"아가씨 . 나 사람을 찾고 있어요 ." "헤에 .. 그래요 ? 이런 촌구석에 아저씨같은 사람이 찾는 사람이 있어요 ?" "촌구석이 아니에요 . 이곳은 .. 무척 예뻐요 ." 아저씨는 내 말에 대답하고는 다시 예쁘게 웃었다 . 그 웃음을 보면 .. 그냥 .. 뭐랄까 . 이 아저씨가 웃으면 기분이 좋다 . 보는 사람의 마음이 뭉클해질정도로,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다. 그의 다정한 온기로 가득찬 눈이 날 부드럽게 바라보며 짓는 미소에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아마 오늘 중 가장 많이, 정말 진심으로 미소지은 순간일꺼다. 친구들과도 부모님과도 함께 있으면서도 그저 가면을 씌운것 같은 미소를 짓던 나. 어째서 오늘 처음 만난 이 사람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던 걸까?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 아마도, 그가 미인이라는 것을 둘째치고, 무척이나 .. 무척이나 다정하고, 너무 다정해서 슬퍼지는 눈을 지녀서 그랬을 꺼다. "헤에 .. 그래요 ?" "네 . 그래서 아가씨에게 부탁이 있어요 ." "아저씨같은 완소남의 부탁을 누가 거절하겠어요 . 무슨 부탁인데요 ?" 헤벌쭉 웃는 나를 보며 아저씨가 부드럽게 말했다 . "내가 찾는 사람이 되어줘요 ." 아저씨의 말에 난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 부드럽게 미소짓고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아저씨 , 아무리 내가 미쳤다지만, 아저씨까지 미치면 안돼요 ." 진지한 내 말에 그는 다시 쿡쿡 거리며 웃었다 . "내 이름은 '지르오디스'에요 ." "헤에 .. 외국인인건 알았지만 우리말을 너무 잘해서 혼혈인인가 했는데 .. 이름도 외국사람같네요 ." "난 이 나라 사람이 아니니까요 ." "에 , 역시나 그런거에요 ?" 나의 말에 '지르오디스'는 싱긋 미소 지었다 . "하지만 난 '지르오디스'보다는 아저씨가 편해요 . 아니면 '지오'라는 애칭으로 불러줄까요 ?" 나의 말에 그가 또 다시 키득거리며 웃었다 . "아저씨 , 그렇게 웃으면 폐에 바람들지도 몰라요 ." 순전히 그가 웃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하는 말이었는데 , 정말로 '지르오디스'가 웃어줘서 , 기분이 좋아졌다 . "'지오'든 , '지르오디스'든 상관없어요 . 근데 아저씨는 좀 곤란해요 ." 살짝 곤란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순간 정말 충독적으로 그를 안을뻔했지만 .. 내가 태어나서 18년간 쌓아온 인내심으로 겨우 그 행동만은 말릴 수 있었다 . 하지만 .. 그의 손을 잡은건 수양부족으로 인한 내 손이 내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 "그럼 '지오'라고 부를께요 . 어쩜 그렇게 예쁘게 웃어요 ?" 또 다시 키득 거리며 웃는 그를 보면서 이것참 .. 내 몸뚱이가 언제 또 다시 나의 통제권을 벗어날지 걱정되기도 하고 ..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난감했다 . 나의 질문에 대답은 안하고 지오가 빙긋 웃으며 갑자기 물었다 . "허락해줄꺼에요 ?" "뭘요 ?" "내가 찾는 사람이 되어준다는거요 ." "찾는 사람이 누군데요 ?" 내 말에 그의 청록색 눈동자가 짙은 청색으로 물들었다 . "[에르테이샤]에요 . 다른 말로는 [신과 함께하는 자]라고 해요 ." "[신과 함께하는 자]요 ? 전 종교인이 아닌데요 .." 미안하다는 듯한 나의 말에 그가 싱긋 미소지었다 . "종교인일 필요는 없어요 ." "에 .. 하지만 전 '무교'에요 .. 가끔 신을 믿긴하지만 .. 끙 .. .." 이것 저것 생각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조용히 말했다 . "나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에요 ." "네 , 알아요 . 아까 그랬잖아요 ." 새삼스러운 그의 말에 헤실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는 나의 웃음에 내 뒤통수를 후라이팬으로 후려치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 이 세계 사람도 아니에요 ."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 ". . . . 네 ?" 잠시 헛것을 들었나 ? 하는 듯한 나의 표정에 지오가 말했다 . "난 이 나라사람도 , 이 세계의 사람도 아니에요 . 다른 세계의 사람이에요 . 아니 , '사람'도 아니에요 ." 이해할수 없어서 , 그냥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 "난 실수를 해버렸어요 . 그래서 그 실수를 되돌려야해요 . 아니 ..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일이고 미안한 일이지만 .. 그래서 내가 실수를 만회할 동안 다른 일을 해줘야할 [에르테이샤]를 찾고 있었어요 ." "무슨 실수인데요 ?" 나의 말에 처음으로 그가 씁쓸한듯 슬픈듯 .. 그렇게 웃었다 . 아 .. 웃는게 슬퍼보인다는게 .. 정말 그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 "한순간 화가 나버려서 , 차원을 비틀어버렸어요 ." "네 ?" "그래서는 안되었는데 , 너무 화가나서 , 너무 슬퍼서.. 그 곳의 모든 생명들을 도저히 살려두고 싶지 않아서 .. 그래서 모든 기의 흐름을 비틀어버렸어요 ."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다시 빙긋 웃었다 . "나 너무 못됬죠 ? 하지만 너무 화가났어요 . 내가 사랑하던 모든 생명들을 무참히 어둠 속에 내버리고 싶을정도로요 ." "왜 화가 났는데요 ?" 믿을 수 없는 말인데 , 헛소리로 치부할 수 있는데 . 나는 그의 말을 정말 아무런 사심없이 순수하게 믿어버렸다 .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슬펐으니까 . 아파보였으니까 .. "싸우지 않기를 바랬는데 . 나의 뜻과는 달리 싸움이 일어났어요 . 많은 목숨이 죽어갔어요 . 너무나도 많은 .. 소중하고 소중한 .. 사랑스럽던 생명들이 죽었어요 ." 그는 웃고 있었지만 울고있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안아버렸다 . 그가 나보다 커서 내가 안긴 꼴이 되어버렸지만 ..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뭍었다 . 잔잔하던 바람이 나와 그를 중심으로 슬프게 요동쳤다 . "그래서 .. 더 이상 싸우지않기를 바랬어요 . 하지만 .. 싸움은 더 커져버렸어요 . 인간들로 인해 시작된 싸움은 그 싸움으로 인해 피해받은 다른 종족으로까지 .. 그렇게 커져갔어요 ." 그가 나의 품에서 울고있었다 . 처음 만난 사람이 울고있었지만 내 마음이 더 아팠다 . 왜 그의 슬픔에 슬퍼지는지 알수 없었다. 그의 감정에 동화되는 것일까 .. "슬펐어요 . 싸우지말라 말리고 싶었는데 .. 말릴 수가 없었어요 . 아무도 내 슬픔을 알아주지 않았어요. 그 누구도 내 말에, 내 슬픔에 귀기울여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 슬픔이 분노로 바뀌었어요 . 어린 아이같다라 욕할지도 모르지만, 잔인하다 말할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 차라리 모든 이들이 죽었으면했어요." 작게 떨리고 있던 그의 어깨를 감싸안고 토닥여주었다 . "괜찮아요 ." 나도 모르게 마치 연인에게 사랑한다 속삭이듯 .. 악몽을 꾼 아이에게 어머니가 속삭이듯 그에게 말했다 . "괜찮아요 ." 그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 그가 슬퍼하는 이유를 난 이해하지 못했다 . 아니 .. 이해할 수 없었다 .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 잘 몰랐으니까 ..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 그저 내 어깨가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 점점 .. 세상이 그에게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 맑은 하늘에 먹구름도 없이 비가 내렸다 .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던 비는 , 곧 세상을 적시기 시작했다 . 나의 품에서 울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 물기에 젖은 청록색 눈동자가 나를 보고있었다 . 빗물이 나의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슬프게 웃었다 . "나의 [에르테이샤]가 되줘요 ." " .. [신과 함께하는 자]요 ?" "네 ." "무슨 일을 .. 하면 되는데요 ?" 이건 허락이나 마찬가지의 말이었다 . 도저히 그의 슬픈 눈을 보며 거절할 수 없었다 . "나는 내가 비틀어버렸던 차원을 다시 되돌릴꺼에요 . 하지만 차원은 되돌릴 수 있지만 , 싸우고 있던 그들의 싸움을 내가 직접 끼어들어 막을 수는 없어요 . 이건 내가 아닌 '태초의 그 분'께서 정한 규칙이니까요 ." " .. 지오 ? 나에게도 그들을 말릴 능력은 없어요 ." 그는 지금 내게 그들의 '싸움'을 말려달라 말하고 있었다 . 어색하게 웃는 나의 모습에 지르오디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 "당신이라면 .. 괜찮아요 ." "에 ?" 조심스럽게 그가 나의 이마에 입맞추었다 . 따스한 빛이 나를 감쌌다 . 그의 따스한 청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신]인 나의 슬픔조차 .. 감싸줄수 있는 사람이니까 .. 괜찮아요 ." * * * "넌 누구냐." "내가 누구게요." "장난치는 것인가?" "장난도 상황에 맞게 쳐야죠. 아저씨들 같으면 이런 상황에 장난치게 생겼어요?" 내 목 아래서 빛나고 있는 아름다운 은색의 검날. 헤실거리며 웃고있는 내게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내가 대답할 리가 없었다. 나도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짐작하고 있는데, 그리고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곤란한데, 아저씨의 물음에 답해줄 여유는 없어요. "마지막으로 묻겠다." "조심해서 묻어주세요. 아, 머리만 내놓고 묻어주실래요? 숨은 쉬어야죠." 아저씨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회색빛의 하늘이군요. '이곳'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요~" 검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매연으로 가득찼던, 더 이상 푸르지 않던 그 하늘과도 많이 닮았지만, 태양은 우리 세계를 비추던 것만큼 강렬하게 타오르지 않았다. 딱 적당한 온기로 세상을 비춰주고 있었으니까. 지오, 저 태양은 아름답네요. 마치 지오처럼, 상냥한 다정함을 지니고 있어요. 그리 나쁘지 않은 곳이에요. 하늘도 주위의 자연도 오히려 제가 살던 곳보다 아름다워요. 당신은 세상을 비틀어버렸다고 했지만, 비틀림은 이렇게 아름다운건가요? 비틀렸음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슬픔으로 인해 분노했음에도 당신에게 남아있던 이 세계에 대한 애정이었던 건가요? 하지만 지오, 당신이 말했던 데로 당신이 비틀어버린 차원으로,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한다던 그 세계로 날 보낸건가요. 그렇다면 지오 .. 내가 도착하고 나서의 삶도 보장해줘야 하는거 아닌가요. 날 지켜보고 있을, 확신하진 못하겠지만 분명히 날 보고 있을 지오를 향해 원망의 감정을 품어보지만, 곧 그것도 포기했다. 그 다정하고, 여린 '사람'이 아닌 존재를 원망해봤자지. 이미 그의 부탁을 들어서 이곳으로 와버렸는데, 이게 왠 청승이냐. "죽이겠다." 살벌한 표정의 지푸라기 색의 아저씨가 검을 치켜들었다. 나는 현실감없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아저씨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살기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있었다. 완벽한 고립. 그 어느곳으로도 도망칠수도, 벗어나고자 몸부림쳐도 벗어날수도 없는 상황. "한방에, 고통조차 없이. 부탁드릴께요." 지오,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사람들의 분쟁을 막을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만약 누군가가 싸운다면, 그들을 지켜보기만 할뿐이에요. 내가 살던 곳에서는 싸운다고 해도, 서로를 죽이거나 그렇게 하진 않아요. 난 무척이나 평온하고 안정되있던 삶을 살았던 그저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항상 내가 생각했던 것은,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저 받아들이겠다고. 오히려 계기가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지오, 미안해요. 기껏 보내줘서 하루도 안되었는데 말이에요. 당신의 부탁은 들어주지 못할것 같아요. 다른 사람 찾아보세요. 아저씨가 날 향해 검을 내려치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검은 어둠이 날 감싸안았다. 꽤나, 포근하지 않은가. 모래먼지 때문에 얼굴이 따갑긴하지만 .. "눈을 떠라." 시간이 조금 흘렀음에도 아무런 변화도 없던 내 몸에 이상함을 느끼던 찰나, 날 죽이겠다던 아저씨의 저음이 들렸다. 살짝 한쪽 눈을 뜨자 무표정한 눈동자로 날 보는 아저씨와 놀란 눈동자로 아저씨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넌 누구냐." "그러니까." 나는 웃었다. "내가 누굴까요." 내 질문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렇게 내버려둬도 되는겁니까?" 회색 머리카락에 눈을 가진 남자가 천막에 앉아 멀뚱멀뚱 이쪽을 바라보는 검은 머리카락에 눈을 가진 소녀를 보며 말했다. 그의 물음에 지푸라기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지도를 보다가 그 남자를 보았다. "사령관님,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저 소녀는 적이 보낸 자일지도 모릅니다." "그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죽고 싶어하는 자에게, 죽음을 내릴정도로 나는 자비롭지 않다." 사령관이라 불린 남자는 곧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사령관님께서 못하시겠다면, 제가 죽이겠습니다." 회색빛의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그리고 등을 돌려 소녀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사령관의 말에 남자는 소녀에게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검은 소녀는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사켄, 성급하게 굴지마라.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사령관이 무표정하지만 시리도록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자 사켄이라 불린 남자는 곧 주먹을 꽉 쥐고는 한쪽 무릎을 그에게 굽히며 말했다. "제 이름은 사켄, 영원히 당신의 뒤를 따를 당신의 기사입니다." "알고 있으면서, 내 명없이 저 소녀에게 손을 대겠다 한것이더냐?" "..죄송합니다." 사령관은 고개를 숙인 사켄을 보다가 지도를 바라보았다. "일어서라." "네." 사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젠 흥미롭다는 눈동자로 이곳을 바라보는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군의 뒤에 서서 언제라도 발검할수 있도록 검을 잡았다. 날 죽이겠다한 사켄이라는 남자가, 사령관 아저씨의 말을 듣고는 다시 얌전해진걸 보고 슬쩍 어깨를 으쓱했다. 지오, 이젠 어쩌지요. 그래도 떨구긴 잘떨궈준것 같네요. 아무래도 이곳은 '인간'들의 진영인것 같아요. 거기다가, 사령관 아저씨한테 막바로 직행되었으니. 확실히 지오, 난 죽을뻔하긴 했지만, 고마워요. 일부러 이제 어떻게 하나 고생하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니, 그거 하나는 좋네요. "이름이 무엇이냐." 지오를 생각하며 홀로 뭘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을때, 사령관 아저씨가 말했다. 여전히 지도를 보고 있어서 순간 누구에게 질문을 한것인가 의문에 잠겼지만 곧 회색빛의 남자가 날 노려보는 것을 보며 내게 질문한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엘 이에요." 나는 [에르테이샤]로서 왔지, 한국에서 살던 고등학생으로 온게 아니야. 이곳에서 내 본명을 쓸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에르테이샤]의 '에르'를 따서 엘이라 대답했다. 사령관 아저씨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보고 어쩌라는건지.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또 다시 날 노려보는 사켄이라는 남자의 시선에 그냥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쓸데없이 미움을 살필요는 없겠다 싶었으니까. "어디서 보냈지?" "네?" 사령관 아저씨가 지도에서 눈을 떼고 날 보았다. "이종족들인가? 아니, 인간이라면 치를 떠는 이종족이 보냈을 리가 없지. 그러면 서연합인가?" 아, 정말 지오 고마워요. 이종족들에게 걸렸으면 난 당신이 사랑한다 했던 이 세계를 구경도 못해보고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거네요. 그냥 마구잡이로 보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다행이에요. 난 그냥 지오가 자기 일이 바빠서 아무렇게나 떨궈버린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미안해요, 지오. 의심해서.. 속으로 지오에게 사과하고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날 보며 말하고 있는 아저씨에게 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 굳이 누가 보냈냐 한다면 .." 내 말에 사령관 아저씨도, 사켄이라는 남자도 날 보는 것을 보며 슬쩍 웃고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르켰다. 지오, 당신의 마지막 말은 확실하게 들었어요. '사람'이 아니라 했던 당신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당신이 했던 마지막 말을요. "신께서 보내서 왔어요." "다행이라면 다행이군요." 내 말에 잠시 꽁꽁 얼어붙었던 천막 안은 막 천막으로 들어온 남자로 인해 깨졌다. "무슨 말이지?" 사켄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 역시 장미빛을 품은 화려한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호스트를 하면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매력적인 페로몬을 폴폴 풍기고 있는 남자였다. "일단, 미쳐버린 소녀에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게되었으니까요. 아마도 눈 앞에서 가족이 살해당했거나, 큰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군요." 쾌활한 어조로 남자는 날 완벽하게 무시하고 미친사람으로 취급했다. 사켄도, 사령관 아저씨도 그런 그를 보다가 날 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그런것인가.'라는 동의의 시선이 섞여 있었다. "음?" 난 확실히 지오 .. 그러니까 '신'이 날 이 세상으로 보냈다는 것을 밝혔다. 그걸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이 아닌가.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그냥 웃었다. "그보다, 사령관님, 저 소녀는 어떻게 하실런지요?" 장미빛의 남자는 사령관 아저씨의 옆에 서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저 웃어주었다. "네가 데려가라." 사령관 아저씨는 그 남자에게 대답했다. 사켄은 입을 열지 않았고, 남자는 의문어린 눈으로 아저씨를 보았다. "여자들이 사죽을 못쓰는 네 녀석이라면, 어떤 조치든 잘 취하겠지." 아저씨는 다시 지도를 보기 시작했다. 사켄은 아직도 의심이 걷히지 않은 눈으로 날 보다가 다시 사령관 아저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령관님의 명이시라면." 남자는 자신의 오른손을 심장 위에 대고는 사령관 아저씨에게 허리를 굽혔다. 곧 나에게로 몸을 돌려 손을 내밀며 웃었다. "자, 따라오세요, 귀여운 아가씨. 이름이 뭐지요?" "엘이라고 해요, 장미빛의 기사님." 단정짓자면, 그는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할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로 생각하는것 같았다. 굳이 날 어린아이 취급하며 기사와 아가씨 놀이를 하고 싶다면 응해주지. 그런 심정으로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날보더니 곧 고개를 돌리고 날 이끌며 말했다. "제 이름은 세브릭이죠. 잘부탁해요." 또 다시 날 어린아이 취급하는 그의 목소리에 그저 웃음밖에 안나왔다. 난 당신에게 호감을 품을 수 없을 것같아요, 세브릭. 차라리 날 의심하며 믿지 못하고 있는 사켄이라는 사람이 더 나은 것 같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그는 '진심'을 가리고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그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많은 사람들이 날 보며 사켄과 마찬가지로 의심의 눈동자로 날 보았다. 하지만 날 데려가고 있는 세브릭을 바라보며 곧 나에대한 시선이 바뀌었다. 뭐랄까. 아까 시선이 '적일지도 모르는 존재'였다면, 세브릭을 보고는 '무시해도 되는 존재'가 되었달까. 뭐지, 그 시선의 의미는? "저기, 세브릭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이름은 부르라고 가르쳐준거에요, 아가씨." 그는 날 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럼 좀 천천히 걸어가면 안될까요? 난 바지를 입고 있는 세브릭과는 달리 치마를 입고 있는데다가, 기사인 세브릭과는 달리 운동조차 제대로 안했던 여자거든요." 내 말에 그가 처음으로 멈칫하더니 날 보았다. 또 다시 묘한 표정.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지 물어도 될까요?" 나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 걸어갔다. 아까보다는 좀 속도가 늦춰진것이 만족스러웠다.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미친것 같지는 않아서요." "미친 것에도 정도가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내 말에 또 그는 멈칫하고 날 보았다. "비꼬는건가요?" "어, 알았어요? 대단하네요." 나의 감탄에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었다. "있잖아요, 세브릭." "뭐죠?" "난 상당히 못된 사람이에요." "그 의미는?" 날 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으며 세브릭은 내 말에 응답했다. "세브릭 같은 사람을 보면 속까지 파헤쳐보고 싶어지거든요." "저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도착했는지, 세브릭은 천막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 손을 놓고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날 보았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진심을 숨겨놓고, 가면을 쓴것같이 미소짓는 사람이죠." 내 말에 세브릭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그 표정이 당신의 본모습인가요?" 꽤나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건 재미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포커페이스를 깨는 것만큼 짜릿한 놀이는 없으니까. 금방 다시 본래의 미소를 짓는 세브릭. 하지만 처음 만났을때와는 달리 위험한 나른함을 품고있는 미소에 웃음이 나왔다.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거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세브릭의 물음에 웃음이 나왔다. 그를 지나쳐서 그의 천막을 둘러보았다. 그가 내 행동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시해버리고는 삐걱거리는 침대에 앉아 날 보고있는 장미빛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 "다시 물어도 될까요?" 세브릭의 위험한 미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스릴감있는 달콤한 감정이 내 심장을 휘감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의 위험한 미소를 보는것은 꽤나 즐겁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더 이상 위험한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짜증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날보고 있었다. "닮았거든요." 최대한 이 두근거림을 잠재우고 그를 보았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정도가 다르겠지만. 무척이나 닮았거든요." "무엇을 닮았다는 건가요, 귀여운 아가씨?" 잠시간 이 묘한 침묵을 즐겼다. "진심을 숨기고, 자신을 감춘다." 나의 말에 그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짜증이 나더라도, 화가 나더라도, 그저 웃어넘긴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걸까? 아가씨, 장난을 칠 상대는 제대로 골라야하는거 아닐까? 난 그렇게 인내심이 강한 남자가 아닌데." 어느새 내게 말을 놓고는 세브릭은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내 앞에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위험하다. 내 온몸이 경고하고 있었지만, 내 이성조차 그만하라 외치치만 난 무시했다. 이런 사람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작은 장난으로도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 "닮았어요." ". . ." 그는 날 내려다보고, 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척이나. 아, 하지만 이렇게 작은 장난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닮지않았네요." 나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웃을뻔했다. 그리고는 웃음을 참았다. 여기서 웃어버린다면, 이 귀여운 사람은 날 무시하며 나가버릴테니까. "누군지 가르쳐줄까요?" "무시하려 했지만, 궁금하긴 하군요. 누구를 닮았다는 건지?" 그는 다시 미소지었다. 나의 말이 자극이 된듯 다시 자연스런 포커페이스로. 말투도 다시 본래의 가벼운 어조로. "나." "나?" 지오, 그렇게 생각안해요? 이 사람은 꽤나 나와 닮았어요. "나와 무척이나 닮았어요. 그 지루하다는 감정을 품고 있는 그 눈을보고 알았어요." 이 사람은 나와 닮았지만, 또 나와는 달라요. "하지만 나와 다르네요." 난 그저 숨을 쉬고 있기에 살아있었던 거에요. 나의 평화롭고, 안정되어있는 삶에 젖어 날 지워가며 살아가고 있었던 거에요. "나는 살아있기에 살았던 거지만 말이에요." 나는 자리에 일어서서 그의 약간은 거칠은 뺨에 손을 대고 그의 시선에 내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당신은 살기위하여 살아가고 있군요." 지오, 세브릭이라는 사람은요. 살아남기 위해, 살기 위해 자신을 감추고, 진심을 숨기는 사람이에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의 볼에서 손을 때고 돌아섰다. 천막 안에 있던 의자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았다. 어떻게 할껀가요, 세브릭? 날 죽일껀가요? 별로, 죽여도 상관없긴 한데 .. 난 아직도 꿈 속에 있는 느낌이거든요 . 마치, 지오를 만난 그 순간부터 꿈을 꾸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럼 편히 쉬시길." 그는 내게 얼굴도 보이지 않은채 빠르게 돌아서서 나갔다. 저벅저벅 -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네." 그래, 많이 아쉬워. 의자에 머리를 기댄채 눈을 감았다. 지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세브릭은 날 싫어하게 되겠죠? 하긴, 나같아도 날 그렇게 들쑤셔놓으면 화낼지도..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도 되는걸까? 잠시 망설여졌다. "안에 얌전히 있는게 좋아요," "응?" 조금은 맞지 않는 커다란 투구를 쓴채 날 바라보며 싱긋 웃는 소년. 맑은 갈색 눈동자에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었다. " . . 누구?" 내 질문에 잠시 얼굴을 긁적이고는 다시 해맑게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세브릭님이 지키라고 하셔서.." "지켜? 누굴?" "그러니까 .." 소년은 난처한듯 힐끔 날 본다 . 아, 하긴.. 빈 처소를 지키라는건 말이안되는건가.. 날 지키라는 거구나. 하지만 지키라는게 아니겠지. '감시'하라는 거겠지. 난 소년을 바라보다가 최대한 사람 좋아보이게 웃었다. "난 엘이라고 해요. 네 이름은 ?" "에 .. 쿠.. 쿠오.. 라고 해요." "헤에 .. 쿠오라 .. 몇살?" 상당히 어려보이는 쿠오의 모습. 하지만 .. 나랑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데.. "1.. 15살이에요 .." 우물쭈물 말하는 쿠오의 모습에 한없는 사랑스러움(!!)을 느끼며 생긋 미소지었다 . 연하인가 .. 좋지 . 연하의 풋풋한 미소년. 내가 자주 상상하던 공상 속에서 "누나~"하며 귀엽게 얼굴을 붉히는 그런 레어아닌가. "그럼 내가 누나네 . 엘 누나라고 불러도 좋아, 쿠오." "네?!" "아니, 개인적으로 '누나'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그래줄수 있지?" 약간 강압적인 나의 부탁아닌 부탁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날 바라보는 쿠오에게 싱긋 웃었다. 아무리 봐도 귀엽다. 어떻게든 구워삶아먹어버릴까 .. "말 놔도 되지?" ".. 이미 반말하고 있으면서 ."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대던 쿠오는 씨익 웃었다. 그런 미소를 짓다니 반칙이다. "헤에~ 위험해.." "에..?" 약간 어벙한 표정을 짓고있는 쿠오를 바라보며 내가 얼마나 어둠에 물들은 자인지 순간 깨달을수 있었다. 이런 .. 나도 모르게 세브릭과 얼마나 어울릴까를 생각해버렸어. 넌 잘 모르겠지 쿠오, 난 위험한 여자야. 지금도 어떻게 하면 널 꼬실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거든. 단순한 흥미 이상의 감정은 품지 않고, 생각만으로 그치겠지만. 내가 싱긋 웃자, 쿠오 역시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 난 그저 가만히 쿠오를 바라보았다. 다정한 갈빛 눈동자. 아직 전쟁에 참여하기에는 어린 나이일텐데.. "쿠오." "네?" "넌, 왜 여기있는거야?" 난 천막안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입구 가까운곳에 놓고 앉아 물었다. "왜 여기있냐뇨?" "15살이면, 너무 어린데 .. 무섭지 않아?" 이곳은 어린아이에게도 전쟁에 참여하라 하는 곳인가. 우리나라, 아니, 21C의 지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지금도 내전이다 뭐다 쿠오보다도 어린 아이들이 쉼없이 죽어가고 있을테니까.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 상황에서, 죽어가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어른들의 욕심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사람들의 욕망으로 가장 먼저 희생되는건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세계에서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멍청이였다. 한없이 세상을 비뚤어지게 바라본것은, 그런 나에대한 무력감 때문. "아니에요." 사람들에 대해 한없는 경멸감을,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에대한 무력감을 생각하고 있는 내게,순간 쿠오의 말이 들렸다. 쿠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겐 아직 커다란 투구가 눈을 덮어버려 허둥지둥 하더니 다시 들어올려 똑바로 쓰는 것에 픽 웃음이 나왔다. "아니야?" "네, 전 이미 성인인걸요. 성인식도 다 치뤘어요." " . . . 헤에 . ." 이곳은 성인의 나이가 15살인건가 .. "그리고 .." "그리고?" 쿠오는 씨익 웃었다. 아, 소년이 아닌 마치 어른같은 미소. "지금은 전쟁 중인걸요. 저 역시 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진입대한거에요." "자진입대라 .." 아직도 맑갛게 세상을 비춰주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소중한 것은 .. 가족?" "네. 저희 어머니랑, 보보요." "보보?" "아, 제 여동생 이름이에요. 이제 6살인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가끔 넘어지면 울먹울먹거리다가 제가 곁에 없으면 울면서 절 막 찾아요. 그리고 평소에는 오빠오빠 하면서 제 뒤에 찰싹 붙어다녀요." 약간 흥분한채로 자신의 여동생 얘기를 하는 쿠오의 모습에 순간 멍해졌다. 나의 세계에서, 한국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나의 가족이 생각났다. "이건 꿈이 아닌건가." "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걸까?" 쿠오의 갈색 눈동자가 의아한 빛을 띈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쿠오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오는 내게 뭘 바라는 걸까." "지오요?" 쿠오의 물음에 싱긋 웃고는 대답했다. "나의 신." ".. 시.. 신이..요?" 하긴, '나의 신'은 좀 건방진 표현인가. "응." 나의 말에 쿠오는 당황했지만 난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오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실버블론드, 투명한 청록색 눈동자에, 다정한 미소를 품고 있는 신, 지르오디스를. 지오, 꿈인걸까요. 아님 현실인걸까요. "나도 가족이 있어." "누나?" 조심스레 내게 말하는 쿠오를 보다가 땅을 바라보았다. "인자하고 날 이해해주시는 아빠랑, 엄마가 있고,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내 동생도 있어." "..." 쿠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얘기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이곳'에 없어." 그래, 나의 가족은, 나의 친구는 '이곳'에 없다. 지오가 나를 '이곳'에 오게했으니까. "'나의 세계'는 '이곳'이 아니야." "저.. 저기 누나.." 그래서 꿈처럼 느껴진다. 현실이 아닌것 같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이 불쾌해도, 날 바라보고 있는 쿠오의 걱정스런 눈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기저기서 시끌시끌한 욕설 섞인 남자들의 목소리도. 내겐 그저 '비현실적'일뿐이다. "쿠오, 난 '이곳'에 있어?" "네?" "난, 지금 '이곳'에서 존재하고 있는걸까?" 지오, 말해줘요. 나는 꿈을 꾸고 있는건가요. "난 '이곳'에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야." 지오, 난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되잖아요. 나는 다른 세계, 다른 차원의 사람이잖아요. 난 '이곳'에서 살아가야하는건 아니겠죠? '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건가요? 한없이 답답해진다. 지오, 분명 난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한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 하지만 지오. 날 이리로 보낸 것은, 옳은 행동인건가요? 내가 이곳으로 온것은 옳은 행동이었을까요? 내가 당신에게 납치해달라고 해서, 날 이곳으로 보내버린건가요? 그래서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났었던 걸까요? 아니면 지오, 내 평소의 바람대로 나는 '일탈'을 해버린 건가요. 꿈인지, 현실인지 . 나는 알수가 없어요. 쿠오는 당황스러웠다. 신비한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는 자신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어떤 말을 해줘야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채로 안절부절하며 있을 때, 자신의 상관인 세브릭님이 하신 말이 생각났다. 그건 아주 잠깐의 대화였고, 또 세브릭님이 처음으로 보인 표정과 목소리였다. "쿠오." "네!" 세브릭님은 기분이 좋지 않으신듯 냉정한 미소와 목소리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 처소 안에 있는 소녀를 감시하세요." "..네?" "다시 한번 말해야하나요?" 세브릭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짜증이 난듯 싶었다. "아.. 아니요 ! 알겠습니다." 자신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세브릭님은 사령관님의 처소로 향했다. "쿠오, 너 뭐 잘못한거 있냐?" "아.. 아니요? 없.. 없을텐데요.."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형이 자신을 향해 말했지만, 자신 역시 당황스러울뿐이었다. "일단, 처소로 가봐. 세브릭님이 말하셨던 여자를 지켜야지." "네.. 네!" 급히 처소에 도착해서 입구의 옆에서 지키고 있자, 곧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살짝 고민스러운듯 나오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잠깐의 대화. 가볍고 기분좋은 .. 유쾌한 여인이였다. 하지만 곧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저.. 저 .. 누.. 누나?" "응?" 자신의 부름에 곧장 고개를 들며 바라보는 흑안은 무척이나 고요해서, 방금 전까지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고민스럽게 만들었는지, 아니, 그것이 자신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저기 .. 그러니까 .." 날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픽 바람빠지는듯한 웃음을 짓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쿠오" "네!" "나가면 안되는걸까나?" "그냥 얌전히 계시는게 .." "흐음, 역시 그래야하나?" "그..그러는게 좋을것 같아요. 지금은 전쟁 중이고, 또 .. 그러니까 누나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 그러니까 저기 .."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고민스러울때 기분좋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그러니까 내가 첩자인지, 자객인지 확실치 않으니 얌전히 짱박혀 있으라는 얘기지?" 무척이나 담담하고, 또 재밌다는 듯이 말해서 당황스러워졌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킥킥 거리더니 돌아서서 처소로 들어갔다. "누.. 누나?!" "심심해지면 또 대화하러 나올께, 쿠오. 그러니까 내가 없어서 심심하더라도 거기서 날 잘 감시해줘~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거든. 고민해야할것도 있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 침대에 누웠다.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처소에 있기로 한 것을 알고 한숨 놓았다. "이상한 사람.." 그녀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였다. 묘하게 붕 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 무언가 이질적인 .. 그런 느낌을 가진 사람이다. "사령관님." 장미빛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넘기며 묘한 웃음을 달고 있는 세브릭이 바로 사령관에게 말했다. 사켄은 사령관의 뒤에서서 잠시 세브릭을 바라보고는 다시 지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왔군." "예." 사령관은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지도를 바라보며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맥클라스님." 세브릭이 나즈막히 이름을 부르자 사령관은 움찔하더니 지푸라기 빛의 눈동자로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사령관이라 부르라 했을텐데." "제 사적인 요청으로는 맥클라스님이라 불러야 덜 혼날것 같아서 말입니다." ".. 무슨 일이지?" 맥클라스 뿐만 아니라 사켄 역시 세브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사령관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사령관은 사령관일뿐,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는 그의 명령때문이였다. "그 소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브릭은 여전히 묘한 웃음을 띄운채로 맥클라스를 보며 말했다. "죽이시지 않으실 껍니까? 아니면, 계속 진영에 데리고 계실껀지요?" 그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불쾌함을 가득 안고 있었다. "..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군. 그 소녀의 무엇이 너를 그렇게 불쾌하게 만든건지 궁금하군." 맥클라스는 담담하게, 하지만 의아심 서린 목소리로 세브릭을 보며 말했다. "뭐, 불쾌함이라면 불쾌함이겠지만 .. 솔직히, 이렇게 짜증나는 여자는 처음이로군요." "짜증? 여자라면 남들이 고개를 젓는 고약한 할머니마저 살살 웃으며 대하는게 너 아니던가?" 사켄 역시 약간의 당황함을 안은채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세브릭은 그런 사칸을 바라보며 더 이상 미소 짓지 않았다. "그녀는 누굽니까?" "...뭐라고?" "언제까지 이곳에 두어야합니까?" ".. 상당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로군. 아직 네 처소에 들여놓은지 채 한시간도 안된것 같은데 말이야." 맥클라스는 세브릭을 바라보다가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상당히라 .. 상당히는 아니죠." 세브릭은 삐딱한 웃음을 띄웠다. "존재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상당히 극단적인 말이로군. 그 소녀가 네게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런 반응을 보이는건가?" 세브릭은 사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맥클라스를 바라보았다. 묵묵부답인 맥클라스를 향해 세브릭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사켄의 처소에 놔두면 안되겠습니까? 아까 말했듯 전 그녀를 제 처소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명령을 불이행하겠다는 것인가, 세브릭?" 사켄은 믿을수 없다는 듯이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무수한 시간을 함께 해온 사이였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였다.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아까 제가 한말 못들었습니까, 사켄? 전 그녀 존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세브릭은 아까 검은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며 조소를 띄우던 소녀를 생각했다. 생각만했을 뿐인데도 불쾌해져서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만함. 불쾌하고 불쾌했다. 신비로운 검은 눈동자 속에 거세게 몰아치던 침묵의 바다. 그 침묵의 바다 속에서 자신을 인형마냥 가지고 노는것 같은 그 불쾌함이라니! ".. 네가 그런 반응을 보일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군." 맥클라스는 지도를 보며 나직히 말했다. 세브릭을 찌푸렸던 미간을 핀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켄의 처소로 옮겨주십시오. 제가 감당하기에, 그녀는 무리입니다." "절대로?" 그의 말에 세브릭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절대로." " . . . 사켄, 네 생각은 어떻지?" "사령관님께서 명하신다면, 상관없습니다." 사켄의 회색 눈동자에도 역시 불만이 서려있었지만, 눈동자 가득 불쾌함과 약간의 애원을 담은채 자신을 바라보는 세브릭의 시선을 그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알겠다. 그렇다면 그 소녀는 사켄의 처소로 옮기도록 하지, 허나." 사켄의 처소로 옮긴다는 것에 다시 본래의 미소로 돌아오던 세브릭은 맥클라스의 허나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 소녀에 대한 책임은 사켄과 세브릭, 둘 모두 지도록 해라." "사령관님 ?!" 둘 모두의 목소리에 맥클라스는 손을 들며 둘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원래는 세브릭의 담당이었고, 세브릭의 요청으로 사켄에게로 넘어갔다. 사켄 역시 그 소녀를 자신의 처소에 두기로 했지. 그렇지 않나? 그러니 책임을 둘이 공동으로 지도록 한다. 불만있나?" 고요한 맥클라스의 눈빛에 세브릭도 사켄도 모래를 한움큼 씹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맥클라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지도를 보았다. "세브릭." "예." "넌 그 소녀를 사켄의 처소로 보낸 후에, 각 부대의 대장들을 불러와라." "예, 알겠습니다." 세브릭이 가볍게 목례하고 나가려 하자, 맥클라스가 다시 그를 불렀다. "아니, 세브릭." "예." 세브릭이 그 자리에 멈춰 다시 맥클라스를 바라보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곧 다시 말했다. "그 소녀도 같이 데려와라." ".. 예?" "사켄, 네가 부대의 대장들을 불러와라. 세브릭, 넌 그 소녀만 데려오도록 해라." "하.. 하지만 사령관님!" 세브릭이 항의를 하려고 하자 그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두번 말해야겠나?" "... 알겠습니다." 세브릭이 나간후 사켄은 맥클라스를 바라보았다. ".. 내가 했던 말을 듣지 못했던가, 사켄?" "..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사켄 역시 천막을 나가자 그는 지도를 바라보던 눈을 감고 손으로 감쌌다. "피곤하군.." "따라오세요." 갑자기 들어와서는 따라오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세브릭의 모습에 의아하기도 했지만, 내가 이곳에서 무슨 힘이 있던가? 그저 따라오라는 그의 말에 나 역시 조용히 그를 따라갈 뿐이었다. 기분좋은 온기를 담은 햇살을 만끽하며 그의 장미빛 머리카락을 보던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 천막이 세워져있고,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앉거나, 혹은 서있거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끔 나를 보는 자도 있었지만 곧 고개를 돌렸다. 그들 중에는 나와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 난 별로 여기서 희귀한 색을 지닌 사람은 아닌건가? 저렇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니. 솔직히 판타지하면 검은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때문에 신비롭다, 아름답다, 혹은 반대로 경멸스럽다, 저주받았다 말이 많지 않은가? 저렇게 무관심한 시선에 나는 살짝 상처를 받았다. 뭐랄까. 난 나름대로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보다, 어디를 가요?" ". . . " 그는 나를 힐끔 보고는 계속 걷기만 했다. 벌써 내 질문은 3번째였지만, 나머지 2번과 같이 이번도 그저 무시할 뿐이었다. 왜 저러는걸까. 잠시 생각하다가 갑작스레 든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삐진거에요?" "아니에요." "삐진거군요."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까 내가 들쑤셔서 화가났나요?" "아니니까, 조용히해줬으면해요." 이런 귀여운 사람을 보았나. 순간 뒤돌아서서 눈동자 속에 불을 품은채 날 보는 그의 시선에 웃음이 터져나올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웃어버린다면 이 사람은 정말로 다시는 날 상대하지 않겠지라는 생각에 꾹 참았다. 내가 아까 좀 휘저어놓았다고 해서 이런 격한 반응을 보이다니. 마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질풍노도의 소녀(!)같지 않은가. "화났거나 삐졌다면 그만 풀어주면 안될까요?" "화가 나지도 않고, 삐지지도 않았어요." "하긴, 그렇게 귀여운 표현은 성인 남자에게 좀 웃긴 표현이긴 하죠? 근데 화 풀면 안돼요? 아까 말했듯이 내가 그렇게 들쑤셔서 화가난거라면요." 나의 재잘거림에 순간 그가 돌아서더니 나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엇!'하는 사이에 그와 나의 얼굴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는 유혹적인 장미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내 귓가에 소근거렸다. "화나지 않았으니까 그만 입닥쳐." 그리고 그는 서서히 멀어져 손을 놓고는 다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난 얼음상태에서 풀려나 그가 잡았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으며 킥킥 웃었다. 이런 맙소사 . 아까 했던 말 취소할께요. 이 사람, 놀릴 재미가 있는 사람인데요. 들쑤신 보람이 있네요. "데려왔습니다." 세브릭이 날 데려온 곳이 아까 사령관 아저씨의 천막이라는 것을 알고 살짝 기운이 빠졌다. 난 또 어디 대단한데 데려가나 했는데 ..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 안으로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아, 아까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있는것을 보고 잠시지만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뭐야. 왜 날 이곳으로 데려온거지? "알겠다." 사령관 아저씨의 말과 함께 내 옆에서 쌩하니 가버리는 세브릭. 그는 사켄의 옆에 서서 마치 굳은 결심이라도 한듯 내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저 소녀는 .. 아까 그 소녀 아닙니까?" 한 사람이 사령관 아저씨에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왜 여기에 있냐에서부터 당장 죽여야하지 않겠냐, 첩자가 분명하다. 무슨 생각인거냐 뭐, 여러가지 말을 들었지만 난 입구에서 멀뚱멀뚱 서서 제발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좀 알았으면 할 뿐이었다. "조용히 하라." " . . . " 사령관 아저씨의 중우한 목소리 한방에 다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멈췄다. 와우. 이런게 바로 카리스마라는 건가? "저 소녀에 대한 것은 사켄과 세브릭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이 이상 말할 사람이 있다면 내 친히 대화에 응해주지. 이 바쁜 시기에 나와 대화하고 싶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있는가?" 아저씨의 지푸라기 색 눈동자에서 강력한 눈빛이 뿜어져 나오자 다른 사람들은 슬슬 시선을 외면했다. 사켄과 세브릭은 정말로 싫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내가 바라보자마자 훽하니 시선을 돌렸다. 뭐 이런 .. 날 뭘로 생각하는거야? "저기 .. 전 세브릭의 처소에서 묵는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럼 세브릭만 절 맡으면 되는거 아닌가요?" 나의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와서 박혔지만, 알게 뭐냐. 난 지금 내 놀이 상대를 순식간에 저 아저씨에게 회수당하게 생겼단 말이다. "세브릭보다는 사켄이 맡는것이 더 괜찮다고 여겨져서 이다. 불만이 있는가?" 강압적인 사령관 아저씨의 말에 순간 '아니요.'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세브릭이 짓는 저 활짝 만개한 장미같은 미소에 검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예." "헉!" 다른 사람들이 마치 미친x 보는 것 마냥 날 바라보는 것에 의아하다는 생각은 둘째치고 저 세브릭의 미소를 일그러뜨리고 싶어졌다. "불만이 있다?" 아저씨의 눈에서는 내 말에 대한 노기와 함께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아저씨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 있어요. 제가 인형도 아니고, 왜 이 사람에게 갔다가 저 사람에게 갔다가 해야하는 거죠? 전 세브릭의 처소가 마음에 들어요. 그곳에 있을래요." 내 말은 어린아이가 '난 이게 좋으니까, 이거 내꺼할꺼야.'라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이럴 땐 정공법이 최고다. 세브릭을 이미 흥미로운 놀이상대로 인식하고, 저 미소를 본 이상, 이대로 순순히 물러난다면 천하의 둘도 없는 대마왕이라 불리던 내가 아니다. "... 세브릭,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불만이 있다고 말했을때부터 사켄의 회색눈동자는 이글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세브릭은 온갖 감정을 눈에 품은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을때의 그 쾌감이란~ 심장 떨리게 카리스마 넘치는 아저씨의 말에 태클건것을 잘했다고 나 스스로 다독였다. " ... 제 매력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요...." 까득 거리는게 멀리서도 들려요, 세브릭. 그러니까, 그런 미소 짓지 말지. 난 사켄도 상당히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당신 못지 않게 놀리는 재미가 있을꺼라고 .. 아니, 당신을 놀릴때보다는 더 목숨을 걸고 장난쳐야겠지만. "뭐, 하지만 결정이 내려진것 같으니 순순히 따라야겠지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말이에요. 이대로 쫓아내시거나 죽이시지 않은걸 감사하다 여겨야 하겠죠?" 난 순식간에 다시 으쓱 거리며 경직되었던 분위기를 풀었다. 내가 가볍게 이를 수긍하게 된 것은 분명 사령관 아저씨가 나를 사켄과 세브릭, 둘의 공동책임으로 넘겼기 때문이다. 뭐, 내가 사고치면 둘다 곤란할테니, 필사적으로 날 따라다니거나 날 막겠지. 어떻게 골려먹을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사령관 아저씨의 뚫어질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러시나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 사령관 아저씨?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지.. 이 뒷 말은 생략한채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널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네가 어떤 이인지 확실히 하기 위함이다." "헤에? 전에도 말했듯, '넌 누구냐'라는 질문에는 '내가 누굴까요'라고 밖에 대답해 드릴 수 밖에 없어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사켄의 회색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날 태워버릴듯 뜨겁게 타올랐다. 오오, 저 아저씨가 당신의 약점인가요? 잠깐 사켄을 흘끗 보고는 다시 사령관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좋다. 그럼 넌 어디에서 왔지?" "음, 땅에서 솓았거나, 하늘에서 떨어졌을껄요." 아마도라는 가정이 붙겠지만, 내가 정신을 차렸을때는 회색 하늘이 날 반겨주고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우두커니 앉아있을때 느꼈던 그 황당함이라니. "... 어디 나라 사람이냐 물은 것이다." "어, 제 나라 말하면 아세요? 아저씨 ... 가 아니라 사령관님에게 말해도, 모르실텐데요?" 아저씨라고 하려 했을때 사켄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경악과 분노를 담아낸것을 보고 순식간에 말을 바꿨다. 이왕 지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거, 죽지도 않았으니 임무수행이나 해볼까 싶은 마음보다는 죽어도 곱게 죽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 . . 내가 모를것이라 여기는 것인가?" "흠, 그럼 사령관님 , [대한민국]이라고 아세요?" 내가 [대한민국]이라고 한 것은 이 세계의 언어가 아닌 한국어로 한 발음. 내가 말하고 있는 언어가 한국어가 아니라는 것은 처음 떨어졌을때부터 알았다.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오던 말은 분명, 이 세계의 공용어이리라 생각하고는 마음 편히 받아들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않은가? 낯선 이세계로 떨어져 말도 못하고 쩔쩔맬 수도 있었는데, 참고로 말하자면, 난 외국어가 쥐약이었다. "[대..하느민국]..?" "네네 ~ [대한민국]이랍니다. 아세요?" 외국인 특유의 어색한 발음에 웃음을 참으며 사령관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지도를 보더니 이내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런 나라는 없다." "아저씨가 모르는 것일뿐, 분명 존재하고 있는 나라에요." 당연한거겠지. 대한민국은 '나의 세계'에 있으니까. '이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거짓말을 한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령관님, 저 자를 그냥 내버려둘 순 없습니다. 국적조차도 불분명한 이가 아닙니까." 아까 웅성대던 사람들 중 한명이 사령관 아저씨에게 말했다. 사켄과 세브릭도 열렬히 그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난 또 마음이 상했다. 그래도 꽤 오래 본 것은 저 두명과 사령관 아저씨가 아니던가.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저렇게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다니.. 괴롭혀 버릴테다. 속으로 열심히 다짐하고 있을때 아저씨의 입이 열렸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이 이상 장난을 친다면 너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뭐든, 하지만 전 장난을 친적은 없어요." "너를 보낸 이가 누구인가?" 나를 보낸 이라 . . . . "흐음 . . . " 그의 이름을 .. . 이들은 알고 있는걸까? 지오, 당신은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당신을 알고 있는건가요. 그리고, 내가 [에르테이샤]라는 것을 말해도 되는건가요. 처음 봤을 때부터 그저 웃고만 있던 소녀가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것을 보며 사령관인 맥클라스는 '드디어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 들었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소녀는 가만히 자신의 턱을 쓰다듬다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읽어내릴 수 없는 검은 눈동자에 순간 한기가 들었다. 지금까지 몇십년간 전쟁터에 있으면서, 다른 이의 마음을 어느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고 믿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소녀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그 소녀에게 흥미롭다는 것 뿐이었다. 소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마치 그 소녀만 다른 공간에 있는 듯한, 그런 이질감이 들었다. "[에르테이샤]." 소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소녀가 한 말에 천막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에요." 소녀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 [에르테이샤]라고? ". . . [에르테이샤]가 무엇이지?" "아까 말했듯이, 내가 할 말은 그 한마디 뿐이에요. 그 이상은 알려드리고 싶지도 않고." 소녀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위를 둘러보고 의자에 앉았다. 다른 이들은 소녀의 행동이 무례하다며 웅성대고 있었지만, 난 그 소녀의 행동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저 소녀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건가? 가벼운 걸음걸이, 마치 공기 중에 금방이라도 흡수 될 듯 투명한 존재감. 분명 존재하는 것을 알고있음에도,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이 묘한 위화감이라니. 말이없는 소녀를 향해 난 다시 입을 열어야했다. " . . 다시 한번 말해야 하는가?" 소녀는 침묵했다. 아니, 침묵이 아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또 어째서 그곳에 있었는지 말하지않는다면, 당신에게 절대 유리한 상황이 될 수 없을텐데요." 세브릭이 소녀를 향해 말하자, 소녀는 싱긋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엘. 그리고 아까도 말했잖아요? [에르테이샤]라고. 그걸 못알아들은 당신들의 머리를 탓하라고요. 뭐, 사실 말하자면 저도 [에르테이샤]가 뭔지 잘모르겠어요. 지금도 열심히 고민중이에요. 그러니까." 소녀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후에 제가 확실히 제 존재에 대해 알게된다면, 그때는 듣기 싫다고 해도 말씀드릴께요." 그 말과 함께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여기서 할 일은 끝난거겠죠? 아니면 . . . " 소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쿡쿡 묘한 웃음을 흘렸다. "또 절 죽이신다 하실껀가요?" " . . . 사켄" "예, 사령관님" "저 소녀를 네 처소로 데려가라." " . . . 알겠습니다." 사켄이 천막을 벗어나 나가자 소녀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나비와 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켄을 뒤따라갔다. "그냥 저리 내버려 둬도 되겠습니까?" 모여있던 이들 중 한명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저 소녀를 죽이기라도 해야한다는 것인가?" "적이 보낸 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가차없이 베면 그만이다." "한번의 방심으로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겠다. 이제 그만 이 일에 대해선 접어두지." 내 말에 모두 입을 닫았다. 세브릭이 자신을 쳐다보며 입을 달싹였지만 경고의 시선으로 바라봐주자 고개를 숙였다. 분명 속으로는 후에 둘만 남게되었을 때 할 말을 고르고 있겠지. "회의를 시작한다." " . . . " " . . . " 정말 할말없다. 그나마 세브릭은 특유의 분위기 가벼운 포커페이스 탓에 건드릴만 했는데 . . 힐끔 앞을 보자 '건드리기만 해봐'라는 듯한 포스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사켄이 보였다. 목을 살짝 감싸고 있는 회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조금 내려 단단하고 넓어보이는 등이 보였다. " . . . 호오 . . " 확실히 이세계인 건가? 그의 허리에 차여져있는 검을 바라보다가 그가 기사 비스무리한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한번 사켄의 뒤에서 그를 훑어보았다. "흐음 . . " 남자의 매력은 그 훤칠하고 믿음직스러운 등에 있다고 했던가? 낭창거리며 장미와 같이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 세브릭이었다면, 사켄은 그 섹시한 등 하나로 반은 먹고 들어가는 남자였다. 소설 속에서 줄곧 공략하면 가장 뿌듯한 캐릭터 1위. 독자들로 하여금 가슴에 불붙이는 캐릭터 1위 바로 냉미남 아니던가? 그 무뚝뚝한 얼굴이 자신을 향해 부드러이 풀리는 모습이라던가. 간혹 자신 때문에 한숨을 내쉬며 어쩔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을 때. 여인들의 가슴을 애닳게 하면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냉미남! 그 세브릭도 들쑤셔 놓았는데, 사켄이라고 못그럴까? 잠시 고민을 하고는 해봤자 죽기보다 더하겠나라는 생각에 슬금슬금 웃음이 나왔다. 미인(美人)과의 대화라면 죽음조차도 하찮은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큼큼, 저기요." " . . . " 어렵사리 여러번 고민을 거듭했던 내 말은 당당히 무시하고 걸어가고 있는 사켄을 향해 다시한번 심호흡을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켄! . . 이라고 . . 하면 안되는거겠죠? 아하하 . ." 사켄이라고 입에 담자마자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사켄. 그 무감각한 회색빛 눈동자가 불빛에 번뜩이는 모습에 순간 오싹했다. 이런 . . 생각보다 까다로운 상대네. " . . 네게 내 이름을 허락한적 없다 ." "사람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거라고 세브릭이 그러던걸요? 전 아까도 말했듯 엘이라고 해요. 사켄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이름부르는 데 허락이 필요한 거였군. 참 귀찮은 사람이네 .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는 말도 옛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최대한 안면근육을 잡아당겨 미소지었다. 세브릭은 건들여서 반응을 보고 싶다면, 사켄은 건들이기 전부터 스릴감에 휩싸이는 타입이군. " . . . " 그는 다시 내게서 뒤돌아서려고 했다. 그렇게 나온다면 . . 할 수 없지 . "그보다, 사령관님은 왜 절 당신에게 맡긴건가요?" 그가 멈추어섰다. 아까 천막 안에서 그의 반응을 이끌어내었던 유일한 이. 바로 처음 만났던 아저씨, 사령관님이였다. "아까 사령관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은건가." 그는 나즈막히 날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듣긴 들었지만, 이해할 수가 없잖아요? 세브릭에게 맡긴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 . 그러니까 당신에게 맡겨지냐구요." 나는 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면서 장난끼가 일었다. "한번 남자가 말을 뱉었다면 끝까지 지켜야하는거라 생각했는데, 사령관님은 제 예상외로 판단이 쉽게 바뀌시는 분이신가보군요." " . . . "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 . . . ." 그의 시선이 날 옭아매었다. 위협적인 시선뿐 아니라 온몸이 따끔할 정도의 살기가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정말 내 목을 내놓고 있는 듯한 느낌인데? 세브릭, 당신만큼이나 흥미진진한걸요. 정말 제 목숨을 걸고 장난을 쳐야겠네요. 그가 날 훑어보더니 훽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아 . . 무시당한건가요 . . " 우울하군. 나름 맘먹고 장난을 걸었던건데 .. 푹 한숨을 내쉬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애써 넣었던 기합이 쭉 빠졌다 . . . . 나 미움 비스무리한 것도 못받을정도로 무시당하고 있는건가? 사켄의 처소는 세브릭의 처소와도 별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세브릭의 처소 앞에 서 있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쿠오에게 살짝 손을 흔들며 웃어주고는 문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는 사켄의 앞에 멈춰섰다. " . . . 아는 이인가?" 사켄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며 쿠오를 바라보았다. 쿠오는 사켄의 시선을 받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짝 얼어서 세브릭의 처소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쿠오에게로 향하는 그의 시선을 가로막고 살찍 웃었다. "전 사교성이 좋거든요. 아까 세브릭의 처소에 있을 때 인사를 나눈 사이일뿐이에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하자 사켄은 날 힐끔 보고는 다시 뒤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 제 맘대로 안에 들어가 있어도 되는거에요?" " . . . ." 잠시 멈춰섰던 사켄은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슬슬 앞머리를 매만졌다. "뭐야 . . 재미없는 사람이네." 달캉달캉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쿠오가 열심히 내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누 . . 누나? 왜 사켄님이랑 함께 오는거에요?" "응? 데이트랄까?" "헉?!" 나의 농담에 쿠오의 눈이 거의 찢어질듯이 떠졌다. "농담이야 . 그렇게 놀라워하면 내가 당황스럽잖아." 가볍게 쿠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큭큭거리자 쿠오가 또 다시 입술을 삐죽였다. " . . 진짜라고는 생각안했지만서도 . . " . . . 이런 고얀 녀석 . 아까 내가 그리도 맘속으로 경고했건만 . . 슬금슬금 내 손이 쿠오의 얼굴로 올라갔다. 쿠오는 멀뚱히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그를 향해 미소짓자 쿠오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눈둘곳을 찾아다녔다. "쿠오?" "ㄴ.. 네?!" 쿠오의 볼에 손을 대었을때, 약간 거칠던 세브릭의 뺨과는 달리 어린 소년의 보드라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말랑말랑하네. 쿠오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그의 얼굴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단단히 잡아채고 싱긋 웃었다. "누 . . 누나아아아 ?!" "풉~ 진짜 잘늘어난다~" "누 . . 누나 아 . . 아프아요~" 내 손에 볼을 잡힌채 어쩔 줄 모르는 쿠오를 향해 한바탕 웃고는 손을 놓았다. 하얗던 볼이 빨개져있었고 쿠오의 눈에는 눈물이 찔끔 흘러있었다. "누 . . 누나!" "미안~ 네가 너무 귀엽게 쳐다보길래." 싱긋 웃고는 그의 투구를 툭 쳤다. "으악! 누나!" "아까부터 누나만 몇번째인지 모르겠네~" 투구를 올려쓰느라 허둥대는 쿠오를 뒤에 두고 처소로 들어갔다. 사켄같은 사람은 어떻게 놀려야 반응이 나올까나? 역시 사령관님을 물고 늘어져야할까 ? "아 . . " 그러고보니 . . "이름 부르는거 허락 못받았네." . . 낭패다. * * * "세.. 세브릭님." "무슨 일이죠?" 장미빛 머리칼의 화려한 미남자가 급하게 자신의 처소로 들어온 병사를 바라보았다. 차분한 장밋빛 눈동자는 병사를 주시했다. 병사는 다급한, 혹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있었다. "우문이었군요." 붉은 입술에서 살짝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번엔 어디죠?" "저.. 호.. 호수입니다." 세브릭은 망토를 손에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사는 세브릭을 앞서 걸었다. 그 뒤를 세브릭이 따랐다.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쳤나요?" 세브릭의 조용한 물음에 병사의 얼굴이 곤혹스러워졌다. 입을 달싹거리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세브릭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아~ 정말 치사하게 이러기에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자자~ 빨리 나오라니까요? 누가 잡아먹는데요? 정말 비싸게 구네."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세브릭은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긴 손가락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제.. 제발.. 엘! 옷.. 옷 좀.." 호수에는 몇명 되지 않는 이들이 들어가 있었고, 호수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큰 바위 위에는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엘이 앉아서 옷을 팔랑 거리고 있었다. 소녀에게는 맞지 않을 커다란 옷들은 아무래도 지금 호수 속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사내들의 것으로 보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건가요?" 모두의 시선이 세브릭에게로 향했다. 검은 눈동자 역시 그에게로 와닿았다.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장밋빛 눈동자에는 짜증이 서렸고, 검은 눈동자에는 즐거움이 서렸다. "무슨 상황인것 같아요?" "세브릭님!" 호수속에 있는 이들이 감격어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엘은 작게 키들거리며 다시 한번 손에 잡고 있던 옷을 팔랑였다. 세브릭이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에요? 안기라고요?" " . . . 옷." 짧은 대화 후 다시 호수 주변은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 소악마의 진정한 면목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귀엽다거나 천진스럽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여기 모인 이들은 그 미소가 가증스럽기만 했다. "세브릭,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요?" 세브릭이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며 엘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살짝 젖어보이는 목소리에 세브릭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뭘 기다렸다는 거죠?" 세브릭이 조용히 엘에게 물었다. 엘은 세브릭을 바라보며 약간 설레이는 듯한 얼굴로 두손을 꼭 모았다. "저들이 함께 있는 것!" 엘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 거렸다. 세브릭은 잠시 입을 다물고 물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과연.." 세브릭과 엘을 제외한 이들은 의아했지만 곧 입이 열린 엘의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제가 여기서 지내고 있는 동안 눈여겨보았던 꽃들이 함께 있다구요! 이게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알아요?! 그리고 하나도 아니고 무려 여러명! 가볍게 씻는 것도 아닌 이렇게 옷까지 벗어두고 갔다구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 이 기회를 놓치는건 여자도 아니에요! 최소한 훔쳐보기가 민망하다면 이렇게 앞으로 나와 요구할 수 있는게 여자죠!" 당당하게 외치는 엘의 말이 끝나고 모두 가까스로 벌어졌던 입을 닫았다. 고요한 침묵이 호숫가를 맴돌았다. 세브릭은 밝게 웃고 있는 엘을 바라보았다. 이번만이 아니였다. 매일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사건사고를 벌여놓는 것에 진영 내 엘을 모르는 이가 드물정도였다. 처음에 엘을 경계하던 병사나 기사들도 시간이 지날 수록 미워할 수 없는 그녀의 묘한 매력에 매번 그녀의 장난에 당해주고 있었다. 아니, 당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하고 있었다. 심지어 최고 사령관인 맥클라스에게 까지도 장난을 쳐 멋지게 성공해 진영 내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었던 엘을 말릴 수 있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세브릭과 사켄은 정말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녀야했다. 물론 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엘 내려오세요. 그리고 옷 돌려주도록 하세요." 세브릭이 지친 한숨을 쉬자, 엘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순간 세브릭은 그 모습을 보고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곧 묘한 미소를 짓는 엘로 인해 세브릭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돌려줄께요." 얕으막하게, 다정하게 말한 엘은 샐쭉 옷을 흔들며 웃었다. "그대신.." "그.. 그대신?" "가는게 있다면 오는게 있어야겠죠?" 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세브릭은 저 미소를 계속 보아왔고, 그 미소가 이제는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았다. 저런 미소를 지을 때의 엘은 항상 그와 사켄을 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싶게끔 만드는 발언을 내뱉었으므로. "세브릭, 저들 중에 한명이랑 찐~하게 포옹 한번,, 어때요?" 소녀의 검은 눈동자는 웃었고, 청년의 장미빛 눈동자는 울었다. 곧 호숫가에서 소녀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 며칠 새에 얼굴이 많이 상했군." 맥클라스의 말에 세브릭과 사켄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곧 외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명에게서 얕은 한숨이 세어나왔다. 여전히 책상 위에는 커다란 지도가 있었고 맥클라스는 그들을 힐끔 보다가 지도를 매만졌다. 엘이 벌여놓은 사건은 메말랐던 동연합 진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지만, 전시 중에 풀어지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기도 했다. "도대체.." 세브릭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을 벌이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매번 사고를 쳐대서 이젠 진영내 병사들이 엘을 내기 대상으로 삼았다더군요. 다음엔 어떤 사고를 벌일까, 혹은 누가 가서 그 사건을 수습할껀가. 그런걸로 말입니다. 엘 때문에 정말 미치기 일보직전입니다." "...." 세브릭의 진심어린 불만에 맥클라스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뜻밖의 인물이 세브릭의 불만에 답했다. "그래, 자네가 오늘 병사와 진하게 포옹했다는 얘기는 들었지." 사켄이 맥클라스의 뒤에서 담담히 말했다. 그 말에 세브릭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저도 어제 사켄이 어린 병사 한명을 안아들고 몇번이고 돌았다는 것을 잘들었지요." "아, 그저께는 기사중에 한명의 손을 부여잡고 '참으로 아름다운 손입니다.'라고 했다고?" "사켄 역시 그날 요리사의 음식을 먹으며 '내 평생 그대의 음식을 먹을 수만 있다면..' 이라고 했다죠?" "..." "..." 세브릭과 사켄의 눈이 서로를 맹렬히 바라보았다. "... 오늘 아침 둘이 손을 잡고 걸었다는 건 알고 있으니 이제 그만하도록 해라." 맥클라스의 말에 둘다 그를 바라보았다. 메말랐던 그의 얼굴에 얼핏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사켄과 세브릭은 그의 얼굴에 웃어야할지, 아침 일을 알고 있는 것에 울어야 할지 고민했다. "안됩니다." "왜요?" "세브릭님과 사켄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날 막는다고요? 정말? 그 명 때문에?" 평소처럼 오늘은 뭐할까 생각하며 나가는 도중에 뜻밖에 받은 방해에 난 가만히 그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 병사 아저씨의 얼굴에는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서려있었다. 쉽지 않겠네.. "진짜로 안돼요?" "진짜로 안됩니다." "정말?" "정말." "아저씨가 후에 .. 하고 .. 해서 ..하게되도?" 내 말에 아저씨의 혼이 여행을 떠났다. 난 가볍게 그의 옆을 지나쳤다. 이 세계 남자들은 참 순진하니다니까. 놀리는 재미가 있어. 근데 .. 말이 너무 심했나? 슬쩍 고개를 돌려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아저씨에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농담이었어요." 혼잣말이지만, 분명 그는 들었으리라 믿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사켄은 처소에 도착해서 멍하게 땅만을 쳐다보고 있는 병사를 보고 멈춰섰다. 그리고 잠시 그 병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여자를 봐도 안될꺼라고? 그냥 저냥 그 끔찍한 삶을 살며 혼자 평생을 지낼꺼라고?" 망연자실해서 넋을 잃은 병사를보고 있다가 사켄은 재빨리 뒤돌아섰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또 어디서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사켄은 주위를 살피며 열심히 걸었다. 회색빛 흙 먼지가 이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목적지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이래서 평소처럼 주군의 곁에 있으려고 했던건데 .. 사켄의 회색빛 눈동자가 짜증스러움을 담았다. 지금까지고 몇번이나 엘의 장난에 당하면서 자신이 많이 풀어졌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그녀가 장난을 치던 말던 무시하고 언제나 주군의 뒤에서서 난 아무런 상관없다 라는 마음을 일관했던 그다. 하지만 그 마음가짐은 그녀의 장난으로 인해 자신의 주군이 당했을때부터 흐트러지고 말았다. 사켄은 잠시 멈춰서서 주군이 있는 천막을 바라보다가 그 날을 생각했다. 진영 내 거의 모든 이들을 유쾌하게 했던 그 사건을. 그 날은 평소와 다름없던 날이었다. 여전히 하늘은 회색빛이었고, 바람은 건조했으며 자신의 주군 역시 진중한 눈으로 다음 전투를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똑똑~" 소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천막 안을 울렸다. 주군도 자신도 그 목소리가 들린 입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다물었던 입을 더욱 꾹 다물었다.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구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소녀가 자신의 처소에서 묵기 시작하면서, 자신은 단 한번도 그 처소에 들리지 않았다. 쉬는 것은 대부분 세브릭과 교대하면서 그의 처소에서 머물렀다. 그래서 세브릭이 소녀의 사건을 수습하고 다니면서 가끔 자신을 향해 원망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그대신 자신의 처소에서 그녀를 묵게 하지 않았던가? 세브릭이 보내는 원망정도는 가벼이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첫날을 빼고는 단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소녀가 자신의 주군의 처소에 들린 것을 보며 사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직 완벽히 저 소녀에대해 알지 못한다. 특이한 머리카락과 눈동자색을 지녔음에도, 자신들의 정보력으로도 소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기에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힐끔 자신의 검을 바라보다가 그 위에 손을 올렸다. 소녀가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한다면 . . . 베어버릴 것이다.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허락도 구하지 않은채 들어와 탁자 앞에 섰다. "무슨 일인가." 자신의 주군의 물음에도 소녀는 생글거리며 주군을 바라보았다. " . . . 나는 두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주군의 눈동자가 소녀를 향해 있었다. 그 눈동자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함을 지니고 있었다. "있잖아요." 소녀가 한쪽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철없어 보이는 소녀일 뿐이었지만, 소녀의 검은 눈동자는 알 수 없는 빛을 품고 있었다. "있잖아요, 사령관님." " . . 뭐지?" "저 . . . 에이 . . 조금만 기다려봐요." 소녀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베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싹한 한기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관통했다. 그것은 전장에서 살기로 인한 것과는 달랐다. 무엇인가 . . 엄청난 불안이 자신을 찾아왔다. 그런 자신을 알아챘는지 소녀의 눈동자는 더욱 위험스레 빛났다. "사령관님, 저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 ." 소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처소 안에 맴돌았다. "부탁?" 주군의 한쪽 눈썹이 스윽 하고 올라갔다. 자신 역시 어처구니 없는 심정이 되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조차 모른단말인가? "네, 부탁이요." "어떤 부탁이지?" 주군의 담담한 음성에 소녀는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자신을 힐끔 바라보고는 그 눈동자가 위험스레 빛났다. "저기 . . 저 분이 계시면 얘기하기 좀 그런데 . . " 소녀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살랑거리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주군도, 자신도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허튼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주군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사켄." 주군의 음성이 자신을 불렀다. "예, 주군." "잠시 나가있도록." " . . 예?" 자신을 내보내려 하는것인가? 믿을 수 없는 주군의 목소리에 되묻자 주군의 담담한 시선이 자신에게 와닿았다. "나가있도록." " . . . 존명." 불안했지만 처소 밖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감각은 처소 안에 모여져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불안했다. 곧 처소 안에서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주군!!!!!" 그 소리에 밖에서 대기하다가 바로 천막 안을 들어갔다. 주군의 한쪽 손은 마치 금방이라도 소녀를 때릴 듯 올라가 있었고, 소녀는 겁에 질린 눈으로 주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 . . 사령관님, 잘못했어요. 다신 . . 다신 안그럴테니까." 소녀의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어 촉촉해져있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바른 성정을 지녔던 자신의 주군이 소녀를 때리려고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은 사그라들었다. 절대 그럴리 없다. 저 소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것이다. 곧 소녀의 비명이 진영 내 울렸는지 몇몇이 처소 안을 바라보았다. "무슨일입니까!" "사령관님!" 그 중에는 자신의 친우, 세브릭 또한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주군의 손으로 갔다가 그 앞에 촉촉히 눈이 젖어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주군의 처소는 순간적으로 침묵 상태가 되었다. "저 . . 이 . . 이건 무슨 . . " 한 사람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말을 꺼내자 소녀가 살짝 가늘게 어깨를 떨며 두손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가냘픈 소녀의 어깨가 떨리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 안타깝게 변하였다. 아무리 정체를 알 수 없다 하나, 아직 어린 소녀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일것이다. "자. . 잠시만 . .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 . " 3번대 대장이 소녀를 바라보다가 주군을 바라보았다. 주군의 눈동자가 소녀를 향해 당황스럽다는 듯, 혹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 . . 사령관님, 일단 손을 내리고 . . 아직 어린 소녀가 아닙니까.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 ." "예,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체는 모르지만 아직 어린 소녀가 아닙니까." "거기다가 여자아이인데 손을 올리시는 것은 좀 .." "일단 무슨 상황인지 말씀을 해주시고 .." 몇몇이 자신의 주군에게 말하자, 주군이 손을 내렸다. 가늘게 떠는 소녀를 제외한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두들 짐작하려는 듯 했다. 주군의 굳은 입매가 달싹 거리더니 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 . . 다웃었나." " . . . ?" 모두 주군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울고있는 소녀에게 다 웃었냐니 .. 자신 역시 주군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떨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푸흡 . . . " 떨고 있던 소녀에게서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풉 . . 푸흐. . . 어떻게, 못참겠어~" 까르르 소녀의 웃는 소리로 인해 모두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로 주군을 바라보다가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가볍게 자신의 눈가를 훔치더니 발그레해진 얼굴을 빛내며 활짝 웃었다. "에이, 모두들 너무 진중하니까, 너무 재밌잖아요."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굳은 자신을 보며 가벼이 위험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 . 무슨 . . ?" "사실은 . . 오늘 뭘 할까 고민했거든요 ." 소녀가 뒷짐을 진채 살짝 세브릭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소녀의 시선을 받은 세브릭의 눈매가 험악하게 일그러져 파르르 떨렸다. "근데, 맨날 오는 사람이 세브릭이니까, 이게 또 재미가 없는거에요." 소녀가 주군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분명 사령관님이 저분과 세브릭 둘에게 절 공동책임 지웠는데, 그렇죠?" " . . . 그랬지." "그런데, 맨날 세브릭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소녀는 밝게 미소지었다. 세브릭의 시선이 더욱 험악해졌다. 확실히 세브릭을 고생시킨 장본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아니었다. "그래서, 저분을 끌어들이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니까~" 소녀가 자신을 향해 빙글 돌아서며 검지를 치켜올렸다. "저 분의 모든 감각은 사령관님을 향해 열려있거든요." 소녀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소녀의 까딱거림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저분의 관심을 한몸에 사고 있는 사령관님이 부럽기도 하고, 또 질투도 나고." 소녀가 샐쭉 웃었다. "그렇게 되어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니까, 이 방법이 제일일것 같아서." 소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의 작은 장난이였답니다. 모두 너무 당황하셔서 제가 더 당황스러웠어요." 너무나도 가볍게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 천막 안에 순간 침묵이 맴돌았지만 곧 바람빠지는 소리같은것이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평소 사람좋기로 유명했던 7번대 대장이였다. "아 . . 아니 죄 . . 죄송 . . 풉 . . . 저기 . . 그러니까 이게 . . 푸흡 . . " 그가 웃음을 참지 못하자 다른 이들도 전염된 것인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웃지 않는 자는 세브릭과 자신, 그리고 자신의 주군 뿐이였다. "그러니까 ." 소녀가 말을 꺼내자 한두명씩 웃음을 멈추고 한결 풀어진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사령관님, 저분을 너무 독차지하지 말아주세요." 가볍게 주군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소녀를 보며 단 두명을 제외한 모두가 다시한번 유쾌하게 웃었다. 심지어 항상 무겁던 주군의 입매조차 부드럽게 풀려 픽 바람빠지는 듯한 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세브릭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그 시선은 . . 동정하는 것도 같았고, 기뻐하는 것도 같았다. 그 날 이후, 자신 역시 주군의 명에 의해 소녀의 사건을 수습하려고 뛰어다녀야했다. 그 날을 생각하며 사켄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사켄의 회색빛 머리카락이 그 작은 움직임으로 인해 살짝살짝 바람에 맞춰 흔들렸다. 그는 우뚝 멈춰섰던 걸음을 다시 옮겨 주위를 살폈다. 아마 그녀라면 진영 내 가장 소란스러운 곳에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메마른 대지 위로 부는 모랫바람을 맞으며 귀를 기울여 걸음을 빨리 했다. "엘! 내려.." "내..빨.." 거칠게 없다는듯, 하지만 주위에 귀를 귀울여 걷고있던 사켄의 발이 멈췄다. '엘'이라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 것을 보아 분명 소리가 들린곳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소리에 집중하여 걷던 사켄의 발걸음은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회색빛 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켄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가 다시 본래의 자리를 찾았다. 사람들은 나무 위를 바라보며 안절부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엘! 내려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맞습니다. 내려오십시오, 저희가 사켄님과 세브릭님께 혼납니다." "내려와요, 누나! 위험하다니까요!" 그들의 목소리와 시선을 따라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메마른 갈색빛 사이로 밤하늘같은 검은색이 언뜻언뜻 비췄다. "설마 떨어질라고, 걱정하지 말아요~ 올라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줄 알아요?" 가볍고 싱그러운 목소리가 나무 아래로 흩날렸다. 엘은 굵은 나뭇가지에 앉아 특유의 싱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나무 아래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주위를 살피던 엘의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 놀란듯 살짝 커졌던 눈동자는 곧 곱게 휘었고, 붉은 입술도 기분좋은 호를 그렸다. 엘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팔을 따라 자신에게로 닿았다. "헉! 사.. 사켄님!"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 사이로 들어가 나무 아래에 섰다. 별로 높아보이지 않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고는 톡톡 자신의 옆자리를 쳤다. "앉을래요?" " . . . " 묵묵부답인 자신을 향해 그녀는 입가가 아프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웃어주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고, 그 시선을 외면하며 사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자신과 엘을 번걸아보고 있었다. " . . .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 자신의 말에 모두가 머뭇거리더니 흩어지기 시작했다. 몇명은 아쉬움이 남는지 자꾸만 뒤를 흘끗거리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얼른 걸음을 옮겼다. 그 중 갈색빛 머리카락을 지닌 한소년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다시 한번 엘이 있는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갈색빛 눈동자 가득 그녀에 대한 걱정을 품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잠시 그 소년을 어디에서 봤던가를 생각하던 사켄은 이곳으로 왔을때 세브릭의 처소 앞을 지키고 서있던 어린 병사였음을 기억해내었다. "누나 .." 아직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것인지 소년다운 여린 미성이 가벼이 엘을 향했다. 그녀는 그 소년을 바라보며 살짝 손을 흔들어주며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기분좋게 미소지었다. 어린 소년병사는 자신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자꾸만 뒤를 돌아보다가 멀리 사라졌다. 가끔 엘의 곁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래도 묘하게 소년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누군가와 닮은 듯한 낯익은 모습을 지닌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켄의 귓가에 마치 바람과도 같은 가벼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전 제가 있어야할 자리를 모르는데. 어떻게하죠?" 엘의 목소리에 사켄은 나무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미소짓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걸 알면서도 묘한 위화감이 섞인 눈동자가 자신이 아닌 자신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켄은 한번의 도약으로 엘과 가까운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시선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는 회색빛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묘한 위화감을 담은 눈을 감추며 부드럽게 풀린 웃음을 지었고, 회색빛 눈동자는 그런 소녀의 웃음을 바라보며 슬쩍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건조한 모랫바람이 두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사켄은 엘보다 낮은 나뭇가지 위에 자리를 잡고 엘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고, 엘은 그런 사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살풋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제 옆에 앉으라고 했었는데, 죽어라 말 안듣는다니까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사켄이 입을 열었다. "분명 처소에 있으라는 명을 들었을텐데." "아, 그런 말을 들은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고~" 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엘의 시선은 더 이상 사켄에게 머물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빈공간을 통해 멀리 앞에 펼쳐져있는 동연합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것또한 확실치 않았다. 앞을 보고 있으나 앞을 보고 있진 않았다. "뭘 보는거지?" "글쎄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자신의 물음에 가볍게 답하며 그녀는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댔다. 평소와는 달라보이는 모습에 사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동연합에 온것은 이제 막 일주일을 넘겼지만, 그녀에 대해 아는 이들은 모두 엘의 가볍고도 싱그러운 누구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에 웃음지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무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엘의 모습은 낯설었다. 무언가에 잔뜩 지쳐있는 듯이 가벼운 숨을 내쉬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외로워보이고 여려보였다. " . . . " 사켄은 입을 다물고 엘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바람에의해 가느다란 검은색 머리카락이 갈색빛 나뭇잎들을 피해 살랑였다. 사켄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지금은 감겨있는 엘의 눈동자를 생각했다. 여유로움을 담고 항상 기분좋게 반짝이는, 마치 검디검은 밤하늘을 퍼다가 부어놓은 것처럼 부드러운 검은 눈동자. 검은색이라 .. 확실히 흔한 색이 아니었다.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켄은 바람에 흩날리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자신의 손 아래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얽혔다가 풀렸다. 갑자기 묘한 감정이 들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심장이 의아할 정도로 가벼이 두근거렸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거둬들이고 엘을 보았다. 어느새 엘의 눈동자는 소리도 없이 떠져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주친 눈동자 속에는 읽어낼 수 없는 무엇인가가 담겨져있었다. 벌써 몇십년이나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지쳐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소녀. "내려갈까요?" 엘의 검은 눈동자가 부드러이 휘며 자신을 향해 물었다. 평소와 같이 가볍고 싱그러운 목소리였다. 아까와 같은 외로움도, 여려보이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 . . " 사켄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려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무 위에 앉아있는 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엘은 샐쭉 웃으며 자신에게 말했다. "내가 뛰어내리면 잡아줄껀가요?" 거친 모래바람으로 인해 메말랐던 나뭇잎이 거칠게 나부끼다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갔다. 엘은 바람으로 인해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잡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사켄은 그런 엘을 그 담담한 회색빛 눈동자로 계속 바라보았다. 거칠게 불던 바람이 멎었다. 엘이 엉켰던 머리카락을 단정히 정리하며 사켄을 보았다. " . . . 내려와라." "한번 믿어보겠어요." 엘이 키득거리며 가볍게 뛰어내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부드러이 물결쳤다. 사켄의 단단한 두 팔이 엘의 가는 허리를 안아들었다. 엘의 가녀려보이는 두 팔은 사켄의 어깨 위에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사켄은 아까와 같은 가벼운 두근거림이 더욱 커진것을 느꼈다. 품 속에 안겨있던 엘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기가 자신을 감싸안았다. 당혹스러운 기분을 애써 내리 누르며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분좋은 온기를 자신의 품안에서 땅으로 내려놓으려 할때 , 사켄의 귓가에 엘의 붉고 부드러운 입술이 작게 속삭였다. "사켄이라고 불러도 되요?" 귓가에 닿은 한숨과도 같은 가벼운 숨결에 사켄은 자신도 모르게 굳었다. 엘은 다시 한번 사켄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사켄이라고 . . 불러도 되요?" 엘의 발이 땅에 닿았다. 사켄은 그녀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신을 바라보며 의미모를 웃음을 짓고 있는 엘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던 회색빛 눈동자는 그녀를 외면해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엘은 그런 사켄의 뒷모습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라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바람결에 날리는 사켄의 목소리에 엘의 입가가 달콤하게 미소지었다. ". . . 마음대로 해라." 사켄의 뒤를 따라 걸어 도착한 곳은 내가 묵고 있는 처소. 그러니까 사켄의 처소였다. 사켄은 그곳에서 걸음을 멈춰 날 쳐다보았다. "들어가라고요?" " . . . " 대답은 없었지만 그의 눈이 긍정하고 있었다. 뭐 하라면 해야지. 직접 이렇게 찾으러 와줬는데, 또 말썽을 일으켜서 그의 미움을 살수는 없지 않겠는가? 애써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 맡았는데. 그가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처소 안으로 들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켄의 회색빛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사켄." " . . . " 부름에 대답없는 사켄의 눈을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회색빛 눈동자는 아까와 같은 흔들림을 갖지 않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 가까이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사켄은 내가 사령관 아저씨에게 작은 장난을 친 후 내 사고를 수습하고 다니게 되면서,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꽤 자주 본 사이였다. 그렇게 따진다면 세브릭과는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본 사이가 되었지만. "사령관님께 안부전해주세요." " . . . " 사켄은 내 말을 마지막으로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겼을 때 두근거리던 심장을 그에게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자자, 정신 차립시다. 나는 계속 '이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난 내게 되뇌었다. '이곳'에서 내가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언제까지인지는 알수 없다. 아마도 지오가 이 차원의 비틀림을 해결하고, 내가 이 전쟁을 끝낼 때까지. 만약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고 해도 '이곳'에서 계속 있을 수는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품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처소로 들어갔다. " . . 이제 돌아온건가요." "응?"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처소 안의 그림자 속에서 한남자가 걸어나왔다. 화려한 장미빛을 품은 남자, 세브릭이었다. 세브릭은 그림자를 벗어나 나를 바라보며 조금씩 내게 다가왔다. "흐음? 기다린거에요? 세브릭같은 미남이 기다려주고 있었다니, 이거 조금 우쭐해지는데요?" "혹시라도 또 무슨 사고를 치러나간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뭐, 내가 매일 사고를 치겠어요? 소소한 장난으로 모두를 즐겁게 해줄 뿐이랍니다. 그런데 사켄이 날 데리러 왔었는데, 세브릭은 사령관님의 옆에 있는 것 아니었어요?" ". . . 사켄?" 세브릭의 옆을 지나치려다가 세브릭의 의문어린 목소리에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날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사켄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자신이 허락치 않는다면 그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주어지지 않지요." "아, 오늘 사켄에게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답니다. 이젠 제게도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생겼어요. 참 아쉽게 됬죠?" 그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항상 생각하지만, 그의 장밋빛 눈동자는 아마도 모든 여인들에게 너무나도 유혹적일것이다. 그의 화려한 외모도, 장밋빛 향기도. "그렇게 쳐다보는 것은 무슨 의미? 믿을 수 없다는 거라면, 사켄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도록 해요, 세브릭. 내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해줄 말은 없답니다, 장미빛 아름다움을 품은 기사님." " . . . 확실히 믿기 힘들군요." 잠시 유혹적인 세브릭의 눈동자에 가슴 떨려하다가 슬쩍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의 옆을 지나쳤다. 하지만 그에게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나의 손목을 아프게 잡아챘다. "아?!" 순간적으로 뒤돌려세워져 그의 눈과 시선을 마주보게 되었다. 그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으나 지독히도 위험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날 왜 잡은건지 물어볼 수 도 없었다. 그저 아무말도 못하고 손목을 잡힌채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세브릭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아까 당신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하는 말을 들었지요." "무슨 . . 말이요?" "계속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말."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가 위험스레 빛을 발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조심성 없이 말을 내뱉은 것으로 인해 세브릭의 의심을 사게되었다.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죠. 내가 계속 이곳에 있을 꺼라고 생각했어요? 사령관님께서 나에 대한 의심을 풀면 나도 이곳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야죠. 이곳에서 천년만년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나의 웃음기 어린 말에 세브릭은 내 손목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더했다. "저는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믿지 않아도 좋아요. 나도 나를 믿으라 말하기 힘든 사람이거든요. 특히 세브릭같은 미인들에게 나란 사람은 매우매우 위험한 사람이죠." 그의 말에 대답한 나는 손목에서 짜르르 느껴지는 아픔으로 인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에서 옴싹달싹 못하는 것에 대한 이상함도 함께 섞여있었다. 세브릭은 여전히 내 눈에 시선을 맞춘채 계속해서 말했다. "전 당신이란 존재가 싫어요." "아, 그건 좀 충격이네요. 나는 세브릭을 좋아하고 있는데요." 내 대답에 나의 손목을 잡은 세브릭의 손에 힘껏 힘이 들어갔다. 부러질 것 같은 아픔에 눈을 찌푸렸지만 애써 폈다. 그의 눈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 . . . "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그는 내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인가. 두근거리는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애써 그에게 여유를 가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내가 여기 왔을 때 들었던 질문이랑 같은 의미인가요?" 그는 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손목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아릿한 아픔으로 인해 힐끔 손목을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말했다. "그때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어요." 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나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떼어내려고 얼마 힘주지 않았는데 그의 손이 내 손목을 놓았다. 그가 힘껏 잡아 빨개진 손목을 감싸고 그에게 뒤돌아서서 침대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 . . 내가 누굴까요 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어요." "잘알고 있네요." 내 말이 끝나고 고요함이 주위를 감싸안았다. 계속 웃고있는 나의 모습에 그는 날 바라보다가 훽 돌아섰다. 그가 저벅저벅 처소에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멀어지는 발걸음을 듣고 있다가 풀썩 침대 위로 누웠다. 그에게 잡혔던 손목이 욱신거렸다. "멍들겠네.." 정말 이렇게 힘껏 잡아서 멍들 수도 있구나. 멍해진 머릿 속에는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곧 사켄의 일도 떠올랐고, 세브릭의 일도 떠올랐다. 메마른 회색빛의 남자와 화려한 장미빛의 남자 . 그 둘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의 생각을 없애려고 애써 달리 생각할게 무엇이 있는지 고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정하고 여린, 나의 신 지르오디스가 떠올랐다. "이렇게 있으면 안되겠지." 지오의 부탁을 들어줘야했다. 이곳에 오래있을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누군가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의 시선 속에 있을 때가 떠올라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돼." 그래, 이래선 안된다.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품지않기로 방금 스스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이쪽 세계'의 인간이 아닌 나로서는 . . . 쓸데없이 특별한 감정을 품는다면, 후에 어떻게 될지 나는 대충 짐작 할 수 있었다. 아마 분명히 .. 그래, 분명히 나도, 내가 특별한 감정을 품은 그 사람도 힘들게 되리라. 나는 돌아가야할 사람이고, 그 사람은 분명 이곳에 남아야할 사람이다. 침대위에서 뒤척이다가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모포 속으로 꼬물꼬물 기어 들어가 눈을 감고 살짝 한숨을 내뱉었다. "지오, 내게 너무 큰 부탁을 했어요." 하지만 일단 지오의 부탁부터 해결하고 봐야했다. 평화로워보이지만 실상 전시 중이라는 것을 진영을 돌아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오가 차원을 비틀었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오가 차원을 비틀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나는 이곳에서 몇일을 지내면서 그 의미를 알게되었다. 일단 그 의미를 알게 된것은, 처음 이 곳으로 왔을 때는 이상치 않다 여겼던 회색빛 하늘이였다. 그저 하늘로만 여겼던 그것이, 사실은 하늘이 아니라 온통 구름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어째서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적당량의 온기만을 머금고 있는 것인지 알게되었다. 그리고 몇달에 한번 비가 내리는 데, 보슬보슬 내리는 비도 아니고 정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내린다고 들었다. 비가 내리는 그 일주일에서 이주일간의 기간을 '레아멘 기간'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집안에만 있어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내린다고 했다. 난 그걸로 비틀림의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이곳으로 오고 3일째되던 날, 맹렬하게 모래바람이 몰아쳤다. 사람들은 그 모래바람을 '카젠드'라고 불렀다. 사막에서는 가끔 그런 모래바람이 분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곳은 사막이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그 엄청난 규모의 모래바람, 카젠드 덕분에 그 날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얌전히 처소에 쳐박혀있었다. 모래바람은 단 한순간에 모든 것을 망가트릴듯 엄청난 기세로 몰아치다가 금방 수그러져 사라졌다.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듯 진영 내를 돌아다니며 보수공사를 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 엄청난 두가지.. 아니 하늘을 뒤덮은 구름까지 합하면 세가지 재앙을 제외하고 또 알아야할 것이 있냐고 물었을때, 아, 물론 그 물음의 대상은 나의 귀여운 연하친구 쿠오였다. 여하튼 쿠오는 별다른 것은 없고, 음식을 먹을 때 조심해야한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안되서 갑자기 식물과 동물들이 이상하게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식물은 독을 품어, 몇몇개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먹을 수 없게 되었고, 동물들 역시 꽤 많이 몬스터화가 되었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없었던 몬스터가, 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마을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몬스터도 없고, 독을 품은 식물도 없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종족들이 머물고 있는 '생명의 숲'이었다. 이종족들이 필사적으로 생명의 기운을 붙잡아놓고 있는 마지막 숲. 그 곳을 인간들도 이종족들도 '생명의 숲'이라 불렀다. 생각을 정리하며 마음이 진정된 것을 느끼고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약간은 흐릿한 시선으로 천막의 구석을 바라보았다. 짙은 그림자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나타나기라도 할듯 나는 뚫어지게 그 부분만을 보고 또 보았다. "이게 뭐하는건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대충 벗어두었던 신발을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내가 이곳에서 전쟁을 어떻게든 말리는 동안, 지오가 차원의 비틀림을 해결한다고 했으니 .. "지오, 당신은 잘해결하고 있는거겠죠?" 처소 밖으로 나가는 입구를 향하며 지오를 떠올렸다. 소중한 생명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슬퍼하다 그것이 분노로 바뀌어 차원을 비틀어버리고, 그것을 후회하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던 지오. 신이면서도 슬픔이 많던 그를 믿고 나도 내 일을 해야했다. 처음에는 전쟁을 어떻게 말리나 싶었다. 그런데 주위를 기웃거리면서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 나는 대충 어떻게 전쟁을 끝마칠 수 있을지 생각해낼 수 있었다. 전쟁을 거슬러올라가자면, 두제국의 전쟁으로 인해 지금의 대륙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전쟁의 원인은 바로 서쪽의 '카슘 제국'의 황녀 때문이였다. 카슘 제국의 황녀는 동쪽에 있는 '아렌타 제국'의 황태자와 정략혼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 대륙 내에 제국이 '카슘 제국'과 '아렌타 제국'뿐이였으니 혼인동맹을 맺어 입지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황녀가 아렌타 제국으로 넘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때 사건이 벌어졌다. 아렌타 제국 내의 숲에서 황녀가 암살당한 것이다. 독에 의한 암살이였다. 카슘 제국은 하나뿐인 황녀의 죽음에 분노했고, 아렌타 제국은 카슘 제국의 분노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렌타 제국의 막내 황자가 카슘 제국의 사신으로 직접 가기로 했었는데, 이 막내 황자 또한 카슘 제국 내에서 누군가에 의한 기습으로 인해 암살 당했다. 이 사태로 두 제국은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리게 되었다. 두 제국의 주위에 있던 왕국들도 어쩔 수 없이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후에 인간들의 전쟁은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받은 이종족들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서연합, 동연합, 이종족연합 이 세 연합의 전쟁. 바로 '제 1차 대륙 전쟁'이었다. 그 전쟁이 거의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맺지 못하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카슘제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 '서연합', 아렌타제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 '동연합', 생명의 숲에서 살아가는 이종족들로 이루어진 곳이 '이종족 연합'이였다. 아, 하지만 한군데 중립국을 외치고 있는 곳이 있었는데, 춥디추운 북쪽에 있는 커다란 섬왕국, 하빔 왕국이었다. 대륙 전쟁이 일어나고나서 하빔 왕국은 한동안 침묵을 고수하더니, 끝내는 중립국을 선포하고는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바로 아렌타 제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동연합', 그 중에서도 바로 동연합의 본진이었다. 처음에 그저 사령관인줄 알았던 그 지푸라기 빛의 아저씨가 사실은 '동연합'의 중심인 아렌타 제국의 황제란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라니. 믿을 수 없었지만, 모두가 그리 말하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령관 아저씨는 바로 카슘제국의 황녀와 정략혼을 맺기로 했던 황태자의 아들이었다. 그 황태자는 이미 병으로 세상을 등진지 오래였고, 지금 사령관 아저씨가 황위에 올라있었지만,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고 뭐고, 아무 쓰잘 데 없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대지. 그리고 비틀림에 의한 죽어가는 대륙. 이제는 두연합은 왜 전쟁을 계속해야하는지도 모르고 서로를 향해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어째서 끝맺지 않냐고 사람들을 향해 물었을 때, 그들 역시 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이 전쟁을 어떻게 끝맺을 수 있을지 대충 잡아낼 수 있었다. 이 세 연합은 서로 화해를 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뿐이다. 너무나도 오랜 전쟁으로 인해 서로 힘든 이 시기에, 누군가가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기회를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 생각되었다. 어쨌든 신과 함께하고 있는데, 무서운 것이 뭐가 있으랴 싶었다.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을 이끌어 손을 맞잡게 해야했다. 지금 동연합의 본진에 있으니, 사령관 아저씨를 설득하고, 서연합과 이종족 연합도 설득한다면 서로 화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게 나의 계획. 그렇게만 된다면 이 지겨운 전쟁은 끝나게 되고 모든 이들이 평화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때쯤이면 지오 역시 차원의 비틀림을 해소하여 지금의 회색빛 하늘은 맑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지 않을까. " . . .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리 없겠지." 무엇보다 내가 짐작하기도 힘들정도로 오래된 전쟁이였다. 50여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훨씬 더 길고 긴 시간이었다. 그 전쟁을 겪어오면서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을, 나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죽어갔을 것이고, 그로인해 많은 이들이 눈물 흘렸을 것이다. 발 아래로 메마른 모래가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다가 걷고 있던 걸음을 멈춰섰다. 분명 그럴것이다. 서로에 대한 골이 무척이나 깊겠지. 하지만 .. 하지만 이대로 계속 이 전쟁을 이어나간다면, 분명 이 대륙에겐 멸망의 길을 걷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지오의 부탁도 있었지만, 나 역시 이 전쟁이 끝나길 바라게 되었다. 쿠오의 맑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 곳에서 지내면서 겪게된 다른 사람들의 순박하고 지친 눈동자도 함께 떠올랐다. 지친 그들을 쉬게 해줄 수 있다면, 그들에게 평화를 안겨다 줄 수 있다면 ..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생각했던 곳을 향해 걸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긴,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무거운 일들은 가볍게 잊어버리고,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인간의 삶을 무한하지 않다. 유한하다. 그 삶 속에서 내가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리면 되는 거다. 주위에 신경 쓸 새도 없이 길을 걷고 있던 나를 누군가의 손이 가로막았다. 햇빛을 받아 약간은 그을린 그 손을 따라 팔을 거치고 마지막에는 얼굴을 확인했다. 맑은 갈색 눈동자가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음? 쿠오. 무슨일이야? 혹시, 사켄이랑 세브릭이 내가 어디 못가게 막고 있으라고 한거야?" "아니요 ." "응?" 그럼 뭐 때문에 나를 막은거지? 잠시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생긋 웃었다. 사켄도, 세브릭도 더 이상 날 막는 것은 불가하다 생각했는지, 아까 나에게 당했던 가련한 병사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쿠오같이 귀여운 미소년이 있다는 것에 즐거워졌다.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려고?" "ㄴ.. 네?! 아 ..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게 .." 갈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무척이나 당황한 듯 손까지 내저으며 허둥지둥 정신없이 굴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 나는 작게 웃으며 나와 엇비슷한 키를 가진 쿠오의 갈색 머리카락을 있는 힘껏 흐트려놓았다. 쿠오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누나!"라고 불렀고 나는 그의 음성에 환하게 미소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생각에 대해 꼭 실행시키리라 결심했다. 쿠오와 같은 어린 소년들이 이대로 전쟁으로 인해 어른이 되어간다면 .. 그건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사랑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한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푸르른 자연을 느끼며, 평화로운 여유를 즐기며. 그렇게 살아야한다. "데이트 신청이 아니라면 왜 날 막은거야? 방금 봤으면서도 내가 보고싶었던거야?" 짖궂게 쿠오에게 물었다. 쿠오는 어색한듯 투구를 쓰지 않은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긁적이더니 곧 결심한 듯 날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또 한참을 아무말도 않고 보기만 하기에 나 역시 눈을 마주쳐 쿠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누나, 있잖아요." "응?" "그러니까 .. 계속 이곳에 있을꺼죠?" " . . . 응?" "계속 . . 여기에 있어줄꺼죠?" 쿠오의 물음에 순간 당황했다. 계속 '이곳'에 있을꺼냐고?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마음을 다잡아 여유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내가 여기 있어주길 바라는거야?" "네."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였다. 소년의 진지한 눈동자가 나를 한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 속에 잡힌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평소 버릇처럼 오른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물기 없는 건조한 바람이 쿠오의 머리카락을 희롱했지만, 쿠오는 신경도 쓰지 않은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혼이라도 하려고?" 나의 장난기 어린 나직한 물음에 쿠오는 또 다시 아까와 같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에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쿠오를 지나쳐 걸어갔다. "누나!" "응?" "대답은요?!" "대답?" 내 뒤에서 나를 부르며 대답을 요구하는 쿠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리에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등 뒤로 쿠오의 맑은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고민스러워졌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곳'에 남을 수 없다. 쿠오가 바라는데로 '이곳'에 함께 있어줄 수 없다. "미안." 그 한마디와 쿠오를 남겨둔채 나는 그 장소를 떠났다. 쿠오의 시선이 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난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뒤돌아 볼 수 없었다. 난 지오와의 약속을 지켜야한다. 그리고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가야한다. 아니, 나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이곳에 남을 수 없다. 내가 나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 내가 죽었을 때뿐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쿠오, 너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네가 바란다고 했던, 내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 불가능한 일이야. "사령관님, 계세요?" 분명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령관 아저씨의 처소로 들어가며 물었다. 처소 안에는 여전히 커다란 탁자가 있었고, 그 탁자위에 손으로 직접 그린 지도가 있었다. 그리고 탁자를 둘러싸고 세브릭과 사켄, 사령관 아저씨가 서있었다. 얘기를 하던 중이었던지 내가 들어온 순간 세사람 다 열었던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특히 날 자신의 처소로 데려다주었던 사켄이나, 방금 전까지 나와 대화를 나눴던 세브릭 같은경우에는 왜 또 여기에 있는거냐 라는 듯한 시선이어서 그 시선을 슬쩍 외면하며 사령관 아저씨를 향해 웃어보였다. "무슨 일인가."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어서요." 가볍게 미소지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 잠깐 세브릭과 사켄을 힐끗 보고는 어정쩡한 웃음으로 사령관 아저씨에게 말했다. "둘이서만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요." 세브릭과 사켄이 나간 후, 사령관 아저씨도 나도 입을 열지않고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침묵은 사령관 아저씨가 입을 열게 되면서 자연스레 흩어졌다. "할 이야기가 무엇이지?" " . . . 전쟁이라는 거 말이에요." " . . . " "전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거든요." " . . 지금도 전쟁 중이다." 아저씨의 말에 피식 웃음지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전쟁을 겪은 적이 없다고.. 마음 속으로만 중얼거리다가 나는 동쪽에 있는 '아렌타 제국'을 손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사령관님이 아렌타 제국의 황제 폐하시라면서요." " . . . 이름만 남은 황제일 뿐이지." 담담한 목소리에 나는 사령관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진중한 시선과 굳은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얼굴 가득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 아저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옮겨 생명의 숲을 짚고, 그 다음에 카슘 제국을 짚었다. 카슘 제국을 짚었던 내 손가락은 다시 대륙의 한복판에서 멈췄다. 아저씨는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할 수 있도록 가벼이 심호흡하고 싱긋 웃었다. "제가 움직일 경로에요." " . . 움직일 경로?" 사령관 아저씨의 지푸라기색의 눈썹이 지긋이 올라갔다. 하긴, 좀 뜬금없는 소리인가? 나는 생글거렸다. 서서히 내게 다시 여유가 돌아왔다. 이렇게 긴장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전쟁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말이 되든 안되든 일단 시도는 해보아야할 일이었다. 일단 [에르테이샤]인데, 지오의 부탁을 들어줘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죽는다면 그것도 내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령관 아저씨를 바라보다가 아저씨가 다시 입을 열때까지 나는 나대로 생각에 빠졌다. 나는 돌아가거나 혹은 죽게될 것이고, 그전에 쿠오와 같은 이 세계의 지친 이들에게 평화를 안겨주고 싶었다. "그 의미는?" 드디어 사령관 아저씨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씨익 나는 나도 모르게 정말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나의 세계에서도 많은 이들을 힘들게만 하는 그 더러운 전쟁. 모두를 아프게만 하는 전쟁. 모두를 지치게만 하는 전쟁. "이 빌어먹을 전쟁을 끝내려고요." 지르오디스, 나는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내 식대로 한걸음을 내딛게 되었어요. 그 한걸음이 이 대륙에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대로 노력하려고 해요. 한숨을 내쉬듯 속으로 지오에게 중얼거린 후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하며 나는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 . . . . " 사령관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빤히 보고 있었다. 나 역시 별 할말이 없기에 얌전히 입을 닫고 있었다. 아저씨는 아까 내가 짚은 지도의 길을 따라가보더니 다시 날 지그시 보았다. "전쟁을 끝내겠다?" "네." ".. 50여년간 그 누구도 끝내지 못한 이 전쟁을, 네가 말이냐?" "누구도 끝내지 않은 것뿐, 끝내지 못한건 아니죠. 누군가가 나섰다면 이 전쟁은 이렇게 큰 전쟁으로 규모가 커지지 않았을꺼고, 또 이렇게 오랫동안 싸우지 않았을 꺼에요." "누군가라.." "만약 제가 끝내지 못한다면 .."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사령관 아저씨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제가 끝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도 끝내지 못한다면 또 다시 다른 사람이 이 전쟁을 끝내려고 하겠죠." 그것이 지오가 보낼 사람들일지, 아니면 이 세계에서 이 힘들기만 한 전쟁을 끝맺기 위해 사람들이 나설지 모르는 거지만. " . . . "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사령관님은 언제까지 이 전쟁을 계속할껀가요? 백년? 이백년? 그로인해 얻는건 뭐죠? 이름뿐인 황제의 이름인가요?" 내 말에 아저씨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이 바보같은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나요? 저주받은 것만 같은 이 대륙이 보이지 않아요? 언제까지 죄없는 피를 흘려가며 이 아무 이익없는 전쟁을 계속할꺼에요?" " . . . " "전쟁이 시작되고 그 누가 행복하게 미소지었죠? 사람들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슬픔, 허무함 . . 그리고 그 지친 모습 . . 사령관님의 눈에도 분명 보였을 꺼에요." 나는 말을 하면서 아저씨의 표정을 살폈다. 아저씨는 그저 눈을 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입을 닫음으로써, 처소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그 누가 끝내려고 할까." 아무 반응 없이 내 얘기를 듣던 아저씨가 조용히 입을 떼었다. "이 전쟁이 아무 의미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누구도 끝내려 하지 않는 것은, 이 깊은 갈등을 어떻게 끊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이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어. 나 역시 이 전쟁으로 인해 잃은 것이 있고, 이런 전쟁을 계속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끝낼 수 없지. 끝낼 수 없어." 사령관 아저씨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넌 누가 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는가?" "알고 있어요." " . . . 누구지?" "모두죠." " . . . 모두?" "사령관님도 아까 말했듯이 마음 속에선 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시잖아요? 쓸데없는 고집피우지 마세요." ". . . 그래서?" 아저씨가 조금은 혼란스럽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말했잖아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빌어먹을 전쟁을 끝내고 싶다고." 한번 깊게 숨을 들이킨 후 탁자위로 두손을 깍지낀채 아저씨에게 말했다. "사령관님, 절 도와주세요.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선, 아렌타 제국의 황제인 사령관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처음엔 동연합에서부터 시작할꺼에요. 사령관님이 전쟁을 끝내는 것에 동의하신다면, 일은 더 수월해지겠죠. 전 생명의 숲으로 가서 이종족 연합의 대표와 만날꺼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서연합으로 가겠죠. 사령관님께 했듯, 지금 이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세 연합에게 모두 전쟁을 끝내자고 설득할꺼에요. 만약 모두를 설득해낸다면, 마지막으로 제가 짚었던 곳으로 가서 사령관님과, 서연합 대표, 이종족 연합 대표, 이렇게 세연합의 대표들이 전쟁을 끝맺자고 하면 되는거에요. 어때요, 간단하죠?" 분명 말은 간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저씨는 다시 지도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저씨의 눈에서는 아무 것도 잡아 낼 수 가 없었다. 더이상의 말은 무의미했다. 이 다음은 아저씨의 판단에 맞겨야했다. 지도만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곧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만약.. 그래 만약 이 제의가 무시당한다면 내겐 방법이 없다. 지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 이 방법도 겨우 생각해낸 것이니까. 무슨 "합"하면 천지가 뒤바뀌는 무위를 지닌것도 아니고, 우리 시대의 지식을 적용해 대륙을 진동 시킬 수도 없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 나다. 내게 있는 게 있다면 그나마 말재주 정도와 '죽는 것쯤이야. '라고 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혈기왕성함이랄까. 나는 아저씨의 말을 기다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땀으로 인해 조금 축축해진 손을 치마에 쓱쓱 닦아내었다. "사켄과 세브릭, 그 둘과 함께 가도록해라." "네?"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나는 멍하게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설마 혼자 가려고 생각한건 아니겠지?" 아저씨의 눈이 부드러이 풀리더니 조금은 다정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이젠 네가 누구든 별상관 없어졌다. 네게 무슨 의심을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만약에 네가 정말 전쟁을 멈출 수 있다면.. 그렇게 되도록 나 역시 도와야겠지." ".. 절 믿어주시는 건가요?" 아저씨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날 지나쳐가며 내 머리에 손을 올려 한번 다정하게 토닥여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가 만진 머리에 손을 얹으며 멍한 기분에 조용히 만지작거리다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주체못할 행복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지오, 어떻게 하죠? 안면근육이 고장난듯 얼빠진 웃음만 흘러나왔다. 나 지금 엄청 기뻐요. 아저씨가 날믿어주었다. 비로소 이제 좀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정말 이 전쟁을 멈추리라 결심했다. "누나, 그게 사실이에요?" "응?" 없는 짐이지만 혹시 몰라 짐을 챙기고 있는데, 천막안으로 급히 들어온 쿠오가 내게 물었다. "뭐가?" "떠난다는거!" 안절부절거리는 쿠오에게 살짝 챙기던 짐을 들어보여주었다. 무언의 긍정인 나의 행동을 보며 쿠오는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다. 난 그런 쿠오를 무시하곤 얼마 없는 짐을 챙겨 어깨에 매고 로브를 단단히 여몄다. 혹시라도 카젠드가 다시 몰아친다면 .. 끔찍했다. "정말.." 쿠오의 울음끼섞인 목소리에 멈칫하고 쿠오를 돌아다보았다. 맑은 갈색 눈동자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담고 있는 것이.. 이것 참, 미인의 눈물만큼 가치있는 건 없는데 .. 거기다가 미인 중에서도 이제 여물어가는 미소년의 눈물 .. 그런 가치있는 눈물을 나같은 사람을 위해 왜 흘리려하다니.. 사람 마음을 무겁게 하네. "왜 울려고 하는거야? 내가 죽으러가니?" 난 쿠오에게 다가가 빙글거리며 뛰어왔는지 쿠오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주었다. 나랑 엇비슷한 키의 쿠오의 시선과 마주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정말 갈꺼에요?" "그럼 거짓말로 갈까?" " . . . 마요 . . " "응?" "가지마요, 위험한데.. 안가면 안돼요?" ... 쿠오는 내가 뭐하러 가는 줄 아는건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어 쿠오를 바라보았다. 내가 뭘 하러 가는지 알고있는 사람은 사령관 아저씨, 그리고 나와 함께가는 세브릭과 사켄 정도 일 것이다. 쿠오는 주먹으로 자신의 눈가를 쓱 닦으며 여전히 물기로 반짝이는 눈으로 날 보았다. "가지마요, 누나. 제발 .." . . . 이 녀석이 또 누나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두손을 들어올려 쿠오의 얼굴을 잡고 마치 입이라도 맞출듯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쿠오의 맑은 눈동자가 크게 뜨여 흔들리는 게 보였다. 코가 닿을락말락하는 거리에서 난 조용히 쿠오에게 말했다. "쿠오, 난 부탁을 받았어. 난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해. 아니, 내가 들어주고 싶어졌어. 그 이유에는 너를 포함해서 이 세상 많은 이들도 포함되어있어.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그 부탁때문이야. 네가 정말 내가 가지 않길 바란다면, 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는게 되는거야. 근데 그건 안되는 일이거든? 일단 맡았으니 어떻게든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내 나름대로 애쓰고 싶어. 쿠오, 넌 내가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거야?" " . . . 아니요 . . " 쿠오의 울먹임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 웃어주고 쿠오의 얼굴을 놔주었다. 쿠오는 여전히 울것만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마, 끽해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나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쿠오는 더욱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울먹거렸다. 나는 그런 쿠오를 뒤에 두고 나오려다 한숨을 쉬었다. 난 마음이 너무 여리다니까.. "쿠오." 난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쿠오가 날 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녀올께, 그 때까지 누나보고 싶다고 울면 안된다?" 웃음기 어린 내 목소리를 알아챈걸까? 조용히 있던 쿠오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곧 내 몸이 빙글 돌아갔다. 내 어깨를 잡은 의외로 힘이 들어간 단단한 손을 지닌 소년. 눈은 여전히 울먹이지고 있었지만 입은 웃으려하는 맑은 쿠오의 얼굴이 보였다. "누나, 다녀와요. 잘갔다와야해요? 그리고 누나야말로 나 보고 싶다고 울지말아요." 쿠오가 따스하게 웃었다. "그건 장담 못하겠네." 나도 쿠오에게 웃어주었다. '이곳'으로 갑자기 오게되었을때, 가장 먼저 내게 마음을 열어주고 수줍게 웃어주던 쿠오. 걱정하지마, 너를 비롯해 '이곳'의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밝게 웃게 해주기 위해서, 나 열심히 노력할테니까 말이야. 쿠오와 작별한 뒤 가볍게 처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입구에 서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구름으로 인해 뿌옇게 번져보이는 태양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지오, 당신은 지금 뭘하고 있나요? 하긴, 비틀림을 해결하느라 바쁘겠죠? 나는 이제 떠나려고 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지오를 위해서, 또 쿠오를 위해서,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실 난 아직까지도 좀 얼떨떨해요. 어쩌다가 내가 지오와 만나게 되서, 이렇게 한대륙의 운명을 움켜잡게 되었을까 하고 말이에요.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 하지만, 지오, 나 나름대로 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벌써 세 연합 중 동연합의 황제 폐하를 굴복(?)시켰다구요. 이렇게만 나간다면 참 좋을텐데 . . 그렇죠? 지오에게 작게 푸념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엘, 정말 어디 가는거야?" "짐까지 챙겼잖아, 정말로 가나보네." "어딜 가길래, 사켄님이랑 세브릭님과 동행하는거야?" 웅성웅성 내가 확실히 진영을 들쑤셔놓고 다니긴 한모양인지, 아저씨의 처소로 가는 내내 사람들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사람들에게 싱긋 웃으며 나중에 사켄과 세브릭이 돌아왔을 때의 특별 이벤트를 위해서 그들에게 말했다. "사실 . . . 사켄이랑 세브릭이 사령관님의 명으로 어디로 가게되었는데, 제가 가지 않으면 안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사령관님이 제게도 말하셔서 함께 가게 된거에요. 참,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라니까요. 저한테 정들었나봐요. 제가 없으면 쓸쓸하고 외롭다나? 그렇다는데 어떻게해요, 함께 가줘야지." 그리 말하고 다니며 아저씨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미와 주위에 한기를 폴폴 풍기고 있는 얼음을 보았다. 벌써 소문이 퍼진것인지, 아저씨의 처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퍼트린 말로 인해 세브릭과 사켄은 그 시선의 한가운데에 서있었지만, 다른 것에 신경이 팔려있는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약간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며 후에 그들이 돌아왔을 때, 얼마나 이를 갈지 생각하자 다시 혼자 흐뭇해져서 씨익 웃었다.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날 씹어먹어버릴 듯한 시선에 흠칫해서 어색하게 웃음을 멈추고는 그들의 앞에 서있는 아저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 . . 시선이 장난 아닌데요? 가는길에 잡아먹히는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어깨를 으쓱이며 아저씨에게 말하자 아저씨는 평소처럼 진중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 . . . 잡아먹는다면 네가 잡아먹겠지." " . . . . . . 부정할 수가 없네요." 확실히, 잡아먹는다면 내가 잡아먹어버리겠지 . 처음 만났을때와는 달리 가볍게 농을 건네는 아저씨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아저씨의 시선을 받으며 가만히 자리에 서있었다. "네가 있는동안 . . " "음?" "네가 이 곳으로 온 이후로, 진영 내의 분위기가 많이 밝아졌다." 담담하게 말하는 아저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아저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널 만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오랜 전쟁으로 지친 사람들의 표정이 보기 좋아졌어." 무슨 말을 하려길래 이렇게 서문이 긴가 싶어져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까지도 쳐다보고 있는 사켄과 세브릭의 시선 때문에 얼굴에 구멍이 날것 같아서 살짝 부끄러워졌다. 두미남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니, 난 행운아라니까. 애써 그렇게 합리화 시키며 꿋꿋이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을때, 다시 아저씨가 말을 꺼냈다. "난 아직도 내 선택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 ." 굵직한 저음이 여운을 남기며 끊어졌다. 곧 아저씨는 카리스마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네가 하려는 것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아저씨의 팔이 들리고는 든든한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잔뜩 굳어있던 얼굴의 아저씨는 가만히 그 굳은 얼굴을 풀어주며 신뢰성이 깃든 웃음을 지어주었다.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엘." 아무래도 내가 진영 내에서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면서, 알게 모르게 아저씨도 내게 정이 든 것 같았다. 하긴 항상 자신을 보필하던 세브릭과 사켄이 쉴새없이 내 뒤를 쫓아다녔는데, 그럴만도 하겠다. 아저씨를 바라보다가 애매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잘다녀올께요." 다녀오게 될지, 아니면 그곳에서 끝나게 될지는 모르는 미래였지만, 어쨌든 아저씨에게 다녀오겠다고 답했다. 아저씨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더니 사켄과 세브릭에게로 돌아섰다. "처음 엘이 이곳에 왔을때부터, 너희에게 엘을 맡겼었다. 책임을 맡겼다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너희에게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희 둘다 보내는 것이다." 사켄과 세브릭의 표정은 날 바라보던 이글거리던 표정에서 잔뜩 불만을 담은 듯한 표정이 되었지만, 차마 존경하고 존경하는 사령관 아저씨에게 터트릴 수는 없는지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난 너희를 믿겠다." 아저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에, 나도, 사켄과 세브릭도 멍하게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너희를 믿고, 기다리고 있겠다." 아저씨는 사켄과 세브릭을 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기다리마. '그들'과 만나게 될 날을." 아저씨가 말했던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던 나는 아저씨를 지나쳐가며 사켄과 세브릭의 앞에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서서 아저씨와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저씨를 바라보며 슥 손을 올려 이마에 댔다. 경례자세였다. "걱정말고 기다리세요. 냉큼 물어다가 척하니 데려다놓을테니." 아저씨 때처럼 그들이 제 생각에 쉽게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 뒷말을 삼키며 그들에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을 하는 동안 벌써 말에 타있는 두사람을 바라보았다. 두사람은 날 내려다보며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그래서 . . " 내가 꺼낸 말에 둘의 표정이 살짝 불안해졌다. 그런 두사람을 보며 싱긋 웃었다. "누가 날 자기 말에 태우고 갈껀데요?" 내 물음에 두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의 얼굴을 즐겁게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회색빛 하늘에는 새한마리가 날개짓을 하며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지오, 제법 시작이 괜찮죠? 저 두 사람 덕분에 여행길이 심심하지는 않겠어요. 누가 엘을 자신의 말에 태울것인지, 아니 자신의 말에 태우기 싫다며 투닥거리던 그들은 곧 합의를 봤는지 엘을 사켄의 말에 태운채로 멀어져갔다. 맥클라스는 그들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사령관님." 한사람이 자신을 부르자 곧 뒤를 돌아보았다. "저렇게 보내도 되는것입니까? 아직 정체도 확실치 아니한데 .. 사켄과 세브릭까지 딸려보내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싶습니다만.." " . . . 필요에 의해 보낸 것이니, 걱정 마시오." "하지만 . . . " 맥클라스는 그를 보다가 이제 거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엘과 사켄, 세브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었소." "예?"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손을 들어 차단하고는 맥클라스는 처소로 돌아갔다. " . . . 이름뿐인 황제에게 남은 것은 백성뿐이지." 전쟁이 계속되면서 힘든 삶을 살아왔다. 태어나서 얼마되지 않아 암살의 위협을 받았고, 도망다니고 도망다니다가 한여인을 만나 사랑을 알게되었다. 자신이 아렌타 제국의 황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여인과 행복했다. 작은 집을 짓고, 밭을 갈고 생활하며 그렇게 자신이 아렌타 제국의 황자라는 것도,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모두 잊고 살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가 생겼다. 자신과 아내를 꼭 닮은 사랑스럽고 순수한 맑은 갈색 눈망울을 가진 아이가. 그렇게 행복하게 살리라 생각했다. 아내와 아이만있다면, 행복하게 모든 것을 잊고 살수 있을 것이다, 그리 믿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두번째 아이가 생기고 모든 가족이 기뻐했을 때 깨져버렸다.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그 황위를 이을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며 찾아온 사람들에 의해, 그 행복은 산산조각나버렸다. 자신은 황제가 되어야만 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버려야만 했다. 가지말라며 붙잡던 아내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에 입맞춰주며 나오는 길에 자신을 바라보던 아들을 한번 더 안아주고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옛일을 회상하다가 처소에 돌아왔을 때, 자신보다 먼저 처소 안에 있는 이가 보였다. 맥클라스는 잠시 멈칫했다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나서 얼굴이 부드러이 풀렸다. " . . 내가 엘을 보낸것을 원망하느냐?" "아니라고 하면 거짓이겠지요." 소년의 맑은 미성을 들으며 맥클라스는 묵묵히 의자에 앉았다. ". . . 다녀오겠다 했으니 . . 믿고 기다리려 해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년은 맑은 갈색 눈망울을 반짝이며 미소지었다. "제가 그랬잖아요. 누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 아닐꺼라고 ..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는 소년에게 맥클라스는 가만히 시선을 주다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누구도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하려하니까." " . . . 위험하겠지요?" "내가 거짓을 말해주길 바라느냐?" " . . . " 소년은 다시 고개를 숙이다가 살살 머리를 흔들고는 자신과 비슷한 지푸라기 빛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 . . . 전쟁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래, 나도 그렇단다." "그래서, 얼른 어머니에게 돌아갔으면 해요." " . . . " 맥클라스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그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그때는, 아버지. 보보를 꽉 안아주셔야해요?" " . . . 걱정말거라,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맥클라스는 자신의 앞에 아내의 미소를 꼭 닮은 미소를 짓고있는 자신의 아들을 눈에 가득 담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마음에 맺혀있었던가. 그런 아들이 15살이 되자마자 자진입대를 해서,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때는 놀라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었다. 아무도 없을 때 자신에게 와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다정히 미소지었을 때, 헤어져야만했던 사랑하는 아내와 아내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생각나서 얼마나 목이 메였던지. 맥클라스는 그때 조그만 아이에서 어느덧 아이의 티를 벗어내며 청년이 되어가려하던 자신의 아들을 품안에 꽉 안았었다. 헤어질때 안아주었듯이, 그렇게 꽉 안아주었다. "만약 엘이 성공한다면 .. 어찌 할 생각이냐." 맥클라스의 말에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더니 곧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른스럽다고 느껴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청혼이라도 할까요?" " . . . 네가 감당하기 힘들지 않겠느냐?" 소년이 맥클라스에게 부정할 수 없다는 듯 미소지었다. 맥클라스는 소년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엘을 믿느냐?" 소년은 그의 말에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 그런 생각이 들어요." ". . . . " 동연합의 사령관이자, 아렌타 제국의 황제이지만, 지금은 그저 아버지인 맥클라스는 소년을 보며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다." 맥클라스의 앞에 앉아있는 짧은 갈색 머리카락과 맑은 갈색 눈동자를 지닌 소년. 쿠오는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와 똑같은 웃음을 지었다. "아, 진짜 가슴 콩닥거리네." 난 사켄의 앞에 앉아 마치 변태 중년아저씨가 된것같은 기분으로 킬킬거리며 중얼거렸다. 사켄이나 세브릭이 듣던 말던 상관치 않은채, 나는 사켄에게 기댄채로 계속 히죽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 . . . " 두사람은 로브 속에 가려진 내 표정이 상상이 가는 것인지 얼굴을 잔뜩 찡그린채 앞만을 바라본채 말을 몰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둘을 바라보다가 다시한번 흐뭇해졌다. 이런 미남들과의 여행이라니, 난 복받은겨. 이세상에 다시 없을 듯 아름다웠던 지오를 만난 것 부터가 행운이였던거야. 나의 세계에서만 살아갔다면 이런 세상에 떨어져 미남들과의 여행이라는 건 말그대로 정말 꿈 그 이상이었을테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모자를 푹 뒤집어쓴채 콩닥이는 가슴을 살며시 쥐고 속으로 환희의 노래를 불렀다. 지금이 전쟁이고, 내가 그 전쟁을 막기위해 생명의 숲으로 가는 중이고 뭐고, 내겐 잠시 뒤로 미뤄진 덜 중요한 일일 뿐이다. 이런 .. 이런 사켄과같은 미남의 품에 안겨 말을 타고 가다니 !! 세상은 정말 살만한거야 ! 온통 핑크빛 오로라로 감싸여 달콤한거라구!! 비록 엉덩이가 많이 배기긴 하지만, 말이 덜컹덜컹 움직이는 것 때문에 시야가 흔들려서 자꾸만 혀를 깨물고 있지만! 미인(美人)과 함께하는 삶이라면 무엇이 두려우랴! 라는 심정이랄까나 ~ "세상은 정말 살만한거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세브릭?" " . . . " "아아, 이런 세상이 있었다니~ 이젠 죽어도 . .. 아니지 죽으면 안돼지, 일단 할일이 있는데 .. 죽어도 그 일은 끝내고 죽어야지 .. 아, 어쨌든 기분 너무 좋다아." " . . . . . " "왜 아무도 말 안하는 거에요? 여행길이 이렇게 조용해서야, 재미가 없잖아요. 재미가~" " . . . . . . . . " 내가 말을 할 수록 세브릭과 사켄의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지만,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쉴새 없이 말을 했다. 나까지 조용하면 이 침묵의 바다에서 난 어색하고 심심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들었다. "둘다 왜 그렇게 불퉁한거에요? 저랑 가게된 것이 아직도 그렇게 억울하고 분하고 열받고 짜증나는 일이에요?" " . . . 아니니까 좀 조용히 하는게 어떨까요 ." "흐음, 세브릭 아니라구요? 그게 아니라면 저번에 제가 들쑤셔 놓은게 아직도 안풀린거에요? 쯧, 남자가 그렇게 속이 좁아가지고 어디다 쓰겠어요? 그렇게 비좁아터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오던 여자도 도망갈껄요?" " . . . " 세브릭의 이마에 살며시 실핏줄이 서가는 것을 바라보며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자자, 언제까지 그 입을 다물고 살 수 있는지 보자. "아아, 세브릭~ 얼굴만 예쁘면 뭐해요. 이렇게 소인배인데. 저처럼 좀 마음 넓은 여자가 되는게 어때요? 음 .. 그게 싫으면 .. 그러고 보니, 전 굉장히 마음이 넓은 여자잖아요? 세브릭정도는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어요. 어떄요? 나한테 장가올래요?" 나의 말에 점점 그의 장미빛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좋아좋아, 달아오른다아~ "어라, 무언은 긍정이라던데, 솔직히 말해봐요, 사실 날 좋아하는거죠? 어제 했던 말 거짓말이죠?" 사실 저번에 세브릭이 날 싫다고 했던 말에 살짝 충격을 받았었다. 물론 내가 엄청나게 휘저어놓은데다가, 매일매일 사고를 벌여놔서 날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것은 알았지만 .. 그렇게 대놓고 여자한테 '당신이 싫어요'라고 하는 귀여운 남자가 어디있단 말인가? 내 여린 마음에 상처를 입힌 그를 쉽게 용서해줄 수야 없지. " . . . 제발 그 입좀 다무시죠." 이를 아득아득 갈며 세브릭이 말했다. "내가 입다물면 뭐해줄껀데요? 세브릭이 대신 떠들어줄껀가요? 아니잖아요?" " . . . " 내 말에 차라리 무시하고 말겠다는 듯 세브릭이 말을 거칠게 몰아 앞서나갔다. "이 꽉 깨물고 있는 것이 좋을꺼다." "네?" "이럇!" "으꺄 ?!" 갑자기 달리기 시작하는 말 위에서 난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새하얗게 질렸다. 잠깐 잠깐 이건 아니잖아!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꼼짝도 못하고 사켄에게 바짝 붙어서 얼어있던 나는 앞서나가고 있는 세브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저렇게 앞서나가면 사켄 역시 자신을 따라오기 위해 말의 속도를 높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저렇게 달려가는 걸꺼다. 두고봐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그리고 그 분노를 다잡으며 세브릭의 뒷통수를 노려보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무리 내가 당신을 마구잡이로 휘저어놓았다지만 이러는게 어딨어 ! 남자가 쪼잔해가지고는, 억울하면 자기가 언어실력을 기르든가! 덜컹이는 안장에 계속 해서 내 엉덩이를 박아대면서 허리가 끊어질듯이 아파오는 것을 눈물을 머금고 이를 악물며 버텼다. 속으로는 엄청나게 세브릭을 씹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쉴새없이 달리는 중에 얼굴에 집중적으로 날아드는 모랫바람을 맞으며 속으로 세브릭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때, 저 멀리서 희미하게 회갈색빛이 아른거리며 보이기 시작했다. 회갈색빛이 곧 숲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가까워지는 그곳을 모랫바람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앞서가던 세브릭의 말이 속도를 줄였고, 덩달아 사켄의 말도 속도를 늦췄다. 그제서야 나는 켁켁 거리며 쉬고있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숨을 쉴때마다 까끌까끌한 모래먼지가 함께 들어와서 입 안 가득 먼지를 머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난 힐끔 날 바라보는 세브릭에게 잔뜩 원망의 시선을 안겨주고는 사켄에게 말을 걸었다. "왜 속도를 늦추는거에요?" " . . . 평지는 그나마 괜찮지만 숲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세브릭한테 안물었어요." "사켄은 대답하지 않을 것 같으니, 대신 말해주는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아까처럼 또 시끄러울테니까요. 저 역시 당신한테 대답해주고 싶진 않았다는걸 알았으면 해요." 세브릭과 나는 철천지 원수를 보듯 서로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훽 돌렸다. "흥! 쫌팽이." 투덜거리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내 뒤통수가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 알바 아니었다. 사켄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숲을 바라보다가 세브릭을 보며 입을 열었다. "숲을 돌아가는 것이 어떤가?" "생명의 숲으로 가기위해서는 이 숲을 통과해 가는 것이 더 빠를것 같다고 여겨지는군요. 이 숲을 돌아간다면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걸릴테니까요." " . . . 어쩔 수 없군." . . . 뭐야, 왜 자기들끼리만 얘기하는거야. 숲을 돌아가네 마네 하는 얘기에 내가 끼어들 수 없는건, 내가 이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온지 겨우 일주일을 막 넘겼는데, 솔직히 뭘 안다면 그게 더 이상한거였다. 살짝 한숨이 세어나왔다. 아아, 지오. 날 이곳으로 보낼 때 뭔가 특별한 거 하나라도 주지 그랬어요. 예를 들자면 엄청난 힘! 이라던가 엄청난 마법! 이라던가 엄청난 지식! 이라던가 . . 엄청난 . . . 잠깐... 계속 엄청난만 반복하고 있잖아? 이런 내가 바보같아져서 한숨을 내쉬다가 씨익 웃었다. 하긴 그랬으면 이런 스릴 따위 없었을테지. 얘기가 끝났고, 숲을 통과해 가기로 결정을 봤는지 천천히 말을 몰아 숲으로 들어갔다. 녹색의 싱그러움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이 그저 칙칙하고 메마른 숲을 바라보며 내 얼굴은 차차 굳어갔다. 하긴,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고, 햇빛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식물들이 제대로 크길 바라는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 그런 식물들을 바라보다가 한층 가까워진 나무 위에 달린 열매를 향해 팔을 뻗었다. 샛노랗고 윤기가 흐르는 것이 꽤나 먹음직하게 보였다. 하지만 곧 내 손은 사켄의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내 손을 잡아채는 그의 손에 놀라 그를 멀뚱히 바라보자 그는 담담한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쓸데없는 행동 하지 마라." "난 또 사켄이 내 손이 너무 예뻐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잡아버린건가 싶어서 가슴이 콩닥거렸는데 . . . 이게 왜 쓸데없는 행동이에요. 맛있게 보여서 하나 먹어보고 싶었던 것 뿐이에요." 뚱한 내 표정에 멀리서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맹렬히 고개를 돌리자 입가에 가득 비웃음을 띈 세브릭이 날 향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미친건 확실한가 보군요. 대부분의 식물에 독이 있다는 것을 잊은건가요?" " . . . 아 . ." 그러고보니 쿠오가 말했었던 일이었다. 몇몇개의 식물을 제외하고는 식물들이 모두 독을 가져, 음식을 먹을 때 조심해야한다고. 저 열매도 독을 가지고 있는건가? 멍하게 그 식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입가가 슬쩍 비틀렸다. "말해줘서 눈물나게 고마워요, 세브릭. 그리고 막아줘서 고마워요, 사켄." 내가 순순히 고맙다고 한것이 이상했는지, 사켄도 세브릭도 날 불안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않고, 얌전히 사켄의 품속에 있었다. 아무 말 없는 내가 더 불안한지 계속 그들이 힐끔거리며 날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난 속으로 코웃음치며 나의 침묵을 고수했다. 이로서 계속 시끄럽던 우리 일행은 고요함 속으로 물들어갔다. 조용해진 날 신경쓰는 듯 세브릭과 사켄이 가끔 날 바라봤지만, 곧 귀찮아졌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무시하기로 했는지 더 이상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한심한 남자들 같으니 ... 여자가 삐진 것 같으면 당장에 풀어줘야할것 아니야? 나중에 여자한테 능력 무시당하는 놈들이나 되버려라!!! 속으로 악담과 저주를 퍼부으며 숲을 지나가고 있을 무렵, 순간적으로 등 뒤로 사켄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 . . . ?" 그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사켄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무표정한 얼굴이긴하지만 더더욱 굳은 듯한 표정의 사켄을 느끼며 의아해졌다. "사켄?" " . . . 세브릭" "알고 있습니다. 귀찮게 되었군요." 세브릭이 주위를 둘러보며 고삐를 꽉 붙들었다. "어떻게든 돌파하죠." " . . 알았다." 또 둘이서만 . . . 툴툴 거리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둘은 질투날 정도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입." " . . . 네?" "아까처럼 꽉 다물어라." "네에?!"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사켄과 세브릭이 거세게 말의 옆구리를 찼다. "히히힝~" 놀란 말이 나무 사이를 누비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으으~" 달리는건 정말 싫다. 거기다가 이렇게 높은 말 위에서 달리는 건 더 싫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 . . . 눈을 감으면 토할 것만 같아서 더욱 부릅떴다. 이런 미남에게 안겨서 토악질이라니 ! 그런 창피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바짝 다가서있는 사켄에게 의지하며 제발 이 말이 멈추기 만을 .. 아니 제발 내가 토하지 않기만을 빌었다. "컹.. 컹컹!" 개 짖는 소리? 잘못들은건가? 희미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무.언.가가 짖는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잘못들은거겠지? 갑자기 .. 그것도 꽤 많아보이는 개들의 짖는 소리라니 .. 곧 사켄과 세브릭이 급하게 말을 세웠다. 그 반동으로 말에서 굴러 떨어질뻔했지만 사켄이 잡아줘서 무사할 수 있었다. "저기 .. 제가 잘못들은지도 모르겠는데 .. 방금 개가 .." "크헝! 컹, 컹컹!!" 수풀에서 뛰어나오며 끈적하게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 족히 수십마리는 되어보이는 개들을 보며 할말이 없어졌다. "귀찮게 되어버렸군요." 세브릭의 고운 웃는 얼굴이 짜증으로 살짝 굳어졌다. 사켄은 아까와 같은 표정이었지만 이미 말에서 내려 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곧 세브릭도 곁으로 다가와 말에서 내리고는 힐끔 날 쳐다보았다. " . . . 왜요? 싸우기 전에 승리의 입맞춤이라도 받고 싶은거에요?" "헛소리 집어치우세요. 얌전히 말에서 내려 나무나 붙들고 있어주면 좋겠군요. 뭐 굳이 낙마해서 목이 부러져 죽고 싶다면 거기 있어도 되요." 다정한 말투와 상냥한 표정이지만 .. 목소리에 험상궂은 기운을 잔뜩 깔고 있는 그가 말했다. "그럼 저 좀 내려줘요. 아직까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혼자서 내려올 수 있는 힘이 없네요." "알아서 잘 내려오리라 믿어요." "내려주면 뽀뽀해줄께요." 세브릭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다가 이내 무시하기로 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 . . . . 사켄~" 침 흘리며 우리를 경계하고 있던 개무리를 보고 있던 그가 내 부름에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사켄마저 절 버리는건 아니죠?" 그에게 웃으며 약간은 간절한 애원을 담은 내 목소리를 누군가가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후회하게 만들꺼야. 두고보라고 .. 언젠가 그 매력적인 웃는 얼굴에 입이라도 맞춰서 기겁하게 해줄테니. 속으로 음산하게 .. 아니 조금은 기대하며 이를 갈고 있을때, 사켄이 다가왔다. 손을 내밀자 그가 잡아주며 끌어당겼다. 폭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겨있을때, 세브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껀가요?" 사켄에게 안겨 그를 보자, 세브릭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미소짓고 있었다. " . . 왜요, 부러워요?" "항상 생각하지만, 당신의 그 헛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하는거죠?" "글쎄요, 아마도 세브릭이 무릎꿇으며 절 여왕님이라고 부르는 그 날까지?" "죽어서도 그 헛소리는 멈추지 않는다는 얘기군요." "이것 참, 눈딱감고 무릎꿇고 여왕님이라고 부를 생각은 없어요?" "차라리 혀를 깨물고 자결하겠어요." "아~ 그러지 말아요. 피 흘리며 죽어가는 미인의 모습은 별로 보고픈 모습이 아니거든요." ". . . 그만 그에게서 내려오지 않겠어요? 지금 보다시피 한가한 상황이 아니라서요." "알았어요 ~ 이거만 하고요." 세브릭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그리곤 회색빛 머리카락이 살랑이는 볼에 촉 입맞추고 땅으로 내려왔다. 사켄도, 세브릭도 얼음 상태가 되서 멍하니 나를 보았다. "왜요?" 샐쭉 그들을 보며 웃었다. "내려주면 뽀뽀해주겠다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난 한번 뱉은 말은 어지간해선 지키자는 여자거든요." 거기다가 .. "사켄과 같은 미인에게 입맞추는 거라면 죽을 병에 걸려 내일 모래한다고 해도 지켜야죠!"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친 나의 말에 침묵이 흐르고 있을때, 개짖는 소리가 그 침묵을 깨며 주위를 맴돌았다. 얼음 상태에서 풀린 그들이 내게서 돌아서서 개들과 마주보았다. 뭐야, 아무 반응도 없는거야? 재미없게 .. 담담한 두남자의 가슴 떨리게 하는 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도 나름 큰맘먹고 뽀뽀한건데 말이야.. 이렇게 아무 반응도 없다니.. 뽀뽀할까말까로 얼마나 고민했는데.. 그래도 세브릭한테 엿먹일라고 나름 소심한 용기를 내서 했건만. 이렇게 반응이 없다니. 쯧, 낮게 혀를 차는 그녀였지만, 등을 돌리고 있던 두남자를 보지 못했기에 그런 평이 나오는 것이다. 세브릭의 얼굴은 기묘하게 굳어 얼굴에 그려지듯 지어져있던 미소가 일그러져있었고, 사켄의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두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 . 음 . . " 재미없지만 . . 어쩔 수 없지. 힐끔 앞을 바라보며 바글바글한 개들에의해 살짝 기가 죽은채 누군지 딱 집어 묻진 않았지만 말을 꺼냈다. "고작 개인데, 그렇게 긴장할 것 있어요?" "고작 개인데, 한번 물려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죠." "세브릭이 몸소 시범을 보여주신다면야." 그에게 웃으며 말하자 그가 잠시 질린 표정이 되어서 날 보다가 이를 앙 물었다. .. 정말 귀여운 사람이라니까. 놀리는 재미가 있어. 속으로 슬금슬금 웃다가 이젠 주위를 뱅뱅 돌며 우릴 노리는 개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저 개들도 비틀림 때문에 저렇게 된건가? ".. 그냥 개죠?" " . . . 아니다." "그럼요?" "물리면 간단히 팔하나쯤은 내줄 수 밖에 없는 괴력을 지닌 녀석이죠." 세브릭이 여전히 개들을 경계하며 말했다. "보통 개보다 빠를 뿐만 아니라, 무리지어 움직이기 때문에 굉장히 귀찮은 '몬스터'중의 하나예요." "헤에.." 몬스터면 .. 소설에서나 보던 돼지인간인 오크라던가, 아니면 끊임없이 재생되는 트롤같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멋쟁이들만 생각했었는데. 저 정도면 좀 .. 우스운데? 그리고 그 생각은 개들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깨져버렸다. 탐색을 마쳤는지 붕 날아오른 개는 순식간에 사켄과 세브릭에게 달려들었다. ... 맙소사 .. 날으는 개인가? 발에 콩콩이라도 단거야? 무슨 개가 저렇게 높이 뛰어오르는거야! 열심히 싸우고 있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나무에 딱 붙어서서 외쳤다. "힘내요!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구요!" "하- 당신도 죽음은 두렵나보죠?" 세브릭이 열심히 개에게 검을 휘두르는 걸 눈으로 쫓다가 조금 나무에서 떨어져 외쳤다. "개한테 먹혀서 죽는다니! 말 그대로 개죽음이잖아요! 난 깔끔하고 담백한 죽음을 원하는 여린 심성의 여자라구요!" 순간 그들이 삐끗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슬로우 모드처럼 그 틈새를 한마리의 갈색개가 비집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침을 질질흘리며 광기를 띈 눈동자의 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개는 아까와 같이 놀라운 점프력으로 뛰어오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엘!" "엘!" 다급한 두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에 가해지는 둔탁한 고통. 나무에 등을 부딪혀 온몸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짜릿한 아픔. 곧 따뜻한 액체가 얼굴에 떨어지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삐루루루루-" 회색빛의 하늘에 한마리의 새가 빙빙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말에 타고 있던 한 남자가 손을 뻗자 하늘을 날고 있던 새가 그의 손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가볍게 부리를 쓰다듬은 그는 새의 다리에 묶여져있는 종이를 풀고, 자신의 어깨에 올라타게 했다. 차분히 종이를 읽던 그의 눈에 약간의 흥미를 담았다. "무슨 소식인지요." 그의 옆에 서있던 남자가 묻자 종이를 읽던 그가 답했다. "동연합이 움직였다." "동연합이 말입니까? 꽤 오랜 침묵이었군요 .. 그래서 이번엔 어디서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까?" 흥미없다는 듯 건성으로 묻는 남자의 말에 그는 묘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 . . 글쎄 . . " "예?" 그의 대답에 의문을 느낀 남자가 되묻자 그는 여전히 종이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싸움이 아닌 것 같군 ." ". . 그럼 무엇입니까?" "잘모르겠지만, 사령관의 직속 부하인 사켄과 세브릭이 움직였다." " . . . 동연합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 둘이 말입니까?" "그래." "무슨 일로요?" " . . 황제의 명으로." ".. 하긴 그 둘이 움직였다면 당연히 황제의 명 때문이겠군요 .. 하지만 .. 도대체 무슨 명이기에 .. "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말던 그는 종이에 적혀있던 이름을 중얼거렸다. ". . . '엘'이라 .." [사켄과 세브릭 떠남. 황제의 명. '엘'이라는 소녀와 동행. '생명의 숲'으로 향한다고 함.] 그가 읽고 있던 종이에 적혀져 있던 글이었다. "손." "멍!" "발." "멍!" "... 그래, 넌 짖는 것 밖에 못한다 이거지?" "멍멍!" 멍멍거리는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다가 픽 웃었다. 그래, 멍멍이가 멍멍거려야지, 뭘 어쩌겠니. " ... 지금 상황을 설명해주시겠어요?"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의 세브릭이 말했다. "지금 보시는데로죠. 뭘 어떻게 더 설명해요?" ". . . 제 이해력이 부족해서 말이죠...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된거죠?" 글쎄..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해도.. 머리를 긁적이다가 내 앞에 바짝 엎드려 헥헥 거리고 있는 멍멍이들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침을 질질 흘리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날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개들. "당신을 공격하는 줄 알았는데요." "저도 그런줄 알았죠." 나에게 달려들었던 갈색개의 털을 쓰다듬다가 좋아 죽으려 하는 녀석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근데 좋다고 달려들어서 제 얼굴을 침범벅으로 만들어놓은걸요.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힘없고 연약한 여자일뿐인 제가요."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둘의 모습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이래서, 인기인은 피곤하다는거죠. 이거 뭐, 사람, 동물을 가리지 않으니 ..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니까요. 안그래요, 사켄?" ".. 그걸 왜 나한테 묻는거지?" "어라, 사켄 절 사랑하지 않는거에요?" 나의 장난끼 어린 말에 사켄은 침묵했다. .. 이거 좀 당황스러운데? 그럴 땐 당연히 '물론이다.'라고 대답해야하는 거라구요. "우와, 무언은 긍정이라던데~" "..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하세요. 지금 이 상황이나 제대로 설명해달라는 말, 안들리나요?" "음.. 아마도.." 그래, 아마도다. 비틀림을 해결하는 것은, 지오. 지르오디스, 나의 신. 아름답고 다정한, 여리면서도 슬픔이 많은 .. 지금쯤 비틀림을 해결하느라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지오. [에르테이샤]는 '신과 함께하는 자'. 신과 함께한다라 ..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이곳'의 비틀림을 해결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광범위하게는 불가능하지만, 지금처럼 몬스터화 된 동물이라던가 독이 스며들어있는 식물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지도. 이건 순전히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도 라는 가정하에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이런 힘이라면 .. 꽤나 여행길에 도움이 되겠는걸? "그런거죠." "뭐가 그렇다는 거죠?" "어라, 못들었어요? 왜 못들은건데요? 참, 사람이 그렇게 귀가 어두워서야." " ..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요?" 쯧쯧, 혀를 차는 나의 모습을 어이없다는듯 보는 두명이었지만, 진실을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처음에 말했잖아? 신이 보내서 왔다고. 믿지 않은건 당신들이라고.. ".. 분명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마도라는 말을 꺼낸 후에." "전 분명 말했는데요." "언제말이죠?" 짜증서린 세브릭의 얼굴을 보며, 아니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미묘한 미소의 차이를 보며 평소처럼 웃었다. "방금요." " .. 어떻게요?" "마음속으로죠." 둘의 얼굴이 확실하게 일그러졌다. 후후, 그러니까, 아까 말달릴때 좀 조심하지 그랬어요. 내가 그렇게 쉽게 원한을 잊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난 완전 소심의 극치를 달리는 소인배라구요. 조금 전만 하더라도 마음 넓은 여자라며 세브릭에게 장가오라고 했던 말은 깔끔하게 잊은채, 심각한 표정이 된 두사람을 보며 즐거워했다. " . . . 곤란하군요." "무엇이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정말 우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세브릭의 진지한 말과 표정. 무표정하지만 사켄 역시 차분한 회색빛 눈동자로 날 보는것을 느끼며 조금 짜릿해졌다. ".. 그렇게 쳐다보다니, 반칙이에요. 반칙." "뭐가 반칙이라는 거죠?"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면, 힌트를 줄 수 밖에 없잖아요." 나의 말에 멈칫하며 입을 다무는 둘을 보다가 픽 웃었다. "제 이름은 엘이죠." " . . 알고 있어요." "어? 그렇게 나올꺼에요? 말하지 말까요?" 세브릭이 입을 앙 다무는 모습에 주먹 쥔 손으로 입을 막으며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전 [에르테이샤]에요." " . . . " "그리고 전 . . . " 그래, 한번 더 말해주지. 믿고 안믿고는, 당신들의 선택이야. 알고 있죠? "[에르테이샤]란 '신과 함께하는 자'라는 뜻." " . . . " 흔들리는 눈빛으로 보고있는 그 둘에게 살풋 미소지어 주었다. "전, 신께서 보내서 '이곳'에 왔어요." " . . .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두사람이었지만 난 그 둘이 좀 더 고민할 수 있도록 침묵한채 바위에 앉았다. 날 보며 헥헥 거리고 있는 개들을 보다가 손을 내밀자, 귀여운 분홍빛의 혀로 핥아주는 것에 간지러워져서 킬킬 웃었다. 다른 개들이 역시 날 둘러쌓지만, 아까와같은 두려움은 없었다. 아..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움보다는 .. 그래, 너희 아무리 몬스터화 되서 제정신이 아니었다지만 .. 좀 씻고 다니지 그랬어.. 네가 나한테 달려들어서 침범벅으로 만들었을 때, 사실 좀 많이 토할뻔했어. 안그래도 속이 안좋았는데 말이야 .. 뭐 하지만 네가 달려들었을 때 나무에 등을 부딪혀서 아팠던 것은 이미 씻은 듯 사라졌으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참아주겠어. 지금까지도 욱씬거리며 아팠으면, 넌 지금쯤 팔팔 끓는 냄비 속에서 내 몸보신을 위해 장렬히 희생당했을지도 몰라. "날 너무 좋아하면 안돼, 난 사람이고, 넌 개야." "멍!" "그래도 내가 좋다고? 그럼 안된다니까 .. 너와 난 이어질 수 없어." "멍멍!" "정말 어쩔 수 없구나 .. 너 날 죽어도 포기할 수 없다는거니?" "멍!" " . . . 고마워, 하지만 너의 사랑은 받아 줄 수 없어." "멍, 멍멍!" "미안, 마음만 고맙게 받을께." " .. 지금 개와 대화하고 있는 겁니까?" 생각을 마쳤는지, 세브릭의 잔잔하면서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달콤한 장밋빛 눈동자로 날 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어떻게 보여요?" " . . . 동물과 대화하는 힘도 있는 겁니까?" "어, 그거 특급 비밀인데 .. 알아버렸네요." " . . . " 담담한 눈동자로 날 보는 그를 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보며 빙그레 미소지어주었다. 그의 옆을 지나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물론, 거짓말. 알고 있죠?" " . . . 당신의 말은,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진실이죠?" 다시 출발하기 위해 말을 향해 가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세브릭의 낮은 음성에 자리에 멈춰섰다. "글쎄요, 제 말을 100% 믿지 마세요. 제 말의 90%는 거짓, 10%는 진실이거든요." " . . 그럼 아까 그 말은 진실인가요?" "흐음 . . ." 내게 달라붙은 개들을 떼어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어디, 고민 좀 해보세요. 장밋빛의 기사님. 고민하는 미남은, 아름다운 법이랍니다. 타닥거리며 타고 있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이 되었다. 하긴, 마을에 도착하긴 힘들려나 싶었지만 .. 정말 숲에서 노숙을 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수학여행이나 야영가서나 하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 . . . 생각보다 낭만적인 것만은 아닌데요."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죠?" 지친 듯한 세브릭의 목소리에 내 맞은 편에 앉은 그를 보았다. 담담한 장밋빛 눈동자는 모닥불과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 의해 침이 꼴깍 삼켜질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세브릭이 오늘따라 예뻐보인다는 거죠." " . . .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건가요?" "원망하려거든 모닥불의 마법을 원망하세요. 앞으로 누굴 꼬시려거든 모닥불을 지펴놓아야겠네요. 이거 원, 사람이 훨씬 예뻐보이는데요." 잠시 웃다가 멈칫하고는 내 오른쪽에 있는 큰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는 사켄을 보며 말했다. "물론, 사켄의 옆모습도 세브릭 못지않게 멋져요." " .. 어째서 그는 멋지고, 전 예쁜건가요?" .. 문제는 그게 아니지 않나?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기분이 나쁜것같은 세브릭을 보며 대답했다. "그야.." ".. 그야?" "세브릭은 예쁘고, 사켄은 멋지니까요." " . . . 우문우답이로군요." "어째서 제 답이 우답이라는 거에요? 제 답만큼 현답이 어딨어요!" "사켄, 오늘은 제가 먼저 불침번을 서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감사해요." " . . 이것 봐 이것 봐, 또 내 말 무시하네." 툴툴 거리다가 세브릭이 건네줬던 모포를 더 꼭 여몄다. " . . . 흐음 . . . " 주황빛, 붉은빛, 노란빛 . . 여러 빛깔이 섞여들어 몽환적인 따스함을 담은 모닥불을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사켄 . . " " . . . 뭐냐." 담담한 사켄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내가 피곤하긴 피곤했나보다. "저 잘 때 너무 예뻐보이면 .. 덮쳐도 되요." " . . . 닥치세요." 세브릭의 어이없음을 담은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물고 그렇게 얕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타닥거리며 장작불 타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손끝부터 온기가 돌며 저릿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멍한 기분으로 두세번 눈을 깜박이자 여전히 어둠 속에서 타고 있는 모닥불이 보였다. ".. 응?" 몇시간 잔거지? 아직도 꿈속인건가? 몽롱한 기분 속에서 흘러내린 모포를 끌어올려 덮고는 작은 하품을 내쉬었다. 뭐지 .. 꿈인가? "일어난걸까나요.." 잠이 덜깨서인지 목이 가라앉아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아직 자고 있는것 같군." "헤.. 역시나 난 자고 있는걸까요? 난 꿈 속에 있는 거군요.." 사켄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와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긴 .. 현실이라면 사켄이 저렇게 다정하고 따스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진 않겠지.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꿈인가보네." 고개를 돌려 사켄을 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더 자도록." "안졸린걸요 .. 라고 말해도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니까, 말해봤자 설득력 없겠죠?" 헤실거리며 웃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모닥불의 온기 때문에 평화로운 마음이 든 한편 .. "사켄.." " ... 뭔가" "팔이 저릿저릿해요.. 앉아서 잔것 때문인지, 팔에 쥐가 났나봐요." 웅얼대는 내 목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사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가와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크고 단단한 두손으로 조심스레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그의 차분한 온기에 기분이 좋아지며 몸이 노곤해졌다. "사켄은요.." "..." "사켄은.. 다정하다니까요." 처음의 차갑고 무뚝뚝했던 모습도 물론 매력적이었지만 .. "지금 사켄이 이렇게 다정한 모습도 .. 전 아주 좋아해요." 꿈 속이니까 뭐 .. 하긴 꿈이든 현실이든 상관없나. "꿈이라서 아쉽네요." 아니, 땡 잡은건가. 꿈 속에서도 미남과 함께 하다니. 사켄의 온기로 노골노골해진 몸 때문에, 난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 . . " 사켄은 잠이 든 엘을 바라보았다. 모닥불에 의해 옅은 온기가 배인 검은 머리카락이 유난히 신비로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사켄도 모닥불의 마법에 걸렸나요?" 나즈막한 세브릭의 목소리에 사켄은 고개를 돌렸다. 깊은 잠을 자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 그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사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면, 엘의 말대로 너무 예뻐보여 덮칠 생각인가요?" " . . . 비꼬는 건가?"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 . . 모르겠군." " . . . . " 세브릭을 보던 사켄은 고개를 돌려 엘을 보았다. 얕은 숨소리를 내며 평온한 잠속으로 숨어든 그녀의 모습에 사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엘이 누구인지." " . . . " "그녀가 한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 세브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작불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전쟁을 진심으로 멈추고 싶어하는지, 그녀는 어디에서 온 존재인지." 옆에 쌓여있던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건드리며 세브릭이 말을 이었다. "도대체 모르겠군요,." " . . .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래뵈도 동연합의 중요직을 맡고 있는 둘인데 말이죠." 세브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잠이든 엘을 바라보았다. 세브릭의 시선을 따라 사켄 역시 엘을 바라보았다. 어디에서 온지도 모르는 한 소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동엽합을 휘저어놓고, 전쟁을 멈추겠다며 여행을 시작한 소녀. 사령관님의 명 때문도 있지만, 자신들 역시 그 소녀가 어디까지 갈런지 궁금한 점도 있었다. "아까 그녀가 한 말을 믿어야할까요." " . . . 우리의 선택이겠지." " . . 그렇겠죠. . . 신(神)이라 . . . " 세브릭을 장작불을 휘젓던 나뭇가지를 불 속으로 던져놓았다. 수수께끼같은 말을 던져놓고 잘만 자는 엘이 조금은 원망스러워진 밤이었다. "이제 몇일 후면 생명의 숲이 보일꺼에요." "으- 드디어 생명의 숲인가요?" "오늘은 마을에서 묵기로 하죠." "와- 마을이다 마을~" 생명의 숲을 향해 말을 타고 이동한지 여러날 . 첫날 몬스터가 나타났던 것을 빼면 무난한 여행길이었다. 조금정도는 사켄과 세브릭에게 가까워진것도 같고.. 음.. 나 혼자만의 생각이려나? "앞의 마을은 어떤 마을이에요? 지금까지 우리가 거쳐왔던 곳과 비슷한가?" "그보단 풍요롭죠. 생명의 숲이 가까우니, 그만큼 신의 축복이 머물러 있기도 하죠." "헤에~ 기대되는데요." 생명의 숲은 유일하게 비틀림을 피해 간 장소다. 지오가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신의 축복이 깃든 곳이라.. 건조해진 두 손을 슥슥 로브자락에 비비며 생각에 잠겼다. 잘하면 .. 조금의 기대감을 갖고 몇일 후 도착하게 될 생명의 숲을 떠올렸다. 가능성은 있다. 그래 ..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확실히 생명의 숲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마을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던 생기가 남아있었다.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남자들이 많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 허전함을 메우고 있었다. "어떻게 할꺼에요?" "일단 여관에서 머물기로 하고, 다음날 떠나도록 하죠. 한시가 급하니까요." "아- 하루의 평화인가." 잠시 우울해졌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 여관을 발견하고 그곳에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3인실하나요." "2인실 하나와 1인실 하나주세요." "..네?" 나와 세브릭에게서 서로 다른 말이 나오자 점원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하지만 그런 점원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나와 그는 신경전에 들어갔다. "세브릭, 돈이 넘쳐나요? 3인실 하나가 더 싸다는건 알고있죠?" "당신이 여자라는 것을 매번 잊나보죠? 절대 안돼요." "절대는 무슨, 저번에도 같이 자고, 노숙할때도 항상 같이 자고선.." "어쨌든 안돼요." 확고한 그의 눈과 굳은 그의 입매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세브릭 .." " .. . ?" "설마 . . " "뭐죠?" "나에대한 .. 사랑이 식은거에요?" "무 .. 무슨!" 울먹이는 내 목소리에 세브릭이 당황했다. 오케이, 걸렸다! 이제 미친듯이 낚아올리기만 하면 되는거다! "내가 싫어진 거군요. 역시 나보다 사켄이라는 거에요?! 난 당신에게 그저 새로운 유흥.. 읍 . 읍!!" 세브릭이 순식간에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 이글거리던 눈으로 날 보다가 묘한 눈길로 우릴 보고있는 점원에게 이를 갈며 말했다. "3인실 하나 주세요." 이겼다. 진작에 그럴것이지. 어깨를 으쓱한 사이 세브릭에게 들쳐엎힌채로 달랑달랑 방으로 들어갔다. 뒤에선 사켄이 작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고, 멀리 점원이 묘한 시선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살짝 그녀에게 윙크해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더더욱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뭐 .. 사켄과 세브릭이라는 미남 커플 사이에 끼인 여자 정도로 보는 걸까나? 힐끔 사켄을 보며 슬금슬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세브릭과 사켄, 아주 잘 어울리잖아? 음 .. 그래도 .. 역시 공은 사켄일까나. "지금 이게 뭐하자는거죠 !" 침대에 내팽겨쳐졌다. 딱딱한 나무 침대였기에 내평겨쳐진 나로선 꽤나 아팠다. "흑, 이것봐 저에대한 사랑이 식은거죠? 이렇게 내팽겨치다니!" "엘!! 제정신이에요?" "아니요? 미친 여자한테 제정신이냐 묻다니. 세브릭이야 말로 제정신이에요?" "누가 미쳤다는 건가요?" "처음 세브릭이 그래놓고는 잊은 거에요? 쯧, 사람이 그렇게 건망증이 심해서 되겠어요?" "엘!" "자자, 세브릭의 목소리는 항상 매력적이지만, 그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아무리 나라도 심장이 또 콩닥콩닥 거린다구요. 자제해주세요." "당신이라는 여자는 정말.." 분노어린 장밋빛 눈으로 날 보는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세브릭 그렇게 날 보지 말아줄래요?" "하- 왜죠?" 스윽, 입꼬리가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진심으로 한번 당신을 꼬셔보고 싶어지거든요." "으으..!! 엘!!" 묵묵히 짐을 푸는 사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고 씩 웃었다. "그 말은 진심이에요." "무슨 말 말이죠?" "꼬셔보고 싶다는 말." 세브릭의 길다란 장미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다가 끝부분에서 뱅글 손에 감았다. "그러니까." 굳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의 머리카락을 풀고 입가로 올렸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니까요." 살짝 그의 달콤한 머리칼에 입 맞추고 샐쭉 웃었다. 스륵 내 손에서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들을 보다가 그를 보았다. 화가 난듯, 혹은 당황스러운 듯한 그의 표정이 귀여웠다. "내가 꼬시면 넘어와줄꺼에요?" 세브릭이 내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정말 참을 수 없도록 놀려먹는 재미가 있는 남자라니까. "짝!" 가볍게 손뼉을 치며 싱긋 웃었다 . 멍하게 굳어있던 세브릭과 사켄이 정신을 차린듯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장보러 가야죠. 내일 바로 떠난다면서요?" 싱글거리는 내게 세브릭은 진절머리가 난다는듯이 이를갈며 보다가 휙 뒤돌아 돈주머니를 챙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장난이 심했나요?" 어깨를 으쓱이며 사켄에게 묻자, 그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에.. 심했던건가요?" 나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위로 들고 물었다.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사켄이 입을 떼었다. "심했다." "역시 .. 그랬던건가 .." "왜 그런 장난을 친거지?" "재밌잖아요?" 키득거리며 웃다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별로." "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 멈칫하고 뒤돌아섰다.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사켄이 걸음을 옮겨 날 지나쳐갔다. "재미없었다." " . . . . " 사켄마저 나가고 난 후,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부여잡았다. 뭐지 . . 그 미묘한 말은 . . ? ". . . 재미없었다고?" 뭐야 .. 그거 . . 마치 . . "설마 . . 아니겠지 . . " 그래, 아니겠지 .. 설마 . 다른 사람도 아니고 .. 사켄이 .. "내가 세브릭에게 그런 장난을 치는게 싫은건가?" 사켄이 . . 정말 .. 아니 .. 설마겠지만 . . " . . . 설마 정말로 세브릭을 좋아하는건가?" 만약이지만 . . 그래 . . 만약이지만 그런 거라면 . . .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쓰다듬었다. . . . 매우 바람직한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 . "지혈제 사세요~" "몬스터가 싫어하는 향입니다. 여행을 떠나시려거든 사가세요~" 와글와글 거리는 시장을 지나가며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우와 .. 진짜 전의 마을과는 다른데요. 거기는 완전 다죽어가더니.." " . . . " " . . . 대답도 안해주네 . 아, 또 삐진거에요? 이거 난감한데 . . " " . . . . 으득 ." 아.. 이번엔 진짜 화났나보다. 으득거리는 이 가는 소리를 살짝이 무시하고는 뻣뻣한 고개를 돌렸다. "와~ . . . 하 . . 하 . . " . . . 신나는 척 해봤자 소용없는건가? " . . . 잘못했어요 . 아까같은 장난 이제 . . . 음 . . 안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되도록이면 안칠테니까 너무 화내지 말아요. 삐졌다고도 되도록이면 안할께요 . 네?" " . . 되도록이면 이라는 말은 왜 들어가는거죠?" "안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난 거짓말을 못하는 여자에요." " . . . 그 말 자체가 거짓말이군요." "나에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니까요. 밤길 조심하도록해요. 내가 언제 덮칠지 몰라요~" "엘!!!!!!!" "푸흣~" 방방 뛰는 세브릭을 뒤에 남겨두고 열심히 사람들을 제치며 걸었다. "응?" 뭘까 . . 이 엄청나게 이글거리는 시선들 . . 슬쩍 물건을 보는척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힐끔힐끔 시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해 있었다. " . . . 아항 ~" 하긴 . . " . . 죄많은 남자들이라니까요." " . . . 뭐가 말이냐." "휴, 자신의 죄를 모르는 그대는 죄인이에요, 사켄." " . . . " 멀뚱히 날 보는 사켄에게 슬쩍 웃어주며 새삼스레 그들의 외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세브릭이 비록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표정이 되려 매력적일 정도로 그의 외모는 화려했다. 그에 비례해서 사켄같은 경우는 세브릭과 반대로 소박하긴 하지만, 그 왜 있지 않은가. 화려하지 않은 대신 가질 수 있는 특권. 그 담담한 소박함이 되려 매력이 되어 끌리는거다~ 이 말씀 . "둘이 한세트라니까. 서로를 빛내주는 존재들이라구요." " . . . 의미를 알 수 없군." "둘이 잘어울린다는 말이죠. 흑, 역시 제 자리는 없는거군요." " . . 진심으로 그 입을 다물어버리게 하고 싶군요." "뭘로요? 입맞춰준다고 말하는 거면 대환영인데." 은근한 내 표정을 보며 세브릭이 소리없는 분노를 질렀다. 키득거리며 열심히 물건을 사다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음 . . ? 무슨 일일까요?" "상관없는 일이겠죠. 우리 볼일이나 보고 얼른가죠." "에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엄청난 미인이 불량배한테 걸려서 오도가도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지도." " . . . 그러니까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세브릭! 같은 미인끼리 그러면 안돼는거에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저 일이 반드시 미인이 연루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그리고, 누가 같은 미인이라는건가요!" "정말, 세브릭은 바보로군요. 당신의 미모를 부정할건가요?" " . . . . 당신은 정말 !" 세브릭이 막 나에게 뭐라 말할 무렵, 사람들에의해 들리지 않았던 한 목소리가 크게 귓가를 울렸다. "아! 그러니까, 나랑 가면, 진짜 짜릿하게 해준다니까 그러네?" " . . . 들었죠? 저것봐요. 역시나 ! 미인이 관련되있는거야!" "엘!!!!!!!!!" 와하하 웃으며 사람들을 제치고 들어가는 도중에 세브릭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것 같았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아, 뭐야-" "죄송합니다." "윽!" "아이고, 죄송해요. 못봤네요." "아, 밀치지 말어!" "이야, 멋진 사투린데요? 좀 지나갈께요." 온갖 양해와 죄송함을 담은 인사를 하고 드디어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던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좀 그럭저럭 생긴 남자 한명과 정말 말그대로 조선시대의 선비를 보는듯한 청아한 외모의 남자가 서있었다. " . . . 남자들인것 같은데?" "남자들이로군요." "어, 언제왔어요?" " . . . 당신이 뚫어놓은 길을 따라왔죠." "남자가 뒤에서 비겁하게 . . . " "길은 쓰라고 있는것 아니겠어요?" " . . . 하긴, 세브릭같은 미인이라면 용서해줄께요." "제발 그 미인이라는 소리 좀 그만 할 수 없나요?" "세브릭이 미인이 아니게 되면 그만할께요." "얼굴을 칼로 그을까요?" "어머? 세브릭, 자학이 취미에요?" " . . . 빌어먹을." 세브릭의 작은 욕소리가 들린듯했지만 애써 외면하고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집중했다. "형씨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니까 그러네. 응? 어때, 나랑 한번?" " . . . . 사양하겠소." "사양은 무슨~ 안그래도 여기저기 많이 사랑받았을것 같은데 말이야. 응? 나랑 한번만 하자고." " . . . 난 그쪽에 취미 없소." "지금부터라도 괜찮잖아? 내가 예뻐해줄테니까, 어때?" " . . . . 싫소." . . . . 그러니까 이거 . . 뭐랄까 . . . " . . . 남색가로군요." 세브릭이 담담하게 그럭저럭 생긴 남자를 보다가 말했다. "남색가가 저렇게 대놓고 다닐줄은 몰랐지만 . . 하긴, 물불 가릴처지가 못되나보군요." 그는 상황을 냉정히 살피고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도록 하죠. 우리가 딱히 . . " " . . .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엘?" 세브릭이 날 잡으려 하는것도 뿌리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청아한 선비같은 남자가 무심히 날 보는것을 느끼고 슬쩍 그에게 웃어주며 그럭저럭 생긴 남자에게 눈웃음쳤다. "이봐요, 멋진 오빠." " . . . 뭐야?" "오빠, 몸 너무 좋다~ 안그래도 나 요즘 . . 외로운데 . . " 슬쩍 슬쩍 그의 위아래를 훑으며 달콤하게 웃었다. 그래, 좀 심심하지, 그러니까 당신 찐하게 굴려주겠어. " . . . 난 그쪽 취향 아니야." 그럭저럭인 남자가 멈칫멈칫거리며 두걸음 물러섰다. "에이, 뭐 어때, 응? 짜릿하게 해줄테니까. 나랑 가자? 응?" " . . . 나 . . 난 그쪽 취향 아니라니까! 그 . . 그리고 그 .. 그쪽 취향이라도, 너. . 너랑은 안해!" 남자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내게서 슬슬 멀어졌다. "비켜!" 그리고는 있는 힘껏 멀리 도망가 버렸다. . . . 여자를 저렇게 싫어할 수도 있는 건가? " . . . 뭐야?" "제발 적당히 하시죠, 엘. 아까 그 유혹은 뭔가요?" "세브릭,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나요? 저 사람 저렇게 기겁하게 도망갈 정도로?" " . . . . 상황 정리 됬으면 이만 가지." "그래요, 장도 다봤으니까요." 그 둘이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리는 것이 의아했지만 어깨를 으쓱하고는 청아한 미모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런 남자가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셨네요. 축복받으셨어요." " . . 도와줘서 고맙소." 남자의 담담한 하오체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말투 . . 신선한데? "제가 도와드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던 것 같지만서도, 그래도 용서 할수는 없는 노릇이죠." " . . . 용서?" 남자의 눈에 살짝 의아심이 묻어나며 내게 되물었다. "그렇죠. 당신같은 미인을 홀로 독차지 . . 읍읍!" " . . 죄송하군요. 좀 맛이 간 여자라서요. 그럼 이만." 부지불식간에 세브릭에게 기습당하고 그의 손에 의해 입이 막혔다. 그가 거침없이 사람들을 뚫고 나가려 하자, 한명두명 비켜서더니 결국 길을 내주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편히 길을 갈 수 있었다. "참 황당한 경우도 다있네. 그렇지, 아크산? 남자한테 유혹받는 느낌이 어땠어?" " . . . " 청아한 미모의 남자, 아크산은 녹색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 털털해보이는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 . . . " "미안미안, 내가 뭐좀 사러 간 사이에 이런 일이 있을줄 알았나, 뭐?" 사내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하자 아크산이 말했다. "아까, 그 소녀." "응?" " . . . 검은 머리더군." "아, 나도 봤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처음보는데 . . 뭔가 신비롭던걸?" "라세스, 그대 보다 나이가 많이 어릴텐데. 아름답다니 . . 반한것인가?" " . . . 누가 아름답다고 했어? 누가 반했다고 했냐고!" 라세스라고 불린 남자, 녹색머리의 그가 방방거리자 아크산이 그를 무시하며 엘이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 방금 그 사내가 엘이라고 했던가?" "응? 엘이라고 했지. 아무래도 . . 그 소녀의 이름 같지?" 라세스는 아까 방방 뛰던 것도 잊었는지 또 다시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었다. " . . . 자세히도 들었군. 여인으로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아니라고! 내가 그런 어린애를 여인으로 생각한다는거야!" " . . 그대, 요즘 많이 굶주렸지 않았는가." 아크산의 진지한 말에 라세스가 할말을 잃은채 멍하게 그를 보다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지금도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나 좋다고 달려들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걸까나, 아크산?!" " . . . 그런 여인도 있었던가?" 진지한 그의 표정과 말에 라세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보다 . . " "그보다라니,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딨어! 얌마, 아크산!!" " . . . 엘이라 . . " 방방거리는 라세스를 무시한채 아크산이 중얼거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의미를 알수 없는 고민으로 인해 짙게 가라앉았다. "제발, 부탁이에요. 그 입 좀 조심해주세요." "왜요? 미인한테, 미인이라고 하는건데. 그건 죄가 아니죠!" " . . . . 어떤 이에겐 죄가 되는 법이에요." " . . . 그거 . . 질투?" "악, 엘!!!!!!!!!" "히~" 활짝 웃는 나를 보며 이걸 때려 말아 라는 눈빛의 세브릭으로부터 도망가며 사켄의 뒤에 숨었다. "사켄, 세브릭이 날 때리려고 했어요~" "여자는 안때려요." "거짓말! 때리려고 했잖아요~" " . . 세브릭은 여자를 때리지 않는다." "어라, 정말요?" "어째서, 사켄의 말은 믿고 제 말은 안믿는거죠?" " . . 그거 , 질투?" "엘!!!!!!!!!!" 이글거리는 세브릭의 눈을 보며 즐거워하다가 잠시 뒤돌아보았다. 사람들로 인해 조금은 북적거리는 길 속으로 이제는 보이지 않는 푸른 머리카락에 눈동자의 청아한 외모를 지닌 남자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 . . 청발에 청안인가 ." "뭐라고 한거죠?" " . . 세브릭, 긴장해야겠는데요?" "왜죠?" 그의 눈빛이 조금 진지해졌다. " . . . 청발에 청안에다가 . . 그정도 외모면 . . 세브릭의 라이벌로서 손색이 . . " "엘! 제발 !!!!!!!!!" "알았어요, 알았어~" 조금만 더 하면 울지도 모르겠다. 키득거리다가 다시 뒤돌아 그 남자가 있었던 방향을 쳐다보았다.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인걸요." 하지만, 미남은 언제고 대환영이지. 여관에 돌어온 후 우리의 방에는 처음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사켄은 원래 그렇다지만 .. 세브릭도 입을 꾹 닫은채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고 있으니 .. ... 심심하잖아 . 또 어떤 장난을 쳐야지 이 분위기가 바뀌려나. " . . . 얌전히 있으세요." "응? 뭐가요?" 생각이 들킨건가? 시치미 뚝 떼고 생글생글 웃자 세브릭이 의심어린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또 무슨 이상한 행동이나 말을 하려고 했잖아요?" "아닌데요?" "그럼 뭘 하려고 했죠?" "어떤 장난을 칠까 생각했던 것 뿐이죠." 어깨를 으쓱이는 내 행동에 세브릭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게 그거죠." "어떻게 그게 그거가 될 수 있어요? 장난은 이상한 행동이나 말이 아니에요. 저의 유희이자 삶의 낙이라구요~" "당신의 유희든 삶의 낙이든, 그것에 저희를 집어넣잖아요?" "그거야, 제 주위에 있는 사람이 세브릭들뿐이니까 그렇죠. 지금 밖에 나가서 모르는 사람 붙잡고 결혼해달라고 유혹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거기서 왜 결혼이 나오는거에요!" "음? 그러니까 예를 들어 그런거죠. 뭘 그렇게 발끈해요?" 내 말에 또 다시 세브릭의 장미빛 눈동자가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물 흐르는 듯한 포커페이스는 점점 짧은 주기를 반복하며 사라져가고 있었다 . 근데 그게 또 쏠쏠한 재미란 말이지. 하나하나 벗겨나가는 이 묘한 쾌감이란 . . . 아 . . 어감이 좀 이상해졌네. 쩝 . . 뭐, 그렇지만 흐뭇한 나의 표정을 보았는지, 세브릭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꽉 쥐고는 말했다. "부탁이에요. 적당히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 . "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껀데요?" 흥미로운걸? 어떻게 하려고 저런 말을 꺼낸 거지? 세브릭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떤 말이 내게 가장 효과적으로 먹힐지 궁리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또 싱긋 웃고 말았다. 그리고 내 어깨를 잡고있는 손에 살며시 내 손을 얹고는 다정히 말했다. "걱정말아요. 적당히 할테니까." " . . . 정말인가요?" 못믿겠다는 듯 의심쩍은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아올렸다. 순순히 잡히는 손을 보며 응큼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 . . . 바보라니까." "무 . . . 으아!" 촉, 그의 손에 가볍게 손가락에 입맞추자 그가 발작을 하듯 내게서 멀어져 벽에 붙었다. "내가 무슨 전염병이나 벌레라도 되는거에요? 뭘 그렇게 기겁하고 달아나는 걸까나?" "지 . . 지금 . . 지금 무슨 짓을 !!" "무슨 짓이라뇨? 나도 모르게 그만 버릇이 나와버렸지 뭐에요." "버 . . 버릇?" 그가 당황하면서도 더듬거리며 묻는 말에 살짝 윙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한테 입맞추는거, 좋아하거든요." " . . . . 아무한테나 말인가요?" 그가 떨떠름한 표정 . . 아니 조금은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되물어서 다시한번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아니요." "그럼요?" "내가 예뻐하는 사람이나, 귀여워하는 사람한테만이죠. 아무한테나 그러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세브릭은 내게 선택받은 사람이죠. 영광으로 알고 절 극진히 모시도록 해요." 키득거리며 웃자 세브릭이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 그럼 누군가가 당신에게 입맞추는것도 좋아하나요?" "어라, 그 질문 상당히 묘하네요. 왜요, 입맞춰주려는거에요?" " . . . 그런게 아니라는걸 잘알텐데요." 이제는 경련이 일고 있는 그의 입가를 흥미를 가지고 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난 내가 하는걸 좋아하지, 당하는건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특히나 상대가 당하는 것을 기겁할정도로 싫어할때는, 기분이 최고죠." " . . . 당신, 정말 성격이 나쁘군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나만큼 둥글둥글하게 인생사는 사람 아마 찾기 어려울껄요?" "하, 둥글둥글한 사람 다 죽었군요." "그렇진 않을껄요? 찾기 어려울꺼라고 했지, 한명도 없다고는 안했어요. 쯧, 세브릭 애꿎은 사람 죽이지 마요." " . . . 큭 . . " 세브릭이 노려보는 것을 가볍게 넘기며 사켄 쪽을 바라보았다. " . . . " "에, 사켄?" 가만히 침대에 앉아 우리의 얘기를 듣고있던 사켄이 옆에 놓여있던 검을 잡으며 날카롭게 눈동자를 빛냈다. "무슨 일이에요?" " . . . 세브릭." 사켄이 부름과 동시에 세브릭이 튕겨지듯 벽에서 떨어져나와 창문을 확 열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생명의 숲과 가까운데 . . 하지만 . . 저건 도대체." "뭐에요, 무슨 일인데요?" "몬스터의 살기다." " . . . 몬스터? 잠시만요 . . 여긴 마을이라구요?" "미쳤는데, 마을이고 뭐고 알 게 뭐겠어요? 거기다가 . . 젠장 . . 늑대잖아?" "늑대? 늑대라구요? 잠시만, 늑대?" 그의 말을 듣고는 옆으로 다가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늑대들이 휘번뜩한 안광을 내며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밖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 . . . 저거 . . 그러니까, 지금 나와 세브릭의 다정한 대화 중에 저런 상태로 이른건가요?" "누가 다정한 대화 중이었다는 거죠?" "그정도면 다정한 대화죠. 그보다 . . 우와, 진짜 늑대네. 신기할세." 늑대는 처음 보는데. 정말 듣던 대로 꼬리가 축 쳐져있네, 개보다 좀더 . . . 그래 좀더 무섭게 생긴것 같기도 하고 . . "아우~" 오, 진짜 늑대 울음소리다. 한마리가 울자, 다른 놈들도 아우아우 거리는데 . . 저게 또 . . 웃긴 상상을 하게 한단말이야 . . 근데 들개들이랑 만난지 얼마라고 늑대야 늑대는 . . " . . . 전 개들한테 사랑받는걸까요?" "하, 그럴지도 모르죠." 그의 이죽임에 슬쩍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왜, 제가 개들한테 사랑받는다는 걸 긍정하는 건데요?" "당신의 성격이 개같으니까요." " . . . 그 말 지금 개를 모욕하는 말이에요. 개가 얼마나 충직하고 사랑스러운 동물인지 알아요?" "보통은 자신을 개에 비유한것에 불쾌해할텐데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것에 픽 웃고는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창턱을 잡고 있는 손에 꾹 힘이 주어졌다. "음, 내 성격뿐만 아니라, 나란 존재가 개보다도 못한 존재일지도 모르니까요." 개들은 자신의 주인에게 충성하며 애교를 부리기라도 한다지만, 나란 인간은 도무지 그런 것도 없이 그저 주는대로, 받는대로 아무 의미없이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렇게 쉽게 지오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말했던 걸지도 모르지. [에르테이샤]라니 . . .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인데. 내가 왜 살아가야하는지, 내가 왜 살아있는지 . . 그런 것을 생각하며 그저 숨쉬는 인형으로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뭐, 그것도 '이곳'에 와서는 줄어들었다.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개들은 살아간다는 것에 의문을 품진 않잖아요?" 싱긋 웃으며 그를 보자, 의미불명의 표정으로 날보고있는 그가 보였다. "왜 그런 표정으로 봐요?" " . . . 살아간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 것은, 인간뿐일테니까요." "음?" "저들은 본능에 충실해 살아가죠." " . . 그렇죠." "인간이기에 고민하는 것이에요. 무엇이 당신을 그들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 거죠?" 그의 진지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멍하게 그의 눈만 바라보고 있자, 그 역시 아무 말도 안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얽히고,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려는 찰나, 누군가가 날 뒤로 당겼다. "어, 어, 우 . . 우아?" 툭, 누군가의 단단한 몸에 머리를 부딪쳐서 위로 고개를 들자 세브릭을 보고 있는 사켄이 보였다. 세브릭 역시 날 보던 눈으로 사켄을 바라보았다. 날 가운데에 두고 두남자가 서로를 보는 것을 보고 있자니 . . 이거 상당히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 . 뭔가 두근거리기도 하고 . . 좀 . . 설레이는 것도 같고 . . 이것이 바로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남자들의 싸움인가? 라는 생각도 들고 . . 그게 아니라면 . . 그러니까 . . 바람피는 세브릭에대한 사켄의 경고인가 . . 싶기도 하고 .. 후훗 . . " . . . 도우러 갈것인가?" "그래야겠죠. 어쨌든 이 마을 역시 아렌타 제국에 포함되어 있는 마을이니까요." "같이 가지." 사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세브릭 역시 검을 찬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 " . . . 저기, 나는요?" 어정쩡하게 사켄의 품에 머리를 댄채 검지로 날 가리키자 둘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에 남아있는게 당연하잖아요." "방에 남도록." " . . . 네에 -" 둘 모두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나는 가만히 창가에 앉아있다가 그들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는 쩝 입맛을 다셨다. ". . 뭔가 묘한 기분이였는데 말이지." 그래, 정말 묘한 기분 . . 밍숭맹숭한것도 아니고 달콤쌉싸름한것도 아니고 . . 무밍맹콩한 기분이랄까 . . 아, 나도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푹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다가 우뚝 멈췄다. " . . . 저 사람 . . " 늑대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 있는 사람 . . 푸른 머리카락, 그리고 무감정한 푸른 눈동자 . 선비와 같은 청아한 외모의 사내. " . . . 아까 그 예쁜이잖아 ." 예쁜이가 왜 여기있는거지? 여관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예쁜이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살짝 호흡이 거칠어진 예쁜이의 청발을 타고 땀이 아롱지며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날카롭게 늑대들을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 . 색기 만땅인데." 주륵, 흘러내리는 침을 씁하고 삼키고는 창문을 열고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멀리서도 누군가가 늑대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거기까지 내 관심범위가 넓어지기에는, 바로 아래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예쁜이의 모습이 너무 색기가 좔좔 흘러넘쳐서 . . 차마 다른곳으로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큭!" 늑대 한마리가 붕 날아오르더니 그의 검에 베여져나갔다. 하지만 검을 휘두를때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 그가 손목을 잡고는 입술을 깨무는게 보였다. ". . . . 세브릭이랑 사켄한테 혼날텐데 . . " 분명 밖으로 나가면 엄청나게 혼날꺼다 . 진짜로 이번에야 말로 세브릭의 진정한 분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음 . . 그 모습은 한번 보고 싶은데?"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커다란 회색 늑대 한마리가 그의 등 뒤에서 날아올랐다. "아우 , 어쩔 수 없잖아!" 정말, 말그대로 순식간 . 난 2층 창문을 타고 넘어 커다란 회색늑대의 등을 밟으며 땅에 데구르르 굴렀다. 그래도 늑대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고, 작은 생채기만 난 정도였다. " . . . 그대는 . . " 차분한 표정으로 날 보는 청발의 미남을 보며 싱긋 웃었다. "또 만났네요.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 . . . 그건 피차일반인것 같소." "하하 . . 이왕, 이렇게 된거 통성명이라도 . . " 그가 날 바라보는 사이, 아까 내게 밟혔던 늑대가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뭐, 그리고 내가 한 행동은 순식간이었다. "큭!" "무슨!!" 늑대의 발톱이 내 어깨를 스쳤다. 그를 안고서 바닥을 구르며 목숨을 구한 대신 얻게된 말그대로 영광의 상처였다.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멍하게 보다가 지그시 반대편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무슨 . . 이게 무슨 짓이오!" "무슨 짓이라뇨. 정말 몰라서 묻는거에요? 이것 참, 여기도 바보같은 남자가 한명 있네." "어째서 . . 상처는 괜찮은 것이오?!" "상처는 괜찮은것 같아요. 그리고, 어째서는 무슨 어째서에요." 빙 둘러싸고 있는 늑대들을 바라보다가 싱긋 그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인은 이세상 어디에서든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니까 이정도 상처쯤이야 대수롭지 않아요." " . . . . 그대는 이상하오." "나도 알고 있답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날 보던 그가 내 앞을 검으로 막아섰다. " . . . 지켜주겠소." "네?" "내 목숨을 구한 그대를, 꼭 지켜주겠소." " . . . 이야, 든든하네요." 키득거리는 내 웃음이 좀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검을 쥔 그의 손이 새하얗게 변했다. "조금만 참으시오." "별로, 큰상처도 아니에요. 걱정마세요." "금방 끝내겠소." "헤에, 과연?" 그와 내가 잠시 대화를 나누던 도중 늑대들이 내 피냄새를 맡아선지 눈이 반쯤 훼까닥 뒤집힌채 달려들었다. 후후, 이거 여기서 이대로 죽어버리는걸까나? "아크산!" 정말 간발의 차이로 녹색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들어온 남자 덕분에 청발 미남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대, 너무 늦었군." "어쩔 수 없었다고, 저렇게 많은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거야?" "내가 죽은 다음에나 오지 그랬나, 그럼?" "죽은 다음에 오면 안돼지, 죽은 다음에 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녹발의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하다가 힐끔 날 보고는 눈이 커졌다. " . . . 아까 그 . . ?" "헤, 일행이신가보네요. 그보다, 저 늑대들 좀 어떻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 지금 상처가 눈물나게 아프거든요." ". . . 별로 아파하는것 같지 않은데 . . " "흉터 남으면 제 인생 책임지실건가요? 좀 서두르시죠."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그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늑대들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으랏차차~ 저런 어린애, 책임질 수야 없지~ 내게는 앞으로도 만나게 될 많은 여인들이 있다고!" 이상한 기합 소리와 함께 열심히 투덜거리며 검을 휘두르는 남자의 뒷태를 감상하다가 내 옆에서 늑대들을 경계하고 있는 예쁜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숨 놨네요. 그보다 저분, 일행이신가요?" "그렇소." "애인?" " . . . . 아니오." 앞의 여운은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상처를 보았다. 뚝뚝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았다. "이름이 아크산이에요?" 녹발의 사내 덕분에 늑대들에게서 비교적 여유로워진걸 보곤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크산이라고 하오." "제 이름은 엘이에요." 지금에야 통성명을하다니 .. 뭐, 이름을 알게 된건 행운인걸? 그보다 . . 아크산이라 . . 별로 안어울리는데 . 예쁜이가 훨씬 잘어울릴 것 같은데 . . 그렇게 부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채,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 . . . 알고있소." "헤에, 혹 제 모습에 반해서 몰래 쫓으며 절 짝사랑하고 있는 분이신가요? 이것 참, 쑥쓰럽기 그지없네요." "난 그대를 오늘 처음 보았소." 그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에 킥킥 웃다가 슬쩍 뒷쪽 벽에 기대었다. "그럼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데요?" "그대의 일행이 그대를 그렇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소." "똑똑하네요. 하지만 애칭이면 어쩌려고?" " . . . 그것도 그러하군." 좀 많이 진지한 남잘세. 그걸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그냥, 애칭이면 애칭이구나 라고 넘겨버리면 되는거지. 융통성없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멍하게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그리고 어느새 으르렁 거리며 둘러싸고 있는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소름끼치는 살기어린 눈동자에 솜털하나하나가 삐쭉삐쭉 서는 느낌이었다. 헤에, 사켄의 살기와 맞먹겠는걸? . . . 그럼 사켄은 늑대랑 동급인걸까나? " . . . 이 녀석들, 비틀림 때문만은 아닌가보네요." "무슨 소리요?" 그의 맑은 청안을 바라보다가 그저 웃어주었다. " . . . 무슨 소리냐 물은 내 질문을 듣지 못한것이오?" "그저, 아크산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고, 당신의 눈에 내 모습이 담기는 게 더 보고싶었을 뿐이에요." " . . . . 부끄럽지도 않소? 그런 말을 입에 올리다니." 슬쩍 한걸음 물러선 채 날 멀뚱히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살짝 상처를 받고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부끄러울게 뭐가 있어요? 솔직한 건 좋은 거죠. 그리고, 내가 부끄러워할꺼 아크산이 대신 부끄러워해주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 . . 누가 부끄러워한다는 것이오. 그보다, 비틀림 때문만은 아니라니 . . 비틀림은 무엇이오?" "뭐, 사람들이 '신의 분노'라고 생각하는 이상기후 현상들과 일들이라고나 할까요." " . . . 이 녀석들이 몬스터화된것을 말하는 것이오?" "똑똑하네요. 하긴 그거 말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서도." 예를 들자면, 회색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라던가. 그 거대한 모래폭풍, 카젠드와 일정한 기간에 하늘에 구멍이 뚫린듯 쏟아지는 레아멘같은 것들도 . "그럼, 몬스터화가 된 때문만은 아니라니, 그건 무슨소리요?" "흠 . . 뭐라고 할까나." 그를 보다가 가까운 곳에서 우릴 지켜주고 있는 녹발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저분은 이름이 뭐에요?" " . . 갑자기 얘기가 왜 그쪽으로 튀지?" "사람은 많이 알 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그것도 미남이라면 필히 . " . . . 라세스라고 하오." "라세스라 . . 흠흠, 아크산과 라세스군요. 좋은 이름이네요." 빙글거리며 말하는 내게 그가 반듯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 해주겠소?" "끈질긴 사람이네요. 끈질긴 사람은 매력없어요, 그거 알아요?" "그런걸 몰라도, 잘 살수있으니 걱정마시오." "하긴, 아크산 정도의 외모면 손가락만 까딱해도, 여자들이 코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고 숭배할꺼에요." " . . . 아까도 말했지만, 왜 얘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새는거요." "나도 확실치 않으니까 그렇죠." 저 늑대들이 공격하는 이유가 비틀림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 . 저번에 들개들을 만났을때, 그녀석들은 내가 몇번 손만 댔을 뿐인데도, 헉헉 대면서 평범한 개로 돌아갔다. 본래, 개들이란 사람들에게 길들여져서 사람들을 잘따르니까 몬스터화가 된것만 풀면, 그저 무리지은 개들 정도밖에 안되는법이다. 하지만, 지금 만난 것은 늑대. 늑대들은 본래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존재. 뭐, 내 덕분에 비틀림이 풀린다고해도, 가뜩이나 먹을 것이 없는 이 세계에서 늑대들은 인간에게 이를 들어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배는 고프지, 앞에 피냄새 폴폴 풍기는 고기덩어리(?)가 있지. 생각해봐라. 인간 역시도 마찬가지니까. 엄청나게 배가 고픈데, 갑자기 눈 앞에 떡하니 삼겹살 . . 혹은 맛있는 그 무언가가 모락모락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를 피워내며 있다고 쳐보자. 그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모르고 일단 먹고 보는거다. 맛있으니까는 둘째치고, 배가 고픈데, 뭐 눈에 들어오는게 있겠는가? 그건 늑대들 역시 마찬가지. 날 공격했던 늑대는 아.마.도 제정신으로 돌아왔을테지만, 그래도 배가 고픈건 고픈거다. 그러니, 배고픈 늑대들이 피냄새를 맡고서 . . 응 . . ? 피 . . 냄새를 . . 맡고 . . 서 . . ? "으아아- 늑대들이 더 몰려든다아-" 라세스가 급하게 외치는 말에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늑대들이 혀를 길게 내밀고는 음흉한 . . 아니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늑대들이 음흉한 웃음과 잘먹겠다는 눈빛을 띄운채 우리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지 않겠소." "네?" 이제 어쩌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크산이 내게 다가오더니 자신의 소매를 쭉 찢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는 내 상처에 그 찢어진 천쪼가리를 대었다. "손보다는 나을 것이오." " . . . " 멀뚱히 천을 상처에 대고 있다가 일어서려는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채었다. 그의 얼굴이 내 얼굴과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윽." "다치지 말고, 조심해요." 그의 귓가에 속삭이고 머리카락을 놓아주자 후다닥 그가 멀어졌다. "무 . . 이건 또 뭐요!" "힘내라는 응원정도랄까?" "왜 그런 응원을 이렇게 한단말이오!" "음 . . .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죠." 싱긋 웃자, 그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게, 이러지 마시오." "왜요? 반할것 같아요?" "그런것이 아니오." "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뭔데요?" " . . . 말할 수 없소."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데." 꾹 상처를 누르며 싱글거리자 그가 곧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여인의 유혹에 잘 넘어가는 편이오." "어, 정말요? 그럼 내가 유혹해도 넘어와줄껀가요?" 의외네. '난 한우물만 파고, 일직선으로만 걷는 바른 생활 청년이야.' 라는 분위기였는데. "여인의 유혹에는 넘어가지만, 마음만은 넘겨주지 않소." 그는 무감정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난 시선을 맞추고 픽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마음 바란적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데요 ." "그렇다면, 그리 쉽게 남자를 유혹하려 들지 마시오." 그의 말에 킥킥 거리며 웃다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유는?" "그대,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없소?" 그가 검은 쥐고서 하는 말에 잠시 그의 손에 시선을 뒀다. 그리고 다시 그의 담담한 청안에 시선을 맞췄다. "당신같은 미인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여자로서의 자존심정도 가볍게 즈려밟을 수야 있죠." " . . . " "난 남자가 궁한게 아니에요. 그리고 남자들을 유혹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빙긋, 난 그 사람을 향해 조롱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그의 눈썹이 움찔거렸지만 그 모습마저 우습게 느껴졌다. "내게 유혹당한다면, 그건 고작 그정도의 유혹으로 넘어오는 쉬운 남자라는 뜻일 것 같은데. 안그래요?" " . . . 그대, 성격이 나쁘다는 말을 들어보았소?" "그거, 엄청난 우연이네요. 마침 오늘 들었는데." "누군지 몰라도 . . " "음?" 그가 내게서 빙글 뒤돌아섰다. "무척이나 용감한 자로군." "뭐, 용감한걸까나요?" "그대와 같은 여인에게, 그런 말을 쉽게 한다는 것은 사내로서도 용기가 없다면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일 것이오." "흠, 저와 같은 여인이라? 저와 같은 여인이 어떤 여인인데요?" 잠시 아무말도 않던 그였기에,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려고 할때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사람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는 . .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잡아먹어버릴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 . . . 헤에 . . " 내가 그런 무시무시한 여자란 말이야?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건 좀 아닌것같은데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제게 성격나쁘다고 했던 그 사람 ." 긴청발이 장밋빛 머리카락과 겹쳐졌다. 몸 전체에서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며 진정한 자신은 감추고 있는 사람. 그를 생각하자 잠시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뭐, 세브릭같은 경우는 . . "내가 무척이나 귀여워하는 사람이라 그정도 무례는 관대히 용서해주는 편이죠." " . . .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는 장미빛과 회색빛 . 두명의 인영에 슬금슬금 온 몸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세브릭도 양반은 못되겠네요." " . . 양반이 무엇이오?" "음 . . 팔자걸음으로 걷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 . " " . . . 팔자걸음?" 되묻는 아크산에게 싱긋 웃어보이며, 점점 가까워지는 둘을 바라보았다. 늑대들이 내게 집중해 있다가 자신의 동료들을 무지막지한 기세로 해치우고 있는 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우- 아우- 거리면서 울고는 그 둘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 내가 가보지 않아도 되겠소?" "당신이 가면 난 그대로 늑대 밥이 되는데요? 날 버리고 갈 수 있어요?" " . . . . 옆에 있어주겠소." 그의 대답에 다시 긴장을 풀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세브릭과 사켄이다. 강하니까, 아마도 무척 강하니까 사령관 아저씨가 그 둘을 믿고 자신의 옆에 뒀을꺼다. 그러니, 나 역시 믿고 안심할수 있다. 점점 다가오고있는 둘의 모습 . "아크산." " . . 왜그러시오?" "저기 . . 소매 한번만 더 찢어주면 안될까요?" 늑대의 손톱에 독이라도 있었던 걸까? 내 말에 날 보게된 그의 청안이 동그랗게 떠지며 입을 열었다. "무슨 . . !!!!!!!!!" "피가 안멈추네요." 헤실거리며 웃던 나는 내 손에 들려있던 그의 소매쪼가리를 보여주었다. 내 피에 푹 젖은채 피를 뚝뚝 흘리며, 이제는 본래의 색도 알아보기 힘든 천쪼가리였다. 그럼에도 아직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으니 . "헌혈 할때도 이만큼 피를 흘린것 같진 않은데 ." 머리가 띵해지고, 눈을 뜨고 있음에도 사물들이 흐릿하게 비추어졌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글쎄요. 제가 피한테 기다리라고 해도, 기다리겠어요?" 천 찢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사켄과 세브릭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엘!" "이 바보가 !!" 급한 손길이 내 어깨를 감싸쥐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죠?" ". . 미안하오. 내 탓이오." "제길, 분명 방안에 있으라고 했는데." 거친듯한, 하지만 묘하게 안정되는 손길에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세브릭, 엘을 부탁하지." "알았어요." 웅성웅성거리던 소리가 멀어져갔다. "엘! 정시 . . ㄴ ." 이런 . . . 그렇게 난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 . . . 살아있나보네." 하긴 죽을꺼라는 생각은 안했으니까. 잠시 뻑뻑해진 눈 때문에 몇번 깜빡이다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뜰 힘도 없이 지쳐버렸다. 손가락을 몇번 까딱거리고, 발가락도 몇번 움찔움찔해보았다. 뭐 .. 아무래도 몸에 별 이상은 없는 모양이다. "하마터면 죽을뻔했지요." "음?" 눈을 뜨지 않은 상태였지만, 누군지 뻔히 알 수 있었기에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만약, 지혈제를 팔던 사람이 없었다면, 그리고 늑대의 독을 중화시켜주는 약초를 팔던 사람이 없었다면, 분명 거기서 죽었을지도 몰라요." "역시 난 행운아 . . 라니까요 . . 후후 ." 살짝 힘겨운 말을 내뱉고는 잠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뭐가 행운아라는 건가요? 그 많던 늑대 중 하필 독을 품고 있는 단 한마리에게 당해놓고는." "뭐, 살아있으면 된거 아니겠어요?" 내 대답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 뭐랄까 . . 죽음이라는 것은 . .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까 그 늑대 덕분에 죽을뻔했다는 세브릭의 말에 묘한 기분이 되었다. 안정감이라고나 할까 . 그렇구나 . 사람은 . . 이리도 쉽게 죽어버릴 수도 있는 존재였구나. 침묵이 이어지던 방 안에서 뚜벅뚜벅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점점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 그보다 . . 바로 옆에 있어준게 아니었던가? 발자국 소리를 듣자니 . . 그만큼 걸어와야할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있었다는 건데 . . . . . . 좀 우울해지는군. 내가 우울해지건 말건, 세브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듣기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잔잔한 어조였다. 하지만 나는 그게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 . . . 분명 방안에 있으라고, 사켄과 제가 말했던것 같은데요."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얌전히 있어요?" "그래서, 제 말을 무시했다는 건가요?" 점점 낮아지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한채, 나는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무시한게 아니라, 무시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어요." 순간, 삐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살랑거리는 것이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바로 얼굴 앞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체온에 감고 있던 눈을 떠버렸다. 정면에서 비춰지는 강렬한 장밋빛. 순간 내뱉던 숨이 막히고,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 . . . 이거 . . 덮칠라고요?" "헛소리 하지 말고, 내 말 잘듣는게 어떨까 싶은데 ." " . . . "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곤, 단한번도 말을 놓지 않았던 그가 조용조용히 속삭였다. 발끝부터 천천히 오싹해지며 굳어갔다. "두번 다시, 이런 일 없도록 하는게 여러모로 좋을꺼야 ." " . . . " "또 다시, 내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해서 이런 결과가 발생한다면. . " 그는 천천히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마디 한마디, 아니 한글자 한글자에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차가운 분노를 담고 있었다. 그가 잠시 눈을 감았을 때야, 난 참고 있던 숨을 약하게 내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가 눈을 떠서, 그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지에 대해선 . . 네 상상에 맡기도록 하지." 그 자세 그대로 날 바라보고 있던 그가 일어서더니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번에는 좀 얌전히 있도록 해요. 지혈을 해놓긴 했지만, 어떻게 될진 모르니까." 그때까지 난 뻣뻣히 굳은채 멀뚱히 눈을 뜨고 있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우와 . . 위험위험 . ." 정말 위험신호가 삑삑 울렸었다. 저런 모습의 세브릭, 두번째던가? 처음 만나서 마구 휘저어놓았을 때, 그리고 지금 . . 하지만 그때의 세브릭과 지금의 그는 달랐다. "이런거 정말 약하다니까 ." 오른 팔을 들어올리려다가 미약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왼손을 들어올려 눈을 가렸다. "저렇게 나오면 아무말도 할 수 없잖아."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고 했었는데 . 뭐 . . 변명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특유의 뻔뻔함으로 밀고 나가려고 했다. 난 아무런 잘못 없어요~ 라는 식으로 .. " . . 화난건가 . . " 평소 내가 장난쳐서 화내는 것과는 질적으로 틀렸다. 정말 제대로 화났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눈동자에서는 순수한 분노 외에는 어떤 감정도 찾아 볼 수가 없었으니까 . 한번쯤 보고 싶었던 세브릭의 진정한 분노랄까 . . . .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기분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으니까. " . . 어떻게 풀어줘야하지?" 이런거 정말 싫은데 . 누군가가 나의 장난으로 인해 화가 난다면, 그정도는 풀어줄 자신이 있다. 장난으로 인한 화는 뻔뻔함으로 모른척하면, 상대도 그저 맥없이 웃으며 지나가버리는게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저렇게 진심으로 화가 나서 아무런 감정조차 없이 바라본다면 . . 그건 . . 솔직히 좀 두려운 일이다. " . . 싫어하려나?"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했었다. 누군가가 날 싫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꽤나 열심히 노력했다. 싫은 소리가 듣기 싫었으니까. 그렇기에, 내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이 숨어있었다. 그건,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도 마찬가지. 예전에는 생각하며 행동했다면, 지금은 이제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이 나오는 수준이랄까. 누군가에게 미움받는다는 것은 내게는 꽤나 두렵고, 상당히 성가신 일이기도 하다. " . . 그냥 내버려둘까 ." 쓸데없이 힘들일 필요 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 . " . . . 세브릭인걸." 사령관 아저씨의 명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대한 걱정인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화를 내준다면 . . "어쩔 수 없지 . . " 눈을 가리고 있던 왼손을 떼어내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거친 느낌을 지닌 나무의 무늬를 바라보다가 어깨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도 무시하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멍하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등 뒤로 넘기고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양손을 쥐었다 펴자, 왼손같은 경우는 가볍게 내 의지대로 움직여줬지만 오른손은 쫙 따라올라가는 고통에 끙끙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까 세브릭의 말이 생각나서 또 다시 움찔하고 굳어버렸다. "그러고보니 . . 얌전히 있으라고 했던가 ." 하지만 . . 이렇게 앉아있는것도 나름 얌전히 있는 행동 . . . 이겠지 ? 멍하게 그렇게 생각하다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어떻게 풀어줘야할까나 ." 상당히 고민하며 진지해지려고 했지만,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짙은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문을 닫고 나오는 세브릭의 모습에 식탁에 앉아있던 아크산이 벌떡 일어났다. 사켄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세브릭을 바라보았고, 라세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어찌하고 나오신것이오?" "깨어나서 나온것뿐이니 걱정마세요." "아, 깨어난것이오?" 아크산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서리자 세브릭은 힐끔 바라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엘은?" "멀쩡하더군요. 작은 주의를 주고 내려왔으니, 또 황당한 일을 만들어내진 않겠지요." 차분한 세브릭의 어조에 사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엘이 있을 방문을 보았다. "걱정이 되신다면 들어가보는게 어떨까요?" " . . . 별로 ." 사켄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컵을 잡았다. 그리고 한번에 들이켜 마셔놓고 다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세브릭은 그의 모습을 보다가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서 어색하게 웃고있는 라세스를 보았다. "하하 .. 이거 죄송하게 됬습니다. 그보다, 전 라세스라고 합니다." " . . 세브릭이라고 해요." "제 일행 때문에 이리 된것에 대해 .. 뭐라 말해야할지." 힐끔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 앉는 라세스의 말을 듣던 세브릭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고있는 아크산을 바라보았다. 일어서 있던 아크산은 자리에 앉아 사켄과 세브릭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오. 나 때문에 다친 것에 대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 " . . 그녀가 설치다가 다친 것이니 저희에게 사과를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다고 하여도 . ." 아크산의 말이 잠시 멈췄을 때,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명의 시선 모두 이층으로 향하고, 세브릭의 눈이 찌푸려졌다. "설친다니, 너무한것 아니에요, 세브릭?" 엘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달고는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엘 .. 분명 나올때 말했던것같은데요 . 얌전히 있으라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일층에 내려오지 말라는 말은 안했잖아요?" "얌전히 있으라는 말이, 침대에 누워있으라는 뜻으로 들리지는 않던가요?" "그럼 그렇게 말해줬어야죠. 난 바보라서 사람말은 일차적인 것 밖에 모르거든요." 어깨를 으쓱하다가 아픈지 인상을 찌푸린 엘이 그들이 앉아있던 식탁 앞에 섰다. " . . . " 세브릭이 차가운 시선으로 엘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아크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왜 여기 있어요?" " . . . 여기있으면 안되는것이오?" "아니, 그건 아닌데 .. 그냥 궁금해서요. 어쩌다가 여기 이렇게 사켄과 세브릭과 함께 앉아있는 건가 싶어서." "나 때문에 그대가 다쳤으니, 그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소?" "역시나 융통성없이 정직하신 분이군요. 그리고 사과할 방향을 모르는 분이기도 하고." 작게 키득거리며 웃던 엘은 라세스를 바라보더니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라세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순간 아하 하는 표정이 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시죠." "고마워요, 라세스."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는 엘을 보며 라세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른 곳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보다, 배고픈데 뭐 좀 먹죠. 설마 식사시간이 아니라고 안된다는 건 아니겠죠?" 엘의 가벼운 웃음에 세브릭은 뭐라 말할듯 입을 열다가 다시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카운터 쪽을 바라보며 점원을 불렀다. "부르셨어요?" 점원은 여전히 묘한 시선으로 사켄과 세브릭을 쳐다보다가 세브릭이 말을 꺼내자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먹을 수 있는게 뭐가있죠?" "글쎄요.. 몬스터들 때문에 .. 지금 먹을 수 있는 거라면 가벼운 식사정도밖에 안되는데 .. 스프랑 빵 정도밖에 없거든요." "잘됬군요. 그럼 스프로 가져다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아- 저희것은 필요없습니다. 이 분것만 부탁할께요." 세브릭이 엘을 지목하며 말하자, 점원은 알았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이 고개를 숙이고 가버리자 식탁에는 잠깐 가벼운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곧 엘이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자, 그럼 아크산 말해봐요." " . . 뭘 말이오?" 아크산이 무슨 소리냐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엘은 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다친 장본인한테 해야죠." " . . . 그렇군." 아크산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비록, 그것이 내 의지는 아니었다고 하나, 나 때문에 다친 것이니." "많이 미안해요?" "그렇소." 엘의 눈이 잠시 빛났다가 순식간에 그 의문스런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싱긋 웃었다. "아크산, 보아하니, 이 마을 사람은 아닌것같은데요." " . . 그렇소. 나와 라세스는 용병이오." "와우, 그거 잘됬네요." " . . . 잘되었다니?" "저희는 생명의 숲으로 가고 있는데요." "엘!" " . . . " 세브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사켄이 지그시 엘을 바라보았다. 엘은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고개를 갸웃 거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왜요?" "무슨 말을 하려는거죠?" "함께 가자고 말하려고요, 일행은 많을 수록 좋은 법이고, 사람이 많을 수록 위험부담은 적어지는 법이죠." "그들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른채 함께 여행하는 것은 위험해요." ". . . . " 엘은 잠시 세브릭의 말에 입을 닫았다가 묘한 웃음을 입가에 단채 말했다. "누구인지 모르는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렇지 않아요?" 엘의 말에 식탁 주변은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점원이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다가섰다. "여기, 주문하신 스프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엘은 가볍게 웃어주곤 스프를 보았다. 노란 빛이 도는 하얀 스프를 보던 엘은 그 스프를 빤히 보다가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 . . . 뭐죠?" 세브릭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묻자 엘이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세브릭." " . . . ?" "저기요, 저 다쳤어요." " . . 알고 있어요." "그럼 어디를 다쳤는지도 알아요?" " . . . 어깨를 다쳤잖아요?" "헤에, 알고 있었네요. 저기요. 근데 지금 제 앞에 스프가 있어요." " . . 뭘 바라는 거죠?" 세브릭이 의심을 가득 담은채 엘을 바라보자 엘은 가볍게 미소짓곤 스프를 가리켰다. "먹여줘요." " . . . 뭐라구요?" "나 어깨 다쳤다니까요?" " . . . 그거랑 먹여주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오른쪽을 다쳐서, 오른손을 들기 힘들어요.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난다구요." " . . . 당신 잘못이잖아요?" "하지만, 내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먹어야 될 이유는 아니잖아요?" "왼손으로 드세요." "세브릭이 먹여주는걸 먹고 싶은데요?" " . . . 그럼 먹지 마세요." 세브릭의 가벼운 거절에 엘의 표정이 묘해졌다. 엘은 그를 빤히 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스푼을 잡았다. 달그락 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가볍게 떨리는 손으로 스프를 떠서 먹으려던 엘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덜그럭 -" 엘의 스푼이 식탁 아래로 떨어지면서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에이 ..." 가볍게 쯧 혀를 차던 엘이 허리를 숙여 스푼을 잡으려 하자, 그보다 먼저 세브릭이 스푼을 잡았다. "제길." 그리곤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여기, 스푼 하나 더 가져다 주겠어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헤에- 먹여주려구요?" 엘의 헤실거리는 웃음에 세브릭이 작게 인상을 쓰며 고개를 훽 돌렸다. 그러자 엘은 침울해진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점원이 스푼을 놓고 사라지자 엘이 다시 잡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곧 그 스푼은 세브릭의 손에 들린채 스프를 담았다. " . . . " 엘이 멀뚱히 바라보자 세브릭은 이를갈며 말했다. "입 벌리세요." " . . 이거 무서워서 먹겠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엘이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벌려 스프를 받아먹었다. 스프 한그릇을 다 비우자 세브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 . . . . 저 . . 그러니까 . . " 라세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엘이 그를 보았다. "저기, 미안하다고 .. 그리고 아까 그 얘기는 . ." "음 . . 글쎄요. 어떻게 하실래요? 같이 가실래요?" " . . . 생각을 해보겠소." 아크산이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 그럼 나도 이만." 라세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볍게 엘들에게 인사하고는 아크산을 따라 나가버렸다. "흠, 동행을 내 마음대로 청해서, 또 화가났을까요?" 엘이 점원이 가져다 준 물을 마시며 굳게 닫힌 방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엘을 보며 말했다. " . .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음? 뭐가요?" " . . 아까 왜 세브릭에게 먹여달라고 한건지 묻는거다." "왜요? 질투났어요?" 사켄은 대답하지 않은채 그저 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에 엘은 푹 한숨을 내쉬고는 컵을 살짝살짝 돌리며 그 속에서 휘둘리고 있는 물을 보다가 대답했다. "세브릭이 화가 났는데, 어떻게 풀어줘야할지 몰라서요." " . . 그래서?" "그래서, 일단 부딪혀보자! 하면서 나왔는데, 마땅히 할게 없더라구요." " . . . " 대답이 없는 사켄이었지만 엘은 그저 가벼운 웃음을 짓고는 그를 보았다. "그래서 아크산네를 들먹인거고 .. 근데 마침 그때 스프가 나와서, 장난을 치면 화가 풀리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해본 거에요." " . . 그렇군 ." "근데, 결과는 대실패네요. 오히려 세브릭이 더 화가 나버린것 같아요." "왜 화를 풀어주려고 한거지?" "그야 . . " " . . . 그야?" 잔잔해진 물의 표면을 보고있던 엘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싫으니까요." " . . 싫다?" "누군가 내게 화내는 거, 별로 . . 좋아하지 않아요." " . . 고작 그 이유 때문인가?" "고작이 아니라구요." 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 날 미워하는것이, 싫어하는 것이, 화내는 것이 .. 난 싫다구요." " . . . 상관없지 않나. 세브릭은 항상 네게 화냈었으니까." "그 화랑, 지금의 화랑 다르잖아요." 투덜거리며 말하는 엘에게 사켄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단순히 화내는 것이 싫은 것인가?" " . . . 아니요." 엘은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그 상대가 세브릭이라서, 불안한거에요." 엘이 만지작거리던 물컵을 놓으며 웃었다. "세브릭에게 미움받는거 싫거든요. 아, 그건 사켄한테도 마찬가지지만." 침울하게 엘이 고개를 식탁에 박으며 말하자, 사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 . . 그렇다는군." "응? 뭐가요?" 여전히 식탁에 고개를 박은채 엘이 사켄에게 살짝 고개를 돌리며 묻자 사켄은 그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응?" " . . . 그렇다면 좀 정상적인 방법을 쓰는게 어떨까요." "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엘은 곧 뒤에 서있던 세브릭을 볼 수 있었다. "어? 내 . .내려오는 소리 못들었는데요?" 엘의 당황한 목소리에 세브릭은 흥하며 코웃음 치고는 의자하나를 빼내서 앉았다. 여전히 당황하고 있는 그녀를 보던 세브릭은 그녀가 잡았던 컵을 잡아 물을 마시곤 대답했다. "당신에게 들킬정도로 기척을 숨기지 못한다면, 기사라고 할 수 없겠지요." " . . . 그게 숨긴다고 숨겨지는 거에요?" 엘이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머뭇거리다가 애교어린 웃음을 지으며 세브릭을 쳐다보았다. "저기, 화 풀렸어요?" "화난적 없는것 같은데요." 세브릭이 전혀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면서 말하자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화났잖아요. 날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화 안났어요." 이번엔 세브릭이 엘을 보며 말했다. 엘은 가만히 세브릭의 눈을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도 화나있잖아요. 날 바보로 아는거에요?" "어째서 화났다는거죠?" 세브릭이 가볍게 미소지으며 묻자 엘은 왼손으로 가볍게 세브릭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 " . . . 눈?" "여전히 눈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잖아요. 입은 속일 수 있어도, 눈은 속이지 못한다는 말 못들어봤어요?" " . . 못들어봤는데요." "그럴꺼에요. 제가 막 지어낸거거든요." " . . . " 엘이 작게 웃으며 왼손으로 턱을 괴며 세브릭을 쳐다보았다. " . . 왜 그렇게 보죠?" "화 많이 났어요?" " . . .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군요." 세브릭의 말에 엘이 작게 웃었다. "이번엔 진짜네요." "그럼, 이제 말해주겠어요?" "응? 뭘요?" 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세브릭은 그녀를 지그시 보며 말했다. "아까처럼 장난치지말고, 정상적인 방법으로요." 세브릭의 담담한 말에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진심이 담긴 미소를 띄운채 사켄과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 . . . . " "말도 안듣고 내 멋대로 행동해서." 엘은 세브릭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진심이 담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요." 아마, 시험 성적표를 기다릴때도 이렇게 두근거리진 않았을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 가창시험을 볼 때보다 더 떨고 있을때, 그제서야 둘의 입이 열렸다. " . . . 어쩔 수 없군요." " . . 그렇군." "응? 뭐가요?" 세브릭이 날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한번뿐이에요." "에?" "용서해주는것, 다시한번 이런 일이 생기면 두번은 용서가 없을 줄 알아요." " . . . 에이, 하지만요 . . " 다시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가 예전과 같이 돌아왔다. 따스하지도, 특별히 나에게 온기를 품고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더 이상 차가운 시선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정말 안심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떨고 있었는지 느끼고,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세브릭의 눈썹이 올라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음, 예를들자면-" "예를 들자면?" "세브릭이 너무 예뻐보여서 코피를 쏟는거라던지 . ." " . . . . " "히-" 활짝 웃는 나의 웃음에 세브릭은 고개를 돌려버렸고, 사켄은 평소와 같은 담담한 표정으로 비어버린 물잔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찌되었든 해피엔딩 - 해피엔딩 - 좋게 끝났으니 정말 다행이다 .. 그런데 .. "그보다, 저기, 아크산네랑은 정말 같이가면 안되는거에요?" " . . . 아까 그냥 제 화를 풀기 위해 들먹인거라고 말하지 않았던 가요?" "음 . .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함께가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 . . . 그들이 미인이라서?" "그렇죠!! . . . 가 . . 아니라 . . " 아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는 날 보던 세브릭이 입가에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여럿이면 좋잖아요. 예를 들면 위험부담도 더 줄 수 있을테고 .." "있을테고, 또 뭐죠?" 뭐가 더 있을까. 어쨌든 함께갔으면 좋겠는데 .. 열심히 고민하던 내게, 세브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이유를 말해봐요." "진짜 이유요?" 멀뚱히 세브릭을 보자,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진짜 이유요." " . . . " . . . 화내지 않을까나 . . ? " . . 화내지 않기?" "화 안낼께요." "삐지지 않기?" " . . . 삐지지 않는다고, 분명 말했는데요?" "소리 지르지 않기?" " . . . 도대체 진짜 이유가 뭐길래 그런 다짐을 받으려는거죠?" "어쨌든요. 소리 지르지 않기?" " . . . 후우, 소리 안지르도록 하죠." 세브릭의 약속 아닌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난 조심스레 세브릭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세브릭이랑 함께 서있으면, 홍(紅)과 청(靑)의 대비로, 환상적인 효과가 . ." "엘!!!!!!!!!!!!!!!" 뭐야, 세브릭 거짓말쟁이!!!! 소리 지르지 않기로 해놓고 !! 난 그렇게, 한참을 세브릭에게 혼나고, 혼나고, 또 혼나야만했다. "후암 -" 거의 30분동안 세브릭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듣느라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브릭에게 계속 말대꾸하다가 1시간정도 함께 싸우느라고 ..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치, 난 환자란 말이야. 환자라구 . 그런데 그렇게 날 막 대해도 되는거야? 뚱한 마음이 들어서 따뜻한 이불 속에서 꼼지락 거리다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회색빛 하늘이라 어두침침했지만, 그래도 어슴프레한 빛으로 인해, 날이 밝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기지개를 펴려다가 다시 아려오는 고통에 작게 새어나오는 비명을 삼키고는 끙끙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둘이 누워있을 침대를 바라보자, 사켄은 이미 어디가고 없었고, 다른 한쪽 침대에 붉은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세브릭의 모습이 보였다. " . . . 어라?" 굉장히 의왼데 .. 사켄도, 세브릭도 항상 일찍 일어났었는데 .. 멍하게 바라보다가 슥슥 머리를 정리하고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었다. 그리고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그의 침대에 다가섰다. 색색 거리는 고른 그의 숨소리와 대비되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에 작게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참고는 침대 곁의 바닥에 앉았다. 눈을 감고 자고 있는 그의 모습에 작은 감탄이 나왔지만, 그것 역시 속으로 삼켜버렸다. 창 밖에서 새어들어온 작은 빛으로 인해, 세브릭의 자는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뭐랄까 . . 미인은 역시 자는 모습도 예쁘구나. 항상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났기에 둘의 자는 모습을 단한번도 보지 못한 내게 세브릭이 자고있는 모습은 상당히 . . 큼큼. . 멀뚱히 그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살짝 손을 내밀었다. 침대 위 여기저기 흩어진 그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움찔, 그가 움직였고,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조용히 말했다. "잠에서 깼어도, 눈 뜨지 말아요." 세브릭이 잠에서 깬것은 분명한듯 내 말에 멈칫했다. 하지만 내가 부탁한대로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당신 말이에요. 상당히 날 곤란하게 하는 사람이에요." " . . . " "항상 나한테 뭐라뭐라 잔소리나 하고 .." " . . . " "맨날 내가 뭔 말만하면 비웃기나 하고 ." " . . . " 그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지 않고 있던 나는 조심스레 그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그리고 앉아있던 자세를 풀고 일어나 그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에게서 등 돌린채 있던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밉지 않거든요." " . . . " "상당히 ." 난 비어있는 사켄의 침대를 보며 빙긋 웃었다. "좋아하고 있어요." 왜 좋아하는걸까 싶을정도로 . "사켄도, 세브릭도 모두. 내가 깜짝 놀랄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어요." " . . . . " 그건 어제야 겨우 느낀 사실 . 미워하면 어쩌나, 싫어하면 어쩌나 . 계속 내게 화내면 어쩌나라는 걱정을 하다가 문득 깨닫게 된 진실. 아무런 대답없는 세브릭을 보았다. 여전히 내 말에 충실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 점점 그의 속눈썹이, 곧게 뻗은 콧날이. 그리고 붉게 물든 입술이 가까워졌다. "앞으로도 ." " . . . " "잘부탁해요, 세브릭." 그의 조금 거친 볼에 살짝 입맞췄다. 그리곤 조금 부끄러워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에선 사켄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어라? 왜 안들어오고 있었어요?" "막 들어가려했다." "그럼 들어와야죠." 미소를 짓는 내게 사켄이 갑자기 말했다. "궁금한게 하나있다." "음, 사켄이라면 궁금한게 한 100가지 정도 된다고 해도 대답해줄 용의가 있는데, 뭔데요? 내 신체 사이즈? 이상형?" 싱글거리는 내게 사켄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직 상처가 아픈가?" " . . 아니요? 이제 좀 괜찮아졌는데요. 아, 아직도 좀 아프긴하지만." 근데, 그건 왜묻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그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 . . 열이 있는가?" "에? 열이요?" " . . 얼굴이 붉어졌군." " . . 어 . . " 사켄이 한쪽 손을 들어 내 이마에 댔다. 그리고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 . . 열은 없는것 같은데." " . . . . 저기, 저 얼굴이 더 붉어지지 않았어요?" 사켄은 가만히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 지금 빨개진건 사켄 탓이에요." "왜 내 탓이지?" "사켄이 너무 멋지니까요." 내 말에 사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아무 대답없이 웃어주었다. " . . . 나가려는 것인가?" "음 . . 아니요, 그냥 다시 들어가죠." 그냥 그 상황이 어색해서 나온 것 뿐이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브릭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우릴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군요." . . . . . . 뭐야. "그러네요. 좋은 아침이에요." 싱긋 웃어보였지만 속은 베베 꼬이고 있었다. 어째서 저렇게 아무 반응도 없는건데? . . . 에씨, 괜히 나만 부끄러워했던거야? 그렇게 툴툴 거리던 나는 내 짐을 챙겨들었다. "먼저 나갈께요." "마음대로 하세요." 세브릭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덜 닫힌 문 틈으로 사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브릭, 열이 있나?" "네?" "귀가 빨갛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문을 닫았다. 그리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정말 재밌다니까." 흥얼흥얼 작은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으로 내려가 식탁에 앉아있은지 좀 시간이 지나고 세브릭과 사켄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내가 짓궂은 표정으로 세브릭을 보며 미소짓자, 세브릭은 내 시선을 피하며 식탁에 앉았다. "뭐 먹고 출발할꺼에요, 아니면 출발한 후에 먹을꺼에요?" " . . 먹고 가도록 하죠." "그럴까요? 여기요~ 주문 받으세요." "네-" 점원에게 이것저것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여관문이 열리며 아크산네가 들어왔다. "응? 아크산이랑 라세스?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음 . . 생명의 숲으로 간다면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라세스가 웃으며 말하다가 멈칫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일단 앉아도 될까?" 힐끔 세브릭의 눈치를 보다가 세브릭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것을 보고는 나 역시 둘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앉으세요." "뭐 시켰어?" "아침 식사요. 아, 식사 하셨어요?" "응, 우린 먹고 왔어." "그래요? 그럼, 차라도 시킬까요?" "아니, 괜찮소."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아크산의 대답에 난 말을 멈췄다가 빙글 웃었다. "그래서, 온 이유는 어제의 대답때문?" "에- 그러니까 . . 그렇지." 라세스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세스와 얘기해본 결과, 그대의 상처는 내 탓이기에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소. 그래서 . ." 잠시 아크산이 말을 멈추고 세브릭들을 보았다. "그쪽이 허락해준다면, 함께 가고자 하오." " . . . " 식탁 위에서 손가락을 톡톡 거리던 세브릭도, 담담한 표정으로 아크산을 바라보던 사켄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음 . . " 잘못한 것도 있겠다. 어제 내멋대로 행동한 것도 있겠다. 나 역시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 . . 괜찮겠군요." "세브릭?" 마침내 세브릭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외로 거절의 말이 아닌 긍정의 말이었다. "생명의 숲으로 가면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는 차분히 말하더니 날 힐끔 보았다. "누구누구가 함께 하면 위험부담이 덜 하다고 말하기도 했고." " . . 에헤 -" 몽실몽실 좋아지는 기분에 난 헤벌쭉 웃었고, 그 웃음에 세브릭이 못볼 것을 봤다는 듯 훽 고개를 돌렸지만 그것은 기꺼이 용서해줄 수 있었다. " . . . 나도 별 상관없다." 사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라세스가 안심한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지. 내 이름은 라세스라고 해. 그리고 .. 저기 말 놓아도 될까? 아, 싫다면 그냥 존대하도록 하고." " . . 상관없다." "마음대로 하시죠." "저 역시, 괜찮은데요." 생글 거리며 말하는 나와는 달리 사켄도, 세브릭도 조금은 무뚝뚝하게 대답했고, 라세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아크산이라고 하오. 앞으로 잘부탁하겠소." "저희야말로, 앞으로 잘부탁해요, 아크산." 내 웃음에 아크산이 지그시 날 보다가 물었다. "그보다 상처는 이제 괜찮소?" "하루만에 괜찮아진다면, 그건 사람이라고 보기엔 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 . . .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괜찮아요. 아직도 좀 쿡쿡 쑤시긴 하지만, 괜찮아지겠죠." 다행히, 흉터도 안남을 것 같고. 그렇게, 우리 일행에는 아크산과 라세스, 두 미남이 추가되게 되었다. 여관에서 즐거운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마을에서 벗어나 생명의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새로 추가된 일행 중 라세스 같은 경우, 상당히 나와 죽이 잘맞아서 우리 일행의 대화 중 반은 나와 라세스가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켄은 말이 별로 없었고, 세브릭도 내가 특별히 장난을 치거나, 혹은 잘못을 할때를 제외하곤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상당히 조용했었는데 라세스 덕분에 조금은 시끌시끌해졌으니, 그게 굉장히 즐거웠다. "라세스 덕분에 살았네요." "응? 뭐가?" "사실, 저 둘 말이 별로 없어서 심심했거든요." "아- 그건 나 역시 동감. 아크산도 별로 말이 없는 성격이라서, 함께 여행하면 항상 입 아프게 떠드는건 내 쪽이거든."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그건 내가 할 말인걸? 고생이 많았겠어." 나와 라세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로를 보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나와 그의 담화(?)대상이 된 나머지는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있다가 그 중 한명인 세브릭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말이 많은 거라고는 생각 안해봤나요?" "저것봐요, 저렇게 말하는데 무슨 말을 해요?" "그러게, 이거 겁나는데?" "그쵸,그쵸?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해요, 힘도 없는데. 저런 말이 나오면 그냥 조용히 있다가 또 눈치보다가 .. 흑흑 ." "그래그래, 괜찮아 괜찮아, 이젠 내가 있잖아." "흑, 라세스!" "엘!" 우리 둘이 찐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이에 아크산이 끼어들어 라세스를 데려가버렸고, 사켄 역시 라세스의 말과 멀어지게 말을 몰았다. "어, 아- 라세스~" "엘~ 잠깐만 아크산 왜 이러는거야?" "그대, 좀 닥치는게 좋겠군." "우아, 이건 인권 침해라구요! 우린 대화할 자유가 있단 말이에요!" "저희도 조용히 길을 갈 자유가 있지 않겠어요?" 내가 아무리 앵앵거려봤자, 사켄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태도로 묵묵히 말을 몰았고 세브릭은 그 와중에도 내게 한마디 했다. "라세스, 아무래도 이들은 우리 둘을 질투하는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그런것 같지? 아, 잠시만 아크산, 얘기 좀 하자!" 내가 라세스에게 말을 걸자, 그가 대답했지만 곧 아크산이 다시 가로막고 멀리 보내버려서 우리는 다시 대화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 시끄럽군요. 당신만 있을 때도 충분히 시끄러웠는데." 세브릭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나는 뚱한 표정으로 사켄에게 기대서 크게 소리치듯 말했다. "아- 이거 무슨, 얘기도 못하게 하고! 세브릭 나빠요! 아크산 나빠요! 사켄도 나빠요!" " . . . 무슨 어린애 같은 짓인가요?" "난 어린애니까 괜찮아요." "누가 어린애라는 거죠?" "나요~ 나 말고 여기에 어린애가 어딨어요?" " . . . . 그러니까 누가 어린애?" 계속해서 부정하려하는 세브릭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보다, 생명의 숲은 언제 도착해요." "이 속도라면, 3일 이내에 도착하겠군요." "이보다 빨리 가면요?" " 적어도 모래쯤 도착하겠죠." "아- 저기, 그럼 가는 동안 마을이 있어요?" " . . . 그러고 보니 말하지 않았군요. 마을은 어제 묵은 그 곳을 끝으로 이제 가는 동안은 없을테니, 노숙을 해야합니다." " . . 에? 왜요?" 세브릭은 잠시 날 바라보고 있다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 . . . 뭐에요? 그 엄청나게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은?" "정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아니면 모른척하는 건가요?" 세브릭의 말에 난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긴,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아는게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이곳'의 존재가 아닌데. "그 이유는 내가 말해 줄 수 있을것 같은데-" "응? 오, 아크산에게서 벗어났네요." "그렇지, 아크산한테 한번만 더 막으면 울어버리겠다고 했거든." "우와, 그거 좋은 방법이네요. 나도 종종 써먹어야겠어요." "그렇지, 좋은 방법이라구. 종종 써먹도록 해." " . . . 남자 엘인가요." "여자 라세스로군." 나와 라세스의 대화를 듣던 세브릭과 아크산이 한숨을 쉬다가 서로 바라보고는 동질감이 섞인 눈빛을 교환했다. "고생이 많았겠군요." "그대 역시, 고생이 많았을 것 같소." 잠시 서로를 보던 그 둘은 다시 말을 재촉해 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 둘을 보다가 라세스를 보았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뭐에요?" "음 . . 지금은 알다시피 전쟁 중이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라세스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러니까, 생명의 숲은 이종족 연합의 본거지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주변에 마을이 있을 수 있겠어?" "에 . . 그러니까 . . " "이종족인 그들에게 인간의 마을은 위협이 되었던 모양이야. 그들은 마을을 전부 없애버렸지." " . . 전부?" "그래, 전부." "저기 . .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요?"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웃으며 묻자 라세스가 하늘을 바라보며 진지한 눈빛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미쳐버렸지." " . . 네?" "본래, 그들은 살생을 싫어하며 생명을 사랑하는 . . 말 그대로 자연의 종족이었는데 말이야." " . . . . " 멀뚱히 바라보는 내 시선에 라세스가 시선을 맞추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세계가 이상해진 것에 대해, 이종족들도 피해갈 수 없었나봐 ." . . . 비틀림 얘기다 . 지오가 세상을 비틀어버린 후, 이종족들에게도 영향이 미쳤던 건가. 하긴 . . 자연에 가장 민감한 것은 그들이었을테니까 .. "그러니까 . . 그 말은 . . " "전멸이었죠." 세브릭이 담담하게 말했다. "남은 이들이 믿을 수 없어할 정도로 참혹했소." 아크산 역시 말을 몰며 대답했다. "생명의 숲에 어느정도 가까이 있던 마을은, 단 한달만에 모두 폐허가 되었다." 뒤에서 들리는 사켄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라세스가 날 보던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키며 말했다. "그들은 인간들보다 오랜 수명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였고, 그 누구보다 강했으며 .." 라세스의 표정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선량한 존재가 악한 이가 된다면 그 누구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 조용히 모포를 여미고 모닥불을 보고있던 내게, 라세스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 중이야?" "음, 라세스랑 어떻게하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않고 대화할 수 있을까, 정도?" "그건 나 역시 고민해봐야할 일이겠는걸?" 라세스는 큭큭 거리더니 모닥불에 장작 하나를 던져넣었다. 세브릭은 물을뜨러 간다고, 사켄과 아크산은 장작을 주으러 가서 없었다. "그래서, 정말로 고민하는게 뭔데?" 일렁이는 모닥불을 보다가 그를 보았다. 마치, 오빠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정도로 친근하고 편한 사람이었다. "있잖아요, 라세스." "응." "라세스는, 이 전쟁으로 무엇을 잃었어요?" " . . 글쎄 . . ." 라세스는 내 질문에 가만히 생각에 잠기더니 내게 웃으며 말했다. "자랑스럽던 아버지를 잃었고, 다정하던 어머니를 잃었고 .. 그리고 .." "그리고?"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불을 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지." " . . . . 라세스." "응?" "라세스는 소중했던 사람들을 잃게 만든, 이 전쟁이 멈췄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나요?" 나직한 내 물음에 라세스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면 오히려,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만든 이 전쟁에서 그 보상을 받기위해 이 전쟁이 지속되길 빌었나요?" " . . . 아니 ." 그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울컥할 정도로 처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전쟁이 끝나길 빌었지. 이런 전쟁, 끝났으면 하고 빌었어." " . . 근데 왜 라세스는 이 전쟁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어요?" "글쎄 . . "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씨익 웃었다. "난 겁쟁이였으니까. 내가 잃은 것을 추스리는데 급급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거든." 그의 대답에 난 그를 보던 시선을 불로 옮기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요." " . . . " "이 전쟁, 멈추려고 해요." "전쟁을 . . 멈춘다고?" "응. 멈추고 싶어요. 멈췄으면 했어요." 불의 온기에 나는 잠시 건조해진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픽 웃으며 무릎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근데 자신이 없네요." " . . . 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죽음이 가까워서요." " . . .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의 슬픔이 느껴져서요." 고개를 묻고 있던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라세스, 세상에 당신같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 . . . "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 이 전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 그런 사람들의 슬픔을 , 무엇으로 보상해주죠?" " . . . 엘 ." "이 전쟁을 증오하며, 이 전쟁에 지쳐있을 사람들을 무엇으로 위로해줄 수 있죠?" " . . . 글쎄 ."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무언갈 묻는 듯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보던 시선을 어두운 숲 쪽으로 돌렸다. 짙은 그림자 속을 바라보며 난 다시 입을 열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짙어지죠." " . . . 어?" "이 전쟁으로 이득을 얻으려고 했던 사람은, 다른 이들의 그림자는 보지 않은채 자신의 빛만을 보려했던 사람이에요." 처음 전쟁의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생각했다. 아렌타 제국으로 오던 카슘 제국의 황녀가 죽고, 그 일로 오해를 풀러가던 아렌타 제국의 황자가 죽은 것은 분명 누군가의 음모 때문이다. 어째서 그때의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그 음모는 분명했다. 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두 제국은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이 일로, 잘하면 영토를 넓혀 이 대륙의 단 하나뿐인 제국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하지만, 자신의 빛만을 바라보던 사람도 깨달았겠죠, 다른 이들의 그림자가 얼마나 짙어졌는지를." " . . . " 멍하게 나를 보는 라세스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자신의 죄값을 치러야할꺼에요." " . . . 누가?" 라세스의 말에 나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림자를 생각지 못했던 빛을 쫓던 사람이." 타닥거리며 장작이 타는 소리만 울릴 뿐,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있던 우리 중 그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왜 그렇게 굳어있어요?" 빙긋 웃는 날보며 라세스가 굳은 표정을 풀었다. "글쎄, 네가 어떤 사람인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냥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못하게 되버린 소녀정도로 칠까요?" "큭큭, 그게 뭐야." 그의 가벼운 웃음에 나 역시 같은 웃음을 짓고는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섰다. "어딜 가려고?" "좀 씻으려구요. 자기 전에 손정도는 씻을까 싶어서." "음 .. 아마도 세브릭이 있을테니까 상관없겠지. 아니면 같이 가줄까?" "괜찮아요. 가는 길에 만나면 거기서 다시 돌아오던가 하죠 뭐." 조심해서 갔다오라는 라세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짙은 어둠이 깔린 숲 속을 걸으며 점점 마음이 가라앉고 기분이 차분해졌다. 아까는 라세스가 너무 굳어버려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화제를 돌려버렸지만, 난 아직도 낮에 들었던 얘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전멸당해버린 마을들 . 그 곳에서는 아마도 곧 결혼할 행복한 연인도 있었을 것이고, 태어나서 빛을 본 아이들과 즐거이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부모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겪었던 불행, 슬픔 ..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없는 내가 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이 전쟁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게 아닌가. 그냥 대표들을 설득해서 이 전쟁을 멈추자고 화해하게 만들면 되는거 아닌가. 그렇게 .. .. 그렇게 희생된 이들의 아픔을 .. 슬픔을 생각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웃으며 결정해버렸던건 아닐까.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할 수 있었던 생각. 전쟁의 참혹함을 보지 못하였기에 할 수 있었던 다짐. 지오가 생각났다. 쿠오를 생각했다. 전쟁으로 인해 지쳐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났고, 어째서 전쟁을 해야하는지도 모른채 전쟁을 하고 있던 병사들이 생각났다. 동연합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생각했고, 지금 이곳으로 오면서 만나왔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멈추고 싶다. 그들의 지친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다. 난 전쟁을 겪어본적이 없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적도 없으며, 그로인해 슬픔에 잠겨본적도 없었다. 이 전쟁이 멈춘다면, 더 이상 그런 사람들을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모두 괜찮아질 것이다. 그냥 .. 그냥 그렇게 결정해버렸다. "하지만 . . 하지만 그게 정말 그렇게 쉬운 일이야?" 자리에 우뚝 멈춰선채, 난 혼란스러워해야만 했다. "지오, 정말 내가 이 전쟁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지오, 정말 당신은 내가 이 전쟁의 슬픔을 모두 거둬들일 수 있다고. 이 전쟁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에요? 입술을 깨물며 푹 고개를 숙였던 나는 주먹을 꽉쥐며 말했다. ". . . 다시 만나게 되면, 각오해요, 지오."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다잡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애써 미소지었다 . "이렇게 덜렁 보내버린거, 그 때 가서 원망할테니까." 지금은 아니야. 지금 이렇게 흔들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처음 생각대로, 전쟁을 멈추려 했던, 지오가 부탁했던 때로. 사령관 아저씨와 약속했던 때로. 그래, 그때처럼만 생각하자. 희생된 이들의 슬픔을 잊지 않으면 되잖아. 그들의 아픔을, 전쟁을 향한 증오를 ..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 더 이상 이들의 슬픔이 계속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다면 . 그러기 위해 전쟁을 멈춘다면 . 그게 내가 이세계(異世界)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다. 이계인(異界人)일 수 밖에 없는 내 최선이야. 만약 성공치 못한다고 해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전쟁을 멈춰줄 수 있을테지. 길은 누군가가 먼저 걸어간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로인해 생기는 것이니까. 분명,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그리고 내가 실패한다면, 내 뒤를 이어 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 그 사람은 노력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지오가 슬퍼하지 않을것이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든, 분명 이 전쟁을 끝날테니까. 내가 성공한다면 .. 그래, 내가 성공한다는 것은 언젠간 끝날 이 전쟁을 조금 더 일찍 끝내는 것 뿐이다. 인간은 오래도록 서로에대한 미움을 키워가며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삶을 사니까. 마음을 정리하고 크게 심호흡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참방참방 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느림보 세브릭, 아직도 물을 안떠놨던 건가?" 한참 전쟁으로 인해 고민하다가 들려오는 물소리에 슬쩍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무슨 말을 해줄까 고민하던 나는 호수의 모습이 보이자 입을 열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흐린 달빛을 받으며 호수 속에 서있던 한 존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장밋빛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올리다가 날 보며 굳어버린 세브릭의 모습에 나 역시 굳은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휭하는 바람만 맴돌던 와중에, 그가 입을 열었다. " . . 뒤돌아서겠어요?" " . . . 왜요?" "지금 제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힐끔 호수의 가장자리를 보자, 가지런히 접은채로 놓여진 옷가지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그를 보자 그의 매끈한 허리 아래 쪽으로 . . 그러니까 . . 침이 꼴까닥 넘어가게 만든 아슬아슬하게 감추어진 골반선이 보였다. " . . . . 그냥 나오면 안될까요?" " . . . 절대로 안돼요." "난 괜찮은데요." "제가 안괜찮아요." " . . . 정말로 괜찮은데 ." "엘 ." "알았어요-" 빙글 뒤돌아서자 참방거리는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뭐에요, 씻느라 늦었던 거에요?" " . . . " "저기, 지금이라도 뒤돌아서면 안될까요?" "안돼요." 키득거리며 웃다가 어두운 숲쪽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닳는것도 아닌데, 조금 보여주면 어때요?" " . . . "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그 침묵이 민망하였기에 난 다시 말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그보다, 역시나 환상적인 몸매네요. 두근두근거리는데요?" 그렇게 계속해서 장난식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쓰고 있는데 뒤쪽에서 시원한 물내음과 함께 세브릭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날 휘감았다. "다갈아입었어요?" 내 뒤로 다가온 것을 보아, 다갈아입은 모양이다 라고 생각한 나는 어떻게 골려줄까 웃으며 뒤돌아섰다가 다시 멍해졌다. 바지는 갖춰입었지만, 위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세브릭이 평소와는 다른 무표정한 얼굴로 내 뒤에 서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 . . 기 . . 그러니까 . . 세 . . 브릭 ?" 그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평소보다 붉게 물들어 젖어있었고,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그의 단단해보이는 어깨로, 팔로 떨어져내리며 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 . . . 저기 다시 뒤돌아설까요?" 망설이던 내가 말하자 세브릭은 날 가만히 보다가 내게 걸어왔다. 나는 한걸음씩 물러섰고, 그는 한걸음씩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에 부딪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세브릭이 날 자신의 두팔 안에 가두며 바라본채 입을 열었다. "당신은 너무 무방비해요." " . . 에?" "지금 내가 조금만 힘을 써도, 난 순식간에 당신을 취할 수 있을꺼에요." " . . . 저기 . . 세브릭이라면 난 기꺼이 . . " 내가 애써 장난끼어린 미소를 짓자, 세브릭이 점점 다가왔다. "장난으로 넘기려고 한다면."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내 볼을 적셨다. 세브릭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쉽게 넘어가진 않을꺼야." . . . 내가 뭐 화나게 한일있나? 없는데? 분명 없을텐데? 맹렬하게 굴려지고 있는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브릭이 그 자세 그대로 약간은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항상 말했잖아?" " . . . " "세브릭이라면, 사켄이라면, 혹은 다른 그 어떤 미인이라면." 짜릿한 느낌이 귀에서부터 찡하게 몰려오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힘이 쭉 빠져버리며 바닥에 주저앉아버릴 듯했다. 마성(魔聲)이 이러할까. "난 언제든 환영이에요. 라고." "세브 . . 릭?" 그는 내가 불렀음에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남자를, 그리 쉽게 보지 않는게 좋아." " . . . " "지금도, 넌 날 뿌리치지 못하잖아." 세브릭이 내 귓가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짜릿한 느낌을 사라졌지만 그의 강렬한 시선에 붙들려 쉽게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네가 여자이고, 나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남자라는 것을." 그가 내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바닥에 놓여있던 옷을 잡고는 날 지나쳐 걸어갔다. "잊지 않는게 좋아요." 그가 가버린 후,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주제할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다. "풉 . . ." 그리고, 입가에선 차마 막을 수 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푸하 . . 푸하하하핫 ." 그리고 난 그렇게 바닥에 엎어져 끅끅 거리며 웃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아." 키득키득 웃던 나는 이제 너무 웃어 아롱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유쾌하게 호수를 바라보았다. "정말 당신은 곤란한 사람이에요, 알아요?" 아까와 같은 전쟁으로 인한 불안함도, 우울함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 사람과의 대화로 이런 기분이 들다니, 뭔가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정말 이런 일도 있나보네." 너무 웃어 당기는 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혼자 바보같이 실실거렸다. 그리고 흐린 달빛으로 작게 일렁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까 흔들렸던거 미안해요, 지오." 맞아요,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각오하라고 했던 것도 .. 음 .. 아닌가, 이건 좀 기억해두도록 해요." 다시 만나게 되면 한껏 원망에 원망에 원망에 원망을 더해줄테니까. "어쨌든 .. 여기로 날 보내줘서 고마워요." 다시 당신을 보고싶어. 비틀렸음에도, 한껏 다정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는 '이곳'과 닮은 .. 다정하고 여린 당신을 만나고 싶어. "만날 수 있을까요 .. 만나고 싶은데."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저 웃었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설마 세브릭이 그렇게 나올줄이야. 지오의 모습이 서서히 머리속에서 사라지며 아까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렬한 장밋빛 눈동자, 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던 그 숨막히는 매력. " . . . 이 참에 진짜로 세브릭이나 꼬셔볼까." 흐린 달빛을 보며 마음을 다독이고, 어두운 호수에 세수를 한 후 심호흡을 했다. "사람 곤란하게 한다니까."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에 울려퍼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당황하기도 또 오랜만이네." 평소 무사태평항시안일의 태도로 살던 내겐, 정말 드문 경험이였다. " . . . 그보다, 걱정해준걸까나." 남자들 속에만 파묻힌채, 미남만 밝혀서 그런가 .. 하지만, 난 미인(美人)이라면 남녀를 안따지는데 .. 지금까지 거쳐왔던 곳에서 미녀들은 발견할 수 없었단 말이야. 혼자서 투덜투덜 거리다가 호수 속에 가만히 손을 담근채 물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손을 보았다. 멍하게 그 손을 바라보고 있자, 서서히 호수의 표면이 잠잠해지더니, 맑은 거울같은 표면으로 내 얼굴이 보였다. 길게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 쌍커풀진 검은 눈. 그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나. " . . . 참 행운이라니까." 행운아라니까요, 나는. "지오를 만난건 내게 행운이었어요." 운명이라면 운명, 필연이라면 필연. "우연이라도 상관없지만." 우연이었어도, 그건 내게 필연이었고 운명이었을꺼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런 사람들 못만났을테니까. 그렇지 않아요?" 물 속에 흔들리던 내 모습이 빙긋 웃음을 그렸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오?" "응?" 흠칫 놀라 뒤돌아서자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걸어나오는 아크산의 모습이 보였다. " . . . . 글쎄, 호수의 요정한테 랄까." "요정?" 그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힐끔 호수를 바라보더니 다시 날 보았다. "근데, 여기까진 무슨일로 왔어요? 아크산도 씻으려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날 보던 그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세브릭은 돌아왔는데, 그대가 오지 않기에." "이야, 영광이네요, 아크산과 같은 미남이 데리러 오고." 한쪽 무릎을 꿇고있던 자세에서 일어나 젖은 손을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내 모습을 보고있던 그가 굳은 입매를 풀며 입을 열었다. " . . 어깨는 ." "네?" "어깨는, 괜찮아졌소?" " . . 음, 그 질문 두번째인것 같은데요." 그는 짙은 푸른 눈동자로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채 그저 날 바라보기만했다. 그 모습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냥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많이 괜찮아졌어요." " . . 그렇소?" "그렇사옵니다." 키득거리는 대답하자 그의 눈가가 살짝 .. 정말로 살짝 웃음기를 머금었다. "처음이네요." " . . 무엇이 말이오?" "아크산의 표정이 그렇게 풀어진거요." " . . . 내 표정?"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웃고 있잖아요. 여기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부드럽게 풀어진걸요." 그는 내 말에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아주 잠깐의 시간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다시 평소와 같은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아깝네요. 말하지 말걸 그랬나." " . . 무엇을 말이오?" "표정이 풀어졌다는 거. 말 안했다면, 지금도 아까같이 부드러운 눈으로 날 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가볍게 걸음을 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내가 다가가기까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눈으로만 내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그와 두걸음정도의 거리만을 남겨놓고 내가 멈춰서자, 그의 눈동자 역시 멈춰섰다. 가만히 그와 시선을 맞추고 있다가 뒷짐을 지며 웃었다. "무엇이 당신의 표정을 그렇게 만드는걸까요?" " . . . " "당신의 성격 때문일까요, 아니면 당신이 자라온 환경 때문일까요." 분명 그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오체를 들으며, 혹은 그의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며 보통 사람은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할까 .. 그 왜 있잖은가, 높은 자리에서 많은 이들에게 우러름을 받는 사람의 분위기랄까. " . . . 날 아는 것이오?" "알 것 같아요? 당신은 절 몰랐고, 저도 당신을 몰랐는데요." " . .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것이오?" "음 . . " 뒷짐을 진채로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숲 속의 어두운 그림자 속을 걸으면서, 그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슬쩍 뒤돌아보자, 역시나 그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내게서 세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저번부터 생각했는데요." " . . . " "'이곳'의 남자들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일까요." " . . 뭘 말하는지, 난 모르겠소." "뭐, 내가 만나본 사람들로만 판단하면 안되는 거겠지만." 머리 속에서 한명한명, 내가 아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는 조용히 내 말이 이어지길 기다려 주었다. "모두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거든요." " . . 비밀 말이오?" "뭔가를 감추고 있다고나 할까. 비밀은 남자를 더욱 멋지게 만든다. 뭐 그런걸까나요?" " . . . . " 그가 우뚝 멈춰선 것을 느끼고 뒤돌아서며 그를 보았다. 그의 푸른 머리카락이 어둠에 짙게 물들었다. 푸른 눈동자는 짙게 가라앉아 얼핏보면 나와 비슷한 검은 눈동자로도 보였다. "우연이로군." "뭐가요?" "나 역시, 그대에게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오." "어라? 난 감추는 거 하나 없이 한꺼풀만 벗기면 모든 것을 보여주는 바나나같은 여잔데요." " . . . 바나나가 무엇이오?" "과일이에요, 과일. 노란 껍질을 벗기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속살이 들어있죠." 그의 눈이 잠시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 혼자만의 생각이겠지." "에- 난 정말 감추는게 없는데요." " . . . 진심으로 하는 소리로군." "진심이니까요." 빙글 웃으며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흥얼흥얼 작은 콧노래를 불렀다. "난 그대가 더 궁금하오." "물어보세요, 곤란한게 아니라면 대답해 드릴 테니." " . . 그대는 어디에서 온 것이오?" "아크산의 마음 속에서 왔어요." " . . . 무엇이든 대답해준다고 하지 않았소?" "곤란한 질문이었으니까요." 앞을 보면서 키득거리며 그의 목소리가 들리길 기다렸다. 이윽고 잠시 후 다시 그가 물어왔다. "그럼, 그대는 왜 전쟁을 멈추려고 하는 것이오." "싫으니까요. 누군가의 부탁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곳'에서 생긴 소중한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부탁 . . ?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누구'인지, 묻는다면 답해주겠소?" "답해주길 바래요?" " . . . 그렇소." 난 자리에서 멈춰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일렁이는 불빛을 보다가 뒤돌아서서 그림자 속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그저 그곳에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서있었다. 가만히 손을 들어올려 턱을 매만지다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뽀뽀해주면 대답해줄께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곧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내 앞에 서서 두손을 들어올리는 모습에 나는 멍하게 있다가 급하게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우아- 농담농담, 농담도 못해요?" "답해주겠소?" " . . . 흠 . . . " "그대에게 입맞춰야 답해주는 것이오?" 그의 말에 잠시 아무말도 못하다가 푹 한숨을 내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내 꾀에 내가 걸렸군. "하긴 아크산, 여자의 유혹에 약하다고 했죠." 그러니, 엄청나게 많은 여자들을 안아왔다는 소리도 되겠지. 아크산의 외모면, 많은 여자들이 붙을만도 하니까. "그보다, 궁금한게 있는데요." "아직 내 질문에대한 답을 듣지 못했소." "내 질문에 답해주면, 대답해줄께요." " . . . 무엇이 궁금한 것이오." 아크산의 뒤쪽으로 펼쳐진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당신은, 신(神)을 믿나요?" " . . . . " 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푸른 눈동자에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짙게 일렁였다. 그저 그의 눈동자를 보다가 싱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아크산, 당신은 신(神)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믿고 있나요?" " . . . 나는."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신(神)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소." " . . . ." 그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뒤돌아서며 흐릿하게 일렁이는 모닥불으로 다가갔다. " . . . 그 질문에 답해주면, 내게 답해준다고 하지 않았소?" "음, 생각이 바뀌었다고나 할까." " . . . . . " 그가 내 뒤에서 짓고있을 표정이 생각났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만 지닌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만약, 당신이 내 질문에 마음에 드는 답을 해주었다면, 대답이 바뀌었을지도요." 지오를 믿지 않는다니 ..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 하지만 .. 지오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여기 어린양이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있어요. 혼자 딴생각을 하고있는데, 뒤에서 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가 해서 뒤돌아보자, 사켄이 아크산의 팔을 잡고 내 뒤에 서있었다. " . . . 귀신들이라니까 아무튼." 도대체 어떻게 아무 기척도 없이 이렇게 다가올 수 있는거야? 투덜투덜 조금 놀란 마음을 다독이다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 . . 무슨 일이에요?" " . . . 아무것도." 내게서 등돌리고 있는 사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크산을 보았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사켄을 보다가 이내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 역시나 내가 쉬이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오." "그래요? 사람들이 나보고 단순하다고 하던데. 아, 이상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그렇게 짐작할 수 없다. 신비하다. 뭐, 그런 말은 요새들어 듣는 말이네요." '나의 세계'에서 친구들은 그저 내게 이상하다, 혹은 웃기다라는 말만 했지. 알 수 없다. 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 . . 신비하다고는 한적 없다." "아, 어림짐작이에요, 어림짐작. 나 스스로 신비주의의 여자라고 생각하니까~ 비밀은 남자보다 여자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법이거든요." 사켄의 말에 혼잣말하듯 답해줬다가 잠깐의 침묵 후 난 다시 입을 열었다. " . . 근데, 둘이 사겨요? 왜 계속 손잡고 있는 건데요?" 내 말에, 둘의 손이 살그머니 풀리었다. . . 두사람 혹시 나 모르는새 눈이라도 맞은건가? * * * 회색빛 구름 사이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저 흐릿하게나마 날이 밝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때쯤, 사건은 발생했다. " . . . 뭐라고요?" "그러니까." 모두 나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믿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 . 뭐라고요?" "앞으로는 육포로만 3일을 버텨야한다고 . . " "육포로만?" "그래, 육포로만." 그랬다. 그나마 여러가지를 곁들여서 나름 풍족한 식사를 즐기던 우리 일행 . 그런데 이제 식재료가 다떨어졌으니, 육포로만 살아야한단다 . " . . 차라리 나한테 죽으라고 하세요." "어쩔 수 없잖아? 육포 외에는 전부 상해버렸는걸." 라세스가 삐질삐질 어색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넋을 놓고 말았다. 하루만에 상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왜 음식이 하루만에 이렇게 물러버리는건데?! "어떻게 된거에요?" "아마도 .. 사기를 당한게 아닌가 싶은데 .." " . . . 하 . . 하하 . . . 육포 . . 육포라 . ." 육포빼고는 전부 사기로 날려먹었다고? " . . . . 차라리 중독되어버리겠어요." "뭐?! 엘!!" "놔!! 난 육포만 먹고 못살아 ! 나의 상큼한 과일을 돌려줘!!" 숲으로 손을 뻗으며 아무 과일이나 잡으려는 날 라세스가 힘껏 붙들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뭐하는거야!? 빨리 안말려?" "죽도록 고생한번 해봐야 정신차리지 않겠어요?" " . . . 어?" 순간 나도, 라세스도 동작그만 상태로 굳어서 세브릭을 보게되었다. " . . .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어이 . . ?" "나 역시 생각이 같소." " . . . 아크산 . . " " . . . " 라세스가 멍하니 세명을 둘러볼동안, 나 역시 차근차근 세사람을 바라보았다. 세브릭은 어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짐정리를 하고 있었고, 사켄은 아직 남아있는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크산은 말들을 둘러보며 이상이 없는가를 살피고 있었다. "헤에, 그러니까 여러분은 내가 뭘 먹든, 죽어도 내버려두겠다. 그 말이에요?" "죽으면 곤란하니까, 죽기 직전에 살려드릴께요. 약초는 충분하니까요." "그러니까, 죽도록 고생한번 해봐라?" "사켄이 말했듯, 경험만큼 쉬운 방법은 없죠." " . . . 헤에 -" "하하 . . 그 . . 그렇다네? 그러니까 엘, 괜한 고생하지 말고, 그냥 육포만 먹는게 어떨까? 쓸데없이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잖아." 라세스의 어색한 미소에 나 역시 마주 웃어주며 말했다. "그럴까요? 쓸데없이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겠죠?" "잘생각했군요." 세브릭이 짐을 다 챙겼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켄도 담담한 눈빛으로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그만 갈까?" 라세스의 이제 해결되었다는 환한 웃음에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활짝 웃었다. "에 . . . 엘 . . ?" "근데, 이걸 어쩌죠?" 난 다시 한걸음 물러서며 네명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내가 뭘 할지 의문이 서린 눈빛이었다. 그에 정말,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못된 마음으로 피식 웃었다. "여러분, 난 그 화를 자초해보고 싶거든요." "엘?!" 어디 엿 한번 제대로 먹어봐라. 라세스가 손을 뻗었지만 난 재빠르게 과일을 손에 쥐고 입으로 한웅큼 물었다. 쌉싸름한 과일맛이 입안 가득 퍼지고, 나중에는 아삭한 맛만이 남았다. 상큼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일품이었다. "엘!!!!!!!!!" 모두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다가왔다. 사켄이 순식간에 내 손에서 과일을 빼앗아가버렸고, 세브릭은 내 입을 벌리고 과일을 토해내게 하려했다. 하지만 꿀꺽 삼키며 싱긋 웃었다. "이거, 꽤 맛있네요." 일그러지는 모두의 표정을 보며 활짝 웃었다. 누가 날 그렇게 방치플레이 하듯 놓아버리랬어? 응? 이 사람들이, 날 그렇게 쉽게 봤단 말이지? 내가 하라고 겁주면 못할줄 알았어? 응응? "고 .. 괜찮아?!" 라세스가 안절부절못하며 과일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싱긋 웃었다. "괜찮은것 . . 으 . . 읏 . . " 허리가 푹 숙여졌다. 그리고 배에서부터 무언가가 날 훑고 올라왔다. "엘! 사켄, 약초를!!" "기다려라."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세브릭이 와락 내 어깨를 붙들고는 화난 표정으로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죠!" "하 . . 하지 . . 읏. . 하지 말라고는 안했어요-" "저번에도 말했었는ㄷ. . . !!!" "세브릭, 약초를 ." "네." 세브릭이 급하게 내 입속으로 약초를 넣으려고 할때, 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뭐하는거죠?! 손치워요!" 그의 약간 화난 듯 하면서도, 조금은 간절한 목소리에 이제 그만 하기로 결정했다. "놀랐죠?" 세브릭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얼빠진 듯한 모두의 표정을 보며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뭍지도 않은 먼지를 털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웃음을 참으려다가 딸꾹질이 나올뻔했잖아요. 보는 내가 미안해지게. 앞으로 이런 장난은 치면 안되겠네요. 이렇게 모두 놀랄지는 몰랐어요." "뭐야 . . 장난이였어?" 라세스가 허탈하게 웃으며 털푸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죽겠다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놀랐다고." "놀라라고 한거죠."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을 보았다. 사켄은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지만 약간 화난듯한 하지만 다행이라는 듯한 안도의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크산은 가벼이 고개를 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게로 가버렸다. 그리고 . . " . . . 재밌나요?" "네, 재밌어죽겠는데요." " . . 얼마나요?" "어제, 세브릭이 날 놀래킨것만큼이나요." " . . 그랬군요." 세브릭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장밋빛 눈 속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뭐. 나한테 막말한건 당신이잖아. 난 내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물들의 비틀림을 해결했을때, 세브릭과 사켄 몰래 과일을 따다 먹은적이 있다. 그때,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이후로 종종 과일을 따먹었다. 아무래도 비틀림을 해결하는 것은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에도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라고 간단하게 해답을 내리고. 근데 . . . . . . 쫌 심했 . . 나? 그냥 장난이었는데 . . 갑자기 급소심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화났 , . 어요?" "조금요." "얼마나요?" . . . 응? 이거 무슨 데자뷰같은 느낌인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힐끔 그를 보았다. 그는 날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훽 돌아서서 매어져있는 말들을 향해 가버렸다. " . . . 사켄, 세브릭이 많이 화났나봐요." "쓸데없는 장난을 쳤으니까." "사켄들도 날 방치했잖아요?" "방치한적없다." "과일 먹고 죽도록 고생한번 해보라면서요." " . . . 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고생하길 바란거에요?" " . . . " 대답없이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의 모습을 원망하듯 쳐다보다가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세브릭의 모습을 보았다. 툭 - 그 때 내 등을 치는 손길에 멍하니 뒤돌아섰다. "얼른." 라세스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말을 이었다. "뭘요?" "빨리, 화풀어주고 와야지." " . . 어떻게요?" "찐하게 뽀뽀라도 해주는게 어떨까?" "라세스한테 먼저 해드릴까요? 라세스는 화안났어요?" "아쉽지만 난 목숨이 하나거든. 그리고 나야 뭐, 네가 괜찮으니까." " . . 라세스, 멋진 남자네요." "이제 알았어? 자, 그러니까 얼른 가." 라세스에게 고마움을 담아 웃어주고는 세브릭을 향해 걸어갔다. 분명 내가 다가가고 있음을 알고있음에도 완전한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이번엔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화많이 났어요?" "그 질문 한지 한시간도 지나지 않았을껄요." "에이- 화풀어요. 이런걸로 화내면 쫌생이에요." "쫌생이라 미안하군요." " . . 정말로 화 많이 났어요?" "거짓말로 화내는 사람도 있던가요?" 여전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그였다. " . . . . 세브리이익-" 그의 긴 장밋빛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잡고서 흔들거리자, 당기는 느낌에 훽 그가 고개를 돌리며 나를 보았다. " . . 놔줄래요?" "화 풀어요- 네?" " . . . 다시한번 말할까요? 놔줄래요?" 난 여전히 그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고, 그는 날 뚫어버릴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 . . 그쯤에서 화 푸는 것이 어떻겠소." 옆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던 아크산이 말했다. 세브릭도, 나도 그를 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했던 마음에 화를 내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말해주진 못할망정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남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 . . . 신경 끄시죠." "미안하오. 그래도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 모른척 할 수가 없소." "단지 그뿐인가요?" 세브릭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크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단지 그뿐이오." " . . . " " . . . " 묘한 대치상태에서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데, 뒤에서 누가 날 들어올리더니 말 위에 앉혔다. "에.. 사켄." "지금 가지 않는다면, 더 늦게 도착할지도 모른다." " . . . 알고 있어요." 세브릭이 사켄의 말에 답하고는 훌쩍 말에 올라탔다. 나머지도 말에 올라타고 우린 출발했다. " . .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 싫은데요." 툴툴 대는 내 말에 뒤에서 사켄의 낮은 저음이 들려왔다. "괜찮다." " . . 사켄?" "아까 아크산의 말대로, 세브릭은 널 걱정하는 마음에 화를 낸것뿐이니까." " . . 정말 그럴까요?" "내 검에 걸고 맹세하지." "맹세를 그렇게 쉽게 해도 되는거에요?" 살풋 웃으며하는 나의 말에, 사켄이 잠시 조용하더니, 이내 다시 말했다. "그와 난 다르지만 마음은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음이요?"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뿐." 등 뒤로 느껴지는 사켄의 체온이 따스하다. "너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다." 기분좋은 심장의 고동소리가 내 마음을 울린다. " . . . 사켄, 그 말 다시한번 해주면 안될까요? 지금 완전 감동먹었어요." "싫다." "에이- 빼지말고 한번만 더요. 네?" 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사켄은 아무 말 없이 말을 몰았다. 그리고 나는 . . . 삐질까하다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타이밍 잘맞춘다니까. 오히려 타고난 선수는 세브릭보다는 사켄이라고 사켄. 어떻게 .. 그렇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그렇게 듣고 싶은 때에 잘맞춰서 말할 수 있는지. 혼자 헤실거리며 웃고있는데 뭔가 바로 옆에서 싸한 기운이 몰려온다. 그 기운에 혼자 움찔하며 슬금슬금 옆을 돌아다보았을 때, 무감정한 장밋빛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마치 무생물 보는 듯한 그 맑은 눈빛에, 순간적으로 난 겁을 먹어버렸다. " . . . 세브릭, 왜요?" " . . . . " 훽 고개를 돌려 말을 몰고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다가 등 뒤에 버티고 있는 사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나 지금 울고싶어질라 그래요. 나 좀 위로해줘요." " . . . 뭘 바라는거지?" "바라면 이루어주실 껀가요?" 반짝이는 눈동자로 올려다보자 사켄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소원을 들어주는 힘같은건 없다." "하긴, 사켄같은 소원 들어주는 요정이 있다면 기겁할껄요." " . . . 무슨 뜻이지?" "요정에게 홀딱 반한다는 뜻이죠."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듯한 그의 얼굴에 빙글빙글 웃다가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넘실넘실 장밋빛 머리카락이 그의 허리 쪽에서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두번다시 돌아보지 않을 사람처럼 그렇게 . . " . . . " 큰일났네. 어떻게 풀어주지 .. 내 목숨(?) 가지고 장난친것에 대해 저렇게 화낼 줄은 몰랐는데 . 아우-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랬냐고 화라도 내면, 어떻게 그런 말을 ! 하면서 우는척이라도 하지. 이게 뭐야. 완전 사람 무시하고 .. 저번에는 어떻게어떻게 풀었는데 .. 저게 날 걱정했던 사람의 태도야?! 이씨, 사실은 내가 죽었으면 했는데, 안죽어서 화난거아니야?! "잉잉- 사켄, 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그건 말이지." "라세스?" 라세스가 슬금슬금 우리 말 옆으로 다가오더니 힐끔 세브릭을 보곤 소곤거렸다. "내가 좋은 방법을 알고 있는데 .." "좋은 방법이요?" 라세스가 내게 한마디한마디 해줄수록, 사켄의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었더라면 .. 하긴, 알았었더라도 했겠지. 재 미 있 을 것 같 았 으 니 까. "별로 .. 그 참혹한 현장같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오히려, 다른 곳들보다 아름답다. 산들산들한 연두빛 풀밭. " . . 나도 처음 봐.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으니까." 라세스가 감탄의 눈빛을 숨기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 보이는 짙은 녹음빛이 생명의 숲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고, 주위에는 넓게 펼쳐진 들판으로 인해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바람에 섞인 산뜻한 풀내음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세브릭은 아무말도 없이 말을 주위에 나무에 매어놓고는 혼자 훌쩍 어딘가로 가버렸다. "엘!" "알았어요- 라세스, 뒤를 부탁해요!" "걱정마,걱정마!" 그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세브릭의 뒤를 따라 열심히 걸었다. 일행들과 멀어졌을 때쯤에야, 난 겨우 세브릭의 걸음에 속도를 맞춰서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옆이 아니라 뒤에 붙어 느긋하게, 하지만 조급하게 걸었다. " . . . " " . . . " 혼자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가는 동안, 그는 단한번도 내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나라는 사람은 없는 것 마냥, 그렇게 걷고 있었다. " . . . 아직도 화 많이 났어요?" " . . . " 묵묵부답. 아직도 화났다는 무언의 표시인건가?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바로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이 살고있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던 곳. 들판으로 뒤덮여 마을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 "* 맥수지탄(麥秀之嘆)인가." (* 맥수지탄(麥秀之嘆) : 조국이 멸망한 것을 한탄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뭐 .. 조국이 멸망한 것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상황이니까. 보리가 아닌, 아름다운 들판이지만. " . . . " 혼잣말을 하다가 힐끔 앞을 보자, 역시나 세브릭은 아무말도 않고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후우- 어쩔 수 없나. 라세스가 말해준 방법을 쓸 수 밖에. "세브릭-" " . . . " "세브리익-" " . . . " "대답 안해주면 삐져버릴꺼에요?" " . . . " "우와 .. 나 삐져도 상관없다는 거에요?" " . . . " 여전히 묵묵부답. 그에 난 한숨을 쉬고는 점점 걸음을 빨리해서 세브릭의 바로 뒤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곧 그의 등으로 손을 내미는 순간, 손이 잡혀 그와 함께 들판으로 쓰러졌다. 싱그러운 풀내음과 향긋한 꽃내음으로 인해 정신이 어지러웠지만, 당황한 듯한 그의 눈빛에 싱긋 웃음이 나왔다. " . . . 이게 . . 무슨 짓이죠 . . " 낮은, 하지만 매력적인 저음에 난 아무 대답도 않았다. 그러자 그가 다시 땅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뭐, 아까 등으로 손을 뻗는것까지가 라세스가 말해준 방법. 기사인 이상, 자신의 등뒤로 무언가가 다가오면 위협으로 간주하고 즉각 대처한다나? 뭐, 내가 듣기에는 그런식의 말이었다. 끽했으면, 세브릭의 검에 세상 떴을지도 모르지만, 나라는걸 느끼고 있을텐데 설마 죽이기야 할까 라는 마음이었는데. 뜻밖의 수확이네. 라세스, 고마워요 - 나중에 내가 .. 뭐 해줄껀 없고, 아크산이랑 잘엮어줄께요. (이 때, 라세스와 아크산은 뭔지모를 오한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일어서려는 그의 목으로 손을 뻗어 꽉 안았다. 순식간에 팔에 힘이 빠지며 내게 안겨오는 그의 모습에 혼자 헤죽거리며 그는 보지 못할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들려요?" " . . " 두근- 두근- 안들리려나? 아니, 아마도 들리겠지. 작지만 분명 뛰고 있는 나의 심장소리가. "난 살아있어요." " . . . " "분명 지금도 열심히 제 심장은 제 기능을 발휘해서 뛰고 있다구요." " . . 그래서요?" "그러니까." 난 그의 머리카락에 폭 얼굴을 묻으며 활짝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구요." " . . . " "예전에도 말했잖아요." "무슨 말 말인가요 . . " 조금은 누그러진듯한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새어나올뻔 했지만 애써 억누르며 속삭였다. "나요, 세브릭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 . . 그럼 미움받을 짓을 하지 않는게 좋지 않겠어요?" "그거야, 세브릭들이 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놓아두니까 그렇죠." " . . . "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하늘이,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인게 아니라, 붉은 노을이 지고 있다면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할텐데. 아쉬움에 쯧 혀를 차고는 그의 목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그러자 그가 스윽 고개를 들더니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주 가까운 거리, 서로의 숨결이 느껴져 간질간질한 정도의 거리였다. " . . . 입맞춰주면 분위기 뿅뿅 환상일텐데. 안그래요?" " . . 사양하도록 하죠." 그의 장밋빛 눈동자가 다시 포근한 꽃잎색으로 물들었다. "화 풀었어요?" " . . . 항상 그렇잖아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역시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내가 당신을 이겼던 적은 없으니까요." 그의 손이 내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갔다. 주위에 나즈막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세브릭이 말했다. "돌아갈까요?" "손 잡고 갈까요?" " . . . . 싫어요." 훽 뒤돌아서서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곤 뒤를 따라 걸어갔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죠. . . .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삐죽 고개를 내민 생각을 순식간에 갈무리했다. '어쩌면'이라는, 가정으로만 .. 남겨둬야할 생각이다. 마치 주위가 붉은 빛으로 넘실거리는 석양의 환상을 보는것 같은 기분이다. 그 환상에 나는 잠시 자리에 멈춰서서 멀어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곧 그가 뒤돌아서서 날 바라보았다. 왜 빨리 오지 않느냐는 듯한 재촉의 눈빛에 난 싱긋 웃고 그에게 다가섰다. 그 후 이동과 노숙을 번갈아하며 몬스터도 만나지 않고, 우린 그저 한가로이 들판을 지나 숲에 가까워졌다. 숲에 가까워질수록 가슴 두근거리는 . . . 내가 알듯모를듯 야릇한 느낌에 기분이 묘해졌다. 뭐지? 이건, 무슨 느낌일까. 다정하고도 다정한, 하지만 그러면서도 슬퍼지는 . . "아-" "엘?" "아- 맞다. . . 풋 . . 아, 왜 몰랐지." 그래, 이 기운. 이 느낌. 분명 알고 있다 . 그리고 느껴본 적이 있다. 다정하고도, 여린 . . 너무나도 아름다워 인간같지 않았던 존재. " . . . 지오." "엘?" 라세스의 부름에 난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지오가 누구야?" 순간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 . . . 지오를 라세스가 어떻게 알아요?" "방금, 네가 말했잖아?" " . . 내가 말했어요?" 내가 말했던가? 혼자 생각하지 않았나? " . . 지오가 누구지?" 뒤에서 나직히 들려오는 사켄의 목소리에 난 잠시 생각을 하다가 상관없겠다 싶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게 해준 이랄까." " . . . 부모님?" " . . . . 글쎄요?" 지오가 우리 부모님? 그, 아름답고 아름다운 존재가? 킬킬 흘러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난 다가오는 녹빛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지오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그보다 . . .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지오, 생명의 숲은 정말로 당신의 기운으로 가득차있는 곳이네요. 당신이 비틀어버리기 전의 세상은 저토록 다정하고 아름다운 곳인가요. 생명의 숲의 입구쯤일까. 완연한 녹빛으로 둘러싸인 숲을 바라보던 우리는 말에서 내려 그저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 아름다운 곳이군요." 세브릭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숲을 둘러보았다. 파릇파릇하게 돋고있는 새싹들,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다채로운 빛의 꽃들. 그리고, 그 숲을 배경으로 서있는 . . . "크읏-" "왜그래, 엘?" "어디 아픈것이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흘러나오려는 침을 애써 삼키며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 헤죽거리는 음흉한 웃음을 그들에게 보인다면 .. 그래, 난 확정이다. 미친 여인들 중에서도 최고의 미친 여인으로 등극할 수 있을테니까. " . . . 정말 괜찮은건가?" 사켄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네, 잠깐 현기증이 났을뿐이니까요." " . . . 왜 현기증이 난거죠?" " . . . 너무 아름다워서라고나 할까." 그래, 여러모로 .. 여러모로 정말 . . . 우리 이쁜이들과 잘어울리는 곳이구나. 감탄에 감탄, 즐거움에 즐거움. 모든 행복이 여기 모여있는 듯한 느낌이야! 다시 한번 세상이 핑크빛 오로라로 둘러쌓인 것 같은 기분에 홀로 헤죽였다. " . . . 이거 완전 .. 이세계판 F4인데 말이에요. 그럼 난 .. 난 .. 차마 금잔디라고 하지는 못하겠는걸." 난 그렇게 뻔순이가 아니란말이지. 혼자 중얼거리며 키득거리다가 아무도 못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숲에 관심을 보이느라, 다행히도 내 말은 듣지 못한 모양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쓸어내리며 씩씩하게 외쳤다. "자, 그럼 숲으로 들어가볼까요?" "안돼요." "에-?" 힘차게 걸어들어가려던 나는 세브릭의 말에 삐끗해서 가까스로 자리에 멈춰서서 그를 보았다. 그는 힐끔 날보더니 쯧 작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잊은 건가요? 여긴 이종족 연합의 본거지라는 것을." " . . . 알고있는데요? 그래서, 그들을 만나기 위해 여기 온거잖아요?" "지금, 우리가 무슨 용무로 왔는지 그들이 알것 같나요?" "그러니까, 알리기 위해 들어가야지요." "바보로군요. 들어가기도 전에 우린 그들의 손에 살해당할껍니다." " . . . 말을 꼭 그렇게 무섭게 해야겠어요?" "그렇지않으면 당신은 경각심을 가지지 않잖아요?" "세브릭들이 있는데 뭔 걱정이겠어요?" 빙글거리며 그들에게 웃어주자 세브릭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라세스는 킥킥 거리며 아크산의 어깨에 기대었고, 아크산은 그런 라세스를 어깨에서 떼어내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사켄? 그는 그저 묵묵히 내 뒤에 서서 검에 손을 얹어놓고 있었다. "어쨌든." "네, 어쨌든?" "여기서 좀 기다리도록 해요." "에- 언제까지요? 왜 기다려야해요?" "그들이 곧 알고 나올때까지. 그래야 더 안전할테니까요." "우리가 여기있는지, 그들은 알 수 있는건가요?" 그건 처음 듣는 얘긴데, 인간들이 숲 가까이 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건가? "그러고보니까, 이종족들은 어떻게 생겼어요? " 이종족이라 .. 뭐 엘프같은거 아닌가? 난 미의 화신이라 불리는 판타지의 감초, 엘프를 생각하며 혼자 흐뭇해졌다. 드디어, 판타지에서 미의 절정이라 불리는 그들을 만날 수 있는건가? " . . . 그건 왜 묻죠?" 우린 세브릭의 의견을 따라 숲 가까이에 앉아 이종족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꽃들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묻는 내 질문에 세브릭이 의심어린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웃었다. "궁금하니까요. 어떻게 생겼어요?"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라세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들의 용모는 매우 아름다워, 그들을 보면 순간적으로 넋을 잃을정도로." 흠, 대충 지오정도의 외모로 생각하면 되는건가? "귀는요?" " . . . 귀?" "그러니까 뾰족하고 길고 .. 그렇지 않아요?" 이종족이라면 .. 엘프, 묘인족, 낭인족 .. 여러가지가 있잖은가? 로망 중에 로망 .. 크윽, 묘인족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 쫑긋거리는 귀, 살랑거리는 꼬리 .. " . . . 엘,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실실 웃고있는거야?" "아 -" 라세스의 말에 순식간에 표정을 수습하며 그를 보았다. 그가 웃기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말했다. "귀는 평범한 인간과 다를바 없는데." " . . . 평범해요?" "그래, 그들의 외모는 인간과 다를바가 없어." " . . . 인간과 다를바가 없어?" "아름답긴 하지만, 그저 .. 인간들 중에서도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잖아?" "예를들자면, 세브릭이나 아크산처럼?" "그렇지, 그렇지." "거기서 왜 제가 나오죠?" "불쾌하오." 세브릭과 아크산이 항의하는 것은 간단히 씹어삼키고는 라세스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요? 그럼, 왜 이종족이라고 불리는 건데요?" "음 - .. 인간이 아니니까." " . . . 그들이랑 우리랑 다를게 없다면서요?" "그렇긴한데 .. 뭐라 설명할 수 가 없네. 나중에 직접보면 알수 있을꺼야." 라세스가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보자마자,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테니까." 늦은 저녁이 될때까지, 이종족은 커녕 산짐승조차 보지 못했다. 살랑이는 꽃내음을 묻힌 바람만이 우리와 대화하며 곁에서 머물고 있었다. " . . . . 안되겠네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모두 날 바라보며 의아한 눈동자를 했다. "뭘 말이죠?" "못참겠어요." " . . 조금만 더 참는게 어떨까요?" "여기서 더 참으면 난 정말 울어버릴꺼에요." " . . . 인내심이 없군요." 세브릭의 말에 난 픽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여자는 남자랑 몸구조가 다르거든요." " . . . . !!!" 잠시 생각하던 네명의 얼굴이 빨개진채 어쩔 줄 몰라하는걸 속으로 즐거워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잠시, 전 볼일 좀 보고 올께요." "하지만 .. 숲에 들어가면 .." "여기서 일을 해결하라는 거에요? 세브릭, 변태!" "아 . . . . 으 . . " 살짝 두팔을 엑스자로 교차하며 말하자 그가 얼빠진듯한 표정으로 날보았다. 어쨌든, 더 이상 날 말리지 못하는 남자들을 내버려두고 숲 안으로 들어갔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더욱 짙어지고, 지오의 기운에 기분이 좋아졌다. " . . . 확실히, 지오의 기운이 살아숨쉬고 있는 듯한 기분이네." 단한번 만난 이가 이렇게 깊게 내 속에 숨쉬고 있을 줄이야. 다시 그를 생각해도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게 된다. 묘한 느낌, 낯선 기분. 하지만 싫지 않은 미소 .. 라고나 할까. 조금 깊게 들어왔을까, 슬슬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 "흑 -" "응?"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정말 작은 울음 소리. "하브- 흑, 하브-" " . . . 어?" 수풀 쪽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난 순간 굳어버렸다. 그리고 무언가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에 입을 다물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뭐지? 몬스터는 없다고 했으니까 .. 산짐승인가? 아니 .. 산짐승이 말할리는 없으니까 .. 이종족 .. 이라거나?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내 고막을 울렸다. 그리고 저녁무렵이 되어 낮게 깔린 어둠 속에서 작지만 흐릿한 빛이 보였다. 둥근 원형 .. 말하자면 .. 반딧불이의 빛이 핸드볼공 크기정도로 커진듯한 빛이라고나 할까. "하ㅂ ... -" 멍한 상태에서 그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영롱한 빛의 구 속에서 그러니까 .. 수저 정도의 길이랄까? 하여간, 그정도 키의 조그마한 존재가 온몸에서 작은 빛을 뿌리며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누... 누구!!" 물기 젖은 맑은 금빛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 . .하브 !!"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하브'라는 말만 되뇌이는 작은 존재를 보며 .. . . . . 보며 . . . "안녕하세요?" 살짝 웃으며 그 존재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존재는 경계의 눈초리로 나와 나의 손을 번갈아보았다. "누구 .. 세요 . .?" "난 하브의 친구에요." "정말 . . 요 . . ?" 하브의 친구? 개뿔, 난 하브가 누군지도 모른다. "네, 사실 그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서 .. 근데, 당신과 같은 이를 만나다니 행운이네요." 구불구불한 금빛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작은 바람에도 가볍게 일렁였다. "정말로 .. 하브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요?" 아직도 작은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하브라는 이름의 효력이 큰지, 그 작은 존재는 조금씩 내게 다가서고 있었다. 순진하기도하지. 나는 그냥 웃음을 머금고 참을성있게, 그 아이가 내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 . . 예쁘네요." "네?" 마치 .. 예전에 가지고 놀던 팔등신의 미인 인형의 축소판을 보는것같다. 정교한 피규어와 같은 느낌이랄까. 내 말에 작게 홍조를 띄며 부끄러워하는 그 아이에게 난 다시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이름이 뭐에요? 그보다, 하브는 어디있죠?" "에 .. 에프릴이에요 .. 그리고 .. 저도 하브와 떨어져버려서.." 자신을 에프릴이라고 소개한 작은 아이가 내 손에 살며시 서더니 큰눈에서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며 울먹였다. "이런, 울지 말아요. 예쁜 얼굴이 미워지잖아요." 혹시나 아플까 무서워 난 손을 대지도 못한채 멍하게 내 손에 서있는 에프릴을 바라보았다. 날개가 있나 확인해보았지만, 날개는 없었다. 그냥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다는 건가? 신기하네. "흑, 하 .. 하브 .. 랑 . . 떨어져서 . . 흑 .."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거에요? 이곳은 숲의 끝부분인데, 혼자오면 위험해요." 맞아, 위험하다고 위험. 혹시라도 산짐승을 만난다거나 하면 어쩔 뻔했어? "흑 .. 중 . . 중간까진. . 하 . .하브랑 같이 왔었는데 .. 잠깐 한눈.. 을 .. 판 사이에." 다시 울먹이며 울려고 하는 에프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괜찮아요. 그럼 나랑 하브가 우릴 찾을때까지 기다리도록 할까요?" " . . 네 . . 흑 . . " "내 이름은 엘이에요. 잘부탁해요, 에프릴." "에 . . 엘 . . "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내 이름을 말하는 것에 난 순간 고개를 훽돌리며 이를 악물었다. "엘? 왜 .. 왜그래요?" "아무 . . 것도 . . "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어떻게 !! 너무 예뻐! 정말 귀여워, 완전 사랑스러워!!!!!!!!!!!! 맙소사, 지오같이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 이런 .. 이런 이 사랑스러움은 뭐야! 간신히 날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걱정스런 눈길로 날 보고있는 에프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왜 여기까지 온거에요?" "인간이 .." "인간?" "인간이 숲 밖에 있다고 해서 .. 저랑 하브가 대표로 가게 되었어요." "헤에- 그래요?" "엘 .. 엘이 그 인간 . . 인가요?"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에 나는 걱정말라는 듯이 다정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전 인간이에요." "왜 . . 왜 이 숲에 온거에요?" 겁에 질린듯, 파르르 떨리는 금빛의 속눈썹을 보다가 생긋 웃었다. 뭐, 솔직하게 말해두는게 편하겠지? "저는, 이 대륙을 망치고있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어요. 동연합에서는 이미 저와 뜻을 함께하겠다고 동의했구요. 그래서, 이번에는 이종족 연합의 대표에게 제 뜻을 전하기 위해서 왔어요." "전쟁을 . . 멈추기 위해서요?" "네,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요." 멍하게 날 바라보는 에프릴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 아이가 놀라지 않을정도로 천천히 자리에 앉아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이건 그보다 더 의미있는 만남을 했네요." "네?" "에프릴을 만나다니, 행운 중에 행운이에요." 지금까지 지오같은 성스러운 느낌의 미인, 쿠오같은 부끄럼많은 미소년, 세브릭같이 섹시한 미청년, 사켄같은 냉미남. 아크산, 라세스 .. 많은 미인들을 만나왔지만 .. "정말 . . 예쁘네요. 에프릴." "아-" 발그레한 홍조를 띄며 작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에프릴의 모습에 난 다시 한번 속으로만 팔짝팔짝 뛰었다. 무려 미소녀다 ! 미소녀 중에도 금발의 미소녀! 청순, 청초, 수줍은 아름다움을 지닌 미소녀!! 크윽- 이런 여자아이를 보길 원했어! 이런 미인(美人). 아니 .. 인간이 아니니까 .. 어쨌든 이런 미소녀, 미녀를 만나고 싶었다고!! 그렇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흐뭇해하고 있을때, 톡톡 가벼이 누군가가 내 볼을 두드렸다. 그에 시선을 옮기니 작고 가냘픈 팔을 뻗어 내 볼에 손을 대고 있는 에프릴이 보였다. " . . . . 위험 ." "네 . . ?" 동그래진 금빛 눈동자에 또 다시 몽글거리는 기분이 느껴지기 전에 얼른 감정을 추스리고 활짝 웃었다. "아니, 하브는 언제쯤 올까 싶어서요." "저 . . 저도 잘 . . " " . . 그러고보니, 저도 일행한테 돌아가야하는데 말이죠." "일행이 . . 있나요?" 두눈을 깜빡이는 에프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일행들이 있을 방향을 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곤란하네요, 에프릴을 혼자 두고 갈수도 없으니 말이에요." "아 .. 어차피 전 당신들에게로 가야했으니까. 함께 가도 되지 않을까요?" "음?" "하브도 .. " 에프릴이 활짝 꽃이 휘날리는 듯한 샤방한 미소를 지었다. "하브도 분명 그곳에 있을꺼에요." "음 . .그럴까요?" "네! 분명, 분명 그럴꺼에요! 하브는 그곳에 있을꺼에요. 얼른, 얼른 일행들에게로 가요!" 에프릴이 내 손에서 붕 날아오르더니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에 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 에프릴이 이끄는데로 걸어가다가 말을걸었다. "그보다 에프릴." "네?!" 발그레하게 밝은 얼굴로 날 돌아보는 그녀를 보다가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제 일행이 어디있는지는 아는거에요?" " . . . " 잠시 아무말도 없이 굳어있던 에프릴. 하지만 곧 내 머리를 잡아당기던 힘이 빠지고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 . . 전 바보에요 . . 어 . . 어딘지도 모르면서 . . 흐 . . 하브 . . " "으아- 울지마요. 에프릴, 내가 알고있잖아요?"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 난 정말, 이런 여자애들한테 약해 .. 남자들이라면 짓궂게 이것저것(?)하겠는데.. 여자애들은 워낙에 섬세해서, 자칫 어긋나면 피곤해지니까. 폭 한숨을 쉬고는 에프릴을 살며시 감싸쥐어 내 어깨위에 올렸다. 얌전히 어깨 위에 앉아 훌쩍이는 에프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천천히 우리 일행들이 있을 곳으로 돌아갔다. .. 그보다,, 지금 화장실 가는건 글렀군 . 속으로 한탄하며 그녀가 놀랠까 조심스럽게 걷다가 자리에 멈춰섰다. "엘? 왜그래요?" "아니 .. 그게 . . " 멀리서, 분명 일행들이 있을 곳에서 .. 내가 예상한 것보다 큰 불빛이 보인다. 이 시간대면, 모닥불이면 충분할텐데 .. 숲이라도 불 태워버리려하는건가? "아!" 옆에서 에프릴의 밝은 감탄사가 들렸다. "하브에요!" " . . 네?" "하브가 저기있어요 !!" 난 그 말에 설마라는 생각과 함께 그녀를 내 손에 감싸쥐고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가 다칠까 손에는 완전히 힘을 푼채로 조심스럽게 말이다. 그리고 도착했을때, 난 내 예감이 들어맞은것을 알 수 있었다. "에프릴을 어떻게한거지?! 에프릴을 내놔!" 차갑게 타오르는 금안의 눈동자를 지닌 소년 .. 에프릴과 비슷하지만, 역시나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하지만 에프릴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키를 가진것에 살짝 놀라웠다 . "미안하지만, 우린 모르는 일이오." "에프릴이 누군지도 모른다니까?!" 아크산과 라세스가 열심히 소년에게 말을 했지만, 소년은 그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는 두손을 몸 한가운데로 모았다. 그리고 곧 그 손과 손사이에서 밝은 빛이 회오리치듯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언제나 똑같군. 너희들의 거짓말 따윈 듣고 싶지 않다! 에프릴과 분명 이곳까지 왔었는데, 그럼 어디있다는거지?!" "모르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을텐데요!" 모두 굳은 표정으로 있는 것을 보며, 내 손에서 빼꼼 에프릴이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가 .. 남자들이란." 바보들이라니까. 일단 부딪히고 보자야? 대화라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말이야. 쯧, 놀란 표정으로 나와 그들을 보던 에프릴에게 살짝 미소지어주곤 걸음을 옮겼다. "엘!" 사켄이 날 발견했는지, 회색빛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중 가장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지마라. 거기에 있어!" " . . . 에- 미안하지만, 그건 안되겠는걸요?" "엘!" 화난 듯한 그의 모습을 보다가 싱긋 웃고는 금방이라도 던져버릴듯한 회오리치는 빛을 지니고있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넌 뭐지?" "당신이 하브인가요?" " . . .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거냐!" 앙칼지게(!!) 말하는 하브의 모습에 폭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풀었다. 그러자 그 속에 얌전히 앉아있는 에프릴의 모습에 그 소년이 크게 외쳤다. "에프릴!" "하 . . 하브 . . " 안절부절못하던 에프릴이 내 손에서 살포시 날아올라 하브에게로 다가섰다. 하브의 손에 있던 빛의 구가 서서히 작아지더니 이내 바람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하지만, 난 곧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을 목격했다. 에프릴의 몸에서 나던 작은빛이 환하게 변하더니 에프릴이 순식간에 커져 하브라는 소년과 비슷한 키로 변해 그 소년에게 안겼던 것이다. "흑, 하브 -" "괜찮아. 에프릴, 괜찮아-" 하브는 에프릴의 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더니 이를 악물고 우릴 보았다. "인간, 역시나 거짓투성이의 존재로군. 에프릴을 데리고 있었으면서!" " . . . 엘, 이게 어떻게 된거죠?" 세브릭의 물음에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여전히 커져버린 에프릴에게로 시선을 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숲에서 길을 잃은 에프릴을 발견한것 뿐이에요. 하브, 자세한 얘기도 듣지않고 공격부터 하려 하다니, 정말 어린애로군요."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르지마라, 인간 주제에!" "인간 주제에 죄송하지만." 인간주제에? 꼬맹이가 입이 험하네. "이종족 밖에 안되는게 좀 조용히 할래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하브는 입을 뻐끔뻐끔하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에프릴, 하브에게 사정 좀 설명해주겠어요?" " . . 엘, 하브와 . .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요?" "누가, 저런 인간 따위와 친구라는 거야!" "하 . . 하지만 엘이 . . " 에프릴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자, 하브가 당황하더니 손을 내저었다. "으 . . 으앗, 울지마! 울지마 에프릴." "흐 . . 하 . . 하브 .. 하브가 화내.. 화내니까 . . 흐으 . . " "울렸네요." "울렸군." "그렇게 윽박지르니 울지않소." "쯧, 남자가 되서 여자를 울리면 쓰나?" "울렸데요- 울렸데요-" "시끄러워!" 우리가 한마디씩 하자 하브가 씩씩거리며 소리지르더니, 다시 울고있는 에프릴의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친곳은 없어? 저 인간에게 무슨짓을 당한건 아니지?" "흑 . . 응 . . " 고개를 끄덕이는 에프릴을 따뜻한 눈으로 보던 그가 곧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던 눈과는 180도 다른 눈빛으로 우릴 보았다. "인간. 어째서 에프릴을 데리고 있었던 거지?" "당신을 놓쳐서, 어두운 숲속에 혼.자 남겨져 울.고 있더군요. 아아-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당신은 매정하게도 작고 작은 에프릴을 혼.자 남겨두고 가버렸다지요? 어쩌면 남자가 되서 그런 짓을 할 수 가 있죠?" "뭐 . . 뭐 . . " "뭐라고? 정말 그랬단말이야?" "그렇다니까요, 정말 저 하브라는 소년 너무하다고 생각안해요?" "너무하잖아, 이름이 하브라고 했던가? 남자가 되서 그러면 안되지!" "맞아요, 그러면 안되죠!" "어 . . 어 . . 으 . . " 나와 라세스의 말에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던 하브를 보던 세브릭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호흡이 척척 맞는군요 ." " . . . 괜히 여자 라세스와 남자 엘이겠소." "하긴 . ." 둘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말던 나는 하브에게로 한발짝 다가섰다. 어느새 에프릴을 뒤에 숨긴채 이글거리는 금안으로 날 보는 그 소년에게 싱긋 웃어주며 손을 내밀었다. "에프릴." " . . . 무슨 수작이냐." "에프릴, 미안해요. 하지만 그때, 하브의 친구라고 하지않았다면 당신이 도망가버릴것같아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하브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채 날보는 에프릴의 맑은 금안이 살며시 흔들렸다. "미안해요, 내게 사과할 기회를 주지 않겠어요?" "허튼 수작부리지 마라! 인간 주제에, 에프릴에게 말 걸지 말라고!" 그가 크게 소리치더니 다시 두 손을 몸 가운데로 모았다. "엘!"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한걸음 더 다가섰다. 하브의 손에서 빛의 구가 점점 흉폭하게 휘몰아치고, 그래서 생긴 바람으로 인해 내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한걸음 더 그들에게 다가가 여전히 손을 내민채, 시선은 에프릴에게로 집중했다. "에프릴." 재촉하지도 않고, 매달리지도 않는 그저 담담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꺼져라, 인간!" 하브가 소리치는 순간. 그래 그 순간이었다. 그의 어깨를 살며시 쥐는 에프릴의 손 때문인지 빛의 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떨리는 걸음으로 내게 한걸음 한걸음, 에프릴이 다가왔다. "에프릴!" "괜찮아, 하브. 엘은 . . 우리가 듣던것처럼 나쁜 인간이 아닌걸." "그건 모르는거야! 속이고 있는걸지도 몰라!" "만약 . . 만약 속는거라면 .. 그래도 난 엘을 믿을래." 그녀가 하는 말에 하브가 멍하게 내게 다가오는 에프릴의 뒷모습을 보는것이 보였다. 내 손을 망설이는듯한 떨리는 손으로 쥐는 에프릴을 보다가 싱긋 웃었다. "다시 한번 소개할까요? 난 엘이에요. 인간이고, 전쟁을 멈추려고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 왔어요." "전 . . 전 에프릴이에요. 이샤링족으로 생명의 숲에서 살고 있어요." 수줍은 에프릴의 미소에 몽글몽글해진 기분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앗, 에 . . 엘!" "아으- 너무 귀여워요. 어쩜 이렇게 귀엽죠?" "아 . . 아 . . " "이익, 인간 ! 감히 에프릴에게 무슨 짓이냐, 놓아라!!" 뚱한 표정으로 우릴 보던 하브가 순식간에 다가와 옆에서 방방 뛰었다. 하지만 난 힐끔 하브를보다가 내 품에서 발그레해진 얼굴로 부끄러워하는 에프릴을 보았다. "미안한데, 하브는 좀 기다리도록 해요. 전 지금 에프릴한테 푹 빠져있거든요." "익, 헛소리하지마라 !!" 오랜만에 듣네, 저 헛소리라는 소리. 싱글거리며 웃던 나는 이내 에프릴을 안았던 팔을 풀고 뒤돌아보았다. "모두 표정이 왜그래요?" 안도한듯, 혹은 화가난듯, 아니면 신기하다는 듯. 미묘한 표정으로 보고있는 그들을 보다가 피식 웃어주었다. "날 능력있는 여자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 . . . 헛소리하지 마세요." 역시, 원조는 세브릭이라니까. 키득거리며 웃고는 어느새 내 품에 있던 에프릴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긴채 으르렁거리는 하브를 보았다. 에프릴과 같은 금발에 금안 . . 확실히, 라세스의 말이 이해가 가기도 하네. 딱보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니. " . . 반짝반짝하네요." 그랬다. 그들의 몸 주위에서는, 작았을때와 마찬가지로 은은한 빛이 .. 하지만 이제는 금색을 띄우고 있는 빛이 그들의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그들의 빛을 보다가 살짝 숨을 들이마쉬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단 대충 해결된 것 같으니, 자기 소개부터 할까요?" " . . . 인간 ." 아직도 이글거리는 하브의 금안을 보다가 생글 웃었다. "왜 불러요, 하브?" "인간 주제에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싫은데요, 만약 '이종족 밖에 안되면서 나한테 반말하지 말아요.'라고 하면 당신은 지켜줄껀가요?" "감히, 인간 주제에!!" 하브가 벌떡 일어서더니 손을 모으려는 것을 보며, 난 아직도 내 품에 안겨있는 에프릴에게 말했다. "에프릴, 하브가 당신까지 날려버리고 싶은가봐요." "하, 하브, 그런거야?" 에프릴의 맑은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브는 두손을 늘어뜨리고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훗, 이미 네 약점은 내가 쥐고 있다! 하하하 - . . . . 마치 나 지금 엄청 악당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이제 뭘 어쩔꺼죠?" "당연히 이샤링족의 족장님을 만나야죠. 근데 .." 난 살짝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다. 결코 끄고 싶지 않은, 모락모락 피어나 죽지 않고있는 나의 희망이야. "이종족은 . . 이샤링족 밖에 없는 건가요?" 내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자라나던 나의 희망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그래, 엘프나, 묘인족들은 .. 내가 결코 볼 수 없단 얘기구나 .. ... 우울해, 우울하다고! 지오는 그들같이 눈에 이로운 존재들을 창조하지 않고 뭐한거야!! .. 라고 하고 싶지만, 지오 자체가 아름다우니깐 특별히 용서하겠어. 후- 난 정말 여린 사람이라니까. "뭔가 .." 세브릭이 말을 꺼냈다. 그에 잠시 나의 여린 마음을 탓하던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응? 왜요?" "당신의 표정, 뭔가 기분이 나쁘군요." " .. 귀신이라니까, 세브릭은 질투쟁이~" 내가 딴남자(?) 생각하는 줄 어떻게 알고 저런데? "누가 질투쟁이라는거죠?" "모르면 됬어요. 그렇게 솔직하지 못해서야. 에프릴, 당신은 나중에 저렇게 솔직하지 못하고 질투심 많은 남자 만나면 안돼요, 알았죠?" 마치 아이를 얼르듯, 에프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그러자 에프릴이 내 품 속에서 꼼지락거리더니 날 올려다보았다. "저기.. 엘은.." "응?" 그녀가 잠시 망설이더니 힐끔 세브릭을 보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엘은 저분이랑 연인 사이이신가요?" 순간 모두 조용해졌다. 에프릴은 금안을 말똥말똥 뜨고 날 보았고, 난 그에 잠시 굳어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여요?" "엘..이 말하는걸보면 .. 아닌가요?" "글쎄요, 세브릭 어떻게 생각해요? 연인 사이 같다는데?" 난 에프릴을 품에 안은채로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키득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세브릭이 답했다. "제가 미치광이가 되지 않는 이상, 당신을 제 연인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꺼에요." 세브릭이 잔잔한 미소를 띄운채 말했다 . 역시 웃는거 이쁘다니까. 미칠듯이 깨뜨려보고 싶기도 하고 .. 근데 .. 그보다 .. 미치광이?! " . . . 말이 심하군." 사켄의 말에 열렬히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브릭은 그런 날 보더니 훽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지? 저 반응.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귀찮아져서 에프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에프릴, 족장님께 저흴 안내해주실 수 있으세요?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안돼." 잠잠히 있던 금빛 소년이 내 말에 대답했다. 소년의 목소리에 에프릴이 살짝 어깨를 떨었다. 난 그 어깨를 살며시 토닥여주며 소년을 보았다. "왜 안된다는거죠?" "인간은 믿을 수 없어. 그리고 에프릴을 놔줘!" "에프릴을 놓고 안놓고는 내 마음이죠. 그리고 인간을 믿을 수 없는게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거잖아요?" "인간은 무가치해. 언제나 세상을 파괴하고, 결국 이 세상을 파멸시킬뻔했어! 난 그런 당신, 인간들을 믿지 않아!" 씩씩대는 하브를 보다가 픽 웃으며 에프릴을 더 꼭 안았다. 에프릴의 다정한 온기에 내가 지금 기분이 좋은걸 다행으로 여겨, 꼬맹이. 에프릴만 아니었으면 네 놈을 어떻게 했을지 나도 상상이 안가니까. "그래서 인간을 믿지 않는다? 확실히, 인간들이 세상을 파괴한 것도 진실, 파멸시킬뻔한 것도 진실. 하지만 그 파괴와 파멸 속에 당신들 역시 끼어들었던 것은 잊었나보죠? 그리고 우린 더 이상 어리석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당신들과 얘기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요. 그들의 대표로 당신들이 왔다고는 하지만, 족장님을 만날 수 없다?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행동인지, 생각이나 하는건가요?" 차가운 내 말에 하브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미소년이라고 해서 다 사랑하고 용서해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난 '이곳'에 전쟁을 멈추기 위해 왔다. 그걸 위해서 난 꼭 족장을 만나야하고. 고작 하브, 너의 주관적 판단 때문에, 그 길목이 차단된다니. 웃기지도 않아. 차갑게 내려앉은 기분으로 하브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금빛의 머리카락은 축 늘어져있었고,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꼭 깨무는 모습에 .. 아 - .. .. 연하도 매력적이라니까, 쿠오가 생각나는걸. 방금까지 하브에 대한 비딱한 생각이 슬그머니 사그라 들었다. 그래그래, 연하의 매력은 바로 튕김질에 있지. 우리 에프릴이나 쿠오와 같이 순수한 수줍음과 부끄럼도 좋지만 ..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았던 것도 잊고 흐뭇한 기분으로 하브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족장님께 우리를 안내해주겠어요? 또 싫다고 할껀가요?" 또 싫다고 하기만 해봐라, 에프릴을 보쌈해 갈테다. "큭 .. 따라와." 화가나서 어쩔 줄 몰라하던 그가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쩝- 아쉽네. 에프릴 보쌈 . . . "엘-" 내 옷깃을 슬그머니 잡고 올려다보는 에프릴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긴 금발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에프릴을 걱정하고, 또 인간들에 대한 의심 때문에 화낸다는 거 알아요. 하브, 많이 좋아하죠?" 내 말에 에프릴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빙긋 웃고는 뒤돌아서서 지켜보기만 했던 네명에게 말했다. "자, 그럼 가볼까요?" 하브를 뒤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어 나무들의 그림자들 때문에,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더욱 깊은 어둠으로, 오직 하브와 에프릴의 은은한 금빛만을 의지하여 걸어들어갔다. 꽤 깊이 들어 온것 같은 기분인데.. 하긴 오래 걸리려나? 아무래도 숲 크기가 크ㄴ.. " . . 저건.." 커다란 구멍이였다. 까마득한 어둠 때문이 아니라, 그 구멍의 어마어마한 크기로 반대편이 보이지 않았다. 비유를 하자면 .. 투**를 가장자리만 좀 남겨놓고 모두 파먹은 것같은 느낌이랄까. "신의 흔적이에요." 에프릴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 신의 흔적? 한마디로 지오의 흔적이라는 말인가? "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 이샤링족까지 참전한 후, 환한 빛이 이 숲으로 떨어져 내리더니 그 후에 생겼어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작아진거에요." "작아졌다구요?" 난 차분해진 마음으로 구멍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구멍이 생기고 세상이 이상해졌어요. 하지만 반대로 이 숲은 신의 기운으로 가득해졌어요. 그래서 우린 이 구멍, 신의 흔적을 지키기 위해 여기에.." "더 이상 말하지마! 인간 따위에게 말하다니!" 하브가 버럭 지른 소리에 에프릴은 움찔하며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구멍 앞에 멈춰서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부스럭거리는 내 소리에 하브가 뒤돌아보자마자, 난 약하게, 하지만 충분히 화를 담은채로 하브의 두뺨을 양손으로 때리고 그대로 잡고 말했다. "뭐- 뭐야!" "당장, 에프릴에게 사과해요." "뭐?" "윽박 지를 필요는 없는 일이었어요. 가서 사과해요." "인간의 말을 들을 것 같아?" 버둥거리는 하브의 얼굴을 바짝 잡아당기고 아름다운 금안에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다시 조용히 말했다. "여자한테 화풀이하는 남자는 최악이에요. 가서 에프릴에게 사과해요." "윽.." 잠시간 눈싸움을 하다가 하브가 먼저 내 시선을 피했다. 난 가만히 하브를 보다가 뺨을 놓아주었다. 놓아주자마자 내게서 멀어지더니 한걸음 두걸음 에프릴에게 다가가 고개를 푹 숙이고 힐끔 그녀를 보며 작게 말했다. "미..안.. 화가.. 나서.." 작지만 솔직한 사과에 에프릴이 괜찮다며 웃었다. 애들은 이래서 좋다니까, 말을 하면 알아듣잖아? 어른들이 배워야하는데 말이야. ".. 족장을 만나기 위해 온것 아닌가요?" 세브릭의 말에 라세스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보다, 너무 어두운데. 까딱하면 이 큰 구멍에 빠질 것 같기도 하고.." "기다려, 인간. 곧 족장님을 부를테니까." 하브가 에프릴의 손을 꼭 잡은채 말했다. 그리고 하브와 에프릴의 몸에서 아까완 비교도 못할정도로 환한 금빛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따스하고, 다정하고.. 또한 아름다웠다. 구멍 반대편에서 곧 작은 빛의 구 여러개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구 속에는 물론 이샤링족일 그들이 있었다. 잠시 우릴 보던 그들이 하브와 에프릴에게 무슨 신호를 보내듯 빛을 반짝였다. 그에 에프릴이 살짝 고개를 젓더니 자신의 빛도 몇번 반짝였다. 저렇게 빛 반짝이는거 어디선가 본것같은데.. 배끼리 신호 보낼때? 아니면 전투정끼리..? . . . 내가 일본 애니를 너무 많이 봤나. 이야기가 끝났느지, 그들 중 한명이 다가왔다. 그리고 우리 앞에 똑바로 서더니 한명한명 시선을 맞추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온것인가, 인간이여." " . . . 금발과 금안은 당신들의 특징인가요?" " . . . " 순간 떠오른 의문에 나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조용해진 분위기에 머쓱해져서 싱긋 웃고 말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에요." 하나같이 아름다운 금빛을 지니고 있으니까. ". . . 그렇다." "그렇군요. 전 엘이라고 해요. 이샤링족의 족장님이신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작지만 아름다운 존재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전 인간이에요. 그리고 이 전쟁을 멈추고 싶어서, 족장님을 만나려 왔어요." ".. 그 말은 에프릴에게 들었다. 인간이여, 그대는 진정 전쟁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전에도 그 질문을 받았었는데." 잠시 옛기억을 떠올리며 방긋 웃었다. "전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죠. 끝낼 수 있음에도 끝내지 않은 것 뿐이라고. 모두가 멈출 수 있음에도 전쟁이 계속 되었던 것은, 그 누구도 먼저 나서서 전쟁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샤링족을 책임지고 있는 족장님. 당신은 이 어리석은 전쟁을 계속해야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인간이 일으킨 전쟁이다." 서늘한 족장님의 금안을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전쟁 속으로 당신들 역시 끼어들었지요." " .. . 말려든 것이지." "과정이 어떻든, 결과는 마찬가지죠." "인간은 언제나 뒤는 생각치 않고 피만을 원하지." "모든 인간들이 그렇다고 생각치 말아주세요, 족장님. 예를 들어,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않아 당신들을 찾아온 저희도 있잖아요?" 내 말에 족장님은 한번 눈을 감았다 뜨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은 모두 똑같다. 인간은 탐욕적이고, 언제나 혼돈 속을 살아가는 존재. 그들의 탐욕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는지 그대는 알고 있는가?" "모두 알진 못하지만, 느낄 수는 있죠. 인간에게 있어서 '욕망'이라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본성. 이샤링족이긴 하나, 당신들 역시 살아있는 존재로서, 기본적인 본성은 지니고 있을텐데요." " . . . 지금 우리와 인간을 같다고 말하는 것인가?" 노기 어린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가면을 쓴듯 차가운 표정에 살짝 혀를 베어물며 싱긋 웃었다. "당신들과 저희 인간들은 다르죠. 하지만 '살아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 . . . 너희 인간 따위와 우릴 비교하지 마라." "비교가 아니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죠. 그보다 족장님, 더 이상 인간 운운하지 말고, 제 제안에 대답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인간과 함께 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전쟁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당신은 정말 그런 어리석은 대답을 할꺼야? 조롱기 어린 내 눈빛에 족장님은 아무말도 하지않고, 옅은 빛으로 주위를 밝히며 조용히 있었다. 상대방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특별히 말을 걸 필요는 없다. 그리 생각하며 족장님을 바라보던 시선으로 '신의 흔적'이라 부르는 구멍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족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그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더 이상의 언쟁은 원치 않는 듯한 그의 질문에 나 역시 꼬투리를 잡지않고 예전 사령관 아저씨에게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족장님의 동의가 필요해요. 이미 동연합과의 얘기는 끝났으니까요. 두 연합의 동의와 마지막으로 서연합의 동의가 있다면 모두가 만나서 종전의 얘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 . . 그 일이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지리라 생각하는가?" "못할 것도 없죠. 지금 족장님이 제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신다면, 이미 세연합 중 두연합이 종전의 의사를 비춘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종전으로 인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지?" "자연을 사랑하며, 그 누구보다도 순수한 존재라고 들었는데 말이죠." 싱긋 웃으며 하는 내 말에 족장님의 미간이 아주 잠깐 찌푸려졌다. 이종족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생각하게 되었나보죠? 분명 불난 집에 부채질 할 것이 뻔한 말을 겨우 속으로 삼키고, 입술을 매만지던 손을 떼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익과 손해를 따지기엔, 이 세상은 너무나도 망가져버리지 않았나요? 하지만 굳이 대답하자면 .."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 잠깐의 어둠 속에서 지금까지 만나왔던 많은 사람들, 내 뒤에서 조용히 우릴 지켜보고있는 일행들. 또 . . 날 이 세계로 보내준 지오가 생각났다.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지고, 다시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는 이샤링족들이 보였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평화, 그리고 신의 사랑이겠죠." 정말 금과 바를바없는 매끌한 금안이 차분히 나와 내 뒤에 있는 사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입이 열렸다. " . . . 다른 이들과 의견을 나누어보도록 하지." "몇일이고 기다릴께요. 아-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은 아니였으면 하는데, 얼른 서연합에도 가봐야하거든요." 어쨌든 생각해보겠다는 족장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한고비 넘긴건가? " . . 그럼, 그대들은 이제 이 숲에서 나가라." "... 나가라고요?" 당신들과 함께 있는게 아니라? "종전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대가 인간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파괴와 혼돈의 종족, 그대들이 이 숲에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종전에 대한 대답이랑은 상관없는 말이니 다행이네. 족장님의 단호한 대답에 살짝 한숨을 쉬며 구멍을 바라보았다. 지오의 흔적이란 말이지? 구멍을 가만히 보다가 뒤돌아서서 내내 조용하던 세브릭들에게 말했다. "돌아갈까요?" " . . . 무슨 일이죠?" "뭐가요?" "나가기 싫다며 땡깡을 피울줄 알았는데요." "저도 이것저것 재볼 머리는 달고다니거든요." " . . . 당신에게 그런 머리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요." " . . 그 말 기억해두겠어요." 꼭 저렇게 심술을 부린다니까. 투덜투덜거리고 있는데, 뒤 쪽에서 족장님이 하브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하브, 네가 저들을 안내해 숲 밖으로 내보내도록 해라." "어째서 제가!" 족장님의 말에 하브가 부르르 떨며 싫어하는 걸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하브가 싫다는데 어떻게하겠어요. 저희는 에프릴이 안내해줘도 괜찮은데요." "젠장, 따라와!" 아- 정말 재밌다니까. 저렇게 기겁하며 싫어하는 애들이 더 사랑스러우니, 이것 참. 혼자 스믈스믈 웃고 있었지만, 하브는 그의 기분을 알려주듯 빛이 이리저리 너울거리며 화려하게 반짝였다. 하브의 뒤를 먼저 따르는 사켄들의 뒤를 따르려다가 멈칫하고 에프릴을 보았다.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네, 엘." 다정히 서로 웃어주고는 돌아가려다가 다시 자리에 멈춰서서 족장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여전히 족장님의 눈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참고로." 알지 모를지 알수 없지만, 말은 해둬야겠지. "전 [에르테이샤]로서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 온거예요. 그럼 제가 원하는 대답, 기대하고 있을께요." 내 말에 족장님의 눈동자가 한순간이나마 흔들렸다. 그에 만족스런 웃음을 짓고 이미 멀리 떨어져있다가 날 기다려주는 일행에게로 갔다. " . . [에르테이샤] . . 라고 . . " "족장님?" 족장의 희미한 목소리에 누군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아무말도 않은채 어둠 속으로 사라진 엘들을 바라보았다. 한편, 나는 가장 뒤에서 하브를 뒤따르며 계속해서 흐뭇하게 웃었다. 힐끔 뒤를 돌아보자 작게 빛나는 가루들이 보였다. 숲 밖으로 나온 뒤 하브는 아무말도 않고 곧장 돌아가버렸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뒀던 야영장소로 가서 불을 지폈다. 완연한 밤이 되어 모닥불 외에는 조금의 빛도 찾을 수 없었다. "그보다." 조용하던 와중에 라세스가 입을 열었다. "난 이렇게 쉽게 이종족 연합의 대표를 만날 줄은 몰랐어. 숲 속으로 들어간 순간 살해당하는건 아닌가, 엄청나게 긴장했는데 말이야." 라세스가 능청을 떨며 씨익 웃는 모습에 키득거리고 한쪽 손으로 머리를 날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모두 제 능력이 특출난 덕분이죠." "그 자만심은 어디서 나오는 거죠?" "음, 매력?" " . . 뻔뻔하군요." "진실을 부정하지 말아요." 투닥거리며 세브릭과 말을 나누고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세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둘은 진짜 지칠 새도 없이 싸우네." 그 말을 하고 그는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그에 난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싸우는게 아니에요. 다정한 대화죠." "웃기지도 않는군요." "흑- 냉정한 세브릭.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다니." "제발 어줍잖은 연기하지 마세요." 세브릭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잠깐 말을 멈췄다가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 . 또 뭐죠?" "사실, 아까 에프릴 때문에 해결 못한게 있어서요." 생글거리는 내 웃음에 모두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슬금슬금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단 한사람. 사켄만은 회색빛 눈동자로 곧게 나를보며 말했다. "이종족들이 있다고 하나, 어두운 숲은 위험하다." "걱정마세요. 멀리 안갈테니까." " . . . " 내 대답에 사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요, 사켄. 거짓말 좀 해도 되죠? 난 거짓말쟁이니까요. "그럼 다녀올께요." 살짝 손을 흔들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숲 안을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내가 남긴 표시를 찾았다. "Yes, 찾았다." 어둠이 짙어진 숲길 속에서 가느다랗게 반짝이는 빛을 보며 싱긋 웃고는 발을 옮겼다. 바닥에 뿌려져있는 반짝이는 가루는 저번에 시장에서 세브릭에게 선물 받은 건데..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사달라고 졸랐다 . 어쨌든 이 가루는 어두웠을 때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축제때나 쓰는 .. 말하자면 형광가루라고나 할까. 그때는 예뻐보여서 사달라고 조른 것이었는데 .. 도움이 됬네. 혼자 그 길을 따라 열심히 ..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길 수록 심장의 두근거림이 커져만갔다. 곧 빛의 길이 끊어졌고 커다란 구멍이있는, 신의 흔적이라 불리우는 장소에 도착해 작게 숨을 고르며 둘러보았다. 그리고 살짝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그곳에 다가섰다. "착각이 아니었어." 한쪽 무릎을 땅에대고 구멍 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지만, 왠지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숲과는 비교도 안되는 지오의 기운, 아까는 그저 가까이 다가서 있을 뿐이었는데도 그가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저 깊은 구멍 속으로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 . . 지오, 내가 빠지도록 내버려둘껀 아니죠?" 이건 목숨을 건 도박이다. 이곳으로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기대를 품었는지. 작은 두금거림과 함께 난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하며 발을 떼었다. 그리고 곧 허공 속으로 발을 디뎠다. 순식간에 몸이 기우뚱하며 떨어지는 순간, 엄청난 공포감 속에서 질끈 눈을 감았다. 윽- 역시 아니었나?! 이렇게 추락사하는건가? 미친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뒷일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며 두려워했지만 곧 다정하게 내 몸을 감싸안는 온기와 귀를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사르르 두려움이 사라졌다.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날 불러서 깜짝 놀랐어요." 다정하게 속삭여주는 목소리. 살며시 감았던 눈을 뜨자, 예쁘게 웃고있는 청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운 . . 사람이 아닌 존재. " . . 여전히 예쁘네요, 지오." "당신은 여전히 엉뚱하군요, 아가씨." 그의 품에서 땅으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고 그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는 날 '이곳'으로 보냈을 때와 조금의 다름도 없는 모습으로 날 바라보았다. 항상, 당신을 생각했어요.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내가 여행하고 있는 이유도 . 모두 당신을 위해서였으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전 '엘'이라는 이름이면 충분해요. 지오." 아름다운 실버블론드, 잔잔한 청록색 눈동자 . 변한 곳이 하나도 없는 . . 다정하지만 슬퍼보이는 신(神), 지르오디스. 그를 다시 만났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것을 알리듯 상쾌한 바람이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실버블론드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그의 청록빛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마주친 청록빛 눈동자는 여전히 다정함과 상냥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잘 지냈나요, 엘?" "못지내지는 않았어요." 처음 떨어졌을 때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세브릭이랑 사켄한테 이리저리 들볶이고(?), 개들한테 습격받고 .. 늑대의 손톱에 당해서 사경을 헤매며 피를 흘리긴 했지만. 뭐, 나름대로 잘지냈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싱긋 미소지으며 지오에게 손을 뻗었다. "지오가 보고 싶었던 것만 빼면, 아주 잘지냈어요." 신의 흔적이라 불리는 그 구멍 위에 떠있던 그가 내 손을 잡고 땅 위에 올라섰다. 그 움직임에, 그의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살랑이며 물결치는 모습을 홀린듯 바라보았다. "엘." 다정한 그의 음성에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그를 보았다.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네었다. "역시나." 그가 완연한 아름다움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가느다랗고 긴 손을 내 볼에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달콤함이 스며드는 것같다고 생각했다. "제 생각보다, 훨씬 더 .. 잘하고 있네요." 숨 쉬기 어려운 아름다움에 멍하게 바라보다가 풋 웃으며 그의 손에 살짝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아- 이래서, 그렇게 지오를 만나고 싶었나 봐요. 당신은, 언제나 다정하니까. 그래서, 그렇게나 당신을 생각했었나봐요. "지오의 부탁이니까, 열심히 하고 있는거에요." 다른 사람이였으면 어림반푼 어치도 없어. 내가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사람같아? 지오 정도의 미인이 아니라면, 무보수로 부탁을 이행하고 있진 않았을꺼야. 혼자 속으로 투덜투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의 손에 두근거림을 느꼈다. 인간이 아님에도, 은은한 온기를 품고 있는 손의 부드러움에 지금까지 겪어왔던 일들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나 열심히 했는데 .. 뭐 해줄꺼 없어요?" 감았던 눈을 뜨며 생글거리며 웃자, 지오는 여전한 미소로 날 보고 있었다. 다정하고 다정해서, 슬퍼지는 그 청록빛 눈동자로. "제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나요?" "아니요. 음 .. 바라는게 있다면, 지오가 조금만 더 내게 가까이 와줬으면 하는것 정도랄까." "지금도 많이 가까운데요." 그의 말에 난 살며시 웃었다. "내가 보고싶어할때, 언제든 지오가 만나줄 수는 없는 거리잖아요." " . . . " 지오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으며 싱긋 웃었다. "농담정도로 넘겨도 되요. 당신을 만나고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만나고 너무 행복해서 말하는 것 뿐이니까." "농담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으니까, 흘려듣지 않을께요." 신이라서 그런가, 그는 내 진심을 잘알아채는 것 같다. "비틀림을 해결하면서, 엘에게 너무 큰짐을 맡긴것은 아닐까 .. 걱정했어요." 그가 내 볼을 감쌌던 손을 떼어냈다. 온기가 사라짐에 허전해졌지만 볼에 스며든 그의 온기에 만족하며 싱긋 웃었다. "지오의 걱정을 받다니, 이거 자손대대로 자랑해야겠는걸요." "엘은 '저곳'에서도 .. '이곳'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빛을 잃지않는군요." 그가 쿡쿡 거리며 웃다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소가 옅어지며, 생각에 잠기는 그의 표정에 살짝 불안해졌다. " . . 돌아가야하나요?" "[신]이니까요. 내가 이곳에 있음으로써 이 차원에 너무 많은 부담을 주게 되요." 지오의 말을 듣다가 땅을 보았다. 겨우 만났는데, 이정도 시간밖에 같이 있지 못하는건가? " . . . 이정도 시간이라도, 충분해요." 내 말에 지오가 가만히 날 보는게 느껴진다. "사실 불안했어요. 흔들렸다고 해도 거짓이 아니에요. 이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 불안해서 .. 초조해서 .. 이 세상 사람도 아닌 내가 마음대로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두려워져서 ..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는데, 갈수록 내가 너무 가벼이 생각한게 아닌가 싶어서." 내 마음 속을 흔들었던 불안과 걱정, 두려움이 천천히 스며나온다. "그래서, 지오를 만나고 싶었어요. 지오를 만나면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서야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 지오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가 걱정하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다는 것을. 지금 이 말을 하면서도, 내가 왜 이 말을 꺼냈을까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엘 .." "이런 말 해서 미안해요, 지오. 당신은 날 믿고 맡긴건데 .. 너무 한심하죠?" 싱긋 웃음을 건네자, 그가 한걸음 두걸음 내게 다가온다.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살며시 만지는 것에 그의 청록빛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살짝 눈을 감았다. "울지 말아요." "안울어요. 내가 우는것 처럼 보여요?" "신인 나에게는, 흐르지 않더라도 보이는게 있으니까요." 그의 다정함에 울컥해서, 정말로 눈물이 흐를것만 같다. 하지만 울지 말자. 그에게는 우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내 눈물에, 자책할 것이 뻔한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 . . . 지오, 날 믿어요?" "물론이에요." "그럼 지오,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의 다정한 향기를 맘껏 들이마쉬며 천천히 물었다. 울컥했던 마음도, 눈물이 흐를것만같았던 마음도 천천히 그 다정한 온기에 동화되어 스르르 녹아내렸다. "제가 비틀림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빨리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의 손가락이 내 눈가를 지나 볼을 살며시 쓰다듬고 머뭇거리듯 입술을 만진다. ". . 도대체 그런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거에요?" 웃음을 머금고 눈을 뜨자 그는 여전히 내 입술을 만지며 달콤하게 웃어준다. "전 절 믿지 않아요. 오직 엘, 그대만을 믿으며 말할뿐이에요." " . . . 부담감이 장난 아니네요." 응, 하지만 지오가 믿어준다면 됐어. 불안도 걱정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곧 그의 몸에서 안타까이 빛이 나기 시작한다. ". . . 돌아가야해요?" "이제 한계니까요." 아쉽다. 가지말라고 붙잡고 싶다. 계속 .. 계속 내 곁에 이 다정한 존재가 있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 . "조심해서 가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난 당신을 보내주겠지. 붙잡지 않아. 내가 붙잡아도, 지오는 갈 수 밖에 없으니까. 아쉬움을 감추며 싱긋 웃어주었다. 그의 몸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한다. "엘." "왜요?" 살랑이는 실버블론드빛 머리카락을. 다정한 청록빛 눈동자를 .. 부드러움이 담긴 목소리를. 다시 만날 때까지 잊지 않기 위해 열심히 기억속에 새기며 대답했다. "당신은 ..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그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앞으로도, 잘지내야해요, 엘." 그가 조심스럽게, 하지만 여전히 다정함을 품은채 내 볼에 입맞춰주었다. 점점 옅어지는 그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는데,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어준다. "전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당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마지막 그의 말에 급히 손을 뻗었지만, 지오를 데려가버린 빛은 이내 내 손을 희롱하다 사라진다. 망연히 사라진 빛을 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항상 지켜보고 있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나도 항상 당신한테 말을 걸잖아요. 대답을 듣지는 않았지만, 내게 귀기울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늘어뜨렸던 손을 들어 내 볼에 가만히 대고는 눈을 감고 새벽의 바람을 들이마쉬었다. 바람에 혹시라도, 그의 다정한 향기가 스며들어있지 않을까 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다음에 만날때까지, 그 예쁜 모습 간수잘해요." 당신을 만나면 원망하려고 했는데, 나한테 너무 큰짐을 맡긴것에 투덜대려고 했는데. 역시, 지오를 만나니까 불만과 원망보다는, 행복이 먼저 다가와. 그를 만났던 짧았던 시간이, 내게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바스락-" 멈칫, 지오가 남긴 여운을 홀로 다잡고 있는데, 뒤에서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 . . . 족장님?" " . . . " 인간의 크기정도로 변한 모습, 이샤링족의 상징인 금발에 금안.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있는 큰키의 족장님. 그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는데. 멀뚱멀뚱 그를 보다가 싱긋 웃으며 완전히 뒤돌아섰다. "죄송해요, 마음대로 숲에 들어와서." " . . 진정 [에르테이샤]였던가." "거짓으로 말하진 않았어요." "방금 . . 그 분은 .. 정녕 신(神)이셨던가." "당신이 말하는 그 분이, 이 세상의 신인 지르오디스를 말하는 거라면 저 역시 맞다고 대답할 수 있겠군요." " . . . 정녕 . . 지르오디스님이셨던가 . . "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표정이 깨지며 멍한 눈빛으로 사라져버린 지오의 흔적을 쫓았다. 차분한 마음으로 그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내 움직임에 족장님이 지오의 흔적을 쫓던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돌아갈까 하고요."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네고 행복해진 기분을 억누르지 않으며 족장님께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제 자야할 시간이거든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을 끝으로 가려했던 내게, 족장님이 말을 걸었다. " . . . 그대는 정녕 신이 보내 이 세상의 전쟁을 막고 싶어했던것인가. 인간이여." "그 사실을 항상 모두에게 말했지만, 그 누구도 믿어주진 않았어요." 그래, 사령관 아저씨도, 세브릭도 사켄도 .. 내가 말한 신(神)이 보냈다는 말을 농담정도로 흘려버렸으니까. "하지만 족장님, 당신은 제가 지르오디스님을 만난 것을 보았으니까, 알수 있겠죠?" 물 흐르듯, 술을 마시듯(?) 부드럽게 말하며 단호한 눈빛으로 족장님을 보았다. 그리고 샐쭉 웃으며 말했다. "전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 . . . 그렇군." 족장님의 긍정에 살짝 웃어주었다. 이런 . . 시간이 꽤 지난것같은데 . . 이만 돌아가야하지 않을까. 사켄에게 멀리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 잠시 걱정을 하다가 힐끔 하늘을 보고는 다시 족장님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는지, 잔뜩 심각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모습에 난 움찔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 . . 저 정도 외모면, 종족의 벽도 넘어볼만 한데. 물론, 지오보다는 못하지만 .. 세브릭이나 사켄정도의 외모란 말이지. 진지하게 생각하며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다가 족장님이 하신 말에 멍해졌다. "하브를 데려가라." " . . . 뭐라고요?" 저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일까 .. 하브를 데려가라고? " . . 신(神)의 뜻을 거스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 . . . 그 말은 . . " "인간은 믿을 수 없지만 [에르테이샤]인 그대를 믿고, 우리 역시 전쟁을 멈추는 것에 뜻을 두겠다." . . . 지오, 내가 당신을 만나고 싶은 이유도 있지만 . 자주자주 내 앞에 강림해줬으면 해요. 이왕이면 서연합 대표를 만날때도 강림해주면 안될까요?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리잖아요. " . . . 왜 대답이 없지?" 멍했던 기분을 추스리고 활짝 웃었다. "걱정마세요. 제가 기대하던 대답이었어요, 족장님." 이렇게, 지오의 강림을 보게 된 이종족 연합의 대표, 족장님 덕분에 쉽게 이종족 연합의 동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잘된 일이라니까." 사박사박- 홀로 숲길을 헤치며 가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 아무리 이종족이라지만, 여자 혼자서 숲길을 간다는데, 데려다주는게 보통 아니야? 그정도의 매너도 없어? 쯧, 장가가긴 글렀. . . 나 . . ? 그정도 외모면 . . 그래, 그정도의 싸가지는 필요한 법이야. 아마도 그 날카로운 눈매로 한번 지그시 바라보기만 해도 '난 오빠꺼야!'하면서 달려들 여자들이 많을테니. 거기다가 이샤링족의 족장이니까 . . 이거 뭐, 한마디로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지위면 지위. 삼박자를 고루 갖춘 미남이잖아? 멈칫- 자리에 멈춰서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요한 침묵에 홀로 민망해져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 . " 역시, 지오를 만나니까 이렇게 마음이 행복해지는구나. . . . 하지만 아마 누가 날 보고 있으면, 날 미친 여자정도로 보겠네. 혼자서 툴툴거리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또 이번엔 바보마냥 헤실거리니까. "흠, 미친x이랑은 상종을 말랬는데.." 그런 날 상대하는 세브릭들은 . . . . 에이- 생각하지 말자. "그보다 . . 무섭다." 너무 고요해서, 오싹오싹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이는건 어둠에 잠긴 나무들뿐. 풀조차도 새벽의 그림자 속에 고개를 숙여 쉬고 있었다. 보통 공포영화에서는 이런 분위기에서 스윽하고 어깨에 손이 . . . 스윽 - " . . . . . "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어깨에 올라와있는 묵직한 느낌.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안 순간 핑- 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귀 . . 귀신 . . 인건가 . . ? . . . . 생명의 숲의 귀신정도면 . . 미인이지 않을까 .. 생명의 숲은 이샤링족들의 숲이나 마찬가지니까 . . 그러면 좋겠는데 ... . . 아으 - 그래도 귀신 싫다구 . 내가 만지질 못하잖아 . . " . . . 뭐하는거지?"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이 슬그머니 이완된다. " . . 제발 기척 좀 내달라니까요. 심장 떨어질뻔했어요." 우울한 숨을 속으로 삼키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날 보는 사켄. 그의 담담한 회색 눈동자에 겨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걱정되서 와준거에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그가 살피는 눈빛으로 내 여기저기를 보더니 날 앞질러 걸어간다. "에- 걱정되서 와준거 아니에요?" " . . 멀리 가지 않는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던가?" "잠깐, 볼일이 생겨서-"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고요한 숲속이, 어둠으로 가득찼던 곳이 사켄을 만난 후로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보다. 이제 서연합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 . . 무슨 소리지?" 그가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생긋 웃으며 브이를 찐하게 날려주었다. "족장님의 동의를 얻었어요. 이제 서연합의 대표만 설득하면, 이 여행도 끝난다는 얘기죠." 그래, 그리고 아마도 난 돌아갈꺼야. 그 생각이 들고, 난 잠시 사켄을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과도 이별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이들과 안녕해야해요. " . . . 아까, 이종족 연합의 대표는 분명 상의한다 했던것 같은데." "뭐, 멀리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어길 만큼의 가치는 있었어요." 지오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지오 덕분에 족장님의 동의를 얻었으니까. 싱긋 웃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자, 사켄의 회색빛 눈동자가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흔들리고 있었다. " . . . 왜그래요?" 뭐지? 왜 저 담담하던 남자가 동요를 일으키는걸까? 멍하게 그를 보다가 가까이 다가섰다. 내가 다가섬에도 사켄은 그저 날 바라보기만 할뿐, 어떤 제지도,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 그의 볼에 대었다. "왜그래요? 어디 아파요?" 마치, 지오가 해줬던 것과 같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정하게. . . . 뭐, 남녀가 바뀌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것 정도는 넘어가자. " . . 그렇군." "음?" "서연합의 대표만 설득하면, 이 여행은 끝나게 되는군." 사켄이 살짝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그의 볼에 대었던 손을 내리며 싱긋 웃었다. "음, 그리고 세 연합의 대표들이 서로 잘말하기만 하면, 이 힘들고 모두를 지치게 했던 전쟁도 끝나게 되는거죠." 쾌활한 내 목소리에 사켄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그가 말했다. "그렇게되면." "응?" " . . 넌 어떻게할꺼지?" 나? " . . 왜요? 저 데리고 가서 살려고요?" 씨익- 내 농담조의 말에 사켄이 침묵했다.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를 지나쳐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상황, 마치 예전의 누구를 떠올리게 하네. 맑은 갈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던, 누나의 마음을 떨리게 했던 소년. 키득거리며 쿠오 생각을하다가 자리에 멈춰서서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는 사켄에게 말했다. "거기서 살꺼에요?" " . . . " 사켄이 잠시 땅을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곤 성큼성큼 걷더니 내 옆을 슥-하고 지나갔다. " . . . ?" 도대체 왜 저러지? 남자의 마음도 참 알수없다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그의 뒤를 따라걸었다. 어쩄든, 생명의 숲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사켄과 함께 숲을 벗어나자, 모닥불을 피워놓고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그가 먼저 모닥불이 지펴진 장소로 가버리고 난 잠시 자리에 멈춰서서 숲을 돌아다보았다. 솨아- 하는 사각거리는 나뭇잎들의 부딪힘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마치, 지오가 내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아, 숲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말아요, 지오. 열심히 할테니까요. 그래서, 당신의 슬픔이었던 이 전쟁을 멈출테니까요. 하지만, 지오 너무 빡세게 비틀림 해결하느라 고생하지 말아요. 그랬다가 당신의 그 아름다움에 병약함도 플러스되면 .. 그건 범죄 이상이에요. 범죄도 그런 범죄가 없다구요. " . . . 거기서 혼자 뭐하는거죠?" "응?" 세브릭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불침번인지 아니면 단순히 잠에서 깬건지, 그가 앉아서 날 보고 있었다. "아아- 작별 인사라고나 할까." " . . 작별인사?" "그렇죠그렇죠." "누구한테 말이죠?" 흠- 누구한테라고나 할까. " . . 내 소중한 존재에게. 라고나 할까요." " . . . " 모닥불에의해 장밋빛 눈동자가 이런저런 색으로 반짝였다. 때로는 다정한듯, 때로는 서늘한듯. "왜 그런 표정으로 봐요? 세브릭 드디어 제 매력을 깨달았나요?" " . . 어처구니가 없군요." "항상 그렇다는거 알잖아요-" 으쓱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세브릭이 모닥불을 뒤적이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사켄에게 들었어요." "어? 벌써요? 이야, 역시 사켄 빠릿빠릿하다니까요." 눈을 감고 있는 사켄을 힐끔 보고는 생글생글 웃었다. " . . 어떻게 한거죠?" "뭘요?" "어떻게, 족장의 동의를 얻어낸건가요?" "족장님도, 어쩔 수 없는 존재더라구요." " . . . 무슨 . . " "훗- 매력에 굴복당하셨어요." " . . . " 세브릭의 찐한 눈길에 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외면했다. 난 사실을 말했잖아? . . 난 누구의 매력인지 말 안했을뿐이야. 족장님은 분명 지오의 매력에 굴복당해서, 동의해준거란말이야. . . . 아닌가? "말해주지 않을껀가요?" "내가 말해줄 수 있는건, 내가 너무너무 세브릭을 좋아한다는거에요." " . . 갑자기 또 무슨 뜬구름잡는 소린가요." "그러니까 날 좀 믿고, 의심을 접으라는 얘기죠." 배신따윈 안해. 내가 배신할 시간이 어딨어? 이 전쟁을 해결하고, 난 나의 세계로 돌아가야하는데. 내 말에 세브릭은 침묵한다. 오늘 여럿 침묵하게 만드네. 혼자 킬킬 웃다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이 지나가고, 얼른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 . . . " "하브가 우리랑 동행할꺼에요." 내가 웃으며 하는 말에 세브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죠?" "몰라요, 족장님이 데려가라고 했거든요." " . . . 연락 때문인가요?" "뭐- 그 비슷한거 아니겠어요?" 생긋 웃음짓고 나 역시 눈을 감았다. 피곤하다- 아니, 지오를 만나서 행복하다. 이 행복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어. 꿈에서 지오 . . 뿐만 아니라 여럿을 만났으면 하는데. 슬쩍 응큼한 웃음을 지었다. 곧 멍한 느낌과 함께 물 속에 빠진듯 묵직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엘이 잠들었을 때, 의미를 알수 없는 두명의 시선이 마주쳤다. * * * 구름들을 피해서 온기를 담은 햇살이 내 눈을 비추었다. 그에, 난 몽롱한 정신으로 깜빡깜빡거리다가, 재만 남은 모닥불을 보고는 작게 하품을 했다. " . . 삭신이 쑤시네." 누워서 잤으면 그나마 편할텐데. 저번에도 쥐가 나서 고생해놓고, 미련하게 앉아서 잔다니까. 푹- 바보같이 잠들어버린 내 어리석음을 탓하다가 쭉쭉 스트레칭을 했다. 빠각(?)거리는 경쾌한 뼛소리를 들으며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을 돌려 하늘을 보자, 여전히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인 모습이 보였다. 언제쯤이면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을까나. 킁킁 거리다가 구름을 가르는 새 한마리를 보곤 싱긋 웃었다. 기분좋은 하루의 시작이였다. "좋은 아침이야, 엘-" "라세스 잘잤어요?" 역시나 아침의 경쾌한 인사는 라세스로부터 시작되는건가? 내게 인사를 건넨 그는 곧 숲 쪽으로 걸어갔다. . . . 라세스는 아침볼일인가. "사켄, 잘잤어요?" " . . . "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켄의 모습에 씨익 웃었다. 처음에는 잘잤냐는 내 인사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것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지. " . . . 뭘 보죠?" "아침 햇살에 세브릭의 모습이 눈부셔서요." "시비거는 건가요?" "비꼬는 거죠." " . . ." 세브릭과는 간단하게 아침식 인사(?)를 하고는 마지막으로, 모포를 정리하고 있는 한사람. 요즘 통 말이 없는 아크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내 시선을 받고 멈칫하더니 그 청명한 푸른 눈동자로 날 보았다. "아크산, 기분좋은 아침이에요." " . . 기분이 좋아보이오." "좋으니까요." 슬금슬금 그의 옆으로 다가가 싱글거렸다. 세브릭은 짐정리하느라 바쁘고, 사켄은 모닥불을 완전히 끄느라고, 라세스는 어디갔는지 모르겠고. 그나마 아크산이 모포정리를 끝내고 가장 한가해보였다. "오늘, 떠나는 것이오?" "그렇죠. 아- 아크산들은 어떻게 할래요? 애초부터, 우리가 생명의 숲까지 같이 가자고 해서 억지로 온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내 책임으로 인해 그대가 다쳤으니, 이곳까지 같이 오는것은 억지로 온것이 아니었소." 참 말도 예쁘게 한다니까. 그의 청아한 외모는 보면 볼수록 신비한 매력이 있다. 뭐랄까 . . 마치 난(蘭)과 같이 고아한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뭔가 . . 금욕적인 기분이 되 . . . 아- 나 뭔가 지금 엄청난 생각을 했는데? "음, 그렇긴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할꺼에요?" "당분간은, 그대와 함께 갈까하오." "어라, 정말요?" "나 역시, 전쟁이 멈추는 것을 함께하고 싶소." 왠지 아크산의 푸른 눈동자가 흐려졌다. 멍하게 흐려진 그의 푸른 눈빛을 보다가 짝 박수를 쳤다. 그러자 그가 흠칫하더니 나를 보았다. "뭘 그렇게 혼자 생각하는거에요? 그럼 서연합까지 함께 가면 되는거지. 세브릭, 아크산이 우리랑 같이 가고 싶데요-" 고개를 뒤로 젖혀 세브릭에게 외치자,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마음대로 하라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엘, 제발 당신의 짐정리는 당신이 해요. 모포도 저렇게 내팽겨쳐놓고, 뭐하는건가요?" "에이, 잔소리쟁이- 세브릭이 다 정리해주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누가 내 버릇을 이렇게 들이라고 했어요?" 툴툴대면서, 거의 적반하장의 태도로 내가 잤던 자리로 돌아가 모포를 정리했다. 그리고 깨끗이 정리한 모포를 세브릭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아크산을 보았다. "들었죠? 함께 가도 된데요." " . . 잘부탁하오." "저희야말로." 아크산이 살짝 미소지었다. 작은 미소였지만, 함께 있다보면 그의 환한 미소를 볼수 있지 않을까나? "아크산-" 볼일을 보러갔던(멋대로 단정) 라세스가 돌아오더니 아크산의 어깨를 툭툭 친다. 아크산이 무슨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어색하게 웃더니 말했다. "잠깐만 얘기할께 있는데." 그 말 한마디에 아크산이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얘기 좀 하고 올께." "잠시 실례하겠소." "얼마든지요."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는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세스가 아크산의 어깨를 감싸고 귀에다가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고, 아크산은 라세스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은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 . . . 흐뭇한 장면이네." 훗, 내가 따로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엮이는구나. 역시, 미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언제봐도 아름다운 장면이라니까.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나머지 커플(?)을 보았다. 세브릭이 사켄에게 육포를 건네며 무슨 말을 했고, 사켄은 그 육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아름다운 장면이로군 . . . . . 어억- 잠깐만 . . . 나만 혼자잖아 . " . . . 외로워, 외롭다고. 이런 씨- " 다른 사람들 짝 지을(?) 동안 난 뭘하고 있었던거지? 급우울해져서 다정한 두커플을 바라보다가 폭 한숨을 쉬었다. 쳇- 세상은 혼자야, 혼자서 살아가는 곳이라고. " . . 인간 . . " "음?"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빛을 흩뿌리고 있는, 요정정도의 크기의 하브가 보였다. "어째서, 내가 너희따ㅇ . . " "하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하브를 손에 쥐었다. "뭐 . . 뭐냐, 인간! 이것 놓아라!" "흑- 있잖아요, 하브. 저 사람들이 나만 왕따시키는거 있죠. 그래서 나 정말 외로웠는데, 하브만 유일하게 나한테 말 걸어줬어요." "놔라, 인간 !!!! 무슨 짓이냐!!" "아이- 그러지 말고요. 좀 고분고분해져봐요."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하브를 더욱더 손에 꼭 쥐고는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귀엽다니깐. 역시 인형 사이즈라 그런가? 다만 인형과 다른 점은 살아있다는 것. 손 안 가득 퍼지는 온기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이것 놓아라, 인간 ! 그렇지 않는다면 족장님의 명이든 뭐든 네 녀석을 없애버릴테다!" "어라, 그럴 수 있어요? 그럼, 족장님은 물론 에프릴한테도 엄청 미움 받을껄요?" "윽-" 하브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와- 진짜, 에프릴 많이 좋아하는구나. "흠, 에프릴 많이 좋아하나보네요." "누 . . 누가!" "그렇지 않고서야, 미움받는다는 소리에 그렇게 멈칫하진 않을꺼 아니에요?" "누가 머 . . 멈칫했다는 거냐! 예 . .옛날부터 바보같은데다가 얼빵하기 짝이없어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아- 그건 동감. 좀 귀엽긴 했죠." "큭, 인간주제에 감히 내 누이를 바보같고 얼빵하다는 거냐!!!!!!!!!" "먼저 말한건 하ㅂ ... 뭐라고요?" 방금, 뭔가 내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를 들었는데.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싱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요? 누가 ?" " . . . 뭘 말이냐." 하브가 잔뜩 눈을 찌푸리며 물어서, 난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말했다. "누가, 당신의 누이?" " . . 에프릴을 말하는 것인가?" " . . . 에프릴이 . . 당신 누이?" "당연한 것 아닌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날 보는 하브의 모습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믿을 수 없는 진실에 따지듯 말했다. "연인이 아니라?!" "누 . . 누가 에프릴과 연인이라는 것이냐! 내 반려는 아직 없다!" " . . 그럴 수가 . . 에프릴이랑 서로 좋아하는거 아니었어요?" "큭- 우리 이샤링족은 친남매가 서로 반려가 되는 일은 없다!" 그럼 어제 그 과보호는 자신의 누이이기 때문? 에프릴이 하브가 좋다고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인것은 단순히 . . "단순히 동생에 대한 사랑 . . ?" "무슨 소리냐? 그보다 인간, 내가 왜 인간인 네 녀석들과 함께 가야하는거냐?" " . . . 믿을 수 없어." 그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에프릴이 . . 하브와 같은 핏줄 . . ? " . . . 외모만 빼면 닮은 곳이 하나도 없잖아." 뚫어지게 하브를 보자, 그가 부담스러운듯 내 시선을 피했다. . . . 우리 에프릴 . .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런 동생을 키운거니 . " . . 하브도 왔으니, 이만 출발하도록 하죠." 세브릭의 말소리에 에프릴이 외모만 잘키워준것에 눈물(!)을 흘리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큭- 인간, 내가 왜 너희따위와 함께 가야하는 것인가!" "그건, 족장님한테 물어봤어야죠." " . . .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이샤링족들은 이 세상이 이상해지고 나서, 되도록이면 숲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에, 그래요?" 하브가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 . . 하지만 그래도 귀여워. 마음 속에서 무수히 떠오르는 하트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왜요?" " . . . 이성이 사라지니까." " . . . 네?" "신의 기운이 머물고 있는 숲을 벗어나면, 그 순간부터 나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시작한다. 이성이 사라지고, 오로지 모든것을 파괴해버리고 싶다는 알 수 없는 살심이 솟구치지. 그래서 족장님께선 되도록 숲에서 벗어나선 안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에게 붙어서 함께 가라니. 족장님께선 무슨 생각이시지?" . . . . 뭐랄까 . . " . . 똑똑하시군요." 그렇군, 족장님께서는 벌써 알아차리신건가? 날 올려다보는 하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폭신한 고수머리가 흐트러졌다. "무 . . 뭐냐 인간!" "걱정말아요, 나와 함께있는한, 당신이 이성을 잃는 일은 없을테니까." 하브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눈빛을 외면하며 숲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에르테이샤]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군요. 신과 함께하는 자인 나와 함께있다면, 비틀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 슬쩍 웃음을 짓고는 사켄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 갈까요?" 계속해서 툴툴거리고 있는 금빛의 꼬맹이를 톡톡 쓰다듬어주었다. 흐음, 이제 . . 서연합만 남은건가? 엘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금빛을 흩뿌리며 이샤링족의 족장과 에프릴이 나타났다. 에프릴은 불안한 눈동자로 엘들이 사라진 곳을 보다가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은 눈빛의 족장을 바라보았다. "족장님 . . 아니 이스틴. 어째서 하브를 그들과 함께 보낸것인가요?" 울먹이는 에프릴의 목소리에, 족장이 시선을 돌려 에프릴을 보았다. 그녀의 맑은 금빛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듯한 투명한 눈물에, 그가 자신의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곧 그는 그의 흰손가락위에 아롱진 눈물을 살짝 입에 머금으며 대답했다. "걱정마, 에프릴." 아무런 감정없던 금안이 곧 부드러이 풀려 환상적인 벌꿀빛으로 변했다. 그 말에도 에프릴은 여전히 걱정스런 눈빛으로 이미 가버린 동생의 흔적을 찾듯 계속해서 엘들이 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족장 . . 아니 이스틴이 그런 에프릴을 소중히 품에 안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의 동생이 이성을 잃을 일은 없어. 세상이 이상해져버린 후, 알 수 없는 살심에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슬퍼할 일도 없을꺼야." "어떻게 . .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어요? 이스틴, 나 역시 엘을 좋아해요. 한번밖에 만나보지 못했지만, 정말 . . 정말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울먹임과 함께,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 . 하지만 하브가 슬퍼하는 것은 싫어요. 엘을 좋아하지만, 그녀와 함께 하브를 보내버린 . .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사랑스런 에프릴, 아까도 말했잖아? 그럴 일은 없어." 그녀의 작은 어깨를 손으로 감싸안고, 이스틴이 그녀의 금안을 바라보았다. 아롱지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입술로 훔치고, 살짝 감긴 그녀의 눈에 키스했다. "이샤링족의 족장이자, 당신에 대한 사랑을 걸고 맹세할께. 에프릴, 영원히 사랑할 나의 반려. 그대의 동생이 슬퍼할 일은 없을꺼야. 그 엘이라는 인간은 특별하니까." 눈을 감고 있던 에프릴이 이스틴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가만히 이스틴이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에르테이샤], 신과 함께하는 자. 그 인간과 함께있는 한, 하브가 이성을 잃을 일은 없어. 그녀의 곁에 신이 함께하실 테니까." 그녀가 곧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런 그녀에게 부드럽게 웃어주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맞춰주었다. 가만히 감기는 에프릴의 금안을 보며, 그 역시 눈을 감았다. * * * 이벤트편 * * * 「사건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사건을 일으킨 주범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바보같은 존재다.」 세브릭과 사켄, 아크산, 라세스는 피로를 풀겸해서 가볍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자들을 보기 드문 전쟁시에, 그것도 반짝반짝거리는 미인들이 함께 모여있는 모습에, 여자들은 붉어진 얼굴로 힐끔힐끔 세브릭들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남자들은 퉁명스런 얼굴로, 몇몇은 여인들과 비슷하게 붉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완벽한 미인 4인방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라, 술 마시는거에요?" 가볍고 경쾌한 목소리에 그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사람들의 고개 역시 돌아가며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엘이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 . . . 잔다고 하지 않았나요?" "잘까했는데, 뭔가 기분이 묘해져서." 엘은 아크산이 비켜준 자리에 앉으며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테이블 위에 깍지를 끼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근데, 뭐 마셔요?" " . . . 술 ." 사켄의 간단한 대답에 그녀가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들고 있는 잔을 보았다. " . . 안돼요." "뭐가요?" 밝은, 하지만 함께다니면서 충분히 위험하다고 인식했던 미소가 엘의 얼굴에 지어졌다. " . . . 주지 않을꺼에요." "달라고 안했잖아요?" "달라고 할꺼잖아요?" "역시나, 세브릭. 나랑 함께 지내더니 내 행동패턴을 알고 있군요." 엘이 감탄을 숨기지 않은채 짝짝 손뼉을 치자 세브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슬쩍 웃은 그녀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손을 움직였다. "근데, 나 한번도 술 못마셔봤는데. 맛있어요?" "글쎄- 처음 마실때에는 좀 . . 거기다가 우리가 지금 마시는 술은 좀 세기도 하고." "어라? 그거 자랑?" "오- 알아챘어?" 라세스와 엘이 농담식으로 말을 나누자, 경계를 하던 세브릭도,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엘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사켄도 슬슬 긴장을 풀었다. "헤에- 라세스가 말하는거 들으니까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뭐, 그리 맛난건 아니야. 그러니까 훠이훠이- 올라가서 얼른 자세요." "지금 어린애 취급하는거에요? 난 성인인데요?" "여자들한테 술이 안좋으니까 그런거야." "라세스의 말이 맞소. 그만 올라가서 자는게 좋겠소." 아크산의 담담한 말에 엘의 입술이 삐죽삐죽거렸다. 그러다가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잽싸게 손을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아크산의 잔이 엘의 손에 쥐여지고, 그 잔은 엘의 붉은 입술에 대어졌다. 꼴깍꼴깍 거리는 맑은 소리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네명의 남자는 침묵했다. "캬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은 엘이 푹 고개를 숙였다. " . . .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세브릭의 말에도 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에 . . 저기 . . 엘?" 라세스가 살짝 살짝 엘을 흔들자,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 . 엘?" "흐응- 마시지 말라고 했었던가?" 아무 반응없던 엘이 묘하게 섹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 하아- 정말 당신은 제 말을 듣지 않는군요." 세브릭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말에도 조용하던 그녀가 곧 어깨를 들썩였다. "히이-" 엘이 살짝 고개를 들더니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로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위험할정도로 풀린 눈동자에 세브릭이 움찔거렸다. 세브릭을 보며 생글거리며 웃던 엘은 곧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훌쩍이기 시작했다. "히잉- 잘못했어 . . " " . . 에 . . 엘?" "힝- 술 맛이 없어 . . 아니 헤에- 맛있는것도 같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보는 엘의 모습에 모두가 굳어있을때, 그녀가 한손으로 눈을 비비적 거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 . . 취한 . . 건가요?" "응? 음 . . 취했나봐, 세브릭." 살살거리며 눈웃음치는 엘의 모습에 세브릭이 멈칫했다. 세브릭을 가만히 바라보던 엘이 살포시 그의 무릎위에 올라앉더니 그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으응, 헤에- 따뜻해. 흐흥흥, 기분좋아-" 바짝 얼어붙어버린 세브릭의 가슴에 얼굴을 부벼대던 엘이 몽롱한 눈빛으로 세브릭을 올려다보았다. "아- 역시 예쁘다니까 . . " 허리에 둘렀던 두손 중 한손을 풀더니 조심스럽게 세브릭의 굳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볼에서 귀로, 귀에서 턱으로 내려온 엘의 손이 멈췄다. 턱을 매만지던 엘이 서서히 얼굴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가 쉴새없이 흔들리고, 엘의 검은색 눈동자는 달콤하게 웃음지었다. 엘에게 잡혀있던 세브릭은 거부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흐르는 엘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고있었다. 그리고 둘의 붉은 입술이 부딪히려는 순간 사켄이 엘을 순식간에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으힝- 아파아." 아까 그녀에게 감돌던 거부하기 힘들던 매력이 사라지고, 세브릭과 엘을 바라보던 나머지 역시 깊게 숨을 내뱉었다. 엘은 또 다시 힝힝 거리며 사켄의 품에서 부비적거렸다. " . . 취했다." "응- 안취했어, 안취했어. 이렇게 멀쩡한거얼?" 살짝 혀가 꼬인채 헤실거리는 엘을 보던 사켄이 그녀를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데려다주려고?" 라세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사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켄의 무언의 대답에 엘이 뾰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그의 품에서 발버둥쳐서 곧 땅에 내려섰다. "싫다- 안잘꺼야아." 키득거리며 웃던 엘이 바로 옆에 있던 아크산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지만, 아크산이 재워주면 잘께." 샐쭉 엘이 웃자, 아크산이 나머지를 바라보았다. 침묵을 지키던 사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크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품에 매달려있는 엘을 안아들고 남아있는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엘의 방으로 들어갔다. "끼익-" 나무문이 열리고, 어두워진 방안에선 촛불만이 일렁였다. " . . 자는 것이오?" "으음- . . " 작은 불빛에 의지해, 아크산은 품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엘을 잠시 보다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일어서려했지만, 아크산의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팔이 풀리지 않았다. " . . . 엘?" 아크산의 작은 부름에, 엘의 눈동자가 뜨여졌다. 그리고 마치 봄바람에 살랑이고 있는 벚꽃과 같은 설레이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아크산, 기억해?"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채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그가 물었다. " . . 무엇을 말이오?" "여자의 유혹에 약하다고 했던거-" " . . . 물론이오." "쿡쿡- 그럼, 용서해줄꺼지?" "무ㅅ. . " 아크산의 푸른 청발과 엘의 흑발이 얽혔다. 그의 청안이 놀라움에 동그랗게 떠지고, 엘의 흑안이 사랑스러운 눈웃음을 짓고는 살짝 감겼다. 아주잠깐이었지만 영원같던 시간이 지나고 엘의 팔이 풀리었다. 멍하게 엘을 바라보던 아크산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흥흥- 잘자, 아크산. 좋은 꿈 꿔." 그런 그의 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말하는 엘의 모습에 그가 손을 내렸다. 살랑이는 목소리와 함께 눈을 감은 그녀를 보던 그는 작은 한숨을 내뱉고는 문을 열었다. "아, 아크산." 라세스가 밖에서 활짝 웃음지으며 그를 보았다. " . . . 무슨 일로?" "어지러울테니까. 술 깨는 약이라도 놔두려고." 라세스의 손에 녹색물이 든 병이 찰랑거렸다. 아크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옆을 지나쳐가버렸다. " . . 이상하네, 열이라도 있는건가?" 라세스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엘의 문에 노크했다. "엘- 들어갈께." 그녀가 자고 있겠다고 짐작한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침대 위는 이미 텅 비어있었다. "어 . . 어라?" "여자방에 함부로 들어오는거야?" "어 . . 아?! 엘?" 없어져버린 엘의 모습에 멍해있던 그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다. 작은 나무의자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앉아있는 엘의 모습에 그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었다. "뭐야? 안자?" 술에 취한 상태임을 알기에, 그는 조심조심 방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녹색물이 든 병을 흔들며 씨익 웃었다. "다행이네, 깨어있으니." "왜?" 라세스의 손에서 흔들리던 병을 보던 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보았다. 그 모습에 멈칫하던 라세스가 큼큼거리고는 그녀에게 다가섰다. "술 깨는 약이야. 그 술을 다 마셨으니. 내일 속이 엄청 쓰리고 머리가 깨질거같을 꺼라고." " . . 흐음- 나 걱정해서 가져와준거야?" 밤임에도 불구하고 꽃이 활짝 핀것같은 웃음을 짓는 엘의 모습에 그가 다시 흠칫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 . 그런 . . 거지?" "응- 그럼 . . 마셔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엘이 비틀거리자 라세스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 땡큐땡큐-" "어?" 키득키득거리던 엘이 그대로 라세스에게 기댄채로 병으로 손을 가져가 뽁-하고 병을 열었다. "으음 . . 맛없어보여." " . . 술깨는 약이 맛있는게 어딨어?"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뾰루퉁해지더니 병을 입에대고 한모금 마셨다. "자자, 쭉 들이켜. 그렇게 개미눈물만큼 마시ㅈ. . . " 병을 입에서 뗀 엘이 라세스의 녹색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땡그랑- 소리와 함께 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약이 흘러내렸다. 한방울 두방울, 약물로 인해 바닥이 검게 젖었다. "으-" 곧 라세스가 비틀거리다가 엘에게 한발자국 물러서자, 그녀가 살짝 자신의 입술을 훔치며 싱긋 웃었다. "맛없어. 안먹어." "그 . . 그렇다고 !!" 버벅거리던 라세스가 확하고 붉어진 얼굴로 방을 나가버렸다. "흐응- 좀 아깝긴하네 . . " 멍하게 꼴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약을 보다가 열려진 방문을 보았다. 그리고 한걸음- 두걸음 방 밖으로 나갔다. 잠시 밖으로 나온 엘이 살짝 한숨을 쉬고는 몽롱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래층은 시끌벅적했고, 밖으로 나갔던 라세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이 살짝 고개를 돌리자, 여관의 한구석에 열려진 창문틀에 앉아있는 인영이 보였다. " . . . 잔다고 하지 않았나?" "응, 그러려고 했는데. 아크산이 도망가버렸어." 엘이 헤실거리며 웃고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흐린 달빛을 받는 그의 회색빛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보였다. "사켄은 안자?" 그의 바로 앞에선 그녀가 생긋 웃으며 묻자, 그는 잠시 아무말없이 그녀를 보더니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켄의 행동에 엘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한발짝 더 그에게 다가섰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보던 사켄은 곧 엘의 손에 의해 창 밖으로 떠밀릴뻔했다. 탁-하고 창틀을잡고는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 " . . 이게 무슨짓이지?" "헤에- 그러니까 누가 내 말 무시하라고 했었나 뭐?" 키득거리며 웃던 엘의 모습에 곧 사켄이 한숨을 쉬며 다시 들어오려는 순간, 엘의 손이 살짝 그의 어깨를 눌렀다. 사켄은 떨어지지 않기위해 두 손으로 창틀을 잡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눈동자로 바라보고있는 그의 모습에 엘이 장난꾸러기 요정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누르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섰다. 곧 사켄의 회색빛 눈동자가 동요를 일으켰다. 엘의 눈은 살짝 감긴채, 여전히 두 손은 사켄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창틀을 잡고있기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던 그는 곧 그녀가 손을떼자 가까스로 여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후후- 벌이야." 헤실거리며 웃은 엘은 창틀에 앉아 자신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보고있는 사켄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엘의 뒷모습을 보던 사켄은 자신의 손으로 살짝 입술을 만지며 바닥을 바라보다가 꾹 주먹을 쥐며 창 밖을 보았다. 한편 방으로 들어선 엘은 몽롱한 정신으로 작은 하품을 하고는 침대에 다가섰다. 곧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한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시지 말라고했더니, 기어코 마시고는 얌전히 침대에 누워자지 않고 뭐하는건가요?" 한숨 서린 그의 목소리에 엘이 멈칫하더니 살짝 고개를 돌렸다.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선채 있는 세브릭을 보던 그녀는 까딱까닥 손바닥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표시를 하였다. " . . 뭐죠?" 의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며 다가오지 않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크산이 도망갔어." " . . 그래서요?" "세브릭이 자장가불러줘." " . . . 자장가 없어도 잘만 잤잖아요?" "자장가 안불러주면 내일도, 모래도 맨날맨날 술을 마셔서 알콜중독자가 되버릴꺼야. 그럼 세브릭은 내가 손을 덜덜 떨면서 밥 먹여달라고 하면, 먹여줘야해? 알았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그녀의 모습에 세브릭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음 . . " " . . 왜 그러죠?" "세브릭, 머리카락에 뭐가 묻었어." " . . . " "떼어줄께, 고개 숙여봐." " . . . 믿어도 되는건가요?" "내가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해야하는건데?" 맑은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엘의 모습에 세브릭은 자신이 괜한 의심을 했나 싶어서 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엘의 입가에 악동같은 미소가 서리더니 훽 하고 세브릭을 잡아당겨 침대 위로 쓰러졌다. 엘은 아래에서 세브릭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세브릭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 역시나 거짓말이었군요." "아니아니- 진짜 묻어있긴 묻어있었어." "뭐가 말이죠?" "아름다움이-" 헤실거리는 엘의 웃음에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도망가면, 나 안잘꺼라니까?" " . . 뭘 바라나요?" 그녀가 그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훑더니 그의 머리카락에 부드럽게 입맞췄다. 그 모습에 그는 아무말도 않은채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봤지?" 엘이 샐쭉 웃었다. " . . 그래서요?" "나한테도 해줘." " . . . " 세브릭이 살짝 눈가를 찌푸리더니 그녀의 흑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곳에 입맞추려고 하자 엘의 손이 그의 입술을 막았다. 그 손을 살짝 보던 그가 그녀의 눈을 보자 그녀가 쯧하고 혀를 차더니 달콤한 웃음을 지었다. "세브릭의 장밋빛이랑 비슷한 곳에 해줘야지." " . . 어딜 말하는거죠?" "응? 나한테서 붉은 곳이 어디있겠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눈빛의 엘을 보던 세브릭은 가만히 그런 그녀를 보다가 살짝 작은 욕설을 뱉었다. 엘이 그런 그의 모습에 키득웃고는 두눈을 감고 그를 기다렸다. 세브릭이 잠시 망설이다니 그녀에게로 머리를 숙였다. 일렁이는 촛불로 인해 여관의 벽에 두명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천천히 숙여지던 사내의 그림자가 곧 여린 선의 여인의 그림자에 겹쳐졌다. "끄응- 머리아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음 . . 그러니까 . . 내 방이네." 아래 내려가서 술마신것까지는 기억나는데 . . 왜 내가 방에 있지? "아항- 누가 데려다줬나보구나." 홀로 만족스러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불을 걷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힐끔 초를 보자, 저녁 때 켜놓고 나갔던 초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누가 꺼준건가? "음?" 뭔지 모르겠지만, 바닥에 굴러다니던 병에 발을 부딪혔다. 내 발에 부딪힌 병이 빙그르르 돌더니 똑똑- 하고 녹색의 물이 떨어졌다. " . . 이건 또 뭐지?" 그 물 때문인지, 나무바닥이 젖어있었다. 흠, 누가 내 방에 저런걸 쏟은거야? 어깨를 으쓱하고는 방을 나서 아래로 내려갔다. "응? 다들 벌써 깼나보네요?" 네명이 한테이블에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보여서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런데 . . " . . . 좋은 아침이오." "아하하 . . . 자 . . 잘잤어 . . ?" " . . . " " . . . " "뭐에요? 왜 모두 내 시선을 피해요?" 아크산은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얼굴로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하면서도 쭉 자기가 먹던 음식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라세스는 평소와 달리 잔뜩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그의 눈은 내 시선에 맞추지 않고 비껴나갔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건 저 사람이다. 뭐, 사켄이야 평소처럼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지만 . . " . . . 뭐에요? 오늘은 왠일로 시비를 안걸까나? 드디어 내 매력에 퐁당 빠진건가요?" 싱긋 웃으며 의자에 앉자 세브릭이 팍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보다가 훽 고개를 돌렸다. " . . 새로운 방법의 시비걸기인가요?" "조용히하고 식사나 하세요." "흐응- 뭐에요? 모두 왜 그래요?" 오늘따라 이상하네? 아, 혹시 그거 때문인가? " . . . 저기 . . 엘 ." "네? 아, 그보다 라세스. 어제 나 방에 데려다준거 누구에요?" 아크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어? 아크산이에요? 에헤, 고마워요." " . . . 괜찮소." "그리고 . . 내 방에 녹색 물이 담긴 병이 굴러다니던데, 그거 누구꺼에요?" " . . 아 . . 수 . . 술깨는 약인데 . . 어제 너한테 갖다주려다가 . . " "쏟은거에요? 쯧, 아깝게 그걸 왜 흘려요." 내 말에 라세스가 아하하거리며 삐질 땀을 흘리고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다. "음 . . " 뭔가 떠오를듯 떠오르지 않는 영상에 생각에 잠겼다가 곧 박수를 치며 사켄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어제 사켄. 분명 창가에 있었던 것 같은데 . . 맞아요?" " . . . 맞다." "아- 그랬구나. 거기서 뭐했어요? 얼른 자지 않고." 내 식사가 나온 것을 보며 스푼을 들고 스프를 떠먹었다. 크윽- 이 적당히 묽은 달콤함. 좋다좋다- "아크산, 어제 내 방 촛불 꺼주고 나가줘서 고마워요." " . . 그건 내가 한것이 아니오." 아크산의 대답에 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라세스를 보았다. "그럼 라세스에요?" "나도 아닌데 . . ?" 여전히 어색한 라세스의 모습에 이상하게 쳐다봤다가 사켄을 보자, 그 역시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 . . 그러면 . . " 멀뚱멀뚱히 세브릭을 보자 그가 나와 잠깐 시선을 마주하더니 또 다시 고개를 훽 돌려버렸다. " . . . 어쨌든 고마워요, 세브릭. 촛불 꺼주고 나가서." " . . 별로." . . . 진짜 뭐지? 이 어색한 침묵? " . . . 뭐에요, 오늘다들 진짜 이상하네?" 내 물음에 네명이 움찔거렸다. "어제 술취해서 내가 무슨짓이라도 한거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모두 . . " 말을 이을때마다 움찔거리는 그들을 보다가 입을 닫았다. " . . . 식사나 하죠." "아하- 그게 좋겠는걸?" "식사 시간에는 식사만 해야하오." " .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갑자기 열심히 식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끙끙 거리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한편, 엘이 고개를 숙이고 어제일을 떠올리려고 애쓸 동안, 네명은 잠시 식사를 멈추고 조금 안타까운 눈길로 엘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는 것은. 엘은 모르는 비밀. * * * 이벤트편 끝 * * * 흔들리는 말 위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시야가 흔들려서 보는데 좀 귀찮았지만, 충분히 볼수 있을정도의 흔들림이었기에 무시했다. 아렌타 제국이 있던 동연합, 그리고 살짝 북쪽에 치우친 생명의 숲. 생명의 숲보다 북쪽에 위치한 서북쪽의 카슘제국이 있는 서연합. 그리고 바다건너 있는 하빔 왕국. "흠 . . 역시나 카슘제국쪽으로 향해서인지 날씨가 점점 추워지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카슘 제국은 북쪽에 가까이있고 .. 또 우리는 최대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피해가니까. 황량해서 더 쌀쌀하게 느껴질꺼야." 라세스의 대답에 한숨을 쉬었다. 추운건 별로인데 . . 물론 더운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적당히 춥고, 적당히 더운게 좋은데 말이죠. 뭐, 하지만 추운 건 괜찮네요." " . . 왜 그렇죠?" 세브릭의 물음에 으흐 하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왜냐고? 왜냐면 . . "비밀이에요." " . . .?" 그 이유는 바로, 그대들을 보면 절로 마음이 따뜻해지기 때문이지. 후끈후끈한 열기가 확 치솟는답니다. 하지만 말하면, 세브릭은 분명 또 '어이없군요. 제정신인가요?'라고 말할께 뻔하니까. 말하지 않겠어. 더 이상의 미친여자 취급은 사양이라고. "그보다, 아크산 또 말이 없어졌네요." 고개를 돌려 뒤쪽에서 말을 몰고있는 아크산을 보았다. 그리고 수심에 잠긴듯한 미인의 모습을 홀로 감상하였다. 아아- 고민하는 미인은 아름다워라. " . . . 생각할 것이 있어 그랬소." "무슨 생각이요? 내 생각했던게 아니라면 용서치 않겠어요." 웃음끼어린 내 말에 세브릭이 비웃으며 말했다. "웃음밖에 안나오는군요. 당신이 용서치 않으면 어쩐다는 말이죠?" "뽀뽀해버릴꺼에요-" " . . . 제발 그 입맞춤을 남발하지 말아주겠어요?" "에이- 세브릭한테만 해달라는 말인가요, 그건?" "제가 언제 그런식으로 말했죠?" "난 그렇게 들었는데요-" " . . . 당신하고 말한 제가 바보군요." "훗, 맞아요. 바라보면볼수록 보고싶어지는 사람이죠." " . . . " 어이없다 못해 황당하다는 듯한 그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가 아크산을 보았다. 그는 내가 말을 건넨 후, 계속해서 날 보고 있었다. "정말로 제 생각했던거에요? 왜요, 나도 바보인가요?" "맞소. 그대 생각을 하고 있었소." " . . . 에?"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난 농담이었는데 . . 저렇게 직설적으로 고백(?!)해오다니. " . . 얼굴이 화끈거리는게 느껴져요, 사켄? 나 고백받은거에요?" ". . .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약간 차가워진 사켄의 음성에 이상함을 느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살짝 살기가 머금고 아크산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매서움 속에선 알 수 없는 혼란이 느껴졌다. " . . . 큼, 아크산, 의미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나 당장에 오해해버릴꺼에요." " . . 무슨 오해를 말이오?" "내 생각했다는게 정확히 무슨 의미에요?" "당신이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죠." " . . 세브릭한테 안물어봤어요." "그정도의 생각도 짐작 못하나요?" "난 미친 여자라서 그정도 생각 짐작 못하겠는데요." "괜한 기대 품지 말고 똑바로 현실을 보는게 어떨까요." "세브릭, 질투가 나면 아크산한테 '엘은 내꺼다!'라고 결투라도 신청하라고요. 왜 아무 죄도 없는 날 후달구고 그래요?" "언제 후달궜다는 거죠?" "봐봐요, 지금도 그러면서." "안그랬어요." "똥고집 피우지 마요. 그랬어요." " . . . " 세브릭의 오기 서린 눈동자를 보다가 슬쩍 시선을 외면했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 시끄러워? 잠을 못자겠잖아!" 내 로브 모자 속에서 하브가 슬금슬금 기어 나와 내 어깨에 올라타서는 짜증을 내었다. 잠을 자고 있었던지 한쪽 손을 들어올려서 눈을 부비고 있는데 .. 아, 이 사랑스러운 녀석같으니. 누나가 세수 시켜줄까? "하브, 오해하지 말아요. 그녀만 시끄러운겁니다." "흥- 내가 보기엔, 남자인간, 네 놈도 만만치 않다." 하브의 말에 세브릭이 충격받은듯, 입을 다물었다. 하브는 요몇일동안 우리와 함께 지내면서 그래도 이제 이름을 불러도 버럭 화를내며 성질을 피우진 않을정도까지 나아졌다. 처음에는 얼마나 틱틱대는지 궁뎅이 팡팡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뭐 그것도 연하의 특권, 미소년의 아름다움 정도로 너그럽게 넘어갔으니까. 내 어깨에 앉아 여전히 눈을 비비는 하브의 고수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하브,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흥, 내가 너와 같은 인간인줄 아는거냐?" 이제는 머리를 쓰다듬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 뭐, 내가 너무 자주 쓰다듬어서 그도 익숙해진건지, 아니면 쓰다듬어주는게 꽤 마음에 들어서인지는 잘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도, 걱정되는건 걱정되는거에요." "누 . . 누굴 거 . . 걱정하는거냐!" 버럭 하브가 소리를 지르며 쏙 모자로 들어가버렸다. 아무튼 귀엽다니까. 이뻐죽겠어 아주. " . . . 오늘은 어디서 묵을 것이오?" "아무래도 곧 바다쪽에 가까워지니까. 항구가 있는 마을에 묵을 것 같군요." " . . 항구인가." 아크산이 혼잣말하는것을 흘려들으며 난 지도에 심취해있었다. 예상했던대로 현대의 지도보다 훨씬 질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볼만했다. 일단 이 대륙은 하트모양이 가깝게 생겼다. 이 지도를 처음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하트모양의 대륙과 북쪽에 떡하니 위치해 있는 섬. 뭐, 섬은 그렇다쳐도 하트모양의 대륙은 정말 귀여웠다. 어쨌든, 지금 있는 위치는 생명의 숲에서 카슘제국으로 가는 방향 .. 그러니까 대륙쪽으로 깊게 들어와 하트모양이 되버리게 한 바다 주변이었다. 벌써부터 귀에 쏴-하는 파도소리와 짭짜름한 냄새가 나는것 같아서 즐거워졌다. 항구가 있는 마을이란말이지- 숲에서 바다주변까지 오게 된것이 약 이주정도 걸렸다 . 음 . . 내가 '이곳'에 온지 약 . . 다섯달 조금 안됬나 . . . . . 그럼 전쟁이 끝날때까지 어느정도 걸릴까나. 그런데 이곳에서 지낸지 얼마 되지 않은것 같은데 . . 꽤 오랜시간이 흘렀구나 . "잘봤어요, 사켄." 이것저것 생각하며 지도를 보다가 쓱쓱 접어서 사켄에게 주었다. 그가 내가 건넨 지도를 받더니 자신의 주머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우리 꽤 오랜시간 함께 있었네요." "갑자기 무슨 소리죠?" "세브릭이 저한테 미운정이 들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소리에요." "미운정인가요." 세브릭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싱긋 웃었다. "미운정도 안들었다고 부정하면, 저 울어버릴꺼에요." "당신이 우는 모습은 볼만한 가치가 있겠군요." "오- 세브릭, 점점 날 닮아가네요. 악취미적인 성격이에요. 내 수제자로 받아줄까요?" 내 말에 세브릭이 확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데 라세스가 끼어들었다. "푸핫- 근데, 정말 둘이 사귀는게 어때? 재밌을것같은데."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난 잠시 멈칫했다가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세브릭이랑 사귄다라 . . "글쎄요, 전 세브릭같은 미남이라면 환영도 그냥 환영이 아닌 대환영인데요." "세브릭, 그렇다는데? 넌 어때?" 라세스가 세브릭에게 던진 질문을 듣고는 기대에찬 시선으로 세브릭을 보았다. 세브릭이 날 힐끔보고는 훽 고개를 돌려버렸다. " . . . 사양하겠어요." 혹시나인데 역시나인가. 약간의 호기심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오, 엘. 세브릭한테 차였는데?" "아- 이럴 수가. 라세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응? 그럴리가- 엘처럼 매력있는 여자도 드물지." "그렇죠? 저도 라세스같이 멋진 남자분도 드물다고 생각해요." "여기있는 녀석들은 어떻게 되는거야?" "물론, 드문 미인들이죠." 내 명쾌한 대답에 라세스가 시원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싱긋 웃고는 슬슬 느껴지기 시작한 바닷바람에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 . . . " 들뜬 기분으로 앞을 보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세브릭이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세브릭이 한쪽눈을 찌푸리고는 훽 고개를 돌려버렸다. . . . 뭐야, 저 고개돌리는거 . . 날 찬건 세브릭이잖아. . . . 날 본게 아니라 사켄을 본건가? 혹시라도 사켄이 오해했을까봐? . . . 이 생각 지금 입 밖으로 내뱉는다면, 분명 사켄은 날 말에서 떨어뜨려버릴꺼야. 홀로 키득거리며 상상하다가 힐끔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 빨리 바다보고 싶다." "응? 엘, 바다 한번도 못봤어?" "그러는 라세스는요? 아, 용병이니까 많이 봤으려나?" 내 질문에 라세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슬쩍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질리도록 많이 봐왔지." "헤에, 역시나? 임무 때문에요?" "뭐, 그런 것도 있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라세스를 보다가 아크산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고 말을 몰고 있었다. 무슨일이라도 있는건가? 왜 저렇게 무게를 잡고있는거지? 스윽- 하고 누군가의 손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어두워진 탓에 움찔했다가 그 손을 치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에, 이건 뭐에요? 나보고 말 위에서 자라는 건가요?" " . . . " "왜 대답이 없어요?" 그의 손 안에서 눈을 깜빡거리다가 뒤에 버티고 서있을 그의 몸에 살짝 내 등을 기대었다. "아니면, 내가 아크산만봐서 질투하는거에요?" 소근대는 듯한 목소리에, 드디어 무겁던 사켄의 입이 열렸다. " . . . 한가지 말해도 되겠나." "사켄이 말하는 거라면, 백가지라도 들어줄 용의가 있어요." 귓가에 잔잔히 울리는 나즈막한 그의 음성에 즐거워하고 있을 때, 귀에 작은 온기와 함께 간질간질한 숨이 흘러들어왔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 . . . 네?" " . . . " 그가 그 말만 해주고는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곧 시야가 밝아지고, 몇번 눈을 깜빡이자 시력이 돌아왔다. 그리고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있을 사켄을 생각하다가 슥슥하고 턱을 매만졌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 . . 무슨 의미지? 그거 . . . 아크산을 경계하라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 . . . . . 멍하게 있으면 덮쳐버린다는 . . 위험성 발언인가? 흐음- 개인적으론 . . 후자쪽이면 좋겠는데- 홀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가끔 대화도 나누다보니 저녁 전에 우린 마을에 들어 설 수 있었다. 항구가 있어서 그런지 좀 시끄러운도 같았지만 .. 생기가 있다는 것은 좋은 거니까. "그럼 우린 저 여관에 방 잡고 있을께." 라세스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세브릭이 답했다. "저희도 곧 들어갈께요." 매번 마을에 들릴 때마다 아크산과 라세스는 여관을 잡고, 세브릭과 사켄, 그리고 나는 장을 보고 들어갔다. 우리 사정상 하루 쉬고 갈지언정 오래 머물 수는 없었으니까. "역시 바다가 가까워서 그런지, 해산물들이 많이 보이네요." 주위에 널린게 해산물들. 싱싱한 바다내음이 가득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 비린내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줄곧 대륙을 여행하고 다녔기에 보지못했던 바다생물 구경 재미에 여기저길 두리번 거렸다. 곧 길을 가던 내 귀에 들리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자네, 얘기 들었나?" "무슨 얘기?" "전쟁 말이야, 전쟁." "왜, 이번엔 전쟁에 승패가 났데?" "아니, 그건 아닌데. 이종족들이 무슨 일이 있는지 모두 생명의 숲으로 돌아가버렸다는군." "도망인가?" "모르지, 그래도 그거면 원래 이종족들은 싸움을 싫어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려니 하겠는데. 동연합이 말이야." "아- 나도 그 얘긴 들었네. 전운이 묘하다지?" "그래. 동연합이 미적지근하게 대해오니, 서연합도 '이건 뭔가.'한다더군. 서로 경계를 하면서 움직이질 않는데." "허허, 그거참. 그리 오래 싸우더니.. 고작 그 일로 움직이질 못한다고?" "경계하는거라니까, 경계. 이번 기회에 휴전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글쎄, 그게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겠나? 지금 전쟁만 몇십년 째인지 모르나?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 되었던 . . " 대충 듣고 싶었던 얘기를 다 들은 것 같아서 신경을 끊었다. 곧 그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빠르군요." 세브릭이 뒤쪽을 흘끔보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활짝 웃었다. "다행이죠 뭐, 이제 서연합만 동의를 이끌어낸다면 끝이라고요." 신나서 재잘거리는 날,세브릭이 밑도 끝도 없는 눈으로 보았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엘, 서연합 황제는 . . " "세브릭." 세브릭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려고 하기에 집중하려했는데, 갑자기 끼어든 사켄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세브릭이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보았고, 사켄은 힐끔 날 보더니 한 가게를 가리켰다. "무기점이로군요." "잠시 다녀오지." "알겠어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무기점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세브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에 멈칫하는 세브릭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하려던게 뭐에요?" " . . . " 그의 얼굴에서 그려진 듯 지어져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표정인지 알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걷기 시작했다. 딱히 날 무시하려했던 기색은 없어보여서 얼른 따라붙어 그의 옆에 섰다. "뭐냐니까요?" " . . . 지금처럼 . . " "음?" "지금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꺼에요." 그는 날 보지도 않은채 말을 뱉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수 있었기에 입을 닫고 있다가 한쪽 귀를 만지작 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나도 알아요." 대답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그의 발이 멈췄다. 나 역시 그보다 한박자 늦게 발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근데 . . " "또 뭐가요?"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태평한거죠?" 드디어 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화가 난듯 붉게 타오르는 장밋빛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데, 그가 몰아붙이듯 쏟아내는 말에 멍하니 정신을 놓았다. "서연합 대표인 카슘 황제는 저희 동연합 사령관님이신 맥클라스님과 달라요. 그와 전쟁을 해온 제가 알고있는 그의 모습만으로도 소름이 끼쳐요. 그는 맥클라스님처럼 소중한것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임하는 것이 아니에요." " . . 그럼요?" "그의 관심사는 여자, 그리고 전쟁 그 자체죠." 그의 눈이 황홀하리만치 차갑게 빛난다. 손끝에서부터 오싹한 기운이 훑고 올라왔다. 아무래도 진짜로 미쳤나봐. 세브릭이 화내는게 재밌어죽겠단말이지. 그가 화를 내면화나면 손끝부터 오싹오싹해지는데, 그게 바이킹 맨끝자리에 타서 소리지르는 것보다 스릴이 있었다. 내 생각을 모르는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화가나는지 마치 날 씹어삼킬듯한 시선으로 보며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몇이나 죽든, 그는 자신이 알바가 아니죠. 그저 죽이기 위해, 죽일 수 있기에 전쟁을 하고 있는게 그니까요." " . . 세브릭." "그뿐이라면 당신이 어떻게 구워삶든 제 알바가 아니에요. 그는.." 그가 이를 악물고 내 어깨를 붙들었다. 아플만큼의 그의 악력에 눈가가 찌푸려졌지만 떼어낼 수 없었다. 내가 느끼는 고통보다도, 그의 눈이 두려움에 젖어있는 것을 보았기에. " . . 걱정해주는거에요?" "누가 당신을!" 세브릭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 목소리에 그의 불안을 읽을 수 있었다. 흐음, 카슘 제국의 황제가 관심있는 것은 전쟁, 그리고 여자라 했던가? "걱정말아요. 죽기 밖에 더하겠어요?" 어깨를 으쓱이는 내 모습에 그의 안력이 더 강해졌다. 그가 고개를 숙이더니 한글자한글자 더럽다는 듯 내뱉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당할지도 몰라.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되면 잽싸게 도망가야죠 뭐. 안되면 . . 흐음, 혀라도 깨물까요?" 나름 심각하게 말했지만, 그는 내 말투에서 이미 나의 웃음을 읽었나보다. 화가 났는지 고개를 번쩍 들며 또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열리는 그의 입을 살며시 막고는 그의 시선에 똑바로 눈을 맞췄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의 여유를 가져가버린거죠?" 지금까지 내가 아무리 놀리고 장난을 쳤어도, 왠만하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던 그다. 예전에 그가 포커페이스를 잊었을 때조차도, 그의 이성은 차갑기 그지 없었으니까. 그는 날 보며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 한쪽 어깨가 묵직해졌다. 그가 자신의 이마를 대고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여유가 사라질만큼 . . 넌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밖에 없게 만드니까." 지오, 부탁이 하나있어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의 등에서 작은 떨림을 느끼며 내 어깨에 기대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었다. 제발, 이 남자가 날 사랑하지 않게 해줘요. 시간이 흐르고 그의 몸에서 떨림이 멈추었다. 곧 그가 멀쩡해진 얼굴로 날 보았다. "이제 좀 진정이 됬어요?" " . . 그런것 같군요." "내가 보기에도 그래요." 빙긋거리며 웃는 내게 그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더니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걷다가 말을 걸었다. "나 많이 걱정해요?" 뜬금없는 말이었는지, 그가 멈칫했지만 그는 여전히 앞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보고있었지만 내 상상 속에서 그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는 것이 보았다. "누가 말이죠?"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 그의 뒤에서 흥흥거리고 웃고는 말을 이었다. "세브릭 말이에요. 훗- 아무튼 날 너무 사랑한다니까." "누가 당신ㅇ . . " 그가 휙 내게 뒤돌아서다가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나의 뒤에 박혀있었다. 아까 날 보던 시선과는 다른 흔들림을 담은 눈에 천천히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꽂혀있는 것 . . 아니 사람은 푸석해보이는 짙은 주황색 머리에 눈을 지닌 여인이었다. 눈 아래의 눈물점과 거의 가렸다정도로 표현을 할 수 있는 천 조각을 두른 여인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눈으로 그녀를 볼 동안, 이미 세브릭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 여자의 얼굴을 잡아채고 있었다. 뚫어버릴 듯 강렬한 시선에 그 여인은 놀란 듯하다가 곧 세브릭의 모습을 보고는 유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어루만졌다. "아프잖아요- 오빠같은 사람이 줄 껀 아픔보단 쾌락이었으면 하는데." 비음 섞인 목소리에 난 잠시 그 둘을 번갈아보다가 그를 보며 쿡 웃었다. "하긴 . . " 그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읽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나랑 있으면서 좀 쌓였나보네요? 그렇게 여자가 궁했어요?" 장난스런 내 미소에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에 어깨를 으쓱하고뒤돌아서며 말했다. "풀고와요. 난 사켄한테 가있을테니까. 아- 점심 되기전에는 여관으로 돌아와요. 내일 여행 갈 힘도 남겨놓는거 잊지말고요." 한걸음 두걸음 앞으로 가고 있음에도 날 붙잡는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 세브릭 너도 남자라 이거지? 나한테 그런 묘한 말을 하고는 그렇게 횡하니 날 버린다 이거지? 칫- 그럴꺼면 왜 그런 말을 해서 사람 마음 이상하게 하고 그래? 투덜투덜 속으로 짜증 비슷한 감정을 토해내고 있는데, 탁- 하고 손목이 잡혔다. "뭐에요, 풀고 오 . . 응? 아크산?" 지금 붙잡았으면 용서해주고 안놀리려고 했는데 . 날 잡은건 화려한 장밋빛의 세브릭이 아닌 그윽한 냔향의 아크산이었다. "왜 여기 있어요? 여관에 있기로 하지 않았었나?" 갸우뚱거리며 묻는 날 그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에 나도 마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요?" " . .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살살 물어요- 라는 농담은 하지 않는게 좋겠죠? 뭔데요?" 생글 웃으며 말하자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결심을 했는지 날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날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겠소?" " . . 네?" "지금 도망간다면 잡지 않겠소." 그의 눈에 서린 것은 어떤 간절함이었다. 자신에게서부터 도망가달라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도망가야해요?" "그래주었으면 좋겠소." 그의 담담한 대답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싱긋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크산인걸요. 미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갈 수 있는 용기가 제겐 없네요." 내 말에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리다가 결국 감겼다. "그대를 . . " " . . 네?" "그대를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의 말과 함께 누군가의 손이 내 입을막았다. 그 손에 들려있던 천에서 나는 강렬한 약내음을 맡음과 동시에 정신이 희미해졌다. "차리리, 그대가 어떤 이인지 몰랐다면 좋았을텐데." 흐릿해진 시야로 괴로워보이는 아크산의 모습이 보였다. "미안.. 엘." 라세스의 목소리가 꿈인듯 흩날렸다. 희미해진 정신 속에서 아크산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온통 암흑으로 물들었다. 엘의 몸이 축 늘어지고 라세스는 얼른 그녀를 잡았다. 정신을 잃은 엘이 곤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던 그는 아크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돌아가시죠." 정중한 말투였지만 서글서글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아크산은 엘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곧 라세스의 품에서 엘을 안아올린 아크산이 걸음을 옮겼다. "제가 안고 갈수 있습니다만?" 라세스가 뒤에서 말하자 그가 자리에 멈춰서 그를 보더니 엘을 더 꼭 자신의 품에 안으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미움 받을 것 같아 두렵다." 그가 그렇게 말하곤 곧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긴 . . 이미 엎지른 물인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크산이 걸음을 옮길 때, 엘의 모자 속에 있던 하브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에 대해 맹렬히 머리를 굴려야했다. 한편 엘이 납치되었는지도 모른채, 세브릭은 여관에 앉아있었다. 그의 손에는 모락모락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차 한잔이 들려있었다. 처음 시켰을 때와 조금도 양이 줄어들지 않은채 서서히 차는 식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느끼지도 못하고 탁자 모서리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곧 낮은 한숨이 차향을 날려버렸다. "어서오세요." 점원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무문이 덜컹거리다가 잠잠해졌다. 뚜벅거리며 다가오는 사켄에게 그가 말을 꺼냈다. "다녀오셨나요?" " . . . " 사켄은 대답하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그는 작게 눈썹을 찡그렸다. "엘은 방에서 쉬고 있는 건가?" " . . 그게 . . 무슨 . . " 세브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쾅-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찻잔이 쓰러지며 탁자의 아래로 차가 흘러내렸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것 아니었나요?" " . . 너와 장보러 가지 않았나." " . . 곧 당신에게 간다며 가버렸어요." " . . . " " . . . ."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사켄은 주먹을 꽉쥐었다. "아크산들은?" " . . 나간듯싶은데." 사켄이 점원을 향해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따끔거리는 살기에 점원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청발의 남자와 녹발의 남자. 이곳에 왔었나?" "나 . . 남자들 말입니까?" 사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점원은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있지?" "방 . . 방을 잡고는 곧 나가셨습니다." 점원의 말을 듣던 그가 세브릭에게로 돌아섰다. 세브릭은 점원의 말을 듣고는 멍하게 바닥을 보고 있었다. 사켄은 그의 멱살을 잡으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왜 혼자 보낸것이냐." "무기점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제가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될꺼라고 판단했어요." "그것만이 아닐텐데." 시리도록 차가운 회색빛 눈동자가 무기력해진 장밋빛의 눈을 보았다. " . . 제 실수였어요. 엘을 신경쓰지 못할정도로 흔들렸었으니까." " . . 네가 흔들릴 일이라면 '그 일' 밖에 없겠지 . . " 세브릭을 보던 사켄이 손을 풀었다. "넌 아직도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건가?" " . . 사켄이 할 말은 아닐텐데요." " . . " 서로를 바라보던 도중, 먼저 행동한 것은 사켄이었다. 그는 강하게 쥔 손으로 세브릭의 배를 쳤다. "윽-" 세브릭이 배를 잡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콜록거렸다. "엘에게 무슨일이 생긴다면 지금 정도로 끝나지 않을테니, 각오해라." 차갑게 내려다보던 그가 뒤돌아 나가려 할 때, 세브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콜록 . . 항구에요." 사켄이 고개를 돌리자 세브릭이 탁자를 잡고 일어서고 있었다. 곧 그는 작은 숨을 내쉬고는 사켄을 똑바로 보았다. "그들이 갈 곳은 항구 밖에 없어요." " . . . " 사켄이 걸어나가고 세브릭은 멍하니 서있는 점원의 앞에 은화 몇개를 놔두며 말했다. "방에서 묵지 않았으니, 차값으론 이정도면 충분하겠죠." 세브릭이 걸어나가고 점원은 물끄러미 은화를 보다가 그 은화를 집었다. 그리고 위로 던지고 받는 일을 반복하다가 입을 열었다. "태양께 연락해야겠군." 그는 귀찮은듯 머리를 흐트리며 밖으로 나갔다. "선수를 뺏길 줄이야." "그들이 항구에 갔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사켄이 말을 타고 달리며 묻자, 세브릭이 바짝 말 위로 엎드리며 말했다. "청발, 청안. 그거면 의심의 증거가 되기 충분했죠."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세브릭이 숨을 골랐다. "아크산이라는 이름, 말투, 분위기. 곧 그가 누구인지 확신했고, 어째서 우리와 함께 다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침묵했어요." " . . 그래서 그는 누구지?" 거친 바람이 그들의 머리를 휘날렸다. 넓고 푸른 바다가 코 앞에 보이자 세브릭이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유일하게 전쟁의 시작 후 침묵했던 나라. 지금까지도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섬왕국." 사켄이 미간을 찌푸렸다. " . . 하빔인가?" 파도가 크게 요동쳤다. 바닷바람이 서로를 마주보는 그들을 농락했다. 세브릭이 입을 열었다. "아크산 자 하빔. 하빔 왕국의 제 1 왕위계승자에요." 흔들거림 속에서 편히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머리를 잡아당기며 귀에다 소근소근거렸다. "이..ㄴ..간.." 누구지? 귀찮아.. 더 자고 싶어. 피곤하다고. "일어..ㄴ..ㅏ.." 싫다니까- 자는게 좋다는데 왜 이래 . . "일어나면 엘이라고 부를께! 일어나라, 인간!" 그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낯선 어둠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하품을 하며 말했다. "하브, 약속 어기면 맴매할꺼에요." "큭 . . 어째서 그런 말에 일어나는거냐, 인간!" 인간이 아니잖아- 후암 . . 여전히 잠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있다간 다시 잠들어버릴 것만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옆을 돌아보자 하브가 팔짱을 낀채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좋은 아침-" "벌써 밤이야." "아- 정말요? 킁, 그 약 독하긴 독하네요." " . .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거야?" "잠든 이유정돈 알고 있어요." 아크산한테 납치당하다니 . . 납치라니- 납치. 색다른 경험이네. 두손을 들어올려보니, 내 손을 묶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가면 어쩌려고 묶어놓지도 않은거지? "이봐, 인간." "엘." " . . 인간." "엘이라고 안부르면, 하브는 거짓말쟁이가 되는거에요." 하브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 결정타 결정타- "인.간.이.랑 똑.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도 상관없다면야 . . " "윽, 엘! 엘!! 됬어?!" 왁왁 소리를 지르는 그를 보며 웃음을 참다가 살짝 손을 내밀었다. 손과 날 번갈아보던 그가 내 손 위로 올라왔다. 대충 눈높이를 맞추고 벽에 기대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나도 몰라." "흐음 . . 흔들리는거 같은데 . . 내 착각인가요?" "착각이 아니야." 멀뚱멀뚱 그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지진이라도 난거에요?" "여긴 배안이야." " . . 배?" "지금 우린 배에 실려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거라고." "아항- 그렇구나." 하브의 말을 듣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슥슥 한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땅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무려 바다인가? . . 사켄이랑 세브릭이 데리러 와주려나. " . . 왜 그렇게 태평한거야? 인가. . 이 아니라 엘!"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내 이름을 말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첫번째 이유는, 날 납치한게 아크산이니까요. 아무래도 그는 내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보이거든요. 죽진 않을테니. 목숨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죠. 두번째 이유는, 세브릭과 사켄이 곧 알고 와줄꺼라 생각하니까. 음 . .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그의 금안을 보다가 싱긋 웃었다. "하브가 곁에 있으니까. 별로 무섭지 않네요." "무 . . 무 . . !" 하브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며 즐거워하다가 밖에서 들리는 뚜벅거리는 소리에 하브에게 말했다. "아크산들은 하브가 있다는 거 알고있어요?" "몰라." "다행이네요. 그럼 계속 지금처럼 그들이 모르게 숨어요." " . . 어째서?" 하브가 '내가 왜?'라며 시건방진 눈빛으로 보는걸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비장의 카드정도로 해둘까요?"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곧 문이 달캉이는 걸 듣고 얼른 그를 모자 속에 넣은채 문을 바라보았다. " . . 깨어있었소?" "너무 잤더니 목이 마르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저녁을 안먹었잖아요. 배도 고프고." " . . 엘,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아는 것이오?" "알면 이러고 있겠어요? 여긴 어디에요?" 내 질문에 침묵하던 아크산이 다가왔다. 그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짙어진 청안으로 날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사람 심장 떨리게." " . . 그대는 지금 납치된거요." "아- 역시나, 그런거에요?" " . . . "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다가 아무말도 않는 그를 봤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을 깍지낀채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딱히 무슨 말을 할 처지도 못되어서 그저 그만 보고 있는데, 곧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뭐가요?" 그가 손을 더 꽉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내게 미안한건데요?" "그대를 속인것, 이곳으로 데려온것 . . 모든 것이." "뭘 속였는데요?" "알고 있었소."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알고 있었다고? "그대가 사켄과 세브릭과 함께 생명의 숲으로 향했다는 것을. 무슨 이유에선지 몰랐기에, 그걸 알기 위해 그대와 함께 가기로 한거요." "어떻게 내가 그들과 움직이는지 알았는데요?" "동연합에 우리 왕국의 첩자를 심어놓았소." "헤에-" 근데, 그런거 나한테 막 말해도 되는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아크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젠 새하얘진 그의 두 손 위로 내 손을 포개놓았다. 움찔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을 마주하며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그의 눈이 옅게 흔들렸다. " . . 엘 . . " "내가 너무 잘난걸 어쩌겠어요 ." " . . 무슨 . . " "그래서 이제 나 어쩔꺼에요? 신부감으로 납치해가는건가요?" 그런거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묻자 그가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뭐야- 아니야? "아쉽네요. 날 두고 대결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자신의 신부로 삼겠다는 아크산과 안된다는 . . . 음? 방금 누굴 떠올린거지? "다시 소개하겠소." "네?" 아크산이 진지한 눈빛으로 보는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뭔가 . . 저런 모습 보니까 기분이 야리송송해. "아크산 자 하빔이라 하오. 하빔왕국 국왕 전하의 명으로 그대를 데려가게 되었소." "헤에, 하빔?" "그렇소." "중립국이라는 하빔?" "그렇소." " . . 하빔이라는 성이 붙은 것은, 아크산. 당신이 하빔의 왕족 중 한명이라는 뜻이겠죠?" "정확히는 왕위계승자요." " . . . 근데 난 왜 데려가요? 국왕전하가 며느리를 보고 싶데요?" 머리가 띵했지만 싱긋 웃었다. 약기운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 . . 며느리가 아니오." "그럼요?" "따지자면 조카며느리일 것이오." "어, 아크산. 방금 며느리라고 인정했어요. 역시 날 신부감으로..?" " . . . 장난치지 마시오." 말장난에 넘어간건 아크산이면서. 어깨를 으쓱하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 . 그보다 조카며느리라고 했어요?" "그렇소." "헤에- 국왕전하가 삼촌? 그럼 큰아버지에요?" 그의 손에 올려놓았던 손을 거두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멀어져가는 내 손을 보다가 다시 날 보았다. " . . 국왕 전하는 나의 숙부요." . . . 숙부? 여긴 장유유서를 따르는게 아니라 능력으로 왕이 되는건가? "아크산의 아버지는요?" 내 의문을 잠재우기 위해 물은 질문은, 그에게 별로 좋지 않은 질문이었던것같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만 자도록 하오. 시간이 너무 늦었소."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오건 뭔데요?" " . . . 내 실수였소." "실수했다고 말만으로 되는거에요? 거기다가 납치까지 해놓고?" 어두운 선실 안에서 약간의 흔들림을 느끼며 살짝 눈을 감았다.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날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 . . 무엇을 바라시오?" "흐음 . . 뭐든 들어주시는거에요?" 머리가 아프다. 아마도 . . 머리가 아픈 이유는 약 때문이겠지? " . . 그대를 세브릭들에게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면." 역시 그건 안되는건가? 모자 속에 숨죽이고 있을 하브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벽에 기대었다. 그리고 눈을떠서 그를 보았다. "그럼요 . . 한가지만 들어줘요." " . . 말해보시오." "후에 돌려보내달라는 것 말고, 단한가지 내가 바라는것을 들어줘요." " . . 후에?" "후에." " . . . 알겠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싱긋 웃고는 그에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잘자요." " . . . 잘자시오." 뒤돌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이 닫히는 모습까지 보았다. 모자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움직임과 함께 은은한 빛이 감싸안고 있는 금발이 눈 앞에 보였다. 아름다운 금안을 멀뚱히 보다가 슥슥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브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제정신이야?" "글쎄요. 내가 제정신같아요?" "아니." " . .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거에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고 . . 어지럽고 . . 나한테 약쓴거, 아무래도 라세스겠지. 그래, 분명 라세스일꺼야. "저 자식이 널 납치했다고!" "네네, 아까 들어서 알아요-" "근데 어떻게 이렇게 태평한거냐!" 방방 뛰는 하브를 멍하니 보다가 피식 웃었다. "내가 태평한걸로 보여요?" "당연한 . . " 그가 말하다가 멈칫하곤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그를 보다가 싱긋 웃었다. " . . . 너 . . 뭐야." "뭐가요?" "태평한게 아니었던거야?" "태평할리가 없잖아요. 납치된건데." 눈을 감고 하품을 하며 베개 속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게 느껴졌지만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웅얼거렸다. "내일 얘기해요. 내일 . . " "미쳤어? 얼른 대책을 세워야될꺼아니야!" 성질은 있는대로 내면서도 아까 내 말 때문인지 큰 소리는 내지 않는 그가 귀여워서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 . . 귀엽네요. 안고자도 되요?" "시! . . . 끄러워." 빽 소리를 지르려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대책은 무슨 대책이에요. 여긴 지금 어디?" " . . 바다 ." "그럼 우리가 있는 곳은?" " . . 배 . ." "그럼 우리가 도망간다면 있어야 할 것은?" "배 . ." "이제 알았죠?" 하브가 있는데로 인상을 구겼다. 톡톡 손가락으로 그의 미간을 건드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우린 도망갈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하브가 날 안고 날아갈꺼에요?" " . . . 내가 왜?" "그봐요. 그럴꺼면서 무슨 대책은 대책이에요." 서서히 소리가 멀어졌다. "당분 . . 간은 . . 그냥 . . 음 . . 그냥 조용 . . 히 . ." 떠듬떠듬 잠에 취해서 마지막 말을 뱉어내지도 못한채로 잠 속에 빠져들었다. " . . 어떻게 하실꺼죠?" " . . 없다면 있게 해야겠지." 늦은 밤. 아직도 항구에는 세브릭과 사켄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엘이 사라진걸 안 저녁부터 돌아다녔지만 배는 구할 수 없었다. 하빔 왕국까지 가는 배는 없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대답이였다.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가달라고 했음에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해일이 심상치않아, 가기엔 많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세브릭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어두워진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바다로, 지금까지 함께해왔던 엘이 하빔왕국으로 가고있다. 혹시라도라는 생각에 여관으로 돌아가보았지만, 역시나 엘도, 아크산들도 없었다. "퍽-" 둔탁한 소리에 세브릭이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있던 사켄이 주먹으로 다시한번 벽을 쳤다. " . . 쓸데없는 짓 할 시간 있으시면, 한번 더 생각하시는게 어떨까요." "엘을 놓친건 너다." "그렇다고, 여기서 네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따질까요? 엘은 이미 하빔왕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중립국이라고 하나, 그들이 수상하다는 것은 이미 대륙의 모든 나라가 알고 있을껍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거지?" "그들이 엘을 어떻게 대할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곁으로 가야하죠. 지금 여기서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는데." 세브릭이 이를 악 물었다. 처음에는 사켄에게 하는 듯 하던 말이, 뒤로가선 거의 혼잣말처럼 들렸다. " . . 저기 . . " " . . . 뭐죠?" 뒤에서 한남자가 멋쩍게 웃었다. "세브릭님과 사켄님이십니까?" " . . . 우릴 아는자인가?" 사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남자는 손을 설레설레 젓다가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말했다. "저기 . . 알기도 하고 . . 모르기도 하고 . . " " . . 그게 무슨 소리죠?" "어쨌든, 사켄님과 세브릭님이 맞으십니까?" " . . 맞다." 남자가 잘됬다는 듯 활짝 웃더니 품 속에서 서한을 꺼내서 세브릭에게 넘겨주었다. "라세스라는 분이 전해달라하셨습니다." " . . 라세스?" 라세스의 이름에 멈칫하던 세브릭이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흐릿한 불빛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서한을 펼쳤다. 〔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 라세스.G〕 "까득-" 자기도 모르게 서한을 구긴 세브릭이 훽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서한 말고 더 전할게 있나요?" "아 . . 그리고 . . 그 . .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만 . . " 모락모락 세브릭의 주위로 몰아치는 살기에 식은땀을 흘리던 남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세브릭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저 . . 배를 구하셨습니까?" " . . 있다면 이곳에 있지 않았다." "역시 . . 그렇다면 저희 배로 가시겠습니까?" " . . 무슨 . . " 세브릭과 사켄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의심어린 눈빛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수작이죠?" "예? 수 . . 수작이라니요?" 당황하는 남자를 보던 사켄이 그에게로 다가가 꽉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게 뚫어지게 쳐다보던 사켄이 물었다. "왜 너희 배로 우릴 데려간다는 것이냐고 물은거다." "그 . . 그러니까 . . 아! 이 . . 이 서한도 . ."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남자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더니 급히 품을 뒤져 다른 서한도 꺼냈다. " . . 왜 그걸 빨리 주지 않았죠?" "저 . . 그 . . 아크산이라는 분이,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행동하면 보여드리라고.." " . . . " 서한과 남자를 번갈아보던 세브릭이 그 서한을 받았다. 그리고 천천히 펼쳐서 불빛에 대었다. 〔 의심마시오. 믿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 역시 그녀를 데려가는 것을 원치 않았소. 그대, 엘을 구하고 싶지 않소? - 아크산.J.하빔〕 옆에서 보고 있던 사켄이 남자를 보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그를 보던 사켄이 말했다. " . . 배는 어디지?" "그 . . 저 . . 따라오십시오." "사켄." 남자가 걸음을 옮기자 사켄이 그를 따라가려했다. 세브릭의 부름에 사켄이 그를 보았다. " . .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가실껀가요?" "아크산을 믿진 않는다." 사켄이 세브릭을 보던 시선을 거둬 남자를 보며 말했다. 남자는 세브릭이 불러서 멈칫거리더니 다시 앞서 걸어갔다. 서한을 전한 남자가 세브릭의 곁을 지나쳐가고, 사켄 역시 그의 곁을 지나쳤다. "그는 엘에게 목숨을 빚졌다." " . . . " 사켄의 말에 세브릭이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아크산은 그 빚을 잊지 않고 있을꺼다." " . . . 정작 엘은 그가 미인이라서 구해준것 뿐일텐데요." 세브릭이 말했다, 사켄이 자리에 멈추더니 세브릭을 보았다. 사실이었기에 사켄이 부정치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만 믿을 수 밖에 없다." "뭘 믿는다는건가요?" " . . 목숨." " . . . 목숨?" 사켄이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난 엘이 쥐고있는 그의 목숨을 믿는거다." * * *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보이는건 온통 바다.바다.바다. . .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 . . 자살충동을 느낀다는데. 사람마음이라는게 이것저것 유혹적이고 흔들리면 괜찮은데. 괜히 바다를 보면 싱숭생숭해지고,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진단 말이지. " . . 바람이 찬데, 나와있어도 되는거야?" 슬쩍 고개를 돌려 말을 거는 라세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색한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난 아직 라세스를 용서하지 않았어요." " . . 미안하다니까 . ." "사람 하나 죽일뻔해놓고, 미안하다는 말이 나와요?" " . . 내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항의는 해야겠는데. 치사량은 아니었다니까?" "난 죽을뻔했어요." 그가 푸욱- 한숨을 내쉰다. 그런 그를 무시하곤 다시 바다를 보았다. 대륙에서 하빔 왕국까지는 오래걸리면 보름, 짧으면 일주일을 조금 넘기면 도착한다고 한다. 어떻게 두배 이상 차이가 날 수 있냐고? 나도 그게 이상해서 선원들한테 물어봤었다. 선원들의 대답은 바다가 워낙 변덕스럽기 때문이란다. 폭풍우는 예삿일이고, 거친 해일, 미쳐날뛰는 몬스터들. 그런 녀석들을 모두 겪다보면 자연스럽게 보름이 걸린다고 한다. 뭐, 하지만 지금은 바람이 순풍이고 . . 이상하게 몬스터들도 얌전하다고 하니까. 해일만 조심하면 된다고. "엘, 많이 화났어?" "글쎄요, 조금 화나지는 않았을껄요?" "화 풀어-" 작게 분노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화는 이제 다 풀렸는데, 그가 괘씸하고 또 평소에 그렇게 서글서글하니 능청스럽던 그가 쩔쩔매는게 재밌어서 계속 화난척 하는 것 뿐이니까. 내가 화났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날 잠재울때 쓴 약이 성인 남.자.한테 쓰는 양이었다는 것. 여자였던 내가 견디기에는 독한 양이었다. 그래서 깨어났을 때 그렇게 두통을 앓았겠지. "어떻게하면 화풀꺼야?" " . . 얼마나 미안해요?" "음 . . 많이. 납치해온 것보다도 약 때문에 더 미움받으니까, 더 속상하네. 엘같이 매력적인 여자한테 미움받는건 충격이거든." "하여간, 라세스 말 잘한다니까요." "화 풀꺼야?" "라세스가 내 질문에 성실히 답해준다면요." 내 말에 라세스의 녹안에 의아심이 서렸다. 그리고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대답해주지. 뭐가 궁금한데?" "흠 . . 일단, 라세스의 얘기를 묻는다면 실례인가요?" "무슨 얘기? 이상형이나 몸매?" " . . 뭐랄까. 역시 라세스 저랑 비슷하네요." "그런가?" 씨익 웃어넘기는 라세스를 보며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바람으로 인해 머리가 이리저리 흩날렸다. 귀찮아져서 하나로 붙잡고 묶을 것을 찾는데 라세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곤 손목에 매고있던 갈색 끈으로 내 머리를 묶어주었다. 그의 손에 내 머리를 맡기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일단, 지금 처음 봤는데. 그 끈은 뭐예요?" "응?" 슥슥 머리를 매만지는 그의 손길에 나른해지고,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내 머리를 묶어주고 있는거 말이에요." "아- 이거 . . " 곧 다 묶었는지 더 이상 머리에서 그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됬어요?" "응." 빙글 돌아서서 라세스를 보았다. 그는 그리움이 담긴 애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어도 되는거에요?" " . . 안될껀 없지." 그가 나와 같이 난간에 기대었다. 복잡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 나 역시 바다에 시선을 두었다. 짙푸른 바다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예전에 잠깐 얘기한 적 있었지?" "흠 . . 워낙에 한 얘기가 많아서." "그랬던가?" "그랬었죠." 그가 씨익 웃으며 날 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난 전쟁 때문에 부모님을 잃었고, 또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지. 그리고, 지금 네 머리를 묶고 있는 끈은 . . 그 연인이 꼭 다시 돌아오라고 내 손목에 매어줬던 거야." " . . 그런 걸 내 머리를 묶어주는데 써도 되는거에요?" "벌써 몇년 전 일이니까. 이제는 그냥 습관처럼 매고 다니는 것 뿐이야." 그가 빙긋 웃고는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곧 손이 멈칫하더니 머리를 부드럽게 훑고 내려왔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여인들이 떠나는 연인에게 다치지않기를 바라는, 꼭 다시 살아돌아오라는 마음을 담아 끈을 매어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니까 말이야." "그녀는 하빔 왕국 사람인가요?" " . . 그랬다면, 그런 바보같은 짓 하지 않았을테지." 날 보던 그가 다시 바다를 보았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하빔 사람이 아니었어. 난 전쟁의 동태를 보기 위해 대륙으로 나갔고, 대륙에서 그녀를 만났지." 라세스의 녹안이 부드럽게 풀리었다. 처음보는 그의 슬퍼보이는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그의 옆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아버지는 전쟁으로인해 서연합의 첩자로 들어가있다가 발각당해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돌아가셨어." 위로해줘야할까? 하지만 섣부른 위로와 동정은 오히려 당사자를 비참하게 할뿐이다. "그래서, 그 분노를, 슬픔을 억지로 전쟁 쪽으로 돌렸어. 서연합을, 정확히는 아버지가 첩자로 들어가계셨던 카슘 제국이 전쟁에 졌으면해서 제국의 정보를 캐는데 필사적이었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작게 숨을 들이마쉬었다. " . . . 그 때, 그녀를 만난거에요?" 내 말에 그가 날 빤히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당시 카슘 제국 황제의 시녀였어." "헤에 . . 의도적이었겠네요." "그래, 의도적이었지." 라세스의 눈가가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난 그녀가 내게 어떤 존재가 될지 전혀 몰랐던거야." "그 당시 황제라면 . . 지금 황제와는 다른거에요?" 한참 진지하게 말하던 라세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 . . 몰랐던 거야?" "세브릭이 나한테 매일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 이유가 뭔지 가르쳐줄까요?" " . . 뭔데?" "난 이 대륙의 기본상식조차 모르는 바보거든요." 싱긋 웃으며하는 말에 그가 조용하더니 픽 웃었다. "바보가 오히려 더 무서운 법이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거거든." "잘아네요." " . . 그녀가 그러했으니까." 그가 눈을 감았다. 바람이 그를 위로해주듯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휘젓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 . . . 그녀는 순수했어. 맑고도 당찼지." 내 손에 머리를 맡긴채 그가 말했다. "그랬어요?" "응, 그래서 속이기 쉬웠어." 그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래서였을까 . ." 그의 목소리가 젖어들어갔다. 머리정리를 끝내며 손을 내리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떻게 알고 있었던걸까." 천천히 그는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누구였는지 . . 맑았기에, 속일 수 없었던 걸까." 작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모른척하며 바다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말이에요." " . . . "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요." " . . . "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말. 듣기 싫으면 기억에서 지워버려요." " . .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거야?" 그의 젖은 목소리에 웃음이 서려있었다. 그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얀 눈이 있다고 생각해봐요. 눈은 그저 존재했고, 그랬기에 어떤 더러움에도 물들수 없었다고 쳐봐요." 머리 속에서 눈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차가운 순수,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완연한 맑음. "어떤 더러움도 몰랐던 눈이 땅에 내렸다고. 그래서 그 하얀 눈에 흙이 묻고, 다른 무엇이 묻어 더러워졌다고 그렇게 생각해봐요." " . . 전쟁이 일어나고 . . 내가 살던 하빔에서도 눈이 내린적이 없는데?" "가정이잖아요, 가정." "응 . . 그래서?" "눈은, 정말로 땅에 내려옴으로 인해 더러워지는 걸까요? 그전까지 어떤 더러움에도 물들지 않고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 . . . " 모든 존재는 작든 크든, 어떤 더러움에 물들 수 밖에 없다. 하얀 백지는 존재할 수 없다. "눈은 정말로 그저 존재하고만 있었던 걸까요?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존재할수 있는걸까요?" " . . .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바다를 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어느새 팔에 머리를 기대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젖어있는 녹안이 새삼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로 순수하고, 맑기만 했을까요?" " . . . " 라세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 안타까워졌다. "그 어떤 더러움도 모르고, 그저 존재하기만 했던 눈처럼 그 어떤 더러움에도 물들지 않았을까요?" " . . 지금 내게서 그녀를 앗아가려는거야?" 감고있는 두 눈이 떠지며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가 보였다. "그저 말해주고 싶었을뿐이에요. 아까 말했잖아요, 듣기 싫으면 기억에서 지워버리라고." " . . . 그래서?" "그녀를 미화시키고, 죄책감 가지지 말란 말이었어요." " . . 죄책감 . . 이라 . . " "그녀가 무슨 일 때문에 죽은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 일에 라세스가 연관되어있다는 건 알겠어요." " . . . 어째서." "그럴 수 밖에요. 라세스가 그런 표정을 짓는데, 누가 모르겠어요?" 내 말에 그가 멍하게 있더니 쿡쿡 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난간에서 일어나 날 보았다. " . . 진짜 매력적이네."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봤자, 아무런 감흥이 없어요." 그가 가만히 날 바라보다가 평소와같이 웃음지었다. "예전에, 널 처음 봤을때." "음 . . 늑대 때문에 상처 입었을 당시?" "아니, 아크산이 남자한테 유혹받았을 때." " . . . 헤에- 그 때 있었어요?" "응."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간 위에 올려놓고 있던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쓱 하고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어버렸다. 풀어진 머리카락의 끝을 잡고 만지작거리며 그가 말했다. "아크산이 그러더군. 너를 여인으로 보냐고." "음 . . 그가 그런 말을 했어요?" "그래서, 난 그랬지. 어린 아이한테 관심 없다고." " . . 어린애라는 거에요?" "난 그때 널 몰랐으니까 말이야." 그가 기분좋은 미소를 띄우며 웃더니 내 손목을 잡고는 끈을 매어주었다. 그의 손목에선 세번정도 감겨있던 끈이 내 손목에선 네번정도 감기었다. " . . . 이거 뭐에요?" 손목에 묶여진 끈을 보곤 그를 보았다. 그가 내 머리를 다정하게 흩뜨렸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젠, 널 여자로 보겠다는 의미." " . . . " " . . 정도로 해둘까?" " . . 재미없는 농담이네요." 작게 한숨쉬고 그를 보았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농담으로 생각하는건데?"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더라고요." " . . . 그런 말이 있나?" 고개를 끄덕이고 빙긋 웃었다. "난 소유욕도, 독점욕도 심한 여자거든요." " . . 의외네." "그래요?" 어깨를 으쓱이곤 뒤돌아섰다. "이미 한 여자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남자를 내 남자로 받아들이기에는 . . " 빙글 뒤돌아서며 활짝 웃었다. 그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마음이 좁은 여자라서요. 그리고 진심으로 말하지도 않으면서 얼렁뚱땅 꼬시려고 하는 점도 마음에 안들고." 손가락으로 똑바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진심으로 날 여인으로 생각하고 싶다면. 시간이 좀더 흐르고 정말로 그녀를 추억으로만 떠올릴 수 있을때 말해봐요. 그때는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줄테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겨 선실로 향했다. 뒤에서 라세스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문을 닫았다. 난간을 부여잡고 큭큭거리던 라세스가 배를 부여잡곤 바다를 힐끔 보았다. "조금은 진심이 담겨있었는데 말이야. 정말 대단하다니까 . . " 멍하게 바다를 내려다보던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 . 널 추억으로만 떠올릴 수 있을때 말하라니 . . " 쏴아- 하는 파도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애써 잊을 필요는 없는거였구나." 그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 . 아직 널 추억으로만 떠올리기에는 . . 시간이 모자른 듯 싶어." 검푸른 바다로 그리움이 깃든 슬픔이 방울지어 떨어졌다. * * * 라세스 번외 * * * 얼굴을 모르는 한남자가 촛농으로 봉인되어있는 편지를 건네주며 말한다. " . . 이 편지를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그 편지를 받아 편지를 뜯었다. 그 편지를 읽을 동안, 남자는 어머니를 무감정한 눈동자로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숙이고 나가버린다. 남자가 나가고도 한참을 . . 정말 한참을 그 편지를 읽고 계시던 어머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친다. "아- 아, 여보. 여보!" 어머니가 종이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아 우신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어머니 울지 마세요." "아가, 오- 내 아가. 라세스. . 어떻게 하니. 이제 어떻게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 말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어째서 우시는지 몰랐다. 그저 저 편지 때문에 우시는거라 짐작만 할뿐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안고 우셨다. 그 편지를 읽을때보다도 더 오래 . . 하녀들이 결국은 실신한 어머니를 방으로 옮길 때까지도 어머니는 우셨다. 계속해서 아버지의 이름인 '가비스'를 중얼거리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눈물을 그치시지 않으셨다. 그때, 어머니가 방으로 옮겨지며 어머니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가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어머니가 우시는가 싶어 그 종이를 보았다. 〔 이 소식을 알리게 되어 참으로 유감이라 생각합니다.   왕국을 위해 그동안 많은 공로를 세우셨던 가비스.G 백작께서 임무 도중 사망하셨습니다.   시신만이라도 돌려받기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 . . 〕 그 뒤의 내용은 잘기억나지 않는다. "라-세-스!"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깜빡이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장난끼 가득한 표정의 소녀, 힐다가 날 보며 허리에 척하니 손을 얹고는 말했다. "왜 여기있는거야!" " . . . 여기 있으면 조금이라도 널 더 빨리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실은, 약속장소까지 가려다가 귀찮아졌거든. 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 "정말로, 못말린다니까." 자신의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분홍빛으로 볼이 발그레해졌다. 참 사랑스러운 소녀다. 솔직하고, 밝고, 어떤면에선 가끔 감당하지 못할정도로 당차기도 하다. 그런 그녀는 내가 원하던 사람이 아니다. 그저 필요에의해, 그녀의 곁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디갈까?" 힐다가 팔짱을끼며 말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췄다. "라세스!" "반나절동안 못봤잖아. 보고 싶었어." "정말로-"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힐다에게 다정하게 미소지어줬다. 그녀가 힐끔거리며 날 보다가 눈을 감았다. 앞으로 조금이면 돼.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분홍빛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끌어당겼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었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떨고 있는 그녀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내게 힐다, 그녀의 존재는 그저 나에게서 부모님을 뺏어간 카슘 제국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한 필요에의해 만나는 사람일뿐이다. "삐이이-" 울음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창문을 열었다. 팔을 뻗자 순식간에 새 한마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날개를 퍼덕이다가 책상에 앉는 새를 보다가 새의 발목에 묶여진 종이를 보았다. 돌돌 말려있는 종이를 꺼내 펼쳤다. 〔 카슘 제국 황제의 동태 파악.〕 차분하게 종이를 읽어내리고 붉은 촛불위에 올려놓자 검은 불씨를 토해내다가 결국 재가되어 사라졌다. 새에게 간단한 먹을 것을 먹이고 작은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잉크를 찍어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짧은 내용의 글을 썼다. 〔 카슘 제국 황실 상태 이상.〕 얇은 다리에 두번을 묶고는 팔에 새를 올린채 창 밖으로 날려보냈다. 푸드덕거리며 멀리 날아가는 새를보다가 창을 닫았다. "똑똑-" 노크 소리에 멈칫하고 문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빼꼼 고개를 내민 힐다를 보며 작게 미소지었다. "무슨 일이야? 이 늦은 밤에." "에헤- 사실 같이 잤으면 해서 . . "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그녀를 훑어보았다. 잠옷차림에 부스스한 머리. 베개를 꼭 껴안고있는 모습이 . . " . . . 이리 와." 안절부절못하다가 내가 두팔을 벌리며 말하자 환하게 웃고는 품 속으로 달려들었다. 한품에 쏙 안기는 그녀를 다독이다가 말했다. "잠이 안와?" "응- 요즘 계속 꿈을 꿔." "무슨 꿈?" 부드러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잘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려나. 귀찮군. "응- 라세스가 . . 떠나는 꿈." " . . . 응?"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내 손이 멈추자 그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말했다. "있잖아 라세스." "응." "꿈에서, 라세스가 계속 날 밀어냈어." " . . 그랬어?" "응, 내가 가지 말라고 . . 가지 말라고 그렇게 울면서 매달렸는데. 라세스는 차갑게 날 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어." " . . . 그래 . . " "그래서 소리쳤어.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했잖아. 그 말은 어디로 가버린거야? 왜 날 떠나는거야?' . 그렇게 . . 계속 계속 말했어." " . . . 내가 뭐라고 그랬어?" 상당히 현실적인 꿈이야. 나는 너와 함께 있을 수 없어. 떠날꺼니까. 너의 꿈은 곧 현실이되겠지. "그랬더니 라세스가 말했어. '널 사랑한적은 단 한번도 없어.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 끔찍해. 널 떠나는 이유는, 단지 널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서 . . 그래서 . . . 무서웠어." " . . 그런 일이 있을리가 없잖아." 그녀의 머리를 꼭 껴안아주며 속삭였다. "응 . . 알고있는데도. 눈물이 났어. 지금도 봐 . . 눈물을 멈출 수 없는걸." 어깨가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쉬- 넌 내게 봄과 같은 사람이야. 따뜻하고 다정하고 . . 밝아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야. 난 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고 .. 말했잖아?" "알아 . . 하지만 . . 라세스 . . " "응." "지금도 . . 라세스는 . . . 응. . " 그녀가 잠시 웅얼거리더니 색색거리며 조용히 잠들었다.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품 속에서 잠든 힐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있다가 곧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하얀 잠옷 위에 동그란 원이 생기는 것을 보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귀찮게됬군." 이제 그만 떠나야하나?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 침대에 뉘이며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으음-"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곧 내 쪽으로 돌아누워 손을 더듬거렸다. 그리곤 내 손을 잡고는 만족한듯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저 그녀의 손에 내 손을 맡겼다. 내 손에 자신의 얼굴을 대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힐다의 모습에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 . . 라세 . . 스 . . 음 . ." 작게 아려오는 심장에 손을 올렸다. " . . 뭐지?" 왜 이러는거지? 가슴 위에 손을 올린채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의자를 당겨와 앉았다. 그리고 손을 빼지 않은채 턱을 괴고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었음에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 . 찬란하여 슬픈 봄과같은 여인을. 미안해, 힐다. 넌 다시 혼자가 될지도 몰라. 재잘거리는 힐다의 말을 듣다보면 꽤나 건질 것이 많다. 아무래도 황제의 시녀이다 보니, 이것저것 들리는게 많은가보다. "그래서 있잖아. 지금 궁 분위기가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음 . . 뭐라고 할까 . . 살얼음을 걷고 있는것 같달까?" " . . 그정도야?" 힐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짓발짓을 해가며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는 굉장히- 굉장히 무서워. 지금 궁에 있는 시녀들은 모두 폐하를 두려워해." " . . 그건 당연한거 아니야?" "아니아니- 황제 폐하이기에 두려워하는거랑은 달라. 폐하께선 매일 한명에서 두명씩 자신의 방으로 들이시니까. 그래서 모두 두려워하는거야." "방으로 들여?" "응, 그렇게 들어간 애는 나중에 만신창이가 되서 나와.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어. 멍들고, 피가 나고 . . 결국은 궁을 떠나게 되버려." " . . . 그정도야?"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에 두려움이 . . 그리고 분노가 서렸다. "내 친구들도 폐하에게 불려갔다가 결국 목을 매었어." " . . .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런 사람이 어째서 우리 제국의 황제인거지?" "쉿- 힐다!" "아. . . 미 . . 미안해." 방금 힐다의 발언은 만약 누군가가 들었다면 대역죄인으로 잡혀가도 할말이 없는 말이었다. 난 그녀에게 작게 주의를 주고는 말했다. "조심해." "응?" " . . . 아니야." 조심하라니? 누가 누굴 조심하라는 거지? 요즘은 자꾸만 이렇다. 힐다만 보면 나도 모르게 이상해진다.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는 달콤한 온기에 눈을 감았다. 그녀의 주위에서는 온풍만이 부는가? 처음에는 심장의 한구석만 아려오더니 이제는 전체가 아려온다. "라세스." "응." "라세스는 내 친구처럼 그렇게 가버리면 안돼." 내 품에서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아- 또다. 심장이 . . 마음이 아려온다. "가면 . . 안돼 . . ?" 작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갈께."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서 미안해. "네 곁에 있을께."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서 미안해. "사랑해, 힐다." " . . 나도." 항상 네게 거짓말해서 . . 미안해, 미안해. 밤이 늦었음에도, 힐다가 오지 않는다. 길에 앉아있다가 이미 어두워져 보이지도 않는 길의 저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항상 해가 지기 전에는 달려와 내 품에 안겼는데. 어둠 속을 몇시간이나 노려보고 있었을까. 그림자 속에서 비틀거리며 오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누군가도 날 보았는지 자리에 멈춰섰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그 누군가가 소리쳤다. "오 . . 오지 마!" 멈칫, 자리에 멈춰섰다. 힐다였다. 두려움에, 고통에 찬 그녀의 목소리였다. " . . . 힐다?" "오지마 . . 오지마, 라세스." " . . . 무슨 일이야?" 한발짝 그녀에게 다가섰다. 작게 어깨를 떨던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 . 힐다 ." "보이고 싶지 않아. . . 다가오지마." 한발짝 더 떼려다가 그녀의 말에 다시 굳었다. . . . 보이고 싶지 않아? " . . . 폐하가 말하셨어 . . " "뭘?" "밑에 것들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날 끌어내릴 수는 없을꺼라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식이 감히 아비의 자리를 넘보다니. 있을 수도 없고 . . 있어서도 안되는거라고." " . . 왜 그런말을 내게 하는거야?" "황태자 전하가 황제 폐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데." "힐다!" "흑, 내 이름 부르지마!" 그녀에게 두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를 내 품에 끌어당겨 울고있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빨갛게 변한 두눈, 여기저기 멍들지 않은 곳이 없고 피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 . . 이게 뭐야." 옷가지 역시 너덜너덜했다. 자세히 보니 제대로 서지도 못해 내 팔에 기대어 떨고있었다. "지금 . . 이 꼴이 뭐냐고!" "화내지 마 . . 화내지 마 . . 라세스 . . 라세스 . . " 그녀가 두팔로 내 목을 감싸안았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지만, 낯선 자가 느껴졌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그녀 자신과 나뿐이었음에도. " . . . 끌려들어간거야?" "떠나 . . 라세스, 이제 네 나라로 돌아가."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그녀를 떼어내고 뚫어지게 시선을 마주했다. " . . . 네 나라라니. 무슨 소리야." "나 알고 있었어." " . . 뭘?" "라세스가, 카슘제국 사람이 아니라는거." " . . . 무슨." "또, 날 사랑해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거." 심장이 저릿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라세스가 어디 사람인지는 나도 잘모르겠어. 하지만 라세스가 나와 함께 있었던 이유가 제국의 정보 때문이였다는 것은 알아." "힐다!" "그러니 . . 이제 돌아가 라세스." 그녀가 운다. 너무나도 서글프게 . . 울어서 . . 울지만 너무나도 예쁘게 웃는다. "난 라세스를 사랑해서 모른척했어. 계속 곁에 있어줬으면해서 .. 하지만 이제 안돼. 이렇게 되었으면서도 라세스와 함께하려하면 안돼." "상관없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그녀가 도리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싫어. 내가 . . 내가 라세스와 함께있는 것이 싫어." " . . 힐다 . . " 그런 말 하지마. 네게 상처준 것은 나. 널 떠나려 했던 것은 나. 거짓사랑을 말했던 것도 나. 왜 . . 왜 이런 마음이 되는거야. "난 라세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많이 . . 많이 행복해졌으면 .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 .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힐다가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니까 라세스." " . . . 응 ." "여기서 너의 슬픔과 괴로움 . 안좋았던 일 내게 주고 . . 넌 가." " . . . " "네 나라로 . . 돌아가 라세스." 그녀의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 . . . 돌아올께." "라세스 . . " "돌아올께. 내 나라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 . 돌아올께." 이곳에서 내가 제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분명 추격자와 암살자가 붙을것이다. 그럼 도망자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상관없지만, 힐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다. "그러니까 . . 기다려줘. 지금까지 거짓말만 했지만 .. 믿어줘." "라세스." 눈물어린 분홍빛을 보다가 가만히 입맞췄다. "이제 . . 네게 진실만을 말할 수 있도록, 밀어내지 말아줘." " . . . 라세 . . 라세스 . . "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나의 나라, 부모님, 내 역할 . . 모든 것이 상관없어.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게 사랑을 속삭이면서. 어느새 거짓이 진실이 되고. 필요가 사랑이 되었잖아. "사랑해 . . 사랑해, 힐다. 나의 봄." "라세스!" "응?" "손 . . 손 줘봐!" " . . 손?"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아픈 얼굴로 어색하게 웃더니 내 손목에 갈색끈을 감고는 질끈 매었다. " . . . 이게 뭐야?" "내가 살았던 예전 마을에서의 관습이야. 떠나는 사람에게 무사히 돌아오라고 해주던건데 .. 나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주는 걸로 의미가 바뀌었어." 그녀가 수줍게 웃고는 그 끈에 입맞추고는 날 바라보았다. "다녀와." " . . 다녀올께." 서로 가볍게 시작한 입맞춤이 그녀가 내 목을 감싸고, 내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면서 깊어졌다. 부드러이 얽히었다가 떨어졌기에 난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아쉬움에 자꾸만 뒤돌아보다가 그녀가 붕붕 손을 흔드는걸보고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녀올꺼, 빨리 갔다오자는 생각에 발을 재촉했다. 옆으로 기사들이 지나갔다. 검을차고 험악한 눈으로 가는 것을 보며, 무슨 일이 났나 보다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마을에서 거의 벗어났을 때, 뭔가가 불안했다. " . . 뭐지?" 이건 무슨 느낌이지? "세 . . 라 . . 라세스 !! 이보게!!" " . . . 누구 . . " 뒤를 돌아보자 뛰어오고있는 옆집의 노인이 보였다. "여기서 뭐하는게야!!" " . . . 예?" "지금, 지금 힐다가 어떻게 됬는데!" " . . . 힐다가 왜요?" 심장이 쿵쾅거린다. 불안한 예감이 내 몸을 감싼다. "빨리 가보게, 빨리 가봐!" 멍하게 노인을 보다가 다시 성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갔다. 무수한 사람들을 지나치고 심장이 터질만큼 쉬지않고 뛰어가다가 힐다가 있는 곳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고꾸라졌다.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다가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걸음 두걸음 . . 힐다의 집에 다가섰다. 문손잡이를 만졌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문을 열면, 힐다는 날 보며 놀라겠지. 왜 온거냐고, 벌써 갔다온거냐고. 그럼 난 놔두고 간게 있었다고 . . 네가 너무 보고싶어서 . . 어쩔 수 없이 다시 오고 말았다고 . . 그러면 되는거다. 숨을 들이마쉬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 . 보게 되었다. " . . . 힐다 ." 문까지 흘러내린 붉디 붉은 . . 피. 한쪽 구석에 쓰러져 눈을 감고 있는 . . 나의 봄. "힐 . . 다 . . ?" 그녀에게 다가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손이 떨려왔다. 함께 있자고 . . 이제 더 이상 네게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고 . . 그 말 한게 바로 어제야. 우리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자고 했던게 어제야. . . 이런게 어딨어. 이러는게 . . 이러는게 어딨어.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뺨을 매만졌다. 항상 발그레하던 따스한 볼이 . . 차갑다 . 너무나도 차가워. "힐다 . . 힐다."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되네이며 중얼거렸다. " . . 라세스, 자네 얼른 도망가." "어르신 . . " 헉헉 거리는 옆집 노인을 보다가 물었다. "왜 . . 힐다 . . 가 . ." " . . 요즘 황제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죽이던가?" " . . . 어르신 . . 이건 아니잖습니까 . . 이건 . . 이래선 안되잖습니까 . ." "그래 . . 이유를 굳이 붙이자면 . . 나라의 기밀을 들었다는군." 멍하게 노인을 보다가 그녀를 보았다. "얼른 자네도 도망가. 여기 있으면 자네도 죽어." " . . . 이건 . . 이건 아니잖습니까 . ." 이러면 안돼지 . . 이러면 . . 뚝뚝 . . 그녀의 얼굴 위로 내 눈물이 떨어졌다. 내 삶의 의미가 되었잖아. 나의 봄이잖아. " . . . 봄이 . . 사라졌습니다." "라세스, 얼른 떠나게." "봄이 없는데 . . 다른 계절을 맞아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난 시간이 멈춘거야. 내게 이제 시간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그녀가 없는데 . . 더 살아봐야 무엇합니까."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딱딱한 어깨가 . . 더 슬프다. 마지막 인사도 못했잖아. 그 입맞춤이 끝인거야? 네게 더 . . 더 해줄 말이 있었는데. 더 함께 얘기하고 . . 웃고 . . 많이 더 많은걸 할수 있을줄 알았는데. "이제 . . 제게 남은건 그녀와 함께하는 것 뿐입니다." 내 삶은 . . 여기서 끝이다. " . . 그렇다면, 그 목숨 내게 주겠나." 낯선 자의 목소리에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짙푸른 청안 . . . " . . . 아크산님 . . " 그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나와 시선을 맞췄다. "여기서 한심하게 이러고 있을텐가?" " . . . 전 원래 한심합니다." 사랑하는 여인 하나 지키지 못한 내가 한심하지 않다면, 도대체 누가 한심하지? "그녀가 가는 마지막길에서 말인가?" " . . . " 마지막 . . 그래 . . 마지막 . . ? "상관없습니다. 아크산님의 말씀대로 . . 마지막입니다." 그녀를 더 꼭 품에 안았다. 곧 날 보던 그가 내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 질질 끌고 나갔다. "큭 - 이거 놓으십시오! 힐다가 . . 힐다가 안에 혼자 있습니다. 혼자 있습니다!" 발버둥쳤지만 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밖에 나와 내팽겨쳐지고 다시 일어나 들어가려 할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잘봐라." "무 . . " 그의 품에서 동그란 무엇이 나오더니 불이 붙자 치직거리며 타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발로 그것을 툭 걷어차 집 안으로 넣었다. 뭔가 촥 하고 물주머니가 터지는 것같은 소리와 함께 잠시후 집 안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 . . 연 . . 기 . . ?" 힐다가 . . 아직 힐다가 안에 있다. 정신이 없던 와중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들어가려했다. 그에 아크산님이 다시 날 막아서며 걷어차버렸다. "왜 이러십니까!!" "잘보라고 했다." "큭 . . 힐다가 안에 있습니다. 홀로 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닥쳐라." 멈칫하며 그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 . . 라세스.G . 입니다 ." "틀렸다. 네 이름은 라세스다." " . . . "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다시 말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 . . 라세스입니다." "틀렸다." " . . 무엇이 말입니까?" 그가 지그시 날 내려다보더니 힐다가 있는 집을 보았다. 이제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을 . . 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네 이름은 라세스.G다." " . . . 무슨 말을 하시는겁니까." 그가 날 보았다. "힐다라는 여자와 라세스는 저 불 속에서 죽었다." " . .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넌 라세스.G라고 했다. 그러니 라세스는 죽은거다. 그러니 라세스.G인 넌 살아가라." " . . . 아크산님." "라세스만은 죽인채, 죽이지 못한다면 마음에 묻고 살아가라. 그게 네가 유일하게 저 여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다." " . . .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죽는다면, 그녀는 누가 기억해주지?" " . . . " "네가 죽는다면, 그녀를 누가 사랑해줄수있지?" " . . . " 고개를 떨궜다. 힐다 . . 힐다 . . 나의 봄. "살아가라. 죽으려했던 힘으로 살아." " . . . 제가 왜 살아야합니까." "지금까지 말은 힐다라는 여인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내 필요에 의해서다." . . . 필요 .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크산.J.하빔. 하빔왕국의 왕위계승자. " . . 제가 당신의 필요에 의해 당신의 곁에 있는다면, 당신은 제게 무엇을 해주실수 있습니까?" 힐다가 내게 가져다주었던 봄이 되어줄 수 있나? 당신은, 내가 살아가야할 이유가 되어줄수 있는건가? "힐다라는 여인을 잊지 않겠다." 그의 말에 입을 닫았다. "네가 힐다라는 여인을 사랑한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고개를 떨구었다. "네가 그녈 위해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후에 증인이 되어주겠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오르는 집을 보다가 노인을 보았다. 멍한 표정으로 집을 보고있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 떠나겠습니다." " . . . 그래 . . 잘가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약속하신겁니다." 살아갈 이유가 없어. "약속하지." 그렇지만 . . 어제 네가 그랬잖아. 아픈일, 괴로운일 . . 모두 여기 두고 가라고. 손목을 꽉 부여잡았다. 갈색끈을 느끼며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보다가 뒤돌아섰다. 널 위해 살께. 내게 평생 봄은 없겠지만. 언젠가 널 떠올리면 참행복했다고. 너와 함께 한 시간들이 . . 참 행복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살아갈께. 라세스는 저 불꽃 속에 죽었으니까. 힐다, 소중한 나의 연인. 이제 평생 내 봄은 오지 않겠지만 그 멈춰진 시간속에서 살아갈께. 하빔은 . . . 봄이 없는 나라니까. * * * 라세스 번외 끝 * * * "야! 일어나!!!" "으음 . . 하브 . . ?" 내 머리를 마구잡이로 당기는 하브 때문에 억지로 눈을 떴다. " . . 나 방금 잠들었어요 . . 하브도 알잖아요 . . " 베개에 얼굴을 묻은채 웅얼거리자 그가 크게 소리쳤다. "일어나라고, 멍청아!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잠이나 쳐자려고 하는거야!!!" " . . 하브, 이샤링족인데 말이 너무 험해요. 도대체 어떻게하면 그렇게 자라는거에요?" 그것도 그 에프릴 아래에서! "젠장, 이스틴 그 자식 때문에 . . 아니 그게 아니라 자지 말라니까!" "졸려요 . . 졸려졸려." "어떻게 지금 잘 수가 있냐고!!" "어떤 상황인데 . . 으악 !!" 쾅- 하고 침대 위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곧 주체할 수 없이 바닥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굴러다니다가 간신히 침대를 잡고 매달렸다. "뭐 . . 뭐에요?!" "폭풍이야." " . . . 폭 . . 폭풍? 윽 !!" 꽉 힘 주고 있는 나와는 달리 하브는 여유롭게 허공에 둥둥떠있었다. " . . 하브 엄청 얄미워요. 나랑 고통을 함께 할 생각 없나요?" "내가 미쳤어? 사서 고생하게." " . . . 제발 하브, 그 예쁜 입에서 미쳤냐느니 젠장이라느니 . . 쳐잔다느니 . . 그런 말을 하지 말아요." "왜? 내가 내 입으로 하고 싶은 말 하겠다는데, 뭔상관이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싱긋 웃었다. "자꾸 그러면 . . " " . . 그 . . 그러면 . . 뭐." "막아버리는 수가 있어요." " . . . 뭐?" 후훗- 내가 받아보지 못한다면 하면 되는거지 뭐. 음흉한 내 웃음을 읽고는 하브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쨌든 여유로운 생각은 저 멀리로 던져버리고 흔들리는 걸 간신히 버티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너 어디가는거야?!" "상황을 알아봐야죠. 여기서 멍하니 있어봤자 뭐해요?" "바보냐?! 지금 여기서 나가면 너 같은 여자애는 순식간에 쓸려나갈껄?!" "그렇다고 이 선실 안에서 탈수기 속의 빨래마냥 있는건 사양이에요." "탈수기? 그게 뭐 . . 야!!" 문을 열자마자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문이 쾅 열렸다. 그 덕분에 문틀을 붙잡고 숨을 헐떡이다가 힐끔 밖을 보았다. "돛을 접어!" "선장님, 파도가 너무 높습니다!" "젠장, 최대한 파도에 순응 . . " 바람 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잘들리지 않은정도로 거센 바람이였다. 높은 바도로 배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의 남자들조차 밀고있는 바람을 느끼다가 입을 열었다. " . . 하브, 당신 말 들을껄 그랬어요." 이젠 바람 때문에 문도 안닫힌다. 위험, 위험, 대위험 사태. 여기서 튕겨져나가면 그대로 바다로 퐁당. 물고기밥이 될지도. "그러니까 열지 말라고 했는데!" 하브가 모자 속에서 콩시랑대는걸 흘려들으며 멍하니 갑판 위를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다가 . .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한순간 커다란 파도가 배를 후려갈기면서 손에 힘을 잃고 문 밖으로 튕겨져나갔다. "꺄악!" 와우- 나도 이런 여성스런 비명을 지를 수 있었던가? 그렇지만 이대로 죽는건가 . . 맙소사 . . 물고기밥이라니 . . 익사한 시체가 제일 보기 안좋다는데 . . 눈을 질끈 감으며 허공 속을 날고 있는데, 강한 힘을 담은 손이 끌어당기더니 날 자신의 품 속으로 가두었다. "으 . . 으왓?" 빠르게 뛰고있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아크산이 배 안쪽에서 날 안지않은 다른 팔로 난간을 부여잡고 다른 팔로는 날 품에 안고 있었다. " . . . 나이스캐치!"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 . 그대는 선실안에 있지 않았소? 어째서 문을 연것이오?" "충동이랄까 . . 탈수될 수는 없었어요." " . . . 탈수된다니 무슨 소리요?" 그의 말에 어색하게 웃고는 또 한번 거세게 배를 치고 튀어오른 바닷물에 아크산도 나도 쫄딱 젖어버렸다. "콜록- 콜록-" "괜찮소?" 역시 바닷물이 짠것은 어디든 똑같나보네. 하필 웃고있을때 바닷물을 맞아버리다니. "나름 . . 괜찮은것 같아요." 하지만 대단하다. 역시 섬나라 사람이라 그런가? 그는 이런 날씨에서도 꿈쩍도 않고 차가운 눈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거세게 배는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의 품은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그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그가 멈칫하곤 나를 보았다. "아크산이야말로 괜찮아요? 팔 안아파요?" " . . . 괜찮소." "다행이네요." 일단 . . . 이제 어떻게하지? 바람소리, 그리고 선원들의 급박해보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멍해졌다. 검은 파도가 사납게 몰아치며 어떻게든 배를 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선장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네게는 아까 내린 지시가 있잖아! 이 머저리가, 당장 니 자리로 돌아가!" "악- 선장님, 파도가 거셉니다!" "젠장, 돛은 제대로 접은거 맞나?!" "바람이 너무 거세서 접기 힘든 상황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접어! 안그러면 우리 모두 죽어!!" 파도가 철썩철썩 배를 침몰시킬 듯 연속으로 쳤다. 사람들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젖은채 배 위를 뛰어다녔다. "악!! 살려줘!!" 어떤 사람이 뛰다가 넘어져 배 밖으로 튕겨져나갈뻔했을때 여러 선원들이 달려들어 붙잡아 올렸다. "크 . . 쿨럭. . " "이 빌어먹을 새끼가, 정신 똑바로 안차려?!" "죽고 싶냐, 이 새끼야?!" "거기서 뭐하는거야! 빨리 빨리 움직여!" 급박한 상황이었다. " . . 이대로 다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건가요?" "걱정마오. 이 배의 선원들은 모두 몇십년간 바다에서 살아왔소. 그들은 바다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법을 알고 있소." 그의 말대로, 곧 돛이 접히고 배가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까처럼 긴장으로 바짝 얼어붙었던 배 안이 조금 느슨하게 풀리었다. 그 때문인지, 아크산이 날 꼭 안고 있었던 팔에도 살짝 힘이 빠졌다. "나 잡고 있느라 많이 힘들었어요?" " . . . 그대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겠소." 차분히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그저 웃어버렸다. 응- 나도 여기서 죽으면 굉장히 억울할 듯 싶으니까. 하지만 긴장이 풀어진 것에 바다가 심술이 난것일까? "촤아아-" 엄청난 파도가 다시 한번 배를 휘저었다. "우지끈-" 그리고, 배의 난간은 우리 두사람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아크산이 바다로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그의 손은 그 와중에도 나를 배로 밀어넣었다. 멀어지는 푸른 눈동자에 담긴 내 모습을 보다가 재빨리 부서진 난간 옆에있던 멀쩡한 난간을 부딪히듯 부여잡고 떨어지는 그의 팔을 잡았다. "큭!" 사람은 위기의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물 때문에 미끄러지는 손을 간신히 부여잡고 어깨를 난간에 댄채 다른 한팔로도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어깨가 부서질듯 아파오고, 팔이 끊어질듯 저려왔다. "뭐하는 것이오! 그 손 놓으시오!"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이를 악물고 그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다. 거대한 파도가 자꾸만 배를 후려치고, 잔인한 바람이 자꾸만 방해했다. "절대로 . . 안놔요! 아니, 못놔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바닷물때문에 눈이 따끔거렸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그가 정신을 차렸는지 급하게 말했다. "놓으시오! 이러다간 그대도 떨어질지도 모르오!" "시끄러워요! 지금 힘들어. . 큭 . . 죽겠으니까 말시키지 마요!" 윽- 하필 예전에 늑대에게 제대로 당했던 상처가 있던 어깨다. 깨끗하게 나았었는데, 이미 한번 상처입었던 어깨는 반대쪽보다 약한듯싶었다. "놓아주시오! 제발, 그대까지 죽게할 순 없소!" 절박한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또 무시했다. "엘!" "누구 맘대로 죽어요!" " . . . 엘 . . " 작게 흩날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당신, 예전에 내가 구했어요. 근데, 지금 나보고 당신을 놓으라고요? 저 끔찍한 바다속으로 떨어져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데?! 난 죽어도, 당신은 절대로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 없어요!" 제발, 누가 좀 도와줘. 그의 팔에서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서서히 서서히 . . 그가 밑으로 떨어지고 . . 내 손은 그의 손을 향해 다가간다. 제발, 지오 .. 지오, 이 사람을 죽게 할 순 없어요. 지오, 도와줘요. . 아니 지오가 아니래도 상관없어. 제발 . . . 제발 누가 좀 도와줘, 도와달라고, 빌어먹을 !!!! "죽지 마요. 아크산, 제발 . . 제발 내 손 놓지 마요." 멍하니 날 보고 있던 그의 눈이 슬프게 웃음지었다. "아크산 . . " 불안해졌다. 미치도록 . . 미치도록 두려움에 젖어들어갔다. "미안하오." 그가 다른 한손을 들어올려 내 손을 잡았다. "아크산!" 안그래도 미끄러지던 내 손이 그의 손에 쉽사리 풀렸다. 멀어진다. 그가 . . 그가 . . 자신을 닮은 바다 속으로 . . 저 심해 속으로 끌려들어가려한다. 그리고 내 손이 풀리는 순간 누군가가 내 위로 겹쳐지며 단단한 팔을 뻗어 아크산의 팔을 잡았다. "누구 좋으라고 여기서 죽으려고 하는겁니까!" 반쯤 넋이 나간채 고개를 돌렸다. 라세스가 필사적인 얼굴로 아크산을 잡고 있었다. 눈을감고 있던 아크산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그가 나직히 말했다. "그대, 늦은 것 아닌가?" 조금은 여유가 생긴 목소리였다. "그 때 제게, 죽으려했던 목숨 달라고 했던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 . . . 시끄럽다. 빨리 끌어올리기나 하는 것이 어떤가?" 라세스가 서서히 그를 끌어올렸다. 곧 아크산의 손이 배 위에 닿고, 부서진 난간 속으로 그가 들어왔다. "잘하셨습니다. 꼴이 말이 아니군요." 라세스가 빈정거리며 말하자 아크산이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엘, 다친 곳은 . . " "짜악-" 아크산의 얼굴이 돌아가고, 라세스가 커다래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천천히 내게로 고개를 돌리는 그를 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아있었다. "폭풍이 멈추고 있습니다!" "오오, 신의 보살핌이로군!" "파도도 가라앉고 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여기저기서 와와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만 딴세상인 듯 조용했다. " . . . 엘 . ." "당신, 지금 나한테 엄청 못할짓 한거에요." " . . . "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마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과해요." " . . 엘 ." "사과하라고요." 곧 그와 라세스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 . 생각할 틈도 없었다. "놓지말라고 했잖아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눈을 꼭 감고 소리를 질렀다. "놓지 말라고 했는데, 왜 놔! 놓지 말라고 했잖아. 놓지 말라고! 안놓는다고, 못놓는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거센 파도,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만이 여전히 내 고막을 울렸다. 어둠 속에서도 반복되는 와중에 누군가가 날 끌어안았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커다란 손이 등을 다독이며 말했을 때야 . . 떨림이 서서히 멈췄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그의 슬픔으로 일그러진 웃음. 손이 놓아졌을때, 그 끔찍한 기분. "흑 . . " '두근- 두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흐 . . 흐윽 . . . 흐아앙 !!" 천천히 뛰고있는 그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 . 난 그제야 참고있던 불안과 두려움을 토해낼 수 있었다. 어두운 선실안, 유일한 빛이라곤 타오르는 촛불 밖에 없다. 너무 울어서 정신이 멍한 가운데, 곧 또 다른 빛인 하브가 은은하게 반짝거리며 왔다갔다거리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무슨 에프릴이냐?! 널 납치한 녀석을 구해준것도 모자라서, 울긴 왜 우는데!" "와- 에프릴과 맞먹는다는거에요? 그럼 나 엄청 착하고 순수하단 소린데." 키득거리며 웃다가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직도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이 아까의 충격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 말 안들려? 구해주긴 왜 구해준건데!" "그럼 죽게 내버려둬요? 내가 죽을지언정, 절대 죽게 못놔둬요." 조용히 대답하자, 곧 선실 안은 조용해졌다. 나즈막한 내 숨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곧 하브의 목소리가 그 고요함을 깨고 다가왔다. "야." "'야'가 뭐에요, '야'가. 하브, 내 이름 잊어먹었어요? 와- 바보바보." "누가 바보야!!!!! 젠장, 그래 ! 야 . . 가 아니라 인가 . . 아, 진짜!!!" 방방 뛰고 있는 하브가 상상이 되어서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렇게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겨우 진정한 그가 작게 심호흡하더니 뚫어져라 날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뽀뽀하려면 뿅-하고 커져서 해줘요. 작으면 감질나기만 하지, 만족하진 못할것 같은데-" " . . . 울더니, 미친거냐?" "이래뵈도 여잔데요. 미친거냐니.. 그 말 두번째에요, 두번째-" 그것도 남자한테 . . 눈보신에 좋은 미남들한테만 . . 그가 머뭇거리며 날 보더니 입을 열었다. "촛불 . . 꺼줘? 잘꺼냐?" 작은 걱정을 담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성질은 성질대로 내놓고 또 저렇게 걱정해주고 . . "괜찮아요, 촛불은 꺼지면 안되거든요. 유일하게 어둠을 밝히는 그 불마저 꺼버린다면, 세상은 정말 암흑으로 물들꺼에요." "저 촛불 껐다고 세상이 암흑으로 물들진 않아." 그는 모르겠지. 아무리 촛불로 세상을 밝히려고 해도,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어둠이 있다는 것을. 하브가 머뭇거리며 내려다보는걸 보며 손을 내밀었다. "촛불을 끄게되면 하브도 못보잖아요. 아- 하긴 자체발광이니까 괜찮은가?" "헛소리하지마." 투덜거리면서도 내 손위로 얌전히 서는 그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안이 금방 찌푸려졌다. "야, 누워. 너 거의 실신하다시피해서 선실로 들어온거 기억안나?" "음- 그랬던가. 기억 속 멀리, 까마득한 일이라서요." 절대 그렇지 않지만. "도대체 왜 구해준건데?" "누구? . . 아 , 아크산이요?" "그 녀석이 널 납치한거 너도 알잖아?" "납치범이기 전에 미인이잖아요-" " . . 그게 뭐?" "아크산 같은 미인이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데 외면했다가 그가 죽는다면 .. 크흑, 그 얼마나 통탄할 일이에요? 세상에 백번 무릎꿇고 사죄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요!" 열심히 말하다가 어이없다는 듯한 하브의 시선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작게 미소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이유도 물론 있지만 . .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뭐가?" "내가 그를 구했었는데,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 허락도 없이 버리려했으니까요." "그 녀석 목숨이 네꺼야?" 하브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목숨이 내꺼냐고? "그렇진 않지만, 그의 목숨에 관여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요. 거기다가 괘씸하잖아요. 내가 그렇게 놓지 말라고 했는데, '미안하오.'란 한마디만 하고 그렇게 홀라당 손을 놔버리다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아크산의 죽음이 . . 이렇게나 두려운 일이었는데 . 하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넘실대는 붉은 촛불이 아름답게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 . . 붉은색하면, 이제 내게 생각나는건 세브릭밖에 없네. 살짝 웃음짓고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나 사켄이랑 세브릭한테 못할짓 했구나. 늑대한테 죽을뻔하고, 과일 먹고 중독 된척하고. " . . 사과해야겠네요." "누구한테?" 그의 맑은 금안을 내려다보다가 빙긋 웃었다. "지금쯤 열심히 쫓아오고 있을 내 사람들한테요." 한편 엘이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을때, 긴 청발을 휘날리며 뱃머리에 앉아있는 남자가 있었다. "바람이 찹니다. 들어가시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라세스의 말에 앉아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뚜벅거리는 발걸음으로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온 라세스에게 아크산이 말했다. "처음엔 그저 흥미였던것 같다." "뭐가 말입니까?" 어리둥절한 라세스의 표정에 아크산은 짙은 검은빛으로 넘실대는 바다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니고 동연합의 주요인물인 세브릭과 사켄과 함께 다니는 소녀. 흥미를 가질만 하지 않은가?" "아크산님?" 조용히 이름을 부르는 라세스의 말에도 아랑곳않고 아크산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 다음엔 귀찮은 상황에서 날 도왔고, 당일 늑대에게 나 대신 상처를 입었지." " . . . " "전쟁을 멈추고 싶다는 것은 솔직히 말도 안된다 생각했다. 그래서 지켜보자 정했고." 그가 바다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짙은 푸른 눈이 바다와 같이 고요히 흔들렸다. "생명의 숲에서 이종족 대표의 동의를 얻은 것을 들었을때는 그저 놀라워서 그녀를 보게 되는거라고 생각했지." " . . .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아크산이 바다쪽으로 내밀었던 손을 꽉 쥐었다. "흥미가 관심으로 바뀌었지." ". . . 지금 아크산님이 무슨 소리를 하시고 계신지, 전 잘모르겠습니다." 라세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크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세스를 보았다. 그리고 파도소리만 잔잔히 요동치는 곳에서 그가 말했다. "관심이 무엇으로 바뀌었는지, 그대는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알고싶지도 않습니다." 라세스가 애써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곤 뒤돌아섰다. "그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아크산님도 얼른 들어오십시오." ". . . " 라세스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던 그가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듯 말했다. "처음엔 그저 관심정도로 생각했기에 몰랐었는데. 오늘에서야 알게되었지."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깨달음은, 때론 후회보다 늦군." 다음날 해는 어김없이 구름사이로 작은빛을 흘려보냈다. 검회색빛 바다가 서서히 푸르게 변해가며, 빛이 닿는 곳마다 눈부시게 반짝였다. 어슴프레한 새벽이 지나가고 아침이 다가왔다. 그리고 갑판으로 나온 아크산과 라세스는 할말을 잃고 멍하니 시끌벅적한 배를 내려다보았다. "어제 제가 본게 꿈이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 역시 그대와 같은 꿈을 꾼것같은 기분이군." 라세스의 말을 받은 아크산이 차분한 눈빛으로 선원들 사이에 낀 엘을 보며 말했다. "크악! 거짓말이야! 정말 처음하는 것 맞아?" 반짝이는 대머리의 한남자가 나무 막대같은 것을 던져버리며 묻자 엘이 싱긋 웃었다. "진실을 외면하고 싶겠지만,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요. 그리고 정말로 처음 하는것 맞아요." 우락부락한 선원들 사이에서, 조금은 겁이 날듯도한데 그녀는 전혀 개의치않고 있었다. " . . 지금 그녀가 뭘하는거지?" "*트버라는 도박입니다. 저 나무 막대에는 1-12까지의 숫자가 있는데, 총 5개까지 나무패를 들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2개 이상을 들어야합니다. 들고있는 나무 막대가 '트버'라고 불리는건데, 트버에 적혀있는 숫자의 합이 최소 10이상이 되어야하고, 숫자의 합이 '13'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이기게 됩니다." (*트버 : 지오가 만들어낸 '이계'에서 존재하는 게임.) 라세스가 설명하는 가운데 다시 트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지는 사람은 엉덩이로 이름쓰기-" 엘의 맑은 목소리에 선원들의 걸걸한 웃음소리가 섞여들어 시끌벅해졌다. 트버를 하다 또 졌는지, 대머리의 선원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는 괴성을 질렀다. 다른 선원들이 어서 하라며 재촉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난 남자가 엉덩이로 자신의 이름을 쓰는것을 보면서 밝게 웃고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그 선원을 보다가 아크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묘한 분위기로 얽혀있던 그들의 시선은, 곧 엘의 소리없는 입모양에 아크산이 피식웃는걸로 끝났다. 엘이 다시 트버로 시선을 돌리자 아크산이 중얼거렸다. "각오해야 . . 하는 것인가 . . " 한참을 시끄럽게 놀고있는데, 한 선원의 목소리에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하빔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섬이 보였다. "어제 폭풍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웃었다. 엘들은 섬나라, 하빔 왕국에 곧 상륙했다. " . . . 아직 먼것인가?" 낮은 사켄의 저음에 선장이 흠칫 놀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 . 그것이 . . 어제 폭풍도 있고해서 . . 예상보다는 일찍 도착할 것 같습니다." " . . 앞에 간 이들과의 차이는?" "저기 . . 아마, 그들은 지금쯤 도착했을 것 . . 같습니다만 . ." 사켄의 눈빛이 차가워질수록 선장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괜한 화풀이하지 마시고, 기다리시죠." 여유로운 세브릭의 목소리에, 사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난간에 기대어 앉아있는 그의 화려한 장밋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여유롭군." 사켄의 말에 세브릭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여유를 가장한 조급함이라 해주시겠어요?" "조급해할것이 있나?" " . . 엘과 함께 생활했더니, 사켄도 그녀를 닮았나보군요." 세브릭의 말에 사켄이 눈을찌푸렸다. "무슨 말이지?" "그렇게 사람을 떠보듯 말하는 것 말이에요." " . . . 내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인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군요." 무표정한 사켄의 얼굴을 보던 세브릭이 작게 웃으며 하빔 왕국이 있을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희가 도착할 때까지 . ." " . . . " "제발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그가 작은 한숨을 쉬며 사켄을 보았다.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일까요?" " . . 확실히." 사켄이 그의 옆에 기대어섰다. 그리고 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얌전히 있기를 바라기보다는, 아크산이나 라세스가 그녀를 막을 수 있기를 바라는게 더 나을 것 같군." " . . . 명답이로군요." 세브릭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조용한 바다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조용하군요." " . . 그렇군." "엘이 납치되고, 그녀가 곁에 없는 것뿐인데 말이죠." 세브릭의 작은 목소리에, 사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브릭의 시선을 따라, 그 역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빈자리는 . . 우리의 생각보다 크군." "지금도 불쑥, 그녀가 맑게 웃으며 농담을 걸어올것만 같으니까요." 세브릭이 눈을 감았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사켄의 눈에 의아한 빛이 서린채, 세브릭을 보았다. "심심하군요." " . . 동의하지." 잠시도 조용할틈이 없었던 엘과의 여행에서, 그들은 이제 소란함에 더 익숙해져있었다. 사켄과 세브릭이 엘의 부재에 심심해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지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아크산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 . . 엘 ." "네?" " . . . 팔 . . 은 . .." "팔이 뭐 어때서요? 아, 내 팔 걱정해주는거에요? 좀 떨어져나갈듯이 아프긴하지만, 괜찮아요. 아크산을 구하기 위해서 희생한 팔인데, 이정도 아픔쯤이야 우습지 않겠어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아크산이 조용히 말을 삼켰다. . . . 나 화났어. 엄청나게 화났다고. 아크산 주제에, 감히 내 손을 놨다 이거야? 놓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지. 그러니, 이 정도 보상쯤은 당연한 것 아니겠어?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묵묵히 한쪽팔을 대준채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그 걸음을 따라 나 역시 열심히 걸었다. "이야- 보기 좋은데?" "그래요? 후훗, 작은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가는데, 저 예뻐요?" "그럼그럼, 엘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는 드물지." "아- 라세스, 가끔은 거짓말도 해줘야하는 법이에요." "그런가? 하지만 어쩌지. 내 입은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데 말이야." "정말 힘들것 같네요. 그렇지만 축복받은 입이군요." 라세스와 내가 주거니 받거니 농담따먹기 식으로 말을 나눌동안, 조용히 있던 아크산이 말했다. " . . . 누가 작은 아버지요?" "어머, 아크산. 정말로 모르는거에요? 국왕 전하 말이에요, 전하." " . . . 그 분이 왜 그대의 작은 아버지이지?" 아크산이 발걸음을 멈추며 빤히 날 보며 말했다. 그에 나 역시 옆에 멈추고, 충격받은 표정으로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아니었어요?" " . . . 아니오." "그럼 . . 그럼 나는 왜 데려가는건데요?" " . . 전하가 데려오라고 하셔서 . . " 한걸음 그에게서 멀어지며 한쪽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눈을 깜빡이자, 눈 안 가득 눈물이 고였다. "단순히 . . 단순히 정말 그것뿐이었어요?" " . . . . 엘?" 아크산의 당황한 표정에 고개를 젓다가 다른 한손 역시 입을 가린 손에 포개어놓았다. 금방이라도 미소지어진 입술이 보일것같아 조마조마했다. "아크산에게 . . 지난 과거 우리의 달콤한 나날들은 . . 거짓이었나요?" " . . . 무슨 . . " 당황으로 떨리는 푸른 눈동자를 보다가 힐끔 주위를 보았다. 선원들이 무슨 일인가 하며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근수근거리며 아크산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다시 쑥덕쑥덕거렸다. 좋아- 분위기 잡혔고. "날 . . 그냥 전하의 명령으로 데려온거였어요? 그래서, 그렇게 내게 다정히 대해주고, 상냥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준건가요?" " . . . 무슨 . . 소리요, 엘." 아크산이 다급히 손을 뻗으며 날 잡으려했기에 황급히 뒤로 한걸음 더 물러서며 소리쳤다. "손대지 마요!" " . . . " 멈칫, 굳어버린 아크산의 모습을 보다가 푹 고개를 숙였다. 가늘게 어깨를 떨다가 다시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 아크산에게, 저란 존재는 . . 그저 전하의 명령으로 인한것에 불과했군요." "그것이 아니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않고 걷기 시작했다. "엘!" "알았어요. 전하를 만나러가요." 뒤에서 부른 아크산의 목소리에 자리에 멈춰서서 말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기 위해 뒤돌아서며 최대한 힘겨워보이도록 웃음지어보였다. "아크산이 . . 바라는 것이니까요." " . . . " 내가 각오하라고 했지? "뭐야, 아크산님이 전하의 명으로 엘을 속인거란말이야?" "아무래도 그런것같은데?" "이야- 아크산님 그렇게 안봤는데 말이야." "가엾어서 어떻게해.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밝게 웃고 있었는데 말이야." 수근거림이 커질수록 아크산의 입매가 단단히 굳어갔다. 그리고 빤히 내 눈을 들여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살짝 윙크하며 뒤돌아섰다. 그제서야 내 계획을 알아챘는지 킥킥거리는 라세스의 웃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여전히 한걸음한걸음 조심스레 걸었다. 연극은 마지막까지 완벽해야하지 않겠는가? 계획이 성공한 것에대해 절로 흥이나서 마음속으로만 조용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타악- 하고 누군가 내 팔을 잡아챘다. 순간 짜릿하게 올라오는 아픔에 악 소리가 나려는 것을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크산의 청안이 크게 넘실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 . . 에헤-" 내가 심하게 장난친건가? 그렇지만 . . 어제는 정말 너무 화가 났었는걸. 다행이라 생각하고, 안심했었지만.. 그래도 괘씸한건 괘씸한거잖아 .. 에 . . 그치만, 그동안 내가 해왔던 것도 있고 . . 그렇다 치면 이렇게 보복하지 않아도 되었나 . . 무시무시한 그의 침묵에 급소심해진 내가 살짝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 . . . 내게 . . " " . . 네?" 장난이 심했던건가로 고민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그는 내가 움찔한 것을 눈치챘는지, 서서히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며 조용히 말했다. "내게 그대는 그저 전하의 명으로 인한 존재가 아니오." " . . 그럼요?" 화가 난건 아닌건가? 그럼 뭐지? 그를 멀뚱히 바라보자 그가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내 팔에서 손을떼며 혼잣말하듯 내게 물었다. " . . 잡아줄 것이오?" "뭘요?" "내가 . . 그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 . 그 때도 어제처럼 내 손을 잡아줄 것이오?" 내게서 서서히 멀어지는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아침햇살로 반짝여서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불안한 듯 굳은 입매가 안타까워보여서도 아니었다. 나는 그를 빤히 보다가 멀어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손바닥에 내 입을 맞추며 얼굴을 기댔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그를 보았을 때, 그의 시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 샐쭉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았다. 천천히 떨어지는 그 손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예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요?" " . . 무엇을 말이오?" "내겐." 그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즐거움의 여운을 즐기며 싱긋 웃었다. "미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갈 수 있는 용기가 없거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얼른얼른 하빔왕국의 국왕 전하를 뵈러가자고. 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진장 궁금하니까. 아마도 아크산의 삼촌이니까 . . 으흐흐흐- 무진장 미인이겠지? 음- 드디어, 사령관 아저씨를 제외하고 . . 아니, 사령관 아저씨도 나름 중후한 미중년이시긴 했지만 . . 미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느낌이 있었지. 미중년이라기 보다는 뭐라고나 할까 . . 항상 곁에 있어줄 것 같은 옆집 아저씨?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미중년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거기다가, 한나라의 국왕이시니. 지니고 있는 기품도, 분위기도 . . . 후훗- 기대해볼만하겠지? 아크산의 작은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무럭무럭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내 귀로, 바람과도 같이 아크산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 . 이제 내게 그대는 [아라]요." "응?" 자리에 멈춰서 머리만 슬쩍 뒤로 젖힌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 했어요?" " . . . 아무것도 아니오." 그가 내 옆을 지나쳐가는 것을 보며 의아함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스윽하고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멈칫하며 옆을 보았다. 라세스가 묘한 표정으로 아크산과 나를 번갈아보는 모습에 입을 열었다. "왜요?" " . . . 아니 . . 아무것도 . . " 그 역시 내 옆을 스쳐지나가려하길래, 그의 잔디같은 녹색 꽁지머리를 훽 잡아당겼다. "아 . . 아악- 으아- 에 . . 엘!!! 아 . . 아파-" "아프라고 한거에요, 아프라고." "으- 진짜 아프다니까. 노 . . 놓고 얘기해. 놓고!" 안절부절못하는 라세스의 모습을 보며 그의 귓가에 소곤소곤 내 목소리를 흘려넣었다. "아크산이 뭐라고 한건지, 라세스는 들은거죠?" "무 . . 뭘?" "들은거죠?" "못 . . 들었습니다아-" 힐끔 내 시선을 외면하는 그의 모습에 꽁지머리를 더욱 확 잡아당겼다. "아아악!! 엘!" 바둥바둥거리는 그의 모습을 잠시 즐기다가 싱긋 웃었다. "뭐라고요?" "아 . . 드 . . 들었어! 들었다니까?!" "그래요? 뭐라고 했는데요?" "에 . . 그게 . . 그러니까아 . . " 그가 또 우물우물거리며 말을 못하길래 손에 힘을 주려고 하자 그가 기겁하며 외쳤다. "말할께! 말한다니까!" "자- 말해봐요." 손을 놓자, 그가 투덜투덜거리며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살짝 미안해졌다. 너무 세게 잡아당겼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라세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 . . [아라]." "에-? 뭐라고요?" " . . . 아크산이 널 자신의 [아라]라고 했다고." "흐음- 그게 뭔데요?" [아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바다라는 뜻이야." " . . . 에? 바다요?" . . . 라세스의 말에 따르자면 . . 아크산이 나를 자신의 바다라고 했다는 건가? "[아라]는 곧 바다." 라세스가 아크산의 뒷모습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바다는 섬나라인 우리 하빔 왕궁에서 가장 절대적인 존재야." " . . 그럼, 날 자기의 절대자라고 한거에요?" 우와- 나 그럼 아크산에게 신급이라는 얘기? 지오, 어떻게 해요. 나 당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자가 되어버렸어요- "그런게 아니야." 라세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우리 왕국에서는." "하빔 왕국에서는요?" 내가 지오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에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며 킬킬거리고 있을 때,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대꾸했다. " . . 를 자신의 [아라]라고 해." " . . . 누구를요?" 잘못들은건가? 멍하게 라세스를 보자 그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는 상대. 혹은 자신의 연인." . . 거짓말. "그 존재를 자신의 [아라]라고 해." . . . . 멍하니 넋을 놓고 라세스가 이끄는데로 걷고 있는데, 문득 든 생각에 라세스에게 물었다. "저기 라세스." "응?" "그러니까 . . [아라]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 . 친구라던가. 친구라던가 . . 예를들면 친구라던가 .. 뭐 그런 뜻 없나요?" 내 말에 라세스가 멀뚱히 쳐다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곤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 그런 뜻이 있기도 하지." "아- 역시, 그런거에요?" 그래그래, 그런거야. 그런거라고 .. 아크산이 말한건 그저 친구라는 뜻으로 한걸꺼라고. 내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라세스가 말했다. "근데, 이상한걸." "뭐가요?" "그러니까 . . 엘이라면, 아크산이 널 자기의 [아라]라고 한것에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음? 그건 무슨 뜻?" "왜 평소처럼 . . '앗- 아크산같은 미인이 날 좋아한다니! 역시 내 매력은-'하면서 말이야." 라세스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정리하다가 툭 내뱉듯 말을 했다. "싫다고나 할까." " . . 아크산이?" "아니아니요- 내가 하고픈 말은 . . " 음 . . 뭐라고 해야할까..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라세스를 보며 말했다. "진지한 건 별로거든요." " . . . 에?" "엔조이엔조이라고나 할까요-" " . . . 엔조이가 뭐야?" "모르면 됬답니다." 싱긋 웃으며 아크산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진지한 것은 별로다. 만약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곳'에서 좋아하게 된다면 . .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니까. "있잖아요- 라세스." " . . . 뭘?" "라세스는, 사랑하지만 곧 떠날 사람이랑, 사랑하진 않지만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랑 누가 좋아요?" 뒤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그에 나 역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응? 누가 좋을 것 같아요?" " . . 그 말 마치, 널 말하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멀뚱멀뚱 날 보는 라세스의 모습에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눈치 백단이라니까. "음? 누가 좋아요?" " . . . 나라면 . . 곧 떠날 것이라도 사랑하는 사람." "헤에- 그거, 라세스의 그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 내 말에 라세스가 아무말 없이 웃는다. "그렇지만, 나라면 말이에요." 그래, 나라면 . . "나는 곧 떠날 사람보다는,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더 좋거든요." 그러니까, 아크산을 .. 아니, 아크산이 아니라 다른사람이라해도. "그 누구도, 내 마음 속에 두고싶지 않거든요. '이곳'에선." " . . 뭐랄까 . . 야박하네." "그런가요? 그렇지만요." 응 . . 그렇지만 말이야. "괜히 상처줄 필요는 없잖아요." " . . . 그거, 엘 나름대로의 배려인가?" 그 말에 멈칫했다가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내 뒤로 다시 라세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앞서나가고 있는 아크산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청발이 하늘하늘 움직이는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 . . 내가 당신의 [아라]라고요? 그거,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 아는건가요? . . . 그냥 친구였으면 해요. 난 '이곳'에서 누군과와 얽히고 싶지 않은게 솔직한 마음이라구요. 뭐- 미인을 보면서 즐거워하는건 상당히 기분좋은 일이지만서도. 라세스를 뒤로한채 걷다가 문득 든 의문에 입을 열었다. "그보다, 전하를 만나러 가는거니까, 왕궁으로 가는건가요?" "아니, 별궁으로." 그의 대답에 왜냐는 듯한 시선을 슬쩍 뒤로 던졌다. "네가 온건 비밀이니까." "오호, 나는 비밀의 연인 . . 들키면 안되는 존재? 뭐 그런거에요?" "뭐 그런 셈이지." 그의 대답에 힐끔 아크산의 뒷모습을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 . 뭔가- 기분이 묘해진다. 라세스와 대화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그 별궁이는 곳에 도착했다. 확실히 별궁이긴 하지만, 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크고 화려했다. . . 하지만 . . 역시 비틀림과 전쟁의 여파가 미쳤는지 그 화려함도 조금 낡은듯한 느낌여었다. "오셨습니까?" 한남자가 아크산에게 허리숙여 인사하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전하께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그가 일어서고는 앞서가기에 우리도 그를 따라갔다. 적막함이 맴도는 긴복도를 따라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새하얬을 기둥들도 회색빛으로 변하고, 아름다웠을 정원은 메말라 죽어버린지 오래. 마치.. 그래, 이 궁은 죽어버린것만 같았다. "이 안에 계십니다." 문 양쪽으로 호위병이 창을들고 서있었다. 그들을 힐끔보고 아크산과 라세스를 보자 .. .. 역시 그대들은 축복받은 존재야. 후광으로 인해 눈이 반짝반짝해지잖아. 홀로 싱글거리며 웃고있자 뒤에 서있던 라세스가 왜그러냐는 듯 툭하고 어깨를 쳤다. 그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젓고 크게 심호흡했다. 아크산이 뒤돌아서며 심해와 같은 청안으로 날 보았다. "준비되었소?" "물론, 난 언제나 준비되있는 여자에요."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건 미인과 만날지도 모른다는 떨림으로 넘겼다. 근데 . . 뭐가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걸까? "고해주게." 아크사느이 말에 우릴 안내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곤 크게 외쳤다. "전하, 아크산 자 하빔님과 라세스.G 백작님이 돌아왔습니다." "오- 들라해라." 문이 열리며 들어가던 와중에 라세스의 곁에 붙어 말했다. "백작?" 라세스가 힐끔 날 보곤 씨익 웃었다. 정말 .. 백작? 잠시만 . . 백작이라기엔 너무 젊잖아. 아- 아버지가 .. 그럼 자리를 물려받았겠구나. 그래도 백작이라니 .. 하빔도 망했네.. 라세스가 백작 .. 라세스가 백작이라는 것에 패닉 상태에 빠져있다가 아크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크산 자 하빔, 전하의 명을 완수하고 귀환하였습니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터라, 나 역시 그러고 있었다. "일어나, 고개를 들게. 우리 사이에 뭐 이렇게 절차를 따지느냐." 전하의 말에 망설이다가 모두 결국 고개를 들고 일어서기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힐끔 왕이 있을 자리를 쳐다보았을때 예상을 빗나가는 전하의 모습에 살짝 실망했다. 확실히 그는 아크산과 같은 피가 흐르는듯 청발에 청안을 지녔다. 유들유들해보이는 눈매와 입가의 미소는 온화해보이기까지 했다. 거기다 약간 비스듬히 앉아있는 전하는 내 예상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한 .. 삼십대 중후반 . . 이랄까. "이리 가까이 오너라. 아- 라세스 경도 수고가 많았어." "감사합니다, 전하." 살짝 고개를 숙이는 라세스의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우린 할걸음, 두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난 순간 마주친 청안에 자리에 멈춰섰다. "음? 거기 숙녀분이 엘인가? 호오- 정말 흑발에 흑안이로군." 싱글벙글 웃으며 깍지를 끼고 바로 앉는 전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부드러이 웃었다. "전하의 위엄에 제 심장이 떨려오는군요. 엘이라고 합니다, 전하."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한숨 돌렸다. 손가락 끝부터 오싹하며 굳어가기 시작한다. 마치.. 그래 사자앞의 토끼가 된 기분이랄까.. "예상과 다르구나. 짐은 그대가 소녀라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숙녀였어." "감사합니다. 전하야말로 제 예상보다 더 미남이시라, 제가 더 놀랐습니다." "하하- 그러한가?" 저 시선안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미인의 눈 안에 콕 박혀있는건 상당히 기분이 좋지만 말이야. 주먹을 꽉 쥐었다. 손안가득 땀이 차기 시작했다. 처음이네, 이런 더러운 기분. "헌데 전하, 절 부르신 연유를 알고싶습니다만." 얼른 용건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다.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기 싫다. 전하라 불리는 저 남자의 눈은 .. 너무나도 차갑게 비틀려있다. "오- 그렇지, 그렇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밖에서 병사가 들어오더니 아크산과 라세스를 떨구어 버렸다. "전하!" "이게 무슨!" 놀란 표정의 그들을 보다가 양 옆에서 내 팔을 붙든 병사를 보았다. "이건 또 무척 흥미로운 상황이네요." "그러한가? 확실히, 보통 계집은 아니로구나, 이 상황에서도 놀라지않다니." 푸른 눈 가득 조롱을 담은채 날 보던 그가 내 턱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순간적인 아픔에 눈가를 찌푸리며 똑바로 그를 보았다. "그래, 동연합과 이종족 연합으로부터 종전을 얘기했다지?" "그뿐만 아니라 동의도 받아내었지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그가 픽 웃더니 말했다. "하하- 천한 평민 주제에 감히 하빔 왕국의 왕인 내게 고개를 드느냐?" 그가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가 뒤돌아서며 다시 말했다. "뭐하느냐? 저 발칙한 계집의 무릎을 꿇히지 않고!" "전하!" 아크산의 목소리와 함께 무릎 뒤쪽에서 누군가의 발길질로 힘이 빠져 털썩 무릎을 꿇었다. 헤- 양팔은 잡혀있고, 무릎까지 꿇다니.. 상황 참 뭐같네. "전하! 그녀에게 왜 그러십니까!" 아크산이 막고있는 병사를 헤치고 나오려다 뜻대로 되지 않는지 전하에게 외쳤다. "아크산, 내 귀여운 조카야. 우리 하빔의 최대 목적을 잊었더냐? 저 작은 계집하나때문에 일을 그르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아크산의 격렬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슨 개가 짓는다는듯 대꾸하며 웃었다. 그에 아크산 역시 병사들에게 팔을 붙잡힌채 말했다. "그렇다해도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합니다. 그녀가 무릎 꿇어야하는 이윤 없습니다!" "평민 계집이 하빔의 국왕인 내게 빳빳히 고개들고 말하는 것을 두고 보라는 얘기더냐?" "고개를 들라한것은 전하십니다!" "내가 들라한 사람은 너와 라세스경이지, 저 계집이 아니다." . . . 저거 억지처럼 들리는건 내 귀가 잘못된 탓인가? 가만히 상황을 두고보려다가 입을 열었다. "천한 계집인 제가 뭘 몰라 전하께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헌데 전하에게 딱 한가지 알 수 있는게 있군요." "무엇을 말이냐?" 천천히 날 훑어보는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적어도 차한잔할 여유는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조롱 섞인 그의 청안을 똑바로 마주하며 여유롭게 말했다. "전하께선 제가 두려우신가봅니다." " . . 두렵다?" "두려움이 아니면 성가심이겠지요. 그렇지 아니하십니까?" 내 말에 적막감이 감도는 와중에 차디찬 하빔의 추위가 날 덮쳐왔다. 무릎이 시큰거리며 아파온다. 뼈를 울리며 올라오는 냉기에 몸이 덜덜 떨리려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흐음. 똑똑한 계집이구나. 아니면 눈치가 빠르거나." 그가 한발짝 내게 다가와 스윽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마주했다. 곧 그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허나 . . " "짜악-" "전하!!" 고개가 돌아갈정도의 힘이었지만 내 양팔을 잡고있는 병사들 때문에 넘어지진 않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건방지구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하가.." "음?" "아크산과 같은 미인이라 참지요." " . . 무슨 소리더냐?" "미인이 아니였다면, 지금 이 상태로 입다물고 있진 않을껍니다." 지오가 날 얼마나 예뻐하는지 알아? 지가 국왕이면 다야?! 여자 뺨을 때리다니! 최악이야- 최악이라고! 아으- 미인이라는 것에 감사하라고. 하긴 . . 미인이 아니라고 해도 . . 지금 이 상태에선 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볼이 욱씬거리고, 입안이 따끔거렸다. 아무래도 . . 터진거겠지? "흐음-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리 건방진 것이냐?" 흥미를 담은 그의 눈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그를 보면 . .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이런 상대일수록 냉정을 잃으면 바보가 되는건 자신이다. "저 계집을 옥에 가두어라." "전하!" 아크산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그를 보았을때, 그는 몸부림치며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선이 마주쳤을때, 싱긋 웃어주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뜰때 내 손으로 직접 목숨을 거두겠다." 그리고 그가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영광으로 알거라." 오싹 소름이 돋는걸 무시하며 병사들에게 끌러가다시피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 " . . 뭐냐?" 무표정한 얼굴의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내일 뵐때까지, 몸 건강하시라구요." 그래, 내일 . . 무슨 수를 써서든 당신의 머리 위에서 내려다봐주지. 옆에서 강하게 미는 힘에 순간 넘어질뻔했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 . 여자를 이렇게 대하다니, 너무하는거 아니야? 생각보다 거칠게 나오는데, 이 아저씨들? "빨리 걸어라." "걷고 있다구요. 밀지만 않으면 더 빨리 걸을 수도 있고." "뭐야? 계집, 네 걸음이 얼마나 느린줄 알고있냐?" "남자가 되가지고 고작 그정도도 못참아요? 이거 정말 한심하네. 나중에 연애할때도 그렇게 말할꺼에요?" "윽-" 둘은 뭐라고 말할려고 하다가 이내 무시하기로 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음- 조용해서 좋네. 그때 뒤에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멈춰서서 뒤돌아보자 라세스가 바로 뒤에 와있었다. "에- 라세스?" 내 부름에 잠시 숨을 고르던 그가 이내 괜찮아졌는지 날 보았다. "하아- 미안" "뭐가요?" 조금은 괴로운 듯, 미안한듯 애써 미소짓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톡톡 옆에서 붙잡고 있는 병사들을 건드렸다. "내 팔 좀 놔봐요." "뭐? 이게-" "놔라-" "예!" . . . 라세스가 하라면 되는거야? 이거 뭐 ..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유로워진 팔을 들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손목에 매어진 끈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이게 피로 물드는 꼴 보기 싫으면 빨리빨리 움직이세요." " . . 어?" 살짝 당황한듯한 그의 모습에 큭큭 웃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 아닌 농담, 진담 아닌 진담이에요." " . . 엘." "여기서 죽게되면 나 꽤 곤란하거든요. 뭐- 누군가가 내가 죽게 내버려두진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지오일지, 아니면 세브릭들일지 . . "그래도 자기가 자신의 [아라]라고 했는데, 그냥 버려두진 않겠죠?" 웃음기 섞인 내 말에 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모습을 뒤로하고 잔뜩 긴장한채 차렷 차세로 서있는 두 병사의 팔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뭐해요? 얼른 가자구요. 난 좀 쉬어야겠거든요." "어 . . 어!" 팔 역시 다시 잡으려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는데 뒤에서 라세스가 말했다. "거기 둘!" "네!" "예!" 내 팔을 잡으려다가 순식간에 경례하는 모습에 휘익-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한마디만 하지." 라세스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불쾌감이나 아픔을 준다면 . . 너희들의 정신과 육체 모두 지옥불에 담금질시켜주지, 알았나?" "ㅇ . . 예!" "알겠습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둘을 보다가 라세스를 보았다. 날 보며 가볍게 웃어주는 그에게 나 역시 박수를 치며 말했다. "꺄아- 오빠 멋져요-" "드 . . 들어가십시오." "고마워요." 정중해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들어갔다. 어두운 감옥에 들어가자 기분이 묘해졌다. 살다보니 감옥도 들어와보고.. 꽤 귀한 경험인데?" "응?" 모자 쪽에서 부들거리며 떨리는 느낌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볼을 긁적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나와도 되요." "이.. 멍청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하브의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뭔꼴이냐 !! 감히!!" "오- 감히라니. 감히 뭐에요?" "시끄러워!" "아아- 화내지 마요, 착하죠?" 허공에 떠있는 하브에게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훽 날 쳐다보는 그의 금안에 움찔하며 굳어있는데 씩씩거리던 그가 내 손 위로 올라섰다. 아- 다행이다, 일단. 진정한건ㄱ... " . . . " 이글거리는 눈동자 . . 금방이라도 녹아내려서 금빛이 흘러내리겠는데? "분노하였어요?" "내가 왜!" 버럭 소리지르는 그를 멀뚱히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나 아파요-" "시끄러워! 멍청이, 멍청이!" "에- 진짜 아픈데." 핑글하고 하브가 두명으로 나뉘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최대한 몸에 힘을 주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어제 . . 파도 때문인가 . . 그렇게 물에 젖은데다 울기까지 해가지고 기진맥진했으니까. 목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 머리를 휘감았다. " . . 야?" "엘 . . 이라니 . . 까요." 내 상태가 이상하단 걸 알았는지 그가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 부어올라버린 뺨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다정한 온기를 품은 작은 손에 아픈 한숨을 내쉬며 차갑디 차가운 벽에 기대었다. 몸이 으슬으슬거렸다. 확실히 . . 가장 북쪽에 있다는 하빔답네. "뭐 . . 뭐야! 너. . 열이.." "아프다고 했잖아요. 사람 말을 못믿네." 내 볼에서 손을 떼며 당황하는 하브를 보다가 킥킥 웃었다. 정신이 . . 서서히 몽롱해졌다. "야! 죽지마!" " . . 감기로 죽진 않을껄요. 아마.." 눈을 감고 벽에 기대는데, 벽에 기댔음에도 순간 환한 빛이 느껴졌다. "음?" 살짝 눈을 뜨자 어느새 커진 하브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마 위에 손을 대고 있었다. "에- 하브는 비장의 카드라니까요? 들키면 안돼요." "시끄러워, 기척정돈 느낄 수 있어, 멍청아." "헤에-" 그 유명한 기척 느끼기 인가 . . 반쯤 정신이 나간채로 있는데 하브가 확하고 끌어당겼다. 몽롱해진 정신 속에서 그의 금발이 내 볼을 간질였다. " . . 하브, 좋으면 좋다고 말로 . . 이건 좀 갑작스러운데요." "죽고싶어? 여긴 하빔이라고! 안그래도 인간에겐 한없이 추울텐데, 벽에 기대있으면 동상 걸리기 쉽상이야, 이 바보야!" 말은 험하게 하면서도 한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날 대하는 하브의 모습에 살짝 감동이라는 것을 받았다. 뭐랄까- 연하에게 끌리는 누님들의 마음을 알것도 같은데. "흐흠- 나보다 작은데 말이에요." 하브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뭔소리야? 내가 더 커!" "응응- 알아요." 마냥 어린 미소년인줄 알았는데.. 제법 남자답잖아. 두근두근- 부드럽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빙긋 웃었다. "하브-" "뭐." "나 조금만 잘께요. 누가오면 깨워줘요." "흥, 닥치고 잠이나 자." 아- 또다. 말은 험한데, 그의 손은 어느새 내 등을 토닥여주고 있다. 응- 이 정도면 . . 든든한걸. 조금만 . . 자자 . . . . . 분명 잠이 든것 같았는데 . . 여긴 어딜까 . 팔짱을 끼고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에대해 고민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으니까. 온통 검은 어둠뿐이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나' 하나뿐. 아무런 빛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보이는 걸까 .. 이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되잖아.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서서히 한점에서부터 물감번지듯 퍼져나가는 빛을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며 보았다. 그 빛은 번지고 번져서 내 뒤의 어둠까지 몰아내버렸다. 그리고 내가 빛이라고 느꼈던 것은, 빛이 아니라 . . " . . . . 뭐지?" 내 주위를 맴돌고있는 영롱한 색채의 존재들. 손을 대도 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될만큼, 깨끗한 빛을 머금은 그 존재들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에 부드럽게 휘감겨들다가 다시 풀어지고, 그러다가 내 몸을 한번 휘감아돌며 멀리 흘러가버린다. 거의 반쯤 넋을 놓은채로 아름답고도 신비한 그 존재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 작은 이끌림을 무시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그저 앞만을 바라보며, 투명하리만치 아름다운 그 존재들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쫓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귀찮게 날 잡아끄는 힘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얽히고 섥히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 . 마치 피처럼 붉디 붉은 잔인하고도 맑은 색이었다. 지금 여기서 보아왔던 존재들과는 '색' 자체가 달랐다. " . . . 뭐에요? 당신이 날 여기로 불러온건가요?" 붉은 그 존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했다. "아닌가요? 이건 꿈인거 같긴한데 . . 나참, 자각몽을 꾸다니."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픽 웃었다. 참 상황 묘하네. 지금 내 몸은 한창 우리 이쁜이 하브의 품에 안겨 곤히 자고 있을텐데 말이야. '나'는 이 붉은 존재에게 불려온것같으니까.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에대해서 물으면 대답해줘야죠. 나 바쁜 사람이에요." " . . . 무어. . ㅅ. . 무엇 . . 을 . . " " . . 네?" 그 붉은 존재에게는 입이 없었다. 그저 . .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내가 어떻게 듣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존재는 분명 내게 말하고 있었다. "무엇 . . 왜 . . " " . . . 무엇 . . ? 왜?" "내 . . 나 . . 왜 . . 어째. . ㅅ. . ㅓ . . ?" " . . 어째서일까요?" 그 존재는 주위에 맴도는 다른 영롱한 색과는 다른 아픈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다른 존재들이 그 존재를 한번씩 휘감고 갈때마다 그 붉은 존재의 빛이 흐려졌다. " . . . 나 . . 잘 . . 모 . .ㅅ . .?" " . . . 당신의 잘못?" 무슨 말을 하려는걸까 . 아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아니 . . 잘못 . . 업..ㅅ.. 다. . 난. . 살 . . 살다 . . " " . . . " 가만히 그 존재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존재를 만졌다. " . . 만질 수 없는건가 . . " "살고 . . 살아서 . . 행복 . . 아파 . ."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지독한 슬픔이 내 손을 휘감았다. 내 손에 휘감긴 슬픔은 서서히 내 팔로 몸으로 . . 날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 존재는 내게 자신의 빛을 덮어씌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슬픔, 피와 같은 붉은 빛은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다른 평온하고도 달콤한 행복에 젖어있는 존재들과는 달리. 이 존재의 빛은 슬픔, 아픔, 고통 . . 분노 . . 그런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슬픈가요?" " . . 슬 . . 퍼? 스 .ㄹ. . 퍼 . ." "아파요? 힘든가요?" "함께 . . 우리 . . 같이 . . 하 . ㅁ. . 께 . . "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 붉은 빛이 내 모든 것을 감싸고 그 존재를 바라보는 눈마저 서서히 가려버리고 있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 .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붉은 빛으로 시야가 가려질 때, 눈을 감았다. 물에 빠진듯, 묵직한 공기가 날 압박해왔다. 최대한 작게 숨을 쉬고 있음에도, 숨 쉬기가 힘들었다. " . . . 당신은 . . . 화를 내고 있나요 . . ?" "화 . . . 그저 . . 우리 . .ㄴ. . . 살. . 고 . .살아서 . . 시.ㅍ. . 었다 . ." 눈을 감고 있는 내게 보이는 것은 그저 검은 어둠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내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 . 오로지 말할 수 있는 입뿐이었다. "그래요? 그래서 . . 당신들은 슬퍼하고 있는 건가요?" " . . 슬 . . 퍼 . . 함께 . . 하자 . . 너만 . . 너만 . . [에 . .르 . . 테이샤 . . ]" "내가 [에르테이샤]라는 것을 알고, 날 부른거에요?" "신의 . . 추 . .ㄱ. . 복 . . 우리 . .에게 . . 시 . . ㄴ의 . ." 더듬더듬 애쓰고 있는 소리였다. 아니, 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 . 의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인데. 심호흡을 하다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렇군요. 당신들은 . . '전쟁'으로 . . 사라져간 존재들." "신 . . 축 . . 보 . .ㄱ. . . [에. . 르 . . 테이. . 샤]" 안타깝도록 슬픈 존재들. 가여운 . . 너무나도 가여워서 . . . 안쓰러운 존재들. 묵직한 팔을 들어올렸다.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약하디 약한 . . 이 가여운 존재는, 살아있는 나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눈을 떴다. 붉은빛 일색인 시야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난 축복같은거 못하는데." " . . 너 . . ㄴ. . . [에르테 . .이샤 . .]" "[에르테이샤]는 [신과 함께하는 자]라는 뜻이에요. 신의 축복을 내려주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미약한 힘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 . 나 밖에 없었던가? 하긴 . . 지금 감기 비스무리한거에 걸려있는데다가, 뺨 맞고 반쯤 정신을 놨었으니까 .. 지오를 부른다는 것은 . . 이들은 상상조차 못한 것이겠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꾸물꾸물거리며 날 감싸려고 따라오는 붉은 존재를 보며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난 완전히 그 존재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 . . 안 . . 돼 . . 신의 . . 축복 . . " 마치, 인간이었다면 황급히 팔을 뻗어 날 잡으려고 하는 느낌이었다. 간절함이 담긴 그 손길을 . .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다가가지도 못한채 난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흩어져가는 그 존재를 보았다. 필사적으로 내게 손을 뻗는 그 존재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 . . . 이건 예상 밖의 일이네." 내가 할 일은 그저, 전쟁을 멈추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주위를 감싸고 흘러가고 있는 존재들에게 손을 뻗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 .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좀 도와줄래요?" 자유로이 흘러가던 흐름이 나로인해 바뀌기 시작했다. 내 주위를 맴돌며 말만 하라는 듯 살랑이는 느낌에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난 힘이 없거든요. 내가 저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 . 부탁 좀 할께요." 휘잉- 하고 내 머리카락을 흩어지게 만드는 그 흐름은 마치 말해보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신들의 평화와 평온을 저들에게 주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 하지만 . . 당신들이 저들의 슬픔과 분노 . . 그 감정들을 품어줄 수 있나요? 다독이며 . . 더 이상의 슬픔은 없다고 . . 그렇게 해줄 수 있나요?" 고요했던 흐름이 내게서 멀어져갔다. "부탁해도 될까요? 저들을 . ." 그 흐름은 천천히 아픈 슬픔을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아 . . 아 . . [에르 . . 테이샤 . .] . . [에르테이 . . 샤 . . ]" "미안해요, 난 해야하는 일이 있거든요. 언젠가 당신들 곁에 갈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 . 그건 아마 후의 일이겠지요. 그러니까 . . 내가 당신들의 슬픔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선 . . 사과할께요." 언제가 될 지 모를 . . 내가 죽음이라는 녀석을 만난후에 . . 난 당신들을 만날 수 있겠지. "그때, 같이 오늘 못다한 얘기나 할까요? 그때는 말하는 연습 열심히 하도록 해요." "아 . . 신 . . . 신 . . 이시 . .여 . . " 물기 머금은 목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흐림이 서서히 . . 서서히 . . 붉은빛을 머금고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밖으로 흘러나온 흐름은 붉은빛을 감싸안고 자유로이 내가 서있는 공간을 흘러다니며 투명하게 . . 눈물나게 . . 그렇게 슬픔을 다독이고 있었다. " . . 고 . .마 . .ㅂ. . [에르테이샤]" 정확한 발음으로 [에르테이샤]라는 말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붉은 빛은 흐름 속에서 사라졌다. 아니 . . 말하자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스며들어버린 것이겠지만. "고마워할 것 없어요. . 내가 당신들에게 해준 건 . . 아무것도 없으니까 . . 그렇지만 . ." 붉은 기운을 품고 여유롭게 흘러다니고 있는 흐름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내 몸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당신들의 슬픔을 . . 대신 짊어지고 갈 수는 없지만." 옅어지는 몸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 슬픔 . . 절대로 . . 잊지 않고 안고 살아갈께요." 이제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야 할때다. "ㅇ . . ㅔ -" 귀에서 웅웅하고 하브의 목소리가 울렸다. "엘, 야!" 귀에서 두근거리는 고동소리를 듣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가 뚫어져라 날 응시하고 있었다. " . . 아- 정말, 센스없어." "센스가 . . . 뭐냐?"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고 알아요?" " . . . 모르는데. . ?" "그러니까, 하브가 애라는 거에요. 에휴- 내가 애 데리고 뭐하는 짓인지." "누가 애라는거야!" 하긴, 지금 잘키우면 나중에 아주 흐뭇해지겠지만. 그때까지 내가 키우긴 좀 힘든 법이지. 작게 하품하며 눈을 뜨고 싱긋 웃었다. "그보다 왜 깨웠어요?" " . . . 온다." "음? 누가요?" "몰라- 어쨌든, 이제 . . 열은 내렸으니까." 툴툴대는 하브의 몸을 은은한 빛이 휘감더니 곧 다시 작은 하브가 되어 내 모자 속으로 쏙 들어갔다. . . . 역시 작은 하브가 귀엽단말이지. 큰 하브는 이제 . . 뭐랄까 . . 미소년 아닌 미소년의 느낌이라서 기분이 묘하단 말이야. 타박타박하는 발소리가 감옥을 울렸다. 그 소리에 힐끔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 . 역시나, 아직 아침이라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시간이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철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횃불로 일렁이는 그림자 사이로, 두명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 . . 굉장히 익숙한 인영(人影)인데 말이에요." "용케 알아보네." 한숨을 내쉬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늦었다면 늦었고, 이르다면 이르네요. 내가 감옥에서 혼자 땅파면서 우울해할 동안, 잘있었어요?" "아아- 말이 날카로운데?" 이제 그림자가 아니라 직접 보이는 사람의 모습에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가만히 내가 들어가있는 감옥 앞에 서있는 두사람을 보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라세스가 이 추운 감옥에 갇혀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텐데, 그렇게 생각 안해요?" "음- 난 경험보다는 생각만으로 끝내는걸 좋아하거든." "남자가 그렇게 의지박약해서야 . . 나중에 좋은 남편되기는 글렀네요." "처음부터, 좋은 남편되기는 힘들었다고." 픽 웃는 그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그의 옆에 서있는 청발의 미남을 보았다. "이거 . . 그러니까 죽기 전 마지막 인사?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나요?" " . . 그대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헤- 그 말 익숙하네요." 파도치며 흔들렸던 . . 내 심장이 잠시 산책나갔다 왔던 밤을 연상시키는군.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을 다독이고는 싱긋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껀데요?" "세브릭과 사켄이 가까이 와있소." " . . . 어떻게 알아요?" "연락이 왔으니까." "호오- 그것 참 . . 그래서요?" 역시나, 찾으러왔나? 다행이네. 잘됬다고 내팽겨치진 않은 모양이야. 흐뭇해져서 웃으며 그를 보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감옥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게 손을 뻗었다. " . . . 나오시오." 불안감으로 떨리고있는 그의 청안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손으로 전해오는 따스한 온기에 살짝 눈을 감으며 말했다. "역시나, 내게는 미인의 손길을 거부할만한 용기가 없다니까요." " . . . 손이 . . 뜨겁군." 아크산의 말에 나가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까 . . 나 아파요." " . . . 괜찮소?" "뭐- 죽을만큼 아픈건 아니거든요. 그냥 . . 좀 현기증 날만큼 아프달까?" 피식 웃고는 설레설레 잡히지 않은 손을 저었다. "일단 여긴 벗어나고 봐야죠. 감기가 대수겠어요? 목숨이 걸려있는데." 뭐 . . 그 전하의 손에 목을 잘리는 것도 꽤나 . . . 날카로운 경험이겠지만 말이야. 빡빡한 눈을 깜빡거리다가 내 손을 잡고 진지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그를 보았다. "걱정마요. 가다가 넘어질만큼은 아닌것 같으니까." " . . . 알겠소." "그럼 가볼까요-" 그보다, 국왕 전하를 어떻게 놀려먹어야 속이 시원할까 . . 뺨 맞고, 무릎꿇고 . . 이 정도면 상당히 . . 아니 엄청 많이 굴욕적인데. 어떻게 배로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나. 골똘히 생각하며 척척 라세스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데, 한순간 묘한 기분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 . . . . 에 . . ?" "왜 그러시오?" 내가 갑자기 멈춘 것 때문에 아크산과 라세스도 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물음에 난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작게 기침을 토했다. " . . . 엘? 아픈것이오?" "아니 - 좀 당황했을 뿐이에요." 왜 몰랐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주위에 이 묘한 흐름을 . . 난 왜 눈치채지 못한거지? 미약한 열 때문에 머리가 흐려져서 그런 건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내 착각이 아니었다. 꿈 속에서 보았던 묘한 흐름을 담은 존재들이 내 주위를 휘감고 유유자적으로 흘러다니고 있었다. 어두웠지만, 그 존재들은 미약하지만 영롱한 빛을 품고서 내 주변에서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 . . . 뭘까나." 도대체 이 흐름은 . . 이 존재들은 뭘까나. " . . . 엘." "네?" 그 존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아크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묘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스윽하고 손을 들어올렸다. "응?" 그리고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더니 이마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 . . . 뭐에요? 내 이마에 지금 입맞춰주려고요? 그거 곤란한데- 지금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구요. 이런건 나중에 작별의 시간 때-" "그것이 아니오." "그럼요?" " . . . 빛나고 있소." " . . . 그거 끔찍한데요, 내가 머리가 벗겨져서 대머리화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럼 안돼- 그건 . . . 그건 너무 눈물나는 일이잖아. 살아가는데 엄청난 지장이 있는 일이라고. 여성 탈모가 있긴 하지만 . . 내겐 먼나라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울먹울먹거리며 아크산을 올려다보자 그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 . . 아니오 . . 이 문양은 . . " "에? 문양?" " . . . " 아크산이 입을 다물었다. 도무지 알도리가 없어서 어색하게 웃고 있자 라세스가 다가오더니 내 이마를 쳐다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급히 아크산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며 도대체 뭐길래 이 사람들이 이러는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뭐에요? 뭐가 빛나고 있다는 건데요?" " . . . 지르오디스 . . " 멈칫하며 라세스를 바라보았다. 라세스가 멍하게 중얼거린 단어는 분명 . . 지오의 본명. 지르오디스 . . 이 세계의 신의 이름이었다. "라세스?" "지르오디스." " . . . 지르오디스께서 뭘 어쨌는데요?" 내 물음에 아크산이 쓸어넘기고 있던 내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곤 복잡한 표정을 하고있는 그들을 보았다. " . . . 그대 . . ." "네?" " . . 아무것도 아니오." "아크산?" 다시 성큼성큼 앞서나가는 아크산을 보다가 옆의 라세스를 보았다. 그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으악- 라세스!" " . . . 도대체, 넌 누구야?" "에? 뭐라구요?" 투덜투덜거리며 머리를 정리하다가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고있는 라세스를 보았다. 라세스 역시 그 말만을 남기곤 아크산의 뒤를 따라갔다. 도대체 뭐야?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이야? 머리를 굴려봤지만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한숨만 내쉬고는 급히 그들을 따라 걸었다. 내가 움직이고 있어도, 그 묘하고 아름다운 존재의 흐름은 날 따라다니고 있었다. 진짜 신기한데 . . 도대체 뭐지? 슬쩍 그들쪽으로 손을 뻗자 그 존재들이 휘감겨 왔다. 아무런 감촉도 없지만, 손 끝부터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 " . . . 아-" 뭐지 . . 뭔가 . . 굉장히 익숙한데 . 몇번이고 . 몇번이고 느껴봤던 느낌이야. 심각하게 그들을 보다가 앞에 멈춰선 아크산을 보지 못하고 그의 등에 코를 박았다. "으왓- 아크산?" " . . 곤란하게 됬군." "뭐가요?" "먼저 가보십시오. 여긴 제가 맡지요." 라세스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난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저벅저벅 들려오는 발소리에 멈칫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 . . 저기, 나 지금 탈옥시키고 있는거죠?" "응- 그것도 몰래 탈옥시키고 있는 중이지." "그러니까, 들키면 나도 아크산도 라세스도 엄청 곤란해지는 상황?" "당연한 얘기지." 라세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에 입을 닫았다가 아크산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내 손을 잡아끌고 다른 쪽을 향해 걸었다. 곧 뒤에서 라세스의 목소리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지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아크산을 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거에요?" "그들과 약속한 곳이오." "약속? 아- 사켄이랑 세브릭?" "그렇소." "헤에- 이제 곧 해가 뜰텐데, 그럼 전하께서 절 죽이려고 오실테죠?" "지금은 새벽이니 괜찮소. 아직 . . 해가 뜰때까진 시간이 남았소." "그러다가, 들키면요? 아크산 위험할텐데요." ". . . 이미 숙부에게 나는 위험인자요." 그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나왔기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했다. "어째서요?" " . . 기억나오? 그가 내 숙부라고 했던것." "물론." "원래는 나의 아버지가 이 하빔의 국왕이셨소. 하지만 . . " "하지만?"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렇지만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독살당하셨소." " . .. 에?" "내가 성인식도 치르기 전의 일이오. 아버지께서는 독살당하셨고, 숙부가 하빔의 왕이 되셨소. 내가 그때는 너무 어렸기에 . . 왕이 되기엔 부족하다며 신하들이 숙부를 왕의 자리에 앉혔지." " . . . 그럼 지금은요? 아크산도 충분히 . . " "숙부는 지금 국왕으로서 잘해나가고 있소. 그렇기에 . . 나는 그저 왕위계승자로 남으면 되는 것이오." "그럼, 전하께서는 자식이 없나요? 어째서 아크산이 왕위계승자죠?" 그는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땅만을 바라보았다. " . . 아크산?" "그는 . . 숙부는 나의 어머니를 자신의 비로 삼으셨소." 잠깐만 . . . 내가 잘못들었어? 아니지? 형의 아내를 비로 삼았다고? "저기 . . 그건 . . " "우리 하빔에서는 형사취수제가 있었소. 숙부는 어머니를 비로 삼았고, 어머니는 몇년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지. 그리고 숙부는 자신의 비를 세우지 않으셨소." 그의 목소리가 메말라있었다. 표정을 보지 못하기에 그저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으로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 . 지금의 국왕 전하는 왕의 자리와 아크산의 어머니를 탐내어서 형을 독살했을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이면 되는건가? " . . . 헤에-" 잡혀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쓰윽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뭐야 . . 이거 . . 조금만 부추기면 될듯도 싶은데. 싱긋 웃으며 아크산의 손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았다. "그럼, 아크산은 그런 마음 안들었어요?" " . . 무슨 마음 말이오?"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악한 마음. 자신의 아비를 독살하고, 자신의 어미를 죽음으로 내몬 자신의 혈육. "어째서 그가 왕인 것인가." " . . 엘."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그의 눈을 보면서 싸늘하게 웃었다. "그 자리는 나의 자리인데, 어째서 그가 왕인가? 그는 내 아비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존재인데." "엘. . .!" 그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 어미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지금도 왕위에 앉아 하빔의 국왕으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있을 수 밖에 없는건가." " . . . " 아크산은 내 이름을 부르지도, 그렇다고 이렇다할 행동도 취하지 않은채 날 내려다보았다. 그에 나는 달콤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제, 그의 자리는 내 자리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아크산은 내 말에 아무말도 않고 그저 내 손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손에 아릿한 아픔이 스며들었지만 나 역시 침묵을 지키며 그를 보았다. " . . . 그럴 수는 없소." "왜요?" " . . . 하빔의 왕이오. 나의 숙부는." "원래 그 자리는 당신의 자리였는데도요?" " . . 과거엔 그러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오." "지금도 아크산은 왕위 계승자라면서요? 그럼 곧 그 자리는 당신의 자리가 될텐데요." 아크산은 내 말에 더이상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치 소리가 난다면 찰랑찰랑하고 날듯한 머리카락을 보다가 다시 말했다. "화가 나지는 않았나요?" " . . 무엇을 말이오?" "당신의 아버지가 독살당하시고, 어머니가 목숨을 끊었을 때. 분하고 슬프지 않았나요?" " . . . 엘." 인간인 이상, 당연한 감정이다. 나라도 . . 만약 그런 상황에 이른다면 . . 글쎄, 난 어떻게 할까. "당연히 그랬겠죠?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꺼에요." " . . . 곧 그들과 약속한 것에 다다르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의미에 어깨를 으쓱하고 나 역시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래서, 날 어떻게 보낼껀데요? 여긴 섬왕국인데." "이미, 그들은 내가 준비해놓은 배를 타고 있소. 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서연합으로 가면 될 것이오." "그거 아쉽네요. 여기 온지 만 하루만에 다시 돌아가야하다니." 픽 웃고는 동이 터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무리하게 입가에 짓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아크산이 날 보고 있지 않은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저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아크산." " . . . 무엇이오?" 그는 날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말하기가 더 쉬웠다. "내가 그를 죽이고 싶다고 한다면, 당신은 들어줄껀가요?" " . . . 누굴 말이오?" 그제서야 아크산은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던 나는 그제서야 싱긋 웃었다. "하빔의 왕이자, 내가 무릎을 꿇었던 전하를 죽이고 싶다고 한다면, 당신도 동참할껀가요?" 그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는 전하를 죽일 마음이 없소." "물론, 난 마음 여린 소녀거든요. 그러니까 묻는거에요. 가정이죠, 가정." 생긋 웃고는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내 손가락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걷기 시작했다. "대답 안해줄꺼에요? 아니면 아까 고개를 저은 것이 동참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그가 손을 놓고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말하자 그가 대답했다. "동참하지 않소." "와우- 그거 놀라운 일인데요. 어째서죠?" " . . . 어머니가 . . " "음?" "어머니가 원치 않으셨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지독히도 담담해서 그의 뒤에서 여유롭게 걷던 걸음을 빨리해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어머니의 부탁?" " . . 그렇소." "그럼, 어머니의 부탁을 제외한다면?" " . . 그것도 가정이오?" "물론이죠." 그가 잠시 고민하는듯 싶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헤- 이번에도 싫어요? 이유는요?" 그가 막아선 날 조심스럽게 지나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에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내가 원치 않소." "그러니까, 이유가 뭔데요?" " . . 그는 나의 숙부요." "호오- 혈육이라 . . 이건가요?" 그의 말을 들으며 고민하던 중에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고개를 들며 그를 보았다. "그대에게 . . 사람이란 존재는 무엇이오?" "응?" "그대에게 혈육이란 존재는 무엇이오?" 그의 질문을 듣고 멀뚱히 그를 보다가 쿡쿡 웃었다. 나의 웃음에 그가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지만 웃음을 멈출 수가 없어서 잠시 웃다가 심호흡을 하고 멈추었다. 그리곤 그를 보며 대답했다. "내게 사람이란 존재는 단지 내가 '나'로 있게 해주는 것이고, 혈육이라는 존재는 '족쇄'로서 나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게 해주는 것이에요." " . . . 무슨 뜻이오?" "사람들이 없다면 굳이 나는 '나'로 존재할 필요가 없고, 혈육이 없다면 나는 '나'로서 살아가며 억제해야할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 . . 단지 그뿐이오?' 그의 청아한 푸른 눈동자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요?" " . . . 사람도, 혈육도 . . 그대에게는 그런 존재일 뿐이오?" "지금으로선 그래요. 사람도 혈육도, 제겐 솔직히 좀 귀찮거든요." " . . . 이해할 수 없는 여인이오, 그대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이해를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사람은 지독하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산다.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착한 사람은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니까 미련해서 싫다. 그렇다고 너무 나쁜 사람은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니까 토할것 같아서 싫다. 희생하는 사람은 멍청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진절머리 난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오로지 . . 내 가족. 나의 혈육 때문이니 이게 또 미칠 노릇이다. 내가 '나의 세계'에서 괜히 일탈을 꿈꾸었던게 아니다. 나는 일부러 내가 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를 하며 시간낭비하는 것이 싫다. 귀찮은 친구들을 내 이미지를 위해 웃으며 받아넘기는 것도 짜증난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 때문. 하긴 . . 사랑한다는 것이 그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 . 그런 나에게, 가족이란 소중한 존재이면서도 '족쇄'가 될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는 이유도, 단지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 . 나는 엄청나게 못된 사람이다. 항상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는 성격이 못됬다고. 그럼 친구들은 웃으면서 장난을친다. 그럼 나 역시 웃어넘긴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하곤 한다. 내 진심을 말하면, 과연 너희는 웃어넘길 수 있을까. 그저 혼자가 되고 싶지 않기에, 웃으며 너희에게 맞춰주는 나를. 너희는 용납할 수 있을까라고.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이것도 후에 어른이 된다면 사라질 감정이겠지. 아니면 쌓이고 쌓여 폭발하던가. 날 바라보고 있는 그의 청안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제는 검푸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 .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 . 이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없이, 그저 . . 살아갈 수 있다면. 쓸데없는 고민하지도 않고. 그저 . . 이렇게 살아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내 주위를 감싸고 돌던 존재들이 날 감싸안는다. 어깨를 감싸안고, 내 얼굴을 쓰다듬어준다. 그 다정함 속에 조심스런 한숨을 쉬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야 기억났다. 이 다정함 . . 지오다. 크게 심호흡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단단히 다졌다. 지금은 . . 이런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손을 들어올려 내 이마를 만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아까 라세스나 아크산의 말을 들어봤을때, 내 이마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전 날 처음 '이곳'으로 보낼 때, 그가 내 이마에 입맞춰준것은 . . 잊지 않고 있다. 이마에 무슨 문양이 있다고 했던가 . . 보고 싶은데 . . 머리는 쉬지 않고 생각을 하고, 내 몸은 여전히 아크산의 뒤를 따라 걷고 있다. 이마에 뭔가가 있는건가 . . 그렇가면 . . 내 볼에도 뭔가가 있을까나. 볼을 긁적거리다가 싱긋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마, 그 다음은 볼 . . . 그럼 그 다음은 . . 후훗. 가라앉았던 마음을 붕붕 떠오르게 할 행복한 상상을 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아크산이 멈춰섰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몸을 떨다가 아크산을 불렀다. " . . 아크산?" 그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자, 그가 곧 한 팔을 뻗어 날 막았다. "이런이런- 사랑하는 조카, 아크산아. 어째서 저 계집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이더냐?" 한쪽 팔에 소름이 돋았다. 차분하면서도 짙은 조롱이 담긴 이 목소리는 . . 아까까지만 해도 어떻게 골려줄까 고민했던 사람의 목소리다. " . . 숙부 . . " 아크산이 낭패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올려다보다가 그의 앞에 서있는 이 나라의 왕, 전하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뒤로 늘어서있는 병사들 역시 보았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네가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알고 있었던건가? 그는. 아크산이 날 탈출 시키려 하는 것을. "고작 그런 계집 때문에, 이 나라의 왕위 계승자인 네가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바다 속에 잠드신 형님께서 침통해하실께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미소를 보다가 나 역시 빙긋 웃곤 말했다. "그리고 선왕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며 눈물 지으시겠지요." "호오? 계집, 무슨 말이더냐?" 여전히 그 재수없는 미소를 입에 걸치고 있는 그는, 아쉽게도 그런 미소조차도 멋져 보이는 미남이었다. 그래서 더 재수없고, 그 얼굴을 깨뜨려보고 싶게 만드는 승부욕을 일으켰다. 이 놈의 망할 승부욕같으니. "그렇지 아니하겠습니까?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왕께서, 자신의 혈육이 하는 일들을 보며 기뻐하실 듯 싶으십니까?" 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사근사근하게 말하자, 전하가 큭큭 웃더니 과장되게 팔을 양쪽으로 뻗으며 말한다. "이런이런- 네가 나의 형님을 아느냐? 자신의 가족 때문에 더 억울해할 형님을 말이야." . . 자신의 가족때문에 더 억울해 한다고? 그가 큭큭 거리며 웃더니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그래, 계집아. 하룻밤 편히 쉬었느냐?" "추워서 혼났지요. 이왕이면 모포라도 보내주셨으면 좋았을텐데요." " . . . 네가 입을 놀리는 것을 내 가만히 봐주는 것은 네가 곧 이 세계에 존재치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렇다면 더 지껄여야지요.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이라는데요." 싱긋 웃으며 힐끔 아크산을 올려다보았다. 아크산의 푸른 눈동자는 짙어진채 자신의 앞에 서있는 전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다가 내 곁을 유유히 흐르고 있던 존재들을 보았다. 일단 . . 죽을 위험은 없으려나. 이 존재들은 아무래도 . . 지오와 관련이 있는 듯 싶으니까. "그래, 저기 보이느냐?" 그가 말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웃으며 묻자, 그가 큭큭 웃으며 말한다. "바다 위에 떠오르고 있는 저 해 말이다." 그의 말에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바다 위에서 붉디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내 분명 말했을 것이다. 저 해가 떠오를때, 네 목을 내 친히 벨것이라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신께서는 제가 아직 죽길 원치 않으시는 듯 싶습니다." " . . 무슨 말이냐?" 일렁이는 해를 등지고, 다가오고 있는 큰 배가 보였다. 그리고 멀지 않은 그 배 위에서 장밋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사람과 그 옆의 짧은 회색빛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는 사람을 보며 미소지었다. 오- 나 꽤 눈이 좋았구나.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이렇게 자세히 보이다니 말이야. 아니면 . . 내가 그들을 그리워했기 때문일까? "한가지 알려드리지요." " . . . " 전하 역시 그 배를 보았는지는 잘모르겠다. 하지만 난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말했다. "신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시던간에, 당신의 손을 들어주시지 않을껍니다." 왜냐면 지오는 나와 함께하는 존재니까 말이야. 날 무릎 꿇린 것으로도 모자라 때리기까지한 전하에게 과연 어떤 관심을 기울여줄지는 모르는 일이거든.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더니 내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잠시 그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잦아드는 바람 속에서 해를 등지고 서있던 난 눈을 떴다. " . . .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 절벽 위에서 네가 도망칠 곳이 있을 듯 싶더냐?" 그가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아크산을 보았다. 그는 숙부를 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서 이별인걸까요?" " . . . 아마도. ." "다시 만날수 있겠죠?" " . . . 그것은 잘 모르겠소." "이별은 만남을 불러오고, 만남은 이별을 말하는 법이지요." 싱긋 웃으며 그에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별일 없길 빌께요." " . . 엘."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할께요." " . . . 무엇을 말이오?" "당신은 현명하니까 . . 어떻게 해야할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가만히 날 바라보는 아크산을 보다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전하의 병사들을 보았다. 그리고 자리에 멈춰선채 여전히 미소짓고 있는 전하를 보며 말했다. "전하." " . . . " 네 까짓게 뭘 할수 있겠느냐. 라는 눈빛으로 보는 그를 보다가 과장된 포즈로 그에게 인사하곤 고개를 들며 웃었다. 그리고 절벽을 향해 한걸음 두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그 한대 패주고 싶은 얼굴 잘간직하세요." " . . 뭐라 . . ?" 바로 뒤에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쿡쿡거리다가 힐끔 뒤를 돌아보고 다시 앞을 보았다. 병사들이 거리를 좁혀들고 있었고, 아크산은 이미 몇명의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크산도 몸조심해요. 다시 만날때까지." 싱긋 웃는 내게 아크산은 의미를 알수 없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를 보던 시선을 돌려 척 한쪽 손으로 전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쉽지만, 당신을 내 발밑에 두는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네요." " . . 지금 네가 도망칠 곳이 있다 생각하느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귓가에 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우와- 이 추락감. 바로 이 행동이 줄없이 번지점프하는거지! 잠시 추락으로 인한 두려움을 만끽하다가 허공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하브!" 곧 환한 빛과 함께 떨어지던 몸이 공중에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바닷바람으로 인해 귓가에서는 광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 바보멍청이가 미쳤냐!" 바람으로 인해 이리저리 휘날리는 금발의 고수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하브의 품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큭큭 웃었다. "뭐가요- 난 잘못없어요. 미치지도 않았고." "미친거냐? 드디어 제대로 돌은거야?" 왈왈대는 그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웃으며 들었다. 그리고는 이글거리는 금안을 마주보며 말했다. "에이- 뭘 그렇게 화를내는거에요?" "누가 화냈다는거야! 네가 멍청한 행동을 하니까, 열받아서!!" "열받는거랑 화내는거랑 똑같은거죠. 아아- 하브는 언어능력을 더 키워야겠네요." "시끄러워!" "아아- 네네." 싱글벙글 웃으며 발밑에서 절벽으로 부딪히며 철썩이는 소리를 내고 있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음땀을 닦으며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브가 제때 나와줘서 다행이야. 안그랬으면 난 저 파도 속에서 산산조각이 났을지도. "하브- 저기 보이는 배로 데려다줄래요?" "내가 왜!" 버럭 소리지르는 하브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 안고있는게 그렇게 좋아요? 그렇다면 나 역시 별로 배로 가지 않아도-" "간다, 간다고! 가면 될꺼아니야!" 왁왁 거리는 그가 너무나도 귀여웠다. 날아가면서 바다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그의 금발을 보다가 가까워지는 배를 보았다. . . . 그런데 그보다 . . 세브릭이랑 사켄을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해야하지. 잘지냈냐고 장난을 쳐야하나, 아니면 왜 이제 왔냐고 앙탈을 부려야하나. . . . 아니면 혼날껄 각오해야하는건가? 아니, 아니지. 내가 납치당한 이유는 분명 세브릭의 영향이 크잖아. 다른 여자랑 시시덕거렸으니까. 그 주황색 머리카락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겼던 여자를 생각하자 조금 불퉁해졌다. 뭐 . . 세브릭이 내 남자가 아니니까, 화낼일이 아니지만서도 . . 그래도, 날 옆에 두고 그러면 안돼지. 지금은 어쨌든 . . 함께 행동하고 있는데 말이야. "야, 다왔으니까 정신차려." 생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날 구해주는 하브의 목소리에 하고 있던 생각을 멈추며 이제 완전히 가까워진 배를 바라보았다. . . . . . 헉. . "하 . . 브 . . ?" "뭐야?" "저기, 조금만 천천히 가주면 안될까요?" "뭐? 내가 왜?" " . . 지금 가면 좀 무서운 상황이 . . " 아니, 나중에 가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렇게 살벌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세브릭이라던가 . . 아니면 평소처럼 무표정하지만 살기 띈 눈동자로 날 보고 있는 사켄이라던가. 저 둘의 뒤로 형성되고 있는 무시무시한 아우라는 내 눈에만 보이는건가? 목숨의 위협을 당했을 때조차 들지 않던 두려움이 밀려오는건 결코 내가 나약해서가 아니다. 하브는 내 애원에도 불구하고 금세 배에 도착했다. 그리고 배의 갑판 위에 올라서자 마자 그는 다시 작아져서 내 모자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 . . 배신자! 어떻게 날 내버려두고 모자 속에 숨을 수가 있어! 모자 속으로 들어가버린 하브를 원망하고 있는데, 분명 나긋나긋한데도 위협적인 목소리인 세브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무슨 이유로 절벽에서 뛰어내린건지 들을 수 있을까요?" "아하하- 오랜만이네요. 잘지냈어요?"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날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팽팽한 얼굴근육을 당겨 애써 미소지었다. "무척 잘지냈지요. 누군가가 사라진 덕분에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오면서 무척 한가한 시간을 보냈구요." "그거 . . 다행 . . 이네요 . . " 눈이 웃고있지않아. 눈이 웃고 있지 않다고!!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내 노력이 보이지 않는지, 그는 집요한 시선으로 날 훑어보며 말했다. "다시 물어야하나요? 왜 뛰어내린건지 말이에요." "에-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해서, 무슨 배짱으로 뛰어내린거죠? 혹시라도 라는 생각은 안해봤나요?" 다정하고 상냥한 . . 부드러운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다가 제발이라는 표정으로 그의 옆에서 팔짱을 낀채 우리의 대화를 듣고있는 사켄을 보며 말했다. "사켄은 어때요? 잘지냈어요?" " . . . 네가 보기엔 어떻지?" "네?" "잘지낸것 같은가?" "에에- . . . " 그를 보았다. 여전한 혈색과 표정. 조금 화가난듯한 눈빛에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음 . . 제가 보기엔 잘지낸것 같은데요." " . . 네가 그렇다면 그런것이겠지." "그 . . 그런가요?" "네가 납치되고 배를 구하느라 반나절동안 뛰어다니고, 배를 구하자마자 아무런 채비도 없이 바다로 나와서 이곳으로 오기까지 몇일동안 잠도 제대로 못잤지만. 네가 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인다고 하니. 잘지낸것이겠지." " . . . " 처음으로 엄청나게 긴말을 내뱉은 그였지만, 그 말의 내용을 듣고 난 쨍하고 얼어버렸다. "하긴, 또 무슨 사고를 저질렀을까, 무슨 일을 당했을까, 폭풍이 부는 날에는 혹시라도 라고 생각하고. 도착하자마자, 당신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그저 보고만 있었지만. 당신은 우리가 잘지낸것처럼 보인다니, 잘지낸 것이겠지요." 세브릭 역시 시니컬하게 말하는 모습에 버벅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 . . . 아니 . . 저기 . . " 한쪽 손을 그들에게 뻗었다. "됐어요. 돌아가죠. 대륙으로." 무심함을 가장한 차가운 분노를 지닌 두사람이 뒤돌아서서 걸어가는 것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민망해진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울것같은 마음을 꾹꾹 다잡은채 뒤돌아서며 방금 내가 뛰어내린 절벽을 쳐다보았다. 절벽 위에서 분노어린 눈동자로 날 노려다보며 뭐라뭐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전하와 급히 움직이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차분한 모습으로 서있는 아크산도 보였다. 그런 그들을 보다가 픽 웃으며 한쪽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내 모습에 노한 기색이 역력한 전하가 멈칫하며 뚫어지게 날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싱긋 미소지으며 한쪽 손을 내 입술에 쪽소리나게 맞추고는 그들을 향해 내밀고 후하고 불었다. 굳어버린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큭큭 배를 잡고 웃으며 다시 그들을 올려보았다. 전하는 방방 날뛰며 금방이라도 절벽아래로 뛰어내릴듯했다. 그런 전하의 모습을 보며 즐기다가 아크산 쪽을 바라보았다. 날 보고 있던 아크산은 한쪽 손을 주먹쥔채 자신의 심장에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향해 내밀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곧 처음으로 풀어진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지어주었다. " . . 아크산 . . " 병사들에의해 둘러싸인 그가 뒤돌아서며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복잡한 기분이 되어 쳐다보다가 주먹을 꽉 쥐고 나 역시 뒤돌아섰다. 그리곤 순식간에 아까의 떨림과 복잡한 마음에 난감함과 당황스러움까지 합쳐져서 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 . . . 저기 . . 간거 아니었어요?" 배의 기둥에 살짝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있는 세브릭의 모습과, 그의 옆에 똑바로 서있는 사켄의 모습에 땀이 삐질하고 새어나왔다. . . . 큰일났다. 이거 . . 이 상황 어떻게해야하는거지?! 비상사태가 되어 속으로는 방방거리며 날뛰었지만 겉으로는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 . . . 뭐 . . 뭐가 그래요?" 세브릭은 날 보던 시선을 돌려 하빔 쪽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날 외면하고 선실의 문을 열더니 쾅하고 닫아버렸다. " . . . 저기 . . 화난거죠 . . ?" "대답해야하는가?" " . . 대답해주면 안될까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푹 고개를 숙였을때, 뚜벅뚜벅 사켄이 내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시야에 그의 신발이 들어왔지만, 난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기 . . 난 잘못한거 . . 없다고는 못하지만 . . 그래도 . . " "그래도?" "납치되고 . . 또 오랜만에 만났는데 . . " 에씨 . . 내가 뭘 잘못했어. 납치됬다가 무사히 돌아온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고 . . 이게 뭐야. 왜 화내는건데? 진짜 눈물이 나올것만 같아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엘." " . . . "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게 되면 지금 내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한 우는 듯한 목소리가 나올것만 같아서. "엘." " . . . 왜요 . . " 울먹이는 목소리를 애써 다잡았지만, 그 떨림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겨우 대답하고나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데, 사켄의 손이 내 볼을 감쌌다. 거칠고 큰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애써 참고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손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점점이 생기는 눈물자국을 보고 있는데 사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순간 그의 사과에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선 더 이상 아까와같은 차가움은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눈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미안함과 . . 알 수 없는 그 무엇 . . 내 볼을 살짝 쓰다듬은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의 눈이 전하에게 맞아 빨개진 볼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회색빛 눈동자를 보면서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속에 가두며 감싸안았다. "네가 납치된 것을 막지 못한 것에 용서를 구해야하고, 네가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해야하는 우리임에도.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 " . . . " 대답하면 흉한 목소리가 나올 것만 같아서,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날 감싸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다시 . . 이렇게 내 곁에 서있는 네 모습에 안심하게 되어 화를 내었다." " . . . 그렇게 . . 말하면 . . 화낼 수가 없잖아요 . . " 그의 품 속에서 웅얼거리듯 말하자 그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짓고있을 미소가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 . 그 눈 속에서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그의 말에 눈물을 닦고 작게 심호흡 한 뒤에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응- 나도. 다시 사켄을 만날 수 있게되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내 대답에 잠시 아무말 없던 그가 힐끔 선실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거지?" " . . . 그러게요 . . " 멍하게 있다가 두주먹을 불끈쥐고 사켄을 바라보았다. 사켄은 그런 나를 차분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생긋 웃는 내 모습에 사켄의 눈에 의아심을 담겼다. "세브릭은 삐순 . . 이가 아니라 삐돌이니까. 세상에서 제일 마음 넓은 제가 가서 달래줘야죠, 뭐." 사켄의 곁을 지나가며 천천히 선실 앞에 섰다. 그리고 뒤에서 담담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는 사켄에게 말했다. "성공할 수 있기를 빌어줘요." "걱정마라." " . . 뭘요?" "세브릭 역시 . . " 잠시 그가 말을 고르는 듯 눈을 감았다. 곧 다시 눈을 뜬 그가 말했다. "네가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니까." " . . . 그럴까요?" "확신하진 못하겠군." 그의 대답에 울상을 지었다가 심호흡하며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문에 노크하며 말했다. "들어갈께요." 세브릭이 대답하건말건 그 사소한 문제에 대해선 그냥 넘어가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빼꼼 방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곤 침대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에 조용히 문을 놓고는 소심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선실 속에서 뒤돌아 앉아있는 그의 모습에 어떻게해야하나 고민하다가 푹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뭔 반응을 보이던, 상관치말자! 일단 매달리고 보자! 세브릭이 화나면 . . 난 국물도 없다! 성큼성큼 힘있게 걸어가던 내 걸음은 침대를 사이에 두고서는 우뚝 멈춰버리고 말았다. "에 . . 저기 세브릭 . . . ?"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세브릭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리 위에 팔꿈치를 얹고 깍지를 낀채 자신의 손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세브릭 . . " 머뭇거리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섰다. "세브리익-" 여전히 대답없는 그를 보다가 마음 속에서 슬그머니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 . 그래, 계속 무시한다 이거지. "세브릭, 대답 안할꺼에요?" 그는 여전히 흔들림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손만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 . . . . . 에라, 나도 모르겠다. 미동도 없이 앉아있길래, 뒤에서 그의 몸을 안아버렸다. 움찔하는 그의 몸을 느끼며 여전히 나는 내 두손을 풀지않고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는 말했다. "세브릭- 화났어요?" " . . . 진실을 말할까요?" "에- 화난거군요." 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 속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의 등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눈을 감았다. 잠시 이것저것 생각하며 그의 허리를 안고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무슨짓이냐, 놔라 . . 뭐 그런 말 안하네요." "알았으니까요." " . . 뭘요?" 그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허리를 감고 있던 내 손 위로 그의 손이 포개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과 내가 싸웠을때, 당신은 항상 내게 이런 식으로 화해를 청한다는 것을." " . . 그랬던가요?" 그러고보니, 그가 화나고 난 다음에는 내가 항상 이랬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그가 말했다. "이번에 사과해야하는 것은 저임에도 말이에요." " . . 별로 . . 누가 사과를 하던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그는 화내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를 안고있던 손을 풀지 않고 있었다. 곧 그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느끼며 묘한 기분이 되었다. 뭐랄까 . . 그러니까 . . 설레인다고 해야하나. 내 손가락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나른한 기분이 되어서 완전히 힘을 빼고 그의 몸에 기대었다. 그러자 더욱 민감하게 내 손의 느낌이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그 때." "응? 언제요?" 뭔가 나른하니까 졸렸다. 하긴, 잠깐 잤던 것도 꿈 속에서 방황하느라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까. 한숨을 쉬듯 대답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뒤돌아 가버렸을 때." "아아- 그 . . 여자분 때문에 사켄한테 간다고 했을 때요?" 이제는 웅얼거리듯 대답하고 있었다. 졸음이 보슬비처럼 천천히 나를 적셨다. "그 때는 . . 미안했어요." " . . 별로, 세브릭의 연애사인데 내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조금만 견디자, 조금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뜨며 깜빡거렸다. " . . . 연애사가 아니에요." "흐음. 그래요? 그럼 뭔데요." 그가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 망할 잠이 눈꺼풀을 내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에 나도 대항하여 눈을 감지 않기 위해서 힘껏 노력했다. " . . . 닮은 여자였어요." "누구랑요?" 누구? 그 여자랑 닮은 사람은? 뭐, 옛첫사랑이라던가 . . 옛애인이라던가 . . 그럼 그냥 잠들어버릴테다. " . . 어머니와 . . 닮았어요." 담담히, 하지만 힘겨운 듯한 그의 목소리에 몰려들던 잠이 천천히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분명 아니라는 것을,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나칠 수 없었어요." " . . . " "제 눈 앞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보았음에도 . . 고작 그 여자와 닮았다는 이유로 . . 바보같이 말이죠." 뭐라고 말해야할까. . . . 왜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거지? 라세스도, 아크산도 . . 그리고 세브릭도. 사켄도 이들과 마찬가지일까. . . 하긴 전쟁이 몇십년간 계속되어 왔는데 . . 정상적인 가정을 찾는 것이 더 힘들겠지. 하지만 모두 . .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나는 평범하게 살았다. 한없이 사랑해주시는 부모님이 계시고, 누군가의 죽음도 내게는 먼이야기였으니까. 그런데 . . 왜 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렇게 슬퍼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흔들렸어요. . 변명하자면, 그래서 당신이 뒤돌아 가버리는 것을 잡을 수 없었어요." 그의 말도 말이지만, 내 손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내 손을 꽉 쥐는 것에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되면 . . 나만 나쁜 사람되는거잖아. 마음 속에 엉켜있던 무언가가 풀어졌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또 복잡해졌다. . . . '이곳'에서는 여러사람이 내 마음을 휘저어놓는군. 어두운 선실 한 구석을 바라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포근한 어둠이 날 감싸안고, 이제 좀 쉬라고 토닥였다. "하지만 . . 오늘 당신을 보고, 아크산이 당신을 향해 하는 행동을 보았을때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군요."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머리 속으로는 입력시키지 못한채 천천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아니 느끼고는 있지만 . . 인정하고 싶지는 않군요." "왜 . .요 . . " 거의 잠꼬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듯 대답하자 그가 말했다. " . . 인정하게 되면 . . "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그런 내 손을 세브릭의 손이 잡아쥐는 것을 느끼며 완전히 잠이 들었다. "걷잡을수 없을것 같으니까요." 어두운 방 안에서 등 뒤에서 새근새근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던 세브릭은 곧 잡고있던 손을 놓고서 조심스럽게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등에 기대어 잠들어있는 엘을 보다가 자신에게 기대어있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음-" 작게 뒤척이던 엘은 곧 제대로 자세를 잡았는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던 세브릭은 그녀의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옷에 달려있는 끈을 풀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그의 눈빛은 차분하고, 그의 손에서도 전혀 떨림을 느낄 수 없었다. 단추까지 다 풀어버린 그는 그녀를 살짝 안아올려 옷을 벗겨내고는 다시 눕혀주었다. 그렇게 잠시동안 엘을 바라보던 세브릭이 다시 손을 뻗었다. 천천히 검은 머리카락을 훑어내리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이 조금들리더니 곤히 잠들어있는 엘의 얼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옅게 떨리는 속눈썹을 매만지며 세브릭은 신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엘의 붉은 입술에 닿을 듯했다. "우으-" 잠시 그녀로부터 들려오는 불편한 목소리에 멈칫하던 그가 굳어버린 몸을 풀고 움직였다. 그의 팔에는 그녀의 옷이 걸쳐지고 세브릭은 그녀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는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편안해보이는 표정으로 자고 있는 그녀를 보던 그는 곧 작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팔에 걸려있는 두꺼운 로브를 보았다. " . . . 볼을 제외하곤 괜찮아보이는군요." 마치 혼잣말 하듯 중얼거린 그는 곧 로브의 모자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밖에 나가서 대화 좀 하죠." 세브릭이 부드럽지만, 엘을 두려움에 떨게했던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모자가 눈에 띄게 부르르 떨었다. "그럼 나갈까요? 하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모자 속에서 하브가 톡 튀어나오더니 마치 구르듯이 엘의 곁에 붙어 세브릭을 경계하며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하브를 내려다보며 싱긋, 엘과 비슷한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뭔가요? 그 표정과 자세는." " . . . 난 너랑 얘기할 것이 없다, 남자인간." "당신은 없겠지만 저희는 있습니다." " . . 저 . . 희 . . ?" 하브의 금빛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세브릭은 슬쩍 고개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하브가 곧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자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사켄이 문가에 기대어 그들을 보고 있었다. " . . . 내가 너희에게 굴복ㅎ. . " "엘이 깰것 같군요." " . . . " 세브릭의 말에 하브가 조용해지더니 힐끔 엘을 보았다. 여전히 고른 숨소리로 자고있는 그녀를 고민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는 하브를 보며 세브릭이 다시 말했다. "어떻게 하실꺼죠? 나갈껀가요? 아니면 엘을 깨울건가요." " . . . 이런 멍청한 상황이 오다니." 이를 갈던 하브가 붕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는 훽 세브릭을 돌아보며 작게 소리쳤다. "결코 너희들에게 굴복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남자인간! 그리고, 나는 엘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안된다는 것을 잊지 마라." "명심하죠. 저희는 단지, 저희가 없을동안 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니까요." 하브는 세브릭을 흘끗 보더니 문 쪽으로 날아갔다. 사켄이 비켜서고 하브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커지더니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켄을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또 다른 남자인간." " . . . 뭐지?" "나도 곧 성인식을 치룬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하브의 말에 사켄은 잠시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브는 여전히 경계심과 적개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무슨 소리지?" "그렇게 되면 나 역시 성장한다." " . . . " 사켄이 무심한 눈동자로 하브를 내려다보자 하브는 그를 보던 시선으로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네 놈 역시 마찬가지다." " . . . 뭘 말이지요?" "흥-" 훽 고개를 돌린 하브를 보던 사켄과 세브릭은 뭐냐는 듯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간 후,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가득했던 선실 안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사람 헷갈리게 . . 뭐하자는 거야 . . " 엘의 목소리가 조용히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 흩어졌다. 창문의 커튼 사이로 옅은 달빛이 힘겹게 비집고 들어왔다. 달빛이 담겨있던 투명한 잔에 붉은 빛의 술이 따라졌다. 매끈한 손으로 술을 따르던 남자는 병을 내려놓고 술잔을 빙빙 돌리며 커튼으로 가려지지 않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똑똑-" 노크 소리에 막 술잔을 입에 대려던 그가 잔을 내려놓고 빙긋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게." 남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가벼워보였던 용병 차림이 아닌 단정한 제복차림의 라세스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라세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남자는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일어서서 양쪽으로 팔을 벌리며 말했다. "뭘 그리 딱딱하게 구느냐. 예전처럼 대하거라, 예전처럼. 지금만큼은 왕과 신하의 사이가 아닌, 네 아버지의 친구와 내 친구의 아들사이로 말이다." 그가 라세스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라세스는 국왕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말했다. " . . . 왜 부르셨는지는 . . " "술이 마시고 싶어졌는데, 문득 적적하더구나. 가비스 . . 항상 같이 마셨주었던 그 친구도 없으니 말이야." 비틀려있던 짙은 청안이 아주 잠깐 그리움으로 흔들렸다가 곧 다시 짙은 빛을 띄었다. 라세스는 국왕의 말에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왕은 환하게 웃으며 라세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꼭 닮았어. 누가 봐도, 가비스 그 친구를 닮았다고 할것이야." " . . . 그렇 . . 습니까?" 라세스가 술을 받은 잔을 물끄러미 보며 대답하자 왕이 부드럽게 웃었다. "많이 컸구나. 정말 . . 먼저 가버린 내 친구이자 네 아비가 자랑스러워할만큼." " . . . 감사합니다. 그보다 . . 전하, 절 왜 부르셨는지." 라세스가 고집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왕이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더니 자신의 잔을 잡고 한입 마셨다. "예전엔 그리도 날 잘따르더니 말이다 . . 그래, 가비스가 그렇게 가버리고, 내가 왕이 되었을 때부터 . . 넌 내게 더 이상 '삼촌'이 아닌 '전하'라 불렀지." "그 때부터는 더 이상 '삼촌'과 '조카' 같은 사이가 아닌, '왕'과 '신하'의 사이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라세스의 담담한 대답에 왕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잔을 손에 잡고는 라세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 . 아크산은 어떻더냐?" " . . . 전하께서 더 잘아시지 않습니까? 자신의 궁에서 근신하란 명을 내리신 것은 전하십니다." 라세스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다. 잠시 왕의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그리곤 그는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방안에 묘한 침묵의 기류가 형성되던 와중에 왕이 작은 웃음소리로 그 기류를 날려버렸다. "그래그래 . . 네 주군이라 이거로구나." " . . . " 라세스가 대답이 없자 왕은 탁자위에 세워져있던 병을 들어올려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륵 맑은 소리를 내며 투명한 잔 안에 붉디붉은 술이 담겼다. 그때까지도, 라세스는 전혀 술에 입조차 대지 않고 있었다. "내겐 형님의 아이이자 친조카였던 아크산도, 내 친구의 아이였던 너도. 모두 소중한 조카였지." 왕이 잠시 그리움이 담긴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라세스 역시 왕의 시선을 따라 창 밖을 보았다. "하늘이 점점 맑아지는구나." " . . .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야, 맑아졌어 . . 구름이 많이 걷혔지. 예전에는 저 흐린 달조차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언제나 하늘을 감싸고 있던 회색빛 구름이 조금 옅어진것도 같았다. 라세스는 가만히 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왕을 바라보았다. 왕 역시 시선을 돌려 라세스를 보고 있었다. " . . . 절 부르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아까부터 계속 그 소리로구나. 나와 함께있는것이 싫으냐?" 짐짓 서운하다는 듯한 그의 어투에 라세스가 다시 정중히 말했다. "연유가 무엇입니까?" " . . . 하여간 고집은 . . 그런 점도 가비스 그 친구를 꼭 빼닮았어." 못마땅하다는 듯 . . 혹은 그립다는 듯 라세스를 보던 왕이 다시 입 속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잠깐동안의 침묵 속에서 라세스는 자신이 들고있는 잔의 매끌매끌함을 느끼며 약간의 미동으로 출렁이는 잔속의 술을 바라보았다. 힐끔 그런 라세스를 보던 왕이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네게 아크산은 누구더냐." "제 하나뿐인 주군이시고, 제가 제 삶을 받쳐야 할분이십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라세스의 모습에 왕이 껄껄 화통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라세스의 보았다. 그리곤 비틀린 감정이 묻어난 눈빛으로 물었다. "흠- 그렇다면 아크산에게 그 검은 머리의 계집은 어떤 존재이냐?" " . . . 엘 . . 말씀이십니까?" 왕이 관심없다는 듯이 잔을 매만지며 말하자 라세스가 술잔을 보던 시선을 들어 의구심을 품은 눈동자로 왕을 보았다. 왕은 라세스의 눈빛에 의자에 비스듬히 앉으며 말했다. "그래, 아크산에게 그 계집은?" " . . . 그저 잠깐의 여행을 함께한 . . " "그랬다면 감옥에서 탈옥시키고, 탈출을 돕지는 않았을터." 왕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라세스가 자신의 잔을 손에 꽉 쥐었다. 잔 속의 술이 수없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사실을 말하라. 라세스.G 백작." 그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왕의 위엄이 흘러나왔다. "지금부터는 더 이상 예전의 관계가 아닌 '왕'과 '신하'의 관계니라." 왕이 자세를 바로하며 말하자, 라세스가 잔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어찌 제가 전하께 거짓을 고하리까." "방금 거짓을 고해놓고는 눈 하나 깜짝않고 그 말을 입에 담는 것이냐?" 라세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 . . 무슨 . . 거짓을 말이십니까?" "백작은 알고 있을 것이야. 아크산에게 그 계집이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창에가 서서는 밖을 바라보았다. " . . . 엘은, 그저 여행 동료로 . . " "내 분명 아크산이 그 계집에게 보내는 축복을 보았는데도 말이냐?" 가소롭다는 듯한 왕의 말에 라세스의 몸이 굳었다. "우리 하빔 특유의 자신의 [아라]에게 보내는 축복을 내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감히 네가 내게 거짓을 고하는가, 백작!" " . . . " 라세스가 입술을 깨물며 땅을 짚고 있던 손이 새하얘질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 . . . 그래, 좋다." 왕이 뒤돌아서며 그런 라세스를 보다가 비릿한 웃음을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내 특별히 날 속인 그대의 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주겠노라." 불안함이 라세스의 온 몸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살짝 떨리는 라세스의 어깨를 더욱 꽉 잡으며 왕이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 기회를 받아들이겠느냐?" "하명 . . 하십시오 . . " 겨우겨우 내뱉은 라세스의 말에 왕이 라세스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그 계집을 죽여라." " . . . " 라세스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지고 왕이 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크산의 [아라]인 그 계집을 죽여라. 그것이 네 주군을 구하고, 너의 죄를 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시금 세브릭과 사켄을 만나 안도했기 때문일까? 감질나게 내 몸을 흔들던 감기 기운이 완전히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대륙으로 향하는 배 속에서 내가 정신을 차릴 때는 물을 찾을 때와 식사를 할 때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겠지. 붉게 열이 오른 얼굴로 힘겨운 숨을 내쉬는 내 모습에 어이없기도 했다. 아니 . . 내가 이렇게 아플때도 있구나 싶었달까 . . 솔직히 억울하기도 했다. 이렇게 아플꺼, 학교 다닐 때 아팠으면 오죽 좋았겠는가? 그럼 병원 입원해서 학교 안가도 됬을텐데! 속으로 한없이 안타까워하면서도 목이 까끌까끌하고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안그래도 배를타고 가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 . 열 때문에 누워있음에도 천장이 빙글빙글 도니 . . 미칠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꼬박 5일동안을 끙끙 거리며 앓고 겨우 열이 내리고 두통이 가시게 된 6일째였다. " . . 괜찮냐? 안죽었어?" 하브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말하는 모습에 힘없이 웃으며 그의 고수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아아- . . 죽을 것 같아요. ." "아씨! 기다려, 금방 물수건 가져올테니까!!" 하브가 순식간에 커지더니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아-" 잠시 하브를 잡으려했던 손을 힘없이 떨구고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난 물이 더 마시고 싶은데 . . 그보다 . . . 억울해 . . 왜 이렇게 아픈거야 . . 아 . . 진짜 서러워 . . " 울먹울먹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끼익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브가 왔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을 때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세브릭의 모습이 보였다. " . . . 나 죽을 때나 오지. 왜 지금 왔어요?" "당신이 정신이 없었을 뿐이지. 전 매일 왔어요." "아항- 내가 그렇게 걱정됬구나. 역시, 세브릭 날 너무 사랑하는군요." " . . . 아픈데도 그런 소리 할 기력은 있나보죠?" "에헤- 아프니까 . . 헛소리가 제대로 나오나보죠, 뭐." 킥킥 웃다가 목이 따끔거려서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 . . . 각혈하겠다 정말로 . . " 작게 뜨거운 숨을 몸 밖으로 내뱉고는 눈을 감았다. "많이 아픈가요?" 조용한 와중에 들리는 세브릭의 물음에 여전히 눈을 감은채로 말했다. "글쎄요, 죽진 않을만큼 아픈데요." " . . . 그 입은 아프지 않은 모양이군요." "후후- 불사의 입이거든요." 핑 도는 정신 때문에 다시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을 때보다 그나마 눈을 뜨고 있을 때가 더 나았으니까. 멍하게 세브릭을 올려다보고 있자 그가 가만히 날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속을 뻗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세브릭의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기분이 좋아져서 헤실거리자 그가 말했다. " . . 왜 웃죠?" "세브릭 손 . . 차가워서 기분 좋아요." " . . . 그래요?" "응- 많이 많이 . . 좋아요."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있던 그가 손을 떼더니 다른 한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듯 만졌다. 그에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았다. " . . 세브릭, 그렇게 쓰다듬으면 이제 겨우 내린 열이 다시 올라가버릴지도 몰라요." "그런가요?" 가벼운 세브릭의 대답에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세브릭같은 미인은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뒤돌아봐야해요. . . 콜록. . 우아 죽겠다 진짜 . . "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까칠까칠했다. 열받아~ 짜증나~ 신경질난다고!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세브릭이 말했다. " . . . 매력적인가요?" "안그럴것같아요?" "당신에게는." "헤에- 내가 항상 말하잖아요. 세브릭은 너무 매력적이라니까요. 내 심장이 두쾅두쾅거려요. 콜록- 켁. . " 아, 이대로 죽는건가 . 미인박명이라더니 . . 훌쩍. 왜 세브릭이나 사켄이나 . . 하브는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거지? 아- 지오가 날 자신의 곁에 데려가고 싶은건가? 지오지오, 내게 부탁해놓고 이렇게 날 데려가면 안되죠. 흑, 지오하니까 지오 보고 싶다. 나 아픈데- 지오. 으헝헝- . . . 아, 나 방금까지 왜 울었지? 횡설수설 정신을 못가누고 있는데 세브릭이 내 볼을 쓰다듬던 손을 눈으로 옮겼다. 그리고 스윽하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에 살짝 눈을 감았을 때, 바로 앞에 세브릭의 달콤한 숨결이 느껴졌다. 멍하게 눈을 뜨자 세브릭이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 . . 깜짝이야 . . . 키스하는줄 알았잖아.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잡고 있는데 곧 세브릭이 고개를 들었다. "열은 많이 내린것같군요." " . . 세브릭, 그러면 안돼죠." "뭘 말이죠?" 세브릭이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며 대답하는 것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가 그저 한숨을 쉬었다. "잔인하다니까 . . 세브릭도 은근히." " . . . 그러니까 묻잖아요? 뭘 말하는거죠?" "그러고보니까 . . 내가 살던 곳에서 이런 말이 있는데." " . . 당신은 내 질문에 항상 대답하지 않는군요 . . 그보다 무슨 말이 있다는거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날 보는 세브릭의 모습에 그의 긴 머리카락을 확 하고 잡아당겼다. 살짝 미간이 구겨진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좀더좀더- 가까이 와봐요." 생글생글 웃는 내 모습에 세브릭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의 차분한 숨결이 느껴질만큼의 거리에서 똑바로 그의 장밋빛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있잖아요.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 . . . 당신에겐 항상 두번 질문해야하는건가요?" 내 착각인지 조금 떨린 듯한 그의 목소리에 잠시 갸웃했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감기는 옮기면 씻은듯이 낫는데요." " . . 옮기면?" "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잡고 쓱 잡아당겼다. 살짝 커진 그의 눈동자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그의 장밋빛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아련히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나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즘에 벌컥 문이 열렸다. "물수건 가져왔어!" 버럭버럭 소리지르는 듯한 하브의 목소리에 난 슬그머니 손에 힘을 빼고 힘없이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세브릭은 내가 잡아당긴 자세에서 천천히 다시 본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쿵쾅거리는 듯한 하브의 발자국 소리를 듣다가 말했다. "기운차네요, 하브. 뭔일 있어요?" "없어. 젠장, 비리비리한 인간같으니. 약해빠져가지고는!" 뭐가 그렇게 성질이 났는지, 계속 왁왁 거리며 그가 물수건을 꽉 짜고는 내 이마에 얹어주었다. 그리고는 훽하고 날카로운 눈동자로 태연하기 짝이없는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 . . 인간남자, 나가지 그래?" "제가 왜 그래야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 녀석의 간호정도는 나만으로 충분해." 그러니까 나가. 라는 뒷말을 애써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멀뚱멀뚱 그 둘을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 . " 하브와 세브릭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그런 그들에게 어색하게 웃어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둘이 . . 언제 그렇게 친해진거에요?" 내 말에 둘다 침묵을 유지하며 지그시 날 노려보는 모습에 콜록 기침하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아- 머리 아파라 . . 기침이 자꾸 나오네." 흥얼거리듯이 말하며 애써 천장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데,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세브릭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 . . 이제 몇일만 있으면 서연합의 진영이 있는 곳에 도착할꺼에요." "벌써요?" "당신이 앓아누운게 몇일인지 알긴 아는건가요?" . . . 그러니까 . . 일주일이 좀 안돼지.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이마에 올려져있던 물수건을 손으로 잡고 일어나 앉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하브가 팍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안눕냐?! 침대에 누워서 다시 죽은듯이 자고 싶은가보지?!" "아아 . . 하브, 무서워요. 콜록-" 웃고픈데 기침이 나오니까 이거 뭘 먼저 해야하는지 . . 열심히 기침을 한후에 조금 진정되자 안절부절 못하고있는 하브와 침착하게 앉아있는 세브릭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있잖아요- 나 지금 바람이 쐬고 싶어요." " . . 바람?" "안돼요." . . . . 하브 공략인가. 속으로 두주먹을 불끈 쥐고 하브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하브는 그런 내 표정에 머뭇거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브 . . 계속 선실 안에 있으니까 답답해요." " . . . 하지만 . . 감기니까 . . " "문을 열어놓죠. 그럼 환기가 될테니까요." 세브릭이 깔끔하게 정리하는 말에 하브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모습을 보고는 하브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하브 . . . 나 바다가 보고 싶어요, 콜록. 내 소원이에요." 감기에 걸려서 열로인해 눈물이 글썽글썽한 상태이기에 애써 쥐어짜낼 필요도 없었다. 내 말에 하브가 다시 맹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있던 세브릭이 이를 아득 깨물더니 날 보며 환히 웃었다. "거기서 더 악화되면 어쩔껀가요?" "걱정말아요, 킁. 어쨌든 죽을때 죽더라도 전쟁은 종전시키고 . . 에 . . 에취. 죽을테니까요. 아- 하브- 나 바람 쐬고 싶어요, 바다 보고 싶어요-" 하브의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칭얼거리자 하브가 결정을 내렸는지 힐끔 세브릭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깐 . . 이라면 . . 뭐 괜찮겠지 . . ?" "안ㄷ. . " 세브릭이 대답하기 전에 얼른 끼어들어서 와와 거리고는 침대에서 발을 내려놓았다. 그때 갑자기 핑하고 현기증이 나서 하브에게 기대어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뭐 . . 뭐야, 괘 . . 괜찮아?!" 내 행동에 화들짝 놀란 하브가 그대로 동작그만 상태가되어 굳어있자 세브릭이 그런 우리를 보더니 살벌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자, 이제 알았겠죠? 얌전히 누워서 다시 주무세요." "히잉- 싫어요. 싫어싫어싫어- 바람 쐬고 싶어. 여기 있다가는 그냥 질식사 당할것 같다고요- 아악악악악! 밖으로 내보내줘ㅇ . . 켁. . 콜록콜록" 악을 쓰다가 또 다시 몰려든 기침에 눈물과 함께 기침을 쏟아내었다. 아, 열받아. 이 놈의 기침. 좀 멈추는 방법 없나? . . . 숨을 참으면 멈춰지지 않을까나? 정신을 감기 때문에 봉인당한채로 한참을 말도 안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짙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일자로 입을 다문 세브릭이 날 보고 있는게 보였다. " . . . 왜요?" "그렇게 나가고 싶어요?" "네. 나가고 싶어요." " . . 할 수 없군요." "와-" 세브릭이 허락해줬다- 그 하나로 헤실헤실거리며 웃자 세브릭이 다가오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 멍하니 그 손과 세브릭을 번갈아 보았다. "이건 무슨 뜻?"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요?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시야가 어지러울텐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안고 나가야하지 않겠어요?" 차분한 세브릭의 말에 조금 감동을 받은채로 그 손을 잡으려 하는데 훽 하고 내손을 낚아채는 존재가 있었다. "흥- 힘이라면 나 역시 인간 못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인간보다 강한것이 우리 이샤링 족이지." "아아- 하브 . . " 하브의 금안이 불타오르더니 세브릭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나보다 조금 더 큰 하브의 경우, 세브릭과 머리하나정도의 차이는 났기에 세브릭은 그런 하브를 내려다보다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생각해야할 것은 힘보다는 엘의 편안이에요." "나도 엘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하브와 그런 하브를 비웃는 세브릭을 번갈아보다가 하브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 . 뭔가 간지가 안나잖아. 나보다 조금 더큰 귀여운 하브가 안고 가는거랑, 나보다 훌쩍 큰 세브릭이 페로몬 폴폴 날리며 안고 가는거랑. "저기 . . 나도 세브릭이 날 안아주는게 더 . . " "뭐?!" 하브가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것을 보며 .. "딸꾹 . . " 그래, 난 딸꾹질을 시작했다. 내 딸꾹질에 잠시 선실 안은 소강사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전히 세브릭과 하브는 대화(?)를 끝내지 않았다. "인간남자, 내가 할테니, 넌 필요없다." "죄송하지만, 저 역시 이번만큼은 귀찮지만 신경쓰이는 일이라 물러설 수 없군요." "크윽, 네 놈보다는 내가 낫다!" "누가 그러던가요? 거기다가 . . 하브, 당신은 . . " 세브릭이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하브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모습에 하브가 잠시 뭐냐는 듯한 시선으로 세브릭을 보다가 곧 세브릭의 행동을 이해했는지 내 손을 놓고는 바락바락 대들기 시작했다. "네. . 네놈이, 인간 주제에! 감히 , 감히 날!!" "감히는 무슨 감히인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엘을 안아들기에는 당신은 너무 작다는걸 알고 있나요? 작고도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을정도로 작아요." 헉 . . . 4번이나 작다고 했어. 그 말에 하브가 충격을 받은듯 부들부들 떨더니 곧 양 손을 모았다. 그리고는 눈에 불을 품은채로 세브릭을 노려보았다. "네 놈 . . 용서치않는다!" "이 곳에서 그런 걸 날린다면, 저흰 순식간에 침몰이겠군요. 어디 해보시죠." 차분한 세브릭의 응답에 하브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 . . 밖에 나가지 말까? 이거 엄청 흥미진진한데. 어느새 딸꾹질까지 멈춘채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데 순간 누군가가 내 몸을 들어올렸다. "꺄아-" 살짝 여성스럽고도 귀여운 비명에 나 스스로 만족하고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내 비명에 세브릭과 하브가 멍하게 날 보는 것을 보니 . . 일단 두명은 아니였다. 그렇다면 . . "나가지." 담담한 목소리로 날 공주님안기 자세로 안아든 사켄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 잠시 정신을 놓은채 문 밖을 벗어나는 우리를 보던 하브와 세브릭이 소리쳤다. "비겁하다!" "비겁하군요!" 그 둘의 말에 난 힐끔 사켄을 보며 말했다. "비겁하다는데요?" " . . . 기회는 있을 때 잡아야하는 법이지." 사켄의 진지한 말에 순간 웃음이 터져나왔다. 맙소사, 지오. 나 여기서 완전 사랑받고 있어요. 새벽이 찾아오는 무렵, 회색빛 구름을 헤치고 빛이 살며시 한남자의 볼에 닿았다. 그 빛에 그의 푸른빛 도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바다를 담아놓은 것 같은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를 지닌 남자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더니 드르르륵하는 소리에 눈을 감으며 말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건가?" "네.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 아크산님." 아크산은 다시 눈을 뜨더니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책장이 반쯤 옆으로 밀려난채 있었고, 본래 책장이 있었을 자리에는 칙칙한 어둠으로 잠긴 입구와 함께 녹색빛 머리카락을 지닌 라세스가 서있었다. "전하가 그대를 불러 무슨 말을 하던가? 날 죽이라고 하진 않았나." 가만히 자리에 서있던 라세스를 보던 아크산이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군.'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듯 말했다. "평소와 같으면서 같지 않았다고 해야겠습니다." 아크산의 질문에 라세스가 잠시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 흔들림을 보지 못한 아크산은 라세스를 지나쳐 입구로 들어서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셨지?" 라세스는 아크산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뒤돌아서며 말했다. "평소처럼 자신의 밑에 있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대는 평소처럼 대답한건가?" 항상 듣는 말이었는듯 아크산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걸어갔다. 그에 라세스는 그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말은?" " . . . 없었습니다." 잠깐의 침묵에 이상하다는 듯 라세스를 바라보던 아크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진실로?" " . . 진실로." " . . . 믿겠다." 라세스의 말에 아크산이 대답하며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갔다. 그에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흔들리던 눈동자로 쳐다보던 라세스가 입술을 깨물곤 눈을 감았다. 《분명 아크산과 너는 하빔을 떠나 그 계집에게 가기로 했을 것이야. 맞지 않느냐?》 비웃는듯한 왕의 목소리가 라세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고 보내주마. 그대신 너는 그 계집의 목숨을 내게 받쳐라.》 《 . . 어째서 엘에게 그리 집착하십니까? 고작 평범한 여자아이일뿐입니다.》 라세스의 말에 왕은 침묵을 지키더니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싹은 애초부터 잘라내야하지 않겠느냐? 내 일에 방해가 되는 존재는 깨끗이 정리하고 기분 좋게 하고 싶구나. 거기다가 . . 그 아이는 이미 대륙의 절반 이상을 종전의 분위기로 몰아넣었어. 난 그걸 바라지 않는다. 알고 있겠지?》 라세스는 눈을 떴다. 그리고 이미 멀어져버린 아크산의 모습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하, 저는 어째서 전하가 그리 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 아버지와 함께 서서 호탕하게 웃음지으며 자신을 안아주던 왕을 떠올렸던 라세스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사켄의 품에 안겨 멍하니 바다를 보는척하면서 힐끔거리며 사켄을 보았다. 짠내나는 바람이 주위를 헤매고 있었고, 그 바람에 살랑이는 사켄의 회색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아- 지오, 제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도와줘요. 저건 사회문란을 조정하는 악질 범죄야. 여자들이 심장을 부여잡고 하악하악하며 손을 내뻗을 수 밖에 없는 마약과도 같은 아름다움이라고. "하아 . . " " . . 왜그러지? 역시 몸이 별로 . . " 사켄의 담담한 시선이 내게 와닿자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침묵을 유지했다. 그의 걱정어린 회색빛 눈동자에 내가 담기자 난 또 다시 약간 울음섞인 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 이거 정말 . . 확 저질러버려? 한참을 갈등하며 사켄의 얼굴로 향하는 손을 애써 저지하며 움찔거리고 있을때, 뒤에서 세브릭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다시 들어가보는게 좋겠군요." " . . . 싫어요- 그건. 그냥 . . 좀 . . . 하아 . . " 아아- 신이시여 . . 아니 그러니까 지오 . . 잔인한 지오. 당신은 제가 금단의 정원에 발을 딛게 하는군요. . . . 온세상이 꽃밭이야. 아름다운 세상이라 눈물이 나는구나. 제길, 이런 아름다움이 '나의 세계'에서도 있었으면 좀 좋아? 왜 거기서는 이런 썸씽이 없었던거지? 속으로 눈물지으며 사켄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그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았다. 움찔거리는 사켄이 느껴졌지만 아랑곳않고 그의 어깨에 기대서 비딱한 눈초리로 우릴 보고있는 세브릭과 하브를 번갈아보았다. 하브는 팔짱을 끼고 초조한듯 한쪽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고, 세브릭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은채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서연합은 언제 도착해요?" " . . 지금 바람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하더군요. 적어도 3일은 걸린다고 말하는걸 들었어요." 세브릭의 차분함 대답에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다가 . . . 내려다보다가? " . . . 표정이 또 이상해졌군요. 그 표정은 뭐죠?" "응? 내가 뭐요?" 내 표정이 묘해졌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세브릭의 눈매가 의심으로 반짝이는것을 보며 슬며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솔직히. 나보다 큰 세브릭을 내려다보는 기회가 어디 흔한가 말이다. 역시 사켄이 크구나. 세브릭을 내려다볼 수 있다니. 이거 참 . . . 후후, 기분 좋은 일인데. 한참을 그 행복을 만끽하며 세브릭을 보고 있자 하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응? 야가 아니잖아요. 난 꼬박꼬박 하브라고 부르고 있는데, 하브는 왜자꾸 엘이라고 안불러요? 이건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구요-" 내 칭얼거림에 하브가 서서히 이를 악물었다. 그 모습을보며 나 역시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아아- 하브의 저 이글거리는 눈동자. 귀엽기도 하지. 조금만 더 약올려볼까. 하브를 내려다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하브가 몇번 벙긋벙긋 거리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 . . . 뭐에요?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실까?" "우리 . . 이샤링족은 . . " "이샤링족은?" " . . . 아무것도 아니야. 나중에 말하지." 그리고는 고개를 훽 돌려버리는 하브.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모 . . 몬스터다!!" "크와와-" 갑자기 촤악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이리저리 출렁였다. 사켄이 겨우 중심을 잡고 자리에 버텨섰을때야 나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바다에는 예전에 한창 유명했던 포켓몬스터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최고로 버리고 싶은 포켓몬이었던 붕어킹이 진화한 갸라도스와 비슷한 괴물이 붉은 눈동자에 살기를 번들거리며 스믈스믈 다가오고 있었다. . . . . 그 갸라도스보다는 작은것 같은데 . . 하지만 좀더 . . 아름다운 생김새야. 멍하게 그 몬스터를 보고 있을때, 배 위는 순식간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켄, 선실로 들어가십시오!" "헹- 저런 몬스터따위, 나 혼자로도 충분해!" "개별행동은 자제해주세요." "부탁하지." 사켄이 세브릭의 말에 대답하고 날 안고서 선실로 들어서려고 했을때, 몬스터가 울부짖었다. 그 울부짖음에 배 위에 있던 두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귀를 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크윽-" "사켄!" 사켄만은 날 안은 팔은 풀지않고 자리에 꼼짝도 않은채 입술을 깨물었다. 새하얘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지금 이 소리가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고통스런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야 . . 뭐가 어떻게 된거지?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저 몬스터의 울부짖음을 뭘로 해석해야하는거지? "사켄, 빨리 내려놔요! 지금 사켄 얼굴 무시무시하다니까요?!" "시 . .끄럽다 . . ." 몬스터는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 . 아니 노래하는것같기도 한데 . . 하여간 울음소리를 멈추지 않고는 배를 향해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 모습과 사켄을 번갈아보다가 순간 나는 내 주위를 맴도는 존재들을 깨달았다. 그들의 .. 아마도 손이라고 추정되는 것이 내 귀를 살며시 감싸고 있는 것을 알았다. . . . 이들때문에 나는 저 소리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건가? 그 존재들을 보던 나는 내 손을 들어올려 사켄의 귀를 막았다. 그러자 사켄이 고통으로 얼룩졌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지금 . . 뭐하는. . 거냐. 네 . . 귀나 . . . 막아라!" 힘들게 말을 이어가는 사켄의 모습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차피 말해봤자 못들을것 같으니까. "내려줘요." " . . . 뭐라는 . . " "내려줘요." 그의 귀에서 살짝 손을 뗀채 그의 귀에대고 크게 말했다. 그가 내 말에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저으려는 모습에 다시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괜찮으니까, 내려줘요. 부탁이에요, 사켄. 안내려주면 미워할꺼에요." " . . . 넌 . . . " 내 진심이 살짝 섞인 목소리에 사켄이 날 보더니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내가 사켄을 미워할리 있겠어요? 사켄을 미워하게 되는건 내가 미인들을 보면 치를 떨고 싫어하는 것보다도 더 현실성없는 얘기인데.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사켄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웃어주고는 다가오고있는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배 위의 사람들은 저 울음소리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한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이샤링족이라던 하브조차도 그 괴물을 보며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그렇구나. 하브도 저 몬스터한테는 어떻게 할 수 없는가보지? 멀뚱히 그들을 보다가 내 옆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는 존재들을 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이 상황은 자신들과는 관계없다는듯이 유유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요, 나 좀 도와줄래요?" " . . . 엘?" 사켄이 날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그 부름을 무시한채 내 옆의 존재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누군지는 잘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신들이 누구와 연관되있는건지는 알것같거든요." 이 다정함, 상냥함, 부드러움. 그렇다면 . . . 그 존재는 단 한명. "지오잖아요?" 내 말에 그들이 날 보는것이 느껴졌다. 눈도 없고, 입도 없고, 손도 없지만. 그 존재들은 날 보고 있었다. "지르오디스, 그가 관련되있잖아요? 틀려요? 아니라고 해도 날 좀 도와주세요." 그들은 묘한 웃음을 짓는듯한 느낌으로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날 감싸안았다. 곧 머릿속으로 이지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틀리지 않았어요, 우린 지르오디스께서 그대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대의 주위에 머무는 존재. 무엇을 바라나요?】 . . . 그렇군. 다행히도 여자랑 비슷한 느낌이네. 남자랑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으면 . . . 분명 나는 한방에 뿅뿅해서 지금 상황이 어떻든간에 작업에 들어 . . 콜록 . . 이게 아니야. 지금은 이렇게 장난칠 상황이 아니라고. "저기요, 저기서 지금 이쪽으로 오고있는 저 존재를 저지해주실 수 있나요? 원래부터 광포한 존재가 아니라면, 저 존재는 비틀림때문에 생긴 존재일테니까요." 작게 기침을 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채 그 존재들에게 묻자, 여러가지 목소리가 복합적으로 얽힌것 같은 그 존재는 다정히 웃는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럼 부탁드릴께요." 내 대답에 그 존재들은 살며시 날 쓰다듬더니 다가오고있는 몬스터에게 향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이는 그 존재들은 몬스터를 몇번 휘감더니 그 몬스터에게서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기류를 감싸안고 몬스터에게서 떨어졌다. 곧 존재들이 떨어지자 몬스터가 우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여전히 붉지만 살기가 맴돌지 않는 선량한 눈동자로 똑바로 배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천천히 자신의 귀에서 손을 떼었고, 나는 그런 그들은 신경쓰지 않은채 날 바라보는 듯한 그 몬스터 . . 아니 이제는 몬스터가 아닌 그 존재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존재가 움직이지 않아 바다가 잔잔해지고 배는 다시 자신이 향해야하는 곳으로 나아갔다. 푸르스름한 빛깔이 도는 그 존재가 곧 다시 입을 열자,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자신의 귀를 두손으로 막았다. "우우우-" 청량하고 맑은 . .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에 난 멍하니 정신을 놓고 그 존재를 보았다. 【고맙다고 하는거에요.】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그 존재들을 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몬스터였던 존재를 보았다. "고마워할것까지는 없는데. [에르테이샤]로서, 이 정도 일은 해야할 일 아니겠어요? 내가 죽을 상황이기도 했고." 내 말에 그 존재들 . . 아니, 존재들인지 그냥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존재는 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당신은 누구에요?" 【당신은 우리가 누구라고 정의할 수 있나요?】 다정하고도 다정한 . . 지오를 꼭 닮은 여성판 지오 목소리에 잠시 정신을 놓고 정신없이 매달릴뻔했다가 푹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지오투?" 【 . . . . 】 "농담이에요." 씨익 웃고는 그 존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부드럽게 내 손을 감아오는 그 존재들을 보며 말했다. "이름을 지어줘도되나요?" 【당신의 뜻대로.】 천천히 내게서 벗어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유유히 흐르는 그 존재들을 보다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존재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류(流). 류라는 이름 싫다면 날 버리고 다시 지오에게 돌아가도 좋아요. 작명센스가 형편없긴하지만 항상 흐르는 당신들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이름인건 확실하죠?" 내 웃음어린 말에 그 존재들 . . 아니 류가 살며시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는 곧바로 내 손을 놓고 흘러가버리는 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 . . . . . 뭘 한거지?" "응?"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자 사켄이 날 내려다보는것이 보였다. "에헤- 아무것도?" " . . . 분명 . . " "음음?" 사켄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내 시야는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엘 . . 넌 . . " 나이스 타이밍이로군. 점점 시야가 좁아지며 가까워지는 사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많은걸 알면 다쳐요." 그의 다정한 심장소리를 들으며 난 또다시 엄청나게 올라버린 열 때문에 정신을 놓았다. 그렇게 쓰러진 나는 꼬박 3일을 다시 앓았다. 뭐, 그 3일동안 여러가지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 . 가끔 정신이 들었을때 날 보며 왁왁거리는 하브 때문에 다시 끙끙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던가. 아니면 깊디 깊은 밤에 이마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을 지닌 손 때문에 잠시 깨어나면 차분한 얼굴로 날 보다가 내 눈을 감겨주며 "더 자라."라고 말하는 사켄이라던가. 내 볼과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묘한 한숨을 내쉬는 세브릭이라던가. . . . 그래, 세브릭이 문제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문제란 말이다. " . . . 볼이랑 머리카락을 쓰다듬는건 좀 . . " 이마는 열이 높은가 때문에 만질 수도 있다지만 . . 볼과 머리카락을 쓰다듬는건 좀 묘한 의미가 담긴 행동 아닌가? "그렇다고 쓰다듬고 있을때 벌떡 일어나서 떡하니 손을 잡고는 날 잡아잡숴요! 라고 할 수도 없고 . . " 복잡한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어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 정말 난감한 사람이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내가 아무리 모른척하고 둔한척하려고 해도 . 이건 알아달라고 아득바득 앵기는 꼴이니, 뭐 어떻게 할수가 없잖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벌컥하고 문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하브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 세브릭의 모습에 순간 묘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 . . 당신도 양반은 못되겠어. 안그래도 당신 때문에 이것저것 고민하고 있는데. " . . 상황이 복잡하게 됬어요." "왜요?" 난 너 때문에 더 복잡해. 알아? 지금 내게는 이것보다도 더 복잡한 문제가 없다고. 겉으로는 유순히 웃으면서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말했다. " . . . 와있더군요." "누가요?" 뭐가 와있다는거야? 세브릭을 향한 맹렬한 고민을 잠시 접어둔채, 주어, 목적어 다 잘라먹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 . 당신이 만나려고 했던 사람." "내가 만나려고 했던 사ㄹ. .." . . . 내가 만나려고 했던 사람? 내가 가는 곳은 어디? 서연합. 가려고 했던 이유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그럼 만나야 했던 사람은? . . . . 사람은 . . " . . . 설마 . . 카슘 제국의 황제 . . 라던 . . 지?" 설마설마하는 내 말에 세브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가 와있어요." . . . 설마가 사람잡는다더니. 오, 지오. 내게 이럴 수는 없어요. 울상을 지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가 다시 번쩍 들며 세브릭을 향해 말했다. "나 목욕도 안해서 냄새날텐데." " . . . " "거기다가 머리도 몇일 안감아서 기름이 흘러내릴지도 모르는데." 아팠으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 . 첫인상이 중요한 법인데. 에이씨, 이럼 안되는거 아니야? 이렇게 더러운 모습으로 새로 떠오를 미인을 만나서야 되겠냐고! "아아, 이럴 수는 없어. 이런 모습으로 미인을 만나다니. 이건 죄악이야!" " . . . 엘." "그렇게 생각하죠? 미인일지도 모르는 폐하를 만나는데, 이런 꼴로 만나다니. 안돼요, 절대로! 자, 우리 다시 하빔왕국으로 돌아가죠! 그것도 아니면 배를 돌려서 다른 곳으로 가던가!!" "시끄러워요." 세브릭이 가볍게 내 말을 자르면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침대 옆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동작그만 상태가 되어서 그를 보고 있는데, 그가 유심히 내 모습을 여기저기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그리 더러워진 정도는 아니군요." " . . . . 사람 간떨어지는 꼴을 보고 싶어요?" "무슨소리죠?" 장밋빛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지만 난 슬며시 그 눈동자를 외면했다. 당신이 요즘 내 머리카락이나 볼을 쓰다듬어서 내가 과민반응하게 된거 아니야.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때 똑똑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문가를 쳐다보자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서있는 사켄이 보였다. "곧 상륙한다는군." " . . 준비를 해야겠군요." 세브릭이 내 머리카락을 놓자 사르륵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아니라 툭하고 내 머리카락이 이불위에 흩어지며 떨어졌다. 흑흑- 이것 봐. 툭이라니, 툭이라니. 그 소리에 패닉상태에 빠져있는데, 세브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켄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패닉 상태에 빠진채로 그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시선으로 쫓다가 물끄러미 날 보는 사켄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왜요?" " . . . . 황제가 와있다더군." "아, 네. 들었어요. 이제 전 어떻게 한다죠?"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사켄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한쪽 손을 내밀며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그의 손을 보다가 내 손을 내밀어서 잡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꽉 쥐더니 확하고 끌어당겼다. "우앗-"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놓아지고 그 손은 내 등을 감쌌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내 오금을 받치더니 번쩍 안아들었다. 그에 순간 넋을 잃고 멍하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가 말했다. " . . . 요즘 사켄, 너무 적극적인데요? 나 혼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있는데." "3일동안 앓으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그럴 힘이 있는건가?" "그것도 그렇네요."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그가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널찍한 그의 품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서, 정말로 와있는거에요? 어떻게 알았는데요?" 내 질문에 사켄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더니 곧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직접 보는게 낫겠지." "음?" 사켄의 걸음이 빨라지는 것에 무심코 눈을 떴는데, 날카로운 그의 턱선에 순간 숨을 멈췄다. 아- 지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애써 그의 턱에서 시선을 떼고 있는데,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저 곳을 봐라." " . . 에?" 지그시 한방향을 쳐다보는 사켄의 시선에 나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곳 . . 그러니까 부두에는 붉은 빛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그 깃발 아래로 여러마리의 말과 은빛 갑옷을 번쩍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 . . . 저기, 단순히 그냥 사람들이 와있는걸지도 모르잖아요? 꼭 황제라고 단정지을 수는 . . " " . . 저 깃발을 자세히 봐라." "에?" 그의 말에 잠시 사켄에게로 돌렸던 시선을 다시 돌려 깃발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바람에 의해 강하게 펄럭이고 있어서 자세히 볼수는 없었지만, 분명 깃발에는 무언가가 새겨져있었다. " . . . 저거 . . 동물 . . 같은데." 마치 사자와 닮은 . . 하지만 사자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기에 뒷말을 흐리자 사켄이 말했다. "*카차다." (*카차 : 붉은 갈기에 황금빛 털을 가지고 있다는 신수(神獸). 대륙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세상이 창조될 때 신과 함께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동물이다.) "헤에 . . 카차 . . 요. . " . . 카차가 뭐지? 동물인가? 카차가 뭔지 몰라서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사켄이 말했다. "신수로서, 카슘 제국의 상징이기도 하지." "아 .. 그래요?" "하지만, 저 카차가 새겨진 붉은 기는 단 한사람 밖에 사용하지 못해." 사켄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카슘 제국의 황제, 그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깃발이다." " . . 그럼 평소 때는요? 다른 곳에서는 어떤 깃발을 . . " "카차가 새겨진건 같지만, 기의 색이 황금빛이지." . . . 붉은것보다는 번쩍번쩍한게 더 멋있을 것도 같은데. 그의 말을 듣고는 무심코 세브릭과 하브를 떠올렸다. . . 하긴, 세브릭이 더 내 취향이긴 하지. 하브 같은 꼬맹이 어따 써먹누. "그보다, 그가 직접 이렇게 행차할 줄은 몰랐군요." "음 . . 아무래도 저희가 눈에 띄 . . . 세브릭?" "뭐죠?" 뒤에서 들려오는 세브릭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대답하다가 그의 모습에 의아해질 수 밖에 없었다. " . . 그 차림은 뭐에요?" "뭐가 잘못됬나요?" 세브릭의 담담한 대답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추위는 나와 평생 연이 없어라는 듯한 얼굴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후드까지 달린 긴 옷을 입고 있었다. " . . . 뭐에요? 왜 후드 달린 옷을 입은건데요?" "그러면 안되는건가요?" 세브릭이 힐끔 날보며 대답하고는 재빨리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 바람에 매혹적인 장밋빛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가려졌다. " . . 아, 싫은데. 후드 쓰지 마요. 세브릭의 미가 퇴색되잖아요." "아픈것은 다 나은줄 알았는데, 아직도 열에들뜬 헛소리인가요?" "헛소리하지 않으면 내가 아니죠. 그보다, 왜 얼굴을 가리는건데요?" " . . 귀찮은 일이 있으니까요." "음?" 세브릭과 사켄의 시선이 잠시 맞닿더니 세브릭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사켄이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 . 이건 또 무슨 상황. 또 둘이서만 비밀 교환하는건가? 결국, 저 둘 사이에 내가 끼어들 틈 같은건 없다는 소리인가? "쳇, 인간들은 귀찮다." "아- 하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그대들을 놓아드리겠어요- 라는 마음으로 눈물을 머금고 둘을 응원하려는 찰나에 들려온 하브의 목소리에 난 망상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하브는 부두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순식간에 작아져서 내 모자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하브, 그러면 내가 모자를 못쓰잖아요." "시끄럽다, 네가 모자를 못쓰던 말던 내가 무슨 상관이 . . 야 . . " 투덜투덜대던 하브의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느끼고 힐끔 모자쪽을 보았다. "당신을 간호하느라 요 몇일새 제대로 못잤어요." " . . 아, 정말요?" . . 조금 감동적인데. 아니 좀 많이 감동을 물씬 먹어버렸는데. "그보다 . . 아까 전에도 말했듯, 그가 직접 이 곳으로 올 줄은 몰랐군요." 세브릭이 복잡한, 하지만 비틀린 시선으로 부두를 바라보았다. 그에 조금 놀란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순식간에 그 비틀림을 갈무리하고는 나를 보았다.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하던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 . . 뭐, 우리가 좀 눈에 띄는 일행이어야죠." "뭐가 말이죠?" "동연합의 사켄과 세브릭에다가 . . 동연합에서 생명의 숲으로, 거기서 또 하빔왕국까지 갔다가 이제 서연합까지 왔으니. 세브릭같으면 호기심이 안생길래야 안생길 수 있겠어요?" " . . . 그런건가요." 담담한 세브릭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데 . . 역시나 기대되네요." " . . . 또 무슨 말을 하려고 . . . " 세브릭의 의심서린 눈동자에 싱긋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아렌타 제국의 황제 폐하이신 맥클라스님은 중후한 멋을 풍기는 미중년이셨고, 하빔 왕국의 국왕전하는 좀 재수없긴 하지만 단아하신 미청년이라고 할수있는 외모고 . . 그럼 카슘 제국의 황제 폐하는? 이라는 생각을 하면 두근두근 하잖아요?" " . . . 제발 그 헛소리들, 카슘 제국의 황제 앞에선 하지말도록해요." "노력해볼께요." 작은 한숨을 내쉬는 세브릭을 보다가 설핏 웃으며 부두를 바라보았다. 냉정하게, 하지만 조금은 열정적인 시선으로 부두를 보던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카슘 제국의 황제 폐하. 전쟁과 여자에 열광하신다 들었는데. 어떤 분이실까 궁금한걸. "상륙합니다!" 한 선원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펄럭이는 붉은 기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곧 우리는 육지에 발을 내딛었다. 드디어 육지에 발을 내딛은 우리는 부두에 내려서자 마자 많은 병사들에게 둘러쌓였다. " . . . 설마했는데, 정말 우리를 맞이하러 온건가봐요." 이야, 우리는 유명인? 그들을 한번 쭉 훑어보고 있는데, 곧 한쪽이 갈라지더니 황금빛이 도는 붉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우리와 몇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걸어온 남자는 가볍게 목례하며 말했다. "카슘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든 완벽하게 해낼 듯한 인상의 남자를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가 유심히 우리를 둘러보더니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고 한쪽으로 비껴섰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거절은 용납치 않겠습니다." . . . 와우, 말 한번 살떨리게 하네. 그 남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껀데요?" " . . 엘." 사켄이 한숨을 쉬듯 내 이름을 불렀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하늘빛 눈동자로 날 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거절하면, 끌고라도 가실 기세라서 말이죠. 거절하면 어쩌실꺼에요?" "흐음 . . "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옆에 서있던 사켄과 세브릭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거야 내 알바 아니고. 바로 앞에 멈춰선 남자는 거의 세브릭과 비등한 키를 지닌 사람이였다. 옅은 하늘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신비롭지만 . . . 뭐랄까, 신비로운 색만 지녔을뿐 그에 걸맞는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라고나 할까. 지금까지 꽃밭에서 뛰돌며 아하하거리던 내게는 갑자기 꽃밭에서 불쑥 솟아난 소나무같은 남자였다. "레이디의 말씀대로, 끌고라도 갈 생각입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무심한 눈동자로 손을 내미는 그였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짝 박수를 쳤다. "좋아요." 그러자 그 남자는 싱긋 미소짓는 나를 보며 물었다. "뭐가 좋다는 것입니까?" "당신 매력있네요. 따라가드리죠." 좋아좋아, 저런 건조한 남자. 요즘 사켄이나 세브릭이나 아니면 하브나. 내게 너무 다정해서, 당신같은 사람 오랜만이라고. 싱글벙글 웃는 나를 침묵으로 대하던 그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 갑자기 세브릭이 내 손을 낚아채고, 사켄이 그의 손을 잡고는 악수를 하듯 꽉 쥐었다. "아렌타 제국의 사켄.T라 합니다." 차분한 사켄의 대답을 듣다가 순간 든 생각. . . . 도대체 저 뒤에 붙은 G 라던가 T는 뭐지? 귀족이라는건가? "제발 얌전히 좀 있어줄 수 없나요?" "세브릭이 뽀뽀해주면 얌전히 있을께요." " . . . 부탁이 있는데." 가까이서 볼 수 있기에,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가 화려하게 빛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그 구경에 즐거워진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뭔데요?" "조심하지 않으면 . . 이번에는 정말로 잡아먹힐지도 몰라요." 어떤식으로요- 라고 물으려고 했던 나는 손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한 온기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요즘따라 그의 행동이 묘해진 것을 떠올리고는 살며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 " . . 조심할께요." " . . . . " 뭐, 세브릭에게 잡아먹힌다면 . . 그건 그거 나름대로 매우 . . 아니 무척이나 가슴 떨리는 첫경험이 되겠지만. 그래도 . . . 좀 난감한데. '이곳'에서 일치르고 돌아가면 . . 우리 부모님은 날 죽이려들꺼야. 하긴, '저곳'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아, 그러고보니까 여기선 성인이니까 상관없나? 세브릭의 시선을 피한채 나름 진지한 생각을 하던 나는 아직까지도 사켄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자, 그럼 자기소개라도 해야하지 않나요? 난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된다고 교육받았거든요." 그럼그럼, 아주 단단히 들었지. 사탕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라고. . . . 하지만 그 사탕주는 사람이 미인이라면 따라갈 용의가 있지. 혼자한 상상에 흐뭇하게 웃으며 미인은 아니지만 독특한 매력이 있는 그 남자를 보았다. 어느새 사켄과 손을 뗀 그 남자는 가만히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 . . . 카이스.A 라고 합니다." "호오, 카이스군이군요. 전 엘이라고해요. 앞으로 잘부탁드릴께요." " . . 따라오십시오." 뒤돌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스믈스믈 기어올라오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역시 제복이 . . . 뭔가 멋있다니까. 저 날렵하고 깔끔한 선이라던지. 쭉 뻗은 다리나 팔이 더 길어보이는 효과라던지. 아니면 . . . 흐흐흐흐흐흐 . . " . . 표정관리하세요." 귓가에 속삭여지는 세브릭의 목소리에 순간 쫙 소름이 돋아버렸다. "어. . 어, 네." 쭈뼛쭈뼛 그에게서 벗어나려는데, 그가 날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것이 느껴졌다. 아우, 세브릭. 이 알 수 없는 남자야. 난 지금 당신때문에 엄청 고민중이라니까? . . . 단순히 관심이 있는 건지, 좋아하는건지 아니면 사랑인건지. 폭 한숨을 내쉬고는 카이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배에서도 보았던 마차에 도착했다. "타십시오." " . . . 에? 그냥 타도 되는건가요?" "무슨 소리십니까?" 아, 여전히 건조하다니까. 이 사람의 건조함은 산뜻한 봄날 산불날듯한 날씨와도 같은 건조함이야.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 . ?" 뒤끝을 흐리긴 했지만 분명 뜻은 전달된듯 카이스가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황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 에헤- 그렇군요." 그의 말에 힐끔 내 옆에 있는 사켄과 세브릭을 번갈아보았다. 슬며시 시선을 딴곳으로 두는 그 두사람을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거짓부렁쟁이들." " . . . " " . . . " 움찔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이럇-" 사켄과 세브릭까지 타고 나자 따각따각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마차는 처음 타보는데 . . 소설에서 봤을때는 굉장히 불편한 줄 알았는데, 이정도면 참을만한 흔들림인걸? 그 멍멍이들 때문에 말을 타고 전력질주했을때라던가 폭풍부는 밤에 배가 침몰할듯 흔들렸던 때에 비하면 . . 이건 뭐 거의 비포장도로에서의 경차와 고속도로에서의 고급 승용차만큼이나 다른 승차감인걸. 마차의 흔들림정도에는 가뿐히 적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브릭과 사켄은 내 옆에 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고, 우리 앞에 앉은 카이스 역시 말이 없는 사람이라는것을 알려주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딱히 무슨 할말이 없기에 조용한 마차 안이었지만 이 적막함을 싫어하는 나는 바로 앞에 앉아있는 카이스를 향해 싱긋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는 이유나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카이스군?" 잠시 말이 없던 카이스가 말했다. "레이디께 '-군'이라는 칭호로 불려질만큼,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아, 그게 걸리는거였어? 난 멀뚱히 그를 보다가 옆에서 콕콕 찔러오는 세브릭의 손가락을 무시하려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카이스군에게는 카이스군이 너무 잘어울리는걸요. 싫다면 카이스군도 저를 엘양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 . . . 차라리 카이스군이 아닌 카이스경이라 불러주십시오." "아, 카이스경은 뭔가 귀엽지 않잖아요." 뭐랄까, 카이스경은 좀 딱딱하고 어른같은 느낌이라면. 카이스군은 귀엽고 친근한 느낌이랄까. 정의를 끝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세브릭이 쉴새없이 옆구리를 찔러와서 작게 한숨을 쉬며 그에게 말했다. "옆구리에 구멍뚫리겠어요. 내 옆구리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는 꼴을 보고 싶은거에요? 왜 자꾸 찌르고 그래요." "제가 한 부탁은 무용지물인가요? 제발, 헛소리 좀 자제해달라고했는데." " . . 아, 이것도 헛소리에요? 처음 알았네요-" 세브릭이 계속 잔소리를 하고, 나는 몰랐어요- 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데 카이스가 그런 우리를 보더니 말했다. " . . 세브릭님이십니까?" 카이스의 말에 멈칫한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브릭.K라고 합니다." 오, 세브릭은 K였어? 사켄은 T고 . . . . . 뭐지? 뭘까. 무엇인걸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세브릭과 카이스의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만난것은 처음이나, 초면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카이스가 형형한 눈동자로 세브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 세브릭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순간 소름이 돋았다. . . . 뭐랄까, 세브릭. 즐거워하는 느낌인데. "하긴, 사사건건 부딪혔으니, 처음이긴 해도 낯설지 않군요." "아렌타 제국에서 카슘 제국으로 넘어오는 대담함에는 기가 질려버렸습니다." "저 역시, 제가 카슘에 오게 될지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힐끔 세브릭이 날 보더니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것도 어이없을정도로 작은 이 분때문에 말이에요." " . . 그건 좀 아니죠. 어이없을 정도로 작다는건 무슨 의미에요?" "말 그대로의 의미죠." . . . 이것 봐라? "처음 만나는 분도 계신데, 이렇게 나올꺼에요?" "처음 만난 것이랑은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초면인 사람한테 '-군'이라는 칭호까지 붙이면서 웃던건 누구죠?" "뭐에요, 질투였던거에요? 세브릭군이라고 불러줄까요?" ". . . 항상 말하지만 어째서 결론이 그렇게 나는건가요?" "아아- 잘못했어요, 세브릭군. 질투하지 말아요. 세브릭군이 질투하면 나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걸요. 카이스군, 우리 세브릭군 너무 귀엽지 않아요?" " . . 엘!" 아, 재밌어. 역시나 이런 말다툼은 세브릭이 아니면 재미가 없다니까. 그동안 아크산이랑 라세스와 함께 있으면서 즐겼던 것도 나름 이것저것 재밌었지만. 뭐라고나 할까, 역시 . . . 부모의 품이 가장 편하다는 건가? . . . 부모라면 . . . 세브릭이 엄마고, 사켄이 아빠인가.. 응? 이게 아닌가? 머리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세브릭과 쉴새없이 이런저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세브릭과 나의 투닥거림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스가 말했다. " . . 친해보이시는군요." 그의 말에 순간 말을 멈춘 우리는 그를 쳐다보다가 상반된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고작 친해보이는거에요?" "당신 눈, 의원에게 보여야겠군요." 생글생글 웃으며 순수하게 기뻐하는 나와, 보이지는 않지만 눈살을 팍 찌푸리며 짜증 비스무리한 느낌을 풍기는 세브릭이었다. 그런 우리의 반응에 카이스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고작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오- 나이스 캐치." " . . . 그건 무슨 말입니까?" "잘잡아챘다는거에요. 요점을 잘잡아내는군요, 카이스군. 모범생의 기질이 있어요." " . . . . 칭찬입니까?" 그의 얼굴에서 미약하게 떨떠름한 감정이 느껴졌다. 어라- 이거 뭔가 . . 슬슬 입질이 오는데. "물론, 칭찬이죠. 그보다, 고작이라는 의미를 알고 싶다고 하셨죠?" " . . 엘,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각오하십시오." "아잉- 세브릭군도 참. 또 그렇게 말한다." 나의 콧소리 섞인 애교에 세브릭이 급히 내게서 조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 . 이건 참 상큼한 반응이군. 내게서 조금 떨어진 세브릭과 떨어진 거리를 보다가 다시 카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의미냐면 말이죠." "무슨 의미입니까?" "이리 가까이 와보세요. 그럼 말해드릴께요." 뭐, 오든 말든, 듣고싶든 듣고 싶지 않든 상관없지만. 그와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그 때 옆에서 세브릭이 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 . 엘, 또 무슨짓을 하려는거죠?" "아, 세브릭군은 조용히 할것. 그렇지 않으면 궁에 갈때까지 입도 열지 못하게 할꺼에요." " . . . 어떻게 말이죠?" "궁금하면 떠들어 보시던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열어봐 열어봐. 떠들어보라고. 안그래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폐하를 못만나서 좀 우울한데 말이야. 자꾸 그렇게 귀엽게 나오면, 재미없 . . 없 . . .. . 없지는 않을꺼야. 후후. 내 협박(?)이 먹혀들어갔는지, 세브릭은 입을 꾹 다문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 . . 좀 아쉬운데. 세브릭의 성격상 몇마디 더할줄 알았는데. 벌써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을 하고 입을 닫아버린건가? . . . 위험한데, 이렇게 세브릭의 예상대로 움직이면 재미없잖아. 힐끔 그를 보고는 건조하기 짝이없는 카이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기사다운 날카로운 눈동자로 날 보고있는 그의 모습에 잠시 감상을 말하자면 . . 뭐라고 해야할까 . . 정말 독특한 매력이라고 해야하나. 머리색과 눈색이 특이하긴 하지만, 그다지 세브릭에 비교하자면 한떨기 꽃과 있어도 없어도 모를 나무 정도인데 말이야. 근데 이상하지. . 왜 이렇게 자꾸 흥미가 생길까나. 자꾸만 거슬리는 이 느낌 때문인걸까, 아니면 . . . . . 역시 . . 제복을 입고 있어서인가. 왼쪽 심장 바로 위쪽에 황금빛으로 새겨진, 그 '카차'라는 신수. 깔끔하게 선이 들어가 날씬해보이는 제복.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과 눈동자와는 살짝 매치가 안되는 붉은 빛이었지만 .. 그게 또 묘하게 어울린단 말이지. 청색과 홍색의 대비라고나 . .. ... 응? 청과 홍의 대비? 아하, 그렇군. 한마디로 저 사람 자체가 조금 미(美)가 부족하디부족하긴 하지만 아크산과 세브릭 정도의 대비인건가. 아름다움이 한참 떨어지긴 하지만, 뭐 그것도 나름 대비는 대비니까 말이야. 그의 황금빛도는 붉은 제복을 보고 있다가 잠시 므흣한 기분에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표정을 수습하고는 작게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카이스에게 말했다. "카이스군, 고작이라는 말의 의미 알고 싶지 않아요?" " . . . 꼭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난 알려주고 싶은데. 원래는 별로 알든 말든 상관없었는데 말이에요. 진짜로 알려주고 싶어졌어요." 응응, 슬슬 입질이 오고 있는데, 이때 살랑살랑 낚아채버려야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선조의 말을 무시해서는 안될뿐만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하는 법이라고, 사켄도 분명히 말해줬는걸?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순리를 따라야하는거지.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진리. 따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랄까나- 자자, 물어라. 물어. 얼른얼른. 오랜만에 신선한 재미 좀 보자. 당신은 내게 있어서 1학년처럼 상콤한 후레쉬맨이라고. 혹시라도 눈치채서 실패할까봐 어떠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은채 생글생글 웃었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에서 살짝 불안감이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에이- 뭘 그렇게 불안해하고 그래요. 나 나쁜 여자 아니에요, 카이스군. 여릴 뿐만 아니라 마음도 약한 평범한 소녀일 뿐인 내가, 기사인 카이스군을 상대로 뭘 어쩌겠어요. 안그래요? 나 믿죠?" 나의 현란한(?) 말솜씨에 곧 잠시 망설이던 카이스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거짓말 하나는 정말 인정할만해요." "불쌍하군." 옆에서 조용히 중얼거리는 두명의 목소리를 무시에 무시에 무시를 해버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하늘빛 머리카락의 신비함을 잠시 흐뭇한 기분으로 보다가 그의 귀에 소곤소곤 말했다. "나랑 세브릭 사이는 말이죠." " . . . " 잠시 말을 끊어주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묘미. 대화의 참맛이겠지. 속으로 키득대며 잠시 입을 닫았다가 조금 숨을 들이마쉬었다. "사이는 말이죠 . . " 하나, 둘! "후우-" "흐윽!" "풉!!!" 자신의 손을 귀에댄채 쾅-하고 마차에 등을 박는 카이스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푸..푸흡. ." "이게 . . 무슨 짓입니까!" 아, 난 참으려고 했어. 필사적으로 참으려고 했다고. 면전에 대고 웃으면 기분 나쁜게 플러스 된다는걸 분명히 알고 있는 예의바른 사람으로서 분명히 . . 절대로 웃지 않으려고 했단말이야. "푸하하하하하- 아꺄아하하. 아, 아 나죽는다. 아푸훕푸후. 꺄하하하하-" 얼굴에 경련이 올정도로 웃어제끼며 배를 붙잡고 좁은 마차의자 위에서 뒹굴거렸다. 건조했던 카이스의 얼굴은 귓가에 불어넣은 바람 때문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을 뿐만 아니라, 작게 홍조(!!)까지 맴돌고 있어, 기대한만큼 신선한 재미가 있었다. ". . . . 엘 . . . 정말 당신이란 여자는 . . "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손으로 머리를 짚는 세브릭의 모습을 너무 웃어서 젖은 눈동자로 보았다. 그러다가 배가 너무 아파와서 헉헉대며 사켄의 팔을 꼭 잡고는 숨을 골랐다. 아, 어떻게. 오랜만에 정말 진짜 즐겁게 웃었다. " . . . 사과하도록." 사켄의 작은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바로 앉았다. 일단 면전에다 웃은것도 있고, 귀에다가 바람을 불어넣는 장난도 쳐버렸고 해서 사과하려고 그의 얼굴을 본 나는 일이 귀찮게 됬다는 것을 알게됬다. 내 정면에 앉아있는 카이스는 아까와는 달리 정말 화가난듯 보였다. 그는 건조함조차 남아있지 않은 냉철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화나셨어요? 미안해요, 그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일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내 실수에요. 기사인것 같아서, 귀도 단련됬을 줄 알았죠." "그건 억지다." "아아, 내가 억지 부린게 하루이틀이에요? 그럼 사켄도 저렇게 기겁할껀가요?" " . . . 글쎄." 응? 앞의 그 기묘한 침묵은 뭐지? 사켄이 가만히 날 바라보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기겁할 지도 모른다는 건가? 아니면 또 묘한 뭔가가 있다는건가. . . . 흐음, 후자 쪽인것 같은데 말이야. "무례합니다." 사켄의 묘한 반응에 한창 고민하고 있던 내게, 차가운 카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례. 무례라 . . 예의가 없다?" 싱긋 웃는 내 모습에 카이스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초면에도 불과하고, '-군'이라는 호칭을 부르는 것을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하시다니. 이건 무례를 넘어선 모욕입니다." 조금의 막힘도 없이 빠르게 말을 내뱉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옆에 앉아있는 사켄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서 흑흑거렸다. "아, 무서워라. 사켄, 어떻게하죠? 저 무례한 짓을 해버렸어요. 흑흑, 이대로 여기서 댕강 목이 잘려 죽는걸까요?" " . . 엘. ." 사켄 역시 내가 지금 이 상황이 내 잘못이라는 걸 잘 알기때문인지, 위로의 말을 해준다거나, 아니면 카이스에게 무어라 말하지는 않고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부름에 우는척을 그만두고 사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하지만 분명 엄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다. " . . . 지금 그 행동 역시 무례입니다."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사켄의 어깨에 기대서 슬쩍 고개를 돌리자 차갑게 타오르는 그의 하늘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버릇대로 한쪽 손은 입술과 턱을 매만지며, 다른 한손은 팔꿈치를 잡고, 마지막으로 포인트로 다리를 꼰채로 비스듬한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무례라 이거지, 모욕이라고.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나. 이성을 잃지는 않았지만, 분노로 인해 일단 감정이 우선이 된 그의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비록 당신의 매력에 넘어가 이 마차를 타고 카슘 제국의 황제 폐하께 가긴 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의 말. 충분히 내겐 무례였고, 모욕이었어요. 라고 말한다면 어찌하시겠어요?" " . . . 무슨 말입니까." "거절은 용납치 않겠다니. 광오(狂傲)하시기도 하셔라." 쿡쿡 입가를 가리며 웃다가 나른한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어리석기 짝이없어서, 기사인 당신께 무례를 저지르고, 모욕을 줬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말이에요." 잠시 말을 멈추고 턱을 괸채 빙긋 웃었다. "당신의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 상당히 거슬려요." 뭐, 여기선 아무것도 아닌 내가 말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말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조금씩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기사라 그런가했지만 .. 그건 이 사람이 지니고 있는 그 어떤 무엇. 말하자면 . . 귀족이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오만함이겠지. 굳은 표정으로 날 보고있는 카이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 당신 말이야. "요즘 내가 너무 행복에 절은 생활을해서 당신의 그 건조함이 나름 매력있었지만 말이에요." 천천히 턱을 괴었던 손을 풀고는 쯧쯧 혀를 차며 그에게 다정히 말했다. "장난감은 장난감으로 그쳐야되는거에요." "누가 장난감이라는 겁니까. 지금 카슘 제국의 기사인 저를. . " "모욕하는거죠. 당신은 제 놀이감정도라고 말하는거에요." 카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되받아치며 말했다. 사람 우습게 보지말라는거야, 장난감씨. 내가 지금까지 상대해온 사람들이 다 어떤 사람들인줄 알아? 무려, 미인에다가 나라에서 한가닥들하신다는 황제와 왕들이시라고. 그런 그들을 만나왔던 내가, 고작 당신에게서 밑바닥에 사는 벌레취급 받아야겠어? 안그래도 하빔의 전하한테 뺨맞고 앓아누운 것 때문에, 이를 갈고 있는데 말이야. 평민계집이라고 무릎이 꿇려지고, 뺨까지 맞았다고. 다시 생각이 나서 그런지 속에서 분노의 소용돌이가 치밀어올랐다. 순식간에 내 속을 휘저어놓은 분노에 그를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자, 자. 진정하자고. 진정 . . 하빔의 국왕전하한테는 일단 통쾌하게 한방 먹여줬잖아. 나중에 다시, 뭐 언젠가 다시 만날 때가 올테니까. 그때 뺨이라도 한대 올려붙이자고. 지금 이렇게 분노해봤자 . . 그 자식은 모르잖아. 열받게시리. 스스로를 납득시킨후에 여전히 휘몰아치고 있는 노(怒)를 잠재우고는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모습에 피식 하고 웃게 되었다. 그는 이를 악물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뚝뚝하고 주먹 쥔 손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네. 스스로를 상처입히다니 말이야. 자기 제어도 못하는건가? "그러니, 장난감씨. 누구를 벌레보듯 하기 전에, 당신 먼저 내게 어떤 존재인지 파악해줄래요?" 내 말을 마지막으로 양옆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잠시 의아해진 나는 양쪽을 번갈아보았지만, 그 둘은 내 시선을 피한채 마차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엥? 뭐야, 내가 뭐 잘못했어? 그들의 알수 없는 반응에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하긴, 말이 좀 심하긴 했나? 장난감에다가, 놀이감이라고 했으니. 나같아도 그런 말 들으면 . . . 난 그냥 웃어넘길것 같은데. '내가 당신의 장난감으로 보이나요? 그럼 까짓것 놀아드리죠. 그대신 뭘 해주실꺼에요?'라면서. 훗- 그 누가 감히 나를 장난감 취급하고, 놀이감 정도로 삼는단 말이야.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 앉은 카이스는 날 보며 무슨 말이라도 할듯 거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곧 그도 나와 대화해봤자 나오는게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아버림과 동시에 입 역시 닫아버렸기에, 마차 안의 침묵은 황궁에 도착할때까지 계속 되었다. "이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멈추어섰다. 황궁에 도착함으로써 마차 안의 침묵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는 개뿔. 여전히 우리는 침묵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카이스를 보았다. 지금 뭐하자는거지? 난 얼른 마차 밖으로 나가고 싶다. 무려 반나절동안 덜컹거리는 이 나무상자안에서 숨막혀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뭔 말만 하려고 하면 세브릭이 눈치를 줘서 그나마 하려던 말도 속으로 삼켰다고! "안나가요? 폐하께서 기다린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아님 폐하를 기다리게 해도 된다는 배짱? 그거, '이곳'에서는 황제모독죄 그 비스무리한걸로 사형감 아닌가? 세브릭, 어떻게 생각해요?" ". .. 제발 엘,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요." "싫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입 다물고 있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구요. 기적은 일생에 단한번으로 만족하도록 해요, 세브릭." 내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는 세브릭의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며 카이스를 보았다. 어느새 그는 아까완 달리 건조한 얼굴로 돌아와있었다. 그래, 반나절 꼬박 걸려서 감정 제어를 한단말이지? 쯧, 정치판에서 살아남기는 힘들겠네. "내리십시오." "나 먼저요? 여기는 뭐, 에스코트같은거 없어요?" " . . . 지금 여긴 카슘이에요. 아렌타 제국의 사람이자, 동연합에서 총사령관님의 보좌관인 저와 사켄이 있음으로써 이들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잊었나요?" "그거랑 에스코트랑 무슨 상관이에요. 카슘에서는 에스코트하면 안된데요? 이건 뭐.. 재미없네. 쫀쫀하기 짝이없는 나라네요, 카슘은." 내 말에 카이스가 날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헹, 당신의 시선따위 까만 생머리 늘어뜨린 일본 인형이 쳐다보는것보다 안무서워. "나도 마차에서 내릴 때 남자 손 한번 잡아보면서 내려보고 싶었는데."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리자 사켄이 시끄러웠는지 스윽 일어섰다. 그리곤 마차문을 열고 먼저 나가버렸다. 에이- 나도 얼른 내리자. 폐하나 보러 가야지. " . . . " " . . . " 순간 멈춰버린건 내 탓이 아니야. 마차 문 옆에서 날 올려다보며 손을 내밀고 있는 사켄 탓이라구. "거기서 뭐해요, 사켄? ". . . 뭐하는 걸로 보이지?" "에스코트해주게요?" "해보고 싶다하지 않았나." " . . . 역시 사켄이라니까요." 살짝 그에게 웃어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을 꽉 쥐는 그의 손의 온기를 느끼며 땅에 발을 딛었다. 그리고 여전히 잡혀있는 손을 풀고 팔짱을 끼듯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와우, 다정한 연인 사이같지 않아요?" "헛소리는 나중에 다시 앓아누운 후에 하시죠." 뒤이어 내린 세브릭의 퉁퉁거리는 목소리에 사켄이 에스코트해주는 걸로 기분이 좋아진 나는 오랜만에 관대해진 마음으로 그의 말에 답했다. "질투쟁이 세브릭, 그렇게 자꾸 질투하면 내가 재밌어서 자꾸자꾸 이런 행동 할 수 밖에 없잖아요." "질투가 아니에요." "아, 맞아요. 투기라고도 해요." "말장난 하지 말아요." "이히힝-" " . . . 엘." "미안해요, 지금 기분이 너무 좋거든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는 세브릭에게 씨익 기분좋은 미소를 보냈다. 무려, 무려 사켄의 에스코 . . . . . . . 에스코트? "세브릭." " . . 뭐죠?" "잠시만 여기 서봐요." " . . . 무슨 짓을 하려고요?" "에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요?" "항상, 항상 언제 어느때든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요." . . . 자꾸 튕기네. 이젠 날 대충 파악했다 이건가? 하아.. 또 캐릭터를 한번 잡아서 신비주의로 나가야하나. 작은 한숨을 내쉬다가 세브릭에게 말했다. "카이스군을 여기다 세울까요?" 나의 상큼살벌한 미소에 세브릭은 얼굴 가득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섰다. 그런 그를 보며 싱긋 웃어주고는 남아있던 나머지 한 손을 그의 팔에 얹었다. 이것이 바로 더블 에스코트! 그야말로 미남들에게 둘러싸여 에스코트 받는다는 여자들의 로망 중 하나! 크윽, 이 세상에 오길 잘했어. 지오, 내가 예전에 고맙다고 했던가요? 안했다면 지금 해드릴께요. 나요, 여자라서 행복해요- " . . . 이건 또 무슨."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에요, 방해하지 말아요." "뭐가 행복이라는 거죠?" "흠, 미인의 향기를 음미하는거죠." " . . 방금 그 말, 소름이 돋는군." "춥디추운 카슘이니 당연하죠." 모른척하며 시치미를 떼자 사켄과 세브릭은 이내 포기했는지 묵묵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둘을 보다가 마차에서 내린 후 가만히 서있는 카이스를 보며 말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되죠?" "폐하를 알현하러 가면 됩니다." "그런가요? 그것 참 간단하네요." 음, 그럼 폐하를 만나 종전을 얘기하고. 동의를 얻어서 세연합이 모여 이제 전쟁 그만하자. 하면.. 내 일은 끝나는 건가. ... 그렇게 . . 되면 . . "엘, 안갈껀가요?" "엘." 그렇게되면, 이제 안녕이네요. 세브릭이랑 사켄이랑.. 안녕이네요. "갈까요?" 복잡한 심정을 추스리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였다. 뭐, 헤어지는건 어쩔 수 없지. 나는 '나의 세계'에서. 세브릭과 사켄.. 이들은 '이곳'에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니까. "어쩔 수 없겠죠?" "뭐가 말이죠?" "비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보는 세브릭에게 조금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헤어짐을 준비해야하는거겠죠? 긴 복도를 걸어가며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자리에 멈춰섰다. 너무나도 중대한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엘?" 갑자기 멈춰선 나 때문에 세브릭과 사켄 역시 멈춰섰다. 그리고 앞서 걷고 있던 카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와, 큰일날뻔했어요." "왜죠?" 세브릭의 굳은 입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잊고 있었어요." "..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물론이죠. 그것도 정말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 말이에요." 사켄 역시 덩달아 심각해진 눈으로 날 보는 것을 느끼며 그 둘을 번갈아보다가 카이스에게 말했다. "카이스군, 부탁이 있는데. 물론 들어주시겠죠?" "제가 어째서 . . " "안갈꺼에요? 폐하를 안만날꺼에요? 여기서 확 혀깨물고 죽어버릴테야." " . . . ." 빙그레 그의 건조한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 아마 그의 눈에는 내 미소가 무척이나 짜증나게 느껴지지 않을까? "여기까지 와서, 안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요." 날 만나고 부쩍 한숨이 는 세브릭의 모습을 보다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라구요." 암, 여자에겐 이만큼 중요한 일이 없지. 사람을 만날 때는 첫인상이 무척이나 중요한 법이라고.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한도 내의 부탁이시라면." 뚝뚝 끊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나에대한 경멸감이 가득 묻어나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얄밉게 웃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나 목욕 못한지 꽤 됬거든요. 먼저 씻고 폐하를 알현해도 되겠죠? 그게 당연한 예의고. 카이스군이라면 내게 당연히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 생각하는데. 맞죠?" 설마 못해? 그정도 능력도 없어? 아니지? 응? 아니라고 하면 네가 기사든 귀족이든 뭐든 그 제복을 벗겨서 세브릭 입혀줄꺼야. 나의 협박어린 미소에 카이스가 잠시 주춤하더니 고민하는듯하다가 내 몰골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먼지 투성이에, 앓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고. 검은 머리는 윤기가 좔좔 흐를만큼 빛나고 있는 상태다. 참, 세브릭이랑 사켄. 비위도 좋지. 아니면 나한테 반해서 콩깍지라도 씌인건가? 혼자 킬킬거리며 웃고 있는데, 카이스가 말했다. "확실히, 폐하를 알현하기에 적당한 예의를 차린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께 여쭤보고,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카이스는 옆에 서있던 시종 중 한명에게 속닥거렸다.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걸어갔다. 저거.. 경보지? 절대 뛰는걸로는 보이지 않는데. 엄청 빠르네. 소리도 안내며 엄청나게 빨리 사라진 시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카이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방부터 안내해주세요. 예상이지만 이곳에서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거든요. 그보다, 폐하께서 왜 저희를 부르시는지 안알려주실껀가요?" " . . . 방은 시종이 안내해 드릴것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카이스는 내가 즐겨 쓰는 스킬 중 하나인 한템포 쉬어 말하기를 쓰며 말했다. "당신들께서 더 잘 알리라 생각합니다만." 그의 하늘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는 것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뒷짐을 지었다. "전혀. 짐작도 못하겠는데요, 카이스군. 아아- 내 머리가 너무 나쁘거나, 눈치가 없나봐요. 그렇죠?" 내 말이 비꼬는 거라고 느껴졌는지 카이스의 눈매가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곧 획 내 시선을 피하는 그의 모습에 킥 웃었다. 난 진짜로 짐작도 못하겠는데? 여자랑 전쟁을 좋아한다니까 . . . 수청이라 들라고 하려나? 그러면 곤란한데. 날 구하러 와줄 몽룡이도 없잖아. . . . 아- 아닌가? 힐끔 양 옆에 서있는 세브릭과 사켄을 보았다. . .. 뭐, 있긴 있나? "알립니다." 아까 보냈던 시종이 어느새 나타나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채로 고개를 숙인채 말했다. "폐하께옵서,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시라 하셨습니다." "와우. 카슘의 황제 폐하는 센스쟁이시네요." 안그래도 여기저기 안쑤신데가 없었는데 말이야. 센스쟁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을 무시한채 싱글벙글 미소짓는 나와는 달리 세브릭과 사켄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 저녁인데, 밤이 늦었다 하시던가? "그렇습니다. 일단, 묵으실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구십도로 허리를 굽힌 시종을 내려다보는 사켄의 모습에 가볍게 그의 팔에 얹어놓은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내 신호에 그의 시선이 내게 온것을 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과잉반응을 하고 그래요?"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은 넣어두었다.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폐하께서 호의를 표하신거라고 봐도 되는 일이잖아요?" " . . 엘, 당신은 그 카슘제국의 황제 폐하를 알고서 그런 말을 하시나요?" "글쎄, 내가 직접 보지 않은 이상은 모를 일 아니겠어요? 사람은 직접 보고 겪어봐야 아는법. 소리 소문만듣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면, 십중 팔구 후회할껄요." 그리고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는 법이죠. 라는 말을 간략하게 덧붙이며 먼저 가버리는 시종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내 평소의 지론이였다. 주위의 사람이 뭐라하든 난 내가 보고싶은 것을 보고 판단하면 그만이다. 타인이 뭐라 씨부리든 그건 그 사람의 의견일뿐이지, 내가 그 의견을 따라야할 필요는 없다. 모든 이들이 나쁘다 욕해도 내가 좋으면 좋은것. 모든 이들이 좋다해도 내가 마음에 안들면 끝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만의 북소리를 따라가야하는 법이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너무 자기중심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난 인간인데, 좀 내 중심적이면 어떤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날 끼워맞추기에는 너무나도 귀찮고 귀찮다. 그렇지만 귀찮은것보다 더 귀찮기에 왠만하면 맞춰주는 시늉정도는 해준다. 시능만 하는 이유? 사람들은 튀어나온 존재를 좋은 눈길로 보지 않으니까. 랄까. 난 내가 편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지루한 평화라도, 그것은 꽤나 달콤한 안락함이니까. 그렇지만 그 평화와 달콤함에 젖어 내가 지워져나가는 것은 싫다. 그러하기에 나라는 존잰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나 외의 존재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엘." "왜요?" "도착했어요." "에?" 딴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방에 도착한건가? 문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종에게 살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목욕을 할 수 있을까요?" "준비하겠습니다." "친절하시군요, 부탁드릴께요." 시종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가버린 후 난 여전히 내 옆에 서있는 세브릭과 사켄을 보며 말했다. "뭐해요? 나랑 같이자게요? 나야 뭐, 대환영이지만." "저와 사켄은 바로 옆방이에요." "아항, 그럼 밤에 몰래 들어오라는?" "말도 안되는 소릴." 팍 인상을 찌푸리는 세브릭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으며 그들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살짝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을 둘러보던 나는 곧 문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존재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렬하고도 흥미롭다는 듯한 보랏빛 눈동자. 팔짱을 낀채로 벽에 기대어있는 남자는 지독히도 위험해보이는 눈빛과 미소를 지으며 날 보고 있었다. " . . . 이럴 때는." 내가 입을 열어 말하자, 그 남자는 여전히 위험한 미소를 띄우면서 내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비명을 질러야하던가요?" 가벼운 내 어조에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보통은." "역시 그런가. 순간적으로 지를까 했는데, 그러면 상황이 재미없겠죠?" 싱긋 그에게 웃어주곤 털썩 침대에 앉았다. 폭신한 느낌에 만족하며 옅은 미소를 띄우며 그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딱히 할말이 있어보이지는 않아서, 나 역시 천천히 그를 관찰했다. 삐죽삐죽 정돈 되지 않은 보랏빛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 마치 잘벼러진 검이라기 보다는 투박한 도라는 느낌이었다. 벽에 기대어 날 보던 그는 내 관찰이 끝나자 팔짱을 풀고는 내게 다가왔다. "흠? 그보다, 누구시냐고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원하는 질문이 아니다. 다른 질문." 대답해줄 의향은 있나보네. "그럼 누구세요?" "내가 원하는 질문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느새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와 날 내려다보며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누구시냐 물어도 되냐는 질문과 누구냐는 질문은 엄연히 다르죠.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 들어보지 못하셨나요?" "당돌하군." 풍부한 저음의 목소리로 웃으며, 보랏빛 눈동자 가득 흥미로움을 담아 날 보는 그의 모습에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보라색이라 . . 보라색. 보라색 . . . 누구지? 서로를 마주본채로 아무런 말도 않고 있던 그와 나는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미묘했던 대치가 끝났다. "목욕하실 준비를 해놨습니다." "네, 곧 나갈께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드럽게 웃었다. 저 남자는, 세브릭과 비슷한 위험함을 풍기는 남자였다. 시선을 뗄라치면, 순식간에 잡아먹힐 듯한 느낌이랄까. "같이 가실래요? 저 목욕할껀데." 아무리봐도 이 사람 말이야. "사양하지. 어린애는 이 몸의 취향이 아니야." "아쉽네요, 그쪽은 상당히 제 취향이신데." 다듬어지지 않은 섹시미하며. "아직 어려보이는데, 못하는 말이 없군." 흥미롭다는 듯이 빛나고 있는 보랏빛의 눈하며. "못할만한 말은 아니죠. 이래뵈도 '이곳'에선 성인이니까요." 꽤나 . . 아니, 상당히. "흐음, 그런가? 어린 아이가 아니라면, 생각해볼만하군." 군침도는 외모잖아? 남자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채로 내게 한걸음 다가왔다. 그가 다가옴으로써 그에게서 조심스럽게 벗어나려했지만 순식간에 잡힌 손목을 보며 쯧하고 혀를 차고 말았다. 한박자 늦은건가? "이름이 엘이라 하던가?" "네, 엘이죠." "정말로 흑발에 흑안이로군." 재밌다는 듯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는 그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만지지 마세요." "왜지?"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는 남자에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이왕 말을 꺼낸거 끝내자 싶어서 말을 이었다. "몇일동안 안감았거든요." "그런건 내게 신경쓸만한 일이 되지 않는다." "그렇군요. 당신껜 그럴지 몰라도, 섬세한 여심을 가진 저로서는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거든요."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 내 머리카락을 빼내며 말했다. 자신의 손을 잡은 내 손을 빤히 보던 그는 곧 역으로 내 손을 잡더니 여전히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올해로 나이가 몇이지?" "음, 먹을만큼 먹은걸로 보이지 않나요?" "꽃이라는건가?" "아직 봉오리죠. 제가 꽃이라면, 당신이 제게 넘어왔을테니까요." 반쯤 농담식으로 말을 건낸 나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내려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내 손을 쥔 손에 더 힘을 줄뿐이었다. "제 손을 부러뜨릴 셈이신가요? 그렇게 되면, 저도 불가항력으로 소리를 질러야겠는데요." "상관없다. 어디 소리를 질러보라." 정말 상관없다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웃기에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나에대한 유쾌함과 흥미로 가득했다. " . . 저 목욕하러 가야하는데, 손 놓아주실 수 있을까요?" 뭐랄까 . . 이 남자 말이야. "싫군. 내게서 네가 벗어나봐라." " . . . 흐음 . . 이것 참 . . "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톡톡 턱을 매만지며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안타깝네요." "뭐가 말이지?" "저는." 그래, 나는 말이야. "동족혐오라는게 있거든요." 나랑 비슷한 사람이 싫어. "동족혐오라?" "그렇죠. 동족혐오, 뭐 말을 풀이하자면 저랑 비슷한 사람을 혐오한다는거죠." "무슨 소리지?" 남자의 눈동자에 떠오른 즐거움을 보며 싱긋 웃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웃는건 좋아도,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웃는건 죽기보다 싫다는 거죠." " . . . 호오." 내 말에 그 남자는 묘한 표정이 되어 나를 보았다. 그 빈틈에 나는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며 옷자락에 손을 닦았다. "미남이잖아, 내 취향인데. 라는 생각이었는데 말이에요." "생각이었는데, 뭐 어쨌다는 말이지?" 옷자락에 손을 닦은게 웃겼는지 남자는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나랑 말이 통하는 사람은 싫어하거든요." 놀려도 놀리는 재미가 없는 사람은 싫다. 거기다 내가 놀림받는건 더 싫다. 그곳에다가 플러스해서 내 모든것을 알고있다는 듯 웃는 사람은 제일 싫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쉽군. 난 지금 막 네가 내 취향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 세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남자란 말이지. 그나마 내 웃고 있는 얼굴 하나만은 다행이었다. 만약 그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기라도 했다면, 그는 더더욱 좋다고 달려들 사람이었다. 뭐, 알겠지만. 내가 세브릭을 놀리는 이유 중 하나가 내 농담에 온갖 인상을 써대며 자신의 포커페이스까지 깨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놀리는 재미와 함께,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휘저어놓는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즐기는건데. 이 남자도 알고 있다. 내가 방금 실수처럼 한말로 인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말 아쉽네요. 좋은 인연이었다면 좋았을텐데요." "인연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다르지. 내겐 넌 좋은 인연이라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문제죠. 전 당신이 내게 좋은 인연이 아니라 생각하거든요." "그런건가?" "그런거에요." 단정짓는듯한 내 말에 그는 다시한번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난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문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애써 무시한채로 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기전에 난 힐끔 문쪽에 기대어 그를 보았다. 이렇게 나만 마구잡이로 휘저어지고 당한것은, 역시 마음에 안든단 말이지. "거기, 제게 차인 남자분." "차인? 그건 나를 말함인가?" 재밌다는듯한 그의 말에 나 역시 재밌다는 듯 말했다. "봉오리는 금방 개화할꺼에요." "그렇겠지. 꽤나 기대되는군." 그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내 말을 따라하며 살짝 말끝을 올리는 그의 말이 거슬리긴 했지만, 뭐 어디 한번 해보자. 당신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그 꽃을 꺾는 사람은, 당신이 아닐꺼에요." "어떻게 확신하지?" "확신이 아니라, 확정이에요." "그럼, 다시 묻지. 어떻게 확정하지?" 남자는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던 나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꽉 힘을주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긴 것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으시네요. 나중에 관리잘하세요, 자식들한테 손벌리기 싫으면." 순간 멍하게 날 보는 그의 눈빛에 활짝 웃어주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럼, 연이 닿는다면 나중에 다시 만나도록해요." "잠ㄲ . . " 날 잡으려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곤 문을 닫았다.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 즉 복도의 가운데에 서있던 시종은 내가 나오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내하겠습니다." "부탁드릴께요." 내 말에 더 깊숙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곧 허리를 편채 앞서 걷는 시종의 모습을 보다가 힐끔 내 방문을 바라보았다. 갔다와서도 있으면 어떻게 하지. " . . . 괜히 불 지펴놓고 왔나?" 미안(美顔)은 내 취향인데. 그 놈의 성격은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지. "역시, 사람은 겉만보고 판단하면 안된다니까." 내 말에 시종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혼잣말을 멈췄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앞서걷고 있는 시종의 얼굴을 볼 수 없기에, 목욕탕에 도착할 때까지 시종은 알수없는 내 혼잣말을 들으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야했다. 한편 엘이 나가고 난후, 여전히 엘의 방에 남아있던 남자는 엘을 부르던 자세 그대로 문 쪽을 보고 있었다. 곧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남자는 미묘하게 빛나는 보라빛 눈동자로 계속해서 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이 바라는 누군가가 나타날듯이. 기대에 찬 눈동자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군." 남자는 중얼거렸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있는 걸음으로 테라스로 나갔다. 어두운 노란색의 커텐을 걷어낸 남자는 회색빛 구름으로 인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달을 보며 웃었다. "아주 재미있어." 새카만 하늘, 유일하게 빛나고있는 희미한 달빛. 그 달빛을 받으며 남자는 유쾌하게 말했다. "가지고 싶군." 곁에서 두고 항상 함께한다고 해도, 질리지 않을 재미다. 저 흑발의 소녀는.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취향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달빛을 즐기듯 눈을 감은 남자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엘이라고 했던가?" 다시 눈을 뜬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광기와도 같은 희미한 갈망이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온통 검은색의 옷을 입은 복면인들이 테라스에 부복했다. "하명하겠다." 남자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즐거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엘이라는 소녀를 한시도 떨어지지말고 지켜봐라. 필요하다면 모습을 드러내어 그녀를 도와도 좋다." 오랜만에 관대해진 기분으로 남자는 톡톡 테라스의 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주인없는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위엄어린, 혹은 엘이 위험하다 했던 표정을 지었다. "카슘 제국의 황제인." 《말했잖아요,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테일러 덴 카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엘이 했던 말을 생각하며 그, 아니 테일러는 말했다. 부복했던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곳에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 후, 테일러는 밖으로 나와 테라스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테라스의 난간에 살짝 기댄채 즐거운 미소를 띄웠다. "네 취향이 아니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네 취향인 이들을 이세계에서 지워내버린 후 나만을 바라보게 만들어주지." 자신을 거부했을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자신에게 흥미를 가지게 만든 엘을 가지고 싶어진 카슘 제국의 황제 테일러 덴 카슘이였다. . . . 이를 어쩐다. 탈의실에있던 나는 로브만을 벗은채로 로브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있었지만, 지금 내 모자 속에는 하브가 아주 미친듯이 자고있었다. 어린애니까 상관없지 싶을지도 모르지만... 하브는 의외로 소년과같단 말이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엄마랑 손잡고 목욕탕에 들어가면 여자들이 날 봐줘요- 라고 달려들정도로 분명 곧 남자가 될 티가 나는 소년이었다. 미래가 기대되는 미인인데.. 그것보다도. 여기다 버려놓고 가면 나중에 분명 길길이 날뛸텐데. "하브, 하브 일어나봐요." "우으-" ". . . 하브." "후응.." 살짝살짝 건드릴때마다 움찔거리며 인상을 찡그리는 하브의 모습에 순간 현기증이 나서 벽을 짚었다. . . . 귀.. 여워.. 귀여워귀여워귀여워귀여워귀여워- 부르르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고 다시 그의 부드러운 금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브, 일어나요." "ㅈ..ㅗㄹ.. 려..."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는 그의 모습에 열망을 담은 한숨을 내쉬고는 살며시 그를 외면했다. 더 이상 보고 있다간 . . 나는 이 작은 천사(!?)를 어떻게 해버릴지도 . . "류." 뭐, 있는지 없는지도 가끔 못느끼지만. 난 내 주위를 자유롭게 흘러다니고 있는 그들(혹은 그)을 불렀다. 그들은 내 음성에 반응하여 천천히 날 감싸안았다. 【무슨 일인가요, 엘.】 여전히 성을 알 수 없는 목소리란 말이지. "부탁드릴께 있는데요." 【부탁?】 잔잔한 류의 목소리에 나는 로브의 모자속에서 자고 있는 하브를 보여줬다. "하브 좀 내 방 . . . 아니 . . .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사켄이나 세브릭 둘 중 한명의 방에 보내주실수 있을까요?" 【그정도라면.】 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브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쿨쿨 잘자고 있는 그의 모습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류가 그를 데리고 나가버리고, 난 모든 옷을 벗고 목욕탕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흠 . . 예상보다는 소박한데." 소설에서 봤던 것 처럼 호화찬란, 벽은 금으로, 탕은 보석으로 되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깔끔한 대리석으로 되어있는 목욕탕의 모습에 조금 실망했다. 하긴 여기서 뭐 내가 상상한데로 된게 있나 뭐. 엘프도 없고, 묘인족도 없고 . . . . . 그래, 미의 화신들이라는 그들이 없다니. 우울해, 우울하다고. 폭 한숨을 내쉬면서 수증기로 뽀얗게 된 목욕탕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리고 탕 앞에 도착해서 물의 온도를 재기 위해 발을 넣어봤다. "오- 좋아좋아, 딱좋아. 따끈따끈한데?" 기분좋은 온기에 우울한 마음을 순식간에 떨쳐버리고는 천천히 물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몸을 담궜다. "하아- 좋다." 오랜만의 목욕이란 말이지. 지금까지는 대충 . . . . . 그냥 생각하지 말자. 더러운 나날들은 생각할 필요 없는거야. 퐁퐁 거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가득한 가운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 . 혹시나 해서 말인데, 갑자기 그, 보랏빛의 위험한 남자가 들어온다던지하는건 아니겠지. 그건 절대로 싫은데. . . . 세브릭이나 사켄이라면야 뭐 . . .놀려먹을 수 있어 좋지만. 천장을 올려보던 나는 몸을 뒤집어 정면에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방에 갔는데, 아직까지도 그 남자가 있으면 어떻게하지. " . . . 그건 좀 무서운데." 무섭다기 보다는 . . . 그래, 맞아. 귀찮은데 말이지. "매력이 너무 철철 흘러넘쳐도 문제라니까." 쓸모없는 날파리들이 모여들고 말이지. 아아- 미인은 좋지만, 광남이는 싫은데. " . . 그치만 머리에 꽃 꽂은 미광인(美狂人)들은 좋지. 꽃은 포인트야. 포인트. 너무 이쁘다고. . . 좀 순박하고 순수하게 미치면 좀 좋아? 왜 비뚤어지게 미쳐가지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냔 말이야." 아- 그러고보니까, 그 사람 완전히 나한테 미쳐서 피곤하게 하는건 아니구나. 내가 너무 앞서나가는건가? 퐁당퐁당 발장구를 치던 나는 갑자기 힘이 빠져서 다시 몸을 뒤집었다. " . . . 아- 목욕탕가고 싶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때를 민 후에 머리를 감고, 밖으로 나왔을때 그 차가운 바람에 으슬떨리는 몸으로 경련 한번 일으켜주고." 그 후에, 목욕탕에서의 최고 하이라이트! "아줌마- 바나나 우유 하나 먹을께요. 라고 말하고 우유를 따서 마시는거지. 아욱, 이 맛에 내가 살아요-" 목욕탕에서의 일을 흥얼거리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가 그리운건 목욕탕만일까? 단순히. 퐁- 물방울 소리에 잔잔해진 물이 작은 물결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그리고 우유를 다 마신 다음에는, 곧 있으면 나올 엄마를 위해서 수건을 챙겨놓고. 먼저 나온 동생한테 등에 로션을 발라달라고 하는거지. 나도 동생 등에 로션을 발라주고." 천장에 송글송글 맺혀있던 물방울들이 얼굴로 떨어져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런 다음에 밖에 나가면, 아빠는 말하겠지.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그럼 엄마랑 나랑 동생은 말하는거야, '우리는 셋이잖아!'. 그럼 아빠는 또 삐져서 툴툴거리고, 우리 세모녀는 아빠를 달래주느라고 애교 부리고." 이제 끝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갑자기 밀려든 가족에대한 그리움 때문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물 속에 있던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보고싶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동생도. 보고싶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보고싶어졌다.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오의 부탁을 . . 기쁘게 들어주고 싶었는데. 손가락 사이로 물방울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새어나와 흘러내렸다. " . . . 외로워."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올리고 어느새 준비되어있는 잠옷으로 갈아입은채 복도에 나왔다. 하늘하늘한 원피스형 잠옷이 어색해서 만지작거리다가 촛불만이 켜져있어 어두컴컴한 복도를 바라보았다. " . . . 좀 많이 무섭지는 않네." 다행이군, 저 정도면 노래부르면서 가면 시종들이 지나가다 귀신이다 하고 기절할정도의 무서움밖에 안되겠어. 어둠정도야 우습지도 않지. 귀신의 집에서 귀신을 놀래켜 울려버린 날 우습게 보지 말란 말이지. 목욕탕에서 혼자 궁상떨었던 것 때문에 좀 부끄러웠던 난 씩씩하게 걸음을 떼어 내 방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우뚝 옆방의 방문 앞에 멈춰서서 내 방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 . 그 사람 아직 있는건 아니겠지?" 설마, 아직 있을라고. . . . 아니야, 설마는 사람 잡는다고 그랬어. 혹시는 생각도 말라고, 역시뿐이라고. "가야되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나는 이 긴밤을 그 사람과 대치상태로 지내야할지도 모르는데?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은 사전에 예방해야지. 그 생각 하나로 옆방의 문고리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자자, 사켄일까, 세브릭일까. 이건 절대 사적인 마음이 있는게 아니야, 말 그대로 쓸데없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 위험을 피해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룰루랄라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달칵- 문을 열고 방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사켄이나 세브릭, 둘 중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잠들었는지 더블 사이즈 정도 되는 침대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에 꿀꺽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끼익- 달칵." 유난히 크게 들리는 문소리에 잠깐 놀랬다가 발을 떼어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 . . 오오- 나 너무 대담한것 같아! 근데 . . 괜찮겠지? 평소에도 거의 같이 자는데 뭐. 아- 하긴 한 침대에서 자는건 아니지만. 뭐, 그정도야 애교로 봐주겠지. 살금살금 고양이 발걸음으로 다가간 나는 커텐 사이로 비추는 어슴프레한 달빛에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 깨달았다. " . . . 곤란한데." 침대 위에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의 주인공을 알아챈 난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짜로 곤란한데. 왠만하면 사켄이 이 방 주인이었으면 했는데 말이지. 구불구불한 긴 장밋빛 머리카락에 입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랬다. 이 방의 현재 주인은 . . " . . . 세브릭일줄이야." 세브릭이였다.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조차도 크게 들릴정도로 고요한 방 안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난 결국 고민해봤자 말짱 헛수고다라는 생각에 침대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살짝 세브릭의 얼굴 앞으로 손을 흔들어보았다. " . . 자는건ㄱ.. 으앗!" 순식간에 손을 잡혀 그의 앞으로 내동댕이 비스무리하게 쳐진 난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세브릭을 쳐다보았다. 흐리멍텅한 장밋빛 눈동자는 가만히 날 보고, 곧 붉은 입술이 열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엘?" "아핫- 자고 있었어요, 세브릭?" 내 말에 아직도 잠기운이 떨쳐지지 않은듯 멍하게 날 보는 모습에 난 세브릭에게 잡혀있는 손을 힐끔 보고는 그의 손을 쥐었다. "이건 꿈이에요." "꿈 . . ?" 몽롱한 그의 목소리가 흩어지듯 말하는 모습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꿈이죠. 세브릭, 그렇게 날 보고 싶었어요? 꿈에서조차 날 보고 싶어하다니, 정말 곤란한 사람이네요." 물론 이 말을 들으면 장난이라는 것을 알고 벌떡 일어나 '여기서 뭐하는거죠?'라고 할 세브릭이라는걸 아니ㄲ. . "그렇군요. 꿈인가요." "아핫- 어쩔ㅅ.. 에?" 왜 인정하는건데? 왜 긍정해버리는건데?! 당신은 정말 이게 꿈이라고 생각해? 고개까지 끄덕이며 인정해버리는 세브릭의 모습에 내가 당황해버렸다. 뭐야, 이럼 안돼지. 왜 여깄냐고 펄펄 뛰면, 난 그 모습을 보며 아까의 그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고 상큼한 기분으로 여기서 자려고 했단 말이야! "꿈이군요." 가만히 아직도 피곤기가 가득한 장밋빛 눈동자로 날 보던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내 머릴 감싸고 있던 수건을 풀어내더니, 젖어있는 내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가져다대었다. . . 보통은 차가우면 현실이라는걸 알지 않나? 왜 안깨어나는건데? 정말 꿈이라고 생각하는거야?! . . . 바보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어! "괜찮군요, 이런 것도." "예? 뭐가요?" 웅얼거리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빼꼼 눈을 위로 올리며 그를 보았다. 내 머리 속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보이진 않지만. "가끔 제 귀찮은 꿈이라는 것이 쓸모있을 때도 있군요. 현실에서라면 또 뭐라고 샬라불라대며 잠시라도 가만히 있질 못해 사고를 쳐대는 당신이 이렇게 조용히 있는것은 기적에 가까우니까요." . . . 야, 솔직히 말해봐. 너 안자는거지? 지금 이게 꿈이라고 생각 안하고 있지? 꿈이라고 핑계대면서 내 인격을 모독하려는 속셈이지!!! "내가 언제 샬라불라댔어요." "항상이요." "그리고 언제 잠시라도 가만히 있질 못했는데요?" "언제나요." " . . . 그럼 내가 언제 사고를 쳐댔는데요?" "매일이죠." . . . 이 사람이 진짜, 나랑 장난하자는거? 우리 함께, 이 달콤한 밤에 서로의 목을 졸라볼까? 응? 슬금슬금 손가락이 간질간질해지고 있는데, 그의 손이 내 목을 휘감아 머리를 감싸고, 다른 한손은 내 등을 토닥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포옹에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간질거리던 손가락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뼈가 맞대어질듯 굳었다. " . . . 세브릭, 자요?" "지금, 자고 있는 중이잖아요? 꿈이란걸 . . 잊었나요?" 아, 하긴. 그한테는 . . 이게 꿈이겠지. "있잖아요, 세브릭." "뭐 .. 죠 .. ?" "나요, 아까 조금 외로웠었어요." " . . . " 그의 대답이 없었지만, 그냥 누구한테든 털어놓고 싶은 기분에 이게 더 낫겠다 싶어서 말을 이었다. "씻고 있는데, 물이 너무 따뜻한거에요. 정말 기분좋게 말이에요." " . . . " "그래서, 노래까지 부르고 싶어질정도로 기분이 좋았는데, 혼자있으니까 묘해지는거에요." 갑자기였다. 향수병도 아니고, 뭔가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계기 . . 그래, 계기라면 단순히, 물의 온도가 너무나도 좋았다는 것 하나였다. "잊어버리고 있었던게 하나 둘 기억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고." " . . ." "엄마랑 아빠 . . 그리고 동생이 있어요, 나." 그러고보니까, 세브릭한테 내 얘기를 한적이 있던가? .. 음, '이곳'에 와서 유일하게 말해줬던 상대는 . . 쿠오였던가? "모두, 내가 참 많이 사랑하고, 날 많이 사랑해주시는 거든요." 근데 잊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은, 갑자기 없어져버린 딸의 걱정으로 잠못이루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몰라, 여러 걱정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난 무책임하게, 그들은 잊고 있었어요." 잊은게 아니라, 잊어버렸던거다. 그건, 고의라고 해도 좋았다. 나는 이 세계를 바라보며, 나의 세계를 생각치 않으려 했으니까. "참 . . 항상 생각하지만, 나 못된 애 아니에요? 어떻게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가족을 잊어버렸을까." 지금 떠올리니 이렇게 가슴 아리도록 그리움에 목이 잠기는데. "정말 . . 나, 진짜로."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그의 대답에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는 내 머리 속에 묻고 있던 얼굴을 빼고 여전히 몽롱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솔직히, 못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 . . 정말요?" "조금은 . . 진심으로." . . . . 갑자기 그리움이라던지, 목이 잠기는 거라던지 쏙 들어갔어. 이 사람 잠이라는 것에 취해, 날 놀려먹으려고 작정한거야. "그렇지만." 한참 속으로 세브릭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고 있을때 들린 그의 목소리에 훽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못되지 않았어요." " . . . 그래요?" "적어도, 당신은 가족들을 사랑하고 있는것이 보이니까." 그의 말을 듣고, 갑자기 든 생각에 한박자 늦게 그에게 물어봤다. "세브릭은, 사랑하지 않아요?" " . . . 이제 . . 그만 자도록 해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듯 느리지만 상냥한, 그의 잠꼬대같은 대꾸에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콩닥콩닥 뛰고 있는 그의 심장에서 들려오는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보니,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했었나? 그럼 아버지는 어떻게 된거지? . . 그리고 '적어도'라는건 . .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여러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계속해서 내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는 그의 손의 온기에 나도 모르게 정말로, 그렇게 그냥 잠들어버렸다. * * *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장밋빛서린 속눈썹에 눈을 깜빡거렸다. 흐트러진 장밋빛 머리카락과 살짝 감기어져있는 눈. 곧게 뻗은 콧날과 붉은 입술. 새근새근, 달콤한 숨결이 내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정도의 거리에서 자고 있는 세브릭의 모습에 난 다시 눈을 감았다. . . .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거지? 무려, 한침대에서 이렇게 꼭 끌어안겨서 잠든건가? 세브릭은 또 그냥 이 상태에서 잠든거고? 정말, 어제 진짜로 내가 그한테 있었던게 그는 꿈이라고 생각했던건가? 수많은 생각을 하며 다시 눈을 떴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조금도 남김없이 훑어보며 왠지모를 즐거운 기분에 싱글벙글 웃어버렸다. 아- 물론, 그가 깰까봐 소리내어 웃지도 않았다. 그보다 . . 아, 너무 귀엽게 자잖아. 꼼지락꼼지락 그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빼내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머리카락에서 속눈썹으로 그리고 콧날로. 그렇게 세세히 만져가던 나는 곧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속눈썹에 뺨에대고 있던 손을 멈췄다. 곧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들리고 장밋빛 눈동자가 보였다. 멍해보이는 장밋빛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기는걸 본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 잘잤어요?" " . . . 무 . . 슨 . . ?"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그의 뺨에 대고 있던 손으로 살며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촉감에 세브릭이 서서히 정신이 드는지 점점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런, 우리 한침대에서 긴긴 밤을 함께 자버렸네요." 뻣뻣하게 굳는 그의 몸을 느끼며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가득 머금었다. 그에 세브릭은 입을 뻐끔거리며 내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내 몸을 못움직이게 하고 있던 가장 큰 요인이 사라졌으므로 그의 뺨에서 손을 뗀채 자리에서 일어난 난 아직도 누워서 굳어있는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다시 한번, 좋은 아침- 세브릭. 오늘 행복한 하루되세요." "으 . . . 엘!!!!!!!!!!!!!!!!!!!" "세브릭, 끌어안겨서 잠든것이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잖아요." "시끄러워요." "에이- 세브릭이 그렇게 꼭 끌어안아놓고 이제와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건 뭐에요?" "시끄럽다니까요." "물론, 세브릭의 방에 몰래 침입한건 내 잘못이지만. 그렇게 꼭 끌어안았는데 내가 어떻게 세브릭을 뿌리칠수 있겠어요." 빠른 속도로 복도를 걸으면서 절대로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세브릭 때문에 난 거의 뛰다시피하며 하지만 끌어안겨 잔걸 강조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에 그는 갑자기 자리에 멈춰섰고, 그의 뒤를 따라가던 나는 그대로 그의 등에 코를 박고 말았다. "아- 세브릭, 코 박았잖ㅇ.." 코를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로브에 가려져있지만 바로 앞이었기에 활활 타오르는 장밋빛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이를 악 물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명히 들어와서 천천히 부드럽고도 장난스런 미소를 가득 지었다. 아- 재밌다. 오랜만에 본 깨져버린 세브릭의 포커페이스다. "시끄럽다고 했지." "아- 그랬어요? 그렇지만 이제서야 날 보네요. 끌어안아놓은 장본인이신 세브릭?" " . . . 꿈인줄 알았어." "현실은 꿈이고, 꿈은 현실인 법이죠." "젠장, 꿈이라 그랬잖아!" "꿈이라 그랬다고 모두 꿈인건 아니잖아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가끔 현실이 더 꿈같은 법이잖아요." "꿈인줄 알았는데." 세브릭은 혼란이 가득한 눈으로 날 보았다. 그의 모습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세브릭." "뭐죠?" 이제야 좀 정신이 들었는지, 다시 본래의 페이스로 돌아온 그의 모습에 살짝 입맛을 다시고는 내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빨개졌어요." " .. 무슨 소리죠?" "세브릭의 얼굴." " . . . " "빨-개졌어요. 오늘 더 예뻐보이는데요, 세브릭?" " . . . 제길 . . " 까득 이를 간 그는 다시 훽 돌아서서 앞서 걸어가버렸다. 하지만 이미 본걸- 그의 얼굴도, 귀도 새빨개진걸 봐버렸는걸. 이를 어쩌나, 이를 어째. "같이가요-" 우리 이뻐죽겠는 세브릭을, 정말로 어쩌면 좋을까나- 그를 따라가던 난 곧 자리에 멈춰섰다.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잠시 아린 침을 삼켰다. " . . 회색빛 구름이, 많이 옅어졌네." 지오가, 그만큼 이 세상의 비틀림을 해결했다는 얘기. 그리고 . . "조금있으면 . . 내가 돌아가야한다는거겠지." 그렇게 된다면 . . 세브릭은 앞서 걸어가다가도 멈춰선 날 느꼈는지 자리에 멈춰서서 뒤돌아보았다. 창문 밖에서 포근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세브릭의 모습이 신기루인양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한번 있었던 것같은데. 언젠가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에 그의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였더라 . . 언제였었지? 아마도 . . 아, 그때구나. 과일을 먹고 중독된척 장난쳐서, 세브릭이 엄청나게 화가 났을때. 그 화를 풀어주기위해 같이 들판을 걸었었고. 화해를 한다음에, 석양이 지고 있는 곳에서 먼저 앞서가던 세브릭을 보고 있었다. 세브릭은 왜 따라오지 않느냐는 듯이 뒤돌아봐주었고. 데자뷰치고는, 너무 막연한 상황이다. 지금은 . . " . . . 뭐하는건가요, 갑자기 멈춰서서." "응?"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세브릭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려 날 보고 있는 세브릭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평상시와 같은 안색에 싱긋 웃었다. "그냥, 갑자기 감상에 젖어서요." " . . . 감상?" "세브릭 기억나요? 왜 예전에 내가 과일 먹고 중독 된척 했을때요." "기억나는군요." 그는 살짝 눈썹을 일그러트리곤 대답했다. "그때, 그럼 들판에서 세브릭이랑 내가 나눴던 얘기도 기억나요?" " . . . 안나요." 훽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걸 참으며 가만히 있던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은 내 손에 그는 움찔하더니 자신의 손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난 그의 손을 잡고선 부드럽게 웃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기억나잖아요?" " . . . 네, 기억나는군요." 한숨을 쉬며 대답하는 세브릭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있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말하자면?" "나, 세브릭 참 좋아해요." 너무 갑작스런 고백이었는지, 세브릭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며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무 . . 슨 . . " "그렇지만, 세브릭은 날 좋아하지 말아요." " . . 무슨 헛소리죠, 이건? 잠에서 덜 깬건가요?" 여기서, 잘라내버리자. 더 이상 서로 힘들어지고,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세브릭도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 . . . 아니에요."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계속 그렇게 있어요. 왠만하면, 우리 서로를 바라보며, 그리워지는 사이가 되지않도록 조금 거리를 둘까요?" 왜 사랑하면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보고 있어도 그리워지고, 사랑하고 있음에도 더 사랑하고 싶어진다고. 난, 그게 싫다. 지금 세브릭과 내가, 그런 관계가 되는것이. " . . 사랑하면 안된다는 소리인가요?" 평소와 다른 내 목소리와 행동에 세브릭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입가에 띄워져있던 그의 옅은 미소도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었다. "사랑하면 안된다는게 아니라 날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그게 그 소리 아닌가요? 어째서죠?" 우린 서로 함께 오랜 시간 같이 있어왔다. 채 일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오랜시간을 함께 있었다. 그렇기에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으니까요." 난 떠나야할 사람. 이세상에 원래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사람. 그리고 그는 있어야할 사람. 이세상에 원래 존재해왔던 사람. " . . 엘." "알겠죠, 세브릭?" 그러니까 . . 날 사랑하지 말아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도록 노력할테니까요. 뭐, 다행이죠. 지금 내 옆에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많잖아요?" 사랑하지 말아줘요, 세브릭. 당신이 날 사랑하게 된다면, 지금 우리 이대로 함께 있기에는 조금 많이 위험하거든요. "엘." "사켄이나, 하브도 있고. 아- 아크산도 있네요. 따지고본다면 라세스도 있지만, 그 사람은 첫사랑도 잊지못해 끙끙거리고 있으니 내 관심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손가락으로 한명한명 꼽아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닫은채로 뭐라말할수 없는 차가운 눈동자로 날 보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에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봐요?" " . . 마음대로 하지 말아요." "뭘요?"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아요." "그건 조금 충격이네요. 아주 조금도?" "조금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저, 맥클라스님의 명에 의해 함께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 외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거죠?" "당연한 소리 아닌가요?" 다행이라고 치기에는 조금 가슴아픈 소리네. "그래요?" 그렇지만, 조금 안도되는 이야기. "다행이네요." " . . . " 싱긋 웃는 내 미소에도, 세브릭은 아무런 말이없었다. "자, 그럼 식사하러갈까요?" " . . . " 세브릭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걸로 된거다. 더 이상 그가 나에대해 묘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이정도 선에서 잘라낸 것. 그걸로 된거다. 언젠가 떠나야할 사람인 내게는, 누군가의 다정한 마음은, 날 사랑한다는 마음은 부담이 될뿐이니까. * * * 한줌의 빛도 찾아볼 수 없는 암흑의 공간. 칠흑과도 같은 그 공간에 홀로 존재하는 자가 있었다. 어디서 빛이 나는것도 아닌데 그는 존재했고, 스스로를 밝히며 허공에 둥둥 떠있었다. 주위에 넘실거리는 가는 실버블론드의 실타래 . . 아니 머리카락들. 눈을 감고 있지만 금빛과 은빛이 서려있는 신비한 속눈썹. 그를 감싸고 있는 흰 옷은 마치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다는 듯, 고결하고도 성스러웠다. 마치 잠이 든듯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신비(神?), 그 자체였다. 곧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길고 곧은 손가락이 까딱하고 움직였다. 그와 함께 옅게 흔들리던 속눈썹이 들려지고 알수 없는 기운이 서려있는 청록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다정함을 한가득 담은 눈은 한번 깜빡였다. 허공 중에 누워있는듯 했던 그가 작게 숨을 뱉어내자마자 흑의 세상이 환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가닥가닥 신비로운 빛깔의 실들이 퍼텨나오더니 주위를 수놓듯 다채로운 색으로 암흑을 몰아내었다. 한참을 얽히고 섥히다가도 금방 풀어지고, 다시 이리저리 꼬이다가 스르르 녹아내리듯 합쳐져버리는 빛의 실들의 움직임은 아름다웠다. "역시나 저지르는 것보다 수습하는게 더 힘들군요." 바람결에 흩어지는 그의 부드러운 미성. 살랑이는 실버블론드의 머리카락은 더욱 그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옅은 빛무리가 주위를 흘러다니는 것을 보던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가볍게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미풍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라앉았다. 그가 천천히 눈을 뜨며 한손을 들어올렸다. 한점의 바람도 없어 흔들리지 않던 흰 옷자락이 가볍게, 하지만 곧 찢겨져나갈듯 거칠게 나부끼기 시작했다. 그의 실버블론드의 머리카락도 그 바람에 의해 거칠게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그의 표정은 한없이 고요했다. 바람은 곧 손에서 주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던 실타래들이 그 바람에 휩쓸려 힘없이 끌려다녔다. 뭉치기도 하고, 얽혔던 것은 풀리기도 하며 조금씩 조금씩 마치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듯한 느낌으로 변했다. 바람이 불기 전에는 뭔가 어지러운듯, 혹은 정돈되지 않는듯한 느낌이었지만, 바람이 불고 난 후에는 서서히 정리되어간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곧 정리를 끝낸 듯 바람이 잦아들었다. 고요했던 그의 표정도 부드럽게 풀렸고, 그는 손을 내렸다. "그럼 . . 이곳은 이제 끝난건가요." 가볍게 미소지으며 주위를 둘러보며 유유히 흐르던 빛들을 바라보며 그는 한없이 다정한 시선을 보내었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였고,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였으니까. 그는 꼼꼼히 주위를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묘한 기류가 피어오르더니 천천히 그를 감쌌다. 끝났다는 듯 그가 눈을 감자 그 묘한 기류는 그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시간의 흐름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벼운 미풍이 불어왔다. 주위는 옅은 빛무리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가운데, 곧 묘한 기류가 그 사이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실버블론드의 머리카락과 하얀 옷. 이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미(美)를 지닌 자가 나타났다. 청록빛 눈을 깜빡거리던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옅은 빛무리를 보았다. 곧 그의 입가에 누가보아도 행복해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그 공간에서 불던 바람은 그를 감싸안으며 불었다. " . . 그녀가 보고싶군요." 다정하고 부드럽지만 결코 무시하기 힘든 그의 음성에 그의 곁을 맴돌던 미풍은 아쉬운듯 그의 머리카락을 한번 더 휘감으며 불고는 옅은 빛무리들에게로 다가갔다. 바람에 휩싸인 빛은 하나둘 영롱한 색채를 입으며 비눗방울과도 같이 변했다. 그 모습들을 보며 그는 한걸음 두걸음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방울들에게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섰을 때, 투명하게 반짝이는 방울들에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소녀로 가득찼다. 방울 하나하나에서 그 소녀는 웃기도 하고,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말하기도 했다. 웃고있는 소녀를 보던 그는 그 중 가장 환하게 빛나는 방울에 손을 대려하였다. 그의 손이 움직이자 흰 옷이 그의 팔을 감쌌고, 사락거리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그는 방울에 손을 대었다. 『지오, 잘하고 있나요? 하늘을 볼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걸보면 그런것 같기도 한데. 지오가 열심히하니 나도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 말과 함께 소녀는 더욱 밝게 웃었다. 소녀의 웃음을 부드러운 눈동자로 보던 그는 하늘거리는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며 다른 방울에 손을 대었다. 『아- 세브릭이 괴롭혀요. 잉잉- 난 잘못한거 없는데! 그냥 단순한 장난에 왜 저렇게 과민반응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지오, 내가 그렇게 잘못한걸까요?』 툴툴대던 소녀는 곧 장밋빛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지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주위로 방울들이 모여들었다. 그 방울들을 보던 그는 뒤돌아 다른 방울을 건드렸다. 『음 . . 아무래도 사켄은 참 배려가 깊은것 같거든요. 역시 사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사람이랄까 . .』 고민하던 소녀는 가볍게 자신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하늘을 보며 싱긋 웃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흐르는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묘하네요. 지오, 당신은 신이잖아요. 저보다도 많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당신은 이런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있을까요?』 혼자서 중얼중얼거리던 소녀는 곧 회색빛 머리카락의 사내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고 짓궂게 웃으면서 뭐라뭐라 그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그 사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소녀의 말을 들으며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그는 그렇게 하나둘 방울을 건드리며 소녀의 말과 웃음을 보고 있었다. 환하게 빛나며 아름다운 색채와 즐거워보이는 소녀의 음성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그는 보는이가 있다면 탄성을 내뱉을 정도로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잘지내고 있는 것 같네요." 그 . . 아니 신 지르오디스는 말했다.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방울을 조심스럽게 쓸어본 지오는 마지막으로 조금 흐린 색채로 빛나고 있는 방울을 보았다. 그 방울에서는 긴복도와 커다란 창문. 소녀 . . 엘은 여린 햇살을 받으며 장밋빛 머리카락의 사내, 세브릭을 보고 있는 장면이 천천히 비춰지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그 방울에 손을대자 소녀라기보다는 어른스러운 숙녀 같은 목소리가 아련하게 공간을 울렸다. 『돌아가야할 사람이겠죠, 난? 돌아가야하니까, 이 이상 누군가가 더 상처입지 않게 내가 잘해야하는거 알고 있는데. 그래도 좀 씁쓸해요, 지오. 못먹을 감 찔러나 보자라는 심보였는데.』 엘의 목소리가 잦아들면 들수록 지오의 청록빛 눈동자도 짙게 가라앉았다. 『너무 많이 찔렀나봐요. 아니면 내가 너무 무책임했나.』 슬픈 미소였다. 웃고 있음에도, 그 웃음이 진정 웃는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슬픈 아름다움이 배여있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던 지오는 손을 들어 방울 속에 있는 엘의 얼굴에 대었다. 엘을 보던 그는 옅은 한숨을 쉬며 그 방울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 . . 힘든 . . 가요?" 대답없는 그녀의 모습에 지오는 다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무시하며 눈을 떴다. 그리곤 곧은 시선으로 방울을 통해 비춰지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많이 . . 슬퍼하고 있나요?" 그의 손길은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눈으로 그리고 볼로 조심스럽게 쓸어나가고 있었다. " . . 전쟁을 멈추는 짐보다도, 당신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별을 생각하며 . . 더 힘들어하고 있는건가요?" 안타까움이 배인 청록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지만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힘내달라 . . 는 . . 말은 . . 이기적인걸까요, 엘." 그는 가볍게 방울에 손을 얹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방울로 천천히 다가섰다. 찬연히 빛나고 있는 실버블론드가 사르륵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곧 그의 붉은 입술이 엘의 이마에 대어졌다. " . . . 실제로 만나러 갈 수 없는것이 . . 아쉽고, 아쉬워요." 방울에 입술을 댄채로 중얼거린 지오는 눈을 떴다. 그리고 방울에서 입술을 떼며 바로 앞에 보이는 엘의 슬픈 미소를 바라보았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지오는,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마치 실제로 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듯 다정한 손길로 방울을 만졌다. "[에르테이샤]인 당신이 슬퍼하면, 당신과 함께하는 저 역시 마음이 아려와요." 그 말을 마친 지오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살랑이는 미풍이 불더니 공간을 채우고 있던 방울들이 다시 옅은 빛무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옅은 빛무리로 돌아가는 방울의 가운데에 있는 지오는 그 빛으로 인해 더욱 신비로워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풍이 지오가 만지며 보고 있던 방울까지 처음의 옅은 빛으로 돌려버렸을때, 그가 중얼거렸다. "이 마음이, 당신이 [에르테이샤]라는 것만이 아닌것도 같지만요." * * *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브릭도 나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복도를 걸었다. 그 침묵이 어색해서 살짝 시선을 돌렸을때 옅은 햇살이 내 마음을 희롱하듯 살며시 날 비추었다. 그 햇살을 향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 큰 소리로 누군가가 날 불렀다. "엘!!" . . . 헉, 맞다. 까먹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때 빠른 속도로 날아와 내 얼굴 바로 앞에서 금안의 눈을 거칠게 치켜뜨며 입술을 앙 다물고 있는 하브가 보였다. "와- 하브. 내 이름 불렀네요." "제정신이냐? 난 너랑 떨어지면 안된다했잖아!" "아이, 그렇게 말하면 부끄러운데. 하브, 역시 날 너무 사랑하네요." "뭔 헛소리야!" "그렇게 나랑 떨어지기 싫었어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너랑 떨어지면 .." "아아- 마음이 아프고 허전하다구요? 이를 어쩌나. 그보다 하브 배 안고파요?" "무 . . . 배 . . 고프긴 . .한데 . ." "그럼 밥 먹으러 갈까요?" "뭔가 이상한데 . ." 내 말에 휘말린 하브가 고개를 갸웃거릴때, 남모르게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일단 한숨 놨다. 귀엽기도 하지, 이렇게 잘 속아넘어가는게 매력이라니까. 살살 웃으며 하브를 달래다보니(?) 어느새 어색한 분위기는 하브로 인해 저 멀리로 날아가 있었다. 그리고 하브와 인사를 마친후 하브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켄을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다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잤어요?" " . . . " 사켄은 잠시 나와 세브릭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브가 내 머리 위에서 "잠깐 이게 아니잖아, 이 멍청이!"라고 하며 쿵쾅거리면서 간지럽힐 동안 난 모두 모인걸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파 죽겠는데, 식당이 어딜까요?" " . . . 잘모르겠군." 음 . . 사켄이 모르면 . . 하브도 당연히 모를테고 . . 그럼 . . 힐끔 세브릭을 쳐다봤지만 그는 의도적이라고 느껴질만큼 내 시선을 피해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하아 . . 이럼 곤란한데 . . 분위기가 어색해지잖아. 나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되는건 . . 귀찮은데. " . . 뭐냐?" "음? 뭐가요?" 하브가 뭔가 이상한지 나와 세브릭을 번갈아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내 머리 위에서 내려와 똑바로 나와 시선을 마주한채 말했다. "너희 둘이 왜 그러는건데?" "뭐가 이상해요?" "평소에는 아웅다웅, 개와 고양이마냥 싸우더니, 갑자기 왜 서로 눈도 안마주치고 말도 안하는건데?" "어라? 언제 아웅다웅 싸웠어요? 하브, 나와 세브릭의 다정한 대화가 그런식으로밖에 안보인거에요?" . . . 예리해. 하브, 의외로 예리해! 날카롭게 물어오는 하브의 말에 어색함을 최대한 감추며 말했지만, 하브는 의심이 가득찬 눈길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말 돌리지ㅁ . . . 쳇, 귀찮아." "에?" 하브는 어느 한쪽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쏙하고 내 로브의 모자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갑자기 뭐가 귀찮다는거지? 하브의 말에 의아심이 생긴 난 아까 하브가 쳐다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왜 하브가 내 모자속으로 숨어버린건지 알 수 있었다. 그 방향에서는 시종 한명이 조심스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종은 우리 곁에 도착하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식사 준비가 다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 . 드디어 폐하를 만나는건가? 심장이 두쾅두쾅거리네. "황제 폐하와 함께인가?" 사켄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시종은 움찔떨더니 대답했다. "아닙니다. 폐하께오선 따로 식사를 하실껍니다." "음? 그럼 저흰 언제 폐하와 만나게 되는거죠?" "식사 후에야 시간이 되신다 들었습니다." 오호- 그럼 점심쯤에 만나게되는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사켄과 세브릭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나름 괜찮네요. 체하지도 않을것같고. 안그래요?" " . . 그렇겠군." " . . . " 사켄은 대답했지만 세브릭은 대답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시종에게 다가가 말했다. "식사를 하고싶군요." "예, 그럼 이리로." 시종이 더 고개를 깊이 숙인 후 조심스럽게 앞서나가고 세브릭은 그 뒤를 이었다. 세브릭의 등을 복잡한 마음으로 보다가 빤히 날 보는 사켄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왜요?" 살짝 웃으며 묻는 내 말에 사켄이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이지?" " . . . 에? 무슨일이냐뇨?" "평소와 다른것은 처음 봤을 때 부터 알았다. 무슨 일이 있는건가?" 그렇게 티가 날정도였나? 사켄을 보다가 한손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활짝 웃었다. "별일 아니었어요." " . . . 별일이 아니야?" "그냥, 내 입장과 세브릭의 입장을 확실히 했을뿐이에요." 사켄의 회색빛 눈동자가 곧게 날 직시했다. 잠시 날보던 사켄이 입을 열었다. " . . 입장? 무슨 입장을 말이지?" "별일 아니라니까요?" 싱글벙글 웃고있는 내 모습을 보던 사켄은 내 옆으로 지나치며 한쪽 손을 들어올리더니 내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채로 앞을 똑바로 보고 있을때, 사켄이 말했다. "별일 아니었다면, 너도 세브릭도 그런 표정 짓지마라." " . . . 헤에? 무슨 표정 짓고 있었는데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든든한 온기에 눈을 감으며 물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없더니 조용히 말했다. "애써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려는 표정." " . . . 그런 표정도 있어요?" 힐끔 그의 손을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었다. 너희 둘다." 종이와 잉크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는 한 집무실. 커다란 책상 앞에 두다리를 올린채 앉아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의자를 비딱하게 기울여앉고 두 손을 깍지낀채로 자신의 머리를 받치며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리곤 곧 잔혹함이 서려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라고 그랬지?" 그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곧 그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지켜보라 명하신 소녀가, 어젯밤 자신의 방에 들어가지 않고 옆방의 세브릭.K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거사라도 이뤄졌다는건가?"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즐거운 잔인함에 반짝거리자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그것은 아닌듯 합니다. 저희가 지켜본바로는, 그저 한침대에서 같이 잠을 잔것뿐입니다." "호오- 그래? 두남녀가 한침대에서 그냥 잠만잤다고?" 남자는 삐그덕삐그덕 소리를 내며 앞뒤로 몸을 흔들다가 빙글 의자를 돌려 발을 땅에 짚으며 웃었다. "고작 그대의 추측인 그 말을 내게 믿으라고 보고를 하는것인가?" " . . . 폐하에 대한 충성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훗 . . 그래?" 테일러는 흥미롭다는듯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쪽 손으로 톡톡 창문을 두드리다가 말했다. "나에 대한 충성이 고작 그정도 맹세에 걸릴정도로 하찮던가, 그대는?" "아닙니다!" 테일러의 말에 한쪽 구석이 일그러지더니 온통 검은 복장을 한 자가 나타나 부복했다. 그는 손이 새하얗게 되도록 꽉 주먹을 쥐고 있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를 즐거움이 젖은 보랏빛 눈으로 내려다보던 그는 살짝 허리를 숙여 부복한 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용조용, 하지만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내게 한 충성을 하찮게 만들어선 안돼. 알겠나?" " . . 명심하겠습니다." 복면인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테일러는 그 자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시 곧게 섰다. 창문 밖을 바라보며 뒷짐을 진 그는 어느새 차분한 눈빛을 띄고 있었다. 아무런 말없이 창 밖을 보던 테일러가 빙글 뒤돌아서더니 뒷짐진 손을 풀어 나뭇결이 살아있는 책상을 톡톡하고 두드렸다.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있는 복면인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던말던 테일러는 아랑곳하지않고 계속해서 두드렸다. 곧 불안한 침묵이 내려앉았던 집무실이 그의 목소리에 의해 걷혔다. "좋아. 그럼 지금은 식사하러 갔다는 말이지?" "예." "만날 준비를 해야겠군. 이만 물러가도록." "예!"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자는 신경도 쓰지 않은채 테일러는 창 밖의 옅은 회색빛 구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세브릭이라 . . 그래, 그가 그대가 말한 그대의 취향인가?" 테일러의 보랏빛 눈에 잔인한 즐거움이 서렸다. 별다른말없이 평화로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식탁에서 오순도순 조용히 얘기를 나누었다. 하브는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고 있는 나와 세브릭을 의심어린 눈길로 쳐다보았고, 사켄은 그런 우리 둘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식사때도, 식사가 끝난 후에도 대화를 나누는건 세브릭을 제외한 사켄, 하브, 그리고 나였다. 세브릭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까 그 일 이후로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식사만 했다. 그게 더 미치도록 어색해서 말을 붙여볼까했는데, 그렇게 되면 거리를 두자는 내 말이 우습게 되는 꼴이라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 . 한마디로 사면초가의 상태랄까. "아- 하브, 그거 맛있지 않았어요? 왜, 초록색 면에 붉은 소스가 뿌려져있던거 . . " "별로, 내 입맛엔 맞지 않았다. 우리 이샤링족에게 최고의 맛은 역시 과일이야." "헤, 그럼 지금까진 어떻게 살았어요? 비틀림 . . 뭐 하여간 이 세상이 이상해진것때문에 왠만한 과일들은 다 이상해졌다고 들었는데." "우리 이샤링족에게 그정도쯤이야." 엣헴- 하면서 허리에 손을 대고 배를 쭉 내미는 하브의 모습에 풋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브는 이젠 완전히 익숙해졌는지 얌전히 쓰다듬을 받다가 힐끔 세브릭을 보았다. "그보다, 정말 무슨 일있는거냐? 지금 너희 둘이 . . " . . . 에이, 진짜. .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더니, 또 걸고 넘어지네. 하브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묻는 말에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딴청을 부렸다. "뭐야, 진짜 무슨 일 . . " "똑똑-" 오- 나이스 타이밍! 난처함에 아무말 없이 있었기 때문에 묘하게 흘러가던 분위기가 노크소리에의해 순식간에 끊어졌다. 곧 끼익- 거리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 . 기름칠도 잘해놨지, 저렇게 소리없이 문이 열리는걸 보면 말이야. "식사를 마치셨습니까?" "물론, 아주 잘먹었어요. 요리사에게 음식이 맛있었다고 전해주시겠어요?" 갑작스런 내 말에 시종이 놀랐는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 .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폐하를 뵈러가야겠지요? 아, 따로 알현을 요청해야하는건가요?" " . . .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폐하께서 초대하셔서 온것이시고 . . " "에이, 말은 바로 해야죠." 당황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시종을 재미있게 보다가 한쪽 턱을 괴며 싱글싱글 웃었다. 초대? 초대라니, 그게 초대야? 우리 소나무같이 꼿꼿한 카이스가 날 초대해서 여기로 데리고 왔다고? "그건 협박이었어요. 안오면 끌고라도 가겠다고 했다구요. 그러니 무서워서 안올수가 있나." 키득키득 웃고는 있지만 그 말 속에 깔린 내 작은 화를 느꼈기때문일까? 시종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너무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탕하고 식탁을 치며 일어섰다. 그리고 멀뚱히 날 보는 그들의 눈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자자, 그럼 이제 가봐야하지 않겠어요? 드디어 만나는거라구요. 애태우고 애태우시던, 카슘 제국의 황제 폐하를 말이에요!" 내 말에 살짝 한숨을 내쉬며 일어서는 사켄, 힐끔 시종을 보다가 시종이 알아채지 못한 것을 알고 재빠르게 내 모자 속으로 들어가는 하브. 그리고 . . " . . 안갈꺼에요?"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는 세브릭. 그의 모습에 의아해진 내가 묻자, 세브릭은 입에서 찻잔을 떼며 말했다. "사켄과 다녀오세요. 제가 갈 필요까진 없을 듯 싶군요." "세브릭이 없으면 무슨 재미에요. 같이 가요."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데 무슨 재미가 필요하죠?" 날카롭게 날 노려보는 세브릭의 시선에 순간 움찔했지만 애써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여전히 날 잡아먹을듯 노려보는 그의 시선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한숨을 쉬며 사켄을 쳐다보았다. 사켄은 내 시선을 받고는 세브릭에게 말했다. "그래도 넌 아렌타 제국의 귀족이다. 당연히 알현에 응해야하지."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 . . . 이상하군, 가지 않겠다는 건가?" "가고 싶지 않아요." 그 말과 함께 다시 후르륵 차를 모시는 세브릭의 모습에 의아해졌다. 정말 이상하네, 평소에는 이렇게 싫다싫다 떼를 쓰듯이 하지 않았는데. . . . 그러고보니, 후드를 뒤집어쓴것도 귀찮은 일 때문이라고 했던가? 뭔가 . . 이 카슘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세브릭은. . . . 그럼 더더욱 데려가야지- 검은 머리카락을 손에감고 빙글빙글 돌리며 세브릭을 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에 띄우며 말했다. "같이 가죠, 세브릭?" "싫어요. 사켄과 다녀오세요." "사켄이랑 가면 질투할꺼잖아요? 아, 그건 사켄 뿐만이 아니라 나랑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해서였던가?" " . . . 쓸데없이 말을 나누고 싶은 생각도 없군요. 얼른 가세요. 카슘의 황제 폐하를 기다리게 할 생각인가요?" 가볍게 대답하는 그의 말에 싱긋 웃으며 그의 턱을 훽 잡아챘다. 그리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채 놀래서 눈이 동그래진 세브릭에게 말했다. "같이 가죠?" " . . 싫다고 하지 않았나요?" "같이 가죠?" " . . . 싫어요." "마지막이에요, 같이 가죠?" 마지막이라는 내 말에 세브릭이 푹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탁 쳐냈다. 그에 살짝 빨개져서 아리는 손을 보다가 세브릭을 보았다. 뭔가 . . 이거 일촉즉발의 상황인데. "싫어요."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하는 세브릭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까 내가 한말때문에 이러는거 아니지? 설마 그것 때문에 이렇게 속좁게 굴라고. . . . . . 아니, 세브릭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이 사람은 엄청난 삐돌이니까! 삐짐쟁이에다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최후의 방법이다. "싫어요, 좋아요?" "싫어요." 내 질문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세브릭은 순식간에 싫다고 말했다. "좋아요, 그럼 같이 가죠." " . . . 싫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 질문은 싫어요, 좋아요 라고 물었을 뿐이잖아요?" " . . . 또 무슨 말이죠?" 내 최고 최대의 스킬! "난 같이 가기 싫으면 말아요, 라고 말하려 했거든요." 억지다, 억지- 나도 억지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왠지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항상 옆 . . . 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거의 같이 있었던 세브릭이 내 옆에 없다고 생각되니 불안해졌다. 어제 그 동족의 보랏빛 사람도 보았고 . . 뭔가 기분이 묘한 사람이었단 말이지. " . . .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말이 안되는 소리가 어딨어요? 일단 입밖에 내뱉으면 다 말이지. 안그래요?" " . . . . 후우 . . . " 자신이 마시던 차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한숨을 내쉬는 세브릭의 모습에 살짝 마음이 약해질뻔했지만, 그래도 함께 가고 싶다는 마음에 활짝 웃으며 그를 빤히 보았다. " . . . 무슨 일이 있어도." "음?"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책임 못져요." 무슨 말이지? 세브릭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사켄을 보았다. 사켄은 무언가 알고있다는 눈으로 세브릭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얽히고 섥힌 묘한 감정이 어떤건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지금 저 뒤에서 아직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허리 숙이고 있는 시종의 모습을 보자, 그 생각은 좀 나중에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말아요." 내 말에 세브릭이 날 올려다보았다. 그런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지켜줄께요. 이래뵈도, 나 꽤 뛰어난 여자거든요." 물론 도망과 말 같은 경우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랑할 수 있지. 내 말에 쓱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세브릭이 시종에게 다가갔다. "가도록 하죠. 안내해주시겠어요?" "이쪽으로 . . " 시종이 안내하는데로 복도를 걸으면서도 세브릭은 시종일관 정면을 향해 시선을 줄뿐 내가 있는 쪽으론 단 한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칫, 당신 맘대로 하라고. 나도 내 맘대로 할꺼야. 내가 왜 세브릭한테 이런저런 신경을 써야하냐고. 아니 . . 물론, 세브릭이 나한테 조금이나마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얼른 그냥 도망치듯 거리를 두자고 했던거지만 . . 아, 그럼 나한테 잘못이 있는건가? 어떻게 한다 . . . 계속 이 상태면 . . 힐끔 세브릭을 보다가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옅은 회색빛 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것을 보며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 때문에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 . . 엘?" "응? 왜요, 하브?" "뭘 그렇게 웃는거지?" 사켄의 담담한 회색빛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무것도." 어차피 난 떠날 사람이잖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브릭이 날 어떻게 대하든, 이제 곧 난 떠나야하잖아. "정말로." 싱긋 사켄을 향해 미소지으며 세브릭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 역시 시선을 정면에 두었다. 내가 이 세계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 .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게 맞는거야. "여기입니다." 문 양쪽에서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여기도 하빔과 마찬가지네. 저 사람들도 날 무릎꿇힐라나? 그럼 좀 많이 열받을것 같은데. 시종은 허리를 숙이며 두걸음 정도 물러섰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우리는 곧 병사들이 문을 여는 모습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 "두근두근하지 않아요? 카슘 제국의 황제폐하를 뵙는건데." " . . 별로." 사켄의 차분한 대답에 입이 삐죽거렸지만 기대어린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상같은 것 위에 있는 황좌를 보며 서서히 미소가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서오게. 레이디 엘, 그리고 세브릭경과 사켄경." 황좌에 앉아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보고 있는 사람. " . . 카슘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 인사올립니다." 양 쪽에서 인사를 올리는 사켄과 세브릭의 모습에도 난 허리를 꼿꼿히 펴고 그를 바라보았다. " . . . 낯설지 않은 분이시네요." "당연한것이겠지. 어제 본 사이인데 말이야. 그것도 잊으면 내가 섭섭하지." 날 보며 보랏빛 눈동자를 예쁘게 휘으며 웃는 사람. " . . 그러게요. 설마 황제폐하일줄은 몰랐는데요." 나 역시 마주 웃어주며 사켄과 세브릭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무시하곤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는 그런 내 시선에 피식 웃더니 말했다. "카슘 제국에 온것을 환영하네. 여기가 바로 내가 다스리는 땅이며 내가 바로 이 제국의 황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의 붉은 망토가 휘날리며 배경처럼 그를 감싸안았다. "테일러 덴 카슘이라 하네." 어젯밤 내 방에 불법침입해서, 내가 세브릭 방에서 잠들게만든 고마운(?) 사람, 보랏빛의 위험해보이는 그가 카슘제국의 황제, 테일러 덴 카슘이였다. 아무래도 북쪽 지역이라 추운 카슘 지역이 더 춥게 느껴졌다. 역시 황제라 그런가. 엄청난 위압감이 순식간에 주위를 휩쓸었다. . . . 귀찮게 됬네. 저런 타입은 괜히 잘못 눈에 들면 힘들어지는데.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다가 옆에서 콕 찌르는 세브릭의 손가락에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엘이라고 해요, 황제 폐하." 간단한 약식의 인사에 누군가가 분노 어린 눈빛으로 날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워낙에 따끔따끔 귀찮게 했기에 힐끔 그 쪽을 쳐다보았다. "응?" 황제 . . 그러니까 테일러의 옆에 서있던 사람을 발견한 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싱긋 웃었다. "와우, 카이스군. 어제 그렇게 우리를 떨궈놓고 가버리더니. 어제 하루 잘 보냈나요?" 생글생글 웃는 내 미소를 보는 하늘빛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지닌 평범한 외모의 사내. 그는 바로 카이스였다. 카이스는 내 말을 듣더니 훽 고개를 돌려버렸고, 그 모습에 한마디 하려던 나는 테일러의 말에 입을 열었다. "호오- 친분이 있는 사이였던가?" "폐하의 명으로 저희를 데리러 오신분이 카이스군이셨거든요." "아, 그랬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을 떠는 모습에 확 저 보랏빛 머리카락을 낚아채다가 탈탈 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어 손가락이 근질거렸지만 그렇게되면 귀찮아지는 지라, 얼른 용건만 끝내고 가자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폐하, 할 얘기가 있어서 저희가 이 곳, 카슘까지 온것을 알리라 생각하는데. 제 생각이 틀렸나요?" "글쎄,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가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군. 무슨 말을 하려고 아렌타와 생명의 숲. 하빔 왕국까지 가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닌거지?" 그는 날 보며 나른한 미소를 짓더니 우아하게 황좌에 앉으며 물었다. 그의 시선에 뭔가 오싹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질문보다 저희가 더 먼저 물어야겠군요. 저희를 부두에서 맞이하신 후 이 궁까지 초대하신 이유가 무엇이죠?" "글쎄,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테일러는 여전히 재밌다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달고 말했다. 아, 저런 사람 진짜 싫어. 캭 그냥 콱 물어버리고 싶네!(?) "저희는 몰라서 묻는건데 말이죠." 어깨를 으쓱이며 싱긋 웃음을 건넸다. 내 웃음을 보며 날 훑어보는 테일러의 시선을 무시하려 노력하다가 다시 말했다. "어째서 저희를 궁에 초대하신것이죠?" "단순한 흥미지. 아렌타- 생명의 숲. 거기다가 하빔 . . 꽤나 흥미가 생길만한 일행이지 않나? 거기다가 전쟁에서 아렌타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것도." 그의 눈에 가득 담긴 것은 흥미와 재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불쾌해졌다. . . . 세브릭, 미안해요. 왠지 당신이 날 처음 만났을때 느꼈던 감정을 나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생명의 숲으로 이종족들이 모두 돌아가버린 것도. 모두 그대 때문이라 들었으니 말이야." " . . 뭐, 그게 제가 이유가 되진 않는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네요." 진실이니까. 내가 종전을 제의했고, 이미 동연합과 이종족 연합에서는 동의를 구했다. 이제 마지막, 서연합에서만 동의를 얻어내면 . . 정말 [에르테이샤]로서의 내 일은 The end. 끝인거다. 그 생각이 든 나는 잠시 시선을 돌려 너무 멀어 보이지 않는 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황좌에 앉아 날 보고 있는 테일러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대륙 전쟁이 일어난지도 몇십년째. 이 전쟁이 지겹지는 않으세요?" "지겹지 않다. 전쟁은 즐거운 법이지." " . . . 그러세요?" "물론." . . . 강적이다. 귀찮다. 이 사람 . . 어떻게 말하면 좋지? 그렇게 전쟁이 좋다고 확답을 할지는 몰랐는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그가 여전히 보랏빛 어린 시선으로 날 보는 것을 느끼며 작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폐하도 아시다시피 더 이상 대륙은 전쟁을 원하지 않아요. 그것은 신께서도 마찬가지. 신은 전쟁을 원치 않으시기에 대륙에 힘든 시련을 내리셨죠. 안그런가요?" " . . 호오- 지금 내 앞에서 신을 거론하는건가? 그대가 신이 보낸 사자라도 되는양 말하는군." 그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거리며 말했다. . . . 아니, 나 [에르테이샤]고 . . 말하자면 . . 그러니까 신이 보낸 사자가 맞긴한데. 여기서 인정하면 . . 뭔가 정말 못빠져나갈것같다. 저 사람이랑 마치 평생 살아야할것 같은 느낌이랄까. 테일러의 눈치를 살피다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으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쟁이 계속되길 원하시나요?" 내 말에 그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입가에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겹지는 않지만 전쟁이 슬슬 질리기도 하고 . . 이것 저것 신경쓰이는 일도 많아서 말이야." 오- 쉽게 풀릴것 같은데? 확 밝아진 내 얼굴에 테일러는 픽 웃더니 손을 깍지끼며 똑바로 앉았다. 그리곤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대는 아렌타의 사신으로서 내게 종전을 제의하는것인가?" " . . . 아렌타의 사신?" 묘한 내 말의 어감을 알아차렸는지, 그 뿐만 아니라 세브릭과 사켄도 날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 . 난 '이곳'의 존재가 아니잖아. 어느 나라의 사람도 아니고 . . 국적도 없다. 그건, 내겐 당연한 사실. " . . 죄송하지만, 전 아렌타인이 아니에요." "그럼 어디 사람이지? 아렌타가 아니면 . . 카슘인이란 말인가?" "그도 아니죠." " . . 왕국의 사람인가?" 사켄의 조용한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더더욱 아니지. 그 왕이 다스리는 그 나라 사람이면 난 차라리 혀깨물고 죽어버릴꺼야. "그러고보니, 듣지 못했군요. 엘, 당신은 어디에서 왔죠?" 세브릭이 드디어 날 보며 말했다. 반들반들한 그의 장밋빛 눈동자에 입을 반쯤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곤란하고, 난처하고 . . 당황스러웠다. " . . 그게 중요한가요? 그저 전 전쟁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대륙을 돌아다닌건데요." "중요하지. 국적이라는것은 말이지." 테일러는 중얼거리듯 말하더니 날 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서, 대륙 전쟁의 종전을 제의하는 건가, 그대는?" "네." 대충 화제가 돌려진것 같은데 . . . 세브릭이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테일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 사람한테는 뭘 이것저것 쉽게 할 수가 없다. 말 한마디한마디에 신경써야한다는 느낌이랄까 . . 저 사람 . . 정말 싫다. 그냥 주는것도 받는것도 없이 싫어. 그는 날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픽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좋다." " . . . 네?" 이렇게 쉽게? 이렇게 간단히? 그냥 종전을 하자고? 그의 대답에 세브릭도 사켄도 황당한 것인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런 우리를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보더니 말했다. "그대신 조건이 있다." . . .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쉽게 전쟁을 멈추겠다라고 할리가 없지.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날 보며 아까의 그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내것이 되거라." "싫은데요."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기에 그가 묻자마자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내 대답에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 . . . 싫다?" 그가 살짝 뒷말을 올리며 묻는 것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리 카슘의 황제 폐하라해도, 저는 누구의 것이 될 생각이 없거든요. 뭐 굳이 누구의 것이 된다고 한다면 . ." . . 누구의 것이 된다고 한다면 . . 절대로 '이곳'에 존재하는 누구의 것이 되고 픈 마음은 눈꼽 . . . 만치는 있나. 아니, 좀 많이 있다. 힐끔 세브릭과 사켄을 본 나는 다시 테일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른 조건은 안될까요? 전 폐하의 것이 될 수 없는데요." 그는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가 스윽하고 세브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 . 즐거워보이기도 했고, 위험해보이기도 했다. ". . . 그러고보니, 카슘 제국의 황제인 내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건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하는거지?" " . . . . " . . . 어째서 화살이 세브릭에게로 돌아가는거지? 그의 말에 세브릭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은가? 얼굴을 가리다니 말이야. 내 듣기론, 아렌타에서도 세브릭경의 얼굴은 알아준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그는 재밌다는 듯 나른하게 웃더니 그 나른함 속에 날카로움을 숨기고 말했다. "얼굴을 보이도록, 세브릭경. 소문이 자자한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군." 옆에 서있던 사람으로써, 세브릭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황좌에 앉아있는 테일러를 보았다. 그는 세브릭과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지금, 벗지 않겠다는 것인가?" 테일러는 조용히 하지만 충분한 위협을 담은채로 말했다. 그의 말에 세브릭이 천천히 모자를 벗으려는 모습에 그런 그의 손을 잡으며 테일러를 올려다 보았다. "안돼요." 내 말에 세브릭이 놀란 눈동자로 나를 보았고, 테일러는 흥미어린 눈동자로 날 쳐다보았다. 그에 난 세브릭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으며 그에게 샐쭉 웃어주었다. "세브릭은 나만 봐야되거든요." 내 말 한마디에 세브릭의 몸이 쨍하고 굳은것이 느껴졌다. 목에서 간질간질하게 느껴지는 세브릭의 숨결을 만족스럽게 느끼며, 테일러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우리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만 봐야한다고?" "물론이죠. 세브릭의 머리에서 발끝까지는 모두 제 소유거든요." 아- 이건 좀 너무 대담한 발언이었나? 싸하게 얼어붙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그런 내가 재밌다는 듯이 빙긋 웃더니 다시 말했다. "호오- 연인 사이였던가?" "연인 사이보다는 더 각별한 사이라고나 할까요." 연인은 개뿔. 거리를 두자고 한게 몇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브릭이 저 남자에게 얼굴을 들켜서는 안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다. 그 증거로 평소라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앙탈을 부릴 세브릭이 얌전히 내 품 속에서 가여운 초식 동물인양 숨죽이고 있지 않나? 그에 왜인지모를 만족감이 혈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것을 느끼며 세브릭을 안은 팔에 더욱 꽉 힘을 주었다. " . . 엘 . ." 나즈막한 목소리로 세브릭이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는 그에게 들릴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 . . 이게 뭐하는거죠?" "저 사람한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잖아요?" " . . . . 후우." 내 말에도 아무말 하지 않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세브릭. 그런 세브릭의 모습을 처음 보는 나로선 즐거운 마음으로 이 상황을 즐겼다. 테일러는 나와 내 품속의 세브릭을 번갈아보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곤란하군." "무엇이 말이죠?" "그대를 처음 만나고 나서부터 계속. 그대를 내 것으로 하려했는데 말이야." "아- 곤란하네요. 아시다시피, 폐하는 제 취향이 아니시거든요." 남자라면 무릇 놀리는 재미와 함께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하는 법! 하지만 당신은 엄청나게 당기기만 해서 속절없이 끌려다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주는 사람이란 말이지. 속으로 테일러에게 내뱉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아무일없다는 양 미소지었다. 테일러는 내 미소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가벼운 톡톡 거리는 소리만이 주위를 울리고, 그의 입이 열렸다. "재밌군. 재밌어." "그래요? 저 역시 폐하를 만나서 즐겁기 짝이 없어요." 만나지 않은채 당신을 상상만했었던 그 순간이 더 즐거웠었지만 . . 미인이라는 건 좋은데, 동족이라는건 싫단 말이지. 계속된 가벼운 내 말대꾸 비슷한 대답에 테일러의 뒤에 서있던 카이스의 하늘빛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마저도 스릴감있게 즐기며 다시 폐하를 보며 깐죽거렸다. "그런데, 폐하. 이제 세브릭 얘기는 뒤로하고, 다시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내 품 속에 있는 세브릭의 자세가 좀 힘겨워보이기도하고 말이지. 품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퍽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도 그의 어깨가 가련하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데 더 이상 내 욕심을 부릴 순 없지 않겠는가? 난 천천히 팔을 풀었고 세브릭은 최대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인채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테일러는 잠시 세브릭에게 시선을 주더니 곧 흥미가 떨어진듯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을 읽고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기 때문에 테일러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래, 본론으로 넘어가야겠지. 내 조건은 하나다. 그대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이제 이 지겹게 끌어오던 대륙전쟁을 멈추는 거지. 그정도의 조건은 들어주어야하는 것 아닌가?" 그는 가볍게 두드리던 손가락들을 까딱까딱거리며 말했다. 그의 까닥거림을 보며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분질러버리고 싶었지만, 애써 그 욕망을 떨쳐내며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안타깝게도, 그 조건은 들어드릴 수가 없다고 했는데요. 폐하가 제 취향이 아니라는 것은 둘째치고 . . 더 큰 중요한 이유가 있거든요." "그대와 각별한 사이라는, 세브릭경 때문인가?" 그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세브릭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세브릭은 더더욱 고개를 떨구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슬쩍 세브릭의 앞을 가로막으며 싱긋 웃었다. 내 행동 때문인지, 테일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는 것 같았지만, 뭐 그야 내 알바 아니고. 테일러의 말에 답하기 위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그래, 무슨 이유지?" 그가 황좌에 푹 기대 앉으며 말했다. 테일러의 모습을 보던 나는 가볍게, 하지만 장난끼있는 미소를 지었다. 내 미소에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이채롭게 빛나는 것을 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전, 매달리는 사람보단 내가 매달려야하는 사람이 더 좋거든요." 그 말과 함께 나는 한손으로 로브 자락의 끝을 잡고는 살짝 무릎을 숙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폐하의 조건은 들어드릴 수가 없답니다. 죄송해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주 잠깐의 침묵이 맴돌고, 곧 테일러의 큰 웃음소리가 그 곳을 울렸다. 카이스는 놀란 눈빛으로 그런 테일러를 보고 있었고, 난 도대체 내 말 중 무엇이 그를 저렇게 웃게 만들었는지 몰라 고민했다. 그는 큭큭거리며 팔에 얼굴을 묻고 웃더니 곧 진정됬는지 턱을 괴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보다도 더 진해진듯한 보랏빛 눈동자가 집어삼킬듯 나를 보았다. "카슘 제국의 황제인 내가, 고작 평민 계집인 네게 매달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냐?" "그럼 아닌가요? 계속 폐하의 것이 되라 하신것을 벌써 잊으셨나보죠?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어제 제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기는 싫은데요." 내 말에 그는 빙글빙글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성큼성큼 단을 내려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채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내게 손을 뻗었을때, 순식간에 누군가가 내 허리를 감싸안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슨 짓이십니까." 차분하지만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회색빛 머리카락이 눈가에서 살랑였다. 아- 사켄 . . 머리가 꽤 길었네 . . 예전에는 간신히 귀를 덮을정도였는데 . . 지금은 이렇게 살랑살랑해질정도로 길었다니.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채 사켄의 따스한 품에 안긴채로 그의 머리카락을 보다가 천천히 여전히 손을 들어올린 자세 그대로 있는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그는 묘한 눈빛으로 사켄을 보더니 날 보았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군." "제가 좀 인기녀거든요." "재밌군, 그대라는 여인은." 그는 진정 즐겁다는 듯이 미소짓더니 사켄의 품에 안겨있는 내게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사켄이 움찔하는게 느껴졌지만, 가벼운 눈짓으로 그에게 가만히 있어달라는 뜻을 전하곤 테일러를 보았다. 그는 내 손을 잡은채로 싱글벙글 웃더니 훽 하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엘!" 사켄의 놀란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앗- 하는 소리도 낼 틈도 없이 나는 테일러의 품에 안겼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을때 그가 내 귀에대고 속삭였다. "널 내것으로 만드는 재미가 있겠군. 저들에게서 너를 빼앗는다면, 저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나?"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위험하리만치 매력적인 저음에 솜털의 가닥가닥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은채 말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요." "어째서지?" "알고 있으니까요." "저들의 표정을 말인가?" "글쎄요? 전 저 자신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 하지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대를 내게 빼앗긴다면." 그는 재밌다는 듯이 계속해서 내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난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여전히 두팔속에 날 가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샐쭉 웃어주었다. "당신은 볼 수 없을꺼에요." "흐음?" 그의 보랏빛 시선 속에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날 보며 나 역시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는 내 미소에 멈칫하더니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볼수 없다는 이유가 무엇이지?" 테일러의 말을 들으며 난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순순히 날 놓아주는 그가 의외였지만 난 그에게서 한발자국 더 물러서서 내 뒤에 단단히 버티고 있는 사켄과 세브릭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양 옆에 서있는 사켄과 세브릭의 손을 슬며시 끌어다가 꼭 잡고선 그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날 빼앗길만큼. 이 사람들은 녹록치 않거든요." 그와 함께 양손에서 꽉 쥐어지는 그들의 힘을 느끼곤 테일러에게 더 활짝 웃어주었다. 테일러는 내 손을 번갈아보더니 다시 날 보았다. 그리곤 그 역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로군, 이런 감정은." 그는 쿡쿡거리며 웃더니 뒤돌아서서 황좌로 돌아갔다. 곧 황좌에 앉은 그는 비스듬히 자세를 기울인채 손을 꽉 잡고 있는 우릴 보더니 말했다. "빼앗는 보람이 있겠어." 위험스레 빛나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지만 난 내 양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믿었다. 곧 우리는 테일러의 물러가 편히 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편히 쉬라는 말을 듣고 나왔지만, 편히 쉴 수 있을리가 있나. 복도를 걷고 있으면서도 숨막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카이스를 쳐다보았다. 당당히 등을 보이며 걷고 있는 그의 모습에 짧은 한숨이 나왔다. 이건 뭐 . . 카이스가 우리를 데리고와서 나름 배려의 차원으로 다시 우릴 안내하게 한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 . 예를 들자면 감시라던가 . . 귀찮아 죽겠다. 말을 걸까 하다가도 슬그머니 내 옷자락을 잡고 고개를 젓는 사켄의 모습에 오싹한 사랑스러움을 느끼며 손가락을 요물조물하기도 오래였다. 편히 쉬라던 황제는 갑자기 카이스에게 카슘 제국의 황성 안내를 명했다. 이왕 황궁에 들어왔는데, 구경이라도 해야지 않겠냐는 듯한 말이었지만 . . 난 구경보다는 쉬고 싶다고.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수많은 고생을 했는데 . . "저 남자인간, 왜 저러냐?" 계속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리고 있자 어깨에 얌전히 널부러져있던 하브가 내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더니 귓가에대고 소근거렸다. "뭐가요?" 하브가 삿대질한 곳에 있는 사람을 잘알고 있기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이상하잖아. 조용한게. 지금쯤이면 벌써 너랑 티격태격하고 있어야하지 않아?" "별로, 이상해할꺼 없어요. 원래 이런 사이였거든요." "네 말은 모조리 거짓말처럼 들려." "하브, 저에대한 믿음이 부족하네요. 아니, 인간에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건 알지만 그래도 좀 믿어요. 함께 한지가 꽤 오래됬는데, 왜 절 안믿어요?" 억울하다는 듯한 내 징징거림에 하브가 질색이라는듯 히익하는 소리를 내더니 내 모자 속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에이- 비겁자. 도망치는거야? 그나마 여기서 대화할 사람은 하브가 유일했는데. 다시 대화할 사람이 없어진 난 조금 침울해져서 바닥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서버린 카이스의 등에 이마를 박기전에 사켄이 잡아줘서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으앗? 아 . . . 고마워요, 사켄." 손목이 잡혀 멀뚱멀뚱 카이스의 등을 보다가 사켄을 보며 말했다. 사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목을 잡은 손을 풀며 천천히 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행동 때문에 회색빛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묘하게 간질간질한 느낌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또 사켄에게 오싹한 사랑스러움을 느꼈지만 착각이라 여기며 카이스에게 따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봐요, 카이스군. 갑자기 멈춰서면 어떡해요?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을 생각해야 할 것 아니 . ." 하지만 내 말을 카이스는 순식간에 무시했다. " . . . 헤딜리아 공녀님, 이곳에는 무슨일로?" "아- 카이스경?" 갑작스레 들려온 고운 미성에 카이스의 등만 바라보며 따지던 난 힐끔 앞 쪽을 보았다. 그리고 복도에서 창으로 들어온 햇살을 한껏 받아 반짝반짝 거리는 듯한 효과를 내는 미녀를 볼 수 있었다. 내 손이 맞잡아지며 황홀경에 빠지는건 순식간이었다. 틀어올린 머리에서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하얀 피부를 강조하는 쪽빛의 머리카락이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쪽빛의 눈동자 역시 아름다웠다. 진주빛의 하얗고 뽀얀 얼굴에 살며시 도는 홍조는 어린 소녀라기보다는 성숙한 여인의 사랑스러움을 지니고 있었고, 입가에 그려진듯 흐릿하게 미소짓고 있는 입술은 촉촉함을 머금은 분홍빛이었다. 마치 해가 떠오르기전 푸르스름한 새벽의 이슬을 머금고 있는 듯한 미녀였다. " . . . 미이..ㄴ.. 읍! 읍읍!!!" 그녀에게로 달려나가기위해 준비하던 나는 갑작스런 사켄의 끌어당김과 세브릭의 입막음에 저지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뭐하는거야! 놔, 놓으라고! 저런 미녀라니, 맙소사 신이시여 . . 아니 지오! 너무 예뻐, 너무 아름다워! 뷰티풀, 엘레강스, 판타스틱! 앙드레 김 선생님이 누구를 보며 연발을했던, 분명 그 선생님은 저 여인 앞에서는 무릎꿇고 숭배하듯 말할 수 밖에 없을꺼야! 내가 한창 그녀 때문에 반미쳐서 세브릭과 사켄이 힘겹게 막고 있을때 , 뒤의 소동은 전혀 모르는 카이스가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황궁으로 오셨습니까?" "폐하를 알현하고자 . . " 수줍게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에 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던 것도 있고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 . . 이건 . . . 이건 에프릴을 만났을때와는 또 다른 사랑스러움이야. 이대로는 해결되는게 없다는걸 깨달은 난 몸부림치던걸 멈추고 살짝 심호흡한뒤에 세브릭과 사켄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들은 불안불안한 표정으로 슬쩍 손을 풀었고, 그 순간에 빠져나간 난 카이스의 옆에 서며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갑작스런 내 등장에 그녀는 놀란듯 살짝 커진 눈동자로 날 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쫙 펴고는 자신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악- 왜? 왜 가리는데! "카이스경? 누구죠, 이 분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위아래로 날 훑어보는 시선 따위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두번째 만나는 미녀라는 것은 그정도야 용서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엘이라고 해요. 공녀님." 이름은 제대로 못들었지만 공녀라고 부르는 소리는 들었다. 공녀라면 . . . 귀족 영애인가? 내 인사에도 공녀라는 그 여인은 내게 경계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카이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폐하의 손님이십니다." "폐 .. 하 . .의 . . 손님?" 조용조용 중얼거리던 그녀는 다시한번 내 위라래를 훑어보더니 경멸을 담은 눈웃음을 지었다. "카이스경, 농이 심하시군요. 폐하의 손님이라니요. 아무리봐도 평민으로밖에 안보이는걸요." 그녀는 부채를 부치며 카이스에게 말했고, 카이스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내 입이 먼저열렸다. "아쉽게도, 폐하께서 직접 초대해주셔서 카슘의 황궁에까지 올 수 있었답니다." 손님 아닌 손님이기는 하지만.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그녀는 부채를 천천히 접으며 말했다. "정녕 폐하의 손님이라는건가요?" "정녕 폐하의 손님이라는건데요." 그녀의 말형식을 그대로 따라하며 말하자, 그녀는 불쾌한듯 인상을 찌푸리며 카이스를 보았다. 카이스는 그녀의 시선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 . . 그렇군요. 페하는 어디에 계신가요?" "집무실에 계십니다." 카이스의 예의바른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힐긋 내게 시선을 주곤 사뿐사뿐 소리없는 걸음으로 방금 우리가 지나온 길로 가버렸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카이스에게 시선을 돌렸을때,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카이스의 모습에 묘한 느낌이 머리 속을 강타했다. " . . . 카이스군?" ". . . " 차갑기 짝이없는 시선으로 날 보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말했다. "누구죠?" "헤딜리아.F 영애이십니다. 카슘 제국의 공작가 중 하나인 페이튼 가의 영애이십니다." "아- 그러고보니 궁금했는데요, F라던가 G . . K. 뭐, 그런건 뭐에요?" 엉뚱한 내 말에 카이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조용히 있던 사켄이 내 말에 대답했다. "성을 줄인 것뿐이다. 페인튼가라고 했으니 . . 헤딜리아 페이튼. 페이튼의 'F'다." "아- 그런거에요? 그럼 사켄이랑 세브릭, 그리고 카이스군도 따로 성이 있다는 거네요?" 반짝반짝거리는 내 시선을 보며 사켄은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보통은 '-경'을 붙일때는 성으로 '-경'이라 불리지않아요? 왜 이름으로 불리는건데요?" "신분을 상징하기 때문이에요." 여태까지 나랑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던 세브릭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놀란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는 날 무시한채, 그는 말을 이었다. "성은 신분을 상징하는 것. 그렇기에 쉽게 불려선 안되는거죠." "이름이 더 귀하지 않아요? 성이 더 중요한가요?" 내 질문에는 사켄이 대답했다. "예를 들자면, 난 사켄.T . . 그러니까 사켄 타이칸이기에 사켄경이라고 불린다. '타이칸'은 아렌타 제국의 후작가의 신분. 그렇게 간단히 드러내서는 안되는 신분이지." 사켄의 담담한 말에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드러내서는 안돼? 어째서지?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세브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쟁 중이니까요. 잊은건가요?" . . . 아- 그런가? 신분이 높은 사람일 수록,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한다는건가? 이유는, 전쟁 중이니까. 정보라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귀족가의 사람인지는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으면 된다는 . . 뭐 그런 논리인가? 내가 대충 이해했다는 시선을 보내자 사켄이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나 역시 미소로 마주하자 그의 입가에 아주 살짝 . . 정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멍하게 그의 미소를 보던 난 큼큼거리며 카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 . .. 응?" 그를 부르려던 난 잠시 대화로인해 그를 빼놓고 있던 사이 그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아까 머리를 강타한 묘한 느낌이 스믈스믈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는 조용히 아까 그 헤딜리아라는 공녀가 간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흠 . . 헤에-" 그의 눈동자에 서린 감정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군요." 갑작스런 내 말에 세브릭과 사켄이 의아한 시선으로 날 보는걸 알았지만, 내가 그런 행동을 한것이 한두번이 아니라 곧 그들은 의아심을 버렸다. 그래- 이거 일이 재밌게됬네. "카이스군, 마저 구경시켜주지 않으실래요?" 내가 웃으며 말을걸자 카이스가 날 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걸음을 옮기기 전, 다시한번 복도 쪽으로 시선을 둔것을 느낀 난 대충 그의 눈에 서린 감정을 확신할 수 있었다. 헤딜리아.F 영애라고 했던가? 그렇군 . . 카이스의 Lady . . 란 말이지? 나 역시 힐끔 헤딜리아가 간 곳을 보고는 카이스의 뒤를 따랐다. 카이스는 안내자로서는 영 꽝이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여기는 어디입니다. 저곳은 어디입니다. 라고 말하는 걸로도 모자라, 시선 한번 맞추지 않았고, 거기다가 구경하기도 전에 먼저 저벅저벅 걸어가버렸다. 이건 뭐, 구경을 하라는건지, 아니면 '나 안내하기 싫어 미치겠으니까, 그냥 좀 꺼져줘.'라는 건지 . . 그런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지만, 그래도 . . . 헤딜리아양이 있는데. 이렇게 그냥 보내는건 좀 재미없지 않겠어? 카이스의 뒤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등을 보다가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에, 헤딜리아 공녀님?" " . . . 무슨 . ." 카이스의 고개가 순식간에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그시 날 내려다보았다. 뜻을 알 수 없는 하늘빛 눈동자를 보며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그냥요, 헤딜리아 공녀님을 한번 보니까 또 보고 싶어져서요." " . . . . " 카이스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빙글빙글 웃고 있던 난 뒷짐을 지며 말했다. "헤딜리아 공녀님, 참 아름답더라구요. 헤딜리아라는 이름도 참 예쁘고. 아- 헤딜리아 공녀님은 폐하와는 무슨 관계가 있으신가요? 헤딜리아 공ㄴ.." 내가 계속해서 헤딜리아헤딜리아 노래를 부르자 카이스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슬쩍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궁의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그러다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딴청을 부리며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는지, 카이스가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시냐고 물었습니다." "꼭 무슨 말이 필요한가요? 그냥 궁금할뿐이에요. 공녀라고해도, 쉽게 폐하를 만날 수 있다고는 생각안하는데-" " . . . 헤딜리아 공녀님은 황후가 되어 카슘 제국의 어머니가 되실 분입니다." 오- 황후 마마가 되실 분이였어? 하긴, 그 우아함과 도도함은 황후가 되기에 딱 알맞다고 생각은 하지만 . . 그렇지만, 그럼 카이스는 어떻게 되는거지? "아- 그런거였어요? 그럼, 헤딜리아 공녀님과 폐하는 혼인을한다는?" "그렇습니다." 카이스의 대답에 내 머리는 다시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보자고 . . 카이스는 일단 헤딜리아 공녀님께 연심을 품고 있는것 같고 . . 그 공녀님은 폐하를 좋아하는것 같고 . . . . . 근데 폐하는 나보고 자기것이 되라고 했잖아. " . . . 후궁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인건가?" 내 혼잣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인것을 알지만 그들의 시선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금 일부일처제를 살다온 나한테, 자기 후궁으로 들어오라는 소리를 한거지? "재밌네 . . . 내 생각외로 . . "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날 빤히 보고 있는 카이스를 보았다. 그리고 카이스에게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저기요, 내가 만약 폐하의 조건을 수락해서 폐하의 것이 된다고 한다면 . . " "엘!" 버럭 소리를 지르는 세브릭과 사켄의 목소리에 한귀로 흘려들으며 카이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래요?" " . . .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제 남자를 다른 여자와 나눠가질 생각은 없거든요." 뒷짐을 진손을 풀며 한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한마디로, 제가 폐하의 것이 된다는 조건을 수락한다면. 전 무슨 수를 써서든 다른 여자는 폐하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할거라는 얘기죠." 카이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좀 이해가 되는건가? 만약, 아니 만약이랄 것도 없지. 난 테일러의 것이 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으니까. 그런 사람이랑 있으면 피곤하다고 . . 그런데, 우리 가엾은 카이스가 아무래도 헤딜리아양께 연심을 품고 있는걸로 보인단 말이지.. 근데 헤딜리아양은 카이스를 그냥 아는 사람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고. 그렇다면 사랑의 전도사인 내가 나서서 둘의 사이가 러브러브해지도록 해야, 내 마음도 편할 것 같단 말이지. 아- 물론, 헤딜리아양이 무척 미녀고, 테일러는 무척 미남이지만 . . 왠지 그 둘이 되면, 헤딜리아양이 무척이나 가엾어진단말이지 . . 우리 독특한 매력이 있는 카이스군도 힘들어질 것 같고 . . 그런 이유로 마음 여리고, 오지랖 넓은 내가 손수 나서서 이 두명을 커플로 엮어주겠어! 생각을 정리한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카이스를 바라보았다. 카이스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천천히 말했다. "지금 . . . 당신은 헤딜리아 공녀님을 무슨 수를 써서든 제거한다는 소리이십니까." "제거라니요, 그렇게 살벌한 단어를 쓰시다니. 제거가 아니에요. 그냥, 내 눈에 안보이게 치워버리겠다는 얘기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카이스가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재밌단 말이지. 재밌어- 이 사람은 역시 . . 세브릭과는 다르게 놀리는 맛이 있단말이지. "그렇게된다면 . . 전 절대로 당신을 용서치 않겠습니다." 카이스의 하늘빛 눈이 짙게 일렁였다. "당신이 용서치 않는다면 어쩔꺼죠? 헤딜리아 공녀는 꽤나 위험한 '적'이잖아요? 제게는 말이에요." " . . . 당신은 '만약'이라는 조건을 붙이시지 않았습니까." 카이스가 이를 악물고 한마디한마디를 내뱉는 것을 보며 난 손장난을 하던 손을 멈추며 말했다. "이제는 조건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래요? 무려 카슘 제국의 황제 폐하시라고요? 거기다가 그 아름다운 외모는 어떻구요. 손수 제게 '자신의 것'이 되라고까지 해주신 분인데 . . 어떤 여자가 흔들리지 않겠어요?" "당신은 . . 거절하셨습니다." "여자는 원래 튕기는 맛이 있어야 하거든요." 대화가 진행될수록 세브릭과 사켄이 불안한 눈빛으로 날 보는것을 느꼈지만, 지금 대화를 끝낼 수는 없었다. 이 카이스라는 기사를 활활 타오르게 할 수는 없겠지만, 불은 지펴놔야할것 아닌가? 그래야 나중에 밥을 해먹든, 죽을 해먹든 하지. "카이스군, 헤딜리아.F 영애 말이에요." 천천히 검지로 카이스의 심장있는 곳을 가르키며 말했다. 카이스는 내 손가락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잘지키도록 해요." 불안하지? 미치도록 불안해 죽겠지?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평민 여자이긴 하지만 . ." 내 계획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녀가 되어주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폐하께선 제게 꽤나 많은 흥미를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러니 당신의 레이디는 조심해야 할꺼야. 내가 폐하의 여자가 된다면, 헤딜리아 영애를 어떻게 할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지? 라는 말의 의미정도로 알아듣지 않을까? 카이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날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 슬그머니 사켄이 내 앞을 가로막고 그를 쳐다보았고, 세브릭은 뒤에서 살며시 날 끌어당기며 카이스를 경계했다. 오오- 이런 아름다운 구조라니. 살다보니 이런 행복한 일도 생기는 구나. 세브릭과 사켄을 번갈아보던 카이스는 그 둘의 보호를 받고 있는 날 보며 말했다. "헤딜리아 공녀님께 손대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행동하려구요?" "절대로, 헤딜리아 공녀가 상처받지 않게 할 것입니다." . . . 우와, 멋지네. 그냥 건조하기 짝이없는 남자인줄 알았는데 . . 저 속에 저토록 뜨거운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니 말이야. 그렇지만 말이지 . . 그렇게 쉽게 자신을 내보여도 되는거야? . . . 이해할 수가 없네. 사랑이라는 건, 저렇게 사람을 바꿔놓는건가? '사랑'이라는 것을 겪어보지 못한 난 그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물론 여기저기서 많이 듣고, 보았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정도로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지 . . . . .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지만, 저렇게 사람이 바뀌게 된다면 . . 그것도 좀 생각해봐야할 일이겠는걸. 일단은 이 일부터 정리해놓고 볼까나. "흐음?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 . . . " 당신, 마음을 숨기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않을 사람으로 보이는데 . . 이렇게 쉽게 적대감을 표헌하면 어떻게해? 놀리는 사람 더 흥이 나게. "왜 당신이 화를 내는거에요?" " . . . . . 폐하의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폐하의 기사죠. 그러니까, 여자들 문제는 상관없는 것 아니겠어요?" "당신이라는 여자가 폐하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와서 발뺌하려는거야? 이미 용서치 않는다. 상처받지 않게 할꺼다 말을 한주제에. 이건 뭐 .. 너무 쉬워서 식후 소화거리도 안되겠네. "그런데 왜 헤딜리아 영애의 일에 그렇게 열을 내는건데요?" " . . . " 카이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는 그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기에, 최대한 내 즐거움을 절제하며 말했다. "사랑하는거 아니었어요?" " . . . " 카이스가 고개를 번쩍 들며 나를 쳐다보았다. "사랑하고 있잖아요? 헤딜리아 영애를." " . . . 황후 마마가 되실 분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 않습니다." "거짓말-"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슬쩍 카이스에게 다가갔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눈썹을 찌푸리며 반응을 보이는 카이스를 보며 키득거리며 말했다. "여자의 감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카이스군." "그렇지 않습ㄴ . . "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확실히 인정하게 만들어드리죠." 카이스를 바라보며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자기도 모르게 헤딜리아 영애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을 정도로. 자신의 마음에 한가득 담아놓고 있어서,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을 정도에요." 내 말 한마디한마디에 카이스의 눈동자가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고작 이런 말 한마디에 저렇게 심하게 흔들리다니 말이야.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잠시 말을 심호흡을 한뒤에 카이스와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사랑하고 있는거에요, 카이스군. 헤딜리아 공녀님을 말이에요." 내 말이 있은 직후, 카이스는 실례하겠습니다. 란 말만 하고 훽 돌아서서 가버렸다. . . . 저거 예의에 어긋나는거 아니야? "저거 무례한 행동 아니에요?" "당신의 행동이 더 무례했으니까, 피차일반이죠." 세브릭이 이를 갈면서 하는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장밋빛 눈동자를 활활 불태우며 날 보고 있었다. " . . . 왜 그래요?" "왜 그러냐구요? 제정신인가요? 도대체 무슨 정신을 가지고 있는거죠?" "아니, 제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당신이 나보다 더 잘알고 있잖아요. 그보다 왜 그러냐니까요?" "뭘 왜 그러냐고 말하는거죠?" 로브를 훽 뒤로 재낀 세브릭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멍하게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화가 난거에요?" 내 말에 멈칫하는 세브릭을 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기우뚱하며 물었다. "왜 화가 난거죠? 왜 화를 내는거에요?" " . . . 지금 제가 화난것 처럼 보이나요?" "물론, 백이면 백, 모두 화났다고 할껄요? 사켄, 그렇지 않아요?" " . . . " 사켄이 작게 한숨을 쉬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더 의아해져서 세브릭을 보며 물었다. "왜요? 내가 뭐 잘못한거라도 있는거에요?" " . . . 정말 모르는건가요?" "내가 카이스에게 막말해서?" "그것과 상관있죠." 세브릭의 입이 비뚜스름하게 미소지었다. 그의 잔뜩 비틀어진 음성을 들으며 조용히 말했다. "뭔데요?" "만약이 아니라구요? 튕긴것 뿐이라구요?" " . . . 아- 그거." 그러니까, 테일러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소리에 이렇게 열을 낸다는건가? 내가 이해했다는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통치며 고개를 끄덕이자, 세브릭이 갑자기 버럭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죠? 정말, 그의 것이 되기로 생각하는건가요?" "전쟁을 멈출 수 있다면야, 그정도는 감수해야하는 것 아니겠어요?"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 말아요!" 세브릭이 훽 내 팔을 낚아챘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팔에서 느껴지는 힘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세브릭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 당신을 희생해서 이 전쟁을 멈추겠다는 건가요?" "희생이 아니에요. 저 정도면 꽤 만족스러운 조건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아까, 내가 카이스군에게 말했던 것 처럼 말이에요." "그렇다고해서, 그렇게 쉽게 자신을 그의 것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는건가요?!" "안될 것도 없죠. 어차피 제가 가장 원하는 건 종전이에요. 그것만 이루어진다면 다른 것은 상관없어요." 어차피, 전쟁만 끝나면 돌아가야하는데, 그의것이 되고 말것도 없다. . . . 그러고보니까, 위험하기도 하네. 그의것이 된다고 뻥쳤다가, 나중에 내가 돌아갈때 지오한테 버럭버럭 대들면 어떻게 하지? 아니, 물론 신한테 대들정도로 그 황제가 멍청해보이지는 않지만 . . 그래도, 자기것에대한 소유욕이라던가 독점욕은 심해보이던데. "지금 . . . 그게 저와 사켄 앞에서 할 소리라고 생각하나요?" 지오와 테일러에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는 가운데, 귀에서 낮게 흘러들어온 세브릭의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그는 눈동자 가득 분노와 애달픔을 담고 날 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쉽게 . . 그런 말이 나오나요?" "음, 쉽게 나오던데요." "상관없다는건가요? 저도, 사켄도?" 잡힌 팔이 점점 더 아파왔지만, 그 아픔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 . . 사람 곤란하게 한다니까, 세브릭은. "어차피 전쟁 끝나면 헤어질 남남이에요. 타인이라구요, 사켄도 세브릭도. 아까 당신이 말했잖아요? 사령관님의 명령만 아니라면,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당신이 말해놓고, 잊으면 곤란하잖아. 확실히, 그냥 거리를 두자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나오면 . . 난처하다고, 당신. " . . . 엘, 당신은." 세브릭이 푹 고개를 숙였다. 구불구불한 장밋빛의 긴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점점, 내 팔을 잡았던 그의 손에 힘이 풀리더니 곧 풀려났다. 그제서야 힐끔 잡힌 팔을 보았다가 말했다. "세브릭, 기억해요. 아까 내가 했던 말들. 당신과 난,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거." 사랑하지도, 사랑해서도 안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쓸데없는 감정 가질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서로, 상처받고 그리워해야할 사람이 되어선 안되는 사이라는 것을. "잊지말라구요, 세브릭." 내 말에 천천히 세브릭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이번엔 내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잠시간의 침묵, 곧 그는 천천히 뒤돌아서서 어딘가로 가버렸다. 바람 소리만이 적막했던 주위를 맴도는 가운데,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사켄." 그때서야 사켄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색하게 그를 보며 웃었다. 담담한 사켄의 회색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무슨 일인지는 묻지 말아주세요." 묻지 말아달라는 기운을 팍팍 풍기는 날 보던 사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관없는 사이인건가, 너와 난?" "음 . . . 어떻게 보면, 깊은 인연이긴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사이죠." 힐끔 세브릭이 간 방향을 쳐다봤다가 다시 사켄을 보았다. 사켄은 그런 날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네겐 상관없다고 할지라도." " . .. 네?" 분위기가 . . 이상하다. 평소와는 달리 흘러가는 분위기에 급히 입을 열어 그가 말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가 내 손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상관없지 않다." " . . . 저기, 사켄. . . 그게 무슨 . ." "이미, 넌 내게 상관없다라는 말로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순간 숨이 콱 막혀왔다. 두근두근- 느리게 뛰던 가슴이 내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따라 급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네 손을 잡고, 너와 함께하고 싶다." 뭐라고 말을 해야하지? 어떤 말을 해야하는거지? "이런 마음은 . . 처음이라고 해야겠지. 네가 내게 준 것이다. 함께 하고 싶다는 . . . 그런 마음을." 반쯤 넋을 놓고 그의 말을 듣던 내 머릿 속은 곧 하얗게 비워져버렸다. "네 옆에서 너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 . 네게 부담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사켄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나며 그 눈 가득 나를 담았다. "그러니, 남남이라며, 곧 헤어질 사이라는 . . 상관없는 사이라는 말을 . . 하지 말았으면하는 부탁은 . . 네게 너무 큰 부탁인가?" " . . . 사켄." "네 마음을 내게 달라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도 아니고." 사켄은 천천히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날 가두었다. 귓가에서 소근소근 속삭여 주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저 함께하는 사이라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하니까." 그의 심장에서 들리는 다정한 고동소리를 들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갑작스런 그의 다정함에, 아니 원래도 다정하긴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다정함에 어떻게 답해야할지 모르다가 머리 속에 세브릭이 스쳐지나갔다. " . . . 사켄." "말해라." 그렇지 . . 난 . . . 그냥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지. 세브릭에게 . . 상처밖에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거, 사켄에게도 . . . 상처입힐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거 . . 잊을뻔했다. "첫사랑은 말이에요." " . . . " 눈물이 날것만 같은 걸 꾹 참고 웅얼거리듯이 그에게 말했다. "첫사랑은 . . 이루어지지 않는데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가 어떤 표정을 하는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렵다라는 말이 맞는 거겠지. 그의 감정을 어렴풋이 눈치채고도 모른척한 . . . 두려움이었다. 잠시동안 내 말에 아무런 말이 없어서,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려고 했을때, 그가 내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의 품에 갇혀있는데, 귓가에서 사켄의 부드러운 저음이 들려왔다. "이럴 때 쓰는 말이다." " . . . " "상관없다는 . . 말은." * * * 이럴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이 어째서 일어날 수 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소?》 평소와 똑같은 하루였다. 그녀는 폐하를 뵌다는 것 하나만으로 예쁘게 치장한채 궁으로 왔고, 폐하를 만나러 가는길에 불쾌하기 짝이없는 그 흑발의 계집과의 만남도 너그럽게 넘어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영애의 가문이지, 영애가 아니오.》 폐하는 평소와 같은,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차가운 미소를 띄우며 자신을 보았다. 보랏빛 눈동자에 선명하게 새겨져있는 자신의 모습은 고양이 앞의 쥐꼴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내 옆자리에 서고 싶다니 . . 말도 안되는 소리를.》 폐하의 옆자리는 제 자리가 아닌가요? 폐하의 옆에 설 수 있는 여인은 저 뿐이에요.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옆자리에 설 수 있는 여자는 자신뿐이라 자신했다. 그의 아름다움도, 고귀함도. 그의 옆에서 그를 더욱 빛나게 해주면서도 자신을 빛낼 수 있는 여자는 자신뿐이라고. 하지만, 그 자신감을 폐하는 산산조각내버렸다. 《그래, 만약 내 옆자리에 세운다면 . . 오늘 만난 그 여인이 나을것같군.》 폐하는 자신에게 지었던 미소와는 다른 재밌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조차도 짓게할수 없었던, 어떤 묘한 감정이 담겨있는 미소를. 《적어도, 그 여인이라면 날 심심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오.》 고작 . . 고작 그 여인이 무엇이라고. 페이튼가의 단하나뿐인 공녀인 자신에게. 고작 . . 오늘 처음 만난 그 여인이 뭐라고!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아니 미래까지도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선 안돼. 절대 이럴 수는 없어." 폐하의 옆에 서기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누구보다도 고귀해지기위해, 당신의 옆자리에서 당신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위해 얼마나 . . 얼마나 많은 노력과 힘을 기울였는데! "용서못해, 아니 절대 용서 안해." 아름답고도 고귀한 폐하에게는 화조차도 품을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하는 폐하에게 감히 자신따위가 어떻게 그분께 원망을 품을 수 있을까. 아니, 조금은 원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째서 그 여인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그의 곁에 있던 자신이 아니라 왜 그 여인인가 하고 조금 . . 아주 조금정도는 원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망하는만큼 가슴아픈 것은 자신이었다. 그 원망조차도 그를 생각할 수록 옅어질뿐, 깊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여자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간단히 폐하의 흥미와 관심을 사로잡아버린 그 여자를. 자신이 아둥바둥 몸부림쳐도 시선한번 주지않던 폐하의 마음 속으로 가볍게 한발을 내딛은 그 여자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절대로 . . 절대로 내 자리는 넘겨주지 않아." 지금까지 폐하의 옆에 아무리 많은 여인들이 있다고 해도 코웃음치며 넘길 수 있었다. 폐하는 항상 그 여자들에게 차가운 미소를 지어주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 . . 하지만 그 여자는 아니었다. 그 여자는 눈 앞에 없으면서도 폐하에게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안돼. . 안돼 절대로, 절대로 안돼." 평소의 침착함과는 동떨어진 채로, 헤딜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최대한 화를 참고 있음에도, 그 화를 겉잡을 수가 부채를 손에 꽉 쥐며 계속해서 서성였다. 어느새 정원에 나와있었지만, 헤딜리아는 그것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부스럭-" "누구냐!" 날카로운 자신의 목소리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을때, 갈색의 로브를 입고 후드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보였다. "죄송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군요."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헤딜리아 역시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사내였다. 묘하게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는 절대 침입자라거나,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중한 그의 태도 역시, 예의를 아는 자의 몸짓이었기에 헤딜리아는 머리를 굴렸다. 어디서 보았지 . . 어디서 . . 어디 . .. 아. . " . . . 이리 가까이오세요." 아무 말 없던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금씩 헤딜리아에게 다가왔다. 헤딜리아는 그를 빤히 보며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헤딜리아.F에요.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죠?" 그 여자와 함께 있던 자다. 카이스경과 함께 있던 여자. 흑발에 흑안을 가진 무례한 계집의 뒤에 서있던 사내중 한명이었다. "세브릭.K라고 합니다, 헤딜리아 영애." 생각외의 사내의 신분에 살짝 헤딜리아의 쪽빛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곧 그것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살짝 손을 내밀자, 세브릭경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추었다. 역시나 예의를 아는 기사였다, 그는. "아렌타 제국의 귀족인 그대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요?" 세브릭.K. 아렌타 제국의 참모로서,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번번히 카슘 제국의 참모인 카이스경과 부딪히는 머리가 비상한 자이지만, 그의 전술보다도 여인들에게 더 유명한것은 그의 아름다운 외모였다. "전쟁과 관련된 일 때문이니, 영애께서 관심을 기울일 일이 아닙니다." 차분한 세브릭경의 대답은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는 말과 같았다. 헤딜리아는 이해한척 넘어가면서 물었다. "폐하께서 초대하여 오셨다 들었는데 . . 세브릭경은 이해가가지만, 경과 함께 있던 여인은 누구지요?" 자신이 관심을 기울일 상대는 전쟁이나 세브릭경이 아니었다. 폐하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 여자였다. 폐하를 미소짓게 한 그 여자! "무례하기 짝이없던데, 아렌타 귀족 영애들은 모두 그런가요?" 엘. . 이라고 했던가? 세브릭경을 보자, 자연스럽게 카이스경 옆에 서있던 그 여자가 떠올랐다. 흑발의 긴 머리카락은 허리를 조금 넘어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의 흑안은 읽어낼 수 없는 반짝임으로 가득차있었다. 부채를 촥 펼치면서 물은 자신의 말에 세브릭경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녀는 귀족이 아니어서, 예의범절에 어둡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헤딜리아 영애." 역시나 그녀는 평민이었다. 긴 흑발을 지니고 있던 그 여자. 반짝이는 흑안으로 자신을 보던 . . . 그 무례한 계집. "역시나 그랬던가요? 무례한 언행을 하는 것을 보니 알만하더군요." 헤딜리아는 부채로 자신의 얼굴을 감추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천한 평민 계집이 이 카슘의 황성에 머물고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불쾌하군요." " . . . 헤딜리아 영애." "세브릭경도 고생이 많았겠군요, 그 더러운 계집의 무례함을 참느라고." 착하고 부채를 접으면서 헤딜리아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세브릭경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를 살폈다. 후드를 쓰고 있어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기에,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가 꺼낸 말에, 헤딜리아는 부채를 꽉 쥘 수 밖에 없었다. " . . . 평민이긴 하나, 영애께 천하다 더럽다 말을 들을 여인이 아닙니다." "무슨 . . " "그 이상 엘을 함부로 말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참고있던 분노가 헤딜리아의 속을 헤집었다. 《알겠소? 헤딜리아 영애.》 아니오, 모르겠어요. 폐하, 당신은 어째서 그런 시선으로 저를 보는 것이지요? 《영애는 그냥 그 자리에 남아있으면 되오. 평범한 귀족 영애로써 살아가면 된단 말이오.》 평범한 귀족 영애라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폐하의 옆자리는 제것이에요. 당신의 옆자리에 어울리는 여자는 저뿐이에요. 《내 옆자리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버리시오. 그대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니까.》 차갑게 비웃던 폐하의 모습을 제 마음 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어요. 폐하의 보랏빛 눈동자 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폐하, 폐하 어째서 . . 어째서죠? 《그 여인을 그 자리에 앉힌다면 . . 재밌을지도 모르지.》 어째서, 그 자리에서 그 여인을 앉힐 생각을 하시죠? 제가 있는데 . . . 페이튼가의 공녀이자, 대륙 최고미라 칭송받는 제가 있는데! 순식간에 마음을 장악해버린 폐하의 음성과 그 여인에 대한 분노가 세브릭경의 한마디에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감히 . . 감히 아렌타의 귀족 주제에! "감히 . . . 지금 내가 그 계집에대해 함부로 말한다하는 것인가요?" "헤딜리아 영ㅇ.." "네 까짓게!" 헤딜리아는 손에 들린 부채를 거칠게 세브릭경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촥하는 소리와 함께 후드가 벗겨지며 장밋빛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하게 휘날렸다. 그와 함께 선명한 선홍빛의 핏방울도 흩어졌다. 차갑게 식은 장밋빛 눈동자를 보던 헤딜리아는 순간 그 눈동자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뺨에 생긴 핏빛의 실선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 . 세 . . 세브릭경. . " 당황으로 인해 말을 잇지 못하던 헤딜리아는 곧 들리는 소리에 입이 굳어버렸다. "이거 . . 정말 재밌는 상황이네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헤딜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정원의 입구에 서서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소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웃음밖에 안나오는 상황이이에요." 소녀의 흑안은, 시리도록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 * 사켄의 갑작스런 고백을 받고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세브릭을 찾기위해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마음을 받아달라는 것이 아니라는 사켄의 말이 있었지만 . . 그래도 나 좋다는 남자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쓸수가 있단 말이야. 폭 한숨을 내쉬며 사켄과 헤어진채로 돌아다니다가 발견한게, 바로 세브릭의 볼에서 핏방울 흩날리는 모습. "정말, 웃음밖에 안나오는 상황이에요." 천천히 굳어있는 그 둘에게로 다가갔다. 바스락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지만, 지금 내 신경을 건들이고 있는건 세브릭의 볼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들이었다. "무 . . 무슨 . . . 무 . . 무례하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 ." "그 입 닥쳐줄래요? 지금 내 신경이 당신의 말을 받아줄만큼 너그럽지가 못해요." "하- . . . 으 . . " 내 말에 충격을 먹었는지 멍하게 날 보는 헤딜리아양을 무시하고는 세브릭에게 완전히 다가선 난 유심히 그의 볼을 바라보았다. " . . . 엘. . " 세브릭이 조용히 날 불렀지만, 그의 목소리를 한귀로 흘려버리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피를닦았다. 아픈지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세브릭의 모습에 더욱 조심하며 손가락에 맺힌 핏방울을 보았다. "와 . . 피나네 . . ." 세브릭의 볼에서 상처난 후 흘러내리고 있는 피 . . . 붉디 붉어서 . . . "열받네 . . 이거 . ." 피가 묻어있던 손을 꽉 주먹쥐며 얼어붙어있는 헤딜리아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멍해졌던 아까와는 달리 침착함을 찾은 모습이었다. "감히, 평민 주제에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무슨 말을요?"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고작 네 주제에, 대귀족인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 이거 죄송해서 어떻게해요. 천한 평민이 고귀하고도 고귀하신 공녀님께 말을 함부로 해버렸네. 이런이런 전 정말 죽을 죄를 지어버린거군요." 내 말에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지만 그래도 무섭도록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있는 공녀님이었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냉기를 지닌 헤딜리아양은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고 내게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엘이라고 했더냐?" "제가 그렇게 말했으니, 제 이름이 엘이 맞겠죠." 가벼운 내 대답에 헤딜리아양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던 내 알바 아니었다. 냉정하게 그녀를 보던 시선을 돌려 다시 세브릭을 보았다. 세브릭은 지금 이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쪽 눈을 찌푸리며 날 보고 있었다. "왜요?" " . . . 무례한 말이에요. 그녀에게 한 말은." "내 알바 아니에요." "엘." "당신을 상처입힌 저 여자따위, 내 알바아니라구요." 천천히 그의 뺨으로 손을 대서 상처를 쓸었다.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내 손길을 쳐내지는 않았다. "아 . . 속상해. . ." "엘?" 내 말에 세브릭의 눈이 조금 동그랗게 변했다.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내게로 내렸다. 순순히 내 의도대로 고개를 내려주는 그의 모습에 조금 만족스러워진 난 그의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에 . . 엘!" 화들짝 놀라서 내게서 벗어나려는 그의 모습에 그의 머리카락을 꽉 붙들고 중얼거렸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물어뜯을줄 알아요. 날 식인종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어요." "읏. . 하 . .하지 . . 만!!!" 그는 내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더 눈동자를 커다랗게 뜨더니, 곧 눈을 감아버렸다. 귀여운 그의 행동에 살짝 웃음을 지은채 상처를 조심스럽게 혀로 쓸었다. 움찔움찔하는 그의 반응을 조금 즐기며 마지막으로 촉 그의 상처에 입맞춘채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멍하게 눈을 뜬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침 바르면 금방 낫는다고 하더라구요." " . . . 그렇다고 해도 이건 . . " 머리카락과 혼동할만큼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에 살풋 웃음을 머금으며 시선을 돌렸다. 조금은 비릿하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맛을 곱씹으며 세브릭과 나의 애정행각(?)을 경악스런 눈동자로 보고 있는 헤딜리아양을 보았다. "하 . . 평민 계집이라 생각했더니, 어디서 굴러먹다온 창녀같은 계집이었구나." 한껏 경멸을 담은 그녀의 목소리에 어이없는 웃음만이 나왔다. 아, 창녀라? "혼인하지도 않았으면서 폐하를 알현한다며 홀로 찾아가는 당신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곳이 중세시대의 귀족 세계라면, 마음껏 그 사회 이용해주지. 내 말에 한방 먹은듯 헤딜리아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확실히 혼인할 사이라고는 하나, 귀족 영애인 그녀가 함부로 찾아갈 사람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찾아가는 사람이 미혼인 황제라면 더더욱. "그 . . 그것은 . . " "안그래요? 황제 폐하와 무슨 일을 하셨을까? 단순히 대화만 나누셨어요? 만약 정말 그렇다면 . ." 내가 잠시 말을 끊자 헤딜리아양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날 보았다. 뭘 그렇게 봐? 당신이 두번째보는 미녀긴하지만, 그래도 해서 용서받을 짓이 있고, 못받을 짓이 있는거야. "실망이네. 당신, 고작 그정도 가치밖에 안되는사람이에요?" 내 말 뜻을 알아들었을까? 지금 내 말은 한껏 그녀를 깔아뭉개는 말이었다. 혼자 찾아간 귀족가의 영애. 미혼인 황제. 하지만 대화밖에 나누지 않았다? "우습기 짝이 없는 상황 아니에요? 헤딜리아 공녀님. 폐하와 무슨 대화를 나누셨어요?" 입가에 한껏 조롱을 담으려노력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곧 부채를 꽉 움켜쥐었다. 오- 그러다가 한대 치겠네요? "그만하십시오."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없이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까 실례한다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던 카이스경이 차가운 시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스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아까 실례한다고 가버렸잖아요." 빙긋 웃음지으며 그를 맞이했지만, 그는 내게 차가운 시선만을 던지고는 조심스럽게 공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아, 카 . . 카이스경." 곧 그녀의 새벽같은 눈동자 가득 안도감과 오만함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녀는 내게 표독스런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저 평민 계집이 제게 모욕스런 언사를 한걸로도 모자라, 절 능멸하더군요. 천한 평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 촥하고 부채를 펼치며 자신의 얼굴을 가려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지만 꽤나 흥미로웠다. 카이스는 그녀의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보호하듯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날 보았다. 건조하기만 했던 그의 눈동자는 약간의 분노를 담고 날 보고 있었다. "왜요?" "공녀님의 말이 사실입니까?" "거짓은 아니에요." 귀족인 그녀에게 모욕스런 언사였을테니. 내가 긍정하자 카이스는 자신의 검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에 픽 웃으며 말을 하려 했을때, 세브릭 역시 내 앞을 가로막고 검에 손을 얹으며 그를 경계했다. "세브릭경, 비켜주십시오. 귀족모욕죄를 모르십니까." "죄송하지만, 안되겠군요. 저희를 황제 폐하께서 초대하셨다는 것을 잊으셨나요?" 세브릭의 말에 카이스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확실히 그랬다. 우리는 황제가 초대해서 온 사람들이었고, 우릴 데려온건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이스였으니까. " . . . 그렇다고해도, 공녀님을 모욕한 죄는 쉽게 용서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뭐라고, 용서하고 말고 하는거죠?" 세브릭의 든든한 보호를 받고 있으니, 무서울게 없다고나 할까. 아니면 아까 헤딜리아양때문에 뻗친 열이 사그라들지 못하고 있다고나 할까. 내 차가운 말에 카이스가 말문이 막힌듯 뚫어지게 날 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초대하신 우리를 당신이 용서 못한다면 어쩌시려구요?" " . . . 레이디, 엘." 천천히 세브릭의 등 뒤에서 벗어나며 똑바로 카이스를 노려보았다. "아시겠어요? 카이스군. 만약, 제게 죄를 묻고 싶으시다면, 폐하의 허락이라도 맞고 오시는게 어떨까요?" 지금 내 사람에게 상처입혔다고, 당신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공녀님이 말이야. 당신이 소중히 하는 만큼, 나도 소중히 여기고 있는 내 사람이 저 개념없는 여자의 손에 들린 부채 때문에 피를 흘렸다고. "하- 고작 평민 계집의 일로, 폐하의 허락까지 맞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 년은." 이제는 완전히 하대가 되어버린 헤딜리아양의 말을 들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넌 좀 입다물고 있음 안될까? 안그래도 너 때문에 이런 상황이 온건데, 상황 파악이 안되니? "생각하고 있거든요, 천한 평민 계집이지만 말이에요. 그러니까 공녀님, 그 입 좀 다물어달라구요. 몇번이나 말해야해요? 카이스군이 있다고 해서, 그 귀까지 머셨어요? 그거 안되서 어떻게하나. 앞으로 이 험한 사회 어떻게 살아가실래요? 지르오디스의 은총이 없다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굴욕일텐데." 비꼬는 내 말에 헤딜리아양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지만, 그야 상관할바 아니다. 카이스는 내 말을 듣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헤딜리아 공녀님의 말씀대로, 이 일이 폐하에게 까지 알려질 필요는 . ." 하지만 그때였다. "아아- 그러면 안되지. 그래도 내가 초대한 손님들인데 말이야." 나른하면서도 재밌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온 것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카슘의 황제, 테일러가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늘따라 정원에 손님이 많군이라며 평이한 어조로 말한 그는 빙긋 웃었다. "안그런가? 카이스경." 그는 무서우리만치 잔혹한 시선으로 카이스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차가운 바람이 정원을 헤매다가 사그라들었다. 오싹 소름이돋은 팔을 슬슬 문지르며 테일러의 보랏빛 눈동자를 힐끔 보다가 조심스럽게 세브릭의 소매를 잡았다. "세브릭, 있잖ㅇ... 세브릭?" 소매를 잡고 있음에도 부들부들 떨리는게 느껴져왔다.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는 지금 막 들어온 테일러에게 향한채로 단한번의 깜빡임조차 없었다. 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난 얼른 그의 후드를 뒤집어씌웠다. 세브릭은 그제서야 작게 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창백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 . . . 폐 . . 하 . ." 카이스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를 보았다. 그의 안색 역시, 세브릭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정도로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 . . 상황 참 난감하게됬네. 일이 너무 커져버렸어. 테일러는 성큼성큼 정원을 가로질러오더니 슬쩍 내 앞에 섰다. 그리곤 나와 세브릭을 번갈아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다 얘기를 듣고 급히 왔는데, 내가 늦지는 않았나?" "정확한 시간에 오셨어요." 나 역시 흔들림없이 미소지으며 그에게 말한후 힐끔 헤딜리아양을 보았다. 그녀는 두손으로 부채를 꽉 쥔채 카이스의 뒤에 서있었다. 곧 헤딜리아양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의 눈에 독기가 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 . 와우, 이거 살떨리게 무서운데. "카이스경, 상황에대한 변명은 하지 않겠지?" 테일러가 천천히 시선을 카이스에게 돌렸다. 카이스는 그의 시선을 받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한손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렸다. " . . . " 명백한 복종의 자세. 변명하지 않겠다는 건가? 테일러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손을 검에 얹어 검을 뽑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가볍게 뽑혀져나온 은색의 검날을 멍하니 보다가 급히 테일러의 손을 잡아챘다. "뭐 . . 뭐하시는거에요?" "음? 내 손님에게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나. 그러니 즉결처분이지." 그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말해서,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오늘 참 여러경험하는구나. " . . . 괜찮아요, 폐하. 그러실 필요까지는 . ." "여긴 카슘이야, 엘. 아, 엘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그는 유려한 폼으로 검을 휘두르더니 똑바로 카이스에게 겨눴다. 카이스는 여전히 땅을 바라보며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황제다. 그러니 그대가 괜찮다고 해도, 내가 불쾌하니 그에게 내리는 처분에대해서 그대가 참여할 순 없지." . . . 미친거아냐? 그래서 죽인다니, 말이 돼? "아니, 저기 곤란한데요. 정말로 곤란해요." " . . . 뭐가 곤란하다는거지? 아, 혹 카이스경도 그대의 취향인건가?" 테일러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애써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근육을 움직여 미소지었다. "음, 아니라곤 못하겠네요. 조금 독특한 매력을 지닌 기사분이라서요. 제복을 입고 있어서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도 하고.." "아, 제복을 입은 남자를 좋아하는건가?" "좋죠. 제복입은 남자. 뭔가 금욕적인 섹시함 . . . 잠깐 제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에요." 분위기에 휩쓸렸다! 역시, 이 남자 위험해. 너무나도 쉽게 자신이 원하는 대화내용으로 바꿨어. 마른침을 살짝 삼키며 힐끔 테일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날 보며 여전히 싱글싱글 웃더니 내게서 등을 돌려 카이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베려는듯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 말라니까요!" "꺄아아악-" 카이스의 뒤에 서있던 헤딜리아양이 비명을 지르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부들부들 떨었고, 카이스는 눈을 감고 있다가 헤딜리아양의 비명에 더 놀란듯 앞에 테일러가 있음에도 주저없이 헤딜리아양에게 물었다. "헤딜리아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아 . . 아 . . " 헤딜리아양이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것을 들으며 카이스의 하늘빛 눈동자가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의 흔들림을 느끼며 난 날 빤히 보고 있는 테일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지 말아주세요. 이건 저와 카이스경, 그리고 헤딜리아 공녀님의 일이에요." "하지만 그대는 내 손님이니 내 일이기도 하지." "그럼 저흴 초대하신 주인으로서 그냥 지켜만 봐주세요. 그 겁나는 검 좀 치우시구요." "흐음- 그대가 어떻게 해결한다는 건가?" 그는 재밌다는 듯이 검을 늘어뜨렸다. 검을 늘어뜨리고 있음에도 위협적인 그의 모습에 다시한번 침을 꼴깍 삼킨 후 말하려했다. 하지만 나보다 카이스가 더 먼저였다. "폐하, 청이 있습니다." 나직한 카이스의 목소리에 이건 또 뭔가라는 듯한 눈빛으로 테일러가 카이스를 보았다. 테일러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청인가?" "폐하의 검을 받기 전, 마지막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카이스의 하늘빛 눈동자는 옅은 애원의 빛을 띈채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테일러는 그런 그를 보더니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카이스경, 기사의 명예를 더럽히는 발언이 아니라는 맹세를 할 수 있나?" "제 검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좋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 테일러와 카이스의 대화였다. 황제와 기사의 대화였기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카이스는 테일러에게 깊숙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한번이라도 좋습니다." " . . . 흠? 뭘 말인가?" 그는 . . 카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에대한 두려움따윈 없었다. "단 한번만 . . . 헤딜리아 공녀님을 생각해주십시오." "공녀를?" 테일러는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이 스윽하고 올라갔다. 카이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다. "폐하의 옆에 서기 위해, 항상 노력한 . . 공녀님을 생각해주십시오." " . . 카 . . 카이스 . . 경. . " 테일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어떤지는 몰랐다. 나 역시 카이스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폐하께서 공녀님을 만났던 과거부터, 공녀님께서는 폐하만을 생각하며, 폐하만을 자신의 마음에 담았습니다." "카이스경, 무슨 소리를 하는거죠?" 헤딜리아양이 카이스의 등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머리가 흐트러지고, 예쁜 드레스가 더럽혀졌지만 그녀는 그조차도 알지 못하는듯 했다. "그런 공녀님을 . . 생각해주십시오." 카이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는 듯 고요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헤딜리아양의 눈 가득 눈물이 찼다. 그녀는 카이스의 옷을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테일러를 보았다. 테일러 역시 가만히 공녀를 바라보았다. "폐하, 폐하께선 제가 폐하의 옆에 서는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그랬소." 테일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헤딜리아양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곤 카이스의 옆에 자신 역시 주저앉더니 말했다. "그럼 전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여기서, 폐하의 검에 지르오디스께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공녀님!" 카이스는 고요히 눈을 감았던 아까완 달리 엄청난 동요를 보이며 자신의 옆에 앉은 헤딜리아양의 어깨를 손에 잡았다. "그래선 안됩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시는겁니까!" "폐하의 옆에 서기 위해 살았어요, 폐하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면, 살고 싶은 마음따윈 없어요." 헤딜리아양의 쪽빛 눈동자에서 한방울 두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멍하게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오른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조용한 정원 안에 오직 그녀의 작은 흐느낌만이 들려왔다. " . . . 폐하." "뭐지?" 내 부름에 폐하는 여전히 재밌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폐하를 바라보았을때, 그 역시 날 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마주쳤다. 재밌다는 듯해보이지만 눈동자 가득 담겨있는 감정은 오로지 '비웃음'과 '지루함'. 저 둘은 목숨을 걸었는데, 당신에겐 고작 그정도인거네. "설마 진짜 베시려는건 아니죠?" "진짜 벨 생각이라면?" "버리시죠." 내 말에 테일러가 유쾌하다는 듯 큭큭 거리며 웃었다. 그리곤 날 보며 말했다. "그대가 원하는대로 해주지. 저 둘을 어떻게하면 좋겠는가?" 뭔진 모르겠지만,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카이스도, 헤딜리아양도 눈이 동그래져서 날 보고 있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채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 급하게 말을 뱉었다. "베지 말아주세요." "그대를 욕되게 했는데? 거기다가 . . 세브릭경에게 상처까지 내지 않았나?" 테일러는 묘한 눈동자로 세브릭을 보았다. 세브릭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미묘한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둘을 번갈아보았다. " . . . 안그런가? 세브릭경. 상처는 좀 어떤가?" "폐하께서 신경쓰실만한 상처가 아닙니다. 괜찮으니 선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아- 그럴 수야 없지. 그 얼굴에 난 상처를 보면 . . 아버지께서 . . 많이 슬퍼하실텐데 말이야." 테일러는 그 말을 끝내고 씨익 웃었다. 세브릭의 안색은 거의 시체마냥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런 그 둘을 가로막으며 테일러에게 말했다. "우리 세브릭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세브릭을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라구요." 내가 애써 툴툴거리며 말하자, 테일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도록 하지. 시간은 . . 많으니까 말이야." 뭔가 . . . 확실히. 테일러가 세브릭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새하얗게 변한 세브릭의 손을 내 손으로 꽉 쥐어주며 다시 폐하에게 말했다. "살려주세요, 저 둘을. 여기에서 죽기엔, 아까운 생명들이잖아요." 헤딜리아양이 물론 우리 세브릭의 얼굴에 상처를 내어 천번만번 죽어 마땅하다지만 . . 세브릭의 얼굴에 생긴 상처와 목이 잘린 것과 비교한다면 . . 그건 비교조차 안되는거다. 폐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는 입을 열어 둘에게 말했다. "일어나라. 오늘의 무례는 용서하지. 허나 또 한번 이런 일이 있을시에는 . . . 뒤는 말하지 않아도 알테지." 테일러의 말에 둘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카이스는 그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고, 헤딜리아양은 날 표독스런 시선으로 한번보고, 테일러를 애달픈 시선으로 한번 보더니 카이스의 부축과 함께 정원에서 나갔다. 뭐 . . 일단 해결은 된건가 . . 세브릭의 상처에 대한 복수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 손을 꽉 쥐고있는 세브릭의 손을 느끼며 테일러를 보았다. "그럼, 저희도 이만 . ." "아- 안돼지." " . . . 예?" "우린, 아까 얘기를 끝마쳐야지." "에?" "내 조건은 생각해봤겠지?" 테일러가 빙긋 웃었다. "그 대답을 지금 듣고싶군." " . . . 그에대해선 대답하지 않았나요?" "그럼 종전에대한건 없는 일이 되는건가?" 이 사람 정말 사람 귀찮게하네. 종전이라면 . .내가 한 수 접고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까 이상의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테니 . ."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나? 그정도 시간이면 꽤 많은 시간을 준거라 생각하는데." "반나절도 안지났어요, 폐하." "내겐 긴시간이었으니, 긴시간이다. 이제 대답을 해주겠나?" 작게 한숨을 내쉬고 여전히 세브릭의 손을 잡은채로 고민했다. 그의 조건은 분명 . . '그의 것'이 되달라는 것. 내가 고민하는 시간조차도 그는 기다리기 힘들었던지 내 옆에 얌전히 서있던 세브릭에게 말을 걸었다. "세브릭경." " . . 예, 폐하." "이제 그 후드는 벗는게 어떤가?" "무슨 . . " 잡고있던 손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에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둘의 대화를 경청했다. . . 왜 안도와주냐고? 그야 뻔하잖아. 나도 세브릭의 사정이 궁금하단 말이지. 분명 테일러는 세브릭을 알고있다. 세브릭 역시 테일러를 알기 때문에 얼굴을 감춘 것이고. 무슨 사정인지 정말 궁금하단 말이지. 하지만 세브릭이 말해줄 것 같지도 않고 . . 비겁하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들어야지 내가 두다리 쭉펴고 잘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미 알고 있는데, 얼굴을 가려봤자 소용이 없지 . . . 아, 아닌가?" 테일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대의 선택이 옳았던것 같아. 후드를 벗지 말고 얼굴을 숨기도록." 그는 자기멋대로 말하더니 검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거짓된 미소조차 짓고 있지 않았다. 세브릭이 점점 더 내 손을 꽉 쥐었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세브릭은 자신이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창백한 그의 안색을 보다가 테일러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세브릭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곧, 그의 입이 열렸다. "아까 그 얼굴을 봤을때, 나도 모르게 즐거워지더군. 잊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이렇게 강렬한 살의는 오랜만이야." 그는 큭큭거리며 웃더니 이를 악문채로 점점 움츠러들고 있는 세브릭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고있지 않은 나조차도 숨이 막혀오고 있는데,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있는 세브릭은 어떤 상태인거지? 숨소리조차도 귀에 거슬릴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정원에 내려앉았다. 내 손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도 못할정도로 세브릭의 손에 꽉 쥐여져있는 상태였고, 테일러는 여전히 살기어린 눈동자로 세브릭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세브릭을 노려보던 테일러는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그려나갔다. 그의 눈동자는 절대로 웃고있다고 볼 수 없었지만, 분명 입은 미소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 나도, 세브릭도 흠칫할때,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잘계시나?" 갑작스런 그의 말에 세브릭이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보았다. 테일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마치, 깜빡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짚으면서. "아아 . . 그렇지, 그랬지. 돌아가셨었지. 하하, 이거 미안하군, 미안해.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다보니, 사소한 건 잘잊어먹게 되어서 말이야." 그는 진정 미안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세브릭을 보았지만, 그것이 가짜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불쾌할정도로, 그는 지금 세브릭을 자극하고 있었다. 기분나쁜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정원에 불었다. 그 바람을 맞으면서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세브릭은 그조차도 신경쓰지 못할정도로 잔뜩 예민해져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그렇게 추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군데, 마치 얼음을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곳은 오직 세브릭에게 잡혀있는 그 손뿐이었다. "그래, 경은 어머니의 끝은 잘보았겠지? 잘봤어야지. 암, 내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테일러의 입가에 미소가 환해질수록, 세브릭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졌다. 지금까지 세브릭과 함께 다니면서, 이정도로 흔들리고 있는 세브릭의 모습은 . . . 아 . . . 한번 본적이 있었다. 내가 아크산에게 납치되던 날. 그는 테일러의 얘기를 하면서 얘기만으로 그렇게 흔들렸었다. 그때라도 물어볼껄 그랬나? 그와 무슨 사이냐고. 세브릭, 저 사람과 도대체 무슨 사이에요. 왜 당신이 이렇게 흔들리는건데요? 저 사람이 뭐라고 . . 어째서 이렇게 아무말없이 당하기만 하는건데요?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천천히 세브릭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 결과로 마치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하는듯한 느낌이 손가락끝을 관통했지만, 그를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세브릭은 멈칫하더니 날 멍하니 보았다. 그에게 살짝 미소지어주고는 테일러에게 시선을 돌렸다. 테일러는 그제야 내게 시선을 돌리며 빙긋 웃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그의 포커페이스에 질려버렸다. 그는 세브릭만 아니라면, 그의 포커페이스를 흐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 조건에대해 말해도 될까요?" "흠, 대답을 바꿀 생각이 든건가?" "네."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브릭이 불안한듯 자꾸 잡고있던 손을 꼼지락거렸지만,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아주며 테일러에게 말했다. 지금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나에게도, 세브릭에게도. "조건을 좀 바꾸죠." 테일러의 눈동자가 아까의 '분노'를 버렸다. 그의 눈동자 속의 감정은 분명 '호기심'. . . . 이지 않을까 . . . 추측할 뿐이지만. "그대의 조건을 말하라." 테일러의 말에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폐하께서 원했던 조건은 내가 폐하의 것이 되는것. 맞죠?" "맞다." "좋아요. 그럼 그 조건에서 . . " 그래, 이게 최선이잖아. 일단 . . 이 상황부터 모면하고 봐야지. 우리 이쁜 세브릭부터 구해내자. 저 대마왕을 넘어서는 대마신같은 녀석에게서 어여쁜 세브릭왕자를, 용감한 용사인 내가 구해내는 거야! 그럼, 나는 이 대륙의 최고 미인인 세브릭 왕자를 구해내고 마지막 엔딩을 달콤한 키스로 . . . 에이- 이건 뭐 애들이나 좋아할 동화같은 이야기잖아. "내가 폐하의 것이 되는건 수락할께요." "엘!" 세브릭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고 흥미롭다는 듯이 나른한 미소를 짓고있는 테일러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대신, 꼬셔봐요." " . . .뭐?" 순간 포커페이스가 흐트러지며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테일러를 보며 유쾌해졌다. "카슘 제국의 황제 폐하가 고작 저같은 여자도 못꼬셔요?" " . . . . 나보고 그대를 꼬시라고 하는건가 지금?" "저도 많이 양보한거에요. 제가 만약 폐하께 넘어가지 않는다면, 종전은 하되 전 폐하의 것이 되지는 않을꺼에요." 테일러가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 . . 여기서 황제모독죄다 뭐다로 검을 들고 싹둑 썰어버리는거 아니겠지? 그는 잠시 웃음을 참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거 재밌군. 황제인 내가 고작 평민인 그대를 꼬셔 내것이 되게 만들어야하는건가?" "전 폐하한테 지금 홀라당 넘어가있는 상태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꼬셔달라구요. 그정도도 못하면, 황제 자리 때려치우세요." 내 과격한 발언에 테일러가 잠시 날 보더니 말했다. "지금 그대는 내게 조금의 호감도 느낄 수 없다는 얘기인가?" "그럴리가. 저도 눈이 달려있는데요. 그냥 호감은 있으나 폐하가 남자로는 생각되지 않는다는게 맞는 말이겠죠. 관상용 꽃같은 느낌이랄까." 내 말에 테일러는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 모독이다 뭐다 . . . 뭐 그런말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지만 이정도로 통쾌하게 웃을 줄은 몰랐는데. 그는 한참을 웃더니 날 보며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정말 다른 여인들과는 다르군.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내 침대로 달려들 여인이 이 카슘제국만해도 수천은 될터인데. 그 여인들과는 정말 달라." "절 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비교라는게 좋든 나쁘든 사람한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줄 아세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황제인 테일러 덴 카슘에게 가는거잖아요?" 내 말에 순간 테일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보았다. 난 가볍게 그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테일러가 되어 날 꼬셔봐요." "지금 내게 황제의 자리를 버리라는 것인가?" "잠시 잊으라는 거죠. 아니면, 자신 없으세요?" 테일러는 잠시 입을 닫고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콩닥콩닥 거리는 소심한 심장을 토닥이며 애써 여유있는 척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자신없어요? 테일러 덴 카슘 황제 폐하." 내 입가에 그려지듯 지어지는 미소를 보던 테일러 역시 나와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다. 꼬셔보지. 만약 그대가 넘어온다면?" "그럼 암말않고, 폐하의 것이 되어드리죠." "그건 당연한것 아닌가?" 테일러는 자신이 손해라는 듯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웃음에 나 역시 마주 웃어주며 말했다. "아니죠." "뭐가 아니라는 것이지?" "전, 정말 '폐하의 것'이 된다는 소리에요. '제 세상'을 버리고 말이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테일러가 날 보는 것을 슬쩍 피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옅은 회색빛 구름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내 말은 세브릭이나 테일러에게 전해지지 않고 흩어져버렸다. "지르오디스의 뜻에 반하더라도, '당신의 것'이 되어드리겠다는 말이에요." 이런 결심까지 하게 하다니, 테일러라는 사람 . . 의외로 난 그를 꽤 마음에 들어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뚱멀뚱 서서 날 보는 두 남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죠? 얘기는 끝났잖아요? 저희 먼저 실례해도 될까요?" 테일러는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세브릭은 그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정원을 벗어났다. 그의 시선이 우리가 정원을 떠날때까지 우리를 쫓아다니는 걸 느꼈지만 무시했다. 아아- 세브릭 미안해요. 당신이 이렇게 기겁할정도로 저 사람과 함께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방관하고 있지 않았을꺼에요. 힐끔 내 뒤에 묵묵히 날 따라오는 세브릭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할까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세브ㄹ. ." 그를 부르려던 난 순간 내 몸을 휘감는 '류'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류는 내가 부르기 전에는 단한번도 내게 관심을 쏟지 않았었기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온몸이 경직되었다. 【대답하지 마세요.】 천천히 류의 목소리를 들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순간의 경직으로인한 몸이 아릿하게 저려오면서 풀리는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당신에게 전해줄 말이 있어요.】 전해줄 말? 일단 듣고 보자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류는 내 몸을 감싸안은채로 조용히 말했다. 【 . . 하는군요.】 . . . 뭐라고? 뭘해? 다시한번 말해달라는 뜻으로 류를 바라보았다. 류는 내 뜻을 알았는지 다시한번 날 감싸안으며 말했다. 【당신은 에르테이샤니, 당신의 뜻이 있는 곳에 자신의 뜻이 있다고 하는군요.】 그 말에 난 자리에 멈춰섰다. 세브릭 역시 내 옆에 멈춰서서 날 보았지만, 난 그를 신경쓸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류를 보았다. " . . . 지오가 그래요?" 하지만 어느새 류는 내게서 물러나 주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멍하게 그 흐름을 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전하는 말이었다고 하니까, 지오가 내게 전해달라는 말일것이다. 내가 자신한테 반하더라도 내 뜻을 따라준다니 . . 지오도 참. 말은 이렇게 했지만 기분이 좋아져서 붕붕 바보마냥 실실거리며 웃었다. 바쁜 와중에도 날 신경쓰고 있다는 것만 같아서, 조금 마음이 벅차올랐다. 역시 지오. 날 한시도 잊지 않는다니까. "엘." "아- 세브릭." 조용한 세브릭의 부름에 난 고개를 돌려 세브릭을 보았다. 세브릭은 고요한 시선으로 날 보다가 말했다. "아까 그 조건 . . . " "응? 왜요? 뭐가 잘못됬어요?" "제국의 황제에게 자신을 유혹하라고 하다니 . . 제정신인가요?" "물론 제정신이죠. 근데 조금 위험하긴 하네요. 정말 넘어가면 어떻게하죠?" 내 싱글거리는 웃음에 세브릭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날 보기만했다. 그 침묵이 무거워서 헛기침을 했지만, 세브릭은 그 침묵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더 견딜수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여전히 잡고있는 세브릭의 손을 끌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꽤 많은 일이있었는데도,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오늘 일은 마치 일주일동안 벌어졌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인데. 살짝 한숨을 쉬는데 뒤에서 세브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요." 그의 말에 자리에 멈춰서서 뒤에있는 그를 보았다. 세브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날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나요? 제가 황제와 어떤 사이인지." " . . . . 글쎄요 . . " 그의 눈에 내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가르쳐줄꺼에요?" " . . . 궁금하다면." 세브릭의 담담한 말에 멀뚱히 그를 보다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뒤돌아서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얌전히 내 손에 이끌려 오는 것을 느끼며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궁금해요.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궁금하죠." "근데 왜 묻지 않죠?" "말해줄때까지 기다리려구요." 그 말을 하고 자리에 멈춰서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배려거든요." 내 말에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보다가 그의 손을 더 꽉 잡고는 다시 뒤돌아 걸었다. 세브릭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힘도 없이 잡혀있던 세브릭의 손이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곧 세브릭이 날 앞질러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뭐 . . 아직 . . 내겐 해줄 수 없는 말인가보다. 하지만, 그가 말해줄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꽤 재밌을 것 같으니까. 여전히 아무말없이 방문앞까지 온 나와 세브릭은 그때까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방으로 들어섰다. 아직까지 세브릭의 온기가 남아있는듯한 손을 잡으려고 하는데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모자속에서 하브가 튀어올랐다. 그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난 잠시 놀란 심장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우와, 깜짝이야. 심장마비로 돌아갈뻔했어요. 여기서 내가 죽으면 얼마나 큰사건이 되는줄알아요?" "시끄러워." 눈을 비비적 거리던 그는 흐물흐물 공중을 날아 침대에 푹 누웠다. 그리곤 곧 새근새근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 . . . 하브, 자려구요?" "시 . . 끄러워 . . 졸리니까 . . 잘꺼야 . . " 웅얼웅얼 거리는 모습에 핀치를 먹어버린 나는 달아오르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아, 하브가 졸린건 알아. 졸린건 안단말이야 . . 하지만 . . 하지만 . . 너무 귀엽잖아 . . "하브, 나 열나는 것 같아ㅇ.." "뭐?! 또 열난다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하브는 잽싸게 날아오르더니 내 이마에 손을 대본다. 그리고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멍하게 보고있는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버럭 화를 냈다. "아프면 얌전히 쳐자빠져 잘것이지, 뭘 이렇게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어!" " . . . . 아구, 이뻐라." "무.. 뭐?!" 내가 아프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 하브가 이렇게 귀여울수가 없다. 허공에 떠있는 그를 양손으로 쥔채로 얼굴에 부볐다. "으 . . 으악! 뭐 . . 뭐하는, 악! 그만둬, 그만두라고!" "아잉, 좋아서 그래요, 예뻐서." 헤실거리며 웃는 날 보는 하브는 몸부림을 치더니 내게서 벗어나서 내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본다. 그리고는 의아한듯 말했다. " . . . 아프다며." "열이 나는것 같다고 했죠." " . . . 열 나는게 아픈거잖아." "열은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아파서 나는 열이 아니었어요." "그럼 무슨 열인데." 인상을 찌푸린 그의 모습에 그에게 살짝 손을 뻗었다. 내 손을 빤히 보던 하브는 곧 얌전히 내 손 위에 올라섰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최대한 그가 화내지 않기를 바라며 애교어린 미소를 지었다. "하브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얼굴이 뜨거워졌지 뭐에요." " . . . 귀여워?" "네, 엄청나게." 하브는 내 말을 곱씹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하브?" 화내거나 혹은 부끄러워서 버럭 화를 낼줄 알았는데,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반응에 의아해져서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얼마간 그렇게 아무말도 않던 하브가 중얼거렸다. " . .. 는.. 거야?" "예?" "나는 . . 귀여운거야?" "물론이죠. 무척이나 귀여워요. 하브는, 귀여움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자신만만한 나의 말에 하브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래서, 더 의아해졌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한건가? 곧 환한 빛과 함께 하브가 커졌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나보다 아주 조금 시선이 높았는데, 지금은 그보다도 더 높아졌다. 세브릭이나 사켄에 비하면 아직 작았지만, 곧 그만큼 클정도로 그는 성장했다. " . . . 와, 하브. 키컸어요." "야." "음? 왜 그래요?" "난 귀엽지 않아." ". . . . 아니, 자기부정을 하다니. 안돼죠, 그럼." 그는 두팔을 들어올리더니 내 어깨를 꽉 잡았다. 하브는 나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난 귀엽지 않아, 알았어?" "모르겠는데요 . . . 귀여운걸 귀엽다고 하지, 뭐라그래요?" 하브의 반응이 이상했다. 저렇게 정색할정도 . . 자기가 귀엽다는게 싫은건가? 하지만 . . 귀엽잖아. 귀엽고 귀여운걸. 바람불면 날아갈까, 깨물면 죽어버릴까(?) 고이고이 하고 싶을정도로 귀여운걸. 나의 어리둥절한 반응에 하브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어깨를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에 살짝 내가 아픈 신음을 흘리자, 화들짝 놀란 하브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엘." "오, 엘이라고 불렀네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어요?" 하브가 엘이라는 이름을 불러줬당- 행복게이지가 업되고 있어. "예전에도 말하려 했는데." "네." "이샤링족의 성인식은." "음? 성인식이요?" 하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며 입을 벙긋거리더니 다시 입을 닫아버렸다. 그런 그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려주었다. 곧 생각을 정리했는지 하브가 날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샤링족은 성인식을 하는 동시에 성장을 해." "헤에- 그렇군요." "하지만, 그 성인식이라는 것은 어디서 하든 상관없어." "그래요? 성인식이라는게 뭔데요?" " . . 죽는거야." "예?" 잘못들은건가? 죽어? "한번 죽고, 다시 살아나는거야." "하브가 죽는다는 말이에요?" 무슨 그런 말도 안돼는 성인식이 다있어. 아무리 성장을 위해서라지만, 죽다 살아난다는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황당함이 가득 담겨있는 내 말에 하브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그때, 성인식을 위해 한번 죽어야할때." " . . 죽어야할때요?" "그래. 그때 . . 네가 해줬으면 해." " . . 네?" 뭘 해달라고? 자기를 죽여달라고? "네가, 날 죽여줬으면 해." " . . 잠깐만요, 하브. 저기 그건 좀." 하브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곧은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우리의 성인식에선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 의식을 치루게 돼. 하지만 한번 죽다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정말 자신이 가장 믿는 존재가 아니면 절대로 그 의식을 치르지 않아." " . . . 지금 그럼 하브는 절 믿는다는거에요?" 하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 . . 난 못해요." "엘." "하브를 죽이라니, 그건 나한테 너무 잔인하다 생각치 않아요?" "별로, 잔인하지 않아. 그저 내 링을 깨뜨리면 되는거니까." " . . . 링?" "이샤링족이 왜 이샤링족이라 불리는지 알아?" 하브의 다정한 목소리에 순간 넋을 놓았다. 항상 버럭버럭 화를내고 소리를 질러서, 그저 귀여운 남동생으로 보였는데. 지금 하브는 그때 감옥에서 나를 안아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믿음직스럽고, 어른스러워보였다. "[이샤]라는 것은 '빛'이라는 뜻이야. [링]이라는 것은 '생명'이지." " . . . [이샤링]은 그럼 . . " "그 둘의 뜻이 합쳐져서 빛의 생명정도로 해석하지는 마." 하브가 내 생각을 꿰뚫어본듯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샤링]의 의미는 '빛나는 존재'라는 뜻이야." " . . . [링]은 '생명'이라면서요?" "실제로, 우리에게 [링]은 '생명'이야." 하브는 날 보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두손을 자신의 몸 가운데로 모았다. 평소에 죽인다뭐다하면서 빛의 구를 만들때와 같은 자세였다. 하브의 손에선 곧, 빛의 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아름다운 .. 정말 찬란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는 옅은 금빛의 '구슬'이 생겼다. 작은 구슬은 너무나도 영롱한 금빛을 흩뿌리고 있어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게, [링]이야." " . . . 제가 생각한 링이 아니었네요." 난 둥그런 고리를 생각했는데. "이게 바로 내 '생명'이야." " . . 그런걸 나한테 맘대로 보여줘도 되는거에요?" "널 믿으니까." " . . . 하브?" 갑작스레 들린 믿을 수 없는 소리에 난 고개를 들어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는 똑바로 날 직시하며,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남자'의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 "믿어. 인간인 '엘'이 아니라, '엘'인 너 그 자체를 믿고 있다." " . . 하브. 잠시만." "그러니까, 네가 해주길 바래." "그래도 . ." "가장 믿는 존재는 아닐지 몰라, 솔직히 내가 가장 믿는 존재는 아무래도 에프릴이니까." . . . 갑자기 치솟아올랐던 감동이 순식간에 사그라드는군. " . . 그럼 에프릴한테 해달라지 그래요?" "에프릴은 . . 이미 임자가 있으니까 안돼." " . . . 임자?" "그래, 그 빌어먹을 족장님 말이지." 순간 하브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 "내게서, 내가 고이고이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지켰던 에프릴을 순식간에 채가버렸다고! 나쁜놈, 못된놈! 그 자식은 [이샤링]이 아니라 [카즈링]인게 분명해!" . . . [이샤]가 빛이랬으니까, [카즈]는 . . . 어둠 . . . 일까나? "그 자식, 에프릴이 좋아하는 장소를 알아내서는 우연인척 가증스럽게 연기하는 꼴이 어땠는지 알아? 나쁜 자식, 이제 이 세계에 존재치 않는다는 [카즈링]의 후예인게 분명해. 절대로 그런 녀석이 [이샤링]일리가 없다고! 어째서 모두 그 녀석을 족장으로 인정한거지? 에프릴이 그 자식을 반려로 택하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절대,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꺼라고!" "아, 그래요?" 하브가 꽁시랑거리는 소리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침대위에 눌러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그에 화들짝 놀란채 벌떡 일어났을때 독기서린 눈동자로 날 보고 있는 헤딜리아양을 볼 수 있었다. " . . . 우와, 엄청 무례해요, 공녀님. 노크는 필수 아니에요?" "평민 주제에 예를 따지다니 어이가 없구나, 평민계집." 한마디한마디 냉정하게 말하는 공녀님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딜리아양은 가만히 날 보더니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하브는 침대 한구석에서 나와 헤딜리아양의 대치를 지켜보기로 했는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힐끗 하브를 본 후에 헤딜리아양을 똑바로 바라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헤딜리아양은 가만히 날 보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곧 입을 열었다. "하나 . . 하나 물어볼 것이 있어 왔다." "무슨 질문을 하시려고?" 고고하기짝이없고 오만하기 그지없던 대귀족 공녀님이 내게 무슨 볼일이신가? 라는 듯한 눈빛과 웃음으로 그녀를 보며 자세를 건들거렸다. 아까 목숨이 걸려있었기에 내 화를 삭혔지만, 난 세브릭을 상처입힌 그녀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내 표정과 자세를 보며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할듯말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는 모습에 조금씩 지루해진 난 약간의 미소만을 띄운채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해야 우리 세브릭이 상처입힌 만큼 그녀를 상처줄 수 있을까 . . 거기다가 카이스군도 꽤나 괘씸한데 말이지. 그렇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을테지, 그녀를 사랑하는데 말이야. 참, 사랑이라는게 뭔지 . . 그렇게 목숨까지 함부로 내던질정도로 바보로 만들다니. . . . 어떻게보면 정말 싫단말이지. 지금 헤딜리아양도 테일러를 사랑하니까 내게 이러는거잖아. 사랑이라는 게 없었다면 . . 하긴 그것도 좀 삭막했겠구나. " . . . 지?" 점점 시야가 흐려지며 멍 때리기 직전이었던 난 헤딜리아양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 . . . 미안해요, 다시한번 말해주시겠어요?" 미안하다는 내 말에 그녀는 확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천천히 표정을 풀더니 다시 말했다. "어째서 너지?" "공녀님!" 그녀의 말이 끝나고 나서 바로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카이스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멀뚱히 그녀를 보았다. "글쎄요 . . 어째서 너냐라고 물으신다면 . . . 저도 딱히 대답할 수 있는게 없는데요." 내 말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까 방금 헤어졌잖아. 근데 또 이렇게 찾아와서 대뜸 '어째서 너지?'라니 . . 도대체 뭐 어쩌자는거야? 나야말로 묻고 싶다고 . . 어째서 나야? "공녀님,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 . " "조용히 해주세요, 카이스경. 전 . . 전 이렇게 물러날수 없어요. 아까 폐하의 앞에서, 폐하의 손에 죽지못한게 억울해요."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손을 보던 난 천천히 미소를 거둬들였다. 죽지 못한게,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지 못한게 . . 억울하단 말이지? 내 눈동자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헤딜리아양은 계속해서 말을 뱉어냈다. "예전부터 쭉 그분을 보며, 그분의 곁에서기를 바랬어요. 바라고 바래서 . . 지금 여기까지 왔어요. 근데 . . 근데 제게 남겨진 것이 이런 비참함인가요? 이런 . . 이런 것인가요?" 그녀의 쪽빛 눈동자에 한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 눈물을 보며 카이스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꾹 닫은채 그녀를 보았다. 그를 보던 헤딜리아양은 다시 날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너 따위 . . 창녀같은 평민 계집에게 . . . 내 자리를 빼앗길 수 없어. 너같은 천한 계집에게 . . 네 주제에 . . 감히 폐하의 옆자리가 어울릴 것 같아?!" 빽 높은 하이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벌컥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카이스의 양 옆으로 사켄과 세브릭이 보였다. 그들은 놀란 눈동자로 카이스와 헤딜리아, 그리고 나를 번갈아보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날 보았다. 그들을 발견하고 나서야 점점 가라앉던 마음이 다시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난 그들에게 시선을 주며 어깨를 으쓱여보였고, 내 움직임에 공녀님은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들었는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세브릭과 사켄이 다가오려는 모습에 고개를 젓자, 그들은 자기 자리에 멈춰섰다. 그들이 멈춰선것을 보고 내 앞까지 다가온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말해봐라, 천한 평민 . . . 네가 그분의 옆에 설수나 있을것 같으냐!" "평민평민 하지 말아주실래요? 듣는 평민 기분은 별로 좋지 않네요. 고귀하디 고귀한 공녀님." 살짝 웃는 내 모습에 헤딜리아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말라가는 것이 보였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 공녀님의 질문에 대답해도 될까요? 어째서 저냐구요? 폐하의 옆자리에 설수 있냐구요? 음 . .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저도 잘모르겠다고 답해야겠네요. 저도 정말 모르거든요." " . . . " 천천히 그녀의 쪽빛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사륵하고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을 받으며 부드럽게 그녀에게 웃어주며 말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 설수는 있죠. 라는 대답정도로 해둘까요? 폐하의 앞에서 할말못할말 다한 저인데, 옆자리에 서는게 어렵겠어요?" "하 . . 뭐라? 네가 . . 네가 . . 너 따위가!" "물론, 제 주제에 카슘 제국의 황제폐하의 옆자리인 황후의 자리가 어울리지않는다고 말하고 싶으신거겠죠? 근데 . . 어떻게 해요? 폐하는 제가 좋다는데." 샐쭉 웃으며 말을 잇자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몸을 떨수록 뒤에 서있던 카이스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와 시선을 마주했을때, 그의 눈동자에는 극한의 분노를 담고 있었다. 피식 그에게 웃어주곤 다시 그녀를 보며 말했다. "폐하가 공녀님이 좋대요? 아까 보니까 그것도 아닌것 같던데. 좀더 노력하시지 그러셨어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를 메마른 눈동자로 내려다보다가 한발짝 두발짝 그녀에게 다가서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 폐하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되었어야죠. 그게 기본 아닌가?"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들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 . .. 어 . . 째서 . ."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입가에 띄웠던 비웃음을 지웠다. 역시 이런거 . . 별로란 말이지. 하지만 . . 안타까웠다. 그런 황제에게 이 여인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헤딜리아양의 마음을 한낱 가벼운 유희로 치부하는 테일러에게, 이 미녀의 마음은 너무나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세브릭을 상처입힌 것에대한 분노는 아직 다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 . 뭐, 이정도 정신적 데미지를 입힌걸로 . . 만족하도록 할까. 오랜만에 세브릭에게 스퀸십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 . .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날 노려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너야? 난 최선을 다했어. 폐하를 사랑해서, 폐하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언제나 . . 폐하계서 다른 여자들에게 시선을 줘도, 그건 아주 잠시뿐이었으니까 상관없었어. 폐하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나뿐이라고! 나뿐이야, 폐하께 어울리는, 폐하와 어울리는 여자는 나뿐이라고!! 고작 너 따위가, 너 따위가!" 절규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그녀는 보답받지 못한 자신의 사랑을 토해내며 선명하도록 맑은 질투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꽉 쥐어진 부채도, 섬세하게 세공되어 그녀의 귀에 걸려있는 사파이어빛 귀걸이도. 그 순간만큼은 고귀한 귀족 영애를 치장하는 장신구의 가치를 상실했다. "흐 . . 흐윽 . . 아 . . 아아아 . . !" 그런 그녀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할까. 분노하며 슬퍼하고 있는, 오로지 내게 순수한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그에 대답해줄 수가 없네요. 나도 폐하가 왜 날 마음에 들어하는지 모르겠고 . . 생각같아선 거부하고 싶은 관심이거든요."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고개 숙여 절규하던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젖은 쪽빛 눈동자는 해가 떠오르기 직전, 푸르스름한 새벽의 이슬같아서 홀려버릴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도 참 악취미라니까, 울고 화내고 있는 젖어버린 저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다니. "하지만 오로지 당신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그 말을 꺼내면서 절규하고 있는 그녀의 뒤에 묵묵히 서있는 카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나에대한 분노는 어디론가 숨겨버리고, 차마 그녀를 바라보지도 못한채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눈물 방울을 보고 있었다.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그를 고요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자신의 사랑을 지켜나가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받치는 사람도 있어요." 사랑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사랑은 반드시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사랑도 언젠가는 변해버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저 카이스라는 사람은 헤딜리아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현재는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사랑한다란 말 한마디조차, 꺼낼 수가 없어서 속으로 삼키며 뒷모습만을 쫓는 사람도 있어요. 어리석기 짝이없는 바보라 생각하지만 . . 보고있는 사람이 답답하지만 . ." 헤딜리아의 눈에서 한두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그녀에게 한발자국 다가섰다. 한쪽 팔을 뻗어서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아까와는 다른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 . 그런 사람 멋지잖아요. 자기의 마음보다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위해주는 사람 . . 사랑스럽잖아요." 카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을때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지어주고 헤딜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멍한 눈동자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날 밀어내려고 하는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화나죠? 나 많이 밉죠? 근데 지금은 그냥 이렇게 있어요. 고귀한 여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이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안되겠어요." "흑 . . 펴 . . 평민 . . 계집 . .이 . . 흐 . . 흐윽 . . 흐아앙-" 날 밀어내려던 손은 어느새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문가에 서있는 남자들을 보았다. 한쪽 눈을 찌푸리며 슥 고개짓을 하자, 그들은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나가고도, 헤딜리아는 한참을 내 품에서 울었다. 어깨가 축축히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헤딜리아는 정말 끊임없이 울었다. 지금은 그저 어깨를 들썩들썩하는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 . 그래도 계속해서 "흑- 읏 .. 흐윽. ."하는 흐느낌이 들렸다. 조용히 그녀를 달래다가 곧 훽하고 그녀는 내 품에서 벗어나 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 . . . 공녀님?" "나가라." " . . 예?" "나가라는 말이 안들리느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공녀님의 모습에 어리벙벙해졌지만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브가 모자 속으로 들어가는 걸 본 후에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탁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 . . . 어? 여기 내 방인데?" 헉 . . . 방 주인인 내가 쫓겨난거야? . . . 공녀님의 박력에 밀려버렸어. 아아- 나 오늘은 어디서 잔담 . . . . . . 오늘은 사켄방에서 잘까. 문고리를 잡은채로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훽하고 그쪽으로 돌려지는걸 느끼며 눈을 깜빡거렸다. 카이스가 조급해보이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 . . . 공녀님은 어떻습니까?" "조금 진정됬어요. 덕분에 제 로브는 눈물에 푹 절여졌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보았다. 그는 안심한듯 표정을 풀더니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들어가보시지 그러세요?" " . . . 무슨 . ."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 몰라요? 좋아하는 남자한테 차인거라구요, 공녀님." "큭, 공녀님은 폐하에게!!" "차인거에요. 차인거. 거절당한거라구요. 명백한 거절. 폐하는 공녀님께 개미 눈꼽만큼의 관심정도는 있을지모르지만 그래도 그 이상의 관심은 없다구요." " . . . "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한채 벙긋거리는 그를 보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들어갈꺼에요? 당신의 가녀린 레이디가 저 방에서 계속해서 울고있는데." " . . . 들어가봤자 . . 제가 도움이 되진 않습니다." 축 어깨를 늘어뜨리고 방바닥을 보는 카이스. . . . 비 맞고있는 고양이같네.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어주며 날 황당하다는듯 보고있는 카이스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전하는 자가 미인을 쟁취한다는 말이 있죠." " . . . . " "나라면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했을 때 누군가가 내 옆에 있어준다면 정말 마음이 엄청 흔들릴꺼에요." 원래 내 마음은 모든 여성들의 표본인 갈대거든. 영원한 사랑은 개뿔 . . 멋진 남자.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랑스러운 남자면 난 단숨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따위 깨끗하게 잊어주겠어! 감히 날 거절하고 얼마나 잘난 여자랑 만나서 사는지 지켜볼테다. 손수건을 입으로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얼마나 잘사는지. . .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 . 지켜볼꺼야. 갑자기 푹 가라앉은 기분에 한숨을 내쉬며 카이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의아한듯 날 보는 카이스를 보며 싱긋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아자뵹, 카이스군 화이팅!" "무 . . 무!!" 방으로 확 밀어넣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조용해진 방안을 느끼며 키득키득 웃고 있자 앞에서 뭔가 엄청나게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벽에 기대어있던 사켄과 팔짱을 끼고 있는 세브릭이 보였다. ". . . 다봤어요?" "계속 여기 있었다." " . . 그렇군요."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어색히 웃고있자 세브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사켄만이 묵묵히 자리에 남아 날 보길래 그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왜요? 새삼스레 내가 너무 예뻐보여요?" " . . . 가끔이지만 그렇지." "어? . . . 에?" 우악! 이 남자 또 왜이래! 이런 부끄러운 말을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거야! 쿵쿵 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얼굴에 쏠리는 피를 느꼈다. 맑은 회색빛 눈동자로 날 보던 사켄이 피식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리 묻지 마라." 기대있던 벽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온 사켄은 내 머리를 한번 부드럽게 흐트러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후에 카이스와 헤딜리아가 왠지모를 핑크빛 오로라를 풍기며 방에서 나올때까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애써야했다. "이히힝- 푸르르 . . " 갈색 말의 검은 갈기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렇게 빨리 출발할 필요 있어요?" "하빔까지 갔다오느라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그래도 . . . 동연합이랑 이종족 연합엔 아직 연락이 . . " "동연합에는 이미 내가 연락을 보냈다." 무뚝뚝한 표정의 사켄을 보며 푹 한숨을 내쉰 후에 입술을 내밀고 말했다. "그럼 이종족 연합이 . . " "내가 연락했다. 빨리빨리 움직여!" 모자 속에서 톡 튀어나와 내 어깨에 늘어진 하브를 보며 다시한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이틀이다. 쉬면 내가 얼마나 쉰다고 . . "아, 피곤해- 힘들어-" "너만 피곤하고 힘드냐?" "난 여자잖아요." " . . . 흥- 네가 여자야?" 하브의 앙칼(?)진 목소리를 귀엽게 들으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아, 요즘 우리 하브 사춘긴가봐. 왜 이렇게 반항이 심하지. 아무리 질풍노도의 시기라지만 . . 멍하게 이런저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응? 무 . . . 세브릭?" 이젠 후드를 쓰지 않기로 했는지 세브릭이 찬란한 외모를 빛내며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옅은 미소조차 짓고있지 않은 세브릭을 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아직도 뭔가 걸리는게 있는건가? "지금, 전쟁은 휴전 중이라고 하는군요." " . . 어, 그래요?" "저희가 하빔까지 왕복하는 동안, 미적지근하게 대응하던 동연합이 서연합에 제의했어요. 그리고 서연합은 그를 받아들였죠. 그래서 카슘의 황제 . . 폐하가 카슘에 있었던거에요." "아, 그건 몰랐네요." 휴전 중이라는건가 . . . 그럼, 휴전 중인 지금 세 연합이 모두 모여 종전을 꽝꽝 결정지으면 되는건가 . . . . . 내가 끼어들 필요도 없이, 원래 이렇게 끝날 수도 있었겠네. 가만히 생각에 잠기려다가 아직까지 느껴지는 시선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세브릭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의미모를 눈동자로 날 보고 있었다. "왜요? 또 무슨 일이 있어요?" " . . . 엘." "네." 뭘까 . . 카슘에 들어온 후부터 축 쳐져있었는데. 아마도 그 황제 때문이겠지만. "하고 싶은 ㅁ . . " "모두 준비가 끝난건가?" 세브릭이 말하던 도중 갑작스레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곳에는 윤기나는 흑마의 고삐를 잡은 황제 . . 테일러가 씨익 웃으며 서있었다. " . . . 폐하?" "그대를 꼬시라해놓고 이리 떠나버리면, 나보고 어쩌라는거지?" "짧은 시간 안에 꼬시는 것도 능력아니겠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는 내게 테일러는 재밌다는 듯한 웃음을 계속해서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동행하기로 했지." " . . 예?" "유혹하려면, 함께 있어야하지 않겠나?" "불편한데요." "아아- 괜찮아. 난 전혀 개의치 않으니까." "아니, 저희가 불편하다구요." "그것도 걱정마라. 너희도 불편하지 않을테니까." . . . . 이놈 뭐야. 지금 네가 불편하지 않다고 하면, 안불편한줄 아냐?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느끼며 그를 보다가 순간 말을 멈췄다. . . . . . . 어? . . " . . 폐하." "음? 왜 그러지?" 보랏빛 머리카락과 눈동자. 야성적이고도 거친 . . 남자다운 얼굴선도 그대로.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조금은 불편해보이는 . . "왜 제복을 입고 계시죠?" 그래, 그가 입고 있는 것은 황금빛이 도는 붉은색의 제복. 거기에 떡하니 카슘의 신수인 카차가 새겨진 . . 아주 멋드러진 제복이었다. 내 말에 테일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잘어울리나?" "예, 잘어울려 .. . 가 아니라, 왜 입고 계시냐구요." "그대를 유혹하기 위해서지." " . . 에?" "제복이 뭔가 금욕적이라 멋있다하지 않았던가?" "그 . . 그건 그렇지만." "그대의 취향에 따라 입은것인데, 이상한가?"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오는 말에 순간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버렸다. 그는 어색하게 굳어있는 내 얼굴을 보더니 흑마의 고삐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는 촉 하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스퀸십에 굳어있는 사이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각오하도록, 엘." " . . . " 멍하게 굳어있는 날 보며 테일러가 매력적인 웃음을 입가 가득 지었다. 그런 그의 웃음에 순간 넋을 놓고 그를 보자, 그가 다시 날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난 내 자존심을 걸고 전력으로 그대를 유혹하기로 했으니까." "어 . . 어 . . " 천천히 테일러가 내 손을 놓을때까지 난 움직이지 못했다. 내 손에서 그의 온기가 떠났을때, 그제서야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한쪽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엄마야- 자존심을 걸었데! 화르륵 얼굴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그걸 진심으로 행한다고? 유혹하라고 유혹하는 황제가 어딨냐! 이런 . . 이건 무슨 . . . 으아! 너무 행복하잖아!! 한참을 우왕좌왕하며 공황상태에 빠져있을때 슥하고 누군가가 내 뒤에서 날 끌어안았다. 목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팔을 느끼고 뻣뻣하게 굳어있는데, 귓가에 세브릭이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보이는군요." "에 . . 저기, 좀 그렇네요." 내 대답에 잠시 살랑살랑하고 세브릭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으앗- 귓가에 바람 불었어! 기분 묘해!!! 카이스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 . 옴짝달싹못하고 있는 사이, 세브릭이 다시한번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짜증나네요." "네?" 난 손을 내렸고, 세브릭은 날 감싸고있던 팔을 풀었다. 바로 앞에 있던 테일러가 묘한 눈동자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지금 그건 무슨 행동이지?" 테일러의 말에 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그를 보고 있는데, 세브릭이 대답했다.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세브릭?" "호오?" 테일러의 앞에만서면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바들바들 떨며 새하얗게 질리던 세브릭이었다. 그런 그가 침착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조금 놀라웠다. 테일러도 의외였는지 세브릭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세브릭은 테일러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엘을 당신에게 쉽게 빼앗길만큼 녹록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약간 창백한 기색이 있는 세브릭이었지만, 그의 말에 내 마음에 춘풍(春風)이 몰아닥치는걸 느꼈다. . . . . 이건 . . 이건 정말 . . . "그렇다네요?" 행복해 . . 행복하다구- 엄머나엄머나- 세브릭이 날 안빼앗기겠다네? 테일러는 날 진심으로 유혹한다네? "하아- 정말 피곤한 삶이네요." 말을 이렇게하면서도 싱글벙글 웃고있는 날 모두가 묘한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은 살짜코롬 무시하고는 사켄을 보았다. 사켄은 차분한 시선으로 날 보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살짝 잡고 그에게 다가가려는데 누군가가 훽하고 내 손을 잡았다. "에?" 사켄에게 향하던 내 몸은 순간 기우뚱하고 기울었고, 간신히 균형을 잡고 뒤돌아보았다. 뒤에는 내 손을 잡은 테일러가 날 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양쪽 손을 다른 사람들에게 잡힌 나는 멀뚱멀뚱 가운데에 서서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어디를 가는거지?" "사켄에게요." "왜?" "사켄과 같이 말을 타려고요. 여행할때는 항상 사켄과 함께 탔거든요." 내 지극히 정상적인 대답에 테일러가 한쪽 눈썹을 쓰윽 들어올리더니 사켄을 보았다. 사켄은 그런 테일러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 . . . 저쪽도 그대의 취향인가?" "음, 냉미남 좋죠. 전 미인이면 다좋거든요." 어깨를 으쓱이며하는 내 말에 테일러는 가만히 날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대의 취향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처음엔 내 취향이라고 했잖아요. 폐하의 성격만 아니었다면 상당히 구미당기는 사람이라구요, 폐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에게 말하자, 그는 다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곤란하게 됬군." "음? 그래요? 이제 나한테 흥미가 떨어진거에요?" "그럴리가." 테일러가 나와 마찬가지로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다른 이들보다도 늦은데다가, 거기다가 그대의 취향까지 아니라니." 순간 내 손을 잡고 있던 테일러가 확하고 잡아당겼다. 아무런 힘도 주지않고 있던 나는 사켄의 손을 놓치며 테일러의 품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끙하는 소리와 함께 테일러를 보자,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대는 나와 함께 타도록하지." " . . . 왜요?" "그게 공정한것 아닌가?" 빙긋 미소짓는 테일러를 보며 난 세브릭과 사켄을 보았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테일러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 . . . .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있다면, 난 지금쯤 엄청난 부러움과 시기를 한몸에 받고 있겠는데요." 세명의 미인이 날 가운데에두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니. 아아- 이 얼마나 행복한 전개란 말인가! "제 죄네요." 폭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모두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보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싱긋 미소짓곤 말했다. "뭐, 정당해야하겠죠?" 내 말을 마지막으로 테일러는 순식간에 날 안아서 말에 앉혔다. 그리고 그 역시 멋지게 말 위에 올라탔다. 내 바로 뒤에 있는 테일러를 힐끔 올려다보고는 입을 앙다물고 있는 세브릭과 사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어색하게 그들에게 웃어주자, 그들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각자의 말에 올라탔다. 아- 물론 말은 카슘에서 준비해준거였다. 그리고- "이럇!" 우리는 대륙의 중앙, 전쟁의 끝을 향해 출발했다. "우와 . . 진짜 비온다." 시커먼 회색빛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에 한쪽 손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손에 토독토독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보던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그 *레아멘의 전조라구요?" (*레아멘 : 에르테이샤 12회를 참고하세요-) "그렇지." 어느새 이렇게 다가온건지 내 바로 옆에 앉아있던 테일러가 답했다. 날 보며 싱글벙글 웃고있는 테일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창밖으로 여전히 내리고 있는 비를 봤다. 지금 우린 대륙 중앙으로 가고있는 도중에 갑자기 내리는 비로 인해 마차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역시 황제는 황제 . . 혼자 가는것도 아니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갈줄이야. 밖에서 분주히 움직이고있는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을 보며 잠깐 비를 맞는 그들의 모습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떨쳐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조용히있는거지?" 옆에 서있는 테일러의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하때문이라고는 죽어도 말못하겠네요." 빗방울을 탁탁 털어버리고는 그를 보며 로브에 손을 쓱쓱 닦았다. 그리곤 테일러에게 황당함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무리 유혹이라고 하지만 . . 남녀칠세부동석이거늘. 어찌 저랑 같이 자고싶다는 발언을 하세요?" 그것도 세브릭이랑 사켄까지 쫓아버리고. 뒷말은 차마 내뱉지 못한채 비딱하게 기대서 그를 보다가 아무말없이 씨익 웃는 그의 모습에 다시 깊게 한숨을 쉬고는 창밖을 보았다. 아- 역시 피곤한 사람이야. 상큼한 세브릭과 편안한 사켄을 같이 있고 싶다- 밖에서 뚝뚝 비를 맞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금 내리고 있는 비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소나기와 같아서, 이 비가 내리고 얼마 안있으면 엄청난 비 . . 그러니까 태풍과도 같은 위력의 비가 이주정도 주구장창 내린다고 한다. 아, 지오 이 비좀 멈춰주세요. 우리 가여운 미인들이 저 빗속에서 입술이 파랗게 질려서 추위에 떨고 있잖아요. 팔에 얼굴을 묻고 비스듬한 시선으로 세브릭과 사켄을 보고 있자 테일러가 조용히 말했다. "누구를 보고 있는거지?" "흠? 누구라고 예상하시는데요?" "분명 그대의 취향이라는 이들이겠지." "역시 폐하- 모르시는게 없네요." 픽 웃으면서도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주지않고 대답했다. 테일러는 잠시 아무런 말도 없더니 내 팔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런 아픔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보자 그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불쾌하군." "뭐가요?" "보지마라." " . . . 이젠 제 시야까지 폐하의 허락을 맡아야하는거에요? 유혹하라고 했지, 제게 명령하라고 한게 아닌데요." 나 역시 요 몇일새 테일러에게 쌓인게 많았기에 비딱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조금 흉폭한 눈동자로 날 보더니 곧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그를 보며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는 가만히 내 눈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용서치 않는다." "헤에? 용서하지 않으면 어쩌시게요? 죽이시려구요?" 그는 시도때도없이 나와 세브릭, 사켄이 함께 있는 것을 방해했다. 조금 얘기를 나누려고 하면 뒤에서 확 끌어안아버리지 않나. 잠시 시선이라도 마주하면 내 턱을 잡아채서는 빙긋 웃어버리질 않나. 한마디로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 . . 정말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난 누군가에게 구속되는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대의 눈동자에 담는 그들을 사라지게 할지언정, 그대를 죽이진 않아." 가볍게 웃는 테일러의 모습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멍하게 넋을 놓고 조금씩 물러나는 그를 보았다. 그는 마차에 기대어서 한쪽 턱을 괴며 날 보더니 다시한번 빙긋 웃었다. "그러니, 그들을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나와 함께 있을때 그들을 보지마라." " . . 무서우신 분이네요." 입가에 옅게 짓고 있던 미소조차 지우고 그를 보며 말했다. 내 말에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날 보았다. 그런 그를 보다가 콰르릉 치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사람 귀찮게." 그리고 그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적이다!!" 빗소리에 섞인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까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란인가 밖을 내다보려했던 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세브릭과 사켄의 목소리에 몸을 멈추었다. "가만히 그 안에 있으세요, 엘!" "나오면 절대로 가만 두지 않을테니, 알아서해라!" 아 . . 몸이 근질근질거리는데 . .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테일러가 말했다. "나가보지 않는건가?" "폐하는요?" 어째서 넌 그렇게 여유만만이야? "고작 이런 소란은 전쟁에서는 자장가정도지." 아, 그래 . . . 전쟁에서 많이 겪어봤다 이거지? 난 한번도 못겪어봐서 걱정되서 화가날지경인데 말이야. 그를 확 노려보고는 다시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 그냥 나가볼래요. 나중에 사켄이랑 세브릭한테 혼나겠지만." "뭐?" 테일러가 황당히 날 보는 시선을 무시한채 벌컥 마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빗물에 섞인 쓰러져있는 사람들과 피를 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 . . 죽었어?" 입을 벌리고 초점없는 눈으로 쓰러져있는 사람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싸우고있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과 카슘 제국의 병사, 기사들. 온 몸을 적시는 비를 맞으며 멍하게 그들을 보다가 급히 세브릭과 사켄을 찾았다. 쓰러져있는 사람들 중에 그들은 없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려 싸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들을 찾았다. "제발 . . 제발제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그들을 찾다가 마침내, 젖어버려 완전히 핏빛으로 물든 세브릭의 붉은 머리카락을 찾았다. 한번도 본적없는 다급한 표정으로 서로 등을 맞대고있는 사켄과 세브릭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터져나올뻔한 소리를 참았다. 지금 그들을 불러봤자, 오히려 그들에게 방해가 될뿐이라는걸 잘아니까. "뭐하는건가? 얼른 들어오지 않고." 여전히 여유로운 테일러의 목소리에 뒤돌아 그를 보았다. 그는 가만히 마차에 앉아 날 보고 있었다. 태평한 그의 모습에 잠시 어떤 말을 해야할까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뭐하는거에요, 폐하?" "난 이 행렬의 중심이다. 내가 움직이면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 유리할게 없지." "그렇다고해도 . . 폐하가 다스리는 나라의 사람들이 죽고 있어요. 지금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거에요?" "날 지키기 위해서니, 어쩔 수 없는 희생아닌가? 나도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어." 빙긋 웃으며 말하는 테일러의 목소리를 들으며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화를 참지 않고 소리 질렀다. "난 당신이 정말 싫어!" 순간 높은 내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리고 그들 중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내게 다가왔다. 뭐야? "엘!! 피해요!" "으 . . 으아앗?!" 내게 찔러오는 검을 간신히 피한채 바닥을 뒹군 난 다시한번 내게 향하는 은빛의 검날 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들이 노리는건 나였던건가? 어째서 날 노리는거지? 오히려 노릴려면 지금에서야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뜬 황제를 공격하는게 정석이잖아! 다시한번 날 향해 다가오는 검을 피하며 퍽하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발목을 찼다. 잠시 그 사람이 휘청이는 사이에 급히 일어선 난 숨을 헐떡이며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았다. 뭐야? 지금 왜 이런 상황이 된거냐고. "엘!!" 멀리서 달려오고있는 사켄과 세브릭을 보며 난 다시한번 다가오는 검을 보았다. "우와, 너 . . 너무하잖아요!" 소리를 지르며 이번엔 피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질끈 눈을 감았을때, 눈을 감았음에도 밝은 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휘잉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고통도 없어서 눈을 떴을때, 바로 앞에 황금빛의 머리카락이 젖어가는 걸 보았다. "하 . . 하브?" "뭐하는거야? 이 자식들은 또 뭐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하브가 무사하다는걸 알고는 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 . 진짜 . . 놀랐다 . . "괘 . . 괜찮아요?" "당연하지!" 저 멀리 날려가 나무에 처박힌 검은 옷의 사람과 하브를 보다가 말했다. "어떻게한거에요?" "날려버린거지, 뭘 어떻게해?" 날 멀뚱멀뚱 보는 하브의 금안을 보다가 어설프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하브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다시한번 날아오는 검에 내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사켄의 검에 그 검이 막혔다. 세브릭이 확 날 노려보는 것을 느끼며 다시한번 어색하게 웃은 후에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있어섰다. 아 . . 다 젖어버렸어 . . 그것도 아주 푹 젖어버렸다구. 하브가 무사하다는 것에 대한 안도도 잠시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손을 꼭 부여잡았다. 사람이 죽는건 처음 봤다. 곧 챙하고 사켄의 검에 몸이 꿰뚫리는 검은 옷의 사내를 보며 난 눈을 꽉 감아버렸다. '이곳'은 '나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니, 저건 어쩔 수 없는거겠지만 . .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죄책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지오 . . 지오 . ." 애타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려도, 그는 내게 와주지 않는다. 지금도 '비틀림'을 해결하느라 힘들테니까 . . 그는 내게 올 수 없다. 응 . . 지오는 바쁘니까. 지금도 비틀림을 해결하느라 . . 정신이 없을테니까. 그가 내게 올수 없다는 걸 잘알고 있기에 씁쓸한 미소를지었다. " . . . 류!" 눈을 꼭 감은 내가 지르는 소리에 차갑게 와닿던 빗방울 대신 따스한 온기가 내 몸을 감쌌다. 【엘,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거죠?】 조곤조곤 말하는 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부들부들 떨고있는 몸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내 눈을 가리고 있는 옅은 빛들을 보며 난 그제서야 천천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가 . . 할 수 있는 일이 . . 없어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저들을 죽인다는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내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건 더더욱 싫다. 【당신은 내게 무엇을 바라나요?】 조용한 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쓰러져서 눈조차 감지못한 사람들은 보며 류에게 말했다. ". . 최소한 . . 저들의 영혼이 . . 편히 . . 쉴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세계의 [에르테이샤]인 내가 할 수 있는 . . 유일한 것. 내 말에 내 몸을 휘감고 있던 류가 스르륵 풀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명한명 다정하게 감싸안는 빛 . . 아니 류를 보며 난 꼭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내가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에대한 두려움. '죽음'이라는 것은 이정도로 . . 사람을 나락(那落)으로 몰고 가는 거구나. "엘!" "아?" 멍하게 눈을 뜨자 세브릭이 내 어깨를 꽉 부여잡고 말했다. "다친 곳은?" " . . . 세브릭?"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기어코 나오는군요!" 거세게 타오르는 장밋빛의 눈동자를 보며 난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브릭." "다치면 어쩌려고 나온거죠? 지금이라도 당장 들어가요!" "세브릭 . . " "내 말 안들ㄹ . . " 천천히 그의 허리에 내 팔을 감고 그의 품을 파고 들었다. 젖어있는 그가 차갑다는 생각같은건 들지 않았다. 지금 내겐 . .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엘?" "세브릭 . . 세브릭이야말로 안다쳤어요?" 의아한듯 말하는 세브릭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그제서야 두려움에 떨고있던 심장을 진정시켰다. 빠르게 뛰고있던 심장이 조금씩 . . 조금씩 . . " . . . 다치지 . . 않았어요 . ." 느려진다. "무슨 일이 있는건가요? 어딜 . . 다친건가요?" 아까와는 달리 조심스러운 세브릭의 말에 천천히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두려웠어요." "엘." "누가 다칠까봐 . . 혹시라도 . . 설마 . . 사켄이나 세브릭이 위험해지면 어쩌나 . . 걱정했어요." 턱을 타고흐르는 따스한 빗물은 무시하자. 비가 . . 너무 많이 온다. "무서웠어요." 부들부들 떨리는 내 어깨를 꽉 감싸안아주는 세브릭의 온기를 느끼며 마음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 몸은 아닌가보다. 여전히 챙챙거리는 검 소리를 들으며 난 그의 품에서 안정을 찾았다. 그렇게 가만히 안겨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비에 푹 젖은 그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괜찮나요?" 내 눈을 가만히 보고있는 세브릭의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됬어요." 조심스럽게 내 등을 토닥여주는 세브릭의 손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검은 옷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세브릭! 뒤에!" 내 말에 세브릭 날 안고 급히 다른 쪽으로 돌았다. 그러자 방금까지 우리가 서있던 곳에 그 사람의 검이 찔러들어왔다. "인간 . . 엘에게 무슨 짓이야!" 확 하고 하브가 소리를 지르는게 들렸다. 그리고 그 검은 옷의 사람은 옆으로 날려가버렸다. 멍하게 날려간 사람을 보다가 하브를 보았다. 하브는 씩씩거리더니 빨개진 얼굴로 우릴 보며 말했다. "얼른 안떨어져?!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그러고 있는거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모습에 몸의 떨림까지 사라졌다. 그리고 긴장이 풀어져 실소를 터트리며 세브릭의 옷을 꽉 잡았다. 아 . . 정말 . . 하브 때문에 내가 산다니까. 하브는 계속해서 왁왁거리며 뭐라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빗소리에 묻혀 잘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 . 아까 그 사람으로 인해 확실해졌다. 저 자들은 .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노리고 있었다. "세브릭 . ." "엘?" "미안해요!" 확하고 그를 밀치고는 급히 숲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저 사람들이 노리는건 나다. "엘!!!!!!!!" 뒤에서 세브릭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는 나무와 수풀을 헤치며 더 깊숙한 숲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사사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 계속해서 뛰었다. "으읏!" 넘어지며 손이 쓸렸는지 따끔거렸다. 그 손을 보다가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었다. 지금 넘어져서 그 자리에 있어봤자, 뭐 어쩌자는건가. 죽을 자리를 그곳으로 하기에는 . . 너무 억울하고 비참하잖아.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을새도 없이 물에 젖어 무거운 로브를 벗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뛰었다. 심장이 터지도록 뛰면서 산소결핍으로 머리가 핑글핑글 돌때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뛰고 또 뛰다가 숲을 벗어나자마자 급히 발을 멈추었다. 투두둑하고 . . 돌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우와 . . 이런 빌어먹을 상황이 오다니!" 지오는 내 편이 아닌거야! 갑작스레 든 생각에 울상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어느새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날보며 검을 들었다. "하아하아 . . 여기서 . . 후우 . . 죽는건가요?" 난 여기서 죽는걸까? 미치도록 뛰고있는 심장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제서야 갈증을 느끼며 살짝 입술을 핥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흘러들어온 빗물을 삼키며 천천히 호흡을 다스렸다. 쏴아하는 빗소리만이 내 귓가에 들리는 와중에 묘한 감정에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빗물이 내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며 눈에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 빗물을 닦으며 그들을 똑바로 보았다. "당신들은 날 죽일건가요?" 류는 . . 아까 내 부탁으로 지금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하브까지 떼어놓고 왔다. "이를 어쩐다나 . . " 날 도와줄 사람이 . .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 . . 왜 웃는거지?" 아 . . 내가 웃고 있었던가? 하긴 곧 있으면 죽을텐데 . . 이상하기도 하겠구나. 멍하게 그들을 보다가 다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재밌잖아요.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오싹오싹하지 않아요?" 당신들은 모르겠지.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모르는데, 단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 미지의 세계잖아. "지금 기적적으로 살아나도 재밌겠지만 . . 지금 죽는다고 해도 엄청 재밌잖아요." 그럼 난 지오한테로 가는걸까나? 이 세계는 어떻게되는거지? 음 . . 나 하나없다고 해서 . .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이미 세연합에서는 전쟁이 끝나는 것에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보다 궁금한게 있는데 가르쳐주실래요?" 뒤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느끼며 오싹함에 미소짓는 날 보며 그들은 한걸음 물러섰다. 그런 그들을 보며 살짝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다가 다시 상관없다 느끼며 물었다. "누구에요?" " . . . 무슨 소리지?" "날 죽이라고 한사람, 누구에요?" " . . 어차피 죽을 너에게 가르쳐줄 필요는 없다." "그러니 궁금하잖아요. 누가 날 죽이라고 했는데요?" 곧 그는 입을 꾹 다물더니 날카롭게 검을 치켜들며 다시 한걸음 다가왔다. 그의 모습을 지그시 보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아 . . 알았다." 하긴, 모를리가 있나. 그 사람인가 . . 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내가 '이곳'에 와서, 방해받은 적은 딱 한번 있거든요." 내 웃음에 당황했던 그들을 보며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비웃듯 그들을 한명한명 바라보며 말했다. "저 바다 너머의 . . 하빔의 국왕 전하 맞죠?" " . . . " 비 때문에 그들을 제대로 볼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경직되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말했다. "정말 . . 너무하시네. 내가 얼굴 간수 잘하고 기다리라고 했더니 . . 이렇게 비겁하게 나오시나?"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리다가 난 한걸음 물러섰다. 자 . . 이젠 어쩔까나. 하브도 없고, 류도 없다. 뒤에는 절벽, 또 다시 하빔의 사람들 때문에 궁지에 몰려있는 이 상황. "익숙하네요. 뒤에는 절벽이고, 앞에는 검이라." 다시 한걸음 물러서며 그들에게 활짝 웃었다. 그리곤 다시 한걸음 더 뒤로 갔다. 지금 이순간, 난 또 다시 같은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바이바이-" 난 내 운명을 시험해보겠어. 바스락하는 소리와 함께 난 마치 침대에 눕듯 뒤로 누워버렸다. 바람소리와 함께 터질듯한 두려움이 내 심장 속에 스며들어왔다. 천천히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엘!!!!!!!!!!!!!!" 눈을 감는 순간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다시 멍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누군가의 모습에 다시없을 정도로 눈이 커졌다. "세브릭!?" 어떻게 . . 어떻게 당신이 여기있어? 빠르게 떨어지고 있던 나는 곧 그가 뻗은 손을 보았다. 간절한 표정의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와 . . . 당신과 같이 죽는건 상상도 안했는데. 세브릭의 품에 안겨 난 키득거리며 웃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 세브릭에게는 미안하지만서도 . . 그래도 . . 함께 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건, 꽤나 행복한 기분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는 순간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과 함께 부드러운 빛이 나와 세브릭을 감쌌다. 빠르게 떨어지고 있던 그와 나는 땅으로 곤두박질칠꺼라는 예상과는 달리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 . "풍덩-" 우린 절벽 바로 아래에 고여있던 샘 속으로 빠졌다. "당장 찾아라." 테일러의 보랏빛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마차 옆에 부복하고 있던 검은 옷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마차에 기대어 테일러는 눈을 감았다. 테일러가 속으로 화를 삭힐동안, 밖에서는 시체수습을 하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 사켄과 하브가 대치하고 있었다. "젠장, 당장 찾으러 가야할것 아니야!" "어떻게 찾는다는 말이지? 네가 찾을 수 있나?" 사켄의 차분한 대답에 하브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더니 순간 표정이 환해져서 사켄을 보았다. 사켄은 나무에 기대 있다가, 하브의 시선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방법이 있어." "어떻게?" "지금 . . 어떻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엘이랑 떨어졌는데도 난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러니까 그렇게 멀리 떨어진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 . 어느정도 가까이가면 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까." 하브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사켄은 하브를 보며 말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뭘?" "엘이 곁에 없는 상태로 . . 얼마나 버틸 수 있냐고." " . . 나도 잘몰라. 이정도로 엘이랑 떨어져본적이 없으니까." 그 말을 마치고 하브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사켄은 잠시 그런 하브를 보고는 엘과 세브릭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좋겠군." "뭔소리야?" " . . . " 사켄은 꾹 입을 다물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브 역시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켄을 뒤따라갔다. 그리고 사켄이 숲으로 들어가려할때, 그의 앞으로 테일러가 막아섰다. " . . . 뭐하시는 겁니까?" "뭐하긴. 자네들까지 없어지면, 곤란해지니까." 테일러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자, 사켄이 살짝 한쪽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그대들이 없으면 엘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않나." "억지입니다. 저희는 돌아옵니다." "그래도 싫은건 싫은거지. 세브릭이 엘을 따라간것만해도 상당히 불쾌한 일인데 말이야." 테일러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사켄이 말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현재 엘은 폐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리고, 엘은 . ." "흠? 엘은?" 테일러의 말에 사켄이 차갑게 표정을 굳히고 그를 보며 말했다. "폐하에게 소유될만한 여인이 아닙니다." "하하, 대단한 대답이군. 어째서지?" " . . . 폐하는 엘에대해서 얼마나 아십니까?" 갑작스런 사켄의 물음에 테일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사켄을 보았다. 사켄은 조용히 테일러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다시 말했다. "폐하는 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군." "저 역시 엘에대해서 아는게 없습니다." "그건 좀 재밌는 말이군. 엘과 그토록 오래 있었으면서, 엘에대해 아는게 없다?" 테일러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에도 아랑곳않고, 사켄이 다시 말했다. "엘은 자기에대해 알려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 . . 그래서? 지금 그대가 하는 말과 엘이 내 소유가 되지 못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지?" 사켄은 잠시 테일러의 말에 입을 다물고 있다가, 옅게 . . 정말 옅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기에입니다." " . . 무슨 소리지?" "엘은 떠납니다." 사켄의 말에 테일러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사켄의 입가의 미소는 조금씩 . . 누군가를 생각하는지 알정도로 황홀하도록 다정하게 지어졌다. "그녀는, '이곳'에 남지 않습니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는 저도 알지 못하지만, 엘은 그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고, 옆에서지도 않을껍니다." " . . 떠난다고? 떠나봤자,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테일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사켄을 바라보았다. 사켄의 미소는 곧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의 맑은 회색빛 눈동자가 테일러의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사켄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소용없습니다." " . . . 지금 황제인 내게서 그녀가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것인가?" 테일러의 눈이 짙어졌다. 그런 그의 눈을 보며 사켄이 비웃듯 천천히 말했다. "만약, 그녀를 잡을 수 있었다면 . . " 사켄은 막아서는 그를 지나쳐 숲속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전 엘을 그저 바라보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에 . . 에취!" 으- 장난 아니게 춥네. 물에 젖어 무거워진 로브를 벗어버리며 쭈욱 물을 짰다. 내 뒤에서도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려서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선 세브릭이 등을 돌리고 선채 젖은 옷을 벗고 있었다. 그 역시 입고있던 로브를 벗어 대충 물을 짠후에 바닥에 내려놓고, 멈칫하더니 날 보았다. 세브릭을 훔쳐보고 있던 난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다시 물을 짜는 시늉을하며 딴짓을 했다. 아 . .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죽는줄알았더니 . . 하긴 지오가 그렇게 쉽게 날 죽게 내버려둘리가 없지. 대충 물을 짠 로브를 탁탁 털며 아까 그 상황을 생각했다. 《엘은 정말 제가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군요.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날뻔했어요. 제발 . . 조심해요.》 부드러운 빛이 떨어지는 우리를 감싼 순간, 귓가에 들려왔던 . . . 지오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지오의 모습을 볼수는 없었지만 뭐 . . 목소리 듣는게 어디야. 이정도로 만족해야지. 그 후 샘에서 나와 우리는 물이 깊게 고여있는 샘 가까이에 있던 동굴에 들어왔다. 그리고 현재 밖에서는 여전히 빗줄기가 그치지않고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 . . 음 . . 옷을 벗어야하나 . . " 멍하게 젖어있는 옷을 보고 있자, 뒤에서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잔뜩 긴장하며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얼굴이 붉어졌다. 툭하고 머리에 차가운 무게가 전해졌다. " . . 당신이 입고있는 옷보다는 나을꺼에요." 조용한 세브릭의 목소리를 들으며 머리에 얹어져있던 옷을 잡았다. "이거 세브릭 옷 아니에요?" "빨리 입어요. 뒤돌아보지 않을테니까." 세브릭의 옷을 꼭 잡고 힐끔 그를 보자, 그의 매끈한 등이 보였다. 오- 두번째보는, 세브릭의 반나체 . . 헛, 심장이 터질것같아! 황급히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힐끔힐끔 그를 훔쳐보며 옷을 벗었다. 한벌 두벌 벗을때마다 사륵거리는 소리에 내가 더 민망했지만 꿋꿋히 벗고 세브릭의 옷을 입었다. 좀 젖어있긴 했지만, 확실히 내 옷보다는 나았기에 푹 한숨을 내쉬었다. . . 그보다, 역시 세브릭도 남자는 남자구나 . . 손가락 끝이 소매 밖으로 간신히 나올 정도라니. 거기다가 지금 내꼴은 . . 뭐랄까 . . 그냥 짧은 원피스 하나를 입은듯한 모습이었다. 벗은 옷들은 쭉쭉 짜서 대충 동굴 한쪽에 널어놓은 후에 젖지않은 곳에 앉았다. 살짝 한숨을 내쉬었을때 뿌옇게 나오는 입김을 보며 난 순간 얼어버렸다. . . . 이렇게 얇게 입고 있으니까, 장난 아니게 춥다. " . . 세브릭." "뭐죠?" 추위에 떨리는 목소리는 무시해도 괜찮았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 파랗게 질렸을 입술 역시. 하얀 입김이 동굴 속을 헤매다가 곧 물방울로 화해 사라졌다. 이대로 있다간 분명 동사할꺼야. "절대로 어쩔 수 없어요." "뭐라는 . ."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등돌려 앉아있던 그에게로 다가갔다. 내 기척을 느꼈는지 세브릭의 숨소리가 고요해졌다. 조심스럽게 그의 뒤에 앉아서 내 등을 그의 등에 맞대었다. 아무리 나라도 . . 지금 이 상태에서 안기는건 . . 창피해, 그것도 엄청나게! 얇은 옷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있는 등으로 뜨거운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나마 . . 살만하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절대 사적인 마음은 없어요." 아니 . . 조금 있나? . . 그래, 사실 조금 많이 있어요.. " . . . " "세브릭? 말 좀 해봐요, 민망하잖아요." 주룩 주룩 쏟아져내리는 빗줄기가 눈에 선명해질정도로 차가운 빗소리가 동굴에 가득찼다. 빗소리와 함께 들리는건 세브릭과 나의 작은 숨소리정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침묵의 시간이였다. 등으로 전해져오는 온기를 느끼며 무릎을 끌어모아 팔로 안았다. 그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잠시 있었을까, 세브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어머니는 . . " 아? 세브릭의 어머니라면 . . 돌아가셨다고 그에게 들었었다. 자신의 과거를 얘기해주려는걸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자제하며 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예였어요." " . . 노예요?" "네, 그것도 . . 노예 중 . . " 잠시 말하기 힘든듯 말을 멈춘 세브릭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동안 마음을 정리했는지, 세브릭이 다시 말을 이었다. " . . . 성노 . . 였죠." "아 . . " 무슨 말을 해야하지? . . 무슨 말을 . . 해줘야하지? "어머니는 원래 귀족가의 딸이였어요. 그러다가 가문이 역모죄에 걸려들어, 노예가 된것이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지만,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느끼며 난 그가 얼마나 힘들게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무릎을 안고있던 팔을 풀고 천천히 그의 등에 기대어 머리를 맞대었다. 잠시 내 행동에 멈칫했던 세브릭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 . 카슘으로 흘러들어와 . . 선황 폐하의 눈에 띄게 되었어요." "그럼 . . " "예, 제 몸에는, 카슘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제 성인 'K'는 카슘의 . . 'K'이기도 하죠." 씁쓸하게 말하던 세브릭은 다시 천천히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자신을 낳아 어머니는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선황 폐하의 첩들 중 한명이 되었다고 한다. 뛰어난 미색을 지녔던 세브릭의 어머니는 선황 폐하의 달갑지 않은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고, 그 당시 테일러의 어머니 그러니까 카슘 제국의 황후 마마는 몸이 약할뿐아니라, 황후답지 않게 선한 성격을 가졌기에 궁 안에서는 세브릭의 어머니가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사건은 일어났다. 황후 마마와 세브릭의 어머니의 티타임때, 황후 마마가 차에 타져있던 독을 마시고 정신을 잃었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그 후 이미 선황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던 세브릭의 어머니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당시 어린 나이였던 세브릭은 테일러를 제치고 황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황후 마마의 일은 세브릭의 어머니가 꾸민 일이었다. 세브릭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인 세브릭이 테일러를 제치고 카슘의 황제가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테일러가 일으킨 것이 그 시대 때에 흔히 있었던 반란이었다. 테일러는 선황 폐하의 수많은 첩들과 자식의 목을 베었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있던 자신의 아버지, 선황 폐하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간신히 궁을 벗어난 세브릭의 어머니와 세브릭은 산으로 도망쳤다. 거기까지 얘기한 세브릭은 잠시 말을 멈췄다. 아마 . . 이 이후의 얘기가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 . 얘기가 아닐까. "그리고 . . 도망쳐나온 저와 어머니는 . . 작은 마을에 숨어들어가 살게되었죠." 그는 그저 얘기를 하고 싶은 듯했다. 자신의 삶에대해, 내게 얘기해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그저 조용히 경청했다. 그리고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릴때, 다시 세브릭의 얘기가 시작됬다. "그 날도, 지금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어요. 어머니는 식사 준비를 하고있었고, 전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죠. 그리고 . .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머니와 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그들이 누구인지 . . 어머니는 제 손을 잡곤 가장 안쪽의 방으로 갔죠. 어머니는 그때 . . 웃으셨어요. 죄값을 받을때가 된거라며 . . 웃으셨죠." " . . 그리고 . . 어떻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절 벽장 쪽에 숨기셨고, 곧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죠. 그리고 . . 어머니는 . . 돌아가셨어요." "어떻게요 . . 라고 물어도 . . 될까요?" "처음엔 손가락 하나하나를 자르더군요. 과다출혈로 죽는걸 바라지는 않았는지, 자른 곳을 불로 지져 피가 나오지 않게했죠. 그리고 . . 그 다음엔 팔, 다리 . . " "세브릭." "마지막엔 . . 목을 . . 잘랐어요." 세브릭의 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는 동안, 그 고통을 받는 동안 . . 전 아무것도 못했어요. 아무것도 . . 할 수가 없었어요." "세브릭." "그리고 아렌타로 도망갔고 . . 그곳에서 맥클라스님을 만나 그분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 . . 세브릭." "여기서 제 얘기는 끝이에요." " . . 괜찮아요?" "뭐가 말이죠?" "세 .. " "자도록 해요. 곧 비가 그친다면 . . 누군가가 우리를 찾으러 올테니까." 세브릭을 위로해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위로해야하는지, 난 알수가 없었다. "세브릭 . . 한마디만 할께요." 그렇지만 . . 그렇지만 세브릭의 얘기를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 . . 그 말만 하고 자요." 세브릭의 나즈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난 눈을 감았다. "고마워요 . . 얘기해줘서 . . 그리고 . . 미안 . .해요." 빗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엘의 새근새근한 숨소리에 그제서야 세브릭이 천천히 움직였다. 맞닿아져있던 등이 떨어지자 엘이 표정을 찌푸렸지만 곧 세브릭의 품안에 갇혀 따뜻해진듯 엘은 그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자신의 품 속에서 눈을 감은채 자고 있던 엘을 보던 세브릭은 엘의 푸르스름한 입술을 살짝 손가락으로 쓸었다. 따스한 냉기에 세브릭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곧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엘의 입술에 입맞췄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는 . . 그저 단순한 입맞춤이였다. 잠시 그렇게 그 자세로 있던 세브릭이 고개를 들었을때, 엘의 입술은 푸르스름한 빛 대신 평소와 같이 붉은 빛을 띄웠다. "나야말로 . . 미안해요. 그리고 들어줘서 고마워요." 부드러운 미소를 띈 세브릭은 좀더 그녀를 자신의 품안에 끌어안고 자신 역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어두웠던 동굴에서 엘의 볼이 붉으스름해진것이라던지, 그가 눈을 감았을 때 엘이 살짝 눈을 떠 그를 묘한 눈동자로 바라봤다는 것은. 아마도 세브릭은 평생모를 비밀 . . 이랄까. * * * "엘- 엘 . . 일어나요, 엘." "응 . . ? 세브릭?" 어느새 정말로 잠든건지, 그의 따스한 품에 안겨있던 난 눈을 깜빡이며 세브릭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세브릭의 굳은 얼굴을 보며, 나 역시 숨을 멈췄다. 뭐지? 무슨 일이지? "제 말 잘들어요, 엘." "무슨 . . 일이 있는거에요?" 밖에서는 비가 그쳤는지, 똑똑하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뿐, 비올때 특유의 쏴한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이 무서울정도의 고요함이라니. 세브릭은 내 어깨를 꽉 부여잡고 내 눈에 똑바로 눈을 맞췄다. 난 멍하게 그의 눈을 응시하며 다시 말을 꺼냈다. "뭐에요? 무슨 일이냐구요." "아까 그들입니다." " . . . 까만 옷입은 내 스토커들?" " . . 스토커가 뭐죠? 그들의 정체를 아는 건가요?" "아니요,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까만옷입고 나만 쫓아다니니까 . . 세브릭은 몰라도 되는 단어에요." 나도 모르게 너무나도 적절한 비유를 내뱉었군. 가끔 난 재치가 너무 넘치는것 같아 탈이란 말이야. 나의 뛰어남을 탓하며 다시 세브릭을 보았다. 그가 알아듣진 못했지만, 내 말로 우리의 분위기는 한결 풀어졌다. 아까 그가 내 입에 입맞추고 눈을 감아버렸을 때는, 이걸 어떻게해야하나 고민했었지만 . . 뭐, 어쨌거나 특별하고 달콤한 경험이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어쨌든 그들이 밖에 있습니다." " . . 날 죽이려고?" " . . . " 내 말에 세브릭이 잠시 입을 다물고 머뭇거렸다. 그의 망설임의 원인을 안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말아요, 두려운건 없으니까. 아까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그들에게 죽을꺼라는 공포는 다이겨냈거든요." 라는건 물론 거짓말. 칼이 내 몸 속을 파고 들어도, 난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절대 못할꺼다.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소리 지르겠지. 하지만, 난 절대적으로 믿는게 하나있다. 지금 내 곁에는 류가 살랑살랑 흘러다닌다는 것과, 아까와 마찬가지로 내가 [에르테이샤]인 이상, 저들은 날 죽일 수 없다는 것. 아니 .. 물론, 만약. . 정말 만에 하나 지오가 "이제 당신 싫어요."라고 하면서 내게서 손떼면 나도 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지만 . . 그건. . 그건 내겐 너무나도 가혹한 최악의 상황이다. 잠시 끔찍한 상상에 인상을 찌푸렸을때, 볼에 와닿는 온기어린 손에 눈을 깜빡였다. 세브릭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빙긋 웃어주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 . . 그래도, 이곳에 있어요."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세브릭이 책임질꺼에요?" "적어도 밖보다는 안전하겠죠." "절대로- 안전한 곳이 어디있다고 그래요? 난 세브릭의 품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지는데요?" "지금은 장난할때가 아니에요." 조금 엄해진 눈동자로 세브릭이 날 보았다. 그런 그를보다가 빙긋 웃으며 아직까지 내 볼에 닿아있는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그리고 똑바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에요?" " . . . " "말해봐요, 세브릭. 내가 누구에요?" "엘 . . " "나요, '이곳'에 처음 왔을때도 죽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만약 내가 죽어야했다면 벌써 죽어야 될 상황이 아마 열번은 족히 넘을꺼라구요." "그건 . . " "그건, 세브릭이랑 사켄이 날 지켜줬기 때문이잖아요. 그리고 내 스스로의 능력도 있고." "당신이 무슨 능력이 있다는거죠?" 세브릭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난 최대한 활짝 웃어주며 말했다. "그 어떤 누구도 날 보면 숭배하게만드는 매력!" ". . 좋아요, 동굴안에 얌전히 있도록 해요." "으앗! 세브릭 무시하지말아요! 지금 내 매력을 무시하는거에요?" "얌전히 있어요, 알았어요?" 세브릭은 내 말을 철저히 무시한채 내 손에서 자신의 손을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레 떨어진 온기에 허전함을 느끼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가지말아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떠나시나요-" " . . . 에 . . 엘?" "흐윽- 다이아반지에 넘어간것이 그리 큰 잘못이었나요!" "무슨 말을 하는건가요! 이 . .이거 놓으세요!" 당황하는 세브릭의 바짓가랑이를 꽉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았는지, 세브릭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절대로 . . 절대로 내 옆에만 있어요. 알겠어요?" "물론, 당신의 옆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께요." "떠나면?" "음, 세브릭한테 뽀뽀 10번정도 하기?" "이럴때도 장난인가요?" 지쳤다는 듯이 말하는 세브릭을 보며 그의 옷을 놓고 몸을 탈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옷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옷을 손에 들고 심각하게 그 옷을 쳐다보았다. 아직 축축한데 . . 심하게 축축한데 . . " . . . 세브릭, 그냥 그 상태로 나갈래요?" "지금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인가요?" "에이, 저들도 눈보신하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남의 구경거리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세브릭의 말을 들으며 나 역시 폭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뒤돌아보지 말아요- 뒤돌아보면, 세브릭 변~태." "절대 안볼테니, 옷이나 갈아입어요." 그가 이를 갈며 하는 대답에 킥킥 웃으며 세브릭의 옷을 벗고 축축한 내 옷을 입었다. 뼛속까지 시리게하는 냉기를 느끼며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 위에 로브까지 입은채 세브릭의 옷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내 체온에 따스해진 옷을 보며, 세브릭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옷을 받아들고 바로 입었다. "따뜻하죠?" " . . 그렇군요." "우훗- 부끄러워라." 실제로도 얼굴이 발그레해졌기에 동굴이 어두운것에 감사하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 웃음을 묘한 표정으로 보더니 다시한번 내게 말했다. "내 옆에만 있어요." "걱정말라니까요." "정말 . . 내 옆에 있어줘요."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매세요." 내 당찬 대답에 세브릭은 뭔가 씁쓸해보이는 미소를 짓곤 자신의 검을 확인한 후에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멀뚱멀뚱 보다가 나 역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만족스러운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조심스럽게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입구에서 여러명의 검은복면인들을 보게 되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힐끔 류를 보았다. . . 과연, 류가 살인을 허용할까. 나 역시 내가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에 대해서는 . . 전혀 . . 전혀 눈꼽만큼도 생각해본적없는데.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보다가, 세브릭이 내 손을 끌고 자신의 뒤에 날 감추기에 나 역시 얌전히 그를 따랐다. 옆에 있으라해놓고서는, 뒤에 세워두다니. 이거 약속이 틀리잖아. 아무리 툴툴대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을 투덜거림이었기에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이 긴장감 넘치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엘을 노리는건가요?" 이 상황에서도 여유있게 말을 높이는 세브릭의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가 피식 웃었다. 그들은 세브릭의 질문에도 대답치않은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모습에 세브릭은 자신의 검을 꽉 잡았다. 그의 등 뒤에 서있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 .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헤에- 그럼 나 칼침맞을텐데요?" 내 대답에 잠시 세브릭이 비틀거리더니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절대로, 당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꺼에요." "응. 나도 알아요." 류가 살랑거리며 숲을 돌아다니더니 유유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부드럽게 한번 날 감싸안고는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류가 해준 말에 난 나도모르게 내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세브릭, 있잖아요. 지금 엄청 위험하잖아요?" " . . . 그래 . .서요?"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이제 . . 다시는 못할 지도 모르는데." 여유로운 내 목소리에 세브릭이 다시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그의 장밋빛 눈동자를 보며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없어요?" " . . . 할 수 있어요." "에?" "절대로, 할 수 있으니까 . . 지금은 하지 않을꺼에요." " . . 세브릭도, 되게 고집쟁이네요."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세브릭은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말해주지 않는구나. 내가 잘때는 그렇게 잘표현하면서 . . 만약 지금 그가 고백한다면 . . 확실하게 . . 그의 마음을 거절할 수 있었는데. 작게 한숨을 쉰 난 세브릭의 손목을 잡았다. 세브릭은 검은 복면인들을 경계하다가 흠칫 놀라며 날 보았다. "걱정말아요." " . . 엘?" 검은 복면인들의 뒤에 펼쳐진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류가 말했던 것을 생각하며 난 싱긋 웃었다. 《【청발에 청안을 지닌 남자와 녹발에 녹안을 지닌 남자 . . 그리고 여럿이 오고 있더군요. 그들은 당신의 동료 아닌가요?】》 "난 [아라]거든요." "무슨 . . " 검은 복면인들까지 모두 뒤에 시선이 몰려있을때, 수풀에서 여전히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는 청아한 외모의 사내가 나왔다. 그 뒤로 빙글 웃고있는 풀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우릴 보며 활짝 웃었다. "여어- 우리가 제 시간에 왔나?" "오랜만이에요, 라세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날 빤히 보고 있는 청발에 청안의 난(蘭)과 같은 고아한 기품을 지닌 사람을 보며 웃었다. "잘지냈어요?" "그대야말로, 잘지내었소?" "보시다시피." "별로 잘지내지 못했나보군." 차분히 복면인들을 보는 그의 시선에 다시한번 활짝 웃으며 말했다. "보고싶었어요, 아크산." 내 말에 아크산의 청안이 부드럽게 풀렸다. 새벽의 차가운 빛을 받아 맑게 빛나는 청안을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을때, 세브릭이 내 옷깃을 확 잡아당겼다. 그에 살짝 비틀하고는 왜 그러냐는 듯한 시선으로 세브릭을 보자, 그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입을 불퉁하게 내밀고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크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요? 뭐가 또 불만이에요?" "보고 싶었다고요? 당신을 납치한 저 자를 말인가요?!" "잉, 하지만 보고 싶은걸 보고 싶었다 하지 어떻게해요? 평소처럼 거짓말이라도 할까요?" "차라리 지금 그 말이 거짓말이었으면 좋겠군요." "하하- 여전히 티격태격하네. 달라진거라고는 엘의 외모가 더 찬란해진건가?" "아, 라세스. 당신의 입은 항상 너무 솔직하다니까요. 티격태격대다가 라세스의 말을 들은 나는 또 좋다고 헤실거리며 웃었고, 그 모습에 세브릭은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렸다. 하지만 우리의 소란상태에 잊혀진 검은 복면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아크산 일행을 보며 당황하는 듯 보였다. 그들의 당황을 느끼고 픽 웃으며 아크산을 보았다. 아크산은 잠시 검은 복면인들을 보던 시선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우린 서로 묘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곧 슬그머니 가운데에 끼어든 세브릭 때문에 묘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크산과 세브릭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한쪽은 화려한 장미빛의 세브릭, 다른 한쪽은 고아한 난과같은 아크산. . . . 이거 정말, 눈 뜨고는 못볼정도로 아름다운 구도야. 잠시 이 아름다운 구도에 행복감으로 가득 젖어있던 나는 곧 들려오는 아크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오랜만이오, 세브릭." "그렇군요, 별로 보고싶지는 않았지만 말이에요." "나 역시 그대가 엘 곁에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소." "그거 안타깝게 됬군요." 세브릭은 부드럽게 날 자신의 품에 감싸안더니 아크산을 보며 웃었다. "지금 엘은 저와 함께 있으니까요. 다시는, 그때처럼 허무하게 당신에게 보내지 않을꺼에요." "아 .. 저기, 지금은 우리가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아크산과 세브릭의 대립에 라세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그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곧 가운데에 끼인 검은 복면인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날 자신의 품에 안고 있던 세브릭은 다시 조심스럽게 날 자신의 뒤편으로 보냈다. 그의 손에 의해 앞뒤로 왔다갔다거린 난 좀 귀찮았지만, 아크산과 세브릭의 묘한 대치 때문에 슬금슬금 민망하기도 했다. 이보라구요. 지금 한명은 도둑키스하고, 다른 한명은 날 [아라]라고 생각하고 . . 나보고 뭐 어쩌라는거에요? . . . 이런 행복한 상황을 두고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가야하다니. 지오한테 투정이나 부려볼까. . . 어쩌면 돌아가는 시간을 늦출수 있을지도. 머리 속에서 맹렬히 내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대해서 재고해볼동안 검은 복면인들과 세브릭, 아크산들의 대치는 점점 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검은 복면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곧바로 세브릭과 내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달려들때, 라세스와 아크산 역시 검은 복면인들에게 검을 빼들고 다가갔다. 세브릭의 뒤에 꼭 붙어서 검은 복면인들이 내게 조금이라도 다가오려하면 정강이를 차버릴 요량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긴장하고 있었지만, 나한테까지 올 정도의 실력자는 없었나보다. 아니면, 뒤에서 한명한명 베고있는 아크산들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슬금슬금 풀리는 긴장으로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고 있을때, 갑자기 반대편에 있던 아크산의 눈동자가 커졌다. "엘, 피하시오!!" "아?" 그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을때, 어느새 세브릭의 시선을 따돌린건지 검은복면인의 사내가 내게 검을 들이밀었다. 이제 죽겠다 싶어서 눈을 감았을때, 촤악하는 소리와 함께 털썩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빳빳하게 굳어진 몸 때문에 천천히 눈을 뜨자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검을 든 사켄이 보였다. "아 . . 사 . . 켄. . ?" "괜찮은가?" 날 위아래로 살펴보며 묻는 사켄에게 어색하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 쪽에 쓰러진 시체에는 시선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제길, 남자인간 갑자기 뛰어내리면 어떻게 해!" 위 쪽에서 투덜투덜 거리는 하브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중부양하고 있던 하브는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와 내 바로 옆에 착지하더니 사켄과 똑같이 날 살펴보며 말했다. "다친데는?" "없어요. 예상외로 빨리 찾았네요." "네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필사적으로 찾았으니까." 툴툴거리는 하브를 보며 그의 고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는 이제 조용해진 세브릭쪽을 바라보았다. 밑에는 녹회색빛의 풀들에 붉은 빛이 서려있었고, 모두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검을 쥔채 가볍게 심호흡하고 있었다. "와 . . 이건 뭐 . . 얼른 황제 폐하를 찾으러 가야겠네요." "무슨 소리죠?" 세브릭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 말에 스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렸다. 아, 거기다가 지오까지 강림하면 . . 그건 정말 환상적이겠는데. "그보다, 왜 . . . " 사켄이 아크산을 보며 말하자, 세브릭은 내게 다가와 꼼꼼히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크산을 보았다. 우리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아크산은 차분하게 검을 털고는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위를 잠시 살펴보고는 우리를 보았다. "대화하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닌것으로 보이오만." " . . 확실히 그렇군요." 그들의 말에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주위에 흐르고 있는 류를 보았다. 류는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이젠 말하지 않아도 부드럽게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는 이들에게 다가가 감싸안았다. 그런 류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 다시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는 양쪽을 번갈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말만하지말고 자리를 옮기면 안될까요?" 내 말에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에 싱긋 미소짓곤 뒤돌아서 푸른 새벽의 안개를 헤치며 걸었다. 뒤에서 사박사박 따라오는 소리를 들으며 눈에 선명히 남은 붉은 자국들을 하나하나 지웠다. 미안해요. 눈을 감았음에도 서려있는 붉은 기운이 지워지지 않아서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곤 갈회색의 나무를 쳐다보며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그들의 죽음을 내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내탓이었다. 그들이 내 목숨을 원했기에 정당방위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죽음은 나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내 마음 속을 파고 들면서 쓰린 상처를 남겼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곳'에서 너무 가깝다. 죄책감을 가지고 싶지않아도, 마음이 무거워지기만 한다. 순간 시야가 흔들리며 비틀거렸다. 탁하고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채서 단단히 날 잡아주었다. " . . 어딜 다친건가?" "아, 사켄 . . " 걱정이 서린 회색빛의 눈동자를 보다가 그저 웃어버렸다. 지금 이건 내 몫이라는 생각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웃었다. 내 웃음에 사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흔들림을 모르는척해버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거절하며 다시 걸었다. 지금은 그냥 걷고 싶었다. 아무 생각없이 . . 아니, 솔직히말하자면 생각을 정리하면서 걷고 싶었다. "정말 다친건가요?" 바로 옆에서 세브릭이 조금 굳은 얼굴로 물어왔다. 그의 물음에 난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곤 빙글 돌아서서 그를 보며 말했다. "다친걸로 보여요?" " . . 아니면 어제 비를 맞아서 감기에 걸린건가요?"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에도 걱정이 서렸다. 뭐랄까 . . 사랑받고 있구나, 난. "과보호에요. 모두 . .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났을뿐이에요." "괜찮은가요?" "네. 괜찮아요.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요. 그보다, 사켄. 폐하는요?" 지금은 . . 묻어두자. 또 다시 가슴 속에 묻어야할것이 생겼다. 불안도, 두려움도, 죄책감도 . . 묻어뒀다가 후에 . . 후에 . . 더 이상은 숨겨야 할 필요가 없을때 모두 털어버려야지. "나와 하브가 내려왔으니, 그들도 곧 내려올꺼다." "하브를 타고 나는 기분이 어땠어요?" "네가 절벽에서 몸을 두번씩이나 내던진 기분을 알겠더군." 무표정함속에 감춰진 화가 느껴져서 아하하 웃고는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아크산을 보았다. 아크산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싶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조용히 날보았다. 그와 시선이 맞춰지자 천천히 그에게 물었다. "여기까지는 왠일이에요, 아크산? 날 탈출시켜주고나서 국왕 전하에게 무슨 일 안당했어요?" "일단 여기까지 온 것은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이고, 그대를 탈출 시켜준후에 별일은 당하지 않았소." 담담한 아크산의 대답에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해졌다. 날 만나기 위해서라고? 옴마나, 이거 또 이상한 생각이 들려하자나. "엘을 만나기 위해서라구요?" 내 대신 세브릭이 아크산에게 물었다. 아크산은 잠시 세브릭에게 시선을 두고는 다시 날 보며 말했다. "그대가 세 연합에게서 종전에 대한 동의를 얻은 것을 들었소. 그리고, 그에 나 역시 전쟁에대해 말할 것이 있어서 왔소." "아- 그거 때문이에요? 전쟁에대한 얘기?" 잠시 안도와 함께 묘한 허탈감이 마음 속에 돌아다녔다. 뭐지, 이 허탈감은? "그렇소." "전쟁에 대한 얘기라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입니까?" 사켄은 전과는 달리, 아크산에게 깍듯하게 존댓말로 물었다. 하긴, 용병 아크산과 하빔의 왕위계승자 아크산은 . . 다른거겠지. 내게는 별차이가없는 '신분'이라는 것은 이들에게는 그 사람을 판단짓는 '잣대'가 될테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물론있겠지만. " . . 그건 후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말하겠소." 급작스레 심각해진 아크산의 얼굴에 냉랭한 바람마저 숨죽이고 지나갔다. 아크산을 따라온 다른 사람들 중 라세스를 제외하고는 아크산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표정이였다. 그들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쉬었다. "그럼, 폐하에게 돌아가죠. 사켄, 폐하는요?" "자세히는 모르겠군. 절벽 위에 있을꺼라고는 예상하고 있지만." 사켄의 무뚝뚝한 대답을 들으며 손가락을 까닥까닥거리다가 하브를 보았다. 내가 자신을 보자 뭔가 불안했는지 하브가 날 빤히 마주보았다. "하브." 얕고도 달콤하게 그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하브가 후다닥 사켄에게 달라붙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싫어!" " . . . 에?" "뭐 시키려고 그러지?!" " . . 귀신이네요. 역시 이샤링족!" 내 마음을 알아채다니, 요즘 하브가 날 많이 알아버린 것 같단 말이지. 근데, 내 부탁이 뭐가 어떻다고 저렇게 기겁하는거지? "너랑 떨어지면 싫다니까!" " . . 아, 그 말 귀엽네요. 그럼 하브 빨리 폐하를 찾아보고 올래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듣지!" "아니, 들으니까 이렇게 대답하죠. 자자, 얼른 다녀오세요." 하브는 주먹을 꽉 쥐고 날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딴청을 부렸다. " . . . 너랑 떨어지면 기분이 이상해진단말야." 귓가에 들려온 하브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브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사켄의 뒤로 숨어버렸다. 그리곤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을때, 그의 금안에 가득찬 투명하고도 순수한 눈물을 보며 심장이 급격하게 간질간질해졌다. " . . . 하브, 이리와요." 생긋 웃으며 조심스레 두 팔을 뻗자, 하브는 불안한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사켄의 뒤에서 슬그머니 나와 주춤주춤 내게 다가왔다. 우리 투덜쟁이 하브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 . "괜찮으니까, 다녀와요. 날 찾는것보다 시간은 덜 걸릴테니까." "싫다니까. 난 너랑 있을꺼야." "음, 자꾸 그렇게 떼쓸꺼에요? 얼른 다녀와요. 난 어디 안갈테니까." " . . 싫 . .어 . . " 입술을 삐죽 내밀고 땅을 보며 자꾸 투정을 부리는 하브의 얼굴을 단단히 붙잡았다.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린후 부드러운 황금빛의 고수머리를 지나 하얀 이마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벙찐 모두를 가볍게 무시하며 멍한 눈동자로 날 보는 하브에게 부드럽게 웃어주며 말했다. "다녀와요." "엘 . . " "어제를 제외하면 항상 함께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 있을껀데. 뭘 걱정하는거에요?" 내 말에 날 멀뚱히 보던 하브가 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살며시 잡고 내 볼에 쪽하고 입맞추곤 휙하고 절벽위로 날아가버렸다. 하브가 떠난 후, 우리 일행은 침묵했다. 아크산과 테일러가 만났을때 번개가 번쩍치고 바람이 휭하고 부는 그런 소설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테일러는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었고, 아크산은 특유의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군. 카슘의 황제, 테일러 덴 카슘이오." "아크산 자 하빔이라 합니다, 폐하.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하오체가 사라진 아크산의 말이 약간 어색하게 들려서 힐끔 아크산을 보다가 테일러가 말을 꺼내서 다시 그를 보았다. "그래서, 하빔 왕국의 왕위계승자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로?" 테일러의 물음에 순간 아크산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하지만 곧 본래의 빛으로 돌아오더니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해야할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지금 들을 수 있겠나?" " . . 후에, 세엽합이 모두 모였을 때 말하겠습니다." 아크산의 대답을 듣고는 테일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들으라는 듯 귓가에 소근거렸다. "나보다 그대를 먼저 만났다지?" "역시 알고 계셨네요." "그도 그대의 취향인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실껀가요?" "절대 못믿겠군." "뻔한 대답을 왜 물어요?"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하자 테일러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간질거리는 테일러의 숨소리에 솜털까지 삐죽 섰을때 누군가가 나와 그를 떼어놓았다. " . . . 이건 무슨 의미지?" 테일러의 입가에 비뚜스름한 미소가 자리잡자, 날 자신의 뒤편에 세운 아크산이 그를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만, 엘에게 무슨 짓이십니까?" "보면 모르시는 것이오?" "제가 보는 것이 맞다면,엘은 폐하께 마음을 허락치 않은 것 같습니다만." 담담한 아크산의 대답에 테일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미소에 담긴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조금씩 불안해졌다. 우아- 아크산 왜이래요. 저 사람 심기를 건드려봤자 귀찮아지는건 우리라구요. "그렇소. 내가 그녀를 유혹하고 있는 형편이지." 그 말이 퍽 유쾌한듯 테일러는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을 보던 아크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혹?" " . . 저기, 사정이 있어서요." 내 말에 아크산이 가만히 날 보기에 그에게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그러자 그는 날 보던 시선을 돌려 세브릭과 사켄을 보았다. 그의 시선에도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짓는 그들이었지만, 뭔가 미묘하게 분위기가 변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소." "아하하 . . . " "허나 . . " 아크산은 그들을 보다가 천천히 날 바라보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하오." " . . 글쎄요. 그건 장담 못하겠는데요." 내 대답에 아크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청안에 담긴 부드러움을 보며 나 역시 웃었다. 그는 내 미소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내 귓가에 그 누구도 들을 수 없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대에게 할말이 있소." "할말?" "나중에 . . 꼭 하고픈 말이 있소. 그러니 . . " 아크산이 고개를 들면서 그의 차분한 청발이 내 볼을 간지럽혔다.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난 빼꼼히 고개를 들며 아크산을 보았다. 아크산은 내게 여전히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넘어가지 마시오, 엘." "노력할 . . 께요 . ." 절대로 심장이 두근거려서 이런 대답한거 아니야. 얼굴에 열이 확 올라서 이런 대답한거 아니라고. . 이건 . . 이건 그냥, 아크산이 할말이 있다니까. 미인의 말은 들어줄 수 밖에 없는 내 천성이라고!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때 누군가가 뒤에서 날 확 잡아챘다. 등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에 순간 팔에서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누군지 당연히 알수 있었다. "지금 그 말과 행동, 엄연히 월권이오? 아크산 왕자." 그의 목소리는 즐거운 듯 보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확인했을때 난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대가 참견할만한 일이 아니오." 테일러의 눈은 단 한번도 보지못했던 차가운 광기에 젖어 아크산을 잡아먹을듯 노려보고 있었다. . . . 이 사람은 무섭게 왜 이러는거야? 날 가운데에 두고 찬바람을 쌩쌩 달리는 두사람 때문에 모두의 분위기가 쏴해졌다. 아크산은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듯 두눈이 차갑게 식어있었고, 그의 옆으로 보이는 라세스는 뭔가 난감한듯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보고 있었다. " . . . 멋대로 엘을 당신들의 싸움에 끼우지 않아줬으면 하는군요." 세브릭은 또 왜그러는거야! 한발자국 앞으로 나와 냉정한 시선으로 아크산과 테일러를 보는 장밋빛 눈동자에 정말 울고 싶어졌다. 지오,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요. 당신의 장난이라면 . . 정말 . . 정말 완전 쌩유베리감사해요! 행복과 당황의 중간쯤에서 허우적거리던 난 기어코 현실도피를 하며 신을 찾게 되었다. 이런 내 상황을 전혀 모르는 . . 아니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이 남정네들은 스파크를 파지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아, 세브릭경. 그대야말로 이 싸움에 끼어들지말도록. 이건 나와 엘 사이의 일이니까 말이야." 테일러의 상큼한 미소에 세브릭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노려보는 세브릭의 옆에서 사켄이 천천히 걸어나와 테일러의 품에 폭 안겨있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능숙한(?) 솜씨로 테일러에게 묶여있는 날 풀어내고는 슬그머니 날 자신의 뒤로 보냈다. 사켄의 뒤로 가자마자 세브릭이 내 손목을 잡아서 뒤로 보냈다. . . 이건 릴레이야? 내가 바톤이 되는건가? "이건 또 무슨 놀이지?" 내가 묻고싶은 말이었어요, 테일러! 하고싶었던 말을해준 테일러에게 열렬하게 감사의 시선을 보내다가 멈칫했다. . . . 난 저 사람 싫단말이지. 그러니까, 감사의 표시 안해도 되지 않나? 아주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세브릭이 모두를 한번씩 번갈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엘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이상은 저희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걸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지금까지 조용히 있다가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테일러가 빙글거리며 웃자, 세브릭은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보다가 평소와 같은 장밋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는 당연히 저희가 신경쓸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과같이 엘이 곤란한 상황이라면 . . 저희 역시 신경쓸 수 밖에 없죠." 그 말에 한순간 분위기가 쏴해졌다. 테일러의 미소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점점 더 위험하게 빛나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방금 그 말 . . 그러니까 . . 테일러는 자신들이 신경쓸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 . . 맞겠 . . 지? "지금 그 말은 . . 엘이 내게 넘어올만한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고 단정지었다는 말로 들어도 되는건가?" " . . . " 사켄과 세브릭은 침묵했다. 그 침묵 끝에 테일러는 조금씩 어깨를 떨더니 마지막에는 배를 잡고 웃었다. 시원하게 숲을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무섭게 들리는건 왜일까. 그는 큭큭 거리며 눈물까지 글썽일정도로 웃어대더니 슬쩍 눈물을 닦으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여유로운 목소리로 세브릭과 사켄에게 말했다. "자만하는것도 정도것이어야지." 어느새 싹 굳어진 얼굴로 테일러는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날 보았다. 그의 시선에 움찔거리다가 베시시웃자, 테일러가 날 보며 굳은 얼굴을 풀더니 물었다. "그대도 같은 생각인가?" "무엇을요?" "내 유혹이 헛된 것이라 생각하냐고 묻는거지." " . . 제대로된 유혹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테일러가 재밌다는 듯 입가에 호를 그리더니 톡톡 자신의 턱을 건드리며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그의 시선 속에 있다가 힐끔 아크산쪽을 바라보았다. 아크산은 지금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는지 차가운 시선을 테일러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 뒤의 라세스는 날 보고 있었는지 순간 마주친 시선에 그의 풀빛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곧 눈을 감추며 빙그레 웃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낄새도 없이 또 다시 테일러가 말했다. "제대로 된 유혹은 어떤것이지?" "묻겠는데, 폐하는 어떤게 유혹이라고 생각하세요?" "흐음 . . 나 자체가 유혹적이지 않나?" 매력이 넘쳐흐르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테일러의 모습에 순간 그것도 그렇지만 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려서 얼른 고개를 훼훼 저었다. 이런 미친 생각이 들다니 . . 하긴, 테일러같은 미인이 매력적이긴 해. 저 독점욕이라던지 소유욕이라던지 . . 아님 광기라던지. 뭔가 묘-하게 매력적이잖아. 하지만 . .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생긋 웃으며 하는 말에 세브릭과 사켄뿐만아니라 아크산까지 내 쪽을 훽 쳐다보며 두눈을 이글거렸다. 아, 말 잘못한거야? 난 그냥 사실을 말한건데? 살짝 등쪽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고는 세브릭의 뒤에서 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유혹이라는건 말이죠." 한마디한마디하면서 세브릭을 스쳐지나가고. "폐하같이 날봐라- 나 유혹적이지 않은가? 라는 유혹은 솔직히 구미가 안당기거든요." 한걸음 더 옮기며 이번엔 사켄을 지나쳤다. 테일러는 그런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고, 난 샐쭉 웃으며 그의 앞에서서 뒷짐을 지며 그에게 말했다. "유혹이라는게 뭔지도 모르죠? 폐하는 항상 유혹당하는 입장이었을테니까." "부정하지 못하겠군." 테일러의 긍정에 난 살짝 웃으며 뒷짐을 풀었다. 그리고 등에 꽂히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손을 올렸다. 테일러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가는 것에 작은 즐거움을 느끼며 슬쩍 그의 거친듯한 보랏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내 손길에 그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폐하에게 유혹당하고 싶지 않거든요?" 서서히 내 손은 머리카락에서 귀로 그리고 턱선을 살짝 훑고 마지막으로 그의 뺨에 닿았다. 그의 뺨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는 그의 호흡과 온기, 그리고 무서울정도로 집중된 보랏빛 눈동자에 애써 담담히 웃었다. 조금씩- 서두르지 않고. "유혹당하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하면 되는줄 아세요?" " . . 어떻게 하면 되지?" 조금씩 입가가 부드럽게 풀리며 빙그레 미소짓는 그의 모습에 난 살짝 발을 세우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익숙하게 고개를 숙여주었고, 그의 배려아닌 배려에 또 웃음이 나왔다. "먼저 유혹해서 넘어오게 하면 되는거에요." " . . 간단하군." "그렇죠?" 그와의 얼굴간격이 불과 손가락 한마디정도 되었을때, 그의 숨결이 내 입술에 닿았을때 난 키득거리고 웃고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테일러의 붉고 색기어린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조금씩 심장이 떨려왔다. "두근거리세요?"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테일러는 분명히 들었는지 쿡 웃었다. 그리곤 천천히 내 귓가에 중얼거렸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흐음- 어떨까나." 그의 뺨을 잡고있지 않은 한쪽 손을 그의 심장위에 올렸다. 두근두근- 조금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소리에 나도모르게 정말 장난어린 미소가 지어졌다. "뛰고있네요." " . . " "두근-두근 . . 두근두근- 뛰고있네요." 천천히 내리깔았던 눈을 올렸다. 그의 시선에 똑바로 맞추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 나한테 유혹당했어요?" "아아-" 내 말에 킥 웃은 테일러가 조금씩 다가오더니 내 입술 바로 앞에서 중얼거렸다. "유혹당한 것 같군." 그 말과 함께 허리에 둘러진 테일러의 손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테일러의 입술과 닿기 직전 강력한 힘이 날 끌어당겨 그와 떨어졌다. 뭔가 아쉬운듯 자신의 손을 보는 테일러를 보다가 고개를 뒤로젖혔다. "사켄?"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는 사켄의 모습에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질투했죠?" 내 말에 사켄이 한숨어린 시선으로 날보더니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이래서 사켄이 좋다. 사켄은 무엇을하던 항상 든든하게 날 받쳐주는 사람이었다. 무뚝뚝하지만 다정하고, 차가워보이지만 실은 녹아버릴정도로 달콤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빙글거리며 웃다가 앞쪽에 빙긋 웃고있는 테일러를 보며 말했다. "폐하." "왜 그러지?" "나랑 있을 동안은 싸움 금지에요." " . . . 흐음?" "안그러면 다신 폐하랑 안놀아요." 내 유치한 발언에 테일러가 큭큭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테일러를 보던 시선을 돌려 아크산과 사켄, 세브릭을 보았다. 그들 역시 내 시선에 조금씩 긍정을 표하는 모습에 만족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분위기를 정돈하고 출발하기 직전, 세브릭이 내게 다가오더니 스쳐지나가며 중얼거렸다. "당신 때문에 정말 돌아버리겠군요." 아아- 세브릭. 나도 지금 내가 벌여놓은 일때문에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이에요. 내 말 때문인지 아크산과 테일러가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커다란 부딪힘없이 우린 대륙의 중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세엽합의 경계선이 맞닿아있는 '라트비엔타'라는 곳이었다. 특별한 점 하나없는 지역이지만 생명의 숲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연합이 맞닿아있는 곳이라 사람하나 살지 않는 . . 그야말로 이름만 남은 지역이었다. 뭐, 이번에 그곳에서 전쟁에대해 마무리가 된다면 라트비엔타는 발전할 수 있을지도? 가만히 라트비엔타를 생각하다가 깊게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크산들이 합류한 이후로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듯 불안해졌다. 테일러가 내게 조금만 말을 걸려하면 어느새 아크산이 내게 말을 걸었고, 테일러와 아크산이 맞붙을때쯤엔 세브릭과 사켄이 조심스레 날 감싸며 다른곳으로 가버렸다. 싸우기 직전이던 그 둘은 의미모를 시선으로 세브릭과 사켄을 보았다. 네명의 미묘한 신경전에 죽어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었다. 난 내가 벌여놓은 일이 있어서 모른척하고 있었지만 . . 지금 그 일보다도 더 신경쓰이는 것은 라세스였다. 라세스는 뭐마려운 강아지마냥 내게 불안한 시선을 던져서 내 신경을 건드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얼른 할것이지, 남자가 왜 저렇게 우물쭈물하는거야? 조금씩 신경이 날카로워질때면 하브가 톡톡 내 볼을 건드리며 표정 풀라고 했기에 그나마 가느다랗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브는 저번에 내 볼에 뽀뽀한것이 많이 부끄러웠는지 자꾸만 나와 시선이 마주칠때마다 딴청을 부리며 시선을 피했다. 뭐 그의 그런 행동에 내 불쾌지수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복숭아빛으로 뺨이 붉게 물들어서는 날 힐끔 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 후다닥 세브릭의 모자속으로 숨어드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하브뿐만 아니라, 사켄, 세브릭, 테일러, 아크산 모두 독특한 매력과 함께 아리따운 외모 때문에 난 행복한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아, 지오. 절 시험에 들게하지 마소서. 당신의 아름다움과 상냥함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사람이라고요.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고 있는데 드디어 라세스가 결심이 섰는지 내게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에 몇몇이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를 보았지만, 라세스는 무시하는건지 못느끼는건지 . . 아마도 후자로 생각되지만, 어쨌든 내게 다가오더니 한걸음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췄다. "엘, 잠시 할말이 있는데." "무슨 말이요?" 아, 드디어 말할 생각이 들었어? 그래, 뭔말인지 들어나보자. "여기선 좀 . . " "응? 여기서는 말 못할 말?" "비밀스런 말이거든."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가 내밀어준 손을 잡으며 탁탁 옷을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날 보는 이들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따라오지 말것. 따라오면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꺼에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켄. 바둥거리는 하브를 손에 꼭 잡고 힐끔 날 보는 세브릭.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아크산과 테일러. 모두를 뒤로하고 라세스를 따라갔다. 만약 라세스가 내게 지었던 웃음이 예전과는 달리 서글픈 것을 알았더라면, 아니면 그의 눈이 날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 . 어쩌면 . .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벤트편> "그럼 오늘도 좋은꿈들꿔요- 내 꿈꿔서 날 너무 귀찮게는 하지 말구요." 예쁘게 웃음짓는 내게 모두는 굳은 표정보다도 더한 썩은 표정으로 날 보았다. 그런 그들을 모른척하며 내 방으로 들어가 딱딱한 나무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모아 안은 후에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뭇결을 따라갔다. 요즘 통 잠이 안온단 말이지. 그렇다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 . 아니, 꿈을 꾸는것같기는 한데, 아침엔 통 기억이 안나니까. 천장의 무늬들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어둠속으로, 꿈 속으로 한발짝씩 걸어들어갔다. "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으 . . .잠 . .시끄 . .러워 . ."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시계 소리에 팔을 더듬거리며 알람시계를 껐다. 이상하다 . . 평소라면 누군가가 와서 깨워줬을텐데 . . 세브릭의 새침한 아침인사라던지, 사켄의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굿모닝이라던지. 아니면 하브의 악악대는 귀여운 . . . 뭐 그런걸로 깼어야하는데. 이건 마치. . 마치 '내 세계'에서의 아침과 같잖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옥색의 책상. 그 옆에 갈색의 옷장. 가지런히 걸려있는 교복. 내가 덮고자는 분홍빛 이불. 하늘빛의 베게. 그리고 . . 고요한 새벽의 소리. " . . 뭐지?" 이건 꿈인가? 아니면 . . 방금까지 있었던 곳이 꿈이었던건가? 잠시 침대에 앉아 정면을 주시했다. 소름돋는 현실의 침묵이 내 몸에 다가왔다. 꿈이었던건가? '그 곳'에서의 일이. 지오와 만나 '그곳'으로 넘어간것이 모두 꿈이었던건가? 세브릭도, 사켄도 . . 하브도 아크산도 라세스도 테일러도 . . 모두 꿈이었던거야? "어이없네 . . 나 꿈도 너무 현실적으로 꾸는거 아니야? 아님 . . 망상이 너무 지나쳤나." 어젯밤 읽다가 책갈피를 끼워놓은 책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아침, 난 학교에 가야하는 학생이었으니까. 깨끗하게 샤워를 마치고 가볍게 토스트를 입에 문후에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엄마도 아빠도 아직 잠에서 깨지않았고, 동생은 . . . 뭐 자기가 알아서 학교가겠지. 아직까지도 현실같지가 않아서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한번 심호흡한뒤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 . " . . 정말 늦게 나오는군요. 평소보다 5분이나 늦었어요. 알고 있나요?" "뭐랄까 . . 꿈이 아닌건가요." " . . 아직 헛소리인가요? 잠꼬대는 집에서나 하시죠." 붉은 장밋빛 눈동자로 한심하게 날 보는 세브릭. 그는 구불구불한 긴 장밋빛 머리카락을 가볍게 하나로 묶고,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남색의 마이와 하얀 와이셔츠. 마찬가지로 남색의 넥타이. 회색바지. . . . 잘어울려. 교복이다, 교복! "세브릭?" "정말 잠에서 덜깬건가요? 지각하고 싶지 않으니, 얼른 걷는게 어떨까요." 살짝 눈을 찌푸리는 모습도 세브릭. 하지만 . . 하지만 . . "세브릭이 왜 여깄어요?" ". . . 정말 잠에서 덜 깬건가요? 평소와 다르군요." 계속되는 내 말에 세브릭이 한걸음 내게 다가오더니 한손을 내 이마에 짚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살짝 눈을 감더니 곧 눈을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열은 없는데." " . . 뭐, 좋은게 좋은거겠죠. 학교 갈까요?" 생긋하니 웃고는 그의 손을 잡고 가로수가 길게 늘어져있는 인도를 걸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손 놔줄래요?" "싫은데요- 놓고 싶으면 날 버리고 가세요." " . . 젠장." 이건 . . 지금 이 상황은 꿈이다. 학교에 도착하자 모두가 세브릭을 보며 얼굴을 붉힌다. 하긴 당연하지. 우리 세브릭은 미인이니까. 괜히 내 어깨에 힘이들어가며 생글거리며 웃다가 턱하니 내 책상을 손으로 누군가가 짚는 모습에 고개를 들었다. "여어- 오늘도 세브릭이랑 사이좋네?" " . . 라세스 눈에도 그렇게 보여요?" 역시나 꿈이구나. 라세스가 우리반이라니. 여전히 하나로 묶은 머리. 하지만 다른것은 그도 세브릭과 마찬가지로 우리학교 교복을 입고있다는 것. 그는 서글서글하니 웃더니 내 책상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날 보았다. 그런 그를 나 역시 마주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요? 오늘따라 내가 너무 예뻐보이나요?" "응, 그냥 캭 덮치고 싶네." "아- 그거 위험발언이에요. 그대로 깜빵가서 콩밥먹어야되는 발언이라구요." "그런가? 장난인데 뭐 어때." 어깨를 으쓱이는 라세스였지만 난 그에게 웃어주며 말했다. "라세스 뒤에 있는 분은 그렇게 생각안하는것 같은데요?" "응? . . 아 . .하 핳. . 세 . .세브릭." "학생이면 학생답게 얌전히 자리에 앉아 수업준비나 할것이지. 왜 엘에게 껄떡거리고 있나요, 라세스?" 세브릭은 옅게 미소짓고 있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세브릭을 멀뚱히보며 어색하게 웃음짓던 라세스는 곧 자신의 자리로 줄행랑치며 푹하니 한숨을 쉬었다. "왜그래요? 질투하지말라니까요." "당신이 항상 그렇게 가볍게나오니까, 라세스가 저런 말을 하는것 아닌가요? 좀 조심하는게 어떨까요." "네네- 제가 잘못했어요." 교복차림의 세브릭은 색다른걸. 뭐랄까, 묘하게 더 멋져보이잖아. 역시 '-복'자 들어가는 것들은 남자들을 훨씬 멋져보이게 한다니까. 그는 계속 자신을 훑어보는 내가 이상한지 눈을 찌푸리다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내 자리는 교탁 바로 앞. 그러니까 선생님이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곧 종이치고 와글와글거리던 아이들은 제자리에 앉아 얌전히 문을 주시했다. 뭔가 모두 묘하게 들떠있는 모습이 이상하기 짝이없었다. " . . 세브릭, 모두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것같지 않아요?" "그야 . . 새로운 교생선생님이 오기 때문이겠죠." 세브릭의 대답에 나 역시 문을 기대에 찬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교생선생님이라 . . 이거 정말 기대되는데, 어떤 선생님이 오실까나. 드르륵-하는 문여는 소리와 함께 눈웃음이 그윽하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우리의 눈을 보더니 씨익 웃으시며 문을 향해 말했다. "선생님, 들어오십시오." "실례하겠습니다." 문 쪽에서 가볍게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난 잠시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춰야만했다. "모두들 인사하거라, 우리학교에 교생 선생님으로 오신 '지르오디스' 선생님이시다." 아름다운 실버블론드 머리카락을 아래쪽에서 느슨하게 묶고 부드러운 청록색 눈동자로 아이들을 훑어보는 . . "안녕하세요, 여러분. 한달간 잘부탁드릴께요, 지르오디스라고 해요." 지오, 나의 신(神). "와아아- 으아, 완전 좋아!" "선생님, 멋져요- 꺄아악!"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반응에 지오는 수줍은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내 심장이 맹렬히 간질거렸다. 얼른 그에게 달려가서 안겨버리고 싶다. " . . 정신차리는게 어때요?" "음?" 멍하니 지오를 보던 눈을 돌려 뭔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날 보는 세브릭을 보았다. 세브릭은 나와 지오를 번갈아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차리라구요." " . . 질투하지 말라니까요. 내가 좋음 고백을하라니까, 왜 고백도 안하고 질투만해요?" "네, 아직도 당신은 꿈속이라는거군요." 정확히 정답을 말하는 세브릭의 말에 싱긋 웃고는 다시 지오를 보았다. 세브릭과 얘기를 하는 내내 지오가 날 보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지오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살짝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하긴, 여긴 내꿈이고 . . 그는 나와 처음 만난거니까. 살짝 한쪽팔로 턱을괴고 샐쭉 웃었다. 꿈이니까 . . 그렇지? 쉬는 시간, 선생님이 나가시고 벌컥하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문에서 맹렬히 돌진해오는 금덩어리가 보였다. 쾅-하니 내 책상을 친 금덩어리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세브릭을 한번 쳐다보고는 날 보며 소리쳤다. "엘!" "네, 왜 그래요, 하브?" 그래, 놀랄필요도 없는거다. 이건 꿈이니까, 언젠가는 깨어날 꿈이니까 말이야. "왜 내가 너랑 같은 반이 아닌거지?" "그야, 하브는 나보다 어리니까요." "젠장, 넌 왜 나보다 나이가 많은거야!" "원망하려거든 부모님을 원망해요. 아님, 하브가 좀 빨리 태어나지 그랬어요." "으이익- 마음에 안들어." 털썩하니 내 책상에 걸터앉은 하브의 고수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문쪽에서 안쪽을 기웃거리는 소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에프릴. 오랜만이에요." "아 . . 안 . .안녕하세요." 수줍게 볼을 물들이는 에프릴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녀에게 살짝 손짓하자 쪼르르 안으로 들어오며 얌전히 내게 쓰다듬을 받으며 어쩔줄 몰라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 다도부때문이지." " . . 다도부?" "넌 니가 든 부도 잊은거야?" "하브, 아무리 친하다고는 해도, 저희는 엄연히 선배란걸 잊은건가요?" 날카로운 세브릭의 말에 하브가 꾹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보더니 이를 악 물고 말했다. "검도부는 좀 꺼지시지. 난 지금 엘과 얘기하는거야." "나 역시 당신의 선배라는걸 잊은건가요?" "흥, 내 알바아니지." 훽 고개를 돌리는 하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다가 에프릴을 보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에프릴은 내 시선에 얌전히 웃더니 말했다. "아 . . 아크산 선배가 오늘 좋은 차가 들어왔다고 . . 함 . . 함께 마시자고 하셨어요." "그랬어요? 세브릭, 같이 갈래요?" " . . 그러도록하죠." 세브릭과 하브는 여전히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종치는 소리와 함께 하브가 흥 소리와 함께 에프릴을 데리고 바람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세브릭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건방지기 짝이없는 후배군요." "왜요, 귀엽잖아요." "당신의 귀여움의 기준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군요." "뭐, 내 귀여움의 기준은 언제나 세브릭이죠." "닥쳐요." 어이없다는 듯한 세브릭의 말에 살며시 웃으며 칠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곧 드르륵 소리와함께 숨죽인 비명소리가 들렸다. "오늘, 국어 선생님 대신 수업을 맡게된 지르오디스에요. 부족하지만 이번 시간 잘부탁드릴께요." 부드럽게 미소짓는 지오의 모습에 모두가 소리지르듯 "예!"라고 대답했다. 지오는 반아이들에게 다시 달콤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분필을 잡아 글씨를 썼다. "오늘 몇페이지지요?" "139p지요!" "네, 그럼-" 조곤조곤 다정하게 속삭이는듯 말하는 지오의 말소리에 모두 넋을 놓고 지오를 쳐다보았다. . . 저런 선생님이라면 난 정말 국어 100점 맞을 수 있어. 아이들은 간간히 지오에게 질문을 던졌고, 지오는 그 질문에 모두들 가볍게 미소지을 수 있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 그를 멀뚱히보다가 살짝 손을 들었다. "네, 거기 . . 이름이 . .?" "엘이라고 해요, 지르오디스 선생님." "네, 엘. 질문이 있나요?" 지오의 청록빛 눈동자에 내가 온전히 담기는 것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연인이 있으신가요?" "네?" 당황한듯 하얀 볼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에 모두가 맞아요, 있어요? 라는 질문을 던졌다. 지오는 허둥지둥하더니 날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까지 없어요." "꺄아아아아- 없으시데!" 여자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지오에게 부드럽게 웃었다. 지오는 내 미소에 살짝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무슨 생각이죠?" 교과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필기하는 세브릭을 힐끔 보고는 나 역시 교과서를 보았다. 그리고 볼펜을 한번 빙글 돌리고는 중얼거렸다. "꿈이잖아요." " . . 무슨?" "비밀이에요-" 세브릭에게 찡긋 윙크하고는 지오를 쳐다보았다. 힐끔 날 보는 지오에게 풋하니 웃어주고는 다시한번 볼펜을 빙글 돌렸다. 꿈이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잖아. 그치? "선생님." 수업 종이 치고, 복도를 벗어나는 지오의 이름을 불렀다. 역시 내 꿈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는 계단에서 지오는 계단에서 날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웃고있는 내게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무슨 질문이 있나요?" "네. 아까 묻지 못한 질문이 있어서요." "그래요? 무슨 질문인가요?" 다정하게 웃어주는 지오를 보며 난 싱긋 웃었다. 내 웃음에 지오 역시 의아한듯 하지만 부드럽게 웃어주는 모습에 그의 넥타이를 손에 쥐고는 훽 당겼다. 동그랗게 떠진 청록빛 눈동자를 마주보며 샐쭉하니 웃으며 물었다. "연인 있어요?" " . . 아까 . . 없다. . 고 . . 그보다, 엘? 이게 무슨 . . " "그래요?" 그의 넥타이를 놓았다. 한걸음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는 지오를 보며 뒤돌아섰다. "엘?" 날 부르는 지오의 목소리에 자리에 멈춰서서 고개만 돌려 그를 보았다. 당황한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난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했다. "비밀-" " . .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내 등을 보는 지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아직은- 때가 아닌것 같아서 말이지. 점심시간이 되었다. 갑자기 쳐들어온 하브에게 잡혀 질질 끌려가듯 복도를 걸었다. "아, 우앗- 하브. 넘어져요. 나 넘어진다니까요?" "잡아줄테니까 시끄러워." "아- 너무해. 안넘어지게 해줘야죠. 우 . . 우앗. 으앗-" 세브릭은 아까부터 뭔가에 뚱해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을 힐끔 보다가 에프릴이 다도부라고 써져있는 곳의 문을 여는게 보였다. "오셨소?" 자리에 단정히 앉아있는 아크산의 모습에 난 또다시 벙찌고 말았다. 아크산의 옆에는 무릎을 꿇고 차를 마시고있는 사켄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책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흘러내린 보랏빛 머리카락을 보아 테일러임을 알 수 있었다. " . . 모두 여기 모여있었네요." "사켄과 테일러는 검도부지만 평소처럼 함께 차를마시자고 내가 부른 것이오." "그러셨어요?" 아크산에게 빙긋 웃어주고는 나 역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앉자 다른 사람도 모두 자리에 앉았고, 그런 그들을 한번씩 쳐다보다가 비스듬히 한쪽 턱을 괴었다. " . . 무엇때문에 그러지?" 가벼운 침묵이 이어지던 도중, 사켄이 날보며 묻는 말에 난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내 시선에도 사켄은 한모금 차를 마시며 담담한 모습으로 다시 말했다. "평소의 너와는 분위기가 다르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 . . 별일 아니에요. 그냥 . . 현실에서도 이랬으면, 내가 고민했을필요는 없었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 . . 무슨 소리지?" "나도 차달라는 소리죠." 사켄의 꿰뚫어보는듯한 회색빛 눈동자를 일부로 외면했다. 꿈이라고는 하지만, 저 눈동자는 날 보고있을때 부드럽고 다정해서. 그냥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지니까. "여기 있소." 아크산이 건내준 차를 받으며 싱긋 웃어 고마움의 말을 대신했다. 창문에서 봄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차향을 걷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윽하게 스며든 차향을 즐기며 살짝 눈을 감았다. 이런 평화는 . . 이제 다시는 즐길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 . 조금 서글퍼졌다. 차를 마실때 먹은 다과로 배를 때운후 난 먼저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모두를 다도부에 남겨둔채 교정을 걷기 시작했다. 이리봐도 저리봐도 내가 찾고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발걸음을 돌려 학교 뒤에 있는 작은 정자를 향했다. 거기에도 없으면 . . 교무실로 가봐야하는걸까. 그건 귀찮은데. 몇번 눈을 깜빡이다가 옅게 귀여운 녹빛으로 물든 정자를 보고는 난 빙고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계셨어요?" "아, 엘." 내 목소리에 당황한듯 녹색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던 지오는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그의 흔들리는 청록빛 눈동자를 보며 싱긋 웃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 등장이 당혹스러웠던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라도 있는지 날 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예쁘죠? 우리 학교." "아 . . 네. 아름답습니다." "그쵸?" 그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정자에 마련되어있는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오는 내 시선에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나요, 엘? 선생님에게 뭐 물을 것이라도 . . " "참. . 선생님 예뻐서요." " . . 선생님을 놀리면 안돼요." 지오의 다소 엄격한 목소리에 키득거리며 웃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살랑이는 바람을 따라 그의 가느다란 머리카락도 흩날렸다. 깊은 그의 청록빛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조급해보이지 않게 느릿느릿 여유로움을 가득담아 말했다. "선생님." "네?" "지르오디스 선생님." " . . 엘?" "지오라고 부르면 화내실껀가요?" " . . 전 선생님이니까 .. 화는 내지 않아도, 허락할 수는 . . " 난처한듯 웃는 그의 달콤한 입매를 눈으로 따라그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화향(花香)을 가득 담은 바람이 거칠게 우리 주위로 몰렸다. 바람에게 살짝 고마워하며 그의 넥타이를 다시한번 손에 쥐고 그의 입술을 내 입술에 닿을듯 말듯 그를 잡아당겼다. "선생님, 여고생 좋아하세요?" "엘, 이 . . 이러면 곤란해요." "물론 곤란한건 아는데. 연하 좋아하세요?" "엘. 놓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 . " "화내실꺼에요? 화내면 미워요." 장난스런 내 목소리에 지오의 청록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에 날 살풋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싫어요. 선생님. 날 좀 봐주세요." "엘, 놔주세요. 여긴 학교 . . " "여기가 학교가 아니면요?" " . . 엘." "내가 학생이 아니고, 지오가 선생님이 아니면요?" " . . . 그래도 곤란해요." "그렇겠죠?" 내 대답에 지오가 아직도 옅게 흔들리지만 그래도 똑바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을 쳐다보던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난 안곤란해요." "에-" 넥타이를 쥔 손을 잡아당겼다.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이 달콤했다. 커다랗게 떠진 청록빛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살짝 그의 입술에서 내 입술을 뗐다. 멍한 눈동자로 날보는 그를 보며 다시 싱긋 웃었다. "난 아직 철들지 않은 어린 소녀거든요." " . . 이게 . . 도대 . . 체 . ." "첫눈에 반하지 않았어요." " . . 오늘 엘과 전 처음 본 사이 . . " 지오의 변명과도 같은 말에 난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이젠 포기했는지 살짝 눈을 감는 그의 모습에 빙긋 웃고는 다시 말하기위해 입을 뗐다. "선생님도 나 싫지 않죠?" " . .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 요 . . " "계속 선생님의 눈에 내가 들어오죠?" " . . 이유는 알수 없지만요." 다정한 그의 청록빛 눈동자에 담긴 난 사랑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내 꿈이잖아. 내 사람이잖아. "내 사랑이잖아요." " . . 엘?" 그의 의아한 부름을 생각할새도 없이 그의 목에 두팔을 두르고 다시한번 입맞췄다. 꿈이 아니면 . . 현실에서 다시 그를 볼 수 없잖아. 머뭇거리던 지오도 가녀려보이지만 힘있는 두팔로 내허리를 안고서 뜨겁게 키스해주었다. 숨쉬기 위해 살짝 입이 열린 틈을타 그의 달콤한 혀가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말랑하고 달콤한 지오의 향에 취해 몽롱해지는 정신을 가눌새도 없이 귓가에 멍멍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이니까요 .. 그렇죠?" " . . 지오 . . ?" "일어나, 엘. 언제까지 잘꺼야?" "음 . . " "일어나, 일어나라고. 일어나!" 악악대는 듯한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아 . . 꿈 . . " "뭐야? 무슨 꿈을 꿨길래 그렇게 불러도 안일어나려고 하는거야?" "아아 . . 좋은꿈 . . 꾸고 있었는데요." 하브의 목소리에 졸린 기운을 가득담은채 대답했다. "무슨 꿈인데?" " . . 기억안나네요."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무슨 꿈을 꿨더라 . . 몇번 눈을 깜빡이자 하브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그의 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잘잤어요?" "앙, 너 말고 다 일어났어. 얼른 일어나." "응차- 그래야죠." 무슨 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 "어쨌든 기분 좋은 꿈을 꾼건 확실하네요." 응, 뭔가 . . 정말 좋은 꿈을 꾼것같아.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빛 구름을 보며 싱긋 웃었다. "오늘도 좋은 아침이에요, 지오." "얼른 안나와?" "네- 나가요, 나가." 대충 침대를 정리하고 나가는 사이, 류가 날 부드럽게 휘감으며 힐끗 하늘을 보는듯 했던건 . . 내 착각이겠지. 【지오도 . . 못말리는 신이군요.】 그 목소리에 열심히 비틀림을 해결하던 지오가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은 류와 지오밖에 모르는 비밀- <이벤트편 끝> 사박사박- 라세스와 내 발걸음 소리만이 조용히 숲속에 흩날렸다. 라세스는 내게 등을 보인채로 무언가 고민에 잠긴듯 앞만보고 있었다. 서글서글한 평소와는 달리 뭔가 심각한 분위기에 내 고개는 다시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뭐야, 무슨 말이 있길래 이렇게 깊이 들어가는거야. . . . 혹, 뭔짓을 하려고 이러는건가? . . 역시나 뭔가 있는건가. 힐끔 라세스의 등을 보다가 심호흡을 하고는 자리에 멈춰섰다. 내 움직임을 느꼈는지, 라세스도 멈칫하고는 뒤돌아보았다. 의아한듯한 그의 표정에 난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내 표정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 . . 왜그래, 엘?" "라세스, 솔직히 말해봐요." "뭐 . . 뭘?" "지금 우리 어디가는거에요?" " . . .할 . . 말이 있어서 . ." "그게 이렇게 깊이 들어가서 해야할 말이에요? 이쯤이면 일행들이랑도 많이 떨어졌는데." " . . . " 내 말에 라세스는 천천히 표정이 굳어갔다. 그의 표정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쉰 후에 머리를 쓸어올렸다. 곤란하네. " . . 지금 뭐하자는거에요, 라세스?" " . . 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재깍재깍 하고 돌아가죠." "미 . . 안해 . .엘." " . . 당연히 미안해야겠죠." 류의 움직임이 불안해졌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내 신경은 온통 잔뜩 굳은 표정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라세스에게 꽂혀있었으니까. 정말 . . 너무하는거 아니야? 아무리 헤어진지 오래되었다지만,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때리나? "라세스." " . . 알고 . . 있었어?" "조금쯤은." " . . 어떻게?" 더욱더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잠시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저기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민감하게 잡혔다. "평소와 다른 행동, 표정, 말투 . . 그정도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아요? 이 사람 나한테 뭐 감추는게 있구나. 하고." " . . . 그럼 . . " "할말있다고 따라오라고 할때부터 이미 눈치챘어요." 내 말에 라세스의 표정이 무너졌다. 미안한듯, 혹은 당황스러운듯한 그의 표정에 난 깊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자, 이제 말해봐요." " . . 엘." "그리고 깨끗하게 차일준비해요." " . . . 어?" 뭔가 벙찐 라세스의 표정을 보며 싱긋 웃었다. "고백하려는거 아니었어요?" " . . 미안하지만, 난 아직 내 첫사랑을 못잊었어." 어색한 그의 표정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물었다. " . . 그럼 뭐에요? 뭐가 나한테 미안하고, 뭐가 내가 알고 있어야하는거에요?" "그건 . . " "이봐요, 라세스." "너한테 고백하려는건 아니야." "그렇겠죠."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세스와의 대화로 긴장이 조금 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 . 불안했다. "그럼, 나한테 할말이란 . . 아, 그거에요?" " . . 뭐?" "내가 너무 매력적이라는말?" " . . 아니야." "그럼 뭐죠? 에- 라세스의 그녀를 잊기위해 도와달라는 말?" "그것도 아니야." 한숨을 내쉬는 라세스를 보며 가볍게 웃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바로 앞에서서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님, 날 죽일 수 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 " . . !" 놀란듯 눈이 동그래진 라세스를 보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역시, 그랬나. 라세스의 불안한 태도가 저번부터 묘하게 신경을 자극시켰다. 나를 힐끔힐끔 보는것도, 날 보며 침울한 표정을 짓는것도. 가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모닥불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것도. "라세스들을 만났을때도 나 위협받고 있었어요. 기억나요?" " . . 응." "그럼 누가 보낸지도 알겠네요?" " . . . 응." 작은 라세스의 대답에 픽 웃고는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는 라세스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죽일꺼에요?" " . . 넌 . . " "날 죽일 수 있어요?" 하빔의 국왕 전하가 그렇게 쉽게 포기하리라고는 생각 안했다. 아크산은 전혀 그런 낌새가 없어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지만, 라세스는 아니었다. 그는 일단 하빔의 '귀족'이였고, 그 빌어먹을 미남 국왕의 '신하'였으니까. 하라면 해야지. 별수 있나 뭐. 내 말에 멀뚱히 있던 라세스는 조금 망설이더니 말했다. "넌 . . 알면서 날 따라온거야?" "그럼, 모르는데 따라왔겠어요?" "어째서? 내가 널 죽일지도 모르는데?" "난 안죽어요." " . . 뭐?" "난 안죽는다고요." " . . . 어떻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지?" 어이없다는 듯한 라세스의 미소에 난 씨익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신은 내 편이거든요." " . . . " "그러니까 걱정없어요. Don't worry- 지르오디스는 날 너무너무 예뻐하시거든요." 아마도 라는 가정하에. 내 말에 라세스는 여전히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한숨을 쉬더니 날 똑바로 보았다. 그의 곧은 풀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도망가라, 엘." "음?" "전하께선, 내게 널 죽이라 명하셨다. 하지만, 네가 도망간다면 . . 이번 전쟁일에 더 이상 끼어들지 않는다면 . . " 라세스의 절박한 말을 듣다가 불쑥 든 생각에 그에게 물었다. "라세스, 기억나요?" " . . 어?" "예전에, 물었잖아요. 왜, 생명의 숲에 도착하기 몇일 전에." " . . . . 아." "전쟁에서 잃은게 있냐는 내 질문에, 라세스는 대답했고. 전쟁이 끝나길 바란다고 말했어요. 근데 . . 지금 와서 그런말 하면 내가 당혹스럽지 않겠어요?" "하지만 . . " "하지만이고 뭐고 . . 상관없어요. 도망따위 안가요. 그리고 . . " " . . 그리고?" "이용할 수 있다면 . . 이용해야겠죠?" "뭐?" 그의 되물음에 난 싱긋 웃고는 수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목숨이라도 . . 그렇지 않아요? 전하." "전 . . 전하?" 내 말에 라세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수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툭툭 옷을 털어내는 국왕전하가 보였다. 그는 여전히 고아한 미를 자랑하며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전하? 어떻게 . . 어떻게 이곳에!" "라세스경, 그대에겐 실망이네. 설마 정말 명을 무시할 줄은 몰랐어." 쾌활한 그의 목소리에 라세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슬쩍 그를 올려다봤다가 다시 앞에서 유쾌한 표정을 짓고있는 전하를 보았다. 그 역시 날 보고 있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전하. 잘지내셨어요?" "물론, 숙녀분도 잘지냈나?" "저 역시, 전하 덕분에 항상 마음 설레하며 잘지냈죠."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전하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기분이 좋아지는건 . . 내가 못됬기 때문이겠지? "그보다, 아까 그 말은 무슨 말인가, 엘양?" "무슨 . . 아,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한다는 말,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 말이지." 잠시 일그러졌던 표정을 수습하신 전하를 보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일을 빨리 매듭짓고 싶어서요. 언제까지 어영부영 귀찮게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랄까. 그래서, 라세스가 할말있다고 했을때 기회다- 싶어서 따라온거에요. 내 목숨이라면 . . 전하는 분명 모습을 드러낼꺼라 생각했거든요." "똑똑한 아가씨군. 정말, 짜증날만큼 똑똑한 숙녀야." "칭찬 고맙게 받아들일께요, 전하." 살짝 무릎을 굽히며 말하자, 전하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군, 라세스경이 내 명을 어기려했다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이상 그는 네 힘이 되어주지 못할텐데." "뭐, 그거말고도 믿는게 있으니까요. 말했잖아요? 신께선 . ." 그래, 지르오디스 . . 지오, 그는. "내 편이라구요." " . . 하 . . 하하 . . " 내겐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아니었던듯 싶다. 날 가만히 보던 전하는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하하하 . . 크크흑 . . 신께서 네 편이라고? 우습구나. 고작 평민계집인 네게 신께서 작은 관심이나 가지실듯 싶으냐." "저야말로 어이없네요. 지르오디스께서는 인간들이 만든 계급따위, 신경도 안쓰실텐데 말이죠."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내가 마음에 안드는지 전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라세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 . . 지금 나 무시하려는거? "라세스경, 다시한번 기회를 주지." " . . 전하." "지금 당장 저 소녀의 목을 벤다면, 이 이상의 죄를 묻지 않을테니." " . . . . 전 . .하 . . " 주먹을 꽉 쥐는 라세스의 모습에 슬금슬금 마음이 안타까워졌다. 어쨌든, 라세스도 산뜻한 미인이란 말이지. "있잖아요, 전하." 내 목소리에 전하가 라세스를 보던 시선을 돌려 날 보았다. 아크산과 닮았지만, 다른 푸른빛을 지닌 사람. "뭔지나 알고 죽어도 되나요?" "엘!" "앗, 라세스, 조용히해요."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미인이 곤란해하는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어깨를 으쓱이는 내 모습에 라세스가 어이없었던지 입을 벙긋거렸다. 그에게 빙긋 부드럽게 웃어주고는 다시 하빔의 국왕 전하를 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날 보다가 입가에 비죽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그래 . . 알고는 죽어야겠지. 뭐, 별꺼 아닌 이유이긴 하지만 말이야." "음? 제가 죽는 이유가 별꺼 아니라니. 좀 슬픈데요." 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그는 잠시 파르르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곧 잠잠해졌다. 그리곤 한걸음 두걸음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앞을 가로막으려는 라세스의 손을 잡아 아무것도 못하게 한 후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와 마주섰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무런 말도 안할까나. "말씀 좀 해주시죠. 제가 죽어야하는 이유가 뭔지." " . . 방해되니까." " . . . . 방해?" "우리 하빔이 대륙의 유일무이한 제국이 되는 길에, 네가 장애물이 된다는 말이다." " . . . 와 . . 이거 . . 엄청난 얘기를 들었네요."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때, 그리고 전쟁때문에 대륙을 돌아다녀야했을때 . . 하빔에 갔을때, 다시 대륙으로 돌아왔을때 . . " . . 어이없네요." 허탈한듯한 내 목소리에 그가 여전히 비틀린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과거부터 하빔은 대륙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저 준비했을뿐이야. 그리고 몇십년전에야 성공했지. 제국들끼리 싸움을 붙여놓으니 볼만하더군. 약해질대로 약해진 제국따위 허수아비를 쓰러트리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지." 킥킥 음산하게 웃어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한쪽 손을 들어올려 시야를 가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 . "그런데 네가 방해가 된단말이다. 화해를 시켜? 전쟁을 끝내? 무슨 헛소리냐.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약해지고 약해져 . . 쓸데없이 일을 크게 벌릴 필요도 없이 최소의 피해로 대륙을 삼키기 위해 . . 얼마나 긴 기다림을 가져야했는데!" " . . . 그래서 . . 당신의 빛을 위해 다른사람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 . 얘기?" "다른 이들? 큭큭 . . 무슨 상관이냐. 내가 왕이다. 내가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황제가 되는거지.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이더냐?" 그는 그에게 어울리지않는 광소를 터트렸다. 단단히 . . 비틀리고 비틀린 그의 모습에 난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를 보며 난 처음으로 마음이 싸늘해질때로 싸늘해졌다. "그때문에, 고작 그 이유로 이렇게 많은 슬픔을 만들어냈다구요?" "정확히는 나 때문이 아니지. 난 선조의 뜻을 따랐을뿐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즐겁게 미소짓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난 다시 입을 열었다. "유일무이한 황제가 되고 싶었다구요?" "제국을 가진 황제들도 어리석지 . . 그들또한 유일무이한 황제가 되고싶었을까? 그렇게 간단한 불씨로 이렇게 크게 불이 붙을줄이야. 내심 바라고 있었던거야, 그들도. 전쟁을 말이지." 큭큭 비식비식 계속해서 웃는 그. 그런 그는 . . 그런 그의 모습은 . . " . . 쓰레기." " . . . 뭐라?" 차갑디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보던 난 부드럽게 . . 아니 . .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더러운 쓰레기. 라고 했어요." " . . 그래, 네가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소리로군." 그는 가볍게 대꾸하더니 라세스를 바라보았다. 그와 내가 대화하는 동안, 라세스의 얼굴은 더욱 하얘져있었다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던 난 천천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쓸데없이 흥분해봤자 . . 내게 손해니까. "라세스경." " . . . " "죽여라." " . . . 하오나 . . " "내 명을 거스를 생각인가?" 무표정한 전하와 하얗게 질린 라세스. 그런 둘을 보다가 난 한걸음 물러서서 그들을 . . 아니 정확히는 전하를 바라보았다. 당신 때문이야? 아니 . . 당신 때문은 아니겠지. 당신은 그저 바라만봤을 뿐이니까. 방관자로 . . 이 대륙의 두제국이 힘이빠질때까지 . . 어부지리를 위해 말이지. 나쁘지 않아. 전략적으로도 . . 매우 . .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해. " . . 그건 아니죠." " . . . 또 뭐라 하는것이냐." 귀찮다는 듯 무심한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최대한 . . 그래, 최대한 노력해서 웃었다. "그건 안되는거죠. 그래선 안되는 거였잖아요." " . . 죽을 때가 되니 갑자기 두려워지더냐?" 우습다는 듯 날 비웃는 그의 눈동자는 아쉽게도 내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지금 . . 지금 내가 화가나는 이유는 말이야. "하늘이 회색빛으로 물들었어요." " . . . 뭐?" "신은 세상을 비틀어버렸고 . 그럼에도 인간들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죠. 그리고 지금 당신은 당신의 선조에 의해 이 세상이 모두 망쳐졌다고 말하는군요." " . . .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내게 죄책감이라고 느껴야한다고 말하는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토록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까. 난 . . 난 다만 말이야 . . "조금쯤은 . . 노력해줄수도 있었잖아요." " . . 뭐?"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말을 하는지는 알고있는데 . . 그래도 . . 그래도 노력해줄수 있었잖아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래도 . . 그래도 화가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열받고 . . 슬퍼지는것은 . . 그걸 막을 수 없단말이야. "아이들이 울지 않도록 . . 사람들이 더 이상 회색빛 하늘을 보며 절망하지 않도록 . . 그렇게 해줄 수는 있었잖아요." " . . . 어리석기는." "어리석은 소리라는건 알아요. 당신은 당신이 바라고, 원하는 일을 했을테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다시 깊게 심호흡했다. " . . 더 이상은 들어주기 힘들군." 그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라세스를 힐끔 보더니 손수 검을 뽑아들었다. 그런 그의 날카로운 은빛의 검날을 보면서도 . . 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전하!"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 정말 반역으로 간주하여 그대의 가문을 멸문시켜버릴것이다." 차가운 전하의 대답에 라세스가 멍하게 그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내 친우의 가문을 직접 멸문시키지 않도록 . . 행동에 신중하도록 해라." 그는 시린 푸른 눈동자로 날보았다. "잘가거라." 잔인하게 웃는 왕의 얼굴을 보며 난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죽는건가. 여기까지 와서 . . ? . . . 죽지 않아. 죽진 않을꺼야. 지금까지처럼 . . 지금은 . . 류도 있고 . . 지오도 날 보고 있는걸. 귓가에 선명히 들리는 바람소리와 함께 푸욱하고 섬뜩한 소리가 내 귀를 관통했다. 절대 들릴 수 없는 . . . 들려선 안되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지오가 나와 함께하는 이상 . . 난 죽지 않으리라고 . . 생각했어. 그렇지만 . . 나 . . 바보 . . 였나. "죄송 . . 합니다, 전하. 전하의 명에 따르지 못한 점 . . 죽음 . . 큭 . . 으로 사죄하겠습니다." 눈 앞에서 흩날리는 풀빛의 머리카락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를 꿰뚫고 나온 검 끝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검은색으로 보였다. 난 죽지 않을꺼야. "라세 . . 스 . . ?" 하지만 . . 다른 사람들은 죽겠지. "어리석은 것!" 불같이 화를 내는 왕의 손이 검에서 떨어졌다. 그와 함께 라세스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나도 모르게 급하게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힘겹게 숨을 내쉬는 라세스의 모습에 귓가에 맴도는 바람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라세스." 내 부름에 파르르 떨리던 그의 속눈썹이 들리고 맑기만한 그의 풀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 담긴 내 얼굴은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희미하게만 보였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날 보던 그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힘겹게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울지도 . . 않는 . . 거야?" "울어 . . 줄까요 . . ?" 나 역시 그의 말에 천천히 대답했다. 살 수 있을까. 라세스, 죽는 . . 건 . . 싫 . . 다. "아니, 네가 울면 . . 힐다가 . . 하아 . . 겹쳐질것 같아서 싫네." "라세스의 그녀?" 내 말에 그가 편안하게 눈을 감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이에요.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두고, 옛사랑을 기억하고 있단 말이에요?" 투정같은 내 말에 그가 킥킥 웃더니 콜록하고 피를 토했다. 멍하게 그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부들부들떨리는 손으로 닦아내었다. 그는 맑은 눈동자로 날 보다가 . . 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용서하지 마." " . . 싫어요. 용서해버릴꺼야." "미안해, 엘. 네게 . . 이런 상처를 줘서." "상처주기 싫으면 말하지 말아요. 곧 . . 곧 누군가가 와줄테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와 라세스만이 있었다. 그 누구도 없는 . . 그 누구도 존재치않는 . . 순간이었다. "엘 . . " "라세스 . . 라세스 . . 살고 싶어요?" 지오 . . 지오 . . 지오, 도와줘요. 그는 싱그러운 풀빛 눈동자로 부드럽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도와줘요 . . 당신은 . . 신(神)이잖아요. 지오 . . 당신은 . . 신이잖아요. "왜? 살고싶지 않아요?"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눈물따윈 흘리지 않아. 라세스의 아름다운 얼굴을 . . 흐려진 눈으로 볼 수는 없잖아. "힐다에게 . . 갈수있게됬으니까." " . . 라세스." "이제 . . 됬어." 만족스러운듯 평온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천천히 내 모습을 담은 풀빛 눈동자가 닫혔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으로 따스한 . . 얼굴로. " . . 라세스." " . . . " " . . . 잘 . . 가요 . . 힐다랑 . . 당신의 그녀랑 . . "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의 이마에 입맞췄다. "행복하세요." 내가 . . 당신에게 해줄수있는 유일한 축복. " . . 지오 . . " "네 년 . . " "지오 . . " "죽여버리겠다." 고개를 들었을때 보이는 것은 눈에 핏줄이서 살기등등해진 전하의 푸른 눈. 당신은 내게 의미가 없는데. "지오 . . 부탁해요." "죽여버리겠다!" "부탁 . . 해요 . . 지오 . . 제발 . . 한번만 . . " "으아아아!"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 . " 은빛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보고 . .싶어요." 멍하게 뜬 눈 앞에서 멈춰선 검. 여전히 살기어린 얼굴의 전하. 유채색의 세상이 무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바람은 숨을 죽이고, 조금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 . 엘." 밝은 빛이 시야를 물들였다. 아름다운 유채빛의 빛망울들이 영롱하게 빛나며 주위를 흘러다녔다. "엘 . . " 안타까운듯, 슬픈듯 . . 나보다도 더 아픈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그. " . . 지오 . ." "엘 . . " "지 . . 오 . . " 그제서야 . .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뚝뚝 흘러내린 눈물이 라세스의 얼굴을 적셨지만 . . 그 때문에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졌지만 . . "지오 . . 지오 . . 흐 . . 흐윽 . . " " . . . " 지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서서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다정한 청록빛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그의 실버블론드빛 가느다란 머리카락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 . 하지만 . . "살길 . . 바라지 않는데요." 그 아름다움도 . . 슬픔에 희석되고 희석되어 . . 느껴지지 않아. "라세스는 . . 힐다에게 가고 싶데요. 그리고 . . 가버렸어요." " . . 네 . ." "나 잡을 수 없었어요. 그가 . . 죽는걸 바라진 않았지만 . . 지오를 부르면 혹시라도 그가 살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 . 그래도 . . 잡지않았어요." " . . 살려줄 수 있어요." 내 말에 지오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들으며 난 흘러내리는 눈물도 신경쓰지 않고 라세스를 바라보았다. 내 품 속에서 내 눈물에 얼굴이 젖어버린 . .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 . 바라보았다. "그의 영혼은 아직 그를 떠나지 않았으니까 . . 엘의 말대로, 전 이 세계의 신이니까. 당신이 . . 엘이 원한다면." " . . . " "살려줄 수 있어요. 엘 . . . 그걸 . . 바라나요?" " . . 바래요." 내 말에 지오가 천천히 입을 닫았다. 라세스를 보던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누구라도 감싸안을듯한 눈동자로, 누구보다도 감싸안아주길 바라는 눈동자로 날 보고 있었다. "하지만 . . 내가 바란다고 . . 그녀에게서 라세스를 빼앗을 수는 없겠죠." 허탈해졌다. 너무나도 허무해졌다. "난 . . 이 사람의 생명을 책임질 수 없어요." 살아야한다는 것을 강요할 수 없어. 라세스의 선택을 내 멋대로 . . 바꾸고 그의 삶에 빛과 행복만이 있을꺼라고 . . 당당하게 말해줄수 없어. 내 대답에 지오는 천천히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에 내 눈물을 맡기고 그의 손에 내 얼굴을 기대었다. 달콤한 온기에 취해 내 품속에서 옅게 느껴지는 라세스의 온기를 천천히 떠나보냈다. 그녀에게로 . . 제발, 그녀에게로. 라세스의 아름다웠던 연인에게로. 라세스에게 너무나도 깨끗하고 순수했던 . . 그녀에게로. "슬퍼해도 괜찮아요." "네." "아파해도 괜찮아요." " . . 네." "당신의 슬픔, 아픔을 전 덜어줄 수는 없어요 . . 하지만 . . " 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할께요." " . . 지오." "함께 . . 당신과 . . " " . . 응, 언제나 . . " "언제나 함께." 마지막 빛무리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 빠르게 . . 그가 사라지자마자 너무나도 빠르게 세상에 유채빛으로 돌아왔다. "죽어라!" 귓가를 울리는 전하의 목소리에 전혀 반응 할 수 없었다. 내 품엔, 아직도 라세스가 잠들어있었으니까. 그 검은 내게 닿지 못했다. 내게 닿기도 전에, 전하의 검은 가루가되어 사라져버렸으니까. " . . 뭐 . . 뭐?!" 당황한듯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라세스를 보았다. 뭐가 그렇게 편안해요? "당장 . . 이 계집을 죽여라!" "예!"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있어요? 내게 닿으려는 검들은 모두 가루가되어 사라졌다. "뭐 . . 뭐야!" "이게 도대체 . . !" "새검을 . . 당장 어떤 방법으로든 이 계집을 죽여버려!" 전하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다시 피식 웃었다. "바보같은 사람같으니 . . 신이 내 편이라고 했잖아요. 뭣하러 끼어든거에요." 나직한 내 목소리를 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련하고 희미하지만 . . 분명 . . . "엘!!!!!!!!!!!!!!" 그 작은 목소리를 들었지만 난 눈을 감았다. 지금은 . .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 . . . 엘 . ." 세브릭은 신음소리을 흘리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가느다란 바람에 긴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앉아있는 엘의 모습은 . .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듯 희미해보였다. 아마 그래서이리라, 그들이 그녀의 이름을 아까처럼 크게 부를 수 없었던 이유는. 조금이라도 그녀가 흔들리면, 사라져버릴것만 같아서. 그 두려움 탓에 그들은 한발자국도 못움직이며 자리에 멍청히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엘은 라세스를 자신의 무릎에 뉘여놓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릿한 미소조차 짓고 있지 않는 엘의 모습은 지독히도 이질적이어서, 마치 그곳만 다른 세계인것 처럼 느껴졌다. 모두들 그녀에게 다가서진 못하고 머뭇거릴때, 아크산이 한걸음 두걸음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빔의 국왕은 그런 아크산을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검자루만을 손에 쥐고, 그는 아까처럼 엘을 죽이라며 소리지르지도 않은채, 그저 라세스와 아크산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크산은 그런 국왕은 신경도 쓰지않고 엘의 바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엘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은 엘을 고요히 바라보던 아크산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자고있는듯 평온한 표정의 라세스를 바라보았다. 아크산의 푸른빛의 눈동자가 물결치듯 일렁이고 곧 떨리는 손으로 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도 엘은 눈을 뜨지않고 인형마냥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크산은 엘의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 . 계속해서 부드럽게 . . . 부드럽게 매만져주었다. "그대 잘못이 아니오." " . . . " "그대의 탓이 아니오." " . . . " 자신의 말에 대답조차않는 엘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크산은 손을 거둬 라세스의 배에 박힌 검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가볍게 검을 뽑아내었다. 뚝뚝 섬뜩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보던 아크산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숙부를 . . 자신의 왕을 바라보았다. " . . 이게 전하께서 바라시던 일이셨습니까." "그럴리가 . . 충성스런 라세스경의 죽음은 원치 않았단다, 사랑하는 조카야." 아크산의 말에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왕의 모습은 . . 지금의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 . . 엘을 죽이고, 저도 죽이고 . . 그리고 이 대륙의 황제가 되고 싶으셨습니까." "하하, 듣고 있었느냐? 이런이런,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군." 왕의 대답에 검은 더 꽉 잡은 아크산의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손을 바라보던 왕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날 죽일테냐?" " . . 죽이지 못할 것 같습니까?" "반역을 저지른다는 것이냐?" 그의 말에 아크산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큭큭 . . 네가 할 수 있겠느냐? 날 죽일 수 있어?" 언뜻보면 무표정한 왕의 얼굴이었지만 . . 그 속에 스며든 감정은 . . 분명 괴로움이었다. 아무도 . .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분명 왕의 눈동자는 괴로움으로 비틀려있었다. "죽이지 못하겠느냐? 하하 . . 그렇겠지. 넌 형님을 쏙 빼닮았으니 말이다. 그 푸른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 . 그리고 그 곧은 성격까지 말이다." " . . . 전하." "어쩜 그리 어리석으셨을까. 형님은 어찌 그리 어리석을 수 있지?" " . . . " 아크산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왕은 비소를 입가에 띄우며 말했다. "억울하실꺼야 . . 어떻게 보면 행복하시겠지." "무슨 . . 소리십니까." 아크산의 목소리가 떨려나왔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아크산을 바라보았다. 아크산과 왕이 대치하는 동안, 사켄과 세브릭이 조용한 발걸음으로 엘에게 다가갔다. "엘 . . 엘, 정신차려요." 세브릭은 조금씩 떨리는 손으로 차마 엘에게 손을대지도 못한채 안절부절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세브릭과는 달리 사켄은 담담한 회색빛 눈동자로 엘을 바라보다가 라세스를 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라세스를 보던 사켄은 다시 시선을 엘에게 돌렸다. 여전히 미동도 없다. 마치 자신은 여기에 없다는듯 . . 눈을감고 귀를 막은 그녀의 모습에 작은 한숨이 사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뭘 이렇게 앉아만있는것이지? 슬퍼하고있다면 차라리 울어라. 외면하고 싶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사켄의 고저없는 목소리에 세브릭이 약간 불안한듯한 시선으로 사켄을 보다가 곧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와함께 그의 손에서도 흔들림이 사라졌다. 사켄은 곧게 손을 뻗어 엘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끌어당겼다. 아무런 반항도 없이 가볍게 끌려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사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충격받았을 것 알고 있다. 하지만 . . 이렇게 멍청히 있어봤자 해결되는건 없다는걸, 현명한 네가 모르는건가? 엘, 눈을 뜨고 똑바로 직시해라. 널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그를 외면할껀가?"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사켄의 손길만은 한없이 다정했다. "사켄의 말에 백번 동감하는군요. 힘들다는건 알지만, 정신차려요. 당신은 그냥 이대로 이 자리에 주저앉을 여자가 아니잖아요." 세브릭의 나직한 목소리 또한 엘의 귀에 닿지 않는지 그녀는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사켄도, 세브릭도 그런 엘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엘에게 말하고 있을때, 아크산이 말도 안된다는 듯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거짓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하지?" " . . 그럴 . . 리가 . . 어째서 . . 어째서입니까?!" "참, 형님은 정이 너무 많으셨어.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에게 독을 먹일 줄이야 . . 상상도 못하셨겠지. 아니, 알고 계시고 묵묵히 드셔주신건가? 크큭." 왕은 한손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몇번 매만졌다. 아크산은 떨리는 눈동자로 멍하게 그를 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아크산. 내 조카야 . . 난 네가 한없이 사랑스럽지만, 또 한없이 증오스럽다." 애증이 깃든 눈동자로 아크산을 보던 왕은 환하게 웃었다. "형님은 무척 멋진 분이셨어. 내가 동경하는 왕이었지. 그런 형님의 피를 이어받은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느냐?" " . . . " 거칠게 휘몰아치는 감정을 참고있는지 아크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 아크산을 조용히 쳐다보던 왕은 곧 흥미가 없어졌는지 시선을 돌려 엘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그의 시선에 사켄도, 세브릭도 긴장한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힐끔 그들에게 시선을 줬던 왕이 입을 열었다. "한심하기 짝이없어. 재미없지 . . 네 그 건방진 입은 다놀린것이냐? 너 따위년 때문에 라세스경이 죽은 것을 보니 죄책감이라도 가지는것이냐?" 냉소지은 왕과 눈을 감은 엘의 주위로 찬바람이 휘날리기 시작했지만 모두 그 바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 . . 그 이상 엘을 모욕한다면, 저희 역시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엘을 자신의 품에서 조심스레 떼어놓은 사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세브릭 역시 사켄이 일어나고 잠시 엘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브릭과 사켄이 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왕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왕은 그들의 시선이 가소롭다는듯 픽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의 목숨이란 참 덧없는 것이지. 이리도 쉬운것이란 말이야." 흥얼흥얼거리듯 중얼거리는 말에 . . 뜻밖에도 대답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게요. 정말 . . 이리도 쉽다니까요. 죽음이라는 것은." 평소와 똑같은 어조, 똑같은 즐거운듯한 목소리. 하지만, 사켄도 세브릭도 . . 뒤돌아볼 수 없었다. 아까와달리 찬바람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침묵했다. 숨막히는 정적, 그리고 . . "재밌죠. 사람의 죽음 . . 어차피 죽기위해 살아간다지만." 발걸음 소리만이 그곳이 살아있는 곳이라는걸 증명하듯 들려온다. 아크산은 라세스를 부드럽게 뉘여놓고 사켄과 세브릭 사이로 걸어나오며 가볍게 미소짓는 엘을 보며 말을 삼켰다. 언뜻보면,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보였다. 아까 침묵하며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않고 싶어하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한가지 . . 알 수 있는것은. 평소엔 읽어낼 수 없던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그 . . 감정 . .은 . . "사람 미안하게스리 . . 그렇지 않아요?" 분노가 아니었다. 증오같은 것도 아니었다. 완전한 . . " . . . 의외로군, 라세스경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지던 것이 아니었나?" 즐거움. 엘은 . . 그녀는 . . 지금 이 순간에 맑게 웃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당신같은 사람의 손에, 자신이 원하고 있던 죽음을 맞아들였으니 . . 화낼일은 아니죠. 그가 이제 내 옆에서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것에대해서는 . . 무척 안타깝고 서글프고 슬픈 일이지만." 그녀는 우는 시늉을 하며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 모습이 . . 한편의 희극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온몸에서 재밌다는 듯한 기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 . . 그렇더냐?" 분노해야할 사람은 그녀인데, 화가나서 울부짖어야할 사람은 그녀인데, 분노하는것도 화를내는것도 . . 왕이다. 그는 그 비틀린 푸른 눈으로 찢어버리고 싶은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멀뚱히 보던 그녀는 한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더니 훽하고 아크산을 보았다. 아크산은 갑작스런 그녀의 시선에 멈칫 굳어버렸다. 그의 반응에 그녀는 싱긋 웃더니 한손을 내밀었다. " . . 무슨?" "검 . . 이리 줘요." " . . 엘?" "이리줘요. 자살같은건 안하니까. 자살이라니-" 그녀는 키득키득 웃고는 천천히 여유로운 걸음으로 아크산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검을 부드럽게 빼앗아들었다. 아직까지도 라세스의 피가 묻어있는 검을 묘한 시선으로 보던 그녀는 왕에게로 뒤돌아 다가갔다. 그녀의 움직임을 . . . 모두가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않고 왕에게 다가서서 검을 내밀었다. "엘!" "뭐하는거냐!" 사켄과 세브릭의 부름에도 엘은 싱긋 웃더니 굳어있는 왕의 손을 잡아 검의 손잡이를 쥐어주고는 자신을 겨누게 했다. 멍하게 엘을 보던 왕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건 무슨 수작이지?" "죽여볼래요?" " . . 뭐?" "죽일 수 있다면, 죽여보라구요." " . . 못죽일것 같더냐?" 차갑게 식은 왕의 푸른눈을 보며 엘은 검은 눈동자를 빛냈다. 그리곤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서서 어깨를 으쓱이고는 눈을 감았다. 왕은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검을 들었다. "상관없지. 죽이면 그만이니!" "엘!!" 강한힘을 담아 휘둘러진 검. 모두가 경악에찬 비명을 지르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 . 검은 또 다시 가루가 되어 붉은 핏방울을 흩날리며 사라져버렸다. " . . 재밌죠?" 장난기 가득한 엘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똑바로 왕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 . 너무나도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재밌잖아요.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 라세스는 날 구한답시고 죽어버리고." 부드럽게 왕에게 다가가 엘은 그의 손을 잡았다. 뿌리칠 수 없는듯 깊게 숨을 들이킨 왕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엘은 다시 조용히 말했다. "날 죽였다면. 차라리 내가 죽었다면 좋았을꺼에요. 난 사람을 미워할만한 성격은 못되서." 애정을 담은듯한 손길로 왕의 머리카락을 감싸쥔 그녀는 곧 시리디시린 웃음소리를 내었다. "누굴 죽여버리고 싶다는, 그런 못된 아이는 못되서요."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흘리던 그녀는 머리카락을 꽉 잡아채고는 훽 끌어당겼다. 자신의 얼굴에 바짝 다가선 왕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죽여줄것같아요? 괴롭고 괴로운 당신의 삶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해줄 것 같아요?" " . . . 무슨 소리냐." "힘들죠? 괴로워죽겠죠? 죽어버리고 싶죠? 짜증나고 열받죠?" "건방진 계집이 . . " 새파랗게 빛나는 푸른 눈을 들여다보던 엘이 환하게 . . 정말 환하게 웃었다. "그 삶 . . 평생 살아봐요. 죽고 싶다고, 죽고싶다고 소리질러봐요. 당신은 . . 절대 죽지않아." " . . . 무 . . 슨 . . " "저주에요. 당신에게 주는 내 최대의 . . . " 그녀는 맑게 웃고는 그에게서 멀어졌다. "복수야." 차갑게 말을 내뱉은 그녀가 뒤돌아서자 순식간에 광포한 바람이 그를 휘감았다. "으 . . 으아아악! 아아악!"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바람이 왕을 감싸안고, 그 속에서 왕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흥미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걷기 시작했다. " . . 엘." "음? 왜요, 세브릭?"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세브릭을 빤히 보는 검은 빛 눈동자에선 다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 . . 무슨 . . 어떤 . . 뭘 한건가요?!" "말했잖아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게 한것뿐이에요." " . . 네?" "살릴 수 있다면, 죽지 못하게 할 수도 있겠죠?" 그녀는 세브릭을 지나쳐 라세스에게 다가갔다. 부드러운 손길로 라세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엘은 고개를 돌려 아크산을 보았다. 아크산은 멍하게 자신의 숙부를 삼켜버린 바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크산." 엘의 부름에 아크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힐다라고 아세요?" " . . . 라세스의 연인이었소."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저기, 그럼 그녀를 어떻게 보내줬는지 알아요? 무덤이 있나요? 아님 수장? 화장?" 맑아서 소름끼치는 검은 눈동자를 보던 아크산은 조금 굳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이었소 . . 그보다, 엘." "네?" "전 . .하는 . . 도대체 . . ?" "아, 별꺼아니에요. 신경쓰지 말아요." 어떻게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곧 비명소리가 그치고 바람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속에서 비척비척 걸어나온 이는 곧 괴로운듯 신음소리를내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전혀 바뀐것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망할 . . 계집 . .이 . . 내게 무슨짓을 한것이냐." "말했는데요- 복수라고." 그녀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여기저기를 보더니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가지고 와서 라세스에게 얹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가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 "챙-" 한순간 검을 뽑아들어 그의 목을 위협하는 사켄과 세브릭. " . . 지금 그대들이 위협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이리 행동하는건가?" "그럼 당신이 죽이려했고 다가서려했던 이가 누군인진 알고 있습니까?" 사켄의 조용한 물음에 왕은 비틀린 웃음을 짓더니 대답했다. "계집이 아니더냐. 그것도 비천하디 비천한 . . 아렌타의 평민 계집이지." 이를 아득갈던 그는 시선을 돌려 독기서린 눈빛으로 엘을 보았다. 그의 시선에도 엘은 태평하게 계속해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라세스의 몸에 얹었다. "음 . . 화장하려면 이렇게 하는게 맞던가 . . 아크산, 그냥 이렇게하고 불붙이면 되는거에요?" " . . 물론 안되오." "아, 정말? 이런 . . 헛수고했네. 좀 알려주지 그랬어요. 내가 고생하는거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뚱한 표정으로 그녀는 다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에 왕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대답해라, 계집. 내게 . . 내게 무슨 짓을 한거냐!"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런 그녀에게 왕은 다시 소리질렀다. "내게 무슨 짓을 한거냐!" 무슨짓 . . 글쎄, 확실치가 않아서. 확실히 그의 몸을 류가 휘감는 것을 보았다. 악에찬 그의 비명소리도 들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듯 죽어있는 라세스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사켄과 세브릭 때문에 내게 다가오지못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감이 좋으시네요." " . . 뭐라?" "내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건 알고 있네요." " . . . " "아님, 내가 먼저 말하고 이상한 바람에 당신이 휩싸였다는것 때문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에게 다가섰다. 시린 냉기가 내게도 느껴지는데, 당신은 못느끼나봐. 검에 서린 차가운 김이 내겐 보이는데, 당신은 못봤나봐. . . . 세브릭도, 사켄도 모르고 있었는데, 지금 당신에게 느껴지는 냉기를 깨달으며 경악하고 있는걸 . . 당신은 모르나봐? 두걸음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보던 난 한손을 들어올려 내 심장위에 올렸다. 그는 날 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뭐하는것이냐. 내게 무슨 짓을 했냐 묻지 않았나!" "내가 당신에게 대답해드릴 의무는 없지만, 재미있으니 대답해드릴께요. 내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있어요, 전하." " . . 뭐?" "전하의 심장은?" " . . . . 무 . . 슨 . . "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 . . 내 악감정이 너무 깊이 새겨졌나봐요." 키득키득 웃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소름끼쳤다. 라세스의 죽음이 . . 충격이었어? 응? 충격이었니? . . 당연히 충격이지. 당연히 . . 당연한거지. 그의 죽음이 . . 서글픈데, 이렇게 힘든데. 그래서 . . 이렇게 미쳐버린건지도 모르는데. "말해봐요, 전하. 전하의 심장은?" 내 입술이 말려올라가며 짓는 미소를 보던 전하는 멍하게 내가 한것처럼 자신의 손을 심장위에 올렸다. 그리고 한걸음 . . 두걸음 . . 경악서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달고있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않았다. "전하의 심장은?" " . . . 말도 . .안돼 . . " "심장이 . . 뛰고있긴해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복수야. 그렇게,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 . 이 차원이 멸망할때까지 살아봐. 지오가 사랑하는 이 세상에 당신같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안들긴하지만 . . 그렇다고해서 다른 세계로 보내버리는건 . . 너무 불쌍하잖아. 어줍잖은 동정심에 홀로 조소하며 키득거렸다. "지금 그 모습으로, 평생 뛰지않는 심장을 가지고 . . 살아봐요." " . . . 계 . .집 . . " "날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고 . . 당신이 빌어먹도록 싫어하는 이 세상에서 . . . '영원'이란 시간을 살아봐요." "으 . . " "그게 . . 당신이 내게서 라세스를 앗아간 벌이야." "아 . . 아악 . . " "당신 스스로 자초한 . . 벌이라고." "아아아 . . 아 . . 하 .. 하 . . 말도 . .안돼 . . " 공허하게 비어버린 눈동자로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최후에 미소짓는 자가 승리한다고 했던가? . . 이건 승리도 뭣도 아니야. 추하다. 너무나도 추해. 죽지못해 살아가야할 당신도, 괜히 땡깡부리다가 한사람의 생명을 허무하게 보내놓고 화풀이하는 나도. 추하기 짝이없어. 그를 무감정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고 있어요?" " . . . 지금 . . 이게 . . 있을 수 . . 있는 일인가요?" "보고도 못믿어요? 이 사람들이, 정말 날 과소평가한다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싱글벙글 웃고있는 내 모습에 모두들 주저앉아버린 그와 날 번갈아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난 라세스의 옆에 쪼그려앉아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 . . 당신때문이에요, 내가 사고친건." 그에게만 들릴정도로 웅얼거리듯 말하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 . 리가 . .그럴리 없어 . . 절대로 . . 절대로!" 악에 받친 소리와 함께 푸욱- 하는 심상치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도 난 뒤돌아보지 않고 라세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가 그럴리 없다는거에요?" "아 . . 아아-" "내 말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 . 이런이런- 내가 그런 쓸데없는 거짓말 할 필요없잖아요." 라세스에게 슬쩍 한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레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크게뜬 아크산을 힐끔 보고는 뒤돌아서서 왕과 사켄, 세브릭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켄의 검에 정확히 심장이 관통당한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있는 전하의 모습이보였다. 그는 말도 안된다는 듯,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자신의 몸을 관통한 검을 보고 뒷걸음질쳤다. 사켄의 검이 완전히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음에도, 그의 옷은 조금의 핏기도 없이 찢어진 것만 빼고는 멀쩡했다. "이럴 . . 수가 . . 이럴 . . 이럴수는 . . " "불로불사의 삶이라니 . . 멋지죠?" 얄밉게 말하는 내 말에 그는 떨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내 시선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누군 얻고 싶어서 불로초를 찾다가 약물중독으로 죽어버렸는데, 당신은 너무나도 쉽게 얻었잖아요." "계 . . 집 . . " "고맙다는 말은 안해도 되요, 전하." "계집!" "행복하게 살아봐요. 당신이 아는 사람이 죽고, 후에 생길 소중한 사람이 당신을 남겨두고 죽고 . . 그 죽음을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겪어봐요." " . . 계집!!!!!!!!!!!!!!!!!!!!!!!!!!!!!!!!!!!" "영혼이 메마르는걸 . . 조금의 평화도 없이 . . 즐겨보도록 해요." 그가 절규하듯 내게 달려드는걸 보았다. 내게 다가서기도 전에 세브릭과 사켄이 막아줬다. 그들에게 살짝 감사의 표시로 웃어주며 그들의 손에 잡혀 버둥거리는 왕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날 보며 이를 가는 그를 보며 한손을 뻗어 그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멈칫, 행동이 멈춘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손가락이 얼어버릴것같았다. "혹시 모르죠." 그래, 혹시 모르잖아. 사켄에게도, 세브릭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중에, 나중나중 . . 무척이나 오랜 시간 후에 . . 또 다시 이 차원에 무슨 일이 뻥-하고 터져서. 나랑 비슷한 [에르테이샤]가 이곳에 왔을때, 빌어봐요." " . . 무 . . 무 . . " " . . '날 좀 구해주세요.'하고 . . 구차하게 빌어봐요." "윽 . . 으윽!" "난 절대로 . . 당신이 무릎꿇고 빈다고해도, 구원해줄 생각같은건 없으니까." 부들부들 떠는 그에게서 물러서며 싱긋 부드럽게 웃었다. 내 미소를 보며 점점 초점이 사라져가는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그의 볼에서 내 손이 떼어지자마자 그는 한걸음 두걸음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쉬지않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중얼거리던 전하는 멈칫 자리에 멈춰서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반쯤 넋을 놓은듯했던 그는 날 보더니 입가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던 나 역시 그와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었다. " . . 구원? 네까짓게 . . 네가 날 구원?" "그러니까, 난 전하를 구원해줄 생각같은건 없다니까요? 내 말을 야금야금 잘도 씹어잡수시네요." 이 사람 이젠 말도 못알아듣나봐. 심장이 멈추니까 몸의 기능이 저하된건가? 음 . .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후회 . . 할 것이다." "과연? 제가 후회할 일이 있을까요?" "날 이런 몸으로 만든것을 . . 평생 후회하게 할 것이다." 그의 푸른 눈에 독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흐려졌던 초점이 내게 똑바로 맞춰지면서 그는 모든 증오와 분노를 내게 쏟아주었다. "반드시 네 년을 비참하고 비참하게 . . 추하고 추하게 만들것이다!" 그의 악에 받친 외침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를 보며 짓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응원이라도 해드릴까요?" " . . . " "화이팅- 이에요, 전하. 내가 무릎꿇고 후회하며 피눈물 흘리게 만들어보세요." "큭. . . 으윽. . " "피를 토하며, 이럴 수가- 라고 땅을 치게 만들 수 있기를 . . 조금정도는 진심을 다해 응원해드릴께요." 날 보던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며 싱긋 웃었다. "다만 한가지 충고할께요." 그래, 충고라면 충고 . . . 하지만 충고라기 보다는 경고- 겠지. 그를 보며 짓던 미소를 천천히 거뒀다. 입가를 가리고 입던 손으로 살며시 아랫 입술을 쓸어내리며 내 눈 속에 그를 가두고 속삭이듯 말했다. "후회하게 만든다고 하셔놓고 . . 후회하지 마시길." 내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뒤돌아 숲속으로 사라졌다. 전하를 따라왔었던 사람들도 주춤주춤거리더니 곧 전하를 따라 사라져버렸다. " . . 엘, 저렇게 가도록 내버려 둘껀가요?" "그럼 어떻게해요, 잡을까요?" " . . . 잡아야하지 않겠나." "그건 싫은데요. 궁금하지 않아요? 어떤 식으로 날 후회하게 만들지." "당신이라는 여자는. . "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 세브릭에게 빙긋 웃어주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날 보고 있는 아크산을 보았다. 그는 작게 숨을 죽인채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망설임을 여유있게 기다렸다. 곧, 그는 망설임을 다잡았는지 똑바로 내게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 . . . 엘, 그대는 . . . 도대체 누구인 것이오?" "누구라니요? 난 나에요. 기껏 묻는게 그거라니 . . 실망이네요." "내가 묻는것이 그것이 아님을 . . 알고 있지 않소!"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는 아크산의 모습을 지긋이 보다가 살짝 머리카락을 넘기며 웃었다. 내 웃음에 아크산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아요. 궁금하다면 알려드릴테니까." 내 말에 아크산도, 세브릭도, 사켄도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날 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씨익 웃어주며 입을 열었다. "나는 . . " "엘!!!!!!!!!!" "-에요." 내가 말하던 도중에 들려온 목소리때문에 내 말은 묻히고 말핬다. 뭐, 내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말이지. 허망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조금씩 눈이 매서워지는 그들의 모습에 킥 웃고는 내 이름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서는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하브와, 한쪽 나무에 기대어 서있는 테일러가 보였다. "와- 하브. 왜 지금 왔어요? 이미 재밌는 구경거리는 다끝났는데." 내 싱글거리는 미소에 하브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세브릭을 노려보며 한글자 한글자 분노를 담아 말했다. "어떤 빌어먹을 인간남자가 날 가방속에 쑤셔넣어서 늦었다."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군요. 어떤 사람이 그랬는지." 태연한 표정으로 하브를 외면하는 세브릭의 모습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하브와 세브릭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날 관찰하고있는 테일러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흥미롭다고 계속 쳐다만보고 계세요?" "아니, 조금 궁금해져서 말이지." "흐흠?" "도대체, 넌 누구일까 . . 하고 말이야." 그는 비스듬히 기대있던 나무에서 똑바로 서서 뚜벅뚜벅 내게 다가와 바로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가 보랏빛 눈동자 가득 즐거움을 담고 물었다.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데요." "정말인건가?" "거짓말이겠어요?" " . . 호오- 이거 의외로군. 난 정말 그대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게 빙긋 웃어주더니 말을 이었다. "저기에 누워있는 자의 죽음에 . . 꽤나 태연해보여서 말이야." 그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쏴해졌다. 아무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크산도, 서로 투닥거리던 하브와 세브릭도, 차분한 눈동자로 날 보고 있던 사켄도. 조용히 날 바라보며 걱정스런 눈빛을 띄웠다. " . . . . " 테일러의 말한마디에 겨우 정리했던 마음이 무너졌다. 가장 가까이있던 테일러는 내 눈을 바라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듯 입을 달싹이는 모습이 보였지만 난 살며시 그를 외면했다. 하필 . . 외면했던 곳에 라세스가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 . . . . 라세스 . . 보내줘야하잖아요." " . . . " 내 말에 작은 정적이 맴돌았다. 그 정적을 참지못하고 . . 난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따윈 흘리지 않아. "설마 연약하디 연약한 제가 혼자하게 하진 않으시겠죠?" 그는 내가 운다면 힐다와 겹쳐질 것 같다며 . . 싫다고 했으니까. 화르륵-하고 불이 타오른다. 붉은빛, 주황빛 . . 노란빛- 밝고 화려한 빛깔들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늘 높이 올라가는 회색빛 연기는 밤하늘 가로지르며 높이 높이 올라갔다. 숲에서 벗어나 평야에 들어서자마자, 우린 라세스를 힐다의 곁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난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거대한 모닥불같은 모습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보았다. 저 곳에, 라세스가 있다. 평온한 표정으로, 누구보다도 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 . 잠들듯 죽어버린 라세스가 있다. " . . . Rough he come say strolling samey(떠돌아다니는 거친 남자가 다가와 말을 하네)."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조용히 노래를 시작했다. 내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천천히 . . 라세스를 생각했다. "why strong play wax seen of strung(왜 흥분을 하고 있죠 위대한것을 보았다)." 처음 당신을 보았을때는, 글쎄 뭐랄까 . . 참 가벼운 사람이라고 느꼈었는데. 풀빛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던 라세스는 . . 내겐 그냥 미인이다- 정도였었는데. "sizer sizer zowie dey me say Zoa to dey ah wary strong(크게 나는 놀라서 묻자 그를 심하게 경계하였다)." 함께 생명의 숲으로 여행하기로 하고 . . 죽이 잘맞아자서 말도 많이했고 . . "halleluiah halleluiah halleluiah(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corner fizz i stew myth gonna feal so roust ye(나는 구석에 조용한 소리로 신께 충실하겠다며)." 참 우스운 일이죠. 그 후에, 납치를 당했는데도 . . 난 라세스도, 아크산도 밉지 않았거든요. 이거 참 신선한 경험이다- 싶었지. "zoa still to can sloppy special singing sub swing but it Bell(여전히 그저 나약하고 감상적인 특별한 노래 그것은 벨). cose so pile me actuation to he's come troll lassie Gus(편안히 쉬고 있던 명랑한 소녀가 그들에게 다가와 발동하다)." 그리고 장난으로 화를 냈었고 . . 또 . . 아- 그랬네요. 그때 처음 라세스의 첫사랑이라던 힐 . . 다? 그분의 얘기를 들었는데. "will swept eft cheer will swept eft cheer will swept eft cheer(영원한 격려를 하며 영원한 격려를 하며 영원한 격려를 하며.) finis she he of hop hay scroll(최후는 일폭의 잠자는 모습에 거짓말같은 그녀와 그)." 그 후에 난 도망쳤고 . . 이렇게 다시 만났고. 뭔가 할 얘기가 있어보이던 당신때문에 신경질도 났었고 . . 그리고 . . 그리고 당신은 나를 지키려다가 죽어버리고. "play singing plural long hay sky(노래 할거야 하늘에서 길게 자고있는 두사람을 위해)." <크르노 크루세이드 아즈마리아의 진혼곡 - Cantus Sacrus> 눈을 꼭 감았다. 타닥타닥- 거리는 모닥불 소리만이 . . 라세스가 웃는 모습을 선명하게 떠오르게했다. " . . . 무슨 노래인지 물어도 되겠소?" "진혼곡이에요-라고 말하면 될까요." " . . .처음 듣는 노래요." 천천히 눈을 떠 정면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에 시선을 맞췄다. 너울너울 춤추고 있는 불이 그 속에 잠들어있는 그림자를 와작와작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로 . . 이제 라세스는 내 곁에 없는거구나.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럴 수 밖에요.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은 '이곳'에서 저 밖에 없을껄요." " . . . 혹 그대가 지은 노래인것이오?" "설마- 전 작곡작사하는 능력은 없어요." 손을 설레설레 젓고는 무릎을 감싸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땅을 짚고 일어나 툭툭 옷에 묻어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내 사선에 서서 하염없이 불을 바라보고 있는 아크산을 보았다. 그의 푸른 눈에 넘실거리는 푸른 불길은 한없이 침잠되어 있어서, 그가 과연 불을 보고 있는 것인지에대한 의문을 갖게했다. 하긴 . . 그가 무엇을 생각하던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지만. "아크산한테, 미안하다고 해야할까요?" " . . . 내게?" 처음으로 그가 불에서 시선을 떼고 날 바라보았다. 그의 눈과 마주치고, 서로가 서로의 눈에 담겨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서 라세스를 앗아갔으니까요." " . . . ." "전하가 내게서 라세스를 앗아갔듯이, 내가 아크산에게서 그를 앗아갔으니까요." " . . . ." "나 역시 벌을 받아야하는것일까요?" 그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날보더니 다시 시선을 높이 치솟고있는 불로 돌렸다. 그런 그의 무반응에 천천히 입가에 짓고있던 흐릿한 미소를 지웠다. 똑바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못하고 시선을 뛀궈 땅만을 바라보았다. " . . 그대답지 않소." "헤에-?" 그러니까 . . 이럴때는 '나다운게 뭔데요?'라고 말해야하는걸까. 아니면, '네가 뭘 알아-'라고 소리를 질러야하는걸까. . . . 그런 뻔한 반응을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아무 대답도 않고 물끄러미 그를 올려보았다. 그는 불을 여전히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언제 어느때든 당당하지 않았소. 모욕을 당하던, 생명에 위협을 받던 . . 실제로 죽음 앞에서도, 그대는 당당했었소." 그의 말이 이어지는걸 가만히 . . . 가만히 귀를 기울여들었다. 밝고 따스한 불빛에 그의 얼굴이 다정하게 풀어진것 같았다. "엘." " . . 네." "난 라세스가 힐다를 잃었을때, 죽고 싶다던 그의 목숨을 내게 달라하였소." " . . 그런 비겁한 방법을 썼단말이에요?" "비겁한것이오?" 조금 허탈한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살짝 미소를 입에 베어물고 말했다. "비겁하죠. 비록 그때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 라세스가 앞뒤 가리지 못하고 죽으려고 했다고 해도. . . 그건 그의 선택이고, 그의 삶이잖아요. 존중해줘야하는거 아니에요?" " . . . 엘, 지금 그대는 내가 그때 라세스가 죽게 내버려뒀어야한다고 말하는것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라세스가 죽었다면 난 그를 알지 못했을꺼고 . . 그가 내 앞에서 죽는 일도 없었겠죠." "도망치고 싶은것이오?" 갑작스런 아크산의 말에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불길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마치 날 보고 있는것처럼 느껴졌다. "죽음에도 정면으로 맞서던 그대가 아니었소? 그의 죽음에서 도망가는것이오?" " . . 잠시, 자리 좀 비울께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다간 . . 아크산에게 내 모든 감정을 쏟아부을 것 같았으니까. 불을 뒤로하고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 자리에 멈춰서서 어두운 숲을 보며 말했다. "아크산은 . . 라세스가 살아가게 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글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 . . . 제 대답 역시 글쎄-네요. . 그걸 말해줄 사람은 . .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타는 소리와 아크산을 남겨두고, 난 숲으로 들어갔다. 건조한 나무냄새가 옷자락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목적지없는 걸음을 옮기면서 난 더 깊은 곳을, 포근한 어둠 속을 찾았다. 복수라고 할 수 없는 화풀이를 해버렸다. 죽음을 . . 죽음보다도 더한 저주를 라세스를 죽게한 그에게 쏟아부었다. . . 글쎄, 과연 그게 내가 원하던 것이었을까. "난 아무 잘못도 없어-" 조용히 입속에서 웅얼거리듯 말했다. 입 안 가득 씁쓸한 초콜릿을 먹은듯 달디 달았다. "응 . . 난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파르르 떨리는 입가는 나 역시 나의 잘못을 알고 있기 때문. " . . . 난 . .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 그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말을하면서 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두손에 얼굴을 묻었다. 한없는 정적 속에서 내 작은 숨소리가 귀에 거슬리도록 크게 들려왔다. 내가 '이곳'에 오게된 이유가 뭐였지? 아 . . 지오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에르테이샤]가 되어, 전쟁을 끝내달라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난 '이곳'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처음에 사령관 아저씨를 만났지. 그곳에서 사켄도 만났고, 세브릭도, 쿠오도 . .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도 만났어. 사령관 아저씨 . . 아니, 아렌타의 황제 폐하의 믿음을 얻고, 난 사켄과 세브릭이랑 생명의 숲으로 향했지. 가는 길에 아크산과 . . 응, 그때 라세스를 만났지. 그들과 만나, 함께 생명의 숲으로 가기로 했고 . . 생명의 숲에서 하브와 에프릴, 족장님 . . 그리고 다시 지오를 만나서 마음을 다잡았어. 그 후에 하브도 동행하게 되어 서연합, 카슘으로 향하기로 했지만, 아크산과 라세스에 의해 하빔으로 갔었지. 하빔에서 국왕전하를 만났고 . . 아크산과 라세스와 헤어지고 극적인 탈출도 했어. 다시 세브릭과 사켄을 만나 카슘에 가서, 카이스를 만났고. 카이스와 함께 황궁에 갔을때, 테일러를 만났지. 테일러와 인사 아닌 인사를 나누고, 헤딜리아 공녀님과 만나, 카이스가 그녀를 사랑한다는걸 알았고 . . 어쨌든 그 둘을 이뤄주고 테일러와 함께 드디어 중앙으로 가기로 했었는데. 가는 도중에 . . 암살자를 만나고, 그 후에 전하를 만나고 . . 라세스는 죽어버렸지. 어디서부터 . . 잘못된걸까. 내가 '이곳'으로 온것? 아니면 전쟁을 멈추기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닌것? . . . 그게 . . 과연 잘못인가. " . .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 . 잘못된 일 아니었을까." 웅얼거리는 소리가 손사이로 흘러나갔다. "부스럭-" 갑작스런 소리에 멈칫하고 두손에 묻었던 고개를 돌리려고했지만, 따스한 손길이 뒤에서부터 날 끌어안았다. 내 손이 떨어졌어도 보이는것은 . . 여전한 어둠. 커다랗고 조금은 거친 '남자'의 손이 내 눈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 . . . 뭐에요?" " . . . " 소리죽인 숨소리에 난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천천히 날 안아주고 있는 그의 품에 기대어 완전히 눈을 감았다. 편안했다. 그의 품에서 따스한 심장의 고동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차갑게 식은 내 몸은 쿵쿵-하고 뛰고있는 심장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위로해주는거에요?" " . . . " " . . .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해요?" " . . . 아니라고 할수는 없겠군요." 역시나 . . 그인가. 귓가에 들리는 장밋빛으로 가득찬 숨결에 나도 모르게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받지 않았어요." "그랬겠죠." " . . . 흐음?" "당신은 지금 스스로를 상처입히고 있으니까요." "그럴리가요. 전 절 너무나도 사랑해서, 스스로 상처입힌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걸요-" 장난끼어린 내 대답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조금 불편한 그의 침묵에 난 그 잠깐을 참지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상처입지 않았어요. 스스로를 상처입히고 있지도 않고 . . 그저 생각한 것뿐이에요. 난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까-하고 . ." " . . . 엘." "그러니까, 걱정하지마요. 위로해주지 않아도 되요. 곧 정리할 수 있을테니까요." 싱긋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짓고는 눈을 떴다. 여전한 어둠이지만 그 어둠속에서 희미한 그의 손윤곽이 보였다. "당신은 입만 열었다하면 거짓말이군요." "그럴리가요. 내 진심을 거짓으로 치부하다니 . . 슬픈데요." 조금 뜨끔한 마음에 잉잉- 우는 소리로 투정하듯 말하며 킥킥 웃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날 끌어안은 손길이 더 강해졌다. "거짓말 아니에요." 귓가로 깊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따스하다 못해 조금은 뜨거운 그의 숨결에 귀가 간지러웠다. . . 기분 묘한데 . . "일단, 풀어주면 안돼요? 지금 이 자세, 되게 묘하다는거 알아요? 세브릭이 날 좋아하는건 물론 알고있지만, 이런 적극적인 애정표현은 제가 너무너무 부끄럽다구요." " . . 아주 잠깐이라도 좋아." "아?" 갑작스런 그의 반말에 난 흠칫 몸이 굳었다. 세브릭도 그걸 느꼈는지, 날 끌어안던 팔에서 조금 힘을 풀었다. "잠깐 . . 잠시만 네 진심을 털어놓으라고." "난 언제나 진심인데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항상 금방이라도 떠날듯 구는지 . . 난 알지 못해." 조금 빠른감이 있는 그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 . 그는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껄까. "그래서 . . 불안 . . 하고, 가끔은 화가 나기도 해." 마지막 말은 거의 으르렁거리듯 말했기 때문에, 난 또 다시 흠칫 놀랐다. 내 놀람을 느꼈는지, 세브릭은 천천히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며 말했다. "말해." " . . . 뭘요?" 암록색으로 보이는 시야를 회복하기 위해 몇번 눈을 깜빡였다. "네가 지금 생각하는것." 훽하고 내 몸이 돌아갔다. 세브릭은 내 어깨를 부술듯이 꽉 쥐고 날 노려보듯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라고." " . . . 말했잖아요. 그냥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을뿐이에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 . " "그게 아니잖아!" 버럭 소리치는 그 때문에 다시 움찔 몸을 떨었다. 아마도 동그래졌을 내 눈으로 멍하게 세브릭을 쳐다보았다. "네가 생각하는건, 네가 마음에 품고 있는건 그게 아니잖아!" 거칠게 내게 소리지르던 그는 입을 다물고는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턱선으로 느껴지는 짜릿한 온기에 나도 모르게 멍청히 웃어버렸다. 내 웃음에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지만 난 웃는걸 멈출 수 없었다. 코가 찡해지고 눈이 알싸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조금도 눈을 깜빡이지 않고 진지하게 봐주는 모습에, 난 눈물을 참지않고 그대로 흐르게 내버려두었다. "나도 . . 알고 있어요." " . . . " "죽음이란거,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거 알고 있다구요. 그냥 . . 이제 볼 수 없는 것 뿐이잖아요. 다시는 함께 말하고, 보고, 웃을 수 없다는것. 그것뿐인데 . . 멀리 여행갔다고 . .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건데 . ." 죽음이라는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오히려 죽어도 상관없다고 . .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 . 무서워졌다. 죽음이란것이, 끔찍하게 무서워졌다. 죽으면 끝이지만 . . 남는 이들이 겪을 그 고통을 . . 생각치 못했다. 난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 .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 . 라세스의 죽음을 통해 알게되버렸다. "화가 난다구요. 열받고 짜증난다구요. 나란 사람 정말 . . 정말 싫다구요." 눈을 감고 악을 쓰듯 그에게 말했다. "사실, 하빔의 왕이라는 그 사람에게 저주같은거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를 죽일 생각같은거 전혀 없었어요." 그래, 죽일 생각같은건 없었다. 난 . . 난 이제 고작 고등학생일뿐이었다. "나 여기에서 뭐하는거에요? 나 왜 '이곳'에 오게 된거에요? 누굴 원망해야되는건데요? 내가 왜 이런 아픔 겪어야하는건데요!" " . . 엘." "이런 내가 밉다구요, 미워 죽겠다고! 나보고 어떻게하라고. 참고 있잖아요. 라세스의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잖아요. 근데 . . 근데 왜 . . " 그가 내 어깨를 감싸며 꽉 안아주었다. 그의 품 속에 이마를 기대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이런 사람이에요. 몇번이나 생각하고 생각해서 . . 내 스스로 납득할만한 이유를 생각하고 그제서야 포기하는 사람이에요. 모든걸 납득하고 나서야 이해하고 다시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구요." " . . . " "근데, 라세스의 죽음을 어떻게 납득해요? 그가 죽은건 나 때문인데. 나 때문에 그가 죽은건데. 내 앞에서 . . 내 앞에서 자길 용서하지 말라며 웃어버린 사람인데 . . "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때문에 그의 옷깃을 꽉 잡아쥐었다. 손안에 가득찬 천조각을 구길만큼 손에 힘을주고 다시 한번 눈물을 삼켰다. "그러니까 . . 정리하게 내버려둬요. 곧 괜찮아질테니까. 라세스를 생각하며 웃을 수 있도록 . . 누군가를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바보가 되고 싶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손에 힘을 풀고 그를 밀어내었다. 그리고 의외로 순순히 밀려주는 그를 느꼈다. 난 눈을 깜빡이며 마지막 눈물방울을 떨군후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어깨에 닿아있는 손을 천천히 떼어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만족하죠?" 잠시 눈을 감았다가 아린 눈가의 아픔을 참으며 싱긋 웃었다. 조금은 . . 후련해진것도 같다. "고마워요, 세브릭. 마음이 좀 편해졌거든요. 더 쉽게 정리할 수 있을것 같아요." ' . . . 정말 . . " "음?" 말똥말똥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복잡해보이는 눈으로 날 보다가 설핏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곤 손을 뻗어 다시 날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는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 . . 세브릭?" "당신은 . . 정말 . . "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은 분명 내 착각이 아니겠지. " . . 왜그래요?" "당신 때문에 . . 엘, 당신이란 여자때문에." " . . . 나요? 나 왜요?" 울었기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꽁꽁 숨기고 있던 마음을 말해버렸기때문일까 . . 조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정신을 차릴 수없이 혼란스러웠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 머리속은 놀랍도록 개운하고 맑아졌다. "당신이란 여자 때문에 . . 미치겠어요." " . . . 와- 이거 엄청난 말을 들었네요. 내 마음 털어놓으라고 한건 세브릭이잖아요. 이렇게 나오면 나 무척 곤란해요." 그러니까 내버려두라고 했잖아. 애써 마음 추스리느라 정신없는 나한테 왜 그렇게 집적(?)거렸어. . . . 이번에야말로 난 잘못없어. 털어놓으라고 해서 털어놓은것 뿐이란말이야. " . . 정말 곤란해하도록 해요." "에?" 천천히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진지한 장밋빛 눈동자로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 했던 말이있죠." " . . 무슨 말이요?" 그는 천천히 다가와 귓가에서 아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땐 . . 설마라고 생각했었는데요." " . . . 지금 난 세브릭이 무슨 말을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눈 앞에서 살랑이는 머리카락을 보았다. 밤이라서 그의 머리카락 역시 어둠에 젖어있었다. " . . '제가 미치광이가 되지 않는 이상, 당신을 제 연인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꺼에요.'라고." "그런 말 한적이 있었던가요?" "분명 한적있어요.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그는 내게 다가섰던것처럼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아까의 복잡한 눈과는 달리 모든 것이 정리된듯 맑은 눈동자로 날 보더니 픽 웃었다. "설마 . . 내가 그 미치광이가 될줄이야." " . . 에?"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듣지 못했다.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그는 입가에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더 정리할께 남았나요?" "에 . . 아 . . 네?" "정리할께 더 남았냐고 물었어요." " . . 조금 . ." "알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 나무가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 . . 기다려주려구요?" "혼자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 . . . . 뭐, 고맙다고 해둘께요." 싱긋 웃는 내 미소를 보며 그 역시 픽 웃었다. 뭔가 전과는 그 웃음이 다른것 같았지만 . . 뭐 . . 좋은 쪽으로 변한것같으니까 . . 그냥 신경쓰지 말자. 한편 엘과 세브릭을 유심히 지켜보는 한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 눈동자는 즐거워보이기도했고, 어떻게보면 지독히 불쾌해보이기도 했다. " . . 호오 . . " 나무에 기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그는 빙긋 양쪽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 . 예상외로군." 그 말을 하고는 그는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곤 기대있던 몸을 일으켜세우곤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발을 디뎠다. 하지만 바스락 소리를 내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옅은 달빛이 빈약한 나뭇잎을 통과해 두사람을 비추었다. 한명은 황금빛도는 붉은 제복을 입은 테일러였고, 다른 한명은 머리카락이 이제 어깨에 닿을정도로 길어진 사켄이였다. " . . 이번에도 그대인가?" 말없이 서로를 주시하던 그들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테일러였다. 테일러의 물음에 사켄은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왜 방해를 하는지 모르겠군. 난, 내 것을 빼앗기고픈 생각따윈 갖고 있지 않다. 그대가 포기하는 것은 내게 좋은일이지만 . . 그대가 포기했다고 나한테까지 엘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건 아니겠지?" " . . . 내버려두십시오." "하? 내버려두라고? 내가 왜 그래야하지?" 테일러는 어이없다는 듯 비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말했다. 그런 테일러를 보던 사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폐하는 엘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 . 그대가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고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이지?" 테일러는 사켄의 대답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표정을 풀고 물었다. "엘은 폐하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저 자는 보고 있다는건가? 큭 . . 천한 노예의 피를 이은 세브릭경-을?" " . . . 그건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나서는것인가?" 테일러는 표정을 굳히며 사켄을 보았다. 사켄은 테일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잠시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 . . 무례?" 사켄은 똑바로 고개를 들더니 성큼성큼 테일러에게 걸어와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바짝 끌어당겼다. 테일러 역시 순식간에 사켄에게 끌려가듯하다가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멈춰서서 사켄의 손을 꽉 쥐었다. "도대체 엘에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사켄의 진지한 회색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테일러는 빙긋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원하냐니? 뻔한것 아닌가. 그녀의 미소, 그녀의 눈빛,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몸 . . 그녀의 마음. 모든 것을 원한다." "엘은 절대로 당신에게 가지 않을껍니다." "절대로? 그럴리가. '절대'라는 것은 없어." 테일러의 비웃음에 사켄은 그의 멱살을 더 꽉 틀어쥐었다. 그의 힘에 테일러는 픽 웃고는 말했다. "그리고 묻겠는데 . . . 이게 무슨 짓이지?" 사켄은 테일러의 말을 들었으면서도 그의 멱살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똑바로 들어 테일러와 시선을 맞추며 한글자 한글자 힘주어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은 엘은 널 바라보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는것이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거다." " . . 그래서?" "더 이상 . . . " 사켄은 잡았던 멱살을 풀며 그를 거칠게 밀어냈다. 잠시 비틀거리다가 곧 똑바로 자세를 잡은 테일러를 보며 사켄이 차갑게 말했다. "엘을 흔들지마라." " . . . 하하 . . 내게 흔들렸다는건가? 엘이?" 테일러는 어깨를 으쓱이며 뒤에 있던 나무에 기댔다. 그리고 나른하면서도 위험스런 분위기를 풍기며 비딱하게 사켄을 노려보았다. "폐하가 생각하는 흔들림이 아닙니다." " . . 하?" "엘이 폐하를 눈요기정도로 생각하고 있을지언정, 사랑 때문에 흔들리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 . . . 사랑이라 . . " "엘을 흔들지말라는 것은 . . 더 이상 그녀의 마음을 헤집지 말라는 소리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쨌다고?" 테일러는 픽 웃으며 조금씩 더 짙어지는 보랏빛 눈동자로 사켄을 보았다. 사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정말 모르니 묻고있다네. 내가 어쨌길래, 고작 아렌타의 귀족 밖에 안되는 기사가 카슘 제국의 황제인 내게 이리 함부로 대할 수 있는지 말이야." " . . 제가 말하고 있는 사람은 카슘 제국의 황제가 아닙니다." " . . 내가 아니다?" "저 역시 아렌타의 귀족인 기사로서 폐하께 말씀드린게 아닙니다." 테일러의 입가에 미소가 지워졌다. 다정한 어둠을 품은 바람이 사켄의 회색빛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사켄은 그를 담담한 시선으로 보며 말했다. "엘을 지켜주고 싶은 남자인 '사켄'으로써, 나와 같지는 않지만 똑같이 그녀를 마음에 둔 '테일러'라는 남자에게 말하는겁니다." " . . . 눈물겨운 사랑이로군." 테일러의 이죽이는 말에 사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테일러는 보랏빛 눈동자를 번뜩이더니 킥하고 웃었다. "엘의 주위에는 모두 그대같은 이들 뿐인것같아. 하빔의 왕자도 그렇고, 노예의 피를 이은 세브릭경도 마찬가지. 거기다가 그대까지 . . " 그는 그 말을 끝낸후 사켄에게서 시선을 돌려 어두운 숲속을 바라보았다. 테일러의 시선에서 벗어난 사켄은 잠시 심호흡을하며 테일러의 옆모습을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엘이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며 고민에 잠겨있었고, 세브릭은 그루터기에앉아 그런 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묘하게 안정되어보이는 그 둘을 보며 사켄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미세한 미소를 지으며 한손을 들어올려 앞머리를 살짝 흐트러트리고는 눈을 감고 지그시 손으로 눈을 눌렀다. " . . 내가." " . . . " "내가 포기 못한다고 한다면, 그대의 말에도 엘을 기어코 흔들어놓겠다면 . . 그대는 어찌하겠는가?" 갑작스레 꺼낸 테일러의 말에 사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런 사켄을 재밌다는 듯 보며 그는 다시 슬쩍 나무에 기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말해보게. 무척 궁금하니까." " . . . 무슨 대답을 하길 원하십니까." "날 죽일껀가? 아니아니- 죽일 수 있을리가 없지 . . 엘의 일을 모두 망쳐놓는 일이라는건 그대가 더 잘알테니까 말이야." 테일러의 말에 사켄의 회색눈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곧 그 어두운 기운은 씻은 듯 사라졌다. "막을껍니다." " . . 어떻게? 그대의 생명이라도 걸텐가?" 테일러의 비웃음담긴 말에 사켄은 입을 다물었다. 사켄을 재촉하지 않으며 테일러는 집요한 시선으로 사켄을 쳐다보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천천히 . . 사켄의 입이 열렸다. 대답을 끝낸 사켄이 테일러에게 목례를 하고 뒤돌아가버리고 혼자 남은 테일러는 방금까지 세브릭과 엘이 함께 있던 장소로가서 세브릭이 앉았던 그루터기에 앉았다. 그리곤 손에 깍지를 끼고 물끄러미 정면에 있던 나무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손장난을 치듯 깍지낀채로 손가락을 움직이던 테일러의 손이 딱 멈췄다. "엘을 마음에 둔 테일러라." 담하한 달빛이 내려앉아 조금씩 빛나는 녹회색 나뭇잎을보던 테일러는 곧 고개를 젖혀 한쪽 손으로 그루터기의 가장자리를 잡아 자세를 고정한후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발을 까닥였다. "날 보고 있지 않고 . . 날 사랑하지도 않는다 . . . 나는 엘을 행복하게 해줄수없다 . . 라 . . " 그는 계속해서 발을 까닥이다가 눈을 한번 지그시 감고는 말했다. "하명하겠다." " . . . " 그가 말하자마자 그의 주위로 검은 복면을 두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부복했다. 테일러는 그런 그들을 보지도 않으며 다시 눈을 떴다. "찾아라." " . . 누굴 . . 말씀하시는지." "누구일것같나?" 그는 젖히고 있던 고개를 똑바로 하고 여전히 나른한 보랏빛 눈동자로 질문한 이를 쳐다보았다. 질문했던 복면인은 이마를 땅에 박으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 어리석어 모르겠습니다." "흠 . . 하긴, 나도 뜬금없다 생각하니 용서하지." 테일러는 빙긋 붉은 입술에 소름끼치는 웃음기를 머금었다. "하빔의 국왕." " . . . " "멀리 가지는 못했을터 . . 찾아라.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된다." "예!" 복면인들은 짧게 대답하며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바람이 그들이 사라진 곳을 채웠다. 가만히 그루터기에 앉아 바람을 느끼며 기분좋은 웃음을 짓던 그는 한쪽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보랏빛서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투명하리만치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 . .사켄경, 그대가 영혼을 바쳐서라도 날 막겠다는 말 . . 어디 어떨지 확인해보도록 하지." 누군가 내 얘길하는듯한 느낌에 귀가 간질간질해졌다.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는 세브릭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건조한 장밋빛 눈동자로 바닥을 응시하며 조용히 내 발자국을 따라 걷는 그의 모습에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 . 라세스에대해 대충 정리했더니, 이번엔 세브릭이 문제네. 아까도 뭔가 기분이 이상하긴했지만 . . "큼-" 더 이상 이 답답한 침묵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작게 헛기침하자 그제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난 자리에 멈춰서서 뒤돌아섰다. 그는 내게서 두걸음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춰섰다. "왜그래요?" "뭐가 말이죠?" "왜 그렇게 조용하냐구요-" " . . . 생각이 끝난건가요?" "어느정도는." 아직도 라세스를 생각하면 마음이 울렁울렁하고 눈이 시큰해지긴하지만 . . 그래도 이제는 라세스의 웃는 얼굴이 더 기억에 선명히 남는다. 이렇게, 천천히 납득하면 되는거겠지. 사람을 잊기보다는, 서서히 추억으로 만들면 되는거다. 예전에, 내가 라세스에게 그녀에대해 말했듯이 . . "그렇군요." 내 말에 작게 대답하는 세브릭 때문에 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참을 멀거니 날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엘." "네." "만약, 제가 죽어도 아까처럼 울어줄껀가요?" " . . . 글쎄요-" 과연 우는걸로 끝낼 수 있을까. 그가 죽었다는것을 . . 난 납득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는걸로 끝내진 못하겠죠." "어째서죠?" "어째서냐니 . . 그야, 난 세브릭을 무지무지 좋아하니까요." 장난식으로 웃으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한걸음 떼려는 찰나,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좋아하고 있어요." " . . 네?" 잘못 들은건가? 걸음을 떼려던 발을 그대로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지, 그의 장밋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날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 "좋아하고 있어요, 당신을." " . . . 아- 네. 저도 세브릭 엄청 좋아해요. 그것보다- 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 . . 엘." "세브릭이 날 좋아한다니- 이거 고백이에요? 우앗- 얼굴이 화끈화끈한데요?" 정말 얼굴로 피가 몰리는 느낌에 난 두 손을 양볼에 대고 꺅꺅 작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내 반응을 묵묵히 지켜보던 세브릭은 한걸음 내게 다가왔다.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난 순간 소리지르던것을 멈췄다. 내가 소리지르는 것을 멈추자, 그가 다시 내게 한걸음 더 다가왔다. 이제, 그와 나의 거리는 애써 손을 뻗지않아도 쉽게 닿을만한 거리였다. 그는 진지한 눈동자로 날 보고는 천천히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쓸려내려갔고, 순간 내 심장은 멈춘듯이 쿵 하고 떨어졌다. " . . 세브릭?" "좋아해요, 정말로." "저도 좋아한 . . "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그의 말에 난 서서히 양손을 떨구고 그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 멍한 눈빛에 피할 수 없을만큼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확실하게 제 감정을 정의할 수 있게되었어요." 거짓말- 이런 . . 이런 일이 왜 . . "난." 달콤한 낮은 저음이 내 귓가에 울려퍼졌다. "엘, 널 사랑하고 있어." 지오, 내가 부탁했잖아요. "대답은." 제발 이 사람만은 . . " . . . 세브릭." 날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애매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보았는지 그는 내 눈에서 시선을 돌렸다. 사르륵-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내 머리카락이 빠져나왔다. "대답은 나중에." "세브릭. 난 . . " "대답은 나중에 들을께요." 그는 내 뒷말을 기다리지 않고 저벅저벅 날 놔두고 가버렸다. 거의 넋을 놓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맙소사 . . " 지금 . . 이건 '진짜' 고백인거지? " . . . 절대로 말 안할줄 알았는데 . ." 세브릭이 내게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그건 거의 여자의 직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써 모른척했고, 얼마전 난 분명 그에게 말했었다. '날 사랑하지 말라'고.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건 . . " 상처뿐이란말이야, 이 바보같은 남자야. 우리의 최종도착지 '라트비엔타'로 가는길. 우린 어색한 분위기로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크산은 아크산 나름대로 라세스를 잃고 마음정리를 하느라 주변을 신경쓸 수 없었고, 사켄은 무슨 일이 있는지 가끔 테일러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나와 세브릭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하브는 우리의 이상기류를 알아챘는지 눈치를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우리들 중 유일하게 이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 . "엘, 오늘도 사랑스럽군." "감사해요, 폐하. 폐하도 참 멋지세요." "그건 당연한거지." 빙긋 웃는 테일러 덴 카슘 . . 이 황제폐하 뿐이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날 유혹할 생각인지, 끊임없이 저런 칭찬을 내게 던지고 있어서, 안그래도 불편한 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눈치가 없는거야, 아님 알면서 일부러 이러는거야? . . 분명 후자다. 이 사람은 나랑 똑닮았으니까, 이런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거라고. 생각을 확정짓고 나자 더더욱 이 사람이 얄미워보였다. 전에도 별로 예뻐보이지 않았는데 . . 아- 진짜 미치겠네. "궁금한게 있는데, 엘." "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그대는, 어떤 삶을 살았지?" "음?"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테일러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날 보더니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어디서 살았고, 어떻게 살았지?" "음, 평범하게 살았어요." 그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다가 '이곳'으로 오면서 온갖 일들을 겪었지. 목숨의 위협도 받았고, 절벽에서도 떨어져보고 . . 거기다가 소중한 사람의 죽음 . . 도 겪었고. 그리고 . . 힐끔 세브릭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기전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직까지 그를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나중에 대답을 달라고는 했지만 . .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 . 하나였으니까. "절대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그럼 제가 어떻게 살았을것 같은데요?" 샐쭉 웃음짓는 내 모습에 그는 나른한 미소를 짓더니 살짝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람에 휘날리는 내 긴머리카락을 잡고 슬쩍 그 끝에 입을 맞추며 똑바로 날보았다. "내가 알 수 있는건 단한가지같은데." "에 . . 뭔데요?" 그의 입술이 닿았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사람은 . . 이 사람은 싫고 정말 싫지만. 그래도 . . 심장이 뛰는건 불가항력이야. 여자라면 당연히 뛸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많은것을 누리며 살았겠지." " . . 그래보여요?" "그래." 그는 내게 나른한 위험함을 품은 섹시한 미소를 지었다. "한번 그대를 바라보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할정도로 유혹적인 이유는 모든것을 누렸기 때문인가?" 그의 말에 난 사켄의 품에 안겨 말을 타고 있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머리카락끝을 잡고 뱅뱅 손가락에 돌리며 테일러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건 아닐껄요-" "그럼?" "제가 유혹적인 이유는 말이죠, 폐하." 의미심장하게 살짝 목소리를 줄여 말하자, 테일러는 눈가에 옅게 흥미를 품은 웃음을 담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때 사켄이 내 허리를 꽉 붙들었다. 그에게 걱정말라는 미소를 지어주며 난 테일러에게 속닥거리듯 하지만 조금 크게 말했다. "그건, 폐하가 제게 푹 빠지셨기 때문이에요." " . . . . " 내 말에 순간 휘잉-하는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애써 무시하며 난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씨익 웃었다. "정답이죠?" " . . . 확실히." 그는 바람때문에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날 바라보았다.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그가 그 말을 하면서 살짝 묘한 열기를 품은 눈동자로 날 보자, 사켄이 내 몸을 감싸안으며 테일러의 말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 . . 사켄?" 갑작스런 이동에 의아해져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테일러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싶은 기분을 . . 조금은 알것도 같군." " . . . 사켄, 그 말은 내 전용이에요." 내 말에 사켄은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가 곧 착잡해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복잡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슬쩍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 손에 얌전히 앉아있는 하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브는 귀찮은지 인상을 찡긋거리긴했지만 그래도 뿌리치지는 않았다. 조금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드디어 '라트비엔타'로 가는길에 위치한 마을에 도착했다. 황량해보이기는 하지만 . . 뭐 그런데로 갖출것은 제법 갖춰진 마을에서 우린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는거에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준 사켄에게 싱긋 웃어주며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는 움찔하며 회색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켄, 시간있죠?" 여기저기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두 완벽하게 무시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내 웃음에도 차분한 모습으로 날 보는 사켄의 손을 잡아끌며 뒤에대고 말했다. "그럼 사켄과 저는 잠시 나갔다올께요." "엘!" 내 말에 하브가 금방이라도 내게 날아올듯 튀어올랐지만 지긋이 그를 쳐다보았다. "하브는 얌전히 있을것. 이제는 나랑 떨어져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많이 안들잖아요?" 문을 열고 하늘을 확인하며 말하는 내 귀에 우물쭈물한 하브의 숨소리가 들렸다. "알았죠?" 올려다본 하늘은. "얌전히 있어요." 청회색빛으로 물들어, 햇살의 따스함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고 있었다. "어딜가는거지?" 건조한 모랫바람에 목이 칼칼하게 느껴질 무렵 들려온 사켄의 목소리에 우뚝 자리에 멈춰섰다. 여전히 손을 잡고 있던 우리였기에, 사켄도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섰다. " . . 글쎄요, 딱히 갈곳을 정해놓지는 않았는데." 싱긋 웃으며 그에게 말하자 그는 맑은 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침묵했다. 그의 배려심 깃든 침묵에 어설프게 걸친 웃음을 지운채 살짝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분위기가 너무 불편해서요. 사켄이랑 나오는게 제일 좋겠다- 싶기도 했고." "단순히 바람을 쐬고 싶었던 것뿐인가." "어라, 뭔가 기대한거에요? 이거이거 사켄도 은근히 응큼하다니까." " . . . " 키득 작게 웃고는 멀리서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나무로 천천히 다가갔다. 사켄은 조용히 날 따라와주었다. 나무에 도착해서 그 나무를 올려다보며 난 잡았던 손을 풀었다. 가볍게 풀려나가는 그의 손을 느끼며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응시했다. " . . .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건가." "음, 어떻게 사켄은 내 머릿속을 꿰뚫어보듯 말하는걸까 . . 정도?" 하늘을 보던 시선을 돌려 사켄을 보았다. 그는 차분한 눈동자로 날 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않고 뒤의 나무에 기댔다. 등으로 느껴지는 건조한 느낌에 씁쓸해지는 입안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 . . . 있잖아요, 사켄." "뭐지?" "그러니까 . . 고백 . . 받았어요." 이기적이지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 내가 품고있는 마음을 모두 말할 수는 없어도 . . 조금이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얼마전에 . . 세브릭한테 . . 요." " . . 그랬군." "좋아한데요, 사랑하고 있데요." " . . . " 사켄을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고갤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세브릭의 마음, 난 받아줄 수 없어요." " . . . " "미안한 일이지만, 난 그를 사랑할 수 없어요." 금방이라도 파란 하늘이 보일듯, 회색빛 구름이 옅어져있었다. 이제 몇일 후면 우린 '라트비엔타'에 도착한다. 그리고, 전쟁에대한 얘길 나누고- . . 아마도 끝나지 않을까. 그럼, 더 이상 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는거다. 내 일은 . . [에르테이샤]로서의 내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일은 . . 끝나는 거니까. 복잡한 심정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았을때, 귓가에 사켄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네게." 저벅이는 발걸음 소리. 휘날리는 모래의 느낌.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사켄의 . . 그 특유의 다정함. "그러니, 그 일때문에 고민할 필요없다. 내가 . . 할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세브릭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테니까." 그는 이내 내 머리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사켄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치워졌을때 난 눈을 떴다. 그리고 앞에 서있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얼굴을 비볐다. 갑작스런 내 행동으로 사켄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사켄의 깊은 향을 들이마쉬며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사켄, 참 좋아해요." " . . . " "정말로, 정말로 좋아해요."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심장소리가 두근두근 구슬프게 떨려왔다. 사켄은 조심스럽게 날 품에서 떼어놓더니 담단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사켄은요?" " . . . 나 역시." 그는 지독히도 단 초콜릿을 입안에 머금은듯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너와 같다." 미안해요. "아우- 부끄러워라. 이제 그만 갈까요, 사켄?" "그러지." 미안해요, 사켄. 먼저 뒤돌아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 . 미안해요. 여관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을때 공교롭게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방에서 쉬는 모양이라 짐작하고 사켄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 쉬어도 되요?" "그래." "씻어도 될까요?" " . . 그래." "자도 되요?" " . . . 그래." 대답할때마다 그의 말이 한템포씩 늦어지고 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그에게 웃어주며 말했다. "굿나잇 키스해도 되요?" "그ㄹ. . !" 그의 대답이 들리자마자 뒷발꿈치를 들고 그의 뺨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멍한 눈동자로 날 보는 그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며 한걸음 물러섰다. "잘자요, 사켄." " . . . " 상쾌한 기분으로 뒤돌아서는데 순간 강한 힘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어-'하는 순간 사켄에게 끌어안겨져 깃털같이 가벼운 온기가 내 볼에 닿는 것을 느꼈다. " . . . 어?" "편히 . . 쉬어라." 급히 날 지나쳐가는 사켄의 귀가 빨개진 것을 보며 난 한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가 들어간 방을 바라봐야만했다. . . . 나, 당한거야? * 따그닥따그닥- 거리는 말발굽소리가 묘하게 기분을 안정시킨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설레이는 것은 저 멀리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는 것 때문이겠지. 마음 가득 차오르는 만족감, 혹은 허탈함. 기쁨 . . 슬픔 . . 행복, 안타까움. 많은 감정들이 내 마음속을 휘젓고 다닌다. 끝-이다. 정말로 . . 이제 곧 . . 모든 것이 끝나리란 생각에 눈물마저 흘러내릴 것 같다. 내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모든 감정들이 조금씩 삐죽삐죽 고개를 드는것을 느끼며 난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끝난게 아니다. "사켄, 저기요, 저 멀리 보이는 국기는 . . 음 . . 아렌타의 깃발이 맞나요?" "그래. 카슘이 '카차'라면, 아렌타는 '라펫'이지." " . . '라펫'? 그건 또 뭐에요? '카차'랑 비슷한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물끄러미 깃발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색으로 빛나는 깃털을 가진 새로, 신께서 이 세계에 재앙을 내리셨을때 나타나 울었다고 알고 있다." " . . 오색으로 빛나는데, 깃발에서는 어떻게 표현해요?" 반짝이라도 붙여놓은건가 . . 아니, 이 세계에 그런게 있을리가 없는데.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 표정을 보며 사켄은 뭐 그런 이상한걸 묻냐는 듯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쓱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깃발에는 흰색이다." " . . 왜요?" "흰색은 어떤 색이든 물들일 수 있으니까." "아-" 그런가? 확실히 . . 흰색은 여러색으로 바뀌기 쉽지. 이해했다는 내 끄덕임에 사켄은 피식 웃고는 고삐를 잡은 손을 느슨하게 풀며 말을 재촉했다. 그의 멋드러진 미소에 심장이 쿵쾅이는 것을 내 잘못이 아니야- 로 넘겨버리고는 숨을 쉬기 위해 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 " 그리고 그곳에서 날 보고 있던 세브릭 때문에 정리하려던 마음이 더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잠시 마주친 시선, 세브릭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의 눈속에 담긴 감정을 읽어낼 수 없다.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네요." " . . . " 내 말에 사켄이 살짝 의아하다는 눈동자로, 하지만 조금 굳은 얼굴로 날 보았다. 그에게 살짝 웃어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얼른 이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차라리 나의 세계로 빨리 돌아갔으면 . .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복잡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상처주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며 도망가고 싶은 나의 마음을 가슴 속 깊이 다시 묻어버렸다. 잠시 사켄의 가슴에 기댄채로 눈을 감고 있었을까, 멀리서 환청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누 . ㄴ. . -" "응 . . ?" "ㄴ... 누나!" "엥?" 점점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난 눈을 뜨고 사켄을 올려다보았다. 사켄 역시 놀랬는지 조금 흐트러진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나 역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는 환하게 웃고있는 . . 여전히 맑게 미소짓고 있는 연갈색의 다정한 빛을 품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 . . . 쿠오?" "누나!" 활짝 웃고있던 쿠오가 '이럇-'하는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 . . . 진짜로 쿠오?" "누나, 오랜만이에요. 잘지냈어요?" 생글생글 미소짓고 있는 것은 분명, 예전에 동연합에서 내게 수줍은 미소를 짓던 그 쿠오가 맞았다. "우아앗? 진짜 쿠오야?!" 심란해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쿠오를 다시 만나게 됬다는 기쁨이 퐁퐁 샘솟았다. 난 가까이 다가온 쿠오를 보며 두손을 꼭 잡으며 외칠수 밖에 없었다. "쿠오, 바람직하구나!" " . . . 에? 누 . . 누나?" "정말 바람직하게 자랐어!" 못본지 얼마나 됬다고, 이렇게 잘자라있단 말인가! 쿠오의 부드러운 갈색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단정했지만, 예전 완전히 어리게만 보였던 그는 순식간에 '남자'로 자라있었다. 곧게 뻗은 등과, 든든해보이는 어깨. 그리고 입가에 짓고있는 순수하고도 상냥한 미소. "누나는 여전히 이상하네요." 애매한 미소를 짓고있던 쿠오는 날 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머리속에 휘몰아치는 망상들을 발로 꾹꾹 밟으며 쿠오에게로 살짝 손을 뻗었다. 쿠오는 잠시 망설이더니 곧 내게로 한쪽 손을 뻗어왔다. 그리고 닿으려는 찰나 휙 하고 말이 쿠오의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손끝만이 스치고 말았다. "에?" " . . 누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보던 쿠오는 민망해진 손을 살며시 주먹쥐며 다시 고삐를 잡았다. 나 역시 쿠오를 같은 표정으로 보다가 슬쩍 시선을 위로 올렸다. 사켄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 . . . 사켄." " . . . . " "질투쟁이-" " . . 큼." 살짝 헛기침을하며 내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조용히 키득거리고는 쿠오를 보았다. 쿠오는 조금 굳은듯한 표정으로 사켄을 보다가 내가 보는 시선에 다시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누나, 내 질문에 아직 대답 안했어요." "응?" "잘지냈어요? 나 보고 싶다고 울지는 않았어요?" "에-" 그러니까 . . 누나는 말이지. 조금 많이 바빴단다. 이런 저런 생각과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거든. 그래서 . . 널 생각한건 정말 . . 정말 아주 초-큼도 없었던것 같아. 초큼도 . . 초큼도 . . 아니, 초초초초초-큼은 있었나? "그럼- 네 생각에 밤잠을 못이뤘을 뿐이지, 울지는 않았어." "그게 뭐에요." 순수미소년 쿠오를 상처줄 수 없어서 한 거짓말에 황당하다는 듯이 웃던 쿠오는, 귀가 빨개진 채로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그 자세 그대로 내게 빙그레 눈을 반달로 휘며 웃어주는 모습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 . . 정말 잘자라주었구나. 이 누나 기쁘고도 기뻐. 누나가 정말정말 예뻐해줄께! 간질간질한 손끝을 어찌할줄을 모르며 어서 빨리 도착해서 말에서 내렸으면 하는 생각만 들었다. 한편 엘이 그런 생각을 하는동안, 쿠오는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이건 어디서 굴러들어 온 돌맹이야.'라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보랏빛 머리카락에 눈을 지닌 사람. 무심해보이지만 잔뜩 날이 서있는 푸른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지닌 사람. 그 둘의 반응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익히 잘아는 세브릭과 사켄의 시선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방실방실 웃고있는 엘을 다정히 품에 감싸안으며 자신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사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사이로 살며시 파고 들어와 짓는 세브릭의 살벌한 미소에 쿠오는 더더욱 어정쩡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 . . . . . " "응? 쿠오, 왜그래?" 엘의 말에 쿠오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애써 미소지었다. 쿠오에게로 집중된 시선을, 엘만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새파랗게 질린 쿠오가 이상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어색하게 웃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뭐, 별일 아니라니까, 별일 아니겠지. 가볍게 그의 안색에대한 걱정을 접고 급상승된 기분을 즐기며 가만히 사켄에게 몸을 기댔다. 쿵쿵하고 들려오는 사켄의 심장소리를 등으로 들으며 잠시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저기 . . 누나?" "응?" 뭐, 그것도 쿠오의 부름에 아주 잠깐 잠시뿐이었지만. 힐끗 눈을 뜨고 쿠오를 보자, 그가 힐끔거리며 테일러와 아크산쪽을 바라보더니 내게 속닥이듯이 물었다. "저 . . 기 . . 저분들 누구?" "응? 아- 쿠오는 처음 보는구나?" "네. 누구에요?" "저기 보라빛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가진 제복을 입은 색기가 만땅으로 흐르는 남자가 카슘 제국의 황제 폐하고, 또 저쪽에 푸른빛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가진 금욕적이게 생긴 남자는 하빔 왕국의 제 1왕위 계승자시지." " . . . 누나?" "응?" 내 말에 뭔가 이상한점이 있었나? 묘한 시선으로 날 보던 쿠오가 입가를 어색하게 굳히며 살짝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저기 . . 색기 만땅? 금욕적?" " . . . 어머- 우리 쿠오가 언제 그런 말을 배웠을까. 이제 쿠오도 어른이구나?" "아니 . .저기, 누나가. . " "응? 난 모르는 일인데?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가지고는-" 아아- 슬픈 일이로군. 이제 쿠오도 남자란 말인가? 알거 다 아는 남자란 말이지? "흑, 우리 순수했던 쿠오는 어디로 간거지? 순수 쿠오야- 돌아와-" "누나, 무슨 소리를 . . " 엄청나게 당황하며 으악으악- 소리를 질러대는 쿠오를 즐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때, 귓가에 소근소근하는 감미로운 저음의 목소리가 속닥거렸다. "너무 놀리지 마라." " . . . 아웅- 사켄, 이 질투쟁이." "질투가 아니다." "그럼 뭘까요? 사랑인가!" " . . . "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는 사켄의 시선에 아하하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마주하다가 새초롬하게 삐진 눈동자로 날 보는 쿠오를 보았다. 쿠오의 갈색 눈동자와 마주치고, 방글방글 웃어주자 쿠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풋- 상큼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눈꼬리를 곱게 휘며 웃었다. 아- 아무리 봐도 바람직하게 자란 소년이여. 소년이여, 욕망이 되어라! . . 어, 이 말이 아니었던가? 아무려면 어때, 잘어울리면 됬지. 한참을 쿠오와 쿵짝쿵짝 쿵짜작쿵짝 놀아대다가, 점점 천막들이 보이자 기분이 묘해졌다. 아- 또 이런 기분 . . 음 . . 끝이 다가온다는, 뭐랄까, 보람이 있다고 해야하나, 서운하다고 해야하나. 멍하게 천막들을 보다가 누구랄것 없이 입을 열어 물었다. "이제, 조금있으면 이 전쟁의 결말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 . 기분이 어때요?" 내 질문에 모두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난 질문만 던져놓고 조용히 기다리다가 한명 한명 . . 날 뚫어져라 보는 시선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들은 내 웃음에 잠시 입을 꾹 따물더니, 아크산이 첫번째로 말했다. " . . . 아직은 뭐라 말하기 힘드오." "헤- 그래요? 그러고보니, 아크산은 회의에서 뭔가 말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렇소." "그거, 이제 조금있으면 듣게 되겠네요." " . . . "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는듯한 그의 굳건한 시선을 보다가 장밋빛 시선과 마주하자 순간 멈칫했다. 세브릭은 그때의 그 갑작스런 고백 이후로, 나와 말한마디 제대로 섞지 못했다. 아니 . . 내가 그를 은근히 피하고 있다고나 할까. . . 솔직히, 그만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 마치 내것이 아닌양 뛰어대서 곤란했다. 시큼한 석류알을 입안가득 넣고 씹은 것 같기도 하고, 떫은 감을 먹었는데 뱉지 못해서 그 쓴맛을 제대로 느끼는 듯도 하고 . . 어쨌든 무조건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가슴 설레는 달콤함보다는, 씁쓸함과 시큼함이 내 속을 가득 채워버렸으니까. 결국 그의 시선과 마주하지 못하고 은근슬쩍 테일러를 보았다. 테일러는 나와 시선이 마주하기를 기다렸는지 살짝 웃더니 말했다. "아직 끝은 모르는 것이니까." " . . . 그거, 마치 파투낼 것처럼 말하네요?" "글쎄, 아직 내게 네가 넘어온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넘어갔으니까 말이지." 그는 한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더니 비스듬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 . . 남자가 되서 쪼잔하긴." "음?" "이것봐요, 황제 폐하." "하하 . . 정말 그대는 한나라의 황제인 내게 너무 쉽게 대한단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는 그의 모습에 슬쩍 혀를 베- 내물었다가 말했다. "그거 아세요?"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데, 내가 알리가 있나?" 나른한 미소를 입가에 짓는 테일러를 보며 씨익 웃었다.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거다- 라고, 내가 살던 곳에는 그런 말이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좀 져주시면 안될까요?" " . . . 그거, 정말 남자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말이로군." 그는 잠시 침묵을 즐기는듯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금세 떠진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아주 잠깐 묘한 기색이 흘렀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해 난 미간을 찌푸렸다. 테일러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시선으로 날 보더니 위험한듯하면서도 지극히 여유로워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카슘에는 이런 말이 있지." 이런 말? 무슨 말? 내가 궁금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테일러는 색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대가 원하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면 문제없다." " . . 그거 상당히 이기적인 말인데요?" "곧 카슘에 널리 퍼질 말이지." " . . 에?"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채 멍하게 그를 보자, 테일러는 나와 곧게 시선을 마주하고는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상당히 미묘해서,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거 . . 저 말, 분명 날 겨냥해서 하는 말이지? . .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자기가 원하니까 . . 그런 말인가? " . . . 테일러도 은근 소심쟁이라니까요." 내 투덜거리는 듯한 말에 사켄이 잠시 움찔하더니 날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싱긋 웃어주며 별꺼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가만히 날 보다가 말했다. "엘." "네-" "전쟁이 끝난다면." "네." 사켄은 날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앞을 바라보았다. 난 그의 시선이 날 향하지 않음에도 그를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 거렸다. "떠날 것인가?" " . . . 아." 담담한 그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곧 작게 . . 정말 작게 대답했다. "네." " . . 그렇군." 사켄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 역시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 . 우리는 '라트비엔타', 이 길었던 전쟁과 나의 길었던 여행을 끝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럼 우린 총사령관님을 뵈러 갔다오겠다." "에, 그러실래요?" 도착하자마자 쏠리는 무수한 시선들을 살짝 무시하며 우린 말에서 내렸다. 집요하기까지한 시선에 내가 애매한 웃음을 짓자, 사켄이 차분한 시선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넌?" "글쎄요 . . 총사령관 아저 . . 가 아니라, 총사령관님을 만나뵙는것도 좋겠지만." 톡톡 턱을 두드리다가 힐끔 모자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마도 쿨쿨- 하브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것이다. 절대, 결코 난 하브를 잊지 않았다. 이 사랑스러운 귀염둥이를 . . 절대절대 잊은게 아니었다. 그저, 그가 자고 있으니까, 그는 잠꾸러기니까 깨우지 않은 것 뿐이었다. 큼- 뭐랄까 . . 내가 대신 누군가의 변명을 해주는듯하네.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사켄에게 밝게 웃어주었다. "난 저쪽에 묘하게 반짝반짝 거리고 있는 '이샤링족'의 족장님을 뵙고 올께요. 일단 . . 여기 생명의 숲과 꽤 많이 떨어져있는 곳이니까. 어떨지 걱정되서요." 내 말에 사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가버렸다. 쿠오 역시 내게 살짝 미소짓더니 "좀 있다 봐요, 누나."라는 깜찍한 말을 남기고 사켄을 뒤따라 가버렸다.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나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날 장밋빛의 달콤한 눈동자로 보고있는 세브릭이 있었다. ". . 음? 왜 그렇게 쳐다봐요?" 가슴 가득 뻐근해지는 느낌에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내 미소를 본 그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곧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가 아무말도 없이 눈을 감아버려서 우리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일었다. "그럼, 나 역시 잠시 실례하지." "아? 네. 폐하는 어떻게 하시게요?" "내가 머물곳은 알아야할 것 같아서 말이야. 같이 가도 상관없는데." 생글생글 웃는 그의 모습에 난 얌전히 웃으며 말했다. "절대적으로 사양할께요." "절대적인건가?" "혼전동침은 반대거든요. 전 조숙하고 얌전한 아가씨니까요." " . . . 얘기를 너무 비약시키는군." 피식 웃은 테일러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카슘 사람들도 함께 뒤따라갔다. 테일러가 가버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아크산은 날 보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 역시 . . " "가야하신다구요?" "그렇소." "이거, 저만 남겨두고 모두 떠나버리시네요. 흑- 나에대한 사랑이 식은거에요?" 가짜 눈물을 글썽거리며 잉잉- 거리자, 아크산이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가 곧 장난이라는 걸 알았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런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말했다. "식을리가 없지 않겠소." " . . . 네?" "그럼." 그는 내 되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은채 뒤돌아 가버렸다. 살랑살랑 거리는 그의 푸른 머리카락을 멍하게 보다가 한손을 들어올려 살짝 눈을 가렸다. . . . 그래. 그런거야 . . "잘못들은거야. 반드시 잘못들었어야해. 난 . . 난 . . 여기서 더 이상 뭔가 나오면 정말 울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악을 쓰듯 작게 중얼거리고는 곧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손을 내리자마자 보이는 세브릭의 모습에 순간 아차- 했다. . . 이 사람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 "저기 . . 세브릭, 무슨 할말 . . 이라도?" "나중에 . . 라고 했어요." "네?" "대답, 나중에 듣겠다고." " . . 아, 네."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무진장 어색해서 살짝 그의 시선을 비껴서 보고 말았다. 그는 내가 그를 제대로 보고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한쪽 손을 들어 내 턱을 잡아채고는 똑바로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했다. 갑작스런 그의 따스하지만 거친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조금 평화로우면서도 조급해보이는 눈동자로 말했다. "피하지 말아요." " . . 지금 키스하려고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 . . 그걸 말하는게 아니잖아요." "그럼 뭘 말하는건데요? 여기서 피하지 말라면 그것밖에 더있어요? 아아- 세브릭, 응큼한 남자!" "당신은 뭐든 장난인가요?" 그의 다소 지친듯한 기색에 내 거짓된 웃음이 조금 일그러졌다. 호들갑을 떨던 나는 움찔움찔거리다가 훽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나- 이샤링족에게 갔다올께요. 조금 있다봐요, 세브릭." "엘." 그의 나직한 부름이 들렸지만 그 부름을 무시한채 난 무조건 앞으로 걸었다. 지오의 기운이 조금 뚜렷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내 등뒤로 꽂히는, 세브릭의 시선을 무시하고, 무시하고, 또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삐이이익-" 날카롭게 울려퍼지는 새의 울음소리에 천막이 세워지는 것을 조금 무료한 표정으로 보고있던 테일러의 눈빛이 달라졌다. 퍼덕퍼덕거리며 다가오는 갈색빛의 새에게 한쪽 팔을 내밀자, 새는 곧 그의 팔에 얌전히 앉았다. 즐겁다는 듯 새를 슬쩍 쓰다듬어준 그는 새의 발에 묶여져있는 종이를 보며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종이를 꾸깃하게 접고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로 던져넣었다. 붉은 불에 잡아먹혀가며 점점 재로 변해가는 그 종이를 바라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일이 점점 재밌게 되가는군."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자, 사켄경 . . 그대의 영혼을 걸고서라도 . . 엘을 지켜낸다고 했던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그가 자신의 팔에 올라앉은 새의 부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과연 그가 지켜낼 수 있을까?" "삐익-" "그래그래, 한낱 미물인 네가 알리가 없지." 큭큭-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던 그는 새가 앉은 팔을 살짝 위로 올렸다. 그러자 그 새는 푸드득 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새의 깃털이 한들거리며 떨어져내렸다. 손을 쫙 펴 그 깃털이 손 위에 얌전히 착지한것을 보던 테일러는 어둠이 깔린 나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하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면 상관없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그의 웃음소리는 꼭 하늘을 가리고 있는 마지막 회색빛 구름과 같이 탁하고도 흐릿했다. 세브릭을 무시하고 왔기 때문일까, 싱숭생숭해진 기분을 감출수가 없어서 푹 고개를 숙이고 무작정 걸었다. 아무리 그래도 . . 무시하는건 너무했나? 확실하게, 거기서 그냥 대답할 것 그랬나? 하지만 . . 이미 그도 알고 있을텐데. 내가 자신을 거절한다는 것 정도는 . . 그도 알고 있을텐데.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회색빛 구름에 마음이 더 서글퍼졌다. "지오- 사랑하는 나의 지오. . 과연 당신이 비틀림을 해결하는게 더 먼저일까요, 내가 전쟁을 종결시키는게 더 먼저일까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내 말에 류가 조용히 대답했다. 【누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런말을 하는거지요?】 나긋나긋하고도 상냥한 류의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듯 눈물이 고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기어코 난 . . "하암-" 작게 하품을 하며 눈을 부비적거렸다. 그리고는 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중요하지 않지만, 제겐 꽤 중요하거든요." 【어째서인지 물어도되나요?】 그냥 희끄무레한 빛덩어리 . . 즉 류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푸른 하늘이 회색빛 구름을 헤치고 나올듯했다. "지오가 말했으니까요." 【 . . 무슨 말이요?】 "내가 더 먼저 끝낼 수 있을꺼라구요. 지오의 말은 즉 신의 말! 그것은 예언, 곧 이 세계의 진리! 뭐 그런거 아니겠어요?" 내 장난스런 웃음에 류가 나직하게 웃는것 같았다. 다채로운 빛깔로 반짝이는 류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 역시 싱긋 웃었다. 하지만 . . 곧 . . " . . . . . . " " . . . . . . " 깜빡깜빡-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고수머리. 하얗고 맑은 피부와 금방이라도 톡 터질것마냥 도톰한 분홍빛 입술. 요정같이 작고 아름다운- 아아, 그의 이름은 하브라. "마치 . . 머리에 꽃꽂은 여인 보는것 마냥 날 보지 말아줄래요, 하브?" " . . 머리에 꽃꽂은 여인이 누군데?" "산과 들을 자신의 집으로 삼아 활짝 웃으며 사물은 물론 자연과 대화하는 분들이시죠." " . . 그거 좋은거 아니야?" "좋은거죠. 미쳤다는 건, 현실을 볼 수 없다는거니까." 생긋- 그를 향해 미소짓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난 널 좋게 보지 않았는데." "그럼 어떻게 봤는데요?" "미치-" "악악악악- 하브, 그런 말하면 못써요! 이 예쁜 입술에서는 마냥 예쁘고 순수하고 맑은 말만 나와야하는거라구요!" 내 말에 하브는 황금빛 눈동자 가득 '지랄 쌈싸먹는 소리하고 있네.'라는 말을 담아 날 보았다. 아아- 슬퍼라. 순수쿠오는 남자가 되버렸고, 귀여운 하브는 언제 이렇게 비뚤어져버렸을까. . . 나의 교육이 잘못되었던건가? 역시, 21C 교육은 잘못되었던거야. 모든것을 교육문제로 돌리며 난 아직까지도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보는 하브를 외면했다. 그러다가 난 . . 구세주를 발견했다. "에-프-릴!!!!!!!!!!!!!!!!" "어? 무 . . " 멀리서 보이는 곱슬곱슬 길게 내려오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소녀.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내쪽을 보던 소녀의 하얀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곧 소녀는 커다란 황금빛눈동자 가득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엘!" "에프릴, 에프릴, 에프-" "에프릴!!!!" 내가 에프릴에게 다가가는것보다 먼저, 하브가 휑하니 날.아.서 에프릴에게 가버렸다. 한순간 버림받은 듯한 느낌과 함께, 뿅-하니 커져서 에프릴을 꼭 껴안은 하브의 모습에 한쪽 가슴에서 생긴 감정이 스믈스믈 날 좀먹기 시작했다. 아무말도 없이 재회의 정을 나누고 있는 아름다운 남매를 보다가 나 역시 살포시 하브의 뒤에서 에프릴을 끌어안았다. "아악-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나도, 에프릴 안고 싶었단 말이에요." "뭐라는거야! 이 . . 이거 안놔?!" "싫어요- 하브도 같이 안아보고 싶었으니까." "에 . . 엘." 어쩔줄 몰라하며 부끄러워하는 에프릴을 보며 싱긋 웃었다. 물론 에프릴과 나 사이에 껴서 바둥거리는 하브따위는 가볍게 무시했다. "잘지냈어요, 에프릴? 어디 다친데는 없구요?" "네. 전 잘지냈어요. 엘은요?" "저야 물론, 언제 어디서든 잘지냈죠." 뭐, 에프릴과 헤어진 후에 카슘으로 가다가 납치를 당하기도 했지만 . . 목숨의 위협을 꽤 많이 아니, 조금정도 받긴했지만. 잠시 멀리서 펄럭이는 깃발에 시선을 뒀다가 아직도 바둥바둥거리는 하브를 보며 말했다. "아아- 하브하브, 움직이지 말아요. 간질간질하잖아요." " . . 그 . . 그럼 네가 놓으면 되잖아!" 내 말에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며 버럭 소리지르는 하브의 뒷통수를 보다가 에프릴을 안았던 손을 풀고 하브를 뒤에서 살포시 안았다. 하브의 배쯤에서 손으로 깍지낀후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대자 하브가 바짝 굳는것이 느껴졌다. "아구- 우리 하브. 에프릴이랑 같이 안아준다고 삐진거죠?" " . . . 이 . . "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활화산같은 하브의 느낌에 훗- 살짝 웃어주며 손을 풀었다. 그리고 울긋불긋 붉어지는 하브를 보다가 다시 에프릴을 정식으로 보았다. "에프릴, 여기까지 오는데 괜찮았어요?" "네. 요즘은 . .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밝게 웃는 에프릴의 모습이 보기좋아서, 다시한번 그녀를 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근데 누군가가 잽싸게 에프릴의 허리를 채가더니 자신의 품에 폭 끌어안았다. 순간 당황한 에프릴이 고개를 들어 누구인지를 확인하더니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난 에프릴을 한번보고, 내게서 에프릴을 뺏어간 이를 한번보다가 아항- 하는 느낌에 느믈느믈하게 웃었다. " . . 원조? 족장님은 로리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기분 나쁜건 사실이군, 에르테이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는 족장님의 모습에 난 다시한번 샐쭉 웃고는 에프릴을 보았다. 에프릴은 어찌할 줄을 몰라하며 그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하자 다시한번 화들짝 놀라며 엄청나게 부끄러워했다. "으윽- 에프릴을 놔줘, 족장!" "어디서 반말이지? 난 족장이다." "젠장, 족장이든 뭐든 놓으란말이다, 이 자식아!!" 하브는 그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에프릴과 족장님을 떼어놓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힘따위는 아랑곳않고 더욱 에프릴을 꼭 껴안는 족장님의 여유만만한 작태에 하브의 안간힘이 안쓰러워졌다. 하브 . . 넌 . . 비교가 안돼. 역시, 여자들은 서툰 남동생보다는 연륜 깊은 아저씨가 좋은가봐. . . . 하지만, 에프릴이 아저씨를 좋아하는지는 몰랐는걸.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어린 소녀와 30대 중후반정도되는 미남 아저씨의 로맨스. . . . 나중에 현실 세계로 돌아가면 찾아서 읽어볼까. 꽤 재밌을듯 싶은데. 잠시 그들의 태도를 방관하며 팔짱을 끼고 본격적으로 구경태세로 몰입했다. "놔,놔놔놔놔! 이스틴, 놔!!!!!!!!!!!" 얼굴이 빨갛다 못해 터질듯이 붉어지자 에프릴도 좀 걱정이 되는지 살짝 족장님의 소매를 잡고는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순수한 황금빛 눈동자를 보던 족장님은 천천히 에프릴을 풀어주고, 순식간에 그의 품에서 에프릴을 채간후 자신의 등뒤에 숨긴 하브는 씩씩거렸다. 묘한 그들의 대치상황에 그들을 지그시 보다가 중얼거렸다. " . . . 삼각 관계?"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를 하는거야!" "앙- 오늘 하브는 맨날 소리만 지르고- 미워요미워-" 장난스러운 내 말에 하브는 한순간 흠칫했지만 흥-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모습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는 에프릴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정말 부드럽게 내게 미소지어줬고, 그 미소에 나도 마주 웃어주며 생각했다. 에프릴은, 분명 하브의 누나가 분명해. . 라고. 상황이 조금 진정된후, 그제야 난 다시 족장님과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아까 에프릴을 두고 하브와 겨룬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차가움은 우습게 느껴졌다. "잘지내셨어요, 족장님?" " . . 에르테이샤, 그대는 잘지낸것같군." 에프릴의 손을 꼭 잡고 그렇게 차갑게 말해봤자, 별로 안차가워보인다니까요. 이래서 냉미남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안된다는 거야. 다른 여자들한테는 냉랭하면서 나한테만 다정하기때문에, 미치고 팔짝 뛰게 심장을 아릿아릿하게 만들지만서도 . . 망가지는 냉미남의 모습에 또한 눈물나지, 암. 지금 족장님의 꼴이 딱 그꼴이란 말이지. "냉미남은 냉미남으로 남아야하는건데 . . " "무슨 소리지?" "족장님, 사실은 말이죠." " . . ." 큰 비밀이라도 말한듯 소근거리는 내 말투에 족장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의 얼굴을 보던 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켄이 없었다면 . . 족장님은 저와 함께 여행하셨을지도 몰라요." " . . . "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지. 이렇게 아름다운 냉미남과 함께 여행하지 못했다는 것은 . . 아- 사켄만 아니었어도, 냉미남! 이라는 캐릭터하나로 내 여행동료가 될 수 있었을텐데. 쩝 입맛을 다시는 내 모습에 족장님이 슬쩍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족장님이 뒤로 물러서면서 에프릴이 슬쩍 그의 앞으로 나서는 모습에 큭큭- 배를 잡고 웃어버렸다. 에프릴의 눈동자에 서린 '이 남자는 내꺼야!'라는 듯한 눈빛이 귀여웠기 때문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 모습을 보면서 입을 떡벌린 하브의 모습이 웃겼기 때문일까. 음 . . 아마도 그 두가지 모두 다 때문이겠지. "누나-" "응?" 뒤에서 들려온 산뜻한 목소리에 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내게 다가와 살짝 웃어주는 쿠오가 있었다. 쿠오의 맑은 웃음에 난 그의 손을 덥썩 잡고는 에프릴의 앞에 세워놓았다. 갑작스런 인간의 등장에 에프릴은 물론, 족장님과 하브도 긴장했고, 그들의 앞에선 쿠오도 바짝 얼어붙었다. "에프릴, 이쪽은 쿠오에요." "처 . . 처음 뵙겠습니다, 쿠오입니다."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버린 쿠오를 쓰다듬어주며, 난 쿠오에게 말했다. "쿠오, 이쪽은 에프릴이야." "안 . .녕하세요 . . " 작게 중얼거리듯 대답한 에프릴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씩 웃고는 쿠오를 잡지않은 손으로 에프릴을 잡았다. 멍하게 날 보는 쿠오와 에프릴, 그외 2명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로써, 양손에 퓨리티한 캐릭터를!!!!" " . . 뭐라는거야!" "에에?" "누나?" " . . . . . . . " 음하하하하 웃어대는 내가 낯선지 쿠오는 손을 놓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며 움찔거렸다. 족장님은 순식간에 내 손에서 에프릴을 빼앗아가며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겼고, 하브는 다시한번 날 진지하게 '미친거아냐?'라는 듯한 눈빛으로 보았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 뻘쭘해져서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쿠오에게 물었다. "쿠오, 여긴 어쩐일?" "아 . . 그러니까 . . 총사령관님이 . . 이제 . . 회의를 시작하고자 한다고 . . " "음, 너무 이른거 아닌가?" "이미 휴전한지 꽤 됬으니까요. 더 이상 끌어봤자 . . 그리고 오늘은 일단 가볍게 의견이나 나누자는 . . " 말을 얼버무리며 힐끔힐끔 족장님을 보는 모습에 난 쿠오 대신 족장님을 보았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어떻게하실래요, 족장님께서는?" " . . . 가도록 하지." 그의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는 잊은것 한가지를 생각해내어 똑바로 족장님을 보았다. 내 시선에 족장님은 차가운 눈으로 날 보았다. "족장님, 잊을뻔했는데." " . . 뭐지?" "역시, 작은 것보다는 큰게 더 멋지시네요." " . . . . " 내 말에 순간 입이 굳은듯 아무말도 없는 족장님을 무시하며 흥얼흥얼 쿠오의 손을 잡고 나폴나폴 '나 잡아봐라-'할때처럼 나긋나긋하게 뛰었다. 그런 날 보며 모두 약속이나 한것처럼 침묵을 지키는 모습에 발끝부터 민망함이 스믈거리며 날 뒤덮으려했지만 다시 발끝으로 밀어내고 신발 밖으로 내보내 꾹꾹 밟아버렸다. 난 민망하지않아, 절대 민망하지 않다고. 왜냐하면 . . 난 사실을 말한거니까! 조그마했을때는 그냥 인형같아서, 멋있든 뭐든 그냥 귀여워 보였단 말이지. . . . 인형한테 "꺄아악- 멋있어!!!"라며 눈을 빛내는건 솔직히 . . . 아무리 나라도 입안이 씁쓸해지는 일이라구. "저기요, 족장님." " . . . " 아까 내말에 충격을 먹은건지, 더 이상 나와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포스를 흘려대시는 족장님을 느꼈지만 그 포스들 역시 상큼하게 무시하며 말했다. "저기, 변신 모습 보여주시면 안돼요?" 함께 발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내 말때문에 또 다시 멈칫했다. 족장님은 황당하다는 듯이 날 보았고,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브와 에프릴이 '변신!'하면서 뿅하고 변하는 모습은 봤는데, 족장님의 '변신!'은 못봐서 . . " "내가 언제 그렇게 변했어!" "난 분명히 봤어요. '변신!'하면서 샤랄라하는 음악소리와 함께 정체불명의 빛이 터져나오면서, '나는야 하브!'라고 외치며 깜찍한 모습을 취하는것을!" " . . . 무 . . 무슨 . . 아 . . 아니야, 에프릴, 아니라고!" 에프릴이 자신을 묘한 시선으로 보자, 하브는 무척이나 당황하며 손짓,발짓,고개짓까지 동원해서는 절대적으로 아니야! 라고 소리쳤다. 그의 곤경에 빠진 모습을 즐기며 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헹- 족장님의 변신! 모습따위 보고 싶 . . 다. 솔직히, 보고싶다고. 작아졌다가 뿅-하고 커지는 모습 무척이나 보고 싶다고. 하지만 . . 그 말하면 에르테이샤고 뭐고, 여기서 날 도륙낼듯한 분위기였어. 아아- 그럴수야 없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푹 깊게 한숨을 내쉬다가 하브가 애써 에프릴의 눈빛을 바꾸려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 그나마, 저 귀여운 아가가 발악이라도 하니, 이 누나의 마음이 좀 풀어지는구나. " . . 누나." "응?" "예전부터 그랬지만 . . " "으음?" 쿠오는 조금 미적미적대더니 힐끔 날보고는 핏 웃었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누나는. . " "에엥? 이상하다니. 누나만큼 정상적인 사람이 어딨어?" " . . . " 내 말에 아무 대답도 않고 씩 웃는게 귀엽다. 그의 말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 .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드는건, 역시 퓨리티한 캐릭터이기 때문인가. 요즘 연상의 멋진 오빠들하고만 있다보니, 이렇게 급격히 연하남이 끌리는건가. 솔직히 . . 하브는 좀 팅겨팅겨 막팅겨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내가 화르륵 불타오를 수 없었지. 하지만, 이렇게 나긋나긋하게 굴면 이 누나의 마음이 마구잡이로 흔들리잖니? 척하고 쿠오의 갈색 머리카락을 마구마구 헤집었다. "으아악- 누나!" "어라? 쿠오, 너 키 진짜 많이컸다? 이제는 내가 발뒤꿈치를 들어야, 네 머리에 내 손이 닿네?" 왠지 신기한 기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놀랍다는 시선에 쿠오는 등을 꼿꼿하게 펴뎌니 헛기침을 하고는 활짝 웃었다. "저 엄청 컸죠?" "응- 진짜 많이 컸다. 이야- 쿠오도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된건가?" 내 입가에 지어진 장난스런 미소를 보던 쿠오가 잠시 얼굴을 굳히고는 날 보았다. 난 그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싱긋 웃으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한걸음 두걸음 중앙 막사를 향해 다가가다가 휙하고 뒤로 잡아당겨지는 느낌에 으왓-하며 급하게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남자'의 얼굴을 하고있는 쿠오를 보았다. 멍하게 그를 보자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족장님과 에프릴, 그리고 하브를 보며 말했다. "먼저 가주시겠습니까? 바로 저곳이니까요." 쿠오의 말에 모두 힐끔 우릴 보다가 우릴 지나쳐가버렸다. 하브가 조금 볼을 불퉁하게 부풀리고는 쿠오를 노려보는것이 느껴졌다. 그런 하브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자 하브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투덜거리며 뒤돌아가버렸다. 모두가 가버리고 조용해지자, 쿠오는 헛기침을 하더니 날 보았다. "그래, 쿠오군. 모두를 보내놓고 내게 무슨 할말이 있는걸까나?" "누나." "응?" 한없이 진지해보이는 쿠오의 모습에 난 멀뚱멀뚱 그를 보았다.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 누나에게는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 . . 음?" "거기다가, 지금도 '누나'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 . 어린 아이라는 것도 알아요." 조금씩 어렵게 말을 꺼내고있는 쿠오의 말에 난 잠자코 입을 닫고 들었다. 뭐랄까 . . 어리게만 보였던 동생의 갑작스러운 성장은 . .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누나. 조금만 . .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어요?" "조금만?" "네." 내 대답에 쿠오는 어두워졌던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활짝 웃었다. 그런 쿠오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얼마나?" "네?" "얼마나 기다려야하는데?" "으 . . 2 . . 2년?" "에- 2년?" "아니요! 1년, 아니 반년!!! 아니, 3달만!" 내 표정이 점점 구려지고 있다는걸 깨달은 쿠오가 급격히 말을 내뱉었지만 난 쿠오의 말이 이어질 수록 쓰게 웃었다. 내 웃음에 쿠오의 얼굴 역시 점점 어두워졌다. "역시 . . 안돼 . . 요?" "음 . . 안되는건 아니지." "정말요?" 다시 한번 활짝 개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난 천천히 손을 올려 쿠오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하는 모습에 가볍게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쿠오." "네?" "나한테는 시간이 없어." "누 . . 나?"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니면 삼일 후일지, 일주일후일지 . . 나도 잘모르지만." " . . . " 쿠오는 내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쿠오의 볼을 쓰다듬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널 기다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 . . 누나." 부드럽게 그의 이마에 입맞춰주고,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따스한 쿠오의 온기가 입술에 남아있어서 조금 행복하기도 . . 그리고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네 고백을 듣게 된건 영광인데?" 씩 웃는 내 웃음에 쿠오는 조금 씁쓸한 얼굴로 날 보다가 평소의 그 맑은 웃음을 지었다. "저도, 제 첫고백의 대상이 누나라는게 영광인데요?" "어라, 정말? 이거, 첫사랑이었다는건가-" "그럴리가요. 제가 마을에서 얼마나 인기있는지, 누나가 몰라서 하는 소리에요." "음? 그건 무슨 소리지? 내가 첫고백 대상이라면서?"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쿠오는 조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척하니 허리에 손을 얹더니 말했다. "전 항상 고백을 받았으니까요!" " . . . 우와- 그거 엄청 의외다?" "어째서요?" 억울하다는듯이 말하는 쿠오의 어깨를 가볍게 탁 치고는 그를 스쳐지나갔다. 살짝 스쳐지나갈때 낮은 내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조금 투덜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가볍게 걸음을 옮기면서 그의 투덜거림 속에 가득 묻어있는 슬픔을 묵묵히 가슴 속에 담았다. 쿠오, 나도 널 무척 좋아해. 하지만 . . 너도 알지? 널 향한 감정은 '이성'이라기 보다는, '가족'에게 향하는 애정과 같은거야. '이곳'에서, 처음으로 내게 마음을 열어준 네가 무척이나 소중했어. 이 전쟁을 막아보자- 했던것도, 지오로부터 시작했지만 계기가 된건 너였으니까. 그래서 . . 난 '이곳'에 없는 내 가족만큼 널 좋아했어. 소중히 생각했어. 쿠오. 사랑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쿠오.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 네게는 . . 고맙기만 할께. 미안해하지 않을께. 미안해한다면 . . 그건, 네가 너무 미안해지는거니까. 그러니까 고마워할께. 고마워, 쿠오. 정말로- 정말로. "늦어서 죄송합니다-" 예의 그 뻔질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난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꺼번에 집중되는 시선에 삐질 땀을 흘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잉- 부끄럽게시리." 살짝 볼을 붉히며 주먹쥔손을 입에 붙이고 몸을 비비꼬자, 모두가 못볼꼴 봤다는 듯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헛- 그런 표정으로 보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단 말이죠. 그들의 반응에 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왼쪽에는 동연합이, 오른쪽에는 서연합이. 마지막으로 그들의 가운데에는 이종족 연합이 있는 것을 보며 살짝 고민했다. "흠 . . 제 자리는 그럼 . . " 쿠오가 동연합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며 난 그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것을 조금은 즐기면서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막사는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 . . . 엘, 네 자리가 거기인가?" "와- 총사령관님,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다 . . 그런데, '그곳'이 네 자리인것이냐." 다정한듯 차가운듯 총사령관 아저씨의 지푸라기빛 눈동자는 여전했다. 아니, 조금 긴장한듯한 입매가 인상적이었다. 아저씨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가 제 자리에요." 내가 앉은 자리는 바로 문 앞. 동연합과 서연합의 가운데, 그리고 이종족 연합의 맞은편. 한마디로 완벽한 중립의 자리였다. 아직까지 아크산이 보이지 않는것에 조금 의아해졌지만 그에대한 의문은 접어두고 입을 닫고 있는 모두를 한번 쭉 둘러본후에 말했다. "이거, 제가 회의 진행까지 해야되요? 조금- 부끄러운데." 내 말에 먼저 말을 시작한것은 역시나, 서연합의 중점. 테일러였다. "만나서 반갑소. 카슘 제국의 황제, 테일러 덴 카슘이라 하오." 그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을 받으며, 총사령관 아저씨가 말했다. "이렇게 보게 되어 나 역시 반갑소. 아렌타를 다스리고 있는 맥클라스 림 아렌타라고 하오." "이샤링족의 족장, 이스틴이다." 이종족이라 상관없다 생각하는지, 족장님의 말투에도 누구하나 얼굴이 찌푸려지는 이가 없었다. 별다를것 없이, 이름을 나눈후 천천히 얘기가 시작되었다. "몇십년간 긴 전쟁이 계속 되었소. 전쟁을 끝내야했지만, 갑작스런 변화에의해 모두들 신의 분노라 두려워했지만 전쟁을 멈출 수 없었고, 지금의 사태에 이르렀소." 무뚝뚝한 총사령 . . 아니 맥클라스 아저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쟁을 끝낼 계기가 필요했소. 하지만 그 계기를 만들 수 없었지. 그렇지만 . ."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한번 받았던 시선, 두번 못받을 쏘냐 라는 표정으로 싱긋 웃어주자 모두 살짝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외면했다. . . . 자꾸 그런 반응이면 나 상처받는다니까? 이씨, 비뚤어져버릴테다. 내 표정이 뚱해지던 말던 상관없다는 듯 맥클라스 아저씨는 말을 이었다. "엘이라는 저 소녀 덕분에, 이렇게 세 연합이 모이게되었소. 그 긴 전쟁도 . . 이제 막을 내릴때가 온것같소." "서연합 역시 생각이 같소. 이 전쟁은 끝내야하겠지."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깍지를 끼며 빙글빙글 웃으며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시작이 누구인지. 이 전쟁이 누구의 책임인지는 확실히 해야할 것이오." 테일러의 말에 막사안이 진득한 침묵으로 가득찼다. 확실히 . . 전쟁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 . 카슘제국의 '황녀'. "우리 카슘에서는 아렌타의 황태자비로 우리 제국의 '황녀'를 보내었소. 아무리 전쟁이 길었다지만 그것까지는 잊지 않았을 거라 믿소." " . . . 물론 기억하고 있소." "그렇다면, 아렌타국 내에서 독에의해 암살되었던 것도 기억하시리라 믿소." 빙글빙글 웃던 테일러가 표정을 차갑게 식히며 보랏빛 눈동자를 번뜩거렸다. 순간 등을 타고 내려가는 한기에 살짝 두손을 맞잡았다. 금방이라도 입김이 나올듯 막사안의 공기가 차가워져갔다. 양쪽의 기사들은 물론 이종족 역시 입을 꾹 다물고 금방이라도 전투태세에 들어갈 듯 했다. " . . . 그것은 분명 원인 불명의 사고였소. 그러하였기에, 우리 아렌타 역시 황자로 하여금 카슘 제국에 사신을 보냈었지." "그리고 분명 그는 카슘 제국 내에서 기습을 당해 죽었소." 테일러의 대답에 맥클라스 아저씨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두 황제가 서로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을때,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족장님이 입을 열었다. "우리 이샤링족은 이 전쟁에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 . . . " "하지만, 인간들은 우리 종족을 위협했고, 그 위협에 우리는 종족을 지키기 위해 맞섰다. 그 결과 신의 분노를 사 이 세계는 엉망이 되었다." 나직한 족장님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말은 분명 흥미로웠다. 그래서 난 약간 자세를 푼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 .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계속해서 그 생각을 되풀이해가며, 한없이 냉정한 눈으로 그들의 말을 들었다. "물론, 이샤링족의 경우 부득이하게 큰 피해를 입었소. 하지만 이샤링족으로 인해, 우리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았소." 테일러의 말에 족장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에프릴은 내 예상과는 달리 인형처럼 굳은 얼굴로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그건, 버럭- 소리지르며 날뛰지는 않을까했던 하브 역시 마찬가지. 오호- 이거, 대단한 발견인데. . . . 어떤 모습이 진짜일까. 조금 흥미가 동하는 것에 피식 속으로만 웃고는 가볍게 깍지 낀 손을 풀었다. 분위기가 점점 냉랭해지는 것을 느끼며 금방이라도 '휴전이고, 종전이고 필요없다! 다시 전쟁이다!'하며 2차 대륙 전쟁이 발발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짝!" 갑작스런 박수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한번 날 향했다. 그들의 흉흉한 살기 역시 내게 향했지만, 내겐 아무런 영향이없었다. 이유가 뻔하지 않은가. 그 중간에서 류가 살포시 날 보호해주고 있으니까. " . . . 엘, 아무리 네가 모두를 모았다고는 하지만 중립의 자리에서 그런 행동은 옳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것이냐." 낮은 맥클라스 아저씨의 목소리에 싱긋 가볍게 웃어주고는 말했다. "전쟁을 끝내자고 아둥바둥 모아놨더니, 이거 '전쟁이다!'라고 다시 소리칠 듯한 분위기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뻔뻔하게 대답하는 내 모습에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살짝 한숨을 내쉬며, 서로 감정을 수습한듯한 모습에 난 다시 깍지를끼고 끼어들지 않겠다는 태도로 모두를 보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펄럭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윽하게 풍기는 난향(蘭香)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려주었다. "늦어서 죄송하오. 하빔 왕국의 대표, 아크산 자 하빔이오." "늦었어요-" 나의 장난스런 대답에 아크산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리고 단정한 얼굴로 모두를 한번 훑어본 후에 입을 열었다. "하빔의 대표로, 지금 하시고 계신 전쟁의 계기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아크산 특유의 하오체가 없어진 말투는 뭔가 어색하기 짝이없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그의 단정한 말투는 얼굴과 잘어울렸다. 그의 말에 모두는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크산을 잠시 보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 . 이제 뭔가 진상이 밝혀지는 걸까나. 한쪽 발을 의자위로 올리고, 무릎 위에 깍지낀 손을 올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지오는 알고 있었으려나 . . 신인데 설마 몰랐었던 건 아니겠지. "일단 . . . " 아크산은 말의 운을 띄워놓고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푸른 머리카락이 하얀 목덜미를 지나 흘러내리는 모습은 . . 쓰읍- 안돼 안돼- 지금은 이럴 상황이 아니야 . . "모든 분들께 사죄하겠습니다." " . . . 그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맥클라스 아저씨가 대답했다. 아크산은 고개를 들지 않고 잠시 그 자세로 멈춰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담담한 푸른 눈동자를 하고 딱히 누구에게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말했다. "전쟁의 첫번째 계기인 카슘 제국의 황녀마마의 사건은 저희 하빔이 시작한 일입니다." 갑작스런 아크산의 말에 막사안에 폭탄이 떨어진듯 커다란 침묵이 돌았다. 그의 말에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검은 어둠이 무척이나 . . 고요하게 다가왔다. " . . 하빔의 일이라고?" 테일러의 말을 시작으로 막사안이 시끄러워졌다.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난무하던 가운데 쾅 하고 누군가가 탁자를 내리친 것이 느껴졌다. "모두 입을 다무시오. 아직, 말은 끝나지 않았소." 맥클라스 아저씨였다. 그의 진중한 목소리를 들으며 난 눈을 떴다. "계속하시오." 아저씨의 말에 아크산이 감사하다는 듯 한번 더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섬 왕국이었던 하빔에서는, 대륙의 두제국이 혼인동맹을 맺는것에 큰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두 제국이 합쳐진다면 결코 우리 하빔에 유리한것이 없으리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 . . " "그래서, 하빔에서는 아렌타로 향하는 카슘의 황녀의 식사에 독을 넣었습니다." " . . . 그랬군, 이건 하빔이 꾸민 일이란 말이지?" 테일러가 재밌다는 듯 차가운 눈동자로 말하자 아크산은 표정한번 바꾸지 않고 말했다. "예, 분명히 시작은 그러했습니다." " . . 시작은 그러했다?" "저희 하빔에서 한 일은 그저, 카슘 황녀의 몸이 불임의 상태가 되고 그뿐 아니라 의식을 차릴 수 없게 한 것뿐이었습니다." " . . . 목숨을 잃을 독은 아니었단 말인가?" 맥클라스 아저씨의 말에 아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끄덕임에 막사안에서는 다시한번 찬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카슘 황녀의 일은 분명 하빔에서 시작했지만 황녀를 독살하지 않았고,아렌타제국의 황자 사건은 저희가 한 일이 아닙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 . . . " 아크산이 입을 꾹 다물고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테일러와 아크산은 한참동안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 둘의 모습을 잠시 묘한 시선으로 보다가 맥클라스 아저씨를 보았다. 맥클라스 아저씨 역시 그 둘을 보고 있었다. " . . . 이거 . . " 내 목소리에 모두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에게 한번 방긋 웃어주고는 깍지낀 손을 풀고 발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제 제가 나설 차례인가요?" " . . . 무슨 소리지?" "분명 이것은 무슨 사건이 있었을테고 . . 모종의 음모가 있었겠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내 모습에 모두는 아무런 말도 않고 날 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짝 손뼉을 치며 다시 주의를 끌었다. "자, 여러분. 저는 분명 중립을 지키고자 했답니다." " . . . 네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맥클라스 아저씨의 무심한 말에 난 대답대신 한번 웃어주고는 족장님을 보았다. 그는 물끄러미 날 보더니 입을 열었다. "넌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건가?" "그렇게 생각하시는거에요?" " . . . 그럴 리가 없겠지." 족장님의 말에 천막 안에 다시한번 술렁임이 일었다. 잠시 그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해진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엘. 전 [신과 함께하는 자]." 지금 난 그저 지오가 부탁한 일을 행하는 자. "[에르테이샤]." . . 이 세계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 입니다." 가볍게 그들에게 웃어보였다. 엘의 말이 끝나자 몇몇은 의아한 눈동자를 하였고, 몇몇은 눈을 빛냈다. 엘은 모두를 한번 그 검은 눈동자로 가볍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처음, 그녀의 시선이 닿은곳은 카슘의 황제, 테일러였다. "카슘의 황제 폐하." "왜 그러지?" 엘의 물음에 테일러는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엘은 그런 그에게 살짝 웃어주며 말했다. "별로, 이런 말 하는거 쑥쓰럽고 부끄럽긴 하지만 . . 신의 앞에 단한치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하시겠습니까?" 그녀가 그 말을 끝내자 갑작스런 영롱한 기류가 그녀를 감쌌다. 바람에 색을 입힌듯, 묘한 빛깔을 내며 마치 흐르듯 그녀를 감싸안고 있는 모습에 모두 숨을 죽였다. 빛에 휩싸인 엘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한들거리며 흩날렸다. 신비스로움과 가벼이 대할 수 없는 고귀함, 성스러움같은 것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것만 같았다. 그 빛을 보며 엘의 눈이 잠시 반짝였지만 곧 부드럽게 휘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여행을 하셨으니, 제가 한 일에 대해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 . " "아아- . . 하빔의 국왕 얘기 말인가?" 알수없는 둘의 대화에 잠시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리인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지만 모른다는 듯 서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테일러는 엘을 빤히 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신의 앞에 거짓이 없음을 맹세하지."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환히 웃은 엘은 이번에는 빙글 고개를 돌려 맥클라스를 보았다. "아렌타의 황제폐하. 신의 앞에 단한치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하시겠습니까?" " . . 맹세하지." 잠시 엘을 보던 맥클라스가 고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좋다는 듯 짝 박수를 치며 엘이 싱글싱글 웃었다. "네까짓게 뭔데 나서냐!라고 몰아붙이지 않아서 좋네요. [에르테이샤]라니 뭔 헛소리냐! 할까봐 잔뜩 겁먹고 있었는데."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는 투로 말하는 엘의 모습에 모두 미간을 찌푸렸다. 엘은 그런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이 사건들에 대해서 좀 파헤쳐보죠. 일단 카슘의 황제폐하. 이 일에대해 전혀 아시는것이 없으신가요?" " . . 무조선 진실을 말해야하는 것이로군?" "네, 말하시지 않는다면 하빔의 국왕전하와 같이 불로불사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꽃꽂은 남자 티켓을 끊어드리죠." " . . . 꽃꽂은 남자는 뭐고, 티켓은 뭐지?" "네네,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가셔도 되는 문제랍니다." 엘의 장난스런 대답에 테일러는 픽 웃더니 편한 포즈로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우리 카슘이 알고 있는 일은, 그 당시의 선대 황제께서는 무척이나 전쟁을 원하셨다는 것이지. 솔직히 . . 혼인동맹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고나 할까- 어떻게 대륙의 유일무이한 제국이 될 수 없을까 틈틈히 빈틈을 노리고 있었지." 테일러의 말에 순간 막사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맥클라스 역시 입을 열었다. "아렌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선황폐하 역시 지금 들은 카슘의 선황 폐하와 같은 생각을 지녔지." 맥클라스의 담담한 대답에 테일러가 픽 웃더니 말했다. "어차피, 황녀 따위 카슘에서는 썩어날 정도로 있었고 . . 한명쯤 죽는다하여 문제는 없었다." " . . . 우리 아렌타에서 역시. 막내 황자는 개망나니에 필요없다, 차라리 사라져라 하는 존재였다." "계기는 황녀의 죽음이었지만 . . 그 죽음은 아바마마에게서 들은 비밀 지령,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때문이었다. 어차피 독을 먹어 살기 힘들다 싶으니, 황녀는 자결했지." "아렌타의 막내 황자는 죽지 않으려 발악했기에, 일부로 밤에 기습을 하여 목을 베었다." 이렇게 쉽게 술술 흘러나오는 대답에 사람들은 경악을 하며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한사람, 아크산만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런 두 제국의 싸움에, 하빔은 굳이 끼어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빔의 경우 꿩먹고 알먹고, 두 제국은 근질거리는데 누군가가 긁어준 격이었다는 얘기네요." 엘의 간단한 정리에 사람들의 시선은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야?'라는 듯한 눈빛을 엘에게 죽어라 보냈지만, 물론 그녀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싱긋 웃었다. "네, 이렇게 쉽게 술술 얘기하는게 믿겨지지 않고, 어떻게 이 긴 전쟁이 고작 이렇게 결말이 날 수 있나 생각하시죠?" " . . 솔직히 그렇다." 맥클라스의 솔직한 대답에 엘은 가볍게 웃고는 대답했다. "신의 힘은 이것저것 써먹을게 많거든요. 지금까지 몇번 제대로 써먹지는 못했지만 . .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이거, 다른데도 좀 써먹을껄 그랬어요-" 쩝 입맛을 다시며 익살맞게 웃는 엘의 모습에 모두 침묵을 지켰다. 그런 그들을 보며 심호흡을 하며 엘이 말했다. "네, 모든 사건의 전말은 이렇게 쉽게 나왔습니다. 한마디로 . . 이기적인 욕심에 의해 이 무의미한 전쟁이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 . . . " "참 재미있는 일이죠? 수천, 수만의 목숨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고. 신께서는 이 전쟁으로 이 세계에 벌을 내리셨고 . . 그런데 이유는 고작 . ." 엘의 입가에 짙은 조소가 지어졌다. 그 조소를 보며 사람들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채 살짝 그녀와의 시선을 피했다. "두 황제 폐하의 욕심 때문이었데요- 라니." 엘은 그 말을 끝낸 후 킥킥 웃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웃음을 멈추더니 똑바로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한번 그들을 보더니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여기까지겠군요." " . . 엘." 맥클라스의 나직한 부름에 엘은 그와 시선을 맞추더니 빙긋 부드럽게 웃었다. "이유는 두 제국의 욕심. 과정은 무의미한 전쟁. . 그렇다면 결말은 현명한 현재의 사람들이 맺어야하지 않겠어요?" 엘의 웃음에 맥클라스는 천천히 입을 닫았다. 맥클라스를, 테일러를 한번 본 엘이 다시한번 입을 열었다. "현명한 선택 바랄께요."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는 그들에게, 엘은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사락하고 그녀의 가느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영롱한 색채를 지닌 빛이 조금씩 흩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치 최면에 걸렸다 풀린 듯 얼떨떨한 정신으로 그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에르테이샤]로서 . .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에요." 허리를 숙인채로 말한 엘은 허리를 숙였을때처럼 천천히 허리를 피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세계에 속하지 못한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겠네요." 마지막 말은 마치 혼잣말하듯 . . 그 누구도 듣지 말라는 듯 중얼거렸기에 아무도 듣지 못했다. 멍하게 엘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엘은 뒤돌아섰다. 그녀를 신비롭게 비추어주던 빛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엘이 천막을 벗어나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야, 어떤 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 신의 . . 사자 . . 인겁니까 . . " "현명한 사람들이니까 . . 어떻게든 결말이 나지 않을까." 왠만하면 전쟁을 종결시키자- 로 끝나면 좋겠지만. 길게 흘러내려온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은 계기가 중요하다. 끝이 났으면 확실히 이 전쟁은 승자의 역사로 흘러갔겠지만 . . 내가 끼어듦으로써 이 전쟁은 갑작스런 종결을 맺게 되었다. 그러니, 그들이 물고 늘어질 것은 이 전쟁의 '계기'. 근데 계기는 하빔과 아렌타, 그리고 카슘 모두 끼어들었으니 딱히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그렇다면 . . 이제 그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종식시킬까. 다시 희생양을 만들어낼까? 그도 아니라면, 그냥 각자의 삶, 각자의 국생(國生)!하며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은채 끝내버릴까. 끝까지 결말을 들어야겠지만 . . 들을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머리가 아프기도 했고 . . 이 이상 내가 끼어들어보았자, 결말이 좋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그보다, 류. 고마웠어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부드러운 류의 대답에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류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입을 열게 할 수 없었을텐데도요?" 【당신은 [에르테이샤], 지르오디스께서 보내신 자. 그렇기에 나 역시 그저 도운것뿐이에요.】 조용조용한 류의 대답에 살짝 키득 웃고는 입가를 가렸던 손으로 눈을 가렸다. 천천히 발을 멈춘채 작은 바람소리만 들려오는 곳에서 입을 열었다. "참 허무하죠?" 【 . . . 】 "정말 . . 죽어간 사람들이 . . 너무나도 가엾잖아요." 【엘 . . 】 "난 '이곳'의 사람이 아니지만 . . 그래도 . . 같은 사람이잖아요?" 【네, 당신도 . . 사람이에요.】 "안타까웠어요. 가엾고 . . 가여웠는데. 목숨에대해 . . 내가 뭐 어떻게 해줄수 있는게 없더라구요." 말을 마친 후에 손을 내렸다. 그리고 조금은 메마른듯한 검은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하늘을 바라보며 피식 건조한 웃음을 지었다. "지오, 나 정말 형편없는 [에르테이샤]죠? 이렇게 얼렁뚱땅 일을 끝내서 . . 조금 어이없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 . 이게 내 최선이었어요." 조금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검으로 하늘을 벨수있는 검의 달인도 아니었고, 천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전략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언령이다 뭐다로 사기적인 마나의 사랑을 받는 마법사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여기까지가 . .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을때, 멀리서 누군가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 "음?" 하늘을 보던 시선을 돌려 내 이름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긴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는 아크산이 있었다. 아크산은 단한번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않고 다가오더니, 약 두걸음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멈추어섰다. " . . 무슨 일이에요?" "그대가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말이오." 작은 흔들림을 담은 그의 목소리에 픽하고 웃고는 한발짝 그에게 다가갔다. "그럴리가 없잖아요. 내가 뿅!하면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인것 같아요?" 아직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전쟁. 뭐- 어떻게든 결과가 나오면 . . 사라지리라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뒷말은 속으로 삼킨채 싱긋 웃었다. 그는 맑은 푸른 눈동자로 날 보더니 입을 열었다. "기억하시오?" "뭘요?" " . .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오?" "내가 아크산에대해 기억해야할 것은 너무너무 많아서요." 생글거리며 웃는 내 모습에 아크산이 어쩔 수 없다는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 조금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감싸안고 물었다. "그보다, 회의는 어떻게하고 이렇게 날 쫓아나온거에요?" " . . 미뤄졌소." "음?" "세나라가 모두 전쟁을 일으킨것이나 마찬가지니, 누구 하나의 책임으로 미룰순 없는 일 아니겠소?" 아크산의 담담한 대답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쪽을 보았다. 서늘하게 내려앉고 있는 저녁 노을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산책이나 할까요?" " . . 산책말이오?" "뭔가 할 얘기가 있는 것 아니었어요?" 내 말에 아크산이 날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크산의 푸른 머리카락에 저녁놀이 다정하게 물드는것을 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갈래요? 안갈래요? 선택의 기회는 단한번!" 내 장난스런 말에 아크산의 희미한 미소가 조금 짙게 변했다. 그리고 그는 그와 나 사이의 마지막 한걸음까지 좁히며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가겠소." "요우, 훌륭한 선택이었어요." 빙글빙글 그를 보며 웃다가 발을 떼었다. 천천히 함께 걷던 우리는 아무말도 없이 진영을 돌아다녔다. " . . 뭐랄까, 여기 참 삭막한 곳이네요." 여길 돌아보면 병사, 저길 돌아보면 기사. 거무틔틔한 막사들과 푸르르푸르르 투레질을 하는 말들. 울적하다는듯한 내 말에 아크산이 말했다. "엘." "네-" 조금 말을 길게 늘이며 힐끔 그를 보자 그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은채로 잠시 정면을 보다가 물었다. "[신과 함께하는 자] . . 그리고, [에르테이샤]." " . . 으흠-" " . . 정말로 그대는 신이 보내서 온것이오?" "어떤것같아요? 나, [에르테이샤]에 잘어울려요?" 새침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묻자,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날 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말도 없이 한참을 날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가 멈춰선 관계로 나 역시 발을 멈췄다. 공교롭게도-인지, 아니면 그가 의도한 것인지. 우리가 있는 곳은 누구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다. 오로지 그와 나, 둘만이 있는 곳. 그 사실을 인식하고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 . . 내가 그대에게 할말이 있다고 했던것을 . . 기억하시오?" 나직한 아크산의 물음에 그를 보지 않은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에 그는 다시 조금의 침묵을 지켰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소." "응? 뭐가요?" 다른 곳에 시선을두고 있던 나는 뒤돌아보며 물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동안 숨을 쉴수 없었다. 아크산 . . 그가 미소짓고 있었다. 다정한 미소를 한껏 지어보이며, 단한번도 본적없던 푸르게 풀린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내 손을 잡고, 천천히 자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그때까지도 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채 불규칙적인 호흡만 간간히 내뱉었다. 그는 내 손끝에 입맞추면서도 나와 맞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씩, 심장이 두근두근 귓가에 속삭인다. 모르진 않았겠지, 알고 있었잖아? "그저, 그대가 좋소." "아크산 . ." 그가 널. "그대가 나의 [아라]가 된 순간부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를 내 심장에 품고, 사랑하게 되었소." 해가 진것인지, 서늘한 밤의 기운을 담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에르테이샤]로 잘어울리냐 물었더니, 갑작스런 고백이에요?" " . . 그대답군." 옅게 미소짓는 그의 얼굴을 보며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손에 감았다. 멀뚱히 땅을 내려다보는데, 아크산이 말했다. "잘어울리오." " . . . 그래요?" "그대가 신이 보내서 온 사자이든 뭐든 . . 만약 정말 신께서 보내준 이라면, 신께 . . 감사드리오." " . . 예전에요." 땅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툭차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날 보고 있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예전에, 아크산이 '내 정체'에 대해 물었을때, 난 [에르테이샤]에요. 라고 말하려고 했거든요." " . . 생명의 숲에 도착하기 전?" "네." 그의 말에 대답하며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아크산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때 내가 뭔 생각을 했게요?" " . . 무슨 생각을 하였소?" "아, 지오- 여기 어린양이 당신 품을 벗어나 봥황하고 있어요. 라고." " . . 정말 그런 생각을 하였소?" 조금 황당하다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킥킥 웃곤 다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게요?" "짐작하기 힘드오." 담담한 아크산의 대답에 입가에 작은 웃음을 달고 말했다. "지오, 나한테 감사해요. 여기 어린양이 다시 당신 품에서 안정을 찾았어요-" " . . . " 아크산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의 얼굴을 보며 난 작게 짓던 웃음을 . . 천천히 지웠다. 내 미소가 사라지자, 아크산의 얼굴 역시 살짝 굳었다. "지금, 대답해도 될까요?" " . . 대답을 해주시겠소?" "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던 찰나에 얼핏 눈에 붉은빛이 비췄다. 잠시 말을 멈추고 그쪽을 보다가 어설프게 웃으며 아크산에게 말했다. "고개, 숙여주실래요?" " . . . " 아크산은 의아하다는듯한 기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난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요." " . . 엘." "받아 . . 줄 수 없어서." 그 말을 하고 뒤로 물러셔려는데, 아크산이 살짝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숙였던 고개를 들며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말했다. "엘." 진지한 그의 눈빛을 보다가 싱긋 웃어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내 대답에 아크산이 날 꼭 끌어안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부탁이 있소." " . . 부탁?" "단 한번 . . " 그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고아한 난향(蘭香)이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진정시켜주었다. "단한번 . . 그대를 내 마음에 새기고 싶소." ". . .그럼 나도 부탁이 있는데요." "무엇이오?"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며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람조차도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하는 가운데 난 입을 열었다. "예전에, 기억하세요?" " . . . 무엇을?" "나 납치해갔을때,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준다고 했었는데. 기억안나는건 아니죠?" 장난스런 내 말에 아크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끄덕임에 살짝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말아주실래요?" " . . 어떤 대답을 말이오?" "누가 무엇을 묻든, 아무 대답도 하지 말아주실래요?" " . . . 무엇을 묻든, 어떤 대답도 안하면 되는것이오?" "네." 내 대답에 아크산이 다시한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아크산의 부탁 들어드릴께요." 내 말이 끝나자, 아크산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부끄러울만큼 날 바라보던 아크산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가 감기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살며시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조금 창피하다고 느꼈을때, 입술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날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만큼, 상냥한 입맞춤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쉬듯 입을 열자, 조심스러운 아크산의 혀가 느껴졌다. 달콤하면서도, 안타까울만큼 조심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아크산의 어깨너머로 세브릭이 얼음같이 차가운 장밋빛 눈동자로 날 보고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아크산과 입맞추고 있던 난 잠시 움찔했지만 곧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가 내 미소에 꽉 주먹을 쥐는 것을 보며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른후, 아쉬운 여운을 남기며 떨어진 나와 아크산은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부끄럽다는 듯 웃는 내 모습에, 아크산이 설핏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별로 . ." 머리카락을 베베꼬던 난 잠시 시선을 땅에 떨궜다가 아까 세브릭이 서있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이미 세브릭은 없었다. 그가 없음에 살짝 입술을 깨문 나는 다시 아크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내 모습에 아크산의 푸른 눈동자가 의아함에 물든것을 보며 말했다. "비밀이에요- 아크산?" " . . . " "내가 한 부탁 . . 잊으면 안돼요?" " . . 알겠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크산을 보며, 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에 아크산이 조금 아프다는듯 웃는것을 보며 심장을 감싸오는 미안함에 다시 눈을 떨궜다. "엘." "네."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아크산이 다시한번 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엘." " . . .네." 그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가 상냥했던 그의 입맞춤만큼,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랑하오." " . . . 너무하잖아요, 아크산." 그의 갑작스런 반칙과도 같은 말에 순간 심장이 덜컹거렸다. 꼼지락거리던 손을 들고 살짝 심장에대며 픽 웃었다. "두근두근거렸다구요." "그 두근거림이 . .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소." 아크산의 말에 난 대답하지 않고 그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참을 날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날이 많이 어두워졌소." "네, 그렇네요." "같이 가시겠소?" "아니요, 잠시 들릴데가 있어서요." 내 대답에 아크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섰다.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돌려 세브릭이 서있던 곳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씩 커지는 두근거림에 눈을 꼭 감았다가 뜨며 입가에 잔경련이 일만큼 활짝 미소를 지었다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세브릭이 있었던 곳 바로 앞에 도착한 나는 입을 열었다. "악취미네요, 세브릭."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난 다시 말을 이었다. "훔쳐보다니, 사람 부끄럽게시리." 내 말이 끝나자마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막사 뒤에서 세브릭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아까, 나와 아크산을 보았던 자리에 정확히 선 세브릭의 모습에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미안하게시리." " . . . 그렇군요." "음?"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것만 같았던 세브릭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시리도록 냉기어린 눈동자로 날 보다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게, 제 마음에대한 대답인가요?" " . . . . " 그의 말에 어떤 대답을해야할까. 아니라고 해야할까, 맞다고 해야할까. 잠시 어떤 대답을할까 고민하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버렸네요?" " . . 엘." "그러니까 . . 세브릭의 마음,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미안해요, 세브릭. 하지만 . . 생각이 나지 않는걸요. 내 말에 완전히 굳어버린 그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내려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뚝뚝- 흐르고 있는 붉은 핏방울에 심장이 아프도록 저려왔다. "이정도면 대답이 된것같은데 . . 안그래요?" 바보같은 사람같으니 . . 상처났잖아요. 피가 흐르잖아요. "에- 확실하게 말해드려야하나요?" 당신에게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마음도 거절해야하니까. 하지만, 어떻게 거절해야할지 모르겠어서 . . 미안해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당신의 마음을 거절해서. "세브릭, 난 . . " "됐어요." 그는 날 보던 시선을 돌리더니 뒤돌아섰다. 세브릭의 뒷모습을 보던 난 천천히 입을 닫았다. "당신의 마음 . . 잘알았으니까요." 그 말을 남겨놓고 성큼성큼 내게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세브릭." " . . . " 내 부름에 멈춰서는 그의 모습에 되도록 떨리지 않게 말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아까 세브릭이 서있었던 자리에 서서 말했다. "손에있는 상처, 치료해요. 검을 쓰는 사람이 자기 손에 상처가 생기도록 주먹을 쥐다니 . . 기사로서 실격아니에요?" " . . . " 그가 내 말을 모두 들은 후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는 모습을 계속 . . 계속 보다가 뒤돌아섰다. 멀어져가는 세브릭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연해서 마음이 아팠다. "아 . . 바보같아 . . " 좋게 거절하는 방법도 있었는데. 쿠오처럼, 사켄처럼 . . 아니면 아크산처럼. 날 사랑해줬던 그들에게처럼, 고맙다고 . . 고맙다고, 나 역시 좋아하고 있다고. 당신들의 마음에 . . 무척 . . 무척 감사하다고. 그렇게 거절하는 방법도 있었는데. "바보 멍청이 . . 진짜 . . 바보 . . " 푹 고개를 숙였을 때 보이는 검은 핏자국에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까슬한 바닥을 손으로 훑으며 그의 피가 흐른 곳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세브릭, 세브릭 . . 이 바보같은 남자." 조심스럽게 쓸어모으자 모래와 함께 뭍어나오는 그의 피를 손에 꾹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엘, 엘 . . 이 멍청한 여자." 막사로 돌아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리뒤척, 저리뒤척해보아도 잠이 오지 않았으니까. 조금 까슬한 모포를 몸에 둘둘말고 애벌레 상태로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고요한 새벽이 점차 지나가고,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에 꾹 눈을 감았다. 한숨도 자지못해서, 눈이 뻐근하니 아려왔다. "아- 이게 뭐람 . . " 아크산과의 키스, 세브릭의 고백 거절. 그 두가지 문제로 잠을 못자는것에 무척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크산과의 키스는 물론 첫키스가 아니다. 고등학생이나 되서, 키스한번 못해봤을만큼 난 천연기념물이 아니었다. 가볍게 남자친구도 사귀어봤고, 나름 남자애들에게서 제법 인기도 좋았다. 그건, 아무래도 밀고 당기기를 잘했기 때문이겠지만. 하지만, 그건 말그대로 가벼운, 엔조이(enjoy)랄까. "차라리, '이곳'이 내가 사는 세계였다면 좋았을텐데." '비현실'이, 나의 '현실'이었다면 . .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텐데. 쓸데없는 생각을하며 시간을 죽이다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포에서 벗어나 신발을 신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여기저기 피워져있는 모닥불들을 확인하며 걷다가 멈칫 자리에서 멈춰섰다. " . . 여기, 세브릭의 막사로 가는 길 아니었던가." 무의식적으로 세브릭에게 가려고 했던 내 모습에 한쪽 손을 들어 탁하고 이마를 치고는 빙글 뒤돌아섰다. 그리고 보이는 사람의 모습에 다시한번 빙글 돌아서려다가 탁하고 어깨를 잡혔다. "아아- 사람을 보고서도 그렇게 뒤돌아서는건, 어디서 배운 예의지?" "그럼, 알아채지 못할만큼 숨죽여 여자 뒤를 쫓아오는건 어디서 배우신 예의세요?" "카슘에서는 당연한 예의지." " . . 황제 폐하라고 너무 막갖다붙이시는거 아니에요?" 툴툴거리는 내 말에 그가 쿡쿡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 어깨위에 얹혀진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아 내리고는 뒤돌아 그를 보았다. 테일러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졸음기 하나없는 모습으로 당당히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 . . . 그래서, 이 이른 새벽에 황제씩이나 되시는 분이 뭐하고 계세요?"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지." " . . 제가 나올껄 어떻게 아시고요?" "다아는 방법이 있으니, 알려하지 말도록." 빙긋- 나른한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에 끙-하는 소리와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그보다." "음?" "이 근처에 호수가 있더군." "호수요?" 테일러는 날 내려다보더니 묘한 눈동자로 날보며 말했다.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지. '라피야'라고 불리는 호수야." "헤에 . . '라피야'라구요?" "내가 알기로는 . . " 잠시 말을 멈추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자, 그는 나직하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조금 거친 그의 손길에 다시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는 손을 치우더니 매력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미안하군, 너무 귀여워보여서." "이거, 콩깍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서 차마 거짓말이라고 할수가 없네요." "그런건가?" "물론이죠." 조금의 민망함도 없이 당당한 내 대답에 그가 빙긋 웃더니 말했다. "어제는 즐거웠나?" " . . . 무슨 말을 하시는걸까나?" . . 뭐야, 본거야? 설마? 불안해지는 느낌에 되도록 얼굴에 티가 나지않도록 싱긋 웃으며 말하자, 그가 내 생각따위는 이미 알아버린지 오래라는듯 빙글빙글 웃더니 답했다. "회의에서 [에르테이샤]라고 말해서 모두를 공황상태에 몰아넣은 장본인이지 않나." "아- 그거요? 별로, 즐겁지는 않았는데." 그거 말하는거구나 . . 난 또, 아크산이랑 세브릭의 일을 알아버린줄알고 조마조마했잖아.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그저, 조금 재밌었을뿐이에요." "성격 참 고약하군. 난 무척 놀랐는데 말이지." "놀랐어요? 그런 말도 안돼는 거짓말을 . . 폐하, 진실도 거짓말처럼 하시는 분이 그렇게 뻔한 거짓말을 하시면 안돼죠." "그런가?" 유순히 웃는 그의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 . . . 오늘따라 유난히 이상하시네요." "흐음- 역시 그대는 눈치가 빠르군." "무슨 일이 있는거에요?" 내 말에 마치 장난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보이는 그의 모습에 한순간 오싹해졌다. "아까, '라피야' 호수에대해 얘기한것 기억하고 있나?" " . . 방금 한 얘기를 잊을 정도로 멍청한 머리는 아니니까요." "그정도야 알고 있지 . . 그럼, 엘. '라피야'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지는 않았는데 . . 폐하의 말을 들으니 무척 궁금해지네요."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에 마음이 불편했다. 뭐지, 왜 이러지 . . "그 뜻은 말이지." 테일러가 재밌다는 듯한 시선으로 날 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얼른 말하라고 그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 . . [희생]이지." "[희생]이요?"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걸까. 뜻을 알 수 없었기에 인상을쓰며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또 다시 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예전에, 사켄경과 그대에대한 얘기를 나눈적이 있지." " . . 사켄이요?" 갑자기 또 여기서 사켄이랑 나눈 얘기가 왜 나와? 이 사람 . . 도대체 뭐하자는 걸까? 머리 속에 무수히 그려지는 물음표에 살짝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그대를 흔들어놓는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사켄경에게 물었지." 그는 날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더니 날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가볍게 내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테일러를 눈으로 쫓았다. 날 스쳐지나간 테일러는 두걸음정도 걷더니 뒤돌아서서 날 보았다. 그리고는 심장이 떨릴만큼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답하더군. '영혼'을 바쳐서라도 막겠다고." " . . 그거, 너무하시네요." 그의 말에 태연히 웃어보이자 그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 사람 너무 우습게 보시는거 아니세요?" "음? 우습게 보다니?" "폐하가 그렇게 말한다면, 제가 당장이라도 '라피야' 호수로 뛰어갈 줄 아셨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지. '라피야'의 의미는 [희생]. 사켄경의 얘기 . . 그럼, 혹시라도라는 생각에 그대가 호수로 뛰어갈꺼라고 말이지." 싱글벙글 웃는 그의 모습에 난 살풋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런데 넘어갈만큼 전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곳에 절 위해서 깜짝 놀랄만한 일을 준비해놓으셨다면 . . 아쉽게됬네요." 나의 웃음에 잠시 굳어졌던 그의 얼굴이 곧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던 나는 미소짓던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지 . . 이런 일이라면, 당연히 이제 불안함따위 사라져야하잖아. 난 가지 않았으니까 . . 그러니까 . . "내 말에 넘어가는 어리숙한 사람이 있더군." " . . 네?" "아마, 그대가 막사에서 나오기 이십여분전쯤 . . 이었나?" 생각이 잘안난다는듯 눈을 찌푸리던 그가 한쪽 손으로 턱을 쓰다듬더니 먼곳을 응시했다. " . . 무슨 소리에요?" "새벽부터 누군가에게 찾아가는 사켄경의 모습에 말을 걸었지." "뭣하러요?" 불안함이 증폭된다. "예전에 그가 내게 좀 무례하게 대했거든." 빙긋 웃는 그의 모습에 살짝 주먹을 쥐었다. 내가 아무말 않고 그를 쳐다보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방금 엘이 라피야 호수로 갔다고. 그리고 라피야의 뜻은 희생이라고." "그리고요?" 조금 냉정한듯한 내 말투에 테일러는 재밌다는듯 턱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더니 살짝 팔짱을 꼈다. 그의 동작을 보며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 . 하빔의 국왕이 그곳에 있다고 말했지." " . . 국왕전하?" 라피야에 내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빔의 국왕도 있다. 그리고 . . 라피야의 뜻은 [희생] . . 빠르게 돌아가던 머리는 곧 하나의 결과를 산출해냈다. " . . 내가 생각한 답이 . . 답이 아니죠?" "무슨 생각인지 모르니까, 대답해줄수가 없겠는데?" 그의 장난스런 대답에 이를 꽉 물고 말했다. "내가 . .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나 혼자만 희생하러 그 호수에 갔다고 . . 사켄에게 말한건 아니죠?" "그럴리가.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손을 설레설레 젓는 그의 모습에, 살짝 불안감이 덜어졌다. 하지만 곧 피식 웃으며 말하는 테일러의 모습에 난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내 말을 듣고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 . 알 수 없는 일이지." " . . . 그곳에 하빔의 국왕전하가 . . 정말로 있어요?" "글쎄- 과연 . . 있을까? 없을까?" 그의 모호한 웃음을 보던 난 꽉 쥐었던 주먹을 풀며 다시 한걸음 뒤로 갔다. "만약 . . " 그래 . . 만약 . . 정말 만약에 . . "사켄에게 무슨일이 생긴다면 . ." 눈 앞에 빠르게 라세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배에 꽂혔던 검, 그 검에서 흘러나오던 피. 하얗게 . . . 차갑게 변해가던 그의 미소. "절대로 . . 용서 안할꺼에요." 마지막으로 이를 악 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라피야 호수는 저쪽으로." 그가 한쪽 손을 들어 멀리, 해가 떠오르는 쪽을 가리켰다. "열심히 뛰어가면 있을꺼야." 친절하게 웃어주는 테일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후 해가 떠오르는 쪽으로 달렸다. 새벽바람이 얼굴에 차게 부딪혀왔지만 차갑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고, 또 뛰었다. "제 . . 발. . 사켄. . " 사켄, 아무일도 없어줘요. 제발 . . 당신에게 아무 일도 . . 아무일도 없었으면 . . 허벅지부터 아릿하게 고통이 오기 시작했지만, 숨쉬는것조차 힘들정도 갑갑해졌지만 . . 멈출수가 없었다. 벌써 이십여분이 흘렀다고 했다. 만약 . . 만약 호수에 아무도 없다면, 돌아가서 테일러에게 한방 날리면 되는거고, 하빔의 국왕 전하만 있다면 그랑 다시 한번 웃으며 대화하면 되는거고 . . 사켄이 . . 사켄 혼자만 있다면 사켄도 테일러에게 속았냐며 함께 돌아오면 되는거다. 그렇지만 . . 최악의 결과로 . .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을 가정이지만 사켄과 하빔의 국왕전하가 대치하고 있다면 . . 그가 상처입었다면 . . "하악 . . 윽 . . 하악 . . " 점점 눈에 들어오는 회색빛 수풀을 보며 더 열심히 뛰었다. 만약 . . 상처입었다면 . . 핏- 하고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혀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아 .. 하아 . . " 붉게 물든 호수. "음? 오- 이거 . . 오랜만이군, 엘." 날 보며 빙긋 웃는 하빔의 국왕전하. "윽 . . "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검을 땅으로 짚은채 큰흔들림을 담고 날보는 . . 회색빛 눈동자. "사켄 . . " "무 . . 슨 . . 크윽 . . 엘 . . 어. .째서 . . "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내가, 후회하리라 말하지 않았던가?" 파란 눈동자 가득 광기를 담은채 날 보는 전하의 모습에 하하 . .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게 어딨어 . . 후회하게 만들어보라고 했지만 . . 응원까지 했지만 . . "이건 반칙인데요 . . 전하?" 복수는 . . 제게 했어야지요. 쓰러져있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오직 . .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은 . . "다른 사람들이 아닌 . . 제게 해야죠." 붉게 물든 사켄 . . 호수보다도 더 붉게 물든 . . 사켄뿐. 한발짝 떨리는 걸음을 내딛자, 사켄이 번쩍 고개를 들더니 소리쳤다. "오지마라!" " . . 사켄 . . " "큭 . . 돌아 . . 가! 위 . . 험 . . 읏 . . " 바들바들 떠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빠르게 다가가 그의 옆에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날 보며 쓰게 미소짓는 사켄의 모습에 나 역시 마주 웃어주었다. "내 말 좀 들 . . 어주면 . . 하아 . . 안되는건가." "미안해요, 사켄. . 못들었어요." " . . 그렇게 . . 크게 . . 말했 . .큭 . ." 쿨럭 입가에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바라보며 쨍하고 몸이 얼어붙었다. 힘든 숨을 내쉬고 있는 그의 뺨에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가 마음 한쪽이 무너져내릴만큼 부드럽게 내 손에 기대오는 모습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을 느꼈는지, 사켄이 날 보던 시선을 감고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하하하하- 내가 기다린 것은 계집이었는데, 왠 사내놈이 오나 싶었지." 멍하게 사켄을 보다가 말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마치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곧게 등을 편채로 웃고있는 전하가 있었다. "하지만 . . 이거 예상외로군, 그래." " . . 무엇이요?" "오히려 저 사내를 상처입힌것이 . . 더 큰 복수가 된것 같으니 말이야." 그는 땅을 짚었던 검을 빼내들더니 검손잡이를 굳게 쥐며 빙긋 웃었다. "그대 덕분에, 저 사내 . . 아, 그러고보니 . . 아렌타의 사켄경이었던가? 그래그래, 사켄경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는 한바퀴 빙글 돌았다. 여기저기 찢겨진 그의 옷을 확인하며 다시한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만약,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열두번도 넘게 사켄경의 검에 죽음을 맞이했을텐데 말이지." 재밌다는듯 크게 웃는 그의 모습에 천천히 시선을 사켄에게 돌렸다. 그의 회색빛 머리카락은 붉게 물들어있었고, 그의 뺨은 조금씩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그의 뺨에 대었던 손을 조심스레 거두자, 천천히 검손잡이에 이마를 기대며 힘든 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에 정말 . .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릿하게 아파오는 다리의 고통을 무시한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말했지? 이런 몸으로 만든것을 . . 후회하게 만들어준다고 말이야." 푸른 눈을 번뜩이는 그의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류." 【엘 . . 】 "저번에 내가 했던 복수 . . 다시 거두면 저 사람 죽겠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는 내 모습에 국왕 전하는 큭큭 웃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거두어갈텐가? 그래도 좋겠지 . . 뭐, 이미 할만큼 했으니 말이야 . . 저 상태로 과연 살수나 있을까?" 전하가 힐끔 사켄을 보며 말하는 모습에 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가 신경쓸 일이 아니실테지만 . . 한가지 말하자면. 폐하, 죽지 못하는 몸으로 만드는게 더 쉬울까요, 아니면 죽지 않은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는게 더 쉬울까요?" 내 말에 그의 몸이 잠시 굳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킥킥 웃고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내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차분히 국왕전하를 바라보다가 무릎을 끌어안고는 살짝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네? 폐하, 에이- 제가 질문하잖아요? 산사람을 죽여, 죽을 수 없게 만드는게 쉬울까요-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는게 쉬울까요?" 풀에 묻어있는 피가 옷에 스며들었겠지만, 그걸 신경쓸 겨를이없었다. 사켄의 힘든 숨소리가 . .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대답없는 전하의 무표정을 무시하며,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걸친채로 천천히 말했다. "류,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류가 내 곁을 떠나 사켄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난 일부러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전하를 바라보았다. 사켄이 죽고 싶은지, 살고 싶은지 . . 그것을 아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그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저번에 라세스는 . .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제 그만 . . 힐다에게로 . . 그녀에게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살아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책임지지 못할 그의 삶을 . . 내 멋대로 줄 수 없었다. 하지만 . . 하지만 사켄은 다른걸.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해도 . . 사켄이 . . 그가 죽는건 . . "당신이 죽는건 싫은걸요." 도저히 그를 볼 수 없어 눈을 감자, 피묻은 누군가의 . . . 너무나도 익숙한 손이 날 끌어안는것을 느꼈다. 진한 피냄새가 내 몸을 감싸안았지만 눈물을 참으며 그의 품에 더 파고 들었다. "사켄 . . 사켄이 죽는다면 . . 그렇게 된다면 . . " "엘 . . " 다시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면. "괜찮다." 그의 부드러운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된다면. "이제 . . 괜찮아." 그가 더 이상 내 곁에 없다면. "그건 . . 그건 차라리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다도 힘든 일인걸요." 그의 어깨에 내 얼굴을 묻고 안심이 될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잘게 떨고 있는 내 몸을 아무 말없이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켄 때문에, 울지않고 버틸 수 있었다. 가만히 그의 품에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날 보고 있었던건지, 사켄의 회색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의 눈을 보며, 그의 눈에 담긴 내 모습을 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웠다. 그러자, 사켄 역시 내게 작게 웃어주었다. " . . 이렇게 있으니까, 꼭 전쟁을 떠났다가 돌아온 남자와 남자가 살아돌아오길 기다렸던 여자같지 않아요?" "이럴때도 장난 칠 수 있는 네 무심함은 정말 놀라울정도군." 나직하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두근두근 뛰던 심장이 다시 평소의 흐름으로 돌아갔다. "다행이에요, 정말." 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켄이, 죽지않아서 . .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로 . . 정말로 다행이야. 진정 된 마음으로 두근두근 뛰고 있는 사켄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 . . 어째서냐." 그러다가 가까운곳에서 들려오는 분노에 찬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 . 맞다, 잊고 있었네요." "어째서 . . 어째서냐!" 푸른 눈동자가 붉게 보일정도로 눈에 핏발이 선 전하의 모습에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전하를 보던 시선을 돌려 아래를 보았다. 크고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날 보는 사켄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괜찮다는듯 웃어주었다. 내 웃음에 사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옷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혈향이, 사켄이 상처입었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서 머리가 냉정해졌다. 냉정해진 머리만큼 내 마음 역시 차가워졌다. 절규하듯 소리를 지르는 전하를 보다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가요?" "어째서 . . 살아난거냐. 그때, 라세스가 입었던 상처보다도 더 심한 상처였는데. 어째서 살아난거냐!" "그야, 내가 살렸으니까요." 그의 말에 간단하게 답하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어째서야. 죽지 못하게 할 수도, 살리는 것도 할 수 있는데. 살아있는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게 어려울까. "그런데 . . " "그런데?" "어째서 . . 라세스는 죽게 내버려둔것이지?" " . . 뭐라구요?" 전하의 말에 순간 머리 속이 멍해졌다. . . 저 사람 방금 라세스를 언급한것 맞아? "왜, 라세스는 죽게 내버려둔것이냐 물었다!" 악을 쓰듯 내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옆에있는 사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내가 라세스를 살리던, 살리지 않았던 . . 전하께서 무슨 상관이세요?" "왜 살리지 않았지?! 어째서 죽게 내버려뒀나!" " . . 그러니까 . .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잖아요?" 단조로운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말에 전하는 아무런 말도하지 않았다. 몇번 입을 벙긋거리다가도 곧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한번 손으로 훑어내리더니 냉정해진 눈동자로 날 보며 말했다. " . . 네 년을 절대 살려두지 않으려 했는데." "에헤-? 그러세요?" "결국 . . 세 연합을 모아, 전쟁을 멈출 수 있게 되었군." 큭큭- 거리며 웃던 그가 잠시 붉게 물든 호수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푸른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데, 곧 그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 비밀을 알려주지." 호수를 바라보던 전하가 시선을 돌리더니 우리를 보며 말했다. "내 형님의 죽음은." 전하는 마치 말을 음미하듯 천천히 말하며 차분한 푸른 눈동자로 우리를 보았다. 그 모습은 . . 아크산과 많이 닮아있어서, 아까전에 악을쓰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형수이자, 아크산의 어미였던 . . 왕비의 짓이었다." " . . 네? 당신이 죽인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난 당연히 저 사람이 죽였으리라고 예상했다. 아크산에게 비아냥거리며 가끔 이상한 말을 던지긴 했지만 . . 왕비가 한일이라고? "글쎄 . . 어떻게보면 내가 죽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 담담한 그의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 . . 왕비가 죽였다면서요?" "그래, 죽인것은 분명 형수였지." "근데 당신이 죽였다고요?" "형수가 형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나'였으니까." 그는 검을 손에 쥔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더럽고 역겨운 일이었지 . . 형님의 아내가 날 사랑했으니." 큭큭 거리며 웃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허무해보여서 아까까지만 해도 불타올랐던 그에대한 복수심이 사그라들었다. 사그라든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지금 내 옆에서 굳건히 서서 내 손을 잡아주는 사켄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 사켄이 죽었다면, 지금 전하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는 . . 상상조차 못하겠으니까. "형님은 전쟁중인 대륙을 여행하다가 형수라 부르기도 싫은 그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하빔으로 데려와 혼인하고 그녀를 왕비로 세웠지." 그는 하늘을 올려다본 시선을 내려 날 보았다. 메마른듯한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담기는걸 확인하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었다. " . . 왕비께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했군요." "잘아는군." "아크산에게 . . 형사취수제가 하빔에 있다는 걸 들었으니까요." 예전에 아크산에게서 들었던 말이 지금와서 생각날줄이야. 살짝 미간을 찌푸린 내 모습을 보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 . 형님은 돌아가셨다. 아마도, 형님은 그 여자가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독을 드셨던것같아." 그의 목소리에 담긴 허무함에 나까지 허무해지는것 같았다. 내 손을 쥐고있는 사켄의 손을 꽉 쥔채로 난 다시 말했다. "그래 .. 서요?" "잘부탁한다 하셨지. 내게, 하빔과 자신의 아내를 잘부탁한다고." " . . . " "그리고 그 여자는 나의 비가 되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안지 않았어. 내겐 이미 [아라]가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아라]가 떠올랐는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마음 속으로밖에 품을 수 없는 [아라]였다. 이미 나의 [아라]는 다른 누군가의 [아라]가 되어있었으니까." " . . 짝사랑?" 한나라의 왕인 그가, 짝사랑? 지금 이렇게 전쟁을 위해 핏발을 세웠던 그가 . . 짝사랑? "나의 가장 친한 친구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 . . . 삼각관계! 헉하고 나오는 숨소리를 꿀꺽 삼켰다. "항상 함께였지만, 그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며 내게 말해왔을때 난 그저 축하한다며 웃을 수 밖에 없었지." " . . 전하?" "입 다물어라." "네 . . " 끼어드는 것은 용서치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는 모습에 난 나도 모르게 깨갱하고 말았다. . . . 이게 무슨 꼴이야. "그렇게 그 둘의 사랑을 지켜보며, 난 만족했다. 행복해보이는 그 둘은 영원히 사랑하리라 생각했으니까." 차분하게 얘기하던 그가 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이를 아득 가는 그의 모습에 사켄이 긴장하며 살짝 날 뒤로 물렸다. "하지만 . . 내 친구는 전쟁의 첩자로 카슘으로 갔다. 그리고 . .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돌아오지 못했지. 나의 [아라]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 친구 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 . . . " "괴로웠지 . . 형님의 죽음, 소중한 친구의 죽음, 사랑하던 여인의 죽음 . .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건가 괴로웠다." 천천히 손을 들어 피묻은 자신의 손을 보던 그는 큭큭-하고 다시 광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알게되었다. 이게 다 '그 여자'가 벌인 일이라는것을!" " . . 설마 . . " "처음에는 나의 아내가 되고 싶어 형님을 죽인 그 여자는 곧 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을 보는 것을 알고, 내 친구를 사지로 내몰았다. 어쩐지 이상했지 . . [아라] . . 그녀는 분명 약하지만 강한 여인이었어.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를 두고 그렇게 가버릴만큼 . . 약한 여인이 아니었다고 . . " 그는 피묻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한참을 . . 한참을 웃었다. 허리를 젖혀 하늘을 향해 광소를 내뱉던 그가 한순간 뚝 웃음을 멈추고 천천히 젖혔던 허리를 펴고 손을 떼었다. 그리고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로 날 보았다. "내 친구를 죽인 카슘과,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그 여자의 모국, 아렌타를 이 세상에서 깡그리 없애버리려 했건만." " . . . 그때문에 . . 더욱 전쟁을 부채질했다는거에요?" "설마 고작이라고 생각하는건가? 응? 아니겠지 . . 방금전까지만 해도 사켄경이 죽을까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나." 그의 정확한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 . 사켄이 죽을까봐 . . 두려웠으니까. "지금 . . 그 말을 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데요?" "그건 말이지." 그가 입을 열려고 할때 한쪽의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하와 닮은 푸른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담담한 푸른 눈동자는 날보고 눈이 커졌다가 전하를 보고는 더욱 커졌다. " . . 전하?" "오- 아크산 . . 네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더냐?" 어느새 아까의 진지함은 싹 사라진채 싱글싱글 웃는 전하의 모습에 한순간 소름이 끼쳤다. "어째서 . . 전하께서?" "어째서냐니 . . 섭섭하구나, 아크산아.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는것이냐?" " . . 그건 . . " 머뭇거리는 아크산을 보던 전하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 . 무슨 . . 소리십니까?" "네 어미를 닮지 않고, 형님을 닮은 것이 . .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진심인듯 환하게 웃는 전하의 모습에 뭔가 불길한 생각이 머리속을 스쳤다. "자 . . 잠깐 . . " "네가 . . 이제 하빔의 왕이다." "전하? 무슨 말을 하시는겁니까!" 당황스럽다는 듯 전하에게 다가서던 아크산은 곧 자리에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전하는 아크산을 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자신을 찔렀다. 그의 가슴에서부터 번져나오는 핏물을 보며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 . . 왜? 어떻게 . . 된거에요?" 【 . . . 엘.】 "어떻게 된거에요, 류. 어떻게 . . 어째서?!" 내 말에 류가 조용히 날 감싼채 말했다. 【아까 당신이 말했잖아요?】 " . . 뭘?" 【복수를 거둬달라고.】 " . . . 그렇게 말한적 . . 아 . . " 설마 . . 복수를 거두면 전하가 죽겠냐고 한말을, 거둬달라는 말로 들은건가? 그런 . . 그런 어처구니 없는 . . 허공 중으로 흩어져내리는 말소리를 뒤로하고 내 발은 내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크산이 어느새 전하를 붙잡고 계속해서 '전하'라고 불러댔다. 그의 고통스런 비명과도 같은 부름을 들으며 난 두번째로 전하에게 무릎을 꿇었다. 전하는 잠시동안 날 보다가 큭큭거리며 웃더니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아크산은 멍하게 날 보았고, 난 그의 시선을 외면한채 천천히 전하에게 다가갔다. 전하는 나직하면서도 그와 닮은 고아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살리겠. . 다는 . . 소리 . . 는 . . 하지 . . 마라 . . 큭 . . 크큭. ." " . . . 내가 . . 말하지 않았던가요? 당신은 . . 죽을 수 없다고 . . !" 이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내 말을 듣던 그는 물끄러미 날 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보는, 비틀리지않은 평온한 미소였다. "라세 . . 스는 . .말이지 . . 나의 . . 친우이자 . . 흐윽 . . . [아라]의 . . 아이 . . 였다." " . . . 대충 . . 짐작정도는 했어요." 어째서 라세스가 죽게 내버려뒀냐고 분노하던 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갑자기 비밀이라며 내게 얘기하던 것도. 살려버릴까 . . 이대로 . . 죽지 못하게 해버릴까. 잊지 못해, 그저 묻어두고 있었던 라세스의 죽음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내게 용서할 수 밖에 없는 평화로운 미소를 남긴채 죽어버린 그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망막에 맺혀있는데. . . 사켄 때처럼 . . 살려버릴까. 나의 고민을 눈치챈것인지 그가 피묻은 손으로 내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는 내 모습에 그가 푸른 눈 가득 날 담더니 씨익- 마치 소년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비밀 . . 이다." " . . 뭘 . . 말하는거죠?" "아크산 . . 에겐 . . 내 . . 말은 . . 큭 . . 비밀 . . 이다. . " " . . 보장못해요." 내 차가운 응답에 그는 날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넌 . . 지켜 . .줄테지 . . "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큭큭 . . 쿨럭 . . 넌 진심으로 . .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니까." " . . 죽을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내 말에 그가 큭큭거리며 웃더니 말갛게 변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크 . . 크큭 . . 지 . . 겹다 . . 이 . . 세상 . . " "전하 . . 안됩니다. 안됩니다. 숙부!" 아크산의 안타까운 외침에 전하가 내 손을 놓고는 부들거리는 손을 그에게 뻗었다. 그는 얼른 전하의 손을 붙잡았고, 푸른 눈 가득 눈물을 글썽였다. 금방이라도 흐를듯 그의 눈가득 차있는 눈물을보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날 보고있는 사켄에게 살짝 미소지어주었다. 난 . . 난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은건 아니지만 . . 괜찮아요. 아직은 . . 견딜만해요. "아크산 . . 넌 형님의 아들이다." " . . 예." "누구보다 . . 도 . . 자랑스웠던 . . 내 형님의 . . 아들 . . 이다." " . . . 예." 이를 악물고 대답하는 아크산을 보던 왕은 나에게만 들릴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 . 죽이고 . . 싶어도 . . 어린 네게 . . 빼앗을 . . 수 없었던 . . '그 여자'의 . . 아들. . 이지." 깊고도 힘든 숨을 내뱉은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그런 모습이 . .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두주먹을 꽉 쥐고 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음 속의 갈등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 . 나처럼 멍청한 여자가 있을까. 저주해놓고 . . 죽지 못하게 저주해놓고 . . 절대 풀어주지 않겠다 해놓고 . . 이렇게 쉽게 풀어버리는 . . 멍청한 여자가 있을까. "아크산 . . 사랑하는 조카야." "예." 그가 아크산을 부르는 호칭은 예전과는 달리 부드럽고 다정했다. 비틀림으로 가득차 마치 비꼬는 것처럼 들렸던 '사랑하는 조카'는 . . 너무나도 다정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숙부의 심술을 . . 용서해라 . . " " . . 용서 . . 할 것도 . . 없습니다." "그래 . . 그래도 . . 용서하거라 . . " 마지막으로 말을 내뱉은채 편안하게 미소짓는 그의 모습에 몸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옆에서 내 손을 잡아주던 사켄이 날 더 꽉 잡아주었다. 그 덕분에 뒤로 넘어지지 않은채 멍하니 전하를 보았다. 칼을 타고 흐르는 붉은 핏방울이 . .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뭐야? . . . 어째서 . . 어째서?" 어째서 죽은건데? 그는 . . 그는 절대로 죽을 수 없는 몸인데. 절대 죽을 수 없다고 . . 멍하게 죽어버린 전하를 보다가 갑작스레 그가 호수를 보며 생각에 잠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부터임이 분명했다. 내게 비밀을 말해준다고 하기전에 . . 그는 자신의 심장이 다시 뛰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내게 말했던거다. " . . 하 . . 뭐 . . 저런 사람이 다있어?" 이런게 어딨어. 이렇게 . . 어이없이 . . "전 . . 하 . . 전하!" 아크산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더니 그를 급하게 불렀다. 고통스런 절규를 내지르는 그의 옆에서 멍하니 그를 보았다. 푸르게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때문에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전하 . . " 툭하고 떨어진 물방울이 전하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어째서 . . 숙부님 . . " 한방울 두방울 . . 전하의 얼굴로 흘러내리는 아크산의 눈물 방울을 보며 난 눈을 감으며 사켄에게 기댔다. 평생을 사랑했던 자신의 [아라]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우와 사랑하게 된 것을 보며 전하는 어땠을까. 자랑스럽고도 자랑스러웠던 자신의 형님이 죽으며 왕비와 아크산을 자신에게 맡겼을때는? 시체조차 찾지못한 친우의 죽음과 왕이 되었음에도 사랑하였던 [아라]의 죽음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자랑스러웠던 형님의 아이이지만, 저주스러운 그 왕비님의 아이이기도 한 . . 아크산을 볼때의 심정은? 친우와 '아라' . . 그 둘의 사랑스럽고도 사랑스러웠던 . . 라세스가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때는? 전하 . . 전하, 이 망할 전하야 . . 당신은 미칠 수 밖에 없었던거야?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 모두가 파멸하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던거야? 이 . . 빌어먹을 전하 . . 망할 . . 망할, 재수없는 전하 . . 내게서 라세스를 앗아가버린 . . 당신이란 사람 . . 정말 싫어. 전쟁을 일으킨 과거의 황제들보다도, 날 여기까지 오게 만든 테일러보다도 싫다고. " . . 엘 . . " "아무 . . 말도 . . 하지 말아요, 사켄." " . . 그럼 . . 한마디만 하지." 사켄의 든든한 어깨에 기대고 있던 내 귓가로 나직한 사켄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울지마라." 젠장 . . 세브릭의 고백을 거절했을 때도 안흘렸던 눈물인데. 사켄이 피투성이가 됬을때조차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 . . 전하 때문에 우는거 절대로 아니에요. 그냥 . . 그냥, 내 비장의 복수가 허무해져서 . . . 그래서 우는거야. 그래서 . . 그래서 우는거라구요." 절대로 . . 절대로 당신의 죽음이 슬퍼서, 당신이 가여워서 우는거 . . 절대로 아니라구요. 알았어요? 얽혀있는 두 푸른 머리카락을 보며 난 시선을 돌렸다. 아크산은 차가운 표정으로 전하를 등에 업은채 한걸음씩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를 보던 시선을 돌리자 이제야 막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쪽을 바라보며 우뚝 서있는 테일러 역시. 내가 그를 발견했을때, 사켄 역시 그를 발견했는지 자리에 멈춰섰다. 아크산은 그런 우리를 신경쓰지않고 계속 걸어가다가 테일러의 옆에 멈춰섰다. 별로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아크산이 테일러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감사는 않겠습니다."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아크산의 말에 테일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감사할 필요 없다네." "예. 절대로 감사하지 않을것입니다." 그 말을 마치고 아크산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가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을쯤에야, 테일러는 그를 보던 시선을 돌려 우리를 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사켄과 그의 피 때문에 피투성이가 된 날 본 테일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빙긋 웃었다. "이거,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그가 말을 잇기전에 그에게 다가가 짝-하고 그의 뺨을 쳤다. 고개가 돌아간채 멈춰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위험스레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로 날 보았다. 테일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보다가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황제 폐하." "호오-? 내가 뺨맞을 일을 했던가?" "폐하." "그것도 한나라의 황제에게 감히 네가 손을 올릴 수 있다는 말인가?" "테일러 덴 카슘 황제 폐하." 그의 이름을 모두 말하자, 그가 잠시 입을 닫으며 날 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으며 가볍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감히 [신과 함께하는 자]를 건드려놓고 무사하다는 사실에 감사하도록 해." " . . . " 내 말에 그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내 소중한 사람을 건드려놓고, 지금 멀쩡히 웃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게 좋아." 만약 사켄이 내 옆에 더 이상 서있지 못했다면, 국왕 전하처럼 차가워져있었다면. 당신을 절대로 이대로 내버려두지 않았을꺼야. 이렇게 그저 사람을 장난으로 이리저리 갖고 노는 당신을. "절대로 용서 안했을꺼에요. 아시겠어요?" 앞의 말을 잘라먹고 싱긋 웃으며 말하자, 그가 천천히 굳은 얼굴을 풀며 말했다. "상당히 . . 짜증나는군." "음?"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지?" 테일러는 정말 알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왜 너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것이냐." "그야 . . " 당연한 것을 묻는 그의 모습에 큭하고 작게 웃어준 뒤에 옆에있는 사켄의 손을 잡은채로 그를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인형따위가 아니니까요." " . . 인형이 아니다." 그의 곁을 벗어낫을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자리에 멈춰섰다. 내가 멈춰섬에, 옆에있던 사켄 역시 멈췄다. 저벅저벅 내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켄의 손을 잡지 않은 손목을 그의 손에 잡히며 빙글 그에게로 몸이 돌려세워졌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리자, 테일러가 간신히 화를 참는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내 감정이 그렇다." "폐 . . " "내 감정이 그래, 내가 그걸 원한다." " . . . . 이봐요, 폐하." "카슘의 황제인 내가 널 원한다. 네가 내 곁에 있기를 원하고, 나에게만 웃어주길 원한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 아픔을 말할 수 없었다. 테일러는 . .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한 감정을 내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날 사랑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것이지?" " . . 폐하." "네가 내 여자가 되길 바란다. 널 품에 안고, 너의 목소리를 듣길, 너의 모든것을, 네가 내게 해줄 모든것을 원한다고!" 끝내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모습에 사켄을 보았다. 사켄의 굳은 얼굴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켄, 손 좀 놔주실래요?" " . . . 하지만." "괜찮아요, 놔주세요." " . . . " 내 말에 살짝 망설이던 그가 손을 놓아주었다. 그가 놓아준 손을 들어 테일러의 뺨에 올려놓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보는 테일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럼, 소중히 여겨줬어야죠." " . . 뭐?" "사랑한다, 사랑한다 . . 내가 느낄 수 있을만큼, 소중하고 소중하게 여겨줬어야죠." " . . . . " 손목을 잡고있던 손에 조금씩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폐하, 난 나 밖에 모르는 여자라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의 사랑방식밖에 몰라요." " . .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네, 근데 폐하는 한번도 표현한적 없잖아요." "항상 말하지 않았나?" 완전히 힘이 풀린 그의 손에서 조심스레 손목을 빼내고 그의 뺨에 올려뒀던 손을 내렸다. 묘한 무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테일러를 보며 살짝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난 못들었어요. 당신의 사랑 못느꼈다구요." "만약 . . " 그의 작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답지 않게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약 네가 아는 방식으로 네게 사랑한다 말했다면 . . 넌 . . "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평소 보였던 나른함이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흥미거리정도로 보는 시선이 사라지자,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더욱 매력으로 다가왔다. "넌 내 여인이 되었을 것이냐?" " . . . 글쎄요." 그의 말에 곰곰히 생각하던 난 턱을 쓱 쓰다듬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에게 웃어보였다.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껄요." 내 말에 허탈하게 웃는 그를 보며 난 쓰게 웃었다. "진심으로 날 사랑한다고 말한 폐하께,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뒤돌아섰다. 온몸으로 그의 시선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삼키고는 다시 눈을 떴다. 한걸음 발을 내디뎠을때, 바람의 장난 때문에 들려오는 테일러의 속삭임에 순간 움찔했다. "차라리 거짓말이, 내게는 더 좋았을 것이다." 말했잖아요, 진심으로 내게 다가온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수는 없었다고. 테일러가 날 빤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시선을 난 모른다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 옆에서 함께 걷던 사켄이 조용히 말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물론이죠. 예전에도 말했지만, 사켄의 질문은 언제든 대환영이거든요." 사켄의 물음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말했다. 척척 걷던 나는 곧 들려오는 사켄의 질문에 멈칫 자리에 멈춰섰다. " . . 떠날 것이기 때문에, 받아주지 않는건가?" "음 . . "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사켄에게 시선을 돌렸다. 맑은 눈빛으로 날 보는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찬찬히 머리 속에 새기며 싱긋 웃었다. " . . . 그런거군." 내가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내 웃음 속에서 답을 읽었는지 사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머리카락에서 속눈썹, 눈, 코에서 입술 . . 턱 . . . 그의 옆선을 차례차례보다가 나 역시 정면을 보며 말했다. "묻지 않아요?" " . . 무엇을?" "내가 어디로 떠나는지, 어디로 떠나기에 오만방자하게 모두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 . . 오만방자한건 아니다." "에-? 충분히 오만방자하지 않아요? 카슘의 황제 폐하 마음까지 거절했다구요?" "거기다가 하빔의 계승자 . . 아니, 이제 곧 왕이 될 아크산 자 하빔과, 아렌타의 황태자 쿠오 림 아렌타까지 거부했지." 담담하게 말하는 사켄의 말에 난 순간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천천히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 . . 아크산 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리고 쿠오가 황태자라는 건 무슨 소리고?" 내 말에 순간 아차한듯 눈을 찌푸리는 사켄의 모습에 덥썩 그의 팔을 잡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냐니까요?!" " . . 아크산의 일은 직접 봤다." "그거?" " . . 그거." 으아아아악- 마음 속으로 괴성을 지르고 있음에도 겉으로는 쩡하니 굳어있는 날 힐끔 본 사켄이 말했다. "그리고 방금 한 질문으로, 네가 그의 고백도 거절한 것을 알았지." " . . 그럼 쿠오가 황태자라는 소리는? 쿠오가 내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건?!" "그 두가지 모두 총사령관님께 들었다." 맥클라스 아저씨, 이 입싼 아저씨 같으니라고! 그 진중한 얼굴로 자신의 친아들의 고백을 나불나불 떠들고 다녔단 말이야?! 이를 까득까득 갈다가 순간 든 생각에 훽 사켄을 보았다. "그럼 . . 진짜 쿠오가 황태자?" "그래, 아렌타의 황태자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켄을 보며 헉-하는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 . 갈색빛 나는게 좀 닮았다 싶더라니 . . 그렇지만, 쿠오 너 나한테 아무 말도 없었잖니? 아렌타의 황태자라니 . . 으아우아으아- 패닉 상태에 빠져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 . . . 잠깐만 . . 그럼, 저기 아크산의 일까지 봤으면 . . 세브릭도 . . 봤어요?" " . . . "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는 사켄의 모습에 쓰게 웃었다. "봤군요." "그래." 그의 대답을 듣고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내 마음을 휘저었다. 잠시 침묵이 맴돌다가 곧 내가 입을 떼면서 그 씁쓸한 침묵이 걷혔다. "사켄, 있잖아요." 대답하지는 않지만, 그가 내 말에 귀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기에 자리에 앉아 무릎을 감싸안은채로 가만히 땅을 보았다. "나 못된걸까요?" "글쎄." "세브릭에게 상처준걸까요?" "아마도겠군." 그의 조금 성의없이 들리는 대답에 눈을감고 떠오르고 있는 햇빛에서 전해오는 온기에 몸을 맞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네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나도 사람인데요." 농담처럼 들리는 그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아리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서,답답하다. "난 돌아가야하는 사람이니까, 그와 함께 있어줄 수 없어요. 그의 마음을 받아드리면 안돼요. 그래서 . . 그래서 조금 후회되요." "무엇이?" 담담한 사켄의 대답에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빛이 눈부셔서 잠시 깜빡인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 . . . 그를 사랑 . . 하고 있다는 사실이." " . . . " 내 말에 또 다시 아무런 말도 않는 사켄 때문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난 이만 내 막사로 돌아갈께요." "엘." "사켄도 . . 좀 쉬어요. 옷도 갈아입고 . . " 그의 피묻고 찢어진 옷을 보며 말하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내 말은 세브릭한테 절대적으로 비밀? 약속해줄 수 있죠?" 내 말에 사켄이 물끄러미 날 보았다. 그에게 다시한번 씨익 웃어주고는 뒤돌아서려했을 때, 사켄이 말했다. "엘." "네?" 뒤돌아서려던 자세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가만히 날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안되는 것인가?" "뭐가요?" "네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나?" "음?" "카슘의 황제에게, 만약 정말로 네가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네 세상'을 버리고서라도 그의 것이 되겠다 하지 않았나?" " . . . 그때 사켄은 없었던걸로 아는데." 고개만 돌려 사켄을 보다가 다시금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안거에요, 사켄?" "나중에, 세브릭에게 들었다." "아- 세브릭이 말해줬구나." 사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사켄이 다시 말했다. "정말 안되는건가." 진지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짝 고개를 떨궈 그의 신발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리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싱긋 . .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 . 안되는 . . 것인가 . . " "음 . . '내 세상'을 버리면서까지 . . '이곳'에 남을 수 있을까 . . 란 생각이 드네요." 내 말에 사켄이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을 잠시 감상하다가 작게 웃고는 뒤돌아서서 내 막사를 향해 걸었다. 멀어져가는 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켄은 주먹을 살짝 쥐더니 피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묘한 애달픔을 안고 있었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걸음조차 신중하게 느껴질만큼 그의 얼굴은 경건했다. 그리고 한 막사 앞에 도착하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뚫어지게 그 막사를 응시했다. " . . 세브릭, 안에 있나?" " . . . " 그의 말에도 조용한 막사를 보던 사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들어가겠다." 그 말을 내뱉고 사켄은 세브릭의 막사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오는 숨막히는 적막에 사켄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 . 있었던건가?" "알고 들어오셨으면서 하는 말치고는 웃기지도 않군요." 낮게 내려앉은 저음은 탁하게 막사 안으로 퍼져나갔다. 사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세브릭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탁자에 손을 얹고 있던 세브릭은 감고있던 눈을 뜨며 사켄을 보았다. 그가 피로 붉게 물들어있음에도, 세브릭의 표정에는 그 어떠한 것도 떠오르지 않는 무(無), 그 자체였다. "옷이 심상치않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건성으로 묻는 세브릭의 말에, 사켄은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하빔의 왕이 죽었다." "그렇군요." 사켄의 말에 잠시 그를보던 세브릭이 다시 눈을 감았다. " . . . 놀라지도 않는건가?" "놀랄 필요가 있는건가요?"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치던 세브릭의 모습을 보던 사켄은 세브릭의 맞은 편에 있는 침대에 앉았다. 사켄이 무엇을하던 세브릭은 그에게 조금의 시선도 주지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이 다시 막사에 내려앉았다. 그 침묵이 불편했던 사켄은 지그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엘이." " . . . . " 사켄이 엘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세브릭의 손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그리고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가 선연하게 드러나며 사켄을 그 눈에 담았다. 그의 주위에 흐르던 분위기마저 바뀐 모습에 사켄은 마음 속으로 가볍게 실소하며 말을 이었다. "하빔의 왕이 죽을 때 함께 있었다. 그리고 . . 방금까지 나와 함께 있었지." " . .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까와는 다른 울림이 담긴 목소리에 사켄이 천천히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그 말을 조용히 듣던 세브릭이 테일러의 고백을 엘이 거절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픽하고 조롱어린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렇군요, 그녀의 마음 속에는 . . 이미 하빔의 왕위계승자가 있다는 거로군요." " . . 세브릭." "대단한 여자지요, 엘은. 카슘의 황제의 마음까지 거부하다니 말이에요. 정말 대단한 사랑 아닌가요?" " . . .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사켄의 말에 세브릭은 입을 꾹 다물었다. 복잡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 장밋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의 눈을 조용히 보던 사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엘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나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 ." "의외군요." "뭘 말하는거지?" "전 사켄 역시 저와 같은 마음인줄 알았으니까요." 그 순간 입구의 천이 펄럭일정도로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어오자 세브릭이 눈을 감았다. 그때문에 세브릭을 보던 사켄의 시선이 흔들렸음을 그 누구도 몰랐다. " . . 가보도록 하지." 사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세브릭은 사켄에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알았다는 표시를 하였다. 천천히 뒤돌아선 사켄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후회한다하더군." " . . 무슨?" 사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옅게 흔들리는 다정하고 슬픈 회색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널 사랑한것을." " . . 누가 . . 말인가요?" "그녀가." 본래의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온 사켄이 뒤돌아섰다. 멍하게 사켄을 바라보던 세브릭의 시선이 사켄과 마주쳤다. " . . . 그녀는 . . 아크산을, 그를 사랑하 . . " "한가지 말하지." " . . . " 사켄은 세브릭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그 '누구'의 마음도 받아주지 않았다." " . . 하지만 . . " 세브릭의 눈동자에 떠오른 혼란에 사켄은 차분한 회색빛 눈동자로 대응했다. 그의 눈을 보던 세브릭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 . . . 진실인가요?" "엘과 약속했는데, 너에게 자기가 한 말은 비밀이라고. 이제 큰일났군." 사켄이 담담했던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며 세브릭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 . . . 여기서 . . 가장 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은 당신일꺼에요, 사켄." 세브릭의 말에 사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표정을 단호하게 굳히며 말했다. "여기서 뭐하는거지?" "예?" "엘은 자신의 막사에 있다." 사켄이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가서 잡아." "사켄." "무릎을 꿇어서라도 잡아라." ". . 무릎까지 꿇어야하나요?" "그러지 않는다면, 내가 꿇도록 하지." 세브릭의 눈이 커졌다. 사켄을 보던 세브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켄을 지나쳐가다가 자리에 멈춰서 머뭇거리다 말했다. " . . 후회하시지 않을껀가요?" 세브릭의 말을 들은 사켄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엘을 사랑하고 있다고해도, 엘은 날 좋아할 뿐이니까." 멈춰서있던 세브릭이 움직였다. 천천히 걷던 그가 조급하게, 곧 빠르게 뛰어갔다. 혼자 남겨진 사켄은 천천히 주저앉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볍게 숨을 내뱉은 그는 오른손을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에 대며 눈을 감았다. "네 말대인것 같군, 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건가." 급하게 달려가던 세브릭은 곧 한남자를 마주하고 자리에 멈췄다. 엘의 막사가 별로 멀지않은 곳에 가만히 서있던 그는 자리에 멈춰선 세브릭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있길 잘했군." " . . . 폐하." 세브릭의 신음성같은 부름에 테일러가 빙긋 웃더니 팔짱을 풀었다. 한걸음 두걸음, 세브릭과 테일러의 거리가 줄어들고 곧 훽하는 소리와 함께 테일러가 세브릭의 멱살을 잡았다. 테일러에게 멱살을 잡힌 세브릭이 미간을 찌푸렸음에도 별 상관없다는 듯 테일러가 말했다. "남자의 직감이라는 것도 꽤 믿을만한 것이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세브릭경?" " . . . 무슨 일이십니까." "난 그대가 정말 싫다네, 세브릭경." 테일러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태연히 말했다. 세브릭은 그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곧 입가에 옅은 미소를 달며 말했다. "저 역시, 폐하가 증오스럽습니다." "그렇군, 서로를 증오하는것인가? 이 얼마나 슬픈일인지 . . 엄연히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데 말이야." " . . . 같은 피라고 하시지 말아주셨으면 하군요." "내가 그대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겠지?" 테일러의 대답에 세브릭이 입을 꾹 다물고 거칠게 테일러를 뿌리쳤다. 순순히 세브릭을 놓아준 테일러가 말했다. "하나, 내 어미를 죽게 만든 그대의 어미가 싫기에, 그대도 싫다네." "저 역시, 제 어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한 당신이 싫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했다. 하지만 곧 테일러는 빙긋 굳은 얼굴을 풀며 미소지었다. "둘, 나도 모르는새에 소중하게 생각한 여인을 빼앗은 그대가 . . . 무척이나 싫어." " . . . " 그의 말에 이번에 세브릭은 침묵했다. 테일러는 재밌다는 듯이 웃더니 툭툭 가볍게 그의 한쪽 어깨를 치며 말했다. "셋, 엘의 시선이 그대에게 머물고 있기에 그대를 싫어해." " . . . " 세브릭의 장밋빛 눈동자가 가볍게 요동쳤다. 그의 눈을 모른척하며 테일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넷, 엘은 그대를 보고 있는데, 그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 땅을 파는 모습이 눈꼴시려서, 그대를 싫어하고 있어." " . . 폐하." "다섯, 사켄경의 마음, 아렌타 황태자의 마음, 하빔의 후계자의 마음 . . 거기다 내 마음까지 모두 거절한 그녀가 단호하게 그대의 마음을 내쳤기에, 그대가 싫다." " . . . 그것은 절 싫어하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여섯, 멍청하기짝이없는 그대를 왜 엘이 좋아하는지 모르기에, 그대가 싫지." " . . . . . . . . . " 세브릭은 테일러의 말에 침묵으로 답했다. 그런 그를 유심히 살피던 테일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엘이 내게 말했지, 진심으로 다가왔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 . . . " "하지만 그것 아는가? 그대에게만은, 엘은 거짓말을 했어." " . . 무슨 . . " 세브릭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테일러를 보았다. 테일러는 빙긋 웃고는 말했다. "진심으로 다가선 그대에게, 엘은 거짓말을 했다네. 그거 특별취급 아닌가?" 테일러의 말에 세브릭의 눈이 옅게 흔들렸다. 그의 흔들림을 가만히 지켜보던 테일러는 가볍게 뒷짐을 지고는 빙긋 웃었다. "난 그대가 무척 싫어, 세브릭경." 테일러는 조용히 뒷짐을 지던 자세 그대로 아직까지 혼란에 빠져있는 세브릭을 보며 말했다. "옹졸하게도 자신의 마음밖에 보지 못해서, 엘의 눈도, 마음도 보지 못하는 그대의 쓸모없는 눈을 빼버리고 싶을 정도지." 조금은 잔인하다 싶은 테일러의 말에 세브릭이 눈을 찌푸렸다. 그의 찌푸림을 보면서 테일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에 엘을 만나고, 그녀를 오로지 나만 보게 할 생각이었지. 모두 이 세상에서 지우고, 나밖에 볼 수 없게 말이야." 테일러는 그 말을 끝내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새벽하늘이 옅디옅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그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던 테일러는 천천히 시선을 세브릭에게 돌렸다. 세브릭은 아무말도 없이 테일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유혹하려다가 유혹당해버렸어." 생각만으로도 재밌다는 듯 테일러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그의 미소를 보던 세브릭이 말했다. " . . . 엘을 사랑하게 되셨다는 말입니까?" "사켄경에게 듣고 엘에게 가는것이 아니었나?" 테일러가 다알고있다는 듯 눈을 빛내자, 세브릭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끄덕임을 확인한 테일러가 빙긋 웃더니 말했다. "카슘 제국의 황제이자." 테일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청아한 새벽의 향을 품은 바람이 잠시 두사람을 스쳐지나갔다. 테일러는 처음으로 세브릭의 앞에서 오만한 황제의 가면을 벗었다. "한 여자에게 반하게 되어버린 한 남자로서." 그의 얼굴은 당당하고, 또 빛나보여서 세브릭은 꾹 주먹을 쥐었다. "엘이라는 여자를, 테일러 덴 카슘이라는 남자가 사랑하고 있다." 말을 끝낸 테일러는 거만한 눈빛으로, 혹은 도발하는 눈빛으로 세브릭을 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세브릭은 쥐었던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 . . . . 나 역시." 테일러를 보던 세브릭은 주먹을 꽉 쥐고 그를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엘을 사랑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세브릭을 힐끔 뒤돌아본 테일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나 더 추가해야겠군. 일곱, 기껏 싫은 놈 도와줬더니, 반말이나 찍찍 날리는 그대를 난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군." 단한발자국도 물러 설 수가 없다. 바로뒤에 침대가 있기 때문보다는 내 앞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서있는 세브릭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왠지 여기서 밀리면 애써 내가 악녀가 되면서까지 그를 뿌리쳤던 것이 헛되이 되버릴것같은 느낌에 복잡한 심정을 최대한 감추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말하고 싶은게 생겨서요."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표정을 짓는걸까. 잠시 머리속에 사켄이 스쳐지나갔지만, 나와의 약속을 설마 . . 설마 어겼을까 싶어서 조금 불안한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그의 장밋빛 눈동자가 무척이나 맑고 선명해서,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세브릭, 당신이 날 사랑하는건 알지만서도 . ." "엘." "그러니까 말이에요. 아크산을 두고 당신과 바람을 피우는 것도 꽤나 매력적인 제안이기는 하지만 . . 그래도 우리 이래서는 안돼요. 난 아크산을 배신할 수 없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채 와다다 뱉어내고 배시시 웃자, 세브릭이 미끈한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더니 말했다. "시끄러워요." "에 . . ?" 멍하게 그를 보는데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뒤로 물러설틈도없이 그의 팔이 내 허리를 휘어감고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부딪히듯 그의 품에 안긴 순간 벗어나려고 했지만 귓가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굳어버렸다. "도망가는건 허락 못해." 그의 목소리는 고혹적이면서도 달콤했다. 순간적으로 딸랑딸랑, 난 당신의 종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을만큼 유혹적인 목소리였다. "매일 거짓말만 하는 그 입따위 믿지 않을꺼다." "믿지않는다니 . . 사랑하는 사람인데 믿지 않을 수 있어요?" 내 말에 세브릭이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니 입가 가득 비웃음을 지었다. "백번천번이라도 말할 수 있어. 널 믿지 못한다고." "이거 . . 사랑이 아닌가보네요. 흑, 사랑은 신뢰라던데." 내가 잉잉 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동안, 세브릭은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말했다. "이제 네가 무슨 말을 하던, 어떻게 날 거부하던 신경쓰지 않을꺼다. 그리고 . . " 그의 장밋빛 눈동자가 고혹스러운 빛으로 반짝였다. 순간 숨이 딱 멎을정도로 유혹적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 . . 어 . . 어디에다가 시선을 둬야하는거지? "그리고, 널 사랑할꺼다." 그의 말을 이해했을때는 이미 천천히 그의 손이 내 허리를 타고 올라와 내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소름끼치도록 달콤하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 때문에 순간 나른해지는 몸에 애써 힘을 주며 그의 팔을 꽉 잡았다. " . . 그거, 내 의사는 완전히 무시하는거 아니에요?" "먼저 내 감정과 네 감정을 무시한건 너잖아." "미안하지만 세브릭, 난 내 감정을 무시한적 . . "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말하려 하는 순간에 그의 눈을 보았다. 수만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인듯한 장밋빛 눈동자가 아리도록 눈에 새겨졌다. 으아- 지오, 하필 이 순간에 저런 눈을 보게하다니! "무시한적 없다고?" " . . 네." 그가 가만히 날 보더니 내 허리를 감았던 두손을 풀어 내 어깨를 잡았다. "한치의 거짓도 없이?" "물론이죠." 그에서 풍겨오는 유혹적인 장미향이 우리를 휘감았다. 그와 함께 잠시 작은 침묵이 찾아들었다. 서로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보던 그와 나의 대립은 곧 그가 손을 떼면서 끝나는 듯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였다. "세브릭!" 그는 내 부름에도 아랑곳않고 무릎을 꿇었다. 메마른 땅 위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무릎꿇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내 생에, 다시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시 단정해진 그의 말투를 들으면서도 내 앞에 무릎꿇은 그의 모습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날 휘감았다. "다시는, 당신만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꺼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 . 진짜 . . 이제 어쩔 수 없다. 그 생각이 듬과 동시에 허탈한 미소가 입가에 자리했다. 이렇게 밀어내고, 밀어냈는데 . . 왜 당신은 내게 다가오는건데? 그렇게 싫다싫다 . . 당신에게 상처줬는데 . .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 . . 세브릭." "이렇게 애원해서라도." 그의 장밋빛 눈동자가 젖어들어간다. 아름답다. 정말 답답할정도로 아름다워서 이 남자가 너무나도. . 너무나도 . . "사랑합니다." " . . . 세브릭." "사랑하고 있어요, 엘을 . . 저도 어떻게하지 못할정도로 사랑할 수 밖에 없어요." 난 돌아가야만해, 알고 있잖아? 이 세상은 아름다워,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흥미롭지. 하지만 '이곳'에는 내 가족이 없어. 가족 . . 그래, 눈 앞의 남자와 결혼하면 '가족'은 생기겠지. 친구도 사귈 수 있을꺼야. '이곳'에는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무척 많으니까. 하지만 . . 난 그럴 수 없어. "난 겁쟁이에요, 세브릭." 조용히 그의 눈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고요한 눈빛으로, 조금 젖어든 눈동자로 흔들림없이 나를 보았다. "너무너무 겁쟁이라서, 당신을 밀어냈어요. 당신을 계속 사랑할 자신이 없으니까요." "당신이 날 사랑할 자신이 없다면, 내가 계속 당신이 날 사랑하게 만들께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푹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감에 그의 목젖이 움찔하며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가볍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도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갑자기 내게 이러는건지 말해줄 수 있어요?" " . . . 말못해요." "네, 그러니까 . . 사켄이 말해줬다는 얘기군요?" 내 말에 세브릭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의 얼굴을 보며 픽 웃고는 그의 이마에서 눈가로 내려와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가에 입맞추며 말했다. "사켄에게 들었어요? 내가 왜 당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지?" " . . . 후회한다더군요, 당신이." 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 사켄, 당신이 이렇게 내 뒷통수를 때릴지는 몰랐는데. 쓰디쓴 배신감에 말라버린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일단 지금, 사켄의 배신은 나중의 일이겠지. 세브릭의 떨림을 느끼며 눈가에서 조금씩 입술을 옮겨 동그랗고 섹시한 귓가에 속삭였다. "왜 후회하는지 알아요?" " . . . 모르 . . 겠어요." 목쪽에 뜨거운 그의 숨결이 닿는것을 느끼며 그의 귀를 살짝 이로 물었다. 움찔- 조금은 격하다 싶을정도로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쿡쿡 귓가에서 조용히 웃다가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열기어린 장밋빛 눈동자를 보며, 내가 장난이 너무 심했나 싶었지만 . . 뭐, 이정도는 애교로 넘겨줄꺼죠? "난 돌아갈꺼에요." 내 담담한 말에, 세브릭이 무슨 소리냐는듯한 눈빛으로 날 보았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난 '나의 세계'로 돌아갈꺼에요. '그곳'에서 난 새로운 사랑을 할지도 몰라요. '이곳'에서의 당신에대한 사랑을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꺼에요. 아마도, 반드시." 조곤조곤 그에게 말하며 조금씩 그에게 다가갔다. 코와 코가 맞닿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 담긴 내 눈을 보며 싱긋 웃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요?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어요?" "난 . . " "난 '이곳'에 있지 않을껀데, '이곳'에서는 더 이상 내가 없을텐데. 그렇게되면 . . 세브릭, 당신은 다른 여자를 당신의 아내로 맞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더 이상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내 시야에 들어오는것은 그의 꽃잎처럼 부드럽고 촉촉해보이는 입술이었다. . . . 아쉬운데, 한번만 키스하면 안될까나.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 세브릭을 생각하는것만으로 서글픈데. 그 전에 . . 내가 먼저 이 입술 먹어버릴까나. "그렇게 된다면."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조금 그와 거리를 벌렸다. 이제야 완전히 내 눈안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 심장이 콩닥콩닥 설레임을 담고 뛰기 시작했다. 심장아, 왜 이러니 . . 세브릭이 아무리 멋져보여도, 너무나 빛나보여도 . . 이렇게 유혹적이라도, 더 이상 뛰면 안되지. 네가 그렇게 두근두근 거리니까, 내 얼굴이 화끈화끈거리잖아. "그렇게된다면, 전 '이곳'을 버릴꺼에요." " . . 뭐라구요?" 그의 황당한 대답에 멍하게 그를 보았다. 세브릭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그의 뺨을 잡고 있는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똑바로 날 보았다. "어떻게해서든 '이곳'을 버리고,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꺼에요." " . . . 그게 될것같아요?" 가능해? 당신 정말로 '이곳'을 버리고, 내가 살았고, 살아갈 '그곳'으로 갈 수 있어? 그런 질문을 마음속으로만 말한채 그를 보자, 그는 붉은 입술을 곱게 휘며 말했다. "누구도 불가능하리라 생각한 '전쟁'을 종결시킨 당신의 남자라면, 그정도는 당연히 해내야하는거 아닌가요?"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난 킥킥 웃었다. 조금씩 배에서부터 유쾌하게 날 감싸고도는 행복감을 지우지 않고, 뿌리치지 않고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무릎꿇고 있는 그를 생각하지 못한채, 그렇게 계속 웃고 웃었다. "반드시 할꺼에요. 어떻게 해서든, 해낼 꺼에요." 그는 조금씩 내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닿을듯, 금방이라도 내게 입맞춰줄듯 그렇게 다가와 열기로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거부하지 마. 이번에도 거부한다면 . . " "거부한다면?" 장난스러운 내 미소를 보며 그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고민에 잠긴 그의 장밋빛 눈동자를 보다가 키득하고 작게 웃었다. 내 웃음에 세브릭이 의아하다는 듯 날 보았다. "비겁해요, 세브릭." 나는 그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넘기며 웃었다. 지오, 내 생애 당신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 정정해야겠네요. "이럼, 내가 키스할 수 밖에 없잖아요?" 정식으로 그와 하는 키스는 처음이던가? 그의 놀라 동그래진 장밋빛 눈동자에 담긴 나를 보며 웃음이 나올뻔했다. 조금 굳어있는 그에게로 고개를 숙여 붉은 입술에 입맞췄다. 부드러운 온기가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날만큼 아려와서 눈을 감아버렸다. 곧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 속을 파고 들어와 자신에게로 깊게 끌어당겼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자신이 살던 '이곳'을 버리고 날 따라온다는 남자를, 내가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이렇게 유혹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여기서 어떻게 더 이 사람을 밀어낼 수 있지?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가는 남자를, 날 똑바로볼때는 나도 모르게 작게 숨을 내쉬며 심장을 진정시켜야하는 남자를. 날 사랑한다며, 사랑한다며 온몸으로 말하는 이 남자를 . . 난 더 이상 외면못해. 그러니까 . . 세브릭, 당신이 책임져요. 당신이 날 따라 '나의 세계'로 온다는 말 . . 믿을테니까. 믿고 싶으니까요. 날 삼켜버릴듯한 그의 키스때문에 무릎에 힘이 풀렸다. 어느새 우리는 내가 그에게 입맞추는 자세에서, 그가 내게 입맞추는 자세로 바뀌어있었다. 그의 두손은 내 머리와 허리를, 내 두손은 그의 뺨을 살며시 감싸안았다. 매혹적으로 다가온 그의 입맞춤은 순식간에 내 정신을 저 멀리로 내던져버렸다. 숨을 쉬기 위해 살짝 벌리자마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그의 혀가 내 혀를 감쌌다. 부드럽게, 어떨때는 조금 거칠게. 한순간도 자신에게 벗어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잠깐의 숨을 내쉴때조차 뜨겁게 날 갈구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에게 매달렸다. 서로에게 느끼는 갈증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서로에게 매달렸다. 열정적으로 서로에게 입맞추던 우리는 천천히 입술을 떼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숨이차서 숨을 고르고 있던 날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내 입술을 할짝- 혀로 핥았다. 몽롱하게 취한듯한 기분으로 숨을 고르던 나는 귓가에 선명히 들려오는 선정적인 할짝거리는 소리에 잠시 공황상태에 빠졌다. 곧 내 입술을 달콤한 사탕마냥 핥아대던 그의 혀가 떨어졌다. 아무리 내가 먼저 덤볐다지만, 이렇게 화끈하게 하게 될줄은 몰랐다고. 무지막지하게 얼굴이 화끈거려서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부끄러움도 잠시 조금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힐끔보던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세브릭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 . . 왜요?" "엘." 후회하는건가? 아니면 다른 무슨일이 있는건가? 조금 불안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 꼭 품에 감싸안고 있던 그는 폭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혼전동침은 안되는거겠죠?" 웅얼거리듯 들려오는 소리에 난 나도모르게 킥하고 웃고는 부드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떻게 보면, 당신이 무릎을 꿇어서 우리 서로 입맞춘거잖아요?" 은근한 내 목소리에 그의 몸이 움찔움찔거렸다. 그의 반응을 조금 즐기면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 . 이 다음 단계로 가기위해서 세브릭이 해야할 일은 뭘로 할까요?" "제발 엘 . .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나요?" 지친다는 듯 날 꼭 끌어안는 세브릭 때문에 잠시 생각이 멈췄다. 하지만 곧 싱긋 미소지으며 그의 품에서 조금 벗어나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무섭다는 듯 긴장된 표정으로 날 보았다. "흐음 . ." " . . 엘 . . ?" "내 발에 입 맞추면서 '평생 여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난 당신의 노예입니다.'정도로 할까요?" 내 말에 세브릭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곧 그는 날 완전히 품에서 떼어내더니 내 발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금방이라도 신발을 벗길듯한 그의 기세에 손을 내저으며 재빨리 그에게서 벗어났다. "꺅! 세브릭, 변태!! 뭐하려던거에요?" "다음 단계로 가자구요." 그는 뻔뻔하게도 입가에 가증스런 미소를 걸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유혹적이게 웃었다. "그러니까 . . '평생 여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난 당신의 노예입니다.' . . 이 말이죠?" 내게 위험한 미소를 품고 다가오는 세브릭으로부터 도망가려고했을때, 펄럭하고 내 막사 입구의 천이 흔들렸다.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고 나와 세브릭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빙긋 흥미롭다는듯 미소짓고있는 테일러와, 담담한 표정으로 우리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엉뚱한 곳을 보는 사켄, 조금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쿠오, 그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우리를 빤히 보는 아크산이 서있었다. "내가 방해한건가?" 테일러의 능글맞은 웃음에 난 안도의,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내가 일어남에따라 세브릭도 못마땅하다는 듯 작게 혀를 차며 따라 일어섰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훔쳐내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역시 남자한테 이런 장난은 치면 안된다니까. 위험했어, 빨간불이 들어와서 삐뽀삐뽀 했다고. "알고 계시니 뭐라 더 말해드릴께 없군요." 쌀쌀맞은 세브릭의 말에 테일러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천천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날 보며 매력적인 웃음을짓는는 테일러때문에 내 얼굴은 나도 모르게 붉게 달아올랐다. "미 . . 미남-" "엘!" "아니, 하지만 세브릭 . . 이거 그거 뭐냐 . . 그러니까 이건 어쩔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랄까 . ." 우리 테일러가 달라졌어요- 란 말이야. 그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지자마자 저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거야? "바람피지 말아요." 세브릭이 내 팔을 꽉 붙들고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바람에 난 푹 한숨을 내쉬었다. "구속받기는 싫은데." 내가 툴툴거리며 말하자, 테일러가 조금씩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에 세브릭은 날 살짝 뒤로 밀치고 내 앞을 막아섰다. 오오- 이것은 '내 여자는 내가 지켜!' . . 뭐 그런건가? 기대에 들떠 반짝반짝한 시선으로 세브릭의 등을 보고 있을때, 테일러는 한껏 매력이 넘치는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네게 좋은 소식이 있다, 엘." "엥? 좋은 소식이요?" "그래." 테일러는 다시 한걸음 다가와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 . . . 네?" 잠시 벙찐 표정으로 그를 보자, 그는 빙긋 웃더니 다시 말했다. "네가 세브릭경과 짝짜꿍하는 동안, 세연합이 모두 모여 만장일치로 전쟁을 마치기로 했다. 뭐, 세세한 사항은 나중에 더 얘기를 나눠야 하겠지만 . . " " . . . 끝났 . . 어요?" 전쟁이 끝났다고? 조금 믿기 힘든 . . 믿을 수 없는 그의 말에 다시한번 되묻자 테일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네가 원하던 일이 아니었던 . . . 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 세브릭을 밀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지나쳐 막사 밖으로 빠져나왔다. 순간적으로 뛰었기때문인지 조금 벅찬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 . 제발을 되내이며 고개를 들었다. " . . 하 . . . 하하 . . 하하하하하 . . " "엘? 왜 그러는거죠?!" 내 어깨를 잡으며 다급하게 묻는 세브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브릭이 무슨일이냐는 듯 날 초조한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웃는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브릭, 하늘 봐요." "하늘은 갑자기 왜 . . . 아 . . " 세브릭은 내 말에 뭔소리냐는 듯 날 보다가 내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브릭을 따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하늘로 옮겨갔다. 그들이 믿을 수 없다는듯 작은 감탄성을 내뱉는 것을 들으며 세브릭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세브릭은 멍하게 하늘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날 끌어안았다. "어때요, 세브릭?" " . . .멋 . .지군요 . . ." "그렇죠?" "정말 . . 하늘은 . . 파랬군요." "그렇 . . 죠?" 파란 하늘, 너무나도 맑고 깨끗해서 . . "눈물나게 예쁜 하늘이죠?" 회색 구름이 모두 사라진 맑은 하늘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영문을 모른채 내 등을 토닥이는 세브릭은 모르겠지. 저 하늘이 무슨 의미인지 . . 당신은 모르겠지. 【끝났어요, 엘.】 멈칫, 따뜻한 세브릭의 심장고동을 듣던 난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하지만 . . 너무나도 냉정하게 들리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영롱한 색채로 빛나는 '류'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이 세상의 신(神) 지르오디스가 . . .】 세상이 환하게 변했다. "무슨?!" "무슨 일이지?" 놀라서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오늘이었단 말이에요, 지오. 【오고 있어요.】 나, 오늘 드디어 세브릭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었단 말이에요. 푸른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은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그 빛의 기둥 속에서 지오는 세브릭의 품에 안겨있는 엘을 바라보았다. "엘." 믿을 수 없을정도로 아름다운 울림을 담은 목소리로, 지오는 부드럽게 엘을 불렀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의 고귀하고도 신비로운 외모를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할때, 엘은 꼭 울것만 같은 표정으로 세브릭의 품을 벗어났다. "엘?" 세브릭은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향해 걸어가는 엘을 멍한 목소리로 불렀다. 엘은 뒤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지오를 향해 걸어갔다. "엘!" 잠시 넋을 빼놓고 있던 세브릭이 엘을 향해 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엘은 빛의 기둥 속으로 들어가버린 후였다. 빛의 기둥이 그의 손을 튕겨내자 세브릭은 멈칫하고는 쾅하고 그 기둥을 두 주먹으로 쳤다. 잔잔히 울리는 그 파동을 느꼈는지, 엘이 멈칫 자리에 멈춰 천천히 뒤돌아섰다. 아까 울것만 같은 그녀의 표정은 거짓이었다는 듯,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장난끼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거에요, 모두?" 엘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혀를 쯧쯧차며 싱긋 웃었다. "신의 강림을 보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니 . . 당장 무릎꿇고 지오를 향해 경배하라구요!" 장난스러운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순간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농담인듯 그녀는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뒤에 서있는 '지르오디스'의 존재감은 농담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한명한명 . . 무릎을 꿇는 그들. 흔들리는 눈동자로 엘을 보던 사켄도, 진중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던 맥클라스도. 멍한 얼굴로 있던 쿠오도 . . 심지어 미소가 싹 사라진 테일러조차 지르오디스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찬찬히 그들을 훑어보던 엘은 아직까지도 기둥에 두주먹을대고 꽉 쥐고 있는 세브릭을 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주먹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얇은 막이 그들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세브릭의 손에 닿지는 않았지만 그의 온기를 느끼는듯 잠시 조용히 서로를 느끼는듯 한번 눈을 깜빡인 엘은 샐쭉 웃으며 말했다. "세브릭, 미안해요." " . . 엘?" "나요, 나만 좋자고 당신을 데려가는 일 못하겠어요." " . . 무슨 . . 소리에요?" 세브릭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엘은 잠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세브릭은 여기 있어요." " . . 엘." "여기서 행복하게, 나보다 더 멋진 여자는 없겠지만 . . 나보다는 아니더라도 멋지고 예쁜 여자 만나서 아들딸낳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요." 엘이 한발짝 물러서려는것을 느꼈는지 세브릭이 다시한번 쾅하고 기둥을 쳤다. 잔잔했던 파동이 조금 격하게 요동쳤다. 그에 지오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지만, 엘은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엘이 그에게 살짝 미소짓고는 다시 세브릭을 바라보았다. 세브릭은 이를 악 물며 말했다. "따라간다고 했잖아요. '이곳'을 버리더라도,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말했잖아!" 주먹을 꽉 쥐고 냉정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엘은 기둥에 두손을 대고는 뒷발꿈치를 들었다. 조금씩 간격을 좁히며 엘이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나 좋자고, 당신한테 '이곳'을 버리라고는 못하겠다고. 역시 충동적인 행동은 후회를 낳는다니까요." 눈을 내리깔고 말하는 엘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브릭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씩, 조금씩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감에 다른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의 일은 장난이었던 건가요?" "장난이라니, 장난 아니에요. 난 정말 진심으로 사랑을 듬뿍 담아서 당신에게 키스한거라구요." 엘이 섭섭하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지만, 세브릭은 여전히 타오르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지금 엘의 말은 절 가지고 놀았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가지고 논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큰일날 소리를 하시네?" 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장난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자, 세브릭이 간신히 화를 참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뭐죠?" 세브릭의 말에, 엘은 희극적인 행동을 멈추고는 고개를 떨궜다. 곧 엘은 생각을 정리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금방이라도 입을 맞추려는 듯 그의 입술 가까이로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난 그저 내 방식대로 당신을 사랑했을 뿐이에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브릭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보다가 좀더 고개를 숙였다. 엘도, 세브릭도 눈을 감고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엘이 눈을 감고 그의 입술 가까이에 입맞췄다. 세브릭도 그런 엘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녀의 입술이 있는 곳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간절하게 . . 너무나도 간절하고 애달프게 서로에게 키스하는 그들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못볼것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몇몇은 순진하게도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시켰고, 테일러같은 경우는 키스라면 자신있는데, 라는 망발을 지껄였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세브릭과 떨어지며, 엘은 자신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브릭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이제 . . 안녕이에요, 세브릭." " . . 엘." 그의 모습을 보던 엘이 시선을 돌리며 한사람한사람 유심히 바라보았다. " . . . 아, 사켄 . . 당신이 그럴 줄 몰랐어요. 내가 비밀이라고 했는데, 하루도 안지나서 그걸 세브릭한테 말하다니." "네가 자주하는 말이었던가? 불가항력이었다." 사켄이 툭툭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다가왔다. 세브릭의 옆에선 사켄은 차분한 눈빛으로 엘을 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의 맑은 회색빛 눈동자에 담긴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잊지 않는다." 그의 말에 엘이 멍하게 사켄을 보았다. 사켄은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주며 말을 이었다. "잊지 않고 . . 네가 알려준 이 감정을 품고 평생을 사랑하며 살겠다." " . . . 정말 . . 사켄 . . " 엘은 한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톡하고 서로를 막고 있는 기둥에 이마를 대며 엘이 말했다. "정말 멋진 남자라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조용히 있던 테일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테일러는 엘의 이마가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쳤다. 그 울림을 느꼈는지 엘이 고개를 들자, 테일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진실로 [에르테이샤]로군." "지금까지 그럼 거짓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런건 아니지 . . 다만 . . 네가 고개를 숙인 모습이 안타까웠을뿐이야."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어이없다는 듯 엘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테일러가 조금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떠날듯 싶은데 . . 네가 고개를 숙여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고개를 들어줬으면 했는데. 막상 네가 고개를 드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더군." 테일러의 말에 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던 테일러는 고개를 숙여 가볍게 기둥에 입맞췄다. "지르오디스와, 신의 사자 [에르테이샤]인 엘에게 경외를 표하며-" 씨익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 테일러에게 엘 역시 마주 웃어주었다.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있을 때 순간 웅-하고 기둥이 울렸다. 하브가 금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기둥 속으로 가뿐히 들어와 엘을 보았다. 엘은 놀랍다는 듯 하브를 보다가 뒤에 서있는 지오를 보았다. 지오는 하브를 보다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고, 하브는 지오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혀 경애의 눈빛으로 보더니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보자마자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 하브를 보던 엘은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는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브의 [링]. 내가 못깨줄것 같아요." " . . 역시 인간은 거짓말쟁이야. 약속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툴툴대는 하브를 보던 엘은 그의 고수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며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하브가 날 믿어줬던 것, 무척 기뻤어요. 고마웠어요. 그렇지만 . . 역시 하브의 반려는 내가 못되니까. 과감히 포기하는거에요." "거짓말. 포기는 무슨 포기야." 하브는 달콤한 꿀같은 금안으로 세브릭을 힐끔 노려보고는 엘의 얼굴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 엘이 엥-? 하는 순간에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촉- 입을 맞췄다. 얼떨결에 당해버린 엘은 멍하게 하브를 보았고, 하브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잘가. 이별의 키스 정도는 남자로서 할 수 있는거잖아?" 쿵쿵-하고 기둥이 마구잡이로 울렸다. 엘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때, 사켄이 세브릭을 막는 모습이 보였다. " . . . 이로써, 또 다시 인간과 이종족의 전쟁이 시작되는건가. 전쟁의 발단은 한여인에게의 입맞춤?" 엘은 넋이나간 표정으로 밖으로 날아간 하브를 보며 중얼중얼거렸다. 중얼거리다가 어색하게 웃던 엘은 멀리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지 않는 아크산을 보았다. 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검은 눈동자 가득 복잡한 심정을 담았다. 아크산에게 아무말도 건내지 않고, 엘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 모든 이들을 한번씩 보았다. 세브릭을 아주 오래도록 보던 엘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엘의 시선에 정신을 차린 세브릭이 그녀를 보았다. "엘."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세브릭을 뒤로하고 엘은 뒤돌아서서 지오를 향해 걸어갔다. 뚫어지도록 뜨거운 세브릭의 시선을 느끼면서 엘은 사뿐사뿐 지오에게 다가가 말했다. "와- 지오 . . 진짜진짜 오랜만이에요." 생글생글 웃는 엘의 모습은 가만히 바라보던 지오는 입가에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유심히 살피던 엘이 두손을 허리 뒤로 보내며 뒷짐을 지며 다시 한발자국 그에게 다가갔다. "비겼네요." "뭐가 말인가요, 엘?" "제가 전쟁을 끝내는 거하고, 지오가 비틀림을 해결하는 것하고 . . 거의 비슷했잖아요?" "아 . . 그렇네요." 부드럽게 미소짓는 지오의 모습에 엘은 한호흡을 들이마쉬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지오- 지오, 그렇게 웃지말라니까요. 심장이 터질것 같다고 . .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요?" 엘의 말에 지오는 키득 작게 웃으며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지오의 품에 가만히 안겨들며 엘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기다려요, 절대로! 바람피지 말고, 잊지도 마!!!!!!!!!!" 세브릭의 목소리에 엘은 감았던 눈을 반짝 떴다. 지오의 품에 안겨있던 엘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세브릭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씹어먹을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엘은 겁에질린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반드시 . . 반드시 갈꺼니까! 절대로, 우연을 운명으로 바꿔서라도! 널 찾아낼테니까!" 악을 쓰듯 자신을 뚫어지게 보며 말하는 세브릭의 모습에 엘은 어색한 웃음을 버리고 싱긋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언제 올지알고 당신을 기다리라는거에요? 그것도 바람 안피우고?" "피지마요, 절대로 피지마. 피면!" "피우면?" " . . . . 다시 뺏어버릴꺼에요." 할말이 없었는지 투덜대듯 내뱉는 세브릭의 말을 들으며 엘이 짤랑짤랑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알겠지만, 세브릭. 난 그렇게 인내심이 많은 여자가 아니에요. 빨리 안나타나면 . . 그냥 확 아무 남자나 잡아서 결혼해버릴꺼야." 엘의 농담 아닌 농담에 세브릭이 다시한번 거칠게 기둥을 팡하고 쳤다. 곧 기둥 안에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정도로 환한 빛으로 가득찼다. 포근하고 따스한, 하지만 눈을 뜰 수 없는 밝은 빛에 모두들 눈을 감으며 그 기둥에서 고개를 돌렸다. " . . . 간건 . . 가 . . " 사켄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한두사람이 눈을 떴다. 그리고 방금까지 고귀한 빛을 흩뿌리고 있던 존재가 있는 곳으로 시선이 모였다. "하 . . 정말 . . 가버렸군요." 세브릭이 허무하다는 듯, 엘이 서있던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 . . 정말로 . . 가버렸어요." 마지막으로 본것은,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을듯 노려보던 세브릭의 얼굴. "이렇게 된거 웃는 얼굴이었으면 좋았을텐데." "후회하나요?"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한번 눈을 깜빡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만남은 길게, 이별은 짧게 . . 좋잖아요?" 서로 미련가질만한 시간도 없이, 이렇게 헤어져버리는 것은. 서로 헤어졌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렇게 떨어져버리는 것은. 탁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직도 사라지지않은 지오를 보았다. 내가 겪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 방금까지의 일들이 나의 터무니없는 상상이나 신기루가 아니라는 증거가 내 앞에 있었다. "지오, 왜 안가요? 나랑 여기서 천년만년 살꺼에요?" 샐쭉 웃는 나의 얼굴을 보며, 지오는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않고,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그거, 내가 할말이에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그들을 만나지도 못했을꺼고,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도 몰랐을테니까. "바라는게 있나요?" 조용히 물어오는 지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그의 슬퍼보이는 청록빛 눈동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우연을 운명으로 바꿔서라도 날 찾겠데요." " . . 그를 말하는건가요?" "네." 지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서 한걸음 떨어졌다. 이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보며 한쪽손을 들어올려 흔들었다. "잘가요, 지오." " . . 마지막으로 물을께요. 바라는게 없나요?" 그의 다정하고도 진지한 표정을 보며 나는 나도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와주세요. 그 사람을 . . 세브릭이라는 이름을 지닌, 장밋빛의 남자의 품에 안겨 다시한번 입맞출수 있게 해주세요. 금방이라도 입밖으로 나올듯한 말을 꾹 참아삼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길게 늘어진 검은색 머리카락이 내 고개짓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라지 않아요. 당당하게 내 남자라면- 이라고 말한 남자의 자존심정도는 지켜줘야하지 않겠어요?" 만날꺼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오는 가만히 날 보다가 한쪽 손을 길게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에서 떠나자마자, 미약한 아쉬움이 남았다. 끝 . . 이구나. "엘." "네." "당신의 이름은?" 갑작스런 지오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보았다. 그는 다정한 미소와 함께 묘한 눈빛으로 날 보며 말했다. "당신은 더 이상 '엘'이 아니잖아요." "아 . . 그렇네요. '이곳'은 더 이상 지오가 만들어낸 '그곳'이 아니니까." 잠시 멍해지는 기분에 멀뚱하니 지오를 보다가 그에게 보일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린이에요. '이예린'. 밝을 예(叡)에, 맑을 린(潾)을 써요. 밝고 맑다는 뜻이죠. 나한테 정말 잘어울리는 이름 아니에요?" 한쪽 눈을 찡긋- 윙크하며 말하자, 지오가 살포시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롱하고도 환상적인 빛이 지오를 감쌌다. "[이예린], 한없이 밝고, 누구보다도 맑은 당신에게 [지르오디스]의 이름으로 한가지 약속할께요." 그는 두손을 뻗어 내 머리를 살짝 끌어당겨 내 이마에 입맞추며 혼잣말하듯 작게 말했다. "- 있을꺼에요." "지오? 방금 . . 뭐라고?" 이마에 느껴지는 그의 다정한 온기가 사라졌다. 이리저리 너울거리는 약한 빛만이 그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증거로 남아있다가 흩어졌다. 조용한 골목길. 지오와 처음 만났던 인적이 드문 그 골목길에 지금은 나 혼자 서있었다. 칠이 벗겨진 가로등도 그대로고, 붉은 회색빛의 인도도 그대로다. 바뀐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뀐 것은 나인걸까나." 눈을 감아도 더 이상 내곁에는 아무도 없다. 시리도록 차가운 고요함이 날 감쌌다. "아무도 없네. 정말로-" "누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떠 고개를 돌렸다. "누나, 거기서 뭐해? 집에 안가?" 멀뚱멀뚱 날 보는, 키만 멀대같이 커서는 순박하기 짝이없게 생긴 나의 동생. "누나?" " . . . 있지, 예성아." "뭐야?"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다가오는 동생을 보다가 한쪽 팔을 뻗어 가볍게 예성이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 얼마만에 만나는거지?" " . . 지금 장난해? 아침에 봤다가 지금 보는거잖아. 얼마만이냐면 . . 한 반나절만? 그정도되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한쪽 눈썹을 찌푸리는 동생을 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반나절. 아니, 그렇게 말하면 지오와 처음 만나고, 나의 세계에서는 조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하나. 내 웃음에 동생이 살짝 날 흔들었다. "누나? 뭐야. 진짜 이상하네? 누나, 정신 좀 차려." " . . . 예성아. 누나 있지." "뭐." 조금 퉁명스럽지만 걱정이 담긴 예성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싱긋 웃었다. "엄청나게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일을 경험했어. 궁금하지?" " . . 별로 안궁금한데. . " 꺼려진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걸음 물러서는 예성이의 모습이 흐려졌다. "궁금하다고 해줘." " . . 누나." "있지, 누나 있잖아. 놔두고 왔어. 근데, 가지고 와버렸어." "누나 . . 누나 설마 울어?" 이제 . . 더 이상 묻어둘 필요없잖아. '그곳'에서 만난 모든 인연은 '그곳'에 두고왔다. 하지만 . . "내 마음만은 도저히 '그곳'에 두고 올 수가 없어서 . . 가지고 왔는데." '그곳'에서의 모든 슬픔과 행복과 . . 기쁨과 설레임을, 참을 필요가 없잖아. 그래서 가지고 온건데 . . 갖고 와버린건데. "어떻게 . . " "누나. 왜 울어! 누나, 누나!" "어떻게, 괜찮을 줄 알았는데 . . " 허둥지둥하는 예성이를 보다가 두손에 얼굴을 묻었다. "안괜찮아, 예성아." "누 . . 누나!" "안괜찮아 . . " 「대륙년 781년. 제 1차 대륙전쟁이 발발한 694년으로부터 87년 후, 세상에 이변이 일어난 후 혼돈에 휩싸여있을 때였다. 카슘 제국을 중심으로한 서연합, 아렌타 제국을 중심으로한 동연합, 그리고 이샤링족으로 이루어진 이종족 연합이 전쟁에 지쳐있음에도 멈출 수 없었던 그 시기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동연합에서 출발한 그 여인은 아렌타 제국의 기사 2명과 함께 이종족 연합으로 향했다. 그 여인을 호위했던 인물은 지금까지도 이름이 남아있는 아렌타 제국의 타이칸 후작가를 공작가로 올려놓은 사켄.T경과 제국의 머리로 알려진 세브릭.E경이었다. 당시 공작이 아니었던 사켄경과 세브릭경들과 함께 그 여인은 이종족 연합에서부터 서연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여인은 종전지이자 중립지로 알려진 마지막 도착지 '라트비엔타'[지금은 '아카이에(아렌타·카슘·이샤링·에르테이샤의 앞글자를 딴 이름)'라 불리운다.]에서 세연합을 모아 전쟁을 종결시킨다. 약 90여년을 이어왔던 전쟁을 여인의 몸으로 종결시킨 위대한 여인. 그 여인의 이름은 '엘', [에르테이샤(신과 함께하는 자)]로 더 잘알려진 그 여인이다. 현재의 역사가들은 중 몇은 이렇게 말한다. 그 여인이 전쟁을 종결시켰다고 보기보다는, 그 당시에 전쟁을 멈출 구실이 필요했고 마침 그 여인이 종전을 계기가 되었을 뿐이라고. 확실히 그 당시에 '신의 분노'라 불리우는 세상의 이변에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고, 전쟁 역시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이 단지 계기만 제공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에르테이샤]라 불리우는 그 여인, 엘은 확실히 아렌타 제국의 맥클라스 림 아렌타 황제와 카슘 제국의 테일러 덴 카슘 황제를 종전으로 이끌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다. 그 당시 아렌타 제국의 황태자였던 쿠오 림 아렌타는 전쟁이 끝나고 몇년 후, 어두운 갈색 머리카락의 평민 소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황태자비로 만든다. 테일러 제국의 황제 테일러 덴 카슘에게 가장 사랑받았다고 알려진 후궁, '에르나 비엔'은 검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청초한 여인었다. 하빔 왕국의 제 1왕위 계승자였지만, 왕위를 이어받아 하빔을 왕국에서 제국으로 만든 아크산 자 하빔의 왕후 또한 언뜻보면 검은빛으로 보이는 잿빛 머리카락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사켄 타이칸 공작의 부인 역시 암록색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시에 대륙에서 손꼽히던 남자들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검은빛'과 연관되어있다. 역사가들 중 몇몇이 그 검은빛과 관련하여, 전쟁이 종결된 후 믿기 힘든 신의 강림 이후에 사라진 [에르테이샤], 즉 엘이란 여인을 그들이 잊지 못한 것은 아닌가. 라는 가설을 세웠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조심스레 이 가설에 동의하고 있다. 엘은 분명 이 대륙에서 보기힘든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중 현재까지도 여자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있는 단 한명의 여인을 사랑해 자신의 성조차 바꿔버린 세브릭.E경은 전쟁이 끝나고, 수습을 마친 몇년 후, 사라지기 전에 '엘에게 갑니다.'라고 써놓은 것은 매우 유명한 [에르테이샤]와 관련된 일화 중 하나다. …중략… 그녀는 어디에서 온 여인이었을까? 정말로 전쟁을 멈추기 위해 신이 보낸 사자였을까? 그리고 그녀는 전쟁이 끝난 후 어디로 사라져버린것일까? 많은 물음이 떠오르지만, 필자는 감히 말한다. [에르테이샤]인 엘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다스리는 것은 여자다'를 몸소 보여주는 최고의 예라고. - 쵸나 안도에스 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다.' 中」 "하압!" 우렁찬 기합소리가 울리는 체육관 안. 밝은 조명 아래서 서로에게 죽도를 겨누고 있는 두사람의 모습을 보던 나는 작게 하품을 내뱉었다. "아- 재미없다. 괜히 왔나봐 . . " 지옥 중 하나인 입시지옥을 벗어나 대학생이 되어, 이제야 입시지옥에 들어선 동생녀석을 놀리는 맛에 살고 있었는데. 예성이가 갑자기 같이 검도대회를 보러가자고 했을때 거절했어야했어. 그냥 집에서 멍하니 천장을 보며 심심함에 몸부림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집에 있어야했다고. "재미없어." "누나, 재미없어도 그 재미없다는 말 좀 안하면 안돼?" "안돼, 재미없는데 재미있다고 하는건 죄악이야." 단호한 내 말에 예성이가 입술을 삐죽였다. "어, 우와! 드디어 나온다!!" "응? 누구?" "저기, 저 사람 보여?" "누구누구?" 예성이가 눈을 반짝이며 가르키는 쪽에는 호구로 얼굴을 가린채 단정하게 걸어나오는 남자가 있었다.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 없어서 계속해서 그 남자를 보며, 예성이가 옆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는 한귀로 흘려버렸다. "이상하다 . . 만난적이있나." 정말 이상하다. 시합이 시작되고, 난 유심히 그 남자를 살펴보았다. 죽도를 내뻗는 모습과, 믿기힘들정도로 빠른 움직임. 순식간에 시합을 끝내고 서로에게 인사하자마자 대회장 안은 우렁찬 함성소리로 가득찼다. "봤어? 봤어? 진짜 멋있지? 저 사람이 검도계에서 알아준다는 . . " "예성아, 좀 조용히 해봐." " . . 누나?" 신나서 떠들던 예성이가 의아하다는 듯 날 부른 것을 넘겨들으며 그 남자가 호구를 벗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뒤의 줄을 풀고 호구를 풀어내자 한순간 장밋빛의 긴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순식간에 그 환상은 목덜미를 간신히 덮고있는 젖은 검은빛 머리카락으로 변했지만 . . " . . 말도 안돼." "누나? 뭐가 말도 안돼?" "저 사람 . . 누구야?" 설마 . . 설마, 정말 . . 기대하면 안되지만. 기대해서는 안되지만. 그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이 놀람에 커지는것을 느꼈다. " . . 세빈 . . 임세빈이라고. 누나, 아까부터 말했는데, 안들었은거야, 못들은거야?" "하하 . . 정말? 진짜로?" 예성이의 말을 들으며 힘이빠지는 느낌에 난간에 기대어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는 멍하게 날보더니 호구와 죽도를 내팽겨치고는 입구로 뛰어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안보일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쫓다가 멀뚱히 날 보는 동생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있지, 예성아. 누나 한번만 도와주라." "뭐? 뭘 어떻게 도와줘?" 의심스런 눈빛으로 날 보는 예성이의 허리에 살짝 팔을 두르고 생글생글 웃으며 예성이를 올려다보았다. 예성이는 이게 뭔짓이냐는 듯 날 보았고, 난 쿠당탕- 쿠당거리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두근거리는 고동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빌어먹을!" 뒤에서 조금은 큰 욕소리와 함께 훽하고 내 팔이 예성이의 허리를 벗어났다. 곧 난 한남자의 품에 안겼고, 귓가에 소름끼치도록 낮지만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바람피지말라고, 핀다면 뺏겠다고 . . 분명 경고하지 않았나?" "난 인내심 없는 여자라고, 분명히 얘기하지 않았어요?"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다르지만, 분명히 같다. 내 몸은, 내 심장은, 내 마음은 . .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말 이런 일이 있네요. 진짜 '그곳'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줄은 몰랐어요." "버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당신은 날 버리고 갔지만." 단정하면서도 뼈대있는 말투에 뜨끔하며 천천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 뒤돌았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과 땀에젖은 검은 머리카락.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로 손을 뻗어 그의 뜨거운 뺨에 손을 대었다. 뚫어지리만치 날 보는 그에게 픽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 . . 저 뒤의 남자, 누구죠?" "내 동생이에요." 활짝 웃으며 말하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을 위해 급하게 준비한, 특별이벤트라고나 할까?" " . . 이런 이벤트, 재미없군요." "그래요?" 나머지 한쪽 손까지 그의 뺨에 가져가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곳'에서 '이곳'으로 돌아온 후 난 그날 단하루, 정말 밥도 먹지않고 울었다. 울고 울다, 지쳐 잠들어서도 울었다. 다음날 흐리멍텅해진 시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더 이상 울지말자고 결심한 이유는, 더 이상 그 아름답고 신비한 기억을 눈물로 지워버리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은 '이예린'이에요." 내 말에 그의 눈이 흔들렸다. 조금 흔들리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 . . 내 이름은." 내가 다가오는 것보다도 빨리, 그가 내 입술을 덮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브릭.E. 현재는 임세빈으로써, 당신을 과거에서부터 사랑해왔던 사람이에요." 《[이예린], 한없이 밝고, 누구보다도 맑은 당신에게 [지르오디스]의 이름으로 한가지 약속할께요. '나의 세계'에서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단 한명]이 있을꺼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