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 플루토스 ======================================= [1화] 제1장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저를 사랑해 주실 건가요?” 아타나시아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인 황제 클로드는 제 발치에서 흐느끼는 아타나시아를 무정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제가 제니트처럼 되면 되나요? 그럼 저를 사랑해 주실 건가요? 제니트에게 그렇듯,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고 온기를 담은 눈빛으로 저를 봐주실 건가요? 제가 지금보다 더 노력하면…….” 그녀의 아름다운 이복 자매. 아타나시아의 한 줌 보잘것없던 영광을 가져간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아버지마저 빼앗아간 사랑스러운 제니트.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며 매달릴 정도로 아타나시아는 정신적 한계에 몰려 있었다. “그 손으로, 더 이상 저를 내치시는 일 없이 안아주실 수 있나요?” “내가 죽는 날까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어째서요?” 하지만 클로드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순종적이던 딸이 이렇게 절박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도 한 점의 감흥조차 없어 보였다. “저도 아바마마의 딸이잖아요. 제가 제니트보다 훨씬 오랫동안 곁에 있었잖아요.” 아타나시아로서는 생의 모든 용기를 쥐어짜낸 첫 애원이었고, 마지막 호소였다. 하지만 그녀의 왕, 그녀의 아버지는 끝까지 비정했다. “어리석은 것.” 클로드의 다리를 붙들고 있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강렬한 경멸. 두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보다 잔인했다.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내 딸이라 여긴 적이 없다.” 푸른빛으로 물든 아타나시아의 눈동자에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절망감이 어렸다……. -『사랑스러운 공주님』 제8장 어그러진 운명 中- *** “헉.” 미쳤다. 갑자기 생각난 소설 속 한 장면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딸랑이를 떨어뜨렸다. 재수 없게 왜 하필 예전에 봤던 이 소설이 머릿속에 떠오른 거지? PC방 야간 알바 중에 중학생 한 명이 자리에 두고 가서 슬쩍 읽어봤던 로맨스 소설. <사랑스러운 공주님>이라는 촌스러운 제목과 맞먹는 촌스럽고 유치한 내용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에서 친아버지에게 18살 생일날 살해당하는 쩌리 공주와 지금 내 이름이 같아서 그런가. 아씨, 재수 없게. 훠이훠이, 내 머릿속에서 당장 꺼져 버려. “아우, 뭐야. 칠칠맞게 왜 자꾸 떨어뜨린대.” 바로 그때, 지금까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여자가 딸랑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타박을 던진다. 당연하게도 나는 어이가 없었다. 자꾸는 무슨 자꾸! 내가 뭘 그렇게 많이 떨어뜨렸다고 구박이야. 그리고 원래 애기들은 뭐든 손에서 잘 놓치는 거거든? “시끄럽게 울지 말고 이거 가지고 얌전히 노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닥에 떨어졌던 걸 씻지도 않고 주니? 이 나라 위생 관념이 원래 별로인 건지 아니면 내가 뒷방 공주라고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 같은데……. 흑,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응아.”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딸랑이를 다시 떨어뜨렸다. 아무리 지금 내가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아기라도 해도 이건 좀 아니잖아. 그러자 나쁜 언니가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지금 짜증 나 있는 거 다 티 난다. “왜 그러세요? 가뜩이나 바느질할 게 많아서 바쁜데. 자, 다시 쥐어드릴게요.” “이어.” 이거 싫어! 일단 내가 두 번인가 떨어뜨렸던 거라 지저분하고 무엇보다 내 취향도 아니야! 아무리 지금 내 몸이 애기라지만 정신연령이 몇인데 이런 딸랑이가 재미있을 리 없잖아! “이제 질리셨나?”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카펫 위에 엎드려 놀고 있던 나를 다시 요람 속에 눕혀준 뒤 방을 나섰다. 아마도 시녀장에게 간 게 분명하다. 또 딸랑이 같은 거나 들고 올 거면 아예 그냥 오지 마. “으아응.” 난 얌전히 요람에 누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빌 아래로 하얗고 말랑거리는 통통한 손이 보인다. 하, 몇 번을 보아도 적응 안 된다. 분명 나는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는데……. 다시 눈을 떠보니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이게 말이 돼?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갑자기 애기가 되다니. 게다가 나를 돌봐주는 언니들에게 주워들은 바로는 내가 이 나라의 공주란다. 완전 미쳤군. “공주님!” 아, 이 언니는 맨날 이래! 애기가 있는 방문을 이렇게 벌컥벌컥 열고 들어와서 막 소리 질러도 되는 거야? “시녀장님이 예산 부족이래요. 그냥 이거 가지고 노세요.” 시녀 언니는 내 손에 딸랑이를 강제로 다시 쥐어준 뒤 다시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울어도 안 달래드릴 거예요. 저 진짜 바쁘다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참으로 매몰차기도 했다. 나 애기라고! 지금 애기가 그 말을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으앙, 진짜 너무해! 진짜 공주도 공주 나름인가 보다. 전생에 고아였던 내가 금수저를 입에 문 공주로 태어난 건 좋은데…… 왜 하필 구박데기 공주인 거야. 으앙. 제2장 공주 팔자가 상팔자다 나는 고아였다. 신생아 때 헌 옷에 둘둘 말려 고아원 정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고 같은 시설에 있던 언니가 훗날 말해주었다. 내가 처음 그 사실을 들은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2월이었고, 그 언니는 곧 고아원을 나가야 할 나이인 19살이었다. 나를 버린 엄마는 내게 이름 석 자조차 지어주지 않아서 고아원의 원장님이 전화번호부를 뒤져 ‘이지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고아원에는 나 같은 아이들이 수두룩했고, 처음 자의식을 형성할 때부터 내 인생에 존재하지도 않던 엄마의 부재를 느끼기에는 이미 때가 늦은 감이 있었다. 고아원에서는 8살짜리 아이도 아이가 아니다. 나는 좁아터진 고아원에서 나와 똑같은 사정을 가진 아이들과 매일 박 터지는 밥그릇 싸움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도 내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 언니와 같은 나이가 되어 고아원을 나갈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드디어 벗어난다는 해방감에 철없이도 약간 들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 생각보다도 더 팍팍한 것이었다. 돈도 빽도 학벌도 없는 나 같은 고아 계집애에겐 더더욱. 고아원을 나간 뒤부터 먹고살기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손이 부르트도록 음식점에서 설거지를 하기도 했고, 담배 냄새 쩌는 PC방에서 성희롱을 참아가며 야간 알바를 하기도 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편의점 알바도 하고 일사병이 날 정도로 뜨거운 땡볕 아래의 세차장에서 번쩍이는 차를 닦으며 내 처지를 비관하기도 했다.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곰팡내 나는 단칸방 월세를 다달이 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한눈팔 새조차 없이 죽어라 일만 했다. 와, 정말 꿈도 희망도 없구나. 한겨울, 난방조차 하지 못해 꽁꽁 얼어붙은 방 안에서 덜덜 떨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바로 다음 날 새벽부터도 알바가 있는데 추워서 잠조차 오지 않았다. 차라리 여름이 낫지.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동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이렇게 제대로 잠들지 못한 지도 벌써 며칠째다. 결국 나는 식당의 주인아주머니에게 부탁해 하루 전에 받아두었던 수면제에 손을 댔다.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하는 수마가 현실에서의 모든 근심과 걱정조차 잊게 해줄 수 있을 것처럼 다디달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공주가 되어 있었다. *** “아으바.” 오늘도 난 요람에서 옹알이를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싸고 멍 때리기만 했더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가끔 헷갈렸다. “우리 예쁜 아타나시아 공주님.”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내 옆에 나를 구박하는 시녀 언니들만 있는 건 아니란 사실이었다. 나는 요람을 흔들어주는 여자를 향해 방실 웃어주었다. 그녀는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젊은 언니였다. 나이는 대충 이십 대 초반쯤 되어 보였는데 이번 달부터는 그녀가 내 전담 시녀인 것 같았다. 나는 공주인데 왜 유모가 없고 시녀만 있냐고? 크흑. 그것도 바로 내가 구박데기 공주라 그렇다. “어서 건강하게 쑥쑥 크셔야죠.” 처음 얼굴을 보았을 때 그만 멍하니 침을 흘리고 말았을 정도로 그녀는 예뻤다. 청순과 청초의 뺨을 골백번 후려치고도 남을 그녀의 이름은 릴리안이었다. 어쩜 한 떨기 백합 같은 외모와 딱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하지! 그래서 난 그녀를 내 마음대로 릴리라고 줄여서 부르고(속으로) 있었다. 이런 바람 불면 휙 날아갈 듯 가녀려 보이는 미인이 내 시녀라니. 하, 나 이 정도면 출세한 거 아닌가. “우아, 바아.” 그런데 나를 보던 릴리의 얼굴에 서서히 잔잔한 슬픔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런, 예쁜 언니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내 가슴이 다 미어지는 것 같다. 릴리는 나를 볼 때마다 무언가를 생각하며 곧잘 이런 얼굴을 하곤 했다. 언니, 그런 얼굴 하지 마. 언니는 웃을 때가 제일 예쁘단 말이야. “어머. 공주님, 이제 주무실 시간이네요.” 하지만 기쁨조로 재롱을 부리던 것도 잠시뿐, 문득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린 릴리의 말에 난 거부의 뜻으로 몸부림치고 말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자야 한다니! 몸이 애기라 그런지 사실 하루 종일 자도 또 졸리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나랑 좀 더 놀아줘. 여기 너무 심심해. “안 돼요. 맘마도 잘 드시고 또 코 주무셔야 쑥쑥 크시죠.” 하지만 내 반항은 소용없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다독임을 받으며 옹알이를 하고 있으려니 릴리가 그런 나를 보며 또 곱게 웃었다. “릴리안!” 그때, 방 밖에서 릴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언니는 매번 저러더라. 난 작고 연약한 아기라서 쉽게 깜짝깜짝 놀란단 말이야! 릴리도 문 밖에 있는 사람의 몰상식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놀랐을까 봐 가슴 언저리를 부드럽게 다독여 주는 손길에 기분이 좋았다. “공주님, 잠시만 밖에 다녀올게요.” 나는 잘 다녀오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래 봤자 그녀의 눈에는 의미 없는 버둥거림과 똑같아 보였겠지만. 흑. 혼자가 된 나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하릴없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섬세한 문양이 그려진 천장이 변함없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더 옆으로 눈을 돌리자 요람 너머로 번쩍번쩍거리는 가구들과 장식품들이 시야를 찔렀다. 볼 때마다 궁금한 건데 저거 진짜 금일까? 나중에 이빨 나면 뜯어서 깨물어 봐야지. 물론 그때까지 살아 있을 때의 얘기지만. ======================================= [2화] “으야.” 아빠라고 하는 인간의 소문을 다시금 떠올리자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시녀 언니들에게서 새어 나온 정보들뿐이었지만 그놈은 진짜 사이코였다. 매일 내 방을 청소하러 들어오는 언니들이 속닥거리는 이야기만 들어도 각이 나왔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이름은 루비궁으로, 황제의 후궁들이 사는 궁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 황제의 하렘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황제는 루비궁에 있던 사람들을 어째서인지 하루아침에 모조리 죽여 버렸다. 아직까지 이유는 불명이었으나 무언가에 크게 속이 뒤틀린 황제가 직접 제 손으로 그들 모두를 도륙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내 어머니인 다이아나는 황궁 연회 때 초대받았던 무희로 어쩌다 황제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었으나 그 후 그에게 잊힌 채로 나를 출산했다고 한다. 다이아나는 평민조차 되지 못하는 비천한 출신이었던지라 황제의 정식 후궁조차 되지 못했다. 그리고 갓난쟁이인 나만 남겨두고 죽어버렸다. 그 후 황제는 제 유일한 친자인 나를 줄곧 이렇게 방치해 두고 있고 말이다. 그래서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가 아니라 팔 할이 루비궁에 있는 시녀 언니들이었다. 으음, 이렇게 말하고 보니 완전 콩가루 집안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이 몹쓸 황제 자식은 처자식도 내팽개치고 도대체 뭐 하는 거래?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런 잔인한 학살이 일어났던 성에서 살고 있었다. 으으. 처음 그 얘기를 듣고 난 밤마다 악몽을 꾸어야 했다. 나 같은 아기를 이런 데 짱박아 두다니 악취미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성에 얽힌 괴담보다도 얼굴조차 모르는 황제가 더 무서웠다. 이 궁에 있던 사람들을 죄다 죽인 것처럼 갑자기 또 회까닥해서 ‘너 끔살!’ 하고 나도 죽이러 오는 거 아니야? 기껏 공주가 되었다 했더니 내 팔자도 참 박복하다. “응아으.” 아, 참. 그러고 보니 현재 내 이름이 뭔지 말했던가. 지난 생에서는 고아원 원장님이 전화번호부에서 대충 지어주었었지만 이번 생의 이름은 내 생모가 직접 지어준 것이란다. 그 이름하야 바로 아타나시아(Athanasia). 참으로 거창하게도 내 이름은 ‘불멸’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다. 릴리가 어젯밤에 말해줘서 알게 되었는데 나 같은 뒷방 공주에게는 참으로 사치스러운 이름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로맨스 소설 <사랑스러운 공주님>에 나오는 비운의 공주와 동일한 이름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도 내 어머니라는 사람이 황제의 손에서 만수무강하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 아닐까 싶은데……. 크흑. 그런데 소설 속의 아타나시아 공주는 18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왠지 찜찜하다. 게다가 하필 친아버지인 황제의 손에 죽는 공주라니!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 갓난쟁이 몸이 된 뒤로 왜 자꾸만 그 소설이 생각나는 거야. “으으.” 그래서 난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부터 혹여나 내 아빠라고 하는 인간이 날 찾아올까 봐 문을 힐끔거리며 두려움에 떨곤 했다. 벌컥!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려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방 안에 들어선 것은 황제가 아닌 시녀 언니들이었다. 그녀들은 요람에 있는 나를 보며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아직 안 자잖아.” “우리가 꼭 여기 있어야 해? 어차피 혼자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릴리안이 유난인 거 알잖아. 정말 귀찮다니까.” 아이고, 또 시작이다. 나만 보면 수군거리면서 구박하는 거. 어차피 이 루비궁에 짱박혀 있는 다 똑같은 처지면서 그러지 맙시다, 언니들. “그냥 쉬다 가는 셈 치지 뭐.” “갑자기 빽빽 우는 거 아니야?” “빨리 잠들게 요람 좀 흔들어줘 봐.”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울어재끼는 줄 알겠네. 나처럼 안 우는 애기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릴리도 내가 옹알이만 하고 잘 울지 않는다고 걱정하는데 이 언니들은 날 볼 때마다 저런 소리들이었다. 평소 속닥거리는 것으로 봐서 황제가 단 한 번도 찾지 않는 나를 뒷방 공주라고 무시하는 것이 뻔했다. 그래서 서럽냐고? 천만에! 난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쩌리 공주로 지내는 게 목표였다. 이 방에 있는 금 좀 챙겨서 튀어도 한평생 놀고먹겠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잊어주라. “폐하의 관심도 못 받는 공주인데 그래도 공주라고 팔자 좋네.” 게다가 시녀 언니들이 지금 투덜거리는 말이 맞았다. 비록 내가 지금은 분유만 먹고 있지만 이래 봬도 황궁이라고 삼시 세 끼 밥도 꼬박꼬박 나오겠다, 잠자리도 안락하고 포근하겠다, 사방이 금붙이 천지겠다. 이대로 황제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어쨌든 밥 굶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팔자가 박복하다고 하나 이런 것을 보면 공주 팔자가 상팔자가 아닐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대로 쑥쑥 자라서 꼬꼬마를 벗어난다면, 적당한 기회를 봐서 금 좀 긁어다가 그대로 줄행랑 쳐서 떵떵거리며 살 테다. 그러니까 일단은 이 요람 신세에서 벗어나자. 그러려면 릴리가 말하는 것처럼 맘마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중요했다. 영차영차. 나는 다리 근력을 기르기 위해 열심히 자리에 누워 버둥거렸다. “그래 봤자 바람 앞의 등불이지. 손짓 한 번이면 찍 소리 못하고 바로 죽는 건데.” “맞아. 우리도 어쩌다 이런 곳으로 배정받아서……. 그 얘기 들었어? 밤마다 부엌에 귀신 나온다는 얘기.” “소름 끼쳐 죽겠어. 우리도 언제 그 신세가 될지 모르는 거잖아.” 수군수군. 시녀 언니들은 연신 나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나도 그녀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부터도 사람들이 대거 죽어나갔던 이런 궁에서 살고 싶지 않은데 당연하지. 도주 비용만 어느 정도 모으면 바로 탈출하고 말 테다! 나는 다시 한 번 굳세게 다짐했다. *** “으에헤.” 지금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내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헤벌쭉 웃자 릴리가 그런 나를 향해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좋으세요?” “오아!” 어화둥둥 내 금. 예쁘기도 하지. 난 금색의 동그란 공을 보고 신이 나서 릴리에게 애교를 부렸다. 꺄르르 웃으며 부비부비 뺨을 비비자 릴리도 기분이 좋은지 내 뺨에 뽀뽀를 했다. 시간이 더 흘러 나는 이제 카펫 위를 별로 힘 들이지 않고 기어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난 방 안 곳곳에 있는 금과 보석들에 대한 탐욕으로 눈을 번뜩였다. 황궁이 괜히 황궁이 아닌 듯 사방팔방에 어지간히 금칠을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벽에도 보석들이 박혀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런데 이거 진짜 금이랑 보석 맞겠지? 아무튼, 내가 자꾸만 버둥거리며 금으로 도색된 장식들과 보석에 손을 뻗자 릴리는 내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 후 그녀는 금으로 된 딸랑이나 모빌 같은 것을 가져와 내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원래 후궁들이 살던 곳이라 그런지 궁전 자체는 휘황찬란했지만 예산 부족을 이유로 내 소유의 물건은 장난감조차 잘 생기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질리시면 다른 걸로 가져다 드릴게요.” 원래도 예쁘던 릴리의 얼굴에 후광이 비쳐 보였다. 언니는 내 노다지야! “갸아. 어우아.” 나는 카펫 위에 엎드려 릴리가 가져다준 공을 가지고 놀았다. 어차피 아직 걸음마도 시작하지 못한 몸으로 다른 걸 할 수는 없었으니 릴리도 기껏해야 바닥에서 굴리고 놀라고 준 것이 분명했다. 이것도 잘 챙겼다가 나중에 가지고 나가야지. 에헤헤. 앗, 침. 루비궁에서의 생활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좀 조마조마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인 것을 보면 황제는 정말 날 잊었을 확률이 커 보였다. 혹여나 황제가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오지는 않을까 긴장하던 릴리와 시녀 언니들도 이제는 안심한 기색이 완연했다. 물론 급탕실과 부엌 곳곳에 등장한다는 귀신 이야기는 아직도 그녀들 사이에 성행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난 밥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잠도 잘 자서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가는 중이었다. 릴리의 보살핌도 살뜰해서 나는 큰 병치레 한 번 하는 법 없이 건강한 아가로 크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빨리 걸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래야 도주 자금을 빨리 모을 수 있을 테니까. 기분 탓인지 내 방에 있는 장식품들이 하나씩 줄어가는 느낌이라 어쩐지 뒷목이 싸했다. 내가 기어 다니다가 실수로 떨어뜨릴까 봐 릴리가 치우는 건가. 으앙. 안 돼, 내 금. 내 금 내놔라! “으아앙!” 난 얌전히 공을 가지고 놀다 말고 우렁찬 울음소리로 릴리를 불렀다. 엉덩이가 축축했다. 흐흑. 부끄럽지만 기저귀 갈아야지. *** “탑의 마법사는 현존하는 마법사들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답니다.” 나는 릴리의 품에 안겨서 동화책을 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말이 동화책이었지, 거의 이 나라의 건국 이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줄여 거기에 삽화나 몇 개 수록한 역사서나 마찬가지였다. 나야 이곳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으니 얌전히 듣고 있지만 보통 이 나이의 아가가 이런 어려운 내용을 이해할 리 없었다. 으음. 아마도 릴리는 아기들의 조기교육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릴리가 읽어주는 동화책의 내용은 흥미진진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중에서도 내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마법사의 존재! 이 세계에는 마법사가 있다고 한다! 와, 왠지 그냥 평범한 외국이 아닌 것 같긴 했는데 정말 다른 세계라니! “이어!” 나는 릴리가 책장을 넘길 때 놓치지 않고 삽화 하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가시덩굴이 칭칭 휘감고 있는 시꺼먼 탑이 그려져 있었다. “탑의 마법사가 마음먹기에 따라 제국 하나쯤 지도에서 지우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해요.” 나는 처음 접하는 마법의 존재에 흥분했다. 나도 보고 싶어! 마법 보고 싶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심장을 얼리고 있다고 하죠.” 이제야 이 재미없는 역사서가 동화책 같아지기 시작했다. 릴리가 말해주는 검은 탑의 마법사 이야기는 엄청나게 흥미로웠다. “이성이 아닌 감성이, 냉정이 아닌 열정이 마음을 잠식하게 되면 그 힘은 대의가 아닌 사사로운 일을 위해 쓰일 수 있으니까요.” “우아.” “오벨리아의 현 왕조가 폐허 위에 다시 세워진 이유도 탑의 마법사가 옛 오벨리아를 파멸시켰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어요.” 건국 설화나 구전되는 전설들이 으레 그렇듯 탑의 마법사 이야기 역시 과장되거나 왜곡되었을 확률이 컸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건 재미있는 거였다. 나중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꼭 내 두 눈으로 직접 마법을 볼 테야! 나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릴리가 읽어주는 다른 이야기들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문득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이어 우아?” 이건 뭐야? ======================================= [3화] 나는 책의 삽화를 보고 손가락질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성검을 옥좌에 꽂고 서 있는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어머나. 이분이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알긴 내가 뭘 어떻게 알아. “네, 그래요. 공주님의 아버님이세요.” 앗, 뭐라고? 부인도 딸도 내팽개치고 지금 뭐 하는지 모를 그 망할 놈? “아으오! 으에이.” 나쁜 놈! 쓰레기! 나는 동화책 속의 남자를 향해 마구 욕을 했다. “어머. 우리 공주님 영특하기도 하시지.” 내가 책 위의 남자를 손가락으로 격렬히 삿대질하자 릴리가 기특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책에 써진 글자를 읽지는 못 했지만 릴리가 말해준 이야기를 종합해 보았을 때 그는 내 아빠이자 오벨리아 제국의 현 황제가 분명했다. 동화책에는 폭정을 휘두르던 선황제와 악마와 계약한 전 황태자를 처단하고 대신 옥좌에 앉은 그를 영웅이라도 된 양 그려내고 있었다. 자기 하렘에 있던 여자들과 궁인들까지 깡그리 잡아 죽인데다 제 딸까지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이런 놈이 성군으로 기록돼 있다니. 역시 역사서란 믿을 게 못 된다. 아무리 동화책이라고 해도 그렇지! 나는 홀로 분노해서 씩씩거렸다. “그러고 보니 공주님께 폐하의 존함을 말씀드린 적이 없네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릴리가 읊조리는 말에 내 표정은 절로 썩어 들어갔다. “여기 그림을 다시 한 번 보시겠어요?” 하나도 안 궁금해! 그딴 나쁜 놈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하지만 나는 뒤이어 내 귓가에 속삭여지는 이름에 곧 쩡하니 얼어붙고 말았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아버님이신 클로드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황제 폐하시랍니다.” 그 직후 내 머릿속은 ‘????????’의 향연이었다. 응? 언니 지금 뭐라고 했어? 내 의문 어린 눈길을 느꼈는지 릴리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시 생긋 웃어 보였다. “클로드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황제 폐하세요.” 아니……. 진짜 재수 없게 왜 그 소설 속 황제랑 이름이 똑같은 거야. “그리고 공주님께서는 아타나시아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공주님이시죠.” 으아? 기분 나쁘게 내 풀네임까지 그 소설 속 공주랑 똑같네? 생전에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본 것도, 그만큼이나 더럽게 긴 이름을 본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본래 황족들의 이름은 대물림되지 않지만 폐하께서는 공주님을 처음 보신 날 미들네임을 주셨어요. 그러니 공주님께서는 분명 폐하께 사랑받고 계시는 거예요.” 와, 별게 다 똑같네. 진짜 찜찜하게…….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왜 뒷목이 서늘한 걸까? 하하……. 제3장 사랑스러운 공주님? 어디 보자. 그 소설 내용이 어떻게 되더라. <사랑스러운 공주님>은 인터넷 웹 연재로 폭풍 같은 인기를 끌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물론 내가 일하던 PC방에 책을 두고 갔던 중학생 여자애한테 들은 이야기다. 밤늦은 시간 심심함에 몰래 그 책을 읽어봤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였다. 제목 그대로 그 소설책에는 사랑스러운 공주님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오벨리아 제국의 둘째 공주인 제니트. 이야기에는 두 명의 공주가 등장하지만 다른 한 명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조연에 불과했기 때문에 여주인공은 명실상부 제니트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갈색 머리카락에 황족 고유의 보석안을 지닌 매우 아름다운 공주님이었다. 제니트는 외모뿐 아니라 마음씨까지도 천사처럼 고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오벨리아의 제국민들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내로라 하는 멋진 남자들이 모두 제니트에게 반해 그녀에게 열렬한 러브콜을 보냈다. 그리고 제니트를 아끼는 사람에는 그녀의 아버지인 황제 클로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지 않냐고? 그건 다 클로드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놈은 제 아버지인 선황과 배다른 형제이던 황태자를 죽이고 직접 제위에 오른,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다. 선황이 워낙 끔찍한 폭정을 휘둘렀기 때문에 클로드는 오히려 제국을 구한 성자로 추앙받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놈이 정말 착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이놈은 제 후궁전에 있던 사람들을 깡그리 잡아 죽이지 않았던가. 아무튼 그런 냉혈한을 녹인 대단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랑스러운 공주님 제니트였던 것이다. 사실 클로드가 제니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녀가 14살이 되던 때였다. 그때까지 제니트는 제국의 삼대 기둥 중 하나인 알피어스 공작가에 의탁하여 지냈다. 후작 가문의 딸이었던 제니트의 어머니는 본래 클로드의 약혼녀였는데, 어떤 사정으로 인해 황궁 밖으로 쫓겨난 채로 제니트를 낳다가 죽게 되었다. 이미 시집가 백작 부인이 되어 있던 제니트 모친의 언니, 즉 제니트의 이모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서 그녀는 제니트의 출생을 숨긴 채로 평소 신의가 있던 알피어스 공작가에 맡기기로 결정한다. 똘끼가 무르익어 한창 포악을 떨어대던 클로드에게서 어린 조카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클로드는 제니트의 존재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물론 이 새파란 피를 가진 남자가 처음부터 제니트에게 애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의 여주인공 제니트가 어떤 사람이던가. 여주인공 버프를 잔뜩 받아 비현실적인 사랑스러움을 지닌 공주님 아니던가. 얼음덩어리처럼 꽁꽁 얼어 한기를 폴폴 날리던 클로드도 결국은 제니트에게 속수무책으로 함락당하고 만다. 그 후 제니트는 든든한 빽인 아버지도, 그리고 알피어스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정이 들었던 제국 최고의 신랑감인 공자 이제키엘도 얻어 평생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 “애우엄어.” 재수 없어. 나는 가만히 소설 내용을 생각하다 말고 담요를 물어뜯었다. 보드라운 천 조각이 내 유치 사이에서 잘근잘근 씹혔다. 괜한 질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제니트가 왠지 재수 없었다. 세상의 쓴맛을 모르는 때 묻지 않은 천사표 여주인공이라 그런가. 태어났을 때부터 주위에서 사랑만 받으며 자라온 이 아가씨가 마침내 아버지인 황제 클로드의 마음마저 얻었을 때에는 분통이 터져 나도 모르게 읽던 책을 카운터에 내던져 버렸다. 와, 클로드나 제니트나 진짜 나쁜 연놈들이네. <사랑스러운 공주님>을 다 읽고 난 후의 내 감상이었다. 하지만 욕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여주인공 제니트가 만인에게 사랑받아 꽃길을 걷는 동안 비참하게 소외당해야 했던 첫째 공주 아타나시아를 생각하면 말이다. 창백한 백금발과 보석안을 지닌 제니트의 동갑내기 자매 공주 아타나시아. 천한 무희에게서 태어난 아타나시아는 제니트와 마찬가지로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삶의 궤도를 타게 된다. 제니트와 달리 아타나시아의 존재는 출생 직후 곧장 클로드에게 알려졌지만 그는 자신의 딸을 후궁전에 처박아놓고 방치했다. 그래서 아타나시아는 자신을 무시하는 루비궁의 시녀들에게 눈칫밥을 먹어가며 개복치 같은 심약한 공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녀가 처음 아버지를 만난 것은 9살의 생일날. 딸의 생일을 기억할 리가 만무한 클로드는 이웃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맞아 화려한 연회를 열고 있었다. 아타나시아는 그 빛과 소리에 이끌려 늦은 저녁 시간 루비궁을 나오게 되고, 우연히 길을 잘못 들어 당도하게 된 황제궁의 후원에서 클로드를 마주친다. 물론 클로드는 어린 아타나시아를 무심한 눈길로 훑어본 뒤 그대로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정에 굶주려 있던 아타나시아에게는 가히 운명적인 만남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제니트가 나타나기 전까지도 그녀는 이미 냉정한 아버지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타나시아는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래서 아타나시아는 재예를 겸비한 우아한 공주님으로 성장하지만 14살 그녀의 데뷔당트 날 알피어스 공작의 비호를 받으며 등장한 제니트로 인해 그녀의 희망은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만다. 태양처럼 밝고 화사한 제니트와 상반되게도, 아타나시아는 어딘가 음울하고 흐릿한 분위기를 풍기는 안개 같은 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아타나시아보다 제니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제니트가 천사표의 어여쁜 공주님으로 강조되어서 그렇지 아타나시아도 소심하기는 하나 굉장히 선한 공주였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뒤늦게 나타나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제니트를 시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가 처음 황궁에 들어와 적응하지 못하고 클로드를 서먹하게 여길 때 그것을 안타깝게 여겨 궁에서의 생활을 도와주기까지 한 것이 바로 이 아타나시아 공주였다. 아이고. 참으로 바보 같은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먹는 거지, 뭘 또 자기 라이벌인 공주를 도와주고 있어. 아무튼, 그 정도로 순해 빠졌던 아타나시아는 결국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아버지의 사랑마저 제니트에게 빼앗기게 된다. 사실 클로드는 단 한 번도 아타나시아를 딸로서 사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빼앗겼다고 하면 틀린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불쌍한 공주는 아버지인 클로드의 손에 죽게 되고 말았다. 성대한 연회 날, 독배를 들고 쓰러진 제니트의 암살 사주자로 그녀가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누명이었다. 범인은 제니트의 이모인 백작 부인으로, 눈엣가시 같았던 아타나시아를 제거하고 자신의 조카인 제니트를 제1 황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아타나시아는 클로드의 관심 한 자락 받지 못하던 보잘것없는 공주일 뿐이었는데. 게다가 결정적으로 아타나시아는 그런 짓을 할 깜냥조차 되지 못했다. 바보 같은 이 아가씨는 오히려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이 대신 독이 든 잔을 받아서라도 제니트를 구하려고 했을 것이다. 만약 제니트가 잘못된다면 클로드가 슬퍼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아는 이토록이나 멍청하고 불쌍한 공주였다. 백작 부인은 기껏 해야 아타나시아를 유폐시키거나 제1 공주에서 끌어내리는 것 정도의 결과를 바랐다. 하지만 클로드가 어떤 사람이던가. 그는 제니트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안 아직 범인으로 확정되지도 않은 아타나시아를 죽여 버렸다. 18살의 생일날. 그를 처음 만났던 9살의 그때로부터 딱 9년이 더 지난 맑은 날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결국 나중에는 그 모든 것이 백작 부인의 흉계였다고 밝혀지지만 아타나시아는 이미 억울하게 죽은 뒤였다. 게다가 애초에 제니트 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던 클로드는 자신의 죽은 첫째 딸에 대해 일말의 죄악감도 후회도 갖지 않았다. 천사표 주인공인 제니트는 물론 아타나시아를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지만 연인인 이제키엘의 품에서 위로받고는 곧바로 그 일을 털어버렸다. ======================================= [4화] 그러고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로 이야기가 끝나니 내가 분통이 터지겠니, 안 터지겠니. “아오.” 생각하니 또 열 받네. 도대체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개죽음당하는 캐릭터를 조연으로 넣은 건지 모르겠다. 그 소설의 열렬한 팬인 듯하던 중학생 애가 흥분해서 주장했던 바에 의하면 그런 게 다 여주인공 제니트만 온리 러브하는 폭군 아빠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던데. 그러면서 공주 육아물의 묘미라느니 여자들의 로망을 싹 다 집결해 놓은 완벽한 소설이라느니 뭐라고 더 떠들어 댔지만 워낙 말 같지 않아서 그냥 흘려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타나시아를 좋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클로드나 제니트보다는 나았다. 물론 나 역시도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든 일단 내가 우선적으로 행복하면 된다는 주의이지만 이건 별개다. 왜냐고? 바로 내가 지금 그 소설 속의 아타나시아가 된 것 같으니까 그렇지! “으아앙!” 갑자기 또 서러워져서 나는 우렁차게 울었다. 계속해서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현실도피에도 한계가 있었다. 일단 그 빌어먹을 소설이랑 비슷한 게 너무 많아!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주위 상황까지 전부 똑같을 수 있는 거야? 이 찜찜한 기시감을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봐도 무리였다. “공주님!” 내 구슬픈 울음소리에 릴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 공주님이 왜 우실까.” 나는 내 몸을 안아 드는 익숙한 품에 얼굴을 묻고 계속해서 엉엉 울었다. 가뜩이나 요즘 감정 기복이 들쭉날쭉한데 릴리의 얼굴을 보자 더 서러워졌다. “혹시 배가 고프신가요?” 릴리안 요르크.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 아타나시아 공주의 결백을 끝까지 믿고 주장했던 유일한 사람. 그 대가로 릴리안은 아타나시아와 함께 클로드에게 죽임을 당한다. 릴리안은 꽤나 권위 있는 백작 가문의 차녀로 원래대로라면 천한 무희 소생에 불과한 아타나시아의 시녀가 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원하여 루비궁에 와 아타나시아에게 유모 같은 사람이 되어주었다. 그 이유는 아타나시아의 죽은 친모인 다이아나 때문이었다. 다이아나는 비록 모두가 천하다 하는 무희였으나 달빛 같은 백금발과 신비로운 자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황궁 연회 때 맨 앞에서 독무를 출 정도로 실력 또한 출중했다. 답답한 황궁 생활에 지쳐 가던 릴리안은 연회의 밤 다이아나를 보고 새처럼 자유로운 그녀를 부러워하며 동경한다. 하지만 결국 다이아나는 클로드의 하룻밤 상대가 되어 루비궁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만다. “으아아아아앙!” 클로드 이 개자식아, 엉엉. 내가 더욱 큰 소리로 오열하자 릴리안은 당황한 기색이 완연했다. “어머. 공주님, 왜 그러세요?” 하지만 내가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지금 내가 있는 이 세계가 그 빌어먹을 소설 속 세계가 맞는 것 같은데! 릴리안과 다이아나의 우정은 소설에서도 아주아주 짧게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난 거기에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어릴 때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간 동급생의 집에서 봤던 빨간 머리 앤과 다이애나처럼 질기고도 아름다운 여자들의 우정! 그래, 사실 나 친구 없었다. 그래서 줄곧 이런 멋진 우정을 동경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결국 릴리, 이 언니도 아타나시아 편을 들다가 죽어버렸다는 거잖아. 으아앙! “기저귀 갈 때가 되었나.” 앗, 잠깐! 나 쉬야 안 했어! “맘마도 아니고 기저귀도 아닌데…….” 으앙, 내 순결! 강제로 벗겨진 나는 이제 온몸을 버둥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물론 이 몸이 되고 나서부터 이런 상황을 겪은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심적 타격감이 적지 않단 말이야! “요즘 들어 부쩍 보채시네.” 릴리는 내가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그녀 못지않게 답답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해! 진짜 꿈도 희망도 없어! 환생이든 빙의든 내가 공주가 된 것부터가 난센스이긴 하지만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오, 릴리안. 당신의 이름은 왜 릴리안인가요. 다이아나는 왜 다이아나고 클로드는 왜 클로드인 거지? 그리고 나는 왜 아타나시아인 거야, 왜! 나 그냥 제니트 할래. 아타나시아 안 할래! “괜찮아요, 공주님. 제가 여기 있잖아요.” 나를 달래는 릴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후로도 한동안 더 울어댔다. 역시 언제라도 이 망할 궁을 떠날 수 있게 빨리 자라는 수밖에 없겠다. 시간아, 제발 좀 빨리 가라! 제4장 아티, 5살입니다. 죽이지 말아주세요! 맑고 화창한 봄날이었다.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루비궁의 정원은 그럼에도 자연 그대로 자라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나는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를 도도도 달려 막 복도를 지나가던 시녀 언니의 치맛자락을 살짝 붙들었다. “언니, 언니.” 오늘은 일주일간 요리해 먹을 각종 채소와 육류, 어패류 등의 재료들이 성에 들어오는 날이었으니 그 확인을 끝마치고 다른 일을 하러 가는 중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내 부름에 시녀 언니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최대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티, 쪼꼬 주세요.” 난 다섯 살이다. 다섯 살이야. 그러니까 안 창피하다. 안 부끄럽다…… 는 개뿔. 으흑, 쪽팔려. “귀여운 공주님, 초콜릿 드릴까요?” “응! 쪼꼬 조아. 마니 마니 주세요.” 하지만 시녀 언니는 내 귀여움에 넘어간 듯 뺨을 상기시키며 앞치마의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부엌에서 일하는 한나였는데, 나는 그녀가 내게 줄 초콜릿이나 캔디 같은 것을 항상 가지고 다닌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초콜릿이 좋으세요?” “아티 쪼꼬 조아! 이마안큼 조아!” 나는 팔을 들고 위아래로 크게 원을 그렸다. 좀 창피하긴 하지만 애교 한 번으로 간식을 얻어먹을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한나도 조아!” “어머.” 기브 미! 기브 미 어 초콜릿! “한나, 지금 뭐 하는 거니?” 하지만 시녀 언니에게 초콜릿을 얻어먹으려던 내 원대한 계획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금세 방해받고 말았다. “세스!” “릴리안 님의 말씀 못 들었어? 공주님께 마음대로 간식을 드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 복도 끝에서 나타난 시녀 언니는 ‘차도녀’라는 명찰을 이마에 써 붙인 것 같은 차가운 인상의 늘씬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세스라는 이름을 가진 시녀 언니였는데, 이런 식으로 나타나 다른 시녀 언니들이 나한테 간식을 주는 걸 방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딱 하나만 드리면 되잖아.” “너처럼 안일하게 생각하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문제지.” 크으, 초콜릿과 나 사이를 가로막지 마! 세스는 한나와 달리 한기를 폴폴 날리게 생겨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이었지만 나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다. “언니.” 나는 이번에는 세스의 치맛자락을 슬며시 붙잡으며 눈빛 공격을 날렸다. “아티 쪼꼬 먹고 시퍼요.” 최대한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자 시녀 언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안 돼요, 공주님.” 하지만 난 다 알아! 지금 당신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걸! “정말 안 되는데…….” 결국은 내가 이겼다. 잠시 후 시녀 언니는 무릎을 굽혀 내 눈높이에 몸을 맞춘 다음 초콜릿을 한 움큼 쥐어주었다. “릴리안 님께는 비밀이에요.” 예전부터 거의 내 생활을 전담해 책임지고 있는 릴리가 요즘 내 충치를 걱정해 달달한 간식거리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내가 시녀 언니들에게 이렇게 간간이 초콜릿을 삥 뜯어 먹는단 건 그녀들과 나 사이의 비밀이었다. “고마어, 언니!” 나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뺨에 쪽 뽀뽀를 했다. 내 깜찍함에 마주한 얼굴이 절로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거 봐. 이 언니는 생긴 것만 쌀쌀맞지 사실은 한 다정 하는 성격이라니까? 크으. 나한테만 다정한 차가운 미인이라니. 좋구나. “앗! 세스 치사해! 이러려고 끼어들었지?” “크흠. 무슨 소리야? 내가 너처럼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인 줄 알아?” “그럼 왜 네가 공주님께 초콜릿을 드리는 거야? 으윽, 원래 공주님 뽀뽀는 내 건데.” 두 사람은 등 뒤에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행여나 릴리가 나를 보기 전에 다시 도도도 달려 복도를 벗어났다. 뭔가 좀 먹튀 같기는 하지만 일단은 릴리한테 안 들키는 게 중요하니까!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내 나이도 5살이 되었다. 릴리는 내가 이러는 걸 볼 때마다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높이지도 친근하게 굴지도 말라고 잔소리했지만 이건 내가 이 궁에서 좀 더 쉽게, 좀 더 편하게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이런 구석진 궁전에 짱 박혀 있는 공주에게 무슨 품위가 필요하단 말인가. 내 필사의 노력으로 날 무시하던 시녀 언니들도 이제는 곧잘 내게 간식을 주거나 먼저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곤 했으니 이 정도면 나름대로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시녀들이 먼저 내게 말을 거는 것은 황족 모독이었지만 내 궁에는 그런 법 따위 없었다. 내가 그녀들의 환심을 사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할 때쯤이었다. 그전까지는 나를 무시하는 시녀들이 얄미워 이유 없이 엉엉 울어대거나 실수인 척 물 같은 걸 쏟아 심술을 부리곤 했는데, 그런 것보다 상호 우호적인 관계가 내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클로드 때문에 달랑달랑한 명줄인데 굳이 시녀 언니들과도 척을 져서 구박을 받으며 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대로라면 소설 속 아타나시아 공주와 내가 다른 점이 없잖아!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내 방에 있는 금붙이들이 사라지는 게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돈 밝힌다고 비웃지 마라. 없이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한을 모른다구. 흑. 황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귀족 출신이었지만 현재의 루비궁에 소속된 궁인들은 그중에서도 한미한 집안 출신들이었다. 황제 클로드가 궁 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이후 아무도 이곳에 일을 하러 오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내 궁에 배정받은 사람들은 귀족들 중에서도 작위가 낮은 남작 자작 같은 가문 출신들이었다. 한마디로 죽어도 끽 소리 못 할 권력 없는 사람들만 내 궁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말이다. 그들은 남작과 자작 중에서도 주로 몰락직전인 가문 출신으로 평소에도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궁인들이었다고 했다. 그들도 처음에는 살육의 흔적이 낭낭한 루비궁에서 몸을 사리며 지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자 황제가 이 궁에 처박혀 있는 나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때부터 내 신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만도 못하게 변했다. 클로드가 무섭다 무섭다 해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두려움을 잊은 것인지, 그들은 루비궁에 들어오는 예산을 야금야금 빼돌리기 시작했다. ======================================= [5화]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클로드의 하렘과 마찬가지인 이 루비궁에 그 후 새로 들어오는 여자들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거칠 것이 없어졌나 보다. 처음에는 눈치채기 어려웠으나 나중에는 장님이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수법이 대담해졌다. 심지어 그들은 궁에 있던 장식품들과 벽에 붙은 보석까지 하나씩 떼어가기 시작했다. 와, 나 진짜. 클로드가 요즘 사람도 별로 안 죽이고 잠잠하다고 하더니 단체로 간덩이가 부었나 보다. 나는 릴리보다 먼저 내 방에 있던 값비싼 물건들이 사라지는 걸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맨날 군침을 흘리며 저걸 어떻게 빼돌릴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 밥그릇이 하나씩 줄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원통함이란. 황제한테 찾아가서 궁인들의 건방진 작태를 모조리 고자질하고 싶었지만 클로드는 내가 ‘아빠! 쟤가 나 무시했어!’라고 말한다 해서 ‘어이구 그랬어, 내 새끼!’ 하며 내 편을 들어줄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응? 너 아직도 살아 있었냐’ 하면서 내 목을 따버릴까 봐 무섭다. 무, 물론 이 모든 게 내 망상일 확률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굳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싶진 않아. 난 소중하니까! 그래서 난 두 눈을 멀쩡히 뜬 채 내 금을 홀라당 뺏기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녀 언니들이 내 방에 들어와서 내 눈치를 보며 금촛대 같은 것을 슬쩍 앞치마 속에 넣을 때마다 우렁차게 울어대는 것밖에 없었다. 으으, 아까운 내 금! 흐흑. 하여튼, 그 일은 무섭게 화가 난 릴리가 직접 황궁의 시녀장과 담판을 지어 해결했다. 어릴 때 금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을 가져다주는 것이나 다른 시녀들이 그녀의 앞에서 존댓말을 하는 것에서도 느꼈지만 알고 보면 나보다는 릴리가 루비궁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일지도 몰랐다. 나야 그녀를 좋아하니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 시녀들은 루비궁에서 쫓겨났다. 그것도 지금까지 훔쳐 간 것들을 모조리 토해낸 뒤 궁에서 쫓겨났다고 하던데, 괴이쩍게도 내 궁에 있던 물건들이 다시 나한테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증발한 거냐, 내 금! 난 시녀장이 의심스러웠지만 격렬하게 ‘으앙아’ 칭얼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예산을 핑계로 나한테 딸랑이 하나 안 사줄 때부터 알아봤어.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그 빈자리들 때문에 내가 몰래몰래 한두 개씩 성에 있는 물건들을 훔쳐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정정할래. 어차피 이건 내 궁이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훔치는 게 아니라 보관. 그래, 내 귀중한 금이랑 보석들을 따로 보관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그것도 정도가 있지, 실은 릴리가 요즘 들어 유심히 궁 안을 살피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내 눈에도 실내 풍경이 미묘하게 허전해진 것 같아 요즘 양심이 마구 찔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근차근 도주 자금을 모은다는 게…… 너무 열심히 일해버렸나. 이러다 릴리가 3년 전의 반복인 줄 알고 궁을 뒤집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아무래도 한동안은 자중해야겠다. “공주님, 어디 가세요?” “에헷. 릴리 보러 가!” “호호. 그 전에 입을 닦으셔야겠어요. 초콜릿이 맛있으셨나 봐요.” 그때, 복도를 지나가던 시녀들이 나를 부르더니 갖고 다니던 손수건으로 내 입을 닦아주었다. 거기에는 방금 전 내가 먹은 초콜릿의 흔적이 완연했다. 릴리한테 들키기 전에 먹는다는 게 그만 입에 다 묻히고 먹어버렸나 보다. 시녀들은 그런 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만 난 부끄러워졌다. 이런 몸이 되어서 한동안 어린애처럼 행동했더니 정말 내가 애라도 된 건가. 으앙, 쪽팔려. “아티가 쪼코 먹은 거 비밀이야!” “네, 공주님.” 하지만 쪽팔림보다도 릴리한테 혼나는 게 더 무서웠다. 나는 시녀 언니들에게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에잇, 이놈의 초코 손에도 묻었잖아. 그냥 슬그머니 옷에다가 문지를까 하다가 오늘 입은 드레스가 하필 흰색이라 참았다. 괜찮아. 가까운 곳에 분수가 있으니까. 예전에 황제의 후궁들이 살던 곳이라 그런지 이곳에는 운치 좋은 호숫가나 분수, 또 화원 같은 곳이 많았다. 물론 관리는…… 그냥 그랬지만. 후궁들의 거처에 혈육 외의 남자가 발길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났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는 여자 궁인들밖에 없었다. 나는 시녀 언니들을 서넛 더 만난 뒤에 천사상이 세워진 분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 천사상이지, 홀딱 벗어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는 조각상은 그 포즈도 요염하기 짝이 없어 천사가 아닌 요부 같았다. 하지만 이 궁에 있는 조각상들은 모두 다 이랬다. 여기가 후궁전이기 때문인가. 하여간 어린아이 교육에 썩 좋은 궁전은 아니었다. 물론 난 매일매일 눈요기하고 좋았지만. 워호. 언니 오늘도 몸매 대박 쩔어줘요. 참방참방. 난 초콜릿 범벅인 손을 분수 물에 씻었다. 이 몸으로 호숫가에는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까치발을 들면 되는 분수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바닥을 딛는 힘이 과했는지 석조 분수대에 약간 깊숙이 몸을 들이게 되었다. 엄마야, 깜짝이야. 물에 빠지는 줄 알았네. 화들짝 놀라 버둥거리고 있는데, 잔잔한 물살이 그려진 수면 위로 서서히 선명한 형체가 잡혔다. 몸을 내리기 위해 버둥거리던 것조차 잊고 난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쁘다아.” 자뻑 같긴 했지만 물 위에 비친 나는…… 좀 심하게 예뻤다. 크으.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아가가 나라니! 만약 이런 애기가 내 눈앞에 있다면 너무 깜찍해서 깨물어주고 싶었을 게 분명하다. 적당히 살이 오른 뺨은 꼬집고 싶을 만큼 보송보송했고 주먹만 한 얼굴에 자리 잡은 이목구비도 올망졸망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부스스한 느낌 없이 부드러웠고, 눈도 크고 또렷한 데다 속눈썹도 길었다. 아역 배우나 모델을 했으면 정말 대성했을 얼굴이다. 올이 가는 백금발과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아름다운 무희였던 어머니 다이아나를 닮았지만 내 독특한 눈동자만큼은 아버지인 클로드를 닮은 것이라 했다. 난 물 위에 비치는 내 눈동자를 보다가 잠시 넋을 놓았다. “헤에.” 난 한눈에 보아도 사랑스럽고 예쁜 아기였지만 그중에서도 탄성이 나올 만큼 특히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눈동자였다. 릴리는 내 눈동자가 직계 황족들만이 물려받는 보석안이라고 했다. 특히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작가는 제니트의 눈동자를 가져다가 온갖 미사여구를 다 써서 찬미해 놨다. 그걸 활자로 읽었을 때에는 이게 무슨 중2병 설정이냐고 코웃음을 쳤었는데 실제로 보니 그 설명이 얼마나 적합했는지 알 것만 같다. 과연 그 이름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신록의 녹색에서 청명한 파랑을 지나 고아한 군청색으로까지 보이는 내 눈은 신비롭고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현재 오벨리아의 황족은 클로드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보석안 역시 단둘만이 지닌 것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쯤 알피어스 공작가에서 한껏 예쁨받으며 살고 있을 제니트가 있었으니까. 아니, 물론 난 아직 이 세계가 그 망할 소설 속의 세계가 아닐지도 모른단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각자마다 고유의 마력이 있는데, 직계 황족들이 갖는 마력의 파장은 특히 독특해 이런 색채의 눈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릴리가 구해 준 서적에서 읽은 설명이 복잡해서 나도 이 이상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예쁘면 됐지, 뭐. “공주님! 위험해요.”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내 몸을 덥석 안아 들었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기는 했지만 익숙한 손길에 곧 나를 안아 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혼자 다니지 마시라니까 이제는 제 말도 안 들으시고.” 나는 릴리의 품에 익숙하게 자리 잡으며 그녀를 향해 헤헤 웃어 보였다. “릴리, 보고 시펐어!” 내 아부에 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는 4년 전이나 지금에나 변함없이 청초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난 얼빠 기질이 있어서 전부터 릴리의 앞에만 서면 재롱을 부리기 바빴다. “공주님, 오늘 초콜릿 드셨죠?” 헉. 난 웃는 그대로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어, 어떻게 알았지. “한나한테 다 들었어요. 앞으로 일주일간 간식 금지예요.” 으앙앙. 말도 안 돼! 한나, 이 배신자! 앞으로 일주일이나 초콜릿을 못 먹는다니! 하지만 내가 아무리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심 유발 작전을 써도 릴리는 끝끝내 넘어오지 않았다. 안 돼, 내 초코! *** 잠시 후, 나는 궁의 정원에서 꽃을 꺾고 있었다. “공주님, 저도 한 송이만 주시면 안 돼요?” “앙 대! 때찌야!” 한나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다른 시녀와 교대해 한가하다고 나를 쫓아다니기 시작하더니 슬슬 지루해진 눈치였다. 나한테 줄 간식을 항상 가지고 다닐 만큼 날 예뻐하는 그녀는 지금도 내가 들고 있는 꽃이 탐나는 모양이었다. 다른 때의 나라면 방긋 웃으며 한 송이쯤 주고도 남았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왜냐하면 내가 초콜릿을 먹었다는 사실을 한나가 릴리에게 전부 말해버렸으니까! 물론 절대 고의가 아니었고 아까 전에 세스만 나한테 뽀뽀를 받은 것이 속상해서 무심코 투덜거리다가 실수해 버린 것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래도 말한 건 말한 거였다. “공주님 너무하셔.” 한나의 우는 소리에도 나는 꿋꿋이 눈앞의 예쁜 들꽃들을 골라 꺾기만 했다. 시녀장을 만나러 간 릴리에게 큰 화관을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따, 딱히 릴리를 꼬셔서 초콜릿 금지령을 어찌 해볼 생각은 아니다, 뭐. 아무튼 나는 릴리에게 어울릴 법한 하얀 꽃들을 다 모으고 나서 심심한 고민에 빠졌다. 이걸로만 화관을 만들면 조금 밋밋할 것 같은데. 응, 그래! 포인트가 될 만한 크고 예쁜 꽃이 있으면 좋겠어! “한나, 여기 무슨 색 꽃이 예쁠 거 같아?” 내내 심통이 나 있던 내가 말을 걸자마자 한나가 눈을 빛냈다. 하여간 이 언니는 날 정말 좋아한다니까. “릴리안 님께 드릴 거죠? 그럼 파란색이나 보라색이 어울리지 않을까요? 으음. 노란 꽃도 예쁠 거 같고.” 한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곧 자기도 어울리는 꽃을 찾아보겠다며 다른 곳으로 떠났다. 나는 나대로 정원을 좀 더 뒤져 보기로 했다. 릴리안에게 줄 꽃을 찾다가 한나에게 어울리는 걸 발견하면 작은 화관을 만들어줘도 괜찮을 것 같고……. 에잇, 난 너무 착하다니까. 하지만 평소에 한나가 날 얼마나 좋아해 주는지 알았기 때문에 이제 그만 심술을 부려도 될 것 같았다. “꽃바테는 꽃드리 모오여 살고요.” 나는 동요를 흥얼거리며 꽃밭을 열심히 뒤적였다. “우리드른 유치원에 모오여 사라요.” 그리고 한참 후, 내가 루비궁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헉?” ======================================= [6화] 뭐야, 여기 어디지? 나는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끝없이 널린 꽃밭을 걷다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는데 처음 보는 곳이었다. 워낙 터가 넓어 원래도 끝과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던 궁이라지만 이렇게 당황스러울 때가. 심지어 한 방향으로만 걸어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 온 직후 처음으로 미아가 되었다. 지, 진정하자. 궁전은 엄청나게 크니까 어느 방향으로든 고개를 들면 보일 수밖에 없잖아.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시선을 들자마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성의 외벽이 보였던 것이다. 나는 들꽃들을 품에 한 아름 안고 쪼르르 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머야.” 그런데 내가 도착한 곳은 루비궁이 아니었다. 사람이라고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그 궁은 내가 사는 곳 못지않게 한적했다. 아니, 내 궁보다 훨씬! 훨씬 더 텅텅 비어 있었다. 여긴 아무도 안 쓰는 곳인가. 청소는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를 않지. 난 그냥 꽃 한 송이 따려고 했을 뿐인데 다른 궁으로 와버리다니 어이가 없다. 어, 그런데 잠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궁이라고? “호오?”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도 없는 궁이면 내가 써도 되겠네? 마침 내 도주 자금들을 숨겨둘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고민이었는데 이건 운명인 것 같았다. 그동안은 루비궁 내부에 조금씩 분배해 숨겨 놓았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는데. 게다가 왠지 오늘 릴리가 시녀장을 만나러 간 것도 찜찜하고.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궁 내부를 이리저리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조사를 해본 결과 이 궁은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긴 했지만 정말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곳이었다. 아마도 선황제 때 사용되던 궁전 중 하나로 지금은 주인이 없어 가끔씩 관리만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난 궁인들이 이곳에 청소를 하러 올 때만 조심하면 되었다. 내 궁과 거리도 가까운 것 같고. 역시 내 운은 기가 막히다니까. 그렇게 이 버려진 궁은 내 아지트로 낙찰되었다. *** 생각해 봤는데, 역시 나는 4년 전에 수면제를 잘못 먹고 죽은 것 같다. 그때가 한겨울이었고 방에는 난방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럼 역시 동사인가. 크흑. 뭐, 어차피 난 혈혈단신 고아였기 때문에 딱히 이전 생에 미련이라거나 아쉬움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 해도 절대 절대 싫었으니까. 사실 그 망할 소설을 따로 떼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가만히 있어도 따박따박 밥 나오겠다, 돈 벌 필요 없이 하루 종일 먹고 놀기만 하면 되겠다, 어쨌든 내 명의로 된(?) 집도 있겠다, 지상낙원도 이런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빙의자 버프가 있는 것인지 처음 이 세계에서 눈뜬 날부터 나는 바로 이곳 언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릴, 리!” 나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힌 종이를 들며 방실방실 웃었다. 이 세계는 교육 수준이 낮아서 내 나이 때 글씨를 익히기 시작하는 건 없는 일이라고 한다. 나는 무난무난하게 존재감 없이 사는 게 목표라 이쯤하면 되었겠지 싶어 작년 초 처음 글씨 쓰는 모습을 보였는데 완전히 망했다. 릴리와 시녀들은 내가 세기의 천재라도 되는 것처럼 놀라 나를 경악시켰다. “우리 영민하신 공주님.” 게다가 그 이후 그녀들은 내게 본격적인 조기교육을 시작했다. 내 영민함을 보고 교육열이라도 불타오른 것인지, 평소 나를 예뻐하던 시녀 언니들이 기초적인 예법부터 내게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본래 이 세계의 귀족들은 최소 8살 때부터 본격적인 예법 공부에 들어간다고 한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옆에 있을 수 있어서 전 정말 기뻐요.” 나는 빙의자일 뿐인데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천재 취급을 받고 있으려니 묘하게 양심에 찔렸다. 하지만 난 의도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난 적당히 맞춤법도 틀리고, 찻물도 흘리고 하면서 내가 둔재란 것을 필사적으로 어필하고 있었다. 별로 소용은 없는 것 같았지만. 으앙. “아티도 릴리랑 같이 있어서 쪼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루비궁은 외부와 고립되어 있어 어지간하면 내 소식이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퍽 안심이었다. 왜냐면 난 소설 속 아타나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9살에 황제궁 후원에서 클로드를 만나지도 않을 거고! 18살이 되기 전에 일찌감치 한 밑천 챙겨 여길 나갈 거니까! 으으, 클로드 놈만큼은 어떻게든 피해 줄 테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황제궁 따위 쳐다보지도 않겠어. 뭐, 황제가 사는 곳이니까 엄청나게 휘황찬란한 성 아니겠어? 제일 으리으리하고 삐까번쩍한 곳만 피하면 되겠지. “공주님, 우유 가져다 드릴까요?” “응! 차가운 거 시러!” “네, 따뜻하게 데워다 드릴게요.” 릴리가 방을 나가고 난 뒤 나는 바닥에 엎드려 글씨를 끄적이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내 침대 밑에 미리 숨겨두었던 주머니 두 개를 꺼내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한나에게 애교를 부려 받아냈던 주머니들 안에는 그동안 내가 모아두었던 도주 자금이 들어 있었다. 궁의 벽이나 조각상에 붙어 있던 보석들과 그동안 조금씩 떼어냈던 금붙이들을 얼추 비슷한 무게로 넣어 균형이 맞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후딱 치마를 걷었다. 그러자 호박 모양 바지 형식으로 된 내 깜찍한 유아용 속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릴리가 오기 전에 서둘러 주머니에 달린 끈을 허벅지에 묶기 시작했다. 일부러 시간을 벌기 위해 뜨거운 우유를 가져다 달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끙끙. 근데 이거 왜 이렇게 단단히 안 묶이냐.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봤는데 내가 릴리나 다른 시녀들에게 들키지 않고 내 예쁜이들을 궁 밖으로 빼내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됐다!” 고사리 손으로 쪼물쪼물 끈을 다 묶고 나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이 어린 몸에는 제법 무거웠지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아마 그동안 숨겨 놓은 자금들은 빠른 시일 내에 무사히 옮길 수 있을 것이었다. 아, 그리고 릴리가 얼마 전 시녀장을 만나러 간 이유는 조만간 내 궁을 대청소할 계획이기 때문이란다. 전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이제 나도 얼추 크고 했으니 한번쯤 궁을 정비해야겠다 싶었나 보다. 물론 깐깐한 시녀장이 나와 시녀들을 위해 인력보충 같은 걸 해줄 리는 없었지만 어쨌든 궁의 법도상 그녀에게 말하긴 해야 했단다. 릴리의 말을 듣고 난 뒷덜미가 싸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내 계획을 조금 더 앞당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난 오늘 낮잠 시간을 핑계로 몰래 궁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동안 자는 척을 하며 몰래 알아봤는데, 릴리는 내가 낮잠을 잘 때는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한번 잠들면 깨우기 전까지 절대 눈 뜨지 않는단 사실을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공주님, 좋은 꿈꾸세요.” 오늘도 내가 새근새근 잠이 든 것 같자 릴리는 내 뺨에 입을 맞춘 뒤 조용히 방을 나갔다. 나는 잠시 동안 그대로 누운 채 문 밖에 귀를 기울이다가 살그머니 눈을 떴다. 아오. 주머니에 다리 눌려서 혼났네. 아무래도 안에 있는 것들이 죄다 딱딱한 데다 각까지 져 있어서 피부에 자국이 남았을 것 같다. 내 예쁜이들 안전한 곳에 무사히 가져다놓기 한번 힘들구나. 달칵. 나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문을 빠져나갔다. 시녀들이 일하는 시간과 동선을 알아둔 탓에 다행히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본대로 들키지 않고 정원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릴리만 아니면 다른 시녀들은 내가 잘 구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들켜도 상관없었다. 나는 걸음을 서둘러 꽃밭을 가로질렀다. 이미 지난번에 길 탐색을 모두 끝마친 뒤여서 그때 보았던 궁으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 어린 몸뚱이로 짐 덩이까지 매달고 뛰려니 좀 힘든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목적했던 곳에 다다랐을 때쯤에는 난 완전히 지쳐서 헥헥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머니를 달아 놓은 다리가 바들거리며 떨리기까지 했다. 하, 제길. 이러다 다리 풀릴 것 같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었다. “끙차.” 일단 난 다리에 묶었던 끈을 풀고 전에 봐두었던 곳으로 달려갔다. 건물 내부에 숨겨두면 차후 다시 꺼내갈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야외에, 특히나 으슥하고 나무가 울창한 후원에 묻어둘 요량이었다. 나는 덤불을 헤치고 적당한 곳에 주머니를 묻으려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땅을 팔 도구가 없잖아!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바닥은 내 말랑한 손으로 파기 힘들 정도로 아주 딱딱했다. 게다가 손에 흙을 묻혀 가면 릴리에게 들킬 것이 분명했다. 이걸 어쩐다지. 잠시 동안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내 예쁜이들을 덤불 속에 잘 숨겨두고 뒤돌아섰다. 아무래도 내일 다시 와서 파묻어야 할 것 같았다. 한나에게 부탁해서 소꿉놀이용 모종삽이라도 달라고 해야지. 그래도 다시 돌아갈 때는 짐이 없기 때문인지 좀 더 가벼운 몸으로 뛸 수 있었다. 방으로 가는 길에 멀찍이서 지나가던 시녀 언니와 눈이 마주쳐 간이 떨어질 뻔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냥 내가 놀러 나왔거니 가볍게 생각하고 만 것 같았다. 그동안 빨빨거리고 여기저기 쏘아 다니길 잘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누웠을 때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헉헉. 아이고, 나 죽겠다. 달칵. “우리 공주님, 일어나셔야죠.” “으으응.” 진짜로 힘들어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다 나왔다. 릴리는 잠결에 보채는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지만. “응? 무슨 땀을 이렇게 많이 흘리셨어요?” 릴리의 놀란 음성에 나는 그만 흠칫해 버렸다. 역시 완벽한 범죄는 무리였어. “미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아프신 건…….” “으응, 방 더워. 해가 쨍쨍해서 뜨거.” 내 말에 릴리는 잠시 방을 훑어보다가 이내 내 이마의 땀을 손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내일부터는 창문을 열든가 커튼을 쳐드려야겠어요. 벌써 여름이 오려나 봐요. 방이 남향이라 확실히 햇볕이 뜨겁긴 하네요.” “아티 우유 머글래. 찬 우유 주세요.” “낮잠 주무시기 전에 드셨으면서.”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릴리는 내게 가져다 줄 시원한 우유를 가져오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리고 혼자가 되자마자 난 완전히 뻗어버렸다. *** 그 후로 난 두 번 더 루비궁을 빠져 나갔다. 릴리에게 들킬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매일 밖으로 나가기 힘들기도 해서 내 비밀 외출은 며칠에 한 번 꼴로 이루어졌다. ======================================= [7화] 그동안 이 일에 제법 익숙해진 탓에 나는 처음보다 용의주도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아령을 매달고 달리는 것처럼 다리가 묵직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몇 번씩 이 짓을 하는 동안 회의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루비궁에서의 지금 생활이 너무 좋아서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계속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황궁에는 클로드라는 거대한 시한폭탄이 살고 있었으니. 아무리 이 생활이 좋다 해도 무작정 내 목숨을 담보 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그러니까 이 예쁜이들은……. 말하자면 내 보험. 그래, 언제라도 이 궁을 빠져나갈 수 있게, 언제 올지 모르는 디데이를 위한 보험이다. 난 벌써 다섯 번째라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길을 따라 꽃밭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날과 변함없이 쥐죽은 듯 조용한 궁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곧장 후원으로 가지 않고 지난번에 왔을 때 눈도장을 찍어두었던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핫! 있다! 그동안은 멀리서만 봐서 긴가민가했는데 사방이 개방된 형식의 궁전 1층 복도에 진열된 건 천사상들이 맞았다. 크기는 다양해서 내 키보다 큰 것도 있고, 내 팔뚝만 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조리 금이었다! 세상에! 내 궁에 있는 건 전부 대리석 같은 돌조각이었는데 금이라니! 나는 흥분에 젖었다. 천사상이 워낙 많아서 이 중에 하나쯤 슬쩍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지금은 무리지만 좀 더 나이가 들면 작은 거 하나쯤은 쓱싹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거 진짜 금인 거 맞겠지?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천사상을 요리조리 뜯어보다가 내 눈높이에 있는 토실한 궁둥이를 슬쩍 깨물었다. 내 유치도 이제는 제법 튼튼하니까. 아앙. 저벅. 그런데 그때, 문득 내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천사상의 엉덩이를 깨문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언제부터 내 성에 이런 버러지가 살았지?” 경직된 내 귓가에 싸늘한 음성이 박혔다. 제5장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역시 내 인생의 장르는 리얼리티 서바이벌이었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돌아선 직후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주춤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내 등 뒤로 턱, 딱딱한 조각상이 부딪쳤다.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던 걸까. 소리 없이 내게 다가온 것은 두 사람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비교적 먼 거리에 있어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복장을 보니 아마도 기사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투둑. 챙그랑!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팔다리에 힘이 풀렸다. 손에 들려 있던 주머니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내용물들을 밖으로 쏟아냈다. 약 3년 동안 하나둘씩 야금야금 모아왔던 보석들이 새하얀 바닥 위에서 오색찬연하게 빛났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힐끔 그것을 내려다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 바로 앞에 버티고 선 남자는 다른 곳으로 시선 한 번 돌리는 법 없이 오직 나만을 미동 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얼굴.” 낮게 깔린 목소리만큼이나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 직시했다. 역광에서도 빛을 바래는 법 없이 오묘한 색채를 내는 신비로운 눈동자.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와 똑같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감정 한 점 깃들어 있지 않아 정말 그 이름 그대로의 보석안 같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바람에 흩어지는 진한 황금색 머리카락. 황족들만이 가지고 태어나는 보석안. 나른히 나를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얼굴. 온몸에 흐르고 있는 맹수 같은 분위기. 클로드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아타나시아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의 황제인 남자가 길가에 널린 돌멩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 시오도나에서 온 무희였나. 그 계집과 닮았구나.” 예기치 못한 만남에 굳어버린 내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듯 새하얬다. 이, 이런 게 멘붕이란 건가. 지금 얘, 걔 맞지. 18살에 아타나시아를 죽이는 황제. 아니, 근데 왜 얘가 지금 내 눈앞에 있어?! 지금 난 5살인데요. 여긴 황제궁 후원도 아닌데요?! 이제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멘붕에 빠진 나를 또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읊조렸다. “하긴. 누구라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할 정신도 없었다. 내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는 동안 남자는 아주 느린 동작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폐하.” 그러자 뒤에 서 있던 기사가 동요하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나는 내게 뻗어지는 손을 여전히 멍청한 얼굴을 한 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그의 손이 멈추어졌다. 다음 순간 무감정한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천천히 내 얼굴을 훑는가 싶었다. 믿을 수 없게도, 이제껏 무기질적인 빛만을 띠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실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군.” 그의 보석안은 까만색에 가까운 짙은 청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계집이 지었던 네 이름.” 그리고 그의 입에서 마침내 내 이름이 속삭여진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해 멈추었던 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분명 아타나시아였지.” 그것은 내게 있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쿵 내려앉았던 심장이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것처럼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던 기사는 지금껏 내 존재를 몰랐던 듯 그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땐 목도 가누지 못하는 핏덩이였는데.” 확실히 클로드는 5년 전 아타나시아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의 이름이 아타나시아라고?’ 소설 속에서 아타나시아가 클로드를 만난 것은 9살 때라고 나와 있지만 사실 그들의 진정한 첫 만남은 아타나시아가 태어난 직후였다. 그리고 그날 황제 클로드는 젖먹이인 아타나시아 공주에게 제 미들네임을 준다. 그것은 어린 공주의 이름이 그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소설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 불사와 관계된 이름은 차후 황제가 될 정식 후계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이름은 황제만이 직접 하사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주인공인 제니트의 이름도 ‘신의 은총’이란 뜻일 뿐, ‘불멸’이나 ‘영원’을 뜻하고 있지는 않았다. 제니트의 이모인 백작 부인이 아타나시아를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고작 비천한 무희에 지나지 않았던 다이아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신의 딸에게 ‘아타나시아’라는 제왕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참으로 간 큰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재미있구나.’ 즉, 아타나시아가 클로드의 미들네임을 가질 수 있던 것도 릴리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부모 자식 간의 애정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아타나시아를 죽일 마음으로 그날 그녀를 찾아간 것이었다. ‘과연 그 이름처럼 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 와, 그럼 나 지금 실제로 날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거야? 미친. 물론 소설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놈이 요주의 인물이란 건 충분히 주지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치고 나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새 많이 컸구나.” 그새 많이 컸구나. 이제 살 만큼 산 것 같은데 그만 죽어라! 서, 설마 이러진 않겠지? 9살인 아타나시아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고 했잖아! 이대로 조용히 짜져 살다가 18살이 되기 전에 궁에서 빠져나가겠다는 내 원대한 계획은? 툭! 챙그랑! 그렇게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있을 때, 내 다리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져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못 박혔다. 그곳에는 보석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는 주머니가 반짝이는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한나가 직접 수놓아준 당근 먹는 토끼 무늬가 참으로 앙증맞기도 했다. “…….” “…….” “…….” 미, 미친. 엿 됐다. 다리에 묶어놓은 끈이 어째 느슨하다 싶더니만 이런 미친 일이! 오늘 양쪽 다리에 달고 온 내 예쁜이들 7호와 8호를 모두 들키게 되다니!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클로드의 얼굴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바닥에 있는 주머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향해 저벅 걸음을 옮겼다. 번쩍! 그러더니 글쎄,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나를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동일한 눈높이에서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보석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 깜짝 놀라서 목까지 올라왔던 욕이 돌덩이에 걸린 듯 턱 막혀 버렸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그런데 내 당황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불쑥 입을 열 뿐이었다. “무겁군.” 무심한 그 음성에 나는 그만 벙쪄 버렸다. “어쩐지 볼살이 터질 듯하다 싶더니 이리 무게가 나갈 줄이야.” ……이 미친놈아! 여자한테 몸무게 얘기를 하다니, 완전 비매너! 나 하나도 안 무겁거든요? 그리고 내 볼살은 지극히 표준이다! 아니, 그런데 그건 둘째 치고 너 왜 나한테 말 거는 거니? 너 냉혹한 폭군 아빠잖아! 제니트만 온리 러브하고 아타나시아는 본체만체하는 개자식이잖아! “그런데 내 궁에서 뭘 하고 있던 거지?”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쭈그러져 버렸다. 내 궁. 내 궁이란다. 하기야 황궁에 있는 궁이 모두 황제의 소유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하는 말이나 마실 가듯 편안한 복장을 한 것을 보아하니 아마 이곳은 그가 실제로 이용하는 궁전인 듯했다. 으헐. 뭐야. 나 그럼 완전히 지뢰를 밟은 거였나 봐. 설마 여기가 황제궁인 거야? 루비궁보다도 검소한 이 궁이?! 미쳤다. 돌았다. 그럼 작중에서 아타나시아가 연회의 불빛을 보고 황제궁에 가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이렇게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서였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놈의 시선이 내 등 뒤로 향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때문에 내 등 뒤로 또 한차례 식은땀이 흘렀다. 클로드와 함께 시선을 옮긴 기사가 천사상의 엉덩이에 민망하게 남은 잇자국을 보며 말했다. “장난감인 줄 아셨나 봅니다.” 으아아! 나 죽일 거야? 죽일 거야? 네 성에 허락 없이 들어왔다고 죽일 거야? 네 천사상에 이빨 자국 남겼다고 죽일 거야?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고 죽일 거야? “루비궁에서 놀다가 길을 잃은 모양이군.” 나는 멘붕에 빠져 있느라 그가 나를 든 상태로 몸을 돌렸단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필릭스.” “예, 폐하.” “들어라.” 내 의사와 상관없이 공중에서 몸이 옮겨졌다. 가까이에서 본 기사는 꽤 훈남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며 당황과 곤혹감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클로드 때문에 느닷없이 나를 받아 들게 되었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 [8화] 우리는 불편한 자세로 서로를 본 채 흔들리는 동공을 마주했다. “손님과 다과라도 들어야겠다.” 그 후 이어진 클로드의 말은 내게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 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일까. 피부 위로 배어나는 땀에 등이 축축했다. 나 지금 밀폐된 방 안에서 클로드 놈이랑 오붓하게 마주앉아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거니? 그것도 먼 훗날 나를 죽일 운명인 이 나쁜 놈이랑? 헉. 눈 마주쳤다. 나는 내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13년 후가 아니라 그냥 지금 당장 나를 죽인다고 할까 봐 서둘러 밑으로 눈을 깔았다. 크흡. 비굴하다고 욕하지 말아줘. 이건 생존 본능이라고. 현재 상황에서 유유자적한 건 클로드 놈뿐이었고, 구석에 선 기사 오빠도 이 분위기가 영 불편하고 어색한 눈치였다. 물론 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잔뜩 얼어붙어서 도르륵 눈만 굴리며 내 맞은편에 있는 사람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까. “벙어리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클로드가 읊조린 말에 나는 작게 딸꾹질해 버렸다. “너무 조용하니 어째 재미가 없구나.” 헉. 전생에 읽었던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영향일까. 무료하다는 듯 속삭인 놈의 말에 등줄기로 오싹거리는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재미가 없으니 널 죽여야겠다. 뭐 이런 의미인 걸까? 그동안 잊고 있던 딸을 다시 만나 반가워하기를 바란 것까진 아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무생물을 보듯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래. 어쩌다 보니 이렇게 함께 마주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그의 마음이 바뀌면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바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원래 말을 못 하나?” “아티, 말할 수 이써요.” 헤헷.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 나는 굳은 얼굴로 애써 미소를 그려 보였다. 으어,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난 아직 죽기 싫단 말이야. 물론 아직까지 이놈이 날 죽이려는 낌새는 없었지만 내가 읽었던 소설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간 시녀 언니들에게 들었던 놈의 이력이 화려해서 절로 쫄게 되었다. “이제 겨우 목소리를 들었군. 왜 지금까지는 입을 열지 않았지?” 이놈은 자기 앞에 있는 게 5살짜리 꼬마라는 걸 알긴 아는 건지, 또 이따위 질문이다. 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쫄아서 말문이 막혀 있었다고 해? 할 말이 없어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나를 도와준 건 벽에 붙어 서 있던 기사 오빠였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본래 공주님 또래의 유아들은 낯을 많이 가린다 합니다.” “그래?” 그러자 언제 나를 간 보듯 응시했냐는 것처럼, 클로드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반문했다. 그래, 이 자식아! 어린애가 낯가리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게다가 네 앞에서는 누구라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 걸! 어린애뿐만 아니라 어른이어도 그래! 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쑥스러운 듯이 헤헤 웃고 말았다. 흑흑. 그래 네 말이 다 맞으니까 제발 나 좀 보내줘. 클로드는 내 얼굴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소파에 나른히 몸을 기댔다. 내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태양빛의 진한 적금발을 가진 클로드가 그런 자세로 있자 그 모습이 마치 휴식을 취하는 동물의 제왕 사자처럼 보였다. 물론 난 그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먹잇감이었다. 사지 묶인 토끼나 생쥐 정도 될까. 사자가 앞발로 탁 후려치면 끽 소리도 못 하고 찍 죽을 그런 힘없는 짐승 말이다. “필릭스.” “예, 폐하.” “나가라.” “…….” 기사 오빠는 곧바로 방에서 강퇴당했다. 내 대신 대답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 잠깐만. 오빠, 진짜 나만 혼자 두고 나갈 거 아니지? 으허헝. 이 나쁜 클로드야, 기사 오빠 내보내고 날 어쩌려고! 하지만 기사 오빠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내 간절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용히 부복해 보인 뒤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떠나기 직전 그가 나를 안타깝게 바라본 것 같긴 하지만 위안이 안 된다, 제길. “아티란 건 애칭인 모양이군.” 정신이 없어서 아까 내가 뭐라고 지껄였는지도 몰랐는데 시녀 언니들에게 평소 귀여운 척하던 버릇대로 말했나 보다. “아타나시아. 아타나시아라.” 그가 내 이름을 음미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나는 또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의 의미를 아느냐?” 아, 큰일이다. 클로드가 내 이름에 관심을 두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비록 그가 아타나시아를 처음 살려둔 것은 이름 때문이긴 했으나 그것은 언제 나를 벨지 모르는 양날의 검이었다. 나는 더없이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실제로는 엄청 긴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첫 만남 때 클로드가 나를 살려준 것은 정말 두 번 있을 수 없는 요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이 제왕의 이름은 현 황제인 클로드조차 갖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제 아이에게, 그것도 계집에게 감히 그 이름을 붙이다니. 살아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거열형에 처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클로드가 선황의 정식 후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듯, 클로드는 제 아버지와 배다른 형제였던 황태자를 죽이고 직접 왕관을 차지했다. 클로드의 손에 죽은 선황의 이름은 ‘아에붐’, 그리고 클로드의 형이었던 황태자의 이름은 ‘아나스타시우스’. 그들의 이름은 둘 다 영원과 불멸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오벨리아 최초의 여왕이었다고 하는 ‘앰브로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오벨리아의 역대 황제 중 오직 클로드만이 제왕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니 클로드 놈이 혹시라도 내 이름에 불쾌감을 느끼고 변덕을 부려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는 클로드를 향해 필사적으로 무해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신에게 해롭지 않답니다. 왕위에는 전혀 관심도 없구요. 최대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는 게 인생 목표예요. 굵게 살 마음도 없고 지금까지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가늘게, 최대한 가늘게 사는 게 장래 희망이랍니다. 이름만 거창하지 님 말대로 전 그냥 다섯 살 먹은 식충이에 버러지예요. 아니, 그렇다고 ‘죽어라, 이 버러지!’ 하며 밟아 죽이면 곤란하지만. “왜 그러고 있지? 먹으려무나.” 희망 고문인지 클로드는 지금 당장 날 죽일 마음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이대로 루비궁에 그냥 보내줄 생각도 아닌 것 같아서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나는 지금 이 상황에 내게 불행인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내오라 시켰는데 네가 먹지 않으면 이것을 가져온 이를 벌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잘 먹겠슴니다.” 이런 썩을 놈. 지금 나 협박한 거 맞지? 그렇지?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내 앞에 곱게 놓인 포크를 들었다. 테이블에는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가 여러 개 놓여 있었지만 이미 식욕은 싹 사라진 뒤였다. 아씨. 체할 것 같다. 이런 가시방석에서 다과를 들어야 하다니. 그런데 내가 이걸 남기면 클로드가 또 궁인들을 잡아 죽일 것 같아 안 먹을 수도 없었다. 클로드가 아무리 요즘 잠잠했다지만 또다시 기분 나쁘다고 4년 전 같은 학살을 벌일지 어떻게 아나.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 사망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들어 있겠지. 어흑. “마이쪄요.” 거울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내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난 웃었다. 좀 더 오래 살고 싶었으니까. 어흐흑. 릴리 보고 싶어. 그런데 이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놈인가. 헉, 아냐.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것도 무서워. 그래. 말해라, 해. 그리고 나 좀 그만 보내줘. 흑흑.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여기에 앉아 있게 된 건지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놈의 금이 뭐라고 내가 이런 마왕 소굴까지 기어 들어와서는. 이대로라면 클로드가 날 죽이기 전에 심장마비로 그냥 먼저 사망할 것 같았다. “예법은 누가 가르쳤지?” “릴리가 가르쳐 줘써요.” 하지만 이 몸은 생각보다 생존 본능이 강한지 속으로 흐느끼고 있는 와중에도 클로드의 물음에 착실히 답하고 있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클로드가 마침내 읊조리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 릴리안 요르크를 말하는가 보군.” 난 그냥 ‘릴리’라고만 말했는데 어떻게 풀네임을 전부 다 아는 거야? “5년 전 겁도 없이 내 앞을 가로막았던 그 시녀가 아직 옆에 있는 모양이구나.” 헉! 릴리, 그런 과거가 있었어? 5년 전이라면 언제야? 아타나시아를 처음 만난 날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클로드 앞을 가로막다니? “내가 네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도 그 계집의 입을 통해서였지.” 뭣! 그럼 아타나시아를 살린 게 릴리안이었단 말이야? 클로드가 아타나시아를 죽이려다가 그만둔 건 이름에 흥미를 느껴서였으니까. 그렇다면 내 생명의 은인은 릴리안이 되는 셈이다. 어흐흑. 역시 갓릴리! 언니는 이 빌어먹을 소설에서 내 최애캐였어요! 더군다나 이 무시무시한 놈의 앞을 가로막기까지 하다니! 정말 감동이다. “감히 내 앞을 막아서고도 내 손에 죽지 않은 것은 네 어미와 그 계집이 유일할 것이다.” 아이고. 그 와중에도 이놈은 착실히 살벌하다.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오들오들.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목덜미가 싸늘한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케이크를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가 싶던 클로드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누구인지 아나?” 딸그락. 바로 그 순간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접시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앉아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을지도 몰랐다. 바싹 침이 마른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와 닮은 보석안과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무서워서 당장에라도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의 시선을 피해서는 안 된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시험이다. 전생에 고아로 태어나 험난한 삶을 살며 늘어난 것이라고는 눈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는 내게 호의가 있어 이곳에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래 아타나시아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는데. 아마도 이것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한 변덕. 일순간 그의 흥미를 끈 상으로 대가처럼 주어진 기회. 그는 나를 이대로 좀 더 살려둘지 말지 오늘 다시 결정할 셈이었다. 책에 나와 있지 않았을 뿐, 사실은 9살의 아타나시아도 클로드에게 지금처럼 시험받았던 걸까? 그는 다만 심연 같은 눈동자로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아까보다 한층 더 깊은 따분함이 어려 있었다. ======================================= [9화]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이곳이 내 죽을 자리가 될 것 같았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는 그의 소리 없는 손짓이 흐르는 시간을 반증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손이 뚝 멈추어졌다. “아, 아바마마?” 이런 미친 자야. 반사적으로 말해놓고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여기가 내 묏자리라고 전해라. 아무리 할 말이 없어도 그렇지 이 미친 황제에게 아바마마? 아바마마? 지껄이면 다 말인 줄 아나. 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지! 죽여 달라고 하지! 루비궁의 시녀들이 다들 날 공주라고 부른다고 해서 진짜 아타나시아라도 된 것 같냐? 차라리 그냥 무난하게 ‘존엄하고 위대하신 대제국 오벨리아의 황제 폐하’라고 말하면서 아부나 떨걸. “…….”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클로드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그는 느린 손짓으로 턱을 쓸며 마치 더해 보라는 듯이 두 눈을 나른히 뜬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나 실패한 게 아니었어? 어라,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면 클로드는 제니트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던가? 티 한 점 없는 해맑음을 간직하고 있는, 그 화사한 미소 하나로 주위를 온통 봄빛으로 물들이곤 하던 아름다운 제니트.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며 늘 한 발짝 뒤에서 클로드를 바라보기만 하던 아타나시아와 달리 그에게 먼저 손 내밀기를 주저 않던 사랑스러운 소녀. 그럼……. 그렇다면……. 나는 제니트처럼 될 수도 없고, 또 제니트처럼 그의 마음을 녹이지도 못 할 테지만……. 그래도 단지 흥미를 끄는 것뿐이라면……. 나는 이왕 미친 소리를 꺼낸 김에 좀 더 미친 척을 해보기로 했다. “……파파?” 소름 끼치는 적막감이 주위에 감돌았다. 내가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클로드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짙은 황금색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흐트러지는 것이 보였다. 내 심장은 이미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왜, 왜 반응이 없는 거야. 으아아!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나는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활짝 웃으며 외쳤다. “파파!” ……내가 지금 새로운 데드 플래그를 꽂은 게 아니라고 누가 좀 말해줘! 제6장 공주 팔자가 상팔자라는 건 다 개소리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살아남았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클로드의 시선을 받으며 케이크를 마지막까지 싹싹 긁어먹은 뒤에 기사 오빠의 품에 고이 안겨 내 궁까지 무사 배달되었다. 내가 생사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 시간이 꽤 많이 흘렀는지, 루비궁은 발칵 뒤집혀져 있었다. 방에서 얌전히 낮잠을 자는 줄 알았던 내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증발했으니 모두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릴리는 황제의 직속 호위 기사에게 안겨 온 나를 보고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이대로 쓰러지지 않을지 진심으로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녀는 기사 오빠 필릭스의 손에서 곧바로 나를 받아 든 뒤 마치 역병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릴리의 가슴에 푹 파묻혀 얼굴을 보지는 못 했지만 몸으로 전해져 오는 떨림으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릴리는 부들거리는 팔로 숨이 막힐 만큼 나를 꽉 끌어안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필릭스는 릴리와 시녀들에게 유괴범 취급을 받고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기사 오빠의 편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면 저놈이 나만 혼자 두고 클로드 말대로 방을 나갔으니까! 그 이후 클로드 놈과 단둘이 보냈던 시간을 생각하자면 피눈물이 날 정도였다. 오죽하면 내가 기사 오빠에게 안겨오는 동안 내내 죽은 것처럼 넋이 나가서 축 늘어져 있었겠느냔 말이다. 어흐흑, 이 나쁜 놈들아. 나처럼 무력한 어린애를 괴롭히다니. 천벌받아라. 어흐흑. “폐하께서 조만간 다시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찾으시겠노라 하셨습니다.” 헉. 이런 미친. 지금 뭐라고? 나뿐만이 아니라 시녀 언니들 모두가 기사 오빠의 말에 경악했다. 응? 그런데 뭐야. 왜 다들 두려움 반, 기쁨 반의 표정인 거야? 아, 이런. 뒷방 신세이던 내가 지금 황제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무슨 루비궁에 처박혀 오매불망 황제만 기다리고 있던 후궁도 아니고! 클로드 놈은 또 날 찾긴 왜 찾는다는 거냐! 싫어, 싫어. 으아앙. 하지만 어디 세상이 단 한 번이라도 내 뜻대로 된 적이 있기는 하던가. 황제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기라면 기어야 하는 것이 내 팔자였다. 필릭스가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떠난 뒤 루비궁은 내가 사라졌을 때와 다른 의미로 또다시 발칵 뒤집어졌다. 나는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인지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우웩!” “공주님!” 그 전에 먼저 속 좀 비워내고. * * * 그날 밤 나는 이부자리에 누워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세웠다. ‘플랜 A 실패.’ 꾸깃꾸깃한 하얀 종이가 내 손짓을 따라 검은 잉크로 물들어갔다. 만약 누군가가 이 내용을 본다면 낭패였기 때문에 글씨는 당연히 한국어로 적었다. 나는 방금 적은 글씨 밑에 ‘플랜 C’라고 덧붙여 쓴 뒤 종이의 맨 윗줄에 써놨던 문장에 가로줄을 쫙쫙 그려 지웠다. 내가 제일 먼저 세웠던 계획인 플랜 A는 ‘이대로 죽을 때까지 클로드에게 들키지 않고 루비궁에 짱박혀 산다’였다. 이 경우에는 원래 아타나시아와 클로드가 만나는 시점인 9살의 생일만 특별히 조심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안일한 생각이었다. 지난번 황제궁에서 클로드를 만난 순간 이 계획은 말짱 도루묵이 된 셈이었으니. 아니, 그 심플한 궁이 클로드의 거처일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애초에 황후궁도 아니고 하렘이나 마찬가지인 후궁전이 왜 황제궁이랑 그렇게 가까운 거야? 오벨리아의 선대 황제들은 모두 호색한에 난봉꾼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속으로 잠시 투덜거리다가 방금 전 검은 잉크로 덧칠해 지웠던 부분의 다음 문장을 주시했다. ‘플랜 B : 18살이 되기 전에 도주 자금을 모아 궁 밖으로 토낀다.’ 이건 그래도 아직까지 현실 가능성이 있었다. 원작에서 클로드가 아타나시아를 죽이는 건 18살 때였으니. 물론 내가 4년이나 일찍 클로드를 만나 버리면서 미래가 뒤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놈이 지금 당장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내 예쁜이들을 모으는 계획도 이대로 계속 실행인가? 아마도 궁에서 빠져나갈 때는 시녀로 변장을 하든가 궁 밖으로 연결된 개구멍을 미리 찾아서 그걸 이용하든가 해야겠지. 이건 일단 보류. 그리고 대망의 플랜 C.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엄숙한 얼굴로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글씨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열심히 아양을 떨어 클로드의 하트를 픽업♡ 한다.’ 쓰읍. 그런데 막상 적고 나니 현타가 온다. 나는 방금 전 종이에 쓴 문장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이내 마른세수를 했다. 으으, 현실도피가 시급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클로드를 꼬시겠다니. 하트를 픽업하긴커녕 데드 플래그만 수두룩하게 꽂는 거 아냐? 미쳐 버리겠네. 방금 전 쓴 글자 위에 또 박박 줄을 그어 그냥 지워 버릴까 하다가 결국 나는 종이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팔짱을 꼈다. 그런 내 미간에는 깊숙한 주름이 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예 실현이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 같잖아? 아니, 물론 근거 없는 자신감 같기도 하지만 말이지. 나는 책 내용도 미리 알고 있겠다, 제니트처럼 클로드를 딸바보로 만들지는 못 해도 적어도 죽일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까지는 가까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까도 내가 겁 대가리 없이 ‘파파’라고 했는데도 살려서 보내줬잖아! “으악!” 그러나 아까 일을 생각하자 수치심이 밀려들어서 나는 이불을 빵빵 걷어차고 말았다. 맙소사 ‘파파’라니!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소멸할 것 같다. 그런데 앞으로 이 흑역사를 몇 번이고 새로 갱신할 것 같다는 게 더 수치스러워! “으으어어.” 그렇게 얼마간이나 더 몸부림쳤을까. 마침내 나는 베개 속에 파묻었던 얼굴을 번쩍 들고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좋아. 플랜 B와 플랜 C를 병행하자. 보험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럼 그렇게 결정하고 릴리가 오기 전에 종이 치워야지. 그리고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 얻게 될 나의 흑역사와 부끄러움은…… 크흑. 내 미래를 위한 밑천이자 발판이라 생각하자. “공주님, 이제 주무실 시간이에요.” “릴리, 나 자장자장 해줘!” 나는 릴리에게 안겨 한껏 어리광을 부리며 어렵사리 피눈물을 삼켰다. * * * “릴리안 요르크, 간만이군.” 싫은 일을 앞두고 있을 때는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클로드와 단둘이 밀실에서 생존을 건 다과 시간을 가졌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로부터 열흘 후인 지금 나는 또다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오벨리아의 태양께 영광과 축복을.” 그나마 의지가 되는 것은 이번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릴리도 함께라는 점이었다. 흑. 미안해, 릴리. 하지만 난 클로드가 너무 무서워. 지금도 심장마비 걸릴 것 같아. 후하. 후하. 내가 5살짜리 어린애라 그런지 간도 콩알만 해졌나 보다. 클로드를 보는데 이렇게 쫄리는 기분인 걸 보니. 운동장만큼이나 넓디넓은 알현실에는 나와 클로드와 릴리, 그리고 지난번 보았던 필릭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번부터 느낀 건데 이놈은 황제치고 주위에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짐이 공사다망하여 그간 하나뿐인 공주에게 충분히 신경 쓰지 못했구나. 한데도 아타나시아가 이리 몸 성히 자랐으니 네 공이 작지 않다.” “황공하옵니다.” 웃기지 마라. 넌 충분히 신경 쓰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신경 쓰지 않았잖아! 그뿐이냐. 내 존재조차 완전히 잊어 놓고는. “이제부터는 짐이 공주의 안위를 두루 살필 것이니 염려치 말라.” 콰콰콰쾅. 머리 위로 날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드는 옥좌에 여전히 몸을 나른히 기댄 채로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좁혀 웃고 있었다. 우, 웃어? 지금 쟤가 날 보고 웃었어? 그런데 내가 귀여워서 짓는 그런 푸근한 미소가 아니라 마치 그래서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듯한 섬뜩한 미소다. 그에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방금 한 말 취소. 방금 욕한 거 취소! 그동안 잊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도 몰라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제발 좀 그래주세요! 뭣하면 그냥 호적에서 파주셔도 울면서 고마워할게요. 으흐흑. 하지만 힘없는 소시민인 내가 뭘 어쩌랴. 황제의 말에 릴리도 동공을 사정없이 흔드는 것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 [10화] “금일 이후 아타나시아는 공주로서 그에 걸 맞는 복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넌 날 딸로 인정한 게 아니잖아. 아타나시아를 단 한 번도 딸로 여긴 적이 없다고, 분명 책 속의 클로드가 말했었잖아? 지금도 날 진짜 공주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면서 이게 무슨 말장난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나와 같은 것을 릴리 역시 느낀 모양이었다. 알현실을 빠져나온 뒤에도 릴리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올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공주님.” 내 몸을 끌어안은 채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못 본 사이 살집이 더 늘어난 것 같구나.”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도 클로드와 나는 여전했다. 너랑 나랑 마지막으로 만난 게 닷새 전인데 그사이 육안으로 구분될 만큼 살이 쪘을 리가 있냐! “헤헤, 파파도 예뻐요!” 그동안 클로드와 나는 두 번 더 만나서 부녀간의 살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느낀 건데, 이놈은 내가 당돌하고 발칙하게 군다고 해서 날 죽이려고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겁 많은 아이처럼 행동할수록, 또 판에 박힌 대답을 내놓을수록 그의 얼굴은 무표정해졌다. 나는 클로드가 지루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볼 때가 가장 무서웠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 사람이 지금 나를 살려두는 이유가 잠시 동안의 여흥거리를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도 무서워서 기절할 것 같았다. 릴리가 내 말을 듣고 저 옆에서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클로드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역시 이놈은 들이대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였어! “따라와라.” 그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잠시 동안 나를 내려다보다가 먼저 뒤돌아섰다. 그때에서야 릴리와 필릭스도 참았던 숨을 얕게 내쉬는가 싶었다. 어찌 된 게 나날이 내 목숨 줄이 간당간당해지는 것 같아서 피눈물 난다. “마침 뱃놀이를 가려던 참이니 준비해라.” 준비하긴 뭘. 게다가 ‘마침’ 뱃놀이를 가려던 참이라니. 일부러 지금 이 시간에 맞춰서 불러놓고는 우연인 척하기는! 애초에 내가 무언가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면 미리 지시했을 것이 분명하니 지금 저 말은 ‘닥치고 날 따라와라’라는 의미가 틀림없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공주님께서는 아직 물을…….” “짐과 함께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지?” 바로 그게 문제다, 이놈아! 용기 내 클로드에게 먼저 입을 열었던 릴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황족들의 뱃놀이에 허락받지 않은 사람이 낄 수는 없었으니 여차했을 때 황제에게서 나를 구할 수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지 마, 릴리 언니. 저놈이 또 홱 돌아서 언니한테 해코지하면 어떡해. 하지만 사실은 나도 클로드랑 같이 배를 타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재미가 없군. 죽어라. 이러면서 호수에 퐁당! 빠뜨릴 줄 누가 아는가. 그런데 이 망할 놈은 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굳이 내게 물었다. “나와 동행하는 것이 싫으냐?” “으으응, 아티도 파파랑 같이 갈래요.” 나는 또다시 무해한 미소를 만면에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말에 릴리의 얼굴은 또 새하얘졌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클로드와 오붓하게 뱃놀이를 하게 되었다. 황성이 얼마나 넓으면 뱃놀이할 호수까지 다 있을까. 나는 핼쑥해진 얼굴로 클로드와 마주앉은 채로 호수 위를 둥둥 떠다녔다. 클로드는 나를 직접 안아서 배에 태웠는데, 혹시나 이대로 물에 빠뜨리는 게 아닐까 싶어 난 남몰래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그리고 배에 올라타는 미션을 끝마치자마자 완전히 기력이 쇠해 버렸다. 응? 그런데 이 배, 승선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황족들이 타는 배는 원래 다 이런가? 흔들림도 없이 막 미끄러져! 그런데 이 큰 배에 클로드랑 단둘이 타고 있으려니 여간 간이 쫄리는 게 아니다. 잠깐. 그런데 지금 우리 둘 다 노 같은 거 안 젓고 있잖아. 그럼 이 배는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모터 같은 건가? 아니면 설마 배가 이 층으로 되어 있어서 이 밑에서 노예들이 열심히 발을 구르고 있다던가. 흐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나한테 말 걸지 마. 쳐다보지 마. 으앵. 클로드의 물음에 ‘오늘 날씨가 좋아요!’나 ‘호수가 예뻐요!’ 같은 말을 할까 하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그에게 아부나 하기로 했다. “파파 머리가 빤짝빤짝! 예뻐요!” 하지만 클로드의 머리가 예쁜 건 사실이었다. 색이 연한 내 금발도 예쁜 건 맞았지만 클로드의 꿀 같은 진한 금발은 확실히 더 내 취향이었다. 전생에 하도 없이 살다 보니 금에 한이 맺혔나. 크흑. “빤짝빤짝 조아! 헤헤.” 내 말에 클로드가 갸름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니, 잠깐……. 얘가 이렇게 웃으면 뭔가 불길한데. “그러고 보니 그날도 보석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지.” 쿠구궁! 골인입니다! 아타나시아 선수 정신을 못 차리네요! “네 보물은 내가 고이 간수하고 있으니 다음에 직접 와서 찾아가거라.” ……지뢰다. 지뢰야! 사방이 지뢰밭이라 피할 수가 없다! 으아아! 어쩐지 그날 천사상 앞에 주머니를 전부 두고 와서 충격이었는데 재수 없게도 클로드가 그걸 가져가다니. 으아아, 미쳤다, 미쳤어. 난 진짜 곱게 죽을 팔자는 아닌가 봐. 내가 말을 잃고 있자 클로드는 그새 또 흥미를 잃은 눈치였다. 그의 눈길이 내가 아닌 호수의 저편을 향했다. 그래서 나는 방금 전보다 조금 편하게 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으음. 클로드가 입은 이런 복식이 어느 나라 거더라? 이집트? 그리스? 석유 왕국? 모르겠다. 아무튼 클로드에게는 지금처럼 폼이 크고 느슨한 옷이 참 잘 어울렸다. 온몸으로 무료함을 내뿜고 있는 남자라서 그런가. 지난번에는 사자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햇볕에서 일광욕하는 표범 같기도 하고 그렇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야생의 육식동물인 건 마찬가지다. 처음 봤을 때에는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미처 몰랐는데, 클로드 놈은 확실히 헉 소리 나게 잘생겼다. 제길. 인정하기 싫어. 뭐랄까. 야성적인 느낌의 페로몬계 미남이라 해야 하나. 평소에 그렇듯 오늘도 가운 형태 같은 옷을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 쇄골에서부터 복근까지 언뜻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핫! 안 돼. 코로 피가 몰리는 것 같다. 아타나시아의 어머니인 다이아나도 클로드를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외전에서 본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는데 클로드를 보면 여자들이 불나방처럼 뛰어들 만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는 클로드의 눈은 감탄이 새어 나오리만치 아름다웠다. 온기 한 점 없는 그의 눈동자는 진짜 보석 같았으니까. 지금 이 각도에서는 호수의 푸른 물보다 약간 옅은 청록색으로 보였다. 내 눈도 그러려나? 그렇다고 클로드를 오래 쳐다보기에는 내 담이 작았기 때문에 나는 곧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어? 그리고 신기한 꽃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나 싶었는데 내 시선이 닿은 곳으로 배가 점점 가까워져서 잠시 후 나는 가까이에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우와아. 이거 뭐야? 파란색 연꽃이잖아? 앗, 아니다. 호수물이 파란색이라 그렇게 보이는 것뿐, 신기하게도 꽃잎 자체는 투명했다. 생긴 건 연꽃하고 비슷했는데 꽃잎이 투명하다니. 그런데 연꽃이 호수에도 피던가? 저거 갖고 싶다. 왠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아서 나는 배의 가장자리로 엉덩이를 옮겼다. 클로드가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조차 내 관심을 돌리지는 못했다. 신기하기는 해도 별로 예쁜 꽃도 아니었는데, 왜인지 지금 당장 저걸 손에 넣어야만 할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리고 막 손가락 끝에 푸른빛으로 물든 꽃잎이 닿았다 싶었을 때. 풍덩! 나는 배에서 떨어져 버렸다. “아, 푸!” 순식간에 코와 입으로 물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정신없이 팔다리를 휘저으며 첨벙거렸다. 이거 뭐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보글보글 숨이 막혀 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 클로드와 만난다고 시녀 언니들이 입혀준 드레스는 레이스가 몇 겹이나 덧대져 있어 무거웠다. 잠깐. 난 수영 못 해. 못 한다구. “사, 살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발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물에 젖은 손은 배를 긁기만 할 뿐, 그 위로 몸을 끌어올릴 힘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공포에 젖어 자꾸만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고요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차갑던 몸이 발가락 끝까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클로드는 호수에 빠져 버둥거리는 나를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동요 한 점 없는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안 구해 줄 거야. 저 남자는 나를 안 구해 줄 거야. 이대로 내가 물 밑으로 가라앉아 가는 것을 지금 같은 무감정한 눈동자로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겠지. 첨벙. 그것을 깨달은 순간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발목을 휘감은 무언가가 나를 밑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물속에 잠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폐에 물이 차오르는 느낌은 끔찍했다. 이번 생의 죽음이 익사라니. 배에 타기 직전 했던 생각이 진짜가 되어버렸다. 이래서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아푸!” 개새끼야! “허억! 헉. 윽, 콜록…….” 바로 그때 강한 힘이 나를 물 밖으로 끌어 올렸다. 나는 정신없이 물을 토해내며 기침했다. 눈앞은 어지러웠고 귓가에는 이명이 가득해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세상에, 공주님!”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릴리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귀를 찔러 들어왔다. 나는 클로드가 어느덧 육지로 도달한 배에서 나를 꺼내 호숫가에 내려놓았단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필릭스.” “예, 폐하.” “내일부터 아타나시아에게 물에서 헤엄치는 방법을 가르쳐라.” 그는 물에 젖은 손을 한번 툭 털어낸 뒤 그대로 내게서 뒤돌아섰다. “짐의 딸이 고작 호수 따위에 빠져 익사한다면 수치스럽지 않겠느냐.” 지금 막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제 딸에게 할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의 비정함을 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릴리는 달달 떨고 있는 나를 커다란 수건으로 감싸 안고 달래느라 경황이 없어 보였다. 필릭스는 황제의 말에 차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황망한 표정을 짓다가, 앞서 걷기 시작한 그를 따라 주저함이 서린 발길을 돌렸다. “공주님. 공주님…….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요, 공주님.” ======================================= [11화] 나를 안고 있는 릴리의 손이, 내 귀에 속삭이는 릴리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멀어지는 클로드의 뒷모습이 흐린 시야를 파고들었다. “으…….” 나는 그가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으아아앙……!”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인생에서 이처럼 공포에 질려 눈물이 났던 적은 또 없었다. * * * 병치레 한 번 없이 건강하던 내가 클로드를 만난 뒤부터는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그 자식하고 같이 다과 시간을 보낸 뒤에 체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는 뱃놀이 도중 호수에 빠져 익사할 뻔하기까지 했으니. 그 후 나는 생전 걸려본 적 없던 감기 때문에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 식음을 전폐해야만 했다. 그렇게 릴리와 시녀 언니들의 보살핌을 받는 동안 나는 클로드가 진정한 개새끼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물론 나중에 나를 물에서 건져 주긴 했지만 분명 그놈은 내가 허우적대는 꼴을 보면서도 곧바로 구해 주지 않았다. 나쁜 사이코패스 새끼 같으니라고. 어떻게 5살짜리 애가 호수에 빠져서 죽으려 그러는데 그런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수가 있지? 더군다나 난 자기 딸인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끼쳤다. 하긴. 그런 놈이니까 책에서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아타나시아를 죽여 버렸겠지. 흑흑. 나는 그날 이후 밤마다 악몽을 꾸며 훌쩍훌쩍 울었다. 그럴 때면 방을 나가지 않고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릴리가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안아주었다. 나는 릴리의 따뜻한 품속에서야 겨우 다시 잠이 들 수 있었다. * * * 요즘은 정말 사는 게 뭔가 싶다. 예전 생에서와는 또 다른 의미로 나는 너무나 무력했다. 아마 내가 보통의 어린애였다면 이 일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아 두 번 다시 물은 쳐다보지도 못 했을 것이다. 그냥 금이나 더 모아서 한시 바삐 이곳을 뜨고 싶다. 역시 플랜 C보다는 B가 나한테 여러모로 이로울 것 같다. 내가 저 흉악한 사이코패스 자식을 무슨 수로 꼬셔? 와, 새삼스럽게 내가 참 헛된 객기를 부렸었구나 싶다. 나 이 황궁에서 언젠가 벗어날 수는 있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내 예쁜이들도 두 개나 클로드에게 뺏겨버렸지. 이 나쁜 자식! 그는 나한테 직접 와서 보물을 찾아가라고 말했지만 내가 미쳤나. 그 악의 소굴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게. “한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 의욕이 안 생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생의 최대 장점을 이용해 바닥을 치고 있는 삶의 의지를 끌어 올려보기로 했다. “쪼꼬 줘.” 삥을 뜯는 것처럼 손을 척 내밀고 있는 나를 향해 한나가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나 지금 재롱부릴 기분 아니야. 내 마음은 지금 아주아주 시꺼멓게 피폐해져 있다구. “쪼꼬.” “아, 안 돼요. 릴리안 님이…….” “쪼꼬 머글래.” 하지만 내가 거듭 보챘는데도 한나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아마 릴리에게 단단히 주의를 받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나를 만날 때마다 어울리지 않게 달달한 케이크를 내주는 클로드 때문에 요즘 내 당분 섭취가 늘기는 했다. 하, 참. 그럼 하는 수 없지. 나는 한나를 향해 내 필살기를 내보였다. “언니, 아티 쪼꼬 먹고 시퍼요.” 한나의 얼굴이 몽롱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자, 내 반짝반짝 공격을 받아라! “이, 이러지 마세요.” 반짝반짝. “정말 안 돼요, 공주님! 죄송해요!” 그런데 한나는 결국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는 듯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뭐야, 뭐야! 어디 가! 내 초콜릿! 초콜릿 주고 가! “한나!” 말도 안 돼. 한나가 내 반짝이 공격을 이겨내다니! 아무래도 요즘 정신적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내 애교 레벨이 많이 하향된 모양이었다. 크으으, 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못 먹을 줄 알고? 나는 시녀들의 눈을 피해 몰래 부엌에 숨어들었다. 이 궁에 산 지도 어언 5년째라 시녀 언니들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초콜릿이나 사탕을 어디 숨겨두는지도 알고 있지! 나는 살금살금 부엌으로 들어섰다. 애 같은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초콜릿을 향한 집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야, 이전 생에서 이런 것들은 나한테 완전 사치품이었는걸! 하루에 한 끼만 먹거나 그마저도 편의점의 유통기한 지난 김밥으로 겨우 겨우 배를 채우는 신세였는데 이런 기호품이라니. 꿈꾸는 것조차 사치였다, 나에겐. 그러니까 먹을 거야, 초콜릿! 눈을 번뜩이며 조용히 주위를 살펴봤지만 역시 내 예상대로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신이 나서 초콜릿이 있는 선반으로 달려갔다. “세스, 어디 가?” “잠깐만. 냄비 뚜껑을 안 닫고 온 것 같아서.” 헉! 그러다 갑자기 문가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숨기고 말았다. 부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차도녀 시녀 언니 세스였다. “역시 뚜껑이 열려 있네.” 앗. 그럼 굳이 내가 초콜릿을 훔쳐 먹을 필요도 없이 그냥 지금 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 하필 이 타이밍에 만난 것도 운명인데! “어…….” “앗! 벌레!” 내가 그녀를 부르려 막 입을 열었을 때, 갑자기 세스가 날카롭게 외치며 눈을 번뜩였다. 쿵! 콰직! 잠시 후 그녀의 뾰족한 구두 굽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완전히 뭉개져 처참한 몰골이 된 바퀴벌레였다. “더러운 벌레가 감히 부엌에 발을 들이다니.” 나는 귓가에 울리는 서늘한 목소리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궁 청소를 좀 더 서두르자고 릴리안 님께 말씀드려야겠어. 공주님도 계시는 궁에 바퀴벌레라니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군.” 여, 역시 세스 언니는 루비궁의 세X코야! 벌레 잡는 달인 같은 저 신의 발놀림! “그런데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그, 그렇지만 지금 나가지는 말아야지. 물론 세스가 나를 저 바퀴벌레 대하듯이 할 리는 절대 없었지만 바닥에 짓뭉개져 있는 벌레 사체를 보니 뭔가 좀……. 지금 나가도 초콜릿을 주는 게 아니라 릴리한테 말해서 날 혼낼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내가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자 세스는 잘못 들었다 싶었는지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엌을 나섰다. 나는 그제야 몸을 숨기고 있던 선반 뒤쪽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으흑. 오늘따라 초콜릿을 쟁취하기 위한 여정이 쉽지 않구나. 나는 문 쪽을 힐끔거리며 다시 초콜릿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부스럭. 헉? 그런데 갑자기 옆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혹시나 또 누가 들어온 걸까 싶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정적이 바닥 위를 한차례 굴러갔다. 뭐지? 잘못 들었나?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몇 년 전부터 시녀 언니들이 틈날 때마다 떠들던 ‘부엌의 귀신’ 얘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헉.” 얼마 전의 일 때문인지 어젯밤에도 머리를 미역 줄기처럼 늘어뜨린 물귀신이 내 발을 잡아당기는 꿈을 꾸었던 참이라 나는 더 섬뜩해졌다. 그동안은 클로드가 했던 일 때문에 헛소문이 돌아다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갑자기 그 소문이 이제까지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 한 명 없이 침묵만 가득한 부엌은 몇 년간 관리가 잘되지 않은 탓인지 천장에 달린 불빛까지 깜빡이고 있어 더욱 음침해 보였다. 그동안 가끔씩 릴리 몰래 부엌에 와 초콜릿을 훔쳐 먹은 적이 있었지만 이곳이 이토록 을씨년스럽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귀신이 두세 마리는 살고 있을 것처럼 생겼잖아? 갑자기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귀신이 쨘! 하고 나타나 내 어깨를 덥석 붙잡을 것만 같았다. “공주님!” 덥석! 그래, 바로 지금처럼……! “으아아악!”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경기할 듯 비명을 내질렀다. 귀신이다! 귀신이 내 어깨를 잡았어! 클로드가 죽였다던 루비궁의 시녀가 악령이 되어서 나를 잡으러 왔나?! 아니면 어제 꿈에서 봤던 물귀신이 쫓아온 건가?! “어머, 공주님!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어요?” 하지만 내 뒤에서 나타난 것은 릴리였다. 그녀는 내가 자지러지자 나 못지않게 깜짝 놀란 듯했다. “공주님, 빨리 나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릴리는 무언가 급한 일이 있는 듯, 나를 제대로 달래기도 전에 황급히 안아들었다. 앗! 그런데 내가 부엌에 있는 걸 들켜 버렸잖아. 게다가 내 손에는 선반 바구니 속에 있던 초콜릿이 그새 두 개나 들려 있었다. 핫. 역시 내 순발력이란…… 이 아니라. 나는 릴리 몰래 손에 있던 것을 슬쩍 소맷자락 속에 집어넣었다. 눈치를 보니 릴리는 내가 부엌에서 초콜릿을 슬쩍한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이러지? 그리고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릴리의 품에 안겨 있는 나를 향해 읍하는 시녀들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다 몇 명이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나는 내 앞에 일렬로 선 시녀들을 대강 서른 명까지 세다가 포기했다. 이 언니들이 오늘부터 나를 모시게 될 거라고? 예전에 고깃집에서 알바를 하다가 곁눈질로 봤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기름 떼가 덕지덕지 낀 불판을 닦던 내 신세와 너무도 비교되어 부러움의 감정은커녕 실소만 자아내던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재벌 2세 여주인공의 로맨스를 그린 그 드라마는 당시 꽤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현실성이 하나도 없이 유치뽕짝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내가 본 장면은 여주인공이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현관 앞에 정렬해 그녀를 맞이하는 장면이었다. “오늘부터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임시 호위 기사로 명받았습니다.” 내가 얼떨떨하게 있는 사이 옆에 서 있던 필릭스가 내 앞으로 걸어와 부복했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니? 클로드는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또라이였다. 나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는 온몸이 폭삭 젖은 채로 달달 떨고 있는 내게 일말의 온정도 느껴지지 않는 모진 소리를 했으면서, 오늘은 내 궁에서 일할 시녀들과 호위 기사를 친히 하사해 주었단다. 더군다나 필릭스는 황제인 클로드가 늘 옆에 두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임시라지만 그런 사람을 빌려주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폐하의 성은에 감읍하나 어찌 로베인 경을…….” 릴리 역시 미리 소식을 듣지 못한 듯 몹시 당황하고 놀란 눈치였다. 그러자 필릭스가 나를 쳐다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 [12화] “이러나저러나 공주님을 아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필릭스가 하는 말에 뒷목이 저렸다. 이것 봐, 기사 오빠. 당신도 지금 ‘이러나저러나’라고 했잖아! 아끼기는 개뿔. 그 말을 누가 믿는다고. “그, 그러신가요.” 그것 봐. 오죽하면 릴리가 말을 다 더듬겠느냐고! “예. 폐하께서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정식 호위 기사를 심사숙고하고 계시니 아마 공주님 곁에 오래 머물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필릭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하면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공주님.” 아무튼, 그렇게 해서 클로드의 기사 필릭스는 매우 수상쩍은 방식으로 내 임시 기사가 되었다. * * * 알고 보니 클로드가 내게 궁인들을 직접 하사한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는 내 궁에 시녀들을 추가로 더 보내준 것이 아니라 아예 기존에 있던 시녀들과 교체해 버렸다. 그 말인즉, 그동안 내가 열심히 구워삶았던 시녀 언니들이 몽땅 다 내 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녀들이 내 궁에 온 바로 그날 저녁 나는 그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내 원래 시녀 언니들이 보고 싶어서 떼를 써도 릴리는 난처한 표정만 지었다. 듣자 하니 내 시녀들은 이미 오늘 아침 이곳을 떠나 곧바로 다른 궁으로 배치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몹시 골이 났다. 시녀들이 루비궁의 보물들을 훔칠 때에도 내게 관심조차 주지 않던 클로드가 이제 와 내 궁인들을 멋대로 갈아치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무리 황제의 명이라지만 군말 없이 궁을 떠난 시녀들에게도 서운했다. 그럴 만한 일이 아니란 것을 머리로는 아는 데도 사람 마음이란 것이 참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게다가 이번에 새로 온 시녀 언니들은 내 애교에도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기 일쑤라 나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역시 같은 시녀라도 버려진 공주의 궁에 보내진 하급 시녀와 황제가 엄선해 보낸 시녀들은 다른 것일까. 내가 그 언니들을 어떻게 꼬셨었는데! 어흐흑. “한나랑 세스 보구 시퍼.” “공주님이 원하신다면 꼭 다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언제?” “으음, 열 밤 후에?” 나는 어른들이 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들이 아이들을 속일 때 하는 대표적인 거짓말 아닌가? 게다가 전생의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부모님을 찾을 때마다 밥 먹듯이 들었던 소리도 바로 저것이었다. 내 입이 불룩 튀어나오자 릴리는 그런 나를 달래려고 또 진땀을 뺐다. 옆에서 그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필릭스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폐하께 한번 말씀드려 보시면 어떨까요.” 그 말에 나도 릴리도 미쳤냐는 듯이 필릭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무슨 말실수를 했냐는 양 오히려 우리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중에 필릭스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호숫가 한가운데 있던 그 연꽃은 무려 마법 생물로, 사람을 현혹해 물에 빠지게 한 다음 양분을 빨아먹는 무시무시한 식물이라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해준 기사 오빠 때문에 나는 눈앞이 아찔해져 한동안 넋을 놓아야만 했다. 필릭스는 그런 위기에서 나를 구해 준 클로드의 능력과 멋짐을 어필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오히려 클로드를 향한 분노와 함께 이번 생에 대한 회의감이 우르르 달려들었을 뿐이다. 클로드 이 멍멍이 자식! 그런 상황에서 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다니! 아, 또 생각했더니 혈압이 오른다. “마침 폐하께서 오늘 만찬 시간을 공주님과 함께 보내고 싶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덧붙여진 필릭스의 말에 한껏 치솟던 혈압은 순식간에 푸스스 떨어져 버렸다. 나는 사색이 된 얼굴을 릴리의 품에 파묻었다. ……나 아무래도 한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띠링. 로그아웃을 신청합니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크아앙……! * * * “공주님, 그러지 마시고…….” “싫어!” 나는 릴리의 난처한 표정을 못 본 체하며 홱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폐하를 뵙는 자리인데…….” 우리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이유는 바로 내 옷차림 때문이었다. 클로드와의 만찬 시간을 위해 릴리가 드레스를 갈아입자고 했으나 내가 강력히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내가 지금처럼 우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릴리는 다소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왜 클로드 놈을 위해 귀찮게 치장까지 해야 하느냐 이 말이다! 물론 나라고 해서 아직 플랜 C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수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처음 클로드와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일까. 도무지 그놈에게 잘 보이기 위해 꽃단장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날도 시녀 언니들이 주렁주렁 입혀준 드레스 때문에 몸이 무거워서 더 빨리 물에 가라앉아 버렸고. 그리고 지금의 옷이 아무리 수수하다고 해도 클로드를 만나기 전에 입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화려한 편인데 굳이 갈아입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클로드가 언제 나를 부를지 모른다는 이유로, 그리고 또 모름지기 공주라면 언제나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시녀 언니들이 항상 내 복장에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베인 경도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내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꿈쩍도 않자 릴리가 필릭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흥. 무슨 말을 하던 절대 안 넘어갈 테다. 난 지금 5살이니까 떼 쓸 권리도 있는 거라고. 필릭스는 릴리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해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어떤 복장이셔도 사랑스러우십니다. 분명 폐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테지요.” 쿨럭. 물론 내가 귀엽고 깜찍하긴 하지만 그건 좀 아니지 않니. 클로드가 날 보고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물론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릴리는 거기에 또 설득된 듯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그럼 머리라도 다시 만져 드릴게요.” 그녀는 결국 포기한 듯 내가 앉아 있던 의자 뒤로 다가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릴리의 풀 죽은 얼굴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으으, 물에 빠진 내 모습을 그렇게 건조한 눈빛으로 지켜만 보고 있던 놈한테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떨어야 하다니. 흑. 더러워. 치사해. 그래도 결국 나는 내 머리 모양에 심혈을 기울이는 릴리를 말리지 못했다. “자, 가시죠. 공주님.” 최소한의 단장을 끝마치고 나서 필릭스가 나를 안아 들었다. 루비궁과 황제궁이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우니 이대로 나를 안고 걸어서 가려는 것이다. 뭔가 공주의 이동 방식치고는 참으로 심플했으나 그래도 요란한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나는 릴리에게 다녀오겠다고 손을 흔들어준 뒤 다른 시녀들의 공손한 배웅을 받으며 필릭스와 함께 루비궁을 나섰다. 알고 보니 루비궁과 황제궁을 잇는 길은 지난번 내가 잘못 들었던 화원만이 아니었다. 필릭스는 분수대 옆의 잘 닦인 길을 이용해 나를 황제궁까지 데려갔다. 처음에는 꽤나 훈남인 기사 오빠에게 안겨 간다는 게 좀 낯부끄러웠지만 몇 번인가 이 짓을 하면서 이제는 나도 꽤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필릭스도 많이 발전해서, 처음과 달리 나를 제법 안정감 있게 들고 있었다. “폐하,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드셨습니다.” 그런데 이 궁, 정말 삭막하기 짝이 없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도대체 왜 시녀들이나 시종들이 한 명도 없는 거지? 심지어는 황제의 방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조차 없어서, 지금도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필릭스가 직접 클로드에게 내 방문을 고하고 있지 않은가. “오빠, 오빠.” 궁금해서 못 참겠다. “왜 파파 궁에는 다른 기사 오빠들이랑 언니들이 아무도 없어요?”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어 한 번 더 입을 여는 필릭스를 향해 나는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내리며 대답해 주었다. “궁인들이 없는 까닭은 폐하께서 무엇이든 손수 하시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궁을 지키는 기사들이 없는 것은…….” 그러면서 필릭스가 이어서 지어 보인 미소에 나는 조금 알쏭달쏭해졌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럴 필요가 없다니? 아니, 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야? 황제궁이면 당연히 다른 궁보다도 예산이 빵빵할 테고, 일단 황제가 살고 있는 곳이니 일하는 사람들도 제일 많아야 하는 것 아닌가. 혹시 클로드 놈이 또라이라서 다들 알아서 피한다는 얘기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저를 그리 칭하시면 안 됩니다. 필릭스나 로베인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으응.” “말씀도 편히 놓으시고요.” 그런데 필릭스는 내 의문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다시 눈앞에 있는 방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폐하께서 아무래도 오수 중이신가 봅니다.” 뭐야? 사람을 불러 놓고 자기는 자고 있어? 와, 진짜 이 똥 매너. 하지만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몰랐다. 이건 다 클로드가 자고 있던 탓이니까 난 그냥 루비궁으로 돌아가도 되는 거 아니야? 필릭스가 증인을 해주겠지. “그럼 아티 그냥 갈래.” “그러지 마시고…….” 그런데 잠시 동안 나를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필릭스가 이내 덧붙인 말은 아주 기가 막혔다. “안으로 들어가 보시겠어요?” ……네?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것이겠죠? 아무래도 요즘 몸이 허하다 보니. 하하……. “공주님께서 직접 깨워주신다면 폐하께서도 더 기꺼우실 겁니다.” 달칵.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필릭스는 눈앞에 있는 육중한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미처 당황할 새조차 없이 부드러운 손길에 등을 떠밀려 그 벌어진 틈 사이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럼 전 여기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탁. 미소 짓고 있는 필릭스의 얼굴이 닫힌 문 뒤로 사라졌다. “이, 뭐, 잠깐…….” 나는 황당함에 젖어 닫혀 있는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내 팔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필……!” 문 뒤에 서 있을 필릭스를 부르려고 했으나 나는 곧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지금 소리를 지르면 클로드 놈이 깨는 거 아니야?! 와, 진짜 필릭스 이 나쁜……. 나는 어쩔 수 없이 문을 등지고 뒤돌아섰다. 그러자 역시나 문 밖과 마찬가지로 살풍경한 방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망할…….” 난 아무래도 최종 보스의 방에 진입해 버린 모양이다. 제7장 위급 상황! 보스몹을 만났는데 피가 딸립니다! 그동안 황제궁에서 클로드를 만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안쪽에 있는 방까지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방금 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일어나버린 건 아닐까? 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시끄럽게 군다고 나한테 해코지하면 어떡해! 난 개복치다. 개복치는 많이 약하다. 이대로 돌연사해 버릴 거다. 그러니까 개복치 많이 아껴줘야 한다! ======================================= [13화] 그런데 실내는 바늘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것처럼 조용했다. 다행스럽게도 클로드는 잠귀가 어두운 편인 것 같았다. 잠깐. 생각해 보니 내가 굳이 클로드를 깨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아무리 기다려도 안쪽에서 소식이 없으면 필릭스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와 보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나는 그냥 필릭스가 알아서 저 무거운 문을 열고 여기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살펴본 클로드의 방은 황제가 사용하는 방답게…… 평수만 컸다. 여기 정말 황제의 침소 맞니? 뭐 이렇게 심플하지. 심지어 루비궁의 내 방보다도 허전한 것 같다. 이상하다. 듣기로 전 황제는 폭정뿐 아니라 사치까지 엄청났다고 하던데 여기는 선황제가 쓰던 방이 아닌 것일까? 클로드 성격에 다른 사람이 쓰던 방을 개조까지 할 만한 열의는 없을 것 같은데. 운동장만큼 넓은 방이 워낙 휑해서 저 멀리 있는 큰 침대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베일이 길게 드리워져 있어 안쪽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니, 그런데 침대가 이렇게 문에서 훤히 보이면 위험한 거 아니야? 원래 황제면 암살 기도도 있고 막 그런 것 아닌가. 이건 완전 나 잡아 잡수쇼, 하는 것 같은데. 하긴. 클로드가 죽든 말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그것보다 벽에 걸린 저 세계지도 왠지 내 레이더를 건드리는데? 나는 아까부터 내 시각을 자극하던 것을 향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헙.” 그리고 이내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감탄이 새어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말았다.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맞았다.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운 세계지도는 전부 눈부신 황금이었다. 더군다나 겉면만 도금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로 판화 찍듯이 만든 것 같다. 헐, 세상에.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이런 건 처음 본다. 너무 감동이야. 크으, 역시 황제궁이구나! 이런 걸 벽면에 붙이고 있다니. 나도 이거 하나만 있으면 금촛대도 금딸랑이도 필요 없어! 설마 저쪽 벽에 걸린 것도 금인가? 나는 흥분에 차서 거의 뛰다시피 카펫 위를 가로질렀다. 클로드, 혹은 선황제는 그림을 모으는 취미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장식품은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 오직 액자만이 가득가득했으니. 사이즈도 세계지도만큼은 아니어도 완전 특대였다.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성서 속의 한 장면을 그려 넣은 것 같은 그림도, 깜찍한 아기 천사들과 눈 돌아가게 예쁜 천사 언니들이 그려진 그림도 전부 호화로운 금 액자 속에 보관돼 걸려 있었다. 앗! 이 그림은 최초의 여왕이었던 앰브로즈의 대관식 장면이다. 릴리가 공부용으로 가져다줬던 책에서 이거랑 비슷한 거 본 적 있어. 아무튼, 그림들이 엄청나게 큰 만큼 그 틀인 액자들도 어마어마한 사이즈를 자랑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들이 세 명 정도 모여 양팔을 쫙 뻗으면 이 정도 넓이가 될까. 게다가 이게 다 금이라니! 심지어 바닥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깨진 액자까지도 전부 금이었다. 응? 그런데 이런 먼지 앉은 액자를 왜 안 치우고 있는 거야? 혹시 이거 버리는 거면 나 주면 안 되니……. 나는 입맛을 다시며 뽀얗게 먼지가 앉은 액자를 보다가 이내 방금 전 보았던 세계지도를 다시 한 번 보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마지막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없었다면. “…….” 나는 지금 막 보았던 액자를 향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벽에 걸린 다른 호화로운 그림들과 달리 구석진 곳 바닥에서 하얀 먼지를 담뿍 먹고 있던 깨진 액자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그것은 어떤 여인의 초상화였다.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세기의 미인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어지간히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귀부인이었던 듯 그림에 나와 있는 여인의 머리끝에서부터 손끝까지는 온통 화려한 장신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 화려함만으로 보자면 일국의 황후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아한 목선을 드러내며 틀어 올려진 머리카락은 따스한 색채의 담갈색. 그리고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초원을 닮은 녹빛이었다. 그저 책 속에서 단 몇 페이지에 걸쳐 설명되었던 글을 읽었을 뿐 당연히 실제로 본 적은 없었는데도……. 나는 그림 속의 여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로테스크하게 깨진 액자의 표면 위로 지저분하게 얼룩진 검은 자국이 유독 선하게 눈에 박혀든 것은. “으음.” 괜히 봤네. 나는 매우 찝찌름한 기분에 휩싸여 미간을 구겼다. 왠지 봐서는 안 될 걸 본 기분이었다. 하, 그냥 안 본 걸로 해야지. 난 지금 아무것도 안 봤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진짜다, 정말이다! 그렇게 되뇌며 눈을 감고 고개를 마구 휘젓다가 이내 뒤돌아섰을 때. “헉!”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심장을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왜, 왜, 왜, 왜 클로드가 침대가 아니라 여기 있는 거야! 검은 가죽 소파 위에 한가득 흐트러진 황금색이 유독 뚜렷이 눈에 박혀들어 왔다. 클로드는 기다란 소파에 미동 없이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세계지도가 걸린 곳에서는 소파의 등받이 때문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 반대쪽인 이 위치에서는 클로드가 누워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드러나 보였다. 헉, 허억. 너무 놀라서 심장이 떨어진 것 같다. 당연히 침대에서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낚시질을 하다니. 내가 깜짝 놀라서 심장마비라도 걸렸으면 어쩔 뻔했어! 그런데 아직까지도 진정이 되지 않아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나와 달리 클로드는 한 번 뒤척이는 일조차 없이 참으로 편안하게도 잠들어 있었다. 으어, 얄미워. 한 대 때리고 싶다. 한 대만 쥐어박고 싶어. 진짜 딱 한 번만 때려보면 안 되나? 나는 갑자기 억울해져서 몹시도 불건전한 마음을 안고 클로드가 누워 있는 소파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다른 때와 달리 나와 비슷한 눈높이에 있는 얼굴을 보고 갑자기 기분이 미묘해졌다. 거참. 동화 속 왕자님처럼도 자고 있네. 눈을 감고 있는 클로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순하고 착해 보였다. 물론 난 무심코 이 생각을 해놓고 소름이 돋아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어야만 했다. 내 눈이 잠깐 맛이 갔나? 누가 온순하고 착해 보여? 얘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이코 클로드가? 그런데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눈앞에 잠들어 있는 얼굴은 흡사 저 벽에 걸린 그림 속의 성자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법했다. 이러고 있는 것만 보면 꽤 내 취향인데. 그냥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말아주면 안 되겠니? 나는 왠지 착잡한 기분으로 클로드를 보다가 그의 얼굴 위로 휘휘 손을 내저었다. 필릭스가 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도, 그리고 내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도 깨어나지 않은 걸 보면 정말 깊이 잠든 게 맞는 모양이었다. 만약 내가 이놈을 죽이러 들어온 암살자면 어쩌려고 이리도 속 편히 자고 있는지. 아무튼 잘됐다. 너 딱 한 대만 맞아라. 앞으로 언제 이놈을 때려볼 수 있을지 모르니 지금이 기회였다. 게다가 호수에서의 일도 당연히 잊지 않았고! 나 뒤끝 있는 여자야, 왜 이래! 나는 어느 부위를 때릴까 고민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얼굴은 티가 날 것 같아서 이내 그의 몸통을 노리고 손을 올렸다. 휘익! 툭! 그런데 바로 그때, 내 소매 속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재수 없게도 클로드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춘 뒤 튕겨나가 바닥에 깔린 카펫 위를 나뒹굴었다. 그건 바로 오늘 낮에 내가 부엌에서 몰래 꺼내와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초콜릿이었다. 으아아……! 릴리에게 들킬까 봐 소매에 슬쩍 넣어놨던 건데! 클로드가 보낸 시녀들을 맞이하는 동안 초콜릿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오늘따라 옷도 안 갈아입고 왔었지. 나는 초콜릿에 얻어맞은 클로드가 혹여나 깨어날까 봐 한껏 숨을 죽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클로드의 눈이 떠졌다. “…….” “…….” 나는 그를 향해 손을 치켜 올리고 있는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클로드는 눈을 한두 번 느리게 깜빡이다가 이윽고 건조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깊은 숙면을 취하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게도, 내 얼굴에 못 박혀 있는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마침내 나는 클로드를 힘껏 내려치기 위해 들었던 손을 그의 가슴팍 위로 사뿐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클로드의 가슴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자, 자장자장…….”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죠……? 무심결에 내가 한 짓을 깨닫고 나는 속으로 마구 비명을 내질렀다. 으앙, 으아앙! 도대체 나한테 뭘 어쩌라고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야! 지금 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버린 거 맞지? 이거 위급 상황인 거지?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클로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빤히 나를 쳐다보기만 하는 시선에 이미 내 머릿속은 공황 상태였다. “달님이 웃네요. 오늘은 안녕. 아가도 별님을 보고 웃어요.” 어흐흑. 이런 미친! 왜 당황하기만 하면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니.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클로드한테 자장가라니, 제발 그만해! “내일은 더 반짝이는 아침이 올 거야. 예쁜 꿈만 꾸세요. 잘 자요, 우리 아가.” 나는 혹여나 내가 클로드를 때리려 했던 것을 그가 알아차릴 새라 혼신의 힘을 다해 자장자장 클로드의 가슴을 토닥였다. 그러고 보니 클로드가 눈을 떴을 때 나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지? 어떻게 하면 찰지게 때릴까 생각하느라 완전 처키 같은 표정 짓고 있었던 거 아니야? 어흐흑. 왜 자꾸 내 명줄 깎아먹을 일만 생기는 것 같지. “그게 무슨 노래지?” 그런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내가 하는 짓을 가만히 두고 보는가 싶던 클로드가 마침내 입을 열어왔다. 나는 구명줄을 잡듯 냉큼 대답했다. “나쁜 꿈이랑 빠이빠이 하는 노래예요.” 이 자식, 자장가도 모르나. 시녀 언니들이 말하기를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이 자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하던데. 하지만 자장가라고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좀 그래서 나는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돌려 설명했다. 그리고 검은 속내를 숨기며 천진난만한 척 웃어 보였다. “파파, 좋은 아침이에요!” 그런데 클로드의 표정이 일순간 미묘해졌다. 물론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 내가 잘못 보았나 싶기도 했지만. 무표정한 얼굴의 클로드가 툭 내뱉은 말에 나는 티 나지 않게 웃고 있는 입매를 꿈틀거리고 말았다. “지금은 아침이 아닌데.” “좋은 저녁이에요!”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되겠냐. “필릭스가 들여보냈나?” 그는 자신의 침소에 있는 나를 보고 모든 정황을 금세 추리해 낸 듯했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클로드가 눈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나른한 손짓으로 쓸어 넘겼다. ======================================= [14화] 방금까지 누워 있어서 그런지 머리카락도 평소보다 자연스럽게 헝클어져 있었고 현재 입고 있는 옷도 가슴 부위가 벌어져 잘 짜인 근육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엇, 부끄러워. 이건 왠지 좀 부끄러운데. 내가 비록 겉모습은 꼬꼬마라지만 속은 과년한 처자인데! 클로드는 그런 나를 모른 채로 왼쪽에 위치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덧 밖에는 노란 석양이 뉘엿뉘엿 무르익어 있었다. 그는 맹수가 기지개를 펴듯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읊조렸다. “만찬은 이곳에 준비시켜야겠다.” * * * “낯빛이 환한 것을 보니 그간 잘 지냈나 보구나.” 클로드와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지난 뱃놀이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황제의 침소 한가운데 마련된 탁자에 앉아 그 위에 펼쳐진 음식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요리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것이 하나같이 군침이 날 만큼 맛있어 보였지만 황제의 식단치고는 제법 검소한 면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의외라고 생각하다가 클로드가 꺼낸 말에 황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내가 아팠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데도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물론 저놈이 날 찾아와봤자 내 화병만 가중되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아무튼, 딸이 아프다는데 병문안을 오지는 못할망정 신수가 훤해졌다는 소리나 하는 클로드 때문에 나는 몹시 어이가 없었다. ‘많이 아팠다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니?’라든가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같은 온정 어린 한마디를 원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아? 하긴. 네가 괜히 클로드겠니. “파파도 예뻐졌어요!” 하지만 난 힘없는 소시민. 잊지 말자. 플랜 C다, 플랜 C. 플랜 B를 위해서라도 이놈에게 오늘내일 죽지 않을 만큼 잘 보여 두는 건 필요해!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어! 나는 클로드의 말을 받아치며 실없이 보일 정도로 해죽 웃었다. 내 웃는 얼굴에 클로드의 눈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 호수에 빠져 어제까지도 골골대던 애가 이렇게 생긋생긋 웃고 있으니까 신기하냐? 클로드는 내 맞은편에 나른하게 앉아 손에 턱을 괴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치명적인 매력을 뽐내고 있는 거지? 지금 나 홀리려고 작정했니? 저것도 참 재주다. 물론 그래 봤자 난 안 넘어갈 거지만! “들어라. 특별히 네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만 준비했다.” 그래서 그게 고기인 거야? 이거 지금 나 통통하다고 까는 거지? 지금 돌려서 욕하는 거지? “잘 먹겠슴니다.” 물론 그렇다고 못 먹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클로드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와, 완전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 클로드는 매일 이런 걸 먹고 있단 말이야? 내 궁에서도 이런 비싸 보이는 고기가 나오긴 했지만 이런 맛에 이런 품질은 아니었는데, 이건 차별이다! 그런데 어린 내가 들기에는 식기가 좀 많이 무거웠다. 게다가 고기를 자르지도 않고 줘서 내가 하나하나 일일이 썰어서 먹어야 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식탁이 너무 높아! 끼익, 결국 내 손에서 엇나간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으헉. 그 순간 나는 숨을 멈추었다. 창피한 건 둘째 치고서라도 일단 클로드의 눈치가 보였다. 서, 설마 불쾌한 소리를 냈다고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나한테 던지는 건 아니겠지? “예법 공부를 더 해야겠구나.”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클로드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지막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휴, 십년감수했다. “내일 궁으로 사람을 보내마. 근본 없는 것들에게 배워 그런지 지적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영 성가시군.” 뭐? 지금 네가 내 시녀 언니들을 깠니? 근본 없는 것들이라고? 그 언니들도 다 귀족이야 왜 이래! “이제부터는 좀 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라.” 아, 그래요. 너님은 황족이시죠.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으나 앉은 자리가 식탁의 끝과 끝이었기 때문에 들키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식탁이 무식하게 커서 다행이다. 허허.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나는 오히려 클로드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아티 열심히 할게요, 파파!” 그러자 클로드가 그런 나를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는가 싶었다. 그동안 티타임을 표방한 고문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낸 날들이 적지 않지만 저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런데 뭔가 해괴한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이라 기분이 영 찝찌름하다. 클로드는 밥을 먹는 내내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 체할 거 같아. “파파, 잘 자요! 빠이빠이!” 그렇게 나는 클로드와 함께 참으로 길었던 만찬 시간을 보낸 뒤 다시 필릭스에게 안겨 루비궁으로 배달되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내게 편안한 밤을 보내라고 인사했지만 나는 평소와 달리 그의 인사를 받아주는 법 없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에 릴리가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나는 필릭스에게 단단히 삐져 있었다. 그야,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나를 덜컥 클로드의 방에 집어넣지 않았던가! 으으으, 거기에서 내가 당해야 했던 살 떨리는 일을 생각하자면 필릭스의 머리를 쥐어뜯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다. 흑흑. 그래도 믿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클로드에게 넙죽 들이밀어버리다니. 필릭스는 토라진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거리는 얼굴로 뒤돌아서 나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릴리, 나 자장가 듣고 싶어.”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무렵, 나는 릴리에게 애교를 부리며 졸랐다. 그녀는 내 어리광에도 기분이 좋은 듯 후후 웃다가 이내 이불에 덮인 내 몸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그럼 한 곡 불러드릴까요?” 곧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귓가에 번져 들었다. “살금살금 밤이 오면 나를 위해 꽃을 꺾어주세요. 어여쁜 별님이 인사하며 웃어주네요.” 크으. 역시 내가 엉망으로 불렀던 자장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오늘도 이불을 좀 걷어차고 싶지만 릴리 앞이니 참아야지. “오늘은 안녕. 내일은 더 반짝이는 아침이 올 거야.”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절로 눈이 감겼다. 누군가 나만을 위해 불러주는 자장가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비록 지금 내가 자장가를 들으며 잠을 자기엔 나이가 심하게 많긴 했지만. “예쁜 꿈만 꾸세요. 안녕. 잘 자요, 우리 아가.” 내일은 또 어떤 버라이어티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전부 다 잊고 자자. 푹 자야지 키도 쑥쑥 크고 무럭무럭 자라지. 눈 감았다 뜨면 10년 후였으면 좋겠다. 크흑. “잘 자요, 우리 아가.” 릴리도 잘 자! 나는 재수 없는 클로드의 얼굴을 떨쳐 버리려 애쓰며 릴리의 옥구슬 같은 노랫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매일 밤 그렇듯,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꿈꾸면서. 제7.5장 그 아빠, 클로드 밤을 맞은 가넷궁은 한층 더 짙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클로드는 서서히 제 영역을 넓혀가는 암흑을 바라보다가 아까부터 줄곧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반쯤 녹아 물렁해진 초콜릿이었다. 겉면을 감싼 종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자 가운데 부분이 어렵지 않게 움푹 꺼졌다. 저녁 시간 그의 방에 다녀갔던 아이가 잠들어 있는 그의 머리맡에 떨어뜨리고 간 것이었다. 클로드의 머릿속에 다 녹은 초콜릿만큼이나 말랑말랑 연약하던 자그마한 생명체가 떠올랐다. 제 어미를 그대로 빼박은 듯했던 얼굴도. 문득 그는 실소했다. “다이아나를 닮아 그런지 발칙하지 않나.” 그 조그만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또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가끔씩 흔들리는 눈빛을 보일 때면 눈앞에 있는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그 말이나 행동이 어디로 튈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미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점이 제 어미인 다이아나와도 비슷했다. 클로드로서는 이해할 수 없게도, 그런 두려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에게서 달아나지 않는다는 점까지도. “확실히 다이아나 님은 누구에게나 쉬이 잊힐 만한 분은 아니셨죠.” 클로드의 뒤쪽에 서 있던 필릭스가 그의 말에 웃음으로 긍정했다. 그러나 클로드는 냉정히 읊조릴 뿐이었다. “일 년만 더 지났어도 그깟 계집의 얼굴쯤은 완전히 잊었을 것이다.” 필릭스는 클로드의 말이 반쯤은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과연 그 말처럼 그의 냉정한 주군은 다이아나를 잊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이미 오래 전 교차점이 지나간 여인을 기억할 이유는 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그러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일 년이란 짧은 기간은 결코 아니었으리라. 그 증거로 클로드는 다이아나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과의 만찬 시간은 즐거우셨는지요?” 그러나 그 점을 구태여 꼬집는 법 없이 필릭스는 다른 화제를 꺼내는 것으로 말을 돌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필릭스의 얼굴에 피어난 것은 진심 어린 미소였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공주님 아니십니까.” 어린 공주의 존재만으로도 삭막하던 궁이 한결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그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비록 필릭스의 주군은 아직까지 자신의 작은 딸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있었지만. “‘사랑스럽다’라.” 역시나 클로드는 납득하지 못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조금이나마 다채롭게 해주는 일종의 유흥거리라면 또 모르겠으나 ‘사랑스럽다’니. “그런 감정은 잊은 지 오래다.” 분명 아주 오래전에는 그런 마음을 가졌던 적도 있었던 것 같았으나, 그마저도 이미 빛바랜 과거일 뿐이었다. 두꺼운 먼지로 덮여 이제는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가 없는, 그런 오래된 기억의 잔상. 필릭스의 시선이 아주 잠깐 방의 한구석에 놓인 초상화의 깨진 액자에 머무는 것과 동시에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나가라. 피곤하구나.” 필릭스는 그런 클로드를 향해 다른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벨리아의 축복과 영광을.”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분명 그 안에 아직 남아 있을 겁니다. 언젠가 당신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되실 테지요. 그날이 빨리 오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편히 쉬십시오.” 긴 시간 동안 쌓인 어둠은 깊었고 오래된 침묵은 해묵어 있었다. 언젠가 이곳에도 밝은 빛이 스미는 날이 오기를. 그러나 아직은 끝나지 않는 밤이 오늘도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제8장 엄마? 엄마!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놀랍게도 나는 20살이 되어 있었다…… 라는 내용의 꿈을 꾸었다. 그럼 그렇지. 내 인생이 어디 단 한 번이라도 내 뜻대로 된 적이 있기는 하던가. 그래도 말이야. 눈을 떠보니 어른이 되어 있었다는 게 다른 세계의 공주가 되었다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잖아? 그래서 어쩌면 이 꿈이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 [15화] “파파, 보고 시펐어요!” 하지만 역시 나의 현실은 이쪽이었다. 클로드에게 잘 보이려고 살랑살랑 애교를 부리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일상.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나니 살짝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아!” 파릇하게 자라난 잔디를 밟으며 뛰어가다 말고 나는 클로드의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잠시 깜빡했다는 듯 아 하고 소리 낸 뒤 그에게 다시 인사했다. “아티를 티타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교육받는 중인 예법대로 치마의 양쪽 끝을 사뿐히 잡아 올리며 인사하자 뒤에 있던 필릭스가 풋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애가 어른 흉내 내니까 귀엽지? 하긴, 오늘은 내가 좀 평소보다 심하게 귀여울 거다. 이 짓을 하기 위해 내가 가진 옷 중에 제일 깜찍한 걸 골라 입은 데다 어떻게 하면 더 귀엽게 보일 수 있을지 몰래 거울을 보며 연습도 했으니까. 오늘의 콘셉트는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아직 인사 예절에 서툰 꼬마 숙녀다. 물론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엉망이어서야 감점 요소일 뿐이니 딱 귀여워 보일 정도로만 서툴러 보여야 했다. 다행히도 내 작전은 성공인 것 같았다. 필릭스는 둘째 치고서라도 야외의 티 테이블 옆에 시립해 있는 시녀들까지도 용감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으니. 프릴을 잔뜩 넣어 부풀린 하얀 드레스를 입은 나는 내가 봐도 정말 천사 같았다. 물론 이 경우에는 어여쁜 천사 언니가 아닌 아기 천사였지만…… 크흑. 클로드는 그런 나를 보고도 그저 눈썹을 한번 슬쩍 들어 올려 보였을 뿐이지만, 언제는 얘가 내 바람대로 반응해 준 적이 있던가. “필릭스.” 클로드의 부름에 필릭스가 짧게 대답한 뒤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필릭스의 도움을 받아 의자에 착석할 수 있었다. 나 혼자 의자에 올라가기에는 아직 내 키가 심하게 작아서 그렇다. 이것도 몇 번 해봤다고 이제는 제법 익숙한 걸 보면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란 말이 이해가 된다. 클로드와 마주앉게 되자마자 나는 그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파파!” 지금 시간은 오전 10시. 원래 그가 나를 부르던 시간은 오후 티타임 시간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약 한 달 전부터 점심 식사 전인 오전으로 그 시간이 앞당겨졌다. 한 달 전이라고 한다면 내가 클로드에게 자장가를 불러줬던 때인데,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뭐 언제는 이놈이 예측 가능한 놈이던가.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이제는 매번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해주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클로드는 내가 이렇게 인사할 때면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내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했다. 예상했듯 ‘좋은 아침이구나’라는 답변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꿋꿋했다. “어제 아티 꿈에 파파가 나왔어요!” “꿈이라.” “아티랑 파파랑 릴리랑 필릭스랑 다 같이 빗자루 타고 올라가서 별님도 따고 달님도 따고 재미있게 놀았어요!” “개꿈이구나.” 호호. 말도 참 예쁘게도 하지요. 나는 클로드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에헤헤 해맑게 웃어 보였다. “파파랑 같이 구름 위에서 폭신폭신 놀이도 했는데 아티 정말정말 좋았어요.” 클로드는 내 말이 어지간히 헛소리로 들리는지 바람 빠지는 듯한 실소를 내뱉었다. 하지만 나도 내가 무슨 소리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괜찮다. 에잇, 이 짓도 더 못 해먹겠네. 그냥 케이크나 먹자. 그런데 문득 깨닫고 보니 옆에서 다과 준비를 하던 시녀 언니가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제궁에는 시녀도 기사도 없었지만 이렇게 우리가 다과를 즐기거나 함께 만찬을 들 때에는 당연히 궁인들이 와서 그 준비를 하곤 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시녀 언니는 클로드와의 티타임 시간에 자주 보았던 시녀인데 지금처럼 우리가 대화하는 건 처음 봐서 놀랐나 보다. 하지만 역시 베테랑은 베테랑인지 그녀는 금세 표정을 수습한 뒤 조용히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클로드는 오늘도 몹시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습도 계속 보다 보니 조금 의문이 든다. 혹시 얘 수면 부족인가? 지난번에 만찬 시간 전부터 낮잠을 자고 있던 것도 그렇고……. 요즘은 특히 오전 시간에 봐서 그런지 유독 풍기는 분위기가 느슨하다. 나사 하나 빠진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날카로운 느낌이 한풀 가라앉은 걸로 보이는데, 내가 저혈압이라 그런지 혹시 클로드도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럼 그냥 날 부르지 말든가. 아니면 그냥 평소처럼 오후에 부르든가. 왜 꼭 이 이른 시간에 날 불러내서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꼬박꼬박 받아내는 거야? “파파, 그거 마싰어요?” 그건 그렇고, 오늘도 익숙한 향기가 흘러드는 걸 보니 클로드는 또 같은 차를 마시는가 보다. 차 취향이 꽤나 확고한지 클로드는 나와 갖는 다과 시간마다 매번 저것만 먹었다. 그는 내 질문이 의외였는지 일순간 멈칫하다가 무심히 답했다. “맛으로 즐기는 게 아니다.” 나는 그가 찻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호기롭게 외쳤다. “아티도 파파랑 똑같은 거 머글래!”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지나는 동안 나는 클로드와 조금 더 친해져서…… 가 아니라 그냥 내 간이 조금 더 커져서 이런 식의 객기도 전보다 어렵지 않게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내 당돌함에 감명받아 나를 죽이지 않고 좀 더 두고 볼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도 오케이다. “공주님께서 즐기기에는 향이 다소 강할 겁니다.” 클로드는 내 말이 퍽이나 의외였던 듯 차를 마시는 것을 그만두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대신 옆에 있던 필릭스가 나를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뺨에 바람을 집어넣어 부풀린 뒤 계속해서 우겼다. “머글래, 똑같은 거!” 필릭스의 얼굴이 살짝 난처하게 변했다. 솔직히 내가 단걸 좋아하긴 해도 매번 당분 덩어리 케이크에 꿀을 넣은 차나 우유만 먹으려니 혀가 너무 괴롭다. 그러니까 나도 클로드가 마시는 차 먹을래! “주어라. 굳이 원한다면 말릴 것도 없지.” 기쁘게도 클로드가 내 말을 두둔했다. 그가 손짓하자마자 저 멀리 있던 시녀 언니가 눈치 빠르게 다가와서 클로드의 지시대로 새로운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따라주었다. 나는 또 요즘 예법 시간에 배운 대로 나름대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린 뒤 먼저 향을 음미하듯 맡아보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필릭스가 또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찻물을 한 입 머금자마자 그의 눈빛에 걱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괜한 걱정이라니까. “아티도 이거 조아요!” 나는 찻잔을 입에서 떼고 환하게 웃었다. 몇 번인가 클로드가 마시는 걸 보면서 향이 내 취향이다 싶었는데,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이었다. 그동안 설탕에 길들여진 내 혀가 거부하지 않을 정도의 씁쓸함이 입안에 번져 나갔다. 그런데 향이 좀 독특해서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기는 하다. “아티 입에서 꽃이 피는 것 가타!” 응? 그런데 내 말에 반응들이 왜 그러니?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내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필릭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이 입을 열었다. 클로드는 아마도 내가 이 차를 한 입 먹어보고는 맛이 없다며 뱉어낼 줄 알았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그런데 꼭 내가 못 할 말을 한 것처럼 굳은 얼굴이다. 왜 저러지? “폐하께서 즐겨 드시는 리페차입니다.” 이름이 리페차구나. 그동안 이 맛있는 걸 클로드 혼자만 먹었겠다? 그런데 곧 이어진 필릭스의 말이 내 관심을 끌었다. “다이아나 님께서도 무척 좋아하셨지요.” 그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약간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입안에서 꽃이 피는 것 같노라고……. 그분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타나시아의 모친인 다이아나에 대해 듣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필릭스가 하는 말에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슬쩍 클로드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이인 양 필릭스를 향해 물었다. “엄마랑 아티랑 똑같이 말했네?” “예.” 그는 나를 보며 다이아나를 떠올리는 듯 잔잔히 미소 짓고 있었다. “폐하께서 처음 리페차를 즐기게 되신 것도 다이아나 님 때문입니다. 리페차의 원료인 산유초는 시오도나에서 나는 것이거든요. 아, 지금 이 자리에서 두 분이 함께 다과를 드신 적도…….” “그런 기억 없다.” 하지만 그 순간 귓가를 파고든 서느런 음성에 필릭스의 말은 도중에 끊어지고 말았다. 클로드는 방금 전 내 말을 들었을 때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오늘따라 쓸데없는 말이 많군. 시끄러우니 그만 물러가라.” 필릭스는 클로드의 갑작스러운 퇴출 명령에도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여 보인 뒤 녹색 잔디가 깔린 정원을 빠져나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조금 불쾌해져서 클로드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뭐야, 이 자식. 이제는 스쳐 지나간 여자라고 얘기조차 듣기 싫다는 거야? 어차피 딱 한 번 충동적으로 품었던 여자에, 그 하룻밤 실수로 태어나게 된 아이라 이거지. 재수 없어. 진짜 재수 없어. 그 여자의 초상화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나는 왜인지 기분이 좀 나빠졌다. 다이아나는 내 진짜 엄마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클로드가 내게 시선을 움직였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하, 내 강력한 생존 본능이여. “아직 차를 들기에는 이른 나이인 것 같으니 우유를 마시는 편이 좋겠구나.” “헤헤. 아티, 우유도 조아해요.” 이번만큼은 왠지 싫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온순하게 대답한 뒤 클로드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 * * 나는 요즘 클로드가 보낸 가정교사에게 기본 예법과 기초 교양을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엘로이즈 백작 부인으로, 이 방면에서 꽤나 이름을 알린 전문가라 했다. 물론 유아들을 상대하는 만큼 교육에 엄격함이 있지는 않았고, 그마저도 나는 보통의 귀족 아이들이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8살보다도 어렸기 때문에 그저 간만 보는 수준으로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시키는 것을 곧잘 따라하자 엘로이즈 백작 부인은 크게 놀란 눈치였다. 떼만 쓰고 어리광만 부리는 코흘리개 5살 여자애를 상상하고 온 것 같은데, 아무렴 내가 그런 철없는 애는 아니지! 하지만 그래 봤자 내가 배우는 것이라곤 기본적인 황궁 예절 정도가 전부였는데 말이야. 그래도 생각해 보면 5살짜리 어린애가 얌전히 앉아서 수업을 듣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 [16화] 릴리는 내가 사실은 4살 때부터 글자를 썼다느니 하는 약간 팔불출적인 자랑을 늘어놓아 엘로이즈 백작 부인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 부인은 내 공부 양을 늘렸다! 이제 나는 황궁 기본 예법에 더해 기초 파스칼 공용어와 오벨리아의 역사, 그리고 세계 명작 등을 공부하고 있었다. 크으. 생각보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생전 안 하던 공부를 하려니 당이 땡긴다. “공주님, 초콜릿 전부 압수예요.” 쿠쿵! 그래서 부엌에서 초콜릿을 훔쳐 와 먹는 걸 그만 릴리에게 들켜 버렸다. 새로 바뀐 시녀들이 내 간식 선반은 건드리지 않아 지금도 나는 종종 부엌에 가 초콜릿과 사탕을 빼내 먹곤 했던 것이다. 다만 이제는 한나와 세스가 없어 그런지 내게 몰래 간식을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릴리가 허락해 준 양이 성에 차지 않을 때에는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부엌에 숨어들어가야만 했다. “힝. 진짜 조금만 먹었는데…….” “자아, 공주님. 지금 가지고 계신 초콜릿 이리 주세요. 숙제 다 끝내면 드릴게요.”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릴리를 보면서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어놨던 초콜릿을 꺼냈다. 하나, 둘, 셋, 넷. 릴리는 내가 준 초콜릿의 개수를 보고 이게 전부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말 이게 다다. 릴리가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엄격한 얼굴을 했다. “너무 많이 드시면 이가 아야 해요.” 흑흑. 그건 나도 알아!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하라고! “숙제 끝내시면 초콜릿 하나 드릴게요.” 나는 좌절해서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릴리가 나를 달래듯 숙제의 포상으로 초콜릿을 약속했다. 내 마음대로 초콜릿도 못 먹는 신세가 한탄스럽긴 했지만 이 나이 먹고 이런 일로 심각하게 침울해지는 것도 민망했다. 그래서 나는 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뒤 다시 숙제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릴리의 걱정 어린 혼잣말이 내 귀에 꽂혀들었다. “방금 보니 바구니가 텅 비었던데 충치가 생기지 않으셨을지 걱정이네.” 아니, 잠깐. 나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았어! 그거 나 아니야! 나 아니라고! “릴…….” “그래도 숙제도 척척 하시고. 착하세요, 우리 공주님.” 나는 생긋 웃으며 문을 나서는 릴리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간식 바구니가 텅 비어 있었다니? 내가 마지막으로 꺼내올 때만 해도 아직 초콜릿이 남아 있었는데? 뭐야, 뭐야. 내 초콜릿 누가 먹었어. 누구냐. 어떤 시녀 언니냐.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애가 먹는 걸 뺏어 먹기나 하고. 어흐흑. 내 초콜릿. 게다가 릴리는 내가 다 먹은 줄 알잖아! 몹시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주장하기에는 내가 생각해도 내 말에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나는 매우 떨떠름한 기분으로 엘로이즈 백작 부인이 내준 독후감 숙제를 끝마친 뒤 릴리에게 칭찬과 함께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뭘 그리시는 건가요, 공주님?” “필릭스 바보! 세상에서 제일 제일 예쁜 릴리잖아!” 그리고 현재 나는 카펫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종이 위에 낙서를 하며 노는 중이었다. 역시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는 그림이지. 사실 내 그림은 엉망이라 누가 봐도 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평소 필릭스에게 쌓인 게 있어서 그런지 조금은 진심을 담은 바보란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 이번엔 알겠네요. 폐하시죠?” 내 놀림에 짐짓 풀 죽은 시늉을 하던 필릭스가 이윽고 내가 다른 종이를 꺼내 그린 남자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땡! 틀렸어요.” 으헤. 하지만 아니지롱. “이거 필릭스 오빠 줄게.” 필릭스는 내가 주는 것을 얼떨떨하게 받아 든 뒤 잠시 동안 종이 위에 그려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설마 저인가요?” 그런데 어느 쪽의 설마냐? 내가 자기를 그려준 게 놀라워서 ‘설마’라는 거야, 아니면 이 못생긴 남자가 자기일 리가 없어서 ‘설마’라는 거야.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 평생의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전자였던 모양이다. 엣헴. 그렇게까지 감동받을 건 없는데. “릴리, 릴리! 선물이야.” “어머. 제가 이렇게 예쁜가요?” “하늘만큼 땅만큼 예뻐!” 옆에서 그런 우리를 지켜보며 미소 짓던 릴리에게도 그림을 선물했다. 어디 보자. 그럼 이번에는 클로드 놈을 그릴 차례인가.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종이 위에 클로드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흐헤헤. 제일 못생기게 그려줘야지. “그 그림을 받으시면 폐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시겠네요.” 아니, 이거 안 줄 건데? 내가 그린 미니어처 클로드는 우주 최고 못생겨서 이걸 줬다간 날 죽이려고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이걸 선물한다고 해도 그놈이 내 그림을 받을 리가 없잖아? “다해따!” “폐하와 공주님이 함께 놀이를 하고 계신 그림이군요.” 아니, 내가 클로드에게 드롭킥을 날리는 그림이다. 이런 걸로 스트레스 해소를 하는 내가 좀 불쌍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지. 어디 보자. 더 그릴 사람 없나. 나는 잠시 동안 색연필을 들고 고민하다가 문득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사람을 그리기로 했다. 그런데 일단 동그란 얼굴을 그리고 나니 자료 부족으로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으음. 일단 머리랑 눈은 이 색깔이고……. 머리 길이는 이 정도인가? 아니면 이쯤? “릴리, 릴리.” “네, 공주님.” 나는 혼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다가 결국 릴리를 불렀다. “엄마는 어떻게 생겼어?” 잠시 동안 공기가 멈춘 느낌이었다. “엄마 그리고 싶은데, 아티는 엄마 얼굴 몰라.” 필릭스와 릴리는 왜인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재차 이어지는 내 질문에 그래도 정신을 차린 듯했다. “엄마 머리는 릴리처럼 쭉쭉쭉이야? 아니면 꾸불꾸불이야?” 곧 릴리가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답해 주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처럼 황홀하게 물결치는 백금발이셨답니다.” “헤에. 그럼 이만큼 길었어?” “그것보다는 약간 짧으셨어요.” 나는 그 밖에도 다이아나의 얼굴형이라던가 앞머리의 유무라던가 눈꼬리의 위치나 키 등을 물어보았고, 그럴 때마다 릴리는 상냥하게 답변해 주었다. 우리가 그러는 동안 필릭스는 웬일로 대화에 끼어드는 법 없이 옆에서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으흠. 좋아. 이제는 그릴 수 있겠는걸. 얼추 머릿속의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싶었을 때, 나는 다시 종이 위에 색연필로 슥삭슥삭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척 아름다운 분이셨죠. 아타나시아 공주님처럼요.” “아티처럼?”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릴리는 다이아나를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 속의 얼굴을 덧그리듯 아득한 눈빛을 한 채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도 다이아나는 누구나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힐 만큼 아름다운 무희였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나 예뻤던 건지 궁금하다. 물론 지금 내 얼굴과 많이 닮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애기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기란 무리였다. 아, 그러고 보면 천하의 클로드조차 다이아나를 마음에 들어 해서 결국 아타나시아를 낳게 되지 않았던가. 으음. 그 정도로 엄청난 미인이라니. “나도 보고 싶다.” 으아. 궁금해, 궁금해! 한 번쯤 직접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아쉽다. 한 십 년쯤 후에 거울을 보면 다이아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어야 말이지. 흑. “…….” “…….” ……응? 그런데 지금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 무거운 침묵은 뭐야? 나는 별 생각 없이 의문 어린 시선을 들었다가 이내 마주한 얼굴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릴리와 필릭스가 나를 향해 매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필릭스는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무겁게 입을 다문 채 굳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릴리는 잔뜩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왜인지 드디어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나는 매우 의아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이 왜 이러는지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다. 혹시 내가 지금 다이아나 보고 싶다고 소리 내서 말했니……? 그럼 그들의 반응도 이해가 되었다. 다섯 살짜리 애기가 처음으로 죽은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무렴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겠지. 헉. 그런데 난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고! 나는 잠시 동안 당혹감을 담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까르르 웃었다. “오빠랑 릴리 얼굴 이상해!” “…….” “어제 책에서 본 동그리 도깨비 같아!” 내가 이렇게 나이에 맞지 않는 재롱까지 부리면서 우스꽝스러운 흉내까지 짓고 있는데 그만 분위기 좀 풀어주면 안 되겠니? 이 불편한 공기 어떡할 거냐고! 진짜 온몸이 오그라들 것만 같다. “으응, 그림 그리기 이제 재미없어. 나가서 놀래.” 제기랄. 안 되겠다. 도망쳐야지. 나는 이 무거운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종이랑 색연필을 바닥에 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주님…….” 릴리와 필릭스가 그런 나를 보고 다시 입을 열었으나 나는 또 다른 어색한 상황에 빠지기 전에 서둘러 방을 빠져나와 버렸다. * * * 그러고 난 뒤 두 사람은 며칠 내내 내 눈치를 봤다. 물론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어디 보통 어린애던가. 그래도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모른 척했다. 모른 척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나한테 다이아나에 대해 설명해 준답시고 무슨 말인가를 해봤자 어차피 진짜 내 엄마도 아닌데 마음만 불편하고 어색할 뿐이다. 그러니까 내 눈치 좀 제발 그만 봐. 으앙. 두 사람은 몇 번인가 나를 붙잡고 대화를 시도했으나 그럴 때마다 내가 헤헤헤 웃으며 자리를 회피하자 이내 포기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점심 식사 이후 잠시 자리를 비우는가 싶던 필릭스가 한 시간 뒤쯤 슬며시 내 방에 들어와 릴리를 불러냈다. 그들은 『오벨리아 역사서』를 읽는 나를 두고 소리 없이 방에서 빠져나갔다. 잠깐……. 지금 뭔가 뒷덜미가 싸했어. 지금부터 저 두 사람이 나눌 얘기가 나한테 아주아주 중차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내 감이 소곤거렸다. 그것도 자칫하다가 뒤통수를 얼얼하게 얻어맞을 수도 있는 아주아주 위험한 이야기일 거라고! 나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두 사람이 나간 문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릴리가 문을 조금 열어두었기 때문에 밖에서 나누는 대화가 내게도 작게나마 들려왔다. “다이아나 님의 모습을 담은 영상석이 있는지 알아보고 왔는데 황궁에 보관된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아쉽네요.” 그런데 필릭스가 내뱉은 영상석이란 단어가 내 귀에 콕 박혀들었다. 앗, 맞아. 그러고 보니 여기 마법이 있는 세계였지. 마법을 이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게 내 원대한 꿈인 적이 있었어! 요즘 살기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 [17화] 영상석은 전생의 동영상과 비슷한 기능으로, 길게는 약 30초 정도의 영상을 보석에 담아 보관할 수 있는 마법 물품이었다. 궁정 마법사라면 당연히 영상석을 제조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다이아나를 담은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당연한가. 기껏해야 딱 한 번 황제 앞에서 춤을 춘 적이 있던 무희일 뿐인데 비싼 영상석을 그런 데 썼을 리가. 그런데 필릭스는 자신이 잘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꼭 다이아나 님을 뵙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로베인 경…….” 지난번부터 느낀 건데, 필릭스도 릴리만큼이나 다이아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이아나는 그냥 딱 하룻밤의 정으로 클로드에게서 나를 얻은 뒤 그대로 루비궁에서 잊혔던 여자가 아니던가. 릴리와 다이아나의 우정은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지만 지난번 다과 시간에 봤던 클로드의 반응도 그렇고 필릭스의 반응도 그렇고 뭔가가 찜찜하게 이상했다. 하지만 내 의문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내뱉은 필릭스의 말에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뭐? 클로드한테 뭘 말해? “폐하의 힘이라면 기억을 직접 전달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요.” 그러자 릴리도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오직 나만이 어리둥절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개인의 기억이니만큼 객관적이지도 않을 테고, 또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영상석처럼 선명하지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잠시 동안 공주님께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뭐?! 클로드 놈이 그런 마법을 쓸 수 있었단 말이야?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 그런 내용을 본 기억은 없는데? 설마 도중에 짜증 나서 내가 대충 읽은 부분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나? “하지만 폐하께서 그런 일을 허락하실까요?” “공주님을 위한 일인 걸요. 제가 한번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저 오빠가 지금 돌았나? 당신, 진정 미친 거야? 그런 걸 부탁하면, 클로드가 뭐 얼씨구나 좋다고 할 것 같아? 솔직히 클로드가 다이아나를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회의적인데 짜증 나는 여자를 생각나게 했다고 날 죽이고 싶어 하면 어떡해?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 식으로 클로드를 귀찮게 굴면 완전히 나만 손해였다. 전부터 영 수상쩍긴 했지만 필릭스 저 오빠 진짜 클로드에 한해서만큼은 천하의 눈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지금 바로 폐하께…….” “하지 마!” 갑작스럽게 닥친 생명의 위협에 나는 본능적으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헉. 그런데 내가 좀 세게 말한 것 같다. 갑자기 문을 열며 외치자 두 사람 모두 놀란 눈치였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번에는 평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공주님.” “파파한테 엄마 얘기 하지 마.” 내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그렇게 말하자 릴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슬픈 얼굴을 하며 내게 반문했다. “어째서요, 공주님?”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런 얼굴인 거냐고. 나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그런데 너무 앞뒤 분간 없이 다짜고짜 대화에 난입했나 보다.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이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아타나시아가 할 법한 적절한 말이 뭐가 있을까? 으아! 빨리 생각해 내라, 나! “엄마 얘기하면 파파가 싫어해.” 문득 지난번 야외에서의 다과 시간이 떠올랐다. 필릭스의 말을 듣고 평소보다 날선 반응을 보였던 클로드가. “그런데 엄마 보고 싶다고 말했다가.” 으어어, 멘붕이 온다. 누가 나 좀 도와줘. “파파가 아티도 싫어하면 어떡해?” “공주님!” 내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릴리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 그런 생각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헉. 릴리의 떨리는 목소리에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나를 보며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으헐. 미, 미안. 릴리, 미안! 아무리 할 말이 없었어도 이 말은 좀 아니었던 것 같아. 어떡해. 진짜 우는 거 아니지? 울지 마, 릴리! 내가 잘못했어! “공주님.” 그런데 그때, 필릭스가 한참 멘붕에 빠져 있던 나를 불렀다. 그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로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당연하게도 우리의 시선은 정면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필릭스의 눈빛에 나는 또 한 번 아득해지고 말았다. “폐하께서는 싫어하지 않으세요. 정말 맹세코, 제 이름을 걸고 감히 단언하건대.” 그는 내게 신뢰를 주려는 듯 내 눈동자를 곧게 들여다보며 단호히 말했다. “폐하께서는 다이아나 님도, 아타나시아 공주님도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어……. 나 어떡하지. 릴리와 필릭스가 너무 심각해서 양심이 찔렸다. 으, 으윽. 나 지금 순진한 이 사람들을 속여 먹고 있는 건가. 난 그냥 아타나시아가 했을 법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궁여지책으로 되는대로 내뱉은 것뿐인데……. “그러니 폐하께 다이아나 님이 보고 싶다고 솔직히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상황이 뭔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공주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벌써부터 참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되세요.” 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눈동자를 불안히 굴리다가 이내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아냐. 아티 진짜 괜찮아. 이제 안 보고 시퍼졌어. 진짜야.” 하지만 두 사람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릴리는 여전히 울망울망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필릭스는 필릭스 나름대로 나를 향해 아주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나는 등 뒤로 식은땀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제, 제길. 나 이제 어쩌지. 그런데 다음 순간 필릭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향해 슬프게 미소 짓더니 이윽고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짐짓 밝게 읊조렸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공주님께서 말씀하시기 어렵다면 제가 대신 전해드릴게요.” 뭐, 그럼 다시 원점이잖아! 애초에 내가 당신들 대화에 난입한 이유가 뭔데! 오빠 진짜 나 죽이려고 작정했니? “안 그래도 돼!” “아닙니다. 제가 꼭 폐하께…….” 아씨, 됐다니까! 나는 답답함에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내 앞에 있는 필릭스를 밀치며 버럭 소리 질렀다. “싫어!” 으악, 손바닥 아파. 민 건 나인데 왜 뒤로 밀려나는 것도 나니. 내 행동에 그가 당황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져 양심이 콕콕 쑤시긴 했으나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필릭스가 정말 클로드에게 내 얘기를 해버릴 것 같았으니까. “파파한테 말하면 미워할 거야! 진짜 진짜 미워할 거야! 이제 엄마 안 보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소리치자 필릭스는 또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보나마나 내 속을 뒤집는 소리나 해대겠지! 게다가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정말 너무너무 너무 불편했다. 에잇, 도망가자! 나는 필릭스가 나한테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홀라당 뒤돌아서 뛰어갔다. “공주님!” 릴리의 울먹이는 부름이 들렸으나 그마저도 내 발걸음을 붙잡지는 못 했다. 그래서 내가 어디로 도망갔느냐 하면……. 바로 내 방이다. 윽.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밖으로 나가봤자 달리 갈 곳도 없고, 또 내가 지금 궁 밖으로 뛰쳐나가면 릴리가 걱정할 텐데. 그렇지 않아도 지금 거의 울릴 뻔했는데 걱정까지 끼치고 싶진 않은걸. 나는 약간 뻘쭘한 기분으로 『오벨리아 역사서』가 펼쳐진 책상 앞에 엉거주춤 다시 가 앉았다. 그러자 릴리가 잠시 후 문을 열고 내게로 다가왔다. “공주님.” “이거 볼 거야.” 흑, 미안. 지금은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줘. 지금 현타 왔단 말이야. 다행히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릴리가 잠시 후 다시 조용히 문을 나섰다. “으으아으아.” 그 직후 나는 책 위에 얼굴을 파묻고 마구 몸부림쳤다. 나 이제 어떻게 하냐고. 수습이 안 된다고. 어흐흐흑.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필릭스가 클로드한테 가지는 않겠지? 일단 급한 불은 끈 것 같았지만 또 다른 시련이었다. 제발 누가 이 상황 좀 어떻게 해주세요. 으엉. * * * 다음 날 우리 세 사람 모두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얼굴이 까칠해진 상태로 마주했다. 필릭스와 릴리는 어제 일로 내게 마음 쓰여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 눈치였고, 나는 나대로 두 사람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제 내가 일찍 자는 척하는 것을 모르고 릴리가 나를 토닥이면서 ‘다이아나 님은 언제나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곁에 계시다’느니, ‘분명 아타나시아 공주님이 이렇게 예쁘게 자라신 걸 봤으면 다이아나 님도 기뻐하셨을 게 틀림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내 마음은 돌덩이가 앉은 것처럼 천근만근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다이아나가 보고 싶단 말을 그렇게 생각 없이 내뱉는 게 아니었는데! 어흐흑. 여러분, 혼잣말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잘못하다가 아주 주옥 되는 수가 있어요. “이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막대에 꿰어진 동그랗고 납작한 사탕을 깔짝깔짝 핥아먹다 말고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클로드가 나를 제 궁으로 불렀기 때문에 늦지 않으려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나 참. 그놈은 맨날 나만 자기 궁으로 불러내고 정작 자기는 한 번도 루비궁에 찾아오는 법이 없어! 반항적인 마음이 들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 갈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간 크게 배 째고 클로드를 바람 맞추면……. 으음. 아마 그날이 진짜 내 배가 째지는 날이 되겠지. 흐잉. 그런데 다른 때 같으면 곧장 나를 안아 들었을 필릭스가 오늘따라 머뭇거렸다. 나는 잠깐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필릭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이고. 이 오빠 지금 내 눈치 보고 있네. 어제 내가 다이아나의 일로 그에게 버럭 소리 지른데다 손으로 밀쳐 내기까지 했던 것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필릭스는 내게 쉬이 손을 뻗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하긴. 그런 그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싸우고 난 뒤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는 게 어려운 건 애나 어른이나 똑같은 법이지. 더군다나 그게 먼저 자기를 밀어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는 사탕을 입에 문 채로 곤혹스러운 듯 주저하는 필릭스를 잠시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내 사탕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바지 자락을 아래로 꾹꾹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아티 다리 아파.” 어쩔 수 없네. 내가 먼저 화해하자고 해야지. 애초에 이게 전부 필릭스 탓인 것도 아니었고, 어제는 뜻하지 않게 나도 좀 심하게 굴었으니까. ======================================= [18화] 게다가 필릭스나 릴리는 내가 5살짜리 애인 줄 알고 걱정해서 그랬을 게 분명한데 이대로 입 싹 씻고 있긴 양심에 스크래치가 나다 못해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으으으. “나 어부바해죠.” 그리고 난 지금 어린애니까! 자고로 어린애는 아무 근심걱정 없이 해맑은 게 최고지. 어제 일은 벌써 다 잊었다는 양 내가 천진난만하게 올려다보며 보채자 필릭스가 한순간 멈칫하는가 싶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익숙한 팔이 나를 들어 올렸다. “그럼 다녀오세요.” “릴리, 빠이빠이!” “다녀오겠습니다.” 근데 이 광경 좀 신혼부부랑 그 딸내미 같지 않니. 릴리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자 적잖이 안심한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건 필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두 사람 그러다가 눈 맞는 건 아니겠지? 안 돼! 릴리는 내 거란 말이야! “오늘은 알현실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필릭스의 너른 등판에 업혀 사탕을 쪽쪽 빨면서 그의 뒤통수를 찜찜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잠시 기다리셔야 할 것 같네요.” 내가 이 알현실의 문을 본 것은 오늘로 두 번째였다. 예전에 릴리와 함께 클로드를 만날 때 이 문을 넘었었지. 크흑. 그날로부터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다니. 아니, 고작 이만큼밖에 안 지났다고 해야 하는 건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는 동안 뭔가 굉장히 많은 일이 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나저나 사람을 기다리게 할 거면 차라리 방에 가서 있으라고 하던지. 하여간 클로드의 매너는 오늘도 변함없이 똥이다, 똥! 그것도 개똥! 벌컥. 그런데 내가 한창 클로드의 똥 매너를 씹고 있을 때쯤,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오, 드디어 내가 들어가도 될 차례인가. 하지만 지금까지 알현실 안에 있던 누군가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 먼저였다. 알현실의 문은 실로 웅장해서, 나는 처음 이 앞에 섰을 때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누구나 작아 보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니었다. 알현실의 문을 통해 나타난 사람은 클로드나 필릭스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런데 기백이랄까, 풍기는 분위기랄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느낌이었다. 클로드랑은 다른 의미로 카리스마가 있는 아저씨네. 나이는 젊은 편인 것 같은데 머리가 백발인 걸 보면 실제로 그보다는 좀 더 나이가 든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사탕을 쪽쪽거리면서 하릴없이 그를 관찰했다. 그런데 필릭스와 남자는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필릭스를 발견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어왔다. “로베인 경.” 흐에. 뭐야. 클로드랑 알현실에서 만날 걸 보면 당연히 귀족일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필릭스가 이렇게 반가워하기까지 할 사람이었나. 그 정도로 친한 아저씨인 거야? “알피어스 공, 간만입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필릭스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크헉 놀라고 말았다. 무, 뭐. 알피어스 공작이라고? 이 아저씨가? 진짜? 알피어스라면, 14살 때까지 제니트를 맡아 길렀던 바로 그 공작 가문이잖아! “그렇잖아도 알현실에 보이지 않아 의아하던 참인데 여기 있었군.”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필릭스의 어깨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억. 아저씨 머리 백발이 아니라 은발이었나 보네. 하, 이렇게 다시 보니 알겠다.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이제키엘 알피어스는 반짝이는 은발과 금안을 가진 제국의 일등 신랑감이었지. 이렇게 보니 그 색소는 아버지한테 그대로 물려받은 것인 모양이었다. “이런. 미처 몰라 뵈었군요.” 필릭스의 어깨 위로 드러난 내 얼굴을 보고 남자도 그제야 내 존재를 깨달은 것 같았다. 곧 그가 내게 정중히 인사해 왔다. “신, 로저 알피어스라 합니다. 오벨리아의 번영이 깃들기를.” 제법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있었지만 이 남자가 로저 알피어스라면 그 속이야 뻔했다. 훗날 황실의 제2 공주로 인정받았다가 제1 공주인 아타나시아의 죽음 이후 클로드의 유일한 후계로서 그 자리를 공고히 했던 제니트. 그리고 그런 그녀를 갓난아기일 때부터 맡아 길렀던 알피어스 공작가. 여기까지 들어도 그림이 뻔히 나오지 않는가? 애당초 제니트나 그녀의 어머니와 아무런 연고도 없던 알피어스 공작가가 왜 제니트의 이모인 백작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그녀를 숨겨 주었겠는가. 거기에는 알피어스 공작의 야심이 숨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공작가의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제니트를 그 자체로 아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알피어스 공작만큼은 제니트가 훗날 가져다줄 영광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로저 알피어스는 상당한 야욕을 가진 인물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제니트를 이용해 아주 성공적인 인생을 산 셈이었다. 특히 아들인 이제키엘 알피어스와 공주인 제니트의 결혼으로 그는 엄청난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채로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에, 뭐야. 혹시 자신이 가진 패인 제니트와 나를 비교해 보고 있는 건가? 우와, 아저씨 바보. 나 지금 5살인데? 나는 로저 알피어스를 향해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헤헷. 안녕, 흰둥이 아저씨!” 그래, 제니트는 잘 자라고 있냐? “흰둥…….” 저도 모르게 내 말을 따라 했던 필릭스가 곧 멍하게 입을 벌렸다. 내가 가리키는 게 눈앞에 있는 로저 알피어스란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것은 로저 알피어스도 마찬가지인 듯, 곧 그에게서 반문이 흘러나왔다. “설마…… 저를 지칭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아저씨, 멍뭉이 흰둥이랑 똑같이 생겨써!” “……” “이거 머글래? 맛있는 거야.” 나는 또 한 번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 뒤 선심 쓴다는 듯 침 묻은 사탕을 척 앞으로 내밀었다. 로저 알피어스는 상식을 벗어난 내 언행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이제키엘하고 제니트는 아저씨한테 이런 짓 한 적이 없나 보지? “풉.” 그런데 그런 로저 알피어스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필릭스에게서 돌연 억누른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이내 간헐적으로 어깨마저 들썩이기 시작하는데……. 이 오빠 지금 빵 터졌나 보다. 소리 안 내려고 용쓰는 건 알겠는데 부들부들 떠는 것 좀 어떻게 해봐. “고, 공주님께서 알피어스 공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요.” “…….” 당연히 그런 말을 듣는다 한들 로저 알피어스의 기분이 좋아질 리 없었다. 이제키엘이나 제니트라면 훈육을 위해 따끔하게 혼낼 수라도 있을 텐데 나한테 그럴 수는 없으니 저리 표정 관리에 힘쓰며 눈썹만 꿈틀거리고 있을 수밖에. 거기에 대고 나는 빨리 안 받고 뭐 하냐는 듯 사탕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이제 아저씨의 눈썹은 완전히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주가 손수 주는 선물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는지, 곧 그가 떨떠름하게 앞으로 손을 내미는가 싶었다. 나는 그 손이 내 사탕 막대에 닿기 전에 홀랑 다시 팔을 굽혔다. 당연하게도 로저 알피어스는 허공에 대고 헛손질을 하게 되었다. 난 또 한 번 황당한 빛을 띠기 시작한 금색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다시 사탕을 빨기 시작했다. 쪽쪽쪽쪽. “…….” 쪽쪽쪽. “…….” 기막히지? 아마 엄청 어이없을 거다. 그런데 5살짜리 애한테 진심으로 화를 내기도 뭐하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겠지. 크헤헤. 아저씨 놀리기 재밌다. 로저 알피어스에게 일명 줬다 뺏기를 실천한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멀뚱히 보며 사탕을 빨다가 잠시 후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쓰읍. 때찌야! 흰둥이는 이런 거 먹는 거 아니랬어.” “큽.” 필릭스는 그런 나를 말리지는 못할망정 아까부터 시종일관 어깨를 떨며 웃어대기 바빴다. 평소 냉철한 카리스마로 귀족들을 이끌던 로저 알피어스가 내게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못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귀여운 공주님이시군.” 로저 알피어스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이내 씹어 삼키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으엑.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 “아티, 파파 보고 시퍼!” “크흠. 그럼 들어가실까요.” 내가 칭얼거리자 필릭스도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애써 웃음을 참아 삼켰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와 확연히 온도가 달라진 로저 알피어스를 향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럼 공주님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알피어스 공도 살펴 가십시오.” “빠빠이, 흰둥이 아저씨!”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오벨리아의 번영이 함께하기를.” 그래도 역시 괜히 공작이 아닌지 마지막에는 침착해 보이는 표정과 말투를 내게 보였지만 문장 사이에 있는 저 찜찜한 말줄임표는 어쩔 거야. 쯧쯧. 다 큰 어른이 속 좁게 꽁해져서 있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나는 방긋방긋 웃는 낯으로 로저 알피어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닫히는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그는 그런 나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는데, 그게 또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왔나.” 알현실에 들어가자마자 큰 옥좌 위에 팔을 걸친 채 턱을 괴고 앉아 있는 클로드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저렇게 불량한 자세로 로저 알피어스를 맞이했던 건 아니겠지? “예, 폐하. 앞에서 알피어스 공을 만났습니다.” “흰둥이 아저씨!” 내 반사적인 외침에 클로드가 드물게도 의문을 표했다. “흰둥이?” “멍뭉이 흰둥이 닮아써!”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클로드가 일순간 미세하게 입매를 움직이는가 싶었다. 분명히 아주 작게 들썩이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똑똑히 봤다. 너 지금 웃었지! 다 들켰어!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는 알피어스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군.” 아무리 그래도 공작인데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댄다니. 원작대로라면 그 양반은 당신 사돈댁이 될 거라고! “혹 언짢은 일이 있으셨는지요?” “그네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들으나 마나 한 소리지.” 클로드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어 대화를 끝냈다. 그런데 그러다 말고 갑자기 필릭스를 지그시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그의 입술 끝이 이번에는 확연히 눈에 드러나 보일 정도로 깊은 호선을 그렸다. “그새 보모가 다 되었구나.” 와, 어쩜 저렇게 얄밉게 비웃을 수가 있지? 클로드가 툭 내뱉은 말에 필릭스는 약간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지금까지 줄곧 업고 있던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대리석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클로드 쪽으로 아장아장 뛰어갔다. 앗! 그러고 보니 깜빡했다. 내가 다시 뒤돌아 뛰자 필릭스의 눈동자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에게 내 사탕을 고이 들려준 뒤 다시 클로드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알피어스 공에게도 공주님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 [19화] 내가 준 것을 버리지도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필릭스가 마침내 내 사탕을 손에 든 채로 뒷짐을 져 섰다. 잠시 동안이지만 잘 부탁하네, 내 간식. “아마 사내아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클로드가 앉은 옥좌는 더욱 화려했다. 헉, 이 보석들 좀 봐. 알 크기 하며, 광택 하며! 이 뒤쪽에 있는 건 하나 정도 없어진다고 해서 티도 안 날 거 같은데……. 내가 츄릅 군침을 흘리며 옥좌에 붙은 보석을 탐내는 동안 필릭스는 방금 전 봤던 로저 알피어스의 아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응? 그런데 그 아저씨의 아들이면 이제키엘이잖아? “공주님의 말벗으로 붙여주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클로드는 옥좌에 턱을 괴고 앉은 채로 옆에서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뭐야, 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나, 난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보석이 예뻐서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구! 그래도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지금까지 눈을 번뜩이며 보석들을 탐내던 모습을 클로드가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속이 뜨끔거렸다. 그래서 나는 순진무구한 척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티 친구 생기는 거야?” 필릭스는 내가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신이 난 눈치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알피어스 공작을 만나 기분이 더욱 저조한 눈치였던 클로드는 필릭스와 내 말에 또 싸늘한 미소를 드리울 뿐이었다. “황궁에 아이가 둘씩이나 뛰어다닌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쁘구나.” 으억, 내가 좀 방심하고 있었나 보다. 친구 같은 거 필요 없다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 보석 같은 거에 한눈을 파니까 빠릿빠릿하게 반응하지를 못하지! 죄송해요, 이제 한눈 안 팔게요! “시끄러운 아이는 딱 질색이다. 게다가 로저 알피어스를 닮은 사내놈이라니. 상상만 해도 신물이 나는군.” “하하……. 역시 그건 좀 그렇지요.” 로저 알피어스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오히려 필릭스가 설득당했다. 으음. 눈치 없음의 대명사인 필릭스까지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니 평소 흰둥이 아저씨의 이미지가 어땠는지 알겠다. 그나저나 아쉽네. 남자 주인공인 이제키엘의 어린 모습이 좀 궁금하기도 했는데. 이제키엘 나이가 제니트보다 두 살이 더 많다고 했나, 세 살이 더 많다고 했나? 하긴 두 살이나 세 살이나 다 똑같긴 하……. 번쩍! “으에.” 그런데 갑작스럽게 내 몸이 번쩍 들렸다. 온몸을 감싼 부유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래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고개를 들고 나자……. 방금 전보다 백배는 더 어리둥절해졌다. “역시 무겁군.” ……응? 으응? 왜 내 위에 필릭스가 아니라 클로드의 얼굴이 보이는 거지? 의아하게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필릭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그럼 뭐야? 뭔데, 이 상황?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으나 지금의 상황을 총체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헐, 이게 지금 뭐야. 클로드, 너 설마 지금 나 안아 들었니? 물론 짐짝 들듯이 한 팔로 달랑 들어 옆구리에 꼈을 뿐이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나는 클로드에 의해 운반되고 있었다. 앞으로 내딛어지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 아래로 늘어뜨려진 내 팔다리도 함께 덜렁덜렁거렸다. 와, 와아. 이런 쇼킹한 일이. 아니,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사람이 그러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는데! 클로드에게 직접 안겨서 이동되고 있는 이 상황이 나는 참으로 후덜덜 했다. 그는 나를 안은 채로 옥좌 뒤쪽에 늘어뜨려져 있던 불투명한 휘장을 걷어 올렸다. 헉. 이거 벽 아니었네. 휘장 너머에는 푹신해 보이는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또 솜을 잔뜩 집어넣어 엄청나게 말랑말랑해 보이는 쿠션이 한가득 널려 있었다. 나는 클로드가 나를 그 한가운데에 얌전히 내려놓기까지 하자 더욱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이른 시간부터 시끄럽게 짖는 소리를 들었더니 피곤하구나.” 벌써 해가 중천인데 뭐가 그렇게 이른 시간이라고. 그리고 또 개 짖는 소리란다. 흰둥이 아저씨는 당신 사돈될 사람이라니까. 쯧. 이러다가 만약 원작대로 제니트랑 이제키엘이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할는지. 오, 그나저나 이 쿠션 보이는 대로 엄청나게 폭신폭신하다. 속에 뭘 집어넣은 거지? 내가 쿠션에 대고 꾹꾹거리고 있는 동안 클로드는 내 옆쪽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고 누웠다. 흐엑, 설마 여기 이런 식으로 쉬려고 만든 장소인 건가? 아니, 여긴 연회장도 아니고 알현실인데? 나는 뜨악한 마음으로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급히 코를 부여잡으며 다시 눈을 돌렸다. 헉. 잠깐. 이러지 마. 옷 좀 제대로 입어주지 않으련? 클로드가 복장을 신경 쓰지 않고 쿠션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던 탓에 복근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느꼈지만 그놈 참 근육들이 실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남자가 말이야! 너무 조신하지 못한 것 아니냐고! 아무 데나 넙죽넙죽 눕지를 않나, 옷을 다 풀어헤치고 있지를 않나. 으으. 엄한 처자 낯부끄럽게시리. 그래 봤자 나, 난 네 미인계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니까! 그런데 왜 난 자꾸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저놈의 속살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거지. 크윽. 뭔가 진 기분이다. “그때 그 노래.” 아잇, 깜짝이야. 내가 훔쳐보고 있던 걸 들킨 줄 알았다. 갑자기 말 걸지 말란 말이야. 내 간은 토끼만 해서 쉽게 깜짝깜짝 놀란다구. 그런데 노래라니. 뭔 노래 말이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 “나쁜 꿈을 몰아내는 노래라고 했었지.” “아! 자장자장 노래!” “자장자장 노래?” 헉. 실수. 자장자장 아냐! 여기 취소 버튼이 어디 있죠? 쓸데없이 눈치 빠른 클로드 놈이 수상쩍음을 감지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자식. 그게 벌써 한 달 전 일인데 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야! “어쨌든, 그거.” 그나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클로드가 금방 말을 돌려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내게 있어 ‘다행’의 범주에 들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번 불러 봐라.” 뭣.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네 앞에서 재롱을 부려보라 이 말이냐?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귀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클로드는 여전히 나른히 누운 자세로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눈빛은 말없이 무언가를 종용하고 있었다. 허허……. 이런 개먹이 쌍X바 같은 놈이? 아무리 내가 까라면 까고 달라면 줘야 하는 비굴한 인생이라지만 맨정신으로 네 앞에서 쇼까지 해야 한다니. 아무리 내가 5살로 보인다지만 정신만은 성숙한 성인인데 이건 좀 너무하지 않니. “아티 그거 까먹었는데에.” 크와와왁. 지난번에는 워낙 위기 상황이라 되는대로 자장자장도 하고 자장가도 부르고 했다지만 지금 또 그 짓을 하기엔 많이 민망하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란 눈으로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지금 그 노래를 모르는 거다! 그래서 너한테 불러주고 싶어도 못 불러줘! “잊었다?” 그래! 그게 벌써 한 달 전인데 잊고도 남았지! “하면 어찌 해야 기억이 날까.” 그냥 포기해라, 이 끈질긴 놈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 내가 옥좌에 앉은 직후 멍청하게도 이 알현실에서 내게 위해를 가하려 한 불순종자들이 있었지.” 그런데 클로드가 느닷없이 옛날 얘기를 시작했다. “모두 붙잡아 무릎을 꿇리고 나니 그 어리석은 종자들이 하나같이 배후는 없다, 나는 이번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 말하더군.”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괜스레 목덜미가 휑한 느낌이 들었다. 클로드는 정말 문득 떠오른 과거의 이야기를 하듯 무덤덤한 어투로 말을 잇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서서히 내 위험 경보에 빨간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강제로 기억이 나게끔 만들어줬지.” 제, 제길. 왜 불길한 느낌은 틀리는 법이 없냐. 기억이 나게 만들어줬다니. 그게 무슨 의미죠? 왜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렇게 등골이 시린 느낌이 드는 거죠? “증발된 기억이 돌아오게 만드는 방법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수백 가지쯤 알고 있지만.” 크앙. 그 방법이 뭔데! 아니, 아니야. 그냥 말하지 마. 말하지 말아주세요. 곧이곧대로 배후를 실토하지 않는 암살자들에게 사용하는 방법이란 게 뭐겠냐? 고문이지? 고문인 거지? 그런 거지? 으허허허엉. “그런 것을 네게 쓸 수도 없고.” 당연하지, 당연하지! 그런 무시무시한 방법을 나 같은 애한테 쓴다는 건 네가 사이코패스보다 더한 인간 말종이라는 의미야! 으앙. 엄마, 나 얘 너무너무 무서워. “하나 방금 전에는 그 노래를 아는 듯하다가 그새 또 잊었다 하니. 내 어찌 해야 네 기억이 제 기능을 찾을지 방도를 고민…….” “생각나써요. 자장자장 노래!” 심장 쫄려서 기억 안 난다고 더 우기지도 못 하겠네! 으아앙. 얘는 진짜 왜 멀쩡하다가 갑자기 살벌하다가 오락가락하고 난리야! 이 소름 돋는 자식!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아티가 파파한테 노래 불러 줄게요. 헤헤.” 괜히 쓸데없는 자존심 챙겨보겠다고 까불다가 요단강 건널 것 같다. 그래, 계속 뻐팅기다가 저놈이 노래 가사를 기억나게 한답시고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오, 상상도 하기 싫다. “살금살금 밤이 오면…….”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구슬프게 노래를 시작했다. “어여쁜 별님이 인사하며 웃어주네요. 오늘은 안녕. 내일은 더 반짝이는 아침이 올 거야.” 크흑. 너무나 거지 같은 기분이군. 클로드, 너 이 자식. 넌 나한테 수치심을 주었어. 그런데 이 망할 놈이 내가 한 곡조를 다 뽑은 뒤에도 계속 안 하고 뭐 하냐는 듯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놈아! 이 노래 원래 엄청 짧은 노래거든! 지금 벌써 한 곡 다 부른 거거든! 결국 나는 이놈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자장가를 열창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여섯 번이나 이 노래를 반복해 부른 뒤에야 클로드는 눈을 감았다. 뭐야, 지금 너 자겠다고 나한테 이 창피한 짓을 시킨 거였냐! 크아악. 나는 클로드가 정말 잠든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눈앞에서 휘휘 손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볼을 쿡쿡 찔러 보기도 하고 그래도 그가 일어나지 않자 가슴까지 간질간질 간질여 보았다. 그리고 클로드가 완전히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오늘만큼은 참을 수가 없어서 누워 있는 클로드의 머리카락을 잡초 뽑듯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이이익! 나한테 이런 수치심을 주고도 아무 짓도 안 당할 줄 알았냐! 에잇, 에잇! 대머리나 돼라! “폐하께서 잠드셨습니까?” ======================================= [20화] 악, 깜짝이야! 갑자기 휘장 밖에서 필릭스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랐다.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 걸 보면 바로 앞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언제 여기까지 다가온 거야? “으, 으응.” “드문 일이군요. 다른 이를 앞에 두고 무방비한 모습을 보일 분이 아닌데.” 그리고 덧붙여진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공주님의 노래가 효능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으악! 너도 내 노래 들은 거야? 으앙, 난 망했어. 이제 필릭스 얼굴을 어떻게 봐. 으앙으앙. 쪽팔려. “공주님.” “왜에?” 나는 발버둥 치며 쿠션들 사이를 마구 굴러 다녔다. 그러자 필릭스가 다시 한 번 나를 불러왔다. 으흑.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날 부르니. 그래, 할 말 있으면 해라 해. “어제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게 말한 것은 어제 일의 사과였다. “공주님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엥. 뭐, 뭘 또 그걸 나한테 사과하고 있어? 괜히 더 미안해지게시리. “전 그저 다이아나 님을 뵙게 되면 공주님께서 기뻐하실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아니, 그건 릴리나 당신이나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문제지. 일단 내가 말실수라지만 먼저 다이아나를 보고 싶다고 했고……. 어쨌거나 두 사람 다 아타나시아의 보호자로 옆에 있는 거니까 엄마 얼굴도 모르는 애한테 당연히 마음 쓰일 수밖에. 흐억. 그런데 난 양심 없이 그런 사람들한테 신경질이나 내고 심지어 물리적인 폭력(?)까지 행사해 버렸잖아? “어, 저기.” 크으윽. 이제 보니 나란 사람 완전히 인성 쓰레기잖아요. 어흐흑. “아, 아티도 어제 때려서 미안…….” 그냥 이대로 없던 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필릭스가 먼저 사과를 하니 나도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며 미안하다고 하자 밖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조금 아팠지만 벌써 다 나았어요.” 이익, 그건 거짓말이야! 이 솜방망이 주먹이 뭐가 그렇게 아프다고! 오히려 필릭스를 밀쳐 내려고 했던 내 손이 다 얼얼했는데! 게다가 뒤로 밀려난 것도 오히려 나였고! 하지만 또 어제처럼 말실수하기 전에 그냥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겠다. 크흑. 그런데 클로드 얘는 정말 자는 거 맞지? 나는 클로드의 코를 돼지 코로 만들어 본 뒤 그래도 미동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안심했다. “실은 저도 아타나시아 공주님만큼은 아니지만, 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휘장 너머로 들려온 담담한 독백에 귀가 쫑긋 섰다. “제 어머니께서는 폐하의 유모이시기도 했죠. 그러니 폐하와 저는 젖형제가 되는 셈입니다.” 나는 그제야 클로드가 유독 필릭스에게 너그러워 보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유모의 아들이라고 필릭스를 많이 봐주고 있었나 보다. 아니?! 그런데 새로운 발견인걸. 클로드 너,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인내와 자비심을 발휘할 수도 있는 인간이었니? 그거 나한테도 조금만 떼어주라! “어릴 때에는 사실 어머니가 조금 밉기도 했어요. 저와 함께 놀아주시는 시간보다 폐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으셨거든요.” 쯧. 한창 어릴 때 클로드에게 엄마를 빼앗겼었구만. 그럼 클로드가 필릭스에게 잘해 줄 만도 하네. “그래서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직후에는.” 그나저나 어릴 때의 클로드라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왠지 쟤는 태어났을 때부터 철심을 입에 물고 태어났을 것 같아……. “어머니 같은 건 조금도 그립지 않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그 후 3년 정도는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특별히 한 적도 없었고요. 생전에 저와 보낸 시간이 극히 적었던 분이니만큼, 어머니의 부재를 크게 느낄 일도 없었습니다.” 나는 필릭스가 갑자기 자기 어머니의 얘기를 꺼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청자로서의 예의로 도중에 그의 말을 끊는 법 없이 조용히 필릭스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아주 우연히, 평소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의 자수를…….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생전에 직접 수놓아 주셨던 제 이름을 새삼스럽게 눈에 담는데.” 필릭스는 담담히 말하고 있었지만 아마 저렇게 되기까지는 스스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터였다. “믿을 수 없게도 눈물이 나더군요.” 나는 약간 난처한 기분으로 생각보다 부드러운 클로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내가 필릭스와 클로드의 이런 개인사를 들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필릭스는 자기가 직접 나한테 말해주는 거니까 나중에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클로드 이놈은 내가 자기 어릴 때 이야기를 들은 걸 알면 나중에 나한테 해코지하는 거 아니야? “그토록 미워했던 어머니인데. 제게는 그저 그 이름으로만 그림처럼 존재했던 어머니인데도, 실은 저는 그분이 그리웠던 겁니다.” 사실 나는 필릭스의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지 않았다. “비록 함께한 추억은 없었어도 그분은 제 하나뿐인 어머니셨으니까요.” 필릭스의 비밀 얘기까지 들어놓고 이런 말을 하기에는 좀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그런 식으로 미워할 만한 가족조차 곁에 없었으니까. 물론 나도 아주 어릴 때에는 나한테도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던가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그런 감정마저도 나이가 들면서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이 날 버리고 갔다는 사실에 화가 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가족을 그렇게 미워하고 그리워하는 것마저도 일종의 기대가 남았을 때 가능한 얘기니까 말이다. 만약 내가 진짜 아타나시아였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의 얼굴조차 모른 채로 루비궁에서 박대받으며 살다가, 처음으로 아버지인 클로드를 만나게 되었던 아타나시아 공주라면. “있지. 이거 진짜 진짜 비밀인데.” 나는 필릭스에게만 비밀 얘기를 해주겠다는 듯 소곤소곤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엄마 안 보고 싶다고 한 건 아티가 거짓말한 거야.” “그러셨습니까.” 필릭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저 그러냐는 듯 내게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근데 엄마 안 봐도 된다는 건 거짓말 아냐.” 으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소설 속의 아타나시아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아티한테는 파파가 있자나.” 아마 이 나이쯤의 나였어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고. “엄마 없어도 파파랑 자장자장도 할 수 있으니까 아티 안 울어.” 크으. 클로드 이 나쁜 자식. 제니트만 편애한 건 둘째 치고서라도 자기만 해바라기처럼 사랑하던 아타나시아를 그런 식으로 죽여 버리다니. 너 이놈 벌받아라! “그리고 루비궁에 가면 릴리도 있고 필릭스도 있고 다른 시녀 언니들도 있고 쪼코도 있어!” 그리고 클로드는 없지! 이 얼마나 쾌적한 환경이란 말인가. 흑흑. 지금도 루비궁으로 돌아가고 싶다. 클로드 이놈도 나만 내버려 두고 자고 있는데 나 그냥 가면 안 되겠니. 자, 필릭스야. 어서 나를 안아라!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소원이 있으십니까?” “소원?” “그러니까, 이랬으면 좋겠다고 원하는 일 같은.” 그걸 말이라고 묻니? 내 소원은 당연히! “열여덟…….” 18살에 클로드 놈이 나를 안 죽이는 거 말고 또 있겠냐. 그러려면 일단 18살 생일이 되기 전까지 죽으면 안 되겠지만요. 흑흑. “예?” 다행히도 필릭스는 내 말을 듣지 못한 눈치였다. 나는 5살짜리 아이에 맞춰 내 소원을 변형시켰다. “파파가 아티를 더 많이 많이 좋아해 주면 좋겠어!” 날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10살이 돼도, 18살이 돼도 날 죽이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만큼! “아티가 파파를 좋아하는 것처럼 이마안큼! 아주아주 많이!” 너에 대한 내 애정도 쥐뿔 없긴 하지만 적어도 난 널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니까 제발 기본 상식만이라도 장착하고 나 좀 봐주라. 그럼 최소한 네 딸인 날 없애려는 생각은 안 들지 않겠니. 크흐흑.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내 짠내 나는 소원에 필릭스가 마침내 작게 웃었다. “그 소원, 꼭 이루어지실 겁니다.” 나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구나. 잠결에라도 내 말이 무의식중에 자리 잡아서 클로드 놈이 제발 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게 해주세요. 제발요, 하느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이 잠든 클로드의 머리카락을 또다시 얍얍 쥐어뜯었다. 그리고 내 손 안에서 사정없이 모양을 일그러뜨리는 금발머리를 보자 조금은 속이 개운해져서 크크크 소리 죽여 웃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후 나는 병든 병아리처럼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다가 이내 클로드의 옆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전날 릴리와 필릭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 거의 밤을 샜던 탓인 듯싶었다. 게다가 옆에서 클로드까지 눈을 감고 있으니 긴장이 풀려서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아래로 자꾸만 내려앉았다. 필릭스는 무엇을 하는지 아까부터 계속 조용했다. 게다가 마침 시간도 딱 낮잠을 자기 좋은 때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푹신한 쿠션들 틈에 누워 깜빡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수마 속에서 어떤 여인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처음 내 오감을 건드린 것은 새벽이슬이 은반 위를 굴러가는 듯한 맑은 노래 소리였다. 그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도대체 누가 이렇게 예쁜 목소리로 콧노래를 부르는 건지 무척 궁금해졌다. 내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듯 마침내 시야가 맑아졌을 때, 나는 싱그러운 연두색 풀잎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햇빛 조각 같은 옅은 금발 머리가 눈앞에 아찔하게 흩날렸다. 처음에 보이는 것은 뒷모습뿐이었는데, 그녀는 마치 춤을 추듯 맨발로 푸른 잔디 위를 걷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한 마리의 나비 같아 당장에라도 멀리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무의식중에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내 손이 닿기 직전, 먼저 그녀가 나를 뒤돌아보았다. 아. 웃는다. 미소를 머금고 휘어진 자색 눈동자는 무척이나 고혹적이었으나 아직 때 묻지 않은 소녀 같은 느낌이 남아 있어 무척이나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보는 순간 숨이 멎을 듯한,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헐, 초미인! 언니, 대박 이뻐요! 완전 내 스타일! 이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라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와, 이런 언니가 매일 날 보면서 웃어준다면 진심 발닦개라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완전 여신이야. 요정이야. 언니는 나의 데스티니……. 내게로 쏟아져 내리는 그녀의 미소는 특히나 무척이나 따사롭고 다정해서, 나는 그것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고 말았다. 왜인지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먹먹해질 정도로. “공주님께서 좋은 꿈을 꾸고 계시나 봅니다.” 잠결에 흘러드는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내려 했지만 아직은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나쁜 꿈을 몰아내는 노래라며 한참을 불러댔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예. 방금 전까지 공주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요정님이 좋은 꿈을 선물해 주었겠지요.” “요즘은 입만 열면 헛소리.” “후후.” 시끄러워. 나 아직 더 자고 싶단 말이야. “우응…….” 내 입에서 잠투정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자 두 사람의 대화가 멈추어졌다. 나 조금 더 자도 되는 거야? 문득 내 머리 위로 새털 같은 온기가 와 닿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것은 닿았다는 느낌조차 거의 들지 않을 정도의 약한 힘으로 내 머리를 몇 번인가 어루만졌다. “귀찮구나. 자라.” 지금 꾸고 있는 꿈이 정말 너무나도 아름답고 행복했기 때문에, 나는 그 목소리를 허락 삼아 다시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런 다디단 낮잠이었다. ======================================= [21화] 제9장 당신은 누구십니까? “필릭스, 나 초코.” “안 됩니다.” “딱 한 개만.” “제가 혼납니다.” “흐잉.” 야멸찬 거절에 나는 울상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민쯤은 할 줄 알았는데! 나쁜 필릭스는 내 간절한 눈빛을 슬쩍 외면하기까지 했다.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매정한 오빠였어. 흑흑. “죄송합니다, 공주님.” 그래도 내가 불쌍해 보이기는 했는지 필릭스는 나를 향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난처해했다. 그럼 뭐 하나. 나한테 초콜릿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에잇! “아티는 초코가 너무너무 먹고 싶어서 잠도 못 잤는데에.” 물론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수는 없지만! 내가 잔뜩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필릭스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좋았어! 역시 효과가 있군. “진짜 진짜 딱 한 개만 먹으면 안 돼요?” 나는 내 초콜릿 물주에게 한껏 애교를 피우며 귀여움을 어필했다. 그러자 마주한 동공이 약간 흔들리는가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필릭스는 내 시녀였던 한나와 세스를 대신해 훌륭한 간식 조달자가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릴리안이 특히나 내게 단것을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필릭스의 초콜릿 지원도 끊어져 있던 참이었다. 그래그래, 너의 고충도 잘 알겠으니 이쯤 하고 어서 넘어와라, 넘어와라. “이번에는 정말 안 되는데…….” “약속. 진짜 하나만 먹을게.” “릴리안 님이 알게 되면 혼나는…….” “릴리한테 말 안 할게. 우리 둘 다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나는 열성적으로 필릭스를 설득했다. 자, 나를 봐. 초콜릿에 굶주린 내가 불쌍해 보이지 않아? 진짜 진짜 딱 하나만 먹을게. 아니, 물론 하나가 두 개가 되고, 두 개가 세 개가 될 수도 있는 거지만. “그래도…….” “아티는 초코를 못 먹어서 며칠 내내 우울하고……. 막 세상이 깜깜하고. 울고 싶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 말에 필릭스가 서서히 넘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나는 그가 나를 더더욱 가련히 여기도록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초코 먹으면 다 나을 거 같은데.” 애 먹이지 말고 빨리 넘어오란 말이야! 나는 울망울망한 눈빛으로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크흑. 지난 2년간 클로드를 상대하면서 늘어난 것이라곤 이런 불쌍한 연기밖에 없다. 그래도 나름대로 처절히 살아온 보람이 있어서, 필릭스는 결국 내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럼 정말 딱 한 개만입니다.” “필릭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나는 좋다고 필릭스를 넙죽 띄워주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러자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자, 어서 초콜릿을 내게 다오! 아이 러브 초콜릿! 기브 미 어 초콜릿! 필릭스가 내게 내미는 초콜릿이 내 방 벽장에 숨겨 놓은 내 예쁜이들만큼이나 눈부시게 반짝거려 보였다. 그러나 나는 내 초콜릿과의 감격적인 접선에 성공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어요.” “헉.”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릴리가 내 초콜릿을 압수해 갔다. “로베인 경,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 잘 부탁드린다고 했는데.” “하하. 죄송합니다.” 어느덧 릴리에게 꽉 잡혀 살게 된 필릭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 오빠는 클로드를 상대할 때에도 쓸모가 없더니 언젠가부터 릴리를 대할 때에도 저렇게 약해져 버리고 말았다. 이 개복치 오빠야! 나보다 더한 개복치 같으니! “공주님, 초콜릿 많이 드시면 또 이가 아야 한다고 했죠?” “흐엥.” 릴리의 엄격한 말투와 표정에 나는 또다시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크으. 이게 다 그 초콜릿 도둑 때문이야! 잊을 만하면 부엌 선반에서 초콜릿을 훔쳐 먹는 그놈 때문에 나는 릴리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초콜릿을 꺼내 먹으러 갔다가 바구니에 담긴 양이 생각보다 줄어들어 있어서 그냥 빈손으로 나온 적도 있었다. 그간 서너 번 정도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루비궁에 출몰한다는 귀신 얘기가 생각나 흠칫흠칫 놀라야만 했다. 아, 아니! 물론 내가 이 나이 먹고 귀신 같은 게 무섭다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진짜 귀신 게 있을 리도 없지만! 크흠. 하여튼, 그 초콜릿 도둑이 부엌에서 내 초콜릿을 훔쳐 먹은 지도 어언 2년이니, 그 인연이 참으로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느 시녀 언니인 건지 눈을 번뜩이며 찾아보려 했지만 아직도 나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대신 초콜릿 서리를 시켰던 필릭스는 그동안 한 번도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해 내 간을 더욱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내가 기가 허해서 자꾸만 잡귀들이 달라붙는 건가! 크앙. “다 공주님을 위해서예요. 공주님도 또 아프시긴 싫잖아요. 그렇죠?” 실제로 작년에 충치로 고생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릴리의 초콜릿 금지령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먹고 싶다고, 초콜릿. 어흑. 릴리도 실패, 필릭스도 실패. 루비궁의 시녀 언니들에게는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되고. 이런 철혈의 언니들 같으니라고. 으앙. 벌써 거의 2년간이나 보지 못한 한나와 세스가 그립다. 흑흑. 제길. 하는 수 없이 나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나 아빠 보러 갈래.” 어느덧 내 나이도 벌써 7살. 나는 작년쯤부터 스리슬쩍 클로드를 부르는 호칭을 변화시켰다. 사실 클로드를 처음 만난 날 어떻게든 그놈에게 임팩트 있어 보이려고 마구 던졌던 그 빌어먹을 ‘파파’란 호칭 때문에 내가 밤마다 얼마나 이불을 빵빵 걷어차야만 했던가. 역시 어린애인 척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엉엉. “공주님…….” “왜에? 아티는 진짜 아빠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하여튼, 그래서 드디어 파파 소리를 졸업하게 되어 나는 매우 기뻤다! 아티는 자유로운 아티예요! 아임 프리덤! 그런데 내 속셈을 간파한 듯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옆에 있는 필릭스를 따라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계속 느끼고 있는 건데, 이거 빼박 소규모 가족 같은 풍경 아닌가요. 철없는 아빠와 그 딸내미,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꾸중하는 엄마 같은 그림인데. “아티 안아줘. 아빠 보러 갈래!” 으앗, 자리를 피하자! 나는 필릭스의 옷자락을 밑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런 면에 있어서 눈치가 빨라진 필릭스가 지체 없이 나를 안아 들었다. “공주님께서 폐하를 찾으시니 어쩔 수 없네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래도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폐하께서는 언제든 공주님의 방문을 기꺼워하시는걸요.” 그래그래. 릴리도 참 아직까지 괜한 걱정이었다. 그놈이 비록 나를 딸이 아니라 애완동물 대하듯 하긴 하지만 고작 이런 걸로는 안 죽인다니까. “그럼 다녀오세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릴리, 빠이!” 으악. 이 신혼부부와 아이 같은 낯간지러운 모습에서 얼른 벗어나자. 나는 필릭스의 팔을 잡아당겨 한시바삐 루비궁을 나설 것을 재촉했다. “왔나.” 그간의 내 눈물 어린 노력 덕분인지 내가 가넷궁에 들어서자마자 클로드가 우리를 아는 척해 왔다. 크흑. 들었냐? ‘왜 왔나’가 아니라 ‘왔나’란다. 물론 그게 ‘또 왔나’ 하는 듯한 말투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그간 뻔질 나게 클로드를 찾아와서 애교를 부리고 귀여운 척을 했던 보람이 있었다. 그 인고의 2년을 생각하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빠아아!” 나는 필릭스의 팔에서 내려와 한껏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클로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클로드도 자상하게 웃으며 두 팔 벌려 그런 나를 안아주었다. “이제는 아주 내 궁을 제 집 드나들 듯하는군.” ……는 개뿔. 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한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클로드는 소파에 반쯤 기대 누운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로 귀찮다는 듯 휘휘 손짓해 나를 쫓아 보내려 했다. 아유, 저 손목 스냅 하나하나가 너무 얄미워서 재수가 없다. 그래도 이 정도에 기가 죽을 거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아빠, 아티 왔어요!” 나는 그런 클로드에게 쪼르르 다가가 그의 무릎에 손을 얹고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갑자기 아빠가 이마안큼, 이마아아안큼 보고 싶어서 왔어요!” 늘 해오던 짓이라 그런지 이제는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이놈에게 바라는 것까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클로드 앞에서 귀여운 척을 해댔다.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럽구나.” 클로드는 여전히 다정한 말 한 마디 해주는 법이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이런 식으로 달라붙을 때마다 그런 나를 먼저 떼어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느낌상, 본인은 아닌 척해도 내가 지금처럼 불쑥불쑥 찾아오는 걸 클로드도 진심으로 싫어하진 않는 것 같다. “에헤헤.” 얼굴만 봐도 좋다는 듯 바보같이 실실거리는 나를 보고 클로드가 작게 혀를 차는가 싶었다. 이거 봐. 아직까지도 내 위험 경보가 울리지 않고 있잖아? “필릭스.” “예, 폐하. 지시 내리겠습니다.” 클로드가 이름을 부르자 필릭스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마치 종소리를 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내 눈도 절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헉헉. 내 예쁜이들만큼 사랑스러운 귀염둥이들을 드디어 만날 수 있는 건가? 노련한 시녀 언니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내 가슴은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두근두근 콩닥콩닥거렸다. 아, 너무나 감동적인 순간이다. 시녀 언니들이 들고 오는 눈부신 하얀 접시 위의 저 아리따운 자태! 크으. 너무나 예술인 것. 만약 나한테 꼬리가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쯤 사정없이 방정맞은 움직임을 보이며 흔들리고 있었겠지. “아무래도 나보다 그 케이크를 더 반가워하는 것 같은데.” 내가 군침을 흘리며 탁자 위에 차려지는 디저트들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때 클로드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이, 얘는 쓸데없이 이런 데서만 눈치가 빨라서는. 그냥 좀 모른 척해 주면 안 되니? 사람 쑥스럽게 말이야. “아빠랑 같이 먹으니까 더 맛있어요. 에헷.”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방긋방긋 웃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눈앞에 있는 케이크를 폭풍 흡입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여전히 나를 만날 때마다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간식들을 내어주곤 했다. 그래서 나는 릴리에게 금지령을 받아 초콜릿 기근에 시달릴 때면 최후의 수단으로 클로드를 찾아와 지금처럼 간식을 얻어먹고는 했다. 옛날 같으면 내가 이렇게 자의적으로 클로드를 찾아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 새삼 흐르는 세월이 참 무섭기도 하다. “그러고도 볼살이 터지지 않다니 신기하구나.” 이놈은 맨날 나 보고 살 쪘다면서 내가 올 때마다 자꾸 이런 디저트를 내준다니까? 혹시나 복스럽게 먹는 내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만 뭔가를 먹이고 싶다거나…… 는 너무 앞서간 생각이겠지. 뭐, 지금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냠냠냠. 나는 찐득찐득한 초콜릿 퍼지 케이크를 전투적으로 흡입하며 부족한 당분을 보충했다. 이렇게 허구한 날 단 걸 퍼먹는데도 살이 찌지 않는 걸 보면 아타나시아는 실로 축복받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모양이다. ======================================= [22화] 클로드는 늘 그렇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앞에 둔 채로 내가 먹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 시선 때문에 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도 저 눈빛을 밥 먹듯이 마주하다 보니 예전처럼 무서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익숙해져서 그런가. 냠냠. 그런데 나한테 할 말 있나? 왠지 그런 표정인데? “오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나?” 아니나 다를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던 클로드가 슬쩍 미간을 좁히며 내게 물어왔다. “냠냠. 만나요? 누구를?” 당연하게도 나는 입안 가득 먹을 것을 문 채로 의문을 내비치고 말았다.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궁전에서 살고 있으면서 만나긴 누구를 만났느냐는 거야? “만나지 않았으면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무시하려무나.” 아니, 그러니까 누구를 말하는 건데요? 하지만 클로드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저조해지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이 드물게도 약간 짜증이 배어난 얼굴을 하며 찻잔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나는 케이크를 우물우물거리며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나는 클로드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잠시 후 알게 되었다. “앗! 흰둥이 아저씨다!” “안녕하십니까, 알피어스 공.” “평안하셨습니까, 공주님…….” 나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알피어스 공작을 향해 방실방실 웃어주었다. 오늘따라 정말 피곤했는지 짧은 다과 시간을 갖자마자 나를 쫓아 보낸 클로드 때문에 나는 생각보다 일찍 가넷궁을 나선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 클로드를 만나러 가는 길인 듯한 로저 알피어스를 딱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안녕, 흰둥이 아저씨?” “그러니까 신에게는 로저 알피어스란 이름이…….” “흰둥이 아저씨, 손.” 로저 알피어스는 내가 부르는 자신의 호칭을 정정하려고 하다가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2년간 나는 이런 식으로 종종 알피어스 공작을 만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를 흰둥이라 부르며 놀리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로저 알피어스는 나를 볼 때마다 학을 떼며 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일단 나는 공주이지 않겠는가? 애당초 나를 피하는 데 성공해 마주치지 않았다면 또 몰라도 이렇게 만나버린 이상 클로드의 충복을 자처하는 로저 알피어스는 내 요구를 대놓고 거부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는 필릭스에게 고이 안겨 있는 내게 하는 수 없다는 듯 시키는 대로 손을 내밀었다. 아마도 내가 평소 그런 것처럼 애완동물 먹이 주듯 자질구레한 간식 같은 것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흰둥이 아저씨, 착해요! 참 잘했어요.” 자, 오늘은 변화구입니다! 나는 내게 내밀어진 손을 밑에서 척 붙잡은 뒤 다른 쪽 팔을 뻗어 알피어스 공작의 머리를 잽싸게 쓰담쓰담했다. “푸읍.” 나를 고이 안고 있던 필릭스는 또다시 웃음을 참기 바빴다. 로저 알피어스는 또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썹을 꿈틀거리며 내게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앗, 이제 도망치려나 보다. 알피어스 공작은 이렇게 한번 공격당할 때마다 엄청난 순발력으로 자리를 비워 웬만해서는 내가 연타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크흠.” 으응?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로저 알피어스가 내게 곧바로 작별 인사를 고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헛기침 소리를 내뱉더니 ‘이만 물러가겠다’는 소리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는.” 우와, 흰둥이 아저씨가 웬일이지? 뭔지는 모르지만 나한테 할 말이 있나 본데. 이건 평소와 다른 패턴이라 조금 흥미가 동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더욱 흥미진진해지고 말았다. “혹시 주위에 말벗으로 삼을 만한 친구가 없어 적적하지 않으신지요?” 겉은 호랑이지만 속은 능구렁이에 가까운 이 아저씨가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걸까? 그러고 보니 클로드가 방금 전에 누구를 만나든 무시하라고 했었는데, 그게 이 아저씨였던 모양이다. 헉. 뭐야, 뭐야. 흰둥이 아저씨가 클로드한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기에 나한테 그런 소리를 다 한 거야. 이거 궁금하잖아. “친구?” 요즘 내 간이 많이 커지긴 했나 보다. 한 반년쯤 전이었다면 클로드가 시키는 대로 흰둥이 아저씨를 못 본 체하고 지나갔을 텐데 이렇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걸 보면. “죄송하지만, 알피어스 공. 공주님께서는…….” “로베인 경, 공주님께서 말씀 중이시지 않나. 허락 없이 끼어들지 말게.” 오직 필릭스만이 클로드의 말을 따라 알피어스 공작을 물리치려다가 그의 정색한 얼굴에 난감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필릭스의 가문인 로베인도 오벨리아의 삼대 공작가 중 하나라고는 하나, 필릭스 자체만 놓고 본다면 공작인 로저 알피어스에게 약간 밀리는 감이 있었다. 역시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이자 여주인공인 제니트의 든든한 뒷배였던 알피어스 공작이라 이건가. 그런데 그런 아저씨가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친구 얘기를 꺼냈는지 몰라. “흰둥이 아저씨, 바아보. 아티한테 친구가 왜 없어.” 음. 하지만 역시 이 아저씨가 원하는 대로 반응해 주기는 싫었다. “필릭스가 아티 친구인데?” “공주님.” 내 말에 필릭스가 감격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꿩 먹고 알 먹고. 흰둥이 아저씨도 놀리고 필릭스 호감도도 올려주고. “그보다는 또래의 아이와 관계를 맺는 편이 공주님께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오호라. 처음부터 혹시나 싶긴 했지만 흰둥이 아저씨 속내를 대충 알 것 같다. 이 아저씨가 워낙 나만 보면 기겁을 해대서 내 짐작이 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는데. “실은 신에게 공주님과 비슷한 나이의 자식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로저 알피어스는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남자 주인공이자 자신의 아들인 이제키엘을 내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흐으응? “저를 닮아 무척 총명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입니다. 나이는 공주님보다 3살 위이니 공주님께서 친오라비처럼 대해 주시면 그 아이도 공주님을 누이처럼 아낄 겁니다.” 나는 마구 소리 내 폭소하고 싶은 것을 꾹꾹 억눌러 참았다. 아이고, 이 아저씨 진짜 속 보이는 것 좀 봐! 이건 어딜 봐도 날 보험 취급하는 거지? 내가 클로드랑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으니까 제니트뿐만 아니라 나까지 스페어키로 옆에 두고 싶은 거야. 혹시라도 나중에 제니트를 앞세웠을 때 클로드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그때는 나로 갈아탈 속셈인가 보지? 그래서 미리미리 자기 아들을 나한테 붙여서 오누이의 정이든 이성 간의 정이든 뭐든 간에 일단 붙여놓으려는 계획인 모양이다. 하기야 그래서 이제키엘이 내게 뭔가를 크게 밉보이지 않는 한 이 아저씨로서는 득이 되면 되었지 결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크흠……. 그리고 이런 말은 제 입으로 하기 다소 부끄럽지만 제 아들이 저를 닮아 아주 잘생겼답니다.” 그런데 아저씨, 설마 클로드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회유하려고 했니? 본인 입으로 아들이 자기를 닮아서 잘생겼다느니 성격이 좋다느니 하면서 애들끼리 친구 시켜 주자고 꼬시려고 했다면 클로드가 짜증이 날 만도 했다. 흰둥이 아저씨, 공략법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구요! 차라리 클로드 대신 국정을 한 달 동안 봐주겠다고 그래라. 차라리 그게 더 성공 가능성이 높겠다. “흐엥, 흰둥이 아저씨 닮았으면 아티는 별로.” 아무리 남자 주인공 버프를 받았다 한들 10살은 10살. 그런 이제키엘을 보면……. 음. 좀 심하게 깰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애 데리고 나한테 뭘 하라고. 같이 쎄쎄쎄라도 하라는 말이야? 그럴 시간에 아를란타어 단어를 하나라도 더 외우겠다. 가뜩이나 요즘 공부 양이 늘어서 놀 시간도 줄어들었는데 말이야. 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널 닮았으면 싫다’고 말하자 알피어스 공작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그는 내 말에 미묘하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 7살짜리 꼬마의 말에 기분 상한 티를 내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한 듯,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그리고 심드렁하게 알피어스 공작을 바라보던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슬며시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 말았다. “공주님과 동년배인 여자아이는 어떠신지요?” 아니, 이 아저씨가 시방 돌았나? 나는 기가 막혔다. “아, 알피어스 공의 질녀라는 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몸이 약해 플로레아 지방에 요양 간 내 사촌 누이의 막내딸을 대신 돌봐 주고 있지.” 핑계 한번 좋구나. 물론 제니트를 황제의 딸이라고 대놓고 드러내 키울 수는 없으니 그런 적당한 구실을 붙이는 게 당연하겠지만. 알피어스 공작이 데려다 맡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듯, 필릭스도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그는 예전부터 내게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클로드를 설득했던 만큼 나와 동갑인 여자 아이에게 호기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떠십니까, 공주님?” 알피어스 공작 때문에 지금 좀 빡쳐 있었다. 어떻긴 뭘 어때, 이 미친 아저씨야! 이제키엘이라면 차라리 그러려니 하겠는데 지금 이 아저씨가 나한테 제니트를 갖다 붙이려고 해? 하, 진짜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 척하고 있으려니까 호구로 보이나. 애초에 아타나시아가 죽게 된 게 여주인공인 제니트의 꽃길에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인데 지금 나보고 그 애랑 친구를 하라고? 그래서 친구가 되면 뭐. 미리 클로드한테 눈도장이라도 찍으라고 하게? 물론 나도 제니트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타나시아가 되었기 때문인지, 제니트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소설 속에서 아타나시아가 죽을 일도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제니트의 존재 자체가 다소 꺼림칙했고, 그런 그녀를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제니트의 이모나 알피어스 공작을 생각하면 가끔씩 그들을 한 대씩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한 짓은 어디까지나 책 속에서의 일이었던데다 또 실제로 마주한 알피어스 공작은 내 생각만큼 악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지금껏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왔던 것인데.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치려 하는 꼴을 목격하자 이마에 빠직 핏대가 서는 것 같았다. 아오. 아까 머리를 쓰다듬는 게 아니라 그냥 쥐어뜯어줬어야 하는 건데! “공주님, 만약 공주님께서 친구를 원하신다면 저도 알피어스 공과 함께 폐하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필릭스는 순진한 눈빛으로 내 의견이 어떤지를 묻고 있었다. 로저 알피어스는 설마 내가 두 번씩이나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까 싶은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태였다. 궁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아무도 없는데다 보통 이 나이의 아이는 친구를 갖고 싶어 하게 마련이니 나 역시 어렵지 않게 그의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라 믿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마침 알피어스 공작가에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한 명씩 있었으니 내가 어느 성별의 친구를 원하든 맞춰줄 수 있어 잘되었다 싶었겠지. ======================================= [23화] 지금쯤 새로운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을 로저 알피어스를 생각하니 내 표정은 절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클로드가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 생각 취소할래. 이제부터 재수 없음의 1인자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하얀 멍멍이다! 나는 알피어스 공작을 엿 먹여 주기 위해 짜증 난 기분을 숨긴 채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입을 볼록 내민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응, 그치만 아티는 아티보다 멍청한 친구는 싫은걸?” 내 반응이 뜻밖이었던 탓일까? 설마 내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내 직설적인 화법에 필릭스도 알피어스 공작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 공주님.” 큭. 내가 생각해도 나 지금 좀 재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이 아저씨에게 크고 아름다운 엿을 안겨줄 수만 있다면! “크흠. 공주님께서 그런 걱정하실 필요가 없는 제법 영특한 아이입니다.” 아, 그러세요? 자신만만한 로저 알피어스의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렴 그러시겠지. 훗날을 위해 일찍부터 제니트를 조기교육시켰던 당신이니까. 그럼 이건 어떠냐. 나는 흰둥이 아저씨의 말에 기대된다는 듯 우와, 소리 내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그럼 흰둥이 아저씨가 말한 애 아를란타어로 말할 줄 알아? [흰둥이 아저씨 바보 똥개 말미잘].” 내 입에서 제법 유창하게 흘러나온 아를란타 언어에 로저 알피어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 놀라면 쓰나. “파스칼 공용어는? [하얀 멍멍이 오줌싸개 멍청이. 메롱 메롱].” “…….” “사이칸시아 신성 제국어 정도는 쉬우니까 벌써 다 끝냈겠지? [신은 거짓말쟁이에게 천벌을 내리리라].” 사이칸시아 신성 제국어로 성서의 한 구절을 낭독하기까지 하자 로저 알피어스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렇지만 아직 더 남았는데? “사회학 이론은 어느 정도 공부했어? 그렇게 똑똑한 애면 중권까지는 벌써 다 떼었겠네? 웅, 아티는 막스 베르딩거의 기능주의 이론이 좀 어려워서 막혀 있는데 그 애는 벌써 빌 로이츠까지 배웠겠지. 다른 공부는 어때? 마력학은? 철학은? 역사는?” “…….” “어……. 그런데 흰둥이 아저씨가 그렇게 똑똑하다고 하는 애니까 아직 아를란타어도 잘 못하는 아티랑은 친구하기 싫다고 할지도 몰라……. 지금 배우고 있는 거 다 끝낸 다음에 그 애한테 친구 하자고 해봐도 돼?” 나는 벌써부터 그 애한테 차이기라도 한 양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알피어스 공작에게 물었다. 그러고 나자 어느덧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있었다. 하, 이 희열. 아무래도 제가 이 날을 위해 그동안 클로드가 보낸 가정교사들에게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배웠었나 봅니다. 난 그냥 클로드에게 예쁨받으려고 숙제도 열심히 하고 수업도 열심히 듣고 그랬던 것뿐인데 이런 일에도 쓸모가 있을 줄이야. 그래. 나도 성격이 좀 고약하긴 하다. 인정. 그렇지만 이 흰둥이 아저씨가 먼저 날 건드렸단 말이야! 으씨, 여긴 내 홈그라운드인데 제니트를 막 내 옆에 밀어 넣으려고 하고. 어, 그런데 잠깐……. 만약에 흰둥이 아저씨의 계략이 성공해서 원작보다 제니트가 더 빨리 클로드를 만나게 되면, 혹시 나도 원작에서보다 더 일찍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헐헐. 미쳤다. 돌았다. 이거 그냥 알피어스 공작이 제니트 정체를 숨기고 나한테 붙여주려고 한다는 이유로만 짜증 낼 문제가 아니었어!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무척이나 영민하시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바로 그때 로저 알피어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어왔다. “이건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것 같군요.” 그는 침착한 모습을 되찾은 채 나를 향해 감탄했다는 듯 허허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마치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제 질녀 역시 일찍부터 학문에 관심을 두긴 했으나 공주님께 댈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당연하지. 아무리 여주인공이라고 해도 제니트는 지금 한창 손에 흙 묻히고 놀 나이인 7살이잖아. 나도 내가 그런 아이를 상대로 지금 반칙을 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으악.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나니 실로 낯부끄러운 짓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흑역사는 축적되고, 나는 오늘 밤도 이불을 빵빵 걷어차고. 그래도 어쨌거나 흰둥이 아저씨를 물리친 기분은 썩 나쁘지 않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지. 내가 이 정도까지 했으면 그냥 물러가라. 훠이훠이. “역시 제 아들은 어떠시겠습니까? 공주님과 어느 정도 말이 잘 통할 듯싶은데.” 뭐얏? 그 10살짜리 꼬꼬마가 벌써 나랑 비슷한 수준이란 말이야? 그거 허풍 아니야? 평소 나를 대할 때 로저 알피어스가 느꼈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고작 10살 먹은 어린애와 내 수준이 같다는 말에 나는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흰둥이 아저씨 안 닮게 되면 생각해 볼래.” 입을 삐죽거리며 내뱉은 내 말에 로저 알피어스가 끄응 소리 냈다. “아티 이제 갈래.” 나는 그런 그를 뒤로하며 이제 그만 루비궁에 가자는 의미로 필릭스의 팔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래서 알피어스 공작은 결국 나를 회유하지 못한 채로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필릭스의 팔에 안겨가면서 슬쩍 뒤돌아보니 로저 알피어스는 클로드가 있는 가넷궁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나를 구슬리는 건 실패했으니 이제 또 클로드를 설득해 볼 생각인가 보다. 벌써 몇 번씩이나 거절한 걸 보면 클로드도 뭐 저 수작질에 넘어가지는 않겠지. 에잇, 퉤퉤. 여기 소금 없냐. 오늘 일진이 안 좋아서 소금 좀 뿌려야 할 것 같은데. 그나저나 진짜 이제키엘 그놈이 나랑 같은 수준으로 공부 중이라고? 나는 왜인지 기분이 나빠져서 또 다시 입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풀이 죽어 있는 듯하던 필릭스가 이내 다짐하듯 내게 말했다. “공주님, 저 공주님께서 부끄러워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응? 뭐를? 당연하게도 나는 의문 어린 눈길을 보냈지만 필릭스는 다만 혼자서 굳세게 결의를 다질 뿐이었다. * * * “자, 자리에서 일어나 보세요.” 오늘도 나는 무척이나 바빴다. “이제 앉아 보세요.” 앉아! 일어나! 기다려! 같은 똥개 훈련을 하느라 말이다. “이번에는 제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와 보세요.” 이놈의 기초 예법은 말 그대로 기초 예법이었기 때문에 매일 30분씩 기본적인 궁정 예절을 복습한 뒤에 그날 배울 다른 내용으로 넘어가곤 했다. “공주님께서는 일찍부터 예법 공부를 시작하신 탓인지 기본자세가 아주 좋으세요.” 나를 칭찬해 주는 것 같지만 이건 다 자화자찬이다. 요컨대 자신이 지난 2년간 내게 기본을 잘 가르친 탓에 또래 애들 같지 않게 예법이 봐줄 만하다는 것이다. 으아유. 다른 공부는 재미라도 있지 예법은 꿈도 희망도 재미도 감동도 없어. 그래도 다행히 시간은 빨리 흘러서 엘로이즈 백작 부인에게 배우는 예법과 작문 수업은 금세 지나갔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었다. “오벨리아의 번영이 닿기를. 간밤엔 평안하셨습니까, 공주님.” 이번에는 아를란타어 수업이다. 전 시간에 암기 숙제로 내주었던 단어를 간단히 테스트하고 난 뒤에 독해와 읽기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날 배운 단어를 넣어 간략한 문장을 만드는 것이 수업 말미에 있는 그날의 최종적인 과제였다. 하지만 나 같은 어린애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란다 싶었는지, 실제로는 나를 가르치는 교사가 문장을 만들면 내가 그걸 따라서 읊는 식이었다. 그리고 약 두 시간에 걸친 아를란타어 수업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역사 공부에 들어간다. 내게 아를란타어와 역사 과목을 가르치는 사람은 오벨리아의 유명한 학자로,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나는 잘생긴 젊은 오빠를 바랐는데 좀 아쉽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것을. 크흑. 참고로 나는 그에게 격일로 사회학 이론도 배우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우와아! 드디어 하루치 수업이 모두 다 끝났다! 나는 신이 나서 속으로 마구 환호성을 내질렀다. “허허. 공주님께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시니, 스승 된 입장에서 참으로 뿌듯합니다.” 그래그래, 내가 좀 똑똑해. 그러니까 그쯤 추켜세워 주고 얼른 가라.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루비궁을 떠나는 백발의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오전 시간에 나를 가르치러 왔던 엘로이즈 백작 부인이 본다면 질겁할 본데없는 인사법이었지만 이 할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친손녀처럼 격 없이 대하는 걸 더 좋아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나는 스펀지처럼 배우는 것마다 그 엑기스를 쭉쭉 빨아들였다. 전생에서는 하고 싶어도 못했던 공부라 이렇게 원하는 대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기도 했던 탓이었다. 물론 어떤 날은 공부가 너무너무 하기 싫어서 좀이 쑤실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필릭스, 필릭스. 뭐 해?”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투다닥 필릭스를 향해 뛰어갔다. 요즘은 매일 가정교사들에게 수업을 받는 것 외에 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심심했다. 가넷궁 앞에서 알피어스 공작을 만났던 이후로 클로드는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필릭스가 전하기를, ‘말이 안 통하는 멍멍이가 있으니 한동안은 루비궁을 나오지 말라’고 클로드가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혼자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흰둥이 아저씨 참 용감하기도 하지. 저러다 클로드가 한번 제대로 빡 돌면 흰둥이 아저씨도 사지 멀쩡히 집으로 돌아가진 못할 건데. 하기야, 전과 비교하면 클로드도 좀 얌전해진 게 아니긴 했지만.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았던 2년 전에 비하면 참으로 순둥순둥해지기도 했다. 물론 그 순둥하다는 기준이 보통 사람과 다르긴 했지만 말이다. “으응? 이거 뭐야? 뭐야, 뭐야?” 아무튼, 나는 릴리를 제외하고 루비궁에서 유일하게 나와 잘 놀아주는 필릭스에게 가서 뭐야 뭐야 공격을 퍼부었다. 필릭스는 방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드물게도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그는 내가 다가간 것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필릭스의 다리에 매달려 사정없이 기웃거렸다. “아, 공주님. 수업은 끝나셨나요?” 그러자 필릭스가 그제야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필릭스는 뭐 하구 있어?” 나는 하던 건 그만두고 나랑 같이 놀자고 할 요량으로 필릭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별안간 필릭스가 내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뿌듯한 웃음을 내뱉는 것이었다. “막스 베르딩거를 공부 중이었습니다.” “어, 막스 베르딩거?” “예. 공주님의 친구라면 무릇 이 정도 내용은 머리에 담고 있어야지요.” 뭐, 뭐지? 나는 갑작스러운 필릭스의 학구열에 남몰래 당황했다. 때늦은 바람이라도 든 것일까. 어쩐지 며칠 전부터 틈이 날 때마다 책을 들여다본다 싶더니만……. ======================================= [24화] 필릭스가 움직일 때 슬쩍 들여다본 책의 제목은 『사회학 이론 中』이었다. 이거 내가 흰둥이 아저씨한테 말했던 거잖아? “으응. 이거 다하고 나면 나랑 놀아줘.” 그런데 다른 때 같으면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필릭스가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오늘 공부해야 할 분량을 아직 끝마치지 못해서 지금은 같이 놀아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오래 걸리는 거야?” “이걸 다 보고 나면 아를란타어 기초 단어를 50개 외워야 하거든요.” 찜찜한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이 오빠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 그래? 그런데 그런 건 갑자기 왜 하는 거야?” 뭔가 느낌이 쎄 해져서 묻자 필릭스가 쑥스러운 듯 콧잔등을 긁적이며 수줍게 말했다. “실은 저는 그날 감동했습니다.” “으응?” “공주님께서 저를 친구라고 말씀해 주실 줄 몰랐거든요.” 내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아니, 물론 내가 흰둥이 아저씨 앞에서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거 그냥 별 의미 없는 소리였는데. 헉. 왠지 미안해지고 있어. “그래서 저는 그날 결심했습니다. 절대로 공주님께 부끄러운 친구가 되지 않겠다구요.” 필릭스가 굳은 결의에 찬 얼굴로 말하는 것을 보자 나는 무척 당황스러워지고 말았다. 잠깐, 잠깐. 내 친구가 되는 거랑 공부랑 무슨 상관이라고 자꾸 이러는 거지?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던 바로 그 순간 어떤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티는 아티보다 멍청한 친구는 싫은걸?’ 크헙.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내 목소리에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러니 저 힘내겠습니다, 공주님.” 눈앞에서 반짝이는 순진한 눈망울에 등 뒤로 삐질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뭐야, 뭐야. 설마 그래서 나 때문에 공부를 한다는 거야? 내, 내가 그날 나보다 멍청한 친구는 싫다고 해서? 그건 그냥 흰둥이 아저씨를 무찌르려고 한 말이란 말이야! “아니……. 그런 거 안 해도 필릭스는 아티 친구인데?” “아닙니다. 공주님의 친구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기본으로 숙지하고 있어야지요.” “아, 안 그래도 돼.” “저, 필릭스 로베인은 다시 태어날 겁니다.” 내 거듭된 만류에도 필릭스는 꿋꿋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한 번 공부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에게 어정쩡한 인사를 남긴 채로 방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이, 이런. 왠지 나 또 순진한 저 오빠를 속여먹은 것 같은 느낌인데. 저런 천연기념물 뺨치는 오빠 같으니라고. 방금 전 본 필릭스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떠올리자 마음속 깊이 죄책감이 일었다. 크으. 나, 난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어느 정도 인적이 없는 후원 쪽에 와서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아우, 필릭스 저 오빠를 진짜 어쩌지. 하기야 생각 없이 막말을 내뱉어댔던 나도 문제지만. 으흑. 나란 바보. 나란 곱등이. 흑흑. 바스락. 그런데 바로 그때 근처에 있는 덤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한창 회한에 젖어 마른세수를 하고 있던 손을 뗐다. 응? 저거 뭐야? 그리고 보게 된 것은 녹색 덤불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 새까만 털 뭉치였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저게 도대체 뭐지? 먼지 덩어리인가? 그런데 방금 저거 움직이지 않았어? 부스럭. 헉. 또 한 번 검은 털 뭉치가 흔들렸다. 나는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며 그것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털 뭉치가 낀 덤불을 살며시 벌려 보았더니……. “헉, 귀여워.” 동글동글한 노란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흐억, 이거 뭐야? 동화나라 요정이야? 이 귀여운 생물체는 도대체 뭐야? 새까만 털이 복슬복슬한 그것은 고양이도 강아지도 아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엄청나게 귀엽잖아! “맘마 줄게, 이리 와.” 루비궁에 이런 동물이 살았던가? 나는 무섭게 흥분해서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새끼 짐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털 만지고 싶어! 쓰담쓰담하고 싶어! 그런데 그것은 잠시 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덤불 너머로 홱 몸을 날렸다. “앗, 기다려!” 먼지 덩어리처럼 생긴 게 잽싸긴 엄청 잽싸다! 에잇, 안 돼! 털 한번만 만져 보게 해줘! 나는 까만 털 뭉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까망아!” 벌써 이름까지 붙여줬다. 이렇게 강력한 운명을 느낀 건 꿈속에서의 요정 언니 이후로 처음이야! “까망아, 어디 있어?” 우쭈쭈. 이제 그만 이리 오지 않으련? 내가 맛있는 맘마도 주고 털도 빗어줄게. 나는 까만 털 뭉치를 찾아 평소에 잘 오지 않던 루비궁의 후원 구석구석을 뒤졌다. 앗! 저쪽에 있다! 새까만 털! 나는 또다시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 웃자란 수풀 너머로 보이는 까만 형체를 향해 확 달려들었다. “잡았다!” “윽!” 그런데 내 귓가에 울린 것은 나지막한 남자의 신음이었다. 헉?! 이거 까망이 아니야? 그러나 미처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나는 곧바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엄마야!” 잠깐만! 기울어진다, 기울어진다! 바스락! 초록의 잎사귀들이 내 얼굴이며 팔다리를 마구 할퀴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체중을 실어 사정없이 몸을 날렸기 때문인지 그다음 내게 닥친 여파도 작지 않았다. 아야야. 따가워! 풀잎에 긁힌 피부가 아려서 나는 잠시 끙끙거렸다. “으윽. 갑자기 뭐야.” 그런데 별안간 머리 위에서 혼잣말 같은 낮은 음성이 흘러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따라 눈물이 찔끔 맺힌 눈동자를 움직였다가 이내 깜짝 놀라 숨을 멈추고 말았다. “아파. 내 머리 그만 잡아당겨.” 장미처럼 아주 예쁜 붉은 눈동자였다.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빨간 색깔의 눈이 무서울 만도 한데, 그저 한없이 예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내가 자기 머리를 뭘 어쩌고 있다고……. “그만하고 내려올래?” “헉.” 내가 이 사람 머리를 잡아 뜯고 있었잖아! 게다가 방금 전 덤불 너머로 넘어지면서 누구인지 모를 이 남자를 깔아뭉개고 있기까지 했다. 어쩐지 이상하게 몸통에 와 닿는 충격이 적더라니! 나는 화들짝 놀라 손에서 힘을 빼고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며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전 내가 덮쳤을 때 실수로 삐끗한 모양이었다. 그는 목이 뻐근한 듯 뒷목을 주무르며 눈살을 살짝 찌푸리기까지 했다. 슬며시 고개를 내리자 아마도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내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하하……. 이렇게 보니 까망이랑 달리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인데 왜 착각을 했는지 몰라……. 나는 앞에 있는 사람 몰래 그의 머리카락을 푸른 잔디 위로 슬쩍 날려 보냈다. “쪼그만 게 무겁네.” 그건 그렇고, 무슨 남자애가 이렇게 인형같이 생겼대? “너 누구야?” 나이는 열일곱, 열여덟 정도 되었을까? 대충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는데, 아직도 가슴이 쿵덕쿵덕거릴 만큼 예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게 여자애처럼 예쁘게 생겼다는 게 아니라……. 전에 알바하던 곳에서 알고 지냈던 동생이 요즘 인기라며 보여줬던 비스크돌처럼 생겼다. 한마디로 잘생쁨이다, 잘생쁨. “그러는 오빤 누구야? 여긴 아무나 들어오면 안 되는데.” “난 아무나 아니야.”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하긴 그러니까 여기에 있겠지. 그런데 루비궁은 남자 출입 금지라서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물론 클로드가 직접 붙여준 필릭스는 제외였지만. 그는 임시로 내 기사가 되어서 어쩌다 보니 벌써 2년째 호위를 맡고 있었지만 사실 황궁 안은 안전해서 따로 호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현재 필릭스가 하는 일이라곤 클로드를 만나러 갈 때마다 나를 안아서 이동시키는 일이나 릴리가 바쁠 때 나랑 같이 놀아주는 것 정도가 다였다. “눈을 보니 직계인 것 같은데. 카일룸이 언제 딸을 낳았지?” 그런데 이 오빠 지금 무슨 소리 하니? 황궁에 살고 있는 어린애는 당연히 나 하나뿐인데 직계니 아니니 따질 게 뭐가 있어. 그리고 카일룸?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너 몇 살이야?” “나 7살.” 잠깐. 내가 왜 순순히 대답을 해주고 있지? 남자의 태도는 당당하기 이루 말할 데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가 묻는 대로 술술 대답을 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황족이라는 걸 아는데도 그는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거리낌 없이 하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매우 의문스러워졌다. 진짜 이 사람 뭐야? “오빠 진짜 누구야?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내 질문을 듣고 남자가 아까부터 잔디 위에 고정시키고 있던 왼쪽 팔을 들어 올렸다. “이거 잡고 있었어.” “까망이!” 그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 내가 열심히 쫓고 있던 털 뭉치가 들려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노란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것은 남자의 손 안에서 ‘키잉’ 소리 내며 몇 번인가 버둥거리다가, 붉은 눈동자가 내게서부터 옮겨가는 순간 아주 얌전해졌다. “오빠가 키우는 거야?” “설마 이거 오늘 처음 봐?” 무슨 동문서답이야? 당연히 처음 보니까 너한테 묻는 거 아니겠니? 그런데 그는 내가 이 동물을 오늘 처음 보는 것이 아주 신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뭐야. 네가 주인이라서 데리러 온 거 아니었어? “공주님!” 어라? 그런데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필릭스 같은데? 공부를 한다고 나를 혼자 내보내놓고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나 보다. 아니면 릴리가 나를 찾아오라고 했거나. 마침 나도 이 수상쩍은 남자와 단둘이 있기 찜찜했던 참이라 냉큼 필릭스를 부르기로 했다. “필…….” 따악. 그런데 내 앞에 있는 남자가 손가락을 튕긴 바로 그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도대체 어디 계신 거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필릭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다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찾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피, 필릭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따악. 내 앞에 있는 남자가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갑자기 필릭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맞아. 아를란타어 단어를 아직 열 개밖에 못 외웠지. 빨리 마저 끝내고 공주님 찾으러 가야겠다.” 그러고 난 뒤 필릭스는 곧장 나를 내버려 둔 채 후원을 빠져나갔다. “들키면 귀찮아지니까.”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멀어지는 필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특히 오벨리아 놈들은 꼭 볼 때마다 사람 성가시게 군단 말이야.”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생각만 해도 귀찮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나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그래서 최대한 조용히 왔다 가려고 했는데 너한테 벌써 들켜 버렸으니. 어쩐다지.” 그는 잠시 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듯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까만 털 뭉치가 다시 ‘끼잉끼잉’ 소리 내며 버둥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지금.” 그런 내 가슴은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지금 뭐 한 거야?” “그냥 귀찮은 것 좀 치웠어. 그런데 이상하네. 생각보다 감각도 둔하고 마력도 많이 약해졌어.” ======================================= [25화] 그는 제 마음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듯 자유로운 오른쪽 손을 쥐었다 펼쳤다 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그의 말에 흥분해서 외쳤다. “오빠 설마 마법사야?” 그런 내 목소리는 한껏 고양돼 있었다. 나는 남자에게 더 바싹 다가가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촌스럽게. 마법사 처음 봐?” 그러자 그가 별 이상한 애를 다 보겠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이 오빠 궁정 마법사인가 봐! 어쩐지,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황궁을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오벨리아에서도 마법사는 꽤나 희귀한 존재라 황궁소속 마법사도 고작해야 그 수가 50명이 안 된다고 배웠다. 물론 클로드가 마법을 쓸 수 있다지만 나한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모든 것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다른 거, 다른 것도 할 수 있어?” 내가 너무 좋아하자 마주한 눈빛이 약간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이내 다른 말없이 손을 들었다. “이런 거?”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나온 비눗방울이 둥실둥실 허공을 날았다. “우와아!” 지금! 맨손에서! 비눗방울이 나왔어! 손 위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화염 같은 걸 보여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소박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기구 없이 그가 손에서 비눗방울을 계속 뽑아내기 시작하자 나는 진짜 7살짜리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흥분하고 말았다. 눈앞에 투명한 비눗방울이 둥둥 떠다녔다. 햇빛을 받아 오색 찬연하게 반짝이고 있기도 하다. 바람이 불자 그것들은 나를 향해 훅 날아들었다. 나는 그것을 잡으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내 손가락 끝에서 동그란 것들이 비누 향기를 풍기며 방울방울 터져 나갔다. 아, 냄새 좋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왠지 점점 숨이 막히는 것 같……. “크릉!” 바로 그때, 나를 감싸고 있던 것들이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나는 꿈이라도 꾸었던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떴다. 응? 그런데 눈은 언제부터 감고 있던 거지? 낑. 끼잉……. 그런데 아까부터 어디서 멍멍이 소리가……. 방금 전에는 짐승이 이를 드러내며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기가 억눌린 듯 낑낑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있었다. “하. 뭐야.” 나는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가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그 따위 잔재주로 감히 날 방해한 거야?”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까만 새끼 짐승을 향해 기가 막히다는 듯 혼잣말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섬뜩할 정도로 차게 식어 있었다. “짐승 새끼 주제에 건방지게. 그냥 없애 버릴까?” 그러자 그 한기 가득한 시선을 받은 털 뭉치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또다시 끼이잉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뱉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그가 까망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해 보였다. “까망이 괴롭히지 마!” 우리 까망이 괴롭힐 데가 어디 있다구! 작은 동물 친구를 괴롭히는 건 나쁜 사람이야! 인간 말종이야! 쓰레기야! 그것도 타지 않는 쓰레기! 분리수거 불가능! “오빠 까망이 주인 아니지?” 나는 이번에야말로 확신을 갖고 물었다. 그러자 마주한 얼굴이 심드렁하게 변했다. “이거 주인은 너잖아.” 아까부터 이해하지 못할 소리만 하고 있었다. 내가 주인이었으면 너한테 ‘네가 까망이 주인이냐’고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거듭 물어봤겠니? “마법사도 처음 보고, 신수도 처음 보고. 어디 깡촌에서 살다 왔어?” 그런데 이놈은 오히려 나를 지진아 혹은 천치 취급이었다. 아니, 이거 조금 열 받는데? 그는 잠시 동안 뭔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의심하는 듯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너 카일룸 딸 맞아?” “그거 우리 아빠 아니야!” 아까부터 말해주고 싶었다! 어디서 남의 족보를 지 마음대로 다시 만들고 있어? “아니야? 역시 그런가. 내가 생각보다 좀 오래 잤나 보네. 그럼 그 아들 이름이…….” 그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다가 마침내 원하는 답을 생각해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아에테르니타스. 그럼 너 그놈 딸이야? 그래도 카일룸은 나름대로 바보 소리 안 들을 만큼은 똑똑했는데 어쩌다 그 아들하고 손녀는.” 이번에는 나도 확실히 알고 있는 이름이 나왔다. 아에테르니타스. 역대 오벨리아의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영원’을 뜻하는 그 이름의 주인공은 클로드보다 3대 전에 제위했던 황제였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 아빠 이름은 클로드야!” 넌 깡촌이 아니라 언덕 위에 있는 하얀 집에 살다 왔니? 무슨 3대 전 황제 이름을 자기 앞집 꼬마 얘기하듯 말하고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카일룸이란 이름도 생각났다. 아에테르니타스의 바로 전에 제위했던 황제로 너무 빠르게 요절해 역사서에는 거의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이 아니던가. “클로드?” “그래!” “설마 그게 지금 황제 이름이야?” “그래!” 헉. 그럼 나 지금 살짝 머리가 돈 사람하고 단둘이 인적도 없는 후원에 있는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하는 말에 짜증스럽게 답해 놓고 나는 갑자기 흠칫해서 입을 다물었다. 아, 아무래도 난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아하하!” 그런데 갑자기 내 귀에 뜬금없는 웃음소리가 번졌다. 나는 무심코 그 소리를 따라 눈길을 움직였다. 내 말을 듣고 나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던 미친 사람이 갑자기 웃기까지 시작하니 겁이 나야 정상일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웃음소리가 너무 맑아서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하하. 그게 뭐야. 나 이런 거 처음 봐. 그새 역성혁명이라도 일어난 거야?” 그리고 보게 된 그의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해맑아서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보니 십 대 중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소리 내서 웃는 얼굴이 소년처럼 해사해서 그런가. 그런데 방금 전에 까망이를 향해서 서느런 눈빛을 빛낼 때에는 보이는 것보다 어른처럼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에 이 남자의 실제 나이가 몇인지 도무지 추정해 낼 수가 없었다. “응?” 그런데 그가 한참 웃다 말고 갑자기 내 얼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웃음기가 남아 있던 얼굴에 문득 눈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 어렸다. “잠깐.” 그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지기까지 했다. 이, 이거 왜 이래? 어디서 처음 보는 여자 얼굴을 함부로 막막! “흐응?” 그러는 와중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까망이가 자유를 되찾아 잔디 위로 폴짝 내려앉았다. 하지만 까망이는 자리에서 달아나는 대신 내 품을 파고들었다. 헉. 이거 좀 좋다. 내 앞에 있는 이놈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게 뭐야.” 그는 내 얼굴까지 잡아 돌리면서 나를 요리조리 뜯어봤다. 바로 코앞에서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내 심연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마치 영혼을 붙들린 것처럼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나는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너 신기하네. 이런 경우는 처음 봐.” 마침내 유리알 같은 붉은 눈동자 안에 이채가 돌았다. 나는 그 붉은빛 속에 마치 꽃처럼 생기가 피어나는 모습을 약간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따분했는데 이건 좀 재미있겠어.” 방금 전에는 무슨 말을 하던, 무슨 행동을 하던 그냥 사람 감정을 흉내 내는 인형 같았는데……. 갑자기 말하는 인형이 진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어쩔까.” 그러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그럼 그냥 살려둘까.” 저기요……? 지금 그 고민의 대상이 혹시 나입니까? 이거 내 목숨이거든요? 네 목숨 아니거든요? 이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돼먹었길래 클로드 놈이나 이놈이나 다들 내 목숨을 맡겨놓은 담보 취급하지 못해서 안달이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이 사람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보다 황당함이 먼저 내 머릿속을 뒤덮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워낙 맑아서 진짜 죽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얘 진짜 미친놈 아니야? 끼잉. 바로 그때, 내 품속에 있던 까망이가 작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를 따라 내 얼굴에 못 박혀 있던 시선도 마침내 다른 곳으로 움직여졌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는 내가 안고 있는 까만 새끼 짐승을 보며 선심 쓴다는 듯 웃어 보였다. “좋아. 이게 뭔지 설명해 줄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아니, 이제 별로 안 궁금한데. 안 궁금, 안 물. 너 그냥 좀 가주면 안 되겠니. 하지만 뒤이어 그가 내뱉은 말에 나는 금세 호기심을 되찾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이건 네 마력으로 태어난 거야.” 뭐, 내 마력? “내 마력으로 태어났다고?” 귀를 의심하며 반문하자 그가 또 다시 부진아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연하게도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아니, 이놈이? 이래 봬도 내가 나름 영재 소리를 듣고 있는데 어디서 날 바보 보듯 하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직계면서도 이렇게 마력이 쥐똥만큼도 없지. 네 아빠가 그런 것도 말 안 해줘? 그 보석안을 보면 기껏해야 서자가 적통 후계자 대신 보위에 오른 정도고 아예 오벨리아의 핏줄까지 바뀐 건 아닐 텐데. 이름은 클로드지만 어차피 그놈도 직계인 건 맞았을 거 아니야. 그나저나 제 자식한테 클로드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아에테르니타스 그놈도 원래부터 음침하고 성격 나쁜 건 알았지만 참 상상 이상이네.” 나는 놈의 말에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직계의 마력이니 뭐니 클로드에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고, 클로드의 아빠는 아에테르니타스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은 벌써 3대 전의 황제라니까 그러네! “아, 벌써 좀 귀찮은데.” 몇 마디나 했다고 귀찮대, 이놈이! “그래서 까망이가 내 마력으로 태어난 신수라는 거야? 신수가 뭔데?” “신수는…….” 그는 자신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지진아 제자가 잘 알아들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선생님처럼 약간 착잡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네 마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지.” “마력의 결정체?” “성체가 되면 스스로 너한테 흡수돼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이 될 거야.” 그는 이런 것까지 굳이 설명해야 하나 회의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마저 말했다. “그리고 신수는 아무한테나 생겨나는 게 아니고, 소유자의 능력이 그릇보다 넘쳐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일 때만 그게 신수 형태로 떨어져 나오는 거야.” 그의 말을 들은 직후 내 머릿속에 댕댕 종이 울렸다. “그래서 보통은 주인한테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건 짐승 새끼 주제에 수줍음이라도 타는 건지.”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내 자질이 너무 뛰어나다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내 마력이 몸 밖으로 떨어져 나왔다는 거지? 왜냐면 내 마력이 너무 강해서. 그래서 신체 보호 차원에서! “그럼 내가 대마법사란 말이야?” ======================================= [26화] 헉헉, 대박. 완전 대박! 드디어 내 인생에도 볕 들 날이 오는 건가! 가슴이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내가, 내가 마법을 부릴 수 있다니! 그것도 이 몸이 대마법사님이시라니! “둘 중 하나지. 마력은 어마어마한데 아직 어린 신체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깨질 위험이 있거나 그냥 그릇이 너무 심하게 부실해서 보통의 마력조차 담아내지 못할 정도이거나.” 그는 내가 껴안고 있는 까망이를 힐끗 내려다보면서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려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네 건 좀 쓸 만해. 아까도 임시지만 내가 발현시킨 마법도 깨버렸고.” 뭔지는 잘 몰라도 아까 이놈이 까망이한테 무섭게 굴던 것과 상관이 있나 보다. 그러니까 이 까망이는 내 마력으로 형체를 갖게 된 거고, 나중에 성체가 되면 내 힘이 된다 이거지? 그럼 그때부터 나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고? 와! 우와! 우와와아! 역시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열심히 살다 보면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오는 거였어요. 클로드가 나한테 왜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걸로 내 생명줄이 조금은 더 길어진 느낌이었다. “말해줘서 고마워, 오빠!” 눈앞에 있는 사람의 뒤에서 갑자기 후광이 비쳐 보였다. 이 오빠가 말 안 해줬으면 계속 모를 뻔했잖아! 어라, 그런데 좀 이상하다.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 아타나시아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내용은 본 적이 없었는데. 뭐, 클로드가 마법사라는 얘기도 소설 속에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긴가민가한 거랑 같은 경우인가? 아닌데. 클로드가 나오는 부분은 짜증 나서 대충 봤지만 아타나시아가 나오는 부분은 그래도 자세히 읽었었는데. “고마워할 건 없는데.” 에라이, 모르겠다. 사실은 그 책을 읽은 지 7년이 넘어가다 보니 내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오빠 생각보다 착하고 괜찮은 사람이었잖아? 신수가 뭔지도 친절히 설명해 주고 까망이까지 대신 잡아주고! 게다가 지금은 겸손하게 고마워할 것 없다는 말까지. “이제 슬슬 가봐야겠네.” 그는 잠시 동안 허공의 저편을 보며 무언가를 가늠해 보듯 눈살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아, 맞아. 필릭스! 릴리랑 필릭스가 찾을 텐데, 나도 들어가 봐야겠다. “아티도 그만 갈게. 오빠, 조심해서 가.” 그리고 까망이를 안은 채로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그래. 다음에 또 볼일이 있겠지.” 갑자기 내 품속에 있던 털 뭉치가 사라졌다. 나는 가벼워진 무게감에 고개를 숙였다가 곧바로 텅 빈 팔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하게 다시 얼굴을 들었다. 엥? 그런데 내 까망이가 왜 또 저 오빠 손에 들려 있는 거지? “응? 까망이 왜 가져가?” 까망이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채로 또다시 불쌍하게 끙끙거리고 있었다. 내 의아한 물음에 그가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예쁘게 웃었다. “내가 언제 너 준대?” 내 머리 위로 ‘???????’가 떠올랐다. 지금 뭐라 그랬니? 아니, 이게 뭔 소리야. “까망이 내 거라며?” “내가 찾아내기 전까지는 그랬지.” ……네? 뭐라구요? 허허. 내 귀가 이상한가. 왜 자꾸 개소리가……. “내가 주웠잖아. 그러니까 이걸 회 쳐 먹든 구워 먹든 그것도 내 마음이지.” 이건 또 무슨 신종 또라이죠? 저런 말을 뭐 이렇게 당당하게 해? 하도 아무렇지도 않게 저딴 말을 지껄이는 것을 보자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잠시 동안 앞에 있는 남자를 멍청히 바라보다가 까망이의 낑낑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니, 뭐 이런 뻔뻔한 놈이 다 있어! “내 걸 왜 오빠가 가져가! 까망이 이리 줘!” 나도 도둑놈한테 차려줄 예의 같은 건 없다! 주인이 이렇게 버젓이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데 그 앞에서 내 걸 훔쳐 가겠단 소리를 해? “까망이 데려가서 뭐 하려고!” 서, 설마 진짜 잡아먹을 건 아니겠죠? 우리 작고 어여쁜 동물 친구를! 으아앙! “잠이 부족하면 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거랑 똑같지.” 그런데 놈은 또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보다 오랜만에 눈을 떴더니 마력이 많이 약해져서 말이야. 대대로 황족들의 마력 순도가 가장 높거든. 그래서 신수를 하나 찾으러 왔는데, 하필 네 까망이가 내 눈에 딱 발견됐네?” 콰콰콰쾅! 어디선가 천둥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궁정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애초에 신수를 훔쳐 가려고 황궁에 들어온 도둑놈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여기 왜 이렇게 신수가 없어? 그새 씨가 마르기라도 한 것처럼. 어쨌든 그냥 허탕 치나 했는데 네 덕분에 살았어.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이거라도 먹고 나면 내 마력도 어느 정도 보충이 되겠지.” 끼야악!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놈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까망이 돌려줘! 우리 까망이 잡아먹지 마아!” 이 또라이 놈아! 할 짓이 없어서 우리 귀여운 까망이를 잡아먹으려고 하냐! 그리고 내 까망이인데! 내 마력인데! “아, 이래서 안 들키고 몰래 가져가려고 한 건데.” 내가 달려들어서 까망이를 빼앗으려고 하자 놈이 혀를 차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내가 아무리 폴짝폴짝 뛰며 손을 뻗어도 까만 털 끝 하나 닿지 않았다. 안 돼, 우리 까망이 내놔라! 어흐흑. 내 머릿속에 사지가 결박돼 식탁 위에 진상되어 있는 까망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어헝, 우리 까망이이! 그런데 내가 울먹거리며 매달리자 이놈도 나름대로 양심이 있기는 한지 속이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한쪽 눈매를 슬쩍 찡그리며 나를 내려다보던 놈이 잠시 후 위로랍시고 말했다. “신수 없어도 별거 아니야. 그냥 지금까지처럼 마력 없이 살면 돼.” 이 자식이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어디서 이따위 궤변이야! “마력이 줄어든 건 그쪽 사정인데 왜 내 까망이를 너한테 줘야 돼! 이리 줘! 우리 까망이 이리 내놔아아!” 내가 하도 발악을 해대자 놈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어! 어서 마음을 고쳐먹으라고! 나 같은 어린이와 작은 동물 친구를 괴롭히면 벌받는단 말이야! “그냥 이거 먹지 말까?” 잠시 후 놈이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나는 갑자기 나란해진 눈높이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놈의 붉은 눈동자가 바로 정면에서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좀 귀찮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마력을 회복할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놈이 나를 떠보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그걸 말이라고 하니?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그걸 썼으면 됐잖아! “이거 그냥 내버려 둘까 말까. 어차피 아직 덜 자라서 먹어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긴 한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아주 분통이 터졌다. 그런데 왠지 저놈 말에 냉큼 좋다고 낚이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내가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노려보고만 있자 놈은 작전을 바꾼 듯했다. 그렇게 불쌍한 표정 지어 봤자 안 통하거든! “그리고 난 아주아주 착한 마법사라서, 너 같은 꼬맹이 걸 뺏어 먹으면 미안해서 밤에 잠도 안 올 거 같아.” “웃기지 마!” 나는 가차 없이 소리쳤다. 그런 놈이 애초에 남의 신수를 훔치러 여길 기어들어와? 끝까지 내가 믿지 않는 눈치이자 놈이 유감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 나서 덧붙이는 말에 나는 또 발끈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게 성체가 될 때까지 일단 보류할게. 그럼 됐지?” “되긴 뭐가 돼. 그리고 보류라니, 내가 왜.” “왜라니.” 내가 따지려고 입을 열자마자 그가 아주 바보 같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소리 내 웃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화가 나고 말았다. 하지만 뒤이어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는 붉은 눈동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내가 지금 널 봐주겠다는 말을 한 거니까 그렇지.” 그는 분명 웃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한순간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넌 이걸 알아야 해. 난 지금 당장에라도 널 없애고 네 걸 뺏어갈 수 있어. 아니면 지금 바로 네가 보는 앞에서 네 마력을 전부 삼켜 버릴 수도 있지. 아마 상대가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주저 없이 그랬을 거야. 그런데 너한테는 특별히 그러지 않아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뒤이어 눈앞에서 피어나는 미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난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그는 더없이 상냥한 말투와 표정을 한 채로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말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임을 깨닫고 말았다. 내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는 아마도 나를 설득하려 굳이 애쓰는 것보다 차라리 이대로 나를 처리한 뒤 까망이를 훔쳐 가는 것이 보다 손쉬울 터였다. 게다가 방금 전 그가 한 말처럼 지금이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나 방금 전에 엄청 패기 돋게 얘한테 막 소리 지르고 까망이 내놓으라고 떼쓰고 ‘너’라 그러고, 막 그러지 않았니? 나는 슬그머니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놈의 옷자락에서 손을 뗐다. 나, 나도 안 그러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쫄았다. 지금 이 으슥한 후원에서 이 미친놈하고 단둘이 있는 것 자체도 위험한 상황 같은데 괜히 자극해서 나한테 좋을 건 하나도 없잖아? 어흐흑……. 까망아, 미안. 내가 너무 약해서 널 지켜주지 못해. 허흐흐흑. 내가 상황을 깨닫고 입을 다물자 그가 착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겁먹지 마. 나 착한 마법사야. 보류하는 동안 혹시라도 내 마음이 변해서 안 먹고 싶어질지도 모르잖아?” 세상에 있는 착한 마법사가 다 얼어 죽었냐! 네놈이 진짜 착한 마법사면 내 성을 간다! 어느 착한 마법사가 7살짜리 애를 상대로 공갈 협박에 갈취에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는데!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슬슬 놈의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나, 나도 내가 비굴한 거 알아. 그래도 무서운 걸 어떡해. 으엉. “그 대신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너 꽤 똑똑하네.” 그는 정말로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이 킥 웃었다.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인 데다 네가 가만히 있어도 내가 알아서 받아갈 수 있는 거거든. 아, 하지만 내가 너한테 뭔가를 빼앗거나 하는 건 아니야.” 그게 뭐야. 겁나 찜찜해. 그래도 싫다 그러면 지금 당장 까망이도 꿀꺽하고 나도 슥삭해 버리겠지? 흐흑, 하느님! 왜 저를 이렇게 약한 존재로 만드셨어요! “그래놓고 나중에 또 다른 말하거나 속이는 거면…….” “안 그래. 난 착한 마법사라니까? 너한테 해로울 거 하나도 없는 조건이야. 맹세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이 사람아! 어디서 돼먹지도 않은 말로 약을 팔고 있어. “그리고 내가 너한테 받아간 게 내 마음에 들면.” 어우. 그렇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나는 그저 의심하는 눈초리로 놈의 눈치나 슬슬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명의 위협 너무나 오랜만이야. 하지만 결코 반갑지는 않구나. 크흑. “그 털북숭이가 성체가 돼도 안 잡아먹을게. 그럼 너도 손해는 아니지?” 놈은 내게 마지막으로 의사를 묻듯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쁜 놈! 애초에 나한테 무슨 선택권이 있다고! ======================================= [27화] 내 불만스러운 눈빛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놈은 내가 거부하는 말을 내뱉지 못하자 그럼 승낙으로 알겠다는 듯 방긋 웃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까망이를 나한테 건네주었다. “자, 가져.” 까망아아아! 으앙아앙! 나는 까망이와 극적인 상봉을 한 뒤 또다시 놈이 빼앗아갈세라 냉큼 뒤로 물러났다. 까망이도 자신이 생사의 기로에 섰다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내 품에서 낑낑거리며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진짜 가야겠다. 고작 이 정도 일로 마력 소모라니 기분 참 거지 같네.” 크앙, 빨리 꺼져 버려! 나는 털을 바싹 곤두세운 동물처럼 까망이를 꼭 끌어안은 채로 놈을 경계했다. 저러다가 또 마음 바뀌었다고 안 가는 거 아니야? 헉. 다음 순간 갑자기 놈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는 소스라칠 듯 놀라고 말았다. 으앙, 딸꾹질 나올 것 같아. “너 이름이 뭐야?” “알아서 뭐 하려고.” 앗,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날선 대답이 튀어나갔다. 그러자 놈이 오해받아 슬프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그래? 나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하지만 나는 그저 놈이 한없이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까망이를 안고서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 결국 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내 이름부터 알고 있어. 난 루카스. 다음에 만나면 이름으로 불러.” 싫어, 싫어, 싫어! 네 이름도 부르기 싫고 다음에 다시 만나기도 싫어! 그래도 그 말을 끝으로 놈이 진짜 자리를 떠날 것처럼 몸을 돌려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따악. 그가 손가락을 마찰시키기 무섭게 신비로운 하얀빛이 물거품처럼 몽글몽글 허공에 피어올랐다. 그 눈부신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뒤돌아보며 웃었다. “갈게. 나중에 봐.” 그 직후 몇 번인가 더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의 목소리는 내 귀에까지 닿지 않았다. 섬광 속에서 무심코 눈을 질끈 감았던 내가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 “공주님, 품에 안고 계신 그건 뭔가요?” 내가 까망이를 안고 내 방으로 돌아갔을 때, 필릭스는 아를란타어 단어를 40개째 외우고 있었다. 그는 내 가슴에 안긴 것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혼자 놀고 싶다고 저도 버리고 가시더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서 오셨네요.” “내가 혼자 놀고 싶다 그랬다고?” “네. 릴리안 님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면서요. 화원에서 방해 없이 혼자 놀고 싶으시다고.” 필릭스가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이것이 그 루카스라는 놈의 소행이란 걸 눈치챘다. 와, 와아. 그 무서운 놈. 진짜 나 같은 건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실종되었어도 아무도 몰랐겠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나자 그놈이 정말 무시무시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끼잉. 까망아, 우리 아무래도 괴물 같은 사이코패스 또라이한테 가까스로 살아서 나왔나 봐. “공주님, 간식 시간에 딱 맞춰서 들어오셨네요.” 내가 방금 전 만났던 놈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릴리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간식은 오랜만에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초콜릿 케이크……. 어머나? 그게 뭐예요?” 그녀 역시 내 품에 안긴 검은 털 뭉치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까 궁에서 애완동물 길러도 되나? “뀽!” 그런데 지금까지 내 가슴에 얌전히 안겨 있던 까망이가 돌연 눈을 빛내며 바닥으로 폴짝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앗, 까망아!” 새까만 털 뭉치가 구르듯이 카펫 위를 달려가더니 테이블 위에 접시를 올려놓다 말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릴리에게 그대로 돌진했다. “잠깐!” 필릭스가 까망이를 잡기 위해 급히 자리에서 발을 뗐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까망이가 그렇게까지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지금 이 순간 처음 알게 되었다. 까망이는 놀라운 순발력을 이용해 자신을 향해 달려온 필릭스의 몸을 타고 올라가 탁자 위로 곧장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접시에 그대로 코를 박더니……. 우걱우걱! 내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에 먹어치워 버렸다. 우리 세 사람은 당혹감과 놀라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양쪽 뺨을 크게 우물거리고 있는 새까만 털북숭이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뇌리를 스쳐 지나간 놀라운 깨달음에 아앗!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였구나, 초콜릿 도둑! 제10장 이런 급전개는 좋지 않습니다 “까망아, 목욕하자!” “공주님, 머리 마저 말리셔야죠.” 나는 릴리의 부름조차 뒤로한 채로 까망이를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저녁 목욕을 막 끝내고 난 참이라 온몸이 뽀송뽀송했다. 사실 나는 까망이와 같이 목욕을 하고 싶었는데 릴리의 결사반대로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애완동물(사실은 신수지만)인 까망이를 나랑 같이 목욕하게 할 수는 없단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까망이와 함께하는 즐거운 목욕 시간을 또 다음 기회로 미뤄야만 했다. 자, 까망아. 이제 네가 목욕할 차례야! 어라, 그런데 분명 방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침대 위에서 몸을 말고 있던 까망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디를 간 거지? 하지만 까망이가 이런 식으로 어딘가에 숨거나 도망친 것도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까만 털 뭉치가 몸을 숨겼을 만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방을 조금 살피자마자 침대 밑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풍성한 까만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까망이 찾았다!” 나는 한달음에 침대가로 달려가 곧장 바닥에 엎드렸다. “공주님, 지지예요!” 그런 나를 보고 릴리가 질겁했지만 나는 까망이를 오구오구 해주기에 바빴다. 아이, 귀여워. 우리 까망이 누구 신수인지 오늘도 참 귀엽기도 하지. 침대 밑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던 까망이가 내가 우쭈쭈 하는 소리를 듣고 귀를 꿈틀거리더니 이내 얼굴을 들었다. 동전 같은 노란 눈동자가 나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으윽. 안 돼, 그런 식으로 쳐다보면 내 심장이! 나는 까망이의 깜찍함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헉헉거렸다.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까지 정말 너무너무 귀여웠다. “우리 까망이 반짝반짝 예뻐지러 가자.” “뀨.” 목욕을 하지 않아도 새까만 털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있었지만 오늘도 하루 종일 나랑 밖에서 뛰어놀았기 때문에 씻겨주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까망이는 물을 아주 싫어해서 매일 목욕 시간마다 전쟁이 따로 없었지만. “까망이 착하지. 가만히 있……. 으앗!” “낑끼잉!” 오늘도 나는 까망이를 씻기느라 힘겨운 씨름을 해야만 했다. 한참 애먹는 나를 보고 릴리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제가 씻긴다고 한 건데. 또 다 젖으셨잖아요.” “괜찮, 으푸!” 바로 그때 까망이가 촤르르 꼬리를 흔들어 터는 바람에 나는 머리끝에서부터 물을 뒤집어 써 쫄딱 젖고 말았다. 까망이는 고양이도 아닌데 물을 왜 이렇게 싫어하지? 꼭 호수에 빠진 뒤로 전보다 깊은 물을 기피하게 된 나 같네. “까망이, 이제 맘마 먹자.” 물을 뒤집어써도 그저 좋다고 까망이를 챙기는 나를 보면서 릴리도 결국은 포기한 듯했다. 하지만 우리 까망이가 어디 보통 사랑스러움을 가지고 있던가! 나랑 같이 바닥에 엎드려 노닥거리는 까망이를 보고 릴리가 귀엽다는 듯 웃는 걸 나는 보았다. “냠냠 잘 먹네, 우리 까망이. 아이 예쁘다.” 까망이가 지금 먹고 있는 건 오벨리아에서 나는 신선한 과일이었다. 릴리가 구해 온 애완동물용 사료를 몇 번인가 줘보긴 했지만 그때마다 까망이는 풍성한 꼬리를 흔들어 밥그릇을 가차 없이 후려갈겨 버렸다. 개나 고양이가 좋아한다는 먹이를 줘도 마찬가지였다. 첫날 릴리가 내 간식으로 준비해 온 초콜릿 케이크를 냉큼 훔쳐 먹을 정도로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통의 평범한 애완동물은 초콜릿 같은 걸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릴리나 필릭스는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마도 까망이는 신수여서 그런지 그런 것에 나쁜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벌써 몇 년째 부엌에서 내 초콜릿을 훔쳐 먹었겠지! 그나마 과일 같은 건 먹어서 다행인데, 왠지 단 것만 골라 먹는 것 같단 말이지. 신수는 이렇게 편식해도 되나? “릴리, 릴리. 우리 까망이 무슨 동물 닮은 거 같아?” 나는 오벨리아의 동물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릴리에게 물었다. “글쎄요. 바움이나 레피의 일종이 아닐까요?” 그러나 무엇 하나 딱 짚이는 것이 없는지 릴리도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도 오벨리아의 특산품인 보라색 사과를 한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까망이를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내가 봤던 동물들 중에서는 그거, 그거 닮았는데. 그 강아지 이름이 뭐더라. 포……. 포오……. 포오메……. “아!” 그래, 그래! 포메라니안! 털이 북슬북슬한 포메라니안 닮았다! “왜 그러세요?” “에헤헤. 아무것도 아니야.” 이 귀염둥이가 내 신수라니! 우웅, 예뻐, 예뻐. 쪽쪽쪽. “내일은 오랜만에 폐하를 뵙고 오시겠네요.” 그러게. 한동안은 우리 까망이랑 같이 밥도 먹고 정원도 뛰어 놀고 낮잠도 자고 천국도 이런 천국이 따로 없었는데 말이야. 흑흑. “이제 그만 주무셔야죠. 자, 까망이 이리 주세요.” “흐잉. 더 놀고 싶은데.” 나는 밥을 다 먹고 앞발을 핥는 까망이를 애처롭게 쳐다보았지만 릴리는 그런 나를 까망이에게서 엄하게 떼어놓을 뿐이었다. 까망이도 릴리의 품이 좋은지 그 안에서 꼬리를 말고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결국 나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침대에 눕고 말았다. *** “아빠아아!” 나는 클로드를 보자마자 눈 만난 강아지처럼 뛰기 시작했다. 어유, 이 연기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좀 감정이입이 안 된다. “보고 싶었어요!” 내가 녀석을 보고 방긋방긋 웃자 놈은 나를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눈동자만 움직였다. 오늘도 클로드는 알현실에 있는 큰 의자에 앉아 나를 맞았다. 그 모습이 예전 같으면 나도 모르게 기가 눌리고 말았을 정도로 위압감 있었지만 나는 지금 그의 상태가 어떤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너 지금 졸리니?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딸을 오랜만에 봤는데 졸려? 지금 잠이 와? 그것도 네가 오라고 불러 놓고? 하지만 필릭스에게 듣기로 클로드가 하루에 자는 시간은 길어봤자 4시간 정도라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역시 황제도 할 게 못 되는구먼. 그냥 하는 일 없이 매일 한가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봐. “폐하, 오늘은 날도 좋으니 바깥에 나가 산책이라도 하시는 것이 어떨지요.” 꽤나 오랜만에 보는 클로드의 분위기가 평소보다 나른나른한 것을 필릭스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산책이야 아무래도 좋은 입장이었고, 그보다는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힐끔힐끔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산책이라. 나쁘지 않군.” 쓰읍. 아무리 봐도 저 옥좌 너무 멋지단 말이야. 저 정도 크기의 보석이면 시중에서 얼마나 할까. ======================================= [28화] 내 방에 숨겨둔 이쁜이들은 하나같이 미니미니한 사이즈에 아담하고 큐티한 보석들이었는데, 여기에 있는 것은 거대 사이즈만큼이나 거대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어 자꾸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앗, 침 나올 뻔했다. 조심해야지. “공주님?” “으응.” 나랑 저 이쁜이를 떼어놓지 마. 흐흐흑. 저기 있는 저 이쁜이 하나라도 가져보면 소원이 없겠네. 바로 옆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나는 여느 때처럼 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필릭스에게 안아달라고 할 때마다 나오는 습관으로, 보석에 정신이 팔려 있는 채로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필릭스는 내 채근에도 나를 안아 들지 않았다. 아, 맞아. 산책 갈 거라고 했지? 그럼 클로드랑 같이 걸어야겠네. “아빠…….” ‘아빠랑 같이 산책 가는 거 아티도 좋아요!’라고 또다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눈앞에 보이는 얼굴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엥.” 클로드, 너 왜 여기 있냐? 필릭스는 어디 있어? 의아하게 고개를 들자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필릭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왜 그렇게 멀리 서 있는 거야? 난 당연히 내 앞에 있는 게 당신인 줄 알았잖아! 이제 보니 클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 나를 지나쳐 가는 길이었던 듯했다. 왜냐면 알현실의 문은 내 뒤쪽에 있었으니까. 으악! 난 그것도 모르고 가는 사람 붙들어서 옷까지 잡아당긴 거야? “뭐지?” 무슨 짓이냐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클로드의 눈빛에 어버버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필릭스가 말갛게 웃으며 내게 폭탄을 던졌다. “안아 달라는 의미십니다.” 아냐! 아니라고! “안아 달라?” “예. 걷다가 다리가 아프실 때 제게도 곧잘 그러시거든요.” 그건 너한테나 그런 거지! 상대가 클로드인 줄 알았으면 안 붙잡았어! 필릭스의 말에 클로드가 눈썹을 휘며 나를 내려다봤기 때문에 나는 더욱 위기의식을 느끼고 말았다. “아냐. 난 그냥 아빠 옷에 뭐가 묻어서……. 으어으!” 억! 잠깐만 내 배! 가만히 있던 클로드가 예고도 없이 나를 잡아들었기 때문에 나는 허공에서 잠시 버둥거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는 예전에 그랬듯 나를 짐 덩이처럼 옆구리에 끼기까지 했다. 내가 불편함을 참지 못해 덜렁거리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자 클로드가 나를 보고 짧게 혀를 찼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데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 말투가 마치 부모의 노고도 모르고 철없이 난동을 피우는 어린애를 대하는 것 같아서 내 이마에도 빠직 핏대가 섰다. 난 지금 체중이 다 배로 쏠리는 것 같다고! 이 자세로는 내 앙증맞은 에나멜 구두와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레이스 양말이 한눈에 들어왔다. 왜냐하면 내 몸이 지금 폴더처럼 반으로 접혀 있으니까! 너만 편하면 다야? 응응? “폐하, 그렇게 안으시면 공주님께서 불편하실 겁니다.” “제 두 다리 쓰는 일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불편하다는 거지?” 클로드는 진심으로 필릭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딱딱한 팔뚝에 배가 눌린 채로 낑낑거리며 내 상태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수, 숨 막혀……. 흐억.” 게다가 머리에 피도 쏠린다. 나는 필릭스에게 구해달라는 의미로 울망울망한 눈빛을 보내며 손을 뻗었다. “그렇게 말고 이렇게 안아주셔야죠.” 그래도 내 이동수단으로 살아온 짬밥이 있어 그런지 필릭스는 이제 나를 제법 편하게 안을 줄 알았다. 처음에 클로드에게서 엉거주춤 나를 받아 들고 난 뒤 동공지진을 일으키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노련한 솜씨다. 그래, 그러니까 그냥 네가 날 안아 들고 가란 말이야! “자, 지금 제가 한 것처럼 안아 보세요.” 안 돼, 그러지 마! 날 클로드에게 보내지 마! 흐어어. 나는 나를 클로드에게 넘겨주려고 하는 필릭스에게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고, 공주님.” 필릭스가 좀 당황하는 것 같긴 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옆구리에 매달린 도롱이 애벌레 신세가 되는 것도 싫지만 클로드랑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한 채로 안기는 것도 싫단 말이야. 생각만 해도 뻘쭘하다고! 나 안 해, 안 해! “폐하께서 기다리시는데…….” “그냥 필릭스랑 이러고 갈래.”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필릭스는 난처함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분 좋은지, 그는 입꼬리를 작게 들썩이다가 이내 작게 헛기침을 하며 클로드를 향해 말했다. “크흠. 공주님께서 제가 안고 가시는 게 좋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 “가시죠, 폐하. 먼저 앞서시면 제가 공주님과 함께 뒤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래. 이제 그만하고 어서 산책하러 가자꾸나. 역시 필릭스 가슴팍이 공기도 쾌적하고 딱 좋네! 쓸데없이 클로드한테 바람을 넣어서 날 고문하려고 하지 말란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인지 클로드는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옆얼굴에 와 닿는 시선에 나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왜 저러는 거지? 괜히 팔 아프게 날 안 들어도 된다니까? 그리고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낮게 읊조린 클로드의 목소리에 나는 질겁하고 말았다. “내가 들겠다.” 뭐! 아니, 왜! “하도 훈수를 두기에 아이를 안는 데 대단한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별것 아니로군.” 아무래도 애 하나 제대로 못 안는 사람 취급당한 것이 자존심 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네 사정이구요! 난 싫거든? “아티는 그냥.” “그래서. 나한테 안겨 가는 게 싫다고?” “에헤헤.” 으앙. 음산히 내리깔린 물음에 기가 눌렸다. 나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웃으며 클로드에게 냉큼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제가 요즘 좀 시건방졌던 것 같죠? 반성하겠습니다. 이놈은 언제 홱 돌지 모르는 잠재적인 범죄자였는데 제가 너무 방심하고 있었어요. 흑흑. 결국 나는 눈물을 삼키며 클로드의 팔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런데 봐. 역시 어색하지? 팔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 하필이면 클로드가 나를 안아 드는 과정에서 눈동자가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헤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클로드에게 웃어주었다. 으씨, 못 해먹겠네, 진짜. 아무튼 클로드는 어찌어찌 나를 안아드는 데 성공했다. “비켜라. 방해된다.” 클로드는 나를 빼앗기고 난 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필릭스를 구박하기까지 했다. 그러지 말고 너나 좀 내 인생에서 비켜주면 안 되겠니? 그냥 너 자체가 내 인생에 너무나 심각한 방해거든요. 영구 퇴출! 내 인생에서 이제 그만 좀 영원히 나가줘! “앞서갈 테니 뒤에서 따라와라.” 클로드는 필릭스만 뒤에 덩그러니 남긴 채로 나를 안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애꿎은 필릭스한테 왜 그래? 으음. 그렇지만 필릭스의 말에 자극받아서 기분이 상한 것 같으니 애꿎은 건 아닌가. 그러게 필릭스도 참, 괜히 클로드 놈의 신경을 긁어서. 쓰읍. 불편하다고 뒤척이지 말고 그냥 쥐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겠다. 나는 돌상이다. 돌하르방이다. 이대로 발가락 하나 꼼지락거리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다. “다른 때도 매번 이런 식으로 필릭스가 안아주나?” 그런데 알현실을 빠져나가 복도를 걷다 말고 갑자기 클로드가 내게 물어왔다. 다른 때라니, 그게 언제를 말하는 거래. “아빠 보러 올 때?” “그 외에.” 루비궁에서 말인가. 어차피 내가 루비궁을 나올 때는 네놈 얼굴을 보러 올 때밖에 없는걸. “아티 혼자서 씩씩하게 잘 걸어요!” 그러니까 나 좀 그만 내려주라. 흑흑. “지금도 아빠가 손 잡아주면, 응. 아티 걸어갈 수 있는데.” “필릭스가 안아주는 것보다 불편해서 내리고 싶다는 의미냐?” 쿨럭. 그런 걸 왜 굳이 물어보고 그래……. 아무래도 필릭스에게 자존심을 이만저만 많이 다친 게 아닌가 보다. 얘 은근 속좁네. 난 괜히 새우등 터지기 전에 가만히 있어야지. “내가 부를 때 말고는 필릭스에게 쉬이 안기지 마라. 버릇 든다.” 이건 또 무슨 의미지? 필릭스를 조만간 다시 데려가려는 건가? 하기야, 필릭스는 어쩌다보니 원래 계획보다 좀 더 오래 내 옆에 있을 뿐, 어디까지나 임시로 보내진 기사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클로드 이놈, 내 호위 기사를 따로 선별한다더니 벌써 2년째 감감무소식이잖아. 혹시 도중에 귀찮아서 때려치운 거 아니야?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만 무언가가 눈앞에서 정신 사납게 돌아다녔다. 이거 뭐야. 벌레인가? “저, 폐하. 저도 좀 가까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에잇, 눈앞에서 알짱알짱. 신경 쓰이네. 가뜩이나 클로드한테 안겨 있느라 꼼짝도 못하는데. 저리 가. 저리 안 가? 으앙, 루비궁의 세X코였던 세스 언니가 필요해! “방해라고 하지 않았나. 열 걸음 더 뒤로 떨어져라.” 나는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손을 휘휘 내저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쫓아 보내려 했다. 그런데 이 망할 잡벌레가 계속 집요하게 나한테 꼬여드는 것이었다. 아우, 별게 다 성질 긁네! “혹시 힘드시면 제가 공주님을 안아도 되는데요.” 으악, 짜증 나! 죽어라, 날벌레! “시끄럽…….” 짜악! 손을 휘둘러 벌레를 때려 맞추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벌레 대신 다른 걸 때려 맞춰 버린 모양이다. 잠시간의 정적 끝에 지금의 하늘색 같은 맑은 푸른빛을 띤 보석안이 나를 응시해 왔다. “헉.” 나는 클로드의 뺨에 고사리 같은 손을 댄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난 분명 벌레를 후려쳤는데 왜 내 손이 여기에 있는 거지? 방금 전 귓가를 울린 찰진 소리나 손바닥에 닿은 따끔한 타격감은 그럼……. “지금 이게…….” 마침내 클로드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불현듯 놀라 그때까지도 클로드의 오른쪽 뺨에 찰싹 붙어 있던 손을 떼어냈다. “……무슨 짓이지?”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공포에 젖었다. 설마 내가 지금 클로드 뺨을 때린 거? “폐하.” 클로드의 심상찮은 반응에 필릭스도 놀라 앞으로 나섰다. 나는 바로 코앞에서 비치는 서늘한 눈동자에 얼어붙어버렸다. 주위로 싸늘한 공기가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소름 끼치는 정적을 뚫고 마침내 클로드가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너를 너무 많이 봐준 모양이구나.” 그의 눈동자 속에 담긴 냉혹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깨닫고 말았다. 그러자 곧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열심히 숨기려 노력했지만 이런 상황이 되고 나자 여지없이 내 몸은 클로드를 향한 공포로 빠르게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재미없어진 장난감은.” 고작 7년. 내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 짧고도 긴 시간. “치워 버려야지.”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단 한 번의 손짓으로 그것을 너무도 간단히 수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클로드의 손이 내 목에 닿는 순간, 나는 내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느낌만은 아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잠이 드는 것처럼 눈앞이 급속도로 흐려지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런 순간까지도 나를 향한 온기라고는 한 줌도 담아내고 있지 않은 무정한 눈동자였다. ======================================= [29화] 아아, 그녀는 좋은 아티였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일대기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 “지금 이게…….” 하지만 클로드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망상에서 깨어났다. 헉. 뭐, 뭐야! 혹시 방금 전에 제가 꿈꾼 건가요? 저 아직 안 죽었어요? 나는 목을 만지작거려본 뒤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늘에 감사 인사를 올렸다. “……무슨 짓이지?” 크큭,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아니라 내 오른손에서 날뛰고 있는 흑염룡이…… 가 아니라! 으어어, 난 이런 손 몰라! 이거 내 손 아니야! 기왕 망상이려면 클로드 뺨을 때린 부분부터일 것이지 이게 뭐예요! 흐엉엉!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 있던 지뢰를 밟아 터뜨려 버린 느낌이라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내 의식이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내가 한 짓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필릭스가 먼저 뒷수습을 시도해 왔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괜히 시끄럽게 굴어 공주님께서.” 으와와와와왁! 필릭스 이 미친 오빠가? 뒷수습이 아니라 확인 사살이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둘 다 그만 입 닥치라는 의미로 클로드 싸대기를 날린 것 같잖아? 지금 나한테 무슨 똥을 퍼 먹이려고 하는 거야? 나 그런 의미로 때린 거 아니란 말이야! “버, 벌레. 벌레가! 난 그냥 벌레를!” 이번엔 진짜 놀라서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자 내가 당황한 모습을 가늘게 뜬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던 클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벌레라고?” 야이, 그게 아니라! “아냐, 아빠 얼굴에 벌레가! 아빠 괴롭히려고 해서, 그래서 아티가 이렇게! 잡아준 거야!” 어흐흑. 길고도 짧은 인생이었습니다. 18살 생일날 이후까지 살아남으려고 지금까지 그렇게 갖은 애를 다 썼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인생을 종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역시 인생지사 새옹지마. 엉엉. 에잇, 내 오른팔에서 날뛰는 망할 흑염룡 자식이……. “그러셨군요. 공주님이 폐하께 호 해드리면 금방 낫지 않을까요?” 전부터 계속 느낀 건데 필릭스 좀 때려주고 싶다……. 날 도와주려는 건지 죽이려는 건지 모르겠어. 나한테 그딴 짓 시키지 마! 내가 아무리 지금 뒷수습에 애를 먹고 있다지만 말이야! 그런 거 하란다고 내가 할 것 같아? 나를 울상을 지으며 클로드를 쳐다봤다. “아빠. 호, 호오…….” 제길, 살기 어렵다……. *** 약 30분 뒤 나는 눈물 섞인 우유를 마실 수 있었다. 크흑. 여러분, 저 살았어요. 아직 목이 제대로 어깨 위에 붙어 있어요! 으허허헝. 내가 클로드를 그동안 너무 나쁘게만 생각했었나 보다. 이렇게 막! 나한테 뺨을 후려 맞아도! 클로드는 날 죽이지도 않고 살려줬는데! 그런데 난 클로드를 막 오해하고! 물론 그 이후로 기분이 몹시도 언짢은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기는 했지만. 흑. 지금 마시는 우유에서 왠지 짠내가 나. 설마 이게 내 마지막 만찬인 건 아니겠지. “역시 공주님은 다음부터 제가 안는 것이 낫겠지요?” 눈치 없는 필릭스가 클로드를 향해 해맑게 물었다. 크아아아. 제발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구요. 난 아직 앞날이 구만 리로 창창한 사람이란 말이야! 클로드는 아무런 대답 없이 필릭스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차를 마셨다. 우리가 늘 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곤 하는 바로 그 야외 정원이었다. 원래 오늘 클로드를 만나면 신수에 대해 아냐고도 물어보고 루카스라는 또라이 얘기도 하려고 했는데 그냥 얌전히 짜져 있어야겠다. 그러고 보면 나 지금 클로드 싸대기를 광역으로 날리고도 사지 멀쩡히 살아 있는 거잖아? 헉! 새삼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깨달았다. 예전에는 틈만 나면 저걸 어떻게 죽일까 하는 시선으로 날 보던 놈이었는데. 이제는 내 흑염룡이 마구잡이로 날뛰어도 날 가만히 내버려 두고 말이야. 그래. 다른 건 바라지도 않으니 나 죽일 생각만 하지 마라. 저도 오늘부터 흑염룡 단속을 철저히 할게요. 흑흑. “아무래도 옆에 붙여줄 사람을 새로 뽑아야 할 것 같군.” 그런데 가늘게 뜬 눈으로 한참 동안 나를 보던 클로드가 갑자기 혼잣말처럼 그렇게 읊조려 왔다. 응?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거니? 필릭스도 클로드의 말이 뜬금없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옆에 붙일 사람이라 하시면.” “이제부터 체술을 배우게 할까 싶다.” 네? 체술을 배우다니, 누가요? 설마 제가요? 나는 잘 먹던 우유를 뿜을 뻔했다. 아니, 나한테 뺨 맞고 돌았나? 왜 느닷없이 나보고 체술을 배우래? “벌레 한 마리 제대로 때려잡지 못해 아무 데나 함부로 손을 휘두르는데, 그런 것이라도 배워야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않겠지.” 헉. 이 사람 뒤끝 쩐다……. 클로드의 말에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났다. 나, 나한테 맞은 게 그렇게 충격이 컸니. “게다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클로드의 지긋한 눈빛에 심장이 벌렁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손힘까지 이리도 약해빠져서야 앞으로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지. 이대로라면 벌레가 사람을 잡을 수도 있겠군.” 그, 그건 뭐냐. 반어법? 나한테 꽤나 세게 얻어맞았을 텐데 내 손힘이 약하다니. 이거 그냥 내가 벌레 같다고 돌려서 욕하는 거지? 허흐흑. “하오나 공주님께서는 아직 일곱 살…….” “무엇보다, 호위라고 붙여준 놈이라고는 그저 하루 종일 애를 안고 다니는 것 말고 하는 일이 없으니 영 쓸모가 없구나.” 클로드가 지나가듯 던진 무정한 말에 필릭스는 금세 풀이 죽어 시무룩해졌다. 물론 필릭스가 하는 일이 없는 건 맞지만 그건 다 황궁이 지나치게 평화로운 탓인데. 호위도 어떤 위험에서 날 지킬 필요가 있을 때에나 효용이 있는 거지. 역시 클로드는 그냥 지금 기분이 나빠서 누구라도 까고 싶은 것 같다. 쓰읍. 그런데 이상하네. 아까부터 자꾸만 심장이 두근두근 쿵덕쿵덕 난리법석을 떨어대는 게……. 헉. 혹시 부정맥인가.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는데 혹시 내 주위에 있는 또라이들 때문에 계속 내 심장이 혹사당해서……. 어라, 갑자기 가슴에 막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게 쑤시기까지……. “욱.” 바로 그때, 목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으악! 설마 지금 먹은 우유가 역류하는 건가! 헛구역질을 하는 소리에 옆에 있던 클로드와 필릭스도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 두 사람의 얼굴이 변했다. 악! 창피해! 그래도 아직 안 토했어! 는 무슨. 겨우겨우 참았나 싶었더니 또 한 번 속이 크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입가에 우유가 좀 흘러내린 것 같은데. “공주님!” 응? 그런데 왜 우유가 빨갛지? 그런 의문을 갖기 무섭게 내 입에서 다시 한 번 비릿한 무언가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핑글 돌았다. 뭐야?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피 같은데? 설마 나 지금 독살당한 거……. 하지만 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의자 밑으로 떨어지는 내 몸을 서둘러 누군가가 받아 드는 것도, 내 귀에 누군가가 큰 소리로 무어라 외치는 것도, 또 다른 그 어떤 자극도 내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설마 나 지금 죽는 건가요? 이렇게 허무하게? 잠깐만요……. 이거 너무 급전개잖아요? 제11장 고양이도 목숨이 아홉 개라던데 왜 나는 하나뿐인지 속을 쥐어뜯기는 듯한 고통 속에서 나는 강제로 눈을 뜨게 되었다. “폐하, 공주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그러자마자 다급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공주님, 제가 보이시나요?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나 지금 기억상실증 아니거든? 당연히 알지, 이 오빠야. 그런데 귀에 대고 너무 쩌렁쩌렁 말하지 말아주라. 그렇지 않아도 지금 속이……. 속이……. “으.” 갑자기 또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나는 침대에 누운 상태로 입을 벌렸다. 그러자 필릭스가 말해보라는 듯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내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으아아앙……!” 으허헉, 나 죽네! 내장이 터지는 것 같아! 으악, 악악! “고, 공주님!” 나 지금 죽을 것 같으니까 공주님 그만 찾아, 허어어헝. 눈을 뜨자마자 내가 무턱대고 울어대자 필릭스는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기절한 동안에도 나는 계속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얼굴이 이렇게까지 흥건히 젖어 있을 리는 없으니까. “아파, 흑. 아파…….” 가슴 언저리인지 명치 부근인지가 불에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역시 우유에 독이 들어 있던 거지! 그런 거지! 아니,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이건 너무하잖아요. 으어엉. “어쩌죠, 폐하?” 예전에 호숫가에서 물에 빠졌을 때 말고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는 애가 이렇게 자지러질 듯 빼액 울어 젖히기 시작하니 아마 좀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긴 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신경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진짜 진짜 아팠다. 전기드릴 같은 걸로 누가 내 내장을 막 헤집어놓는 기분이야. 흐어어. 설마 나 이렇게 죽는 건가요? 이제 고작 7살인데? 아직 클로드한테 속 시원히 욕 한 마디 해주지 못했는데? “치료를 하라고 불렀더니 이게 무슨 짓이지?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상태가 더 나빠졌느냔 말이다.” “말씀드리기 외람되오나, 상태가 더 위중해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공주님께서 의식을 잃고 계시는 동안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셨던 것이지요. 하나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지금처럼 마력이 체내에서 원인 불명으로 날뛰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는…….” “쓸모없는 놈.” 내가 마구 우는 동안 옆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클로드가 이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래도 내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지니까 나름대로 날 치료하려고 사람을 부르기는 했나 보다. 그런데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다. 아, 몰라, 몰라. 그냥 빨리 나 좀 살려달란 말이야!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허어엉. “그래서 방법을 찾으라 했더니 제 무능력함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잘도 나불대는군. 이놈 말고 다른 마법사를 데려와라.” “죄, 죄송합니다. 하나 궁정 마법사 중 마력의 이상 현상에 대해 가장 정통한 것은 소신이라 자부합니다. 아마 다른 어떤 마법사가 와도 공주님께는 도움이 되지 못할…….” “죽고 싶나?” 얼음장 같은 스산한 속삭임에 클로드와 얘기하던 사람이 헉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까 아저씨, 누군지는 모르지만 왜 그렇게 바닥에 엎어져서 달달 떨고 있어? “그래, 네놈 말대로라면 밥버러지 같은 놈들을 더 이상 내 궁에 둘 필요가 없겠구나.” 아파서 엉엉 울고 있는 와중에도 지금 클로드 놈이 얼마나 섬뜩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죽여 달라는 말을 그리 번거롭게 돌려 하지 않아도 너희들이 계속 앵무새 같은 말만 반복한다면 알아서 죽여줄 것이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 꽂히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아저씨가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사시나무 떨 듯이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다른 마법사를 불러와라. 그리고 저놈은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예, 폐하.” ======================================= [30화] “살고 싶다면 그 멍청한 머리를 좀 더 열심히 굴려보도록 해라. 다음 차례에도 만약 지금 같은 말을 지껄인다면 그때는 그 쓸모없는 목을 베기 전에 네놈의 사지부터 하나씩 잘라줄 테니.” 그러고 나서 한동안 절박하게 클로드를 부르던 목소리가 점차 내 귓가에서 멀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가 이렇게 아픈 이유가 독 때문이 아니란 것과 그걸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 저 아저씨가 끌려 나갔단 사실만은 알 것 같았다. 그 후 클로드가 나한테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마침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 아파. 아빠, 나 아프……. 으앙…….” 클로드는 무언가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듯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짜식, 그래도 좀 감동이다. 그때 호수에서처럼 내가 죽든 말든 무감정한 눈빛으로 그냥 가만히 구경만 할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 날 살릴 방법을 찾고 있긴 하구나. 그러고 보니까 여긴 클로드 방 같은데? 그런데 침대에 누워서 한참 울고만 있는 나를 조용히 응시하던 클로드가 다음 순간 내 얼굴 위로 손을 뻗었다. “시끄럽다. 자라.” 야, 이놈아! 네 딸이 아파서 죽으려고 그러는데 할 말이 그거밖에 없냐! 감동받은 거 취소! 그리고 지금 장난해? 그렇지 않아도 기절했다가 아파서 깼는데 지금 나보고 어떻게 자라고! 하지만 클로드의 체온 낮은 시원한 손이 내 눈 위를 덮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빠른 속도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와, 와아.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오다니……. 나란 여자…… 알고 보니…… 멘탈 강도가 오리하르콘…… 같은 여자……. 음냐.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서늘한 손이 눈물에 젖은 내 눈가를 언뜻 매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꿈속에서 또다시 요정 언니를 만났다. 2년 전 클로드의 옆에서 깜빡 잠이 들었을 때 처음 보았던 요정 언니는 여전히 환상적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나는 지금처럼 꿈에서 요정 언니를 가끔 만나고는 했기 때문에, 이렇게 동일한 사람이 등장하는 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꾼다는 사실에 나 홀로 신기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요정 언니는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내 꿈에 등장했다. 한 번은 싱그러운 녹색 이파리들을 배경으로 한 숲의 요정 같은 모습으로, 또 한 번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밤에 홀로 춤을 추는 달의 요정 같은 모습으로, 또 어떨 때는 호숫가에서 장난스럽게 물장난을 치는 물의 요정 같은 모습으로. 큽. 이러나저러나 요정이구만. 아무튼 버전에는 대충 일곱, 여덟 가지가 있었지만 요정 언니는 항상 그림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이왕 나타난 김에 나랑 같이 얘기도 하고 놀기도 하면 참 좋을 텐데 마치 스크린 속의 영상처럼 나는 그녀를 만질 수도 같이 무언가를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동안 내가 전해 들어오기만 했던 아타나시아의 엄마와 외양이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다이아나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눈물의 요정님 버전이었다. 이건 진짜 진짜 레어한 장면인데! 나도 지금까지 딱 한 번밖에 못 봤다고. 하지만 늘 발랄하던 요정 언니가 유일하게 슬픈 모습을 하고 있던 장면이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내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지금 죽네 사네 하고 있는 슬픈 상황이라 이 장면이 나온 건가. 흑흑. 언니, 나 오늘 죽을 뻔했어요. 아니, 사실은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몰라. 우유 먹다가 갑자기 피 토해쪙. 그래서 나 많이 아팠쪙. 흐엉. 나는 그녀가 내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징징거리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역시 오늘도 요정 언니는 내가 뭐라고 말하든 슬픈 표정을 지은 채로 허공의 한 점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요정 언니의 꿈을 꿀 때마다 나는 늘 다른 사람의 시각에 서 있었다. 지금도 나는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되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요정 언니는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창가에서 스며드는 달빛을 받고 있었는데, 잠시 후 그런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져 내렸다. 하, 이런 미인이 소리도 없이 울고 있으니 내 애간장이 다 녹는 것 같다. 가서 달래주고 싶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의 ‘나’는 그런 그녀를 못 본 것처럼 그대로 방을 빠져나온다. 지난번에도 이 꿈은 거기에서 끝났다. 어라?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약간 매정하게 뒤돌아 방을 빠져나오던 ‘나’의 걸음이 갑자기 우뚝 멈추어진 것이다. 그렇게 잠시 동안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나’는 이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발소리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창가에 앉아 있던 요정 언니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 내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졌다. 나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숨을 죽이고 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손에 놀아난 기분이군. 하지만 원한다면 그대에게 애원이라도 하겠다. 뜻밖의 등장에 놀라 미처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 하고 있던 언니가 그 말을 듣고 황망한 얼굴로 속삭였다. -어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앞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 아닌가. 남자는 속에서 무언가가 치미는 듯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스스로를 향해 조소했다. -그래, 안다. 이 또한 어리석은 감정놀음일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또다시 이런 식으로 먼저 끝을 보이게 되다니. -폐하.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 당장에라도 그대를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야. -……. -그런데도. 지금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잠시 동안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요정 언니의 표정도 급속도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꼴사납게 애원이라도 하고 싶다. 이대로 떠나지 말아달라고. 마주한 눈동자에서 방울져 떨어진 눈물이 창백한 뺨을 적셨다. ‘나’는 울고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젖은 뺨을 감싸며 또다시 속삭였다. -그러니 나를 선택해라.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좀 더 이기적으로 그대만을 위한 결정을 내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이제까지 내가 꿈속에서 봐왔던 그 어떤 장면들보다도 선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소리에 실려 나오는 감정까지 모조리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의 목숨을 좀먹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그 말을 듣고 내 눈앞에 있는 요정 언니는 웃었다. 유리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자신의 뺨을 감싼 손등 위에 하염없이 뚝뚝 떨어뜨리면서.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후회가 없을 만큼 행복해 보이는, 혹은 지금 당장에라도 죽고 싶을 만큼 무척이나 괴로워 보이는 얼굴을 한 채로. 그 얼굴을 끝으로 서서히 영상이 흐려져 갔다. 물속에 푹 잠겨 있던 몸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느낌을 알고 있다. 이제 꿈이 끝나려나 보다. 예상대로 잠시 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 일어났네. 자기가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도 되는 줄 아나 봐.”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왜 이 까만 또라이입니까? 나는 다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제가 올 곳을 잘못 찾았나 봅니다. 로그아웃! 로그아웃을 신청합니다! “이번엔 자는 척이야? 다른 나라에서 왕자라도 데려와 줄까? 어느 나라 왕자가 좋아? 아를란타? 휴에일? 사이칸시아?” 아, 좀! 여운에 잠길 틈 좀 주면 안 되겠니? 나 지금 엄청 중요한 꿈꿨거든? 그래서 엄청 엄청 진지하거든?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으아앙!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얼굴이 하필이면 지난번 까망이를 먹으려고 했던 놈의 얼굴이라 나는 급격히 짜증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피 토하고 아파서 신경질 나는데, 왜 또 이 잡놈이 여기에……. 으응? 바로 그 순간 나는 내 몸의 변화를 깨달았다. 뭐야, 안 아프잖아? 아까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눈물이 쏙 빠지게 아팠는데! “너 나한테 목숨 빚 진 거야.” 심드렁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가, 아니, 오빠가 날 고쳐 준 거야?” 그 와중에도 이놈이 무서웠던 기억은 있어서 내 비굴한 생존 본능이 저절로 놈의 호칭을 정정하고 있었다. 크으. “그래. 나 아니었으면 너 심장 터져서 죽었을걸.” 이 자식, 아무렇지도 않게 살벌한 소리 하네. 그런데 클로드랑 필릭스는 어디 간 거야? 날 이놈이랑 둘이 두고 도대체 어디를 갔대? 그러고 보니 피가 묻어 있던 옷을 갈아입혔는지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도 잠옷인 데다 금방이라도 목욕을 한 것처럼 온몸이 뽀송뽀송했다. 릴리가 왔다 갔나? 아니, 그런데 이놈은 내가 초죽음 상태인 걸 어떻게 알고 와서 날 고쳐 준 거지? “내가 아픈 건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그 말을 하자마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애초에 날 고쳐 주러 왔던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혹시 또 까망이 훔치러 왔던 거 아니야?! “우리 까망이는 안 돼!” 나는 방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던 것조차 잊고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까만 또라이가 그런 나를 보고 픽 웃었다. “사람 말 참 못 믿네. 안 먹는다고 했잖아.” 내가 믿을 게 없어서 네 말을 믿겠니? 당연하게도 나는 의심의 빛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자 침대맡의 의자에 앉아 있던 놈이 다리를 꼬며 갸름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놈은 언제 또 뻔뻔하게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 “물론 그때보다 지금 더 탐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속한 게 있으니까 까망이는 안 먹어. 그리고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이놈 말을 정말 믿어도 되나? 물론 믿을 수 없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네 아빠가 까망이 죽이려고 하는 걸 내가 말려줬거든.” “뭐?” 이건 또 무슨 헛소리죠? 난데없이 클로드가 까망이를 왜 죽이려고 해? 그런데 놈은 내 의문을 친절히 해소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가 한 자락 낮게 깔린 목소리로 덧붙인 말에 나는 어깨를 움찔 떨고 말았다. “나 되게 힘들었어, 옆에서 먹고 싶은 거 참느라.” 히익. 역시 까망이를 죽이려고 한 건 클로드가 아니라 네놈이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시간이 다 됐나 보네.” 바로 그때, 놈이 문 쪽으로 슬쩍 시선을 움직였다. 그 눈길을 따라 나도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공주님!”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클로드와 필릭스였다. 먼저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던 클로드가 침대 위에 앉아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나를 보고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필릭스는 나를 다시 본 것이 퍽 반가운지 감격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냉큼 침대에서 벗어나 클로드를 향해 달려갔다. “아빠아아아!” 나만 까만 또라이랑 단둘이 두고 가면 어떡해! 쟤가, 쟤가 그랬어! 막 내 까망이 먹는다고 협박하고, 나도 죽인다고 막막! 그런데 너랑 필릭스는 나랑 쟤를 이런 밀폐된 방에 같이 넣고! 흐어어엉! ======================================= [31화] 뒤에서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살려준 건데 너무 몹쓸 놈 취급하는 거 아니냐’고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그런데 막 바닥에 발을 딛고 뛰기 시작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어머나. 이런 창피한 일이. 갑자기 우유 마시다가 피 토하고 쓰러진 것도 억울한데 눈을 뜨자마자 저 까만 또라이를 본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카펫 위에서 격하게 슬라이딩까지 하게 되는 건가요? “으억!” 나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균형을 잃었다. 하지만 내가 바닥에 꽈당 넘어지기 전에 클로드가 먼저 나를 받아 들었다. 아마 클로드도 내가 넘어지려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던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자신의 품에 쏙 안기게 된 지금의 상황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렇게 굳어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헉. 그렇다고 설마 다시 나를 내팽개치거나 하지는 않겠지? 내가 눈치를 보며 슬쩍 고개를 들려고 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등 언저리에서 잠시 동안 미동 없이 머무는가 싶던 클로드의 손이 곧이어 나를 완전히 안아 든 것이다. “이제 아픈 곳은 없나.” 클로드는 어리둥절한 상태의 나를 향해 그렇게 묻기까지 했다.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서늘하고 또 무뚝뚝하기 그지없었으나 어째서인지 나는 그 안에서 꿈속의 목소리에 담겼던 감정과 겹치는 부분을 발견하고 말았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크게 놀라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클로드의 눈동자가 나를 살피듯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다른 부작용은 없는 거겠지?” 마침내 내게서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클로드가 내 뒤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 맞아! 까만 또라이! “아빠, 저 사람!”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보다 필릭스의 말이 더 빨랐다. “아. 공주님을 치료하기 위해 힘을 거의 소진했나 보네요.” 넹? 뭐라구요? 누가 누굴 위해 힘을 거의 소진해? 나는 필릭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표정은 왜 저렇고? 감동과 안쓰러움과 고마움이 공존하는 저 뜻 모를 표정은 대체 뭐야? “확실히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겠군. 물론 공주가 완쾌한 것을 확인한 후의 일이지만.” “황공하옵니다만 공주님께서는 아직 완쾌하신 것이 아닙니다.” ……응? 뭐죠? 한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내 등 뒤에 있는 거 까만 또라이 아닌가요……? 그런데 저 촉촉하게 젖은 가냘픈 미성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죠? 게다가 한 공손, 한 예절 하기까지 하는 저 단정한 목소리는 대체? “완쾌한 것이 아니라니?” “송구합니다. 아직 미진한 몸인지라 공주님의 마력을 완전히 안정시키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 뒤쪽을 향해 끼기긱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깜장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자 위에 시건방지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또라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한 고비는 모두 넘겼으니 이제 체내에 남은 마력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갈 것……. 콜록!” 11살 혹은 12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쌕쌕거리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가 갑자기 숨이 넘어갈 것처럼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몇 번 더 이런 경우가, 콜록. 발생할 수 있으나 그때에는 또 다시 제가…… 이 한 몸을 바쳐서라도 공주님을 도와드릴…… 읍, 콜록콜록! 흐윽, 컥!” 남자아이는 창백한 얼굴로 기침을 하다가 바닥을 짚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입을 떡 하니 벌린 채 어버버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너 누구야! 여기 있던 싸가지 또라이 어디 갔어?! 원래 저렇게 어린애가 아니었는데? 마치 도깨비의 둔갑술을 본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폐하, 일단 쉬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공주님도 깨어나셨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 듣는 것이 어떨지요. 어린 마법사님도 많이 지친 듯합니다.” 어린 남자애가 저렇게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는데 마음이 편할 사람은 없었다. 클로드도 혀를 차며 필릭스의 말을 수용했다. 그래서 결국 까만 또라이의 미니미 버전인 남자 아이는 필릭스의 부축을 받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방문을 나서기 전 내게 움직인 녀석의 붉은 눈동자가 한순간 쌜쭉한 미소를 머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저, 저, 저! 쟤 역시 까만 또라이 맞지? 그렇지? “공주님!” 하지만 곧 이어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 까만 또라이에 대한 생각을 잊고 말았다. “릴리!” 아무래도 나를 많이 걱정했던 듯,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된 릴리가 울먹이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 그런데 여기 클로드도 있는데 이렇게 막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와도 돼? “공주님, 공주님을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저는 정말, 정말…….” 내 얘기 듣고 많이 놀랐구나. 하긴 갑자기 피 토하고 쓰러졌다고 하면 나 같아도. 결국 릴리는 내 앞에서 눈물을 터뜨려 버렸다. “한 달이 너무 길었어요. 정말 다시는 못 뵙게 되는 줄 알고…….” 으엥? 잠깐. 뭐라구요? “한 달?” “예.” 귀를 의심하며 내뱉은 내 반문에 대답한 건 방 안으로 막 다시 들어서던 필릭스였다. 그리고 그가 감격스럽다는 듯 덧붙인 말에 나는 멍청히 입을 벌리고 말았다. “공주님께서 잠드신 지 오늘로 정확히 48일째랍니다.” “넹?” *** 놀랍게도 내가 멀쩡히 우유를 마시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지 한 달이 넘었다고 한다. 난 하루 동안 자면서 꿈꾼 줄 알았는데 48일이라니! 진짜냐고, 이거. “그럼 진짜지.” 탁자 위에 있는 초콜릿 쿠키를 주워 먹으면서 미니미 버전의 까만 또라이가 말했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내가 며칠만 더 늦게 왔어도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넌.” 그러니까, 네가 왜 여기 있는지 설명 좀요. 그리고 왜 릴리가 나 먹으라고 가져다준 과자를 네가 다 먹고 있어? 에라이, 이 간식 도둑놈아. 게다가 며칠 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다 죽어가는 몰골로 퇴장한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도 그는 아주아주 건강하고 생생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따로 할 것도 없으니까 대충 시간이나 때우자.” “뭐? 다른 사람들한테는 날 치료해야 하니까 한 시간 동안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잖아?” “그거야 당연히 공갈이지. 이래서 세상물정 모르는 애들은.” 악, 이게 또 누굴 무시하고 있어? 아예 접시 째로 과자를 끌어와 오물딱거리면서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는 모양새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클로드한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던 놈 맞아? 나를 치료하는 데에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밖으로 다 쫓아 보내더니! “다들 나 같은 미소년 천재 마법사는 처음 봐서 그런지 어딜 갈 때마다 야단들이란 말이야.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귀찮아.” 미소년 천재 마법사는 개뿔. 으윽, 제길. 하지만 사실 10대 초반의 모습을 한 까만 또라이는 정말 인형처럼 예뻤다. 으어, 인정하기 싫다! 그치만 너무 예뻐! 저 윤기 나는 깜장 머리도,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빨간 눈동자도(물론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 오밀조밀 섬세한 이목구비도, 전부 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진짜 진짜 예뻤다. 심지어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히고 양 뺨을 가득 부풀린 채 과자를 먹는 모습까지도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웠다. “미쳤다.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이따가 시녀 오면 더 달라고 해.” 하지만 그 알맹이는 어째서……. 나는 잠시 현타가 와서 놈이 햄스터처럼 냠냠거리며 과자를 씹어 먹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맞아. 네 아빠 아에테르니타스 아들 아니더라?” “오빠 바보지? 아에테르니타스는 벌써 200년 전에 죽었는데.” 그때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까망이가 살금살금 내 다리 위로 기어 올라왔다. 나는 반질반질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면서 까만 또라이를 향해 수상쩍은 눈길을 보냈다. 아직도 저 소리야? 설마 이놈 200년 묵은 구미호 같은,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진짜 이놈 정체를 모르겠네. “어쩐지 계속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만.” 까망이는 놈이 먹고 있는 초콜릿 쿠키가 매우 탐나는 듯 빠른 속도로 비워져 가는 접시를 헥헥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차마 놈의 손에서 과자를 강탈할 엄두는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나랑 똑같았다. 크흑. 까망아, 저놈 가고 나면 내가 초콜릿 쿠키 한 접시 먹게 해줄게. 애초에 여긴 내 집인데 이놈 눈치를 왜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으흑. 억울해. 하지만 아마도 이놈은 황궁에서 내 은인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한 달이 넘도록 눈을 뜨지 못하고 있던 공주를 구한 천재 마법사라나. 내가 의식 없이 누워만 있는 동안 꽤나 많은 일이 벌어졌었던 모양이다. 며칠 전 필릭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우유를 먹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이유는 체내에 있는 마력이 갑자기 제멋대로 날뛰며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분명히 아주 미비한 마력만 있던 내 몸에서 돌연 그런 일이 발생한 이유도, 그리고 그것을 치료할 방법도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기절하다 깨는 것을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통증을 호소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클로드는 나를 수면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를 고칠 수 있는 마법사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궁에 오는 족족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단다. 그러던 차에 이 까만 또라이 놈이 나를 치료할 수 있다고 황궁에 찾아온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놈은 황궁 마법사를 보호자로 둔 어린 천재 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클로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입 안의 혀처럼 구는지 몰랐다. 그간 재미라도 들린 건지, 놈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마다 ‘예의 바르고 가녀린 천재 미소년 마법사’인 척해댔다. 나는 내 앞에 있는 날강도 같은 놈을 힐끔 흘겨보았다. 어쨌거나 날 구해 준 것은 맞으니 고마워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 별로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단 말이지? 그런데 내 시선을 받은 놈이 과자를 우물거리다 말고 방긋 웃었다. “왜, 이거 먹고 싶어? 그거랑 바꿀래?” “안 먹어! 안 바꿔!” 으앙, 이놈이 또 내 까망이를 노리고 있어! 까망이도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내 품속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며 끙끙거렸다. “그래도 내가 살려줬는데 너무 야박하네. 아주 살짝 맛만 보고 다시 돌려줄게.” “안 돼!” 맛만 보는 건 또 뭔데! 으아아앙. 저런 놈에게 우리 까망이를 내어줄 수는 없어! 그런데 내가 질겁을 하자, 나를 놀리는 듯했던 놈이 흐응 소리 내며 이상한 말을 했다. “애초에 네가 이렇게 된 것도 다 그거 때문인데?” “뭐? 왜 그게 까망이 때문이야?” “네 신수 몸에 있던 마력의 일부가 너한테 다시 옮겨가서 이 사달이 난 거니까. 지금처럼 끌어안거나 하면서 접촉할 때마다 조금씩 네 몸에 흡수되고 있는 거지. 이런 건 극히 드문 일인데 네 마력은 회귀 본능이 강한가 봐. 아니면 그 신수로도 다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마력양이 많던가.” ======================================= [32화] 헉. 역시 나에게는 대마법사의 자질이? 하지만 그렇게 마냥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그, 그럼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위험한 거 아니야? 나 이제 우리 까망이랑 같이 있으면 안 돼?” 그러자 까만 또라이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 날 너무 얕보고 있네.” 그는 이걸 기분 나빠해야 할지 한심하게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고작 그 정도도 해결하지 못해서 기껏 살려놓은 애를 다시 죽게 만들 얼간이로 보여?” 아, 아니요……. 아니라고 해둘게, 그러니까 검은 오오라는 좀 집어넣지 않으련? 나는 까망이를 꼬옥 끌어안으면서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자 놈이 다 먹은 접시를 툭 쳐서 탁자 끝으로 밀어놓은 뒤 의자 등받이에 편안히 기대앉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시건방지기도 했다. “네 아빠가 이걸 없애서 해결하려고 한 걸 내가 막아준 거니까 고마운 줄 알아.” 앗, 맞아! 클로드가 까망이 죽이려고 했다고 그랬지? “너 꽤 예쁨받는 모양이더라. 이거 때문에 네가 다 죽어가는 거라고 하니까 당장 잡아서 족치려고 하던데. 사실 죽였으면 신수 몸속에 있던 마력이 너한테 전부 다 이동해서 더 위험했을 테지만.” 바로 그 순간 꿈에서의 목소리가 생각난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난 직후 보았던 클로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방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문 앞에서 우뚝 멈추어졌던 걸음과 눈을 뜨고 있는 나를 발견한 순간 그가 보였던 표정도. “참. 요즘은 신수 갖고 있는 사람이 없나 보더라?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마법 생물이라고 했어. 그리고 널 치료하는 데 쓸 수 있다고 말해서 겨우 살아난 거야, 네 까망이.” 줄곧 내게 안겨 있던 까망이가 갑자기 내 손을 핥아 와서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노란 눈동자를 보자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나랑 같이 있으면 위험한 걸 알고 까망이가 그동안 날 피해 다닌 건가?” 처음에는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으나 곱씹을수록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헉, 우리 까망이는 영특하니까 진짜 그런 거일 수도 있어! 왜냐하면 까망이는 장차 대마법사가 될 내 신수니까! 그런데 까만 또라이가 내 감동에 초를 쳤다. “아니? 걔네들한테 그런 지능이 어디 있어? 신수들의 행동은 그냥 주인 습성 따라가는 건데? 너랑 까망이가 나란히 초콜릿에 환장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글쎄, 나를 보고 비웃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곧 이어 그가 비밀 얘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인 말에 나는 그만 깜짝 놀라 몸을 떨고 말았다. “너 사실은 황궁에서 도망가고 싶지.” 흠칫. “어디로든 아무한테도 안 들키게 숨고 싶고 궁 밖으로 훌쩍 떠나고 싶고 그렇지?” 흠칫흠칫. “여기 있는 동안 좀 지켜봤는데 네 까망이 말이야. 틈만 나면 방구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기어들어가지를 않나,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지를 않나 아주 난리도 아니더라고. 신수들은 대개 주인을 닮게 마련이거든.” “아, 아니야. 지금 무슨 소리…….” “그리고 너 나 엄청 싫어하지? 지금 당장 눈앞에서 꺼져 버렸으면 좋겠지? 다시는 꼴도 보기 싫지?” 완전 흠칫! “이거 봐. 네가 그러니까 이것도 내가 만지기만 하면 경기를 일으키려고 하잖아.” 끼잉, 낑. 말하는 동안 점점 내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던 놈이 어느덧 내 품에서 까망이를 빼내갔다. 다가오는 빨간 눈동자에 굳어 있던 나는 낑낑거리는 까망이의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니, 이놈이 언제 또 까망이를 가져갔어! 그리고 유도신문 쩌네! “네가 계속 먹고 싶다고 그러고 괴롭히니까 까망이가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지!” “와, 그럼 너 나 안 싫어? 안 무서워? 다행이다. 나 사실은 엄청 소심하고 섬세해서 누가 나 싫어하면 완전 상처받거든.” “…….” 이 미친놈…….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도 어이가 없어서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의 나보다 고작 몇 살 위로 보이는 외모 때문인지 어떤 소리를 지껄여도 귀여워 보인다는 게 문제다. 크흑. 이건 말도 안 돼. 제가 이렇게 아이들에게 약했었나요? “그런데 꼭 그 모습으로 있어야 해? 왜 굳이 어린애인 척하는 건데?” 나는 불만을 담아 물었다. 이놈이 이런 귀여운 모습으로 나를 현혹시키려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숭을 떨어대는 것도 짜증이 났다. 그러자 버둥거리는 까망이를 이번에는 아예 품에 끌어안으며 놈이 콧방귀를 꼈다. “까망이 먹어도 되는 거 아니면 그런 소리 하지 마.” “헉, 뭐?” “지금 내 마력양이 너무 쓰레기라서 그나마 사이즈라도 줄여야 효율성이 쥐똥만큼이라도 오르거든. 그 이유 아니면 나도 이런 꼴로 재롱이나 피우고 있진 않았어.” 그럼 그렇다고 곱게 말하면 될 것이지, 우리 까망이는 왜 또 걸고 넘어져?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는 놈이다. 얘 대체 자기 집으로 언제 돌아가지? 빨리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이야! 크아앙. “며칠 전에는 마력이 조금 차서 잠깐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자주 하는 건 좀. 한동안 이 모습으로 있으면서 마력이나 모으려고.” 과연 내가 48일 만에 눈을 떠 처음 봤을 때는 고등학생 정도의 모습이었던 또라이였다. 물론 클로드와 필릭스가 나타나자마자 미니미 버전으로 탈바꿈해 나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긴 했지만. 그러고 나서 그는 줄곧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가 까망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르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아 참. 네 마력 생각보다 맛있더라.” ……네? 뭐가 맛있어요? 나는 귀를 의심하며 놈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 너한테 융합되지 못하고 난동 부리는 마력만 먹은 거야. 어차피 그건 없애는 거 말고 다른 방법도 없어. 그렇다고 그냥 버리면 아깝잖아.” 놈의 말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먹었냐? 먹은 거냐……! 먹어서 치료한 거냐?! 설마 그날 잠깐 동안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내 마력을 먹어서였어?! “그렇다고 그걸 왜 먹어!” “뀨앙!” “어쭈.” 녀석에게 쓰다듬을 받는 동안에도 불안하게 버둥거리던 까망이가 그때 갑자기 이를 세우며 놈에게 꼬리를 휘둘렀다. 까망이도 참다 참다 폭발한 모양이다. “이거 제법 깜찍하게 구네.” “끼잉, 끄이잉…….” 물론 그것도 잠시뿐, 곧 섬뜩하게 미소 짓는 또라이 놈에게 금세 꼬리를 내리고 말았지만. “데려가. 날 너무 무서워하네.” 놈은 멘붕에 빠져 있던 나에게 웬일로 곱게 까망이를 돌려주었다. “네 아빠 온다.” 클로드가 와서 그런 거였냐! 벌컥. “공주님!” 며칠 전과 같은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필릭스를 뒤에 세우고 들어오는 클로드에게 대번에 달려들었다. “아빠아아!” 클로드는 그런 나를 보고 이상함을 느낀 듯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 나는 ‘나 쟤 싫어!’를 장렬히 외치려고 입을 벌렸다. 나이 사기치고 있는 것도, 전에 까망이 훔치려고 황성에 들어왔던 것도, 지금 내숭 떨고 있는 것도 다 말해버릴 테야! 저놈이 내 은인이라고 하는 데다, 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좀 살펴보려고 나도 며칠 동안은 가만히 있었는데 이제 더 치료할 것도 없다고 하니까! 그런데 수상쩍음을 감지했는지 까만 또라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공주님.” “느, 넹?” 으, 으잉? 쟤 뭐야, 왜 저래? 왜 갑자기 나한테 사과하는 거지?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하지만 공주님의 애완동물은 숙련된 마법사도 제대로 다루기 어려운 마법 생물로, 되도록 가까이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 공주님께서 그리할 수 없다 하시니, 최소한 이제부터는 함께 보내는 시간만이라도 줄이시는 편이 나으리라 사료됩니다.” 뭐, 무슨 헛소리야! 놈이 지껄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너랑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어느덧 연약한 미소년 천재 마법사 캐릭터로 돌아간 까만 또라이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군 채 눈망울을 잘게 흔들고 있었다. 마치 나를 걱정해 조언한 말이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자 풀이 줄어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나는 어디서 위험한 동물을 주워 와서는 그게 해로운 줄도 모르고 떨어져 있기 싫다고 우기는 떼쟁이 어린애고! “맞는 말이군. 하나 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놈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지켜보던 클로드가 그 말에 냉큼 긍정해 왔다. 당연하게도 그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사실 클로드가 까망이를 죽인다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이 봐준 것이란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버리라니! “아, 아빠. 까망이 이제 안 위험하다고 저 오빠가 그랬는데…….” “한 번 주인을 문 개가 두 번 물지 말란 법은 없지.” 까망이는 개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까망이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으헝, 우리 까망이 겁먹잖아! “공주님의 마력이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한동안은 하루에 서너 시간 이상 접촉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역시 든든하네요. 어린 마법사님이 계셔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릅니다.” 필릭스는 내 속도 모르고 감탄하며 놈의 칭찬을 해댔다. 클로드는 그의 말에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까망이를 죽이거나 버리라는 소리를 또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겸손한 척하는 까만 또라이를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텄다, 텄어. 이놈은 이미 제 본색을 완벽히 숨기는 데 성공했어. “허면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것도 같이 가지고 나가라.” 클로드는 마치 버러지 보듯 까망이를 경멸 어린 눈초리로 싸늘히 깔아보기까지 했다. 우씨, 왜 다들 우리 까망이를 가만히 두지 못해 난리야! “아빠, 아빠. 까망이 아티가 맘마 주면 안 돼요? 아까부터 까망이 배고플 텐데.” 물론 그런 말을 큰 소리 내서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나, 난 소중하니까. 대신에 나는 클로드를 향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부탁했다. 내가 깨어난 후로 이놈도 좀 유해졌기 때문에 어쩌면 내 애교에 넘어올지도 몰랐다. 내 초롱초롱한 눈빛에 클로드가 잠시 동안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역시 지금 버리는 것이 좋겠군.” “응? 마법사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 오빠가 아티 대신 까망이 맘마 준다고? 고마워, 오빠!”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 당장.” “하, 하아암. 으응, 자꾸 하품 나. 아티 졸려요, 아빠.” 나는 클로드의 날카로운 눈빛을 모른 척하며 길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클로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까만 또라이 놈을 향해 마구 눈짓했다. 까망이 빨리 데리고 나가, 빨리! 그러자 별 신기한 걸 다 보겠다는 듯이 잠시 동안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 끝을 씰룩거리던 놈이 정중히 클로드에게 인사한 뒤 까망이를 안아 들었다. ======================================= [33화] “공주님께서 잠이 오신다 하시니, 저도 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필릭스와 까만 또라이는 나란히 방을 나섰다. 그러자 실내에는 클로드와 나,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으으음, 졸려어.” 내 발연기를 클로드가 눈치챘는지 못 챘는지는 알 방도가 없었으나, 어쨌든 그는 짧게 혀를 찬 뒤 나를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괜한 짓 말고 자라.” 아잇, 진짜 잘 생각은 없었는데 클로드가 또다시 내 눈을 손으로 덮는 순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냥 자는 척만 하다가 까망이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하지만 무산된 계획에 내가 속으로 발버둥을 치든 말든 내 의식은 빠른 속도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꿈에서 요정 언니를 만났다. 처음에 꾸었던 꿈에서처럼 녹색 나뭇잎들 사이를 춤추듯 걸으며 환히 웃고 있는 요정 언니를.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사위가 온통 깜깜했다. 으앗, 이런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나도 모르게 숙면해 버렸네. 뜻하지 않게 내 하루가 몽땅 날아가 버렸잖아. 나는 약간 억울한 기분으로 뻑뻑한 눈을 비비다가 돌연 손을 멈추고 말았다. “…….” 어렴풋한 달빛 사이로 클로드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침대맡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미묘한 기분은 안고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요정 언니 꿈꾸게 해준 거 역시 당신 맞잖아. 생각해 보면 그런 꿈을 꾸게 되는 것도 주로 클로드를 만난 후였고, 무엇보다도 그 꿈속의 요정 언니는……. “아직 밤이 길다. 좀 더 눈을 붙이도록 해라.” 내 귓가에 고요한 밤공기만큼이나 조용히 속삭이는 음성이 흘러들었다.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눈 바로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그동안 어딘가 멀게만 느껴졌던 클로드와의 거리가 갑자기 부쩍 좁혀진 것처럼 느껴져서 곤란했다. “완전히 잠들 때까지 여기 있을 테니.” 여전히 정 없는 말투로 말하고 있으면서 그 내용은 왜 쓸데없이 다정한 건데. 나는 속으로 작게 투덜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날 밤은 꿈조차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제11.5장 그 아빠 클로드 “우욱!” 흰색의 테이블보가 붉게 젖었다. 지금 막 입에서 피를 토해낸 아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주님!” 경악 어린 외침이 귀를 찌른 직후 붉은 피가 한차례 더 왈칵 쏟아져 나왔다. 자그마한 발에 신겨진 구두처럼 붉디붉은 피가 테이블보만큼이나 새하얀 옷 위로 짙게 물들었다. 곧이어 기울어지는 몸에 클로드는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 밖으로 풀썩 떨어진 몸이 물기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것이 마치 시체 같았다. 클로드는 그렇게 생각한 직후 곧바로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공주님, 이게 무슨!” 옆으로 달려온 필릭스가 쓰러진 아이를 붙잡고 경황없이 소리쳤다.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아이를 받아 든 상태 그대로 잠시 동안 미동 없이 굳어 있었다. 어쩐지 지금 벌어진 일이 현실성 없게 느껴졌다. 손 아래에서 마력이 거칠게 요동치는 감각만이 생생했다. 경위야 알 수 없으나 체내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마력이 각혈의 원인인 듯했다. 그것을 급히 억제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클로드는 제 마력을 흘려 넣기 위해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놓고 이내 멈칫했다. “공주님! 정신을 차려 보세요, 공주님!” ‘굳이 살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의문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이 아이를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지 않았나. 하면 이대로 그냥 죽게 내버려 둬도 괜찮지 않겠나. 태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으…….” 손바닥에 박힌 가시 같았던 이 아이가 알아서 사라져 준다는데. “아, 윽……. 아빠…….” 작은 신음과 함께 잠깐 모습을 드러낸 물기 어린 눈동자가 그의 경직된 얼굴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조막만 한 손이 가까스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나 싶더니, 곧이어 힘없이 풀썩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보석 안에 담겨 있던 그의 얼굴도 눈앞에서 사라졌다. “궁의를 불러라.” 클로드는 미동 없는 몸에 마력을 불어 넣어 구제불능으로 날뛰는 힘을 강제적으로 억압하며 입을 열었다. “빨리!” 그렇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다소 다급했으나, 정작 그 스스로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공주님께서 잠 드셨습니까?” “그래.” “편안한 얼굴이시군요.” 방금 전까지 치료를 받느라 지쳤는지 금세 잠든 아이를 보며 필릭스가 안심한 얼굴을 했다. “마법사님은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까지는 수상한 점을 찾지 못했는데 그래도 조금 더 조사해 볼까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따로 지시할 때까지 경계심을 버리지 마라.” “예.” 클로드와 필릭스, 둘 모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어린 마법사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 겨우 열댓 살로 보이는 그 소년이 아이를 살려낸 것은 사실이었다. 만약 적절한 때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클로드는 자신의 애완동물을 버린다는 말에 어설프게 연기해 말을 돌리던 아이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새근새근. 얕은 숨이 내쉬어졌다 다시 삼켜지는 소리가 귀에 선연했다. 잠시 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클로드의 입술에서 이윽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제 죽어도, 언제 내 눈앞에서 없어져도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 평온히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품고 있는 감정의 대상은 눈앞의 아이가 아닌 그 자신이었다. “우습게도 그게 아니더군.” “폐하.” “또 입바른 소리 할 작정이라면 나가라. 오늘은 들어줄 기분이 아니니.” 필릭스는 그의 말에 잠시 동안 조용한 시선을 던지더니 곧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방을 나섰다. 그러고 난 후 방 안에는 다시 농도 짙은 정적만이 가득 들어찼다. 클로드는 그의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며 조소했다. 사실 그는 언제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빠!’ 오늘은 죽여도 되지 않을까. 오늘은 죽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루하루. 그리고 오늘이 가고 또다시 내일. ‘아빠. 헤헤.’ 하지만 결국 죽이지 못했다. ‘아티가 자장자장 해줄게요!’ 망할 계집. 그는 저도 모르게 짓씹듯 새어 나온 욕을 다시금 되삼켰다. 죽어 사라졌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쓸데없이 저와 똑같이 닮은 것을 내 앞에 남겨두고 가서는. ‘아빠, 좋은 아침이에요!’ 독한 계집. 그리도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주제에. 그런데도 죽어서까지 망령처럼 들러붙어 완전히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게……. 거의 다 잊어가고 있었는데. 거의 다 지워가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동자에 다시 떠올려 버리고 말았다. ‘파파가 아티를 더 많이 많이 좋아해 주면 좋겠어!’ 그가 잠든 줄 알고 아이가 그런 말을 했을 때, 클로드는 남몰래 속으로 헛웃음 지으며 그것을 비웃었다. ‘사실 이제 엄마 안 보고 싶다고 한 건 아티가 거짓말한 거야.’ 멍청한 것.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않나. 죽는 날까지 내가 너를 딸로 생각하는 일도, 네게 좋은 감정을 품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근데 엄마 안 봐도 된다는 건 거짓말 아냐.’ 그가 아이를 살려둔 것은 어디까지나 매일매일이 똑같은 지금의 일상이 따분했기 때문이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예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이 그저 손만 많이 가고 시끄럽기만 한 아이를 옆에 두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아티한테는 파파가 있잖아.’ 하지만 그 말에 묘하게 속이 답답해진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따끔따끔. 언제부터인가 아이를 볼 때마다 속이 묘하게 따갑게 아리는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어째서인지. 그가 살의를 품은 채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아이는 언제나 티 없이 맑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럴 때면 마치 돌멩이가 굴러와 틀어박힌 것처럼 미비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날이 갈수록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으아앙! 아파, 흑. 아파…….’ 막상 정말로 죽을 상황에 처하자 화가 났다. ‘아, 아파. 아빠, 아프……. 으앙.’ 웃기지 마라. ‘공주님께서 고통을 겪게 되신 원인은 이 마법 생물입니다.’ 이런 것까지 제 어미를 닮을 필요는 없지 않나. ‘죽이겠다.’ ‘폐하! 어린 마법사님이 공주님을 치료할 수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의 처분은 공주님이 깨어나신 후 결정해도 늦지 않다 생각됩니다.’ ‘이미 결정했다. 제 주인의 생명을 갉아먹는 짐승을 살려둘 필요가 어디 있지?’ 당장에라도 목을 분질러 버릴 생각으로 새까만 짐승을 허공에 들어 올리자 팔딱팔딱 가늘게 뛰는 맥박이 손에 잡혔다. 그것은 지금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도 모르는 듯 다소 불안히 눈동자를 굴리면서도 그의 손 안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 멍청함이 제 주인과 닮아 있어 실소가 났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 생물을 이용해 공주님의 마력을 한결 더 빨리 안정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아타나시아, 그 이름만큼이나 발칙한 아이. 그는 그 아이가 줄곧 귀찮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죽이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이는 그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따금씩 두려움을 내비쳤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끊임없이 아이를 냉정히 대한 데에는 어느 정도 고의성도 있었다. 하면 그대로 숨어서 다시는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될 텐데. 그럼 그와 아이, 둘 모두 지금보다는 마음이 편해질 텐데.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런데도 아이는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찾아와 멍청하게 웃어댔다. 그것이 신물이 날 만큼 지독히도 귀찮았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라. 만약 공주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증오스러워 죽이고 싶다. 그래도 아직은 조금 더 눈앞에 두고 지켜보고 싶다. 아니, 지금 당장 이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 그래도 아직은 조금만 더……. 변덕스러운 마음이 쉴 새 없이 시끄럽게 난동을 부렸다. 아아, 전부 다 귀찮기 짝이 없구나. “아타나시아.” 그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이 작고 연약한 생명체의 숨을 단번에 끊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니 살려두는 거다. “나는 네가 싫다.” 클로드는 조용히 눈꺼풀을 내리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한 번 더 속삭였다. “나는 네가 싫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 같기도 한 그 작은 속삭임은 잠들어 있는 사람 대신 그의 귓가에 돌아와 안쪽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네가…….” 그러나 마침내 앞으로 뻗어진 손은 가느다란 목을 조르는 대신 식은땀이 맺힌 동그란 이마를 간질이듯 조심스레 스칠 따름이었다. 새근새근 곤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그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 역시 밤이 깊을 때까지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 [34화] 제12장 또라이에도 격이 있다 “저기, 아빠. 아티도 혼자 걷고 싶은데요.” “이게 더 빠르다.” 저기, 산책을 빨리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지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그리고 산책이란 건 원래 자기 발로 걸어야 산책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건 유람이나 관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나는 클로드의 가슴팍에 어정쩡하게 안긴 채로 주위의 풍경을 관망하며 생각했다. 분명히 이건 내 재활 치료를 겸한 산책이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맞습니다. 아직 무리하시는 건 좋지 않아요, 공주님.” 그래, 너였구나, 이 원흉! 역시 필릭스 말고는 나에게 이런 똥을 퍼 먹일 사람이 없었다. 바야흐로 산책을 시작한 지 십 분 후 나는 콧속에 직격한 꽃가루 때문에 잠시 재채기를 하고 말았는데, 그것을 듣자마자 필릭스가 또다시 저 가벼운 입을 놀린 것이다. 48일 만에 깨어난 나는 그 후유증으로 전처럼 팔팔하게 뛰어다니지 못했다. 첫날 클로드를 보고 달려가려다가 바닥에 엎어지고 만 것도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였다. 그나마 며칠 후에는 마법의 힘을 빌려 짧은 거리나마 내 두 다리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필요 이상 마법을 이용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걷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까만 또라이가 또다시 순진한 척 내숭을 떨며 말했다. “10분이면 이미 충분히 걷지 않았나.” “물론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요.” 아니거든요? 엄청나게 모자라거든요? 이 양반들이 단체로 약을 잘못 주워 먹었나. “오늘은 날이 좋으니 이대로 후원까지 걸어야겠다.” 심지어 클로드는 필릭스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나를 안아 들더니 이제는 앞장서 후원 관광까지 시켜주려 하고 있었다. 아니, 정 그러면 나를 필릭스한테 주고 혼자 산책하든가. 꼭 나를 이렇게 안고 가야 하는 거야? 으허. 기분 탓인지 클로드가 요즘 들어 나한테 미묘하게 다정해진 것 같았다. 허허, 미친 거 아닌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역시 착각이겠지. 그렇겠지? 그런데 바로 그때, 멍하게 벌린 내 입안으로 금색의 실타래가 날아 들어왔다. 악. 바람 때문에 클로드 머리카락 먹었어. 에잇, 저리 가! 저리 가! “에퉤퉤.” 퉤퉤퉷! 그런데 아무래도 내가 좀 요란하게 클로드 머리털을 뱉었나 보다. 침을 튀기는 소리에 클로드가 내게로 시선을 움직였다. 나는 잔뜩 인상을 쓴 채 혀를 내밀던 상태 그대로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퉤…… 에헤. 헤헤…….” 그, 그렇게 보지 마. 내가 네 머리카락을 먹고 싶어서 먹은 건 아니잖니! 나는 지긋한 눈빛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잖아! “머리카락은 먹는 게 아니다.” 으악! 나도 알아, 이 바보야! 진짜 까만 또라이나 얘나 다들 날 멍청이 취급하고 있어! 난 이 나이에 모국어인 오벨리아어까지 4개 국어나 할 줄 아는데! 그런데 이거 봐. 내가 자기 머리에 침을 묻혀놨는데도 화를 안 내잖아! 신경질도 안 부리고 짜증도 안 내고! 봤지? 그치? “폐하, 공주님은 제가 안을까요?” “지금보다 다섯 걸음 뒤에서 따라와라.” 끙. 필릭스는 금세 시무룩해져서 총총총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 모습을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는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그냥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클로드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아따, 고놈 참 어깨 한번 실하기도 하지. 내가 볼 때마다 맨날 하는 일 없이 늘어져 있는 게 전부인 것 같은 놈이 가만 보면 등짝이나 가슴팍이 참 튼실하단 말이야. 그래도 그동안 이놈 맨살을 좀 봤다고 이제는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놈은 지금 내 생물학적인 아버지란 놈인데, 단정치 못하게 속살을 드러낼 때마다 코피가 날 것 같은 기분이면 그것도 난처하지 않겠냐 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놈의 유혹을 견뎌냈어! 부동심! 철벽의 여인! 그런 미인계 따위 나한테 통할 줄 알고! 흥, 어림도 없지. 나는 콧방귀를 뀌며 도도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얏.” 어라. 그런데 누가 내 머리 끄덩이 잡았냐? “뭐 하는 거지?” 헉.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에 정수리 부근을 더듬거리던 나는 곧 헛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어서 오세요, 릴리의 미용실에!’로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나는 오늘도 릴리가 심혈을 기울여 꾸며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굽실굽실한 머리카락을 조금 모아서 사과 꼭지처럼 올려 묶은 정수리 부근에는 반짝이는 구슬들과 리본으로 장식된 머리핀이 꽂혀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왜 지금 그게 클로드 머리랑 엉켜 있는 걸까? 하하하. “머리카락은 먹는 게 아니라고 내가.” “아냐, 안 먹었어! 그게 아니라! 아티 머리핀에 아빠 머리가 낀 거 같아요. 으힝.” 어, 어떡하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깜찍한 내 모습에 아주 잘 어울리는 귀여운 머리핀이라고 마음에 들어 했었는데! 왜 그랬어, 머리핀아! 으허엉. “그럼 미적거리지 말고 빼면 될 것이 아니냐.” 망할. 그게 쉬웠으면 내가 이렇게 꼼지락거리고만 있었겠니? 내가 끙끙거리며 엉킨 부분을 풀려고 애쓰는 동안 뒤에 있던 필릭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공주님?” “다섯 걸음.” “…….” 이익, 필릭스가 도와주겠다는데 왜 쫓아내고 난리야! “산책이 끝날 때까지 풀어라.” 헉. 이래놓고 십구팔칠이일, 산책 끝! 아직도 내 머리를 못 풀다니, 죽어라! 이런 상황이 펼쳐지는 건 아니겠죠? 흐어어어. 한 가지 다행인 건, 클로드가 이상할 정도로 느리게 걷고 있다는 거였다. 앗. 설마 내가 무거워서는 아니겠지. 어쨌든 나는 내 사랑스러운 머리핀에 엉킨 클로드의 머리를 빼내려고 갖은 용을 다 썼다. 내가 그러는 동안 클로드는 느긋하게 후원을 거닐었다. 헉. 그런데 실수로 클로드 머리 뽑았다. 나는 흠칫 놀라 힐끔 놈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클로드는 방금 전 내가 자신의 두피에 가한 공격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 다행이다. 이놈 생각보다 좀 둔한가 보네. 나는 방금 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클로드의 머리카락을 슬그머니 그의 등 뒤로 날려 버렸다. 이거 내가 그런 거 아니야! 진짜야! 그런데 이거 진짜 왜 이렇게 안 빠지냐. 으엉, 이 방법만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나는 릴리가 해준 머리핀을 잡아 빼는 것으로 클로드의 머리카락을 해방시켜 주었다. “이제 됐다!” 으잉, 오늘 머리 마음에 들었는데. 아깝지만 할 수 없지. 자, 내가 네 머리를 해방시켜 주었어. 클로드는 지금부터 자유로운 클로드예요. 옜다, 받아라, 양말……. “머리가 지저분해졌군.” 뭣. 나보고 지금 네 머리까지 빗기라 이 말이니? “아빠 머리 오늘도 반짝반짝 예뻐요. 헤헤.” 흐엉. 하라면 해야지 어쩌겠어. 나는 속없이 방실방실 웃으며 핀에 엉킨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놈의 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겨주었다. 자, 이 정도면 너도 만족하겠지! 그런데 클로드는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뭐야, 이 이상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 놈을 쳐다봐주었다. 그러자 클로드가 작게 혀를 찬 뒤 다시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나를 보는 시선이 마치 까만 또라이의 눈빛 같았다! 이 자식, 내가 뭘 했다고 또 날 바보 취급해?! 그리고 잠시 후 클로드가 나를 잔디 위에 내려주었다. 응? 네가 날 안고 관광시켜 주는 게 아니었니? 뭐, 상관없지만. 그런데 이놈이 갑자기 나한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헉. 진짜 얘 미쳤나 봐. 서, 설마 손 잡아주려는 거야? 진짜? 나는 얘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녀석의 손에 내 손을 척 가져다 대주었다. 그런데 글쎄, 이놈이 또 나를 멍청이 보듯하며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 올리는 것이었다. 뭐, 뭐, 왜! 네가 손 달라고 한 거잖아! 아니야? “말고.” 손 아니면 뭔데? 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만 지어보이자 결국 클로드가 직접 손을 움직였다. 나는 내 반대쪽 손에 들려 있던 내 머리핀이 클로드의 큼지막한 손으로 옮겨가는 걸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있는 놈이 그걸 내 머리에 무심한 손짓으로 꽂아주는 모습도. “이제 좀 봐줄 만하군.” 나는 너무 놀라서 입만 벌린 채 어버버거리고 말았다. 얘 진짜 약 잘못 먹은 거 아니야? 오늘 아침밥에 독약이 들어 있었나?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나는 또 한 번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지 말고 얌전히 걸어라.” 너 지금 내 손 잡았니? 설마 내 손 잡고 산책하려는 거니? 미쳤다. 돌았다……. 얘 정말 정신이 나갔나 봐.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클로드 때문에 내 기분이 참으로 요상해지고 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요즘 들어 클로드의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내 필사적인 노력 탓인지 전부터 조금씩 나에게 부드러워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긴 했다. 하지만 산책할 때 손을 잡아준다거나, 이동할 때 필릭스 대신 직접 나를 안아서 데려다 준다거나, 지난번처럼 내 머리가 헝클어졌다고 핀을 꽂아준다거나 하는 건 어디로 보나 이상했다. 심지어 클로드는 내 거처를 다른 궁으로 바꿔주기까지 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나는 클로드의 무관심 때문에 황제의 후궁전이었던 루비궁을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며칠 전 클로드는 내 거처를 황제궁과 거리가 가까운 또 다른 궁인 에메랄드궁으로 옮기라는 전언을 보냈다. 얼마 전 루비궁에 왔을 때 처참하던 꼴을 봐서 그런가……? 하기야 몇 년 전 일(간 큰 시녀들의 반란이랄까)로 벽면에 박혀 있던 금과 보석들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상태지, 시녀장이 예산 부족을 핑계로 보수를 미뤄 여기저기 손볼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지. 그러니 클로드가 첫눈에 내 궁을 보고 ‘언제부터 이 궁이 개집이 되었지’라며 스산하게 중얼거릴 만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저녁, 에메랄드 궁으로의 대대적인 이사가 시작되었다. 아니, 사실 나야 몸만 덜렁 가면 돼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참고로 말하자면 클로드 놈이 내가 사는 루비궁에 직접 와본 것은 7년 만에 처음이었다. 사실 보통의 평범한 가정 같으면 아빠가 딸이 사는 곳에 7년 만에 처음 방문한 사실에 경악해야 마땅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아빠란 사람이 클로드이기 때문인지 나는 이놈이 내 궁에 그 귀하신 몸을 들였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루비궁보다 휘황찬란한 에메랄드 궁에서 나 홀로 찜찜해하고 있었다. 도대체 클로드가 왜 이러는 거지? 역시 가장 유력한 건 그거였다. 내가 죽을 뻔한 것에 나름대로 충격을 받고 회개해서 이제부터는 나한테 잘해 주려고 한다던가. 허허……. 하지만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나도 참 꿈이 야무지네. 자기 친딸도 막 죽이는,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기껏해야 내가 피 좀 토하고 헤롱헤롱했다고 정신을 차렸을 리가. ======================================= [35화] 하지만 잠시 후 나는 또 떨떠름하게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사실 클로드가 마냥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은 아니긴 했다. 자기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독히도 무심해져서 그렇지. 오히려 자기 선 안에 들어온 사람한테는 약간 호구 같은 구석도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 증거로 원작에서는……. “헐. 아에테르니타스가 역대 최강의 마법사 황제라고? 이 멍청한 찌질이 놈이?” 갑작스럽게 고막을 찌른 비웃음 소리에 생각이 끊기고 말았다. 아나, 맞아. 까만 또라이 너도 이 방에 같이 있었지? “아무리 애들 동화책이라지만 이거 너무 허풍이 심한 거 아니야? 이미 죽은 놈이라고 미화를 장난 아니게 해주네.” “그거 동화책 아니야!” “이게 동화책이 아니면? 이딴 게 역사서인 건 말도 안 되지.” 나는 카펫 위에 엎드려 뒹굴거리는 놈을 찌릿 노려보았다. 역사 수업 시간에 내가 공부하는 책을 홀랑 가져가 읽으며 과자를 우물거리는 폼이 참으로 태평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 방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퍽이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아니, 이 망할 놈이 이제는 아예 내 방을 자기 방처럼 쓰고 있어?! “내가 아직 다 안 나았다는 거 거짓말이지?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 속이고 이렇게 내 방에서 빈둥거릴 셈이야?” “아니. 너 아직 다 안 나은 거 맞아.” 그렇게 건성으로 대답하는 걸 누가 믿을 줄 알고! 이놈이 날 치료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을 속인 것도 벌써 세 번째였다. 매번 하는 일 없이 내 방에서 과자나 축내다가 나가는 주제에, 시간이 돼서 다른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오면 또 얼마나 신들린 내숭을 떨어대는지! 당장에라도 피를 토할 것처럼 기침을 해내며 비틀거리는 연기가 어찌나 일품인지 몰랐다. 처음에는 그게 진짜인 줄 알고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으니 이만하면 말 다했다. “뭐, 지금의 오벨리아 영토를 완성시킨 것도 이놈이라고? 희대의 현자라고까지 불리는 위대한 마법사? 무슨 위대한 마법사가 다 얼어 죽었나.” 놈은 계속해서 아에테르니타스 황제 윗대의 일을 운운하며 오늘날 오벨리아 마법사들의 씨가 마른 이유를 찾아봐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역사서를 가져다 보기 시작했으니, 전에 말했다시피 신수가 사라진 이유나 마법사의 숫자가 금 200년간 급격히 줄어든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신수 얘기는 책에도 안 오는데. 그렇지만 저놈이 허탕을 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았다. “이놈 부분만 뭐가 이렇게 줄줄이 길어?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바지에 오줌 싸서 질질 짜던 놈이 말이야.” 그나저나 이 까만 또라이는 진짜 정체가 뭐길래 200년 전에도 살아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거지? 자꾸 듣다 보니 단순히 미친놈의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아서 찝찝했다. 으음. 아에테르니타스 황제도 엄청난 마력을 보유했던 마법사라 장수해서 거의 150살까지 살았다고 하던데 혹시 이놈도 그런 경우라든가.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해 놓고 나는 소름이 끼쳐서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저놈이 하도 자칭 미소년 천재 마법사라고 떠들어대는 걸 듣다 보니 나까지 세뇌를 당했나. 역대 최강이라 불렸던 황제도 150살쯤에 죽었다고 하는데 그럼 쟤는 무슨 탑의 마법사라도 된다는 거야? 으헤헤. 어이없당. “이게 뭐야.” 그런데 방금 전부터 이상하게 잠잠하던 또라이가 갑자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엥. 저 책에 별 내용도 없을 텐데 왜 저래? 표정은 또 왜 저렇게 굳어 있고. “하. 아에테르니타스 이 개또라이 병신 새끼.” 예쁘장한 남자애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짓씹듯 토해져 나온 욕설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놈이 갑자기 살벌하게 왜 저러지? “마력 운용도 제대로 못하던 코찔찔이 놈이 무슨 수로 역대 최강의 마법사가 된 건가 했더니.” 그는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난 것 같았다. 만약에 내 책이 생물이었다면 아마도 저놈의 눈빛에 열 번은 족히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으리라. 까만 또라이는 내 역사서를 말 그대로 찢어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놈이 살벌하게 읊조리는 말에 호기심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에? 아에테르니타스 황제가 어떻게 대마법사가 된 건데?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몇 년간 클로드를 상대하다 보니 나도 좀 겁대가리가 없어졌다. 하지만 궁금하단 말이야! 나도 클로드한테 죽지만 않으면 나중에 대마법사님이 될 운명이니까! 음하핫. “그럼 이 자식이 금지된 마법을 쓰다 못해 자기 후손들까지 잡아먹었는데 욕이 안 나오게 생겼어?” 까만 또라이가 짜증스레 뇌까렸다. 당연하게도 나는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놈은 그런 내게 친절히 설명해 주는 일 없이 계속해서 자기 혼자 살기등등하게 이를 갈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제대로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뒈지려면 혼자 곱게 나자빠져서 뒈질 것이지. 나이를 몇이나 처먹었는데 함부로 처먹을 거 못 처먹을 거 구분을 못 하나?” “헙” “게다가 내 마력까지 이놈이 처먹은 거 같은데.” 바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뭔지 몰라도 지금 저놈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알겠다.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어린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도 또라이 놈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허헉. 무, 무서워. “진짜 등신 같은 놈.” 그런데 그 나직한 음성에는 분노 외의 다른 복잡한 감정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만 도록도록 굴리면서 까만 또라이의 눈치를 봤다. 여긴 내 방인데 왜 내가 매번 저놈 눈치를 봐야 하냐구요. 흑흑. 바로 그 순간, 놈의 앙증맞은 손이 더 볼 가치도 없다는 양 두꺼운 역사서를 덮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놈을 보고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 어디 가?” “오늘 치료 끝이야.” 이놈이?! 애초에 자기가 거짓말까지 해서 내 방에 마음대로 쳐들어와 놓고는! 치료는 개뿔 넌 엎드려서 내내 책이나 보고 과자나 까먹었잖아! 나도 안 말려, 안 잡아! 하지만 기분 나쁜 티를 폴폴 날리는 놈이 방문을 나선 후에 나는 저도 모르게 문 쪽을 힐끔거리고 말았다. 저놈이 저렇게 대놓고 짜증 내는 건 처음 봐서 괜한 호기심을 자극받은 탓이었다. 진짜 뭐냐, 쟤? 그리고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릴리가 하는 말에 나는 기가 막혀졌다. “어린 마법사님도 참 걱정이네요. 저리 몸이 약해서 어찌할지. 매번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돌아가는 모습이 안쓰러워요. 그런 와중에도 꼬박꼬박 공주님의 치료에 전력을 다해 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어요.” 오늘 같은 날까지 내숭 떠는 걸 잊지 않다니. 이 징그러운 놈……. “폐하께서 곧 오실 테니 머리를 다시 만져 드릴까요?” 한껏 짜게 식어 있던 나는 릴리가 덧붙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클로드에게 한 가지 변화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제는 클로드가 직접 나를 보러 내 궁에 행차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던데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헛소리 마라.” 갑자기 고막을 뚫고 들어온 서늘한 음성에 나는 경기를 할 뻔했다. “역시 그렇겠지요? 어제 알피어스 공을 만났는데 아들을 조만간 아를란타로 보낼 계획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그 전에 마지막으로 공주님과 인사시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잘되었군. 더 이상 그 일로 짖어대지 않을 테니.” 나, 나한테 하는 소리 아니구나. 어휴, 딴생각하다가 깜짝 놀랐네. 그런데 알피어스 공작 아들이면, 남자 주인공인 이제키엘이잖아? “흰둥이 아저씨네 오빠 아를란타 놀러가요?” “아를란타에 있는 학교에 들어갈 예정인 것 같습니다.” “따로 관심 둘 만한 문제가 아니다.” 쿠, 쿨럭. 아주 단호박이세요? 흰둥이 아저씨네 얘기 나올 때마다 철벽 수비가 장난이 아니시네요. 흐음. 그러고 보니 이제키엘은 원래 조기 유학파였지. 원작에서도 어릴 때 아를란타로 공부하러 갔다고 하더니 그게 지금이었나. “친구가 될 수도 있었는데 싶어 아쉬우십니까?” “으응. 그치만 흰둥이 아저씨 닮았다고 하니까 그렇게 많이 궁금하진 않아!” “공주님의 말 상대가 될 수 있도록 제가 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아, 아니. 노력 안 해도 돼! 매일 아를란타어 단어 외우는 것도 그만해도 돼! 철학 공부도 그만해! “새로운 궁에서는 지낼 만하나?” 이거 봐. 얘도 진짜 이상하다니까. 지금 클로드가 나한테 안부를 묻고 있어요. 크허헝. “궁이 반짝반짝해요!” 여기도 반짝 저기도 반짝! 예쁘기도 하지요! 그렇지 않아도 루비궁에는 이제 더 떼어낼 보석들도 없던 참인데 나는 신이 났다. 앗! 아앗! 그러고 보니 내 예쁜이들! 갑자기 생각났다. 루비궁에 숨겨뒀던 내 예쁜이들 안 가져왔어, 으아앙! “그렇겠지. 내친김에 시녀장도 바꿨다. 그간 주제도 모르고 설쳐 댔던 것을 들으니 가관이더군.” 나는 통한에 젖어 좌절하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헉. 시녀장을 바꿨다니. 예산 부족이라고 내 딸랑이도 새로 안 사줬던 그 시녀장? 재정이 안 좋다고 루비궁 보수도 안 해줬던 그 시녀장? 지난번에 루비궁 꼴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얘도 빡쳤나 보구만. 그, 그런데 설마 안 좋은 방법으로 바꾼 건 아니겠죠? 가령 다시는 이 세상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줬다거나. 그래서 더는 시녀장 노릇을 못 하게 되었다거나. 뭔가 묻기가 두려우니 그냥 가만히 있자. “에메랄드 궁은 가넷궁과 가까운 데다 환경도 쾌적하니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 클로드가 사용하는 가넷궁은 정식 황제궁은 아니라고 한다. 클로드가 황자였던 시절부터 이용하던 궁을 제위 후에도 그냥 계속 쓰는 거라나. 그리고 에메랄드 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대로 공주들이 사용하던 궁이란다. 그래서 나는 클로드가 내게 이 궁을 주었을 때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에메랄드 궁은 클로드가 제니트를 딸로 인정한 후 하사한 궁이었기 때문이다. 클로드는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도 그다지 쉬운 놈은 아니라 아타나시아가 죽기 얼마 전쯤에서야 제니트를 완전히 딸로 받아들이고 이 궁을 주었었다. 그래서 제니트도 그 전까지는 손님들이 묵는 사파이어궁에 머물러야 했고 말이다. 참고로 소설 속의 아타나시아는 죽을 때까지 루비궁에 짱박혀 살았다. 크흑. 그런데 그렇게 의미가 남다른 궁전을 지금 나한테 주다니! 내가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 클로드, 얘가 진짜 뭘 잘못 먹어서 이러지? 헉. 혹시 이러다가 나중에 제니트 오면 내가 쓰던 궁 뺏어서 주는 거 아니야? 그거 진짜 치사한 건데! 원래 줬다 뺏는 게 아예 안 주는 것보다 더 치사한 거랬어! 내 금! 내 보석!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공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으응.” “역시.” 나는 아직 하나하나 공들여 만져 보지도 못한 에메랄드궁의 금과 보석들을 불안히 떠올리다가 옆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무의식중에 대꾸했다. 응? 그런데 지금 뭐라고 한 거니? ======================================= [36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자 눈썹 사이를 살짝 좁히고 있는 클로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엥? 넌 또 왜 그런 얼굴로 날 보고 있어? “이해할 수가 없군. 그따위 귀찮기만 한 게 왜 필요하다는 건지.” “물론 공주님께는 저도 있지만, 그래도 역시 아이들에게는 또래 친구가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뭐야, 뭐야! 흰둥이 아저씨네 아들 얘기는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아티는 흰둥이 아저씨네 오빠랑은 친구 안 하고 싶어!” “예. 그러시다고 했죠.” 그런데 안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 있는 것치고는 뭔가 방금 전 나눈 대화가 의미심장하지 않았냐? “오늘은 그만 되었으니 물러가라.” “예. 쉬십시오.” 하지만 클로드가 짧게 혀를 찬 뒤 대화를 종결시켜 버렸기 때문에 나도 수상쩍게 그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키엘하고 친구 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으니까 괜찮겠지? 제니트랑도 친구 하기 싫다고 말하고 싶지만 흰둥이 아저씨가 이번에 직접 다시 얘기를 꺼낸 건 이제키엘뿐인 것 같아서 지금 괜히 말했다가는 긁어 부스럼만 만들 것 같았다. 나는 찜찜한 마음을 끌어안은 채로 클로드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며칠 뒤 내 불안은 약간 다른 의미의 현실이 되었다. “금일부터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말동무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주님.” 까만 또라이, 넌 또 왜 튀어나오고 난리야! 나는 내 앞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선 놈의 까만 머리통을 보며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어린 마법사님이라면 공주님의 이야기 상대로 적합할 것 같아 제가 추천드렸습니다.” 뿌듯하게 웃으며 말하는 필릭스를 나는 진심으로 때리고 싶어졌다. 역시 당신이었어! 매번 그렇게 해맑게 웃는 얼굴로 나한테 몇 번이나 똥을 뿌리는 거야! 캬악! “지난번에 공주님께서도 알피어스의 어린 영식보다 어린 마법사님이 좋다고 하셨지요?” 지난번에 내가 제대로 못 들었던 게 그거였던 거야?! 난 그냥 흰둥이 아저씨네 얘기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티는 새로운 친구 필요 없어! 필릭스만 있으면 된단 말이야!” “감사합니다, 공주님. 정말 기쁩니다.” 그래, 그러니까 그냥 저 또라이는 보내고 얘기하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같은 나이 대의 친구를 사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나이를 초월한 우정도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합니다만, 또래의 친구에게만 받을 수 있는 값진 경험들도 분명 있게 마련이니까요.” 헉. 언제부터 필릭스가 이렇게 청산유수가 되었지? 무, 물론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만 아니야, 당신들 지금 속고 있어! 저놈도 나랑 나이 안 비슷하다니까? “부끄럽지만 예전부터 몸이 편치 않아 실내 생활을 하며 여러 학문적 소양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공주님의 말동무로서 부족한 모습 보이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저, 저 능구렁이 같은 놈이? 어디서 은근슬쩍 내 친구로 여기 붙박으려고! “아빠는? 아티가 아빠한테 직접 말할래.” 그동안 나름대로 날 살려준 은혜가 있어서 입 다물고 있었지만 이제는 나도 전부 다 밝혀 버릴 거야! 설마 내가 진정성을 담아 말하는데 내 말이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공주님의 까망이는 오늘도 참 귀엽군요.” 그런데 갑자기 까만 또라이 놈이 소름 끼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린 듯이 예쁘게 지어 보인 꽃 미소였지만 내 눈에는 한없이 무서워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 까망이는 또 언제부터 안고 있던 거야?! 분명 탁자 밑에 들어가 있던 까망이였는데 저 귀신 같은 놈이? “역시 공주님의 애완동물이네요. 볼 때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대로 제 방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예요.” 히익. 까망이의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말에 나는 대번에 사색이 되어버렸다. 까망이도 놈의 다정한 손길에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얘 지금 나 협박하는 거지? 우리 까망이 납치해 버릴 거라고 협박하는 거지? 우리 까망이 먹어버릴 거라고 지금 나 협박하는 거지?! “너무 조그마해서 한 입 거리도 안 되게 생겼네요. 정말 귀엽기도 하지…….” 그리고 놈이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음산하게 속삭이는 순간, 나는 항복했다. “와, 와아. 아티한테 새로운 친구가 생겼네. 오빠, 잘 부탁해! 아빠한테는 나중에 아티가 고맙다고 해야지. 헤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공주님.” 어흐흑. 저는 왜 항상 이렇게 비굴하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필릭스는 자신의 중매가 성공해서 기쁜지 매우 흐뭇한 얼굴로 에메랄드궁을 떠났다. 저 나쁜 필릭스 오빠 같으니! 오늘밤 내 일기장에 다 써버릴 거야! 앞으로 10년 동안은 두고두고 보면서 계속 욕해 줄 거야! 어흐흑. “잠깐 신세 좀 지자. 며칠 있어 봤더니 역시 황궁이 익숙해서 편하네.” 이 뻔뻔한 놈이? 자기가 뭔데 내 집을 자기 집처럼 여기고 난리야? 지금 불청객 주제에 어쭙잖은 주인 의식을 자랑하고 앉았네, 이놈이? “오빠 누구야?” “루카스.” “그거 말고!” 나는 또다시 카펫 위에 편하게 드러눕는 놈을 노려보다가 소리쳤다. 그러자 놈이 어쭈,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빠, 진짜로 몇 살이야?” “몇 살 같은데?” 지금 나한테 물어봤냐? 어디 봅시다. 그 싸가지로 봤을 때 네 나이는요. “18! 오빠는 18! 어디로 봐도 18! 18 맞지?” “…….” “나이 말이야.” 내 입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다다다 터져 나온 말에 놈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후, 그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는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쩔 거냐. 난 지금 7살인데. 설마 너도 7살짜리 애가 일부러 욕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잖아? 은근히 기분은 나쁘겠지만 뭘 어쩔 거야. 그런데 갑자기 까만 또라이 놈이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웃으며 황당무계한 말을 했다. “나, 너랑 동갑인데.” 야이, 사기도 적당히 쳐! 재미있니? 재미있어? “그래, 그냥 적당히 맞먹어. 어차피 이제부터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이놈이 자기가 지금 어린애 형상을 하고 있다고 진짜 회춘이라도 한 줄 아나? 나는 짜증이 난 상태로 놈에게 다가가 까망이를 확 빼앗으며 눈을 치켜떴다. “진짜 정체가 뭐야? 이제부터 내 친구 할 거라며? 그럼 최소한 자기소개 정도는 제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름 알고 나이 알고. 또 뭐가 더 필요한데? 그 밖에 날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죄다 없어져 버렸는데. 그러는 넌 처음 친구 사귈 때 뭐라고 자기 소개해?” 헉. 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까만 또라이 놈이 내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하자 마땅히 답변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그러게. 친구끼리 자기소개는 어떻게 하는 거지? “거봐. 할 말 없지?” “아, 아니야!” 허흑, 제가 이렇게 휩쓸리기 쉬운 성격이었나요? 이놈이 정색하고 쳐다보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보다 알피어스 공작이면 어제 너네 아빠가 불러서 갔을 때 복도에서 언뜻 본 그 아저씨인가?” ‘그런 것보다’라니! 이놈이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고 있어! “오빠랑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흰둥이 아저씨네 오빠랑 친구하는 게 나았어!” 적어도 남자 주인공인 이제키엘이라면 까망이 상습 협박범인 얘보다는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었을 텐데. 으아앙. 괜히 흰둥이 아저씨랑 얽히기 싫어서 거절했다가 이게 뭐야. 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가 버렸고. 으앙앙. “설마 흰둥이 아저씨라는 게 그 너구리 말하는 거야?” 내 작명센스에 감탄했는지 놈이 신나게 웃어댔다. 지금 이 까만 또라이가 누구 이름을 비웃고 있는 거래? 나는 양쪽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린 채 놈을 찌릿 째려보았다. 저놈이 며칠 전에 심각하게 뛰쳐나간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었어. 역시 이놈은 나랑 까망이의 공공의 적! 사회악! 이 개미핥기! 헉, 아냐. 미안해, 개미핥기야. “그렇게 원하면 흰둥이네 애랑 친구하면 되겠네.” 그런데 한참을 소리 내 웃던 놈이 갑자기 나를 보며 사악하게 씨익 미소 짓는 것이었다. 잠깐. 너 무슨 짓하려고? 내 위험경보가 오랜만에 삐용삐용 요란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친구한테 자기소개 하는 법 배워 와.” “뭐? 그게 무슨.” 그런데 미처 질문을 끝마치기도 전에 내 시야가 반전되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뭐야? 너 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이 또라이야! 휘이잉. 그리고 잠시 동안의 현기증 끝에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어째서인지 나는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으아아, 엄마야!” 당연하게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왜 하늘이 보이는 거죠? 왜 내가 허공에 떠 있는 거죠? 풀썩! 그런데 한순간 내 몸이 둥실 공중에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떨어지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 싶었을 때, 누군가가 타이밍 좋게 내 몸을 붙잡았다. 하지만 역시 온전히 받아내는 건 무리였는지, 나를 붙잡은 사람도 결국은 나와 함께 뒤로 넘어져 버렸다. “아야…….” 파릇한 잔디가 햇빛을 머금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넘어진 충격으로 잠시 신음하던 나는 곧 내가 깔아뭉개고 있는 사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윽.” 낮게 울리는 신음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헉. 죄송…….” 하지만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햇볕 아래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과 그 아래에서 금화처럼 반짝이고 있는 금색의 눈동자였다. 한순간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통으로 약간 접혀 있던 눈동자가 조금씩 크게 터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지금의 까만 또라이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년이 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천사님……?” 너 설마 이제키엘이니……? 하지만 나는 곧 내 생각을 부정해 버렸다. 아하하. 설마 아니겠지. 그냥 외양만 좀 비슷한 사람이겠지. 물론 지금 내 아래에 깔린 소년의 얼굴이 흰둥이 아저씨와 버전만 달리한 것처럼 무섭게 닮아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 그래도 아니겠지? 그렇겠지?! “천사…….” 소년은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 크게 놀란 듯 잔디 위에 드러누운 상태 그대로 또 한 번 멍하게 중얼거렸다.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가 제 나이에 맞게 순진해 보여서 귀여웠다. 저기, 그런데 나보다는 네가 더 천사 같은데……. 물론 내가 좀 많이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확실히 나보다는 새하얀 은발과 반짝이는 금안을 가진 소년이 더 천사처럼 생겼다. 이, 이건 절대 내가 금에 환장하는 애라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당혹감과 놀라움을 담고 있던 금색 눈동자 안에 서서히 침착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성을 되찾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년은 방금 전의 무방비함이 모조리 헛것이었다는 것처럼 놀랍도록 차분했다. “천사가 아니야.” 마치 스스로에게 정답을 주지시키는 것 같은 작은 혼잣말이었다. 다, 당연히 아니지. 일 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순진해 보였던 아이가 빠르게 동요를 갈무리한 상태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창피하게도 나는 그 시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졌다. ======================================= [37화] “그런데 어떻게 하늘에서.” “이제키엘!” 헛. 그럼 도망가면 되잖아! 하지만 곧바로 내 귀를 파고든 목소리에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움직이고 말았다. 흐허억. 이 목소리는! 내가 서둘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소년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몸을 숨기는 게 더 빨랐다. “이제키엘, 여기 있었구나.” 그리고 내가 나무와 덤불 뒤로 폭삭 주저앉자마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혼자 무얼 하고 있던 게냐?”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루카스 이 진성 또라이야! 저거 흰둥이 아저씨잖아! 그럼 저 애는 이제키엘이 맞다는 거고! “제니트를 찾고 있었어요.” 게다가 여긴 알피어스 공작저인 거냐구! 허허헝. 제니트래, 제니트. 제니트가 여기에 있대! 그리고 남자 주인공인 이제키엘하고 흰둥이 아저씨는 지금 내 코앞에 있고! “그 아이가 또 혼자 토라져서 저택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루카스 이 미친놈이 날 흰둥이 아저씨네 소굴로 던져 버리다니. 나는 소리 없이 발버둥 치며 혹시나 흰둥이 아저씨에게 들킬 새라 조용히 숨을 죽였다. 설마 이제키엘이 방금 전에 날 만날 걸 전부 얘기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가 숨은 곳을 티 나지 않게 한번 곁눈질했을 뿐, 제 아버지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널 친오라비처럼 따르고 있으니 한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단 사실에 서운해할 만도 하지.” 알피어스 공작이 그렇게 말하며 한 차례 혀를 찼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제키엘이 조만간 아를란타로 유학 가는 것 때문에 제니트가 많이 속상해한 모양이다. 어, 음. 하지만 실망하지 마렴, 제니트야. 네 낭군님은 몇 년 후에 최고의 예비 신랑감이 되어 돌아올 테니까. 나는 방금 전 보았던 소년을 떠올리며 과연 미래가 기대되는 외모였다고 잠시 감탄하다가, 곧 그 얼굴이 흰둥이 아저씨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썩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냐, 하지만 버전이 다르게 생겼으니까 나이 들면 흰둥이 아저씨랑은 별로 안 닮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 투정을 네가 일일이 다 받아줄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나는 못마땅하다는 듯 내뱉은 로저 알피어스의 목소리에 다시 그들의 대화로 관심을 집중시키고 말았다. “그 아이도 물론 알피어스의 소중한 보물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너란다. 그 사실을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내 아들인 너라면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네. 잊지 않았습니다.” 와. 저 아저씨 좀 봐. 아들한테 아주 좋은 교육시켜 주네. 아니, 물론 흰둥이 아저씨 입장에서는 저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열 살짜리 어린애한테 굳이 그런 말을 따로 해야 하나. 뜻하지 않게 엿듣게 된 대화에 나는 입맛이 약간 떨떠름해졌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찾아보고 들어갈게요. 아버지 말씀처럼 이제 곧 알피어스를 떠나게 될 텐데 그 전에 달래줘야지요.” 그 와중에도 이제키엘은 시종일관 침착하게 알피어스 공작을 상대하고 있었다. 분명히 열 살짜리 애인데 왜 이렇게 어른 같지?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제법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래.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너를 믿는다.” 그렇게 말한 뒤 로저 알피어스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 후 주위가 급속도로 조용해졌다. 사방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가득 울렸다. 나는 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로 덤불 뒤에서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 거기 있으십니까?” 바로 그때 이제키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야생동물을 포획하기 직전의 사냥꾼처럼 지극히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제가 미흡한 탓에 제대로 받아들지 못해 죄송합니다. 혹시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공…….” “처, 천사는 이깟 일로 다치지 않아.” 제 손 발이 멀쩡한지 확인 좀 해주시겠어요……? 아주 그냥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시공간이 뒤틀리는 기분이네요. 하지만 내가 공주라고 할 수는 없잖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공작저로 무단 침입한 걸 무슨 수로 설명하라고? “……천사시라고요?” 악, 왜 이래, 그 천사 소리는 네가 먼저 시작해 놓고! 그렇지 않아도 이 나이 먹고 그런 소리하기 창피한데 내 입으로 또 말하라고? 그 금단의 단어를? “크흠. 그래. 그리고 천사는 함부로 인간에게 얼굴을 보이면 안 돼. 그러니 거기에서 다가오지 말도록 해.” 쪽팔림을 감수하고 도도하게 내뱉은 내 말에 뒤에서는 잠시 동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왜 반응이 그런 거니? 아무리 어른스러운 것 같아도 애는 애잖아. 방금 전에도 넌 날 천사님이라고 불렀잖아? 그러니까 애면 그냥 애답게 속아라, 으아앙. 서, 설마 그 잠깐 사이에 내 정체를 파악한 건 아니겠지? 문제는 내 눈인데, 방금 전까지 머리가 완전 산발이었어서 어쩌면 못 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런데 바로 그때 덤불 뒤로 웃음을 꾹 눌러 참는 듯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천사님이시군요.” 제, 제길. 쟤가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데 오늘 간식을 걸게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아마 지금 누군가 날 본다면 얼굴이 토마토 같다고 비웃지 않을까. 이익. 그런데 아까 전에 그렇게 귀여운 표정으로 나한테 ‘천사님’이라고 했던 애가 왜 이러실까? 나 아직 안 잊었거든? 네가 엄청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 동그랗게 뜨고 날 천사라고 부른 거! “크흠, 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왜 몰랐던 것처럼 그래? 먼저 날 천사라고 부른 건 그쪽이잖아?” “그건…….” 이제키엘은 내 갑작스러운 역공에 당황한 듯했다. 그래, 한번 변명해 보시지. 뭐라고 할지 들어나 보자. 하지만 잇따른 것은 기묘한 침묵뿐이었다. 으응? 왜 이렇게 조용해? 바스락. 나는 덤불 사이의 틈으로 빼꼼히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초록의 잎사귀 사이로 보게 된 이제키엘의 얼굴에 훅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키엘은 상당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듯 그 단정한 얼굴을 옅게 붉힌 채 딴청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 놀랄 정도로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였던 소년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쑥스러워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귀엽기도 했다. 헉. 모, 모에하다. 이것이 바로 갭모에인가. 큭, 안 돼! 위험한 것에 눈 떠버릴 것 같아! 나는 까망이를 볼 때 같은 기분으로 잠시 헉헉거렸다. 무엇보다도 평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다 뻔뻔한 성격들이라 그런지 이런 식으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무척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이런 걸 보니까 확실히 10살이 맞구나. 크윽. 그런데 넌 왜 하필 흰둥이 아저씨 아들인 거니. “제가 가까이 다가가는 게 곤란하다고 하시니 여기에 있겠습니다.” 이제키엘은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며 잠시 동안 혼자서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내가 숨어 있는 곳 근처의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는 것이 아닌가. “천사님은 어떻게 이런 곳까지 오게 되신 건가요?” 크허헝, 항마력이 부족합니다! 천사 소리를 육성으로 또 들으려니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네요! 나는 덤불 뒤에 무릎을 세우고 쭈그려 앉은 채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그런 건 비밀입니다아…….” 으허헝, 왜 매번 흑역사를 차곡차곡 적립해 가는 느낌이죠?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린 내 말에 이제키엘은 또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그렇군요’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그러고 난 뒤 우리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작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 침묵이 불편한 건 나뿐인가? 나는 소리 없이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먼저 정적을 깨뜨렸다. “난 그냥 내버려 두고 동생 찾으러 가.” 그러고 보니까 난 어떻게 돌아간다지. 이대로 여기 머물다가 결국 흰둥이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 까만 또라이 놈이 아무리 또라이라지만 날 여기에 이렇게 던져 놓고 언제까지나 나 몰라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적당히 때 되면 데리러 오지 않을까. 으아아, 나도 몰라. “동생이라면…….” “제니트라는 애 말이야. 아까부터 찾고 있었다면서?” “전부 들으셨군요.” 이제키엘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난 뒤 그는 잠시 동안 망설이며 말을 아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내가 제니트를 만나게 되면 이제키엘이 난처할 수도 있겠다. 제니트 보석안은 어쩔 거야. 흰둥이 아저씨가 나한테 제니트를 소개시켜 주려고 했던 걸 보면 그 눈을 숨길 방법이 아예 없는 것 같진 않지만 지금도 그런 준비가 되어 있을지는 모르니까. “실은 혼자 울고 있을 것 같아서 찾기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키엘이 자기 입으로 말한 망설임의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순진한 이유구만, 그래. 나는 방금 전 들은 대화로 대강의 전말을 유추했음에도 모르는 척 물었다. “동생이 왜 울어?” “제가 곧 이곳을 떠나게 되거든요. 그래서 많이 서운한 것 같아요.” “흐응. 그 애가 오빠를 많이 좋아하나 보네.” 이제키엘은 또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문득 이제키엘의 입에서 나오는 제니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저기, 그 제니트라는 애는 어떤 애야?” 사실 소설에서는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았던 그들의 어린 시절이 궁금한 이유도 있었다. 뭐, 여주인공인 만큼 당연히 어렸을 때에도 귀엽고 깜찍했겠지? 그런데 이제키엘이 무미건조하게 읊조리는 말에 나는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제가 지켜줘야 할 아이지요.” 저런 말을 할 거면 좀 어린애답게 호기로워야 하는 거 아닌가. 정해진 답을 읊듯 하도 무덤덤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깐 혼란스러웠다. “그, 그럼 더더군다나 찾아서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야?” 왜인지 이제키엘은 내가 뭐라고 할 때마다 잠깐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뭐 내가 어려운 말이라도 했니? “우는 아이는.” 그리고 잠시 후 작게 속삭여지는 목소리에 나는 또 요상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달래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헐. 이건 또 무슨 어울리지 않는 고민인가요? 혹시 지금 할 말이 없어서 대강 지어낸 말 아닌가요? 나는 이제키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또다시 덤불 사이로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건 진짜다. 얘 지금 진심이네. 으악, 저 민망해하는 얼굴 좀 봐.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우스웠다.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의 이제키엘은 남자 주인공답게 멋진 놈으로 서술되어 있었는데, 소설 어디에도 이런 귀여운 고민을 했던 순수한 소년이었단 말은 없었다. 으앙, 놀려주고 싶다! 막 괴롭혀주고 싶어! 나한테 이런 가학적인 본능도 있었다니. 으어어. “공……. 천사님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달래주면 우는 것을 멈추시나요?”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내 안의 위험한 본성과 한바탕 격한 레슬링을 하다가 이제키엘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이것만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 ======================================= [38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 “난 애초에 아예 안 우는데.” “…….” “나이가 몇인데 애처럼 울어.” 그래. 내 나이가 몇인데 어린애처럼 질질 짜겠니? 난 애기 때부터 안 우는 애로 유명했다 이거야. 물론 얼마 전에 죽을 뻔했을 때는 아파서 징징거렸지만……. 그, 그건 아프니까 할 수 없는 거고. 그것 말고는 운 적이 없다는 말씀. 그런데 내 위풍당당한 선언에 한동안 침묵하던 이제키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신가요?” “왜, 왜 웃어?” 이제키엘은 방금 전보다 확연히 티가 나게 웃고 있었다. 뭐야, 아까부터 계속. 내가 웃겨? 그래? 그리고 이어진 이제키엘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천사님이 귀여워서요.” 헉. 너 지금 나한테 작업 거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당연한가. 얘는 지금 열 살짜리 꼬마니까. 지금 한 말도 여동생을 귀여워하는 듯한 것이었고. 실제로 나는 지금 이 녀석이 동생처럼 아끼는 제니트와 동갑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얼굴이 빠른 속도로 달아오르고 심장도 같이 두근두근 쿵쾅쿵쾅 뛰기 시작하…… 기는 무슨. 허. 내가 지금 열 살짜리 남자애한테 귀엽다는 말을 들은 거야? 아니, 이런 어이없는 일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이 아가가 지금 누구를 제멋대로 귀여워하고 있는 거야? 와,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새삼 회의감이 든다. 나는 까만 또라이를 향해 이를 갈았다. “루카스, 이……” 이 망할 놈! 당장 날 여기서 빼내가란 말이야!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따악- 처음 이곳에 떨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한순간 눈앞이 환해진다 싶더니, 곧 주변에 어른거리던 풀벌레 소리와 실바람이 사라졌다. “잘 다녀왔어?”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방의 카펫을 밟고 있었다. “꽤 즐거웠나 보네. 생각보다 날 늦게 부른 걸 보면.” 눈앞에서 까만 또라이가 예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까망이는 침대 위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자기소개 하는 법은 배워 왔고?” 나는 까만 또라이를 향해 헤헤 웃어주었다. 자기소개? 그럼. 그 정도야 쉽지. 다음 순간 내 손이 놈을 향해 힘껏 휘둘러졌다. 나를 알려면 먼저 내 주먹하고 얘기해라! 퍼억! “윽!” 주먹에 가해지는 짜릿한 타격감에 나는 십 년 묵은 체증이 아주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와. 날 때린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사실 무턱대고 저질렀던 일인 만큼 뒤늦은 후폭풍을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까만 또라이는 내게 화를 내지도 보복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 행동에 분노는커녕 얼떨떨한 감정만 느끼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어떻게 이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가차 없이 때릴 수가 있지?” “내가 오빠보다 어리거든?” “아, 맞아. 그랬지.” ‘아, 맞아’ 좋아하시네! 까먹을 게 없어서 내가 자기보다 어리다는 걸 까먹냐? 그리고 이놈 자기 외모의 위력을 너무 잘 알고 있잖아?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약한 척하면서 동정과 호의를 사는 거겠지. “그런데 왜 때려? 네가 흰둥이 주니어랑 친구 하고 싶다고 해서 보내준 건데.” “그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였지!” 그리고 넌 진짜 내가 이제키엘이랑 친구 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보낸 게 아니잖아!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그런데 누가 너한테 위해를 가하거나 네가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진심으로 바라면 저절로 이동하게 해놔서 위험한 일이 생길 건 하나도 없었어.” 내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자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까만 또라이가 나한테 사과했다. 아오, 진짜 이 개똥구리 같은 자식. “이제부터 마음대로 이런 짓 안 한다고 약속해.” “알겠어.” 나한테 얻어맞은 게 퍽이나 충격적이었는지 놈은 순순히 대답했다. 아직 좀 찜찜하긴 하지만 웬일로 깐죽거리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거기에 대고 더 뭐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런데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까만 또라이가 뜬금없이 툭 내뱉듯 내게 물었다. “너 내가 엄청 센 마법사인 거 알아, 몰라?” 이 자식이 재수 없게 왜 또 갑자기 잘난 척이래? “내가 마음만 먹으면 오벨리아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도 있어. 하다못해 이 황궁 하나 폭파시켜 버리는 건 일도 아니야.” “그, 그래서 뭐?” 이게 혹시 또 날 협박하려는 건가?! 자기가 미친놈인 걸 뭐 이렇게 당당하게 지껄이고 있어? 까만 또라이는 내가 자기 눈치를 보는 걸 유심히 지켜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알면서도 그랬다는 거지.” 머리 한 대 얻어맞았다고 돌았나? 너 지금 나 홀로 독백하니? “기분 이상하네. 태어나서 부모한테도 한번 맞아본 적 없었는데.” 나한테 말하고 싶은 거면 좀 잘 들리게 말하든가. 혼잣말이면 그냥 조용히 속으로만 생각하든가. 얘는 왜 자꾸 이도저도 아니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어? 녀석은 신기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 동안 나를 보더니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 간다. 이제 혼자 놀아.” 야이, 내가 언제 너한테 놀아달라고 한 적 있었니? 이건 뭐, 자기 마음대로 내 말동무 자리를 꿰차놓고는. 하지만 이제는 일일이 반응하기도 지친다. 그래, 그냥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 그래야 내 마음이 평온을 되찾지. 그리고 까만 또라이가 방을 나선 뒤에야 나는 침대 위에 편하게 드러누워 까망이와 함께 진정한 휴식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이제키엘한테 온다고 말도 안 하고 왔잖아? 제13장 우리 또라이가 달라졌어요 “너 나중에 학자라도 될 생각이야?”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던 까만 또라이가 질렸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진도 밀려서 바쁜데 귀찮게 굴기는. “오빠 바보야? 꼭 학자가 되려고 공부를 하니? 그냥 칭찬받으면 뿌듯하고 또 재미있으니까 열심히 하는 거지.” “흐응. 너 나중에 여왕 되고 싶어?” 나는 열심히 오늘 배운 내용을 복습하다 말고 콧방귀를 뀌었다. 여왕이라니.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난 그냥 18살 이후까지 생존하는 게 목표다, 이놈아. 그리고 여왕은 뭐 아무나 하나? 되고 싶으면 다 될 수 있는, 그런 건 줄 알아?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결말에서도 그냥 제니트하고 이제키엘하고 클로드하고 잘 먹고 잘 살았다고만 나와서 클로드 다음 황제가 누가 되었는지 알 방도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지금의 나와는 거리가 먼 문제 아니겠는가? 난 그냥 가늘고 길게 사는 게 꿈인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저리 가. 방해된단 말이야. 저쪽 가서 역사서나 봐. 나 오늘까지 숙제해야 돼.” “이거 재미없어. 죄다 사기야.”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역사서를 킬킬거리며 보던 놈이 얼굴을 구기며 질색했다. 또 왜 이러실까? 처음에는 아에테르니타스 황제의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심각하게 굴던 놈이 그 뒤로는 내 역사서를 보면서 만화책이라도 보듯 배를 잡고 웃어대지를 않나, 그러더니 이제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이렇게 질겁하는 표정을 짓고. “특히 탑의 마법사 가지고 아주 소설들을 써놨어.” 변덕이 아주 죽 끓는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놈이 지나가듯 내뱉은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말았다. “탑의 마법사가 왜?” 탑의 마법사가 누구이던가. 릴리가 어릴 적 읽어줬던 책들에 빠짐없이 등장해 나에게 마법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던 존재가 아니던가. 가시덩굴로 휘감은 검은 탑에 홀로 은둔하고 있다는 세계 최강의 마법사 이야기는 언제나 내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들곤 했다. “하나하나 짚자면 한도 끝도 없어. 일단 탑의 마법사가 오벨리아 옛 왕조의 부패를 참지 못해 제도를 날려서 정화했다는 것도 어이없고(그냥 황제 놈이 시건방진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딱밤 한 대 때렸는데 황성이 날아간 걸 어쩌라고), 탑의 마법사가 아에테르니타스의 강대한 마법에 감명받아 충실한 심복을 자처했었고 그래서 그놈이 죽고 난 뒤에 절망해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도 진짜 개소리고(빠드득, 진짜 이 병신이 당사자 없을 때 이딴 사기를), 그리고 결정적으로 탑의 마법사가 불의의 사고로 흉측한 외모를 가지게 돼서 칩거하고 있다는 건 완전 헛소리지.” 이놈이 하는 말은 언제나 진짜 같기도 하고 그냥 미친놈의 허풍 같기도 해서 영 아리까리했다. 까만 또라이는 엄청난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잠시 썩소를 짓다가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탑의 마법사는 언제나, 늘, 세계 최고로 잘생겼거든.” ……아, 네. 그러세요. 그런데 왜 네가 그렇게 흥분해서 말하는 거니? 한껏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놈이 지금 10대 초반의 모습을 한 채로 카펫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꼴이라 더 웃겼다. 물론 나도 탑의 마법사를 좋아하니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혹시 이놈도 탑의 마법사의 열렬한 팬인가? 아, 하긴. 전생에서도 남덕들 화력이 의외로 장난 아니란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똑똑. 달칵. “간식 드세요, 공주님.” 바로 그때, 릴리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유난히 극성맞은 까만 또라이를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릴리가 들고 온 간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 맛있겠다!” 헉헉, 초코 수플레다, 초코 수플레! “이건 마법사님 거.” 힐끔 보니 어느덧 단정한 정좌 상태로 돌아간 까만 또라이도 아닌 척하면서 접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훗, 다른 건 몰라도 우리 릴리의 초콜릿 디저트는 완전 짱짱이라구. “까망이는 여기.” 이제는 릴리도 까망이가 마법 생물이라 탈이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마음껏 초콜릿이 들어간 음식을 주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던 까망이도 어느새 릴리의 발치에까지 와 꼬리를 마구 흔들어대며 헥헥거리는 중이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릴리는 그런 우리들 모두를 귀엽다는 듯이 보다가 방을 나섰다. 내게 말동무가 생긴 뒤부터 릴리는 우리들이 함께 있을 때면 노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 다른 곳에 가 있곤 했다. “맛있어, 어흑.” 나는 따끈따끈한 수플레를 한 입 떠먹은 뒤 감격에 젖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솔직히 말해봐. 저 여자, 간식에 마약 타지?” “저 여자가 뭐야, 릴리한테!” 사실 여전히 재수는 없었지만 양 뺨 가득 수플레를 쓸어 넣고 햄스터처럼 우물거리는 까만 또라이는 좀 귀여웠다. 물론 외양만. 엇, 그런데 쟤 왼쪽 눈 밑에 눈물점 있었네. 그래서 입 다물고 있을 때 더 새침해 보이는 건가. 하여간 까만 또라이나 이제키엘이나. 남자애들이 생긴 게 다들 왜 이렇게 예쁜 거람. “너 안 먹으면 나 줘.” “앗! 내 거야!” 으악, 이 방심할 수 없는 놈! *** 오늘은 오랜만에 내가 먼저 클로드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만나게 된 것은 알피어스 공작이었다. “흰둥이 아저씨, 안녕!” 가넷궁으로 향하는 초입. 나를 발견한 로저 알피어스가 웬일로 나를 기피하는 느낌 없이 공손히 인사해 왔다. ======================================= [39화] “안녕하셨습니까, 공주님.” 크으. 이렇게 보니까 이제키엘하고 더 닮았네. “자네도 잘 지냈나.” “예. 얼마 전에도 뵈었었지요, 알피어스 공.” 이 아저씨는 뭘 먹고 이렇게 능구렁이 같은 아저씨가 되었을까. 이제키엘은 설마 이렇게 자라지 않겠지? “공주님, 건강해 보이셔서 기쁩니다. 오벨리아의 보배이신 공주님께서 갑작스러운 병환에 시달리신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염려했답니다.” 오랜만에 봤다고 흰둥이 아저씨가 내게 입에 발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공주님을 치료했다는 어린 마법사의 이야기도 들었지요.” 그런데 까만 또라이 얘기를 꺼내는 알피어스 공작의 눈동자가 약간 가늘어져 있었다. “듣자 하니 그 마법사를 공주님의 말동무 상대로 삼으셨다고…….” 아하. 이제키엘을 내게 밀어 넣으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언짢은 상태구나. 더군다나 어디서 굴러들어 온지도 모르는 까만 또라이가 떡하니 그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했으니 이 사람 입장에서는 못마땅할 수밖에. 나는 그런 그의 속내를 모르는 척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으응. 아티가 아직 아를란타어 공부를 덜 해서 흰둥이 아저씨네 오빠랑 여자애랑은 친구할 수가 없으니까.” 전에 만났을 때 했던 얘기를 또 꺼내자 로저 알피어스가 사레가 들린 것처럼 큼큼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역시 구렁이를 백 마리쯤 삶아 먹은 것 같은 아저씨라 그런지 회복력이 장난 아니게 빨랐다. 그는 클로드를 만나러 가던 길에 우연히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다시 나를 회유하려 들었다. “실은 이번에 제 아들이 보다 폭넓은 소양과 경험을 위해 아를란타로 떠난답니다. 당연히 아를란타어를 꽤나 유창히 할 줄 알지요. 그러니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 전에 제 아들이 공주님의 아를란타어 공부를 도…….” “와아! 대단하다! 그럼 흰둥이 아저씨네 오빠가 다시 오벨리아에 올 때까지 아티도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아니, 제 아들에게 말해서 공부를…….” “지금 아빠 보러 가려고 했는데, 그냥 가서 공부할래. 아티 지금보다 더 똑똑해질 수 있어! 그럼 흰둥이 아저씨 빠빠이! 그 오빠도 아를란타에서 힘내라고 해줘!” 이제는 척하면 척이었다. 내가 옷자락을 잡아당기자마자 필릭스가 알피어스 공작에게 인사를 남긴 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내가 돌아서기 직전 본 로저 알피어스는 또다시 내게 한 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7살짜리인 내가 계획적으로 자기를 물 먹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거고, 그냥 나처럼 말 안 통하는 애는 처음 봤다고 답답해하고 있겠지. 크크. 흰둥이 아저씨 놀리기 재미있당. “저도 오늘부터 공부 양을 더 늘리겠습니다, 공주님. 공주님의 예비 친구인 알피어스의 어린 영식도 학문적 소양을 넓히기 위해 유학을 간다는데, 공주님의 현재 친구인 저도 더 노력해야지요.” 헉. 필릭스가 듣고 있는 걸 또 잊고 있었네. 이제는 내 호위 기사라기보다는 이동 수단이란 느낌이 더 강해서 그만! “아아아냐. 필릭스는 진짜 지금 이대로도 좋은데.” “아닙니다. 공부도 하다 보니 나름대로 재미있는걸요.” 결국 나는 다른 때보다도 유독 강한 열의를 보이는 필릭스에게 지고 말았다. 그, 그래. 공부는 마음의 양식. 우리 모두 공부합시다. 자, 어서 책을 펼치세요! “어서 와!” 그리고 정작 나는 공부를 하지 않고 시간 맞춰 내 방에 온 까만 또라이를 반겨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클로드 보러 간다고 말도 안 했었잖아. 헉. 흰둥이 아저씨 아니었으면 이놈 바람 맞출 뻔. “뭐야. 왜 날 이렇게 반겨? 수상쩍게.” 에잇, 말 좀 예쁘게 해줄 수 없니? 내가 말이야, 이유 없이 널 좀 반가워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지금 까만 또라이가 이상한 눈으로 날 보는 게 이해가 되었다. 크흠. 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다가 까만 또라이에게 말했다. “있잖아, 나 그때 거기로 다시 보내줄 수 있어?” “그때 거기? 흰둥이네 집?” 이놈도 척하면 척인걸? “언제, 지금?” “어, 진짜 보내주려고?” “네가 보내달라며. 이번에도 그냥 해본 말이야?” “그건 아니지만.” 뜻밖에도 그는 내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놈이 왜 이렇게 순순하지? 나한테 얻어맞은 보람이 있었나? 만약 안 된다고 하거나 조건을 걸거나 아무튼 치사하게 나오면 그냥 관두려고 했는데. 뭐,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는 내친김에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응, 그리고…….” *** “으악!” 그런데 꼭 이렇게 우아하지 못한 방법으로 보내줘야 하냐고! “읍, 콜록, 콜록!” 잠시 후 나는 까만 또라이를 속으로 마구 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놈의 순간 이동 방법은 꼭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걸로만 한정 지어진 건 아닌가 보다. 그 증거로 나는 눈을 뜨자마자 먼지가 폴폴 날리는 비좁은 공간에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얏!” 여긴 어디야? 왜 이렇게 좁아? 악,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머리 부딪쳤잖아. 내 뇌세포. 으아앙. “고……!” 그래도 제대로 온 모양이다. 먼지 때문에 눈물을 찔끔하며 앞을 보니, 이제키엘이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서 있었다. 그런데 ‘고’라고? “거, 거기서 뭘 하시는 건가요?” 방금 전보다 약간 정신을 차린 것 같은 그가 그래도 여전히 당황하며 물었다. 말을 더듬는 걸 보니 놀라긴 많이 놀랐나 보다. 그런데 왠지 급하게 말을 돌린 느낌인데, 뭐지? “손을.” 나는 이제키엘이 내미는 손을 잡고 좁은 공간에서 벗어났다. 으억. 벽난로였냐? 벽난로였어? “머이 머어떠.” 으앙. 먼지 먹었어. 퉤퉤. 루카스 이 망할 놈은 왜 하필 날 벽난로에 밀어 넣고 난리야? 내가 혀를 삐죽삐죽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동안 이제키엘은 내 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주었다. 그러더니 내 머리카락에 붙은 벽난로의 잔재들까지 부드러운 손길로 떼어내 주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 제니트를 돌보던 솜씨인가. 행동이 아주 자연스러운데. 이런 세심한 손길은 릴리에게서밖에 느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 어린 소년의 오빠다운 면모에 약간 감탄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문득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 이제키엘이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앗. 여기 오기 전에 까만 또라이한테 할 수 있으면 내 눈 색깔을 바꿔달라고 했었는데 정말 해준 모양이다(놈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건 세상에 없다며 코웃음 쳤다). 그런데 왜 하필 빨간색이야, 에잇. 혹시 귀신 눈 같아서 놀랐나? 그치만 까만 또라이 눈은 제법 예쁜 빨간색이었는데. “저기, 너무 빤히 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제키엘은 자신이 내 얼굴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을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그 직후, 그가 흠칫 놀라서 내게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급하게 물러설 건 없는데. 어째서인지 이제키엘은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로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갈팡질팡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내게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나는 약간 겸연쩍어져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그, 그때 내가 갑자기 사라졌잖아?” “네. 걱정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이 돌아왔다. 크으. 역시. 얘라면 왠지 걱정할 것 같았어. 이제키엘은 내 말에 다시 한 번 시선을 돌려 나를 살피더니 이내 안심했다는 듯 웃었다. “아마 그럴 것 같다고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원래 계신 곳으로 무사히 돌아가셨던 것 같아 다행이에요.” 헉. 얘 뭐야. 치유캐인가? 뭐 이런 가슴 훈훈해지는 남자애가 다 있죠? 역시 오늘 다시 오길 잘했다. 이런 순진한 남자애를 계속 걱정시켰으면 아마 죄 짓는 기분이 들었을 거예요. 으앙. “으응. 그때 간다고 말 못하고 가서, 그래서 다시 온 거야.” 마침 흰둥이 아저씨도 황성에 있고 말이지. 그래도 네가 까만 또라이 같은 애였으면 여기 다시 안 왔을 거란다. “그럼 그때 인사를, 제게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오신 것이라는…….” 이제키엘이 내 말을 확인하려는 듯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으억. 얘 입으로 다시 들으니까 좀 민망하당. “그러니까 오늘은 저를 만나러 와주신 거군요.” “그렇지……?” 읭. 지난번에도 어쨌거나 까만 또라이가 널 만나라고 보내준 거였으니까, 그때도 어쨌든 널 보러 왔던 건데. 그리고 다음 순간 보게 된 것에 나는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이제키엘의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귀가 약간 빨갰던 것이다. 헉. 쑥스러워하는 건가? 고작 이런 걸로? 으앙, 귀엽다. 역시 이 신선하고 풋풋한 반응! 그나저나 오늘은 방에 혼자 있었네. 으음. 이제키엘 방이 맞겠지……? 왜, 왜인지 방의 인테리어나 분위기가 애가 쓰는 방 같지 않아서 좀 의심스럽다. “뭐 하고 있었어?” 헤헤. 나 무사한 거 봤으니 됐지? 그럼 안녕! 뿅! 이러고 사라지기는 또 뻘쭘해서 나는 괜히 하릴없이 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답변에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말았다. “『편미분방정식에 의한 시공간의 곡률 연구와 특수 상대성 이론에 기반한 게일 쉴러의 논리가 가진 오류와 그 비판 그리고 재해석』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네? 그게 뭐죠? 책 제목인가요? 지금 열 살인 네가 그걸 공부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정말요? 이 나라 원래 예법 같은 기초 교양도 8살부터 시작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얘는 뭔데요? “……사회학 어디까지 공부했어? 빌 로이츠 알아? 조셉 로투스의 재귀 이론은?” “벌써 빌 로이츠와 조셉 로투스를 아십니까? 놀랍군요. 저는 최근에 하퍼스 코엘의 표상적 실재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를란타어로 일상 회화해 봐].” “예? 그러니까……. [갑자기 이런 질문은 왜 하시는 건가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데. 그나저나 벌써 아를란타어 일상 회화를 할 줄 아시는].” “아를란타어로 표상적 실재론 설명해 봐.” “[하퍼스 코엘이 마크빌력 231년에 처음 주장한 이론으로, 사물의 내적 대상과 외적 대상에 대한 직간접적 지각을 관념적으로……].” “사이칸시아 신성 제국어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아? [신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핏빛 젖 속에서 태어났으니 타락한 낙원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리라]. 이 뒤에 구절이 뭐야?” “[그러나 억겁의 세월이 흐른 뒤 내가 너희들을 구원할지니, 그 파멸의 날까지 모두 피의 성배를 들라]. 맙소사. 사이칸시아의 성서 내용을 벌써 12장 41절까지 외우고 계시다니. 15세는 되어야 보통 그 정도 진도를 나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대단하시네요.” 제, 제길. 몇 장 몇 절 내용인지까지 알고 있는 거냐……! 나도 그건 모르는데! 그러는 너도 10살인데 벌써 성서를 그 정도까지 외우고 있잖아! 게다가 내가 뜬금없이 뒤 구절을 말해보라고 했는데도 1초도 안 망설이고 대답했어. 나도 아직 배우지 않은 하퍼스 코엘도 알고, 그걸 아를란타어로 설명하라는 것까지 다해 내다니! 일상 회화도 엄청 유창했어! 심지어 아를란타어에서 어렵기로 소문난 ‘i’ 변화형 단어도 제대로 맞게 썼다고!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39화 플루토스 장편소설 지은이 : 플루토스 발행인 : 권태완 전자책 발행일 : 2017-01-18 제 공 : CL Production 등록번호 : 480-88-00091 주소 : 서울시 구로구 공원로 41, 826호 이 책은 KWBOOKS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전자책으로 발행한 것입니다. 본사의 허락없이 본서의 내용을 무단복제 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습니다. ======================================= [40화]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이런 게 남자 주인공 버프입니까? 그런 겁니까?! 그런데 이놈은 오히려 나를 천재 보듯 하고 있었다. 이 무슨 학이 까마귀를 보고 네 깃털 희다고 하는 소리며, 황새가 뱁새 보고 다리 길다고 감탄하는 소리란 말인가. 흰둥이 아저씨가 자기 아들 잘났다고 내 앞에서 주름잡던 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단 말이야? 정말? 진정? 나는 왜인지 지금까지 용을 쓰며 공부하던 게 허탈해져서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똑똑. 그런데 돌연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그것은 어린 여자애의 목소리였다. 뭐?! 어린 여자애의 목소리? 이 집에 있는 어린 여자애라면 제니트밖에 없잖아? 내 짐작이 맞는지 이제키엘이 멈칫했다. “동생이야?” 모르는 척 내가 묻자 금색 눈동자가 더욱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오빠, 나 들어가도 돼?” 역시 여주인공 파워인지 문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참으로 깜찍하기도 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나갈게.” 사실 나는 오늘 여기에서 제니트를 만나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왔던 것이었다. 물론 저 아이가 껄끄러워서 보기 싫은 건 맞았지만 지난번 여기에 왔을 때 흰둥이 아저씨와 이제키엘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어린 제니트가 조금 궁금해졌다. 루카스를 통해 눈 색깔도 바꿨겠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도 흰둥이 아저씨밖에 없겠다, 솔직히 여기에서 누굴 만난다 해도 내가 아타나시아 공주라는 걸 알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난 여기에서, 크흠. 처, 천사님이니까. 게다가 지금의 상황에서 제니트와 나 둘 중, 정체를 숨겨야 할 사람은 아마 나보다는 제니트 쪽일 것이었다. “잠시만 여기에서 기다려 주세요.” 이제키엘은 또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제니트는 평소 교육을 잘 받은 건지 허락 없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난입한다거나 하는 일은 벌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지금의 이제키엘에게 있어 퍽 다행스러운 일이리라. “무슨 일이야?” 방문을 연 이제키엘이 아마도 문 밖에 서 있을 사람을 향해 부드럽지만 어딘가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이쪽에서는 문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소녀의 목소리만큼은 문을 닫고 있던 방금 전보다 한결 또렷이 들렸다. “나 책 읽어줘.” “책?” “응. 지난번에 읽어줬던 거 뒤 권 마저 읽어줘.” “그건 이틀 전에 끝까지 다 읽어줬잖아.” 그러자 제니트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이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 앨리스 머리 빗겨주는 거 도와줘.” 으응? 앨리스가 누구래? 머리를 빗겨준다는 거 보니까 우리 까망이처럼 애완동물인가? “앨리스는 지금쯤 빨랫줄에 널려 있을 텐데. 아침에 깨끗하게 만들어준다고 에이미랑 같이 빨래통에 넣었잖아. 그냥 새 인형을 사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면서.” 인형이었냐! 그럼 이제키엘한테 같이 인형 머리 빗겨주자고 한 거야? 저 애늙은이가 퍽이나 재미있게 인형 놀이를 하겠다. “그, 그럼 같이 온실에 가. 오늘 아침 처음으로 하얀 장미가 폈다고 앤이 그랬단 말이야.” “제니트…….” 어쩐지 약간 짠내가 나기 시작했다. 저 일곱 살짜리 여자애가 왜 갑자기 이제키엘의 방에 찾아와 저런 말을 하는지 슬슬 이해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 아이는, 무얼 하든 상관없으니 그저 이제키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뿐인 것 같았다. “지금은 아저씨도 없잖아. 그러니까 나랑 같이 장미 보러 가줘. 응?” 이제키엘이 난처해하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흐음. 지난번에 밖에서 흰둥이 아저씨가 한 말을 생각해 봤을 때 아마도 그 아저씨가 있을 때에는 제니트가 필요 이상 이제키엘을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아이는 지금 7살밖에 되지 않은 꼬마고, 친오빠 같은 이제키엘이 집에서 떠나기 전에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한다. ……이 정도로 설명이 되는 건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문을 열었을 때 무심코 커튼 뒤에 숨은 채로 머리만 삐죽 내밀고 있는 나를 보고 그가 한순간 웃음을 참는 얼굴이 되었다. ‘가도 돼.’ 나는 입모양으로 말해주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이미 달성한 참이었으니 이제키엘과 더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제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방에 뭐가 있어?” “아니. 창문이…… 열려 있는지 확인했을 뿐이야.” 그러고 난 뒤에도 그는 몇 초가량 침묵했다. “그래. 온실에 가자.” 그러자 기쁜 듯이 ‘정말?’ 하고 묻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고마워. 나 오빠가 같이 가줄 줄 알았어.”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제니트가 무척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크흡. 여주인공이라 그런지 매우 귀엽네요. 클로드도 나중에 저기에 넘어가는 건가요. 지, 지금 저 위기 의식을 가져야 할 때 맞죠? 문을 닫기 직전 이제키엘이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으응? 뭐라고 하는 거니. ‘금방 다녀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 탁. 그리고 문이 닫혔다. 지금 기다려 달라고 한 거 맞아? 네가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려? 난 그냥 갈래. “쟤 키메라야?” “악!” 그때 갑자기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 귀 따가워.” 깜짝이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까만 또라이, 이 미친놈아! “갑자기 뭐야?” “뭐긴 뭐야. 네가 친구 삼고 싶어 하는 애 구경하러 왔지.” “이 미…….” “뭐?”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욕을 집어삼키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쟤 키메라냐니까?” “느닷없이 와서 뜬금없이 뭔 소리야.” “저 여자애 말이야.” 내가 숨어 있는 커튼 뒤에서 나타난 까만 또라이 때문에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놈이 나를 따라서 커튼 밖으로 머리만 삐죽 내민 채 하는 말에 나는 또 한 번 흠칫하고 말았다. “온실 간댔지? 나도 구경 가야겠다.” “뭘 구경 가? 난 이제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괜찮아. 안 들켜.” 놈은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야이, 그냥 가자니까! 따악. 놈이 손가락을 튕긴 다음 순간, 우리는 온실 밖에 도착해 있었다. 유리온실 안에는 벌써 이제키엘과 제니트가 와 있었다. 까만 또라이가 또 한 번 작게 손가락을 마찰시키자 눈앞에 반투명한 무언가가 한번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지금 뭐 한 거야?” “저쪽에서 우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 거야.” 앗. 신기하다. 그런데 그거 정말 믿을 만한 거 맞아? 하지만 이런 걸 또 물었다가는 저놈이 짜증 내겠지. “저 여자애 뭐야? 너 동생 있었어?” 헉, 맞아. 제니트 보석안! 루카스 얘가 서 있는 곳에서는 제니트 얼굴이 보이나? 나는 까만 또라이를 은근슬쩍 옆으로 밀어내고 온실 안을 기웃거렸다. 오늘 아침 하얀 장미가 피었다는 제니트의 말대로였다. 흰 꽃들 사이로 이제키엘과 제니트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앗! 제니트 얼굴 보인다! 그 순간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우으아아아! 제니트 뭐야! 짱 예뻐! 짱 귀여워! 이런 졸귀! 씹귀! 역시 여주인공이라 이건가요! 예쁜 애는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건가요! 이거 완전 개사기! 저 깜찍이는 대체 뭐죠! 살랑살랑 보드라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보석안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올망졸망 예쁜 얼굴이 이제키엘과 같이 온실에 와서 좋은지 약간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어 더욱 사랑스러웠다. 와, 이래서 ‘사랑스러운 공주님’, ‘사랑스러운 공주님’ 그 타령을 해댔던 거구나. “이상한데.” 그런데 내 옆에서 얼굴을 구긴 채 제니트를 유심히 관찰하던 까만 또라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쟤 마력 파장은 순수 황족의 것이 아닌데. 뭔가가 막 섞여 있어. 좀 가까이에서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에서 보긴 뭘 가까이에서 봐?” 작작해, 이놈아. 우린 지금 무단 침입자라고. 전생 같으면 들키자마자 바로 철컹철컹인데. “너 저 여자애 알고 있었어?” “뭐, 뭐?”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얼굴이길래. 놀라지도 않고.” 나는 당황했다. 으앙, 망할. 여기서 이 까만 또라이가 제니트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하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따악. “정말? 그럼 안 가면 되잖아.” 헉. 제니트 목소리다. 갑자기 온실 안에서의 대화가 바로 옆에서 울리는 것처럼 생생히 들리기 시작했다. 까만 또라이, 이놈 참 신묘하네?!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면 그냥 여기 있으면 되는 거잖아.” “제니트.” “내가 대신 말해줄게. 아저씨도 아주머니도, 내가 말하면 들어주실 거야. 오빠도 사실은 여기에 있고 싶은 거라고, 내가 오빠 대신 말해줄 수 있어. 그럼 되겠지?” 둘이서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지, 제니트가 반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반면 이제키엘은 약간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빈말인 걸 모르다니 애는 애구만.” 옆에서 한가롭게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과연, 그런 건가. 지금 말하는 걸 들어보면 이제키엘이 ‘사실은 나도 너랑 같이 있고 싶다’거나, 아니면 ‘사실은 나도 공부 같은 거보다 네가 더 좋다’거나 하며 말한 것을 제니트가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은데. “네가 그래도 나는 가.” “왜?” 이제키엘의 단호한 말에 제니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줬으면서 왜?” “그래야 하는 일이니까.” 이제키엘은 그렇게 말하며 제니트를 잠시 동안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방금 전보다는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덧붙였다. “아예 떠나는 게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학기 중에도 종종 널 보러 올게.” “…….” “네가 내게 편지를 보내주면 나도 잊지 않고 답장할 거야. 그러니 내가 영영 네 앞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울지 않아도 돼.”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으음. 소설을 봐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 두 사람 진짜 사이가 좋은가 보다. 특히 제니트는 이제키엘을 진짜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그를 아를란타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싶을 만큼. 하지만 책에서도 이제키엘은 결국 다년간 유학생활을 하다가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다시 오벨리아에 정착하게 된다. “울지 마.” 우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니, 이번에도 이제키엘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해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그의 앞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제니트의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쌍의 어린이 천사들처럼 가슴 훈훈하게 예뻤으나……. 내 쪽에서 보이는 이제키엘의 얼굴에 나는 그만 기분이 미묘해지고 말았다. “한 달에 한 번…… 나 보러 와.” “그래.” “매일 편지할 거야. 꼬박꼬박 답장해 줘야 해.” “그래.” ======================================= [41화] “나 말고 친한 친구 만들면 안 돼.” “……그래.” 그래도 마음이 달래지지 않는 듯 제니트는 이제키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속 훌쩍거렸다. “재미있는 것 좀 있나 했더니 쪼그만 것들이 신파 찍고 있네.” 그 모습을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던 까만 또라이가 약간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냥 가자고 했잖아!” 소리 죽인 내 외침에 놈이 쯧 혀를 차더니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곧장 시야가 뒤틀렸다. “으억.” 저놈이 순간 이동 쓰기 전에 눈 감았어야 하는 건데! 어지러워! “뀨웅!” 두다다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혼자 있던 까망이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 여자애 뭐지?” 까만 또라이 놈은 또다시 이상하다는 듯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키메라인 듯 키메라 아닌 키메라 같은 희한한 애네.” 야아, 아무리 그래도 키메라는 너무 심하지 않니? 키메라는 보통 돌연변이 괴물 같은 의미로 많이 쓰이는 말인데. 하지만 사실 까만 또라이가 제니트를 보고 첫눈에 키메라냐고 물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끄응. 왜냐하면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여주인공인 제니트는 클로드의 방에 있던 초상화 속 여인, 즉 제니트의 어머니인 페넬로페 유디트에 의해서 ‘만들어진’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그녀가 클로드의 분노를 사 황궁 밖에서 몰래 제니트를 낳아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 음. 하지만 사실 제니트의 엄마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긴 하다. 그녀는 그냥 그 일에 동조한 것뿐이니까. 게다가 만들어졌다고 해봤자 막 거창한 의미도 아니었다. 어쨌든 제니트가 자기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자라 태어난 것은 맞으니까 말이다. 다만 배 속의 아이가 생기기까지의 과정이 다분히 인위적이었다는 의미였다. 어디 보자. 그게 어떻게 된 일이었더라. 전에 말했듯 페넬로페는 유디트 후작 가문의 둘째 딸로 클로드의 약혼녀였다. 페넬로페는 꽤나 허영심이 많고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도 컸던 여자로, 어릴 적부터 클로드와 결혼을 하기로 내정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페넬로페의 데뷔당트 이후로도 공식화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클로드의 아내로 만족할 만한 여자가 아니어서였다. 그녀는 자신을 아끼는 유디트 후작에게 약혼을 늦추어 달라 부탁했고, 그러는 동안 황태자를 유혹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페넬로페는 클로드 역시 한 손에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클로드는 당시 황제였던 아버지와 황태자인 이복형에 의해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젊을 적부터 광기가 있던 황제가 자신의 둘째 아들인 그에게 ‘절름발이’의 의미를 가진 ‘클로드’라는 이름을 붙여줄 정도였다. 클로드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소설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아 그 이상은 나도 몰랐지만, 어쨌든 그가 꽤나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시녀 출신인 클로드의 어머니 역시 황제가 죽였다고 했으니. 페넬로페는 그런 클로드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유일한 안식처를 어릴 때 잃고 줄곧 외로웠던 클로드의 마음을 손쉽게 뒤흔들었다. 그때는 클로드 역시 아직은 앳되었던 소년이었으니 ‘영원히 곁에 있어주겠다’는 페넬로페의 약속은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으로 느껴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페넬로페는 클로드를 배신했다. 언제나 그에게 달콤한 말만을 속삭이던 페넬로페가 그의 형인 아나스타시우스의 침실에서 발견되었을 때, 클로드는 두 번 다시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시우스가 그 일로 자신을 조롱했을 때, 그동안 자신의 인생을 폐허로 만들어 왔던 이 질긴 피의 족쇄를 완전히 끊어내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황인 아에붐과 황태자 아나스타시우스를 죽이고 핏빛 왕관을 쓰게 된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사실 클로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페넬로페가 그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사랑한다는 것도, 영원히 옆에 있어주겠다는 것도. 하지만 설령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 해도, 그는 페넬로페의 손을 먼저 놓아버릴 수 없었다. 그녀가 아나스타시우스를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았음에도 그것을 모른 척한 것 역시 그래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제 손으로 아버지와 형을 죽인 날, 클로드는 페넬로페 역시 버리기로 결정했다. 사실은 단 순간도 자신의 사람이었던 적이 없는 여자를 비로소 완전히 놓아버리기로. 클로드와 페넬로페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제니트의 탄생 비화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클로드가 황제가 되자 제국민들은 그를 ‘폭정을 휘두르던 선황과 악마의 추종자인 황태자를 처단한 성자’라 추앙했다. 으음. 이건 내 역사서들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바로 황태자 아나스타시우스가 금기된 마법을 사용하는 흑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이 사악한 남자는 자신을 유혹하는 페넬로페를 이용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바로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아이를 만드는 것. 그는 자신의 흑마법으로 어느 정도 강력한 힘을 지닌 아이를 만들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페넬로페 역시 자신을 비로 맞아준다는 아나스타시우스의 꾐에 넘어가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클로드가 선황과 황태자를 죽이면서 그녀의 꿈 역시 박살이 나고 만다. 클로드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그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태어날 아이를 기다렸다. 아이를 앞세워 오벨리아의 모두를 제 발 아래에 두게 될 황홀한 미래를 꿈꾸면서. 그리고 태어난 아이는 아나스타시우스의 마력 덕분에 보석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 아이였다. 게다가 페넬로페는 그 사실을 알기도 전에, 출산 직후 과출혈로 죽어버렸다. 자신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도 모르고 그녀는 그 자리에 있던 자신의 언니에게 ‘앞으로 이 아이가 나를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대로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페넬로페가 아나스타시우스의 흑마법을 이용한 아이를 갖게 된 것을 당사자들 외에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페넬로페의 언니나 후에 제니트를 맡게 된 알피어스 공작가의 사람들은 제니트를 진짜 클로드의 딸이라 믿었다. 왜냐하면 페넬로페는 어릴 적부터 줄곧 클로드의 암묵적인 혼약자였던 데다, 클로드가 돌연 선황을 죽여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사이도 원만했으니까. 다만 그들은 제위 이후 선황과 마찬가지로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한 클로드에게서 제니트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출생 소식을 숨겼다. 그러니 다시 말해, 제니트는 사실 클로드의 친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오. <사랑스러운 공주님> 두 번째 외전에 이 내용이 나왔는데 이거 보고 대박 뒤통수 맞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요즘 막장이 대세라지만 이렇게 쓸데없이 출생의 비밀을 넣어야만 했냐고. 한편 클로드는 페넬로페의 일 이후 일종의 인간 불신과 여성 혐오에 빠져 이전과 전혀 다른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는데, 그러던 중 만난 것이 바로 시오도나의 무희인 다이아나였다. 비록 동갑이기는 하지만 제니트는 일 년 중 가장 첫 달에, 그리고 나는 가장 마지막 달에 태어난 정도의 달 수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생일로 치면 사실은 제니트가 제1 공주여야 했다. 물론 그건 클로드의 친딸일 때 얘기지만. 이게 얼마나 뚜껑 열리는 얘기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한마디로 클로드의 친딸은 아타나시아뿐이었는데, 친딸도 아닌 제니트 때문에 죽어야 했다는 거잖아? 이런 썩을. 심지어 클로드는 제니트가 자기 딸이 아닌 걸 알고 있지 않았던가. 세월이 흘러 과거의 분노도 애증도 모두 잊은 인형 같은 사람이 된 그는 당시의 쳇바퀴 같은 일상에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쯤에는 아마 사람을 죽이는 것도 슬슬 질리지 않았을까…… 쿨럭.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튼 그러던 중 그의 딸이라며 알피어스 공작이 데려온 여자아이는 클로드에게 꽤나 신선한 자극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완전 개막장! 당연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작가가 그렇게 쓰겠다는데. 나에게 이 책을 처음 소개했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중학생 아이는 제니트가 클로드의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여 나를 짜증 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을 읽고 클로드가 제니트의 엄마인 페넬로페를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사이도 좋지 않았던 제 이복형의 자식인 제니트를 그렇게까지 아끼려면. 그 여자의 초상화까지 아직 가지고 있지를 않나. 비록 먼지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클로드와 다이아나의 인연은 분명 하룻밤뿐으로, 그 후 그녀는 그에게 잊힌 채로 루비궁에서 아타나시아를 낳았다고 원작에서 그랬는데.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히 클로드의 유일한 사랑은 제니트의 엄마였을 텐데, 왜 꿈속에서의 그는 아타나시아의 엄마를 사랑한 것처럼 나왔지? 그가 내게 보여주었던 꿈을 생각했을 때 애초에 다이아나를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고, 특히 지난번 꾸었던 꿈에서는……. 분명 그거 같지? 다이아나가 아타나시아를 가져서 생명이 위험해지니까 아이를 죽이라고 한 거야. 크윽. 클로드 그놈은 진짜 아타나시아랑 전생에 무슨 악연이어서 태어나기도 전부터 자기 딸을 죽이려고 그랬대? 어쨌든 난 그냥 다이아나가 아타나시아를 낳다가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 전부터 아이 때문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걸 알고 있었다니 조금 놀라웠다. 그리고 기분이 약간 이상해졌다. 내가 진짜 아타나시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켰다는 점에. 클로드 같은 아빠에 다이아나 같은 엄마라니! 이거 밸런스 붕괴 아닙니까! 너무 극과 극이잖아. 으아앙. 역시 내 최애캐인 다이아나가 살아 있었어야 했어. 그랬으면 아마 아타나시아의 삶은 엄청나게 많이 달라졌을 텐데. 지금까지 내가 개고생할 이유도 없었을 테고! “으앙!” 갑자기 너무 억울해져서 나는 까망이를 쓰다듬다 말고 바닥에 엎어져 몸부림쳤다. “왜 갑자기 지랄 발광이야?” 그러자 언제나처럼 카펫에 배를 깔고 엎드려 얼굴을 구긴 채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까만 또라이가 그런 나를 힐난했다. 그나저나 이 자식, 딱 한 번 보고 제니트가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애란 걸 알다니! 물론 자세한 것까지는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키메라니 뭐니 한 걸 보니 확실히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애한테 지랄 발광이 뭐야? 나 같은 어린애한테는 고운 말을 써야 하는 거 몰라?” ======================================= [42화] 전부터 느낀 건데 애 교육에 안 좋게 너무 말을 막 하고 있어! 내가 보통 어린애였으면 엄청난 악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그런데 심드렁하게 이어진 녀석의 말에 나는 그만 경기하듯 몸을 떨고 말았다. “너 애 아니잖아.” 이,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당연히 별 의미 없이 내뱉은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방금 전 이놈이 제니트의 정체를 알아맞힌 것을 떠올리자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애, 애가 아니라니. 내가 왜 애가 아니야. 나 7살이야. 그것도 몰라?” 그러자 까만 또라이가 카펫 위에 옆으로 누워 팔에 얼굴을 괴고 있던 자세 그대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붉은 눈동자가 내 눈을 그대로 직시했다. 곧 그가 여우처럼 얄쌍하게 웃었다. “아하. 7살.” “그으래!” “너 7살이야? 정말?” 나는 눈동자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갖은 용을 다 썼다. 이, 이 자식 설마 뭘 아는 건가? “그럼 내가 7살이 아니면 뭔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는 괜히 찔려서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자 루카스가 여전히 눈동자를 갸름하게 접어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누가 뭐래? 그래, 너 7살이야. 속은 좀 늙었지만.” “헉. 그게 무슨 뜻이야?” “아무 뜻도 아닌데. 아까 봤던 흰둥이네 아들처럼 그냥 너 애늙은이라고.” 아직도 내 눈은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 진짜인가? 그냥 나 놀리려고 한 말인가? 하긴, 그렇겠지?! 똑똑. “공주님, 간식 드세요.” 바로 그때 릴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그만 까만 또라이와 더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아빠아!” “정신 사납게 뛰지 마라.” 자신을 향해 달려가는 나를 향해 클로드가 냉정하게 말했다. “넘어진다.” 크으. 들었어? 지금 들었어? 넘어지니까 뛰지 말란다. 2년간 이놈 옆에 찰싹 붙어 있던 보람이 있구나. “에헤헤.” 나는 클로드를 보며 최대한 귀엽게 웃어 보였다. “아빠아, 보고 싶었어요오.”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가서 손을 잡아당기자 클로드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니지!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클로드의 손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부비부비하기까지 했다. 크흑. 이러니까 진짜 똥강아지 같당. 그러자 클로드가 내게 닿은 손을 한순간 움찔거렸다. “간지럽다. 그만 놔라.” 그래? 그럼 네가 뿌리치면 되지 왜 가만히 있으실까? 이상하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감이 왔다. 너 지금 나한테 흔들리는 거지? 내 필사적인 노력이 깃든 애교에 너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거지! 플랜 C 성공적? ‘열심히 아양을 떨어 클로드의 하트를 픽업♡한다’는 내 세 번째 계획은 이제 반쯤 성공인 건가? 워호! 이런 경사가! “아빠, 아빠.” 크헤헤. 그래, 그래. 앞으로 내 매력에 더더더 빠져들어라. 나는 해맑게 웃는 낯으로 클로드를 올려다보며 위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클로드가 비스듬히 눈썹을 올린 채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곧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즘 잘 먹고 있나 보군.” 으씨, 무겁다는 소리는 좀 그만해라. 크윽, 그래도 내가 안아달라고 손 내민 줄 찰떡같이 알아차린데다가 또 이렇게까지 선뜻 날 안아 들다니! 여러분, 우리 클로드가 달라졌어요! “헤헤. 아티는 뭐든 아빠랑 같이 먹는 게 제일 맛있어! 아빠가 요즘 아티 많이 많이 보러 와줘서 좋아요!” 그럼 이제 굳히기를 들어가야죠! 으흑, 사실은 얼마 전에 제니트를 보고 왔더니 나도 모르게 위기의식이 들어서 다른 때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애교를 부리게 되었다. 내가 방긋대며 말하자 가까이에 있는 클로드의 표정이 한순간 또 미묘해졌다. 그런데 옆에서 그런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던 필릭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공주님께서 유독 행동하시는 것이…….” 내 행동이 뭐, 뭐, 왜. 물론 내가 오늘따라 클로드한테 적극적으로 귀여운 척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욕할 거면 그만둬, 그만둬. 이 나이 먹고 귀여운 척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구. 진짜 얼굴에 철판 깔고 해야 하는 짓이라 부정적인 소리를 들으면 용기와 자신감이 회복 불가능할 만큼 팍팍 깎인단 말이야. 크흑. “그러니까 꼭…….” 그리고 필릭스는 정확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잠시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이윽고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아! 까망이 같으시네요.” 뭐! 이 사람이! “그렇군.” 그 말을 듣고 클로드가 기다렸다는 듯 대번에 긍정했다. 야이, 이 사람들아! 말이면 다인 줄 아냐! 물론 우리 까망이는 엄청나게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렇다고 내가 까망이를 닮았다니. 크흑. 지금 또 나보고 개 같다고 한 거지. 그런 거지? “헤헤. 아티가 그렇게 귀여워?” 나는 표정이 썩어들어 가는 걸 참고 얼굴에 더 두꺼운 철판을 깔았다. 그래, 어차피 한 번 살다 가는 인생……. 이제는 쪽팔릴 것도 없는 거야. 으흑. “아마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귀여우실 겁니다.” 쿨럭. 고, 고맙긴 한데 스케일이 좀 크구나. 난 그냥 지금은 일단 클로드 눈에만 귀여워 보이면 되는데. 저렇게 말하는 필릭스의 얼굴이 이만저만 진지한 게 아니라서 괜히 내가 더 부끄러워졌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죠. 내 아빠는 클로드인데 왜 당신이 더 팔불출인 거야? 응? 우리 필릭스 장가가고 싶니? 나 같은 예쁜 딸 낳고 싶어?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폐하?” “실없는 소리.” 클로드는 필릭스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린 뒤 나를 안고 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또 한 번 클로드에게 말했다. “이렇게 귀엽고 어여쁘신데요. 세상 그 어떤 아이도 아타나시아 공주님처럼 사랑스럽진 않으실 겁니다.” “하나마나한 소리 말고 열 걸음 떨어져라.” 끄잉. 필릭스는 또다시 클로드에게 ‘뒤로 물러나’ 벌칙을 받았다. 그런데 클로드가 한 말은 듣기에 따라 그 의미가 상당히 애매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도대체 저게 긍정이야 부정이야? “그 마법사는 어떻지?” 잉. 마법사요? “말동무로 쓸 만한가.” 루카스, 그 까만 또라이 말하는 건가? “만약 마음에 안 든다면.” 내가 잠시 놈을 생각하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클로드가 미간을 좁힌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아이를 구해 주겠다.” 네? 다른 아이요? 설마 제 말동무로 삼을 다른 아이요? 이게 갑자기 뭔 소리래. 나는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헷갈려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귀찮고 번거롭고 쓸모없기 짝이 없는 친구라는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하다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필릭스가 계속 우기더군.” 나는 계속 내 귀를 의심하며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원한다면.” 그리고 마침내 바보같이 입을 헤에 벌리고 말았다. “말동무로 삼을 만한 다른 적합한 아이를 더 찾아주겠다.” 그렇게 말하는 클로드는 기분이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부터 알피어스 공작의 공세를 수없이 무시하고 필릭스의 말조차 못 들은 척해 왔던 사람이 지금 내게 친구를 구해 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아직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분명하면서도, 그래도 다른 아이를 이 궁에 들여도 좋다고. 그러니까…… 내가 원한다면. 나는 경악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지금 날 위해서 내 친구를 구해 주겠다고 말한 거 맞아? 클로드는 어린애 싫어하잖아! 지난번에도 어린애는 시끄럽다느니, 귀찮다느니 하면서 애가 둘씩이나 궁에 있는 건 생각만 해도 신물이 난다고 했잖아! 헉.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이 어린애로 둔갑한 루카스를 이 성에 아직까지 놔두고 있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게다가 필릭스의 추천을 수용해서 까만 또라이를 내 말동무로 보내기까지 했었지! 설마 그것도 날 위해서였다는 거야? 필릭스가 하도 귀찮게 구니까 그냥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런 게 아니라? 너 클로드 아니지! “머리카락은 먹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으허헉. 나도 모르게 이놈 가죽을 벗기려는 듯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안에 클로드의 껍데기를 쓴 다른 사람이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잉. 그런데 안 벗겨지네. 너 클로드 맞는 거네? “놔라.” 넵. 나는 언제 클로드의 머리채를 붙잡았냐는 양 후딱 손을 놓았다. 으아아앙! 진짜 감동의 눈물을 멈출 수가 없구나. 우리 클로드가 이렇게까지 달라지다니! 그래도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확실한 태도 변화를 보인 건 내가 쓰러진 이후부터인 것 같은데. 하긴 이런 거대 이벤트가 있어줘야 거기에 따라오는 보상도 크고 그런 거겠지? 이런 걸 보면 죽을 위기도 한두 번쯤은 겪어볼 만한 것 같고!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 당시의 끔찍한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으, 으음. 아니야. 이건 아니야. 지금 마지막 말은 취소다. 내가 실언을 했어! 요단강을 건널 뻔한 정도의 위험한 이벤트는 인생에서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지, 진심이에요. “으으응, 아티는 필릭스랑 마법사 오빠가 좋아요.” 사실 처음에는 루카스가 못마땅했었지만 한동안 같이 지내보니 나름 이 생활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미묘하게 말이 잘 통하는 것도 있고. 또 내 말동무로 처음 올 때 그랬던 것 이외에는 까망이 데리고 다시 협박하는 일도 없고. 게다가 요즘은 이상하게도 깐죽거리는 일이 급격히 줄었단 말이야? 크흑. 하지만 무엇보다도 까만 또라이 앞에서는 내가 의식해서 내숭을 안 부려도 돼서 편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아빠가 보내준 친구들이라 더 좋아!” 일단 점수 좀 따고 들어가겠습니다. 실없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클로드가 잠시 동안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마음에 든다면 되었다.” 클로드는 그 이상 무언가를 더 말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에게 안긴 채로 계속해서 헤헤거렸다. 얼마 후 나는 이제키엘이 아를란타로 떠났다는 소식을 필릭스로부터 전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이제키엘이 내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그냥 와버려서 좀 찜찜하긴 했지만 나는 그 일을 금방 털어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또 먼저 이제키엘을 만나러 가는 것도 이상하잖아? 물론 마지막에 온실에서 보았던 그의 지친 표정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제키엘에 대한 그 어떤 종류의 관심도 그에 대한 내 학구적 흥미를 이기지는 못 했다. 큭, 사실 흥미라기보다는 수치심이다. 이게 말이 돼? 열 살짜리 남자애한테 내가 지식으로 밀리다니! 난 전생의 기억까지 있다지만 이제키엘은 진짜로 그냥 어린애인데 말이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같이 책상에 코를 박고 열심히 공부를 해댔다. 까만 또라이는 그런 나를 보며 질린 얼굴을 했지만 세상에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는 사이 몇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 [43화] 제14장 그래도 또라이는 또라이였는데 ‘짐의 딸이라.’ 모두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 초유의 사태에 소리 높여 웅성거렸다. 슬쩍 눈길을 돌리자 그녀와 마찬가지로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알피어스 공작과 이제키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두 사람을 눈에 담고 나니 불안하던 마음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들을 앞에 둔 채로 황제 클로드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제니트는 그동안 배운 대로 우아하게 인사하던 자세에서 살짝 고개를 들었다. 허락 없이 움직이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피고 싶은 마음이 이긴 탓이었다. 샹들리에 아래에서 다채롭게 빛나는 아름다운 두 쌍의 보석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다행스럽게도 클로드는 그런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당돌함에 퍽 흥미를 느낀 듯했다. 아, 이분이 내 아버지구나.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가슴속에 짙은 감동이 빠르게 들어찼다. 바로 그때, 황제의 시선이 한순간 그녀의 뒤로 향했다. 제니트는 무심코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가 곧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장에라도 기절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창백한 얼굴을 한 소녀가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대한 홀 한가운데에 홀로 덩그러니 선 소녀는 가여울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아름다운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어쩐지 생기 없이 시들어가는 흰 안개꽃을 생각나게 하는 인상이었다. 제니트는 곧 그 소녀가 자신의 이복 자매인 아타나시아 공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미있군.’ 황제의 목소리가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알현실에서 듣도록 하지. 그만 일어나겠다.’ 데뷔당트 내내 따분한 듯 앉아 홀 안의 귀족들을 싸늘히 지켜보고 있었던 클로드가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얕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사람은 없었으므로 모두가 공손히 읍한 채 그의 퇴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황제가 완전히 자리를 떠나자마자 주위는 경악 어린 소음으로 시끄러워졌다. ‘허리를 좀 더 꼿꼿이 펴십시오.’ 제니트는 안도와 긴장감이 섞인 숨을 내뱉다가 옆에서 들리는 알피어스 공작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누가 뭐라 해도 오늘의 주인공은 제니트 공주님, 당신이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요. 어릴 때부터 그녀를 친딸처럼 길러주었던 알피어스 공작은 이제 그녀에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불편했지만 그만큼 지금 그녀가 처해 있는 현실의 무게가 더욱 뼈저리게 와 닿는 것도 사실이었다. ‘손을.’ 옆에 있던 이제키엘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니트는 깊은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알피어스 공작과 그 후계자인 이제키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홀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을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제니트는 군중 속에 존재감 없이 파묻힌 아타나시아 공주를 발견했다. 보석 같은 눈동자가 푸른빛을 머금은 채 여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홀 안에 들어서기 전에 제니트는 오늘 데뷔당트에서 아버지 클로드가 아타나시아 공주를 에스코트하지도, 첫 춤을 함께 춰주지도 않았다며 다른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릴 적부터 동정심 많게 자란 소녀인 제니트는 그 누구보다 찬연하게 빛나야 마땅한 날, 그 누구보다 초라한 모습으로 덩그러니 남게 된 자신의 이복자매가 신경 쓰였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그런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니트는 붉은 융단을 밟고 그녀가 원래부터 서 있었어야 할 자리로 한 발짝 나아갔다. -『사랑스러운 공주님』 제2장 최고의 데뷔당트 中- *** “오른쪽으로 반걸음.” 맑고 화창한 13살의 어느 날. 나는 무반주로 댄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곧바로 두 바퀴 도시고. 아주 좋아요!” 손뼉 치는 소리만으로 박자를 맞추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이 짓도 몇백, 몇천 번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다. 음하하. 이것이 바로 인간 승리지! “한 발짝 뒤로 물러나셨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이제 거의 막바지였다. 나는 가볍게 회전한 뒤 다시 제자리에 균형을 잡고 섰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 뿅!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한 마리의 나비 같으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역시나 내 춤 선생인 퐁파듀 부인이 잔뜩 흥분한 채 꿈꾸는 듯한 어조로 정신없이 말했다. “정말이지,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춤 실력은 나무랄 데가 없군요. 제가 가르치는 영애들에게 교본으로 선보이고 싶을 정도예요. 어쩜 이렇게 요정처럼 날 듯이 가볍고, 또 우아하고 아름답게 움직일 수 있는지!” 훗. 내가 춤에 강한 이유를 알고 싶나? 그건 바로 내가 탈주 닌자이기 때문이다! 음하하핫! ……흠, 커흠. 드립 죄송. 그게 아니라 난 요정 언니의 딸이기 때문이지. 유전자의 신비라고 아시나? 퐁파듀 부인도 같은 것을 생각한 듯했다. “공주님의 어머니가 무희였던 것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요.” 아이, 저 아줌마 또 저러네. 퐁파듀 부인의 말에 악의는 없었지만 듣기에 따라 상당히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늘 그렇듯 그녀를 향해 해맑게 방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과찬이세요.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열심히 배운 것뿐인 걸요.” 내 겸손한 말에 퐁파듀 부인이 감격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처럼 예쁘고 뭐든 잘하는 애는 물론 좀 오만하게 굴어도 괜찮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퐁파듀 부인은 기분 좋은 얼굴로 에메랄드궁을 떠났다. 나는 그때에서야 방긋거리고 있던 표정을 썩혔다. 으웩. 퉤퉤. 악의가 없는 건 알지만 매번 엄마 얘기를 걸고 넘어가야겠니? 나이가 들면서부터 부쩍 옥의 티인 내 출생(다른 사람들의 말로는)을 아쉬워하는 선생님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나는 저 소리가 꽤나 듣기 싫었다. 게다가 전생까지의 기억을 합쳐 보았을 때, 지금의 퐁파듀 부인 같은 스타일은 대개 저런 말에 기분 나빠하며 열 내는 사람을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그들이 저런 말을 할 때마다 차라리 상대하지 않았다. 음. 하지만 사실 저 사람들이 내게 나쁜 마음으로 말하는 게 아니란 걸 아니까 그럭저럭 참고 넘어갈 수 있는 거지, 나중에 내 앞에서 이 문제로 악의적으로 걸고넘어지는 인간들이 나오면 또 모르겠네. “마귀할멈 오래도 있다가 가네.” 문득 뒤에서 미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꽤나 갑작스러운 등장이었지만 이제는 이놈이 예고 없이 뿅뿅 나타나는 게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 체통 없이 주저앉아 구두끈을 푸르기 시작했다. 으억, 오늘도 열일했더니 발 아프다. “어차피 할 일 없이 빈둥거릴 거면 내 춤 상대나 해주면 좋잖아.” “차라리 마력 없이 던전을 들어가라고 해.” 루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놈이 사교댄스에 얼마나 학을 떼는지 알고 있는 나는 그 말이 좀 웃겼다. 얘는 춤을 못 추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다니까. “종이 인형처럼 혼자 팔랑팔랑 움직여야 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꽤나 즐기면서 하던데 뭘 이제 와서 아닌 척은.” 이 까만 또라이가? 코웃음 치는 거 왜 이렇게 얄밉죠? 물론 내가 사교댄스 시간을 꽤나 즐거워하는 건 맞지만! 원맨쇼도 쪽팔림 없이 나름대로 재미있게 하고 있는 것도 맞지만! 그래도 내가! 너한테 지금처럼 비웃음 살 이유는 없는 거거든! 내가 끈 푸는 걸 멈추고 째려보자 놈이 ‘그래 봤자 네가 어쩔 거냐’는 듯이 쳐다봐서 더욱 성질이 났다. “답답하게 굼뜨기는. 이리 내놔 봐.” 그러던 어느 순간 까만 또라이 루카스가 내 앞에 털썩 앉더니 지금까지 내가 잡고 있던 구두끈을 빼앗아갔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이제는 나도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오십 보 백 보구만 이런 높은 신발은 매번 왜 신는 거야? 이런 거에 올라타서 네 키가 변하면 얼마나 변한다고.” “적어도 오빠보단 커질걸?” 지난 6년 동안 꽤나 많은 것이 변했는데 그중 하나가 까만 또라이와 나의 키 차이였고, 또 다른 하나는 놀랍게도 내가 까만 또라이와 생각보다 많이 친해졌다는 것이다. 까만 또라이는 중간중간 내 성장 속도에 맞춰서 자기 신체도 리모델링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13살인 나와 비슷한 체구와 키를 가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음. 물론 나는 생일을 몇 달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곧 14살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나저나 고놈 참 손길이 야무지기도 하지. 구두끈 푸는 장인이 있다면 아마 이 녀석일 거야. 음. “이딴 걸로 네가 나보다 커진다고? 웃기고 있네. 반 토막만 한 게.” 루카스가 또 내 말을 비웃는 동안 나는 댄스 시간 내내 하나로 올려 묶고 있던 머리카락을 풀었다. 그러자 풍성한 백금발이 어깨 위로 물결치며 떨어졌다. 으헤헤. 내 머리 짱 예쁘다. 전생의 머리는 귀찮아서 짧게 자른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였는데, 이번 생에서는 어릴 때부터 관리를 잘 받아서 그런지 만지면 그렇게 보들보들하고 폭신폭신할 수가 없었다. 그냥 척 보면 완전히 공주 머리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내 머리 짱 예쁘다는. 역시 유전자의 신비! 감사합니다, 다이아나 요정 언니! “왜 이렇게 느려. 빨리빨리 좀 해.” 나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한껏 행복해하다가 내 구두끈의 마지막 매듭을 풀고 있는 루카스를 괜히 구박했다. 댄스 연습용 구두는 춤추다가 벗겨지지 않게 특히 매듭을 단단히 져 묶기 일쑤였는데, 그래서인지 연습 전후로 구두를 신고 벗는 데만 시간을 꽤나 할애해야 했다. “난 이 뒤로도 할 일이 산더미 같단 말이야. 그냥 마법 써서 벗겨주면 빠르잖아.” “너 얼마 전부터 내 마법을 너무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 이 망할 신발을 아예 소멸시키는 수가 있…….” 내 말에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들던 까만 또라이가 웬일로 갑자기 멈칫했다. 그 직후 가늘게 떠져 있던 눈동자가 아주 약간 그 모양을 달리하는가 싶었다. 엥. 하던 말 안 하고 또 왜 이런대.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이런단 말이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루카스가 손에 쥐고 있던 구두끈을 갑작스레 바닥에 집어 던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네가 해.” 아잇, 얘가 또 왜 짜증이래? 내가 이런 사소한 일에 마법 써달라고 해서 화났나? 그런 거야? “나, 나 그냥 농담한 건데. 당연히 미소년! 천재! 마법사! 루카스 님의 마법은 우주 제일 존엄…….” 따악! 하지만 까만 또라이는 쌀쌀맞게도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뿅 하고 사라져 버렸다. 저, 저 변덕스러운 놈! 거참 기분 맞춰주기도 힘드네! 으앙. 이제 매듭 하나 남았는데 마저 해주고 가지! 혼자 남은 나는 끈을 풀기 위해 끙끙거리며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루카스를 향해 혼자서 투덜거렸다. ======================================= [44화] 오늘 저녁은 클로드와의 만찬이 약속되어 있었다. “아빠!” 사실은 오늘뿐 아니라 어제도 그렇고 그제도 그렇고, 내일도 모레도 저녁은 클로드와 함께 먹기로 쭈욱 약속되어 있었다. 4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매일 클로드와 함께 다과 시간과 저녁 식사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오늘은 내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기 때문에 자리에 앉기 전에 클로드를 만났다. 당연하게도 나는 자동적으로 그를 향해 생글거리며 달려갔다. 그리고 나를 발견한 직후 자리에 멈추어 서서 기다려 주고 있던 클로드를 포옥 끌어안았다. “뛰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래도 내가 본인을 볼 때마다 반갑게 뛰어가는 걸 싫어하지 않는 거 다 안다. 몸집의 차이 때문에 안는다기보다는 안긴 모양새가 된 내 어깨 위로 클로드의 손이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나는 헤헤 웃었다. “오늘도 보고 싶었어요, 아빠!” 오전에 클로드가 보낸 궁인이 와서 오늘은 다른 볼일 때문에 나와 다과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기 때문에,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딱 하루 만이었다. 며칠 만에 본 것도 아니고 바로 어제도 같이 저녁을 먹었으면서 그런 말을 하자 클로드가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들썩였다. “매일 보는 얼굴에 무슨 특별한 게 있다고.” “에헷. 그래도 좋은걸요.” 하지만 당신도 내 얼굴 보는 게 지겨웠으면 애초에 다과 시간이랑 저녁 시간마다 나를 뻔질나게 불러대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흐헤. 다 아는데 아닌 척은. 나는 활짝 웃으며 발뒤꿈치를 들어 클로드의 뺨에 인사의 의미로 쪽 뽀뽀를 했다. 내 애정 공세에 익숙해진 클로드도 내가 그럴 때마다 이제는 슬쩍 고개를 낮춰주는 걸 나는 알았다. “들어가지.” 내가 클로드와 있을 때 하는 얘기란 주로 그날의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늘어놓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높은 비중으로 공부 얘기가 많았다. 크흡. 어, 어쩔 수 없잖아. 난 대부분의 시간을 에메랄드궁에서만 보내는걸! “그래서 요즘은 윤리학 시간이 제일 재미있어요. 열흘 만에 책 한 권을 떼서 이제 새로운 개론서를 공부할 건데 정말 기대돼요.” 그리고 그 공부 얘기라 하면 또 대부분이 내 자랑이었다. 클로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말 내가 늘 가정교사들에게 칭찬만 들어서 그런 것도 있었고, 또 내가 이렇게 뭐든 시키면 잘하니 날 좀 예쁘게 봐달라! 는 어필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댄스 수업 선생님은요, 제가 춤을 출 때마다 꼭…….” 평소처럼 주저리주저리 혼자서 떠들다 말고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억. 나도 모르게 ‘댄스 수업 선생님은 제가 춤을 출 때마다 꼭 엄마 얘기를 해요!’라고 고자질할 뻔했다! 으악, 지뢰를 밟을 뻔했습니다! 저녁 시간 내내 혼자서 떠드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무심코 그만! 번뜩이는 직감에 입을 다물지 않았으면 살벌한 저녁 시간이 될 뻔했네. 내 생존 본능아, 오늘도 고생하고 있구나. 으아앙. “꼭 요정을 보는 것 같대요! 헤헤.”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고, 그 사이의 부자연스러운 공백을 해맑은 웃음으로 때워 버렸다. 그러자 클로드가 잠시 동안 기민한 눈으로 나를 살피더니 곧 무심한 어조로 흘리듯 말했다. “퐁파듀 부인은 평소에도 헛소리를 자주 하는 편이니 뭐든 적당히 흘려들어라.” 뭣, 내가 요정 같다는 게 그렇게 헛소리 같단 말입니까? 크윽, 내 마음에 스크래치. 이 가차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그러고 보니 곧 생일이군.”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뱉은 클로드의 말에 나는 접시 위로 움직이던 식기를 잠시 멈추고 말았다. 사실 공주의 생일치고 내 생일은 언제나 존재감 없이 지나가기 일쑤였다. 내 일에 언제나 열혈인 릴리와 필릭스도 내 생일날만큼은 성대한 파티를 주장하지 못했다. 물론 나도 그들에게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바란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나만을 위한’ 생일 파티가 왜인지 민망했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도 고아원에서 매달 생일인 아이들을 모아 케이크를 하나 나눠먹는 게 파티의 전부였던데다, 그 생일이란 것도 고아원에 버려진 날짜였으니 애당초 그날이 행복한 날이 되기는 무리였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먹고살기 바빠 따로 생일을 챙길 새가 없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내 생일 파티를 해준다고 해봤자 그 낯선 상황이 적응되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하지만 만약 이유가 그것뿐이었다면 아마도 릴리나 필릭스는 내 생일 파티에 대해 좀 더 강경히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지 못한 건 내가 가진 이유보다도 확연히 큰 무게를 가지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내 생일은 바로 어머니인 다이아나가 죽은 날이었으니까. 이건 내가 몇 년 전에 알게 된 건데, 과거에 클로드가 루비궁에서 살벌한 학살을 벌인 것도 바로 그즈음이라고 한다. 그때에서야 나는 아마도 그 일이 다이아나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래서’라고 해야 할지, 클로드는 나와 만난 5살 때부터 내 생일 때만 되면 며칠간 나를 부르지도 보러 오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동안 생일 파티는 항상 릴리와 필릭스와 함께 조촐하게 보내곤 했다. 그들은 그것이 퍽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셋이서 함께하는 생일 파티도 그냥 없앴으면 싶었는데, 크흑. 선물 타임 때마다 리액션하기도 힘들단 말이야. 아니, 물론 선물은 좋지만! 날 정말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기쁘지만! 그래도 영 적응이 되지 않아 민망한 건 민망한 거였다. 하지만 한번 그 말을 꺼냈다가 릴리와 필릭스가 ‘공주님은 사랑받아야 마땅한 아이이고, 또 오늘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공주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기쁘고 감사한 날이므로 반드시 축하해야 한다’고 열과 성을 다해 설득해서 나는 금세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엄마의 죽음 때문에 생일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불쌍한 공주님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으앙. 그거 아니라고! ‘갖고 싶은 게 있나?’ 그러던 중, 7살 생일 때 클로드가 처음으로 내게 그런 것을 물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로드는 진심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무렵, 내가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 돌아온 뒤부터 나를 향한 그의 태도는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클로드가 처음으로 내게 생일 선물에 대해 언질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환희의 종이 요란하게 울리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 내 팔자 펴는 소리! 꺄오! 하지만 막상 뭘 달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중을 위한 자금으로 금 같은 거나 한 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내 상상력의 한계였다. 흑.) 그렇게 말하면 너무 속이 보일 것 같았다. 크흡. 나는 대신 루비궁에 있던 한나와 세스를 내 시녀로 다시 달라고 했다. 그들은 내가 예쁜 보석이나 옷, 구두 또는 인형 같은, 어린애들이 좋아할 법한 약간은 사치스럽지만 귀여운 그런 선물을 달라고 할 줄 알았다가 놀란 눈치였다. 특히 릴리는 내가 아직까지도 한나와 세스를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에 나는 ‘루비궁에 있을 때 아티한테 초코도 주고 같이 꽃 화관도 만들었던 시녀 언니들인데 어떻게 까먹어!’라고 말했다. 고작 2년 지난 걸로 내가 잊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백 밤만 자면 한나와 세스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릴리가 나한테 거짓말한 것도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말하자 릴리는 또 울려고 했다. 아니, 도대체 왜?! 그 표정이 마치 내가 엄마를 보고 싶어 한다고 오해했던 그때의 표정을 닮아 있었다. 가만히 보니 필릭스도 마찬가지였다. 그 눈빛이 마치 정에 굶주렸던 외로운 아이를 보는 것 같아 나는 또 약간 식은땀이 났다. 단지 클로드만이 ‘초콜릿 같은 걸 많이 먹으니 그렇게 살이 쪄서 무거웠던 모양’이라고 냉소적으로 읊조렸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날 클로드는 내게 한나와 세스를 보내주었다. 그녀들은 설마 내가 다시 자신을 불러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나를 보고 울먹울먹했다. 그런데 에메랄드궁에 온 것은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녀들의 뒤로 웬 시녀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온다 싶더니 잠시 후 세계 각지의 다양한 초콜릿이 내 앞에 진상되었다. 그것을 클로드가 보냈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짓고 말았다. 진짜, 이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 같으니라고. 내친김에 더 말하자면 내가 클로드와 처음으로 뽀뽀를 트게 된 건(?) 내 9살 생일 때였다. 온갖 요망한 짓은 다 하면서도 그동안 민망함 때문에 뽀뽀만큼은 차마 할 수가 없었는데, 그날만큼은 진심으로 그럴 마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로드가! 클로드가! 오벨리아에 왔던 사신들이 공물을 주고 갔다며 내게 보물 창고 열쇠를 통째로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클로드가 ‘오는 길에 주웠으니 너나 가져라’ 하는 식으로 귀찮다는 듯 내게 그 열쇠를 주었을 때, 나는 진정한 후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때 클로드의 뒤에서 어찌나 휘황찬란한 빛이 번쩍번쩍하던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격한 감동을 받고 클로드에게 냅다 달려가 안기며 그의 뺨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그때 클로드가 지어 보였던 표정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크크크. 어쨌든 내 9살 생일날은 소설 속에서 아타나시아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날이었기 때문에 클로드의 행동은 더욱 의미 깊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날이 어떤 날이던가. 아타나시아가 몰래 루비궁을 빠져나와 아버지인 클로드를 만났던 날이 아니던가. 그날 아타나시아는 클로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품게 되지만 클로드는 그런 아타나시아를 못 본 체하며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다름 아닌 보물 창고 열쇠를 받은 것이다. 만세! “이번에도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보려무나.” 하지만 클로드의 기행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못 해주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꼭 생일 때만이 아니더라도 종종 내게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작년에는 이유 없이 황성 안에 내 전용 도서관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혹은 따로 바라는 것이나 해줬으면 하는 일 같은.” 흐흑. 지금 이날을 위해 그동안 제가 그렇게 피똥 싸게 고생했나 봐요. 그럼 여기서 필요한 거 뭐다? “아빠가 주시는 선물이면 다 좋아요!” 나는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빛내며 클로드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이제는 내가 따로 뭘 요구하지 않아도 내게 척척 선물을 떠안겨주는 클로드였으니, 이 얼마나 갸륵한가. 흑흑. 감동의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구나. ======================================= [45화] 물론 클로드는 좀 겉과 속이 다른 면이 있어서 마치 김첨지가 부인에게 설렁탕 주듯, 또 점순이가 소작인 아들에게 감자 주듯 ‘쯧. 너한텐 이런 거 없지? 이거 오다 주웠는데 난 많으니까 너나 갖든가’ 식으로 선물을 휙휙 던져 주곤 했지만 그래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따로 원하는 게 없다?” 잉? 그런데 이 이상한 반응은 또 뭐랍니까? 내 말에 클로드가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이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인데. 서, 설마 몇 년 만에 벌써 선물 고르기가 귀찮아졌다거나……. 그래서 내가 꼭 짚어서 말해주기를 바란다거나……. “사실은 그냥 아빠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에헷.” 혹시 선물 얘기를 그냥 빈말로 꺼낸 거였나? 그래서 나는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돌려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클로드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쿨럭. 이게 아닌가 보당. “……마저 먹어라.” 클로드는 여전히 언짢은 표정으로 다시 식사하라는 소리를 할 뿐이었다. 으앙. 뭐지, 뭐지? 왜 저러는 거지? 난 그냥 이번에는 내 데뷔당트도 겹치겠다, 신경 쓸 게 많으면 귀찮을 것 같아서 편하게 해주려고 그런 건데! 나는 클로드의 기분이 갑자기 나빠진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식사 시간 내내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그를 훔쳐보았다. *** “폐하께서 생일 선물에 대해 묻지 않으시던가요?” 에메랄드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필릭스가 내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내 호위 기사 자리에 머물고 있었는데, 단지 이제는 나도 나이가 있다 보니 필릭스에게 안겨서 이동하는 것을 진작 졸업한 뒤였다. 나는 필릭스와 나란히 걷다 말고 눈을 번뜩였다. 오호라. 이 오빠는 클로드가 왜 저러는지 알겠구나! “원하시는 선물을 말씀드렸는지요?” “으응. 그냥 아빠가 주시는 선물이면 다 좋다고 했는데.” “그래도, 따로 바라시는 것은 없으신가요?”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좁히고 고민했다. 어디 보자. 클로드가 달에 한 번 꼴로 한 상자씩 보내줬던 보석들도 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궁에 가득하고. 클로드가 간수하기 귀찮다며 던져 줬던 보물 창고 열쇠도 세 개나 되고. 작년에는 도서관, 그리고 재작년에는 내 궁에 호수만 한 연못을 만들어줬었지. 정원에 핀 장미가 예뻐서 에메랄드궁이 좋다고 했다가 황성에 장미 화원이 네 개나 생겼고. 가넷궁에 있는 천사상(성별 남)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 에메랄드궁에 그것과 비슷한 천사상(성별 여)들을 수십 개 가져다주지를 않나. 드레스나 장신구 같은 것도 너무 많아서 이제는 처치 곤란이었다. “흐잉. 잘 모르겠어.” 와아, 세상에! 나도 이런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어! 으허허헝. 내 입으로 너무 가진 게 많아서 더 필요한 게 있는지 모르겠다고, 이런 복 터진 소리를 멋들어지게 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허헝허헝헝! 내가 한창 속으로 감격의 몸부림을 치는 동안 필릭스가 어쩐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두어 번 큼큼 헛기침을 한 뒤 화제를 돌렸다. “공주님의 데뷔당트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어. 혹시 첫 춤은 어떻게 하실 계획인지.” 데뷔당트의 첫 춤. 보통 귀족들은 집안에서 정해 준 혼약자가 어릴 때부터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혼자와 첫 춤을 추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직 미혼인 친오빠나 사촌오빠 같은 가족이 대신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째서인지 아빠는 딸과 함께 첫 춤을 추는 일이 거의 없는 듯했다. 데뷔당트라 하면 그래도 아직은 청소년들의 무대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런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클로드가 춤이라니. 뭔가 상상이 되지 않잖아? “필릭스랑 같이 추면 되지 않을까?” 별로 큰 고민 없이 내뱉은 말에 필릭스가 사레가 들린 듯 기침했다. 필릭스라면 공작가 사람으로 직위도 끝내주겠다, 얼굴도 꽤 잘생긴데다 동안이겠다, 게다가 아직 미혼이겠다. 구색이 완전 딱 맞지 않은가? 원작에서 아타나시아가 자신을 에스코트해 줄 사람이 없어 쩔쩔맸던 것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이란 말이야? “제, 제가 공주님과 첫 춤이라니.” “어, 싫은 거면…….” “물론 영광입니다! 아니,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필릭스는 사색이 되어서 잠시 횡설수설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건 또 처음 봐서 매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으흠. 저보다 더 적합한 파트너가 있지 않을까요?” 잠시 후 진정한 필릭스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으음. 필릭스라면 당연히 흔쾌하게 그러자고 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까지 회피하려고 하다니. 뭔가 배신감이 드는걸……. “아직 몇 달이나 남았는데 더 생각해 보지 뭐.” 나는 그냥 그렇게 말한 뒤 약간 뾰로통해져서 에메랄드궁을 향해 걸었다. *** “까망아! 언니 왔어!” “꾸우, 꺙!” 우쭈쭈. 우리 예쁜 까망이. 오늘도 귀엽기도 하지! 에메랄드궁에 들어서자마자 잔디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꼬리를 흔들고 있던 까망이가 달려와 나를 반겨주었다. 이제는 까망이도 몸집이 제법 커져서 지금처럼 나한테 달려들면 한순간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물론 우리 까망이는 사이즈가 커져도 여전히 귀엽지만! 나는 거리낌 없이 잔디에 주저앉아 까망이와 기쁨의 재회를 누렸다. 으헉, 그런데 까망아, 잠깐만! 나, 나 뒤로 넘어가! 때마침 까망이에게 밥을 주러 나왔던 한나가 그런 우리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주님, 옷에 풀물 들어요.” “에이. 풀물 좀 들면 어때서. 앗!” “뀽!” 내게 배를 보이고 재롱을 떨던 까망이가 순식간에 발딱 일어나 한나를 향해 달려갔다. 으앙, 까망이 너! 나보다 초코가 더 좋은 거야? 그런 거야! 저저저, 꼬리 흔드는 것 좀 봐! “까망이 님, 오늘도 잘 드시네요.” 그릇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식사 중인 까망이를 보며 한나가 흐뭇해했다. 그녀는 에메랄드궁에 온 이후로 거의 혼자서 까망이를 전담하고 있었다. 루비궁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나는 제법 빠릿빠릿해서 내가 없어도 까망이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다. 사실 작년부터 급격히 자란 까망이를 은근히 무서워하는 시녀 언니들도 있었는데 한나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음. 릴리가 화나면 무섭다는 걸 알면서도 나한테 몰래 초콜릿을 줬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 언니 간도 보통 큰 게 아니란 말이야? 물론 까망이를 무서워하지 않는 건 세스도 마찬가지였지만 왠지 그 언니는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크윽. 역시 세스 언니는 나한테만 따뜻한 차도녀야! 그런데 다른 시녀 언니들도 참. 우리 까망이가 얼마나 착한 귀염둥이인데. 으흑. 크기만 커졌지 여전히 순둥순둥한 우리 애를 그렇게 피하다니! 아무튼 그래서인지 까망이도 한나를 유독 좋아하는 눈치였다. “한나도 저녁 먹었어?” “아직이요. 로베인 경이 오시면 식사하려고 릴리안 님이랑 다 같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크으. 역시 화목한 에메랄드궁! “그럼 배고프겠다. 자자, 한나도 필릭스도 어서 어서 가서 식사하세요. 릴리랑 세스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밥도 잘 먹어야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요! 음음! 나는 방금 전까지 필릭스 때문에 약간 뚱했던 것도 잊고 기분 좋게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까망이 너 초코가 좋아, 내가 좋아?” 와구와구. “네? 초코보다 내가 더 좋다구요?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냐구요?” 와구와구. 헥헥. 까망이와 둘이 남은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혼자서 자문자답하며 놀았다. 하지만 까망이는 내 말을 듣는 척도 안 하고 여전히 밥그릇에 얼굴을 박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귀라도 한번 쫑긋거려 주면 안 되겠니. 크윽. 그래도 귀여우니 하는 수 없지. 나는 이제 밥을 다 먹고 그릇에 묻은 초콜릿을 핥고 있는 까망이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앗!” 그런데 바로 그때, 까망이에게 닿은 손끝이 한순간 찌릿했다. 정전기인가? 깜짝이야. 이따가 우리 까망이 빗질 좀 해줘야겠네. “까망아, 털 좀 깎아줄까?” “끄릉! 킁!” “앗. 알았어, 알았어.” 그냥 털은 안 깎는 걸로! 으악! 또 뒤로 넘어졌엉! 나는 그 후로 한동안 더 잔디 위에서 까망이와 뒹굴거리다가 내 방으로 돌아갔다. *** “공주님, 그럼 쉬세요.” “릴리도 잘 자.” 나는 막 문을 나가는 릴리에게 생글거리며 굿나잇 인사를 건넸다. 혼자가 된 후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할지 잠시 동안 고민했다. 방금 목욕을 하고 나와서 그런지 온몸이 뽀송뽀송했다. 바로 자면 딱 좋을 것 같은 노곤한 상태였지만 머리도 덜 말랐고 하니 조금 더 있다가 잘 생각이었다. 게다가 보통 이 시간이면 루카스가 심심하다고 몰래 놀러올 때였다. 처음에 그 까만 또라이가 내 방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나타났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줄 알았다. 놈은 내가 혼자 있을 때만 잘도 골라 아무 때고 뿅뿅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얼마나 깜짝깜짝 놀랐었는지! 그래도 이제는 그것마저도 적응이 되다니, 인간의 적응력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허허허. “잘 때까지 뭘 한다지.” 하지만 어쩌면 오늘은 안 올지도 모르겠다. 아까 춤 연습 시간에도 기분이 저조한 상태로 사라졌으니까. 아니,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구두끈까지 내던지고 갔대? 나는 잠시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이내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두고 ‘코X콜라 맛있다’를 했다. 남는 시간 동안 책이나 읽을 생각이었다. 절대 그 깜또를 기다리는 건 아니야!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후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보면 몰라. 스트레…… 칭하잖아.” 그래도 왔네! 하도 변덕이 죽 끓어서 오늘은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카펫에 앉아 몸을 반으로 접은 채 낑낑거리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어쩐지 책 읽기도 지루해서 하릴없이 몸이나 풀고 있던 중이었다. “후하!” 아이고, 다리야. 아무래도 오늘 너무 무리했나 봐. 루카스는 아까랑 달리 기분이 제법 괜찮아 보였다. 하여간 말이야. 사람이 뭐든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얘는 그게 너무 부족해. 투덜투덜. 까만 또라이는 내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비어 있는 내 소파에 가서 드러누웠다. 6년 전 처음 황성에 왔을 때만 해도 10살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루카스는 이제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 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그 이상 성숙해 보이면 클로드가 자기를 에메랄드궁에 못 들어오게 할 거라고 하던데. 난 설마 그러기야 하겠냐고 생각했지만 루카스는 오히려 모르는 소리 말라며 나를 비웃었다. “너 또 까망이랑 붙어 있었지.” 헉. 이 귀신같은 놈! 그때 지나가듯 툭 던진 루카스의 말 때문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46화] “으아니?” “뻥치지 마.” 뻔한 거짓말에 루카스가 썩소를 지었다. 이익, 나도 애초에 속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얄밉다! 이놈은 내가 까망이랑 좀 오래 붙어 있거나 하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기 일쑤였다. 내가 까망이랑 같이 있으면 까망이에게 있던 마력이 나한테 찔끔찔끔 옮겨와서 그렇단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특별히 위험하지 않다고 해서 나도 그냥 적당히 눈치껏 시간을 조절해 가며 까망이랑 놀아주고 있었다. “네가 이제 열넷이던가?” “생일 되면 그렇지? 아참, 아까 아빠가 말이야.” 갑자기 내 생일을 묻는 루카스 때문에 아까 클로드와의 일이 떠올라버렸다. 나는 저녁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내가 말하는 내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그가 잠시 후 나를 비웃었다. “너 바보야?” 뭐, 왜 또 나한테 바보래요! “답이 뻔히 정해져 있는데 눈치 없이 굴긴. 애초에 네가 말해야 할 건 딱 하나였네.” 뭐라. 한마디로 클로드가 ‘답정너였다’ 이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넌 네 아빠와 관련된 일에만 가끔 그러더라.” 그리고 다음 순간 루카스가 부진아를 가르치는 듯한 눈빛으로 날 보며 내뱉은 말에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보나마나 너랑 데뷔당트 첫 춤을 추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그건 신종 개그인가요? 클로드가 나랑 첫 춤을 추고 싶어 해요? 왜요? “그, 몰라서 하는 소리 같은데. 데뷔당트 때는 아빠랑 같이 춤추는 거 아니야.” “아주 간혹 있잖아, 그런 경우.” “다들 촌스럽다고 생각해서 안 한다고 하던데.” “그래. 네 아빠가 그 촌스러운 짓을 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 헐. 헐? 허어얼? “진짜?!” “이거 봐. 그러니까 공부는 왜 해. 이렇게 헛똑똑이일 거면서.” 내 표정이 아주아주 이상했는지 루카스가 소파에 나른히 누운 자세로 있는 대로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에게 발끈하지도 못 할 정도로 놀라 있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까 눈치 못 채는 게 바보였던 건가! 생각해 보면 필릭스도 힌트를 줬었던 것 같은데! 헐, 그럼 진짜라구요? 클로드가 내 데뷔당트 때, 나랑 첫 춤을 추고 싶어 한다는 게? 마침내 마지막으로 루카스가 심드렁하게 내뱉은 말에 나는 정말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네 아빠는 네 생각보다 널 훨씬 더 많이 좋아하고 있다니까.” *** 다음 날 나는 여느 때처럼 클로드와 함께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오전의 맑은 햇살이 그의 눈동자를 새뜻한 초목의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빠.” 조용히 차를 마시던 내가 그를 부르자 곧 고요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 눈빛을 받으며 나는 방긋 웃었다. “얼마 후면 제 생일이잖아요.” 어젯밤 루카스에게 그 말을 듣고 나는 참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허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클로드’가 내 데뷔당트 때 나랑 같이 첫 춤을 추고 싶어 한다니! “또 제 데뷔당트도 있구요.” 어제 클로드, 필릭스와 각각 나누었던 대화나 그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루카스의 말이 진짜 맞는 것 같아서 나는 너무나 놀라웠다. 내 말에 클로드가 ‘그래서?’ 하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그냥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그냥 대놓고 그를 떠보기로 했다. “실은 그래서 누구 에스코트를 받고 첫 춤을 추면 좋을지 생각해 봤거든요.” 한순간 클로드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힐끔 눈길을 돌리니 옆에 서 있던 필릭스가 ‘공주님, 바로 그겁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나를 응원하듯 보고 있었다. “의미 있는 날이니만큼 가까운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어제 루카스한테 얘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긴 했지만 지금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이젠 정말 감 잡았다. 흐헤. 자꾸 악동 같은 미소가 비집고 나오려 해서 참기가 힘들다. 나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필릭스가 제일 적합하지 않을까요? 아빠 생각은 어떠세요?” “흡!” 곧바로 필릭스에게서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것이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필릭스보다 다른 사람의 반응이 더 내 관심을 끌고 있었다. 달칵. 마침내 클로드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필릭스라. 나쁘지 않지.”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어조였으나 그가 내 말을 듣자마자 한순간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헤헤 웃으며 맞장구쳤다. “역시 그렇죠?”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필릭스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다는 뉘앙스였다. 하기야, 애초에 필릭스가 클로드의 명을 거부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설령 그런 명령이 없더라도 필릭스라면 내 진심 어린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물론 필릭스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라면 우리 둘 다 억지로 시키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필릭스가 내 데뷔당트 날 나를 에스코트하고 함께 춤을 추는 일을 진심으로 싫어할 확률은 전혀 없다고 봐도 되었다. “와아. 실은 어제 물어봤는데 필릭스도 더 적합한 사람이 달리 없다면 좋다고 하더라구요.” “고, 공주님.” “그래도 아빠 의견은 어떠신지 궁금해서 여쭈어 봤어요.” 내 눈치 없는 짓에 필릭스는 완전히 얼굴이 새하얘져 있었다. 당황하는 모습이 좀 안돼 보이기도 했지만 평소에 내가 이 오빠한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는…….” “마침 잘되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필릭스가 네 데뷔당트 이야기를 했었는데. 단 한 번뿐인 중요한 날이니만큼 에스코트를 맡길 이는 특히 심혈을 기울여 정해야 할 것이라 주장했었지. 그러니 필릭스도 네게 선택받아 기쁘지 않겠느냐.” “폐, 폐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지? 별로 기뻐 보이는 낯이 아니구나.” “물론 대대손손 가문의 자랑으로 삼을 일이라 생각……. 헉. 폐하! 그것이 아니라.” 필릭스는 옆에 서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보아 하니 늘 그렇듯 필릭스가 먼저 앞장서 클로드에게 내 데뷔당트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뜻하지 않게 자신이 내 상대가 되게 생겼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다음 순간 클로드가 필릭스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낮게 읊조렸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대대손손 가문의 자랑이라. 물론 그래야겠지.” “저도 필릭스랑 같이 갈 수 있어서 기뻐요! 헤헤.” 나는 차마 클로드를 쳐다보지도 못 하고 핼쑥해져 있는 필릭스를 향해 또 해맑게 말했다. ‘네 아빠는 네 생각보다 널 더 좋아하고 있다니까.’ 흐응. 그리고 나는 잔상처럼 남은 어젯밤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남몰래 슬쩍 웃었다. 어쩐지 두 사람을 약간 놀려 주고 싶어졌다. *** “나랑 춤 연습하자!” “안 해.” 며칠 뒤 나는 루카스에게 기세 좋게 외쳤다. 하지만 그는 에메랄드궁의 드넓은 대리석 바닥에 홀로 팔자 좋게 드러누운 채로 어디선가 가져온 사과나 와삭 베어 물 뿐이었다. “매일 혼자서도 좋다고 심취해서 춰대더니 갑자기 왜 나까지 끌어들이려고? 난 안 해.” “아무래도 내가 데뷔당트 때 아빠랑 같이 춤을 출 것 같단 말이야.” 나는 훗 미소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날 내가 필릭스와 데뷔당트에 가겠다고 말한 후로 클로드는 알게 모르게 저기압 상태였다. 나는 나날이 파리해지는 필릭스를 볼 때마다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물론 클로드 입으로 직접 내 데뷔당트 에스코트를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이건 딱 봐도 그런 느낌이 아닌가? 하지만 나도 끝까지 필릭스에게 에스코트를 받고 싶다고 우길 작정은 아니어서, 나중에는 못 이긴 척 클로드에게 손을 내밀 생각이었다. 크흑. 내가 클로드를 상대로 이렇게 밀당이란 걸 할 때가 올 줄이야. “그런데 어디를 봐도 키가 안 맞잖아? 그날 높은 구두도 신어야 할 텐데 춤추다가 발 밟으면 어떡해.” 음. 난 기껏 늘려놓은 내 수명을 다시 줄이기는 싫다네. 그러니 어쨌거나 데뷔당트 전까지는 열심히 춤 연습을 할 참이었다. 내 말을 듣고 루카스가 반쯤 먹은 사과를 입에서 떼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어른 모습으로 변해서 연습 상대를 해달라?” “응응!” 난 정말 천재 같다!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말이야. “그때 오빠 키가 우리 아빠랑 비슷하지 않았나?” 물론 내가 루카스의 원래 모습을 본 것은 7살 때가 마지막이어서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상당히 키가 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뭐, 그게 아니어도 비슷하게 변신해 줄 수 있잖아?” 그러자 루카스가 나를 향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러실 줄 알고 제가 아부를 준비해 놨죠! “세계 제일 최강 능력자이자 우주 최고 미소년 천재 마법사인 루카스 님이라면 이 정도는 밥 먹는 것보다 쉽게 할 수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으응? 그러니까 안 될까요? 응?” 나는 루카스를 상대로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잘 먹혔던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순간 루카스가 잘 먹던 사과가 목에 걸린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가 싶었다. 다음 순간, 그가 내게서 눈길을 돌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난 바쁘니까 이거나 데리고 해.” 그리고 내 눈앞에 웬 새하얀 종이 인간이 나타났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네 파트너지.” “이게 왜 내 파트너야! 맨날 뒹굴거리면서 뭐가 바쁘다고 이딴 거나 만들어줘!” “난 매일 숨 쉬느라 바빠.” 그냥 좀 해주지, 이 귀차니즘 같으니! 하지만 루카스는 정말 나랑 같이 춤을 춰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가 그런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 놀랍지도 않았지만. 사실 그는 2년 전에 내 춤 선생님인 퐁파듀 부인의 극성으로 잠시 동안 내 파트너로 함께 춤 연습을 한 적이 있었다. 까만 또라이와 내 키 차이가 마치 하늘이 내려준 짝인 것처럼 연습하기에 적합하다나 뭐라나. 그때도 루카스는 춤이란 소리에 학을 뗐지만 퐁파듀 부인의 무서운 기세에 어리벙벙하게 떠밀려 결국은 나와 함께 댄스홀에 섰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아주 놀랍게도 까만 또라이가 춤을 매우 잘 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후로도 춤이라면 질색을 했기 때문에 두세 번 함께 춤을 춘 이후로는 퐁파듀 부인이 에메랄드궁에 올 때마다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기 일쑤였다. 에잇. 그럼 정말 지금도 안 해줄 건가. 그래도 은근히 내 부탁을 잘 들어주던 루카스였는데 이건 정말 싫은가 보다. 으흑. “이왕 만들어줄 거면 눈, 코, 입이라도 좀 그려주던가.” 결국 나는 하는 수 없이 종이 인형의 손을 잡으며 투덜거렸다. 종이 인형은 종이 인형 주제에 소름 끼치게 내 손을 맞잡기까지 했다! 으허. 루카스 놈 별 이상한 걸 다 만드네. 가끔 보면 진짜 기상천외하다니까. ======================================= [47화] “흠흠, 흠.” 그러고 난 뒤 홀 안에는 내가 혼자 박자를 맞추며 내는 허밍 소리와 구두굽이 바닥에 부딪치며 내는 발자국 소리만이 가득 찼다. 아이, 그런데 이 종이 인형 키 진짜 크네. 예전에 루카스랑 같이 연습할 때랑은 차원이 다른데? 걸음 맞추기도 더 어렵고. 그런데 종이 인형 주제에 움직임이 섬세해! 왠지 기분 나빠! “으악!” 압도적인 신장의 차이 때문인지, 결국 나는 황새를 쫓다 가랑이가 찢어진 뱁새처럼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루카스는 내가 비틀거리며 넘어진 꼴을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비웃음을 날려 나를 분노하게 했다. “지금 바닥 쓸어? 재미있어?” “이익! 이거 뭐야! 비실비실해! 관절도 없어! 내가 넘어져도 붙잡아주지도 못하고! 완전 흐물흐물 이상해! 그리고 달걀귀신처럼 생겼어!” 춤에 관한 한 자부심이 넘치던 내게 넌 모욕감을 주었어! 그런데 바닥에 엎어져 다다다 쏘아 보낸 내 뾰족한 외침에 루카스가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표정을 변화시켰다. “인신공격 쩐다. 얘 상처받아.” “헉. 그냥 인형 아니었어? 내 말 알아들어?” “당연히 아니지.” “…….” 사람 놀리니까 재미있냐! 나는 약간 짜증이 나서 자리에서 다시 벌떡 일어났다. 루카스 놈은 여전히 재수 없게 킬킬거리며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배경음악 필요해? 만들어줘?” 따악. 순식간에 주위에 웅장한 음악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이건 무슨 일류 오케스트라 뺨칠 정도의 솜씨다. 소리의 근원은 알 수가 없었으나 어차피 루카스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으니 일일이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나만 호기심으로 사망할 거다. “밖에서는 안 들리니까 마음껏 추시죠, 공주님.” 아악, 얄미워! 얄미워! 그때, 무언가가 내 어깨를 툭툭 쳐서 돌아보니 종이 인형이었다. 잠깐! 갑자기 내 손은 왜 잡아! 허리에 팔은 왜 둘러! 결국 나는 종이 인형의 묘한 박력에 이끌려 다시 댄스홀을 누벼야 했다. 그런데 이 인형 엄청 팔랑팔랑거리면서 움직여서 영 집중이 안 된다! 잠시 후 나는 종이 인형에게 이끌려 한 바퀴 회전을 하며 루카스를 향해 다시 투덜거렸다. “그냥 진짜 사람 같은 인형을 만들어줄 순 없어?” “내가 못 하는 게 있을 것 같아?” 역시! “그럼 만들어줘. 될 수 있으면 잘생긴 인형 오빠로.” “싫어.” 하지만 루카스는 내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 “왜 싫은데?” “그러게. 왜인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나빠서 싫네.” 심지어 마땅한 이유조차 없었다. 이 자식, 꼭 잘 나가다가 가끔 이렇게 심술이더라? 할 수 있으면서 왜 안 해준대! 에잇. 두 번 더 춤을 추고 나서 나는 그냥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종이 인형은 계속 눈앞에서 경망스럽게 팔랑팔랑거리지, 거기에 안 어울리게 배경음은 한 장엄하지, 루카스는 내가 비틀거리는 걸 보면서 간간이 비웃음을 날려대지, 도저히 집중을 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에이, 나 안 해! 그런 나를 보고 루카스가 홀 안 가득 울리던 음악을 없앴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벌써 그만둬?” “차라리 필릭스한테 연습 상대해 달라고 하는 게 낫지.” “너 은근히 잔인하다니까.” 내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루카스가 ‘정말 그 기사를 피 말려 죽이고 싶은 거냐’며 혀를 찼다. 흥. 필릭스가 걱정되면 제대로 된 사람 인형을 만들어주던가! 누가 저런 하느작거리는 종이 인형 같은 걸 달랬나. “아, 힘들다.” 나는 루카스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저 멀리 보이는 샹들리에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에메랄드궁의 연회장은 이제까지 딱히 사용할 일이 없어 지금은 내 댄스 교습을 위한 장소로나 쓰이고 있었다. 그래도 공주들이 머물던 궁의 홀이라 그런지 사방이 참으로 눈부시게 화려하기도 했다. 나도 이제 데뷔당트가 지나면 여기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연회를 열기도 하고 그런 건가? 처음에는 이런 반짝이는 걸 볼 때마다 넋 놓고 감탄하기 일쑤였는데 이것도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다니. 내가 타고난 소시민이기 때문인지 아예 감흥이 없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공주 생활에 이렇게까지 익숙해졌다는 게 놀랍다. 물론 금과 보석은 언제 어느 때나 소중합니다. 그러합니다. 인생 불변의 진리! 보는 사람도 없겠다, 나는 체통이고 뭐고 바닥에 완전히 드러누워 하는 일 없이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긴 했어. 아구구, 삭신이야. 그러던 중에 갑자기 어젯밤 한나가 내 머리를 빗겨주며 해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키엘이 돌아왔다고 하던데.” “이제키엘 알피어스?”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루카스가 곧바로 반응해 왔다. 자기 대신 내 친구가 될 뻔했던데다 6년 전 알피어스 공작가에서 직접 얼굴을 보기까지 했던 이제키엘이니, 루카스도 그를 기억하고 있을 만했다. 게다가 한나의 말을 듣자 하니 이제키엘이 얼마 전 아를란타에서의 오랜 수학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궁에서도 이미 소문이 파다한 이야기라고 하니까. 젊은 시녀들도 그 일로 며칠째 계속 시끌벅적하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지난번에 알피어스 공작과 함께 클로드한테 인사를 하러 궁에 왔었다지? 소문에 의하면 아를란타의 학술원을 수석 조기 졸업하고 왔다던데. 그 순간, 문득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6년 전의 그날로부터 지금까지도 가끔씩 내 머릿속에 예고 없이 떠올라 학업 욕구를 마구마구 불살라 주곤 하는 그 수치스러운 기억! 크으. 내가 10살이던 이제키엘에게 지식으로 밀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때부터 6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컸을지 궁금하네.” 정확히 말하면 어느 정도로 똑똑해졌을지 궁금하다. 아를란타의 학술원을 수석 조기 졸업했다니, 그게 어느 정도여야 가능한 거지? 하지만 나도 그동안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중얼거린 말에 루카스가 흐응, 소리 내더니 물었다. “너도 이제키엘한테 관심 있어?” “말도 마. 지난 6년 동안 책을 읽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서 얼마나 괴로웠는데!” 내 흑역사! 그날 이후로 내가 지난 몇 년간 미친 듯이 읽어댔던 책이랑 공부한 양을 따지면 말이야.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보고 오면 되겠네.” 이 홀 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느, 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지금 들은 말이 뭐였는지 한순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루카스가 누워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직후 나는 나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헉. 나 이 표정 알아. 까만 또라이가 사고 치기 직전에 짓는 건데, 이거!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나한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런데 위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루카스의 눈빛이 왜인지 평소와는 약간 달랐다. 내가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가 눈꼬리를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특별 서비스니까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따악! 휘이잉. 갑자기 나를 가격한 강풍에 머리를 묶고 있던 리본이 풀어져서 저 멀리로 날아갔다. 나는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어리둥절하게 있다가 곧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거 뭐야?!” 나 왜 허공에 떠 있어?! 바로 그때 내 머리 위로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곧장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잖아도 심심했는데 잘됐네.” “잘되긴 뭐가 잘돼!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 친구.” “야, 이…… 엄마야!” 곱게 휘어지는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싶었을 때, 나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나쁜 놈아아아!” 긴 머리카락이 햇빛과 뒤섞인 채 깨진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며 공중에 휘날렸다. 나는 밑으로 떨어지는 동안 속으로 마구 까만 또라이를 욕했다! 이 미친놈! 나쁜 놈! 역시 또라이는 그 이름값을 하는 거였어! 으아앙! ‘휴또’는 있어도 ‘탈또’는 없다는 건가요! 엄마아! 풀썩! 그런데 이번에도 어느 정도 떨어졌을 때 몸이 약간 붕 뜬다 싶더니 잠시 후 무언가가 나를 안정감 있게 받아냈다. 으아아! 이번에는 6년 전보다 더 무서웠어! 내가 그때보다 무거워져서 중력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아서 그런가? 으아앙. 몰라 몰라. 루카스, 너. 너어! “……괜찮으십니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내 머리 위에서 낯선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한순간 움찔거렸다. 헉. 그러고 보니 지금 누가 떨어지는 날 받아낸 거야? 진짜? 나는 슬그머니 손가락의 틈을 벌려 그 사이로 밖을 엿보았다. 그러자 어딘가 익숙한 듯도 하고 낯선 듯도 한 남자의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야에 박혀들었다.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은빛의 머리카락과 오후의 빛을 모조리 끌어모아 놓은 듯 눈부시게 빛나는 금색의 눈동자가 그대로 내 기억의 한 부분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막 소년과 남자의 경계에 서기 시작한 수려한 외모도, 나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깊고 어른스러운 눈동자도, 내 몸을 단단히 받쳐 들고 있는 다부진 육체도 모두 내 기억속의 아이와는 확연히 많은 차이가 났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만날 때마다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마침내 그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속삭일 때까지. “보고 싶었습니다, 천사님.” 천사님. 천사님……. 지금 막 내 고막을 뚫고 들어온 말이 메아리처럼 끈질기게 귓가에서 맴돌았다. 이거 지금 무슨 상황? 나는 지금 뭐 하는 거? 이 남자는 누구죠? 왜 지금 날 보고 웃고 있는 거죠? 나는 정말 오랜만에 심각한 멘붕에 빠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나를 향해 눈부신 꽃 미소를 시전하고 있었다. 으, 으헉. 잠깐만, 내 눈! 인간적으로 실드 칠 시간은 좀 주시지 않겠어요? 갑자기 그렇게 사기적인 광채를 뿜뿜 하면 난 어쩌라고! 그나저나 생긴 것도 그렇고 저놈의 천사 소리도 그렇고, 이 사람 이제키엘 맞지? 그런데 뭐야. 내가 알던 어린애 어디 있어?! 이번에도 나는 루카스 때문에 하늘에서 뚝 떨어져 버렸고, 이제키엘이 그런 나를 밑에서 받아냈다. 왜인지 6년 전의 재현 같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나를 안은 채로도 흔들림 없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달랐다. 잠시 동안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한 얼굴에 시선을 못 박고 있던 나는 내가 아직까지도 이제키엘에게 안겨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헉.” 으허헉, 아니, 이런 공주님 안기는 좀 많이 부끄러운데! 게다가 너무 지나치게 밀착한 거 아닙니까? 이, 이래 봬도 내가 과년한 처자인데! “내, 내려갈래.”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크게 버둥거렸다. 하지만 내 등과 다리를 받쳐 들고 있는 팔은 내 몸부림에 한번 움찔했을 뿐, 돌덩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 [48화] 아니, 이게 뭐람? 진짜 뭐람? 나는 약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제가 내려드리겠습니다.” 결국 나는 그가 나를 잔디 위에 내려주고 나서야 내 의지대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나는 그를 경계하듯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으악!” 하지만 이 망할 놈의 구두가 문제였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클로드의 키에 맞춤 연습을 하기 위해 신었던 특대 길이의 굽 높은 구두 말이다! 허접한 순정 만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발목을 삐끗해서 휘청거리고 말았고, 이번에도 이제키엘이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그런 나를 붙잡았다.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제키엘에게 팔뚝을 붙잡힌 채로 남몰래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흐, 흐헉. 그래도 잡힌 게 팔이라 다행이다! 하이틴 드라마나 순정만화 같은 곳의 여주인공처럼 남자 주인공에게 허리를 끌어 안겨서 붙잡힌다거나, 때마침 주위에 핑크색 꽃이 촤아악! 피어나서 화아악! 흩날리는 그런 분위기였다면 난 아마 지금쯤 완전히 수치사 했을 거야! 그런데 이제키엘 너 왜 이렇게 폭풍 성장했니? 사, 사람 당황스럽게.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에게 잡힌 팔을 털어냈다. 그러자 이제키엘이 자연스럽게 내게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가 싶었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헉. 이, 이런 제기랄. 순간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얘 그래 봤자 지금 나이가 열여섯? 열일곱? 그쯤 아니야? 그럼 어차피 나보다 까마득하게 어리잖아? 게다가 얘, 6년 전에 천사님 찾으면서 수줍게 귓불까지 붉히던 순진한 어린애였잖아? 아니,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처음 보는 남정네처럼 낯설게 느껴지냐는 말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변성기가 오래전에 지난 듯한 감미로운 낮은 음성이 귓가에 흘러드는 순간 그 낯선 느낌은 더욱 뚜렷하게 다가들었다. “6년 전보다 많이 자라셨습니다.” 아, 아니. 너보다는 아니야. 넌 왜 이렇게 많이 컸어? 나야말로 누구인지 몰라볼 뻔했잖아! 녹색 음영과 흰 햇빛이 뒤섞여 이지러지는 나뭇잎 아래에서 몰라보게 훌쩍 큰 이제키엘이 나를 보며 또 한 번 얕게 웃었다. “그래도 역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말이에요.” 크리티컬! 크리티컬입니다! 머릿속에서 삐용삐용 소리가 났다. 이제키엘 알피어스는 역시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우어! [이제키엘의 ‘매혹’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효과는 굉장했다아!] 뭔가 이런 알림창이라도 떠야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제키엘에게 두근두근 설렌다기보다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가 최우선적인 고민이었다. 차라리 내 눈앞에 있는 게 여전히 10살짜리 어린 이제키엘이었다면 이렇게 난감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도대체 이렇게 다 큰 이제키엘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맑디맑은 푸른 하늘뿐이었다. 으익, 까만 또라이 또 어디 갔어?! 분명 어딘가에서 내가 당황하는 꼴을 보면서 밉살맞게 웃고 있겠지? 갑자기 여기 던져 놓으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런데 내 곤혹스러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제키엘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그라졌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다음 마주한 눈동자에 서서히 번져 드는 감정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찬란한 황금색 눈동자 안에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실망감과 씁쓸함. 하지만 그것을 굳이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으며 홀로 깊숙이 눌러 담는 체념까지. 그 표정이 그냥 그를 모른 체할까 했던 내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아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요…….” 사실 6년 전에 이제키엘이 기다려달라고 한 것을 무시하고 그냥 집에 갔던 것도 기억 속에 내심 찜찜하게 남아 있던 참이었다. 으아악! 그렇다고 해서 이제키엘과 또다시 이런 식으로 만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루카스 너 진짜! “그렇군요. 저를 기억해 주셨던 거군요.” 하지만 내 말에 곧 이제키엘의 표정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정말 애매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어, 어디선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표정 변화는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 분위기라고 해야 할지, 그런 게 너무 다르잖아요……. 그런데 애초에 날 왜 이렇게 반가워하는 건데? “크흠. 혹시 전에 날 여기서 봤던 걸 누구한테 말하지는 않았겠지…… 요?” “말씀을 편히 하시지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그때도 지금도 나랑 만난 건 비밀로 하도록 해.” 나는 이제키엘의 말이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홀랑 어정쩡한 존칭을 버리고 곧바로 말을 놓기 시작했다. 자, 자기가 말 편하게 하라고 하는데 뭘. 어차피 여긴 사석이고 난 지금 천사님…… 크흑. 손발이 오그라든당. 아무튼 난 그거니까. 어쩐지 이제키엘은 6년 전에도 내가 공주인 걸 아는 것 같기도 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아니라고 했으니, 일단은 이제키엘도 아닌 것으로 해줄 것이다. 왜인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라면 그래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럴 겁니다.” 역시 이제키엘은 내 말에 쉬이 그러겠노라 약속해 주었다. 그러고 난 뒤 나는 또다시 뻘쭘해졌다. 더 할 말도 없고, 이 상황은 부담스럽고. 도주, 도주가 하고 싶다! 그것도 격하게! 아주 격하게 어디론가 도주해 버리고 싶어! 한동안 잠들어 있던 나의 도주 본능이 간만에 시끄럽게 날뛰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속이 근질근질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키엘이 무슨 말을 할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이제키엘? 거기에 있어요?” 헉.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깨끗하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이제키엘이 남자 주인공 버프를 받아 환상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다면, 이 꿀 떨어지는 목소리는 아마 여주인공 버프쯤은 받아야만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내 눈은 태풍을 맞은 종이배처럼 마구마구 줏대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이제키엘을 만날 때면 매번 누가 찾아오는 거지?! 이건 또 무슨 식상한 연출이랍니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잠시 시선을 움직였던 이제키엘이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나를 향해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향수 냄새인지 뭔지 아무튼 시원한 느낌의 은은한 향이 코끝을 한차례 간질인다 싶었을 때, 그가 나를 다시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다. 옴마야. 이건 또 뭔 상황이래요. “조용한 곳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제키엘은 이곳에 몰래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내가 혹여나 다른 사람을 만나 곤욕을 치를까 봐 걱정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헉. 그나저나 얘는 어떻게 이 각도에서도 이렇게 굴욕 한 점 없이 잘생겼다지요? 원래 아래에서 보면 브이 라인 얼굴도 좀 찐빵같이 되고, 깎아지른 것처럼 오똑한 코도 좀 돼지 코로 보이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역시 남자주인공! 나는 아까처럼 가까워진 이제키엘의 얼굴에 잠시 홀려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지금 너 찾는 거 제니트 아니야? 그럼 그냥 네가 지금 제니트한테 가면 문제는 다 해결되는 거 아니야? 그럼 나도 까만 또라이를 불러서 다시 궁으로 돌아가고. 그럼 모든 게 완벽해! “난 여기 두고 그냥 가보는 게…….” “그럼 또 말없이 사라져 버리시겠죠.” 뜨끔! 이제키엘이 무덤덤하게 읊조린 말에 나는 괜히 양심이 찔리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도 난 기다리겠다고 약속한 적 없었는데? 왜, 왜 내가 이런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거죠. “어쩌지.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텐데. 이제키엘-” 그때,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또 한 번 이제키엘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를 같이 나가기로 약속해서 저렇게 찾는 것 같은데. “저기. 역시 난 그냥 여기 두고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하지만 이제키엘은 내게 조용히 하라는 듯 ‘쉬잇’ 소리 낸 뒤 나를 안은 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이것 참. 뭔가 미묘하네. 얘가 외국물을 먹고 들어오더니 묘한 박력이 생겼어! 하긴 6년 전의 순진한 어린애일 때보다야 지금 모습이 오히려 원작 속 이제키엘답긴 하지만. 아무튼, 그는 주위에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소리 없이 걸었다. 제니트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과 반대되는 곳을 향해서. “이상하네. 분명 이쪽으로 왔다고 했는데.” 의문을 품은 고운 목소리가 작게 울리더니 이윽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는 소리가 사라진 곳을 너른 어깨 너머로 훔쳐보았다. 이제키엘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해서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오는 곳입니다.” 도대체 날 데리고 어디까지 가나 싶었을 때, 이제키엘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그는 나를 사방이 탁 트인 언덕 어귀에 내려주었다. “이곳을 아는 건 저 혼자뿐이니 나름대로 비밀 장소인 셈이지요.” “어, 그런 장소에 내가 있는 건 좀 미안한.” “어째서 말입니까?” 그,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원래 자기 비밀 장소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좀 싫은 일 아닌가? 하지만 이제키엘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어서 한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내게서 고개를 돌리며 주위의 풍경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았습니다.” 과연 이제키엘의 말대로 주위에 펼쳐진 경관은 내 마음에 들었다. 완만히 경사진 언덕은 탐스러운 하얀 꽃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가 여기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았다니? 꼭 여기 올 때마다 내 생각을 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허허. 아무래도 제가 한동안 공주로 살았더니 약도 없는 병에 걸렸나 봐요. 공주병 그건 진짜 치료도 못 한다던데 말이죠! “이렇게 갑자기 또 제 앞에 나타나실 줄은 몰라 놀랐습니다.” “그건 나도…….” “예?”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키엘의 말에 나도 속으로 열렬히 동의했다. 내 말이, 내 말이! 나도 갑자기 네 앞으로 떨어질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다고. 이게 다 루카스 때문이야! 걔는 예전에도 갑자기 날 흰둥이 소굴에 떨어뜨리더니, 진짜 이번에는 또 무슨 변덕으로 갑자기 이런 짓을 했대? “저를 만나러 와주신 거라면 기쁠 테지만.” 다시금 입을 열기 시작한 이제키엘 때문에 나는 꽃밭 한가운데에 아무렇게나 두고 있던 시선을 옮겼다. “아마도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리고 나를 향해 어렴풋이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또 기분이 약간 싱숭생숭해지고 말았다. ======================================= [49화]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나, 원하신다면 이 일은 앞으로도 계속 함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지만 순간 멈칫하는가 싶던 이제키엘은 거기에서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잠시 동안 내 얼굴에 머물던 그의 시선이 이내 옆으로 비껴나갔다. 그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했다. 그런데 미남이 꽃밭에 서 있으니 그림이 참 끝내준다. 하긴 남자 주인공에게 배경이야 뭔들. 아무튼, 그가 더 이상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아까 찾아온 사람하고 같이 외출하기로 약속한 것 같던데 지금이라도 가봐야 하는 게 아닌지…….” 큭. 사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제키엘하고 편하게 대화하던 것도 7살 때 얘기지, 얼마 뒤 데뷔당트 날에 또 볼지도 모르는 판에…….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나는 힐끔 이제키엘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괜찮을 겁니다. 꼭 제가 같이 가지 않아도.” 그의 옆모습은 그래도 6년 전과 아직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는 내 마음은 그때와 같을 수 없었다. 원작대로라면 내 데뷔당트 날은 제니트의 화려한 등장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이제키엘은 알피어스 공작과 함께 제니트를 에스코트하며 나타날지도 몰랐다.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이제키엘의 눈동자는 여전히 올곧아서, 나도 그냥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실은.” 그러자 잠시 후 이제키엘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6년 전 아를란타로 떠나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을 처음 만났던 곳에 갔었습니다.” 그것은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후로도 반년마다 한 번씩 오벨리아에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의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이어질 말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된 오늘까지도.” 나는 이미 충분히 이상한 지금의 상황 속에서 그보다 갑절은 더 이상한 말을 들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물론 지난 만남이 어린 그에게 상당히 인상적인 일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늘 본 그의 태도가 설명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미동 없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담담하게 속삭인 말들도. 그래서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왜일까요.” 그리고 내 질문에 이제키엘이 스스로에게 묻듯이 반문한 순간, 나는 또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단 이틀뿐이었는데. 그것도 한낮의 꿈이었다 생각해도 좋을, 단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었는데.” 나지막한 음성이 얕은 바람에 실려 내 귓가를 간질이며 스쳐 지나갔다. 나는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금색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들어 올려진 그의 손이 내게로 느리게 움직여질 때까지도. “정말로.” 바람에 사그라질 듯한 작은 속삭임이 먼저인지, 깃털처럼 부드럽게 날아든 따스한 체온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일까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길이 귀에 닿는 순간 나는 움찔 손끝을 떨고 말았다. 흰색의 꽃잎들이 눈앞에서 새하얀 눈처럼 흩날렸다. 그 속에서 이제키엘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금색 눈동자에 문득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온기를 품은 손이 내게서 떨어진 것과 마주한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담긴 것은 거의 동시였다. “괜찮습니다.” 이제키엘이 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제가…….” 따악.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희게 흔들리던 꽃밭도, 눈앞에 이지러지던 미소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고작 눈을 두어 번 깜빡할 정도의 짧은 시간만 지난 것 같았는데, 어느덧 나는 본래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화려한 내벽을 장식하는 에메랄드궁의 연회장이었다. “앗!” 그리고 내 앞에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까만 또라이가 있었다! 아주 잠시 동안 꽃밭의 여운에 젖어 있던 나는 루카스를 보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그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아, 정말! 그놈의 순간 이동은 예고 좀 하고 쓰던가, 그리고 사람을 왜 네 마음대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하는…… 은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어, 어라. 그런데 왜인지 이놈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뭐, 뭐야.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왜 이런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그에게 화내던 것을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까만 또라이가 입을 열어 내뱉은 말은 아주아주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나 지금 짜증 난 건가?” ……요즘은 질문에 질문으로 되돌리는 게 유행인가요? 도대체 왜 그걸 나한테 묻니? “그, 그래 보이기는 한데?” “그래. 내가 지금 기분이 나쁜 건가 보네.” 아니, 기분이 나쁠 건 난데, 네가 왜! 네가 왜! “도대체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하지만 까만 또라이가 여전히 살벌한 표정을 지은 채로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놈에게 더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싸늘하게 식은 표정을 지은 채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던 루카스가 돌연 내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니, 저놈이? 이제키엘이 앞에 버젓이 있는데 갑자기 순간 이동을 써서 다시 날 여기로 데려온 것도 그렇고, 갑자기 멀쩡하던 기분이 더러워져서 있는 것도 그렇고, 진짜 이해할 수가 없네? “왜 저래. 뭘 잘못 먹었나?” 하지만 루카스는 이미 떠나 버린 후였기 때문에 나는 그의 빈자리를 보며 어이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15장 파란만장 데뷔당트 “흐으음.” 막 목욕을 하고 나온 직후, 나는 거울을 통해 비치는 내 모습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로 몸이 뜨끈뜨끈해서 그런지 젖살이 남아 있는 뺨이 약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갸름한 턱을 매만지면서 끊임없이 각도를 바꿔 내 얼굴을 관찰했다. “흐음?” 해가 지날수록 나는 꿈속의 요정 언니와 점점 외양이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동그란 이마에서 내려와 갸름한 선을 그리다가 오똑 솟아난 콧마루도, 끝이 말려 올라가 있는 길고 풍성한 백금색의 가느다란 속눈썹도, 자세히 살펴보면 은근히 꼬리가 올라가 있는 눈매도, 옅은 장밋빛으로 물든 미소 띤 입술과 백금을 녹인 폭포수처럼 물결치는 머리카락도, 전부 다. 단 하나 그녀를 닮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불빛 아래에서 시린 바다색을 띠었다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페리도트를 닮은 연한 녹색과 금색 사이의 오묘한 빛으로 변하는 이 보석안뿐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잘 먹고 살아서 그런지 딱 보기 좋게 살이 붙은 몸은 드디어 밋밋한 유아 체형에서 벗어나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소녀다운 풋풋한 굴곡을 그리고 있었고, 백옥 같은 피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절로 윤기가 흘렀다. 이것이 바로 금수저의 수혜! 크흑. 나는 거울을 보다 말고 잠시 동안 혼자서 감동하는 시간을 가졌다. “릴리, 릴리.” 그리고 잠시 후, 한창 내 잠자리를 봐주는 중인 릴리에게 물었다. “나 예뻐?”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시죠.” 그러자 침구를 정리 중이던 릴리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마치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물으면 ‘세상에서 왕비님이 제일 예뻐요!’라고 대답해 주었다는 백설공주 새 엄마의 거울 같은 스피드였다. 역시 우리 릴리야!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를 돌아보며 헤엣 웃었다. 릴리도 그런 나를 보고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하긴. 아타나시아가 다이아나를 닮아서 예쁘긴 참 예쁘지. “주무시기 전에 머리를 빗겨드릴게요.” 그러니 이제키엘이 호감을 가질 만도 해. “후후. 기분 좋으세요?” “응. 릴리가 머리 만져 주니까 좋아.” 나는 얼마 전에 꽃밭에서 보았던 이제키엘을 떠올렸다. 비록 내가 전생에 팍팍한 삶을 사느라 흔한 연애 한 번 못 해봤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키엘이 내게 보인 말과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예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무, 물론 잠시 동안은 내가 공주병인가 싶기도 했지만 말이야. “저도 우리 공주님 머리 만져 드릴 때가 제일 좋답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이제키엘에게는 여주인공인 제니트가 있었으니까. 그러니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착하기까지 한 소설 속 여주인공 대신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잖아. 하지만 아무래도 이야기에 약간의 변수가 생긴 모양이다. 루카스가 6년 전 나를 알피어스 공작가로 날려 보냄으로써. 요컨대 그건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 그리고 어린 시절의 미화된 기억 속에서 나는 꼬마 이제키엘의 첫사랑 비슷한 역할이라던가. 왜냐하면 아타나시아는 내 최애인 다이아나 요정 언니를 닮아서 엄청 예쁘니까 말이야! 음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서도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뻔뻔스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주님, 갑자기 움직이시면 머리카락이 엉킬 수 있어요.” 어차피 제니트를 두고 이제키엘이 날 진지하게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생각까지는 안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쁠 게 없었다. 애초에 주인공들이 행복해지도록 설계된 이 소설 속의 인력이 그대로 움직이고 있다면 남자주인공인 이제키엘에게 호감을 사서 손해 볼 건 없잖아. 뭐, 그건 데뷔당트 후에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릴리, 오늘도 루카스 안 왔어?” “마법사님이 바쁘신가 봐요. 하긴 모르긴 몰라도 궁정 마법사시니까 많이 바쁘긴 하겠죠.” 바쁘기는 무슨. 루카스 그놈이 진짜로 하는 일이 많아 바쁘면 내 성을 간다. 루카스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느 때고 내 앞에 뿅뿅 나타날 수 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어린애인 척을 하며 ‘미소년 천재 마법사’ 역할극을 즐기곤 했다. 심지어 녀석은 3년 전부터 최연소 궁정 마법사의 타이틀까지 달고 있었다! 3년 전이라 하면 내가 10살 때인데, 루카스 이놈은 처음 황성에 굴러 들어왔을 때 이후로 외모 보수를 하지 않아 여전히 10살에서 11살 정도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나야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마도 이놈의 몸은 보통 사람처럼 하루하루 나이를 먹는 시스템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루카스는 그 무렵 또 죽 끓는 변덕으로 황궁 생활이 심심하다고 하며 덜컥 궁정 마법사 시험을 봤고 결국은 최연소로 합격했다. 이때 이놈이 우리 궁정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허접하다고 어찌나 비웃어댔는지 모른다. 어우, 얄미워. 그런데 분명히 나와 4살 차이가 난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던 루카스의 나이가 어찌 된 일인지 나와 동갑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더욱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것은 아무도 그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루카스의 어려진 나이에 일말의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가 그랬던 것처럼. ======================================= [50화] 나는 이놈이 사람들을 상대로 또 다시 사술을 부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이 또라이와 처음 만났던 때에도 놈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찾지 못하게 필릭스와 릴리를 포함한 루비궁의 사람들에게 환술을 걸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놈이 처음 황궁에 들어올 때, 주위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듯했던 그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나섰다는 궁정 마법사까지. 하나하나 따져 보면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내가 마법 쓴 거 맞는데? 그게 뭐.’ 루카스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쉽게 인정했다. 게다가 자신이 쓴 마법이 정신 계열 마법이라 정신력이 약한 사람의 경우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았다. 아오, 다시 생각해도 열받는다. 그 후 나는 그를 좀 귀찮게 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두 번 다시 그런 위험한 마법을 쓰지 말라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자기 마음이라고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했던 놈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어지간히 성가셨는지 결국은 알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루카스는 최소한 그날의 약속이 있은 뒤부터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술을 쓴 적이 없었다. “마법사님도 어린 나이에 참 대단하세요.” 물론 그래 봤자 나와 약속하기 전에 사용한 마법 때문에 이미 모두가 놈을 나와 동갑으로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허흐흑. 분명 이놈은 나이 어린 척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똑똑하다고 떠받들어주는 걸 즐기는 게 분명해. 나도 가끔은 내가 진짜 어린애인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이 천재라고 치켜세워 줄 때마다 민망한데 말이야! “물론 우리 공주님보다는 아니지만요.” 가령 지금처럼 말이지. 나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빗어주며 엄마 미소를 짓는 거울 속의 릴리를 향해 그저 헤헤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아무래도 빨리 자야겠다. 릴리도 은근 팔불출적인 면이 있어서 날 너무 띄워준단 말이야! “릴리, 나 졸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주무셔야죠, 공주님.” 나는 이제키엘을 만난 날부터 도통 얼굴을 보이지 않아 신경 쓰이게 만드는 루카스를 상념의 저 멀리로 냉큼 밀쳐 버린 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 “아빠, 아빠.” 나는 한껏 간드러진 목소리로 클로드를 불렀다. 오늘은 처음 봤을 때부터 특히나 애교를 담뿍 담아서 그를 보고 웃어주기까지 했다. “저 얼마 후에 있을 데뷔당트가 너무 걱정돼요.” 하지만 지금은 웃을 타이밍이 아니지! 나는 눈썹 끝을 추욱 내리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불쌍한 기운을 폴폴폴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른한 손짓으로 찻잔 속의 액체를 휘젓던 클로드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쩐 일로 리페차 대신 선택한 다른 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지 딱 한 번 찻잔을 입에 댄 뒤로는 줄곧 지금처럼 그 내용물만 휘휘 젓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혹시라도 긴장해서 실수하면 어쩌죠.” “실수해도 된다.” 그러자 클로드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춤 연습도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래도 걱정이에요.” “걱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만약 실수를 한다 해도 옆에서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필릭스 탓이 아니겠나.” 여, 역시 클로드는 뒤끝이 쩔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렇게 필릭스 저격을!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가라앉히며 계속 ‘얼마 남지 않은 데뷔당트를 걱정하는 어린 딸’ 연기를 했다. “그래도 다들 흉볼 거 아니에요.” “마지막 유언치고는 거창한 편이로군.” 헉. 누구든 내 흉을 보면 그걸 유언으로 만들어주겠다 이거냐! 이건 좀 감동이었다. 아, 아니. 물론 방법이 좀 과격하긴 하지만! 그래도 무심한 척 딸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줄 줄도 알고. 정말 많이 발전했잖아요. 으아앙. “그리 대단하게 생각할 것 없다. 정 불편하다면 그저 의례상의 춤 한 번만 추고 나오면 끝날 일이니.” 클로드는 데뷔당트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런 클로드의 얼굴을 보며 오늘의 목적을 다시금 상기했다. 자아, 밀당은 여기에서 끝냅시당! “사실은 저요, 그날 아빠 손잡고 같이 들어가고 싶어요.” 나는 주저주저하며 말할까 말까 하다가 말한다는 듯이 웅얼거렸다. 그러자 찻잔 위에서 느리게 움직이던 클로드의 손이 우뚝 멈추어졌다. “첫 춤도 아빠랑 같이 추고 싶고.” 밀당도 길어지면 독이 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있어서 필릭스나 클로드나 좀 더 괴롭혀 주고 싶었지만 이쯤해서 그만둬야지. “14살 데뷔당트를 축하한다는 말도 아빠한테 제일 먼저 듣고 싶어요.” 슬쩍 눈치를 보니 클로드가 찻잔을 젓던 것도 멈춘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포인트는 바로 여기다! “하지만 아빠는…….” 나는 내 앞에 있는 찻잔을 양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최대한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시겠죠.” 작은 아티는 꼭꼭 아빠랑 같이 연회장에 들어가고 싶은데 아빠가 싫어할 것 같아서 지금 시무룩합니다. 아무룩. 그런 티를 팍팍 내자 티스푼을 든 클로드의 손이 한순간 움찔했다. 오호라, 확실히 입질이 오나 보다. “그래서 필릭스한테 대신 부탁한 거긴 하지만요. 그래도…….” 필릭스가 들으면 섭섭해할지도 몰랐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당사자도 없으니 괜찮았다. 왜냐하면 지난번 내 폭탄선언 이후 클로드가 다과 시간마다 필릭스를 우리 옆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아빠랑 가고 싶은데…….” 움찔. “살면서 딱 한 번 있는 데뷔당트인데.” 움찔. 내가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클로드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표정은 여전히 방금 전과 별 차이가 없는데 저런 자잘한 부분에서 티가 났다. 나는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이 또 아련하게 미소 지어 보인 뒤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헤헤. 너무 욕심 부리지 말아야지.” “…….” “아빠처럼은 아니어도 필릭스라면 그래도 옆에서 저를 잘 도와주겠죠. 아빠한테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저 노력할게요.” 달칵. 티스푼을 아래로 내려놓은 클로드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는 잔을 기울여 옅은 향기가 풍기는 액체를 쭈욱 원샷한 뒤 다시 팔을 내렸다. “흠. 그렇게까지 소원이라면.” 그리고 마침내 클로드가 못 이긴 척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빠밤! 월척입니다! 파닥파닥! 갓 잡아 올린 신선한 클로드 대어입니다! “딱히 들어주기 어려울 것도 없다.” “정말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냉큼 화색하며 반문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반응이었다는 것처럼 나는 곧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 춤추고 그러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기껏 해야 에스코트 한 번, 춤 한 번 추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클로드는 어느덧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그는 다시금 티스푼을 들어 찻잔 속의 액체를 느리게 빙글빙글 휘저었다. “그래도 괜찮으세요? 요즘은 아빠랑 같이 데뷔당트 파트너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다른 귀족들이 수군거리기도 한다고 해서, 전 혹시나 아빠도 기분 상하실 일이 생길까 봐.” “내가 하는 일에 누가 감히 뭐라고 한다는 거지?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은 없을 것이니 너도 괜한 데 신경 쓸 필요 없다.” 역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그는 내 고민이 아주아주 쓸모없다는 듯이 코웃음까지 치면서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 최고십니다. 나는 확인 사살을 위해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저랑 같이 데뷔당트 파티에 가주실 거예요?” “그렇게까지 원한다는데 하는 수 없지.” 그는 어디까지나 내가 원하니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간절하고 절실하게 일생의 소원이라고까지 하니 어쩔 수 없이 은혜를 베풀어 같이 가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같이 지낸 세월이 있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이건 좀 귀엽지 않은가. 그럼 저도 당근을 드려야죠! “본래 그런 시끄러운 자리는 딱 질색이나 특별히…….” “아빠아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맞은편에 앉은 클로드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말요? 정말요? 진짜 그날 저 에스코트해 주시는 거예요? 저랑 같이 춤도 춰주시는 거죠?” “그.” “아, 정말 기뻐요! 어떡해, 너무 좋아. 이게 꿈은 아니겠죠?” 클로드를 끌어안은 채로 호들갑스럽게 재잘거리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말할 틈을 안 준 것도 맞지만 이 사람 지금 당황했다. 도무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떤 반응을 내보여야 할지 몰라서 굳어 있는 티가 났다. “무르시기 없어요. 저랑 약속하신 거예요?” 나는 진짜 너무 행복해서 주체를 못하겠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클로드가 그런 나를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마침내 느리게 말했다. “그래. 약속하마.” 올레! 이제 됐다! “고마워요, 아빠. 역시 아빠밖에 없어요. 에헷.” 나는 마지막 공격으로 클로드의 뺨에 쪽, 뽀뽀까지 하며 대망의 데뷔당트 파트너 건을 해결했다. 그러고 나서 언뜻 내려다보았을 때, 그가 방금 전까지도 티스푼으로 마구 휘젓고 있던 찻잔은 액체 한 방울 없이 텅 비어 있어 나는 더욱 웃음을 참기 어려워지고 말았다. *** 나는 필릭스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서운해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어딘가 초췌했던 얼굴을 화악 밝게 개며 ‘감사합니다, 공주님!’을 외쳐 나를 다소 뻘쭘하게 만들었다. 끄응. 아무래도 그동안 필릭스의 마음고생이 내 생각보다 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동안 당신의 그 눈치 없는 행동에 내가 당했던 걸 생각하면! 왜 이래, 나도 뒤끝 있는 여자라고. 흑. “오벨리아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그리고 나는 막 가넷궁을 빠져나오던 길에 흰둥이 아저씨를 만났다. “알피어스 공, 오랜만이에요.” 또 댁입니까? 그래도 요즘은 눈앞에 잘 안 보인다 싶더니만. 하지만 속이야 어떻든 간에 나도 웃으며 그에게 인사해 주었다. 나도 이제는 나이가 있으니 ‘흰둥이 아저씨’라는 호칭은 진작 졸업한 뒤였다. 옆에 있던 필릭스도 로저 알피어스와 심심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이상할 정도로 나랑 자주 마주치는 것 같단 말이지? 아닌가? 그동안 가끔씩 이렇게 가넷궁 앞에서 다른 가신들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만 보낼 뿐, 나한테 굳이 말을 걸지 않아서 그런가?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쓰읍. 이렇게 매번 립 서비스를 잊지 않고 말이야. “허허. 알현 시간보다 이르게 입궁하길 잘했군요. 이렇게 우연히 공주님을 다 뵙고 말이지요.” ======================================= [51화] 호오. 이건 좀 새까만 아우라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저 사람이 말하는 ‘우연’이란 보통 그 앞에 ‘계획된’이라거나 ‘만들어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마땅하지 않던가. “저도 이렇게 우연히 알피어스 공을 만나게 되니 반갑네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러고 보니 공주님의 데뷔당트가 얼마 남지 않았더군요.” 흐응. 내 데뷔당트 이야기였네. 겉으로 태연히 웃으며 그의 말을 듣던 나는 이어지는 목소리에 썩소를 짓고 싶어졌다. “그날 손을 맡기실 짝은 정하셨는지…….” 이 양반이 지금 날 의식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가? 그날 이제키엘하고 같이 제니트를 데리고 올 생각이라 내 파트너는 누구인지 미리 알아두려고? 우리 제니트 짝은 벌써부터 오벨리아 최고의 신랑감으로 회자되는 이제키엘인데 네 파트너는 내 아들보다 못하지? 뭐 이런 건가? 그래서 나 약 올리려고? 허허.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짜증 나네. 로저 알피어스는 조심스럽게 물은 뒤 그 후로 조용히 내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내용을 알아서 그런지 그런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친히 알피어스 공작에게 크고 아름다운 엿을 선사해 주기로 했다. “그야 당연히 정했죠.” 나는 로저 알피어스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화려한 똥을 투척했다. “아바마마가 함께 가주시기로 했답니다.” 다 비키라 그래. 내 파트너는 이 나라 황제다! 때마침 지금 막 클로드와 이야기도 마치고 온 참이라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황제면 이 나라 일짱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제 할 말 없지? 할 말 없지? 옆에서 필릭스도 아주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일이 해결되어 마음이 무척 가벼운 것 같았다. 로저 알피어스의 흔들리는 음성이 내 귀를 파고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폐하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는 내 말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듯 드물게도 눈동자의 흔들림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께서 정말, 공주님의 에스코트를…….” 그래, 놀랄 만도 하지. 이 아저씨도 클로드의 그 성격을 다 알고 있을 텐데. 크흡. 당혹감으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겸손하게 말했다. “물론 제가 먼저 부탁드린 것이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클로드의 체면이 있으니 내가 먼저 조른 것으로 해두는 게 나았다. 그러니 이만 진정하지 않겠나, 흰둥이 씨. 하지만 알피어스 공작은 아직까지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듯 내 말을 곱씹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공주님의 청을 폐하께서 흔쾌히 수락하셨다는 말씀이군요.” 마침내 로저 알피어스가 다시금 동요를 가라앉힌 낯으로 나를 향해 너털웃음 지었다. “허허. 이런 놀라운 일이.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폐하께서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이만저만 아끼시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나는 그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신중한 빛을 띠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쯧. 이 아저씨 또 머리 굴리고 있구먼.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는 나도 그만 무심결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 참, 아쉽군요. 혹, 아직 상대를 정하지 못하셨다면 제 아들은 어떠신지 여쭈어보려 했는데.” “알피어스 공의 아들이요……?” “소식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제 아들이 이번에 아를라타에서 수학을 마치고 오벨리아로 돌아왔답니다.”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을 잃을 차례였다. 이, 이 아저씨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남몰래 또 다른 아들을 숨겨놓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이 아저씨가 말하는 건 이제키엘일 수밖에 없잖아?! 지금 그 이제키엘을 내 파트너로 붙여주려고 했다는 거야? “아무래도 제가 한발 늦은 것 같군요.” 아니, 이제키엘은 제니트랑 같이 손잡고 사이좋게 데뷔당트 파티에 오는 거 아니었습니까? 제니트는 어쩌고 이제키엘을 나랑 같이 붙여주려고 한대요? “알피어스 공자가 제게 그런 청을 하고 싶다던가요?” “공주님을 보필하는 자리인데 제 아들에게도 당연한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키엘의 의사는 아니라는 거군. 내 생각에는 어릴 때 그를 내 친구로 붙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흰둥이 아저씨 혼자서 설레발 치고 나한테 떡밥이나 던져 보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만약 내가 걸리면 그 나름으로 나쁠 것 없는 일로 치려고. 이것 참. 제니트 노선으로 아예 한 길만 파는 게 아니라 나한테도 한 다리 걸쳐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이 능구렁이 아저씨가 나한테도 그물을 펼친다는 건,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가 놓치기 아까운 물고기라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알피어스 공에게 자주 이야기를 들어 그런지 저도 호기심이 생기네요. 데뷔당트 파티 때 만날 수 있겠죠.” “예. 그때 인사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알피어스 공작과 나는 서로에게 속내를 숨긴 웃는 얼굴로 마지막까지 대화하다가 이내 여상한 인사말을 남긴 채 헤어졌다. 어유, 저 능구렁이. “알피어스 공자와는 매번 엇갈리는군요.” “그러게.” 으앗. 필릭스의 말에 대꾸하면서도 약간 찔렸다. 그의 말은 반만 맞는 것이었으니까. 난 이미 이제키엘하고 비공식적으로 만나 버렸는데!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계속 그와의 만남을 미루고 있기는 했다. 나도 흰둥이 아저씨의 원대로 해주기 싫어서 매번 튕기기는 했지만 클로드가 퇴짜를 놓은 경우도 만만찮게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내 데뷔당트 날이면 끝인 건가. ‘그래도 괜찮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나는 지난번 만났던 이제키엘을 떠올렸다. 흰 꽃잎이 눈꽃처럼 흩날리던 그곳에서 희미하게 웃으며 내게 속삭이던 그를. “아, 마법사님이시네요.” 바로 그때 옆에서 들려온 필릭스의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눈길을 돌렸다. 대대로 공주들이 사용하던 에메랄드궁은 후궁전이던 루비궁보다 덜 고립되어 있어서 이렇게 가넷궁과 연결된 길을 오가다 보면 황궁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흰둥이 아저씨 같은 가신들이나 황실 마법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저 멀리서 보이는 푸른빛 도는 깜장 머리에 한순간 주변의 시선을 잊고 큰 소리로 외쳤다. “루카스!” 옆을 지나던 궁인들이 내 외침을 듣고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릴 정도였으니 까만 또라이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나와 단둘이 있을 때야 어떻든, 밖에서만큼은 건실한 미소년 천재 마법사를 자청하고 있던 루카스가 나를 뒤돌아보았다. 동요 없는 붉은 눈동자에 약간 심통이 났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내 앞에 코빼기도 내비추지 않았던 루카스를 향해 웃으며 약간 빈정거렸다. “요즘 무척이나 공사다망하신가 보죠? 얼굴 보기가 아주 힘듭니다?” 하지만 그는 내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양 나에게 그저 겸손히 답할 뿐이었다. “황실의 녹봉을 받는 신하로서 게으름을 피워서야 쓰겠습니까.” 헛. 이 월급 도둑이 지금 뭐라고 하니? 나는 루카스의 뻔뻔한 헛소리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자고로 황실의 가신이라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해야지요.” 필릭스는 루카스의 말에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말이다. “말씀처럼 한동안 공사다망하여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그간 건강히 잘 지내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요.” 웃기고 있네. 네가 정말 내 걱정을 했으면 그렇게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았을 리가 있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에 나타나서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들던 놈이 빈말은. “송구합니다만 지금도 바로 탑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진짜 바쁜 거야?” 그런데 얼굴을 보자마자 곧바로 가봐야 한다는 말에 이놈이 진짜 할 일이 있어 바쁜 건지 긴가민가해지기 시작했다. 대륙 최강의 마법사였던 검은 탑의 마법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오벨리아의 황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거처를 ‘검은 탑’이라 명명하고 있었다. 대륙에서도 그 수가 적은 마법사들이었기 때문에 오벨리아에서도 그들은 꽤나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잘은 몰라도 루카스는 그중에서도 특히 인정받는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최연소 황궁 마법사가 된 이후부터는 황실 마법사들이 쉴 새 없이 자신을 찾는다고 내 앞에서 투덜거리곤 했으니. 나는 의심과 궁금증을 담은 눈빛을 보냈으나 루카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나를 잠시 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뭐야, 오랜만에 만나서는 또 시비 걸려는 건가? 나도 눈싸움에서 지지 않는다고. 당연히 잘못한 게 없는 나는 당당히 루카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쳐 줬다. “잠시.” 그러자 쯧, 하고 작게 혀를 차는가 싶던 그가 돌연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이마에 따뜻한 체온이 닿고, 그 직후 착각인지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잉? 얘 지금 뭐한 거래요. “어린아이도 아닌데 이런 것을 붙이고 다니십니까.” 잠시 후 비웃음과 함께 루카스가 손에서 날려 보낸 것은 어디서 붙었는지 모를 나뭇잎이었다. 어, 이상하다. 왜인지 얘가 내 이마에 손을 대고 나서부터 묘하게 몸이 가벼워진 느낌인데. 하지만 곧 루카스가 내게서 뒤돌아섰기 때문에 내 의문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몹시 바쁘긴 하나 짬을 내서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아무래도 공주님께서 저를 많이 그리워하시는 듯하니.” “호호. 농담도.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몰라.” 나는 얄밉게 웃는 루카스를 향해 마찬가지로 흥 콧방귀를 뀌어주었다. “이제 돌아가시죠, 공주님.” “그래.” 그러고 나서 에메랄드궁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처음 그곳을 나설 때보다 확연히 가벼워져 있었다. 어쩐지 밀려두었던 숙제를 오늘 전부 해결한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생일 축하드려요, 공주님.” “축하드립니다.” “우리 공주님이 벌써 열네 살이시라니.” “아, 정말 감동이에요.” 평소처럼 이것저것 배우고 춤 연습하고 했을 뿐인데 벌써 내 생일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사실 나는 내 생일이라 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네 사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릴리, 필릭스, 한나, 세스 모두 감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부족하지만 공주님을 생각하며 열심히 준비한 선물입니다.” “여기, 저도요.” “제 것도 있어요, 공주님.” “한번 풀어보세요.” 나는 두근두근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 틈에서 약간 어색한 기분으로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와아. 예쁘다.” 필릭스의 선물은 데뷔당트 때 신어도 될 법한 화려한 구두였다. 크리스탈로 장식된 흰 구두는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공주님께 정말 잘 어울려요.” 릴리의 선물은 보석함인가 싶었지만 뚜껑을 열면 맑은 음악 소리가 흐르는 오르골이었다. 어여쁜 소녀가 세공된 오르골은 테두리까지 전부 금이었는데, 알알이 박힌 색색의 보석들까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 [52화] 세스는 나를 위해 직접 만든 것이라며 가운데 있는 붉은 보석 주위로 반짝이는 구슬들이 박힌 머리핀을 선물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한나의 선물은 까망이를 본 떠 만든 것 같은 푹신푹신한 검은 인형이었는데, 까망이도 이 인형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이 옆에서 꼬리를 마구 흔들며 헥헥거리고 있었다. “전부 다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정말 고마워.” 나는 선물을 차례로 풀어본 뒤 그들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 온 일인데도 생일 때마다 선물을 받는 것은 어딘가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그만큼 고마운 마음도 컸다. “공주님을 만난 것이 제 생의 가장 큰 기쁨이랍니다.” 릴리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속삭인 말을 필두로 다른 세 사람도 차례로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생일 축하드립니다, 공주님.” “내년 생일에는 더 멋진 선물을 준비할게요.” “앞으로도 공주님께 항상 즐겁고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뀽!” 내 머리에 묶은 것과 세트인 붉은 리본을 목에 맨 까망이도 의자에 앉은 내 허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고마워요, 다들.” 나는 공연히 쑥스러워져서 헤헤 웃었다. “자,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케이크예요.” “와아아! 빨리 먹자, 릴리의 특제 케이크!” “저도 같이 만들었다고요, 공주님.” “그래, 릴리와 한나의 특제 케이크!” “케이크 위에 있는 장식은 세스가 만들었답니다.” 내 생일 케이크는 한마디로 짱짱 멋졌다! 매년 사이즈도 업업! 초콜릿의 당도도 업업! 그리고 내 살들도 업업! 크흑. 그래도 이런 날은 안 먹을 수 없지! “맛있다! 다들 빨리 안 먹으면 내가 다 먹을 거야!” 나는 생일 때면 늘 그렇듯, 또 다시 나 몰래 짠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네 사람을 향해 외치며 까망이와 함께 초콜릿 케이크를 전투적으로 해치웠다. *** “안녕히 주무세요, 공주님.” “릴리도 잘 자.” 으아아, 배불러. 생일 때는 항상 나도 모르게 과식하게 된다니까. 이건 다 릴리의, 아니, 릴리와 한나와 세스의 특제 생일 케이크가 너무 마약 같기 때문이야. 으아앙. “아타나시아 공주님.” 릴리는 곧바로 방을 나가지 않고 침대 머리맡에 와서 살며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공주님은 저뿐만 아니라 오벨리아 모두의 보배시랍니다.” 매번 내 생일 때면 잠들기 직전 그녀가 내게 해주는 말이었다. “저에게도, 다른 분들에게도 그 자체로 아주 귀하고 소중한 분이세요.” 이럴 때의 그녀는 꼭 엄마 같았다. 물론 나는 한 번도 엄마가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소 띤 얼굴로 내 손을 잡고 속삭이는 릴리의 얼굴을 보며 나도 눈을 접어 웃었다. “나도.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릴리.” 내 생일만 되면 그들이 어떻게든 내 기분을 밝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서 결국은 나도 그냥 바보처럼 웃는 것을 선택했지만 나를 생각해 주는 그 예쁜 마음들이 고맙지 않은 건 아니었다. 릴리는 내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해준 뒤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나는 조용한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잠이 안 와서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스름한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내 생일은 이대로 지나가려나 보다. “그래도 이번에는 혹시나 싶었는데.” 결국 클로드는 내 14번째 생일에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나는 이럴 때마다 기분이 묘하게 이상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처럼 클로드에게 섭섭하다거나 혼자서 풀이 죽어 우울하다거나 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어릴 때 클로드의 방에서 깨진 초상화 액자를 보았을 때나, 그가 나에게 다이아나의 꿈을 꾸게 해주었을 때, 혹은 내가 처음으로 그에게 먼저 안기며 뺨에 입을 맞춘 순간 클로드가 한순간 무방비하게 내보이고 말았던 그 표정을 보고 말았던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 별론데.” 마치 알아서는 안 될 동전의 뒷면을 몰래 엿본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아니, 찜찜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느낌을 나는 아직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 모든 순간을 눈에 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때때로 들었다. 그럴 때의 클로드는, 정말이지 평범한 사람 같아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냉혹한 사람이 아니라, 슬픈 일에 울고 기쁜 일에 웃고 또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그런 보통의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리고 예전 같으면 생존을 위해 그에게서 발견되는 그런 인간다운 면을 마냥 기쁘게만 여겼을 내가 어째서인지 더 이상은 그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 몰라.” 몰라, 몰라. 이런 복잡한 건 딱 질색이란 말이야. 아무튼, 클로드가 왔으면 오히려 더 어색해질 뻔했는데 차라리 잘됐지, 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몸을 반대쪽으로 끙차 뒤집었다. “모르긴 뭘 몰라?”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는 놀라지도 않고 침대에 누운 채로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달빛을 등진 채 서 있는 루카스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툭 내뱉듯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내 생일이라고 와준 걸 알았다. 물론 따로 선물을 준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지난 6년 동안 루카스가 내 생일날 밤에 나를 혼자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짜식. 이왕 올 거면 선물도 좀 들고 올 것이지. 하지만 이놈에게 그런 센스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나는 생일마다 늘 그래 왔듯 알아서 그에게 내 생일 선물을 요구했다. “까망이 보러 가자.” “너 내 말 귓등으로 듣지? 진짜 확 먹어버린다.”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보러 가자!” 그래 봤자 까망이를 먹는다는 게 빈말이란 걸 알아서인지 이제는 무섭지도 않았다. 루카스도 자신의 협박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얼굴을 구겼다. 어차피 데려다줄 거면서 앙탈은. 결국 내 예상대로 루카스는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쏴아아. 그리고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우리는 밤바람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후원에 도착해 있었다. “까망아!” 까망이는 잔디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다가 우리의 인기척을 느끼고 귀를 쫑긋거렸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게 나라는 걸 깨닫자마자 벌떡 일어나 풍성한 털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끼잉!”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이제는 내 허리 높이만큼 오는 까망이가 달려들어서 나는 그대로 잔디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유, 우리 까망이 언니 보고 싶었어요? 오구오구.” “뀨웅!” 나는 그래도 좋다고 까망이랑 같이 잔디를 뒹굴며 히히덕거렸다. 청소년에게 있어서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제일 꿀잼인 건 어른들 몰래 하는 늦은 밤의 비밀스러운 일탈 아니겠습니까? 루카스가 나를 향해 구시렁거렸지만 나는 그냥 까망이의 까만 털에 얼굴을 묻으며 헤죽거릴 뿐이었다. “추워 죽겠는데 무슨 짓이냐고.” “보온 마법 걸어주면 되잖아.” 아무리 날이 따뜻하다고 해도 밤바람이 약간 서늘하기는 했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몸에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고맙다는 의미를 담아 루카스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 역시 까망이랑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따뜻한 체온이 몸 속 깊은 곳까지 스며서 노곤노곤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게 바로 애니멀 테라피인가? 뭔가 좀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자. 너 또 그거랑 뒹굴다가 정신 놓을 거잖아.” 이 자식. 내가 까망이랑 놀다가 자는 걸 저런 식으로 말하다니. 크흡. 그래도 내가 나도 모르게 잠들면 방까지 다시 데려다주는 게 루카스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우리 까망이 요즘 밥을 잘 먹었나. 좀 살이 찐 것 같은데.” “뀨잉!” 뭐, 푹신푹신하니 좋긴 했다. 나는 까망이를 끌어안고 별이 총총히 뜬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따끈따끈한 체온에 감싸여 있으려니 잠이 올락 말락 했다. 나는 약간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 이제 데뷔당트야.” “알아.” “실수 안 하겠지?” “네 아빠가 실수하면 안 된대?” “아니.” “그럼 뭐가 문제야.” 이 자식. 사람이 고민 상담을 하는데 성의 없긴. 그래도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지긴 했다. “너 맨날 발바닥에 불나게 연습했잖아. 바보가 아니면 어지간한 정도로는 하겠지.” 무심하기 짝이 없는 심드렁한 목소리가 낮게 흔들리는 잔디 사이로 가물거리다 사그라졌다. “떠들지 말고 자라니까.” “내가 뭘 얼마나 떠들었다고 그래?” “네가 원하는 까망이까지 대령해 줬으니까 빨리 눈 감아. 네가 잠들어야지 나도 가서 잘 거 아니야.” “치사해…….” 아, 진짜. 이왕 내 생일이라고 서비스해 주는 김에 좀 더 놀아줄 것이지. 으윽. 그래도 평소에는 까망이랑 붙어 있지 말라고 성질부리는 놈이 내 생일이라고 밖으로 데리고 나와 준 데다 또 까망이랑 뒹굴거리다가 잠든 나를 다시 방으로 곱게 돌려보내준 은혜가 있으니 따지지는 말아야지. 약간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감자 살랑살랑 이마를 간질이는 바람이 느껴졌다. 코끝을 스치는 풀잎 냄새도. 포근하게 온몸을 감싸주는 따스한 온기에 서서히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왜인지 생일 때는 잠이 잘 오지 않았는데 까망이를 안고 있으려니 저절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역시 애니멀 테라피가 최고시다. 크으으. “잘 자, 루카스.” 잠들기 직전 나는 그에게 웅얼거리며 인사했다. 어쩐지 잠시 후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으나 수면 속에 가라앉기 시작한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미처 닿지 않았다. 나는 까망이를 끌어안은 채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 그리고 시간은 흘러 마침내 데뷔당트의 날이 밝았다. “공주님, 서두르세요. 시간이 없어요.” “저기, 세스……. 나 지금 일어났는데?”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아무리 일찍 준비를 해도 부족한걸요!”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몽롱한 내 목소리에도 세스는 나를 재촉해 자리에서 일으켰다. 아니, 데뷔당트는 해질 때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무슨 이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세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시녀 언니들의 기세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으어? 평소에는 존재하는 듯 안 하는 듯 언제나 조용히 옆에 머물고 있던 언니들이 갑자기 왜 이렇게 전투 모드인 거지? 나는 비몽사몽간에 얼떨떨한 상태로 그녀들에게 이끌려 욕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때부터 고문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공주님 눈을 감아주세요.” “다리를 좀 더 쭉 펴주세요.” “몸에 힘을 푸시고 편하게 누우세요.” 평소에도 시녀 언니들이 내 목욕 시중도 들어주고 하긴 했지만 지금은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리를 받고 있었다. ======================================= [53화] 욕조 속에 미용과 피로 회복과 혈액순환과 기타 등등에 좋다는 향기로운 꽃잎이며 약초이며 오일을 마구 가져다 넣는 것은 기본이고, 내 몸에 피부 미용에 도움을 준다는 뭔가를 치덕치덕 발라대며 온갖 곳을 주무르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식으로 관리받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 짓은 정말이지 몇 번을 해도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중요한 날이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많은 시녀 언니가 내게 달라붙어 있어서 더 부끄러웠다. 으아앙. 이런 수치 플레이는 싫어, 싫어. 하지만 내 창피함과는 상관없이 언니들은 얼굴에 증기를 쐐 수분 공급을 해야 하니 눈을 감아라, 어깨가 뭉쳐 있으니 힘을 빼고 편하게 있어라, 구석구석 마사지를 해야 하니 발끝까지 일직선이 되게 다리를 조금 더 쭉 펴라, 자꾸만 꼼지락거리지 말아라 등등의 요구를 해댔다.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공주의 데뷔당트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그동안 한껏 차려입고 어딘가를 간다 해도 에메랄드궁에서 도보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황제궁의 클로드와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물론 클로드를 만나러 가는 데에도 꽃단장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다른 귀족들 앞에 처음 나서는 데뷔당트라 그런지 시녀 언니들도 오늘따라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나는 데뷔당트 준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오늘에서야 똑똑히 깨달았다. 물론 에메랄드궁으로 사람을 불러 오늘 입을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 등을 맞출 때에도 무척 긴 시간을 들여 고생하긴 했었지만 말이다. 아침에 나를 깨운 직후 곧장 세스와 한나에게 뒷일을 맡기고 사라졌던 릴리는 내 준비를 도울 다른 시녀 언니들을 통솔하느라 바빴다. 나는 기나긴 목욕 후에 마침에 다시 만나게 된 그녀가 나를 구해 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오늘 에메랄드궁에는 전투력이 만렙에 달한 언니들밖에 없나 봐. 크흑. “이거 더 먹고 싶어.” “너무 많이 드시는 건 곤란해요.” “하지만 배고픈걸?” “두 시간 후에 간단히 요기하실 만한 걸 드릴게요.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런 식으로 식사도 조금씩, 겨우 공복만 달랠 수 있는 간단한 과자류 같은 걸로 채워야 했다. 한나한테 들어보니 최상의 몸매를 위해 아예 하루 종일 굶는 귀족 영애들도 있다던데. 그래도 난 굶지는 않아서 기뻐해야 하는 건가. 으앙. 아니, 이게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짓인데 왜 밥 하나 제대로 못 먹으면서 파티 같은 걸 해야 한대요? 남자들은 파티 때마다 안 굶겠지? 남녀 차별 너무해! 개억울! “공주님 이제부터 한 시간 동안은 말씀하시면 안 돼요.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그녀들은 또 나를 앉혀놓고 내 얼굴에 열심히 뭔가를 발랐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팩과 비슷한 효능인가 본데. 아까 목욕할 때 하던 거랑은 또 다른 건가? 으어어, 불편해. “얼굴도 찡그리시면 안 돼요.” 그리고 그러는 동안 릴리가 내 머리에도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핫. 그렇지 않아도 피곤했는데 머리를 만져 주니 노곤노곤해져서 잠이 온다. “피곤하시면 잠시 눈을 붙이셔도 괜찮아요.” 내 상태를 가장 빠르게 알아챈 릴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뒤에서 속삭였다. 으앗. 사실은 긴장해서 잠을 설친 터라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으윽, 이 나이 먹고 긴장이라니 부끄럽당. 쑥스럽당. 크으윽. 하지만 밀려드는 수마 앞에서는 부끄러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병든 병아리처럼 앉은 자세로 꾸벅꾸벅 졸다가 짧은 쪽잠에 들었다. *** 본래 데뷔당트는 일 년 중 마지막 달의 1일에 열리곤 했으니 추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벨리아는 1년 내내 봄과 여름만이 지속되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거울 한번 보시겠어요?” 그건 아주아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같은 날 나 같은 여자애들은 추워서 벌벌 떨 수밖에 없지 않았겠어? 이렇게 하늘하늘 얇은 옷을 입고 있는데 말이야. 잠시 후의 데뷔당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멋을 부리고 시녀 언니들에 의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신해 재탄생된 나는……. “어떠세요?” 완전히 꿈속에서 만난 요정 언니의 미니미 버전이었다! 으아앙! 아타나시아는 원래도 본판이 한 미모 했었는데 이렇게 꾸며 놓으며 이건 정말 사기캐 아닌가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공주님.” 오늘을 위해 노력해 준 시녀 언니들 모두가 자랑스러움과 감동이 뒤범벅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오늘 데뷔당트 파티에서 분명히 공주님이 가장 아름다우실 거예요.” 나도 그녀들을 향해 고마움을 담아 환하게 웃어주었다. 데뷔당트 때에는 흰 드레스를 입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나 역시도 순백의 하얀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나는 언뜻 비슷해 보이는 흰 드레스들에도 이토록 많은 디자인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처음 알았다. 처음으로 사교계의 문을 두드리는 데뷔당트 날 어른스러운 모습을 부각하고 싶은 마음에 과한 노출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도 좀 나이가 들면서 느낀 건데 원래 아이는 아이다운 것이, 또 소녀는 소녀다운 것이 가장 보기 좋은 법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레이스가 나풀나풀하고 너무 유아틱한 드레스도 곤란했다. 그래서 릴리와 함께 고르고 고른 드레스가 바로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이었다. 이 드레스는 한마디로 말하면 아타나시아의 소녀다운 순수함과 풋풋함, 또 요정 같은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요정 드레스라고 할 수 있었다! 재질도 얇고 보들보들한 데다 특히 치맛단이 겹겹이 덧대어져서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면 마치 한 송이의 흰 꽃이 개화하는 것만 같은 모양이었다. 주름을 잡아 적당히 부풀린 소맷단에도, 쇄골을 드러낸 드레스의 앞부분에도, 가슴 아래를 조이며 허리 뒤로 길게 늘어뜨린 리본에도 보석이 박혀 있어 내가 움직일 때마다 신비로운 빛을 냈다. 구두는 필릭스가 선물해 준 것 말고 다른 것을 착용했다. 내 생일 이전에 이미 맞춰놓은 것이 있는 데다, 그때 주문한 두 켤레의 똑같은 구두 중 하나를 신고 굽 높이에 익숙해지도록 춤 연습을 했던 터라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혹시나 익숙하지 않은 신발을 신었다가 사람들 앞에서 대자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흑흑. “티아라는 최대한 단단히 고정시켰으니 쉽게 모양이 흐트러지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 이 티아라도 진짜 예쁘다. 평소에도 결 좋고 예쁘게 굽실거리던 머리카락에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오늘따라 내 금발에는 윤기와 탄력이 넘쳐 보였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 위에 티아라까지 얹자 나는 정말 공주 같았다! 장신구는 너무 지나치지 않게 붉은 가넷이 박힌 귀걸이와 목걸이, 그리고 팔찌만 찼는데, 아타나시아의 생김새 자체 때문인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해 보였다. “공주님. 이제 나가보셔야죠.” 밖에서 무슨 전갈을 받았는지 잠시 방을 나갔다 온 릴리가 곧 나를 향해 말했다. 벌써 나가야 할 시간인가? “오늘은 분명 공주님께 멋진 데뷔당트가 될 거예요.”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기도하듯, 그리고 나를 응원하듯 미소 띤 얼굴로 속삭였다. 나도 그녀를 보고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웃어주었다. “응. 분명 그럴 거야.” 그야, 나는 원작 속의 아타나시아가 아니니까. 릴리와 다른 시녀 언니들의 응원도 있겠다, 오늘 하루 파이팅 할게요! 그러고 난 뒤 나는 그들의 격려를 받으며 방을 나섰다. “공주님.” “필릭스.” 문 앞에는 필릭스가 정복 차림을 한 채 서 있었다. 헉, 기사 복장인가? 역시 남자는 제복! 으윽, 심장에 좋지 않다. “오늘따라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우십니다.” 평소에 말수가 적던 시녀들까지 내게 아름답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감이 가득 차오른 상태였는데 필릭스까지 가감 없이 놀란 얼굴을 보여주자 약간 쑥스러워 웃음이 났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죠.” 그래도 오늘은 내가 딱 봐도 굽 높은 신을 신고 있어서 그런지 필릭스도 그냥 내 뒤에서 걷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에스코트해 주려고 했다. 나는 필릭스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으악, 그런데 에메랄드궁전의 계단이 원래도 이렇게 많았었나?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네! 그래도 옆에서 다른 시녀 언니들이 우리를 선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밖으로 표출해서 분위기를 깨게 만들지는 않았다. “폐하. 공주님을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클로드를 만나게 되었다. 헉.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예장을 잘 차려입은 건 처음 본다. 평소에는 맨날 석유 부자 같은 천 조각이나 대충 걸쳐 입은 모양새인데다 그나마 일 년에 두어 번 외국 사신들을 맞을 때에나 격식 있는 옷차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설마 오늘이 내 데뷔당트라고 빼입은 거야? 그런 거야? 그런데 당신 애 아빠 맞아요? 왜 이렇게 번쩍번쩍 빛이 나는 거죠? 그런 생각에 나는 그를 보고 놀랐고, 클로드도 나를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나와 마주치는 순간 잠시 움찔거리며 가늘어지다가 이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다. “추워 보이는군.” 저런 말이 이렇게 예쁜 나를 보자마자 처음 내뱉는 말이라니. 허허.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아빠, 오늘 굉장히 멋있어요!” 어쩌겠니. 내가 먼저 금칠을 해줘야지. 자, 칭찬 머겅. 두 번 머겅. 많이 머겅. 그러자 클로드가 나를 보며 다소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가 싶었다. 으음. 보아하니, 내색하지는 않고 있어도 내 생일날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것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오늘이 내 생일 이후로 처음 보는 거였지. 하지만 아마도 그건 이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 나도 이해하는 수밖에. 게다가 그 사실을 이렇게 마음 걸려 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는 이미 괜찮았으니까. “오늘 아빠랑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기뻐요.” 나는 이번에도 클로드가 다이아나 때문에 내 생일 때 얼굴을 보이지 않은 것을 잊은 것처럼 그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그런 내 미소에 클로드의 눈동자도 조금씩 빛을 달리했다. 곧 그가 방금 전 필릭스가 그랬듯, 내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오늘.” 나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 직후 클로드가 나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무척 예쁘구나.” 그 단조로운 음성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지만 나는 표정 없는 그의 옆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이내 얕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고마워요, 아빠.” 내 말에도 그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무반응으로 일관했지만 그래도 내 웃음은 멈추지를 않았다. 클로드와 함께 손을 붙잡고 데뷔당트가 열리는 거대한 홀에 도착할 때까지도. ======================================= [54화] “클로드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아타나시아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공주님께서 드십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지금 이게 다 뭐 하는 거?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멍해져 있는 상태였다. 처음 회장 안으로 들어설 때 문 앞에 있던 사람이 클로드와 내 도착을 우렁찬 목소리로 알린 것이 내 긴장의 시작이었다. 암막처럼 길게 내려온 보라색의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 감미롭게 연주되고 있던 음악이 일시에 뚝 끊어졌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백, 수천 개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헉? 흐어억? 소, 솔직히 미친 줄 알았다. 나는 클로드의 손을 붙잡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다가 그 시선들을 받고 흠칫 제자리에 멈추어서고 말았다. “왜 그러지?” 얼굴은 여전히 웃는 상태인데 갑자기 제자리에서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 나를 향해 클로드가 물었다. 당신은 지금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하지만 나는 이미 멘붕이 온 상태였다! 끄아아앙! 생각해 보니까 나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선 건 처음이야! 게다가 주위는 바늘 굴러가는 소리조차 들릴 것처럼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 속에서 오직 내게 고정되어 있는 시선들만이 시끄러웠다. 허헉, 헉. 숨 막혀서 죽어버릴 것 같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나를 잠시 동안 내려다보던 클로드가 고개를 들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스윽 훑어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러자 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눈동자를 내리깔고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히익. 이것이 바로 권력의 참된 맛입니까? 지금만큼은 리스펙트! 이 순간만큼 당신이 내 아빠인 게 기뻤던 적은 없었어! 으아앙. 쳐다보고 있던 눈들이 사라지니 이제야 좀 살겠다. 하지만 클로드를 향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샘솟던 것도 잠시뿐, 곧 그가 내게 무심히 속삭인 말에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원한다면 식이 끝날 때까지 저들이 두 번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해주마.” “아, 아니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오늘 데뷔당트하는 게 나 혼자만인 것도 아닌데 말이야! 저쪽에 나처럼 하얀 드레스 입고 몇 달, 혹은 몇 년 전부터 오늘만 기대한 여자애들도 있는데 데뷔당트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겠다니. 그건 그냥 오늘 데뷔당트를 망치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크흑.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저 수많은 소녀의 원한을 사서 내 명대로 못 살지도 몰라. “아빠가 옆에 있어주실 거니까 괜찮아요.” 으윽, 하지만 아직도 속 울렁거려. 춤추다가 갑자기 쏠려서 토해버리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난 수치스러워서 죽어버릴 거야. 흐어엉. “의외로, 이런 별것도 아닌 일에 긴장을 하는구나.” 네? 별것도 아닌 일이라고요? 이 거대한 장소에서, 그것도 저 한가운데 있는 댄스홀로 지금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전 압사당해 죽을 것 같은데요? 와, 그런데 저기에서 춤을 춰야 하다니. 새삼스럽지만 미, 미쳤다. “어릴 때 그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잡아 뜯어 놓거나 겁 없이 얼굴까지 때려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일쯤이야 거뜬할 터인데.” 커헉! 클로드가 단조로운 음성으로 지나가듯 읊조린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해서 딸꾹질을 할 뻔했다. 이, 이런 식으로 기습 공격하기 있기 없기? 애초에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그게 몇 년 전인데? 흐히익, 이 사람 뒤끝 있는 건 알았지만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에, 에이. 전 그런 기억이 없는 걸요? 아빠도 참, 농담이 지나치세요. 하하하.” 나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것처럼 소리까지 내서 웃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넘어가지 않았다. “어린 것이 그때부터 퍽 당돌한 면이 있었지.” “아익, 그만 놀리세요.” 크앙! 내 흑역사 그만 말해! 때리고 싶다! 때리고 싶어! 하지만 그랬다가는 간만에 또 생존 위협을 느끼게 되겠죠. 흑흑. 그러는 동안 어느덧 클로드와 나는 댄스홀에 도달하게 되었다. 클로드가 입술을 약간 삐죽거리고 있는 나를 향해 남자 쪽에서 먼저 춤을 청할 때 보이는 인사를 했다. 물론 클로드답게 그 인사는 기름기를 쫙쫙 뺀 닭 가슴살처럼 지극히 간소화되어 있어 아주아주 단순하고 담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손.” 내가 똥개입니까? 크흑. 자기 집 강아지한테 손! 발! 굴러! 누워! 할 때처럼 말하지 좀 말아주실래요? “헤헷.”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달라면 드려야지요. 그, 그래. 적어도 지금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지는 않잖아. 나는 치맛자락을 양옆으로 살짝만 들어 올려 인사한 뒤 내 앞으로 내밀어진 클로드의 손에 내 손을 처억 얹었다. 크윽. 이러니까 진짜 똥개 같다. 그래도 방금 전 들은 클로드의 말이 나름의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더 이상은 아까처럼 긴장되지 않는 걸 보니 말이다. 그래, 사람들 보는 앞에서 춤 좀 추는 게 뭐 대수라고. 난 사람들이 벌벌 기면서 무서워하는 클로드 뺨도 때렸던 사람이야, 왜 이래! 쿠, 쿨럭. “마음을 편히 가지려무나.” 내가 클로드와 손을 맞잡자 지금껏 수백 번은 더 연습한 것 같은 미뉴에트의 음이 홀 안에 느리게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흘러드는 클로드의 목소리는 음악 소리에 묻힐 정도로 자그마했지만.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던 너만 즐거우면 그만인 날이니.” 그 어떤 소리보다도 크게 내 귓가에 박혀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손을 이끌며 움직이고 있는 클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비식 웃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내 긴장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옛날 얘기를 꺼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정말 마음이 편해졌으니 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나도 아무 말이나 해야겠다. “아빠, 제가 춤을 얼마나 잘 추는지 모르시죠? 깜짝 놀라지 마세요. 퐁파듀 부인도 매일 입에서 침이 마르도록 얼마나 제 칭찬을 했는지 모르…….” 콰악!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구두 굽 아래로 대리석 바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밟혔다. 클로드가 한순간 말을 잃은 내 얼굴을 보면서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렸다. “지금 네가 내 발을 밟았다는 건 알겠다.” “…….” 제, 제기랄. 정말 나한테 왜 이래요! 나 지금 잘난 척했는데! 한껏 거들먹거리면서 신이 내린 내 춤 솜씨를 자랑했는데! 그런데 왜 이 타이밍에 클로드 발을 밟고 만 건데요! 크아앙! 신이 있다면 정말 너무한 것 아닙니까? 흑역사는 이제 그만 줘도 되잖아요. 흐엉엉! “손힘이 야무진 건 진작부터 알았지만 발도 그렇다니.” “괘, 괜찮으시…….” “아프다.” “…….” 클로드가 너무 즉답을 해서 나는 더더욱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니, 발을 밟히자마자 날 내던지거나 하지 않아서 고맙긴 한데 그냥 좀 모른 척해 주면 어디가 덧난답니까? 더군다나 하필 내가 그의 발을 밟을 때 내뱉었던 말이 있어서 더 창피했다. 똑똑똑. 여기 어디 쥐구멍 없어요? 제가 좀 세놓고 싶은데요? 으앙! 그런데 바로 그때 앞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야트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부끄러움에 푹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반사적으로 들었다가 이내 시야에 비친 얼굴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래. 아무리 닮아도 다른 사람인 것이 당연한데.” 클로드는 나를 볼 때 이따금씩 드러내곤 하던 복잡한 감정을 씻은 듯이 지워 버린 얼굴로 엷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나도 많이 아둔해졌군.” “아빠?” 나는 클로드의 그런 표정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그 때문에 집중력을 잃어버린 탓일까. 아차 하는 사이, 나는 다시 한 번 더 클로드의 발을 밟았다. 으아아! 이건 고의가 아니에요! 제, 제 발이 주체성이 넘치다 보니 따로 움직이고 있어서! “퐁파듀 부인이 하루가 멀다 하고 칭찬한다 하지 않았나?” “워, 원래는 잘하는데요. 오늘은, 오늘은 제가 긴장을 많이 해서…….” 하지만 내가 듣기에도 내 말은 영 부실하게 들렸다. 크으윽, 분하다! 나 진짜 원래는 춤 엄청 잘 추는데! 하지만 나는 그 후로 두 번 더 클로드의 발을 밟았고, 그 때마다 클로드가 내 속을 긁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내 클로드와 추는 춤이 끝날 무렵, 나는 최선을 다해 표정 관리를 하며 웃고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한없이 피폐해져 있었다. 크으윽, 울고 싶다! 오늘의 이 굴욕은 절대 잊지 않겠어! 따단- “끝났군.” 마침내 미뉴에트의 마지막 음이 홀 안에 길게 울렸다. 기분 탓인지 클로드가 낮게 읊조린 말이 마치 이제 안심이라는 듯 느껴져서 기분이 약간 꽁해졌다. 그래, 좋겠다. 더 이상 나한테 발 안 밟혀도 되니까. 흑. 나는 클로드의 손을 놓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잘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주위에서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때가 되자 조금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눈 녹듯 사르르 녹아 내렸다. 나는 또다시 내게 내밀어진 클로드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는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들을 위해 댄스홀을 비워줄 차례였다. 나는 클로드의 손을 붙잡고 걸으면서 투덜거리듯 속삭였다. “다음에는 더 잘할 거예요.” 그 말을 듣고 클로드가 또다시 아까처럼 야트막하게 웃은 것 같았다. 아까보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실 내가 클로드와 춤을 추면서 생각보다 실수를 많이 한 이유는 날이 날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령 이곳 어딘가에 있을 제니트라던가. 피, 핑계가 아니고 진짜다. 정말이라구! 하지만 제니트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며 나타났던 것은 데뷔당트가 시작되고 얼마쯤 지나서였더라. 그 책을 읽은 후로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자세히 기억나지가 않았다. 클로드의 손을 붙잡고 걷는 동안 내가 본 사람들은 저마다 외계 생물체를 본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응? 아니, 그런데 저 표정들은 뭐래요? 못 볼 걸 본 것처럼 말이야. 내 행색이 좀 이상한가? 머리가 산발이라던가. 옷의 실밥이라도 뜯어졌다거나. “아빠, 저 어딘가 이상해요?” 물어볼 사람이 옆에 있는 클로드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소리 죽여 속닥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흘깃 내려다본 뒤 툭 던지듯 말했다. “처음 들어올 때 모습 그대로 예쁘니 걱정하지 말아라.” 커흡. 이 사람 뭘 잘못 먹었나? 아까부터 립 서비스가 아주 그냥! 게다가 남의 눈치 따위 하나도 보지 않고 뭐 저렇게 대놓고 크게 말해! ======================================= [55화] “헉!” “크읍!” “컥, 콜록콜록!” 웅성. 바로 그때, 비교적 가까이에 서 있어 클로드의 말을 직격으로 들은 사람들이 한차례 크게 술렁였다. 그들의 눈은 이제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떠져 있었다. 외계인을 보는 듯한 눈빛이 한결 더 짙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못 들을 걸 들은 사람들처럼 저마다 숨을 급히 들이켜지를 않나,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해대지를 않나. 아주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으앙!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죠! 창피한 말은 이 사람이 했는데! 누가 들으면 클로드가 평소에 나를 엄청 애지중지하는 줄 알겠네! 그러는 동안 댄스홀에는 또다시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공주인 내가 데뷔당트의 기념비적인 첫 춤을 추고 난 뒤의 두 번째 미뉴에트였다. 나는 클로드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는 사실에 약간 얼굴이 홧홧해서 구두 신은 발을 공연히 바닥에 비비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클로드는 어느덧 다가온 필릭스의 귓가에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방금 전 내가 떠나온 자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알고 있던 얼굴을 발견했다. 아. 저기 알피어스 공작이다. 역시 오늘 데뷔당트에 왔구만. 혼자서 서 있는 걸 보니, 만약 제니트와 이제키엘도 함께 왔다면 지금쯤 저 댄스홀에서 춤을 추고 있겠지. 매해 개최되는 데뷔당트 볼은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은 소녀들이 자신의 파트너와 미뉴에트를 추는 것으로 시작되어 그 후 짝을 바꾸어 자유롭게 화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데뷔당트 때 서로의 신랑 신붓감을 점찍어 놓기도 한다고. 그러니 데뷔당트의 파트너로 왜 기혼자를 기피한다 들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마 클로드도 더 이상 댄스홀에 서지는 않을 것 같은데. 으음. 그나저나 저 많은 사람 중에서 제니트와 이제키엘을 찾는 건 역시 무리였다. 이번에도 그들은 제니트가 클로드의 딸이라 주장하며 나타날까? 만약 그렇다면, 클로드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리고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나는 슬쩍 내 옆에 서 있는 클로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필릭스와 이야기를 마쳤는지 무료한 눈빛으로 저 앞의 어딘가를 의미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내렸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빠, 오늘 같이 있어주셔서 감사해요.” 이번만큼은 그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영악한 의도가 아니라, 온전한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아빠 말씀처럼 무척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될 것 같아요.” 만약에 클로드가 원래의 이야기가 그랬듯 제니트에게 마음을 빼앗겨 나를 더 이상 딸로 여기지 않는 날이 온다 해도,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에게 받았던 것들까지 부정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일단 지금까지는 고마웠다고 말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물론 그렇게 되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하진 않겠지만 나는 지금껏 그랬듯 살기 위해 모두를 속이는 것마저 망설이지 않을 테니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일지 몰랐다. “저요, 아빠가 제 아빠여서 정말 좋아요.” 어쨌든 당신은 살면서 내가 처음으로 가져본 아빠고, 나는 지금까지 그것이 내심 좋았던 모양이니까. 나는 그를 향해 웃었고, 그는 그런 내게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딴- 바로 그때, 두 번째 미뉴에트가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세 번째 음악이 시작되었다. 이번 곡은 두 사람이 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데뷔당트를 맞은 모든 소녀가 다 함께 열을 맞추어 추는 춤이었다. “아빠. 그럼 안녕.” 그렇게 경쾌하게 속삭인 뒤 나는 줄곧 붙잡고 있던 클로드의 손을 놓아버렸다. 바로 그 순간 마주한 얼굴이 표정을 변화시켰다. 맞닿았던 체온이 완전히 멀어지는 순간 그의 손이 잠깐 멈칫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벌어진 입술은 나를 부르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미소 짓는 얼굴 그대로 뒷걸음질 쳐 어지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었다. 알피어스 공작이 클로드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도 뒤엉킨 사람들 사이로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제15.5장 그 아빠 클로드&그 공작 알피어스 “아타나시아-” 그때, 이름을 부르고 만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다만 어렴풋하게 미소 띤 얼굴이 흰색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흘려보낸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당도하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와 입안에서만 메아리쳤다. 흰 드레스들이 썰물처럼 눈앞에서 밀려나간 후 자리에 남은 것은 물안개처럼 흐릿한 잔상뿐이었다. 클로드의 눈동자가 싸늘히 가라앉았다. 방금 전 본 그 표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지? 아타나시아가 그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지어 보였던 미소를 다시금 상기하자 가슴 한구석이 이유 없이 선득해졌다. 손 안에서 빠져나간 온기가 괜스레 마음에 밟혔다. 까닭 모를 한 자락의 불안감이 속 깊은 곳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클로드는 어느덧 다가온 알피어스 공작이 그의 옆에 선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폐하.” 공손한 부름에 날카로운 눈빛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신, 로저 알피어스 인사드립니다. 오벨리아의 무궁한…….” “그만 되었다.” 클로드는 알피어스 공작이 예를 올리는 것을 막았다. 쓸데없이 장황하기만 한 인사를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저조한 그의 기분을 모를 리 없는데도 로저 알피어스는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벌써 데뷔당트를 맞게 되셨다니 감읍한 일입니다.” 그의 말에 클로드의 시선이 다시금 흰색의 레이스 물결 속으로 옮겨 붙었다. 하지만 춤을 추고 있는 소녀들 틈에서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뵈었을 때만 해도 그리 작고 어리시더니.” 문득 마음 한구석이 잘게 술렁거렸다. 그것은 오늘 에메랄드궁에서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그의 손을 붙잡던 아이를 볼 때 느꼈던 감정이기도 했고, 또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는 아이를 앞에 두고 그가 때때로 느꼈던 기분이기도 했다. 작은 손을 꼬물거리던 아이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더니 어느덧 데뷔당트를 치르는 소녀가 되어 있었다. “폐하께서 직접 공주님을 에스코트해 주신 일로 회장이 떠들썩합니다. 신 또한 놀랐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처음에는 그저 변덕일 뿐이었는데. 그러니 언제든 눈앞에서 치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폐하께서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귀애하시는 모습에 언제나 감탄을 금할 수 없답니다.” 지금은 그 아이가 없는 일상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 아닌가. 잠시 동안의 여흥이라 생각했던 일이 어느덧 이렇게 길어진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날이 갈수록 마음속에 아쉬움이 자라났다는 점이다. 그가 아는 것은 아이의 5살 이후부터의 모습뿐이라는 사실에. 그가 스스로 잃어버린 그 5년간의 세월이 이상할 정도로 아쉽고 또 아쉬워서. “만약 폐하께 다른 왕자나 공주님이 더 계셨어도 마찬가지로 지금처럼 이리 보듬어 아껴주셨겠지요.” 잠시 동안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던 클로드가 이윽고 귀를 스친 로저 알피어스의 말에 실소했다. “다른 왕자나 공주라. 쓸모없는 가정이군.” “말 그대로 가정이지요.” “공도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는 취미가 있었나.” 젊은 황제가 싸늘히 읊조린 말에 알피어스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짐에게 자식은 하나뿐이다.” 비어 있는 그의 옆자리를 두고 황후를 들이라느니, 황제로서의 본분을 잊지 말라느니 하며 귀찮게 굴어대는 가신들은 아직까지도 있었다. 물론 클로드는 그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한 앞으로 그가 자식을 더 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미래의 일은 속단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아니, 없다.” 마침내 발견한 백금색 머리카락이 멀리서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클로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 “저 아이가 둘이 되지 않는 이상은.” 바늘 하나 꽂혀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그 틈 없는 말에 로저 알피어스는 드물게도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십니까.” 클로드의 옆얼굴을 신중한 눈길로 바라보던 그는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를 셈해 보다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이번에 제 질녀도 공주님과 함께 데뷔당트를 치르고 있답니다. 이번 곡이 끝난 후 인사 올려도 되겠습니까?” “질녀라. 공이 전부터 지겹도록 말했던 그 아이 말인가.” “예. 아주 어릴 때부터 알피어스가 보살피고 있던 아이지요.” “알피어스에서 친딸처럼 보살피는 아이라니. 전부터 생각했지만 공답지 않은 일이라 제법 흥미롭군.” 온기 없는 보석안이 로저 알피어스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가만히 주시했다. 알피어스 공작은 그 섬뜩한 눈빛에 한순간 속이 시린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주춤한다면 로저 알피어스의 이름이 울 것이었다. “본래 공주님 또래의 여자아이란 유리 공예품처럼 섬세한 면이 있어 옆에서 어른의 눈으로 보살피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요. 같은 성별의 벗이 생긴다면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방금 전 군중들의 소란 속에서 아타나시아 공주와 데뷔당트를 여는 첫 춤을 추던 클로드의 모습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아마 내색치는 않아도 분명 공주님께서도 외로우실 테니까요.” “외롭다?” 그 말에 클로드의 곧게 뻗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저 알피어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워낙 어른스럽고 총명하신 공주님인지라 말을 아끼고 계시지만 그 마음에 빈자리가 없을 리 있습니까. 물론 신이 구태여 이리 말하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아타나시아 공주님에 대해 전부 다 헤아리고 계실 테지요.” 그 담담한 음성에 어째서인지 클로드는 서서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래서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로저 알피어스를 스치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음악 소리에 귀가 번잡한데 시끄럽게 구는군. 오늘은 그만 물러가라.” “공주님과 함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도 연인데, 그러지 마시고 지금…….” “되었다고 하지 않나. 내 딸과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그리고 클로드는 그의 직설적인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로저 알피어스를 뒤로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줄곧 곁에 서 있던 필릭스가 알피어스 공작을 향해 가볍게 목례한 뒤 소리 없이 클로드의 뒤를 따랐다. 음악은 한창 절정에 다다라 있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연주음 속에서 로저 알피어스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허허. 이것 참. 바로 눈앞에 있던 황금 동아줄을 미처 못 알아보고 있던 기분이군.” 황제 클로드와 공주 아타나시아. 그들에 관한 것은 온통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특히 클로드는 아타나시아 공주와 연관된 일에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듯했다. ======================================= [56화] 주위를 둘러보자 아직까지도 소리 죽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음악 소리에 묻혀 귓가를 간질였다. 하긴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베일에 싸여 있던 아타나시아 공주가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 클로드의 손에 직접 에스코트받고 나타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인데, 그간 연회 때마다 상석에 앉아 따분한 기색만 보이던 황제가 방금 전 그 공주와 춤을 추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 사람들은 그만 넋을 빼놓은 채 그들이 춤추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클로드가 공주를 향해 미소 짓는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해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그 클로드’가 웃다니! 그것도 저런 다정한 얼굴로! 그들의 충격은 클로드가 아타나시아 공주를 향해 예의 그 무심한 어투로 ‘예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정점을 찍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들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제 귀를 의심하다가, 곧이어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히는 아타나시아 공주를 보고 방금 전 귓가를 스친 음성이 환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피어스 공작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클로드의 뒷모습을 좇다가 그만 또다시 허허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지금 그가 갖고 있는 동아줄이 알피어스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줄 황금 동아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수년 전부터 조금씩 자신감이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타나시아 공주를 향한 클로드의 총애가 견고해지는 것이 그의 두 눈에도 똑똑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로저 알피어스는 괜스레 떫은 입맛을 다셨다. 적어도 알피어스가 가진 것이 썩은 동아줄은 아니어야 할 텐데. “아버지.” 그때, 옆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그와 엇비슷한 눈높이를 가지게 된 아들 이제키엘이었다. “이거, 아타나시아 공주에 대한 폐하의 애정이 생각 이상으로 각별하구나.” 로저 알피어스는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 틈에 섞여 있을 공주를 생각하며 쯧 혀를 찼다. 그로서는 뒷맛이 써서 읊조린 말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이제키엘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실 수밖에 없겠지요.” 그 말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다소 미묘해서 알피어스 공작은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폐하께서 공주님을 향해 웃으시는 모습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그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나 바보가 아닌 이상 아타나시아 공주를 향한 황제의 애정을 감히 가늠하고도 남았으리라. 로저 알피어스는 특히나 몇 년 전부터 직접 두 사람을 마주하며 보고 들은 것이 있는지라 그들이 맡고 있는 또 한 명의 보석안의 소녀를 섣불리 앞에 내세우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제키엘.”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데뷔당트를 치르는 소녀들뿐 아니라 다른 귀부인들의 시선마저 독식하고 있는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예, 아버지.” 예복을 갖춰 입고 단정히 선 이제키엘은 어느덧 훌륭히 장성하여 로저 알피어스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고 있었다. “너는 이 로저 알피어스의 아들이지만, 그 이름을 떠나서도 누구나 탐낼 수밖에 없는 아이다. 내가 너를 그리 길렀고, 너는 내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주었어.” 그래. 그러니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둘 다 얻으려무나. 너라면 그럴 능력도 그럴 자격도 충분하니.” 홀 안에 울리는 음악은 이제 거의 막바지인 듯 한없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제키엘은 아무런 대답 없이 화려하게 흔들리는 순백의 레이스들 사이에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로저 알피어스는 이제껏 그의 뜻을 거스른 적 없는 아들이 이번에도 그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었다. 고요한 폭풍을 동반한 하얀 소용돌이가 눈앞에서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제16장 미안하지만 조금 아픈 건 책임질 수 없어 방금 전보다 발랄한 느낌의 전주가 홀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아직은 앳된 소녀들이 저마다 뽀얀 뺨을 상기시킨 채 자리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어서 얼기설기 서 있는 여자 아이들 사이에 끼어 들 틈이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소곤소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어쩐지 다들 내 옆에 서는 걸 꺼리는 것 같았다. 아니, 꺼린다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인데……. 아무튼 내가 지나갈 때마다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저마다 길을 내주고 있기는 한데, 그게 ‘내 옆에 자리 있으니까 이쪽으로 와’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자, 내가 비켜줄 테니까 어서어서 지나가!’라는 느낌이라 약간 미묘했다. 끄응. 방금 전 클로드와 춤을 춘 일로 다들 내가 공주인 걸 알아서 불편한가 보다. 그렇겠지……? 그냥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헉. 갑자기 두 눈에 습기가. 나는 잠깐 주위를 둘러보다가 백합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여자아이의 옆에 다가가 섰다. 좋아. 너로 정했다! “흰 백합이 무척 잘 어울리네요.” 내가 옆에 서는 순간 깜짝 놀란 듯 흠칫거리던 소녀는 내가 먼저 말을 걸기까지 하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배시시 웃어주었다. “나도 백합을 아주 좋아해요.” 정확히 말하면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었지만. 소녀는 어째서인지 나를 보며 잠깐 멍하니 입을 벌리다가 곧 정신을 차린 듯 뺨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아, 그, 저. 가, 감사합니다.” “이번 곡 잘 부탁해요.”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서로에게 닿았다. 맞잡게 된 손은 약간 긴장했는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번 춤은 데뷔당트를 맞은 소녀들끼리 짝을 이루어 추는 것으로, 중간에 파트너를 4번 바꾸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오늘의 주인공들을 모두 모아 동작을 맞추어볼 기회 같은 건 없었으므로, 애초에 이번 춤은 지극히 단순한 움직임으로만 짜여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춤을 추는 동안 여기저기서 동선이 꼬이고 난리가 나겠지. 그냥 곡 하나가 끝날 때까지 앞으로 세 걸음, 다시 뒤로 세 걸음, 한번 턴하고, 맞은편에 있는 사람하고 자리를 바꾼 뒤 다시 각자가 선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한 칸씩 이동만 하면 되었다. 뭐, 잘 몰라도 대충 다른 사람들 눈치 봐서 하면 되니까. 음악이 시작되고 순식간에 파트너가 한 번 바뀌었다. 백합꽃의 소녀 대신 키가 훌쩍 큰 여자아이가 주저하다가 내 손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이번 춤은 단순하고 쉬운 것이다 보니 중간중간에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령 클로드는 알피어스 공작과 만나서 지금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라던가. 그들이 있는 곳이 여태 조용한 걸 보면 알피어스 공작이 아직 제니트 얘기를 꺼내지 않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번 곡이 끝난 뒤 그녀를 직접 소개하려는 계획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파트너가 두 번 더 바뀌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친목을 다지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냥 데뷔당트의 상징적인 춤이다 보니 한 곡이 끝나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런데 이번 파트너는 지금까지의 소녀들과 달리 선뜻 내 손을 맞잡았다. 그 서슴없는 손길에 나는 무의식중에 옆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곧바로 춤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였다. “허리에 묶인 리본이 거의 풀렸어요.”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속삭여지는 순간,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유리 호반 위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맑은 목소리. 시선이 닿는 순간 환하게 빛이 나는 것만 같은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나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기이할 정도의 호감을 품은 눈동자. 그 색은 심해 같은 깊은 코발트블루색이었다. “제가 다시 묶어드릴까요?” 하지만 나는 이 소녀가 바로 원래부터 오늘 나와 만날 운명이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입에서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된 제니트였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과연 나는 처음 그녀를 보게 될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서로 이름을 모른 채로 만나도 과연 나는 그녀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까? 비로소 오늘 알게 된 정답은 ‘그래’였다. 내가 대답 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마주한 미소에 의아함이 번졌다. “저어, 무슨 문제라도?” “아니…….” 콱! 그때, 발밑에 대리석 바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밟혔다. 헉? 지금 내가 밟은 거 뭐야? 나는 내가 방금 전 제니트의 발을 밟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챈 뒤 경악했다.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었…….” “괜찮아요.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걸요.” 내가 당황해서 사과하자 상냥한 미소와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그녀의 뒤에서 후광이 비친 것만 같았다. 이, 이 천사는 도대체 뭐죠? 여주인공 성격 버프 너무 심각한 거 아닌가요? 나 지금 꽤 굽 높은 구두 신었는데 안 아플 리가 없잖아! 심지어 앞꿈치도 아니고 뒤꿈치에 밟혔는데! 그 증거로 밟히는 순간 귓가에 ‘아!’ 하는 단말마가 울렸고. 콱! “앗.” 그런데 한 번 더 밟았다. 이 짧은 춤을 추는 동안 몇 번이나 밟는 거야?! 으아앙!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중에 네가 클로드 딸 행세를 하든 어떻든 일단 지금은 밟아서 미안해요! 이번에는 정말 아팠는지 고운 얼굴이 고통에 물드는 것이 보여 더욱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내가 당황하자 오히려 괜찮다는 듯 나를 향해 말갛게 웃어주기까지 했다. “실은 저도 엄청 긴장해서 아까 신나게 밟아버렸거든요.” 그거 좀 공감대가 형성되는데…… 가 아니라. 설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니트가 춤추다가 다른 사람 발을 밟았을 것 같지는 않다. 흑흑. 혹시 지금 나 위로해 준 건가? 그때, 어쩐지 길게만 느껴졌던 곡이 마침내 끝났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울렸다. 데뷔당트를 치르는 소녀들 모두가 화사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니트도 나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리본을 묶어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내 입에서는 수락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비치는 순수한 호의에 이상하게도 약간 속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번 곡도 끝났으니 다른 이에게 부탁할게요.” 나는 차마 그런 것을 부탁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거절했고, 그러자 마주한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다른 말을 더 꺼내기 전에 웃는 낯으로 말을 돌려버렸다. “그보다 두 번이나 발을 밟아서 미안해요. 많이 아팠을 텐데, 혹시 다치지는 않았어요?” “정말 괜찮아요. 개의치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 그만 자리를 비켜야겠네요. 이번 곡은 춤을 출 생각이 없어서.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요.” 그녀는 내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나는 생글거리며 그대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 [57화] 워어어. 그러고 나서 나는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지금 내가 제니트랑 얘기를 한 게 맞나? 설마 내가 착각한 것일 뿐, 저 여자애는 제니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던가. 하지만 방금 전까지 있던 곳을 슬쩍 뒤돌아본 뒤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제니트가 알피어스 공작과 함께 댄스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클로드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 확실한데 왜 저렇게 조용한 거야? 원작에서는 내용이 어땠더라. 그나저나 제니트의 저 눈 색깔은 마법으로 바꾼 거겠지? 설마 이따가 클로드 앞에 나타날 때 짜안! 하고 보석안을 내보여서 극적인 효과를 얻을 생각이라거나. 나는 클로드를 찾아서 움직였다.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서로의 짝을 바꿔 춤추는 것이 허용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상대를 바꾸어 댄스홀로 들어가는 소년 소녀들이 눈에 띄었다. 내게 춤을 신청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금 내 관심사는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춤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것보다 나는 클로드를 만나고 싶었다. 그 사람을 만나서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클로드를 발견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불러 세우는 것이 먼저였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사실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귓가를 스치는 내 이름에 나는 어느덧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천사님.’ 나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신뢰감을 주는 중저음의 부드러운 그 목소리는 일전에도 내가 들어본 적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만 낯선 것은 그 음성에 실려 나오는 내 이름뿐이었다.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군요.”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오늘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또 다른 사람을 그곳에서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이제키엘 알피어스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직접 당신을 만나러 갈 테니.’ 흰 꽃잎들 사이로 아련히 사그라졌던 그날의 미소가 다시금 눈앞에 번졌다. “이제키엘 알피어스.” 나는 그가 방금 전 내게 소개한 그 이름을 작게 소리 내 불러 보았다. 분명 음악 소리에 그대로 파묻혀 버릴 듯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다음 순간 그는 내 속삭임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이제키엘 알피어스. 그리고 내 이름은 아타나시아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그런가요.”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담고 있던 서로의 이름을 처음으로 입술에 올린 오늘. 그와 나는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익숙한 듯 낯선 미소를 지은 채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알피어스 공자.” *** 허허허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랍니까? 콱! “미…….” “괜찮습니다.” 내가 지금 이제키엘하고 춤을 추고 있는 게 맞습니까? 바, 방금 전 발바닥으로 와 닿은 생생한 느낌에 의하면 맞는 모양인데. 으아악! 게다가 이 느낌은 지금이 처음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이제키엘이 내가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익숙하다는 듯 괜찮다는 말을 다 할까! 아마도 지금 내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이제키엘이 안심하라는 듯이 저런 봄바람 살랑살랑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는 거겠지! 사실 클로드랑 춤출 것만 생각하고 미뉴에트 외에는 연습을 별로 안 했더니 자꾸만 이제키엘의 발을 밟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나한테 춤 신청을 했어! 그냥 인사만 하고 아름답게 헤어졌으면 좋았잖아! 하지만 거기에서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이제키엘의 손을 붙잡고 만 나도 참 문제였다. 그, 그렇지만 그때 이제키엘 모습이 동화책 속의 한 장면 같아서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구요? 생각해 봐라. 반짝반짝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왕자님처럼 근사하게 예복을 갖춰 입은 은발 금안의 미남이 나한테 춤 신청을 하는 장면을. 그 순간에는 진짜 내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그의 손을 붙잡고 만 뒤였고, 주위에는 그때까지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어느덧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 웅성거리고 있었다. 크으, 무시무시한 남자 주인공 버프! 나는 상황 파악이 덜 된 상태로 이제키엘의 능숙한 리드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심려치 마시지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우셔서 아무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제, 제길. 지금 또 밟았다. 나는 눈앞에서 속삭여지는 목소리에 그냥 마음을 놔버렸다. 클로드, 제니트, 이제키엘에 이르기까지. 어째서인지 춤을 추는 상대마다 발을 밟아대기 바쁘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허흐흑. 그런데, 이제키엘 너……. 아까부터 미묘하게 날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인데? “아무 느낌도 들지 않으면 그냥 모른 척해 주지 그래요?” 모름지기 숙녀가 춤을 추다가 실수로 발을 밟았으면 눈치껏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해 주는 게 진정한 신사인 법인데! 그런데 이제키엘은 내가 자기 발을 밟을 때마다 꼬박꼬박 저런 말을 한마디씩 덧붙여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뭔가 놀림 받는 느낌이라 미묘하다! “원하신다면 이제부터는 그러겠습니다.” 지금도! 지금도 봐! 말투는 한없이 예의 바르면서 눈으로는 웃고 있잖아! 크으. 그래. 아를란타에서도 그렇고 오벨리아에서도 그렇고 리드하는 게 이렇게 능숙한 걸 보면 그동안 다른 여자들하고 한두 번 춤췄던 것도 아닐 텐데, 아마 그중에 이렇게 자기 발을 사정없이 밟아댄 사람은 없었을 테니 웃기기도 하겠지. 으허헝. 그런 의미로 저는 망했어요. “폐하께서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무척 귀애하신다 들었는데.” 그런데 바로 그때, 이제키엘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총애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던 말이 사실이었군요.” 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미간을 좁혔다. “공주님께서 밟으신 발등보다 아까부터 집중된 시선을 받고 있는 등이 더 따갑습니다.” 나는 이제키엘의 말을 듣고 그의 등 너머로 의아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곧 발견하게 된 것에 급히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헉.” 뭐, 뭐, 뭐죠, 저 눈빛은! 눈빛만으로 사람도 죽이겠어요! 저거 분명 클로드인데? 오늘은 다른 때보다 단정히 정리된 저 순금 같은 머리칼, 지금은 불빛에 반사돼 녹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보석안, 은실로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색 예복!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찾고 있던 그 클로드가 맞는데? 그런데 왜 저런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거죠? “귀애하는 공주님의 손을 아직 다른 이에게 맡기고 싶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에,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런 팔불출적인 이유는 아니겠지. 나는 웃음기 띤 이제키엘의 말을 흘려들으며 저 멀리서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사람을 간간이 훔쳐보았다. 으억, 저 사람 지금 심기 불편하다고 이마에 써 놓은 것 같다. 지금 클로드 눈앞에 종이라도 가져다 대면 단번에 두 동강이 나고도 남을 것 같은 날카로움이 아닌가. 여, 옆에 있는 사람들이 사색이 되어서 슬금슬금 클로드한테서 멀어지고 있는 건 내 착각이 아닐 거야. 그러고 보니까 이제키엘을 만나기 전까지 난 클로드를 찾고 있었는데. 나는 크흠, 헛기침한 뒤 말했다. “알피어스 공이 평소 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니 아바마마께서도 흥미가 동하여 그러시는 것일 테지요.” 아니면 방금 전 만난 로저 알피어스가 뭔가 클로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클로드는 평소에도 로저 알피어스를 성가시게 생각하는 편이었으니 그 영향이 대물림되어 이제키엘에게 향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 아무튼 어떤 이유이든 간에 단순히 내가 외간 남자랑 춤추는 게 불만이라 저러는 건 아닐 거야! “저야말로 무척이나 영민하고 아름다운 공주님이시라고 항상 들어와 만나 뵙는 날을 손꼽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 사람. 알피어스 공작을 닮아서 그런지 립 서비스가……. 다음 순간 눈이 마주쳐서 이제키엘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채로 방긋 웃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그와 내가 퍽 사이좋게 보였을 수도 있는 미소였다. 하지만 이건 내숭이다. “과연 소문 그대로이십니다.” 난 그렇다 치고, 이제키엘도 이런 식으로 웃을 수 있었구나. 이제키엘이 다른 얼굴로 웃는 것을 본 적이 있어 그런지 지금의 미소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잘 만들어진 것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저야말로, 소문 속의 알피어스 공자를 이렇게 만나게 되니 신기한 기분이네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알피어스 공작저에서 서로를 만났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 만났을 때부터 얼굴에 동요 한 점 없는 걸 보니까 역시 알고 있었구만, 내 정체. 하긴. 저 이제키엘이 누구인데 그것 하나 유추해 내지 못했을까 싶었다. 내 말을 듣고 이제키엘이 눈꼬리를 살짝 접어 웃었다. 아, 지금은 진짜 웃는다. 콱! 그리고 나는 이야기 속 남자 주인공이 내뿜는 남다른 광채에 한눈을 파는 사이 그만 또 한 번 그의 발을 밟고 말았다. 웃음 띤 상태로 굳어버린 내 얼굴과 달리 눈앞의 미소는 한결 더 짙어졌다. “이제부터 모른 척하라 명하셨으니 그리하겠습니다.” “…….” “그러니 앞으로도 내딛는 발걸음을 편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 ……여기 정말 쥐구멍 없나요? 내가 세 들고 싶다니까? 나는 속으로 절규하며 제발 이 곡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 “끝났군요.” 으아앙! 드디어 해방이다! 물론 이 말은 나보다도 이제키엘이 해야 맞지만. 으앙, 으앙. 이번 곡은 유달리 길었는데 그동안 나한테 밟히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으흐흑. “마음 같아서는 한 곡 더 청하고 싶지만.” 나는 이제키일이 하는 말에 진심으로 학을 뗐다. 서, 설마 빈말이지? 그거 진심 아니지? 네 발등도 강철은 아니잖아? 아하하. 어쩜 흰둥이 아저씨 아들 아니랄까 봐 빈말도 잘하지. “후일을 기약하겠습니다.”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나는 그가 마음을 바꿔먹고 나한테 또 춤을 신청할까 봐 냉큼 대답했다. 그러자 이제키엘이 옅게 소리 내 웃었다. 그래. 웃어라, 웃어. 으아앙. 퐁파듀 부인이 혀를 내두르며 극찬하던 환상의 춤 솜씨를 가지고 있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몰락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으허, 으허엉. 나 내일부터 춤 다시 배울 거야. 오늘 방에 가서 이불 많이 걷어찰 거야!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소중한 날에 뜻깊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제키엘이 내 손등을 붙잡고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크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멋있는 애가 이러니까 진짜 그림 같구나. 이제키엘이 아를란타에서 돌아왔다고 시녀들까지 떠들썩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겠다. 역시 우유 빛깔 이제키엘! 일등 신랑감 이제키……. ======================================= [58화] “그럼 다음에 만나 뵐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천사님.” 쿠, 쿨럭!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방금 전에 금단의 단어가 내 귀를 스친 것 같은데? 내가 굳어 있는 동안 이제키엘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춘 뒤 그 상태로 나와 눈을 마주한 채 빙긋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 엄마. 남자 주인공이 순박한 강아지인 줄 알았더니 여우였어요! 이거 지금 나 놀리는 거 맞지? 지금도 그렇고 아까도 내가 발 밟을 때마다 아닌 척 나 놀렸던 거 맞지? 역시 그런 거지? “오늘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그런데 아까는 미처 몰랐는데 이 시선들 대체 뭡니까? 엄청, 엄청 쳐다보고 있잖아요? 아까 클로드랑 춤출 때랑 비슷한 듯 약간 다른 시선인데. “공주님.” “필릭스.” 그때, 이제까지 줄곧 클로드의 옆에 있던 필릭스가 내게 다가왔다. “아빠는?” 클로드는 어디 두고 혼자 왔니? 나는 방금 전까지 나와 이제키엘을 향해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사람을 찾아서 눈길을 움직였다. “폐하께서는 다른 용무로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아까도 필릭스랑 뭐라고 속닥거리더니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하긴. 클로드가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오늘도 나 때문에 일부러 시간 내서 와준 건데. 바로 그때,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혹시 이거 원작 속 그 내용인 건가? 지금 알현실에서 알피어스 공작과 제니트를 만나고 있다거나.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던 것도 아닌데, 그 순간 약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금방 돌아오실 테니 걱정 마세요. 다른 누구도 아닌 공주님의 데뷔당트이니, 아마 끝까지 자리를 지키실 겁니다.” 그런 마음이 표정에서 티가 났는지 필릭스가 덧붙여 말했다. 클로드가 말없이 자리를 비워서 내가 서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필릭스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도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공주님. 저와도 한 곡 부탁드립니다.” 뭐, 뭣. 지금 또 춤을 추자고? 으음. 하긴. 클로드와도 춤을 추고 이제키엘하고도 춤을 췄는데 필릭스만 거절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아까부터 내가 춤추는 걸 보고 있었으니 밟힐 건 각오하고 있는 거겠지? 쓰읍. 그렇다면야. “네에, 기꺼이요.” 이제부터 발등이 조금 아플 텐데 내 책임 아닙니다! *** “공주님. 혹시 저도 모르는 새 제가 공주님의 심중을 언짢게 만든 적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오 분쯤 후, 곡이 시작되기 전에 비해 현저히 핼쑥해진 얼굴로 필릭스가 내게 사과했다. 춤을 추는 내내 하도 사정없이 발을 밟아대다 보니 혹시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된 모양이다.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 고의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사과하면 내가 뭐가 되나요? 어흐흑. 나라고 발을 밟고 싶어서 밟은 줄 아나. 나는 민망한 기분으로 필릭스를 향해 속닥거렸다. “다 알고 춤 신청한 거 아냐? 아까 내가 아빠 발 밟는 거 봤을 거 아니야.” “아니요.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는데……. 정말 폐하의 발등도 이리 밟으셨단 말입니까?” 그,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할 건 없지 않아? 사람이 말이야. 춤추다가 발을 좀 밟을 수도 있지. 응? 그런데 왜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겁니까? 내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아서 그런 거야? “제게만 이러신 것이 아니라니 안심했습니다. 앞으로도 마음 편히 밟아주시…….” 콱! “윽.” 그냥 무리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 지금 마음 편히 밟고 있는 거 아니야! 나도 최대한 신경 써서 조심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으아앙! 마침내 곡이 끝나고 난 뒤 필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 기쁨에 젖은 얼굴로 내 손을 붙잡고 댄스홀을 나섰다. 아니, 이 오빠가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는 건 또 처음 본다. 으앙, 너무해. 아니,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폐하께서 조금 늦으시는 모양이네요.” 그러게. 뭔지는 몰라도 이야기가 길어지나 보네. 어라? 그런데 저쪽에 다른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는 건 제니트잖아? 어디 보자. 알피어스 공작은……. 저 뒤에서 이제키엘이랑 얘기 중이네. 그럼 클로드에게 생긴 일이란 건, 제니트와 관련된 일은 아닌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댄스홀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 필릭스가 낮게 웃으며 내게 귀엣말을 해왔다. “실은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시기 직전 제게 명하시기를, 다른 좀벌레들이 더 이상 함부로 꼬여들어 설치는 일이 없게 공주님의 곁을 각별히 주의해 지키라고 하셨답니다.” 네? 그게 뭡니까? 좀벌레요? 꼬여들어 설쳐? 누가 누구한테요?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공주님을 위한 날이니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내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필릭스가 웃는 낯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나중에 혼은 좀 나겠지만 그 정도야 달게 견디겠습니다.” 그리고 내 등을 부드러운 손길로 툭 다독이듯 미는 바람에, 나는 서 있던 곳에서 두어 걸음 앞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제가 뒤를 지키고 있을 테니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시기를.” 다음 순간 나는 흠칫했다. 언제부터인가 내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이에 다가와 서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기. 피, 필릭스? 혹시 내가 춤추는 동안 발 밟아서 그러는 거 아니지? 한두 번도 아니고 도합 열 번쯤은 밟았다고 날 이 사람들 속에 밀어 넣고 복수하는 거 아니지?! 힐끔 돌아봤더니 필릭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잠깐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은 다시 앞을 보고 약간 어색한 기분으로 미소 지었다. 그러자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앞다투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게일 후작 가문의 차남…….” “제 이름은 엘리자베스…….” “예정된 사람이 없다면 다음 곡은 저와 함께…….” “이번 데뷔당트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으아아, 누가 저 좀 살려주세요! *** 데뷔당트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완전히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그리고 불량 공주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 이제 그만 돌아갈래! 허흐흑. “예.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필릭스도 이제는 충분하다 싶은지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럴 만하지! 내가 얼마나 정신없었는데! 처음에는 다들 눈치만 보고 말도 안 걸더니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들고 말이야. 앗! 저기 클로드다! “아빠!” 방금 전까지 사람들한테 시달려서 그런지 괜히 클로드가 더 반가웠다. 내 부름을 듣고 클로드가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곧 함께 있던 사람에게 무어라 몇 마디를 더한 뒤 돌려보냈다. “아직 데뷔당트가 끝나지 않았을 텐데.” “어차피 이제 거의 막바지라 그만 돌아갈까 싶어서요.” “왜?” “네?” 으엥? 그냥 그러려니 할 줄 알았는데 왜냐니? “그리 고대하던 데뷔당트인데 왜 벌써 돌아간다는 거지?” 이, 이유 없는데요. 그냥 피곤해서 일찍 방 가서 엎어져 자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솔직한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잖습니까. “누가 귀찮게 굴었나.” 헉. 족집게다. 그래. 당신이 없는 동안 사람들이 막, 막 나한테 몰려들고! 갑자기 나중에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막 초대하고! 같이 춤추자고 하고! 물론 내 비극적인 춤 실력이 다 뽀록날까 봐 이건 거절했지만. 크흑. “아니면 누가 마음 상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이라도 했나?” 엥. 이건 또 뭐지. 마음 상할 말이나 행동이라니? 당신 그런 걱정도 할 줄 알았어? 그런데 내가 뜻밖의 말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는 걸 클로드는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다. 엇 하는 사이 주위의 온도가 순식간에 극감했다. 그리고 서릿발 같은 낮은 음성이 내 고막을 찔러 들어왔다. “누구냐.” “아니…….” “필릭스 로베인.” 냉혹한 목소리가 필릭스를 불렀다. 뭐야, 뭐야. 왜 무섭게 풀네임으로 부르고 그런대요? 클로드의 부름이 있자마자 필릭스가 각을 잡고 자리에 부복했기 때문에 나는 더욱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 폐하.” “내가 없는 동안 공주를 잘 보필하라 하지 않았나? 한데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 공주의 심기를 거스르는 동안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지?” “죄송합니다, 폐하. 신이 부족하여 주변을 미처 세세히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명백한 제 실책이니 벌하여 주십시오.” “회장으로 돌아간다. 아무래도 짐이 그동안 너무 조용히 있었던 모양이구나. 제 주제도 모르고 겁 없이 설쳐 대는 꼴을 보니 이제 그만 살고 싶은 것 같군.” 아, 아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나만 이해가 안 되나요? 난 별 말도 안 했는데 느닷없이 갑자기 왜 살벌해져서는 다시 회장 안으로 들어간대요?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이 저 안으로 들어가면 왠지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인데? 내 불안은 클로드가 걸음을 떼며 음산하게 읊조리는 순간 확신이 되었다. “감히 짐의 딸에게 망발을 지껄인 놈들은 혀를, 황족을 대하는 예우를 잊고 경거망동하게 행동한 놈들은 손발을 잘라 성문 앞에 걸겠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서 족치겠다는 걸로 들리는데? 이거 딱 그 맥락인데?! 아니, 왜?! 나는 방금 전 클로드가 살벌하게 읊조린 말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띠용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아, 아빠?” 내가 당황해서 클로드를 부르자 그가 나를 뒤돌아봤다. 헉. 저 눈빛을 보니 내가 춤을 추는 동안 클로드가 이제키엘을 노려봤던 건 그냥 애교 수준이란 걸 알겠다. 싸늘하게 가라앉아 섬뜩한 광채를 발하는 눈동자를 보자 오싹 오금이 저렸다. 저 분노가 향하는 곳이 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칠 뻔했다. 스물스물, 클로드의 온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뒤이어 귓가를 스친 말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라. 그치들이 죽고 싶어 네 앞에서 발악을 한 모양이니 내 편히 죽여주지는 않으마.” 주, 죽인다고? 내가 데뷔당트 중간에 그냥 돌아간다고 해서? 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상하게 만든 것 같아서? “필릭스. 공주를 에메랄드궁으로 데려가라.” 잠깐, 잠깐, 잠깐! 난 그냥 내 방 침대에 엎어져 자고 싶어서 그런 거라니까! “아, 아빠! 잠깐만요, 가지 마세요!” 나는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기분으로 급히 클로드를 붙잡았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으며 나를 등지고 걷던 클로드가 절대로 멈춰 세우지 않을 것만 같던 걸음을 제자리에 우뚝 고정시켰다. 하지만 그가 내게 한 말은 여전히 꿈도 희망도 없었다. ======================================= [59화] “돌아가 있어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바로 그때, 오래전 루비궁에서 있었던 학살 사건이 빛의 속도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으아아!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 “아빠!” 와아, 이거 환장하겠네. 난 지금 태풍의 핵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거야! 지금 내가 말 한 번 잘못하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요단강을 건널 수도 있다는 거야! 나는 냉큼 클로드가 서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주위에 일렁이던 위험한 기운이 착각처럼 화악 허공에 흩어져 버린 것 같았다. 에잇,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꼭 붙잡고 있어야지! 나는 내친김에 아예 클로드가 나를 떼버리지 못하게 팔짱까지 껴버렸다. 그러자 맞닿은 클로드의 팔이 아주 잠깐 움찔거렸다. 설마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날 밀쳐 버리지는 않겠지? 그, 그렇겠지? “아빠, 화내지 마세요. 저 마음 상한 거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숨길 필요 없다. 누구든지 건방진 작태를 보인 놈들은 전부 찾아내서 죽…….” “에,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한테 제가 뭘 숨기겠어요?” 자, 내 눈을 바라봐! 내 눈을 보면 넌 행복해지고 넌 웃을 수 있고! “정말이에요. 저는 아빠 딸인데, 어느 누가 저한테 함부로 할 수 있겠어요? 말도 안 되죠.” 아무래도 명색이 자기 딸인 공주가 다른 사람한테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난 모양이니 ‘내 아빠가 짱인데 누가 감히 날 건드리겠어!’ 하는 의미를 담아 클로드에게 살살거렸다. 그러자 클로드의 분노가 약간 누그러진 것 같았다. “하면 왜 벌써 밖으로 나왔지? 누구인지 모를 버러지가 네게 헛소리나 허튼짓을 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난 그냥 내 침대와 혼연일체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거라니까. 흑흑. “아빠가 너무 오래 절 혼자 두시니까 제가 찾아온 거잖아요.” 내 말에 클로드가 멈칫했다.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서 제가 온 건데, 아빠가 저를 두고 다시 들어가 버리시면 어떡해요.” 지금 내가 한 말에는 두 배는 더 크게 팔을 움찔거렸다. 통한 건가? 그런 건가?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에메랄드궁에 가요. 연회장은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다시 들어가기 싫단 말이에요. 네?” 어흐흑. 난 내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힘든데 저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까지 지켜줘야 하다니. 정말 내 전생의 업보가 얼마나 무겁길래. “네에? 아빠아.” 겉으로는 간드러지게 클로드를 부르고 있지만 속으로는 좀 울고 있습니다. 으흐흑. 난 그냥 클로드의 말에 어리바리하게 눈을 깜빡인 죄밖에 없는데! 제발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대로 죽어서 제 업보가 더 이상 무겁게 쌓이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으헝! 내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잠시 후 클로드가 하는 수 없이 내 부탁을 들어준다는 듯이 말했다. “어쩔 수 없군. 에메랄드궁으로 가지.” 으허어. 저 지금 십년감수했습니다. 저는 제 눈 깜빡임이 이렇게 큰 위력을 가진지 미처 몰랐구요! “아. 그러고 보니까 아빠, 다른 급한 일 있으셨던 거 아니에요? 바로 가넷궁으로 안 가보셔도 돼요?” “그렇게 원한다는데 잠깐이라면 시간 내주지 못할 것도 없다.” 그, 그러십니까. 아하하. 그것 참 감사합니다. 그렇게 클로드 회유에 성공한 내가 하하 호호 웃으며 그와 함께 몸을 돌렸을 때, 문득 뒤에 서 있던 필릭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공주님. 허리에 묶여 있던 리본이 사라졌습니다.” 앗. 아까 다시 묶는다는 걸 까먹고 있었네. “아. 정말이네.” 내 빨간 리본! 끝에 보석이 박혀 있는 비싼 거였는데! 크흑. 내 예쁜이 잃어버렸엉. “필릭스. 찾아와라.” “예.” “괜찮아요. 그냥 가요.” 어차피 댄스홀에서 풀려버린 거면 이미 여러 번 밟혀서 걸레짝이 되었을 텐데. 흑. 눈물을 머금고 보내줘야지, 내 예쁜이. 두 사람이 그래도 괜찮겠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헉. 그런데 설마 보석에 대한 내 집념을 알고 저렇게 재확인하는 건 아니겠지? 응? “아타나시아 공주님.” 그때,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가냘픈 목소리가 밤공기에 섞여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줄곧 나를 향해 있던 클로드의 눈동자가 내 어깨 너머로 미끄러지는 모습이 마치 느린 화면을 재생하듯 아주 천천히 시야에 번졌다. 나는 뒤돌아보았고, 방금 전 나를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마침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떨어뜨리셨어요.” 얄궂은 운명의 붉은 실. 그 끝자락을 손에 쥐고 서 있는 제니트였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지? 일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기이한 정적이 밤바람에 휩싸인 채로 내 옆을 맴돌았다. 나는 약간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내 눈앞에 있는 소녀가 마침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 하고 소리 낸 뒤 다시금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황공합니다, 폐하. 공주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 그만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오벨리아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밤하늘의 별처럼 환한 빛을 내던 고운 얼굴 대신 길어 늘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찼다. 나는 반사적으로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앞선 사죄에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은 채 마주한 이에게 뜻 모를 시선만을 고정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걸 방금 알았는데. 찾아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나는 제니트에게서 붉은 리본을 건네받았다. 손이 스치는 순간 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손끝을 멈칫했으나, 제니트는 나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었다. 클로드는 지금 그녀를 보고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 걸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소녀의 얼굴은 분명 클로드의 방에 깨진 채 놓여 있던 초상화 속 여인을 닮았는데. 다만 그림 속의 여인이 지닌 녹색 눈동자 대신 눈앞에 있는 소녀는 심해 같은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는 점만이 두드러지는 차이점이었다. 어차피 그마저도 마법으로 숨긴 것이겠지만. 어릴 때 내가 알피어스 공작저의 온실에서 보았던 어린 제니트는 분명 클로드와 나, 우리 두 사람과도 같은 보석안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직 제 소개도 드리지 않았네요.” 그녀가 웃자 주위에 화악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저는 제니트 마그리타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내 뒤에서 줄곧 무심히 서 있던 클로드가 반응했다. “마그리타?” 원작의 내용과는 달랐다. 제니트는 알피어스 공작과 이제키엘의 비호를 받으며 앞으로 나서는 대신, 홀로 회장을 빠져나와 나와 클로드를 독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밝힌 자신의 신원은 클로드의 딸이 아니었다. “알피어스에서 데리고 있다던 그 아이였군.” 알피어스 공작이 묘하게 조용할 때부터 혹시 그러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그는 아직 제니트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제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나요?” 그런데 클로드가 지나가듯 읊조린 말에 제니트가 호기심 어린 말투로 반문했다. 그 순간 클로드의 눈썹이 굴곡을 그리며 슬그머니 치켜 올라갔다. 과연 제니트는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여주인공이었다. 클로드의 앞에서 저렇게 똑바로 고개를 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신하들 중에서도 극히 드물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소녀다운 귀여운 당돌함으로 느껴진다는 점이 여주인공이 가진 무서운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알피어스의 그늘에서 자라 그런지 당돌하구나.” “송구합니다.” 서늘히 내뱉어진 말에도 제니트는 그저 미소 띤 얼굴로 공손히 답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윽고 클로드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빛이 자신을 ‘제니트 마그리타’라 소개한 소녀의 얼굴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곧 그가 실소했다. “과연, 그런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클로드는 내가 그의 표정을 해석하기도 전에 먼저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돌아가자.” 나는 앞서 걷기 시작한 클로드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금 제니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 그리고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그녀의 얼굴에 탄식하고 말았다. 남빛이 도는 푸른 눈동자가 멀어지는 클로드의 뒷모습을 말없이 좇고 있었다. “아타나시아.” 그때 클로드가 자리에 멈추어 선 채로 나를 불렀다. 나지막하게 울려 퍼진 내 이름에 이번에는 눈앞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녀의 눈빛이 내게 닿기 무섭게 클로드가 있는 곳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걸음이 느리구나.” “죄송해요.” “공주님께서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마차가 준비된 곳까지 제가 안아서 이동시켜 드릴…….” “필릭스. 열 걸음 뒤로 가라.” 나는 내 등을 따라붙고 있는 시선을 느끼며 마차가 준비된 곳까지 걸었다. 그리고 열려진 마차 안으로 올라타기 위해 필릭스의 손을 잡은 순간. 내 손에 감겨 있던 리본이 스르륵 풀려 나갔다. “이건 버리도록 해라.” 어느덧 클로드는 내 붉은 리본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미 바닥에 나뒹굴던 것 아닌가. 공연히 손을 더럽힐 필요 없다.” 아까부터 클로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괜히 나 혼자 재고 따지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어떻게든 굳이 해석해 내려고 애쓰는 건지도. 나는 얕은 숨을 내뱉은 뒤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건데.” “필릭스. 저것과 똑같은 리본을 더 만들라고 일러라.” “예. 내일 바로 재단사를 부르겠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은 전부 맞춤 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리본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사람을 불러야만 했다.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클로드가 손에 쥐고 있던 리본을 날려 보냈다. “저보다 더 좋은 것도 얼마든지 안겨줄 수 있으니 아쉬워할 필요 없다.”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붉은 끈이 밤바람에 실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 밖에도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려무나.” 그렇게 말해놓고 클로드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타나시아.”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는데, 어째서인지 쉽사리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미간을 잔뜩 구겼다. 나는 도대체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마주한 얼굴을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나가듯 그가 속삭인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14번째 생일도, 그리고 오늘 데뷔당트도 모두 축하한다.” ‘사실은 저요. 14살 데뷔당트를 축하한다는 말도 아빠한테 제일 먼저 듣고 싶어요.’ 얼마 전 내가 그에게 고백한 적 있던 말이 불현듯 기억을 스쳤다가 이내 누군가 후우 불어 날린 비눗방울처럼 서서히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 [60화] 클로드는 방금 전 무슨 말을 했냐는 듯이 필릭스의 손에서 내 손을 잡아 빼 그대로 나를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필릭스도 웃음을 참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지금 막 클로드가 내게 했던 말이 환청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풉.” 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내 맞은편에 자리 잡는 클로드를 보면서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빠 지각이에요. 생일 축하도 데뷔당트 축하도 벌써 다른 사람들한테 들었는데.” “그럼 취소하랴?” “에헷.” 릴리의 말처럼, 과연 오늘은 정말로 멋진 데뷔당트 날이었다. *** “라라라랄라.” 깊은 밤, 나는 혼자 테라스에 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동안 에메랄드궁에 들러 나와 함께 짧은 티타임을 가졌던 클로드는 이미 가넷궁으로 돌아간 뒤였다. 그런 후에 릴리도 내 잠자리를 봐준 뒤 방을 나갔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결국 침대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나직한 속삭임이 밤공기에 얕게 번져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흐응. 울고 있을 줄 알았더니 재미없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난간에 대충 걸터앉아 있는 루카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느닷없는 등장이었지만 나는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울긴 왜 울어?” “너 내 종이 인형 네 개나 찢어먹었잖아.” 악! 내 흑역사! 루카스가 직접 내 춤 연습 상대를 해주는 대신 소환해 줬던 사람 모양 종이 인형 이야기였다. “지금 기분 좋았는데 그 얘기 왜 꺼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애초에 네가 종이 인형 같은 걸로 춤 연습을 하라고 시키니까 그렇지! 그런데 루카스는 얄밉게도 내가 발끈하는 양을 보며 나를 비웃었다. “이거 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해봐. 네 아빠가 이제 다시는 너랑 춤 안 춘다고 하지?” “아니거든. 그런 말 한 사람 아무도 없거든?” 그나저나 그럼 저놈은 내가 오늘 클로드의 발을 사정없이 밟아댈 걸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이이익. 그런 건 진작 나한테도 말해줬어야지! “뭐야. 너 네 아빠하고만 춤춘 게 아닌가 보네.” “왜 이래, 오늘 나하고 춤추고 싶어 한 사람 많았…….” “그럼 이것도 다른 사람한테 묻혀온 건가?” 갑자기 눈앞에 번지던 달빛이 사라졌다. 어둑해진 시야와 함께 선명한 붉은빛이 가까이 다가들었다. 어딘가 위태로운 자세로 난간 위에 달을 등지고 앉은 루카스가 나한테 상체를 기울였다. 아래로 내리깔린 싸늘한 눈동자가 잠시 동안 무언가를 살피는 듯하다가 이윽고 내 눈을 직시했다. “너 오늘 누구 만났어?” 그 순간 나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어? 나 오늘 사람 엄청 많이 만났는데.” “그럼 어디서 붙은 건지 모르겠네.” 붙다니, 뭐가? 당연하게도 나는 어리둥절했다. “가만히 있어봐.” 루카스가 귀찮다는 듯이 말한 뒤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으잉? 또 뭐 하는 거야? 그런데 지난번 클로드를 만나러 갔다가 루카스를 마주쳤을 때 그랬듯 또다시 묘하게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내가 인식을 못해서 그렇지 이놈이랑 부대끼고 지내는 동안 간간이 이런 느낌이 들던 때가 또 있던 것 같기도 하고. “너 보수 작업해 주는 것도 그렇고 후속 처리가 은근 번거롭단 말이야. 그때 괜히 살렸나.” 아니, 이놈이? 기껏 좋은 일해 주고서 욕먹을 소리 하는 건 또 뭐죠? “내 허락 없이 이상한 거나 묻히고 들어오지를 않나.” 루카스가 불쾌하다는 듯이 내 이마에 닿았던 손을 쳐다보다가 먼지나 오물을 떼듯이 툭툭 털어댔기 때문에 나는 더 궁금해지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붙어 있었는데?” “있어. 더러운 거.”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너 혼자만 알면 다야! “들어가서 잠이나 자.” 하지만 루카스는 나를 향해 건방지게 손가락을 까딱할 뿐이었다. 그러자 내 몸이 테라스가 아닌 방 쪽을 향해 저절로 돌아갔다. “야잇. 이게 무슨 짓.” “누워서 이불 덮고.”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조종돼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이불이 저절로 목 끝까지 포옥 덮어졌다. “자장가 들으면서.” 따란따라라란- 릴리에게 생일 선물을 받은 후부터 줄곧 머리맡에 올려두고 있던 오르골의 뚜껑이 혼자서 열리더니 곧 그 속에서 마음을 평화롭게 만드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분 좋게 자.” 루카스, 저 이상한 자식……. 잘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막 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단 말이지? “머리 비우고 자라. 괜히 뻗대다가 밤늦게 기절하지 말고.” “안 그래도 자려고 했네요!” 나는 침대에 누워서 구시렁거렸다. 뭐, 그래도……. 처음에 오자마자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내가 데뷔당트를 망치고 혼자서 울적해져 있을까봐 와준 건가. 그럼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면 될 텐데. 물론 내가 이런 말하면 헛소리 말라고 또 비웃겠지. 투덜투덜. “루카스, 좋은 꿈 꿔.” 마음 넓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결국 못 이긴 척 아직까지 테라스에 있는 루카스를 향해 인사해 주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커튼 너머로 달빛을 머금은 그림자가 비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 눈이 말똥말똥하기만 했는데, 그 풍경이 지극히 정적으로 평화로워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너도 좋은 꿈 꿔.” 살랑살랑. 잠결에 귀를 스치는 작은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날 밤 결국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웃는 얼굴을 한 채 잠이 들 수 있었다. 제16.5장 데뷔당트 후 창밖의 달이 밝았다. 루카스는 잠시 동안 시선을 두었던 그믐달로부터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달빛을 받고 있는 하얀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가 싶었다. 새근새근. 깊게 잠든 듯 고른 숨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혼잣말을 읊조렸다. “어쩐다지.” 사실은 그는 얼마 전부터 고민이 있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미적거리는 일 없이 단숨에 결정해 행동에 옮겼을 일이나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자 어째서인지 또 답지 않은 망설임이 생겨났다. 그것은 퍽 우스운 일이었다. 무엇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누구에게도 그 앞길을 가로막힌 적이 없는 검은 탑의 마법사에게 망설임이라니. “그냥 내버려 두고 갈까.” 다만 그렇게 하면 눈앞에 있는 이 소녀는 금방 죽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몇 년 전 폭주하는 마력을 가까스로 잠재웠다고는 하나 그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어서, 기실 루카스는 다년간 이 작은 소녀의 옆에 붙어 어울리지 않게 친절히 후속 조치를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넘쳐흐르는 마력이 갈 곳을 못 찾고 들썩일 때마다 접촉해 안정시켜 주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지금이라도 그가 손을 털고 이곳을 떠난다면 이 소녀는 빠른 시일 내에 죽을 것이 분명했다. 루카스는 침대맡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잠들어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일순간 사람답지 않은 시린 광채가 어렸다가 곧 잠잠히 가라앉았다. 사실 그는 다른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서,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 소녀의 곁에 머무르기로 한 것이었다. 실제로도 소녀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지난 몇 년간 그는 제법 지루하지 않은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사락. 루카스는 잠들어 있는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눈앞에 있는 소녀에 맞추어 앳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에 아직은 소년티가 나는 그의 손에 백금색 머리카락이 잡혔다. 그의 눈에 한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그 빛이 까만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아직은 좀 더 있어볼까.” 루카스는 14살의 소녀 안에 함께 잠들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를 보면서 혼잣말했다. 나이는 스무 살쯤 될까. 아주 가끔씩 소녀에게서 그 모습을 투영시키는 수수께끼의 여자. “으응.”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집요한 손길에 소녀가 잠에서 깰 것처럼 몸을 뒤척였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손을 치우는 대신 약간 헝클어진 채 동그란 이마를 간질이고 있는 백금색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손으로 매만졌다. 잠시 후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든 듯, 약간 찡그려져 있던 소녀의 미간이 곱게 펴졌다. 그래. 아직은 조금 더 있어도 괜찮겠지. 루카스는 결정했고, 그럼에도 언젠가 자신이 이곳을 떠날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주지시켰다. 다음 순간,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어스름한 달빛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 사방이 꽉 막힌 마차 속에서 로저 알피어스는 간만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혼자서 움직이지 말라고 분명 당부했을 텐데?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리본을 주워 공주의 뒤를 쫓아간 것만으로도 기겁할 만한데, 심지어 폐하의 눈앞에 그렇게 아무 대책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하다니. 정녕 네가 제정신이냐?” 화려한 데뷔당트 파티가 파한 시간. 그럼에도 아직 짧은 꿈의 여운에서 깨어나지 못한 소녀들은 몽롱한 기분에 젖어 저마다의 현실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제니트, 듣고 있는 게냐?” “아니요.” 아까부터 반응이 없다 싶어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퍽 놀라웠다. 알피어스 공작은 그 당당한 말에 한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로저 알피어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제니트는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그런 그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모습에 로저 알피어스는 황당한 얼굴이었지만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결국은 이 이상 훈계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아버지, 오늘은 제니트에게도 기념적인 날이었지 않습니까. 정히 꾸중할 일이 있다면 내일 하시지요.” 알피어스 공작은 아들인 이제키엘의 말에 혀를 찬 뒤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난 뒤 마차 안은 조용해졌다. 다른 때라면 앞장서 분위기를 한결 유하게 만들었을 사람도 지금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제니트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아타나시아…….” 그 작은 속삭임에 이제키엘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옆으로 미끄러진 그의 눈동자에 창밖의 불빛으로 곱게 물든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니까 그분이 내 하나뿐인 자매라는 거네요.” 제니트는 시야에 번지는 빛의 향연 속에서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이 직접 리본을 건네주며 짤막한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던 아름다운 공주님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계시던 분이 바로 나의……. 덜컹. 멈춰 있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몸을 따라 창밖의 찬연한 빛들도 이리저리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제니트는 그 불빛을 보며 긴 시간을 인내한 끝에 마침내 오늘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흔들흔들. 한여름 밤의 꿈같았던 짧은 밤이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 [61화] 제17장 설마 이것은 그린 라이트인가요? “공주님, 이것도 먼저 온 것들과 같이 둘까요?” “설마 그것들도 다?” “네! 초대장들이에요.” 나는 한나를 따라 옆방으로 들어갔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편지 봉투들을 보고 약간 얼떨떨해졌다. 지난번에 온 게 끝인 줄 알았는데 오늘 도착한 양은 심지어 그 두 배나 되었다. “앞으로 더 많아질 텐데요.” 한나는 오늘 내 앞으로 도착한 편지 봉투들을 야무지게도 혼자 척척 분리해 놓았다. 처음에는 내가 저걸 일일이 다 열어봐야 하는 줄 알고 질겁했으나 릴리의 말로는 그럴 필요가 없단다. 시녀들이 알아서 분류를 끝낸 후 개중에 중요한 것들만 추려서 나한테 다시 올릴 거라고. 그럼 나는 그때 편지들을 보고 답장을 할지 안 할지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 이처럼 나한테 초대장이 엄청나게 많이 쏟아지기 시작한 건 데뷔당트 다음 날부터였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내 앞에 배달된 편지에 어리둥절했으나 다른 시녀들은 이런 상황을 미리 예감했던 듯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은 약간 신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미 안전성 검사를 끝마친 편지는 릴리의 손에 곱게 꺼내져서 내 앞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보름 후 열리는 파티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보고 감격해 버렸다. 역시 이건 클로드 효과인 걸까? 클로드가 아타나시아를 없는 사람 취급했던 원작에서는 다른 귀족들 역시 그녀를 본체만체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데뷔당트에서 클로드에게 직접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타났으니 이런 관심도 받고 그러는 건가? 크흑. 황제의 후광이란 역시 너무나 엄청난 것. “아,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 너무 기뻐요.” 보아 하니 릴리와 한나도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하기야 어릴 때만 해도 루비궁에서 쩌리 공주로 존재감 없이 짱 박혀 있던 내가 이렇게 초대장도 무더기로 받고 그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으흐흑. 이런 게 바로 인간 승리인가요?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지금은 뿌듯해도 될 때 맞죠? “후우, 드디어 때가 왔군요.” 그런데 모두가 즐거워하는 와중에 오직 세스만이 결의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지실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어요. 혹시라도 무도회장 같은 데에서 질 나쁜 벌레들이 꼬여들면 언제든 저를 불러주세요. 제 목숨을 걸고 처단하겠어요.”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구두굽이 햇빛에 반사돼 섬뜩하게 번쩍였다. 그동안 저기에 밟혀 죽은 해충들이 몇이던가! 거,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좀 무섭다, 세스……. 역시 벌레 퇴치 전문가! “세스도 참. 그나저나 공주님, 어느 가문의 초대를 가장 먼저 수락하실 거예요?”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아, 그런데 나 이런 데 가도 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황성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물론 클로드가 나한테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14살이 된 오늘까지 한 번도 외출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뭐, 이참에 클로드한테 물어볼까? “첫날 초대장을 보내왔던 이레인 후작가는 어떠세요? 다른 시녀들에게 들었는데 이레인 후작가는 저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식물원이나 마찬가지라서 어디에 서 있든 마치 낙원에 있는 것만 같은 황홀경이라고…….” “한나, 그건 공주님께서 결정하실 일이야. 게다가 아직 초대장을 모두 열어보시지도 않았잖니.” 들떠서 재잘거리는 한나를 릴리가 꾸중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진심으로 화가 난 기색은 아니어서, 한나는 그 후로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더 다른 가문들에 대해 떠들어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손가락으로 코 밑을 슥 훑었다. 음. 나보다 더 설레 하는 모습을 보니 이것 참 뿌듯하구먼. “아차. 까망이 님 밥 드리는 걸 잊었네!” 한나는 한참 후에야 까망이의 밥을 줘야 한다며 헐레벌떡 방을 나섰다. 그 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 차례 웃어 보인 릴리가 남은 초대장들을 마저 정리했다. 나는 궁금증도 해결할 겸 클로드를 만나러 가보기로 했다. *** “아빠!” 오늘 클로드가 있는 곳은 집무실이었다. 새삼스럽지만 클로드는 황제여서 국정을 직접 돌보고 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매일매일 상당히 바쁜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랑 같이 다과 시간을 보내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집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서류를 앞에 두고 있는 클로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오, 역시 일하는 남자는 진리! 거기 형씨, 오늘 간지 좀 나시는 걸? “바쁘세요?”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문틈으로 빼꼼 고개만 내민 채 묻자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앉아서 기다려라.” 그래도 들어오지 말라거나 방해하지 말고 가라는 말은 안 한다. 몇 년 전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처음에 멋모르고 클로드가 국정을 보는 중인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유난히 저기압인 클로드에게 쫄아서 언제 문을 열고 들어왔냐는 듯이 다시 스르륵 백스텝을 해서 살포시 문을 닫고 복도로 나갔었는데. 그때도 나를 집무실로 안내한 건 필릭스였고. 부들부들. “조용히 있을게요.”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집무실 한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클로드는 다시 책상 위의 서류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휘날려 적고 있었다. 큼큼. 잉크 냄새. 그러고 보면 클로드 저 양반, 의외로 잉크 냄새가 잘 어울린단 말이지. 솔직히 어릴 때에는 이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든 상관없이 클로드 혼자서 먹고 놀고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의외로 쓸 만한 황제인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선황제가 워낙 폭군의 정석이었다고 하니 클로드 정도면 상당히 좋은 왕인 걸지도 몰랐다. 실제로 제국민들 사이에서 평도 좋다고 하고, 심지어 역사 관련 서적들에서는 클로드를 성자라고 써놓기도 했었지. 으억! 성자라니. 성자라니! 이게 웬 말이오! 아, 안 돼! 항마력이 부족해! 나는 혼자서 잠깐 부르르 몸을 떨다가 이 이상 클로드를 보면 극심한 현타가 올 것 같아서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클로드의 집무실은 이제껏 내가 몇 번 들어와 봤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 참. 사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소파와 간이 테이블은 원래 없는 거였는데 언젠가부터 새로 생겨 있더라. 설마 나 앉으라고 가져다 놓은 건…… 아니겠고. 클로드의 집무실을 찾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가 보다. 응? 그런데 이거 원래 클로드 책상 위에 있던 거 아닌가? 할 일도 없었던 나는 내 앞에 있는 까만 장식품을 요리조리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좀 묘하게 생겼네. 해태 같은 전설의 생물 비슷하게 생겼는데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잖아. 흐음. 이렇게 보니까 색깔도 까만색이라 그런지 꼭 미니 돌하르방 같다. 코를 문지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미신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생김새라 묘하게 정감이 가기도 하고. “갖고 싶나?” 슥슥. 핫! 나도 모르게 그만 새까만 돌하르방의 코를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그걸 또 보았는지 클로드가 내게 지나가듯 물었다. 아잇, 좀 창피하다! 잠깐. 그나저나 이걸 갖고 싶냐니! 내 미적 감각을 뭘로 보고 이 사람이. “아니요. 이상한 돌조각…… 이 아니라…… 뭔가 사연이 있는 장식품 같아서 그냥 본 거예요. 헤헤.” 필요 없어. 줘도 안 가져! 그런데 클로드가 집무실에 두고 있는 걸 보니 혹시나 겉보기에는 이래도 골동품으로서는 천문학적인 가치가 있다거나. 하지만 내 말을 클로드가 비웃는 순간 그것 역시 아니란 걸 알았다. “사연 있는 장식품? 그냥 볼품없이 추레한 돌조각일 뿐이지.” 쿨럭. 클로드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진짜로 그냥 낡은 돌조각인가보다. 아니, 그런데 왜 책상에 고이 모셔둔 거야? 미처 몰랐는데 취, 취향이 좀 특이하시네요……. “갖고 싶다면 주려고 했는데.” 아니, 필요 없다니까! 큽. 내 아빠란 사람의 취향이 이렇게 독특했다니. 그래도 취향 존중! 비웃지 않을게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게요! 돌하르방 좀 좋아할 수도 있지! 나, 나름대로 피규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이해할 만해! 아, 아니, 이건 좀 다른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건가?” 그렇게 내가 까만 해태상을 보며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클로드가 나를 향해 물어왔다. 어음. 초대장 받은 얘기도 하고 겸사겸사 황성 밖에 나가도 되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바쁜 걸 보니 솔직히 괜히 찾아왔나 싶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냥 아빠 보고 싶어서 왔던 건데 바쁘신 것 같으니까 그만 돌아갈게요.” “그다지 바쁘지 않은데.” 아니…….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당신 손은 한시도 쉬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맨날 나만 보면 바쁘지만 특별히 시간 내주는 거라는 둥 그랬으면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필릭스.” 달칵. “예, 폐하.” 클로드가 이름을 부르자 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필릭스가 곧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클로드가 자리에서 유유히 일어나며 하는 말에 나는 약간 황당해지고 말았다.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할 서류가 남았으니 대신 처리해라.” 이제부터 필릭스한테 시킬 거라 안 바쁘다는 거였냐! “폐하, 어찌 제가…….” “이미 검토는 끝났으니 실제로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다. 이게 필요할 테니 빌려주지.” 으잉? 그런데 클로드가 내 앞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까만 해태 돌하르방을 필릭스에게 던지다시피 휙 건네주는 것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필릭스가 불덩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경기하며 두 손으로 받아 든 돌하르방을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폐하! 국보나 다름없는 옥새를 어찌 이리 함부로 다루십니까!” 네……? 잠깐만요. 그 해태가 뭐라구요? 옥새? 옥새라고? 내가 알고 있는 의미의 그 옥새? 저 돌하르방이? 방금 전 클로드가 나한테 주겠다고 했던 저게? 하하하하하하하. 아무래도 요즘 내 기가 허한가 봐. 왜 이상한 단어가 귀에 들리지. “게다가 전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나 다른 각료들도 들어오는 이런 개방된 곳 말고 금고 같은 곳에 보관하시라고. 귀중한 옥새를 이리 아무 곳에나 두시다니요.” “일을 하라 불렀더니 잔소리를 하고 있군. 떠들 시간이 있다면 앉아서 서류를 한 장이라도 더 보는 것이 나을 텐데.” “폐하!” 환청이 아니었나 보다. 그럼 저거 진짜 옥새인 거야? 으악! 잠깐만요! 그런데 옥새 취급 너무 하찮잖아요! 그리고 이런 걸 왜 나한테 준대! 내가 뭣 모르고 넙죽 달라고 했으면 어쩌려고! 당신 혹시 일하기 싫어서 나한테 저거 떠넘기려고 했던 거 아니지? “돌아오기 전까지 다 처리해 놓도록. 반푼이가 아니라면 그 정도야 금방 끝낼 수 있겠지.” “폐하! 정말 너무하십니다!” ======================================= [62화] 나란히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필릭스와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드 혼자만 유유자적했다. 결국 나는 필릭스를 등진 채로 문을 여는 클로드를 따라서 엉겁결에 집무실을 나서고 말았다. “일을 시켰으니 한두 시간 정도는 찾지 않을 테지.” 와아. 이 사람……. 이게 바로 권력의 힘인가. 크으. 필릭스 힘내요. 어, 그런데 잠깐……. 그러고 보니 설마 필릭스 이 오빠, 평소 클로드한테 당하던 걸 눈새인 척하면서 은근히 나한테 풀던 건 아니겠지……? 뭐야. 아까 클로드도 그렇고 필릭스도 그렇고 둘 다 지금 겁나 수상하다. “정원으로 차를 내오라고 해야겠다. 필릭…….” “아빠가 방금 두고 왔잖아요.” 클로드는 습관처럼 필릭스를 부르다가 이내 그가 옆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움찔 미간을 좁혔다. 큽. 깐죽거리고 싶다. 어이, 이봐요. 당신 차 셔틀을 집무실에 버리고 온 게 바로 당신 본인이거든? 그러니까 누가 갑의 횡포를 부리라고 했나! 횡포 부려봤자 결국은 갑도 후회하게 되어 있어! 을은 소중하다! 막 대하지 말아 달라! 나는 잠시 동안 전생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을의 서러움을 떠올리며 속으로 시위했다. 클로드는 이제 와서 필릭스의 빈자리가 아쉬운 눈치였다. 집무실에서 나온 지 아직 오 분도 안 되었는데 말이지.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는 클로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빠. 그러지 말고 우리…….” *** 촤악. 단단한 뱃머리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다.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 물을 감상하고 있을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클로드가 말했다. “뱃놀이라니. 의외로군.” “그래요? 날씨도 좋고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양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태연히 대꾸했다. 이 호수에서 배를 탄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지만 여전히 끝내주는 승차감이었다. 그때는 배가 움직이는 시스템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했었는데 알고 보니 황궁의 뱃놀이에 이용되는 배는 마력을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라 한다. 하기야, 그러지 않으면 이상한 마법 생물이 사는 호수에서 어떻게 마음 편히 안전한 뱃놀이를 즐길 수 있겠어. “어릴 때 네가 이 호수에 빠진 적이 있었지.” 그때, 내가 뱃놀이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뜻 모를 표정을 짓고 있던 클로드가 먼저 지난 일을 화두에 올렸다. 그래. 당신도 안 잊었구나. 그럼 어릴 때 그 일이 나한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도 알겠냐? 물론 난 보통의 5살짜리 애가 아니니까 물에 빠진 일이 트라우마로 남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후유증이 꽤 오래 갈 정도로 무서웠다고. 그리고 당신은 왈왈왈 멍멍이였고. 어흑흑. “전 기억이 잘 나지 않는걸요.” 클로드는 생글생글 웃는 내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응시했다. 표정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클로드와 나 둘 다 지금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클로드의 보석안은 호수 물보다 약간 어두운 남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내 눈을 들여다보는 클로드의 표정 없는 얼굴을 웃으며 마주하다가 다시 반짝이는 포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참방. 나는 맑은 수면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위험하니 물 쪽으로 너무 바짝 다가가지는 말거라.” 그런 나를 향해 클로드가 경고했다. 나는 좀 웃고 싶어졌다. 못된 생각일 수 있지만 여느 때처럼 무심히 내뱉어진 그의 말에서 무언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에는 호수에 빠져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더니. 그래. 이렇게 보니 정말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게 피부에 선명히 와 닿는구나. “아빠, 아빠.”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하고 나자 나는 어린애처럼 약간 신이 났다. “저 꽃,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요.” “저건.” “알아요. 마법 생물이라면서요? 그래도 아빠랑 같이 있으니까 위험하진 않지 않을까요?” 솔직히 유치한 발상이었다. 방금 전 내가 배의 가장자리에 다가가 손을 뻗었을 때 클로드가 예전과 달리 그런 나를 못 본 체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 말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고 또 약간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에도 관심을 보였었지. 저런 게 마음에 드나?” 예전에는 내가 저 위험한 꽃에 손을 뻗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지. 이번에는 어떨까. 또 방금 전처럼 저 꽃은 위험하니 호기심 갖지 말라고 말해줄까? 나는 조금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미묘하게 반짝이는 내 눈빛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가 돌연 쯧 혀를 차는 것이었다. “취향이 꽤나 독특하구나.” 바로 그 순간 두근두근 콩닥콩닥하던 내 마음이 급속도로 차게 식어버렸다. 아니! 당신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물론 그 해태 옥새는 당신 취향대로 만든 게 아니라지만 말이야! 그래도 난 당신을 이해해 주려고 노력했는데! 나도 속으로만 생각한 걸 그렇게 육성으로 말해버리는 게 어디 있어! 치사하게! 이건 배신이야! 으아앙! 나는 클로드가 해태 돌하르방을 애지중지 아낀다 해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는데 뭔가 굉장히 억울한 기분이었다. “잠깐 있어보아라.”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클로드는 약간 귀찮은 듯이 느린 손길을 물가로 뻗었다. 응? 그런데 뭐 하려는 건가요? 저런 마법 생물은 위험하니까 관심 갖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뭘 기다려? 내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출렁. 우리가 타고 있는 배가 한순간 작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클로드가 손을 뻗고 있던 방향의 수면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치솟았다. 촤악! 나는 허공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는 모습을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발치에 후두둑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며 그대로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원하는 만큼 천천히 구경하려무나.” 클로드가 내 앞에 대령시켜 준 것은 방금 전 내가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했던 꽃이었다. 그런데 신비롭게 투명한 빛을 뽐내는 꽃잎 아래로 웬 흉측한 문어 다리 같은 게 있었다. 이, 이 괴리감은 도대체. 내가 할 말을 잃고 있는 사이 연꽃인 척하고 있던 문어가 내 시선을 느낀 것처럼 한차례 크게 몸을 꿀렁거렸다. 미끈미끈한 촉수가 꿈틀꿈틀. 내 동공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흔들. 다시 꿈틀꿈틀. 동공이 흔들흔들. “으.” 결국 나는 기겁해서 소리 지르고 말았다. “으아앙! 이게 뭐야!” 문어 닮았는데 얼룩덜룩해서 징그러워! 악악! 저리 가, 저리 가! 내가 경기하며 몸을 확 뒤로 물리자 클로드가 의아한 낯을 해보였다. “왜 그러지?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하더니.” “아니, 그건! 이런 촉수 괴물인 줄 모르고! 으악!” 내 비명을 들었는지 연꽃 괴물이 이번에는 나를 향해 촉수를 뻗으며 꿀렁거렸다. 나는 촉수의 구애를 피해 무의식중에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클로드가 움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움직이면 위험…….” 어울리지 않게도 약간 다급한 음성이 귓가에 번진다 싶었을 때, 배 끄트머리에 간당간당 달라붙어 있던 내 몸이 균형을 잃고 슬쩍 뒤로 기울어졌다. “아타나시아!” 하지만 나는 물에 빠지지 않았다. 어느새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클로드가 내 팔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열심히 촉수질을 하고 있던 마법 생물은 어느덧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으어, 으어어. 방금 나 또 물에 빠질 뻔한 거야? 그런 거야? 저 문어 연꽃 때문에? “아, 아빠아. 으어어.” 내가 전생에 저 문어 다리랑 무슨 악연이 있어서 어릴 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두 번씩이나! 아니, 클로드 당신도 말이야! 저런 건 좀 예고를 하고 꺼내오던가! 갑자기 내 앞에 던져 놓으면 어떡해. 으어어엉. “위험하니 물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했지 않…….” “무, 문어 다리, 막 꿀렁꿀렁, 징그럽, 으앙.” 말이 문어 다리지, 실제로 보면 맛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을 만큼 얼룩덜룩 징그러웠다! 으어, 취소. 취소. 문어랑 하나도 안 닮았어. 저건 진짜 그냥 촉수 괴물이다. 마음대로 가져다 붙여서 미안해요, 문어 씨! 꿈틀. 응? 그런데 갑자기 시야에 어른거리는 저 촉수는? “아, 아빠! 저기, 저기!” 뭐야, 없어진 거 아니었어! 이제 보니 허공에 떠 있던 게 그냥 배 위로 떨어진 것뿐인 모양이다. 징그러운 촉수 위로 신비로운 꽃이 자라 있는 모습이 오히려 더 기괴하고 징그러워 보였다. “아빠, 저거! 싫어! 싫어, 빨리!” 치워 줘! 치워 달라고! 몰랐는데 나에게 촉수 공포증과 혐오증이 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지금 누구한테 뭘 시키고 있는 건지 자각도 못 하고 앞에 있는 팔이 구명줄인 것처럼 매달리며 그냥 마구잡이로 재촉해 댔다. 그러자 클로드가 내 기세에 떠밀려 엉겁결에 바닥을 기어 다니는 연꽃 괴물을 눈앞에서 없애버렸다. “으허어어.” 그러고 난 후에도 나는 잔상처럼 남은 촉수의 후유증에 시름시름하며 우는 소리를 냈다. 으어, 마이 아이즈! 내 눈은 이미 오염되었어! 촉수 괴물 안 본 눈 사요! “괜찮나?” 클로드는 생전 처음 보는 내 모습에 놀라고 당황한 눈치였다. 하기야 그렇게 난동을 부렸는데 놀랄 만도 하지. 이건 마치 사람들이 바퀴벌레 같은 혐오충을 목도할 때 보이는 것 같은 반응이 아니던가. 크흑. 전생에서 오히려 난 바퀴벌레를 봐도 눈 하나 꿈쩍 안 했었는데 이런 촉수에 질 줄이야. “까, 깜짝 놀랐잖아요. 갑자기 그렇게, 눈앞에 막 촉수를. 으엉. 가져다 대면.” 차라리 뭐 그런 걸 가지고 호들갑이냐고 했으면 안 그랬을 텐데, 괜찮냐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클로드를 향한 원망을 토로했다. 그나저나 이 난리법석을 떠는 와중에도 배가 한 번도 요동치지 않는 걸 보니 참으로 대단하기도 했다. 침대는 과학!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표방했던 모 침대가 생각난다. 하기야, 대단하기는 내가 매달려서 그렇게 막 발버둥 치는데도 꿈쩍도 않던 클로드도 대단했지만……. 그 순간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으, 으응? 나 지금 어디 달라붙어 있는 거래요? 이 팔뚝.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허억. 게다가 내가 지금 뭐라고 지껄여댔지? 나의 멘붕은 머리 위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리는 순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제 안 그러마.” 이, 이게 지금 클로드가 한 말이 맞습니까? 제 귓구멍이 제대로 박혀 있는 것도 맞구요? “그렇게 무서워할 줄 몰랐다.” 내가 얼어붙어 있는 사이 클로드가 덧붙였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다음 순간 아직까지도 그에게 안기듯 매달려 있는 내 등에 어색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으허. 으헐. 으허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그 상태로 어정쩡하게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의 행동에 폭풍 같은 감동이 밀려오기 시작…… 하는 게 아니라 폭풍 같은 쪽팔림이 내 온몸을 마구 뚜들겨 패며 달려들었다. ======================================= [63화] 제, 제길. 이 사람이 먼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도대체 내가 얼마나 요란하게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소리지? 모르긴 몰라도 나는 또 하나의 거대한 흑역사를 기록한 것이 분명했다. 으아아! 어떡해, 창피해! 얼굴 후끈거려! 여기가 제 무덤입니다. 저 오늘 여기서 수치사 할게요. 으어엉! 여전히 어색한 느낌으로 내 등을 두드리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 물어봤지만 결국 클로드는 내가 궁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니, 사실 이건 허락하고는 좀 다른 문제인데……. “건방을 떨고 있군. 어디서 감히 누구를 오라 가라 하는 거지?” 촉수 사건 이후 배를 타고 다시 호숫가로 돌아가는 길은 상당히 뻘쭘했는데, 그 민망함을 떨치고자 내가 화제를 옮겼을 때 클로드가 섬뜩하게 일갈한 말이었다. 그는 다른 귀족 자제들이 나를 그들의 저택으로 초대한 것이 퍽 못마땅한 듯했다. 으에, 그런데 뭘 또 그렇게 삐뚤게 받아들이고 그러신답니까. 솔직히 말해봐. 당신 친구 없지! 친구 집에 놀러간 적도 없고 파티에 초대받아서 간 적도 없지!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는 역으로 내게 초대장을 보냈던 이들을 황궁에 불러들였다. 물론 전부 다는 아니고 개중에 릴리가 엄선한 사람들만 부른 것이었지만 말이다. “오벨리아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아타나시아 공주님, 초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래서 나는 지금 에메랄드궁에서 귀족 영애들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와아. 살다 살다 내가 이 성에서 주인으로 손님맞이를 하는 날도 다 오고. 진짜 인생지사 새옹지마다. 루비궁에서 초콜릿 훔쳐 먹고 살 때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야. 크흑. “모두들 와줘서 고마워요.”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나는 거울을 보고 수없이 연습했던 대로 웃는 낯으로 그들을 반겨주었다. 쓰읍. 어차피 그 많은 초대장 중에서 어느 것에 먼저 응할지도 고민이었으니 차라리 이렇게 다 같이 모인 게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와아. 이렇게 멋진 정원은 처음 봐요.” 오늘 다과회를 연 장소는 에메랄드궁의 장미 정원이었다.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착석하던 영애들이 주위를 살피더니 저마다 감탄했다. 하긴. 내가 봐도 이 정원이 황궁에 있는 정원들 중에 제일 화려하고 예쁘긴 했다. “제가 장미를 좋아해서 아바마마께서 만들어주신 정원이에요. 저도 좋아하는 장소랍니다.” 그런데 이거 참. 원래 이 나잇대 애들하고는 모여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정원 칭찬을 하는 말에 별 생각 없이 대답해 놓고 이어지는 그들의 반응에 곧 당황했다. “세상에! 폐하께서 정말 다정하시네요.” “실은 데뷔당트 때 먼발치에서 뵙고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공주님을 대하시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그날도 공주님께 굉장히 자상하셨죠.” “이런 정원까지 만들어주시고. 공주님을 정말 많이 아끼시나 봐요.” 초롱초롱한 눈빛들에 나는 급격히 부담스러워졌다. 뭐, 뭐지. 이 기분은. 그러고 보니 이건 마치 같은 반 친구가 어느 날 예쁜 새 옷을 입고 와서 ‘와, 네 옷 예쁘다!’라고 감탄했더니 그 친구가 뿌듯한 얼굴로 ‘우리 아빠가 사줬어!’라고 자랑한 것 같은 상황이 아닌가. 헉. 생각했더니 더 뻘쭘해진다. “데뷔당트 날 폐하와 공주님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클로드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폐하께서 공주님께 속삭이시는 말을 들었어요. 분명히 공주님처럼 예쁜 아이는 세상에 둘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셨죠. 그때 두 분 가까이에 서 있어서 또렷이 들었답니다. 아마도 데뷔당트로 긴장하신 공주님을 격려해 주신 거겠죠?” “아앗.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그게 뭡니까? 내가 들은 건 분명 그런 내용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디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구절하고 헷갈린 거 아니야? “하지만 정말 옳은 말씀이세요. 그날 공주님은 무척 아름다우셨으니까요.” “맞아요. 늘 소문으로만 접해 왔었는데, 직접 뵙고 나니 마치 동화책 속의 요정님 같으셔서 깜짝 놀랐어요.” “아하하……. 칭찬이 과하셔서 부끄럽네요.” 쿨럭. 너, 너무들 띄워 주신다. 왠지 낯이 좀 뜨거운데요. 아무래도 그날 클로드 버프가 너무 셌나 보다. 데뷔당트로부터 시간이 꽤나 지난 오늘까지도 이렇게 립 서비스를 해주는 걸 보면. 그런데 다들 뭐랄까. 귀족 영애들이라고 해서 좀 걱정했는데 그냥 평범한 여자애들 같네. 행동거지가 좀 더 우아하고 격식을 차린다는 걸 빼면 중학생 여자애들이 이야기 나누는 거랑 비슷하잖아? 다들 아직 십 대 중반이라 그런가. 한 가지 이상한 건 어째서인지 지금 이 자리에 초청된 것이 여자애들뿐이라는 점이었다. 남자애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이 영 이상하다. 분명 내가 받은 초대장에는 발신인이 어느 가문 공자인 경우도 있었는데. 우연이라기엔 뭔가 수상한걸. 나는 눈동자를 가늘게 접고 정원의 한구석에 내 호위 기사로서 서 있는 필릭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나중에 물어봐야겠어. 그나저나 필릭스도 저러고 가만히 서 있으니 제법 기사 태가 나네. 테이블에 앉은 영애 몇이 힐끔힐끔 필릭스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눈에 띄고. 날씨는 화창하지. 정원에서는 향기로운 꽃 내음이 그윽하게 감돌지. 한창 순수한 나이의 어여쁜 여자애들까지 재잘재잘 떠들고 있으니 정말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나는 대화에 맞춰 몇 번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며 다과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내 왼쪽에 앉아 있던 소녀들 중 한 명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소리 내더니 곧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어요, 공주님. 저는 이레인 후작가의 세레나라고 합니다. 저어, 혹시 제 얼굴을 기억하시나요?” 한순간 누구지? 싶었으나 나를 향해 고개 돌린 소녀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하얀 꽃을 보는 순간 생각이 났다. 데뷔당트 때 만났던 백합 소녀! “데뷔당트 때 같이 춤을 췄었죠.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그때도 그렇고 오늘도 머리에 백합을 꽂고 있는 걸 보니 그 꽃을 정말 좋아하나 보다. 내가 아는 척하자 백합 소녀가 발갛게 얼굴을 붉혔다. “공주님, 저는 듀크 백작가의…….” “저는 이스틴…….” “저는 어쩌구…….” 백합 소녀의 인사에 다들 잊고 있던 자기소개가 생각난 듯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내가 안 그런 척 신경 쓰고 있던 소녀도 마침내 고운 목소리를 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제니트 마그리타예요. 공주님을 이렇게 다시 만나 뵐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데뷔당트 날 마주친 적이 있던 제니트였다. “그날 공주님께서 떨어뜨리신 리본을 제가 가져다 드렸었죠.” 으억, 실은 아까부터 저 많은 영애 중에서 제니트만 보여서 혼나는 줄 알았다. 이게 바로 여주인공 효과인가요? 다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와중에 제니트만이 비교적 수수한 실크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점이 오히려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기억나네요. 고마웠어요.” 내가 대답하자 제니트가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제니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영애들이 한순간 눈부신 무언가를 본 것처럼 두 눈을 깜빡거리는 것을. 허흑. 그런데 그 리본 클로드가 버렸는데. 저 천사 같은 미소를 보니 어쩐지 좀 미안해진다. 그때, 제니트의 미소에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어떤 영애가 이내 생각났다는 듯이 외쳤다. “아! 그러고 보니 그날 알피어스 공자님의 에스코트를 받았던.” 제니트가 성을 빌려 쓰고 있는 흰둥이 아저씨의 사촌 집안은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 썩 이름 있는 가문은 아닌 듯했다. 하기야, 제니트의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 그녀의 존재를 숨기려면 그래야 했겠지. “마그리타라면 알피어스 공자님과는 육촌 관계가 되나요?” 이제키엘이 영애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모두의 눈길이 제니트에게 쏠리는 것을 보면. 제니트가 웃으며 답했다. “어릴 적부터 알피어스에서 자랐기 때문에 친오라버니 같은 분이세요.” 헉. 아까부터 왜 저렇게 예쁘게 웃는 거야. 주위에 막 꽃잎이 휘날리는 것 같은 환영이 보이잖아요! 무섭다, 여주인공! 꽃 뿌리기 버프까지 갖고 말이야! “부러워요. 알피어스 공자님이 에스코트까지 해주시고.” “직접 뵙고 나니 소문이 과장이 아닌 걸 알겠더라고요. 그 훤칠하신 모습이라니.” “아아. 정말 피오레체의 조각상 같은 외모셨죠.” “하아.” 어이구. 제니트뿐만이 아니라 이제키엘도 남자 주인공 효과가 장난 아니었다. 여기도 이제키엘 때문에 상사병에 걸린 영애들이 많구먼. 하지만 어차피 남자 주인공은 여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걸. 사실 제니트를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내가 황궁에만 짱 박혀서 두문불출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녀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늘 그녀가 내 다과회에 초대된 것도 그렇고 일단 제니트는 알피어스 공작가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무시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소설의 여주인공인 제니트부터가 나를 만나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지난번 내가 떨어뜨렸던 리본을 굳이 주워서 가져다준 것도 그렇고. 그러니 어차피 언젠가는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날이 다만 오늘로 앞당겨졌을 뿐이다. “저기, 그럼 혹시 알피어스 공자님이 어떤 여성상을 좋아하는지…… 아시나요?” 그 와중에 어떤 영애가 용기를 내 물었다. 다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제니트의 대답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제니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저도 그런 건 잘…….” “뭐어, 그냥 한번 물어본 거지 그렇게 많이 궁금했던 건 아니에요.” “흠흠.” “큼큼.” 나는 차를 홀짝이면서 그들의 활발한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으으응. 이렇게 보니 다들 참 귀엽기도 하지. 한창 예쁠 나이인 소녀들이 저마다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좋아하는 남자애 얘기를 하는 모습이 참 풋풋해 보였다. 크흑. 십 대 중반 여자애들이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떠드는 게 이렇게 귀엽고 훈훈하게 느껴지다니. 이러니까 나 진짜 늙은 것 같다. 어흐흑. 그렇게 내가 아련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백합 소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헉.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나는 엄마 미소 대신 공주 미소를 다시 입가에 띠웠다. “그러고 보니 공주님도 알피어스 공자님과 춤을 추셨었죠.” 억. 왜 다시 화제가 나한테 튀는 겁니까. 나 창피한데. 그날 이제키엘 발 엄청 밟았는데! 그래서 잊고 싶은 기억인데! “그랬었죠…….” “저도 봤어요! 알피어스 공자님이 공주님께 춤을 청하시는 모습!” 취소한다. 종달새가 아니라 매였어!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번뜩이는 눈빛들을 보며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키엘이 공주님께요?” ======================================= [64화] 미처 몰랐던 이야기인 듯 한순간 멈칫하는가 싶던 제니트까지 반문하자 나는 그만 이 다과회를 파하고 싶어졌다. 이, 이런 식의 관심은 낯설다. 역시라고 해야 할지 이제키엘 인기 장난 아니구나. 이렇게 보니 그가 남자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 닿는다. 이건 아까 전 클로드가 화제에 올랐을 때보다도 더한 관심 집중이 아닌가.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역시 그 정도는 되어야 남자 주인공이란 거겠지. “그때 공자님과 공주님 모습이 꼭 동화 속 한 장면 같더라구요!” 저 영애는 아까부터 계속 동화책 타령이었다. 하긴 동화책 속 단골 주제가 공주랑 왕자, 혹은 공주랑 기사 뭐 그런 거긴 하다. “그래서 어떠셨어요, 공주님?” “만약 저한테 춤 신청을 해주셨더라면. 아아.” 보아하니 이제키엘하고 같이 춤을 춘 소감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초롱초롱 반짝반짝거리는 눈빛들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잠깐이었다. 어유, 다들 참 좋을 때다. 크흑. 나는 또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해놓고 약간 아련해졌다. 물론 이제키엘이 남자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아직 17살인데 벌써부터 키도 크고 여자애들 마음 설레게 얼굴도 잘생기긴 했다. 은발 금안이라는 눈에 띄는 색 배합부터가 이미 주인공이라고 도장 쾅쾅 찍어놓은 거 아니던가. 게다가 자고로 로맨스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란 완벽남이어야 하는 법이므로 아마 이제키엘은 모든 스펙에서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를 미혹시키기에는……. ‘괜찮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으음. 하긴 그때는 한순간 이제키엘에게서 눈을 뗄 수 없긴 했지만.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알피어스 공작저에서의 이제키엘을 애써 털어버리며 입을 열었다. 흐음. 다들 이렇게 귀여우니 장단을 좀 맞춰줄까? “사실 좀 놀랐어요. 설마 알피어스 공자에게 춤 신청을 받을 줄 몰랐거든요.” 내가 꺼낸 말에 영애들이 꺄악꺄악 소란을 떨어댔다. “저도 알피어스 공자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터라 평소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렇게 운을 띄웠을 뿐인데도 다들 좋다고 추임새를 넣으며 장단을 맞춰왔다. 헉. 이건 마치 다 함께 한마음 한뜻이 된 아이돌 팬덤 같기도 하고. 아, 아냐. 나는 거기에서 빼줘! “역시 황성에도 알피어스 공자님에 대한 소문이 흘러들어갔군요!” “오히려 세간의 소문은 황성 내에 있는 궁인들이 더욱 꽉 잡고 있을걸요?” “와, 대단해요!” 그래도 아직은 다들 어려서 그런지 반응들이 참으로 솔직하고 꾸김이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물개 박수는 귀족 영애가 보이기에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튼 그런 분위기라 그런지 나도 처음보다는 마음이 많이 편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댄스홀을 막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어머나!” “그때 옆에서 누군가 저를 불러서……” “세상에!” “고개를 돌렸더니…….” “꺄악!” 내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리액션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것 참 이야기할 보람 있는 청자들일세. 그래도 내가 이제키엘하고 같이 춤췄다고 시기 질투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부러워하고 있어서 다들 귀여웠다. 사실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도 별것 아닌 이유로 다른 영애들의 질투를 사 괴롭힘당했던 엑스트라가 얼마나 많던가! 크흑. 원래 여주인공이 아니고서야 남자 주인공 옆에서 얼쩡거리는 여캐들의 말로야 뻔하다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 소설은 오로지 제니트의, 제니트에 의한, 제니트를 위한 소설이다 보니 이제키엘에게 껄떡거리던 여자들은 모두 제대로 된 갈등을 형성하기도 전에 존재감 없이 금세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런 장치 자체가 그냥 남자 주인공인 이제키엘의 인기를 설명하기 위해, 또 그런 유혹에도 주위에 눈길 한 번 돌리지 않던 이제키엘의 멋진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싶었다. “그랬군요. 전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터라 이제키엘과 공주님이 함께 춤을 추신 줄 몰랐어요.” 그리고 우리의 천사 같은 여주인공인 제니트 역시 그런 여자들에게 질투심이나 불쾌감 한 번 가진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제니트는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씨 여리고 아름다운 완벽한 여주인공이었으니까. “아쉽네요. 저도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분명 무척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겠죠.” 엄밀히 따지자면 굳이 제니트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필요조차 없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녀를 위해 존재하고 있지 않던가. “네, 전 직접 봤는데 얼마나 멋졌는지 몰라요!” “댄스홀 밖에서도 다들 넋을 놓고 두 분만 바라보고 있던걸요.” “처음 에스코트 받았던 마그리타 양을 제외하면 알피어스 공자님이 그날 먼저 춤을 청한 건 아타나시아 공주님뿐이었어요. 하아. 다음에는 저한테도 기회가 있었으면.” 다시 한 번 주위가 떠들썩해졌다. 이야, 이렇게 많은 소녀가 거의 다 이제키엘을 흠모하고 있다니. 여간 죄 많은 남자가 아니네. “저어, 저는 데뷔당트 날 뵈었던 자르비에 공자님도 멋진 것 같더라고요.” 그러나 역시 미세한 취향의 차이는 존재해서 그런지 이제키엘의 곁다리로 조금씩 다른 영식들의 이름이 물망에 오르기 시작했다. “자르비에 공자님이라면! 그! 고독한 회색 늑대!” 하지만 뒤이어 귓가를 찔러 들어온 목소리에 나는 그만 마시던 차를 뿜을 뻔하고 말았다. 내가 지금 뭘 들었지? 뭐, 고독한 회색 늑대? “아아, 맞아요. 알피어스 공자님이 완벽한 미모와 여심을 녹아들게 만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계시다면 자르비에 공자님은 무리에서 벗어난 한 마리의 고고한 늑대 같은 분위기가 있죠.” “저어, 저는 아까부터 저쪽에 서 계신 기사님께 자꾸만 시선이 가서…….” 수줍은 음성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에 서 있는 건 필릭스였다. “아아, 저도요! 저 무엇이든 베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 하지만 분명 저 냉정함 속에 숨겨두신 건 불꽃같은 뜨거운 열정이겠죠!” 아, 아니, 필릭스가 아닌가 보다. 날카로운 눈빛? 냉정함 속에 숨겨놓은 불꽃같은 열정? 그런 수식어라면 절대 필릭스일 리가 없어. “공주님, 혹시 저쪽에 검은 제복을 입고 서 계신 붉은 머리카락의 멋진 기사님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붉은 머리의 기사는 필릭스밖에 없었다. 나는 약간 기가 막힌 기분으로 답했다. “제 호위 기사인…… 로베인 경 말인가요?” “아앗! 로베인 경이라면, 설마 적혈의 기사 필릭스 로베인 님?!” 오소소!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 적혈의 기사? 그건 또 뭔데! “적혈의 기사님이라면, 폐하께서 오벨리아를 선황제의 폭정에서 구하실 때 부정한 세력들을 누구보다 빨리 섬멸시켜 주위를 온통 피바다로 만들었다는 바로 그!” “어쩐지 한눈에 그 기도가 범상치 않다 느꼈는데 설마 적혈의 기사님이셨다니!” 피, 필릭스? 필릭스가 적혈의 기사? 적혈구도 아니고 적혈의 기사라고? 그, 그리고 그거 원래 책 속에 있던 설정이야? 설마 저 오그라드는 호칭이 진짜 필릭스 거야?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움직여 저 멀리 서 있는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필릭스의 동공도 지금의 나 못지않게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레인 후작가에도 한 분 계시잖아요. 그 자태가 꽃처럼 아름다워서 꽃 공자님이라고 불리시는 분이!” “맞아요, 맞아!” 이레인 후작가라면 백합 소녀의 가문이었다. 나는 필릭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고개를 돌리다가, 곧이어 무방비 상태에서 고막을 찔러 들어온 외침에 더욱 격한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말았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 “냉혹한 적혈의 기사!” “꽃보다 아름다운 꽃!” 으악! 내 귀! 이거 도대체 장르가 뭐예요? 무슨 인소 속 사대천왕, 그런 것도 아니고! 으아악! 그리고 나는 보았다. 영애들이 흥분해서 외치는 구령에 백합 소녀가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기침하는 것을. 고독한 회색 늑대 얘기를 제일 먼저 꺼낸 게 자기면서 막상 남동생인지 오빠인지를 상대로 한 저 오그라드는 수식어를 들으려니 멘탈 붕괴가 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놈의 늑대 얘기를 왜 꺼냈어! 으아악! “공주님은 어느 분이 제일 멋지다고 생각하세요?” “역시 함께 춤을 추셨던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알피어스 공자님?” “아니면 외로운 회색 늑대 자르비에 공자님?” “냉혹함 속에 다정한 불꽃을 숨기고 계신 적혈의 기사님은요?” “한 떨기 꽃보다 더 아름다운 이레인 공자님은 아직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으시죠.” 아, 안 돼, 내 항마력! 이제 제발 그만해, 으아아악! *** “무척 즐거운 다과 시간이었어요. 모두들 오늘 방문해 줘서 고마워요.” 그래. 즐거웠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흑. “정말이지 너무나도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초대해 주세요, 공주님.” 자리가 파할 때쯤 나는 다과 시간이 처음 시작될 때보다 확연히 정신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처음 고독한 늑대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장장 한 시간 동안이나 인소 속 사대천왕 뺨치는 무시무시한 얘기를 들었더니 타격이 여간 큰 게 아니었다. 으어, 다시 생각하니 또 소름이! “아타나시아 공주님.” 한 가지 놀라웠던 건, 제니트도 그런 영애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저 시공간이 뒤틀어지는 것 같은 얘기를 꽤나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 꽃보다 공자인지 뭔지 하는 이레인 후작가의 꽃 공자 얘기가 나올 때마다 속이 안 좋은 것처럼 핼쑥해지던 백합 소녀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나는 옆에서 들려온 제니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아앗, 잠깐! 나,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또 그렇게 꽃잎을 빰빰 뿌리면! “공주님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조금 아쉽네요.” 나는 제니트가 뿌린 꽃잎들에 뺨을 얻어맞고 약간 얼얼해진 상태로 마주한 얼굴을 보았다. “다음에 또 만나 뵐 수 있겠죠?” 천사 같은 외양의 마음씨 고운 제니트. 아마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책 내용 같은 걸 몰랐더라면, 나는 이 아이를 지금과 다른 기분으로 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제니트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럼요. 기회가 되면 또 만나도록 해요.” 그리고 내 말에 봄꽃처럼 환히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며 약간 착잡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나는 내 다과회에 와준 영애들을 에메랄드궁의 입구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때마침 그 앞에서 낯익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루카스.” “오벨리아의 번영이 함께하시기를.” 다른 사람들의 앞이라 그런지 루카스가 내게 공손히 인사해 왔다. 나를 따로 찾아올 때가 아니면 늘 그렇듯 그는 오늘도 황실 마법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내 옆에 있는 영애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루카스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 [65화] 끙. 그런데 나 루카스한테 반말해야 하나, 존대말해야 하나? 한 1초 남짓 고민하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드세요.” 어흠. 난 위엄 있는 공주니까. 앗! 그런데 이놈이. 고개 들기 전에 입꼬리 씰룩이는 거 다 봤어! 내가 웃겨? 이렇게 우아하게 고개 들라고 하는 공주 또 본 적 있어? 그런데 착각인지 루카스가 고개를 드는 순간 주위에서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오늘 궁전에서 다과회를 여신 모양이군요.” 붉은 눈동자가 내 옆에 있는 다른 영애들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으응? 그런데 왜 자꾸 흡흡 숨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리지? “네. 무척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답니다.” “공주님께서 즐거우셨다니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악. 루카스 쟤, 오늘 에메랄드궁에서 다과회를 열게 만든 게 클로드라는 걸 아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꼭 지금 저런 말을 해야겠니? “송구합니다만 탑에서의 부름이 있어 지금 바로 자리를 비켜야 할 것 같습니다.” “저런. 바쁜 사람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안 되죠. 그만 물러가세요.” “감사합니다, 공주님. 오벨리아의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루카스를 후딱 보내버렸다. 으윽. 하여간, 루카스는 뭔가 잠정적인 시한폭탄 느낌이라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한테 예의를 안 차린 적도 없고 내숭을 안 부린 적도 없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막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고. 그렇게 내가 멀어지는 깜장 뒤통수를 보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고, 공주님. 저분은 도대체 누구신가요?” 나는 옆에서 들리는 떨리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뺨을 발갛게 상기시키고 있는 백합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으응? 그러고 보니 얼굴 붉히고 있는 영애들이 왜 이렇게 많지? “어, 음. 루카스라고. 황실 소속 마법사예요.” 나는 왜인지 기분이 미묘해져서 대답했다. 그러자 돌연 백합 소녀가 탄성을 내지르며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부여잡는가 싶었다. “루카스 님! 어쩜 존함까지도 너무 멋지세요!” 넹……?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백합 소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영애들에게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격한 반응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세, 세상에. 검은 탑에 저렇게 멋진 분이 계셨단 말이에요?” “아아, 저 밤하늘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루비처럼 붉게 반짝이는 눈동자!” “방금 전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는 벼락을 맞는 것 같았어요!” 그, 그러고 보니 루카스가 겉모습만큼은 멀쩡하다 못해 깜짝 놀랄 정도로 훌륭했지. 자칭 타칭 미소년 천재 마법사이기도 하고. “정말 예쁜 마법사님이네요.” 심지어 여주인공인 제니트마저도 깔끔하게 감탄했다. 다만 아직은 앳된 소년의 외모이기 때문에 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쁘다는 평이었다. 나도 이제는 본 지 하도 오래 되어서 좀 가물가물해지려고 하지만 원래 모습은 그래도 남자답게 선이 굵고 체격도 지금에 비해 확연히 컸던 것 같은데. 어쨌든 나는 루카스 때문에 뜻하지 않게 일어난 소란에 약간 얼떨떨해졌다. 이거 아무래도 나만 루카스를 매일 보다 보니 별 감흥이 없었던 건가 보다. 멀어지는 루카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꿈결 속을 헤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백합 소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저 우수에 젖은 눈동자. 온몸을 휘감고 있는 고독한 분위기. 깊은 외로움이 느껴지는 뒷모습!” 헉. 바로 그 순간 내 동공은 다시금 세차게 흔들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서, 설마 이건. “마치 야생을 방랑하는 한 마리의 고고한 검은 늑대 같아요. 아아.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아아, 루카스. 너 방금 전에 고독한 회색 늑대를 밀어내고 사대천왕 됐어……. 나는 멀어지는 깜장 머리를 향해 아련한 눈빛을 보내고 말았다. *** “공주님, 그렇게 빨리 걸으시면 위험합니다. 조금 천천히…….” “하지만 넘어지기 전에 적혈의 기사님이 ‘쨘!’ 하고 구해 주실 거잖아요?” “…….” “그렇죠, 적혈의 기사니이임?” 내 말에 필릭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다과회가 있던 날로부터 벌써 며칠. 나는 세간에 떠도는 필릭스의 별명으로 그를 놀려주는 데 재미가 들려 있었다. “적혈의 기사님이 제 호위 기사님이라 얼마나 영광인지 몰라요. 크으. 역시 피보다 붉은 정열의 불꽃! 냉혹한 빙산 속에 용솟음치는 뜨거운 심장! 앞으로도 저는 적혈의 기사님만 믿을게요.” “…….” 내가 그럴수록 필릭스의 낯빛은 점차적으로 파리해졌다. 아무래도 저런 오그라드는 소리를 생으로 들으려니 이만저만 타격이 큰 게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그럴수록 나는 깐죽거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크크크. 필릭스 놀려주는 거 너무나 재미있는 것. “공주님, 너무하십니다…….” 상처 입은 어린 영혼 필릭스가 나를 향해 원망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속해서 앞서 걸었다. 품에 한 아름 안고 있는 꽃다발에서 달콤한 향기가 올라와서 기분이 좋았다. 클로드의 궁은 언제 가도 늘 삭막했기 때문에 분위기 쇄신 겸 집무실에라도 놓아줄 생각이었다. “쉬고 계신 모양이네요.” 그런데 클로드는 집무실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이전에도 드물지 않게 있었기 때문에 나는 클로드를 찾아 익숙하게 가넷궁의 복도를 걸었다. 이 궁은 오늘도 참 조용하구만. 그래서 어릴 때 폐궁인 줄 알고 여기를 내 예쁜이들의 아지트로 삼으려고 했던 것만 생각하면! 크흑. “아빠?” 나는 클로드의 침실로 들어섰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으니 내가 알아서 들어가 확인해 보는 수밖에. 필릭스는 항상 그렇듯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소파 위에서 내가 찾던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 또 여기서 자고 있네. 멀쩡한 침대 놔두고 왜 맨날 이런 좁은 데서 자는 거야? 그리고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누가 들어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말이야. 이러다가 칼 맞고 죽으면 어쩌려고 이래? 그러고 보면 필릭스를 내 호위 기사로 잠시만 빌려준다고 했던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몰랐다. 황제란 사람이 시중들어주는 사람을 나보다도 적게 데리고 있지를 않나. 클로드는 정말 피곤했는지 내 발자국 소리에도 한 번을 뒤척이지 않았다. 새근새근 잘도 자네. 나는 클로드를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오늘은 별다른 이유가 있어 찾아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내 정무를 보다가 피곤해서 잠깐 쉬는 사람을 깨우자니 어쩐지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흐음. 그러고 보면 요즘 들어 부쩍 낯빛이 피곤해 보이긴 했었지. 내 데뷔당트 때도 그렇고 뱃놀이 때도 그렇고, 어쩌면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나한테 시간을 내주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방전돼서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숙면 중인 건지도 몰랐다. 한 번 더 불러보고 안 깨면 그냥 말자. “아빠.” 나는 작게 소리 내서 클로드를 불렀다. 조용한 방 안에 내 목소리만 가득 울려서 어쩐지 조금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도 클로드는 눈을 뜨지 않아서 나는 더 이상 그를 깨우려고 시도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나서 자리를 떠나는 대신 나는 클로드가 잠들어 있는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 턱을 괴고 클로드가 자고 있는 얼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역시 자고 있는 모습은 참 온순하고 착해 보이는데 말이야. 나는 눈앞에 있는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갑자기 든 생각에 그때까지도 끌어안고 있던 꽃다발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예쁜 분홍 꽃을 클로드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와아! 여기도 꽃 공자가 있어! 나는 머리에 꽃을 단 클로드를 보며 흥분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꽃! 봄의 여신조차 고개를 숙이고 말 정도의 이 눈부신 아름다움! 보고 있냐, 이레인 후작가의 꽃 공자! 루카스가 회색 늑대를 밀어내고 고독한 검은 늑대로 승격한 것처럼 클로드도 지금 너의 꽃 공자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구! 나는 신이 나서 이번에는 좀 더 크고 화려한 꽃을 클로드의 머리에 꽂았다. 크으! 이것이 바로 독장미보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클로드의 아름다움! 그 농익은 매력은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공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 탁!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래에서 불쑥 올라온 손이 내 팔목을 확 붙들었다. “으악!” 악, 깜짝이야! 놀라서 시선을 움직이자 클로드와 눈이 마주쳤다. 악!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이 사람 왜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눈을 떠?! 그런데 마주친 클로드의 눈동자는 바로 어제 내가 봤던 것과도 달랐다. 헉. 내가 머리에 꽃 단 광년이로 만들어서 화났나 보다! “아니, 전 그냥 꽃이 예뻐서, 이거 달면 아빠도 꽃 공자…… 가 아니라 옥동자, 아니! 아니, 내가 지금 뭐래.” 냉기가 흐르는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하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저런 눈을 본 게 몇 년 만이더라? 그런데 내 어수선한 변명을 듣던 클로드의 눈빛이 어느 순간 갑자기 변했다. “아타나시아.” “네, 넹?” “너였나.” 느엥? 그럼 나지, 누구냐! 설마 방금 전까지 잠이 덜 깨서 그렇게 사람을 겁준 겁니까? 내 생각이 맞는지 클로드가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헉. 지금 당신 눈 비비는 거야? 아, 안 어울리게 왜 귀여운 짓을……. 내가 잠깐 동안 멍하니 클로드를 보는 사이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잠기운이 어려 있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묘하게 느슨하던 표정도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아니……. 머리 양쪽에 꽃 달고 눈 비비는 게 대박 귀여워서요. 물론 이런 소리를 진짜 했다가는 간만에 내 생명이 좀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있었다. 으헐. 아니, 그런데……. 이건 진짜 의외의 귀염성인데? 당신 이렇게 분홍 꽃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냐는? “아빠는 자고 일어난 모습도 멋있어요!” “실없는 소리.” 크흑. 제법 싸늘한 말투와 아기자기한 꽃의 괴리감이 더욱 갭모에였다. “필릭스.” 그때 클로드가 나직한 목소리로 필릭스를 불렀다. 그러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러고 보면 항상 그렇게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부르는데 잘만 알아듣는단 말이야? 아마도 필릭스의 귀가 유달리 좋거나 아니면 클로드가 음성에 마력을 싣는 게 아닌가 싶었다. “궁인들에게 차를 내오라 시켜라.” “예, 폐하……. 헉.” 그런데 방으로 들어와 클로드에게 부복해 인사하던 필릭스가 다음 순간 고개를 들더니 흠칫했다. “왜 그러지?” 헉. 그러고 보니까 클로드 머리에 꽃 달고 있었지! 필릭스는 양쪽 머리에 예쁘게 꽃을 달고 있는 클로드를 보며 못 볼 걸 본 것처럼 동공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충정한 기사답게 곧 큼큼 헛기침을 하며 태연한 낯을 한다. “꽃이…… 참으로 어여쁩니다.” ======================================= [66화] 클로드는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나 싶은 표정으로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렸다. 그러다 이내 내가 꽃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는지 힐끔 시선을 던졌다. “화병에 꽂아서 창가에 둘까요? 햇빛을 받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클로드의 머리 위에 곱게 꽂힌 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냉큼 말했다. 클로드가 깨기 전에 잠깐 꽂았다가 다시 빼려고 했는데! 망했다. 허흑. 저걸 어쩐다지. “향기가 좋아요. 아빠도 맡아보세요.” 나는 필릭스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품에 안고 있던 꽃을 클로드에게 덥석 들려주었다. 다행히도 클로드는 내가 준 꽃을 내던진다거나 하지 않았다. “벌써 라플리에가 필 시기가 되었군.” “예……. 라플리에 꽃이 폐하께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시끄럽다, 이 적혈구 기사야! 괜히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으앙. “오늘은 둘 다 실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다행히도 클로드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차를 내올 때 화병도 가져오라 일러라.” “예, 폐하.” 필릭스가 방을 나선 이후 나는 초조해졌다. 제, 제길. 궁인들이 오기 전에 저 꽃을 어떻게 해야 할 텐데? 필릭스는 그렇다 쳐도 궁인들까지 저 모습을 보고 놀란다면 클로드도 이상한 걸 눈치챌 게 뻔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천하의 클로드에게 이런 발칙한 짓을 한 나는……! “아, 아빠. 오늘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나는 내 심신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일단 클로드에게 접근했다. 그는 내가 준 꽃을 앉아 있는 자리 옆에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클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영영 기회를 박탈당하기 전에 서둘러 움직였다. “잠깐이라도 침대에서 편하게 주무시지. 소파는 몸이 결리지 않아요?” 내가 소파 뒤로 가서 클로드의 어깨 위로 손을 뻗자 그가 ‘이건 또 뭐 하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슬쩍 뒤돌아보았다. 악, 안 돼! 지금 꽃이 약간 흘러내렸어. “이거 봐. 어깨가 다 뭉쳤잖아요.” 주물주물! 나는 애써 웃으며 클로드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꽉 주물렀다. 내 불시의 기습에 손끝에 닿은 어깨가 일순간 딱딱해졌다. 헉. 너무 셌나. 아프다고 일어나면 안 돼! 나는 손에서 힘을 약간 풀고 방금 전보다 살살 클로드의 어깨를 주물주물했다. “아무리 바쁘셔도 쉴 때는 제대로 쉬셔야 해요.”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있는지 어느 정도 그 짓을 하자 클로드도 어깨에서 점점 힘을 빼고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대왔다. 어윽. 그런데 도대체 언제 자연스러운 타이밍으로 저 꽃을 빼낸다지요? “그, 그런데요. 침실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나는 일단 클로드의 주의를 돌릴 겸 아무 말이나 꺼내기로 했다. “누가 나쁜 마음먹고 들어오면 어떡해요.”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만 클로드는 내 말을 듣고 대번에 심드렁하게 코웃음 쳤다. 코웃음조차 시큰둥한 느낌을 풍길 수 있다니 그것도 참 재주였다. 아니, 그런데 지금 이 사람 무슨 자신감이지? 아무리 당신 마력이 세다고 해도 자는 동안 누가 칼침 한 번 놓으면 다 끝나는 거 아니야? “지금처럼 아빠가 주무시는 동안 나쁜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잖아요?” 방금 전에도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쿨쿨 자고 있던 사람이! 그런데 따지는 듯한 내 말투에 클로드가 또 콧방귀를 뀌었다. “자고 있든 깨어 있든 상관없다. 살심을 품고 내게 접근하는 순간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을 테니.” 우뚝. 나도 모르게 클로드의 어깨를 주물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 그게 무슨……?” “보호 마법이다.” 클로드는 내가 동요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태연히 설명했다. “살심을 품고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는 사람은 모두 고통스럽게 죽도록 마력을 이용해 몸에 술식을 새겨놓은 것이지. 몰랐나?”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안답니까?! 그러니까……. 누구든 당신을 죽이려고 다가가면 오, 오체분시를 당한다 이 말이야? 나, 나 어릴 때 반쯤은 농담으로 지금 이 사람이 없어지면 내 앞길이 좀 편안해질까 생각했었는데……. 만약에 내가 진심으로 나쁜 마음을 먹고 이 사람을 해치려고 했으면 나도 오체분시를 당했을 거라는……? 갑자기 오싹 소름이 돋으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역시 클로드 이 무서운 사람! 그런데 이어지는 클로드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네게도 비슷한 마법이 걸려 있으니 자다가 칼 맞아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네……? 비슷한 마법이 걸려 있어요? 누구한테요? 나한테요? 그럼 나한테 살심을 갖고 누가 접근하면 내 눈앞에서 피투성이의 참극이 벌어진다는 겁니까……? 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언제부터……?”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오래전부터 나한테 그런 무서운 마법을 걸어놨던 거냐! 으아앙! 그래도 혼자 멍 때리다가 칼침 맞아 죽지 않게 신경써줘서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으허헝. “그래도요.” 나는 왜인지 허탈한 마음이 되어 다시 클로드의 어깨 위에서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만의 하나의 경우라는 게 있잖아요. 조금이라도 아빠한테 위험한 일이 있을까 봐 걱정돼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클로드한테 위험한 일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제 곁에 있어주셔야죠.” 그러자 클로드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평화로운 정적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내 사명을 떠올렸다. 으아. 이제 그만 저 꽃을 제거해야 하는데! 슬슬 다과상 차리러 궁인들이 들어올 때가 된 것 같단 말이야! “웃기는구나. 감히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꽃 어떡해. 으어어어. “아타나시아, 너야말로…….” 나지막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멈추어졌다. 어째서인지 클로드는 거기에서 말을 더 잇지 않았다. 기묘한 침묵을 등에 업은 채 나는 홀로 안절부절못했다. 똑똑. “폐하.” 으악! 궁인들이 왔나 보다! 으아악! 클로드가 문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가 궁인들에게 들어오라 명하기 전에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빠!” 나는 뒤에서 클로드의 목을 끌어안아버렸다. 그리고 클로드가 멈칫하는 사이 재빠르게 꽃 하나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다과 시간 후에 짧게라도 좋으니까 저랑 같이 산책해요. 오늘은 햇볕도 좋아서 아빠 기분도 한결 좋아지실 거예요. 네?” 내 신경은 온통 클로드의 오른쪽 머리에 남은 꽃에 쏠려 있었다. 으어, 으어. 나는 클로드의 목에 감고 있지 않은 팔을 살금살금 움직였다. “난 바쁘다.” “정말 안 돼요?” 똑똑. “폐하?” 시간이 흘러도 들어오라는 말이 없자 밖에서 다시 한 번 노크를 해왔다. “하는 수 없군.” 결국 클로드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승낙했다. 자신은 정말 바쁘지만 내가 졸라대니 어쩔 수 없이 넘어가 주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들어와라.” 핫! 잠깐 기다려! “고마워요, 아빠!” 쪼옥. 나는 기쁘다는 듯이 웃으면서 클로드의 뺨에 뽀뽀를 했다. 잉차! 클로드 머리에 꽂힌 깜찍한 분홍 꽃! 넌 내 거야! “오벨리아의 태양께 영광과 축복을.” 때마침 들어온 궁인들이 클로드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음 차례로 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헉헉. 나는 손에 잡고 있는 깜찍한 분홍 꽃을 소파에 놓인 꽃다발 위에 휙 던져 놓고 클로드에게서 떨어졌다. 이, 이건 마치 미션 임파서블을 찍은 기분이랄지. 조금만 늦었어도 똥 될 뻔했다. 어흑. 앞으로는 꽃 공자니 뭐니 하면서 깝치지 않을게요. 으헝. “왜 그러고 서 있지? 와서 앉아라.” “느에.” 처음 이 방에 들어올 때보다 한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다과상을 향해 총총 다가갔다. *** 클로드와 산책까지 하고 난 뒤 나는 혼자 내 전용 도서관으로 향했다. 필릭스는 황실 공용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가져다 달라고 심부름을 보낸 참이었다. 물론 그는 직무 태만이라느니 하며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그냥 보내 버렸다. 방금 전 클로드를 통해 나한테 보호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도 알았겠다, 혼자 간다고 해도 무서울 게 없었다. 크흑. 다시 생각해 봐도 좀 충격이다. 내 몸에 그런 무시무시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니! 내 전용 도서관은 황실의 공용 도서관보다도 컸다. 무슨 변덕인지는 몰라도 클로드가 지어서 내게 선물로 준 것인데 역시 황제라 그런지 스케일 한번 남달랐다. 흐음. 오늘은 무슨 책을 본다지? 도서관에는 이미 읽은 책들도 있었고 일단 구해 놓기만 하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도 있었다. 나는 책장 사이를 누비면서 고민했다. 팔랑. 어라? 그런데 기분 탓인지 내 도서관에서 절대로 있을 리 없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내가 지난번에 책상 위에 책을 그냥 올려놓고 갔나? 그래서 열려진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에 종이가 날리고 있는 걸까? 나는 작은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책장을 빙 둘러 걸었다. 또각. 그리고 나는 마침내 내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와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뜻밖의 손님에 놀라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과 동시에 그 역시도 내 구둣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에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는 남자. 하얀 은발이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바람에 뒤섞여 흩날렸다.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아타나시아 공주님.” 반짝이는 빛무리에 잠긴 이제키엘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과연 소설의 주인공은 내뿜는 광채부터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얼마 전 만났던 제니트가 그랬고,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이제키엘 역시도 그랬다. 보통 해를 등 뒤에 두고 있으면 얼굴에 음영이 져서 어두침침해 보여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이제키엘은 마치 빛에 산화되어 가는 성자처럼 신성해 보여서 나는 한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탁. 바로 그때 책을 접는 소리가 평화로운 정적 속에 울렸다. “좋은 오후입니다.” “좋은 오후네요.” 헉. 이제키엘의 인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너 왜 여기 있는 거니? 여긴 내 개인 도서관이라고? “공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나는 약간의 놀라움과 약간의 어이없음을 담아 이제키엘에게 물었다. 아니, 남자 주인공이면 다야? 쓸데없이 멋있게 웃어서 사람 혼을 빼 놓으면 다야? 도대체 남의 개인 공간에 이렇게 떡 하니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건 뭐랍니까? 마치 내 도서관이 자기 도서관인 것처럼 말이야! 그러면서 남의 책을 마음대로 읽고 있지를 않나, 또 무단 출입을 주인한테 딱 걸린 주제에 태연히 인사까지 하지를 않나? 허, 허참. 나열해 보니 진짜 황당하네? 그런데 손에 펼쳐 들고 있던 책을 곱게 접어 든 이제키엘이 여전히 담담한 낯빛으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 [67화] “이곳은 황실의 공용 도서관이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의 말에 나는 더욱 기가 막혀졌다. 설마 지금 길을 잃었다는 거야? 황실의 공용 도서관은 출입 허가증만 며칠 전에 미리 받아놓으면 귀족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서가마다 출입이 불가능한 구역도 있었지만 어쨌든 내 개인 도서관과 달리 개방된 곳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제키엘이 길을 잃어서 도서관을 잘못 찾아왔다니 어째 믿기지가 않는다. “아무도 제지하는 자가 없기에 출입이 통제되지 않은 공용 도서관인 줄 알았습니다.” 엇. 그런데 뒤이어 귓가를 스친 목소리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이 있었을 텐데요?” “한담을 나누느라 제가 접근하는 것도 모르던 기사들 말입니까?” 으음. 나는 방금 전 내가 이곳에 들어올 때 문 앞에서 각을 잡고 서 있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그런가. 내가 안 볼 때는 농땡이도 부리고 그러면서 적당히 일하고 있던 건가. 하지만 상대가 이제키엘이라는 점에서 그들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키엘은 문무 모두 출중히 겸비한 남자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본인도 모르는 사이 주인공 버프가 발동되어 이제키엘이 원하는 대로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길을 잃은 게 아니죠?”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러자 이제키엘이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타지에서 오래 생활한 탓인지 오벨리아의 지리에 그리 익숙지 못합니다.” 순 거짓부렁이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윽고 시야에 얕게 번지는 미소를 보자 더욱 그랬다. “황궁 역시 낯설어 쉽게 길을 찾지 못하겠더군요.” 와, 와아. 이제키엘 그렇게 안 봤는데……. “하여 설마 제가 들어온 곳이 공주님의 전용 도서관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역시 얘도 흰둥이 아저씨 아들이 맞았어! 나는 이제키엘에게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고 미비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으어, 피는 못 속인다더니 옛말이 딱 맞나 봐요. “한데 중간에 공용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려 다가온 몇몇 궁인과 직무 태만인 기사들 외에는 앞을 제지할 만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니. 황족의 사적인 공간이라기에는 치안이 지나치게 허술한 것 아닙니까?” “애당초 이곳은 내 개인 공간이라 다른 사람은 아무도.” “지금 제가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어, 어라.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 말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지금 이 자리까지 당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지요.” 설마……. “심지어 오늘은 호위 한 명 옆에 두지 않으셨군요.” 설마 나 지금 이제키엘한테 혼나고 있는 건가……?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 의문은 이제키엘이 나를 보며 단호하게 읊조리는 순간 확신이 되었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 해도 수행인을 최소 열은 두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하는 이제키엘을 약간 생경한 기분으로 올려다보았다. “평소 공주님을 보필하는 이가 호위 기사인 로베인 경뿐이라 들었습니다.” 흔들림 없이 곧은 금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지금 이제키엘이 진지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로베인 경의 실력이 출중함은 아나 지나친 복례의 간소화는 좋지 않다 사료됩니다.” 아무래도 지금 이제키엘은 나를 걱정해서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피어스 공자…….”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기분이 미묘해졌다. 그래서 마주 보고 있는 이제키엘을 향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법 침입자면서 말을 참 잘하네요.” 어떤 의미로 감탄이라면 감탄이었다. 우와, 어찌나 말을 논리 정연하게 잘하는지. 정작 내 개인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온 불청객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란 것조차 깜짝 잊을 뻔했다. 아니, 걱정해 준 건 고마운데 말이야. 일단 지금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닌 것 같지 않니? 내 말에 이제키엘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저를 이대로 쫓아내시렵니까.” “쫓아내기만 하겠어요. 죄를 물을 수도 있죠.” “그러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째서죠?” 하지만 이제키엘은 여전히 동요 없이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태연자약하던지, 누가 봤으면 그를 이 도서관에 허락받고 들어온 사람인 줄 알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해 놓고 나는 설마 싶어졌다. 혹시 기사들도 그래서 이제키엘을 무심코 그냥 들여보내 준 거 아니야……? 들어오는 폼이 하도 당당해서? 그리고 이제키엘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속삭이는 말에 나는 결국 그를 벌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무단 침입으로 따지자면 이로써 감히 제가 공주님과 적을 함께 두게 되었다고 여겼는데, 아닙니까.” 나는 흠칫해서 입을 벌렸다. 아, 아니. 얘가 아픈 데를 꼬집네? 지금 내가 너희 집에 무단 침입했었다고 쌤쌤이로 치자는 거니?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니라 루카스가 마음대로 그랬던 거야! 물론 그중에 한 번은 내 자의로 갔던 거지만. “무단 침입으로 공자와 적을 함께 두었다니. 그런 기억 없는데요?” 이제키엘은 내 발뺌에 그냥 미소 지어 보이기만 했다. 차라리 그가 더 우기면 나도 오기로라도 더 반박했을 텐데, 이렇게 그냥 웃기만 하니까 오히려 내가 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으악, 뭔가 얄밉네! “흰둥이 주니어…….”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나도 모르게 음산히 중얼거린 말에 이제키엘이 반문했다. 못 들었으면 되었다네. 이 작은 흰둥이 같으니라고! 나는 내 안에서 이제키엘의 평가를 다시 내렸다. “이제 보니 공자는 아버지를 많이 닮으셨군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내 표정이 어땠는지, 한순간 이제키엘이 당황과 곤혹감이 뒤섞인 눈빛을 보이는 것이었다. ……내 표정이 그렇게 썩어 있었나? “송구합니다.” 나도 이제키엘도 동시에 표정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를 불만스럽게 쳐다보고 있었고, 이제키엘은 방금 전 내 얼굴이 퍽 인상적이었는지 어쩐지 다소 면구한 기색이었다. “오늘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공주님의 사적인 공간에 허락 없이 발을 들인 점, 또한 공주님께 예우를 다하지 않고 건방진 말을 늘어놓은 점. 모두 제 잘못이니 만약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을 것입니다.” 나는 그의 정중한 사과에 또다시 미묘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진심으로 그를 벌할 생각은 없었다. “다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서는 안 될 거예요. 금일 이후 보안을 철저히 할 예정이거든요.” 나는 이제키엘을 위해서 만약 네가 나를 해칠 마음으로 다가왔으면 그대로 오체분시가 되었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크흑. 주인공 버프보다 더 무서운 클로드의 마법이여. “알고 있습니다. 저도 오늘 같은 천운은 두 번 다시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요.” 천운이라니, 뭐가요? 내 도서관 보안이 엉망이라 쉽게 들어와 볼 수 있었던 게? 하지만 다음 순간 이제키엘이 나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인 말에 나는 그만 훅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혹여나 싶은 마음에 무작정 발길을 옮기기는 했으나 마음속으로 바라던 분께서 정말로 이리 제 앞에 나타나 주실 줄은 몰랐기에.” 헉. 아까 한 말 취소다. 이제키엘이 내게 남자 주인공의 미남계 버프를 발동했다! 효과는 엄청났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어째서인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 동안은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무례가 아니라면.” 귓가에 번지는 낮은 음성만이 고요한 공간 속에 유독 강렬하게 울렸다. “제가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한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건지 그러라고 해야 하는 건지. 처음 접해 보는 상황에 그저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이제키엘이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이미 충분한 무례입니다.” 그때 등 뒤에서 나를 대신한 대답이 들려왔다. 이제키엘도 서늘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움직인 뒤였다. 하지만 굳이 뒤돌아 확인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미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공주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실 테니 걸음을 멈추십시오.” 이제키엘의 앞이기 때문인지 미소년 천재 마법사를 코스프레 중인 루카스였다. 뒤에서 타악 걸음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루카스의 기가 막힌 타이밍에 놀라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탑의 마법사인가.” 루카스의 의상이 황실 소속 마법사의 복장인 것을 알았는지 이제키엘이 읊조렸다. 나는 나대로 갑자기 등장한 루카스에게 의문을 느꼈다. 때마침 난처하던 찰나에 시기 적절히 나타난 건 잘된 일이긴 한데 얘 성격에 웬일이지? 끼어들기를 다 하고. “신원을 밝혀라.” “이미 황실에 속한 몸. 황제 폐하와 공주님의 명이 아니라면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의외라고 해야 할지 루카스는 이제키엘을 상대로 밀리는 법 없이 맞서고 있었다. 루카스의 야무진 대답에 이제키엘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바로 그때, 퍼뜩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앗! 그러고 보니 지금 이건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고독한 늑대의 격돌인 건가! “공자는 이미 법도를 어기고 공주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하나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자비로우시게도 그 죄를 묻지 않겠노라 하셨으니 정도를 안다면 이쯤 하여 물러나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마치 그대의 행동에는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대야말로 공주님의 서가로 허락 없이 들어올 자격이 있나?” 내 다과회에 참석했던 귀족 영애들이 본다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격하게 흥분할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왜인지 편이라도 갈라서 ‘우리 편 이겨라!’ 하고 응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거기에 야광봉과 팝콘도 곁들이면 그야말로 화룡점정, 금상첨화! 그나저나 루카스도 루카스지만 이제키엘도 의외였다. 매번 나한테 봄바람 살랑살랑한 모습만 보여서 미처 몰랐는데 저런 식으로도 말할 수 있구나. 방금 전에 루카스한테 한 말도 ‘너야말로 주제도 모르고 설치지 마라’ 이런 의미 아니었나? 하지만 그런 말도 이제키엘이 말하니 제법 우아하고 위압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역시 부드러운 카리스마! 우유 빛깔 이제키엘! 크흡.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제키엘한테까지 개드립을 치지는 못 하겠다. “하면 공자에게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제게 그 자격을 따져 물을 권리가 있으신지요.” 나는 공손한 척 계속 얄미운 말을 해대는 루카스를 보며 잠깐 동안의 관전을 멈추고 앞으로 나섰다. “그만해, 루카스.” 그러자 루카스가 입을 다물고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왔다. 짜식. 그래도 다른 사람 앞이라고 내 체면을 차려주긴 하네. 루카스가 이런 온순한 모습을 보일 때면 아직도 가끔 적응이 안 된다. ======================================= [68화] “공자도 그만하세요. 둘 다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잊은 것 같습니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이제키엘도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내게 사과했다. 팝콘 먹는 기분으로 둘의 대치 상태를 그냥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을 테지만 사람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내 서가에 출입이 허락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니 신원을 따로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루카스가 날 생각해서 중간에 나서줬으니 나도 편 좀 들어줘야겠지. “그 역시도 공자처럼 내 일신상의 안위를 걱정해 나선 것이니 이쯤 해서 그만하세요.” 내 말에 이제키엘의 시선이 루카스의 얼굴에 가 닿았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내 기억났다는 듯이 이제키엘이 내뱉은 말에 나는 기분이 다소 미묘해졌다. “몇 년 전, 폐하께서 제 대신 공주님의 말벗으로 들이셨다던 그 마법사입니까.” 어, 음. 그게 맞긴 한데.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루카스가 입꼬리를 약간 삐딱하게 비틀고 있는 게 보였다. 그가 이제키엘을 향해 ‘어쭈’ 하는 소리가 내 귀에 육성으로 들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제키엘이 자신을 대타로 취급하는 걸 루카스도 느낀 것 같았다. 이, 이렇게 보니까 이제키엘도 은근히 성격이 나쁜데? 그렇지? 지금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지? 하지만 다행히도 루카스가 ‘청순가련 미소년 천재 마법사’ 코스프레를 집어치우기 전에 이제키엘이 먼저 내게 작별 인사를 고해 왔다. “오늘은 이쯤해서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무례를 용서해 주신 공주님의 그 너그러우신 마음에 탄복하며 감사드립니다.” 저벅. 그 말을 끝으로 이제키엘이 나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키가 커서 그런지 그가 몇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눈앞에서 창문이 가려지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제키엘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그대로 내게 건네주었다. “공주님의 서고를 사사로이 엿봐 죄송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 많더군요.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가 내민 책을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그러다 닿은 온기에 한순간 손가락 끝이 움찔 떨렸다. “부디 공주님의 다과회에 초대받는 영광을 제게도 내려 주시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는 내게 똑바로 시선을 맞대며 그리 속삭인 뒤 먼저 자리를 떠났다. “뭐 저렇게 있어 보이는 척을 하고 가?” 옆에서 루카스가 못마땅하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굳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게다가 책 제목이 이게 뭐야. 「요조숙녀 드봐리의 달콤한 계약 연애」?” “으아악!” 나는 루카스가 내 손에 든 책을 빼내 가며 비웃듯 제목을 읊은 순간 비명을 내질러 버렸다. “이거, 이거 내 거 아니야!” “아. 방금 전 흰둥이 아들이 말한 흥미로운 책이라는 게?” “아니야!” 으아악! 아마 지금 내 얼굴은 새빨개져 있을 거다. 내가 전용 도서관에 몰래 숨겨놓고 읽던 내 로맨스 소설을 이렇게 들키다니! 사서한테만 몰래 부탁해서 릴리도 한나도 세스도 모르는 건데! 이제키엘 뭐야! 멋있는 척 창가에 서서 보고 있던 책이 이거였냐고! 으아앙!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 많더군요.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방금 전 이제키엘이 남기고 간 말이 떠오르자 더욱 낯이 뜨거워졌다. 저건 분명 날 놀린 거지? 그런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책을 이렇게 직접 내 손에 다시 들려주고 갈 리가 없잖아! “이런 게 재미있어?” “내 거 아니라니까!” “뭘. 여기도 있네. 「공주님의 첫사랑을 찾아라」, 「어느 레이디의 비밀 고백」, 「제국 제일 검의 은밀한 순정」. 와, 제목들이 하나같이 흥미진진해?” 으앙! 구석에 숨긴다고 숨긴 건데 왜 이렇게 잘 찾는 거야! 나는 루카스가 꺼내 든 책들을 빼앗으려 했다. 그런데 글쎄 이놈이 실실 웃으면서 내가 책을 빼내가지 못하게 손을 높이 드는 게 아닌가! 나는 루카스의 손에서 책을 뺏기 위해 폴짝폴짝 뛰면서 용을 썼다. 아니, 그런데 이게! 나랑 키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에잇! 닿아라, 닿아라! “왜 그래. 좋은 건 같이 좀 보자.” “이리 내놔!”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방금 비명이!” 투둑! 바로 그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내 비명을 들었는지 헐레벌떡 서고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루카스가 들고 있던 책이 하필 그 순간 기사들의 코앞에 떨어진 것은 분명 놈의 얄궂은 술수였을 것이다. 「요조숙녀 드봐리는 왜 그 방랑 기사에게만 고기를 먹였을까?」 “헉.” “흡.” 책 제목을 본 기사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나는 나대로 당황해서 있었고, 어느덧 다시 천재 미소년 마법사 코스프레를 시작한 루카스만이 오직 침착했다. 그는 시선을 책에 고정시킨 채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깊이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기사들에게 물었다. “왜 레이디 드봐리는 방랑 기사에게만 고기를 먹였을까요? 기사님들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예, 예?” “저, 저희가 어찌.” 바닥에 있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기사들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눈동자를 부산스럽게 굴리며 고개를 휘휘 젓는다. 악,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마 루카스가 책을 집어 들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버럭 소리 질렀을지도 몰랐다.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던 객이 두고 간 물건인 것 같네요. 제가 전해 주겠습니다.” “헉. 방금 전 있던 객이라면.” 역시 들어올 때는 몰라도 나가는 이제키엘은 봤었는지 기사들이 뜨악한 얼굴로 다시금 책에 눈길을 박기 시작했다. 이제키엘과 저 요망한 제목의 책이 연결이 안 돼 경악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루카스의 입가에 싸늘하게 번지는 미소에 곧 기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버렸다. “그보다 불청객의 침입을 허용한 이유에 대하여 공주님께 직접 드릴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 잠시 후 루카스와 나는 나란히 도서관을 나섰다. 루카스는 이제키엘에게 그랬듯 황실의 법도가 어쩌구 직무 태만이 어쩌구 하면서 기사들을 호되게 혼쭐냈다. 그런데 이 녀석, 아까부터 미소년 마법사 역할극에 너무 심취한 것 같은데. 왠지 즐기고 있는 느낌이잖아? 그래도 문지기인 기사들이 제 역할을 못한 것은 맞았기 때문에 나도 그냥 그들이 혼나는 걸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잔뜩 각이 잡힌 기사들을 등지고 돌아섰을 때, 나는 루카스를 향해 속닥거렸다. “그런데 너도 문으로 들어왔어?” 루카스는 처음 이제키엘을 만났을 때와 달리 꽤나 상쾌해 보이는 얼굴로 가볍게 코웃음 쳤다. “나한테 출입구 같은 게 왜 필요해.” 그 말은 즉 마법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는 이야기다. 아니, 내가 곤란한 상황인 걸 어떻게 알고 날아온 거지? 게다가 그런 주제에 두 번씩이나 외부인 출입을 손 놓고 허용했다고 기사들을 그렇게 잡다니. 루카스 얘, 이제 보니 아무래도……. “이제키엘이 꽤나 마음에 안 드나 보네?” 괜히 등장해서 이제키엘한테 일침을 가한 것도 그렇고, 내 도서관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앞장서 뭐라고 한 것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까 전에 이놈이 나를 알피어스 공작가로 날려 보낸 것도 이제키엘의 이름을 들은 직후였잖아? 그런 생각에 내가 의심 어린 눈초리를 보내자 루카스가 쉽게 긍정해 왔다. “재수 없게 생겼잖아.” 헉. 그거 지금 이제키엘한테 한 말 맞아? 재수 없게 생겼다니. 남자 주인공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하다! “이제키엘한테 그런 말하는 사람은 아마 네가 처음일 거야.” 이제키엘이 도대체 루카스한테 뭘 어쨌기에 재수가 없다는 거지? 일단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건 오늘이 처음 아닌가? 그런데 내 순수한 의문을 곡해했는지 루카스가 어이없다는 듯 허, 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다. “뭐야? 설마 너도 다른 시녀들이나 네 다과회에 왔던 여자애들처럼 그 흰둥이 아들이 마음에 든다는 거야?” 아니, 왜 생각이 그리로 튀는 거야? 하지만 곧 루카스가 심드렁하게 읊조린 말에 나는 그만 발끈해 버렸다. “취향 하고는. 네 나이를 생각해.” “내 나이가 뭐?” 갑자기 나이를 왜 걸고넘어지지? 그리고 지금 뉘앙스가 굉장히 애매했는데. 지금 내 나이가 많다는 거야, 적다는 거야? 루카스는 내 나이가 열 넷인 줄 아니까 당연히 후자 쪽일 텐데 얘가 말하면 왜 가끔씩 미묘한 느낌이 들지? 그, 그냥 나 혼자 제 발 저리는 건가? 그래도 어쨌거나 기분이 나쁘다! “너 이제키엘 질투하니?” “뭐?” 당연히 내 입에서도 고운 말이 튀어나올 리 없었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오벨리아에서 알아주는 일등 신랑감이라잖아. 너무 완벽해서 재수 없는 거 아니야?” “완벽?” 그런데 루카스는 내 말을 비웃었다. “내가 더 똑똑하고 잘생겼어.” 그 당당한 말에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감이 만렙을 찍다 못해 하늘 끝까지 부수고 나갈 기세가 아닌가. 나는 왜인지 약이 올라서 어느새 더욱 열심히 이제키엘의 두둔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이제키엘은 알피어스잖아. 알피어스는 오벨리아에서도 셋밖에 없는 공작 가문인데다 땅도 가장 비옥하고 영지 내에 광산이 있어서 엄청 부유하댔어.” “그런 거 다 가져다 대도 내가 이겨.” 이익. 하지만 루카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도대체 얘는 무슨 자신감이지? 어디로 보나 근거 없는 헛소리인 것 같은데 뻔뻔할 정도로 당당해서 당최 거짓말처럼은 들리지 않는 게 미스터리였다. 나는 옆에 있는 루카스의 뺀질한 얼굴을 잠시 동안 썩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여전히 찜찜하게 기분이 나쁜 상태로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키는 이제키엘이 더 큰 것 같…….” “누가 누구보다 크다고?” 쏴아아. 그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착각인지 바닥에 드리워진 루카스의 그림자가 내 머리 위로 훌쩍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귓가에 스친 낮은 목소리에 일순간 뒷덜미가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 고막을 울리던 음성과 비슷하지만 그 색이 완전히 다른 목소리가 재차 머리 위에서 메아리쳤다. “내가 네 나이에 맞춰 어린애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해서 진짜 어린 줄 알면 곤란하지.”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한참 더 고개를 꺾고 나서야 비로소 앞에 있는 사람의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루카스를 처음 만났던 게 몇 년 전이었지? 어쨌든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내 기억 속에서보다도 어른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쏴아아. 바람을 따라 나뭇잎이 우수수 흔들렸다. 그 틈새로 새어든 빛이 완연한 성인 남자의 모습을 한 루카스의 머리 위로 조각조각 흩어지고 있었다. 살랑살랑 부드럽게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에서 나를 조용히 직시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 그 얼굴의 낯익은 이목구비까지도. ======================================= [69화] 그는 분명 방금 전까지 내가 마주하고 있던 루카스였지만 내가 알고 있던 소년은 아니었다. 인형처럼 한 점의 온기도 감정도 없는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숨을 멈추고 있었고, 어른이 된 루카스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며 방금 전까지 그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있던 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숨 막히는 공기가 깨졌다. 루카스가 피식 가볍게 미소 지은 순간의 일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너 되게 작다.” 나는 그의 미소에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면서 시야에 비치는 루카스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가 퍽이나 만족스러운 듯이 배부른 표정을 지은 채 웃고 있었다. 헉. 그때에서야 나는 지금의 상황을 깨달았다. 아니, 얘가!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이렇게 밖에서 갑자기 변신을 해!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주위를 급히 둘러보며 루카스에게 소리쳤다.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 빨리!” “원래대로라니. 이게 내 원래 모습이거든?” “미니미 버전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 빨리!” 내가 하도 성화를 부리자 결국은 루카스도 투덜투덜 다시 작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금 어려진 루카스를 보며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깜짝 놀라서 그런지 심장이 쉴 새 없이 벌렁벌렁했다. “아, 마력 또 줄어들었어.” “그러니까 누가 갑자기 변신하래?” “너 때문이잖아.” 그래 봤자 여전히 괴물 같은 마력을 가졌을 게 뻔한데 하여간 엄살이었다. 나는 옆에서 짜증스레 심통을 부리는 미니미 루카스를 보며 아직까지도 진정이 되지 않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이제부터 이 녀석 앞에서는 이제키엘 얘기를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 “그래서 며칠 전 이레인 후작가의 꽃 공자님을 제가 직접 만나 뵈었다는 게 아니겠어요.” “어머나! 정말 소문대로의 미모시던가요?” “제가 감히 단언하건대, 소문 이상이세요.” “꺄아!”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나는 꽃 같은 소녀들 속에 파묻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왜 또 이 아가씨들 틈에 껴 있는 거지? “그래도 저는 역시 지난번 황궁에서 마주쳤던 마법사님이…….” “아, 고독한 검은 늑대 루카스 님!” 쿨럭. 그래. 이건 다 내가 빈말로 지난 다과회가 즐거웠다고 클로드에게 말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달력을 한 장 넘기기도 전에 또다시 내 성에 이 아가씨들을 초대할 줄 알았으면 그런 말은 절대 안 했을 텐데!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나는 황궁 내에 있는 전망 좋은 꽃밭에서 그녀들과 함께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참이었으니까. 멀거니 시선을 위로 들어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화창하고 날씨는 더없이 맑았다. 그리고 재잘재잘 쉴 새 없이 흘러드는 소녀들의 목소리는 꾀꼬리처럼 청아……. “맞아요! 그 눈동자 속에 어린 위태로운 매력은 회색 늑대 자르비에 님을 능가하고도 남았죠!” ……했지만 그와 동시에 먹잇감을 잡아채는 매처럼 박력이 넘쳤다. “아아, 저는 완전히 반해버렸어요. 매일 밤 꿈에 그분이 나오셔서 저는 잠을 자나 잠에서 깨나 언제나 마법사님 생각을…….” 쿨럭. 여기 루카스의 열성적인 팬이 있네. 지난번에 루카스에게 검은 늑대란 호칭을 직접 수여한 바 있는 백합 소녀가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눈동자를 빛내며 외쳤다. “이건 운명적인 만남이에요! 저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지금껏 살아온 거예요!” 아, 아니. 아직 한 번밖에 안 만나본 사이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속고 있어! 그날 당신이 본 루카스는 평소의 루카스가 아니야! 그거 다 사기라고! “외로운 검은 늑대 루카스 님! 아아. 내가 그 등을 안아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으앙. 그러니까 당신 지금 속고 있는 거라니까! 그리고 그 금기의 단어를 내뱉지 말란 말이야! 저 멀리서 루카스가 듣고 날아올까 봐 무섭다구요. 으아앙. 나는 다시금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찌릿찌릿한 것을 느끼며 백합 소녀와 다른 영애들을 애써 외면했다. 하하. 바람이 참 좋구나. 어머. 잔디 위에 있는 메뚜기 좀 봐. 음. 폴짝폴짝 잘도 뛰는 걸 보니 아주 건강한 메뚜기로군. 새들도 참 발랄하게 지저귀기도 하지. 어, 이쪽으로 날아온다. 나 그거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손을 앞으로 내밀면 새가 내 손가락 위에 착 앉는……. 허헉. 새가 메, 메뚜기 물어갔어. 이런 게 생태계의 먹이사슬인가. 아디오스, 메뚜기……. “날씨가 참 좋지요?” 그런데 현실을 부정하고 있던 내 곁에 누군가 사뿐히 다가와 앉았다. 엇. 누구인가 했더니 제니트였다. 크흠. 오늘도 참 예쁘구나. 야유회라 그런지 베일로 장식된 모자를 쓴 제니트는 오늘도 변함없는 눈부신 미모를 자랑했다. “네. 오늘 비가 온다는 소리가 있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날이 맑아서 다행이에요.” 나는 들고 있던 양산을 빙그르르 돌리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릴리에게 이제부터 초대장에서 제니트를 빼달라거나 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구나. 하긴, 그때만 해도 두 번 다시 이런 모임을 가질 생각이 없었으니. 흐흑. 이게 다 클로드에게 말을 잘못한 내 업보다. “마그리타 양, 영애들과의 대화가 재미없나요?” “그럴 리가요. 모두들 입담이 좋으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던데요.” 그런데 왜 굳이 멀리 떨어져 있던 날 찾아온 거니? 일광욕을 핑계로 잠깐 차양 밑에서 벗어난 참이었는데. 하기야 그런 것치고 내가 지금 양산을 들고 있긴 하지만. “실은 저런 이야기는 처음 접해 봐서 무척 흥미로워요.” 그리고 다음 순간 제니트가 천진난만하게 읊조린 말에 나는 쿨럭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는 거요. 지난번에 처음 듣고 너무 재미있어서 이제키엘에게도 말해줬거든요.” 뭐? 누구한테 뭘 말해? “그랬더니 이제키엘이 그런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냐고 묻더라고요.” 문득 다과회가 있던 날 밤 내가 루카스에게 검은 늑대 이야기를 꺼냈던 기억이 났다. 그때의 루카스는 정말이지……. ‘고독한 검은 늑대’의 출처를 캐물으며 으스스하게 웃던 루카스가 떠올라 나는 또다시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공주님의 다과회에서 들었다고 했더니 표정이 아주 이상해지는 거 있죠.” 그럴 만도 하지! 와, 나도 차마 이제키엘한테 개드립을 시전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역시 제니트는 괜히 여주인공이 아니었어. 대단하다! 존경스럽다! “이제키엘이 그런 얼굴을 하는 건 처음 봐서 정말 재미있었어요.” 잠시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 듯하던 제니트가 곧 이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귀족 영애답지 않은 경쾌하기까지 한 웃음에 나는 조금 놀랐다. 게다가 마치 은방울꽃이 뾰로롱 피어나는 것 같은 맑고 투명한 웃음소리가 아닌가?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제니트에게 화답하고 있었다. “재미있었겠네요.” “그렇죠?” “그 얼굴 나도 보고 싶은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는 금기의 단어를 눈앞에서 들은 이제키엘의 표정이라니. 크으. 궁금하다, 궁금해. 내가 한창 금기어를 마주한 이제키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보고 있는데 별안간 영애들 틈에서 말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그리타 양, 전 조금 더 있다가 일어날 테니 먼저 가서 담소 나누세요.” 크흡. 오늘은 또 얼마나 길게 인터넷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려나. 중간에 이렇게라도 쉬어주지 않으면 도무지 정신이 버텨줄 것 같지 않았다. 아까 내가 자리를 떠나기 전에도 지금 내 옆쪽에 서 있는 필릭스가 멋지다고 열을 올리고 있었지. 나는 나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못 박혀 있는 필릭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래도 오늘이 두 번째라 그런지 필릭스도 첫 번째 다과회 날처럼 지진이 난 듯이 동공을 흔들고 있지는 않았다. “공주님께서는…….” 그런데 바로 그때, 어째서인지 곧장 자리를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던 제니트의 목소리가 다시금 내 귓전을 울렸다. “혹시 제가 싫으신가요?” 헉. 나는 당황해서 제니트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니트는 약간 어두운 낯빛을 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약간 풀이 죽은 듯이 보여 나는 당황스러워졌다. 가, 갑자기 이게 웬 난데없는 직구라지요? “그게 아니라.” 뜻밖의 물음에 놀란 탓인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잠시 동안 대답하지 못하자 제니트의 표정이 조금 더 시무룩해졌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질수록 나는 왜인지 내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한 뒤 변명했다. “그게 아니라, 실은 내가 동성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어서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아 그래요.” 한순간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해야 하지? 싶었지만 그래도 역시 마주한 울적한 얼굴을 보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 대화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해야 할지. 그래서 딱히 싫어서가 아니라.”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제니트의 얼굴에 서서히 낯꽃이 피었다. 내 말 한마디에 화악 밝아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저도 그래요.” 제니트가 나를 향해 다시 웃어 보였다. “이런 말 불쾌하게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 무구한 미소에 나는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쩐지 공주님과 저는 조금 닮은 것 같아요.” 데뷔당트 날 제니트가 순수한 호의로 내게 다가왔던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뵈었던 때부터 줄곧 공주님과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천사처럼 순진무구하기만 한 얼굴을 보자 마치 지금껏 그녀를 경계하고 있던 것이 죄악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런 아이를 상대로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제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실례일까요?” 소설대로라면, 제니트는 알피어스 공작과 그녀의 이모에게서 이야기를 들어 클로드와 나를 진짜 자신의 아버지와 자매인 줄 알고 자랐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데에는 다른 의도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 어린 제니트가 얼마나 가족을 애타게 바라왔는지는 소설책에서도 거듭 묘사되어 있지 않던가. 비록 나는 여주인공을 위해 의미 없이 희생당해야 했던 아타나시아 때문에라도 그런 그녀를 마냥 좋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막상 종이책 속의 활자가 아닌 실재하는 제니트를 마주하자 책 속의 내용만으로 그녀를 다소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잘못된 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제니트는 내게 잘못한 것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아니요.” 무의식중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말해놓고 나는 한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어쩐지 내 것 같지 않았다. 단 세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래도 뿌리 깊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상대에게 이렇게 순식간에 방어벽을 허무는 게 정상인가. ======================================= [70화] 하지만 그러한 마음은 곧이어 내가 본 것 중 가장 환하게 웃는 제니트를 보는 순간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감사해요. 정말 기뻐요.” 결국 나는 제니트를 따라 하는 수 없이 웃어버렸다. 그래. 아무렴 어떠냐. 좋은 게 좋은 거지. 데뷔당트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소설 속에서 아타나시아가 죽은 원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제니트를 눈앞에 두고도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다음에는 알피어스에 한번 와주시겠어요? 전부터 공주님을 초대하고 싶었어요.” “기회가 된다면 그럴게요.” 그리고 그 이유는, 어쩌면 더 이상 클로드가 전처럼 무섭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어렴풋하게 생각했다. 제17.5장 고독한 검은 늑대 루카스를 건드리지 마세요 “뭐 해?” 다과회가 있었던 밤, 내가 한창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때 루카스가 나타났다. 나는 내 전용 도서관에서 꺼내온 책을 읽고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든 참이었다. 그런데 불빛이 반만 비추는 침대 한구석에 선 루카스를 보는 순간 내 안에 나조차 모르고 있던 어떤 충동이 눈을 떴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고 개드립을 시전했다. “황혼보다 어두운 자여.” 내가 입을 열자 루카스의 표정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쟤가 또 혼자서 무슨 생쇼를 하나 싶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이미 한번 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여!” 어린 시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모 마법 소녀 애니메이션에서의 대사를 장엄하게 읊자 루카스의 눈썹이 서서히 굴곡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인데! “상처 입고 이 도시를 홀로 떠도는 외로운 한 마리의 짐승!”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해라.” 루카스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역시! 백합 소녀가 고독한 검은 늑대 얘기를 하며 호들갑을 떨 때 기분 탓인지 루카스가 발을 삐끗하는 것 같더니만! 역시 넌 다 들었던 거였어! 그 금단의 단어를! “고독한 검은 늑대 루카스!” 루카스가 나를 죽이고 싶다는 눈빛으로 보자 나는 더욱 신이 났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뜨거운 심장에는 그 이름처럼 눈부신 한 줌의 빛을 숨기고 있겠지!” “야.” “마법사계의 떠오르는 혜성! 아아! 그 치명적인 매력에 모두들 눈이 멀어버…… 읍!” 루카스가 손가락을 따악 튕기자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야잇, 치사하게! 나 아직 대사 다 못 끝냈단 말이야! “읍읍!” 하지만 내 발버둥은 루카스가 다가와 내 턱을 잡아 쥐는 순간 고장 난 로봇처럼 뚝 멈추고 말았다. “하지 말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 오소소. 다과 시간 때와는 다른 의미로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 이 자식. 웃고 있는데 개무서워!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늑대니 뭐니 그딴 소리 하면 진짜 혼난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짜증을 내는 것보다 더 무섭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죠?! 나는 오랜만에 보는 까만 또라이 다운 면모에 쫄아서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그러자 루카스가 내 턱을 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이번에는 내 머리 위에 툭 손을 얹었다. “그래. 착하네. 이왕 착한 김에 하나만 더 대답해 봐.” “뭐, 뭘요?” 눈치를 보며 반문하자 루카스가 방금 전보다 한결 더 섬뜩하게 미소 지었다. “그 개소리 맨 처음 꺼낸 게 누구야?” 헉.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되물었다. “그, 그, 그건 왜 물으시는지?” “내가 왜 물은 것 같아?” 차, 찾아가서 족치려고……? 내가 생각한 게 맞다는 듯 마주한 예쁜 미소가 깊어졌다. 으앙! 백합 소녀! 위험해! “누구야.” “몰라!” “누구냐고.” “몰라!” “너 동공에 대지진 났어. 빨리 불어.” “모른다니까!” 으아아아앙! 그날 밤 까만 또라이에게서 백합 소녀를 지켜내는 것은 아주아주 힘들었다. 크흐흑……. 제18장 자고로 외출은 몰래 해야 제맛 클로드는 오늘도 아주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한동안은 괜찮나 싶더니 또다시 사람이 시들시들한 파김치처럼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아빠,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오늘도 내내 집무실에 처박혀 있었다는 클로드를 보러 왔다가 깜짝 놀랐다.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게 아무래도 그에게는 휴식이 절실히 필요해 보였다. 필릭스가 나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있었네. 내 방문을 핑계 삼아 겸사겸사 클로드를 쉬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공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밤새 집무실에만 계시지 않았습니까. 잠깐이라도 쉬시지요.” 그, 그런데 이상하다. 원래 밤새 일하고 그랬으면 사람이 좀 후줄근해 보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와중에도 오히려 퇴폐미가 잘잘 흐르는 게……. 뭐, 뭔가 지금 아주 위험한 페로몬을 마구마구 흩뿌리고 있는 것 같은데? “금방 끝나니 앉아 있거라.” 그래도 기다리라고 하는 걸 보니 하던 것만 마무리하려나 보다. 오늘만이 아니라 어제도 집무실, 그제도 집무실, 내내 집무실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러다가 과로사 하는 거 아니야? 여긴 근로기준법 같은 것도 없습니까? 주 5일 근무제 도입이 시급합니다! 나는 피로가 가득한 클로드의 얼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냥 필릭스한테 시켜 버리시지.” 내 말에 필릭스가 마치 배신당한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못 본 척해 버렸다. 얼굴이 까칠해져서 퇴폐한 매력을 내뿜는 클로드와는 달리 얼굴에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필릭스를 보니 아무래도 그에게는 노동이 좀 필요한 것 같았다. 내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클로드가 코웃음 쳤다. “영 부실해서 좀처럼 뭘 맡길 수가 있어야지.” “이상하다. 필릭스가 평소에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요. 시키면 뭐든 잘할 것 같은데?” “헛똑똑이란 건 저런 걸 두고 말하는 거지. 너는 저런 어른이 되면 안 된다.” “전 아빠 같은 어른이 될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구슬프게 듣고 있던 필릭스가 이내 쓸쓸히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폐하와 공주님은 참 많이 닮으셨군요…….” “당연한 소리 그만하고 나가라. 방해된다.” 끵. 필릭스는 집무실에서 그대로 퇴출당했다. 나는 클로드가 미간을 구기고 서류를 보는 동안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으흑. 그런데 자꾸만 눈길이 탁자 위에 있는 까만 해태 돌하르방에 꽂힌다. 처음 이것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로도 계속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니 역시나 옥새 취급이 너무나 하찮은 것……. 주르륵. 힘내라, 해태야. 그래도 너는 이 나라의 단 하나뿐인 소중한 옥새니까! 탁. 잠시 후, 클로드가 하던 일을 끝마쳤는지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두통이 이는지 손으로 미간 사이를 주무르는 것이 영 안 되어 보여서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빠, 과로는 안 좋아요.” 지난번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주물주물하자 손끝에 닿은 근육이 딱딱하게 뭉친 것이 느껴졌다. 쯧. 황제란 것도 할 게 못 되네. 이렇게 허구한 날 일만 해야 하고. 역시 돈 많은 백수가 짱인 것이다. 내 장래 희망은 이제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가늘고 길게, 그리고 내 새로운 보석 예쁜이들이랑 오순도순 사는 걸로……. “어제 다과회는 어땠지?” 그런데 바로 그때, 가만히 내 안마를 받고 있던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제니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 이후로 내 궁에는 서너 번 더 다과회가 열렸다. 그때마다 클로드는 지나가듯이 즐거웠냐고 물어봤고, 나는 그랬노라고 대답했다. “신경 써주신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으, 음. 물론 모일 때마다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얘기는 항상 나왔지만요. 그래도 해맑은 여자애들과 함께 이런 식으로 노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나름대로 재미있기도 했다. “잘되었구나.” 사실 클로드와 릴리가 엄선하는 영애들에는 별다른 조건 같은 것이 없었다. 있다면 단 하나, 나와 같이 데뷔당트를 치렀던 동갑의 여자아이들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정치적인 색도 신분 고하의 차별도 없었다. 그러니 이쯤 되면 나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그저 나한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은 거구나. 어릴 때부터 흰둥이 아저씨의 강력한 어필도 무시하고 필릭스의 간언도 모르쇠로 일관했던 클로드의 마음이 왜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내가 전보다 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일단 데뷔당트도 치른 나이이니 언제까지나 예전처럼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쓰읍. 그럼 궁 밖으로도 좀 내보내주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초대를 많이 받았는데 수락하는 답장을 보내도 될까요?” “안 된다.” 하지만 클로드는 오늘도 칼 같았다. “궁 밖은 위험하니 정히 적적하다면 에메랄드궁에서 더 자주 다과회를 열도록 해라.” 호위 기사를 더 많이 붙이면 되지 않냐고 설득을 해도 클로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궁 밖의 위험성을 모르는 걸 보니 아직도 많이 어리다고 하며 내 외출 금지령을 더욱 공고히 하기만 했다. 아니, 내 다과회에 초대받는 영애들도 나랑 동갑이거든요? 그런데 그 애들은 위험하게 집 밖으로 막 불러내도 되고 내가 궁에서 나가는 건 안 된답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해본 결과, 그들의 목숨과 네 목숨 값이 같냐는 살벌한 소리만 되돌아왔을 뿐이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요. 다과회보다 아빠랑 같이 있는 시간이 훨씬 더 좋아요.” 어휴. 가뜩이나 피곤해 보이는 사람 붙잡고 또 입씨름하기 싫어서 그냥 내가 그만둔다. 이건 다 당신의 그 힘세고 강력한 다크서클 때문이니 고마워하라고! “계속 앉아만 있으면 더 피곤해요. 같이 나가요, 아빠.” 나는 어두침침한 방구석에서 아까운 인생을 낭비 중인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고자 살살 웃으며 클로드를 집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 아무래도 내가 요즘 좀 게을러진 것 같다. “아, 하기 싫다.” 나는 한 시간 전부터 혼자 공부 중이던 「100년 외교의 시대」 책 위에 엎드리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좀 더 필사적으로 공부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책을 읽는 것도 귀찮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랬더라. 아무래도 데뷔당트 후부터인 것 같은데. 귀여운 여자애들하고 같이 어느 집 자제가 잘생겼네, 어느 가게 드레스랑 리본이 예쁘네, 이번 생일 때 가족들하고 어디로 놀러가기로 했네, 하면서 하하 호호 놀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느슨해진 걸까? 어흑. 이래서 인간의 나태함이란. 아니면 그냥 단순히 공부하는 게 질린 것일 수도 있겠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코흘리개 어린애일 때부터 내가 책을 좀 많이 봤던가. 나한테 딸린 가정교사만 해도 한둘이 아니고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주구장창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하고……. 그러면서 틈틈이 클로드한테 점수도 따고. 와아, 생각해 보니 나 엄청나게 알찬 14년을 보냈던 거였어. 체감 시간으로 치면 14년이 아니라 140년이라도 된 것 같네요. 으아앙. ======================================= [71화] “책상에 머리 박고 뭐 해?” “아, 깜짝이야!” 으악!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책상에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다. 내가 진저리치며 고개를 들자 어느덧 내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던 루카스가 그런 나를 비웃었다. “심심해서 와봤는데 너도 만만찮게 심심한가 봐?” 그런데 왠지 말투가 날 빈둥거리는 백수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별로다. “아니거든. 나 스케줄 엄청 빡빡하거든?” “넌 여왕이 될 것도 아니라면서 주구장창 공부, 공부, 공부. 지겹지도 않아?” 그, 그건 그렇지만. 솔직히 나도 방금 전까지 공부하는 거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그러는 넌 탑에 있다가 온 것 같은 행색인데 이렇게 빈둥거려도 돼?” “아, 맞아. 너희 아빠한테 걔네들 월급 좀 줄이라고 해. 밥값도 못하는 것들이 허구한 날 거지 같은 연구나 하고 앉았어, 그냥.” 그렇게 말한 뒤 루카스는 생각만 해도 짜증 난다는 듯이 쯧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궁 마법사들을 이렇게 무시하는 건 루카스 너밖에 없을 거다. 오벨리아는 그래도 마법사들의 수준이 전 세계 상위권에 든다고 배웠는데 말이지. 오죽하면 황궁 내에 있는 마법사들의 탑 이름도 검은 탑이라고 다 지었을까. 웬만한 자부심 가지고는 안 될 일이지. 물론 그 작명 센스는 솔직히 좀 구리지만 말이야. 크흑. “걔네들이 맨날 귀찮게 오라 가라 해서 나까지 우중충한 탑에 처박혀 있어야 하잖아.” 하지만 지금 루카스가 투덜거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확실히……. “밖에 놀러 나가고 싶은 날씨네.” 나는 창밖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맑기도 했다. 확실히 루카스의 말처럼 어두컴컴한 탑에나 짱 박혀 있기에는 아까운 날씨였다. 나는 책상 위에 팔을 뻗고 엎드려서 애꿎은 책장을 팔락팔락 넘겼다. 열려진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에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런데 뭐, 나가서 할 것도 없고. 황궁 안은 맨날 거기가 거긴데.” 오늘따라 그 당연한 사실이 지극히 따분하게 느껴졌다. “너 여기가 지겨워?” 그, 그렇다고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십니까. 지겹다니요. “하긴, 그럴 만도 하네. 너도 벌써 여기 말뚝 박은 게 몇 년째야.” 아니, 땡전 한 푼 안 내고 이렇게 등 따시고 배부를 수 있는 데가 또 어디 있다고. 그냥 맨날 똑같은 일상만 보내다 보니까 살짝 지루한 감이 있는 거지. 이를 테면 권태기라고 할까. 나는 루카스에게 짐짓 젠 체하며 말했다. “그냥 어른의 배부른 투정이란다. 매일 꽃등심만 먹다 보니 가끔은 삼겹살이 먹고 싶어지는 이치랄까.” “뭔 소리야.” 이곳에는 꽃등심도 삼겹살도 없어서 그런지 루카스는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를 어린애 대하듯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눈치챈 것처럼 곧 그가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튼 황궁 안에 처박혀 있기 싫다는 거 아니야?” 나와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루카스가 쓸데없이 뭐 그리 말을 꼬아서 하냐는 듯 툭 말을 던졌다. “그 말을 뭐 그렇게 장황하게 해. 나가고 싶으면 나가면 될걸.” 이놈이 지금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네! “아빠가 허락을 안 해주잖아!” 영애들 집에 간다고 할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이라고는 ‘안 돼!’밖에 없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허락 안 해주면 몰래 나가면 되지.” 그런데 루카스가 간단히 내린 결론에 나는 다소 허탈해지고 말았다. “몰래 어떻게? 너 개구멍 어디 있는지 알아?” “없어 보이게 개구멍이 뭐야, 개구멍이.” 루카스가 불쌍한 중생 보듯 내게 측은한 눈빛을 보내며 쯧쯧 혀를 찼다. 아니, 그런데 이놈이! 저 기분 나쁜 눈빛은 도대체 뭐지? 손가락으로 확! 저 눈을 그냥 막! “내가 말했지. 넌 가끔 날 너무 무시한다고.” 따악! 나는 발끈해서 책상에 기대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루카스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내 눈앞에는 어느덧 내가 이제껏 몰랐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웅성웅성. “어이, 거기! 그 물건은 조심해서 내려놔야 돼!” “어서 오세요, 손님!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환상의 맛!” “오늘 밤 여러분의 눈과 귀를 현혹시킬 미녀 마술사와 그 조수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에이, 이건 너무 비싸다! 조금만 깎아주세요. 여기 흠집도 나 있는데.” “팜킨 사세요, 팜킨! 오늘만 특가!”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음이 일제히 내 고막을 뚫고 달려들었다. 분주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내 시야 가득 들어찼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커다란 시장의 어느 골목 같기도 하고 활성화된 상업 도시의 어느 구석진 자리 같기도 했다. 그런 장소 특유의 활기 같은 것이 훅 다가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소음과 눈앞에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들의 모습에 약간 얼이 빠진 채 서 있었다. 루카스와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두컴컴한 골목길이었는데, 저 많은 사람 중 누구도 그늘 속에 있는 우리에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았다. 내가 처음 보는 황궁 밖의 풍경에 넋이 나가 있는 사이, 옆에 있던 루카스가 나를 위아래로 한번 쫙 훑어보는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옷 꼴이 영.” 따악! 이번에도 루카스의 손짓 한 번에 내가 입고 있던 옷이 바뀌었다. 어디로 보나 비싸고 화려해 보이는 드레스의 밑단에 하얀 물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물거품이 아니라 자글거리는 하얀빛 같기도 했다. 아무튼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마치 허물을 벗듯 치마 밑단에서부터 모습을 변화해가는 모습은 신기했다. “그 정도면 쏘다닐 만하겠네.” 몇 초의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원래 입고 있던 레이스 달린 화려한 노란 드레스 대신 하늘색의 수수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느덧 루카스의 옷도 황궁 마법사의 복장이 아닌 평상복으로 바뀐 상태였다. 신데렐라에 나오는 요정 할머니처럼 신통방통하기도 하지! 물론 지금 이 녀석은 내 옷차림을 상향 조정해 준 게 아니라 하향 조정해 버렸지만! “루카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루카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왜 그동안 이런 방법으로 황궁을 나올 수 있다고 말 안 했어?” 그동안 내가 클로드한테 외출 금지를 받을 때마다 얼마나 구슬퍼 했는지 다 알면서! 이렇게 순식간에 나올 수 있었으면서 왜 말을 안 해주고! 그런데 루카스가 대꾸한 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왜 이래. 너 내가 순간 이동 쓸 수 있는 거 알잖아. 예전에 네가 흰둥이네 집에 갔던 건 뭔데.” “그, 그건.” 세, 세상에. 루카스 말이 맞았다. 그때도 분명히 루카스의 순간 이동으로 흰둥이 아저씨네 집까지 이동했었지. 아니, 그런데 난 왜 그동안 이런 생각을 못 했지? 루카스한테 밖으로 데리고 나가 달라고 했으면 쉽고 빠르고 간단했을 텐데! “좀 웃기긴 하더라.” 그런 생각에 내가 할 말을 잃은 걸 아는지, 루카스가 나를 향해 얄밉게 웃어보였다. “이렇게 쉽고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그동안 네 아빠한테만 허락받는다고 끙끙거리는 거 보니까. 눈앞에 일 등급 황금 거위 알이 있는데도 장님처럼 그걸 못 알아보고, 우리 공주님은 참 재미있으셔?” 이익! 내가 바보 같았던 건 맞지만 얄미워! 얄미워! 결국 내가 혼자 삽질하는 게 재미있어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는 거잖아! “너 진짜 성격 나쁜 거 알아?” “응. 넌 진짜 바보 같고.” 악! 진짜 한 마디를 안 져요! 이 나쁜 놈! 대머리나 돼라! 그렇게 내가 속으로 마구 저주를 날리고 있는데, 불현듯 루카스가 그런 나를 향해 웃었다. 물론 그건 놈의 새까만 머리를 잡아 뜯어주고 싶을 만큼 참으로 밉살맞은 미소였지만 다음 순간 내 손을 잡아끄는 힘에 나는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빨리 와. 시간 없어.” 나는 그의 손길에 이끌려 엉겁결에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러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결 더 도드라지게 울렸다. “가자.” 내 손을 붙잡은 채 이제 막 골목 밖으로 나선 루카스의 얼굴 위로 눈부신 햇볕이 내리쬐었다. *** “야, 촌티 나니까 그만 좀 두리번거려.” 루카스가 또 나를 구박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신기한 것투성인데 나보고 어떻게 우아 떨고 있으라고! “너야말로 자꾸 야야 하지 마.”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한 뒤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내 이름은 아티야. 알겠어?” “그거 네 애칭이잖아.” 그러자 루카스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밖에서 쓰는 이름까지 아예 따로 정하시고, 아주 본격적이신데?” 하지만 루카스의 이죽거림조차도 내 기분을 하락시키지는 못 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오벨리아의 제도에서 가장 활성화된 상업 거리로, 전국 방방곳곳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업의 중심지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볼거리도 많고……. “거기, 예쁜 아가씨. 이거 하나 잡숴 봐요.” 먹거리도 많았다! “이게 뭐예요?” “내가 직접 키운 토종닭을 양념해서 꼬챙이에 끼워 구운 거야.” “헉. 설마 닭 꼬치!” “그렇지!” 나는 아저씨가 주는 꼬치를 냉큼 받아서 냠 한 입 물어뜯었다. 이, 이것은! “맛있지?” 조미료의 맛! 크흑. 나는 감격해서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몸에는 나쁠 것 같지만 묘한 중독성이 있는 익숙한 그 맛이 아닌가! 그동안 황성에서 온갖 산해진미만 먹어서 그런지 너무 오랫동안 이 맛을 잊고 있었어! “동화로 두 개만 주면 되우.” 앗. 그런데 내가 빠른 속도로 꼬치를 먹어치우는 걸 싱글벙글 웃으며 보고 있던 아저씨가 내게 돈을 요구했다. 이, 이제 보니 이 아저씨. 멀쩡히 지나가던 사람한테 한번 먹어보라면서 다짜고짜 꼬치를 내밀지 않나, 다 먹는 걸 지켜보고 난 뒤에야 금전을 요구하지를 않나. 왠지 상술에 넘어간 것 같은데? 그럴 거면 내가 먹는 걸 보면서 아빠 미소는 왜 지었어! 닭 꼬치 장수 아저씨의 푸근하게 웃는 낯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약간 허탈해졌다. 와, 와아. 나도 다 죽었구나. 하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먹었으면 돈을 내는 게 당연하지. 예전 같으면 이런 술수에 절대 넘어갈 리가 없는데, 그동안 황궁 생활만 하다 보니 감이 다 죽었나 봐. 크헉.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돈이 없었다. 가진 돈도 없으면서 남의 가게에서 닭 꼬치를 덥석 주워 먹다니.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내 이동하는 ATM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루카스.” 내가 슥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루카스가 왜 부르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 [72화] “돈 줘.” 그러자 루카스는 내 행태가 상당히 웃기다는 듯이 반문했다. “나한테 돈 맡겨놨어?” “나 한 푼도 없단 말이야.” “그래서?” “네가 데리고 나왔으니까 네가 책임을 져야지!” 그럼, 그럼! 내가 말했지만 맞는 말 같아서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러자 닭 꼬치 집 아저씨도 그런 나를 따라 루카스에게 꼬치 값을 치루기를 종용했다. “그럼! 데리고 나온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더도 덜도 말고 동화로 두 개라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땡전 한 푼 없다고 하니 아무래도 돈을 가지고 있는 듯한 루카스를 공략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이 아저씨 이제 보니 뭔가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잖아? 결국 루카스는 황당한 얼굴로 내가 먹은 닭 꼬치의 값을 치렀다. 쩝. 그런데 하나 먹은 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네. “나 꼬치 하나 더 먹고 싶어.” 나는 옆에 있는 루카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하나 더 줄까?” 작게 속닥거린다고 한 거였는데 그 말을 들었는지 아저씨가 냉큼 내 손에 꼬치를 하나 들려주었다. “동화 두 개.” 그리고 역시나 돈을 요구했다. “아주 죽이 척척 맞으셔들.” 루카스는 상당히 어이가 없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돈을 내주었다. “자, 이건 서비스. 여자 친구가 예뻐서 주는 거야.” “안 먹어. 그리고 누가 여자 친구…….” “헤헤. 아저씨 고맙습니다!” 나는 루카스의 옆구리를 팔꿈치를 확 찌른 뒤 아저씨가 내민 꼬치를 대신 받아들었다. 그리고 루카스를 질질 끌고 닭 꼬치 노점상을 벗어났다. “공짜로 준다고 하면 넙죽 받을 것이지 뭘 또 거절하고 앉았어?” “그러는 넌 이런 게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데. 아주 그냥 이 시장 바닥에 뼈를 묻었다고 해도 믿겠어.” 쿨럭! 이, 이런 쓸데없이 예리한 자식.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보는 루카스를 외면하며 앞장서 걸었다. “크흠. 이거 너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을래.” 그리고 양손에 닭 꼬치를 들고 걷던 중 문득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아, 맞아! “릴리가 나 없어진 거 알았을 텐데!” 내가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보자 루카스가 그런 나를 보며 퍽이나 일찍 기억해 냈다는 듯이 답했다. “모를걸. 너랑 똑같이 생긴 인형 만들어 두고 나왔으니까.” “인형? 지난번 거 같은 종이 인형?” 도대체 언제 그런 걸 만들어두고 나왔대? 이 주도면밀한 자식! “그건 제일 후진 거고. 특별히 말도 하고 걷기도 하는 최신식으로 만들어줬으니까 고마운 줄 알아.” 루카스가 거들먹거리듯 말했다. 아니, 그런데 이거 봐. 이 자식 역시 사람 같은 인형도 만들 줄 알잖아! 그런데 왜 내 댄스 연습 때만 그따위 종이 인형을 만들어준 건데! “빨리 먹어. 여기 사람 너무 많다.” 그때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나를 툭 치고 가자 루카스가 꼬치를 들고 있는 내 한쪽 팔을 붙잡아 약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꼬치 한 개를 스틸해 갔다. “안 먹는다며?” “그거 다 먹으면 너 돼지 될 거 같아서.” 콧방귀를 뀌며 내 닭 꼬치를 한 입 물어뜯는 루카스의 모습은 얄미웠지만 오늘의 나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먹던 거나 먹으면서 길을 가기로 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인파에 길을 잃을 것 같아 나는 꼬치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루카스를 붙잡았다. “와, 저기 봐. 새 시장인가 봐.” 어디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목을 빼고 봐보니 저 멀리서 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새장들이 보였다. “저기 가보자.” 나는 꼬치를 우물거리며 루카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놈이 제자리에서 꿈쩍도 안 하는 것이었다. “왜 그래?” 의아하게 고개를 돌려 보니 루카스가 오묘한 표정을 지은 채 내가 붙잡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허락 없이 막 붙잡아서 기분 나빴나? 아니, 무슨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손에 금칠을 한 것도 아니면서 내가 좀 붙잡으면 어때서! “저긴 아직 정리 중이라 지금 가봤자 볼 것도 없어. 가려면 이따가 가.” 그래도 정 기분 나쁘다면 옷이나 붙잡아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루카스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 그럼 나 저거 사줘.” 나는 막 다 먹은 닭 꼬치의 막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뒤 가까이에 보이는 솜사탕을 손가락질했다. 크읍. 이러니까 꼭 엄마한테 조르는 애 같다. 하지만 마성의 짠단 법칙이라고 아나! 맵고 짠 걸 먹었으니 이제 단 걸 먹어줘야지! “그래, 먹어라. 먹어.” 그리하여 루카스와 나는 그대로 노점상을 순회하며 먹방을 찍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식도락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아, 맛있었다.” 잠시 후 나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해봐. 네 위에 경량화 마법 걸려 있지?” 루카스도 내 맞은편에 앉으며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나 저나 다 비슷하게 먹은 것 같은데 왜 나한테만 이래. “여기 파르페가 맛있대.” 나는 이 앞을 지날 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두근두근하게 메뉴판을 펼쳤다. “아주 그냥 이 동네가 너네 집 같아, 응?” 나는 루카스의 말을 흘려들으며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다 맛있어 보이는데, 뭐 먹지?” 루카스와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은 노천카페로, 듣자 하니 이 거리에서 꽤나 유명한 집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가게 안은 만석이었고, 우리는 점원의 안내에 따라 겨우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긴 고급 찻집 같은 느낌이라 메뉴들도 다 비쌀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메뉴판을 보니 방금 전 루카스와 내가 빠져 나왔던 시장통과 달리 이곳에서 파는 음식들의 가격은 기본이 동화가 아닌 은화였다. 나는 루카스를 향해 슬쩍 소리 죽여 속닥거렸다. “여기 좀 비싼 거 같은데 어떡하지?” “비싸봤자 얼마나 비싸다고.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순간 루카스의 등 뒤로 후광이 비쳐 보였다. 이, 이 녀석. 전에 돈 많다고 한 거 진짜였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막 비웃고! “어차피 동화든 은화든 1초면 만드니까.” 허세라고 생각……. 응? 그런데 지금 뭐랬니. 만들어? 뭘? 투둑. 챙그랑! 바로 그 순간이었다. 루카스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리자 갑자기 그 앞에 은색의 동전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너 먹는 양을 보니까 금화도 필요하겠는데.” 투둑. 챙그랑! 이번에는 금색의 동전이 뿅 하고 나타났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그만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이, 이것은 위조 동전! “설마 아까부터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돈 낸 거야?” “그럼 내가 그 많은 동전을 다 챙겨들고 다녔을까?” 그놈은 멋있었다…… 가 아니라 그놈은 뻔뻔했다. 엄마! 저 지금 불법 화폐 제조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어요! “너 이거 불법이야!” “그래? 그럼 너도 공범이네.” 뜨헉! 맞는 말이었다. 그동안 공부한 오벨리아 법전에 의하면 불법 화폐 제조를 한 자는 한쪽 손을 자르고 그로 인해 금전적 이익을 취한 자는 사유 재산 모두를 국가에 귀속시킨 다음 그들 모두를 30년 노동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는 돈과 루카스의 생글거리는 낯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녀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암묵적인 협상을 맺었다. 조, 좋아. 이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는 거야! “이거 시간 지나면 없어져?” 나는 예전에 보았던 모 유명 마법사가 등장하는 영화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건 허접한 애들이 만든 거나 그렇고.” 한마디로 난 그런 허접한 애들과 다르니 이건 영구전인 돈이라는 의미였다. 이 자식. 이런 식으로 언제든 돈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부자라는 거였어! 이제 보니 루카스 얘, 완전히 황금 알 낳는 거위, 살아 있는 현금 자동 출금 기계잖아? 그럼 사양 않고! “이거랑 이거랑 이거 먹자. 아, 이것도. 이건 이 가게에서 제일 유명해서 안 먹으면 후회한댔어!” 나는 ‘루카스 찬스’를 마음껏 이용하기로 했다. 루카스는 그런 내 행태를 퍽이나 웃겨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내가 주문하는 걸 막지는 않았다. 가게 안은 바깥보다 조용했지만 여기저기서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들이 정겨웠다. 이렇게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고 있는 게 몇 년 만이더라? 그동안 클로드한테 살아남는 데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던 탓인지 너무 오래 동안 이런 사람 사는 풍경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흑. 새삼스럽게 짠내가. “제니트, 시간이 오래 지체되었으니 이만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런데 바로 그때, 착각인지 내 귀에 낯익은 목소리와 낯익은 이름이 들려왔다. 어라? 왜 지금 이제키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내 시야에 들어온 인물들에 흠칫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키엘. 아직 주변을 다 둘러보지도 못했잖아요.” 헉. 이제키엘과 제니트였다! 나는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후다닥 창가 쪽으로 엉덩이를 이동시켰다. 호, 혹시 날 본 건 아니겠지? “흰둥이 아들이잖아?” 루카스도 그를 본 모양이었다. 이제키엘과 제니트는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의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왜 지금까지 몰랐지? 앞에 찻잔을 하나씩 놓고 있는 걸 보니까 우리보다 빨리 온 것 같은데? “짜증 나는데 치워 버릴까?” 바로 그때 루카스가 음산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 아니요! 네가 말하니까 왠지 그 치워준다는 말 앞에 ‘영원히’, ‘다시는 이 세상에 발붙일 수 없게’ 뭐 그런 수식어가 붙어야 할 것 같아서 무서워! “저쪽은 금방 나갈 것 같은데 그냥 조용히 있자.” 나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루카스에게 소곤거렸다. 와,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저 두 사람이 여기에 있을 게 뭐람. “아직 둘러볼 곳이 남았던가?” “잘 기억해 보세요. 가장 중요한 걸 아직 못 샀어요.” 나는 머리카락을 양쪽에서 끌어모아 코 밑에 복면처럼 가져다 댄 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제키엘과 제니트는 과연 이 구역의 선남선녀였다. 극상의 미모를 지닌 둘이 함께 있으니 시너지 효과라도 받는 건지 어째 평소보다 더 멋지고 예뻐 보인다. 아. 가만히 보니 찻집 안에 있는 사람들도 저 두 사람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잖아? “이제키엘이 웬일이에요? 나오기 전부터 제가 몇 번이나 강조해 말했었는데 그걸 다 잊고.” 제니트가 투정 부리듯 말하자 이제키엘이 난처한 낯빛을 보이나 싶었다. 듣자 하니 뭔가를 사러 나온 모양인데 이제키엘이 그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들린다. 아, 아니. 그렇다고 내가 뭐 굳이 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싶은 건 아니지만! “뭐라는 거야.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데 좀 더 들어볼까.” 그런데 다음 순간 루카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오늘 하루 종일 그랬어요. 같이 다니는 내내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처럼.” 앗! 소리가 엄청 선명하게 잘 들린다! 루카스 이 녀석, 넌 정말 훌륭한 범죄의 싹이야. 으흑. ======================================= [73화] “내가 그랬던가.” 제니트가 토라진 듯 말했지만 이제키엘은 휩쓸리지 않았다. 그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저 누구와 닮은 사람을 봐서.” “공주님이요?” 그 말에 이제키엘도 나도 멈칫했다. 지, 지금 뭐라고 했니? 혹시 아까 전에 내가 꼬치 먹으면서 돌아다니는 걸 본 거야? 그런 거야?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요.” 제니트는 후 웃으며 앞에 놓인 찻잔에 설탕을 한 스푼 넣고 그것을 휘휘 저었다. “그야, 이제키엘은 내가 공주님 얘기를 할 때 가장 생기 있는 얼굴을 하잖아요. 설마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니트.”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공주님에 관한 일이 아니고서야 이제키엘이 그렇게 정신을 다른 데 둘 리가 있나요.” 제니트가 찻잔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자 갈색 머리카락이 차양처럼 그녀의 옆얼굴로 드리워졌다. 그래서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 나가자.” 하지만 제니트의 맞은편에 앉은 이제키엘은 잠시 동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들고 있던 찻잔을 다시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네가 아버지께 청해 간만에 외출을 허락받은 날이니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가봐야지. 공단 리본을 취급하는 곳이 이 주위에 있다고 들었어.” 그렇게 말한 뒤 이제키엘이 먼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제니트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나가요.” 나는 아까보다 목소리가 밝아진 제니트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붙잡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게에 가면 저와 같이 리본을 골라 주세요. 하나는 그분께 선물로 드릴 것이니 이제키엘도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헉, 이쪽으로 온다! 나는 머리카락을 최대한 많이 끌어 모아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대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으어. 들키는 줄 알았네.” “대화가 영 뜨뜻미지근한 게 재미없네.”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루카스도 흥이 식었다는 듯이 혼잣말했다. 나는 이제키엘과 제니트가 사라진 방향으로 슬쩍 눈길을 미끄러뜨렸다. 하지만 내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까지는 잠깐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나폴리아 슈퍼 초코퍼지, 내 마음속에 두근두근 퐁당 퐁듀, 블루벨벳 시크릿 캬라멜, 아가사 딸기 쇼트케이크, 구름에 빠진 몽블랑, 슈가슈가 달콤상콤 파르페와 코코아에 빠진 진한 시그니처 초콜릿입니다.” 우와아앙! 드디어 나왔다! “작명 센스하고는. 근데 설탕 덩어리를 뭐 이렇게 많이 주문했어. 너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당연한 거 아냐?” 나는 루카스를 향해 흥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리고 그러는 너는 뭐. 저 초코 음료는 네가 시킨 거잖아? 코코아……. 뭐였더라. 점원 언니가 주문을 읊는 느낌이었는데. 아무튼 알고 보면 루카스 얘도 단 거 꽤나 좋아한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릴리가 만들어주는 초코 간식들을 항상 게 눈 감추듯 먹곤 했었어! 까망이 못지않은 초콜릿 킬러인 게 숨기기는. 봐, 지금 디저트들을 눈앞에 둔 네 눈빛도 평소보다 반짝반짝하고 있잖아! 나는 앞에 놓인 디저트를 향해 전투적으로 포크를 들어 올렸다. “먹자!” 루카스와 내가 테이블 위의 간식을 전부 싹쓸이하고 부른 배를 만족스럽게 두드린 것은 그로부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제 어디 가지?” “그렇게 먹고 또 뭘 먹게?” 아니, 먹는 건 이제 되었다는. 여기서 더 먹으면 집까지 굴러가야 할지도 몰라. “아! 새 시장! 아까 거기 가자!” 마침 아까 가보고 싶었던 새 시장이 떠올라서 소화도 시킬 겸 다시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빨리 와, 루카스!” 나는 신이 나서 루카스를 앞질러 뛰다시피 걸었다. 루카스는 뒤에서 그런 나를 대단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하게 책상에 엎어져 있던 내가 이렇게 지치지도 않고 생생하게 뛰어다는 게 퍽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는 루카스보다 한발 먼저 새 시장에 도착했다. “와아.” 머리 위에서부터 층층이 걸려 내려오는 줄에는 저마다 크고 작은 새장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또 색색의 예쁜 새들이 들어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장관이었다. “예쁘다.” 찌르르, 새들이 떼 지어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러울 만도 한데 신기하게도 마치 화음을 넣은 노랫소리처럼 곱고 예쁘게만 들렸다. 나는 홀린 것처럼 새장들 사이를 걷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푸른 깃을 가진 새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청조랍니다. 잘 길들이면 전서구 역할도 하지요.” 새들의 주인인 듯한 남자는 내게 그렇게 말한 뒤 다른 손님의 부름을 받고 곧 옆에서 자리를 비켰다. 와아, 이렇게 예쁜 파란색은 처음 봐서 그런지 자꾸만 새장 속으로 눈길이 간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흰 새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설마……. 공주님?”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읊조려진 소리에 나는 새장에 손을 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익숙한 음성이 무언가를 확인하듯 다시 한 번 내게 속삭여졌다. “혹시 제가 아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으악! 뒤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건 이제키엘의 목소리였다! 리본 사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벌써 다 고르고 밖으로 나온 거야? 아니, 그런데 넌 지금 내 뒤통수만 보고 나인 걸 어떻게 아는 건데? “이제키엘! 거기서 뭐 해요?” 악, 제니트 목소리까지 들린다. 안 돼, 이쪽으로 오지 마! 에잇! 결국 나는 도주를 감행했다. “잠깐……!” “이제키엘?” 지금 내 옷차림이 가벼운 원피스에 굽 낮은 플랫슈즈라서 다행이었다. 나는 이제키엘과 제니트를 피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색색의 깃을 가진 새들이 내 옆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으아아, 그런데 너 왜 쫓아오는 거니!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새장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며 달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눈앞에 루카스가 나타났다. “루카스!” 그런데 넌 뭐 하고 있어? 왜 새랑 눈싸움을 하고 있는 거야? “뭐야, 새 구경한다더니 갑자기 왜 헐레벌떡 뛰어와.” 루카스는 붉은 깃의 맹금류와 쓸데없이 눈싸움을 하다가 나를 발견하고 의문을 표했다. “이제키엘이 뒤에서 쫓아와!” 급박한 외침에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내 등 뒤로 미끄러졌다. 다음 순간 루카스의 눈매가 슬쩍 찡그려지는가 싶더니 곧 그가 쯧 혀를 찼다. “내 손 잡아.” 순간 이동 쓰려고 그러나? 아무튼 나는 루카스가 내민 손을 냉큼 붙잡았다. “으어!” 그런데 이거 뭐야?! 왜 내 발이 허공에 붕 뜨는 거야?! “엄마야! 뭐야, 뭐야! 이게 뭐야!” 나는 어느덧 루카스와 함께 땅을 박차 오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줄에 매달려 있던 크고 작은 새장들도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내가 기겁하며 소리 지르자 루카스가 고막이 아프다는 듯 한쪽 눈매를 찡그렸다. “아, 귀 따가워. 하늘 처음 날아봐?” 그럼 처음이지, 이 자식아! 내가 또 언제 하늘을 날아봤겠냐! 기껏해야 네가 예전에 알피어스 공작가로 날 날려 보낼 때 위에서 떨어졌던 게 다인데! 으헉.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서 더 무서워졌다. “이, 이러다가 갑자기 나 떨어뜨리는 거 아니지?” “떨어뜨리긴 왜 떨어뜨려.” 하지만 난 믿을 수가 없어서 루카스를 생명줄 삼아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그러자 그런 나를 보고 루카스가 재미있다는 듯이 픽 웃었다. 잠깐. 내가 쫄아서 매달리는 게 웃기냐? 웃겨? “너 안 떨어져. 앞에 밟아.” 바, 밟긴 뭘 밟아요? 여기 발 디딜 데라고는 눈을 씻을 찾아봐도 안 보이는데요? “손 놓는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자 루카스가 사악하게 나를 협박해 왔다. 아니, 밟을 게 있어야 밟지! 어흐흑. 이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협박이나 하구요.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손 놓지 마! 으앙! 나는 두 눈을 딱 감고 루카스가 하라는 대로 발을 뻗었다. 아니, 그렇다 한들 발밑에 뭐가 있을 리가…… 있네? “헐, 이게 뭐람.”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밑을 내려다보고는 대차게 후회했다. 으어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런데 루카스는 분명히 나를 옆구리에 데롱데롱 매단 채로 계단을 밟듯이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루카스가 한 번 발을 박찰 때마다 몸이 놀이 기구 타듯 위로 부웅 떠올랐다. “왜 이렇게 쫄아. 이게 무서워?” “당연히 무섭지!” 루카스는 내 꼴이 퍽 웃긴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꼭 그거 같은데? 왜 있잖은가.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마법사랑 소녀랑 같이 공중을 산책하는 장면. “이상하네. 이게 왜 무섭지.”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읊조리는 말에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또 눈을 질끈 감고 루카스를 따라 허공에 발을 디뎌보았다. 그러자 쑤욱 몸이 위로 떠올랐다. 그, 그런데 몇 번 하다 보니 의외로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따라오던 놈 따돌렸어. 나 잘했지?” 이놈이? 루카스가 칭찬해 달라는 듯이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이제키엘을 따돌리려고 그런 거라지만 이 짓을 해놓고 잘하긴 뭘 잘해? “그냥 순간 이동 쓰면 됐잖아!” “뭐? 혼자 걷고 싶으니까 손 놔달라고?” “아니요. 루카스 님의 선택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으앙! 그래요, 한번 또라이는 영원한 또라이. 어릴 적 또라이가 여든까지 가는 법이지요. 어흐흐흑. 그나저나, 지금 갑자기 생각난 건데 루카스 이 자식! “나 치마 입었는데!” “악, 내 팔!” 나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올 때까지 비매너 루카스의 팔을 사정없이 꼬집어주었다. *** “이제 집으로 가자.” 아, 오늘 재미있었다. 비록 마지막은 좀 구렸지만. 날아오면서 봤던 시계탑의 긴 바늘이 5와 6 사이에 걸려 있었으니 슬슬 돌아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루카스는 내가 꼬집은 팔뚝이 아픈지 얼굴을 구기며 팔을 매만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순간 이동할 거지?” 우리가 착지한 곳은 사람이 없는 널따란 들판이었다. 억새 같기도 하고 갈대 같기도 한 황색 풀이 허리 높이까지 올라와서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루카스가 순간 이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 먼저 팔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불현듯 루카스의 눈매가 움찔 찌푸려지는 것이었다. “야, 너는 무슨 손을 그렇게 덥석덥석…….” 아까도 그렇고 내가 손을 잡는 게 퍽이나 불만인 모양이었다. “아, 하긴 안 잡아도 순간 이동되던가?” 생각해 보면 오늘 궁 밖으로 나올 때도 그랬고 예전에 알피어스 공작가에 갔을 때에도 굳이 손을 붙잡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에이, 퉤퉤. 그럼 놓지 뭐. 치사해서 안 잡아, 안 잡아. 그깟 손 한 번 붙잡았다고 얼굴까지 찌푸리고 말이야. ======================================= [74화] “됐어. 이제 간다.” 그런데 내가 손을 놓으려고 하자 이번에는 루카스가 먼저 내 손을 붙잡았다. 아니, 너 내가 네 몸에 손대는 게 싫은 거 아니었니?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간 변덕하고는. 게다가 웬일로 이제부터 순간 이동할 거라고 친절히 경고해 주기까지! 따악. 루카스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노란 풀이 흔들리던 고즈넉한 들판에서 안락함이 느껴지는 방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오셨어요?” 헉! 그런데 뭐야. 방 안에는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다! 거울 속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모습의 내가 곱게 웃으며 나와 루카스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플갱어!” “뭔 소리야. 인형이라고 말했잖아.” 앗차, 그랬지. 나는 약간 민망한 기분으로 인형을 삿대질하고 있던 손을 내렸다. 아니, 그런데 말이야. “이거 진짜 인형 맞아? 내 쌍둥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하. 내 실력이 너무 뛰어난 탓이지. 난 대충 만들어도 이래.” 내가 가만히 서 있는 인형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감탄하자 루카스가 한껏 잘난 척하며 거들먹거렸다. 인형은 내가 이 방을 나설 때 입던 것과 같은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조금 끌어 모아 반 묶음을 하고 있는 것도, 거기에 진주가 박힌 머리 장식을 하고 있는 것도 나와 똑같았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도 거울에서 보던 것과 동일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타자화해 관찰하는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무척 신기한 기분이었다. “실컷 뜯어보던지. 어디를 봐도 너랑 똑같을걸.” “진짜? 진짜 똑같아?”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내가 이렇게 예뻐?” “당연하…….” 자신의 눈썰미를 자랑하듯 말하던 루카스가 내 물음에 무심코 대답해 놓고 멈칫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내 유도신문에 넘어갈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았다. 에, 에잇. 넘어올 줄 알았는데 아깝네. “에헷. 역시 루카스 님은 대단하십니다. 아니, 이렇게 실물하고 똑 닮은 인형을 다 만드시고.” 내가 루카스를 마구 찬양해 주는 동안에도 인형은 그림처럼 미소 지은 채 자리에 얌전히 서 있었다. 이 인형은 참 얌전하기도 하네. 나답지 않게 너무 요조숙녀 컨셉인데? 그런데 인형의 모습을 보고 있던 루카스가 불현듯 슬쩍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똑같은데 안 똑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 따악! 엥, 그건 또 무슨 궤변입니까? 하지만 루카스는 내가 미처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손가락을 튕겨 내 눈앞에 있는 인형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버렸다. “아직 덜 구경했는데 왜 벌써 치워?” “징그러워서.” “뭐!” 너 지금 나랑 똑같이 생긴 인형이 징그럽다고 했냐? 지금 내 면전에서 날 디스한 거야? 그런 거야? “왜 흥분해? 내가 언제 네 욕했어?” “나랑 똑같이 생긴 인형이 징그럽다며!” “똑같기는 개뿔. 하나도 안 똑같아.” 루카스는 역시 이상한 놈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대충 만들어도 이렇게 똑같은 인형이 된다며 잔뜩 잘난 척하더니. 그런데 이제는 또 날 본떠서 만든 인형이 나랑 하나도 안 똑같단다. 내가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루카스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겨 내 옷차림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 주고는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역시 좀 못생겼어도 가짜보다는 진짜가 낫네.” 저기요? 너 지금 또 나 욕한 거죠? 그래놓고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네? “금방 네 시녀 들어올 거야. 나 간다.” “안 잡아! 가든지, 말든지!” 내가 성질이 나서 소리 지르든 말든, 루카스는 마지막까지 만족스럽게 웃는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공주님, 들어갈게요.” 과연 루카스의 말대로, 내가 혼자서 씩씩거리고 있는 동안 밖에서 릴리가 노크를 해왔다. “어머. 자리에서 일어나 계셨네요. 오늘따라 너무 열심히 공부에 매진 중이셔서 아까도 말을 못 붙이고 그냥 나왔는데.” “그, 그랬어?” “네. 곧 만찬 시간이에요. 슬슬 준비하셔야죠.” “으응, 그래야지.”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보이며 릴리를 향해 하하 웃었다. 곧 있을 클로드와의 만찬 시간에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게 안도하며 나는 릴리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음? 그런데 이상하네. 왜인지 밖이 다소 시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똑똑! “공주님, 들어가도 될까요?” 바로 그때 문 밖에서 한나가 노크를 해왔다. “들어와.” 내가 허락하자 한나는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째서인지 그런 그녀의 얼굴이 약간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호라. 이건 분명 나한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표정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세스가 어쩔 수 없는 사람을 보듯이 한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한나, 밖에 무슨 일 있어?” “네, 공주님도 들으면 무척 놀라실 거예요!” 나는 호기심에 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나가 흥분해 외친 소리에 그만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몇백 년간 은둔하고 있던 검은 탑의 마법사가 지금 폐하를 배알하고 있대요!” 제19장 특보! 검은 탑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세상에! 호수가 정말 예뻐요!” 영애들이 눈앞에 펼쳐진 호수를 보며 감탄하는 모습을 나는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그냥 보면 참 예쁘지.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 설마 이 속에 촉수 괴물이 살고 있을 줄이야. 역시 그냥 겉으로 보기만 해서는 모르는 거였어. 수면 아래에 그런 끔찍한 걸 숨겨두고! “꼭 공주님의 눈동자 같아요.” 흠칫. 한창 호수의 표리부동함에 대해 불평하고 있던 나는 어떤 영애의 말에 그만 움찔거리고 말았다. “물론 신안이라고까지 불리는 보석안의 아름다움과 비견할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요. 실은 데뷔당트 날에도 너무 황홀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답니다.” “맞아요, 맞아!” 아, 칭찬이었구나. 나는 한순간이나마 욕인 줄 알고 흠칫했던 게 머쓱해서 칭찬을 다시 되돌려 주었다. “코린트 양의 눈도 무척 예뻐요. 꼭 이제 갓 싹이 튼 새순처럼 아주 싱그럽고 예쁜 녹색이죠.” 내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내 보석안을 칭찬해 주었던 영애가 어머, 소리 내며 발그레 뺨을 붉혔다. 허허. 반응이 참 귀엽구나. 평소 이제키엘의 열렬한 팬으로서 앞장서 그의 치명적인 매력을 설파하는 데 힘쓰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 걸? “정말 멋지네요. 황궁에서 이렇게 뱃놀이까지 즐길 수 있고.” 과연 그 말처럼 나도 처음에는 황궁 부지 내에서 뱃놀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니 그녀들의 감탄이 이해되기도 했다. “호수 안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경치가 아주 장관이랍니다.” 물론 여기에서 촉수 연꽃에게 호되게 당한 적 있는 나는 두 번 다시 이쪽 방향으로 고개도 돌리기 싫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자 하니, 클로드가 지난번 사건 이후로 이곳에 있는 촉수 괴물의 씨를 모조리 말려버렸다고 한다. 나로서는 좋은 일이기는 한데……. 기, 기분이 다소 미묘한 건 왜지? 거의 몇 세대 동안 이 호수에 터를 잡고 있던 촉수 괴물을 그렇게 한 순간에 전부 박멸해 버릴 정도로 내가 그날 그렇게 흉하게 난리법석을 떨었나? 으흑. 왠지 그게 맞는 것 같다. 클로드가 그런 식으로 당황하는 모습은 나도 처음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 말에 안심하고 오늘 영애들과 함께 뱃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모두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음. 내가 주최자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황궁 뱃놀이의 경험자이기도 하니까 먼저 배에 올라타는 게 맞겠지. 그래도 이 배는 마력이 깃든 배라 그런지 누가 올라타도 기우뚱거리거나 하지 않아 안전했다. 그래서 딱히 누가 팔을 잡아주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공주의 체면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필릭스의 손을 잡고 걸음을 뗐다. 이얍.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배 위에 사뿐히 올라탔다. 응?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후 아무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 저렇게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는 거지? 뭔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뱃놀이가 처음이라 무서운 건가? 옆에 있는 기사들에게는 영애들을 잡아주라고 말해놨는데. 그래서 지금도 대기 중이고. 앗. 호, 혹시 이 호수에 살고 있던 괴물 연꽃에 대해 들은 건 아니겠지? “무서워 말고 이리 와요. 제가 손을 잡아줄게요.” 나는 잠시 동안 그들을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웃는 낯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런 직후 영애들이 매처럼 눈을 번뜩이며 방금 전보다 더욱 열렬히 서로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뭐, 뭐지? 지금 눈치 싸움하시나요? 아니, 그냥 배에 올라타는 것뿐인데 그럴 게 뭐가 있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직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주님 옆에는 제가!” “아니에요, 제가 타겠어요!” “무슨 소리세요? 공주님은 방금 전 제게 말씀하신 거라고요.” “앗, 아까부터 뒤에서 옷 잡아당기지 말아요! 반칙이잖아요!” 알고 보니 그녀들은 내가 탄 배에 아무도 먼저 올라타지 못하게 뒤에서 서로의 옷이나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서, 설마 지금 나랑 같은 배에 올라타겠다고 이런 난투극을 벌이는 거야? 지금 내가 감동해야 하는 건지 웃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허흑. 그래도 다들 나랑 같이 뱃놀이하기 싫어서 피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고마워해야 하는 거겠지. 흑흑. 그동안 같이 사대천왕 이야기도 하고 릴리의 특제 초콜릿 디저트도 같이 나눠먹은 보람이 있네. “그만 출발할까요?” 엥? 그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산보를 나온 듯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약간 놀랐다. 그것은 다른 영애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직후 이내 발견한 것에 놀라 입을 쩌억 벌렸다. “여기는 이제 자리가 다 찬 것 같으니 여러분은 다른 배를 이용해 주셔야겠어요.”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내 맞은편 자리에 어느덧 우아하게 양산을 들고 선 제니트가 다른 영애들을 향해 곱게 웃었다. 와, 와아. 제니트에게 이런 기술이? 다른 영애들이 저들끼리 씨름하는 동안 그 속을 유유히 빠져나와 이렇게 감쪽같이 배에 올라타 있다니? “공주님, 먼저 앉으세요.” 제니트는 나를 향해 웃는 낯으로 먼저 자리에 착석할 것을 권했다. “마, 마그리타 양. 도대체 언제?” “앗, 치사해요! 그 자리는 제 것이었는데!” “아니, 분명 마그리타 양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뒤에 있었는데?” 다른 영애들이 느끼는 황당함이 나한테까지 전해졌다. 나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천연덕스럽게 서 있는 제니트를 보니 이상하게도 한순간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 아니. 지금 상황이 좀 웃기지 않습니까. “자리가 다 차버렸으니 어쩔 수 없네요. 뒤에 다른 배가 있으니 조심해서 올라타세요.” 결국 나도 웃는 낯으로 다른 영애들을 다른 배에 보내버렸다. 그녀들은 허탈한 표정이었지만 이미 제니트가 내 앞자리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하는 수 없었다. ======================================= [75화] 내가 먼저 자리에 앉고 그 후 제니트가 착석하자마자 배가 미끄러지듯 수면 위를 움직였다. 호숫가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영애들이 멀어지기 무섭게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만 소리 내 웃어버렸다. “마그리타 양, 그동안 미처 몰랐는데 발이 무척 빠르네요?” “그런 소리 종종 들어요.” 제니트도 나를 따라 밝게 웃었다. 몇 달 전에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생각 외로 즐거웠다. 다과회를 여는 동안 나름대로 정이 들어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이렇게 제니트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나 홀로 가지고 있던 그녀와의 심적 거리감이 대폭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공주님 말씀처럼 경치가 정말 멋지네요.” 감탄 어린 목소리가 실바람을 타고 흘러들었다. 제니트의 눈동자는 호수보다도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문득 어릴 때 알피어스 공작저에서 보았던 그녀의 보석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외출할 때마다 마법으로 눈을 숨기려면 많이 번거롭겠네. 알피어스 공작가에 소속된 마법사가 도와주고 있는 거겠지? 앗. 내가 너무 빤히 쳐다봤나 보다.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고 있던 제니트가 잠시 후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왔다. 나는 약간 머쓱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아흑, 이제는 이미지 관리용 미소가 거의 자동화되었다니까요. “지금 공주님 눈동자가 호수 같은 짙은 청색으로 보여요.” “그래요?” “네. 지금 제 눈과 비슷한 색이요.” 제니트가 한 말에 나는 한순간 멈칫했다. 나와 시선을 맞대고 있는 제니트는 또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엿보이는 친근감에 약간 마음이 술렁거렸다. “데뷔당트 날 폐하와 공주님을 처음으로 직접 뵈었었죠.” 만약 지금의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타나시아였다면 나는 그녀가 내게 보이는 친근감을 우정에 기반을 쌓은 호의의 표시로 여겼을 것이다. “함께 서 계신 두 분의 모습이 너무 다정하고 화목해 보여서 저도 모르게 눈길로 좇고 말았어요.” 그러나 제니트는 이미 나를 그녀의 자매라 여기고 이와 같은 호의를 내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 점은 처음부터 이미 명백했지만 막상 이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마주하자니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나는 손에 쥔 양산을 고쳐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제니트도 알피어스 공작가와 돈독한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던걸요.” “네, 맞아요. 제게는 가족 같은 분들이죠.” 제니트는 내 말에 쑥스럽다는 듯이 그저 웃었다. 나는 무어라 다른 말을 더 꺼내려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모든 걸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이런 식으로 그녀를 떠보는 것이 기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눈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담뿍 머금은 레이스 양산 아래로 부드러운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동그란 눈동자는 티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했다. 연한 분홍색의 드레스를 입은 제니트는 그 자체로 굉장히 사랑스럽고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로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는 이제 열넷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였다. “아.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울까요.” 책 속의 사랑스러운 공주님, 제니트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호수에 꿈꾸는 듯한 시선을 둔 채로 이윽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저는 살면서 지금처럼 행복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공주님.” *** “맞아, 그 소문 들으셨어요? 검은 탑의 마법사요.” 뱃놀이 후 우리는 다 같이 전망 좋은 호숫가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나는 필릭스에게 들었던 대로 호수에 연꽃 괴물이 출몰하지 않아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가 어떤 영애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앗, 저도 들었어요!” “저도요!” 와아. 벌써 소문이 다 퍼졌구나. 하긴, 그 많은 궁인 입을 어떻게 단속했겠어. 나도 소문이 돌기 시작한 바로 그 첫날부터 한나에게 소식을 들었는데. “그런데 검은 탑의 마법사가 나타났다는 게 정말인가요, 공주님?” 역시 영애들은 내게서 소문의 진위를 알아내고 싶어 했다. 하기야, 내가 그들이어도 황궁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가 묻고 싶었을 테니 나한테 저런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이해가 된다. 아, 이것 참. 간만에 또 엄마 미소가 나오려고 하잖아. 흠흠. 나는 잠시 표정 관리를 한 뒤 아기 새들처럼 나를 오매불망 바라보고 있는 영애들에게 답해 주었다. “네. 검은 탑의 마법사를 자칭하는 이가 얼마 전 아바마마를 배알했다고 해요.” “세상에!” 내 확답에 영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아니, 그런데 잠깐만요. 난 ‘검은 탑의 마법사를 자칭하는 이’라고 했지, ‘검은 탑의 마법사’라고는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정말, 정말 대단하잖아요!” “와아, 살아생전 검은 탑의 마법사의 재림을 보게 될 줄이야!” “저도 보고 싶어요, 그런 엄청난 대마법사님이라니!” 확실히 검은 탑의 마법사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전설처럼 여겨지던 존재가 아니던가. 나는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그를 거의 신화 속의 인물로만 생각했지만 원래부터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인 영애들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와, 이 아가씨들이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건 오벨리아 사대천왕들 이야기를 할 때 빼고 처음 보는 것 같네. “어쩜 좋아요. 그럼, 그럼 혹시 지금 황궁에 계신 거예요?” 그녀들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기대감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기분이 착잡해졌다. “아니요. 지금 황궁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아요.” 크흡. 이렇게 기대했다가 나중에 그 사람이 가짜인 걸 알게 되면 얼마나 크게 상심할까? 나는 얼마 전 클로드와의 만찬 시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아빠, 오늘 검은 탑의 마법사를 만나셨다는 게 진짜예요?’ 루카스와 함께 몰래 궁 밖으로 외출했던 날, 나는 귀가 후 한나에게서 검은 탑의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나는 ‘설마 진짜겠어?’ 하는 의심 반,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 반으로 클로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닿았나.’ 아마도 그때의 내 눈빛은 지금의 영애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검은 탑의 마법사라는데! 크흐, 아타나시아로서의 외로웠던 내 어린 시절을 함께한 마음의 벗이여. ‘그건 가짜다.’ 하지만 클로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은 말에 나의 환상은 와장창 깨져 버렸다. ‘네? 가짜요?’ ‘제법 흥미가 돋아 한동안은 그 웃기는 작태를 좀 더 두고 볼까 싶긴 하다만, 그래 봤자 검은 탑의 마법사를 사칭하는 놈일 뿐이니 너도 관심 두지 말아라.’ 회상 끝! 나는 그날 보았던 클로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황궁 밖 어딘가에 있을 가짜 검은 탑의 마법사를 향해 조용히 묵념했다. 응. 흥미가 생겨서 놔둔다고는 했지만 그 흥미란 게 절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닌 것 같았지. 그건 마치 발밑에서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걸 같잖게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어! “그런데 검은 탑의 마법사님은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실까요?” “어머. 그러고 보니 지금쯤 백발이 성성하고도 남으시겠네요.” “아니에요! 대마법사들은 신체 노화가 일반인들보다 느려서 젊음이 오래 유지된다고 하던걸요? 그러니 위대한 마도왕이셨던 아에테르니타스 선황께서도 그렇게 치세를 오래 이어가셨죠.” 휘익. 다시 한 번 대답을 갈구하는 눈빛이 내게로 쏘아 보내졌다. 아니, 그러니까 당신들 나중에 그 사람이 가짜인 거 알면 실망할 거라구요. 엉엉. 나는 측은함을 숨긴 채 내가 아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음. 젊은 청년의 모습이었다고 들었어요.” 올레! 영애들은 마치 계라도 탄 듯이 기뻐했다. “검은 탑의 마법사는 굉장히 자유분방한 성품이라고 서적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폐하를 배알하기 위해 황궁에 오다니. 그만큼 폐하의 위명이 높다는 이야기겠죠. 역시 대단하세요.” 제니트도 흥미로운 얼굴로 영애들의 대화에 동참했다. “저희가 검은 탑의 마법사님을 직접 뵐 수 있다면 영광이겠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겠죠. 아, 정말 아쉽네요.” 으아아! 제니트, 너마저! 나는 카이사르의 심정으로 속으로 절규했다. 검은 탑의 마법사는 진짜가 아니야! 진짜인 척하는 가짜라고! 아니, 물론 클로드가 말한 바에 의하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로드가 한 말이니까 사실이겠지, 뭐. 왜인지 근거 없는 믿음 같았지만 그럼에도 정보의 출처가 클로드라는 것만으로도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공주님.” 그리고 오늘의 다과회가 파할 무렵, 제니트가 조용히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마그리타 양, 오늘도 즐거웠어요. 다과회가 열릴 때마다 선뜻 참석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제니트가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망설이는 것이었다. 커헉. 그런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이렇게 귀여울 필요가 있는 건가? “저어. 혹시 괜찮으시면 이걸 받아주시겠어요?” 마침내 주저함을 떨치고 내게 무언가를 내밀기에 봤더니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였다. “공단 리본이에요.” 바로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얼마 전 황궁 밖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아직 둘러볼 곳이 남았던가?’ ‘잘 기억해 보세요. 가장 중요한 걸 아직 못 샀어요.’ “데뷔당트 때 전해드렸던 리본의 끝이 조금 상해 있던 게 생각나기도 하고……. 댄스홀에서 주울 때 얼룩이 져 있기에 공주님께 드리기 전에 제가 털어낸다고 털었는데도 말끔해지지 않아서 계속 마음이 쓰였거든요.” ‘이제키엘이 웬일이에요? 나오기 전부터 제가 몇 번이나 강조해 말했었는데 그걸 다 잊고.’ “그런데 마침 일전에 외출했을 때, 우연히 공주님께 어울릴 것 같은 리본을 발견했지 뭐예요.” 제니트는 손에 들고 있는 상자를 내려다보며 수줍게 웃었다. “그래서 도저히 이걸 두고는 가게를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는 동안 점차적으로 마음에 동요가 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제니트는 우연히 내게 어울리는 리본을 발견해 이것을 구입했노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날 황궁 밖의 카페에서 내가 들었던 내용은 그와 달랐다. ‘가게에 가면 저와 같이 리본을 골라 주세요. 하나는 그분께 선물로 드릴 것이니 이제키엘도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아, 하지만 정말 그리 대단한 선물은 못 되고……. 또 공주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지도 모르니 그냥 가지고 계셔주시기만 해도 기쁠 거예요.” 내가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제니트가 자신감이 다소 결여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만 동공을 흔들고 말았다. 이, 이러면 내가 미안해지는데? ======================================= [76화] 데뷔당트 때 주워줬던 리본, 심지어 얼룩이 묻은 걸 닦아주기까지 한 거였어? 그날 제니트한테 리본을 받자마자 클로드가 그걸 날려 버려서 미처 몰랐다. 그래서 클로드도 그 리본보고 더럽다고 한 거였나? 아무튼. 게다가 그걸 내내 신경 쓰고 있다가 나한테 새 리본을 선물로 주기까지 하다니! 그리고 방금 전 한 말처럼 그냥 길 가다가 우연히 마음에 드는 리본을 발견해서 산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나한테 줄 선물을 사러 외출한 거였잖아? 그날 내가 다 들었는데. 그럼 차라리 나한테 선물하려고 고심해서 고른 거라고 생색이라도 내지, 왜 저렇게 나한테 내쳐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것처럼……. 나는 왜인지 마음이 짠해져서 마주한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기 전에 상자를 받았다. “선물 정말 고마워요.” 내 말에 제니트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담겼다. “다음 다과회 때 꼭 착용하고 나올게요. 기대되네요. 마그리타 양이 직접 나를 생각하며 고른 리본이라니.” 그리고 제니트는 아까 전 호수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눈꼬리를 예쁘게 접어 웃었다. “그래주시면 더 바랄 게 없을 거예요.” *** “공주님, 친구가 생기셨군요.” 영애들을 보내고 에메랄드궁으로 들어가는 길에 필릭스가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런 그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내가 아니라 자기에게 친구가 생기기라도 한 듯 해사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친구. 친구라. 어쩐지 좀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에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뀽!” “앗, 까망이 님!” 바로 그때,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저 멀리서 까망이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까망이에게 밥을 주고 있는 듯했던 한나는 이제 포기한 듯 제자리에 서서 그런 까망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망아, 잘 놀고 있었어?” “끼잉!” 나는 한달음에 달려와 매달리는 까망이의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으며 하하 웃었다. 우리 까망이는 뭘 먹고 매일 이렇게 애교가 늘어나나? 아구. 귀엽기도 하지. 우쭈쭈쭈. 앗! 또 정전기. 요즘 날씨가 많이 건조하나? “공주님, 까망이 님은 이리 주시고 들어가서 쉬세요.” “까망이 밥 내가 주면 안 돼?” “마법사님이 까망이 님하고 자주 붙어 있지 말라고 했잖아요. 자아, 까망이 님 식사는 제가 챙겨 드릴게요.” 나도, 나도 우리 까망이 복슬복슬한 털 만지면서 맘마 챙겨 주고 싶은데! 크흑. 비록 맘마라고 하기에는 우리 까망이가 이미 너무 많이 커버리긴 했지만. 나는 얼마 전 까망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줄이라고 엄포를 놓았던 루카스를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자기 말을 안 듣는 걸 아니까 이제는 아예 릴리를 통해서 날 좌지우지하려고 한단 말이야? 우리 까망이가 비록 요즘 폭풍 성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이즈가 나날이 커지는 것 말고는 특이 사항도 없는데. “뀽뀽!” “옳지. 많이 드세요, 까망이 님.” 으으음. 그런데 까망이는 나한테서 떨어져 나온 마력이라고 했잖아. 그럼 이렇게 자라다가 나중에는 나한테 흡수돼서 사라지는 건가? 그건 싫은데……. 나는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까망이를 보다가 나중에 루카스를 보면 방법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메랄드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기회는 바로 그날 밤 찾아왔다. “루카스, 까망이가 나한테 흡수 안 되게 하는 방법 없어?” 루카스는 내 탁자 위에 있는 말린 과일을 주워 먹다가 내 물음에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대마법사, 대마법사 어릴 때부터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더니 왜. 마법 쓰기 싫어?” 크흑. 이 자식, 그렇게 말하니까 좀 가슴이 아프잖아. “그건 아닌데 나한테 흡수되면 까망이가 없어지잖아.”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대마법사의 꿈을 접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흡수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우리 예쁜 까망이가 사라진다니! 그런데 루카스는 내 말을 듣고 소파에 길게 몸을 늘이더니 이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애완동물처럼 기르고 있다고 해서 신수가 진짜 네 강아지라도 되는 것 같아?” 나는 카펫 위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던 자세 그대로 멈칫했다. “관둬. 그건 진짜 생명체도 아니고 그냥 마력의 총집합체일 뿐이니까.” 고개를 들자 무감정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루카스가 보였다. 이따금씩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아닌 듯이 느껴지게 만드는, 바로 그 삭막하고 매정한 눈빛이었다. “멀쩡한 신수를 똥강아지 취급하다보니 네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뿐이야.” 나는 가만히 루카스가 하는 말을 듣다가 이내 손끝에 닿는 것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정 주지 마. 어차피 그래 봤자 나중에는 뼈 가루 하나 안 남을…….” 퍼억! 내 손을 떠난 쿠션이 루카스의 얼굴로 날아갔다. 하지만 얄밉게도 그는 머리를 살짝 숙이는 것만으로 타격의 범위에서 간단히 벗어나 버렸다. “맞아봤자 얼마나 아프다고 그걸 피해?” 루카스는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 그대로 시선만 움직여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가만히 내 얼굴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한 채로 스트레칭 하는 데 쓰던 쿠션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쿠션은 루카스가 있는 소파의 등받이에 맞고 튕겨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허리 숙여 루카스의 앞에 떨어진 쿠션을 주우려 할 때 그가 입을 열었다. “화났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났네.” “치워.” 루카스의 손이 내가 막 주워 올린 쿠션의 끝을 붙잡아서 나는 쌀쌀맞게 말했다. “네가 왜 기분 나빠하는지 알아. 그런데 난 틀린 말 한 적 없어.” 다음 순간 귓가에 박힌 음성에 나는 빠직했다. “그래, 너 잘났어!” 나는 루카스의 손에서 홱 쿠션을 빼낸 다음 그를 향해 마구 팔을 휘둘렀다. “난 바보라서 진짜 살아 있지도 않은 마력 덩어리에 정 붙이고 오늘 사라질까 내일 사라질까 이렇게 쓸데없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왜!” 쿠션에 맞는 내내 루카스는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좀 맞아주면 어때서. 어차피 아프지도 않을 텐데.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래도 좀 돌려 말하면 어디가 덧나? 꼭 그런 식으로 재수 없게 말해야 해? 응? 정말 그게 최선이야?” 나는 쿠션으로 루카스를 마구 내려치다가 이내 제풀에 지쳐 팔을 내렸다. “이제 다했어?” “아니!” 퍽! 나는 마지막으로 루카스의 얼굴에 쿠션을 집어 던졌다. 방금 전에 미처 성공시키지 못했던 일의 연장선이었다. 툭, 쿠션이 떨어져 내리자 한껏 미간을 좁히고 있는 루카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흥. 뭐, 왜, 뭐!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나는 그를 향해 흥! 하고 콧방귀를 껴주었다. 그리고 루카스의 얼굴을 맞고 떨어진 쿠션을 다시 집어 들고 그대로 그를 지나쳐서 내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으악!” 억, 그런데 이 치사한 놈이 다리를 뻗어서 나한테 발을 걸었다! 나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인위적인 힘에 이끌려 그래도 바닥이 아닌 소파 위로 풀썩 넘어져 버렸다. “조심 좀 하시지. 왜 가만히 있는 남의 다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러시나?” 이, 이 자식. 지금 복수전이야? 내가 쿠션으로 좀 때렸다고 지금 이러는 거야? 그래놓고 마지막에 팔은 왜 잡아줘? 나는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확 고개를 들어 루카스를 찌릿 노려보았다. “이리 와.” 그러자 그런 나를 약간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던 루카스가 이내 작게 혀를 차더니 나를 불렀다. 아니, 그런데 이놈이? 내가 똥개냐? 똥개야?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그런 사람으로 보여, 내가? “볼일 있으면 네가 와.” 루카스와 내 사이의 거리가 불과 1미터도 되지 않는 것을 고려하자면 상당히 웃긴 상황이었다. 내 말에 그는 가지가지 한다는 듯이 하, 하고 소리 냈다. 하지만 결국 루카스는 오늘만 져 주겠다는 듯이 먼저 나한테 손을 뻗었다. “못생겨 가지고.” 크아아!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라 또 다른 시비였냐! 내가 다시금 포악을 떨려고 할 때, 루카스가 손으로 내 이마를 툭 치듯이 덮었다. “진짜 이걸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누가 AS 해달랬나?” 루카스가 이런 식으로 나한테 접촉하는 것에는 이제 익숙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가 내 안에 있는 마력을 정리시켜 주기 위해 이러는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방금 전의 일로 루카스에게 앙금이 남아서 그를 향해 투덜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싸워놓고 또 언제 그랬냐는 양 나한테 붙어 앉아서 보수 작업을 해주는 루카스도 웃겼고, 또 그걸 가만히 앉아서 받고 있는 나도 웃겼다. “네가 고쳐 달라고 애원해도 이제 못 해줘.”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앞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무의식중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나 한동안 멀리 떠나 있을 거야.” 루카스가 담담한 얼굴로 내게 통보했다. 제20장 잠시만 안녕 “우와! 이것 좀 보세요, 공주님!” 우리는 내 앞으로 보내져 온 선물들을 모아놓는 방에 있었다. 한나가 소란을 떠는 소리에 저 구석에서 초대장을 정리하던 릴리도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한나의 부름이 있기 전부터 이미 눈앞에 보이는 것에 동요하고 있던 참이다. “어머나. 예쁜 새네요.” 천이 걷히고 드러난 것은 하얀 새장이었다. 여러 가지 섬세한 문양을 넣어 정교하게 제작된 둥근 새장은 한눈에 봐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는데, 나를 동요하게 만든 것은 그 안에 있는 푸른 깃털의 새였다. 찌르릉. 횃대에 얌전히 앉아 있던 새가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푸드득 작게 날갯짓을 했다. 그, 그런데 기분 탓일까. 왜 이 새를 제가 어디선가 본 것만 같죠? 이 깜찍한 누란 부리 하며, 동글동글 까만 눈동자 하며, 뒤쪽으로 우아하게 뻗은 꼬리 깃털 하며. 왜인지 루카스랑 외출했을 때 새 시장에서 봤던 청조라는 새랑 엄청 엄청 똑같아 보이는데? 기, 기분 탓이겠지? 그냥 비슷해 보이는 다른 새겠지? “더군다나 선물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한나는 내 반응이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작은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매우 찜찜한 기분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고상한 금박 무늬가 박힌 종이를 펼치자 그 안에는……. [일전의 짧은 만남을 추억하며 그리움을 담아 보냅니다. -이제키엘 알피어스.] 으어어어억! 카드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러 버렸다. “바로 그 알피어스 공자예요! 이런 선물을 보낸 걸 보니 역시 데뷔당트 날 공주님께 홀딱 반한 게 틀림없어요!” ======================================= [77화] 내 마음도 모르고 한나는 흥분해서 그런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말이나 해댔다. 아냐! 이건 그런 의미가 아니야! 이제키엘은 그때 새 시장에서 봤던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그래 봤자 어차피 뒷모습밖에 못 봤을 텐데 어떻게 나인 걸 확신한 거지? 게다가 그때는 옷차림도 평소랑 달랐는데! 그럼 이 새는, 말하자면 ‘나는 네가 그날 한 일을 알고 있다!’ 뭐 그런 의미인 건가! “한나, 공주님 앞에서 말을 가려 하렴.”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공주님이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우신데 알피어스 공자라고 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겠어요?” “뭐, 물론 그건 그렇지.” 릴리마저 한나의 말에 은근슬쩍 동의하며 내심 흐뭇한 기색을 내비쳤다. 앗, 저건 간만에 보는 릴리의 엄마 미소! 예쁘게 잘 자라준 딸을 보는 듯한 그 푸근한 눈빛에 나는 엄마에게 일탈을 숨기는 딸이 된 것만 같은 기묘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크흠. 저기, 알피어스 공자가 나한테 선물을 보냈다는 건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 “공주님께서 원하신다면요.” 릴리는 선뜻 웃으며 답했지만 어째서인지 바로 그 순간 한나가 난처한 낯빛을 띠었다. 릴리와 내가 그것을 보고 수상한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급히 입을 열었다. “절대로 제가 말한 건 아니에요, 공주님. 저어, 하지만 실은 아까 전에 새장을 옮기다가 함께 있던 카드를 떨어뜨렸는데 지나가던 시녀들이 그때 카드 겉면에 있는 서명을 보았던지라…….” 제, 젠장. 그렇다면 이제키엘이 나한테 선물을 보낸 걸 다른 시녀들도 이미 안다는 의미였다. “한나, 공주님 앞으로 보내진 물건을 그렇게 조심성 없이 다루다니!”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정리 담당을 다른 아이로 바꿔야겠구나.” “아앗!” 릴리가 한나를 혼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었다. 궁인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겠네. 그럼 다음 다과회쯤에는 영애들도 이 소식을 다 알게 되겠지. 어흑.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소문이 흘러들게 되었을 때 가장 나를 곤란하게 할 복병이 누구인지를 잊고 있었다. “알피어스의 애송이가 네게 선물을 보냈다지?” 커헉.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지나가듯 흘린 물음에 그만 마시고 있던 찻물을 뿜을 뻔하고 말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얼굴을 보니 이미 궁 안에 파다한 소문이 진짜란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클로드는 손에 들고 있는 찻잔을 기울이며 싸늘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아무래도 아를란타에서 나쁜 버릇만 들어온 모양이군.” 부, 분명히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죠? 온몸에서 한기를 폴폴 날리고 있는 걸 보니 지금 여기가 햇빛 포근한 정원인지, 눈보라 날리는 설원인지 구분이 안 되는데요? 설마 지금 이제키엘한테 고작 선물 하나 받았다고 이렇게 질색하는 거야? 나는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클로드를 향해 약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음. 하지만 다른 영식들이나 영애들처럼 친교의 의미로 보낸 선물일 뿐, 다른 의미는 없으니까요.” 도서관에서 봤던 것도 그렇고, 밖에 몰래 나가서 우연히 마주쳤던 것까지 알면 정말 큰일이 나겠어. 주, 죽는 날까지 숨기자. “그 능구렁이의 아들답게 주제넘은 생각을 품은 게지.” 그런데 클로드는 끝까지 신랄했다. 그가 코웃음 치며 하는 말에 나는 또 한 번 흠칫하고 말았다. “네 데뷔당트 때 고작 한 번 함께 춤을 춤 일로 그 애송이가 착각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쿠, 쿨럭. 아니, 그 일을 왜 지금 갑자기 입에 담는 거랍니까? 벌써 반년이나 지난 일이잖아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한 말 그대로 고작 딱 한 번 같이 춤췄을 뿐이잖아? 그런데 왜 그걸로 착각을 하니, 주제넘은 생각을 품었느니, 그런 말이 나오나요? 그, 그러고 보니 이제키엘하고 춤을 출 때도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지. 역시 당신은 흰둥이 아저씨와 쌍으로 그 아들인 이제키엘도 싫어하고 있는 거였어! “게다가 감히 실수를 가장해 네 개인 서고에까지 발을 들이다니. 참으로 간 큰 놈이라고 할 수밖에.” “흐억!” 나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이야! 지금까지 계속 조용하기에 난 문지기 아저씨들이 혼나기 무서워서 숨긴 줄 알았는데! 루카스도 굳이 클로드한테 그런 걸 일러바칠 위인은 아니고, 또 나도 아무 말 안 했으니까 당연히 모를 줄 알고! 그, 그럼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내 도서관 문지기 기사들이 싹 다 한꺼번에 갈아치워진 게……! “기껏 아량을 베풀어 살려놓았더니 또 네게 그따위 간교한 수작질을 부리다니.” 클로드의 눈빛이 너무나도 살벌해서 나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이, 이러다가 내일 송장 치루는 거 아닌가요? 이거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인 것 같은데 제 착각이 아니죠? “공주님의 미모가 다이아나 님을 닮아 날이 갈수록 꽃 피듯 아름다워지시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데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필릭스가 또 눈치 없게 기름을 부어댔다. “앞으로 황실 행사에도 간간이 모습을 비추시게 되면 공주님께 반해 구애하는 영식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날 겁니다.” 그러니 그런 당연한 일로 더 이상 열 내지 말라, 뭐 그런 의미 같았다. 필릭스 나름대로는 클로드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일지도 몰랐다. 그는 마치 릴리가 그랬듯이 장성한 딸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듯한 아빠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 하지만 이건 아니야! 위험해! 도망쳐, 필릭스! “나중에는 공주님도 좋은 짝을 찾아 폐하의 품을 떠나게 되시겠지요. 설령 궁에 부마를 들인다 해도 지금처럼 폐하와 단둘이 오붓하게 지내시는 시간은 확연히 줄어들 테니까요.” 그러나 필릭스는 내 필사적인 눈짓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말을 해댔다. 어느덧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은 클로드가 더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아. 그것이 부모 된 이들의 외로운 숙명인가 봅니다. 그때가 되면 폐하께서 홀로 그 적적함을 어찌 달래실지 저는 벌써부터 걱정이…….” “필릭스.” “예?” 결국 클로드가 낮은 음성으로 필릭스를 불렀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닥쳐라.” 그 서슬 퍼런 목소리에 필릭스는 대번에 쩡하니 얼어붙어버렸다. “그리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아니, 앞으로 다과 시간에는 아예 내 앞에 얼씬도 말도록 해라.” “폐, 폐하.” “뭐 하나? 빨리 꺼지지 않고.” 끼, 끼잉. 필릭스는 뭔가 자신이 실수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엉거주춤 정원을 떠났다. 으아아, 이렇게 되면 나 혼자 한기 폴폴 날리는 클로드를 상대해야 하잖아! 으흑. 하지만 원래도 필릭스는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긴 하니까. 뭐, 뭔가 필릭스의 취급이 하찮은 것 같긴 하지만 사실인걸. 나는 필릭스를 쫓아내고 나서 더욱 저기압이 되어 있는 클로드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표정을 가다듬고 우울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결혼 같은 거, 꼭 해야 하나요? 전 싫은데.” 크흑. 필릭스의 말에 속이 상한 척하는 것도 힘들다. 그래도 좀 더 투덜거려 보자. “부마고 뭐고, 저는 그런 거 필요 없단 말이에요. 지금처럼 아빠랑 둘이 지내는 게 좋은데 꼭 결혼해야만 해요?” 그러고 나서 힐끔 시선을 움직이니, 클로드가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탁자에 놓인 찻잔으로 다시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결혼을 강제하는 제국법은 없긴 하지.” 옳거니. 입질이 오는구나! 나는 신이 나서 클로드의 말에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럼 전 결혼 안 할래요. 나이 들어서 할머니 될 때까지 아빠랑 살 거예요!” 그러고서 내가 헤헤 웃자 착각인지 주위에 감돌던 날카로운 기운이 약간 온화해졌다. “지금은 그리 말해도 나중에는 시집가고 싶다고 떼를 쓸지도 모르지.” “에이, 그럴 리가 없어요. 그때가 되어도 분명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아빠일 텐데요.” 살랑살랑 어디선가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클로드의 눈빛이 오늘 보던 것 중 가장 느슨해진 것을 발견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떠들어대는군.” 그러면서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있지만 당신 지금 기분 좋아진 거 맞지? 그렇지? 게다가 가만 보아 하니 클로드가 수상쩍었다. 아니, 그런데 이 사람……. 지금 보니 그동안 내 다과회에 영식들을 한 명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던 이유가 설마……. “알피어스의 애송이가 또 너를 귀찮게 굴면 언제든 말하도록 하여라. 두 번 다시 네게 허튼수작을 못 하도록 만들어주마.” 그, 그런 말을 듣고 잘도 당신한테 이제키엘 얘기를 하겠다! “그 상대가 다른 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요즘 어린 영식들 중에는 발칙한 것이 유독 많은 것 같으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라.” “아하하.” “대답.” “네엥.” 나는 클로드의 스산한 눈빛에 그저 식은땀을 흘리며 에헷 웃고 말았다. 거참, 선물 두 번 받았다가는 누구 한 사람 저 멀리 날려 보내고도 남겠네. 혹시 들어는 보셨습니까? 그 이름 하여 요단강이라고. 비로소 평온을 되찾은 듯 다시금 느긋이 찻잔을 기울이는 클로드를 보다가 나도 눈앞에 있는 디저트를 향해 포크를 움직였다. 크으. 내 사랑스러운 케이크들. 오늘도 몽땅 남김없이 먹어치워 주겠어. “아빠, 제가 정말 엄마를 그렇게 많이 닮았어요?” 냠냠. 나는 눈앞에 있는 치즈 케이크를 흡입하면서 지나가듯이 물었다. 방금 전 필릭스가 한 말도 있고, 릴리도 ‘다이아나 님을 갈수록 많이 닮아간다’고 내게 부쩍 많이 말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클로드의 앞에서 다이아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금기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는 그녀의 이름이나마 입 밖에 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단순히 내 착각에서 비롯된 낙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은 클로드가 나를 죽일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어떤 건방진 말을 해도, 그리고 내가 그에게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도.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달그락. 클로드가 빈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귓가에 흘러든 목소리는 따사로운 햇살의 온도를 약간 선선하게 상쇄시켜 줄 정도로 차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그는 나를 벌하지도 책하지도 않았다. “모른다. 죽은 사람의 얼굴 따위는 벌써 오래전에 다 잊었으니.” 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고개를 돌려 노란 햇빛으로 가득 물들어 있는 정원에 시선을 두었다. 파릇한 초목이 얕은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클로드의 금발도 바스러지는 햇빛 조각처럼 낮게 흩날렸다. 나는 한껏 무심한 눈빛을 한 채 내 얼굴을 외면하고 있는 클로드를 보며 그저 어렴풋이 웃어버렸다. ======================================= [78화] “아빠, 저 소원이 하나 있어요.” 하지만 어젯밤 꿈속에서 보았던 요정 언니는 변함없이 아주 예뻤는걸요. “아빠만 들어주실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누구에게나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란 것은 있게 마련이므로 나는 클로드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그냥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이걸로 다음 생일 선물을 미리 앞당겨 받아도 좋아요. 들어주실 거예요?” 초목의 빛으로 물든 눈동자 안에 마침내 다시금 내 얼굴이 담기는 것을 보며 나는 그를 향해 말갛게 웃었다. *** “그래. 이게 바로 그 소문의 새 새끼인가 보네.” 기분이 저조한 사람은 여기 또 한 명 있었다. “새 새끼가 뭐야, 새 새끼가!” 나는 그날 밤 다짜고짜 내 방에 난입해 빈정거리는 루카스를 향해 질색하며 소리 질렀다. 아니, 이 예쁜 새를 보고도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물론 내 비밀 외출을 목격해 버린 이제키엘이 줬다는 점에서 찜찜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새는 죄가 없는걸! 게다가 봐, 이 영롱한 푸른빛을! “쯧. 청조가 뭐야, 청조가. 매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쓸모가 있지. 안목도 구려서는.” 하지만 루카스는 새장 안에서 몸을 움츠리고 자고 있는 파란 새를 보며 쯧쯧 혀를 찰 뿐이었다. 크윽. 분명히 이놈의 감수성은 바짝바짝 메마르다 못해 황무지처럼 황폐해져 있을 거야! 이 귀여운 새를 보고도 할 말이 그런 것밖에 없다니! “잘 기르면 전서구 역할도 한다고 했어!” “전서구는 개뿔. 날다가 맹금류라도 만나면 한입에 꿀꺽 먹히게 생겼네.” 헉, 내 파랑새한테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 작은 동물 친구는 아껴줘야 한다고! 루카스는 다른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건방지고 얄미웠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더 뭐라고 힐난하는 대신 그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다가 나는 툭 던지듯이 말했다. “진짜 오늘 갈 거야?” “왜, 가지 말까?” 루카스가 새장에서 눈을 떼고 나한테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처럼 잠옷 차림인 나와 다르게 루카스는 평소와 다른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지난번에 나와 함께 궁 밖으로 나갔을 당시 마법으로 바꿔 입었던 옷과 비슷한 차림이었다. “아니, 나 잘 거니까 빨리 가라고.” 가지 말라고 말린다 해서 정말 안 갈 것도 아니면서 떠보기는? 나는 조금 심통이 난 채로 쌀쌀맞게 답했다. 사실 ‘꼭 지금 떠나야만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 맞았기 때문에 혼자서 괜히 더 심술이 났다. 하지만 루카스는 내 생각이 어떻든 간에 오늘 이곳을 떠날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를 자칭 세기의 대마법사로 만들어줄 마력 보충제를 찾아서! “그 세계수라는 거 찾는 데 오래 걸려?” 나는 루카스에게 슬쩍 물었다. 얼마 전 그와 다퉜던 밤에 들었던 내용에 의하면 500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다는 세계수라는 게 있다나. 그리고 그 마법 생물인 세계수의 열매는 순도 높은 마력의 결정체나 다름없어서 그걸 흡수하면 부족한 마력을 보강할 수 있단다. “뭐, 대략적인 위치는 옛날에 파악했으니까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겠지.” 루카스 이 녀석. 매일 마력이 딸린다고 투덜거리더니. 크흑. 그래도 까망이를 대신할 다른 마력 보충제를 찾아서 다행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이놈이 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마력 보충 방법이 있다고 했던 게 바로 그 세계수 열매였던 모양이다.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판타지 같은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집 앞 호수에 촉수 연꽃도 있는 판에 세상 어딘가에 그런 나무 하나 없을까 싶었다. “그럼 좀 일찍 찾으러 가지 왜 이렇게 간당간당하게 가? 열매 다 떨어지는 거 아니야?” 그 열매란 게 5년도 아니고 50년도 아니고, 무려 500년의 간격으로 나는 거라면서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떠나다니! 그, 그러다가 혹시라도 열매를 못 얻으면 또 우리 까망이를 노린다거나! 설마 그러진 않겠지? 응? 그런데 루카스는 잠시 동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뭐야, 뭐야. 왜 그러고 쳐다봐? 헉, 설마 지금 까망이를 걱정하는 내 속마음을 읽고 있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그리고 마침내 루카스가 나한테서 시선을 돌리고 툭 내뱉은 말에 나는 기분이 요상해졌다. “그러게.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닌데 좀 더 빨리 떠날걸.” 이, 이상하네. 왜 이렇게 순순히 말하는 거지? 괜히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뭐, 정 늦는다 쳐도 낙과 하나쯤은 건지겠지.” 그래도 루카스가 그동안 마력이 부족하다며 얼마나 답답해했는지 아는지라, 나는 혹여나 그가 열매를 얻지 못했을 때 품게 될 실망감이 우려되었다. 지금 루카스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낙과라도 건지면 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괜찮아. 이미 위치도 다 안다면서? 열심히 순간 이동 쓰면 안 늦을 거야.” 물론 그 세계수가 있는 곳은 세상의 끝이라 해도 좋을 만큼 아주아주 먼 곳이라 순간 이동도 여러 번에 걸쳐 써야 한다고 했고, 또 그마저도 세계수의 영역 안에 들어서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불편하다고 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가는 데라고 했잖아. 그럼 그 열매라는 거 따가려는 사람도 없을 테고. 그러니까 후딱 다녀와.” 그래도 그동안 미운 정이 든 게 있어서 그런지 막상 루카스가 떠난다고 하니까 섭섭했다. 예전에는 마냥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래. 슬슬 가야겠네.” 루카스는 내 말을 듣고 픽 웃더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마에 온기가 닿는 순간, 나는 루카스가 떠나기 전 내 마지막 마력 보수 작업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짜식, 그래도 나름대로 세심한 면이 있단 말이……. “다녀왔을 때 쓸데없는 마력 많이 쌓여 있으면 까망이 확 잡아먹어버린다.” 느, 네? “그러니까 웬만하면 까망이 말고 저 새 새끼랑 놀아. 그러라고 눈앞에서 안 치워 버린 거니까.” 아, 아니. 지금 분위기 나름대로 훈훈했는데 왜 갑자기 또 우리 까망이 가지고 협박이래요? 그리고 내 파랑새의 행방을 왜 네가 마음대로 결정하냐! “야, 이…….” “간다.” 하지만 내가 입을 막 떼기 무섭게 루카스는 내 눈앞에서 뿅 하고 사라져 버렸다. “허.” 이 자식, 사람이 무슨 말을 할 틈도 안 주고 이렇게 갑자기 가버리다니? 나는 루카스의 빈자리를 보며 허탈하게 손을 들었다.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온기가 갑자기 사라진 탓인지 괜스레 이마가 시렸다. 그 세계수에 갔다가 오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으니 앞으로 대략 몇 달은 얼굴을 못 보는 건가? “짜식. 대마법사의 꿈을 꼭 이루고 와라.” 나는 서운한 마음을 속으로 눌러버리며 루카스의 원대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빌어주었다. 어쨌든 이제 한동안은 안녕이구나.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그날 밤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 루카스가 떠난 지 보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은 미처 몰랐는데 루카스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평소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던 놈 때문에 나는 창문만 덜컹거려도 루카스가 온 줄 알고 깜짝깜짝 놀랐다. “마법사님이 없어서 많이 적적하신가 봐요.” “그래도 연구 자료를 위해 마법 생물을 채집하러 가신 것이니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대외적으로 루카스는 검은 탑에서 진행 중인 연구를 위해 마법 생물을 찾으러 떠난 것으로 공표되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참 주도면밀하게 장기 출장의 이유를 만들어놓고 갔구나 싶어 내심 혀를 찼다. 아니, 그래도 이제는 그 이상한 사술로 사람들 기억을 조작한다거나 하지는 않으니 기특하게 생각해야 하나? “그래도 공주님의 또 다른 친구인 제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 자, 공주님과 함께 공부를 하려고 저도 책을 가져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심 내가 적적해하는 걸 알았는지 릴리와 필릭스가 나를 위로했다. 특히 필릭스는 간만에 학구열을 불태우며 나를 공부방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크흑. 하지만 난 지금 별로 공부하고 싶지 않은데. “크응.” 그때 부드러운 털이 내 손에 감겨 와서 고개를 내리니 동전 같은 동그란 금색 눈이 똘망똘망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 까망이 밥 다 먹었어?” 나는 아이를 어르듯 까망이를 우쭈쭈하며 말했다. “필릭스, 난 좀 이따 들어갈래.” “오늘도요?” 물론 루카스가 까망이랑 놀 바에는 청조랑 놀라고 했지만 혹시라도 날아갈까 봐 새장 문을 열 수도 없는데 도대체 뭘 하고 놀라는 말이야? 내가 얼마 전 ‘파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청조는 물론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예쁘고 깜찍한 새였지만 관상만 하는 건 이제 심심했다. 그래서 나는 루카스가 떠나고 난 후 오히려 까망이와 더 많이 붙어 있게 되었다. “까망이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들어갈게. 응?” 역시나 치밀한 루카스가 릴리와 필릭스에게까지 당부하고 간 탓인지 그들은 까망이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뀨우?” 나는 까망이와 함께 초롱초롱 눈빛 공격을 보냈다. 결국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가 까망이와 조금 더 어울려 노는 것을 묵인했다. 하지만 뭐, 괜찮지 않을까? 내가 까망이 때문에 마력이 불안정해져서 위험했던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고, 그 후로는 별다른 일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루카스가 돌아오면 다시 보수 작업을 해주겠지, 뭐. “금방 들어오셔야 해요.” “제가 공주님 곁에 있을 걱정 마십시오.” “오늘도 부탁드려요, 로베인 경.” 나와 까망이는 릴리와 필릭스가 오늘도 신혼부부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 것을 약간 짜게 식은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진짜 저러다가 둘이 결혼하는 거 아니야? “필릭스도 들어가 봐도 돼.” “아닙니다. 이제 마법사님도 없는데 공주님의 또 다른 친구인 제가 옆에 꼭 붙어 있어야지요.” 그, 그렇습니까? 아니, 그런데 지금 필요 이상으로 기합이 들어간 것 같은데요. “까망아, 우리 필릭스랑 같이 저쪽으로 산책 가자.” “뀽!” 하는 수 없지. 그럼 필릭스도 숙녀들의 산책에 끼워주는 수밖에. 나는 내 다리에 애교스럽게 머리를 비비는 까망이를 쓰다듬으며 밝게 웃었다. “자, 공주님 가시죠.” 이때만 해도 나는 몰랐다. 루카스의 경고를 무시한 채 내가 선택한 그 무수히 많은 나날이 결국은 얼마나 큰 후회로 남아 내게 상처를 남길지. 그러니 이후 벌어진 일은 전부 내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모두 잘 지냈죠?” 나는 오랜만에 에메랄드궁으로 손님들을 초대했다. 물론 그 손님들은 전부터 내 다과회에 초대받았던 영애들로, 이번에도 영식들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클로드가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가 남자애들과 오순도순 어울리는 꼴을 못 보겠다는데. ======================================= [79화] 크, 크흠. 아니, 물론 클로드가 직접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고. “공주님, 오늘도 너무 아름다우세요!” 앗, 부끄럽게. 영애들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찬양해 줬다. 그래서 나도 그녀들에게 웃는 낯으로 적당히 칭찬을 돌려주었다. 음. 하지만 그렇다 해서 빈말 한 건 아니라고. 영애들은 정말 뭘 해도 귀엽고 예뻤으니까. 아앗. 안 돼. 가라앉아라, 엄마 미소! 나는 영애들을 볼 때마다 자꾸만 주책없이 튀어나오는 푸근한 미소를 애써 속으로 눌러 담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마그리타 양도 반가워요.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나는 아까부터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 내 머리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짙은 푸른색의 리본. 부드러운 감촉의 공단 리본은 지난번 제니트가 내게 주었던 것으로, 하나로 모아 묶은 오늘의 내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오늘 모임이 있기 전 모처럼 릴리가 솜씨를 부려 주었지. 엣헴. “오늘은 화원으로 가요. 노란 장미가 아주 예쁘게 피었어요.” 보는 눈들이 있었기 때문에 따로 리본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제니트에게 고마움의 의미를 담아 생긋 웃어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도 서서히 밝은 미소가 번져 올랐다. “네, 공주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나는 왜인지 쑥스러운 기분으로 기쁨 어린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뒤로한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말인데요, 축제가 열리면 같이 구경 가지 않으실래요?” “아앗, 그러고 보니 폐하의 탄신일 후에 건국제가 있었죠.” 오늘도 영애들과 보내는 시간은 꽤 즐거웠다. 그녀들은 앞으로 넉 달쯤 남은 축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공주님께서도 이번 건국제부터는 참가하시겠네요. 정말 기대돼요.” 과연 그 말처럼 데뷔당트를 마친 이번 해부터는 나도 오벨리아의 공식적인 행사 등에 모습을 드러내야만 했다. 어흑, 생각했더니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건국제 같은 건 데뷔당트랑 비교할 수조차 없이 큰 행사잖아. 그런 걸 어떻게 한다지? 물론 난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클로드 옆에 찰싹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고 릴리랑 필릭스한테 들었지만. “공주님도 축제에 가시나요?” 그때 제니트가 웬일로 다른 영애들처럼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내게 물어왔다. 헉, 크리티컬! 왜 이렇게 귀여운 표정을 하고 물어보는 거야! “잘 모르겠어요.” 으윽, 물론 난 가고 싶지만 과연 클로드가 허락해 줄지. 다른 영애들 집에 초대받아 가는 것도 위험하다고 못 가게 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아. 실은 전 이번 축제 때 겨우 참가를 허락받은 참이라 공주님도 함께 가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머. 그러고 보니 마그리타 양은 몸이 약해서 어릴 때부터 거의 저택에서만 지냈다고 했죠?” 제니트의 말에 다른 영애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제니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약간 흐리게 웃는 얼굴로 ‘맞아요’라고 대답했다. 아이구. 저거 보나마나 흰둥이 양반이 생각해 낸 핑계구만. 보석안을 감추는 마법의 지속 시간도 있는데다 또 황실의 피를 이은 제니트를 밖으로 함부로 내돌릴 수가 없으니까 저 따위 핑계를 대고 애를 집 안에만 꽁꽁 숨겨놓은 거다.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내용을 다시금 상기하는 동안 나는 흰둥이 아저씨를 향한 새삼스러운 반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양반 얼굴 본 지도 꽤 되었는데 요즘 뭐 하는지 몰라? 쓰읍. 그래도 지난번 외출도 그렇고 이번 축제에 구경 가는 것도 허락해 준 걸 보면 이제는 제니트를 예전보다 좀 자유롭게 풀어주기로 마음이라도 먹은 건가. “응? 그런데 저게 뭐죠?” 그때, 옆에서 머핀을 먹던 백합 소녀가 갑자기 어딘가를 보며 의문을 표했다. 그녀를 따라 나를 포함한 모두가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까 왜인지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뀨앙!” 헉! 이 익숙한 소리와 형체는! “꺄악!” “엄마야, 저게 도대체 뭐예요?” “마수다! 마수가 나타났어요!” 아, 아냣! 저건 마수가 아니라 우리 까망이라고! 하지만 처음 보는 까망이에 놀란 영애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꺅꺅 소리 지르며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시작했다. “공주님! 어서 피하세요!” “자, 잠깐만! 이 아이는 마수가 아니에요!” 제니트도 나한테 달려와서 급박하게 내 팔을 잡아끌었다. 으앙! 그러니까 우리 까망이는 마수가 아니라니까요! “까망아!” 나는 영애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니트의 손을 놓고 내게 달려오고 있는 까망이에게 다가갔다. 그런 나를 보고 제니트가 두 눈을 크게 뜨는가 싶었다. 다른 영애들은 이미 저쪽에 있는 나무 뒤로 도망간 지 오래였다. 앗! 필릭스의 등 뒤로 숨은 영애들도 있잖아! 나는 나 못지않게 당황한 필릭스가 자신의 등 뒤로 매달린 영애들을 향해 눈동자를 마구 흔드는 것을 보았다. “뀽뀽!” “앗! 공주님!” 까망이가 짧은 다리로 폴짝 뛰어 나한테 달려들었다. 뒤에서 단말마의 외침이 들렸지만 곧장 내 얼굴을 핥기 시작하는 까망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괜찮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꺅! 공주님이 공격당하셨어요!” 아니라고! 까망이가 마수면 지금처럼 필릭스가 당신들한테 붙들려서 가만히 서 있겠냐구요? “그래, 그래. 우리 까망이 착하지?” “꾸웅!” 악, 이놈의 정전기! 나는 아무래도 까망이를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후우 숨을 내뱉은 뒤 외쳤다. “까망이, 앉아!” 끼잉. 그러자 잠시 깨갱하는가 싶던 까망이가 시무룩하게 나한테서 떨어져 잔디 위에 몸을 앉혔다. 어흑. 루카스가 예전부터 틈날 때마다 까망이한테 앉아! 기다려!를 가르친 보람이 있네. 평소에 까망이랑 놀 때는 안 쓰는 거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라도 까망이를 멈추게 해야 했다. “그래. 착해요, 우리 까망이.” 나는 얌전히 배를 깔고 앉은 까망이의 복슬복슬한 까만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그런데 후원에서 놀고 있어야 할 까망이가 왜 갑자기 화원에 난입한 거지? 대답은 헐레벌떡 까망이의 뒤를 쫓아온 한나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죄송해요, 공주님! 방금 전 새로 가져다드린 초콜릿 케이크의 냄새를 맡았는지 까망이 님이 갑자기…….” 그러니까 방금 전 우리들이 먹을 초콜릿 케이크를 가져다준 궁인에게서 냄새를 맡고 그걸 찾아 까망이가 여기까지 뛰어왔다, 이 말이었다. 어이구, 우리 까망이. 냄새 한번 잘 맡지요. “고, 공주님? 그건 대체?” 앗! 내 뒤에 있는 제니트를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니트는 까망이가 나를 덮치는 순간 나를 구하기 위해 뛰어왔던 듯, 내 바로 뒤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으와앙! 이 많은 영애 중 나를 구하겠다고 나선 유일한 사람이 제니트라니! 이건 좀 많이 감동이다. 제니트도 다른 영애들처럼 까망이가 무서웠을 텐데! “으응. 제 반려동물이에요.” 저, 정확히 말하면 신수지만 말이지. 물론 우리 까망이는 어릴 때와 다름없이 쏘 러블리 큐트했지만 나날이 덩치가 커지다가 지금은 거의 내 신장의 절반 이상까지 자라 있었다. “애교도 많고 순한 아이랍니다.” 하하.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까망이를 두둔했다. “그런가요. 공주님께서 기르시는 애완동물이군요.” 제니트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또 가슴이 조금 찡해졌다. 으엉. 오늘 당신이 보여준 용기를 잊지 않겠어요! 방금 전에 제니트가 빨리 피하라며 내 팔을 잡아 끌 때는 꽤나 걸크러쉬였다고! “이렇게 보니 정말 착하고 순해 보이네요.” 헉. 게다가 결정적으로 제니트는 우리 까망이의 참모습을 봐주었다. 이, 이럴 수가. 이래서 누군가가 자기 반려 동물을 같이 예뻐해 주면 마음의 문이 활짝 오픈된다고 했던 건가? 하긴. 작은 동물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은 없으니까! “실례가 아니라면 저도 한번 쓰다듬어 봐도 될까요?” 제니트는 역시 용감했다. “그럼요.” 나는 한 사람이나마 우리 까망이의 깜찍함을 알아봐 주었다는 것에 감동했다. 까망이는 여전히 얌전하게 두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제니트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까망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꾸응.” 까망이는 제니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섬섬옥수가 까망이의 까만 털을 살살 어루만지는 광경을 또 엄마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았다. 오구오구, 우리 까망이. 여기까지 온 김에 간식이나 줄까. 나와 제니트의 모습을 본 영애들이 저 멀리서 주춤주춤 다가왔다. 제니트는 이제 완전히 긴장을 푼 듯 방금 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까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훈훈하게 보다가 나도 까망이에게 손을 뻗었다. 파직!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까망이에게 손이 닿는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통증이 순식간에 내 손을 타고 심장에까지 흘러들어갔다. 속에서부터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뜨거운 용암이 배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비로소 동그란 금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는 구역질을 참지 못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욱!” 헉.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이 익숙한 느낌은 설마……. 투두둑. 푸릇한 잔디 위로 붉은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옆에 있던 제니트가 나를 향해 소리 질렀다. “공주님!” 울컥. 또 한 번 입 밖으로 왈칵 피가 토해져 나왔다. 그녀의 경악 어린 외침을 뒤로한 채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까망이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파지직! “앗!” 제니트의 손이 내게 닿기 무섭게 눈앞에 새하얀 빛이 번개처럼 작렬했다. 퍼엉, 퍼엉. 내 안에서인지, 밖에서인지 수십 수백 개의 무언가가 작은 폭죽처럼 불규칙하게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저 멀리서 필릭스의 경악 어린 외침이 들렸다. 나는 주위에 가득 퍼져 나간 새하얀 빛이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제니트는 내게 손을 댄 직후 튕겨나가 저 멀리서 쓰러져 있었다. 파직! 퍼엉! 지금 내게 벌어진 일은 어릴 때와 비슷했지만 실상 완전히 달랐다. 나는 사정없이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까만 몸 위에서 손가락 끝을 아주 살짝만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까망이의 새까만 털은 지금도 내가 쏟아내고 있는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주위가 온통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미처 입을 열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고통이 밀려와서 결국 나는 얼마 못 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순식간에 짙은 어둠이 찾아들었다. ======================================= [80화] 제21장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을 깨우는 방법 마치 깊은 겨울잠을 자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데 반해 머릿속은 스스로조차 놀라울 정도로 맑았다. 몸은 잠들어 있어도 의식은 깨어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흠. 그럼 이건 자각몽이라도 되나?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금발인 여자의 뒷모습, 어딘가 익숙한걸? 그러고 보니 어릴 때 피를 토하고 기절한 후에 보게 된 것도 이런 거였지. 그때는 클로드가 나를 강제로 재우고 다이아나의 꿈을 꾸게 해줬었는데, 그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아, 그러고 보니 두 번이나 이런 일을 겪다니. 으흑. 클로드가 또 까망이를 죽이려고 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네. 물론 까망이보다는 내 상태를 더 걱정해야 할 테지만 지금 이게 꿈속이라 그런지 어쩐지 현실의 나는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일로 까망이의 목숨을 노릴 건 클로드뿐만이 아니잖아! 루카스가 돌아오면 분명히 또 까망이를 잡아먹는다 어쩐다 하겠지? -들어…… 거예요?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이제 나는 어쩐다지. 지난번에는 루카스가 뿅 하고 나타나서 살려줬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가사 상태로 버텨야 하는 걸까. 으앙! 모르겠어요, 선생님! 게다가 기껏 루카스가 충고도 해줬는데 이게 뭐야. 어릴 때 이후로 한참 동안이나 아무 문제도 없어서 설마 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었나 봐. 지금쯤 밖에서 클로드랑 다른 사람들도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어떡해. 으앙, 난 바보야! 바보! 이런 똥멍청이! -아타나시아. 으, 으엥? 나는 눈앞에 지나가는 영상을 설렁설렁 보며 자학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헉. 그리고 급히 숨을 들이켰다. -14번째 생일도, 그리고 오늘 데뷔당트도 모두 축하한다. 아, 아니? 이게 뭐죠? 내 요정 언니, 다이아나 님이 나오는 꿈이 아니었어요? 난 평소에 보던 그 꿈들인 줄 알고 다른 데 정신 팔고 있었는데! 그런데 왜 눈앞에 다이아나가 아닌 내가 있는 거야! 왜! 나는 ‘데뷔당트 날의 나’로 보이는 사람이 클로드를 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내가 잠깐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곧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헐. 허얼. 내가 저런 얼굴로 웃었구나. 왠지 다른 사람 시각으로 보니까 좀 충격적이야. 어라? 그럼 이건 나에 관한 클로드의 기억인 건가? 내가 당황하는 사이 영상이 바뀌었다. -필릭스가 제일 적합하지 않을까요? 아빠 생각은 어떠세요? 이번에는 내가 클로드를 놀리기 위해 내 데뷔당트 에스코트를 필릭스에게 맡기겠노라 말했던 때의 일이었다. 이, 이렇게 보니까 나 좀 소악마 같잖아. 이, 이런? 나는 넋을 놓은 채 눈앞에 휙휙 지나가는 영상들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장면들은 최근의 일에서 과거의 일로 점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은 참으로 일관성 있게도 모두 나였다. 저녁 식사 시간에 양 볼이 빵빵하게 무언가를 먹고 있는 나, 뜨거운 차를 호호 불며 마시는 나, 같이 산책을 하다가 발을 삐끗해서 넘어질 뻔한 나, 그리고 무언가에 심통이 났는지 입술을 삐죽이며 클로드를 흘겨보는 나……. 이렇게 보니까 참 기분이 이상하네. 꼭 주마등 같잖아? 헉. 그럼 설마 나 이제 곧 죽는 건가? -아빠가 최고야! 바로 그때, 클로드에게 보물 창고 선물을 받고 감동받아 볼 키스를 날리는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제, 제기랄. 아까부터 내 흑역사도 같이 재생시키지 말란 말이야! 으아앙! -아빠, 선물이에요. 이제 시간은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 과거로 흘러내려갔다. 나는 새하얀 꽃밭에 둘러싸여 클로드에게 화관을 내밀고 있었다. 아아, 맞아. 그러고 보니 저런 때도 있었던가. 저게 몇 살 때더라? 8살? 9살? 기억이 좀 가물가물했다. 와, 그런데 나 저렇게 방긋 웃고 있는 걸 보니까 한 귀여움 하잖아? 크흑. 역시 다이아나 언니를 닮아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어린 내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때의 모습이 재생되어서 나는 금세 숙연해지고 말았다. 아, 진짜 클로드랑 루카스를 볼 면목이 없다……. 생각할수록 나 진짜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한 것 같아. 진작 루카스 말 듣고 까망이랑 거리 좀 둘걸. 밖에는 또 나 때문에 난리가 났을 텐데. 그런데 이거, 언제 끝나는 거지? 지금까지도 벌써 한참 본 것 같은데. 어릴 때로 갈수록 내 부끄러운 흑역사가 점점 더 많이 튀어나와서 너무나 괴롭다. 고통스럽다. 어흐흑. 게다가 왠지 이 영상이 끝나야 내가 깨어날 수 있을 것 같고. -언제부터 내 성에 버러지가 살았지? 마침내 이 꿈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스가 잔뜩 들어간 치맛자락이 발돋움하는 움직임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금빛 머리카락에 묶인 것은 내가 제니트에게 선물 받은 것보다 연한색의 푸른 리본이었다. 입을 벌려 천사상의 엉덩이를 깨물던 아이가 낯선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과거로 올수록 오래된 사진처럼 점차적으로 뜨문뜨문 흐려지던 영상이었으나, 이 장면만큼은 과거의 모든 기억 중 가장 선명한 색채를 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의 어린 내가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광경을 기이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오색빛깔로 빛나는 보석안이 두 눈에 박혀 들 것처럼 강렬했다. 그리고 마침내 암전. 꿈이 끝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아타나시아로서 클로드를 처음 만났던 그 최초의 기억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가슴이 급속도로 허전해져 왔다. 마치 속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는 없어 답답하고 그저 조금은 서글픈 그런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내가 소중히 여겼던 무언가를 지금 막 이 손에서 빼앗겨 버린 느낌이야. 마치 모래알이 손에서 빠져나가듯이, 나조차 눈치채지 못한 새 너무나 조용하게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그런 감상도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늪에 빠진 것처럼 무겁던 몸이 조금씩 수면 위로 끌려 올라가듯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날 시간인가 보다. “공주님!”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곳은 없고요?” 막 잠에서 깨어난 나를 붙잡고 릴리가 울면서 물었다. 으어, 난 릴리의 눈물에 약한데! “아, 세상에. 하늘이 도우셨어요. 전 이번에야말로 공주님이 잘못되시는 줄 알고…….” 나는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그저 고개만 저어 보였다. 그러자 내 상태를 알았는지 릴리가 허둥지둥 탁자 위에 있는 물병에서 물을 따라주었다. “나 얼마나 누워 있었어?” 억. 내 목소리 왜 이래. 꼭 두꺼비 같잖아. 모르긴 몰라도 엄청 오래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보름이 지났습니다.” 대답은 울먹이는 릴리 대신 필릭스가 해주었다. 오잉? 생각보다 얼마 안 됐잖아? 지난번에는 40일이 넘게 누워 있지 않았었나? 난 이번이 지난번보다 심각한 상태인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던 걸까? “또 루카스가 치료해 준 거야?” 나는 이불에 푹 파묻힌 채로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눈치챘다. “아빠는?”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는 내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여야 할 사람이 없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서서히 고개를 든 불안감이 심장 어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재차 묻고 나서야 필릭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 “공주님!” 나는 두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방문을 나서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근 보름 동안 의식이 없었다는 내 몸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님, 제발요! 이러시면 안 돼요. 제발 침대로 돌아가세요.” 릴리가 또 울먹이며 내 팔을 잡았지만 나는 평소답지 않게 그녀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클로드를 찾아가야만 했다. 지금 바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그래서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폐하께서는 보름 전 쓰러지신 뒤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다 거짓말이지? ‘폭주한 마력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없어서, 하지만 그대로 시간을 허비했다가는 공주님을 잃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래서 폐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이 목숨을 걸었다니. 그리고 결국은 나 대신 죽을 고비를 넘겼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라 내 눈으로 직접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제가 모시겠습니다.” 내가 릴리의 손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방문을 향해 걷자,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필릭스가 나를 안아 들었다. 그때가 되어서는 릴리도 나를 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나는 필릭스에게 안긴 채로 클로드의 침소까지 이동했다. 마침내 평소 보아오던 거대한 문 앞에 내려섰을 때, 필릭스가 대신 문고리를 잡아 밀쳐 주며 말했다. “공주님께서 무사히 깨어난 것을 보신다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셨을 겁니다.” 그 후로 그는 무언가를 내게 더 말했으나 나는 그저 홀린 것처럼 눈앞에 열려진 문을 향해 또다시 비척비척 걸어들어 갔다. 클로드의 침소는 조용했다. 여느 때의 이곳이 늘 그랬듯이. 다만 언제나 소파에서 쪽잠을 자던 클로드가 커다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것만이 달랐다. “아빠.” 그 모습이 너무 이상했다. 왜 이 사람은 이런 편안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거지? 마치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아빠.” 나는 클로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얀 이불보 위에 흩어진 금빛 머리카락도, 잠들어 있을 때에는 완전히 힘을 풀고 있는 얼굴도, 이불 위에 놓인 단정한 손도 내가 알던 그의 것이 맞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야윈 얼굴이나 바짝 마른 입술이 그의 상태가 위중함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몇 번을 불러도 눈을 뜨지 않았다. 갑자기 턱 숨이 막혔다. 이게 뭐야. 이런 게 어디 있어. 당신이 뭔데 나를 구하고 대신 이러고 누워 있어? 내가 언제 날 살리고 대신 죽어달라고 했어? 갑자기 의식이 없는 동안 꾸었던 꿈이 생각나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바보같이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주마등 같던 기억은 분명 내 것이 아니었는데. 그럼 그건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의 꿈이었을까? 어쩌다가 그가 꾸는 꿈이 나한테까지 흘러든 것뿐이었을까? “일어나요.” 이런 건 싫었다. “아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아빠, 일어나.” 나는 클로드의 손을 붙잡고 그저 그의 이름만 계속 불러댔다. 방 안이 너무 조용해서 숨이 막혔다. 무거운 침묵이 위에서부터 머리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클로드의 옆에 머리를 숙이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움찔. 손끝에 움직임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으나 곧 다시금 내가 잡고 있는 클로드의 손이 꿈틀 미동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느덧 가늘게 떠진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잡듯 두어 번 떠 깜빡거리더니 이윽고 나를 향해 미끄러지는 것이 보였다. “아, 아빠.” 나는 침대에 반쯤 기대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다시 그를 불렀다. 아, 그럴 줄 알았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고작 이런 일로 죽을 리가. “너는…….” 그리고 마침내 나를 두 눈에 완전히 담아낸 클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어 작은 목소리를 흘려보낸 순간. “도대체 누구지?” 나는 머리끝에서부터 찬물을 뒤집어 쓴 느낌을 받으며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 [81화] 제22장 이 시점에 리셋이라니? 이게 웬 말이랍니까! 클로드가 보름 만에 눈을 떴다. 그 엄청난 소식에 당연하게도 황성은 발칵 뒤집어졌다. 물론 황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만 아는 크나큰 비밀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다친 것까지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오벨리아의 황제와 단 하나뿐인 후계자인 공주까지 마력 폭발로 함께 상해를 입은 것은 앞으로의 대륙 정세에도 영향을 미칠 만한 실로 엄청난 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 당시 내 다과회에 초대받았던 영애들도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애쓴다 한들 그 일을 완전히 쉬쉬하며 묻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보름 후 나와 클로드 모두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경사도 보통 경사가 아니었다. “공주님, 왜 또 일어나 계세요?”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게 벌어진 이 모든 일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된다고 했죠?” 앗, 들켰다! 나는 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릴리를 마주한 채 잠깐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제, 제길. 오늘은 웬일로 문밖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드디어 탈주에 성공하나 했는데! 하지만 내가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 하필이면 릴리가 신의 타이밍으로 문을 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보며 엄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푹 쉬셔야 낫는다니까요. 자, 어서 침대로 가세요.” “아빠는?”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그렇잖아도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직접 나가서 확인하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그럼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 물음에 릴리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를 보는 그녀의 표정은 쉽게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식으로 클로드의 상태를 물은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곧 능숙하게 자신이 곤혹감을 감추며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침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세요. 자, 그러니 공주님도 어서 누우세요.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쾌차하시죠.” 그리고 내 질문과 마찬가지로 릴리의 답변 역시 지난 일주일간 내가 매일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내가 몇 번을 더 묻는다 해도 돌아올 대답 역시 바뀌지 않을 확률이 컸다. 그래서 나는 릴리의 손길에 못 이긴 척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금방 따뜻한 차를 가져다 드릴게요. 혹시 오한이 드시거나 하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알았어.” 그녀는 내가 누운 자리를 꼼꼼히 살펴 준 뒤에야 다시 방을 나갔다. 지난번 다과회 때 내가 쓰러졌다가 깨어난 이후로 릴리는 전보다도 더 나를 과보호했다. 물론 나도 내 상태가 제법 위중했다던 이야기는 들었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주일 내내 사람을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도롱이 벌레처럼 침대에서 이불만 둘둘 감고 있게 만들다니. 난 이제 그렇게 아프지도 않은데. 게다가 아프기로 치면 나보다는 클로드가 더……. “…….” 스륵. 나는 잠깐 동안 가만히 있다가 덮고 있던 이불을 코밑까지 바싹 끌어올렸다. 사실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한 번도 클로드를 만나지 못했다. 아무리 내가 그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도 릴리와 필릭스 둘 다 그런 나를 만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그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너는 도대체 누구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사람이 나한테 뭐라고 한 거지?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긴,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심 멘붕이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날 보는 클로드의 눈이 한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너무나도 차가웠기 때문이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나? 크윽.” 그런데 그는 다시 한 번 똑같은 것을 내게 물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클로드는 침대에서 상체를 반쯤 들어 올리다 말고 돌연 가슴을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그 바람에 나는 방금 전 그가 내뱉은 말을 잠깐 잊고 말았다. “아, 안 돼요! 갑자기 그렇게 일어나시면.” 나는 얼른 그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병색이 완연한 주제에 앞뒤 안 보고 무작정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사람이! 바로 그 순간 클로드의 눈동자가 자신의 팔에 닿은 내 손에 미끄러졌다. 곧 그의 눈매가 한차례 꿈틀거린다 싶더니. “필릭스!” 클로드가 필릭스를 불렀다. 아, 맞아! 클로드가 눈을 떴으니 밖에 있는 필릭스랑 릴리를 불렀어야 하는 건데! 그리고 궁의도 오라고 해야지. 클로드가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한 위화감이 드는 게……. 잠깐. 그러고 보니 헛소리도 하지 않았어? 방금 전에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잖아. “폐하?” 과연 평소에 클로드의 작은 부름에도 곧장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필릭스다웠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보름 만에 눈을 뜬 클로드를 보고 크게 놀란 것 같았다. 하기야 나를 침소 안에 들여보내기 전까지만 해도 클로드가 의식불명이라며 한껏 침통해져 있던 그가 아니었던가. “폐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필릭스가 곧 감격한 표정으로 클로드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크흠…….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는 클로드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와 나처럼 그 옆에 무릎을 꿇고 매달렸다. 그는 당장에라도 눈물 바람을 할 것처럼 울먹울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릴리도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가렸다. “세상에, 눈을 뜨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뭐지? 꼭 내가 십 년은 자다 깬 것 같은 반응이구나.” 반면 클로드는 별 해괴한 놈을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말을 듣고 필릭스는 이 시점에 농담이 나오냐는 듯이 클로드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필릭스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짐짓 미간을 좁히는 클로드를 보며 점차적으로 불길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얼굴이 이상하군. 하룻밤 새 왜 이렇게 폭삭 늙었지?” “너무하십니다! 제가 누구 걱정을 하느라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하루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의식을 잃으신 지 벌써 보름이 지난걸요.” “뭐?” 그 말에 클로드는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그는 지금 필릭스가 간이 부어서 자신을 상대로 농담 따먹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머리가 돌아서 미친 소리를 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된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필릭스는 진지했고, 심지어는 그 뒤에 서 있는 릴리마저 눈물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만 클로드만이 진심으로 지금 이 상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그런 그의 얼굴을 숨을 죽인 채 바라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속을 갉작갉작 긁으며 등허리를 타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마치 필릭스의 속을 꿰뚫어보려는 듯 그의 얼굴을 직시하며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 헛소리는 나중에 다시 듣기로 하고.” 하지만 울먹이는 필릭스에게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클로드는 곧 쯧 혀를 차며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옆에 있던 나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내 침소에 함부로 다른 사람을 들여도 좋다고 했나.” 곧 그의 서늘한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폐하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필릭스는 그제야 클로드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클로드의 시선을 따라 나를 시야에 담은 직후 급히 사죄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아마도 그는 방금 전 클로드가 한 말을 ‘내가 의식도 없이 누워 있는 걸 보면 아타나시아가 걱정할 게 분명한데 왜 내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오게 했냐’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클로드의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는 심해 끝까지 꽁꽁 얼어붙은 빙산처럼 지독히도 차디찼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그때까지도 클로드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무의식중에 주춤 뒤로 물리고 말았다. “넌 뭐지? 암살자라면 이 방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당장에 그 몸이 썰려 나갔을 텐데.” 아마도 지금의 내 표정은 방금 전 클로드가 지었던 표정과 비슷할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저 바보처럼 마주할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 아니. 애초에 이 사람이 눈을 뜨고 나서 나랑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라도 찍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장르가 너무 다르지 않나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반응의 범주를 넘은 것 같은데? “누구냐? 저 새파랗게 어린 계집을 내 침소에 들여보낸 게.” 그리고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필릭스와 릴리 역시 두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몽베르크의 늙은 너구리냐? 아니면 라헬의 미친놈? 누군지는 몰라도 제대로 돌았군. 어느 쓰레기인지 와서 솔직히 이실직고하라고 해라. 그럼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그 식솔들만큼은 단두대형으로 그쳐 줄 테니.” 그러는 동안에도 클로드는 계속해서 신랄하게 말했다.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스산하게 비소하는 그를 향해, 필릭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묻나? 내 앞에 있는 저 계집 말이다.” 클로드가 턱짓으로 가리킨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나’였다. “그, 그게, 무슨, 설마 지금 공주님을 말씀하신 겁니까?” “공주? 대관절 어디의 공주이기에 겁도 없이 내 침소에 기어들어온 거지?” 그 순간 클로드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어버렸다. “타국의 공주라 해서 짐이 죽이지 못하리라 생각하나?” 놀랍게도 그는 정말 나를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너는 도대체 누구지?’ 처음 눈을 때 그가 나를 향해 읊조렸던 말이 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끊임없이 되풀이되기 시작했다. “폐하, 설마 공주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시겠습니까?” “너는 저 계집의 시녀인가?” 심지어 그는 나뿐만 아니라 릴리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했다. 경악해서 클로드에게 물었던 릴리도 아연실색한 얼굴로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필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폐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폐하의 하나뿐인 혈육이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지금 막 눈을 뜨신 탓에 폐하의 기억에 잠시 혼동이…….” “필릭스, 돌았나?” 하지만 클로드는 필릭스를 향해 오히려 미쳤냐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을 뿐이었다. ======================================= [82화] 나는 그런 클로드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생사를 헤매고 있던 사람이 눈을 뜬 것까지는 좋은데 이건 무슨 웃기지도 않은 소리랍니까? 릴리와 필릭스는 저마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한껏 심각해져서 있었지만 나는 지금 이 상황이 하도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그런지 그저 어처구니가 없기만 했다. 뭐?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아니, 그게 말이 돼? 아……. 이거 혹시 그런 건가? “이거 몰래 카메라야?” “네?” 내가 황당하게 내뱉은 말에 필릭스와 릴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그렇잖아? 지금 다 같이 짜고 날 놀리려는 거 아니야? 보름 동안 눈을 못 뜨고 있었다면서 내가 오자마자 클로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난 것도 그렇고. 날 보자마자 뜬금없이 엉뚱한 소리나 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 처음부터 말도 안 됐어. 이 사람이 나를 구하려다가 대신 죽을 뻔했다는 것부터도 믿기지 않았는데. “지금 다들 장난치는 거지? 이런 거 하나도 재미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침대에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참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심한 장난을 치는 게 어디 있어? 한순간 진짜인 줄 알고 놀라서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줄 알았잖아. 아, 그래도 차라리 장난인 게 다행……. “아빠…….” “죽고 싶나?” 하지만 내 손은 고막을 파고든 냉혹한 음성에 가로막혀 허공에서 우뚝 멈추어지고 말았다. “감히 누구의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것이냐.” 순식간에 주위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눈만큼은 훌륭한 황족의 것이로군.” 나는 얼어붙은 그의 눈동자를 아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면 그 눈을 뽑아버려야 더 이상 네가 내 딸이라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지 못할까?” 그 순간의 그는 정말로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클로드가 아니었다. 허공에 멈추어 있던 내 손이 한순간 흠칫 떨렸다. 이게 뭐지……? 왜 저렇게 나를 적대적으로 쳐다보는 거야? 지금의 나를 덮친 것은, 마치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생면부지의 낯선 타인이라도 된 것만 같은 기괴한 위화감이었다. “그런데 잠깐…….”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나를 싸늘히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잠시 후 클로드가 내게서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움찔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 때까지. “한데 그 몸에 왜 내 마력이……. 윽!” 그런데 돌연 그의 입에서 억누른 신음이 흘러나온다 싶더니, 곧 클로드의 몸이 반으로 접혔다. 하얀 이불보 위로 검은 피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커헉!” “폐하!” 클로드의 기다란 손가락을 타고 죽은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폐하! 궁의, 궁의를 부르겠습니다!” “왜 내가, 우욱! 컥!” 후두둑! 내 눈동자 속에 클로드가 고통스럽게 앞으로 상체를 숙이며 또 한 번 왈칵 검은 피를 쏟아내는 모습이 비쳤다. 곧 방 안에 혈액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가득 차올랐다. 필릭스가 급히 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릴리가 마찬가지로 다급한 움직임으로 클로드의 입가를 적시고 있는 피를 닦아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색하게도, 클로드는 쉴 새 없이 피를 토해내며 하얀 이불보 위에 거의 웅덩이 같은 검붉은 자국을 만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돌처럼 굳어 그런 그의 모습을 그저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 후의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잠시 후 궁의와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클로드의 침소로 급박하게 뛰어 들어와 한바탕 소란을 떨었으나, 나 역시도 한동안 누워 있던데다 일어나자마자 작지 않은 정신적 충격을 받은 탓에 기력이 쇠해져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고 나중에 릴리가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따로 궁의에게 조치를 받은 뒤 에메랄드궁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로 꼬박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기까지, 나는 클로드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 그 후로 내 일상은 평범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 아니, 솔직히 이 정도면 평범을 떠나 빈둥거린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내가 쓰러진 것도 어릴 때에 이어 두 번째라서 그런지 나는 말 그대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고이 대접받고 있었다. 내 다과회에 초대받았던 영애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릴리와 필릭스가 알아서 조치를 잘 취했다고 했다. 다른 영애들은 둘째 치고서라도 제니트는 내 옆에 있다가 이상한 힘에 떠밀려 쓰러지기까지 했기 때문에 나는 더욱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릴리가 소식을 알아다 준 바에 의하면 그녀가 입은 상해는 타박상 정도로 지극히 미비해서 얼마 후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했다. 까망이도 그날 이후 후원에서 얌전히 쉬고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이번 일이 벌어졌던 것 자체가 내 탓이니 이런 생각을 할 자격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와 까망이 때문에 더 이상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은 다행이었다. 어째서인지 아직까지도 클로드가 까망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혹시 내가 까망이를 만져서 마력 폭발이 일어났던 걸 모르나? 나는 하릴 없이 침대 위를 뒹굴거리다 말고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필릭스를 못 본 지도 오래되었네. 처음 며칠 정도는 클로드의 상태를 알려주러 오더니, 어찌 된 게 그마저도 요즘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클로드가 눈을 뜬 직후부터 필릭스는 내 옆을 떠나 다시 클로드에게 돌아가 있었다. 그것을 명한 것은 바로 나였다. 아무래도 클로드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믿을 만한 누군가가 한 사람이라도 그의 옆에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릭스는 9년 전처럼 클로드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고 있었다. 하루 중 짬이 날 때 내게 와서 들려주던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클로드는 그새 몸을 많이 회복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피도 토하지 않고 안색도 처음에 비하면 확연히 좋아졌다고 했으니. 게다가 의식이 없던 보름 동안 밀려 있던 국정까지 다시 돌보기 시작했다고 하니, 이제는 모두가 걱정을 한시름 덜어놔도 될지 몰랐다. 그래서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나는 적잖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클로드가 어떤 사람인데 그 정도로 오늘 죽네 내일 죽네 하겠어? 내 마력 폭발을 직접 막은 것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능력이 되니까 한 거겠지. 클로드는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은 사람인데! 그런데 그 사람이 날 구하는 데 자기 목숨까지 걸었을 리가 없어. 그게 그렇잖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죽을 만큼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나섰을 리가 없잖아? 언제부터 그 사람이 그렇게 자기희생적인 사람이었다고……. 나는 그동안 다소 강박적일 정도로 몇 번이나 반복해 생각하던 것을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어쨌든, 나는 이제 막 쓰러졌다가 일어난 사람이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조금 불만이었다. 하여간 자기 몸 하나 돌볼 줄 모르고. 그 사람은 자기가 무슨 철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투덜거림 속에 작은 의문과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는 왜 나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일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국정을 볼 정도라면 한 번이라도 이 에메랄드궁에 찾아와 나를 만나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게 더 아픈 곳은 없는지, 그 후로 잘 지내는지. 그런 게 궁금하지도 않은 걸까? 물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던 클로드의 모습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필릭스와 릴리는 분명 클로드가 보름 만에 깨어나 그때 잠시 동안만 기억에 혼란이 온 거라고 거듭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그렇지 않은가? 클로드, 그 무시무시한 사람이 나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더군다나 그 후유증으로 기억에 문제가 생기기까지 했다니? 허허. 다시 생각해도 너무 허무맹랑해서 웃음이 나오는군. 그래서 나는 그냥 클로드가 많이 바쁜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응, 그래.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밤을 새워서 집무를 보던 사람인데 이번에는 보름 동안이나 본의 아니게 땡땡이를 친 셈이 되었으니, 그 사이 밀린 일이 얼마나 많을까. 더군다나 이번에는 사고를 친 것도 나, 그가 다치게 된 원인도 나라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나를 만나러 오기는커녕 내가 자신을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소식 한 번 전해 오지 않는 그가 조금 야속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클로드를 만나러 가는 것을 미루는 동안 하루하루 시간이 갔다. *** 찌르릉. 나는 푸른 새가 새장 속에서 푸드득 날갯짓을 하다 지저귀기 시작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숨 쉬는 것밖에 없어서 매일매일이 너무 심심했다. 먹고 자는 일을 제외하고는 기껏 해야 지금처럼 파랑이 구경을 하는 게 전부였으니. 심지어는 책을 보는 것도 안 된다, 밖에 산책을 하러 나가는 것도 안 된다, 릴리의 철통 보완이 여간 빈틈없는 것이 아니었다. 에메랄드궁에 몇 번인가 왔던 궁의도 내 회복 속도가 빨라서 이제는 일상생활을 해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했는데 릴리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했다. 그러다 보니 한나와 세스도 릴리와 함께 덩달아서 나를 내 방의 붙박이로 만들었다. 지난번처럼 방 밖으로 나가려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릴리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고 말이다. 설마 나를 지박령으로 만들기라도 할 셈인가?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한동안은 방 안에만 얌전히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조용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지! 나는 요 며칠간 내 방을 살피는 릴리의 감시가 느슨해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오늘에야말로 이 방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똑똑. “공주님, 들어갈게요.” 달칵. “쭈쭈쭈. 파랑이 잘 먹네. 배고팠구나?” 때마침 릴리가 나를 보러 방에 들어왔지만 나는 파랑이와 노는 데 심취한 양 그녀의 방문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했다. 갑자기 부쩍 친한 척을 하는 내 모습에 파랑이가 ‘얘 왜 이래?’ 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릴리가 내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다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 새장 속에 모이를 넣어주던 손을 멈추었다. 또각또각.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문 너머로 작게 새어들어 왔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바로 지금이야! 달칵. 문을 여는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깜짝 놀랐다. 나는 문틈으로 고개를 빠끔 내밀고 잠시 밖을 살펴보았다. 크으. 이렇게 몰래 밖으로 나가려 하니까 갑자기 예전 생각나네. 그때에는 내 예쁜 보석들을 숨기려고 이렇게 살금살금 몰래 방을 빠져나갔었는데. ======================================= [83화] 아니, 그런데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이렇게 엄마 눈치 보면서 야밤에 외출하는 청소년처럼 바깥의 동태를 살펴야 하는 거지요? 예쁜이들 숨겨두러 갈 때에는 외양상으로나마 새 나라의 어린이이기라도 했지. 으흑. 불행 중 다행으로 문 밖에는 아무도 없어서 나는 생각보다 수월히 방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복도를 조금 걷자마자 나는 낯익은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앗, 공주님!” 헉, 들켰다! 내가 만난 것은 지금 막 소독을 마쳤는지 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수건을 들고 있는 한나였다. 그래도 릴리나 세스가 아니라 한나라서 다행이다! “안 돼요, 이렇게 나오시면!” “나 이제 아픈 데 없어. 그냥 잠깐 산책만 할 거야.” 당연하게도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하지만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으며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이 에메랄드궁에서 나를 직접 말릴 수 있는 건 릴리와 필릭스 정도였는데 지금은 둘 다 이 자리에 없었다. 한나는 나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라오며 다시 한 번 나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아직도 안색이 창백하신걸요.” “그건 한동안 햇볕을 못 쬐어서 그래.” 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그녀가 무어라 말하던 그것을 들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아무리 나를 설득하려 노력해 봤자 통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한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까망이 후원에 있지?” 그런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툭 물음을 던진 바로 그 순간, 한나의 걸음이 멈칫했다. “저어, 공주님. 역시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금방 다과를 올릴게요. 오늘은 공주님이 좋아하시는 케이크도 많이 만들었어요.” 찰나라고 말할 법한 실로 짧은 순간이었으나 내 마음에 의심의 불을 지피기에는 충분했다. 한나는 내 말에 언제 동요했냐는 듯이 다시금 나를 방으로 돌려보내려 분주히 노력했다. 하지만 오히려 내 결심은 더욱 확고해져 있었다. “후원에 갈 거야.” “고, 공주님!” 한나의 부름을 뒤로한 채로 나는 후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마침내 목적했던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휘이잉.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평소 까망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이렇게 까망이를 직접 만나러 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지난 마력 폭발의 원인이 나와 까망이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 일로 클로드가 크게 다치기까지 해서, 한동안은 릴리에게 안부만 묻을 뿐 이렇게 직접 까망이를 보러 후원에 오지는 않았었다. 솔직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기는 하나 그 일이 있은 후 전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까망이를 만나는 것이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까망이에 대해 내가 물어볼 때마다 릴리나 다른 시녀 언니들이 보이는 반응이 다소 미묘했다. 생각해 보니 마력 폭발 후 까망이에게 별다른 이상은 없는지 한번쯤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루카스가 예전에 말했던 대로 불안정한 마력의 여파로 내게 이런 변고가 일어난 것이라면, 까망이의 마력을 안정시키지 않는 한 아직까지 폭주의 위험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주저하다가 까망이의 상태를 잠시 확인하러 후원에 오기로 결정한 것인데……. 내가 찾는 것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후원은 넓으니까 다른 곳에서 놀고 있을 수도 있겠지. “까망아!” 그런 생각으로 나는 후원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불러도, 또 내가 아무리 찾아 헤매도 까망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님!” 잠시 후 릴리가 한나를 뒤에 데리고 헐레벌떡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는 덤불을 뒤지느라 풀잎투성이가 된 나를 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릴리, 까망이 어디 있어?”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나와 마찬가지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생각나는 것은 단 하나였다. “혹시 아빠가 데려간 거야?” “공주님, 그게 아니라…….” “아빠가 까망이 죽인다고 데려간 거 맞지?” 릴리는 내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렇다는 말도 아니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까망이의 행방이 묘연해진 이유가 클로드 때문이라는 내 생각은 더욱 확신을 띠기 시작했다. 뭐야, 진짜 그런 거였어? 어쩐지 요즘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하다 했는데,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까망이를 데려가 버리다니! “아빠한테 갈 거야.” “안 돼요, 공주님!”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벌써 몇 년 전이기는 하나 루카스가 했던 말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너 꽤 예쁨받는 모양이더라. 이거 때문에 네가 다 죽어가는 거라고 하니까 당장 잡아서 족치려고 하던데. 사실 죽였으면 신수 몸속에 있던 마력이 너한테 전부 다 이동해서 더 위험했을 테지만.’ 루카스의 말대로라면 지금 까망이를 죽이는 일이 또 한 번의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릴리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리를 박차며 달려갔다. 한동안 이상할 정도로 클로드에게서 소식이 없었던 것은 전부 다 이 날을 위한 전초전이었던 모양이다. 바로 어제만 해도 후원에서 멀쩡히 잘 놀고 있다던 까망이가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다니! 내가 오늘따라 유독 방에서 나오고 싶었던 것도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일을 막기 위해서였어. 원래는 깨어나자마자 까망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클로드의 일에 정신이 팔려 깜빡하고 있었다. “아빠!” 오늘의 클로드는 하필이면 침소에도, 집무실에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가넷궁을 전부 뒤져 보았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결국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이번에는 클로드가 평소 산책하곤 하던 후원으로 향했다. “고, 공주님!” 클로드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필릭스가 나를 보더니 두 눈을 부릅뜨는 것이 보였다. 곧 클로드의 시선도 내게로 느리게 미끄러졌다. 이렇게 클로드를 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예전에는 매일같이 얼굴을 보던 사람이라 그런지 한동안 그의 소식 한 번 전해 듣지 못하고 있던 시간이 더욱 길게만 느껴졌다. 클로드는 생각보다도 더 건강해 보였다. 언제 시꺼먼 피를 토했냐는 양 얼굴도 혈색이 좋았고, 당시의 파리하던 얼굴에도 다시금 윤기가 흘렀다. 정원을 산책하는 것을 보니 거동하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벌써 그를 마지막으로 본 지도 거의 3주가 지났으니 그 정도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무의식중에 마주한 사람의 안색을 살핀 뒤 곧 클로드가 멀쩡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이번에는 반작용처럼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아니, 빠른 속도로 회복 중이라는 소식을 필릭스랑 릴리한테 전해 듣기는 했지만 정말 멀쩡하잖아? 그런데 나한테는 코빼기도 안 비추고 말이야! 나는 괜히 억울한 마음에 클로드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필릭스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며 내 앞을 막아섰다. “공주님, 지금은 안 됩니다. 일단 에메랄드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에잇. 내가 아빠 만나서 얘기 좀 하겠다는데 왜 말리는 거야?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오래 참았는데! “아빠가 까망이 데려갔어요?” 클로드에게 내심 서운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고운 말이 튀어나오지를 않았다. 이봐, 형씨. 일단은 까망이의 문제가 있으니 그것부터 해결하고 그 후에 나랑 다른 얘기도 좀 합시다! 그런데 내 입에서 까망이의 이름이 나온 순간 필릭스가 움찔했다. 그것을 보고 내 의심은 완전한 확신이 되었다. 역시! 까망이 납치범은 클로드가 맞았어! “아빠, 까망이 죽이지 말아요.” 설마 벌써 죽이지는 않았겠지? “그러니까…… 아빠가 격리시키자고 하면 그건 저도 반대하지 않을 건데 죽이는 건 진짜 안 되거든요.” 나는 클로드를 향해 까망이의 생존권을 주장했다. 내가 처음 후원에 발을 들인 직후부터 그는 줄곧 아무 말도 없었다. 물론 나한테 말도 없이 까망이를 죽일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니, 그렇다고 나한테 말한 다음에는 죽여도 된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내가 아는 지금의 클로드는 내 동의도 없이 까망이의 생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만큼 무자비한 사람도 몰인정한 사람도 또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인내심도 끝에 달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빠, 까망이는…….”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는 나와 클로드 둘 다 목숨이 위태로웠지 않은가. 지난번처럼 마력이 날뛰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마력 폭발까지 일어나 먼저 내가 쓰러졌고, 그 뒤에 클로드가 그런 나를 구하려다가 오히려 나보다 더 크게 다쳐서…….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지금까지 믿고 싶지 않아 애써 부정하려고 했지만 클로드는 정말 나 때문에 죽을 뻔했던 것이다. 파리한 얼굴로 침대 위에 미동 없이 누워 있던 클로드를 다시금 떠올리자 한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클로드는 나와 내 마력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까망이 때문에 보름간 혼수상태이기까지 했는데 기껏 오랜만에 만나서 내가 한 말은 ‘까망이 죽이지 마!’라니.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지만, 그래도 그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어쩌면 이번 사건은 클로드가 오롯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왜, 오벨리아의 역사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던가. 공주가 기르던 고양이가 황제의 손등을 할퀴자 신하들이 ‘아닛! 저 짐승이 감히 폐하의 옥체를 상하게 하다니! 폐하! 당장 죽이셔야 합니다!’라고 상소문을 올리면서 난리를 쳤다고 하는. 그리고 정말 공주의 고양이를 참수시켜서 죽여 버렸지. 더군다나 어찌 보면 이번 일에는 예기치 않게 다른 영애들까지 말려든 셈이니 다른 귀족들도 그 원흉을 까망이라고 생각해서 없애야 한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클로드를 설득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는 루카스가 클로드에게 거짓말을 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까망이가 사실은 내 마력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이 일에 관한 사안은 더 이상 나 혼자 결정할 만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또다시 많은 사람이 말려들어 다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혹시 또 클로드가 다치기라도 하면…….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좀 더 일찍 말했어야 하는 건데, 사실 마력 폭발의 이유는 까망이가 위험한 마법 생물이라서가 아니라…….” “필릭스.” 하지만 내가 그것을 말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줄곧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던 클로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기 때문에. ======================================= [84화] “예, 폐하.” 필릭스는 어쩐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나를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답답한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클로드의 서늘한 음성이 내 두 귀를 파고드는 순간. “왜 저 계집이 내 궁이 제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직까지 여기에 들어앉아 있는 거지?” 나는 입술을 작게 벌린 채 마주한 얼굴을 올려다보고 말았다. “폐하,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그 헛소리는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클로드는 질 낮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필릭스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읊조렸다. “공주. 공주라.” 곧 그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걸렸다. “웃기는군.” 나는 내 앞으로 툭 내던져진 그 예리한 조롱을 미처 손 쓸 틈조차 없이 정면에서 마주하고 말았다. “짐에게는 자식이 없는데 어째서 저것이 공주란 말이냐?” 그 순간 옆에서 필릭스가 훅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클로드가 얼어붙은 눈동자로 나를 직시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말았으니까. “누가 보냈지? 어느 정신 나간 놈이 감히 내 딸을 사칭하라 시킨 거냐?” 지금의 클로드는 내가 5살 때 처음 만난 그와도, 바로 얼마 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와도 달랐다. 왜냐하면 지금의 그는……. “그렇게 하면 온갖 금은보화가 모두 네 것이 된다고 감언이설이라도 늘어놓던가?” 지금의 클로드는 아예 나를 생면부지의 낯선 타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클로드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그의 딸인 아타나시아가 아니었다. “어떤 간교한 사술로 필릭스와 다른 이들까지 꾀어냈는지는 모르나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을 사용한 것인지는 모르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술을 걸어 공주의 자리를 차지한 간악한 어린 계집. 내 착각이 아니라면, 클로드는 나를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멍청히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아빠…….” “아빠?” 클로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 말을 따라 한 번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방금 전보다도 더한 한기를 온몸에 두른 뒤 낮게 일갈했다. “닥쳐라. 한 번만 더 나를 그리 부르면 혀를 잘라 버릴 테니.” 그 순간 두근, 심장이 뛰었다. 클로드가 이런 식으로 내게 직접적인 협박을 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적이 없었다. “당장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판이나 그 뻔뻔한 작태에 한순간이나마 흥미가 당긴 것은 사실이니 특별히 목숨만은 살려주마.”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게 위해를 끼칠 것이라거나, 혹은 죽일 것이라거나……. 그리고 그 이유는, 어찌 되었든 나는 클로드의 눈앞에 나타난 후로 단 한 번도 그의 딸이 아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비궁에 방치되어 그에게 냉대를 받고 있을 때조차도. “이 시각 이후로 이 계집을 에메랄드궁에 유폐시키겠다.” 클로드가 선포하자 옆에 있던 필릭스가 ‘폐하! 말도 안 됩니다!’라고 소리쳤다. 그 후로도 그가 클로드를 말리며 무어라 더 말한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내 앞에 있는 클로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숨이 아깝다면 궁 밖으로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말아야 할 거다.” 온기 한 점 없는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이윽고 나를 내버려 둔 채 먼저 자리를 떠날 때까지.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정말 죽여 버릴 테니.” 눈앞에 하얀 햇살이 고였다. 클로드가 떠난 뒤에도 아직 자리에 남아 있던 필릭스가 굳은 얼굴로 나를 향해 무어라 말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왜냐하면 내 귀에는 방금 전 클로드가 남긴 말만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정말 놀랍게도 클로드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나를 에메랄드궁까지 데려온 필릭스가 해준 말을 듣고 나는 그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기억상실이라니? 그런 건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거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아, 맞아. 이거 소설 맞지. <사랑스러운 공주님>이라는 책 속이었지? 허허……. 허. 릴리와 필릭스는 내가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곧 쉬라는 말을 남긴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런 그들의 표정은 아주 침통했다. 알고 보니 그들이 나를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은 것도 클로드가 줄곧 저런 상태였기 때문이다. 필릭스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기억을 몽땅 다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건 즉 클로드가 나와 함께 보낸 9년간의 시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옆에서 필릭스가 아무리 나에 대해 설명해도 그는 필릭스를 흑마법에 걸린 사람 취급했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딸이 있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허…….” 또 한 번 내 입술을 비집고 건조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 전 보고 들었던 클로드의 한기 폴폴 날리는 눈빛과 살벌한 말들을 다시금 떠올리고 나니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이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부 다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오늘 내가 직접 만나 본 클로드도, 지금까지 줄곧 그의 옆에 있던 필릭스도, 그리고 그동안 내 외출을 막았던 릴리도 하나같이 내게 지금의 상황이 진짜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설마 정말인 거야? 클로드가 기억상실증이라는,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그 어이없는 증상에 걸린 게? “하하……. 말도 안 돼.” 나는 한동안 혼자서 허탈하게 웃다가 이내 침대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기억상실이 웬 말이란 말입니까? 지금 이거 농담이죠? 네? 너무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지금 이게 꿈인지 생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나는 두 손을 들어서 내 뺨을 착 내려쳤다. 그 후 두어 번을 더 때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으앙, 아프잖아! 그럼 이거 꿈 아니라는 거잖아!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나 어떡해…….” 그렇게 한참 동안 발악하고 나자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현타가 머리를 내려쳤다. 나는 시체처럼 침대에 몸을 추욱 늘어뜨리고 망연자실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 그럼 이제부터는 어떡하면 좋지? 막막해도 너무 너무 막막했다. 나를 벌레 보듯이 쳐다보던 클로드를 떠올리자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쿵 떨어져 박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목숨이 아깝다면 궁 밖으로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말아야 할 거다.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정말 죽여 버릴 테니.’ 어째서인지 클로드는 나를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부정해 놓고도 살려주었지만, 거기에는 평생 이 에메랄드궁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유폐. 그가 내게 명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만약 내가 이 궁을 나가서 그의 눈에 들면, 그때는 정말 나를 죽일 거라고? 오늘 본 클로드의 눈빛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마 하니 그가 진짜로 나를 잊었을 줄은 몰랐다. 아니……. 나는 정말로 모르고 있었나? 그럼 왜 오늘까지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클로드를 찾아가지 않고 필릭스와 릴리가 시키는 대로 방 안에만 있었을까? 클로드가 나를 보러 오지 않으면 내가 그를 찾아가도 되는 일이었는데. 아무리 릴리가 나를 감시하고 만류한다 해도, 내가 고집을 부렸다면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아……. 바보 같아.” 나는 침대에 벌렁 누워서 팔로 얼굴을 가렸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내 얼굴을 밖으로 드러내기가 싫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잠에서 깨어난 첫날, 내게 보였던 클로드의 냉랭한 태도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란 사실을. 그리고 그가 정말 기억을 잃어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만 나는 그 사실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인정하기가 싫었을 뿐이다. 방을 나서기 전, 릴리와 필릭스는 지금은 클로드의 상태가 이렇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억을 되찾을 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 역시도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혹시 지금 당장이라도 클로드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전부 다 질 나쁜 장난이었다고, 네가 이번 일의 위험성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혼을 내주려고 기억을 잃은 척한 것뿐이라고 말해주지 않을까? 아니면 혹시 내일이라도 감쪽같이 사라진 클로드의 기억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을까?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문득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던가……? 오히려 이제까지의 내 삶에는 세상의 온갖 불행이 슬금슬금 기어 들어와 나도 모르는 새 집을 짓고 들어앉아 있지 않았던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하자 또다시 불안감이 심장 어귀를 좀처럼 갉작갉작 긁어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불안감을 종식시켜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서, 결국 나는 밤이 새도록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새벽을 맞고 말았다. *** “공주님, 실은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다음 날 내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것 같았는지 릴리가 내 손을 꼭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까망이는 폐하께서 데려가신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내가 못내 걱정되는 것처럼 흐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망설임 끝에 릴리가 내뱉은 말에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공주님과 폐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마력이 완전히 사그라지고 난 뒤 우리가 가까이 갔을 때 까망이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다과회가 있었던 장소를 포함해서 에메랄드궁도, 그 바깥도 샅샅이 찾아봤지만 어디에서도 까망이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어서…….” 릴리의 말이 서서히 귀에서부터 멀어졌다. 굳은 채 그녀의 말을 듣던 바로 그 순간, 문득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루카스는 까망이가 내 마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며 언젠가는 내 안으로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릴 때 내가 쓰러진 이유도 까망이와의 잦은 접촉으로 그 마력이 나한테 옮겨와 불균형이 생긴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까망이까지 없어졌다는 걸 알면 공주님께서 더 크게 상심하실까 봐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 일 역시 그와 비슷한 이유로 벌어진 마력 폭발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기는 했는데……. 그런데 까망이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고? “공주님, 괜찮으세요?” 내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자 릴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 [85화] 사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나한테 너무 많은 일이 생겨서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릴리에게서 손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망이가 사라졌다고 한다. 궁의 어디에서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완전히.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지금 이 상황이 그냥 다 꿈같아서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 좀 잘게. 어제 한숨도 못 자서 좀 졸리네.” 릴리는 그런 나를 향해 입을 열었지만 결국은 섣부른 위로라 생각했는지 푹 쉬라는 말만을 남긴 채 방을 떠났다. 마침내 혼자가 되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째깍, 째깍.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나를 홀로 내버려 둔 채 혼자서만 앞을 향해 착실히 흘러갔다. 이상하다……. 왜 자꾸만 주위에서 무언가가 하나둘씩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 같지? 나도 모르는 새 내가 가지고 있던 걸 누군가에게 야금야금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야. 갑자기 가슴이 텅 빈 것 같았고, 길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버려진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실감은 애초에 내가 알지 못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그리고 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비로소 찾아온 깨달음에 나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 그렇구나.” 아무 이유도 대가도 없이 나한테 생긴 행운이었으니 또 이렇게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거구나. 마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동안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아타나시아로 사는 동안 잊고 있던 현실감이 돌아오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상실감’이라고? ‘내가 가지고 있던 걸’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느낌이라고? 언제부터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아타나시아가 되어서 예전 같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것들을 손에 쥐게 되니, 이제는 그런 게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라도 해?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한 마음을 가지게 된 걸까? 고작 이까짓 일로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이렇게 동요하고 흔들리다니. 아타나시아가 아닌 나는 애초부터 혼자였는데. 클로드와 릴리, 그리고 필릭스와 까망이를 비롯해서 이 에메랄드궁에 있는 사람들과 지금까지 내가 이곳에서 이루었던 모든 것. 그 모두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 모두가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서 한꺼번에 없어진다 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내 옆에서 완전히 없어진다 해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상처 하나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그래야 했다. 그래. 애초에 이런 행운을 완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실수였어. 그런 사치를 부리니까 지금 이렇게 먹는 게 아까워서 오랫동안 품속에 고이 아껴만 두던 사탕을 빼앗긴 어린애처럼 서글프고 또 속상해서 울고 싶은 거지. 하지만 이게 맞는 거야. 오히려 지금까지가 이상했던 건데. 내가 이렇게까지 운이 좋을 리가 없는데. 지금까지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던 게 오히려 말도 안 되던 건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혼란스럽던 머리가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불규칙적으로 뛰던 심장도 점차적으로 차분함을 되찾았다. 가슴속에 꽉 채워져 있던 것들이 모래알이 흩어지듯 서서히 내 안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텅 비어버린 가슴에 허무함이 들어찼다. 하지만 그 대신 더 이상은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내게 있어 익숙하기까지 한 감각이었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찌르릉. 그때에도 새장 속의 파랑새는 홀로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지저귀고 있었다. 제23장 대마법사 되기가 이렇게 쉬웠나요? 한동안 나는 평소와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생각해 보니 지금의 생활은 나에게 있어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내 유폐 생활은 클로드의 기억이 돌아오면 종지부를 찍을 일로, 지금은 그날을 기다리는 유예 기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애초에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목표는 오직 하나 아니던가? 바로 생존! 따져 보면 이제껏 내가 온갖 흑역사를 만들어내며 클로드의 앞에서 귀여운 척, 착한 척, 아빠가 너무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딸인 척했던 것도 전부 다 생존을 위해서였다. 그러니 나는 착각하면 안 되었다. 아무리 그와 함께하는 생활이 생각보다 즐거웠다고 해도, 애초에 내가 그에게 다가갔던 이유를 잊지 말아야 했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에메랄드궁에 얌전히만 있어도 내 목적은 성취되는 거잖아? 클로드는 분명히 내게 이대로 자신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죽이지 않겠노라 말했으니까. 어디 보자. 그럼 전 그냥 앞으로 이 구역의 쩌리 공주로 살면 되는 건가요? 궁전에 짱 박혀 있는 거라면 제 전문이죠! 제가 루비궁 시절에도 5년이나 클로드에게 들키지 않고 숨어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이미 클로드의 눈에 띄었는데도 가만히 있으면 안 죽인다고 나름대로 약속까지 받은 셈이니, 그가 언제 나를 찾아와 죽일까 매일 벌벌 떨며 살던 어릴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은 편이었다. 궁전만 봐도 그래! 여기는 다 쓰러져서 바퀴벌레가 튀어나오던 허름한 루비궁도 아니고 으리으리한 에메랄드궁이잖아?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노력하니 오히려 나쁜 점이라 할 만한 걸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말만 유폐지 내 수발을 들어주는 시녀 언니들도 다 그대로 있겠다, 언뜻 보니 내 궁에 들어오던 금전적인 지원도 아직 끊이지 않은 것 같겠다, 이건 완전히 내가 염원하던 돈 많은 백수 생활이 아닌가! 빠밤! 그런 생각을 하자 이거야말로 14년 동안 내가 그렇게 원해 왔던 내 미래의 청사진이 아닌가 싶었다. 오히려 얼마 전에 생각했다시피 예전의 내 박복했던 삶과 비교하자면 클로드가 기억을 잃은 건 운이 나쁜 수준에 들지도 못 하는 것 아닌가? 그래, 어차피 변하지 않을 현실이라면, 그냥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후로 나는 그야말로 한량 같은 생활을 지속했다. 매일매일 세 끼 꼬박꼬박 맛있는 것도 먹고, 남아도는 시간 동안 책도 보고 산책도 하고 또 파랑이랑도 놀면서 여가 생활도 하고, 초저녁부터 점심나절까지 내내 퍼져서 자기도 하고. 연달아 일어난 클로드와 까망이의 일로 내 상심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릴리를 비롯한 다른 시녀 언니들도 아무도 그런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배부르고 등 따신 평화로운 생활을 마음껏 누리며 지냈다. “어디 보자.” 그리고 어느 날인가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던 마법서를 꺼내 들었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익숙한 내용이 눈앞에 촤르륵 펼쳐졌다. [마법이란 극히 드물게 발현되는 이능의 일종으로 오늘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백억 명 중 열 명, 또한 그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열 명 중 한 명 정도이다. 그들은 체내에 존재하거나 자연물에 속한 마력을 이용하여 사물을 이동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고 또한…….] 도서관도 아니고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란 것은 곧 내가 이미 몇 번이나 읽어본 적 있는 책이란 의미였다. 나는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거의 외울 지경이 될 초반부를 그냥 대충 휙휙 넘겼다. 어차피 앞부분은 이론서에 불과한데다 어릴 때부터의 관심으로 마법서의 이론 정도는 이미 빠삭하게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더 볼 필요가 없었다. [매우 간단하고 쉬운 초급 마법! 멍텅구리도 따라할 수 있다! 물론 당신이 저능아가 아니라면.] 으음. 몇 번을 봐도 참 약 오르는 문구란 말이지. 그냥 심심풀이로 읽을 때에는 이 톡톡 튀는 말투가 재미있어서 좋았는데 막상 내가 이 책을 교본 삼아 마법 연습을 해보려니 영 거슬리잖아? 나는 잠깐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삐죽이다가 이내 책장을 다시금 넘겼다. 그래. 이미 다 짐작했겠지만 오늘 나는 이 마법서에 나오는 실전 마법을 한번 시도해 볼 생각이다. 할 일도 없는 김에 머리에 쥐가 나도록 몇 번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는데……. 까망이가 사라진 이유는 지난번 직감했듯이 아무래도 나한테 흡수되었기 때문일 확률이 가장 큰 것 같았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원래 까망이는 내 마력이 떨어져 나와 생물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라고 루카스가 그랬지 않은가? 그런데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내 마력 폭발이 있던 순간 까망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어쩌면 다시 본래의 성질로 돌아가 내 마력이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할 결정을 하기까지 나는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에서야 마음을 잡고 이 마법서를 눈앞에 펼쳐 들게 된 것이었다. 자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앞에 놓인 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 할 것은 이곳이 마법을 쓰면서 ‘롤리 롤리 롤리팝! 받아라, 로즈 블라썸 파워☆’ 같은 정체불명의 주문을 외치거나 ‘심연보다 검은 암흑이여, 나의 적에게 죽음을 내리소서!’와 같은 소름 끼치는 시동어를 읊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크흑. 그것만큼은 정말 감사합니다, 신님! 제 손발을 지켜주셔서! 만약 마법을 사용할 때 저런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온 우주가 폭발할 것 같은 주문을 외쳐야만 했다면 아마도 나는 진작 대마법사의 꿈을 접고 말았으리라. 그리고 루카스가 내 앞에서 마법을 쓸 때마다 폭소를 참아낼 수 없었겠지! 나는 잠시 동안 ‘어둠의 다크, 죽음의 데스!’ 따위의 주문을 읊는 루카스를 상상하다가 곧 당장에라도 그가 살벌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죽이겠다고 나타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어디 보자. 그냥 머릿속으로 원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강렬히 바라면 된다고 했지.” 주구장창 장황하게 뭐라고 길게 써놓기는 했지만 간추려 설명해 보자면 요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그런데 정말 이게 끝이라고? 게다가 이건 그냥 말만 쉬운 것 아닌가? 이러고서 책을 내다니, 이거 순 날강도 아니야? 이럴 거면 나도 마법서 쓰겠다! 그냥 재미로 읽을 때에는 아무런 불만도 없었던 마법서지만 막상 내가 이걸 들고 마법이란 걸 직접 사용해 보려니 초장부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불만 어린 눈초리로 잠시 마법서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속는 셈 치고 한번 책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해 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 펼친 부분은 초보자가 비교적 쉽게 따라할 수 있다는 ‘물질 소환 마법’ 부분이었다. 어차피 해봤자 안 될 것 같긴 한데. 쓰읍. 바라는 거라고 한다면 돈이라던가, 돈이라던가, 돈……. 크흑. 이렇게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어도 전생에서 워낙 돈에 한이 맺혀서 그런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돈밖에 없구나. ======================================= [86화] 나는 일단 최대한 모습을 떠올리기 쉬운 것을 골라 보기로 했다. 내가 PC방에서 알바할 때 찾아온 중학생 애가 해준 말에 의하면 이럴 때는 보통 이걸 제일 먼저 해본다더라. “파이어 볼!” 나는 손을 앞으로 뻗고 장엄하게 외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새빨간 불덩어리가 나타나더니 곧 폭발할 것처럼 거세게 일렁이기 시작…… 했다는 건 역시 책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방 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방 안에서는 바늘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크, 크흠. 이거 조금 머쓱하구먼. 아, 아무도 안 봤겠지? 나는 스윽 손을 내리고 잠깐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방 안에 나 혼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괜스레 안심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으앙! 그나저나 이거 뭐야! 역시 안 되잖아. 이 거지 같은 마법서!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내 몸에 이런 마법을 쓸 정도의 마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긴, 까망이가 사라진 후로도 나는 내 몸에 별다른 변화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걸? 그럼 까망이는 나한테 흡수된 게 아닌 걸까? 그냥 워낙 섬세하고 여린 애다 보니 그때의 상황에 놀라서 어디론가 도망갔다거나. 예전에 루카스도 까망이한테 탈주 본능 같은 게 있다고 했잖아? 나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마법서는 괜히 꺼내왔나. 그럼 그렇지. 갑자기 대마법사는 무슨 대마법사야. 나는 그냥 마법서를 옆에 내팽개치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하긴, 마법이라는 게 뭐 별거 있나. 엄밀히 따져 보자면 지금 내 생활이야말로 나한테는 마법 같은 거지. 릴리나 다른 시녀 언니들한테 말하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뚝딱뚝딱 나오는데, 뭐. 그러고 보니 어릴 때에도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도깨비 방망이나 지니의 요술램프 같은 게 생기면 다른 애들이 바라는 장난감이나 예쁜 옷 같은 건 다 필요 없으니까 나한테 돈도 주고 집도 주고 맛있는 것도 주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크흑. 어릴 때부터 단련된 나의 현실 감각이란. “열려라, 참깨!” 나는 간만에 동심이 불타서 영혼 없는 목소리로 내가 어릴 때 한창 유행했던 모 만화들의 주문들을 외치기 시작했다. “수리수리 마수리!” 크윽. 어릴 때에는 혼자 있을 때 이 짓 많이 했었는데. “금 나와라 와라 뚝딱, 은 나와라 와라 뚝딱!” 이렇게 주문을 외우고 나면 눈앞에 돈이 뚝 떨어질 것 같았……. 챙그랑! 바로 그때 어디선가 동전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려서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으엥? 이게 뭔 소리지? 나는 의문을 느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챙그랑! 투둑. 챙그랑!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빠끔 튀어나온 반짝이는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챙그랑! 챙그랑! 챙그랑! 그리고 곧장 놀라서 쩌억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허공에서 웬 동전이 막 떨어져! 하나둘씩 떨어져 쌓이기 시작한 동전은 전에 루카스와 외출해서 사용한 적이 있던 은화와 금화였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왜? 혹시 루카스가 왔나? “루, 루카스?” 조용. “왔으면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또 조용. 불현듯 든 생각에 나는 주위를 마구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방금 전 내가 흥얼거렸던 주문을 무심코 떠올렸다. 서, 설마. “금 나와라 은 나와라 뚝딱……?” 나는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는 동전을 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챙그랑! 차르르륵! “으억!” 한 개씩 떨어져 내리던 동전이 소나기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잠깐, 잠깐!” 촤르르르륵! 은화와 금화로 이루어진 홍수는 순식간에 불어나 내가 있는 침대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으악! 악악! 이거 어떻게 해! 으악! “자, 잠깐만 기다려 봐! 동전님! 으악!” 나는 멘붕에 빠져 눈동자를 마구 흔들며 허공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동전의 비를 바라보았다. 내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에도 금색의 파도는 착실히 내 이불보를 침범했다. “에잇, 멈춰! 멈추라고!” 나는 발치에서 짤그랑거리는 동전을 피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내 침대가 태평양처럼 큰 게 지금처럼 기뻤던 건 처음이야! 물론 나는 돈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동전이 불어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저기에 파묻힐까 봐 무서워! “당장 멈추라니까! 이제 그만해!” 차르륵. 투둑. 챙그랑! 내가 소리치자 가까스로 동전 비가 멈추었다. 나는 조용해진 방 안에서 혼자 헉헉거렸다. 지금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죠? 혹시 제가 지금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인가요? 이거 꿈 아니에요? 하지만 꼬집은 허벅지가 아픈 걸 보니 이거 현실 맞나 보다. “이게 뭐야.” 나는 눈앞에 펼쳐진 금색과 은색의 향연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침대에 서 있는 내 발은 이미 반쯤 동전의 파도에 집어삼켜진 상태였다. “금화 나와라! 앗, 잠깐. 하나만!” 투둑! 나는 앞으로 손을 내민 뒤 다시 한 번 읊조려 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곧장 내 위로 반짝이는 동전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허허…….” 왠지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이걸 진짜 내가 만든 거라고? 진짜? 진짜로 진짜? 나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더 시험 삼아 같은 짓을 해봤다. 그리고 말 그대로 마법처럼 내 눈앞에 뚝딱뚝딱 나타나는 반짝이는 것들을 보다가 마침내 허탈하게 손을 내렸다. 와, 와아. 이런 기막힌 일이……. 아무래도 나는 이제 루카스처럼 위조지폐를 제조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아니, 방금 전에 파이어 볼을 외칠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니 왜 돈에 관련된 걸 생각하니까 되는 거야! 아무래도 내 마력은 내 안에 그득한 속물근성을 존중해 주는 모양이었다. 허흑. 차르륵.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발에 차인 금화가 소리를 내며 흐트러졌다. 나는 그것을 약간 막막하게 바라보다가 동전의 산 위에 냅다 드러누워 버렸다. 클로드가 내게 보물 창고를 선물할 이후 심신의 안정을 취하고 싶을 때마다 이따금씩 그곳을 찾아가 그랬던 것처럼. 얍! 이게 바로 진정한 돈방석이죠! 금화 테라피라고 들어는 보셨나? “와, 나 부자네.” 차가운 금속성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려니 한결 더 얼떨떨했다. 요즘 들어 계속 비현실적인 일만 일어난다 싶더니 설마 이런 끝판왕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럼 나 이제 마법 쓸 수 있는 거야? 대마법사의 꿈도 이루어진 건가? 진짜? “대박이다.” 그런데 왜인지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런 날이 찾아오면 좋아서 입이 찢어져라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것도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런가? “진짜 대박.” 나는 동전 위에 누워서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진짜 까망이는 없어진 거네.” 내가 갑자기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걸 보면 그동안 짐작했던 게 맞다는 거잖아. 그렇지? 왜인지 그럴 것 같기는 했지만 진짜로 그럴 확률이 크다는 것을 몸소 확인하고 나자 그렇지 않아도 비어 있는 것 같던 속에 급속도로 한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젠가 까망이가 내 앞에서 사라질 거란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 시기가 빨라졌을 뿐이지, 마음의 준비를 아예 하지 않던 것도 아니고. 아, 그래. 그래서 루카스가 그때 나한테 더 심술궂게 말했던 거구나. 까망이한테 정을 떼도 모자를 판에 하루하루가 갈수록 오히려 정을 붙이고 있어서. 어차피 그 끝은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없는 거였는데도. 어쩌면 루카스가 나보다 더 빨리 내 바보 같은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차라리 누군가 그런 나를 따끔하게 질책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난날 내게 ‘멍청하게 굴지 말라’고 말해주던 루카스도 지금은 옆에 없었다. “이게 뭐야.” 까망이에 이어 루카스 생각까지 머릿속에 떠오르자 속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팔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아, 다 귀찮다. 이대로 한 일주일 동안만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싶어. 이번에도 마력이 내 바람을 들어준 것인지,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밀려드는 수마에 못 이긴 척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이 가져다주는 안식 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 그러고 나서 진짜 일주일 동안 내리 잤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거의 두 시간쯤 뒤, 나는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새된 비명에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공주님! 공주님, 어서 일어나 보세요!” 앗! 이 목소리는 릴리! 으어, 나 꿀잠 자고 있었는데. 날 깨우지 말아요. 난 좀 더 자고 싶단 말이야. 음냐. “공주님!” 하지만 내가 일어나지 않자 릴리는 내 몸을 흔들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차르륵 동전이 미끄러져 떨어지는 소리가 귀에 흘러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 동전들 위에서 잠들었던가? “끄응.” 문득 그 사실을 상기하고 나자 몸이 여기저기 결리기 시작했다. 와, 그럼 진짜 이거 꿈 아닌가 보네? 으억, 그런데 내 등!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네. 어흐흑. 아무리 돈이 좋다고는 해도 내가 왜 이런 만용을 부렸지요? 딱딱한데다 울퉁불퉁하기까지 한 데에서 잤더니 관절이 막 삐거덕거리잖아요! “공주님, 방에 이게 다 뭐예요? 혹시 공주님의 금고에 있던 것들을 옮겨 놓으신 건가요?” 릴리는 내 방에 수북이 쌓인 금화와 은화들을 보고 동공을 마구 흔들다가 곧 나를 향해 애잔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다른 궁인들을 시켜서 내 방에 이 동전들을 옮겨놓은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짠한 눈빛을 보고 약간 민망해졌다. 내, 내가 그렇게 자주 금고에 가서 돈 냄새 맡고 동전들에 비비적거리고 그랬었나? 아니, 물론 힐링이 필요할 때 가끔씩 클로드가 선물로 준 보물 창고나 금고들에 갔던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릴리가 지금 나한테 이런 눈빛을 보낼 정도라니. 크흑. 제 이미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 방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는 건 보지 못했었는데…….” 그러다 곧 릴리가 의문을 표했다. 이 정도 되는 동전들을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내 방에 옮겨놨다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 양이면 아마 몇 번은 내 방을 들락날락해야 했을 텐데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니, 여기에 있는 시녀 언니들이 닌자도 아닌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아니야, 릴리. 난 계속 혼자 있었어.” 그냥 거짓말을 할까 한순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에메랄드궁에 있는 궁인들에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올 텐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아니고. ======================================= [87화] 또 지금 내 방에 있는 동전들을 치우려면 시녀 언니들이 고생해야 하잖아. 게다가 지금은 왠지 거짓말을 지어내려 머리를 굴리는 것이 전부 다 귀찮기도 했다. 나는 동전의 산에서 몸을 일으킨 뒤 다시 침대에 올라가 섰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번쩍이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이거 치워야겠지?” 음, 그러니까. 사라지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얍! 없어져라! “헉.”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나자 방에 쌓여 있던 동전들이 정말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릴리가 깜짝 놀랐는지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마법을 써 놓고 조금 웃기긴 하지만 사실은 나도 눈앞에 있는 것들이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한차례 흠칫하고 말았다. 오. 아무래도 원하는 걸 꼭 말로 소리 내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법서에서도 그냥 상상만 하면 된다고 했지. “고, 공주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릴리는 크게 당황했는지 나를 보며 사정없이 눈동자를 흔들었다. “설마 공주님이 없애신 건가요?” 그녀의 동요가 나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나는 잠깐 턱을 긁적이다가 곧 조금은 겸연쩍은 기분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릴리! 나 대마법사가 되었나 봐!” “네?” 바로 그 순간 릴리의 경악 어린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 * * 나는 불과 며칠 전의 일을 다시금 떠올리며 잠깐 회한에 젖고 말았다. 크윽. 그 순간의 릴리의 표정이란……. 한순간이지만 분명히 그녀는 ‘우리 공주님이 아프신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 후로 내가 직접 그녀의 앞에서 뿅! 하고 꽃다발을 만들어서 주자 또다시 급격한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내 말을 믿는 눈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마법이란 게 원래 이렇게 숨 쉬듯이 쉽게 쓸 수 있는 거였나? 헉. 아니면 역시 나에게는 엄청난 대마법사의 자질이! 맞아, 루카스도 내 마력이 꽤 강하다고 그랬었잖아! “공주님, 공주님 앞으로 온 편지들이에요.” 릴리는 일단 내가 갑자기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밝히지 말자고 했다. 듣자 하니 오벨리아의 국적을 가진 마법사라면 일단 황실에 소속되어 일하지 않는다 해도 누구나 의무적으로 자진 신고를 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 과정이 뭔가 굉장히 복잡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유폐 중인 내가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일을 해봤자 좋을 게 없기는 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시 한 번 눈에 띄면 죽이겠다고 클로드가 엄포를 놓기까지 한 상황인데, 혹시나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 ‘역시 네가 내 딸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건 사술 때문이었군.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하면서 그가 나를 콱 죽여 버릴지도 모르지 않은가. 물론 릴리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내 생각이 그랬다. “날짜를 보니 시일이 좀 된 것 같은데 처리가 늦어졌나 봐요.” 나는 릴리가 내게 내민 편지들을 받아 봉투에 적힌 이름들을 보았다. 어디 보자. 백합 소녀를 비롯한 다과회의 참여 멤버가 여섯, 이제키엘이 하나, 그리고 다른 이름 모를 영식들이 둘, 그리고 제니트가…… 다섯?! 이럴 수가. 다른 사람들은 편지를 다 한 개씩만 보냈는데 제니트가 혼자 보낸 것만 다섯 개였다. “마그리타라면 공주님께 리본을 선물했던 영애죠? 공주님이 많이 걱정되었나 봐요.” 릴리는 포근히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나는 미묘한 기분으로 제니트의 편지 중 가장 예전 것을 먼저 열어보았다. 헉! 그런데 왜 봉투를 열자마자 어디선가 향긋한 꽃향기가 나는 거죠? 설마 이거 편지지에서 나는 건가? 킁킁. 향수라도 뿌린 것처럼 엄청 좋은 냄새가 나는데. 그러고 보니 편지 봉투도 그렇고 편지지도 엄청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이잖아. 크으, 역시 여주인공의 센스란. 게다가 꽃이 그려진 하얀 편지지에는 그녀와 꼭 닮은 우아한 필체의 글씨가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결례를 무릅쓰고 편지를 보냅니다. 공주님께서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오늘 오전 전해 들었어요. 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공주님의 병세가 염려되어 그간 한시도 마음 편히 있던 적이 없었습니다. 공주님께서 어서 눈을 뜨게 해달라고 매일 밤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요. 크흑. 거기까지 읽은 뒤 나는 밀려드는 감동에 잠시 편지를 읽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의 편지에서는 나로 인한 걱정과 기쁨이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제니트는 다과회 날 다른 영애들이 까망이를 보고 달아나기 바쁠 때 유일하게 내 안위를 먼저 챙겨주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종이 위의 글자를 다시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날 다과회에 참석했던 다른 영애들도 모두 공주님만 걱정하고 있답니다. 폐하께서 그 자리에 당도하신 직후 저희들은 기사들에게 인도되어 곧바로 그곳을 떠나야 했어요. 그 후 공주님께서 줄곧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는 사실은 알피어스 공작님을 졸라 저도 겨우 알게 된 것으로, 다른 영애들은 단지 공주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만을 귀띔으로 전해 들은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릴리에게 들어 다른 영애들이 무사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클로드가 오자마자 그녀들을 궁 밖으로 피신시켰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혼수상태였다는 것도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밀이었고. 아니, 그런데 흰둥이 아저씨는 도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크윽. 역시 만만하지 않은 아저씨. 나는 구시렁거리면서 편지를 마저 읽었다. 그 후의 내용은 자신도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어서 나아라, 뭐 그런 말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왜 편지를 다섯 개나 보낸 거지?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제니트의 다른 편지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공주님께서 제 안부를 물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상냥하신 분인지. 저는 다친 곳이 아무 데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오히려 공주님이 걱정됩니다. 부디 하루 빨리 쾌유하시기를. p.s. 혹시 결례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종종 지금처럼 공주님께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망설이다가 세 번째 편지를 적습니다. 공주님의 허락 없이 또다시 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공주님께서는 제게 편지를 보내선 안 된다고 하시지도 않았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고 제멋대로 생각해 버리기로 했어요. 혹시 제가 귀찮으시더라도 부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요. 실은 멀리 있는 가족을 제외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이 되기도 하고 무척 즐겁기도 해요. 아. 이제키엘이 아를란타에 있을 때 그에게 편지를 썼던 적은 있네요. 하지만 그는 제게 있어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제키엘의 편지를 받으셨나요? 그 역시도 공주님을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얼마 전 이제키엘의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우연히 보았는데 수신처가 황실이더군요. 그래서 공주님께 보낼 편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사실을 이제키엘에게는 아는 척하지 않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이 편지를 적고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 어떤 의미로 그와 저는 동지라고도 할 수도 있을까요? 나는 제니트의 남은 편지도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갔다. 아무래도 제니트는 작문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내게 보낸 편지들이 하나같이 재미있는 것을 보면. 남은 두 편지의 내용도 앞의 것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날 걱정해서 안부를 물으려 시작된 편지가 왠지 점점 친구한테 보내는 일상 편지 같은 느낌으로 변해가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14살이면 한창 그럴 나이인가……. 어헝. 이런 생각하니까 나 또 늙은 것 같당. 다른 편지나 열어봐야지. 앞서 봤던 제니트의 편지가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의 편지들 내용은 다 그게 그거 같았다. 이제키엘도 그렇고 백합 소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하나같이 내게 걱정을 표하며 어서 나으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방금 전 읽은 편지들을 들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을 창가에 있는 내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나도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 보자. 나한테 편지지가 있던가.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다과회 초대장을 보낼 때에는 대필을 했기 때문에 내가 직접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나한테 쓸 만한 게 있을지 직접 서랍을 찾아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서랍을 활짝 열고 그 안을 좀 뒤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편지지라고 불릴 법한 종이를 찾아냈다. 하지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나는 그것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제니트뿐만 아니라 다른 영애와 영식들이 보낸 편지에서도 하나같이 놀라운 센스가 엿보이는데 나만 이런 데다 답장을 보내면 속으로 촌스러운 공주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크으. 게다가 내가 받은 편지지에서는 이렇게 좋은 향기까지 나는데. 킁킁. 결국 나는 릴리를 불러 평소 초대장을 쓸 때 보냈던 종이들을 모조리 다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예쁜 것을 고른 다음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선택한 것은 탐스러운 장미가 귀퉁이에 작게 그려진 편지지였다. 어디 보자. 뭐라고 답장을 써야 하나……. 잠깐 동안 펜의 끝 부분을 턱에 대고 고민하던 나는 마침내 마음을 정한 뒤 하얀 종이 위로 손을 움직였다. -친애하는 마그리타 양에게. 본의 아니게 답장이 늦은 것을 사과드려요. 일전에 보내준 편지들은 모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답니다……. * * * 그 후로 나는 제니트와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다. 어차피 에메랄드궁에서는 딱히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따금씩 도착하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보내는 것은 내 새로운 취미 생활이 되었다. “공주님, 어쩐지 요즘 좀 야위신 것 같아요.” “어, 그래?” 릴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말했을 때에도 나는 향기가 배어 나오는 봉투를 열고 제니트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요즘 살이 빠진 거 같다고? 이상하네. 난 요즘 엄청 편하게 잘 있는데. 매일 놀고먹고 하는데 오히려 살이 쪄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써서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해야겠네요.” 하지만 릴리는 잠시 동안 어쩐지 조금 흐린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난 이 이상 잘 먹으면 돼지가 될 것 같은데. 으으. 하지만 난 역시 릴리의 저런 표정에 약했다. 그냥 아무 말 말아야지. “공주님, 정말 오늘도 정원에 가실 거예요?” “응. 날씨도 좋은데 실내에만 있으면 아깝잖아.” 릴리가 왜인지 머뭇거림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으나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흐린 표정으로 나를 향해 설핏 미소 지어 보인 뒤 다과 준비를 위해 먼저 방을 나섰다. 타악. ======================================= [88화] 나는 제니트의 편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곧바로 답장을 쓰지 않고 조금 더 고민한 뒤 오늘 저녁이나 내일 쓸 생각이었다. 사실 그녀와 내 편지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냥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평범하게 주고받는 것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우리 둘 다 마음대로 밖에 외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니트는 알피어스 공작저에서, 그리고 나는 에메랄드궁에서 뭘 하며 지냈는지가 편지의 주된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제니트와 이렇게 오래 편지를 주고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녀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더 편하고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면 실제로 얼굴을 맞댔을 때에도 그랬지. 언제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냐는 양 막상 그 눈을 마주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마음의 방어벽이 스르륵 얇아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는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의 내가 제니트에게 매정히 대하지 못했던 이유와 지금의 내가 그녀와 주고받는 편지를 쉽게 끊지 못하는 이유는 조금 다를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를 대하는 내 감정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그때의 내 감정이 그녀를 향한 연민과 동정심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내 감정은 아마……. “할 일이 없으니까 자꾸 잡생각만 많아져.” 나는 양손을 들어 뺨을 아프지 않게 찰싹찰싹 내려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며칠에 한 번 꼴로 주고받는 편지에 일상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요즘 제니트가 내게 보내는 편지에는 그녀의 이모에 대한 이야기도 속해 있었다. 여기서 제니트의 이모라 하면,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 제니트를 제1 공주로 만들 요량으로 아타나시아를 죽게 하는 데 일조한 여자였다. 아직 갓난아기였던 제니트를 알피어스 공작가에 맡긴 것도 바로 그녀였지. 물론 제니트는 어디까지나 현재 마그리타의 성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가족 같은 분’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편지 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 접하는 동안 나는 제니트가 말하는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그녀의 이모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편지 속의 제니트는 그녀가 곧 제도로 올라올 예정이라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기야 제니트에게 있어서는 어머니 쪽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니 그런 그녀를 오랜만에 만난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제니트처럼 기뻐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오늘 제니트의 편지를 받아보는 순간, 나는 이 뱀 같은 여자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제도로 올라온다는 것인지 의심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제야 슬슬 뭔가 행동 개시를 하려는 건가? 하긴, 소설 속에서도 그녀가 로자리아의 영지를 떠나 제도로 올라온 것이 이맘때쯤인 것 같기는 한데. 다만 이야기 속에서는 제니트가 데뷔당트를 성공적으로 마쳐 이미 황성에 들어와 있었다는 점이 지금과 다르기는 했다. 어찌 되었거나 그래서 나는 괜스레 머릿속이 복잡하여 다른 때처럼 제니트의 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가 없었다. “아, 날씨 좋다.” 궁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슬쩍 손을 들어 눈부신 햇살을 가렸다. 오벨리아는 일 년 내내 봄과 여름만 번갈아 오는 나라였기 때문에 사실 비가 오거나 심하게 덥지만 않은 이상 날씨가 항상 좋기는 했다. “오셨어요, 공주님.” 하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정원에 들어서자 여느 때와 같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필릭스도 없었고, 어차피 내가 갈 데라고는 에메랄드궁의 내부가 전부였기 때문에 근래 들어 나는 이동할 때마다 혼자서 움직였다.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기 때문인지 나도 거기에 금세 익숙해졌고, 이제는 궁인들도 혼자 있는 나를 볼 때면 전처럼 흠칫하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했다. “도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주세요.” “고마워, 세스.” 내가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하자 그녀는 아까 전의 릴리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아예 정원을 떠난 것은 아니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장미 덤불 사이로 사라지는 세스를 보며 쩝 쓴 입맛을 다셨다. 아이 참. 요즘은 나만 보면 다들 저런 표정이네. 그녀들의 저런 얼굴을 볼 때면 나도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기야 내가 그녀들이었어도 지금의 나 같은 상황에 처한 여자애를 만났으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도 몰랐으니까. 낮은 한숨을 내쉰 뒤 테이블 위를 보자 거기에는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가 한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때보다도 유독 초콜릿에 집중된 디저트들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내 기분을 신경 써준 티가 났다. 크으. 역시 세스 언니는 차가운 도시 여자지만 나한테는 따뜻하다니까. 나는 잠깐 감동의 시간을 갖다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사실 릴리나 다른 시녀 언니들은 클로드와 늘 함께하던 이 정원에서 내가 혼자만의 다과 시간을 갖는 것이 마음 쓰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원래 세상은 혼자 사는 법. 전생에서도 혼밥, 혼술이 유행한 이유가 뭐겠어? 피곤하게 다른 사람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이게 얼마나 좋은데. 보는 눈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이렇게 과자도 와구와구 막 집어먹을 수 있고 말이야! 게다가 클로드가 없다고 해서 나까지 발길을 끊기에는 정원의 풍취가 너무나도 좋지 않은가? 그런데 클로드 때문에 이런 명당자리를 이용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건 완전히 주객전도지! 애초에 여긴 이 황성에서도 유일하게 내 소유인 에메랄드궁이잖아? 그건 기억을 잃고 나한테 유폐 명령을 내린 클로드도 도장 꽝꽝! 찍어서 인정한 사안이다 이거야. 그래서 나는 다른 시녀 언니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한가로이 주변의 경치를 즐기며 티 테이블 위에 놓인 초콜릿 쿠키를 맨손으로 마구 주워 먹었다. 이것 봐. 이렇게 삼시 세끼 다 챙겨 먹고 간식까지 막 먹어대고 있는데 내가 살이 빠졌을 리가. 아무래도 릴리가 요즘 내 걱정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잠깐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자 잔디 위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가 속절없이 흔들거렸다. 나는 직접 찻주전자를 들어 내 앞에 놓인 찻잔에 액체를 콸콸 들이 부었다. 클로드는 이 간단한 것도 자기 손으로 하는 법 없이 늘 시녀 언니들을 시키곤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멀쩡한 손발이 있는데 이 간단한 일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시킬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황족이나 귀족들은 남들 앞에서 신경 써야 할 체면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었지만, 흥. 쩌리 공주에게 그딴 건 없다! 게다가 지금은 나 홀로 다과 시간이라 어차피 보는 눈도 없는데 뭐 어때. 그런 생각으로 나는 평소 클로드의 앞에서 보이던 내숭도 다 집어치우고 의자에 불량하게 퍼져 앉아,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 머리까지 손 위에 삐딱하게 얹었다. 아, 편하다. 다른 사람 눈 신경 안 쓰고 나 좋을 대로 하니까 이렇게 편한 것을. 귀족들에게는 예법 공부가 필수 소양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교본을 보면 영애들한테 요구하는 게 영식들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깐깐한 것 같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예쁘게 앉아라, 예쁜 말씨를 써라, 항상 바른 몸가짐을 보여라.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여자들한테만 왜 이렇게 바라는 게 많아? 에이, 더러워라. 퉤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잠시 심통이 나서 찻잔 속의 액체를 냅다 들이마셨다. 차를 한 잔 다 비우고 나자 입안 가득 은은한 향기가 차올랐다.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건 리페차였다. 사실 단걸 선호하는 내 입맛에 더 맞는 다른 차도 많이 있었지만 클로드를 따라 마시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도 다과 시간마다 리페차만 마시고 있었다. 나는 텅 빈 찻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꽃이 만개한 정원에는 그윽한 향내가 감돌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연초록의 잎사귀를 한결 더 짙은 빛으로 물들였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위에 그늘을 만들고 있는 풍성한 나뭇잎도, 또 내 발아래로 깔린 풀잎도 저 멀리서부터 날아온 바람에 휩쓸려 사부작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파릇한 잔디 위에 위치한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 두 개. 테이블 위에 내가 좋아하는 온갖 종류의 쿠키와 케이크 따위가 놓여 있는 것까지 여느 때 보아오던 풍경과 같았다. 하지만 그 위에 찻잔이 하나라는 것과 내 맞은편 자리가 텅 비어 있다는 점이 이전과 달랐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찻주전자를 들어 그 안에 있는 액체를 찻잔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찻주전자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은 뒤 눈앞에 고인 말간 찻물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충동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달칵. 내 맞은편 자리는 그냥 팔을 뻗어서 닿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야만 했다. 잠시 후, 내 찻잔은 맞은편 비어 있는 의자 앞에서 모락모락한 김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비록 차를 마실 사람은 여전히 그곳에 없었지만 찻잔이라도 놓고 나자 옅은 만족감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눈앞의 광경을 또다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잠시 후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아, 참새.” 그리고 파란 하늘 위로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실로 조용하고 평온한 다과 시간이었다. 내가 다시금 맞은편에 있던 찻잔을 내 앞으로 가져온 것은 그 내용물이 차갑게 식은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제24장 그냥 쩌리 공주도 아니고 미움받는 공주라니 “오늘이 폐하의 탄신일이네요.” 아침에 내 머리를 빗겨주던 릴리가 말했다. 나는 하품을 하다 말고 거울에 비친 릴리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펴보고 있던 참이었다. “응. 다들 많이 바쁘겠다.” 그러게. 오늘이 클로드 생일이네. 하지만 나는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다만 여상히 반응했다. “저녁 때 가넷궁에서 연회가 열린다고 해요.” 가넷궁을 비롯하여 황궁 안이 클로드의 연회 준비로 떠들썩하단 것은 얼마 전 간만에 에메랄드궁을 찾은 필릭스에게서도 들은 이야기였다. 원래는 나도 그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그것 역시 클로드가 기억을 잃으면서 없던 계획이 되어버렸다. 14살이 되어 데뷔당트를 치른 황족이 황제의 탄신일 연회에 불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던데……. 뭐, 정작 생일인 사람이 초대를 안 하니 어떻게 하겠어. “어차피 내가 갈 것도 아닌데 뭐.” “폐하께서는 분명히 금방 완쾌하실 거예요.” 릴리가 나를 위로하듯 단언했으나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그저 한번 설핏 웃어 보이고 말았다. 오늘도 창밖에는 해가 쨍쨍했고 파랑이는 새장 속에서 얌전히 모이를 주워 먹고 있었다. 새를 계속 새장 속에만 두면 갑갑할 것 같아서 가끔은 방에 풀어주기도 했지만 그 직후에는 여지없이 파랑이를 다시 새장 속에 넣는 것이 문제였다. ======================================= [89화] 잘 훈련시키면 전서구로 쓸 수도 있다고 했지만 도대체 무슨 수로 파랑이를 훈련시키라는 거지? 으음. 아무래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궁에 부르던가 해야겠다. 찌르릉. 나는 파랑이가 밥 먹는 모습을 보다가 다소 따분한 손길로 앞에 있던 책을 펼쳐 들었다. 한동안 에메랄드궁에서만 지내야 했기 때문에 클로드가 만들어주었던 내 전용 도서관에도 직접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요즘은 시녀 언니들에게 부탁해 책을 가져와 읽고는 했다. 나는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상태로 책장을 넘겼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세계 문학 전집이었는데, 사실은 좀 더 흥미진진한 소설책이 보고 싶었지만 시녀 언니들에게 내가 도서관에 숨겨놓고 읽던 책들을 가져다 달라고 차마 말할 자신이 없어서 참았다. 크흑. 지난번의 굴욕은 루카스와 문지기 아저씨들에게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구. 아, 그러고 보니 루카스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도대체 그 세계수라는 게 어디에 있는 건지는 몰라도 상당히 먼 길을 가야 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지. 지금 루카스가 내 꼴을 보면 분명 비웃겠지? 나는 책을 펼쳐 놓고 또다시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다가 문득 손바닥을 위로 가게 펼치고서 읊조렸다. “돈.”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방에 동전들을 만들어냈던 날 이후로 나는 제대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되다 안 되다 하는 거지? 어떨 때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다가도, 또 어떨 때는 아무리 용을 써도 마법이 발현되지가 않았다. “금화!” 휘이잉. “금덩어리 나와라!” 휘이이잉. 커흡. 역시 마법 쓰는 건 쉬운 게 아니었어……. 미, 미안하다. 루카스. 사실 처음 마법 쓰고 난 이후로 너를 조금 만만하게 봤는데. 나는 다시 팔을 내리고 소파에 널브러졌다. “공주님, 들어가도 될까요?” 릴리였다면 자세를 다시 바르게 했을 테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문 밖에 서 있는 건 한나였다. “들어와.” 그래서 나는 그냥 소파에 널브러진 채로 그녀를 맞았다. 문이 열리고, 한나는 한량처럼 퍼져 있는 나를 보고 한순간 흠칫했다. “피, 피곤하신가 봐요, 공주님?” 그런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게, 왠지 사춘기 조카를 대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공주님 드리려고 마들렌을 만들었어요.” “아, 맛있겠다.” 한나가 가져온 간식을 보자 급속도로 사그라지던 기운이 다시 되살아났다. 크흡.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역시 어릴 때부터 내 간식 담당이던 한나야. “그런데 기분 탓인가? 오늘따라 궁이 조용하네?” “아. 연회 준비 때문에 인력 보충이 필요하다고 해서 저희 궁에서도 몇몇이 차출되어 간 모양이에요.” 아하, 그렇군. ‘우린 가뜩이나 연회 준비하느라 바쁜데 너희는 할 것 없지? 그럼 와서 일이나 도와라!’ 뭐 이렇게 된 일인가 보구나. “그래서 세스도 오늘은 하루 종일 가넷궁에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럼 한나, 심심하겠네?” “아이, 공주님도 그러시기예요? 저 원래 세스랑 안 친하다니까요.” 이미 에메랄드궁에 있는 모두가 아는 진실을 부정하면서 한나는 또다시 투덜거렸다. 세스와 한나가 바늘과 실, 혹은 젓가락 한 쌍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이미 나도 알고 릴리도 알고 에메랄드궁의 다른 시녀 언니들도 알고 또 그동안 세스가 무참히 박멸했던 벌레들도 아는 사실일 텐데 이제 와서 아닌 척은. “어쨌든 공주님, 요리사에게도 저녁 식사 때는 특별히 더 신경 쓰라고 했으니까요. 오늘은 저희끼리 즐겁게 보내요. 네?” 그리고 이어지는 한나의 말에 나는 마음이 조금 짠해지고 말았다. 아, 오늘이 클로드 생일인데 내가 혼자서 울적하게 있을까 봐 신경 써주는 거구나. 더군다나 원래 연회에 참석하기로 해놓고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린 거라서, 더더욱. “응. 고마워, 한나.” 나는 고마움을 담아 한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물론 이런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한량 자세로 있기는 좀 뭐해서 슬쩍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뒤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날 저녁, 나는 에메랄드궁의 식구들과 함께 단란한 식사 시간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있는 에메랄드궁으로 갑자기 기사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지금, 지금 뭐라고 했죠?”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선 릴리의 뒷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금 막 에메랄드궁에 갑자기 쳐들어온 기사들은 그녀와 대적하고 선 상태였다. 그들은 곧바로 내가 있는 식당까지 들어와 실로 놀라운 말을 꺼내 들었다. “지금 당장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끌고 오라는 폐하의 명이십니다.” “끌고 오다니! 지금 누구의 앞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폐하의 진노를 사고 싶지 않다면 비켜서십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공주님께는 손 끝 하나 대지 못……. 앗, 공주님!” 릴리가 내 앞을 가로막은 채 비키지 않자 기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다른 이들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꺄악! 이거 놓지 못해요?” “당장 공주님한테서 손 떼요!” 나를 연행해 가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았는지, 기사들은 식당에 있던 릴리와 한나를 포함한 다른 궁인들마저 모조리 포박했다. 그리고 내 팔을 양쪽에서 잡아 강제로 나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공주님!” 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나는 낮에 한나가 말한 대로 그녀들과 함께 이제 막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지금은 연회장에서 파티가 한창 아니었나? 그런데 왜 클로드가 나를 끌고 오라고 한 거지? 아…….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야? 나를 데려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끌고 오라고 했다고? 이렇게 죄인을 호송하듯 강제로 포박해서? “아, 아타나시아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공주님 드십니다.” 클로드가 있는 가넷궁의 연회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나는 이 현실감 없는 상황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의 탄신일에 참석한다기에는 너무나도 볼품없는 내 꼴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은 내 입장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가 미처 내 이름을 다 읊기도 전에 기사들은 나를 데리고 그대로 문을 통과했다. 연회장의 눈부신 빛에 한순간 눈이 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멈칫할 새조차 없이 나는 양팔을 거칠게 잡아끌려 그대로 붉은 융단 위에 내동댕이쳐지듯 무릎 꿇려졌다. “아타나시아.” 그러자마자 머리 위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심한 듯 서늘한 그 음성은 내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아, 클로드다. 그 안에 온기 한 점 깃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를 좇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얼음장같이 차게 식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내 기껏 어울리지 않는 아량을 베풀어, 감히 짐을 우롱했던 계집을 살려 주었거늘.” 지독히도 냉혹한 눈빛이 그대로 나를 꿰뚫고 지나갔다. 클로드는 연회장의 가장 상석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 앉아 바닥에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언뜻 이 상황을 무료해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를 향하고 있는 눈동자만큼은 빙해만큼이나 시린 푸른빛을 띠었다. “하나 오늘 같은 날에도 그 발칙한 이름이 짐의 귀를 더럽히니 내 너를 어찌 해야 할까.” 클로드의 입에서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연회장 안에는 소름 끼치는 적막감이 더욱 깊숙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들이 주위에 이렇게 많은데도 내 귀에는 그들이 숨 쉬는 소리 한 번 들려오지 않았다. “폐하!” 다만 클로드의 옆에 서 있던 필릭스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일 뿐이었다. “도대체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 어찌, 어찌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그는 기사들에게 죄인처럼 끌려 들어와 연회장 바닥에 내팽개쳐진 나도, 또한 이 같은 잔인한 명령을 내린 클로드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필릭스 로베인.” 하지만 곧 소름이 끼치도록 싸늘한 목소리가 필릭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정녕 반역죄로 죽고 싶으냐?”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이곳에서 살면서 클로드가 필릭스를 향해 저렇게 섬뜩할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나같이 저 계집을 공주라 추켜세우며 헛배를 부르게 하니 저 계집도 덩달아 간이 부어 건방을 떠는 것이 아닌가.” 또한 클로드가 저렇게까지 온정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 이 연회는 그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클로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기가 사나워 보였다. 그리고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파드마 백.” “예, 폐하.” “지금 저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계집을 무엇이라 생각하나?” 클로드는 여전히 살벌하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그의 왼편에 서 있던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그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고, 그러자 다시 한 번 싸늘한 음성이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왜 벙어리가 되었지? 방금 전 그대가 그 입으로 내뱉은 말을 다시 한 번 읊어보라, 짐이 그리 명하지 않았느냐? 그새 귀라도 먼 것인가?” 파드마 백이라 불린 남자는 그제야 식은땀을 흘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직접 인정하신 아타나시아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공주 마마가 아니신지요.” “틀렸다.” 사실 파드마 백이 한 답변은 정론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클로드와 나의 관계를 본다면 그랬다. 하지만 그에 이은 대답은 긍정이 아니었다. “저 계집은 짐의 딸도 공주도 아니다.” 클로드는 자신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다른 귀족들 앞에서 내 존재를 부정했다. 그의 입에서 위와 같은 말이 선언처럼 흘러나온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동요했다.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연회장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혹자는 두 눈을 부릅뜨며 나를 보았고, 혹자는 놀란 듯이 입을 막았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옆에 있던 사람과 소리 죽여 무어라 귀엣말을 했다. “하물며 지금껏 단 한순간도.”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점차적으로 온몸에 찬물을 맞은 듯 손끝부터 차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것은 짐의 딸이었던 적이 없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아타나시아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였다. 그러니까 <사랑스러운 공주님> 속에서의 아타나시아 말이다. “저 앞에 무릎 꿇려 놓은 것은 한낱 하잘것없고 우매한 죄인일 뿐이니.” 나라는 존재는 그의 앞에서 송두리째 파괴되어 먼지처럼 허공으로 훌훌 흩어져 버렸다. “그러니 짐의 앞에서 두 번 다시 저것을 공주라 부르는 이가 있다면, 그때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반역죄를 물어 참수시켜 버리겠다.” ======================================= [90화] 클로드가 나를 딸이 아니라고 한 순간. 또한 그가 단 한순간도 내가 그의 딸인 적이 없었다고 한 순간. “하. 아타나시아라니, 그 이름이 가당키나 한가?” 클로드가 내보인 서늘한 비소가 그대로 내 심장을 뚫고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그에게 그렇듯이, 그 역시도 내게 있어 낯선 사람이었다. “지난번 그 얼굴을 보았을 때 결심했던 것이 있었지.” 클로드의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나는 그의 차가운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바닥에 깔린 융단을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유일하게 매달릴 수 있는 지푸라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잡았다. “다음에 또다시 널 보게 되면 그때에는 반드시 죽여 버리겠노라고.” 샹들리에의 흰빛 아래에서 클로드는 마치 피가 흐르지 않는 얼음 조각상처럼 보였다. 불필요한 자비심도 온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아타나시아를 딸로 인정하지도 그 이름을 단 한 번도 다정히 불러준 적조차 없는 냉혹한 책 속의 황제. “하나 오늘은 피를 보고 싶은 기분이 아니니 아쉽게 되었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바로 그 클로드였다. “흥이 식었다. 오늘 연회는 이것으로 파하도록 하지.” 그는 끝까지 나를 향해 비수 같은 날카로운 말과 한기 어린 냉정한 눈빛만을 남긴 채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계집을 당장 내 눈앞에서 끌어내라.” 그의 명을 들은 기사들이 다시 내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릭스가 그것을 저지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폐하!” “필릭스, 내 말이 우습나?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저것을 이 연회장에서 치우지 않고.” “폐하! 차라리 저를 벌하십시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필릭스의 말이 클로드의 말보다 우선시될 리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기사들에게 팔을 붙잡혀 자리에서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가시 같은 클로드의 말을 듣는 동안 깨물고 있던 입술이 아려왔다. 마침내 나는 입을 열어 내 팔을 아프게 붙들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손을 놓고 물러나라.” “폐하의 명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팔을 옥죄는 손길이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나는 잠시 이를 악 물다가 옆에 있는 이들을 힘껏 뿌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장 물러나라고 했다!” 파삭! 바로 그 순간 지난번 제니트와 다른 사람들을 튕겨냈을 때와 같은 힘이 기사들을 밀쳐 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힘이 미비해서 그들을 두어 걸음 주춤 물러나게 하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저마다 당황한 눈빛으로 자신들의 손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한차례 훑으며 차가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대도 좋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주위에는 방금 전과 비슷하나 약간 다른 적막감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은 놀라다 못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사색이 되어서 나와 클로드를 바라보고 있었고, 클로드는 서늘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 강제하지 않으셔도 제 발로 나갈 것입니다.” 사람들의 한껏 꾸민 옷차림도, 천장의 눈부신 샹들리에도, 하다못해 붉은 융단 옆으로 드러나 보이는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대리석 바닥도. 그 무엇 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연회장 안에서 오직 나만이 한없이 초라했다. 그러니 떠나는 뒷모습만큼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수백 번이나 연습했던 대로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며 예를 갖추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클로드에게 그의 딸이 아닌 오벨리아의 공주로서 인사했다. “이런 경사스러운 날 그에 걸맞은 선물 하나 마땅히 준비해 오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축사조차 원치 않으실 것 같으니 바라시는 대로 소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소름 끼치는 정적 속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클로드의 얼굴을 보았다. “오벨리아의 태양께 영광과 축복을. 탄신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폐하.” 그리고 마지막까지 고요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당장에라도 나를 잡아 죽이라고 명할 것 같던 클로드는 어찌 된 일인지 조용했다. 다만 내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기는 한지 그를 향하고 있는 등이 따가웠다. 드넓은 연회장 안에는 내가 문을 향해 걷는 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졌다. 끼이익. 나는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도 움츠러들지도 않고 클로드가 내게 직접 선사한 그 지옥에서 벗어났다. * * * 연회가 시작된 지 벌써 한참이 지났기 때문인지 복도는 한산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이 조용한 그 하얀 길을 혼자 걸었다. 또각, 또각. 내가 만드는 발자국 소리가 음산하게 내 뒤를 쫓아왔다. 처음에는 느린 발걸음이었으나 그 소리에 떠밀리듯 점차적으로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거의 뛰다시피 치맛자락을 날리며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타악! 콰당! 그러던 중 발목을 삐끗하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무릎과 손바닥에 아릿한 둔통이 스몄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에 넘어져 있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구두 굽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만이 따갑게 귀를 울렸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바닥을 짚은 채 형편없이 덜덜 떨리고 있는 내 손이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벌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회장을 빠져나올 때까지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있던 탓인지 손톱에 짓눌린 손바닥이 아팠다. 방금 전 그곳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그리고 그 후에 지금 내가 넘어져 있는 이 복도까지는 어떻게 걸어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 강제로 내던져져 구경거리가 된 것도 처음이었고, 또 그렇게 잘 갈린 날카로운 말을 손쓸 틈조차 없이 머리끝에서부터 무방비하게 뒤집어쓴 것도 처음이었다. 갑자기 덜컥 숨이 막혔다.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꾸역꾸역 토해져 나올 것 같아서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목을 감쌌다. 도대체 지금 내가 무슨 일을 겪고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주님!”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무의식중에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급박한 느낌을 풍기는 발소리가 다가온다 싶더니 곧 지척에서 숨소리 섞인 낮은 음성이 흘러들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나를 공주라 부르면 반역죄를 물리겠다던 클로드의 엄포가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계속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하면 그냥 가지 않을까?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시선을 느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잠시 후 멀어지는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내 고집이 통한 줄 알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곧이어 내 발목에 닿아오는 손길에 움칫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실례를 범하겠습니다.” 내가 놀란 것을 알았는지 이제키엘이 내 발목을 잡은 손길을 약간 느슨히 했다. 만약 자신의 손길이 불쾌해 거부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내 의지로 그의 손에서 벗어나도 좋다고 말하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탓에 나는 빛과 어둠에 반씩 잠긴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늘이 클로드의 탄신일 연회이기 때문인지 이제키엘은 지난번 데뷔당트 때 보았던 것처럼 성장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늘 단정하던 그의 머리카락은 급히 뛰어오기라도 한 듯 약간 헝클어져 있었다. 내가 움직임 없이 조용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자 이제키엘이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내 구두였다. 지금까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 넘어질 때 한쪽 구두가 벗겨졌던 모양이다. 한순간 그의 인기척이 멀어진다고 느꼈던 이유도 아마 이 구두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던 듯했다. 이제키엘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벗겨졌던 구두를 내게 다시 신겨 주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동안 이상하게도 점점 알 수 없는 기분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그의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방금 전 연회장에서의 일을 모두 보았을 텐데도 나를 향하는 그의 눈빛이나 목소리가 변함없이 너무 정중하고 따뜻해서……. 그래서 이렇게 지금껏 속에 꾹꾹 억눌러 왔던 감정이 제멋대로 울렁거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투욱. 바로 그 순간 이제키엘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본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또 한 번 툭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이건 다……. 이제키엘이 내게 다정히 대해 준 탓이다. 우습게도 그가 그런 만큼 방금 전까지도 더없이 모질게 나를 상처 입힌 사람이 더욱 선명하게 생각났다. 지난날의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너무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깨닫고 나니 너무나도 우스웠다. 상처라니. 내가 클로드에게 상처를 받았다니. 그가 나를 부정해서. 그가 나를 모질게 대해서. 그래서 이토록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다니.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그냥 살기 위해 그를 속인 것일 뿐이었는데. 그와 보냈던 시간들도 전부 내 생존을 위한 거짓이었을 뿐이었는데. 그런데 이게 뭐야.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렸잖아.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정을 줘버리고 말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가 나를 잊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나를 기억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래서 그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나를 거부하고 더 이상 전처럼 대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슬펐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부터 혼자라는 사실에 익숙했고, 사는 동안 무언가를 가진 날들보다 무언가를 포기하며 사는 날들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많았다. 아무리 죽을 만큼 갖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도,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있을 확률은 밤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적었다. 그러니 아무리 욕심이 나도 욕심내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간절히 원하고 있어도 그 간절함을 겉으로 티 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내가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었고, 이 비참함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나는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졌던 적이 없는 것처럼, 그 사람이 내게 주었던 애정도 온기도 다정함도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클로드가 이대로 내 삶에서 사라져도, 까망이가 없어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득문득 생각하고 말 때마다 가슴이 못 견디게 아려 오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에게 있어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은 바로 나였는데. 이제 나는 그에게 세상 그 누구보다도 먼 사람이 되었다. ======================================= [91화] 익숙하다는 것은 결코 아무렇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어서, 나는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문득문득 외로움을 느끼고는 했다. 아, 그래. 그러니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클로드가 나를 잊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괜찮았던 적이 없었다. 아무리 스스로에게 되뇌고 또 되뇌어도, 사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거짓말을 하면서 한심하게도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맛본 따스한 온기와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된 다정함에 취해서, 그것이 달콤한 향기를 내는 수렁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발을 담갔다. 그래서 나는 지금 조금씩 그 안에 침몰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달콤함을 몰랐으면 또 몰라, 이미 알게 된 이상 내 스스로의 의지로는 도저히 이 수렁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실은 매일매일 죽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지금의 불행을 초래한 것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내가 너무 원망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니 사실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난 지금 울고 있지 않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예.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하찮기까지 한 내 고집을 이제키엘은 비웃지 않았다. 그는 내게서 다시 시선을 돌리고 내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그저 묵묵히 옆을 지켜주었다. 멀리서 보이는 하얀 불빛이 시야에 물안개처럼 이지러졌다. 비 내리는 한밤의 풍경처럼, 혹은 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꿈결같이 뿌옇게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마치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항 속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 이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가미가 없어 숨을 못 쉬는 금붕어가 된 것 같은 갑갑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그날 밤은 정말이지 너무도 길어서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제24.5장 연회 이후 “이제키엘!” 알피어스 공작은 비로소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아들을 향해 기함하며 달려갔다. 오늘 있던 황제의 탄신 축하 연회는 엄청난 후폭풍을 남긴 채로 일찌감치 파해졌다. 그런데 그 논란의 중심거리가 된 아타나시아 공주를 따라 자리를 비운 이제키엘이 한동안 감감무소식이었으니, 그가 좌불안석으로 있을 만도 했다. “너마저 화를 입으면 어쩌려고 그 자리에서 공주의 뒤를 쫓은 것이냐?” 알피어스 공작은 이제키엘을 꾸중했다. 대관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아타나시아 공주가 황제 클로드의 노여움을 사 총애를 잃었다는 것만큼은 명확한 듯 보였다. 아니, 총애를 완전히 잃었다는 것은 아직까지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알피어스 공작은 처음 연회장에 끌려 들어올 때와는 달리 제 발로 당당히 문을 나선 공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끄응 신음했다. 아타나시아 공주가 기사들을 뿌리치는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그대로 자리를 떠나게 허락한 것을 보면 확실히 아직 황제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마차에 오르자꾸나.” 하지만 어찌 되었든, 황제 클로드가 아타나시아 공주를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공표하고 나선 이상 이제키엘이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위험했다. 그래서 로저 알피어스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이제부터는 아타나시아 공주와 거리를 두라는 말을 이제키엘에게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 총명한 아들이라면 이리 장황히 말할 필요도 없이 벌써부터 아버지인 그의 뜻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나, 어찌 된 일인지 이제키엘은 아타나시아 공주에 관한 일에서만큼은 이따금씩 불명확한 태도를 내비칠 때가 있었다. “아버지.” 마침내 이제키엘이 로저 알피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늘 이성적으로 행동하라 말씀하셨지요.” “그래.” “지금껏 제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아들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 스스로는 그 가르침을 오늘까지 제법 잘 따라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이었다. 이제키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로저 알피어스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저는…….” 그런데 이제키엘은 알피어스 공작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말을 꺼냈다. “생전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로저 알피어스는 지금 자신의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나직한 목소리에 그는 허를 찔린 기분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아버지, 제게는 그분의 눈물을 다시 볼 용기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이제키엘은 흔들림 하나 없는 눈동자로 아버지인 알피어스 공작을 마주하고 있었다. “또한 그분을 울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자신 역시 없습니다.” 이처럼 믿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로저 알피어스는 잠시 동안 그만 할 말을 잃은 채 그만 그답지 않게 버벅거리고 말았다. “이제키엘, 너…….” 이제키엘이 말한 ‘그분’이란 아타나시아 공주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로저 알피어스의 눈동자에 충격이 어렸다. 창을 통해 마차 안으로 새어 든 불빛이 이제키엘과 로저 알피어스의 옆얼굴을 금색으로 물들였다. 알피어스 공작은 그 불빛이 녹아든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곧게 자신을 향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미 그 어떤 말로도 아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설마 진심인 것이냐?” 소리 죽인 물음에 이제키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실 그것은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 후 마차 안에는 잠시 동안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잠시 후 로저 알피어스는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속 깊은 울림을 목 밖으로 토해낸 뒤, 마침내 이제키엘을 향해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오늘 일에 관여한 것은 내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키엘은 거기에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 앞으로의 일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바로 그 순간 로저 알피어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비대칭을 그렸다. 아들의 뜻이 무엇인지 알 듯하면서도 그간의 믿음이 있기 때문인지 설마 하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은 탓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잇따라 이제키엘이 내뱉은 말은 그에게 있어 더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준비 중이신 일이 그분께 누가 되는 일이라면, 저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너의 뜻이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로저 알피어스는 또다시 말문이 막혀 맞은편에 앉은 아들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아연히 바라보았다. “허…….” 문득 기가 찬 헛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부모 뜻대로 안 되는 게 자식 일이라더니, 설마 하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제키엘이 이럴 줄은 몰랐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결국 로저 알피어스는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감에 손으로 한차례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그는 제니트와 아타나시아 공주 중 아직 어느 한쪽의 손을 완전히 잡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쪽을 선택한다 한들 크게 다를 것도 없었지만 오늘 연회 때 본 바에 의하면 아타나시아 공주의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하나뿐인 아들이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온전한 제 의견을 내세운 것이 아니던가. 알피어스 공작은 미간을 좁힌 채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하지만 기나긴 하루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눈물바람이 된 제니트를 마주해야만 했다. “방금 서신을 받았는데 이모님이, 이모님이……!” 심상치 않은 그 모습에 로저 알피어스는 제니트의 손에 들려 있던 구겨진 종이를 급히 낚아챘다. 그의 얼굴이 곧이어 딱딱하게 굳어졌다. * * * “은쟁반이 좋을까요, 화분 받침이 좋을까요?” 옆에서 들려온 물음에 릴리안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걸레로 계단 난간을 닦다 말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세스가 있었다. “걸레 자루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니?” 그런데 난간을 문지르는 그녀의 손길이나 허공을 향해 있는 눈빛이 어딘가 매서웠다. 그에 릴리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세스의 고개가 옆으로 돌려졌다. 그녀는 릴리안을 마주하며 말했다. “충격 요법이 효과가 있다고 하던데 폐하의 머리를 한두 대 세게 때리면 어떨까 해서요.” “세스, 불경죄로 하옥되고 싶은가 보구나?” 누군가 듣기라도 한다면 황제 능멸죄를 물어 지하 감옥에 갇히고도 남을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다 또 세스가 다른 데서 경솔히 입을 놀릴 사람도 아니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릴리안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쉰 뒤 다시 화병 속의 꽃을 정리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폐하의 상태가 언제 나아질지 알 수가 없잖아요.” 게다가 릴리안의 마음도 세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의 탄신일 날 연회장에 갔던 아타나시아 공주가 어디 한 군데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은 천만다행이었으나, 그렇다 한들 그날 있었던 일을 쉽게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공주님을 그런 식으로 끌고 갈 수 있지? 평소의 우아하고 온화하던 모습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 동안 릴리안은 자신도 모르는 새 뿌득 이를 갈고 말았다. 그날, 기사들의 손에 붙들려 강제로 끌려갔던 아타나시아 공주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게다가 그 후로도 다른 궁인들과 함께 마음 졸이며 그녀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던 자신의 무력한 모습 또한. 릴리안도 처음에는 아타나시아 공주가 몸 성히 돌아온 것을 그저 기쁘게 여겼으나……. 나중에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세스에게 전해 듣게 되었을 때에는 그야말로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날 저녁 붉어진 눈가를 숨기지도 못 하고 에메랄드궁에 돌아와 오히려 의연한 모습으로 놀란 궁인들을 다독였던 아타나시아 공주를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아,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러셨을까. 단 하나뿐인 가족이 자신을 잊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나큰 충격일 텐데 더군다나 그런 끔찍한 일을 겪기까지 했으니. 아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그 속이 말이 아닐 것이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아니라고 우겼지만 날이 갈수록 그녀의 얼굴이 수척해지는 것도, 또 밤마다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도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런데 거기에 더해 이런 참담한 일까지 생기다니. ======================================= [92화] 가넷궁의 연회장 안에서 손님들을 맞을 궁인으로 차출되어 직접 그 사건을 지켜봤던 세스는 그 일을 전하는 동안 분개하여 눈시울을 붉힐 정도였다. 한나는 이미 그 말을 듣기 시작할 때부터 대성통곡을 했고, 릴리안도 그날 이후부터 오늘까지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검은 탑의 마법사님이 폐하를 낫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폐하께서 스스로의 용태를 인정하지 않으시니…….” 얼마 전 나타난 검은 탑의 마법사라면 황제의 병세를 완화시킬 방법을 알지도 몰랐지만 정작 그 당사자부터가 자신의 상황을 개선시킬 의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아. 걱정이구나.” “저도요. 아, 가엾은 아타나시아 공주님. 정말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하지만 릴리안은 아타나시아 공주는 물론이거니와 황제 클로드도 걱정이 되었다. 이미 아타나시아 공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되었으니, 차후 기억이 돌아온다면 이 일은 클로드에게도 비수가 되어 꽂힐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그들 모두에게 상처로 남을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탄신일 이후 폐하께서 더 이상 공주님을 찾지 않으시니 다행인 걸까. 분명 연회 때의 일로 또다시 공주님께 경을 치리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어야겠구나.” “저도 도울게요.” 릴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근래 들어 걱정이 마를 날이 없었다. 제25장 안녕, 아빠 “공주님, 오늘은 책을 읽지 않으세요?” 릴리가 오늘도 소파에 퍼져 있는 나를 향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별로 재미없어서.” 나는 오전부터 내내 지금 있는 자리에 누워서 천장을 타고 움직이는 햇빛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이걸 관찰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는 것뿐이니까 관찰이 아니라…….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요즘 하는 일 없이 멍하게 있는 게 취미라 그런가 보다. 나는 잠깐 동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올바른 명칭을 찾다가 금방 귀찮아져서 생각을 멈추고 다시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벌써 오후 세 시인데. 간식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야.” 하지만 요즘 들어 늘 그렇듯 오늘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릴리와 한나, 또 세스는 내가 간식을 거부한다는 데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원래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사실은 그들이 나 때문에 며칠 내내 계속 안절부절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그들에게는 충분히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내 일거수일투족에 다른 사람들이 신경을 쓰고 나 역시도 거기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머리 아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나를 걱정하는 걸 알면서도 매일매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때우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릴리의 앞에서조차 몸가짐을 신경 쓰지 않고 지금처럼 소파나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일 없이 뒹굴거리기만 할 정도로 말이다. 어찌 된 일인지 그 후 제니트로부터도 편지가 끊겨서 나는 말 그대로의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거야말로 클로드가 바라던 것처럼 쩌리 공주에 걸맞은 생활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릴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산책이라도 하시겠어요? 햇볕이 아주 좋아요.” “귀찮은데…….” “안 돼요. 이럴 때일수록 움직이셔야죠. 혼자 있고 싶으신 거면 뒤쫓아 가지 않을게요. 네?” 역시 릴리는 강력했다. 며칠 내내 소파와 침대를 떠나지 않던 나를 일어나게 만들다니! 하지만 아무리 귀차니즘의 대명사가 된 나라고 해도 릴리의 간절한 눈빛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의 부탁에 못 이겨 떠밀리듯 방을 나서고 말았다. “공주님!” “산책 가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는지 세스와 한나는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내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이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초롱초롱 눈동자를 빛냈다.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그래요. 오늘 날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녀들은 내가 드디어 방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아주 기쁜 눈치였다. 아앗.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보니까 뭔가 그동안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던 것 같잖아. “다녀올게.” 나는 약간 뻘쭘한 기분으로 세 사람, 그리고 복도를 걷는 동안 만난 다른 시녀 언니들에게까지 격한 환영을 받으며 건물을 나섰다. 밖에 나가자마자 눈부신 햇빛이 머리 위로 내리비쳤다. 아, 눈부셔. 그러고 보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해를 쬐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 어쨌든 기껏 바깥에 나온 김에 주변을 좀 어슬렁거리다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잠시 멈추어 있던 자리에서 발길을 뗐다. 그런데 설마 위에서 날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문득 든 생각에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홱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햇빛에 반사된 창은 그 내부를 투영시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눈동자를 가늘게 좁힌 채 다시 고개를 내리고 말았다. 에메랄드궁에만 틀어박혀 있게 되면서부터는 딱히 갈 곳도 없었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내 옷차림은 한결 간소화되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산책 삼아 걷는 것도 예전보다 더 편해졌다. 나는 릴리가 바라던 대로 주변에 있는 나무도 보고 풀잎도 보고 하늘도 보고 하면서 천천히 궁의 주변을 거닐었다. 그리고 그러다가 이내 하얀 장미꽃이 만발한 화원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장미 화원은 클로드와 내가 함께 다과 시간을 갖던 정원보다 훨씬 더 탐스러운 하얀 장미들로 가득했다. 이곳은 일전에 내가 지나가는 말로 장미가 예쁘다고 했다가 클로드가 어느 날인가 덜컥 만들어주었던 바로 그 화원 중 하나였다. 나는 꽃들을 감상하기 좋게 화원의 한가운데에 외길로 난 통로를 걸었다. 그러다가 옆으로 손을 뻗자 곧 손가락 끝에 만개한 꽃송이와 반질한 초록 잎사귀가 닿아왔다. 나는 손 안에 스치는 감촉을 느끼며 발길을 느리게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문득 손에 걸리는 장미를 더듬거리다가 그 줄기를 잡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뚜둑. 고개를 내리자 내 손에 꺾인 장미가 햇빛을 받아 한결 더 새하얗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잠시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내 바닥에 그것을 투욱 떨어뜨렸다. 그리고 또 외길을 따라 걷다가 다른 장미도 꺾어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정원 가득 새하얗게 피어 있는 장미를 보자 그것을 눈앞에서 치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뒤를 돌아보자, 내가 꺾어서 버린 흰 장미들이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빛나는 돌처럼 풀잎 위에 얼기설기 놓여 하얀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잠시 동안 가만히 서서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금 앞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서서 고요한 시선만을 보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쏴아아.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그의 금색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주위에 있는 장미와 풀잎도, 내 치맛자락도 그 바람에 쓸려 한차례 크게 흔들거렸다. 클로드와 나는 그 상태로 잠시 동안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장이 미처 예기치 못한 것이었는데도 나는 어째서인지 저 멀리 서 있는 그를 보고 그리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조만간 한 번쯤은 그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던 탓일지도 몰랐다. 클로드는 지난날 연회장에서 보았을 때처럼 나를 향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무 그림자를 삼킨 것처럼 짙은 녹색으로 물든 보석안이 먼발치에서 나를 꿰뚫었다. 침묵은 한없이 길게 느껴지기도, 오히려 그 반대로 한없이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클로드는 그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한 무정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잠시 후 그가 제자리에 멈추어 있던 걸음을 떼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장미를 들고 있던 손을 무의식중에 움찔 떨고 말았다. 쏴아아. 일단 그가 마음먹고 나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잠시 후 나는 클로드가 만들어내는 그림자 안에서 마주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어째서인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며칠간 심하게 앓았던 사람처럼 낯빛이 좋지 않았다. 마침내 나를 앞에 둔 채로 클로드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역시 살려두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그렇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이제까지 나를 협박했을 때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시리게 가라앉은 음성이 계속해서 나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봤을 때 진작 내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면 오늘까지도 그 얼굴이 이토록 질기게 기억에 남아 마음에 걸리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가 거기까지 말을 마쳤을 때, 내가 보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약간 색을 달리했다. 지금까지 무심함이 깊게 새겨져 있던 눈동자에 스산한 한기가 어렸다. 그 상태로 클로드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직! 콰쾅! 무형의 무언가가 서로와 만나 강력히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찌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가 부서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한차례 시야에 예리한 빛이 번쩍였다. 그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주위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장미들도 우수수 몸을 흔들었다. 나는 휘날리는 머리카락 틈으로 시리게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웃기는군. 그 보호 마법에 담긴 것은 분명 내 마력인데.” 그가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건조하게 읊조렸기 때문에 나는 방금 전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대관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으나 마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어쨌든 그 몸에 겹겹이 보호 마법을 건 것은 내가 맞다는 의미겠지.” 내 몸을 감싼 힘에 튕겨져 나간 그의 손은 그사이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기라도 한 듯 가느다란 상흔을 그리고 있었다. “한데 그것을 파괴하는 것도 나라니.” 그가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쿠우웅! 파직! 챙그랑!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구나.” 쏴아아. 눈앞에 하얀 장미 꽃잎이 흩날렸다.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가운데, 나는 또 한 번 허공을 가로지르는 거센 파공음을 들었다. 아……. 지금의 클로드는 정말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듯 단순히 나를 겁주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손에 깨져 나가고 있는 보호 마법이 그 사실을 내게 직접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그 얼굴. 그 표정.” 그 순간, 클로드가 나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거슬린다.” 파사삭! 콰앙! “그렇다면 없애버리면 그만이야.” 그것은 나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콰직! 챙그랑! ======================================= [93화] 나도 모르는 새 클로드가 내 몸에 겹겹이 새겨놨다 하는 보호 마법이 하나둘씩 순차적으로 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지난 세월 동안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내가 내 안에 차곡차곡 소중히 쌓아가던 것들도 하나씩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쿠웅! 파사삭! 고막을 찢을 듯이 울리는 날카로운 굉음이 우리 두 사람을 공중에 날려버릴 것처럼 거센 바람을 만들어냈다. 조금씩 내게 가까워질수록 클로드의 손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붉은 핏방울을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오늘에야말로 진정한 끝을 보겠다는 듯이. “하찮은 그 목숨.” 사실은 이런 장면을 몇 번이고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내 친히 끊어주마.” 언젠가 클로드가 나를 죽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오래전의 그때.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그러한 두려움마저 희미해져 그를 만나는 일은 내게 있어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파사삭! 챙! 정원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며 그와 함께 차를 마시고, 화원에 흐드러지게 핀 꽃을 한 아름 꺾어다가 그 품에 직접 안겨주기도 하면서. 쿠쿵! 콰지직! 사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를 내 가족이라 여기고 있었다. 한 번도 진짜 가족을 가져 본 적도 없으면서, 그래서 그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주제넘게도 가끔씩은 어쩌면 이런 게 진짜 아빠와 딸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파직! 챙그랑! 처음에 나는 그를 두려워하며 경계했고 그는 나를 잠시 동안의 여흥거리 정도로만 여겼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그런 마음이 그와 내 안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아마도 나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 사실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많이 행복했었나 보다. “네가 사라지고 나면.” 그러니까 ‘어떻게 이 사람이 나한테 이럴 수 있지?’ 같은 그런 원망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런 까닭 모를 답답함도.” 이렇게 된 건 전부 나 때문이었으니까. “그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계속해서 가슴 한구석을 찝찝하게 짓누르는 이 불쾌한 느낌도 사라지겠지.” 내가 루카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까망이와 거리를 두지 않아서, 또 내 몸에 있는 마력 하나 바보같이 뜻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그래서 당신이 그런 바보 같은 나를 구하려다 이렇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어쩌면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래,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그러니 죽어라.” 그래도 이런 클로드는 보기 싫어. 내 아빠가 아닌 당신을 보는 게 생각보다 더 아파. 지금도 이런 당신을 향해 소리 내서 말 한 마디 하지 못할 정도로 속이 너무 아려서 죽을 것 같아. “지금 내 손에.” 파삭! 챙그랑! 또 한 번의 파공음이 흩날리는 장미꽃잎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제 클로드의 손은 내 목에 거의 닿아 있었고, 거의 넝마가 되어 있는 그의 손에서는 새빨간 선혈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꺾어 든 장미를 든 손은 가시투성이 줄기에 찔리고 긁혀, 어느덧 흘러내린 붉은 핏방울이 그 밑에 있는 풀잎을 적셨다.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보호 마법은 이제 거의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이대로 한두 개쯤 더 파괴되고 나면 클로드는 원하는 대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전히 변함없는 무정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 곧 입술을 깨물었다. 콰지직! 하지만 나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파삭! 적어도 당신에게만큼은. 챙그랑! 지금 당신의 손에서만큼은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아……! 화아악!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서 흰 눈송이처럼 흩날리던 장미꽃잎이 회오리바람에 휘말리듯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쳤다. 눈앞에는 이 세상의 모든 새벽을 모조리 그러모아놓은 듯한 새하얀 빛이 주위를 온통 집어삼킬 것처럼 만발하기 시작했다. 내 목에 막 닿았던 클로드의 손이 그대로 멈추어졌다. 사라락. 나는 가까이에 있는 그의 얼굴이 점차적으로 무언가에 놀란 듯 차갑게 굳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위에 한가득 피어나 있던 장미꽃송이들이 다시 한 번 일제히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이미 하얀 폭풍우가 부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꽃잎도 빛도 아닌 새하얀 무언가가 뒤섞여 있었다. 먹먹한 소음이 귀를 멀게 했다. 소란스러운 침묵. 혹은 고요한 비명. 클로드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했으나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닿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시야를 뒤덮는 새하얀 물질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흰 물거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였다. 나는 흰색의 폭풍우에 떠밀려 서서히 공기 속에 잠겨가고 있었다. 마주한 얼굴은 분노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에 젖어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 나는 입을 열어 그에게 속삭였다. “안녕, 아빠.” 곧 눈부신 빛이 시야 가득히 점멸했다. 제25.5장 그 아빠, 클로드 눈앞에 새하얀 빛의 폭풍우가 산개했다. 자리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무형의 힘에 클로드는 눈동자를 굳혔다. “폐하!” 오늘은 여느 때와 같은 한가로운 날이었고, 필릭스에게 일찍이 전해 들었던 바에 의하면 에메랄드궁에 다과회를 열어 손님을 맞이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딸인 아타나시아는 지금쯤 제 궁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마땅했다.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하지만 클로드가 에메랄드궁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의 파장을 느끼고 급히 왔을 때, 아타나시아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클로드는 자신이 찾는 사람이 저 하얀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단숨에 깨달았다. 그것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태풍의 핵이 되어서. “필릭스, 사람들을 에메랄드궁 밖으로 내보내라.” “알겠습니다! 지금쯤 마법사들에게도 연락이 닿았을 테니 폐하께서도…….” 필릭스는 폭발하는 마력 사이에서 가까스로 구출해 낸 제니트 마그리타를 두 팔에 안고 있었다. 그녀는 이 이상 현상이 처음 발현되었을 때 보이지 않는 힘에 튕겨져 나간 충격으로 혼절해 있었다. 주위에 산발하는 바람이 너무 거세서 필릭스는 클로드에게 말하기 위해 목청껏 언성을 높여야만 했다. 그런데 그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클로드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폐하!” 필릭스가 두 눈을 부릅뜨며 불렀으나 클로드는 멈추지 않았다. 허공에 휘날리는 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뒤섞여 부서지는 태양 조각처럼 첨예하게 반짝거렸다. “안 됩니다, 폐하!”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서 시킨 일이나 해라. 방해된다.” 뒤에서 무어라 급박하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클로드는 힘의 파장 속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들였다. 파지직! 한순간 예리한 통증이 살갗을 가른다 싶더니, 곧 그의 뺨을 타고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마력은 마치 잘 벼려진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상황은 아주 좋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저 한가운데에 있을 아타나시아 역시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파직! 파아악! 강력한 힘의 파동이 침입자를 밀어내려는 듯 날을 잔뜩 세운 채 그의 온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클로드의 걸음을 늦추지는 못했다. 그는 폭풍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지금의 폭발을 강제로 잠재울 생각이었다. 지금의 그와 아타나시아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고, 클로드는 그 이상의 합리적인 방법은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그의 마력이 지금의 상황에서 강제로 개입할 경우 둘 중 한 명은 목숨이 위태롭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클로드는 모든 위험을 자신이 감수하는 방향으로 힘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생각을 안다면 열에 아홉은 미쳤냐며 기함할 것이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 그를 막아선다 해도 클로드는 지금 생각 중인 일을 멈출 의지가 없었다. 콰쾅! 파사삭! 그런 짓을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내 목숨과 바꿔 저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파지직! 클로드는 불안정한 마력이 가장 깊게 고여 있는 곳을 향해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새하얀 빛이 눈앞에서 폭발했다. * * *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금 그것을 농이라고 지껄이는 건가?” 클로드는 중요한 외교 문서 위에 도장을 찍다 말고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그를 짜증 나게 만들고 있는 사람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농이 아닙니다.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폐하의 단 하나뿐인…….” “필릭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온 싸늘한 음성이 필릭스의 말을 가차 없이 가로막았다. 그렇지 않아도 밀린 일이 많아 골치가 아프던 참이었다. 그런데 필릭스까지 계속 시답잖은 헛소리를 해대니 그의 심기가 불편해질 만도 했다. 게다가 현재 그는 몸도 편치 않은 상태였다. 필릭스는 그 이유가 마력 폭발에 휘말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클로드는 기가 차서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력 폭발에 휘말렸다니, 대체 왜?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이 나이 먹도록 마력 하나 제어하지 못해서 이 사달을 냈을 리는 없고. 허면 타인의 마력 폭발에 휩쓸렸다는 말인데. 이 좁은 황성에서 그를 의식 불명에 빠뜨릴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가 있었던가? “폐하께서 아타나시아 공주님 대신 위험을 자처하셨기 때문이지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문인데 필릭스는 더욱 기가 찬 소리를 늘어놓았다. “제 손도 뿌리치시고 직접 공주님을 구하러 그 마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시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보름간이나 의식불명 상태였다는 것만큼이나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공주라니? 도대체 그에게 언제부터 딸이 있었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 공주를 구하기 위해 그가 목숨을 걸었다고? “필릭스, 돌았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클로드는 진심으로 필릭스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보다 폭삭 삭아 있는 얼굴도 그렇고, 하루아침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란 말인가? 설마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하지만 계속되는 필릭스의 호소를 듣다 보니, 처음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 있었던 소녀가 문득 떠올랐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소녀는 감히 그에게 ‘아빠’라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했었다. 이제껏 비어 있는 황후나 비의 자리를 탐내며 그의 침실에 기어들어온 여인은 많았기 때문에 그리 놀랍지도 않았지만, 그의 딸을 자처하며 나선 사람은 또 처음이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 [94화] 생각해 보니 그 계집의 눈은 선명한 보석안이었다. “아무래도 폐하의 기억에 혼란이 온 것 같습니다.” 필릭스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그리 말했으나 클로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호라. 이제 보니 그 간악한 계집, 혹은 그 계집을 사주한 자가 흑마법을 사용한 게로구나.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필릭스마저 이렇게 단단히 홀려 놓을 정도라면 실력이 꽤나 출중한 자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필릭스의 얼굴이 10년은 더 늙은 듯 하루 만에 저렇게 폭삭 삭은 것도 흑마법의 부작용 때문인 모양이로군. 그제야 이 모든 일이 납득이 가서 클로드는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쩌면 필릭스가 그의 상태를 기억상실이라 우기는 것도 소녀가 술수를 부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마력 폭발 속에 뛰어들었을 리가. 설령 백번 양보해서 그 소녀가 진짜 그의 딸이라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자식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그런 정신 나간 일을 그가 할 리 없지 않은가?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죽은 그의 부친이 무덤을 기어 올라와 클로드를 비웃는다 해도 찍 소리도 못 할 만한 대단히 미친 짓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클로드가 생각했을 때 이번 일은 그의 상식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결론내린 뒤 일단 상한 몸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워낙 괴물 같은 그였기 때문에 회복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국정을 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드는 필릭스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깨달음은 아타나시아 공주에 대한 것은 아니었고, 그가 정말 지난 9년간의 기억을 잃었다는 점에 있었다. 오벨리아의 내정에서부터 각국의 외교 상황을 비롯한 것들이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집무실에 쌓인 일거리를 비롯해 필릭스가 따로 준비해 놓은 다년간의 자료들을 박박 긁어 읽고 나자 그 깨달음은 더욱 선명해졌다. 사실 클로드는 그렇지 않아도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얼굴이나 필릭스의 외모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보다 원숙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은근히 찜찜하던 참이었다. 그가 내상을 견디지 못해 까만 피를 토했을 때 상태를 살피러 왔던 궁의나 탑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 그럼 설마 필릭스의 말이 사실이라고? 클로드는 얼굴을 구기며 눈앞의 국내 정세 자료를 노려보았다. 그날 그는 집무실에서 밤을 새워 고민했지만 ‘그가 9년간의 기억을 잃은 것이 사실’이라는 것 자체만 가까스로 인정했을 뿐이다. 다른 건 둘째 치고서라도 그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헛소리할 정도로 한가하면 차라리 거기 앉아서 서류 처리나 돕지 그러나?” 그래서 클로드는 오늘도 아침부터 쳐들어와 그의 집무를 방해하는 필릭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그에게 책상 한쪽에 쌓인 서류를 뭉텅이로 안겨주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에 낯선 소파가 걸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내내 궁금하던 참이라 클로드는 필릭스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기 왜 소파가 있지? 내 집무실에 앉았다 갈 사람은 없을 텐데.” 가끔씩 급한 일이 있을 때 각료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그것은 대개 짧은 대화로 그칠 뿐이었다. 앉아서 상의해야 할 정도라면 옆에 있는 회의실을 사용하면 될 일이었고, 또 그런 공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라 하기에는 눈앞에 있는 소파가 지나치게 푹신해 보여서 이상했다. 하면 그가 가끔씩 쉴 때마다 사용하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클로드가 기억하기로 자신에게는 집무실에서 휴식을 취하는 취미가 없었기 때문에 저 소파의 용도가 못내 수상했다. 그런데 클로드의 물음에 필릭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폐하를 보러 오셨을 때 서서 기다리시지 않도록 들여놓으신 소파입니다.” “뭐라?” “게다가 앉았을 때의 푹신함을 고려하여 특별히 주문 제작하라고 폐하께서 제게 명하셨었지요.” 그 내용이 워낙 황당무계해서 클로드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잘 보십시오. 뭔가가 기억나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이곳에 종종 앉아 폐하께서 집무 중인 모습을 보셨었는데요.” 필릭스는 물 만난 고기처럼 달려가서 소파를 아예 클로드 쪽으로 돌려놓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계속해서 무언가를 떠올려 보라고 그에게 종용했다. 클로드는 그 간절한 눈빛을 잠시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하!’ 하고 기가 찬 소리를 내뱉었다. “이번에는 제법 신선한 농이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농이 아닙니다.” 필릭스는 급기야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듯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여간 진지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클로드의 표정은 절로 소태를 씹은 것처럼 떨떠름해졌다. 하지만 좀처럼 말이 되어야지 속아주는 척이라도 할 게 아닌가. “나도 거듭 말하지만 농담 따먹기나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마침 자리도 마련되어 있으니 일을 다 끝내기 전에는 입도 벙긋할 생각하지 말아라.” 차라리 지금처럼 필릭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 들여놓은 소파라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았다. 클로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집무실의 이상한 소파에 대한 생각을 저 멀리로 치워 버렸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의 의문은 계속되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저런 건물이 있었지?”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취미가 독서이십니다. 폐하의 명으로 3년 전 지은 공주님의 전용 도서관입니다.” “도서관?” 클로드는 귀를 의심하며 반문한 뒤 이내 정색했다. “웃기지 마라. 나는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 “그러시겠지요. 폐하께서는 기억을 잃으셨으니까요.” 필릭스는 건방지게도 그를 중증의 환자 보듯 하며 측은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동안 클로드는 꿈틀 눈매를 찌푸리고 말았다. 곧 그의 걸음이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을 향해 옮겨졌다. “페하, 오셨습니까!” “오벨리아의 태양께 영광이 함께하기를!” 마침내 눈앞에 다가온 문제의 건물 앞에서 클로드는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냈다. 가까이에서 본 건물은 그의 생각보다도 크고 웅장했다. 클로드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이 등허리를 잔뜩 곧추세운 채 깍듯이 인사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양새였다. “여기서 뭣들 하는 거냐?” 클로드는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로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 건물을 지으라 명한 기억도, 기사들을 이곳에 배치시킨 기억도 없었기 때문에 클로드는 지금의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금 전 들은 필릭스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폐하, 오셨습니까!’라니? 마치 전에도 그가 이곳에 왔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발언이 아닌가? 그런데 그의 착 가라앉은 물음에 기사들은 필요 이상으로 사색이 되어 그에게 사죄하기 시작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경비에 미흡함이 있었다면 소신들의 부족함 탓입니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욱 경비를 강화하겠습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오셨을 때 터럭만 한 위험도 없도록 이 한목숨 다 바쳐 문을 지킬 것입니다!” 클로드의 미간에 더욱 깊은 굴곡이 생겼다. 도대체 그 계집의 사술은 어디까지 뻗쳐 있단 말인가? 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까지 그 계집의 이름을 꺼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그의 앞에서 그 계집을 목숨 걸고 지키겠노라 선언까지 해? “일전에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개인 도서관에 허가받지 않은 이의 출입이 있었던지라 폐하께서 문을 지키는 기사들을 모조리 물고를 낸 뒤 갈아버리셨지요.” “아직도 그딴 헛소리를.” “그때 폐하께서 얼마나 노발대발하셨던지. 그래서 새로 배치된 기사들도 저리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옆에서 속닥거리는 필릭스의 말에 클로드는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지금 보인 기사들의 태도가 납득이 되는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클로드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니, 아니다. 아무리 말이 되는 것 같아도 말이 되지 않았다. 설마 저런 허황된 말이 진실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클로드를 향해 필릭스가 다시 한 번 속살거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잠시라도 안에 들어갔다 오시지요.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안 계실 때 폐하께서도 종종 이곳에 와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닥쳐라. 그런 기억 없다.” 하지만 클로드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고 다소 거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향해 문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은 또 우렁찬 목소리로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외쳤다. 그러나 그리 오래 걷지도 않아, 그의 발걸음은 다시금 우뚝 멈추어지고 말았다. 어째 길을 걷는 내내 그윽한 향내가 코끝을 간질인다 싶더니, 처음 보는 장미 화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저 소름 끼치는 화려함이라니. 이것은 마치 비나 공주가 즐길 법한 화원의 모습이 아닌가? “폐하께서 아타나시아 공주님이 장미를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황궁 곳곳에 장미화원을 만들라 직접 지시하셨지요.” 옆을 바짝 뒤따라오던 필릭스가 또다시 옆에서 속닥거렸다. 그 바람에 클로드는 그만 어깨를 크게 흠칫했다. “그중에서도 아타나시아 공주님이 계신 에메랄드궁의 장미화원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곳에서 두 분이 함께 오붓한 다과 시간을 갖기도…….” 이번에는 필릭스가 떠들든 말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가넷궁을 향해 걷는 클로드의 얼굴은 있는 대로 구겨졌다. “지금 보신 것뿐만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선물로 드린 금고와 보물 창고들도 한두 개가 아니지요. 궁금하시다면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필릭스…….” “송구하옵게도, 저를 그리 잡아먹을 듯 노려보신다 해서 있던 일이 없던 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폐하.” 허. 클로드는 기가 막혀 헛웃음 짓고 말았다. 만약 필릭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과거의 그는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나라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총비에게 홀려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었다는 선선대의 황제도 아니고. 그러니 지금까지 필릭스가 한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그 헛소리가 제법 진짜 같아서 깜빡 속아 넘어갈 뻔하기도 했으나, 자신이 실성했던 것이 아닌 이상 저런 말이 진짜일 리가 없었다. 클로드는 처음 가넷궁을 떠날 때보다 확연히 기분이 저조해진 상태로 침소에 들어섰다. “하루 종일 지겨운 수다를 들었더니 피곤하기 짝이 없구나. 좀 쉬어야겠으니 당장 나가라.” “제가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폐하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일 수 있고, 또 궁금하신 점이 있어도 제가…….” “당장, 나가라.” ======================================= [95화] 클로드는 이를 갈 듯이 재차 명령했다. 그러고 난 뒤에는 필릭스도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나려 했다. 클로드가 침실 휘장 너머로 언뜻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잠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쪽 구석에 있는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난날 피를 토하며 눈을 뜬 이후 그가 침대에 가까이 다가간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평소 쪽잠을 자는 그였기에 항상 침대 대신 소파를 이용하곤 했기 때문이다. 화악! 그런데 필릭스를 등지고 몸을 돌린 순간, 침대 기둥을 타고 벽면을 가린 휘장 너머로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클로드는 그것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거침없는 손속으로 휘장을 걷어냈다. 그리고 곧 시야에 들어온 것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 이상한 건 뭐냐? 주술이 깃든 부적인가?” 천 조각을 들어 올리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눈에 보아도 수상쩍은 기운을 몽글몽글 뿜어내고 있는 이상한 종이였다. 그 안에는 사람 같기도 하고 괴물 같기도 한 기이한 형체의 그림이 삐뚤빼뚤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그 기괴함이 클로드의 경계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침실 벽면에 몰래 붙여두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수상함은 배가 되었다. “세상에, 폐하!” 이것만큼은 필릭스 역시 처음 보는 것인지 가까이 다가와 벽을 확인한 그에게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을 보고 클로드는 역시 이것은 그 요망한 계집의 사술이 분명하구나 싶어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잇따른 필릭스의 말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이것을 이렇게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습니까? 아, 폐하께서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아끼신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클로드는 감동적인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자신을 향해 촉촉한 눈동자를 빛내는 필릭스 때문에 또 한 번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이것은 어린 시절의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폐하께 선물한 그림입니다.” “그 말인즉 이 사특한 사술이 담긴 그림을 그 계집이 그린 것은 맞다는…….” “사특한 사술이라니요? 아, 다시 보니 보존 마법이 걸린 것 같군요. 벌써 오래전의 그림인데 이렇게 빛바랜 곳 하나 없이 온전한 것을 보니.” 그 말을 듣고 클로드는 다시 한 번 눈앞에 있는 그림을 보았다. 방금 전에는 그의 딸 행세를 하는 계집이 몰래 수작질한 증거를 찾았다는 생각에 잠시 착각했으나……. 다시 한 번 살펴보니 그림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다른 누구도 아닌 클로드 자신의 것이었다. 그리고 필릭스의 말대로 그림에 걸린 것은 보존 마법이 맞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외의 어떤 마력도 담지 않은, 정말 말 그대로의 단순한 그림일 뿐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한들…….” 하지만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그림이 수상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 기괴한 형체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계집이 필시 나를 저주하려 이런 불길한 그림을 선물한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이딴 것을 벽에 붙여놓고…….” “실은 저도 놀랐습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에게 그림 선물을 받을 때마다 늘 탐탁지 않은 듯이 콧방귀를 뀌시더니, 뒤에서는 이렇게 고이 간직하고 계실 줄이야……. 게다가 혹여 때라도 탈까 직접 보존 마법까지 거시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저 필릭스, 입 하나는 무겁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보지 않는 침소 벽면에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그림을 남몰래 소중히 붙여두신 것을 어디에서도 발설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필릭스의 굳은 다짐에 클로드는 그만 답지 않게 말문이 막혀 옆에 있는 얼굴을 황망히 쳐다보았다. 뭐라? 이 그림을 자신이 소중히 간직해? 그래서 혹여 때라도 탈까 두려워 손수 보존 마법까지 걸어두었다고? “하아. 이렇게 보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 좌측부터 시간 순으로 배열해서 붙여놓으신 것 같은데, 역시 폐하십니다. 아, 폐하께서는 기억나지 않으실 테니 괜찮으시다면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가장 첫 번째는 공주님이 5살 때 그리신 폐하와의 즐거운 놀이 시간 그림, 그다음이 8살 때 그리신 폐하와 하늘을 나는 꿈 그림, 다음은 9살 때 그리신 보물 창고와 폐하의…….” 맙소사. 들을수록 점입가경이었다. 가관도 이런 가관이 따로 없었다. 일순간 극심한 두통이 밀려와서 클로드는 이마를 짚었다. 필릭스가 한창 떠들어대고 있는 말을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저게 사실이라면 그동안 누군가 그의 몸속에 들어와 있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행세를 한 다른 사람이 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클로드가 생각했을 때에는 그가 미쳤거나 필릭스가 미쳤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속속들이 나타나는 증거 앞에서 클로드가 바로 그 미친 사람일 확률이 점차 커져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폐하. 그 그림을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것 말고 또 다른 그림이 있단 말이냐?” 클로드는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외치는 필릭스를 향해 이제는 아예 지겹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상의 또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니 가당키나 한가? “제가 아는 바로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아니, 되었다. 설명은 필요 없다. 보나마나 또 이것처럼 미친 그림이겠지.” “아닙니다. 궁정화가가 그린 초상화입니다.” 바로 그 순간 휘장을 내려놓던 클로드의 손이 멈칫했다. 곧 그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제까지와 확연히 다른 온도를 품고 있었다. “초상화? 내가 초상화를 그렸다고?” 아직 미친 짓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클로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초상화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궁정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리도록 허락했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폐하와 공주님, 두 분이 함께 계신 모습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클로드는 이 정 떨어지는 황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죽을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었다. 보위에 오른 황제들이라면 누구나 그 기념비처럼 자신의 전성기 때의 모습을 박제해 남기기를 원했으나 클로드는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황자 시절에조차 황실 가족이라면 누구나 한 자리쯤 차지하게 마련인 거대한 화랑에 자신의 얼굴을 건 적이 없었다. 클로드가 황자일 때에는 그의 아버지와 형이라는 작자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황제가 된 이후에는 클로드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공주님의 청이었지요. 작업에 들어간 지 오래되지 않아 비록 아직 미완성이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자신의 딸이라는 그 어린 계집과 함께. “어디에 있지?” “보러 가시겠습니까?” 속에서부터 서서히, 엉망으로 뒤섞인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것은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인 동시에 얼음장처럼 싸늘한 혐오였다. 클로드는 파괴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필릭스가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있습니다. 아마 물감 냄새가 좀 날 텐데…….” 그리고 마침내 목적했던 곳에 다다랐을 때, 필릭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과연 방 안에는 기름 섞인 물감 냄새가 가득했다. 일부러 커튼을 쳐 놓은 것인지 시야에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클로드는 이번에는 직접 움직이는 법 없이 마력을 이용해 커튼을 걷었다. 촤르륵! 두꺼운 천이 일제히 한쪽으로 몸을 치우쳤다. 그와 동시에 밝은 햇빛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 너머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자연광을 오래 쬐면 변색한다 하니 커튼을 너무 긴 시간 동안 열어 두시면 안 됩니다.” 필릭스가 옆에서 초상화의 취급 방법에 대해 무어라 종알거렸으나 클로드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눈앞에 있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가 양팔을 뻗으면 얼추 크기가 비슷할 법한 사각형의 공간. 그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그였다. 클로드는 지금도 방의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주색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서 있는 것은 지난 날 침소에서 보았던 바로 그 소녀였다. 과연 미완성이라는 말대로 그림은 군데군데 색이 덜 칠해져 있었고, 곳곳에 뭉그러진 것처럼 형체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부분들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애초에 클로드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그림 속에 있는 두 사람의 얼굴에만 줄곧 못 박혀 있었다. 하! 그리고 굳은 듯이 그림 속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클로드는 잠시 후 그만 참지 못해 실소하고 말았다. 도대체 뭐냐? 그 계집이 만들어낸 같잖은 연극에 심취하기라도 한 것이냐? 이를 악물기라도 한 듯 곧 클로드의 턱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지금의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참을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림 속의 두 사람을 보는 동안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점차적으로 가슴속에서 크게 술렁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참으로 우습구나. 가족이라니. 아버지와 딸이라니. 너무 우스워서 이제는 메마른 비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만일 이런 정신 나간 짓을 저질렀던 이유가 사술이라 한다면, 그는 멍청하게도 간사하기 짝이 없는 속임수와 거짓말에 놀아났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 왜. 왜. 대체 왜. 클로드는 살아생전 저런 표정을 지어 본 적이 없었다. 한평생 그의 삶을 뒤덮고 있던 삶에 대한 이 지독한 염증과 권태도 온데간데없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린 얼음처럼 한없이 안온하고 편안해 보이기만 하는 저 멍청한 얼굴. 그는 자신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한데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탈을 쓰고 긴장감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사술이다. 역시 사술인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니 당장에라도 그 계집을 불러내 죽이지 않으면……. 클로드는 그 전에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림을 없애버리려 손을 들었다. 멈칫.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의 손은 단 한 번 작게 움찔했을 뿐, 여전히 아래로 늘어뜨려진 상태 그대로였다. 다시 한 번 눈앞에 있는 그림을 파괴시키기 위해 손을 들려 했으나 기이하게도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저는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옆에 있던 필릭스가 잠시 동안 클로드의 얼굴을 살피다가 곧 조용히 문을 나섰다. 달칵. 그러는 동안에도 클로드의 눈은 줄곧 그림 속에 있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해사한 얼굴을 마주하는 동안 도대체 왜 이리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인지. ‘아빠, 저 소원이 하나 있어요.’ 그러던 어느 순간, 누군가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 [96화] ‘이걸로 다음 생일 선물을 미리 앞당겨 받아도 좋아요. 들어주실 거예요?’ ‘소원이라. 그게 뭐지? 말해봐라.’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요. 화랑에 있는 다른 황실 가족들 그림처럼, 아빠랑 같이.’ 그러자 곧 밀려드는 두통에 클로드는 신음을 삼키며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어디에 있나. 눈앞에 거슬리는 것은 그저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니 그는 저 그림을 부숴야 했다. 부숴야 했는데…….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차마 저 그림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것이 뭐라고. 이까짓 그림이 뭐라고. 도대체 이 안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뭐라고……. “단단히 돌았구나.”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지금에도 이런 것을 보니 그 어린 계집이 그에게 부린 조화가 여간 신묘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클로드는 그 후로도 가시를 삼킨 것 같은 기분으로 눈앞에 있는 그림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새 잃어버렸던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기이한 그리움마저 느끼면서.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미쳤냐고 되물으면서도 해가 질 때까지 질리지도 않고. * * * 그 후 클로드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밀렸던 집무를 본 후 잠시간이라도 눈을 붙일라 치면 여지없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떠올랐다. 잠에서 깨어난 그를 울 것처럼 쳐다보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그는 매일 밤잠을 설쳐야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상화 속의 소녀가 다시금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는, 이번에야말로 이 맹랑한 계집을 단숨에 죽여 버리자고 생각했다. “아빠!” 사실은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게 맞는 일이었고, 이 아이가 그의 딸이든 딸이 아니든 그 사실은 이미 클로드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는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꿈속에서도 자꾸만 그를 괴롭혀 미칠 듯이 거슬렸고, 누군가와 닮은 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속이 뒤집힐 것처럼 울렁거려 짜증이 났다. “아빠가 까망이 데려갔어요?” 그런데 정작 죽이려고 마음먹고 난 후에도 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딸이라 하는 이 소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계집이 그의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지금 죽여야만 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그는 이 아이를 처리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것을 또다시 무의식중에 피하고 말 것이었으므로. “아빠, 까망이 죽이지 말아요.” 어리석은 계집. 제 목숨이나 걱정할 것인지 지금 그 주제에 누구를 죽이지 말라 부탁하는 것이냐? 지금 그가 자신을 살인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아빠…….” “아빠?” 게다가 소녀가 자신을 그리 부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꽉 조여 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닥쳐라. 한 번만 더 나를 그리 부르면 혀를 잘라 버릴 테니.” 하지만 어째서란 말인가. 그는 또다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죽이지 못했다. “당장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판이나 그 뻔뻔한 작태에 한순간이나마 흥미가 당긴 것은 사실이니 특별히 목숨만은 살려주마.” 미친놈.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저런 간악한 계집은 당장에 죽여 마땅한데 살려 주겠다니? 무방비한 소녀의 목숨을 취하는 것쯤이야 실로 간단한 일이 아닌가. 그저 손을 앞으로 뻗어 그 손끝에 마력을 싣기만 하면 되었다. “이 시각 이후로 이 계집을 에메랄드궁에 유폐시키겠다.” 그런데도 고작 그 간단한 일을 못 해서. “목숨이 아깝다면 궁 밖으로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말아야 할 거다.” 클로드는 아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을 싸늘히 외면한 채 자리를 떠났다.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정말 죽여 버릴 테니.” 하지만 소녀를 지나쳐 걷는 그의 얼굴은 방금 전의 견고한 표정은 가면이었던 것처럼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누군가 가슴을 세게 후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미친 듯이 쑤셔왔다. 누군가 서늘한 손길로 그의 목을 꽉 조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콰앙! 클로드는 침소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먹으로 거칠게 벽을 쳤다. 그런데도 찢어진 손등보다 가슴이 더 욱신거렸다. 그날 밤부터 클로드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이 아이를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것을 악몽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의 저편에 애써 묻어두고 있던 사람이 꿈속에 나타나 그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였다. ‘저를 사랑해 주셨듯이, 부디 제가 남기고 갈 이 아이도 그 품에 소중히 보듬어 아껴주세요.’ 꿈에서 들려오는 그리운 목소리에 클로드는 실소했다. 웃기지 마라. 누가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그는 딸을 둔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꿈속에 나타난 여인을 사랑했던 적도 없었다. 그래봤자 죽은 주제에. 옆에 있어달라는 그의 애원조차 뿌리치고 혼자서 죽어버린 주제에. 그래놓고는 이제 와서 꿈속에 나타나 누구를 부탁한다고? 그래. 필릭스도 그렇게 말했지. 아타나시아라는 그 계집이 다이아나와 그의 딸이라고. 지금 그의 꿈속에 나타난 여인이 죽기 전 그에게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이라고. 그렇다면 더더욱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 대신 살아남은 그런 계집을 딸로 받아들여 사랑하다니. 그것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클로드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향해 싸늘히 읊조렸다.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다. 지금까지도 한시도 그랬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정 그 아이가 걱정된다면 그대가 망령이라도 되어 돌아오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놓고 혹여나 그의 모진 말에 상처라도 입어 마주한 사람이 슬픈 표정을 짓지는 않을까 싶어졌다. 그러나 그를 혼자 두고 죽은 것이 괘씸해서라도 다정한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그리고 뜻밖에도……. 다이아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마치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전부 다 안다는 듯이. 그 얼굴에 한순간 울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시야에 비치는 모습이 점차적으로 흐려지기 시작하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었다.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지 마라. 입 밖으로 토해진 음성 역시 그답지 않게 급박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 싫었던 것이다. 이래서 부질없는 감정놀음 따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허덕여 이처럼 더없이 무력하고 초라해져서, 그래서 이런 볼썽사나운 애원밖에 할 수 없게 되니까. 하지만 다이아나는 끝까지 그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은 얼굴로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의 손 안에 또다시 끝없는 그리움만을 남긴 채로. “뭐지……?”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클로드는 꿈속에서의 일을 모두 잊어버렸다. 무슨 꿈을 꾼 것 같기는 한데, 새벽녘 눈을 뜬 직후부터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못 견디게 가슴이 먹먹했고 그 때문인지 잠시 동안 숨이 막혔다. 그 후로 클로드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러는 와중에 오히려 그는 다른 생각을 떨치려는 듯 하루 종일 정무에 집중했고, 탄신 연회가 열리는 날에도 그 직전까지 집무실에서만 밤을 새웠다. 또다시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꿈을 꿀 것 같아서 침소에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매일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필릭스가 가끔은 산책도 하고 바람도 쐬라며 옆에서 잔소리를 했지만 지난번 후원에서 자신의 딸 행세를 하는 소녀를 만났던 이후로는 건물 안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생활을 하는 클로드의 신경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클로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언제 이 지겨운 연회가 끝나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한데 오늘 연회에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오지 않으셨습니까? 지난 데뷔당트 때처럼 폐하와 다정히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요. 허허.” 어찌 보면 별것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그 말에 팽팽히 조여져 있던 끈이 끊어지듯 예민하게 반응하고 만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소녀를 죽이지 못했다는 것은, 이제는 작은 실소조차 내뱉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도 우스운 일이었다. 아니, 죽이는 것이 웬 말인가. 오히려 클로드는 눈앞에 있는 소녀를 향해 잔인한 말을 토해낼 때마다 자신이 독에 중독되기라도 한 듯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의 명으로 붉은 융단 위에 무릎 꿇린 소녀를 보는 것이 즐겁기는커녕 지금 이 순간 마치 그가 아주 중대한 실수라도 하는 듯한 까닭 모를 불안감과 자괴감마저 느껴졌다. 마주한 이를 향해 일부러 더욱 모질게 굴고 만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저 계집을 당장 내 눈앞에서 끌어내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클로드는 그동안 자신이 말로만 실컷 떠들어댔을 뿐, 사실은 눈앞에 있는 저 소녀를 죽일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강제하지 않으셔도 제 발로 나갈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각오 이전의 문제였다. 그는 저 소녀를 차마 자신의 손으로 죽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오벨리아의 태양께 영광과 축복을. 탄신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폐하.” 지난번 자신이 한 말을 잊지 않았는지 소녀는 그를 향해 더 이상 ‘아빠’라는 발칙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의 가슴에 쿠웅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져 앉았다. 클로드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숨을 죽인 채 바라보기만 했다. 콰앙! 와장창! 연회를 곧바로 파해버린 뒤 클로드는 집무실로 돌아와 책상 위에 있던 것들을 거친 손길로 전부 다 쓸어냈다. 시도 때도 없이 밀어닥치는 두통은 날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져만 갔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자꾸만 무언가가 생각날 듯 말 듯한데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클로드는 이제 하루 중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언뜻 창밖을 스쳐 지나갔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어둑한 음영이 드리운 눈동자가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온 햇살을 그 안에 한차례 담아냈다. 며칠 동안 문 밖에서 시끄럽게 굴던 필릭스도 이제 포기한 것인지 어제부터는 줄곧 잠잠했다. 기이하게도 오늘은 정신이 말짱한 느낌이었다. 머리를 깨부술 듯 사방에서 옥죄어오던 두통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끔하게 가셨다. 그와 대조되게도 햇살을 받고 선 클로드의 얼굴은 더없이 피폐했지만 그 스스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 그렇다면 오늘에야말로 이 끈질긴 두통의 원인이 되는 것을 없애버리자. 그렇게 이 지겨운 소모전도 완전히 끝을 내자. 그런 생각을 가진 채 그는 처음으로 에메랄드궁을 향해 직접 걸음을 옮겼다. ======================================= [97화] 이상하게도 아타나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그 소녀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두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새하얀 장미 화원 속에서 금빛 머리카락을 나부끼고 있는 소녀를 마침내 마주했을 때. 그 순간의 클로드를 잠식한 것은 뜻 모를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거기에 흔들릴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클로드는 이번에야말로 손에 살기를 실어 눈앞의 얼굴을 향해 주저 없이 내뻗었다. 파사삭! 챙그랑! 마력과 마력이 부딪쳐 내는 파도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음과 하얀 꽃잎들을 동반한 바람이 주위에 쉬지 않고 넘실거렸다. 콰직! 채앵!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텐데도 마주한 사람은 단 한 걸음도 그에게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야 그를 상대로 두려움을 느껴 몸이 굳은 것일까? 아니면 설마 아직도 그가 자신을 죽일 리 없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어리석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 당장에라도 뒤돌아 달아나는 것이 나을 터인데. 그리고 클로드는 사실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조차 아주 조금쯤은 그런 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했다. 파지직! 파삭! 챙그랑! 지금 그의 손에 무참히 깨져 나가고 있는 보호 마법은 기실 클로드의 마력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클로드는 수십 겹이나 포개져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 마력의 장을 보며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건 거의 강박적이기까지 한 수준이 아닌가? 마치 이 작은 소녀가 손끝 하나라도 다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 정도로 촘촘하고 견고한 보호 마법이라니. 그러나 그것을 부수고 있는 것 역시 클로드라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울 뿐이었다. 파사삭! 챙그랑! 하지만 서서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의문이 폐부를 찔렀다.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 허공으로 흩어지는 마력의 잔재를 보는 동안 클로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답해 주는 이 없는 의문이 마력의 소용돌이 속에 떠밀려 그를 덮쳐 왔다. 정녕 이것이 그가 바라던 일이던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끝났을 때, 정말 그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클로드는 억지로 수긍했다. 물론이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이 화원에 발을 들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죽을 것처럼 가슴이 아프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죽으면 마치 그 역시도 못 견뎌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가 눈앞에 있는 소녀를 해하려 하는 지금 이 순간이 지독히도 끔찍하고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챙그랑! 이제 보호 마법은 단 한 겹만이 남아 있었다. 마침내 그의 손이 소녀의 목에 닿았다. 팔딱거리는 맥이 손끝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순간, 클로드는 거의 미칠 거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는 새하얀 목덜미에서 손을 약간 떨어뜨리고 말았다. 화아악!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새하얀 빛의 파도가 일렁이더니 갑자기 방금 전과는 다른 하얀 무언가가 꽃잎과 뒤섞여 주위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서진 마력의 잔류인 줄로만 알았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보글보글. 눈이 멀 것처럼 티 한 점 없이 새하얀 빛의 물거품. 클로드는 마주한 사람이 그것에 휩쓸려 점차 그 형체를 흐리게 하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화아아.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온통 새하얬다. 지금 그가 선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언뜻 분간이 되지 않았다. 클로드가 멍하니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눈앞에 있는 소녀의 몸은 조금씩 물거품이 되어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불현듯 그는 다시금 앞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녀를 죽이기 위해 손을 내민 것이 아니었다. 안 돼. 가지 마. 클로드는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간절함에 집어삼켜져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하얀 물거품 말고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서……. “안녕, 아빠.” 빛의 파도에 눈이 멀 듯한 순간, 마침내 소녀가 그를 향해 속삭였다. 마지막 인사처럼. 마치 그것이 그를 향한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되는 것처럼. 그 직후 빛이 점멸했다. 아아, 그토록……. 그토록 섬뜩한 공포는 난생처음이었다. 클로드는 방금 전까지의 소란도 전부 거짓인 양 무거운 고요 속에 침잠한 장미 화원에서 홀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지금껏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원인이 비로소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는데도……. 그는 방금 전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한 고통 속에 내던져져 있었다. 당장에라도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마치 그가 가지고 있던 것 전부를 모조리 다 잃기라도 한 것처럼 끔찍한 상실감이 목을 졸랐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폐하!” 그래서 클로드는 방금 전의 소란에 달려온 필릭스와 다른 궁인들의 부름에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폐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공주님은 어디에…….” 그들은 마력의 파장 때문에 화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다가 그 힘이 잠잠해진 지금에야 부리나케 달려온 것 같았다. 필릭스와 에메랄드궁의 시녀로 보이는 여인들이 사색이 되어 그를 향해 물었다. “사라졌다.” 가까스로 입 밖에 낸 나직한 음성이 다시금 그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내 눈앞에서.” 다른 이들은 그가 아타나시아 공주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 일단 안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소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필릭스, 찾아내라.” 감히 내 손에서 빠져나가다니.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감히 그 따위 작별 인사를 남기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타나시아를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 그렇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서 찾아내 주마! 클로드는 그렇게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소녀가 사라진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흰 장미 한 송이와 그 주위에 흩뿌려져 있는 붉은 핏방울이 그 순간에도 그의 두 눈을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제26장 나를 찾지 마세요 오늘따라 밖이 떠들썩했다. 나는 양 볼이 가득 미어져라 베이컨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 넣다 말고 창밖을 보았다. 그러자 웬 게시판처럼 생긴 나무판자 앞에 우글우글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기에 저러지? 나는 의문이 생겨서 마지막 한 입 남은 빵조각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봤지만 앞이 가려져 게시판의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동안 사람들의 등 뒤에서 기웃거리다가 이내 직접 확인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에 슬쩍 물었다. 그러자 나보다 한발 앞서 밖에 나와 있던 여관의 주인아줌마가 대답해 주었다. “왜, 얼마 전에 사라진 공주님 찾는다고 방방곳곳에 방이 붙었잖아. 그런데 그림만으로는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다고 하니까 오늘 광장에서 공주님의 모습이 담긴 영상석을 틀어준다나 봐.” 그 말에 나는 한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한마디씩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관리국에서 일하는 친척한테 들었는데 그 영상석이란 걸 지역마다 하나씩 다 돌린다나 봐요.” “그거 엄청 비싼 거 아니야?” “그토록 아끼던 공주님이 사라지셨다는데 뭐 그런 게 대수겠수.” “그동안 공주님이라고 줄줄이 황성 안으로 모셔갔던 여자들도 결국 아니었다며.” “아가씨도 조심해. 요즘 금발 여자만 보면 다 데려간다는 소리도 있으니까.” “네, 그래야겠네요.” 나는 호호호 웃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곧장 방으로 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니, 영상석이라니? 도대체 그런 건 언제 만들어뒀대? 이런 시골 동네에까지 내 몽타주를 그려서 돌린 걸 알고 식겁한 게 엊그제인데 이번에는 심지어 2D도 아니고 3D라니! 크흑. 독하다, 클로드. 그렇게까지 나를 잡아서 죽이고 싶은 건가? 응? 나는 짐을 꾸리면서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방문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요즘 이상하게 여기저기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하고 있대요.” “남서부에서 산사태도 여러 번 발생했다던데. 왜, 그 무슨 백작 부인도 거기 휘말려서…….” “퀸른에서는 글쎄 눈이 내렸다나?” “퀸른은 사막이잖아?” “그러니까 이상한 조화지. 얼마 전 사이칸시아 신성 제국에서도…….” 모두 다 광장으로 몰려간 건지 밖은 아까보다 확연히 조용해졌다. 그래도 이번에 오게 된 곳은 작은 시골 동네라 황실 일에 딱히 크게 신경 쓰지 않아 편했는데 조금 아쉬웠다. 나는 마지막으로 식탁 위에 놓인 주스를 쭈욱 들이켜 마신 뒤 침대 위에 놓인 짐을 챙겨 들었다. 크으. 역시 사과 주스는 100% 과즙이 진짜지! 사실 짐이라고 해봤자 지난번에 시내에서 구입한 옷가지 몇 개와 주머니에 든 돈이 전부였지만 지금의 내 생활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따악! 나는 옷걸이에 걸쳐 두었던 망토를 대충 어깨에 두른 뒤 손가락을 튕겼다. 화악! 잠시 후 나는 바람이 솔솔 부는 들판 위에 서 있었다. “또 여기네.”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오늘도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나는 작게 살랑거리는 갈대숲을 보다가 짐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곳은 지난번에 루카스와 함께 비밀 외출을 했을 때 한번 들른 적이 있던 곳이다. 왜, 새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제키엘을 피해 하늘을 날다가 순간 이동을 위해 마지막으로 내려섰던 갈대밭 말이다. 끙. 사실은 아직도 이 풀이 갈대인지 억새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냥 내 편의를 위해 갈대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이곳은 지난날 장미 화원에서 나를 죽이려 했던 클로드에게서 벗어난 직후 내가 처음 오게 된 곳이기도 했다. 점멸하는 빛 속에서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이 흔들리는 갈대밭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시야 가득 흩날리던 장미 꽃잎은 어디에도 없이, 눈앞에는 바람에 낮게 흔들리는 갈대들만이 서로에게 고요히 몸을 부대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절체절명의 순간, 나도 모르게 순간 이동을 써버린 모양이었다. 그동안 내 말을 잘 듣지 않던 마력이 그 중요한 순간 나를 보호하려는 듯이 작용한 것을 보면 확실히 내 생존 본능이 강렬하긴 했던 모양이다. 으흑. 그걸 보면 역시 사람이 꼭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그 후 나는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물론 내 가출은 예기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땡전 한 푼 들고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노숙 생활을 한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세기의 위조지폐범이 되었기 때문이지! 음하하! ……가 아니고. 으엉. 나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갑자기 클로드가 나를 찾아오는 바람에 에메랄드궁에 숨겨놓은 내 예쁜 보석들도 미처 못 챙겨들고 나왔지 않은가. 어흐흑, 내 예쁜이들! 내가 그거 모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애초에 이럴 때를 대비해 마련해 놓았던 내 도주 자금이거늘! ======================================= [98화] 그렇다고 해서 클로드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황성에 다시 들어갈 수도 없고. 사실 클로드한테 들키는 게 걱정되면 내 소유의 금고나 보물 창고 중 하나만 털어도 될 일이었으나 순간 이동이란 게 그렇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그냥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 에메랄드궁에 있을 때 마법서에서 본 바에 의하면 무슨 좌표 계산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원하는 장소를 그려 보라고 하던데, 그놈의 좌표 계산이 영 복잡해서……. 마, 만약에 섣불리 시도하다가 보물 창고가 아니라 클로드의 눈앞으로 떡하니 순간 이동이 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위조 동전의 달인이 되기로 했다. 궁을 나온 이후 다시 마법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위조 동전을 사용할 때마다 양심이 콕콕콕 쑤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왜냐하면 난 루카스 같은 철면피가 아니니까! 크흑, 판사님! 이 돈은 제가 아니라 우리 집 고양이가 만든 겁니다! 그러니 선처해 주십시오! 물론 저는 고양이 같은 거 안 키우지만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까지 마력으로 만들어낸 동전이 탄로 난 적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언제 또 내 마력이 말을 안 들을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마법을 쓸 수 없게 될 상황에 대비해서 미리 만들어 놓은 돈과 간단한 옷가지는 꼭 챙겨들고 다녔다. 루카스처럼 아무 때나 마법을 뿅뿅 쓸 수 있으면 이 고생도 안 할 텐데 말이지. 쓰읍. 그래도 땡전 한 푼 없이 빈털터리로 궁을 나온 것치고 굉장히 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건 맞으니까, 솔직히 이건 고생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다가 나 잡혀가면 진짜로 다 털리겠지. 위조 동전 제조에 황제 능멸죄까지 얹어서 능지처참은 물론이고 시체까지 탈탈 털릴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까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고 있는 사람인데. 나는 여관에서 순간 이동을 하기 전에 들었던 영상석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궁을 나온 이후 클로드가 곧바로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은 것이 잘한 선택 같았다. 솔직히 순간 이동이란 게 꽤나 고위 마법인 만큼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도착지가 거의 랜덤이어서 초반에는 얼마나 골치 아팠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것도 하면 할수록 나름대로 숙련이 되는 건지 요즘에는 제법 조절이 되는 편이었다. 사람들은 딸을 너무너무 아끼는 황제가 시름에 젖어 사라진 공주를 찾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건 거의 지명수배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찾아서 죽이려는 거잖아! “그럼 이제 오벨리아에는 더 못 있으려나.” 그래도 지금까지는 국내에서만 떠돌아다니며 지냈는데 클로드가 시골 동네에까지 손을 뻗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더 이상 오벨리아에 있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 나는 새파란 하늘을 보며 멍하니 고민했다. 사실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조차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클로드가 나를 찾아서 방방곡곡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는 지금, 어떻게 보면 나한테는 또 한 번 위기가 닥친 거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별다른 걱정도 공포도 생기지 않았다. 솔직히 언제까지 내가 이런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든 숨어 다니려고 마음만 먹으면 정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순간 이동도 큰 어려움 없이 쓸 수 있고 또 혼자서 심심풀이로 연습해 봤던 다른 어려운 마법들도 몇 개는 성공했으니까. 미처 몰랐는데 역시 나는 마법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 아니다, 뭐. 혼자 독학해서 나만큼 하는 애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아무튼, 그래서 나는 클로드가 나를 죽이기 위해 찾고 있는 걸 알아도 전처럼 간이 쪼그라들거나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설령 클로드에게 이대로 붙잡힌다 해도 지난번 장미 화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그의 앞에서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일단은 나도 그에게 순순히 죽어줄 마음이 없었고 말이다. 그날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절대로 클로드 손에만큼은 죽지 않겠다고. 우수수. 옅은 바람이 내 머리를 쓸며 지나갔다. 주위에 있는 하얀 갈대들도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작게 몸을 흔들어댔다. 그러고 보니 벌써 그날로부터 시간이 꽤나 많이 지났구나. 나는 장미 화원에서의 일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뿐만이 아니라 가넷궁의 후원에서 있었던 일도, 클로드의 생일날 연회장에서의 일도 덩달아 꼬리를 물고 하나둘씩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뭉그러지는 빛 속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동자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입술을 사리문 채 소리 없이 눈물만 떨어뜨리던 내 옆을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지켜주었던 이제키엘. 나는 충동적으로 다음 이동 장소를 결정했다. “아를란타에나 가볼까.” * * * “하루 숙박하려고 하는데요.” “네. 숙박비는 방마다 달라요. 지금 남아 있는 방이…….” 나는 카운터에 있는 남자가 설명하는 것을 신기한 기분으로 경청했다. 와, 외국어다. 여기가 진짜 아를란타가 맞긴 맞나 봐. 혹시 방금 전 내 회화가 이상했던 건 아니겠지? 혹시 모르니까 말은 최대한 아껴야겠다. 지금 나는 이 근방에서 제일 큰 여관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말이 여관이지 층층이 쌓아 올린 건물이나 1층의 넓은 로비를 봤을 때 이곳은 거의 호텔 같았다. 역시 대도시라 그런지 시골에 있던 여관하고는 급이 다르구나! “세끼 식사는 숙박료에 비포함이라 식당에서 따로 지불하셔야 하고 미리 말씀해 주시면 방에서 드실 수도 있어요. 여기 열쇠고요. 계단은 왼쪽으로 쭉 가시면 바로 보일 거예요.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위조 동전으로 제일 좋은 방까지 쓰는 것은 비양심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그냥 중간 정도 되는 방을 잡고 카운터를 벗어났다. 으윽. 물론 가짜 돈으로 이런 호텔 같은 여관에 들어온 것부터가 충분히 비양심적이었지만 나도 한번쯤은 이런 데서 지내보고 싶었단 말이야. 그, 그래도 죄송합니다! 나중에 꼭 진짜 돈으로 갚으러 올게요! 나는 1층의 카페테리아로 보이는 곳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신사 숙녀들을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따악 손가락을 튕겨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마법을 해제시켰다. 어디 보자. 내 눈이랑 머리,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나? 나는 방 한편에 놓인 거울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마법은 제대로 풀린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머리색과 눈색을 마력으로 바꿔놓았었다. 사실 처음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 영 자신이 없었는데 황궁을 나오고 처음 사람들 앞에 나설 때 그냥 이러고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한번 시도해 보니까 다행히도 잘되더라. 그래도 혹시 또 마력 조절을 못해서 도중에 마법이 풀리면 눈은 몰라도 머리는 면적상 너무 눈에 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은 보석안만 가린 채 다녔었다. 그런데 금발 여자들은 모두 잡아갈지도 모른다는 지난번 여관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나서 이번에는 내친김에 머리까지 다른 색으로 바꿔 버렸다. 물론 여기는 오벨리아가 아니라 아를란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는 게 아니겠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외국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클로드의 손길이 타국에게까지 뻗어 있어서 여기서 잡히기라도 하면 외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헉.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나 지금 불법 밀입국자 아닌가? 게다가 오벨리아에서 도주한 극악 범죄자 신분이기까지! 물론 그런 걱정이 든 건 잠시뿐이었고, 곧 그마저도 ‘에라, 모르겠다’ 싶어지기는 했다. 지금 내 팔자에 외교 문제니 뭐니 그런 걸 신경 써서 뭐 한단 말인가. 으앙, 어쩌다가 제 신분이 지명수배 범죄자가 된 거죠?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그런 의미로 마법을 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아마 난 클로드에게 진작 잡혀서 황성에 끌려갔겠지. 아, 아니다. 그럼 아예 황성을 나오지도 못 했겠구나. 그럼 난 그냥 그 화원에서 클로드 손에 죽었으려나? 책 속의 아타나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기분이 복잡해져서 나는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미간을 짚었다. “와하하하! 나 잡아봐라!” “아, 진짜! 카벨 오빠, 거기 안 서?!” 그러다 문득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는 소리가 들려서 창밖을 보니 밖에는 벚꽃 같은 연분홍색의 꽃나무가 거리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아, 아를란타도 봄이 한창이네. 아를란타는 오벨리아와 달리 사계절이 존재하는 나라라서 혹시 시기가 맞으면 오랜만에 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따악. 나는 잠깐 창밖을 보다가 다시 마법으로 머리색과 눈색을 바꾼 뒤 방을 나섰다. 손가락을 튕기는 것은 마력 조절을 위한 일종의 스위치 같은 것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러면 왠지 마력을 덜 낭비하는 느낌이었다. 혼자만의 신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마력에게 사인을 보내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으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마법을 쓰고 싶을 때 이렇게 손가락을 튕길 테니까 그 전에는 네 마음대로 마법을 발현시키면 안 돼?’라고 마력을 다독이는 느낌이었다. 쿠, 쿨럭.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좀 이상하네. 아무튼, 마법이란 것이 시전자의 바람이나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보니까 딱히 마법을 쓰고 싶지 않아도 가끔은 마음대로 허공에서 돈 같은 것이 뚝 떨어지거나 갑자기 순간 이동이 되어서 솔직히 난감할 때가 종종 있었다. 아니, 이건 난감하다기보다는 사실 엄청 위험한 일이었다. 지난번에는 클로드한테 쫓겨서 산으로 도망가는 꿈을 꿨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고 있는 곳이 여관이 아니라 웬 산기슭이어서 얼마나 놀랐었는데. 으윽. 만약 산이 아니라 벼랑이나 바다 같은 곳으로 이동되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그래서 나는 그 후 ‘초보자는 마력 조절을 위해 마법을 사용할 때의 수신호를 정해두는 것이 좋다’고 마법서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리고 루카스 흉내를 내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후로는 정말 마법이 전처럼 아무 때나 남발되지 않아서 좀 더 편해졌다. 루카스도 지금까지 마력 조절을 하려고 손가락 튕기기를 했던 걸까? 으음. 물론 루카스가 마법 초보자는 아니지만 마력량이 줄어서 불편하다고 몇 년 동안 계속 투덜거렸었으니까. “아, 눈 내리는 것 같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건물을 벗어나 꽃나무가 깔린 거리를 혼자서 거닐었다. 그런데 걸음걸음마다 위에서부터 쏟아져 날리는 꽃잎들이 꼭 하얀 눈송이 같았다. ======================================= [99화] 그러고 보니 이런 시간이 보낸 것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 물론 황성에서의 생활이 나빴던 건 아니지만 예전에 루카스와 함께 몰래 놀러 나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밖에서 이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몽타주와 영상석을 보고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바깥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아를란타에는 아직 내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외국 공주의 일이기 때문에 외부인에게 그렇게까지 관심들이 없는 것인지, 지금 거리에 있는 누구도 나를 수상쩍은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무관심이라니. 나는 때에 맞지 않게도 그만 조금 감동해 버렸다. 하긴, 그렇지? 여기가 내가 살던 황궁도 아니고 오벨리아는 더더욱 아닌데, 사람들이 나한테 관심이 있을 리가. 무슨 자의식 과잉도 아니고 나도 참. 나는 지금까지의 긴장을 풀고 좀 더 편하게 거리를 걸었다. 십수 년간의 황궁 생활에 적응이 되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바깥이 좀 낯설었지만 나는 금세 익숙해질 수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잃었던 감이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그야 당연하지. 원래 난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니까. 날씨도 따뜻하고 경치도 좋겠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사람들 틈에 뒤섞여 간만의 여유를 만끽하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 * * 으음. 문이 꽉 닫혀 있네. 나는 고개를 쳐들고 눈앞에 굳게 잠긴 철문을 바라보다가 난감하게 미간을 좁혔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이제키엘이 다년간 유학했던 아를란타의 학교였다! 빠빰! 그런데 높다란 철창과 그에 버금가는 단단한 담벼락을 보니 아무래도 잠입하기가 꽤나 어려워 보였다. 아니, 원래 학교 정문이란 건 월담도 가능할 만한 그런 사이즈 아니었나요? 크흑. 이 학교 학생들은 지각하면 정말로 얄짤 없겠네. “흐음.”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 한 명 없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평일 중 외부인은 안 받는 것 같고. 뭐,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 정도야 순간 이동을 쓰면 된다지만 어떻게 안 들키고 내부 구경을 한다지? 나는 잠깐 동안 문 앞에 서서 고민하다가 요즘 성공한 마법 중 하나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아, 수업 듣기 싫어. 과제도 어제 밤새워서 겨우 했는데.” “오늘은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질문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다. 애초에 질문이 어려워서 제대로 대답하는 건 두어 명밖에 없잖아?”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학교 안을 돌아다니는 데 성공해 있었다. 음하하! 이름 하여 투명화 마법이라고 아시나? 일명 다른 사람 눈에 내가 보이지 않게 얇은 마력장을 내 몸에 씌워서 투명인간처럼 되는 마법이었는데, 이거 진짜 어려운 고위 마법이다! 하지만 난 그걸 성공했지! 크으. 내 대마법사 신화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앗! 늦겠다. 빨리 가자!”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곳은 아를란타에 있는 학교 중 가장 큰 학교라고 들었는데, 과연 그 명성만큼이나 웅장한 내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교정 한가운데에 자리한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도 그렇고, 체력 운동을 위한 곳인지 흙으로 단단히 다져 놓은 넓은 공터도 그렇고. 게다가 4층 이상 되는 건물도 교정에 하나가 아니라 대여섯 개나 있었다. 아, 혹시 저건 도서관인가? 나중에 가봐야지. 어디 보자, 저 건물은 이제 보니 기숙사 같기도 하고. 음. 물론 황성에서 살았던 내 눈에도 이 학교가 그렇게 놀랄 정도로 막 크고 화려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확실히 아를란타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학교라는 소리를 들을 법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부딪치지 않게 요리조리 요령껏 피해 다니며 학교 구경을 하다가, 문득 옆을 지나가던 여학생들의 말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어쩐지 교정에 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이상하다 했는데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라 그랬던 거로군? 내가 살금살금 뒤를 쫓는 동안 여학생들은 정원 앞쪽으로 난 길을 가로질러 이내 두 번째 건물의 입구로 들어섰다. 나는 별관으로 보이는 건물의 내부를 구경하며 여학생들이 들어간 문으로 발소리를 죽인 채 다가갔다. 다행히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다른 학생이 내 앞을 가로막기 전에 슬쩍 문틈으로 몸을 들였다. “너 과제 다 했어?” “당연하지.” “와, 나 잠깐만 보여주라!” 어이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하고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나는 와글와글 떠드는 학생들을 피해서 최대한 벽에 붙은 채 게걸음으로 강의실 뒤쪽을 향해 움직였다. “앗! 교수님 오신다!” 그런데 누군가 외친 바로 그 순간, 학생들이 일사분란하게 자리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자리에 착석한 뒤 교과서로 보이는 책을 펼쳤다. 강의실 안에 고요한 정적이 깔렸다. 오잉. 가, 갑자기 이게 뭐지. 지금 교수님 들어온다고 이렇게 순식간에 조용해진 거야?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풍채 좋은 중년의 남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말한 교수인 모양이다. “모두 왔으면 오늘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습관처럼 콧수염을 잠깐 만지작거리더니 출석도 부르지 않고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나는 약간 얼떨떨해져서 강의실 맨 뒤에 남은 자리로 이동해 슬며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와아. 여기 학생들 전부 모범생이구나. 면학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네. 과연 명문 학술원은 다르다 이건가? “그렇다면 이 시공간 중력 이론을 반박한 조지 마이언은 어떤 주장을 펼쳤을까요? 르미에 장다르크 학생.” “예. 조지 마이언은 빌헬름 로마르티의 시공간 중력 이론을 질량과 가속 운동의 예시를 들어…….” 수업은 꽤 재미있었다. 아까 전 학생들이 듣기 싫다고 몸부림친 것에 비해 수업 내용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고, 또 교수의 설명도 알아듣기 쉬운 편이었다. 음. 어쩌면 이미 내가 가정교사와 함께 예전에 다 공부한 내용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아를란타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내가 이렇게 술술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전부 다 그동안 황성에서 들었던 수업들 덕분이었다. 어흑. 내가 이날을 위해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었나 보다. 이것 참, 보람이 느껴지는걸. 게다가 현생에서 이렇게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나는 지금 이 시간이 꽤나 재미있었다. 이대로 수업이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 앞자리에 앉은 에른스트 양에게 과제를 내고 가도록 하세요.” 크윽. 벌써 끝나다니. 두 시간 연강이었는데도 수업이 너무 빨리 끝나버렸어. 이 강의실에서 다른 수업은 또 없으려나? 좀 더 앉아 있어 볼까. 콧수염 교수가 먼저 강의실을 떠나고 나서 학생들은 과제 제출을 위해서인지 맨 앞자리에 있는 여학생에게 우글우글 몰려갔다. 나는 맨 뒷자리에서 책상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그런 그들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에른스트 양이라고 했나. 그러고 보니 아까 교수의 질문에 제일 대답을 잘해서 칭찬을 들은 여학생이었지. 과제 제출까지 담당하는 걸 보니 반장 같은 일도 하는 건가? 그런데 이제키엘이랑 비슷한 은발이라 그런지 뭔가 괜히 친근하다.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고 나자 강의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맨 앞자리의 여학생이 다른 학생들의 과제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모습을 하릴없이 구경했다. 드륵. 마침내 여학생이 긴 은발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보게 된 그녀의 얼굴에 나는 작게 감탄하고 말았다. 아, 계속 뒤에서 수업을 듣느라 이렇게 앞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데 되게 예쁜 애다. 꼭 세계 명작에 나오는 소공녀 같아. 그냥 자리에서 일어난 것뿐인데도 행동 같은 게 엄청 우아하네. 내 예법 선생님이 보면 호들갑을 떨면서 좋아하겠는걸. 나는 그녀가 이제 나가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여전히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가는 대신 돌연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 이제 나가야 되는데, 넌 과제 안 내?” 미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아직도 강의실에서 나가지 않고 있는 학생이 또 있나 싶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그런데 이상하다. 지금 내 앞에는 저 여학생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지금 난 맨 뒷자리에 앉아 있고. 그래도 혹시 몰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역시 내 뒤에는 벽밖에 없었다. 나는 경직된 채 다시 앞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한껏 소리를 낮추어 반문하고 말았다. “나?”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러자 이번에는 여학생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한테 되물었다. 헐, 너 지금 내가 보이는 거야?! 아무래도 나한테 말 건 게 맞는 거 같은데! 혹시 나도 모르게 마법이 풀렸나? “어, 그런데 교복이 아니네. 그럼 외부인 청강?” “으응.” 나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어, 엄밀히 말하면 도둑 청강이지만. 그래도 이 학교에 원래 외부인 청강이라는 제도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여학생이 납득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약간 안심했다. “아. 난 또 낯이 익어서 학생인 줄 알았어. 앗, 잠깐. 그럼 혹시 선배세요?” “아, 아니요.” 이, 이 상황 좀 많이 당황스럽다. 왜 갑자기 마법이 풀린 거지? 그래도 한동안은 마력이 내 말을 안 듣는 일이 없었는데. 그나마 주위에 다른 학생들이 없을 때 풀린 게 다행인 건가? “그래……. 그럼 난 먼저 갈게.” 여학생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한테서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모습에 마음을 놓은 반면, 곧 밀려드는 난처함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또 마력이 뜻대로 제어되지 않는 거라면 순간 이동도 안 될지 모르는 거잖아. 그럼 밖으로 어떻게 나가지? 우뚝! 그런데 갑자기 문을 향해 걷던 여학생이 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나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아아앗!” 나는 그녀가 경악한 듯 외치는 소리에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행방불명된 오벨리아 공주님!” “헉!” “맞아! 영상석에서 봤는데!” 여학생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너무 깜짝 놀라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할 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여학생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나를 향해 두어 걸음 더 다가왔다. 나는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바닥을 울릴 때마다 흠칫 몸을 떨었다. “내 말이 맞죠? 오벨리아 공주님이시죠?” “사, 사람 잘못 보셨어요!” “아, 잠깐만요!” 따악! 나는 곧바로 순간 이동을 시도했다. 마력아, 제발 이번만큼은 내 말 좀 들어라! 휘이익! 다행히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여학생의 얼굴이 눈앞에서 서서히 흐려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또다시 갈대밭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흐얼.” 완전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지금도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서 죽을 것 같았다. ======================================= [100화] 나는 갈대 사이로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저 사람 도대체 뭔데 내 얼굴을 바로 알아보는 거지? 그러고 보니 영상석이라고 하지 않았나? 설마 클로드가 뿌린 영상석이 벌써 아를란타에까지 도착한 거야?! 멘붕이 와서 그런지 동공이 쉬지 않고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으악, 으악!’ 마구 소리 죽여 외쳤다. 그 여학생이 내가 여기에 있다고 바로 학교랑 황실에 알리는 거 아니야? 하지만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직접 봤으니까 알려봤자 별 소용은 없을지도 몰랐다. 그 증거로 난 지금 이 갈대밭에 와 있었고. 와, 그래도 이렇게 진짜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처음 봐서 진짜 깜짝 놀랐다. 이, 이것 참. 스릴이 넘치는걸. 나는 갈대 사이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아직까지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아를란타에는 좀 오래 붙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최단 시간에 들켜버리다니. 어흑. 이런 식으로 사람 허를 찔러도 되는 건가? 그럼 이제 또 어디로 가지? 일단 마법이 될 때 돈은 또 만들어 두면 되니까 짐 가방을 다시 찾으러 갈 필요가 없기는 한데. 나는 갈대밭에 누워서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 * * 휘오오. “아, 교수님들이 오늘 내준 과제만 4개야.” “난 3개. 진짜 우리를 피 말려 죽이려는 거 아니야?” 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하는 바람을 느끼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지붕 위에 앉아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니 감회가 참 남달랐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아까의 그 학교였다. 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 않던가.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그 여학생이 여기서 나를 봤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아를란타의 사람들이 가장 방심할 만한 곳은 이 학교일 것 같았다. 일단 내 정체를 들키자마자 곧바로 도주하기까지 했는데 설마 다시 여기에 내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 않을까? 아, 아니면 말고. 크흠. 그래서 나는 또 투명화 마법을 쓴 채로 건물의 꼭대기에 올라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느낀 건데, 뭔가 좀 이상하다. 황실에서부터 대대로 지명수배를 내린 공주가 발견되었다는데 다들 너무 평온한 거 아닌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요한 교정의 모습에 의아함이 느껴졌다. 설마 그 여학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걸까? 학교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 느껴지는 소란도 없고. 딱히 이 일대에 경비가 삼엄해진 느낌도 아니고. “으음.” 나는 끄응 신음하며 지붕 밑을 지나다니는 학생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차라리 옷을 교복으로 바꾸고 학생들 사이에 뻔뻔하게 끼어들까 싶기도 했지만 뭔가 주책인 것 같기도 해서 그러지 않았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 나이에 교복은 좀 아니지. 으흑. 그래서 나는 그냥 해가 지면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뒤 멀거니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아, 경치 좋다. “큼큼.” 응? 그런데 기분 탓인가. 어디서 웬 헛기침 소리가……. “저기, 갑자기 말 걸어서 죄송한데요. 거기 좀 위험하거든요. 어제 비가 와서 지붕이 미끄러울 수 있…….”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보이는 얼굴에 그만 화들짝 놀라 소리 지르고 말았다. “으악!” 경기하듯 펄쩍 뛰며 상체를 뒤로 물리는데, 갑자기 몸이 주르륵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앗! 위험해!” 타이밍 좋게 옆에서 튀어나온 손이 나를 붙잡아줘서 살았다. 으아앙! 진짜 이 귀신같은 학교! 나한테 왜 이래, 어허헝!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제 손 놓지 마시구요.” 알고 보니 내가 앉아 있던 곳 옆쪽에는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그 안으로 가까스로 몸을 들이고 보니 좁은 공간이 마치 다락방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그런데 학교에 무슨 다락방이야? “저어, 비품실이라 좀 누추하긴 한데…….” 아, 비품실이구나.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나를 끌어올려준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까 강의실에서 만났던 바로 그 은발의 여학생이었는데, 나와 함께 이 비품실에 있는 것이 왜인지 좀 민망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경계하며 주춤 뒷걸음질 친 뒤 물었다. “내, 내가 지붕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음. 지나가다가 보여서요.” 그러자 여학생이 다소 겸연쩍은 듯이 대답했다. 으아, 이 귀신같은 여자! 나는 다시 마법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내 낌새를 눈치챘는지 곧 여학생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해 급히 손을 저어 보였다. “저기, 잠깐만요. 저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 아까 강의실에서 만난 것도 지금까지 말 안 했는걸요.” 그 말에 나는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진심인 것 같았다. 게다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그러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믿어도 되는 건가? 물론 오늘 하루 종일 연달아 마법을 많이 쓴 탓에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으니 지금 당장은 순간 이동을 안 쓰는 게 나한테도 좋긴 한데……. 결국 나는 망설이다가 손을 내렸다. 그러자 여학생이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나는 그런 그녀와 거리를 벌리고 창문 쪽에 기대섰다. 그런데 석양이 비치는 곳에 몸을 들였기 때문인지, 빛 속에 드러난 내 얼굴을 보며 여학생이 문득 감탄하는 것이었다. “아. 어쩐지 눈동자색이 신기하다 했는데 이게 바로 그 보석안이구나.” 나는 그녀의 자그마한 혼잣말에 잠깐 움찔거렸다. 끼익! 하지만 바로 그때, 비품실의 문이 갑자기 화악 열렸다. 나도, 내 앞에 있는 여학생도 그 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너 거기서 뭐 해?”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은발에 벽안을 지닌 남학생이었다. 이상하네. 은발이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닌데 왜 이 학교에 와서 만난 여학생하고 남학생이 하필 둘 다 은발이지? 아를란타에는 은발이 그렇게 희귀한 게 아닌 걸까? 아니, 잠깐! 그런데 나 지금 이 남학생한테도 들킨 거야?! 그런 거야?! “에, 에리히.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바보같이 말은 왜 더듬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학생은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앞에 있는 여학생을 향해서만 계속 말했다. “설마 내가 한가하게 널 쫓아다니기라도 할까 봐? 지나가는 길에 문틈으로 네가 보여서 들어왔을 뿐이야.” 그는 여학생을 향해 콧방귀를 뀌다가 곧 이상하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아무도 없네. 분명 대화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너 혼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강력한 의구심이 떠올랐다. 뭐? 지금 네 앞에 버젓이 있는 나를 두고 이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그리고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내 앞에 있던 여학생의 눈동자 안에도 물음표가 수십 개는 떠오르는 것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눈매를 구기며 잠깐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방금 전까지 얼굴에 드리우고 있던 당혹감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로 남학생을 향해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뭘 하고 있든 넌 알 거 없어. 지나가던 길이면 그냥 계속 갈길 가.” “너도 지금 안 가면 학술 발표회에 늦을 텐데. 더군다나 담당이 쏜튼 교수잖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교수님한테 혼나기 싫으면 너 먼저 가. 아, 걱정해 준 건 고마워.” 바로 그 순간 남학생이 눈매를 움찔거리더니 곧 쌀쌀맞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걱정? 웃기지 마. 누가 네 걱정을 했다는 거야? 네가 혼나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야. 난 네가 지각 따위를 해서 에른스트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봐 말해준 거라고. 발표회 시작까지 5분 남았으니까 그 안에 오든지 말든지.” 흥! 그러더니 그는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로 휙 뒤돌아서 그대로 비품실을 빠져나갔다. 뭐, 뭐지. 츤데레인가? 말투는 좀 싸늘해도 걱정해서 말해준 거 맞는 거 같은데? 게다가 친절하게 발표회인지 뭔지의 시작 시간이 5분 남았다는 것까지 알려줬어. 나는 마주한 여학생을 향해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 역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짜식, 앙탈은’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둘이 좀 닮은 것 같지 않아? 일단 남학생이 벽안, 여학생이 자안으로 눈색은 다르지만 둘 다 머리는 은발이고. 게다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 같은 게 묘하게 닮은 것 같았다. “남동생?” 궁금증에 나도 모르게 묻자 갑자기 여학생이 멈칫하더니 곧 나를 돌아보았다. 그, 그런데 방금 전보다 기분이 좀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보는 눈동자에 왠지 모르게 호감이 좀 늘어난 것 같은데……. 그, 그냥 내 착각이겠지? “뭐, 나이는 동갑이지만 제가 더 빨리 태어났으니까 그런 셈이죠. 정신연령으로 봐도 그렇고.”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납득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아, 쌍둥이인가 보다. 꼭 일 분 간격으로 태어난 거 가지고 내가 오빠네, 내가 누나네 하면서 투닥거리는 것 같아서 뭔가 귀엽네. “그런데 공주님, 지금도 마법 쓰고 계세요?” 그나저나, 아무래도 이 여학생도 나와 같은 걸 깨달은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 모습이 아무한테나 보이는 건 아닌가 봐요.” 방금 전 들어왔던 남학생이 나를 못 알아봤던 걸 보면 틀림없이 그런 것 같았다. 그럼 아까 강의실에서도 내 투명화 마법은 계속 유지 중이었다는 말인가? 지금도 그렇고? 그런데 왜 이 여학생한테만 내가 보이는 거야? 나와 마찬가지로 여학생도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도 답을 찾지 못했는지, 곧 머리를 긁으며 나한테 말했다. “아무튼 다른 사람한테 안 들켜서 다행이네요.” 그, 그나저나 생긴 건 엄청 귀족적으로 우아하고 청순가련하게 생겼는데 이렇게 소탈하게 머리를 긁고 있는 걸 보니 뭔가 갭이……. “그건 그렇고. 공주님이 왜 아를란타에 계세요? 아, 이런 거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요?” 하지만 나는 이어지는 그녀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걸 보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덧붙여 말했다. “이미 아실 것 같기는 하지만 오벨리아 황제 폐하가 계속 공주님을 찾고 계세요. 아를란타에도 얼마 전 공문이 왔고요. 공주님의 데뷔당트 때 모습을 담은 영상석도 지참해서요.” 커헉!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사레가 들릴 뻔하고 말았다. 아니, 데뷔당트 때 모습을 담은 영상석이라니! 이번에 전국 각지로 돌린다던 영상석이 그거였단 말이야? 게다가 그걸 다른 나라에까지 다 뿌렸다고? 나, 나를 수치사시키려는 건가! 그런 속셈인 건가! 어흑, 클로드 이 잔인한 인간! “혹시 가출인가요?” 그리고 소리 낮춘 그 물음에 나는 왜 이제껏 사람들이 클로드를 ‘잃어버린 딸을 찾는 가엾은 아빠’로 봤는지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영상석에 담긴 데뷔당트 때의 모습이라 하면 어쨌든 간에 클로드랑 내 사이가 나쁘지 않을 때였으니 그걸 봤으면 지금도 우리 사이가 돈독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긴 하지. ======================================= [101화] 하기야,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클로드가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딸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 슬슬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나는 그 조심스러운 권유에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그녀를 향해 난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곤란하게 만들었으면 미안해요. 아를란타에 피해를 입히지 않게 금방 떠날게요.” “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내 얼굴을 본 뒤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나를 향해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나 봐요. 오벨리아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신 거군요?” 그녀는 내가 치기로 가출을 해 아직까지 황성으로 안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일 때문에 황성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간파한 듯이 다른 것을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저는 여차하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우겨도 되니까요. 공주님을 만난 일로 제가 곤란해질 건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런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 그런데 전생까지 합하면 분명 내가 훨씬 더 나이가 많을 텐데 이상하게 어른스러운 애네. 뭔가 눈빛이나 분위기 같은 게 미묘하게 나보다 언니 같잖아? 물론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다 어른스러운 건 또 아니긴 하지만요. 흑. 아무래도 난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 봐. “그런데 아를란타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공주님이 이 학술원에 오신 걸 보면…….” 그리고 잇따른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동기는 혹시 이제키엘 알피어스인가요?” “이제키엘을 알아요?” 무심코 던진 내 반문에 그녀는 역시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학술원에서 이제키엘 알피어스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요. 학술원 역사상 무려 네 명밖에 안 되는 조기 졸업생 중 한 명인걸요.” 헉. 역사상 네 명이라니. 거기에 끼다니 역시 이제키엘이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저희 오빠 친구…… 까지는 아니고. 저희 오빠랑 동급생이서 저도 좀 개인적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친했던 것까지는 아니고요. 일단 저랑은 학년도 다르고.” “그렇구나…….” “이제키엘 알피어스가 저희 학술원에서도 그렇지만 오벨리아에서도 유명하다고 들어서요. 게다가 이번에 졸업하고 오벨리아로 돌아갔으니 공주님도 만나신 적이 있을 것 같아서.” 그 후 그녀는 학교에서의 이제키엘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었다. 대부분 재학 중의 그가 얼마나 훌륭한 학생이었고 또 여학생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는 동안 나는 간만에 또 ‘역시 남주인공!’을 속으로 외치고 말았다. “그래서 나이는 똑같은데 저희 오빠랑은 어쩌면 이렇게 다른지…….” 나는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석양에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은 이제키엘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색이 조금 다른 은발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이전에 내가 꿈에서 보았던 것과 언뜻 닮아 보이는 짙은 자색이었다. 아, 그래서인가.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가 알게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지던 이유를 깨달았다. 벌컥! “야! 너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또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이번에도 나와 내 앞에 있는 여학생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까 보았던 그 남학생이었다. “아, 또 왜? 발표회는 꼭 안 가도 되잖아?” 여학생이 귀찮다는 듯이 힐난하자 남학생이 그게 아니라는 듯이 다급하게 소리 쳤다. “그게 아니라, 카벨 형이 또 발광하고 있어!” “뭐? 그럼 교수님을 불러.” “이번에 걸리면 형 진짜 정학당할지도 몰라! 그래도 형이 네 말은 듣잖아!” “아, 진짜 이 망할 진상…….” 나는 여학생이 잠깐 동안 회한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을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어, 어째서인지 저 얼굴을 보니까 미묘한 동병상련 같은 게 느껴지는데……. “교실이야? 나도 바로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빨리 와야 돼!” 남학생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난 후에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만사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저 아무래도 오빠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히, 힘내요.” 왠지 그렇게 말해줘야 할 거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응원하고 말았다. 뭔지는 잘 모르지만 오빠 때문에 고생인가 보다. “공주님은 아무래도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시는 것 같으니까 배웅은 따로 안 할게요. 그래도 저녁 늦게 외출은 위험하니까 조심하세요.” “오늘 고마웠어요.” “천만에요. 그리고 저 입 무거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나를 향해 옅게 미소 지어 준 뒤 곧 비품실을 나섰다. 나는 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다가 붉은 햇빛이 들어서는 창가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도 지금 바로 갈까? 아니면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좀 더 여기 있다가 갈까? 달그락. 그때, 창문 쪽으로 한 발짝 내딛은 내 발에 무언가가 걷어 채였다. 어, 뭐지? 나는 의문을 느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곧 허리를 굽혀 발치에서 반짝이는 것을 주워 들었다. 그것은 금줄이 달린 작은 펜던트로, 그 뒤에는 음각의 작은 글씨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리 에른스트. 그러고 보니 아까 강의실에서 교수가 에른스트 양이라고 불렀었지. 잠깐. 그런데 아를란타에서 에른스트면, 대대로 황실의 강력한 우방이었던 공작 가문 아닌가? 와, 저 언니 꽤나 대단한 집 딸이었구나. 하긴, 아까 전에 자기 오빠랑 이제키엘이 친구라는 말도 했었잖아. 다른 의미로 말하면 그런 대단한 가문이니까 재학 시절의 이제키엘하고도 친구로 지냈을 수도 있겠다. 그,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하지? 그냥 여기에 두고 가면 나중에 와서 찾아갈까? 그런데 혹시 그 전에 다른 사람이 와서 주워 가면 어떻게 해? 그렇다고 내가 직접 전해 주기에는……. 붉은 해가 저무는 비품실에서 나는 펜던트를 손에 들고 혼자 끙끙 고민했다. * * * 결국 그다음 날에도 나는 학교에 왔다. 내 주머니에는 어제 비품실에서 주웠던 펜던트가 고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어제 그녀에게 도움받은 것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이 펜던트를 비품실에 그냥 두고 가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잃어버리면 곤란한 소중한 물건일 수도 있고. 하지만 아무리 틈을 엿봐도 나는 도저히 이걸 그녀에게 돌려줄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하리 에른스트는 하루 중 혼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뜻하지 않게 그녀를 몰래 관찰한 결과, 하리 에른스트가 이 학교에서 엄청난 우등생인데다 또 학생들에게 인기도 엄청나게 많은 여자애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수업 시간마다 질문을 단골로 받으면서도 대답 한 번 망설이는 법이 없어서 교수들에게 엄청난 예쁨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러면서도 잘난 척 한 번 하지 않고 성격도 의외로 털털해서 그런지 교우 관계도 아주 좋아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의 나보다 한 살이 많은 15살이었다. “하아, 카벨 오빠. 일단 오빠도 공부란 걸 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할 것 아니야.” 하리 에른스트는 어제 보았던 남동생과 또 다른 오빠와 함께 이 학술원에 재학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두 사람을 대할 때면 가끔씩 해탈한 표정을 지어서 나를 묘한 기분에 젖게 만들었다. 마치 ‘어유, 저 화상을 어쩐다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카벨 오빠는 있지. 오빠 나이를 좀 헷갈려 하고 있는 것 같아.” 지금도 마치 유치원생을 달래는 것처럼 말투는 한없이 사근사근 다정하면서도 그 표정에는 차마 숨길 수 없는 귀찮음이 역력히 묻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니까 도대체 누가 오빠고 누가 동생인지 잘 모르겠다. “17살이 아니라 7살짜리 애처럼 계속 사고만 치고 다니고,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이상하게도 오늘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주위에서 기웃거려도, 또 작게 소리 내 그녀를 불러도, 하리 에른스트는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발길을 돌렸다.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내 쪽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뭐지? 역시 어제 그녀가 날 볼 수 있었던 게 우연이었던 건가? 아니면 오늘 따라 내 투명화 마법이 잘 먹혔나? “오빠가 자칭 친구라고 주장하던 이제키엘 알피어스 선배는 벌써 졸업했는데. 물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벨 오빠에게 조기 졸업씩이나 바라지는 않지만 적어도 유급은 당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어?” “뭐? 검술 천재인 내가 유급이라니! 그리고 나도 마음만 먹으면 조기 졸업쯤은 껌이지만 특별히 널 생각해서 안 하고 있는 거야. 내가 홀랑 졸업하면 네가 심심할 거 아니야!” 그런데 대화를 듣자 하니 좀 웃기다. 이 언니, 지금 엄청 다정한 목소리로 옆에 있는 사람을 막 디스하고 있잖아? 게다가 저 오빠라는 사람의 뻔뻔한 말에 예쁜 얼굴이 갈수록 짜게 식어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리 에른스트의 옆에 있는 남학생은 갈색 머리카락에 벽안을 가진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의 남자아이였는데, 이름이 카벨이 모양이었다. 으음. 그런데 좀 이상하네. 왜 이름이 묘하게 낯설지가 않지? 어제도 비품실에서 들었던 이름이라 그런가? “그리고 너 바보야? 난 어차피 검술학부 특기생인데 쓸데없이 공부를 왜 해?” “검술학부 특기생이어도 졸업 시험은 보잖아. 설마 잊은 건 아니겠…….” “헉! 특기생도 시험 봐? 왜? 왜왜왜?” “아니, 오빠가 이 학술원에 다닌 게 몇 년인데 아직 졸업 시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어?!” 앗! 이 언니 폭발했다! 나는 이제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그냥 에른스트 남매들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 망할 학술원이 이상한 거지! 당장 가서 따질 거야! 씨이, 졸업 시험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내가 지금 당장 이사장실에 가서……!” “아, 진짜. 다른 교수님들이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조용히 하고 이리 와.” 나는 웃음을 참으며 하리 에른스트가 피로감과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오빠를 끌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결국 나는 하루가 다 갈 때까지 그녀에게 펜던트를 돌려주지 못했다. 한밤중, 나는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숙소의 창가에 앉아 고민했다. 쓰읍. 그럼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는걸? 내일은 하리 에른스트가 앞을 지나갈 때 그냥 주머니에 쑤욱 넣어줄까? 아니면 교실이라도 알아내서 거기에 두고 와야 하나? 오늘 하루 동안 지켜보니 어제 강의실에 그녀가 혼자 남아 있던 게 얼마나 큰 요행이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 [102화] 그나저나 오빠랑 남동생하고 사이좋네. 난 남매가 없어서 저렇게 투닥거리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따져 보면 제니트가 아주 조금 비슷한 느낌이려나. 그러다가 문득 나는 클로드를 떠올리고 말았다. 시선을 돌리자 창밖에서 어둠을 배경 삼아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는 꽃잎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눈앞에 점점이 흩뿌려지는 하얀 꽃잎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잠깐만 보러갔다 올까……? 나는 불빛이 어른거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손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창문이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차가운 냉기가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어쩌면 지금쯤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낮밤이 따로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날 죽이려고 한 사람인데도, 그리고 그에게서 달아나 지금껏 모습을 감추었던 건 나인데도 클로드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갑자기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하리 에른스트와 그 오빠의 우애 좋은 모습을 본 탓일지도 몰랐다. 여차 하면 다시 도망쳐 와도 되니까 잠깐만 보고 오자. 참으로 대책 없는 생각이란 걸 스스로도 알면서도 결국 나는 충동적으로 그렇게 결정하고 말았다. 따악! 나는 망설임을 던져 버리고 마력의 파도에 몸을 맡겼다. *** 내가 도착한 곳은 어둑한 방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숨을 죽인 채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도착 지점으로 설정한 곳은 황성 지붕인데 왜 엄한 방에 들어와 있어?! 마력님,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한동안 안 그러더니 왜 또 나한테 똥을 퍼주려고 하냐는 말이야? 난 일단 황성 지붕에 올라가서 주위를 좀 살핀 다음에 슬쩍 창문 밖에서 클로드가 뭘 하는지 보려고 한 건데 다짜고짜 방 안이라니! 게다가 지금 이곳은 내게 있어 실로 익숙한 곳이 아닌가. 왜냐하면 여기는 바로 클로드의 침소니까! 뚜둥! 나는 방의 한가운데에서 오도가도 못 하고 완전히 얼어붙어버렸다. 물론 내가 만약 클로드한테 붙잡혀도 지난번 장미 화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도망쳐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혼자서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그, 그래도 그 말이 이렇게 맹수의 아가리 속으로 직접 머리를 들이밀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난 자살 희망자가 아니라구요, 으어헝. 어떡하지? 다시 순간이동을 써야 하나? 나는 잠깐 동안 눈알을 굴리면서 주위의 상태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방 안은 아주 조용했다. 혹시 클로드가 집무실에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잠시 후 나는 보고야 말았다. 소파 위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낯익은 금발을. 그것을 발견한 직후 나는 숨을 죽인 상태로 한동안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스럭. 그런데 바로 그때 내가 무언가를 밟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나는 그 작은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 그만 흠칫 제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힐끔 눈치를 보니 소파에서는 어떤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혹시 서류 같은 건가. 또 침소에서 문서 같은 걸 보다가 바닥에 떨어뜨렸을 수도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무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그런데 몇 걸음 옮기지도 못 해 다른 종이를 또 밟고 말았다. 으악, 이거 도대체 뭐야? 도대체 이런 게 바닥에 몇 개나 널려 있는 거야? 두 번이나 소리를 내자 아무래도 소파에 있는 클로드의 눈치가 보여서 나는 그가 깨어나도 나를 볼 수 없게 일단 몸을 낮게 수그렸다. 그런데 달빛에 비친 종이가 왜인지 조금 이상했다. 어라? 이거 문서가 아니라 그림 같은데? 도대체 뭐지? 나는 내가 밟고 있는 종이를 향해 손을 뻗어 별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미간을 좁힌 채 종이 속의 그림을 천천히 살피다가 이내 기겁하여 화등잔만 하게 눈을 뜨고 말았다. 헉! 이게 뭐야! 이건 내가 어릴 때 그린 그림이잖아! 뭐, 뭐지?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너무 당황스러워서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주위에 널려 있는 다른 종이들도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곧장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으악! 아무리 봐도 이거 내가 어릴 때 클로드한테 그려줬던 그림들 맞는데! 나름대로는 아첨이랍시고 내 고사리 손으로 열심히 그려서 클로드에게 고이 안겨주었던 내 흑역사들! 창고에서 금화 테라피를 하는 나와 옆에서 그걸 어이없게 지켜보는 클로드를 그린 그림은 내 9살 생일날 금고를 선물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선물한 것이었고, 다른 그림은 정확한 시기는 생각나지 않으나 구름 위를 둥실둥실 날아다니다가 클로드에게 산성비를 내려서 대머리를 만드는 꿈을 꾼 직후 그 역사적인 날을 잊지 않으려 그린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건……. 헉! 내 최초의 역작! 내가 클로드에게 드롭킥을 날리고 있는 그림이잖아! 세상에, 내 기억으로 이건 선물한 게 아닐 텐데 왜 클로드가 이걸 가지고 있는 거야? 나는 홱 고개를 돌려 저 멀리서 보이는 반짝이는 머리통을 해괴한 생물체라도 되는 듯이 쳐다보았다. 다, 당신 도대체 뭐야? 무슨 꿍꿍이로 이걸 가지고 있던 거야? 지금은 또 왜 이 그림들을 바닥에 흩뜨려 놓고 있고? 헉. 설마 이걸 보면서 나에 대한 살의를 불태우고 있던 건 아니겠지……? 나는 진저리를 치며 혹여나 꿈에라도 나올까 두려운 내 흑역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막 내버려 둔 뒤 다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소파로 다가갔다. 클로드는 은은한 달빛을 얼굴에 받으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악몽이라도 꾸는지 한껏 깊은 굴곡을 그리고 있는 그의 미간을 보자면 ‘곤히 잠들어 있다’는 말은 틀린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비로소 가까워진 클로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 사람 왜 이렇게 말랐어? 누가 보면 진짜 딸래미 잃어버리고 식음을 전폐한 사람인 줄 알겠네. 달빛을 받아 한결 더 창백한 빛을 발하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동안 조금씩 마음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날 죽이려고 한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한동안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처럼 피로감이 짙게 배어나 있는 얼굴이나 며칠 내내 앓던 사람처럼 창백한 낯빛 같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꼴도 보기 싫다고 해서 내가 사라져 줬으면 좀 더 잘 먹고 잘 살 것이지, 이게 뭐람? 오히려 이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지내는 것 같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못내 마음 쓰이다가도 어느 순간 속에서부터 울컥 무언가가 치밀었다. 뭐야, 이러니까 꼭 내가 진짜 아타나시아라도 된 것 같잖아. 물론 난 소설 속에서처럼 당신한테 죽어줄 마음 같은 거 조금도 없지만. “바보 같아.”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방금 전보다 깊게 패여 있는 클로드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러자 잠깐 움찔거리며 굵은 자국을 그리던 미간이 서서히 평평한 곡선을 그리며 펴지기 시작했다. 줄곧 아래로 내리깔려 있던 금색의 속눈썹이 아주 느리게 들어 올려졌다. 나는 초점 없는 눈동자가 마침내 달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그의 보석안이 나를 향해 움직이는 동안 내 손도 다시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클로드는 나를 앞에 둔 채로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그런 그를 여전히 내려다본 채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이 느리게 벌어졌다. “지겹구나.”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순간 나는 손끝을 움찔 떨고 말았다. 하지만 잇따른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넌 지치지도 않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밤 꿈에 나오는군.” 자조적인 냉소와 함께 혼잣말처럼 읊조려진 말에 나는 눈을 한번 깜빡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매일 밤 내가 나오는 꿈을 꾼다고? 호, 혹시 날 죽이는 꿈같은 건 아니겠죠? “그래도 오늘은 입을 다물고 있구나.” “…….” “그래.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그 빌어먹을 말을 몇 번이나 내 앞에서 반복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용한 게 낫다.” 어쨌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클로드는 지금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그냥 지금 이게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 잠시 동안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왜…….” 나는 내 얼굴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이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는 그를 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나를 찾으려고 해요?” 사실 나는 클로드가 왜 이렇게 혈안이 되어 방방곡곡을 뒤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눈에 거슬려서 그랬던 거라면 그냥 이대로 내가 밖에서 죽든 살든 신경 쓰지 않고 지내면 되는 것 아닌가? “날 찾아내면 죽일 거예요?” 아니면 정말 그렇게까지 자기 손으로 날 죽여서 끝을 보고 싶은 걸까? 그런 거라면 당신 진짜 악취미잖아. “지금도 날 보니까 죽이고 싶어요?” 조용한 방 안에는 내 나지막한 물음만이 울려 퍼졌다. 클로드는 내가 묻는 동안 줄곧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내 마지막 물음에 눈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한차례 작게 움찔거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어스름한 달빛을 받고 있던 그의 메마른 입술이 한순간 얕게 짓이겨지더니, 곧 그가 낮은 목소리로 씹어 뱉듯이 말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찢어죽이고 싶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마찬가지로 낮게 잠긴 목소리를 새어 보냈다. “난 안 죽어.” 눈앞에 있는 그의 손이 한 번 더 움찔거렸다. “아빠 손에는 절대 안 죽어.” 내가 작게 읊조리는 동안 클로드의 팔이 달빛 사이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소파 위로 투욱 떨어져 내렸다. “죽어도 아빠한테는 안 죽을 거야.” 줄곧 클로드의 팔에 가려져 있던 눈동자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마주한 눈빛이 서서히 또렷해지는 모습을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라보았다. “너…….” 마침내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보석안에 경악이 어렸다. “꿈이 아니었어?” 나는 그를 향해 어렴풋이 웃어 보였다. 있죠. 나는 정말로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아빠.” 하지만 아직은 당신을 만나도 될 때가 아닌가 봐. “안녕.” 그러니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어. “잠깐, 기다려!” 따악! 자리에서 급히 몸을 일으킨 클로드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가 한발 더 빨랐다. 나는 그대로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화아악. 눈을 감았다 뜨자 달빛 속에서 눈송이처럼 점점이 나부끼고 있는 꽃잎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클로드의 침소에 있던 나는 어느덧 다시 아를란타로 돌아와 있었다. 지금도 나를 죽이고 싶다니, 그럼 이대로 한동안은 안녕이겠네. 다시 만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또 한 번의 이별이었다. 나는 하얀 꽃잎이 흩날리는 달빛 가득한 거리에 서서 방금 전 내가 두고 떠나온 사람에게 혼자만의 작별 인사를 했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클로드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의 나는 그와의 재회가 생각보다 이르다는 사실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103화] 제26.5장 루카스와 세계수 -나는 먹는 게 아니에요! “와, 이거 골 때리네.” 세상의 끝. 일대의 전부가 강대한 마력으로 뒤덮여 무지개색의 신비로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고요한 곳에는 신들의 나무라 불리는 세계수가 있었다. 그런데 보통 인간이라면 접근조차 불가능한 그곳에 침입자가 있었으니. “어떤 새끼가 내 걸 죄다 처먹은 거야?” 그것은 옅은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미소년이었다. 투욱! 퍽! 그는 1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외양을 하고 있었는데, 어지간히 성질이 난 얼굴로 바닥에 있던 세계수의 열매를 발로 차버렸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누가 일부러 짓밟기라도 한 것처럼 반쯤 짓뭉개져 있던 낙과가 터져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미 깨져 있는 열매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새어 나온 마력은 실로 경미한 수준이었다. 세계수는 남자가 날뛰는 모습을 황당함과 분노가 뒤섞인 눈길로 지켜보았다. “아니, 양심적으로 낙과 하나 정도는 남겨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나더러 이딴 똥 찌꺼기를 먹으라고? 진짜?” 그 남자는 바로 세계수 열매를 얻으러 먼 길을 떠났던 루카스였다. 그리고 세계수는 예전에도 한 번 이 자리에서 그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게 100년 전이었는지, 200년 전이었는지, 어차피 거의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사는 세계수에게는 눈 한 번 깜빡할 정도의 시간이라 헷갈리기는 했으나, 애초에 이곳에 발을 들이는 데 성공한 인간이란 가지 하나에 난 이파리 수보다도 훨씬 적었으니 그 얼굴을 기억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계수가 루카스를 다른 누구보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야, 아무리 그래도 너랑 나랑 몇 백 년 동안 쌓아온 우정이 있는데 요령껏 열매 하나 정도는 숨겨놨어야 할 거 아냐?” 우우웅! 그 철면피 같은 말에 세계수는 분노했다. 우정은 개뿔! 그때도 네가 내 열매 훔쳐 먹으러 온 거였잖아! 그런데 자기가 바보같이 아직 열매를 맺을 시기도 아닌데 찾아와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막 화내고! 뿌리 뽑아버린다고 협박하고! 그리고 실제로 내가 몇 천 년 동안 고이 길렀던 이파리를 죄다 뽑아놓고 갔으면서! 크아앙! 그런데 그때로부터 100년 이상이 지난 건 분명한데 왜 아직도 안 죽고 있는 거냐, 이 바퀴벌레 같은 인간! “요즘에도 여기 위치를 아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도대체 누가 왔다 간 거지? 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쉬워졌어? 그렇게 아무한테나 막 열매 주고 그래도 돼?” 우웅! 세계수가 분노하자 마력 파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웅성이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지난번에 왔을 때 내 열매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어, 안 했어?” 그게 왜 네 열매야, 내 열매지! 나한테 열매 맡겨 놨냐? 이 멍청한 인간 같으니! “또 대머리 되고 싶지? 응?” 하지만 눈을 희번뜩거리며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세계수는 쫄아서 이파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이 무도한 인간이라면 또다시 자신의 탐스러운 이파리를 모조리 쥐어뜯어 놓고도 남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그냥 보통의 나무가 아니라 마법 생물인 만큼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그는 자신의 멋들어진 이파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새끼는 상도덕도 모르나? 먹을 수 있을 만큼 처먹었으면 얌전히 꺼질 것이지 남은 열매는 왜 다 이 지경으로 만들고 간 거야? 진짜 뒤지고 싶나.” 웅앵웅. 내 잘못 아니다, 뭐……. 그 무식한 인간이 열매들을 죄다 짓밟고 간 걸 나한테 어쩌라고……. 구시렁, 투덜투덜. 세계수는 얼마 전 이곳을 찾아와 열매를 하나 따 먹고 난 뒤 남은 열매를 모조리 못 써먹게 만들어놓고 갔던 인간을 떠올렸다. 자신의 아이와 마찬가지인 열매를 죄다 부숴놓는 것이 괘씸해서 저 밖으로 날려 버리기는 했는데……. 솔직히 세계수에게 있어서는 그 인간이나 이 인간이나 전부 다 똑같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기는 했다. “아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빈손으로 갈 수도 없고.” 제발 그냥 가! “이걸 어쩐다지.” 세계수는 자신의 평온을 깨뜨리는 인간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이 인간도 결계 밖으로 날려버려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지난번의 인간은 또 몰라도 지금 눈앞에 있는 인간은 솔직히 좀 무시무시한 놈이었기 때문에 강제로 내쫓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게다가 설령 이 인간을 결계 밖으로 내보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더러운 성격에 또 어떤 보복을 해올지 모르고……. 그러니까 제발 그냥 가라. 어차피 열매도 없잖아! “하는 수 없지.” 결국 인간은 포기하기로 한 듯 쯧 혀를 찬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 인간이 누구던가. 이 구역의 까만 또라이, 루카스가 아니던가! “꿩 대신 닭이라고, 남은 거라도 먹는 수밖에.” 곧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세계수는 의문을 느끼고 말았다. 뭐? 남은 거? 남은 거라니? 그게 뭔데? 이제 열매는 하나도 안 남았는데? 설마 아까 전에 ‘똥 찌꺼기’라고 가차 없이 평했던 낙과를 먹으려는 건 아닐 테고. 그리고 곧 세계수는 루카스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어어어~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세계수는 만약 자신에게 동공이란 것이 있다면 지금쯤 지진이 난 듯이 흔들리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슬쩍 가지를 움직였다. ……설마 나? 끄덕끄덕. 진짜 나……? 끄덕끄덕! 지금 날 먹겠다고? 방긋! 세계수가 가지를 움직여 자신의 몸통을 가리키자 루카스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로 그 순간, 세계수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 우매한 인간이……! 꿩 대신 닭이라니? 꿩 대신 닭이라니! 이 몸이 꿩도 아니고 닭이라니! 크아아아! 세계수가 울부짖었다! 세계수는 졸라 짱 세서 마법 생물 중에 최강이었다! 그러니까 죽일 거다, 바퀴벌레 같은 인간! 크오오오! 한 줌의 가루로 만들어주마, 어리석은 인간이여! 세계수가 분노해 폭주하기 시작하자 마력장이 커다란 파장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해 나가는 마력이 주위에 정신없이 휘몰아치며 거센 바람을 형성했다. 콰아앙! 쿠앙! 크오오오오! 한동안 가히 살인적인 위력의 마력 폭발이 이어졌다. 열매를 피우는 데 꽤나 많은 마력을 소진한 상태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인간 하나쯤은 간단히 부스러기로 만들고도 남을 강력한 힘이었다. 휘오오오오. “아우, 먼지.” 하지만 역시 루카스는 보통의 범주에 속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 왜 이렇게 발광이야? 벽에 똥칠할 만큼 산 노인네가 미련은 많아서. 쯧.” 마력의 파장이 마침내 잠잠히 가라앉고 주위에 부유하던 뿌연 공기가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아까부터 있던 자리에 여전히 멀쩡히 서 있는 루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그는 사지 멀쩡한 모습으로, 다만 주위에 산발하는 흙먼지가 거슬린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고 있을 뿐이었다. 세계수는 경악했다. 이, 이 괴물 같은 인간! 감히 이 몸의 공격을 받고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니! “그러니까 네가 열매 하나만 잘 숨겨놨어도 내가 널 먹겠다는 생각은 안 했을 것 아니야.” 게다가 세계수의 열매도 아니고 세계수 자체를 집어삼키겠다는 저 기상천외한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열매가 없다고 해서 본체인 세계수를 흡수하는 것은 꿩 대신 닭이 아니라, 꿩 대신 봉황을 먹는 격이었다. 자칫 잘못 하다가는 마력을 감당하지 못해 죽을 수도 있었다. 아니, 누구라도 그런 시도를 했다가는 분명히 온몸이 터져서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절대로 시도하지 않을 일인데……. “뭐, 이래 봬도 난 평화주의자라 널 죽이고 싶은 건 아니야.” 개소리! 세계수는 ‘우우웅!’ 거친 소리를 내며 반박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스스로의 배려심에 도취된 듯이 계속해서 헛소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알아온 세월이 있는데 500년 후에 또 열매는 맺을 수 있게 해줘야지. 뭐어,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때 가서 또 네가 나한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거고…….” 크아앙, 서, 설마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거냐! 진짜 이 지겨운 인간 같으니! 세계수가 멘붕에 빠져 몸부림을 치거나 말거나, 루카스는 앞을 향해 손을 뻗으며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먹을게.” 그 후 세계수의 결계 안에는 한동안 강력한 마력이 폭발하는 소리와 무언가가 울부짖는 것 같은 괴성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결계를 넘어서 그 밖으로까지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던 마력 조각이 비로소 잠잠히 가라앉은 것은 세계수와 루카스가 피의 혈전을 벌인 지 정확히 41일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목적을 이룬 루카스가 홀연히 떠나고 난 뒤, 세계수는 이번에는 땜빵처럼 듬성듬성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에 수액을 바르며 300년 동안 훌쩍였다나 뭐라나……. 제27장 아무래도 소설 속의 서브남을 만난 모양입니다 “자, 지난 시간에 이어 게일 쉴러의 논증 오류에 대해 계속 공부하겠습니다.” 음? 게일 쉴러라고? 나는 강의실의 맨 뒤에 앉아 딴청을 부리다 말고 눈길을 앞으로 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콧수염을 자랑스레 만지작거리고 있는 노교수가 눈에 들어왔다. 흐음. 아를란타에서는 콧수염을 기르는 게 유행인가? 이상하게 강의에 들어오는 교수님 중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아저씨랑 할아버지가 많단 말이지. 특히 이 교수님은 도대체 매일 콧수염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저렇게 털 한 가닥 한 가닥에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걸까? 그러고 보니 생긴 것도 그 동그랗고 납작한 감자 과자 로고에 그려진 콧수염 아저씨 닮았당. “자, 모두들 교재 173페이지를 펼치세요.” 나는 오늘도 강의실의 맨 뒷자리에서 도둑 청강 중이었다. 이 학교의 수업 내용은 대부분 내가 이미 몇 년 전에 다 배웠던 것들이라 슬슬 따분해지던 참이었는데, 이번 수업에서는 그중에서도 익숙한 이름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번쩍 들리고 말았다. 익숙한 이름이 나오면 오히려 지루해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내가 이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나는 모처럼 흥미가 돋아서 학생들의 앞에 놓인 교재를 힐끔 훔쳐보았다. 책의 제목은『편미분방정식에 의한 시공간의 곡률 연구와 특수 상대성 이론에 기반한 게일 쉴러의 논리가 가진 오류와 그 비판 그리고 재해석』이었다. 그 쓸데없이 긴 제목을 눈에 담은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크으’ 신음하고 말았다. 으억, 나 이 책 알아! 이거 이제키엘이 10살 때 공부했던 거잖아! 알피어스 공작저에서 만났을 때 이제키엘이 이 책을 공부 중이라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식겁했었는데. 이제키엘은 그때부터 아를란타 회화도 유창하게 하고 신성 사이칸시아 성서 내용도 죄다 줄줄 외우고 있어서 나한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지. 크윽. 생각할수록 불공평한 남자 주인공 버프 같으니라고. ======================================= [104화] “지난번 설명했다시피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한 시공간의 연구는 마법에도 응용될 수 있는데…….” 잠깐……. 그런데 지금 이 수업 몇 학년 수업이더라? 나는 문득 밀려드는 의구심에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윽고 강의실 뒤쪽에 앉아 졸고 있는 하리 에른스트의 오빠를 발견했다. 저 사람이 이제키엘하고 동갑이라고 했었지? 그럼 지금 이 수업, 17살 애들이 듣는 거란 말이네? 헉, 그럼 이제키엘은 17살 때 배우는 내용을 이미 10살 때 공부하고 있었다는 소리야? 진짜? 허허……. 나는 또 한 번 이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깨닫고 잠깐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아니, 이건 진짜 너무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주인공이라고 해도 그렇지, 불공평하게 능력치를……. “찹스테이크…… 음냐.” 그래, 찹스테이크를 몰빵해서……. 으, 응? 뭐? 찹스테이크?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웅얼거리는 소리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누가 잠꼬대라도 하는 건가? 아마도 그 소리를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닌 듯, 내 근처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씩 찹스테이크의 근원지를 찾아 의문 어린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오므라이스 말고…… 찹스테이크……. 음. 으윽…….”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 정체불명의 소리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갈색 머리통의 남학생에게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수업이 막 시작될 때부터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고개를 떨어뜨리며 졸고 있던 하리 에른스트의 오빠였다. 뭐……. 지금은 점심시간도 지난 오후 수업이겠다, 계절도 딱 춘곤증이 오기 좋은 봄이겠다, 이런 박 터지는 내용의 수업을 듣고 있으면 졸릴 만도 하지. 나도 에메랄드궁에서 이 부분을 공부할 때에는 지루함에 몸서리쳐야만 했으니까. 흑, 하지만 난 일대일 과외 같은 교습 방식이라 수업 중에 졸 수도 없었지. 내가 얼마나 허벅지를 꼬집으며 졸음을 참아야만 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할 내 인고의 세월이여! 나는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에게 동병상련의 정이 담긴 짠한 시선을 보내며 남몰래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르륵! 쾅! 그런데 바로 그때, 갑자기 하리 에른스트의 오빠가 자리에서 요란스럽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고기……! 오므라이스 말고 찹스테이크 달라니까아아!” ……찹스테이크 달라니까아아! ……달라니까아! ……니까! 고요한 강의실 안에 방금 전 그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이 쩌렁쩌렁하게 외친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 아련한 울림 속에서 학생들은 입을 쩌억 벌린 채 제각각 놀라거나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중에는 흠칫하며 앞에 있는 교수의 눈치를 살피는 학생들도 있었다. “쓰읍……. 으응?” 하리 에른스트의 오빠……. 그러니까 카벨 에른스트는 여전히 잠이 덜 깬 얼굴로 인상을 팍 쓰더니 손을 들어 입가를 훔쳤다. 호, 혹시 지금 침 닦는 거니? “카벨 에른스트 군…….” 착 가라앉은 음산한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헉, 콧수염 교수님 화났나 보다. “어? 교수님, 제 찹스테이크 못 보셨어요?” 그 상황에서 오직 카벨 에른스트만이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교수에게 찹스테이크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입매를 한차례 꿈틀거린 콧수염 교수가 처억 문 쪽을 손가락질했다. “나가게.” “아, 밖에 있었구나! 감사합니다, 교수님!” 푸읍!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을 뻔했다. 하지만 나뿐만이 아니라 강의실 안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간간이 웃음을 참는 소리를 내는 것을 나는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콧수염 교수는 화가 나서 ‘넌 내 수업을 들을 자격도 없어! 당장 나가! 겟 아웃!’을 시전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카벨 에른스트는 찹스테이크의 행방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알려줘서 고맙다’고 어리벙벙하게 대꾸했으니 황당해서라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게다가 그는 정말 날듯이 강의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당연하게도 콧수염 교수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혼자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학생들은 너도나도 웃음을 애써 참는 이상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서 자꾸만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참느라 용을 써야만 했다. * * * “자주 오시네요? 찾으시는 책이 뭔지 알려주시면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꽤 자주 얼굴을 봐서 이제는 낯이 익은 서점의 점원이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법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앗, 들켰다. 하긴 들켰다고 하기에는 그동안 내가 너무 비슷한 내용의 책에만 한결 같은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 여기가 아를란타에서 제일 큰 서점이라 다른 데보다 자주 왔던 것인데, 아무래도 점원에게 눈도장을 찍혀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지난번에 클로드가 아를란타에까지 영상석을 뿌렸다는 말을 듣고 경계심을 갖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비품실에서 하리 에른스트에게 들었던 바에 의하면 외국의 백성들에게까지 영상석을 전부 보여주는 건 무리라 황실과 귀족들에게만 내 소식이 전해졌다고 했다. “혹시 정신 계열 마법에 대한 책은 없나요?” “정신 계열이요?” “음, 그러니까 사람의 기억을 다루는 마법이라던가…….” 나는 망설이다가 점원에게 물었다. 학교 도서관에 있던 책도 그렇고, 서점의 이 방대한 서적 중에서도 내가 원하는 핵심 내용을 담은 책은 없었기 때문에 그렇잖아도 한번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점원은 내 물음에 멈칫하다가 곧 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아가씨, 설마 흑마법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이번에는 내가 멈칫할 차례였다. 흑마법은 현재 오벨리아에서 금서로 취급되어 더 이상은 그에 관련된 서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본래 흑마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폭정을 휘두르던 선황과 황태자가 오벨리아에서 손꼽히는 흑마법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자신의 뜻을 거스른 가신들의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등 횡포를 부렸다고 한다. 그런 황제의 밑에서 오벨리아의 흑마법사들이 덩달아 겁 없이 난동을 부려댄 것은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클로드의 치세 아래 흑마법사들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데다, 그나마도 실전 마법형이라기보다는 이론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비록 흑마법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대륙에는 흑마법을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서점의 점원이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기억에 관한 마법은 흑마법에서 찾아야만 하는 거예요?” “정신 계열 쪽은 대개 그쪽이라고 알고 있어요.” “전부 다는 아니겠죠?” “이론만 찾으시는 거라면…….” 점원은 여전히 나를 경계하면서도 책장을 뒤져 책을 몇 권 찾아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훑어보았지만 역시 내가 원하는 내용은 그 안에 없었기 때문에 실망하고 말았다. 내 머릿속에는 방금 전 점원이 해준 말이 맴돌고 있었다. 그렇구나. 흑마법에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마법이 있을 수도 있는 거구나. 그런데 고민에 빠진 채 빈손으로 서점을 나서려고 하는 나를 점원이 불러 세웠다. “여기 적힌 곳에는 원하시는 책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는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볼일이 끝났다는 듯 다른 손님에게 가버렸다. 나는 두어 번 접힌 쪽지를 들고 서점을 나섰다. -뉴그레이 56번지 13번 골목의 이름 없는 검은 간판.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쩍은 기운이 흐르는 내용이었다. 혹시 흑마법에 관한 책을 취급하는 곳인가? 아를란타에서는 그래도 오벨리아에서처럼 흑마법이 금서처럼 취급되는 건 아니라 나한테 이 쪽지를 준 것 같은데……. 서점 직원이 직접 알려준 곳이니만큼 위험한 장소는 아닐 것 같았지만 그래도 조금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쪽지에 적힌 곳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어서 옵쇼.” 그리고 도착하게 된 검은 간판의 가게는 예상외로 평범했다. 쪽지만 봤을 때에는 꼭 음침하고 으슥한 골목에 있을 것 같았는데, 양지 바른 땅에 엄청 대놓고 위치해 있잖아? 심지어 가게 맞은편에는 식료품점이 있어서 길에 사람들의 왕래도 잦았다. “혹시 사람의 기억이나 정신 쪽을 다루는 마법서가 있을까요?” “있지.”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은 두말 않고 어느 한곳을 손가락질 했다. 나는 약간 찜찜한 기분으로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걸어갔다. 으엑, 먼지! 무슨 청소를 1년은 안 한 것처럼 이렇게 책마다 먼지가 다 쌓여 있는 거지? 여기 평소에 손님도 없는 건가? 물론 주인 할아버지의 저 시큰둥한 반응을 보니 별로 장사할 마음은 없는 것 같지만 말이야.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가게의 한쪽 구석에 대강 쌓여 있는 책들을 살펴보았다. 하도 먼지가 많이 쌓여 있어서 제목을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랑은 전쟁! 연적의 피를 말려 죽이는 44개의 저주에 대하여』, 『진짜 마녀가 소개하는 사랑의 묘약 제조법』, 『‘연인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당신도 할 수 있다, 흑마법 100선』. 엥, 근데 제목을 보니까 왜 죄다 연애 관련 책 같지? 내가 원하는 카테고리랑 완전 다른데! 나는 얼굴을 구긴 채 문 앞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나에게 관심을 끄고 꽤나 집중해서 신문의 퀴즈 같은 것을 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알아서 원하는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흑마법서를 몇 개 뒤적여보고는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원하는 내용을 생각보다 상세히 기록해놓고 있는 책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직접 그런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이것들을 가져가서 기억 회복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거 계산해 주세요.” “응? 이걸 다 산다고?” 눈앞에 책을 수북이 쌓아놓자 그제야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그의 눈빛이 변했다. 뒤이어 고막을 파고든 외침에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이제 보니 저주 받았구먼!” 지금 이 할아버지가 나한테 뭐라고 한 거지? “저주라고요?” “그래, 아가씨가 불행해지길 원하는 사람에게 저주받았어!” 나한테 못 박힌 듯 고정된 눈동자에는 기이한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더분한 인상이었던 노인의 분위기가 일순간 급변하자 나는 약간의 오싹함을 느꼈다. “할아버지, 혹시 흑마법사세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는 동안 불현듯 그런 느낌이 등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청산했지만 소싯적에는 그랬지.” 가게의 주인이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제가 무슨 저주를 받았다는 거죠?” ======================================= [105화] 흑마법사를 이렇게 직접 만난 건 처음이라 약간 긴장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려서 애써 꺼림칙함을 뒤로한 채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귀기가 흐르는 눈동자로 나를 훑어보았다. “아주 교묘하구먼, 교묘해…….” 기묘한 시선이 나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손끝을 움찔거려야만 했다. “아가씨가 받은 저주는…….”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그만 김이 팍 새고 말았다. “나도 잘 모르겠수. 허허.” 다시금 수더분한 인상으로 돌아간 주인 할아버지가 턱을 긁적이며 소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건 거의 사념 같으니 애초에 그리 영향력이 큰 저주도 아니었겠구먼. 기껏 해야 길을 가다가 돌부리 걸려 넘어진다거나, 밥을 먹다가 재수 없게 음식물이 흰 옷에 튄다거나 하는 수준이었겠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폼을 잡던 것치고는 참으로 싱거운 답변이었다. 이 할아버지, 그냥 돌팔이 아니야? 하긴, 진짜 실력 좋은 마법사라면 이런 구석진 골목길에 처박혀서 먼지가 폴폴 날리는 책이나 팔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저주를 풀려는 생각 때문이면 이 책들은 굳이 살 필요가 없어. 보아하니 어차피 쥐똥만 하던 효력도 다 사라졌는데, 뭘.” 지, 지금 이 말 믿어도 되는 건가? 저주라고 하니까 되게 찜찜한데. 그런데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보통은 어떻게 해서든 물건을 팔아보려고 해야 정상인데, 이 할아버지는 오히려 사지 말라고 하니까 묘하게 믿음이 가고 있어……. 나는 기묘한 기분으로 마주한 사람을 바라보다가 곧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쭈어 봐도 되나요?” “뭔데?” “전직 흑마법사셨다고 하니까 고견을 구하고 싶어서요. 이 책들에 나오는 마법들 말인데,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사용해도 위험하지 않은 건가요?” 그는 내가 가져온 책들을 한번 눈길로 스친 뒤 쯧 혀를 찼다. “아가씨, 인생 종치게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 나는 그의 물음에 뜨헉 놀라서 반사적으로 외쳤다. “반대예요! 저 때문에 다친 사람이 있는데 치료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구요.” “치료라고? 흑마법으로?” “일반 마법으로는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했는걸요.” “관두쇼.”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딱 잘라 말했다. “아가씨, 웬만하면 흑마법에 손을 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흑마법은 말이야.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흑마법을 남발한 놈이나 그 주위에 있는 사람 치고 끝이 좋았던 놈은 하나도 보지 못했단 말이지.” 나는 그의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사실 나도 흑마법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벨리아에서도 그렇고 아를란타에서도 흑마법에 대한 서적은 찾아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 위험성의 정도나 마법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흑마법으로 치료를 한다니, 내 평생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구먼.” “하지만…….” “보나마나 아가씨도 무언가 간절한 게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왔겠지?” 그의 말에 나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금 혀를 차며 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힘에 함부로 기댔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지. 아가씨는 그걸 감당할 수 있겠나?”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해봤자 그 능력은 아직 미진했고, 그마저도 지극히 불안정했다. 그러니 차라리 가만히 있는 편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조차 해보지 않고 이대로 가만히 손을 놓은 채 있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모든 건 나한테서 비롯된 일이니 어떻게든 내가 해결해야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기 위한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었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실제로 내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다는 것이 지금의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굳은 얼굴로 입술을 벌리는 내게 노인이 다시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잠깐, 쉽게 대답하지 마슈. 흑마법 그놈은 꽤나 영악해서 시전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본인도 모르는 사이 하나씩 야금야금 뺏어간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이의 얼굴이 방금 전과는 또 달리 더없이 황폐하고 어둑해 보여서 나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사악한지, 불행의 기운만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그 사람의 영혼을 한입에 먹어치우려고 해. 한번 잘 생각해 보슈. 아가씨가 여기까지 이끌려 오게 된 경위도 아마 정상적인 건 아니었을 테니.” 젊었을 적 흑마법사였다고 하는 초로의 노인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잃어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어둡게 그림자 진 눈동자 속에 마모된 빛을 드리운 채 말했다. “척 보니 아가씨는 잃을 게 아주 많아 보이는데, 그럼 더더욱 이런 곳을 찾아오면 안 되는 거라우. 아가씨에게는 아가씨가 무언가를 잃었을 때 같이 걱정하고 울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나?” “…….” “만약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런 데 발을 들여서는 안 돼.” 그 후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여전히 눈앞에 서 있는 나를 등진 채 돌아앉았다. “돌아가. 아가씨에게는 책을 팔지 않을 테니.” * * * 잠시 후, 나는 노을이 지는 길목으로 나섰다. 저녁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맞은편의 식료품점을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동안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가게 안에 있을 때만 해도 무언가에 부추겨지듯 원인 모를 갈망이 차올랐었는데, 이제야 좀 차분하게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다. 날씨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어쩐지 양쪽 어깨가 공연히 으스스했다. 마치 나도 모르는 새 누군가에게 떠밀려 절벽 끝에 간당간당하게 서 있다가 가까스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느낌이었다. 한번 힐끔 뒤를 돌아보자 방금 전과 변함없는 검은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인 할아버지는 아직도 문 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힘에 함부로 기댔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되지. 아가씨는 그걸 감당할 수 있겠나?’ 방금 전 가게 안에서 들었던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척 보니 아가씨는 잃을 게 아주 많아 보이는데, 그럼 더더욱 이런 곳을 찾아오면 안 되는 거라우. 아가씨에게는 아가씨가 무언가를 잃었을 때 같이 걱정하고 울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나?’ 나는 잠시 동안 제자리에 서서 지금 막 빠져나온 가게를 바라보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땅거미 진 길거리에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정신 차리자.” 나는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왠지 좀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것도 꾹 억눌러 참았다. 바로 얼마 전에 봤는데도 클로드를 또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자꾸만 그림자처럼 등 뒤로 눌러 붙는 미련을 애써 떨쳐 버린 채 홀로 해지는 거리를 걸었다. * * * 며칠 후, 나는 투명화 마법을 건 채 학교의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여기도 그동안 몇 번 와서 죽치고 있었더니 익숙해져서 그런가, 이제는 거의 내 전용 도서관 같고 그러네. 어쩌면 학생들이 이용하지 않는 수업 시간에만 와서 그럴 수도 있었다. 지금은 학생들이 마지막 교시의 수업을 듣고 있을 때여서 도서관 열람실도 한산했다. 이 학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을 꼽으라 한다면 역시 도서관이었다. 물론 오벨리아의 황성에 있던 공용 도서관이나 클로드가 만들어주었던 내 개인 도서관도 좋았지만 이 학교의 도서관은 또 그 나름대로 훌륭했다. 일단 학교라 그런지 비치된 서적들의 양도 방대했고, 원하는 책을 한눈에 찾기 쉽게 구간마다 정리도 아주 잘되어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오벨리아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아를란타의 책이 가득해서 좋았다. 물론 그 책들은 외국어인 아를란타어로 쓰여 있었지만 그동안 내가 갈고 닦은 아를란타어 실력이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아를란타의 원서로 된 책들을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술술 읽을 수 있었다. 비록 10살 때부터 아를란타어로 회화를 좔좔 읊어댔던 이제키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그래도……. 그러고 보면 나는 인생 2회 차인데 아무리 남자 주인공이라고는 해도 왜 이제키엘에게 지식으로 밀리는 거지? 으윽, 갑자기 눈물이……. 나는 구슬피 눈가를 훔치며 외국 원서를 모아놓은 책장을 지나쳐 갔다. 오벨리아에서 아를란타의 책들이 원서로 취급되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내가 공부하던 오벨리아의 책들은 외국 원서로 분류되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다소 기분이 미묘해졌다. 내가 정말 지금 아를란타에 있긴 하구나 싶어서 말이다. 나는 슬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본 후 책을 몇 권 뽑아서 가장 구석진 책상에 앉았다. 사실 아무리 내가 투명화 마법에 성공을 했다고 해도 그게 내가 들고 있는 다른 사물에까지 오래 지속이 될지 영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혼자서 허공에 둥둥 떠 있거나 저절로 종이를 팔락이며 넘기는 책을 보고 심장마비에라도 걸릴까 봐 칸막이로 된 책상의 가장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내가 꺼내 온 책들은 마력을 다루는 방법과 마법의 이론 또 실전 마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아놓은 각종 마법서와 마법학 책들이었다. 아직 마력 운용에 대해 공부해야 할 점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틈틈이 도서관과 서점을 찾아 독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검은 간판의 가게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그날의 기억을 털어버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약간 울적해졌다. 안 돼,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하자. 마력 조절도 아직 혼자서 잘 못하는 주제에 나서서 뭘 하겠다고……. 나는 침울해진 상태로 들고 온 책들에 코를 박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확 밀어붙이는 게 중요하다니까!” 오잉? 그런데 얼마 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두런두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수업이 다 끝났나?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있는 시계를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앗, 그럼 빨리 자리 정리하고 가야겠네! 아무래도 직접 책장으로 가서 책을 꽂아 넣을 시간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손에 마력을 모았다. “내가 언제 너한테 충고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던가?” “내 말 들어서 손해 볼 거 하나도 없대도. 요한, 너도 잘 생각해야 돼. 그렇지 않아도 네가 좋아하는 여자애는 인기도 많은데 그러다가 다른 놈이 확 낚아채 가는 수가 있어.” 그러자 내 앞에 쌓여 있던 책들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를 향해 슈웅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전까지 우울했던 것을 잠시 잊고 책장의 빈칸마다 하나둘씩 차곡차곡 꽂히기 시작하는 책들을 약간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 [106화] 와아, 이러니까 나 좀 루카스 같지 않아? 으앙. 루비궁에 찌그러져서 오늘 죽나 내일 죽나 하던 내가 어느새 이렇게 훌륭한 마법사가 되다니. 이것이야말로 인간 승리, 인생 반전 아니겠습니까? “글쎄. 지금까지 네 말을 들어 득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말이지. 그리고 목소리 낮춰. 여긴 도서관이야.” “야, 그러지 말고…….” 그나저나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청춘이로세. 나는 아련한 감상에 젖어 코 밑을 손가락으로 쓰윽 훑었다. 그래, 나중에 후회 말고 학창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쌓도록 하세요. 아디오스! 다행히도 내가 정리를 모두 끝마쳤을 때 학생들이 책장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들을 피해 살금살금 도서관을 벗어났다. * * * “하리, 넌 방학 때 뭐 할 거야?” “글쎄. 아직 생각 안 해봤어.” 이 짓도 몇 번 하다 보니까 익숙해져서 그런지 나도 이제는 전보다 더 수월히 학생들 사이를 요리조리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으흠. 이러고 있으니까 꼭 첩보물을 찍는 것 같아서 조금은 재미있기도 하고. 나는 기회를 노리다가 하리 에른스트의 옆으로 슬쩍 다가가 손 안에 쥐고 있던 것을 그녀의 교복 치마 주머니에 쑤욱 넣어주었다. 지난번 비품실에서 그녀가 떨어뜨리고 갔던 이름이 새겨진 펜던트였다. 이렇게 몰래 주머니에 넣어두면 나중에 발견하겠지. 하지만 나는 하리 에른스트가 얼마나 놀라운 육감을 가지고 있는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가 방금 전보다 약간 묵직해진 것을 눈치챈 듯이 곧장 ‘으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다음 순간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으헑!” 하리 에른스트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엉거주춤 옆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이 분명했다. “헉! 너 갑자기 왜 그래?” 그녀의 괴성을 듣고 옆에 있던 친구도, 그리고 주변을 지나가던 학생들도 저마다 못 들을 걸 들은 듯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하리 에른스트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등 뒤로 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미, 미안합니다! 난 이렇게 빨리 알아차릴 줄 모르고 그만…….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몇 번이나 가까이 다가가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그러더니만! 나도 설마 지금 눈이 마주칠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다구요, 으앙! “아, 아니야. 내가 뭘 잘못 봤어.” 하리 에른스트는 어지간히 크게 놀랐는지 심장을 부여잡고 헉헉거리다가 겨우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나 잠깐 화장실!” “꺄악. 그런 얘기는 크게 말하지 마!” 그리고 그녀는 옆에 있던 내 손목을 붙잡은 뒤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엄마야, 이제 보니까 이 언니 제법 박력 있네. “공주님, 왜 아직도 여기에 계세요?” 잠시 후 우리 두 사람은 비어 있는 강의실로 들어섰다. 하리 에른스트는 문을 닫고 잠깐 교실 안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다가 곧 소리를 낮추어 내게 물었다. 지난번 비품실에서 헤어진 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또 나를 보게 되어서 몹시 놀랐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의 교복 치마를 가리켰다. “비품실에서 뭘 주웠는데 그걸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요.” 그제야 하리 에른스트는 방금 전 자신의 오감을 건드렸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곧 그녀가 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자신의 치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 어디로 갔나 했었는데.” 그녀는 펜던트를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몰랐던 눈치였다. 물건을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한 뒤 조금 더 부드럽게 풀어지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그녀에게 있어 꽤나 중요한 펜던트였던 것 같았다. 크흥. 그럼 진작 오늘 같은 방법을 쓸 걸 그랬나? “좀 더 빨리 돌려주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어서 늦었어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아예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감사하죠.” “그거 마법용품이죠?” “네? 마법용품이요?” 나는 오늘에서야 거의 확신한 사실을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하리 에른스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나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아, 이 언니도 모르나 보네. 하지만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면 그거 잠깐만 나한테 줄 수 있어요? 딱 10초, 아니, 5초면 돼요.” 나도 방금 전 저 밖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깨달은 사실인데,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면 더 분명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부탁하자 하리 에른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한테 펜던트를 넘겨주었다. “어어!” 그리고 펜던트가 완전히 내 손에 옮겨온 순간, 돌연 그녀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 보여요?” “아, 아니요.”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나는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펜던트를 하리 에른스트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내 손이 자신에게 닿는 순간 흠칫하다가 곧 다시금 나를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이걸 돌려주러 그동안 몇 번 왔었는데…….” “네? 저 때문에 학술원에 몇 번이나 오셨었단 말이에요?” “네. 그런데 처음 만났던 날과 달리 가까이 가도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더라고요.” 그녀는 내가 이 펜던트를 돌려주기 위해 학교에 몇 번이나 왔었다는 사실에 꽤나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 펜던트가 마법의 영향을 무효화시키는 것 같아요.” 나는 내가 알아차린 사실을 하리 에른스트에게 말해주었다. 그녀도 방금 전 내가 이 펜던트를 잠깐 빌렸을 때부터 내가 안 것과 같은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하리 에른스트는 옆에 있던 책상 위에 펜던트를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하며 무언가를 혼자서 시험해 보더니 곧 감탄했다. “와, 진짜네요. 신기하다.” 신기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지고만 있어도 마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물건이라니, 완전 대단하잖아? 만들기도 어렵고 비싸기도 엄청 비쌀 것 같은데. 벌컥! “어라? 야, 너 혼자서 뭐 해?” 바로 그때 벌컥 문이 열리더니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약간 굽실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장난스러운 푸른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곧바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하리 에른스트의 오빠이자 얼마 전 강의실에서 찹스테이크의 행방을 열렬히 묻던 카벨 에른스트였다. 쓰읍. 그런데 지난번부터 느낀 거지만 저 형제들은 아닌 척해도 하리 에른스트에게 관심이 엄청나게 많은 것 같단 말이야? 어떻게 그녀가 혼자 있을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오는 거지? 물론 하리 에른스트는 그들이 귀찮은 눈치였지만. 봐, 지금도 ‘또 너냐?’는 듯이 쳐다보고 있잖아. “카벨 오빠, 웬일이야?” “어, 이거 너 입학할 때 형이 줬던 거네?” 그런데 강의실 안으로 갑자기 난입한 카벨 에른스트가 여동생의 손에 들려 있던 펜던트를 아는 척하며 갑자기 그것을 낚아채 갔다. 헉! 안 돼, 지금 그걸 가져가면! “오빠!” “악! 으헑!” 이번에는 카벨 에른스트가 펜던트를 손에 쥔 채 괴성을 내질렀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그 요상한 소리조차 꼭 닮아 있었다. 그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듯 주춤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 나를 향한 그의 푸른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나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상황에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악, 갑자기 펜던트를 뺏어 가면 어떻게 해! 우리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채 동공을 흔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동안 카벨 에른스트의 얼굴이 점차적으로 몽롱하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글쎄, 그가 나를 향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멍하게 중얼거렸다. “요정님……?” “이리 줘!” 바로 그 순간, 나 못지않게 당황하고 있던 하리 에른스트가 정신을 차린 듯 오빠의 손에서 펜던트를 잽싸게 다시 빼앗아 갔다. 그러자 나를 향하고 있던 푸른 눈동자가 잠에서 깨어난 듯이 퍼뜩 초점을 되찾았다. “헉! 방금 뭐였어?” 카벨 에른스트가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천사님에 이은 또 하나의 금단의 단어를 듣고 돌처럼 굳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럴 수가! 천사님 하나로도 벅찼는데 이제는 요정님이라니! 그건 우리 다이아나 요정님 전용 단어인데! 이, 이제 보니까 너 이제키엘 친구 맞구나! 게다가 강의 시간에 찹스테이크의 행방을 찾던 것도 그렇고, 이 사람 뭔가 사차원인가? “나 방금 요정을 봤어! 뭐지? 뭐야?” 으억! 잠깐만, 나 지금 잡힐 것 같아! 나는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뻗어진 손을 피해서 멀찍이 물러났다. 카벨 에른스트는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가 서 있던 곳을 팔로 휘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리 에른스트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 무슨 이상한 소리야? 세상에 요정이 어디 있어?” “아니야! 분명히 이 앞에 있었다고!” “오빠, 그새 꿈 꿨어?” “넌 못 봤어? 바로 이 앞에 요정님이 있었는데! 머리도 반짝반짝 눈도 반짝반짝했어! 뒤에서 막 빛이! 후광이!” 그, 그만해! 나 민망하단 말이야! 으아아앙! “특히 눈이 엄청 신기했단 말이야! 파란색도 녹색도 아니고 온갖 색깔로 반짝이는 게 꼭 보석처럼…….” “요정님 맞나 보네! 와아, 그런 신기한 눈은 요정님이 아니면 가지고 있기 어렵지. 그럼.” 쿠, 쿨럭! 나는 잇따른 하리 에른스트의 말에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그녀는 카벨 에른스트가 보석안을 보고 혹여나 내 정체를 눈치챌까 싶어 그냥 방금 전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요정이었다는 식으로 밀고 나가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래서 덩달아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차츰 고통스러워지고 있었다. 어흑. 왜 여기저기서 날 수치사시키려는 것 같지? 하지만 내가 방심한 것도 맞으니까. 그래, 마음껏 나를 괴롭혀라……. “헉! 그런데 어떻게 해, 오빠! 책에서 보니까 다른 사람한테 요정님을 본 걸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헉, 왜?” “그럼 요정님이 부끄러워서 숨어버린다고 했어. 방금 전에도 카벨 오빠가 ‘요정님’이라고 소리 내서 말하는 바람에 요정님이 다시 사라진 거 아니야?” “그런 거야?!” 아니, 그런데 저 말을 진짜 믿나? 7살도 아니고 17살이나 돼서 저런 말을 진짜 믿어? 이제키엘이 날 보고 천사님 소리를 했을 때는 당시 그의 나이가 10살이기라도 했지. 크흑. 세상에 요정이 있다는 걸 진짜로 믿으면 성격이 단순한 걸 떠나서 조, 조금 바보 같은 게 아닌가……. “으억! 그럼 어떡해! 이제 요정님 안 나와? 나 이제 요정님 다시 못 보는 거야? 안 돼! 처음으로 만난 내 이상형인데! 너 빨리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다고 해! 들은 거 취소해! 빨리!” 카벨 에른스트는 심지어 제 여동생의 어깨를 붙잡고 앞뒤로 막 짤짤짤 흔들기까지 했다. 잠깐……. 그런데 설마 이 세상에 진짜로 요정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 [107화] 새, 생각해 보면 마법이랑 마법 생물도 있는 세상인데 요정 같은 이종족도 어딘가 있을 법한 것 같기도 하고. 다 큰 사람이 저렇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요정을 믿는 걸 보니까 괜히 좀 찜찜해진당. “아, 좀! 오빠가 착하게 살면 요정님이 다시 나와 줄 수도 있겠지!” 한참을 오빠의 손에 과격하게 흔들리던 하리 에른스트가 마침내 폭발한 듯이 소리쳤다. 바로 그 순간 카벨 에른스트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착하게?” “그래.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고도 좀 안 치고! 상식적으로 요정님이 착한 사람을 좋아하겠니, 오빠처럼 막무가내에 사고뭉치인 사람을 좋아하겠니?” 그런데 이상하네. 왜 자꾸만 카벨 에른스트의 저 비글 같은 정신 산만함을 어디에선가 봤던 것 같지? 저 단순 무식, 혼자만 해맑은 성격도 묘하게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데. “네 말이 맞아.” “뭐?” 그러다 문득 카벨 에른스트가 여동생의 어깨를 놓으며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그에 하리 에른스트는 의아하게 얼굴을 찌푸렸으나 그는 결심한 듯 장엄하게 외쳤다. “난 요정님을 위해 달라질 거야아아아!” ……달라질 거야아아! ……질 거야아! ……거야! 사자후 같은 커다란 목소리가 강의실 벽을 타고 몇 번이고 메아리쳤다. 바로 그때, 불현듯 섬광 같은 깨달음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앗, 이제 생각났다! 어떻게 지금까지 새까맣게 잊고 있었지? 카벨 에른스트는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 제니트에게 홀딱 반해서 구애했던 서브남 중에 한 명이잖아! 제28장 소설 속의 여주인공은 행복하지 않아 카벨 에른스트는 어찌 보면 비운의 남자 조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니, 카벨 에른스트뿐만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공주님>에 등장했던 모든 남자 캐릭터가 그랬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키엘을 제외한 모든 남자 캐릭터’였지만. 왜냐하면 사랑스러운 공주님 제니트는 소설의 여주인공답게 타국의 내로라할 멋진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선택받은 것은 이제키엘뿐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제키엘이 워낙 독보적인 원탑 남자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다른 서브남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그와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하지도 못 했다. 뭐, 그래도 서브남들은 또 그 나름대로 마이너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카벨 에른스트도 소설 속에서 제니트에게 반해 열렬히 구애했던 비운의 서브남 중에 하나였다. 제니트와 카벨의 첫 만남은 오벨리아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제니트의 나이가 17살이었던가, 18살이었던가? 크흑. 남아 있는 기억이 영 부실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지금 시점에서는 몇 년 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 속에 나오는 카벨 에른스트는 학생이 아니라 아를란타 황실에 속한 꽤나 실력이 출중한 기사였으니까. 그래서 그는 아를란타의 사절단이 오벨리아에 왔을 때 그 호위로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애써 되살려 보자면, 아마도 겸사겸사 재학 시절의 친구였던 이제키엘을 만나 볼 생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카벨 에른스트는 그렇게 방문하게 된 오벨리아의 황성에서 제니트를 만나 첫눈에 ‘폴 인 러브!’ 하게 된다. 그것은 분명 그의 입장에서는 가히 운명적인 만남이라 일컬을 만했으나 불행히도 제니트에게는 아니어서, 결국 카벨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브남으로만 머물러야 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좀 불쌍하기는 하구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키엘이 처음부터 미친 존재감을 뿜어내는 남자 주인공이었던 것을! 그래도 비운의 사나이 카벨은 나름대로 해바라기 같은 캐릭터로 인기가 있었다. 무, 물론 오늘까지 그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잊고 있던 내가 뭘 알겠느냐만은……. 사실은 나에게 그 책을 소개해 주었던 중학생 여자애가 그렇게 말해주었던 것을 방금 막 기억해 냈을 뿐이었다. 으앙! 미안합니다, 서브남이여! 하지만 당신의 존재감이 너무나 티끌 같았던 것을……. 또르륵. 아무튼 그동안은 완전히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카벨 에른스트가 요정님 타령을 하면서 앞으로는 달라질 거라고 선포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수면 저 아래에 파묻혀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에서 제니트한테 요정님, 요정님 하면서 졸졸 쫓아다니던 멍멍이 같은 서브남이 있긴 했었지. 아무래도 저놈의 요정 소리를 하는 이유가 이 특이한 보석안 때문인 것 같은데……. 어흑. 사람 면전에 대고 저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하다니 진짜 너무한 것 아닙니까? 무, 물론 나도 다이아나를 요정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우리 다이아나 엄마는 진짜 요정님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다이아나를 요정님이라고 하는 건 아무 문제없다! 옳소, 옳소! 나는 카벨 에른스트를 끌고 강의실을 나서며 내게 눈인사를 하던 하리 에른스트를 떠올렸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씩 짠해지기 시작했다. 그 언니, 알고 보니 고생이 많았어……. 카벨 에른스트는 소위 막 나가는 불도저형의 인간이라 주위 사람들을 애먹이는 스타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카벨이 제니트한테 차이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닌가 싶고. 볼 때마다 눈앞에서 저놈의 망할 요정님 소리를 육성으로 내뱉어대는 남자라니……. 오소소! 상상만 해도 너무나 오싹하잖아? 아무리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저 요정님 공격을 면전에서 당했던 사람으로서 두둔해 줄 수가 없구나. 어흑, 역시 서브남은 서브남인 이유가 있는 거였어요. “그러고 보니 제니트는 요즘 뭘 하고 지내려나.” 제니트에게 첫눈에 반해 구애할 운명인 카벨 에른스트를 만난 탓이었을까. 나는 문득 제니트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뭐, 당연히 잘 지내고 있겠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황성을 나오기 전까지 어째서인지 한동안 연락이 없던 것이 떠올라서……. 잠깐. 혹시 흰둥이 아저씨가 ‘지금이 기회다!’ 하고 제니트를 클로드한테 넙죽 가져다 바친 건 아니겠지? 그 양반 좀 맛이 가서 제니트도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는데. 하기야 그런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면 소문이 안 날 리도 없으니 그건 또 아니려나 싶었다. 게다가 왠지 흰둥이 아저씨라면 제니트의 첫 등장도 엄청 요란하게 준비할 것 같은걸. 애초에 소설 속에서는 데뷔당트 날 제니트를 클로드와 처음 만나게 했었고. 그러니 적어도 클로드가 나를 찾는 일에만 이렇게 열혈인 지금, 제니트는 아직 알피어스 공작저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그럼 살짝만 보고 올까? ‘아가씨, 이제 보니 저주받았구먼!’ ‘아가씨가 불행해지길 원하는 사람에게 저주받았어!’ 나는 흑마법사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잠시 동안 침묵했다. 따악. 그리고 얼마 전 꽃 축제가 열렸던 라수스 지역의 흐드러진 꽃나무 위에 앉아 있다 말고 생각한 것을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 * * “이상하네…….” 잠시 후, 나는 저택을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다. 이번에는 순간 이동이 잘되어서 나는 알피어스 공작저의 지붕 위에 조용히 안착할 수 있었는데, 그 후 투명화 마법을 두르고 나무 위에 올라가 잠시 주변의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일단 나는 제니트의 방도 어디인지 모르니 무턱대고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쩐지 저택의 분위기가 기이했다. 뭔가 음울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단순히 기분 탓인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달칵. 바로 그때, 이유 모를 고요함에 젖어 있던 저택의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앗, 흰둥이 아저씨!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설마 알피어스 공작부인? 우와, 그동안 흰둥이 아저씨는 지겨울 정도로 얼굴을 봤지만 공작 부인을 보는 건 처음이다. 약간은 엄격해 보이는 우아한 귀부인이네. 이제키엘하고는 별로 안 닮은 것 같은데, 역시 흰둥이 주니어……. “이제키엘, 준비는 다 되었느냐?” “네, 아버지.” 알피어스 공작이 문 너머를 향해 묻자마자 다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번에는 이제키엘이었다. 나는 연회장에서의 일이 있었던 후로 처음 보는 이제키엘의 모습에 잠깐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문득 기억 속의 나지막한 음성이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만 실례를 범하겠습니다.’ ‘예.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키엘이 말없이 한참 동안이나 울고 있는 내 옆을 지켜주었던 것도 덩달아 떠올랐다. 나는 잠깐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다시금 그들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들 부자는 어디론가 외출을 하려는 것 같았다. “정말 당신과 이제키엘, 둘만 가도 되는 걸까요?” “대외적으로 로자리아와는 큰 교분이 없으니 그 편이 나을 것 같소.” 알피어스 공작 부인의 물음에 알피어스 공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로자리아라고? 지금 제니트의 이모네 집에 가려는 건가? 나는 혹시나 알피어스 공작이 드디어 ‘행동 개시!’를 외치며 수상한 일을 도모하려는 건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는 그렇다 쳐도 제니트는…….” “저도 갈 거예요.” 바로 그때, 열려 있는 문을 통해 검은 형체가 몸을 내밀었다. 검은색 일색인 차림으로 문을 나온 사람은 바로 제니트였다. 어째서인지 알피어스의 가족들은 그런 제니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네. 다들 옷차림이 왜 저러지? 다들 새까만 색이잖아. 그나마 흰둥이 아저씨나 이제키엘은 남성용 정장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제니트까지 왜 저런 까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까? 게다가 모자 아래로는 까만 베일까지 드리워져 있고……. “제니트,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안 된다는 거죠?”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뿐, 곧 알피어스 공작이 다소 엄한 말투로 제니트에게 말했다. 보아 하니 지금 두 사람의 목적지인 로자리아 백작가로 제니트를 데려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제 이모예요. 제가 아니면 누구에게 자격이 있단 말이에요?” “제니트, 이건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너도 알지 않느냐?” “그럼 무엇이 문제인데요? 아저씨가 말리셔도 저는 갈 거예요.” 어, 음.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런 거죠? 제니트는 가고 싶어 하고, 알피어스 공작은 말리고 싶어 한다는 건 알겠는데…….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이상하게 찜찜하고 무거운 공기는 도대체 뭐랍니까? “허락할 수 없다.” “아저씨!” 잠시 침묵하던 로저 알피어스가 냉정하게 읊조린 순간, 제니트가 거의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녀가 이 정도까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얼굴에 드리워진 베일 때문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들었을 때, 제니트는 거의 울먹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피어스 공작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제가 가야 해요. 제가 가야 한단 말이에요…….” ======================================= [108화]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는지, 이어지는 제니트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은 채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위독하다는 비보를 처음 전해 들었던 날부터 오늘 아침까지, 분명히 네가 이해하기 쉽도록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했었지. 이렇게 우겨도 안 된다.” “하지만…….” “그것 보거라. 지금도 네 감정 하나를 주체하지 못해 그리 쉽게 눈물 바람을 하면서 어디를 따라오겠다는 것이냐?” “제 이모인데, 제 가족인데 어째서…….” “그래.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로자리아 부인의 관을 눈앞에 둔다면 분명 이보다 훨씬 더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게 뻔하지 않더냐?” 바로 그 순간 나는 소리 죽인 채 훅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뭐?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죽었다고? 제니트의 이모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로자리아 백작 부인은 앞으로 제니트의 뒤에서 그녀를 제1 황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할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데 소설 속에서는 아타나시아를 처리하기 전까지 멀쩡히 살아 있던 그녀가 이렇게 갑자기 죽었다니?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제도로 온다고 제니트가 기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장례식은 이제키엘과 둘이 다녀오겠다. 그러니 제니트, 너는 방에서 마음을 잘 추스르고 있거라.” 알피어스 공작은 끝까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니트를 로자리아 백작가로 데려갈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얼굴과 말투였다. 나는 여전히 숨을 죽인 채 까만 베일 밑으로 드러난 제니트의 턱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결국 제니트는 자신의 주장을 알피어스 공작에게 관철시키지 못한 채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아버지, 제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그러려무나.” 이제키엘이 제니트의 뒤를 따라 자리를 비우고 난 뒤 알피어스 공작의 깊은 한숨 소리가 귀를 울렸다. “제가 잘 달래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탄식하는 알피어스 공작과 그런 그를 위로하는 공작 부인을 뒤로한 채로 슬며시 나무 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방금 전 제니트가 눈물 젖은 얼굴로 2층의 창가에 나타나 커튼을 치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방이 어디인지 알아차린 상태였기 때문에 순간 이동을 쓰는 것도 쉬웠다. 똑똑. “제니트.” 이제 나는 저택 내부에 들어와 2층 복도의 구석에 몸을 숨긴 채 방문을 두드리는 이제키엘을 보고 있었다. 커흑. 그런데 나 왜 화분 뒤에 이렇게 모양 빠지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니? 지금 투명화 마법도 쓰고 있으면서. 뭐, 솔직히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것 자체가 악취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난 이제 로자리아 백작저로 출발해야 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제니트에게서 대답이 없자 이제키엘은 그냥 닫혀 있는 문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화분 뒤에 다리를 굽히고 앉은 채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전에 아까 들고 있던 걸 나한테 줘. 내가 대신 전해 줄 테니까.” 응? 그런데 아까 제니트가 들고 있던 거라니. 그런 게 있었나? “제니트.” 다시 한 번 이제키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제니트의 이름을 불렀다. 그 후 한동안 주위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키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문을 마주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달칵,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마침내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제니트는 울고 있었다. 아까 창가에 살짝 모습을 비췄던 것처럼 검은 베일을 벗은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흠뻑 젖어 있는 상태였다. 제니트는 문 밖에 서 있는 이제키엘을 보며 그저 말없이 울기만 했다. 어쩌면 알피어스 공작과의 대화를 통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제니트.” 그런 그녀를 잠시 동안 가만히 바라보던 이제키엘이 마침내 천천히 손을 올렸다. “괜찮아.” 앞으로 뻗어진 팔이 작은 떨림을 머금은 가냘픈 어깨에 둘러졌다. 나는 제니트가 이제키엘의 품에 안겨드는 모습을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울어도 괜찮아.” “으, 흐윽…….”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으니 슬픈 게 당연해.” 이제키엘의 낮은 속삭임과 제니트의 작은 흐느낌이 조용한 공기 속에 파도처럼 떠밀려 와 내 귀에까지 선명히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괴롭게 느껴지겠지.” “흐흑…….” 몇 년 전, 하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온실에서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를란타로 떠날 날을 앞두고 있던 이제키엘과 그런 그에게 매달려 가지 말라고 울던 제니트. 그때에도 그는 지금처럼 흐느끼는 그녀를 안아서 달래주었다. 약간은 서툰 손길로 떨리는 작은 어깨를 애써 다독여가며. “제니트, 우리도 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 다만 지금 이 순간 제니트를 위로하는 이제키엘의 손길은 그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했다. 그런 그의 품 안에서 제니트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이제키엘의 등을 껴안고, 듣는 사람조차 울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서럽게……. “제, 대신…….” 마침내 제니트가 눈물 섞인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꽃을…… 전해 주세요.” “그래.” “제가 아주 많이 사랑했다고……. 흐윽. 지금도 많이 사랑한다고…….” “그래.” “앞으로도, 많이……. 아주 많이 보고 싶을 거라고…… 그렇게 전해 주세요…….” 가까스로 그렇게 말한 뒤 제니트는 또다시 감정이 복받친 듯 흐느꼈다. 나는 이제키엘의 등에 둘러진 제니트의 손에 하얀 꽃이 들려 있는 것을 그제야 발견했다. 아, 그렇구나. 제니트는 죽은 이모의 마지막 가는 길에 꽃 한 송이조차 직접 바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전할게.” 이제키엘은 울고 있는 제니트의 귓가에 대고 그렇게 속삭여 주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감상에 젖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쩐지 약간 답답한 기분이 되어 소리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 * * 눈을 뜨니 나는 또다시 갈대밭에 와 있었다. 아무래도 심적 동요를 일으킨 상태에서 순간 이동을 쓰면 이 갈대밭으로 이동될 확률이 커지는 모양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체크 포인트, 뭐 그런 건가? “아아아아…….” 어쨌든, 나는 갈대밭 위에 드러누우며 억눌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왜 이런 일이 연달아 생기는 거지? 클로드는 기억 상실에 로자리아 백작 부인은 사망이라니. 나는 머리 위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잠깐 동안 말문이 막힌 채 바라보았다. 연갈색의 갈대 잎이 몸을 부대끼며 시야 가득 정처 없이 흔들렸다. 방금 전 보았던 이제키엘과 제니트의 모습도 그와 함께 덩달아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러자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 갑자기 루카스가 보고 싶다. 루카스라면 콧방귀를 뀌면서 날 비웃겠지. 이런 일들도 전부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고민거리도, 복잡하게 생각할 일도 하나도 없다는 듯이. “아, 갑자기 전개가 이상해지네.” 물론 소설대로 이야기가 진행되기를 바란 건 절대 아니었지만 말이다. 크윽. 당연하지! 난 소설에서처럼 독살극의 누명을 쓰기도 싫고 클로드에게 죽기도 싫단 말이야. 그러니까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죽은 건 어떻게 보면 나한테 있어서 호재라고도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문득 방금 전 보았던 제니트의 모습을 떠올리고 나면 마음이 다소 미묘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로자리아 백작 부인은 비록 나에게는 반길 만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제니트에게는 하나뿐인 이모가 아니던가. 어릴 때였다면 솔직히 제니트가 슬퍼하든 말든 나와는 큰 상관이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다과회와 편지로 쌓아온 그동안의 정이 있어서 그런지 나는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래서 그날 저녁, 나는 또 한 번 알피어스 공작가로 몰래 잠입했다. 낮에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컴컴한 밤중에도 알피어스 공작저에는 음울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 어둑한 분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첫째가 이모를 잃은 제니트, 그리고 둘째가 앞으로의 계획이 꼬이게 된 알피어스 공작일 테지. 물론 흰둥이 아저씨가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한테 한 다리 걸쳐 놨던 것처럼 로자리아 백작 부인하고도 나름대로의 공모를 하고 있었을 테니까. 참, 그러고 보면 그 양반도 소설 속에서와는 달리 하는 일이 쉽게 안 풀리는 케이스란 말이야? 여기저기 포석은 잘 깔아 놓는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자꾸만 튀어나오니, 원. 나랑 좀 잘 지내는가 싶던 클로드가 기억을 잃고 횡포를 부리지를 않나, 또 제니트 쪽의 아군이었던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갑자기 죽지를 않나. 크읍. 그러니까 아저씨, 이제부터라도 다른 사람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수성가합시다.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으면서 왜 쓸데없는 욕심을 더 부리고 그래요? 그렇게 복잡하게 살면 나중에 대머리 된다구요. 나는 잠깐 흰둥이 아저씨의 머리카락을 향해 애도하는 마음을 갖다가 손가락 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내 손에 들려 있던 쪽지가 둥실 날아가 제니트의 방에 있는 테라스에 떨어졌다. 탁! 이번에는 옆에 있는 나무에서 녹색의 덜 여문 열매를 딴 다음 마력을 이용해 날려 보냈다. 타악! 그 짓을 한두 번 더 하자 창가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창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이 걷혔다. 그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달빛에 한결 더 창백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이제키엘이 가고 나서도 한참을 울었는지 여전히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커튼을 걷고 잠시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제니트가 이윽고 테라스 위에 있는 종이를 발견한 뒤 문을 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3일 후 지금 이 시간, 만나러 갈게요. 당신의 친구로부터.] 쪽지를 주워서 그 내용을 확인한 제니트의 눈이 곧 크게 떠졌다. 그녀는 방금 전보다 더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결국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 다시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나는 제니트가 종이를 들고 테라스의 문을 닫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알피어스 공작저를 떠났다. * * * “실례합니다.” 예고했던 대로 사흘 후, 나는 제니트의 방을 찾았다. 혹시 그녀가 알피어스 공작이나 다른 사람에게 내 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걱정되어 3일 전부터 계속 동태를 살폈지만 다행히도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치 내 방문을 환영하듯이 활짝 열려 있는 테라스의 유리문 앞으로 들어섰다. “안녕, 마그리트 양. 오랜만이에요.” 달빛을 받으며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제니트가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저렇게 혼자 우뚝 서 있는 걸 보니 좀 처녀 귀신 같아서 가슴이 벌렁벌렁…… 하기는커녕 무슨 밤의 여신 같아서 가슴이 두근두근하네. ======================================= [109화] 헉! 오히려 지금 내 모습이 처녀 귀신 같지 않으려나? 머리라도 묶고 올 걸 그랬나? 미, 미안합니다, 당신의 눈을 지켜주지 못해서……. “혹시 놀라지 않…… 으억!” 나는 그런 생각에 약간 멋쩍게 입을 열다 말고 곧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건 바로 갑작스럽게 나한테 달려든 제니트 때문이었다. “공주님……! 정말, 정말 공주님이세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약간 난처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크흡. 설마 진짜 내가 귀신 같아서 확인해 보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렇고 확인하기도 전에 이렇게 대뜸 나한테 달려들다니, 이 아가씨도 은근히 행동이 앞서 나간다니까. “네, 진짜 나예요.” 내 대답에 마주한 눈동자가 방금 전보다 더욱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팔을 붙든 손을 통해 잔잔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억, 그런데 잠깐! 왜 점점 눈망울이 울먹울먹해지는 거예요? 서, 설마 지금 울려는 거 아니지? 응? 그런 거 아니지? “아, 공주님……!” “커흑!” 하지만 내 조마조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국 제니트는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러면서 내 허리를 꽈악 힘주어 안는 바람에 나는 그만 또 한 번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으앗! 이, 이거 그린라이트를 좀 넘어선 것 같은데? 비록 우리가 같이 다과회도 갖고 편지도 주고받으면서 나름대로 친분을 다진 사이라고 하지만 이건 갑자기 단계를 너무 확 뛰어넘은 것 같지 않아요? 으윽, 방심한 틈에 훅 들어오네. 그,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지만 뭔가 어색해. 으앗,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는 내 매너 손을 봐! “다, 다시는…….” 나는 갑자기 품에 안긴 제니트 때문에 당황해서 그녀를 덩달아 끌어안지도 못 하고 엉거주춤 허공에 손을 들고 있다가 아래에서 울리는 울먹이는 목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고……. 흐흑.” 그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갑자기, 갑자기 황성에서 사라지셨다는 말을 들어서…….” “…….” “이, 이대로 공주님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될까 봐…….” “…….” “너무 무서워서, 흐윽, 윽……. 그래서…….” 더듬더듬 이어지는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눈물에 푹 젖어 있었다. 제니트는 이대로 내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렵기라도 한 사람처럼 떨리는 두 팔로 나를 꽉 끌어안은 채 흐느껴 울었다. “우윽, 흑…….” 나는 잠시 동안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움직였다. 토닥, 토닥. 내가 등을 토닥여 주자 제니트는 방금 전보다 더욱 마음 놓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간헐적인 울음소리가 내 귀를 두드리다가 곧 선선한 밤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흐흑…….” 나는 감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가엾다고 생각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구를 동정하는 거냐고 비웃는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언젠가 내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이런 마음을 품는 게 바보 같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단 하나의 동아줄이라도 된 양 절박하게 붙든 채 처량하게 우는 14살의 제니트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약간 먹먹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지난 사흘간 오벨리아에 머물며 소식을 알아본 바에 의하면 로자리아 백작 부인은 영지를 떠나 제도로 올라오던 중 갑작스러운 낙석 사고에 휘말려 중태에 빠졌다가 며칠 전 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자연재해로 인한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데 아무래도 산길을 이동하다가 거기에 휘말린 것 같다고. 나는 흐느끼고 있는 그녀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이렇게 제니트를 안아주고 있으려니 기분이 다소 이상해졌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혼자서 외롭게 울고 있을 아이가 아닌데. 소설의 내용대로라면 그녀는 이미 데뷔당트를 치른 직후부터 황궁에 들어가 클로드의 마음을 얻고, 또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웃고 있어야 했다. 이 소설은 오직 여주인공인 제니트의 행복만을 위해 설계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알피어스 공작저의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슬픔을 삭이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혹시 나라는 변수가 책의 내용을 비틀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 “흑, 으흑…….” 조용한 방 안에서 오직 제니트의 울음소리만이 선명하게 두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제니트가 얼굴을 파묻고 있는 가슴 부근이 조금씩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마주 안은 그녀의 등을 부드러우나 다소 건조하기도 한 손길로 쓸어주었다. 미안해, 제니트. 나는 누구도 듣지 않을 말을 속으로 읊조렸다. 마음 깊은 곳 한편으로는 너의 불행에 안도하는 내가 있어. 네가 데뷔당트 날 클로드의 딸로 나타나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있는 자리를 위협하지 않아서, 또 그 사람이 네가 아닌 나를 딸로 받아들여 아껴주어서……. 그리고 훗날 나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를 네 이모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혼자서 울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너라는 사실을 나는 조금쯤은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지도 몰라.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흑…….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귓가에 속삭여지는 눈물 섞인 음성을 들으며 달빛이 비치는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니트가 지금의 나를 단 하나뿐인 자매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래서 이모를 잃게 된 지금 그녀는 그보다 더 가까운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내게 매달려 이렇게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요.” 그리고 나는 그런 제니트를 감히 동정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의심하는 마음을 품은 채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했다. “나도 오늘 당신을 만나서…….” 그런 주제에 지금은 또 내 안의 이기적인 마음을 숨기고 가증스럽게도 품에 안긴 그녀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알피어스 공작이나 로자리아 백작 부인을 탓할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소설 속의 아타나시아가 아닌 나는, 지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이 이야기 속의 가장 지독한 거짓말쟁이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앞의 가련한 사람을 조금 더 힘주어 꽉 안아주었다. 제29장 내 이름은 아티! 이 구역의 마법 소녀죠 “네. 공주님과 저, 둘만의 비밀로 해요.” 어째서인지 처음에는 조금 망설이던 제니트였으나 결국 그녀는 나를 만난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럼 오늘처럼 또 만나러 와주실 건가요?” 그러고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데……. 쿨럭. 그 눈빛이 마치 한 마리의 아기 고양이 같아서 나는 약간 부담스러워졌다. 왜, 왜인지 꼭 내가 탑에 갇힌 공주님을 구하러 오는 기사나 마법사가 된 것 같잖아? 크흑. 이 구도 별로 좋지 않아! “그, 그럴게요.” 그리고 미인에 약한 나도 별로 좋지 않아! 으앙. 그래도 내가 떠날 때쯤에는 눈물을 그친 제니트가 그나마 전보다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내가 곤란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황궁을 떠나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갑자기 내가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시작한 마법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건 퍽 고마운 일이었다. 으음. 그래서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제법 순조로웠는데 말이지……. “예쁜이들. 우리 말만 잘 들으면 무섭게 안 한다니까?” “크큭. 맞아, 그냥 외로운 남녀들끼리 모여서 재미있게 놀자는 것뿐이라고. 마침 그쪽도 둘, 우리도 둘, 짝이 딱 맞잖아?” 어쩌다가 내가 이런 거지 같은 소리를 듣고 있게 되었더라? “아, 아티. 어떻게 하죠?” 게다가 내 옆에는 갓 태어난 아기 새처럼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제니트까지 있었다. 나는 우리를 골목길에 몰아넣은 뒤 징그럽게 실실 웃고 있는 깡패들을 마주한 채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잠시 회상했다. * * * 세상의 거의 모든 사건이 그렇듯이, 발단이 된 동기는 사소했다. 나는 하릴없이 아를란타의 아름다운 관광지로 이름난 세비라 폭포수나 제뉴어리 신전, 거대 수목원, 또 라수스 꽃 축제 등을 전전하다가 문득 제니트를 향한 ‘파워! 오지랖!’을 발동시키고 말았다. 요컨대 ‘제니트는 그동안 이런 데 한 번도 못 와봤겠지?’ 같은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동안 황성에만 적을 둔 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았던 것처럼 제니트 역시 자유롭게 외출도 못 하며 알피어스 공작저에서만 갇혀 지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메랄드궁에서 제니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내가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은 다름 아닌 ‘동질감’이었다. 나는 클로드에 의해 에메랄드궁에 유폐된 나와 알피어스 공작저 밖으로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는 제니트를 겹쳐 봤었다. 하지만 이렇게 궁을 떠나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된 지금, 나는 제니트에게 또 다른 의미로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그녀는 죽은 이모인 로자리아 백작 부인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마지막 다과회 때였나? 영애들끼리 건국제 얘기를 할 때 제니트도 알피어스 공작에게 축제에 참석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며 좋아했던 것 같은데. 때마침 건국제가 바로 이틀 뒤로 다가와 있었지만 지난번에 만났을 때 언뜻 느낀 바로는, 제니트는 축제에 참석할 계획이 없는 것 같았다. 지난번 알피어스 공작저에서 처음 그녀를 만난 날 이후로 나는 두 번 더 제니트를 보러 그곳에 갔었다. 사실 제니트를 만나러 가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었지만 성에 갇힌 공주님처럼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그녀가 외로워 보여서, 또 나를 볼 때면 반가움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 활짝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이상하게 눈에 밟혀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제니트를 보기 위해 알피어스 공작저의 담을 넘었다. 게다가 사실 나는 내게 저주를 건 사람이 제니트는 아닐지 의심하고 있었다. 애초에 별것 아닌 저주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 불행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영 찜찜했을뿐더러, 내 주위에 흑마법에 관련된 사람은 그녀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니트를 만나면 만날수록 내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은 그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볼 때마다 넘쳐흐르는 기쁨으로 더없이 환해지는 그 얼굴을 보면 아마 누구나 그녀를 의심한 스스로에게 죄악암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자신의 외로움을 미처 감추지도 못하는 14살의 어린 소녀이기 때문에 더더욱. 얼핏 듣기로는 이제키엘도 요즘 바빠서 제니트와 잘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던데……. 내가 갈 때마다 저택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 것도 그래서인가? 다른 일 때문에 이제키엘이 공작저를 비운 지도 벌써 시일이 꽤 지났다고 말하며 제니트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건국제가 시작된 날, 제니트를 찾아갔다. “공주님, 어서 오세요.” 제니트는 이제 내가 마법으로 뿅뿅 나타나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큽, 나도 루카스에게 적응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니트는 적응 속도가 장난이 아니구나. 그, 그런데 지금 꼭 출근했다 돌아온 남편을 맞은 아내 같은 대사와 포지션 아니었나요……. 나는 꽃같이 웃으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제니트를 약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니트에게 며칠 내내 고민하던 것을 말했다. ======================================= [110화] “마그리타 양, 우리 밖으로 놀러 갈래요?” “네?” 당연하게도 제니트는 내 말에 깜짝 놀란 듯이 반문했다. 그녀는 방금 전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잘 모르겠다는 듯 나를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점차적으로 크게 떠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내가 권유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제니트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주한 얼굴이 만개하는 봄날의 꽃처럼 점차적으로 활짝 피어나는 광경은 마치 마법 같았다. 나는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잠시 후 제니트가 해사하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다만 그렇게 대답했다. 마치 내가 원한다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듯이. 그래서 나는 기꺼이 그녀에게 피터팬이 되어주기로 결정한 뒤 손가락을 튕겼다. * * * 웅성웅성. “세상에! 공주님, 정말 밖이에요!” 나는 며칠 전 미리 봐두었던 인적 없는 골목길로 무사히 순간 이동을 했다. 주위에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낡은 상자 같은 것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제니트는 그마저도 신기한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혼자 벽을 붙잡고 헉헉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어흐헉! 기껏 폼은 잡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순간 이동을 쓰는 건 처음이라 솔직히 쫄았다! 혹시 잘못해서 다리 한 짝을 두고 온다거나 할까 봐 무서웠다구, 엉엉. 왠지 황궁 밖으로 나오고 나서 늘어난 거라곤 ‘될 대로 돼라!’ 하는 깡밖에 없는 것 같아요, 훌쩍. “공주님! 우리 빨리 저기로 가요!” “으억, 잠깐만요.” 한눈에 봐도 신이 난 것 같은 제니트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이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눈 만난 강아지처럼 좋아하는 건 처음 보네. 밖에 나와서 좋은가 보다. 나는 발그레하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손을 한 번 휘둘러서 망토 같은 것을 소환했다. “일단 이거라도 걸쳐요.” 옷이 좀 비싼 티가 나긴 하지만 겉옷을 걸치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다. 몇 번 알피어스 공작저를 방문하며 느낀 바로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아무도 먼저 그녀를 찾지 않는 것 같으니 잠깐 외출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그렇게 되고 나서 되도록 제니트를 가만히 내버려 두려고 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그럼 난 일단 얼굴이나 손봐야지. 짜잔! 쉽고 편리한 ‘아티의 1초 성형외과’로 어서 오세요! “앗, 공주님의 얼굴이!” 내가 마력을 얼굴에 불어넣자마자 제니트가 헉 숨을 들이켰다. “영상석 때문에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잠깐만 바꾼 거예요.” “머리카락이랑 눈동자 색도 변했어요.” 아마도 그동안 몇 번이나 연습하며 거울을 통해 봤듯이 내 얼굴은 원래보다 확연히 밋밋해졌을 것이었다. 크흠. 좀 자뻑 같긴 하지만 다이아나를 닮아 한 미모 했던 얼굴이 길 가다가 흔히 볼 법한 그럭저럭한 얼굴이 되었달까. 물론 얼굴의 뼈나 근육 자체의 모양을 바꾼 건 아니고 그냥 투명화 마법과 비슷한 원리로 마력장을 씌워서 이목구비를 흐리게 만든 것뿐이었다. 좀 더 고위 마법으로 올라가면 일정 시간 동안 얼굴 자체를 완벽히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고는 하던데……. 나는 ‘뚜두둑! 뿌득!’ 같은 살벌한 소리를 내며 얼굴뼈를 움직이는 상상을 하다가 오싹해져서 그만두었다. “그럼 갈까요?” “네!” 제니트는 내 변한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내 말에 또 금세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그 순간 주위에 또 뾰롱뾰롱 꽃이 피어나는 환각이 보였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제니트 얼굴을 마법으로 바꾸는 게 시급할 것 같은데. 으아, 너무 예뻐서 막 길 가던 사람마다 다 쳐다보고 작업 걸고 그러는 거 아냐? 여주인공 미모버프로 이상한 인간들이 막 꼬여들지도! 하, 하다못해 밖에서는 지금처럼 너무 예쁘게 웃지 말라고 주의라도 줘야 하나. 으앙, 그것도 이상하잖아! “가요, 공주님!” 제니트는 그런 내 고뇌도 모르고 또다시 맞잡은 내 손을 끌어당겼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사람이 북적이는 거리로 발을 들였다. * * * 루카스와 왔을 때도 그렇고, 또 며칠 전에 혼자서 왔을 때도 그렇고, 원래도 이 거리는 사람이 북적이는 시장통이었으나 이번에는 건국제까지 겹쳤기 때문인지 그 소란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행여나 일행과 떨어질까 싶어 제니트와 함께 손에 손을 꼭 맞잡고 식도락 여행을 시작했다! “아저씨, 꼬치 열 개 주세요! 저 여기 단골인데 저 옆에 있는 작은 거 두 개는 그냥 서비스로 주시면 안 되나?” “아줌마, 여기 솜사탕 두 개요! 무지개색으로 예쁘게 만들어주세요!” “앗, 잠깐! 이거 왼쪽 게 더 가벼운 것 같은데? 언니, 이거 정량보다 덜 줬죠? 그렇죠?” “허니허니 콤보 아이스크림 4층짜리로 두 개요! 위에는 초콜릿 칩 뿌려 주세요!” 제니트는 이런 식으로 사람이 많은 거리를 돌아다닌 게 처음이라 그런지 모든 게 신기한 눈치였다. 나는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데리고 미리 점 찍어두었던 맛있는 노점상들을 빠뜨리지 않고 순회했다. “굉장해요! 공주님은 어쩜 이렇게 모르는 게 없으세요?” 그렇게 몇 군데를 돌아다녔을 때, 제니트가 나를 향해 감탄하며 외쳤다. 후훗. 실은 제가 왕년에 가출하고 저잣거리에서 혼자 놀던 짬이 좀 있어서! 물론 그래 봤자 요 근래의 일이고, 그 가출이란 게 100% 제 의지가 아니기는 하지만요. 으엉. 나는 닭 꼬치를 후후 불어가며 먹는 제니트를 향해 아까부터 생각하던 것을 넌지시 말했다. “그보다 마그리타 양, 그 호칭 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아.” 그제야 제니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나를 ‘공주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또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주변 사람들은 우리의 대화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단 하나! 바로 닭 꼬치를 먹으면서도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제니트였다. 으음, 아무래도 사람들이 좀 적은 곳으로 이동할 필요는 있겠다. 제니트는 엄마와 함께 처음 외출한 착한 어린이처럼 내 손을 꼭 붙잡고 쫄래쫄래 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실로 오랜만에 내 외출용 이름을 꺼냈다! “이제부터는 나를 ‘아티’라고 부르세요.” “앗. 어떻게 제가 그런.” 제니트가 화들짝 놀라며 더듬거렸지만 나는 검지를 그녀의 앞에 꺼내 들며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마그리타 양을 ‘제티’라고 부를 거예요.” 크으, 드디어 입 밖에 내보는구나! 제니트를 볼 때마다 입안에서 맴돌던 정겨운 마법의 초코 가루 이름! 크윽, 아련한 과거여. 누군가 듣는다면 까망이, 파랑이에 이은 실로 구린 작명 센스라며 비웃을 터였으나 어차피 이 세계에는 흰 우유에 넣어 먹는 마법의 초코 가루를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제티란 이름 귀엽지 않아? 꼭 아티랑 한 세트 같고. 제니트도 내가 지어준 외출용 이름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몹시도 수줍은 듯이 뺨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꼭 애칭 같아서 어쩐지 쑥스럽네요.” “원래 다 처음이 어려운 거예요. 자, 제티! 제티도 한번 저를 불러보세요.” “그럼……. 아, 아티…….” 부끄러워하며 말끝을 흐리는 제니트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자랑했다. 헉, 어쩜 수줍어하는 것도 예뻐라. 단숨에 호칭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우리는 또다시 하하 호호 사이좋게 축제를 즐겼다. 오늘은 건국제의 첫날이기 때문에 그리 큰 행사는 없었고, 그냥 사람들에게 먹거리와 온갖 물건을 팔거나 또 새총으로 인형을 뽑는 것 같은 오락거리를 즐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일 오후에는 황족들의 거리 행차가, 그리고 건국제의 마지막 밤에는 불꽃놀이가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지금 궁에 있는 황족은 클로드뿐이었기 때문에 내일 있을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그 혼자가 될 것이었다. “이거 선물이에요.” 나는 그녀에게 가느다란 실을 여러 가닥 모아 꼬아 놓은 모양의 팔찌를 선물했다. “이건……?” “팔에 차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아까 제니트가 거리의 한쪽 구석에서 팔던 친칠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그 옆에 있는 갑판에서 구매한 것으로, 이른바 소원 팔찌 비슷한 것이었다. 솔직히 별건 아니지만 이런 게 다 축제의 묘미지. 크흡. 지난번에 제니트에게 리본 선물을 받은 게 생각나서 충동적으로 사긴 했는데 어쩌면 제니트 눈에는 이런 거 별로일 수도……. “정말, 정말 감사해요. 매일 하고 다닐게요.” 하지만 제니트는 감동받은 얼굴로 내가 준 팔찌를 소중히 감싸 안았다. 아, 아니……. 그렇게까지 좋아하면 뭔가 좀 미안한데…….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하는 태양을 등진 채 우리는 나란히 커다란 막대 사탕을 손에 들고 길을 걸었다. 제니트는 자신의 얼굴만 한 사탕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쩔쩔 매다가 그냥 손에 들고 있었고, 나는 어차피 이걸 다 먹어치우지 못할 걸 알았기 때문에 그냥 건성으로 끄트머리만 깔짝깔짝 핥아 먹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니 아쉬워요.” “하지만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들어가야 완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제티가 그랬죠?”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을 하는 제니트를 향해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호칭이 입에 익숙지 않아 우리 둘 다 가끔씩 실수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되도록 서로의 외출용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완전 범죄를 저질러야 다음에 또 놀러 나올 수 있잖아요.” 내가 웃는 낯으로 내뱉은 말에 제니트의 눈동자가 얕게 흔들렸다. “다음…… 다음이 또 있는 건가요?” “불꽃놀이 보고 싶지 않아요? 나도 황성 밖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한데. 그런데 같이 불꽃놀이를 구경해 줄 사람이 없거든요.” 나는 어느덧 자리에 멈추어 선 제니트를 향해 말을 이었다. “괜찮으면 나랑 같이 불꽃놀이 보러 와줄래요?” 어찌 보면 내 첫 데이트 신청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제니트라니! 큽. 하지만 뭐 어때. 오늘 제니트랑 같이 보내는 시간도 생각보다 즐거웠고, 또 축제의 묘미인 불꽃놀이도 보지 못한 채 이대로 제니트의 외출을 끝내 버리면 그녀의 첫 가이드로서의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 “기꺼이요. 정말 기뻐요.” 나는 제니트의 얼굴에 오늘 봤던 것 중에서 가장 예쁜 미소가 걸리는 것을 보고 괜스레 머쓱해져서 코밑을 한번 손가락으로 스윽 훑었다. 크흠. 이거 괜히 좀 겸연쩍네. 우리는 늦지 않게 알피어스 공작저로 돌아가기 위해 인적 없는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어이, 예쁜이들!” 그런데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웬 잡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응? 이게 뭔 참기름을 한 사발 퍼마신 것 같은 느끼한 목소리래요? “휘이익! 한가하면 오빠들이랑 같이 놀래?” 게다가 휘파람 소리에까지 버터를 처바른 것 같았다. 나는 골목길 입구에 서서 한껏 건들거리고 있는 놈들을 ‘저것들은 도대체 뭐지?’ 하는 눈길로 쳐다보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고 무릎을 찰싹 때렸다. ======================================= [111화] 아앗! 이거 설마 그건가? “뭐야? 지금 무서워서 굳어진 건가? 우후후. 오빠들 무서운 사람 아니야.” “물론 그건 말을 잘 들었을 때 얘기지만.” 왜, 어디에나 있잖아. 으슥한 골목길 같은 데서 여자들한테 추파를 던지거나 개중에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철컹철컹 범죄자의 길에 발을 들이기도 하는 멍멍이 같은 놈들이! 와, 진짜 그런 거면 이거 너무 전형적이네. 만일 이게 소설이라면 작가 양반 너무 창의성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 예쁜이들. 우리 말만 잘 들으면 무섭게 안 한다니까?” “크큭. 맞아, 그냥 외로운 남녀들끼리 모여서 재미있게 놀자는 것뿐이라고. 마침 그쪽도 둘, 우리도 둘, 짝이 딱 맞잖아?” 이런 별 거지 같은……. 웬 오징어 같은 놈들이 입으로 똥을 싸고 앉았어? “아, 아티. 어떻게 하죠?” 그러다 문득 나는 내 옆에 있는 제니트가 내 팔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상황에 겁을 먹었는지 그녀의 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앗, 까망이 때도 용감하게 내 앞을 가로막고 섰던 제니트라 이 정도 일에는 눈 하나 깜빡 안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저쪽 언니는 특히 예쁘네?” “휘이익. 우리가 특히 많이 예뻐해 줘야겠어.” 으음. 그러고 보니 저놈들 눈빛이 좀 많이 더럽긴 하네. 하기야 알피어스 공작저에서만 곱게 살았을 제니트가 언제 또 저런 종류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아봤겠어. 게다가 내 얼굴에는 아직 마법이 작용되고 있기 때문인지 추잡한 시선이 제니트에게만 집중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귀엽게 앙탈은. 예쁜이는 아무 걱정 말고 오빠만 믿어!” 아이고, 개소리 좀 작작해라. 이 세상에 ‘오빠 믿지?’만큼 신뢰도가 0에 수렴하는 마법의 말이 또 있을 것 같냐! 게다가 너네는 그냥 빼도 박도 못 할 범죄자 2인조일 뿐이거든!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난 깡패들의 만행에 어이가 없어서 잠깐 동안 가만히 서 있던 나는 깡패들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곧 ‘후우웁!’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곧장 배에 힘을 줘 쩌렁쩌렁하게 소리 질렀다. “야아아아아아아!” 조용히 있던 내가 돌연 미친년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범죄자 2인조들이 한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난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삐삐삐- 삐삐- 삐삐삐해서 삐삐삐- 삐할 삐삐삐삐- 야!” 심의 규정상 ‘삐-’로 처리되고도 남을 찰진 욕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입에서 다다다 쏟아져 나왔다. “삐삐삐삐- 삐삐를 삐삐삐- 해서 삐삐삐- 해줄까? 이 삐삐삐- 삐삐야! 어디다 대고 삐삐삐- 를 삐삐삐삐- 삐해? 삐삐- 하고 싶지?” 내가 바로 이 구역의 미친년이다! 나는 그야말로 머리에 꽃을 단 광년이처럼 신들린 듯이 두 잡놈을 향해 욕쟁이 할머니에 버금가는 욕들을 마구잡이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이 삐삐삐삐를 삐삐- 해서 삐삐삐해도 시원찮을 삐삐- 삐들! 확 삐삐- 삐삐해 버려라, 이 삐삐삐들아!” 갑작스러운 욕 난사에 범죄자 2인조는 벙찐 얼굴이었다. 들어는 봤냐! 이게 바로 아를란타에서 배워온 욕이다, 이것들아! 외국 물 먹은 욕설로 목욕 재개나 해라! 어휴, 나도 거의 14년 만에 속 시원하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냈더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네. “아, 아티…….” 헉. 제니트를 잠깐 잊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듯이 동공을 마구 흔들고 있는 제니트를 향해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티는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데헷! “아니, 저년이!” “이게 미쳤나? 우리한테 그렇게 심한 욕을 하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뒤늦게 정신이 들었는지 깡패 놈들이 핏대를 세우며 나한테 욕을 하기 시작했다. 헉! 그 흉악한 욕설들에 나는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내 마음에 스크래치! 내 섬세한 유리 하트가 와장창창! ……은 무슨. 나는 그냥 심드렁한 기분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봤자 내가 알고 있는 욕들에 비하면 유치원생들이 떠드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어유, 댁들은 욕쟁이 꿈나무로서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구나. 좀 더 정진하세요! 나는 나를 찢어죽일 기세로 다가오는 놈들을 향해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들고 있던 것에 마력을 담아 앞으로 있는 힘껏 던졌다! 퍼억! “꾸엑!” “어맛! 사탕이 마음대로 날아가 버렸잖아!” 내 얼굴만 한 커다란 사탕은 무시무시한 속도를 내며 날아가 범죄자 1의 가랑이 사이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파사삭 깨져 나가는 사탕이 노을에 반사돼 반짝반짝 눈부신 빛을 냈다. 사탕에 맞은 범죄자 1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곧장 게거품을 물었다. 범죄자 2는 다리 사이를 움켜쥐며 힘없이 풀썩 쓰러지는 동료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낫, 사탕이 요기 하나 더 있네?” 내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들으란 듯이 읊조린 말에 범죄자 2가 세차게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나는 제니트에 손에 들려 있던 사탕을 가져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크으, 왠지 이쯤 해서 한번 외쳐 줘야 할 것 같은데?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받아라, 내 필살기! 캔디☆크러쉬!” 퍼억! “꾸웨에엑!” 파사삭! 저무는 해를 배경으로 한 채 반짝이는 사탕가루가 어여쁘게도 휘날렸다. 범죄자 2는 동료 못지않은 괴성을 내지르며 마찬가지로 골목길 입구에 풀썩 쓰러졌다. “내, 내가…… 내가 고자라닛…….” 털썩! 그래도 범죄자 2는 범죄자 1보다 조금 더 방어력이 강했는지 마지막 유언 같은 말을 남긴 채로 눈을 감았다. 쓰레기 처리 끝! 나는 탈탈 손을 턴 뒤 그때까지도 멍하게 서 있는 제니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그리타 양, 내 손 잡아요!” “네, 네? 아앗!” 그대로 우리는 순간 이동을 해 사탕가루가 아련히 반짝이는 골목길에서 벗어났다. * * * “혹시 늦은 건 아니죠?” 휴,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 나는 제니트와 함께 알피어스 공작저로 무사히 귀환했다. 막판에 좀 쓸데없는 잡놈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쓰읍. 그놈들을 좀 더 잘근잘근 밟아주고 왔어야 하는 건데. 혹시 제니트가 그 자식들 때문에 충격받고 외출 공포증이 생긴다던가……. 그, 그러진 않겠지? “푸웃…….” 그런데 바로 그때, 옆에서 바람 새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으응? 뭐지? 뭔가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소리인데. “아하하하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리자마자 맑은 웃음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어왔다.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제니트였다. “아하하……. 저, 이런 건 처음이에요.” 잠시 후, 그녀는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아무래도 막판에 깡패들을 처리했던 일이 그녀에게 굉장히 신선하고 새로운 추억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쿨럭. 내 ‘캔디☆크러쉬’ 공격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물론 오늘 있었던 일이 제니트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새겨지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건 다행이었지만. “아, 왠지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아요.” 이윽고 완전히 웃음을 멈춘 제니트가 후우, 한숨처럼 여트막한 미소를 입가에 띠우더니 말을 이었다. 헉! 제니트, 알고 보니 이런 스릴 있는 경험을 즐기는 여자였던 건가? “얼마 전까지는 꼭 지옥에 있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잇따른 그녀의 말에 나는 어떤 반응을 내보여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공주님을 만난 후부터는 천국이 되었어요.” 쿠구궁! 순진한 소녀의 눈빛 공격입니다! 크리티컬! 크리티컬이네요! 아타나시아 선수, 이런 공격에는 면역이 없군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공주님. 이렇게 즐거웠던 건 처음이에요.” 크윽. 나는 잠깐 격침당한 심장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다가 제니트를 향해 지나가듯 대답했다. “앞으로 즐거운 일이 훨씬 더 많을 텐데요.” 그래도 오늘의 비밀 외출을 훈훈하게 끝맺게 되어 나도 기쁘구나. “불꽃놀이 같이 보기로 한 거 잊지 말아요.” 내가 제니트를 향해 웃으며 말하자 그녀도 나를 보며 밝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건국제의 마지막 날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제29.5장 각자의 잠 못 드는 밤 “폐하, 한동안 대륙 곳곳에 일어나던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 사고가 이제는 완전히 그친 것 같다고 합니다.” 어둑한 방 안에서 필릭스는 그가 며칠 동안 알아낸 사실을 클로드에게 보고했다. “갑작스러운 자연재해로 여기저기서 상소가 올라와 걱정이 컸는데 일시적인 현상이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갑자기 대륙 곳곳에 일어나기 시작한 재해로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컸던 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약속이나 한 듯 원인 모를 낙석이나 홍수, 날씨 이상 등의 괴현상이 사라졌다고 하니 이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 동시 다발적인 재해가 정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나?” 하지만 바로 그때, 나른히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클로드가 무심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그의 말에 필릭스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하시면, 혹시 인위적인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모른다.” “예? 아니, 지금 막 폐하께서…….” “그저 짐작일 뿐, 게다가 어차피 지금은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나가라. 할 일은 다 끝났으니.” 필릭스는 다시 의자 위에서 눈을 감는 클로드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각이었으나 그의 주군은 오늘도 쉽게 잠들지 못할 모양이었다. 하기야, 제 딸을 잃어버리고 마음 편히 눈을 붙일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만……. “폐하,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찾고 있으니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행방도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 “그러니 잠시라도 침소에 가셔서 눈을 붙이시지요.” 그러나 클로드는 여전히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필릭스도 자신의 말이 정말 그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 여겨 이리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옆에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무도 속이 쓰리고 또 갑갑하여 이런 소용없는 말이라도 흘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을 뿐이다. 한동안의 침묵 후에 클로드가 눈을 감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나가라.” 그 조용한 음성을 끝으로 결국 필릭스는 방을 나섰고 말았다. 잠시 후, 그는 클로드가 아직도 머물고 있는 에메랄드궁을 뒤돌아보았다. 요 근래 들어 클로드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궁전인 에메랄드궁을 거의 거처 삼아 지내고 있었다. 필릭스의 얼굴이 한순간 어둑해졌다.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공주님…….’ 그러나 그의 의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필릭스는 답답한 마음에 신음하며 홀로 쓸쓸히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 * “누가 내 얘기하나?” 루카스는 간지러운 귀를 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한동안 주인 없이 비워져 있던 검은 탑이었다. 달빛이 아련히 비추는 탑은 창밖의 구름이 아주 가까이에서 보일 정도로 드높이 치솟아 있었다. ======================================= [112화] 그러고 보니 세계수의 둥지 밖으로 나왔을 때, 자연재해다 뭐다 눈에 띄는 인간들마다 말이 많기는 했지.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그 자연재해란 것이 세계수와 싸우는 동안 날아간 마력의 파편 때문에 발생한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뭐,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그런 것도 아니고 그 모자란 세계수 노인네가 발악하는 동안 조절을 못해서 사방팔방으로 제 마력 조각을 터뜨린걸. 루카스는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마력을 완전히 회복하다 못해 세계수 가지를 흡수하고 나서 전보다 더욱 강력해진 루카스는 이제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어둠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조각한 듯한 미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보다 더 길어진 머리카락이 아무래도 영 치렁치렁하게 느껴져서 그냥 잘라버릴까 싶었지만 일단 지금은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오늘 그가 탑에 들른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애초에 목적했던 세계수의 열매보다 훨씬 더 좋은 걸 먹어서 기분도 좋겠다, 마력을 회복한 김에 오랫동안 비워뒀던 탑에나 한번 가보자, 뭐 그런 심심한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죽은 아에테르니타스에 대해서도 잠깐 확인할 것이 있기도 하고. 그런데 처음 탑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의 오감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흐응, 쥐새끼가 한 마리 들어왔었네?” 오랜 잠에서 깨어난 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곧장 탑을 비운 탓인지, 침입자가 들어온 흔적이 눈에 띄었다. 어둠을 삼킨 붉은 눈동자에 섬뜩한 한기가 흘렀다.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 쥐새끼 씨가 아무래도 뒈지고 싶어 환장한 모양인데…….” 루카스는 간만에 진득한 불쾌감을 느끼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그럼 어떻게 죽여줘야 하려나.” 휘영청 밝은 달이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다시금 완전히 재림한 검은 탑의 마법사를 내리비췄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세상은 또 한 번의 파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 * * “그럼 아버지,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제키엘은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긴 외출을 끝내고 귀가한 후 아버지인 알피어스 공작에게 인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복도로 나선 이제키엘은 잠시 동안 제자리에 멈추어 선 채 낮은 한숨을 흘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서는 피곤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 만나고 온 그의 아버지 역시 피로가 얼굴 곳곳에 물들어 있는 상태였다. 요 근래에 일어났던 일들을 상기해 보자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제키엘.”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스름하게 그림자 진 복도의 끝에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는 제니트가 눈에 들어왔다. “제니트.” “이제 들어오세요?” 제니트가 지금처럼 먼저 방에서 나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로자리아 백작 부인의 부고 이후 그녀의 방을 지날 때면 언제나 구슬피 흐느끼는 소리가 안에서 새어 나오고는 했다. 물론 이제키엘은 그 후 곧잘 저택을 비웠기 때문에 항상 제니트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 잠시 돌아왔어. 내일 다시 나가 보려 해.” “내일 또 나가신다고요……?” 이제키엘의 말에 제니트가 잠시 멈칫하다가 반문했다. 그런 그녀의 음성이 어딘가 미묘하게 느껴져서 이제키엘은 잠시 동안 마주한 이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떨어져 있는 거리 때문인지, 혹은 그녀의 얼굴에 어린 음영 때문인지 마주한 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지금 그가 상당히 피곤한 상태이기 때문에 주의력이 흐려진 탓일지도 몰랐다. “제니트?” “아니, 아니에요. 그럼 내일부터 또 바빠지실 테니 어서 방으로 돌아가서 쉬세요.” 한동안 말이 없던 제니트가 곧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너도 그만 들어가서 쉬어.” “네, 편안한 밤 보내세요.” 이제키엘은 따로 덧붙이는 말없이 제니트를 남겨둔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홀로 남은 그녀는 무거운 정적에 휩싸인 채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발길이 멈추어지는 일은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제니트는 완전한 혼자가 되었다. 장미처럼 탐스러운 입술이 속상한 마음을 대변하듯 살며시 짓이겨졌다. 다른 때라면 좀 더 세심히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을 텐데. 그녀는 지금 이제키엘이 그녀의 기분에 이토록 둔감하게 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사라진 아타나시아 공주를 찾기 위해 매일 같이 알피어스 공작저 밖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그의 마음을 아타나시아 공주가 이미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제니트는 술렁이는 마음을 안고 발소리를 죽인 채 자신의 방을 향해 걸었다. 방으로 돌아오자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온 달빛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토록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 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니트는 이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키엘에게 숨기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타나시아 공주님이 그것을 바랐으니까. 다른 누구에게도 그녀의 방문 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부탁했으니까……. 제니트는 누구에게인지 모를 변명을 속으로 읊조리며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하얀 이불보 위에는 여러 가닥의 실을 꼬아 만든 팔찌가 놓여 있었다. 제니트는 그것을 들어 가슴에 소중히 품었다. 결코 화려하고 세련된 생김새가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이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바로 이것을 선물해 준 이가 아타나시아 공주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밖에서 보냈던 시간을 생각하자 가슴속에 벅찬 행복이 빠르게 차올랐다. 요 근래 들어 계속 그랬다. 아타나시아 공주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마법처럼 달콤하고 행복했다. 나는 공주님이 좋아. 그분은 이렇게나 다정하고 상냥하신걸. 게다가 내가 너무나도 끔찍하게 괴롭고 슬플 때 마법처럼 나타나서 나를 위로해 주셨어. 누군가의 온기가 너무도 절실했던 그때, 주저 없이 내 손을 잡아주셨어. 제니트는 낮에 선물 받은 팔찌를 여전히 소중히 손에 쥔 채 침대에 풀썩 몸을 누였다. 그러니 그녀도 약속을 지킬 것이었다. 이제키엘에게 아무리 미안해도, 아타나시아 공주가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공주님은 나만의 공주님이 될 수 있는 걸까? 공주님도 지금 황성 밖으로 나와 딱히 기댈 사람도 머물 곳도 없다고 하니까, 어쩌면……. 아……. 단순한 기분 탓일까? 황성 안에서 만날 때보다 지금 더 공주님과 가까워진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 깊은 곳이 공연히 간질거려서 제니트는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창가에서 번져 드는 달빛에 그녀의 보석안이 황홀하게 반짝거렸다. 어제도 오늘도, 아름다운 밤이구나. 모두의 잠 못 드는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제30장 아빠? 아빠! “청조는 특히 이 튀튀 열매를 눈 뒤집히게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전서구 훈련을 시킬 때도 이 열매를 이용하고는 하는데…… 어쩌구 저쩌구.” “아, 그래요?” “튀튀 열매는 오늘 두 봉지를 구매하시면 한 봉지를 더!” 나는 또다시 열린 새 시장에서 그 주인아저씨에게 청조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고 있었다. 역시 건국제 때 또 여기에 새 시장이 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짐작이 맞았어. “그리고 가끔 날개가 가렵다고 긁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이 투투 오일을……. 이 투투 오일로 말할 것 같으면…… 블라블라. 오늘만 특별 할인을 해서…… 이러쿵저러쿵.” 으, 으음. 그런데 왜 지식 전수보다는 호객 행위 같지……. 아까부터 전서구 훈련에 대해 물어본 건 제대로 대답해 주지도 않고 자꾸 이거 사라, 저거 사라 하고 있잖아? “저 오늘은 돈을 안 가지고 나와서요.” “아, 그래요? 진작 말하시지.” 돈이 없다는 내 말에 새 장수 아저씨가 금세 안면몰수하고 나섰다. 이, 이 아저씨! 잠재적 고객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야? “어서 오세요! 앵무새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나는 금세 다른 손님에게 관심을 돌리는 새 장수를 뒤로한 채로 떨떠름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1초 성형외과 마법’에 성공하고 난 후로 나는 전처럼 숨어 지내지 않고 오벨리아 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외양에 변화를 주고 나니 내 소탈한 매력 때문에 아무도 내가 공주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 우윽. 그런데 왜 조금 슬픈 거지……. “와아아! 황성 문이 열렸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빨리 가자!” “나도 갈래!” 그런데 갑자기 거리가 다른 때보다 소란스러워졌다. 아, 건국제 기념 퍼레이드 시간이 된 모양이다. 클로드가 드디어 황성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황족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기 때문에 다들 흥분한 것 같았다. 나는 방금 전보다 시끌벅적해진 인파의 틈에서 슬쩍 벗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지붕 위에 올라가 황성에서부터 이어지는 거대 행렬을 구경했다. 우워, 스케일 한번 장난 아니네! 행렬의 주위에는 황실 기사단으로 보이는 기사들이 제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채 양옆으로 쭈욱 정렬해 있었는데, 흥분한 관중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럼 혹시 저기에 필릭스도 있는 걸까? 그런데 주위에 흩날리는 이 꽃잎들은 뭐야? 아무래도 마법 같은데. 그리고 잠시 후 나는 화려한 행렬의 한가운데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반짝이는 금발 머리는 분명 클로드의 것이었다. 진짜 임금님 행차시구나. 이걸 앞으로 두 시간 동안 계속한다고? 저 사람 성격에 그런 귀찮은 짓을 잘도 참는구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쯧쯧 혀를 차게 되었다. 역시 황제란 건 할 게 못 되는 것 같다. 그래, 사람은 역시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장땡이지. “슬슬 가볼까?” 오랜만에 클로드를 먼발치에서나마 보게 되자 이제는 거의 반사적으로 가슴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 또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나는 지붕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잠시 동안 저 멀리 보이는 행렬을 시야에 담다가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 * * 화아악! 눈을 감았다 뜨자 익숙한 풍경이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아, 오랜만에 와보는 에메랄드궁이다. “고, 공주님!” “릴리!” 우와아아앙!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릴리다아아! 릴리는 소파 위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자수용 천이 카펫 위로 투욱 떨어져 내렸다. 으앙, 그동안 걱정 많이 했지? 보고 싶었어, 릴리이이이이! 나는 지면을 박차고 울먹이면서 그녀를 향해 한 달음에 달려갔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던 감동적인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왔군.” “헉!”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릴리를 향해 뛰어가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113화] “공주님…….” 이제 보니 릴리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압박이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망가진 로봇처럼 끼기긱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역시 건국제를 노리고 있었나.” 그리고 그러자마자 방 한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나를 지켜보고 있는 클로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싸늘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숨을 멈춘 채 자리에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이상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클로드가 맞는 건가? 하지만 분명 건국제의 행렬에 그가 있는 걸 확인하고 왔는데?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 멍해져 있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동안 침묵하고 있던 클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소 이 에메랄드궁의 시녀들과 사이가 돈독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내가 없는 틈을 타 한 번쯤은 이곳에 오리라 예상했지.” 나는 오늘의 내 행동을 이미 예측했다는 듯이 말하는 클로드를 향해 나도 모르게 더듬거리고 말았다. “부, 분명 밖에 있는 걸 보고 왔는데…….” “대역을 봤나 보군.” 쿠궁! 대역? 대역이라구요? 충격적인 말에 나는 바보같이 입을 벌렸다. 그래, 생각해 보니 이런 대대적인 행사라면 충분히 대역을 쓸 수도 있는 거잖아? 게다가 클로드는 원래도 그런 자리를 싫어하는데. 그, 그럼 난 이제 어떡하면 좋아? 나는 충격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린 뒤 손을 들었다. 일단 튀자. 따악!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자 앞에는 흔들리는 갈대숲이…… 나와야 하는데 왜 아직도 에메랄드궁이지?! “마력을 제어하는 술식이다.” 내가 하는 양을 같잖다는 듯이 보고 있던 클로드가 당황하는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울컥! 그런데 뭔가 ‘저 우매한 아해에게 내가 직접 가르침을 주지’ 같은 표정이라 기분이 좀 구린데요? “에메랄드궁뿐만이 아니라 황성 곳곳에 설치해 놨지. 설마 가넷궁에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기 때문에 지난번에는 손쉽게 놓쳤다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헐,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술식이란 걸 여기에만 만들어둔 게 아니란다. 한마디로 내가 릴리를 보러 올 줄 알고 황성 곳곳에 덫을 설치해 놨다, 이겁니까? 이, 이 치사한 인간 같으니! 화악! 클로드가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젓자 바닥에서 아지랑이처럼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황금색의 마법진이었다. 독 안에 든 쥐를 대하듯 의연한 그의 모습에 나도 슬슬 약이 올라서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공주님, 잠시만……!” 따악! 내가 온 것을 알았는지 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온 필릭스가 나를 말렸지만 이미 마력은 내 몸을 휘감으며 솟구쳐 오른 뒤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폐하!” 주륵. 아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필릭스가 외치는 소리에 시선을 움직인 나는 클로드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에 흠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손등으로 대충 입가를 한번 훔친 뒤 손에 묻은 붉은 자국을 힐끔 내려다보며 싸늘히 입꼬리를 들썩일 뿐이었다. “쓰레기 같은 술식인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정말 그 쓸모없음이 하늘을 찌르는군.” “폐하, 괜찮으십니까?!” 필릭스도 릴리도, 그리고 나도 클로드의 모습을 보며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 속에서 오직 클로드만이 담담했다. 나는 고요한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하는 순간, 움찔 손끝을 떨고 말았다. “이 마법진 위에서는 누구도 마력을 사용할 수 없으나 술식에 가해지는 영향은 고스란히 시전자에게 전달된다.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비효율적이라 사실상 사장된 술식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지금 본 것처럼 네가 이 위에서 마법을 쓰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게 올 터.” 옆에서 필릭스가 ‘폐하! 그런 것은 진작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설명해 드렸어야지요!’라고 답답하다는 듯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클로드는 그쪽으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는 내가 처음 이 자리에 나타났을 때부터 오직 내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나도 자리에 멈추어 선 채 그런 클로드와 눈을 마주했다. “만약 지금처럼 내가 피를 토해 쓰러져도 상관없다면 얼마든지 마법을 써 이 자리를 벗어나거나 나를 공격해도 좋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밭은 숨을 후욱 내쉬고 말았다. 그게 뭐야……? 만일 내가 진짜 ‘당신이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하면서 마법을 쓰면 어쩌려고? 지금 저게 날 막을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뭐, 내가 당신이 다치는 게 무서워서 겁먹고 그냥 가만히 있을 줄 알고? 하지만 사실 클로드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보았을 때부터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눈앞에 번지는 붉은색에 조금씩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마력 폭발에 휘말린 영향으로 지난번 침대 위에서 피를 울컥 토해내던 그의 모습이 또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내 생각보다도 지금 내가 더욱 겁에 질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든 그의 앞에서 도망칠 수 있으리라 믿고 이리 대범하게 행동했지만 사실 나는 클로드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그는 내 발을 묶기에 가장 효과적인 인질을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나를 붙잡아 죽일 생각이라면 뭐 하러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거지? 게다가 시전자에게만 불리한 술식이라면서, 왜 굳이 그런 걸 여기에 그려놓은 건데? 설마 클로드는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리라 확신한 걸까?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클로드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도 아를란타에 있는 동안 이런저런 마법서를 좀 찾아봐서 알지만 적을 공격하고 강제로 포박하는 술식은 여럿 있었다. 힐끔 시선을 움직여 보니 릴리도 실로 오묘한 표정을 지은 채 클로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 또다시 네가 사라진다면…….” 그때,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귀에 울렸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섬뜩하게 이어지는 말에 나는 ‘헙!’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으스스하게 내뱉어진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지금 이 사람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자, 잠깐만요! 설마 지금 이 에메랄드궁을 제2의 루비궁으로 만들겠다고 선포한 건가요? 네? 릴리와 한나, 세스, 그리고 그동안 나름대로 정들었던 다른 시녀 언니들과 주방장, 정원사를 비롯해서 내 궁에서 일해 온 그 무수히 많은 사람을 전부 다 죽여 버리겠다고? 그것도 나 하나 때문에? 오래전 루비궁에서 있었던 잔혹한 학살극이 갑자기 내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쿠구궁! 내가 릴리를 쳐다보며 폭풍 동공지진을 일으키자 클로드가 쐐기를 박으려는지 다시금 살벌하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농이 아니다. 그러니 이 황궁을 거대한 무덤으로 만들고 싶다면 얼마든지…….” “폐하, 그게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필릭스가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버럭 소리쳤다. “도대체 왜 또 공주님을 겁박하시는 겁니까? 참 답답하십니다!” 허억! 개복치 같던 우리 필릭스가 달라졌어요! 그는 이렇게 참다가 속이 터져서 죽겠다는 듯이 외쳤는데, 당연하게도 클로드는 그런 필릭스를 향해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그런 식으로 무섭게 말씀하시면 저 같아도 골백번은 도망가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들을수록 이상하다……. 클로드가 진짜 날 죽이려는 거면 필릭스가 안 저럴 것 같은데. 릴리도 아까부터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고. 솔직히 내가 갓난아기일 때에도 나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클로드의 앞을 막아섰던 릴리인 만큼 이번에도 클로드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그녀가 그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공주님께 정말 하시고 싶은 말씀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필릭스의 절박한 호소는 클로드를 향한 것인지, 나를 향한 것인지 솔직히 조금 헷갈렸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좀 제대로 해보라고 클로드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지금 클로드가 한 말은 진심이 아니니까 아직은 도망가지 말아달라고 나한테 부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던 클로드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나가라.” 흠칫! 나는 그의 축객령에 움찔 몸을 떨고 말았다. 나가라면 나가 드리는 게 인지상정. 필릭스랑 릴리랑 같이 저도 좀 밖으로 나가드리면 안 될까요? 어흑. 하지만 저 퇴실 명단에 나는 속해 있지 않겠지……. 하지만 필릭스와 릴리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님, 공주님께서 여기 있으라고 하시면 나가지 않겠습니다.” “저도 여기에 있겠어요.” 우, 우리 필릭스와 릴리가 단호박이 되었어요! 그들은 굳은 결의가 내비치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에 약간 감동을 받았고, 반면 클로드는 또다시 얼굴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라도 해야 믿겠나?” 나는 그런 클로드를 잠깐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곧 옆에 있던 릴리와 필릭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 괜찮아. 혹시 죽을 것 같으면 소리 지를게.” 어, 음. 뭔가 말해놓고 보니까 이상하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괜찮겠냐고 몇 번이나 내게 확인한 뒤에야 겨우 방을 나섰다. 달칵. 마침내 클로드와 나는 마법진이 그려진 방 안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드륵. 방금 전의 상황이 심히 못마땅한지 얼굴을 구기고 있던 클로드가 마침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저기, 너무 가까이는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멈칫. 그 순간 앞에서 풍겨지던 분위기가 약간 변했다. 나는 마주한 눈동자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그 안에 품어내는 모습을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혀 지켜보았다. 이, 이상하네. 분명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처럼 여전히 무심한 듯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왜 꼭 버림받은 멍멍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지? 클로드는 내가 거부하자 제자리에 멈추어 선 뒤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잠깐 동안 불편한 침묵이 주위에 맴돌았다. 이윽고 그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열어 나직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지?” 으응? 갑자기 웬 안부 인사랍니까? 나는 이 사람이 도대체 뭘 잘못 먹고 이러나 싶어서 눈동자를 도르륵 옆으로 굴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생각보다 더 의외라 내심 당황스러웠다.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어디를?” “산 따라 물 따라 발길 닿는 대로랄지.” “영상석까지 복제해 돌렸지만 네 소재지를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는데?” ======================================= [114화] “그건 요령껏 마법을 써서…….” “수중에 돈도 없었지 않나?” “그것도 마법으로…… 가 아니라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 엄마야, 위조 동전 만든 걸 나도 모르게 불 뻔했다! 나는 클로드의 게슴츠레한 눈을 못 본 척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 어디서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고 지내는 건 아닌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군.” 그리고 이윽고 낮은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스치는 순간 나는 클로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말았다. 그와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클로드는 장미 화원에서 봤을 때보다, 그리고 또 지난번 그의 침소에서 봤을 때보다 한결 더 창백하고 피폐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그동안 피죽 한 그릇 못 먹고 지냈던 게 누구인지 모를 정도가 아닌가. 다만 방금 전 피까지 한차례 토해 놓고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꼿꼿하게 자리에 서 있는 것이 클로드다웠다. 나는 그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잠시 후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 아빠가 아니라면서요.” “그래. 난 네 아빠가 아니다.” 내 물음에 무덤덤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런데 왜 그래요?” 나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동안 점차적으로 속에서 묘한 감정이 술렁이는 것을 느끼며 거의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 아빠도 아니면서 왜 아빠인 척해요?” 마치 그동안 나를 걱정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묻고, 또 지금까지 계속 나를 찾았던 게 죽이기 위해서가 아닌 것처럼……. 이번에는 대답 대신 짧은 침묵이 잇따랐다. “나도 모른다.” 나는 이를 악물 듯 잠시 동안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던 클로드가 이윽고 방금 전과 눈빛을 달리하며 읊조리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네가 날 그렇게 부르면 기분이 이상해져.” “…….”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봐도 마찬가지다.” 내 표정이 어떻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클로드의 표정도 내 마음을 이상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치 압정을 수십 개는 집어삼킨 사람처럼 보였다. “대관절 네가 뭐기에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클로드의 손이 방금 전보다 더욱 꽉 쥐어졌다. “나는 여전히 네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네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도 없다.” 그의 말은 분명 슬펐지만……. “어쩌면 죽는 날까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그렇게 말하는 클로드 역시 사실은 나 못지않게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상황이 불안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마침내 클로드가 한 번 더 이를 악물더니 이내 씹어뱉듯이 내게 읊조렸다. “그래도 떠나는 건 용납 못 한다.” 그의 눈동자에 다시금 섬뜩한 한기가 흘렀다. “내 시선이 미치는 곳에, 언제든 내가 원하면 손닿을 수 있는 곳에 있어라.” 두 번씩이나 나를 눈앞에서 놓쳤던 것을 상기하는 듯, 그의 주위에 어려 있던 공기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두 귀에 날아와 꽂히는 음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냉혹했다. “다시 한 번 말없이 사라지면 죽여 버리겠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의 협박이 두렵지 않았다. “너도, 네 도주를 도운 사람들도, 그리고 너와 옷깃 한 번이라도 스친 적 있던 사람들까지 전부 죽여 버릴 거다.” 하물며 정말 그가 다른 사람들과 나를 죽여 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조차 더는 들지 않았다. 그게 뭐야……. 도망가면 죽일 거라면서 자기 혼자만 불리해지는 술식을 방에 새기지를 않나, 지금도 가까이 오지 말라는 내 말에 진짜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지를 않나……. 말하고 행동이 완전히 따로 놀잖아. 게다가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만 하고……. “그게 뭐예요?” 결국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진짜로…….” 진짜 뭐야…….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그게 뭐예요……?” 어쩌면 내가 착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클로드가 마치 내게 ‘옆에 있어도 된다’고…….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에 있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데……?” 문득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것 같더니 방금 전보다 흔들리는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영문을 알 수 없게도 갑자기 목이 멨다. 바로 그 순간, 돌연 클로드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어쩐지 숨이 막히는 듯한 얼굴로 잠시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를 내다가, 곧 바닥을 긁는 것처럼 잔뜩 가라앉은 거친 음성을 토해냈다. “미치겠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그의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클로드는 가까스로 소리를 내는 데 성공한 사람처럼 짤막한 말을 내게 전했다. “울지 마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워.” 나는 뿌연 시야 속의 클로드를 보며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워……. 으흑. 아빠 미워…….” 그동안 속으로 꾹꾹 눌러 참았던 서러움이 봇물처럼 불어나 밖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진짜 미워……. 윽, 흐윽.”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밉다’는 말만 계속해서 입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눈물이 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클로드는 아연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 굳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또 미처 제어하지 못한 눈물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윽……. 자기 혼자만 다 잊어버리고.” 나도 이러기는 진짜 싫었는데……. 진짜 14살 먹은 아이라도 된 것처럼 이렇게 엉엉 울면서 원망이나 토해내기는 정말 정말 싫었는데……. 그런데 일단 한번 터져 나온 눈물은 도저히 멈출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볼 때마다 죽인다고 하고…….” “…….” “진짜로 죽이려고 하고…….” 차라리 클로드가 나를 죽이려고 혈안일 때에는 참을 수 있었는데, 정작 이렇게 그가 나를 직접적으로 어쩌지도 못 하고 다시는 도망가지 말라고 협박만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속에 고여 있던 감정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들어 눈을 마구 문지르면서 잔뜩 뭉개져 알아듣기도 힘든 소리를 횡설수설 계속 웅얼거렸다. “바, 바보같이…….” 나는 내가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나 때문에 죽을 뻔하기나 하고…….” 내가 루카스의 충고를 무시해서, 그래서 내 한심한 욕심 때문에 까망이도 사라지고 클로드도 이렇게 되고 만 것이라고. “아빠가 잘못될까 봐, 으흑, 얼마나…… 얼마나 무서웠는데.” 어쩌면 소설 속의 내용만 떠올리고 클로드가 절대로 죽지도 다치지도 않을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한 건지도 몰랐다. 나는 내가 죽게 될 것만 걱정했지, 세상에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언제나 초연한 모습만 보이던 이 사람이 설마 나 때문에 잘못될 수도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진짜 미워…….” 그래,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사실 진짜 미운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그제야 그동안 내가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이토록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처럼 제멋대로 굴 수 있었던 것도, 또 이렇게 마음껏 이기적이고 철없이 굴 수 있었던 것도, 그걸 다 받아주리라 믿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클로드의 앞에서 나는 항상 그의 어린 딸인 아타나시아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분명 내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지금껏 온 힘을 다해 나를 보호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마주한 사람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눈을 비볐지만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쉴 새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릴 때 이후로 클로드의 앞에서 이렇게 주체 없이 우는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아빠밖에 없는데…….” 아, 정말 싫다. “아빠가 그러면, 아빠가 없으면……. 난…….” 이 나이 먹고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무래도 이 몸에 들어와 있는 동안 내가 진짜 애가 된 모양이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서는 코맹맹이 소리나 내면서 이런 유치한 말이나 하고. “난…….” 아마 지금 내 꼴은 말이 아니겠지. 표정도 엄청 우스꽝스러울 거야.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속으로만 삼키고 있던 말은 고집스럽게 내 의지를 벗어나 멋대로 밖으로 흘러넘치고 말았다. “다시 혼자가 되는데…….” 진짜 싫어……. 지금 나 너무 꼴사나워. 이런 거 하고 싶지 않았어. 감정 하나 뜻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이렇게 온몸으로 부딪혀 깨지고 또 깨지고…….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서 먼지처럼 초라하게 사라지고 말 거야. 그래서 아무도 내 안에 들여놓고 싶지 않았던 건데. 그래서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으, 흐윽, 잘못했어요…….” 나는 내 안에 남아 있던 어리석은 고집도 모조리 내려놓고, 그동안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단단히 두르고 있던 껍질도 완전히 허물어버린 채 숨이 넘어갈 듯 울면서 그에게 사과했다.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흑, 다시는 안 그럴게요…….” “…….”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마도…… 내가 이렇게까지 절박하고 필사적인 마음이라는 사실을 나 스스로에게조차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건가 보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어. 이 이상 추해져도 좋아. 이것보다 더 꼴사나워져도 좋아. 슬프긴 하지만 이대로 두 번 다시 나로 딸로 생각해 주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벅. 그때 뿌연 시야 너머로, 지금까지 계속 굳은 듯 서 있던 클로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발길을 떼는 모습이 흐리게 비쳤다. 마침내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그의 손이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려졌다가 멈칫한 뒤 잠시 동안 허공에서 배회했다. 그 상태로 그는 흐느끼는 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곧 클로드가 숨을 죽인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내가 미안하다.” 나는 귓가에 스미는 사과의 말에 깜짝 놀라서 눈을 문지르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런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낮은 음성이 속삭여졌다. “나야말로 너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미안하다.” 정작 울고 있는 건 나인데, 클로드는 그런 나보다도 더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그를 아주 악질적으로 괴롭히기라도 한 줄 알 정도였다. “두 번 다시는 그러지 않으마. 그러니까…….” 그 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허공에서만 배회하던 그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졌다. “그러니까 울지 마라.” 그 억눌린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내게는 거의 애원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내게 손을 대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주저함 어린 손길이 마침내 눈물로 젖은 내 얼굴에 닿았다. “부탁이다.” 나는 그의 망설임이 깊어지기 전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를 위해 준비된 너른 품에 그대로 안겨 버렸다. 내가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자 맞닿은 몸이 반사적으로 경직되었다. 내 눈에서 떨어져 내린 눈물이 클로드의 옷자락을 적셨다. ======================================= [115화] 잠시 후 내 등에 묵직한 온기가 내려앉는 순간, 나는 오히려 방금 전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면서 울어버렸다. “아, 아빠…….” “그래.” “아빠…….” “그래.” 그는 분명 제 입으로 기억을 잃은 자신은 내 아빠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울면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부름에 묵묵히 대답해 주었다. 아, 당신도 나도 어쩌면 이렇게 바보 같은지…….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울고 싶은 것을 참았던 탓인지 눈물은 한참 동안이나 멈추지 않았다. 클로드의 품에서는 아주 익숙한 향기가 났다. 내 등을 감싼 온기가 마치 너는 이곳에 있어도 된다고,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대고 울면서 비로소 내가 다시금 그를 만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 나 이제야 겨우 돌아왔구나. 그리운 사람이 있는 내 집으로. 나는 약간 서툴게 내 등을 다독이는 손길을 느끼며 그냥 눈물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마음껏 울어버렸다. 제31장 관계의 재정립 “릴리, 그 술식이 뭔지 알고 있었어?”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릴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에메랄드궁의 내 침대 속에서 잠들 준비를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와 이야기를 하며 울었던 탓인지 릴리의 눈은 아직 촉촉했다. 나도 황성에 돌아온 직후로 한참 동안 눈물 바람을 했기 때문에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폐하께서 매일 공주님과 함께 그린 초상화를 보러 가셨어요.” 릴리는 내게 이불을 덮어주며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러지 않으실 때에는 방에 영상석을 틀어 놓으셨고.” 나는 그녀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아까 보았던 클로드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지난 일을 많이 후회하고 또 그만큼 많이 괴로워하셨어요.” 릴리의 말처럼 클로드는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술식이나 그려서 또 한차례 피를 토하기까지 했으니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물론 저는 공주님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폐하께 화가 많이 났지만요.” “애초에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뭐…….” “부모와 자식은 원래 다른 거니까요.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제가 감히 공주님을 제 아이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머리 위에서 한숨 섞인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울렸다. 나는 내 몸을 다독이는 부드러운 손길과 귓가에 스미는 다정한 음성을 느끼며 공연히 매운 기운이 올라오는 코를 작게 찡긋거렸다. “그래도 폐하께서 공주님을 정말 해치실 리 없다는 사실만큼은 믿었어요.” 온몸이 노곤해질 만큼 따스한 손길과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를 안심시키듯 다독거렸다. 그러다 문득, 밖에 있는 동안 내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하자마자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푹 쉬세요. 사랑하는 우리 공주님.” 자그마하게 속삭여지는 애정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날 밤은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꿀처럼 단잠을 잘 수 있었다. * * * “공주님, 폐하를 만나러 가고 싶지 않으세요?” 그 후 나는 다시 황성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 나갈 준비를 할까요?” “아니.” 에메랄드궁의 식구들은 모두들 나를 격렬히 환대해 줬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전보다 더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음. 공주님, 폐하가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보고 싶지만 지금은 만나러 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지금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때 늦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아빠랑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걱정 끼쳐서 미안하고 또 항상 신경 써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제부터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볼게. 그러니까 필릭스랑 릴리도 마음 편하게 쉬고 있어.” 내가 단호히 말한 뒤 방을 빠져나오자 뒤에 남은 릴리와 필릭스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그들은 에메랄드궁에서 내가 클로드와 눈물의 부녀 상봉을 한 후 한 번도 그를 만나지 않자 애가 닳는 눈치였다. 하기야, 그 후로 전보다 더 돈독하고 끈끈한 부녀간의 정을 과시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썰렁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가 이상해 보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지금 바로 클로드를 만나러 갈 생각이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클로드와 나, 우리 두 사람에 대해 조금 고민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현명하신 결정이세요, 공주님.” 오직 세스만이 이런 나를 지지하고 나섰다. “원래 더 간절한 사람이 지고 들어가게 되어 있는 법이죠. 어떤 관계에서든 밀고 당기기란 중요하답니다. 게다가 불경한 말이긴 하지만 폐하께서는 조금 더 마음고생하셔도 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지난날 공주님께 하신 일을 생각하면…….” “하지만 세스, 만약 그러다가 폐하께서 또 노하시면 어떻게 해?” “한나, 그동안 폐하께서 얼마나 애타게 공주님을 찾으셨는지 잊었어? 그리고 원래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잖아.” 하지만 사실 나는 지금 클로드와 밀당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아주 틀린 것도 아닌가? 어쩌다 보니 그날 클로드와 화해 비슷한 것을 하게 되어버렸지만 솔직히 말해서 알게 모르게 그와 만나는 일을 피하고 있는 건 맞았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이러는 이유는 지난날의 충격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아 그를 만나는 일이 망설여진다거나, 혹은 세스가 말한 것처럼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에게 상처받은 마음이 깊어 나도 그를 본체만체해 애태우고 싶다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말로서 표현하자면, 나는 그와 나의 관계를 바꾸고 싶었다.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입장에서 이제는 진실로 서로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있도록. “지금 뭐 하자는 건가?”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클로드가 에메랄드궁에 직접 방문했다. “오셨어요?” 나는 그와 내가 종종 함께 다과 시간을 갖던 장미 화원에서 그를 맞아주었다. “그 서신은 도대체 뭐지?” “다과회 초대장이죠.” 나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클로드의 미간이 꿈틀, 작은 굴곡을 그렸다. “제가 다과회에 아빠를 초대했고, 아빠는 거기에 응해 제 화원에 오신 거잖아요.” 참 쉽죠잉? 나는 마음껏 클로드를 무시하며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는 내가 설마 그걸 몰라서 너한테 물은 것 같냐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 맞은편 자리를 클로드에게 권했다. “그러지 말고 어서 앉으세요. 저 목 아프단 말이에요.” 그동안 두세 번 정도 클로드가 가넷궁으로 오라는 뜻을 필릭스를 통해 전했으나 나는 에메랄드궁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오늘, 이번에는 내가 직접 그에게 다과회 초대장을 보냈으니 ‘얘가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 클로드의 기분이 저조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 초대장의 의미는 ‘내가 보고 싶으면 당신이 직접 와라!’가 맞았으니 기분이 나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진짜로 내가 부르자마자 이렇게 에메랄드궁에 직접 행차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지 않나?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 주도권 싸움은 그만하고 사이좋게 다과나 듭시다. “이곳, 왜인지 낯설지가 않군.” 클로드는 잠깐 동안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보다가 곧 어쩔 수 없이 져주겠다는 듯이 내가 권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여기에 자주 왔었나?” 머리 위에서 푸른 나뭇잎이 사부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 그에게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오셨으니 그런 편이었죠.” 쪼르륵. 은은한 향을 내는 맑은 액체가 앞에 있는 찻잔 속으로 가느다란 물줄기를 그리며 쏟아져 내렸다. 지난번에 나 혼자 있을 때에는 다소 과격하게 찻물을 콸콸 들이부었지만 나도 우아하게 차를 따르려면 할 수 있다, 이거야! “리페차예요. 오늘은 제가 직접 우렸어요.” 달그락. 나는 그의 앞에 직접 찻잔을 놓아주기까지 했다. 오늘은 내가 미리 요구했기 때문에 다과 시중을 들던 궁인들은 일찍이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클로드와 나, 단둘만이 있는 화원에는 그윽한 꽃향기와 차향이 한데 어우러져 떠다니고 있었다. 잠시 후, 내가 준 찻잔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클로드가 이내 손을 움직였다. 나는 그의 손이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곧 클로드가 찻잔 속에 든 액체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냥 드세요? 제가 독이라도 넣었으면 어쩌시려구요.” 그런 식으로 떠보듯 물은 것은 말로는 잘 설명하지 못할 작은 충동 때문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얄밉도록 태평한 얼굴을 한 채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독을 넣었나?” “아니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럼 되었지 않나.” 아니, 되긴 뭐가 되었습니까? 진짜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차에 독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요? 내가 기억 안 난다며? 그런데 그렇게 막 아무런 경계심 없이 무방비하게 내가 주는 걸 막 먹어도 돼? “아빠한테 저는 낯선 사람이잖아요. 좀 더 경계하시는 편이 낫지 않아요?” 그렇다 해서 굳이 이런 말을 하고 말다니 나도 참 성격이 나쁘다. 클로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드라진 음영에 먹힌 그의 눈동자 위로 노란 햇살이 한 조각 머물렀다. “모르겠군.”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어 낮게 속삭였다. 그의 대답은 애매했다. 내 말처럼 나를 경계하시는 게 나은지 모르겠다는 건지, 아니면 내가 왜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건지. 혹은 그 둘 모두에 의문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을 멈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실제로 이 안에 독이 들었고, 또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나는 이걸 마셨을 거다.” “왜요?” “네가 준 거니까.” 바로 그 순간 나는 잠시 동안 말문이 막혀 버렸고, 그는 자신의 헛소리에 지레 놀란 사람처럼 불현듯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했지?” 그, 그걸 당신이 알지 내가 안답니까? 아마도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소리였던 것 같았다. 클로드는 별 해괴하고 끔찍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방금 전 자신의 고막을 타고 들어온 그 믿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인 사람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미친 소리를 한 게 바로 클로드 자신이라는 점이 가장 웃기는 부분이었다.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있다가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양손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그리고 괜스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저는 아빠가 저한테 독이 든 잔을 주셔도 안 먹을 건데요.” 물론 클로드가 나한테 독이 든 잔을 줄 리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 이 순간, 나는 굉장히 낯간지러운 말을 들은 기분이 되어 그런 소리라도 하지 않으면 내 안에 어린 이 엄청난 동요를 감출 수 없을 것 같았다. ======================================= [116화] “안 죽인다고 몇 번을 말해야 믿을 셈이지?” 그는 아직도 내가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하는 듯 슬며시 한쪽 눈매를 찡그렸다. “만약 내가 또 정신이 나가서 너를 죽이려고 하면…….” 그리고 마찬가지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때는 도망쳐라.” 나는 그 말에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언제는 도망치면 죽여 버리신다더니.” “물론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다시 찾아 잡아올 거다.” 그거 완전히 모순이잖아요?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는 그만 어쩔 수 없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의 손을 꽉 붙잡아주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게 낫다. 네가 내 손에 죽는 것보다는.” “그게 뭐예요. 이상해.” “나도 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또다시 미친 소리를 한 것 같다 싶은지 눈살을 찌푸리며 내가 따라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짹짹. 나는 머리 위에서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바보 같은 내 아빠를 향해 조금 울고 싶은 기분으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 * * “허억!” 한밤중, 문득 나는 잠에서 깨어나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사위는 온통 깜깜했고, 주위에는 내가 토해내는 가쁜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뭐지? 지금 엄청 끔찍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방금 뭔가 굉장히 무서운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막상 일어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꿈에서 느꼈던 섬뜩한 느낌만큼은 아직도 생생했다. 나는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이윽고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머. 공주님, 이 시간에 왜 나오셨어요? 잠이 오지 않으세요?” 방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때마침 컵이 든 쟁반을 들고 복도를 지나고 있던 릴리를 만날 수 있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그녀는 아직 잠들지 않고 있던 것 같았다. “아빠한테 갈래.” “네?” 내 뜬금없는 말에 릴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나는 다른 말을 더 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공주님, 갑자기 왜…….” 릴리는 급히 나를 쫓아오며 묻다 말고 내 얼굴을 확인한 뒤 어째서인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밤공기가 차니 이거라도 걸치세요.” 들고 있던 쟁반을 아무데나 내려놓은 릴리가 자신이 걸치고 있던 숄을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어멋. 공주님,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에 어디를…….” 아직 깨어 있던 궁인들이 늦은 시간 밖으로 나서는 나를 향해 의문을 내비쳤다. “잠시 폐하께 다녀올 테니 그런 줄 알고 있으렴.” 하지만 그녀들은 릴리의 말에 곧 다른 말없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제각각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나는 에메랄드궁을 벗어나 가넷궁으로 향했다. 내 뒤에는 얼마 전부터 클로드가 궁전 앞에 배치해 놓은 기사들이 어느덧 릴리와 함께 따라붙어 있었다. 황성 도처에 그려 넣었다는 위험한 마법진을 어서 지워 버리라고 했지만 클로드는 아직도 자신이 한눈을 팔면 내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는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순간 이동을 써서 클로드에게 갈 수 없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클로드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집무실에서 서류를 읽고 있던 클로드가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향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오라고 할 때는 죽어도 오지 않더니 느닷없이 이 야심한 시각에 찾아온 내가 이상하기는 할 것이었다. 이제는 식사도 제때 하고 또 불면증도 차차 나아지고 있는지, 마주한 그의 얼굴은 얼마 전보다 확연히 낯빛이 좋아져 있었다. 클로드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나자 마음속의 긴장감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 자다가 깼는데 그냥 갑자기 보고 싶어져서요.” 나는 내가 이런 영문 모를 짓을 벌인 이유를 그냥 솔직히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를 마주하고 있는 클로드의 얼굴이 점차적으로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이러고 그냥 가는 게 좀 웃긴 것 같기는 했지만 어차피 목적도 이루었겠다, 나는 또다시 홀연히 집무실을 나서려고 몸을 돌렸다. “얼굴도 봤으니까 이제 갈게요.” “잠깐 기다려라.”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별안간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까보다 확연히 가까워진 클로드가 지척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 그런데 그는 문득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타나시아.” 잠시 후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이 귀에서 맴돌다가 곧 허공에 흐트러졌다.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억눌린 소리가 잠시 머리 위에서 헛돌더니, 곧 내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살다 살다 별 이상한 짓을 다 해보는구나.” 나는 갑자기 나를 안아 든 클로드의 행동에 깜짝 놀라 두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깜빡이고 있다가, 머리 위에서 한탄조로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아니, 제가 언제 이런 이상한 짓 해달라고 했어요?” “네 이상한 짓에 나까지 전염된 것이 분명하다.” 뜨끔. 이 늦은 시간 갑자기 집무실에 들이닥친 건 분명 이상한 짓이 맞았기 때문에 한순간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 클로드가 은근히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더욱 울컥했다. 그, 그런데 이거 좀 민망하다. 나이 들고는 이런 식으로 클로드한테 안겨서 이동했던 적이 없었는데……. 게다가 공주님 안기야! 크앙! 클로드는 문 앞에 있던 사람들을 눈짓 한 번으로 물러가게 한 뒤 그대로 나를 안고 복도를 걸었다. 나는 굉장히 창피한 기분이었지만 왜인지 지금 내려달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분위기라서 하는 수 없이 꼼지락거리며 가만히 있고 말았다. “오늘만 봐줄 테니 얌전히 자라.” 클로드는 침소에 도착해서 나를 던지듯이 내려놓은 뒤 아예 이불로 돌돌 감싸버리기까지 했다. 이만저만 성가신 게 아니라는 듯한 말투라 나는 금세 부루퉁해지고 말았다. “제가 뭐 악몽 꾸고 혼자 잠도 못 자는 어린애인 줄 아세요?” 크흑. 사, 사실은 악몽 꾸고 찾아온 게 맞았지만 그걸 인정하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콧방귀 한 번으로 단번에 내 자존심을 구겨버렸다. “아니라고 생각하나?” 크악, 얄미워! 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분노에 몸을 떨자 클로드가 쯧 혀를 찼다. “잡생각 말고 그냥 자래도.” 문득 머리 위로 투박한 손길이 느껴져서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서툴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클로드는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줄 생각인 것 같았다. “……싶어.”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를 밖으로 새어 보냈다. “엄마 보고 싶어요.” 별안간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추어졌다. 침묵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이 순간의 정적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머리 위에 머물던 온기가 다시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둑한 방 안에는 그와 내 숨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창 밖에서 새어드는 달빛이 클로드의 한쪽 얼굴을 희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침내 내가 잠들고도 남을 정도로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희미한 음성이 밤공기 속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나도 그렇다.” 그날 밤에는 그도 나도, 둘 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짹짹. “으음?” 창밖에서 울리는 새 소리에 나는 퍼뜩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런데 가물가물한 시야에 비친 방 안의 풍경이 왜인지 한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잠시 초점 없는 눈을 깜빡이다가 겨우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냈다. 아, 맞아. 나 어제 가넷궁에서 잤었지. 생각보다 자리가 편안해서 나도 모르게 숙면한 모양이다. 나는 부스스한 몰골로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켰다. 창밖에서는 밝은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평소에는 릴리가 늘 같은 시간에 깨우러 오는데 오늘은 그게 아니라서 지금이 몇 시나 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클로드는 어디에 있지? 또 집무실에 일하러 갔나? 어제 그는 정말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 옆에 있어주었다. 어쩌면 그러고 나서 하던 일을 마저 하러 다시 집무실에 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일하고 있는 그를 내가 방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서 하릴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저 멀리 소파 위로 보이는 낯익은 금색 머리칼을 발견하고 말았다. 앗, 집무실에 간 게 아니구나! 나는 이불을 완전히 걷고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인 뒤 살금살금 클로드가 있는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짹짹. 그는 창가에서 스민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푹 잠든 것 같다. 나는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곤히 잠들어 있는 클로드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음음. 이제야 원래의 미모가 좀 돌아오는 것 같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볼 때마다 꼭 죽을병에 걸려서 골골거리는 사람처럼 얼굴이 영 안 좋아 보여서 신경이 쓰였는데. 으흑, 물론 그것마저 뭔가 퇴폐적인 느낌이라 나름대로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얼굴에 혈색도 돌아오고 다시 살도 붙고 해서 제법 사람 같은 몰골이 된 지금이 낫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꽃 거지…… 아니, 꽃 거지라기보다는 꽃 좀비 같았는데 말이지. 아니, 그런데 이제 나이도 꽤 먹은 아저씨면서 얼굴이 왜 이렇게 뽀송뽀송한 거죠? 피부는 또 왜 이렇게 좋은 거랍니까? 이거, 이거 뺨이 찹쌀떡처럼 탱탱한 것 좀 보게! 나는 클로드가 잠들어 있는 틈을 타 햇살이 어린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슬슬 그를 깨워야 할 것 같아서 눈앞에 있는 매끈한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크으, 이 찰진 떡 같은 촉감. 근데 보기와 달리 촉감은 찹쌀떡 말고 절편 같다. 흐음. 말랑말랑하다기보다는 뭔가 쫄깃쫄깃 탄력이 있는 피부의 느낌인데……. 그런데 나 왜 클로드의 피부를 이렇게 열심히 분석하고 있는 거지……? “음.” 잠시 후, 그의 반듯한 미간이 꿈틀거리며 찌푸려졌다. 앗! 완전히 깨기 전에 한 번 더 찔러 봐야지! 쿡쿡쿡! 나는 클로드가 천천히 눈을 뜨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빠!” 하얀 햇살이 한 웅큼 고여 있는 눈동자가 나를 그 안에 담아내며 오색 찬연하게 빛났다.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모조리 모아놓은 것 같은 신비로운 보석안이 나를 마주하는 동안 서서히 초점을 되찾았다. 잠시 동안 시간이 멈춘 것처럼 미동 없이 나를 응시하던 클로드도 이윽고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좋은 아침이구나.” 하늘 꼭대기에 걸린 태양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 [117화] 잠시 후, 클로드의 방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며 나는 폭탄을 던졌다. “저 오늘 잠깐 밖에 다녀올 거예요.” 달그락. 바로 그 순간, 식기를 들고 있던 클로드의 손이 우뚝 멈추어졌다. “허락할 수 없다.” 나는 대번에 서늘한 기운을 몽실몽실 피워내기 시작하는 그를 약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이구, 지금 내 나이가 몇이고 당신 나이는 몇인데 그냥 외출 한 번 하겠다는 거 가지고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뭐, 어차피 허락해 주지 않을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는 포크로 샐러드를 콕콕 찌르며 클로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아빠도 좋고 이 황성도 좋아요.” 갑자기 꺼낸 말에 마주한 사람이 눈매를 움찔거렸다. “그리고 필릭스도, 릴리도, 에메랄드궁에 있는 다른 시녀들과 궁인들도, 또 황성 곳곳에 있는 장미 핀 화원도, 아빠가 공들여 만들어주신 도서관도, 그리고 조금 삭막하긴 하지만 지금처럼 아빠와 함께 있는 가넷궁도 전부 다 좋아요.” 클로드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건 전부 다 이 황성 안에 있죠. 왜냐하면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 안에서만 살았으니까요.” “그래, 원하는 건 모두 네 앞에 대령시켜 주겠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제가 원하는 건 전부 다요?” “그렇다.” “그럼 저는 지금까지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황궁 안에 그저 가만히 있으면서 아빠한테 뭐든 말만 하면 되겠네요?” “그래.”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닌 걸요.” 나는 클로드의 굳은 얼굴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황성을 떠나 밖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리고 이곳에 다시 돌아와 생활하는 동안 줄곧 생각하던 것을 그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저는 지금 이곳이 제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에, 그래서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골랐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인즉, 아타나시아가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클로드를 만나 이 황성에 살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사실상 지금껏 내 선택의 폭은 지극히 좁았다. 금수저를 입에 문 공주로 태어났지만 하필이면 아버지에게 죽을 운명인 아타나시아가 되어버린 탓에 솔직히 처음에는 ‘생존’ 아니면 ‘죽음’이라는 양 갈래의 길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클로드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그리고 저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변명하고 싶지 않구요.” 내게 있어 그런 우리의 관계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태로운 모래성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사랑스러운 공주님>이라는 책의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불안감일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이제까지와 똑같은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와 함께 진짜 아빠와 딸로서의 신뢰를 쌓고 싶었다. “이제는 언제든지 원하면 이곳을 떠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내가 설핏 웃으며 말하자 클로드가 움찔했다. 역시 지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깨지지 않게 방 안에만 고이 간수해야 하는, 그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유리 인형이 아니었으니까. “또 누군가가 안겨주는 걸 그저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게 있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얻을 수 있어요.” 만약 내가 지금까지처럼 내게 허락된 것들에만 만족하는 새장 속의 새로만 살게 된다면 우리의 관계는 앞으로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저는 앞으로 아빠 속을 좀 썩이는 딸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처럼 황궁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면 아빠한테 얘기한 후에 언제든 나갈 거예요. 그리고 그 후에는…….” 나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내 말을 듣고 있는 클로드를 향해 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늘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거예요.” 바로 그 순간 클로드의 표정이 변했다. 나는 딱딱한 가면을 뒤집어쓴 듯 경직되어 있던 그의 얼굴이 아주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런 말을 생전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가 저를 기다리는 한, 적어도 제 의지대로 말없이 사라져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이에요.” 나는 이제 내 의지로 이곳에 남아 그와 함께 살아가고 싶었으니까. “왜냐하면 여기가 제 집이고, 아빠가 있는 곳이 제가 돌아올 자리니까.” 클로드는 나의 불안을 모르고, 나는 그의 불안을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사는 동안 영원히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금방 다녀올게요.” 왜냐하면, 설령 그렇다 해도 그는 내가 죽는 날까지 내 아빠일 테고, 나는 그가 죽는 날까지 그의 딸일 것이니까. “꼭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해요.”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연약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 * * “마그리타 양.” 주황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저녁 하늘을 건너 나는 제니트를 만나러 갔다. “공주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움과 염려가 뒤섞인 얼굴로 달려왔다. “폐하께서 더 이상 공주님을 찾지 않으신다고 해서,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걱정했어요.” 헉, 그렇구나! 잠깐 잊고 있었는데 클로드가 내 수배령을 중지시켰다니! 어흑, 다행이다. 이제 내 수치스러운 영상석도 안 돌아다니는 거겠지? “음.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요.” 나는 속으로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멋쩍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시 궁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바로 그 순간 제니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런데 이건 무슨 표정인 걸까? 나는 깊은 푸른색 눈동자 속에 어리는 의미 모를 감정에 무심코 입술을 달싹이고 말았다. 검은 심해 속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마주한 눈동자에 그림자 같은 옅은 파문이 그려졌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것은 실로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다. 나는 다행이라는 듯이 내 손을 붙잡고 웃는 제니트의 얼굴을 마주했다. “정말 잘되었어요. 축하드려요.” 그녀는 내가 궁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하는 것 같았다. 그 얼굴 어디에도 거짓은 없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위화감은 무엇이었을까? 그냥 기분 탓이었을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금 상기한 뒤 일단 오늘의 목적을 이루기로 했다. “그럼 가요.” “네? 어디를요?” 앗, 약속한 걸 잊었나 보다. 이거 조금 서운한걸? “불꽃놀이요. 이제 시작할 시간이 되었거든요.” 그러자 다시금 제니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지더니, 곧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꽃물이 들었다. 나는 웃는 얼굴로 제니트의 손을 붙잡고 알피어스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그날 그녀와 함께 본 불꽃은 이제껏 내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예뻤다. “짜잔!” 그리고 짧은 외출을 끝내고 난 뒤, 나는 클로드가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내가 몇 번이고 우겨 황성에 있는 마법진을 전부 다 박박 지워 버린 뒤였기 때문에 이제는 자유롭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녀왔어요!” 오늘의 그는 집무실이 아닌 침소에 있었다. 내가 눈앞에 뾰로롱 나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클로드의 시선이 나한테 못 박혔다. 그 상태로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 하고 계셨어요?” “…….” “으음,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툭툭 두드리며 짐짓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고민하는 척하다가 이내 알았다는 듯이 발랄하게 외쳤다. “아빠는 너무너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딩동댕!” 이쯤 하면 ‘별 참신한 헛소리를 다 들어보겠군’이나 ‘어디 아프나?’ 같은 말로 코웃음을 치며 받아칠 줄 알았는데, 클로드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뻘쭘함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릴 무렵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 돌아왔군.” 그 가라앉은 음성에 나는 한순간 멈칫하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나가듯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전 약속을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그 후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클로드가 앉아 있는 소파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갔다. “아빠, 솜사탕이 뭔지 알아요?” “열로 녹여 반고체이자 반 액체 상태가 된 설탕에 원심력을 작용해서 가느다란 실 모양으로 변한 것을 막대에…….” 헉! 괜히 물어봤다! 난 솜사탕이 뭔지 모를 줄 알고 클로드한테 물어본 거였는데! 황성에서는 불량 식품이나 마찬가지인 솜사탕이 반입되지 않을 테니까 어벙하게 ‘솜은 먹는 게 아니다’ 같은 말이나 하길 기대했더니! “헐, 재미없어…….” “물어본 건 너다.” 나는 내 기대감을 와장창 깨뜨린 클로드를 약간 배신감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클로드가 같잖다는 듯이 나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이제야 좀 클로드 같네. “자요, 선물이에요!” 나는 등 뒤에 숨기고 있는 것을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나는야, 선물 요정 아티! 내가 외출한 동안 얌전히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로드에게 솜사탕을 줄 거예요! 하지만 클로드는 내가 들고 있는 솜사탕을 보며 또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양반이! 신성한 솜사탕 님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부덕한 눈빛이야! “원래 아무한테나 안 주는 건데 아빠만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맛있겠죠? 맛있겠죠? 네? 그렇죠?” 나는 그의 손에 억지로 솜사탕을 들려주었다. 크크, 그런데 진짜 안 어울린다. 클로드와 솜사탕이라니. [클로드의 해맑음이 1 상승했습니다!] [클로드의 동심이 앞으로 30초 동안 유지됩니다!] 뭐 이런 창이라도 눈앞에 떠야 할 것 같네. “아빠도 불꽃놀이 봤어요? 되게 예쁘던데. 하긴, 황궁에서 보는 불꽃은 거기서 거기지.” 나는 인상을 구기고 있는 클로드의 옆에 털썩 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말했다. 어휴, 역시 집이 최고다. 그나저나 이 소파, 뭐로 만든 건지 엄청 푹신푹신하단 말이야? 이참에 에메랄드궁에 있는 소파도 이걸로 바꿀까? 그러고 보니 클로드의 집무실에서 기다릴 때마다 앉았던 소파도 엄청 푹신했었지. “다음에는 같이 보러 가요. 불꽃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발견했거든요.” 그래. 내 다음 불꽃놀이의 동행자는 클로드, 당신으로 정했다! 어째서인지 내 말에 그는 또 대답 없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지만 나는 그냥 내 멋대로 결정한 뒤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불렀다. 얼마 남지 않은 내 14살의 밤이 그렇게 또 하루 지나가고 있었다. 제32장 검은 탑에 어서 오세요! “나 좀 긴장되는 것 같아…….” 으억, 속이 쓰린 걸 보니 스트레스성 위경련 같은데. “걱정하실 것 없어요. 공주님께서는 그냥 손만 흔들어주시면 되는 걸요.” “맞습니다. 공주님께서 잠깐 얼굴만 비춰주셔도 다들 좋아할 거예요.” 릴리에 이어 필릭스까지 나를 다독여 주었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비추는 날이었으니까. 건국제도 다 끝났는데 도대체 왜 나보고 대중들 앞에서 인사를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 [118화] 물론 원래대로라면 건국제 중간에 있던 행사식 때 클로드와 함께 얼굴을 보일 예정이기는 했지만 그때는 내가 아직 지명수배 중이었지……. 쿨럭. 아무튼, 그래서 나는 지금 간만에 치장을 한 뒤 커튼 뒤에서 더부룩한 속을 애써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곳은 평소에 안 쓰는 궁이라 나도 가본 적이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꼭대기 층의 테라스 같은 데로 나가면 바로 광장이 보이더라. 그리고 지금 난 바로 그 테라스의 커튼 뒤에 서 있었고. 으악,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다 들려서 더 긴장되네! “그냥 가만히 서서 손만 몇 번 흔들어주면 되는데 그게 어렵나?” 클로드는 이런 나를 향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심드렁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쓰읍, 저 표정을 보니까 갑자기 긴장감 대신 전투력이 막 상승하는데요? “시간이 되었군.” 옆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커튼을 걷자 클로드가 먼저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우와아아아!” 우레 같은 거대한 함성이 광장 가득 울려 퍼졌다. 워호, 역시 반응들이 장난이 아니네요. 하기야 지난번 건국제 행사도 그렇고 일반 백성들이 황제의 얼굴을 이렇게 직접 볼 기회는 드무니까. 게다가 특히 오늘의 클로드에게서는 간지가 줄줄 흘렀다. 아니, 어떻게 망토를 저렇게 멋지게 휘날리는 거지? 내가 연습했을 때에는 안 되던데? 보기보다 천이 무거워서 지금도 어깨가 아래로 축축 가라앉는 것 같은데. “공주님.” 으헉, 내 차례인가 보다! 뒤에서 재촉하듯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하는 수 없이 나는 자리에서 걸음을 떼고 말았다. 우, 웃어야겠지? 클로드처럼 딱딱하고 근엄한 표정은 나한테 잘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부녀가 나란히 그러고 서 있으면 분위기가 엄청 썰렁해질 것 아니야! “뭐 하나?” 뭐 하기는, 혼자서 얼음땡 놀이를…… 이 아니라 왠지 발이 안 떨어져서 잠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에잇, 당신은 이런 게 익숙할지 몰라도 난 아니라고! “누가 보면 걸음마도 못 뗀 아이인 줄 알겠군.” 호호호, 우리 아빠는 말도 참 예쁘게 하시지요. 클로드는 일단 테라스의 문턱을 넘어놓고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쯧 혀를 찼다. 그리고 이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왜, 왜인지 데뷔당트 때의 일이 데자뷔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똥개 부르듯이 ‘손!’ 하고 외치더니……. 당신 정말 기억 잃은 거 맞아요? 크흑, 아니면 역시 기억이 없어도 사람의 본성은 그대로라는 건가. 잠깐……. 그거 뭔가 은근히 암울하잖아요? 나는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다가 하는 수 없이 잡아주는 거라는 듯이 클로드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웃어라.”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광장 안에 우글우글 몰려 있는 엄청난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약간 굳자 클로드가 옆에서 속삭였다. 앗차, 표정 관리! 나는 애써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약간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귀를 찢을 듯한 함성이 고막을 찔러 들어왔다. “우와아아아아악!” “와아아! 공주님! 여기도 봐주세요!” “오벨리아 만세에에!” “황제 폐하 만세! 아타나시아 공주님 만세!” 허억! 군중의 열렬한 반응에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 뭐지? 왜들 이렇게 텐션이 높이 올라가 있는 거야? 너무 뜨겁게 반겨줘서 당황스럽다. “영상석 때문이 아니겠어요?” 아직까지도 크게 울리고 있는 함성을 뒤로한 채로 내가 얼떨떨하게 다시 안으로 들어서자, 그런 나를 보며 릴리와 필릭스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영상석이라는 말에 흠칫하고 말았다. “공주님의 데뷔당트 때 모습을 보고 반한 사람이 무척 많답니다. 오벨리아에서도, 또 외국에서도 엄청난 화제라고 하던걸요.” “게다가 공주님께서 폐하의 뒤를 이은 강력한 마법사라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공주님의 인기가 더욱 급속도로 치솟고 있다고 합니다.” 커헉! 너무 엄청난 얘기를 들어버렸잖아요? 나는 그동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던 이야기를 듣고 타격을 받아 잠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으악, 그러고 보니까 그 영상석 외국에까지 막 돌렸지! 나는 방금 전 공식석상에서의 인사를 무사히 끝마치자마자 가신들과의 회의가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난 클로드를 생각하면서 울상을 지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 영상석 도대체 몇 개나 만든 거야? 아니, 그리고 나도 모르는 새 언제 그런 걸 만들어놨었대?” 그런데 릴리와 필릭스는 영상석을 몇 개나 만들어둔 거냐는 말에 왜인지 내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피우다가 잇따른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희도 몰랐는데 폐하께서 만들어두신 게 있더군요.” 네, 네? 아니, 도대체 그런 건 언제 만들어뒀대요? 데뷔당트 때 영상이라면 혹시 그건가? 내가 춤추면서 클로드의 발을 마구 밟아대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라던가. 그리고 덧붙여지는 필릭스의 말에 나는 그만 자리에 멈추어서고 말았다. “다른 것도 더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오싹! 다, 다른 거요? 다른 거라니, 그게 뭐지요? 설마 지금 내 데뷔당트 때 모습을 담은 영상석 말고 다른 것도 더 있다는 소리를 한 건가요? 네? “……데뷔당트 때 영상석만 있는 게 아니야?” “그럼요. 궁금하시면 직접 가셔서…….” “아니요, 전 궁금하지 않습니다.” 궁서체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클로드, 이 무시무시한 인간! 이것은 필시 내 흑역사를 박제해서 나를 수치사시키려는 술수다! “그러지 마시고 한번 감상을…….” “어머나, 저기 귀여운 아기 귀뚜라미가 있네. 와아, 엄마 찾아서 왔나봐.” 난 지금 아무것도 못 들은 거다. 영상석 얘기 같은 건 들은 적이 없는 거야. 나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발걸음을 서둘러 에메랄드궁으로 향했다. * * * “아아앗!” 그렇게 어느 정도 걸었을 때, 문득 어딘가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고막을 찢을 듯한 그 소리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으, 응? 그런데 저 사람들, 다들 왜 날 보고 저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대각선 방향에 보이는 4명의 사람들은 남녀가 섞여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입고 있는 게 황실마법사의 복장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챘다. 와아, 저 옷도 뭔가 오랜만에 보네. 루카스가 있을 때에는 거의 매일 봤었는데. 크흑, 갑자기 뭔가 아련해지는구먼. 나는 루카스 생각에 잠깐 아련한 감상에 빠져 있다가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외치는 순간 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만났다, 요정 공주니이이이임!” “커헉……!” 띠링! [‘요정 공주님☆’ 공격에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데미지를 입어 체력이 500 감소합니다!] 띠링! [정신적 타격으로 멘탈이 60% 손상됩니다!] 띠링띠링! [고막이 복구 불가능합니다!] 띠링띠링띠링! 방심하고 있던 사이 직격한 금단의 단어에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으헉, 누가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긴 것처럼 두개골이 얼얼하네요! “우와아아앙!” “가까이에서 볼 거야아!” “나도, 나도!” “우워어어억!”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흡사 한 무리의 거친 좀비 떼처럼 나를 향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헐, 저게 뭐야?! 내가 기겁을 하며 주춤거리자 내 뒤에 있던 필릭스가 앞으로 나섰다. “공주님의 허락 없이 가까이 오실 수 없습니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허억.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고 선 필릭스의 등짝이 엄청나게 듬직하게 보였다. 여, 역시 적혈구의 기사! 그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닌가 봐! 흡, 예전에 비웃어서 미안해요, 필릭스 오빠! 나를 향해 돌진하던 마법사들도 필릭스의 기세에 주춤했는지 끼익 브레이크를 밟은 듯 걸음을 멈추었다. “죄, 죄송……. 이렇게 가까이에서 실물을 본 건 처음이라 너무 신기해서…….” “맞아. 제가 매일 심혈을 기울여서 반짝반짝하게 닦아드리고 그랬었는데…….” “매일 코피 터지게 잠도 못 자고 밤새 공주님 얼굴만 보고 또 보고…….” “영상석만 하루에 오십 개씩 매일 피똥 싸게 복제하고…… 추가 수당도 못 받고…… 웅얼웅얼.” 앗. 처음에는 이게 웬 이상한 사람들인가 했는데 영상석 얘기를 하는 순간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 감을 잡았다. 클로드가 시켜서 내 흑역사를 담은 영상석을 만든 게 이 사람들이구나! 그, 그런데 저 얼굴들은 도대체 뭐지? 나는 이 사람들을 처음 보는데 이 사람들은 꼭 십 년은 사귄 친구를 보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못하게 필릭스가 앞을 막아서기까지 하자 엄청나게 섭섭하다는 듯이 울망울망한 눈으로 나를 보기까지 했다. 쿨럭. 검은 탑의 마법사들, 뭔가 생각했던 거랑 이미지가 많이 다른데요……. “필릭스, 괜찮아.” 그래도 뭔가 호기심이 들어서 나는 필릭스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루카스를 제외하고 탑의 마법사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라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기도 했다. 평소 황궁을 오다 가다 탑의 마법사들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중이든가 혼잣말을 하듯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도 한 번도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던 데다, 무엇보다 그들도 나에게 관심이 한 톨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이렇게 탑의 마법사들이 나를 아는 척한 것 자체가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음.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그 영상석을 만들어주신 분들이었군요.” 화아악! 내가 말을 건네자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게 갰다. 으억, 꼭 굴에서 고개 내민 두더지들 같다. “그, 그 영상석들을 매일 코피 터뜨리면서 제일 많이 만든 게 바로 저!” “외국에 보낸 스페셜 영상석은 제가!” “저는 보존 마법 담당! 제가 있기에 비로소 공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영상석은 내구성 100의 티 한 점 없는 순백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죠!” “저는 추가 수당 없이 매일 야근을 하면서 저 게으른 놈들을 지휘했습니다!” 그, 그런데 너무 격하게들 반겨주신다……. “그런데 공주님!” 그러다 문득 마법사 1이 나를 향해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하루에 순간 이동을 몇 번씩 할 수 있으시다는 게 진짜입니까?” “맞아! 게다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곧바로 연계 마법까지 사용하신다고 하던데!” “황성 안에서 마법을 쓰시는 모습을 봤다는 마법사도 있었는데요!” “저희들은 탑이 아니면 황성 안에서 불꽃 하나 일으키기도 힘든데!” 나는 또 정신없이 다다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 폭탄에 잠깐 정신이 없어서 넋을 놓고 있다가 곧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고개를 갸웃했다. “어, 황성에서는 마법을 사용하는 게 힘든가요?” 그러자 또다시 마법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다다다 대답했다. “그야, 황성 안에는 마력 제약이 걸려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정된 공간을 제외하고는 마력을 운용할 수가 없는 걸요!” “진짜 죽어도 써야겠다 싶으면 물론 쓸 수야 있지만 정말 죽습니다! 아니면 그 반작용으로 평생 죽는 것만 못하게 살아야 하던가요!” ======================================= [119화] “황성에서 제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오직 폐하뿐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불공평하지만 폐하께서는 평소에 마법을 즐겨 사용하지 않으시니까 결과적으로 공평해진 셈이죠! 그래서 저희 탑의 마법사들도 묵묵히 탑에서만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와글와글! 마법사들의 수다력은 엄청났다! 나는 그들의 와글거리는 목소리 틈에서 정신 산만함을 느끼며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황성 안에 마력 제약이 걸려 있다고? 루카스도 그냥 막 쓰던데, 마법? “게다가 이렇게 갑자기 후천적으로 마력량이 극대화된 경우는 처음 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희 탑에서는 매일 공주님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루에 순간 이동을 몇 번이나 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자질이라니!” “공주님! 괜찮으시다면 저희 탑에 한번 와주시지 않겠습니까!” 띠링! [검은 탑으로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나는 또 한 번 눈앞에 게임 시스템 창이 떠오르는 환영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차피 이제 할 일도 없고, 또 검은 탑이라면 나도 전부터 궁금했었으니까 한번 가볼까? 띠링띠링! [초대를 수락합니다!] 그렇게 나는 충동적으로 검은 탑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 * * “그래서 저희 검은 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최강의 마법사였던 검은 마법사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블라블라…… 이 대륙 최고의 강력한 마법사들을 모아 다시 한 번 그날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블라…….” 그리고 현재 나는 영혼을 잃은 눈으로 탑의 안내인이 하는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아까의 시끌벅적하던 마법사들은 당장 검은 탑의 수장님을 부르러 가겠다며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탑의 안내인을 자처하는 마법사를 만나 이곳의 장대한 역사에 대해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벽면은 초대 탑의 수장께서 미스릴을 깎아…….” 나는 검은 탑에 처음 초대받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일이라며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저어,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이 탑의 이름은 검은 탑인데 생긴 건 왜 이렇게 새하얀 건가요?” 흠칫! 바로 그 순간 탑의 안내자인 마법사가 말을 멈추며 크게 흠칫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탑의 이름은 ‘검은 탑’인데 탑의 외관이나 내부나 새하얗기 짝이 없었으니까! 군데군데 까만 부분도 있지만 그건 그냥 때가 탄 것 같고. 쓰읍. 그렇잖아도 멀리서 볼 때마다 궁금했었는데. 클로드한테도 전에 한번 물어봤었지만 그는 알 게 뭐냐는 식으로 모른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탑의 안내자는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금 ‘무조건 우리 탑이 짱짱이야!’ 모드가 되어 검은 탑을 예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저희 탑의 마법사들의 압도적인 센스! 초콜릿에도 화이트 초콜릿과 다크 초콜릿이 있고! 체스에도 까만 말과 하얀 말이 있고! 또 어둠의 반대쪽에는 빛이 있는 것처럼! 저희 선선선대 탑의 수장께서 처음 그 이름을 따오실 적에 무작정 검은 탑이라는 이름을 좇아 단순무식하게 탑의 외양을 새까맣게 보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임팩트 있게 이 눈처럼 순결하고 깨끗한 하얀 건물을 유지한 것이 바로 기가 막힌 신의 한 수였다고 할 수 있습죠! 까만 건물은 보는 사람의 기분도 칙칙해질 뿐 아니라 365일 건물 내부에서 연구에만 매진하는 우리 마법사들의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고 또 우울증을 유발하기에 딱 좋으며, 더군다나…….” “그냥 그때 예산이 없어서 이름만 따오고 벽에 까맣게 똥칠을 못 한 거잖아.” “예, 꼭 똥칠을 한 것처럼 미관상 더럽기 짝이 없……. 헉!”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목소리에 나와 탑의 안내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제 막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황실 마법사 망토를 대충 걸쳐 입은 모양새로 걸어오는 호리호리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느슨히 땋고 있는 그 사람은 언뜻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목소리 역시 그랬다. 나이는 얼추 젊어 보이는데 말이지. “이야, 저희 애들이 매일 노래를 불러대던 요정 공주님이시군요.” 커헉! 또 한 번 고막을 찌른 금단의 단어에 나는 크리티컬로 타격을 입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충격을 받아서 굳어지거나 말거나 그 사람은 흥미가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설마……. “탑의 수장님이신가요?” “공주님의 마력은 아주 예쁜 무지개색이네요.” ……네? 그게 갑자기 무슨 이상한 소리세요? 저 도 안 믿어요. 옥장판 안 사요. 그러니까 물렀거라! 나는 느닷없이 등장해서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수장님께서는 사람마다 가진 고유한 마력의 색채를 눈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무심코 똥칠 얘기를 한 뒤 옆에서 헛기침을 하고 있던 안내자 마법사가 대신 내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오잉, 그런 신기한 능력이 다 있다니? “공주님의 마력은 아주 오색찬연하게 반짝거려서 보고 있으면 홀릴 것 같아요. 이거 위험하네요.” 흠칫. 뭐, 뭐지. 내 마력이 예쁘다고 말해주는 건 좋은데 지금 눈빛이 뭔가 꼭 마약한 사람 같아. “와아, 폐하의 마력은 아주 순도 높고 청정한 파란색하고 금색이 섞여 있었는데 공주님의 마력은 꼭 오로라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보석안을 그대로 녹여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수장니이이임!” “공주니이이임!” 바로 그때 저 멀리에서 마법사들이 우당탕탕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고, 저 정신 산만한 것들. 쯧쯧. 쟤네가 아직 어려서 저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으, 으음. 그런데 뭔가 말투가 좀 할머니나 할아버지 같기도 하고. 게다가 아까부터 날 되게 격식 없이 대하고 있잖아? 하긴 그건 다른 마법사들도 그렇긴 한데. 여기 사람들은 원래 다 이러나? 하기야 탑에 적을 두고 평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인 데다 탑에서는 수장을 제외하고는 다들 엇비슷한 위치라고 했으니 바깥의 신분제 같은 것에도 자연스럽게 무딜 수 있겠다. “저 똥개 같은 놈들이 공주님께서 탑에 오셨다고 아주 신났네요.” “아,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루카스에게 몇 번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또 평소에도 탑에 관심이 있어서 궁금했었는데.” 멈칫. 바로 그 순간 내 옆에 있던 탑의 수장과 안내자 마법사가 눈에 띄게 흠칫했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마법사들은 도중에 멈추어 서기까지 했다. “루카스?” “루카스라고?” 으, 으잉?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런 거지? 꼭 루카스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처 몰랐는데 루카스가 검은 탑의 볼드모트라도 되나? 내가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마법사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기 시작했다. “루카스! 그 검은 탑의 무법자 같은 자식!” “부조리한 세상의 부조리한 놈!” “남은 피똥 싸게 노력해서 마력 운용하는데 혼자서 0.00001초 만에 마법 쓰는 새끼!” “지난번에 난 개고생, 생고생해서 아득바득 통신석 한 개 만들었는데 그 자식은 하품하면서 손 한 번 휘젓더니 열 개나 만들어냈어!” “마법 쉽게 쓰는 법 좀 알려 달라고 했더니 막 눈앞에서 슉슉! 솩솩! 하라면서 진짜 개똥같이 알려주고는 이게 안 되냐고 막 무시하고 막 불쌍하게 쳐다보고…… 우윽. 내가 진짜 서러워서, 으흑!” 크억! 마법사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눈에 불을 켜고 원통함을 토해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루, 루카스! 너 도대체 탑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냐! 일단 ‘청순가련 미소년 천재 마법사’ 코스프레를 탑 안에서는 안 하고 있단 사실만큼은 알겠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인가부터 그놈이 공주님 친구였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크흠. 7년입니다, 수장님.” 탑의 수장이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리듯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안내인 마법사가 헛기침을 하며 정정해 줬다. 수장은 10년이든 7년이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는 듯 잠깐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고 안내인 마법사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곧 나를 향해 말했다. “루카스, 그놈의 마력은 말이죠. 아주 지이잉~ 그러워요! 너무 지이잉그러워서 볼 때마다 아주 그냥 미쳐 버리겠어!” 쿨럭. 탑의 수장은 정말 미치도록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루카스가 도대체 탑에서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에 대한 나의 의문은 한결 더 깊어졌다. “제 60 평생 그런 마력을 가진 놈은 처음 봤다니까요. 보고 있으면 막 등골이 오싹오싹하고 식은땀이 미친 듯이 나는 게, 꼭 환 공포증인 사람이 무수한 동그라미 떼를 눈앞에 둔 것처럼…….” 응? 그런데 잠깐! 나 지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나는 루카스의 징그러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는 사람을 멍하니 보다가 곧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60이요?!” 지금, 지금 60 평생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겠죠?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아, 제가 좀 동안 소리를 듣는답니다.” 헐, 이건 동안 정도가 아닌데요?! 외모는 30대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지금 60이 넘었다고? 정말? “허허. 그렇게 보시니 좀 쑥스럽네요. 원래 마법사는 노화가 느리게 오지 않습니까. 허허허.” 경악한 나를 보고 탑의 수장이 할머니나 할아버지처럼 푸근하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그럼 혹시 저분들도……?” 나는 기껏해야 20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로 보이던 마법사들을 향해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더듬거렸다. 그러자 탑의 수장이 또 손녀딸을 보는 듯한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내게 말했다. “저놈들은 아직 어리답니다. 저 중에 제일 늙은 놈이 끽 해야…… 몇 살이더라? 야, 띨띨이! 너 나이 몇이야?” “옙! 올해로 41살입니다!” “거기 모질이는?” “전 아직 28살이에요! 한창이죠!” “아이고,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말랐네.” 그는 ‘저 어린아해들을 어찌할꼬’라는 시선으로 마법사들을 보며 쯧쯧 혀를 찼지만 나는 충격을 받아 동공을 흔들고 있었다. 나, 난 진짜 어리고 젊은 마법사님들인 줄 알았는데! 그런 나를 향해 이번에도 ‘커흠, 큼!’ 헛기침을 한 안내인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들은 성인이 지난 후부터 급속도로 노화가 느려져 신체 나이가 한계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일반 사람들보다 비교적 오래 젊음을 유지할 수 있습죠. 이래 봬도 제 나이도 올해 46세입니다.” 그, 그 얘기는 저도 책에서 봐서 알고 있었는데 막상 실제로 확인하게 되니까 더 충격적이라서요. 앗! 그래서 클로드 피부가 이 나이를 먹고도 그렇게 탱탱했던 건가! 알고 보니 마력이 이 세계 최강의 안티 에이징 화장품이나 마찬가지였어! ======================================= [120화] “공주님, 여기까지 오신 김에 탑에 있는 놈들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 폐하의 명으로 몇 날 며칠이고 밤새 영상석을 만들면서 저놈들이 요정 공주님을 직접 보고 싶다고 아주 그냥 허구한 날 타령을 해댔답니다.” 그때, 충격에 빠져 다른 생각 중인 나를 향해 탑의 수장이 넌지시 물어왔다. 그, 그거 좋은 의미 맞습니까? 혹시 ‘아이고, 내가 저 가출 공주 때문에 추가 수당도 못 받고 야근하면서 매일 눈알 빠지게 영상석이나 만들고 있네. 저놈의 공주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해봐라! 아이고, 아이고’ 뭐 이런 의미였던 거 아니야? “헉, 요정 공주님 실물이다!” “맙소사, 지금 내 눈앞에서 걷고 있잖아!” “우어어, 아침마다 하루에 두 시간씩 클린 마법 걸린 천으로 영상석에 광이 나게 닦았었는데!” 하지만 다행히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탑의 수장과 다른 마법사들의 청으로 뜻하지 않게 검은 탑을 층마다 순회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마주친 마법사들은 꼭 자기네가 애기 때부터 키운 조카가 처음 걸음마하는 걸 본 사람처럼, 혹은 찬장 속의 피규어가 살아 움직이는 걸 본 오타쿠처럼…… 쿨럭. 그렇게 나를 쳐다보았다. “자, 여기가 바로 제 연구실입니다!” 그리고 나는 꼭대기 층에 있는 수장의 연구실에 초대받아 그 안에 발을 들였다. “와, 이게 다 뭐예요?” “제 보물들이죠. 실험용으로 만들어서 아직 불안정한 마법용품들도 있으니 섣불리 만지지는 마시고 그냥 눈으로만 보시는 게 좋아요.” 탑의 외벽과 마찬가지로 온통 새하얀 벽에는 수십 장이나 되는 종이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고, 책상과 바닥에는 수많은 책과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중에는 신비로운 광채를 내는 돌과 보석들도 있었고 보글거리는 수상쩍은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 병이나 혼자서 팔이나 귀를 흔들고 있는 귀여운 인형들도 있었다. 앗, 책장에 있는 저건 뭐지? 뱀술 같은 건가? 그, 그런데 병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 구석에 있는 건 천에 덮여서 속이 안 보이지만 계속 안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짐승 같은 걸 가둬놓은 우리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여기 왠지 좀 수상한데……. 마법사들의 연구실은 원래 다 이런가? “자, 그럼 공주님. 머리카락 한 올만 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내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갑자기 탑의 수장이 나를 뒤돌아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나는 한순간 흠칫하다가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머리카락이요……?” “네! 기왕 오신 김에 불쌍한 늙은 마법사를 도와주신다 치고.” 삐용삐용! 내 경고음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뭐, 뭔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 머리카락을 주면 안 될 것 같은데? 뭔가 엄청 찜찜한 일에 내 머리카락을 쓸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시면 피도 한 방울…… 아니, 열 방울만…….” “헉, 싫어요!” 이, 이 사람! 또 마약한 것 같은 얼굴이잖아! “아이, 그러지 마시고. 공주님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갑자기 이렇게 환상적으로 예쁜 마력이 뾰로롱 생겨났는데! 왜 나한테 이런 어여쁜 마력이 생겼을까! 이 어여쁜 마력이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공주님도 궁금하실 게 아니에요? 네?” 문득 아까 전 탑 밖에서 마법사들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게다가 이렇게 갑자기 후천적으로 마력량이 극대화된 경우는 처음 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희 탑에서는 매일 공주님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헉! 그래서 지금 이 탑의 수장 양반, 날 데리고 실험을 하고 싶다는 거야? 사실 내 마력량이 갑자기 많아진 이유는 까망이 때문이었지만 루카스 말고 다른 사람들은 신수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허억, 헉…….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공주님의 마력은 정말 너무 예쁘네요. 한번만 만져 보면 안 될까요?” 그리고 마침내 그가 맛이 간 얼굴로 휘청거리며 나한테 다가오는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에잇, 마법사들이 있는 탑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웬 미친 노인네가 있어! “싫어요! 전 엄청 비싸거든요!” 따악! “오오오옷! 공주님도 0.00001초 만에 마법 발현을!” 나는 잔상처럼 귓가에 남은 감탄 어린 목소리를 뒤로한 채 검은 탑 밖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어머, 공주님. 생각보다 일찍 나오셨네요.” “안에서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에이, 퉤퉤! 내가 앞으로 두 번 다시 저 영감탱이가 있는 탑에 오나 봐라! 내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릴리와 필릭스, 그리고 다른 기사들과 궁인들이 일제히 나를 맞았다. 검은 탑 안에는 초대받은 손님만 들어갈 수 있는 게 규칙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다 떼어놓고 나 혼자만 갔던 건데 그냥 에메랄드궁에 가서 발 닦고 낮잠이나 잘 걸 그랬다. “릴리, 에메랄드궁에 가면 소금 좀.” “네? 소금이요?” 궁에 가면 검은 탑이 있는 방향으로 뿌릴 거야! 크앙! 나는 약을 빤 사람처럼 몽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탑의 수장을 생각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 * *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공주님.” 다음 날, 탑의 수장이 나한테 직접 사과하러 찾아왔다. “어제는 제가 잠시 공주님의 그 황홀한 마력을 보고 이성을 잃어서 그만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어제 소식을 전해 들은 클로드가 검은 탑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절대로 탑의 절반이 날아가서 사과드리러 온 건 아니고요.” 나는 에메랄드궁에 직접 행차해 사죄하는 탑의 수장과 마법사들을 보고 남몰래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내 궁의 시녀 언니들은 엄청나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을 목격한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적거리다가 내 명령을 받고 각자 할 일을 하러 자리를 떠난 참이었다. “공주님께 백배 사죄드리지 않으면 나머지 절반도 마저 날려 버리고 성문 앞에 거꾸로 매달아 놓겠다는 협박을 받아서도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으악, 난 그냥 어제 클로드랑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탑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데 그 이상한 사람 도대체 뭐냐?’ 대충 이런 얘기를 했을 뿐인데 설마 클로드가 그 길로 탑을 날려버릴 줄이야! 소문을 듣고 검은 탑을 구경하러 갔다 온 한나의 말에 의하면 탑의 1/3이 거의 휑하니 사라져 버렸단다. 게다가 나한테 사과하지 않으면 성문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거라는 협박까지 했다니! 그런데 이 와중에 죽인다는 게 아니라 그냥 성문 앞에 매달아 놓겠다는 협박이라 클로드치고는 수위가 다소 약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글러먹은 걸까. 크흑! 그나마 클로드가 미리 경고한 뒤 탑을 날려서 사상자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나는 소리 죽여 끄응 신음한 뒤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드세요.” 물론 저 이상한 탑의 수장 때문에 기겁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저분 연세가 60세나 되었다는 걸 알아서 그런가. 뭔가 내 앞에서 저렇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게 불편하다. 난 동방예의지국에서 살던 착한 사람이란 말이야! 노인 공경! 웃어른에게 예의를 지키자! 물론 지금 내 앞에 있는 탑의 수장은 노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두 번 다시 어제처럼 제 신변에 위협을 가하려 시도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약조해 주신다면 저도 지난 일은 잊겠습니다.” 으, 으윽. 어제 저 할아버지가 나한테 무례하게 군 건 맞았지만 안내자 마법사가 말해준 대로라면 엄청난 역사를 지닌 탑의 반이 하루아침에 날아간 셈인데. 왜 내가 저 마법사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지! “공주님의 자비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어흐흑!” 수장의 뒤에서 오들오들 떨며 내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마법사들이 진심으로 감동했다는 듯 외쳐서 나는 더욱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흑! 탑의 수장은 좀 사이코 같지만 그래도 나머지 마법사들은 순박하고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았는데 왠지 미안해지고 있어. 가련한 사슴 떼처럼 울망한 눈으로 나를 보던 마법사들이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열을 지어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장 양반, 당신은 왜 안 나가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나는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탑의 수장이 뺀질한 얼굴로 나를 보며 또다시 인자한 너털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았다. “허허허. 황궁 마법사로 사는 동안 공주님 덕분에 진귀한 경험을 많이 해보는군요. 오벨리아의 국보나 마찬가지인 탑도 제 대에서 절반이나 날려먹고…… 등골 빠져라 영상석만 500개나 만들어 보고…… 또 지하 감옥에도 갇혀보고…….” 회한에 젖은 얼굴로 읊조리는 그의 말에 간간이 흠칫거리던 나는 이내 의아하게 반문하고 말았다. “저 때문에 지하 감옥에 갇히셨다고요?” 서, 설마 그새 클로드가 저 할아버지를 지하 감옥에 넣었다 꺼낸 건가! 어쩐지 몰골이 추레하더니만! 아니, 사실 저 추레한 몰골은 어제도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아, 공주님께서는 의식이 없으실 때라 모르셨겠지만 사실 공주님의 마력이 문제를 일으켰던 두 번 다 저도 상태를 살피러 왔었거든요.” “앗, 그러셨어요?” “예, 뭐……. 물론 별다른 도움은 못 드렸지만요. 마력을 육안으로 보는 잔재주가 좀 있다지만 항상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공주님께서 처음 쓰러지셨을 적에 진노하신 폐하의 명으로 동료들하고 사이좋게 지하 감옥에도 갇히고……. 허허허. 그래도 그때는 제가 탑의 일반 궁정마법사였기 때문에 그리 큰 곤욕을 치르지는 않았습니다만.” 아! 아앗! 아, 맞아! 가물가물하게 기억난다! 그때 클로드 앞에 웬 아저씨가 달달 떨면서 엎드려 있고 날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죽인다고 하면서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막 그랬었지! 헉, 그런데 동료들하고 사이좋게 갇혔다니? 설마 그 아저씨 하나만 가뒀던 게 아닌 거야? “그 당시 수장이셨던 스승님께서 곤욕을 많이 치루셨다고 들었습니다. 몇 년 전 돌아가셔서 제가 그 자리를 이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죠.” 나는 그리운 사람을 회상하듯 아련한 눈빛을 보이는 탑의 수장의 앞에서 덩달아 숙연해졌다. 그럼 혹시 그때 그 아저씨가 수장이었던 건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때 클로드 앞에서 ‘탑에서 내가 짱임! 그런데 나도 방법을 모르니까 다른 애들도 모를 거임!’ 같은 말을 했다가 그의 분노를 샀던 것 같은데. 잠깐……. 그럼 그 당시 그 사람 나이가 몇이었다는 거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할아버지도 60살쯤 되었다면서도 지금 이렇게 30대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그럼 그때 아저씨의 외모를 가지고 있던 그 마법사님은 도대체 연세가! 흡. 클로드, 할아버지를 괴롭혔던 거였어! “스승님도 참, 설마 100세를 꼬박 채우고 가실 줄이야. 쩝. 사실 전 한 10년은 더 일찍 제가 수장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양반 명줄이 참 길어서…… 아차.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혼잣말처럼 이어진 수장의 말에 약간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보고 말았다. ======================================= [121화] 뭐야, 방금 스승님이 그리워서 아련한 눈빛을 보인 게 아니었어? 설마 다 공갈이었던 거야? 진짜 이 수상한 할아버지 같으니라고. “그래도 공주님이 계시고부터는 좋은 의미로 놀랄 만한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는 내 눈빛을 못 본 척하며 또다시 소탈하게 웃었다. “솔직히 저희 탑에 있는 머저리들과 마찬가지로 저한테 있어서 폐하는 아직 배냇머리 송송 난 어린 아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래 봬도 폐하께서 태어나시기 전부터 제가 탑에 몸을 담고 있었고……. 또 만약 결혼을 했다면 폐하만 한 아들과 공주님만 한 손녀가 있을 수도 있는 나이라 그런지 더 애틋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나를 향한 그의 눈동자는 정말 할아버지가 손녀딸을 보듯이 더없이 인자하고 자상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니 그의 나이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젊지 않다는 사실이 갑자기 확 와 닿았다. “그래서 공주님께서 이렇게 무탈하게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신 것이 기쁘고, 또 오랫동안 황폐하던 이 황궁에 진정한 봄을 불러와 주신 공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진정으로 감사를 표하듯 나를 향해 더없이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점차적으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그의 땋은 머리가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진 것을 잠깐 동안 말문이 막힌 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니요. 제가 감사받을 일이 아닌걸요. 오히려…….” “아닙니다. 공주님께서는 진정으로 폐하의 소중한 보물, 저희 오벨리아의 진정한 보배이십니다.” “그런…….” “그런 의미에서 폐하 몰래 피 한 방울만…… 정말 안 되겠습니까?” “나가세요.” 나는 언제 당황해서 더듬거렸냐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으악, 지금 날 낚으려고 한 거 맞지? 기껏 분위기 잡아놓고, 사람을 한껏 당황하게 만들어놓고는! “허허허. 이거 참, 탑에만 적을 두던 무거운 제 엉덩이를 공주님께서 가볍게 만들어주시는군요.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오지 마세요! 어차피 원하는 건 얻지 못하실 테니까!” “허허허. 그럼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허허허허.” 검은 탑의 수장이 까만 또라이인 루카스보다 더 말이 통하지 않고 한결 더 똘끼가 충만한 사람이었다니! 으아앙! 검은 탑에 대한 내 환상을 돌려줘! * * * “다 늙어서 노망이 든 미친 노인네지.” 과연 탑의 수장을 향한 클로드의 평가 역시 박했다. 그는 그 미친 인간이 언제 또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과 또다시 그 미친 인간이 미친 짓을 하면 언제든 자신에게 말하라는 것을 다과 시간 내내 나에게 주지시켰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말을 던졌다. “흐응. 아빠, 그 할아버지랑 친하시구나.” “돌았나?” 내 말에 클로드는 귀를 의심하는 듯이 미간을 좁혔지만 나는 이미 감을 잡은 뒤였다. 그동안 한 번도 탑의 수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지 못해서 미처 몰랐는데 오늘 에메랄드궁에서 그 할아버지가 나한테 했던 말도 결코 나를 낚기 위한 속임수였던 것만은 아닌 것 같고, 또 그를 대하는 클로드의 행동이나 말에서도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역시……. 일반인과 적을 달리 둔 사람들은 그들끼리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그래서 클로드랑 탑의 수장도 알게 모르게 친분이 있는 것이고……. 나는 심심한 의문에 빠졌다. 하지만 클로드는 진심으로 내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눈치였기 때문에 나는 그냥 더 이상 괜한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 후 나는 접시 위에 있는 케이크를 먹으며 힐끔 마주한 사람의 얼굴을 살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생일 때 파티 열 거예요.” “뭐?” 내 난데없는 통보에 클로드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정확히 말하면 생일날은 아니고, 며칠 후에요.” “무슨 파티를 말하는 거지?” “점심때는 에메랄드궁에 있는 사람들하고 간단히 다과 파티를 열고, 저녁때는 영애들과 영식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서 가장무도회를 열까 해요. 재미있겠죠?” 표정을 보아 하니 클로드는 내 말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걸 보니 역시 기억은 없어도 사람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구나 싶어서 얼핏 웃음이 났다. 하기야 클로드는 원래부터 내가 궁 밖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했고, 또 내 궁에 영식들을 초대하는 것도 질색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내 다과회에 오는 사람들이 항상 영애들뿐이었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통보가 괜히 통보겠는가?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을 지은 채 클로드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맑게 웃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까 제 궁에서 파티를 연 적이 한 번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이참에 한 번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 볼까 하고.” 나는 완전히 막 나가고 있었다. 크크크.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하니 기분이 좋은걸요? 이렇게 짜릿할 줄 알았으면 진작 막 나가는 건데! 물론 지난번 탄신연회 때 클로드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한테 한 짓이 있었기 때문에 눈치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내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듣기로는 내가 없는 동안 열렸던 만찬회에서 클로드에게 섣불리 나에 대해 입을 놀린 귀족을 그가 반쯤 죽여 놓았다고 한다. 그 귀족이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어쨌든 그 후로 감히 나를 공주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어졌단다. 한편으로는 병 주고 약 주고인 것 같기도 했지만 애초에 클로드가 기억을 잃은 것도 내 잘못이었던 데다 또 내가 없는 동안 그의 마음고생도 보통이 아니었다고 하니……. 게다가 어제는 클로드와 내가 사이좋게 손을 붙잡고 같이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고, 또 클로드가 나를 실험체로 쓰려고 한 탑의 수장에게 분노하여 건물을 날려 버리기까지 해서 우리 둘의 불화설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 했다. 더군다나 내가 실종된 동안 클로드가 애타게 나를 찾는 모습까지 보인 탓에 사람들은 이제 우리의 지난 일이 단순히 클로드와 나의 부녀 싸움이었던 줄 아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게 단순히 아빠와 딸의 싸움이라 하기에는 좀 살벌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대상이 클로드이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럭저럭 납득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내 귀환 소식이 알려졌을 때부터 에메랄드궁에 다시금 온갖 초대장과 선물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늘어나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생일 때도 내가 초대를 하면 아마 클로드와 내가 정말 화해를 했는지 궁금해서라도 참석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내 계획이 마음에 안 드는 듯 대번에 싸늘한 얼굴을 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궁인들과 함께 에메랄드궁에서 파티를 여는 것은 괜찮지만 가장무도회라니. 그런 번잡한 파티는 딱 질색…….” “뭐, 아빠는 초대 안 할 거니까요. 가넷궁에서는 그래도 소리가 작게 들리지 않을까요?” 바로 그 순간 찻잔을 들고 있던 클로드의 손이 멈칫했다. 곧 그가 귀를 의심하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이 참, 뭐 이런 걸로 그렇게 놀라고 그러십니까? 나는 자신을 초대할 생각이 없다는 내 말에 다소 충격을 받은 듯 보이는 클로드를 향해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차피 아빠는 제 생일 때 한 번도 만나러 와준 적 없잖아요. 이번에도 며칠 내내 가넷궁에만 계실 거 아니에요?” 으흑. 그래, 나 속 좁고 뒤끝 길다! 물론 클로드가 내 생일 때마다 나를 보러 오지 않았던 이유가 다이아나 때문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네요. 내가 인생 2회 차가 아니라 진짜 어린애였다면 상당히 상처받았을 일이라고. 투덜투덜. 하지만 설마 내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 한순간 클로드가 덜컥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동자는 한껏 굳어져 있었다. 나는 그가 이런 식으로 내 앞에서 동요하는 모습은 또 처음 봐서 약간 묘한 기분이 되었다. 잠시 후, 클로드가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방금 전에 비해 침착해진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랬던가?” 그런 그의 얼굴은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그렇겠지. 당신은 내 생일에 관한 기억도 혼자서 홀라당 다 잊어버렸으니까. 그러니 내 생일만 되면 며칠 내내 코빼기도 안 비췄던 것도 하나도 기억 못 하겠지. “괜찮아요.” 나는 잠깐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곧 그것을 집어 든 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게 웃으며 말했다. “저 생일 때마다 엄청 재미있게 보내고 있거든요. 이번에 파티까지 열면 더 재미있을 거예요. 너무 시끄럽지 않게 놀게요.” 생일날 나를 보러 와달라고 단 한 번도 조른 적이 없는 것은 그에 대한 내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리고 지금 지나가듯 그의 곪은 상처를 건드리고 만 것은 내 욕심이었고, 그럼에도 또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는 말이었던 척 담담히 웃고 만 것은 어쩌면 내 바보 같은 고집일지도 몰랐다. “아빠, 차 한잔 더 드릴까요?” 클로드는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앞에 있는 티포트를 들어 비어 있는 그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바라면 안 되었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하고 싶었던 말을 오늘 해버려서 조금은 속이 후련하기도 하고 또 조금은 괜한 말을 했나 싶어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내 앞에 있는 스콘을 베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내 생일이 또 코앞까지 다가와 있구나. 새삼 시간이 참 빨리 흐르는구나 싶었다. 클로드는 그 후로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가겠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어 낮은 목소리를 밖으로 흘려보냈다. “이번 생일에는 늦지 않게 가겠다.” 나는 하릴없이 잔디에 어린 나무 그림자를 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손에 괴고 있던 턱이 살짝 위로 들어 올려졌다. 시선을 돌리자 아직까지도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짜요?” “그래.” “거짓말 아니고 진짜?” “그래.” “아……. 저 정말 괜찮은데요. 방금 전에는 그냥…….” “내가 안 괜찮다.” 이번에는 클로드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귓가에 번지는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한결 또렷하게 울렸다. “그러니 이번 생일에는 늦지 않게 가마.” 물론 기대하는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서 바랐던 말을 정말 듣게 되자 가슴이 서서히 간지러워졌다. 어쩌면 내가 너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투정을 부려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금과 같은 말을 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기뻤다. “헤헷.” 내가 참지 못하고 작게 소리 내서 웃자 그가 그런 나를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아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 맞게 된 생일인데. ======================================= [122화] “제 생일인데 빈손으로 오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선물 없이 오시면 안 들여보내드릴 거예요.” “네 생일 선물은 그 초상화로 퉁 친 것이 아니었나?” “아앗!” “잊고 있었나 보군.”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훈훈한 공기 속에 녹아들었다. 환한 햇살이 우리를 다독이듯 머리 위로 한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제33장 돌아온 루카스 “사실 아빠는 저를 말도 못 할 정도로, 진짜 엄청 엄청 좋아하셨거든요.” 햇살이 유리구슬처럼 호수 위에 알알이 모여 포말을 일으켰다. 나는 클로드에게 진실과 공갈을 반씩 섞은 우리의 아름다운 과거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제가 원하면 별도 달도 전부 다 따다 주겠다고 하실 정도였다니까요?” 지금 그와 나는 나란히 배를 타고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수면 위로 반사된 빛이 마주한 얼굴에 희미한 물결무늬를 덧그렸다. 물론 클로드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또 이런 식으로 그를 놀려보겠는가! “제 말이 거짓말 같으시죠?”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흐응’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양산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클로드에게 회심의 공격을 날렸다. “뭐, 그럼 아빠가 예전에 선물 받은 제 그림을 침소에 고이 간직하고 계시던 거나 저 몰래 영상석을 만들어두고 있으셨던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데요?” “그건 내가 한 게 아닐 거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썹을 꿈틀거린 클로드가 대번에 부정하고 나섰다. 하지만 나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세상에, 저 정말 놀랐어요. 아직까지 그런 걸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 더군다나 그림이 상하지 않게 보존 마법까지 걸어두셨다니.” “그것도 다른 누군가가 장난을 친 것이 분명…….” “영상석은 또 어떻구요? 금고에서 발견된 게 한두 개도 아니었다면서요? 탑의 마법사들도 아빠가 복제하라면서 느닷없이 던져 주고 간 영상석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던데.” “…….” “필릭스랑 릴리도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클로드는 할 말을 잃은 눈치였다. 하기야 본인의 기억에도 없는 일을 내가 꺼내고 나섰으니 할 말이 없을 만도 했다. 그는 또다시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짐짓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는 ‘미친놈’이란 과거의 그 자신인 것이 분명했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나?” 곧이어 클로드가 다소의 회의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한테 묻는 건지,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투였지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작년에 루카스에게 들었던 말을 오늘날 이렇듯 확신에 차 내 입으로 클로드에게 내뱉는 감회는 남달랐다. “아빠는 아빠 생각보다 저를 훨씬 더 많이 좋아하고 계시다니까요.” 내 새치름한 말에 클로드는 오묘한 얼굴을 한 채 잠시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그저 즐거워서 반짝이는 호수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른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은 건가?” 잠시 후 그런 나를 향해 클로드가 물었다. 사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 나를 보러 에메랄드궁에 와준 클로드와 함께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같이 뱃놀이를 하러 가자고 말하자 그는 오늘 같은 날 기껏 하고 싶은 일이 이런 것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환하게 웃는 낯으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에이. 아빠, 모르시는구나.” 나는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듯 물어온 그를 향해 다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해주었다. “아빠랑 같이 보내는 시간은 저한테 다 특별한걸요.” 투둑. 툭.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소리가 가볍게 귓가를 스쳤다. 클로드의 보석안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잠시 후, 푸른빛을 띠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심연 같은 깊은 남빛을 그 위에 덧씌웠다. “만약 내 기억이 계속 돌아오지 않으면 어쩔 거지? 떠날 건가?” 이번에는 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뜻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에는 누구라도 쉽사리 알아채기 어려울 듯한 망설임이 어려 있었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하세요?”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조금은 애처로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아주 가끔이기는 하나 기억을 잃은 그가 지금처럼 내 앞에서만 자신의 약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애틋함이 어리고 마는 것이다. “제가 아빠에게 딸이 아니어도 아빠는 저한테 아빠인걸요. 기억하지 못하셔도 상관없어요.” 그래서 나는 설령 이대로 그가 나를 기억해 내지 못해도 괜찮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대신 제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빠는…….” 그저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함께일 수만 있다면. “그저 계속 그 자리에 있어주세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클로드는 또 조용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날 클로드는 정말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우리는 뱃놀이도 하고 에메랄드궁에서 다과 시간도 갖고 또 요즘 내가 새로운 취미로 삼은 체스 게임을 하기도 하면서 평소와 비슷하지만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에는 릴리가 만들어준 특제 케이크를 같이 나눠 먹었다. 어찌 보면 평소와 그리 다를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클로드와 함께이기에 내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하루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나는 가넷궁으로 돌아가는 클로드를 배웅한 뒤 내 방으로 돌아왔다. 작년에 릴리가 생일 선물로 줬던 오르골을 열어놓자 고요한 밤공기 속에 고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잠옷 차림으로 테라스에 나와 난간에 상체를 기댔다. 높이 뜬 달이 은은한 빛을 어둠 속에 흩뿌리고 있었다. 아, 오늘 정말 재미있었다. 생일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걸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살면서 오늘처럼 행복한 생일을 보낸 적은 또 없었던 것 같았다. 클로드가 내 생일날 나를 보러 와준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릴리와 필릭스, 그리고 한나와 세스를 비롯한 다른 에메랄드궁의 식구들도 모두들 한껏 들뜬 눈치였다. 오늘따라 다과 시간에 올라온 디저트들도 그렇고 식사 시간에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들도 그렇고 완전히 초호화 메뉴를 자랑했었지. 클로드는 의외로 체스를 잘해서 몇 번이고 게임을 하는 동안 나는 내리 져야만 했다. 그래서 마지막 게임에서는 재채기를 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판을 엎어버렸다. 기껏 욕심을 부린 김에 클로드에게 조금 더 아이다운 떼를 써볼까 싶기도 했지만, 결국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그를 가넷궁에 보내주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즐거웠으니 오늘 하루 중 몇 시간 정도는 내 엄마인 다이아나에게 클로드를 양보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향해 또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클로드를 웃는 얼굴로 배웅해 주었다. 난간에 팔을 올려놓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대자 선선한 바람이 내 뺨을 스쳐 지나갔다. 달빛을 머금고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난간 아래로 늘어뜨려져 살랑살랑 흔들렸다. 클로드가 처음으로 내 생일에 와줬는데, 그 대신 항상 있던 루카스랑 까망이가 없어졌네……. 나는 허공의 한 점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며 생각했다. 옅은 숨이 어둑한 밤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혼자가 되자 무언가가 사라진 빈자리가 문득 제 존재감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지.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니까 지금 가진 것들에 기뻐하고 감사해야지. 그래도 역시 조금은……. “보고 싶다.” 나는 작게 입을 열어 누구도 듣지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구? 나?”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밤공기에 섞여 마법처럼 흘려 들어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훅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굳은 듯 멈추어 있다가 이내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옅은 푸른빛을 띤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어느 때인가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며 나를 내려다보았던 남자가 내가 서 있는 테라스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까 많이 놀랐나 보네.” 나는 어째서인지 그의 그런 모습을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한 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루카스가 그런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미소 지어 보일 때까지. “나 다녀왔어.” 제34장 역시 그놈은 무서웠다 “루카스.” 마침내 정신을 차린 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인지 믿기지가 않아서 약간 현실감 없는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내가 너무 반가워서 말이 안 나와?” 하지만 장난스럽게 읊조리는 말을 듣자 지금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이 정말 루카스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너 오늘 생일이라며?” 그래도 역시 지금 막 그를 떠올리고 있던 참이기 때문인지 이렇게 보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그가 환상 같기도 했다. “내가 딱 맞춰서 왔네?” 게다가 지금 그의 모습은 내게 익숙한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완연한 성인 남자의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루카스는 마치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뭐야.” 그래서 나는 잠시 동안 나를 살펴보던 그가 이내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여는 순간까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저 마주한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너 까망이 흡수했어?” 바로 그 순간 덜컥 가슴에 돌덩이가 날아들었다. “갑자기 마력 부자가 됐네.” 그의 목소리에는 나를 질책하는 낌새라고는 하나도 엿보이지 않았다. 루카스는 그저 갑자기 마력량이 많아진 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요리조리 뜯어보고 있었다. “넌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거야?”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그에게 물었다. 그 직후 얼마 동안 심심한 대화가 이어졌다. “왜, 다시 갈까?” “열매는 먹었어?” “열매는 어떤 새끼가 쓰레기로 만들어서 못 먹고 대신 더 좋은 거 먹었어.” 다행히도 루카스는 바라는 것을 이루었는지 아주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 잘됐다.” 이상했다. 그가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이런 시시한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괜스레 서먹했다. 루카스가 반갑지 않은 게 결코 아니었는데도 지금 그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왜인지 말문이 덜컥 덜컥 막혔다. “흐음?” 루카스도 그런 내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 곧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더 참지 못해 ‘에잇!’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은 채 앞을 가리듯 손을 뻗고 말았다. “너 꼭 그 모습으로 있어야 돼? 다시 어릴 때 모습으로 돌아오면 안 돼?” “뭐 하러?” “너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눈을 감고 있어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귓가에 또 한 번 ‘흐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지금의 내 반응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조금은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 [123화] “이제 됐어?” 뜻밖에도 루카스는 별다른 말없이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방금 전보다 앳된 느낌을 풍기는 미성이 고막을 파고드는 순간,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눈을 떴다. “루카스!” “아, 고막이야.” 내 눈앞에는 진짜 루카스가 서 있었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예쁘장한 소년이 내 외침에 눈살을 찌푸리며 이제 만족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반가움을 느끼며 그에게 격한 기쁨을 표출했다. “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너 나 엄청 많이 보고 싶었나 보다?” 얄밉게 대꾸하는 모습까지 전부 다 진짜 루카스가 맞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앞에 있는 그를 덥석 끌어안아버렸다. “어, 잠깐……!” “기다렸잖아, 이 바보야!” 루카스는 어째서인지 돌이라도 된 양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져 버렸지만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 감동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세계수 열매를 먹으러 간다던 애가 몇 달 동안이나 감감무소식이라서 슬슬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그런데 내 생일에 딱 맞춰서 이렇게 돌아오다니, 이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고! 게다가 루카스가 없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던 탓에 돌아온 그가 더욱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나는 이 녀석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한가. 루카스는 어릴 때부터 줄곧 내 옆에 붙어 있던 놈이었고, 또 클로드가 나한테 줬던 내 첫 친구니까. “야, 너……. 이거 너무…….” 루카스는 내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듯이 어울리지 않게 버벅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루카스를 더욱 꽉 끌어안은 채 기특한 놈의 등을 팡팡 두드려 주었다. “소원 성취하고 온 거 축하해! 이제 마력도 회복하고 잘됐네!” “어, 그래…….”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린 거 아니야? 걱정했잖아! 하다못해 연락이라도 한번 줬어야지!” 루카스는 나한테 안긴 채 한참 동안이나 뻣뻣하게 굳어서 버벅거리다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는지 화악 나를 밀쳐 냈다. “야, 너 너무 막 덥석덥석 안기는 거 아냐?” 엥? 너야말로 언제부터 나랑 내외했다고 이래? 나는 당혹감을 담은 루카스의 외침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러자 내 시큰둥한 반응을 아는지 루카스가 눈매를 꿈틀거렸다. 그는 무언가 내게 불만이 있는 눈치였지만 결국은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듯이 잠깐 회의감 어린 표정을 짓다가 곧 나를 향해 말했다. “아, 됐고. 이제 네가 말해봐.” “뭘?” “뭐긴 뭐야. 나 없는 동안 있었던 일들이지.” 이어진 루카스의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런 나를 향해 그가 숨기지 말고 죄다 불라는 듯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까망이가 없어진 건 말 안 해도 알겠고. 더러운 건 또 뭐 이렇게 많이 묻혔어? 짜증 나게. 너 그동안 만난 사람 누군지 죄다 리스트 대봐.” 조금은 까칠한 빛을 띤 붉은 눈동자가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마력의 상태가 썩 정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왜인지 죄 지은 기분이 되어 그에게 변명조로 웅얼거렸다. “내가 네 말 안 듣고 매일 까망이랑 붙어 있어서…… 그래서 나한테 흡수된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루카스가 없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말해주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루카스는 내 말을 끊지도 나를 탓하지도 않고 그냥 특유의 무심한 태도로 자리를 지켜 주었다. 그것은 속에 쌓여 있던 말들을 밖으로 토해내는 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거 봐. 역시 넌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거지? 나 참.” 그리고 마침내 내가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왜인지 배부른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보던 루카스가 곧 나를 향해 척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리 와.” 아니, 그런데……. 왠지 저 태도 좀 묘한데?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꼭 ‘이 모자란 중생아,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위대한 이 몸이 거둬 먹여주마!’ 하는 것 같아서 은근히 기분이 구리고……. “뭐야, 어디 가려고?” “너 오늘 생일이잖아. 선물 주게.” 엥? 느닷없이 뭔 생일 선물? 난 또 딱 생일 맞춰서 돌아왔길래 ‘네 생일 선물은 바로 나다!’ 같은 헛소리나 할 줄 알았더니. 내가 얼떨떨하게 있는 사이 루카스가 더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내 손을 붙잡았다. 손이 온기에 휩싸인 순간, 시야가 뒤바뀌었다. 악, 어지러워! 순간 이동은 예고 좀 하고 쓰면 안 되겠니? 하지만 그런 불만도 잠시뿐, 곧 나는 눈에 비치는 광경에 급히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헉, 뭐야! 여기 클로드 침소잖아! 심지어 클로드는 아직 자고 있지도 않잖아! 루카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우리의 정체를 알아챈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창가에 서 있는 클로드의 뒷모습을 보고 한껏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리고 말았다. 나는 미쳤냐는 듯이 옆에 있는 루카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한 술 더 떠 클로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까지 했다. 아, 안 돼! 그만 멈추라고, 이놈아! 두 사람의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클로드가 동물적인 본능을 발동시켰는지 문득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익! 푸욱! “윽!” 루카스의 손이 잠시 동안 허공 속에 모습을 감춘다 싶더니, 곧이어 무언가를 그 안에서 끄집어내 클로드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았다! 나는 루카스의 손에 들린 뾰족한 무언가가 그대로 클로드의 머리에 박히는 모습을 보고 경악해 소리 질렀다. “아, 아빠아아아!” 하지만 이미 클로드는 자리에서 쓰러진 뒤였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어라, 인기척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알고 뒤돌아봤지? 하마터면 얼굴에 박을 뻔했네.” “아, 아빠! 아빠아!” 내가 아무리 흔들어도 클로드는 미동조차 없었다. 루카스가 그의 머리에 사정없이 내리꽂은 것은 웬 나뭇가지로 보였다. 나는 그걸 뽑아야 할지 일단 그냥 놔둬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허둥지둥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했다. 서, 설마 죽은 거 아니야? 아니겠지? 그렇겠지? “이거 엄청 귀한 거라 원래 아무한테나 안 주는 건데 네 생일이라 특별히 아끼는 거 내준 거니까 많이 고마워하도록 해.” 나는 머리 위에서 뻔뻔하게 울려 퍼지는 루카스의 목소리를 듣고 빠직 핏대를 세웠다. “야, 이 미친놈아!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누가 우리 아빠 죽이래!” 으어어엉!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한 거였어! 기껏 돌아와서 반갑고 장하다고 내가 격하게 환영까지 해줬는데 그걸 이렇게 홀랑 원수로 갚을 줄이야! 하지만 루카스는 내가 씩씩대든 말든 심드렁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저거 세계수 가지라 안 죽어.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손상된 부위에 직접 꽂는 게 효과가 직빵이야.” 클로드가 바닥에 죽은 사람처럼 엎어져 있고 또 그 옆에서 내가 울먹울먹하는 걸 보면서도 그는 혼자만 천하태평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루카스가 나를 향해 음산하게 웃는 얼굴로 속삭인 순간, 나는 울먹이다 말고 그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너도 이거 꽂아야 되거든.” 네,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클로드에 이어 나까지 죽이겠다는 거야? 정녕 그래야 속이 시원할 거라는 말이야? 나는 불안하게 동공을 흔들며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어어어~ 하지만 루카스는 역시 왕년에 괜히 깜또라는 별칭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가차 없게도 나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넌 마력 안정만 시키면 되니까 특별히 작은 걸로 줄게.” 휘익! 푸욱! 내가 무어라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또 한 번 허공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린 루카스가 새싹이 달린 가느다란 가지를 내 머리에 냅다 내리 꽂았다. 야, 그 흉기를 그렇게 막! 진짜 이 무식한 놈아……! 나는 짧은 통증을 느끼며 서서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사, 살인자는 루카스…… 깰꼬닥! 곧바로 눈앞이 암전되었다. * * * “으헉!”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경기하듯 몸서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뭐, 뭐지?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던 거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나는 잠시 정체성에 혼란이 와서 주위를 마구 두리번거리다가 곧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내고 말았다. 아아앗! 이 망할 깜또! 클로드랑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돌아오자마자 하는 짓이 부녀 살인이라니! 어흐흑, 역시 이 무서운 녀석! 반사적으로 머리를 더듬거려 보니 나뭇가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과연 루카스가 말한 대로 죽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이상하게 몸이 개운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진짜 너 그러는 거 아니야! 으앙. 그런데 클로드는? 잠시 후 나는 바로 옆에서 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클로드를 보고 뜨헉 놀라 그를 마구 흔들었다. “아, 아빠! 아빠!” 루카스가 옮겨 놓은 것인지 우리가 기절해 있던 곳은 싸늘한 바닥이 아닌 푹신한 침대 위였다. 이제 새벽이 된 모양인지 창밖에는 시린 햇살이 서서히 비추고 있었고, 주위는 아주 고요했다. 나는 클로드를 흔들어 깨우다 말고 불현듯 놀라 하던 짓을 멈추었다. 헉, 설마 죽은 거 아니야?! 숨은 쉬고 있는 건가?! 어젯밤 무식하게 머리에 꽂혀 있던 나뭇가지는 안 보이는데! 유혈 사태도 안 일어난 것 같고! 그래도 왜 이렇게 사람이 미동도 없는 거지? 나는 덜컥 겁이 나서 그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그리고 콩닥콩닥 뛰는 심장박동 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안심해서 깊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니, 우리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루카스 이놈은 도대체 어디를 간 거야? 내가 눈 뜨면 가만히 안 둘 걸 알아서 미리 토낀 건가? 그런 거야? “으음.” 바로 그때, 밑에서 억눌린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렸다. “아빠! 정신이 드세요?” 아직 의식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제 쓰러지면서 바닥에 부딪친 타격은 그대로인지 그는 미약한 통증을 느끼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클로드가 눈을 뜨기 무섭게 그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아빠, 어디 아프신 데 없어요? 머리라든가, 머리라든가, 머리라든가!” 어흑, 아무래도 어제 루카스가 사정없이 나뭇가지를 꽂아 넣었던 머리가 제일 걱정되었다. 다행히 난 멀쩡했지만 나보다 큰 걸 머리에 박아야 했던 클로드는 또 혹시 모르니까!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한 그의 눈동자가 그대로 나한테 못 박혔다.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클로드의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이 변했다. “아빠?” 으악, 뭐, 뭐죠? 혹시 부작용? 루카스 이 자식, 나한테 좋은 거 해줄 것처럼 굴더니!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어째서인지 클로드는 자리에 누운 상태로 시시각각 표정을 변화시켰다. 나를 보고 잠시 아득한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곧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다음 순간 누군가에게 명치를 얻어맞기라도 한 듯이 괴롭게 찌푸려졌다. 그의 보석안에는 잔잔한 물살과 격류가 번갈아 일어나고 있었다. ======================================= [124화] “아타나시아.” 그런 혼란의 틈새에서 마침내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한 채 숨을 멈추고 말았다. 단순히 내 기분 탓일까? 정확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뭔가가 달랐다. “아타나시아.” 그것은 어제까지의 그가 나를 보던 눈빛도, 또 어제까지의 그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도 아니었다. 나는 마주한 사람이 재차 나지막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속삭이는 모습을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마침내 클로드의 얼굴에 고요함이 물들었다. 나를 향한 그의 눈동자도 폭풍 끝에 평온을 되찾은 심해처럼 흔들림 한 점 없이 잔잔해졌다. 곧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라.”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멍하니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빠……?”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아주 자그마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주저 없이 나한테 대답해 주었다. “그래.” 그런 그의 눈빛은 분명 어제까지 내가 보아오던 것보다도 훨씬 더 익숙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다시 한 번 더 그에게 숨죽인 음성으로 물었다. “진짜로 아빠예요?” 내 얼굴을 본 그가 다음 순간 움찔 눈매를 찌푸렸다. 곧 그의 입술에서 여트막한 숨이 토해져 나왔다. 나를 향해 뻗어진 손이 내 마른 뺨에 닿은 것은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울지 마라. 못생겨진다.” 여전히 무심해 보이는 얼굴. 여전히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하지만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는 한순간 가슴이 꽉 죄일 정도로 따뜻했다. 울고 싶은 내 기분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나를 향해 ‘울지 말라’고 말했다. 아……. 나는 클로드가 정말로 잃어버렸던 지난 기억을 모두 되찾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직후 나는 어느덧 스스로조차 인식하지 못한 새 울먹이면서 클로드의 품에 와락 뛰어들고 있었다. “아, 아빠아……!” 그가 이대로 기억을 되찾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진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과 가까스로 어렵게 재회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숨이 막히도록 가슴이 조여 오는 것을 보니. 망설임 없이 내 등을 마주 안아오는 단단한 팔을 느끼며 나는 마주한 가슴팍에 매운 코를 비볐다. 아, 아빠다. 진짜 아빠다. “그새 많이 무거워졌구나.” “아빠, 바보오.” 후우,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마주한 사람이 행여나 사라질 새라 그를 안은 팔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15살 아침, 그렇게 클로드는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과연 루카스의 말처럼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제34.5장 그 공주님을 건드리지 마세요 “폐하, 심려치 마십시오. 그 무도한 공주, 아니, 그 무도한 계집은 제가 반드시 찾아내 폐하의 눈앞에 무릎 꿇려 놓을 것입니다.” 만찬회 도중 카르자바 백작이 황제 클로드를 향해 결의를 다지며 말했다. 클로드는 요즘 들어 줄곧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기분이 저조한 듯 만찬회 내내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만찬회의 분위기는 침침하고 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르자바 백작의 말에 클로드의 시선이 오늘 중 처음으로 그에게 미끄러졌다. 그것은 등골이 시릴 정도로 서늘한 시선이었으나, 카르자바 백작은 드디어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는 생각에 더욱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감히 폐하의 뜻을 거스르고 도주하다니, 그런 죄인은 필시 눈앞에 끌어내 치도곤을 내야 합니다!” “크흠. 카르자바 백. 만찬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그만하다니요? 이레인 후작이야말로 이번 문제에 퍽 미온적이십니다? 후작의 딸이 아타나시아 공주와 다소의 친분이 있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죄인을 감싸줄 생각이라면 폐하에 대한 불경이 아니겠소!” “뭐라?” 잠시 발끈했던 이레인 후작은 곧 옆에서 쥐 죽은 듯이 상황을 외면하고 있는 다른 귀족들과 황제 클로드의 얼굴을 한번 살핀 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카르자바 백작도 좀 입을 닥쳐 줬으면 싶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좁쌀만 한 눈치도 없었다. “폐하께서 공주가 아닌 죄인이라 직접 선포하신 계집을 하루 빨리 붙잡아 끌고 올 생각은 못하고, 참! 폐하, 하지만 이 데온 카르자바가 있으니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반드시 그 계집을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 클로드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카르자바 백작.” “에, 폐하!” “죽고 싶나?” 으, 응? 예상과 다른 반응에 카르자바 백작은 당황했다. 왜인지 이유는 몰라도 클로드는 지금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본래 만찬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기분이 저조해 보였던 그였으나 지금은 그에 비교할 수조차 없이 큰 불쾌감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죽여줄까?” 섬뜩하도록 냉혹한 음성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카르자바 백작이 당혹감 어린 눈길을 돌렸으나 다른 귀족들은 역시나 그를 외면한 채 앞에 있는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중에 영문을 모르는 것은 오직 카르자바 백작뿐이었다. 마침내 클로드가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래, 죽여주지.” 콰콰쾅! “커헉……!” 카르자바 백작이 앉아 있던 자리가 갑작스럽게 밑으로 푹 꺼진 것은 실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커다란 테이블 앞에 견고하게 서 있던 의자가 굉음을 내며 사방으로 부서져 나갔다. 그 잔해의 한가운데에는 형편없는 몰골로 바닥에 엎어져 있는 카르자바 백작이 있었다. 콰콰콰쾅……! “컥!” 강력한 힘이 카르자바 백작의 온몸을 으스러뜨릴 듯이 위에서부터 그를 짓눌렀다. 마치 거인이 장난 삼아 던진 거대한 바위가 그를 압사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중력에 짓눌린 카르자바 백작의 얼굴에 절로 핏대가 섰다. 당장에라도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고, 또 당장에라도 온몸의 뼈가 맥없이 부스러질 것 같았다.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본능적으로 입을 열어 가까스로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헉, 커헉! 자, 잘못했습니다……! 크억, 폐하……!” “네놈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이냐?” 살얼음판 위를 구르는 것 같은 나직한 음성이 불길할 정도로 고요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것이…… 으헉! 그것이…… 신성한 만찬회 자리에, 커윽! 삿된 이야기를 올려…….” “틀렸다. 모르겠다면 내가 말해주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카르자바 백작은 덜컥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네놈의 옷에 박힌 그 천박하기 짝이 없는 공작 깃털 장식이 마음에 안 든다.” “허억, 예, 예?” “네놈의 그 투박한 매부리코가 오늘따라 눈에 거슬려 미칠 것 같다.” “그, 그게 무슨!” “그래, 이제 보니 네놈의 그 번들거리는 눈동자색이 배설물 같은 황갈색인 것도 불쾌하구나.” “커어헉……!” 쿠콰쾅! 콰앙! 퍼억!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을 이기지 못한 뼈가 기어이 부서져 나갔다. 처음에는 왼쪽 다리, 그다음은 오른쪽 손목, 또 그다음은 갈비뼈였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카르자바 백작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중력에 눌려 끊임없이 비명을 토해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발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한평생을 눈치 없이 살아왔던 카르자바 백작의 머릿속에 사상 최초로 정답에 가까운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폐하, 크억! 소신은, 소신은…… 다만 폐하의 충신으로서…… 허흑!” 설마 지금 그가 아타나시아 공주를 죄인이라 말하며 신변 확보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고 이러는 것이란 말인가! “커어헉……! 감히, 폐하와 뜻을 함께…… 하고자…… 으허큭! 했을 뿐……!” 하지만 카르자바 백작은 억울했다. 네가 네 딸 아니라며! 그러니까 당장 잡아다가 눈앞에 데려다 놓으라며! “짐과 뜻을 함께하고자 했다?” 찬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섬뜩한 음성이 만찬회장 안에 울렸다. 바로 그 순간 애써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양 지금의 사태를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귀족들이 너도 나도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저 멍청한 놈이 기어이 또 지뢰를 밟다니! “그래서, 짐이 말한 대로 네놈도 똑같이 말하고.” 으, 응? 카르자바 백작은 섬뜩한 음성이 고막을 콕콕 파고드는 동안 또 한 번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또 짐이 하는 대로 네놈도 똑같이 따라서 행동할 참이었다?” 그리고 그의 느낌은 정확했다. 귀족들은 저마다 속으로 카르자바 백작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지금 네놈이 감히 그렇게 말한 것이냐?” 이제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힘은 잠시 멈추어져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카르자바 백작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싸늘한 목소리가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클로드가 분노마저 어린 음성으로 그를 향해 거칠게 일갈하는 순간, 카르자바 백작은 ‘허억!’ 급히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왜, 지금 짐이 앉은 이 자리에도 앉아보고 싶다고 말해보지 그러나!” 지금 클로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카르자바 백작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역죄였다. 반역! 반역이다! 지금 클로드가 말한 대로라면 그는 감히 주제도 모르고 황제의 자리를 넘본 반역자가 된다! “폐, 폐하! 당치도 않으십니다! 오해십니다, 폐하……!” “닥쳐라.” “커억! 으억……!” 그 후로 만찬회장에는 한참 동안이나 더 비명이 울렸다. “쯧쯧. 평소에도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더니만.” “폐하께서는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찾아서 데려오라고 했지 잡아서 끌고 오라고 하지 않으셨거늘.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다니.” “게다가 아타나시아 공주님이 폐하의 총애를 잃었다면 이미 탄신연회 날 두 발로 직접 연회장을 나서지도 못 했을 것을. 쯧쯧. 어찌 사람이 이리도 어리석나.” 마침내 황제 클로드가 먼저 자리를 떠나고 난 뒤 귀족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카르자바 백작을 한 번씩 곁눈질하며 차례대로 만찬회를 떠났다. 어차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카르자바의 호위 기사가 그를 챙길 것이었으니 딱히 반 주검이 된 백작을 보살필 이유도 그럴 만한 의리도 없었다. 그들이 생각했을 때에는 클로드가 카르자바 백작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예전에는 심기를 거스른 이를 상대로 손속에 사정을 두는 법이 없어 정말 문 밖으로 송장이 실려 나가게 만들더니……. 황제 클로드가 이렇게 낮잠 자는 맹수처럼 물렁물렁해진 것도 전부 다 아타나시아 공주가 있은 후부터였다. 그러니 부부 싸움…… 아니, 부녀 싸움은 어차피 칼로 물 베기이거늘. 눈치가 없어도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갈 터인데. 쯧쯧. 귀족들은 역시 아타나시아 공주가 사라진 후부터 클로드의 분위기가 살얼음판을 기듯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볼 때마다 아주 죽을 맛이라고 생각하며 하루라도 빨리 그녀가 무사 귀환하기만을 매일매일 간절히 빌었다. ======================================= [125화] 제35장 아빠와 나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요?” 귓가에 흘러들어온 맑은 목소리에 클로드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시선을 움직이자 테이블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를 응시하고 있는 제니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바마마의 표정이 밝지 않아 걱정스러워요.” 그녀는 그 말처럼 클로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퍽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클로드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던 스스로를 향해 쯧 혀를 찼다. “혹시 마음에 담아두신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애초에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문제다.” “요컨대 아바마마의 심중을 흐트러뜨릴 만한 일이 있기는 하다는 이야기군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평소처럼 무심한 태도로 말했으나 제니트는 눈치가 빨랐다. 클로드는 무심코 방금 전 만났던 얼굴을 다시금 뇌리에 떠올리고 말았다. 일전에 약속했던 제니트와의 다과 시간을 위해 에메랄드궁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마주치고 말았던 아타나시아. ‘어떻게 하면 저를 사랑해 주실 건가요?’ 먼발치에 서서 물기 어린 눈동자로 그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던 그녀를 생각하자 얼마 전 들었던 애원조의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가 제니트처럼 되면 되나요? 그럼 저를 사랑해 주실 건가요? 제니트에게 그렇듯,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고 온기를 담은 눈빛으로 저를 봐주실 건가요?’ ‘내가 죽는 날까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어째서요? 저도 아바마마의 딸이잖아요. 제가 제니트보다 훨씬 오랫동안 곁에 있었잖아요.’ 처음으로 그에게 매달려 우는 아타나시아에게 클로드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어리석은 것.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내 딸이라 여긴 적이 없다.’ 그 순간 숨이 멎은 듯한 표정을 짓던 그 얼굴을 생각하자면, 아마도 클로드의 말이 그녀에게 퍽 잔인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다시 시간을 되감는다 해도 분명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 분명했다. 처음으로 제 속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며 부딪혀 오는 그 아이에게, 클로드 역시 처음으로 제 속에 담고 있던 말을 솔직히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 탓에 그 아이가 상처를 받든 말든 클로드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 분명히 그럴 터인데……. 어째서 아까 보았던 그 어둑한 눈동자가 이처럼 눈에 밟히는 것인지. 제니트는 찜찜한 기분에 휩싸인 채 미간을 좁히고 있는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 기울여 보였다. 마음씨 고운 그녀는 제 아버지의 심중을 무겁게 만드는 일이 대관절 무엇인지는 모르나 어떻게든 그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어떻게 해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문제라면 차라리 아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덮어두고 잊는 것도 괜찮겠지요.” 제니트의 말에 클로드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그녀는 천사처럼 티 한 점 없이 순진무구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채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애초에 문제가 되는 원인을 없애버리던가요.” 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클로드의 손이 한순간 움찔했다. “의외로 과격한 해결 방안을 내놓는군.” 뒤이어 그가 입을 열자 제니트가 입술을 삐죽이며 짐짓 삐진 척했다. “아무렴 어때요. 아바마마께는 그런 얼굴이 어울리지 않아요. 간만에 함께 보낼 수 있는 다과 시간이라 기대했는데 계속 그런 딱딱한 얼굴만 보여주실 건가요? 자, 제가 차를 따라드릴게요. 이제는 제 리페차 우리는 실력도 제법이랍니다.” 제니트는 손수 찻주전자를 들어 그 안에 있던 액체를 찻잔에 따라 부었다. 곧 클로드의 눈앞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리페차가 놓여졌다. “드세요. 아바마마의 고민을 한 번에 사라지게 만들어드릴 차예요.” 장난스러운 속삭임에 클로드는 그저 한 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옅게 웃고 말았다. 당연히 그런 차가 세상에 있을 리 없었으나 마주한 사람의 마음이 갸륵해 굳이 딴죽을 걸지 않았다. 곧 클로드의 손이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제니트는 여전히 그런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서서히 편안해졌다.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었으나 그는 제니트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마다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일말의 근심조차 모조리 증발해 버리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래, 마음에 걸리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치고 잊으면 그만이었다. 아니면 방금 전 마주한 이가 말한 대로 깔끔히 눈앞에서 치워 버려도 괜찮겠지. 물론 제니트는 그의 기분을 찜찜하게 만드는 대상이 아타나시아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리 말한 것이겠지만. “차 맛이 어떠세요? 제 실력도 많이 늘었죠?” “그럭저럭 나쁘진 않군.” “치, 그냥 솔직히 좋다고 말씀해 주시면 어디가 덧나나요?” 클로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찻잔을 기울였다. -『사랑스러운 공주님 제9장 폭풍 전야 中- * * * “진짜 아빠예요?” “그래.” 클로드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나도 내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어제와 다른 눈으로 나를 보는 클로드를 앞에 두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가슴에 코를 박고 우는 나를 쓰다듬어 달래던 클로드도 내가 눈물을 그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게 소리 내 통곡을 하자 슬슬 당황하기 시작한 눈치였다. “이제 그만 울어라.” 나라를 잃은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이 떠나가라 우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똑같이 울지 말라고 하는 말이라 해도 기억을 잃고 있던 클로드와는 말투부터가 다른 것 같았다. “아, 아빠아아으으엉……!” “네 눈물 때문에 가슴이 축축해져서 찝찝하다.” 과연 그 말대로 클로드의 옷은 내 눈물에 한껏 젖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엉엉 울면서 그를 약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에잇, 설령 그렇다 해도 하필이면 지금 이 시점에 꼭 그런 말을 해야 합니까? 이런 감동적인 순간에! “우윽, 제가 지금, 으흑, 누구 때문에 우는데요?” 더듬거리며 흘려보낸 내 코맹맹이 소리에 클로드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그 음성에 나는 코가 매워져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울지 마라, 못생겨진다.” 그의 가슴팍에 엎어져서 우느라 산발이 된 내 머리를 못 봐주겠다는 듯이 정리해 주는 손길이 퍽 부드러웠다. 방금 전까지 온갖 격류가 일었던 그의 눈동자는 다시금 차분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 얕게 어린 동요를 보고 클로드가 보이는 것만큼 침착한 상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의 투박한 손길을 받으며 눈물을 펑펑 쏟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고 말았다. “보고 싶었어요.” 내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클로드의 손이 돌연 멈추어졌다. 한순간 마주한 표정이 아주 이상해졌다. “보고 싶었어요, 아빠.” 나는 참지 못해 한 번 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혹여나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질 새라 그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끅끅거리며 울었다. 들릴 듯 말 듯한 ‘나도 그렇다’라는 속삭임이 귓가에 방울방울 맺히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말이다. * * * 가넷궁에는 다시금 궁의와 마법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진찰 후 저마다 감탄하며 클로드의 몸이 지극히 정상이다 못해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최상의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까지는 아니나 어제까지만 해도 다소 불안정하던 마력도 완벽히 제자리를 찾은 데다 전체적인 마력량도 갑자기 증가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클로드의 상태를 알던 사람들, 특히 그동안 나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에메랄드궁의 궁인들은 거의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와, 너 지금 얼굴 장난 아니다.” 하도 울어서 두 눈이 붕어처럼 퉁퉁 부은 나를 보고 루카스가 웃기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어느덧 내 방에 자리를 잡고 누워 탁자 위에 있던 과자를 동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먼 길을 떠나 있던 사람 같지 않게 참으로 자연스럽기도 했다. 어젯밤에 그러고 나서 어디로 사라졌나 했는데 역시 내 방에 있었구나. 설마 감동의 부녀 상봉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기라도 한 건가? 나도 내 얼굴 꼴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손으로 눈을 부비적거리며 루카스를 살짝 흘겨보았다. 그러자 과자를 우물거리면서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루카스가 반쯤 빈 접시를 옆으로 대강 치우며 얄밉게 웃었다. “너 나한테 고맙지?” 알면서 뭘 묻나 싶었지만 나는 그냥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한 시간이 넘게 클로드를 붙잡고 울어댄 탓인지 목소리도 약간 맛이 가 있었다. 그게 조금 민망하기도 했지만 루카스 앞에서 이제 와서 폼을 잡는 게 더 웃기다 싶었다. 솔직히 그가 처음 클로드의 머리에 수상한 나뭇가지를 찔러 넣을 때만 해도 질겁했었는데 이렇게 단번에 효과를 본 것을 보니 그 세계수 가지라는 게 보통 영약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루카스가 어제 말하기를, 얻으러 갔던 열매 대신 다른 더 좋은 걸 먹었다고 했지? 그것도 이 세계수 가지인 걸까? 그럼 진짜 내 생일 선물로 엄청 귀한 걸 내주었다는 말이 되는데. 게다가 클로드뿐만이 아니라 나한테도 줬잖아. 자고 일어난 뒤부터 몸이 가뿐한 걸 보면 아마도 내가 몰랐을 뿐, 지난 마력 폭발 이후로 내 몸 상태도 조금 이상했나 보다. “너 아니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야.”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계속 클로드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틈만 나면 내 피나 머리카락을 탐내는 수장 할아버지한테도 찾아가서 혹시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탑에 있는 마법사 모두 일반 마법 중에 정신 계열 마법은 극히 드물뿐더러, 그마저도 자칫 잘못하다가 위험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며 섣부른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기억의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 단순히 기억을 교환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오벨리아에서 기억을 직접 전달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은 검은 탑의 마법사를 제외하면 오직 클로드뿐인데, 그마저도 쌍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본인의 기억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만 가능하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클로드가 전에 가짜라고 했던 검은 탑의 마법사라도 만나보고 싶었지만 그는 또다시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들었다. 아를란타에서 찾아본 마법서와 마법의 역사를 다룬 책들에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마법은 나오지 않았다. 황궁에 있는 금서들까지 뒤져 봤지만 그나마 쓸 만해 보이는 마법은 전부 다 수상쩍은 기운을 몽실몽실 흩뿌리는 흑마법뿐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그런 위험한 마법을 클로드에게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럼 너 나한테 빚진 거네?” 그러니까 나는 정말 루카스에게 엄청난 빚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나한테 바라는 거라도 있어?” 그래도 막상 루카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저렇게 말하자 경계심이 생겨나기는 했다. 클로드가 기억을 되찾은 건 나한테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루카스가 그 대가로 바랄 것도 상상 이상일 것 같았다. “이제부터 천천히 생각해 보지 뭐.” ======================================= [126화] 하지만 루카스는 쿨하게 말했다. “지금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말 꺼낸 거 아니야?” “아니, 그냥 너한테 빚져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건데?” 루카스, 너…….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사채업자 같은 거 하면 적성에 맞을 거 같잖아. 크흑, 그래. 어쨌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내가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으마. 나는 다시 릴리가 만들어준 과자를 먹기 시작한 루카스를 쳐다보다가 잠시 후 지나가듯이 물었다. “그런데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루카스. 너 내 이름 알잖아?” “그거 말고.” “알아서 뭐 하려고.” 루카스는 심드렁하게 내 질문을 넘겼다. 딱히 숨기는 느낌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대답해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나는 루카스가 자신의 정체를 말하기를 꺼리는 건지 아닌지 긴가민가해서 그냥 지금껏 그랬듯이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다른 말은 더 안 해?” “무슨 말?” “내가 네 말 안 들어서 이렇게 되었잖아.” “아, 뭐.” 루카스는 마지막 남은 비스킷을 바삭거리며 한 입 베어 물더니 곧 가차 없이 나를 비웃었다. “전부터 너 하는 거 보니까 언젠가 이 사달이 날 것 같긴 했어. 사람 말을 귓등으로 듣더니 꼴좋다. 솔직히 네 아빠는 둘째 치고 너부터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네. 하긴, 너 대신 네 아빠가 요단강 건널 뻔했다고 했지? 이야, 난 남의 마력 폭주에 패기 좋게 끼어드는 정신 나간 인간이 진짜로 있을 줄은 몰랐잖아. 그거 진짜 죽으려고 작정한 거나 마찬가지거든. 기억만 날아간 게 기적이네, 기적이야.” 철썩, 철썩! 쫘악! 루카스가 비웃으며 날린 말들이 내 뺨을 연속으로 후려쳤다. “너 또 그러면 진짜 답 없는 거 알지? 나잇값 못 하고 철딱서니 없이 구는 것도 한두 번이야. 사고를 쳐도 그냥 어떻게든 해결되는 수준이 있는 거고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인 게 있는 건데. 막말로 네가 정신줄 놓고 있다가 위험해지면 너 하나만 잘못되는 걸로 끝날 것 같아? 그거 완전 민폐야. 적어도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워야지. 지금까지 네가 운이 좋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과신하지 마. 그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으니까.” 윽, 나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속으로 신음했다. 지금까지 다들 나를 달래주기만 했지 이런 일침을 해준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가슴이 푹푹 파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새삼스럽게, 내가 지금까지 이곳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는지 깨달았다. 그 탓에 너무도 안일한 마음을 품고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기분 나빠? 화나?” 내가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자 루카스가 물었다. 하지만 저런 말을 들어도 싼 짓을 한 게 맞았기 때문에 딱히 반박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아니, 네 말이 다 맞아.” 나는 쓰게 인정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바보 같지 않은가. 이토록 많은 보호를 받고 있었으면서도, 그리고 거기에 기대 내가 어떤 실수를 해도 어영부영 해결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면서도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양 건방을 떨고 있었다니. 내가 너무 오만했고,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지금 이 순간 내 눈에도 그게 너무 똑똑히 보여서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런 나를 보고 루카스가 흐음, 소리를 내며 이제 됐다는 듯 말했다. “보아하니 후회는 이미 뼈저리게 한 것 같고. 반성도 뭐,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고. 딱히 더 뭐라고 할 마음은 안 드네.” 여, 역시 1절만 하고 끝낸 거였구나. 2절, 3절까지는 안 들어봐도 알 것 같긴 한데, 끝까지 안 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그는 흔들리는 내 동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제 할 말만 계속했다. “그리고 솔직히 난 네 아빠가 죽든 말든 상관없어서. 이제 마력도 충분하니까 까망이도 필요 없고.” 그 말에 괜히 울컥했지만 그렇다고 루카스에게 뭐라고 하는 것도 좀 그래서 나는 그냥 손을 들어 얼굴만 몇 번 쓸어내렸다. 그래, 엄밀히 따지자면 루카스한테는 남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상관없는 것도 맞지, 뭐. 그렇다고 치면 오히려 그런데도 선뜻 도와준 거니까 고마워하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까 너 예전에 까망이 안 먹는 대신 나한테 뭐 받아간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러다 문득 나는 예전에 있던 일이 생각나서 입을 열었다. 처음에 루비궁 후원에서 루카스를 만났을 때, 얘가 분명 유예 기간이니 뭐니 하면서 까망이를 안 잡아먹는 대신 나한테 다른 걸 가져간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예전 일이니만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 그거. 이미 받아갔는데?” “뭐? 도대체 뭘 받아갔다는 거야?” 루카스의 산뜻한 대답에 나는 그만 흠칫하고 말았다. 그는 그 와중에도 방금 전 다 먹어치운 과자 대신 이제는 상자에 든 내 초콜릿을 탐내고 있었다. “별거 아니라니까. 네 옆에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으니까, 까망이 값은 그걸로 치룬 셈 쳐.” 루카스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가져간 게 재미? 뭐 그런 거라는 거야? “뭐야. 이 초콜릿, 설마 이게 다야? 뭐 이렇게 병아리 눈곱만큼밖에 없어?” 뭐 이런? 그리고 까망이는 원래 네 것도 아니었는데 까망이 값이라니!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초콜릿을 우물거리는 루카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초콜릿의 개수를 확인한 뒤 한껏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상태로 상자 안의 초콜릿을 한 입에 털어 넣은 루카스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난 네 아빠는 죽어도 상관없는데 네가 죽거나 다쳤으면 그건 좀 짜증 났을 거 같아.” 하하하. 그러니까 네 앞에서 재롱 부려야 할 장난감이 갑자기 사라져서 짜증이 났을 것 같다는 거죠? 이거 참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나요? 나는 약간 짜게 식은 눈빛으로 루카스를 응시했다. “뭔 초콜릿이 간에 기별도 안 가게. 더 없어?” 없어, 이놈아! * * * “공주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클로드를 만나러 가기 위해 궁 밖으로 나서는 나를 릴리와 궁인들이 배웅했다. 그녀들은 요즘 들어 내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녀들 역시 클로드의 쾌유를 나 못지않게 반기는 것 같았다. “다녀올게.” 하지만 기분이 좋은 건 맞았기 때문에 나는 웃는 낯으로 인사한 뒤 아직까지도 클로드가 내 옆에 붙여둔 기사들과 함께 가넷궁으로 향했다. 사실 마법을 이용해서 가는 게 간단했지만 오늘은 좀 걷고 싶었다. 궁의 후원에 다다라 기사들을 떼어놓고 혼자 걸음을 옮기자, 곧 필릭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도 밝은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필릭스가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는 걸 보고 괜스레 약간 멋쩍어졌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후원에는 보라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는 푹신한 잔디를 밟고 클로드가 있을 곳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잠시 후, 보라색 꽃 그림자에 물든 클로드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꽃 덤불 옆에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머리 위에서 내리비추는 햇살이 그렇게 짙지도 않았는데, 나는 잠깐 눈이 부셔서 제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고 서 있지?” 클로드는 내가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했다. 제자리에 서서 멀뚱히 그를 보며 서 있는 나를 향해 곧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리 와라.” 나는 클로드의 부름에 잠깐 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서 그를 덥석 끌어안아버렸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한순간이지만 맞닿은 몸이 움찔했다. 내가 이러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억을 잃고 있는 동안의 공백 기간이 있었기 때문인지 새삼 이런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끌어안은 채로 고개만 빠끔 들고 클로드를 향해 힛 웃어 보였다. “바보 같은 얼굴이구나.” 그러자 그가 한숨처럼 여트막한 숨을 흘려보내며 내 코를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맞아요. 아티는 아빠바라기인 바보예요!” 나는 그런 클로드를 향해 한 발짝 떨어져서 손가락 하트를 뿅뿅 날려주었다. 나는야, 당신의 해바라기! 자, 내 오랜만의 애교 공격을 받아라! 역시나 예상대로 클로드는 내 하트 공격에 크리티컬을 당해 헤롱헤롱했다…… 라는 결과면 좋았을 테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휘이잉. 나는 서서히 차게 식기 시작하는 클로드의 얼굴을 보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음, 뭔가 이런 상황은 오랜만이라 개드립을 쳐봤는데 좀 아니었나 보다. “크, 크흠! 갑자기 웬 바람이래. 어째 오늘은 날씨가 좀 쌀쌀하네요.” 에잇, 그래도 장단 좀 맞춰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 혼자 이렇게 민망하게 만들다니 너무해, 으흐흑. “다과상이 저기에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죠? 자, 가시죠.” 나는 뻘쭘함을 숨기려고 클로드를 지나쳐서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내 어깨 위에 온기가 내려앉은 것은 잠시 후였다. “난 좀 더운 것 같으니 네가 걸쳐라.” 클로드가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겉옷을 내게 덮어준 뒤 말했다. “왜 더우신데요? 역시 방금 전 제가 날려 보낸 하트가 너무 뜨거워서…….”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지 모르겠군.” 클로드가 약간의 회의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그를 향해 그저 헤헷 웃었다. 사실 내 썰렁 개그에 한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져서 그렇지 진짜로 추운 건 아니었다. 그래도 클로드가 기껏 날 위해 건네준 옷을 다시 벗기는 싫어서 나는 그냥 어깨 위에 그의 겉옷을 걸친 채로 후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 기억이 돌아온 날 아침, 어떻게 알고 내 방에 있었지?” 커헉! 그렇게 한참 분위기가 좋을 때, 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클로드 때문에 흠칫하고 말았다. “아, 아빠를 생각하는 저의 갸륵한 마음이 텔레파시를 불렀다고나 할까…….” “기분 탓인지 그 전날 밤, 웬 시꺼먼 형체와 함께 있는 너를 내 방에서 본 것 같…….” “와, 와아. 아빠 저 많이 보고 싶으셨구나? 어쩐지 저도 그날 아침 눈을 떴는데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더라구요! 역시 우린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으억,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나는 헤헤 웃으며 그의 말을 얼렁뚱땅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전날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면 필수적으로 루카스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는데, 그에 대해 어디까지 내 마음대로 말해도 될지 모르겠고……. 이래 봬도 루카스는 내 은인이나 마찬가지인데 동의도 없이 나불나불 말하기도 그렇고 말이지. 클로드는 내게서 수상함을 감지했는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끼약! 작정하고 그를 속이려는 마음은 아니었는데 이미 나도 모르게 무심코 말을 돌리고 만 뒤라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곧 그가 무심한 목소리를 흘리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어투가 왜인지 ‘네 노력이 가상하니 이 정도는 그냥 모른 척해 주마’ 하는 느낌이라 나는 또 기분이 괜히 찜찜해지고 말았다. ======================================= [127화] 뭐, 뭐지? 혹시 이 사람, 사실은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의 얼굴을 살펴봤으나 클로드는 좀처럼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느덧 나를 앞서 가기 시작한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뒤쫓을 수밖에 없었다. * * * “그래, 내가 네게 별도 달도 다 따다 주겠다 했다고?” “푸웁!” 잠시 후, 나는 난데없는 클로드의 말에 두 번째로 격침당해 마시던 차를 입 밖으로 내뿜으며 마구 기침하고 말았다. 악, 사레 들렸나 봐! 차, 차 마시다 말고 갑자기 뭔 소리야?! 당황한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클로드는 연달아 무심한 목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그 덤덤한 음성은 내게 이중 삼중의 타격을 입히기에 손색이 없었다. “퍽 흥미로운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도 못 할 정도로 내가 너를 아주 많이 아끼고 있어서 무엇이든 다 주지 못해 안달이라고 했던가?” “쿨럭, 쿨럭!” 그건 바로 클로드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동안 내가 했던 말이었다! 내 생일 날 함께 뱃놀이를 하던 중에 갑자기 음흉한 마음이 들어 그를 놀려주려고 했던 건데! 그걸 이런 식으로 되받아치다니! 역시 우리 사이에 감격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운 거였어. 그, 그래도 그렇지, 설마 이런 식으로 지난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흐흑. 한껏 당황한 나를 앞에 둔 채로 클로드는 유유히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거짓말도 아니잖아요?” 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래, 당신 나 좋아하잖아! 이제 와서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고! “아빠 저 엄청 좋아하시는 거 맞으면서.” 내 말에 클로드의 눈썹이 비대칭을 그리며 슬그머니 치켜 올라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지긋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반박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엥? 부, 부정하지 않는 거야?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의 표정이 썩 유쾌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클로드는 내 말에 ‘헛소리 말라’든가, ‘꿈도 야무지구나’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다못해 코웃음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이게 뭐지요? “아타나시아.” 잠시 후 클로드가 내 이름을 불러서 나는 이제야 예상했던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은 내 생각과 달랐다. “누가 뭐라고 해도 넌 내 딸이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흔들리는 나뭇잎 아래에서 클로드는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죽는 날까지…… 아니, 내가 죽는다 해도 네가 내 딸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그에게 상처받기 싫어서 언제든 대신 그를 상처 입힐 준비를 하고 있던 내 안의 비겁한 마음이 한 줌의 먼지조차 남기지 않고 깨끗이 부서져 내린 것은.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잊지 말거라.” 클로드가 초록의 풍경을 뒤로한 채 나를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 그때, 나는 어떤 거짓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네.” 지난날 그가 그랬듯, 나 역시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느 때건 기꺼이 대신 죽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알고 있어요.”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기대는 일 없이 완전히 혼자 살아가던 과거의 나로도 다시 돌아갈 수 없었고,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이 넘치도록 큰 애정을 더는 모른 척 외면할 수도 없었다. “제가 아빠의 딸이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아마도 나는 만약 이 사람을 잃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더는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바닥까지 무너져 버릴지도 몰랐다.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나도 있는 힘을 다해 지켜내야지. 내가 가진 걸 전부 다 걸고서라도, 이 사람의 옆에 지금처럼 함께 있을 수 있게. “그러니까 아빠도 잊으시면 안 돼요.” 나는 아빠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가 그렇듯, 이 사람도 내 옆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몰래 가슴에 품은 채. * * * “폐하께서 기억을 되찾으셔서 정말 기쁩니다.” 후원을 나와 걷는 길에 필릭스가 말했다. 그는 클로드의 명으로 다시 내 호위 기사가 되어 에메랄드궁까지 가는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내리비추는 햇살이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분명 어제와 같은 일상이었는데도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어제보다 한결 더 다채로운 빛깔로 반짝이는 것 같았다. 상투적인 말로,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상하다. 원래 세상이 이렇게 예쁘게 반짝거렸던가? 나뭇가지에 걸린 초록의 잎새도, 세월이 담긴 낡은 조각상도,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모두 다 눈부신 광채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아까부터 내 가슴속에 가득 차서 찰랑거리는 이 감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클로드를 만나는 동안 서서히 부풀어 오르던 마음이 지금은 누군가 콕 찌르면 한순간에 터져 나갈 것처럼 목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아, 왜인지 지금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그 순간 내 몸속에서 무언가가 푸드득 날갯짓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필릭스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그를 뒤로한 채로 허공에서 가볍게 손을 저었다. 화아악!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공주님……?”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음성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필릭스와 함께 내 뒤를 따라오던 기사들과 궁인들도 급히 숨을 들이키며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화아아. 초록빛으로 무성하던 시야에 순식간에 화사한 꽃물이 들었다. 새로 난 연두색의 잎사귀들로 가득하던 나무가 계절을 역행하듯 일제히 꽃망울을 틔워내기 시작하는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내가 손을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리자 봉오리 져 있던 꽃들이 한꺼번에 봄을 맞은 듯 활짝 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색색의 화려한 꽃들로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 “맙소사…….” “이게 대체…….” 귓가에는 새가 노래하며 지저귀는 소리가 가득 울렸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리다가 곧 허공에 사그라졌다. 그윽한 꽃향기가 온몸을 달콤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안을 넘쳐흐를 듯 가득히 채우고 있는 이 충만함.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세계에서 내 의지로 가장 완벽히 구현해 낸 첫 마법이었다. * * * “뭐? 다시 한번 말해봐.” 오늘도 태평한 모습으로 내 방에 있는 과자를 열심히 주워 먹던 루카스가 반문했다. 그는 방금 전 들은 말이 영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만나자마자 생각하던 일을 이야기하면 더 난데없이 느껴질까 봐 최대한 분위기를 살피다가 말을 던진 거였는데 말이지. 릴리가 내 몫으로 준비해 준 과자도 전부 다 루카스한테 밀어주고! 뭐, 그래도 정 궁금하다면 다시 한번 말씀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나는 숨을 한 번 훅 들이마셨다. 그리고 여전히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카스를 향해 다시 한번 외쳤다. “저를 제자로 삼아주세요!” 제36장 제자로 삼아주세요! “마법을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데, 탑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내가 가넷궁에서 에메랄드궁까지 이르는 길을 온통 꽃밭으로 만든 직후의 일이었다. 나는 겸허하게 마법에 대한 내 가방끈이 짧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검은 탑의 수장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으음, 물론 볼 때마다 내 피를 탐내는 그가 여전히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몇 번의 방문으로 이제는 나름대로 적응이 되어서 괜찮았다. 그리고 이제는 클로드 때문이라도 대놓고 나한테 그러지는 못 했으니까……. 휘이잉~ 나는 뻥 뚫린 천장을 애써 외면했다. 검은 탑은 황궁 안에서 마력 사용에 가장 자유로운 곳이었으나 듣자 하니 클로드가 심술을 부려 마력으로 탑을 보수하는 데 제한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검은 탑은 천장이 시원하게 뚫려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다소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마법사들은 의외로 탑의 상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탑의 도움이라 하시면…….” “좀 더 제대로 마법을 배워 보고 싶어서요.” “이제껏 황실에서 마법 수련을 위해 정식으로 탑의 도움을 받은 전례는 없었습니다만.” 수장 할아버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도 승낙도 아닌 애매모호한 말을 흘렸다. “그리고 공주님께서는 이미 자유자재로 마법을 사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공주님께서 황성에 봄을 꽃피우셨다는 소문도 이미 궁 안에 자자합니다.” “혼자 독학을 해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검은 탑은 오벨리아뿐 아니라 대륙에서도 인정하는 훌륭한 마법사님만 계시다고 들었어요.” 내가 은근슬쩍 검은 탑을 띄워주며 말하자 수장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알게 모르게 들썩들썩했다. 그의 말처럼 황족의 마법 수련은 대대로 황실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 왔다고 하던데, 클로드에게 물어보니 그는 살면서 부모나 형제 중 누구에게도 마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뭐, 클로드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선황과 황태자가 클로드와 함께 얼굴을 마주대고 하하 호호 하면서 무언가를 하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게다가 듣자 하니 클로드는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그냥 처음부터 마력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왜 그런 걸 따로 공부해야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다. 으엉, 정녕 제 주위에는 죄다 불세출의 천재밖에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혹시 루카스 놈은 어떠신지요?” “루카스요?” 그리고 나는 수장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귀를 쫑긋하고 말았다. “예, 제 입으로 이런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희 탑에서도 그놈은 쓸 만한 축에 들거든요. 게다가 공주님의 말동무로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하니, 다른 마법사들보다는 그놈이 더 편하시지 않을까 싶고. 절대 그놈을 저희 탑에서 치워버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허허허.” 저, 저기요? 뒤에 덧붙인 말이 무척이나 수상쩍습니다만? 지금 할아버지의 진심을 너무 대놓고 드러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요? 아무튼 수장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심심한 고민에 빠졌다. 흐음, 그러고 보니 등잔 밑이 어둡다고 루카스 생각을 못 했네. 마력을 회복해서 돌아온 뒤에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던데 만나면 말이나 한번 꺼내볼까? “그럼 조만간 한번 물어봐야겠네요.” 그런데 내 말에 수장 할아버지가 한순간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어깨를 크게 움찔하는 것이었다. “조만간이라면……. 공주님, 혹시 해서 묻는 것인데요. 최근에 루카스, 그놈을 보셨나요?” 앗, 지금 막 이상한 촉이 등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저 말투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혹시 루카스 얘, 탑에서 다들 바쁘게 지내는데 먼 길 갔다가 돌아왔다고 혼자만 빈둥거리고 있는 건가? “아, 저도 그냥 인사차 한 번 잠깐 얼굴만 본 것뿐이라.” “그러셨습니까?” “네에, 얼마 전에 막 돌아와서 그런지 아직 정신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많이 바쁜지 인사만 하고 헤어졌고…….” ======================================= [128화] 크흑, 루카스가 클로드의 기억을 찾아준 은혜 때문인가. 나도 모르게 루카스를 두둔하게 되네. 어쨌든 수장 할아버지가 탑에서 루카스 상사인 거니까 일단 실드 쳐 둬서 나쁠 건 없겠지! 하지만 이어지는 수장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오호라, 그러니까 그놈이 드디어 오벨리아에 돌아왔단 말이군요?” 헉! 아무래도 지뢰였나 봅니다! 뭐야? 수장 할아버지, 루카스가 돌아온 것도 아직 모르는 거였어?! “그런데 요놈이 귀환 보고도 안 하고 홀랑 공주님 얼굴만 보고 튀었다, 이거네요?” 쿠, 쿨럭. 루카스, 너 설마 탑에는 아직 왔다고 말도 안 하고 내 방에서 뒹굴거리는 거였니……? “하, 이런 귀여운 놈 같으니라고.” 수장 할아버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참으로 흉흉하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루, 루카스. 땡땡이를 치는 중이면 그렇다고 말을 했어야지! “아, 참. 공주님, 좀 늦었지만 이건 생신 선물입니다. 요즘 마법 용품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서 전에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걸 찾아봤어요. 좀 더 제대로 된 걸 만들어드리고 싶었지만 시일이 촉박해서.” “앗, 감사해요.” 내가 전에 말했던 거라면 마법이 무효화되는 물건을 말하는 건가? 하리 에른스트의 펜던트가 상당히 인상적이라 지난번에 탑에 와서 물어봤던 건데. 수장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마법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마법 용품은 엄청나게 귀한 거란다. 그런데 그 비슷한 걸 내 생일 선물로 주다니, 뭔가 감동이기도 하고. 평소에 엄청 이상한 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상적인 면도 있었……. “정 고마우시면 답례로 손톱 끄트머리를 조금만 잘라주셔도 됩니다.” ……정상적이긴 무슨! “아니, 생일 선물에 무슨 답례를 요구해요?” “허허. 요즘은 생일 선물을 주고 답례를 받지 않나요? 제가 젊을 적에는…….” 이상한 할아버지의 이상한 소리가 시작되었다. 이 할아버지, 또 시작이네. 더 듣고 있어 봤자 나만 손해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잖아? 전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어요. 선물 정말 감사해요.” “이런, 벌써 가시는 겁니까?” 내 말에 수장 할아버지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티를 냈다. 난 저 뒤에 생략된 것이 ‘아직 피도 한 방울 못 얻었는데……’ 따위의 말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혹시 루카스 놈을 또 보시거든 저한테도 알려주십시오.” “그, 그럴게요.” 나는 눈을 번뜩이는 수장 할아버지를 뒤로한 채로 서둘러 검은 탑을 빠져나왔다. * * * “제에자아~?”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내가 다시 만난 루카스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소리를 하게 된 것이었다. 수장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루카스는 마력 사용이 제한된 황성 안에서도 마음대로 마법을 쓸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녀석이었다. 으음, 이런 말은 탑의 마법사들에게 좀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지금까지 내가 본 마법사 중에서는 루카스가 제일 강한 느낌이랄까. 크흠. 어쩌면 워낙 어릴 때부터 놈에게 세뇌당한 탓에 나도 루카스를 자칭 타칭 세계 제일의 천재 마법사로 생각하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난 가르치는 취미 같은 거 없는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 루카스는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래, 뭐……. 너한테 그런 취미가 없다는 건 지난번 검은 탑의 마법사들이 울분에 찬 원성을 터뜨리는 걸 듣고 대강 알고 있기는 한데……. 그리고 이어지는 녀석의 위풍당당한 말에 나는 그만 짜게 식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마법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원래 타고나는 거야.” 크윽, 역시 루카스 얘도 클로드과였어! 저 표정, 저 말투! 전부 다 왜 이렇게 얄밉죠? 어흑. 그나저나 역시 루카스는 무리인가. 탑의 마법사들 얘기를 듣고 루카스한테 배우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서 루카스가 싫다고 하면 나도 더 떼쓰지 않고 그냥 바로 포기할 생각이었다. 전에 녀석이 끝끝내 내 데뷔당트 춤 연습 상대를 안 해줬던 것도 그렇고, 루카스가 저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성격이란 걸 다년간의 세월을 통해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카스는 꽤나 건방진 자세로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서 잠시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흐음’ 소리를 내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뭐, 그래도 정 부탁하면 못 들어줄 것도 없고.” “어, 진짜?” “근데 한 번에 못 알아들으면 그냥 때려치울 거니까 그런 줄 알아.” 그거 거의 100%의 확률로 때려치운다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너 자꾸 사방팔방으로 마력 줄줄 흘리고 다니는 거 거슬렸어.” “내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내려 내 몸을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하지만 역시 나한테는 아무런 이상 기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얘기는 가끔, 아주 가아아~ 끔 사람의 마력을 육안으로 본다는 수장 할아버지도 나한테 해준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루카스가 같잖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야, 나 정도나 되니까 알아보는 거야.” 호호호. 아, 예. 그러십니까? 워낙 잘난 척이 일상인 놈이라 이제는 새롭지도 않구나. 넌 신선함이 부족해! 그래서 제 점수는요……. “말 나온 김에 지금 한번 해볼까. 일단 마력 방출부터 막아봐.” “어떻게?” 내 물음에 루카스가 잠깐 표정을 변화시켰다. 잠깐! 저 표정 뭔가 기분 나쁘잖아. 시작도 하기 전인데 벌써부터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야. 게다가 저 저능아를 보는 듯한 눈빛! “그러니까 마력을 이렇게 팍! 해서 저렇게 슈욱! 한 다음에 요렇게 하라고.” 루카스의 설명은 거지 같았다. 내가 짜게 식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루카스가 뭐냐는 듯이 슬그머니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더니 글쎄, 잠시 후 이놈이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한숨을 포옥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여는 게 아닌가? “그래, 뭐. 애초에 한 번에 따라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어. 특별히 한 번 더 설명해 줄 테니까 잘 들어. 마력을 요렇게 해서 어쩌고저쩌고…….” 다시 거지 같은 설명이 이어졌다. 저기……. 얘, 혹시 지금 날 놀리려고 이러는 건가? 나는 긴가민가했지만 루카스의 얼굴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진짜 저걸 설명이라고 하는 거라고? 나는 문득 지난번 만난 탑의 마법사가 루카스 이야기를 할 때 원통히 외쳤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마법 쉽게 쓰는 법 좀 알려 달라고 했더니 막 눈앞에서 슉슉! 솩솩! 하라면서 진짜 개똥같이 알려주고는 이게 안 되냐고 막 무시하고 막 불쌍하게 쳐다보고…… 우윽. 내가 진짜 서러워서, 으흑!’ 그, 그렇구나. 탑의 마법사들이 루카스에게 학을 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어! 말로만 들었을 때보다 직접 경험하고 나니까 확실히 와 닿는 게 다르잖아! “뭐 해, 빨리 해보라니까.” 심지어 루카스는 나를 재촉해대기까지 했다. 나는 끄응 신음하다가 루카스의 강렬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움직였다. 설명이 너무 개똥 같아서 뭐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방금 전 들은 바에 의하면…… 으음, 대강 이런 느낌인가. 나는 일단 뭐라도 해볼 생각으로 대충 마력을 움직여 보았다. “어, 뭔가 달라졌나?” 앗, 그런데 왠지 방금 전과 비교해서 몸이 약간 가뿐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냥 기분 탓인가? “루카스, 나 한번 봐봐. 뭐 바뀐 거 있어?” 에잇, 내가 봐서는 모르겠다. 나는 괜히 팔을 들어서 보다가 루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응? 그런데 안 어울리게 두 눈을 왜 저렇게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는 거야? “뭐야, 너 꽤 하잖아?” “헉, 진짜 됐어? 이제 마력 안 새?” 루카스는 내가 자신의 거지 같은 설명을 듣고도 이렇게 곧잘 따라하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하긴 나도 놀라운걸! 역시 나에게는 엄청난 마법의 재능이……. 하지만 내 고막을 파고든 루카스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한번 차게 식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와, 나 지금 소름 돋았어. 어떻게 너 같은 초심자도 한 방에 따라할 만큼 기똥찬 설명을 할 수 있는 거지?” “…….” “역시 탑의 멍청이들이 똥멍청이라 못 알아들었던 거잖아.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 이 몸의 놀라운 천재성이란.” “…….” “아, 그래도 넌 뭐, 그 정도면 제법인데? 좋아, 너 정도면 가르칠 맛이 나겠어. 난 원래 아무나 안 가르치니까 영광으로 생각하도록 해.” 루카스는 물 만난 고기처럼 미친 듯이 자화자찬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의 놀라운 천재성에 새삼 감탄한 듯 보이는 루카스를 약간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거 뭔가 억울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내가 똑똑해서 네 개떡 같은 설명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것 같은데! 나는 루카스를 똥 씹은 얼굴로 쳐다보다가 그의 거들먹거림을 더 봐주기 싫어서 탑에서의 일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까 너 돌아온 거 아직 탑에 보고 안 했다며?” “아, 뭐.” “수장님이 이제 너 온 거 알았는데, 나중에 혼나는 거 아니야?” “알면 어쩔 건데.” 그런데 루카스는 쫄기는커녕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말뿐이었다. 얘, 아무리 그래도 직장 상사인데, 태도가 너무 불량한 거 아니냐! “그것보다 너 다른 것도 한번 해봐. 이번에는 마력을 이렇게 저렇게…….” “이, 이렇게?” “아니, 그렇게 말고! 잘 봐봐, 이렇게 하라고. 이번에는 ‘슈욱’보다는 ‘화악’ 하는 느낌으로.” ……여기 어디 뒤로 가기 버튼 없습니까? 루카스한테 배우기로 한 거 취소하고 싶은데요! 하지만 내 인생에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결국 나는 루카스에게 한참 더 붙들려서 슉슉 솩솩 같은 콩가루 가르침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이때만 해도 나는 이런 시간이 무려 2년이 넘게 계속될 줄은 몰랐다. 알았으면 아마 어떻게 해서든 루카스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발언을 취소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크흑. 안녕, 내 청춘이여……. 제37장 생일 무도회는 화려하게 에메랄드궁에서 열린 아타나시아 공주의 15번째 생일 기념 무도회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아타나시아 공주와 비슷한 또래의 귀족 영애와 영식들이었는데, 이날 가장 무도회의 참석률은 거의 백에 달했다. 한때 황제 클로드와 공주의 불화설이 돌았던 데다 또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공주를 찾는다는 황제의 방이 전국에 쫙 깔리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의 호기심이 끝 모르고 치솟는 것도 당연했다. 얼마 후 공식 석상에서 아타나시아 공주와 황제 클로드가 다시금 돈독한 모습을 보인 탓에 두 사람의 불화설은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긴 했으나 아직까지도 그들의 관계를 의심 어린 눈초리로 지켜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아타나시아 공주가 에메랄드궁에서 자신의 15번째 생일을 맞아 파티를 연다고 하니, 초대받은 이들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겸 참석을 결정한 것도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면을 준비하지 못하신 분들은 입장 전에 말씀해 주십시오.” 게다가 특이하게도 아타나시아 공주의 무도회는 참석자 전원이 가면을 착용해야만 했다. ======================================= [129화] “가면을 착용하지 않으신 분은 무도회에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초대장에 적힌 설명대로 미리 가면을 준비해 온 영애와 영식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마차의 문을 열자마자 앞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에게 가면을 하나씩 전달받았다. 그들은 전부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귀족 자제들이었기 때문에 무도회에 참석한 경험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 더군다나 이처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입장하는 무도회는 처음이어서 당혹감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느끼고 말았다. 얼떨결에 얼굴을 가리고 궁 안으로 들어서자, 제각기 모양이 다른 가면을 쓰고 있는 참석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들 지금의 상황이 낯선 눈치였다. 저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면식이 있는 사람을 찾아 쉬이 움직일 수도 없어서, 참석자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만을 여기저기 움직이며 제자리에서 쭈뼛거렸다. 바로 그때, 샹들리에의 불이 일시에 꺼졌다. “어어?” “갑자기 뭐야?” 순식간에 내려앉은 어둠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무도회장 안으로 번져 나갔다.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모두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도회의 주최자인 아타나시아 공주인 것이 분명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음성에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초대장에 설명 드린 대로 오늘의 가면무도회는 서로의 얼굴을 숨긴 채 즐기는 비밀 무도회입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무도회장의 방에 준비된 가면을 여러 번 바꿔 써도 좋고, 자유롭게 가명을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의를 집중해도 소리가 나는 방향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샹들리에의 불이 한꺼번에 꺼진 것도 그렇고, 혹시 마법인가? 아타나시아 공주가 황제 클로드에 이어 강력한 마법사의 힘을 각성했다는 소문은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의 아주 흥미로운 가십거리였다. “무도회가 끝날 때 가면을 벗는 것이 규칙이며 상대방의 가면을 억지로 벗기거나 어떤 식으로든 강제하는 것은 규칙 위반입니다. 이 경우 무도회에서 퇴장당할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어쨌든, 아타나시아 공주는 단숨에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데 성공했다. “그럼 제 15번째 생일을 맞아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아바마마께 감사드리며.” 무도회장 가득 울려 퍼지는 맑은 목소리 속에 옅은 웃음이 섞였다. “오늘,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샹들리에와 무도회장 곳곳에 마련된 촛대의 불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내뱉는 탄성이 귀를 울렸다. 음악 소리가 회장 안에 퍼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참석자들에게 음료를 권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저어, 왠지 신기한 무도회네요.” “그러게요. 그런데 음, 조금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저쪽으로 가서 잠시 얘기하실래요?” “좋아요.” 처음에는 약간 주저하던 영애들과 영식들이었으나 막상 무도회의 방침에 따라 정체를 숨긴 채 이야기하다 보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묘한 자유와 재미가 느껴졌다. 대화와 행동을 통해 상대방이 누구인지 추리하는 것도 제법 흥미진진했다. 곧 그들은 색다른 무도회에 흠뻑 빠져들었다. * * * ……라는 게 나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척 보아 하니 내 시나리오는 성공한 것 같았다! 좋아, 계획대로! 나는 언제 낯을 가렸냐는 듯 삼삼오오 모여 화기애애하게 놀고 있는 영애들과 영식들을 보고 안심했다. 어쩌면 오늘 내 생일 파티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아무래도 괜히 했던 것 같다. 그래, 그래. 이게 바로 가장무도회의 묘미지. 익명의 자유라고 아시나? 무도회장을 돌아다니면서 보니 한쪽에서는 서로의 정체를 맞추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나도 목소리 변조를 하고 그 안에 슬쩍 끼어들었다. “음, 제가 한번 맞춰볼게요. 그 장미꽃 같은 붉은 머리카락과 한 떨기 백합처럼 흰 피부를 보니…….” 두구 두구! 너의 이름은! “영애는…….” 바로 이레인 후작가의 백합 소녀! “플로렌스 백작가의 장미라고 불리는 로레나 양이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지금 밝혀 버리면 재미없으니까 더 헷갈리게 만들고 가야지. 나야 백합 소녀를 그래도 가까이에서 자주 본 편이라 대번에 정체를 알았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긴가민가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오늘 가면무도회에 작정을 하고 왔는지 머리에 가발까지 쓰고 있었다. 물론 오늘 같은 날에도 저 백합은 포기를 못 한 모양이었지만 말이야. “그, 글쎄요.” “앗, 말을 더듬는 걸 보니 맞는 거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로레나 양이라면 전에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열심히 헛발질을 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처음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처럼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파티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의 정체를 모른다는 생각에 껄끄러워 하던 사람들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거리낌 없이 서로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또래 소년 소녀들만 모아놓은 자리라 그런지 아무래도 마음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음, 좋아. 오늘 재미있게 놀다 가면 클로드와 내 불화설도 지금보다 더 잦아들겠지. 뭐, 일단 미움받는 공주의 생일 파티를 황제가 허락해 줄 리는 없으니까 오늘 가면무도회를 연 것 자체로 대부분의 잡음은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잠시 후, 나는 무도회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몰래 빠져나갔다. “후아.” 바깥으로 나오자 그제야 숨이 조금 트였다. 사실 나도 오늘은 별로 사람들 틈에 끼어 어울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는데 역시 테마를 가면무도회로 정하기를 잘한 것 같다. 아니었으면 파티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내가 이렇게 밖으로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했겠지. 이제키엘과 제니트는 사정이 생겨 오늘 내 생일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오전 중에 알피어스 공작저에서 전갈이 온 상태였다. 나는 무슨 이유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지난번 건국제의 마지막 날 알피어스 공작저에서 보았던 제니트의 얼굴도 줄곧 신경이 쓰였고, 탄신연회 때 복도에서 만났던 이제키엘도 역시 조금쯤은 마음에 걸려서……. 나는 거기까지 생각한 뒤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괜히 마음이 약간 복잡해졌다. “이거 네 생일 파티 아냐?” 물론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지만. “왜 혼자 나와서 청승맞게 고독을 곱씹고 있어?” “앗, 고독은 네 전문인데?” 나는 어느덧 테라스에 걸터앉아 있는 루카스를 보며 깐족거렸다. 그게 그렇잖아? 내가 아무리 혼자 외롭게 고독을 곱씹고 있어도 고독한 검은 늑대인 너를 이길 수는 없는 것! 하지만 내 말을 들은 루카스의 얼굴은……. “야, 너 그 표정 좀 너무하다…….” 너무나 적나라하게 ‘웬 개소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으, 으윽.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노골적인 표정이라니. “역시 그때 제일 처음 그 헛소리를 지껄인 인간을 없애버렸어야 했어.” “앗, 백합 소녀는 안 돼!” “호오, 백합 소녀라고?” 아차! 나도 모르게 루카스에게 ‘고독한 검은 늑대’라는 칭호를 수여한 사람이 누구인지 불고 말았다! 위, 위험해! “와, 와아. 저기 좀 봐, 루카스! 밤하늘에 별이 총총……!” 다행히 루카스는 나를 용쓴다는 듯 쳐다볼 뿐 백합 소녀의 정체를 더 이상 파헤치지 않았다. 혹시 오늘이 내 생일 무도회라 그냥 넘어가는 건가! 어흑, 그런 거면 좋겠다. 나한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 난 백합 소녀를 지켜줘야 한다고! 헉, 그러고 보니 오늘 백합 소녀는 바로 저 무도회장 안에 있잖아? 잘못하다가는 오늘 내 무도회가 피의 무도회가 될 수도 있는 건가? “오늘이 네 생일 파티라고 하니까 특별히 봐준다.” 앗, 그것 참 다행……. “오늘 보니까 굳이 캐묻지 않아도 어차피 나중에 또 네 입으로 불 것 같기도 하고.” 뭣이?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뭐, 오늘은 기분도 꽤 나쁘지 않겠다, 생일 선물은 이미 줬지만 공주님을 위해 특별히.” 그게 무슨 의미인가 파악할 새조차 없이 루카스가 허공에 손을 좌우로 한 번 가볍게 그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 눈앞에는 말 그대로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와아!” 밤하늘에서 보드라운 꽃잎과 반짝이는 별빛이 동시에 넘실거리며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 가득히 고여 있던 꽃과 별이 지상으로 흘러넘쳐 폭포수를 이루는 것 같았다. 커다란 함성이 들려와 고개를 돌려 보니 무도회장 안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넋을 놓고 천장에서 쏟아지는 반짝이는 꽃잎을 맞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쁘다.” 루카스는 날 위해 이런 마법을 부려준 것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무덤덤하게 난간 위에서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고마워.” 나는 눈앞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밤공기 속에 흩어지는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는 듯 작았지만 아마도 루카스는 틀림없이 들었을 터였다. 조금 늦은 내 15번째 생일 파티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나는 혼자 방에서 창밖을 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살랑. 눈을 감았다 뜨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흰 꽃이 시야에 가득 번져 들었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꽃들을 보니 약간의 후회가 생겼지만 그래도 곧바로 다시 이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내가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이유가 일순간의 충동인 것인지, 그도 아니면 무수한 망설임을 동반했던 고민 끝의 결정인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고, 아니면 둘 모두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잠시 꽃밭을 걸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전에 만났던 사람을 또 보게 된다면 그것으로도 괜찮았고, 만약 이대로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면 또 그것대로 괜찮았다. 그래, 사실은 이 또한 전부 다 궤변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쩌겠는가. 그리고 잠시 후 뒤돌아섰을 때, 나는 거짓말처럼 내 앞에 나타난 그를 볼 수 있었다. 쏴아아. 낮게 부는 바람에 단정한 은발이 약간 헝클어졌다. 햇빛 조각을 한 웅큼 모아 놓은 듯한 금색의 눈동자가 조금 크게 떠진 채 먼발치에서 나를 담아내고 있었다.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이제키엘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속삭였다. 나야 알피어스 공작저에 제니트를 만나러 갔을 때 이제키엘을 잠깐이나마 본 적이 있었지만, 그가 나를 이렇게 두 눈에 담는 것은 클로드의 지난 탄신연회 이후로 처음일 것이었다. 그 후 내가 실종되었다가 다시 황성에 돌아왔다는 소식만을 전해 들었을 테니, 지금 이제키엘이 나를 보고 저렇게 두 눈을 의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니면 제 바람이 만들어낸 환영입니까?” 게다가 지금 그와 내가 서 있는 곳은 일전에 루카스의 장난으로 알피어스 공작저에 오게 되었을 때,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이제키엘이 나를 데려왔던 하얀 꽃밭이었다. 나는 시선을 움직여 접어 올린 셔츠의 소매 아래로 드러난 흰 붕대를 눈에 담았다. ======================================= [130화] 어쩐 일인지 그의 왼쪽 팔은 팔꿈치부터 그 아래로 이어지는 손목 부근까지 하얀 붕대로 꼼꼼히 감겨 있었다. 나는 아마도 그것이 어제 이제키엘과 제니트가 내 생일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 어렴풋이 예상했다. “꿈일까요, 환영일까요?” 나는 마주한 사람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도 아니면…….” 내 입술에서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이제키엘의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 “현실일까요?” 여신의 축복으로 생명을 받고 태어난 인형 갈라테이아를 보는 피그말리온의 얼굴이 저러할까. 이제키엘은 그제야 내가 꿈도 환상도 아니라는 확언을 들은 것처럼 나를 향해 멈추었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는…….” 그리고 마침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박혀드는 음성에 나는 손끝을 움찔하고 말았다. “당신께 닿고 싶습니다.” 마주한 얼굴이 어쩐지 괴로운 듯 보여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지금도 눈을 감았다 뜨면 당신이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 같아서…….” 자조적인 음성이 바람결에 떠밀려 내 귓가를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이런 애끓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리라 여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키엘. 이제키엘 알피어스. 책 속의 주인공인 그가 마치 제 마음을 고백이라도 하듯 열띤 목소리로 속삭인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만남은 그저 한낮의 꿈이라 여기세요.” 나는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게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이제키엘은 마치 날카로운 비수에 꽂히기라도 한 사람처럼 표정을 변화시켰다. “방금 당신께서는 이것이 현실이라 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아니게 될 테니까요.” “또다시 제 앞에서 사라지시는 겁니까?” 이제키엘은 견딜 수 없는 무언가를 억누르듯 잠시 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마침내 가라앉은 음성을 토해냈다. “오늘,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 제가 지금 이곳을 찾은 이유와 같은 것은 아닙니까?” 눈송이 같은 꽃잎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다. 나는 마주한 사람을 그저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당신께 닿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낮은 속삭임 뒤에 이제키엘이 내게 성큼 다가왔다. 하얀 꽃잎과 연두색의 풀잎이 이제키엘의 다리에 쓸려 옅은 향기를 피어 올렸다. 곧 내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붕대를 감은 왼쪽 팔 대신 그의 오른쪽 손이 나를 향해 뻗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키엘의 손끝이 내게 닿았을 때. 화아악! “내가 방해했나?” 돌연 싸늘하게 식은 음성이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어느덧 나는 풀 내음과 꽃향기가 뒤섞인 꽃밭 대신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배알이 뒤틀려서 더 이상 참고 볼 수가 없었거든.” 루카스가 소파에 누운 나를 차갑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물론 내가 방해한 거라고 말해도 그 자식한테 다시 돌려보내 주지는 않을 거지만.” 나는 잠시 동안 소파에 머리카락을 펼쳐 놓고 누운 채 가만히 있다가 이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아니, 잘했어.” 솔직히 내 의지로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적절한 때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루카스가 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잘했다고?” “그래.” 내 말에 어째서인지 루카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렸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3시였다. “아, 혹시 릴리가 다녀가지 않았어?” “다녀갔어.” “내가 없는 거 알았겠네.” 뭐, 그럼 검은 탑에 갔다고 생각했으려나. 나는 잠깐 동안 그런 심심한 생각을 이어가다가 곧 나도 모르게 무심코 자그마하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있잖아, 산다는 건 참 복잡한 일인 것 같아.” “…….” “그렇지?” 물론 내 말에 루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하얀 꽃밭의 풍경과 그 속의 이제키엘과 또 한순간이나마 내게 닿았던 온기를 모두 떨쳐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보러 가야겠다. 넌 좀 더 있다가 가던지 마음대로 해.” 루카스는 또다시 내 등 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어질 말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나섰다. 이제 막 그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음에도 어쩐지 이미 마지막 장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던 15살의 초여름이었다. 제38장 꽃다운 17살이랍니다 시간은 착실히 흘러 나는 꽃다운 17살이 되었다. “여기 이 수식 말인데, 좀 비효율적이지 않나요?” 나는 두꺼운 마법서를 탁자 한가운데에 놓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말을 꺼냈다. “이것만이 아니라 ‘성장’ 부분에 나오는 수식들은 전부 다 불필요한 미사여구가 많은 느낌이에요.” “하지만 아에테르니타스 황제 폐하의 집권 시기부터 체계화된 방법인걸요. 예로부터 여러 마법사가 머리를 맞대고 연구했지만 이보다 효율적인 수식은 찾지 못했습니다.” 내 말에 탑의 마법사 중 한 명이 곧바로 반박했다. 어이구, 또 나왔구먼. ‘우리 아에테르니타스 폐하가 짱짱이야! 우리 선조 최고! 아에테르니타스식 수식이 우주 최강!’이라고 외치는 듯한 저 말투! 게다가 다른 마법사들도 거기에 동조해서 고개를 냉큼 끄덕거리고 있었다. 우윽, 평소에 아에테르니타스 황제가 정리한 마법서를 볼 때마다 표지의 겉가죽을 쓰담쓰담하는 걸 보고 알아봤다니까. 아마 아에테르니타스 황제가 아직도 살아 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들 훌륭한 사생팬이 되었을 것이야. “맞습니다. 이 자체로 이미 완벽한 수식인데요!” “이걸 보십시오. 촘촘히 그려진 선 하나하나에 흐르는 이 우아함과 화려함!” “이 수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가운데에 있는 나선형 무늬는 마력의 결속을 돕고, 그 위쪽으로 퍼져 나가는 꽃잎 모양의 여섯 가닥의 선은 마력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블라블라…….” 아니, 그러니까 어차피 마법 쓰려고 그리는 수식이 화려해서 어디에 쓰냐고요? 나는 짜식은 표정을 지으며 진성 빠돌이들 같은 마법사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지난 2년간 나름대로 적응이 되었지만 이럴 때 보면 참 깬단 말이지. 나는 또다시 심취해서 수식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마법사의 말을 흘려듣다가 더 참지 못해 불쑥 말했다. “네,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그 수식을 좀 더 효율적으로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에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 “이걸 좀 보세요.” 나는 ‘이 완벽한 수식을 더 완벽하게 고친다고? 무슨 마아아알도 안 되는!’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아까 전 수식을 끄적였던 종이를 보여주었다. 탑의 마법사들은 예상대로 매우 의심스러운 얼굴로 내가 준 종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눈을 부릅뜨며 ‘헉!’ 소리를 냈다. “이, 이것은?” “공주님, 설마?!” 그들의 목소리와 눈빛은 이미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이제야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훗, 그래. 놀랍지? 200년 동안 완벽하다고 극찬받던 수식을 더 완벽하게 만들었으니, 아마 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흥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기꺼이 바꾼 수식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력의 결속을 돕는다고는 하지만 집중력만 있다면 이렇게 많은 선을 이용하지 않아도 충분해요. 이미 시험해 봤는데 가운데 원을 하나만 그려도 수식을 발동할 조건은 충족할 수 있었어요. 대신 이 부분을 조금 바꿔봤는데 마력의 불필요한 유출을 막는 수식을 응용한 거예요. 여기 이쪽의 선을 이용하면 기존의 효과와 마찰도 일으키지 않아요. 게다가 이 수식은 단기간에 마력을 주입해서는 효과가 없어서…….” 마법사들은 내가 설명하는 동안 종이 위로 움직이는 내 손을 거의 홀린 듯이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면 마법 발동까지의 시간은 단축되고 효과는 거의 세 배로 증가해요.” 설명 끝! 어휴, 이 짓도 힘들다. 그래도 난 루카스랑 다르니까 슉슉 솩솩! 따위로 설명하진 않을 거라고! 그리고 역시나 내 멋진 설명에 감명을 받은 마법사들이 곧바로 잔뜩 흥분해서 소리쳤다. “오오오오! 이건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엄청난 사건입니다! 200년 간 아무도 아에테르니타스 황제식 수식에 손을 대지 못했었는데!” “맙소사, 이렇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수식이! 이런 환상적으로 완벽한 방법이!” “이 수식대로라면 마법 발현이 1.5초 정도 빨라지지 않을까요!” “우오오! 지금 당장 시험해 보죠!” 나는 옹기종기 모여 구겨진 종이를 금은보화라도 되는 양 다루는 마법사들을 보며 뿌듯하게 코 밑을 스윽 훑고 말았다. 아, 저 수식 볼 때마다 감기로 코가 꽉 막힌 상태인 것처럼 답답했는데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구나. 나는 어느덧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새로운 수식 활용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는 마법사들을 보며 흐뭇하게 검은 탑을 빠져나왔다. * * * “공주님, 탑에 다녀오세요?” “응.” 에메랄드궁에 돌아오자 여느 때처럼 릴리가 가장 먼저 나를 맞아주었다. 내가 검은 탑에 왕래하며 지낸 지도 어느덧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런지, 그녀도 이제는 익숙한 눈치였다. “앗, 릴리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나.”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릴리에게 달라붙었다. “방금 피낭시에를 만들었어요. 방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그런 나를 향해 릴리가 푸근한 엄마 미소를 흩뿌렸다. 크으, 역시 우리 릴리야. 마침 간식배가 고팠던 걸 어떻게 알고 이렇게 내가 올 시간에 딱 맞춰서 피낭시에를 준비했지? “공주님, 초대장은 탁자 위에 정리해 뒀어요.” “아. 고마워, 세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익숙하게 탁자 위에 정리된 초대장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미 밑에서 한번 걸러진 뒤 나한테 도착한 초대장들이기 때문에 사실상 내가 따로 신경 써야 할 것들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이 중에서도 승낙할 게 있고 거절할 게 있긴 하지만. “흐응.”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파에 앉아 내 앞으로 온 초대장들을 읽어나갔다. 오늘은 드디어 벼르고 있던 수식 얘기를 끝낸 참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상큼하고 좋았다. 아, 이렇게 속이 시원할 줄 알았으면 진작 말을 꺼내 보는 건데. 그동안 검은 탑에 있는 마법사들이 아에테르니타스를 보통 숭배하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좀 눈치를 보느라고 참고 있었지 뭐야. 와아, 그러고 보니 나도 많이 발전했단 말이야? 설마 내가 강력한 마법사 황제로 이름 높던 아에테르니타스의 수식을 손보는 날이 올 줄이야! 어흑, 생각해 보니 새삼스러운 감격이!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내가 이렇게 멋져지기까지는 루카스의 영향이 컸다. 인정한다, 너의 천재력! “공주님, 좀 드시면서 하세요.” 그렇게 내가 혼자서 감격하는 시간을 갖고 있을 때, 릴리가 내 방으로 간식을 들고 왔다. “아, 커피네?” “네. 지난번에 공주님이 좋아하시던 게 생각나서요. 저희 궁에도 조금 들어왔거든요.” ======================================= [131화] 사실 오벨리아에는 원래 커피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릴리가 아를란타에서 시험 삼아 수입해 온 새로운 차를 에메랄드궁에도 들어왔다며 내준 것을 보니, 글쎄, 커피가 아니겠는가? 나는 아련한 향수에 젖어서 금세 그 맛에 빠져들었다. 물론 홍차 같은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 맛이 그리웠다고. 흐흑, 물론 내 입맛에 딱 맞는 인스턴트식 커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나이가 들어도 내 입맛은 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릴리가 가져다준 커피에 설탕을 아낌없이 쏟아 넣었다. “릴리도 여기 앉아서 같이 먹자.” “전 공주님이 드시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걸요.” 흐잉, 그래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릴리가 또다시 엄마 미소를 얼굴에 가득 드리운 채로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또 권하지는 못 했다. 사실상 릴리 정도의 직급이 되면 이런 일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녀는 여전히 내가 먹을 간식을 직접 만들어주거나 잠들기 직전 머리를 빗겨 주고 잠자리를 봐주는 등, 내 생활 전반에 걸친 일을 손수 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도 그것이 좋았기 때문에 17살이 된 지금까지도 그런 그녀를 말리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공주님께서 언제 이렇게 어여쁘게 자라셨는지…….” 지난 2년간 나는 키가 조금 더 컸고, 전과 비교해 겉모습에 배어나오던 어린애 티를 훌쩍 벗게 되었다. 젖살도 빠져서 얼굴도 한결 갸름해졌다. 풋풋한 느낌이 나던 내 몸매에 보다 뚜렷한 굴곡이 생긴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인지 릴리는 요즘 들어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저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그런 릴리를 향해 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난 원래 예뻤잖아.” “물론이죠. 공주님은 태어나신 순간부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가셨어요.” 쿠, 쿨럭. 제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치시는 것도 여전하십니다. 약간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릴리의 이런 애정은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나도 릴리한테는 자꾸만 어리광을 부리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간식을 먹고 방에서 초대장을 보면서 뒹굴거리다가 나는 시간에 맞춰 가넷궁으로 향했다. “아빠, 산책할 시간이에요!” 클로드는 오늘도 집무실에 틀어박혀 서류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클로드가 눈 밑이 약간 거뭇해진 채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야 한참 일하고 있는 그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심했지만, 이제는 내가 방해하지 않으면 클로드가 날이 새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간에 집무실을 방문한 나를 보며 클로드가 한차례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필릭스.” “예, 폐하.” 클로드의 조용한 부름에 내 뒤에 서 있던 필릭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 시간만 되면 마치 내가 목줄 잡고 산책시켜야 할 개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기분 탓인가.”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어여쁜 마음이시지요. 폐하의 건강을 걱정하셔서 매일 이 시간만 되면 집무실로 찾아오시는데 그 마음이 갸륵하지 않습니까.” “맞아요, 아빠. 목줄 잡혀 산책 가는 개라니, 그런 묘사는 너무해요.” “게다가 동물이든 사람이든 적당히 햇볕도 쬐고 다리도 움직여 주고 해야 하는 법이지요, 폐하.” 잘한다, 필릭스! 다년간의 세월을 함께한 탓인지 이제는 이 오빠하고도 꽤나 죽이 잘 맞는단 말이야? 예전의 그 눈새 같던 필릭스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헝,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수많은 일화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아무튼 청산유수 같은 나와 필릭스의 말에 클로드가 슬쩍 눈매를 구기는 것이 보였다. 그냥 포기하면 편하답니다, 아빠님. “자자, 하시던 것만 마무리하고 오늘도 같이 산책 가요. 필릭스 말대로 사람은 적당히 햇볕도 쬐고 밖에 나가서 걷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라구요.” “하아.” 클로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물론 예전 같으면 그가 내뿜는 불만 어린 분위기에 쫄아서 머뭇거렸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다 어릴 때 이야기였다. 게다가 고집으로 치자면 이제는 나도 지지 않았다. “그럼 전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위해 준비된 푹신한 소파 위에 앉았다. 쓰읍, 그런데 이상하네. 2년 전에 내 방에 있는 소파도 분명 이것과 똑같은 브랜드의 것으로 바꿨는데 왜 엉덩이에 닿는 감촉이 다른 것 같지? 이상하게 집무실에 있는 소파가 더 푹신푹신한 것 같단 말이야? 나는 소파의 푹신함을 좀 더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엉덩이를 자꾸 들었다 놨다 하면 클로드에게 방해가 될까 봐 그냥 참기로 했다. “아빠, 매일 후원만 걸으면 지겨우니까 오늘은 화원으로 가요.” 그리고 잠시 후, 나는 클로드의 팔을 붙잡고 가넷궁을 벗어났다. 필릭스는 이제 알아서 저만치 뒤떨어져 걷고 있었다. 하도 클로드가 눈에 보이지 마라, 열 걸음 뒤로 떨어져라, 야단을 해대니 이제는 눈치 없음의 대명사인 필릭스도 클로드와 내가 둘이 있을 때에는 알아서 가까이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쫓겨날 때마다 매번 풀이 죽어 시무룩해서 있더니 요즘에는 그렇지도 않은 게, 아무래도 적응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으, 으음. 그런데 좀 다르게 생각해 보면 적응이 될 정도로 구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되는 건가? 크흑. 필릭스, 갑자기 짠내가 좀 나잖아……. “봐요, 아빠도 밖에 나오니까 좋으시죠?” “귀찮다.” “귀찮다고 실내에만 있으면 허약해진다구요. 아빠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내 팩트 폭력에 클로드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흐헹, 나이 얘기를 하니 기분이 좀 나쁘십니까? 하지만 사실인 것을. 물론 클로드는 세월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불공평한 동안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껍데기만 동안이면 뭘 하겠는가? 매일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난 얼굴로 비실비실거리는 것을. 당연히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클로드는 부정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평소 활동적인 일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 더군다나 허구한 날 집무실에만 처박혀 있지를 않나, 또 수면 시간은 불규칙하지를 않나, 그러니 내가 걱정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은 꼭 침대에서 주무시라고 했죠? 자꾸 그러시면 소파 치워 버릴 거예요.” 게다가 소파에서 잠드는 버릇은 어찌할 수가 없는 건지, 그나마 쉰다고 쳐도 꼭 불편하게 소파 위에서 쪽잠을 자고 말이야. 그런데 내 말에 클로드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하나뿐인 딸이라고는 어째 날이 갈수록 잔소리가 늘어나기만 하니.” “하지만 저 아니면 누가 아빠한테 이런 말을 하겠어요?” 필릭스가 골백번 말한다고 해서 들을 당신도 아니고. 그나마 나라도 이렇게 잔소리를 해야 당신이 조금이나마 제 몸을 돌볼 것 아닙니까. 하, 이렇게까지 아빠의 건강을 신경 쓰다니 난 참 좋은 딸인 것 같다. 자, 날 칭찬해 주고 싶지 않아? 막 너밖에 없다고 날 예뻐해 주고 싶지 않아? 하지만 클로드는 역시 클로드였다. 그는 나를 칭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회한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딸에게 개 취급을 당하지를 않나, 매일같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잔소리를 듣지를 않나. 나도 완전히 갈 데까지 갔군.” 아잇, 왜 자꾸 개 취급이래요! 산책 좀 같이하자고 밖으로 데리고 나오면 다 개 취급하는 건가? 무, 물론 사실상 내가 당신을 반강제로 밖으로 끌고 나와서 산책을 시켜주는 느낌이긴 하지만……. “그나저나 이 화원도 이제는 질리지 않나?” 그런데 잠시 주위를 살피는가 싶던 클로드가 문득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상념에서 벗어나 클로드와 함께 덩달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분홍 장미가 피어 있는 화원이었다. 물론 이곳도 예전에 클로드가 만들어준 곳이다. 어라, 난 괜찮은데 아빠는 이제 질렸나? “그럼 다음부터는 산책 코스를 바꿀까요?” 커흡, 이렇게 말하니 진짜로 키우는 멍멍이의 산책 코스를 고민하는 견주가 된 것 같다. 이건 다 클로드가 아까부터 개 취급이 어쩌구 해서 그래! “필릭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자마자 뒤에 있던 필릭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내일부터 이곳을 열대 수목원으로 만들라고 일러라.” 푸읍! 느닷없는 클로드의 말에 나는 그만 마주한 사람을 황당하게 쳐다보고 말았다.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클로드의 부름에 한달음에 다가온 필릭스도 그 뜬금없는 말에 움찔거렸다. “열대 수목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무래도 아타나시아가 이제 장미 화원에 질린 모양이다.” 네? 제가요?! 갑자기 덤터기를 쓰게 된 나는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아빠,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지난번에 들어 보니 이레인 후작가에서 본 정원이 꽤나 인상 깊었다고 하더군. 그때 말한 꽃 이름이…….” 아앗, 잠깐! 당신 지금 이러는 이유가 설마! “그래. 아리스톨로키아 엘레강스라고 했던가?” 쿠, 쿨럭! 나는 클로드의 입에서 나온 그 럭셔리한 이름에 그만 침을 뿜을 뻔하고 말았다. “예? 아리스토…….” “아리스톨로키아 엘레강스.” “아리스톨로키아 엘레강스……. 그런 꽃이 있었군요. 이름을 잊지 않게 잘 기억해 둬야겠습니다.” 두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읊조리는 그 이름은 학명 그대로 너무나도 엘레강스해서 오히려 우스운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저 사람들한테 안 어울려! 그런 정색한 얼굴을 하고 버터 바른 우아한 발음으로 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아빠, 제가 언제 그 꽃이 좋다고 했어요?” 게다가 나는 억울했다. 난 그냥 이레인 후작가의 정원에서 본 그 꽃이 엄청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을 뿐인데, 그걸 저런 식으로 왜곡하다니! “이레인 후작가에 또 방문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황성 안에 그와 똑같은 열대 수목원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문제 많습니다! 그것도 엄청 많은데요! “그 꽃을 어지간히 좋아하지 않고서야 저 쓸데없이 긴 이름을 마지막 한 글자까지 전부 기억하는 데다 외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보러 가고 싶다는 소리를 할 리가 없지 않느냐.” “과연 맞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폐하.” 그런데 거기에 대고 필릭스는 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냐, 그거 아니란 말이야! 사실 클로드는 내가 밖으로 나다니는 것을 아직도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래서 황궁 안에 열대 수목원을 만들어준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필이면 아리스톨로키아 엘레강스라니! 나 그 꽃 별로 안 좋아해! 내 취향 아니란 말이야! “아빠, 전 그냥 지금 화원이 좋은데요?” “빈말할 것 없다. 필릭스,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당장…….” “에, 에이. 이레인 후작가에서 본 정원도 멋지긴 했지만 아빠가 만들어주신 화원이 훨씬 더 예쁘고 좋은걸요. 이것 보세요. 장미가 얼마나 화사하고 예쁘게 피었어요?” 자, 이 장미를 봐! 이렇게 예쁜 장미를 없앨 거야? 진짜? 정말? 이 예쁜 장미에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할 거야? 응? ======================================= [132화] “공주님께 장미가 참 잘 어울리긴 하지요.” 꽃을 등지고 선 나를 보며 필릭스가 흐뭇하게 말했다. 자, 클로드 당신도 나를 봐! 당신도 장미꽃에 둘러싸여 있는 나를 보는 게 그 이름 긴 열대 꽃에 둘러싸여 있는 나를 보는 것보다 더 좋을 거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클로드는 나한테 앙금이 남은 것 같았다. 어쩌면 비단 이레인 후작가의 정원 때문만이 아니라 요 근래 들어 내가 산책을 빙자해서 귀찮게 굴었던 것에 불만이 쌓인 건지도 몰랐다. “아니, 아리스톨로키아 엘레강스란 꽃이 도대체 얼마나 어여쁘기에 네가 그러는지 나도 알아야겠다. 필릭스, 당장 이 화원을 열대 수목원으로 만들라고 전해라.” “예, 폐하.” “아, 아니! 아빠, 잠깐만요! 잠깐만요, 아빠? 필릭스도 아직 가면 안 돼! 잠깐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앞서 걷기 시작한 클로드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면서 내 장미 화원을 지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써야만 했다. 어흑. * * * “이 자태를 좀 보세요. 정말 환상적으로 아름답지 않나요?” 으음. 나는 눈앞에 있는 자주색 꽃을 보며 남몰래 신음했다. “아리스톨로키아 엘레강스(Aristolochia elegans)라니, 어쩜 이름도 참 멋지지요.” “호호, 그렇네요.” 그래, 참 엘레강~ 스하고 고져~ 스하기도 했다. 나는 흰색의 무늬가 가득 들어찬 꽃을 보다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자연스럽게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 물론 취향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제 취향도 존중해 주세요, 흑흑. 전 이 꽃을 볼 때마다 약간 등줄기가 오싹오싹해진다구요. 꽃잎 전체에 그려진 저 흰 무늬 때문인가? “지난번에 공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셔서 좀 더 알아봤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칼리코 꽃이라고도 한다나 봐요.” “아하, 칼리코 꽃…….” 나는 백합 소녀에게 호응하다 말고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잠깐, 잠깐……! 마음에 들어 하다니? 난 그냥 지난번에 봤을 때 ‘아……. 꽃이 참 강렬하고 인상적이네요’라고 말했을 뿐인데! 하지만 백합 소녀가 너무나 환한 얼굴로 설명을 하고 있어서 나는 차마 저 꽃이 내 취향이 아니라는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그래, 사실 난 좀 귀여운 여자애들에게 약하다. 으흑. 그렇게 한참 동안 눈앞의 열대 꽃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던 도중에, 문득 백합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머, 제 정신 좀 봐.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설명이 너무 길어졌네요. 하녀들에게 미리 일러서 다과를 준비해 뒀어요.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오늘 나는 오랜만에 이레인 후작가에 방문한 참이었다. 나를 초대한 것은 데뷔당트 때부터 인연을 이어왔던 백합 소녀, 세레나 이레인이었다. 15살 때 처음 에메랄드궁에서 무도회를 열었던 것을 기점으로 나는 초대장을 보내오는 가문의 저택에도 간혹 방문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클로드는 질색하며 싫어했지만 이제는 나도 그가 막는다고 무작정 따르지 않아서 어느 정도는 대외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레인 후작가는 예전에 한나가 호들갑을 떨며 말한 대로 과연 저택 내부가 완전히 식물 천지였다. 듣기로는 백합 소녀의 아버지인 이레인 후작의 취미라고 하던데……. 내가 봤을 때에는 백합 소녀도 제 아버지 못지않게 집안의 식물들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올 때마다 저렇게 애정이 그득히 묻어나는 얼굴로 식물도감 뺨치는 설명을 해주는 거겠지. 나는 얼마 전 내 장미 화원을 열대 수목원으로 바꿔버리겠다고 선언했던 클로드를 떠올리고 잘게 어깨를 떨었다. 크읍, 하지만 난 지켜냈어! 내 어여쁜 장미들에게 뻗치는 클로드의 마수 같은 손길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세레나는 식물을 참 좋아하는군요.” 나는 그날의 힘겨운 사투를 떠올리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다가 오늘도 주위에 가득한 온갖 종류의 꽃과 풀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백합 소녀가 약간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식물은 애정을 주는 만큼 예쁘게 피어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활짝 피어난 꽃을 보면, 꼭 제 애정에 보답해 주는 것 같아서 기뻐요.” 음,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백합 소녀의 말을 듣고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주위의 식물을 살펴보았다. “참, 공주님. 지금 공주님 뒤에 있는 꽃이요. 지난번에 오셨을 때 공주님이 마법으로 도와주신 거예요.” “아, 그래요?” 나는 그 말에 두 눈을 약간 크게 뜨고 뒤돌아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지난번 이레인 후작가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것과 이파리 모양이 비슷한 꽃이 있었다. “꽃잎이 푸른색이었네요.” “예쁘게 자랐죠? 아직 봉오리지만 일주일쯤 지나면 완전히 활짝 피어날 거예요.” 다 시들어서 죽어가던 꽃이 저렇게 꽃망울을 맺었다니. 백합 소녀가 어떻게 해서도 살릴 수 없을 것 같다며 울적해했었는데 다행이다. 사실 저 꽃은 이번에 내가 수정한 아에테르니타스식 수식을 이용해 성장시킨 것이었다. 때마침 나는 새로 고친 수식을 시험해 볼 곳이 필요했고, 백합 소녀는 죽어가는 꽃을 어떻게 해서든 살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내가 저 식물에 마력을 불어넣어보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공주님이 도와주지 않으셨으면 분명 제 손으로는 살릴 수 없었을 거예요.” “제가 한 일은 별로 없는걸요. 마력으로 식물을 성장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전부 세레나가 애정을 갖고 돌본 덕분이죠.” 물론 모든 마법이 그렇듯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되겠지만, 수식을 조금 더 손보면 오벨리아에서도 비교적 척박한 북부의 토양에 곡식을 키운다던가 하는 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심심한 고민을 하며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찻잔을 기울였다. “저, 저기, 그런데 공주님…….” 그러던 중에 문득 백합 소녀가 주저주저하며 뺨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어떻게, 루카스 님은 요즘 잘 지내고 계시는지…….” 아앗, 오늘도 백합 소녀의 순정은 여전했다. 루카스가 고독한 검은 늑대의 칭호를 처음 획득했을 때부터니까 저런 한결 같은 마음도 어느덧 3년째던가? 으앙, 루카스도 꽤나 죄 많은 놈이네! “늘 비슷하죠. 요즘도 탑에서 많이 바쁜 것 같더라고요.” “아, 하긴. 검은 탑 최고의 마법사님이시니까요.” 쿠, 쿨럭. 지고지순한 순정 못지않게 백합 소녀의 콩깍지도 여전했다. 대외적으로도 최연소 탑의 마법사니까 확실히 대단한 놈이긴 하지만 말이지, 탑에는 수장 할아버지도 있고 다른 연륜 있는 마법사들도 있는데 루카스가 최고라니. 물론 나도 사실은 루카스가 오벨리아 마법사 중 제일 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하아, 지난번 공주님의 다과회에 가는 길에 우연히 루카스 님을 뵈었는데 어쩜 그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빛이 나시던지. 그 눈부신 모습에 잠시 현기증이 나서 그만 쓰러질 뻔했지 뭐예요. 하지만 그분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애잔한 고독이 해마다 더욱 짙어지는 것 같아 저는 마음이 너무나 찡해져서…….” 아앗, 또 시작됐다! 나는 꿈을 꾸는 몽롱한 눈빛을 한 채 기도하듯 두 손을 부여잡고 또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한 백합 소녀를 향해 아련한 눈빛을 보내고 말았다. “그 뒷모습을 제가 한 번이라도 꼬옥 안아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이 상태면 한동안 나란 존재는 또 이 자리에 있으나 마나 한 투명 인간이 되겠구나. 허허, 이제는 이것도 익숙하다. “하아, 예전에는 제가 너무 어렸어요. 루카스 님을 조금만 더 빨리 만났다면 자르비에 공자님에게 잠시나마 현혹되는 일도 없었을 것을.” 나는 귓가에 흘러드는 백합 소녀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다시금 찻잔을 기울였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깊은 외로움에 잠긴 그분의 붉은 눈동자를 볼 때마다 저는…….” 음, 이 차 향이 꽤 괜찮은데 에메랄드궁에도 좀 들여놓을까? * * * “뭐야, 왜 이렇게 깜깜해?” “불 켜지 말아봐!” 내 방에 손님이 온 걸 알자마자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으앗, 내 눈! 에잇, 쓸데없이 행동이 빠르다니까! 가늘게 좁힌 내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비쳐 들었다. 갑자기 밝아진 방에 눈이 부셔서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루카스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불 다 끄고 혼자 뭐 하는 거야?” 거참 빨리도 물어본다. 그런 건 불 켜기 전에 먼저 좀 물어봐주면 안 되겠니. 하지만 마음씨 넓은 내가 이해해 주기로 했다. 나는 침대에 편하게 누운 자세 그대로 루카스를 불렀다. “루카스, 이리 와봐.” “내가 개야?” 아, 요즘은 여기저기서 왜 이렇게 다 개 소리인가요? 다들 자기 자신을 멍멍이라고 생각하는 게 유행인가요? 하지만 저는 억울합니다, 어흑. 그러나 루카스는 불만인 듯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이거 봐, 어차피 순순히 올 거면서 앙탈은. “좀 더 가까이 와봐.” 그런데 너 나랑 내외하니? 왜 오다가 말아?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던 상태 그대로 고개를 돌려서 루카스를 재촉했다. 그러나 내 부름에도 루카스는 미간을 한 번 찡그릴 뿐 쉽게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이리 와 보라니까.” 거참 답답하십니다. 결국 나는 침대에서 서너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루카스를 향해 직접 손까지 내밀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하자 그제야 루카스가 멈춰 있던 걸음을 움직였다. 나는 가까워진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순간 내 손에 닿은 루카스의 팔이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잡아당겼다. 루카스가 처음처럼 버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누운 옆자리에 그를 쉽게 눕힐 수 있었다. “이것 좀 봐봐.” 나는 손을 휘휘 저어 루카스가 켜 놓은 불을 다시 껐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을 줄 안다는 말처럼 나도 마법을 쓴 지 어언 3년이 되어서 그런지 이제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내가 마력을 불어넣자마자 천장에 반짝이는 마법진이 펼쳐졌다. 아까 전 내가 허공에 그린 마법 수식이었다. 수식 공부를 하다가 어제 자기 직전에 심심해서 해본 건데 마력을 실처럼 가늘게 뽑아서 허공에 그리면 저렇게 은하수처럼 반짝거리더라. 아, 마음이 편해진다. 꼭 예전에 까망이 등에 누워서 밤하늘을 보던 그때가 생각나기도 하고……. “수식이 꼭 별자리 같지 않아?” “너 요즘 수식 연구하는 데 재미 들린 것 같네.” 그런데 저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도 루카스는 어딘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저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는 그의 메마른 감수성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안 예뻐? 나도 어제 발견한 건데!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준 거란 말이야.” “그래, 예쁘다, 예뻐.” “앗, 너 지금 한숨 쉬었지? 지금 내가 한심하다 이거야?” “그렇다기보다는…….” 루카스는 어째서인지 약간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런데 천장의 은은한 빛을 받아 음영이 진 그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옅은 곤혹감이 어려 있어서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지금 내가 너랑 왜 이런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건지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 [133화] “뭐, 소꿉놀이?” “그래, 소꿉놀이.” 내가 눈을 깜빡인 딱 1초의 시간이었다. 귓가에 흘러든 ‘그래, 소꿉놀이’라는 속삭임이 어쩐지 방금 전보다 한결 더 낮고 굵어졌다고 느끼는 것과 동시에 내 눈앞에 있던 소년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리깔린 붉은 눈동자가 고요히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훅 숨을 들이켰다. 화악. 내가 평정을 잃자 순식간에 마력이 흩어지며 천장에서 반짝이던 빛도 일시에 사그라졌다. 앗! 나는 흠칫해서 반사적으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너! 내가 전부터 이런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요?” 허억, 나 왜 존댓말 하고 있는 거니? 어른 루카스만 보면 이상하게 전처럼 편하게 대하지를 못 하겠단 말이야? 방 안이 갑자기 어두워져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한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껏 당황한 내 얼굴을 루카스가 보지 못할 테니까. 어둠 속에서 나른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네가 너무 무방비하게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데 갑자기 내 손목에 온기가 닿아서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곧바로 어정쩡하게 상체를 일으키고 있던 내 어깨에 힘이 실렸다. “괜히 건드리고 싶어지잖아.” 그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한순간에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엉겁결에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힐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도 루카스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지, 진정하자. 얘는 루카스라고. 그래, 겉모습은 좀 늙었지만 그래 봤자 루카스야! 나는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낮이고 밤이고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에 들락날락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차피 넌 내가 이 모습을 할 때만 의식하니까.” 귓가에 부스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그런데 이상하다. 나 왜 긴장하고 있는 거지?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귀가 간지러워서 미치겠고……. “내가 원래 애가 아니란 것도 이제는 충분히 알 텐데.” 그러다 문득 피부 위에 온기가 눌러 붙어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 잠깐만요? 손목은 왜 그렇게 이상하게 만지는데? 아직도 루카스는 내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피부 위를 훑는 손가락 때문에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움찔거리게 되었다. “아니면 우리 공주님은 기억력이 썩 좋지 않나?” 루, 루카스야? 지금 너랑 나랑 너무 가깝게 붙어 있는 것 같지 않아? 아까 하던 내외를 계속해 주면 안 되겠니……? 게다가 성대에 꿀을 발랐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 너무……. “하루에 한 번씩은 상기시켜 줘야 하는 걸까?” “…….” “그랬으면 좋겠어?” 고막에 흘러드는 나지막한 음성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어둠에 적응이 된 눈에 익숙하지만 낯선 사람의 형체가 비쳤다. 나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긴장감 있는 공기는 다음 순간 깨어졌다. “숨은 좀 쉬지그래.” “아, 이어 앙나?” 앗, 내 코를 당장 놔라! 나는 갑자기 장난스럽게 손으로 내 코를 꼬집는 루카스 때문에 버둥거려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소리 없이 눈앞이 환해졌다. 악, 내 눈!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시야를 가렸다. 아까부터 말이야, 불 켤 때는 예고 좀 해달라고. 흑흑. “다음부터는 조심해.” 불시에 빛의 공격을 받은 눈이 아파서 손으로 비비며 고개를 들자 루카스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어느덧 다시 소년일 때로 돌아와 있어서 나는 적잖이 안심했다. 루카스는 작년 이후로 신체 리모델링을 아직 하지 않아서 2년 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루카스가 가끔씩 어른인 모습으로 변신해 나를 놀라게 하는 걸 저 혼자 재미있어 하며 즐긴다는 사실이었다. “아무 남자나 이렇게 침대에 눕히고 그러지 말고.” “네가 아무 남자야?” 쟤 가끔씩 웃기는 말을 한단 말이야? 나랑 저랑 몇 살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저래? “물론 난 아무 남자가 아니긴 하지.” 그런데 루카스는 내 말에 한순간 멈칫하다가 곧 미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만족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반대로 불만스러운 것 같기도 한 실로 애매모호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지 않은 것도 맞고.” 어라, 멀어지는가 싶던 루카스가 다시 걸음을 옮겨 나한테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따가운 눈을 비비면서 오늘따라 이상한 그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으응? 그런데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고 그러나? 왜 이렇게 바싹 다가와? 나는 침대에 앉아 있는 내 앞으로 다가와 선 뒤 상체를 굽히는 그를 의문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잠시 후 내 귀에 닿는 루카스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흔들고 말았다.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는 말지?” “……!”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괴롭혀 주고 싶어지니까.” 완전히 무르익은 성인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귀를 곧바로 꿰뚫고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으나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루카스만 시야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너 자꾸 장난칠래?” 나는 심통이 나서 홧홧한 귀를 붙잡고 원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런 나를 향해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처음 방 안에 나타날 때처럼 소리 없이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루카스의 빈자리를 보며 혼자서 씨근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 * * “공주님께 또 선물이 왔어요.” “아, 나중에 확인해 볼게.” “그럼 늘 두던 방에 옮겨 놓을게요.” 나는 오늘도 클로드와 함께 단란하고 오붓한 산책 시간을 가진 후 에메랄드궁으로 돌아왔다. 크흑, 클로드가 또다시 내 장미 화원을 어찌나 위험한 눈빛으로 살펴보던지! 열대 수목원 이야기는 지난번에 내가 잘 구슬려서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초대장도 늘었어요, 공주님. 영식들에게 온 편지도 이만큼이나 돼요!” 오늘은 세스가 아니라 한나가 나한테 온 초대장을 정리했나 보다. 앗, 그런데 진짜 다른 때보다 숫자가 많은 것 같잖아? “나날이 아름다워지시는 공주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 필릭스는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물론 폐하께서는 수심이 깊으신 것 같지만 말이죠.” 필릭스는 나를 보면서 아련한 눈빛을 보냈다. 그 모습이 릴리와도 퍽 닮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이런 눈빛을 보일 때마다 머릿속에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다이아나 엄마를 점점 더 닮아 간다고 그들이 이따금씩 말하는 것을 나도 들었으니까. “공주님께서 대외적인 활동을 시작하신 후부터 영식들이 꾸준히 접근해 오니 그러실 만도 하죠. 전부터 멋지다고 소문이 자자한 자르비에 공자님과 듀크 공자님도 공주님께 매일같이 연서를 보내고 있잖아요.” “한나, 연서는 아니야.” “공주님께서 너무 순진하신 거예요. 남자는 흑심 없이는 그렇게 매일 편지를 써 보내지 않는다니까요?” “한나, 공주님 앞에서 경망스러운 소리를 하지 마렴.” 그 순간, 때마침 방으로 들어온 릴리가 한나를 꾸중했다. 그녀는 릴리의 말에 찔끔한 듯 잠시 시무룩하게 있다가 금세 기운을 차리고 슬그머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전 다른 공자님들보다 알피어스 공자님을 응원하고 있긴 한데요…….” “한나.” 하지만 릴리는 강력했다! 단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한나의 입을 다물게 만들다니. 한나는 영식들의 이야기를 하지 못해 입이 근질근질한 눈치였지만 방금 전에 이미 두 번이나 릴리에게 지적을 당한 터라 다시 말을 잇지는 못 했다. “릴리안 님께 한 번은 혼날 줄 알았어.” “세스, 너도 같이 궁금해해놓고! 이건 배신이야.” 나는 세스와 한나가 속닥거리는 것을 듣고 그냥 한번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한나, 이제키엘파였구나……. 하긴, 전에 파랑이 선물을 받았을 때부터 유난히 이제키엘 얘기가 나오면 호들갑이긴 했지. 나는 근래 들어 궁인들이나 영애들 입에 더욱 자주 오르내리는 이제키엘을 잠시 동안 머릿속에 떠올렸다. “사실 내일 있을 야유회도 폐하께서는 영 마뜩잖으신 눈치입니다만.” “괜찮아. 아빠는 내가 아빠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 다 안 좋아하시니까.” “하하…….” 필릭스가 슬쩍 내 눈을 피하며 웃었다. 이것 봐, 필릭스도 내 말에 부정하지 않잖아? 이제는 클로드가 날 궁 안에만 고이 숨겨 놓으려고 하는 걸 다들 아는 게 분명했다. 물론 나도 그가 나를 아껴서 그러는 건 알지만 말이지……. 그래도 이 나이 먹고 언제까지나 아빠하고만 놀 수는 없는 거잖아요? “하지만 역시 이런 날들도 오래 남지는 않은 거군요. 공주님께서 후에 결혼하시면 폐하께서 얼마나 적적해하실지…….” 앗,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이르답니다. “괜찮아, 난 비혼주의자야.” “예?” “네?!” 어째서인지 내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으, 으음. 일국의 공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독신주의라고 하니까 놀란 걸까? 그러나 그들은 모두 빠르게 동요를 가라앉혔다. 어쩌면 그냥 이 나이 때 흔히 하는 ‘난 결혼 안 하고 모두와 같이 살래!’ 같은 소리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곧 필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왔다. “그 말씀을 들으면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군요.” 아, 아니? 대번에 클로드 소리부터 나오다니? 이제는 정말 클로드의 이미지를 지켜줄 수 없게 되었는지도……. “저야 공주님께서 에메랄드궁에 오래오래 함께 계셔 주시면 좋지만 말이죠.” “아앗, 전 공주님께서 결혼하셔도 계속 모실 생각이었어요!” “한나, 그런 당연한 소리를 생색내면서 하지 마.” 으흑, 역시 오늘도 단란한 에메랄드궁의 식구들……. 그렇게 내가 새삼스럽게 훈훈한 기분에 젖어 있을 때, 여느 때처럼 한나와 티격태격하던 세스가 내게 말했다. “공주님, 혹시라도 이상한 영식들이 공주님께 꼬여들면 살짝 말씀해 주세요. 제가 조용히 가서…….” 스윽. 세스의 날카로운 구두 굽이 번쩍! 섬뜩한 빛을 냈다. 여, 역시 벌레 퇴치 전문가! 그 이름 하여 바퀴벌레 헌터 세스! 과연 다년간의 노하우로 세X코 못지않은 살상력을 겸비하게 된 세스인 만큼 그녀는 소리 없이 강했다! “로베인 경, 공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시는 분이니 내일 야유회 때도 위험한 영식들이 공주님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잘 지켜주시리라 믿어요.” “맞아요, 로베인 경만 믿을게요!” “예, 내일은 특히나 각별히 주위를 살피겠습니다.” 피, 필릭스. 뭘 또 그렇게 불끈 다짐하면서 대답하는 거야? 게다가 내일 야유회는 영애들만의 모임인데요. 그나마 릴리가 그런 그들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공주님, 지난번에 맞추신 실크 장갑이 오늘 마무리되었다고 해요. 자수가 아주 근사하던데, 지금 한번 보시겠어요?” “그래. 같이 가서 보자, 릴리.” 나는 결의를 다지는 필릭스와 그를 부추기는 세스와 한나를 애매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곧 릴리와 함께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섰다. ======================================= [134화] “야유회? 그런 게 재미있어?” 오늘도 내 방을 찾아온 루카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지난번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그를 흘겨봤으나 루카스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에잇, 관둬, 관둬. 얘를 상대로 길게 심통을 내 봤자 내 손해다. 나는 탁자 위에 있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재미있든 없든 알피어스에서 주최하는 거라서 가는 거야.” “흰둥이네?” 내 말에 루카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얼굴을 보아 하니 지금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는 루카스도 참 변함이 없단 말이지? “그래, 제니트가 초대장을 보냈거든.” “아, 그 키메라.” “키메라 아니라니까.” 이번에는 그의 무신경한 말에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루카스 얘는 자꾸 제니트한테 키메라라고 하더라. 물론 제니트가 보편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애는 아니지만 말이지. 그래도 그런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제니트가 좀 많이 착하고 예쁘지 않니?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앗!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왜 제 레이더에 매우 꺼림칙하고 찜찜한 무언가가 걸리는 거지요? “너 설마 따라오려는 거 아니지?”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루카스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끄응, 이상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수상쩍은 느낌이 가시지를 않는 거지……. 루카스는 예전부터 가만히 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 영 안심이 되지 않았다. 내가 계속해서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자 루카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 오히려 내 의심의 불은 더욱 활활 지펴지고 있었다. 으음, 왜 내 눈에는 루카스가 순한 양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를 현혹시키려 하는 거짓말쟁이 늑대로 보이는 걸까……. “너, 한 입 가지고 두말하면 안 돼.” “왜 이래? 같이 가달라고 해도 내가 싫거든.” 저렇게 질색하는 걸 보니 진짜 아닌가? 나는 구린 표정을 짓는 루카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하는 수 없이 그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말았다. * * * 다음 날, 나는 알피어스에서 주최한 야유회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사실 순간 이동으로 가면 더 빠르고 효율적인데 그렇게 하면 나한테 줄줄이 달린 수행원을 모두 이동시킬 수도 없는 데다, 또 그러다가 클로드한테 걸리면 밥줄이 잘린다고 다들 하나같이 우는 소리를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기간 마차를 타면 나중에 얼마나 몸이 삐거덕거리는지 예전의 외출 때 배운 바가 있어서, 나는 흔들림 방지나 공기 청정 마법 같은 것을 걸어놓고 그야말로 쾌적하고 흔들림 없는 마차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훗, 침대…… 가 아니라 마차는 과학이니까요! “공주님,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필릭스의 부름에 마차에서 내려섰다. “공주님!” 그리고 내가 필릭스의 손을 붙잡고 지면에 발을 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기껏 멋을 낸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달려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안녕, 제니트. 잘 지냈어요?” 내가 미소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자 제니트도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드리웠다. “어서 오세요, 공주님. 보고 싶었어요.” 햇빛을 머금은 푸른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아앗, 오늘따라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잖아? 2년 전의 제니트가 아직 덜 여문 꽃봉오리였다고 한다면, 요즘의 제니트는 그야말로 갓 피어난 꽃 같은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뒷골목식으로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17살이 된 제니트는 죽여주게 예뻤다. 갓난아기일 때부터 내가 남다른 청순미를 자랑하고 있던 릴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미인에 약했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노곤노곤하게 풀어져서 흐뭇한 미소를 드리우고 있지 않을까? “아, 제니트, 잠시만. 머리가 조금 헝클어졌어요.” 그러고 보니 이 완벽한 아름다움에 옥의 티가! 나는 손을 들어 제니트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아니, 물론 제니트는 머리가 헝클어져도 변함없이 예쁘지만 그래도 오늘 야유회를 위해 기껏 공들여 꾸민 머리니까 기왕이면 처음 모습 그대로인 게 좋잖아. “자, 이제 됐어요.” “감사해요, 공주님.” 제니트도 약간 수줍은 기색을 보이면서도 내가 머리를 만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앗, 그런데 필릭스! 왜 그렇게 옆에서 아빠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를 보고 있는 거야? “저쪽에 먼저 온 영애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같이 가요, 공주님.” 나는 멋쩍은 마음에 필릭스를 외면하며 걸음을 옮겼다. 백합 소녀에게 그렇듯이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도 이제는 마그리타 양이 아니라 제니트라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제는 그러는 게 익숙한 걸 보면 지난 시간 동안 내가 제니트와 좀 더 친해지긴 한 모양이다. 게다가 전에는 그녀를 의심의 눈으로 보던 나였으나, 이제는 흑마법을 사용해 나를 해코지하려 한 게 제니트가 아니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어머, 공주님! 어서 오세요.” “이렇게 뵙는 건 오랜만이네요.”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오늘의 야유회에 초대받은 영애들이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재잘거렸다. 나도 그녀들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저도 반가워요. 제가 늦은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마그리타 양, 오늘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공주님께서 참석해 주셔서 영광인걸요.” 오늘의 자리는 사적인 것이라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제니트의 이름 대신 마그리타 양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래서, 글쎄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왔다지 뭐예요.” “세상에, 정말요? 웬일이에요, 아하하하.” “발렌틴 양이 많이 난처했겠어요.” 영애들의 한담이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나도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중간중간 그녀들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으흑, 하지만 역시 별로 재미는 없구나. 제니트를 위해 알피어스에서 이렇게 야유회를 열어준 건 처음이라 방문하긴 했는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마그리타 양도 드뷔닉의 홍차를 좋아하지 않나요?” 나는 방긋 웃는 얼굴로 영애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는 제니트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그러자 제니트가 잠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사르르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네, 맞아요. 전 드뷔닉의 홍차 중에서도 레몬을 넣은 가향차를 좋아해요.” “드뷔닉의 홍차에 커피를 블렌딩한 것도 새롭던데요.” “아, 그런 게 있었나요? 다음 기회에 꼭 맛보고 싶네요.” “어머나, 공주님도 마그리타 양도 드뷔닉의 홍차를 선호하시는군요.” “저희 어머니께서 자주 드시는데 저도 이제부터는 좀 더 제대로 즐겨봐야겠어요.” 나는 영애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제니트를 보며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훗, 계획대로! 아무래도 이런 자리를 직접 주최한 건 처음이라 그런지 좀처럼 대화에 못 섞여드는 것이 보여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 안심하고 뒤로 빠져도 되겠다. 게다가 뽀얀 뺨을 약간 상기시킨 채 밝게 웃고 있는 제니트는 그야말로 극상의 미를 자랑했다. 크으, 미인이란 너무나도 소중한 것. 미인은 모두가 함께 지켜줘야 합니다, 암요. 하지만 사실 제니트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영애 모두가 가지각색의 매력을 간직한 꽃들처럼 어여뻤다. 그래, 원래 미에는 순위가 아니라 취향만이 있을 뿐이죠. 그런 의미로 내 얼굴은 꽤나 내 취향이라 기쁘다. 다이아나 엄마 감사합니다. 클로드 아빠도 감사합니다. 부모님이 나란히 제 취향의 미인이라 그 유전자를 이어받을 수 있어서 저는 너무나 행복해요, 흐흑. 부스럭! 응? 그런데 갑자기 옆쪽에 있던 덤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지금은 바람도 안 부는데. “음?” “저기 저 덤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잠시 후에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영애들도 기이함을 느낀 눈치였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긴 숲의 경계잖아? 그럼 혹시 길을 잃은 밤비 친구라거나? 물론 알피어스에서 거친 들짐승이 있는 곳을 야유회 장소로 삼을 리는 없었지만, 이 근방에는 황실에서 허가를 내린 사냥터도 있다고 알고 있으니까.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손가락 끝에 마력을 모았다. 바스락! “헉!” 깡총! 그리고 곧 덤불을 헤치고 튀어나온 생물체에 긴장을 풀고 다시 손을 내리고 말았다. “어맛, 아기 토끼네요.” “귀여워라.” 길 잃은 동물 친구는 맞는데 자그마한 토끼였다. 괜히 오버해서 마력부터 날렸으면 미, 민망했을 뻔……. “털이 정말 부드러워요. 공주님도 한번 만져 보실래요?” 저렇게 막 만지면 토끼가 놀랄 것 같은데. 그리고 난 이제 동물은 별로……. “전 괜찮아요.” 나는 영애들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부스럭. 그런데 돌연 숲에서 다시 한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엄마 토끼인가? 부스럭! 앗, 그런데 저 그림자, 왠지 곰 같잖아! “모두 잠시만 뒤로 물러나 주시겠어요?” 숲에서 다가오는 형체는 토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우직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동물이 많이 나오는 곳을 야유회 장소로 삼았지?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작은 동물 친구는 아닌 것 같으니 미리 경계해서 나쁠 건 없겠지. “저게 뭘까요?”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니트가 불안 반 호기심 반인 목소리로 물었으나 형체만 봐서는 아직 저 생물체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영애들을 뒤로 물리고 앞으로 팔을 뻗었다. 필릭스와 다른 기사들도 저마다 검을 빼 들 준비를 하고 숲을 경계하고 있었다. 바스락! 마침내 저벅저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숲의 경계를 넘어 햇빛 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아무래도 제가 길을 잃은 모양이군요.”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것은 곰이 아니었다. 나는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알피어스 공?” 아니, 흰둥이 아저씨! 당신이 왜 거기에서 나오는 겁니까? 숲에서 나타난 것은 정복 대신 사냥복을 입고 있는 로저 알피어스였다. 긴장하고 있던 다른 기사들과 영애들도 예상 밖의 인물에 놀란 듯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알피어스 공작은 상상 이상으로 얼굴이 두꺼웠다. 그는 뻔뻔할 정도로 반질한 낯을 한 채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오벨리아의 번영이 함께하시기를.” 태연하게 인사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황당한 기분에 젖어 팔을 내렸다. “공이 야유회 장소에 방문하다니, 무슨 일인가요?” 옆에 있던 제니트도 깜짝 놀라서 ‘아저씨?’라고 새된 소리를 내뱉으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사냥복을 입고 있는 것을 봐서 이 근방에 있는 사냥터에 있었던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째서 우연을 가장해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났냐는 것이다. 내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묻자 알피어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아버지, 계속 모른 척해드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 방향은…….” 부스럭. 바로 그때, 알피어스 공작의 뒤로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그림 같은 남자의 모습에 내 등 뒤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 [135화] “꺄아!” “어머머!” “아, 알피어스 공자님?!” 으앗, 흰둥이 아저씨 다음에는 이제키엘인 건가! 하지만 먼저 등장한 흰둥이 아저씨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뜨거운 반응이구나. 알피어스 공작도 다소 민망한지 공연히 ‘크흠’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와 눈을 마주한 직후 한순간 멈칫한 이제키엘이 눈동자를 약간 가늘게 좁힌 채 제 아버지를 힐끔 쳐다보는 모습을 발견했다. “오늘 아침 이제키엘과 함께 사냥을 왔는데 부끄럽게도 제가 그만 숲에서 길을 잃었지 뭡니까. 쭉 걷다 보니 이곳이더군요.” “아니, 사냥을 허가받은 구역에서 한참이나 더 내려오셨군요. 그렇게까지 길을 잃을 수 있다니…….” 알피어스 공작의 설명을 듣고, 옆에 있던 필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어쩜 이렇게까지 끔찍한 길치일 수 있냐는 듯 마주한 사람을 다소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셔야겠습니다. 허가받은 구역 밖에서의 사냥은 벌금을 물어야 하니까요.” “크흠…….” 그 악의 없는 충고에 흰둥이 아저씨의 이마에 슬그머니 핏대가 서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야 그럴 만도 하겠지. 어차피 진짜 길을 잃어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닐 테니 말이야. 나는 대강의 그림을 파악하고 난 뒤, 참 저 양반도 이제는 별수를 다 쓰는구나 싶어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알피어스 공작의 기행에 미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던 이제키엘이 야유회에 와 있던 사람들에게 정중히 사과해 왔다. “예기치 못한 방문에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설마 야유회 장소까지 흘러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뜻밖의 무례를 저질렀군요.” “어멋, 전혀 아니에요, 공자님!” “오히려 이렇게라도 만나 뵙게 되어서 너무나 기쁜걸요!” “기왕 오신 김에 같이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떨지요?” 뜻하지 않은 이제키엘의 등장에 야유회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는 일명 오벨리아 최고의 신랑감이니까 말이지. 게다가 이제키엘은 20살이 되도록 아직 혼약한 상대도 없었기 때문에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인 것도 당연했다. 으음, 그리고 뭐랄까. 평소의 격식 있는 차림도 멋지지만 사냥복을 입은 이제키엘은 일종의 야성미까지 겸비되어 매우 남자다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빛이 나는구나, 빛이 나. “그래요, 오늘 야유회는 알피어스에서 준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나저나 흰둥이 아저씨 좋겠수? 계획대로 되어서. 영애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나 혼자 싫다고 하기도 그렇고, 또 오늘 야유회를 개최한 건 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그들을 쫓아낼 이유도 내게는 없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것도 나, 또 그들의 동석을 최종적으로 허락을 할 수 있는 것도 나였으니 딱 거기까지의 역할만 할 생각이었다. “그럼 사냥 도구를 시종에게 주세요.” 제니트도 그들의 방문이 퍽 반가운 눈치였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부담스러웠던 걸까. 그러고 보니 알피어스에서 제니트를 위해 열어준 첫 야유회인데 알피어스 공작 부인은 왜 없는 거지? 혹시 제니트가 혼자서 해보겠다고 했나. 으음, 제니트의 성격으로 봐서 그럴 가능성도 꽤 높아 보인다. “크흠.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나이가 드니 그리 넓지도 않은 사냥터 안에서 길을 찾는 것도 꽤나 힘들군요.” “저런, 그러셨군요. 그래서 토끼 사냥은 많이 하셨나요?” 내 짓궂은 물음에 흰둥이 아저씨가 머쓱한 듯 ‘어흠, 어흠!’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영애들은 이미 그들이 나타난 이유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는 눈치였다. 이제키엘이 왔다고 신이 나서 까르륵 소란을 떨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젊은이들의 모임에 낄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으니 전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있겠습니다. 이제키엘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이보세요, 아저씨. 당신이 무슨 사랑의 큐피드입니까? 노력하는 모습이 꽤 귀엽기는 한데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왜인지 2년 전부터 저 아저씨가 나한테 거의 완전히 줄을 대려고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단 말이야. 나는 멀어지는 알피어스 공작을 약간 짜식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로베인 경도 여기 있었군.” “저야 공주님의 그림자 아닙니까. 한데 함께 온 다른 수행인들은 없는지요?” “숲 속에 두고 왔으니 신경 쓸 것 없다네.” “맙소사, 수행인들도 전부 길을 잃은 겁니까? 어떻게 그런 믿기지 않는 일이! 기사들을 모아 숲을 수색해 보라고 해야겠군요.” “아니, 그럴 필요는…….” “모두가 알피어스 공처럼 운 좋게 이곳을 찾으리라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잠시 집합!” “로베인 경, 잠깐 기다려 보게!” 나는 저쪽에서 벌어지는 알피어스 공작과 필릭스의 만담 같은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경청했다. 크으, 아직 남아 있는 필릭스의 눈새력이 이럴 때는 사이다로구먼. “알피어스 공자도 고생이 많네요.” 나는 시종에게 사냥 도구를 건네고 다가오는 이제키엘을 향해 말했다. 아까 처음 등장할 때 그가 했던 말에 의하면 그 역시도 제 아버지의 행동에 설마 했던 모양이니까. “티에로스 부근의 허가받은 사냥터는 이 자리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제니트에게 신경이 많이 쓰이셨던 모양입니다.” 이제키엘은 알피어스 공작이 보인 기행의 원인으로 가장 합당해 보이는 이유를 댔다. 그래, 그의 생각에도 이제 와서 나를 속일 수는 없을 것 같고. 혼자서 야유회를 주관하게 된 제니트를 걱정해서 우연을 가장해 걸음 했다는 것이 가장 그럴싸하고 듣기 좋은 미담 같기는 하지. 물론 그런 이유가 아예 없지도 않을 테고. “실은 숲에서 곰이 나온 줄 알고 마법을 쓸 뻔했어요.” “아버지와 제 상황이 퍽 곤란해질 뻔했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제키엘은 그 만일의 일을 상상하니 퍽 우스운지 여트막한 웃음을 흘렸다. 아,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긴 한데 저렇게 웃는 걸 보니 또 심장이 눈치 없이 나대는 게……. 그만 진정해라, 내 심장아! 아무리 본능적으로 미인에 약하다고 해도 그렇지, 으흑. “실은 오늘 아침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티에로스로 사냥을 가자고 하셨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끼기는 했지요.” 이제키엘의 웃는 얼굴은 심장에 매우 해로웠다. 나는 알피어스 공작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제니트를 보고 그만 자리를 비켜야겠다고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영애들이 공자의 등장을 퍽 반가워하고 있으니 야유회가 한결 더 즐거워지겠네요. 그럼 전 먼저 가 있을 테니 천천히 오세요.” “저는 다른 누구보다 공주님께서 저를 기꺼워해 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잇따른 그의 말에 나는 한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곧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이제키엘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마주한 이를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얕은 웃음과 함께 그의 말을 가볍게 받아친 뒤 뒤돌아섰다. “알피어스 공자와의 만남을 기꺼워하지 않을 이가 있다면 그게 더 놀랍네요.” 농담처럼 대꾸한 나를 향해 이제키엘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영애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향해 걸으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니트, 기별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을 텐데.” “아니에요, 오히려 와주셔서 좋은걸요.” 오누이처럼 훈훈하기만 한 그들의 대화가 오늘따라 손가락 끝에 난 거스러미처럼 느껴졌다. * * * “마그리타 양,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에는 저도 오늘처럼 밖에서 야유회를 열어보고 싶네요.” “공주님께서 주최하신 야유회는 분명 훨씬 더 멋질 거예요.” 어느덧 야유회가 파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한 영애들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황성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럼 제니트, 다음에 또 만나러 갈게요.” 내가 슬쩍 그녀에게 귀엣말을 하자 제니트가 밝게 웃었다. 그래도 오늘 야유회 때 그녀가 즐거웠던 것 같아서 다행이다. “제가 배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이제키엘이 내게 말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서 있던 알피어스 공작이 자리에서 내게 인사를 해왔다. 음, 어쩔 수 없군. 나는 내 앞에 내밀어진 이제키엘의 손을 잡았다. 한순간 제니트의 시선이 그와 내 맞닿은 손에 닿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향해 웃는 낯으로 인사했다. “공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 다음 다과회 때도 초대해 주세요.” “물론이죠.” 나는 제니트를 뒤로한 채 이제키엘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둘이서 걸음을 옮기게 되자 그는 내게 보편적인 화제로 말을 건네 왔다. “오늘 야유회는 즐거우셨는지요.” “물론이지요. 알피어스에서 이토록 정성들여 준비한 야유회인데 즐겁지 않았을 리가 있나요.” “제니트가 전부터 오늘을 많이 고대했습니다. 특히 공주님께서 초대에 응해 주셔서 많이 기쁜 것 같더군요.” 나는 이제키엘의 입에서 나오는 제니트의 이름에 힐끔 시선을 들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키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그리타 양과는 전부터 꾸준히 교류가 있었으니까요.” “그러셨지요. 공주님의 데뷔당트라면 저도 아직 선명히 기억이 납니다.” 윽,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끙 신음하고 말았다. 내 흑역사인 데뷔당트 날 얘기는 도대체 왜 꺼내는 거야? 아무리 그날이 내 공식적인 첫 데뷔 날이었다고 해도 좀 참아주세요, 으흑. “그 밖에도 공주님과 함께한 시간은 모두 어제 일인 듯, 하나같이 또렷하기만 하니.” 계속해서 귓가에 흘러드는 이제키엘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사실 저는 그런 기억들이 차라리 제 안에서 조금이나마 흐려지기를 바라기도 합니다만.”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옅게 배어나는 감정의 편린에 다시금 고개 들어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그 역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제키엘은 나를 향해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미소가 아니었다. 예전에 그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 나는 지금 눈에 보이는 미소가 잘 만들어진 미소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를 향해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그래요? 저는 지난 일을 길게 기억하는 편이 아니라.” “그러십니까?” “알피어스 공자는 기억력이 좋은 모양이네요.” 마침내 마차에 다다랐을 때, 이제키엘이 내 손을 약간 힘주어 잡았다. “이대로 놓아드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결례겠지요.” “알피어스 공자.”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사 정도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를 내가 거절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아래로 내리깔리는 은색의 속눈썹과 그 밑으로 요요한 금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침묵했다. 곧 이제키엘의 입술이 내 손등에 가볍게 닿았다. 초목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것 같은 그때, 그가 나를 향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게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손에서 온기가 떠난 직후, 나는 그에게서 뒤돌아서 곧바로 마차에 올랐다. ======================================= [136화] 문이 닫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이제키엘이 서 있는 창문 쪽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옆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 나는 자꾸만 다른 곳으로 가려는 상념을 붙든 채 아까 보았던 제니트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제니트가 예전보다 약간 소극적인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어릴 때 오히려 더 당찬 구석이 있었다. 첫 데뷔당트 때 바닥에 떨어진 리본을 가져다주기 위해 혼자 내 뒤를 쫓고, 클로드의 앞에서 그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인사할 정도로. 그리고 소설 속의 그녀 역시 당돌한 사랑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제니트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예쁜 아가씨였지만……. 그리고 방금 전에 본 이제키엘은……. 나는 자꾸만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는 상념에 약간 가라앉은 기분으로 달리는 마차의 창밖을 보았다. “야유회라고 해봤자 역시 별거 없네.” “헉!” 그리고 갑자기 앞에서 새어 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렸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직후 곧바로 소리 지르고 말았다. “루카스!” “왜?” 왜? 왜에? 왜에에? 너 지금 왜라고 했니? “네가 여기 왜 있어! 너 때문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악, 진짜 깜짝 놀랐네! 하지만 루카스는 자기 때문에 경기하는 나를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으흑. 그래, 네가 짱 먹어라. 네가 이 구역 최고의 뻔뻔남이다, 으헝. “잠깐! 그런데 설마 황성에서부터 따라온 건 아니겠지?” “하,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라니까.” 루카스는 내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저 따위 소리를 해댔다. 저기요? 그렇게 공사다망한 사람이 왜 지금 내 마차를 훔쳐 타고 있는지 전 그게 의문입니다만? 그리고 이어서 덧붙여진 루카스의 말에 나는 그만 또 한 번 흠칫 놀라고 말았다. “흰둥이 소굴이 비었길래 좀 뒤져 보고 왔지.” “뭐어?” 뒤, 뒤져요? 뭐를? 흰둥이 소굴이라면 알피어스 공작저? 거기를 네가 뒤졌다고? “그냥 개인적으로 찾아볼 게 있어서 그랬던 거니까 넌 신경 쓸 거 없고.” 그렇게 상큼하게 말씀하셔 봤자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습니까! 크윽, 하지만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나. 루카스 얘가 아무 예고 없이 저렇게 움직이는 게 처음도 아니고. 나는 반쯤 체념한 채 말했다. “그래, 원하던 건 찾았니?”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해. 다음에 한 번 더 뒤져 봐야지.” 그의 태연자약한 대답에 나는 멈칫했다. 호, 혹시 제가 지금 범죄 예고 현장에 있는 겁니까? 이것은 무단 가택 침입! 하지만 나도 전에 다른 사람들 몰래 알피어스 공작저에 들어간 적이 있으니까 남 말 할 처지는 아닌 건가. “너 또 더러운 거 묻었어.” 내가 그런 생각에 눈동자를 흔들고 있을 때, 루카스가 지나가듯 툭 말을 던졌다. 그는 여전히 내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괸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가 곧 담담히 말했다.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거든.” 이제는 나도 루카스가 말하는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로 제니트가 무의식중에 흘려보낸 마력이었다. 때는 2년 전. 나는 루카스에게 한참 마법을 배우다 말고 제니트를 볼 때마다 느꼈던 이상한 위화감에 대해 무심코 말했는데, 그날 루카스는 한밤중에 알피어스 공작저로 잠입해 잠들어 있는 제니트의 마력 상태를 스캔해 보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나는 다음 날 그 얘기를 듣고 루카스의 막 나가는 행동에 당연히 기함했으나……. 으흑,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진 데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내 힘으로는 이놈을 막을 자신이 없는 것을. 어쨌든, 그날 루카스는 드디어 내 몸에 자신의 허락 없이 더러운 것을 묻혔던 인간이 누구인지 알았다며 후련해했다. 아니, 솔직히 나는 저 말을 듣고 내 몸에 누가 뭘 묻히던 왜 저놈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지 어이가 없었지만 말이지. 아무튼, 루카스의 설명은 이러했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흑마법에 의해 인위적으로 태어난 아이인 만큼, 제니트의 몸에 있는 고유의 마력도 다소 특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따라 덕지덕지도 묻혀놨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거슬려.” “그래? 중간에 한 번씩 털어내긴 했는데. 뭐, 감정 상태에 따라서 강도가 달라진다고 네가 그랬으니까.” 놀랍게도 제니트의 마력은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니트가 의도하고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나, 그녀의 마력이 제니트의 무의식에 영향을 받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루카스가 제니트를 처음 보았던 7살 때에는 마력의 움직임이 아주 미약했기 때문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의 눈에도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마력의 움직임이 활성화되었다고……. 내가 제니트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고 말았던 이유도, 또 처음에 그녀를 껄끄럽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 쉽게 마음을 열고 말았던 것도 그녀의 마력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기분이 묘해지고 말았다. “너무 그러지 마. 어차피 금방 정화할 수 있잖아.” 루카스는 내 몸에 묻은 제니트의 마력이 꽤나 마음에 안 드는지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일 년 전의 어느 날인가에는 ‘역시 그 키메라 그냥 없애버리는 게 어때?’라고 섬뜩한 소리를 해서 내가 얼마나 기겁했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가 파티 도중 내 앞에서 넘어지려고 하는 제니트를 붙잡아준 날이었던가? 하지만 제니트의 마력이 나를 해하려는 의도로 움직이는 건 아니라고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는. 게다가 애초에 그녀의 마력은 그리 강하지 않아서 타인을 단번에 홀리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외로운 어린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무의식이 타인의 호감을 끌어내는 데 아주 약간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움직이고 있는 것이 바로 제니트의 마력이었다. “가만히 있어봐.” 나는 루카스가 또 제니트를 없애버린다는 소리를 하기 전에 내 몸에 묻었다는 마력을 정화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몸 안의 마력을 끌어내기 전에 루카스가 먼저 내게 손을 뻗었다. “아주 그냥 치덕치덕 골고루 잘도 묻혔네.” 루카스의 손이 이마에 닿는 것과 동시에 은은한 흰 빛이 시야에 번졌다. “여기도.” 닿을 듯 말 듯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손길이 어깨에서 멈추었다. 지난 2년간 루카스에게 정화 마법을 배워 이제는 나도 제법 잘할 수 있었는데도 그는 굳이 직접 손을 움직였다. 우리 둘 다 등받이에서 몸을 떨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가까웠던 거리는 루카스가 내게 팔을 뻗으며 더욱 근접해졌다. 나는 살짝 맞닿는 무릎에 기이하게도 약간 어색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루카스의 손이 팔을 타고 내려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제일 더러운 거.” 별안간 시선을 내린 루카스의 붉은 눈동자 안에 차가운 미소가 어리는가 싶었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 직후, 갑자기 손목 부근이 휑해졌다. 아까 전 이제키엘이 손댔던 장갑이 시야에 고인 빛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내 실크 장갑이 새하얀 재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는 광경을 잠시 동안 넋 놓고 지켜보았다. “아앗!” 그리고 루카스가 완전히 맨 피부를 드러낸 내 손을 보고 배부르게 웃는 순간에야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내 장갑! 너 지금 뭐 한 거야!” “버려. 더러운 거야.” “이번에 새로 맞춘 건데!” 내 원성에 루카스가 손을 한 번 허공에 휘저었다. 곧 그의 손에는 방금 전 내가 끼고 있던 실크 장갑과 똑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자, 됐지?” 나는 기분 탓인지 오히려 전보다 한결 더 럭셔리해진 것 같은 새 장갑을 보며 멈칫했다. 뭐, 뭐지? 저 섬세한 자수는 도대체 뭐지? 왜인지 실크에서도 전보다 더 비단결 같은 윤기가 흐르는 것 같아! 루카스가 주는 장갑을 엉겁결에 받아들고 나자 손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에 화내기가 더 애매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들어, 그 자식. 키메라 같은 그 여자애도 그렇고, 죄다 허락 없이 내 거에 더러운 거나 묻히고 말이야. 역시 흰둥이 소굴을 갈아엎어버려야…….” 그 후 나는 혼잣말 같은 루카스의 섬뜩한 중얼거림에 남몰래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저기, 내가 왜 네 거니? 난 내 거란다? 내 소유권은 나한테 있단다?” 하지만 루카스는 내 소심한 반박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 아무래도 지금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이니 그냥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아니, 그런데 이 마차는 내 거고 이 장갑도 내 건데 내가 왜 이 녀석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 확 쫓아내버릴까 보다. 나는 마차가 황성에 당도할 때까지 불만 어린 눈으로 루카스를 흘겨봐주었다. * * *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 나는 황성으로 돌아왔다. 루카스는 문이 열리기 전에 적당히 알아서 사라진 뒤였다. 피곤해서 곧바로 에메랄드궁에 가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지. 외출한 직후 돌아왔다고 클로드에게 인사하는 건 우리 둘 나름대로의 약속 같은 것이었으니까. “궁이 또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궁 안에 감도는 공기가 평소와 약간 다른 것 같았다. 나는 궁의 붕 뜬 분위기에 의문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가넷궁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궁인에게 무언가를 전해 들은 수행원이 앞으로 와서 내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공주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방금 전 검은 탑의 마법사가 폐하를 배알하였다고…….” 옆에서 흘러들던 목소리가 내 귀에서 멀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는 해를 등진 채 저 멀리서 걸어오는 정체 모를 남자를 눈에 담은 직후의 일이었다. 푸드득! 어째서였을까? 그를 보는 순간, 나는 한순간이나마 주위의 현실이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검은 새가 푸드득 날갯짓을 하며 낙조 위를 노닐었다. 바로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도 나를 발견했다. 나는 암흑 같은 검은 눈동자가 정면에서 나를 직시하는 모습을 숨을 죽인 채 바라보았다. 문득 깨달았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는 나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고, 어느덧 내 앞을 가로막고 선 필릭스가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아아, 그렇군.” 장신의 남자가 곧 느리게 입을 열더니 나른한 음성을 뱉어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이시군요.” 나는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에 이유 모를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주님.” 그가 연극을 하듯 몸을 움직여 나를 향해 인사를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제 소개를 드려야겠군요.” 그의 태도는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으나 다소 지나치리만큼 자유분방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저는 검은 탑의 수호자, 마법사 카락스라고 합니다. 오벨리아의 축복과 번영이 함께하시기를.” 검은 탑의 마법사. ======================================= [137화] 그의 소개를 들은 내 등 뒤의 수행원들이 깜짝 놀라 훅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오직 나와 필릭스만이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마음의 동요를 내비치고 있지 않았다. “검은 탑의 마법사…… 당신이 말인가요?” “세간에서는 그리 부르더군요.” 본인을 검은 탑의 마법사라고 소개한 카락스는 인사를 마친 뒤 조용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군요. 아바마마를 배알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들었어요. 오벨리아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놀라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태연히 인사를 받자 그의 눈동자에 한순간 이채가 떠올랐다. 물론 마주한 남자의 기이한 분위기에 나 역시 잠깐 동요하기는 했지만……. 예전에 클로드가 말했던 바에 의하면 결국 가짜라는 거 아니야? 그런데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다가 3년 만에 또 나타난 이유가 뭐지? “호오.” 나는 마음속에 의구심을 품고 가짜 검은 탑의 마법사인 남자를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런데 돌연 알 수 없는 감탄을 흘리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걸음을 떼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이 이상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불허합니다.” 하지만 필릭스가 그를 제지했다. 그러자 그는 제자리에 멈추어선 채 흥미가 동한 눈빛으로 나를 요리조리 훑어보았다. “그대는 황궁의 예법을 잘 모르나 보군요.” 그 눈빛이 퍽 무례했기 때문에 나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아,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그런데 그는 내 말을 듣고 한차례 헛웃음 같은 것을 흘리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갈아치우며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공주님, 이런 질문은 실례란 것을 압니다만, 혹시…….” 그리고 이내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고 엄중히 속삭였다. “도를 믿으십니까?” “……?” 나는 한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 머릿속에 이미 수많은 물음표가 물 만난 고기처럼 뛰쳐나와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게 제대로 들은 게 맞을까 싶어 슬쩍 눈길을 돌리니 필릭스도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럼 내 귀의 성능이 이상해진 건 아니란 말인데……. “…….” 그럼 뭐야, 이 사람. 도르미……? 도르미였어? “지금 제게 농담을 하신 건가요?” “이런, 농담 같았습니까?” 나는 난처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주위의 수행원들은 ‘역시 괴짜 마법사’라고 대충 납득하고 넘어가는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나는 이 사람이 영 수상하고 마뜩잖았다. 그러나 어쨌거나 대외적으로 검은 탑의 마법사라고 하는 이 남자를 상대로 내 행동반경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것도 맞았다. 으음, 그냥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무시하는 게 낫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 뒤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어머나, 아바마마를 만나 뵈러 가는 길이었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네요. 마법사님도 해가 지기 전에 살펴 가세요. 그럼.” 도 안 믿어요, 옥장판 안 사요! 그러니까 날 붙잡지 마! “그럼, 혹시 윤회를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를 스쳐 지나가던 바로 그 순간 귓가에 바람처럼 날아든 음성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은 채 나는 필릭스와 수행원들을 데리고 그대로 남자를 지나쳐 갔다. 뭐지, 저 사람? 왜 나한테 저런 걸 물어보는 거지? 방금 전 들은 말 때문에 기분이 찜찜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돌아가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에게 다시 다가가기는 망설여졌다. 나는 스스로를 검은 탑의 마법사라고 한 저 남자가 꺼림칙했다. 어두운 녹색 머리카락, 동공까지 새까만 검은 눈동자. 하물며 내가 아는 누군가와도 전혀 닮지 않은 낯선 얼굴.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는 왜 처음에 그를 보고 루카스와 닮았다고 생각한 거지……? * * * “나도 잊고 있었다.” 클로드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의 등장을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늘 그 낯짝을 보고 나서야 ‘그러고 보니 그런 놈이 있었지’ 싶더군.” “왜인지 분위기가 좀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과연. 그동안 뭘 주워 먹었는지 몇 년 전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기는 했던데. 그래 봤자 진짜인 척하는 광대인 것은 여전하지만.” 역시 가짜는 맞다는 거로군.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내가 너무 클로드를 맹신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우리 아빠가 가짜라면 가짜인 거지. 하지만 클로드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보았던 남자를 떠올리면 어김없이 기분이 찜찜해졌다. “너 검은 탑의 마법사가 다시 나타난 거 알아?” 이럴 때 내가 붙잡고 얘기하기 제일 만만한 사람은 역시 루카스로구나. 나는 그날 밤 또다시 내 방에 찾아온 루카스에게 검은 탑의 마법사 얘기를 꺼냈다. “그래?” 하지만 흥미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루카스는 다만 시큰둥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나는 ‘어라?’ 싶어졌다. “별 관심 없나 보네?” “어차피 가짜인 걸 뭐.” “앗, 가짜인 걸 어떻게 알아?” 나는 약간 놀라서 루카스에게 반문했다. 나야 클로드가 가짜라고 말해줘서 아는 거지만 얘는 어떻게 아는 거지? 황성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다 곧이곧대로 그 사람이 검은 탑의 마법사라고 믿는 눈치던데? 에메랄드궁에 있는 궁인들도 오늘 하루 종일 그 일로 떠들썩했고. 그러나 루카스는 얄밉게 입꼬리를 당기며 나를 비웃었다. “너 역사서 안 봤어? 검은 탑의 마법사라고 사기 치다가 나중에 들통 나서 여럿 뒈진 거 몰라?”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김이 샜다. 아, 역사서 얘기였냐. 난 또 뭐라고. “아니,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일 수도 있잖아. 무슨 근거로 이번에도 가까일 거라고 확신하는 건데?” “알려주면 뭐 해줄 건데?” 그런데 루카스 이놈이 갑자기 나한테 저따위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응? 뭐 해줄 거냐고?” 처음에는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을 마주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가령 지난번에 어둠 속에서 보았던 어른 버전의 루카스가 지금 갑자기 겹쳐 보인다거나……. “해, 해주긴 뭘 해줘? 됐어. 나도 뭐, 막 그렇게 궁금했던 건 아니거든?” 나는 흥 콧방귀를 뀌며 상체를 뒤로 물려서 루카스와 거리를 두었다. 그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던 듯 대수롭지 않게 말을 돌렸다. “그래서 아까 그 가짜 놈을 직접 만났다는 거야?” 그러합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도르미였지! “나한테 도를 믿냐고 묻던데.” “푸읍!” 그래, 웃기지? 어이없지? 이해합니다. 나도 딱 그 심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남자가 뒤에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윤회를 믿냐고도 묻더라고.” “뭐, 윤회?” 내 말에 루카스가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황당하지 않아?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어.” “그러게. 이상한 놈이네.” 그런데 루카스는 어째서인지 잠시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루카스의 얼굴을 살피다가, 가짜 검은 탑의 마법사를 보고 어딘가 널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그냥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 간다.” “어, 이렇게 일찍 가는 거…….” 슈욱. 야이! 인사도 안 하고 가냐! 아까 마차에서도 그러더니! 나는 얼마 전에 그랬듯, 또다시 심통이 난 채 방에 혼자 남아 루카스를 향해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불현듯 화르륵 분노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 밤중에 루카스, 쟤 때문에 열 받아서 이불을 뻥뻥 차고 있는 게 도대체 몇 번째지? 크악, 갑자기 생각하니까 더 열 받는다! 너 그냥 다음부터 내 방에 오지 마! 붕붕! “아, 맞아. 너…….” “으악!” 퍼억! 나는 베개를 들고 루카스가 사라진 허공에 대고 마구 휘두르다가 갑자기 나타난 형상에 깜짝 놀라 발을 삐끗했다. 방금 전 사라진 자리에 귀신같이 나타난 루카스가 내가 휘두른 베개에 팔을 맞았다. “지금 달밤에 체조해?” 하마터면 넘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루카스가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줬기 때문에 나는 민망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 그래도 역시 좀 창피하다! 내가 원맨쇼하는 걸 들키다니! 게다가 그냥 못 본 척 좀 해주면 덧나나, 꼭 저렇게 놀리듯이 말할 건 뭐야? 나는 괜히 무안함을 감추고자 루카스를 향해 따지듯이 말했다. “왜, 뭐 왜 뭐! 왜 또 갑자기 나타났는데?” 그러자 루카스가 넘어지려 하는 나를 붙잡아줬던 손을 놓으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니, 그 가짜 놈 만나면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보아 하니 그럴 필요 없겠네. 이제 보니 공주님 전투력이 장난이 아니신데?” 으, 으윽! 올해도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 나의 흑역사여……. “그럼 난 갈 테니까 하던 거 계속 열심히 해.” “당장 사라져 버려!”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다시 베개를 휘둘렀다. 하지만 루카스는 여전히 얄밉게 웃는 얼굴로 베개에 맞기 직전 순간 이동으로 내 방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잇, 그래도 한 대 정도는 맞아주고 가지! 나는 방에 혼자 남아 아까보다 더한 광란의 베개 휘두르기를 시전할 수밖에 없었다. 제39장 첫 사랑, 아픈 가시 같은 “이야, 공주님. 지난번 수식 얘기는 띨띨이들에게 들었습니다.” 맑고 화창한 어느 날, 나는 검은 탑의 귀신같이 등장한 수장 할아버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주 환상적인 수식이더군요.” 으엑, 엄청난 얼굴이잖아? 한 일주일간 계속된 야근에 찌든 회사원 같구나. 하긴 탑에 종속돼서 낮밤 없이 일하고 있으니 맞는 건가? 헉, 생각해 보니까 더군다나 이건 종신계약이잖아? 하, 할아버지 갑자기 짠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신 거지요? 어휴, 저는 그만 소름까지 돋았지 뭡니까.” 요 근래 들어 무슨 연구를 하는지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는 다크 서클이 거의 턱 밑까지 내려온 얼굴을 하고 비실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과찬이세요. 검은 탑의 마법사님이 보시면 조악하다고 웃으실 걸요.”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마법사라 해도 수식은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는 피곤에 절은 모습을 하고서도 껄껄 웃으며 나를 추켜세워 주었다. 으앗, 보자마자 얼굴에 이렇게 금칠을 해주니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 “제가 지금 연구 중인 것도 공주님의 머리카락 한 올이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역시 그겁니까? 그럼 그렇지. 난 또 잠깐 넘어갈 뻔했잖아! 나는 잠깐 동안 탑의 수장 할아버지를 흘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데 쓰실 건 아니죠?” 그런데 내 말에 별안간 수장 할아버지가 깜짝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정말로 주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지극히 조심스러워졌다. 하기야 평소처럼 반쯤 농담식으로 던진 말에 웬일로 내가 낚여줬으니 놀라울 만도 했다. “딱 한 올이에요.” 그래도 그동안 지켜본 결과 신용 못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처음에야 다짜고짜 마약한 사람처럼 몽롱한 얼굴을 하고 피를 달라고 하는 모습에 질겁했지만 그때 이후로는 저쪽에서 알아서 조절하고 있기도 하고. 비록 겉모습은 초동안이지만 그래도 연세도 많으신 분이 저렇게 날밤을 새우면서 일하는 것도 좀 짠하고……. ======================================= [138화] 또 그는 정말 오벨리아와 클로드를 아끼는 것 같으니까 국익에 반하는 짓을 하지도 않을 것 같고, 평소에 보면 마법사로서의 윤리 의식도 제법 잘 준수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지. “헉, 허억. 이 영롱한 머리카락이라니!” 크헉! 그딴 립 서비스 하지 마! 내가 큰마음 먹고 머리카락을 한 올 떼어주자 수장 할아버지가 그새 어디론가 달려가 가져온 천 조각에 그것을 올려놓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흥분했다. “으워어,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 전 어서 가서 다시 연구를!” 그래요, 어서 가보세요. 머리카락 준 게 벌써부터 후회되기 전에……. “앗, 수장님! 드디어 나오셨군요! 이번에 제가 연구한 것 중에서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 “비켜, 비켜! 나 지금 다시 연구실에 간다! 내가 밖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나 찾아오는 놈 있으면 죽인다고 전해!” “흐엥, 지금 들어가시면 또 언제 나오시는데요?!” 나는 언제 기운 없이 비실거렸냐는 듯 생생한 모습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수장 할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리카락을 감싼 천을 갓난아기 품듯 소중히 품에 그러안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애잔하기도 했다. 쿨럭, 내 머리카락을 정말 어지간히 갖고 싶던 게 아닌 모양이구나. 아, 그나저나 오늘 수장 할아버지를 보면 검은 탑의 마법사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쳤잖아? “앗, 공주님도 계셨군요! 토론의 방에 함께 가시죠. 다른 마법사들은 이미 모여 있다고 하던데요.” 그럼 그냥 다른 마법사들한테나 정보를 얻어 볼까? “저희 탑에도 한번 방문해 주시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크으, 검은 탑의 마법사님이 저희 검은 탑에 와주신다면 이 얼마나 영광일까요. 꼭 신화의 재림 같고, 그림이 확 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탑 구멍 났잖아. 그림이 살기에는…….” “헉!” “흐억!” 바로 그 순간, 내가 던진 미끼를 물어 검은 탑의 마법사에 대해 주저리 떠들던 마법사들이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듯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곧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서둘러 탁자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빨리 천장 보수를!” “오늘부터 내부 수리를!” “일단 겉보기에라도 그럴싸해 보이게 외벽부터 고치자!” “오오, 멋진 임기응변!” “그래, 역시 세상은 공갈로 사는 거지!” 나는 그런 그들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다가 이내 토론의 방을 나섰다. 으음, 탑의 마법사들도 궁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나타난 가짜 마법사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구나. 그들이 본 검은 탑의 마법사는 어떤지 궁금했는데 아직 한 번도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하니. 나는 내 머리카락을 고이 싸들고 사라진 수장 할아버지의 빈자리에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탑을 나섰다. * * * “아를란타에서 곧 사절단이 온다고 하더군.” “그래요?” 나는 클로드의 어깨를 주물주물해 주다 말고 잠깐 손을 멈추었다. 아를란타의 사절단이라니, 이거 소설 속에서도 나왔던 에피소드 같은데? 제니트가 18살일 때가 아니라 17살일 때의 일이었나? 그럼 역시 하리 에른스트의 오빠이자 서브남인 카벨 에른스트가 사절단에 껴서 함께 오는 걸까? 나는 예전에 아를란타의 학교에서 보았던 은발 자안의 여학생과 갈색 머리카락과 벽안을 가진 소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요정님!’ 앗,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같이 떠올라 버렸어! “손이 놀고 있다.” 불시의 기습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내게 클로드가 말해왔다. 나는 입술을 작게 삐죽이며 다시 멈춰 있던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네, 알겠습니다요. 소인은 안마를 계속할 테니 폐하께서는 서류를 마저 보시지요.” “좀 더 안쪽으로.” “네엡.” 나는 그의 요구에 따라 태평양 같은 어깨의 안쪽으로 슬금슬금 손을 움직여 목덜미에 가까운 부위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자 클로드가 내 손길에 맞춰 고개를 슬쩍 앞으로 기울였다. 처음에만 해도 내가 안마해 줄 때마다 영 익숙하지 않은 듯이 뻣뻣하게 있더니 이제는 적응의 단계를 지나 심지어 즐기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여기 주물러 달라 저기 주물러 달라, 그렇게 힘을 살살 주면 간지럽기만 하다, 곧잘 훈수도 잘 두고 말이야. 나는 근육이 딱딱하게 뭉쳐 있는 어깨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슬슬 손이 뻐근하구나. “아타나시아.” “네.” “이번에 새로 손봤다던 마법 수식에 관한 안건, 추수제 때 시험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군.” 앗? 나는 뜻밖의 소리에 귀를 쫑긋하며 멀거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 각도에서 클로드의 얼굴이 보일 리 없었다. 나는 그의 예쁘장한 금발 뒤태만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 아빠, 새삼 두개골 모양이 참 예쁘시네요! “제가 쓴 거 보셨어요?” “보라고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었나?” 에헷, 물론 그건 그렇지만 말이죠. 나는 약간 머쓱해져서 아하하 웃었다. 지난번 생각했던 대로 이번에 새로 정리한 아에테르니타스의 수식을 식물 성장에 넓게 활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정리해서 집무실 책상 위에 슬쩍 올려놓은 것인데 다행히 좋게 봐주신 모양이었다. “다만 지금 이대로 하면 인력이 너무 많이 든다. 이번 달 내에 좀 더 시정해 오도록.” 헉! 미션 임파서블인가! 띠링! [갑자기 돌발 퀘스트가 떨어졌습니다!] [거절은 거절합니다!] 나는 클로드에게 강제 퀘스트를 부여받고 망연자실했다. 수식을 그 정도까지 축약시키는 것도 힘들었는데 여기서 뭔가를 더하라니! 우주의 기운이 필요합니다, 으흑! “아타나시아.” “네에.” 아이 참, 오늘따라 왜 자꾸 부르실까? 또다시 손이 놀고 있으니 좀 더 열심히 움직이라는 걸까? 하지만 그건 당신 때문인걸! 이 섬섬옥수로 아빠 어깨를 열심히 주물러주는 착한 딸에게 칭찬은 못 해줄망정 일거리나 덥석 안겨주다니, 너무해요. 으흐흑. 하지만 클로드가 나를 부른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뒤이어 흘러든 고요한 음성에 다시금 멈칫하고 말았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 왕좌에 앉고 싶으냐?”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움직였으나 여전히 나를 등지고 앉은 클로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내게 언제인지 모를 훗날의 일을 묻고 있었다. “아니요.” 나는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이내 솔직히 대답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제 소박한 꿈은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니까 말이죠. 솔직히 말하면 클로드도 그냥 황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나랑 한적하게 오순도순 살면 좋겠다. 다이아나 엄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클로드가 새 장가를 들어도 나는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물론 좀 서운하기야 하겠지만 클로드가 좋다면 반대는 하지 않을 거랍니다. “솔직히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은 있지만 그걸 원하냐고 물으시면, 글쎄요.” 하지만 새 장가 같은 건 아마도 틀림없이 클로드가 필요 없다고 하겠지. 나는 지금도 간혹 내 꿈속에 나타나는 다이아나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래, 이런 자리는 누가 줘도 갖지 않는 것이 낫다.” 클로드는 내 말에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주는 것 하나 없이 빼앗아가는 것만 많은 자리이니.” “원한다면 천하도 가질 수 있다는 오벨리아의 황제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는 후우 작은 웃음소리를 밖으로 새어 보내며 말했다. 왕위를 이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는 아직 내게는 먼 일로만 느껴졌고, 어차피 클로드도 지금 바로 무언가를 결정할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클로드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자식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문제에 있어 내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게 이런 것을 묻는 것 역시 클로드가 내 아버지가 아니라 단순히 오벨리아의 황제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사실도 알았다. “본래 세상에 대가 없이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법이니 천하를 가진 자라 해도 결국은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잃은 자나 마찬가지다. 너도 그것을 유념하고 있거라.” “네, 아빠.” 그가 아버지로서 물었기 때문에 나도 딸로서 솔직한 내 마음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든든하게만 느껴지는 클로드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 * * “흐음.” 클로드의 집무실을 나와 나는 회랑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 탓인지 이곳의 공기는 다른 곳에 비해 항상 더 무겁고 차가운 것 같다. 역대 황족들이 저마다 커다란 초상화 속에 몸을 담고 이 앞에 선 사람을 엄중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어서 그런가? 나는 초상화들의 시선을 느끼며 걷다가 이윽고 어느 그림 앞에서 멈추어 섰다. [아에붐(Aevum) 황제와 황태자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아나스타시우스는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단독으로 그린 초상화가 없었다. 나는 그림 속에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시야에 담다가 이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전부터 느낀 건데 이 사람들은 볼 때마다 참 재수가 없단 말이지? 생긴 것도 완전 성격 나쁘게 생겼어!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있다더니! 우리 아빠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살아생전 그렇게 괴롭혔답니까? 치사하게 그림도 자기들끼리만 홀랑 그리고 말이야. 자기들이 뭔데 우리 아빠만 왕따시키고. 에이, 퉤퉤퉤! 하지만 이제는 우리 아빠도 초상화가 있다, 이 말씀! 나는 죽은 선황과 황태자의 재수 없는 낯짝을 열심히 흘겨봐준 뒤 팔랑거리며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회랑의 가장 좋은 자리에 떡 하니 걸린 커다란 그림을 보고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띠우고 말았다. 아이고, 예쁘다. 여기 이 속에 있는 이 예쁜 처자는 도대체 누구예요? 그 옆에 있는 이 잘생긴 남정네는 누구 아빠예요? 나는 애정을 담아 우리의 초상화를 쓰담쓰담해 주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마음속으로만 한껏 찬양했다. 14살 때부터 그리기 시작한 클로드와 내 가족 초상화는 실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으, 으음. 솔직히 실물보다 0.5배 정도 더 멋지고 예쁘게 그려진 것 같기는 한데, 원래 약간의 미화는 다들 당연하게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분명 여기 걸린 다른 초상화들은 더 엄청난 합성과 수정을 반복했을 거라고! “크으, 역시 우리 초상화가 최고다.” 클로드와 내 초상화는 사실 회랑에 걸린 다른 황족들의 초상화와 약간 달랐다. 일단 우리는 분위기부터가 눈에 띄게 훈훈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림들을 보면 ‘다들 나 황제야! 나 황족이야! 내가 제일 잘 나가!’ 하는 듯이 눈에 힘을 빡 주고 도도한 척을 하고 있는데 클로드와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역대 황족들 중에 내가 제일 파격적인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 아닐까? 다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중에 혼자서 생글거리고 웃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을 그림일 수도 있는데 정색하고 그려 봤자 좋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애초에 난 화기애애한 가족사진 같은 분위기를 원했단 말이지. 그런 내 바람을 알았던 것일까? 놀랍게도 나와 함께 있는 클로드 역시 아주 여트막하게나마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 [139화] 물론 클로드는 미완성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대, 노안이 왔나 보군. 짐이 언제 이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거지?’라고 서늘히 읊조려 궁정화가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지만 이 그림이 마음에 든다는 내 말에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더 이상의 수정 요구 없이 오케이를 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둘 다 미소를 짓고 있는, 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해지는 이 훈훈한 분위기의 초상화가 황실의 회랑에 걸리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오벨리아의 황족 중에서 나름의 이단아가 아닐까 싶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클로드가 다른 역대 황제들보다 없어 보이게 그려졌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우리 아빠는 원래도 카리스마가 넘쳐서 힘을 좀 빼고 있어도 이렇게 간지가 줄줄 흐르고 멋지단 말이야! 내가 예쁜 건 다이아나 엄마랑 클로드 아빠의 좋은 유전자만 받았으니까 당연한 것이고. 나는 약간의 콩깍지가 씐 팔불출적인 생각을 하면서 다시금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게 나는 실컷 우리의 초상화를 구경한 뒤에야 만족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필릭스는 회랑이 끝나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문득 내 시선 끝에 한 초상화 속의 남자가 걸려들었다. [아에테르니타스(Aeternitas) 황제.] 순금 같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그는 역대 최강의 마법사 황제, 세기의 현자라는 위명에 어울리는 위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황제로서나 마법사로서나 그가 이룬 업적은 실로 엄청나다고 공부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괜히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부터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으음, 아무래도 제가 당신이 갈고닦아 만든 마법 수식을 좀 씹고 뜯고 맛보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까마득한 후대가 예술에 가까운 내 수식을 파괴하고 있다고 진노하지는 말아주셨으면, 으흑. 나는 속으로 선조 마법사 황제를 향해 심심한 사죄를 올린 뒤 회랑을 빠져나갔다. * * * “어서 오세요, 손님!”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팜킨이 오늘만 초특가!” “환상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늘 저녁 8시, 중앙 광장에서 대륙 최고 인기의 애슐라 서커스단이 공연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아, 역시 시끌벅적하니 사람 사는 맛이 나고 좋구나. 나는 클로드의 허락을 받고 황성 밖으로 나와 있었다. 물론 클로드는 여느 때처럼 못마땅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지만 내가 잠깐 바람만 쐬고 올 거라고 하자 결국은 어쩔 수 없이 그러라고 해줬다. 끄응, 물론 그냥 맨몸으로 나온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지금 나한테 걸려 있는 보호 마법은 아마 예전에 클로드가 나한테 몰래 새겨 놨던 보호 마법의 뺨을 여러 번 후려치고도 남을 것이었다. 사실 그는 나한테 호위도 몇 명 붙이고 싶어 했는데 그러면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힘들 것 같아서 내가 거절했다. 놀랍게도 클로드는 꽤나 쉽게 승낙해 주었다. 나는 그 점이 굉장히 수상했지만……. 클로드가 쓸데없이 의심할 거면 그냥 나가지 말라고 해서 일단 의구심을 고이 접고 말았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내 마음속에 두근두근 콩닥콩닥 퐁당 퐁듀와 슈가슈가 달콤상콤 스페셜 파르페입니다.” 나는 예전에 루카스와 함께 외출했을 때 들렀던 디저트 카페에 들어와 있었다. 오늘도 점원은 기나긴 디저트의 이름을 주문을 외듯 읊었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왜인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이름이 조금 더 길어진 것 같기도 하고. 크으, 그나저나 오늘도 역시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구나!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를 보고 대번에 행복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아, 이럴 때는 같이 온 사람이 있어야 여러 종류를 시켜서 같이 나눠먹고 그러는 건데. 루카스라도 불러서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갔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아직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점원이 내 앞에 예쁘게 플레이팅 된 케이크를 하나 내려놓았다. 응? 나 이건 주문 안 했는데? “이건 서비스입니다.” “서비스요?” “네, 단골이시잖아요.” 앗!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버렸다. 무, 물론 내가 외출할 때마다 이 디저트 카페를 찾은 건 맞지만 설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더군다나 내가 황성 밖의 가게에서 단골소리를 들을 줄은 설마 몰랐기 때문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아, 그래도 3년 전에 유포된 데뷔당트 때의 영상석으로 제국민들 사이에 내 얼굴이 알려져 있는 걸 알아서 외출할 때마다 마법으로 얼굴을 살짝 바꾸고 있던 참이라 다행이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고맙습니다.” 점원은 쿨한 인사와 함께 쟁반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어쨌거나 공짜라니 좋구나. 윽, 공짜를 밝히면 대머리 된다던데. 그래도 원래 밥은 공짜 밥이 더 맛있고, 디저트는 공짜 디저트가 더 맛있는 법이지!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눈앞에 있는 디저트를 맛보기 시작했다. 아, 이런 여유로움 참 좋구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끔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나는 맛있는 것도 먹고, 창밖도 구경하고 하면서 홀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다그닥. 그러던 어느 순간, 거리에 멈춰 선 마차가 문득 눈에 띄었다. 응? 왜인지 저 마차 눈에 익은데. 기분 탓인가? 하지만 마차의 문이 열리고 거기에서 내려서는 사람을 보았을 때, 나는 어디선가 저 마차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반짝이는 은발과 태양 같은 금안을 가진 미남자가 마차에서 내려서자 길을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눈에 그에게 집중되었다. 나 역시 가게 안에서 창밖으로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잇따라 그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려서는 아름다운 소녀를 본 뒤,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거기에 턱을 괴었다. 이제키엘과 제니트는 길가에 비추는 햇살을 통째로 독점하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운 존재감을 자랑하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누군가가 공들여 만든 남녀 한 쌍의 아름다운 인형 같았다. 거리에 있는 사람 모두가 한 번씩 그런 두 사람을 훔쳐보고 지나갔다. 제니트가 마차에서 완전히 내려선 직후, 이제키엘이 그녀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러자 제니트도 입술을 열어 그에게 대꾸했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있는 데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그런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물론 루카스가 그랬듯 나 역시 마법을 이용하면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정도야 식은 죽 먹기일 터였으나 무엇하러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나는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턱을 괸 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곧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돌연 제니트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졌다. 이제키엘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직후 이제키엘의 눈동자가 그녀의 발치로 향했다. 나는 제니트가 난처한 얼굴로 살짝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녀의 구두 굽이 바닥에 깔린 도보 사이에 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이고, 저거 쉽게 안 빠질 텐데. 물론 반동을 이용해 힘을 줘서 다리를 확 들어 올리면 굽을 빼는 데 성공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숙녀로서 꽤나 민망한 모양새가 되는 데다 자칫 잘못 하다가는 굽이 부러질 수도 있었다. 이 디저트 카페의 단골이 될 만큼 이곳을 자주 방문한 만큼, 나는 저 밖에서 지금의 제니트와 같은 곤욕을 치룬 귀부인을 꽤나 많이 봐왔다. 내가 몰래 도와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몸속의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나설 자리는 없었다. 빛나는 은발이 잠깐 모양을 흐트러뜨리는 것과 동시에 이제키엘의 몸이 낮아졌다. 나는 직접 다리를 굽혀 제니트의 구두로 손을 뻗는 이제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 제니트의 장갑 낀 가느다란 손가락도. 이제키엘이 손을 대자마자 구두 굽이 쉽게 빠졌기 때문에 사실상 그 광경은 몇 초의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몸을 일으킨 이제키엘에게 향하는 제니트의 눈빛을 보고 작게 벌렸던 입술을 다시 다물었다. 저 눈에 담긴 감정을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 외에 달리 무엇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저렇게나 봄볕처럼 다정하고 따스해,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설렘과 애정이 여실히 전해져 오는 것을. 이제키엘은 저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걸까? 나는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두 사람을 정확히 정의내리기 어려운 기분을 안은 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착각처럼 환한 금색의 눈동자와 한순간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나는 무심코 흠칫했지만 이제키엘과 제니트가 곧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저 기분 탓이었다고 치부해 버렸다. “역시 루카스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어…….” 나는 공연히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끼며 거의 다 녹은 파르페의 아이스크림을 뒤적였다. “여기요!” 에잇, 케이크나 더 먹어야지! 이번에는 자몽 무스랑 초코 퍼지를 시킬까? 나는 돼지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케이크를 많이 주문해서 눈앞에 수북이 접시를 늘어놓고 다시금 행복한 먹방을 시작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배가 차서 노란 햇살이 비쳐 드는 창가를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귓가에 부드러운 저음의 음성이 파고든다 싶더니 비어 있던 맞은편 자리에 별안간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이게 뭐지?’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소스라치게 놀라서 손에 괴고 있던 턱을 떨어뜨릴 뻔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제키엘이었던 것이다! 내가 당황해서 어버버거리고 있는 사이 그가 나를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까 저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그, 그런 기억 없는데요?” 서, 설마 아까 전에 눈이 마주친 것 같았던 게 기분 탓이 아니라 진짜였나?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왜 여기까지 와서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내 말에 이제키엘이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미남의 공식에 따라 이제키엘은 고개를 어느 각도로 틀어도 굴욕 없이 잘생겼다. 그래서 주위에 있던 여자들이 자꾸만 그를 힐끔거리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뒤이어 이제키엘이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기까지 하자 더욱 그랬다. “실은 제가 아는 분과 무척 닮으셨습니다.” “그래서요?” 아마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이제키엘에게 헌팅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대로 놓치기 아쉬워 잠시 인사라도 나눌 수 있을까 하고.” 하지만 나는 지금 그가 내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참, 난감하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마주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체념하고 끄응 신음했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당신을 못 알아볼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키엘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황성의 바깥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듯 나를 ‘공주님’이라는 호칭 대신 ‘당신’이라고 불렀다. 황궁 밖에 있는 나를 처음 본 것이 아니라 그런지 그는 별로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안녕, 내 얼굴. 오늘로서 이 얼굴은 마지막이다. 앞으로는 좀 더 새롭게 리뉴얼한 얼굴로 외출하리라! 나는 마법으로 얼굴을 약간 손봤는데도 먼 거리에서 곧바로 나를 알아본 이제키엘을 보며 다짐했다. ======================================= [140화] “함께 온 마그리타 양은 어쩌고 이 자리에 있나요?” “제니트가 드레스를 맞출 동안 저는 커프스단추를 보러 가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럼 원래 목적대로…….” “괜찮습니다. 가봤자 마음에 드는 것은 없을 예정이니까요.” 나는 부드럽게 속삭이는 이제키엘의 목소리에 그만 허를 찔린 기분이 되어버렸다. 선수……? 선수인가? 이제키엘은 알고 보니 선수였던 건가? 어떻게 저런 천연덕스러운 말을……. 내가 허락하기도 전에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저렇게 쓸데없는 멋짐을 뿜어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어차피 잠시뿐일 테니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저 짧은 시간이나마 가까이에 있고 싶을 뿐이니 저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이어진 이제키엘의 속삭임도 앞의 말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그를 내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대로라면 이번에도 마땅히 그래야 했고, 또 그러는 것이 내게도 더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귀에 닿은 말은 나로 하여금 그를 밀어내기 어렵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에 그대는 존재감이 너무 강한걸요.” 내 말에 이제키엘이 후, 웃었다. “한데…… 꽤나 시장하셨던 모양입니다.” 다음 순간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를 한차례 훑는다 싶더니 내 귀에 그리 반갑지 소리가 들려왔다. 억, 맞아. 나 케이크 엄청 많이 시켜먹었지. 나는 그와 내 사이에 있는 수많은 접시와 그 위에 있는 케이크의 잔해를 보면서 다소 민망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원래 디저트를 먹는 배는 따로 있다는 속설도 모르나요?” “그런 속설이 있었군요.” 흥, 이 정도 가지고 놀리려고 하기는. 이거 왜 이래, 제니트도 나랑 둘이 있을 때는 꽤 많이 먹는다고? 만약 제니트가 그동안 당신 앞에서 새 모이처럼 먹는 모습만 보였다면, 그건 아마 그녀가 그쪽을 좋아하기 때문일 거랍니다. “…….” 그러던 도중에, 문득 아까 전 창밖에서 보았던 장면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에게 조용히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후의 햇빛에 반쯤 하얗게 물들어 있는 단정한 은발. 고요히 나를 담아내고 있는 미동 없는 금빛의 눈동자. 이제는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어른이 된 그의 얼굴. 이제키엘 알피어스. 제니트가 좋아하는 남자.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잠시 후, 나는 먼저 평온한 공기를 깨뜨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법 용품은 너무 장기간 소지하고 있으면 좋지 않아요. 저택 내에서라도 몸에서 떨어뜨려 놓으라고 그대가 마그리타 양에게 대신 전해 주세요.” 나는 오늘도 그녀가 끼고 있던 반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것은 제니트가 평소에도 늘 착용하고 있던 것으로, 아마도 보석안을 가려주는 마법 용품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마법 용품 때문에 악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고 이것 역시 제니트가 흑마법에 의해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에 갖는 희귀한 경우였지만 그런 말은 따로 하지 않았다. 내 말에 이제키엘이 미세하게 눈매를 움찔하더니 내게 물었다. “마법 용품의 소지자를 가려내실 수 있는 겁니까?” “아주 옅게나마, 느낌으로요.” 그 후 이제키엘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내 눈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동안 마찬가지로 마주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는 가끔씩 공주님께서 사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곧이어 그에게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음성에 나는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그려 보였다. “그럴 리가요. 모든 걸 다 아는 건 오직 신뿐이겠죠.” 언뜻 평온하게 느껴지는 침묵 어린 공기 위를 그의 미동 없는 시선이 가로질렀다. 잠시 후, 작은 목소리가 노란 햇빛 속을 부유했다. “예, 신뿐이겠지요.” * * * “어머머머머.” 나는 내 귀를 스치는 ‘어머머’의 향연에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리고 말았다. “그럼 지금 입고 계신 그 드레스를 알피어스 공자님이 직접 골라주신 거란 말이에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오후였다. 오늘도 변함없이 다들 참 발랄하구나. 내 다과회에 초대받은 영애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원인은 바로 이제키엘이었다. 나는 그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제니트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네, 맞아요.” 제니트가 수줍은 듯 대답하자 영애들이 또 한 번 일제히 소란을 떨어댔다. “세상에, 부러워라.” “어쩜 알피어스 공자님은 세심하기도 하시지.” “어쩐지 오늘따라 마그리타 양의 드레스가 참 예쁘다 했어요.” 이야. 제니트, 오늘 참 핫하네. 이렇게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니. 이렇게 된 이유는 제니트가 방금 전 우연히 ‘오늘 입은 드레스는 지난번 이제키엘이 함께 골라준 것’이라는 말을 흘렸기 때문이다. “제가 부탁하면 종종 같이 외출해서 드레스나 보석 등을 함께 골라주기도 해요.” 그 말에 모두가 제니트를 향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영애들은 파티 때 춤 한 번 같이 추기도 어려운 이제키엘이 제니트와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쇼핑 때 옷을 직접 골라주기도 한다고 하니, 그를 흠모하는 여인들이 부러움을 느낄 만도 했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의 공식에 따라 오벨리아에서 열이면 아홉 정도는 모두 이제키엘에게 이성으로서의 연심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만약 제니트가 잘난 척을 하거나 거들먹거리듯이 말했으면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모든 여인의 공공의 적이 되었을 테지만 제니트의 태도에서는 담백한 쑥스러움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 모습이 소녀다운 수줍음을 간직하고 있어 참으로 풋풋하고 어여쁘기도 했다. “흐음. 마그리타 양과 알피어스 공자님은 그저 오누이 같은 사이라고 했죠?”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제키엘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그녀에게 약간의 질투심도 느끼지 않기는 확실히 어렵긴 하겠지. 어느 영애가 입술을 모으며 흘린 말에 다른 영애들이 냉큼 미끼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알피어스 공자님과 마그리타 양은 몇 년 전부터 줄곧 같은 저택 안에서 지내고 있잖아요.” “예전의 그 생각은 아직 그대로인가요? 저라면 그렇게 동고동락하는 동안 없던 연심도 싹틀 것 같은데 말이죠.” “게다가 알피어스 공자님이 좀 멋있는 것도 아니고요.” “또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저희 오벨리아에서는 사촌 간의 혼인까지도 허가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대부분은 나쁜 의도가 있다기보다 순전히 이제키엘과 제니트 사이에 핑크빛 기류는 정말 하나도 없는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건…….” 나는 그녀들 사이에 끼지 않고 그냥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기만 했다. 제니트가 눈에 띄게 곤란해하고 있어서 중간에 한번 분위기를 전환시켜야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지금 내가 끼어들어 봤자 저런 질문은 앞으로 몇 번이고 계속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제니트가 뭐든 대답하게 놔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솔직한 심정으로 이제키엘과 제니트의 일에 어떤 식으로든 먼저 간섭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겨드는 제니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공주님, 검은 탑에서 마법사님이 방문하셨습니다.” 마침내 제니트가 대답하려는 듯 작게 입술을 벌렸을 때, 화원 한쪽에 서 있던 세스가 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전해 왔다. 검은 탑에서 마법사가 왔다고? 무슨 일이지? “이쪽으로 오시라고 해.” 그리고 내 허락을 받아 화원 안으로 들어선 검은 탑의 마법사는 바로……. “오벨리아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기별 없이 방문해 죄송합니다, 공주님. 실례를 용서하시기를.” 어억, 바로 루카스였다! 나는 내 앞에 살짝 수그려진 깜장 머리를 보며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침착하게 고개를 들라고 그에게 명했다. “아앗!” “허억! 저분은……!” “어머, 어머어머어머어머.” 귓가에 울리는 ‘어머’의 횟수가 지금까지 중에 제일 많았다. 애써 소리를 죽인다고 노력했을지 모르나 반응이 너무 노골적이라 모른 척하기가 오히려 힘들었다. 영애들은 화원에 모습을 드러낸 루카스를 보고 저마다 뺨을 붉히거나 탄성을 내뱉었다. 관심 없는 척하며 그를 힐끔거리는 영애들도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수장님께서 공주님께 전해드리라 한 것이 있습니다. 수식에 관련된 사항이라 하면 아실 것이라 들었습니다만.” 아, 맞다! 클로드가 그때 추수제 전까지 시정해 온다고 한 수식 때문에 뭘 좀 실험해 보려고 수장 할아버지의 의견을 구했지!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한참 방에 틀어박혀서 실험중이라 도통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 얼굴 한 번 보기가 참 힘들었는데. 크흑, 생각하니 아련해지는구나. 어쨌든 너무 늦지 않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고마워요. 제 궁인이 안내하는 곳으로 옮겨주세요.”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준다는 게 그냥 자료인지, 아니면 실험 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일단 내 방은 말고 옆에 있는 빈 방에 가져다두기로 했다. 루카스는 나한테 또 한 번 정중히 인사한 뒤 뒤돌아 화원을 떠났다. 와, 그런데 루카스 쟤, 탑에서 제대로 일할 때도 있잖아? 심부름도 할 줄 알고! 난 매일 빈둥거리면서 놀고먹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것 참 의외……. “아아, 고독한 검은 늑대님……!” 헉, 그러고 보니 당신도 지금 여기에 있었지!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몽롱한 음성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매우 아련한 눈망울을 한 채 루카스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백합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또 곧장 화들짝 놀라 시선을 움직였다. 앗, 다행이다! 루카스가 완전히 화원을 벗어났어! 그럼 저 고독한 검은 늑대란 소리를 못 들었겠지? 으앙, 백합 소녀, 당신은 방금 구사일생했어요! “마법사님 너무 멋지세요!” “마법사 복장 때문인지 평소 금욕적인 느낌인데, 왼쪽 눈 밑의 눈물점을 보면 은근히 섹시해서 가슴이 술렁술렁 두근두근하는 게…….” “제가 봤을 때는 앞으로 이삼 년만 더 지나면 분명히 알피어스 공자님 못지않게 오벨리아에서 최고로 근사해질 것 같아요.” 루, 루카스. 너 영애들 사이에서 평가가 굉장히 후하구나. “같은 황성에 있으니 공주님은 마법사님을 자주 만나시겠죠?” “꼭 그렇지도 않아요. 그는 거의 탑에서만 생활하니까요.”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에 나타나긴 하지만, 그건 비밀이었다. “하긴, 탑의 마법사님들은 속세를 떠나서 마법 연구에만 매진하신다고 들었어요.” “어마, 아쉬워라. 그럼 마법사님은 결혼도 안 하신단 말이에요?” “으음,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대부분은 독신으로 지내는 것 같아요.” 하기야 마법사들은 매일 탑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결혼을 한다고 해도 그걸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러자 곧바로 영애들 사이의 분위기가 약간 어두워졌다. 루카스는 순식간에 ‘앞으로 2, 3년 후가 기대되는 멋진 마법사’에서 ‘2년 후든 3년 후든 아무리 눈앞에 알짱거려 봤자 못 먹는 감일 뿐인 쓸데없이 멋진 마법사’로 평가 절하되었다. ======================================= [141화] “아아, 역시 고독은 루카스 님의 숙명인 것을……!” 오직 백합 소녀만이 이루어질 수 없는 연정을 혼자서 더욱 불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알피어스 공자님은 왜 약혼을 하지 않는 걸까요?” “그러게요. 이미 혼기도 되었는데.” 영애들은 다시 관심사를 바꿔 이제키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그리타 양은 그 이유를 아나요?” “이제키엘은…….” 나는 제니트의 시선이 한순간 나에게 닿은 것 같다고 느꼈지만 그것은 실로 찰나였다.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따로 마음에 둔 분이 있는 건 아니고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떤 영애가 물었다. 나는 다른 영애들의 귀까지 덩달아 쫑긋 세워지는 느낌을 받고 그만 그녀들이 귀여워 야트막하게 웃고 말았다. “그의 속마음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제니트는 대답을 망설였던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 지금까지 이제키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저니까요.” 워낙 청아해 그저 조용히 읊조리기만 해도 노래하는 듯 들리는 제니트의 목소리가 화사한 꽃들 사이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해석하기에 약간 모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나는 영애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서로 헷갈리는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도 알피어스 공자님과 마그리타 양이 밖에 있는 것을 누군가 보았다고 하던데요.” “네, 함께 외출했었어요.” “그런데 그날 디저트 카페에서 알피어스 공자님과 웬 여성분이 함께 있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멈칫. 바로 그 순간 찻잔을 옮기던 나와 제니트의 손이 나란히 멈칫했다. “그 여성분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하던데 그냥 뜬소문일까요?” 다, 다행이다. 그날 이제키엘을 만난 직후 혹시 몰라서 인식 장애 마법도 같이 걸었는데. 아니었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알피어스 공자가 밖에서 아타나시아 공주를 닮은 묘령의 여인과 단둘이 데이트를 했더라!’라는 소문이 오벨리아의 온 시내를 휩쓸었겠지. 영애들의 의문 어린 얼굴을 보며 제니트도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그날 이제키엘이 다른 사람을 만났던 걸까요?” “마그리타 양도 잘 모르시는군요?” “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제가 그에 대해 모든 걸 알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는 제니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영애들이 곧 화제를 돌렸다. 제니트는 화사한 꽃을 등지고 앉아 잠시 동안 그녀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곧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이럴 경우는 세면실에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자리를 떠나는 제니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마그리타 양이 자리를 비웠으니 이제 좀 속 시원히 말을 꺼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제니트가 화원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 어느 영애가 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공주님, 혹시 알피어스 공자님이 공주님께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요?” “어머, 무슨 말씀이시죠……?” 나는 그 은근한 물음에 웃는 낯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그런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영애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바비드 영애의 생각도 저와 동일했군요?” “네. 전부터 제 느낌은 그랬는데, 마그리타 양이 있으면 왜인지 이런 말을 꺼내기가 조금 그렇더라구요.” “맞아요. 아무래도 알피어스 공자님과 가장 근접한 거리에 있는 영애라서 그런 걸까요?” “그런데 알피어스 공자님이 공주님께 마음이 있는 것 같다니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딱히 길게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가끔씩 연회 때나 무도회장에서 보면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지난번 야유회 때도 그랬고요.” “아, 전 다른 일 때문에 야유회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날 알피어스 공자님이 그 자리에 방문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나는 약간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으로 영애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제가 보았을 때는, 알피어스 공자님이 공주님을 바라볼 때의 눈빛이 다른 이를 대할 때와 사뭇 다르던걸요.” 그녀들은 상당히 궁금한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 이제키엘과 이런 식으로 엮일 만한 일이 특별히 없었는데도 영애들이 저렇게 말하는 것이 나는 약간 신기했다. 내가 대답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쉽게도 알피어스 공자와 저 사이에는 여러분이 궁금히 여기실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나는 처음 바비드 영애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한 치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으며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 말을 이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그는 친절한 사람이라 제게도 할 수 있는 모든 예를 갖추어 행동했을 뿐이에요.” 2년 전 흐드러지는 하얀 꽃들 사이에서 내 시야에 아스라이 번졌던 열띤 눈빛이 떠올랐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이런 오해를 받는 것을 알면 알피어스 공자가 상당히 곤혹스러워하겠네요.” 나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것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을 지워버렸다. 영애들은 내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웃어 보이자 약간 실망하는 눈치였다. 만약 이제키엘과 나 사이에 아무런 감정적 교류가 없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하다못해 내가 수줍어하며 뺨을 붉히거나 조금이라도 당황스러워했다면 대화가 퍽 재미있게 진행되었을 텐데. “그런데 오늘 마그리타 양이 입은 드레스가 정말 예쁘던데, 저도 다음에는 마담 티오렌의 숍에서…….” 다시금 대화의 화제는 다른 것으로 옮겨졌다. 나도 영애들이 하는 말에 중간중간 화답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야 가득 만발한 꽃. 귓가에 재잘거리는 맑은 목소리. 코끝에 감도는 달큼한 차향. 그 속에서 아무도 몰래 소리 없이 가슴에 일던 파문도 곧 잠잠히 가라앉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나는 생각했다. 제니트는 왜 돌아오지 않는 거지? 제39.5장 클로드&제니트 “시간이 늦었는데 마시려고요?” “내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찾으셔서.” 늦은 저녁, 제니트는 물을 마시러 방에서 나왔다가 장식장에서 술병을 꺼내 드는 이제키엘을 맞닥뜨렸다. 진코냑 299년산. 로저 알피어스가 아끼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독한 브랜디였다. “오늘 아저씨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원래 기복이 좀 있으시잖아.” 야유회를 무사히 끝마친 후부터 알피어스 공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알피어스 공작 부인은 제니트의 고집으로 혼자 주관하게 된 야유회에 크게 염려하고 있다가 오늘의 야유회가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남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안심한 눈치였다. 그러나 야유회 이후 제니트는 언젠가부터 아타나시아 공주를 만날 때마다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말로는 쉽게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기분에 젖어 있었고, 이제키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채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내내 창밖만 보고 있었다. “저도 마시고 싶어요.” “넌 아직 어려서 안 돼.” 제니트는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잔 두 개를 쥔 채 걸음을 옮기는 이제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셔츠의 소매를 거의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이제키엘의 팔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럼 잘 자, 제니트.” 정확히 말하면 2년 전의 어느 날인가에 그녀 때문에 다친 적이 있던 그의 왼쪽 팔에 시선이 박혀들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키엘의 팔은 흉터 하나 남지 않고 말끔히 나아 있었지만 제니트는 마치 그 자리에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흔적이라도 남은 것처럼 아직까지도 옛 상흔이 있던 자리를 신경 쓰고 있었다. “내일 드레스를 새로 맞추러 외출하려고 해요. 같이 가주시겠어요?” 제니트는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걷는 사람을 향해 반쯤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조용히 날아든 음성에 이제키엘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그는 천천히 그녀를 뒤돌아보며 여느 때와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네가 원한다면.” “당신은 원하지 않나요?” 이 상황에서 제니트가 반문하는 것이야말로 뜻밖의 전개였으리라. 제니트는 한순간이나마 이제키엘이 멈칫하는 것을 보고 곧 빙긋이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내일 외출이 기대되네요.”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으며 뒤돌아섰다. 하지만 이제키엘을 등진 제니트의 얼굴은 그를 마주했을 때보다 확연히 흐려져 있었다. 늘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제가 원해서 먼저 부탁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의지로는 단 한순간도 제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등 뒤에 잠시 못 박혀 있던 발걸음 소리가 이윽고 다시금 멀어져 갔다. 제니트가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 빈자리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네가 원한다면.’ 좀 더 어릴 때에는 저 말이 다정함인 줄 알았다. 그래……. 저 잔인함을 한때는 다정함이라 착각했던 적이 있었다. * * * “잠시만 실례할게요.” 제니트는 그렇게 말한 뒤 아타나시아 공주의 다과회 장소를 벗어났다. 바닥에 푹신하게 깔린 잔디 때문에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꽃이 만발해 있던 화원에서 멀어질수록 울렁거리던 속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속이 잠잠히 가라앉을수록 뜻 모르게 술렁대는 마음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제니트는 갑자기 자신이 왜 이러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 이상해. 다과회는 즐겁고 영애들과의 대화는 재미있고 또 내가 좋아하는 공주님도 그 자리에 계시는데 왜 이렇게 나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걸까? ‘마그리타 양과 알피어스 공자님은 그저 오누이 같은 사이라고 했죠?’ 잔디가 깔린 화원에서 벗어나자 또각또각 작게 울리는 발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어째서인지 제니트는 2년 전 이 에메랄드궁에서 열렸던 아타나시아 공주의 15번째 생일 무도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는 이제키엘의 팔이 다친 일로 참석을 거절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날, 무도회에 가지 못하게 된 것이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그녀는 공주님을 보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또 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도 모순된 마음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런 마음이 어디에서 파생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인지 그날 만나게 될 아타나시아 공주는, 그녀와 함께 불꽃놀이를 보았던 그 아타나시아 공주가 아닐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방금 전의 다과회장 안에서 또 그때와 비슷한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알피어스 공자님은 왜 약혼을 하지 않는 걸까요?’ ‘따로 마음에 둔 분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래, 알아. 바보 같은 생각이야. 공주님은 세상에 단 한 분뿐이고, 변함없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분 중에 하나인걸.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제니트는 날이 갈수록 화사하게 피어나는 아타나시아 공주를 볼 때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디저트 카페에서 알피어스 공자님과 웬 여성분이 함께 있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마그리타 양도 잘 모르시는군요?’ ======================================= [142화] 이유를 알 수 없게도 공연히 초조했다. 이런 자신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제가 그에 대해 모든 걸 알 수는 없으니까요.’ 제니트는 에메랄드궁에 있는 궁인들의 눈을 피해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는 이내 자신이 너무 한참 동안이나 넋을 놓고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제야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에메랄드궁의 화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보라색의 꽃이 햇살을 받아 군데군데 밝은 자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이곳은 어디지? 제니트는 내심 당황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궁인을 한 명도 만나지 않은 것도 이상했고, 이렇게까지 정신을 빼놓고 하염없이 걷기만 했던 자신도 이상했다. 쏴아아.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제니트는 이 모든 이상한 상황이 어째서 지금 야기되었던 것인지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넌 누구지?” 눈앞에서 진한 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쓸려 반짝이며 흩날렸다. 그녀를 정면에서 꿰뚫고 있는 것은 찬연한 빛을 발하는 보석안이었다. 아, 그래. 나는 지금 이분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던 거구나. “황성을 멋대로 휘젓고 다니다니 겁이 없어도 너무 없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나직한 음성이 잇따라 고막을 파고들었다. 제니트는 마주한 사람을 잠시 동안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내 제 안의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열고 말았다. “저를…….”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3년 전, 데뷔당트날 딱 한 번 가까이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던 나의 아버지. 어쩌면 지금의 이 운명적인 만남과 마찬가지로 마치 영혼에 새겨지는 것처럼 인상 깊던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짐이 그 얼굴을 따로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러나 클로드는 그녀를 향해 방금 전보다 더욱 서늘히 읊조릴 뿐이었다. 제니트는 마주한 싸늘한 눈빛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 시간에 궁에 있는 외부인이라면 아타나시아의 다과회에 초대받은 손님이겠군.” 그는 에메랄드궁이 있는 방향으로 한차례 시선을 둔 직후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아타나시아 공주의 이름을 입에 담는 그의 눈동자는 방금 전 제니트를 향할 때와는 달리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제니트는 자신을 철저히 외부인으로만 대하는 클로드의 모습에 서서히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면 오늘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그녀의 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자신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로 뻗어졌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아타나시아의 손님이 아니라면 무슨 이유에서건 짐의 처소를 허락 없이 침입한 자를 지금처럼 고이 돌려보내주지 않았을 테니.” 그러나 결국 제니트는 자신의 보석안을 감춰주고 있는 반지를 손에서 빼지 않았다. 곧 그녀의 손이 밑으로 투욱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다음은 없다. 또다시 오늘처럼 황성 안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눈에 띄는 날에는 꽤나 지독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머리 위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짹짹 맑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피어난 꽃은 화려한 보라색. 봄과 여름의 경계에 선 초목이 새뜻한 연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경고하지. 두 번 다시 짐의 눈에 띄지 마라.” 그러나 귓가를 스치는 음성과 그녀를 스치는 눈빛만큼은 온기 한 점 깃들지 않은 차가운 푸른색이었다. 마지막까지 시리게 뒤돌아선 클로드의 등 뒤로 눈부신 햇살이 내려앉았다. 짹짹. 제니트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장소에 홀로 남겨진 채 눈앞에 이지러지는 햇빛을 시야에 담았다. 눈앞은 온통 따사로운 색채의 향연이었는데도, 어째서인지 그녀 혼자만 겨울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추웠다. 그리고 외로웠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녀의 아린 속까지 따뜻하게 보듬어줄 사람이 결국 단 한 명도 없었다. 제니트는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생전 처음으로, 완전한 혼자라는 두려움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제40장 마음을 들었다 놨다 “네 오른쪽에 앉았던 여자지?” “뭐가?” “검은 늑대인지 뭔지, 너한테 거지 같은 소리 지껄인 인간 말이야.” “푸읍!” 갑작스러운 루카스의 말에 나는 마시고 있던 야채 주스를 입 밖으로 뿜었다. 으악, 이거 릴리가 나한테 몸보신하라면서 만들어준 특제 건강 주스인데! 나는 마력으로 바닥에 흘린 주스를 깨끗이 닦으며 더듬거렸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그 여자 겁나 수상쩍었어.” 이 자식,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 가지고! 다과회장에 그냥 잠깐만 들렀다 간 것뿐이면서 도대체 그런 수상쩍음은 언제 감지한 거지? 호, 혹시 루카스가 떠나고 나서 백합 소녀가 검은 늑대란 호칭을 중얼거린 걸 들었나? 아냐……. 만약 들었으면 이놈이 지금처럼 말할 리가 없어. “수상쩍긴 뭐가 수상쩍어?” “네 손님 중에서 나한테 제일 관심이 지대해 보이던데?” 헉, 역시 숨길 수 없었구나! 하긴 백합 소녀의 순정도 어언 3년째! 이번 다과회 때도 루카스를 보고 대번에 하트 뿅뿅한 얼굴이 되었으니 애초에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일단 백합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 튕겨 보았다. “관심은 무슨!” “그 헤롱헤롱한 얼굴 하며.” “헤롱헤롱은 무슨!” “그 초롱초롱한 눈빛 하며.” “초롱초롱은 무슨!” 물론 루카스에게는 1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이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세레나는…… 세레나는 네가 아니라 마법에 관심이 있는 것뿐이야!” “아아, 마법?” “그래! 절대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고! 알겠냐, 이 왕자병아!” 그래도 나는 지레 찔려서 루카스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그러자 루카스가 소파의 팔걸이 부분에 걸터앉은 채로 용 쓴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왜 그렇게 쫄아?” “쫄다니, 내, 내가 언제!” “지금 쫄아서 동공에 지진 났잖아.” “내가 언제!” 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네.” 루카스는 나를 추궁하다 말고 정말 궁금해졌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 기억 없긴 한데 내가 언제 네 앞에서 다른 인간 죽인 적 있었나?” 주, 죽이다니. 그런 살벌한 소리를 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한다지요? “아니면 내가 언제 네 앞에서 다른 인간 족친 적 있어?” 어, 아니요. 그런 적은 없었던 듯한데. “그런데 왜 쫄아?” 어라, 그러게……. 갑자기 루카스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그동안 왜 필요 이상으로 이놈의 앞에서 쫄았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와, 이제 보니까 생사람을 잡고 있네?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고 있었어?” “아, 아니…….” “나처럼 무해하고 선량한 마법사가 또 어디에 있다고. 나 상처받았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뭐,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나는 루카스의 추궁으로부터 백합 소녀를 지켜주려고 했을 뿐인데 왜 도리어 내가 루카스에게 추궁을 당하고 있는 거지? 나는 불현듯 헉 숨을 들이켰다. 아냐, 지금 저기에 넘어가면 안 돼! 게다가 무해하고 선량한 마법사라니? 이게 어디서 약을 팔려고! 그러고 보니까 루비궁 후원에서 처음 봤을 때에도 저런 헛소리를 했었지. 그때도 까망이 가지고 공갈 협박을 한데다가 그 후로도 틈만 나면 먹어버린다, 없애 버린다, 지껄여놓고는! 앗, 그러다가 나는 문득 우리의 살벌했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맞아, 너 나 처음 만났을 때 그 이상한 비눗방울!” “비눗방울?” “그래! 네가 까망이 훔치러 왔을 때 나한테 날려 보낸 비눗방울 있잖아! 그거 나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아, 맞다.” 내 말에 눈매를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하던 루카스가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 무심코 반응했다. 그에 나는 흠칫해 버렸다. 잠깐만요……. 아, 맞다? 아, 맞다?! 너 지금 ‘아, 맞다’라고 했니? “처음에는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생각할수록 이상했어! 분명히 네가 날려 보낸 비눗방울 냄새를 맡으니까 숨이 막혔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그냥 평범한 비눗방울이었어.” 내가 분기탱천해서 따지자 루카스가 한순간 멈칫하더니 곧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네가 촌뜨기처럼 마법 처음 본다고 하도 신기해하니까 내가 보여준 거 아냐.” 아하, 그래서 네가 나한테 공짜로 비눗방울 마술쇼를 보여줬었다? “웃기지 마. 내가 알기로 넌 7살짜리 애가 마법을 처음 봐서 신기해한다고 이유 없이 그런 선행을 베풀 애가 아니거든?” “…….” 그런데 내 반박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루카스가 말문이 막힌 듯 보이자 덩달아 나도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루, 루카스……? 얘? 너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니? 왠지 지금 네 표정이 겁나게 수상한데? 설마 그거 지금 ‘아, 들켰네’ 내지는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군!’ 하는 표정은 아니겠지? 그렇게 내가 두 눈을 흔들고 있을 때, 그런 나를 쳐다보던 루카스가 이윽고 분위기를 바꾸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짓말 아니야. 진짜 보통 비눗방울이었다니까.” “정말? 진짜로 진짜?”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어?”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네가 좀 수상했잖아! “보통 비눗방울이 아니면 그게 뭔데? 내가 설마 비눗방울 가지고 널 죽이려 하기라도 했을까 봐? 지금 나한테 그런 심한 소리를 하는 거야? 와, 그럼 나 상처받는데.” 그런데 짐짓 가련한 척을 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 따져 묻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난 미인에 약했고, 루카스도 속 알맹이는 어떻든 간에 겉모습만큼은 훌륭한 미소년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저 가증스러운 표정도 다 가짜인 게 뻔했지만. 앗, 그러고 보니 지금 이놈이 나한테 미인계를 쓰고 있는 건가! “그리고 애초에 네가 잘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네가 숨 막힌다고 생각한 것도 그냥 비눗방울 잡는다고 펄쩍펄쩍 뛰면서 요란을 떠니까 숨이 차서 그랬던 거겠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그래도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자 루카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지금 다시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야.” 그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동글동글한 비눗방울이 눈앞에 나타났다. 앗, 이거 오랜만이다! 나는 10년 만에 보는 비눗방울에 약간의 반가움을 느꼈다. “근데 잠깐만. 너무 얼굴 정면으로 보내지 마!” “그래야 확인해 볼 거 아냐?” 루카스는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했지만 이건 아무래도 날 물 먹이려고 이러는 것 같았다. 에퉤퉤! 비눗방울이 자꾸 내 얼굴로 날아와서 터지잖아! “봐, 아무렇지도 않지? 그렇지?” 그래, 네가 그렇게 아니라고 하니까 믿어주마. 애초에 내가 널 의심해 봤자 어쩌겠니. 10년 전 일을 이제 와서 입증하라고 할 수도 없고. 게다가 그냥 진짜 보통 비눗방울이라고 생각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도 더 좋겠지, 으흑.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나는 방 안에 둥둥 떠다니는 비눗방울을 손가락으로 톡톡 터뜨리는 데 금세 재미를 들렸다. ======================================= [143화] “그때 너 참 귀여웠는데 말이야.” “난 지금도 귀여워.” “헐.” 나는 비눗방울을 터뜨리다 말고 루카스를 비웃어줄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청소년 루카스가 아니었다! “하, 내가 아무리 귀여워도 너무 반하지는 마. 인기 많은 것도 피곤하거든.” 어느덧 10살가량의 어린애로 탈바꿈한 루카스가 입을 떡 벌린 나를 보며 거들먹거렸다. 그런데 평소라면 재수 없게 보이기만 했을 표정도, 또 잘난 척하며 머리를 쓸어 넘기는 동작도 왜인지 지금만큼은 하나도 얄밉지가 않았다. 이, 이것은 미니미 버전의 완전체! 그동안 잊고 있던 꼬꼬마 루카스의 귀여움이 나를 강타했다. 허헉, 저 올망졸망한 이목구비! 깨물어주고 싶은 앙증맞은 몸짓! 미니미한 루카스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귀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강력하게 나를 치고 간 것은 학구적인 호기심이었다. “나도 너처럼 신체 나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까?” “네가?” 루카스가 내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러자 소매 밖으로 조그만 손가락이 빼꼼 튀어나왔다. 으헉, 저, 저런 동작까지 이렇게 깜찍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디 보자, 너 정도면…….” 나는 그의 눈동자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 모습을 두근두근하며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진 말에 기대감이 푸시식 식는 것을 느꼈다. “한 100살쯤 되면 가능하겠네.” 100살? 100살이라굽쇼? 그 정도면 꼬부랑 할머니이다 못해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할 나이인데 그때야 가능하다니! 으윽, 그래도 루카스 성격에 만약 죽어도 불가능할 것 같으면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100살 때 가능하다는 건 오히려 내 마법적인 재능을 입증하는 거라고 봐도 되는 게 아닐까? 어헝, 그래도 눈에서 짠내가……. “넌 언제부터 가능했는데?” “진짜 알고 싶어?” 루카스가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마치 ‘지금 네 주제에 나랑 비교를 해?’ 또는 ‘알게 되면 좌절할 텐데!’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에잇! 나는 소파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100살이라니, 100살이라니! 노망이 난 것도 아니고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 저렇게 어린애 둔갑을 하는 건 좀 그렇잖아. 포기다, 포기! 그러고 보니까 루카스도 그렇고 어릴 때 제니트랑 이제키엘도 귀여웠는데. 물론 내가 귀여웠던 건 당연하고, 크흠. “그러고 보니까 좀 이상했단 말이지.” 나는 다과 시간에 보았던 제니트를 떠올렸다. 생각보다 오래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제니트는 그 후로도 계속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은 그냥 내 기분 탓이었을까? “이상해? 뭐가?” 나는 내 혼잣말에 반문하는 루카스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그는 아직까지 어린아이 모습을 한 채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루카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아까부터 근질거렸던 손을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얍! 예전부터 나를 두근거리게 했던 너의 그 찹쌀떡 볼따귀! “헉, 말랑말랑해!” 나는 아까부터 노리고 있던 루카스의 뺨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내 손 안에서 미니미 루카스의 뺨이 찹쌀떡처럼 늘어났다. 내 기습을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루카스는 나한테 얼굴을 붙잡힌 채로 눈매를 구겼다. “야, 우슨 지시야?” “너 대체 뭘 먹고 뺨이 이렇게 말랑말랑한 거야? 이거 완전 사기!” 물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놈의 뺨을 사정없이 주물럭거려 주었다. 이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또 미니미 루카스의 말랑거리는 뺨을 이렇게 원 없이 만져 보겠는가! “조은 알로 할 대 이거 나라.” “어멋, 내 손이 네 뺨에 붙었나 봐! 떨어지지가 않아!” 네 뺨은 마약이야! 크으, 이 무서운 자식! 뺨 주물주물 한 방으로 날 중독시켜 버리다니! 놓으란 말을 들었다고 해서 바로 손을 뗀다면 그건 이 말랑말랑한 찹쌀떡 뺨에 대한 모욕이야! 게다가 뺨이 잡아당겨져서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미니미 루카스라니, 제법 귀엽잖아? “하디 마. 당장 앙 나?” “말랑말…… 헉!” 그런데 갑자기 미니미 루카스가 어른 루카스로 돌변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놓으라고 했지?”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흠칫해서 루카스의 뺨에서 얼른 손을 뗐다. “왜, 방금처럼 또 멋대로 주물럭대 보시지?” “피, 필요 없어! 지금은 찹쌀떡이 아니잖아!” “주물러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안 주물러 봐도 알아!” “변태.” 뭣! 루카스가 읊조린 말에 나는 발끈해서 어른이 된 루카스를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너 내가! 갑자기 이렇게! 변신하지 말라고 했지!” “아,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시끄러!” 날 놀라게 한 죄를 네가 알렸다?! 에잇, 더 맞아라! 루카스가 웃기다는 듯이 항변했으나 나는 그러든 말든 그 후로도 한동안 더 루카스를 때려댔다. 내 약점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루카스가 치사하게 다시 미니미 버전으로 돌아갈 때까지 말이다. 제40.5장 루카스-머리카락의 향방은? 한가로운 오후, 루카스는 문득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렸다. ‘맞아, 너 나 처음 만났을 때 그 이상한 비눗방울! 그거 나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그에게 따져 묻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 순간 평평하던 루카스의 미간에 깊은 굴곡이 패였다. ‘무슨 소리야, 그냥 평범한 비눗방울이었어.’ 그때 내가 왜 굳이 그런 거짓말을 했지? 루카스는 그런 심심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10년 전 황궁의 후원에서 신수를 쫓던 여자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 맞았다. 그래야 신수를 훔쳐 가도 귀찮은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마법을 처음 봤다며 신기해하는 해맑은 모습을 보니 그동안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에게 특별히 마지막 고별 선물로 비눗방울 쇼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것은 아타나시아가 예상했듯 보통의 마법이 아니어서, 아마 터진 비눗방울의 냄새를 계속 맡았다면 그녀는 산소 고갈로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 그의 계획을 막은 것이 바로 아타니시아의 신수였던 까망이였다. 루카스는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진짜 살아 있는 짐승도 아닌 주제에 꽤 영특한 구석이 있었단 말이야? 아직 덜 여문 마력 덩어리였으면서도 건방지게 내 마법을 깨지를 않나. 물론 그때는 긴 잠에서 깨어난 직후라 많이 약해진 상태긴 했지만. 예전 같으면 사라진 신수를 아까워했을 테지만 이미 더 좋은 세계수 가지를 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그다지 아쉽지가 않았다. 아무튼, 요는 그것이었다. 왜 자신이 아타나시아에게 ‘그건 평범한 비눗방울이었다’고 거짓말을 했냐는 것. 루카스는 기본적으로 지금까지 제멋대로 막 나가는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거짓말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기껏 필요에 의해 거짓말을 한 경험이라고 해봤자 그 이유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괜히 귀찮아질까 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제의 그가 아타나시아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지금까지와 달랐다. 원래의 루카스였다면 어제의 상황에서 ‘어, 너 죽이려고 한 거 맞는데. 그걸 이제 알았어? 난 또 알고 있었는줄’이라거나 ‘응, 그런데 그때 너 죽이는 데 실패해서 솔직히 좀 아까웠어’라고 뻔뻔하게 대답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설마 아니지?’라는 듯이 그를 쳐다보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이상하게 ‘네 생각이 맞다’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그때 루카스는 자신이 어릴 적 아타나시아에게 했던 짓을 그녀가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위층에서는 탑의 보수 작업을 한다고 야단인데요.” 그렇게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알게 모르게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마법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지금 같이 가서 하면 속도가 더 빨라지지 않을까요?” 하지만 애초에 마법사들이 귀차니즘을 이유로 수년간 미뤄뒀던 탑의 보수 작업에 지금 갑자기 열혈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검은 탑의 마법사가 혹여나 방문하지 않을까 싶어 설레발을 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원숭이 같은 가짜 놈을 위해 루카스가 굳이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루카스는 여전히 탁자 위에 건방지게 다리를 꼬아 올린 자세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띨띨이 1호, 너나 가서 해.” “내가 왜 1호입니까!” 곧바로 발끈한 목소리가 잇따랐다. 탑의 수장이 탑 소속 마법사들을 상대로 하도 ‘띨띨이’라는 소리를 달고 살았던 탓일까? 그는 1호라는 호칭에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정작 띨띨이란 말에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내가 가서 돕는 것보다 댁이 가서 돕는 게 훨씬 더 속도가 날 것 아닙니까?” 그는 재작년 탑에 새로 들어온 신입으로, 짬밥으로만 따지면 마법사 중에서도 막내인 셈이었다. 물론 대외적인 나이는 루카스가 17살로 가장 어렸지만 원래 마법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체적 나이가 아닌 마법적 성취였다. 하지만 그는 처음 탑에 들어온 직후 가장 나이가 어린 루카스를 무시하는 간 큰 짓을 저질러 버렸다. 그리고 방긋 미소 지은 얼굴을 한 루카스에게 ‘새로 만든 마법 수식의 연습 상대가 되어 달라’는 명목으로 곤죽이 되도록 혼쭐이 난 후 급격히 겸손해졌다. 물론 마지막 자존심은 남아서 루카스를 상대로는 어정쩡한 존칭을 쓰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옆에서 한가하게 농땡이나 부리는 루카스를 보며 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저 새파랗게 어린놈의 생글거리는 낯을 보고 다른 마법사들이 사색이 되어 덜덜 떨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어흑!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 직후 그는 루카스로부터 ‘띨띨이 1호’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습득하게 되었다. 에잉, 팍팍한 인생. 삶이란 너무나 부조리한 것! 마법사들의 성지인 탑에 들어와서 드디어 인생에 꽃길이 펼쳐지나 했더니 세상에는 그보다 더한 천재가 너무나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건방진 꼬맹이였고! 그는 심통이 난 채로 마법서를 휙휙 넘겼다. “수장님도 이참에 마력 운용 연습이나 하라면서 탑의 보수는 전부 다 우리들한테만 맡기고…… 구시렁. 내가 마법 공부하려고 여기 들어왔지 노가다나 하려고 들어왔나……. 얼마 전에 드디어 공주님의 머리카락을 받았다면서 신나 하시더니, 이렇게 혼자만 연구에 몰두하시고 말이야…….” “뭐? 누구의 뭘 받아?” 그리고 그가 연달아 투덜거리는 말에 루카스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공주님의 머리카락.” “어디서 났는데?” “지난번에 공주님이 직접 주셨다나. 지금까지 공주님 마력을 연구하고 싶어 했던 마법사들이 탑에 한둘이 아니라 요즘 다들 관심을…….” “지금 연구실에 있댔지?” “누구, 수장님?” “그럼 내가 지금 공주님이 연구실에 있냐고 물은 거겠어?” “수장님은 계속 연구실에 계시다고 내가 방금 말했잖아. 귀 먹었어?” “그새 말이 짧아지셨어?” 뜨끔! 은근슬쩍 루카스에게 말을 놓고 있던 띨띨이 1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느덧 루카스의 붉은 눈동자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 [144화] 위험 경보! 위험 경보! 이건 처음에 멋모르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덤볐다가 된통 당했을 때 느꼈던 불길한 느낌이었다! 띨띨이 1호는 재빨리 공손한 자세로 돌아가 변명했다. “아니, 전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하신 걸 빨리 대답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현대인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지, 말할 때 어미 붙일 시간도 없으면 쓰나? 그러면 아예 말을 못 하는 몸으로 만들어주고 싶어지잖아. 안 그래, 응?” “헉! 여유를 갖겠슴돠!” “좀 잘하자.” “옙.” 루카스에게 공포의 어깨 다독임을 받은 띨띨이 1호는 급격히 노쇠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구석에 쭈그러졌다. “그럼 가봐야겠네.” 그리고 뒤이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루카스를 향해 반사적으로 묻고 말았다. “어, 어디 가세요?” “연구실.” 방금 전까지 나누던 대화를 상기해 볼 때, 루카스가 간다는 연구실은 수장이 있는 곳이 분명했다. 띨띨이 1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기는 왜……?” “내 걸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거슬리잖아.” 내 거라니, 도대체 뭐가? 등 뒤로 박히는 의문 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 루카스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탑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영문을 알 수 없는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후 탑에서는 드디어 연구실 밖으로 뛰쳐나온 수장이 ‘루카스 그 죽일 놈 때문에 귀중한 연구 재료가 불에 타버렸다’며 오열하는 소리가 일주일 내내 메아리쳤다고 한다. 제41장 오벨리아에 어서 오세요, 서브남이여! 아를란타에서 사절단이 온 것은 얼마간의 시일이 더 지난 후였다. “공주님, 연회 준비하셔야죠.” 클로드와 함께 그들을 맞이하고 온 나는 릴리의 말에 그만 속으로 ‘윽’ 신음하고 말았다. 저녁에 있을 환영 연회 준비로 지금부터 또 바빠지겠구나. 어차피 사절단을 보는 자리에 간답시고 아침 일찍부터 때 빼고 광내고 했었는데 그냥 여기서 옷만 갈아입고 가면 안 되나? “그래도 이미 얼추 준비가 된 상태라 시간이 좀 널널하겠네요.” 릴리의 생각도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 역시 릴리와 나는 이심전심! 옆에 있던 한나는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연회 준비는 지루한걸. “이번 사절단에 멋진 기사님이 많았나 봐요. 궁인들이 꽤나 들떠 있더라고요.” 한나가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던가? 아까 사절단을 맞을 때 보기는 했는데 기사들은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 응? 그런데 궁인들은 어느 틈에 얼굴을 본 거지?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의문에 빠져들었다. “그럼 쉬고 계세요. 준비할 시간이 되면 다시 모시러 올게요.” 모두들 물러나자 나는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아를란타의 사절단이 오벨리아를 방문하는 것은 거의 2, 3년 꼴로 있어왔던 일이었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였고, 그중에서도 아를란타와 오벨리아는 클로드의 제위 이후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던 친선국이었다. 그래서 이번 방문에도 별다른 이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브남이었던 카벨 에른스트도 사절단에 껴 있었나? 소설 속의 내용대로라면 슬슬 그가 등장할 타이밍일 텐데. 기사단은 다들 똑같은 제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멀리서 언뜻 봐서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가 좀 어려웠다. 어차피 한가한데 지금 살짝 가서 보고 올까? 지금쯤 사파이어궁으로 이동하고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하릴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말고 문득 생각했다. 솔직히 지금에 와서는 카벨 에른스트가 있든 말든 별로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했으니까. 휘이잉. 그래서 나는 사파이어궁의 천사상 위로 올라갔다. 헤이, 언니! 날개가 몹시 까리한데? 잠시만 실례 좀 하겠습니다. 오, 착석감 좋고! 물론 돌로 만든 조각상인 만큼 푹신한 느낌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야. 크흡, 사실 조각상 머리 위가 제일 명당인 것 같기는 한데 차마 이 천사 언니의 예쁜 머리통 위에 걸터앉지는 못 하겠다. 장인 정신을 가지고 한 땀 한 땀 공들여 깎은 천사 언니의 머리 위에 엉덩이를 붙이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무례야! 그렇게 내가 천사상의 날개에 자리를 잡았을 때, 저 멀리서 긴 행렬이 보였다. 아이고, 워낙 대규모 이동이라 그런가. 인원을 다시 정비하고 거처로 오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네. 나는 다가오는 행렬을 하릴없이 구경했다. 어차피 투명화 마법을 사용하고 있던 참이라 다른 사람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어디 보자, 서브남이 저기에 있나?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기사들 사이에 있는 카벨 에른스트를 보게 되었다. 아, 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어디 보자. 서브남이 등장한 이후로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 중요한 사건 사고 같은 게 있었던가? 아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냥 이제키엘이랑 제니트가 러브라인을 찍는데 조미료 역할만 좀 하다가 쓸쓸히 퇴장했던 것 같은……. “엇?” 그런데 갑자기 카벨 에른스트가 돌연 이상하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사이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카벨 에른스트가 입을 쩌억 벌리며 두 눈을 부릅떴다. “헉! 요정님……?!” 커헉!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카벨 에른스트의 우렁찬 외침이 사파이어궁 주변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나는 곧바로 마법을 이용해 천사상의 날개 위를 떠났다. “아니, 에른스트 군! 자네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는 건가?” “죄송합니다, 단장님! 저 천사상 위에 분명 요정님이…….” “저 위에 있긴 뭐가 있다고?” “어라?” 하지만 나는 이미 사파이어궁의 첨탑 위로 몸을 옮긴 후였다. 카벨 에른스트는 두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결국은 나를 찾지 못하고 멍한 표정만 지었다. 나는 3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좀 더 어른스러워진 카벨을 내려다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깜짝이야. 저 서브남은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예기치 못한 곳에서 사람을 놀라게 한단 말이야? 그래도 다년간의 학습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떠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카벨 에른스트가 지금 나를 볼 수 있었다는 건 혹시 그런 의미인가? 원래 하리 에른스트가 가지고 있던 펜던트를 지금은 그가 가지고 있는 건가? 마법의 영향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마법 용품은 거의 국보와 마찬가지라 매우 희귀하다고 했으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나는 아를란타의 사절단이 사파이어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에메랄드궁으로 이동했다. * * * “이렇게 친히 환영회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 연회 자리에 카벨 에른스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이내 고개를 원상 복귀시켰다. 하기야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서브남을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서 제니트와 카벨이 처음 만났던 장소도 연회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올해는 오벨리아의 아름다운 꽃이신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인…….” 나는 클로드에게 감사 인사를 표한 뒤 이번에는 나를 향해 판에 박힌 립 서비스를 하기 시작한 아를란타 사절단의 대표를 웃는 낯으로 바라보았다. 음, 셀로이드 공작이라고 했던가? 이 아저씨도 콧수염 아저씨구먼. 아를란타에서는 아직도 콧수염을 기르는 게 유행인가? “감사합니다. 오벨리아 계신 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나는 지금까지 사절단을 맞이하는 자리에 끼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를란타의 귀족들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제니트가 처음 아를란타의 사절단을 만난 건 역시 17살 때였던 것 같다. 그래서 서브남인 카벨 에른스트가 첫눈에 제니트에게 ‘폴 인 러브!’ 하게 되어 이제키엘과 박빙의 승부…… 까지는 아니고. 커흠, 아무튼 나름의 승부를 펼쳤었지. 물론 이제키엘은 카벨을 여유롭게 무시했던 것 같지만, 제니트는 쾌활하고 밝은 성격을 가진 서브남과 만나는 것을 나름대로 즐거워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은 호감을 품은 이성을 만나는 즐거움은 아니었고, 자신을 볼 때마다 반갑게 꼬리를 흔들고 다가오는 옆집 강아지를 보는 느낌의 즐거움이었던 것 같지만……. 크흑, 생각하니 또다시 짠내가 나는구나. 안타까운 서브남이여! “아, 그러고 보니 저희 다이스 전하와 2살 차이시던가요? 다음 기회에 한번 아타나시아 공주님과 다이스 전하의 만남을 주선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두 분이 마치 천생연분처럼 아주 잘 어울리실 것 같은…….” 콰득! 파사삭! 바로 그때 옆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악, 셀로이드 공작이 불길하게 입을 턴다 싶더니만! “접시가 종잇장처럼 얇군.” 클로드가 가운데서부터 쪼개진 접시를 내려다보며 스산하게 읊조렸다. 아니, 도대체 고기를 어떻게 썰면 접시가 그렇게 여러 조각으로 깨진답니까? 이건 접시가 얇아서가 아니야! “한데 방금 뭐라고 했나? 아무래도 헛소리를 들은 듯한데.” “그, 그것이…….” 궁인들이 급히 다가와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클로드가 셀로이드 공작을 향해 음산하게 물었다. 그러자 뭔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곧바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클로드가 싸늘한 눈빛으로 셀로이드 공작을 지그시 응시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저씨, 우리 아빠는 딸바보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다구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막 그렇게 건드리면 안 돼! 다이스 전하라면 아를란타의 황손인데, 나랑 천생연분일 것 같다니! 나한테 다른 남정네를 함부로 갖다 붙였다가는 사달이 나는 수가 있답니다. “셀로이드 공.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명실공히 다음 제위에 오르실 분이 아닙니까. 다이스 전하와 미리 좋은 인연을 다진다면 좋겠으나 셀로이드 공의 말씀은…….” 셀로이드 공작의 옆에 있던 다른 사절단의 사람도 식은땀을 흘리며 귀엣말했다. 제 딴에는 소리 죽여 몰래 말한다고 한 것 같은데……. 루카스가 준 세계수 나뭇가지를 흡수한 이후로 청각이 은근히 좋아진 상태라 그런지 내 귀에는 그들의 대화가 똑똑히 들렸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나?” “지금 맞선을 주선하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저것이었다. 내가 클로드의 후계자라는 소문은 이미 타국에까지 공공연히 떠도는 것인데, 그런 나를 자기 나라 황손하고 맺어주고 싶다니? 만약 내가 직접 황위를 물려받지 않는다 해도 나와 결혼할 남자가 부마가 되어 오벨리아의 다음 황제가 될 확률이 컸다. 그리고 아를란타의 황손인 다이스는 노쇠한 현 황제가 서거한 후 아버지인 현 황태자 대신 다음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와 내가 맺어지는 것은 이치상으로도 맞지 않았다. 쯧쯧. 그냥 분위기도 띄울 겸 농담을 할 생각이었다고 해도 그 상대가 클로드여서야 통하지 않지. 게다가 진지한 생각이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헛물을 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어찌 제위에 오른단 말인가?” 그런데 이어서 속닥거리는 셀로이드 공작의 말에 나는 그만 빠직 핏대가 서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 [145화] “비록 지금은 국모의 자리가 공석이라고 하나 나중에 적통 왕자가 태어날 수도 있고, 하면 당연히 계승 서열도 바뀔 테지. 저리 꽃처럼 아름다운 공주님이신데, 잔혹한 왕위 다툼에 끼어드는 것보다 우리 다이스 전하께 시집오시는 편이 누가 봐도 더 낫지 않겠는가? 자고로 여자란 그저 곱게 살다가 남편에게 보호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 뚜드득! 뚜둑! 연회장에 다시 한번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사람도 별안간 귓가를 스친 소리에 내게 시선을 움직인 뒤였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투둑! 툭! 챙그랑! “어머나, 실례했어요.” “허억!” 그러자 내 손 안에서 완전히 반으로 쪼개진 포크와 나이프가 테이블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냥 구부러진 정도도 아니고 완전히 부러진 식기를 보고 셀로이드 공작과 다른 사절단의 사람들이 경악해 입을 벌렸다. “시, 식기를 맨손으로 두 동강…….” “몸에 마력이 넘치다 보니 가끔 이렇답니다. 아, 하지만 아직 사람을 상대로 실수한 적은 없으니까요.” “그, 그렇군요…….” 나는 사색이 된 그들을 향해 해맑은 얼굴로 호호호 웃었다. 참나, 고작 이 정도로 쪼는 주제에 연약한 여자가 어쩌구, 남편한테 보호받는 게 여자의 행복 어쩌구 했단 말이야? 에퉤퉷! 다 집어치우라고 그래. 클로드에 이어 나까지 괴력을 발산하자 셀로이드 공작은 약간 기가 죽은 눈치였다. “식기가 죄다 약해 빠져서 영 못 써먹겠구나.” 게다가 그의 말에 짜증이 났던 건 나뿐만이 아닌지, 옆에 있던 클로드의 식기는 이미 가루가 된 상태였다. “역시 좀 더 튼튼한 걸로 바꾸는 게 낫겠죠?” 나는 클로드와 함께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저런 대화를 나누며 궁인들에게 새로운 식기를 받았다. 그 후의 만찬은 아주 쾌적한 환경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는 만족스러웠다. * * * “허억!” 저 숨을 들이켜는 소리, 뭔가 낯설지 않은걸. 나는 손에 양산을 든 채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원을 산책 중이던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서브남인 카벨 에른스트였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동그랗게 떠진 푸른 눈동자. 그는 아를란타의 기사복을 입은 채 나를 향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키엘과 마찬가지로 카벨도 3년 전에 비해 확연히 소년티를 벗은 뒤였지만, 곧이어 그가 외친 말은 지극히 순진한 것이었다. “요, 요정님!” 그래, 난 다이아나 엄마를 닮아서 좀 요정 같단다. 나는 반쯤 체념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크윽, 하지만 태연하게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도 3년 전에 비해 많이 뻔뻔해졌구나. “크흠.” 앗, 필릭스! 설마 지금 웃은 거야? 옆에 있던 필릭스에게서 헛기침 소리가 흘러나오자 나는 약간 민망해졌다. 물론 필릭스는 릴리와 함께 팔불출 베스트에 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내가 요정 소리를 들은 것이 웃겨서 웃은 건 아닐 터였다. 그냥 저렇게 다 큰 청년이 날 보고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니까 재미있어서 웃은 거겠지. 그, 그렇겠지……?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요정은 아니라서요.” 나는 아직까지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카벨 에른스트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잠시 동안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것 같던 카벨이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는 것이었다. 앗, 저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내 정체를 깨달은 눈치네. 하긴 이 보석안을 보고도 알아차린 게 없으면 그것도 큰일이지. 3년이라는 세월이 과연 짧은 건 아니었는지,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내게 예를 갖추어 사과했다.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타나시아 공주님!” “인사를 허락해요.” “아를란타 제2기사단 소속, 카벨 에른스트라고 합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이번 사절단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오벨리아의 평안에 닿으시길 바랍니다.”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호오? 이렇게 보니 제법 정상적이잖아? 아, 아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벨 에른스트가 원래 정상이 아니었단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히 3년 전 아를란타의 학교에서 봤을 때와 비교해 보자면 철이 든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번에도 날 보고 요정님 소리를 한 걸 보면 아직 순진한 면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행동거지가 좀 더 무게감 있어졌다. 하긴, 솔직히 학교에서 봤을 때에는 너무 깨방정이었지……. 으음, 3년 전의 첫 만남 때 내가 그의 앞에서 허둥대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 둘 다 그동안 발전이 있었다고 봐도 되려나. “혼자 산책 중이셨나 봐요?” “예! 잠시 답답하여 바람을 쐰다는 게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모양입니다.” 카벨 에른스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아 하니 예기치 못한 만남에 동요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바, 방금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아는 요정님, 아니…… 제가 아는 사람……. 아, 아니, 안다고 하긴 좀 그렇고 전에 우연히 만났던 누군가와 몹시 닮으셔서 착각을…….” 뺨을 약간 붉히며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약간 미묘해졌다. 얼마 전 디저트 카페에서 이제키엘을 만났을 때 들었던 말과 내용은 비슷한데 느낌이 참 다르네? “그랬군요.” 으음, 그런데 전에 봤던 요정님이라 하면 내가 맞잖아. 쓰읍, 왠지 좀 양심이 찔리네. 아무래도 그만 가야겠다. “이 화원은 제가 무척 아끼는 곳이에요.” “앗,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고의는 아니었…….” “꽃들이 이렇게 아름다우니, 어쩌면 정말 요정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몇 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나서 요정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건 미안하구나. 그러니 이번에도 나만큼은 당신을 비웃지 않으마! “오벨리아는 사시사철이 따뜻해서 늘 꽃이 만개해 있답니다. 그러니 어쩌면 이곳에 있는 꽃의 요정이 에른스트 경을 이끈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 “전 먼저 자리를 비킬 테니 경은 화원을 천천히 둘러보아도 좋아요. 그럼 이만.” 내가 웃으며 말하자 어째서인지 카벨 에른스트의 표정이 또 조금 바보 같아졌다. 으음, 저 표정 뭔가 찜찜한데. 아무래도 얼른 가야겠다. 나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카벨을 등진 채 먼저 뒤돌아섰다. 그렇게 내가 걷고 있을 때, 필릭스가 옆에서 나한테 슬쩍 속삭였다. “아무래도 공주님의 추종자가 또 한 명 늘어난 것 같군요.” “으음.” 여, 역시 그렇지? 저 얼굴은 어디로 보나 ‘첫눈에 뿅 간’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서, 설마 원래 여기서 제니트를 만났어야 했는데 대신 나를 만나 버려서 그런가? 그래서 제니트 대신 나한테 반한 거야, 설마? 에이, 아니겠지……. 슬쩍 뒤돌아봤지만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카벨 에른스트가 눈에 들어와서 오히려 찜찜함만 더욱 커졌다. 나는 발걸음을 서둘러 화원을 벗어났다. * * * 이틀 뒤 나는 또다시 카벨 에른스트를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군기가 잔뜩 든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나는 흠칫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얼굴에 나도 모르게 끄응 소리 내고 말았다. “아를란타 제2기사단 소속 카벨 에른스트입니다!” 그는 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우렁찬 목소리로 또 한 번 자기소개를 했다. 아니, 그런데 여긴 지난번에 만났던 화원도 아니잖아. 두 번씩이나 우연히 만나다니, 뭔가 좀 이상한데. “오늘도 혼자 산책을 나오신 모양이네요…….” “아니요, 오늘은 동료와 함께 대련을 하다가 멀리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뭐?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우연히 만난 것도 아니고 멀리서 날 보고 쫓아왔다 이 말이니? 아니, 왜 굳이 나를……. 카벨도 무심코 한 말인지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 그게, 오늘 우연히 공주님께 어울리는 꽃을 찾아서…….” 하지만 변명조로 횡성수설 읊은 말이 분위기를 더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도,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서브남이여! 당신이 그러면 진짜로 나한테 반해서 이러는 것 같잖아? “그러니까, 저는 그저…… 이걸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카벨 에른스트가 내게 내민 것을 보고 나는 또 한 번 미묘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잠깐! 그거 내 화원에 있는 꽃 아니야? 지금 내 꽃을 따서 나한테 선물하는 거야? 그, 그건 또 무슨 이상한 선물법이랍니까? 이건 오히려 왜 내 꽃을 마음대로 꺾었냐고 화내도 될 상황 아닌가? 하지만 꽃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차마 그에게 뭐라고 할 수 없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대련 중에 나를 쫓아왔다는 말이 진실인지 카벨 에른스트는 기사단의 정복이 아닌 가벼운 셔츠 차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헝클어진 머리 하며, 바짓단에 묻은 흙 하며……. 그런 행색이라 그런지 그의 손에 들린 분홍색 꽃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게다가 여기까지 뛰어 와서 그런지, 아니면 쑥스러워서 그런지 약간 붉게 물들어 있는 얼굴이 은근히……. “고마워요.” 귀엽잖아? 나는 과연 제니트를 웃게 만들었던 서브남답다고 그를 후하게 평가하며 꽃을 받아 들었다. 내가 꽃을 받아 들자 카벨 에른스트는 기쁜 눈치였다. 꼭 덩치 큰 강아지 같네. 화악 밝아지는 얼굴을 보니 감정이 참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 같구나 싶기도 하고. “어울리나요?” “잘 어울리십니다!” 갑자기 장난기가 샘솟아서 꽃을 들고 묻자 카벨이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해 왔다. “정말 꽃의 요정 같으십니다, 공주님.” 덩달아 옆에 있던 필릭스까지 나한테 금칠을 해줬다. 쿠, 쿨럭. 하지만 꽃의 요정이라니. 역시 민망하다. 창피하다. 서브남과는 이쯤 해서 헤어지는 게 좋겠다! “방에 있는 화병에 꽂아놔야겠네요. 선물 고마워요, 에른스트 경.” 나는 웃는 얼굴로 카벨에게서 뒤돌아섰다. 이번에도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지 등 뒤가 계속 간지러웠다. 결국 산책을 하는 둥 마는 둥 한 나는 에메랄드궁으로 돌아와 내 방에 있던 루카스를 만났다. 그가 내 방에 찾아온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언제 와 있었어?” 루카스는 소파 등받이에 걸터앉아 권태로운 몸짓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내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물었다. “웬 꽃이야?” “선물 받았어.” 바로 그 순간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구한테?” “있어, 멍멍이과 서브남.” “흐응.” 루카스가 책을 든 손을 밑으로 내리며 다른 한 손을 나한테 자연스럽게 내밀었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들고 있던 꽃을 루카스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이거 네 화원에 있던 꽃 아냐? 그런데 그게 무슨 선물이야?” 커흑, 이 자식. 아픈 데를 찌르는군. “준 사람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선물 맞아.” 그래, 카벨 에른스트가 준 선물을 무시하지 말라구! 물론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긴 것과 하는 행동에 갭이 있어서 그런지 제법 귀여웠단 말이야. 으음, 하지만 확실히 찜찜하긴 하다. 원래대로라면 제니트한테 반해야 할 서브남을 본의 아니게 내가 낚아버린 느낌인데……. ======================================= [146화] 소설과 달리 제니트가 황궁에 없어서 그런가? 원래도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 화원이었던가? 으윽, 당최 기억이 나야 말이지. 찌르릉.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득 새가 푸드득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 뭐 해?!” 그리고 곧바로 기함하여 소리 질렀다. “멍멍이인지 뭔지가 좋은 선물해 줬네? 네 애완 새 마음에 들었나 봐.” 내 눈에 띈 것은 루카스가 새장 속에 꽃을 집어넣고 있는 광경이었다! 게다가 새장 속에 있는 파랑이가 그 꽃을 난자해놓는 광경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그 멍멍이가 네 새 취향을 알고 이런 걸 줬나 본데 앞으로 별식 삼아 가끔 주는 것도 괜찮겠네.” 삐삐! 삐이! 루카스는 그래놓고 천연덕스럽게도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급히 다가갔지만 이미 꽃은 꽃받침과 줄기만 남아 있었다. 나는 새장 바닥에 흩어진 꽃잎을 부리로 물고 뜯고 씹고 맛보고 하면서 파랑이가 신이 나서 푸드덕거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초딩이야? 왜 내가 받은 멀쩡한 꽃을 파랑이 밥으로 만들어?” “마음에 안 드니까.” “뭐가?” “이 꽃이 구리게 생겨서 그런가?” 뭐얏?! 그건 내 꽃에 대한 모욕이야! “이게 얼마나 예쁜 꽃인데! 황궁 정원사 아저씨가 얼마나 공들여 가꾼 꽃인지 알아?” “그딴 거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럼 다시 줄게.” 화아악. 바로 그 순간, 코끝에 웬 달짝지근한 향기가 흘러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나는 분홍색 꽃 더미 사이에 파묻힌 뒤였다. 나는 황당하게 루카스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자신이 불러낸 꽃들 사이에 파묻힌 나를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아까 그 꽃보다 훨씬 예쁘네.” “그거랑 이거랑 똑같은 꽃이잖아?” “안 똑같은데?” 이, 이놈이 지금 나랑 말장난 하나? 어디로 보나 똑같은 꽃인 게 분명한데 뭐가 아니란 거야! 그런데 순간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 야유회 때 마차 안에서도 이랬지? 내 장갑을 마음대로 홀랑 없애버려 놓고는 다시 똑같은 걸 만들어주지를 않나. 그때는 이제키엘이 만진 내 장갑을 더러운 거라고 했었고, 이번에는 카벨 에른스트가 나한테 선물해 준 꽃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순간 갑자기 ‘어라?’ 싶었다. “루카스, 너…….” “아, 뭐.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어차피 나한테는 이거 다 껌이니까.”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괜히 딴 놈한테 이딴 거 받아오지 말고.” 그 말을 듣고 ‘어라?’ 싶은 마음이 또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딴 놈한테 아무거나 함부로 주지도 마. 찾아가서 처리하려면 귀찮으니까.” 그 말을 하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루카스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 나는 벙쪄 있다가 문득 질문했다. “내가 누구한테 뭘 줬는데?” “줬잖아. 탑의 늙은이한테, 실험 재료.” 아, 머리카락 말인가? 탑의 수장 할아버지가 요즘 계속 그거 가지고 실험 중이라더니, 루카스도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그런데 처리라니? 도, 도대체 뭘요?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생각보다 기분이 더 나쁘더라고.” 루카스가 꽃 무더기 속에서 꽃을 한 송이 빼 들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나는 마주한 눈빛에서 서늘한 기운을 발견하고 흠칫하고 말았다. 비로소 나는 오늘 그가 여기에 왔던 이유가 지금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 그냥 머리카락 한 올인데.” “그래, 고작 머리카락 한 올인데.” 나도 모르게 변명했다. 솔직히 내가 누구한테 뭘 주던 그건 내 마음인데! 어흑, 하지만 지금 루카스의 분위기가 왜인지 심상치 않아서 솔직히 약간 쫄았다. “그래서 그냥 다 죽여 버릴까 하다가.” 주, 죽이다니? 누구를? 수장 할아버지를?! “그냥 실험실만 뒤엎고 말았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안심했다. 물론 루카스가 진짜로 수장 할아버지를 죽일 리는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지금 한 말은 좀 진심 같아서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다 죽여 버리면 왠지 네가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 사람은 자기 안의 분노를 조절할 줄 알아야 참된 어른인 것…….”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니까 또 기분이 나빠지더란 말이지.” “뭐?!” 이 종잡을 수 없는 놈이? 잘 나가다가 또 왜 기분이 나쁘대?! 그리고 이어지는 루카스의 말에 나는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 너라는 ‘제약’이 생겨 버렸단 말이잖아.” “루카스…….” “꼭 약점 잡힌 것 같아서 이만저만 기분이 불쾌한 게 아니야.” 나는 말문이 막혀서 마주한 얼굴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아무 놈한테 아무거나 받고 아무거나 주고 하지 말라고.” 화아악. 루카스의 손에 들려 있던 꽃이 순식간에 하얀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다음엔 내가 어떻게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루카스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곧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떠난 빈자리에 재가 된 꽃잎들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나는 꽃 더미 사이에 파묻힌 채로 멍하니 생각했다. 루카스……. 저기 너, 설마 지금 그거 나한테 고백한 거니……? * * * 허 참. 루카스 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저녁밥을 먹으며 아까 봤던 루카스의 기행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분명 말하는 뉘앙스는 고백 비스무리 했는데 정작 ‘이건 고백! 판결! 땅땅!’ 하자니 뭔가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대상이 깜또라는 위명을 얻었던 루카스라서 그런가 보다. 평소에도 내가 자기 거니 어쩌니 했던 놈이니만큼 그냥 맛 간 소유욕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소유욕’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기, 기분 탓인가. 이 단어 뭔가 좀 낯간지럽게 들리지 않아? 괜한 기분이겠지? 게다가 내가 자기의 약점 같은 거라니, 이런 오묘한 말이……. “사절단은 내일 돌려보낼 생각이다.” 그렇게 내가 혼자 심심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내 맞은편에 있던 클로드가 갑자기 말했다. 응?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죠? 나는 잠깐 방금 전에 들은 말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곧 그 의미를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뭐? 멀쩡한 사절단을 갑자기 왜 돌려보내?! 보름 정도 여기에 있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렇게 고기를 난자해 놓을 정도라니,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직접 말해도 되었을 것을.” “제가 언제 난자를…… 헉.” 클로드의 말에 고개를 내린 나는 곧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내 고기가 언제 이렇게 넝마가 된 거지?! 루카스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고기를 잘게 썰고 있었던 모양이다. 으악, 황궁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요리한 별 다섯 개짜리 내 최고급 스테이크가!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그 너구리들이 거슬리던 참이다. 굳이 내일까지 갈 것 없이 그냥 지금 바로 쫓아내면 되겠군.” “아빠?! 자, 잠깐만요!” 잠깐, 사람 부르지 말고 잠깐만 기다리시라고! 아를란타는 친선국인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아니, 사절단을 갑자기 왜 쫓아내요?” “불쾌하니까.” 대답이 뭐 그래?! 당신이 루카스입니까?! “왜 불쾌하신데요?” “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지 않느냐.” 띠용. 클로드의 말을 듣고 나는 그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아, 아니. 내가 언제 심기 불편한 상태였다고? 설마 이유가 나 때문일 줄은 몰랐는데 당황스럽네! 그나저나 지금 우리 대화, 겁나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왜 사절단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데요?” “연회 자리에서 그치들이 건방을 떨었지 않나.” 건방을 떨다니, 언제……. 그러다 퍼뜩 내 머릿속에 지난 연회 때 셀로이드인지 셀로판지인지 하는 공작이 속닥거렸던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허억! 그럼 지금 그 셀로판지 공작이 나한테 여자가 어쩌구 하면서 입을 턴 것 때문에 쫓아낸다 만다 하는 거란 말이야? 내가 그 아저씨 때문에 지금 고기도 난자해 놓고,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아서? “지난번에는 네가 말려서 참았다만 그리 마음에 담아둘 바엔 진작 쫓아내는 것이 좋았을 것을.” 물론 중요한 외교 사절단이 타국에 와서 경솔히 입을 놀리는 건 백번 양보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도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안 좋게 보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셀로판지 공작이 한 발언은 사실 공적인 것이라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치가 한 말은 모두 개소리에 잡소리이니, 마음에 담아둘 필요 없다.” 그래서 아를란타 사절단의 저런 발언 때문에 클로드가 그들을 쫓아내는 것이야말로 엄청 쇼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대로 쫓아냈다가는 외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요?” “그래 봤자 제깟 놈들이 뭘 할 수 있겠나.” “운 나쁘게 전쟁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요. 아빠 그런 거 귀찮아서 싫으시다면서요.” “어차피 내가 이긴다.” 내가 제일 잘 나가! 나는 내친 김에 미래의 새로운 청사진을 짜기 시작하는 클로드를 벙찐 채 바라보았다. “이참에 아를란타의 커피 농장이 있는 에비앙 지역을 오벨리아에 속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네가 원해서 커피 수입을 늘리려 했다만, 이렇게 된 바에는 아예 그 땅을 네게 주는 게 낫겠다.” 클로드는 심지어 나한테도 자기처럼 막 나가라는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네 앞에서 겁 없이 입을 터는 놈이 있다면 뒤처리는 내가 해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그대로 파묻어버리…….” “아빠, 전 아빠가 정말 좋아요.” 나는 약간 찡해져서 말했다. 전에 귀찮아서 정복 전쟁도 안 한다고 딱 잘라 말했던 사람이 날 위해서라면 그런 귀찮음도 감수할 수 있다니!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쟁은 그만둡시다. 기껏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내 기분상의 문제 때문에 그 사달이 나게 되면 온 제국민들이 날 원망할 거라고! 그 원혼들 때문에 아마 나도 제명대로 못 살 것이야, 으흑. “잘 못 들었다. 다시 말해봐라.” 그런데 내 느닷없는 고백에 클로드의 손이 잠깐 멈칫하더니, 곧 그가 딴청을 피우며 말해 오는 것이었다. “아빠가 세상에서 제~ 일 좋아요!” “밖이 영 시끄러워서 제대로 안 들리는군.” “우리 아빠가 최고야! 전 아빠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좋아요! 세상에서 제~ 일 좋아요!” 나는 클로드가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외쳐 주었다. “하지만 사절단을 쫓아내는 건 안 돼요.” 하지만 이건 단호히 말해야지! 그 후 우리의 저녁 식사 시간은 훈훈한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물론 표정 변화는 별로 없었지만 클로드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확연히 ‘봄바람 살랑살랑’이 되어 있었다. 클로드는 난자된 내 접시 위의 고기를 보며 음식을 다시 내오라 하겠다 했으나 내가 거절했다. 크으, 그러고 보니 내가 요즘 바빠서 우리 아빠한테 좀 소홀했었네. 반성합니다! 나는 근래 들어 이렇게 기분이 산뜻해 보이는 클로드는 처음이라 앞으로도 가끔씩 그에게 애교를 부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조각조각난 고기는 그래도 여전히 아주 맛있어서 나는 즐겁게 클로드와의 저녁 만찬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 [147화] “공주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벨리아의 번영이 함께하시기를.” “오랜만이네요. 알피어스 공도 그간 잘 지냈나요?” 나는 오랜만에 황궁 안에서 만난 알피어스 공작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도 나를 보며 웃는 낯으로 입에 발린 말을 시작했다. “염려해 주신 덕분이지요. 그나저나 날이 갈수록 빛이 나는 공주님의 미모에 탄복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알피어스 공이야말로 나날이 젊어지시는 것 같아요.” 하하 호호. 우리는 겉보기에는 제법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습으로 잠깐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었다. “외교 회의에 가시는 길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흐음. 오늘 아를란타 사절단의 대표들과 함께 회의가 있다고 하더니, 역시 흰둥이 아저씨도 거기에 가는구나. 실은 나도 오늘 있을 외교 회의에 참관해도 되었지만 클로드가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역시 그는 내가 원하지 않으면 하나뿐인 후계자고 뭐고, 나한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요즘은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되었다. 그때, 흰둥이 아저씨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마침 제 아들이 지금 황궁에 있습니다.” “그런가요?” “예, 사절단의 인원 중에 아를란타 유학 시절 함께 수학했던 동문이 있다더군요.” “그렇군요.” 하지만 지금 로저 알피어스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눈에 뻔히 보였기 때문에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기 싫었다.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알피어스 공작이 눈썹을 한차례 꿈틀거렸다. 척 보아하니 ‘우리 이제키엘을 상대로 그런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다니! 믿을 수 없어!’라는 표정이었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이제키엘이 근처에 있다는데 이런 심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 리는 없지. 다른 영애들이라면 당장에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가고도 남을 테니. 하지만 나는 흰둥이 아저씨를 놀려 주는 게 더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제키엘의 방문 소식이 나한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로저 알피어스가 이번에는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크흠. 제니트, 그 아이도 함께 있으니 언제든 궁에 불러주시면 기쁘게 달려갈 겁니다.” “마그리타 양이 지금 황궁에 있나요?” “예, 그렇습니다.” 이건 좀 먹혔다. 사실 지난번 다과 시간 이후 제니트는 내가 불러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황궁에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은 내가 직접 찾아가 볼까 싶기도 했으나, 마침 클로드가 내준 ‘마법 수식을 활용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씨앗을 성장하게 해보아요!’ 퀘스트 때문에 바빠져서 그러지 못했다. “황궁이 넓어 찾기 어려우실 테니 사람을 보내시면…….” “그럴 필요 없어요. 마력을 쓰면 어디에 있는지 곧바로 알 수 있으니까요.” 나는 황궁 안에서 마력 사용에 전혀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 찾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사실 평소에는 안 쓰는 마법이었지만……. 우윽, 솔직히 이런 식으로 드러내 놓고 잘난 척하듯 말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흰둥이 아저씨한테는 달랐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에게 경고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나는 아무 힘도 능력도 없던 소설 속의 아타나시아와 다르니까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기사단이 사용하는 연무장에 있네요.”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퍼포먼스 하듯이 화려하게 마법을 쓰고 말이야! 내가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오색 찬연한 빛이 불꽃처럼 화악 일어난 뒤 알피어스 공작의 앞을 쏜살같이 지나쳐 갔다. 나는 빛의 잔상을 얼떨떨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곧 그가 잠시 동안 티 나지 않게 내 얼굴을 살피다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 “본래도 특출하셨던 공주님의 능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하시니 신하된 몸으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흐음. 나도 가늘게 뜬 눈으로 잠깐 그를 마주 보다가 곧 웃는 얼굴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산책 삼아 연무장에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알피어스 공도 늦기 전에 가보셔야죠. 그럼 오벨리아의 축복이 닿기를.” “오벨리아의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나는 흰둥이 아저씨와 헤어진 뒤 걷기 시작했다. “공주님, 연무장에 가실 겁니까?” “글쎄.” 나를 뒤 따라오던 필릭스가 묻는 말에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제니트는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한데 흰둥이 아저씨 때문에 영 찜찜하단 말이야. 왠지 몇 년 전부터 하는 걸 보면 나한테 무척 우호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게다가 제니트만 있는 게 아니라 이제키엘도 같이 있다고 하니……. 원래 나는 지금 탑에 가는 길이었는데, 어차피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황실 기사단이 사용하는 연무장 쪽을 지나야 하기는 했다. 나는 그때까지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일단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어라? 그런데 제니트가 지금 이제키엘하고 같이 있다면, 둘이서 카벨 에른스트를 만나고 있다는 얘기잖아? 헉, 드디어 여주인공과 서브남의 첫 만남인 건가? 그럼 이번에야말로 카벨 에른스트가 제니트에게 ‘폴 인 러브!’ 하는 걸까? 왠지 궁금하잖아! “필릭스, 연무장에 살짝만 들르자.” “예, 공주님.” 살짝만 들르자는 뜻은 내 뒤에 줄줄이 달린 수행원들을 두고 단둘이 조용히 다녀오자는 의미였다. 호기심을 해소하고 싶기는 해도 별로 그들의 눈에 띄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하앗! 얍!” 연무장에서는 오늘도 기사들이 한창 열심히 단련하고 있었다. 나는 우렁차게 울리는 기합을 들으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음?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왠지 오늘따라 기사님들 기합에 더 힘이 들어간 것 같은데? 그리고 좀 더 가까이 갔을 때,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하, 예쁜 아가씨가 자기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기합이 잔뜩 들어간 거구먼? 나는 레이스 양산 아래로 긴 갈색 머리카락을 나부끼고 있는 제니트를 보고 참 속 보이는 기사 오빠들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궁인들이 오다가다 연무장을 구경해도 바짝 각을 잡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 하물며 그 대상이 레이디 중의 레이디인 제니트라서야. 왜, 로맨스 소설을 봐도 그런 게 있잖은가. 고귀한 레이디에게 서약을 바치는 기사들의 판타지라거나. 나는 바로 어제도 심심풀이로 읽었던 로맨스 소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구령 맞춰서! 하나, 둘!” “하나, 둘!” “가로 베기! 으랴압!” “으랴압!” 그런데 구령을 맞춰서 훈련하는 황실 기사단과 달리 한쪽 구석에서 자유 대련을 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앗, 카벨 에른스트랑 이제키엘이잖아? 이제 보니 제니트가 보고 있는 것도 그들이었다. 그럼 저 기사 오빠들은 지금 헛물켜고 있는 건가? 으앙, 짠내가! “알피어스 공자와 지난번 공주님께 꽃을 선물했던 기사로군요. 방금 알피어스 공이 말했던 아를란타의 동문인가 봅니다. 신기한 우연이네요.” 필릭스가 약간 놀란 듯이 말했다. 나는 이제키엘이 저런 식으로 대련하는 모습을 처음 봐서 흥미진진한 마음이 되었다. 카벨과 이제키엘은 둘 다 목검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이제키엘이 느슨히 상대하는 것 같은데? “무승부네요. 알피어스 공자는 문무 모두에 능하군요.” 결과는 필릭스가 말한 대로 무승부였다. 보아하니 둘 다 전력을 다하지는 않은 듯했지만 아무래도 이제키엘이 봐준 느낌이었다. 역시 오벨리아 부동의 최고 신랑감! 나는 두 사람이 제니트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발길을 뗐다. “가자, 필릭스.” “이렇게 그냥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데 필릭스가 다 안다는 듯이 아빠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친구분께 계속 신경 쓰고 계셨잖아요.” 앗, 내가 제니트에게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걸 들켰단 말인가! 우리 필릭스가 달라졌어요! 정말 눈치가 이렇게 빨라지다니! 감동적이긴 하지만 지금은 안 반갑다, 으아앙! “음, 하지만…….” 그래도 왠지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기는 좀 그랬다. 나는 됐으니 그냥 가자는 말을 하려고 하며 무심코 연무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후의 햇빛을 담은 진한 금색의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아, 이제키엘하고 눈 마주쳤다. 나 지금 되게 존재감 없이 조용히 서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거지? 으헉, 알다가도 모르겠네. 나는 그들을 몰래 훔쳐보다가 들킨 사람처럼 약간 난처해졌다. 아, 아닌가. 몰래 훔쳐봤던 거 맞나? 크흑. “세 분 다 이쪽을 보고 있네요.” “필릭스 때문이야.” 나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곧바로 그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기 때문에 다시 웃는 얼굴을 하기는 했지만. “아타나시아 공주님.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알피어스 공자, 마그리타 양, 그리고 에른스트 경. 반가워요.” 세 사람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다. 이제키엘은 나를 향해 대외용 미소를 짓고 있었고, 제니트는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이었으나 어딘가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카벨 에른스트는 긴장한 모습으로 있다가 내가 마주 인사하자 금세 얼굴을 활짝 폈다. “그를 먼저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친구의 낌새가 이상했는지 이제키엘이 내게 물었다. “네, 아를란타 사절단의 환영 연회 때 만났지요.” “예!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일부러 얼마 전 화원에서 만난 그에게 꽃을 받은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 그런데 서브남이여. 왜 날 보면서 그렇게 뺨을 붉히는 거야? 당신이 사랑에 빠져야 할 레이디는 바로 옆에 있잖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제니트가 이렇게 꽃처럼 아리따운 모습을 하고 서 있는데!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그가 나를 향해 대뜸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공주님께서 꽃을 받아주셔서 기뻤습니다!” 앗, 꽃 얘기를 냉큼 해버리다니! “꽃이라고?” “꽃이요?” 이제키엘과 제니트의 반문이 두 귀를 파고들었다. “또 공주님과 어울리는 꽃을 찾았는데 다음에 드리고 싶습니다!” 내 화원에 땜빵이라도 만들 셈이냐!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헉, 제 마음을……?!” 으악, 그 반응은 또 뭐야! 수줍게 몸을 비비 꼬지 마! 나는 이제키엘이 제 친구의 이상한 모습을 보며 한순간 눈매를 움찔하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마그리타 양도 오랜만이에요.” 나는 카벨 에른스트를 애써 외면하며 제니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도 호기심 어린 눈빛을 거두고 나를 쳐다보았다. 제니트는 여전히 지금의 상황이 조금 불편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으며 말했다. “네. 저도 오늘 공주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기뻐요.” “흐음, 그 말은 오늘 제 얼굴도 보지 않고 그냥 갈 생각이었단 거군요?” “아, 그게 아니라…….” 미안합니다, 잠깐 장난기가 발동해서. 내 짓궂은 말에 제니트가 당황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은 초특급으로 귀여웠지만 너무 당황하게 만드는 것도 미안하니 이쯤 해서 말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러기 전에 이제키엘이 먼저 곤경에 빠진 제니트를 구해 주었다. “그와는 구면이라 하시니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카벨 에른스트는 아를란타에서 저와 함께 수학했던 친우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를 만나러 온 참인데, 뜻하지 않게 이런 격의 없는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 [148화] 윽, 내가 대련 구경한 걸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구나! 나는 약간 민망해졌지만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천만에요. 두 분의 멋진 모습에 연무장을 지나던 제 발길이 멈춰질 정도였는걸요.” “앗, 설마 대련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내 말에 카벨 에른스트가 격하게 반응했다. “이제키엘! 한 번 더 붙자!” “대련은 딱 한 번만 하기로 했을 텐데.” “무승부였으니까, 무효지! 자, 가자!” “흐음.”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거절하던 이제키엘이었으나 어째서인지 그는 마음을 바꾼 듯 나를 향해 말했다. “공주님, 허락해 주신다면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러세요. 저는 마그리타 양과 함께 있을게요.” 내 말에 제니트가 ‘앗!’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은 자리를 뜬 뒤였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들을 떠나보냈다. “제니트, 여기 앉아요.” 나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을 잔디 위에 깐 뒤 제니트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어 보였다. “풀물이 들 거예요. 차라리 제가…….” “괜찮아요. 자, 어서 이리 와서 앉아요.” 나는 거절하는 제니트를 홀랑 내 옆에 앉혔다. 그녀는 내 숄 위에 앉은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듯 불편하게 꼼지락거렸다. 나는 제니트의 옆얼굴을 보며 슬쩍 물었다. “얼굴이 좀 안 좋아 보이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대답이 너무 칼 같이 돌아와서 더 묻기도 좀 그랬다. 보통 저렇게까지 부정하는 건 긍정의 의미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 아무래도 지난번 다과회 날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때 세면실에 간다고 나갔다가 생각보다 늦게 돌아온 것도 그렇고, 다시 화원에 들어선 제니트가 어째서인지 먼발치에서 다른 영애들과 함께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것도 그렇고……. 그리고 또 그러고 나서 클로드가……. “…….” 나는 말없이 제니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마 전 클로드와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했다. * * * “얼마 후 있을 사냥 대회에 참석하고 싶다고?” 클로드가 말하는 사냥 대회는 아를란타의 사절단도 참석하는 친선 도모용 행사였다. 그러니 나도 공주로서 얼굴을 비춰주는 게 좋았다. “네, 어차피 제가 직접 사냥을 할 건 아니지만요.” “그래, 원한다면 그러려무나.” 클로드도 단박에 오케이 했다. 그런데 잇따라 그가 한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아타나시아.” “네.” “네 다과회에 초대되어 온 손님 중에 마그리타라고 했었던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그리타라는 이름은 한순간 내 가슴을 크게 뛰게 할 만했다. “전에도 말했었지만 너무 정 주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는 클로드는 방금 전 무슨 말을 했냐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그는 예전에도 내게 저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괜히 흠칫해서 클로드에게 왜냐고 물었고, 그는 그런 내게 ‘정을 줘봤자 어차피 나중에는 만나지 못하게 될 테니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표면적으로 제니트가 마그리타의 성을 달고 잠시 동안 알피어스에 머물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클로드가 사실 다른 이유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주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장난스럽게 웃었다. “흐응. 아빠, 질투하시는구나?” 그 순간 클로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질투라니 그런 쪼잔한 걸 내가 할 것 같나?” “에이, 걱정 마세요. 전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으니까요. 아무리 친한 친구가 생겨도 아빠한테는 못 이겨요!” “그건 당연한 거고.” 나는 가소롭다는 듯 흥, 콧방귀를 뀌는 클로드를 보며 한동안 그를 더 놀려댔다. * * * 음. 오늘의 회상은 여기까지! 나는 제니트에게서 시선을 떼고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헉, 공주님!” “뭣?!” “공주님이시라고?!” 그런데 나를 발견한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곧장 기사의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급히 달려온 기사단장을 향해 나를 신경 쓰지 말고 훈련을 계속하라는 의사를 전한 뒤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정렬! 찌르기 시작! 이얍!” “이야아압!” 앗, 그런데 구령 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졌잖아? 이래서 처음에 조용히 다녀가려고 했던 건데. 나는 남몰래 쯧 혀를 찼다. 제니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제니트 표정이 왠지 좀 어두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실은 여기 오는 길에 알피어스 공을 만났어요.” “아, 그러셨어요?” “네, 알피어스 공자와 제니트가 함께 황궁에 왔다고 하더라고요.” “이제키엘의 학창시절 친구라고 들어서, 어떤 분인지 저도 궁금해서요. 그래서 따라와 버렸어요.” 그런가. 좋아하는 사람의 친구라고 하면 확실히 좀 궁금할 것도 같고. 오벨리아에서도 이제키엘은 뭔가 혼자서 고고한 느낌이라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친분을 쌓은 귀족 자제야 수두룩하겠지만. “저랑 비슷하네요. 전 제니트가 여기 있다는 말에 와버렸거든요. 원래는 탑에 가려고 했는데.” 내 말에 연무장을 응시하고 있던 제니트의 고개가 움직여졌다. 나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덧붙였다. “제니트가 요즘 만나주지 않아서 적적했어요.” 마주한 눈동자에 얕은 파문이 이는 것이 보였다. 제니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고,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오늘까지도 이렇게 침체되어 있을 정도면 작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오늘도 제니트가 있다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여기 오지 않았을 걸요.” 사실 나는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들 때는 언제든 말해 달라. 내가 힘이 되어주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클로드의 말이 없었다고 해도, 나는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선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언제나 주지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님, 전 공주님이 정말 좋아요.” “나도 제니트가 좋아요.” 아마도 우리가 서로에게 말하는 ‘좋아요’는 같은 마음이 아니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미안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완전히 받아주지도 끊어내지도 못 하는지도 몰랐다. “공주님은 항상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세요. 그게 너무 신기해요.” 그것은 몇 년 전 이모인 로자리아 백작 부인을 잃고 제니트가 울고 있을 때 느꼈던 마음과 비슷했다. “으악, 말도 안 돼!” 그때, 연무장 쪽에서 절규하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 보니 카벨 에른스트였다. 왜인지 이제키엘한테 카벨이 당하는 느낌이더니 이제야 확실히 결판이 난 모양이다. “이제키엘이 이겼나 봐요.” 제니트가 방금 전에 비해 확연히 가벼워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요. 제니트랑 얘기하느라 대련은 잘 보지도 못 했네요.” “저도요.”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다가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호호 웃었다. “두 분 다 멋있었어요.” “헉, 정말요?” “맞아요, 정말 멋졌어요.” 카벨 에른스트는 풀 죽은 대형견처럼 축 쳐져 있다가 나와 제니트의 칭찬을 받고 다시 소생했다. 제니트보다 밝은 색의 벽안이 유리구슬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호오, 이렇게 보니 카벨 에른스트도 꽤나 미남이잖아? 그동안 하도 미형의 사람들만 봐와서 그런지 나도 눈이 높아져 있었나 보다. 하긴, 괜히 서브남이겠어? “사실은 학술원 시절, 무술 과목만큼은 제가 이제키엘보다 성적이 좋았습니다!” “어머나, 학술원 시절 이야기라니. 궁금하네요.” “다음에 또 뵙게 되면 자세히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니트의 말의 완성형은 ‘이제키엘의 학술원 시절 이야기라니, 궁금해요!’겠지만 아무렴 어떠랴. 나는 즐거워 보이는 제니트와 카벨 에른스트를 보며 이제야 사랑의 화살표가 제대로 작동하는 건가 싶어서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키엘, 대련 한 번 더 하자!” “두 번이면 충분한 것 같은데?” “사나이라면 삼세번은 채워야지! 한 번 더 해! 한 번 더!” 서브남은 승부욕이 강했다. 쿠, 쿨럭. 그런데 너무 조르신다. 제니트도 약간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오직 이제키엘만이 그런 그가 익숙한 듯 반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오잉, 누가 또 날 부르는 거야? 이번에는 뒤쪽이었다. 나는 발랄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직후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여기 계셨군요!” 루카스와 탑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나를 부른 것은 루카스 말고 다른 마법사였는데, 그는 내가 탑에 왕래하면서 친해진 마법사였다. “공주님께서 안 오셔서 마중 나왔어요!” “탑에 오시는 중에 길이라도 잃으셨나 했습니다.” 뒤에 말한 것은 루카스였다. 으윽, 오늘도 어김없이 얄밉게도 말하는구나! 건실한 마법사인 척 웃고 있지만 그 내용이 참으로 불손하기도 했다. “도중에 반가운 분들을 만나서 잠시 걸음을 늦추게 되었네요. 기다렸다면 미안해요.” 아니, 그런데 평소에는 내가 일찍 가든 늦게 가든 다들 신경도 안 쓰고 자기 할 일만 하기 바쁘면서! 왜 오늘따라 마중까지 오고 그러십니까? 게, 게다가 이제키엘과 루카스 사이에 왜인지 날카로운 전류가 튀는 것 같아서 더 신경 쓰인다! “헉, 설마 검은 탑의 마법사들!” 하지만 카벨의 외침으로 분위기가 중화되었다. 지금만큼은 잘했다, 서브남이여! “앗, 아를란타에서 온 분이시군요?” 카벨의 옷에 새겨진 아를란타의 황실 문양을 보았는지 탑의 마법사도 덩달아 외쳤다. “괜찮으시다면 대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으앗, 이제키엘과의 대련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느낌이더니 이번에는 마법사를 상대하겠다는 거야? 띠링! [카벨 에른스트(아를란타 제2기사단 소속의 기사)의 대련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검은 탑의 마법사에게 돌발 퀘스트가 날아갔다. 하지만 그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거절했다. “저는 지금 연구 중인 마법 때문에 마력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어서요.” [대련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카벨 에른스트의 기대 어린 시선이 이번에는 루카스를 향했다. 하지만 아마 루카스도 거절하겠지. 왜냐면 성실한 마법사 흉내를 내고 있는 지금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대련합시다, 마법사님!” “연무장에 있는 다른 기사분들과 대련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오벨리아의 검은 탑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탑 소속 마법사 분과 꼭 한번 겨뤄보고 싶었습니다! 오벨리아의 황실은 마력 사용을 제약하고 있다지요? 힘에 부치시면 그냥 간간이 방어 마법만 펼쳐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것도 어려우시면 도중에 그만해 달라고 언제든 편히 말씀해 주세요! 절대 마법사님을 무리시키지 않겠습니다!” “쿠, 쿨럭!” 헛기침 소리는 루카스의 옆에 있던 마법사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동공을 흔들며 카벨을 보고 있었다. 그, 그만해! 당신 지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고 있다고! 지금 무시할 사람이 없어서 루카스를! 그것도 면전에서 그렇게 자기보다 약한 사람 대하듯 하고 있는 거야? 당신 목숨은 고양이처럼 아홉 개라도 되는 거야? “헤에.” 그리고 나는 루카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낮게 울린 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 [149화] “사, 살인은 반대입니다.” 그것은 옆에 있던 탑의 마법사도 마찬가지인지, 곧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에이, 걱정하실 것 없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대련인데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리 있겠습니까? 마법사분들이 원래 체력이 약하신 것도 알고 있으니 최대한 살살 하겠습니다.” “그, 그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건 너의 목숨이란다! “그럼 이번에는 마법사님과 대련하시는 건가요?” 옆에서 제니트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키엘은 무언가를 가늠하듯 루카스와 카벨을 번갈아 훑어보고 있었다. 둘 중 누구에게 승산이 더 있을지 살펴보기라도 하는 걸까? 카벨은 여전히 자신에게 다가올 암울한 미래도 모른 채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마침내 루카스가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족한 몸이지만 잠시 시간을 내드리지요.” 띠링! [대련 요청을 승낙합니다!] 퀘스트가 성사되었다는 알림창이 한순간 내 눈앞에 번쩍인 것 같았다. 아아, 그는 좋은 서브남이었습니다……. 나와 탑의 마법사는 아련한 눈빛으로 루카스의 뒤를 신이 나서 쫄래쫄래 따라가는 카벨 에른스트를 바라보았다. “흥미로운 대련이 되겠네요.” “어떤 의미로는 확실히 흥미로울지도 모르겠군요.” “공주님은 누가 이길 것 같으세요?” 필릭스, 이제키엘, 제니트 순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카벨 에른스트를 짠하게 보던 마법사는……. “오, 신이시여…….” 으앙, 신을 찾고 있었다! “부디 저 가련한 중생을 구원하소서.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어흑, 최대한 순식간에 절명하도록…….” 그, 그런데 기도하는 내용이 너무 섬뜩하잖아요! 아니, 일단 한 명은 죽는 게 확정이냐고! 하지만 곧바로 귓가에 울리는 굉음에 나는 조용히 묵념하고 말았다. 쿠콰쾅! 쾅! “으아악!” 콰쾅쾅쾅! 푸쾅쾅! “사, 살려……! 으억, 흐어헉……!” 굉음과 함께 처참한 비명이 연무장에 울렸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마,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오죽했으면 제니트가 두 눈을 흔들며 말했다. 연무장은 평소 마력 사용이 허가된 장소 중 하나였고, 마법사가 낀 대련 중에는 주위에 결계를 치는 게 규칙이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눈에는 결계 안으로 흙먼지가 자욱해진 것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폭발음이나 회오리바람 소리, 또 찰진 비명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저 안에서 얻어터지고 있는 건 카벨 에른스트라는 답이 나왔다. “하지만 신성한 대련에 끼어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괜찮을 겁니다. 맷집은 강한 녀석이니까요.” “아마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도…….” 필릭스가 대련에 끼어들 수 없다고 하는 건 이해가 되었지만 이, 이제키엘? 맷집이 강하다는 말로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거야? 엄청 산뜻하게 웃으면서 그런 냉정한 말을! 게다가 마법사님, 그 불확실한 ‘아마도’는 도대체 뭡니까? 쿠콰쾅쾅쾅! “꾸엑!” 물론 처음 대련을 신청한 것도, 멋모르고 루카스를 자극한 것도 카벨 에른스트였지만 말이지! 그런데 진짜 대련에 제삼자가 끼어들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 제니트와 나는 나란히 동공만 흔들고 있었다. 연무장에 있던 기사들도 어느 새 훈련을 멈추고 멍하니 결계 부근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별안간 연무장에 울리던 타격음이 쥐 죽은 듯 사라졌다. “아, 개운하다.”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우리가 보게 된 것은 두 손을 탁탁 털고 있는 루카스였다. 아니, 그런데 얘가?!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곤죽이 되게 패놨으면 저렇게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앗, 그런데 카벨은?! 다행히 그는 살아 있었다. 온몸 구석구석까지 잘 다져진 채 흙바닥에 반 시체처럼 드러누워 있긴 했지만. 곧 그가 부들거리며 팔을 들어 올리더니 루카스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처억 치켜 올렸다. “최, 최고의 대련이었다……. 깰꼬닥.” 곧바로 그는 기절했다. 우리는 연무장의 다른 기사들이 그를 둘러업고 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정도로 쓰러질 만큼 약한 친구가 아니니까요.” “아마도 치유 마법을 번갈아 쓰면서 공격했을 거예요. 그래야 더 오래 괴롭힐 수 있으니까…… 크흑!” 이번에도 필릭스, 이제키엘, 마법사 순의 대화였다. 이제키엘은 여전히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묘하게 냉정했고, 마법사는……. 으앙, 설마 그거 경험담입니까? 잠깐, 울지 말아요! “그럼 귀찮은 일도 일단락되었겠다, 이만 가실까요?” 루카스는 발걸음도 가볍게 다가와서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상큼하게도 웃었다. “마법사님은…… 음, 참 강하시네요.” 그걸 보고 제니트가 내 귀에만 들리게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안에 있던 루카스의 이미지가 살짝 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는 반쯤 체념한 기분으로 허허 웃었다. 헤어지기 전 잠깐 이제키엘과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까 그놈 꽤 쓸 만하던데.” 그리고 탑으로 가는 길에 불현듯 루카스가 말했다. 그는 무척이나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는 다시 한번 서브남을 향해 애도하는 마음을 갖고 말았다. 루카스와 함께 온 마법사는 방금 전의 일로 질려버렸는지 먼저 탑으로 가겠다며 후다닥 달아난 뒤였다. 게다가 필릭스에게도 카벨 에른스트의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보냈기 때문에 지금 내 옆에는 루카스뿐이었다. 뭐, 어차피 루카스가 상대방이 크게 다치지 않게 알아서 잘 조절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가 누군가를 이렇게 좋게 평가하는 건 거의 처음 봐서 조금 신기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 생각보다 강했어?” “나한테는 그래 봤자긴 한데, 죽어도 항복 소리를 안 하더라고.” 요컨대, ‘처음에는 적당히 패주려고 했으나 항복 소리를 안 해서 반쯤 죽을 때까지 패줬다’ 이거였다. 아, 아닛! 그런데 그거 좋은 거 맞습니까? 뭔가 카벨 에른스트가 더 불쌍해지는데! 하지만 그렇게 먼지 나게 맞으면서도 끝까지 항복을 안 했다니 어떤 의미로 대단하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이어지는 루카스의 말에 그냥 카벨을 동정하기로 했다. “고놈 참 때릴 맛이 나더란 말이지.” 마음에 든 거냐! 저건 먹잇감을 앞에 둔 것 같은 눈빛인데! 으앙, 도망쳐요, 서브남! 그리고 나는 지난번 루카스와의 일로 어색할까 봐 약간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화에 안심하며 탑을 향해 걸었다. 제41.5장 제니트와 검은 탑의 마법사 “그럼 다녀올게. 금방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천천히 다녀오세요.” 아타나시아 공주가 마법사들과 함께 자리를 떠난 직후, 제니트와 이제키엘도 연무장을 떠났다. 그러나 역시 기사들에게 업혀 간 카벨이 걱정되었기 때문에 제니트는 이제키엘에게 그의 상태를 보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키엘도 내심 그가 신경 쓰이긴 했는지 흔쾌히 승낙했고, 그래서 제니트는 정원에 혼자 남게 되었다. “아, 공주님의 화원에 있는 꽃과 비슷하다.” 하얗고 고운 손가락이 붉은 꽃송이 위에 내려앉았다. 요 근래 들어 먹구름이 낀 듯 계속 어두침침기만 하던 마음에 햇빛이 든 것 같았다. 지난 다과회 때 황제궁의 정원에서 클로드를 만난 이후부터 제니트는 줄곧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은연중에 자꾸만, 클로드의 옆에 당당히 서 있던 아타나시아 공주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덧 제니트는 그녀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스스로가 초라해져서 어찌할 줄을 모른 채로 그녀는 끝없는 우울감 속에 빠져들었다. 아타나시아 공주와의 만남을 피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제니트는 이런 부끄러운 마음으로는 차마 그녀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를란타의 사절단으로 오벨리아에 방문했다던 이제키엘의 친우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이제키엘이 제 입으로 친구라고 말한 사람은 처음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제니트는 그와 함께 황성에 걸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타나시아 공주를 만나자마자 그녀의 울적했던 기분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제니트는 탐스럽게 피어난 꽃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난 공주님이 좋아.” 자그마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다가 꽃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래, 난 공주님을 좋아해.” 재차 읊조리는 속삭임은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시금 제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고, 또는 다시금 제 마음을 다잡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꿈틀거리며 고개를 드는 못난 생각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제니트의 손이 꽃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만간 찾아갈까 싶었는데 마침 여기에 있었네.” 푸드득! 멀리서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해서 몸을 돌리자마자 제니트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새까만 눈동자가 가까이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시죠?” 제니트는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그러나 등 뒤는 꽃 덤불이었기 때문에 고작 두어 걸음 물러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경계하는 것을 알았는지 남자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웃었다. “아가씨의 소원을 이루어드릴 착한 마법사라고 해야 할지.” “제 소원?” 어두운 녹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이상한 남자였다. 행색은 멀쩡했으나 어째서인지 풍기는 분위기가 다소 기묘했다. “오랜만에 보는 옛 친구와의 만남에 선물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그는 그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그 검은 마력을 보니 좀 반갑기도 하고.” 그렇게 속삭이며 남자는 웃었다. “그러니 아가씨에게도 선물이야.” 제니트가 그 찢어지는 입꼬리를 보았을 때, 머리 위로 밤하늘이 떨어졌다. 아니, 그것은 새까만 낮이었다. 한순간 시야에 검은 빛이 가득 들어찼다. 그 공허한 공간 속에서 제니트는 입을 벌렸다. 짹짹. 하지만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에는,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풍경만이 눈에 비칠 뿐이었다. “뭐였지?” 한낮의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제니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미 방금 전 만났던 남자에 대한 기억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진 뒤였다. “제니트.” 그때, 지금까지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키엘.” 제니트는 그를 향해 웃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그래? 오히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눈 깜짝할 사이였던 것 같은걸요.” 그때, 이제키엘의 시선이 가까워진 제니트의 머리 위로 닿았다. 그 직후 그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제니트가 일순간 움찔하자 이제키엘이 말했다. “잠시만.” 제니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고인 황금색 눈동자에 그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머리 위에 닿는 손길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제니트의 심장은 콩닥콩닥 방금 전보다 강하게 뛰고 있었다. “나뭇잎이 엉켜 있었어. 이제 가자.” 귓가에 스미는 목소리가 무심한 듯 다정했다. 제니트는 익숙하게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이제키엘을 잠시 동안 올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보이는 다정함도 배려도, 단지 오랜 습관 같은 것이란걸. “……에른스트 경은 어때요?” “멀쩡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하지만 알면서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도 이렇게 그녀에게 미소 지어주는 얼굴이 따스했으니까. “다행이에요.” 제니트는 이제키엘을 향해 입술 끝을 당겨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한순간 검은 기운이 도사렸다가 사라졌다. ======================================= [150화] 제42장 만감이 교차하는 사냥 대회 “공주님, 덥지 않으세요?” “날이 좀 후덥지근하기는 한가?” “그러실 줄 알고 제가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가져 왔어요.” “오, 한나. 좀 짱인 듯.” 내 칭찬에 한나가 에헤헤 웃었다. 사실 마법을 쓰면 단번에 해결될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내가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후부터 할 일이 줄었다고 구슬퍼하는 한나였으니까. “이 정도는 기본이죠. 전 공주님의 시녀니까요!” “과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한나의 자부심 넘치는 말에 옆에서 필릭스가 멋지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사냥 대회에는 나와 가까운 사람 중에 필릭스와 한나만 동행했다. 원래는 릴리도 같이 오려고 했으나 어젯밤부터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그냥 궁에서 쉬라고 했다. 릴리만 혼자 두기 걱정되던 참에 세스도 남겠다고 했고. “오늘 꽤나 북적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적하네요.” “아를란타에서 온 사절단은 전부 남자니까 거의 숲에 들어가서 그래.” 물론 사냥을 하러 들어가지 않고 그냥 여기 남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소수였다. 오히려 오벨리아의 귀족들이 반절만 사냥을 하러 간 걸 생각하자면, 아를란타인들이 사냥을 더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공주님, 에른스트 경이 오고 있습니다.” 으잉? 인사는 아까 다 했는데 무슨 볼일이지? 이미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숲에 들어간 줄 알았더니? “아타나시아 공주님.” “에른스트 경.”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소, 손수건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손수건이요?” 나는 의아하게 마주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카벨은 얼굴을 약간 붉힌 채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손수건 하나 빌리러 온 걸 가지고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왜 내 천막에 와서 손수건을 찾는 거야? 호, 혹시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나? 아닌데, 밖에 이제키엘도 있을 텐데? “필릭스, 혹시 손수건 있어?” 한나에게 묻고 싶었지만 때마침 그녀는 잠시 바깥의 상황을 보고 오겠다고 나간 참이라 대신 필릭스에게 물었다. “예?!” “제 손수건 말입니까?!” 그런데 내 말에 갑자기 두 남정네가 나란히 경기하듯 외치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그 모습에 흠칫했다. 아, 아니.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반응들이 왜 저래? 그리고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듯 가벼운 헛기침을 한 필릭스가 내 귀에 속삭였다. “공주님, 아마 진짜로 손수건이 필요해서 공주님께 청한 게 아닐 겁니다.” “그럼?” “승리의 기원이라고 해야 할지.” 앗! 그 말을 듣자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를란타에는 사냥 대회나 무투 대회가 있을 때 우승을 바치고 싶은 레이디의 손수건을 받아서 손목이나 무기 등에 묶는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 일이라, 요즘 젊은 세대들은 고리타분하다고 안 한다고 하던데? “아, 미안해요. 오벨리아에는 그런 관습이 없어서. 제가 실례했네요.” “아닙니다. 아를란타에서도 보편적인 일은 아니니까요.” 카벨은 필릭스에게 손수건을 받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왜 두 사람이 방금 전 기겁했는지 알 것 같았다. 쿨럭, 방금 전에 내가 사랑의 큐피드처럼 두 사람을 엮으려고 했던 거구나. 한나가 챙긴 짐 중에 내 손수건이 있긴 할 것 같은데……. ‘딴 놈한테 아무거나 함부로 주지도 마. 찾아가서 처리하려면 귀찮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 루카스가 떠오른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나는 잠시 동안 끄응 고민하다가 그에게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손수건을 갖고 있지 않아서요.” “아, 그러셨군요…….” 카벨 에른스트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는 곧 내 격려에 또 다시 금세 기운을 차리고 투지를 불태웠다. “에른스트 경은 평소에도 사냥이 취미라고 들었어요. 오늘 멋진 모습 기대할게요.” “예, 기대해 주십시오!” 나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신이 나서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쓰읍, 참 멍멍이 같은 사람이란 말이지. 그나저나 루카스한테 얻어터졌던 게 바로 얼마 전 일인데 엄청 생생하잖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한나가 돌아왔다. 나는 슬슬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공주님, 이쪽으로 오세요!” 오늘 사냥 대회에 참석한 귀족 중에서도 중장년층과 젊은 층은 따로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영애들과 영식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디 보자, 이제키엘하고 제니트는 없네. 알피어스 공작이 있는 곳에도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미 아까 전에 인사를 나눈 상태여서 다시 번거로운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멀리까지 웃음소리가 들리던데,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요?” “공주님, 혹시 검은 탑의 마법사님을 직접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앗, 화제가 검은 탑의 마법사였나! “네, 만난 적이 있어요.” “앗, 정말 소문대로 미남이신가요?” 이것 참,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소문에는 녹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셨다고 하던데요?” “녹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젊은 남성인 건 맞아요.” “지금 사절단분들이 검은 탑의 마법사가 재림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으셔서 얘기 중이었어요.” 으앗, 이건 더 난감했다! 내가 지금 곧이곧대로 ‘검은 탑의 마법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가짜일 확률이 크답니다, 호호’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나는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딱 한 번 봤을 뿐이에요. 워낙 두문불출하는 분이기도 하고.” “아, 그렇긴 하죠? 이번에도 몇 년 만에 다시 나타나시고. 그런데 며칠 전에 황궁의 검은 탑을 싹 다 새 건물처럼 만들어주고 가셨다면서요?” 끄응, 역시 소문이 퍼졌구먼. 나는 드디어 오랜 소원이 성취되었다며 단체로 울먹이던 황궁 마법사들을 생각하며 잠시 아련해졌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신을 카락스라고 소개했던 자칭 검은 탑의 마법사가 며칠 전 황궁에 있는 탑에 방문한 것이다. 당연히 황궁 마법사들은 난리가 났다. 애초에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던 탑의 보수를 이제야 다시 시작한 것도 검은 탑의 마법사를 영접하겠다는 열렬한 소망 때문이 아니던가?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으허헝!’ ‘검은 탑의 마법사님이 저희 검은 탑에! 오오, 죽기 전에 이런 감격의 순간을 목격할 수 있을 줄이야!’ ‘앞으로 오늘을 저희 탑의 기념일로 삼는 게 어떻습니까!’ ‘앗, 이것은 설마 검은 탑의 마법사님의 발자국! 영구 보존을!’ ‘혹시 이것은 검은 탑의 마법사님의 머리카락! 저희 탑의 가보로!’ 게다가 그는 탑의 외관이 영 비루해 보인다며 마법으로 한 방에 복구를 시켜줬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클로드는 말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가짜 주제에 제법이군.’ 그는 가짜 탑의 마법사가 생각보다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약간 의외인 것 같았다. 그리고 루카스는 나중에 자신이 탑을 비웠을 때의 일을 듣고 굉장히 어이없어 했다. ‘미친 새끼, 나 잡아 잡수쇼 하고 아예 대가리를 들이밀고 가네.’ “역시 검은 탑의 마법사님이에요! 강력한 마법사에 거의 영생을 사는 미남이라니, 너무 멋져!” “전 그래도 루카스 님이…….” 다른 영애의 말에 세레나 이레인이 뺨을 붉히며 속닥거렸다. 크흑, 백합 소녀의 변함없는 순정! “앗!” “왜 그러세요?” “방금 모자 위에 뭔가가…….” 바로 그때, 잔디 위로 무언가가 폴짝 뛰어내렸다. “청설모?” “다람쥐 아닌가요?” “귀여워라. 숲과 인접해서 그런지 천막 안으로도 들어왔네요.” “앗, 만져도 공격하지 않아요!” “어멋, 저도 만져 볼래요.” 영애들은 언제 검은 마법사의 일로 흥분했냐는 듯이 야생의 다람쥐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공주님도 한번 만져 보실래요? 털이 보들보들해요.” 하지만 지난 야유회 때 출몰했던 토끼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들 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전 동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예? 아, 하지만 예전에 공주님께서도 애완동물을 기르셨던 적이…….” 전에 내 다과회에서 까망이를 본 적이 있는 영애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랬었죠.” 나는 그녀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지금은 청조를 한 마리 기르고 있어요.” “그러셨군요.” 바스락. “아, 알피어스 공자님!” “마그리타 양도 어서 와요.” 그때,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순간, 막 천막 안으로 들어서던 이제키엘과 눈이 마주쳤다. 곧 그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공주님도 계셨군요.” 나는 이제키엘의 옆에 있는 제니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어깨에는 남성용으로 보이는 겉옷이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키엘은 아까 보았을 때와 달리 셔츠와 베스트 차림이었다. 나와 같은 것을 본 영애들이 ‘어머’ 하고 소리 내며 서로 귀엣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밖에 비가 오나요?” 나는 그들의 머리와 옷이 약간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네, 오는 길에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숲에 가신 분들이 걱정이네요.” “부슬비 수준이니 괜찮을 겁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영애들은 이제키엘과 제니트를 번갈아 보다가 제니트에게 물었다. “찾던 물건은 발견하셨나요?” “네, 다행히 마차에 있었어요.” “그냥 하녀를 시키면 될걸.” “아, 하지만 제가 직접 찾고 싶어서요.”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은 아마 제니트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갔었던 모양이다. 예전부터 이제키엘을 흠모했던 영애라서 그런지 말투가 약간 퉁명스러웠다. 제니트도 그것을 느꼈는지 설핏 곤혹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전 이해해요. 귀금속은 하녀들에게 맡기기에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죠.” “전 하녀들을 의심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다른 영애가 제니트를 두둔하듯 말했으나 이어진 대답에 오히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 지금 건 그냥 둘이 핀트가 안 맞아서 서로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 “마그리타 양,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아무래도 딱딱해진 분위기를 환기해야 할 것 같았다. “몸이 좀 젖은 것 같은데 이리 와서 닦으세요. 한나, 마그리타 양에게 수건을.” “네, 공주님.” “시간이 이렇게 되었으니 간단한 다과라도 드는 게 좋겠네요.” 내가 말하자 또 다른 영애들이 눈을 반짝이며 홀랑 이제키엘에게 자리를 권해 왔다. “알피어스 공자님도 이쪽으로 오세요. 어차피 지금 숲으로 가시기에는 늦었잖아요? 비도 오고.” “맞아요! 마침 여성분들만 있어서 적적하던 참이에요.” “저희도 있습니다…….” 흠칫! 바로 그 순간 영애들이 모두 잊었던 것을 깨달은 듯 어깨를 움찔했다. 헉, 나도 잊고 있었다! 다른 영식들도 있었지! 조, 존재감이 너무나 희끄무레했던 것……. 순식간에 존재감을 말살당한 영식들이 오늘따라 가련해 보였다. 이제키엘은 원래 사냥 대회에 참석할 생각이었으나 제니트 때문에 시기를 놓친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가 봤자 이미 좋은 사냥감은 다른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을 확률이 컸다. 게다가 밖에는 비도 오고 있고. 결국 이제키엘은 천막 안에 남기로 한 듯 자리에서 발길을 뗐다. 그리고 문득 제니트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 자신의 옷을 시야에 담았다. ======================================= [151화] “제니트, 겉옷은 시종에게…….”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제니트의 말에 또 한 번 영애들의 눈초리가 미묘해졌다. 나는 그녀의 손이 어깨 위에 걸쳐진 옷자락을 살며시 그러쥐는 것을 보았다. 곧 제니트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덧붙여 말했다. “조금 추워지는 것 같아서요.” “비를 맞아서 그럴 수도 있어. 담요라도 덮고 있는 게 나을지도.” “그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요.” 음, 뭐랄까. 두 사람의 분위기가 참으로 훈훈하구나. 마치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배경 내지는 들러리가 된 느낌이기도 하고. 연극 무대로 치자면 길목에 자라난 나무나 지나가던 행인 1 같은……. 나만 그런 것을 느낀 게 아닌지 영애들이 속닥거렸다. “알피어스 공자님과 마그리타 양은 예전부터 참 사이가 좋단 말이죠.” “아무래도 친척이니까요. 질투하면 지는 거예요.” “으으, 그래도 부러워요. 나한테도 저렇게 다정히 대해 주셨으면.”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자리에 착석했다. 하 참, 주인공들은 비를 맞아도 빛이 나는구나. 아마 나나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 비에 젖어 있으면 물에 젖은 해초 같을 텐데. 아, 아닌가. 물에 젖은 해초가 붙은 돌덩이 같으려나. 크흑. “그러고 보니 공주님께서 청조를 기르신다고요?”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다른 영애가 물어오는 말에 나는 약간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제키엘과 제니트가 천막에 막 들어왔을 때 나누던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해 미끄러졌다. 나는 은연중에 그들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청조는 기르기 까다롭다고 하던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글쎄요. 크게 까다롭다고 느끼는 부분은 없어요. 아, 어쩌면 파랑이가 얌전해서 유달리 손이 덜 가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어머, 이름이 파랑이군요.” 커헉, 그 순간 나는 혀를 깨물 뻔했다. 으앗! 나도 모르게 파랑이 이름을 말해버렸다! “참 귀여운 이름이에요.” “맞아요, 이름만 들어도 청아한 푸른 깃털이 생각나네요.” “정말 절묘한 이름인 것 같아요. 역시 공주님이세요.” 기회를 포착한 영애들과 영식들이 너도 나도 앞서서 립 서비스를 발동하기 시작했다. 으앙, 그만해! 내 작명 센스가 어떤지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어흐흑. “공주님의 새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아니, 그런데 심지어 이제키엘까지 다른 사람들에 이어 한마디를 더 보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언제나처럼 그린 듯이 미소 짓고 있었지만 나는 저 안에 담긴 장난기를 포착하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저건 날 놀릴 때 주로 짓던 표정이잖아! 지금 내 곤경을 재미있어하는 게 분명해! 그리고 방금 한 말 뭐지요? 뉘앙스가 미묘했는데? 꼭 우리 파랑이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잖아. 아니, 물론 파랑이를 선물한 게 이제키엘이니까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내가 일부러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 안 하는 걸 눈치챘으면서, 지금 고의로 저런 묘한 어투의 말을 날린 거 아니야? 역시 내 생각처럼 이제키엘의 말에 귀를 쫑긋하던 영애가 냉큼 떡밥을 물었다. “알피어스 공자님은 공주님의 새를 본 적이 있으세요?” 이제키엘과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이제키엘은 내가 바라던 것과 반대되는 대답을 꺼냈다. “예전에 우연한 기회로.” “어머.” 으악, 당신 진짜 그럴 거야? 내가 키우는 새를 당신이 무슨 수로 봤다는 건지, 영애들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여기까지 느껴지잖아! “그때에는 손을 쪼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이제키엘의 미소 띤 얼굴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희 파랑이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만 쪼아서요.” “그럼 제가 마음에 안 들었었나 보군요.” “그런 거죠.” 앗, 마지막에 너무 강세가 들어갔나? 지금 댁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으흑. 그런데 그때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서 시선을 움직여 보니 이제키엘이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향한 눈동자가 몹시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어서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른 영애들도 웃고 있는 이제키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저도.” 가느다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방금 전 자신이 낸 목소리에 놀랐는지 잠깐 멈칫하고 있는 제니트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곧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공주님의 새를 본 적이 있어요.” “어머, 그래요?” “네, 무척 예쁜 푸른 새였어요. 날개의 끝 부분이 좀 더 짙은 군청색인데…….” 제니트의 말에 이번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아, 혹시 내가 난처해하는 것 같으니까 도와준 건가? 그런데 난 제니트에게 파랑이를 보여준 적이 없는데 저렇게 자세히 알다니? 아마 파랑이를 선물 받기 전에 그녀도 알피어스 공작저에서 본 적이 있는 모양이다. 퀵서비스도 아니고 설마 새 시장에서 황궁 주소를 곧바로 쏴줬을 리는 없으니, 아마 황궁에 보내기 전에는 잠시 동안 알피어스 공작저에 청조를 두지 않았을까? “그렇게 예쁜 새라니 궁금하네요. 공주님, 저희에게도 보여주세요.” “네, 다음에요.” 나는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저희 아를란타에서는 주로 매를 기르는데…….” 부슬거리는 빗소리를 배경으로 대화는 계속되었다. 제니트는 아직까지도 이제키엘의 겉옷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움직이지 않았다. * * * 빗줄기가 좀 잦아들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을 두고 천막을 벗어났다. 지금까지 내가 있던 곳은 젊은 층이 모여 있던 곳이었으니, 이번에는 다른 천막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올 참이었다. 나이가 좀 있는 귀족들이 모인 곳이니까 여기에 흰둥이 아저씨도 있는 건가? 나는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내가 온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왜인지 다들 집중해서 이야기하는 중인 것 같은데……. 혹시 정무에 관한 대화 중인 걸까? 오, 역시 각국의 노익장들은 다르군.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제가 뭘 잘못 말했습니까?” 어라? 그런데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설마 싸우는 거야? 하지만 슬쩍 시선을 옮겨 보니 무슨 일이 있을 때 보고하라고 지시했던 궁인은 다만 미묘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어서 귓가에 흘러드는 말을 듣고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당연히 저희 다이스 전하가 최고의 신랑감이지요.” “아를란타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오벨리아에서는 아닙니다.” “공주님께서도 다이스 전하를 한 번 만나 보시면 마음이 바뀌실 겁니다.” “저희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는 그리 쉬운 분이 아니라서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그런 얼토당토않은 계획은 일찌감치 접으시지요.” 헐, 지금 둘이 날 두고 싸우고 있는 거야? 셀로판지 공작과 흰둥이 아저씨의 사이에 파직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수록 짜식었다. “저희 공주님께서 아를란타에 시집가시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오벨리아에서 좋은 부군을 맞으실 테니 그때에나 축하하러 와주시면 되겠습니다.” “아니, 앞으로의 일을 어찌 장담한단 말입니까? 자고로 남녀 사이의 일은 한치 앞도 모르는 것…….” 나는 조용히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하고 백스텝을 밟았다. “정작 폐하와 공주님께서는 아직 성혼에 미온한 입장이시니 지금 두 분이 이렇게 언성을 높이셔 봤자…….” 천막에서 벗어나기 직전 다른 사람이 셀로판지 공작과 흰둥이 아저씨를 향해 짜게 식은 듯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뒤로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나 참,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폐하께서 들으시면 진노하시겠네요.” “헉, 말할 거야?” “어떻게 할까요?” 필릭스는 방금 전의 상황이 퍽 재미있었던 듯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투덜거렸다. “필릭스, 지금 자기 일 아니라고 재미있어 하는…… 앗!”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한쪽 발이 잔디 밑으로 푹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차 하는 사이 신발이 훌렁 벗겨졌다. 다음 순간 나는 질척이는 바닥을 양말만 신은 맨발로 짚고 서 있었다. “으앗.” “이런, 비 때문에 흙이 묽어져서 신이 박힌 모양입니다.” 필릭스의 말처럼 내 구두 한 짝은 물렁해진 땅바닥에 박힌 상태였다. 오늘은 오랫동안 밖에 있어야 해서 일부러 옷도 활동하기 좋은 가벼운 걸로 입고 신발도 굽이 낮은 걸로 신었는데! 할 수 없다. 그래도 신발이 망가진 건 아니니까 다시 신어야지. 만약을 대비해서 한나가 여벌옷을 준비해놓은 것 같았는데, 아마 신발도 있지 않을까? 지금은 비가 와서 다들 천막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어쨌든 나도 거기까지 가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신겨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괜찮으십니까?” 그때, 내 귓가에 울린 것은 필릭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닛, 당신이 여기 웬일이야? “알피어스 공자……. 비도 오는데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공주님께서 오래 돌아오지 않으시기에 잠시 바람이라도 쐴 겸 나왔는데…….” 곧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괜히 민망해서 흙이 묻은 발을 다른 쪽 뒤로 숨겼다. “별일 아니에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 뒤 이제키엘이 가까이 다가와서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필릭스가 도와줄 거예요.” “저는 지금 우산을 들고 있어서 움직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공주님.” “뭐…….” “알피어스 공자가 때마침 잘 와주었네요. 그렇죠?”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전이랑 말이 다르잖아! 필릭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 아니, 이 사람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다가온 이제키엘이 몸을 낮추어 내 뒤에 있는 신발을 주워 들었다. 애초에 땅이 물렁해서 그런지 구두는 쉽게 빠졌다. “아무래도 천막까지는 신고 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요.” 필릭스가 팔로 내 지지대가 되어 주고 있는 상태라 한 발로 균형을 잡는 데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이미 버린 발이니까 그냥 땅에 닿아도 되고. 이제키엘이 내 앞으로 와 한쪽 무릎을 굽혔다. “잠깐, 흙이 묻잖아요.” “괜찮습니다.” 그냥 구두만 내려놓고 가기를 바랐는데 이제키엘은 내 앞에 몸을 숙인 채 직접 신을 신겨주기까지 했다. 지금은 필릭스가 들고 있는 우산 속으로 들어왔지만 이제키엘의 머리카락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밖에서 보았던 이제키엘과 제니트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때 제니트의 기분이 어땠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밑에서 얕은 목소리가 번졌다. “이런 작은 신에 발이 들어가다니 신기합니다.” 잔잔한 빗소리에 이제키엘의 나지막한 음성이 섞여들었다. 앗, 이 분위기 뭐지. 왠지 좀 근질근질하면서 쑥스러워지는데……. 나는 그에게 내밀어져 있던 발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여자 구두를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놀라시다니.” 지난번 밖에서 보았던 제니트와 이제키엘의 모습이 떠올라서 무심코 말해놓고 나는 또 괜한 말을 했나 싶어졌다. 이제키엘이 여전히 내 앞에 몸을 낮춘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곧장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물론 처음 본 것은 아니지요.” 잠시 후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안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바닥이 단단하지 않아 혼자 걷기 불편하실 겁니다.” 나는 그 손을 잠시 동안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맞잡았다. “고마워요.” ======================================= [152화] 그 후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비어 있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필릭스가 한나를 데리러 간 직후, 잠시 동안 이제키엘과 단둘만 남게 되었다. “알피어스 공자.” 나는 입구 쪽에 서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몇 년 전 알피어스 공작저에서의 만남 이후 줄곧 모른 척해 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대를 싫어하지 않아요.” 내 말에 이제키엘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습니다.” 고요한 음성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여느 때처럼 단정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침묵했다. 그의 입가에 걸리는 어둑한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불충한 말씀인 줄 압니다만.” 투두둑, 작은 빗방울이 튀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가끔은 공주님께서 차라리 새장 속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런 이제키엘을 대하는 것은 내게 있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조금은 저를 봐주셨겠지요.” 미지근한 공기 속에 약간은 서늘한 음성이 스몄다. 지금의 이제키엘은 예전에 흰 꽃밭에서 만났을 때처럼 격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속삭이는 음성에는 여전히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나는 비 오는 날의 흐린 햇빛이 어려 있는 그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잠시 후, 그에게서 시선을 비끼며 말했다. “방금은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부끄러우니 지금 일은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원하신다면.” “그리고…….” 나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곧 덧붙였다. “몸이 젖었으니 알피어스 공자도 돌아가서 물기를 제대로 닦아내도록 하세요.” 이제키엘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곧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겠습니다.” 투둑, 투둑. 그 후로는 빗방울이 연주하는 화음만이 침묵 속에 가득 들어찼다. * * * 그 후 나는 진흙투성이의 신발을 벗고 한나가 새로 가져다준 무릎까지 오는 양말로 갈아 신었다. 그녀가 준 여벌의 구두는 내가 원래 신고 있던 것보다 굽이 조금 높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부츠를 신고 오는 건데, 궁인들이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는 바람에……. 나는 아까 전 이제키엘이 서 있던 곳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퍼뜩 깨달았다. 아, 맞다! 마법을 쓰면 되었잖아. 손짓 한 번이면 진흙도 없애고 신발도 가져올 수 있었는데. 그럼 아까 밖에서 이제키엘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을 테고. 나는 끄응 신음한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영애들과 영식들이 있는 곳에 잠시 들렀다가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내 개인 천막에 들어왔다. 내가 갔을 때, 이제키엘과 제니트는 또 자리에 없었다. 듣기로는 제니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둘이 함께 자리를 비켰다고 했다. 투둑, 투둑. 천막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아까보다 굵직해졌다.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물러난 뒤였다. 천막 안이라고 해봤자 안에서 또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으니 아마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쿠션을 여러 개 깔아놓은 긴 의자에 앉아 발치에 놓인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전 이제키엘이 내게 신겨주었던 구두는 아직 진흙이 묻은 채였다. “돈이라도 떨어져 있어? 바닥에 코 박고 뭐 해?” 내 등에 무게가 실린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툭 던지듯 내뱉은 말이 빗소리를 뚫고 귓가에 울렸다. 내 사적인 공간에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날 수 있는 건 루카스밖에 없었다. “돈이 아니라 똥인가? 신발이 왜 이렇게 더러워.” “내 눈앞에서 퇴장 좀. 나 오늘은 좀 감상에 젖어 있고 싶은 기분이거든.” “왜, 똥 밟아서 기분 더러워?” 아, 좀! 기껏 분위기 잡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식어버렸잖아! “네가 똥 얘기해서 기분이 더러워!” “내가 오기 전부터 기분이 땅바닥을 뚫고 들어가시던데 뭘.” 보, 보고 있었냐? 나는 약간 머쓱해졌다. 하지만 루카스가 나타나서 조금씩 침체되던 기분이 나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시선을 들자 천막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흐린 빛이 시야에 번졌다. 끼익. 나는 등 뒤의 온기에 조금 더 편하게 몸을 기댔다. “어떤 사람한테 좀 미안해.” “왜?” 아까 전 내 말을 막으며 아린 얼굴을 하던 사람이 떠올랐다. ‘알피어스 공자, 나는 그대를 싫어하지 않아요. 하지만.’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는 이제키엘을 좀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모르겠다는 건 거짓말이다. 3년 전 흰 꽃 속에서 그를 만났을 때, 아마 루카스가 나를 황궁으로 순간 이동시키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너무나 명백하게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전에 내가 거짓말을 했거든.” 하지만 이제키엘과 어떻게 되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책 속의 남자 주인공. 제니트가 좋아하는 사람. 알피어스 공작과의 관계. 그러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았고, 나는 여러 가지를 따져 본 뒤 꽤나 이기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무슨 거짓말?” “그냥, 어쩌면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없던 걸로 만들어버렸어.” 아,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 이 이상 가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길 것 같아. 늦기 전에 일찌감치 접어버리자. 그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나는 이제키엘에게 거짓말을 하고 내 첫사랑에 작별을 고했다. “그래? 그럼 지금은 거짓말이 아니네.” 나를 좋아하는 이제키엘의 마음이 진심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3년 전 그 역시도 나를 완전히 잘라 내버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작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응, 그래서 또 미안해.” 그러나 이 감정은 3년 전과 같은 감정이 아니다. 지금 저 구두에 묻은 진흙처럼, 미처 떨어지지 못한 옛 감정의 잔상이 다만 아직까지도 혼자서 흐리게 빛나며 남아 있을 뿐이다. “미안할 게 뭐 있어? 감정 저당 잡힌 적도 없는데. 혼자 설레발친 놈이 웃긴 거야.” 등 뒤에서 또 지나가듯 툭 던지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문득 이상해져서 물었다. “근데 너 지금 뭘 알고 말하는 거야?” “그놈이 배포가 작다는 건 알아.” 루카스가 흥,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난 널 새장 속에 가두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 따위 안 하는데.” 아앗! “너 훔쳐 들은 거야?!” 나는 루카스에게 등을 떼고 홱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루카스도 내 뒤에 앉은 상태 그대로 나를 돌아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언뜻 건방진 느낌을 풍기는 웃음을 담으며 휘어졌다. 다음 순간 그가 내뱉은 말은 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차피 이 세상 전체가 내 손바닥 위에 있는 새장인데 뭐 하러 그런 쪼잔한 생각을 하지?” 그래, 이놈아. 너 스케일 쩔어서 좋겠다. “게다가 누구 마음대로 널 새장 속에 가두고 싶다느니 헛소리야?” “윽, 창피하니까 그만해.” “넌 내 건데.” 고요한 음성이 습기 찬 공기를 가로질렀다. 어라? 그 순간 심장 어귀가 약간 이상했다. 거기에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나는 마주한 사람에게 시선을 붙들렸다. 문득 깨닫고 보니 분위기가 조금 요상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투두둑, 빗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 틈으로 나직한 속삭임이 새어들었다. “넌 내 거였어.” 나른히 움직인 손가락 사이로 내 머리카락이 휘감겼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루카스가 그대로 손을 움직여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안 줘.” 붉은 눈동자와 정면에서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루카스의 얼굴이 좀 더 가까워졌을 때,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짜악! “헉.” 찰진 소리가 울리는 순간 나는 방금 전 내가 한 짓에 화들짝 놀랐다. 내, 내 손아! 왜 거기 붙어 있어?! 지금 내가 루카스 이마를 때린 거야? 그런 거야? 어,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밀어내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지금 나 때렸어?” 이, 이건! 내 오른손에 잠들어 있던 흑염룡이 오랜만에 깨어나서! “네, 네가……!” “내가?” 왠지 분위기가 이상야릇해서 그랬다고는 말 못 하겠다. 지금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 같아져서 그냥 나 혼자 착각했나 싶기도 하고. “네가 헛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내가 뭘?” “내가 왜 네 거야? 난 내 거야!” “네 것도 맞고 내 것도 맞…….” “안 들려! 갑자기 나타나서는 느닷없이 뭐야? 빨리 나가! 필릭스랑 한나 오라고 할 거야!” 역시 우리 사이에 진지한 분위기는 오래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쿠션을 들어 루카스에게 마구 휘둘러댔다. 내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얄밉게 빙글빙글 웃어대던 루카스가 뿅 하고 사라질 때까지. “헉, 공주님?” “앗, 쿠션에 들어 있던 백조 깃털이!” 이제야 들어온 걸 보니 역시 루카스가 방음 마법을 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필릭스와 한나는 주위에 날아다니는 깃털과 혼자서 헉헉거리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 운동 좀 했어.” “오늘 같은 날 무슨 운동이에요? 아이, 땀 좀 보세요. 시원한 물을 가져다드릴게요!” “공주님, 부채질을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기진맥진한 채 사냥 대회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한 시간 뒤쯤, 사냥을 갔던 사람들이 비에 흠뻑 젖은 채 돌아왔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네요.” “하하, 그래도 제가 사냥한 윰은 안 젖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검은 털이 참 윤기 나지 않습니까?” 나는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돌아온 사람들을 보다가 손을 휘둘렀다. 화아악. “헉?” “갑자기 몸이 뽀송뽀송해졌어!” “이게 무슨 일이죠?!” “앗, 공주님께서……!” 크으, 아까도 진작 이럴걸. 가끔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잊는단 말이야? “감사합니다, 공주님!”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나는 뿌듯하게 뽀송해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앗, 그런데 뭐지? 저쪽에 딱 한 사람만 아직도 생쥐 꼴이잖아! “고, 공주님…….” 모두가 뽀송해진 상태라 그런지 아직까지도 푹 젖어 있는 카벨 에른스트가 유독 눈에 띄었다. 물론 워낙 구석에 서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그런 그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흑!” “자, 잠깐!” 앗, 그런데 저 반응은! 내가 일부러 자기만 쏙 배놓고 마법을 써준 걸로 오해하는 것 같잖아? 나는 충격받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카벨의 뒤를 쫓았다. “에른스트 경.” “죄, 죄송합니다, 공주님. 전 그렇게 저를 싫어하시는 줄도 모르고…….” “그, 그게 아니라.” 나는 그대로 두면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은 카벨에게 얼른 마법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를 말했다. “혹시 마법용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예? 마법용품이요?” “음, 그러니까 지금 몸에 지니고 있는 물건 중에요. 목걸이라든가, 시계라든가, 아니면 펜던트 같은…….” “아! 아를란타를 떠나기 전에 여동생이 준 걸 가지고 있긴 한데.” 카벨 에른스트가 옷깃 사이로 무언가를 짤그락거리며 꺼냈다. “앗, 끊어졌다!” 목에 건 줄에 달려 있던 펜던트가 떨어지자 카벨이 요란법석을 떨었다. 예전에 하리 에른스트가 가지고 있던 건 목걸이가 아니어서 혹시 다른 건가 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그냥 펜던트에 긴 줄을 달아서 목걸이로 만든 것 같았다. ======================================= [153화] “마법의 영향을 무효화하는 마법용품이에요.” “앗, 그럼 혹시 방금 전에도 그래서?” “그런 거죠.” “다행입니다!” 카벨 에른스트는 내가 일부러 자신만 물에 빠진 생쥐 꼴에서 구해 주지 않았다는 오해에서 벗어나 기쁘게 외쳤다. 나는 카벨 에른스트의 펜던트를 돌려주기 전, 그에게 다시 건조 마법을 써주었다. “그나저나 몸에 가지고 있으면 좋을 거라는 게, 그런 의미였다니.” “여동생이 먼 길을 떠나는 오빠가 걱정되었나 보네요.” “여동생이 절 좀 많이 좋아하긴 합니다.” “그, 그래요?” 나는 약간 짜식었다. 3년 전 아를란타에 갔을 때 여동생을 졸졸 쫓아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훤한데! 오히려 여동생인 하리 에른스트는 오빠를 귀찮아하는 눈치였다고. 물론 그래도 가족이라고 오벨리아로 가는 오빠가 걱정돼서 자기 펜던트를 준 것 같기는 하지만. 음? 그나저나 이제 보니까 이 펜던트, 그냥 망가진 게 아니라 강력한 마력 때문에 이음새가 약간 부서진 것 같은데? 서, 설마 지난번에 연무장에서 루카스한테 마법을 연타로 맞아서 그런가? “혹시 오벨리아에 와서 이 목걸이를 몸에서 떼어놓은 적은 없나요?” “네, 여동생이 어찌나 제 걱정을 하면서 간곡히 부탁을 하던지. 번거롭기는 하지만 제가 어쩔 수 없이…….” 헐, 맞나 보다. 그럼 루카스 마법은 이 펜던트에 통한다는 말이네? 나는 괜히 오기가 생겨서 펜던트에 마력을 불어넣어 보았지만 헐렁해진 이음새 부분은 고쳐지지 않았다. 에잇, 나 안 해! “끊어진 게 줄이 아니라 펜던트의 이음새 부분이라 마법으로 고칠 수는 없을 거 같네요.” “예, 대충 손으로 이렇게 눌러둔 다음 돌아가서 고치면 됩니다.” 띠용! 카벨 에른스트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맨손으로 헐거워진 부분을 다시 오므리다니! “참, 제가 예쁜 공작새를 잡았습니다. 오색 찬연한 털이 꼭 공주님의 영롱한 눈동자 같습니다. 공주님께 선물해드리고 싶은데 받아주시겠습니까?” “아, 감사해요.” 앗, 얼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카벨은 내가 공작새를 받아준다고 하자 기쁜지 나는 듯이 자리를 떠났다. 나도 찜찜한 마음으로 뒤이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사냥해 온 동물들을 두고 순위만 매기면 사냥 대회도 끝이겠구나. 아, 잘됐다. 빨리 내 방 가고 싶어. 한시라도 빨리 침대와 혼연일체가 되고 싶습니다, 흐흑. “마그리타 양, 제가 잡은 흰 사슴을 받아주십시오!” 오잉?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울리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카벨이 제니트에게 가서 두 눈을 빛내며 열렬히 외치고 있었다. “흰 사슴의 우수에 젖은 촉촉한 눈망울과 가련한 분위기가 꼭 마그리타 양을 닮았습니다! 오, 제가 그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봤나 했더니…….” 아, 잡아온 동물을 나한테만 주는 건 아니었구나. 아까 손수건이랑 비슷한 의미는 아니었나 봐. 다행이다. 그나저나 소설 속에서 제니트에게 단번에 반해 열렬히 구애했던 서브남치고 별다른 행동이 없어서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속으로는 아니었던 건가?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헉, 감사합니다! 제 사슴도 기뻐할 겁니다!” 제니트는 약간 당황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웃으며 답해 주었다. 다소 뜬금없기는 해도 카벨 에른스트를 재미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나저나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지금은 좀 괜찮아졌나 보네. 나는 슬슬 사냥 대회를 마칠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응? 지금 뭔가 밟았는데, 이게 뭐지?” “브로치나 펜던트 같은데 누가 떨어뜨린 거 아니야? 하녀들에게 물어봐.” 뒤에서 다른 귀족 영식들이 의아해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목소리가 작아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신이 나서 천막을 향해 룰루랄라 걸어갔다. 제42.5장 검은 탑의 마법사들 “왔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언뜻 그는 초목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짙은 녹색의 머리카락이 비에 젖은 채 까만 눈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는 남자를 보고 루카스가 비리게 웃었다. “돌았냐? 뭘 기다렸다는 듯이 지껄이고 앉았어?” “기다린 게 맞으니까.” 하지만 루카스의 기분이 어떻든 상관없이 남자는 지금의 상황이 퍽 기꺼운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나 잡아 잡수쇼 하고 내 근처만 기웃거리면서 싸돌아다니더라니. 그래, 내 흉내는 재미있었냐?” 루카스는 남자와 약간 떨어진 가지 위에 가볍게 내려앉으며 실소했다. “가짜 검은 탑의 마법사.” 후두둑. 가느다란 빗줄기가 다시금 나뭇잎을 때렸다. 그때 문득 멀리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사냥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황궁으로 돌아갈 모양이다. 지금 루카스와 남자가 있는 곳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과 다소의 거리가 있는 숲속이었다. “슬슬 괴사가 오나 봐?” 루카스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금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그 직후 그의 눈동자가 소매 밖으로 드러난 남자의 손에 닿았다. “첫인사치고는 너무 정이 없는 것 아니야?” “지랄.” 루카스는 개소리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탑에 허락도 없이 기어들어온 쥐새끼, 너지?” “맞아. 아직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탑이 비어 있어서 깜짝 놀랐지 뭐야.” 남자는 쉽게 인정했다. “그래서 내가 만든 마법용품들을 죄다 훔쳐 가셨나?” “마력이 너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런데 너도 너무하네. 내 손 보여? 새까매진 거.” “그러게 누가 허락도 없이 쳐 쓰랬나.” 남자는 까맣게 변한 오른손을 보여주며 너무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루카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 세계수 열매 처먹은 것도 너고.” “엄밀히 따지면 네 걸 먹은 건 아니지. 물론 네 탑에서 세계수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건 맞지만.” “닥쳐. 내가 먹으려고 한 거였으니까 내 거 맞아.” 요 몇 년 사이 오벨리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가짜 탑의 마법사와 그동안 정체를 숨기고 있던 진짜 탑의 마법사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분명 오늘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대화했다. 문득 루카스가 물었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냐?” “그런 걸 왜 물어?” “그럼 아에테르니타스라고 불러 주랴?” 바로 그 순간, 남자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 그 이름 200년 만에 들어봐.” 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가장 위대한 마법사 황제 아에테르니타스. 그런데 200여 년 전 죽은 그의 이름을 지금 입 밖에 낸 사람도, 또 그 이름을 귀에 담은 사람도 지극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카락스. 지금은 그렇게 불러.” “이름 꼬라지하고는.” 과거 위대한 마법사 황제였던 카락스는 그 말에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사실은 좀 더 빨리 찾으러 올 줄 알았는데. 내가 여기저기 흔적을 많이 남겨놨잖아?” “그래, 나도 곧바로 찾아서 족치려고 했는데.” 하지만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루카스의 말에 곧 카락스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관심 달라고 징징거리는 애새끼 장단에 맞춰주기가 영 귀찮더라고.” 새까만 눈동자에 어둑한 날카로움이 감돌았다. 하지만 루카스는 동요 한 점 없는 얼굴로 그저 냉정하게 마주한 사람을 응시할 뿐이었다. 곧 카락스가 방금 전까지의 감정을 완전히 거두어낸 얼굴로 웃었다. “괜찮아. 그래서 내가 널 만나러 왔으니까.” “약 처먹었냐? 뭘 징그럽게 굴어?” “좀 외로웠거든.” 질겁하던 루카스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 몸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말이야, 정말 화가 났어.” 카락스는 자신의 새까맣게 변한 손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작게 읊조렸다. “기껏 금지된 마법을 써서 거의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았는데, 정작 다시 태어나 보니 비루하기까지 한 하찮은 몸뚱이인 거야.” 하지만 루카스는 그런 그를 향해 동정 한 톨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가차 없이 말했다. “자기 혼자 잘 살자고 후손들까지 잡아먹은 주제에 욕심 한번 더럽게 많네.” “하지만 난 가장 위대한 황제라 예찬받을 정도로 젊고 아름답고 강했잖아. 그럼 누구나 욕심이 생기지 않겠어?” “젊고 아름답고 강해?” 루카스는 잠시 헛웃음 짓다가 이내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것도 네가 원래 갖고 있던 게 아니잖아.” 벌써 수백 년 전의 이야기이다. 검은 탑의 마법사로 세상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루카스가 오벨리아에 머물고 있을 시절. 그때에는 황제 카일룸이 오벨리아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강대한 마력을 가진 현명하고 강인한 황제로, 아마 제위 기간이 좀 더 길었다면 역사에 길이 기억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못 미더운 후계자인 아에테르니타스가 있었다. 아에테르니타스는 제 아버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못난 외모와 자격지심 강한 성격, 그리고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일룸은 루카스에게 제 아들을 부탁했으나 그는 귀찮음에 거절했다. 얼마 후, 루카스는 카일룸의 호의로 한동안 머물고 있던 황궁을 떠나 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꽤나 긴 시간이 흘러 있었다. 카일룸도, 아에테르니타스도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그 후 역사서 등에 남아 있는 아에테르니타스의 기록을 볼 때마다 루카스가 얼마나 황당한 기분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는 수백 년 사이 멸종되다시피 한 신수의 존재와 오벨리아에 급격히 줄어든 마법사의 수, 그리고 아에테르니타스 이후 급격히 불안정해진 황족들의 마력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답에 이르렀다. 아에테르니타스는 금지된 마법을 이용해 앞으로 수십, 혹은 수백 대에 이르는 후손들을 희생시켜 제 욕심을 채웠다. 아름다운 외모, 강력한 마력, 현자라 불릴 정도의 명석한 두뇌. 그리고 거의 영원에 이르는 삶을. “난 사실 너처럼 되고 싶었거든.” 그리하여 지난 삶의 기억을 안은 채 또 한 번의 생을 얻은 카락스는 유일무이하게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이를 향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은 좀 비슷하지 않아?” “지랄하지 마. 감히 누구랑 같잖은 비교질이야?” 물론 루카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동경해 금기를 저질렀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금기를 범한 죗값으로 앞으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아타나시아라고 했었지?” 하지만 카락스가 혼잣말처럼 읊조린 말에 루카스는 표정을 차게 식혔다. “네가 모처럼 흥미를 가진 것 같기에 나도 관심을 뒀었는데 말이야.” “이 새끼가 누구 마음대로…….” “그 아이, 내 마법에 영향을 받은 걸까? 설마 후손 중에 나처럼 두 번째 삶을 사는 애가 있을 줄은 몰랐어.” 투둑, 투둑. 빗방울이 나뭇잎 위에 떨어져 사방으로 부서져 나갔다. 비를 맞은 탓에 체온이 내려갔는지, 카락스가 몇 번인가 잔기침을 했다. 잠시 후, 그는 딱딱한 얼굴을 한 채 서늘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루카스를 향해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튼 3년 전에 네가 그 애를 버려두고 그냥 떠나길래 ‘아, 어차피 죽어도 되는 애였구나’ 했지.” “닥쳐.” “하하, 왜 그래? 사실은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때 그 아이 마력 상태가 영 불안정해서 네가 없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루카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락스는 루카스의 싸늘해진 얼굴을 보고 만족한 듯했다. “아무튼 그래서 여흥 삼아 아주 살짝 저주를 걸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결과가 나와서.” ======================================= [154화] 그는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네가 세계수 열매 때문에 자리를 비운 동안 있었던 일, 사실 내 작품이야.” “어쩐지 저주 한번 같잖더라니.” “난 정말 아주 사소한 저주를 걸었는데 설마 그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날 줄이야. 아, 제니트라고 했나? 알고 보니 내 후손이 한 명 더 있더라고?” 카락스가 제니트를 본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었다. 비어 있는 검은 탑을 보고 루카스의 자취를 쫓던 카락스는 황궁에서 그의 족적이 끊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검은 탑의 마법사를 자처한 것은 루카스가 먼저 자신을 찾아와주기를 바라서였다. 하지만 계산 착오였다. 위대한 검은 마법사는 자신의 흉내를 내는 피라미 따위에는 관심 한 톨 없었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를 만나러 와주려나. 자신이 루카스를 먼저 만나러 가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루카스는 그를 관심받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애라고 했지만 사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카락스는 오래전 그의 마법에 감동받았던 이후로, 늘 루카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의 옆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뭐,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을 때까지 잠들어버리라지. 그 후 카락스는 새로운 삶을 얻어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루카스 역시 기나긴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자신이 한 대단한 일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의 그를 보면 루카스가 얼마나 놀랄까? 그러려면 일단 루카스를 그의 앞으로 데려와야 했다. 역시 아타나시아 공주를 건드려야 할까? 하지만 그러다가 루카스가 정말 화를 내면 무서운데.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다과회에 참석하기 위해 황궁에 온 제니트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황족의 마력을 가진 존재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 검은 마력으로 보아하니, 아마도 아타나시아보다는 제니트 쪽이 그의 직계에 가까운 것 같았다. “루카스, 너도 우리 대의 알피어스 공작 기억나지? 아버지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던 그 무뚝뚝하고 심지 곧은 인사 말이야. 그치는 아마 아버지의 명령이었다면 구둣발이라도 핥았을 거야.” 자신이 기억하는 사람과 지독히도 닮은 얼굴을 한 채 전혀 다른 속내를 품고 있는 현 알피어스 공작을 떠올리자 이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뭐, 그래서 내가 황제가 된 뒤에 죽여 버렸지만.” 그래서 카락스는 흥미 삼아 제니트의 방에 있는 상자 속 물건에 저주를 걸었다. 그리고 그 직후 루카스보다 강력한 마력을 손에 넣기 위해 세계수의 둥지로 향했다. “콜록. 어쨌든 그 애가 아타나시아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기에 그 리본에 살짝 장난을 쳤지.” 하지만 설마 루카스가 열매 대신 세계수의 가지를 손에 넣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루카스라 해도 망가진 열매를 보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기껏 세계수의 분노를 얻으면서까지 열매를 모조리 부수고 왔더니 참 부질없기도 하다. 게다가 이 비루한 몸뚱이는 고작 열매를 한 개 먹은 걸 가지고도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황궁에 남아서 재미있는 구경이나 할 걸 그랬어. “웁, 쿨럭…….” 아까부터 창백해 보이던 카락스가 기침을 시작하다가 급기야 울컥 피를 토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루카스는 그 모습을 차가운 눈동자로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콜록…….” 잠시 후 카락스가 입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아내며 허리를 폈다. 붉은 핏줄기가 흐르는 그의 손은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새까만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곧 그는 어깨를 떨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 이 몸뚱이 정말 쓸모가 없어. 기껏 아등바등 애써서 세계수 열매까지 먹었는데 그릇이 너무 약해서 오히려 수명만 줄어들었지 뭐야.” 애초에 세계수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쓸 만한 육체가 아닌 듯했으니 아마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루카스의 마법용품 덕분일 터였다. 게다가 루카스 이전에 온 불청객을 날려 버렸다고 세계수가 말했었지. 하면 그 여파로 가뜩이나 약해져 있던 육체에 더욱 큰 손상이 갔을 것이 분명했다. 카락스의 경우에는 세계수 열매가 오히려 독이 된 듯했으니. 그러나 역시 동정해 줄 가치가 없었다. 루카스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곧 그 안에서 섬뜩할 정도로 한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너 지금 내 손에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그러나 카락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네가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곧 죽긴 할 것 같은데, 그럴래?” 루카스는 그를 비웃어주고 싶었다. “미친놈. 최종 흑막인 척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꼴랑 그딴 개소리만 지껄이고 있어.” 하지만 사실 잠들어 있던 동안 아에테르니타스가 한 짓을 처음 알았을 때 그가 느낀 것은 단순한 조롱의 감정이나 한심함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괴롭혀 주고 싶어지는걸.” 지금도 입가에 핏방울을 매단 채로 키득거리는 카락스의 모습에 루카스는 눈매를 찌푸렸다. “하지만 장난은 그때 한 번으로 끝내려고. 이제 내가 직접적으로 그 애를 건드는 일은 없을 거야. 난 너한테 미움받기 싫거든.” 지랄한다. 루카스는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이나 생각하는 줄 모를 말을 또 한 번 작게 읊조렸다. 제 부모한테 관심받고 싶어서 온갖 말썽을 다 일으키고 다니는 어린애도 아니고. 탑이고 황궁이고 흰둥이 소굴이고 간에, 루카스의 눈이 닿는 곳마다 제 흔적을 범벅 해놓고는 어이없게. 그리고 카락스가 어렴풋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루카스의 눈동자에 날카로움이 어렸다. “내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그때에도 지금처럼 날 만나주고 기억해줄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지랄하지 마.” “어라, 난 네가 아타나시아를 선택한 데 그런 이유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참아줄 때 닥쳐.” 하지만 카락스는 루카스의 경고에도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까지 날 죽이지 못하고 있는 거지?” 콰쾅! 숲속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비를 피하고 있던 새들이 푸드덕 젖은 날개를 움직여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내가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허락 없이 네 걸 건드렸던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야.” 하지만 폐허가 된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옆에 있는 나무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카락스가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한 얼굴을 한 루카스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선물이 마음에 들면 다음에 또 날 찾아와줘. 그럼 안녕.”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제43장 변화하는 일상 어느 날 찾아온 루카스가 나한테 새까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게 뭐야?” “오다 주웠어.” 나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 곧 흠칫했다. “까망이……?”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언뜻 보고 까망이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외양이 좀 닮은 다른 동물이네. 그런데 느닷없이 이걸 나한테 왜 줘? “레피랑 바움 혼혈 같던데.” 루카스는 내가 앉아 있는 소파 말고 옆쪽에 놓인 의자를 뒤로 돌려 거기에 털썩 앉았다. 나는 팔 안에서 느껴지는 따끈한 온기에 어정쩡하게 굳어졌다. 레피와 바움의 혼혈 같다는 루카스의 말처럼 새까만 털을 가진 동물은 귀가 둥그스름했다. “그런데 이걸 왜?” “오다 주웠다니까.” “그럼 다시 데려가.” “난 필요 없으니까 너나 가져.” 한마디로 선물이다, 이 말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를 왜 이렇게 빙빙 돌려서 하냐? 나는 얼떨결에 안게 된 동물을 다시 루카스에게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밑에서 ‘꾸웅’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내리자마자 나는 윽 신음하고 말았다. 동그란 파란 눈동자가 촉촉이 젖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마치 ‘나를 쟤한테 보낼 거야? 진짜 그럴 거야?’라고 묻는 듯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머뭇거렸다. 사실 나는 까망이가 사라진 이후 의식적으로 동물들과 가까이하는 것을 멀리 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까망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도 까망이에게 정을 많이 줬던 것 같다. 그 당시 이 책 속의 세상에서, 왜인지 까망이만 유일하게 진짜 내 것 같아서 그랬다. 책 속의 아타나시아도, 제니트도 가지고 있지 않던 유일한 내 것. 물론 유치한 생각이란 걸 지금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귀엽네.” 나는 손에 감기는 보드라운 털을 만지작거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만져 주는 게 좋은지 팔 안의 생물도 그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손에 머리를 비볐다. 오랜만에 품에 가득 차는 온기를 안고 있으려니 기분이 다소 말랑말랑해졌다. 나는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대며 까만 털을 쓰다듬었다. 루카스는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올린 채 그런 내 모습을 하릴없이 멀뚱히 보다가 문득 내가 읽던 책에 눈길을 돌렸다. “넌 온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읽어볼 속셈이야? 지겹지도 않아?” “쯧쯧. 어리석은 중생 같으니. 학문에는 끝이 없는 거라네.” 지금 내가 읽고 있던 것은 역대 위인들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었다. 루카스는 질린 얼굴로 책장을 훌훌 넘기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짜증을 냈다. “아, 진짜 이 새끼는 얼굴을 안 들이미는 데가 없어.” “누구?” “누구긴 누구야. 아에테르니타스, 이 미친놈이지.” 쿨럭, 가만 보면 루카스 얘는 아에테르니타스 황제를 되게 싫어하더라. “검은 탑의 마법사랑도 친했다고 하던데.” “친하긴 개뿔.” 내 말에 루카스는 진심으로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참, 저런 걸 보니 좀 놀려주고 싶네. “검은 탑의 마법사가 아에테르니타스 황제를 엄청 좋아했다잖아. 그래서 아에테르니타스 황제가 죽고 나서 실의에 빠져 사라진 거라던데?” “그래, 이걸 쓴 새끼를 찾아다가 족쳐야지 안 되겠네.” 흠칫! 나의 시도는 불발로 돌아갔다! 내가 운을 떼자마자 루카스가 너무나도 스산하게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이딴 걸 책이랍시고 세상 빛을 보게 만들다니, 겁대가리가 없어서 용감한가?” 루카스의 웃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이대로 두면 사고를 칠 것 같았다. “그, 그래도 정확하게 쓴 것도 있어!” 이놈이 기분 좋을 말을 해줘서 분위기를 쇄신하자! “검은 탑의 마법사가 얼마나 위대한지 엄청 샅샅이 적어놨단 말이야! 너도 한번 볼래?” 나는 급히 책을 뒤적여 루카스에게 검은 탑의 마법사의 이야기가 적힌 부분을 펼쳐 주었다. 그는 관심 없는 척 그걸 보더니 곧 콧방귀를 뀌었다. “다른 골빈 인간들보다 개미핥기 똥만큼 낫네.” 그래도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게 눈에 보였다. 짜식, 단순하기는. 전에도 검은 탑의 마법사의 업적이 적힌 책을 볼 때마다 사실보다 덜 멋지고 덜 대단하게 나왔다면서 까칠하게 굴더니. 그래서 이 녀석도 나처럼 어지간히 검은 탑의 마법사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맞아, 너 지금 동화책 속에 나오는 검은 탑의 마법사는 2대째인 거 알아?” “헐, 진짜?” 그때, 아까보다 기분이 풀려 너그러워진 루카스가 특별히 나한테만 알려주겠다는 듯 말했다. 나는 처음 듣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그런데 그거 동화책 아닌데! 역사책인데! 어쨌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대는 1,200년쯤 살다가 죽었어.” “헉, 엄청 오래 살았다.” ======================================= [155화] 1,200년이라니? 평범한 인간인 나로서는 쉽게 상상이 안 되는 햇수였다. 그럼 도대체 보유한 마력이 얼마나 많았다는 얘기지? 루카스도 내 말에 동조했다. “사는 것도 지겨워질 만한 나이지.” “그렇게 오래 살면 나중에는 달관해서 만사가 다 재미없고 다 무뎌지고 그러려나?” 그러다 나는 문득 어릴 때 릴리와 함께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탑의 마법사가 마음먹기에 따라 제국 하나쯤 지도에서 지우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심장을 얼리고 있다고 하죠.’ ‘이성이 아닌 감성이, 냉정이 아닌 열정이 마음을 잠식하게 되면 그 힘은 대의가 아닌 사사로운 일을 위해 쓰일 수 있으니까요.’ “아, 그래서 검은 탑의 마법사가 심장을 얼리고 있다고 한 건가 봐. 되게 문학적으로 표현했네.” 나는 깨달음을 얻고 중얼거렸다. 크으, 문과와 이과의 차이인가. 그냥 ‘살 만큼 살아서 달관했다!’라고 쓰면 될걸. 그런데 내 중얼거림을 듣고 루카스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관념적인 표현이지만 그거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앗, 그냥 표현을 좀 시적으로 한 건 줄 알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그리고 이어지는 루카스의 말에 나는 미묘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고대 마법 중에는 금지된 게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 감정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마법이 있거든.” “어, 하지만 금지된 마법이라면 흑마법 아니야?” “흑마법은 아닌데 비슷해.” 남들보다 조금 더한 내 학구적인 열의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캐물어도 될 내용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루카스는 딱히 말해줘도 상관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했다. “잊고 사는 게 좋을 것 같은 일이 있으면 그와 관련된 사람, 혹은 일에 대한 감정을 삭제해 버리는 거야. 애초에 없던 것처럼.” ‘기억을 통째로 도려내는 건 비효율적이고 위험하니까, 그 대신’이라며 루카스는 덧붙였다. “예를 들자면, 선대 검은 탑의 마법사는 유일한 가족이던 아들이 자기보다 먼저 늙어 죽었을 때 그 마법을 사용했어. 그 결과 아들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에 그대로 남고 감정만 깨끗이 사라져 버렸지.” “그럼 어떻게 되는데?” “말 그대로.” 그리고 뒤이어 귓가를 파고든 말은 약간 섬뜩한 것이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에 얽힌 자기감정은 전부 잊게 되는 거야. 떠올려 봤자 남의 인생을 보는 기분이겠지. 슬프고 기뻤던 감정도 이미 다 잊어서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남의 일처럼 느껴질 테고.” 감정을 지운다는 건 그런 걸까?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루카스의 말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대개 그런 식으로 감정을 없앤 기억은 나중에 자연적으로 소거돼. 길을 가다가 발에 돌멩이가 채인 정도의 일이나, 옆을 지나가던 사람에게 있었던 의미 없는 일을 보통 오래 기억하지는 않잖아.” 루카스의 말대로 흑마법을 이용해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안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라는 소리는 빈말로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거…… 좀 별로다.” “맞아, 별로지.” 내 말에 호응하며 루카스가 미미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유쾌한 미소가 아니었다. 그는 나로서는 알지 못할 무언가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선대 검은 탑의 마법사도 미쳐 버린 거겠지.” 나는 언젠가부터 말없이 루카스를 보고 있었다. 내가 쓰다듬는 것을 멈추자 품에 안긴 동물이 보채듯 꾸물거렸다. “그 사람, 자살하기 전까지 그 마법을 엄청 많이 썼다더라고.” 루카스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무덤덤한 어투로 선대 검은 탑의 마법사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를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너는?” 나는 마주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썼는데?” 루카스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비스듬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난 그 인간처럼 약해빠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않았지.” 그래, 루카스라면 그럴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 말은 살아오는 동안 많이는 아니더라도 금지된 마법을 몇 번인가 쓴 적은 있다는 의미였다. 지난 3년간 나는 루카스에게 마법 특강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가 한 말은 ‘금지된 마법은 괜히 금지된 게 아니니까 진짜 숨넘어가기 직전이 아니면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 루카스가 감정을 지우는 마법을 썼다면, 아마도 그만큼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손 뭐야?” 갑자기 마음이 좀 그래져서 나는 루카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슥슥 쓰다듬자 마주한 얼굴에 의문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상처받은 네 영혼을 위로하는 거랄까.” “됐으니까 치워.” “에이, 좋으면서 튕기지 마.” “야, 내가 지금 너한테 위로받을 나이는 아니거든?” “언제는 너랑 나랑 동갑이라며?” 나는 엄청나게 오래전에 루카스가 나한테 약을 팔며 했던 말을 들먹였다. 그의 표정이 또 어처구니없다는 듯 변했지만 나는 그냥 예전에 까망이에게 했듯이 루카스를 오구오구하며 쓰다듬어주었다. 루카스는 그런 나를 향해 눈매를 찌푸리면서도 먼저 내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 * “그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내가 안고 있는 까만 털 뭉치를 보고 클로드가 눈썹을 비대칭으로 치켜 올렸다. “강아지는 아니고 레피랑 바움의 혼혈인 것 같대요.” “어차피 개과이니 강아지나 마찬가지지.” 다, 다른데. 하지만 여기서 그런 걸 꼬집어봤자 괜히 긁어 부스럼인 것 같으니 그냥 가만히 있자. “루카스가 확인했는데 위험하지 않다고 했어요. 일단 마법 생물도 아니고.” 바로 그 순간 클로드의 눈매가 작게 꿈틀거렸다. “그놈이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고?” “네.” 앗, 저건 못마땅한 표정인데? 그럼 역시 반대하려나.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내 손을 핥고 있는 동물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클로드는 잠시 후 얼굴을 펴며 무심히 툭 말했다. “그놈이 그렇게 말했다면 괜찮겠지.” 잠깐……. 지금 촉이 뭔가 이상했는데? 저 까닭 모를 믿음은 도대체 뭐라지요? 그동안 몰랐는데 루카스, 우리 아빠한테 엄청 신뢰받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혹시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빠.” “왜 그러지?” 그리고 전부터 속에 담고 있던 말을 드디어 밖으로 꺼냈다. “아무래도 루카스가 검은 탑의 마법사인 것 같아요.” 사실 루카스가 검은 탑의 마법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예전부터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다만 루카스가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하지 않는데다가, 또 나도 어쩌면 검은 탑의 마법사에 대한 내 팬심이 부른 망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나 어제의 일로 내 기나긴 의심은 끝내 확신이 되어버렸다. “그놈이 네게 그런 말을 하던가?” “그건 아니지만요.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클로드는 내 말을 듣고 한참 동안이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무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엥? 그, 그게 끝입니까? 나는 클로드의 시크한 반응에 내심 당황했다.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어요?” “수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 그러시군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니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기쁘기도 하고, 이미 다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나만 늦게 안 것 같아서 뻘쭘하기도 하고. “그럼 이만 나가 봐라. 개털 날린다.” “개 아니에요!” “개나 바움이나.” 으악, 까망이 때도 그러더니! 아무래도 우리 아빠는 애완동물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보다. 이렇게 귀여운데, 왜지? “그 개, 앞으로 내가 갈 때는 방 안에 들이지 마라.” 그래도 안 온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그러지 마시고 한번 안아보실래요?” “치워라.” 클로드가 너무 질겁하는 표정을 지어서 금방 포기했다. 나는 루카스가 준 이 털 뭉치의 이름을 뭐로 지을까 고민하면서 가넷궁을 떠났다. * * * 지난 사냥 대회 이후 아를란타와 오벨리아의 젊은 귀족 자제들 간에 제법 돈독한 친분이 생긴 눈치였다. 그 후로 종종 다 함께 모여 다과시간을 갖는 자리가 마련되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사절단이 온 목적도 친선도모였으니 위의 사람들도 젊은 세대의 교류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에른스트 경, 여기 가운데 앉으세요.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요.” “저도요!” 그중에서도 카벨 에른스트는 오벨리아의 영애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도 알피어스 공자님의 이야기를 해주실 거죠?” “공자님의 학생 시절 이야기라니 어찌나 두근두근하던지요.” 이제키엘 학창 시절 이야기! 이 드문 기회를 영애들이 놓칠 리가 있는가? “마그리타 양께서 원하신다면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이후 카벨은 제니트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단순히 친구의 사촌누이에게 보이는 친근감이라기에는 지나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은근한 눈빛을 두 사람에게 보내고 있었다. “에른스트 경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그럼 여기 계신 분들을 위해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마그리타 양의 부탁이라면 백 번 천 번이라도 기꺼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던 제니트도 이제는 적응이 되었는지 제법 편안한 모습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게다가 카벨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하고도 이제는 곧잘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난 그것이 아무래도 카벨 에른스트의 영향인 것 같았다. 저돌적인 우리의 서브남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분위기가 풀어진다고 해야 할지. 또 카벨이 하도 ‘마그리타 양’ 타령을 해대서 그런지 사람들은 제니트에게도 덩달아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사냥 대회 이후에는 주로 이런 패턴이었다. 첫째 날. “마그리타 양! 뵙지 못하는 며칠간 마그리타 양의 얼굴이 얼마나 눈앞에 어른거렸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우시군요!” 둘째 날. “마그리타 양, 혹시 저를 카벨이라고 불러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저도 마그리타 양의 이름을…….” 셋째 날. “마그리타 양의 옆에 앉을 수 있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이제 마그리타 양이 저를 카벨이라고만 불러주신다면 더 이상 여한이 없는…….” 저런 식이니 카벨이 제니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 수밖에. 뜻밖에도 제니트는 그런 카벨이 싫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그를 이성적인 의미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같이 있으면 즐겁고 재미있는 사람으로는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제가 이제키엘의 곤경을 못 본 척하지 않고 결판을 다음으로 미루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부동의 1위 자리를 넘겨주어야 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결론은 알피어스 공자님이 이기시기는 했다는 거네요?” “중요한 건 승패가 아닙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 중 하나인 트왈롯 경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자고로 기사들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약자를 우선시하고 동료의 곤경을 모른 척하지 않으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으, 으음. 다만 카벨이 이야기하는 이제키엘의 학창 시절 이야기는 이렇게 도중에 다른 길로 샐 때가 많았다. 대부분 이제키엘 얘기를 하다가 자신의 자랑으로 넘어가는 수순이었다. 나는 아마도 제니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무의식의 작용이 아닐까 생각했다. ======================================= [156화] “그리고 제 여동생이 말하기를, 그런 상황에서의 패배는 오히려 승리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키엘과 저는 무승부였던 셈이죠.” “전부터 느낀 건데, 에른스트 경은 여동생과 친하신 것 같아요.” “부디 카벨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마그리타 양. 그리고 여동생이 절 좀 많이 좋아합니다.” 또 시작이었다. 누가 봐도 자기가 여동생을 좋아하는 건데 꼭 반대로 말한단 말이야? 게다가 동생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되게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말하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생각했는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잃어버리신 건 찾으셨나요? 여동생이 준 선물이었다면서요.” “아니요, 아직…….”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이 나서 있던 카벨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아직 못 찾았구나, 그 펜던트. 하긴 어디에서 떨어뜨린 건지도 모른다고 하니, 만약 사냥 대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다면 찾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쯧, 그때도 이음새가 헐거워져 있더니만. “기운 내세요. 저도 얼마 전에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릴 뻔해서 그 마음이 어떤지 알아요. 저도 금방 찾았으니 아마 에른스트 경도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마그리타 양……!” 제니트의 위로에 카벨의 눈동자에 하트가 뿅뿅 차오르기 시작했다. 거참, 역시 서브남은 서브남이구만……. “뭐 재미있는 거 있어?”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당연히 루카스의 것이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갑자기 기별 없이 나타나서 조금 놀랄 뻔했다. 게다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천사상의 날개 위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재미있기는 뭘…….” 얘도 심심해서 나한테 온 모양이다. 나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루카스를 보고는 흠칫해서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루카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느닷없는 내 원망조의 음성에 루카스가 움찔했다. “내가 뭘?”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소리쳤다. “천사 언니의 머리 위에 앉다니!” “그게 뭐?” “이건 천사 언니에 대한 모욕이야!” 루카스는 내 말에 어처구니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잖아! 나도 차마 천사 언니의 머리통에 엉덩이를 붙일 수는 없어서 날개만 살짝 빌려서 앉아 있는데! “빨리 내려와! 이리로 와, 이리로.” 나는 루카스의 똥 매너에 분기탱천해서 그를 막 잡아당겼다. 천사 언니는 외모도 초특급, 날개 크기도 초특급이라 두 명이 충분히 앉을 만했다. 루카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손에 끌려왔다. 그런데 옆으로 엉덩이를 옮기다 말고 나는 균형을 잃고 말았다. “으억!” 꺄악, 같은 귀여운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건 소설 속 여주인공에게나 장착될 법한 비명 버프지요, 어흑. 하지만 휘청거리는 나를 루카스가 잡아줬다. “조심해.” 던지듯 내뱉어진 짤막한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속삭여졌다. 나는 흠칫해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괜히 그랬다. 가까이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더욱 좌불안석이 되고 말았으니까. 나는 슬쩍 루카스가 잡고 있는 팔을 빼내며 우물거렸다. “어, 어차피 떨어져도 안 다칠 텐데.” “하긴, 땅바닥이 다치겠지.” 이놈이?! 어쩐 일로 어울리지 않게 순순히 도와주나 했더니 그럼 그렇지. “그게 아니라 땅에 박기 전에 마법을 쓰면 된다는 의미였거든?” “그래, 그러니까 네 마력 때문에 땅바닥이 다친다고.” “그런 의미 아니었잖아!” “그럼 무슨 의미인데?” 악, 나는 루카스와 더 입씨름하는 걸 포기했다. 내가 흘겨보는데도 그는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잠시 입가를 실룩거리다가 곧 입을 삐죽이 내민 채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삐진 거야?” 그러자 루카스가 재미있다는 듯 방글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거든.” “아닌 게 아닌데, 뭘. 이쪽 좀 봐봐.” 하지만 난 진짜 삐진 게 아니었다. 영애들과 영식들은 아직까지도 담소를 나누며 하하 호호 단란한 광경을 도출해내고 있었다. 나는 크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네가 준 애 이름 지었어.” “뭔데?” “녹스.” “헐.” 그 순간 루카스가 나를 쳐다보며 얼굴을 굳혔다. “너 누구야? 아타나시아 아니지? 정체가 뭔지 순순히 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아는 넌 그렇게 수준 높은 작명 센스를 갖고 있지 못하거든.” “야잇, 내 작명 센스 무시하지 마!” 아오, 내가 뭔 말을 못 한다, 진짜! “그럼 그 이름을 진짜 네가 지었다고? 까망이, 파랑이에서 이름 짓는 솜씨가 갑자기 훅 진화했잖아?” “왜, 좀 멋지냐? 놀랐지? 막 감탄했지?” 엣헴, 내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이름이시다! 루카스가 준 레피와 바움 혼혈의 동물은 밤하늘 같은 까만 털과 새벽 빛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고심하다가 ‘밤’이라는 의미를 가진 ‘녹스’라고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훗, 날 더 찬양해라! 난 달라졌어! 더 이상은 과거의 내가 아니라고! “꽤나 마음에 들었나 봐?” “내가 붙인 이름인데 당연한 거 아냐?” “이름도 그렇고 그 강아지도.” “강아지 아니야.” “개처럼 생겼으니까 맞지 뭘.” 으앙, 클로드도 그렇고 루카스도 그렇고 왜 다들 내 애완동물의 정체성을 강아지로 규정짓지 못해 안달이랍니까? “앞으로는 무슨 일 있을 때 혼자 청승 떨지 말고 걔 끌어안고 놀아.” 엇, 그 말에 나는 멈칫하며 루카스를 쳐다보았다. 저 말은 무슨 의미지? 설마 내가 까망이를 생각할 때마다 울적해 보이니까 일부러 선물해 준 건가? 루카스에게 이런 섬세한 면이 있었다니? 아니, 그것보다도……. “너…….” 아무래도 날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나 뭐?” “아냐, 아무것도.” 루카스가 말을 하다가 만 나를 눈동자를 좁힌 채 수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머리 위에서 내리쪼이는 초여름의 햇볕이 따사로웠다. 그래서인지 약간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43.5장 제니트 “마그리타 양, 내일 티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데 와주실 수 있나요?” “그동안 몰랐는데 마그리타 양은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게 하시네요.” “마그리타 양, 결례가 아니라면 연회 때 에스코트를 청해도 될지…….” “마그리타 양…….” 자신을 찾아 부르는 목소리가 이렇게 달콤할 줄은 몰랐다. 제니트는 요 근래 들어 이상하게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호의적으로 대해 주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던가? “마그리타 양도 드뷔닉의 홍차를 좋아한다고 했죠?” “네, 맞아요.” “차 취향이 저와 맞네요. 다음에 저희 저택에 방문하시면 제가 아끼는 홍차를 내올게요.” 얼마 전 사냥 대회 때 ‘귀금속을 하녀에게 맡기기에는 불안하지 않냐’는 말로 제니트와 약간 껄끄러운 분위기를 형성한 적 있던 로잘리 헤르만도 지금은 아주 친근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감사해요. 정말 기뻐요.” 제니트는 그 호의가 순전히 기뻐 눈동자를 휘며 미소 지었다. 그러자 ‘어머’ 소리를 내며 손으로 입을 가리던 로잘리가 약간 미안한 듯이 말했다. “그동안은 마그리타 양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가씨인 줄 왜 몰랐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동조해 왔다. 제니트는 그 속에서 쑥스러움에 뺨을 붉혔다. 갑작스럽게 모두의 중심에서 관심을 받게 된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게 정상인 건 아닐까? 원래 그녀가 있어야 했던 자리는 이곳이 아니었을까? 스스로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야 어긋나 있던 모든 것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 같다고. “공주님도 오늘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때 문득 자리에 있던 다른 영애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제니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순간 손가락을 움찔했다. “정말 그렇네요. 하지만 마법 수식 건으로 바쁘시다니 하는 수 없죠.” “마력을 다루는 것만도 엄청난 일이라고 들었는데 직접 탑의 마법사들과 교류하면서 마법 수식까지 연구하시고. 정말 대단하세요.” “그러고 보면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어릴 때부터 학자들에게 버금가는 지식을 가진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했잖아요?” “작년에 실라토렌에서 열린 ‘지혜의 전당’에서 오벨리아의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대등하게 토론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하아,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정말 부족한 부분이 하나도 없는 분이네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그토록 공주님을 아끼시고, 또 공주님을 흠모하는 영식들도 그렇게 많은 거겠죠.” 어느덧 대화의 주제는 아타나시아 공주로 옮겨 갔다. 아, 왜인지 조금 싫은 기분이야……. 하지만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제니트는 화들짝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 아주 잠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새까만 빛이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요즘 알피어스 공자님이 마그리타 양에게 전보다 다정한 것 같던데요.” 아타나시아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영애가 그때 제니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가요? 평소와 비슷한 것 같은데요.” “물론 평소에도 알피어스 공자님이 마그리타 양에게 다정하기는 하죠. 아무래도 양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너도 나도 ‘맞아요’라며 공감해 오는 사람들 속에서 제니트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 * * 그런 나날이 얼마간 계속되자 제니트의 얼굴은 이전보다 확연히 밝아졌다. 웬만해서는 혼자 움직이는 일이 없던 그녀가 카벨 에른스트를 만나러 간 이제키엘을 보러 직접 사파이어궁을 찾을 정도로. 평소 아타나시아 공주와의 친분으로 황성의 출입이 잦던 제니트였기 때문에 허가는 금방 떨어졌다. 그리고 사파이어궁을 향해 걷던 중에 제니트는 낯익은 누군가를 보게 되었다. 탑의 마법사 복장을 한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 영애들과 만날 때마다 이제키엘과 함께 언제나 거론되곤 하던 사람이었다. 제니트도 그를 볼 때마다 확실히 멋진 마법사님이긴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영애들이 그에게 붙인 ‘고독한 검은 늑대’라는 별명이 생각나 제니트는 풋 웃고 말았다.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옆을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그래서 제니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루카스 님. 탑에 가시는 길인가요?” 얼마 전 같으면 면식도 별로 없는 타인에게 이런 식으로 먼저 친근히 인사를 건넬 리 없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많은 사람을 만나며 그럴 때마다 집중된 관심을 받은 탓인지 어쩌면 무시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조차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타나시아 공주의 궁을 드나들며 이따금씩 눈앞에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서 괜히 그가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그녀를 아는 척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려 한 것도 단순히 다른 생각에 잠겨 그녀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 그녀를 볼 때마다 앞다투어 친근감을 드러내고 호의를 비치던 사람들을 상기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생각했던 것이 맞는 듯, 루카스는 그녀의 인사에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제니트의 상상과 달랐다. “마음대로 내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을 텐데.” ======================================= [157화] 지극히도 무미건조한 음성에 제니트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한동안 자신에게 친절하던 사람만 보아온 탓인지 마주한 반응이 낯설었다. 게다가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얼굴을 하던 사람이었던가? 공주님의 앞에서는 좀 더 대하기 쉬운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아, 죄송해요. 공주님은 그렇게 부르시기에.” “당신은 공주가 아니잖아.” 그 순간 제니트는 할 말을 잃었다.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대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지독히도 무감정한 그 눈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마치 그녀가 길가에 차이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에게는 이제껏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이던 공손한 말투보다 지금의 하대가 지독히도 잘 어울렸다. 그렇기 때문인지 지금의 무례에 대해 감히 따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마주한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전히 불쾌하게 질척거리네.” “네?” “아무것도.” 그는 제 몸 주위에 날아다니는 벌레나 먼지를 털어버리듯 귀찮음이 담긴 손길로 주변을 휘휘 젓더니 홀연히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제니트는 그 뒷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발길을 뗐다. 이상해. 왜 저 마법사님은 나를 저렇게 대하는 걸까? 모두들 내게 친절해졌는데. 이제는 모두들 나를 좋아하는데. 왜 저 사람은 여전히 아타나시아 공주님만……. 그런 생각을 하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잠시 후 제니트는 사파이어궁에 들어섰다. 바깥에 나와 있던 사절단의 인원들이 그녀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이 카벨과 이제키엘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잠시 후 제니트는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약간 우울한 기분으로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대화 중인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네가 지켜줘야 한다는 사람이 바로 마그리타 양이었구나.” 카벨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순간, 제니트의 걸음이 멈칫했다. “하지만 분명 지켜주고 싶은 사람은…….” 바스락. 무언가 말을 더 이으려던 카벨이 귓가를 간질이는 작은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마그리타 양!” 곧 그가 잔디 위에 서 있는 제니트를 보고 반갑게 외쳤다. 제니트는 뜻하지 않게 두 사람이 하는 대화를 듣게 되어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물론 들은 소리라고 해봤자 극히 일부였지만. “제니트, 여긴 어쩐 일이야?” 이제키엘은 제니트가 이곳에 있는 것을 의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두 사람 모두 제니트가 방금 전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키엘이 여기에 있다고 해서요. 마침 아저씨께서 외출을 허락해 주시기도 했고.” “아버지가 요즘 들어 네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시긴 하지.” 그렇게 읊조리며 이제키엘이 가볍게 웃었다. 제니트에게 상냥해진 것은 비단 다른 사람들뿐만이 아니어서, 알피어스 공작 부부를 포함한 저택 내의 사용인들도 어지간해서는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마그리타 양, 이제키엘이 아니라 저도 있습니다.” “네, 겸사겸사 에른스트 경도 만나 뵈었으면 하고 왔는걸요.” “앗, 정말이십니까?” 카벨 에른스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슬쩍 귓불을 붉혔다. “카벨!” 하지만 멀리서 부르는 소리에 카벨은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부른 이는 함께 사절단의 호위로 온 기사단의 단장이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자유분방한 카벨이라 한들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그리타 양, 다음에 꼭 다시 와주셔야 합니다!” 그는 안타까운 듯 제니트를 향해 신신당부한 뒤 울상을 하며 뛰어갔다. 그런 카벨의 뒷모습을 보며 제니트는 웃고 말았다. “재미있는 분이에요.” “우리도 이만 가자.” “그러고 보니 저 황궁의 공용 도서관에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문득 생각난 듯 제니트가 한 말에 이제키엘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가?” “네, 한 번도요.” 그것은 제니트가 초대받은 에메랄드궁과 사파이어궁만을 오갔기 때문이었다. 전부터 알피어스 공작은 제니트에게 황궁에서는 특히나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각별히 당부하며 궁 안을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는 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황제 클로드 때문이리라. 그렇게 말하며 제니트가 흐린 얼굴로 설핏 웃자 이제키엘의 눈길이 잠시 동안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럼 잠시 들렀다 가자.” 그 직후 손에 온기가 닿았다. 제니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끄는 이제키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역시……. 기분 탓인지 이제키엘도 그녀에게 전보다 한결 더 상냥해진 것 같았다. 물론 이전에도 언제나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던 이제키엘이지만 은연중에 내비치는 행동이나 말이 조금 더 다정해진 것 같다고 하면 착각일까? 잠시 후 그녀는 창가 앞에 선 이제키엘을 보며 생각했다. 시선을 반쯤 내리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햇빛이 머물고 있었다. 창가로 스민 노란 햇볕이 그의 머리카락과 속눈썹을 희게 물들이다가 높은 콧대를 타고 내려가 일자를 그리며 다물린 입술 위로 떨어졌다. 두근, 두근. 언젠가부터 그를 볼 때면 늘 그랬듯 지금도 가슴이 뛰었다. 책을 펼쳐 들고 있던 제니트의 손이 약간 느슨해졌다. 도서관의 고요한 풍경 속에서 오직 이제키엘만이 선명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제니트는 아래로 내리깔린 이제키엘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 끝에 닿은 것에 곧 눈매를 얕게 떨고 말았다. 햇빛에 찬연히 반짝이는 금발, 생기를 가득 머금고 빛나는 보석안. 싱그러운 초목과 화사한 꽃들 사이에서도 단연코 두드러진 존재감을 지닌 아타나시아 공주였다. 제니트의 눈길이 다시금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움직여졌다. 이제키엘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서서히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제니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를 부르고 말았다. “이제키엘.” 보지 말아요.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곧 시선을 돌리는 이제키엘을 보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그녀를 향해 그가 나직이 물었다. 그 음성은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아…….” 달라. 방금 전 창밖을 보던 눈빛과 달라. “아니에요. 그냥 지루하지 않나 해서요.” “그렇지 않아.” 그것은 분명 제니트를 배려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녀 때문에 황실 도서관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지만 괜찮다고. 하지만 방금 전까지 창밖의 아타나시아 공주를 바라보고 있던 그를 알기 때문이었을까. 제니트에게는 이제키엘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마치 가슴에 작은 돌멩이가 굴러와 박힌 것 같았다. “공주님과 루카스라는 마법사님이요.” 그런 말을 꺼내고 만 것은 충동적인 마음에서였다. “사이가 참 돈독한 것 같아요. 두 분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였다고 했죠?”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영애들이 말하기를, 공주님과 마법사님이 그저 단순한 친구 관계는 아닐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황궁에 올 때마다 간혹 두 분이 같이 계시는 모습을 볼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공주님과 마법사님의 분위기가…….” 하지만 제니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불안감과 초조함에 등 떠밀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헛구역질을 할 것처럼 조금씩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야,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아니, 아니에요……. 지금 제가 한 말은 듣지 못한 걸로 해주세요.” 제니트는 차마 이제키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달아나듯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 이제키엘을 상처 입히고 공주님을 모욕하려 했다. 그런 건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추한 마음을 가지게 된 걸까? “제니트.” 책장 옆을 지나쳐 가는 제니트를 이제키엘이 붙잡았다. “무슨 일 있었지?” “아무 일도요.” 그는 그녀의 속마음을 읽어내려는 듯 마주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제니트는 그에게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냥, 저는…….” 잠시 동안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렸지만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애써 미소 지으며 이제키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니트.” “그만 가요. 오늘 저 때문에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이제키엘이 납득하지 못한 얼굴을 했지만 제니트는 그에게 잡힌 팔을 빼낸 뒤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손목에서 색색의 줄을 꼬아 만든 팔찌가 짤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제44장 평범함과 비범함 사이 “제니트, 내일 오후에 에메랄드궁에서 같이 다과라도 들지 않을래요?” “아……. 죄송해요, 공주님.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앗, 퇴짜 맞았다. 제니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 다과 초대를 거절했다. 하지만 다른 약속이 있다니 할 수 없지 뭐. 그녀는 요즘 들어 다른 영애들과 영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만발이었다. 여기저기서 제니트를 초대하고 싶어 하거나 또는 제니트에게 초대받고 싶어 야단이었으니. 물론 그녀도 원래부터 다른 가문에서 주최하는 파티나 다과회에 초대받아 참석하곤 했지만 요즘은 그런 공적인 행사 말고 사적인 자리에도 초대받아 가는 모양이었다. “그럼 아쉽지만 할 수 없네요.” 크으, 이게 바로 다 자란 애를 보는 엄마…… 까지는 아니고 이모 같은 마음인가. 그래도 요즘은 많은 사람하고 어울려서 그런지 전보다 제니트 성격이 밝아진 것 같기도 하고, 자신감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는 그녀에게 좋은 일인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혹시 이렇게 된 게 제니트의 마력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제니트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루카스가 별말이 없는 것을 보니 괜찮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공주님.”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응? 싱겁게 왜 그러십니까. 제니트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하다가 곧 말끝을 흐리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다른 때와 다를 것이 하나 없어 보였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봐요, 마그리타 양.”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이유를 묻지 않은 채 마지막 인사말을 건넸다. 그리고 꽃이 핀 길을 가로질러 멀어져 가는 제니트의 뒷모습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흐음, 아무래도 제니트는 오늘도 사파이어궁에 놀러가나 보다. 나한테도 같이 다과 시간을 갖자는 초대가 들어왔는데 추수제 준비도 그렇고 바빠서 거절한 참이었다. 사냥 대회 이후로 저렇게 다 함께 모여 친목 도모하는 시간이 늘어난 걸 보니, 오벨리아와 아를란타의 젊은 세대들 간에는 마음이 꽤나 잘 통하는 모양이었다. 뭐, 아를란타는 우리와 상호 우호적인 친선국이기도 하니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주역들이 친하게 지내는 건 나쁘지 않았다. “마그리타 양이 요즘 바쁜 것 같네요. 아쉽습니다.” 나는 옆에서 들리는 필릭스의 말에 문득 눈을 가늘게 뜨고 말았다. “필릭스는 전부터 마그리타 양에게 우호적이더라.” “공주님의 친구분이니까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랍니다. 예전에 흰둥이 아저씨가 나한테 이제키엘하고 제니트를 붙여주려고 했을 때는 내 친구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혼자서 나름대로의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더니. 어울리지도 않게 공부하겠다고 허구한 날 책이나 들여다보고 말이야! ======================================= [158화] 그런데 요즘은 왜 이렇게 제니트랑 나를 붙여주려고 하냐, 이 말입니다. “음? 공주님, 왜 그러십니까?” 나는 잠깐 필릭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내 손바닥이 가슴팍에 닿자 필릭스는 의아한 눈치였다. 나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그에게 정화 마법을 썼다. “앗, 방금 뭐지요? 기분 탓인지 굉장히 몸이 가벼워진 느낌인데요?” 필릭스가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더듬거리며 신기한 듯이 말했다. “몸이 가벼워진 거 말고 다른 느낌은 없어?” “다른 느낌이라 하시면…… 잘 모르겠습니다.” 필릭스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음, 이 평소 같은 아방한 표정을 보니 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괜히 예민했나. 하지만 정화 마법은 어느 화장품 광고 문구처럼 몸을 맑고 깨끗하고 자신 있게! 만드니까 해둬서 나쁠 건 없지 뭐. “혹시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기분이 별로거나 몸이 찌뿌둥하거나 하면 말해.” “앗, 혹시 심신의 순환을 돕는 마법인가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몸이 무겁고 피로했는데.” “음, 비슷한 거야.” “공주님이 저를 이렇게 걱정해 주시다니! 이 필릭스, 감동했습니다.” 쿠, 쿨럭. 별것 아닌데 너무 눈을 반짝반짝 빛내니까 살짝 머쓱해진다. “그만 가자.” “예, 공주님!” 한번 몸을 정화한 탓인지 필릭스는 다른 때보다 생생해져서 씩씩하게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진작 그에게 정화 마법을 걸어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앞으로 필릭스는 1일 1정화다! 그렇게 혼자 결심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는 에메랄드궁으로 향했다. * * * “릴리안 님, 무겁지 않으십니까? 저한테 맡겨주세요.” “오늘은 간만에 기사단과 대련을 하고 왔습니다. 이것 참 개운하군요.” “공주님, 앞으로 뭐든 이 필릭스에게 시켜주십시오.” 1일 1정화 탓인지 요즘 들어 필릭스는 한 마리의 비상하는 새처럼 날아다녔다. 혹시 몰라 루카스에게 확인차 물었지만 정화 마법은 몸의 자정작용을 돕는데다가 누적 횟수가 쌓여도 내성이 생기지 않으니 매일 써도 무방하다고 했다. 나도 나한테 정화 마법을 써봐서 아는데 사용 직후 느낌이 굉장히 시원하기는 하다. 예를 들자면 목캔디를 먹었을 때 화악! 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혹은 파스를 붙였을 때 파앗! 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크, 크흠. 뭔가 설명이 좀 저렴한 느낌이지만 하여튼! “공주님, 제가 오랜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회춘이라도 한 것처럼 며칠 새 파릇파릇해진 필릭스를 보며 약간 애매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머리도 굳는 느낌이고 전보다 쉽게 피로해져서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을 갖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몸도 가볍고 정신도 맑아서…….” 이, 이상하다. 정화 마법이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지는 않을 텐데? 무슨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잠깐의 피로 회복이나 기분 전환 정도는 될지 몰라도 말이지. “그래서 요즘은 취미 삼아 사이칸시아 신성 제국의 성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필릭스는 정말 며칠 전에 비해 확연히 기운이 넘치는 모습으로 자신이 요즘 하는 일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미, 미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예전과의 차이가 뚜렷하게 느껴지는구나.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서 그런가? 난 그냥 필릭스가 늘 똑같은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어! 사람이 이렇게까지 생생해지다니! 꼭 시들시들하던 풀이 비 온 뒤에 파릇해지는 것처럼! “공주님, 그 정화 마법이요. 저한테도 한번 써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요.” 필릭스가 저러자 한나도 정화 마법의 효력이 궁금해진 것 같았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한나에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어머, 이상하네요.” 그 직후 한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한나도 필릭스처럼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고 그러나? “효과가 있어?” “아니요. 놀라울 정도로 별다른 느낌이 없어요!” 쿨럭! 한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제 몸을 살피며 말했다. “앗, 그래?” “네. 잠깐 시원한 느낌은 드는데 말이죠. 그런데 로베인 경처럼 갓 뜀박질을 배운 망아지라도 된 양 당장에라도 펄펄 날아다닐 거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네요?” 하, 한나! 필릭스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긴 요즘 들어 필릭스가 좀 넘치는 활력을 주체 못 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고 다니긴 했지. “세스! 이리 잠깐 와봐.” “뭔데 그래?” “공주님, 세스한테도 같은 마법을 걸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 어렵지 않았다. 나는 막 방으로 들어선 세스에게도 정화 마법을 걸어주었다. “기분이 좀 산뜻해진 것 말고는 잘 모르겠는걸요?” 하지만 그녀 역시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이상하다. 한나랑 세스는 아직 젊어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달그락, 쿵! 그런데 그 순간, 옆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바닥을 찧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티 테이블 앞에서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있는 필릭스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자꾸만 자기에게 뭐든 시켜달라고 귀찮게 굴기에 대충 티 테이블이나 조금 옆으로 옮겨달라고 한 참이었는데. “네, 나이…….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죠. 저도 어느덧 거의 마흔이니…….” 헉, 그제야 우리는 방금 전 나눈 대화를 상기하고 흠칫했다. 패, 팩트 폭력이었나! 우린 그냥 별 생각 없이 얘기한 건데! 평소 클로드한테 나이 얘기를 해도 콧방귀만 뀌고 말아서 필릭스가 이렇게 충격받을 줄은 몰랐다. “아, 아니야! 필릭스가 나이를 먹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그래? 필릭스도 아직 젊어! 그냥 한나랑 세스가 좀 더 어리다는 거야.” “맞아요! 로베인 경도 아직 전성기신데 뭘요.” “그래요, 로베인 경.” “그렇게 위로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필릭스는 이미 실의에 잠겨 우리의 말이 위로로 와 닿지 않는 눈치였다. 척 봐도 우울 모드에 돌입한 그의 어깨가 아까와 달리 아래로 푹 꺼져 있었다. 조, 조금은 삐진 것 같기도 하고? “공주님, 저는 잠시 쉬러 가도 되겠습니까? 조금 전까지는 멀쩡했는데 나이가 들어 그런지 갑자기 삭신이 쑤시는 느낌이네요.” “그, 그래.” “아무래도 몸보신을 위한 보약이나 용봉탕 같은 것을 알아봐야겠습니다.” “요, 용봉탕?” “주변에 민폐를 끼치면 안 되니, 나이가 들면 몸 관리 정도는 혼자서 잘해야지요.” 필릭스는 그렇게 말한 뒤 터덜터덜 기운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베인 경이 저렇게 풀 죽어 하는 건 처음 보네요.” “마, 말실수한 걸까요?” “그러게.” 우리는 나란히 식은땀을 흘리며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아빠, 너무 좌절하지 말고 기운을 내세요!” 뜬금없이 집무실에 들이닥쳐 하는 말에 클로드의 눈썹이 비대칭을 그리며 슬그머니 치켜 올라갔다. 나는 필릭스와의 일 이후로 급격히 반성한 참이었다. 그래서 클로드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그동안 너무 아빠 마음을 몰랐던 것 같아요. 전 나쁜 딸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지?” 아무래도 내가 클로드를 걱정한답시고 운동해라, 잠 좀 잘 자라, 잔소리를 해댔던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게다가 아빠도 이제 나이가 있지 않냐느니, 아빠가 아직도 청춘인 줄 아냐느니, 그런 소리도 곧잘 했었는데! 그때는 클로드가 너무 자기 관리를 안 한다는 생각에 심통이 나서 그랬는데 필릭스 일을 겪고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내가 심했던 것 같다. 필릭스도 그 정도로 그렇게 충격을 먹고 시름에 젖었는데 클로드는 오죽하랴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클로드는 필릭스보다 나이도 많은데! “나이를 먹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인데 제가 그동안 너무 모진 소리를 했죠?”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마음이 짠해졌다. 나는 다가가서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아빠도 그렇게 눈 밑이 시꺼멓게 돼서 병든 닭처럼 허구한 날 골골거리고 싶지는 않으셨을 텐데. 작년 재작년이 다르고, 올해랑 작년이 또 다른 건 당연한 건데 제가 너무 아빠 입장을 생각 안 했어요.” “뭐…….” “하지만 걱정 마세요! 아빠한테는 제가 있잖아요.” 내가 말을 이어갈수록 클로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나중에 거동이 불편할 나이가 되셔도 전 항상 아빠 옆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노후 걱정일랑 마시고 벽에 똥칠할 때까지 천년만년 저랑 같이…….” “너한테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넣은 게 누구냐? 필릭스인가?” 뜨끔! 클로드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이 급속도로 흉흉해졌다. “아, 아니. 꼭 필릭스 때문은 아니고…….” “필릭스!” 하지만 이미 클로드는 밖에 서 있던 필릭스를 부른 뒤였다. 여느 때처럼 그의 부름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예, 폐하.” “내가 왜 부른 건지 이유는 알고 있겠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말하는 듯한 클로드의 싸늘한 눈빛에 필릭스가 굳어졌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필릭스한테 왜 그러시나요! “아빠, 필릭스는 잘못한 거 없어요! 그냥 제가 혼자…….”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필릭스가 클로드의 앞에 부복한 채 사죄하기 시작했다. “제 위치를 잊고 개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운 죄, 백번 죽어 사죄해도 모자랍니다!” 에, 엥? 나는 필릭스가 도대체 뭘 사과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그냥 클로드의 심기가 사나워 보이니까 뭔지 몰라도 일단 사과해서 지금 상황을 모면하자! 이런 생각에 조건반사적으로 사과하는 건 줄 알았는데 왠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아,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소 뒷걸음질 치다가 얼결에 쥐를 잡은 격인 것 같은데? 개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운 죄라니? 도대체 뭘 했기에 그러지? 헉! 혹시 필릭스, 몰래 뇌물을 먹었다던가, 황실 돈을 빼돌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 필릭스가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필릭스의 기세가 워낙 심상찮아서 나도 덩달아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죄책감에 점철된 그의 얼굴을 보니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던 것이다. 클로드도 설마 필릭스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의혹이 담긴 눈길로 필릭스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보니까 말이다. “그래, 네 죄를 네가 안다면 그 입으로 한번 말해봐라.” 클로드도 필릭스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티 내지 않고 노련하게 대답을 종용했다. 하지만 집무실 안에 도사리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은 다음 순간 맥없이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용봉탕을, 그 귀한 용봉탕을 혼자만 먹다니……! 제 입에 넣기 전에 폐하께 먼저 진상했어야 하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요, 용봉탕? 필릭스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단어에 나는 그만 커헙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어억, 지난번에 몸보신 한다고 용봉탕을 구해 본다더니, 진짜로 찾아다 먹었나 보네! 클로드도 황당한 눈치였다. “용봉탕이라고?” “요즘 심신이 허해 몸보신을 할 생각으로 동방의 보약을 구해 먹었습니다. 폐하께서 이리 진노하실 줄 모르고……. 아니, 아닙니다. 모두가 제 어리석음 탓입니다! 세월의 흐름 앞에 장사 없다고, 당연히 저보다 연식이 많으신 폐하께서 더 힘드실 터인데!” 바로 그 순간 클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폐하에 비하면 제 고단함은 새 발의 피 수준일 것이 당연하거늘, 어찌 이리 아둔한 생각을 하였는지. 제 불찰입니다! 벌해 주십시오!” ======================================= [159화] 피, 필릭스! 위험해! 나는 클로드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시꺼먼 아우라에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필릭스는 자책감에 시달리느라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곧 클로드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몰래 먹은 용봉탕의 맛은 좋던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들여와 오벨리아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더군요. 한 입 먹자마자 어찌나 비리고 역하던지……. 보약이라는 생각에 꾸역꾸역 먹었지만 그 후 삼 일간이나 속이 느글거렸습니다.” “그래, 그리 역하단 말이지.” 그러나 그렇게 말한 뒤 필릭스는 곧 아차 싶었는지 덧붙였다. 그리고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클로드가 용봉탕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 하지만 본래 좋은 약이란 입에 쓴 법이니 폐하께서도 참고 드시면 드실 만할…….” “필릭스 로베인. 앞으로 한 달간 매일 그 용봉탕을 먹도록 해라. 명령이다.” “예?” “하루라도 명을 지키지 않으면 더 끔찍한 벌을 내릴 테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우리는 급격히 기분이 저조해진 클로드에게 쫓겨났다. 하 참, 난 분명 클로드를 위로해 주러 왔던 건데 괜히 더 속만 긁고 떠나는 것 같잖아? 그리고 옆을 보았을 때, 나는 필릭스의 얼굴이 감동에 점철되어 있어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폐하께서 제 건강을 염려하시는 마음에 이렇게 친히 용봉탕을 하사해 주시다니……!” 으, 으잉? 그, 그거 아닌 것 같은데? 방금 전에 클로드가 ‘하루라도 명을 지키지 않으면 더 끔찍한 벌을 내릴 거’라고 했잖아? 그냥 ‘끔찍한 벌’이 아니라 ‘더 끔찍한 벌’이라구요? 그럼 이미 지금 댁이 용봉탕을 먹는 것 자체가 벌이라는 의미잖아! 으앙. “이 필릭스, 앞으로도 온몸을 바쳐 폐하께 충성할 것입니다!” 하지만 필릭스가 너무 감동받은 모습이라 나는 차마 그런 그에게 찬물을 끼얹지 못했다. 아니, 사실 내가 말한다 해도 지금 상태로는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야……. 그, 그나저나 이걸로 일단 모두가 해피엔딩인 건가. 결국 클로드는 원하는 대로 필릭스에게 벌을 내렸고, 필릭스는 그걸 상으로 여겨 행복해하고 있으니까…… 쿨럭. 나는 두 눈을 그렁거리는 필릭스를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어머,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날 밤, 내 말을 들은 릴리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는 오늘 있던 일을 재미있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생각해 보니 나도 좀 웃긴 것 같아서 릴리를 따라 키득거렸다. “그래서 필릭스는 내일부터 저녁마다 용봉탕을 먹을 거래.” “그럼 에메랄드궁에서의 식사는 이제부터 1인분을 적게 준비해야겠네요.” 나는 부드럽게 웃는 릴리의 얼굴을 보다가 슬쩍 물었다. “릴리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내 물음이 뜻밖이었는지 릴리가 이불 정리를 해주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난 괜찮으니까 좋은 사람 생기면 결혼해.” 필릭스도 그러고, 릴리도 그렇고, 다들 나 때문에 아직까지 혼자인 건가 싶어서 전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다들 그런 게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 어렸을 때에는 필릭스랑 릴리가 결혼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필릭스도 오벨리아에서 적혈의 기사…… 으음. 아무튼 그런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알아주는 기사인 데다, 릴리도 백작 가문의 딸에 내 직속 시녀라는 위치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할 수 있을 텐데. 혹시 내가 그들의 자유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릴리는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말할 뿐이었다.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공주님을 보살펴드리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결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 필릭스도 지금의 릴리처럼 말하더라. 그래도 괜히 마음이 쓰여. 사실은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지금처럼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계속 내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릴리 닮은 아이가 있으면 예쁠 텐데.” 아마 릴리는 진짜 아이가 생겼다면 지금 나에게 그렇듯, 아주 좋은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제 아이는 공주님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릴리가 항상 해주는 말에 지금도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내가 나쁜 애라서 그런 걸까. “실은 나도 릴리가 진짜 내 엄마 같아.” “다이아나 님이 서운해하실 거예요.” “응, 그러니까 나는 엄마가 두 사람인 거야. 엄청 복 받았다. 그렇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릴리가 잠시 동안 움직임을 멈추고 있다가 이윽고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릴리의 눈동자는 약간 젖어 있어서, 나는 그녀를 향해 더욱 활짝 미소 지어주었다. * * * “마그리타 양, 그래서 제가 어제…….” “마그리타 양, 이것도 한번 드셔보세요.” “마그리타 양…….” 황궁 밖에서는 청춘 남녀의 친목도모가 한창이었다. 나는 이틀 전 사파이어궁에서 있던 만찬 시간에 참여한 후, 오늘의 야유회에는 불참한 상태였다. “저거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청춘 남녀의 친목도모가 아니라, 제니트와의 친목도모 같았다. 나는 그들과 약간 떨어진 꽃나무 가지 위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다가 옆에 있는 사람을 향해 물었다. “확실히 정상들은 아니네.” 루카스도 내 의문에 가볍게 동의했다. 나는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제니트를 약간 착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그리타 양을 생각하며 열심히 고른 선물입니다!” 지금은 또 어떤 영식이 제니트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있었다. 물론 저 장면 자체에 문제될 만한 건 없었지만 요는 얼마 전부터 갑자기 사람들의 행동이 변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제니트의 마력을 경계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극히 미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제껏 제니트와 다른 사람들의 사이는 데면데면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모두가 제니트를 향해 급격히 호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저 단순히 그들이 제니트의 매력을 알기 시작하면서 생긴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이 계속 찜찜했다. 나와 함께 꽃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루카스의 시선도 내가 보고 있는 곳을 향해 미끄러졌다. 그 직후 그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 썩은 미소를 흘렸다. “기껏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기에 뭔가 했더니만 조잡하기 짝이 없네.” 응? 방금 전에 제니트한테 뭔가를 선물한 영식을 보고 한 말인가? “뭘 선물했는데?” “있어, 찌질한 놈이 준비한 찌질한 거.” 초, 초면인 사람한테 찌질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니? 저 사람이 제니트한테 뭘 줬기에 저러지? 궁금했지만 이미 내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놔서 볼 수가 없었다. “넌 저 키메라를 어쩌고 싶은 거야?” 문득 루카스가 나한테 물었다. 그,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왜 날 보는 눈빛이 ‘지금 당장 치워 버릴까?’라고 말하는 것 같지?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보세요, 꽃도 활짝 피었어요.” “꽃이 아무리 예쁘다 한들 마그리타 양의 아름다움에 비할 것은 못 됩니다.” 나는 밑에서 야유회를 즐기는 중인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지내는 건 역시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실 그런 건 나 혼자만의 욕심임을 알고 있었다. 명확한 결론을 낼 필요 없이 지금처럼 평화로운 나날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다른 의미로 이도 저도 아닌 지금의 현상 유지밖에 안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일단 그런 걸 제니트가 납득할 리도 없었다. “뭐, 어차피 곧 정리될 테니까 너무 골 아프게 고민하지 마.” “뭐? 그게 무슨 소리…….” “우리도 놀러 가자.” 그때, 루카스가 알지 못할 소리를 해서 반문했다. 하지만 내가 말을 끝맺는 것보다 루카스가 내 손을 잡는 게 더 빨랐다. “앗, 잠깐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 잠깐만은 효력이 없었다. 다음 순간, 나는 루카스의 손을 잡고 허공을 밟고 있었다. 우리가 앉아 있던 꽃나무에서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 새가 앉아 있었나 봐요.”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을 보고 밑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예고 좀 하고 움직이란 말이야!”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물론 전에도 루카스와 이런 식으로 공중 부양…… 이 아니라, 공중 도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지금처럼 허공을 걸어본 적이 있어서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루카스도 그걸 알아서 그런지 내 핀잔에 코웃음만 치고 말았다. “그런데 어디 가?” 그런데 왜인지 이놈이 가는 방향이 수상쩍었다. “너 아까 저 호수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며?” “아니, 그렇긴 해도…… 으악!” 루카스가 나를 붙잡고 호수 한가운데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햇빛에 은쟁반처럼 반짝이는 호수가 예뻐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코앞에서 보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설마 너 지금 무서워서 쪼는 거야?” 그때 루카스가 나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처럼 나는 쫄아 있었다. 으앙, 지금까지는 허공 위를 걸어 다니더니, 이제는 물이냐! “이, 이건 별로 좋지 않아.” 물론 나는 수영을 할 줄 알지만 그건 그거고, 물에 빠지긴 싫은 건 싫은 거였다. 멀리서 볼 때는 그리 커보이지도 않았던 호수였는데, 막상 그 한가운데에 내려서자니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루카스의 손을 붙든 채로 허공에 떠 있자 먼저 아래로 내려가 있던 그가 나를 보고 웃었다. 당연하게도 그건 비웃음이었다. “자세가 아주 참신하신데? 웃겨 주려고 그러는 거면 성공이고. 투명 마법 풀어서 저 사람들한테도 보여 주고 싶네.” “풀면 죽어!” 나는 루카스가 서 있는 모습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새, 생각보다 안전한 것 같기는 한데……. “너 갑자기 장난 쳐서 빠뜨린다거나 하는 거 아니지?” “빠뜨리긴 왜 빠뜨려.”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루카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방금 전까지 하늘 위도 걸어 다녔으면서 새삼스럽게. 발아래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물이라도 있는 게 낫지 않아?” 그, 그건 그런가? 귀가 얇은 나는 금세 솔깃했다. 하기야 방금 전까지 하늘에서도 걸어 다녔는데 물 위를 못 걸어 다닐 건 없었다. 나는 루카스의 재촉에 못 이겨 수면 위로 발을 내디뎠다. “오오, 된다, 된다!” 그 직후 내가 호들갑을 떨자 루카스가 옆에서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이 젤리 같아!” 그런데 공중 도보를 하던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꼭 고무를 밟는 것 같기도 하고, 젤리를 밟는 것 같기도 하고. 걸을 때마다 발밑이 울렁울렁거리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꼭 푸딩 밟고 서 있는 것 같지 않아?” “하여간 먹을 거 되게 좋아해.” 이 자식이?! 그런데 내가 찌릿 째려보기 무섭게, 루카스가 씨익 웃으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먹보 공주님을 위해서, 특별히.” 그리고 나는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동그란 티 테이블이 나타나더니, 곧 그 위로 새하얀 식탁보가 덮어졌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동그란 접시와 포크, 그리고 유리잔 등의 식기들이 눈앞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차라락. 이번에는 3단 디저트 트레이가 식탁보 위에 나타났다. 나는 색색의 예쁜 디저트들이 그 안을 채우기 시작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는 티타임에 어울리는 온갖 종류의 케이크와 푸딩, 과자와 잼 같은 것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 [160화] 어디선가 나타난 티포트가 저절로 움직여 찻잔 안에 그윽한 향기가 감도는 액체를 쪼르륵 부었다. 그 옆에는 어느새 설탕통과 티스푼이 뿅 하고 생겨나 있었다. 그다음, 테이블 한가운데에 있던 크리스털 화병에서 분홍색 꽃이 저절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얀 식탁보 위에도 연 노란색 꽃잎이 흩뿌려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덧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이, 이게 다 뭐야?” 완전히 놀랄 노 자였다. 아, 아니! 의자는 언제 또 생긴 거야? 게다가 나는 앉은 기억도 없는데 그냥 멍하니 있다가 보니까 어느새! 그, 그건 그렇고. 이 상황에 이렇게 화려한 다과상이라니,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내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버버거리는데도 루카스는 혼자만 태연했다. “다과회 처음 해봐? 네가 맨날 다른 사람들하고 하던 거잖아.” “그거랑 완전 다르잖아!” 내가 맨날 다른 사람들하고 하던 거라니! 이게 어딜 봐서 그거랑 똑같단 말이야! 일단 지금 우리는 완전히 물 위에 떠 있었다. 일명 수면 위의 다과회라고 해야 할까. 호수 한가운데에서 티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루카스와 마주 보고 있으려니 다시금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거 좀 미친 것 같아.”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엄마, 이런 획기적인 또라이는 처음 봤어요! 살면서 물 위를 걸어본 것도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는데, 한 술 더 떠서 이번에는 이렇게 물 위에서 다과상을 받고 있기까지 하다니? “수업의 일종이라고 생각해. 넌 네가 범인의 수준에서 벗어났다는 걸 깨달을 필요가 있어.” 요즘도 가끔씩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 주곤 하는 루카스가 말했다. 몇 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재벌과 로또에 맞아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졸부 사이에도 차이가 있는 것처럼, 이게 바로 대마법사와의 어쩔 수 없는 격차인가 싶었다.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는 데다 마법까지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 내 머리는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루카스는 예전부터 내가 생각도 못 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곤 했다. 허허, 참.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앞에 있는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디저트의 성지였다. 루카스는 이미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근데 옆에 이건 좀 깬다.” “얘 성격 세심해서 상처받는다니까.” 나는 떨떠름하게 옆에 있는 종이 인형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다과 시간에 시중을 들어줄 시종이나 하녀 대신인 것 같은데 그냥 마법을 쓰면 될 걸 뭐 하러 이런 것까지 구색을 맞췄담? 얼씨구, 게다가 목에는 나비넥타이까지? 척 보아 하니 예전에 내 춤 연습 상대를 한 적이 있던 바로 그 종이 인형인 같은데. 음,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외양은 그때 그 인형하고 똑같았으니까. 아무튼, 내가 두 번 속을 줄 알아? “웃기시네. 사람 말 못 알아듣는다고 지난번에 네가 그랬잖아.” “얜 업그레이드 버전이야. 봐, 지금 네가 한 말 듣고 울려고 하잖아.” “앗, 진짜?” “믿냐?” 나는 두 번 속은 멍청이가 되었다. 내가 발끈한 얼굴로 쏘아보자 루카스가 키득거리며 옆에 있던 종이 인형을 없애버렸다. 그래도 이런 일로 루카스에게 삐져 있기에는 주위의 풍경이 너무 예뻤다. 하여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루카스, 얘랑 있으면 심심할 겨를이 없는 것 같다니까. “헐, 밑에서 물고기 헤엄치는 거 보여.” “호수니까 당연하지.” “갑자기 튀어 오르거나 하진 않겠지?” “없애줄까?” “없애긴 뭘 없애? 생태계를 존중하란 말이야!” 나를 루카스를 구박하며 주위의 풍경을 감상했다. 얕게 이는 물살을 따라 수면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물가에는 온통 하얀 꽃나무 천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꼭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극락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호수가 반짝반짝거려. 예쁘다.” 그런데 루카스랑 단둘이 이러고 있으려니 왜인지 기분이 점점 묘해졌다. 그, 그러고 보니 이거 좀 데이트 같지 않아? 아냐, 아냐. 평소에 얘랑 나랑 단 둘이 뭘 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 그냥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괜한 기분이 들어서 그런 것뿐이야. “그러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루카스의 눈동자를 마주하기 전까지였다. “꼭 네 눈처럼 반짝거리네.” 손에 턱을 괴고 있던 루카스가 나를 향해 느른히 웃으며 속삭였다. 그 순간 덜컥 말문이 막히고 만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루카스가 어울리지도 않게 부드럽고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방금 전 그가 한 말이 상상도 못 했던 것이라 그런가? 나는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 건지 이유도 모른 채 눈을 깜빡이다가 곧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이,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이거나 먹어!” “난 네가 먹는 것만 봐도 좋은데.” 그러나 루카스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굴었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그의 입에 강제로 케이크를 밀어 넣으려 할 때까지 말이다. 제45장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다가오면 그로부터 얼마 후, 사절단이 아를란타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환송회 겸 파티가 열렸다. “아타나시아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 공주 마마께서 드십니다!” 나는 우렁찬 외침을 배경음 삼아 연회장에 들어섰다. “필릭스 로베인 경께서 드십니다!” 클로드는 연회 중간에 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오늘의 에스코트는 필릭스가 맡고 있었다. “오늘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우십니다, 공주님.” 그는 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한번 나한테 금칠을 해줬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그건 나도 알고 있다네. 크흑, 자화자찬이긴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물이 오른 내 미모는 내가 봐도 장난이 아니었다. 나한테 뛰어난 유전자를 물려준 엄마와 아빠에게 다시 한번 리스펙트를! 게다가 오늘은 아를란타 사절단이 떠나기 전의 마지막 파티라고 시녀 언니들이 얼마나 신이 나서 나를 꾸며 줬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세스랑 한나가 열일했지.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는 지론에 따라…… 서는 아니고. 그냥 준비를 하다 보니 좀 늦었기 때문에 홀에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도착해 있었다. “공주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두 번째 춤을 저와 함께…….” 으앗, 또 몰려들기 시작하는구나. 나는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웃는 얼굴로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지금은 삼삼오오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댄스홀에 나가서 춤을 춰야 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댄스홀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필릭스와 잽싸게 한 번만 춤을 춘 뒤 자리를 비울 계획이었다. “필릭스, 미리 미안하다고 사과할게.” “아닙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벌써부터 핼쑥했다. 왜냐하면 내 춤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하지는 못할망정, 데뷔당트 무렵과 여전히 비슷했으니까! 참 이상하게도 나는 춤만 췄다 하면 파트너의 발을 열심히 밟아대기 일쑤였다. 그나마 겉보기에는 티가 안 난다고 하니 다행인가? 어흑. 아무튼 그래서 필릭스는 오늘 내 제물이 될 예정이었다. 서, 설마 나랑 춤추기 싫어서 클로드가 파티에 늦게 온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배신이야! “그래도 오늘은 발을 좀 밟혀도 괜찮을 겁니다. 매일 몸에 좋은 것도 먹고, 열심히 몸보신을 했으니까요.” 그, 그건 용봉탕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아무리 용봉탕의 덕을 봤다 해도 당신의 발등이 두꺼워지지 않고서야……. “그러니 오늘은 마음 편히 밟아주십시오!” “그, 그래.” 뭐, 본인이 괜찮다면야 내가 딱히 뭐라고 말하기도 그렇기는 했다. “공주님!” 그때, 어디선가 반갑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백합 소녀였다. 앗, 왜인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세레나, 오랜만이에요.” “저도 뵙고 싶었어요! 한동안 못 뵈어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백합 소녀는 감기에 단단히 걸려서 한동안 집 밖을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적혈의 기사님도 안녕하세요?” “하하…….” 흑역사스러운 별명을 면전에서 들은 필릭스는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런데 저쪽에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자 바글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제니트가 있었다. “어머, 신기하네요. 마그리타 양이 중심에 있다니. 제가 저택에만 있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나 봐요.” 백합 소녀는 퍽 신기한 눈치였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지난 사냥 대회 때까지만 해도 이런 광경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같이 가보실래요?” “그래요.” 어차피 클로드가 올 때까지는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필릭스를 달고 백합 소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이 많아 여러 번 붙잡혀야만 했다.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나요?” 나를 보자마자 모두들 반겨주었다. 영식들과 영애들의 가운데에 있던 예쁜 소녀가 나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공주님,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먼저 인사드리러 갔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이거야, 완전히 제니트가 대표로구먼.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나 봐요.” “네, 다른 분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셔서.” 나는 제니트를 향해 웃으며 사람들에게 슬쩍 정화 마법을 걸었다. 이번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써야 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마력을 불어넣어야 할 반경도 넓었다. “응? 방금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는데.” “갑자기 머리가 맑아진 것 같아.” “이상하다, 그냥 기분 탓인가?” 마력의 파도가 한차례 주위를 휘감은 뒤, 근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니트는 내가 한 짓을 모르는지 사람들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아, 역시 알고 쓴 건 아닌가 보네. 나는 무의식중에 약간 안심했다. “클로드 데이 앨제어 황제 폐하 드십니다!” 그 순간 나는 제니트의 푸른 눈동자가 입구 쪽으로 움직여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이윽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그 직후 모두가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나는 움직임을 멈춘 사람들을 지나 곧장 그에게 갈 수 있었다. “오셨어요?” “그래.” 클로드가 손을 들어 올리자 본격적으로 연회의 막이 올랐다. 멈추었던 음악도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공주님.” 으아우, 이제 내가 댄스홀에 설 차례구나. “난 상석에 가 있을 테니 실컷 추고 와라.” 에잉, 실컷은 무슨 놈의 실컷. 내가 춤추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다 알면서 말이야. 나는 클로드를 향해 슬쩍 말했다. “혹시 서운하시면 필릭스 말고 아빠랑 같이 출 수도 있는데요.” “사양하겠다.” 하지만 그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대번에 내 말을 반사시켰다. 크윽, 이 칼 같은 남자! 나는 필릭스의 해방에 장렬히 실패하고 입술을 삐죽이며 뒤돌아섰다. 하지만 필릭스는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애잔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글쎄, 사생결단을 내리듯 의지를 다지며 말하는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이참에 폐하께서 친히 하사해 주신 용봉탕 값을 해야지요.” 저, 저기. 그런데 너무 결의하듯 말하지 말아주시겠어요? 나랑 춤추는 일이 전쟁터에 나가 십만 대군을 상대하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긴장하면 내가 뭐가 되나요? 으흐헝. “으윽!” 그리고 나는 오늘도 필릭스의 발을 실컷 밟아댔다. “괘,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견딜 만합니다. 역시 용봉탕의 효능이…… 윽!” ======================================= [161화] 게다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안해서 조심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나도 그냥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발을 밟을 수밖에 없다면 겉보기에라도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게다가 다년간 내 능력은 약간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상대방의 발을 밟아도 삐끗하거나 휘청이는 일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 그렇다고 해서 절대 마음까지 편한 건 아니랍니다. 정말이야! 지금도 난 필릭스에게 아주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으엉. 짝짝짝!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춤 선생님에게 그동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받았듯이 실로 아름다운 자태로 움직임을 마무리하는 데 성공했다. “필릭스,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음악이 끝나고 나는 필릭스의 팔을 토닥여주었다. 춤을 추기 전의 심지 곧은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확연히 파리해진 얼굴로 엉거주춤 걷고 있었다. 역시 용봉탕은 별 효과가 없었구먼. 크흑. “벌써 끝났나?” 아닛,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필릭스에게는 5시간 같은 5분이었을 텐데. 왕좌에 앉아 턱을 괸 채 다가오는 나를 나른히 쳐다보는 것으로 보아할 때, 그는 지금 꽤나 졸린 상태인 것 같았다. 이봐요, 형씨. 나랑 한 곡 땡기지 않으시겠나? 아마 잠이 번쩍 깰 텐데! “아빠도 저랑 한 곡 추실래요?” “네가 비무장 상태로 권한다면 생각해 보겠다.” 으앗, 내 구두를 무기 취급하다니! 옆에 있던 필릭스는 방금 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혼미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크흑, 내 생각에는 클로드가 나한테 발을 밟히기 싫어서 필릭스에게 자기 역할을 떠넘긴 게 맞는 것 같다. “클로드 황제 폐하, 그리고 아타나시아 공주 전하.” 그때, 셀로판지 공작이 다가왔다. “저희 사절단을 위해 이렇게 성대한 환송회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사절단의 대표로 인사를 하러 온 것 같았다. 그 말을 서두로 셀로판지 공작은 오늘의 파티가 얼마나 멋지고, 또 그동안 오벨리아에 있는 동안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 시간을 보냈는지, 그리고 이번 양국의 만남에 얼마나 유익한 외교적인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한참이나 더 떠들어댔다. 그 말을 어딘가 영혼 없는 얼굴로 듣고 있던 클로드는 마침내 입을 열어 딱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마지막까지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아니, 그래도 명색이 사절단 환송회인데 셀로판지 공작처럼 좀 더 구구절절이 이런저런 얘기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니야? 하지만 사절단이 온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들은 클로드의 반응에 이미 익숙한 것 같았다. 셀로판지 공작도 클로드가 워낙에 마이페이스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그냥 허허 웃으며 감사를 표한 뒤 물러났다. 그런데 자리를 떠나기 전, 어째서인지 그가 나를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아쉽군, 아쉬워. 아무리 봐도 우리 다이스 전하와 천생배필이시거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남몰래 쯧 혀를 찼다. 아직도 그쪽 황손이랑 나를 연결시키는 걸 포기하지 않고 있었구먼. 하지만 모두 다 부질없는 일인 것을. 쯧쯧. “셀로이드 공, 기운 내시지요. 원래 세상만사가 다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 아니겠습니까?” 때마침 클로드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왔던 흰둥이 아저씨가 그런 셀로판지 공작을 향해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셀로판지 공작은 그것이 퍽 분한 눈치였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고 참 나란히 헛다리들을 짚는구나 싶어서 애잔해졌다. “난 여기에 있을 테니 알아서 놀다 와라.” “아빠 혼자 계시면 심심하실 텐데요?” 하지만 클로드는 정말 귀찮은지 손을 휘휘 저어 나를 돌려보냈다. 이건 분명 나랑 같이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드니까 그러는 거다. 크흑,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아빠가 진짜 피곤한 것 같으니까 내가 총대를 메고 사람들을 상대해야지. 아빠는 지금처럼 그렇게 무게 잡고 가만히 앉아 계시지요.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 보니 문득 아까와 또 다른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는 제니트가 눈에 띄었다. 정화 마법의 효력이 벌써 다한 건가? 내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있을 때 옆에서 필릭스가 내게 귀엣말했다. “폐하께서는 잠시 자리 비우신다고 합니다.” “왜?” “회장 안이 답답하시다네요. 어차피 연회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 폐하께서 없으셔도 괜찮을 테지만 공주님이 여기 계시니 잠시 후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이고, 정 그렇게 피곤하면 그냥 다시 안 와도 되는데. 벌써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애 보듯이 나를 이렇게 신경 쓰고. 하여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아빠들은 원래 다 그런가? 그래도 클로드에게 보살핌받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앗, 그런데 필릭스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제니트가 사라졌다. 아니, 그새 어디로 갔다지요? 아무래도 마력 방출이 심한 것 같아서 한번 봐야겠다 싶었는데. 그때, 제니트 대신 이제키엘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알피어스 공자.” 내가 그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자 이제키엘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직후, 그의 눈동자가 의외라는 듯 약간 크게 떠졌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오늘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구나. 그래, 네가 이 구역의 잘생김을 다 해먹어라. “혹시 마그리타 양이 어디에 있는지 못 보셨나요?” “연회 도중 몸이 안 좋아져 테라스에 나가 쉬고 있습니다.” “아, 몸이 많이 안 좋나요?” “그저 미열이 있는 정도이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런, 혹시 마력의 과다한 방출 때문은 아니겠지? 그나저나 역시 이제키엘은 제니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구나. 지금까지 계속 같이 있었던 걸까? 요즘 들어 그 역시도 전보다 제니트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눈치여서 혹시나 했는데 물어보길 잘했다. “혹시 지금 마그리타 양에게 가는 중이었는지요?” “예.” 그 직후 그는 고개를 돌려 테라스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막 들어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하지만 제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군요.” 아, 지금 사람들이 들어선 곳에 제니트가 있나 보다. 어쩐지, 커튼을 보니 안에 사람이 있다는 표시가 되어 있는데 굳이 왜 거기로 들어가나 했네. “공주님께서 제게 먼저 말을 건네주시기에 기대했는데.” 이제키엘은 지나가던 시종에게 들고 있던 물 잔을 주며 말했다. 나는 이제키엘에게도 정화 마법을 걸어야 할까 어쩔까 고민하고 있었다. “제니트 때문이었군요.” 앗. 그 순간 나는 약간 당황했다. 보, 본의 아니게 이제키엘을 농락한 느낌이랄까. 기대했다가 실망했다는 듯한 그의 뉘앙스에 잠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말은 바보 같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이제키엘이 약간 씁쓸하게 웃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니트가 조금 부럽습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이 완벽해 보이는 남자가 다른 사람이 부럽다고 말하는 광경은 어딘가 이상하게 보였다. “아니, 제니트뿐만이 아니라 공주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간 모든 이가 부럽습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기분이 어땠는지 말로는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사랑스러운 공주님>. 그 안에서는 남자 주인공인 이제키엘도, 여자 주인공인 제니트도 티 한 점 없이 완전무결한 사람들로 보였었는데. 하여 그 책 속의 세상에서 그들은 정말 동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완벽하게 행복해 보였었는데. “저 또한 공주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입니까.” 어쩌면 그것은 오래전, 책 속의 냉혹한 황제였던 클로드에게서 처음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했을 때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금 내가 딛고 선 곳이 현실임을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는 아직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제키엘과 제니트를 책 속의 남녀 주인공으로만 여기고 있었나 보다. “그런 표정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키엘이 나를 향해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시를 삼킨 듯한 미소였다. “공주님을 웃게 해드리고 싶은데 제게는 쉬운 일이 아니군요.” 그렇게 말한 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제게 공주님의 두 번째 상대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필릭스에 이은 두 번째 춤 신청이었다. 사실 나는 이런 자리에서 이제키엘과 연관되는 것을 되도록 피해 왔지만 지금은 그를 거절하기 망설여졌다. 그때,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 무슨 일이지? 내가 의문을 느끼고 있을 무렵, 문득 앞에 있던 이제키엘의 시선이 내 등 뒤로 미끄러졌다. “안됐지만 공주님은 이미 선약이 있어서.” 귓가에 간지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곧장 내 손을 파고드는 온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얼굴에 경악해 입을 벌렸다. “루……!”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외칠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루카스! 네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게다가 지금 이 모습은 도대체 뭐야?! “당신은…….” 이제키엘도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눈동자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건 어른 버전의 루카스였으니까. “그럼 공주님. 제게 두 번째 춤의 영광을.” 그렇게 말한 뒤 루카스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어른 루카스에게 이끌려 연회장의 중앙을 향해 얼결에 걸어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느덧 음악이 시작된 뒤였다. “너 갑자기 뭐야?”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익숙하게 내 손을 붙잡고 에스코트하는 루카스를 보며 속닥거렸다. “왜 갑자기 어른 버전으로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래?” “오늘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서 큰 맘 먹고 와봤지.” 그 가운데에서 루카스는 참으로 태연자약, 유유자적하기도 했다. 누가 보면 만인의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한 이 시대의 아이돌인 줄 알겠네! “그런데 어린 모습으로 오면 또 저 자식이 짜증 나게 날 내려다볼 것 아니야.” 쿨럭. 그러고 보니 청소년 버전의 루카스가 이제키엘보다 키가 좀 작기는 했다. 그러니까 이제키엘이 널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싫어서 원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이 말이냐? 그건 그렇고……. 루카스가 지금처럼 격식 있게 차려입고 온 건 처음 본다. 그런데 그게 꽤나 봐줄 만해서 아까부터 넋을 빼놓고 루카스를 보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런 루카스와 손을 붙잡고 춤까지 추고 있는 나는 더군다나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앗, 그러고 보니까 내가 왜 지금까지 네 발을 한 번도 안 밟았지?” 내가 문득 놀라운 깨달음을 얻어 외치자 루카스가 얄쌍한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하고 난 다르거든.” 루카스의 그 말 한마디로 이제껏 내게 발등을 희생당해야 했던 파트너들은 순식간에 어중이떠중이로 전락되었다. 크으, 변함없이 얄미운 걸 보니 미니미 버전이든 청소년 버전이든 어른 버전이든 루카스는 루카스가 맞구나. 아, 그런데 이상하네……. 난 왜 지금 얘 눈을 제대로 못 쳐다보겠는 걸까? “맞아……. 아까 제니트가 좀 이상하더라. 왠지 마력이 과다하게 방출되는 것 같았는데…….” 나는 괜히 밀착해 있는 루카스가 의식되어서 제니트의 얘기를 꺼냈다. “그래?” “그냥 둬도 문제없나?” ======================================= [162화] 그리고 다음 순간 귓가를 스친 음성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 키메라 말고 나한테 좀 관심을 주지?” 시선이 마주치자, 붉은 눈동자가 짓궂게 빛났다. “기껏 네가 좋아하는 모습을 하고 왔는데.” “조, 좋아하긴 누가!” 으악, 요즘 얘 대사나 행동이 왜 이런 건지 모르겠다. 날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재미있냐? 재미있어? “난 미니미 버전일 때의 네가 제일 좋거든? 어른 버전은 제일 별로거든!” 어른 버전일 때는 쓸데없이 사람을 긴장시키기나 하고 말이야. 지금도 붙잡고 있는 손에서 땀이 나지는 않을까, 내 표정이 바보 같이 보이지는 않을까 신경 쓰이고……. “뭐, 그렇다고 쳐.”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그런 거야!” 하지만 루카스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였다. 결국 루카스와 나는 춤을 연속으로 세 번이나 췄다. 으윽, 난 그동안 한 사람하고만 이렇게 춤을 많이 춘 적 없었는데! “그런데 너 춤추는 거 싫어하지 않았어?” “싫어하지.” 그런데 왜 날 놔주지를 않는 거냐! 루카스도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곧 그가 날 향해 하는 말에 나는 순순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랑 이러고 있는 건 재미있네.” 오래전 첫 만남 때도 느꼈지만 루카스는 성인 남자이면서도 웃을 때의 얼굴이 참으로 화사하게 예뻤다. 이, 이럴 수가. 난 그동안 이제키엘의 미모가 내 안의 약한 부분을 제일 사정없이 찌른다고 생각했는데 어른 버전의 루카스가 갖고 있는 미모도 나를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그래. 네가 재미있다면 됐어. 네 재미를 위해 기꺼이 내 발을 희생시킬게! 뭐 이런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헉, 세상에. 저 멋진 분은 도대체 누구지요?” “공주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느 가문의 영식일까요?” “어떻게 저런 존재감 있는 분이 한 번도 눈에 안 띄었는지…….” 주위에서는 루카스의 정체를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때, 루카스가 눈살을 움찔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주위가 영 시끄럽네.” 너 때문이잖아! 나는 루카스의 무딘 성격에 약간 학을 떼고 말았다. 쿠쿵! “어?” 그때, 거친 마력의 흐름이 내 오감을 건드렸다. “뭐지?” 이 익숙한 듯 아닌 듯한 마력의 파장은……. 주위를 둘러봤으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여전히 루카스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두 사람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자 의아한 기색이었다. “뭐야, 연회장이 아니야?” 루카스가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왠지 말투가 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인데? “할 수 없지. 그럼 갈까?” 어디를? 하지만 내가 물을 새도 없이 루카스가 내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화악. 그리고 곧 시야가 뒤바뀌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다음 순간, 나는 절규하는 제니트와 그 앞에 있는 클로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45.5장 파티가 끝나기 전 세레나 이레인은 원래 고독한 회색 늑대인 자르비에 공자의 추종자였다. 자르비에 공자는 회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오벨리아의 대표 미남 중 하나로, 세레나를 포함한 여성 팬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언제나 먼 허공을 바라보는 것 같은 우수에 잠긴 검은 눈동자! 뒷모습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쓸쓸한 분위기! 요컨대 자르비에 공자에게는 여자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볼 때마다 함께 이유 모를 안타까움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는 영애가 많았다. 세레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3년 전에 완전히 변심했다. 자르비에 공자보다 ‘고독한 늑대’란 칭호에 훨씬 걸맞은, 아니, 완전히 딱 들어맞는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검은 탑 소속의 마법사 루카스였다. “하아, 성함조차 멋지세요.” “맞아요. 그분께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아아, 어둠 속에 숨은 한줄기의 빛 같은 루카스 님께 딱 맞는 그 이름!” 역시 보는 눈은 비슷한 것인지, 루카스를 흠모하는 영애는 많았다. 평소 루카스는 황궁 내에서도 모습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대체 이 많은 영애가 어디에서 그를 보고 이리 애타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세레나는 그들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도 아타나시아 공주의 다과회에서 우연찮게 그를 만난 첫 순간, 강렬한 운명의 끌림을 느끼지 않았던가. “루카스 님이 계신 줄 모르고 자르비에 공자 같은 사람이나 쫓아다녔다니……. 저의 어리석음이 너무나 뼈저리네요.” “실라 영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요. 이제라도 루카스 님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해요.” 이따금씩 비밀 모임에서 만나 루카스의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 영애들은 저마다 자신의 흑역사를 떠올리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루카스에 비해 자르비에 공자는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부족했다. 그것이 뭔지 말로 잘 설명할 수는 없어도 어쨌든 2%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하긴, 그때는 그녀들도 어리고 철이 없었으니까. 루카스의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에 비하면 자르비에 공자의 회색 머리카락은 물 빠진 지푸라기 같았고, 루카스의 강렬한 붉은 눈동자에 비하면 자르비에 공자의 검은 눈동자는 동태눈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 치명적인 분위기! 루카스의 금욕적이면서도 나른하고 어딘가 퇴폐적이면서도 고독해 보이는 그 분위기에 자르비에 공자의 초라한 뒷모습 따위는 감히 댈 것도 아니었다. “헉, 설마 저분은……!” “고, 고독한 검은 늑대님의 성장판?” “혹시 제 망상이 지나쳐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그러니 사절단의 환송회를 위해 열린 파티에서 아타나시아 공주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남자를 보았을 때, 그녀들은 저마다 과부하에 걸린 심장을 부여잡고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설마 루카스 님의 형? 형인 걸까요?” “어쨌든 혈연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똑같이 닮은 모습일 리가!” “헉, 허억……. 루카스 님의 황실 마법사 복장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이, 이건…….” 루카스와 너무나도 닮은 남자는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황실연회에 어울리는 성장을 하고 있었다. 루카스 님이 좀 더 자라 어른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평소에도 참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성인 남자의 어른스러움과 왠지 모를 위험한 매력까지 가미되어,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심장에 무리가 오는 것이……. 아타나시아 공주와 춤을 추던 그가 살인적인 미모를 뽐내며 웃기까지 하자, 영애들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되었다. “아아, 참으로 좋은 생이었어요…….” “더 이상은 여한이 없다…….” “아아아…….” 옆에서 흐물흐물하게 녹아가는 그녀들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파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 * * “아하하. 저도 마그리타 양과 같은 생각이에요.” 제니트는 사람들 틈에서 화사하게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자신에게 호의를 내비치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은 즐거웠다. 하지만 아까 전 보았던 클로드와 아타나시아 공주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는 순간, 제니트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두 사람의 정겨운 모습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여지없이 가슴에 돌덩이가 굴러와 박힌 것 같았다. 사실 어제도 제니트는 알피어스 공작과 작은 마찰이 있었다. 그 이유는 역시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알피어스 공작은 제니트의 다른 바람은 대부분 다 들어주면서도 클로드의 앞에서 그녀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서만큼은 미온적이었다. 근래 들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물러지게 된 알피어스 공작인지라 그래도 이번에는 기대를 했었다. 그런 만큼 제니트의 실망도 컸다. 그러고 난 후 그는 퍽 불안했는지 오늘 제니트의 파티 참석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애원하자 마음이 약해진 듯 결국 허락해 주었다. 그 일로 제니트가 우울해했기 때문에, 황성에 오는 길에는 이제키엘이 그녀를 위로해 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상냥해졌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래서, 그게 뭐?’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래?” 제니트가 문득 옆에 있던 그를 올려다보자, 이제키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연회장에 오자마자 바로 아타나시아 공주를 만나러 가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아직까지도 그녀의 옆에 남아 있었다. 그래, 괜찮아. 아버지의 일도 좀 더 참을 수 있어. 이제키엘만 지금처럼 내 옆에 있어주면. 그 순간, 제니트의 몸에서 까만 기운이 피어올랐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마그리타 양, 방금 전보다 낯빛이 조금 어두워진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러네요. 혹시 몸이 안 좋아진 것 아니에요?” 그녀의 기분을 민감하게 포착한 사람들이 저마다 걱정 어린 말을 건네 왔다. “잠시 쉬었다 오시는 게 어떨지요?” “마그리타 양은 몸이 약하니까요.” 주위에서 하는 말을 듣고 제니트는 흐리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러는 게 낫겠네요.” 그 모습이 꼭 한 떨기의 물망초처럼 가련해서 사람들의 눈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그럼 전 잠시 바람을 쐬고 올게요.” “마그리타 양, 그렇다면 저와 함께!” “아니에요, 제가!” 다들 제니트를 따라가겠다고 입을 모아 외쳤다. 그 속에서 모두의 집중된 관심을 받고 있던 제니트가 옆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이제키엘, 같이 가줄래요?” 그러면서 그의 팔을 살며시 붙잡는 손길이 연약했다. 마치 이 세상에 의지할 것이라고는 이제키엘 하나밖에 없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런 제니트를 잠시 동안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제키엘이 이내 대답했다. “그래, 나가자.” 곧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를 떠났다. 예전이라면 곁에 있던 영애들이라도 질시 어린 눈빛을 보냈을 테지만 지금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제니트를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이 또한 얼마 전부터 갑작스럽게 형성된 모습이었으나 정작 그 당사자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 시원하네요.” 테라스에 나오자마자 선선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제니트는 휴식을 취하러 나온 이들을 위해 미리 준비되어 있던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이제키엘도 앉아요.” 이제키엘도 그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제니트의 옆에 앉는 대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미열이 있어.” 이마에 닿아오는 손이 밤공기처럼 서늘했다. 제니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원하는데 왜 가질 수 없는 걸까……? 어릴 때에는 늘 이제키엘과 함께였다. 그녀가 악몽을 꾸거나 지금처럼 열에 들떠 밤새 뒤척이다 잠에서 깨면, 언제나 눈앞에는 이제키엘이 있었다. 그 외에도 그녀의 모든 하루는 이제키엘에게 귀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아를란타로 떠났을 때에는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어찌 보면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아무리 떼를 써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걸. ======================================= [163화]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보내는 그녀의 편지에 귀찮은 내색 한 번 없이 그는 답장을 해주었고, 또 가끔씩 오벨리아에 돌아와 저택에 있을 때에도 그는 늘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그녀에게 내주었다. 그런 그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아타나시아 공주를 만난 직후부터.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직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도 전보다 더한 간절함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도 분명 그녀는 지금처럼 이제키엘을 가슴 깊은 곳에 품게 되었을 것이다. 이미 이 감정의 시작이 언제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 “마그리타 양! 괜찮으십니까?” 그때, 누군가가 테라스의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카벨, 노크 정도는 하고 들어와야지.” “마그리타 양이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어!” 제니트는 호들갑을 떠는 소리를 들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전 괜찮아요. 그냥 조금 쉬면 금방 나아질 거예요.” “정말입니까?” “그런데 그 물건은 받으셨나요?” “아, 받지 못했습니다. 분명 연회장 밖의 촛대 앞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더군요.” 카벨 에른스트는 지난번 사냥 대회 때 잃어버린 여동생의 선물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자리를 비웠던 참이었다. 하지만 물건을 전달받을 장소를 잘못 안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길이 엇갈린 것인지 그는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 실망한 눈치였다. “기운 내세요. 어차피 그분도 연회장 안에 계실 테니 오늘 중에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마그리타 양! 어쩜 마음씨도 이렇게 천사 같으신지.” 카벨은 제니트의 위로에 감동한 듯 두 눈을 그렁거렸다. “제니트, 지금 들으니 목소리도 좀 잠긴 것 같은데.” “그래요?” “마실 걸 가져다줄게.” 그렇게 말한 뒤 이제키엘이 뒤돌아섰다. 제니트는 저도 모르게 그런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았다. 그러자 이제키엘이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보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제니트가 움찔했을 때, 이제키엘이 겉옷을 벋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금방 올게.”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카벨도 옆에서 맞장구쳤다. “그래요, 마그리타 양. 이제키엘이 다녀오는 동안 제가 말벗을 해드리겠습니다.” 제니트는 테라스를 나서는 이제키엘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깨 위에 내려앉는 온기와 여트막하게 느껴지는 향기 때문인지 곁에 없어도 꼭 이제키엘과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렇게 뒤돌아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째서인지 저는 이대로 영영 당신을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 팔찌, 꽤 자주 하고 다니시는군요.” 그때, 어깨에 걸쳐진 옷을 붙잡는 제니트의 손을 보고 카벨이 말했다. 귀족 영애가 똑같은 장신구를 이렇게 볼 때마다 착용하고 있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지금 제니트의 손목에 있는 팔찌는 이런 연회에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것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 준 거예요.” 제니트는 손목에 걸린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읊조렸다. “앗, 혹시 이제키엘입니까?” “아니요.” 그 말에 카벨은 더 궁금한 눈치였지만 제니트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간절히 바라면 정말 소원이 이루어질까요?” 문득 제니트는 어둑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몇 년간이나 상자 속에 고이 넣어두고 보관만 하던 팔찌를 꺼낸 이유는 그 당시 이것을 준 사람이 했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전 그렇다고 믿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미소 짓는 제니트의 등 뒤로 다시 한번 까만 기운이 일렁였지만 두 사람 다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잠시 후 테라스에 다른 사람들이 찾아왔다. 제니트를 걱정해서 걸음 한 이들이었다. 제니트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이제키엘을 찾으러 연회장에 돌아왔다. 요즘 들어 감정기복이 심해 그에게 어리광만 부리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이제키엘을 만나면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줘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제니트는 아타나시아 공주와 같이 있는 이제키엘을 보게 되었다. 아. 아타나시아 공주를 바라보는 이제키엘의 저 얼굴. 발끝에서부터 조금씩 물에 잠겨가는 것처럼 서서히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누구도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마그리타 양,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우두커니 서 있는 제니트를 향해 다른 영식들이 말을 걸어왔다. “마그리타 양?” “아니에요…….” 제니트의 입에서 누구에게인지 모를 말이 흘러 나왔다. “마그리타가 아니에요.” 즐겁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홀로 불행했다. 자신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 * “에른스트 경! 여기에 계셨군요.” 제니트가 이제키엘을 찾아 테라스를 떠나고 난 후 카벨은 다소 시무룩해져서 연회장의 구석에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를 반갑게 부르며 달려왔다. “여기, 이 팬던트가 에른스트 경의 것이 맞습니까? 사냥 대회 때 주운 이후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만.” “앗! 그럼 오늘 만나기로 했던!” 이야기를 해보니 아까 만나기로 한 장소를 전달할 때 혼동이 있었던 듯했다. 잃어버렸던 물건이 드디어 카벨의 손에 돌아왔다. 그는 감격 어린 마음으로 펜던트를 건네받았다. 화앗! 응? 그런데 기분 탓인지 펜던트를 손에 쥐는 순간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라? 방금 전까지 내가 왜 마그리타 양을 그렇게 꽁지 빠진 강아지처럼 따라다녔더라?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벨은 잃어버린 펜던트를 찾아줘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거듭 한 뒤 남자와 헤어졌다. 하지만 알쏭달쏭한 기분만큼은 여전했다. 한동안 이제키엘의 친척 누이인 제니트 마그리타에게 홀딱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꼴같잖은 모습을 보인 스스로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헉!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요정님께 인사도 드리지 않았다니! 이제 아를란타로 돌아가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러다 퍼뜩 든 생각에 카벨은 좌절하여 아타나시아 공주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 * * “이제키엘은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좋아하는 거죠?” 연회장 밖의 복도는 조용했다. 그래서 이제키엘을 향한 제니트의 목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홀 안에서 마법사 루카스를 닮은 남자와 춤을 추는 중이었다. “하지만 공주님은 이제키엘을 돌아봐주지 않을 거예요.” 제니트의 말에 이제키엘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공주님은 아주 상냥하고 다정하시니까요.”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에게 화내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를지도 몰랐다. 이제 제니트는 혼자 상처받는 것에 질려 누구든 상처 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이제키엘도 자신처럼 괴롭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공주님이 그런 당신을 받아줄 리가 없잖아.” 처음으로 소리 내 말한 진심이 그녀를 아프게 찔렀다. 이런 끔찍한 기분으로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씨앗을 틔우듯, 하루하루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주며 그 무엇보다 소중히 키우다가…… 마침내 예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면 그때 이제키엘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아마 내가 죽기 전까지 이제키엘은 공주님을 가질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때에는 이제키엘의 대답이 어떻든 웃으며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내 마음에 대답해 주지 않는 것처럼, 공주님도 당신의 마음에 절대 대답해 주지 않아.” 설령 당신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 해도, 나는 당신을 만나 아주 많이 행복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그러니 이걸로 공평해졌네요.” 그리고 당신이 가슴에 품고 있는 그 사람과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둘 다, 정말 원하는 건 결코 갖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이제 이제키엘은 그녀에게 질렸다고 말하며 뒤돌아설지도 몰랐다. 아니면 싸늘한 경멸과 혐오를 얼굴에 드리운 채 분노를 표출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얕은 물살처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제키엘은 이번 역시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마주하고 있는 차가운 눈동자가 제니트의 가슴에는 비수보다 더욱 아프게 꽂혔다. “제니트.” 자신을 부르는 고요한 음성에 제니트는 움찔했다. “내가 언제까지나 네 옆에서 투정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는 그녀를 향해 화도 짜증도 내지 않은 채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어째서 그것이 더 냉정하게 느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네 마음을 모른 척하고 있었듯, 너 역시도 내 마음을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걸 알아.” 그렇게 말한 뒤, 이제키엘은 길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금 제니트를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사실 나는 조금 더 빨리 지금 같은 상황이 오기를 바랐는지도 몰라.”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키엘의 옆에 평생을 함께 있어온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결정한 것이다. 그녀를 내버려 둔 채, 혼자서 끝을 내기로. “왜?” 속삭이듯 작은 음성이 제니트의 떨리는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왜 그런 말을 해요?” 제니트는 방금 전 이제키엘에게 잔인하게 굴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더없이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듯, 이어지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내 마음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어.” 그토록 잔인한 말을, 이제키엘은 제니트에게 속삭였다. 그 순간, 제니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져 내렸다. “너와 함께 있는 동안 내가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던 것처럼, 아마 너도 그렇겠지.” 그를 조금 덜 사랑했다면, 지금 그녀가 받는 통증의 크기도 이보다 작았을까. “그러니 이제 그만하자.” 하지만 모두가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제니트는 차마 흐느끼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나는 나고, 너는 너야.” 이제키엘은 그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로부터 처음으로 먼저 뒤돌아섰다. “내 모든 걸 네 뜻대로 할 수는 없어.” 흰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10년 전의 온실에서는 미처 하지 못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 * * 그 후 제니트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건물을 완전히 빠져나와 걷는 동안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내 모든 걸 네 뜻대로 할 수는 없어.’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던 이제키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네 뜻대로’라니? 언제 그녀의 뜻대로 되는 일이 있기는 했던가? 그녀는 그 무엇 하나 마음껏 가져본 적이 없는데, 그것은 이제키엘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그는 이제껏 그녀 때문에 숨이 막혔다는 것처럼 말했다. 제니트는 그림자 진 구석에 숨어 혼자 울다가 이내 눈물을 닦고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164화] 나한테 돌아갈 곳이 있기는 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눈물이 났다. 정처 없이 걷는 동안 어두컴컴한 하늘에 하나둘씩 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제니트는 달빛을 받고 서 있는 클로드를 발견했다. 그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가슴이 꽉 죄어들었다. 일전에 후원에서 만나 들었던 경고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스락. 제니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풀이 밟히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 속에 파고들었다. 클로드의 고개가 옆으로 움직여지는 순간, 제니트는 자신을 족쇄처럼 옭아매고 있던 반지를 빼고 보석안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금껏 가슴에 묻고 있던 말을 처음으로 소리 내 속삭였다. “아버지.” 그 순간 섬뜩할 정도로 냉혹한 눈빛이 날카롭게 제니트를 꿰뚫었다. 제46장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는 거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빠?!” “가까이 오지 마라.” 당황한 내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딛기 무섭게 클로드가 싸늘히 읊조렸다. 나는 제자리에 다시 우뚝 멈추어 선 채 두 사람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클로드의 주위로 마력의 회오리가 부상하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던 풀잎과 나무에서 떨어진 꽃들이 주위에 비처럼 흩날렸다. 앞에서부터 몰아치는 바람에 내 머리카락도 물살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 속에서 제니트는 절망 어린 얼굴을 한 채 멍하니 읊조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제니트를 약간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손에 끼고 있던 반지는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클로드와 똑같은 보석안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아둔한 계집.” 지독히도 싸늘한 음성이 귓가를 때렸다. 그와 동시에 뺨을 스치는 바람도 서릿발처럼 한결 더 차가워졌다. “하면 정말 네가 내 딸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 순간 나는 후욱 숨을 들이켰다. 너무도 날카로워 베일 것 같은 눈빛과 목소리가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잔인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것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던 제니트는 거기에 온몸을 찔리기라도 한 듯 이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나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물론 지금처럼 제니트가 독단적으로 클로드의 앞에 서는 상황을 상상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로 닥치자 두 사람 사이에 섣불리 끼어들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클로드가 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제니트를 죽이려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사용한 마법은 살상용 공격 마법이 아니었다. “어이쿠, 이게 갑자기 뭔……!” 클로드의 팔이 허공을 한 번 휘젓자 웬 사람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헉, 폐하! 깜짝 놀랐잖습니까? 이 오밤중에 갑자기 소환 마법을…….” 누구인가 했더니 수장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저 병아리가 그려진 잠옷은 뭡니까? 심지어 그는 하얀 양 인형까지 안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자리에 들었다가 클로드에게 불려온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소환 마법이라니. 지난번부터 연구실에 계속 틀어박혀서 저 술식을 연구하나 싶더니 결국 성공했나 보네. 나는 수장 할아버지의 손등에 새겨진 작은 마법진이 번쩍이는 걸 보고 생각했다. “아, 아니, 급한 일이면 당연히 오밤중에라도 소신을 부르셔야지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등장한 수장 할아버지는 클로드를 발견한 직후 투덜거리다가 곧 분위기를 파악한 듯 말을 바꾸었다. “에반에셀.” “예, 폐하.” 앗, 수장 할아버지 이름인가? 처음 알았네. 탑에서도 다들 맨날 수장님, 수장님 그래서. “와, 안 어울리게 멀쩡한 이름이네.” 루카스도 수장 할아버지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듯 옆에서 중얼거렸다. 아니, 그런데 잠깐? 나는 그제야 깨달음을 얻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아, 같이 순간 이동을 했었지? 자리를 옮기자마자 눈앞에 닥친 상황이 너무 긴장감 넘쳐서 루카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저 계집의 마력이 어떤지 말해보라.” “아니, 갑자기 마력을 보라고 하셔도…….” 그래도 수장 할아버지는 클로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이어 화들짝 놀라 입을 쩌억 벌렸다. “보, 보석안?! 폐하, 언제부터 이런 장성한 딸을 숨겨두고…….” “죽고 싶나?” “어이쿠, 실언을 했습니다.” 날카로운 마력장이 쇄도하자 수장 할아버지는 눈치 빠르게 다시금 태세를 전환시켰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있는 제니트를 보며 잠시 속으로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저 소녀가 폐하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보고 증언하라는 것이군요.” 그러고 보니 수장 할아버지는 개개인이 지닌 고유의 마력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보이는 건 아니라고 했는데…….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긴 한데.” 수장 할아버지가 그때까지도 품에 안고 있던 양 인형을 잔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제야 사안의 중차대함을 안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제니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지금은 아주 잘 보이는군요. 아니, 솔직히 따로 들여다볼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마주한 사람의 속까지 고스란히 꿰뚫어보는 듯했다. “한 치 속도 들여다보이지 않는 검은 마력이 저 소녀 주위에만 자욱하니 말이지요.” 그 순간 제니트가 훅 숨을 들이마셨다. “본래 고유 마력은 혈연관계라면 일정한 연관성 보이게 마련인데, 어디를 봐도 클로드 황제 폐하와 연관된 구석이 보이지 않는군요.”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점차적으로 얕은 파문이 번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니, 오히려 이건…….” 그러다 문득 수장 할아버지가 눈매를 움찔하며 표정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곧 경악한 듯 외쳤다. “맙소사! 아나스타시우스 황자와 이렇게까지 똑같은 마력이라니? 그럼 설마……!” 그는 이제야 제니트의 정체를 깨달은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이야, 그래도 하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가, 퇴물치고 제법이야.” 옆에 있던 루카스가 생각보다 쓸 만하다는 듯 수장 할아버지를 향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짓말, 거짓말이에요……!” 처절한 목소리가 다시금 귓전을 울렸다. 제니트는 방금 전 들은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하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네 어미인 페넬로페가 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은 채 그렇게 혼자 비참하게 죽었는지 아나?” 제니트의 어머니인 페넬로페 유디트. 제니트는 자신의 어머니가 과거에 클로드의 약혼녀였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스스로를 클로드의 딸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어리석게도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이 흑마법의 재물이 된 줄도 모르고 아나스타시우스의 아이를 뱄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사실상 그동안 꿈꿔왔던 아름다운 동화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래, 계집. 감히 스스로를 공주라 여겨 겁도 없이 내 눈앞에 나타난 바로 너 말이다.” 절망에 사로잡힌 제니트의 눈빛이 내 가슴에 박혀들었다. 그녀는 이제 제대로 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망연한 얼굴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콩가루네, 콩가루야.” 아, 좀. 심각한 상황인데도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루카스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옆에서 혀를 차는 루카스를 잠시 째려보다가 다시금 앞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짐의 딸은 오직 아타나시아뿐이거늘.” 이런 상황에서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그 말은 내 기분을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두 번 다시 짐의 눈에 띄지 말라 친히 경고까지 해주었거늘.” 그리고 클로드의 목소리가 잇따라 두 귀에 흘러드는 순간, 나는 두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말았다. 제니트에게 그런 경고를 했었단 말이야? 도대체 언제 만나서 그런 얘기를 했지? 아니, 그보다도……. “짐의 눈과 귀가 멀어 이제껏 널 가만히 내버려 두었는 줄 아나?” 클로드는 제니트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천만에. 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순간 제니트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그동안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사실은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일전에 클로드가 기억을 잃었을 때의 일이 문득 떠오른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그럼에도 지금껏 살려두었던 이유는 오직 아타나시아 때문이었거늘. 한데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싸늘히 일갈하는 음성은 온기 한 점 없이 냉혹하기만 했다. 제니트를 보는 그의 눈빛은 더러운 벌레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경멸마저 어려 있었다. “도대체 누가 네 아버지라는 것이냐?” 제니트의 손에서 떨어진 듯 풀잎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반지가 클로드의 마력을 못 이겨 파사삭 부서졌다. “네 아비는 이미 예전에 죽어 유해조차 삭아 없어진 지 오래이니, 정히 핏줄이 그립거든 무덤부터 뒤져 보아라.” 아연실색한 제니트의 눈에서는 이미 초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넋이 나간 채 눈물로 얼굴을 흥건히 적신 그녀를 눈에 담자 나도 더 이상은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기 힘들어졌다. “아니, 그럴 것도 없겠군.” 바로 그 순간 클로드가 냉소적인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리고 덧붙인 말에 나는 마음이 급해지고 말았다. “직접 저승에 가서 인사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의 손이 앞으로 뻗어진 것과 내가 그를 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빠!” 콰앙! 하지만 굉음을 내며 클로드의 마력을 정면에서 받아친 것은 내 마력이 아니었다. 건물 안쪽에서도 마력의 충동을 느낀 듯 잠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필릭스가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이미 루카스와 내가 앞에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형성한 뒤였기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눈앞에 흩날리는 마력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황금색과 까만색이 뒤섞인 마력의 조각은 마치 허공에서 산산조각 난 투명한 유리 같았다. “맙소사, 마력 폭주의 전조 현상입니다!” 알아서 보호막을 두르고 있던 수장 할아버지가 바람을 맞고 선 채 외쳤다. 과연 그 말처럼 제니트의 주위에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까만 마력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 폭발이라니? 제니트에게는 그 정도의 마력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가지가지 하는군.” 클로드가 혀를 차더니 다시금 앞으로 손을 뻗었다. “폭주가 일어나기 전에 죽이겠다.” 그 말에 나는 입을 벌렸다. 지금 제니트를 죽인다고? 갑자기 일이 너무 극단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폭주 전에 마력을 일시적으로 묶어두는 방법도 있잖아요.” 마력 폭주에 대한 건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그동안 루카스에게 지겹도록 배웠다. 일단 마력 폭주가 일어나면 답이 없지만 그 직전이라면 미봉책이 있었다. “죽이는 게 가장 깔끔하다.” 그러나 역시 타인의 마력에 간섭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시전자의 몸에 다소의 무리가 가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클로드는 내 말에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정도는 식은 죽 먹는 것보다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루카스!” 아무래도 루카스 찬스를 써야겠다. 자기도 이 정도 수고는 할 마음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날 데리고 쫄래쫄래 온 거겠지! “제니트 마력 좀 묶어줘!” 가라, 루카스! 오늘은 너로 정했다! ======================================= [165화] 내 말에 옆에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루카스가 입꼬리를 들썩였다. “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마력 셔틀을 시키네.” “넌 쉽게 할 수 있잖아!” 왜냐하면 우주 제일 초천재 미소년 대마법사 루카스 님이니까! 시각을 다투는 일이었기에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다행히 루카스는 흔쾌히 앞으로 나섰다. “할 수 없지. 공주님 부탁이신데.” 다음 순간 그의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콰앙! 화아악! 루카스에게서 흘러나온 새하얀 빛이 격동하던 검은 마력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꽃과 풀잎이 다시금 주위에 나부꼈다. 화아아. 난동을 부리듯 거칠게 휘몰아치던 마력의 파동이 잠잠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직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폭주 직전의 마력을 일시에 잠재운 루카스를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 이제 키메라 데려가시든가.” 반짝이는 마력의 잔해 속에서 루카스는 홀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작 그에게 마력 셔틀을 시킨 나도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피부로 직접 느끼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법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인 탓인지 지금 그가 보인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경지인지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클로드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루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전의 대화를 통해 이미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검은 탑의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하지만 필릭스는 어른 모습이 된 루카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방금 전에 내가 그를 루카스라고 불렀는데도 연결을 못 시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방금 전 그가 보인 강대한 마력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이럴 수가, 저 마력은…….” 수장 할아버지는 입을 쩌억 벌리고 있다가 마침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더듬거렸다. 그리고 루카스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서, 설마 넌 루카스……?!”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요……. 마력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장 할아버지인 만큼 루카스의 정체도 비교적 쉽게 깨달은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이런, 이런 괴물 같은!” 하지만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했다. “예? 마법사 루카스 님이시라고요? 세상에,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리 성장할 수가 있는 겁니까!” 그제야 루카스의 정체를 안 필릭스도 두 눈을 부릅뜨며 놀라워했다. 루카스는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듯 나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나는 코앞까지 가까이 온 그를 보고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나 잘했지?” 그런데 글쎄 이놈이 생글거리면서 나한테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었다. “그, 그래.”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는 것도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건물도 봉쇄했어.” 헉, 웬일로 셀프 서비스까지? 나는 멍하니 루카스가 바라는 대로 말해주었다. “잘했어.” “그럼 좀 더 칭찬해 줘 봐.” 아이구, 우리 루카스 잘했어요! 어쩜 우리 루카스는 마력 봉인도 잘해요! 우쭈쭈쭈! 이, 이런 거라도 해달라는 거냐? 나는 멍청히 루카스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담쓰담 했다. 그러고 나서 혹시나 또 멍멍이 취급을 당했다고 성깔을 부리는 게 아닐까 싶어 잠깐 멈칫했으나 루카스는 그냥 기분이 좋은 것처럼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었다. “필릭스. 가서 알피어스 공작을 알현실로 데려와라.” “예, 폐하.” 우리의 모습을 보고 못마땅한 듯 얼굴을 구기던 클로드가 이내 필릭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고개를 돌린 그는 곧 다시금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겠군.” 나는 클로드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알피어스 공작을 볼 수 있었다. “저 계집은 지하 감옥에 가두겠다. 알피어스 공은 지금 당장 짐을 따라오라.” 설마 루카스가 딱 필요한 사람만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조치를 취해 둔 걸까? 어쨌든 직접 알피어스 공작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필릭스에게는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역시도 다른 사람이 역할을 대신했다. “제가 들겠습니다.” 어느덧 다가온 이제키엘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제니트를 안아 들었기 때문이다. 한순간 그의 굳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제키엘이 먼저 내게서 눈길을 돌렸다. 연회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시야에 번져 들었다. 한바탕 거센 폭풍이 휘몰아친 뒤의 밤공기에는 옅은 꽃향기와 풀 내음이 가득했다.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밤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들지 못할 밤의 시작이기도 했다. 제46.5화 사랑스러운 공주님은 어디에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사절단이 아를란타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황궁 안은 전체적으로 부산스러운 느낌이었다. 어제 연회장 밖에서 있던 소란은 검은 탑에서 마법을 연구하던 중 마력 파장이 밖으로 새어 나와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차례의 묘한 파동 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금세 주위가 잠잠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회가 파할 때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똑똑. 문 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어두운 방 안에 웅크리고 있던 소녀가 움찔했다. 몇 번인가 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대답을 하지도,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달칵. 그러자 이번에는 조용히 문이 열렸다. 밖에서부터 새어 들어온 빛이 침대 위에 앉아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있는 사람을 비췄다. “제니트.” 자그마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분명 아타나시아 공주의 것이었다. 어제 그녀는 클로드의 명대로 제니트를 차마 지하 감옥에 가둘 수 없어 에메랄드궁으로 데려왔다. 그 호의에 감동해 고마움을 표해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제니트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저를 비웃으러 오셨나요……?” 어둠 속에 파묻힌 제니트의 입에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제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던 탓인지, 아니면 황제 클로드의 앞에서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른 탓인지 꽉 막힌 목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아타나시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제니트를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서 제니트의 처우를 다시 생각해 보시기로 하셨어요.” 그 순간 제니트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에메랄드궁에 머물 수는 없으니, 곧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거예요.” 어젯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아타나시아는 오늘 아침 동이 트자마자 클로드를 찾아갔다. 제니트를 에메랄드궁에 둔 것을 안 그는 당연히 진노했다. “그래도 지하 감옥 같은 곳은 아니니 걱정은…….” 고요하게 이어지던 음성이 점차 잦아들었다. 아타나시아의 눈동자가 얕게 가라앉았다. 이런 말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공주님께서 부탁하셨기 때문이겠죠.” 마침내 제니트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얼굴에서 비치는 냉소에 아타나시아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래요, 내가 부탁했어요.” “어째서요?” 어젯밤 있었던 일련의 충격적인 일들을 알려주듯 제니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공주님은 다 알고 계셨던 거죠?” 두 쌍의 보석안이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제니트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고립된 방 안에서 그녀는 몇 번이나 끔찍한 지옥 속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그리고 고개 들어 아타나시아를 마주한 그녀는 지난밤 가슴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의혹이 사실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다 알면서도, 당신은…….” 그러자 뜨거운 용암이 뱃속을 헤집으며 부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저를 기만한 거군요.” 사실 자신의 비난이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타나시아가 설령 진실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를 기만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지금껏 그 사실을 모른 척해 준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사실 사는 동안 의문을 품은 적은 있었다. 그녀가 클로드의 친딸이 맞다면, 왜 이제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어야만 하는 걸까? 그녀의 어머니가 살아생전 클로드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그래서 파혼당한 채 두 번 다시 황궁에 발조차 들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죄인지는 모르나 딸인 그녀조차 외면하게 할 만큼 중차대한 잘못한 걸까? 죽은 제니트의 이모, 로자리아 백작 부인은 그녀를 알피어스 공작저에 맡겨두고 일 년에 한 번씩만 그녀를 보러 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제니트를 볼 때마다 찜찜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로자리아 백작 부인과 알피어스 공작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와서 아나스타시우스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하지만 페넬로페의 일기장과 편지 외에 명확한 증거는 없으니, 일단 폐하의 환심만 사면…….’ ‘반대로 말하면 폐하의 환심 없이는 득 하나 될 것 없는 위험분자라는 의미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맞을 것만 같았다. “저더러 어쩌란 말이에요……?” 그리고 어젯밤 제니트는 이제껏 그녀의 눈앞에서 가려져 있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제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었다잖아요.” 오벨리아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현 황제인 클로드의 평화로운 치세 아래 그 이전까지의 제국이 얼마나 끔찍한 폭정에 물들어 있었는지에 대해 배운다. 전 황제였던 아에붐에 이어 황태자 아나스타시우스는 그 속에서 언제나 악귀처럼 묘사되곤 했다. “제 자매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제니트는 그의 딸이었고,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고아한 소녀는 그녀의 자매가 아니었다. “사실은 제 아버지를 죽인 사람의 딸이었다잖아요.” 감히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을 바라보았다. 감히 꿈꿔서는 안 될 것을 꿈꾸었다. “그 무엇 하나 제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잖아요…….” 소망의 깊이만큼 끝도 없이 거대한 절망감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아무에게라도 떼를 쓰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작 움직이지 않고 있던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면서. “왜 아무도 끝을 내주지 않은 거예요?” 지금만큼은 어제 이제키엘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 역시 너무 힘들어서 이 모든 걸 어떤 식으로도 끝맺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상상하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나는…… 매일매일이 지옥같이 느껴질 정도로 이렇게 지쳐 있었는데…….” 눈을 뜨면 이 지옥이 끝나 있으리라 믿었는데, 결국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일 뿐이었다. 제니트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어난 죄? 헛된 꿈을 꾼 죄? 무지했던 죄? 그것이 이렇게 큰 절망감을 맛 봐야 할 만큼 커다란 죄인 걸까?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나. 설령 목숨을 구한다 하더라도 이대로 유폐되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했잖아요…….” 눈물 섞인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번져 들었다. ‘이거 선물이에요.’ ‘팔에 차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 [166화] 어쩌면 아타나시아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제니트는 그녀와 함께 보았던 불꽃놀이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축제날 아타나시아가 선물해 주었던 저잣거리의 팔찌를 몇 년간이나 보물처럼 간직했다. 지금 그녀의 손목에 감긴 팔찌에 실제로 그런 마법이 걸려 있을 리 없는데도 바보처럼 믿고 싶었다. 아타나시아는 흐느끼는 제니트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울음을 그치지 않는 그녀를 어둑한 얼굴로 바라보며 이윽고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자리를 지키다가, 잠시 후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 * * 에메랄드궁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햇살이 얼굴 위로 내리비췄다. 해가 뜬 위치를 보니 어느덧 정오가 넘은 것 같았다. 제니트는 지난밤 죄인이 아닌 아타나시아 공주의 손님으로서 에메랄드궁에 머물렀다. 지금도 그녀의 옆은 아타나시아 공주의 호위 기사인 필릭스 로베인만이 지키고 있을 뿐, 그녀를 감시하거나 포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일도 그렇고, 아마도 이 또한 아타나시아 공주의 배려일 터다. 어젯밤 진노했던 황제 클로드라면 날이 밝자마자 당장에라도 사형 집행 선고를 내리고도 남을 것만 같았는데. 제니트는 에메랄드궁을 나섰다. 이제부터 갈 곳이 어디인지 옆에 있던 적혈의 기사가 말해주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흘려들었다. 앞으로 가게 될 곳이 어디든 상관없다는 반 체념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눈에 들어온 사람에 제니트의 발길이 멈추어졌다. 아타나시아와 함께 서 있는 것은 이제키엘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나, 두 사람 다 밝은 얼굴은 아니었다. 혹시 자신의 상태를 살피러 온 걸까? 제니트는 멀찍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전부 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차라리 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실은 예전에 이제키엘이 팔을 다쳤을 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이대로 무도회에 참석해 공주님과 이제키엘이 만나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사실 제니트는 그런 생각을 하고 만 스스로가 너무나도 싫었다.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못난 마음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고, 그들의 불행을 바라게 되는 자신이 끔찍했다. 애초에 그녀가 빌었던 소원은 지금보다 좀 더 당당하게 그들의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었는데……. 그래……. 그러니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리는 게 좋겠어. 투욱. 그 순간 제니트의 손목에 걸려 있던 팔찌가 끊어져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화악! 어젯밤 루카스가 묶어두었던 마력이 속박을 풀고 그녀의 밖으로 홍수처럼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제니트는 곧 자신을 발견한 이제키엘이 다급히 뛰기 시작하는 모습을 베일 너머로 시야에 담았다. “제니트!” 아, 처음 보네요. 당신이 나를 향해 그렇게 간절히 달려오는 모습. 이제 이걸로 됐어요, 나는. 아……. 이런 못난 얼굴을 당신에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눈앞에 있는 베일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녀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도 방울방울 허공에 흩날렸다. 제니트의 마력이 이번에 파괴하고자 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에 어제처럼 폭발적인 힘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제키엘이 달려갔으나 손이 닿기에는 그들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제니트는 눈물 번진 시야에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담았다. 파아앗! 하지만 그녀가 눈을 감은 순간,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 느낌이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꼭 그녀가 알지 못하는 어머니의 품 같았다. 믿을 수 없는 평온함 속에서 제니트는 서서히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제47장 아름다운 동화 속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파아앗! 제니트에게 위험 기류를 느끼자마자 나는 내 안에 있는 마력을 최대치로 뽑아냈다. 어젯밤 루카스가 그랬던 것처럼, 내 손에서 뻗어져 나간 마력이 검은 폭풍을 감싸 안았다. 물론 효과는 동일하지 않아서 나는 루카스보다 약간 더 시간을 지체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나는 이윽고 완전히 사그라지는 제니트의 마력을 느끼며 안도했다. 아, 성공이다. 혹시 몰라서 어제 밤 새워 루카스한테 보충 수업 듣기를 잘했네. 루카스는 만약 자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제니트의 마력이 다시 폭주하려고 하면 봉인하라고 나한테 꼼꼼히 지침을 내리고 갔다. 폭주 직전에 마력을 묶어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방법이라 조금만 틈이 생겨도 쉽게 위험해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훌륭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루카스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들였다. 그래서인지 단기 속성치고 결과는 매우 괜찮았다. “제니트!” 쓰러진 제니트에게 달려간 이제키엘이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그의 얼굴에 깔리는 안도 어린 표정을 보고 덩달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키엘은 클로드의 허락을 받고 제니트의 상태를 살피러 온 것이었는데 갑자기 마력 폭주 비슷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클로드는 지금 이 일을 알면 눈에 쌍심지를 켜겠지만 나는 제니트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크흠, 일단 마력을 묶어두는 일도 클로드의 걱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루카스도 내가 이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나도 몇 년 전에 비하면 제법 강해졌나 보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앗! 그런데 처리 과정이 좀 요란했던 걸까? 굉음을 듣고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아직 황성을 벗어나지 않은 아를란타의 사절단도, 느닷없는 마력의 파동을 느끼고 혼비백산한 검은 탑의 마법사들도 있었다. 나는 쯧 혀를 찬 뒤 손을 휘둘러서 이제키엘과 제니트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일단 지금 저 둘을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면 곤란하니까 말이지. 그다음 나는 자리에 남아 있던 제니트의 검은 마력을 정화했다. 수장 할아버지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강력한 마력의 잔해는 보통 사람들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헐레벌떡 달려온 사람들은 내 주위에서 반짝거리며 내려앉는 마력의 조각들을 저마다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 아름답다…….” “세상에, 지금 이곳이 천국인 걸까요?” “요정님…….” 쿨럭……. 반짝이는 마력이 보기에는 예쁘겠지만 상황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답니다. 그리고 마지막 요정님 소리는 분명 카벨 에른스트일 거야! “헉. 공주님,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탑의 마법사들이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해요. 잠시 소동이 있었는데 지금은 해결…….” 콰앙! 바로 그때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졌다. 아니, 처음에는 운석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다. 한차례 흙먼지가 주위에 자욱하게 일어나더니, 곧 그 사이로 웬 걸레짝 같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 검은 탑의 마법사님?!” 헉! 나는 넝마가 되어 바닥을 나뒹구는 사람을 보고 처음에 시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 만난 적이 있던 가짜 탑의 마법사 카락스였다. 드디어 루카스가 왔구나! 그런데 뭐 이리 과격하게 끌고 왔어? “뭐?” “뭐?!” “검은 탑의 마법사?!” 아를란타 사절단이 검은 탑의 마법사라는 소리에 동요했다. 처음 오벨리아에 왔을 때에도 검은 탑의 마법사가 재림했다는 소식에 관심을 표하던 그들이었으니 지금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당연했다. “아, 아니, 그런데 왜 이리 초주검이 되어 나타나셔서…….” “귀찮게 왜 토끼고 지랄이야.” “토끼고 지랄을…… 응?” 문득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들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곧 누군가가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그 직후 바닥을 나뒹굴던 반 시체를 그대로 인정사정없이 걷어찼다. 퍼억! “으윽!” “사람이 좋게 말할 때 단번에 쳐들으면 좋잖아, 응?” 퍽! “내가 요즘 성깔을 많이 죽이고 있는 건 맞는데, 아무나 다 봐주는 건 아니거든?” “윽, 잠깐, 루카…….” 퍼억! “더군다나 네 새끼는 괘씸죄까지 누적이야.” 가짜 탑의 마법사씨는 루카스에게 완전히 탈탈 털렸다. 나는 다 죽어가는 녹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애잔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저렇게 맞는 걸 보니 조금 불쌍하지만……. 그래도 제니트의 마력을 이렇게 위험하게 만든 게 저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니 동정심은 안 생기는구나. “루카스, 일단 적당히 해.” 그래도 아직 쓸 데가 있으니 이쯤 해서 말려야겠다. 루카스가 내 말에 카락스 씨를 때리던 것을 멈추었다. “루카스?” “루카스?!” “루카스라고?!” 앗, 그런데 탑의 마법사들은 루카스인지 몰랐던 모양이다. 하기야 하루아침에 갑자기 어른이 되어 있으니 그럴 만도 한가. “루카스, 이 자식! 검은 탑의 마법사님께 이 무슨 불손한!” 맑은 날의 매타작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들이 이윽고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그들의 우상인 검은 탑의 마법사가 루카스 따위(?)에게 먼지 나게 밟히는 것을 보았으니 당연했다. “대가리가 장식인가?” “뭐, 뭐?!” “얘가 검은 탑의 마법사면 나한테 이렇게 먼지 나게 처맞고 있겠어?” 루카스의 심드렁한 말에 탑의 마법사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카스와 그의 발밑에 있는 반 시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만 진정하시지요.” “수장님?!” 그때, 수장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아, 클로드랑 흰둥이 아저씨하고 얼추 얘기가 다 끝났나 보구나. 나는 아침까지만 해도 거의 다 죽어가던 흰둥이 아저씨의 얼굴을 떠올리고 내심 혀를 찼다. “저자는 저희가 데려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공손한 존댓말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수장 할아버지도 루카스의 정체를 이제 아는 모양이었다. “검은 탑의 마법사님께 수고를 끼쳐 송구합니다.” 허억……! 바로 그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숨을 들이켰다. “거, 거, 검은 탑의 마법사라뇨?” “누, 누,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 “서, 설마?” 특히 그동안 루카스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마법사들은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심하게 더듬거리며 믿을 수 없어 했다. “수, 수장님, 노망이라도 나셨습니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갑자기 저놈이 나이를 먹은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루카스를…….” “저, 저놈이라니! 이 머저리들이! 말조심하지 못해?” 수장 할아버지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몇몇 마법사에게는 닿지 않았다. “맞아! 말도 안 돼!” “어떻게 루카스가 검은 탑의 마법사님일 수가……!” 루카스는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는 듯 썩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앗, 그런데 잠깐! 저 얼굴을 보니 꼭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아! “뭐 이런 거라도 보여줘야 하려나?” 내 예상이 맞았다. 우르릉! 별안간 밝은 햇볕이 내리쪼이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사위가 어둑해지고, 번쩍이는 천둥번개가 곳곳에서 작렬했다. “메테오……?” 그 모습을 모두가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메테오는 까마득한 오래전, 고대의 오벨리아를 폐허로 만든 원인으로 알려진 마법이었다. 그런데 메테오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했다. ======================================= [167화] 운석은 보이지도 않고, 벼락을 동반한 검은 하늘이 불길한 형상을 그리며 회오리치기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마찬가지로 불길함을 감지한 새들이 떼 지어 하늘을 휘돌았다. 고오오오! 곧 천지가 개벽하듯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자 탑의 마법사들이 경악해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설마……!” “오, 신이여……!”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압도적인 광경에 아연실색해 있었다. 사절단도 사절단이었지만, 그보다는 마법사들의 충격이 더욱 커 보였다. 그중에서도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상이 무엇인지 깨달은 이들은 공포와 경외심에 짓눌려 온몸을 파들거리며 떨고 있기까지 했다. “맙소사, ‘신의 징벌’이라니……!” 신의 징벌! 나도 고서에서나 본 적이 있던 궁극의 마법이었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마법이냐 하면, 저 마법 한 방이면 천지를 새로 창조한다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였다. 메테오가 오벨리아를 날려버린 마법이라 한다면, 신의 징벌은 이 대륙 전체를 폐허로 만들 수도 있는 재앙 같은 마법이었다. 물론 나도 공포를 자극하는 눈앞의 광경에 압도당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혼자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루카스의 모습을 보자 무서움이 싹 가셨다. 이놈아, 지금이 ‘나 멋있지?’라는 듯이 날 쳐다보고 있을 때냐! “루카스, 이제 그만해!” 검은 탑의 마법사의 위용은 이제 충분히 보여준 것 같으니까 고만 좀 해라! 역시 내가 말하자 루카스는 쉽게 신의 징벌을 거두어냈다. 저런 거대한 마법을 발현시키는 것도 순식간이었는데 심지어 이미 진행 중이던 마법을 파훼시키는 것도 이렇게 금방이라니. 역시 괴물 같은 놈이었다. “맙소사,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오오, 신이시여, 어째서…….”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넋이 나가 있었다. 루카스는 그들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쫄기는.” 벼, 별거 아니라니! 신의 징벌이 왜 별게 아니야? 대륙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는 마법인데! “야야, 기절한 척하지 마.” 루카스가 다시 한번 툭 걷어차자 그때까지 그의 발밑에 축 늘어져 있던 사람이 움찔거렸다. “할아범, 이 새끼는 내가 데려갈 테니까 영감은 천천히 오셔.” 루카스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넋이 나가 있는 수장 할아버지한테 말한 뒤, 내 손을 붙잡고 순간 이동을 했다. * * * “야, 너 저 키메라 마력 지금 당장 처먹어.” 순간 이동을 해서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루카스가 다짜고짜 말했다. 갑작스러운 순간 이동의 여파인지 카락스는 소금에 절은 시금치 같은 꼴이 되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아무리 이번 일의 원흉이라고 해도 그렇지 가짜 탑의 마법사 씨 취급이 너무나 하찮은 것 아니니……. “해결책을 들고 온다더니 시체를 가지고 왔군.” 왕좌에 앉아 있던 클로드가 우리를 향해 싸늘히 말했다. 예상한 대로 그는 기분이 매우 저조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기분이 나쁜 이유가 내 부탁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카락스 씨가 마그리타 양의 마력을 안정시킬 거예요.” 루카스가 말해준 바에 의하면, 제니트에게 과다한 마력을 불어넣어 폭주에 이르게 한 것은 카락스 씨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다시 마력을 가져가면 지금처럼 일시적인 방법이 아니라 폭주의 위험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 했다. 클로드가 계속 제니트를 죽이려고 해서 솔직히 지금까지 그를 말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흰둥이 아저씨도 몇 번씩이나 생사의 기로에 선 탓인지 하룻밤 사이 얼굴이 완전히 사색이 되어 다 죽어가고 있었다. 제니트는 여전히 이제키엘의 품에 안겨 기절한 상태였다. 그때, 바닥에서 다 죽어가고 있던 카락스가 입을 열었다. “쿨럭……. 지금 나보고 죽으라고?” “너 어차피 금방 죽잖아.” 루카스는 참으로 몰인정하게도 말했다. “그럼 죽기 전에 네가 싼 똥은 치우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어, 그런데 제니트의 마력을 다시 회수해가면 진짜 저 사람이 죽는 건가? 아니면 그냥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의미인가? 후, 후자겠지? 카락스 씨가 뭐라고 더 웅얼거렸지만 방금 전까지 루카스에게 워낙에 많이 얻어맞은 탓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루카스는 그를 치료해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말하기 편해질 정도로만 그에게 치유 마법을 사용해 주었다. “난…….” 그제야 그가 하는 말이 또렷이 귀에 들렸다. “루카스 네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어디서 기어 나온 자신감이야?” “공주 옆에 붙어 있던 벌레들을 내가 치워줬잖아.” 뭐, 뭐? 느닷없이 내 얘기가 왜 나오는 거야? 게다가 벌레라니? 누구? 설마 제니트? 그런데 왜 복수형이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원래대로라면 이번 일로 끝장이 나야 할 사람에는 흰둥이 아저씨와 이제키엘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그래서 루카스가 평소에 흰둥이 소굴이다 뭐다 하면서 거슬려 하니까 눈앞에서 대신 치워주려고 한 거라고?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얀데레? 얀데레인가? 나는 질색한 얼굴로 헛소리를 늘어놓는 카락스를 바라보았다. “답 없는 새끼네, 이거.” 루카스도 더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쯧 혀를 찼다. “루카스, 친구 좀 가려 사귀어.” “친구는 누가 친구야?” 내 말에 루카스는 진심으로 짜증 난 얼굴을 했다. “야, 우리 공주님이 그런 걸 원하지 않으신다잖아.” 루카스가 다시금 카락스를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솔직히 난 그 키메라나 쟤들이나, 이대로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지만 말이야.” 으앙, 잠깐만. 지금 그 사람들이 바로 저쪽에 있는데 너무 무시하고 말하는 거 아니야? “우리 공주님이 평화로운 방법을 원하신단다. 평화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 응?” 그 말에 카락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입가로 흘러내린 피를 소매로 닦았다. 그런데 손이 왜 저렇게 새까맣지? “너 루카스 맞아?” “나처럼 위대한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 것 같냐?” “꽤나 재미없어졌네, 너도. 실망이야.” “실망이고 나발이고. 네 마력이나 후딱 쳐 먹고 꺼져.” 루카스의 쌀쌀맞은 말에 카락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정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쉽게 말을 들어줄 눈치가 아닌데……. “더 버텨도 상관없다. 저 계집이야 그냥 죽이면 그만이니.” 클로드도 제니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인 듯 냉소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내 눈빛을 받은 클로드가 일순간 움찔거렸다. 곧 그가 잠시 갈등 어린 얼굴을 보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나 아타나시아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니 지금 당장 저 계집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라.” 방금 전과 말을 바꾸어 카락스를 재촉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나한테 원망받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아무리 내 부탁이라고 하지만 마음을 바꾸어 제니트를 살려주기로 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루카스가 한 차례 낮게 혀를 차더니 큰 맘 먹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난 진짜 너무 마음이 약하고 착해서 문제야.” 방금 뭔 헛소리가 내 귀를 지나갔니……? “그 인생도 참 존나 갑갑하고 불쌍하니까 특별히 네 일생일대의 소원을 내가 들어주마.” 앗, 뭔지는 모르겠지만 루카스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든 것 같다. 일명 등가교환이라는 걸까? “다음에 만나면 아는 척해 줄게.” 푸읍! 뭐, 뭐야? 그게 카락스의 일생일대의 소원씩이나 된다는 거야? 아니, 아무리 저 사람이 널 좋아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해도 그렇지, 그게 말이 되냐? 루카스 쟤도 참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 “……다음에 만나도 날 아는 척해 줄 거라고?” 헉, 하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카락스의 검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모습을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으, 으음. 저 사람은 아마 루카스를 굉장히 좋아하는가 보다……. 루카스는 카락스를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만 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단순한 관계도 아닌 것 같고. 혹시 카락스 씨도 생긴 것만 젊지 나이는 엄청 많은 걸까? “짐이 언제까지 이 촌극을 봐줘야 하지?” 클로드는 그들의 아련한 모습에 다시금 심기가 불편해진 기색이었다. “결론이 났으면 서둘러 저 계집의 일을 처리하도록. 알피어스 공은 금일 짐과 나눈 대화를 평생 가슴에 새겨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싸늘히 읊조린 클로드가 더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에 곧장 알피어스 공작과 이제키엘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일단 클로드는 아나스타시우스의 딸을 숨겨두고 있던 알피어스 공작가에게 관용을 베풀기로 한 것 같았다. 솔직히 이제까지 알피어스 공작이 제니트를 데리고 있던 것만으로도 반역죄를 물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흰둥이 아저씨가 간만 보듯이 깔짝거리기만 할 뿐 제니트를 데리고 본격적인 꿍꿍이속을 드러내거나 나한테 위협을 가하거나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흰둥이 아저씨는 제니트가 아나스타시우스의 딸인 줄 꿈에도 몰랐으며,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곧바로 클로드에게 사실을 고했을 거라고 열변을 토했다. 공주라 생각해 제니트를 데리고 있던 것도 모두 클로드를 향한 충심 때문이었다고 어찌나 말을 청산유수로 잘하던지……. 그래도 만약 어젯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보석안을 드러낸 제니트를 보았다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제니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이 전부였기 때문에 진실을 묻기도 쉬웠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제니트의 존재를 공표하지 않는 것이 클로드에게도 좋았다. 일단 클로드는 선황과 황태자 아나스타시우스를 죽이고 황좌에 앉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제니트가 정식 황위 계승자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의 죽음에는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었지만, 제니트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렇기에 제니트를 죽여 화근을 없애는 것이 사실은 가장 깔끔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알피어스 공작은 제니트를 살려달라고 클로드에게 엎드려 부탁했다. 그동안 기른 정이 있는 것인지, 제니트에 대해 만약 지금까지처럼 눈감아 준다면 이대로 두 번 다시는 그의 눈에 띄는 일 없이 살게 하겠노라고 몇 번이나 간곡히 애원했다. 나는 사실 그것이 퍽 의외였다. 알피어스 공작이라면 언제든 제 살 길을 마련하기 위해 제니트를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되었든, 그래서 내가 클로드에게 부탁하기도 한결 쉬워졌다. 간밤에 오갔던 그들의 대화를 물론 내가 다 듣지는 못했지만, 내 생각에는 흰둥이 아저씨와 클로드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것 같았다. “폐하의 자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짐이 아니라 아타나시아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클로드는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아빠, 고마워요.” 나도 곧장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설령 알피어스 공작과 오간 것이 있었다 해도 내 부탁이 없었다면 클로드가 이런 번거로운 수고를 했을 리 없다는 걸 알았다. “이번 일은 내 실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클로드는 이해할 수 없게도 내가 아닌 스스로를 책하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나나 에메랄드궁의 사람들만으로는 네 안의 빈 부분을 완전히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168화] “너의 적적함을 달래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생각보다도 클로드가 훨씬 더 딸인 나를 세심히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종종걸음으로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클로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 네가 마음에 들어 하던 어린 마법사를 옆에 붙여두었고, 그 후 네 또래의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지금까지 내 옆에 있게 된 것이 결국 루카스와 제니트라니. 한 명은 알고 보니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검은 탑의 마법사고, 한 명은 클로드와 악연이 있던 사람들의 딸이었다. 그 조합이 참으로 얄궂기도 했다. 클로드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얼굴을 구겼다. “데뷔당트 이후부터 너는 그 계집의 이야기를 내 앞에서 곧잘 하더군.” 내가 그랬던가? 딱히 그런 기억은 없는데 클로드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아마도 데뷔당트 이후 제니트의 등장에 불안감을 느껴 클로드를 떠보려 이따금씩 그녀의 이야기를 꺼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네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아이라서 내버려 두었다.” 아, 하지만 설마 그걸 보고 내가 제니트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을 줄이야. 그는 자신이 제니트를 그대로 내버려 둬 일을 이 지경으로 키웠다는 생각에 약간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내 어리석음이 지금 네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한 셈이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의 말을 망설임 없이 부정했다. “아빠가 저를 얼마나 위해 주시는지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내가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하자 클로드가 내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아빠가 저한테 주신 것 중에 나쁜 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방금 말씀하신 것도 마찬가지예요. 전 지금까지 넘치도록 즐겁고 행복했는걸요.” 나는 마주한 눈을 직시하며 그의 단단한 손을 더욱 꽉 힘주어 잡았다. “이렇게 된 건 절대 아빠 탓이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클로드는 내가 말하는 동안 가만히 서서 귓가로 흘러드는 말을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듯 나를 응시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클로드가 눈을 길게 감았다 뜬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계집을 살려두는 것으로 네 마음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말에서 클로드의 진심이 너무나도 또렷이 전해져 왔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정말 감사해요, 아빠.” * * * 제니트는 그 후 한동안이나 깨어나지 않았다. 카락스는 루카스가 다음에 만날 때에도 자신을 아는 척해 주겠다는 말이 어지간히 만족스러웠는지, 제니트의 보석안까지 없애주겠다고 말했다. 으음, 이렇게 말하면 갑자기 장르가 고어로 변하는 것 같아서 무섭게 들리는데……. 그 말인즉, 보석안을 만들어내는 마력의 파장을 끊어서 보통의 눈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보석안은 황족 고유의 마력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카락스는 제니트의 마력에 직접 관여하기 쉬워서 그런 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일단 제니트가 깨어난 뒤, 그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마력을 안정시키는 것이야 그녀의 생사와 연관된 사항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보석안의 유무는 다른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제니트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부모와 이어진 유일한 연결고리를 없애고 싶지는 않을지도 모르니까. “공주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제니트가 깨어날 때까지 황궁에 두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이제키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제니트가 두 번째 마력 폭주를 일으키려 했던 날 만났을 때처럼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탓이 아니에요.” “공주님께 진실을 숨기고 감히 기만한 죄를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나 이제키엘은 내게 자신을 벌해 달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말했다. “저를 거짓말쟁이라 욕하셔도 이해합니다.” “이제키엘.”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내게 했던 말과 내게 보인 모습들이 언제나 진실 되어 있었음을 알아요.” 내게는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었다. “세상에는 그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는 거죠. 이 또한 그런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거짓말을 한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신을 거짓말쟁이라고 한다면, 나도 같은 비난을 들어야 마땅하니까.” 어찌 보면 제니트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데에는 나 또한 작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한 사람도,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앞장서 이 이야기의 끝을 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의 위태로운 평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조금씩 망가져 가던 제니트의 마음을 앞으로도 모른 척했을 것이었다. “어렸을 때 당신이 말했죠.”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내줄 수도 없었고, 내 손으로 그녀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편으로 나는 제니트의 불행을 가늠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녀가 불행에 먹혀가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결국 내 행복이 더 중했기 때문이니까. 그런 나를 제니트가 원망하는 것도 당연했다. “제니트는 당신이 지켜줘야 할 아이라고.” 어쩌면 내가 3년 전 이제키엘을 밀어낸 것은, 그런 내 알량한 죄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제키엘 역시 나와 비슷한 마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가세요.” 이것이 아이들의 동화라면 모두가 아름다운 결말을 맞을 수 있을 텐데. 누구 한 사람 불행하지 않고, 누구 한 사람 결핍된 부분 없이, 그렇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야기의 끝을 맞이할 수 있을 텐데. “그때도 지금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더 이상 책 속의 주인공이 아니게 된 이제키엘은 내 말에 어렴풋이 미소 지었다. “예. 공주님은 강한 분이시니까요.”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미소 지어주었다. 그날 저녁, 제니트가 길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어머니를 닮은 녹색 눈동자를 햇살 아래에서 빛내며 황성을 떠났다. 그렇게 길었던 이야기의 막이 내려갔다. 제48장 18살 생일, 엔딩은 없는 추수제가 무사히 끝나고 날씨는 약간 선선해졌다. 그래 봤자 어차피 오벨리아의 기후는 봄 아니면 여름이었지만 말이다. 평소와 같은 나날을 보내면서도 나는 가끔씩 제니트와 이제키엘이 생각났다. 알피어스는 지난날의 사건 이후로 극히 잠잠해졌다. 알피어스 공작이 이따금씩 클로드를 만나러 황궁에 걸음하곤 했지만 예전처럼 내게 치근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도 그에게 굳이 두 사람의 안부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연히 마주쳐도 그냥 간략한 인사만 나눈 뒤 헤어지고는 했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했어요.” 여전히 가끔 만나곤 하는 영애들이 어느 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때에는 마그리타 양만 보면,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피오나 양도 그랬어요? 저도요. 전 마그리타 양과 친해지고 싶어서 별장에 같이 놀러가자고 조르기도 하고 그랬다니까요.” “자르비에 공자도 얼마나 웃겼는데요. 고독한 회색 늑대는 무슨, 마그리타 양한테 어찌나 절절매던지.” 그들은 제니트에게 급격한 호감을 느꼈던 일을 뒤늦게 의아하게 여기는 듯했다. 카락스가 제니트의 마력을 안정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던 영향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알고 보니 착한 영애이기는 했어요.” “그건 그래요.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내숭인 줄 알았는데.” “어디로 요양 갔는지 알면 병문안이라도 갈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제니트는 대외적으로 건강이 나빠져 요양을 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원래도 병약해서 데뷔당트 후에도 외출을 삼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보고 싶을 것 같네요.” 잠시 후 한 영애가 중얼거리자 다른 이들도 거기에 동조했다. 나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 내 앞으로 편지가 왔다. 그것은 이제키엘이 보낸 것으로, 그들의 간단한 안부가 적혀 있었다. 그래도 그들이 나름대로 괜찮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이제키엘도 제니트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녹스 님, 맘마 드실 시간이에요.” “왈!” ‘맘마’라는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녹스가 까만 꼬리를 흔들며 한나에게 달려갔다. 쓰읍, 이럴 때 보면 클로드나 루카스가 말하는 것처럼 진짜 강아지 같단 말이야? 한나는 녹스를 거의 전담해서 돌보고 있었는데, 말은 안 해도 그녀 역시 까망이의 빈자리에 많이 쓸쓸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한나, 밥을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세스! 녹스 님은 성장기라 많이 먹어야 한다고!” 으, 으음. 그런데 내가 봐도 요즘 녹스 뱃살이 늘어난 것 같기는 하다. 너무 과식해도 건강에 안 좋으니 앞으로는 신경 좀 쓰는 게 좋을지도. “난 탑에 좀 다녀올게.” “앗,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공주님.” 여느 때처럼 투닥거리는 한나와 세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나는 그들을 뒤로한 채로 에메랄드궁을 빠져나왔다. * * * “루, 루, 루카스 님. 혹시 자리가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아시다시피 탑이 많이 누추해서…….” “그러니까 내가 이딴 허접한 의자 진작 갈아치우라고 했잖아.” “죄, 죄송……. 아둔한 제가 위대하신 검은 탑의 마법사님의 깊은 뜻을 미처 모르고!”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지? 딱 보면 척 느낌이 와야 정상인데?” “루, 루카스 님! 그보다 오늘 날씨가 좀 덥지 않으신지요? 저는 이상하게 계속 식은땀이 나서…….” “늙어서 그래.” 울컥! “나, 나이로 치면 검은 탑의 마법사님이 훨씬…….” “난 동안이라 괜찮아.” 또 울컥! 방금 전의 평화가 그립구나……. 나는 눈앞의 광경을 애잔하게 보면서 생각했다. 쯧쯧, 얼마나 루카스에게 오감을 다 집중하고 있으면 내가 온 줄도 모르는 걸까? “마법사님들은 왜 또 괴롭히고 있어?” “헉, 공주님!” 내가 입을 열자 그제야 그들은 나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앗, 그런데 너무 격하게 기뻐해 준다. 눈물까지 그렁그렁하잖아? 으앙, 루카스한테 얼마나 시달렸으면!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마법사들과 대조되게도 혼자만 여유자적한 모습으로 시건방지게 앉아 있는 루카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내가 얘네들을 언제 괴롭혔다고 그래?” “요즘 매일 출근해서 그러고 있잖아?”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따박따박 탑에 눈도장을 찍고 다녔다고! 다 마법사님들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런데 루카스는 내 말에 반성하는 기미도 없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스윽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이 얘한테 그렇게 말했어? 내가 괴롭힌다고?” “아, 아닙니다!” “서얼마요!” 그런데 그를 마주한 마법사들의 얼굴이 대번에 사색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부정했다. ======================================= [169화] 아, 아니, 루카스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기에 저래? 내 쪽에서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 머리를 격렬하게 도리도리 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보자 왠지 안 봐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루카스가 그것 보라는 듯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 친목도모야.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 그렇게 해맑게 웃어도 안 속아! 하지만 루카스가 다시금 옆으로 스윽 시선을 움직이자 곧 마법사들이 열화와 같은 반응으로 그의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저희는 루카스 님의 발닦개…… 가 아니라 소중한 동료!” “그렇습니다! 저희는 루카스 님과 동고동락하며 피땀 눈물을 바친 동료입니다!” 도, 동료인데 왜 피땀 눈물을 바친다지요? 게다가 지금 그 말하면서 단체로 울먹이고 있잖아! “공주님이 우리 사이를 계속 오해하네. 사이좋게 마법 공부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믿으려나.” 그런데 루카스가 지나가듯 던진 말에 마법사들이 떡밥을 문 물고기들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손을 번쩍 쳐들었다. “헉! 마법 공부 말씀이십니까? 그럼 제가 제일 먼저!” “아니야, 저야말로 검은 탑의 마법사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마법이 999,999개 있습니다!” “그동안 피땀 눈물을 쥐어짜며 루카스 님께 제일 많이 헌신한 건 바로 이 몸! 저를 뽑아 주신다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와, 꼭 선거 유세 장면 같네. 루카스가 마법 얘기를 꺼내자마자 단체로 달려들어서 저렇게 열렬히 반응하는 걸 보니 역시 뼛속까지 마법사는 마법사구나 싶었다. 하기야 저럴 만도 한가. 진짜 검은 탑의 마법사에게 마법을 직접 사사할 수 있는 경험이란 억만금을 주고서도 얻을 수 없는 엄청나게 귀중한 기회였으니까 말이야. 으음, 그래도 그런 거 평소에는 되게 귀찮아하면서 루카스도 요즘은 가끔 마법사들이 물어보는 것에도 곧잘 대답해 주는 것 같고……. 게다가 탑에 올 때마다 항상 청소년 버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나름대로 아직 그에게 적응하지 못한 마법사들을 배려해 주는 것 같기도……. “‘루카스 님은 세계 최강의 미소년천재 마법사’라고 제일 빨리 10번 외치는 사람한테 선착순 한 자리 줄까?” ……는 무슨! 네가 무슨 사이비 종교 교주냐?! “우오오! 루카스 님은 세계 최강의 미소년 천재 마법사!” 하지만 마법사들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듯 너도나도 앞다투어 루카스의 찬양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기막힌 광경에 잠시 어이없어 하다가 곧 혀를 쯧쯧 차며 탑을 빠져나왔다. * * * “그놈하고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라.” 그날 저녁 클로드가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그놈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루카스였다. “그렇게 속이 시꺼먼 놈하고는 거리를 두는 게 좋다.” “그 속이 시꺼먼 놈을 공주님께 붙여주신 건 바로 폐하가 아니신지요?” “필릭스, 내가 언제 네놈더러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했지?” 끄잉. 필릭스는 스산한 클로드의 눈빛에 떠밀려 방에서 퇴장당했다. 으아! 필릭스, 그러게 왜 아빠 앞에서 쓸데없이 그런 진실을 말하고 그래!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음, 그래도 생각보다 차, 착하니까요.” 커헙,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나, 난 거짓말을 한 게 아닌데. 그런데 루카스를 착하다고 말하려니 왜 이렇게 양심이 찔리는 거죠? 루카스에게 시달려서 오늘도 핼쑥해져 있던 수장 할아버지와 마법사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나한테 달려올 것만 같은 이 기분이란……. “그놈이 착하다면 세상에는 나쁜 놈이 하나 없겠군.” 클로드가 별 소리를 다 들어보겠다는 듯 대번에 코웃음 쳤다. 으악, 루카스의 성격이 그새 다 까발려져서 통하지 않는구나! 그래도 진짜 다들 생각하는 것보다는 착한데. “아, 아니. 루카스가 안 그런 것 같아도 나름 정도 많고 제 말도 잘 듣고 그런데…….” 그런데 내가 왜 그놈을 두둔하고 있는 거지……? 나는 루카스의 변호를 하다 말고 뭔가 이상해져서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 문득 클로드가 무섭게 얼굴을 굳힌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흠칫하고 말았다. “그놈이 네게 사술을 건 것이 분명하다.” 네? 사술이요? “어쩐지 네가 내 말에 그렇게 앞장서 놈의 편을 들기 시작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늘.” 나는 분노 어린 클로드의 말에 잠깐 얼이 빠져 있다가 곧 그가 이를 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내 이 간교한 놈을 당장!” “으억, 아빠!” 그 후 당장에라도 루카스를 박살 내러 갈 것만 같은 클로드를 막으려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 그런데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기는 거지? 아무리 클로드가 강하다 해도 애초에 루카스는 인간 범주에서 벗어난 놈인데, 당연히 클로드가 밀리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클로드를 더욱 열성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어헝, 내 인생. * * * “공주님,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셨나요?” 크흑, 오늘도 아주 스펙타클한 하루를 보냈어요. 나는 내 머리를 빗어주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잠시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릴리가 있어서 나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아! “릴리는 내 천사님이야.” “공주님을 수호하는 천사라니 영광이네요.” 거울에 비친 릴리의 웃는 얼굴에 내 마음도 노곤노곤 말랑말랑해졌다. 크으, 치유된다. “내일은 더 즐거운 하루가 될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아까 전 클로드와 헤어질 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전부 말해도 되니까 오늘밤 미리 생각해 두라고 했었지. 기억을 되짚자 픽 웃음이 나왔다. “공주님께서 벌써 18살이시라니.” 머리를 스치는 릴리의 손길이 조금 느려졌다. 그녀는 감회가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장난스럽게 인사하며 말했다. “18살에도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요.” 릴리도 내 인사를 받아줘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나란히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내 눈을 마주한 뒤 키득거리며 웃었다. 잠시 후, 릴리는 내 잠자리를 봐준 뒤 방에서 나갔다. 하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거리다가 이내 달빛이 환히 비치고 있는 발코니로 나왔다. “아, 밝다.” 오늘은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어쩐지 불을 껐는데도 다른 때보다 방이 밝다 했더니만. 와, 그나저나 제가 이제 18살이라는 게 진짜입니까? 아까 릴리도 감회가 새로운 얼굴이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의 아타나시아는 18살 생일날 클로드에게 슥삭! 당해서 요단강을 건넜었잖아. 그래서 처음에 내 꿈은 어떻게든 그 최후의 날을 무사히 넘겨 가늘게 길고 사는 거였는데. 그런데 내가 진짜 이렇게 멀쩡히 18살이 되다니, 왠지 믿기지가 않는다. 갑자기 이제껏 살았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보니 새삼 내 인생…… 참 별의별 일이 많았구나. 그래도 모두가 있어서 행복한 17년이었어. “여어, 공주님.” 그렇게 한참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머리 위에서 시건방진 목소리가 울려왔다. 아, 또 너냐? 하여간 내가 진지해질 틈을 안 주는 녀석 같으니라고. “나이 먹는 게 억울해서 잠이 안 오나 보지?” “나이 한 살 더 먹어도 난 파릇파릇해서 안 억울하거든.” 물론 넌 그런 거 모르겠지. 수백 년이나 묵은 퀴퀴한 마법사니까! 흥. “벌써 너랑 만난 지 10년이 지났네.” 그런데 오늘은 루카스도 내 기분에 동참해 줄 모양인지 내 옆으로 다가와 웬일로 저런 평범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게. 벌써 10년이네.” 그러고 보니 루카스하고도 참 징 하게 붙어 있었구나.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너 완전 비호감이었는데.” “뭐? 내가 뭘 어쨌다고? 난 그때에도 완전 친절하고 착한 마법사였는데?” 넌 찔리지도 않니……? 그런 무구한 표정 지어도 안 속는다니까! “세월 참 빨리 간다.” 나는 양심 없게도 억울한 표정을 짓는 루카스를 무시한 채 달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17년 살아놓고 세상 다 산 할망구처럼 말하기는.”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내 정신연령은 그것보다 훨씬 많거든.” “그래 봤자 어려.” 루카스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음, 하긴. 너랑 비교하면 아무리 내가 인생 2회 차라고 해도 어리긴 어리지. “그래도 너랑 있어서 재미있었어.” 오늘이 17살의 마지막 밤이라 그런지 루카스에게 다른 때라면 쉽게 하지 못했을 말도 해줄 수 있었다. 이 녀석 때문에 심통이 나고 속이 터질 것 같았던 날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함께 있는 동안 줄곧 지루할 새조차 없이 나는 즐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루카스를 향해 그렇게 말하며 웃어주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옅게 흩날렸다. 루카스는 내 웃는 얼굴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내 입술에 봄바람보다 더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나는 지금 막 일어난 일을 미처 인식하지 못해 여전히 가까워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지척까지 가까워진 붉은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담겼다. 잠시 후, 나는 방금 전 루카스의 입술과 내 입술이 맞닿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지금 나한테 뭐…….” 놀란 내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다시 한번 방금 전과 동일한 감촉이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설마 그가 또 이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굳어 숨을 멈추었다. 루카스는 체감상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 나한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런 그의 얼굴이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하기 짝이 없어서, 나는 처음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퍼뜩 정신이 들자마자 머릿속이 공황 상태가 되어버렸다. “너, 너 이게…….” 이건 어디를 봐도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었다. 처음 한 번이야 어쩌다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아니, 물론 그것도 그냥 그렇게 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하여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제 무슨 짓이야?!” 나는 한껏 당황해서 따져 물었다. 지금, 지금 얘가 나한테 뭘 한 거야? 지금 내가 얘한테 뭘 당한 거야?! 그런데 루카스는 내가 당황하든 말든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나한테 말했다. “아, 미안. 네가 너무 예뻐 보여서.” 어버버.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너, 넌 예쁘면 아무한테나 이래?”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겨우 내뱉은 말이란 이런 바보 같은 것이었다. “뭐? 당연히 아니지.” 내가 속으로 마구 발광하고 있는 사이 루카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눈매를 좁히며 웃었다. “그리고 내 눈에 예뻐 보이는 사람은 너밖에 없는데?” 헉, 또 말문이 막혔다. 지금 이 상황이 그냥 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이,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가 그냥 전부 다 너무 이상하고 당황스러웠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자꾸만 횡설수설하게 되었다. “너…… 이, 이런 식으로 나한테 허락도 없이…….” “아, 허락받으면 괜찮아?” 야이, 그런 말이 아니잖아! 루카스는 변함없이 뻔뻔했고 나는 지금까지의 우리가 대개 그랬듯 그런 그에게 나도 모르게 휩쓸리고 있었다.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해도 돼?” 그런데 내가 이상했다. 달빛에 비친 루카스의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만 달싹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대답할 새도 없이 다시금 마주한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아니, 어쩌면 그냥 대답할 새조차 없이 벌어진 일이라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입술이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따뜻한 온기가 아까보다 조금 더 깊숙이 포개졌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지금 내가 얘랑 뭘 하고 있는 거야? 머릿속이 시끄럽다가, 루카스의 손이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뒷덜미에 닿는 순간 비로소 완전히 새하얘졌다. 잠시 후, 밤에 피어난 장미 같은 눈동자가 내 앞에서 미소를 머금고 휘어졌다. “아, 빨개졌다.” 귓가에 속삭여진 음성에도 봄바람 같은 웃음이 담겨 있었다. 과연 그 말처럼 양쪽 뺨이 홧홧했다. 나는 이대로 달아나 커튼 뒤에 숨고 싶은 기분과 눈앞의 미소를 조금 더 보고 싶은 기분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득 저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과거에는 이야기의 끝처럼 느껴지던 내 18살의 생일.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完> ======================================= [외전 1화] 1. 18살에도 변함없이 왁자지껄 정신없는 하루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검은 탑의 마법사들은 저마다 귀를 의심하며 입을 벌렸다. 조금 전 자신들이 들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충격 속에 몰아넣은 장본인은 여전히 팔자 좋게 소파에 늘어져 과자를 주워 먹고 있는 중이었다. “뭐야, 단체로 귀먹었어? 그 나이에 벌써 그러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울컥! 여느 때와 같은 얄미운 소리에 마법사들은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하지만 상대는 루카스였다. 그러니, 참자. 참아야 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저희가 무언가를 잘못 들은 것 같아서요. 그러니 다시 한번 말씀을…….” 마법사들이 굽실거리며 다시 묻자 루카스가 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그는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다시 말해주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자들이 뭘 좋아하냐고 물었잖아.” 그 순간 마법사들의 동공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잖아! 방금 들었어? 무슨 말 했는지 들었어? “여, 여자들이 뭘 좋아하냐니, 혹시 루카스 님…….” 옹기종기 모여 루카스에게 고대 마법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어보던 마법사들은 단체로 쥐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어버버거렸다. 차마 그 뒤로 말을 잇지는 못 했지만, 그들이 하고 싶은 질문이란 너무나 명백했다. ‘너 설마 연애하냐?’ 연애? 연애?! 연애……! 누가? 저 루카스가?! 몇백 년 묵은 검은 탑의 마법사 루카스가 연애를?! 우리도 못 하고 있는걸! “그, 그, 그런, 그런 것을 왜 저희에게…….” “왜, 너희한테 물어보면 안 돼?” 마법사 중 한 명이 더듬거리며 묻자 루카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하지만 곧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아아’ 하고 소리 내며 표정을 변화시켰다. “아, 하긴.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나? 내 실수.” 그러면서 지어 보이는 측은한 눈빛이 참으로 밉살맞기도 했다. 루카스가 말했다시피 검은 탑의 마법사들은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미혼이었다. 게다가 미혼인 사람 중에서도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한 손에 꼽을 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황실에 소속되어 밤낮없이 마법에만 열중하고 있지 않던가? 어쩌다 여유 시간이 생겨도 탑에 남는 것을 자처해서 마법서에 코를 박고 있거나 수식 연구를 하거나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마법사의 특성상 대부분 개인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런 그들이 이성에게 좋은 연애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루카스에게 지적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저희가 어디가 어때서요!” “맞아, 우린 연애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린! 마법과 결혼한 몸이니까요!” “그렇습니다아아!” “옳소, 옳소!” 성격이 나쁘기로 치면 루카스만 한 사람이 탑에 또 있던가! 게다가 나이는 어떻고! 이미 몇 살인지 세는 것조차 포기한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나이 아니던가! 억울하다! 서럽다! 도대체 우리가 이 사람보다 부족한 게 뭐라서! “아, 귀 따갑게 왜 단체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하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루카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법사들은 이유 모를 패배감에 몸서리치고 말았다. ……역시 얼굴? 얼굴인가?! “아무튼 아무도 모른다 이거지? 쯧쯧, 다들 인생 헛살았네, 헛살았어. 나 참, 어떻게 영양가 있는 놈이 이렇게 한 놈도 없어?” 아무래도 루카스는 그들을 약 올리기 위해 이런 복장 터지는 소리를 꺼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다른 마법사들이 굴욕감에 부들거리든 말든 ‘참으로 답 없는 인생들이기도 하지’라고 말하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 그러는 루카스 님은 왜 그런 걸 저희에게 물으십니까?” “맞아! 천하의 루카스 님도 모르시는 게 있네요!” “설마 그 나이가 되시도록 연애 한 번 안 해보신 건 아니겠죠?” 아무래도 루카스와 같이 있는 동안 늘어난 것이라고는 마법 실력과 간 크기뿐인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 위대하신 검은 탑의 마법사님의 재림!’이라는 사실에 루카스의 앞에서 벌벌 떨던 그들이었지만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혼이 빠져나갈 듯 공포스러웠던 ‘신의 징벌’ 마법에 대한 기억도 서서히 옅어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 후로 루카스가 그들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는 짓을 한 적이 없기도 했다. 오히려 조심스럽게 마법에 대해 물어보면 ‘쯧쯧, 무식한 중생들, 그런 것 하나 모르냐?’라는 듯이 한껏 무시하면서도 대답을 해주기는 했고, 허구한 날 그들을 핍박하고 갈구면서도 진짜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괴롭힌 적은 없었다. ……물론 훈련을 빙자해서 죽기 직전까지 굴려진 적은 있었다. 어흑. 어쨌든, 그래서 그들은 제법 대범하게 루카스를 향해 저따위 용감한 말을 지껄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흐응, 너희들.” 그런데 루카스가 느른히 두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여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요새 내가 막 엄청 친근감 있게 느껴지고, 엄청 편안하고 그런가 봐?” 루카스는 별로 그들을 협박하는 어투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마법사들은 평온하고 나긋하게까지 느껴지는 루카스의 목소리에 소스라치며 몸을 긴장시켰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예 내 연애사에 훈수도 두고 그러겠어?” “아, 아닙니다!” “왜, 친구끼리는 다 그렇게 하는 거지.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해.” 그렇게 말하며 루카스는 방긋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을 순수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중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아, 참. 너희들 시네리아 화산에 연구 재료 채취하러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리고 루카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꺼낸 말에 마법사들은 까닭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지난번에 그 먼 데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했었지?” 곧이어 환한 미소가 루카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내가 지금 보내 줄게.” “네?!” “너희들끼리 번갈아 가면서 단거리 순간 이동 쓰는 것도 중노동이잖아. 내가 특별히 지금 다 같이 거기로 보내 줄게. 좌표는 시네리아 화산 정상이면 되나?”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우린 친구잖아.” “잠깐, 루카……!” 슈욱! 마법사들의 애처로운 부름은 루카스의 손짓 한 번에 사그라졌다. 우르릉! 어디에선가 불어온 뜨거운 바람이 마법사들의 전신을 덮쳤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이 나가 버렸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우르릉, 쿠쾅!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벼도 보이는 것은 새까만 연기뿐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으아아악!” “으악, 분화한다!” “방어 마법! 방어 마법!” “아니야, 냉각 마법!” “그냥 산 아래로 순간 이동을 해!” “루카스 니이이임……!” 졸지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막 분화하기 시작한 화산 위로 떨어지게 된 마법사들은 자신들을 이곳에 보낸 사람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주위에는 ‘쿠쾅쾅! 우르릉!’ 화산이 용솟음치기 시작하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 * * “오늘은 이 정도만 할까요?” “아구구, 그렇지 않아도 이 늙은이는 체력이 달려서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밝은 햇빛이 가득 들어차는 방 안에서 나는 탑의 수장 할아버지인 에반에셀과 함께 고대 술식의 변형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너무 몰두해 버렸나 보다. 문득 시계를 보니 술식을 파헤치기 시작한 지 어느덧 3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래서 침묵을 깨뜨리고 권하자 수장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여 왔다. “눈도 침침하고 어깨도 영 쑤시는 게…… 이럴 때 손녀딸이나 손녀딸 같은 사람이 조물조물 안마라도 해주면 기운이 펄펄 날 것 같습니다만.” 그러더니 글쎄, 이런 얼토당토않은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봤자 수장 할아버지는 30대의 동안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물론 그 속에 든 알맹이는 노인이 맞았지만 말이지. 나는 그의 너스레에 두 눈을 갸름하게 뜨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쉽게도 제 안마는 아바마마 전용이라서요.” “허허, 이래 봬도 제가 지난 수십 년간 폐하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지켜봐 왔으니 공주님께서는 제 손녀딸이나 마찬가지이신…….” “아바마마 앞에서도 지금과 똑같은 말씀을 하실 수 있으면 인정해 드릴게요.” “허허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공주님.” 수장 할아버지는 동안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중후한 웃음소리를 사방에 흩뿌리며 빛의 속도로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해가 지나도 여전히 클로드의 위력은 대단하구먼. 하긴, 우리 아빠가 좀 강력하긴 하지? 나는 남몰래 혼자 뿌듯해하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도 슬슬 방으로 돌아가야겠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에메랄드 궁에 따로 마련된 마법 연구용 방이었다. 원래는 내가 직접 검은 탑에 가서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이런저런 연구를 했었지만, 매일 그러기도 번거로워서 내 궁에 방을 따로 만든 참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요즘 들어 검은 탑에 방문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장 할아버지가 가끔 나를 도와주거나 함께 술식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오곤 했다. “공주님, 지금 나오시나요?” “릴리!” 연구용 방을 나와 내 방으로 향하는 길에 나는 릴리와 마주쳤다. 마법 연구를 할 때면 내가 집중해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방에 있을 때 나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응, 이제 좀 쉬려고.” “그럼 방으로 차를 내갈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고마워, 릴리.” 크으, 역시 릴리가 최고시다. 나는 릴리의 세심함에 여느 때처럼 감탄하다가, 곧 그녀가 웃으며 내게 하는 말에 방으로의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기다리시던 편지가 도착했어요.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답니다.” 나한테 편지가 왔다는 말에 바보같이 마음이 들떴다. 이런 설렘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마침내 방에 도착한 나는 릴리의 말대로 탁자 위에 고이 올려진 편지를 보고 숨을 골랐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제니트 마그리타가.] 봄을 나타내듯 산뜻한 연노랑 편지 봉투 위에 곱게 적힌 글씨가 보였다. 나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숨을 가다듬다가 이내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탁자 위의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얼마 전부터 나는 제니트와 다시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 아주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뛰었다. “앗.” 마침내 편지를 개봉해 접혀 있던 종이를 펼치자 그 사이에 껴 있던 무언가가 내 무릎 위로 떨어졌다. “꽃?” 의아함을 느끼며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보니 잘 말린 보라색의 꽃이었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오늘도 무척 화창한 날씨예요.] 나는 제니트의 편지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느 때와 같은 여상한 인사말이 가장 처음 나를 반겼다. [올 초부터 제가 돌보던 온실에 드디어 꽃이 피었어요. 은은한 보랏빛이 예쁜 이페이온 꽃이에요.] ======================================= [외전 2화] 아, 혹시 그게 이 꽃인가? 보라색이라는 걸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책갈피로 사용하면 제법 운치가 날 것 같아서 한번 말려 보았는데 모양이 제법 그럴듯해요. 문득 공주님 생각이 나서 몇 송이를 동봉합니다. 꽃잎이 꼭 별처럼 생겼죠?] 나는 피식 웃으며 편지 봉투에 들어 있던 꽃을 만지작거렸다. 제니트가 이곳을 떠나고 나서 한동안은 이제키엘을 통해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나도 걱정과 근심이 많았으나 다행히도 이제 그녀는 어느 정도 많이 안정된 상태 같았다. 얼마 전 처음으로 이제키엘 대신 제니트에게 편지가 왔을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한동안이나 가만히 서서 그녀가 보낸 편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제니트의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리는 동안 나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공주님을 원망하듯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위로해 주고, 그 사람이 원할 때마다 손을 내밀어주고 먼저 말을 건네주는 일이 쉬운 건 아니잖아요. 만약 우리의 입장이 반대였다면 저는 공주님처럼 할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만약 제니트라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랬다. 만약 내가 그녀였다면 이런 식으로 먼저 내게 연락하는 것을 더욱 망설였을 게 분명했으니까. 나는 제니트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그 후로 우리는 가끔 자신의 일상을 담은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물론 우리의 관계는 완전히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서서히 서로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언젠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을 수 있게 된다면. 제니트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 그리고 제니트가 그래야 나도 마음 편히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헤에, 너 요즘 키메라랑 자주 편지 주고받네.” “으악!”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없던 애가 떨어질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루, 루카스!” “내가 그렇게 반가워?” 고개를 돌리자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루카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으으윽! 나는 잠깐 동안 그의 얼굴을 보며 두 눈을 흔들다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순간 이동을 썼다. 슈욱! “으아, 으아, 으아!”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고 나서야 나는 심호흡을 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일단 루카스를 피해 아무 곳으로나 순간 이동을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 하지만 시야에 흔들리는 이 익숙한 하얀빛과 코끝에 감도는 그윽한 향기는 장미 화원의 것이 분명했다. “뭐야, 갑자기 순간 이동은 왜 써?” 악! 또 한 번 들려오는 루카스의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사실 나는 지금 루카스의 얼굴을 보기가 굉장히 꺼려져서 그를 피해 순간 이동을 쓴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순식간에 쫓아오다니! 슈욱! 나는 또 한 번 마법을 사용했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사파이어 궁의 연회장이었다. 지금은 손님을 맞이할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연회장은 아주 적막했다. 지금 사용하지 않는 테이블과 의자들, 또 벽면에는 새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이번에도 루카스는 너무 쉽게 나를 찾았다. 허공에서 나타난 루카스가 장난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흐음, 이거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그만 따라와!” 가까이에서 루카스의 눈을 마주하자 얼굴이 급속도로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나는 몇 번이나 더 마법을 이용해 루카스에게서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은 헛된 발버둥일 뿐이었다. 열다섯 번째로 도착한 루비 궁에서 나는 자포자기한 채 분수대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할 만큼 다 했어?” 루카스는 분수대 위에 걸터앉아 그런 나를 흥미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몰랐네. 이런 게 네 취향이야? 하긴, 네가 보는 책에도 꽤 자주 나오긴 하더라.”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그만 나는 버럭 소리 지르고 말았다. “이런 걸 두고 일명 ‘나 잡아 봐라’ 놀이라고 하던가?” “아니야!” 나 잡아 봐라 놀이? 나 잡아 봐라 놀이라고?! 전혀 아니야! 난 지금 너랑 그따위 장난질을 하고 있던 게 아니란 말이야! 으앙! “네가 이런 걸 좋아하는지 알았으면 진작 같이 놀아줬을 텐데.” “그게 아니라 난……!” 하지만 분통이 터져서 말을 하려다 말고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잠시 동안 몸부림쳤다. 네 얼굴을 보기가 왠지 부끄러워서 도망친 거라고 어떻게 말해! 으아앙! 지난번의 내 생일날부터 루카스를 볼 때면 아주 죽을 맛이었다. 무엇보다 내 심장이 너무 나대서 문제였다. 하지만 이건 다 루카스 때문이다! 이놈이 나한테 그런 짓을 해서! “너 요즘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 그런데 의외로 루카스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내가 자기를 피해서 일부러 스케줄을 빡빡하게 잡고, 또 검은 탑에도 출입하지 않는 걸 모르는 건가? 지금도 그는 지금 우리가 벌인 순간 이동 레이스를 일종의 놀이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뜨끔하여 변명했다. “나 요즘 제왕학 배우고 있잖아.” “너 여왕 되려고?” “나중 일은 모르는 거니까 일단 배워 두는 거야.” 끄응, 이 상황 뭐지? 루카스가 나를 너무 태연하게 대하니까 나도 방금 전까지 혼자서 호들갑을 떨었던 게 왠지 좀 머쓱해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것이 풀어지면서 알지 못할 허탈감이 밀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에이, 나도 안 해! 루카스, 얘도 이렇게 멀쩡한데 왜 나 혼자만 동요해야 돼! 그, 그래. 그까짓 뽀뽀쯤, 아무것도 아니야. 그 정도는 까망이랑 녹스랑도 했던 거잖아? 이건 그냥 강아지랑 쪽 하는 거랑 별다를 것도 없는 거라고. 그래도 어째서인지 루카스의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니 속이 조금 부글부글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티 내기는 또 싫었다. “그딴 재미없는 걸 잘도 공부하네.” 루카스는 내가 무언가를 공부할 때마다 그랬듯, 이번에도 질린 표정을 지으며 혀를 쯧쯧 찼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루카스가 그러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제왕학은 정말로 별로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요즘 내가 듣고 있는 수업은 내 상상과 거리가 있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루카스에게서 도망쳤던 것도 잊고 분수대에 팔을 올려 거기에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끄응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진짜 조금 다르더라.” ‘군주는 거짓말쟁이여도 된다.’ ‘군주는 위선자여도 된다.’ ‘그러나 군주로서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런 걸 가르친단 말이지.” 나는 좀 더 멋지고 근사한 걸 배울 줄 알았는데. 역대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 중에는 왕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책에서 보면 다 멋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제왕학에서 가장 처음에 배우는 게 저런 내용이라니. 그래서 요즘 들어 내 마음속에는 루카스에 대한 것 말고도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좋은 왕이란 뭘까?” “네 아빠한테 물어보지그래?” “음, 왠지 이건 내가 직접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아서.” 물론 루카스의 말처럼 클로드에게 물어보려면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 말을 들은 루카스는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태평이 말했다. “뭐, 앞으로 천천히 해나가면 되겠지. 어차피 시간도 많잖아.” 크흑, 그런데 이놈, 지금 남의 일이라고 이러나? 시간이 많긴 뭐가 많아! “난 내가 너무 늦게 시작한 것 같은데. 지금 내 나이가 18살이잖아.” “너나 네 아빠나 앞으로 남은 수명이 몇백 년은 될 텐데, 그걸로 치면 지금 엄청 조기 교육 시작한 거 아니야?” “뭐……? 몇백 년?!” 루카스가 지나가듯 던진 말에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남은 수명이 몇백 년이라니?! 이게 웬 말이오?! “아니, 원래 마법사들의 수명이 긴 건 아는데! 아빠랑 내 마력이 그 정도야?” 우리가 역대 최강의 마법사 왕이었던 아에테르니타스급이라고?! “내가 전에 네 생일 선물로 줬던 게 뭔지 잊었어? 너랑 네 아빠랑 나란히 세계수 가지 먹었잖아.” 그 말에 나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전에 클로드가 내 마력 폭발에 휩쓸려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때 루카스가 치료 약이라며 냅다 머리에 꽂았던 그 나뭇가지! 마력 안정을 시켜야 한다면서 그걸 내 머리에도 꽂았었지. 그 후로 마력량이 늘어나긴 했는데……. “헐, 그것 때문이야?” 하지만 앞으로 몇백 년 동안 더 산다고 해봤자 영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했다.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의 인생 계획은 좀 장기적으로 보고 짜도록 해. 제왕학인지 뭔지 그것도 백 년쯤 뒤에 공부하기 시작해도 이를 텐데. 그런 거 할 시간에 나랑 놀면 좋잖아.” 루카스가 투덜거리면서 어깨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던 내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내가 여전히 얼떨떨하게 있는 사이, 그는 내 머리카락을 손에 휘감아 만지작거리며 놀기 시작했다. “참, 그러고 보니까 여자들은 뭘 선물해 주면 좋아해?”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어오는 루카스의 말에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지……? 얘가 지금 나한테 여자들이 뭘 좋아하냐고 물은 거야? 혹시 나한테 주려는 거…… 라면 나한테 물었을 리가 없겠지? 뭐야, 얘 다른 여자가 있어? 그것도 천하의 루카스가 이렇게 고심해서 선물씩이나 준비할 만한 여자가? 그 순간 기분이 아주 이상해졌다. 정확히 말로는 표현을 못 하겠는데 아까보다 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선물은 선물이니까 아무거나 주면 그냥 다 좋아하겠지.”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말하면 뭐가 좋은지 어떻게 알아?” 루카스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 제대로 대답하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알 게 뭐야! 네가 다른 여자한테 줄 선물 따위 어떻게 되든지! “너라면 뭐가 갖고 싶을 것 같은데?” 은근한 어투로 물어오는 루카스의 머리를 마구 잡아당겨 주고 싶었다. 얘는 무슨 다른 여자한테 줄 선물을 얼마 전에 뽀뽀했던 여자애한테 물어보고 있어? 이 무신경한 놈 같으니라고. “흥. 글쎄, 난 이미 다 가지고 있어서 더 갖고 싶은 게 없는데. 용이라도 잡아 오면 또 몰라.”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빈정거렸다. 참나, 나도 뭐, 너한테 선물 같은 걸 받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거든? 내가 이래 봬도 공주인데 난 남자한테 그런 거 안 받아도 이미 좋은 건 다 가지고 있다 이거야. 내가 제일 짱 세! 크아아! 그렇게 속으로 까닭 모를 분노를 느끼고 있을 때, 루카스가 뜻밖이라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뭐, 용? 너 그런 게 좋아? 원래 여자들은 그런 거 좋아해?”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할 말 다 했으면 빨리 가 버려!” “그래, 그럼 이따 봐.” 내가 심통이 나서 성질을 부리는데도 루카스는 저런 말을 남긴 뒤 홀연히 분수대에서 사라졌다. 나도 방금 전보다 두 배로 심술이 나서 클로드가 있는 가넷궁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 [외전 3화] “아빠아아!” 내가 갑작스럽게 난입했는데도 클로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쩐 일로 그는 후원에 있었다. 나는 보라색 꽃 덤불 옆에 서 있는 클로드를 향해 달려갔다. “뛰지 마라.” 난 이제 다 컸는데도 그는 아직 내가 어린애로 보이는 모양이다. 넘어질 걸 걱정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마구 찡해졌다. 그래서 나는 클로드에게 찰싹 안기며 외쳤다. “역시 전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요!” 남자 따위 필요 없어! 루카스 같은 건 이제 나도 몰라, 흥! 왠지 방금 전의 일로 나 혼자 삐져서 이러는 것이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걸 어찌하겠는가! “오늘도 두 분의 사이가 참으로 돈독하고 보기 좋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흐뭇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앗, 필릭스도 있었네! 그러고 보니까 아까 클로드를 보러 간다고 에메랄드 궁을 나섰던 것 같기도 하고. 응? 그런데 기분 탓인가? “필릭스, 요즘 뭐 좋은 일 있어?” “예? 좋은 일이요?” 나는 필릭스의 얼굴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왜인지 오늘따라 얼굴이 좋아 보여서.” 그러고 보면 요즘 들어 필릭스의 낯이 밝아지긴 한 것 같다. 혈색이 좋아졌다고 해야 할지, 전보다 생기 있어졌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그래서 그런지……. “전보다 조금 더 잘생기고 젊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헉, 그렇습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필릭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외치는 소리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하사하신 용봉탕의 은혜인가 봅니다!” 그, 그런 건가? 지난번에 클로드의 명령이 있었던 후로 필릭스는 한 달 동안의 용봉탕 먹기 미션을 정말 꿋꿋이 클리어해냈다. 그래서 지금 그 효능이 이렇게 눈에 띄게 드러나는 건가? 정말? “폐하, 폐하께서도 이참에 용봉탕을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필릭스는 밝은 얼굴로 클로드를 향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의 폐하의 용태가 전과 같지 않다고 느껴져 신하 된 도리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용봉탕의 효능을 이렇게 몸소 경험하게 되니, 폐하께도 이만한 영약이 없다 사료됩니다.” 나는 그 순간 클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이, 이거 왠지 위험 신호 같은데요? 필릭스, 이제 그만 말하는 걸 멈춰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 그 정도로 나를 걱정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이 필릭스, 충정 어린 마음으로 항상 폐하의 안위만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릭스의 환한 얼굴은 오래 가지 못했다. 클로드가 뒤이어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용봉탕이 마음에 들었다니 더 하사해야겠구나.” “폐, 폐하?” 나는 필릭스의 눈동자가 마구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저는, 저는 이미 충분한 것 같으니 그러지 마시고 폐하께서…….” “내 용태야 한동안 충분한 휴식만 취하면 금세 원래대로 돌아올 일이나 너는 아니지 않나? 그나마 영약의 효과라도 보고 있다니 다행인 일이군.” 나는 등 뒤로 삐질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아마도 지금쯤 필릭스는 그보다 더하겠지? 으앙, 그러니까 필릭스! 왜 우리 아빠 앞에서 용태가 전과 다르니 어쩌니 하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거야? 으흑, 그 긴 시간 동안 클로드를 지켜봐 놓고 아직도 그 성격을 모르나? 보람 없어라. “가신의 안위를 두루 챙기는 것도 군주의 도리니 사양치 마라. 원한다면 일 년 치의 용봉탕이라도 하사해 주겠다.” “그, 그, 그것이…….” 필릭스는 차마 클로드의 말을 거절하지도 못 하고 뻘뻘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어 댔다. 끔찍한 맛을 가진 용봉탕과 클로드의 호의(물론 진실은 호의가 아니었지만)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 하고 갈팡질팡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눈에 훤했다. 쿠웅……! 우수수! 그런데 바로 그때, 갑자기 어디에선가 엄청난 굉음이 울리며 머리 위로 강력한 바람이 밀어닥쳤다. “갑자기 웬 바람이 이렇게……! 방금 전의 그 소리는 도대체 뭘까요?” 필릭스가 한껏 당황해서 외쳤다. 나와 클로드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함께 고개를 돌렸다. “황성 안이다.” 클로드의 말처럼 방금 전 이상 현상이 벌어진 곳은 황성 내부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황성은 전체적으로 방어 마법이 둘러져 있는데? “위험할지도 모르니 너는 여기에 있어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냥 같이 가요.” “폐하, 공주님, 저도…….” 필릭스가 뒤에서 뭐라고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클로드와 나는 그를 버려 두고 마법을 이용해 굉음이 들린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나는 쩌억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 왔어?” 이 소란 속에서 루카스가 팔자 좋게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누가 봤으면 소풍이라도 나온 줄 알 정도의 여유였다. 하지만 지금 루카스가 깔고 앉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다면, 누구나 다 경악해 얼어붙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이, 이게 지금……!” 나는 몹시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용?” 클로드도 지금의 상황이 의심스러운 듯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읊조렸다. 주위에는 어느덧 소란을 듣고 몰려온 사람으로 가득했다. 물론 그들 역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찢어져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렇다, 루카스가 황궁 한가운데에 떡 하니 가져다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용이었다! 저, 저거 진짜인가? 설마 진짜 용이야? 생김새를 보면 맞는 것 같은데? 아니, 그래도 설마! 푸릉! 내가 의심과 충격에 범벅되어 멘붕에 빠져 있을 때,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거대한 생명체가 콧김을 내뿜었다. 그 콧김이 오죽 강한지, 태풍이라도 온 것처럼 머리카락이 사방팔방 휘날릴 지경이었다. “루카스, 그게 뭐야?! 너 도대체 황궁에 뭘 데리고 온 거야!” 나는 기가 막혀서 루카스에게 따져 물었다. 그런데 글쎄, 이놈이 얼마나 황당한 소리를 했느냐면……. “네 새로운 펫. 용 갖고 싶다며? 역시 내 여자 친구야.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애완동물로 길들이는 보람이 있지. 안장은 네가 직접 채울래?” 루카스는 황금색 비늘을 가진 용의 머리 위에서 펄쩍 뛰어내리며 내게 저따위 기가 막힌 말을 했다. 뭐, 뭐라고? 펫? 저 용이 내 펫?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참, 그러고 보니까 여자들은 뭘 선물해 주면 좋아해?’ ‘흥. 글쎄, 난 이미 다 가지고 있어서 더 갖고 싶은 게 없는데. 용이라도 잡아 오면 또 몰라.’ 그 순간 아까 헤어지기 전에 루카스와 나누었던 대화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방금 전보다 더욱 기가 막혀 왔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내 말 때문에 용을 잡아 왔다, 이 말이야? 나한테 주려고? 아, 아니, 일단 그것보다도! “내, 내가 왜 네 여자 친구야?!” “그래, 그 말은 쉬이 넘길 수 없군. 내 딸이 왜 네놈의 여자 친구라는 말이냐?” 고오오! 내가 황망함에 소리치자마자 바로 옆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클로드에게서 몽글몽글 새어 나오는 기운이 어찌나 흉흉하던지, 나는 내 옆에 용이 한 마리 더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 루카스는 뻔뻔했다. 나와 클로드의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아니야? 지난번에 너랑 나랑 뽀…….” 바로 그 순간, 나는 총알같이 루카스를 향해 튀어나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야, 이놈아! 너 미쳤어? 너랑 나랑 그, 그걸 한 걸 지금 공개적으로 말하려고?! 루카스가 발갛게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막은 내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한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뽀뽀도 했는데 왜 아니야? 너도 좋아했잖아.” 그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말을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가 언제 좋아했어?!” 엄마야, 이놈이 사람 잡네! 내, 내가 언제 좋아했다고! 내, 내가 그때 거절하지 않고 어쩌다 눈을 감은 건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거지 네가 좋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거든! 그런데 바로 그때, 루카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표정을 변화시켰다. 그 직후 그가 내뱉은 말에 나는 ‘헉!’ 하고 소리 내고 말았다. “너 설마 지금 날 먹고 튀려는 거야?” 지,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죠……? 먹고 튀어? 내가? 내가 루카스를?! “난 설마 네가 그런 파렴치한 인간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아,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단맛만 쏙 빼먹고 지금 날 버리겠다는 거야?” 너무 황당하고 당황해서 입 밖으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러는 와중에도 루카스는 가증스럽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자신에게 그럴 수 있느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둘이 속닥거리는 거지?” 바로 그때, 클로드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내 딸이 네놈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헛소리를 한 건지 물었을 텐데.” 나는 클로드와 루카스의 사이에 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다들 루카스가 진짜 검은 탑의 마법사인 걸 알고 벌벌거리는데, 클로드만큼은 참으로 한결같기도 했다. 크흑, 하긴 그래야 우리 아빠지! “아타나시아. 네가 한번 말해보아라. 저놈이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지껄인 것인지.” 어흑, 하지만 이런 상황은 반갑지 않다구요! “그, 그게…….” 푸르릉! 하지만 용이 나를 도와주었다. 루카스의 뒤에서 얌전히 있던 용이 갑자기 날개를 펼치고 도주를 감행한 것이었다. “으아악!” 거대 용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이 용의 날갯짓에 비명을 내질렀다. 또 한 번 엄청난 바람이 사방에 휘몰아쳤다. “어? 쟤 토끼려고 하네.” 역시 이 와중에도 태평한 사람은 루카스밖에 없었다. “야, 까불지 말고 앉아.” 쿠쿵! 루카스가 혀를 차며 말한 순간, 용의 육중한 몸이 다시금 지면 위에 내려앉았다. “내가 여기에 버젓이 있는데 네가 튀려고 해? 하긴 그 정도 깡은 있어야 선물용 용이 될 자격이 있긴 한데.” 끼잉. 기분 탓인지 용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옆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용을 보던 클로드가 지나가듯이 툭 말했다. “용이라, 내 딸의 애완동물로 나쁘지는 않군.” 어억, 우리 아빠는 의외로 용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나, 나도 자꾸 보니까 귀여운 것 같기는 한데…… 루카스가 나한테 준 거기도 하고……. 참나, 그런데 결국 뭐야. 루카스가 무언가를 선물해 주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 나란 말이야? 그럼 그냥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되지 뭘 돌려 묻고 그런대? “얘 이름은 노랑이 어때? 딱 네 취향이지?” 바로 그때 루카스가 용의 교육(?)을 마치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며 새침하게 말했다. “내 취향은 뭐가 내 취향이야?” “왜, 마음에 안 들어? 다른 용 잡아줄까?”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향해 재차 물었다. 나는 계속해서 마음에 안 드는 척 흥흥거리며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옷소매로 가렸다. ……난 지금 루카스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게 아니다, 진짜다! 그리고 누구에게인지 모를 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듣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 [외전 4화] 2. 오늘은 아빠와 함께 놀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스승님.” 드디어 오늘치 수업이 끝났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르며 오늘도 열심히 제왕학을 강의해 준 선생님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으어, 이제 좀 살겠다.” 방에서 혼자가 되자마자 나는 소파 위에 널브러졌다. 지금까지 다른 공부는 제법 즐기며 하는 편이었는데 제왕학은 어째 들으면 들을수록 영 머릿속만 복잡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이 공부는 내 적성이 아닌 것 같은데, 으흑. 하긴, 그냥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 최대 목표였던 내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될 수업을 받고 있다니. 일개 소시민인 저에게는 너무 난이도가 높은 미션이잖아요? 요즘은 왕의 역량이 어쩌구, 올바른 인재 등용이 어쩌구 하는 내용을 배우고 있는데 솔직히 아직은 그런 부분이 가슴으로 잘 와 닿지 않아서 겉핥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흐음, 만약 내가 황제가 되었을 때 등용하고 싶은 인재라고 한다면 역시 1순위는 이제키엘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야……. 나는 마지막으로 만난 지 시일이 꽤 오래 지난 이제키엘을 잠시 동안 떠올렸다. 제니트와 가끔 따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이제키엘과 연락하는 빈도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현재 알피어스 공작저가 아닌 킬로디스 지역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이 제도를 떠난 지 그리 오랜 시일이 지난 것도 아니고, 또 알피어스 공작이 낙향의 의사를 표한 것도 아니라 이번 일은 자숙의 의미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그 기한이 어느 정도 이어질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다.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 같아 나도 아직은 조용히 있었지만 역시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 그리고 클로드가 탐탁지 않게 여겨도 언젠가 한 번은 그들을 직접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앗, 공주님. 수업은 끝나셨나요?” 잠깐 조용한 방에서 평화를 만끽하다가 밖으로 나오자 세스가 나를 반겼다. 그녀는 막 내 공부방의 문 앞을 지나던 중에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세스의 손에 들린 수건에서 갓 세탁한 뽀송한 천의 냄새가 났다. “응, 수업은 조금 전에 끝났어. 한나랑 릴리는?” “릴리안 님은 시녀장 님을 만나러 가셨고, 한나는 지금 부엌에 있을 거예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아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바쁜 것 같은데 가서 볼일 봐. 난 잠깐 나갔다 올게.” 한창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린 낮 시간이라 그런지 모두 바쁜 것 같았다. 필릭스도 요즘 몸이 굳은 것 같다면서 일찌감치 연무장에 갔고…… 아무래도 오늘은 나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원래 내가 한가할 때에는 루카스가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나서 심장을 철렁이게 만들곤 했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 역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참, 지난번에 루카스가 황궁에 데려왔던 용은 원래 살던 곳으로 고이 돌려보냈다. 알고 봤더니 글쎄, 루카스 이놈이 데려온 용이 새끼 용이라지 않은가? 성장한 용은 길들이기 어려워서 일부러 제일 어린 용을 보쌈해 왔다고 한다. 크흑, 어쩐지 상상 속의 용과 달리 영 어리바리하고 순둥순둥해서 루카스한테 막 쫄고 울먹이기도 하고 그러더니만! 그 사실을 알고 나는 간만에 루카스를 달달 볶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기 용을 함부로 막 데려오면 어떻게 해! 큽, 애초에 내가 괜히 용 이야기를 꺼낸 게 잘못이었다. 아, 아니, 그렇지만 나는 설마 루카스가 진짜 용을 눈앞에 대령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판사님! 저는 루카스와 공범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아기 용 납치에 숟가락도 얹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듣는 이 없는 변명을 속으로 주절거리며 궁을 나섰다. 그나저나 간만에 한가한데 뭘 한다지? 탑에나 갈까? 아니면 녹스랑 파랑이랑 놀까? 그것도 아니면 백합 소녀한테 놀러 가? 요즘 할 일이 없어서 하도 책만 파고 살았더니 도서관은 가기가 싫고. 아니면……. 나는 내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궁인들을 지나치며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빠!” “아타나시아.” 시야가 뒤바뀌자마자 오늘도 집무에 파묻혀 있는 클로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드는 지난번 루카스의 헛소리 때문에 한동안 심기가 불편하다가 요즘 들어 원래의 기분을 되찾은 상태였다. 물론 그렇게 되는 데에는 내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했다는 사실을 밝히겠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한동안 공부에 집중한다며 코빼기도 비치지 않더니.” 그는 집무실에 나타난 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으억, 사실은 지난 용 사건 이후로 루카스와의 사이를 의심하는 클로드를 피하느라 그냥 공부 핑계를 댄 건데! 막상 그의 입으로 직접 저런 말을 들으려니 조금 양심이 찔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빠가 보고 싶어서 왔죠, 헤헤.” 나는 곰살궂게 웃으며 클로드를 향해 다가갔다. “오늘 하실 일 많으세요?” “할 일이야 늘 많다.” 내 물음에 단호박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 그렇지. 할 일이야 늘 많지. 네,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칼 같은 클로드의 말에 잠깐 말문이 막혀서 버벅거렸다. 그러자 그런 내 얼굴을 보며 클로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하지만 하루쯤 쉰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지.”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방긋 웃었다. 사실은 클로드가 이렇게 말해줄 줄 알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늘 시간을 쪼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던 우리 아빠니까. 그래서 오늘만큼은 나도 그냥 철없는 딸이 되기로 했다. “그럼 저랑 같이 궁 밖으로 놀러 나가요!” 하지만 내가 설마 이런 요청을 할 줄은 몰랐는지, 다음 순간 클로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 * * “번잡하고 더럽고 시끄럽군.” 궁 밖으로 나온 클로드의 첫 감상은 이러했다. 나는 귓가에 흘러든 그의 무감동한 목소리에 할 말이 없어서 그저 ‘허허허’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딸이랑 같이 밖으로 놀러 나온 감상이 ‘번잡하고 더럽고 시끄럽군’이라니! 으앙, 좀 너무하지 않아? 하지만 클로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따라 시끌벅적한 주변을 한차례 훑어보며 읊조렸다. “전에 나왔을 때보다 유독 어수선한 것 같더니만, 원인은 백일장인가.” 사실 클로드와 이런 식으로 밖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 약속했던 대로 같이 불꽃놀이를 보러 나온 적도 있었고, 또 내가 우겨서 축제를 구경하러 나온 적도 있었다. “우리 저쪽으로 가요.” 나는 클로드의 손을 붙잡고 사람들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클로드는 이렇게 사람이 복잡한 곳은 질색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군말 없이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우리는 일반 사람들처럼 수수한 옷을 입고, 또 성형 마법으로 얼굴도 바꾼 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골라요, 골라! 오늘만 초특가!” “미녀 마술사의 공연을 보러 오세요! 오늘 저녁 6시!” “몸에 좋고 맛도 좋은 팜킨 주스를 사시면 추첨권을 드립니다! 대박 경품을 노려 보세요!” 역시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나는 클로드의 손을 붙잡고 길을 걷다가 목표했던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클로드에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아빠, 아이스크림!” 나는 ‘아빠, 저거 사 줘!’를 시전했다. 클로드에게 이런 식으로 밖에서 무언가를 사달라고 졸라 본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나는 여전히 두근두근했다. 다 컸으면서 이러는 게 부끄럽지 않으냐고? 흥, 무슨 소리야? 솔직히 18살이면 대한민국 나이로 아직 고등학생일 때인데 이런 식으로 떼 좀 써도 되는 거지! “어서 오세요! 아이스크림 두 개 드릴까요?” “두 개 말고 하나. 바닐라 맛으로.” “위에 초코 시럽도 뿌려드릴까요?” “어떻게 먹을 거지?” “초코 시럽이랑 딸기 시럽도 추가요!” 우리 아빠가 달라졌어요! 나는 갑판 앞에서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클로드를 보고 감동했다. 솔직히 처음에 그와 함께 밖으로 놀러 나왔을 때는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동화 하나로 값을 치르면 되는 솜사탕을 사달라고 했더니 척하니 금화를 내놔서 갑판 아주머니를 눈 빠지게 만들지를 않나, 지나가다가 본 사자 인형을 가지고 싶다고 했더니 가게에 있던 인형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사들이려고 하지를 않나. “그런 게 맛있나?” 내가 행복한 기분으로 클로드가 사 준 아이스크림을 먹자 그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도 권유했다. “아빠도 드셔 보세요.” “단 건 질색이다.” 하지만 초코 시럽에 딸기 시럽까지 듬뿍 추가한 내 아이스크림을 보고 그는 질린 얼굴로 거절했다. 으엥, 맛만 좋은데 왜 그러지? 아이스크림의 참맛을 모르는 우리 아빠가 불쌍해요! “앗, 아빠! 이번엔 저거 먹어 봐요!” “이럴 수가, 지난번에는 없던 건데 캐러멜 맛이 새로 생겼잖아!” “아빠, 닭 꼬치!” “짠단 법칙이니까 이번에는 솜사탕을!” 나는 클로드의 손을 붙잡은 채 쉬지 않고 먹방을 찍어 댔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작은 몸으로 잘도 먹어 대는구나.” 앗, 이제는 우리 아빠도 충분히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럽게 놀란 모양이었다. 그래도 딸내미가 복스럽게 잘 먹으니까 좋지요? 막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거나……. “그러고 보니 살이 좀 찐 것 같기도 하군. 전보다 볼이 통통해진 것 같은 건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나.” 크아악!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손에 들고 있던 솜사탕을 집어 던질 뻔했다. 으악, 내가 살이 찌다니? 내 어디가? 어디가?! “으아악! 말도 안 돼! 이건 속임수야! 인정 못 해!” “아, 이 양반이 노름 처음 해보나? 판돈 다 날려서 없으면 이제 빠지라고.” 그때, 옆쪽에서 갑자기 고성이 들려서 깜짝 놀랐다. 시끌벅적한 시장통에서도 사람들의 함성과 무언가를 들고 엎는 것 같은 큰 소리가 또렷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투전판인가.” 미간을 찌푸리며 읊조리는 클로드의 말에 나는 귀를 쫑긋거렸다. 먹을 것에 관심이 쏠려서 미처 몰랐는데 우리가 서 있는 곳의 바로 옆에서 투전판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내가 호기심을 느끼고 기웃거리자 이번에는 클로드가 먼저 나를 잡아끌었다. “네가 구경할 만한 게 아니니 관심 두지 마라.” 잉, 궁금한데. 하지만 어쩐 일로 아빠가 제법 엄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투전판 구경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거기 아가씨도 한번 참가해 보지 않을라우?”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앗, 아무래도 나한테 하는 소리 같았다. 내가 자기들한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걸 본 모양이다. “행색을 보니 판돈도 넉넉할 것 같은데. 아가씨 또래의 친구들도 많이 참가하는 건전한 내기판이랍니다!” 응? 저 아저씨가 약을 팔려고 하네. 아무리 봐도 전혀 건전해 보이지 않는데. ======================================= [외전 5화] 흠흠.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내가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를 것처럼 순진하고 곱게 생겼다 보니 저렇게 벗겨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무리 수수한 옷을 입었다고 해도 타고난 귀티는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클로드와 나를 부유한 부녀로 보고 이런 식으로 등쳐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지금까지도 종종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부녀 사이신가? 같이 참가하지 않으시려오? 판돈은 각자 걸고 싶은 만큼 걸면 되는데 말이야.” 옆에 있던 사람들까지 우리를 살살 꼬드겼다. 소, 솔직히 한번 해보고 싶지만 아빠가 허락 안 해주겠지. 하긴, 딸이 노름하는 걸 옳다구나 하고 반기는 아빠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투전이 건전하다니 지나가던 참새가 웃겠군.” 당연히 예상했던 대로 클로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느 간 큰 아저씨가 잠자는 클로드의 코털을 건드렸다. “에잉, 뭐야. 형씨, 돈 없구나? 겉모양은 번지르르해서 혹시나 했더니만 실속은 없는 쭉정이였네. 에잇, 퉤!” 헉! 아무래도 저 아저씨는 미친 게 분명했다. 할 짓이 없어서 우리 아빠한테 저런 망발을! 아마 클로드가 마법으로 얼굴을 바꾸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감히 저런 간이 부은 짓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클로드의 외양은 소, 솔직히 조금 만만해 보였다. 왜냐하면 아까 내가 클로드의 얼굴에 조금 장난을 쳤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성형 마법으로 얼굴의 이목구비 자체가 흐리멍덩해졌는데, 거기에다가 얼굴도 더 못생기게 만들고 코 옆에는 큰 왕 점까지 박혀서 지금의 클로드는 빈말로도 카리스마가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으, 으악! 죄송해요, 아빠! 앞으로는 이런 장난 안 칠게요! 으흐헝! 물론 타고난 기백 같은 것은 숨길 수 없어서 클로드가 스산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도 한순간 움찔거리며 주춤하긴 했다. 하지만 투전판의 과열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수 대 소수라는 자신감 때문인지 그들은 곧 다시 함부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알거지면 알거지답게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으라고! 땡전 한 푼 없는 놈이 왜 밖으로 기어 나와서 어슬렁거리고 있어?” “그래, 그 상판으로 돈까지 없으면 얌전히 집에나 가서 마누라 발이나 핥으란 말이야! 대장간 집 둘째처럼 집 비운 사이에 부인이 딴 놈이랑 눈 맞아서 도망가면 어쩔 거야?” “우하하하!” 더군다나 그들은 대낮부터 술까지 마신 것 같았다. 세, 세상에. 천하의 클로드한테 상판이 어쩌구 돈이 어쩌구 마누라가 도망가니 어쩌구 하는 놈들이 있다니! 하지만 어디를 봐도 그냥 우리를 투전판에 끌어들이려고 일부러 하는 소리라는 게 티가 났다. 서, 설마 우리 아빠가 저런 뻔한 도발에 걸릴 리는…….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이로군.” ……있었다! 나는 클로드의 입가에 떠오르는 썩은 미소를 보고 후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아티.” “네, 넹.” 곧 그가 내 이름을 불러서 나는 바싹 긴장한 채 대답했다. 밖에서 내가 사용하는 이름은 내 애칭인 ‘아티’였기 때문에 클로드도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잡놈들에게도 네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있을 것 같구나.” 어, 어디가요? 내가 불안감에 떨고 있는 사이 클로드가 투전판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신나게 그를 도발해 댔던 사람을 향해 품에 넣어 두었던 주머니를 던졌다. 찰그랑! 나무를 깎아 만든 테이블 위에 떨어진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금화가 쏟아져 나왔다. 이런 시장통에서 유통되는 돈은 전부 동화였기 때문에 아마 그들은 은화조차 자주 본 적이 없을 것이었다. 그 증거로 지금 투전판에서 사용되고 있는 돈도 모두 동화였다. 그런 와중에 찬란한 황금색 동전이 주머니에서 쏟아지는 장면은 몹시도 극적이었다. “판돈이다. 아마도 네놈들로서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만져 볼 수 없는 돈일 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경악한 사람들을 뒤로한 채 클로드는 유유하게 투전판에 자리를 잡았다. “네놈도 판돈을 걸어라.” 그들은 설마 클로드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돈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어버버거렸다. 투전판에 끼게 해서 돈을 긁어먹으려던 속셈인 것은 맞았으나 판돈으로 걸린 것이 상상 이상이라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곧 클로드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강렬한 탐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위에서 요란하게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비슷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그럼 나도 오늘 번 돈을 전부 다…….” “그깟 푼돈을? 수지가 맞는다고 생각하나?” 테이블 위에 있는 동화를 곁눈으로 훑어본 클로드가 같잖다는 듯이 비웃었다. 으악, 저 얼굴을 하고도 저 하찮아하는 눈빛만큼은 그대로라니! 역시 우리 아빠의 ‘같잖은 눈빛’ 내공이란, 크윽. 그리고 이어서 클로드가 시린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장내는 방금 이제까지와 비할 수 없이 시끄러워졌다. “그래, 네놈의 손이라도 건다면 재미있어질 것 같군.” “뭐?” 뜻밖의 전개에 클로드를 상대하고 있던 남자는 퍽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언제 당황해서 동공을 흔들었냐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내가 왜 판돈으로 내 손모가지를 걸어야 하는데?” “겁 없이 건방을 떨며 떠들어 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두렵나? 막상 큰소리쳐 놓고 이길 자신이 없나 보군.” 하지만 클로드는 무덤덤하게 말할 뿐이었다. 앗, 이번에는 클로드가 저 아저씨를 도발하고 있잖아? “네놈의 그 비루하기 짝이 없는 손 한 짝으로 거금을 쥘 수 있는 기회인데 말이지.” 그러나 클로드는 아까 그들이 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을 했다. “용기가 안 나거든 지금이라도 꽁지를 말고 달아나도 좋다. 대신 그때에는 네놈 말고 용기 있는 다른 사람이 저 금화를 모조리 가져가겠지.” 클로드의 말에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흩어진 금화에 내리꽂혔다. 이, 이것은 하이에나들 한가운데에 떨어진 고깃덩어리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클로드는 하이에나들 머리 꼭대기에서 그들을 유유히 내려다보고 있는 한 마리의 사자라고나 할까. “조, 좋아! 나중에 돈 다 잃고 땡전 한 푼 안 남았다고 울지나 말라고!” 결국 남자는 클로드를 상대로 한 내기를 수락했다. 자신이 참여하지 않으면 옆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손을 걸다니. 저러다가 지면 어쩌려고? 크으, 우리 아빠는 저런 어른이 되면 안 된다는 걸 나한테 가르쳐 주려는 건가. “그나저나 규칙은 알고 겁 없이 투전판에 끼어든 건가? 대충 설명해 줄 테니까 잘 들으라고. 종이 울리면 이 패를 열 번 뒤집어서…….” “성가시군.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으니 입 다물고 시작이나 해.” 방법이 꽤 복잡해 보였는데 클로드는 정말 익숙하게 손을 움직였다. 호, 혹시 우리 아빠, 내가 모르는 새 밖에 나와서 산과 들이 아닌 도박장으로 쏘다닌 건 아니겠지? 나는 그런 약간의 의심을 품고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오오, 맞췄다!” “형씨, 제법 하잖아!” 나는 도박을 볼 줄 모르지만 주위의 반응을 보니 의외로 클로드가 이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클로드가 질 것 같은 도박판에 끼어들 리 없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고 있었지만. “이러다가 집 날리고 마누라 도망가는 건 그쪽이 되는 거 아니야? 크하하!” “닥쳐! 지긴 누가 진다는 거야?!” 아까 클로드를 조롱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클로드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향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패를 쥔 남자의 얼굴에 아까의 여유로움은 온데간데없었다. 처음에는 실실 웃기까지 하던 그는 패가 뒤집힐수록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이며 식은땀을 흘려 댔다. 애초에 단판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도박이었기 때문에 결판은 금방 났다. “이, 이럴 리가 없어!” “뭐가 이럴 리가 없다는 거냐?” 우리 아빠에게 도박의 재능이 있었다니! 클로드의 상대였던 사람은 우리가 오기 직전까지 투전판의 돈을 휩쓸었던 사람이라, 모두 클로드의 승리에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그 속에서 오직 이번 내기에서 진 남자만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분개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곧 그가 탁자를 손으로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글쎄, 클로드에게 삿대질하며 입에서 침이 튀기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래, 속임수! 이건 속임수야! 이 비열한 새끼! 내 패에 치사한 술수를 부렸지?!” “속임수를 쓴 건 그쪽이겠지.” 하지만 클로드는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끌어 올리며 자신의 앞에 있던 패를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패에 해괴한 짓거리를 해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이전까지도 이런 식으로 판돈을 싹쓸이했던 것 같은데 어지간히 뻔뻔한 놈이군.” 그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또 한 번 시끄럽게 웅성거렸다. “패에 무슨 짓을 했다고?” “어쩐지 계속 이기기만 하는 게 이상하더라니!” “그게 정말이야? 그럼 내 돈 다시 내놔!” 클로드의 말이 끼친 파급력은 엄청나서 주변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으음, 내 눈에는 저 아저씨가 사기를 친 게 사실이든 아니든 다들 별로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건수를 잡았으니 물고 늘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물론 우리 아빠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 안 하지만! “우, 웃기지 마! 증거 있어?!” 자신의 속임수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남자는 발악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나와 상관없다. 어쨌든 넌 도박에서 졌고, 나는 그 대가만 받아 가면 그만이니.” 다음 순간 클로드가 남자의 손목을 낚아채 탁자 위에 고정했다. 그제야 남자와 주위 사람들은 이번 도박의 판돈이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깨달은 눈치였다. 그들이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리든 말든, 클로드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잘 갈린 번쩍이는 날이 허공에서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사기나 일삼는 더러운 손은 차라리 없는 게 낫겠지.” “자, 잠깐! 으아아악……!” 남자가 발버둥 쳤으나 클로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비명이 장내에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클로드의 손이 움직였다. 콰직! 하지만 단도가 내리꽂힌 곳은 남자의 손이 아니었다. “으, 으으……?” 잠시 후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남자가 파들파들 몸을 떨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 틈새 사이로 박힌 단도를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내 딸의 눈에 흉측한 꼴을 보일 수는 없으니 그 비루한 손은 받은 것으로 치겠다. 앞으로는 사람을 봐 가며 까불어라. 그럴 수 없다면 집구석에 처박혀 두 번 다시는 밖으로 기어 나오지 말도록. 알았나?” 그 후 클로드는 더러운 것을 치워 버리듯 남자를 떨쳐 낸 뒤 내가 있는 곳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기세에 눌려 있던 사람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가, 다음 순간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나는 시끄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다가오는 클로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 [외전 6화] “아빠, 멋있었어요!” 아무래도 클로드는 나한테 도박의 해로움을 몸소 보여 주려고 투전판에 끼어들었던 것 같았다. 크으, 역시 도박은 할 게 아니죠? 저런 것에 한순간이나마 호기심을 느꼈다니, 반성하겠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클로드가 흥, 하고 코웃음 치며 하는 말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보았느냐? 저렇게 멋모르고 겁 없이 기어오르는 놈들은 한 번씩 밟아줘야 하는 거란다.” 네, 네에? 사람의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지, 또 저런 도박으로 어떻게 인생을 망칠 수 있는지, 뭐 그런 걸 보여 주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한번 밟아주기로 마음먹은 상대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도록 하려무나. 기왕 도박을 할 생각이거든 속임수를 쓰든 뭘 하든 상관없다. 어차피 이겨서 목숨을 취하면 그만이니.” 아, 아니, 그 말은 무슨 의미시죠? 설마 속임수를 쓴 게 맞았어……?! 게다가 이겨서 목숨을 취하다니! 아, 아빠 무서워! “우, 우리 그만 다른 데로 가요!” 아무래도 오늘의 중요한 교훈은 클로드에게 까불지 말라는 것 같았다. 왠지 이 이상 도박 얘기를 하면 이것보다 더 무서운 소리가 클로드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서둘러 투전판에서 벗어났다. 그 후 우리는 다시 백일장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져서 장터 곳곳에는 주황색 등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야시장이야말로 백일장의 꽃! 빠뜨려서는 안 될 묘미!” 그리고 나는 슬슬 궁으로의 귀가를 권하는 클로드에게 야시장 구경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몇 시간 동안 내내 그렇게 먹어 대고도 아직 못 먹은 게 더 남은 건가?” “그야 당연히 야시장에서 파는 닭튀김과 볶음국수가…… 아니라! 전 먹을 것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냥 야시장 구경을 하고 싶은 것뿐이고…….” 아차, 나도 모르게 본심을 말해버렸다. 급히 말을 돌렸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으윽, 그렇지만 마, 맛있는걸. 물론 황궁에서 온갖 산해진미를 모두 맛봐 온 나지만 길거리 음식에는 그 특유의 맛이 있었다. 일명 조미료의 맛! 불량 식품의 맛! 크흑, 아마도 나는 역대 황족 중에 제일 입맛이 싼 공주가 아닐까……. 결국 나는 다시 클로드를 끌고 다니며 야시장의 먹거리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그냥 내가 마음껏 움직이게 내버려 두었다. “거기 예쁜 아가씨, 장신구 좀 보고 가요.” 그러다가 나는 옆에 있는 갑판을 보고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예전에 제니트와 나왔을 때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과 같은 팔찌였다. 실을 여러 가닥 꼬아서 만든 수수한 팔찌는 전생에 있던 소원 팔찌와 비슷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야시장에서 팔고 있는 팔찌를 보자 문득 제니트의 생각이 났다. “갖고 싶은 게 있나?” 내 시선이 갑판 위에 고정된 것을 보고 클로드가 물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저기 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나는 클로드의 물음에 대답하다 말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왕 점 있는 새끼! 빨리 잡아!” 그리고 아까 클로드와의 도박에서 진 남자가 패거리를 끌고 저 앞에서 달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앗, 혹시 아까 일의 보복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에 한 번 얼굴을 바꿀 걸 그랬다! “쯧. 그냥 아까 죽여 버릴 걸 그랬군.” 하지만 역시 우리 아빠는 남다르셔서 이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꺼냈다. 아까 내가 지켜보고 있어서 도박판에서의 일을 끝까지 마무리 짓지 않고 그냥 나온 것이 다소 후회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여기에서의 마무리란, 저 남자의 모가지나 손모가지를 ‘슥삭’ 하는 것을 의미했다. 클로드는 아까의 연장선으로 내게 또 하나의 교훈을 알려 주기까지 했다. “아타나시아. 만약 네 앞에서 겁 없이 까부는 놈이 있거든, 두 번 다시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짓밟아주는 게 좋다. 어중간하게 굴면 저렇게 끝 모르고 덤벼드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 있으니 유념하도록 해라.” 으악, 아무래도 우리 아빠는 저 아저씨를 살려 둔 게 많이 유감스러운 것 같은데! 이러다가 피 보는 상황이 오는 거 아니야? 일단 지금도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려고 오는 것 같고! 무엇보다 클로드도 다가오는 패거리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빠, 뛰어요!” 에잇! 아빠가 저 아저씨들을 모조리 요단강 건너편으로 보내 버리기 전에 튀자! “야, 이 왕 반점 새끼야! 거기 서!” 클로드는 우리가 도망가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 불쾌한 듯 얼굴을 구겼지만 그래도 잠자코 내가 잡아끄는 대로 뛰기 시작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조금 신이 났다! 사실 소설책에서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나도 한 번쯤 해보고 싶었어! “뭐야, 어디 갔어?” “헉헉, 이 썩을 것들이 발만 빨라서는! 야, 넌 저쪽으로 가 봐!” “찾으면 바로 불러! 너 혼자 돈 꿀꺽하지 말고!” 사실 마법을 사용하면 몇 사람쯤 따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뛰다가 투명 마법을 펼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우리를 뒤쫓던 사람들이 사라진 후 다시 마법을 풀었다. “아, 재미있었다.” “이런 게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하지만 방실거리며 웃는 나와는 달리 클로드는 이 나이를 먹고 딸 때문에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얼굴을 바꾸고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짠! 아빠를 위한 선물!” 그리고 나는 클로드를 위해 준비한 야심의 선물을 그의 눈앞에 대령했다! 그것은 바로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동물의 귀가 달린 머리띠였다! 왜, 놀이공원 같은 데에 가면 다들 이런 걸 쓰고 돌아다니잖아? 이 야시장에서는 비슷한 맥락으로 이 동물 머리띠가 인기인 것 같았다. “그 흉측한 걸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라.” 물론 클로드는 대번에 정색하며 내 선물을 거부했다. “왜요, 귀엽기만 한데. 그리고 주위를 보세요. 다들 쓰고 있잖아요. 여기서는 오히려 이런 걸 안 하면 촌스러운 거라니까요?” 하지만 나는 클로드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꿋꿋이 그의 머리에 동물 머리띠를 씌웠다. 그는 이 상황이 매우 불만스러운 눈치였지만 그래도 지금껏 그랬듯 내가 떼를 쓰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냥 넘어가 주었다. 판다 귀를 머리에 장착한 클로드는 마치 그 자체로 훌륭한 한 마리의 야생 판다 같았다! 물론 좀 기분이 나쁜 야생 판다였다. 나는 아주 흡족한 기분으로 여우 귀가 달린 머리띠를 쓰고 클로드와 함께 야시장을 쏘아 다녔다. “받아라. 오다가 주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클로드가 잠시 잊고 있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한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나는 말 그대로 툭 던져지듯 내 손에 안착하는 물건을 보고 다음 순간 멈칫했다. 클로드가 나한테 준 것은 아까 내가 보고 있던 팔찌였다. 실을 여러 가닥 꼬아 만든 수수한 장신구가 야시장의 불빛 아래에서 주황색으로 빛났다. “갖고 싶은 게 아니었나?” 아까 내가 갑판에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이유가 저 팔찌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나는 클로드를 보며 웃었다. “저 주시려고 일부러 사셨구나?” “오다가 주웠다고 하지 않았느냐.” 클로드가 틱틱거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그가 준 팔찌를 그 자리에서 착용해 보았다. “짠! 어울려요?”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하군.” 클로드는 나를 힐끔 쳐다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흥, 하지만 그게 칭찬이란 걸 알고 있어! 나는 그의 손을 다시 붙잡고 등불이 걸린 야시장의 거리를 걸었다. “아빠, 그거 아세요? 이 팔찌를 하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그런 미신을 믿는 건가?” “미신이든 뭐든 아무려면 어때요. 아빠는 소원 같은 거 없으세요?” 주변이 시끄러워 미처 내 말을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그런 건지, 클로드는 대답이 없었다. 우리는 그 후로 한동안 조용히 화려한 야시장의 등불 아래를 걷다가 황궁으로 돌아왔다. “릴리! 선물이야!” “어머, 그게 뭔가요?” 나는 릴리에게 야시장에서 파는 동물 머리띠를 선물했다. 물론 평소에 이런 걸 하고 다닐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원래 선물이란 건 마음이니까! “한나랑 세스한테도 줄게. 필릭스 것도 있어!” 릴리 것만 사오면 다른 사람들이 섭섭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선물은 공평하게 준비했다. “앗, 귀여워요!” “전 양인가요?” 릴리는 토끼, 한나는 고양이, 세스는 양, 필릭스는 사슴이었다. “녹용이군요. 마음에 듭니다.” 으, 으음? 필릭스 건 사슴뿔이니까 녹용이라면 녹용이지만…… 그래도 왜 그렇게 보약 얘기를 하듯이 말하는 거야? 쿨럭. 용봉탕도 그렇고, 아무래도 필릭스는 요즘 건강식품에 관심이 많아진 모양이다. “밖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 보네요.” 릴리가 엄마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나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파랑아, 밥 잘 먹고 있었어?” 찌르릉.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씻고 나온 뒤, 나는 새장 속의 파란 새를 들여다보았다. 앗, 그런데 졸린가 보다. 고개를 꾸벅꾸벅 떨어뜨리면서 조는 걸 보니. 녹스도 아까 가 보니까 자고 있던데. 하긴, 오늘은 야시장까지 구경하고 와서 그런지 잘 준비를 하고 보니 시간이 평소보다 늦긴 했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결정한 외출이었지만 재미있었어!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손목에 감긴 팔찌를 응시했다. 클로드는 미신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왜 있겠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고도 하잖아? 크든 작든 소원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도 언젠가부터 욕심이 많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꼭 이루졌으면 하고 바라는 소원이 여러 개 있었다. “공주님! 머리를 말리고 누우셔야죠.” 으앗! 그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릴리에게 꾸중을 들었다. 나는 찔끔해서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릴리는 꼭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면서 내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려 주었다. 물론 건조 마법을 쓰면 1초 만에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난 릴리가 지금처럼 내 머리를 만져 주는 게 좋았다. 그리고 솔직히 릴리가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것 역시 조금도 싫지 않았다. “공주님, 듣고 계세요?” “응.” 그래서 릴리를 향해 실없이 웃어 보이자, 그녀도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침대에 누워 문득 ‘그런데 루카스, 얘는 왜 오늘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비친 거지?’ 하는 의문을 느꼈다. 혹시 이 늦은 밤중에 갑자기 내 방에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오늘은 오랫동안 밖에서 돌아다녀 피곤했던 탓에 나는 금방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또 하루의 다정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외전 7화] 3. 이상한 나라의 공주님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 성을 탐방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황성의 금지 구역에 숨겨진 보물이 있다고요?” 탑의 수장 할아버지가 조금 전에 한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가 손녀딸에게 옛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 같은 얼굴로 허허 웃으며 내게 설명해 주었다. “예전부터 풍문으로 돌던 이야기입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 차기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만든 마법 용품이라고 하더군요.” “차기 후계자를 정하다니, 어떻게요?” “글쎄요. 고서에도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그 마법 용품이 무척 신묘하여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자를 스스로 가려냈다고 합니다.” 오, 마법 용품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니? 갑자기 마법사가 등장하는 모 영화 속의 말하는 모자가 생각났다. 거기에서는 마법 학교의 각 기숙사에 어울리는 사람을 뽑는 데 그 마법 모자가 사용되었지. 잘은 몰라도 초대 황제가 만들었다는 마법 용품도 그거랑 비슷한 건가? “하지만 초대 황제 폐하의 바로 다음 대 후계자를 가리는 자리에서만 단 한 번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마법 용품으로 후계자를 정하는 것에 당시 황족들의 반발이 컸다고 합니다. 그 후 몇 세대 후의 황족이 황궁의 금지 구역에서 그 마법 용품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국보로 취급되지 않고 아직도 황성의 금지 구역에 있다는 거죠?” “그런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아서, 아마도 위치를 쉽게 이동시킬 수 없는 종류의 마법 용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합니다.” 탑의 수장 할아버지가 해준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그런데 황성의 금지 구역이 어디예요?” 내가 알기로 황성에는 딱히 금지 구역이라 할 만한 곳이 없는데. 머리를 좀 굴려 봤지만 이렇다 하고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그나마 생각나는 곳이 한 군데 있긴 한데……. 혹시 거기인가? 예전부터 궁인들에게 가끔 관리만 받을 뿐, 다른 목적으로는 이용되지 않던 북서쪽의 토파즈 궁. 하지만 예전에 클로드랑 릴리에게 물으니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놀고 있는 궁이라고 하던데. “이 늙은이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선조 때만 금지 구역으로 취급받았을 수도 있지요.” 수장 할아버지도 모르는구나. 하긴, 그냥 고서에 나오는 기록이라고 하니까 진짜 그런 게 지금도 남아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는 거지. 그리고 다음 순간 수장 할아버지가 지나가듯 꺼낸 말에 나는 급격히 동요하고 말았다. “그곳보다 공주님. 늙은이의 주책없는 소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공주님의 부마로 루카스 님을 고려 중이신 건지요?” “부, 부, 부마라니요?” 나는 더듬거리면서 반문했다. “지난번에 띨띨이들에게 얼핏 들으니 루카스 님이 느닷없이 용을 포획해 온 것도 공주님께 구혼하기 위해서라고…….” 으악, 구혼은 무슨 구혼! 이 할아버지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아닙니까? 이 늙은이에게만 솔직하게 말씀을…….” “아니라니까요!” 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당황해서 그런지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당연하지! 구혼이라니? 부마라니? 누가? 루카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허허,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루카스 님이 안 계시니 하는 말이지만, 부맛감으로는 참하고 조신한 남자가 최고 아니겠습니까?” 본인이 없는 틈을 타서 수장 할아버지가 은근슬쩍 루카스의 흉을 보았다. 나는 약간 횡설수설하며 루카스와 나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한 뒤 수장 할아버지를 피해 도망치듯 검은 탑에서 빠져나왔다. 구혼이니 부마니,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그, 그리고 상대가 루카스라니,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거 아니야? 하여간 루카스 얘는 눈에 안 보여도 날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진짜, 요즘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막 빠져나온 검은 탑을 돌아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어째서인지 루카스는 지난 용 사건 이후로 근 일주일 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하도 모습이 안 보이길래 오늘은 내가 직접 탑에 오기까지 했는데! 수장 할아버지와 다른 마법사들에게 듣기로, 루카스는 그동안 탑에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까 황궁에 있지 않을 때 어디로 가야 루카스를 만날 수 있는지, 또 이놈이 평소에 뭘 하고 시간을 보내는지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루카스는 원하기만 하면 내 몸에 GPS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언제든 날 찾을 수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는 게 조금 불만스러웠다. 앗, 그런데 이러니까 꼭 내가 루카스에게 관심이 엄청 많은 것 같지 않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루카스에 대해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일주일 동안 나타나지도 않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흥. “토파즈 궁에나 가 볼까.” 나는 순간 이동을 써서 토파즈 궁으로 이동했다. 아까 수장 할아버지가 말해준 황궁의 금지 구역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장소였다.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성안은 소름이 끼치도록 적막했다. 클로드의 궁 역시 평소에 사람이 없어 조용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단순한 기분 탓일까? 지금 이곳은 그보다 조금 더 농도 짙은 묵직한 침묵으로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아주 작은 물살 한 점 없는 깊은 수중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내가 이곳을 고서 속의 금지 구역으로 추정한 이유로는 이 묘한 분위기가 가장 큰 영향을 발휘했다. 음, 평소에 이용하지 않는 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조용하네. 겉만 멀쩡한 폐허 같기도 하고. 또각또각. 사방이 너무 고요해서 나도 모르게 발소리를 줄이게 되었다. 그래도 대리석 바닥에 구두 굽이 부딪쳐 내는 소리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또각또각. 그 소리가 꼭 나를 뒤쫓아 오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고 말 정도의 적막감이었다. 나는 귀신 같은 건 안 믿는데…… 그, 그래도 여기 분위기가 생각보다 묘해서 왠지 모르게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긴 하다. 이 궁전을 사용하지 않은 지는 적어도 몇 대 이상이 지났다고 한다. 이전에 어떤 황족이 이 궁에 살았는지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몇 개의 방문을 열어 보니 내가 사용하는 에메랄드 궁 못지않게 내부가 화려해서 이대로 그냥 묵히기에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읍, 아마 어릴 때 이곳을 발견했다면 내 노다지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나는 아련한 눈빛으로 사방에서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여기에 마법 용품으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역시 수장 할아버지가 해준 말은 거품이었나. 하기야 고서에 나온 내용이라니까 그럴 것 같기는 했지만. 또 이 토파즈 궁이 고서 속의 금지 구역이라는 보장도 없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처음보다 관심이 한풀 꺾인 채로 궁전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곳은 누군가 침실로 사용했던 것 같은 토파즈 궁의 어느 방이었다. 궁인들이 평소에 관리를 열심히 하기 때문인지, 지금도 이곳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방은 무척 깨끗했다. 꼭 누군가가 금방 읽던 것처럼 탁자 위에 책까지 엄청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고 말이지……. “응?”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위화감에 멈칫했다. 적어도 몇백 년은 이 궁을 사용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뜬금없이 웬 책이지? 혹시 이곳을 청소하던 궁인이 휴식 시간에 보던 건가? 나는 그런 의문을 느끼며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책을 들어 올렸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이 책에서도 마법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하게도, 책의 표지에는 제목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새까만 표지를 확인한 뒤, 펼쳐져 있던 페이지를 보았다. “어라, 고어잖아?” 많고 많은 문자 중에 지금은 연구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는 고어라니, 특이하네. 궁인 중에 이걸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황실에 고용해야 하는 것 아니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고어를 해석했다. 어릴 때부터 손을 안 댄 공부가 없다 보니 이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펼쳐진 책에는 단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진정한 자신을 찾는 자만이 돌아와 성운(聖運)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웬 뜬구름 잡는 소리……. 화아악! 책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물건에 불과했던 책에서 갑작스럽게 요란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책에서 급히 손을 뗐지만 별다른 보람도 없이 나는 그 빛에 순식간에 집어삼켜졌다. 강렬하던 빛이 사그라진 것은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눈이 아려서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으앗, 내 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느닷없이 책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다니? 분명히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책이었는데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일까. 아무래도 이 책을 검은 탑에 가지고 가서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누, 누구…….”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토파즈 궁에서 터져 나오는 빛을 보고 온 궁인인가? “누구세요?” 그런데 ‘누구세요?’라니? 내 얼굴을 모르는 궁인은 없을 텐데? 나는 아직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비볐다. 눈부신 빛의 여파에서 벗어난 눈이 서서히 시력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뒤, 나는 두 눈을 의심하며 굳어버리고 말았다. 놀란 것은 내 맞은편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나처럼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라움과 경악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하얀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 위로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은 구불거리는 백금발. 당장에라도 굴러떨어질 듯 크게 떠진 눈동자는 놀랍게도 신비롭게 반짝이는 보석안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나랑 똑같이 생겼어……?” 마치 거울을 앞에 둔 것처럼,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소녀와 내가 똑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녀를 보며 나는 얼어붙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자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하지만 그곳은 내게 있어 낯선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은 내가 어릴 때 살던 루비 궁의 방과 지독히도 닮아 있었으니까. “당신은 누구예요?” 나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며 묻는 사람에게 다시금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채 가련하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설마……. 설마……? “당신, 아타나시아 공주?” 내 충동적인 물음에 소녀가 반응을 보였다. 그제야 설마 하던 내 생각이 단순한 착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책 속의 비운의 공주님. 제니트가 여주인공이던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아타나시아였다. ======================================= [외전 8화] 루카스는 조금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어디에 있는 귀찮은 사람 때문에 일주일이나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해 버렸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 귀찮게 굴 것 같은데 그냥 평생 잠들어 있게 만들어주고 올 걸 그랬나?” 그는 쯧 혀를 차며 혼잣말을 했다. 지금까지 루카스를 붙잡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카락스였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골골거리던 카락스는 아주 질기게도 살아서 루카스를 성가시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평소 같으면 한 번 뻥 걷어차 주고 그냥 무시했겠지만 오늘내일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굴면서 죽기 전의 마지막 소원이니 뭐니 해대는 놈을 완전히 외면하기도 좀 그랬다. 하지만 일주일이나 이렇게 찰거머리처럼 굴 줄 알았다면 그도 생각을 달리했을 것이다. 지금도 루카스는 카락스의 간당간당한 목숨줄을 아예 끊어주고 올 걸 그랬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게다가 이 간 큰 놈은 그의 일에 건방지게 훈수를 두기까지 했다. ‘너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여자가 금방 질린다’느니, ‘너는 밀고 당기기라는 것도 모르냐’느니 하며 아는 척을 해대지를 않나. 사실은 그 말에 솔깃했던 주제에 루카스는 그런 적이 없는 것처럼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는 마법을 이용해 장소를 이동했다. 루카스가 이렇게 먼저 만나러 갈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여긴 또 어디야?” 하지만 다음 순간 시야에 들어온 낯선 방의 풍경에 루카스는 미간을 좁혔다. 평소 아타나시아의 행동반경쯤은 모조리 꿰고 있는 루카스였기 때문에 눈앞에 나타난 낯선 풍경에 의아해졌다. 에메랄드 궁에 있는 다른 방인가? 하지만 그렇다 치기에는 지금 이곳에 고인 공기가 어쩐지 묘했다. 그렇게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을 살피던 루카스의 시선이 마침내 카펫 위에 떨어진 책에 못 박혔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이 책에서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의 마력이 느껴지는 거지? 루카스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있는 책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적혀 있는 고어를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 냈다. [진정한 자신을 찾는 자만이 돌아와 성운(聖運)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책 속의 글귀를 읽은 루카스가 짜증스럽게 읊조렸다.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대신에 웬 수상쩍은 책에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이 영 거슬렸다. 루카스는 책을 좀 더 조사해 볼 생각으로 손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화악! 바로 그다음 순간, 눈부신 빛이 눈앞을 온통 희게 물들였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뜰 정도의 짧은 시간이 지났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그가 감각을 잃었을 뿐, 아주 긴 시간이 지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루카스는 아까보다 더욱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새하얀 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주위는 온통 깜깜한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히 마력이라고는 병아리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책이었는데? 그런데 이 빌어먹을 종이 쪼가리가 갑자기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지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다. 그 망할 종이 쪼가리, 돌아가면 재조차 안 남게 불살라 버려야지. 루카스는 바드득 이를 갈며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마치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루카스의 눈매가 한순간 움찔거렸다. “불쌍한 아이로구나.” 고요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음성은 작은 속삭임에 불과했지만 수천 년 동안 고여 있던 거대한 대양처럼 묘하게 웅장하고 깊은 울림을 냈다. “너는 내가 한심할지 모르지만 나는 네가 가엾다.” 루카스는 어느덧 짙은 어둠에서 벗어나 저물어 가는 석양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탑의 꼭대기였다. 조금 전까지 밀폐된 황궁의 방 안에 있던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그는 날카로운 바람이 밀려드는 첨탑 위에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네가 온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기실 너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핏빛 노을로 붉게 물든 시야, 바람 소리를 뚫고 귓가에 흘러드는 건조한 속삭임, 또 지는 해를 배경으로 한 채 그를 등지고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 그 모든 광경이 지독히도 익숙했다. 다음 순간, 하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를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까지도.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많은 세상에 너 혼자만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살아가다가, 결국은 빈손으로 죽을 테니 이 얼마나 가여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카스의 머릿속에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웃기지 마.” 사방에서 몰아치는 싸늘한 바람 사이로 차게 벼려진 미소가 피어올랐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잖아.”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벌써 오래전에 죽어 없어진 사람이었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린 끔찍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반칙이 아닌가? “하긴, 상관없나.” 루카스는 마주한 남자를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접으며 시리게 웃었다. “꿈이든 환상이든 살아 있다면 다시 죽이면 그만이니까.” 그때까지도 남자는 모든 것을 초월한 얼굴로 미동 없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곧 루카스의 손이 그런 남자에게로 거침없이 뻗어졌다. * * * “헉,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조금 전 빠져나온 루비 궁을 바라보며 아직도 거세게 벌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꼭 판에 찍은 것처럼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마주하고 있던 기분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했다. 도플갱어를 본 기분이 이러할까? 하지만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당신, 아타나시아 공주?’ 왜냐하면 그녀는 단순히 나와 닮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아타나시아라고 했으니까. ‘맞아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예요? 어떻게 갑자기 내 방에 나타난 거죠? 게다가 왜 나랑 그렇게 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당혹과 놀라움, 또 불안과 공포 등으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던 그녀였으나 한 번 입을 열고 나자 내게 이런저런 질문 폭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하.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그녀에게 수면 마법을 걸고 도망쳤다! 으, 으앙!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위급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 나도 모르게 그만……. 하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나한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잖아? 아까는 그녀를 보고 무심코 <사랑스러운 공주님> 속의 아타나시아를 떠올렸지만 말이 돼, 그게? 그럼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그 책 속의 세계라는 거야, 뭐야? 아, 아니…… 그걸로 치면 이미 나는 이미 그 책 속에 들어와서 아타나시아 공주가 되어 있는 거니까 꼭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도 할 수 없지만. 나는 다시금 루비 궁에 두고 온 소녀를 떠올리며 동공을 흔들었다. 수면 마법을 걸어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은 아무리 이리저리 몇 번을 뜯어 보아도 내 얼굴과 너무 똑같았다. 심지어 팔에 있는 점 위치까지 똑같았다고!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한번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겨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에메랄드 궁에 가 보는 것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본능적인 감이 이번 일을 가벼이 넘기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일단 내가 루비 궁으로 이동되기 전에 토파즈 궁에서 만졌던 그 이상한 책도 수상했고 말이다. 에메랄드 궁의 내 침실은 불이 꺼져 깜깜했다. 내가 토파즈 궁에 있을 때가 한낮이었으니 만약 그때부터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궁 안은 발칵 뒤집혔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느낀 것이지만 황궁 안은 아주 조용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내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니트였다. 그녀는 원래부터 이 방의 주인이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으로 잠이 들어 있었다. 뭐야? 진짜야, 이거? 꿈 아니고, 정말 현실이야? 나는 손을 들어 찰싹 내 뺨을 때려 보았다. 그런데 아팠다. 그럼 이게 정말 실화라는 거잖아?! 너무 황당하고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루비 궁에 있는 나와 똑같이 생긴 소녀와 에메랄드 궁에 있는 제니트라니. 나는 어둠 속에서 제니트의 얼굴을 망연히 내려다보다가 방 안의 모습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듯 낯선 방 안의 풍경에 이내 침묵했다. 방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알려 주듯 구조 외에는 내 기억 속의 방과 동일한 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웃기는 일이었다. 분명 이곳은 내가 사용하던 에메랄드 궁의 내 침소인데, 방의 주인이 내가 아니면 누구라는 거지? 나는 다시 한번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제니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쏴아아. 곧 장소가 바뀌고 시야에 은은한 달빛이 번졌다. 하얀 달빛을 받아 한결 더 신비로운 느낌을 풍기는 보라색 꽃이 사방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가넷 궁의 후원이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익숙한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었다. 시야에 비친 그 풍경이 몹시 낯익었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내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스락. 그러다 풀잎을 밟으며 낸 소리에 클로드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입을 벌려 그를 부르려고 했다. “지겨운 계집이로군.” 하지만 다음 순간 날아와 꽂히는 차디찬 목소리에 결국은 아무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낮에 꺼냈던 허튼소리를 다시 지껄일 생각이거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앞으로 수십, 수백 번을 그렇게 구차하게 매달려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역시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 다시 한번 말해주지.” 클로드는 내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그 어느 때보다 섬뜩한 냉정함을 담아 말했다. “나는 이제껏 너를 단 한 번도 내 딸이라 여긴 적이 없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니 더는 이런 식으로 질리게 굴지 마라. 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니.” 그러고 그는 자신의 말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든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곧바로 내게서 뒤돌아섰다. 나는 멀어지는 클로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지만, 사실상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아빠의 뒷모습을. “허, 참.”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입으로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 [외전 9화] 어쩌면 나는 루비 궁에 있는 또 하나의 아타나시아와 에메랄드 궁에서 잠들어 있던 제니트를 보고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다행스럽게도 저런 클로드의 모습에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한테 저렇게 막말을 하는 걸 보면 진짜 우리 아빠가 아니란 거잖아.”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밤하늘은 늘 보아 오던 것이었는데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척이나 낯선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시 장소를 이동해 황궁의 곳곳을 살펴보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클로드가 나를 위해 지어주었던 내 개인 도서관도, 언제나 색색의 장미가 만개해 있던 화원들도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에메랄드 궁의 정원에 핀 꽃도 하루아침에 장미가 아닌 다른 꽃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리고 에메랄드 궁에 나와 함께 살고 있던 녹스와 파랑이도 없었다. 릴리 역시 에메랄드 궁이 아닌 루비 궁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나와 세스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조차 없었고, 필릭스는 아까 후원에서 클로드의 옆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다가 클로드가 떠날 때 내게 한차례 고개 숙여 보인 뒤 조용히 그 뒤를 쫓았다. 무엇보다도 루비 궁과 에메랄드 궁에서 각기 잠들어 있는 아타나시아와 제니트. 그리고 나를 향해 온기 한 점 없는 싸늘한 목소리로 ‘너를 단 한 순간도 내 딸이라 여긴 적이 없다’고 말했던 클로드까지. 그렇게 이상한 점을 하나씩 되짚어 확인할수록 혼란했던 머릿속이 서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이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보았던 수상한 책. 그 안에 있는 이상한 글귀를 읽자마자 책에서 퍼져 나가던 하얀 빛은 분명 마력에 의한 작용이었다. 이쯤 되면 어지간히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 이곳이 내가 살고 있던 세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투명화 마법을 몸에 걸고 루비 궁을 관찰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간밤에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루비 궁으로 이동되기 직전에 들고 있던 책을 찾으려고 토파즈 궁을 뒤져 봤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자칭 아타나시아라고 하는 소녀의 방에 책을 떨어뜨리고 나온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다시 루비 궁으로도 가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내 수면 마법으로 강제 취침 중인 소녀만 있을 뿐, 역시 내가 찾고 있는 책은 없었다. “공주님, 어쩐지 안색이 안 좋아 보이세요.” “아…… 그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는 소녀를 보고 남몰래 몸서리쳤다.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어서 그런가.” 으악, 이렇게 대낮에 보니까 더 소름이! 예전에 루카스가 마법으로 나랑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었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그건 스스로의 의지가 없는 인형이었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진짜 생동감이 넘치는 사람이라 그런가? “이상한 꿈이요?” “응,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오는 꿈이었어.” 아무래도 그녀는 어젯밤의 일을 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어제의 만남이 있었던 직후 내 수면 마법 때문에 곧바로 잠이 들어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도 너무 현실처럼 생생해서…….” “요즘 피곤하셔서 그런가 봐요. 오늘은 푹 쉬시는 게 좋겠어요.” 나와 똑같이 생긴 소녀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말꼬리를 흐리자, 그 앞에 있던 사람이 그런 그녀를 위로하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소녀도 곧 여트막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응, 그래야겠어. 고마워, 릴리.” 그녀의 옆에 있는 사람은 바로 릴리였다. 나는 오순도순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괜히 울컥했다. 릴리는 우리 릴리인데! 원래 릴리가 저렇게 신경 써 주고 챙겨 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아무리 나랑 똑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저렇게 릴리와 사이좋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서서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꼭 옆집 애한테 엄마를 빼앗긴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저 여자애 말이야! 진짜 ‘또 다른 나’인 거냐고? 이것저것 따져 보면 저 여자애는 왜인지 <사랑스러운 공주님> 속의 아타나시아가 맞는 것 같은데……. 그럼 제니트가 에메랄드 궁에 있는 대신 나랑 똑같이 생긴 애가 루비 궁에 살고 있고, 또 릴리가 나를 대하듯이 저 애한테 다정하게 굴고, 게다가 클로드가 어젯밤 나를 그렇게 쌀쌀맞게 대한 것도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긴 하는데 말이지! 그래도! 이거 뭔가 은근히 열 받잖아?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나인 것 아니야? 그런 의심을 품고 어젯밤에 그랬듯 다시 한번 양손을 들어 뺨도 때려 보고 또 허벅지도 꼬집어 봤지만 역시 아팠다. “그럼 공주님, 이제 아침 식사를 준비할게요. 요즘 식사량이 준 것 같아서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들로만 준비했으니 오늘은 많이 드셔 주세요.” 내가 그러는 동안에 스스로를 아타나시아라 칭했던 소녀는 방에서 혼자 아침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번에는 에메랄드 궁으로 이동했다. “어머, 공주님. 그 꽃은 뭔가요?” 에메랄드 궁은 루비 궁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조금 전에 내가 다녀온 루비 궁이 어딘가 정적이고 조용한 분위기였다면, 에메랄드 궁은 아주 밝고 활기찬 느낌이었다. “아바마마께 드릴 선물이에요.” 나는 태양처럼 샛노란 꽃을 품에 안고 웃는 제니트의 얼굴을 보고 한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사용하던 궁전에 있는 제니트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식사 자리에 가져다 놓으려고 하는데…… 아바마마께서 좋아하실까요?” 제니트가 약간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궁인 중 한 사람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공주님의 선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전부 좋아하실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아까보다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그보다 공주님, 말씀을 편하게 해주세요. 저희 같은 것들에게 말씀을 높이시면 안 됩니다.” “아, 알피어스에 있을 때부터 이런 말투가 입에 배서 저도 모르게……. 하지만 벌써 3년째 제 생활을 돌봐 주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제가 존중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제니트의 말에 주위에 있던 궁인들의 얼굴에 감동이 떠올랐다. 일국의 공주이면서도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 주는 그녀에게 감격한 눈치였다. 3년째 생활을 돌봐 주고 있다면, 지금 제니트의 나이가 17살인 건가? 책의 내용대로라면 그녀는 14살에 데뷔당트를 치른 뒤 궁에 들어오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 후에 한동안은 손님용 별궁인 사파이어 궁에 머물다가 클로드의 총애를 받아 이 에메랄드 궁을 하사받은 것이지만 말이지. 게다가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루비 궁의 아타나시아가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나이는 아직 18살이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꽃을 품에 안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제니트의 뒤를 쫓았다. 그녀가 향한 곳은 이미 그들의 대화에서 짐작했듯이 클로드가 있는 가넷 궁이었다. “아바마마!” 커헉. 복도의 한쪽에 서 있는 클로드에게 밝은 얼굴로 달려가는 제니트를 보고 나는 그만 혀를 깨물 뻔했다. “왔느냐?” 그리고 그런 제니트를 무심히 반겨 주는 클로드를 보고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오늘도 좋은 아침이죠? 이건 선물이에요.” 머리로 생각만 하고 있던 광경을 직접 내 두 눈으로 목격한 놀라움은 예상보다 컸다. 이미 어제 클로드를 만나 확인한 것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제니트를 대하는 것을 보니 감회가 또 어제와 달라졌다. “어제저녁에 화원에 갔더니 꽃이 예쁘게 피었더라고요. 아바마마께도 보여드리고 싶어서 오늘 아침 일찍 화원에 들러 제가 직접 따 왔어요.” 제니트가 한 마리의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며 클로드에게 꽃을 내밀었다. 그러자 클로드의 시선이 제니트의 손에 들린 노란 꽃에 닿았다. “꽃이라. 별 선물을 다 받아보는군.” 곧 그가 꽃다발을 받아 들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제니트를 향한 클로드의 눈빛은 어젯밤 나를 보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했다. “꼭 제니트 공주님처럼 화사하고 예쁜 꽃이군요. 기쁘시겠습니다, 폐하.” 클로드의 옆에 서 있던 필릭스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내가 목도한 모습이 평범한 일상인 것처럼 세 사람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곧 이어진 식당에서의 광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밝은 얼굴로 재잘거리는 제니트와 그런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클로드를 보며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 제니트가 무척 행복해 보여서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가짜 탑의 마법사인 카락스에게 부탁해 보석안을 없애고 황궁을 떠나던 제니트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지금 내 시야에 들어온 클로드 역시 무심한 듯 온기 어린 눈빛으로 제니트를 보고 있어서 마음이 무척 싱숭생숭해졌다. 지금 루비 궁에서 홀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아타나시아를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아,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하지?” 결국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괜히 체한 것 같은 기분으로 가넷 궁을 빠져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배가 조금 고팠는데 지금은 뭘 잘못 먹고 속이 얹히기라도 한 것처럼 갑갑했다. 그리고 어쩐지…… 막 뭔가를 쥐어뜯고 싶기도 하고 발로 걷어차고 싶기도 한, 그런 기분인데……! “그래, 그 책을 찾아야 해!” 나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나 마찬가지인 수상한 책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오갈 데 하나 없는 신세나 마찬가지였으니 눈앞이 깜깜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이대로 두 번 다시 원래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재수가 없으니 하지 않기로 했다. [진정한 자신을 찾는 자만이 돌아와 성운(聖運)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오,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아무래도 내가 이런 꼴에 처해 있게 된 것과 그 책에 적혀 있던 내용이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진정한 자신을 찾아라? 성운을 차지한다? 어젯밤부터 저 문장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떠오르는 것은 수장 할아버지가 내게 해준 말이었다. ‘예전부터 풍문으로 돌던 이야기입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 차기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만든 마법 용품이라고 하더군요.’ ‘고서에도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그 마법 용품이 무척 신묘하여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자를 스스로 가려냈다고 합니다.’ ‘그 후 몇 세대 후의 황족이 황궁의 금지 구역에서 그 마법 용품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저 말을 듣고 내가 호기심에 황궁의 금지 구역으로 추정되는 토파즈 궁에 갔던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하필이면 그곳에서 수상한 책을 발견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거지. 그럼 혹시 저 책이 수장 할아버지가 말해준 고서 속의 마법 용품일 수도 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탑에 들어가서 수장 할아버지를 한번 닦달해 볼까? 하지만 만약 내가 짐작한 대로 지금 이곳이 <사랑스러운 공주님>의 세계가 맞다면, 아마 이곳의 아타나시아와 수장 할아버지 사이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아타나시아 공주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으니까. ======================================= [외전 10화] 물론 이게 진짜 그 소설 속의 세계인지, 아니면 단순히 실제처럼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환영이나 꿈일 뿐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지. 그래서 일단 나는 토파즈궁에 가서 다시 그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하지만 몇 시간 동안 눈에 불을 켜고 궁 안을 들고 엎어도 책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해가 저물 무렵, 결국 나는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슬슬 배도 고프고 또 어제 꼴딱 밤을 새워서 그런지 꽤 피곤하기도 했다. 나는 마법으로 소환한 사과를 우물거리며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식욕은 남아 있다니, 삶이란 무엇일까요? 만약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내 원래 세계의 시간도 똑같이 흐르고 있다면 다들 엄청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러니까 초대 황제가 만든 마법 용품 따위에는 쓸데없이 왜 관심을 가져서. 앞으로는 절대 아무 책이나 함부로 만지지 않을 테다! 처음에는 분명히 수상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느껴지는 평범한 책이었는데, 그게 다 낚시질이었다니. 난 당연히 마력이 느껴지는 물건만 조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으흑. 하지만 자괴감을 느끼며 땅을 파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역시 그 책에 적혀 있던 문구를 해석하는 게 관건인 것 같은데. 그나저나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확실히 여기, 공기가 묘해.” 나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궁전의 복도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슬쩍 뒤돌아보자 노을에 붉게 물든 복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쩐지 귀신이 나오기에 딱 좋아 보이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내가 어릴 때 살던 루비궁만 으스스하고 음침한 줄 알았더니, 이렇게 해질 때 보니 토파즈궁도 꽤……. “응?” 그러다 문득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 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 게다가 곡 선정이 묘하게 익숙한 것이……. 혹시 오늘 황궁에서 연회가 열리나? 그러고 보니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바깥공기가 다소 산만한 것 같기도 했어. 그런데 왠지 느낌이 다른 때보다 좀 성대한 연회가 열린 것 같은데. 도대체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그러지? 나는 상황을 잠깐만 보고 오기로 결정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폐하의 탄신연회가 갈수록 성대해지네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좀 더 형식적인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제니트 공주님이 오신 뒤로 더 화려해진 것 같죠?” “듣기로는 작년부터 제니트 공주님께서 폐하의 탄신연회에 각별히 신경 쓰고 계신다고 해요.” 연회장 안은 역시나 화려하게 꾸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앗, 그런데 오늘이 클로드의 생일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연회가 크게 열렸구나. 그나저나 역시 다들 클로드랑 제니트 얘기뿐이네. 하긴 이쪽에서는 제니트가 총애받는 공주이니 당연한가. 윽, 그렇게 생각한 순간 왜인지 조금 속이 쓰렸다. 아무래도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내 기분이 더 싱숭생숭해질 것 같다. 아, 그런데 혹시 내가 찾던 책이 토파즈궁 말고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럼 연회로 궁 안이 산만한 틈을 타서 다른 궁전을 한번 뒤져 볼까? 그런 생각에 나는 연회장을 나섰다. “탄신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아바마마.” 그리고 연회장 안쪽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복도에서 그와 그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 명은 클로드였고, 한 명은 나랑 얼굴이 똑같은 여자애……. 에잇, 그냥 편의상 아타나시아라고 하자. 어쨌든 저 여자애가 자기 스스로를 소개할 때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이 세계의 아타나시아는 클로드와 함께 있었다. 보아하니 클로드가 연회장에 들어서기 전에 그를 만난 것 같았다. 물론 미리 오순도순 사이좋게 약속을 해서 만난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아타나시아가 먼저 생일 축하 인사를 하고 싶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런데 그녀는 상당히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끙, 나랑 똑같은 얼굴로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참 기분이 이상하구먼. 그런 그녀를 잠깐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클로드가 다음 순간 지나가듯 말했다. “생각보다 낯이 두껍군.” 엇,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클로드와 만난 건 나였는데. 분명 그는 나를 저 아타나시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 아마도 나랑 만나기 전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그럼 지금 저 말은 어제 두 번이나 자신이 매몰차게 대했는데도 다시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에 대한 반응인 듯했다. 클로드의 서늘한 속삭임에 소녀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부족하지만 탄신일 선물을 준비했는데…….” 하지만 클로드는 그녀를 향해 냉랭히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사라지는 것이 내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그 순간 나는 흠칫해서 입을 벌렸다. “그런…….” 하지만 가냘프게 떨리는 음성은 내가 아닌 다른 아타나시아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클로드의 말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은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봤을 때도 저 아타나시아는 애써 용기 내 클로드에게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런 그녀에게 저런 말은……. “폐하.” 뒤에 그림자처럼 서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필릭스가 말리듯 클로드를 불렀다. 픽릭스는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다소 심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쪽의 필릭스는 아타나시아와 그다지 친하지 않은지 그녀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아바마마!” 바로 그때, 누군가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밝은 목소리가 귓가에 번졌다. 그 소리에 반응해 클로드가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렸다. “제니트.” 나는 어느덧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풀린 클로드의 얼굴을 보고 착잡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필릭스의 얼굴에도 한순간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제니트가 와서 더 이상 클로드와 아타나시아가 단둘이 있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그가 제니트의 등장 이후 아타나시아가 지은 표정을 보았다면 그런 눈빛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아침에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탄신일을 축하드려요. 제가 아바마마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는데 받아주시겠어요?” “아침의 꽃으로 충분하다 했는데도.” “오늘 같은 특별한 날에 어떻게 그래요?” 클로드를 향해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제니트가 잠시 후 그의 뒤에 서 있던 소녀를 발견했다. “어머, 아타나시아. 거기에 있었군요. 미안해요, 마음이 들떠서 미처 보지 못했어요. 잘됐네요. 우리, 연회장까지 같이 가요.” 제니트의 권유를 받은 순간 아타나시아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녀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클로드에게 향했다. 아마 조금 전 그에게 들은 말을 떠올린 것 같았다. 클로드는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아타나시아가 가까스로 목이 졸린 것 같은 음성을 내뱉었다. “아니, 아니에요. 저는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래서 인사만 드리러 잠시 왔던 거예요.” “어머, 그래요? 그러고 보니 안색이 별로 좋지 않네요. 루비궁으로 궁의를 불러야겠어요.” “괜찮아요. 그저 돌아가서 조금 쉬면 돼요.” 제니트는 끝내 아쉬운 듯했지만 아타나시아의 창백한 얼굴 때문인지 더 권하지는 못 했다. “그럼 아바마마…….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를. 다시 한번 탄신일을 축하드립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조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폐하, 제가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배웅해 드리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 모습이 영 눈에 밟혔는지 필릭스가 클로드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하지만 클로드는 그렇게 일갈한 뒤 뒤돌아섰다. 결국은 필릭스도 클로드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혼자 연회장을 떠난 아타나시아가 계속 신경 쓰이는지 그의 시선은 종종 뒤를 향했다. “필릭스, 너무 걱정 마세요. 연회가 끝나면 제가 그녀에게 가 볼 테니까요.” “아, 공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도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아니에요, 저도 아타나시아가 걱정되는걸요.” 제니트의 말에 필릭스의 얼굴이 확연히 밝아졌다. 제니트는 그런 필릭스를 향해 한 번 웃어 보인 뒤, 종종걸음으로 앞서 걷는 클로드에게 다가갔다. “아바마마, 걸음이 너무 빨라요.” “네가 느린 것이겠지.” “그럼 저를 위해서 조금만 천천히 걸어주세요. 전 아바마마 옆에서 걷고 싶단 말이에요.” 제니트가 살며시 팔짱을 끼면서 하는 말에 클로드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그런 그를 향해 제니트가 방긋 웃었다. 그들은 아까보다 확연히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연회장에 입장했다. * * * “어머, 공주님?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오신 거예요?” 한편 루비궁에 돌아온 아타나시아의 분위기는 그들과 천차만별로 달랐다. 연회가 막 시작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궁에 돌아온 소녀를 향해 릴리가 물었다. 그러자 아타나시아가 얼굴에 미소를 그려 보이며 대답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는데 아바마마께서 그만 쉬는 게 좋겠다고 걱정해 주셔서……. 그래서 아쉽지만 다시 돌아왔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릴리도 그녀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느꼈는지 잠시 동안 말없이 눈앞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릴리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연스럽게 자신의 동요를 감추며 아타나시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셨군요. 몸이 안 좋으시다니 걱정이네요. 어젯밤에 잠을 설치셔서 그런 걸까요? 오늘은 일찍 쉬시는 게 좋겠어요.” 그 후 릴리는 직접 아타나시아의 목욕 시중과 옷 시중을 들고, 또 방으로 돌아간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내준 뒤, 심신의 안정에 좋다는 향기로운 초에 불을 붙인 채 방을 나섰다. 그녀가 떠난 후로도 방은 한동안 조용했다. “흐윽…….” 침묵으로만 가득 차 있던 방 안에 작은 흐느낌이 퍼지긴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귓가에 번지는 서러운 울음소리에 어쩐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으앙, 나 좀 집으로 보내줘어어어!” 잠시 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적막한 갈대숲에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클로드, 이 나쁜! 나쁜……! 자기 딸한테 진짜 너무한 것 아니야? 저렇게 막 싸늘하게 쳐다보고! 냉담하게 말하고! 자기 생일 파티에 온 딸의 면전에서 네가 사라지는 게 선물이라는 소리나 하고! 그래놓고는 제니트랑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보이지를 않나! 으악, 진짜 속 터져서 못 살겠다! 도대체 난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야? 누가 대답 좀 해주세요, 네?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잔뜩 담아 별이 총총히 떠 있는 밤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리며 장렬히 소리쳤다. “나 돌아갈래애애에!” 머리 위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디로?” 그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빛을 발하는 붉은 눈동자가 내 눈길을 옭아맸다.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데?” 언뜻 장난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맴돌았다. 달빛 아래에서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별을 품은 밤하늘처럼 흩날렸다. “루카스?” 나는 무심코 입술을 벌려 그의 이름을 소리 내 불렀다. ======================================= [외전 11화] “불쌍한 아이로구나.”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루카스는 슬슬 짜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구겼다. “상황 참 지랄 맞네, 진짜.” 누군가 공들여 만든 환영이라 하기에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현실처럼 지독히도 생생했다. 그러니 아마도 루카스 자신에게서 파생된 기억의 잔해가 아닐까 싶은데……. “너는 내가 한심할지 모르지만 나는 네가 가엾다.” 설령 그렇다 한들 이렇게까지 구체적일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 같잖은 소리를 하도 많이 들었더니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외울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이 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는 것뿐이라면 그나마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똑같은 사람, 똑같은 장면을 봐야 하는 것이 지겹기 짝이 없었으니까. “너는 네가 온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기실 너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루카스는 귓가에 울리는 잡소리를 흘려들으며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몇 번인가 마법을 이용해 봤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죽일 수 없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많은 세상에 너 혼자만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살아가다가, 결국은 빈손으로 죽을 테니 이 얼마나 가여운지.” “시끄러워, 이 잡귀야.” 루카스는 귓가에 메아리치는 음성에 심기가 불편해져서 중얼거렸다. 마치 귀신을 상대하듯 남자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마치 뿌연 안개 속에 손을 넣어 휘젓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루카스가 내보내는 마력도 그대로 남자를 관통한 뒤 사라졌다. 비단 남자한테만 그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루카스는 이 현상을 깨뜨리려고 여러 방법을 사용해 봤지만 결국은 어김없이 몇 번이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광경을 봐야만 했다. 심지어 순간 이동을 이동해 장소를 바꾸려 해봐도 정신을 차리고 나면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벌써 여러 차례 난동을 피웠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카스는 다른 방법을 궁리하기로 하고 자리에 털썩 앉아 남자를 노려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눈앞에 있던 남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제 곧 장면이 바뀔 차례였다. 루카스의 앞에 반복되는 이 빌어먹을 장면은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 한 개가 아니었다. 휘이잉. 바람결에 흩날리는 하얀 머리칼이 꼭 비상하는 새의 깃털 같았다. 루카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여전히 자리에 누운 채로 남자를 등진 순간, 붉은 해가 지던 하늘이 시린 새벽빛으로 물든 하늘로 바뀌었다. “언젠가 너도 나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루카스는 등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 따위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시야가 차단되었을 뿐, 귓가에 흘러드는 목소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을 때까지 네가 이해하지 못했으면 싶기도 하구나.”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 사이로 모래알이 흩어지는 것 같은 자그마한 소리가 번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지만 그 뒤의 말은 아무래도 듣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루카스는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하지만 그 말은 다른 그 어떤 말보다도 또렷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루카스는 참지 못해 실소하고 말았다. 이제는 더 이상 생에 아쉬운 것도 미련도 없다는 듯, 혼자서만 홀가분하게 지껄이는 그 말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앞에서 죽어가는 남자를 제 손으로 다시금 죽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던 그런 때가 있었다. “진짜 웃기지 말라고…….” 작게 읊조리는 소리가 바람에 쓸려 사그라졌다. 루카스는 마음을 바꾸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비참한 최후를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바닥에 앉아 고개를 돌리자 허공에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있는 새하얀 가루가 시야에 비쳤다. 남자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다만 바람에 날리는 먼지 같은 하얀 재가 눈부신 새벽빛에 부서진 햇살 조각처럼 반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루카스는 어느덧 어린아이의 몸으로 변해 있었다. 오래전, 남자가 그의 눈앞에서 죽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새하얀 재가 흩날리는 하늘 아래에서 다시금 몸을 눕혔다. 이 빌어먹을 경험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해야 벗어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어쩐지 모두 다 귀찮았다. 루카스는 지독한 권태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야는 또다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로구나.” 잠시 후, 그의 두 귀에 조금 전 재가 되어 사라진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끝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또 한 번의 시작. 그 사실이 그렇게 지긋지긋할 수가 없었다. * * * “루카스?” 나는 무심코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소리 내 읊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놀란 탓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달빛 아래에서 한결 더 요사스러운 빛을 내는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흐응, 너 내 이름을 알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은 ‘그 루카스’가 아니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는데도 나는 마음속에 실망감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아무리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루카스가 아니었다. 지금 황궁에 있는 클로드가 내 아빠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난 널 처음 보는데, 넌 날 알고 있네?” 게다가 아마도 이 세계에서 루카스와 아타나시아는 아직 만난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소설 속에서도 루카스는 등장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만약 루카스가 책 속의 주요 인물들과 접점이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았을까? “신기하네. 난 최소한 10년은 탑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는데, 날 어떻게 아는 거지?” 어쨌든, 나는 뜻하지 않게 이 세계의 루카스의 흥미를 끌어버린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난 그냥 혼자 갈대밭에 와서 속에 쌓인 것을 풀어놓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나타난 건 이 녀석이잖아? 아니, 여기서 아타나시아랑 아는 사이도 아니라면서 왜 불쑥 나타나서 아는 척을 하고 그런대요? 그나저나 여기서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그냥 ‘무슨 말씀이시죠? 전 그쪽의 이름을 모르는데요. 아마 잘못 들으셨나 봐요, 호호호’라고 말하고 튈까? 아니면 사실대로 ‘난 다른 세계의 너를 알고 있어!’라고 말해버려? 악, 그런데 왠지 저거 좀 ‘도를 믿습니까?’의 새로운 버전 같지 않아? “그리고 이 마력.” 그렇게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루카스가 허공에서 내려와 소리 없이 지면을 밟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사이에 서 있는 그는 당장에라도 허공에 흩어질 것 같은 흐릿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이 강렬한 존재감은 여전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 마력이랑 파장이 굉장히 비슷한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랑 자기랑 혈연관계도 아닌데 마력이 비슷하긴 왜 비슷해? “저기, 일단 좀 떨어져 줄래…… 요?” 어쨌거나 루카스가 나한테 다가와 내 몸을 요리조리 훑어보기 시작하는 바람에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더듬거리며 그에게 말하자니 곧 루카스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라, 이상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내뱉은 말에 나는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예전에 내가 훔쳐 먹은 신수랑 마력이 똑같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예전에 뭘 훔쳐 먹었다고? 신수……? 신수라고? 그러고 보니까 너와 나의 첫 만남은 네가 우리 까망이를 납치해 가려고 황궁에 와서……. 바로 그 순간 나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입을 벌렸다. 서, 설마 이 자식! 머, 먹었냐? 진짜 먹은 거냐……?! 우리 까망이를?! “너 우리 까망이 먹었어?!” “까망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친 내 소리에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그러니까, 설마 네가 먹었다는 게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까만 신수냐고?” 그러자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루카스가 이내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생김새였던 것 같기도 하고. 벌써 10년은 지난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맞는 것 같은데. 이놈의 신수 씨가 말랐는지 도통 보이지를 않아서 찾느라 꽤 애먹었단 말이지.” 쿠콰콰쾅! 루카스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참지 못해 버럭 소리 지르고 말았다. “야, 이 나쁜 자식아! 네가 뭔데 우리 까망이를 먹어!” 으엉, 으어엉! 으어허엉! 저놈이, 저놈이 우리 까망이를 잡아먹었어! 물론 원작의 아타나시아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데 나한테 마력의 결정체인 신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리고 루카스가 틈만 나면 까망이를 먹는다 만다 하면서 협박했던 것도 그렇고. 또 애초에 저놈이 까망이를 훔치러 황궁에 왔다는 사실까지 내심 찜찜하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서 사실은 ‘혹시 원작에서는 저놈이 까망이를 먹어서 아타나시아가 마법을 못 썼던 것 아니야?’ 하는 의심을 품은 적도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진짜라니! 진짜라니! 이렇게 직접 저 잔인무도한 사실을 루카스의 입으로 확인하게 되니 이만저만 정신적인 타격이 큰 게 아니었다. 으아앙, 까망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으앙! “뭐야, 너 그 신수 알아? 게다가 이름이 까망이라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텐데 신수에 쓸데없이 이름을 왜 붙여?” 그렇게 내가 멘붕에 빠져 있을 때, 루카스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세계의 루카스라고 해도 역시 루카스는 루카스인 모양이었다. 저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내가 아는 루카스도 예전에 까망이를 대하는 내 태도를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까망이는 까망이니까 까망이지!” 나는 또다시 그런 루카스에게 발끈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이 루카스 놈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내 마력의 출처를 추측하느라 바빴다. “그 보석안이나 마력의 파장을 보면 오벨리아의 황족인 건 확실하고. 그럼 내가 먹은 신수가 네 거야? 아닌데, 그럴 리는 없는데. 그럼 지금 너한테 그런 마력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그렇겠지, 네가 먹었으니까! 나는 다시금 화르륵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루카스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듯이 나를 보며 혼잣말을 주절거렸다. 내 정체를 알 듯 말 듯해서 약간의 흥미와 짜증이 동시에 생기는 모양이었다. ======================================= [외전 12화] “날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렇게 혼자 중얼거린 루카스가 나한테 물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내가 말해주면 네가 알아?” 하지만 흥 칫 핏이다, 이놈아! 나는 눈앞에 있는 제2의 루카스를 비웃으며 코웃음을 쳐 주었다. 까망이를 잡아먹은 놈과 도모할 친분 따위는 없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루카스가 다음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곧이어 그가 입가에 그려 보이는 얄쌍한 미소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앗, 잠깐! 저건 이놈이 사고 칠 때 짓는 미소인데? 나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뒷걸음질 쳤다. 사악!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잘려 나간 갈대가 바람을 타고 시야 가득히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 피했어? 너 감이 좋은데?” 의외라는 듯이 읊조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뭐야, 지금 이놈이 날 공격했어? “너…… 설마 지금 날 죽이려고 한 거야?” “무슨 소리야?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나와 비슷한 나이 대의 외양을 한 루카스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만 기가 차서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만에 찾은 재미있을 것 같은 인간인데 이렇게 간단히 죽일 리가 있겠어? 그리고 내가 진짜 널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면 네가 지금 그렇게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이 자식이? 너랑 나랑 지금 처음 만난 거라고 하지 않았니? 그런데 첫 만남부터 지금 너무 막 나가는 것 아니에요? “그럼 느닷없이 왜 공격하는데?” “내가 살던 데에서는 이게 인사야.” 그게 무슨 헛소리냐?! 하지만 루카스는 내가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흥미로운 마력 파장이 느껴져서 그냥 한번 보러 왔던 건데, 생각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네.” 눈앞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새 내 옆으로 다가온 루카스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휘어 감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너, 나랑 같이 갈래?”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붉은 눈동자가 유혹하는 듯한 달콤한 미소를 그 안에 담고 나를 응시했다. “너에 대해 궁금한 게 아주 많아.” 루카스답지 않은 말과 행동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느른히 웃는 그 얼굴만큼은 내가 알고 있는 루카스의 것과 똑같았다. 조금 전에 그가 나를 공격한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리고 만 것은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같이 가다니, 어디로?” “내가 살고 있는 곳.” 다른 한편으로는 루카스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가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 자신에 대해 좀처럼 말해주는 법이 없던 루카스의 거처라니.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만큼 조금은 갈등 어린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권유를 거절했다. “안 돼. 거긴 내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 그러자 마주한 사람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허락한다는데 뭐가 문제야?” “내가 허락받아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니까.” 당연하게도 그는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처음으로 듣고 싶은 상대는 이 루카스가 아니었다. 사실 우리의 대화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루카스와 나 둘 다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장 이상했다. 내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루카스의 얼굴에 짜증이 일었다. 콰쾅! 나는 문득 수상함을 감지하고 놈에게서 멀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원래 내가 있던 곳에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잘린 갈대들이 다시금 시야에 어지럽게 나부꼈다. “야,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나는 아까보다 더한 황당함을 느끼고 놈에게 따졌다. 이렇게 다짜고짜 이 연타 공격이라니! 더군다나 저건 위력도 꽤 강하잖아?! “내 탑에 초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는데 거절당해서 상처받았어. 그러니까 책임져 줘야겠어.” 하지만 루카스 놈은 싸늘한 목소리로 이따위 소리를 지껄일 뿐이었다. 곧 그의 손에서 강력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걱정 마. 팔다리 하나쯤 떨어져 나가도 다시 곱게 붙여 줄게.” “자, 잠깐, 루카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루카스 놈은 진짜 나를 향해 살인적인 위력이 담긴 마력을 날려 보냈다. 쿠콰콰콰아앙! 쾅콰앙! 아까까지는 장난이었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내 고막을 꿰뚫었다. 당연히 나는 마력을 끌어 올려 방어했지만 루카스 놈이 워낙 괴물이어서 내 방어막은 도중에 깨져 버렸다. 잠시 후 나를 집어삼킨 마력이 완전히 사그라졌을 때,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급히 내 몸을 살폈다. 으악, 으아악! 내 팔다리 멀쩡한 거야? 머리는?! 제대로 붙어 있는 게 맞는 거야?! 하지만 놀랍게도 딱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얼떨떨해져서 내 앞에 있는 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크윽…….” 그리고 주위에 자욱하게 깔려 있던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처참하게 뜯긴 갈대의 잔해 속에서 가슴을 움켜잡고 신음하는 루카스를 발견했다. 으, 으응? 넌 또 왜 그러고 있냐? “너……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런데 놈은 황당하게도 나를 노려보며 저런 말인지 방구인지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마치 내가 자신에게 해코지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어서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내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무슨 짓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너, 이…… 정말 죽여 버리겠어.” 헉, 이 자식.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짜 좀 빡친 것 같은데. 저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아마 손으로 움켜잡고 있는 곳이 많이 아픈 모양이다. 허허, 놈이 좀 진정되면 같이 이야기나 나누어 볼까 했는데, 저렇게 날 죽일 듯이 째려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하겠는데? “으, 으음. 그럼 루카스야, 나는 통금 시간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 “야, 가긴 어딜 가? 죽을래? 당장 이리 안 와?” “부, 부정맥은 위험한 것. 네 나이도 있는데 각별히 조심하렴?” 루카스가 바드득 이를 갈았으나, 정말 많이 아프긴 한지 나를 잡기 위해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못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나는 재빨리 손가락을 튕겨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설마 이놈이 또 나를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역시 까만 또라이의 명성은 어느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란 생각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여기 있었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루카스를 너무 얕잡아 봤던 것이 분명했다. 다음날 천사상 위에 앉아 있던 내 앞에 돌연 나타난 놈을 보고 나는 그만 소스라치고 말았다. “마력 냄새를 왜 이렇게 황궁 안에 사방팔방 다 흘리고 다녔어? 찾는 데 애먹었잖아, 귀찮게.” 뭐, 마력 냄새? 네가 무슨 멍멍이냐? 앗, 그런데 이놈. 어쩐지 원래 세계에서도 내가 있는 곳을 잘도 찾는다 했더니만 마력을 쫓아서 온 거였나. 나도 레벨 업 하면 루카스처럼 할 수 있을까? “어제 아팠던 데는 괜찮아?” “웃기네. 지금 병 주고 약 줘? 어제 내장 터질 뻔한 것도 다 너 때문이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이놈이 생사람 잡네! 에잇, 역시 이런 놈을 걱정해 주는 게 아니었어! 기껏 신경 써 줬더니 저딴 소리나 하고! 크흑, 역시 까망이의 원수! 타도하라, 타도하라! “그래서 내가 오늘 널 찾으러 황궁에 왔다가 재미있는 걸 봤는데 말이야.” 그리고 다음 순간 루카스가 썩은 미소를 지으며 내뱉은 말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여기에 너랑 똑같이 생긴 여자애가 있더라? 아무래도 그 공주가 내가 먹은 신수의 원래 주인 같은데.” 뜨, 뜨끔! 아타나시아를 봤구나. “그런데 내가 알기로 이 나라에 쌍둥이 공주는 없단 말이지.” 천사상 위에 있는 루카스와 나 사이로 한차례 더운 바람이 불었다. 루카스가 자신의 눈앞까지 날아간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며 물었다. “너 진짜 정체가 뭐야?” 나는 고민했다. 어쩌지? 사실 이놈을 처음 만났을 때는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혹시 지금의 내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끄응, 그런데 어제는 도무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어서 말이지. “말을 안 하시겠다? 그럼 내가 혼자 알아내지 뭐.” 앗, 그런데 내가 고민하는 사이 놈이 또다시 입가에 삐뚤어진 미소를 그리고 손에 잡고 있던 내 머리카락을 놓았다. 아니, 잠깐만! 아직 1분도 안 지났잖아! 아니, 1분이 뭐야. 아직 한 10초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슈욱! 그리고 내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루카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이 쓸데없이 성질만 급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런데, 잠깐. 혼자 알아내겠다고? 도대체 뭘? 아니, 난 여기에 있는데 무슨 수로 자기가 나에 대해 알아내겠다고……. 그 순간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나는 기겁했다. 슈욱. 그리고 내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순간 이동으로 자리를 이동하고 나서 내가 목격한 것은 루카스 놈이 아타나시아 공주를 납치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야! 루카스, 이 또라이야!” 그녀는 기절했는지 루카스의 품 안에 축 늘어져 있었다. 내 얼굴을 본 그가 배부른 고양이처럼 웃었다. “그 표정 아주 좋은데. 이제야 좀 마음에 드네.” “너 지금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당장 안 내려놔?” “뺏을 수 있으면 뺏어 보든지.” 그런 환장할 말을 남긴 뒤 루카스 놈이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당연히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난간을 밟고 날아올랐다. “루카스!” 마침내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원에서 나는 그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놈은 내가 자신을 붙잡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금 얼굴에 얄미운 미소를 그려 보이며 뒤돌아 나를 마주 보았다. 앗, 저 자식 지금 순간 이동 쓰려는 거구나! 나는 루카스를 막기 위해 손에 마력을 불러들였다. 쿠웅! 하지만 내 마력이 루카스에게 부딪히는 순간, 가슴이 쿵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엄청난 통증이 밀려들었다. “윽!” 나는 신음을 흘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강제로 파훼된 마력이 싸늘한 얼음 조각이 되어 심장에 박혀 든 것 같았다. 힘을 잃은 내 손이 루카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무래도 오늘의 놀이는 여기까지인 것 같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바닥에 털썩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는 나를 보고 루카스가 숨 막히도록 예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아타나시아 공주를 데리고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력의 파동이 사라진 후에도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잠시 후,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내 귓가에 누군가의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향해 묻는 사람은 바로 이제키엘이었다. ======================================= [외전 13화] 붉은 꽃송이 사이에서 그의 흰 얼굴과 반짝이는 은발이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햇살 같은 금색 눈동자가 그 안에 나를 담아냈다. “혹 존체에 편찮은 곳이 있으신지요?” 그는 화원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나 역시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이제키엘을 보고 내심 당황했다. 외모가 똑같아서인지 그는 나를 이곳의 아타나시아 공주라고 생각한 듯했다. 누가 오기 전에 진작 투명화 마법을 쓰든 순간 이동을 쓰든 해야 했는데, 아직도 식은땀이 뻘뻘 날 정도로 가슴과 명치 부근이 아파서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의식만 붙들고 있는 것이 한계였다. “무슨 일이지? 이쪽에서 수상한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는데.” 하지만 내 당혹감은 다음 순간 더욱 커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제키엘의 등 뒤로 지금 내가 이곳에서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클로드였다. 다가온 그가 서늘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착각인지 클로드가 잠깐 멈칫한 것 같았다. “이제키엘! 아바마마!” 하지만 바로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마주친 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제니트, 위험할지도 모르니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이고, 서러워서 못 살겠다! 가뜩이나 속도 아파 죽겠는데 우리 아빠가 내 눈앞에서 다른 애를 챙기는 모습이나 봐야 한다니. 나는 바닥에 엎어져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말이야. “어떻게 그래요? 갑자기 이상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진다면서 아바마마와 이제키엘이 저만 두고 가 버렸는데 당연히 걱정을…… 앗? 아타나시아?” 제니트가 나를 발견하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세 사람이 함께 있다가 루카스와 나에게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흐름을 느낀 것 같았다. 그 직후 이제키엘과 클로드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제니트를 두고 이곳에 와 본 듯하고. 그리고 제니트는 그 뒤를 따라왔다는 건가. “폐하,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계셨습니다.” 이제키엘의 말에 클로드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조금 전 그 마력 파동의 원인이 너였나?” 싸늘한 시선이 내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나는 아직도 뻐근한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신음했다. “아타나시아, 괜찮아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이렇게 세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게다가 조금 전에 이곳의 진짜 아타나시아 공주는 루카스 놈에게 납치되어버렸고……. 그리고 이곳에서 루카스와 내가 한바탕 소란을 피웠던 건 또 뭐라고 변명하지? 어헝, 그나저나 아빠보다 제니트와 이제키엘이 날 더 걱정해 주다니. 진짜 너무하다, 이곳의 클로드. “그게…….” 나는 일단 발뺌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갈고리 같은 것으로 속을 온통 헤집어 놓은 것처럼 끔찍하게 아파서 그런지 목에서 잔뜩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변명할 말을 지금 당장 생각해 내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자마자 목구멍에서 피가 왈칵 토해져 나왔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아!” 손으로 입을 막아도 그 사이로 검붉은 피가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그런 나를 보고 제니트가 비명처럼 내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여전히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이제키엘 역시 당혹과 놀라움으로 얼굴을 굳히는 것이 보였다. 다만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클로드의 반응만큼은 확인할 수 없었는데, 사실은 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눈 하나 깜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잇따라 고막을 파고드는 그의 목소리가 아주 냉정했기 때문에 나는 내 짐작이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시종과 궁의를 불러라.” “폐하, 긴급한 상황이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진짜 딱 죽기 직전으로 아파서 이 사람들이 옆에서 뭐라고 떠들든 아무 상관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왠지 내 상태가 지금 바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게 기분 탓이 아니라 진짜였나! 나는 급속도로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공주님!” 옆으로 기울어지는 내 몸을 이제키엘이 늦지 않게 받아줘서 나는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루카스 놈이랑 달리 이제키엘은 역시 어느 버전이든 참으로 신사답기도 하구나…….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완전히 의식을 놓아버렸다. * * * “공주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공주님이 잘못되실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미, 미쳤다, 이 상황. 나는 촉촉한 눈을 하고 속삭이는 릴리를 향해 당황스럽게 동공을 흔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눈을 뜨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걱정하는 릴리를 보고 원래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지금 루비궁의 방 안에서 꼼짝없이 누워 이곳의 아타나시아 공주로 오해받는 중이었다. “공주님의 마력도 이제는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하니 다행이에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탑의 마법사들이 정기적으로 루비궁에 들러 공주님의 상태를 살피기로 했어요. 그러니 마음 푹 놓으세요.” 내가 피를 토한 이유는 역시 마력 때문에 내상을 입어서였다. 나를 진찰하러 왔던 궁의가 이번 일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하며 탑의 마법사들을 부를 것을 권했다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 루카스를 붙잡으려고 마법을 사용했을 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이 세계의 수장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한테 갑작스럽게 마력이 생긴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물론 실제로는 갑자기 나한테 없던 마력이 생긴 게 아니라 사람이 뒤바뀐 거였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깨어나자마자 수장 할아버지가 호들갑을 떨며 이런저런 것을 물으려 하는 통에 얼마나 정신이 혼미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릴리가 내 휴식을 주장하며 단호하게 그를 돌려보내서 다행이었다. “아까 찾아왔던 사람들도 모두 돌려보냈으니 염려 마시고요. 공주님은 아무 걱정 없이 푹 쉬면 되세요.” 이번 일에 대한 조사를 맡은 것 같은 사람들이 아까 나를 찾아와 화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으나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다. 그들은 몹시 마뜩잖은 얼굴로 나를 보았는데, 그럼 뭐 어쩔 거야! 내가 생각이 안 난다는데! 릴리도 내 몸에 갑자기 마력이 생긴 일로 불안한 것 같았는데, 그것을 티 내지 않고 나를 다독이려 노력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찡해지는 것과 동시에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으응. 난 괜찮으니까 릴리도 가서 쉬어.” 나는 최대한 이곳의 아타나시아 흉내를 내며 릴리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무 시들시들 기운 없게 말했나 보다. 나를 조금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릴리가 이윽고 위로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주님께서 의식을 잃으신 동안에 폐하께서 다녀가셨답니다. 공주님을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쾌차하세요.” 으흑, 그런데 거짓말인 게 너무 티 났다. 여기에 있는 클로드가 아타나시아를 걱정해서 찾아올 리가 없잖아. 아까도 바닥에 쓰러진 나를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사람인데.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숨기고 릴리를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릴리가 푹 쉬라는 말을 남기며 방을 나서자마자 머리를 싸매고 몸부림쳤다. 으아, 도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야? 왜 내가 루비궁에서 아타나시아 공주인 척을 해야 하는 건데? 게다가 진짜 아타나시아 공주는 루카스 놈이 납치해 가 버렸고! 아타나시아 공주를 안고 사라지기 직전에, 나를 향해 얄밉게 지어 보였던 그의 미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순간 또다시 화르륵 열이 올랐다. 이 세계의 루카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처음 만나자마자 느닷없이 나를 공격하지를 않나, 가만히 있는 사람을 멋대로 납치해 가지를 않나. 적어도 내가 아는 루카스는 이 정도로 막무가내이지는 않았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씩씩거린 것도 잠시뿐이었다. 나는 서서히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끼며 쿨럭 헛기침을 했다. 으, 으음. 그래, 솔직히 말해서 루카스가 원래도 좀 막 나가는 성격이긴 했지. 나한테는 그나마 그런 게 좀 덜해서 그렇지. “아, 어떡하지?” 갑자기 골머리가 아파서 나는 이마를 짚으며 신음했다. 루카스가 데려간 아타나시아 공주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놔야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어제 루카스가 검은 탑으로 날 초대했을 때 못 이긴 척 가 줄 걸 그랬나? 그럼 그놈이 이렇게 눈이 돌아서 미친 짓을 저지를 일도 없었을 텐데. 그리고 지금 그놈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이렇게 머리를 싸맬 일도 없었을 테고. 그리고 하나 더. 루카스에게 내 마법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가 도대체 뭘까? 아까의 일을 떠올리자 갑자기 또 괜히 속이 아린 느낌이라서 나는 손을 들어 가슴과 배를 쓸어내렸다. 마치 내 마력이 산산이 조각나서 온몸에 꽂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죽하면 피까지 토하고 말이지. 그래도 예전에 마력 폭주로 요단강을 건널 뻔했던 때보다는 덜 아파서 다행이긴 한데. 그러고 보니 어제 루카스도 나한테 공격 마법을 사용하고 난 후에 통증을 호소했었잖아? 아무래도 어제의 일과 오늘의 일에 연관성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내가 이 세계에 온 지 오늘이 삼 일째라는 게 실화입니까? 갑자기 허탈해져서 나는 허허 웃었다.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고작 삼 일째라니. 하지만 만약 내 세계에서도 지금과 동일하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면, 삼 일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착잡하게 루비궁의 방을 둘러보며 앞으로의 일을 걱정했다. * * * “폐하,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그런가?” 필릭스의 말에 클로드가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루비궁에 다시 들르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아까는 공주님께서 의식을 차리시기 전이라 미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셨잖습니까.” “깨어났다고 하니 괜찮은 것이겠지. 나는 그리 한가하지 않다.” 여전히 무정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필릭스는 ‘역시’ 하는 생각을 했다. 아까는 어쩐 일로 먼저 루비궁을 찾은 클로드를 보고 놀랐었는데……. 그의 주군은 여전히 아타나시아 공주에 한해서만큼은 유독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나가라.” 클로드의 축객령에 필릭스가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집무실을 나섰다. 그 후 클로드는 침묵이 감도는 방 안에서 묵묵히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잠시 후 덧없이 멈추고 말았다. 아까 화원에서 고통스럽게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아타나시아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순간 클로드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그는 손을 들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쿡쿡 쑤시는 이마를 짚었다. 예전부터 아타나시아를 생각하거나 그 얼굴을 마주할 때면 기이하게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 [외전 14화] 똑똑. 그때, 불현듯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바마마.” 귓가에 흘러든 목소리는 제니트의 것이었다. “들어와라.” 클로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제니트가 클로드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루비 궁에서 소식이 왔는데 들으셨어요?” “그래.” 클로드는 제니트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 다녀갔던 필릭스에 이어 제니트의 입에서도 아타나시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듣기가 싫었다. “아까 아바마마께서 루비 궁에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바마마도 아타나시아가 걱정되시죠?” “내가 그 아이를 왜 걱정해야 하지?” 싸늘한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한기에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움츠러들고 말 정도로 차디찬 시선이 뒤따랐다. 하지만 제니트는 클로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바마마는 다정한 분이시잖아요. 전 알아요.” 뒤이어 그녀의 손이 클로드의 팔에 닿았다. 제니트의 몸에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까만 마력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클로드는 아까부터 머리를 쪼개는 듯하던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 모르게 갑갑하던 가슴도 곧 편안해졌다. “아타나시아에게는 제가 다녀올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클로드가 끝내 부정했지만 제니트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그저 빙그레 웃어 보이기만 했다. * * * “겁나 피곤하다, 진짜.” 내가 루비 궁에서 아타나시아 공주 노릇을 한 지도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나는 조금 전에 빠져나온 황궁의 검은 탑을 돌아보며 잠시 내 신세를 한탄했다. 갑자기 내 몸에 마력이 생긴 일로 이런저런 검사를 해야 한다며 수장 할아버지와 마법사들이 귀찮게 구는 통에 얼마나 진을 뺐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그들은 나를 매우 흥미로운 실험체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원래 세상의 클로드 같으면 그들이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막아줄 테지만 여기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황궁 마법사들이 나를 찜 쪄 먹든 회 쳐 먹든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나를 걱정한 릴리가 탑까지 따라오려고 했지만 갑자기 시녀장이 그녀를 불러서 그럴 수 없었다. 참, 지금 이 세계의 시녀장은 어릴 때 예산 부족을 핑계로 내 딸랑이도 안 사줬던 그 시녀장이라고 하더라! 크흑, 이 세계에서는 클로드가 아타나시아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시녀장이 바뀔 일도 없는 거구나. 지난 사흘간 릴리 때문에 나는 행동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수상한 책을 찾으러 다른 궁전을 뒤지는 일도 잠시 멈춘 상태였다. 원래 세계에서는 내가 워낙 여기저기 잘 돌아다녀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도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타나시아 공주가 워낙 판에 박힌 일상만 보내서 그런지 내가 잠깐이라도 말도 없이 사라지거나 하면 릴리가 엄청나게 걱정하곤 했다. 수면 마법 같은 걸 릴리에게 걸고 내 볼일을 보러 가도 되지만…… 우리 릴리한테 어떻게 그래, 으앙. 물론 이곳의 릴리는 내가 알고 있는 릴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그녀만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또 한 번 치밀어 오르는 루카스에 대한 분노에 이를 갈았다. 내가 아타나시아 공주 대신 루비 궁에 짱박혀 있게 된 것도 전부 그놈 때문이 아니던가? “아, 이 미친놈, 진짜.” “미친놈이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앗, 이 목소리는! 갑자기 등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홱 몸을 돌리자 밉살맞게 웃고 있는 루카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루카스!” 이 자식, 이렇게 제 발로 굴러 들어오다니! “뭘 또 그 정도로 격하게 반겨 주고 그래? 사람 설레게.” 사흘 만에 만나서는 이런 헛소리나 하고 말이야! “내가 엄청 많이 보고 싶었나 봐?” 잠깐 주위를 둘러봤으나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마음 놓고 루카스 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데려간 사람 지금 어디에 있어!” “어디긴 어디야, 네가 가기 싫다고 했던 데지.” “빨리 궁으로 다시 데려와.” “싫은데?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줘야 하는데.” 루카스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니, 그런데 이 자식. 지난번부터 왜 이렇게 자꾸 내 머리를 가만히 놔두지 못해서 안달이야? 뒤이어 놈이 눈꼬리 휘며 속삭이는 말에 나는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정 원한다면 네가 직접 와서 데려가던가.” 결국 목적은 그거였던 건가? 쓸데없이 일관성이 있는 녀석 같으니라고. 이번에는 나도 더 우기고 있을 수가 없어서 루카스가 던진 떡밥인 것을 알면서도 그냥 그것을 물어주었다. “그래, 가자. 너 살고 있는 데로 가.” 지금 당장, 롸잇 나우! 그러자 루카스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어진 놈의 말은 황당했다. “‘루카스 님, 제발 부탁이니 저를 탑에 데리고 가 주세요’라고 간곡히 애원하면 생각해 봐 줄게.” “뭐?” “싫어? 싫으면 말고. 그 공주가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말이야.” 이, 이 치사한 자식…… 처음에 내가 초대를 거절했던 게 엄청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루카스 님, 제발 부탁이니 저를 탑에 데리고 가 주세요.” 나는 이를 악물고 루카스 놈이 원하는 대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큭큭거리고 웃었다. 어쩜 그 모습까지 참으로 얄밉기도 했다. “너 동반 순간 이동 쓸 줄 알아?” “그런데?” “그럼 지금 나 데리고 순간 이동 써 봐.” “어디인지 알아야 이동을 하지?” “아, 일단 아무 데다 좌표로 잡고 해봐.” 그런데 잇따른 놈의 말이 어딘가 이상했다. 뭐지? 지금 나한테 마력 셔틀을 시키려는 건가?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왜 이렇게 굼뜨냐며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왜인지 뭔가 좀 수상하다. 그런데 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수도 없어서 나는 찜찜함을 안은 채로 루카스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이동할 장소를 가까운 곳으로 생각하고 마력을 조금만 끄집어냈다. 쿠웅! “윽……!” 다음 순간, 나는 익숙한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몸을 접었다. “흐응, 역시 그런 거였나.” 고통을 호소하는 내 머리 위에서 무덤덤한 루카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래도 너랑 내 마력의 구심점이 같아서 서로한테 마법을 쓰면 반작용을 일으키나 보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너랑 나랑 진짜 똑같은 신수를 먹은 게 맞는 모양이야. 처음 만난 날에 너한테 공격 마법을 썼다가 내장이 다 터질 뻔했던 것도 그래서인가. 지난번에 너도 날 막으려다가 똑같이 아파하는 걸 보고 혹시 했는데 말이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졌다. 그럼 이번에 마법을 쓰면 또 내상을 입을 걸 다 알면서 일부러 나한테 마법을 쓰게 했단 말이야? 사실을 확인하고는 싶은데 자기가 다치기는 싫어서? 설마 하긴 했지만 이 자식 진짜……. “야, 너…… 이 나쁜…… 우욱.” 투둑! 아, 제기랄! 또 피 봤잖아! 그래도 이번에는 마력을 조금만 사용해서 그런지 통증도 지난번보다는 약했다. 그래도 더럽게 아프다! 나는 피가 흘러나오는 입을 막으며 루카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매우 유감이라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치료해 주고 싶은데 너한테 마법을 쓰면 나도 똑같은 꼴이 될 테니까 어쩔 수 없네. 늦기 전에 궁의 불러서 치료받아. 아, 마침 누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루카스 놈이 너무 얄미워서 때려 주고 싶었다. 원래의 루카스도 내 속을 긁을 때가 왕왕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아쉽지만 초대는 다음번에. 내가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내가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거나 말거나, 루카스는 나를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남긴 뒤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그 직후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이제키엘이었다. 그는 내 옆에 있는 황궁의 건물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마력의 흐름을 느끼고 와 본 것은 아닌 듯했다. 사실 평소에 내가 살짝 마법을 쓰는 정도로는 잘 티가 나지 않는데, 며칠 전에는 루카스 놈이 워낙 요란하게 소란을 피우고 가는 바람에 들킨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의 이제키엘은 길을 걷다가 우연히 나와 마주친 눈치였다. 혹시 제니트를 만나러 온 것일까? “존체 미령하신 분께서 왜 혼자 궁 밖에…… 설마 또 각혈하셨습니까?” 그는 내게 말을 건네다 말고 내 손과 입가에 묻은 피를 보고 멈칫했다. 그, 그런데 존체 미령이라니. 이곳의 아타나시아는 그렇게 연약한 이미지인 건가.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이제키엘의 굳은 얼굴을 보고 말했다. 내상을 치료받으려면 황궁 마법사들에게 찾아가야 했지만 거리도 가까운 데다 지난번보다 상태가 괜찮아서 직접 걸어가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이곳의 이제키엘은 왠지 좀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것이……. “잠시만 실례를 범하겠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이제키엘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글쎄, 나를 번쩍 안아 드는 것이 아닌가? 내가 당황해서 입을 벌리자 그가 말했다. “각혈하실 정도로 몸이 상하신 분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제가 모시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곳의 이제키엘은 나를 좀 더 사무적으로 대하는 느낌이었다. 내게 건네는 그의 말은 무척 예의 발랐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섞여 있지 않았다. 하긴, 이곳의 이제키엘은 제니트와 해피 엔딩을 맞는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 이제키엘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제키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마워요, 공자.” 그 순간, 기분 탓인지 나를 안고 있는 이제키엘이 잠깐 멈칫한 것 같았다. 어쩐지 오묘한 빛을 띤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것은 짧은 순간이었다. 이제키엘은 다시 고개를 들고 묵묵히 나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침묵이 조금 불편했지만 그래도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황궁 마법사들이 있는 탑까지 조용히 이동하게 되었다. * * * “또 피를 토했다더니 멀쩡해 보이는군.” 그날 저녁, 놀랍게도 클로드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어쩐 일인지 직접 루비 궁에 행차한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루비 궁의 궁인들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기별도 없는 방문이었기 때문에 루비 궁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아, 아바마마. 제 궁에는 어쩐 일로…….” 나는 당황해서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온 상태였다. 오늘도 내가 한 차례 각혈했다는 사실을 안 릴리가 이른 시간부터 나를 침대에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혹시 아타나시아가 걱정되어서 온 것일까? 평소에 피도 눈물도 없이 자기 딸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그 딸이 피를 토할 정도로 아프다고 하니까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던 게……. “제니트의 부탁으로 잠시 들른 것이다. 곧 돌아갈 것이니 수선 피울 필요 없다.” 아니었구먼. 클로드가 주변 사람들을 향해 싸늘한 어투로 읊조리는 말을 듣고 나는 그만 짜게 식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 [외전 15화] 아마 제니트는 천사표 공주님답게 착한 일을 한 모양이다. 내가 피를 토하건 말건 관심 한 자락 없는 클로드의 등을 떠밀어 이렇게 루비 궁에 보낸 것을 보니. 얼마 전에 나를 만나러 왔던 제니트가 문득 떠올랐다. 솔직히 릴리를 제외하고는 이 세계에서 아타나시아를 제일 걱정해 주는 건 제니트인 것 같았다. 한 번도 아니고 틈날 때마다 나를 찾아와서 걱정 어린 얼굴로 상태를 살피곤 했으니까. 크윽, 그런데 클로드는 하나뿐인 아빠라는 사람이……. “그러셨군요.” 제니트에게 떠밀려 잠깐 얼굴이나 비치러 온 자리에서도 저딴 말이나 하고 말이야.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진짜 아타나시아였다면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어! “잠시 들르러 오신 것이라니…… 그럼 굳이 자리를 권해 아바마마를 번거롭게 만들지 않겠어요. 부디 조심히 살펴 가세요, 아바마마.” 하지만 아무리 속이 터진다 한들 내가 여기서 깽판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나는 이곳의 아타나시아 공주도 아니었으니까, 그 후폭풍을 책임질 수도 없고. 그래도 클로드가 얄미운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나는 그를 자리에 앉히지도 않고 그냥 곧바로 작별 인사를 해버렸다. “헉!” “고, 공주님?” 그러자 주위에 있던 궁인들이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내가 클로드를 문전 박대하는 모양이 되어버리자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클로드도 내 반응이 뜻밖인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기야 진짜 아타나시아라면 아마 이마저도 감지덕지해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클로드와 함께 있으려고 애썼을 테니 모두가 놀랄 만도 했다. 물론 진짜 아타나시아가 돌아오게 되었을 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깽판은 자중해야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클로드는 아타나시아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그냥 ‘얘가 뭘 잘못 먹었나’라거나 ‘다치고 나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졌군’ 정도로 넘어가지 않을까? 그리고 클로드는 평소에 아타나시아가 자신에게 사랑을 애걸하는 것을 꼴 보기 싫어했던 인간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내가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을 만족스러워해야 마땅했다. 어차피 지금 이곳에 온 것도 제니트의 부탁 때문이라고 하니까. 그러나 역시 잠자는 클로드의 코털을 건드리는 정도는 괜찮아도 그의 코털을 뽑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병든 닭 흉내를 내며 시름시름, 시들시들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에는 결코 다른 의미가 없다! 난 댁이 꼴 보기 싫어서 눈앞에서 치우려고 한 게 아니야! 진짜다!’라고 말하는 듯이. 물론 약을 파는 소리였다. 그런데 별안간 나를 응시하는 클로드의 눈빛이 변했다. 나는 그의 얼굴에 지금까지와는 약간 다른 종류의 한기가 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건방진 구석이 있는 계집이로군.” 굳게 닫혀 있던 클로드의 입이 열린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도대체 넌 누구지?” 냉랭한 음성이 귓전에 울리는 순간, 나는 진심으로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뭐, 뭐, 뭐라고? 내가 누구냐고? 설마 지금 내가 진짜 아타나시아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거야?! “내가 알던 아타나시아가 아니로군. 계집, 넌 누구냐?” 그래, 난 당신이 알던 예전의 내가 아니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는 클로드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마치 맹수를 눈앞에 둔 토끼가 된 것처럼 나는 급격히 쭈그러들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원래도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저를 잘 알고 계시지는 않았잖아요.” 그 쭈글거림이 표출되었는지 잇따른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매가리 없이 흘러나왔다. 이번에야말로 그런 척이 아니라 진짜로 시름시름, 시들시들한 내 음성을 듣고 클로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나를 꿰뚫을 듯이 응시하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서 날카로움이 한풀 꺾였다. “그것도 그렇군.” 다행히 클로드는 의심을 거둔 눈치였다. 하기야 설마 그도 진심으로 내 정체를 의심해 저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크, 크흑! 그렇지만 무섭다, 클로드! 무섭다, 클로드의 촉! 클로드는 다시금 나한테 관심이 식었다는 듯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뒤돌아섰다. “더 볼 일이 없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제니트의 앞에서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말도록.” 응? 뭐야, 내가 제니트한테 뭐라고 속닥거려서 제니트가 자기한테 루비 궁에 가 보라고 한 건 줄 아는 건가? 어, 억울하다. 난 지금 이 황궁에서 제일 보기 싫은 게 댁이라고! “공주님, 그만 방으로 들어가서 쉬세요.” 클로드와 나를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릴리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클로드가 내게 경을 치는 일 없이 조용히 사라지자 안심한 기색이었다. “으응, 난 오늘 일찍 잘게.” 나는 클로드를 만난 뒤부터 급격히 피로해져서 기운 없이 내 방으로 돌아갔다. 릴리는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다가 곧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하지만 나는 잠깐 침대에 누워 자는 척하다가 이불을 뻥 걷어차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윽, 졸리지만 지금 잘 수는 없었다. 릴리의 앞에서 피곤한 티를 팍팍 내면서 침대에 기어들어 왔으니까 이제 내 방에 오는 일은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불 속에 솜 인형을 넣어 놓고 나는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쏴아아. 다음 순간 내가 도착한 곳은 지난번에 루카스를 만났던 갈대숲이었다. “야, 루카스!” 나는 고요한 밤하늘에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루카스를 불러 댔다. “루카스, 이 또라이야아아!” 솔직히 근거 없는 생각이었지만 루카스가 내 부름에 응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오밤중에 왜 이렇게 불러 대?” 역시 그는 달빛 아래에서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우리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니야?” 크아,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 “이 나쁜 자식아! 넌 진짜 답 없는 미친놈이야! 개 또라이! 인간 말종! 이 악독한 사이코패스야!” 나는 루카스 놈을 향해 욕을 퍼부어주었다. 이곳에 온 후로 이놈에게 당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이고, 억울하고 분통하다! 루카스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내가 자신을 욕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하네. 왜 너한테 욕을 처먹는데 화가 안 나지?” “이 변태!” 나는 놈의 말을 듣고 대번에 외쳤다. “나 참. 탑에 안 데려가 준 게 그렇게 서운했어? 그렇게 죽자 살자 매달리니 어쩔 수 없네. 특별히 데려가 줄 테니까 그만 좀 진정해 봐.” “매달리긴 누가! 그딴 데 하나도 안 궁금하고 안 가 보고 싶거든!” “진짜?” 루카스가 붉은 눈동자로 나를 보고는 눈매를 휘며 짙게 미소 지었다. 나는 놈의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이, 이 자식. 또 무언의 협박을 하고 있잖아? 무시무시하게도 웃네. “앞장서. 네 뒤로 따라갈 테니까.” 나는 루카스를 노려보며 이를 갈다가 말했다. 그러자 놈이 비로소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으악, 얄미워. 네 뜻대로 되니까 좋냐? 응? 좋아? “잡아.” 뒤이어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법 쓰면 너나 나나 속이 뒤집힐 텐데?” “머리 없어? 서로한테만 안 쓰면 되는 거 아니야.” 빠직! 나는 루카스의 비웃음에 발끈했지만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며 눈앞에 내민 놈의 손을 잡았다. “으앗!” 그런데 루카스가 나를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공주님 안기로 덥석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너 고소 공포증은 없지? 있어도 참아.” 그는 무성의하게 말한 뒤 나를 안은 채로 지면을 딛고 날아올랐다. 아니, 그런데 이 자식! 진작 이 방법을 썼으면 아까 내가 피를 토할 필요도 없었던 거잖아?!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또 한 번 루카스를 찌릿 노려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루카스의 얼굴과 똑같았다. 나는 약간 기분이 착잡해지는 것을 느끼며 녀석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서늘한 밤바람이 뺨을 스쳤다. 검은 비단 위에 뿌려진 보석처럼 화려한 은하수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발아래에서는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은은한 불빛이 반짝거렸다. 응? 그런데 엄청 멀리까지 가는 것 같은데. 나는 루카스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려고 했지만 지형을 확인할 만큼 시야가 밝지 않아서 그럴 수 없었다. 호, 혹시 이러다가 날이 샐 때까지 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위기감이 엄습해서 루카스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저기, 아직 멀었어?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통금 시간이 있단다.” “기다려 봐, 이제 다 왔어.” 루카스는 성질도 급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내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나는 그만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헐, 대박.” 처음에는 그냥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구름이 걷히고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탑은 그 외벽에 밤하늘의 별을 전부 투영하고 있었다. 아니, 투영이 아니라 반사인가? 아무튼, 나는 기가 죽을 정도로 장엄하게 솟은 검은 탑이 황홀하게 반짝이는 은하수를 그대로 품고 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 정도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루카스는 내가 탑의 위용에 넋을 놓고 있는 것이 퍽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위대한 검은 마법사의 탑에 온 걸 환영해.” 탑의 꼭대기에 나를 내놓은 루카스가 마음껏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네가 첫 손님이니까 마음껏 영광스러워 해도 좋아.” 앗, 내가 첫 손님이라니 그거 뭔가 설레는…… 이 아니라. 나는 별이 한 무더기는 쏟아질 것 같은 주위의 경관에 감탄하고 있다가 한순간 멈칫했다. 첫 손님? 내가 첫 손님이라고요? “네가 데려온 여자는 어디에 있어?”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내가 이곳에 왔던 목적을 다시금 상기했다. 우, 우와. 하마터면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깜빡 잊을 뻔했네. 생각보다 검은 탑이 너무 멋있어서 나도 모르게 혼을 빼놓고 있었다. 솔직히 오래된 고성답게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산하고 어두침침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 여자 여기에 없는데?” 그런데 루카스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 “뭐? 네가 사는 데 있다며? 여기 너네 집 아니야?” “여기가 탑이 맞긴 한데, 그 여자가 여기에 있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지.” 뭐? 이 자식이? 그럼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왜 당연해?! “바보 아니야? 내가 그 여자를 탑에 데리고 올 리가 없잖아.” 루카스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달빛에 번진 그 미소가 한순간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난 이 탑에 널 데리고 오고 싶었던 거지 너랑 똑같이 생긴 대용품을 데리고 오고 싶었던 게 아니거든.” 나는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루카스가 농밀하게 웃으며 속삭이는 말에 잠시 멍해졌다.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내 탑에 있는 건 상상만 해도 불쾌해.” ======================================= [외전 16화] 저기, 너 지금 나 꼬시려고 하는 거니……? 나는 요망한 짓을 하는 루카스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얘 좀 봐. 지금 작정하고 날 유혹하는 것 같은데? 우, 우리 만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야말로 너무 적극적인 것 아니에요? 어, 그런데 잠깐.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않았어……? 나는 루카스의 미인계에 홀려 넋을 놓고 있다가 또다시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아, 맞아! 지금 내가 이놈한테 한눈팔 때가 아니지! “이 사기꾼아! 헛소리 말고 빨리 아타나시아가 있는 데로 데려가!” 퍽! “윽!” 나는 가차 없이 놈의 정강이를 발로 깠다. 불시의 기습에 루카스가 단말마를 내뱉으며 몸을 숙였다. 그는 설마 내가 이럴 줄은 몰랐던 듯, 자신에게 날아온 발길질을 피하지 못했다. “너 지금 날 발로 찼어?” 루카스가 구겨진 얼굴로 정강이를 감싸며 황당하게 물었다. 그래, 찼다! 내가 널 발로 찼어! 이제 어쩔 것이냐! 나는 내친김에 손을 들어 놈의 등짝도 후려쳤다. “지금까지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넌 몇 대 맞아도 싸!” “악, 너 미쳤어? 네가 지금 나를 쳐?” “그래! 이 나쁜 놈아! 억울하면 너도 때려!” “야, 야! 아, 좀 그만 때려 봐! 아, 아프다고!” 루카스 놈이 기막혀했지만 그동안의 분통함이 치밀어 올라서 도무지 손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글거리던 속이 그나마 좀 잠잠해질 때까지 놈을 향한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 * * “날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허허.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인데. 막장 드라마나 인터넷 소설 속 단골 대사인 것도 맞지만 예전에 다른 루카스한테도 들어본 적 있는 말이잖아? “어떻게 날 때릴 수가 있지? 그것도 한 대도 아니고 이렇게 여러 대를?”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루카스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별이 총총 떠 있는 밤하늘 아래에서 루카스는 상당히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너,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잊었어?” “잊었으면 내가 지금 널 때렸겠어?” “그런데 내가 안 무서워?” 그는 도저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재차 물었다. “안 무서워. 내가 왜 널 무서워해야 돼?” 그래 봤자 어차피 알맹이는 루카스면서. 물론 이런 생각을 하다가 진짜 공격 마법에도 당해 보고, 피도 토하고 그랬지만 그래도 나는 기본적으로 이놈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지금 녀석을 때릴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루카스는 내 행동에 황당해할지언정 진심으로 화를 내며 나를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 돌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놈이 표정을 차게 식혔다. “너 지금 내가 너한테 마법을 못 쓴다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너 같은 거 하나쯤 마법 없이도 한 손에…….” “시끄럽고, 빨리 다시 날 안아.” 아, 그렇지 않아도 시간 없다니까 쓸데없는 말이나 하기는? 내가 통금 시간 있다고 말했냐, 안 했냐? 해 뜨기 전까지 돌아가야 하는데 아까부터 늑장이나 부리고 말이야!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계속 미적거릴 것 같아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루카스에게 성큼 다가가 놈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가까이에 있는 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지척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루카스가 굳었다. “뭐 해? 어서 안으라니까.” 나는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는 루카스가 답답해서 약간 짜증스럽게 다시 재촉했다. 이제 와서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런담? 그러자 어째서인지 바싹 얼어붙어 있던 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약간 더듬거리며 흘러나온 말은 조금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너, 내가, 그런 식으로 미인계를 쓴다고, 거기에 홀랑 넘어갈 줄 알았다면 오산…….” 뭐……? 얘가 지금 뭐라는 거죠? 미, 미인계요? 누가, 내가? 누구한테, 루카스한테? “뭔 소리야? 그게 아니라 아까처럼 날 안아 들라고.” 아니, 자기가 먼저 나한테 얼굴을 들이밀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런 반응이야? 그리고 미인계는 내가 아니라 네가 썼지! “그 여자애, 여기에 없다면서? 나중에 다시 와서 네가 원하는 대로 탑 구경 실컷 해줄 테니까 일단은 네가 납치한 여자애가 있는 데로 가자는 말이야.” 그제야 내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루카스의 얼굴에 어려 있던 당혹감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신 이제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빨리, 나 시간 없어.” 또 한 번 닦달을 당한 루카스가 얼결에 나를 안아 들었다. 안정감 있는 승차(?)를 위해 내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자 맞닿은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결국 루카스는 매우 찜찜한 얼굴을 한 채로 나를 안고 다시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너 이름이 뭐야?” 그러다 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나한테 물었다. “뭐야, 너 내 이름도 몰라?” “네가 말을 안 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아타나시아는 너랑 똑같이 생긴 그 공주 이름이고, 네 이름은 뭔데?” 내 이름도 아타나시아인데. 하지만 지금 놈에게 나한테 일어난 이런저런 일들을 설명하자니 복잡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그냥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냥 아티라고 불러.” “뭐야, 그 짓다 만 것 같은 이름은.” 울컥! 이 자식이 지금 내 애칭을 비웃었어? 크윽, 그래도 참자. 루카스 놈이 또 홱 돌아서 아타나시아가 있는 데로 안 데려가 준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 나는 등줄기를 스쳐 지나가는 기묘한 느낌에 눈을 가늘게 뜨고 말았다. 어라,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왠지 이 녀석이 지금 가고 있는 곳이……. “루카스야, 혹시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거 황궁 아니니?” “눈 제대로 달려 있는 거 맞네.” 내 물음에 루카스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지금 내 발밑에서 휘황찬란하게 반짝이고 있는 것은 분명 황궁이었다! 클로드가 있고, 릴리가 있고, 제니트가 있는 바로 그 황궁! 심지어 루카스와 내가 내려선 곳은 다름 아닌 토파즈 궁의 어느 테라스였다. 나는 그 안쪽으로 보이는 방 안 침대 위에 고이 잠들어 있는 소녀를 시야에 담고 완전히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자, 데려다줬지? 난 분명히 약속 지켰어. 그러니까 너도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마.” 와, 와아.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내가 한동안 릴리 때문에 책을 찾으러 못 와 본 동안 아타나시아 공주가 여기에 있었단 말이야? “루카스, 너 이…….” 몹시 기가 막히고 짜증이 나서 루카스한테 뭐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아타나시아 공주의 일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나는 침대로 다가가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저, 저기요?” 눈을 뜨세요, 용자여! “저기요, 아타나시아?”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타나시아 공주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연적인 현상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슬쩍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너 이 사람한테 무슨 짓 했어?” 그러자 루카스 놈이 귀를 후비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잠 좀 푹 자게 해둔 것뿐이야. 영영 깨어나기 싫을 정도로 엄청 좋은 꿈까지 꾸게 해줬으니까 이 정도면 완전 양심적인 납치범 아냐?” 양심적인 납치범이 다 죽었냐! 그래도 내가 노려보자 루카스가 어쩐 일로 쉽게 물러났다. “아, 알았어. 지금 깨워 줄 테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왜인지 아까 나한테 얻어맞고 나서부터 말을 좀 잘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앗, 역시 이놈에게는 매가 약이었나? 아무튼 루카스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침대에 누워 있는 아타나시아 공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으음.” 효과는 엄청났다! 내가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이 루카스의 손짓 한 번에 깨어날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신음이 귓가에 울린 직후 미동 없던 그녀의 몸이 꿈틀거렸다.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도 금방이라도 들어 올려질 것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빛을 발하는 보석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다소 어색하게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점 없는 그녀의 눈동자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어……?” 곧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거울?” 크흡, 아직 잠이 덜 깨셨군요. 전 거울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아 공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내 얼굴에 닿은 그녀의 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그저 등 뒤로 식은땀만 흘렸다. 으, 으앗! 그렇게 얼굴을 구석구석 만지작거리면 좀……. 철썩! “손 치워.” 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지금 말한 건 내가 아니야!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가차 없이 쳐낸 것도 내가 아니고! “네가 뭔데 허락도 없이 얘를 그렇게 막 주물럭거려?” 불쾌한 듯이 싸늘하게 읊조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루카스였다. 아니, 그런데 내 얼굴이지 네 얼굴 아니잖아. 왜 네가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거야? 누가 보면 아타나시아 공주가 네 얼굴을 허락 없이 만져서 화난 줄 알겠네. “아니, 난 괜찮으니까 좀 가만히 있어.” “네가 괜찮으면 뭘 해, 내가 안 괜찮은데.” 쿨럭,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런데 바로 그때, 앞에서 ‘헉!’ 하고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당신들, 도대체 누구예요?” 완전히 잠이 깬 듯한 아타나시아 공주가 창백한 얼굴을 한 채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아직 혼란스러워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정해요, 아타나시아 공주. 아니, 물론 지금 상황에서 진정하기 힘들겠지만…….” 으, 으앙! 나도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난감해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나보다는 아타나시아 공주가 몇 배는 더 혼란스러울 테니 어떻게든 그녀를 안정시켜 주어야 했다. 게다가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그녀를 책임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당신이 여기에 있게 된 건 전적으로 나 때문이에요. 본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지금 여기는 황성 내에 있는 궁전이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요. 바로 루비 궁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요.” 해치지 않아요, 잡아먹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친구! 나는 최대한 나와 루카스의 무해함을 알려 주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그러는 것도 웃겼지만, 으흑. 다행스럽게도 아타나시아 공주는 내가 말하는 동안 서서히 마음을 진정시킨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곳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보석안은 홀린 듯이 내 얼굴에 못 박혀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끄응 신음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잠깐만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루비 궁에서 아타나시아 공주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해야겠다 싶었다. 어쨌거나 이런 일에 말려들게 된 것도 나 때문인 데다가, 그녀에게 거짓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타나시아 공주에게 이번 일의 경위를 설명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 [외전 17화] “헤벌쭉한 얼굴 하고는. 좋아 죽네, 죽어.” 루카스는 창틀 위에 걸터앉아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이죽거렸다. 새벽빛이 스러지던 탑 위에서 재가 되어 사라진 남자는 어느덧 다시 살아나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니,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 틀린 말이었다. 단지 그가 죽은 시점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뿐이었으니까. 사실 남자는 빈정거리듯 뇌까린 루카스의 말처럼 헤벌쭉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속을 초탈한 듯 언제나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의 눈빛이 지금은 낯선 온화함에 젖어 있었다. “루카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게냐?” 바로 저 아이 때문에. “그래, 너도 한번 안아 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지랄.” 루카스는 자신의 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읊조렸다. 남자는 루카스가 앉아 있는 창가 쪽이 아닌 문 쪽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과거에는 저곳에 루카스가 서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 남자가 약간 아쉬운 눈을 하고 앞으로 내민 팔을 내렸다. 과거의 루카스가 아이를 안아 보라는 남자의 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당연했다. 루카스는 저 아이가 끔찍하게 싫었으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루카스는 저 아이를……. “어머, 손님이 왔네요?” 그때, 어떤 여자가 부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역시 아무도 없는 문 쪽을 향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마침 저녁 식사 준비를 하던 참이에요. 루카스도 괜찮으면 들어와서 같이 식사해요.” “그래, 네가 이렇게 온 것도 오랜만이니 좀 더 머물다 가려무나.”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그가 저 풍경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리가 있겠는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는 세 사람의 모습에 루카스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여자는 곧 남자의 품에 있던 아이를 안고 자리를 떠났다. “루카스.” 그 후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넌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앞으로도 언제든 마음 내킬 때 오거라.” 석양에 물든 루카스의 입에서 버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기억은, 루카스에게 지금보다 좀 더 인간적인 감정이 있던 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지나온 수백 년의 세월만큼이나 이날의 기억이나 감정도 마모되어야 마땅했다. “이봐, 그럼 어디 한번 말해보시지.” 그런데도 오래전의 기억을 엿보고 있는 지금, 여전히 속이 찼다. 루카스는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과거의 루카스가 떠난 자리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날 아들처럼 생각했다면서 왜 내 앞에서 그렇게 보란 듯이 뒈져 버렸는지.” 조금 전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또다시 세월에 침잠된 것만 같은 마모된 눈빛으로 텅 빈 자리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차라리 루카스가 알고 있는 남자다웠다. 루카스보다 몇 배나 더 긴 세월을 살아온 선대 검은 탑의 마법사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잃어버린 것 같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차라리 그다웠다. “만약 그 자리에 있던 게 내가 아니라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진짜 아들이었다면, 당신은 그런 식으로 죽어 자빠지지는 못 했을 거야. 그런데 어차피 그렇게 뒈져 버릴 거, 쓸데없는 위선은 왜 떨었을까, 응?”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되살려 내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옛일이다. 원래대로라면 루카스는 이런 분노를 느껴서는 안 되었다. 그런 마법이었으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 후 선대 탑의 마법사가 사용한 그 마법은, 그리고 그가 눈앞에서 재로 사라진 뒤 루카스가 사용한 그 마법은, 이 모든 끔찍한 감정을 깨끗이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루카스가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X발.” 루카스는 손을 들어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어머, 루카스는요? 설마 간 거예요?” “음, 녀석이 의외로 수줍음을 많이 타서.” 뭐, 이 X발? 루카스는 다시 고개를 들어 황당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호호, 그런 것 같기는 했어요. 루카스도 알고 보면 귀여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닌 척해도 어릴 때부터 그런 구석이 있었지.” 이게 뭔 X 같은 소리……. 아니, 그런데 뭐야. 이거 내 기억에 있는 일만 보여 주는 거 아니었어? 난 이런 거지 같은 기억 없는데? 하지만 루카스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또다시 시야가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그래.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는 드리고 온 것이냐?” 시간이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 * * “으어, 10년은 늙은 기분이다.” 나는 기운이 쏙 빠진 것을 느끼며 푹신한 침대에 벌렁 나자빠졌다. 긴 이야기를 마친 후 지금 막 아타나시아 공주를 루비 궁으로 돌려보내 주고 온 참이었다. 밤 동안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몹시 피곤했다. 그러다 문득 옆에서 진득한 시선이 느껴져서 나는 침대에 여전히 엎어진 채로 살짝 고개만 돌렸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그동안 이상했던 게 이제 이해가 돼서.” 루카스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로 나를 관찰하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이곳에서 내가 아타나시아 공주에게 설명한 내용을 함께 들었다. “그러니까 네 말대로라면, 넌 다른 세계의 나를 알고 있었던 거네?” 반은 의심스럽고 또 반은 황당하다는 어투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쉽게 내 말을 믿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되는 거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그래서 대강 그렇게 대꾸한 뒤 꾸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토파즈 궁의 침구는 몹시 푹신푹신하고 아늑했다. 크으, 이대로 잠들어버리고 싶어라. 서서히 졸음이 밀려와서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리는데, 문득 조금 전보다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그럼 너, 그 이상한 책을 찾으면 다시 원래 네가 있던 데로 돌아가는 거야?” “으응. 일단 그 방법이 제일 간단할 것 같긴 한데…….” “그래?” 앗? 그런데 그때, 내 무시무시한 촉이 발동했다. 나는 확 잠이 깨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 너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기분 탓인가? 지금 바로 코앞에서 마력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는데? 내 생각이 맞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루카스가 고개를 까딱 옆으로 기울이며 나를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별거 아닌데. 그냥 황궁 폭파?” 이 또라이가! “난데없이 멀쩡한 궁을 왜 폭파해?!” “그러게. 그냥 왠지 좀 그러고 싶은 기분이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이놈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원수를 져서 몇 번이나 이렇게 기함하게 만드는 거야?! 아무래도 루카스 놈이 사고를 치기 전에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겠다. “루, 루카스?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탑에나 다시 가자. 일 끝나면 다시 가기로 했잖아?” 어흑, 사실은 그냥 이대로 자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놈의 기분이 어째서인지 또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니, 지금 황궁에 있는 건 위험할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루카스에게 냉큼 다가갔다. 다행히도 놈은 내 말에 반응을 보였다. “지금 탑에 가자고?” “응! 탑 완전 최고야! 봐도 봐도 안 질려! 늘 새로워! 짜릿해!” 사, 사실 탑과 나는 오늘이 초면이었지만. 그래서 지금 말한 것처럼 질릴 정도로 보고 또 본 적도 없었으면서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마구 찬양을 해댔다. 내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루카스의 손 쪽으로 은근히 뭉쳐 있던 마력이 서서히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 가자! 빨리, 빨리!”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놀이공원에 가자고 엄마를 졸라 대는 어린애처럼 루카스를 마구 재촉했다. 내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잠시 후 우리는 탑에 도착했다. 아이고, 그런데 진짜 죽겠다. 솔직히 지금 머리만 베면 기절하듯이 잘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루카스한테 안겨 오는 동안에도 본의 아니게 꾸벅꾸벅 졸았던 것 같다. 으, 으음. 그래도 침은 안 흘렸을 거야. 아, 아마도. “저기, 루카스. 내가 지금 진짜 기절할 것처럼 졸려서 그러는데, 자세한 구경은 내일 하면 안 될까?”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면서 루카스에게 말했다. 며칠 전부터 나를 탑에 데려오고 싶어 안달이 났던 녀석인데 혹시 내 말에 기분 상해하는 건 아니려나 몰라. “그래, 이제 거의 동이 틀 때니까 피곤할 만도 하네. 사람이 졸리면 자야지.”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흔쾌히 말했다. 심지어 계단을 다 내려가 막 도착한 넓은 공간에 침구를 소환해 주기까지 했다. 나는 홀린 듯이 거기에 기어들어 갈 뻔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루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서 눕지 않고 뭘 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은근히 나를 독촉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그런 놈에게서 수상함을 느끼고 얼굴을 구겼다. “너, 내가 자면 황궁 부수러 갈 거지?” “뭔 소리야.” 루카스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제는 안 속아! “안 돼, 아무 데도 못 가! 너도 이리 와서 누워!” 나는 녀석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내 손이 닿은 순간 루카스가 크게 움찔했다. “손 풀지 마! 너도 그냥 지금 나랑 같이 자.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나는 루카스가 방심한 사이, 그를 강제로 자리에 눕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루카스가 흠칫하며 나한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해서 손아귀에 더 단단하게 힘을 주었다. “야, 너…… 계집애가 겁대가리 없이…….” “나 잠귀 밝거든? 네가 손 놓으면 나도 바로 일어날 거야. 그러니까 날 재우고 황궁에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알았어?” 루카스는 말이 없었다. 가까이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서서히 시야가 가물가물해져서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알았냐고 묻잖…… 대답을…….” 머리만 대면 잠이 들 것 같다는 내 생각은 정답이었다. 어쩌면 루카스가 소환한 침구가 너무 푹신해서 이렇게 빨리 눈이 감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루카스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잠이 들어버렸다. 여전히 그와는 손을 꽉 맞잡은 채였다. * * * “루카스!” 다음 날 눈을 떴더니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눈을 비비며 창밖을 보자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그래도 푹 잤더니 몸이 개운하구나. 나는 간단한 청결 마법을 사용해 몸을 깨끗이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탑 안 곳곳을 뒤지며 루카스를 찾았지만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헉, 설마 황궁에 간 거 아니야?! 퍼뜩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서둘러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아, 멀쩡하네. 다행…….” 다행히 내 걱정과 달리 황궁은 본래의 휘황찬란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밤에 루카스 놈이 와서 깽판을 쳐 놓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크흑, 잠귀가 밝다고 한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녀석이 내 손을 놓고 자리를 떠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나저나, 그럼 이놈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앗.” 그때, 내 눈앞에 익숙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타나시아 공주님?” 나는 얼굴을 마주한 아타나시아 공주와 이제키엘을 보고 숨을 죽였다. ======================================= [외전 18화] 으앗, 저 두 사람이 이렇게 빨리 만나다니! 원래의 아타나시아 공주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나는 약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네, 괜찮아요.” 아타나시아 공주는 살짝 어색한 분위기를 흘리며 입술 끝을 올려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기야 평소에는 이런 식으로 이제키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던 모양이니까. 그래도 간밤에 나와 함께 기나긴 대화를 나눈 덕인지 아타나시아 공주는 제법 의연히 행동하고 있었다. 며칠간 그녀와 내가 바뀌었던 사실이 없던 일인 것처럼. “본의 아니게 공자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해요.” 그런데 그 순간, 이제키엘의 뜻 모를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못 박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여서, 잠시 후에는 아타나시아 공주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이제키엘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터이니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약간 이중적인 의미가 깃든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 아타나시아 공주를 발견한 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마땅히 그녀를 도왔을 것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이제키엘의 도움을 필요로 한 사람이 아타나시아 공주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자신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는 의미인지. 어느 쪽이든, 이제키엘의 태도는 상대에게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제니트 공주님의 다과회에 참석하시는 길이었는지요.” “네, 맞아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네? 아니, 괜찮…….” “어차피 저도 볼일이 있어 그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타나시아 공주가 곤혹스러워하며 거절했지만 이제키엘은 완고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에메랄드궁을 향해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으억, 그런데 저 어색한 공기는…… 보고 있는 나까지 다 불편해지잖아? 하지만 애초에 저들은 서로 서먹한 관계였던 것 같으니까. 게다가 아타나시아 공주는 어쩐지 아까부터 다른 곳에 정신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묘하게 느린 걸음이나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를 보니 다른 생각에 잠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키엘이 예의상 몇 번인가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타나시아 공주는 다소 건성으로 그의 말을 흘려 넘겼다. 그러다 보니 잠시 후에는 자연스럽게 이제키엘도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의 시선이 아타나시아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녀는 그마저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앗, 아타나시아, 이제키엘.” 두 사람은 침묵의 길을 걸어 에메랄드궁에 도착했다. 때마침 밖으로 나오는 중이던 제니트가 그런 두 사람을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왔다. “어떻게 둘이 같이 와요?” “도중에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만나 모시고 왔습니다.”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아타나시아의 몸 상태가 걱정되던 참이었는데.” 음, 이곳의 제니트와 이제키엘이 정식으로 대화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여기에서는 제니트의 신분이 공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옆에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인지, 이제키엘은 제니트에게 존칭을 썼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제니트와 함께 궁 밖으로 나오는 중이던 귀부인. 그녀가 먼저 인사하자 아타나시아도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로자리아 백작 부인, 안녕하세요.” 앗, 아앗!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라고? 그럼 제니트의 이모잖아! 나는 깜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아, 자세히 보니 예전에 클로드의 침실에서 본 적이 있던 초상화 속의 여자를 닮았구나. 하기야 친자매 사이이니 닮은 게 당연한가. 갈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로자리아 백작 부인은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요염한 느낌을 풍기는 미인이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제도로 올라오던 중 갑자기 사고로 죽어버려서 한 번도 직접 얼굴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 저 여자가 원작의 아타나시아를 죽게 한 원흉이로구먼? “얼마 전 큰일을 치르셨다 들었습니다만, 무척 강녕해 보이시는군요.”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아타나시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 조금 발끈했다. 저 아줌마, 지금 아타나시아 공주가 멀쩡해 보이는 걸 매우 아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호호. 이리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니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폐하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 자해라도 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도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말갛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제니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니트는 설마 자신의 이모가 아타나시아에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 곧 제니트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이모님, 그게 무슨…….” “로자리아 백작 부인. 그런 말은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큰 결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제니트보다 이제키엘의 목소리가 앞섰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세 사람의 눈길이 그에게 날아가 박혔다. “어머나, 제가 실례를 저질렀다면 사과드리지요. 어디까지나 밖에서의 소문이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 제 생각도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랍니다.” 로자리아 백작 부인은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는 듯이 사과했지만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었다. 아무래도 아타나시아를 만만히 여기고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 같은데……. 하기야 원작 속의 아타나시아는 여기저기 치이고 다니는 소심한 공주님이었지. 보아하니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아타나시아 공주에게 지금처럼 행동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아타나시아, 이모님의 말은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로자리아 백작 부인이 자리를 떠나고 난 뒤 이제키엘도 에메랄드궁을 나섰다. 역시 이쪽에 볼일이 있다는 말은 아타나시아가 부담을 느낄까 봐 그냥 한 말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떠난 뒤 제니트가 염려 섞인 목소리로 아타나시아를 향해 말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떠드는 말이에요. 아타나시아는 실제로 각혈까지 했는데…….” “괜찮아요.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은 제게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예상외로 아타나시아는 로자리아 백작 부인의 말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제니트의 걱정 어린 말에 담담히 대답한 뒤, 어스름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서 얼마 전 루비궁에 들르신 이유가 제니트의 부탁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그 순간 제니트가 멈칫했다. “아바마마께서 루비궁에 들르셨나요?” 그녀는 두 눈을 약간 크게 뜬 채 아타나시아를 보다가 곧 밝게 미소 지었다. “저는 먼저 부탁드린 적이 없는걸요. 아바마마께서 아타나시아를 걱정해서 가신 걸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조금 놀랐다. 뭐? 클로드는 그때 분명히 제니트의 부탁으로 잠깐 들른 거라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 제니트의 얼굴을 보니 아타나시아 공주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조금 전에도 정말 놀란 표정이었고. ‘더 볼일이 없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제니트의 앞에서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말도록.’ 어, 뭐야. 그럼 그 말은 자신의 거짓말을 들키기 싫어서 그런 거였나? 지금처럼 아타나시아가 직접 제니트에게 그날의 일을 말하면 클로드가 자의로 루비궁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나와 달리 아타나시아 공주는 제니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배려해 줄 필요 없어요. 제니트는 마음씨가 참 곱네요.” “아니, 진짜예요. 저는 아바마마께 그런 부탁을 드린 적이…….” “정말 괜찮아요, 제니트.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니까요.” 제니트는 아타나시아의 반응에 당황한 것 같았다. 나도 흐리게 미소 짓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얼굴을 보는 동안 눈에 습기가 차서 혼났다. 어흑, 이렇게까지 뿌리 깊은 불신이라니.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아타나시아한테 무관심했던 거냐, 이 세계의 클로드! 나는 건물 안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이내 자리를 비켰다. 그나저나 루카스 놈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탑에도 분명 없었는데.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내가 탑을 샅샅이 뒤져 보지는 않았지. 갑자기 놈이 황궁을 폭파하러 간 게 아닌가 싶어져서. 그, 그럼 혹시 내가 또 말없이 튄 줄 알고 빡 돌아서 나타나는 것 아니야? 나는 그런 찜찜함을 안은 채 토파즈궁으로 이동했다. 이제 더 이상 루비궁에서 아타나시아 공주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되니 다시 책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어, 뭐야! 너 여기에 있었어?” 그런데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문을 등진 채 테이블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루카스였다. 내 목소리를 들은 그가 뒤돌아서며 툭툭 손을 털었다. “넌 예상보다 늦게 왔네.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올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집에 가는 게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나 봐?” 루카스의 손짓을 따라 주위에 먼지인지 재인지 헷갈리는 무언가가 잠깐 흩날리다가 사라졌다.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네가 말한 책에 흥미가 생겨서 나도 한번 찾아보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한순간 멈칫했다. “흥미? 갑자기 왜?” “뭘 그렇게 따져? 내가 같이 찾아주면 너한테는 좋은 일 아니야?”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왜지? 지금 막 내 촉이 이놈에게서 또 한 번 수상함을 감지했는데? “그래서 뭘 좀 찾았어?” “아니. 그런데 여기 왜 이렇게 먼지가 많아.” “그래? 매일 청소하는 것 같았는데.” “아침부터 쥐새끼 한 마리 얼씬도 안 했는데 청소는 뭔 놈의 청소.” 루카스는 먼지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기관지가 피해를 입고 있다는 듯이 짜증스럽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봤을 때는 깨끗하기만 한데 괜한 트집은. 아무튼 루카스가 도와준다고 하니 일이 한결 쉬워졌다. 나는 그와 함께 토파즈궁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날 며칠 동안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보이지 않았던 책이 이제 와서 쉽게 나타날 리 없었다. “오늘은 이쯤 하고 가지?” 해가 질 무렵 루카스가 내 앞에 나타나 말했다. 끄응, 어차피 더 찾아도 안 나올 것 같은데 그럴까. “난 잠깐 루비궁에 가 볼게.” “그 공주가 신경 쓰여?” 정답이었다. 사실은 어젯밤부터 계속 그녀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아까도 일부러 아타나시아 공주를 지켜봤던 것이고. “지금 루비궁에 가 봤자 없어. 황제를 만나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데 잠깐 먼 곳을 응시하듯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루카스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것을 듣고 나는 순간 멈칫했다. “정 궁금하면 황제 거처에 가 보든가.” 나는 잠깐 주저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저, 꿈을 꿨어요.” 쏴아아. 바람에 떠밀린 보라색 꽃송이가 가련하게 몸을 흔들었다. 귓가에 흘러드는 가느다란 음성은 아타나시아 공주의 것이었다. 루카스의 말처럼 그녀는 냉담한 얼굴을 한 클로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눈물겹게 행복해서 차라리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싶은 그런 꿈이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어젯밤 루카스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냥 잠 좀 푹 자게 해둔 것뿐이야. 영영 깨어나기 싫을 정도로 엄청 좋은 꿈까지 꾸게 해줬으니까 이 정도면 완전 양심적인 납치범 아냐?’ 나는 지금 아타나시아 공주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눈물겹게 행복한 꿈. 과연 그녀는 꿈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 [외전 19화]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나니 이제야 확실히 알겠네요.” 담담한 어투로 클로드를 향해 읊조리던 아타나시아 공주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떠오른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정말 이제껏 단 한 순간도 저를 딸로 생각하신 적이 없군요.” 쏴아아. 옅은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지나갔다. 나부끼는 머리카락으로 잠시 가려졌던 시야에 곧 다시 여린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정말 단 한 순간도 저를 사랑하지 않으셨어요.” 물기 어린 보석안에 떠오른 감정은 슬픔, 절망, 고통, 서러움, 그리고 체념……. 클로드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저 조용히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아타나시아 공주는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있지 않았던 듯했다. “당신은 정말…….” 이번에야말로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오직 허망함을 담은 작은 음성만이 마침내 바람에 부스러졌다. “제게 잔인할 정도로 늘 솔직하셨네요.” * * * “당신, 거기에 있죠?” 루비 궁으로 돌아온 아타나시아는 그 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침대에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가 이윽고 허공을 향해 말했다. 나는 그녀가 부르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알고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흐리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상해요. 당신과 나는 분명 같은 존재일 텐데, 이렇게 당신을 마주 보고 있어도 ‘또 다른 나’라고는 느껴지지 않아요.” 아타나시아 공주의 말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분명 그녀와 나는 각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아타나시아’였다. 하지만 본래의 나는 아타나시아 공주가 아닌 다른 세계의 이지혜가 아니었던가. 사실 나는 내가 이 몸에 빙의된 것인지 아니면 환생한 것인지 아직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건 나는 원래 책 속의 아타나시아 공주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와 나는 엄연히 다른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우리가 각각 다른 세계의 존재라는 사실을 뒤로하고서라도. “당신도 나와 같았나요?”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아타나시아 공주는 나를 향해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도 나처럼 이런 절망감을 안고 살았나요?” 마주한 보석안에서 드러나 보이는 감정에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자신과 같은 절망감을 느끼고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왔던 또 다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안도와 동질감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 깨진 유리 조각처럼 박혀 있었다. 나는 어젯밤 그녀에게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또 다른 아타나시아 공주’라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본래의 아타나시아 공주가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책 속의 아타나시아 공주가 맞고, 또 그 내용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앞으로 몇 달 후에 그녀가 클로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다시 꿈꾸게 해주세요.” 지금에 와서는 더욱, 말하기가 어려웠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아타나시아 공주가 몸을 움직인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나는 내 발치에 매달리는 그녀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어제까지 꾸었던 꿈을, 다시 꾸게 해줘요.” “아타나시아…….” “제발요. 당신은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나를 올려다보는 눈물 젖은 눈동자에도, 호소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가늠할 수 없는 절박함이 어려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 꿈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루카스가 보여 준 꿈이 그렇게 달콤했던 것일까?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리고 다시 깨어나 맞닥뜨린 현실에 이만큼이나 깊이 절망할 정도로. 또 거짓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그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다면 아마도 그녀는 그 꿈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사랑받고 있었을 것이다. 마주한 간절한 눈빛에 한순간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설령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해도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그 꿈을 보여 줘도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단 한 번 꿈을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내게 매달려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콤하다 해도 꿈은 꿈일 뿐이다. 한데 그녀를 그런 거짓된 행복에 사로잡히도록 두어도 되는 걸까? 나는 입술을 한 번 꾹 깨문 뒤 아타나시아 공주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 어스름한 방 안에 루카스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쪽이 아니야.” 나와 아타나시아 공주는 동시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카스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소원을 이루어주면 넌 대가로 뭘 줄 거지?” “루카스!” 나는 소리를 높여 루카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아타나시아 공주를 현혹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말리는 것보다 아타나시아 공주가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더 빨랐다. “뭐든지, 뭐든지 드릴게요.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간절한 목소리가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섬뜩하게 시린 루카스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그 소원, 내가 이루어줄게.” 매혹적인 음성이 귓전을 울리고, 뒤이어 루카스의 손이 아타나시아 공주의 얼굴을 향해 뻗어졌다. 그녀의 창백한 하얀 얼굴에서 투욱,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 나서 아타나시아 공주의 몸이 허물어졌다. “아타나시아!” 나는 급히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하얀 얼굴 위로 번진 눈물 자국이 애처로웠다. 다행히 그녀는 그저 잠이 든 것뿐인 것 같았다. 아니, 이 경우에는 다행인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타나시아를 품에 안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루카스는 어딘가 조금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잠재운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는 오직 나만을 향해 있었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속에서 치미는 감정을 삭이며 루카스를 향해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이 여자랑 내 문제야. 네가 끼어들 곳은 어디에도 없어.” 루카스의 태도는 냉정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인지도 몰랐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루카스에게 자신의 바람을 이루어주기를 부탁했고, 루카스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그 사이에 내가 끼어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해도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다. “그리고 네가 신경 쓸 만한 문제는 이쪽에만 있는 게 아닌데.” 그때, 루카스가 나직한 음성으로 뜻 모를 말을 속삭였다. “그 황제 오래 못 살 거야.” “뭐?” 나는 그의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지금 루카스가 말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쪽 세계의 네 아버지 말이야. 금방 죽을 거라고.” 곧이어 덧붙여진 루카스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맥없이 부스러졌다. 그가 내게 속삭인 말이 귓가에서 시끄럽게 웅성거리다가 순식간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나는 찬물을 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마주한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 * * ‘내가 졌다.’ 클로드는 꿈을 꾸었다. ‘원한다면 그대에게 애원이라도 하겠다.’ 꿈속에서의 그는 누군가를 향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절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가슴이 저밀 정도로 미치도록 애끓는 마음이라, 눈앞에 있는 사람이 원한다면 기꺼이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를 향해 이런 가슴 절절한 감정을 품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우스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인 것처럼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지독히도 생생하다는 점이었다. ‘나를 선택해라.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좀 더 이기적으로 그대만을 위한 결정을 내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만큼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흐릿했다. 손을 뻗으면 곧바로 닿을 만한 거리에 있으면서도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니, 퍽 묘한 일이었다. 아, 하기야. 어차피 이것은 단순한 꿈일 뿐이니 이런 허무맹랑한 일도 얼마든지 있을 법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을 상대로 이토록이나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의 목숨을 좀먹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바로 그 순간 눈앞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여린 턱과 붉은 입술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클로드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었다. 하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저렸다. 그 투명한 눈물방울에 막 손이 닿은 순간, 클로드는 잠에서 깨어났다. “음.” 눈을 뜨자마자 머리를 찌르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클로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가 어두운 것을 보니, 아직 밤인 모양이었다. 어째서인지 요즘 들어 이렇게 두통을 느끼는 일이 잦았다. 전에도 아타나시아를 볼 때면 이렇게 간혹 머리가 아픈 적이 있었지만 요즘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클로드의 두통이 이 정도로 극심해진 것은 아타나시아가 화원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 모습을 본 뒤부터였다. 그 후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거나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상태는 조금씩 더 심해졌다.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자꾸만 기억날 듯 말 듯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마를 누르던 클로드의 손이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무슨 꿈을 꾸지 않았던가? 그러나 기이하게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히 아주 그리운 꿈을 꾼 것 같은데…….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그립다니, 그런 감정을 느낄 만한 것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개꿈이로군.” 클로드는 나직하게 읊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또 이런 곳에서 쪽잠을 잔 것을 알면 제니트가 한소리 하겠군. 그의 걸음이 달빛이 새어 드는 창가로 향했다. ‘저, 꿈을 꿨어요. 눈물겹게 행복해서 차라리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싶은 그런 꿈이었어요.’ 그때, 문득 아까 만났던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순간 클로드는 움찔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나니 이제야 확실히 알겠네요.’ 아타나시아는 일전에 있던 경고를 무시하고 또다시 그를 찾아왔다. 그런데 기껏 늘어놓은 것이 이런 헛소리였다. ‘아바마마께서는 정말 이제껏 단 한 순간도 저를 딸로 생각하신 적이 없군요.’ 하지만 체념을 담은 그 서글픈 미소를 보는 순간, 그의 가슴 한복판을 가로지른 따끔한 감각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단 한 순간도 저를 사랑하지 않으셨어요.’ 그것은 분명 거짓 한 점 없는 진실이었는데도 정작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그 말에 어째서인지 기분이 아주…… 아주 이상해졌다. ======================================= [외전 20화] 클로드는 아주 오랫동안 아타나시아의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아까 보았던 그 눈물 젖은 얼굴이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렇게 동이 틀 때까지, 클로드의 발길은 창가 앞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오래 못 살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루카스에게 반문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보며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실내에 은은한 달빛이 번져 들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 몸을 걸치고 있는 루카스는 꼭 저승에서 온 사신처럼 보였다. “이유가 궁금해?” “말장난할 기분 아니야.” 날 서 있는 내 반응에 루카스가 웃었다. 뜻밖에도 아주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하지만 다음 순간 귀에 울린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게 왜 궁금해? 넌 어차피 여길 떠나면 그만이잖아.” 눈을 한 번 깜빡인 정도의 짧은 순간이 지났을 때, 어느덧 그는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있던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 손길은 이제까지와는 그 강도가 조금 달랐다. 나는 포악한 힘에 강제로 붙들려 루카스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이봐, 공주님. 착각하지 마. 여긴 너의 세계가 아니야.”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눈빛이 바로 코앞에서 나를 꿰뚫었다. 루카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당히 배알이 뒤틀린 상태인 것 같았다. 씹어 뱉듯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잠든 아타나시아 공주를 붙들고 있던 손에 나도 모르게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어차피 넌 원래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지. 그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네가 알 바 아니잖아? 간섭할 권리도, 자격도 너한테는 없어.” 내게 이런 식으로 뼈 있는 말을 내뱉는 루카스는 오랜만이었다. 이럴 때, 대체로 그는 내게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나는 이 세계의 외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루카스의 말처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되든 내가 알 바는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도 신경 쓰여? 네가 지금 이 공주에게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그 왕에게까지 마음이 쓰여? 왜, 그 사람이 네 진짜 아버지처럼 느껴지기라도 해?”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었다면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리가 있겠는가? 아, 정말이지. 나는 루카스가 전부터 나한테 이런 식으로 입바른 말을 비수처럼 날려 댈 때마다 너무 화가 났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 순간 루카스가 입매를 비틀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 침묵 속에서 답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그럼 알려 줄게.” 그런데 내 착각일까? 어째서인지 루카스는 내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한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 황제가 말이야, 금지된 마법을 썼어.” 이어서 나지막하게 속삭여지는 음성에 나는 훅 숨을 들이마셨다. “금지된 마법이라고……?”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 금지된 마법이라 칭해질 것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흑마법. “보아하니 여기에 새까맣게 구멍이 나 있더라고.” 내 반응을 본 루카스가 나른히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예전에 스스로 기억을 봉인했나 본데, 그게 꽤 과격한 방식이었던 모양이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클로드가 스스로 기억을 봉인했다니…… 어째서 그런 일을 한단 말이야? 예전에 클로드가 나 때문에 기억을 잃었을 때의 일로, 나도 정신계 마법에 대해 따로 공부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을 건드리는 마법은 고도로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마법 중에는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자기 머리에 걸어 둔 금제가 지금에 와서 깨지고 있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 여파로 뇌에 문제가 생긴 거고.” 그러니 루카스의 말처럼 기억을 봉인하는 마법이라면 그것은 흑마법이 맞을 터였다. “아마 최근에 마법이 깨질 만큼 큰 충격이라도 받았나 본데. 자세한 내막까지야 내 알 바 아니지만.”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클로드가 스스로에게 그런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도, 그리고 그 마법의 부작용으로 지금 위험한 상태라는 것도, 모두 믿기지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걸까? 루카스가 이번에는 나를 달래듯이 조금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때까지도 머리카락을 아프게 움켜쥐고 있던 손이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그의 손에서 흘러내린 백금색 머리칼이 소리 없이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루카스는 자연스럽게 움직여진 손으로 이번에는 내 턱을 들어 올린 뒤 나긋이 속삭였다. “어차피 흑마법을 사용한 사람치고 끝이 좋은 인간은 하나도 없어. 저주받은 힘은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이게 되어 있거든. 너도 마법사라면 그 정도는 알 텐데.”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지게 붉었다. “그러니까 그냥 모른 척해.” 루카스의 얼굴에 어스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유쾌한 기분으로 지어 보인 미소가 아니었다. “이 세계의 사람도 아닌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간섭해?” 깨진 유리 조각을 박아 넣은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내 얼굴에 내리꽂혔다. 내 턱을 붙잡은 그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네까짓 게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서 남의 삶을 어그러뜨리느냐, 이 말이야.” 고막을 긁으며 파고드는 낮은 음성에도 가시가 박힌 것 같았다. 나는 루카스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루카스가 움켜쥐고 있는 턱에 슬슬 아린 감각이 들어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나보다 루카스가 먼저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의 거친 손길이 거짓말인 것처럼 더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내 뺨에 닿았다. “그래도 정 그렇게까지 뭔가를 바꾸고 싶다면.” 그 후 이어지는 그의 말을 나는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이 여자가 되든가.” “뭐?” “네가 진짜 이 세계의 아타나시아 공주가 되라고.” 그렇게 말하며 루카스는 나를 향해 고아하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내 품에 안긴 체온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나는 잠들어 있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몸을 무의식중에 좀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럼 내가 네 바람을 이루어줄게.” 마치 영혼을 빼앗기 위해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조금 전 아타나시아 공주에게 그랬듯, 루카스가 이번에는 나를 향해 달짝지근한 음성을 흘려 보냈다. 귓바퀴를 뭉근히 매만지는 손길에 일순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목을 빳빳이 세웠으나 루카스는 이미 내 동요를 눈치챈 듯이 입가에 느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내 바람이 뭔데?” “이 세계의 네 아버지를 살리고 싶지 않아?” “진짜 아타나시아 공주는 어쩌고 나더러 그녀가 되라는 거야?” “이 여자가 바라던 대로 죽을 때까지 행복한 꿈속에서 살게 해주면 되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따른 그의 대답에 얼핏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넌 진짜가 되는 거야.” 루카스의 손이 내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두근두근 뛰고 있는 맥 위로 따뜻한 체온이 스몄다. “네 세계가 아닌 이곳에서.” 루카스는 그렇게 달콤하게 속삭이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입술 위로 겹쳐진 온기에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손으로 내 목덜미를 받치며 더욱 깊숙이 입술을 포갰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것과 동시에 나를 한입에 집어삼킬 것 같은 강렬한 붉은 눈동자와 아주 가까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 후 급작스럽게 밀어닥치는 태풍처럼 거친 입맞춤이 이어졌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의 행동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루카스는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내가 내뱉는 불규칙적인 숨소리가 잠깐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는 내게 닿아 있던 손을 천천히 움직여 조금 전 내가 깨문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달빛에 물든 그의 손가락에 어렴풋이 배어 묻은 피가 보였다. 그 피만큼이나 붉은 눈동자가 한 차례 자신의 손에 묻은 흔적을 스쳐 지나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는 가까스로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했다. 밖으로 흘러나온 내 목소리는 언뜻 침착하게 들렸으나 속까지 그렇지는 못 했다. 지금의 상황이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 그에게서 들은 말도 그렇고, 또 그가 지금 내게 한 행동도 모두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말이 안 돼?” 루카스의 담담한 음성이 지척에서 흘러들었다. “애초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 짓는 기분이 뭔데?” “그건…….” “엄밀히 따지면 너도 진짜고, 이 여자도 진짜잖아.”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은 아무 소리 없이 그냥 다물었다. “그런데 왜 네가 이 여자 대신 이곳의 아타나시아 공주가 되는 게 말이 안 돼?” 어쩐지 나를 비웃는 듯한 어투였다. 루카스는 언제 내게 열띤 키스를 퍼부었냐는 듯 조금 전과는 달리 지독히도 싸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이곳에 잡아 두려는 거야?”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 행복해지는 꼴을 보기 싫어서.” “왜 그렇게 화가 났는데?” “네가 거슬려. 미치도록.” 내 물음에 루카스가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이놈이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는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굳이 입 밖에 꺼내 그렇지 않아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짓까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 루카스는 나를 시린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곧 저주처럼 읊조렸다. “넌 마음대로 이 세계에 발을 들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아니, 그런데 억울하네. 나도 여기에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라고! “공주님? 왜 바닥에 앉아 계세요?” 아, 앗?!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쳤다. 얼마나 놀랐으면 헛숨까지 들이마시며 경기하듯이 몸을 들썩이고 말았을 정도였다. 가, 갑자기 뭐야?! 문을 여는 소리도,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도 못 느꼈는데?! 급히 고개를 돌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릴리의 얼굴이 보였다. “리, 릴리?”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주무시는 줄 알고 숙면에 좋은 향초를 놔드리려고 들어왔는데…….” 하지만 그녀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나는 또 한 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렸다. 으악, 잠깐! 나 지금 아타나시아 공주를 안고 있잖아?!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품에 안겨 있던 사람은 이미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아니, 도대체 언제 없어진 거지? 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리고 불현듯 드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들자 열린 테라스 문 앞에 서 있는 루카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축 늘어져 있는 아타나시아 공주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릴리가 그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루카스 놈이 지금 투명화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지금 나 또 이곳의 아타나시아 공주로 오해받았잖아? 방 안에 들어오는 릴리의 기척도 루카스, 저 자식이 지웠구나! 만약 알았다면 내가 몸을 감출 게 분명하니까! 게다가 저놈은 나한테 직접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대신 다른 사람에게 마법을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이 맞다고 말하듯, 루카스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외전 21화] 달빛 아래에서 그의 미소가 더없이 첨예해 보였다. 그 후 루카스가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공주님?”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달빛만이 고인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릴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미안하게도 그녀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루카스 저 자식……. 죽일 거야. 다음에 만나면 진짜 죽일 거야! 그렇게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며 내 눈앞에서 사라진 루카스 놈을 향해 이를 갈았다. 얄궂게도, 그러는 동안에도 밤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이레인 후작가에서 성대한 무도회가 열렸다. 제니트와 이제키엘은 그 무도회에 파트너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둘이 같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플로렌스 양이 그 목걸이를 보고 고양이에게…….” 여느 때처럼 마차 안에는 제니트가 꾀꼬리처럼 재잘거리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제니트는 이제키엘이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생각을 해요, 이제키엘?” 앞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에 이제키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은 단 한 순간도 그녀에게 집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듯이 고요했지만 제니트는 속지 않았다. 곧 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이 원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이었던가?” 제니트의 청으로 그는 사석에 있을 때는 그녀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물음이 너무나 뜻밖이라 제니트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을까요? 누구나 도움을 받으면 감사의 인사를 하잖아요.” 그녀의 말에 이제키엘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아래로 내리깔렸다. 그 후 그는 혼잣말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려보내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겠지.” 제니트는 그런 그를 보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이레인 후작가의 저택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려섰다. 나란히 무도회장으로 입장하는 이제키엘과 제니트는 누가 보더라도 굉장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듯, 그들은 모두의 환대와 찬사를 받으며 무도회장의 한가운데에 도달했다. 연회의 주인공은 이레인 후작가의 남매였지만 제니트와 이제키엘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화 속에 나오는 달콤한 과자 나라의 설탕 인형들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홀 안에서 함께 춤을 추었다. 주위에는 감미로운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역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춤이 끝난 뒤 그들은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다정한 눈인사를 나누었다. “제니트 공주님, 부디 제게 두 번째 춤의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후 제니트에게 다른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는 얼마 전부터 제니트에게 꽤 노골적으로 구애 중인 이레인 후작가의 영식이었다. 영애들 사이에서 꽃 공자라고 불리며 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소년답게 그는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제니트는 그에게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슬쩍 이제키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근사한 모습을 한 그는 오늘도 다른 영애들과 귀부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제키엘과 제니트는 누가 봐도 앞으로 함께하는 미래가 거의 확실시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뜨거운 열정 같은 것이 없었다. 이제키엘은 제니트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추어도 질투하지 않을 것이며, 제니트 역시 이제키엘이 다른 여자와 달콤한 미소를 주고받아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예전에 제니트는 혹시 이제키엘이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을 느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그런 마음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굳건한 신뢰인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레인의 꽃 공자님의 청이라니 수락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제니트는 방긋 미소 지으며 자신의 앞으로 내민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제키엘과 맞닿아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러나 제니트와 이제키엘, 두 사람 다 거기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제니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댄스홀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키엘도 제니트를 뒤로한 채 홀을 가로질렀다. 영애들은 혹시나 그가 자신에게 춤 신청을 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제키엘은 두 번째 곡이 연주될 때까지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오늘도 혼자 계시는군요.” 그러다 문득 그는 익숙한 이름을 듣고 발길을 멈추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타나시아 공주도 오늘 무도회에 참석했던가? 그녀는 평소에도 벽에 장식된 꽃처럼 언제 어디서나 존재감 없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미처 그녀가 무도회에 참석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저나 체통도 없이 이게 무슨 꼴이신가요? 역시 피는 어디로 가지 않나 봐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비록 천한 무희의 소생이시라 해도 그 절반은 고귀한 황가의 혈통이실 텐데, 어쩜 이렇게 제니트 공주님과 다르신지.” 그런데 이어지는 음성이 꽤 무례했다. 지금 저런 말을 하는 영애들은 황족을 대하는 예우를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키엘은 약간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도회장의 구석진 자리에는 간이 휴게실 겸 두꺼운 커튼으로 분리된 공간이 있었다. 예상했듯이 그곳에는 아타나시아 공주와 다른 세 명의 영애가 함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제키엘은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 * 나는 오늘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그 이유는 바로 첫째가 루카스, 둘째가 이 거지 같은 무도회 때문이었다. 아, 물론 오늘의 무도회를 연 이레인 후작가에는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입맛이 쓴 것은 아타나시아 공주 대신 이 무도회에 참석해야 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크윽, 이런 거지 같은 인생. 당최 내 뜻대로 쉽게 되는 일이 없어. 아타나시아 공주를 납치한 루카스 놈은 완전히 내 앞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나는 그녀를 찾아 황성 안의 모든 궁과 검은 탑을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그들의 머리카락 한 올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졸지에 또다시 이곳의 아타나시아 공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나까지 그냥 모습을 감춘다면 아타나시아 공주의 실종 사실을 금세 모두가 알아차릴 터였다. 차라리 그렇게 하는 편이 그녀를 찾기에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클로드가 사라진 아타나시아 공주를 직접 찾아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크흑, 왜인지 자신이 별로 없었다. ‘그동안 거슬렸는데 잘 없어졌다!’ 하고 오히려 홀가분해 하면 어떡하지? 그럼 릴리만 죽도록 걱정할 것 아니야. 게다가 왜인지 이곳의 아타나시아 공주의 삶이 괜히 나 때문에 엉망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며 사라진 두 사람을 찾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 무도회장에 온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던 듯했다. 아무리 황궁 내에서 존재감이 없는 공주라고는 하나 그래도 공주는 공주라, 일단 나도 어떤 영식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무도회장에 입장했다. 그러나 바보가 아닌 이상 내가 이 무도회장에서 한마디로 개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아타나시아 공주님. 거기에 계셨나요? 너무 수수하셔서 미처 못 알아 뵈었네요. 아, 하긴. 루비 궁의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지요? 미리 귀엣말을 주셨다면 제가 안 쓰는 장신구나 드레스 정도는 기꺼이 빌려드렸을 텐데.” 벌써 세 번째. 나는 은근히 내 속을 긁는 영애를 마주하며 속으로 참을 인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동안 이따위 말을 들으며 여기저기 치이고 살아왔을 아타나시아 공주를 생각하니 마음이 몹시 언짢았다. 그래도 나는 본분을 잊지 않고 이곳의 진짜 아타나시아 공주처럼 온순한 낯을 한 채 자리를 피했다. 그녀들이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 이대로 있으면 내가 못 참고 사고를 칠 것 같아서 피한 거다! 자꾸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나는 무도회장에 마련된 음료를 들고 쭉쭉 들이켰다. 나 이제 세 번 다 참았어! 난 오늘 한 마리의 위험한 들짐승이야, 그러니까 이제 건드리지 마라. 나는 오늘 나를 에스코트한 영식을 자유로이 풀어준 뒤 혼자 구석에 서서 연거푸 음료만 들이마셨다. 음,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왜인지 조금 알딸딸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기분은 아까보다 나아졌으니 다행이었다. 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갈까 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바퀴벌레 같은 커플들이 포진해 있었다. 에잇, 어디에서나 커플 지옥! 나는 투덜거리며 무도회장 구석에 마련된 휴식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소파가 눈에 띄어서 나는 걸음을 옮겨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앗, 푹신해! 그렇지 않아도 구두가 불편했는데 잘됐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야지. 나는 내친김에 소파 위에 다리까지 올리고 늘어졌다. 다른 때라면 밖에서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일 리 없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온몸이 노곤해서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게 느껴졌다. 하, 내 인생. 왜 이렇게 스펙타클한 일이 끊이지 않는 것 같지? 사라진 루카스랑 아타나시아 공주는 또 어디서 찾아? 으어, 그리고 난 도대체 집에 어떻게 가냐고요. ‘진짜와 가짜를 구분 짓는 기준이 뭔데?’ 그러게. 그 기준이 뭘까? [진정한 자신을 찾는 자만이 돌아와 성운(聖運)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자신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장난이고. 완전 철학적인 심오한 얘기 같잖아. “어머나, 아타나시아 공주님?” 그때, 휴식 공간의 입구 쪽에서 얄미운 목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 슬쩍 고개를 들자 세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오늘도 혼자 계시는군요.” 아이고, 표정을 보아하니 이쪽도 평소에 아타나시아 공주를 좋아하던 쪽은 아니구먼. “그나저나 체통도 없이 이게 무슨 꼴이신가요? 역시 피는 어디로 가지 않나 봐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비록 천한 무희의 소생이시라 해도 그 절반은 고귀한 황가의 혈통이실 텐데, 어쩜 이렇게 제니트 공주님과 다르신지.” 역시나 그들은 아타나시아 공주의 출신을 두고 입들을 털기 시작했다. “뭐, 출신조차 불명확한 여자의 태에서 나신 분이니 오죽하련만은. 그러고 보니 무희들은 원래 노예 출신인 경우가 많다지요? 듣자 하니 가무 대신 다른 것을 팔기도 한다던데…….” “어머, 망측해라. 그건 완전 사창가의 창기나 다를 바가 없잖아요.” 이어지는 그녀들의 조롱에 나는 아까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졌다. “야, 인간적으로 그런 패드립까지 참으면 내가 보살 아니겠냐?” “네?” “아니, 보살이 아니라 정신 나간 얼간이겠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빈 잔을 아무렇게나 팽개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좀 많이 안 좋아. 그래도 사고 치면 뒷감당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지금까지는 용케 참았는데 말이야, 너희가 욕한 그 사람은 내 어머니이기도 하거든.” “너, 너희라니요? 지금 저희에게 너무 말씀을 함부로 하시는…….” “시끄럽고, 너나 잘하세요.” 나는 무어라 종알종알 떠들어 대는 영애들을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온갖 물건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세 쌍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떠졌다. ======================================= [외전 22화] 그녀들은 주위의 광경에 눈을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이,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 자, 이제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휘오오! “꺄악……!” 내가 손짓하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물건들이 회오리처럼 거칠게 빙글빙글 돌며 영애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아, 마침 좋은 게 있네. 역시 이레인 후작가의 무도회답게 휴식 공간조차 사방이 꽃과 식물 천지였다. 나는 바닥과 테이블에 놓인 화병 속의 꽃으로도 모자라 벽을 온통 뒤덮다시피 장식하고 있는 꽃들까지 모조리 눈앞으로 불러왔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지만 난 그런 거 몰라! 그리고 내가 이제 세 번 다 참았다고 했지? 촤악……! 철썩, 철썩! 나는 마력으로 꽃을 움직여 영애들을 마구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꺅, 이게 뭐야!” “엄마야!” “나, 난 꽃가루 알레르기가……!” 온갖 종류의 꽃다발에 채찍질 당하듯 얻어맞는 기분이 어떠십니까? 짜릿하시나요? 얼마 안 가 주변은 사방으로 흩날리는 꽃잎들과 꽃가루로 자욱해졌다. 꽃의 폭격을 받은 영애들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공들여 손질했던 것이 분명한 머리카락과 드레스에도 노란 꽃가루와 색색의 꽃잎들이 잔뜩 내려앉아 있는 상태였다. 영애들은 여전히 멈추지 않는 꽃들의 공격을 받으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지금 내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꽤 세게 꽃을 휘두르고 있었으니 아마 맞은 부위가 제법 아프기도 할 것이다. 아이고, 저 모습을 보니까 그래도 조금 속이 후련하다. 그러니까 누가 남의 엄마를 그렇게 욕하랬나? 솔직히 싸울 때 남의 엄마, 아빠까지 소환하는 것만큼 치사하고 더러운 일이 없다고 했는데…… 응? 그런데 바로 그때, 나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이제키엘이었다. 그는 휴게실의 입구 부분에 서서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사납게 나부끼는 꽃잎들 사이에서도 이제키엘의 그 얼굴만큼은 너무나 확연히 눈에 띄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내가 마력을 거두자 주변에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꽃과 물건들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후두둑! 꽃잎을 잃고 대머리 같은 모습이 된 녹색 줄기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못지않게 비참한 몰골이 된 세 명의 영애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달아나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직도 주변에 가득한 노란 가루와 화려한 꽃잎들, 그리고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제키엘만 아니면 지금 이곳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 속에서 나는 홀로 급격히 동공을 흔들며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지금 그와 내가 속한 이 광경이 유치한 촌극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제키엘의 시선이 난장판이 된 휴식 공간을 한 차례 훑다가 곧 이 무법천지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내게로 미끄러졌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렸다. “아, 갑자기 머리가…….” 혀, 현실 부정! 크흑, 그래도 바닥에 쓰러지는 건 좀 아플 것 같으니까 목적지는 소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몸에 닿은 것은 푹신한 소파의 쿠션이 아닌 단단한 무언가였다. 놀라운 속도로 내게 다가온 이제키엘이 옆으로 넘어가는 내 몸을 받아 든 것이었다. “꺅!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 직후 문가에서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 식은땀이 난다. 으아악, 나 진짜 사고 쳤나 봐! 무슨 정신으로 남의 파티장에서 이런 소란을 피운 거지? 설마 그 영애들이 밖에 나가서 내가 한 짓이라고 다 까발렸나? 으윽, 이제키엘이 갑자기 등장하지만 않았어도 입막음까지 확실히 할 수 있었던 건데. “아, 알피어스 공자. 휴게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앗, 그분은 설마 아타나시아 공주님?”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 속에 내 이름이 섞여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작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마, 말할 거야?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든 게 나라고 말할 거야? 나는 기절한 척 눈을 꼭 감은 채 두근두근 불안감을 느꼈다. 으흑, 그래도 방금 기절한 척한 건 제법 자연스럽지 않았나? 얘, 뭐라고 말 좀 해봐. 얼굴에 시선은 느껴지는데 말이 없으니까 영 마음이 불편하구나.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곧 머리 위에서 나직한 한숨과 함께 이제키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공주님을 모시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가뜩이나 미령하신 몸으로 충격을 받아 쓰러지셨으니, 제가 속히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앗, 이제키엘이 모르는 척해 주려나 보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조금 안심했다. 이렇게 되면 그 영애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든 그녀들의 말보다 이제키엘의 말에 무게가 더 실리리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소 아타나시아 공주의 모습을 생각하면, 내가 마력을 써서 영애들을 꽃으로 후려 팼다는 이야기를 믿기 힘들 테니까. 이제키엘은 이곳을 발견한 사람들이 산만한 틈을 타서 나를 안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웅성거리는 소음과 잔잔한 음악 소리가 귀에 흘러들어 오는 것을 보니 무도회장의 홀을 가로지르는 중인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제키엘의 걸음은 단 한 번도 늦춰지는 법 없이 이어져, 얼마 안 가 우리는 무사히 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잠시 후 뺨에 서늘한 바람이 느껴져서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공자, 그만 내려 주세요.” 사방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것을 보니 주변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기절 안 한 거 알고 있잖아요.”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뒤쪽에 보는 눈들이 있습니다. 좀 더 의식을 잃은 척하고 계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역시 이제키엘은 내가 그냥 기절한 척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진짜 제 눈앞에 쥐구멍 좀요……. 나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눈을 질끈 감고 조금 더 얌전히 안겨 있었다. 아니…… 사실은 창피해서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으흑, 미안해요, 아타나시아 공주. 내가 당신의 이미지를 다 말아먹었어. 나, 난 정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만약 내가 기억 조작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이 순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내가 속으로 마구 땅을 파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생각보다 몸도 마음도 그리 연약하시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응……?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야? 뭔가 뉘앙스가 미묘한데요?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실눈을 떴다. 그리고 이제키엘의 얼굴을 확인한 뒤 조금 당황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 뭐야. 당신, 지금 웃고 있는 거야? 그런데 지금 막 그가 말한 것처럼 내 심신이 생각보다 건강하다는 사실에 안심해 웃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것보다는 꼭 코미디 프로를 보고 피식 웃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쿠, 쿨럭. 그럼 설마 지금 내가 웃겨서 웃은 건가? 하기야 살면서 앞으로 언제 또 이런 화려하고 화끈한 꽃다발 채찍 쇼를 볼 수 있겠느냐만.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호호 웃었다. “공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말 그대로의 의미이니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냐고! 으아아! “곧바로 황성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마차가 서 있는 곳에 거의 도착했는지 이제키엘이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무도회장까지 공주님을 에스코트했던 블랑셀 공자는 어디에 있는지요?” “아마도 무도회장 안에…….” “자신의 본분을 모르는 자로군요.” 이제키엘은 여전히 차분한 어투로 나를 에스코트했던 영식을 비난했다. 그 음성이 약간 서늘해서 나는 기분이 약간 알쏭달쏭해졌다. “괜찮으시다면 이대로 제가 황성까지 모시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아직도 이제키엘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뭔가 타이밍이 애매해서 지금 내려 달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역시 아까 안면몰수하고 그냥 내려섰어야 하는 건데. 그런데 여기까지 날 데리고 나와 준 거로도 모자라서 이대로 황성까지 에스코트해 주겠다니. 이제키엘의 신사도는 차원을 구분하지 않는구나. “배려는 고맙지만 공자는 제니트와 함께 무도회장에 남아 있어야지요.” 하지만 애초에 그는 제니트와 파트너가 아니던가? 여기까지 나를 신경 써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크흑, 그래도 고마워라. 이 무도회장에서 나를 공주 취급해 준 사람은 당신뿐이야. 멈칫. 그런데 어째서인지 별안간 이제키엘이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곧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내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의아함을 느꼈다. 저 표정은 또 뭐지? 이제키엘은 마치 조금 전의 내 말을 듣고 그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꼭 제니트의 존재를 잊고 있던 사람처럼 왜 이래?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조금 전에도 나를 에스코트하지 않고 팽개친 영식을 비난했던 이제키엘이니까. “그럼, 공자. 이제는 정말 내려 주세요.” 나는 가까이에 있는 마차를 보며 그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제키엘도 다른 말없이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음, 제가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이만 실례하겠어요. 제니트에게도 저 대신 그렇게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이제키엘과 작별했다. 그는 내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고요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금색 눈이 꼭 비밀을 품고 반짝이는 별 같았다. * * * “아, 진짜 내가 돌았지…….” 다음 날, 나는 머리를 싸매고 격렬한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어제는 정말 내가 미쳤나 보다! 할 짓이 없어서 그 난리를 치다니? 정말 미친 거야? 돈 거야? 지금 여기가 원래의 내 세계라면 또 몰라, 만약 지금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면 고스란히 그 뒷감당을 해야 하는 건 이곳의 아타나시아 공주인데. 게다가 남의 파티장에서 그 깽판이라니? 이레인 후작가에서 곱게 기른 꽃들까지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그 영애들은 나빴지만 꽃은 잘못한 게 없는데, 으앙! 미안해, 꽃들아! 더군다나 아무래도 난 어제 그 무도회장에서 술을 마신 듯하다. 답답한 속에 연거푸 들이켰던 게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였을 줄이야. 그래서 그렇게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던 거였다니! 그럼 난 어제 취사를 부린 거였던가. 어쩐지 막 속에서 용기가 샘솟고 막 나가고 싶어지고 그러더니만.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제키엘이 휴게실에 나타났을 때 한순간 술이 깬 듯한 느낌이 들던 게 그냥 기분 탓이 아니었어! 짹짹. 그렇게 내가 머리를 감싸고 어제의 일을 수백 번 곱씹으며 괴로워하는 동안에도 하늘은 맑고 새들은 즐겁게 지저귀고 있었다. 지금은 상쾌한 오전. 나는 정원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는 중이었다. 부, 부끄럽게도 지금의 나는 숙취를 느끼고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술에 취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어제 술을 과다 섭취하기는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속이 쓰리고 울렁거리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래도 아까 릴리가 꿀을 탄 차를 가져다줘서 아침에 막 눈을 떴을 때보다는 속이 조금 나았다. 그러다 문득 릴리의 걱정 어린 눈빛이 생각나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지금 그녀의 걱정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무슨 뻐꾸기 새끼도 아니고…….” “뻐꾸기요?”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 화원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제니트였다. ======================================= [외전 23화] 그녀는 내 혼잣말을 듣고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제니트…… 갑자기 여긴 어쩐 일로…….” 나는 약간 당황한 채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루비 궁에 방문한 이유를 묻자 제니트가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아타나시아가 보고 싶어서 왔지요.” 으억, 어젯밤의 일로 상처받은 마음이 그래도 좀 치유될 정도로 천사 같은 미소였다. 그런데 여기 진짜 보안이 엄청 취약하구먼. 궁에 손님이 왔는데 나한테 알려 주러 오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또 이 궁의 주인인 내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화원에 제니트를 들여보내고 말이야. 그래도 릴리가 있다면 상황이 좀 달랐을 텐데, 다른 궁인들은 대부분 다 군기가 빠져 있다고나 할지. 하기야 아타나시아 공주가 원래 아랫사람들을 잡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아무리 그녀가 이 루비 궁의 주인이라 한들, 황실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제니트였다. 그 무시무시한 클로드조차 제니트의 말에는 껌뻑 죽는 형국이 아니던가. 그러니 모두가 그녀에게 한 수 접어주는 분위기가 꽤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다 해도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뭐, 어느 세계에서나 그런 권력 피라미드는 있는 법이었으므로 그렇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어제 아타나시아가 무도회장에서 쓰러졌다고 들어 걱정이 되기도 했고요.” 그 말처럼 제니트는 염려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음, 그럼 자리를 옮길까요?” 일부러 나를 만나러 온 제니트를 그냥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왠지 좀 그랬다. 왜냐하면 어릴 때 내가 살던 루비 궁은 원래 대대로 황제들의 하렘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다소 민망한 장식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화원에 있는 조각상도 죄다 요염하게 헐벗은 언니들이었고, 개중에는 다소 낯부끄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아니에요, 아직 몸도 편치 않을 텐데 굳이 그럴 것 없어요. 저도 이 화원이 좋답니다.” 하지만 제니트는 말갛게 웃으며 내 권유를 거절했다. 곧 그녀가 내 맞은편 자리에 와서 앉았다. “언제 봐도 루비 궁의 구조물들은 참 섬세하고 아름답네요.” 쿨럭. 제니트가 주변에 포진한 요망한 조각상들을 보고 하는 말에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그저 하하 웃었다. “아타나시아. 요즘 기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은데, 궁의를 불러 다시 한번 진찰을 받아 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생각보다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괜찮아요. 오늘도 푹 쉬었더니 상태가 많이 좋아졌는걸요.” 그나저나 오늘도 제니트의 마력은 열심히 일하는 중이구나. 나는 제니트의 주변에서 몽실 솟아나는 마력을 느끼며 잠깐 심란함을 느꼈다. 그녀의 마력이 상대방의 호감을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하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물론 나한테는 그것이 통하지 않고 있었으니 내 앞에서 저러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저 마력의 효과가 꽤 크다는 사실을 아는 만큼 한 번쯤 정화 마법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보니까 특히 클로드의 앞에서 제니트의 마력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던데…… 그렇게 장기간 영향을 받으면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무의식에 이끌려 작용하는 것이니만큼 제니트 스스로 조절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이봐, 공주님. 착각하지 마. 여긴 너의 세계가 아니야.’ ‘이 세계의 사람도 아닌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간섭해?’ 그 순간 일전에 들었던 루카스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의 말처럼 나는 이미 이곳의 일에 너무 많이 개입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언가를 또 하는 것은 루카스의 말처럼 너무 주제넘은 간섭이 아닐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명확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꿈속에서 살고 싶다며 울던 아타나시아 공주의 모습과 이대로라면 클로드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루카스의 말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다녔다. 도대체 클로드는 어떤 이유로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 것일까? 혹시 원래 내가 있던 세계의 클로드도 그랬을까? 그럼 지금 위험한 것은 어디의 클로드이든 마찬가지인 건가? 하지만 그곳의 루카스는 별말이 없었는데……. “아타나시아?” 그렇게 잠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불현듯 앞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제니트의 얼굴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손님을 맞이하는 게 부족했네요. 금방 다과상을 내오라고 할게요.” “아니에요, 제가 기별도 없이 온 것이니 신경 쓰지 말아요.” 하지만 제니트의 말처럼 정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나는 곧 화원 앞을 지나가던 궁인을 불러 다과상을 차릴 것을 지시했다. * * *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탁란성 새다. 이 경우 뻐꾸기는 둥지의 어미 새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원래 그곳에 있던 알 하나를 버린 뒤 그 빈자리에 알을 낳고 떠난다. 어미 새는 자신의 둥지에 뻐꾸기의 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부화할 때까지 그것을 품는데, 그렇게 태어난 새끼 뻐꾸기는 먹이를 독차지하기 위해 다른 알과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모조리 밀어 떨어뜨린다. 그것이 뻐꾸기의 생존 본능이다. 제니트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다 말고 문득 아까 루비 궁의 화원에서 들었던 아타나시아의 말을 떠올렸다. ‘뻐꾸기라…….’ 이윽고 제니트의 얼굴에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스름한 미소가 어렸다. “뻐꾸기 새끼는 오히려 내가 아닌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사.” 옆에서 화병의 물을 갈던 하녀가 의문을 표했으나 제니트는 언제 혼잣말을 했냐는 듯이 그저 작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곧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책을 팔락이며 넘겼다. 그런 제니트의 얼굴은 조금 전 어둑한 미소를 지은 것이 아예 없던 일인 것처럼 여느 때처럼 해사하기만 했다. * * * “어때, 이곳 공주 생활은 좀 할 만 하신가?” 이 자식은 뭘 또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고 있어? 이 쇠고랑 철컹철컹해야 할 놈 같으니라고! 익숙지 않은 숙취로 고통받던 나는 결국 해독 마법을 사용한 뒤에야 편안해졌다. 그래도 오늘은 다른 일을 할 의욕이 도무지 생기지 않아서 그냥 방에서 쉬기로 했다. 릴리가 그런 나를 보고 하루 사이에 얼굴이 까칠해졌다며 걱정했다. 크흡, 하지만 내 몰골이 평소와 다르다면 아마도 그건 숙취 때문이 아니라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릴리가 나를 신경 써 줘서 지금 내 얼굴에는 꿀과 우유, 그리고 각종 피부 보습과 영양에 좋은 것들을 갈아서 만든 걸쭉한 액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는 거듭 괜찮다고 했지만 릴리가 단호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루카스 놈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나는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이민 그를 노려보았다. “아타나시아 어디에 있어?” “내가 그걸 알려 줄 것 같아?” 그런데 이놈도 참 이놈이다. 자기 말처럼 내가 ‘이제 여기 일은 알 바 아니야!’ 하고 아타나시아가 납치되었든 말든 그냥 신경 안 쓰고 가 버리면 어쩌려고. “굳이 말하자면 꿈속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지난번에 보았던 것처럼 서늘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로 루카스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아직 아타나시아 공주는 깊이 잠들어 있다는 의미였다. 진짜 아타나시아 공주는 지금도 신기루를 좇아 꿈속을 헤매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한가롭게 팩이나 하고 있다니. 갑자기 속이 답답해져서 나는 마법을 이용해 얼굴을 덮고 있던 것들을 깨끗이 닦아 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루카스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원래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겠느냐고 그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설령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한들 지금에 와서 이놈이 날 보내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루카스를 쳐다보다가 잠시 후 다시 그에게 말했다. “너 내가 그렇게 좋아?” 그 순간 루카스의 얼굴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그리며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무슨 헛소리야, 약 처먹었어?” 역시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뭐, 원래 내가 있던 곳의 루카스도 날 좋아하니까 네가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미 지금의 상황 자체가 난센스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까지 나를 대하는 이놈의 태도를 보면 느껴지는 게 좀 있고. 내 차분한 태도에 루카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새끼가 자기 입으로 그래? 널 좋아한다고?” 아니, 그런데 아무리 황당해도 그렇지, 다른 세계의 자기 자신한테 그 새끼라니……. “응, 내가 죽을 만큼 좋다고 그러던데? 나한테 자기 마음을 제발 좀 받아 달라고 매일 얼마나 귀찮게 매달리던지, 정말 피곤할 정도였다니까? 걔가 나한테 선물해 준다고 용도 잡아 왔었던 거 알아?” 나는 원래 세계의 루카스가 듣는다면 어이없어할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꺼냈다. 크큭, 내가 거짓말을 섞어 말해도 이 세계의 루카스는 모르겠지! 하지만 그놈이 나한테 주려고 용을 잡아 왔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아, 뭐야. 그러고 보니까 지금 내가 한 말 중에 제일 지어낸 것 같은 부분이 유일한 진실이잖아?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 있담. 내 말을 듣는 동안 루카스의 얼굴이 점점 더 구겨졌다. 그는 다른 세계의 자신이 한 짓들을 믿을 수 없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내가 탑에 가자고 하니까 그 전에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지? 그게 그 새끼야?” 그 직후 루카스가 소파에 앉아 있던 나한테 성큼 다가왔다. “너, 그 자식이랑 무슨 관계야?” 불쑥 다가온 루카스를 보고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소파 등받이에 내 몸이 깊숙이 파묻히자마자 그의 팔이 내 얼굴 옆으로 뻗어졌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소파와 루카스 사이에 갇힌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넌 처음 만났을 때도 이상하게 날 반가워했어.”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한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깐 굳어 있다가 이어지는 그의 말에 황당함을 느꼈다. “그 후에도 나한테 경계심 없이 덥석덥석 안기지를 않나.” 뭐…… 지난번에 탑을 오다가다 하면서 이동할 때 안겨서 간 걸 말하는 건가? “그건 네가 멋대로 안은 거잖아!” 이 자식이,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물론 나중에 다시 아타나시아 공주를 찾으러 갈 때는 내가 먼저 요구하기도 했지만, 그건 그냥 다른 방법보다 편하니까 그런 거고! 나는 억울함을 느끼며 항변했다. 하지만 루카스 놈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무방비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탑에서도 겁대가리 없이 날 침대로 끌어들이지를 않나.”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굳어버렸다. ======================================= [외전 24화] 네, 네……? 침대로 끌어들여요? 그거 굉장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 아닙니까? 아, 아니…… 그날 내가 루카스 놈의 손을 잡고 같이 이불에 누운 건 맞지만…… 그래도 우리 순수하게 누워서 잠만 잤잖아요? 그런데 막상 이놈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내가 무척 대범한 짓을 저지른 것처럼 들렸다. “그, 그때는 그냥, 내가 자는 사이에 네가 사고 칠까 봐…….” 나는 얼굴에 서서히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그런 나를 향해 루카스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음성으로 뇌까렸다. “지금도 날 보면서 다른 놈을 떠올리고 있어?” 뭐, 뭐지? 지금 왜 내가 지금 추궁받는 분위기인 거지? “너, 그 자식을 좋아해?” 아니, 그런데 너는 지금 네가 말하는 사람이 다른 세계의 너라는 건 자각하고 있냐? 루카스는 여전히 날카롭게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네가 그러면 누가 쫄 줄 알고?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걔였다니까! 그리고 너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지금 이런 식으로 바람난 부인 잡듯이 나한테 따져 묻는 거…… 예요?” 하지만 쫄았다. 이렇게 진심으로 기분이 더러워 보이는 루카스의 표정은 또 처음이라 개쫄았다. 으, 으앙! 그렇지만 이놈이 원래 내가 알던 루카스도 아니고, 그 루카스보다 똘끼도 더 충만한 놈이니만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내 말을 듣고 이놈이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기만 해서 더 진땀이 났다. 잠시 후, 루카스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그래, 너랑 난 아무 사이도 아니지.”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고, 혹은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그 후로 다른 이야기가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루카스는 또다시 입을 다물고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별안간 내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나는 놈이 떠난 곳에 혼자 남아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 이상한 놈. 아니, 저 자식은 무슨 다른 세계의 자기 자신한테도 질투를 한대? 아무래도 하는 행동이나 말을 보면 질투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거참 누가 루카스 놈 아니랄까 봐 질투 한 번 살벌하게 하기도 했다. 으아, 그나저나 또 저놈에게 말려들어서 아타나시아에 대한 것도, 클로드에 대한 것도 더 물어보지 못했잖아? 나는 혹시 이것이 루카스의 계산된 수작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짜증스럽게 소파에 엎어졌다. * * * “폐하, 곧 어전 회의가 있는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종알종알 시끄럽구나. 짐이 알아서 할 터이니 그만 떠들고 꺼져라.” 클로드는 요즘 들어 늘 그렇듯이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저기압인 채로 낮게 읊조리자 필릭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관료들과 함께 매주 정기적으로 갖는 어전 회의가 목전이었다. 그래서 필릭스는 계속 클로드를 뒤따라가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제 그만 회의장에 들어설 것을 권했다. 그러나 클로드는 귀찮다는 듯이 그를 쫓아내 버렸다. ‘폐하께서 이 아이를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홀로 걷는 동안 또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어른거렸다. 클로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얼굴을 구겼다. ‘아마도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되겠지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거슬려 미칠 것 같았다. 그가 의미 불명의 꿈을 꾸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시일이 꽤 지나 있었다. 누구인지 모를 여자는 요즘 들어 지겨울 정도로 그의 꿈속에 반복해서 나타나 저런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여 댔다.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반응이었다. 어째서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을 상대로 이토록이나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지. 또 어째서 꿈을 꾸고 나면 이렇게나 애간장이 녹을 정도로 애처롭고 그리운 느낌이 드는 것인지. 꿈속의 여자를 붙잡으려 하다가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으며 깨어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해 내려 노력해도 여자의 얼굴만큼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으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클로드는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무런 자각도 없었다. 그렇게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걸음을 옮기다가……. 부스럭. 마침내 누군가를 만났다. 그의 인기척을 듣고 하얀 꽃밭 한가운데에 서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쏴아아. 때마침 낮게 불어온 바람에 사방에 가득 찬 싱그러운 초목이 역동하며 흔들렸다. 눈부신 백금색 머리카락이 하얀 꽃과 함께 바람에 나부꼈다. 처음에는 꿈속의 여자가 눈앞에 나타난 줄 알았다. 클로드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으로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게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 꿈속의 여자와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지독히도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아, 저어, 여기는 어쩐 일로…….” 하지만 망연히 서 있는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당혹감을 담은 목소리가 곧이어 귓가를 가로질렀다. 그 순간 한낮의 짧은 꿈에서 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클로드는 지금 그를 마주 보고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지금 이곳은 루비 궁의 옆에 있는 드넓은 꽃밭이었다. 클로드는 어째서 자신이 여기로 걸음 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그는 일부러 냉담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아타나시아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작게 대답했다. “그저 옛 생각을 하다 문득 그리운 마음이 들어 와 보았을 뿐이랍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또다시 지끈 머리가 아팠다. “요즘 용태는 좀 괜찮으신지요.” 뒤이어 아타나시아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클로드는 실소하며 반문했다. 언제부터 두 사람이 서로의 안부를 물을 관계였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지겨울 정도로 꿋꿋한 구석이 있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그의 차가운 말과 행동에 눈물을 보이면서도, 뒤돌아서면 또다시 애써 미소 지으며 다가와 그를 괴롭게 했다. 그러다 문득 클로드는 멈칫했다. 괴로워? 이 아이를 볼 때마다 자신이 괴로웠던가? 그렇다면 어째서 괴로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지? “그저 안색이 좋지 않으셔서 물은 것일 뿐, 다른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지금도 그의 물음에 난처한 듯이 말끝을 흐리면서도 아타나시아는 자리를 비키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요즘 들어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거나 하지 않으신가요?” 도대체 이 계집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지난번에도 그렇게 눈물 바람을 하고 두 번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을 것처럼 굳은 결의가 서린 눈빛으로 돌아섰던 주제에……. “음, 아니면 갑자기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다거나…….” 그때, 또 한 번 작은 속삭임이 그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저를 사랑해 주셨듯이, 부디 제가 남기고 갈 이 아이도 그 품에 소중히 보듬어 아껴 주세요.’ ‘그것만이 저의 유일한 바람입니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거세게 옥죄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마력이 생겼다 하더니 네가 내게 사술을 부린 것이냐?” 클로드는 끔찍한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쩐지 꿈속에 나타나는 여자가 기이할 정도로 너와 닮은 것 같더니만.” “꿈속의 여자요?” 아타나시아가 두서없이 꺼낸 그의 말에 반응했다. 그리고 이어진 음성에 클로드의 얼굴이 굳었다. “그 사람이 저와 많이 닮았나요? 그렇다면 어머니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쿠웅. 어째서일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얼얼한 감각이 클로드를 뒤덮었다. 마치 그의 육신이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나 허공에 부유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리에 못 박혀 있던 그의 발이 잠시 후 한 발짝 뒷걸음질 쳐졌다. 그것을 보고 아타나시아가 약간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아바마마…….” “다가오지 마라.” 하지만 클로드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흘려보내 눈앞에 굳건한 벽을 세웠다. “그 이상 다가온다면…….” 어쩌면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다. 이 이상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을 더 마주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자신 안의 어느 부분이 손 쓸 틈 없이 완전히 부서져 버리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죽이겠다.” 다행히도 아타나시아는 뒤돌아 떠나는 그를 쫓아오지 않았다. * * * “아바마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기별도 없이 갑자기 방문한 클로드 때문에 에메랄드 궁은 금세 부산스러워졌다. 제니트는 그의 방문에 기쁘면서도 의아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가까이에서 클로드의 얼굴을 올려다본 뒤 멈칫하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안색이…….”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이다.” 클로드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딱 잘라 말했다. 제니트의 시선이 잠시 그런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곧 제니트가 방긋 웃는 얼굴로 클로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매일 국정을 돌보고 계시니 피곤하실 만도 하지요. 이리 오셔서 잠시라도 쉬세요.” 클로드는 그 손길에 이끌려 얌전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자, 제가 곁을 지켜드릴 테니 이제 푹 쉬실 수 있을 거예요.” 제니트는 클로드를 소파에 눕힌 뒤 그에게 어디에선가 가져온 담요까지 덮어주었다.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제니트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다시금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나 클로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서서히 마음이 편안해졌다. 제니트와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그랬다. 그는 머리를 파고들던 날카로운 통증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귓가에 조곤조곤하게 속삭여지는 음성이 마치 자장가 같았다.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쉬세요.” 문가에 서 있던 궁인이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방 안에는 아늑한 고요함이 가득 들어찼다. 제니트는 아까보다 편안해 보이는 클로드를 향해 실바람보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아바마마. 앞으로도 늘 이렇게 제 곁에 있어주세요.” 사실은 당신이 내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사실도. “지금처럼 변함없이, 계속.” 그러니 당신만큼은 내 옆에 있어줘야죠. 당신이 내게서 빼앗아간 사람들 대신 언제까지나. 그게 공평하니까. “저는 그거면 돼요.” 제니트는 자신의 손길이 닿는 곳에서 잠든 사람을 보며 웃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 [외전 25화] 나는 클로드가 떠난 자리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보았던 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루비 궁의 옆에 있는 꽃밭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또 내가 묻는 말에 이상한 소리를 하던 것도 그렇고. 사실은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충동적인 기분에서였다. 반강제적인 이유로 한동안 루비 궁에 머물다 보니 예전에 취미 삼아 꽃을 따러 다니던 꽃밭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에메랄드 궁에서 살게 된 이후 루비 궁에 걸음 한 적이 극히 드물었다. 기껏해야 지난번처럼 루카스와 나 잡아 봐라 놀이를 할 때뿐이랄까. 쿨럭. 아무튼, 그래서 내 원래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의 향수까지 겹쳐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꽃밭에 오게 된 것이었다. 어릴 때 릴리와 클로드에게 화관을 만들어주기도 하며 놀던 그곳은 내 기억과 변함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클로드가 머무는 가넷 궁과 연결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내가 맨 처음 그를 만나게 된 이유도 릴리에게 줄 꽃을 따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였으니까. 크흑, 그때는 거기가 가넷 궁인 줄도 모르고 내 예쁜이들을 숨겨 놓을 아지트로 낙점했었는데. 그러다 나중에 클로드를 맞닥뜨리고는 피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서 잠깐 아련해졌다. 그렇게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며 추억에 잠겨 있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말로 클로드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어째 그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루카스의 말대로 오지랖도 이만하면 병인데,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세계의 그에게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그냥 넘기지 못하고 그의 상태를 묻고 말았다. 클로드는 역시나 변함없이 나한테 쌀쌀맞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가 보였던 태도가 서늘한 무관심에 가까웠다면, 오늘 내게 보인 그의 반응은 어딘가 바짝 날이 서 있었다. 게다가 이어진 클로드의 말은……. ‘갑자기 마력이 생겼다 하더니 네가 내게 사술을 부린 것이냐?’ ‘어쩐지 꿈속에 나타나는 여자가 기이할 정도로 너와 닮은 것 같더니만.’ 나는 그 순간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의 꿈속에 나타났다는 나와 닮은 여자. 원래 세계의 클로드가 가끔씩 꿈을 통해 내게 보여 주었던 다이아나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의 그는 다이아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잇따른 내 말에 지어 보이던 클로드의 표정은 나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혼자서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로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무언가를 외면하듯 뒤돌아섰다. 나는 차마 그런 그를 쫓아갈 수 없었다. 불현듯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클로드가 스스로 지웠다는 기억이 다이아나에 관한 것은 아닐까 하고. 혹시 그래서 원작에서도 아타나시아를 루비 궁에 방치하고 애정 한 톨 주지 않았던 것이라면……. 한 번 설마 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하자 그것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는 잠깐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의 한가운데에 서서 복잡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고민과 갈등을 하다가 결국은 클로드가 사라진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 내가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역시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가넷 궁에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랬듯 클로드가 머무는 가넷 궁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그를 찾아 후원과 침소, 집무실 등에 가 봤지만 클로드의 머리카락 한 올 발견할 수 없었다. “앗, 아타나시아 공주님.” 그 대신 나는 필릭스를 만날 수 있었다. “로베인 경.” 음, 원래 이곳의 아타나시아와 필릭스의 거리감이 어느 정도 되는지 잘 모르겠네. 하지만 분명 데면데면한 관계일 게 뻔하니까 이름보다는 성을 부르는 게 맞겠지. 내 기억상 아타나시아 공주와 필릭스가 직접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다소 애매했다.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다행히 내 예상이 맞았는지 필릭스는 내게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인사해 왔다. “혹시 폐하를 만나 뵈러 오신 것인지요.” “네, 아바마마께서는 어디에 계신가요?” 내 물음에 그가 잠깐 머뭇거렸다. 그 직후 필릭스에게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 나는 멈칫했다. “저도 조금 전에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지금 에메랄드 궁에 계시다고 합니다.” 뭐야?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면 죽일 거라고 협박하더니, 그 후에 곧장 제니트를 만나러 갔어? 그래도 곧장 자기 침소에 가서 뻗은 게 아니라 거기까지 먼 길을 간 걸 보면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았던 모양이다. 뒤돌아서기 직전 보았던 그의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는데. 으으, 그래도 이런 와중에 제니트를 보러 가다니. 여기까지 찾아온 내가 바보 같잖아. 말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로 마음속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곳의 클로드는 내 아빠인 클로드가 아니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복잡한 마음을 금방 가다듬을 수 있었다. 필릭스가 어쩐지 면목이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어서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다. 그런데 내 미소가 어떻게 비쳤는지, 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래도 필릭스는 클로드에게 냉대를 받는 아타나시아 공주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 몇몇 관료들의 모습이 보여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저분들은…….” “어전 회의가 조금 전에 취소된지라…….” 으, 으악. 클로드, 이 사람이? 설마 지금 어전 회의까지 취소시키고 제니트를 보러 간 거야? 황제라는 사람이 그래도 돼? 하긴 클로드니까 그래도 되는 걸지도 몰라…….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예, 폐하께서 오시면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방문하셨노라고 전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까 하다가 그냥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섰다. 그렇게 이룬 바 없이 가넷 궁을 빠져나가는 동안 어쩐지 슬슬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왜인지 얼마 전 이레인 후작가에서 열렸던 파티 때 나를 살살 긁던 영애들에게 느꼈던 감정과 조금 비슷했다. 물론 지금 나는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어쩐지 좀 막 나가고 싶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에잇, 내가 왜 지금 저 클로드까지 이렇게 신경 써야 해? 내 코가 석 자고 내 앞길이 구만리인데! 물론 아무도 나한테 이곳에 있는 클로드와 아타나시아 공주에게 신경 쓰라고 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나는 지금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답답했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그냥 이대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해도 속이 시원해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갑갑한 마음에 눈앞에 있는 돌멩이를 화풀이 삼아 확 걷어찼다. 퍼억! “윽!” 어, 어라? 그런데 별안간 저 앞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들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생각에 잠겨 미처 몰랐는데 아무래도 내 앞쪽에 다른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시야에 비친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두 눈을 크게 컸다. “흰둥……!” 뒷머리를 감싸 쥐며 돌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로저 알피어스였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알피어스 공작의 모습에 때아닌 놀라움을 느꼈다. 아니, 흰둥이 아저씨! 여기에서는 처음 만나네요! 얼굴 때깔이 좋은 걸 보니 이 세계에서는 그동안 잘 먹고 잘사셨던 모양인데? 하긴 제니트와 함께 승승장구하셨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이런, 아타나시아 공주님이 아니십니까?” 나를 발견한 알피어스 공작이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 직후 그가 나를 향해 발길을 움직였다. 그의 옆에는 이제키엘도 같이 있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오벨리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나는 내게 인사하는 그들에게 마주 화답한 뒤 내 앞에 있는 알피어스 공작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쪽 세계에서는 이제키엘과 함께 그의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은 알피어스 공작이 입을 여는 순간 빠르게 식어버렸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직접 가넷 궁에 찾아오시다니 드문 일이로군요. 한데 폐하께서는 제니트 공주님을 만나러 에메랄드 궁에 걸음 하신 참이니, 이것 참 아쉬움이 크시겠습니다.” 아저씨,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 너무 노골적으로 웃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니, 물론 이쪽 세계에서 알피어스 공작은 당연히 제니트 라인의 선두 주자겠지만 말이지.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약 올리는 말을 하면 내 입이 간지럽잖아요? 으흑,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것보다, 조금 전 돌멩이를 차서 제 머리에 맞춘 분이 아타나시아 공주님이십니까? 오벨리아의 공주마마께서 체통 없이 그런 일을 하시다니…… 오벨리아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니트 공주님의 우아함을 조금이라도 본받으시는 편이 좋지 않을는지요.” 참아야 하는데……. “듣자 하니 얼마 전부터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행동거지가 놀라울 정도로 방만하고 품위가 없어져 혀를 내두를 정도라 하던데, 일국의 제1공주로서 좀 더 모범을 보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참나, 참긴 뭘 참아……! 나와 알피어스 공작의 대화에 끼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잠자코 서 있던 이제키엘이 별안간 자신의 아버지를 만류하듯 나직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나도 그때에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피어스 공작님의 말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공께서는 제가 예의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데다 체통은커녕 품위도 우아함도 없어, 공주의 자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군요.” “예?” “그리고 그런 주제에 제1공주의 자리에 있는 저를 오벨리아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자라고 하시기까지…….” “예?” 내 말에 알피어스 공작이 바보처럼 반문했다. 그는 내가 한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한 듯이 약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비록 저 비슷한 내용이기는 했어도 로저 알피어스는 이렇게까지 나를 매도해 말한 적은 없었으니까. “지금 이게 무슨 황망한 소리입니까?” 타이밍 좋게 옆에서 필릭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피어스 공, 정말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필릭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알피어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알피어스 공작은 설마 이런 시점에서 필릭스가 나타날 줄은 몰랐던 듯 당황했다. 흥, 하지만 나는 이미 그가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지! 조금 전에 나랑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던 필릭스가 왜 다시 이쪽으로 오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그, 그럴 리가 있겠나?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오해를 하셔서…….” 로저 알피어스는 내가 그의 말에 동의하기를 바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눈물을 훔치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 [외전 26화] “알피어스 공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상심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네요. 하지만 공의 말대로 이 역시 모두 제 부덕함 때문이겠지요…….” “그,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상처받은 듯이 하는 말에 알피어스 공작이 당황해 변명했다. 사실은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하는데 황실의 기강이 바로 서겠냐!’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 내가 저런 소리를 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쭈그리고 있던 공주가 갑자기 호통을 쳐 봤자 알피어스 공작의 입장에서는 별로 가렵지도 않을 테고. ‘쟤 왜 저래?’ 하고 코웃음 치면서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알피어스 공, 어떻게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그런 무례한 말씀을…… 이 일은 가벼이 넘길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필릭스가 하필 타이밍 좋게 지금 온 것도 요행이었다. 어차피 나도 지금 내가 흰둥이 아저씨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게 진짜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필릭스가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고 클로드한테 전한다고 해도, 아마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큭, 너무 당연한 일이라 새삼스럽게 충격적이지도 않구먼. 하지만 로저 알피어스의 입장에서는 찜찜하기는 할 터. 앞으로 그가 아타나시아 공주의 앞에서 지금보다 말을 조심할 계기 정도는 되겠지. “죄송합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오벨리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앞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로 공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말았습니다. 공주님께 심려를 끼쳐 드린 죄, 달게 받을 터이니 어떤 벌이라도 내려 주십시오.” “저 또한 사죄드리겠습니다.” 흰둥이 아저씨는 과연 약삭빠른 사람답게 금세 태세를 전환했다. 옆에 있던 이제키엘도 내게 함께 사과했다. 앗, 이제키엘까지 나한테 고개 숙이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말이지. “아닙니다, 알피어스 공. 공께서 오벨리아를 위하는 마음을 어찌 모를까요. 그대의 충정을 마음 깊이 새겨 이제부터는 저도 이 자리에 더욱 걸맞은 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끝까지 눈물을 훔치는 척 마른 눈가를 손으로 훑으며 말했다. 그러자 흰둥이 아저씨가 입꼬리를 파들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주님께서는 이미 충분히 그 위치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필릭스가 그런 나를 향해 안타까움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듯이 필릭스를 보며 아련히 웃어 보였다. “괜찮으시면 에메랄드 궁에 함께 가 보시지 않겠냐고 여쭈어보러 왔던 것인데…….” 하지만 곧 그가 우물쭈물하며 내뱉은 말을 듣고 나는 빠직했다. 필릭스는 이 세계에서도 여전히 눈치가 없었다. 어쩐지 조금 전에 헤어져 놓고 왜 또 날 찾아왔나 했더니, 에메랄드 궁에 같이 가자는 권유를 하려고 했던 거구먼. 하지만 내가 지금 제니트랑 희희낙락하고 있을 클로드를 보고 싶겠냐? 게다가 왜 지금도 미련을 못 버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야? 설마 지금이라도 같이 에메랄드 궁에 갔으면 하는 거야? 허허, 꿈 깨세요, 아저씨. 그때, 잠깐 내 얼굴에 시선을 두던 이제키엘이 입을 열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지금 바로 루비 궁으로 돌아가 쉬시는 편이 좋지 않을지요.” 응? 내 안색은 멀쩡할 텐데? 간만에 흰둥이 아저씨도 골려 줬더니 얹힌 체증이 그나마 조금 내려간 것처럼 속까지 시원한데 무슨 소리지? 혹시 내가 에메랄드 궁에 가기 싫어하는 걸 알고 도와주려는 건가? “제가 아타나시아 공주님을 루비 궁까지 모셔다드리고 오겠습니다.” 음, 아무래도 그 생각이 맞는 것 같다. 필릭스는 몸이 안 좋냐고 걱정스럽게 물으며 아쉬운 목소리로 다음을 기약했고, 흰둥이 아저씨는 어떻게든 나를 빨리 보내 버리고 싶은 얼굴을 한 채로 이제키엘에게 그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루비 궁까지 가는 길을 그와 함께 걷게 되었다. * * * 이제키엘은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사람에게 한 차례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앞에서 두 차례나 피를 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녀는 다행히 빠른 속도로 건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일련의 사건이 있기 전의 창백했던 낯빛에 비하면 지금의 혈색이 더 좋은 편이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게다가 아타나시아 공주는 지금 묘하게 속이 시원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키엘은 조금 전에 있던 일을 떠올리며 한순간 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인 알피어스 공작이 아타나시아 공주의 앞에서 그렇게 쩔쩔맨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키엘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봐도 아타나시아 공주가 그의 아버지의 말에 정말 상처를 받거나 상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도 일부러 그의 아버지를 골탕 먹이려고 그런 것 같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알피어스 공자.” 물론 그렇다 해도 이번 일의 발단은 그의 아버지의 지나친 언사였으니 딱히 유감일 것은 없었다. “루비 궁까지 굳이 함께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쯤 해서 헤어지는 게 어떨까요?” 그때, 아타나시아가 이제키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소 조심스러운 권유에 이제키엘이 앞으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썩 편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것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공주님을 혼자 보내기에는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부디 루비 궁까지 동행하게 해주십시오.” 이제키엘의 말에 아타나시아는 잠깐 무어라 다른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곧 이제키엘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는지, 더 이상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조금 더 길을 걷다가, 이윽고 아타나시아가 그를 향해 말했다. “지난번 일도 그렇고, 번거로울 텐데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그 순간 이제키엘은 일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기묘한 느낌을 또 한 차례 받고 말았다. ‘고마워요, 공자.’ ‘본의 아니게 공자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해요.’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이제껏 그가 만나 왔던 아타나시아 공주는 똑같은 사람일 텐데…… 어째서 이런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의 도움을 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표했던 아타나시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아타나시아 사이의 괴리감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난 이레인 후작가에서의 일도, 원래 그가 알고 있던 아타나시아 공주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제키엘의 눈동자에 일순간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옅은 햇빛에 반짝이며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싱그러운 녹음의 색을 머금은 보석안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한순간 그녀의 눈동자 안에 고인 낯선 빛에 눈길을 사로잡힌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이제키엘은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서서 아타나시아 공주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곧 그의 입술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미안하다는 말씀보다는 듣기 좋은 것 같습니다.” 무심코 말해놓고 그는 멈칫했다. 무의식중에 새어 나온 말이니만큼 그것은 가식이나 거짓 한 점 없는 그의 진심이었고, 이제키엘은 타인의 앞에서 거의 처음으로 아무것도 재지 않고 내뱉은 말에 조금은 당황했다. 물론 어떤 의미로 지금 이제키엘이 한 말은 사소하다면 사소했지만, 기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계산 없이 움직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타나시아 공주가 그나마 그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를 향해 지어 보인 아타나시아 공주의 옅은 미소가 유독 선명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조금 전의 이제키엘이 그랬듯 그녀 역시 무심코 내보인 미소인 듯 곧 다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지만 그 잔상은 시야에 남아 오래도록 사라질 줄을 몰랐다. 이제키엘은 다시 아타나시아 공주와 함께 우거진 초목과 향기로운 꽃 덤불이 양옆으로 늘어선 길을 걸었다. 어째서인지 조금 전보다 그 길이 화사하게 느껴졌다. * * * 루비 궁으로 돌아온 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몇 번이나 생각해 봤지만 역시 아타나시아 공주와 클로드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물론 이 세계가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의 내용대로 흘러갈지는 확신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앞으로 몇 달 뒤에 클로드가 그녀를 죽이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내가 보게 된 아타나시아 공주의 불행은 모두 가감 없는 진실이었다. 루카스는 내게 무슨 자격으로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간섭하려고 하느냐 했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한편으로는 나한테 이 세계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할 권한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사실 이 모두가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 자격을 부여하는 게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 말을 하면 신성 모독일지도 모르지만,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신? 하지만 어차피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라면, 그냥 내 멋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이 세계로 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속 편하게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그래, 나도 안다. 결국은 나 좋을 대로 합리화하는 것뿐이라는걸. 그래도 나는 이곳의 클로드와 아타나시아를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고, 이대로 그들을 외면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계속 그들이 마음에 남아 앞으로 10년은 끙끙거리며 밤잠을 설치게 될지도 몰랐다. 어쩌겠는가, 이런 게 나인데. 아마 원래 세계의 루카스가 이런 나를 본다면 바보라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유일하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밤의 시간을 틈타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이 세계의 루카스를 만나야만 했다. * * * 루카스는 아주 짜증이 난 상태였다. 얼마 전부터 그의 기분은 수도 없이 오락가락하며 크게 널을 뛰었다. 어느 특정 인물을 생각할 때면 늘 그랬다. ‘너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지금 이런 식으로 바람난 부인 잡듯이 나한테 따져 물…… 어요?’ 파스슥.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 한 번 귓가에 반복해 울리는 순간, 바닥까지 처박힌 그의 기분을 대변하듯 주위에서 흔들리던 풀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루카스의 이마에 깊은 굴곡을 파이게 한 사람은 바로 다른 세계의 아타나시아였다. 루카스는 그녀를 아주 건방진 계집애라고 생각했다. 감히 누구의 앞이라고 그렇게 겁도 없이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루카스의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게 퍽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과거의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있어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공포와 경외심 외의 감정으로 자신을 대하는 아타나시아가 특이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옆에 두고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거의 몇백 년 만에 처음이었다. ======================================= [외전 27화] 반응 하나하나가 꽤 유쾌하고 재미있어서 그냥 가만히 옆에서 보기만 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루카스는 한동안 무료함에 젖어 깊은 권태를 느끼던 참이었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그는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동하지 않았고, 그 무엇을 보아도 도무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아에테르니타스의 거지 같은 마법에 의해 수백 년은 되는 기나긴 잠을 자기 전부터도 그랬다. 그런 상태는 다시 깨어나고 나서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십여 년의 세월을 탑에서만 칩거했다. 그러다 실로 오랜만에 상당히 재미있는 인간을 만나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루카스는 어느 순간부터 아타나시아 때문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어차피 자신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루카스가 발견한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그러니 제멋대로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건 곤란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그녀의 입에서 ‘다른 세계의 루카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속에서 열이 치솟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또 그녀가 그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에 짜증이 나는 이유도. 처음 봤을 때부터 그에게 살갑게 굴며 서슴없이 굴었던 이유도 전부 자신을 그쪽 세계의 루카스로 생각해서 그랬겠구나 생각하면 서늘한 살의가 밀려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이건 자신의 장난감을 다른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소유욕일 것이다. 설령 그 상대가 다른 세계의 그라고 해도…… 아니, 오히려 다른 세계의 그이기 때문에 더욱이 빼앗기는 걸 용납할 수 없는. 쏴아아. 문득 저 멀리서 그리 낯설지 않은 마력의 파장이 느껴졌다. 루카스는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희미하게 제 존재감을 주장하는 마력의 잔상을 눈으로 더듬었다. 시각뿐만이 아니라 오감을 다 곤두세우자 얕게 밀려드는 마력의 기운이 더욱 면밀히 느껴졌다. 제 주인을 닮은 화려하고 향기로운 마력이었다. 같은 신수를 흡수했기에 분명 루카스의 것과는 그 원천이 같을진대, 희한하게도 둘의 마력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물론 현재 루카스의 마력은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마력과 뒤섞여 있었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루카스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위에 기대 앉아 산들거리는 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아타나시아의 마력을 음미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꽤 집요하고도 절절하게. 아니, 사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아타나시아에게 밑밥을 던진 것은 루카스였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이 아무래도 괘씸해서 순순히 부름에 응해 주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저렇게까지 불러 대는 게 썩 나쁘지는 않아서 루카스의 기분은 조금 전보다 좋아졌다. 흐응, 저렇게까지 날 보고 싶어 하니 한번 가 줄까? 잠시 후 루카스는 별이 총총히 떠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러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마력이 퍼져 나오는 곳을 향해 이동했다. * * * “왜 이렇게 늦게 와?” 그가 나타나자마자 아타나시아가 힐난했다. 여전히 변함없이 건방진 말투였다. 그런데도 화가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녀가 정말 마음에 들긴 한 모양이다. 루카스는 짜증과 만족감을 동시에 느끼며 아타나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엄청 보고 싶었나 보네? 이렇게 간절하게 불러 댄 걸 보면.”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갈대숲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서서 아타나시아는 아까부터 계속 방출시키고 있던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다 혹시 루카스가 오지 않았더라면 마력 고갈로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그런 경우의 수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던 듯했다. 루카스는 그 얄팍한 믿음을 비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약간 묘한 감정을 느꼈다. “네 말처럼 이 세계의 우리 아빠가 어딘가 아픈 게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지금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건 너뿐인 것 같거든. 게다가 공주도 네가 데려가 버렸고.” “그래서?” “도와줘. 부탁할게.” 뜻밖의 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 순간 루카스는 움찔했다. 그는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일순간 결정하지 못한 채로 마주한 보석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서린 빛이 조금 전까지 그에게 언제 건방진 소리를 했느냐는 듯이 솔직하고 온순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타나시아는 루카스와의 소모전을 끝내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내가 도와주면 넌 내 뜻대로 할 거고?”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순간 얼굴에 갈등이 어렸으나 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이건 바보인가? 빈말로나마 그러겠다는 소리를 하면 임시방편쯤은 될 텐데. 거짓말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기 싫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그런 짓을 해서 내가 얻는 게 뭐야?” “음, 내 고마움?” “집어치워.” 루카스는 가차 없이 말했다. 재고의 여지조차 없었다. 고작해야 얻는 게 고마움이라니, 같잖기도 하지. 루카스가 그녀에게 바라는 건 그딴 것이 아니었다. 아타나시아는 그런 루카스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그와의 거래가 성립할 것 같지 않자 약간 골이 난 것 같기도 했고, 마음이 조급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히 지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다 그녀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하는 소리에, 루카스는 그만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럼 나도 이제부터 널 협박할 거야.” 지금 그가 제대로 들은 것일까? 협박? 감히 그를? 도대체 무엇으로? “네가 먼저 날 협박했으니까 나도 지금부터 너를 협박할 거야!” 아타나시아는 위풍당당하게도 선언했다. “아, 그래? 날 뭐로 협박한 건데? 어디 한 번 해봐. 듣고 좀 웃어 보게.” 루카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도 차지 않는 소리였다. 그는 대놓고 입가에 비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하지만 곧 아타나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루카스는 멈칫했다. “난 널 잊을 거야.” “뭐?”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널 깨끗이 잊어줄 거라고.” 우스운 일이었다. 그딴 게 협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하지만 기이하게도 루카스는 조금쯤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는 그런 속내를 티 내지 않고 참으로 황당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깟 시시한 게 무슨 협박이야? 그리고 잊어? 네가 무슨 수로? 지금 기억 소거 흑마법이라도 쓰겠다는…….” “흑마법 말고도 있잖아. 기억에서 지우는 방법. 아, 정확히는 기억이 아니라 감정을 지우는 거라고 했나?” 그 순간 루카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씻겨 내려갔다. 지금까지 입가에 걸고 있던 비웃음은 물론이고, 표정마저 깨끗이 지워진 루카스의 얼굴은 바다 깊숙한 곳에 있는 빙하처럼 차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얼굴은 사막을 구르는 모래알처럼 지독히도 건조했다. 지금 아타나시아가 말한 마법이 무엇인지 루카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정말 그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을 때, 아주 비참하고도 참혹한 마음으로 사용한 최후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쪽 세계의 내가, 너한테 그런 걸 알려 줬나?” 루카스의 입에서 표정만큼이나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과연 그쪽 세계의 자신과 그런 이야기조차 공유할 만한 관계였던 것일까. 죽을 때까지 그런 얘기를 타인과 나눌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때문인지 지금 아타나시아의 공격은 꽤 정곡을 찔렀다. “아, 잠깐만.”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변했다. “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미안해, 미안.”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을 보고 퍼뜩 놀란 듯이 입술을 깨물며 잠깐 주춤거리던 아타나시아가 곧 당혹감 어린 사과의 말을 급히 내뱉었다. 루카스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아타나시아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깐만, 취소할게. 내가 지금 하면 안 될 말을 한 것 같아. 아, 진짜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물론 이미 말해 놓고 이런 소리 하는 것도 웃기겠지만…….” 정작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미안함을 표출하는 것이 우스웠다. 애초에 협박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주제에, 곧바로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거야 원, 칼을 뽑기만 하고 무도 썰지 못할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먼저 더럽고 치사하게 협박질을 한 것은 루카스가 먼저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웃겼다. “그래 봤자 네가 지금 상처 주는 걸 두려워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새끼겠지.” 물론 그는 고작 이까짓 일로 상처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카스는 놀랍게도 지금 아타나시아의 말에 그래도 자신이 어느 정도는 흠집을 입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루카스의 가시 박힌 소리에 아타나시아가 곤혹스러워하며 말했다. “나, 너랑 그쪽 세계의 루카스를 동일 인물로 생각하지는 않아. 너도 나랑 이 세계의 공주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지금 내가 미안한 건 그 루카스가 아니라 너야.” 그녀는 다시 한번 깊게 신음한 뒤 말을 이었다. “으윽, 사과할게. 이건 내가 치사했어. 그런데 너도 나한테 치사했잖아! 남의 아빠 목숨 가지고 흥정하는 게 어디 있어? 아니, 물론 지금은 내가 나빴어.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 하지만 너도 만만찮게 나빴단 말이야! 그, 그래도 미안.” 아무래도 그녀의 오지랖은 이곳에 있는 루카스에게도 발동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다른 세계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면 이곳에 남을 사람들쯤은 그냥 무시해도 될 터인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루카스는 그 사실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는 아타나시아를 보는 동안 어쩐지 마음 한편이 이상해져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너 진짜 바보네.” 이윽고 내뱉은 루카스의 말에 아타나시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루카스는 그 모습을 보며 그래도 조금 전보다 기분이 나아진 것을 느꼈다. 그는 걸음을 옮겨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마주한 몸을 뒤로 밀쳤다. “으악?!” 설마 루카스가 난데없이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는지, 아타나시아는 단말마의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야, 너 이게 무슨…….” 항변하는 그녀의 몸 위를 루카스가 덮쳤다. 그들의 몸보다 높이 치솟은 갈대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흔들렸다. 줄기가 바람에 몸을 맞부딪히며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잔잔히 고였다. 루카스는 자신의 밑에 깔린 채 굳어진 아타나시아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외전 28화] “내가 만약 그 세계에 있었다면 널 새장 속에 가둬 놨을 텐데. 왜 그놈은 그러지 않았지?” 이 세계의 루카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한테 족쇄를 채워도 꽤 잘 어울릴 것 같고.” 만약 그였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꽁꽁 묶어 가둬 놨을 것이 분명했다. 이 가느다란 손목과 발목에 사슬을 채워 어디에도 도망가지 못하게. 이렇게 자유로이 행동하도록 놔두었다가 언제 자신의 앞에서 사라질 줄 알고. 설마 그 세계의 자신은 그런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단 말인가? 혹시 이런 걸 가진 자의 여유라고 해야 하나 싶어져 어쩐지 기분이 또 불쾌해졌다. 아타나시아는 자신의 손목을 그러쥔 루카스의 손을 뿌리치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기색이 얼굴에 완연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어딘가 체념한 어투로 읊조렸다. “뭐, 이 세계 전체가 자기 손바닥 안이라 상관없다고 하던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큭, 시린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과연 이해되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 세계의 루카스조차 이대로 영원히 자신의 품 안에 있으리라 여겼던 사람이 이처럼 다른 세계에서 방황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것도 지금처럼 자신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곳에. 그러니 빼앗겨 버려도 달리 할 말은 없을 터. 루카스는 다소 냉소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진짜 안 도와줄 거야?” 그때, 뜻밖의 보드라운 온기가 그의 뺨을 감쌌다. 잠시 다른 상념에 잠겨 있던 루카스가 다시금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내렸다. “내가 이렇게 부탁해도?”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어딘가 여린 구석이 있어 쉽게 거부의 말을 내뱉기가 어쩐지 어려웠다. 지금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도 떨쳐 내 버려야 마땅한데…… 이상하게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이 나한테 통할 거라고 생각해?” 여전히 서늘한 그의 목소리에도 아타나시아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모양새로 말했다. “응, 넌 날 좋아하잖아.” 웃기지 마, 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감에 찬 목소리도,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사실을 읊듯이 한없이 담담하고 차분한 음성이 그의 귀를 스쳤다. 그래서 루카스는 아타나시아를 비웃어주지 못했다. 실제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갖고 싶어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소 기가 찼지만, 마치 그녀를 만나기로 아주 오래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것 같은 그런 기이한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아타나시아에게는 이상하게도 독점욕을 부추기는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데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껏 원하는 것은 그 무엇 하나 손에 넣지 못한 적이 없는 루카스가 생애 처음으로 자의가 아닌 타의로 놓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루카스는 다소 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너도 나만큼이나 만만치 않게 제멋대로인 거.” 우습게도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속에 그득히 쌓여 있는 심술궂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응, 알아.” 아타나시아는 어찌 보면 항복 선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보며 웃었다. 그 미소 띤 얼굴을 보니 가시 돋쳐 있던 기분이 그래도 약간은 가라앉았다. 고작 이까짓 일로 좌지우지되는 얄팍한 마음이라니. 루카스는 스스로의 멍청함을 비웃었다. 그러니까, 한심하게도 결국은 미인계에 넘어간 셈이었다. * * * “그래서 조만간 이모님이 직접 인사를 드리러 오신대요.” 막 점심나절이 지난 오후, 클로드는 제니트와 함께 가넷 궁의 후원에서 다과를 들고 있었다. 파릇한 신록이 자라난 후원에는 향긋한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어루만지고 간 자리에는 차향이 뒤섞인 은은한 향취가 남았다. 오늘도 청아한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것은 제니트였고, 클로드는 그것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그는 요즘 들어 드물게도 제법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니트와 함께 있는 동안은 기이하게도 두통이 사라졌기 때문에 예전보다 그녀를 찾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문득 제니트가 클로드의 앞에 있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아바마마는 오늘도 리페차시네요.” 클로드의 시선도 제니트를 따라 자신의 앞에 있는 찻잔으로 내려갔다. 금으로 세공된 동그란 찻잔 안에 고인 말간 액체에서 그윽한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어요. 어쩌다 리페차를 좋아하게 되신 거예요? 오벨리아에서는 선호도가 그리 높지 않잖아요. 수입도 잘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녀의 말처럼 리페차는 시중에서 잘 선호되는 기호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로드가 항상 즐겨 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황궁에는 늘 리페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다.” 클로드는 테이블 위의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제니트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의 기억으로는 딱히 이 차를 즐겨 마시게 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있었을 뿐……. ‘아마 폐하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귓가에 또다시 환청이 들려왔다. 찻잔을 기울이던 클로드의 손이 멈칫했다. ‘꼭 입안에 꽃이 피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한순간 착각처럼 눈앞에 어떤 여자의 형상이 어른거렸다. ‘봄이 온 기분이에요.’ 마치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시야에 번졌다. 햇살에 당장에라도 조각조각 깨질 것처럼 연약하게 반짝이는 백금발. 다정한 빛을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는 자색 눈동자. 신비로운 비밀을 품은 것 같은 붉은 입술이 작게 벌어져 그를 불렀다. “아바마마?” 하지만 귓가에 들려온 것은 환상 속 여자의 목소리가 아닌 제니트의 음성이었다. 그 순간 한낮의 꿈과 같은 눈앞의 환영이 연기처럼 바스러졌다. 클로드는 허무하게 사라지는 여인의 자취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왜 그러세요?” 그런 그를 향해 제니트가 또 한 번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차마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여인의 흔적을 쫓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이 부질없는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 그 아스라한 잔상이라도 쫓아 손을 뻗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덜컹, 챙그랑!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극심한 통증이 클로드를 덮쳤다. “으윽…….” 그는 곧바로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렸다. 그의 손에 채인 테이블의 다기들이 파릇한 잔디 위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아바마마!” 한달음에 달려온 제니트가 그를 부축하며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하지만 무엇 하나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폐하!” 나중에는 후원의 입구 쪽에 서 있던 필릭스도 안쪽에서의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 하지만 클로드의 시선은 환영이 사라진 곳에 줄곧 못 박혀 있었다.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통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가물가물하게 흐린 시야로 다시금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클로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미칠 듯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안 돼, 가지 마. 그는 죽을 것처럼 애타는 심정이 되어 멀어지는 환영에 손을 뻗었다. “다…… 이아나…….” 아……. 마침내 떠올려 냈다. 그가 이제껏 잊고 있던 사람. 잃고 난 후, 마치 심장이 억지로 후벼 파인 것처럼 끔찍하게 아파서, 도저히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어 스스로 기억에서 지워 버렸던 그의……. “아바마마!” “폐하!” 그러나 가까스로 그 얼굴을 기억해 내자, 다시금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상실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만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대로 죽어도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클로드는 비로소 겨우 붙들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급속도로 밀려드는 어둠이 차라리 반가웠다. * * * “그런데 이 세계의 너희 아빠를 고치려면 재료가 필요해.” 나는 그래도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은 루카스를 보며 내심 안도했다. 솔직히 아까는 어찌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는지 모른다. 사실은 루카스의 앞에서 다소 허세를 부린 거였다. 원래 세계의 루카스에게 기억 대신 감정을 지우는 마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그걸 쓸 줄 아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루카스 놈이 지난번부터 남의 아빠 목숨을 저당 잡고 하도 약을 올리며 치사하게 나오기에 나도 비슷한 수법으로 나가 주려고 한 것인데……. 아, 놈의 표정을 보는 순간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때 루카스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사이코패스일 터였다. 윽, 그래도 내 진심 어린 호소가 먹혔는지 지금은 나름대로 루카스의 기분이 괜찮아 보여 다행이었다. “재료? 그게 뭔데?” 게다가 이번에는 진짜 도와줄 마음이 들었나 보다! 올레! 루카스와 나는 해가 중천에 뜬 갈대밭 사이에 퍼져 앉아 있었다. 어흑, 그러고 보니까 날을 꼴딱 샜잖아? 잠시 후 루카스가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읊조리는 말에 나는 ‘아앗!’ 하고 소리 내고 말았다. “세계수 열매.” 세계수 열매라면 원래 세계의 루카스 놈이 마력 보충한다고 먹으러 갔던 거잖아? “잠깐. 세계수 엄청 멀리 있잖아?!” “호오, 알고 있어?” 내가 질겁해서 외치는 말에 루카스가 그것도 그 세계의 자신이 알려 줬냐며 입매를 비틀었다. “혹시 해서 묻는 건데, 너 지금 세계수 열매 가지고 있는 거 있니?” “거기 안 간 지 몇백 년은 됐는데? 공주의 신수를 안 먹었으면 마력 얻으러 갔겠지만.” 에라이, 그럴 줄 알았어! “왜, 네 아빠를 위해서 그 정도 시간은 할애할 수 있잖아?” 아무래도 이 자식의 꼼수인 것 같다. 세계수 나무에 다녀올 시간 동안 또 날 여기에 붙잡아 두고 있으려는 것 같은데. “진짜 꼭 세계수 열매의 마력이어야 해?” “흑마법을 정화하는 거라 보통의 마력으로는 안 되거든.” 루카스가 헛된 희망을 버리라는 듯이 나를 향해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세계수 열매를 먹은 게 최근이라면 또 모르지만 너무 오래 지나서 지금 내 마력은 별 도움이 안 될걸.” 그때,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나는 루카스를 향해 지나가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꼭 세계수 열매를 직접 흡수시켜야 하는 게 아니라, 그걸 먹은 사람이 마법을 써서 치료해도 되는 거야? 그럼 내가 전에 어쩌다가 세계수 가지를 흡수한 적이 있어서 체내에 그 마력이 아직 있을 텐데, 네가 가르쳐 주면 내가 정화 마법을 쓴다거나…….” “뭐? 뭘 흡수해?” 그 순간 루카스가 귀를 의심하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잠깐 얼굴을 구긴 채로 나를 보던 루카스가 급기야 내 몸 전체를 훑어보더니, 갑자기 홱 내 손목을 잡아당겨 손이며 얼굴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 [외전 29화] “앗, 왜, 왜 이래?” 당연히 나는 당황해서 루카스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이미 확인 작업을 다 끝냈는지, 루카스가 엄청나게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허, 뭐야. 너 진짜 세계수 가지를 먹었어? 그거 완전히 세계수를 잡아먹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나보고 신수 하나 잡아먹었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대박 신박하네. 어떻게 열매도 아니고 세계수 가지를 먹을 생각을 하지? 미쳤네, 미쳤어. 너야말로 제정신 아닌 거 아니야? 생각하는 게 보통 상식을 가진 일반인의 범주가 아닌데?” 아니, 루카스야…… 나한테 세계수 가지 준 건 바로 너란다? 나는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줄도 모르고 실컷 황당해하는 루카스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클로드를 구하기 위해서는 꼭 세계수 열매가 필요한 건 아닌 듯했다. 나는 루카스에게 마법을 전수받았는데, 역시나 이놈은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 좀 더 훅! 하는 느낌으로 하라고.” 그래도 나는 개떡 같은 가르침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재주가 있어서 몇 시간 후에는 놈이 전수해 준 마법을 그럭저럭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황궁으로 가자!” 그런데 전부터 생각한 건데…… 루카스는 좀 뭐라고 해야 할까. 약간 내 부적 같은 느낌 아닌가? 뭔가 예전부터 나한테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서 중요한 도움을 주는 것 같은데. 무슨 액받이 무녀도 아니고, 쿨럭. 물론 이 세계의 루카스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까망이를 훔쳐 먹어서 대마법사의 혈통을 끊어버렸지만! 그런데 지금은 나한테 도움을 주고 있으니 뭔가 아이러니하다, 크흑.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아예 지금 당장 클로드에게 치료 마법을 써 주기 위해 가넷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황성에 돌아와 보니 왜인지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했다. 나는 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클로드가 쓰러지다니! 나는 크게 놀라서 당장 클로드의 침소로 순간 이동을 했다. “뭐야, 기껏 살려 줄 마음을 먹었더니만.” 옆에서 투덜거리는 루카스 놈도 함께였다. “아바마마…… 흐윽.” 클로드의 침소에는 제니트와 필릭스, 그리고 이제키엘이 먼저 와 있었다. 투명화 마법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필릭스는 필릭스대로 아주 침통한 표정이었고, 제니트는 이제키엘에게 안겨 울고 있었다. “공주님, 울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금방 깨어나실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궁의도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필릭스가 제니트를 위로했지만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뒤로한 채로 침대에 누워 있는 클로드를 향해 다가갔다. “제니트, 괜찮아. 의원들이 한 말은 아직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지, 이대로 폐하께서 깨어나시지 못할 거란 의미가 아니잖아.” 평소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을 때는 제니트에게 말을 높였던 이제키엘이지만, 지금은 일단 그녀를 달래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조곤조곤하게 속삭여지는 음성에 더욱 눈물샘을 자극받았는지, 제니트는 조금 전보다 한결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제키엘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그런 제니트의 등을 다독였다. “아직 안 늦었겠지? 지금 바로 마법을 써야겠어.” 나는 클로드를 내려다보며 루카스에게 말했다.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클로드의 얼굴이 꼭 시체 같아서 마음이 다소 급해졌다. “잠깐 있어 봐. 내가 먼저 좀 보게.” 루카스가 혀를 차며 그런 나를 뒤로 밀쳐 냈다. “그런데 저 키메라는 뭐야?” 앗, 그러고 보니까 이곳의 루카스가 제니트를 본 건 처음이던가? 크윽, 그런데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키메라 타령이라니, 묘하게 일관성이 있잖아. 화아악! 그때, 갑자기 제니트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이며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것이 클로드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저거 혹시 나쁜 거 아니야?” 나는 제니트의 검은 마력이 행여나 클로드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그것을 차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찌푸린 얼굴로 잠시 제니트의 마력을 관찰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평소에 도움이 좀 됐겠는데? 저 키메라 마력이 좀 오묘해서 아무래도 무의식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일단 이 황제한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야.” 엄밀히 따지면 제니트의 마력 자체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타인을 움직이기 때문에 마냥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오히려 이곳의 클로드한테는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제니트가 클로드의 평안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또다시 기이한 기분에 젖어야만 했다. 지금도 제니트의 검은 마력이 클로드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게 도와주고 있다는 소리에 나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필릭스와 이제키엘이 자리를 떠나고 제니트만 클로드의 곁에 남았다. “방해꾼도 한 명으로 줄었겠다, 할 거면 지금 해.” 루카스가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제니트가 눈물 젖은 얼굴로 애처롭게 클로드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응시하다가 손을 움직였다. 내가 사용한 수면 마법에 곧 제니트의 몸이 클로드가 누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 후 나는 클로드의 얼굴에 손을 대고 루카스가 가르쳐 준 대로 마법을 사용했다. 환한 빛이 침실 안에 가득 퍼져 나갔다. “제대로 된 것 같아?” “한 번 더 해.” 의외로 루카스는 더 이상 나를 방해하거나 빈정거리듯 말하는 법 없이 순순히 내가 클로드를 치료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같은 마법을 더 쓰는 동안 나는 급속도로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와, 마법을 쓰면서 이런 느낌을 받는 건 처음인데 확실히 이게 보통 마법이 아니긴 한 모양이다. 막 피가 실시간으로 쭉쭉 빨려 나가는 것 같아. 그러나 내 노고가 무색하게도 클로드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저기요……? 이제 그만 일어나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루카스가 가르쳐 준 대로 마법도 성공적으로 먹힌 것 같고, 이제 얼추 치료가 끝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꼼짝도 안 하는 거지? 그때, 나와 클로드를 한 차례 번갈아 훑어본 루카스가 지나가듯 말했다. “이 황제, 깨어날 마음이 없나 본데.” 뭐?! 나는 예상치 못했던 루카스의 말에 당황했다. 지금, 본인이 깨어날 의사가 없다고? “그럼 어떻게 해?!” “내가 알 바 아니지.” 내가 질겁해 외쳤지만 루카스 놈은 냉소적으로 코웃음 칠뿐이었다. “난 네가 원하는 대로 도와줬어. 하지만 본인이 깨어나기 싫다잖아? 여기서 나더러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 이 자식. 물론 네 말이 맞지만……. “치료가 잘된 건 맞아?” “지금 이 탑의 마법사님을 의심해?” 짜증스럽게 뇌까리는 걸 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거짓이 없는 모양이다. 아, 일단 급한 불은 꺼서 다행이긴 한데……. “아타나시아 공주님.” 앗, 이제키엘! 아무래도 조금 전에 내가 마력 소모를 너무 많이 해서 저절로 투명화 마법이 풀린 것 같았다. 다시 침소로 돌아온 이제키엘이 클로드의 머리맡에 있는 나를 보고 멈칫했다. 으, 으악. 당신 완전히 돌아간 거 아니었나요? “공주님께서도 폐하의 소식을 듣고 오신 모양이군요.” “아, 네에…….” “괜찮으십니까?” 뜻밖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옅은 걱정이 배어 있었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색 눈동자 안에 어린 희미한 염려에 나는 움찔했다. 이곳의 이제키엘이 저런 식으로 나를 걱정하는 것이 조금은 의외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는 조금 전까지 제니트가 흐느끼던 걸 봐서 그런지, 그녀와 비슷한 입장에 있는 나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괜찮아요.” 나는 약간 어색한 기분으로 대답한 뒤 뻑뻑한 눈을 비볐다. 아무래도 갑자기 마력을 대거 소모한 탓인지 빠른 피로가 몰려들고 있었다. 앗, 이건 왜인지 기절 각인 것 같은데. 빨리 이 자리를 뜨는 게 좋겠어. 그러고 나서 인사를 하려고 이제키엘을 쳐다보니 어째서인지 그는 조금 전보다 약간 굳어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혹시 지금 내가 눈물을 훔친 걸로 착각했나? 하지만 그의 오해를 정정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공자는 제니트의 곁을 지켜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으헉, 날 부르지 마! 난 지금 왠지 기절할 것 같단 말이야! 빨리 여기를 떠나야 할 것 같다고! 지금 순간 이동 쓸 마력도 없어! 하지만 이제키엘은 나를 향해 아까 제니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위로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궁의들도 백방으로 방법을 찾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평소 미령하신 분께서 그러다 존체라도 상하시면 폐하께서도 마음이 편치 못하실 겁니다.” “네, 고마워요…….” “그리고…… 지금처럼 홀로 마음 삭이지 마시고, 부족한 몸이지만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언제든…….” 그래요, 전 그냥 지금 기절하겠습니다. 나는 이제키엘의 말을 듣는 동안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이 어느 순간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 비틀거리는 나를 이제키엘이 붙잡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난 병약한 공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이제키엘은 성실하니 아마 날 잘 옮겨 주겠지. 나는 그렇게 기절했다. * * * “이제 일어나?” 눈을 뜬 나를 가장 처음 맞아준 것은 루카스였다. “오래도 퍼 자네. 네가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인 줄 알아?” 야이, 내가 그냥 잤냐? 마력 고갈로 잠든 걸 가지고. “내가 얼마나 잤는데?” “한나절.” “그럼 그렇게 오래 잔 것도 아니구먼.” 루카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스름한 달빛이 그의 얼굴에 신비로운 음영을 그렸다. 나는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다 말고 소스라쳤다. “악, 깜짝이야!” 으억, 갑자기 바로 옆에 나랑 똑같이 생긴 여자가 잠들어 있는 게 보여서 깜짝 놀랐다. 진짜 경기할 뻔했네! “아타나시아 공주?!” 그런데 나랑 같이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바로 아타나시아 공주였다. 아니, 루카스 이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동안 꽁꽁 감춰 놨던 공주를 내 앞에 데려다 놓은 거지? 의아한 내 마음을 알았는지, 루카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나한테 말했다. “네가 이 공주 행세를 하는 거 이제 짜증 나. 그냥 집어치우고 넌 나랑 같이 탑으로 가.” 이건 또 뭔 놈의 변덕……. 하지만 나는 곧 루카스가 이러는 이유를 깨닫고 어이가 없어졌다. 너 지금 이제키엘 때문에 이러니? 아무래도 여기까지 날 옮겨 준 게 이제키엘인 것 같은데. 원래 세계에서도 질투 한 번 살벌하게 하더니만. 어쨌든, 이놈이 내 앞에 아타나시아를 데려다 놓은 것은 잘된 일이었다. 나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클로드도, 아타나시아 공주도 지금은 다들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좋은 꿈들을 꾸고 있기에. “일어나요, 아타나시아.” 문득 가슴이 조금 먹먹해져서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속삭였다.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이대로 영영 놔 버려도 괜찮아요?” 물론 내 목소리가 닿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음 순간, 아타나시아 공주의 금색 속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 [외전 30화] “아타나시아?!” 헉, 설마 지금 깨어나려는 건가? 내 간절함이 공주에게 닿은 거야? 그런 거야?! 우어, 역시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오버하고 있네. 그냥 내가 마법을 거둬서 깨어나는 건데.” 루카스 놈이 옆에서 비웃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아타나시아 공주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별빛 조각처럼 반짝이는 보석안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실제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에 생명이 갓 깃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타나시아.” 으억,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뭔가 내 이름이랑 똑같은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부르려니까 기분이 묘하다. 꼭 내가 나를 3인칭으로 지칭하는 것 같잖아. 눈이 마주친 순간, 아타나시아 공주가 한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초점 없는 그녀의 눈동자에 서서히 또렷한 빛이 어렸다. “당신…….”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잠들게 해달라고 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요, 다시 현실이군요.” 아타나시아 공주가 묘하게 침착한 어투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원한다면 다시 자게 해줄 수도 있는데.” “루카스.” 루카스 놈이 옆에서 또다시 헛소리를 하기에 나는 녀석을 찌릿 째려봐 줬다. “아타나시아, 잘 왔어요.” 나는 막 잠에서 깨어난 아타나시아 공주를 향해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반기는 나를 향해 다시 미끄러졌다. 나는 달빛을 머금은 보석안이 얕게 미동하는 것을 보며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속삭여 주었다. “당신이 다시 깨어나서 기뻐요.” * * * 클로드는 침소에 혼자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가넷 궁을 바쁘게 오가던 궁의와 마법사들도 지금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필릭스만이 아직까지도 침소의 문밖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클로드의 곁에 머물던 제니트도 지금은 쉬러 간 것 같았다. 나는 아타나시아 공주가 숨을 죽인 채 클로드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잠든 클로드를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는 건가요?” 나는 쉽게 대답해 줄 수 없었다. 클로드가 이렇게 된 것은 애초에 흑마법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했고, 비록 치료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어떤 후유증이 남을지는 몰랐으니까. 게다가 루카스의 말로는, 클로드에게 깨어날 의사가 없다고 했으니……. “아바마마.” 아타나시아 공주가 조용히 클로드를 불렀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곧 그녀의 손이 클로드의 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잠시 후, 아타나시아 공주가 나를 돌아보며 어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불러도 화내지 않고, 이렇게 손을 대도 뿌리치지 않네요.” 당연하게도 나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도 애초에 내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다시금 클로드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깨어나기 직전에 꿈속에서 어떤 여자를 봤어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이상하죠? 단 한 번도 직접 얼굴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아마도 아타나시아 공주는 꿈에서 다이아나를 본 듯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나요?” 나는 그녀의 물음에 뭐라고 답할까 이번에도 고민하다가 결국은 질문을 되돌렸다. “당신이 봤을 때는 어떤 것 같았어요?” 아타나시아 공주의 손이 클로드에게서 떨어졌다. 곧 그녀가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죠?” 나 역시 예전에 꿈에서 봤기에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래서 저를 그렇게 미워하신 거라면 차라리 이해가 돼요.” 아무래도 클로드가 지금껏 흑마법으로 다이아나에 관한 기억을 지우고 있었던 것 같다고 아타나시아 공주에게 말해 주어야 할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인 데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그녀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타나시아 공주는 이미 혼자서 해답을 내린 듯, 나를 향해 아스라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유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요. 그동안 아바마마의 화를 살까 두려워 단 한 번도 묻지 못했어요.”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공허한 음성에 나는 잠깐 말없이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데려가 줄게요.” 손끝에 닿은 체온이 침대 위에 누운 클로드 못지않게 서늘하게 시렸다. * * * “여기는…….” 아타나시아 공주와 내가 오게 된 곳은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였다. 나부끼는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넓게 펼쳐진 자연의 경관이 꼭 신선들이 산다는 지상 낙원 같았다. “여기에서 어머니를 보내드렸대요.” 그러나 그 압도적인 광경은 한편으로 공허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바람 따라 어디든 자유롭게 가시라고, 그렇게.” 본래 황족들은 황실의 묘에 따로 안치되는 것이 관례지만 다이아나는 클로드의 정식 비가 아니었다. 물론 클로드는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유해를 황궁의 법도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방법이 다이아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단다. 아마도 클로드의 뜻처럼 다이아나는 이곳에서 세계 각지의 공기가 되었을 것이다.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바람 속에서 아타나시아 공주도, 나도 한동안 말없이 눈앞의 장엄한 광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마침내 아타나시아 공주가 흐린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요. 그럼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계셨던 거네요.” 기실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타나시아 공주는 어쩐지 어제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그녀와 나는 다이아나가 잠든 곳에서 조금 더 머물다가 다시 황성으로 돌아갔다. * * * “아타나시아!” 이번에는 제니트가 클로드의 침소에 와 있었다. 그녀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모습을 보자마자 울먹이며 다가갔다. “아바마마께서 아직도 눈을 뜨시지 않아요.” 그녀와 함께 있던 이제키엘도 아타나시아를 향해 간단히 묵례해 인사했다. “궁의는 뭐라고 하던가요?” “어제와 다를 게 없어요.” 제니트는 누가 봐도 초췌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로드가 쓰러진 지 그리 긴 시일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변화는 확연했다. 그때, 알피어스 공작이 안으로 들어섰다. “제니트 공주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관료들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관료들이 한 말은 한편으로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폐하께서 아직 의식이 없으시니, 공주님께서 공무를 대신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오벨리아의 제1공주는 제가 아니에요.” 아타나시아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들은 제니트에게 클로드의 빈자리를 대신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관료들의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알피어스 공작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분명 저 양반이 바람을 불어넣었을 게 뻔하지. “제니트 공주님. 하나 공주님께서는 언제든 폐하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지금껏 교육받으셨으니 마땅히…….” “아타나시아 공주 역시 데뷔당트를 치른 14살 때부터 저와 같은 교육을 받았지요. 그러니 제가 아닌 그녀에게 권한을 일임하는 게 이치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공.” 하지만 뜻밖에도 제니트는 완강했다. 그녀의 말에 알피어스 공작은 한순간 말문이 막힌 듯이 입을 다물었다. 제니트의 말은 정론이었으니 거기에 반박할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는 제니트가 설마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치 못했던 것 같았다. 곧 로저 알피어스가 제니트에게 다가가 소리 낮춘 음성으로 일갈했다. “제니트 공주님, 왜 이러십니까?” “제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요. 전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예전부터 말했잖아요.” 알피어스 공작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으나 제니트는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저는 아바마마의 곁에 있겠어요.” 관료들 역시 그런 제니트의 태도에 당황한 눈치였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제니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누군가는 클로드 대신 국정을 돌봐야만 했고, 제니트가 그 일을 거부하는 이상 다음으로 권리를 갖는 것은 아타나시아 공주일 수밖에 없었다. 곧 그녀는 관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알피어스 공작은 할 말이 무척 많은 얼굴로 제니트를 보았지만 그녀는 클로드의 머리맡에 자리를 지키고 앉은 채 옆으로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알피어스 공작도 어쩔 수 없이 다른 관료들을 따라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이제키엘도 그런 제니트를 잠깐 말없이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 * * 며칠간 아타나시아 공주는 굉장히 바쁜 일상을 보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클로드의 빈자리를 꽤 착실히 채워 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아직은 부족한 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안심이라고 관료들도 수군거렸다. 제니트는 하루 종일 클로드의 침소를 지키고 있었다. 오매불망 클로드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머리맡을 떠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궁인들과 필릭스는 이만저만 근심이 큰 게 아닌 듯했다. 알피어스 공작과 로자리아 백작 부인은 계속 제니트를 찾아와 설득도 하고 회유도 하고 또 몇 번은 언성을 높이며 화도 냈지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번번이 허탕을 치고 돌아서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타나시아 공주가 클로드의 침소를 찾았다. 때마침 제니트는 필릭스와 궁인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러 간 참이었다. “아바마마.” 달빛이 머문 클로드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창백해 보였다. 그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타나시아 공주가 잠시 후 듣는 이 없는 말을 작게 속삭였다. “당신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제 아버지였던 적이 없지요. 지금은 처음으로 그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희미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천천히 녹아들었다. “저만은 당신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전보다 지금이 더 당신과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느린 손짓이 클로드의 얼굴을 스쳤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잠들어 있는 클로드의 얼굴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매만지며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차라리 계속 지금처럼 잠들어 계셨으면 좋겠어요, 아바마마.” 그 나긋한 속삭임을 듣는 동안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어쩐지 목구멍에 돌멩이가 굴러와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얼굴이 이렇게 평온한 것은 처음 보았다. 물론 그녀의 얼굴에 깔린 감정에는 공허함 역시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아타나시아 공주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예상했던 전개가 아니라서 당황했어?” 옆에 있던 루카스가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 [외전 31화] 어떻게 보면 정답이었다. 동화 같은 아름다운 결말까지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걸 상상했던 건 아니었다. 클로드는 의식불명인 데다, 아타나시아는 차라리 클로드가 잠든 지금의 상태가 더 낫다고 여기고 있다니. 아니, 물론 나도 책 속에 나오는 클로드는 별로 안 좋아했었지만. 지금까지 그가 아타나시아 공주에게 한 걸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말이야. 게다가 이런 말을 하는 아타나시아 공주도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한 말도 진심으로 클로드의 상태를 반겨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번번이 거부했던 예전의 클로드보다 차라리 아무 반응이 없는 지금의 그가 더 낫다는 의미였으니까. 아마 이 두 사람 사이의 골과 상처는 내 생각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잖아? 흑마법을 사용한 인간들 끝이 원래 다 그렇지 뭐.” 그때, 루카스가 지나가듯 읊조렸다. 흑마법의 부작용을 치료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흑마법은 영혼에 각인되는 마법이라고 했던가. 루카스의 말을 듣는 순간, 몇 년 전 아를란타에서 만난 적이 있던 고서점의 주인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아가씨, 웬만하면 흑마법에 손을 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흑마법은 말이야.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흑마법을 남발한 놈이나 그 주위에 있는 사람 치고 끝이 좋았던 놈은 하나도 보지 못했단 말이지.’ ‘흑마법 그놈은 꽤 영악해서 시전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본인도 모르는 사이 하나씩 야금야금 뺏어간단 말이야.’ 그 전직 흑마법사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그래서 지금 클로드는 과거에 흑마법을 사용한 대가를 받고 있다는 건가? “넌 할 만큼 했어. 당장 죽어 엎어질 뻔한 사람을 살려 놨으니 이만하면 된 거 아닌가?” 내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는지, 루카스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음, 좋게 말해 주니 고맙기는 한데 어쩐지 좀 찜찜한 건 왜일까? “웬일로 그렇게 착하게 말해?” “그래야 네가 이쪽에 그만 신경을 끌 것 아니야.” 윽, 그럼 그렇지. 그런데 기분 탓인가? 루카스 이놈, 전보다 묘하게 여유로운 것 같은데. 나한테 진짜 이곳의 아타나시아 공주가 되라느니,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 세계의 일에 끼어드냐느니, 저쪽 세계의 루카스와 무슨 사이냐느니 하면서 살벌하게 굴 때가 엊그제인 것 같은데 말이지. 지금은 다소 독기가 빠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유해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원한다고 해서 다시 저쪽 세계로 바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건가? “다른 이상이 있어서 못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니라고 했지? 그럼 본인이 깨어날 의사가 생기면 언제든 눈을 뜰 수 있는 거야?” “자기가 깨어나고 싶어지면 그렇겠지.” “그래.” 나는 클로드와 아타나시아 공주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이렇게 편안한 얼굴을 하고 계시는 건 처음 봐요. 무슨 꿈을 꾸고 계신가요?” 아타나시아 공주는 여전히 클로드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그가 대답을 해줄 리는 없었지만, 그녀도 그런 것을 바라고 묻는 것은 아닌 듯했다. “제가 꾸었던 것처럼 차라리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꿈인가요?” 나직한 속삭임이 어둑한 방 안에 번져 들었다. 내가 목격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지만, 이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날 선 긴장감이 주변에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고요하고도 차분한 분위기만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클로드와 아타나시아 공주의 표정 역시 지금까지와 달리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것이 낯설어서 기분이 다소 이상해졌다. 그러나 그들의 고요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침소 안으로 제니트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아.” 그녀는 클로드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는 아타나시아 공주를 보고 잠깐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아타나시아 공주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깨달은 듯 표정을 흐리며 입을 열었다. “아타나시아도 아바마마가 걱정되어서 왔군요.” 분명 쉬러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제니트는 또 클로드를 살피러 온 모양이었다. “제니트. 좀 더 쉬는 게 좋지 않겠어요?” 한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제니트의 얼굴은 창백했다. 아타나시아 공주 역시 제니트의 상태를 보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니트는 오히려 아타나시아 공주를 염려하듯이 물었다. “요즘 아바마마 대신 공무를 보느라 바쁘죠?” “제니트야말로 아바마마의 곁을 지키느라 힘들지 않아요?” “전 괜찮아요.” 아타나시아의 물음에 제니트가 고개를 저었다. 곧 그녀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클로드의 얼굴에 닿았다. “금방 깨어나시겠죠?” 소리 죽인 그 음성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불안감이 녹아 있었다. “그럴 거예요.” 그런 그녀를 향해 아타나시아 공주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뜻 모를 확신이 어린 그 음성에 제니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타나시아 공주는 그런 제니트의 눈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윽고 침대 위의 잠든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작게 속삭였다. “아무리 행복한 꿈이라 해도 결국은 허망할 뿐인 거짓이란 걸, 아바마마께서도 깨달으실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 * * 건국제가 다가올수록 황궁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클로드 없이 건국제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다들 비상이 걸린 눈치였다. 일단은 클로드가 의식 불명이라는 사실 자체도 쉬쉬하며 숨기고 있는 형국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이번에도 대역을 쓰지 않으려나? 물론 알피어스 공작은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제니트를 앞세우고 싶어서 성화인 것 같았지만. 그러나 제니트는 조금도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고 있지 않았으니, 아마 이번에도 별 소용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제니트와 아타나시아, 두 공주는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채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뜻밖에도 아타나시아 공주는 클로드의 역할을 아주 잘 소화해 내고 있었다. 제니트가 황성에 들어온 14살 때부터 둘이 함께 이런저런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예상외로 이런 일이 적성에 맞는 모양이었다. 관료들도 그런 그녀를 달리 본 것 같았다. 나도 지금까지 그녀를 개복치 같은 소심하고 연약한 공주님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번 기회로 판단을 달리하게 되었다. 반면 제니트는 자신을 키워 준 알피어스 공작과는 달리 정치적인 욕심이 하나도 없는 듯, 공식적인 일에는 나서지 않고 클로드를 살피는 데에만 전념했다. 그러니 흰둥이 아저씨나 로자리아 백작 부인의 입장에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대로 클로드가 깨어나 준다면야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요원해 보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클로드가 머지않아 눈을 뜰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는 느낌일 뿐이라 어디에 가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 짓이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루카스 놈을 향해 따졌다. “내가 뭘?” 내가 도끼눈을 하고 째려보든 말든, 그는 태평하게 반문했다. “토파즈궁 전소시키려고 한 거 너지?”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길이 토파즈궁을 휩쓸어 황성이 홀랑 다 타 버릴 뻔한 것이다. 다행히 불길이 거세지기 전에 잠재워 인명 피해는 없었고 또 다른 궁은 다 멀쩡하다고 하는데, 토파즈궁만큼은 대부분이 까만 재가 되어버렸다. 이 소식을 처음 듣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당연히 루카스였다. “아닌데? 나라는 증거 있어?” 그런데 내 합당한 의심에 루카스가 코웃음을 치며 부정했다. 이 자식이! 너 말고 또 그럴 사람이 누가 있어?! 지난번에도 네가 토파즈궁을 폭파한다느니 뭐니 했었잖아? “어쩐지 네가 너무 조용히 있다 했어.”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 이놈이 너무 얌전해서 수상하게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궁에 불을 지르다니! 애초에 이놈이 토파즈궁을 노린 목적도 나를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게 분명했다. 와, 그런데 내가 집으로 돌아갈 구멍을 그런 식으로 죄다 막아버리려고 하다니, 이놈 심보가 참……. “그런데 어쩌지? 내가 이미 이걸 찾아버렸거든.” 아무래도 루카스 놈이 좀 얄미워서 약을 올려 주고 싶어졌다. 나는 얼마 전에 찾은 것을 마법으로 소환했다. 한가롭게 누워 노닥거리던 루카스가 내 손에 들린 책을 보고 한순간이지만 멈칫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금 여유로운 태도로 나를 비웃었다. “그딴 가짜로 날 속이려고?” “왜 가짜라고 생각해?” “수상한 책은 죄다 내가 찾아서 없앴으니까.” 문득 얼마 전에 토파즈궁에서 루카스를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분명 이놈이 손을 털면서 웬 가루로 보이는 것들을 흩날리고 있었지. 그러면서 궁전 청소도 안 하는지 먼지가 많다고 투덜거렸어. 그 후로도 종종 나랑 같이 거기에 갔었고. 이, 이 자식. 그게 토파즈궁에 있던 책들을 없애는 작업이었다니. 어쩐지 이 녀석 태도가 전에 비해 묘하게 여유로워졌더라니. “네가 없앤 게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은 안 하나 봐? 넌 이걸 직접 본 적도 없는데 말이지.” 역시 내가 이 책을 찾은 사실을 지금까지 루카스 놈에게 숨기기를 잘한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에 보호 마법도 엄청 많이 걸어서 아무리 이놈이라 해도 쉽게 파손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놈과 내 마력은 서로 거부 반응까지 일으키는 모양이니까. 사실 내가 이 책을 찾은 건 며칠 전이었는데, 루카스가 그새 토파즈궁을 전소시킨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그게 진짜라면 네가 지금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내 의지로 남은 거야. 아직은 좀 더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고 싶어서.” 내 당당한 말에 루카스 놈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이제는 자리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킨 루카스가 내 손에 있는 책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크흡, 사실 이 책을 찾자마자 펼쳐 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는 건 비밀이다. 그래도 일단은 나를 이곳으로 보낸 책과 똑같은 것이었으니 좀 더 보관하고 있어 볼 생각이었다. “그거 당장 이리 내놔.” 루카스 놈이 금세 짜증이 난 얼굴로 나를 협박했다. 흥, 하지만 내가 미쳤냐? 이걸 너한테 주게. “갖고 싶으면 뺏어가든가?” 나는 루카스 놈이 번번이 내 속을 뒤집어 놓았던 약 올리기를 시도했다! 효과는 매우 좋았다! 녀석이 당장에라도 내 손에 들린 것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얼굴을 한 채 나를 쫓아왔다. 나는 마법을 이용해 장거리 순간 이동을 했다. 물론 루카스는 나를 금방 쫓아왔지만 우리 두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 않던가? 바로 서로에게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 때마침 오늘은 오벨리아의 건국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건물마다 걸린 색색의 깃발과 허공에 나부끼는 반짝이는 종이와 꽃잎들 사이에서 루카스와 나의 추격전이 펼쳐졌다. “바보, 네가 그렇게 용을 쓴다고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내 도발에 루카스가 얼굴을 왕창 구겼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킥킥 웃었다. 처음에는 그냥 약 좀 올려 줄 생각이었는데 이거 의외로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아무래도 이 책은 다시 집어넣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한참 건국제 행사로 사람들도 바글거리는데 여기서 이걸 떨어뜨리면 대략 낭패였다. 나는 루카스 놈을 피해 또 한 번 순간 이동을 해서 새 시장이 열린 곳으로 움직였다. 가장 큰 새장 위에 살며시 내려앉자 그 안에 있던 새들이 짹짹 울었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새장들이 수십, 수백 개는 널려 있었다. 화아악! 내 손에 있던 책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어라? 이게 갑자기 왜 이래? 지금까지는 내가 무슨 수를 써도 꼼짝도 안 하더니? 하지만 내가 더 놀랄 만한 일은 바로 다음 순간 일어났다. “여긴 또 어디야? 이번엔 맞게 온 건가?” 환한 빛이 걷히고, 책이 있던 자리에서 나타난 것은 바로 또 다른 루카스였던 것이다! ======================================= [외전 32화] “루카스?” 혹시 내가 알던 루카스인가? 아니면 제3세계의 루카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으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원래 내가 알던 루카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 드디어 찾았네.” 그 역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루카스의 붉은 눈동자가 그 안에 나를 담아낸 순간 이채를 띠었다. “가짜만 줄줄이 보는 것도 이젠 지겨워서 이번에도 아니면 다 때려 부수려고 했는데.” 나는 예상치도 못 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약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너 차원 이동도 할 줄 알아?” “시험 삼아 해보니까 되더라고.” 내 바보 같은 질문에 루카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쿠, 쿨럭. 시험 삼아 해보니까 됐다니, 차원 이동이 그렇게 쉬워?! “뭐야, 이건 또?” 그때, 옆에서 무척 띠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잠깐 잊고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나와 함께 추격전을 벌이던 이 세계의 루카스였다. 그는 내 앞에 있는 또 한 명의 루카스를 보고 얼굴을 왕창 구기고 있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내 앞에 우르릉 쾅쾅! 천둥 번개가 치는 것 같은 환영이 어른거렸다. 헉, 이거 뭔가 그림이 미묘한데? 이, 이것은 그야말로 좌청룡, 우백호 같은 모습이 아닌가? 원래 세계의 루카스도 이 세계의 루카스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새끼는 또 뭐야?” 둘 다 다른 세계의 존재를 알고 있는 데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그 정체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텐데도 이따위 소리를 내뱉었다. 크읍, 그나저나 이 새끼라니. 이 루카스나 저 루카스나, 다른 세계의 자기 자신한테 너무 야박한 호칭인 것 아닙니까? 이런 걸 보면 둘 다 루카스는 루카스인데 말이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카스가 흐응, 하고 소리 내더니 나를 향해 툭 내뱉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너, 나 없는 사이에 바람피웠어?” “뭔 소리야!” 바람을 피우긴 누가? 아, 아니, 그리고 일단 너랑 나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바람이라니? 하지만 곧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엇, 그러고 보니까 나 이곳의 루카스랑 키, 키스하지 않았었나. “아무래도 공주님이랑 나중에 긴한 얘기를 좀 해야겠네.” 윽, 내 표정에서 수상함을 감지했나 보다. 나는 어쩐지 내 앞날이 다소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이 세계의 루카스가 냉소적으로 일갈했다. “개소리 그만하시지? 이 공주님은 너랑 긴히 나눌 이야기 따위 없거든? 죽여 버리기 전에 지금 당장 네 세계로 꺼져.” “네가 제발 가지 말아 달라고 빌어도 갈 거야. 우리 둘이 사이좋게, 우리 세계로. 그리고 네놈이 죽기 전까지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지?” “아까부터 개소리가 심한데? 이 공주가 네 세계로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까 헛물켜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너 혼자 곱게 꺼져.” “하.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이 새끼가 내 걸 탐내고 앉았네.” 우르릉 쾅쾅! 또다시 내 눈앞에 천둥 번개가 치는 환영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좌청룡 우백호! 나는 살벌한 기운을 내뿜는 두 사람을 보며 두 눈을 흔들었다. 으, 으헉. 두 루카스가 맞붙으니 박력이 장난이 아니구나. 얘네들, 왠지 이대로 두면 사고 칠 것 같은 느낌……. “아무래도 곱게 말해서는 안 되겠는데.” “그래, 거슬리는 건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게 상책이지.” 정답이었다! 두 루카스가 내 눈앞에서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서로 맞붙은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콰콰쾅! 쿵쾅! 콰아아앙! 나는 시야 가득 현란하게 번쩍이는 마력과 귀청을 울리는 과격한 폭발음 사이에서 잠깐 넋을 잃어버렸다. 와, 와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쟤네, 지금 나 때문에 싸우는 거야? 무, 물론 서로를 보는 눈동자에 동족 혐오 같은 느낌이 배어 있긴 했었지만. 쿠콰콰쾅! 콰쾅! “꺄아악! 이게 무슨 일이야?” “으악, 사람 살려!” 아니, 그런데 이놈들아! 지금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일 셈이냐? 가뜩이나 오늘은 건국제 행사로 여기에 모인 인구수도 많은데! “야, 너희들 적당히 좀 해!” 나는 두 루카스의 마법 난사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서둘러 마력을 불러내 그들을 보호했다. 주변의 소동으로 놀란 새들이 새장 속에서 푸드덕 날갯짓하며 지저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승패가 금방 난 것이 다행이었다. “별것도 아닌 게 깝치기는.” 광장의 한가운데 있는 시계탑의 꼭대기에서, 루카스가 자신의 발밑에 쓰러져 신음하는 또 다른 자신을 내려다보며 싸늘한 비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파스슥. 벽에 처박혀 있던 이 세계의 루카스가 몸을 들썩이자 부서진 벽의 파편이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이…… 너도 세계수의 마력 처먹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어.” “그딴 거 먹든 안 먹든 내가 너보다 더 세.” 루카스가 이 세계의 루카스의 가슴팍을 발로 지그시 짓밟으며 오만하게 웃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뭘 어떻게 한 건지, 바닥에 쓰러진 루카스의 모습은 처참했다. “아무래도 넌 머리가 나쁜 모양인데 이참에 똑똑히 새겨 둬. 쟨 내 거야.” 와…… 성격 진짜 나쁘네. 루카스 놈은 참 여전했다. 다른 세계에 와서도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보나 마나 여기서 ‘내가 왜 네 거야?’라고 또 따져 봤자 소용없을 게 뻔해서 나도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안 줘. 네 건 네가 알아서 찾아.” 루카스의 말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분한 듯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루카스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듯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야, 이제 그만해.” 그래도 이곳에 있는 동안 정이 들어서 그런지, 이 세계의 루카스가 저렇게 쓰러져서 원래 세계의 루카스한테 밟히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별로 좋지 못했다. 다행히 내 말을 듣고 루카스는 뒤로 물러났다. 이미 한 차례 밟아주고 난 상대라 관심이 식은 것 같기도 했다. 우와아아! 그때, 저 밑에서 환호성이 울려서 나는 시계탑 밑을 내려다보았다. 건국제를 맞아 황족들이 국민에게 인사를 하는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있었다. 클로드는 없었고, 대신 아타나시아 공주와 제니트의 모습이 보였다. 아, 결국 두 사람이 같이 나왔구나. 그래도 두 사람이 생각보다 원만히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물론 흰둥이 아저씨는 달갑지 않겠지만. “나도 갈 거야. 너희들이 있는 세계에.” 이 세계의 루카스가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선언하듯이 읊조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막 나를 향해 발길을 뗐던 루카스가 그 말을 듣고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서늘히 뒤돌아보며 이죽거렸다. “네가 무슨 재주로?” “너도 한 걸 내가 못 할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아, 아앗! 조금 전에 그렇게 깨지고도 아직 도발할 힘이 남았다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무섭도록 닮은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래? 그럼 그냥 아예 지금 죽여 버려야겠네.” 삐용삐용! 내 머릿속에 강렬한 경고음이 울렸다. 이건 진짜다! 이번에는 진짜로 죽일 생각인 거다! “루카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다시금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한 루카스를 붙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세계의 너를 네 손으로 죽이는 건 너무 심하지 않냐? 하지만 이런 말을 해봤자 통할 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다른 말을 꺼냈다. “우리 그만 돌아가자. 여기까지 나 데리러 온 거잖아? 벌써 여기 머문 지 시간도 꽤 지났고, 빨리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잠깐만, 저놈 좀 족치고.” “그, 그냥 빨리 가자니까!” 사실은 아직 이 세계에서 더 지켜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고, 또 이곳의 루카스도 이렇게 두고 가기는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지금이 돌아갈 시점인 것 같았다. 내가 재차 독촉하자 루카스도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꽉 잡아. 차원 경계에 빠지면 찾는 데 애먹으니까.” 루카스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에 나는 얌전히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다 그때까지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 세계의 루카스와 눈이 마주쳤다. “저기, 그동안 고마웠어.” 아무래도 이대로 말없이 그냥 가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헤어지려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좀 갑작스러운 이별이기도 하고. 처음에야 나를 좀 협박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내 부탁으로 클로드를 그냥 도와주기도 한 데다, 또 이 낯선 세계에 있는 동안 이곳의 루카스 때문에 많이 안심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마지막에 토파즈 궁을 전소시킨 건 좀 섬뜩했지만…… 으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하지만 마주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루카스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왜인지 내가 그를 버리고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기다려.” 한 차례 이를 악문 그가 곧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꼭 다시…….” 화아악! 하지만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매정한 루카스가 마법을 발현시켜 버렸다. 눈앞에 황금색 빛의 물결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다 곧 여러 갈래로 흩어진 물살이 오색 찬연한 빛깔로 물들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눈이 멀 듯해, 나는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고 루카스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주변이 빛의 소음으로 가득해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눈 떠도 돼.” 머리 위에서 나직한 음성이 속삭여졌다. 나는 그 소리에 몸을 작게 떨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돌아온 거야?” 잠시 주변을 둘러보자 어딘가 익숙한 광경이 나를 반겼다. 맨 처음 이상한 책을 발견했던 토파즈 궁이었다. 이곳은 분명 다른 루카스가 홀랑 태워 버렸는데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지금까지 내가 있던 그 세계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지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었다. “계속 이러고 있으려고? 못 보던 새 공주님이 꽤 적극적으로 변하셨는데?” “으헉!” 그러다 문득 아직까지도 내가 루카스에게 안겨서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는 걸 깨달았다. 나는 파드득 경기하며 재빨리 밑으로 내려섰다. 툭! 때마침 발치에 무언가가 떨어져서 보니 나를 저쪽 세계로 이동시켰던 책이었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또다시 웬 글씨가 적혀 있었다. [1차 확인 결과- 오류로 인한 유보] 뭐? 1차 확인? 게다가 오류로 인한 유보라고? 뭐라는 거야, 이 종이 쪼가리가? 화르륵! 헉, 갑자기 내 눈앞에 있던 책에 푸른 불꽃이 일어서 깜짝 놀랐다. 물론 마력에 의한 불길이니만큼 뜨겁지는 않았지만. “태우는 거야?!” “이딴 걸 그냥 둬서 뭐 해?” 경악 어린 내 물음에 루카스가 스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게 알고 보면 국보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또다시 이번 같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차라리 없애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것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 [외전 33화] “내가 없어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나도 몰라.” 창밖을 보니 아직 해가 쨍하게 뜬 게 보였다. 나는 곧바로 클로드가 있는 가넷 궁으로 이동했다. “아빠!” 그는 집무실에 있었다.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나를 보고 클로드가 미간을 움찔 찌푸렸다. “갑자기 웬 소란이지?” “아빠, 우리 아빠 맞아요?!” “또 개꿈이라도 꾸었나? 웬 헛소리냐.” 헉, 우리 아빠 맞잖아! 우와, 우와! “아빠, 보고 싶었어요!” 나는 격한 반가움을 느끼며 클로드에게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채로 나한테 덥석 안기게 된 그가 의문을 표했다. “오전 다과 시간에 얼굴을 보고 불과 서너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군.” 엥? 그 말을 듣고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다과 시간 이후로 서너 시간이라면, 내가 토파즈 궁에 갔던 때인데. 그 이후로 시간이 하나도 안 지났다고요? * * * 놀랍게도 내가 저쪽 세계에 가 있는 동안, 이곳에서는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수장 할아버지를 만나고 호기심이 들어 토파즈 궁에 갔던 게 점심 식사 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클로드를 찾아갔을 때도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으니까. 내가 저쪽 세계에서 시간을 보낸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이곳에서는 단 하루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에메랄드 궁의 풍경도 괜히 낯선 느낌이었다. 저쪽 세계에서는 제니트가 에메랄드 궁을 이용하고 있어서 나는 아타나시아 공주 대신 황궁에 머물 때 루비 궁에 있어야 하지 않았던가? “릴리!” “어멋, 공주님.” 크흑, 우리 릴리도 오랜만이야! 클로드처럼 나한테 갑작스러운 포옹 어택을 당한 릴리가 깜짝 놀라서 움찔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다독이며 작게 웃었다. “웬일로 어리광이세요?” “릴리랑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으흐흑, 역시 우리 릴리가 짱이다. 그쪽 세계의 릴리는 그쪽에 있는 아타나시아 공주의 릴리였으니까. 게다가 어쩔 수 없이 아타나시아 공주의 행세를 하는 동안 나를 살뜰히 보살펴 주는 릴리를 볼 때면 양심이 어찌나 찔리던지. “오늘도 공주님과 릴리안 님은 오붓하시네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필릭스가 훈훈한 광경을 목격한 듯이 덩달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주님, 오늘 온 편지들을 정리해 뒀어요.” “앗, 잠깐, 녹스 님!” “왈왈!” 그때, 방 안으로 세스와 한나가 들어왔다. 까만 털을 휘날리는 녹스도 함께였다. 다들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이 다소 묘하기도 했는데, 내가 저쪽 세계에서 보냈던 시간이 마치 한낮의 꿈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없는 동안 넌 그놈이랑 뭘 하고 노닥거린 건데?” 하지만 이렇게 날 취조하는 루카스를 보니 그쪽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 진짜인 건 맞는 모양이었다. “노닥거리다니? 그리고 내가 그 루카스랑 하긴 뭘 해?” 나는 내 방에 들이닥친 루카스를 보며 내심 안도했다. 만약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수상한 책이 보여 준 환영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면 기분이 무척 이상해질 것 같았다. “루카스라니, 너 지금 그놈을 나랑 똑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앗, 그런데 루카스가 이상한 데서 딴죽을 걸었다. “아니, 그쪽 이름도 루카스는 루카스니까…… 그럼 뭐라고 불러?” “그 새끼라고 해, 그냥.” 쿨럭. 아무리 그래도 그 새끼가 뭐니? “그 호칭은 좀 심하지 않아?” 그러자 루카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매우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자식이 꽤 마음에 들었나 봐? 이렇게 두둔하는 걸 보면.” “너야말로 왜 이렇게 그 루카스를 싫어해?” “넌 그럼 내가 그쪽 세계의 너한테 관심 두면 기분 좋겠어?” 앗, 그렇게 물으니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뭐, 뭔가 좀 싫은 기분인데. 이게 바로 역지사지라는 건가?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왠지 내가 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루카스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표정을 보고 정답을 읽어 낸 듯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까 너, 날 어떻게 찾아온 거야?”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어서 나는 루카스에게 물었다. “돌아와 보니까 이곳 시간은 하나도 안 지났던데, 내가 그 세계에 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저 개 같은 책에 나도 빨려 들어갔으니까.” 루카스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생각만 해도 아주 엿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들어 보니 루카스는 나를 만나기 위해 여느 때처럼 내 마력의 잔해를 쫓아왔다고 한다. 그러다 도착한 곳이 토파즈 궁이었고, 거기에서 수상한 책을 발견해 안의 글귀를 읽은 직후 곧바로 마력의 흐름에 휩쓸렸다고. “그럼 너도 다른 세계에 갔었어?” “아무래도 사람마다 다른 것 같은데, 난 다른 세계라기보다는…….” 어째서인지 루카스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아무튼 개X 같은 경험이었어.” 그, 그렇구나. 그의 얼굴이 워낙 흉흉해서 나는 그냥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아, 그나저나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네. 솔직히 똥을 싸다가 도중에 끊고 나온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었다. 그쪽의 클로드도 아직 그런 식으로 의식을 잃고 있는 데다, 아타나시아 공주와의 문제도 아직 해결된 게 없었으니까. 또 제니트와 흰둥이 아저씨, 그리고 로자리아 백작 부인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클로드를 그냥 죽게 둘 수는 없으니 일단 치료는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일 뿐, 그 후의 일은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내가 아니겠지. “우리 아빠도 혹시 흑마법을 쓴 적이 있는 건 아니겠지?” “쓴 적 있는데, 몰랐어?” 혹시 이 세계의 클로드도 저쪽 세계에서처럼 흑마법을 쓴 적은 없을까 싶어서 무심코 중얼거렸더니 루카스가 너무 상큼하게 수긍해서 나는 경악했다. “뭐?! 쓴 적이 있다고?” “꽤 오래전에 쓴 것 같던데. 이유는 모르고, 솔직히 관심도 없지만.” “그럼 부작용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 저쪽 세계에서도 그것 때문에 쓰러지고 막 그랬는데?” “내가 전에 네 아빠한테도 세계수 가지 줬잖아. 겸사겸사 그때 다 치료됐을걸.” 그러고 보니 그 세계수 가지가 정말 보통 영약이 아닌 것 같던데. 저쪽 세계의 루카스도 클로드를 치료하려면 세계수 열매가 필요하다고 대번에 그랬고. 그런데 세계수 가지가 열매보다 훨씬 좋은 거라고 하니까……. “흑마법을 쓰면 정말로 불행해져?”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그렇지. 괜히 악마의 힘이니 뭐니 하면서 떠드는 게 아니니까. 뭐, 예전에 네 아빠한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흑마법의 반작용 때문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인데.” 예전에 있었던 안 좋은 일이라면 혹시 내 마력 폭주에 휩쓸려서 위험했던 걸 말하는 건가? 그래서 기억 상실까지 걸리고. 그럼 <사랑스러운 공주님>에서 클로드가 자기 손으로 친딸인 아타나시아를 죽인 것도 혹시 흑마법의 저주 탓인 건가? 갑자기 그런 심오한 의문이 들었다. “내가 말끔히 치료해 줬으니까 이제 걱정할 거 없는데?” 내 표정이 심각했는지, 루카스가 괜한 고민할 필요 없다는 듯이 말했다. 루카스 이 녀석, 생각할수록 진짜 내 액운 막이 부적 같네. 으윽, 앞으로 더 잘해 줘야겠다. 아니, 물론 원래대로라면 이놈은 우리 까망이를 먹어서 내 앞길이 깜깜해지는 데 한몫 보태는 역할을 했을 테지만 나한테는 안 그랬으니까. “그보다 나 없을 때 그놈이랑 뭐 했냐니까, 왜 대답을 안 해?” 앗, 루카스는 끈질겼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잡아뗐다.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한 표정이 아니었는데?” 쓰,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놈. 문득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세계의 루카스가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 그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내게 속삭였던 말도. ‘기다려. 내가 꼭 다시 너를 찾아갈 테니까.’ 생각해 보면 그쪽 세계의 루카스와는 함께 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짧지만 강렬한 만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있는 세계로 찾아오겠다고 했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이곳으로 돌아오자마자 루카스가 그곳과의 통로나 마찬가지인 책을 태워 버렸으니까. 음, 물론 책에 적혀 있던 ‘1차 확인’이라는 말이 찜찜하긴 한데. 그 말대로라면 2차, 3차 확인까지 있다는 거야, 뭐야? 게다가 결과를 보류한다는 말은 또 뭐고. 오류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책에 적힌 방법 외에 다른 방식으로 귀환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럼 진짜 그 책이 수장 할아버지가 말해 준 대로 차기 황제감을 가려내는 마법 용품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까부터 날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데?” 그렇게 내가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루카스가 손을 뻗어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나는 졸지에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고 말았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계속 다른 사람 얘기나 하고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 루카스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그쪽 세계의 루카스와 내내 같이 있었던 탓인지 그다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그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잠깐, 그러는 너야말로 한동안 감감무소식이었잖아?” 그러다 문득 그 이상한 책을 찾기 전에 루카스 놈이 도통 눈앞에 나타나지를 않아서 내가 심술이 난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안 보여서 아쉬웠어?” 그런데 내 말에 루카스가 어쩐지 반색을 하고 묻는 것이었다. “아니, 하나도 안 아쉬웠어.” “넌 꼭 반대로 말하더라.” 뭐? 아니거든? 내가 기막혀하거나 말거나, 루카스는 다시 배부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만나러 갔잖아, 다른 세계까지. 너, 내가 너 하나 찾겠다고 차원을 몇 개나 넘었는지 알아?” 그런데 내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만지작거려? 하지만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나도 이상했다. “역시 진짜가 좋네.” 루카스에게 밀려서 서서히 뒤로 기울어지던 몸이 어느새 소파 위에 완전히 눕혀졌다. 그런 내 위에서 루카스가 붉은 눈동자를 휘며 느른히 웃었다. “너랑 똑같이 생긴 다른 세계의 너도 많이 만났는데, 역시 네가 아니면 다 필요 없어.” 얘는 참 고백을 독특한 방법으로 한다. 문제는 나도 그게 별로 싫지 않다는 거였다. 아니, 단순히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빨개졌네, 네 얼굴.” 으으……. 루카스가 쿡 웃으며 속삭이는 말에 나는 녀석을 째려보았다. “그냥 좀 모른 척하면 안 돼?” “예쁜데 왜 모른 척해야 돼?” 물론 그는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더 부끄러운 말을 잘만 내뱉었지만 말이다. 결국 이번에도 말문이 막힌 것은 나였고, 분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나였다. 나는 심술이 나서 루카스의 어깨를 주먹 쥔 손으로 한 대 때렸지만 그는 가볍게 내 손을 막으며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를 내려다보는 루카스의 눈빛이 안 어울리게 다정해서 기분이 조금 풀렸다. 나도 언젠가 이 녀석을 똑같이 동요하게 만들어주겠어.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루카스 때문에 뺨을 붉히고 있는 것도 없는 일인 것처럼 흥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어주었다. ======================================= [외전 34화] 외전 4 루카스 이제는 정확한 시점조차 생각나지 않는 까마득한 오래전의 일이다. 루카스는 꽤 유망하고 다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2살 터울의 형이 있었고, 그는 차남이었다. 처음 루카스의 마법적 힘이 발현된 것은 역시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걸음마를 배울 때쯤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계기는 그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형에게 빼앗긴 일이었다. 루카스는 화가 났었고, 그 분노가 그의 안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켰다. 스스로조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나중에 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형을 발견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그 후 루카스의 부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가족들이 다 함께 지내는 본관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왜 나만 별관에서 따로 지내는 거야?” 그러다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루카스는 그와 함께 별관으로 차출된 유모에게 물었다. “루카스 님이 특별하시기 때문이지요.” 언제나처럼 판에 박힌 대답이 돌아왔다. “흐응.” 루카스는 매번 듣는 그 말이 참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앞의 빈 식기를 치우는 중인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 앞으로 손을 뻗었다. 루카스에게 붙들린 유모의 손이 한순간 크게 흠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늘 그래 왔듯 형식적으로 묻는 목소리를 들으며 루카스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유모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곧 그는 짤막하게 대꾸하며 손을 놓았다. 루카스가 흥미를 잃은 듯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유모는 다시 테이블 위의 식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확연히 빨라진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럼 쉬세요.” 루카스는 유모가 방을 빠져나가는 모습도 보지 않고 계속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그곳에는 그의 형과 어머니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손을 붙잡고 정원을 걷는 중이었다. 가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의 형은 공포와 질시가 뒤섞인 눈으로 루카스를 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거기에서 질시만 빼만 되었으니까. 심지어 루카스와 함께 별관에서 지내고 있는 유모조차 그가 숨만 크게 쉬어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루카스의 부모님이 무엇이든 그의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였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루카스가 본관에서 생활하는 것만큼은 결코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재미없어.” 루카스는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루카스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허공에서 한 번 작게 까딱거렸다. “으악!” “꺄악, 이게 뭐야!” 곧 창밖에서 어린 남자아이와 여인의 비명이 울렸다. 정원사가 모양 좋게 다듬어 놓았던 덤불이 어느덧 하늘 높이 자라나 두 사람을 가두고 있었다. 우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정원은 어느새 울창해진 풀들로 밀림 같은 모습을 형성하고 있었다. 자연의 미로 속에 갇힌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저택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함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곧 그들은 이런 장난을 칠 만한 사람이 저택 내에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루카스는 그런 시선을 모르는 척 태연히 창문을 닫았다. 혹시 도움을 요청하러 온다면 도와줄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만큼 용감한 사람이 이 저택 내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 * 루카스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릴 때의 일 때문이라고 했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아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는 마법으로 온갖 일을 다 할 수 있었으니까. 마치 숨을 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루카스에게는 모든 일이 쉬웠다. 그래도 마법사가 드문 시대는 아니라 루카스는 돌연변이 취급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반쯤 격리당한 이유는 그 힘이 비정상적으로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몇 번인가 유명한 마법사들이 와서 루카스를 살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재앙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저택을 떠났다. 루카스의 부모님은 그가 마법적으로 특출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길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루카스가 별관 밖으로 나가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고삐 없는 짐승이나 마찬가지인 루카스를 한 군데에 가둬 둘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그가 얌전히 별관에만 있었던 이유는 밖에서 다른 흥밋거리를 찾지 못해서였다. “네가 그렇게 짱 세다는 게 사실이야?” 그러던 어느 날, 루카스가 있는 별관에 일을 하러 새로 들어온 소년 하나가 겁도 없이 그에게 물었다. “넌 또 뭐야?” “네 유모 조카.” 흠? 이건 조금 흥미가 당겼다. 루카스의 손이 닿는 것조차 꺼리던 유모와 달리 소년은 호기심과 기대가 담긴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를 보고 있었다. “이런 답답한 저택에만 처박혀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나랑 같이 나갈래?” 그것이 루카스의 첫 번째 외출이자 일탈이었다. “야, 내가 데려왔어!” “헐, 진짜 그 마귀가 산다는 집 애야?” “새꺄, 말조심해. 얘가 마귀면 넌 벌써 죽었어.” “하긴 생긴 건 멀쩡해 보이네. 몇 살이야? 너랑 비슷해 보이니까 열둘? 열셋?” 유모의 조카라는 소년이 루카스를 데리고 간 곳은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어느 더러운 뒷골목이었다. 소년은 분명 루카스의 별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저택 곳곳의 숨겨진 출입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켜 귀찮아지는 일 없이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네가 진짜 그렇게 엄청난 마법사야?” “그럼 마법 한 번만 써 봐.” “맞아, 옆 마을 제이미 새끼 옆에 마법 쓰는 애 하나 있다고 했는데. 너도 걔처럼 막 손에서 불꽃도 쏠 수 있고 그래?” 이렇게 왁자지껄 시끄러운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은 처음이라 다소 정신이 없었다. “불꽃?” 게다가 그들은 루카스를 대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거리낌이 없었다. “나도 궁금한데. 한 번 보여 줘 봐.”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소년도 기대감 어린 눈으로 루카스를 보았다. 루카스는 그런 소년들의 모습을 보다가 특별히 그의 마법을 보여 주기로 했다. 휘오오! 콰쾅! 하지만 그가 불러온 것은 작은 불꽃 같은 것이 아니었다. 루카스의 손짓을 따라 허공에 생겨난 수십 개의 불덩이가 소년들이 모인 골목으로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으아악!” 소년들은 혼비백산하여 그 불덩이를 피하다가 이내 그것이 아무런 온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치는 것을 멈추었다. “난 약한 마법은 못 써서.”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졌을 때, 루카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히 그를 바라보는 소년들을 향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소년도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들이 루카스를 대하는 태도는 저택의 사람들처럼 변하지 않았다. “와, X발, 개쩌네!” “X나 대박! 나 마법 직접 보는 거 처음이야!” “이 정도면 제이미 새끼네는 그냥 한입에 발리겠네!” “야, 너 진짜 최고다! 이런 죽이는 걸 갖고 있으면서 왜 지금까지 그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던 거야?” 그 후 루카스는 얼떨결에 그 소년들의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다들 겁이 없어서 루카스의 힘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저 멋지고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주었다. “요즘 네가 저택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잦다고 들었다. 좀 자제하는 편이 좋지 않겠니?” 처음에야 몰래 저택을 빠져나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루카스도 대범해져서 이제는 대놓고 저택의 정문을 통해 외출하곤 했다. 그러니 그의 가족들도 그 사실을 당연히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자신을 불러 말하는 부모님의 앞에서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별관에 혼자 처박혀서 뭘 하든 X도 신경 안 쓰더니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래요? 뒤늦게 꼰대짓 하려고 들지 말고 그냥 지금까지처럼 서로 개무시하고 사는 게 피차 편할 것 같은데. 지금까지처럼 없는 사람인 셈 치면 되니까 오지게 쉽네.” 생전 처음 듣는 저렴하고 저급한 말투에 루카스의 부모님은 입을 쩍 벌렸다. 루카스의 행동거지나 말투는 그동안 밖에서 만난 소년들에게 꽤 많이 물들어 있었다. 부모님이 뒷목을 잡거나 말거나 루카스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때만큼은 그래도 아주 조금 속이 후련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자유로운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옆 마을의 제이미라고 하는 소년들의 무리와 싸움이 붙은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루카스는 자신에게 덤비는 소년을 향해 무심코 마법을 난사했고, 그에게 공격당한 소년은 피를 흘리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X발, 어, 어떡해? 죽은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적당히 하랬잖아!” “나, 난 그만두라고 했는데 루카스가……!” 소년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카스에게 향했다. 루카스는 저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의 눈빛이었으니까. 다행히 소년은 죽지 않았지만 그 후 루카스가 다시 그들에게 가는 일은 없었다. * * * “X발, 사는 거 진짜 재미없네.” 조용한 방 안에 높낮이 없는 메마른 음성이 울려 퍼졌다. 열다섯 살이 된 루카스는 하릴없이 소파 위에 늘어져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루카스, 손님이 오셨다.” 그때, 어쩐 일로 그의 부모님이 직접 별관으로 찾아왔다. 그들의 뒤에는 웬 처음 보는 남자도 함께였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한테 손님은 뭔 놈의 손님? 그게 누군데?” 잇따른 대답은 뜻밖이었다. “검은 탑의 마법사님이시란다. 어서 일어나 예의를 차리거라.” 검은 탑의 마법사. 아마 젖먹이조차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었다. 현존하는 마법사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수백 년 전부터 명성이 자자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곳에 찾아왔다고? 루카스는 모처럼 흥미를 느끼며 눈동자를 굴렸다. 눈에 들어온 남자는 꽤 장신의 키를 가진 남자였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시야에 비쳤다. 눈동자는 머리카락의 색과 대비되는 검은색이었다. 그런데 외모는 이십 대의 청년 같다가도 삼사십 대의 관록이 엿보이고, 그런가 하면 또 무수한 세월을 살아온 초로의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기야 애초에 지금껏 몇백 년 동안이나 세상을 살아왔다고 하니 실제 나이와 외모는 전혀 상관이 없기도 하겠지만. 게다가 검은 탑의 마법사라는 소리를 듣고 봐서 그런지 어딘가 주변에 감도는 분위기가 묘했다. 마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고요하게 서 있는 백조 같다고 루카스는 생각했다. “이 아이가 소문의 그 아이입니까?” “예, 마법사님.” “생각보다 어리군요.” “이제 열다섯 살이니 그리 어린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면 제 눈에는 이제 막 탯줄을 끊은 갓난아기라 해도 되겠습니다만.” ======================================= [외전 35화] 마찬가지로 잠깐 루카스를 관찰하던 남자가 그의 부모님을 향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듣자 하니, 그는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은 말투가 다소 거슬렸다. 뭐야, 저 노땅은. 지금 누구를 감히 갓난아기 취급하는 거야? 오랜만에 자신을 자극하는 상대를 만난 기념으로 루카스는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로 했다. 그가 마력을 불러일으키는 순간, 남자의 눈동자가 루카스를 향해 미끄러졌다. 화아악! 채앵! 하지만 다음 순간 통증을 호소하며 거꾸러진 것은 남자가 아닌 루카스였다. “커헉……!” 귓가에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울린 직후의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루카스는 어느덧 소파 밑으로 굴러떨어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뱃속이 마치 불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맹세컨대, 그의 생에 이토록이나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큰 고통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루카스는 지금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엎어져 신음했다. 목을 타고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느낌이 들더니, 곧이어 검붉은 피가 카펫 위로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X발? 도대체 이게 뭐야? 그렇게 루카스가 황당함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문득 머리 위에서 난감함을 담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런,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하구나. 몸에 새긴 보호 마법은 내 의지대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서 말이다. 설마 이런 식으로 갑자기 무모하게 마법을 쓸 줄은 몰라서 미리 경고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듣고 루카스는 속에서 피 말고 다른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지금 저딴 소리를 말이라고 하는 건가? 고의가 아니라고 하면 전부 해결돼?! 그럴 거면 경비대가 왜 있어?! 마치 루카스가 이렇게 다치게 된 것은 전부 다 그의 무모함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성질이 났다. “흠, 그나저나 이 정도의 보호 마법이 발동될 만한 마력이라니.” 탑의 마법사는 조금 전과는 약간 다른 눈빛으로 루카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잠깐 옆에 있는 남녀를 훑고 지나갔다. 루카스의 부모는 자신의 아들이 고통스럽게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데도 놀라고 당황한 기색을 보일 뿐, 다가가 부축하거나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윽고 루카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손이 루카스의 어깨에 닿은 순간, 내장이 뒤엉킨 듯하던 끔찍한 고통이 놀랍게도 단숨에 수그러들었다. “그럼 이 아이는 아까 말했듯이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예, 예에.” 검은 탑의 마법사의 말에 루카스의 부모는 얼결에 대답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이야기를 끝마치고 이 별관에 함께 방문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루카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지만. “뭔 개소리야? 내가 언제 따라간대?” 하지만 그는 야멸차게 외치면서도 조금 전의 일로 몸을 사리게 되었기 때문인지, 또 마법을 난사하지는 않았다. “이곳에는 더 이상 널 감당할 이가 없다고 하는구나, 아이야.” “감당은 무슨, X발, 난 지금까지도 혼자 잘 살아왔거든?” “이미 그렇게 결정되었으니 지금의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단다.” “뭐? 누구 마음대로?” “그럼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X까, 이 쭈그렁 영감탱이야!” “인사는 필요 없는 모양이구나. 아마 네 부모님도 마찬가지인 듯하니, 그럼 지금 바로 떠나는 게 낫겠다.” 이 미친 노인네가 약이라도 잘못 먹었는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루카스는 그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루카스가 서 있는 곳은 별관의 방이 아니었다. “여기 어디야!” 순식간에 바뀐 풍경에 루카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가 지내고 있던 별관도 썩 아늑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곳은 더욱 살풍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은 루카스에게 낯설었다. “저런, 한눈에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관찰력이 다소 부족하구나. 내가 살고 있는 탑이란다.” “누가 그딴 게 궁금하대?! 이 납치범아!” “앞으로 네가 지낼 곳이기도 하니 사용할 방은 마음에 드는 대로 고르려무나. 마침 남아도는 게 빈방이니 말이다.” 와, X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루카스는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에 황당함을 느끼며 어버버거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바드득 이를 갈았다. “이딴 침침한 데 1초도 더 안 있을 거야. 난 지금 당장 돌아가 볼 테니까 탑인지 뭔지 댁 혼자 사시든가.” 지금껏 의지대로 마법이 발현되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 이번에도 바라기만 하면 될 터였다. 지금 당장 이 망할 탑에서 벗어나고 말 테다. 하지만 1초 후에도, 1분 후에도 루카스는 여전히 탑에 있었다. “참,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조금 전에 네 마력을 묶어 두었단다. 아무래도 체계적인 공부를 하기 전에 마법을 사용하는 건 다소 위험할 듯하더구나.” “뭐? 그런 건 진작 말하든가!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누구 마음대로 내 마력을 묶어?!” “이제부터는 나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공부는 내일부터 시작할 것이니 오늘 하루는 심신을 다스리며 쉬는 것이 좋겠다.” 루카스는 오늘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모든 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뭔가 굉장히 개 같고 엿 같은 기분인데 차마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 루카스를 아는지 모르는지, 검은 탑의 마법사는 그를 자리에 둔 채 홀연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혼자 남은 루카스는 온갖 마법을 다 사용해 봤지만 조금 전 탑의 마법사가 한 말이 사실인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후 그가 혼자서 발광하며 몸부림을 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아마 두 발로 걸어 내려가려면 하루로는 턱없이 부족할 거다.” 아오, 진짜 이 개 같은……. 다음 날 아침, 몇 층인지를 모를 탑의 계단에 널브러져 있던 루카스를 탑의 마법사가 찾아왔다. 루카스는 하룻밤 새 확연히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이 탑이 지상에서부터 구름 위까지 뻗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게냐? 그리고 어제 내가 널 데려다 놓은 곳은 이 탑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단다.” “그딴 건 진작 말하라고, 이 미친 인간아!” 억울함 가득한 음성이 탑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것도 모르고 어제부터 오늘 동이 틀 때까지 내내 탑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계단만 내려가고 있던 루카스로서는 피눈물이 날 만했다. 탑의 마법사는 계단 위에 뻗어 있는 루카스를 데리고 장소를 이동했다. 또다시 피눈물이 나게도, 그들이 돌아온 곳은 어제 있던 탑의 꼭대기 층이었다. “이걸 똑같이 옮겨 쓰거라.” 녹초가 되어 있는 루카스를 보면서도 탑의 마법사는 자비 없이 그에게 책 하나와 종이 다발을 건네주었다. “안 해, 배 째.” 당연히 루카스는 거부했다. “상관없지만, 이걸 옮겨 쓰기 전까지 밥은 없단다.” 그렇게 말한 뒤 탑의 마법사는 사라졌다. 혼자 남은 루카스는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고민했다. 분명 어제 점심때까지만 해도 그는 팔자 좋게 자신의 방에 드러누워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루카스의 부모님은 일언반구의 말도 해주지 않고 그를 탑의 마법사에게 보내 버렸다. “아, 진짜 기분 거지 같네…….” 잠시 후 루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눈앞에 있는 책을 노려보았다. 푹신한 침대와 소파에서만 지내다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으려니 영 몸이 결렸다. 그래서 일어난 김에 탑의 마법사가 주고 간 책이 무엇인지 한번 펼쳐 보기나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책을 열어보자마자 루카스는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뭐야, 이게? 인격 수양? 인성 교육?” 책의 내용을 확인할수록 루카스는 깊이 빡쳐 갔다. 지금 나한테 이딴 걸 종이에 옮겨 쓰라고 한 거야? 어이가 없게도 탑의 마법사가 그에게 주고 간 것은 세상의 온갖 도덕과 윤리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이었다. 루카스는 씩씩거리며 책을 벽에 내던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탑의 마법사가 다시 루카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다 옮겨 썼느냐?” “집어치워, 이딴 걸 내가 왜 해?” 탑의 마법사의 눈길이 벽 앞에 내동댕이쳐진 책에 가 닿았다. 그는 루카스에게 화도 내지 않고 마력을 이용해 묵묵히 그 책을 소환했다. “큰 힘을 가진 자는 모름지기 그에 걸맞은 인격을 가져야 하는 법이란다.” 루카스의 눈앞에 다시 문제의 책이 들이밀어졌다. “내가 보았을 때, 너는 나이에 맞는 기본적인 소양조차 아직 부족한 듯하구나.” 루카스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려보냈다. 이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지금 나보고 무식하다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네가 이 책을 다 옮겨 쓰기 전에는 밥을 주지 않을 거란다.” 이번에도 루카스는 탑의 마법사가 보는 앞에서 책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 * *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설마 진짜로 그를 굶기기야 하겠느냐고. 하지만 이 악덕한 탑의 마법사는 루카스에게 진짜로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의 눈앞에 내밀어지는 것은 거지 같은 책뿐이었다. 이렇게 굶어 본 것은 처음이라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허기를 어찌 달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탑의 마법사가 바라는 대로 하자니 자존심이 무척 상해서 루카스는 차라리 다시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역시 실패였다. 결국 배고픔 앞에는 장사가 없어서, 루카스는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빽빽이를 시작했다. “X발, 이 X 같은 탑 내가 날려 버리고 말 거야.” “할 수 있다면 해보거라.” “이 노망 든 할아범, 당신 뼛가루도 같이 파묻어버리고 말 거야!” 루카스가 악에 받쳐 저주의 말을 날리든 말든, 눈앞에 있는 남자는 태연한 낯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점심, 루카스는 실로 오랜만에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게 눈 감추듯이 허겁지겁 눈앞에 있는 요리들을 먹어 치웠다. “헐, 미친. 이거 X나 맛있어. 여기 약 탔어? 미쳤나 봐, 개맛있네.”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구나. 그걸 다 먹고 나면 조금 쉬었다가 이번에는 이 책을 베껴 쓰거라.” 그러던 중에 탑의 마법사가 태연히 읊조린 말을 듣고 루카스는 잘 먹던 밥을 입 밖으로 뿜을 뻔했다. “그걸 또 쓰라고?!” “그럼 고작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더냐? 녀석, 순진하기도 하지.” 이번에도 역시, 루카스가 아무리 지랄발광을 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이미 한 번 해봤기 때문인지 루카스는 처음보다 금방 포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이를 갈면서 손을 움직였다. “X발, 손 아파! 이딴 거 마법 한 방이면 1초 만에 천 장도 갈겨 쓸 수 있는데 뭐 하러 이딴 개고생을 해야 돼?” 그러는 동안 며칠인지 모를 날들이 또 지나갔다. ======================================= [외전 36화] “내가 욕을 하든 말든! 내가 내 입으로 지껄이겠다는데 댁이 무슨 상관이야? 댁이 내 부모라도 돼? 정작 내 부모는 그런 거에 신경 하나도 안 썼거든? 내가 계속 욕질을 하면 뭐 어쩔 건데. 날 두드려 패기라도 할 거야? X까, 한 번 해봐!” 책을 한 권 종이에 베껴 쓰고, 그다음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잠을 자고…… 한동안 그런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아, 잠깐만. 인간적으로 이렇게 쫄쫄 굶기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나 진짜 죽을 거 같다고! 그깟 욕 좀 쓴 게 뭐 어때서! 그리고 당신 이거 납치 감금인 거 알지? 이거 진짜 사이코 아냐?” 물론 탑의 마법사가 루카스의 언사를 문제 삼으며 또다시 밥을 주지 않기 시작한 후로 그 짧은 평화는 깨져 버렸지만 말이다. “X발, 밥 달라고, 밥! X발! X나 사람을 굶겨 죽이려고! 알아서 자급자족하게 마력이나 풀어주던가! 내 말 안 들려?! 이 인간 말종아!”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패배한 사람은 루카스였다. “아, 알았어! 알았어, 욕 안 하면 되잖아! 아, X나 개 같아, X발…… 악, 아냐! 방금 거 취소! 취소라고, 취소!”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에 젖은 밥을 먹었다. “내가 마법만 다시 쓸 수 있게 되면 댁 같은 거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지금 네가 하는 것을 보면 다시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건 적어도 300년 후쯤이 될 것 같구나.” 농담인 듯 진담인 듯 헷갈리는 탑의 마법사의 말에 루카스는 끔찍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대번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탑의 마법사가 늘 이렇게 책의 내용을 옮겨 쓰는 것만 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끔 루카스에게 제대로 된 마법 수업도 해주었다. 그의 아래에서 루카스는 처음으로 체계적인 마법 공부를 하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은 저택에 있는 모두가 루카스의 힘에 대해 쉬쉬했기 때문에, 그는 단 한 번도 마법 서적을 읽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위험 분자인 루카스가 여기에서 더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검은 탑의 마법사는 오히려 어중간한 것이 더 위험하다며, 루카스 정도의 마법사일수록 제대로 배워 둬야 후에 뒤탈이 없다고 말했다. 루카스는 태어나서 그런 말을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뭐? 벌써 나이가 800살이 넘었다고? 심지어 말년에는 제대로 안 세서 그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어? 와, 미친, 화석이네, 화석이야. 그럼 진짜 할아범이란 말로도 모자라겠네.” “그래, 그래서 내 눈에는 네가 아직도 배냇머리가 송송 난 핏덩이로 보이는구나.” “배냇머……! 아씨, 자꾸 헛소리할래?” 루카스는 어느덧 탑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놀랍도록 편안한 생활이었다. 어느새 루카스는 필사의 달인이 되어 책 한 권쯤은 시간을 오래 들이지 않아도 술술 적어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탑의 마법사가 간간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나 마법에 대한 이야기도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또다시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가 돌아온 탑의 마법사가 느닷없이 루카스에게 말했다. “오늘은 외출을 해야겠으니 준비하도록 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인간에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애초에 루카스는 달리 준비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외출은 금방 이루어졌다. 루카스가 어리둥절한 사이 도착한 곳은 어디서 많이 본 대저택이었다. “뭐야? 지금 나보고 다시 집으로 가라고?” “들어가 보거라.” 설마 이대로 탑에서 나가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탑의 마법사는 다른 말없이 루카스를 독촉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루카스는 얼굴을 구긴 채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루, 루카스. 어서 오렴.” 이해할 수 없게도 루카스의 가족들은 마치 그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반겨 주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는 생전 처음 보는 아기가 껴 있었다. 루카스의 시선이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 못 박혔다. “얼마 전에 태어난 동생이란다. 한 번 안아 보겠니……?” 루카스는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촌극일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기껏 처음으로 그에게 권유한 것을 거절하기도 좀 그랬다. 결국 루카스는 묘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어정쩡한 그의 품 안에 갓난아기가 안겼다. 탑의 마법사가 루카스를 볼 때면 했던 말처럼 아기는 아직 배냇머리조차 자르지 않은 핏덩이였다. 아이는 손가락을 빨며 잠들어 있었는데, 루카스가 안아 드는 순간 잠깐 보채듯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이게 내 동생이라고? 문득 아기의 성별이 궁금해져서 루카스는 아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보게 된 가족들의 얼굴에 루카스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들 그가 동생을 어떻게 할까 봐 두렵기라도 한 듯, 긴장감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다시 데려가셔.” 루카스는 김이 새서 품에 안았던 아기를 다시 돌려주고 뒤돌아섰다. 그의 가족들은 그런 루카스를 붙잡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이미 루카스는 가족이 아니었다. 아니, 단 한 번이라도 그가 저 안에 속해 있던 적이 있기는 했던가? 이럴 거면 도대체 그를 왜 부른 거지? “인사는 잘 나누었느냐?” 그렇게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아까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루카스는 깨달았다. 오늘의 자리를 만든 것은 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쓸데없는 짓을. “그럭저럭. 웬 애가 하나 생겼던데? 두 분도 참, 연세가 있는데 기운 한번 좋으셔.”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간 이동을 하면 간단할 텐데, 두 사람은 그러지 않고 저택 밖으로 난 길을 나란히 걸었다. 눈앞에 긴 나무 그림자가 비쳤다. 그러다 문득 루카스는 자신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그곳이 그의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곳에서 지낸 세월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건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다. * * * 시간이 더 흘러 루카스는 마력 봉인 상태에서 벗어났다. 이제 그는 탑에만 틀어박혀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탑의 마법사 역시 전처럼 루카스를 한 곳에 가둬 두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는 책을 베껴 쓰는 일도 더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무렵 탑 밖에는 소문 하나가 무성히 퍼져 있었다. 바로 오랫동안 은둔하고 있던 검은 탑의 마법사가 마침내 그의 후계로 삼을 제자를 들였다는 소문이었다. “지랄 똥 싸는 소리 하네.” 루카스는 그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제자는 무슨 얼어 죽을 제자. 누가 이런 퀴퀴한 늙은 마법사 뒤치다꺼리나 할 줄 알고?” “루카스. 말을 좀 곱게 쓰라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이 정도면 충분히 곱구먼, 여기서 뭘 더 어쩌라는 건지.” 탑의 마법사가 여느 때처럼 하는 말에 루카스는 귀를 후비적거리기만 했다. 이제 루카스는 청년이 되어 성장이 멈춘 상태였다. 원래 마법사들은 수명이 길기에 신체 노화 속도도 더뎠다. 특히 루카스는 타고난 마력 양이 방대해 앞으로 수백 년은 거뜬히 살 것이라고 했다. 사실 그 말을 듣고도 루카스는 별로 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앞으로 수백 년은 더 살 것이라고 해봤자 크게 실감이 나지도 않았고. 다만 눈앞에 있는 탑의 마법사는 벌써 8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다고 하니 자신도 비슷한 경우이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더 이상 탑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도 루카스의 거처는 여전히 이곳이었다. 루카스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여전히 탑의 마법사에게 시시때때로 시비를 걸곤 했지만 그는 루카스의 건방진 태도를 책잡지 않았다. 물론 루카스의 거친 말투에 대해서는 가끔 한마디씩 잔소리를 하곤 했지만. 루카스는 종종 탑에서 벗어나 밖을 쏘다니기도 했는데, 원래 그가 살던 저택만큼은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좀 더 흘러 그의 부모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는 그곳에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왔구나. 오랜만이다, 루카스.” 그런 루카스를 형이 맞아주었다. 갓난아기일 때 단 한 번 본 적이 있는 동생도 어느덧 청년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이토록 흘렀지만 여전히 그들과는 데면데면했다. 울어서 눈이 부어 있는 형제들과 다르게 루카스는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도 너무나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장례식장을 금방 떠나왔다. “오늘이 네 부모님의 장례식 날이었다지?” 탑에만 틀어박혀 있는 주제에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듣는 건지, 탑의 마법사가 돌아온 루카스를 향해 말했다. “그래.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는 드리고 온 것이냐?” 어느덧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잔잔한 빗소리 사이로 담담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너는 셀 수조차 없이 수많은 죽음을 보게 되겠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일들에 서서히 무뎌질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러니 지금만큼은 마음껏 내키는 대로 슬퍼해도 괜찮다.” 설마 이건 위로하는 건가? 하지만 사실 루카스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금 전 보고 온 그의 부모님의 관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비집고 나오지 않아 조금은 당황스러울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루카스는 뒤이어 그를 안아주는 메마른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어째서였을까?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안아주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루카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격리되어 살았고,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유모조차도 그를 안아주지는 않았으니까. 낯선 포옹에 절로 몸이 굳었다. 어떤 다정함도 느껴지지 않는 실로 건조한 태도, 건조한 손길이었는데도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따스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루카스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정말 그 자신이 위로가 필요한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바보같이도. * * * 그 후 동생이 딱 한 번 루카스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죽어 간다고, 제발 살려 달라고 그에게 애원했다.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찾아왔노라고 말하며 중년의 사내는 여전히 청년의 모습을 한 형의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루카스는 그저 변덕이 생겨 그의 딸을 치료해 주었다. 못 보던 사이 동생은 나이가 많이 들어 있었다. 그의 딸과 루카스가 비슷한 나이로 보일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루카스가 묻지 않았는데도 동생은 형과 그의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번 만나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자신의 딸을 구해 준 루카스에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물론 루카스는 그 권유를 거절했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란 것을 직감했지만 그런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마법사였고, 그런 이의 시간이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흐를 수는 없었다. “뭐? 결혼?” 그렇기 때문에 루카스는 탑의 마법사가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꺼낸 말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외전 37화] 지금 그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귀가 의심스러웠다. 결혼? 결혼이라고? 지금 결혼을 할 거라고? “노망났어?” “음.” 루카스는 진지하게 물었다. 탑의 마법사는 루카스의 심각한 물음에도 여느 때처럼 덤덤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 어렴풋이 떠오른 감정을 보고 루카스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놀랍게도 탑의 마법사는 지금 쑥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티는 거의 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세월이 얼마인데 설마 그 정도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루카스는 여기서 어떤 반응을 내보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바보같이 어버버거리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늙어서 웬 추태람? 창피하지도 않아? 부인이랑 나이 차이가 몇인데.” 상대는 근처 마을에 있는 약재상 집 딸이라고 했다. 루카스도 마을에 들를 때 몇 번인가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어쩌다 눈이 맞은 것인지 그 사연까지는 알 수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나, 그들이 가정을 꾸릴 예정이라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나도 이런 감정은 몇백 년 만에 처음이라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 얼마 후 탑의 마법사는 그 여자를 데려다가 루카스에게 소개해 주었다. 어딘가 선하고 다정한 인상을 가진 그녀는 다소 수줍어하며 ‘남편 될 사람의 하나뿐인 제자이니 루카스와도 잘 지내고 싶다’는 소리를 건넸다. 루카스는 그 말을 듣고 꼴같잖다고 다소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루카스, 너도 언제든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거든 놓치지 말고 붙잡도록 하려무나.” 그날 밤, 떨떠름한 얼굴을 한 루카스를 향해 탑의 마법사는 언제나처럼 고요한 음성으로 말했다. “긴 세월을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으니 말이다. 너를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하는 말이란다.” 루카스는 드디어 탑의 마법사가 노망이 들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 * * 그 후 탑의 마법사는 검은 탑을 떠나 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어 그러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루카스는 탑의 마법사가 어울리지도 않은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에는 루카스도 탑에서 생활하는 시간보다 탑을 떠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탑의 마법사와 그의 부인이 된 여자는 루카스에게 언제든 자신들의 집에 와도 된다고 했지만 루카스는 진저리를 치며 거부했다. 언젠가부터 그는 십 대 중반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여자는 루카스를 자신의 남동생처럼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루카스에게는 지극히 짜증 나는 일이었다. 루카스의 진짜 가족들은 이미 하나도 빠짐없이 죽은 지 오래였고, 루카스는 그 후손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족 놀음이라니.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을 만한 일이었다. 루카스는 탑의 마법사가 새살림을 차린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보면 기분이 묘해졌기 때문에 더욱 기피하게 된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루카스도 탑의 마법사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는 걸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와, 이 영감이 결혼한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애까지 낳았어? 루카스는 그 우스운 꼴을 이 두 눈으로 목격하겠다는 일념하에 탑의 마법사를 찾아갔다. “어서 오거라.” 탑의 마법사는 근 5년 만에 보는 루카스를 바로 어제 만났다 헤어진 것처럼 여상히 맞아주었다. “그 애야?” “그래. 소식을 듣고 왔나 보구나.” 소문은 사실이었다. 탑의 마법사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루카스는 한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를 더욱 침묵하게 만든 것은 바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루카스는 탑의 마법사가 저렇게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게다가 저런 낯설 정도로 자상한, 온기 어린 눈빛이라니……. “루카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게냐?” 루카스의 시선을 느낀 듯이 고개를 든 탑의 마법사 이윽고 알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한 번 안아 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럴 생각 없으니까 치워.” 루카스의 입에서 생각 이상으로 쌀쌀맞은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어머, 손님이 왔네요?” 그때, 부엌에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근 5년 만에 보는 루카스를 향해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저녁 식사 준비를 하던 참이에요. 루카스도 괜찮으면 들어와서 같이 식사해요.” “그래, 네가 이렇게 온 것도 오랜만이니 좀 더 머물다 가려무나.” 탑의 마법사도 함께 권유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자는 밝게 웃으며 아이를 안고 자리를 떠났다. 탑의 마법사는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고, 루카스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카스.” 잠시 후, 그가 루카스를 향해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넌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여전히 메마른 목소리. 모든 감정이 전부 마모된 것처럼 건조하고, 당장에라도 허공에 부스러져 스러질 듯한……. “그러니 앞으로도 언제든 마음 내킬 때 오거라.” 그러나 이전에는 없던 온정이 그의 얼굴에 배어 있었다. 그제야 루카스는 자신이 이곳에 오기 싫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 그가 본 사람들은 완연한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루카스는 이곳의 손님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헛소리 마.” 아들이나 마찬가지라고? “당신도 늙긴 늙었나 보네.” 누가 그딴 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나? 루카스는 결국 그 길로 자리를 떠나왔다. 그가 다시 탑의 마법사를 찾은 것은 그날로부터 수십 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탑의 마법사의 아내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고, 그의 아들은 몰라볼 정도로 늙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오직 탑의 마법사만이 여전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누가 아버지고 누가 아들인지 모르겠는데?” 루카스는 병석에 누운 노인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는 바로 지난번에 보았을 때만 해도 갓난아기였던 탑의 마법사의 아들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루카스.” 여전히 차분한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루카스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어. 그러게 쓸데없이 결혼은 왜 하고 애는 왜 만들어서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어떻게든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비웃어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옆에 끼고 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으면 차라리 불사신으로 만들지 그랬어? 천하의 검은 탑의 마법사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잖아.” 탑의 마법사는 빈정거리는 루카스를 앞에 두고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을 한 그가 마침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런 순리에 어긋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마치 철없는 아이를 꾸짖는 듯한 어투였다. 비록 그 음성이 지독히도 무미건조하기는 했지만. “이제껏 살아온 날이 얼마인데 아직도 그딴 고리타분한 생각에서 못 벗어났어?” 루카스는 그런 탑의 마법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까짓 순리, 그따위 윤리 의식 따위가 무엇이라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왜 이리 바보 천치처럼 살고 있는지. “그럼 다음에는 아들 장례식 때나 보겠네.” 루카스는 다 늙은 아들 곁에 고요히 앉은 탑의 마법사를 마지막까지 비웃으며 그곳을 떠났다. * * * 하나뿐인 아들이 죽은 후 탑의 마법사가 다시 검은 탑에 칩거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루카스의 귀에 닿았다. 지난번의 만남 이후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루카스는 한동안 걸음조차 하지 않던 검은 탑에 모처럼 들러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지난 수십 년간 돌덩이라도 얹힌 것처럼 갑갑하던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그 사람, 아들이 죽어서 상심했으려나? 만약 그렇다면 위로 정도는 해줄 수도 있었다. “왔구나, 루카스.” 하지만 탑의 마법사는 언제나처럼 여상한 모습으로 루카스를 마주했다. “어쩐지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양반은 아니로구나.” 루카스는 붉은 노을 아래에서 여느 때와 같이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움찔 미간을 찌푸렸다. “아들이 죽었다며?” “그래.” “그런데 왜 그래?” 예상과 달리 탑의 마법사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보여서 기이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원래 이 정도 세월을 산 사람은 사랑했던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이토록 초연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 루카스가 지난번에 보았던 그의 슬픔과 절망, 그리고 고통은 너무나 또렷했다. 그리고 뒤이어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 찬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당신 지금 몇 번째야?” 루카스는 탑의 마법사가 지금 이토록 무감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빌어먹을 마법 쓴 게 몇 번째냐고.” 루카스가 이곳에서 지냈던 동안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는 마법이 한순간 떠오른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었다. “당신,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그는 루카스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무표정한 얼굴에 루카스는 화가 났다. “다른 사람이 죽는 걸 못 견딜 것 같으면 차라리 아무도 안 만나면 되잖아.” 루카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의 인생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럴 거면 결혼은 왜 해? 자식은 왜 낳아? 남한테는 못 쓰는 금지된 마법을 왜 본인한테 쓰고 자빠졌어? X발, 그럴 깜냥이 있으면 제 부인이랑 자식이나 자기처럼 죽지 않는 몸으로 만들 것이지.” 지금 이대로, 이 고립된 탑에 단둘이 있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네가 나를 이해하리라 여기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루카스는 언젠가부터 탑의 마법사를 자신의 아버지로 여기고 있었고 그 역시도 루카스를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했으니까……. “루카스, 너는 정말…….” 그리고 마침내 굳게 다물려 있던 남자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불쌍한 아이로구나.” “뭐……?” “너는 내가 한심할지 모르지만 나는 네가 가엾다.” 첨탑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흩날렸다. 나직한 속삭임이 그 사이에서 함께 부유했다. “너에게는 아직 그만큼 행복한 일이 없었다는 거잖니.”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덜컥 말문이 막힌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소중한 사람도, 소중한 기억도, 소중한 일도 그 무엇 하나 없어서…… 그래서 사라지고 나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네게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불쌍하다.” 하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를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이 지독히도 무심했다. “너는 네가 온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기실 너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어째서인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많은 세상에 너 혼자만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살아가다가, 결국은 빈손으로 죽을 테니 이 얼마나 가여운지.” 다만 그의 말은 루카스를 진심으로 분노하게 했다. 루카스는 이를 악문 채 탑의 마법사를 더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그곳을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대로 두 번 다시는 검은 탑을 찾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뜨거운 분노도 희석되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불과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다시 그가 떠나온 곳을 찾게 되었다. ======================================= [외전 38화] 휘오오. 차가운 새벽빛이 번지는 하늘 아래에 탑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루카스가 다시 이곳으로 걸음을 돌린 이유는 탑에서 비정상적인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비정상적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공기가 루카스를 맞았다. 탑의 마법사는 바람에 하얀 머리채를 휘날리며 막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것이 뭔지 아느냐?” 새벽빛만큼이나 조용한 목소리가 루카스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시작은 아니지만 끝만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는 꼭 루카스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껏 죽을 이유를 찾지 못해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그저 흘려보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루카스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이제야 겨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희게 번지는 하늘을 등진 채 그 어느 때보다 흐릿한 존재감을 입은 남자가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그래, 마침내 이제야.” 루카스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래서 지금 죽겠다는 거야?” 지금 탑의 마법사가 혼잣말처럼 읊조린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의미가 너무도 명백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혹시 죽은 아들 때문인가? 루카스는 서서히 치미는 분노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그깟 놈이 뭐라고…… 그놈보다 자신이 훨씬 더 그와 긴 시간을 함께 보냈을 텐데. “고작 사람 하나 죽은 일로 저승길을 따라가겠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너는 혼자 남겨지는 두려움을 모르지 않니.” 루카스가 분을 감추지 못하고 비꼬자 탑의 마법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전에 없이 단호해서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비정상적으로 고여 있던 마력이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이유를 알 수 없게도, 한순간 섬뜩한 느낌이 루카스의 등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 마. 지금 하려는 게 뭐든, 하지 말라고.” “루카스.” 루카스는 까닭 모를 초조함에 사로잡혀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나 짤막한 부름이 그의 걸음을 막았다. “언젠가 너도 나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눈앞에 시야를 마비시킬 듯한 새하얀 빛이 번진 것은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을 뚫고 날아든 잔잔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화아악! 루카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가까이에서 폭발하는 마력을 막아 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을 때까지 네가 이해하지 못했으면 싶기도 하구나.”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당장에라도 그를 압사시킬 것처럼 거칠었다. 온몸을 할퀴는 마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카스는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그는 숨을 멈추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입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탑의 마법사는 허공에 하얀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무에서 태어난 생명체가 다시금 무로 돌아가듯이,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마모되어 서서히 스러져 가고 있었다. 루카스는 차마 그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 하고 그저 자리에 망연히 서서 빠르게 형체를 잃어 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눈부신 여명 속에서 부스러질 듯한 음성이 마지막으로 귓가에 울렸다.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그는 마지막 작별 인사라 할 수조차 없는 말을 남긴 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위대한 마법사의 최후라기에는 너무도 허무하여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는 죽음이었다. 루카스는 조금 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 첨예한 새벽빛이 번졌다. 휘오오, 여전히 거칠게 불어온 바람이 귓가에 어지럽게 울렸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도, 마치 그 자신이 망망대해에서 혼자 길을 잃은 어린애라도 된 것 같았다. 루카스는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겨우 움직였지만 목이 졸린 것 같은 쇳소리만 겨우 뱉어 냈을 뿐이었다. 경직된 손끝에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닥에 얕게 깔려 있던 먼지 섞인 하얀 가루가 부스스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때에서야 마침내 루카스는 자신이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마지막으로 귓가에 울렸던 그 목소리가 떠오르는 순간, 루카스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모라니. 도대체 누가 부모야? 자식 앞에서 보란 듯이 자살하는 게, 무슨 부모야?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루카스는 그것을 강제로 꾹꾹 억눌렀다. 꽉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피가 몰린 눈두덩이가 더없이 뜨거웠다. 하지만 그토록 갖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결국은 참아 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루카스의 몸이 제자리에서 허물어졌다. 투둑……. 바닥을 짚은 손 위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웃기지 마…….” 날 아들처럼 생각했다고? 웃기지 마. 결국 당신은 입으로만 실컷 떠들어 댔지, 한 번도 날 진짜 아들로 생각한 적은 없는 거야. 혼자 남겨져 두려웠다면서. 죽고 싶었다면서. 그런데 왜 당신은 여기에 나를 혼자 남겨 두고 가는 거야? 루카스는 하얀 재로 남은 아버지의 유해 앞에서 오랫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었다. 피를 나눈 가족들이 죽었을 때도 슬픔 한 조각 느끼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낮과 밤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또 울다가 비로소 루카스는 탑의 마법사를 완전히 이해했다. 마침내 눈물조차 모조리 말라 없어졌을 때, 그는 손끝에 마력을 불러들였다. 그 직후 거짓말처럼 깨끗이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에 루카스는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바닥에 남은 하얀 재를 모조리 탑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한동안이나 비어 있는 자리를 보다가 탑을 떠났다. * * * 그 후 루카스는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재앙, 혹은 기적과 같은 거대한 일이 벌어졌고, 모두가 그의 앞에서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때쯤, 루카스는 검은 탑의 마법사라 불리고 있었다. “청이 하나 있습니다. 루카스 님께 제 아들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러다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된 곳이 바로 오벨리아였다. 그 당시 꽤 강력한 마법사 황제였던 카일룸은 루카스를 나름대로 편하게 대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한동안은 오벨리아의 황실에 머물렀다. “누구, 그 코찔찔이 후계자? 이름이 뭐였더라.” “아에테르니타스입니다. 정확히 9번째 물어보시는군요.” “너희 황족들 이름이 하나같이 긴 데다가 다 비슷해서 그래. 어쨌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워낙 부족한 것이 많은 아들인지라, 거기에 검은 탑의 마법사님의 위명이라도 얹어야 남들 보기에 그럭저럭해질 것 같아서요.” 그 뻔뻔한 말에 루카스는 얼굴을 구겼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황제라 칭송받는 카일룸은 루카스를 상대로도 곧잘 이런 건방진 말을 내뱉고는 했다. “싫어, 귀찮아.” 하지만 쓸데없는 일에 끼어드는 것은 사절이라 루카스는 그의 청을 거절했다. 아에테르니타스라면 카일룸의 후계자인 황자였다. 하지만 그는 카일룸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우중충한 외양 하며, 음습한 성격 하며. 그런데 소년은 유일하게 루카스를 볼 때면 아이답게 눈을 빛내곤 했다. 아마 그래서 카일룸도 루카스에게 자신의 아들을 맡아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루카스는 예전부터 아이들이 싫었다. 특히 남자애는 더욱. 루카스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카일룸은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더 이상 부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루카스는 이따금 그랬던 것처럼 오벨리아를 떠나 오랜만에 검은 탑에 들렀고, 그 후 뜻하지 않게 수백 년간의 긴 잠을 자게 되었다. “뭐야, 내 마력이 왜 이렇게 쥐똥만 해졌어?” 잠에서 깨어난 직후 루카스는 자신의 마력이 심각하게 고갈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의 그는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마력에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어서 한 번도 직접 흡수해 본 적은 없었지만 자고로 마력 보충에는 신수만 한 것이 없다고 했다. 어디 보자, 오벨리아 황궁에 지금 신수가 몇 마리 있더라? 어차피 후계자 놈 것만 안 건드리면 나머지는 하나쯤 먹어도 문제없겠지. 루카스는 그런 생각으로 오벨리아의 황궁으로 이동했다. “너 누구야?”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만나게 되었다. “그러는 오빤 누구야? 여긴 아무나 들어오면 안 되는데.” 어쩌면 그가 기나긴 세월 동안 기다려왔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루카스, 너도 언제든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거든 놓치지 말고 붙잡도록 해라.’ 그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던 전대 탑의 마법사는 루카스에게 말했다. ‘사라지고 나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네게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불쌍하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흘러, 이제 루카스에게는 그의 말처럼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언젠가 너도 나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사실은 이미 그가 죽던 날, 루카스는 그의 말을 뼛속 깊이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전대 탑의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죽을 이유가 없어 살아가던 루카스의 삶은 그날의 만남을 기점으로 크게 변하게 되었다. 다만 루카스는 전대 탑의 마법사처럼 멍청하게 소중한 것을 세월의 흐름 앞에 맥없이 놓쳐 버릴 생각이 없었다. “너나 네 아빠나 앞으로 남은 수명이 몇백 년은 될 텐데.” “뭐……? 몇백 년?!” “내가 전에 네 생일 선물로 줬던 게 뭔지 잊었어? 너랑 네 아빠랑 나란히 세계수 가지 먹었잖아.” 음, 하지만 이걸로는 뭔가 부족해. 아끼는 주변 사람들이 모조리 일찍 죽어버리면 전대 탑의 마법사처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질 수도 있으니까. “요즘 들어 전보다 몸에서 기운이 솟는 것 같은데, 폐하께서 하사해 주신 용봉탕의 효능이 아닐까요? 릴리안 님도 한 번 복용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전 괜찮아요. 기분 탓인지 예전보다 피로도 덜하고, 어쩐지 건강해진 느낌이에요. 아, 혹시 공주님의 정화 마법 덕분이 아닐까요?” “앗, 맞아요. 한나와 저도 요즘 몸이 가뿐해진 것 같아요.” “그 정화 마법이 정말 효력이 있나 봐요!” 모든 것이 루카스의 수작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들은 있지도 않은 정화 마력의 효능에 대해 토로했다. “나중에 원망받더라도, 난 당신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루카스는 이상한 책에 빨려 들어가 보게 된 과거의 환영을 향해 말했다. 그래, 그때 당신이 했던 말처럼 나는 이제 당신을 이해해. 지금은 진심으로 갖고 싶고, 또 잃으면 끔찍한 기분이 들 것 같은 사람도 생겼어. 그러니 나는 결코 당신처럼은 죽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망령이면 망령답게, 기억 저편으로 꺼져.” 이런 제멋대로인 행동에 혹시 나중에 그녀에게 원망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원래도 그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였으니까. “너랑 똑같이 생긴 다른 세계의 너도 많이 만났는데, 역시 네가 아니면 다 필요 없어.” 그래, 그의 유일한 한 사람을 온전히 얻기 위해서라면. 루카스는 자신의 앞에서 뺨을 붉게 물들인 소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이렇게 시선을 맞대기만 해도 절로 배가 부른 것 같은 충만한 감정에 취해서. 놀랍게도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감정과 닮아 있었다. 물론 루카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하지만 아마도 그는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일은 생각보다 가까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외전 39화] 외전 5 그리고 계속되는 이야기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지?” 내 집요한 시선을 느낀 클로드가 결국 참다못해 묻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냥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양 눈앞에 있는 케이크로 눈길을 내렸다. 그런 내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는데 클로드의 눈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시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보는 그의 눈이 얼핏 가늘게 떠진 게 시야에 들어왔다. 앗,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를 향해 천진난만한 얼굴로 에헤헤 웃어 보였다. 아니, 내가 내 아빠 얼굴 좀 보겠다는데! 씁, 하지만 사실은 요즘따라 자꾸만 클로드한테 저절로 눈이 가서 나도 조금 곤란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저로서도 불가항력이라고요, 흐흑. “그냥 우리 아빠가 너무너무너무 멋있어서 쳐다본 거예요.” “내 얼굴은 늘 그대로인데 네 행동은 어째 주기적으로 수상해지니 묻는 말이다.” 앗, 수상하다니? 내가 뭘! “제가 언제 수상한 행동을 했어요?” “한 달 전에도 느닷없이 달려와 10년 만에 상봉하는 사람처럼 야단을 부렸지 않나.” 어억, 그건 내가 토파즈 궁의 이상한 책 속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아니, 그때도 난 이유가 있었다고! 물론 말할 수는 없지만. 크흑. 아무튼 클로드가 그때의 일을 꼬집어 말하니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으음, 그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는 했겠지. “원래 제가 좀 주기적으로 아빠에 대한 애정이 솟구쳐서…….” “사람은 한결같은 구석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저한테 한결같은 애정을 받고 싶으시군요, 아바마마?” “너의 잔망스러움만큼은 정말 한결같구나.” 에헷, 칭찬 감사…… 가 아니라. 토끼 같은 딸에게 잔망이라니! 좀 더 귀엽고 깜찍한 표현도 찾아보면 많을 텐데! 내가 봤을 때 한결같기로는 클로드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 우리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사이좋게 정다운 ‘한결 부녀’가 되어 보아요. 그렇게 클로드와 함께 여느 때와 같은 오순도순한 티 타임 시간을 가진 후 나는 가넷 궁을 빠져나왔다. 조금 전에 본 클로드의 얼굴과 함께 문득 어젯밤 내가 꿈에서 보았던 다이아나가 떠올랐다. 사실 내가 요즘 들어 클로드를 빤히 쳐다보는 경우가 늘어난 이유는 바로 그 꿈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종종 엄마인 다이아나의 꿈을 꾸곤 했다. 그것은 주로 내가 클로드에게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할 때였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이유 없이 다이아나를 꿈에서 볼 때가 있었다. 아마도 클로드가 다이아나를 강렬히 그리워할 때가 아닐까, 하고 나는 혼자서 짐작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내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아서 나는 대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다이아나가 아름답고 다정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필릭스, 우리 엄마 정말 예뻤지?” “예, 공주님처럼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우리 아빠랑 선남선녀처럼 엄청 잘 어울렸을 것 같아.” “선남선녀…… 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분이 잘 어울리셨던 건 맞지요.” 내 뒤에서 걷던 필릭스에게 묻자 그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도 착실히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설핏 웃었다. 사실은 어쩐지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내가 클로드에게 평소보다 더한 관심을 두었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 꿈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정확히 풀어서 말하자면 꿈에 나오는 다이아나의 모습이 예전에 비해 흐릿했기 때문이다. 클로드가 내게 꿈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용한 마법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안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흐릿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늘 한결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다이아나의 죽음 이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던 클로드가 이제야 서서히 그녀를 잊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씁쓸함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런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리고 내 생각에는 이제 그만 다이아나가 클로드를 놓아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다소 이기적인 소리일 수도 있으나 어쨌거나 나한테는 내 아빠인 클로드가 나랑 같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했다. 그래도 여전히 꿈에서 본 다이아나는 아름다웠고, 아마 클로드가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엄마도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그렇게 나는 다이아나를 향해 속으로 작게 속삭이며 에메랄드 궁으로 향했다. * * * “공주님, 기다리시던 편지가 도착했어요. 방으로 가 보세요.” 궁에 들어서자마자 릴리가 웃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앗, 내일쯤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도착했구나. 나는 반가움을 느끼며 곧장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주님, 차를 내올까요?” “아니야, 방금 마시고 왔어.” 내 말에 막 청소를 끝마친 듯한 세스가 알겠다고 답하며 문을 나섰다. 한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녹스를 돌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제니트와 이제키엘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들과 나는 여전히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사실은 책에 들어가서 다른 세계의 그들을 본 이후로 두 사람 생각이 더 자주 났다. 물론 그쪽에 남은 사람들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도 궁금했고. 하지만 다른 세계 사람들의 안부를 내가 알 수 있는 방도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지금 내 현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한편으로는 당연했다. 그래서 드디어 나는 다음 주에 제니트와 이제키엘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클로드는 마뜩잖아했지만 그래도 나를 못 가게 막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 고집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준 것일지도 몰랐다. 큽, 사실은 클로드가 계속 말리면 몰래 찾아가 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어쨌든, 그래서 나는 떳떳하게 그들을 보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뭐,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앗, 그런 걸 보면 우리 아빠도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해서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크흡, 새삼스럽게 감동이…… 저도 아빠 속 안 썩이고 효도하겠습니다! “키메라 만나러 가려고?” 내가 그렇게 기특하고 갸륵한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내 정수리에 갑자기 묵직한 무게감이 실렸다.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내 방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당연히 루카스였다. 와아, 나 이번에는 안 놀랐어!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것! “근데 너 지금 내 머리에 뭘 올리고 있는 거야?” “내 턱.” 내가 불만스럽게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루카스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 순간 나는 흠칫했다. 처음에는 그냥 머리가 무거워서 불편한 느낌이었는데 이놈이 팔까지 써서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자 퍼뜩 어떤 깨달음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앗? 아앗? 아아앗? 잠깐! 설마 이건 백허그입니까?! 지금 그림이 뭔가, 내가 상상하기로 루카스 이놈이 날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흰둥이 아들도 있지?” 갑자기 상황을 인식하고 나자 등 뒤가 꽤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흐음, 그 키메라랑 흰둥이 아들이랑 눈은 안 맞았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것들은 허구한 날 붙어 있으면서 진작 짝짜꿍 안 하고 뭘 했대? 눈이 맞아도 벌써 백번은 맞았겠구먼.” 루카스는 이제키엘과 제니트가 아직까지도 솔로인 것에 상당한 유감이 있는 것 같았다. 얍! 나는 기회를 틈타 루카스의 팔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원래도 나를 놔줄 생각이었다는 것처럼 내가 뒤돌아서자마자 자연스럽게 나한테 얼굴을 숙였다. 쪽. 앗! 쪽? 쪽?! 쪽이라니?! 나는 졸지에 루카스에게 또다시 기습 뽀뽀를 당하고 뒤로 한 발짝 주춤 물러났다. “야이, 너! 그렇게 막! 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 막! 막 나한테 이런 짓하고!” “내 거에 내가 도장 찍겠다는데 뭐 어때서.” 내가 분개해 외치자 루카스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놈은 변함없이 뻔뻔했다. 아빠, 여기도 한결같은 놈이 또 있어요! “그래, 말이 나왔으니까 이참에 짚고 가겠는데!” 아까도 느꼈지만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 나는 예전처럼 당황해 어버버거리는 대신 내 앞에 있는 루카스에게 척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내가 네 거인 게 아니라, 네가 내 거인 거야! 알았어?” 그렇지 않아도 전부터 내가 자기 소유물인 것처럼 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내 위풍당당한 선언에 루카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내가 네 거라고?” “그래!” 나는 흥 콧방귀를 뀌며 다시금 호기롭게 외쳤다. 어떠냐, 너도 좀 당황스럽냐? “나쁘지 않네.” 그래, 나쁘지 않…… 으응? 나는 두 귀에 들려온 뜻밖의 소리에 한순간 주춤했다. 내 말을 듣고 최소한 황당해할 줄 알았던 루카스는 의외로 웃고 있었다. 녀석이 느른히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그러쥐었다. 아까 방심하고 있다가 루카스에게 백허그를 당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나는 졸지에 그에게 손을 붙잡힌 채 당황스럽게 두 눈을 깜빡였다. 루카스가 그런 내 손을 당겨 손등에 입술을 묻으며 나를 향해 눈웃음쳤다. “그럼 네 거면 네 거답게, 앞으로 날 좀 더 예뻐해 주도록 해봐.” 어라, 이게 아닌데……. “응? 공주님.” 뭔가 내가 생각한 것과 전개가 다르잖아요? 뭐라고 반발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머릿속의 생각과 달리 나는 이미 루카스의 눈웃음에 홀리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분하지만 나는 녀석의 미인계에 여전히 약했다. 어흑, 아무래도 내가 루카스를 이기기 위해서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 * * 며칠 후, 나는 제니트와 이제키엘을 만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물론 내가 마법을 사용하는 게 훨씬 간편했지만 이번에는 반공식적인 방문이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마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나마 내가 우기고 우겨서 수행원을 최소한으로 줄인 게 다행이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쾌적한 마차 여행을 위해 난 마법을 쓰겠어! 마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늘 그래 왔듯이 마차에 온갖 마법을 다 때려 넣자 내가 있는 곳은 무릉도원이 되었다. 크으, 승차감이 참 끝내주는구먼. 그러고 보니 술식을 이용해서 마차에 직접 이런저런 마법을 거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아예 반영구적으로 말이야. 중첩된 술식은 금방 파훼되니까, 그 부분만 좀 어떻게 연구하면 될 것 같은데. 나는 다음에 검은 탑에 갈 때 한번 수장 할아버지와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의논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혼자서 이런저런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자 오늘따라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참 좋구나. 역시 외출은 이럴 때 하는 게 제맛이지. 잠시 후 만나게 될 제니트와 이제키엘을 생각하니 어린애처럼 마음이 약간 들떴다. 물론 오랜만의 만남이니만큼 다소의 우려가 들기도 했지만. 참, 예전에 이제키엘이 선물해 주었던 청조 파랑이는 요즘 전령새 훈련을 시작했다. 사실 훈련이라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고, 그냥 밖에다 풀어줘도 다시 나한테 돌아오게끔 연습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는 혹시 몰라 방 안에서만 새장 밖으로 꺼내 줬었는데 말이지. 파랑이도 요즘 바깥바람을 쐬어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역시 새는 넓은 하늘 아래에서 마음껏 날아다니는 게 제일인 듯하다. 나는 그렇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창밖의 다채로운 풍경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마침내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아,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밖으로 나가 볼까? 나는 한 번 작게 숨을 내쉰 뒤 약간의 두근거림을 안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잠시 후, 마차의 문이 열렸다. 아마 저 밖에는 내가 오늘 만나고자 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눈앞의 빛 속으로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외전 완> =======================================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외전 40화 외전 6 어느 날 아빠가 되어버렸다 “파파?” 클로드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는 솔직히 그날까지만 해도 사는 것이 재미없었다. 누구도 감히 묻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약 ‘왜 사느냐’고 그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클로드는 ‘그렇다 해서 죽을 이유도 없으니 산다’고 무미건조하게 답했을 것이다. “파파!” 하지만 자신을 아빠라 부르는 작은 생명체를 만나게 된 바로 그날. 클로드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어버렸다. * * * “폐하. 회의 도중 이렇게 갑자기 자리를 비우시면 어찌합니까.” 짹짹. 급박한 음성이 맑게 지저귀는 새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필릭스는 이미 저만치 앞선 사람을 쫓아 걸음을 서두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정한 주군은 여전히 앞만 보며 걸을 뿐, 발길 한 번 늦추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장내 기물 파손이라니요.” 필릭스는 방금 전 빠져나온 회의실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것도 그냥 기물파손이 아니라, 대회의용 원탁과 그 위에 올려놨던 종이들까지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렸으니, 이건 파손이 아니라 소멸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계속 시끄럽게 굴 거면 따라오지 마라.” “다음부터는 미리 언질이라도 해주십시오.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손짓 한 번으로 장내를 공포로 몰아넣은 클로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이라는 말을 남긴 직후 유유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필릭스는 잠시 자리에 멍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그의 뒤를 따라 문을 나섰다. 그러기 직전 시야에 들어온 대신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하나같이 사색이 된 얼굴로 쩡하니 얼어붙어 있었지.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젊은 황제의 마력은 오벨리아 내의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특히 순도가 높아, 손짓 한 번으로 눈앞에 있는 물건쯤은 간단히 가루가 되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오늘 클로드가 보인 행동은, 다음에 가루가 되어버리는 것은 너희일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었다. “아, 로자니아의 500년 묵은 전나무로 만든 유서 깊은 물건이었는데…….” 필릭스는 오랜 시간 동안 황실의 회의장에 뿌리박고 있던 국보급의 물건이 한순간에 가루로 변해 버린 사실에 깊은 통한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회의 시간 내내 간사한 소리만 지껄여 대는 그놈들의 세 치 혀를 잘라 버리는 것보다는 나았을 텐데.” “아니, 물론 그건 그렇지만…….” 건조하게 읊조려진 억양 없는 음성에 필릭스는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몰라도,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두 사람이 함께해 온 세월이 어언 20년이던가. 여하튼 빈말로도 짧다고는 하지 못할 시간이다 보니 저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불과 열흘 전에만 해도, 이웃국인 카스토레아의 공주를 비로 맞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뱀 같은 혀를 놀린 하킨토스 후작을 두 번 다시 말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필릭스는 고인이 된 하킨토스 후작을 생각하며 끄응 신음했다. 물론 그가 죽은 이유는 단순히 혀 간수를 못 한 이유뿐만은 아니고, 카스토레아와의 내통 혐의 등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클로드의 빈 옆자리에 대해 말한 것은 그가 한 일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 딸들을 앞다투어 황제에게 진상하던 귀족들이 왜 얼마 안 가 잠잠해졌겠는가. 그 시기 황궁 밖으로 몇 명이나 죽어 나갔는지 굳이 그 수를 헤아려야 하겠는가. 평소에는 나름대로 선정을 베풀던 황제가 유독 비에 관한 문제에 한해서만큼은 냉혹해지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었다. 한데 시일이 지났다고 과거의 공포를 잊고 오늘 회의실에서 또 하킨토스 후작의 처우에 대한 뒤늦은 공방을 여니 클로드의 심기가 불편해질 만도 했다. “그래도 지나치셨습니다, 폐하.” 그러나 결국은 젊은 황제의 손짓 한 번으로 파생된 결과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게 되었다. 그러니 종국에는 클로드의 의도대로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아까부터 성가시군. 그렇게 불만이 많다면 옥새를 주지. 지금 바로 집무실에 갈 테니 따라와라.” “폐하. 그런 농은 이제 그만하십시오. 아니, 그보다 옥새를 집무실에 두십니까?!” “집무실이 어때서 그러지?” “자고로 옥새 같은 귀중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손길이 닿지 않는 보다 은밀한 곳에…….” “그깟 돌조각 따위가 뭐 그리 중하다고 그러나.” “돌조각…….” 필릭스는 다시금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화사한 금발은 여전히 주저 없이 앞을 향할 뿐이었다. 그런데 한 걸음 한 걸음, 필릭스가 뒤따라오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이어지던 발걸음이 어느 순간 갑자기 뚝 멈추었다. 필릭스도 그때에서야 제 정신머리를 수습하고 클로드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온도 낮은 진청색을 띤 보석안이 흙바닥에 못 박혀 있었다. 클로드는 제게 묻는 필릭스의 말에 대꾸 없이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곳에는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타인의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잡아 올까요?” 필릭스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어 왔다. 답하기도 전에 이미 뛰쳐나갈 것 같은 모양새라 클로드는 짧은 시간 시선을 두었던 곳으로부터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냥 두어라.” “하나.” “만약 길을 잘못 든 것이라면 이대로 또 눈에 띄는 일이 없을 테고, 혹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겠지. 지금은 귀찮다.” 그렇게 말하자 필릭스도 결국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묵묵히 뒤를 따라왔다. 잠시 후 클로드는 뺨을 스치는 따뜻한 바람을 느끼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전 보았던, 후원으로까지 이어진 흔적이 어딘가 이질적일 만큼 작은 발자국이라 어쩐지 이상했다. 가물가물하게 무언가가 생각날 듯 말 듯했으나 곧 예리한 두통이 밀려와서 더 이상 파헤치는 것을 그만두고 미간을 찌푸렸다. “필릭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겠다. 그만 돌아가라.” “하나 침입자가 아직 내부에 있다면…….” “두 번 말해야 하나?” 필릭스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클로드의 말에 강력히 반기를 들지 못했다. 마침내 원하는 대로 혼자가 된 후에, 클로드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적막한 가넷궁을 홀로 걸었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저 심연 같은 깊은 침묵으로만 가득한 공간. 그곳은 클로드가 이 넓은 궁전 안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라 여기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 * * 또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이번에는 홀로 후원을 산책하던 중의 일이었다. 클로드는 자신의 반의반이나 될까 싶은 자그마한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바스락. 흔적은 울창한 덤불 너머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궁의 주인인 그조차도 들어오지 않는 이런 외딴 곳에 침입자는 왜 걸음 한 것일까? 탁! 덜그럭. 바로 그때, 덤불 사이를 가로지르던 그의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풀잎 사이로 언뜻 드러난 각진 모양이나 발에 걷어차였을 때의 소리를 생각해 보자면 이것의 정체는. ‘무기인가?’ 어느 누가 감히 그가 있는 곳에 무기를 밀반입해 숨겨 놓았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어지간히 간이 큰 종자는 아닌 듯했다. 클로드는 덤불 사이에서 반만 모습을 드러낸 쇠붙이를 한 번 더 툭 걷어찼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물건이었다. “……모종삽?” 누군가 그를 해할 목적으로 숨겨 두었다 하기에는 상당히 개성적인 도구였다. 하면 정원사가 두고 간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땅에 파묻어 놓은 것이지? 가늘게 떠진 눈동자가 한차례 흙바닥을 훑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군가 파헤쳐 놓았던 티가 나는 땅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드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무료함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가 흙 위로 새싹처럼 끄트머리만 모습을 드러낸 남색의 끈을 응시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긴 것은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끈으로 연결된 작은 주머니가 땅속에서 쑤욱 꺼내져 올라왔다. 클로드는 잠깐 허공에서 관찰하던 것을 다시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무언가가 투툭 저들끼리 몸을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이것은 또 뭘까. 신종 지뢰나 폭탄인가? 클로드가 황제가 된 지 이제 6년. 치세는 제법 안정되었다지만 그래도 3년인가 4년쯤 전까지는 그의 식기에 독이 발린다거나 궁인으로 위장하여 성에 들어온 암살자가 느닷없이 암기를 날린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었고, 또 개중에 애초의 목적을 달성한 이는 아무도 없기도 했다. 범인은 클로드가 숙청한 귀족가의 숨겨진 자제나, 시녀 소생인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못하는 가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중 두 번인가 세 번은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한 흑마법사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당연히 클로드는 죽은 전 황제의 치세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친히 저승으로 보내 주었다. “흐음.” 좀 더 자세히 보니 눈앞에 동그마니 놓인 주머니에는 무언가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것을 떨어뜨린 이의 이름이나 가문의 문장이라도 되는 것인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는 물건을 이리 대놓고 묻어 두다니 꽤 조심성 없는 자로군. 클로드는 다시 주머니를 들어 올려 천에 새겨진 형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침묵하고 말았다. “…….” 눈코입이 달린 딸기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이쩍은데, 심지어 빨간 딸기는 팔다리를 달고 있기까지 했다. 딸기는 총 두 마리…… 아니, 총 두 개였는데, 그중 하나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어째서인지 우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팔다리를 이상하게 휘적이고 있는 것은 똑같았다. “뭐지?” 줄곧 권태에 젖어 있던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의 궁에 느닷없이 출몰한 이 이상한 물건들을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의 의문은 주머니를 열어 보는 순간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필릭스가 옆에 있었다면 혹여 위험할지도 모르니 정체도 모르는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말렸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 혼자밖에 없었다. 주머니의 끈을 느리게 풀어헤치는 클로드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주머니 속에 든 것은 꽤 조잡한 보석들이었다. 혹시 마법 물품인가 싶었으나 잠시 감정해 본 결과 그냥 보통의 평범한 보석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들어온 햇살에 손안의 페리도트가 반짝 빛났다. 화창한 오후. 녹빛이 우거진 후원의 덤불 속. 여느 때와 같던 클로드의 일상 속에 미처 예상치 못한 비일상이 한 방울 뚝 떨어져 내렸다. * * * “흰 꽃.” 아무래도 침입자는 화원을 통해 가넷궁에 출입하는 모양이다. 얕게 눌러 찍힌 발자국 옆에 떨어진 꽃잎을 보고 클로드는 생각했다. 며칠에 한 번꼴로 침입자가 후원에 들어와 주머니를 파묻으면, 클로드가 그것을 다시 파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외전 41화 주머니에는 항상 질 떨어져 보이는 손톱만 한 작은 보석들과 어딘가에서 떼어 낸 듯한 이상한 금 쪼가리들이 들어 있었다. 클로드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그에게 줘도 갖지 않을 궁핍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었다. 침입자는 자신이 흙 속에 묻어 두었던 주머니가 더 이상 원래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조차 아직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정말이지, 주의력이 부족한 침입자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묻으려고 용을 쓴 것 같기는 하나 어째 마무리가 허술하기 그지없다. 제대로 다져지지 않아 울퉁불퉁한 바닥이나 항상 같은 자리에 숨겨 놓는 모종삽, 그리고 주머니를 파묻은 곳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발자국이 그랬다. 마치 어린애가 소꿉장난이라도 하듯이. ……어린애? “폐하. 왜 그러십니까?” 불현듯 뇌리를 스친 생각에 클로드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또다시 가물가물하게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하다가 곧 조용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버렸다. 뒤에서 의아하게 물어 오는 필릭스를 향해 잠시 후 클로드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파헤쳐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고, 모든 게 다 귀찮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폐하의 집무실에 처음 보는 주머니들이 있던데. 도대체 무엇인지요?” 그때, 클로드의 뒤를 따라 걷던 필릭스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마치 어릴 적 고모님 댁에서 보았던 어린 아기의 물건처럼 주머니가 굉장히 아기자기하더군요. 겉에 새겨진 그림은 흰 꽃잎에 노란 수술이 달린 꽃이었죠?” “그게 꽃이었나?” “아니었습니까?” “달걀인 줄 알았다.” 이번에는 클로드가 멈춰 있던 걸음을 다시 옮기는 대신, 필릭스가 멈칫했다. 폐하…… 주머니에 달걀 같은 것을 수놓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이미 클로드는 저만큼 앞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필릭스는 지적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클로드의 뒤를 따라 걸었다. “까마귀가 둥지를 잘못 찾은 모양이지.” “까마귀요?” 클로드는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반짝이는 것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주머니의 내용물을 보지 못한 필릭스는 그의 말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또다시 지겨워졌다. 클로드의 걸음이 평소 이용하던 서문이 아닌 남문 쪽을 향했다. 며칠 동안은 예기치 못한 비일상이 아주 조금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역시 그마저도 귀찮아져 버렸다. “폐하, 저 앞에…….” “안다.” 처음에는 그저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만 끝내고 싶어졌다. 아니, 정말 끝을 내기 위해서인가? ‘클로드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로서의 진정한 끝이란, 이대로 눈앞에 있는 것을 외면하고 모른 척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 자락의 관심마저 완전히 끊어 내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지금 그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쫓아 걷고 있는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를 잡아당기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살랑. 그리고 마침내 당도하게 된 곳에서 클로드는 만나고 말았다. 햇빛 아래에서 희게 빛나는 밝은 금발. 그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생소할 정도로 앙증맞은 노란 꽃 장식. 부풀린 하얀 치맛자락 밑으로 드러난 레이스가 발돋움하는 움직임을 따라 나풀나풀거렸다. 허리춤에 매인 분홍 리본이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 궁에 저런 생물체가 있었던가? 클로드는 점차 가까워지는 뒷모습을 보며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한눈에 봐도 작고 연약하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것이, 손짓 한 번이면 당장에라도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았다. 심지어는 옆에 있는 천사상만큼이나 작지 않은가. 클로드의 이상한 기분은 그 조그마한 생물체가 뜬금없이 아앙 입을 열어 천사상의 엉덩이를 깨무는 순간 더욱 깊어졌다. 클로드는 옆으로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내 성에 이런 버러지가 살았지?” 그러자 발뒤꿈치를 든 채 눈앞의 반짝이는 엉덩이를 깨물고 있던 아이가 깜짝 놀란 듯 홱 그를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거의 반사적인 반응으로 주춤 뒷걸음질 쳤다. “히익.” 이상한 소리에 이상한 표정이었다. 투둑. 챙그랑! 무언가가 떨어져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클로드는 마침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얼굴.”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시선을 떼지 못한 것이 맞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황성에 있을 리 없는 아이가 난데없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놀랄 만한데 그 얼굴이 기이하게도 낯설지 않아서 더욱 이상했다. 갑자기 지끈, 머리가 아팠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간혹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오르려고 할 때마다 줄곧 이랬다. 뭐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이 미묘한 느낌은. 삐그덕, 그동안 단단히 잠가 놓았던 빗장을 누군가가 밀어젖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틈 사이로 희끄무레한 기억의 잔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시오도나에서 온 무희였나. 그 계집과 닮았구나.” 그러고 보니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처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공연히 그의 마음을 술렁이게 만들던 사람이 있었다. “하긴. 누구라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오래전의 일일 뿐이다. 지금껏 잊고 있었다면 그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않았을 터. 이제와 굳이 기억해 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의 머리카락 위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하얀 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얼마 전 그가 침입자의 발자국 옆에서 발견했던 꽃과 같은 종류였다. 클로드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폐하.”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손짓 한 번으로 몸이 양분 나 죽은 사람도 있다 보니 혹여나 지금 그가 눈앞에 있는 아이를 해하려는 게 아닐까 우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클로드는 앞에 있는 아이를 죽이기 위해 손을 뻗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흔하디흔한 들꽃으로 보이는 저 하얀 꽃이 어째서인지 그에게 낯선 듯 익숙한 감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은 폐하의 단 하나뿐인 혈육이십니다.’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기억의 한 조각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폐부를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그리고 ……님이 이 세상에 남기신 유일한 흔적이지요. 그 흔적을 폐하의 손으로 직접 없애시고도 정녕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뚝,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어졌다.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군.” 피비린내가 자욱했던 과거의 어느 날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그 계집이 지었던 네 이름. 분명 아타나시아였지.” 그날 그가 죽이려 마음먹었던 갓난아기. 그러나 결국은 죽이지 못하고 뒤돌아섰었다. “그땐 목도 가누지 못하는 핏덩이였는데.” 왜 죽이려 했었지? 그리고 끝내는 왜 죽이지 못했지? 누군가 조각조각 찢어 놓은 듯한 기억이 엉망으로 뒤죽박죽되어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새 많이 컸구나.” 마치 며칠간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머릿속이 멍했고,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약간 답답했다. 툭! 챙그랑! 하지만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클로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내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가 바닥에서 파냈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주머니였다. 다만 이번에는 당근을 먹는 토끼가 새겨져 있는 것만이 달랐다. 그것을 앞에 두고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충동적으로 아이에게 다가가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또 아이가 놀라서 훅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무겁군. 어쩐지 볼살이 터질 듯하다 싶더니 이리 무게가 나갈 줄이야.” 말랑말랑 보송보송해 보이는 뺨도, 놀라서 벌어진 작은 입술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도 분명 그와 똑같은 사람의 것인데,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생물체를 목전에 둔 것처럼 신기했다. “그런데 내 궁에서 뭘 하고 있던 거지?” 무심코 속삭인 물음에 손에 잡힌 몸이 쩡하니 굳어졌다. 그의 궁에 몰래 숨어들어 와 바닥에 이상한 주머니를 파묻지를 않나, 천사상의 엉덩이를 깨무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를 않나. 하는 행동이 마치 동물 같지 않은가. “장난감인 줄 아셨나 봅니다.” 천사상의 동그란 엉덩이에 선명히 남은 잇자국을 보고 필릭스가 말했다. “루비궁에서 놀다가 길을 잃은 모양이군.” 이제 생각이 났다. 아이의 머리에 달라붙은 흰 꽃은 루비궁과 가넷궁 사이에 위치한 화원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기억 속의 그가 피칠갑을 한 채 아이를 죽이려 했던 곳도 바로 루비궁이었다. “필릭스.” “예, 폐하.” “들어라.” 클로드는 들고 있던 아이를 필릭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본 채 당황스러워하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손님과 다과라도 들어야겠다.” * * * 도르르륵.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그윽한 향을 내는 차와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케이크 따위가 놓이는 동안 아이는 겁을 먹은 것이 완연한 얼굴로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클로드는 그 맞은편에 앉아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를 관찰했다. 일순간의 충동으로 아이를 데리고 올 때만 해도 제법 흥미로운 기분이었는데 그것도 잠시뿐, 어느덧 마음속에 다시금 무료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의 이름이 아타나시아라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을 보자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으나 루비궁에 있는 궁인들을 제 손으로 모조리 죽인 직후의 일이었다. ‘재미있구나. 과연 그 이름처럼 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 그날 그는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딸인 것이 분명한 갓난아기를 죽이려 했지만 결국 죽이지 않고 뒤돌아섰다. “벙어리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딸꾹.” 다과상을 차리던 궁인들이 자리를 떠나고 난 직후 클로드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이가 깜짝 놀란 듯이 딸꾹질을 했다. “너무 조용하니 어째 재미가 없구나.” 그 잠깐 사이에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표정을 변화시키는 것이 재미있었다. “원래 말을 못하나?” “아티, 말할 수 이써요.” 그렇게 대답한 뒤 아이가 약간 어색하게 배시시 웃었다. “이제 겨우 목소리를 들었군. 왜 지금까지는 입을 열지 않았지?” 괜히 집요하게 묻자 방금 전 언제 웃었냐는 듯이 아이가 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본래 공주님 또래의 유아들은 낯을 많이 가린다 합니다.” “그래?” 대답은 옆에 서 있던 필릭스에게서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기야 아이의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자신을 날름 집어 들어 납치를 해온 셈이니 무섭고 불안할 만도 했다. 클로드는 맞은편에 앉은 아이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이가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말간 얼굴로 헤헤 웃는 것이었다. 그 미소를 보는데 어쩐지 기분이 약간 미묘해졌다. =======================================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외전 42화 왜 저렇게 무방비하게 웃는 거지? 지금 당장에라도 그의 손짓 한 번이면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죽을 걸 모르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낯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너무 쉽게 그를 따라왔던 것이 생각났다. 지금까지 아무도 저 아이에게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나? 몇 년 전 루비궁에서 감히 간 크게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계집이 지금도 옆에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옆에 있던 필릭스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던 게 떠올랐다. “필릭스.” “예, 폐하.” “나가라.” 낯선 사람이 둘인 것보다는 하나인 게 그래도 더 낫겠지. 클로드는 나른히 두 눈을 감았다 뜨며 필릭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면 웬일로 이런 정상적인 생각을 다 했느냐고 놀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필릭스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의 명령에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문을 나섰다. 그 후 클로드는 얼어붙어 있는 아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티란 건 애칭인 모양이군.” 아타나시아. 그리고 아티. 그 이름에 담긴 거창한 의미와는 사뭇 차이가 나는 귀염성 있는 애칭이었다. “아타나시아. 아타나시아라.” 그 이름을 지은 것은 분명 아이의 친모였을 텐데. 도대체 어떤 거만한 계집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 아이에게, 그것도 계집에게 감히 그 이름을 붙이다니. 살아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거열형에 처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떠오르는 것은 어렴풋한 얼굴 생김새뿐. 그마저도 기억을 되짚어 보려 하자 지끈, 또다시 두통이 일었다. 이런 것은 어딘가 비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내려 해도 불투명한 막으로 가려 놓은 것처럼 앞이 희뿌옇기만 해서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금세 귀찮아지고 말았다. “왜 그러고 있지? 먹으려무나.” 문득 앞에서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와 입을 열었다. “일부러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내오라 시켰는데 네가 먹지 않으면 이것을 가져온 이를 벌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잘 먹겠슴니다.” 클로드는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포크를 드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주머니 속에 궁핍한 티가 나는 보석들을 소중히 꽁꽁 모아 두고 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아이의 행색 역시 황족답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미하다고까지 평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이가 입고 있는 드레스의 옷감부터가 최고급품이 아니었다. 하기야, 그조차도 존재를 잊고 있던 아이를 누군가 이 정도까지 신경 써 보살핀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긴 했다. “마이쪄요.” 양 볼이 빵빵해진 아이가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케이크를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것처럼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는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예법은 누가 가르쳤지?” “릴리가 가르쳐 줘써요.” 그 와중에도 꽤나 예법에 능숙한 것이 희한하여 물었다. “그래. 릴리안 요르크를 말하는가 보군.” 그런가. 역시 그 계집이 아직 옆에 붙어 있었던 모양이군. “감히 내 앞을 막아서고도 내 손에 죽지 않은 것은 네 어미와 그 계집이 유일할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중에 그리 읊조려 놓고 클로드는 흠칫했다. 릴리안 요르크라는 계집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의 어미 역시 그의 앞을 가로막은 적이 있었던가? 그런 기억은 분명 없었다. 한데 왜 방금 전 그는 스스로조차 알지 못할 이야기를 한 것일까? 클로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누군가 자꾸만 그의 신경을 갉작갉작 긁는 것처럼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이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계속 그랬다. “너, 내가 누구인지 아나?” 역시. 이 아이, 그냥 죽여 버릴까. 뺨에 생크림을 묻힌 채 그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무구한 눈동자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 지루한 여흥을 이제 그만 끝내 버리자고. 그런데 아이가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머뭇 말했다. “아, 아바마마?” 바로 그 순간 클로드의 눈매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을 너무 무방비하게 따라오기에 겁이 없고 부주의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던 모양이다. 릴리안이라는 그 계집이 말해주었나. 아니면 저와 똑같은 보석안을 보고 혼자서 눈치챈 것일까. “……파파?” ……그런데 이상하군.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거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죽이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클로드는 마음속으로 갈등하며 자신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다음 순간 아이가 그를 향해 활짝 웃는 순간 끝이 났다. “파파!” 클로드 데이 앨제어 오벨리아는 솔직히 그동안 사는 것이 재미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조금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순간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의 선택이 앞으로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것이란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 * * “폐하,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날 저녁 필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묻는 소리에도 클로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분이 정녕 폐하의 따님이 맞으시다면, 그런 분의 존재를 그동안 어떻게 제가 모를 수 있었던 겁니까?” 필릭스의 의문은 타당했다. 그리고 클로드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리 명했다.” 아이를 다시 루비궁으로 데려다주라고 필릭스에게 명한 뒤 빵 부스러기만 남은 빈 접시를 하릴없이 바라보다가 떠오른 기억이었다. “루비궁의 갓난아이에 대한 풍문이 이후 한 번이라도 내 귀에 들어오면, 성의 궁인들도 아이도 모조리 이 손으로 죽여 버리겠노라고 했지.” 루비궁에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친 뒤의 일이었다. 저마다 목숨이 아깝기는 했는지 그들은 지난 4년의 세월 동안 아주 잘 숨죽여 지냈다. 그러니 클로드와 거의 모든 일과를 함께하는 필릭스가 그조차도 잊고 있던 아이에 대해 알 리가 만무했다. “그 역시도 루비궁의 참극이 있던 때의 일입니까? 하지만 어떻게…….” 그런데 필릭스는 드물게도 클로드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다이아나 님이 낳은 폐하의 아이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저에게까지 숨기실 수가 있습니까? 분명 그때 다이아나 님도, 아이도 이미 죽었노라고 제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공주님께서 몇 년간이나 그런 외딴 궁에서 홀로 자라셨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그래도 저는…….” 필릭스는 무언가를 속으로 삼키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클로드의 눈매가 돌연 날카로운 선을 그렸다. “미처 내색치 않으셔도 다이아나 님을 그렇게 먼저 떠나보내신 일이 줄곧 폐하의 가슴에 멍울로 맺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그마저도 저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이었습니까? 다이아나 님께서 남기고 가신 아이를 이제껏 저리 무책임하게 방치해 두시고……!”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닥쳐라.” 바닥을 긁는 것처럼 낮은 음성이 울리는 순간 주위의 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그깟 아이, 그깟 계집 때문에 네게 건방진 소리를 들을 이유 없다.” “폐하!” 필릭스가 항의하듯 클로드를 불렀으나 싸늘히 일갈하는 음성은 여전히 냉소적이기만 했다. “어디까지 지껄이나 보려 내버려 뒀더니 한도 끝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네가 감히 내가 결정 내린 일에 왈가왈부하느냐? 언제부터 제 주인도 못 알아보고 그리 본데없이 건방을 떨게 되었지?” 필릭스의 얼굴이 답답함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클로드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나가라. 기어오르는 걸 봐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결국 필릭스는 어둡게 파인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클로드는 떠나는 그에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다. 탁. 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클로드는 질끈 눈을 감으며 아까부터 격한 통증이 일고 있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누군가 날카로운 쇠붙이로 머리를 들쑤시고 있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이 엄습했다. ‘다이아나 님이 폐하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저에게까지 숨기실 수가 있습니까?’ ‘미처 내색치 않으셔도 다이아나 님을 그렇게 먼저 떠나보내신 일이 줄곧 폐하의 가슴에 멍울로 맺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이아나. 다이아나…… 다이아나라고? 그의 아이를 낳은 계집의 이름이 다이아나였던가. 클로드는 그 이름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어 읊조렸다. 마치 숨이 막힐 정도로 아주 그리운 무언가가 심장을 아프게 꽉 죄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기억해 내지 말라고.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올리지 말라고. 만약 지금껏 애써 잊고 있던 것을 생각해 내면 너는 반드시 후회하고 말 것이라고.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속삭이는 음성에 클로드는 결국 다시 한번 눈을 감고 말았다. * * * “못 본 사이 살집이 더 늘어난 것 같구나.” 클로드는 닷새 만에 본 아이에게 무심히 말했다. 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왜 볼 때마다 얼굴이 핼쑥해지는 것 같지?’ 물론 하얀 우유 빵처럼 양 볼이 통통한 건 여전했지만 기분 탓인지 그와 만날 때마다 안색도 창백하고 어딘가 점점 파리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째서일까. 그의 앞에서는 언제나 몇 개씩이나 되는 케이크들을 한 조각도 남김없이 먹어 치우곤 했었는데. 아이가 지내고 있는 루비궁의 식사가 부실하기라도 한 것인가. “헤헤, 파파도 예뻐요!” 첫 만남 이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늘이 네 번째던가. 아이는 제법 발칙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처럼 겁 없이 그를 향해 저따위 망발을 내뱉는 것부터가 그랬다. 두어 번의 다과 시간을 갖는 동안에도 아이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저런 식의 맹랑한 말을 곧잘 늘어놓았다. “따라오거라.” 클로드는 오늘도 자신을 향해 잘만 방긋거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먼저 뒤돌아섰다. “마침 뱃놀이를 가려던 참이니 준비하도록.”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공주님께서는 아직 물을…….” “짐과 함께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지?” 옆에 있던 릴리안 요르크가 또다시 대담하게 그의 말에 반했으나 클로드는 가차 없이 잘라 내 버렸다. 참방. 후두둑. 결국 클로드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필릭스와 릴리안을 뒤로한 채 아이와 단둘이 배에 올랐다. 아이는 생전 처음 타는 배가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클로드가 그 작은 몸을 들어서 처음 배에 태울 때까지만 해도 겁먹은 표정을 보이더니, 일단 배에 오르고 나자 더 이상은 무서운 기분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순간부터 변화무쌍해지는 얼굴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또 그를 향해 활짝 웃으면서 묘한 말을 내뱉었다. “파파 머리가 빤짝빤짝! 예뻐요!” 반짝반짝하기는 아이의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그와는 색이 다른 금발이니 분명 모친을 닮았을 터. 호수처럼 투명한 파란 하늘 아래에서 햇볕 가루처럼 빛나는 연한 금색의 머리카락이 제법 봐줄 만했다. =======================================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외전 43화 반짝이는 것이 좋다니. 그래서 그런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던 건가. 까마귀가 제 둥지 안에 반짝이는 것을 모아 놓는 것처럼 아이도 가넷궁 후원에 제 주머니를 열심히 파묻어 놓았던 것이 생각나 갑자기 실소가 났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보석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지.” 사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일전에 아이가 천사상 앞에서 떨어뜨렸던 주머니만이 아니었지만 그 사실은 아직 밝히지 않기로 했다. “네 보물은 내가 고이 간수하고 있으니 다음에 직접 와서 찾아가거라.” 왜냐하면 고작 이 말만으로도 아이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클로드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호수 한가운데에 의미 없는 눈길을 두었다. 잔잔한 물살이 이는 호수가 따분하리만치 평화로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참방. 그러던 어느 순간, 한동안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관찰하는가 싶던 아이가 호수에 있는 꽃에 관심을 두었다. 클로드는 그 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생물을 미혹시키는 꽃가루를 공기 중에 실어 보내, 먹잇감이 다가오면 뿌리 부분인 기다란 덩굴로 휘감아 양분을 모조리 흡수하는 마법 생물이었다. 황궁 내에서 마법 생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 몇 대 전인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어쨌든 선대 황제 중 누군가의 별난 취미였다고 들었다. 클로드는 방금 전까지 생기 넘치던 아이의 눈동자가 어느덧 총기를 잃고 흐릿해진 것을 보았다. 어린 아이라 면역이 약하기 때문인지 바람에 실려 온 꽃의 향내에 쉽게 매혹된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끼익. 잠시 후 아이가 향기의 근원을 쫓아 배의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마력으로 움직이는 배는 탑승자가 이동하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다. 아이의 바람을 따라 마법 생물이 밀집한 곳으로 배가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지 스스로조차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순간의 그는 아이를 향해 원인을 알 수 없는 ‘살의’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은가? 4년 전의 어느 날인가에도,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아이를 죽이고자 이미 마음먹었었으니 말이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마침내 투명한 꽃잎에 닿는 것을 그저 방관만 한 건 그래서였다. 풍덩! 앞으로 기울어지던 몸이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아, 푸!”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클로드는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눈은 심연까지 꽁꽁 얼어붙은 빙해처럼 그저 한없이 차갑고 고요하기만 했다. ‘살려 줘.’ 아이가 가까스로 입을 뻐끔거리며 애처롭게 애원했지만 클로드의 눈빛에는 여전히 동요가 없었다. 아이의 눈동자에 절망이 어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치 클로드가 자신을 구해 주지 않을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한순간 완전히 그 빛을 꺼뜨렸다. 첨벙, 첨벙……. 버둥거리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클로드의 가슴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그때부터였다. 참방……. 동요 한 점 없던 고요한 눈동자에 얕은 물살이 번져 나갔다. 쿵쿵. 끝을 알 수 없는 깊숙한 곳까지 단단히 얼어붙어 있던 심장을 누군가 사정없이 두드리는 것 같았다. 다시금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팠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참방. 참방. 당장에라도 사그라질 듯 작게 울리는 소리가 이번만큼은 또다시 외면하도록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 이상 파헤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너는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또다시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클로드는 이를 악물며 그 목소리를 향해 거칠게 뇌까렸다. 웃기지 마라. 그 후회까지도 모조리 내 것이니 주제 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그 안에 숨기고 있는 걸 당장 내놔……! 파삭! 그 순간 서리가 껴 있던 표면이 가장 먼저 부서져 나갔다. ‘폐하께서 이 아이를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깨진 틈 사이로 물이 범람하듯 지금껏 묻어 두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집어삼켰다. ‘아마도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되겠지요.’ ‘저를 사랑해 주셨듯이, 부디 제가 남기고 갈 이 아이도 그 품에 소중히 보듬어 아껴 주세요.’ ‘그것만이 저의 유일한 바람입니다.’ 첨벙! “아푸! 헉. 윽, 콜록…….” 마력으로 건져 올린 아이가 배 위에서 몸을 떨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 사납게 요동쳤냐는 듯이 호수는 다시금 잠잠해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배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를 배에서부터 안아 들어 호숫가에까지 직접 옮긴 것은 클로드였다. “세상에, 공주님!” 물에 흠뻑 젖어 불쌍할 정도로 덜덜 떨고 있는 몸은 여전히 작았다. 이토록 보잘것없는 생명체가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필릭스.” “예, 폐하.” “내일부터 아타나시아에게 물에서 헤엄치는 방법을 가르쳐라.” 클로드는 방금 전 생사의 경계에서 돌아온 아이를 한 번 안아주지도 어르지도 않은 채 발길을 돌렸다. “짐의 딸이 고작 호수 따위에 빠져 익사한다면 수치스럽지 않겠느냐.” 하지만 무심히 뒤돌아선 클로드의 얼굴은 처참할 정도로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투둑. 앞으로 내디뎌지는 걸음걸음마다 손끝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바닥에 짙은 자국을 남겼다. 몇 년 전 그날. 아직 목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갓난아이를 왜 결국 죽이지 못한 채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버렸다. * * * 한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삶은 이보다 조금 더 따스하고 포근한 색채로 덮여 있으리라 믿었던 적도 있었고, 어느 날인가에는 못 견디게 외로워 타인의 온기를 그리워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던 과거의 일이다. 하여 그의 아버지였으나 단 한 번도 아버지였던 적 없는 자는 그를 경멸하며 말했다. ‘개나 돼지가 제아무리 인간인 척하려 애써 봤자 결국은 더러운 짐승에 불과한 것을. 네 어미처럼 죽고 싶지 않다면 짐의 앞에서 인간 행세를 하려 하지 마라. 그 역겨운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그의 형제였으나 단 한 번도 형제였던 적 없는 자는 그의 나약함을 비웃었다. ‘아아, 그래. 애초에 무엇 하나 그 더러운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으니 그런 것은 모두 헛꿈이라는 걸 모르는 게지. 하면 네놈은 영원히 알지 못하겠구나. 나도 부왕도 이 땅에 난 모래 한 톨조차 네놈에게 적선해 줄 마음이 없으니 말이다. 숨 쉬는 것을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네게는 분에 넘치는 대우임을 모르느냐? 과연 천한 종자답다.’ 언제나 그에게 사랑을 속삭였으나 단 한 번도 그를 사랑한 적 없는 여인은 끝까지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내가 한 짓까지 부정하지는 않아. 하지만 나는 당신을 배신한 적 없어.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 이런 나를 이해해 줘. 당신 옆에서 평생 동안 나도 같이 구정물이나 받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나는 이제 이 오벨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여자가 되는 거야. 그러니 당신도 진실로 나를 사랑한다면 이제 그만 내 손을 놓아줘.’ 그때가 되어서야 클로드는 깨달았다. 아, 그렇군. 내가 그동안 바라보던 것은 정말로 한줌의 가치조차 없는 헛된 망상이었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렇다면 그들이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클로드는 손에 넣어 보기로 했다. 만약 정말 그가 한 번도 무언가를 가져 보지 못했기에 어리석게도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라면,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욕심냈던 것을 모조리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자고. 그리하여 마침내 제 혈육의 피로 젖은 옥좌에 앉게 되었을 때 클로드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허무였다. 윗공기나 아랫공기나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은 매한가지로구나. 모두 입을 모아 선황의 폭정을 저지한 성자라 그를 추앙했지만 기실 그는 그런 고결한 이유로 제 아비와 형제를 죽인 것이 아니었다. 또 모두 입을 모아 이제부터는 오벨리아의 모든 것이 그의 것이라 말했지만 정작 그는 그 무엇 하나 진실로 가진 것이 없었다. 원래부터도 사는 것이 재미없었던 클로드는 더욱 깊은 권태에 빠져들었다. 그를 추앙했던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엉망진창인 시간들을 보냈고, 그러면서도 그런 스스로에게 일말의 감흥조차 느끼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왜 사냐’고 묻거든, 아마도 그는 ‘그렇다 해서 죽을 이유도 없으니 산다’고 무미건조하게 답했을 것이었다. ‘미천한 무희 따위의 이름이 궁금하십니까?’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있었다. 스스로조차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혹시 이 순간을 위해서 나는 지금까지 이 의미 없는 삶을 지속해 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던 때가 있었다.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제게 무언가를 주고 싶으시거든 손을 잡아주세요.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너무나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서 언제나 그를 꿈꾸는 것 같은 기분에 젖게 했던 그 찬란한 시간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꽉 조이도록 먹먹하게 벅차올라 차마 숨 한 번 크게 내쉴 수 없던 그 모든 빛나는 순간. 그리고 찰나간의 행복 끝에 너무나도 쉽게 깨어져 버린 덧없는 꿈. * * * 쨍그랑! 거친 손길에 밀려 책상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것들이 부서져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클로드는 어둠 속에서 이를 악문 채 한꺼번에 밀려드는 기억들에 휩쓸려 휘청이고 있었다. ‘본래부터 어느 한곳에 묶이는 일 없이 자유로이 살아온 몸인지라 궁의 법도 같은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오벨리아의 지고한 태양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송구합니다. 지금의 무례로 저를 건방진 계집이라 여기시며 벌하시렵니까?’ ‘하오나 폐하께서 길 잃은 소년 같은 모습으로 이곳에 홀로 우두커니 서 계시니 도무지 말을 건네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는걸요.’ ‘허락해 주신다면 밤 산책을 하시는 동안 곁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그저 변덕이지요. 폐하께서 저를 이곳에 남기신 것처럼, 이렇다 할 이유는 없는.’ 어떻게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을 잊은 채로 살 수 있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둘씩 떠오른 날카로운 기억의 조각들이 그를 거칠게 베고 지나갔다. ‘제 몫까지 이 아이를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기억에 도달했다. 클로드는 흡사 광인처럼 숨을 헐떡이며 비틀거리다가 메마른 비소를 터뜨렸다. ‘아마도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되겠지요.’ 웃기지 마라. 그런 것 따위 누가 필요하다고 했나? ‘저를 사랑해 주셨듯이, 부디 제가 남기고 갈 이 아이도 그 품에 소중히 보듬어 아껴 주세요.’ 차라리 살고 싶다고 말해. 만약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만 말해준다면 다른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외전 44화 ‘그것만이 저의 유일한 바람입니다.’ 그대가 용서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그 아이를 죽일 거다. 그러지 않으면 그대가 죽을 테니까. 그리고 그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왜……. ‘폐하께서 이 아이를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왜 그런 얼굴로 웃는 거지? 지금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클로드는 눈앞에 떠오른 환영에 망연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후의 일이 어찌 되었는지는 그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클로드는 아이를 죽이지 못했다. 다이아나가 죽기 전에도, 그리고 죽은 후에도. 그런 자신을, 그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봉인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지금. 클로드는 아직도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때로부터 오랜 시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변함없이. * * * 그동안 잊고 있던 수없이 많은 기억과 감정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클로드를 가득 채웠다가 다시금 텅 비운 채로 빠져나가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클로드는 마치 자신이 마모된 돌멩이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옆에서 귀찮게 구는 필릭스를 루비궁에 보내고, 그는 자신의 방에 홀로 침잠했다. 루비궁에 새로운 궁인을 하사하고 필릭스를 아이의 기사로 보낸 것은 죽은 다이아나의 유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일 뿐, 클로드는 아이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 외에 다른 무언가를 더 해줄 생각은 없었다. ‘저를 사랑해 주셨듯이, 부디 제가 남기고 갈 이 아이도 그 품에 소중히 보듬어 아껴 주세요.’ 또 한 번 귓가에 어른거리는 목소리에 클로드는 비소했다. 미련한 것.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나? 그대는 내가 이 손으로 그 아이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경탄해야 할 것이다. 클로드는 소파에 누운 채로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얼마 전부터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되새겨져 그를 괴롭히는 여인의 모습이 혹시 그렇게 하면 가려질까 싶어서. 한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일까. 잠시 후 클로드는 그 상태로 잠이 들어버렸다. * * * 툭!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이마에 무언가가 날아와 부딪치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간만에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누가 감히 그의 방까지 들어와 오수를 방해한 것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클로드는 눈을 떴다. 그러자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건지, 그의 앞에서 한 손을 치켜든 채로 굳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드는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약간 멍한 머릿속으로 왜 아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필릭스에게 저녁 만찬 시간이 되면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자, 자장자장…….” 그때, 별안간 아이가 뻣뻣하게 손을 내리더니 그의 가슴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아직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그저 물끄러미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달님이 웃네요. 오늘은 안녕. 아가도 별님을 보고 웃어요.” 아이의 조곤조곤한 노랫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내일은 더 반짝이는 아침이 올 거야. 예쁜 꿈만 꾸세요. 잘 자요, 우리 아가.” 기분 탓인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지금껏 두통에 씨름하던 머리가 조금 맑게 개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무슨 노래지?” “나쁜 꿈이랑 빠이빠이 하는 노래예요.” 클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어 묻자, 아이가 얼른 대답했다. 혹시 그가 불편하게 자고 있어 악몽을 꾼다고 생각한 것일까? 하지만 조금 전 눈을 뜨자마자 본 아이의 자세는 상당히 애매했는데. 클로드는 자신의 가슴팍을 토닥였던 아이를 묘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파파!” 바로 그때, 아이가 그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이해할 수 없게도 가슴이 꽉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클로드는 잠깐 말문이 막힌 채로 아이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아이를 그의 방으로 들여보낸 것은 필릭스인 듯했다. 클로드는 마음에 이는 작은 동요를 외면하며 방에서 만찬을 들 것을 일렀다. “낯빛이 환한 것을 보니 그간 잘 지냈나 보구나.” 그 후 그는 테이블에 마주 앉은 아이의 얼굴을 보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얼마 전 호수에 빠졌던 탓인지 아이의 얼굴에는 약간의 병색이 내비쳤다. 클로드의 눈에는 원래도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것처럼 보이던 아이의 얼굴에 병색까지 어리자 전보다 더 못 봐줄 정도였다. 하지만 클로드는 그것을 모르는 척 냉담하게 반응했다. 그날 그가 홀로 호숫가를 떠난 직후, 아이가 많이 울었다고 들었다. 클로드가 물에서 건져 내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이제 다섯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공포를 느꼈을 만도 했다. 게다가 그때 클로드는 물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를 보고서도 그것을 지켜만 볼 뿐,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아이가 크게 앓은 것도 그런 심리적인 요인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클로드는 단 한 번도 아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사실은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해도 좋았다. 호수에서의 일 이후 클로드는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안에서 격렬히 휘몰아치는 폭풍에 그대로 휩쓸려 넋을 놓다가, 또 끔찍하리만치 거대한 상실감과 고통에 허우적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궁 안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때려 부수다가, 종국에는 머리를 둘로 쪼개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몸부림치며 의식을 반쯤 잃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클로드가 한동안 그나마 제대로 잠을 잤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조금 전의 짧은 오수가 유일했다. 안색이 어둡고 얼굴이 거칠한 것은 아이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클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태가 괜찮았다 한들 아이의 병세를 살피러 루비궁에 직접 찾아갈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었지만 말이다. “헤헤, 파파도 예뻐졌어요!” 그런데 아이는 얼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그를 향해 실없이 웃어 보였다. 마치 호숫가에서의 일을 벌써 잊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물론 아이가 실제로 그 일을 잊었을 리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그를 향해 웃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 퍽 의외라 클로드는 잠깐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그는 식사를 시작한 아이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조막만 한 얼굴의 이목구비는 기억 속의 여인과 조금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기야 피가 통한 모녀 사이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클로드는 아이를 지켜보는 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 동시에 치미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존재를 향한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마음과 불꽃처럼 타오르는 증오. 그는 식사에 거의 손도 대지 못한 채로 아이가 먹는 모습만 바라보다가 만찬 시간을 끝냈다. * * * 퍽 잔인한 일이었으나, 클로드는 아이를 볼 때면 종종 고민했다. 오늘이라도 그냥 죽여 버릴까. 이 아이, 그냥 지금이라도 눈앞에서 없애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아이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간혹 극심한 살의가 피어오를 때가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아이의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칼로 쑤시는 듯한 격한 통증이 밀려와 이대로 미쳐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의 안에 있는 음산한 목소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삭였다. ‘차라리 지금 죽여 버리면 편해질 거야.’ ‘간단해. 그저 손에 마력을 조금 실어서 앞으로 뻗기만 하면 돼.’ 그 목소리는 퍽 달콤해서 정말 이대로 충동에 몸을 맡기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클로드는 가까스로 제 안에서 날뛰는 살심을 억누르며 아이를 돌려보냈다. 그는 이것이 흑마법의 부작용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죽고 루비궁에서 학살극을 벌인 뒤, 그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목숨을 취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 후 클로드가 행한 일은 스스로의 기억을 수면 아래로 묻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난 몇 년간, 그는 지독한 공허감에 휩싸여 있을지언정 모든 것을 잊은 채로 평온할 수 있었다. “파파, 보고 시펐어요!” 어느 맑은 오전. 클로드는 파릇한 잔디를 밟으며 달려오는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자신이 종종 하는 무서운 생각을 모르기에 저렇게 반갑게 뛰어올 수 있는 거겠지. 그 증거로 아이의 생글거리는 얼굴은 티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깜빡했다는 듯이 발길을 멈추었다. “아티를 티타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로이즈 부인이었던가. 아이에게 새로 붙인 예법 선생에게 새로 배운 다과회의 인사법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른 흉내를 낸다 해봤자 아이는 아이였다. 레이스를 넣어 잔뜩 부풀린 치맛자락을 붙잡고 짐짓 숙녀 행세를 내며 인사하는 모습이 클로드가 보기에도 제법 귀염성 있었다. 아이의 뒤를 따라오던 필릭스는 이미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궁인들도 신기함이 담긴 눈빛으로 아이를 힐끔거리는 중이었다. 그들의 얼굴도 필릭스처럼 어딘가 말랑말랑하게 풀려 있었다. 클로드는 그것이 왜인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이어 아이가 다시 고개를 들어 클로드를 향해 방싯 웃어 보였다. 하지만 클로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의 눈매가 한차례 움찔거렸다. “필릭스.” 클로드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말 없이 필릭스를 불렀다. 아이를 의자에 앉히라는 의미였다. 아이의 키가 작아서 혼자서는 다과상 앞에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클로드가 직접 아이를 들어 의자에 앉힌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다음 순간, 클로드는 필릭스가 별종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눈빛이 마치 ‘어떻게 공주님의 이 깜찍한 애교를 보고도 이렇게 무반응하실 수가 있는 겁니까?’라고 말하는 듯했다. 기가 막힌 것은 궁인들 역시 필릭스에게 동의하듯 상당히 미묘한 눈빛으로 클로드를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클로드가 생각했을 때에도 아이는 애교가 꽤 많은 편이었다. 그의 밑에서 이런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니, 퍽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클로드는 그런 아이를 대할 때마다 무미건조한 태도를 취했지만 말이다. “좋은 아침이에요, 파파!” 필릭스의 도움을 받아 의자에 앉은 아이가 다시금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여느 때와 같은 여상한 인사말에 클로드는 침묵했다. 지금은 어중간한 오전 시간 대였다. 보통 다과 시간은 점심 식사를 끝마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오후 서너 시쯤에 갖는 법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언젠가부터 이 시간에 아이를 궁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런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은 한 달 전 아이가 가넷궁의 침소에 들어와 잠들어 있던 그를 깨운 이후부터였다. 그때도 아이는 ‘좋은 아침’이라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물론 실제로는 아침이 아니라 해가 저물 무렵인 저녁이었고, 클로드는 아이에게 그것으로 딴죽을 걸었다. =======================================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외전 45화 그날도 클로드는 이유를 알 수 없게도 덜컥 말문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 어귀에 버석거리는 이상한 감정이 드는 것은 덤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클로드는 오전 다과 시간마다 아이가 지금처럼 말할 때면 입을 꾹 다물고 한동안 마주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다.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자꾸만 아이를 불러 저 특별할 것도 없는 인사말을 계속 듣고 마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이었다. 클로드는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아티 꿈에 파파가 나왔어요!” “꿈이라.” “아티랑 파파랑 릴리랑 필릭스랑 다 같이 빗자루 타고 올라가서 별님도 따고 달님도 따고 재미있게 놀았어요!” “개꿈이구나.” 클로드의 반응이 썩 곱지 않은데도 아이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파파랑 같이 구름 위에서 폭신폭신 놀이도 했는데 아티 정말정말 좋았어요.” 어느새 클로드는 픽 웃고 있었다. 도대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황당하기도 하고, 또 혼자서 눈을 반짝이며 재잘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원래 아이들은 다 이런 것인가?’ 하는 신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자기도 모르는 새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실낱같은 웃음이었다. 비어 있는 클로드의 찻잔에 차를 따르러 다가온 궁인 하나가 그런 그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궁인은 아직도 생글거리고 있는 아이에게도 한차례 시선을 둔 뒤 조용히 물러났다. 클로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이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아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불면증이 다시 시작된 탓인지 머리가 조금 쑤셨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따뜻한 햇볕을 쬐며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공연히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파파, 그거 마싰어요?” 조금 전 궁인이 새로 따라 놓은 차에서 익숙한 향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차를 마실 때마다 이제는 습관처럼 찾는 리페차였다.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아이를 보고 클로드는 멈칫했다. “맛으로 즐기는 게 아니다.” 하지만 호기심이 들었는지 아이는 그와 같은 차를 마시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공주님께서 즐기기에는 향이 다소 강할 겁니다.” “머글래, 똑같은 거!” 옆에 있던 필릭스가 말렸지만 아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통통한 뺨을 더욱 빵빵하게 부풀리고 드물게도 고집스럽게 외치는 통에 오히려 필릭스가 난처함을 표했다. “주어라. 굳이 원한다면 말릴 것도 없지.” 클로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무심히 말했다. 물론 아이를 위해 편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소 심술궂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차는 허구한 날 다디단 초콜릿과 꿀이 들어간 우유나 먹던 아이의 입에는 맞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어디 한번 직접 이 차를 맛본다면, 아이는 대번에 울상을 짓고 후회할 것이 뻔했다. “아티도 이거 조아요!” 하지만 뜻밖에도 아이는 그가 마시던 차를 마음에 들어 했다. 아이가 질색하는 것을 기대했던 클로드는 그 의외의 반응에 흥미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아티 입에서 꽃이 피는 것 가타!”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아이가 웃으며 외친 소리에 클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마 폐하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기억의 한 조각이 부상했다. 웃음기 어린 다정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뒤섞여 귓가를 간지럽혔다. ‘꼭 입안에 꽃이 피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해맑게 미소 지은 아이의 얼굴 위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봄이 온 기분이에요.’ 지금 그들이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다이아나 역시 아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필릭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곧 그의 입에서 아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폐하께서 즐겨 드시는 리페차입니다. 다이아나 님께서도 무척 좋아하셨지요.”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자 흥미가 동한 눈치였다. 잠깐 클로드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말간 눈으로 필릭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엄마랑 아티랑 똑같이 말했네?” “예. 폐하께서 처음 리페차를 즐기게 되신 것도 다이아나 님 때문입니다. 리페차의 원료인 산유초는 시오도나에서 나는 것이거든요. 아, 지금 이 자리에서 두 분이 함께 다과를 드신 적도…….” “그런 기억 없다.” 뒤이어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서슬 퍼런 목소리가 필릭스의 말을 잘라 냈다. “오늘따라 쓸데없는 말이 많군. 시끄러우니 그만 물러가라.” 클로드는 차가운 눈길로 필릭스를 응시했다. 거기에는 이 이상 말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필릭스가 그의 명령을 따라 자리를 떠나고 난 뒤, 정원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스하게 머리 위에서 내리쪼이던 햇빛이 이제는 비수처럼 그를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앞에 앉은 아이가 아까부터 말없이 그의 얼굴을 살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클로드는 또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음습한 감정을 짓누르며 시선을 움직였다. “아직 차를 들기에는 이른 나이인 것 같으니 우유를 마시는 편이 좋겠구나.” “헤헤. 아티, 우유도 조아해요.” 아이는 다시 해사하게 웃었다. 클로드는 옆에 있는 궁인에게 말없이 손짓해 아이에게 우유를 내주도록 시켰다. 아까 차를 마시겠다고 그렇게 우겼던 것이 거짓인 것처럼 아이는 묵묵히 두 손으로 컵을 들어 우유를 마셨다. 그날의 다과 시간은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 * * * “폐하. 아타나시아 공주님의 선물입니다.” 얼마 후, 여느 때처럼 아이의 생활을 보고하러 온 필릭스가 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 웬 하얀 종이였다. 클로드는 오늘도 지끈거리는 머리에 미간을 좁히며 필릭스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았다. “이게 뭐지?”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그린 폐하의 모습입니다.” 그 순간 클로드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는 눈앞에 있는 종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요상한 그림이군.” 알록달록한 색채로 꾸며진 그림은 기이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게 설마 자신이라는 건가? 가만히 보아하니 노란색으로 칠해진 짧은 머리를 가진 하얀 형체가 클로드, 그리고 긴 노란 머리를 가진 작은 분홍색 형체가 아이인 것 같았다. 몸통에 칠해진 요상한 색깔은 아마도 옷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클로드는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아이는 그런 그를 향해 양다리를 쭉 편 채로 허공에 붕 떠 있었다. “폐하와 오붓이 놀고 싶은 바람을 그림에 담으신 게 아닐까요?” 한데 활짝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과 달리 그는 양쪽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모양새인 것이 의아했다. 하기야, 이런 어린애의 그림을 보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이상한 일인지도 몰랐다. “웃기는군.” 클로드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그림도 보시겠습니까?” “다른 것도 있나?”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 다이아나 님의 초상을 그리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클로드는 멈칫하고 말았다. 싸늘한 보석안이 자신을 꿰뚫을 듯 직시하는데도 필릭스는 묵묵히 손을 움직여 클로드의 앞에 다른 그림을 내려놓았다. “아마 폐하께서 보시기에 그리 닮은 모습은 아닐 겁니다.” 클로드의 시선이 느리게 밑으로 향했다. 과연 필릭스의 말처럼 그림 속의 여자는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다이아나와 그리 닮은 생김새는 아니었다. “아타나시아 공주님께서는 한 번도 다이아나 님을 직접 보신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요.” 삐뚤빼뚤한 선으로 그려진 어린아이의 그림. 심지어 그가 알고 있는 사람과 별로 닮지도 않은 그 그림이 별안간 그의 심장을 푹 파고들어 온 것은 어째서였을까. “혹시 다이아나 님의 모습을 담은 영상석이 있다면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필릭스는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다. 클로드는 입을 굳게 다물고 눈앞의 그림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지독히도 무심한 어조로 필릭스에게 말했다. “그런 하찮은 일을 내게 일일이 고할 필요 없다. 나가라. 오늘의 보고는 여기까지 듣겠다.” 필릭스는 지금까지보다 밝아진 얼굴로 그에게 인사한 뒤 문을 나섰다. 클로드는 별다른 허락의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반대 역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조용해진 방 안에서 클로드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장의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거기에서 쉽게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 * * 필릭스는 원하던 것을 구하지 못해 울적한 눈치였다. 하지만 황궁에 다이아나의 모습을 담은 영상석이 없는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클로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지난번 필릭스에게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짹짹. 여느 때처럼 오전 다과 시간을 함께 보낸 뒤 클로드는 아이와 함께 정원을 빠져나갔다. 파릇한 녹색 물이 든 잔디와 나무들로 시야가 온통 푸르렀다. 클로드의 시선이 앞서 걷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걸음을 따라 새의 꽁지깃처럼 살랑이며 나부끼는 금발. 그 위에 묶인 하늘색 리본과 레이스를 넣어 잔뜩 부풀린 하얀 드레스가 덩달아 흔들렸다. 풀밭을 밟는 남색 구두와 소매 밖으로 드러난 하얀 손이 앙증맞을 정도로 작았다. 기분 탓인지 아이를 스쳐 날아온 실바람에서 옅은 우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절로 보드라운 미소가 피어오를 듯한 사랑스러운 어린 여자아이의 뒷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클로드의 눈빛은 조금도 온화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문득 저도 모르게 싸늘한 눈초리로 아이를 응시할 때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앗!” 그런데 별안간, 어째서인지 걸음을 서두르는 것 같던 아이가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거리가 제법 가까웠기 때문에 잡아주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아이가 잔디 위에 철퍼덕 넘어지는 모습을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지난번 호수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보며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오히려 클로드의 뒤에 서 있던 필릭스가 깜짝 놀라 앞으로 달려왔다. 클로드는 다소 건조한 눈길로 아이를 내려다보며 이제 울음이라도 터뜨리려나, 하고 생각했다. 원래 애들은 사소한 일에도 잘 운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아이는 울기는커녕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를 일으켜 세워 주기 위해 앞으로 뻗어졌던 필릭스의 손이 무색해졌다. “괜찮아!”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흙이 묻은 치맛자락을 툭툭 털어 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필릭스가 곧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아이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의 피부가 벗겨지셨는데, 아프지 않으신가요?” “어…….” 걱정스러운 필릭스의 눈빛을 정면에서 마주한 순간, 아이가 멈칫했다. 클로드는 그 얼굴에 떠오른 얕은 당혹감을 발견하고 움찔 눈매를 떨었다. 아이는 마치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는 것을 어쩐지 조금 생소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으, 응, 별로 안 아파.” =======================================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 외전 46화 하지만 곧 아이는 다시금 씩씩하게 말한 뒤, 슬그머니 필릭스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 등 뒤로 감추었다. 그러고는 정말 괜찮다는 듯이 헤헤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클로드도, 필릭스도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통의 어린아이라면 제 상처를 보고 겁을 먹어 울거나 아프다고 칭얼거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아이는 시종일관 약한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굴었다. 살갗이 벗겨져 피가 배어나오는 손이 아프지 않을 리 없는데도. “폐하, 지금 바로 궁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잇따른 필릭스의 말을 듣고 아이가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앗, 나 진짜 하나도 안 아픈데!” “그래도 제대로 치료받으셔야죠.” “아냐, 이런 건 그냥 침 바르면 나아. 그러니까 아티 때문에 의사 아저씨 안 불러도 돼!” 클로드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더욱 열렬히 자신의 멀쩡함을 주장하며 필릭스를 말렸다. 그 모습이 어떻게든 클로드를 귀찮게 만들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면, 그만의 착각일까? 필릭스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어려 있는 것을 보아서는, 아마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일상을 함께 하는 필릭스와 릴리안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의 행동이나 사고가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어 가끔 걱정이 될 정도라고. 클로드가 보기에도 지금 아이의 행동은 제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아이는 평소에도 은근히 그의 눈치를 많이 보았다. 꼭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따끔거려 왔다. 낯선 아릿함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자 아이가 주춤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고 클로드는 근처에 있던 궁인에게 명했다. “지금 바로 궁의를 부르도록.” “예, 폐하.” 그러고 나서 다시 시선을 옮기는데, 아이가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클로드가 자신을 위해 궁의를 불러 준 것을 아주 의외라 여기는 듯했다. 물론 그런 기색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흠칫하며 지워지긴 했지만. “필릭스, 아타나시아의 치료가 끝나면 루비궁으로 돌아가라. 짐은 그만 집무실로 가 볼 터이니.” 클로드는 그렇게 말한 뒤 아이를 정원에 남기고 먼저 자리에서 발길을 뗐다. * * * 그러고 나서 얼마간 클로드는 묵직한 마음을 안고 지내야만 했다.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이상하게도 속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후 클로드가 전해 들은 이야기는 꽤 놀라웠다. 아이가 처음으로 필릭스에게 화를 냈다는 것이다. ‘파파한테 엄마 얘기 하지 마.’ ‘엄마 얘기하면 파파가 싫어해.’ ‘그런데 엄마 보고 싶다고 말했다가 파파가 아티도 싫어하면 어떡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어쩌면 어린아이라 해서 아무것도 모르리라 여기는 것은 어른들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얼마 전 다과 시간 때 다이아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필릭스를 냉랭히 내쳤던 것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의 일로 클로드가 다이아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필릭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데, 어째서인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갑갑해져 왔다. “폐하께서 아타나시아 공주님께 다이아나 님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건 어떨지요? 폐하의 마법이라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필릭스가 간청하듯 말했으나 클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무언의 승낙으로 여기고 혼자서 계획을 세우는 필릭스를 말리지도 않았다. 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여전히 다이아나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아이를 생각할 때면 마음속의 미움과 엇비슷한 크기의 낯선 감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 그 노래.” “노래?” “나쁜 꿈을 몰아내는 노래라고 했었지.” “아! 자장자장 노래!” “자장자장 노래?” 그런 이유 때문에 클로드는 필릭스의 뜻대로 아이를 만났다. “어쨌든, 그거. 한번 불러 봐라.” 아이에게 지난번 가넷궁에서 불렀던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 보라 시킨 것은 그저 변덕이었다. 아이는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싫은 듯, 한순간 얼굴을 구기다가 천연덕스럽게 무슨 노래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잡아뗐다. 그래도 결국 아이는 클로드의 협박 아닌 협박에 또다시 바보처럼 에헤헤 웃으며 노래를 시작했다. 그 음성이 퍽 구슬픈 것을 보니 정말 어지간하게 노래를 부르기 싫었나 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그만두라는 소리를 하지 않자 몇 번이나 열심히 같은 노래를 반복해 부르는 모습이 웃겼다. “어여쁜 별님이 인사하며 웃어주네요. 오늘은 안녕. 내일은 더 반짝이는 아침이 올 거야.” 그러는 동안 클로드는 믿을 수 없게도 한동안 소란했던 마음이 점차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이런 식으로 마음이 편안한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정말 자장가라도 들은 것처럼 서서히 눈이 감겼다. 어쩐지 이대로 잠들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그의 생각이었을 뿐, 실제로 클로드가 잠들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고 오수에 들었다 착각한 듯했다. 그의 눈앞에서 무언가가 얕은 바람을 일으키며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손이라도 흔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가락으로 추정되는 것이 그의 뺨을 쿡쿡 찌르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가 꼼짝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옷깃 사이로 드러난 가슴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스몄다. 클로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아이의 행태에 황당함을 느꼈다. 그래서 과연 어디까지 할지 지켜볼 심산으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하지만 클로드의 인내심은 아이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뽑을 듯이 손에 쥐어 당겼을 때 위기를 맞았다. 이런 발칙한…… 설마 지금 그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아이는 전부터 그의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헤에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기색을 보이곤 했었다. 보석을 모으던 것도 그렇고, 천사상에 관심을 갖던 것도 그렇고, 역시 아이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아까 옥좌를 장식한 보석도 신이 나서 구경했던 것이 기억났다. 클로드의 성격대로였다면 당장 눈을 뜨고 일어나 감히 그의 앞에서 이처럼 되바라지게 행동한 아이를 내쳐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미비하게 미간을 구기기만 할 뿐, 여전히 자는 척을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폐하께서 잠드셨습니까?” 그때 휘장 밖에서 들려온 필릭스의 목소리에 아이가 깜짝 놀란 듯이 클로드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으, 으응.” “드문 일이군요. 다른 이를 앞에 두고 무방비한 모습을 보일 분이 아닌데. 공주님의 노래가 효능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필릭스는 클로드가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클로드의 미간이 또 한 번 불만스럽게 움찔 찌푸려졌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었다. “있지. 이거 진짜 진짜 비밀인데. 사실 어제 엄마 안 보고 싶다고 한 건 아티가 거짓말한 거야.” “그러셨습니까.” “근데 엄마 안 봐도 된다는 건 거짓말 아냐.” 잇따른 아이의 말에 클로드는 잇새에 힘을 주었다. “아티한테는 파파가 있자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왜인지 숨이 막혔다. 잠시 후 클로드는 조금 전 그에게 발칙한 짓을 했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몸이 푹신한 쿠션들 사이에 푹 파묻혀 있었다. 그가 깨어 있는 줄도 모르고 머리를 잡아당기고 얼굴을 꼬집는 등 별 해괴한 짓을 다 하던 아이는 지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옆으로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색색 작게 흘러나오는 숨소리만이 고요한 공간에 가득 찼다. 이렇게 잠든 것을 보니 가뜩이나 작은 아이가 더 작게 느껴졌다. 이윽고 클로드의 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으응…….” 그의 손이 이마에 닿자마자 아이가 잠투정을 하듯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어쩌면 갑작스럽게 이마에 스민 서늘한 체온 때문일지도 몰랐다. 약간 차가운 클로드의 손과 달리 아이의 몸은 따끈따끈했다. 클로드는 잠든 아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아티한테는 파파가 있자나.’ 그러다 문득 조금 전 들었던 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라니…… 그런 것이 되고 싶은 마음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다이아나는 제멋대로 세상에 이런 것을 낳아 놓고 죽어버렸다. “폐하, 휘장을 걷어도 되겠습니까?” 그때, 두껍게 내려온 휘장 너머에서 필릭스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아니.” 클로드는 아이의 이마에 대고 있는 손을 떼지 않은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의 거부에 필릭스는 여전히 휘장 밖에 선 상태로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잠드셨는지요.”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만족하나?” 아마 지금쯤 아이는 꿈에서 다이아나의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클로드의 모난 말에 필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휘장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으로 봐서는 아마도 희미한 한숨을 내쉰 것 같았다. 클로드는 다시금 주위에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아이의 말간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시야에 비친 아이의 표정이 변했다. “……웃는군.” 저도 모르게 내뱉은 그의 작은 목소리를 들었는지 필릭스가 한결 밝은 느낌으로 말했다. “공주님께서 좋은 꿈을 꾸고 계시나 봅니다.” 그 순간 클로드가 움찔했다. 그는 괜히 기분이 조금 이상해져서 아이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처럼 삐뚤어진 말투로 읊조렸다. “나쁜 꿈을 몰아내는 노래라며 한참을 불러 댔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예. 방금 전까지 공주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요정님이 좋은 꿈을 선물해 주었겠지요.” “요즘은 입만 열면 헛소리.” “후후.” 다 안다는 듯이 휘장 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기분이 나빠졌다. “우응…….” 그때, 아이가 잠에서 깨어날 것처럼 작게 뒤척였다. 클로드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잠깐 떼었던 손을 다시 움직여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귀찮구나. 자라.”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다시금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클로드의 입에서도 소리 죽인 얕은 숨결이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모두 다 미련했다. 그에게 아이를 남기고 혼자 죽은 다이아나도. 자신에게 온정 한 번 준 적 없는 이런 비정한 그를 그래도 아버지라 여기며 맹목적으로 따르는 아이도. 그리고 사랑과 미움이란 모순된 감정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헤매는 그도……. 전부 한심할 정도로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잠든 아타나시아를 내려다보는 클로드는 누군가 본다면 깜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을 만큼 따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간지러울 정도로 나긋한 손길이 아이의 동그란 이마를 스쳤다.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런 두 사람은 영락없는 아버지와 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