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17651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28일 13:49 
등록자 : KREUZ1           조  회 : 43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0/12/3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616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반드시 돌아올거야................... .......................반드시 기억할거야................... .......................그러니.............................. 그리고 닥치는 엄청난 고통. "허억!!!!" 초라한 침대위에 잠들어 있던 왜소한 몸의 소년이 눈을 떴다. 뭔가에 놀란양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년의 커진 동공은 한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잠짓 떨어 보이는 소년.밤새 흘린 진땀에 체온을 제법 빼앗긴 모양이다. 소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한손으로 집었다. 한숨을 내 쉬는 소년은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였다. '또 그 꿈' 뒤 늦게 소년은 자신이 잠들어 있던 곳의 변모를 깨달았다. 소년이 잠을 청했던 곳은 분명히 숲속이었던 것이다. '이 곳은......?' 비단 장소 뿐만이 아니었다. 상의 뿐이지만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고, 잔 상처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누군가의 호의 임을 쉽게 추리할수있는 상황이 었건만 소년의 차가운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변하긴 변햇다. 약간의 찌푸림...... '쓸데 없는 짓을......' -벌컥! "그만 일어나!!.......어라 일어났네?" 예의 없는 방문에도 소년은 별다른 반응없이 쳐들어온 이를 봐라 봤을 뿐이었다. 그런 소년의 냉담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는 소년보다는 두어살 많아 뵈는 소녀였다.갈색머리카락에 보기 좋을 정도로 약간 그을린 피부에 장난기가 가득 머금어져잇는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당당하게 소년의 코앞까지 얼굴을 드리내밀며 빠르게 말했다. "내가 널구해준 은인이야. 너 내가 아니였으면 늑대에게 잡아 먹힐뻔 했다구. 그 뿐인줄알아? 다친 널 마을까지 데리고 와서 치료도 해줬지,찟어진 윗옷도 새로 사서 입혔지! 감사히 마음 속 깊이 뇌리에 단단히 새겨 놓으라구, 이.은.혜.를." 소년은 마치 그녀가 없는 듯 아무렇지 않게 뒤로 돌아가서는 대야에 물을 부었다. 그 모습에도 소녀는 상관 없는 지 자기 할말만 계속 했다. "아참! 그럴려면 일단 내 이름을 알아야겠지? 잘 기억해! 널 늑대에게서 구해주고 상처도 치료해주고 옷도 새로 사서 입혀준 은인은 바로 나 민느.파.곤크 라구!" 소녀는 놀랍게도 용병단의 일원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편한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지만 그 위에 기본적인 방어구를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100% 실전용 단검까지 매여 있었다. 민느는 상당한 자부심을 얼굴 가득 담으며 소년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속한 용병단 '곤크'는 대 상인과 대 귀족이 주 고객인 실력높고 유명한 곳이었다.그런 용병단의 당당한 '파'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과 자신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감이던 열등감이던 소년에게는 상관이 없는 듯했다.소년이 아무말 없이 세수만 하자 내심 어떤 반응을 기대했던 민느는 당혹감을 숨기며 주절이 말을 늘여 놓았다. "너 말이야,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용병단에도 계급이 5개가 존재한다구. 제 5계급은 '차'로 견습생에게 주어지는 건데, '차'는 언제 짤릴지 모르는 임시직이라구. 거의 잡일을 하지. 제 4계급은 '타'로 일단은 고정직이 된 자에게 주어지는 건데 정식 멤버 중에선 하급으로 부하는 '차'의 견습생밖에 못 갖는 좀 처량한 계급이지.그리고 제 3계급 바로 '파'로 이몸이 속한 계급이지.'파'는 정규 부하를 거느릴수있다구. 그다은 제 2계급은 '하'로......이봐!!내말 듣고 있는 거야!!" 세수를 끝낸 그가 옆에 있는 수건을 들어 물기를 닦아 내고 잇는 모습은 말하고 있던 이로 하여금 무한한 모욕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너 말이야!! 세상사를 잘 아는 이 몸이 충고 하건데, 그런 태도로는 언제 칼맞아 죽을 지 알수없다구! 남이 열심히 말하면 뭐라 대꾸가 있던가! 아니면 열심히 듣는 척이라도 하던가! 게다가 난 아직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이름도 듣지......" 손가락을 하나씩 펴들며 짐심으로 진지하게 충고하고 있던 민느는 마침내 자신의 깊은 인내와 관용이 바닥을 드러냈음을 알수 있었다. "이자식!!!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 데 어딜 가는 거야!!!" 소년은 묵묵히 그녀를 지나 문을 열고 나가 버린것이다. ==========================================================================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그럼.
번  호 : 17652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28일 13:50 
등록자 : KREUZ1           조  회 : 31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0/12/3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51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내참. 민느 녀석.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것도 생판 모르는 꼬마녀석 때문에 말이야." "그러게 말이다.우리야 '타'니까 별수 없이 따라야 한다쳐도. 이봐, 미클! 넌 왜 꼼짝 못 하는 거야, 죄졌어?" 불만을 잔뜩 늘여 놓던 '타' 계급의 여러 용병들이 그 소리에 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집중 시켰다. 듬직한 근육질의 몸을 지녔으나 결코 둔해보이지 않는 사내였다. 사려심깊어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잠깐 커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입을 열려는 순간,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귀에 더할나위없는 친숙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너 말이야! 아~악! 이 소리도 이젠 지긋지긋해!! 이름을 대, 이름! 오~? 좋아 끝까지 안 대겠단 말이지? 그럼 내 맘대로 불러버리겠어!지금부터 널 꼬마로 부르겠어! 진짜라구!" 일층 테이블에 앉아 있던 10 여명의 용병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중 세명은 고개까지 설레설레 저음으로써 그녀와의 평소 돈독한 관계를 내보였 다. 10 여명의 시선집중 속에서 계단에 등장한 것은 자신들을 골탕먹게한 원흉인 남자아이였다. 이마를 감싼 검정색 천의 매듭이 한쪽 귀쪽으로 나있어 얼굴의 한쪽이 잘 안보이 지만 작은 체구에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적으로 창백하게 보이는 하얀 피부로도 충분히 연약해 보이는, 소년의 눈동자는 예상외로 차가워 보였다. 주홍색의 특이한 눈동자는 여러사람의, 그것도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의 시선집중 속에서도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회색의 넉넉한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어 더욱 왜소해 보이는 소년은 험악한 인상의 그들을 헤쳐나가 구석의 비어있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용병들의 시선은 다시 계단에 등장한 소녀에게로 쏠렸다. 씩씩애며 소년을 쫓아온 소녀는 동료들의 시선에 성깔을 부리며 고함을 질렀다. "뭘 봐! 뭐 구경 났어!!!" 흩어지는 시선들을 한번 쏘아 본 후, 민느는 소년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민느."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는 어쩔수 없는 지 그녀의 어깨가 약간 쳐졌다. "와 앉아라." "......네." 투덜거리며 다가와 앉는 모습을 지켜 보던 미클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쩔 생각이냐?" "네?" 딴청을 부리는 그녀의 천연덕스런 얼굴을 변함없는 얼굴로 마주한 미글은 다시 물었다. "어쩔 생각이냐?" "........" 그냥 넘어가기는 틀린 분위기에 민느는 그냥 침묵했다. "네가 어린아이를 그것도 다친채로 숲에 둘수 없다고 해서 데리곤 왔다. 그래서? 이제는 상처도 낫고 숲도 아니다. 어쩔 생각이지?" ".........." "네가 동정심이 많은 건 잘 알고 있지만 우린 '곤크'다. 약한 자는 '차'에도 들어 올수도 없을 뿐더러 넣어줄 생각도 없다." "안다구요, 뭐." "그럼 저 아이가 정신을 차린 것에서 끝내라." 차분하지만 단호한 그의 태도에 민느는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하지만......" "민느." 민느는 침묵을 고수했고 미글을 대답을 요구하면서 그들사이에 침묵이 깔렸다. 그 사이로 씩씩한 종업원의 음성이 흘러왔다. "주문하시 겠습니까?" 민느는 고개를 돌려 메뉴판을 뒤젓이는 소년을 봤다. 소년은 손짓으로 이것 저것을 집어보이고 있었다. 민느는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 끝까지 말을 안하네." 미글을 좀 더 수준 높을 관점에서 중얼거렸다. "저 아이 돈이 있던가?" 그 말에 민느는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나의 예리한 여자의 직감과 치료할때의 수색에 의하면 없어." '타'의 두사람은 마시던 맥주를 내뿜으며 웃어버렸고 민느는 눈을 부라리며 둘의 발목을 걷어찼다. "민느........" 한숨을 쉬듯 이름을 부른 미글은 말을 돌리지 말라는 메세지를 눈에 모아 실어 보냈고, 민느는 다시 딴청을 했다. "미글.카 야 소용 없단다.사랑에 빠진 여인의 앞을 가로 막는 이 누구더냐." "아~아~ 장애와 시련과 고난은 여인의 여린 가슴을 강철같게 하도다." "강철같은 의지로 그녀는 오직 앞으로 나아 갈...." 둘은 다시 발목을 붙잡고 낑낑댔고 붉어진 얼굴로 민느는 소년쪽의 기색을 살폈다. 그리고 미글은 .........한숨을 쉬었다. '타'의 두 사람은 아픔이 가시자 다시 놀려댔다. "'계속되는 전설' 유르시안과 페르노크의 사랑또한 그랬다." "오호라~ 차원과 공간과 성조차 뛰어 넘은 그들의 사랑앞에 맹세하건데 여인 은...." 학습능력이 없는 두사람에게 주어진 길은 오직 발목을 붙잡고 끙끙대는 것뿐. "미글~날 사랑하는 건 알지만 어쩌겠어. 난 이제 15살인걸. 여리고 섬세한 소녀의 마음을 미글의 둔탁함으로 어찌 알겠냐만은 일단은 젊은 애가 좋은 것은 만인의 진리. 미글의 일편단심 나의 대한 사랑~~알지만 정말루 미안해. 나도 나의 마음을 어쩔......" "일단은 데리고 가보지." 이마를 집으며 잔뜩 인상을 쓰는 대신에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미글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민느는 만세를 외치며 소년에게로 달려갔다. 미글에게 한마디의 말을 쏟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이루어 주겠다니 고마워! 미글 너무 가슴 아파하지마. 꼭 좋은 사람 만날거야." 킬킬대는 부하를 보며 미글도 그냥 웃어 버렸다. ========================================================================== ===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그럼
번  호 : 17653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28일 13:50 
등록자 : KREUZ1           조  회 : 27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0/12/3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84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 "꼬마야.꼬마야.꼬마야.꼬마야.꼬마야.꼬마야.꼬마야." 리듬감까지 살린 체 민느는 식사를 하는 소년의 앞자리에 앉아서 쉴새 없이 그를 불러대고 있었다. 소년은 묵묵히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셨다. 그때까지도 민느는 계속해서 그를 불러 댔다. 가끔씩 물까지 마셔 가면서... 소년은 디저트로 나온 과일 하나를 집어들어 민느에게 던져 주었다. 민느는 반색하면서 받아들고는 물었다. "나 주는 거야?" 소년은 앞의 과일 하나를 더 집어들어 베어 먹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 없는 지 민느는 활짝 웃으며 한입 한입 아껴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역시 애정이 담긴 음식은 뭐든 맛는 법이라니까!" 민느의 원맨쇼를 지켜보던 '타'의 한 이가 반문했다. "애정?" 말끝을 교묘히 비틀면서 능글 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를 보며 민느는 특유의 당당함으로 대답했다. "둔하고 성질만 드러운 중년의 노.총.각.씨.께서 이 섬세하고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하겠어! 이 사과 하나에 들어가는 자연과 정령이 쏟은 사랑! 하나하나 수확한 농부의 정성! 이 상에 올려 놓을 때까지 썩지 말라고 들였을 이 집 주인장의 배려! 이 모든것이 이소녀의 여린 마음에 진한 감격을 주어........" 몇마디 더 남은 듯 했으나 소년이 일어나자 얼른 그 뒤를 쫓느라 아쉽게도 그쯤 해두어야 했다. 용병들에게서 서서히 소년이 구세주로 떠오르고 있음은 당연지사였다. 소년은 계산대로가 장부에 후불이라고 적어 놓았다. 뒤따라와 그것을 본 민느는 마치 엄청난 사실을 안것처럼 박수라는 모션과 더불어 한마디 했다. "역시 돈이 없구나!" 그러자 앞에 서있던 여관 주인의 눈매가 심상치 않아졌다. "짜식! 없으면 없다고 말해! 이 누님이 내주지." 소녀를 싹 무시하고 계단 쪽으로 향하는 그를 도중에 호출하는 이가 있었다. "잠깐 이리와 앉지." 소년은 무심한 얼굴로 미글을 쳐다보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난 현재 이 부그룹의 대장인 미글.카.곤크 라 한다." "참! 아까 설명하다 말았지? 제 1계급이 '카' 나같은 '파'도 부하로 쓸수있는 계급이라구. 간부라고나 할까? 그럴다고 쫄건 없어.이 사람은 싸움 빼곤 건질 것 없는 둔한 아저씨니까 말이야." "민느.역시 곤크에는 강한사람만 필요한 것 같지?" "하지만 말야 싸움은 정말 잘해. 기사 해볼 생각없냐는 제안도 많이 받는 다구." "이름이 뭐지?" 진땀을 흘리며 좋은 점을 손꼽아 대려는 민느를 말리며 물었다. 소년은 앞에 놓여진 물을 테이블에 조금 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테이블에 글씨를 썼다. - 아르 - "너......?" 그의 뜻밖의 행동에 모두 할말을 찾지 못했다. 민느는 잽싸게 카운터에 놓여진 메모지와 펜을 들고 왔고 미글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을......?" 소년은 태년히 고개를 끄떡였다. 미글을 헛기침을 몇번하더니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민느녀석이 널 맘에 들어 하는 것도 있고...... 이이렇게 알게 된것도 인연이고....해서 일단은 곤크에 데려갈까하고 우리들끼리 정해 봤다.그 꼴로 외진 숲에 쓰러져 있었던로 봐서는 고아인걸로..... 생각 되는 데......?" 끄떡이는 소년, 아르를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네가 하기 나름이지만 '차'부터 시작해서 용병단에 들어올수도 있다. 네가 하는 만큼의 보수도 내려 질테고 검술도 배울수 있을거다. 같이 가겠니?" "뭐가 '같이 가겠니' 야! 당연히 같이 가야지!" 아르가 거절하세라 잽싸게 끼어드는 민느를 보며 웃어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미글을 앞에 두고 나머지 멤버들을 허리가 끊어지게 웃었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소년는 여전히 약간은 차가워 보이는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 이었다. 민느는 좀 불안한 안색으로 미글과 아르를 번갈아 쳐다 볼뿐이었다. "저기 아르........" 계속 그녀를 무시했던 아르가 처음으로 그녀의 '말'에 반응보였다. 그 신비한, 아니 기묘한 주홍빛 눈동자를 그녀에게로 돌린 것이다. 민느는 메모지와 펜을 내밀며 물었다. "어디 가야 할 곳이라도 있는 거야? 아님 같이가자. '곤크'는 좋은 곳이야. 노력만 하면 나처럼 '파' 도 될수있고........ 물론 '차' 부터 시작해야 겠지만 말야.....저기.... 하지만 보수는 '차'도 제법 나오고...또......" 아르는 그녀가 내미는 메모지를 가만히 쳐다 보더니 이내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펜을 들어 뭐라고 쓰더니 미글에게 내밀었다. - 곤크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 이름 정도만 쓸수 있을 줄 알았던 소년이 뜻밖에 달필로 글을 써내리자 놀라 대답을 못하고 있는 미글을 대신해서 민느가 끼어들었다. "곤크는 '푸르름의 고향' 을 지나서 욤의 수도에 못 미치는 곳에 있어. '푸르름의 고향' 이 바로 요앞이니까 별로 먼것도 아니고....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쓰러져있던 곳도 '푸르름의 고향'의 끄트머리였네? 우린 의뢰를 와수하고 '푸르름의 고향'의 중심지를 피해 끝쪽을 좀 돌고 있었거든. 중심지는 '성지'이니까 말이야." 아르는 곰곰히 생각하는 눈치더니 곧 팬을 다시 들었다. - 잘 부탁드립니다. - 펜을 논 그는 고개를 깊숙히 숙여 보임으로써 마무리를 했다. 미글을 기쁨에 날뛰는 민느를 무시 한체 다른이들에게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됐는 데.....?" 예상 외로 다들 쌍수 들고 환영했다. "민느를 제어 할수있는 분이라면야!" "돈을 들여서라도 스카웃해야죠!" 유쾌하게 맥주를 들이키는 그들을 변함없는 태도로 훑어 보는 아르였다.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 가. 보호해야할 '짐덩이' 아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전혀 도움은 안됐지만, 일단은 보답을 해야겠지.' ==========================================================================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그럼.
번  호 : 17654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28일 13:51 
등록자 : KREUZ1           조  회 : 28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70 페르노크는 욤제국의 공작가 자제이다. [오르세만.페르노크.마.카르민] 대상인조차 받지못하는 성, 오르세만 장자에게 주어지는 라,차남에게 주어지는 마. 가주의 계승권이 차남까지 적용 되는 걸 고려하면 그는 결코 괄시받을 입장이 아니였다. 게다가 대 귀족, 즉 공작가만이 쓸수있는 '카르민' '카르민'은 하위지만 왕위 계승권까지 부여 받는 치고 귀족을 친하는 말. 페르노크는 그런 남자였다. 풀네임만으로도 자신의 위용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런 남자였다. 평민 뿐만아니라 왠만한 대상인, 귀족 조차 감히 맞대면 할수없는 그런 위치의 그는 당당히 존재 했다. -페르노크의 영원한 벗 페르노크의 영원한 조언자 정보길드의 창시자 요크노민.마.크리터의 회고록중에서 "아~르~!" '푸르름의 고향'. 전 대륙을 통털어 가장 울창한 숲. 성지 쪽으로 가지만 않는 다면 크게 위험할 것은 없는 숲이었다. 물론 그 평가는 용병단이나 기사, 모험가 사이에서 도는 것으로 보통의 평민들에게는 나름대로 위험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일행은 용병단. 그것도 실력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곤크'의 일행이 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흉폭한 적은 어쩌다 나오는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바로, 어떤 말을 하던 몇배로 늘려서 대꾸하고 간간히 폭력이라 불리는 고도의 스킨쉽까지 마지 않는 부대장 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에게도 천적(?)이 드디어 나타났다. 흑발의 단정한 단발을 한 기묘한 주홍빛 눈동자의 소년. 그들 사이에서는 '구세주'로 통하는 그가 나타난 것이다. 이르와 함께한지 겨우 이틀이 지났으나 그의 인기는 벌써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르~!!" 민느의 음성이 더욱 커지자 마침내 아르가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당황한 것은 민느였다.할말은 이미 그를 부르면서 뇌리에서 떠나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타이밍을 놓치면 아르가 다시 자기쪽으로 돌아볼 확률이 극히 적어진다는 것을 민느는 알았다. "쉬는 시간에 화살 쏘는 법 가르쳐 줄까?" 가로 젓는 아르를 보며 민느는 다급히 말을 늘여 놓았다. "앞으로의 길이 이렇게 순조로울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짐짝 취급 받지 않으려면 하나라도 알아 뇌야 한다구!!" 아르는 가만히 민느를 쳐다 보다가 앞쪽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아~르~!" 이런식으로 민느가 아르에게만 신경을 써 다른 용병들에겐 보다 쾌적한 귀대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편안한 얼굴의 부하들을 보며 미글은 자신의 표정 또한 저러리라는 걸을 쉽게 짐작 할 수 있었다.미글은 묵묵히 말을 타고 오는 소년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주변에 말 같은 것이 없는 거나 왜소한 체구로 보나 나이로 보나 당연히 탈 줄 모를 것이라 지레 짐작한 그였다. 그런 아이가 마굿간의 말을 산책 삼아 타고 나갔다 왔을 때의 황당함이란..... 결국 민느의 강요에 의해서 아르에게 말을 사주고 만 미글이었다. 얼마안가 상당한 보람을 느꼈지만 말이다. 이 얼마나 쾌적한 여행길인가. 편안함에 취해 있던 미글은 순간 흠짓하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민느였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좀 쉬었다 가는 게 좋지 않을 까요, 미글.카.곤크 대장~" 미글은 순간 무의식적으로 아르를 한번 살펴 봤다. 지친 기색이 전혀 없는 그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답했다. "아르도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 데? 게다가 조금만 더 가면 마을에 ......" "어머, 그렇게 까지 둔하시니 버림을 받는 거라구요, 미글.카! 이 연약한 소.녀.가 조금 쉬자고 하는 데!! 게다가 감수성이 한창 민감할 때인 소.녀.가 아름다운 숲에서 쉬자고 하면 척하고 알아 들어야죠! 아~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이 섬세한 소녀는 대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취해 노닐고 싶거 늘 그깟 몇분 쉬는 게 그렇게 싫단 말이죠! 미글.카.곤크~~?" 민느의 마수에서 벗어 나고푼 미글은 쥐에 도움의 메세지를 강력하게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외면하는 동료들의 진한 우애를 몸으로 체험한 미글은 진한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떨수 밖에 없었다.결국 잠깐의 휴식을 정한 미글은 진한 우애를 맛 보게 해준 동료들의 곁으로 갔고 목적 달성한 민느는 쨉싸게 짐속에서 활을 꺼내 아르에게 갔다. "자~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좋더라~! 약.속.대로 이 은.인.이 활을 가르쳐 줄께, 아르^^" 결코 약속한 적이 없음은 아르도 알고 민느도 알고 미글도 알고 여타 용병들도 알건만 뻔뻔하게 약속을 운운하는 척 하면서 지난 은혜(?)를 들먹이는 민느였다. 하지만 지난 은혜(?)던 복수던 아르는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 태도로 자신의 손에 민느가 떨군 활을 가만히 쳐다만 봤다.민느는 그런 아르를 일단 내버려두고 자기가 연습용으로 쓰는 과녁이 그려진 천을 얼마 떨어진 나무에 고정 시켰다. "자! 아르 일단은 쏴봐 내가 자세 교정 시켜 줄테니까!" 아르의 곁으로 돌아온 민느가 재촉했으나 그는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미글이 나섰다. "민느, 일단 기본 자세를 가르쳐 줘야 할거 아니냐." "아차!" 민느는 단숨에 아르의 손에서 활을 채가 화살을 한대 끼어 쏘았다. "자! 잘 봤지?" 아르는 관심없다는 얼굴로 민느를 보고 있을 뿐이 었다. "한번 해봐라." 거의 중앙에 밖힌 민느의 화살을 평가하던 미글은 권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빨리 마을로 들어가고 싶은게 그의 바램이었지만 민느의 잔소리가 두렵기도 했고 자기가 먼저 가자고 권한 이상 아르를 어느 정도까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아르가 요번 기회에 활쏘는 법을 어느정도 마스터했으면 하는 것도 있었다. 아르는 그런 그이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귀찮다는 듯 무성의하게 화살을 재기 시작했다. 과녁을 향해 활을 겨냥하는 모습이 제법 잡혀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약간의 기대를 품던 일행은 전혀 상관없는 쪽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화살을 보아야만 했다. 황당해 하는 일행을 보면서도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아르는 활을 민느에게 돌려주었다. 민느는 황급히 그를 위로 해주었다. "괜찮아 처음엔 다 그렇지 뭐. 마을에 가서 더 연습하자! 자세가 잡혀있으니까 좀만 연습하면 될거야." 당연히 침묵하는 아르를 선두로 모두 말에 올라탔다. "그만 가자." 미글의 휴식 종료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일행은 출발했다. 몬스터도 뭐도 등장하지 않았던 휴식시간이었음에도 어딘지 고통스러워하는 대다수의 용병들은 무시하기로 하자. 일행이 떠나고 얼마 안 지난 숲속. 아르가 쏘았던 화살이 떨어진 곳에서 검은 인영 두엇이 나타났다. 그중 한명은 자신의 옆구리를 스친 화살을 신경질적으로 부러뜨리고 있었다. "뭐야 저 꼬마는!!" "여간내기가 아니다." 신음을 삼키는 동료에게 약을 건네며 나직이 말하는 다른 이. "빌어먹을 저 꼬마만 아니면 벌써 물건은 접수했을 텐데......" "미글이란 대장 녀석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건만...." 약을 바르는 것을 도와준 이가 결론을 봤다. "일단 행적만 쫓고 마스터에게 알린다. 그후 일은 명령대로." "그러지."
번  호 : 17667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29일 08:52 
등록자 : KREUZ1           조  회 : 27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2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5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아르." 민느 때와는 달리 금방 반응을 보이며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테바르는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역시 민느를 의식 하는 거냐? 상대 하기 싫은거야, 관심을 끌고 싶은 거야?" 어찌 들으면 놀리는 듯한 내용이었지만 테바르의 음성과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아르는 아무런 변화 없이 펜을 들어 답했다. -무슨 볼 일이십니까?- 자신의 질문이 무시 당했음에도 단순한 테바르는 원래의 용무를 기억해 냄으로써 화제를 스스로 돌려 버렸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 마을에서 하루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나설거다.내일 저녁쯤이면 '곤크'에 도착 할거야. 그래서 우리에게 쾌적한 여행길을 선사해준 너에게 우리가 한턱 내기로 했다. 가자!" 아르는 거절하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이미 그의 몸은 테바르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었다. 아르는 내심 쓴 웃음을 지었으나 내일이 마지막이니 하고 그냥 끌려(?) 갔다. 테바르는 어느 주점에 당도하자 여짓껏의 조심스럼을 떨치듯 문을 거칠게 열며 주인공의 등장을 알렸다. 용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반겼다. "민느 몰래 빼내느라 내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지 몸을 부르르 떨던 테바르는 멀뚱히 서 있는 아르를 중앙 테이블에 끌고가 앉혔다. "형님은 그래도 '타' 니까 대충 넘어 갈수나 있지 저흰 '차' 라구요. 민느.파 에게 걸리면 ......으~윽." 그건 그렇다며 낄낄 대더니 아르에게 큰 잔을 건네 주고는 가득히 맥주를 따라주는 테바르였다. 그 잔을 다 비우면 생긴 일을 예견하고 있는 지 아르는 한모금만 마시고 내려 놓았다. 다음 타번이었던 이가 불평했지만 아직 어린애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가 게 됐다. 곤주레 만주레 퍼 부우는 용병들을 물끄러미 보던 아르는 그 중에 미글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역시 대장이라 그런가.....물건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군. 민느도 부 대장이 니...' 연상작용으로 아까의 질문을 떠 올려 보는 아르였다. '민느가 날 부르는 건 쓸데 없는 일이 대부분이니까 무시 하는 것 뿐인데...' 테바르를 잠깐 쳐다본 아르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귀찮군.'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비우는 아르를 이미 취해버린 용병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주점에서 나와 한참을 걷던 아르는 한적한 뒷 골목길에 도착하자 민느가 빌려준 단검 쪽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듯이 검은 인영 다섯이 나타났다. "꼬마가 제법이구나. 우리를 눈치 채다니." "마스터께서 방해꾼은 용서하지 말라 명하셨다." "우리의 판단으론 네 녀석이 가장 큰 방해꾼! 얌전히 물러난다면 우리도 굳이 해하진 않겠다." 숲의 두 인영이 보고한 후 속히 내려진 결론인 듯 싶었다. 아르의 냉정한 주홍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더욱 차갑게 비쳤다. 아르의 몸이 잠깐 흐려졌다 싶더니만 검은 인영 중 맨 처음에 말을 꺼냈던 이의 뒤에서 나타났다.언제 뽑았는 지 단검을 그의 목쪽으로 그었으나 다른 이가 동료를 구하려 빠르게 옆으로 치고 들어와 실패해버렸다. 하지만 한치의 동요도 없이 몸을 한바퀴 돌려 뒤에 있는 이의 오른 팔을 가차없이 그었고 공격을 시도 할수 없게 된 그는 쨉싸게 몸을 빼어 상처를 살폈다.잘만 조치 한다면 완치 할수는 있겠지만 당장의 사용은 불가능 함을 한눈에 알아차린 그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도움이 못 되느니 방해는 말아라' 라는 철칙을 따른 것이다. 그동안 아르는 여전히 놀라운 빠르기로 다른이 의 급소를 노렸다. 짧은 단검만으로 간격의 불리함을 무시한체 아르는 종횡무진으로 네명의 적을 유린했다. 그가 의도한 바인지, 천운인지 아직까지 사상자는 없었다. 결국 앞의 한명처럼 하나 둘씩 치명타를 입고 은신해 버렸고 그 장소에는 왜소한 체구의 소년과 바닥 가득 고여있는 피의 웅덩이만이 남았다. 아르는 한숨을 쉬더니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곳에서 벗어났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프로' 와의 싸움이었지에 주위에서 이 소동을 눈치 챈 이는 없는 듯 했다. '역시.....귀찮군.' 몸에 묻은 피를 살펴본 아르는 또 낮은 한숨을 쉬었다. 목숨을 빼앗지 않고 적을 소탕하는 것이란 매우 피곤하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후에 괜한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목숨은 빼앗진 않았지만 그것도 그것 대로 귀찮은 일임은 틀림없다.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다시 덤비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귀찮은 일투성이다, 라고 속으로 투덜대보는 아르였다. 숲에서 벗어날때 보았던 시냇가를 향하는 그의 귀에 묘한 노랫 소리가 들려왔다. 전 들었죠, 그들의 여행을. 전 믿었죠, 그들의 사랑을. 전 느꼈죠, 그들의 아픔을. 그대는 알고 있나요, '계속되는 전설' 을. 전 불러요, 슬프도록 아름다운 초월한 그들의 사랑. 전 불러요, 아직 끝나지 않은 그들의 사랑. 전 불러요, 언젠가는 맺어질 그들의 사랑. 전 불러요, 언젠가는 영원할 그들의 모습을. 아르는 약간의 슬픔을 담은 음성을 피해 좀 더 상류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음성의 주인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닥쳐오는 머리의 고통 때문에 움직일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르가 정신을 차린것은 어느새 사라진 음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마치 '그 꿈' 을 꾸고난 뒤처럼 온몸을 덥치는 추위. 가득 흘린 땀으로 생기는 추위가 그의 이성을 완전히 돌아오게 했다. 아르는 조심스레 음성이 들려오던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르는 비틀거리며 물가에 다가가 엎어지더니 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물 속의 그의 모습은 점차 파동 속에서 일그러 졌다. 물 밖의 그가 흘리는 따스한 물방울에 의한 파동 속에서. ========================================================================== 휴~ 하루에 꼭 하나씩 올려 놓겠다고 한 결심이 무너질뻔 한 날이었습니다. 겨우 올리고 보니 그래도 써놓으니 마음이 편하군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럼.
번  호 : 17668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29일 08:52 
등록자 : KREUZ1           조  회 : 25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2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66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화창한 날. 너무나 화창한 날. 신관들은 신의 축복이라 기도한다. 마법사들은 마나의 흐름이 기여한다며 연구한다. 연금술사들은 보기 힘든 별들을 보며 기록한다. 음유시인들은 자연의 선물이라 노래한다. 모두에게 미소를 주는 화창한 날. 정말로 보기 드물게 화창한 그날 밤, 바로 그날 밤. "으으악~!!!" 욤제국이 자랑하는 명문 학원. 욤제국의 초대 황제 욤. 이므르. 라. 제보스라민 께서 설립하셨다는 '이므르' 그 '이므르'의 고요하기만 했던 밤의 기숙사에서 터져나온 비명성. "신관을! 어서 신관을!!" 황급히 뛰어나온 기숙사 사감은 급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상징하듯 언제나 점잖게 걷던 신관이 보기 흉할정도로 급히 뛰어왔다. 모두 부산을 떠는 방 안은 매우 화려했다. 이미 초대 황제 즉, 설립자의 고귀했던 이상은 사라져버린 이곳에서 방안의 화려함이란 곧 그 주인의 배경, 신분이 높음을 뜻했다. 그래서 였을까? 이들이 저렇게까지 당황해 하는 것은. 지친 안색을 한 신관이 방안에서 나왔다. 신관의 정신 집중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밖으로 쫓겨나야 했던 사감과 여타 선생님들, 기숙사장은 그에게 몰려 들었다. "페,페르노크 군은 어떻습니까, 휴로버 신관님?" 휴로버 신관은 지쳤으나 안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러자 모두들 안도의 한숨과 탄성을 내질렀다. "지금은 혼수 상태이나 곧 정신을 차리실겁니다. 그런데 어쩌다......?" 침묵하는 이들을 둘러보던 휴로버 신관은 고개를 설레 설레 젓더니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거군요. 이것만은 알아 주십시요. 중재와 치유의 신께 맹세컨데 소년의 모든 상처를 치유시킬겁니다. 육체적 상처던, 정신적 상처던." 남은 이들은 계속 침묵할 뿐 이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모든것의 시작임을 모르고........... 내가 눈을 뜨고 처음 본것은 TV에서나 보던 스위트 룸 같은 곳이었다. "여기는......?" 내가 모르는 친적 중에 대재벌이라도 있었나.....? 이런 헛소리를 해대며 몸을 일으키던 나는 예상치 못했던 고통에 소리없는 비명을 질러야만 햇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고통의 근원을 찾아 봤다. 그 근원은 바로 나의 왼쪽 손목. 붕대로 감아져 있는 그 손을 본 순간 난 순간 흠짓해야만 했다. 내 손목보다 조금 더 가늘고 긴 손목. 검도를 하느라 흉터투성이었던 내손은 너무나 하야고 매끄러운 손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내 등뒤로 느껴지는 이물질은....날 깊은 충격에 빠뜨렸다. 내머리도 긴 편이었지만 허리에까지 느껴지는 이 감촉.... 오른 손으로 조심스레 눈앞으로 가져다 본 머리카락은 지금의 내 피부처럼 새하얀, 그러면서도 눈부신 은발이었다! 갑자기 닥쳐온 현기증에 침대에 도로 누어버린 나는 상황을 추리해보기로 했다. 일단 나는 분명히 오늘 전국 여자 고교 검도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학교에 트로피를 갖다 주고.......계단! 계단 을 내려오던 중 누가 발을 걸어서 떨어 졌는 데......분명히 머리를 부딧쳤구....... 이생각까지 도달했을 때 머리를 한번 만져본 나는 부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난 좀더 조목조목 따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곳은 어디인가?.........어느 호텔의 스위트 룸이다......일단 낙찰. 내손은 왜 이리 고와 졌는가?......요새는 로션도 좋은 게 많이 나오고...또.... ....일단 보류하자. 내 머리는 왜 하애졌는 가?......백발마녀처럼 큰 쇼크에 의해...... 잠깐 보류하자. 이래저래 패닉 상태가 되버린 나는 일단은 씻고 나가서 알아보자는 쪽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 때문에 난.....나는 ...보았다. 욕조옆, 전신거울에 비치는 내모습을....!!! "아~아~악~!!!!" 주자앉아 나는 난생처음으로 경악성을 질러봤다. 그리고 잠시후 벌컥 열리는 문. 천천히 올려 보자 한남자...라기보다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애가 서있었다. 제법 걱정스런 얼굴로. 하지만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진실을 알려줄 이 였다. 난 물었다. "나....난 누구지?" 그 애는 한참이나 아무말없이 서 있다가 더듬거리며 답해 주었다. 비록 내가 원한 대답은 아니였지만........ "당신은 페르노크.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 입니다. 욤제국 제일의 공작가 자제분이시구요, 차남이시죠." .....내가 원한 대답은 아니였지만......... 기숙사장 앤스크. 파크다. 라. 제모아 는 언제나 차분하고 냉정하며 과묵한 이로 잘 알려져있었다. 중앙의 거물들도 그를 눈여겨 볼 만큼 그의 능력은 탁월했고 그의 출생 또한 휼륭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당황해보는 건 이번이 생전 처음일것이다. 그의 앞에 있는 아름다운 은발의 소년은 출신에서만큼은 그를 뛰어넘는 '카르민' 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소심하고 숫기없는 그의 모습은 그에게 관심 밖의 인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파크다가 알고 았는 페르노크의 모습이란 그 뿐이었지만 사실 그것 만큼 페르노크란 사람을 잘 설명해놓은 것은 없었다. 그런 페르노크가 처음의 발악(?)만 빼고는 너무나 무심한 아니, 차가운 얼굴로 발코디에 서있는 모습은 파크다를 당황케하기에는 충분했다. 페르노크는 외모상으로만 봤을 때는 한마디로 아름다웠다. 달빛을 실로 자아낸 듯한 은발에 우유빛 피부, 진초록 눈동자와 대조적으로 붉은 입술.사실 개인적으로 페르노크의 겁먹은 눈동자, 의지하려는 눈동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파크다였다. 헌데 지금 그 눈동자가 완전히 변해서 그의 눈앞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차.남.이다 이거지.차.남. 둘째 아.들. ,아.들.이다 이거지...!!!' 이를 한번 물어보더니 성이 안풀리는 지 양 주먹으로 발코디의 난간을 내리쳐보는 페르노크였다. '제길,이게...이게 어떻게 된거야!!!!" "....크....페르노크!" 멍하니 저 쪽 하늘만 쳐다보던 페르노크는 그제서야 파크다에게 고개를 돌렸다. 파크다는 그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보고 순간 흠짓하다가 그의 왼쪽 손목을 조심스레 들었다. 상처가 터졌는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페르노크,신관님께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에." '신관? 의사 같은 건가? 상처를 보고 가자는 걸 보면.....' 파크다는 다시 한번 놀랄수 밖에 없었다. 숫기 없는 페르노크는 남이 흘리는 피 한방울만 봐도 토악질을 해댔던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손목을 타고 피가 흐르고 있는 데도 놀라기는 커녕 아픔조차 내보이지 않다니....!! 붕대를 벗겨내고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대충 지혈한 파크다는 말없이 앞장 섰다. 페르노크는 그의 뒤를 따르면서 물었다. "저...제 나이는 몇인가요?" ".....18살이십니다." 순간 속으로 그를 동정해보는 파크다였다. "그럼 저기 .....성함이....?" 그제서야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파크다는 정식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원래는 페르노크도 알고 있었을 자신의 신상을 말이다. "전 앤스크. 파크다. 라. 제모아 라고 합니다. '이므르' 학원의 기숙사장을 맡고 있지요. 파크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페르노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학생이 아닌가요?" "아니요." 파크다는 참 오랫만에 웃는다 라는 생각을 하며 그를 돌아봤다. "전 여기 제 6 학기에 재학 중이죠. 당신은 이곳의 제 5학기이십니다." 고개를 갸웃갸웃 하고 있는 페르노크에게 부연 설명의 필요성을 느끼는 파크다였다. "여기 '이므르'는 욤 제국의 초대 황제께서 건국하신 명문 학원이죠. 대부분의 귀족자제는 물론이거니와 초대황제의 거룩하신 이상을 받들어 평민들도 입학이 자유롭죠. 보통 13세에 입학을 해서 20살에 졸업을 합니다." 페르노크는 평소의 머뭇거림이 아니라 당당함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것이 왠지 파크다를 즐겁게 했다. "그럼.....저보다 선배이신 거네요? 왜 존대말을 쓰지요, 후배한테?" 질문을 잘못 선택 한것일까? 파크다는 가던 걸음도 멈추고 페르노크를 쳐다봤다. 페르노크는 발코드에서의 눈동자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차가움이 서린 그러면서도 당당한 눈빛. 파크다는 오늘따라 많이 웃는 군, 라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그런가.....상처가 덧나기 전에 신관님께 서둘러 가자고. 네 지금 상태에 관해서도 뭔가 조치를 취해주실지 모르니까......." 파크다는 뒷말을 흘리며 페르노크를 봤다. 지금의 그가 휠씬 낫다는 지금의 그라면 좋아질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평소 존경하던 휴로버 신관님이 이번만큼은 무능했으면 하고 바래 봤다. "휴로버 신관님. 파크다입니다. 페르노크과 함께 왔습니다만." "잠깐 만요......으악!!" 파크다는 놀라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문안의 풍경은...... "난장판이군요." 페르노크가 같이 들어 오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이 정답인것같군......." 온갖 책들이 여기 저기 쌓여 있는 모습은 그나마 좋았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 그책들이 한꺼번에 무너진 모습은...... "하하....뭘 그렇게 까지......페,페,페,페르노크군!?" "네?" "그 손!!" 쨉싸게 두손을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휴로버라는 신관을 어이없게 쳐다보던 페르 노크는 자신의 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다시 터졌는 지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 에구 오늘 분도 어떻게 올렸습니다. 페르노크가 누군지는 다들 아시리라 믿구요^^
번  호 : 17669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29일 08:53 
등록자 : KREUZ1           조  회 : 24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18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굉장하군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신의 팔을 살펴보며 중얼거리는 페르노크. 그런 그를 보며 파크다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지었다. "휴로버 신관님은 중재와 치유의 신을 모시는 고위 신관이시지. 매우 박식하고 신성이 막강한 분이셔." "신성?" "아아 그건 신께받은 능력을 말하는 건데 그것이 막강할수록 많은 이를 치유할수있고간혹 신성마법이라는 마법을 사용할수도 있어. 하지만 신성마법이란 것은 극히 적은 신관님만이 사용할수 있어. 흔히들 선택 받은 분들이라고 하지. 참고로 말하면 휴로버 신관님께선 그적은 분들에 속해." 열심히 설명을 듣던 페르노크는 이채를 띄며 파크다를 살펴보고 있는 휴로버를 발견했다. 하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왜 처음부터 상처를 없애지 않은 건가요?" "그건...." 자기 쪽을 힐끔 보는 파크다에게 웃어보이며 휴로버가 대답했다. "그건 맨 처음 자네를 봤을 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여서 내 신성의 반을 피 공급에 썼기 때문이라네. 기력이 딸린 거지. 사실 반시체를 살리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라서." 그렇군, 끄떡여 보이던 페르노크는 신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근데 그 모시는 신의 존칭은 어떻게 됩니까?" 눈을 치켜 뜨며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보는 휴로버를 대신해서 파크다가 대답을 하려 했으나 휴로버는 손짓으로 말리고 대꾸했다. "어찌 신의 존재에 명칭을 붙일 수있겠는 가. 우리는 그저 그분의 존재에 경배할 뿐이라네.....그런데....."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라는 눈길을 보내는 페르노크. 파크다는 결국 끼어 들어서 상황을 설명했다. "휴로버 신관님. 실은 페르노크 군은....." 상황설명하는 파크다 뒤에는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책들을 둘러 보는 페르노크가 있었다. "음....확실히 기억 상실인 것 같군.......과다 출혈의 부작용인가?" "역시......그럼 방법은?" 파크다의 예상과는 달리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휴로버였다. "방도랄게 있겠는 가. 시간에 맡길 수 밖에. 기억 상실이라는 게 얼마 안 지나 회복 되는 케이스도 있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케이스도 있고..... 최악의 경우 평생 안 돌아오는 케이스도 있지." "그렇....습니까....." 실망감보다는 안도감이 더 했다. 휴로버는 장난기를 머금으며 그런 파크다를 놀려댔다. "지금의 페르노크 군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그래?" 파크다는 오랫만에 자신의 포커페이스를 깨뜨리며 얼굴을 붉혔다. "휴로버도 예전의 그를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휴로버도 고개를 끄떡이며 자신의 책에 몰두하고 있는 귀족소년을 봤다. 그러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을 보게 되었는 데, 그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페르노크군."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는 책에 심취해 있는 페르노크의 귀에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그것에 더욱 의아함을 느끼며 좀더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파크다도 덩달아 페르노크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휴로버를 보며 물었다. "고대책 아닙니가? 마법에 관련이 있다고 판명난..... 신관님 마법에 관심 있으셨습니까?" 다시 한번 페르노크를 부른 휴로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대꾸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고대어라네, 파크다군." 그리고는 페르노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페르노크는 흠짓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원인 모를 물기가 고여 있었다. 휴로버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왜 그러는 가, 페르노크 군?" 약간 멍하니 있었던 페르노크는 완전히 정신이 든듯 했다. "아무것도..... " 작게 속삭이는 음성으로 그는 대답했다. "자네 고대어로 된 책을 그리 열심히 보는 겐가? 혹시 읽을 수있는 건가?" 그 말에 파크다도 흥미 어린 얼굴로 페르노크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대어......." 여전히 작은 그의 음성은 대답이 아닌 혼잣말임이 분명했다. "페르노크 군?" 그러자 페르노크는 고개를 맹렬히 저으며 책을 꼭 안았다. "아니요.....아니요....." 뭔가 숨기는 것이 명백했으나 고대어를 읽을 줄아는 이가 있으리가 없다는 생각에 휴로버는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책을 여기저기서 꺼내 그에게 넘겨 주었다. "내가 소지라고 있는 고대책을 이게 전부라네. 원한다면 자네에게 잠시 빌려 주겠네." 페르노크는 얼른 받아들고는 고개를 깊숙히 숙여 보였다. 그모습에 왠지 동정감을 느낀 휴로버는 덧붙여 말했다. "자네가 원한다면 마법길드에서 고대책을 구할수 있을 거라네. 일반인에게는 공개조차 꺼리는 것이지만 자네는 길드의 준 소속이니깐 말이야." 페르노크는 더 구할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번쩍들어 휴로버의 말을 경청하다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준 소속이 뭐죠?" 아차 하는 얼굴로 그의 기억상실을 기억해내며 답해주는 휴로버를 페르노크는 주시했다. "회원이기는 한데 완전히 그 곳 소속이 아니라 길드에서의 많은 권리가 없는 회원을 말하는 거지 일반적으로 실력이 떨어지지만 소질이 있는 이를 일컷는 말이지 만..." 눈을 반짝이며 듣는 페르노크를 새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파크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도 방금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듯, 동정심이 가득한 눈길에 페르노크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는 설명이 끊기자 눈을 멀뚱뜨며 휴로버와 파크다를 살펴보고 있었다. 휴로버는 한숨을 동반한 설명을 마저 해주었다. "자네같은 경우는 귀족이기에 그것도 최고 귀족이기에 특정한 집단에 소속될수 없어서 준 소속이 된거지, 실력은 충분함을 넘었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 휴로버 사라질지도 모르는 인재에게 애도를 표하며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자네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자네는 몇백년 만에 나올까 말까한 희대의 천재라 불리었었지. 마법에 한에서는 말이야." 페르노크는 경악성을 작게 내질렀다. 속으론 한마디를 처절하게 외치면서....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 많은 소감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그럼.
번  호 : 17670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29일 08:53 
등록자 : KREUZ1           조  회 : 25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5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2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페르노크는 자신이 이계에서 왔다고 언젠가 말했었다. 이 곳에 와 처음으로 생긴 친구인 너에게만 특별히 말해주는 거라고도 했다. 나는 장난인 줄만 알았다. 그런 날 보며 그는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며 웃었다. 나는 믿겠다고 했다. '믿는다' 가 아닌 '믿겠다' 고.... 그것이 유시리안과 나의 차이였다. 사랑하는 자와 좋아하는 자의 차이였다. 하지만 둘이 했던 질문은 같았다. 돌아가고 싶냐고..... 둘이 들었던 대답은 틀렸다. 비록의 둘이 물은 시간의 공백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 사랑하는 자와 좋아하는 자의 차이임을... 페르노크의 영원한 친구 페르노크의 영원한 조언자, 정보길드의 창시자. 요크노민. 마. 크리터 의 회고록 중에서. "대마법사라....." 화려한 방. 하지만 싸늘한 방 속에서 그보다 더 화려하고 더 싸늘한 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혼자 있고 싶다는 이유로 그는 방안에서 겨우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발코디의 커튼을 젖혀 나서인지 방안은 약간 추었다. 하지만 방의 주인은 그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듯 했다. "희대의 천재라고?" 가끔가다 내밷는 말은 모두 같은 말. 대마법사나 희대의 천재....... 이 두말만을 번갈아 중얼거리던 이는 왜인지 갑자기 침묵했다. 방안을 두들기는 노크소리가 얼마 후 이어졌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고 있었다. '예의가 없군.' 무시하려는 듯 하던 이는 무슨 생각에선지 이불을 걷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상한 예감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이상하군. '이 몸' 이 반응하고 있어......기분 나쁠 정도로 가슴이 뛴다.' '이 몸' 에 애인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문 쪽으로 다가가는 그의 안색은 몹시 불쾌해 보였다. 그는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낮에 헤어진 파크다 선배의 당부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네 기억상실은 두고 보기로 했어. 휴로버 신관님의 권유와 조치로 한 삼일 간 방안에서 절대 안정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방안에서 쉬도록해. 넌 기억 안 나겠지만 귀족중에서도 최고 귀족 '카르민' 이야. 만일 네 가문의 정적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암살기도가 일어날지도 몰라. 그 동안은 네 마법 때문에 섯불리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방안에 있으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도록해. '음.......어쩌지.......' 계속 망설이던 그의 눈앞에 기분 나쁜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잠갔을 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이었다! 그는 쨉싸게 뒤로 물러나 아까 봐두었던 검쪽으로 기척을 숨기며 뛰어갔다. 방안에 들어온 인영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걸어 갔다. 발소리도 숨기지 않은 체로 당당하게...... 페르노크는 검을 뽑아 빠르게 그의 뒤에 다가가 목을 겨누었다. "누구냐?" 그러나 그는 전혀 당황함 없이 아니 오리혀 황당하다는 얼굴로 페르노크를 돌아 보았다. "무슨 짓이야!?" 페르노크는 곁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당황해 하며 검을 치웠다. '이 몸의 친구 인 건가? 하지만......' 페르노크는 더욱 세차게 고동질하는 가슴을 지긋이 눌러 봤다. 그때였다. -퍽- 갑자기 목 뒤를 강타하는 손길에 무릎을 꿇으며 고통에 떨어야 했다. "네가 간이 많이 커진 모양이구나. 감히 어디다!" 불시의 습격인지라 반격도 못하고 쓰러져 버린 페르노크는 아픈 와중에도 계속 지껄여 대는 사람과 자신의 상관 관계에 대해 이것 저것 예상해 보고 있었다. '뭐야, 이 자식은?' 그와 별로 나이 차도 없어 보이는 소년은 그가 말이 없음에도 상관없이 침대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서는 거만하게 명했다. "뭐하는 거지? 어서 먹을 거나 내와!" 성질 같아서는 옆에 검도 있겠다 한바탕 했으면 좋겠지만 앞의 소년과의 상관관계를 아직 몰랐기에 그냥 따라 보기로 했다. 그냥 닥친는 데로 한바탕 했다가 형이라던가 선배라던가 신분이 더 높다던가 하면 나중이 귀찮아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까 방을 둘러 볼 때 알아 두었던 서랍장에 가서 과자와 비스킷을 바구니 체 꺼내서 소년의 앞에 갖다 놨다. 소년은 여전히 거만하게 과자를 하나 집어 먹다가 멀뚱히 서 있는 페르노크의 발목을 발로 찼다. 이미 눈치는 챘었으나 아직 상황을 파악할수 없었던 그는 그냥 맞아주었다. 그리고 발목이 꺽이면서 그의 앞에 무릎이 꿇어짐에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앞에 소년이 그가 상황을 파악할수 있는 단서를 주길 바라면서.. 거만하게 무릎을 꿇은 그를 내려보던 소년은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살 기도한 녀석치고는 건강해보인다." '자살기도?' 그가 뭘 묻던 성심껏 답해주던 파크다선배가 유일하게 피한 질문. -내가 왜 이렇게 다쳤지요?- 파크다의 당황해 하는 얼굴을 본 그가 다시는 하지 않은 질문. 그 대답을 이상한 상황에서 듣게된것이다. "죽으면 피할수 있을거라 생각한건가? 웃습군..큭큭 넌 그냥 개답게 아무생각 없이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는걸 모르는가 보군, 아직도?" '더럽군... 정말 더러워. 기분이....' 점차 불쾌해져가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그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소년는 소리내 비웃으며 그의 어깨를 발로 밟았다. "앞으로도 이제껏 만큼만 하라고, 천재 마법사 페르노크군." 그리고는 나가는 소년을 페르노크는 어떻게 할수 없었다. 닥쳐오는 거대한 역겨움과 불쾌감에 할말을 잃은 것이다. '개.....라.....' 멍하니 무릎을 꿇은채 고개를 푹숙이고 있었던 그의 어깨가 점차 들썩여지기 시작했다. "큭, 큭, 큭, 크 하하하하하 " 계속해서 웃어대던 그는 차가운 눈동자를 번쩍뜨며 침묵했다. 그는 원래 있던곳과 이곳의 유사한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어때?" 그의 방밖으로 나온 소년은 사감의 눈을 피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방엔 그외에도 두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페르노크보다 신분이 낮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방으로 돌아오자 마자 그를 기다렸던듯 두 사람이 침대에서 일어나 질문을 했다. 소년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답했다. "그대로지. 당연한거 아니야?" 그러자 안심했다는 듯이 두사람은 침대에 누웠다. "얼마나 놀랬는 지 몰라. 그 소심한 녀석이 자살을 하다니 정말이지 생각도 안 해 봤다고. 학원다니는 낙이 없어 질뻔 했다니까?" "쳇, 퍽이나 죽게 놔두겠다. 최고 귀족의 자제가 죽으면 학원에 들어오는 굵직한 돈 줄이 끊기는 건데!" "하긴 고위신관이 직접 와서 치료하는 거 봤지? 더러워서..... 누구는 견습신관한테 실습용이나 되고.....누구는....." 짝짝꿍 나불대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소년은 자신의 침대에 누었다. '그딴건 아무래도 좋아.....아무래도 좋다구.....' "난......" "응? 뭐라고 했어, 소울러?" "아니. 아무것도......" '난 그녀석 눈이 싫을 뿐이니까.....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난 주제에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눈이......' ==========================================================================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그럼.
번  호 : 17699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30일 00:02 
등록자 : KREUZ1           조  회 : 23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6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00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아~르!" 멍하니 있던 아르는 순간 놀라며 빠르게 민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 아르의 크게 커졌던 눈은 점차 제자리를 찾으며 차분히 가라 앉았다.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별일 아니라는 의사를 보이며 길을 벗어나려고 하는 말을 제자리로 몰고 왔다. 민느 보다는 한 박자 늦었지만 그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채고 있었던 미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아르에게 의아함을 표했다. 그가 감탄할정도로 아르는 일행을 잘 따라왔었다. 특별히 그를 배려하지 않았던 행군이었음에도 지친 내색없이 말을 몰고 야영을 하는 아르에게 다른 용병들도 그가 '짐덩이' 라는 인식을 지워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세주' 로써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나름대로 제 몫을 하는 아르는 용병들 사이에서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민느는 자신의 계획이 잘 풀리고 있다고 좋아할 수 있었다. 사실 아무리 '카' 의 추천이라도 실력이 없는 자나 가망이 없는 자는 들어올수 없는 곳이 '곤크' 였고 그것에 불만을 품고 있지 않았던, 아니 오리혀 자부심을 가졌던 민느로써는 연줄을 이용해 아르를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곤크' 까지 오는 동안 그의 주가를 올릴 방법을 모색했다. 일부로 그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척 다른이에게 보다 적은 관심을 보이으로써 조용한 귀대길을 원했던 동료들이 그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만 으로는 부족함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그에게 활을 가르침으로써 그 과정에서 그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당사자가 관심을 안 보이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하나 걱정하던 민느를 비웃듯 그의 주가는 의외로 뛰어 올랐다.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을 다른 이들이 높게 평가한것이다. 때문에 안심 할 수 있었던 민느는 점차 가깝게 보이는 '곤크' 를 여느 때와 같이 반갑게 맞아 들일 수 있었다. "저기가 '곤크'야, 아르!" 밝게 웃는 민느를 보며 아르는 순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무나 한순간의 일이었기에 민느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볼 수 없었다. '이제....이별이군.' 홀가분함을 느끼며 아르는 눈 앞에 보이는 '곤크' 의 위용을 감상했다. 그것은 단지 주택의 용도만으로 만들어진게 아니라는 걸 몸소 보여 주었다. 깊은 해자와 거대한 성벽은 국방의 요새를 방불케 했고 내려진 다리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여느 영지의 출입구를 방불케 했다. '곤크' 의 세력 척도를 짐작케하는 요인이라 할 수있는 심심치 않게 들락 거리는 화려한 마차들은 주위의 눈을 끌었다. 필시 '곤크' 의 주 고객인 귀족의 일부 일 것이다. 자신의 자랑거리인 '곤크' 에 무심한 아르가 관심을 보이며 살펴 보자 신이나 이것 저것 설명해 보이는 민느였다. 일부의 지식만 있다 면 누구나 추리할수 있는 것 들 뿐이지만 민느는 그냥 평범한 아이에 불과한 아르가 그런 것들을 알리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녀의 설명을 듣는 아르였기에 민느는 그저 신이 날 뿐이었다. 그런 그 둘을 무시한 체 일행들은 귀대를 알리며 들어가도 좋다는 명을 기다렸다. 아무리 같은 '곤크' 라도 갑자기 이런 규모의 무장 집단이 오면 안에서의 명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도착했다는 사실에 들떠있는 일행을 둘러보며 아르는 드디어 끝이라는 생각을 하며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움의 한숨이 아닌 듯 싶은 것이 그의 표정이 드물게 밝아 보였다. '드디어 이 짓도 끝이군.' 그때 말고도 몇 차례 더 있었던 기습속에서 일행들 몰래 그들을 처치해온 아르였다. 아무리 자기라도 무리였다는 생각을 해보며 아르는 다시 한번 목적지 를 둘러 보았다. 드디어 사람이 오며 귀대를 허용했다. 일행들은 함성을 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구경이나 할까 하는 생각에 아르도 그 안에 섞였다. '곤크'의 안은 더욱 시선을 끌어 당겼다. 흉흉한 용병들이 부산하게 움직임에도 질서가 잡혀 있음을 쉽게 알수 있었는 데, 이것은 '곤크'의 내부에 질서가 확실하게 잡혀 있음 의미했다. 작은 수도를 방불케하는 소란스러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민느는 아르의 안색을 살폈다. 아르는 별 변화 없이 있었으나 그의 모습에서 민느는 만족하기로 했다. 그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 미글. 카. 왔구만 . 예정보다 늦은 거같아?" 미글은 쓴 웃음을 지으며 민느를 가르켰다. 물론 민느 모르게 였다. 미글에게 아는 체 다가오던 이는 민느를 보자 아차하는 얼굴로 뒷 걸음 쳤다. "아! 그러고보니까, 숙소에서 뒷정리가 남아 있는 걸 깜박했네? 그럼 미글 나중에 보자구." "이봐?" 어느새 멀어진 동료를 멍하니 쳐다보던 미글은 머슥히 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마스터에게 가는 중이 었던 것이다. 늦어지면....... 민느는 신입생이 될지 모르는 아르를 안내하며 미글의 뒤를 쫏고 있었다. "아르, 이제부터 마스터를 만나게 될거야. 마스터가 모든 인사권을 쥐고 계시거든. 네 가입도 마스터가 결정하실거야. 하지만 염려마. 반드시 잘 될거야." 아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그녀의 이끌림대로 가고 있었지만, '귀찮게 됐군. 구경하겠다고 들어 오는 게 아니였는 데....' 그의 미간은 구분하지 못할정도로 약간 찡그려 졌다. "아르?" 약간 쳐지는 아르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여기 오면서 점점 멍해지는 것 같아. 어디 아픈거야?" 아르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조금 쳐졌던 거리를 메꾸었다. '시냇가에서 들었던 노래.....많이 들은 노래다. 페르노크와 유시르안의 노래.... 하지만 왜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을 까? 처음 듣는 노래도 아닌 데...... 그리고 .....그 꿈....' "아르~~!" '제길, 나답지 않아. 이렇게 멍하니 있는 건....... 그딴 건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 갑자기 아르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민느였다. "마스터, 미글. 카 입니다." "들어오게." 같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한 아르는 방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르는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창문 앞에 서서 밑을 살펴보았다. 누군가 본다면 이곳 지리를 염탐하러 온 스파이라고 오해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아르는 실제 밑의 광경에는 별 관심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타계할 방도를 구상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마스터란 사람을 만나긴 해야 할것 같은 데, 그는 어느 집단에 소속 되는 것은 싫었다. 할일도 있는 그가 여기까지 온 이 유는 단지 민느라는 아이의 도움이 되지 못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 였다. '내가 착한 성격도 아니고 그깟 일로 발목 잡히긴 싫단 말이야......' 입가에 손을 갖다대며 고민하는 그를 건드리는 이가 있었다. ========================================================================== 이건 아빠의 아이디로 제가 쓰는 거랍니다. 그런데 가르쳐 주신 수정법이 이 BBS에 올린 게시물을 고치는 방법 맞나요? 전 잘 모르겠 던 데........
번  호 : 17700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30일 00:02 
등록자 : KREUZ1           조  회 : 22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7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92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내가 착한 성격도 아니고 이런 일로 발목 잡히긴 싫단 말이야...' 입가에 손을 갖다 대며 고민 하는 그를 건드리는 이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만......누구신지요?" 묵묵히 자기만 쳐다보는 소년에게서 불쾌감을 읽은 그는 자신의 실례를 깨달았 다. "아 참! 제 소개를 먼저하는 것이 예의겠지요? 전 투만 이라고 합니다. 그럼 당신의 소개를 부탁해도 될까요?" 아르는 투만이라 달랑 이름만 밝힌 그를 쳐다보다가 대답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심각 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르를 어떻게 판단했는 지 투만은 자기의 허리에 달려 있는 검쪽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갖다 대었다. 그 모습에 아르는 눈이 뛸 정도로 불쾌 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여기서 자기마저 검에 손을 댄다면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라 고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속으로 한마디만 을 곱씹으면서. '이 짓도 여기서 끝이야. 민느양.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라고.' "왜 말을 못하는 건지 알아 봐야겠군. 평화적인 방법은 아니더라도 말이죠." '고문...인가? 제길.' 아르는 결국 이 상황을 피해보기로 했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 아르를 경계하며 지켜보는 투만. 그의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소년은 그의 눈앞 에서 뭔가의 작업을 하더니 곧 그 결실을 보여 주었다. -아르- 단 두 글자로 쓰여진 메모지. 하지만 그것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당....." 뭐라 말하려던 투만은 고개를 가로 젓더니 아르를 주시했다. "당신이 정말 벙어리라면 제가 저지른 이 무례를 꼭 사죄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칼등으로 아르의 목덜미를 치려했다. 하지만 계속 되는 기습과 노래소리, 용병단에 끌려온(?) 일 등으로 신경이 잔뜩 곤두 서있던 아르는 속으로 중얼 거리며 공격을 피했다. '여기서 끝이다.' 비록 그의 전 속도를 낸것은 아니였지만, 고수처럼 종이 한징의 차이로 피한 것도 아 니였지만 그의 몸놀림은 보통은 넘어보였다. 투만은 놀라면서도 차분히 검집 체 아르 에게 강한 공격을 넣었다. 아르는 또 그장소에서 피하는 것을 택하는 대신 창문에서 뛰어 내리는 것을 택했다. 투만은 놀라며 창문쪽으로 달려 갔다. "무모한! 여기는 4층....!!!" 그의 눈의 비친 것은 2층 창문 난간을 손으로 순간 잡으며 속도를 줄인 후, 날렵하게 착지하는 아이였다. "대... 대단하군......" 그러더니 씩 웃은 투만은 자신도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착지 방법은 달랐다. 아무것도 집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가볍게 착지하는 모습에서 보통이상의 경 지를 볼수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던 그는 어느 건물 뒤로 빠르게 사라지는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빠르군....하지만 이 곳 지형은 내가 더 잘 안단 말입니다." 중얼거리던 투만은 곧 다른 골목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정말이지.....귀찮군. 하필 이런 때에....' 열심히 뛰던 아르는 어느 한순간 멈취 섰다. 그러자 한 인영이 건물 그림자에서 솟아 나오듯 나타났다. 바로 자기에게로 달려오는 그를 보며 아르는 직감적으로 그가 실력 자임을 알았다. 바로 단검을 뽑아든 아르는 그가 휘두르는 곡도를 짧게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내버려 두면 사라질 녀석에게 정말이지!!!' 곡도를 막아선 직후에 그의 다른 팔에서 단검이 빠르게 찌르고 들어 왔다. "크윽!" 신음성을 지르며 뒤로 한번 더 물러난 아르의 왼쪽 소매가 약간 잘려나갔다. '진짜로 해야하는 건가...' 아르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하는 순간 자객은 뒤로 물러서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려웠다. 자신에게만 쏟아지는,자신만이 느낄수 있는 살기... 아르의 몸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자객은 뒤로 물러서더니 곡도를 고쳐잡고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아르의 손놀림은 분명히 느렸음에도 그의 빠른 검을 막았다. 분명히 느렸음에도 말이다. 자객은 본능적으로 아르를 팅겨내고 한껏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아르의 검은 그의 목을 향해 빠르게 오고 있었다. 죽는다!! 자객이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느꼈을 때, 갑자기 아르의 검이 멈췄다. 뿐만 아니라 뒤 로 물러 섰다. 자객은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인기척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본능 상 그림자 속으로 은신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아르는 설핏 웃었다. 그 모습을 서둘러 은신하던 자객의 눈에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띄었다. " 골목길은 여기까지는 외길이랍니다. 아르군." 투만은 자신만만하게 곧 뛰어 올 아이를 기다렸다. 하지만 늦었다. 아이가 너무 늦었 다. "이상하군...." 이곳 지리에 자신 있는 투만으로써는 아이가 지름길로 온 자신보다 먼저 여기를 지날 수 없다고 확신할수 있었다. 때문에 의아했다. 투만은 천천히 골목길 안으로 접어들었 다. 얼마나 지났을 까 ? 골목이 꺽이는 곳에서 좀 멀게 느껴지는 검성이 들려왔다. "뭐지?" 투만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그러다 멈추는 검성...... 차라리 들리는 편이 났다. 일단은 두 사람이 다 살아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마침내 골목길을 꺽은 투만의 눈 에는 단검을 뽑아들고 헉헉대는 소년이었다. "아르....군?" 그가 가르쳐준 이름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은 그렇게 불러보는 투만 이었다. 아르는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했다. 일단은 간신 히 막아 낸 것처럼 헉헉댐과 동시에 그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 신원은 마스터 방에 있는 두 사람에게 가기만 하면 밝혀 질것이다. 하지만 그건 마스터와의 대면을 뜻한다. 만에 하나라도 마스터의 눈에 든다면 꼼짝없이 '곤크' 에 들 판이다. 게다가 지금은 투만 이라는 자에게 자신의 능력의 일부분을 보여준 상태였 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운동신경이나 반사신경을 높게 평가할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용병단에 들면 빠져 나오기가 쉬울리 없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라고.' 분명 자신을 더 옭가 맬 민느였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간다면 자신을 데리고 온 이들에게 화가 갈 것이 분명했다. '이래서 사람과는 인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구...귀찮아.' "괜찮으십니까, 아르군?" 아르는 이래저래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워낙 표정이라는 게 드문 아르 여서인지 투만은 그것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뭔가 사정이 있으신 모양인데....." 뭔가 말을 꺼내려던 그는 생각을 달리 했는 지 그의 손을 잡고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다행히 상처는 없으신 모양입니다만 일단은 들어가서 이야길 하죠." 순순히 따라오는 아르의 얼굴을 힐끔 본 투만은 빙긋 웃었다.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 에 떠오은 표정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귀찮아.' ======================================================================= 어제는 첨으로 멜을 받았습니다. 근데 처음에 욕으로 시작하기에 많이 속상했죠. 끝부분에서 맨처음 욕을 한 이유가 '넘 느리다'임을 알고 감동, 감격..T.T 그분께서는 주말에 몰아 연재하는 방법을 귄해 주셨는 데.....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을 부탁 드리며... one224@hanmail.net
번  호 : 17701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30일 00:02 
등록자 : KREUZ1           조  회 : 22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16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해서 물건은 확실히 접수했고 무사히 가지고 왔습니다." "수고했네. 그 밖의 상황은 없나?"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민느는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 있습니다. 복귀 중 '푸르름의 고향' 의 '성지' 를 피해 변두리로 지나가고 있던 중 나무 밑에 기절해 있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늑대가 접근하고 있길래 쫓아버리고 살펴보니 큰 상처를 입고 있어 마을로 데리고 와 상처를 살피고 돌보던 중 그가 고아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13살 밖에 안 됐는 데 말이죠. 하지만 얼마나 멋있는 줄 몰라요. 흑 단발인데 윤기가 돌면서 찰랑거리고요, 피부도 무지 하야고 이마는 검은 색 천으로 감았는 데 왼쪽 볼과 귀를 가리면서 분위기도 있지요, 게다가 가장 포인트는 ....." 심천포로 빠지는 민느의 어깨를 잡으며 미글이 짧게 요약했다. "귀대길에 신입 후보를 만났습니다.....마스터가 만나 주셨으면 합니다만....." 재미있다는 얼굴로 민느의 흥분된 설명을 듣던이는 미글의 말에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미글 뿐만아니라 민느도 알것 같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또.....?" 고개를 끄떡이는 그를 보며 둘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민느가 제안했다. "그럼 부관님이라도 한번 만나보세요, 네?" 민느의 설명을 재미있게 들었던 부관은 쉽게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민느는 신이 나 문을 열고 나갔다. "근데....미글. 카." "에, 왜 그러십니까?" "자네 여기까지 오면서 기습을 당하진 않았는 가?" "기습.....? 아니요, 전혀." "그래....." 부관은 미심적다는 얼굴로 입가를 쓰다듬었다. "무슨......." -꽝!! 놀라 뒤돌아 보니 울쌍이 된 민느가 있었다. "왜 그러니,민느?" 민느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르가......" "아르?" 부관이 반문하자 미글은 아차 하며 설명했다. "그 아이의 이름입니다." "음...." "민느 아르가 뭐?" 민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아르가 사라졌어!!" "흠.....그랬군요. 그런데 깨보니 여관이더라?" 아르는 고개를 끄떡이며 한숨을 쉬었다. 투만은 아까의 무례를 사죄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아끼는 차를 내왔다. 자신만의 노하우로 끓인 차를 아주 맛있게 먹는 아르가 마음에 들었는 지 연신 다과를 내 놓으며 그의 이야기를 묻고 자신의 이야기도 하며 즐거워했다. 그것은 의외로 아르도 마찬가지였는 지 말하지 않던 신상까지 이야기하며 차를 맛있게 마셨다. 그의 뇌리엔 민느란 존재가 이미 한켠에 밀려 나버린 듯 했다. "예? 그럼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된 일행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다시 끄떡이는 아르. 투만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크게 웃었다. 아르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불쾌감을 느끼기보다는 쓴 웃음과 함께 차를 한모금 마시는 길을 택했다. "근데 지금은 용병단에 가입하게 될 운명이라 이거군요? 하하하하하하" 아르도 피식 웃었지만 자기 웃느냐 바쁜 투만은 보지 못했다. "나야 당신이 이 곳에 들어 온다면 좋겠지만....." 아르의 눈에서 의아함을 읽은 투만이 웃으며 덧붙였다. "여기선 제 차를 함께 즐길 만한 이가 없거든요." 아르도 그가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별다른 반응을 안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저만 좋자고 싫다는 사람 억지로 들어 오게 할수도 없고.... 가끔 차나 함께 하러 오지 않겠습니까?" 아르는 흔쾌히 고개를 끄떡 였다. 그러자 투만도 기뻐하며 한잔 더 권했고 아르도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차가 마음에 아무리 들었어도 선뜻 약속을 한다거나 마음을 연다거나 하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였다, 아르는. 하지만 투만의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말투며 배려해주는 행동, 또한 서로 너무나 대조적임에도 서로가 편한것이 아르의 마음에 든 것이다. 특히 자신이 벙어리임을 밝혔을때 다른 이처럼 동정을 하기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사실여부를 의심한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의외의 장소에서 지기를 만난 아르는 딴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 았다. 마스터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나, 자신의 부제를 눈치채고 애타게 헤맬 민느나.... "그런데 부관님." "....아, 왜그러는가?" "아까...." "아아!" "무슨 정보라도 들어 온 것입니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집단인지 정부길드조차 알아내지 못한 집단이 '그' 와 관련된 물건을 모으고 있다는 말이 들려서 말이지." "'그' 의 물건이라면....훔쳐서라도 소장할 가치가 있겠지요." 부관은 고개를 끄떡이며 덧붙여 말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부르는 게 값일 테니까.... 정부길드 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를 시작 했다더군. 곧 밝혀 지겠지." "너무 그들만 믿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아아, 나도 마스터께 말해 봤네만 ......." '마스터' 라는 말이 나오자 조건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미글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짓는 부관이었다. 그들의 '마스터' 는 젊은 나이에 '곤크'의 '마스터'에 오른 검술의 귀재일 뿐더러 마법까지 사용할 줄 아는 이였다. 그의 독서량은 무지한 칼잡이로써는 상상도 할수 없는 방대한 양이었고 덕분에 그의 학식과 지혜는 여느 학자 못지 않았다. '곤크'가 전부터 유명하긴 했지만 이정도로 흥성해진 것은 현 '마스터'의 덕이 컸다. 밖에서는 경의의 대상이도 안에서는 흠모의 대상인 그는 불공평하게도 외모 또한 준수했다. 하지만......그렇게 완벽한 그들의 '마스터'는 '괴.짜.'였다. "이러시더군, '우리는 용병단이다. 정보길드가 아니야. 우리는 의뢰를 해결할 뿐이다. 의뢰에 필요한 정보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 이상은 우리의 소임이 아니다.' 라고." 미글을 이름만으로 움찔하게 만든 '마스터'의 말을 옮기는 부관의 표정이 밝은 이유는 그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들어줄 말을 했다는 것. "마스터 답군요." '그렇때만 쓸만한 말을 하는 점이' 같은 생각을 떠오린 탓 일까? 이상할정도로 둘의 미소는 같았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그점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단 이야기지. 우린 그저 의뢰인의 명에 따라 물건만 갖다 주면 되는 거니까. 내가 이말을 한 이유는 경비에 주의 하라는 거야. 알았지?" "녜,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물건은 확실히 창고에 인수 시켰으니 확인 바랍니다." 미글은 인사를 꾸벅하고 나가려다 뒤를 돌아보고 다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길에서 이상한 점이 한가지 있었습니다만, 뭐 별거는 아니고 그저 몬스터의 출몰이 극히 적었다는 점이죠. 덕분에 편안한 여행길이었지만 원가 이상할정도로...." "음....잘 알았네. 알아보지." 미글이 나간 후 부관은 앞의 서류 중 가장 얇은 것을 꺼내 펼쳤다. "음...미글. 카 뿐만 아니라 요 근래 의뢰를 나갔던 이가 모두 그 소리군. 몬스터 퇴치 의뢰는 요근래 뜸하고.....그나저나......" 자신의 책상과 그 앞에 놓여진 책상을 보던 그는 한숨을 깊히 쉬었다. "이 서류들을 언제 다 처리하시려고 안오시는 건지..." 두 책상 가득 쌓여 있는 서류들은 여느 마법사의 연구실같이 보이게 할정도로 산더미였다. "휴~ 이 놈의 로리타!!어디서 또 아이(?!)나 꼬시고 있겠지......" ========================================================================== = 휴~ 올렸다. 게시판 고치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분들 말씀대로 해 봤으나 이상한 영어만 뜨어이다..... 검퓨터 에러 무시기하면서..... 이를 어쪄할까나.........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을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그럼.
번  호 : 17702 / 20368    등록일 : 2001년 04월 30일 00:03 
등록자 : KREUZ1           조  회 : 24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08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아~르~!!" 민느는 울다시피 이리저리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녀 자신도 자기가 억지를 부렸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줄은 몰랐다. 게다가 '곤크' 에 들어 오게 해주겠다는 데...... "싫었던 것일까?" 어느 새 민느의 걸음이 터벅거리고 있었다. 아르가 이 곳에 이미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아무말 없이 사라지다니 너무하잖아." 민느의 얼굴은 새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어이! 민느. 파 한잔 안 할려?" 민느를 부르는 이는 테바르.타. 아르를 꼬들겨 술을 마신 경력이 있는 자로써 아르에게 민느 만큼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민느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왜 그래, 민느?" 민느는 아르를 아는 다른 이를 만났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사실을 털어 놓았다. "아르가 사라졌어!! 으앙~~" "에에에?" 아르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테바르는 민느와 잘되길 바란 것은 아니였으나 함께 일을 하면 이것저것 챙겨줄 결심을 하고 있던 차라 놀라움은 더했다. "내가 마스터는 못 만났어도 부관께 얼마나 잘 말씀드렸는 데!! 멋지게 생긴애라고 잔뜩 자랑 했는 데 이게 뭐야!! 지가 이쁘게 생겼음 다야? 지가 말 못하면 다야? 으으앙!" "이이봐...." 주위에선 휘파람을 불며 지나 갔고 그럴때마다 주변에 히스테리를 부리는 민느를 감당하지 못해 그냥 두고 가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테바르의 귓가에 반가운 음성이 들려 왔다. "민느, 테바르? 둘다 여기서 뭐하는 거냐?" 테바르는 구세주를 만난 양 너무나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글.카!!" 미글은 천천히 자기한테로 고개를 돌리는 민느를 보며 뭐가 정체모를 불길함을 느껴야 했다. "미글....카......" 난처해 하는 미글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천천히 뒷 걸음질 하는 테바르. 미글의 눈은 당장에 원망으로 가득 찼으나 테바르의 속도는 더욱 빨라 질 뿐이었다. "민느, 그러지 말고 우리 잘 찾아 보자. 셋.이.찾.으.면. 금방 찾을 수있을 거야. 오면서 물으니 '곤크' 밖에 나간 이 중 아르는 없는 것 같더라." '셋이찾으면'에 묘한 악센트를 넣은 미글의 속마음을 알길 없는 민느는 좋아라 테바르를 쳐다 봤다. 테바르는 '물귀신'이라는 메세지를 끊임없이 미글에게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뭐해, 테바르? 얼른 찾자!" 테바르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민느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아르 생각을 하며 곧 마음을 다 잡았다. "좋아! 까짓것 찾자구!" 민느의 환호성과 함께 앞으로 나가려던 이들의 발목을 붙잡는 말소리가 있었다. "....마스터가 ........로리타......" '마스터'. '곤크' 의 절대적인 이에게 호기심을 품지 않는 이가 있을리 없었다. "마스터가 뭐?" 서로 이야기하던 '곤크'의 용병 둘은 묻는 미글을 보며 능글 맞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마스터의 취미가 다시 도진 모양이야. 아까 왠 귀여워 보이는 여자애를 끌고 가던데? 도망갈새라 손까지 꼭 잡고 말이야." "내가 같이 봤는 데. 정말 귀엽더라." "그치? 흑발은 많이 봤는 데 그렇게 찰랑 거리는 건 처음 본다니까?" "하얀 피부도 압권이었지.암암."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드는 둘을 두고 셋은 석상이 되어 있었다. "흑발.......?" "하얀 피부.....?" "이봐!! '마스터' 께선 어디로 가셨어?" 제일 먼저 정신 차린 민느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니까....개인 숙소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셋은 빠르게 사라졌다. "음......." 초록색 눈동자를 호기심으로 반짝이며 소년의 상반신을 튿어보던 이는 곧 그의 팔을 들어 가볍게 만져 보았다. "확실히......" 소년은 아무 표정도 뛰우지 않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소년의 다른 팔을 들어 그것 또한 가볍게 만져 보았다. "음..... 음?" 그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소년은 천천히 자신의 팔을 검은색 천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웃옷을 걸칠 새도 없이 그들이 느꼈던 불청객의 기척이 다가와 문을 열었다. 모두 셋..... "마스터!!!!!!!" 그들은 웃옷을 벋고 있는 소년을 보며 똑같이 눈을 크게 떴다. "아르!!!" 아르는 무심하게 그들을 보다가 모두 자신을 보며 놀라자 이상하다는 듯 갸웃 거렸다. "마스터!! 마스터의 취향은 알고 있었지만 남자한테까지 손을 대다니!!!!" 민느는 마스터에게 쏘아 붙이며 아르에게 달려갔다. 아르는 의아한 얼굴로 투만을 보다가 옆에 잘 개져있는 상의를 걸쳤다. "아르 괜찮아?" 아르는 고개를 끄떡인 다음 투만을 보았다. 투만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 다음 불청객을 쫓아 냈다. "자자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남의 처소에 허락 없이 들어 오는 건 '곤크' 의 예의가 아닐 텐데요? 특히, 이런 늦은 시간엔 말이죠?" 문밖으로 밀려 나던 민느는 급한 어조로 물었다. "한가지 마스터!! 아르는 신입 후보라구요!! " 그들의 '마스터'는 '곤크'의 용병만은 건들이지 않는다고 알려져있는 인물이었다. "아아, 그 문제 라면...." 투만은 씩 웃으며 자리에 태연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아르를 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 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본 아르를 본 그는 민느일행에게로 몸을 돌려 말했다. "'곤크'는 그를 받아 들이지 않을 겁니다. 민느양." 생긋 웃는 그에게서 불안함을 느낀 민느는 다시 말했다. "그럼 지금 나가라고 할거지요?" 그가 아르를 건들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아픈 가슴을 안고 말한 민느는 그의 대답에 절망했다. "아뇨." 단호한 그의 음성에 아르는 그 쪽으로 다가왔다. 뭔가 불길함을 느낀 것일까?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했다. 투만은 가까이 온 아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웃으며 말했다. "아르는 나의 '친구'로써 여기에 몇일 놀다 갈겁니다." '친구'라는 말에 민느는 조금은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내일 보자며 나갔다. 그들의 '마스터'는 '곤크'의 용병과 더불어 친구는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르는 그들의 안도하는 안색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며 투만을 올려 봤다. 뭔가 묻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투만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따로 처소를 배정받은 아르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마스터'와의 의외의 인연으로 귀찮은 일은 끝났으나.... '또 인가....' 단검에 손을 갖다댄 그의 뒤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아르는 그 인영이 아까 본 그임을 알수 있었다. 때문에 여유를 부리지 않고 빠르게 공격을 했다. 하지만.... '뭐지...?' 급히 멈추었기에 아르의 단검은 그의 목에 작은 상처만을 남겨 놨을 뿐이었다. 아무런 미동 없이, 아무런 살기 없이 서 있는 그.....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아르를 보며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르는 두걸음쯤 물러 나더니 이채를 띄며 그를 응시했다. "저 아트힌.라.씬은 아르님께 충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씬' 이라니.... 까마득한 선조 때부터 이어져 왔다는 암살자 집안이 아닌가! 그중 장남 '라' 라면 '씬'의 다음 가주가 될 자...... 아르는 가만히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진심이 담겨있는 눈동자..... 아르는 고개를 끄떡였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그는 고개를 깊히 숙이며 아까 보았던 자신의 마스터를 떠올렸다. 그 차가운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 너무나 슬퍼보이면서 아름다운 미소... 그 미소는 그로 하여금 아르를 마스터로 모시게 해버렸다. '라' 일생에 단 한명 뿐인 '씬'의 마스터는 그렇게 정해졌다. -------------------------------------------------------------------------- -- 드디어 시작입니다. '씬'의 차기 가주 아트힌과 충성의 서약을 주고 받고 '곤크'의 괴짜 '마스터' 투만과 우정을 나눈 아르^^ 드디어 배경이 완성 됐군요.^^ 아직 한가지가 남았지만 이만하면 ..... ㅋㅋㅋ 다음 화에서는 페르노크의 이야기가 나올겁니다. 어느 분이 페르노크의 일은 아르의 꿈이냐 물어 왔지만 아니라는 말만 할수있겠군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 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734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1일 00:05 
등록자 : KREUZ1           조  회 : 25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18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소문만 무성했던 페르노크가 모습을 드러낸것은 소동이 있고 삼일 후 였다. 나타난 그를 보고 모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살기도를 했던 이치고는 그가 너무나 태연....아니 평소보다 당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여기야. 네가 다니는 반이. 네 자리는 창가 마지막이고. 돌아가는 길은 찾을 수있겠니?" "네, 파크다 선배." 저 유명한 앤스크. 파크다. 라. 제모아 와 같이 그것도 매우 친한 듯 이야기를 나누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의 변모를 지켜본 이들 중 특히나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대해왔던 이들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아졌다. 모두의 시선 집중 속에서도 페르노크는 태연히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평소 그라면 자신에게 집중된 적의어린 시선에 어쩔줄 몰라하며 자리로 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단 한명, 소울러 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는 이채를 띄우며 페르노크의 변모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페르노크는 서랍에서 자신의 책을 하나하나 꺼내면서 표지를 봤다.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는 이들은 그의 안중에 없는 듯 했다. 그렇게 모두 꺼낸 그는 한숨을 쉬고는 몽땅 도로 집어 넣었다. 단 한권, 수학 만을 제외하고. 그는 그것을 펼친 후 한장한장 넘기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 머금어 있던 호기심은 이내 사그라 들었다. '수학은 같고.......음....고3 과정과 비슷하군......어디보자... 난 제 5학기라고 했는 데.....5학기때 고 3과정이면.....앞으로가 막막하군. 제 7학기에는 도데체 뭘 배우는 거지? 휴~다른 과목은 다 다른데..... 글자를 읽을 수는 있는 것 처럼 '이 몸' 의 지식도 다 끄집어 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모르는 양 자기 할일에만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늘 긴장한체 수업중에도 휴식중에도 꼿꼿이 앉아 있던 그였는 데.....지금의 그는 턱을 괸 체 건성 건성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음? 그러고보니 이책..... 왜이리 새 거지? 딴건 왠만큼 손때가 타 있던데? 음...' 덕분에 그가 갑자기 책을 덮었을 때는 모두들 깜짝 놀랄 수 있었다. '알게 뭐냐. 이거 말고 모르는 걸 보자! 어쩌면 떠 올를 지도!' 그는 멀쩡히 읽던 책을 옆에다 밀어 놓은 채 다시 서랍을 뒤졌다. 그가 꺼낸 책은 역사였다. '음.......어디 보자.......욤 력 1기. 초대 황제 욤. 이므르. 라. 제노스라민 께서 중재와 치유의 신을 보시는 신관의 힘을 입어 신성제국 욤을 세우신다. 욤. 이므르.라. 제노스라민 께서는 제국의 탄압을 받는 소국의 앞에 서서 연합으로 시작 5년만에 국가로 발전하시어 왕의 자리를 물리다가 주위의 청에 결국은 오른다. 왕으로 등국 3년만에 제국에 맞설 무력과 경제력을 이끌어내셨으며...........휴......완전히 하늘에서 내려준 인물인가 보군..... 대단한데? 어라? ..... 제국과의 전쟁 2년만에 승리를 얻어 당당히 욤국을 제국으로 올리신다. 이때 욤국을 신성 제국이라 명하셨으며 중재와 치유의 신을 모시는 교당을 국교로 삼으신다. 하지만 후실 한분만을 남기시고 승하......... 음..... 재미있는데? 전혀 모르는 곳의 역사니까 마치 대하소설을 보는 기분이야.' "정립!" 어느새 시간이 흘렀는 지 교단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선생님 한분이 서계셨다. 모두가 자세를 바로 하는 것을 본 페르노크는 자신도 따라하며 어느 과목인가 옆에 펴논 책을 살펴 봤다. '음..... 수학...'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옆에 밀어 놓은 책을 앞으로 갔다 놓은 그의 귀에 다음 호령이 들려 왔다. "경례." 고개를 약간 숙이는 그들을 보며 자신도 숙여 보인 페르노크는 한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인사말은 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럼 오늘 시간에는........." 페르노크는 처음에는 집중하는 듯 하더니 궁금했는 지 옆에 밀어 놓은 역사책을 들쳤다. '어디까지 읽었더라.....아, 여기......... 제 2기 황제 욤. 자이젠. 라. 제노스라민 께서는 전쟁이후 황폐해진 국토를 살피시는 데 7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셨다. 이 때 황제께서도 백성과 함께 밭을 일구시어 갑자기 승하하신 이므르 폐하의 빈 자리를 메구셨으며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 수업이 시작한후에도 페르노크에 데한 관심이 끊기지 않았던 반에 모든이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수학을 잘하는 페르노크에게 모종의 함정을 파놓고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기에 그 황당함은 더 했다. 소울러와 같은 룸메이터인 제그는 선생님께 한가지 문제를 물었다. 그가 물어 본 문제를 살피던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질문한 제그를 보았다. "제그군. 자네가 제 5학기를 다닐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네. 자네는 자네가 물은 이 문제가 물어 볼 법한 문제라 생각하는 건가?" 제그는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로 고갤 푹 숙였다. "페르노크군을 보고 좀 배우게. 같은 학기면서 도데체 뭘하고 다녔기에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겐가." 그러자 제그의 얼굴은 아까와는 다른 차원의 붉힘을 내보였다. 분노라는....... "그럼......" "뭐라했는가?" "그럼 페르노크에게 물겠습니다." 아까 페르노크가 딴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던 터라 제그는 망설임 없이 이런 말을 할 수있었다. 그의 속을 알길이 없는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그에게서 시선을 땠다. "그럼. 페르노크군." 구석에서 고개를 쳐 박고 있던 페르노크는 그의 호명에 당황해하며 일어났다. "이리와서 I-6문제 좀 풀어보게. 그리고 이 친구에게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군." 페르노크는 자신의 책을 들고 나왔고 그를 본 이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을수 있었다. 페르노크는 칠판 앞에 서서 밑에 놓여진 펜을 머뭇거리며 들었다. 마법이 발달하지 못한 '욤'에서는 비싼 물건이었으나 '이므르'에서는 쉽게 볼수 있는 '묵'이라는 것으로 아무리 써도 줄지 않고 어디에다 써도 그 바탕의 보색이 되는 색으로 쓰여지는 마법 물건었다. 또한 지워지기는 쉽게 지워져 학교나 학회, 회의시 주로 쓰이는 물건이다. 그 가격 또한 일반 서민 가족이 몇년은 먹고 살수 있을 만큼 비쌌으나 여기서는 그저 발치에 차이는 물건일 뿐이었다. 헌데 페르노크는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을 보는 양 신기하다는 듯 살펴보는 게 아닌가? 의아해하는 아이들과 선생님의 시선을 눈치챈 그는 책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곧 칠판에다 옮겨 적고 풀기 시작했다. 막힘없이 문제를 풀고 나름대로 검산까지하고 선생님 쪽으로 고개를 돌린 페르노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선생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랬다. '왜 그러지?' 문제를 한번 더 본 페르노크는 자신이 틀렸다는 판단을 할수 없었다. 때문에 원인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혹시 여기서는 +가 더하는게 아니라 빼는 걸까? 아니면 곱하는게 나누는....' "페,페르노,노,크군!!!" "아,예." "자네....어,어, 떻게...." 그의 책에 모종의 함정을 빠놓았던 이들은 패닉 상태에 빠지며 어쩔줄 몰라했고, 선생님은 자신의 제자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것을 좋아해야 하질 몰라했고, 페르노크는 자신이 뭘 실수했는 지 몰라했다. 결국 교실은 어수선해졌고 제일 먼저 자신의 해야할 바를 깨달은 선생님은 페르노크의 손을 잡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자네 학회 수준의 수학을!!!! 이건 제 7학기에서도 난이도 문제가 아닌가!!!" "에,에?" 당황한체 주위를 둘러보던 페르노크의 눈에 소울러가 띄었다. '그렇군.....' '따돌림'..... 원래는 그를 골려 주기 위함이었을 모종의 함정, 수작...... 그것을 눈치 챈 페르노크의 눈동자가 더할나위 없이 차가워 졌다. 하지만 그를 눈치 챈이는 이 일에 직접적인 선두자 소울로와 제그, 또다른 룸메이크 뿐이었다. 뭔가 말할 수 없는 충격이 그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페르노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나가는 걸 그들은 똑똑히 본 것이었다. ========================================================================== == 지금은 4시 4분.아아 졸렵다. 내일, 아니 오늘은 원서내러 돌아다녀야 합니다. 때문에 미리 올려 놓는 거죠..... 가뜩이나 늦는다고 욕을 먹고 있는 처지라 하루를 빼먹자니....하하^^炚 오늘 보니 1회 조회수가 많이 올라서 넘 기쁨*^^* 하지만 다른 분들의 조회수에 비하면 새발의 피더군요ㅠㅠ 하지만 전 씁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을 부탁 드리며.
번  호 : 1773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1일 00:05 
등록자 : KREUZ1           조  회 : 23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1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92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첫 시간을 그렇게 보낸 페르노크는 골치가 아파왔다. 기분 나쁜 것은 둘째치고 자신이 수학을 잘한다고 그새 소문이 나버려....... "그럼........페르노크군. 답해 보겠는 가?" 둘째 시간의 철학도 셋째시간의 문학도 넷째 시간, 즉 현재 역사시간에도 선생님들이 그를 자꾸 주적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질시의 눈초리로 그를 보던 이들도 이제는 안됐다는 빛과 이상하다는 빛으로 변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페르노크 는 머슥히 일어나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저번 시간에 배운 것이 아닌가?" 그러면 페르노크는,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자네는 수학과 마법만 수업인 줄 아는 겐가?" 하며 찡그렸고 페르노크는 고개를 숙인 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똑같은 패턴은 넷째 시간에도 여지없이 벌어졌고 선생님은 한동안 그를 노려 보다 가 다시 수업을 나갔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은 페르노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 잡고 창가로 눈을 돌렸다. 파크다 선배의 설명에 따르면 넷째 수업이 지나고 점심시간 이라고 했다. 식당까지 안내를 해주며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리를 친철히 설명해준 파크다를 떠올리며 조금은 기분이 가시는 페르노크였다. 대답도 못한 '주제'에 감히 당당히 딴 짓을 하는 그를 발견한 선생님은 언잖은 얼굴로 주위를 주려다가 그가 사흘 전에 벌린 '일' 을 떠올리며 참았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므르'의 귀중한 '고객(?)' 인 것이다. 벨이 울렸다.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선생님은 수업을 마무리하고 반장을 불렀다. "정립!" 창가에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페르노크도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는 지 자세를 바로 했 다. 그 모습에 최소한의 자존심은 되찾은 선생님 이었다. 사실 여간한 귀족 자제들은 자신이 가지는 권력의 힘을 알고 있었기에 선생님과 여타 신분이 낮은 이들을 자신의 종 부리듯 하는 경향이 있었다. 페르노크는 그런 이들보다도 월등히 높은 자리에 있 는 이였고 그가 마음만 먹는 다면 당장 일자리에서 쫓겨날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는 어리숙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에게 간접적이나마 비웃음을 사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몇몇이지만 그를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이도 있었다. 분명 그가 피해자임에도 모두들 가해자인 그들을 걱정했었다. 하지만 페르노크의 어리숙함과 내성적임을 알아챈 이들은 덩달아 그를 괴롭혔다. 그것은 명백한 화풀이였다. 그것은 어른에게 꾸중 먹은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애교를 떠는 강아지를 발로 차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어쨌건 기분이 다소 풀린채 나가는 선생님이었다. 페르노크는 책을 정리하고 일어나 뒷문으로 나가려다 여짓껏 무시했던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마주했다. "무슨.....?" 그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모두는 무시하며 그를 스쳐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나가고 빈 교실에 혼자 남은 페르노크의 얼굴에 조소가 일었다. "유치하군."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야. 파크다 선배가 길을 알려 줘서. 아니면 굶을 뻔 했군.' 그는 경쾌한 몸놀림으로 계단을 내려섰다. 작은 휘파람을 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이질적으로 보였으나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화를 내던 그를 봤던 이가 있었다면 어이없어 할 상황이었으나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따돌림' 에 관한 것이 아니였다. 당장 먹을 '식사' 인 것이다. 어느 인간이 식사를 싫어 하겠는 가? 하지만 그의 뜻밖의 밝음도 그리 오래 유지 되진 않았다. "여~~ 오르세만 페르노크 군. 식사 하는 건가?" 현재 페르노크의 '상태'라면 그렇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는 친구라고 생각 했을거다. 하지만 현재의 페르노크라도 그가 친구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왜냐면 그는 현재 페르노크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관계' 였기 때문이다. "소울러....." 휴식시간의 수다로 인해 그의 이름을 알게 된 페르노크였다. 무슨말을 하려는 지 입을 벙긋하는 그를 밀쳐내며 말을 하는 이가 있었다. 제그였다. "내가 페르노크군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 아아, 사양할 필요없어. '친구' 사이에 사양이란 없는 거니까." 하며 그가 내민것은 벌레.... 아주 큰 벌레도 징그러운 벌레는 아니였으나 벌레란 생각만으로 불쾌감과 구역질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였다. 비위가 약한 페르노크에게 여름에 자주 써먹는 장난(?) 이었다. 그것을 보는 즉시 파리해져 입가를 막는 그를 보 며 평소 그들은 즐거워했었다. 헌데.... "어쩌라는 건가? 그 벌레로?" 정말로 궁금한지 페르노크는 고개까지 갸웃 거렸다. '생긴건 꼭 파리 같이 생긴것이 날개는 없네? 대신 발이 더 길구나.' 이런 식으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펴보던 그는 다시 고개를 올려 제그를 보았다. 제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찡그리다가 손을 뒤집었다. 그러자 페르노크의 식판에 그 벌레들이 떨어졌다. 굳은 얼굴로 그를 보는 페르노크에게 제그는 잔인한 얼굴로 말했다. "네 몸을 봐라. 너무 말랐잖아? 그래서 내가 특별히 동물성 단백질을 구해온거야. 사양할 필요 없어. 먹.어." 페르노크는 한동안 혼란스러운 얼굴로 식판을 보았다. '여기서는 동물성 단백질로 벌레를 쓰나? 하긴 중국 음식에서 고급음식은 벌레를 재료로 쓴다 잖아? 음.....' 그러다 페르노크는 제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제그의 눈가에 맺힌 잔인함을, 입가에 맺힌 흥분을....... 그것은 마치 잠자리를 잡아 하나씩 다리와 날개를 떼어내며 웃는 아이의 얼굴같았다. 페르노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해지면서 자신을 주시하자 기분이 상한 제그는 손을 들어 그의 뒤머리를 잡으려 했다. 아마도 식판에 그의 얼굴 먹기 쉽게 가까이 가져다 주려는 것 같았다. 더불어 굳이 수저를 들지 않더라도 먹을 수있게 배려해 주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호의' 는 멈춰질 수 밖 에 없었다. 그의 손을 막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울러?" 그들의 암암리에 정해진 대장, 소울러의 저지는 제그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호기심 어림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까지 의아함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그쯤해 둬라. 제그." "하지만, 소울러!?" "수학시간때의 분풀이라면 치졸하다. 스스로를 깍아 내리지마라." 소울러의 차분함에 진 제그는 손을 내렸고 상황은 이쯤에서 끝나려는 듯했다. 하지만...... 의외의 인물에게서 사건은 다시 불어졌다. -퍽!!- "크윽.....!!" 소울러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나가 떨어진 제그를 쳐다보며 그 가해자를 황당히 볼 수 밖에 없었다. "페,페르노크?" 더없이 차가운 눈동자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던 페르노크는 발끈하며 일어난 제그에게 달려 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그의 공격이 흥분한 제그의 복부와 오른쪽 빰을 강타했다. 뜻밖의 공격과 뜻밖의 힘은 제그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전투불능에 만들었다. 엎어져 기침을 하는 제그를 차갑게 내려다 보던 페르노크는 식판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벌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긴장한 아이들은 페르노크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의 차가움으로 무장된 얼굴에서 뭔가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태연히 식판을 들고는 제그 쪽으로 걸어갔다.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지 소울러가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제그의 앞에 섰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변함 없는 페르노크에게 소울러는 압박감을 느껴야했다. 마침내 페르노크는 소울러의 바로 앞까지 왔고 소울러 뿐만아니라 모든 이가 긴장하며 그를 주시했다. 페르노크는 무표정하게 진로를 막고 있는 소울러를 보며 말했다. "비켜." 소울러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몸을 틀었고 페르노크는 그로인해 생긴 공간을 지나, 계속 기침하고 있는 제그를 지나 계속 앞으로 가더니 남은 음식을 버리는 곳에가 식판에 있는 것들을 쏟아 버렸다. 그리고는 식판과 수저등을 반납한 후 나가버렸다. 그의 퇴장으로 인해 조용하던 식당은 다시 어수선해 졌다. "두고.... 보자....두고...보자....." 소울러는 연신 중얼거리는 제그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 -- ^^ 페르노크의 성격이 나오는 순간이 었습니다. 페르노크가 세냐고 물으신다면 당연코 세다고 말씀드리지요. 읽어 보신 분은 알겠지만 페르노크의 안에 들어간 '그녀'는 전국 검도 대회 우승자이니까요^^ 갈등이 심화되는 교우 관계에서도 페르노크는 당당하기만 합니다. 모르는 수업에서도 당당하기만 하지요. 다음 내용도 페르노크의 이야기 랍니다.ㅋㅋㅋ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736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1일 00:05 
등록자 : KREUZ1           조  회 : 22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1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01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아직은 모두 식사에 빠져 있을 시간. 이른 시간임에도 식당을 빠져나온 이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을 처리못해 골치를 썩고 있지만 다른 일에서 개운함을 얻은 그는 식당 뒤쪽으로 100m 떨어진 동산에 가 주져앉았다. 그리고는 흐린 하늘을 올려보 더니 이내 누어버렸다. 선선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휴~ 도대체 어떻게 된걸까......" 작게 중얼거리던 그는 자신의 얼굴을 덮치는 그림자를 올려 보았다. "휴로버 신관님?" 페르노크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했다. 휴로버는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나무라네." "네?" 뜬금없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떠보이는 페르노크였다. 그런 페르노크를 보며 휴로버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풀이라네" 반문도 하지 않은 체 의아한 눈길을 보내는 페르노크를 보며 휴로버는 또 웃었다. '선문답인가? 여기선 일상어인가? 음...신관의 인사법인가? 하지만 전에는 그런 말은 없었는 데? 밖에 나오면 따로 하는 인사가 있는 건가?' 고민에 빠져 있는 그를 보며 휴로버는 다시 말했다. "나무는, 풀은 말이 없지." 페르노크의 눈빛이 고요히 가라 앉았다. 휴로버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 챈것이다. 둘은 침묵했다. 페르노크는 고민했고 휴로버는 기다렸다. "전 ........ 혼란스럽습니다." 휴로버는 말을 시작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누어 버렸고 페르노크는 당황하다가 웃었다. 그리고 좀 더 편하게 말을 할수 있었다. "'저'는 희대의 천재도 아니고.... 마법도 하나도 모르고...... '저'는 그저 평범했던 여......" 묵혀 뒀던 문제를 무심코 내밷었던 페르노크는 자신의 두 팔을 들어 보았다. 고운 손. 하얀 손. 가는 손.......하지만 '남자'의 손 페르노크의 말이 끊기자 그를 돌아본 휴로버는 일어나 앉았다. "책은 많이 보았는 가?"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표시. 페르노크는 감사의 웃음을 띄우고는 그것에 응했다. "아, 그러고 보니 돌려 드려야....." 휴로버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자네가 가지고 있게. 어차피 난 읽지 못하는 것..... 왠지 자네라면 그 책의 가치를 잘 알아 줄 것 같군. 나보다 말이세." 페르노크는 대답하지 않았고 휴로버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자네 파크다 군하고 많이 친해진 모양이더군?" 그말에 친절하고 재미있는 파크다 선배를 떠올리는 페르노크. "글쎄요. 단지 제가 기억 상실이기 때문에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게 아닌 가 싶었는 데.... 파크다 선배는 친절한 분이니까 말입니다." 휴로버는 크게 웃으며 페르노크의 어깨를 두들겼다. "파크다에게 친절을 거론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하하." 페르노크는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선배는 친절하신 분입니다만?" 휴로버는 한참을 더 웃다가 말했다. "파크다군은 어린 나이에도 '유능' 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지. '유능' 이란 자신의 감정 또한 잘 다스린다는 의미일세. 자네를 대하는 파크다의 태도는 자신의 가족을 대하는 듯......." 갑자기 뭔가를 떠 올린듯 굳은 휴로버.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파크다군은 누구에게도 반말을 하지않았지.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친구더라도 말이야. 그런데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이에게 말을 놓는 다는 건....... 파크다군으로써는 있을 수 없는 일........" 그렇게 중얼거리는 휴로버에게 뭐라 말을 걸려던 페르노크의 귓가에 벨소리가 들렸다. 예비종 소리였다. "신관님. 전 수업 시간이 다 되가서 이만 실례 해야겠습니다만?" 휴로버는 그제서야 시간이 많이 경과했음을 알고 고개를 끄떡이며 미소로써 그를 배웅했다. 페르노크는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인 후 연마(魔)장 쪽으로 뛰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휴로버는 한숨 섞인 말을 내밷았다. "파크다군.... 페르노크군을 동생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가? 8년전에 죽은 자네의 동생으로....." 다음 수업은 야외에서 하는 거였다. 늘 다섯째 수업에 한다는 마법 실기. 현 '상태'의 페르노크가 가장 두려워한 시간. "오늘은 제 5학기에 배운 마법들을 총 복습하는 시간을 갖겠어요." 파크다 선배의 말에 의하면 13살, 그러니까 제 1학기에는 마법의라는 과목이 아예 없다고 한다. 단지 명상이라는 시간이 있어 인내력과 집중력을 기르는 수업(?)만이 있다고 한다. 물론 대다수의 아이들의 수면시간으로 활용된다고 그는 웃었다. 그때 간혹, 아주 가혹 마나를 느끼는 아이가 있다고 한다. 그럼 그아이는 일주일간 학 교 옆에 있는 마법길드에 가서 마나를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그후엔 아이 스 스로 마나를 다스리는 것을 연마한다고 한 그는 페르노크를 잠시 보다가 한마디 덧붙 였다. '네가 그 그소수의 아이에 속했지.' 그말에 잠시 패닉상태를 가졌던 페르노크였 다. 대다수의 보통아이들은 제 3학기에 이르러서야 마나의 응용을 배우고 제 4학기 동안은 마법의 이론을 배운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야 마법의 주문과 각 주 문에 따른 마나의 응용법을 배운다고한다. 이때까지는 모두 같이 배우나 제 6학기때 는 소질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어 마법 쪽으로 정진하려는 아이와 마법에 소질 이 있는 아이, 마법을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만으로 반을 구성한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들은 마법길드에서 파견된 선생님에게 배운다고 한다. 그리고 가을부터 제 6학기에 갈릴 아이를 뽑는 다고 했다. 지금 선생님이 말한 총복습이란 곧 닥칠 여름방학 후에 시작될 테스트를 대비하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의 페르노크로써는 마법는 커녕 마나에 대한 기초적인 학습조차 없으니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자, 그럼 소울러군 먼저 시작해봐요. 일단은 가장 자신있는 것 부터. 그 다음은 낮은 써클부터하세요." 소울러는 앞으로 나와 두손을 앞으로 뻗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방어. 내가 바라는 것은 불의 힘. 파*이*어*윌*" 첫 한마디에 오른쪽 손을 들고 두번째 한마디에 왼쪽 손을 들고 마지막 시동어에 두손을 모은 소울러. 페르노크는 분명히 보았다. 그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존재'. 그의 한마디 한마디 마다 변해가며 엉키고 뭉치고 풀리고 분해되고 그러다 마침내 구현된....... "역시 소울러야!!" "와~아" 2m 를 거뜩히 넘어 보이는 붉은 벽이 소울러와 좀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페르노크는 처음이지만 너무나 친숙한 느낌에 전율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일단 시전한 소울러는 휴식을 취하고 다른이가 앞에 섰다. 그는 처음부터 손을 높게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방어, 내가 바라는 것은 바람의 힘. 실*드*" 페르노크는 또한 느낄 수있었다. 아까와는 다른 식으로 엉키고 뭉쳐지는 '존재'를. 페르노크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떨꾸었다. 이 느낌! 이 느낌은 '그녀'가 수련중에 깨달았을 때와 같은 것. 그때 '그녀'는 마구 울다가 혼절했었다. 그래서 모두들 몰랐다. '그녀' 가 다다른 또 다른 경지를. 또 다른 이가 나왔다. 그는 손을 합한체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격, 내가 바라는 것은 번개의 힘. 라*이*팅*볼*" 페르노크의 상태를 눈치 챈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그녀'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혼자만의 깨달음을 터득했다. 그는 조용히 아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혼잣말이 아니였다. "안녕......난 '페르노크' 라고해......그래. '페르노크' ....... 우리 친구할까?" 거대한 '존재'가 그에게 웃어보였다. '마나'라는 '존재'가. -------------------------------------------------------------------------- -- 휴~~ 대마법사, 희대의 천재 '페르노크'를 부담스럽게 여겼던 '그녀'는 이제서야 '페르노크'를 받아 들입니다^^ 일단 한가지 문제가 끝났군요. 아직 까마득히 문제들이 산재하지만 말입니다.ㅋㅋㅋ 다음 이야기도 페르노크의 이야기였으면 좋겠지만......... 그래서 '따돌림' 을 하는 아이들에게 크게 한방 먹였으면 좋겠지만....... 아직 아르의 배경이 하나 더 완성 되어야 하기에 다음은 아르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 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이건 비밀님께만 드리는 말씀. 제가 답 멜을 세번 보냈는 데, 수신 확인을 보니 세 통다 보지 않으셨더군요? 혹시 안간겁니까? 그리고 페르노크 이야기가 더 좋으시다고 했지요? 아직 두사람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으니까 아르로 넘어갔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시길......
번  호 : 17737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1일 00:05 
등록자 : KREUZ1           조  회 : 232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6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6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13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73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신성제국 '욤'의 수도와 근접해 있는 용병단 '곤크'. 군대와 같은 병력을 가지는 그들을 방치해두는 '욤'의 행동에 속인들은 '곤크'가 가지는 위치적 조건에 대해 따진다. '곤크'의 북쪽, 즉 '욤'국의 수도쪽에 자리 잡은 '이카미렌' 산맥과 서쪽에 자리잡은 숲 '푸르름의 고향' . '푸르름의 고향'은 몬스터가 거의 없는 대신에 '성지'를 피해가야 하므로 거리적으로 안 좋은 조건을 가진다. 하지만 그것은 약과. 속인들과 나또한 위치적 조건으로는 단연코 '이카미렌' 산맥은 꼽는 다. 골드 드레곤 '아키미렌'의 레어가 있었던 곳인지라 몬스터의 수효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드레곤이지만 한번 스친 입김은 무시할수없는 것이 현실이다. 판단하건데, '욤'국에게 있어 '곤크'는 몬스터를 제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또한 '곤크'에게 있어서도 몬스터를 실전의 상대로 삼고 '욤'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까? 이 가설은 '이카미렌' 과 근접하면서도 무사했던 수도 '자이젠'과 주고객을 '욤'국의 귀족으로 삼고 있는 '곤크'를 보면서 어느정도 진실성을 가진다. '이므르' 제 655기 졸업생 앤스크 라이젠 라 제모아의 졸업논문 중에서. "마스터! '취미생활'도 좋지만 '본업'에 충실하면서 즐기시랍말입니다." '곤크'의 접근 금지 지역중 하나인 마스터의 집무실에는 그동안 골치 썩던 부관의 고 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마스터는 부드럽게 달래 보았다. "자자. 진정해요,부관. 자꾸 화를 내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이는 자상한 마스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실을 알뿐만아니라 그에 따른 고초를 겪었던 부관의 귀에는 가증스럽게만 들렸다. "마스터께서 말없이 잠적한신 이후에 쌓인 안건들이 저만큼이란 말입니다." 하며 그가 가르키는 곳에는 쌓였있다는 말이 무색할정도로 수많은 종이 뭉치가 가득이 었다. 속칭, 서류라 불리는 종이들이 말이다. 그를 본 마스터는 놀랍다는 얼굴로 물었 다. "생각보다 적군요. '곤크'의 사정도 많이 안 좋아진 모양입니다?" 그러자 부관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약간의 떨림은 있었지만 제 법 차분했다. "미.력.한.제.가.조.금.씩.이.나.마.정.리.를.해.서.저.만.큼.인.겁.니.다. 마.스.터." 원래 제 1계급내에서도 최상위급인 부관의 소임은 마스터에게 작은 조언과 더불어 비 서로써 들어오는 서류들을 정리하고 밑에서 들어오는 불만이나 문제점을 해결하거나 걸러내서 마스터에게 보고하는 일들이 전부였다. 그 이상의 간섭은 직무위반인 것이 다. 하지만 지금의 부관은 당대 부관 중에서도 '일벌레'라고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 다. 왠만한 직무위반 쯤이야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않을 만큼 마스터가 그를 의지하 는 강도는 당대 마스터 중에서 최고 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의 마스터는 '괴 짜' 혹은 ' 농땡이의 황제'로 불리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 상관을 모시고 있으니 부관의 인내력과 참을성은 과히 대단하다 할수있었으나 현재 그마저 바닥나려 하고 있 었다. 그만큼 이번에 들어온 일들이 과거에 비해 최고하고 할수 있을 만큼 많았다. "하하. 그래요? 그럼 주요 안건들을 말해보겠습니까? 보아하니 그렇게 분류해 놓은 것 같은데?" 부관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쪽에 있는 것이 마무리 된 의뢰들을 보고한것들이고 그 옆에 있는 것은 이번에 들어온 의뢰들로 이건 건들이지 않았으니 마스터께서 걸러주십시요. 그 뒤에 있는 것은 이번에 신청해온 신입 후보들의 신상명세서이고 그 거 옆에 있는 것은 제 2기에 배급될 급료의 배분표입니다. 그 거 앞에 있는 것은 의뢰 수행중에 생긴 문제점들을 보고해온 것들이고 그 뒤에 있는 것은 1주전에 회의에서 결정한 안건들 입니다. 원래는 마스터께서 바로 보시고 결정해주실 안건들이었으나 갑자기 사라지 신 바람에 아직까지도 실행되지 못했지요. 이제 돌아왔나 싶더니만 집무실에는 들리시지도 않고 또 '취미생활'에 몰두 하셨다지요? 게다가 '예전 취향'에 옵션으로 '또다른 요소'까지 겸비한체 말입니다?" 점차 목소리가 거칠어지면서 이제는 아르까지 노려보는 부관이었다. '취미생활'이란 말에는 수긍하는 지 가만히 있던 마스터, 투만은 '예전취향'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또다른 요소'라는 말에는 웃으며 아르를 돌아 봤다. 아르는 투만이 나온 차를 마시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 = ㅠ.ㅠ 벌써 세번째 쓰는 똑같은 내용입니다. 자꾸 지워지고 또 지워지고....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짧게 짧게 나눠 쓰기로 했습니다.ㅠ.ㅠ 바로 이어쓸테니 재미없다고 마시지 마시고(?) 읽어주세요ㅠ.ㅠ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761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2일 00:08 
등록자 : KREUZ1           조  회 : 22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13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56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예예, 최대한 빨리 검토하죠. 그러니 그만 가서 좀 자는 게 좋겠군요. 눈이 잔뜩 출혈되어있어요. 자고로 사람은 배가 고프고 잠을 못 자면 짜증이 느는 법이죠. 자자." 변함없는 아르의 태도에 미소지으며 부관을 문 밖까지 배웅한 투만은 서류의 바다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좀 전의 부관의 설명을 떠 올리며 한 뭉치를 들어 집무용 책상이 아닌 다과용 테이블에 올려 놓고 안락의자에 앉았다. 아르가 서류 쪽에 시선을 두자 웃으며 설명해주는 투만이었다. "이 뭉치는 이번에 마무리 된 의뢰를 보고한 겁니다. 새로 할 일들도 중요하지만 뒤를 정리하는 것이 이바닥에선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요." 아르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일어났다. '곤크'의 극비에 해당하는 일이니 자신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투만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부관이 난리를 치겠지요? 그럼 전 오늘 하루는 이것들과 놀아야 될것 같으니 아르군은 맘껏 즐기세요. 나중에 숙소에서 뵙지요." 아르가 고개를 끄떡이고 나가자 투만은 곧 보고서에 집중했다. 할일은 하고 놀아야 후환이 없는 법인 것이다. 앞으로도 무사히 잠적하려면 지금 열심 히 해두어야 한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참 읽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부관을 불렀다. 역시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은 얼른 들어왔고 그에게 투만은 확인했다. "오늘 케르가공이 오는 것이 확실합니까?" "예. '그'의 물건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모양입니다만.....?" "음....알았습니다." 부관은 다시 서류에 집중하는 마스터에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아르는 밤에 봐두었던 성내에 있는 용병들의 휴식처인 공원으로 향했다. 해자와 가장 근접해 있는 이곳은 동산처럼 반구의 형태를 하고 있었는 데, 한 쪽에는 연못도 있고 벤치도 곳곳에 있었다. 이곳은 주로 용병들의 가족이 놀러 왔 을 때 가는 곳인데 연못이 있는 쪽으로 한면에는 나무가 빽빽히 늘어져 있어 연인들 의 밀담의 장소로 애용되기도 했다. 다른 한쪽면으로는 해자가 보이는 성벽에 방향을 틀고 있는 데 거의 잔디여서 맑은 날 낮잠의 장소로 애용됐다. 아르는 후자 쪽으로 향 하고 있었다. 멀찍이 '푸르름의 고향'이 보여 전망이 제법이었다. 그곳에 들어 누운 아르는 익숙한 기척을 느낄수 있었다. '아트힌인가.....' 은페물이 없음에도 그냥 봤을 때는 어디에 있는 지 알수 없는 그의 위치는 이렇게 인 적이 없고 조용한 곳에서만 느낄 수있었다. 그 기척에 안심하며 잠을 청해보는 아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르는 익숙하지 않은 기척에 벌떡 눈을 뜨며 신경을 곤두섰다. 그때 그의 귓가에 가냘픈 소리가 들려 왔다. "......아가....?" 돌아본 아르의 눈에 비친건 약간 초췌한 얼굴을 한 우아해 보이는 귀부인이었다. 다소 의외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르는 다음 순간에 놀라 굳어 버렸다. "아가!! 아가!! 어디갔다 이제 오니, 아가! 이 어미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르는 귀부인의 따뜻한 체온에 거부할 생각도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자꾸 팅겨나가서.......ㅠ.ㅠ 언제 팅겨나갈지몰라 짧게 씁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을 부탁드립니다.
번  호 : 1776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2일 00:08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17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67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따스한 품. 처음 느껴보는 그 체온에 아르는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의 평온함을 깨는 인기척이 있었다. "마님! 마님! 어디 계십니까?"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 아르를 안은 부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아르는 알 수 있었 다. 그들이 찾는 이가 그녀임을 말이다. 슬며시 부인을 밀며 아르는 미소를 지었다. 아트힌이 보았던 미소........ 부인은 의아한 얼굴로 아르를 보았다.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아기'가 왜 저리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지.....그리고 어디로 사라졌는 지. ".....아.....가?" 멍한 초점으로 이리저리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 보던 부인은 결국은 고함을 질렀다. "아가!! 아가!! 나의 아가!! 어디있는 거니? 아가!" 그녀의 고함은 다른 이를 불러 들였다. "저기 계신다!!" 계속해서 '아가'를 외치던 부인은 결국은 다른이들에 의해 강제로 돌아갔다. 정적이 흘렀다. 언덕 중턱에 있던 제법 큰나무 뒤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어머니....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마구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쓸며 바람 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을 따라 그의 머리카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의 이마를 감싸고 왼쪽 귓가를 가리던 검은색 천 또한 허공을 멤돌았다. 그의 왼쪽 귓가에서 둔탁한 빛이 잠시 반짝였다. -찰랑- 그의 손이 귓가로 향했다. 차가운 금속을 쓰다듬던 그는 낮게 한숨을 쉬며 주저 앉았다. "마스터......" 떨어진 곳에서 그를 지켜보던 아트힌은 너무나 아파보이는 모습에 그에게 다가갔다. 아르는 자신의 앞까지 온 그를 올려 보다가 옆자리를 툭 쳐보였다. 아트힌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그 곳에 앉았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아르는 복면을 쓴 체 앉아 있는 아트힌을 보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대 낮부터....'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복면을 벗겨냈다. 아트힌은 아르의 손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피하려다 멈췄다. '마스터'의 행동에 감히 의의를 달수 없었던 것이다. 아르의 의도는 별거 아니였다.그저 대 낮부터 복면을 하고 나타나 주위에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아트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수정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복면을 벗은 그의 모습에 그냥 복면을 쓰게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버렸다. 그가 예상 외로 젊었기 때문은 아니였다. 그의 피부가 하얀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 다. 어둠에 묻혀 사는 그의 피부가 그을렸을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유일하게 보였던 부위이니까말이다. 단지 그의 회색 눈동자가 의외로 그에게 잘 어울렸을 뿐....그외 별로 놀랄만한 요소는 없었다. 큰키에 단단히 연마된 날려한 몸매나 적당히 붙은 근육이나...... 놀랄 요소가 별로 없었음에도 아르는 놀랐다. 너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살수' 아트힌에게... 아르는 마구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땠다. -찰랑- 무의식 중에 왼쪽 귀에 걸린 귀걸이를 쓰다듬던 아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보 는 아트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미소를 지었다. 아르에게 있어 아트힌은 편한 상대였다. 왜 그런지는 알수 없었다. 솔직히 만난지 이틀 됐을 뿐이고 처음에는 목숨을 걸고 칼부림을 했다. 그런데도 편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곁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자주 미소 짓는 아르였 다. ========================================================================= ㅠ.ㅠ 이게 얼마만인가.... 컴이 잠깐 이상해져서리....... 맘에 드는 구절도 안떠오르고....여유분도 다 썼고.......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 드립니다. http://one224@hanmail.net
번  호 : 17763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2일 00:09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1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47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물건은 부관이 가지러 갔습니다. 곧 올겁니다." "물건의 진위여부는 따로 묻지 않겠소." 투만은 부즈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체 곧 당도할 부관을 기다렸다. 얼마후 이기척이 들리면서 노크소리가 이어졌다. "들어와요." 투만은 수많은 의뢰 중 하나가 끝났다는 생각과 함께 쌓여 있는 일거리들을 떠올려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작게 한숨을 쉬는 그의 귓가에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 왔다. "자네......부관인가?" 고개를 돌린 투만의 눈에 의외라는 듯 의뢰주를 쳐다보고 있는 소년이 들어왔다. "아르군?" '손님이 있을 줄은...." 실례했다는 제스처, 즉 고개를 깊숙히 숙여 보인 아르는 밖으로 나갔다. "이런... 실례를 범했습니다. 부관 의외의 사람이 여기로 올리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군요." 케르가공은 문쪽을 주시하다가 투만의 사과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아, 제 친구입니다." 뜻밖의 질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응한 투만은 걱정스런 시선으로 케 르가를 주시했다. '설마.... 비밀보장이다 뭐다해서 처리하는 건....' 그렇다면 그를 빼돌릴것인가 아니면 휘하에 보호할것이낙 고민하는 그에게 묘한 질문 이 들어왔다. "특이한 눈동자를 가졌군." "네? 아르군 말입니까? 확실히 그의 눈동자는 유래 없는 색을 띄었지요." "유래....라." 말을 흐리는 그에게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다시 들리는 노크소리에 그럴구 없었다. "마스터, 접니다." "들어와요." 사람좋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평범한 원통이 들려 있었는 데 지름이 15~20 Cm 죄는 제법 큰 상자였다. "물건입니다." 일단은 마스터에게 건네는 부관이었다. 투만은 살펴 볼것도 없다는 듯 바로 의뢰주에게 건넸다. 비밀리에 구해서 극비리에 가지고 온 물건이지만 케르가는 별다른 감흥없이 받았다. 그리고는 곧 일어섰다. 방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배웅하는 투만은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 "그 소년은 아무말 없이 '마스터'의 방에 들어 올만큼 자네와 친분이 두터운가?" 의외의 질문이었지만 대답 못 할 이우가 없는 질문이기에 투만은 별생각없이 답했다. "아르군 말씀이시군요. 굳이 따지자면 그가 말을 할수 없는 몸이라는 것이 그 질문에 합당한 대답이겠지요." 문앞에 서서 가만히 있던 케르가는 어깨를 흠짓해 보이더니 중얼 거렸다. "아르라...." '이런 실레를 저질렀으니....' 한편 밖으로 나온 아르는 멍하니 발코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꼼짝없이 더 묶이겠군.' 미간이 약간 찌프려졌다. 아트힌과 잠시 앉아 있던 아르는 이 곳을 떠나야 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암시, 아니 본능에 가깐운 결론이었다. 몸속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듯안 불쾌감, 털이 곤두서는 한기. 그 느낌은 그에게 빨리 떠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그를 의아하게 보 던 아트힌은 곧 복면을 다시 쓰고 모습을 감췄다. 그의 모습이 사라졌으나 아쉬움 따 위는 없는 아르였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에겐 아트힌의 기척이 느껴지니까. 아르는 서둘러 마스터, 투만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방밖의 또다른 방, 부관의 집무실에 늘 있던 부관의 부재따위는 조금도 신경쓰 지 않고 노크를 했고 들어갔다. 그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투만은 '지기'인 그가 이곳 을 짤리 떠나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고 있었다. 이일로 그가 아르를 붙잡을 건 뻔한 일이었다. 본능이 주는 경고에 몸서리 치면서도 아르는 '곤크'에 남기로 결정했다. 왜일까? 아르는 여전히 발코디에 시선을 준체 생각해 보았다. 따스함.....그리움..... 아르는 천찬히 눈을 감고 아까 그 부인의 체온을 떠올려 보았다. 밑에서는 소란스러움 이 가라 앉고 있었다. 어느 마차가 그 앞에 섬으로써 사람들을 몰아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가 상념에서 벗어난 건 그 정적 때문이 아니였다.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 ======================================================================== 휴~~올렸다. 다음회나 다다음 회쯤에서 제가 가장 쓰고 싶었던 씬 중 하나가 나온 답니다. ^^ 생각을 많이 했는 데 아직 글로 못 옮겼어요. 하지만 내일이나 모레 중에 꼭 올리겠습니다^^ 어느 홈페이지에 갔더니 제 소설을 추천해 주시는 분이 계시더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 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764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2일 00:09 
등록자 : KREUZ1           조  회 : 22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2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5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눈을 뜰때 아르는 바로 뒤를 돌아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뜬 아르는 뒤를 돌아 보지 않았다. 오리혀 발코디 밑에 더욱 신경을 집중했다. 인기척이 가까워 지고 있었다. 발소리로 보아 모두 세명. 암살자는 아닌지 기척을 숨기려는 흔적은 없 었지만 제법 무예를 닦은 자들임은 분명했디. 그럼에도 아르가 그들에게 신경을 끄지 않는 이유는 아트힌 빼문이 아니였다. 마차에서 내린 낯익은 귀부인. 부드러운 감색 비단으로 만는 우아한 문양의 드레스를 입은 고상해 보이는 귀부인이었 다. 윤기가 도는 갈색 머리카락과 창백한 낯빛을 가진 그녀는 인자한 입매가 매력인 중년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를 절감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동공조차 풀려 있는 갈색 눈동자..... 그런 그녀에게서 아르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까....' 그렇다. 아르를 혼란에 빠뜨린 귀부인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라....' 아르의 눈동자에 그리움이라는 안타까운 감정이 맴돌았다. 그리고....그런 아르를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중년의 위엄있는 장군. 젊었을 때 검은 색이었을 머리카락은 약간의 흰머리와 혼합되어 있었지만 눈빛엔 여전히 패기가 있었고 체구또한 왠만한 장수 못지 않은 남자, 케르가. 달. 라. 이브겐 이었다. 그는 구면인 소년의 무심한 눈동자에서 맴돌기 시작하는 감정을 읽었다. 그리고 소년 이 주시하는 바를 살폈다. "부인.....?" 아르는 흠짓하며 뒤를 돌아 보았다. 아까 실례를 범했던 '손님' 이 그의 눈에 들어왔 다. '손님'은 슬픈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깔렸다. 케르가는 뭔가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침묵을 깬건, "아가! 아가! 다시 돌아 왔구나,아가." ....귀부인이었다. 케르가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2년만에 도는 생기를 볼수 있었다. 그 리고 '아르'라는 소년의어깨가 순간 움짓했던 것도. "내 부인이라네. 2년전에 병이 났었지. 그 이후로 그녀의 눈동자에서 생기를 볼수 없었지." 아르는 착찹한 그의 음성을 가만히 들었다. 그 동안에도 그녀의외침은 처절히 계속 됐 다. 결국 아르는 2층 발코디에서 뛰어 내려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케르가는 계속 말을 했다. "그래.... 2년전... 하나뿐인 아들이 몬스터의 습격으로 죽고 난후에 말이지...." 그에게서 깊은 슬픔을 읽어낸 두 부하들은 안타까움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세사람을 짓누르는 침묵 사이로 부인의 명랑한 음성이 빠고 들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구나, 아가. 우리 같이 피크닉을 가자꾸나. 우리 같이 가자, 아가. 어서 타렴."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고는 아르를 재촉했다. 하지만 아르는 머뭇거릴뿐 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귀부인을 보며 더욱 망설이는 아르의 어깨에 누군가 손 을 얹었다. 올려보니 케르가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부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사랑하는 부인은 2년만에 남편을 보고 웃었 고 이름을 불렀다. "다르, 우리 아가랑 피크닉가요. 날씨가 너무 좋지요? 우리, 아가랑 같이 가요." 케르가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팔찌를 꺼내 그녀에게 건냈다. 그리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시오. 당신은 '우리 아가'와 함께 잠시 같다오구려. 난 아직 할일이 남아 있다오, 시미레." 시미레는 방긋 웃으며 팔지를 들어보이고는 물었다. "이건 뭔가요, 다르?" 케르가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결혼 기념일이지 않소." 그리고는 마차에서 나와 아르에게로 걸어갔다. "잠시 시미레와 함께 다녀와 주지 않겠나?" 아르는 가만히 그를 올려 보다가 고개를 끄떡이며 마차에 올라 탔다. '곤크' 밖으로 나가는마차를 잠시 지켜보던 케르가는 좀전의 무뚝뚝한 얼굴로 변해서는 다시 왔던 길 을 되집어 갔다. '마스터', 투만의 집무실로 말이다. ========================================================================== = 실은 20회는 어제 연참할 생각이었는 데.... 제 조회수가 상당히 많이 늘었더군요.*^^* 전에는 100명이 넘었다고 좋아했었는데....한회만이지만요*^^* 다음회에 제가 쓰고 싶었던 부분 중 하나가 나오는 군요. 다음회에서는 아르의 본능이 주었던 위험신호와 잠시 등장했던 문제점이 나옵니다. 전 복선을 무지 좋아 하거든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799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3일 08:29 
등록자 : KREUZ1           조  회 : 22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22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51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곤크'에서 벗어나고도 제법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아름다움 호수구나." 물가에 앉은 시미레 부인은 아르를 손짓으로 불렀다. 아르는 천천히 걸어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마차가 서 있는 인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아 있는 호수는 작은 크기였지만 무 척 맑았다. 게다가 아르가 앉아 있는 곳의 건너편에는 울창한 숲이 자리잡아 있어 공 기 또한 맑았다. 시미레 부인은 아르의 머리를 자신 쪽으로 부드럽게 당겼다. 아르는 순순히 그녀의 손길을 따랐고 결국은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베고 누었다. "아가, 초 봄답지 않게 무척 따스하구나. 그러고보니 우리 아가 올해로 13살이구나. 학원에 입학할 나이가 다 됐구나." '그 아이도 나와 나이가 같았나 보군.' 뜻밖이었다. 아가, 아가 하길레 상당히 어린 아이로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자신의 체 구가 동년배보다도 왜소함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있으니....'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살짝 눈을 감았다. '진짜 어머니인것 같아.....'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 왔다. 상당한 크기의 방안. 한쪽 벽은 완전히 유리로 되어 있어 방안은 따스하고 밝았다. 유리는 마법이 걸린 것이라 밖에서 보면 벽과 같았고 여간한 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다른 한쪽의 벽면은 전부 책장으로 되어있었고 크고 작은 책들이 빼곡했다.유리쪽에 자리잡은 책상은 상당한 세월을 보낸듯 손때가 묻어 있었는 데 그것은 책상을 더욱 고급품으로 보이게 했다. 한쪽에는 벽이 조금 터있어 다른 방으로 연결 되어 있었는 데, 지금은 그곳에서 향긋한 차향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가운데 자리잡은 테이불과 푹 신해 보이는 가죽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 데 그의 모습에서는 편안함을 넘어선 뭔가 따스한 감정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닮은 겁니까, 아르군이?" 찻잔을 두개들고 다른 방에서 나온 남자가 차를 건내며 물었다. 앉아 있던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받아 들었다. "닮진 않았소. 하지만 시미레도 나도 그 아이를 처음 봤을때 아들 녀석을 떠올렸지. 다시 보고 또 봐도 닮지 않았음을 의식하고 봐도 아들 녀석이 아르군의 모습위에 떠 올라버려....." 평상시처럼 사무적으로 말하는 그였지만 투만은 그에게서 흥분과 그리움등을 충분히 느낄수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마음을 텄던 아르는 깊은 상처를 잠깐이나마 내보인적 이 있었다. 그랬기에 투만은 성급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꼭 듣고 넘어갈 것 은 있었다. 케르가의 의중. "아르군을 어쩌고 싶으신 겁니까?" 케르가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차를 한모금 마셨다. "아들 녀석은....." 케르가의 눈에 어두운 빛이 잠시 흘렀다. 한숨을 내쉰 그는 말을 이었다. "주황색 눈동자를 가졌지....참 특이한 색이었어." 투만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아르군과 눈동자색이 같단 말입니까?" "아니오...아니오." 투만은 케르가가 부정하자 알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 보았다. "아들의 색은 주황색이오. 아르군은 주홍색이지. 분명 다른 색이라오." 빨강색과 노란색을 섞을 때 노란색이 많이 들어가면 주황색이 된다. 또 빨강색을 많이 넣으면 주홍색이 된다.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이 사람에 포함된다면 그 차는 더욱 확실할것이다. 케르가는 자신의 아들의 색이 더욱 따뜻했다고 씁쓸히 말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혼동했지만 곧 다른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있었다고.... 하지만 다시 아들을 떠올리게 됐다고 했다. 또한 그 잔영이 사라지지 않는 다고도 했 다. 투만이 물었다. "아르군이 이제는 계속 아들로 보인단 말씀입니까? 왜.....?" "봤거든...." 케르가의 입매가 올라가며 희미하지만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아르군이 내 아내을 보며 짓는 표정, 눈동자 말일세. 물론 아들기 짓던 것과는 달라. 아르군이 지었던것은 그리움이지." 갈수록 모를 소리라며 투만은 더이상 묻지 않았고 그가 말해 주길 기다렸다. "만일 내 아들이 현신한거라면 2년만에 어미를 보고 지을 표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다시 어두워지는 그의 얼굴을 투만은 애써 외면했다. 그가 뭘 생각하고 있던 그건 그의 일이다. 자신이 간섭할 분야가 아닌 것이다. 또 그는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지 아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아 르에게서 아들의 모습만을 찾고 있을 뿐. 투만은 어린 '지기'를 생각하며 그가 더이 상 슬픔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이 얼핏 보고 느낀바로도 아르의 슬픔, 고통이 보 통을 넘었기 때문이다. 케르가는 그런 투만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계속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마스터!!!" -콰당- 노크소리 없이 부관이 들어 왔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지만 그의 분위기가 그점을 덮 어주고 있었다. 너무나 다급한 그의 분위기에 둘은 벌떡 일어나 그를 주시했다. "무슨 일입니까, 부관?" "밖에!! 어서 밖에 나가보십시요!! 어서!!" ======================================================================= 실수입니다. 죄송. 제가 쓰고 싶었던 장면은 다음 회이군요.하하 죄송. 죄송.배분을 잘못했습니다.하하 그럼 다음회를 기대해 주시고 죄많은 전이만....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 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00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3일 08:30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2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54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서로의 얼굴을 한번 본 투만과 케르가는 단숨에 방을 나서 복도를 뛰었다. 부관도 뒤를 따르며 외쳤다. "성벽으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몰려 있었고 다리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이런......" 성벽에 오른 투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많았다. 너무나 많았다. "어떻게...." 케르가도 놀라 말을 흐렸다. 거대한 몬스터 떼였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곤크',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식량'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들은 수효를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은 몬스터떼였다. "2기가 지나면 동면했던 몬스터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관례지만...." 투만은 중얼거리며 평소와는 수준이 다르게 몰려오는 몬스터들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부관은 여기저기 명령을 내리고 뒤늦게 도착했다. 그는 다시 보는 광경이지만 잔뜩 질리며 말했다. "요즘 몬스터가 뜸하다 했습니다. 모집의 기간이라도 가진 걸까요?" 투만은 호기심어린 눈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수치상으로 보면 점차 몬스터가 늘어가고 있었지요. 대신이라고 말하긴 뭣하지만 몰려오는 기간이 줄어들고 말입니다. 이정도 수효라면 3기에 몰려오는 몬스터가 전부 오늘 모인 거라고 봐도 되겠군요." 케르가가 물었다. "도데체 저 많은 몬스터가 어디에서 몰려오는 건가?" 부관은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카미렌'산맥이지요." 그제서야 많은 수효에만 놀라고 있는 그들을 눈치챈 케르가는 이 일이 연래 행사 임을 깨달았다. 뿐만아니라 많은 용병들이 무기 정검을 하고 화살과 투포환등을 설치하고 있는 것도 그 판단에 확신을 주었다. 어느 한편에서는 누가 더 많이 잡을 것이가 내기까지 벌리고 있었다. 그렇게 태연히 준비를 하는 이들 사이에서 경악이 일었다. "마스터!!저기!!" 모두의 눈에 경악이 일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던 몬스터의 모습이 드러나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했기 때문이다. 몬스터들을 피하며 달려오고 있는 이가 있었다. 멀리서 봐도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었다. 멀리서 곡예처럼 말을 몰고 '곤크'를 향해 달려오는 이는 많은 사람에게 경악과 더불어 감탄을 일게 했다. 그 기수는 달려드는 몬스터를 오직 마(馬)술 만으로 피하며 놀라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뒤에는 곧 떨어질듯 휘청거리는 여자를 태우고 말이다.하지만 모두 감탄만할뿐 원군은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원군을 보낸다면 전력에 손실을 입을뿐 구할 확률이 적었기 때문이다. 뒤를 쫓는 몬스터가 한둘이어야지 말이다. '곤크'의 모든이들은 원군은 고사하고 올린 다리를 내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몬스터가 뒤를 쫓고 있어 그들이 다리를 건너도 몬스터들이 바로 안으로 쳐들어올 확률이 절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잔인하고 냉정한 일이라 생각해도 별수 없는 것이다. 그 둘을 살리기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원군을 안 보낼 생각인가?" 케르가 외에 우연히 이곳을 방문한 다른 귀족이 있었다. 모두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젊은 남자였다. 그는 케르가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케르가경 아니십니까? 전 이번에 기사서임을 받게 될 파인. 이노. 라. 스타민 이라 합니다. 의뢰차 왔습니다만...... 원군을 빨리 보내야되지 않겠소. 밑에서 말을 했지만 듣질 않는 군." 투만에게 고개를 돌리며 이노라는 이가 물었다. 투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원군을 보내는 건 제 관할 소임입니다. 이노군." 아직 기사서임을 받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기 때문에 투만은 스스럼 없이 '군'이란 호칭을 덧 붙였다. 기사의 서임을 받았다면 '경'을 붙이고 가주라면 '공'을 붙이는 게 예의 인것이다. 이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전 월권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해 마십시요. 하지만 위기에 처한 이를 모르는 척하는 건 기사로써도 사람으로도 할짓이 아니지 않습니까?" 케르가는 무심한 얼굴로 젊은 이상주의자를 쳐다보다 말했다. "자네는 전법을 다시 공부하는 것이 좋겠군." 더더욱 얼굴을 붉힌 이노는 반문하려 했지만 케르가는 더이상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 동안 달려오던 이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 "아르군!!" "시미레!!" 경악성이 일었다. '제길!!' 아르는 신은땀을 흘리며 뒤에서 휘두른 도끼를 피했다. 자신만 있다면 어느정도 만 피하고 전진하겠지만 뒤엔 시미레가 있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잘 모르는 지 빠르고 아슬아슬한 승마에만 넋이 빠졌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아르에겐 충분히 짐이 됐다. '살려면 떼어내면 된다.' 속으로 갈등하는 아르였으나 그의 행동은 그녀의 팔을 묶은 자신의 끈을 조이고 있었다. 지금 그 둘의 포즈가 어떤가 하면 그녀의 팔을 자신의 허리에 두르고 두 팔을 이마을 감싼던 끈으로 단단히 묶어논 상태였다.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배려한 것으로 당장이라도 그 끈만 푸르면 낙마할 것이 분명했다. 혼자면 충분히 벗어날 자신이 있는 아르였다. 또한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 고민할만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더욱 그녀를 배려하며 달릴 뿐이었다. '곤크'가 보일만큼 달렸으나 아르는 안심하지 않았다. '곤크'에서 원군이 올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다리라도 내려져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 여자를 안은체 성안으로 점프해 들어갈수 있을 까?" 답은 no. 하지만 아르는 계속 곡예만 할뿐이었다. "히히이잉!!!!" 말이 크게 앞발을 올렸다. 계속 된 추격전에 신경이 곤두선 것이다. 하지만 아르는 말에게 자신의 힘을 조금 개방함으로써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었다. 또 말이 앞발을 듬으로써 생긴 여파를 원래 점프하려고 든것처럼 약간의 점프로 깨끗이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이미 헛점은 드러난 상태였다. 뒤에서 던진 도끼에 아르와 시미레는 허공으로 날려졌다. '곤크' 내부에서 경악성이 크게 흘러 나왔지만 아르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르는 잽싸게 그녀의 손을 묶은 끈을 풀고 몸을 돌려 그녀를 감싼체 추락했다. 몇바퀴 더 돈다음에야 멈춘 아르의 눈에 뒷발이 잘린체 몸부림치는 말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에 애도할 시간이 없었다. 아르는 시미레의 손을 잡고 그녀를 강제로 일으켰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저런 무모한!!" 이노는 자신의 의견이 기각당하자 무안함을 감춘채 둘을 지켜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도끼를 휘두르고 많은 종족이 결집해 있는 몬스터 떼거지를 앞에다 두고 기껏 작은 단검을 꺼내든 소년의 무모함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기'와 아내가 위험에 처했음에도 원군을 보내지 않는 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자신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고 숙연해 졌다. 멀리서 놀랍도록 빠르게 달리고 있는 소년과 끌려오는 부인이 보였다. 소년이 무척 빠름을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이노는 감탄했다. "저 소년, 자기 혼자 도망치면 금방 피할수 있겠는 데요?" 철없지만 직절적인 말에 투만과 케르가는 움짓할뿐 대꾸하지 않았다. "아!!!" 소년의 뒤에서 커다란 코불이 달려들자 이노외에도 많은 이들이 경악성을 흘렸다. 그들이 예상하건데 소년이나 간신히 따라오고 있는 부인중 하나는 반 토막이 될 것이 분명했다......였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이 생겼다. 부인을 앞쪽으로 거세에 밀친 소년이 단검을 들어 막아낸것이다. 그것도 한손으로! 소년은 코불의 손톱을 팅겨내고는 그에세 달려들어 눈을 도려냈다. 너무나 빠른 동작이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허공을 수 놓는 피 두 줄기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왼 쪽 귓가로 단검을 쥔 손을 순간 갖다대고는 급히 다시 달렸다. 하지만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곤크'에서 투만 만이 알수 있었다. "프로....라는 건가?" "....?"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무시한체 그는 '지기'에게 집중했다. 그러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어 캐스팅 준비를 했다. "뭐 하는 건가?" 이노가 물었다. 그의 반말에 부관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별다른 말은 하진 않았 다. 그는 귀족인 것이다. 아무리 철 없어도.... 진짜 실력자, 대귀족은 '곤크'의 마스터에게 감히 월권행사를 하려하거나 막말을 하지 않았다. 케르가가 투만에게 말을 놓는 것은 자신이 연장자이기 때문이지 결코 신분의 차에 근거한것이 아닌 것이다. 기분이 상한듯 보이는 부관을 대신해서 투만이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들이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플라이 주문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제서야 납득이 됐는 지 다시 밖으로 고개를 돌린 이노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저건......?" "전법 중의 기본이다." 케르가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체 답해 주었다. 이노는 아주 허접은 아니였는 지 고개를 끄떡이며 확답을 구했다. "다른 몬스터끼리 있을 때 한 마리가 부상을 당하면 다른 종의 몬스터가 잡아 먹는 다고 하죠? 그러니까 지금도 다른 종이 아까 부상당한 종을 잡아 먹으려는 거고 부상당한 종과 닽은 종이 막으려다보니까 싸움이 일어난거군요." "또있지요." 투만도 캐스팅을 하려다 본 광경에 정신을 빼고 있다가 이노의 말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노는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투만 역시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체 답했다. "아까 아르군이 공격한 곳은 눈입니다. 시야가 안보이는 몬스터는 본능에만 의존합니다. 본능으로 가자면 적의를 품은 자를 공격하게 되는 데 그것이 자신을 향한 적의인지 아닌지 구별까지는 못합니다. 일단 몬스터끼리는 서로간의 본능적, 무의식적인 적의가 존재하는 데 눈을 잃은 몬스터는 그 희미한 적의에도 반응을 보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종의 몬스터가 그를 무시하고 싶어도 그 스스로가 막무가네로 덤벼드니 별수 없이 서로 공격하게 되는 겁니다." 이노는 감탄성을 흘리며 서로를 공격하는 몬스터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아이는 알고 한걸까?" "알고 한겁니다." 단호한 투만의 말에 모두 의아한 빛을 띄었지만 그는 미소만 지을 뿐 함구했다. 하지만 지금 모인 몬스터들의 종은 두세개 만이 아니였다. 그 소동에 휘말리지 않은 다른 종들에 다시 몰려들고 있었고 아직 '곤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두 사람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슬라임?' 흐물거리며 빠르게 꿈틀대는 몇안되는 몬스터. 아르는 그들이 내뿜는 액체가 진한 산성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르에게 가장 힘드는 것은 새로 달려드는 몬스터가 아니였다. 바로... "까악!!!!까악!!!!!" ....몬스터를 봐버린 시미레 부인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몬스터에 질겁한 것외에 다른 요인으로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르로써는 그녀의 '아가'가 몬스터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길이 없었다. 하지만 알아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속도라면 그녀를 끌고도 벌써 '곤크'에 도착했을 거란걸 알고 있는 아르였기에 짜증은 더했다. "아가 도망쳐라!! 어서....널 잡아 먹으려고 온다. 아가 어서 도망쳐라...." 점차 줄어드는 음색에 아르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슬라임에 파묵히기 직전의 시미레가 시선에 들어왔다. 아르는 급히 시미레를 자신쪽으로 끌어당기고 다른 손을 내밀어 슬라임의 몸체에 깊숙히 피묵었다. '잡았다!' 아르는 쨉싸게 손을 꺼냈다. 다시 달리는 그의 손에는 투명해서 반사광만으로 존재를 알수있는 물체가 들려 있었다. 그 물체를 원석으로 본 자는 극 소수로 1급의 몬스터 헌터라도 구하기 힘들다는 슬라임의 핵석, '락팔어'였다. 계속 이동하는 슬라임의 핵은 거의 우연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운 좋게 반토막난 단면에 있을 경우 외엔 구하기 힘든 것이다. 슬라임의 시체에서 빼내면 된지 않냐고 무지한 자들은 얘기한다. 하지만 슬라임의 핵은 슬라임의 생기중 반만 빠지면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간신히 생포하다해도 기운이 빠진 슬라임의 핵은 이미 없어진체가 되버린다. 몬스터헌터중 한두명만이 이 핵을 꺼낼수 있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유통되는 '락팔어'는 많지 않다. 연금술에 필수 재료임에도 유통되는 것이 적은지라 거의 부르는 값인 물건이었다. 또 연금술 뿐만아니라 마법의 시약을 만들때도 사용되는 것이라 그 가치는 더했다. 유통되는 것도 완전한 모습이 아닌 부서지고 망가진 것이 대부분으로 부서질 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방금 꺼낸 완전한 '락팔어'의 가치는 무궁무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엄청난 가치의 물건을 손에 넘에도 아르는 무심이 자신의 왼쪽귓가에 잠시 가져다 놓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귓가에 걸린 귀걸이에다 말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원석은 순신간에 사라졌다. 그 행방은 아르와 투만만이 알뿐이었다. 계속 발작을 일으키는 시미레덕에 진행은 더뎠고 두 종을 우회한 다른 몬스터들이 곧 그 둘이 덮쳤다. 아르는 자신의 힘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거체의 몬스터가 달려들자 시미레를 강하게 밀어 자신의 앞에 놓고 뒤를 돌았다. 돌면서 허리에 있던 다른 단검도 뽑아든 그는 두 단검을 교차하여 일격을 막았 다. 뒤에서 계속 들리는 시미레의 비명이 아르를 상당히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크윽!!!' 옆에서 다른 몬스터가 시미레에게 발톱을 찔러 왔고 아르는 단검에 쏟던 힘을 빼고 몬스터의 힘을 흘리며 시미레를 감쌌다. 그리고.... "아가!!!!!" 왼쪽 어깨를 크게 다친 아르는 고통스런 얼굴로 시미레를 밀음과 동시에 뒤로 빠졌다. 다시 달려드는 몬스터에게 단검을 고쳐든 아르가 일격을 주었고 급소를 찔린 몬스터는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였다. 자신의 공격을 흘린 건방진 인간을 향해 아까의 몬스터가 크게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는 뒤로 시미레를 밀며 물러 났으나 어느정도의 부상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뜻 밖에 그 몬스터는 천천히 앞으로 고끄라졌다. '아트힌.' 복면을 쓴 체 나타난 아트힌은 아르를 감싸며 거세게 공격을 넣었다. 그때 생긴 잠깐의 여유. 아르는 두 손으로 비명을 지르는 시미레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피.피.피. 작은 몸에서 많이도 나오는 구나...... 나의 아가. 나의 아가...... 무력하다.너무나 무력한 나.... 저 밑에서 나의 아가는 참혹하게 찟겨져 잔혹하게 씹혀져 사라지고 있는 데..... 나는 비명도 지를 수가 없구나. 이 어미는 너를 위해 소용이 없을 지라도 너의 몸을 감싸주고 싶건만...... 날 놔달란 외침이 왜 이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건지.... 날 놔달라는 데도 굳건히 잡기만 하는 구나. 나의 아가는 뼈조차 남기지 않고 그 작은 몸 다 사라져....다 사라져..... 시미레는 문듯 고개를 올렸다. 아니 올려지는 고개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그래......' 시미레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다 꿈이었어....나의 아가는 이렇게 계속 웃고 있는 걸!' ====================================================================== 언니가 비키랍니다 ㅠ.ㅠ 아직 남았는 데... 여기서 끝내야 겠군요. 많은 감상과 비판 (비방이 아닌) 부탁 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01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3일 08:30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2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25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30 -아해의 장- (신승림) "뭘하는 거지요, 저 아이?" 뜻밖의 원군의 등장으로 생긴 짬에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고 부인의 얼굴만 보고 있는 모습은 많은 이를 답답하고 조바심나게 했다. 특히 이노의 안타까움은 더했다. 하지만 의외로 투만과 케르가는 무덤덤했고 그것은 이노의 조바심을 부추겼다. "마법 준비 안하고 뭐하는 겐가! 자넨 지기가 죽어도 상관 없는 가!!" 투만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이노를 보았다. 철은 없어도 순진하다고 봐줄수 있는 청년이다. 남의 목숨은 뭣같이 아는 대다수의 귀족들에 비하면 얼마나 순수한가! 투만은 천천히 손을 합장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비행........"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 천천히 주문을 외우는 그를 이해한 이노는 안타까운 시선을 성밖으로 돌렸다. "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달려오는 세 인영이 보였다. "시미레가 안정 한거다." "네?" 부드러운 시선, 하지만 초초한 시선으로 밖을 응시하던 케르가는 아직은 순수한 젊은 귀족을 보았다. "시미레가 안정을 취했기 때문에 행군 속도가 빨라진거다. 전법에도 속하는 거지......'기습한 적의 공격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다. 아군의 동요를 막는 것이 최우선이다.'..... 시미레를 보게..." 이노가 본 부인의 표정은 너무나 천진했고 평화로왔다. 두 사람은 듣지 못하겠지만 시미레는 현재 아르에게 이런 말을 하며 뛰고 있었다. "아가, 어미와 술래잡기를 하자는 거냐?" 아르는 계속 밝은 미소를 띄며 그녀의 손을 다급히 잡아당겼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조금 잘려나갔다. 바로 뒤에 따라붙고 있는 몬스터의 손톱에 의해서 말이다. 아르는 이동 속도가 빠른 몬스터의 특성을 이용해서 아주 위급할때 만 해치우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푹!!!- 아르의 단검이 바로 따라붙고 있었던 몬스터,그릭의 이마에 있는 루비빛 눈동자에 혔다. 다른 몬스터와는 다르게 그릭의 눈은 광물성질을 띄고 있고 제대로 빼내기도 힘든 '상품' 이었다. 그 눈동자는 몬스터의 이름을 그대로 따 '그릭'이라고 하는 데 제대로 빼낸것은 '락팔어'에는 못미치더라도 여간한 몬스터 헌터는 구하지 못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튕겨져 나온 눈동자를 날쌔게 잡아든 아르의 다음 행동은 왼쪽 귓가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아트힌이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아르를 보호하려 했으나 아르의 몸놀림은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그의 왼쪽어깨에서 '곤크'에서도 보일만큼 많은 피가 흘려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두 '그릭'이 아트힌에게 덤벼들었다. 앞서 아르처럼 급소를 노려 손쉽게 죽일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눈동자만 빼내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겠지만 겉으로 들어난 그 눈동자는 정말 깨알만했다. 게다가 다른 껍데기들로 잔뜩 감싸져 있었다. 아트힌이 쓰는 상당한 길이의 곡도로는 그 사이를 빠고 들수 없을 뿐더러 단검이라해도 아르처럼 정확하고 숙련되게 헤치고 들어갈수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아트힌은 '씬'의 차기 가주였다. 아르만큼 순식간에 죽일순 없더라도 궁지에 몰릴정도로 약하진 않은 인물인 것이다. 왠만한 용병들도 붙기 꺼려한다는 '그릭'이었지만 아트힌에겐 약간의 시간투자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때였다. 그의 마스터가 부상을 입고 있는 상태였고 '짐' 또한 있는 상태였기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마스터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희미하지만 정확하게 아트힌의 귓가를 강타했다. 다소 무리를 해서 둘을 물리친 아트힌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뒤를 돌았다. 그런 그의 눈에 뿔이 두개 달린 '크라스트마밈' 이 아르의 복부에 한쪽 뿔을 박은 모습이 들어왔다. "마스터!!" 아트힌은 쨉싸게 크라스트마밈의 급소인 두 뿔 사이를 깊게 찔렀고 그것은 곧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아르는 크게 기침을 했다. '실수했군.'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아르였으나 실상은 달랐다. 완전히 몬스터의 존재를 망각해 버린 시미레가 소와 생김이 비슷한 크라스트마밈의 곁에 다가가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 아르는 그릭의 눈을 채취(?)하고 있었고 그래서 애초에 그녀를 막지못하고 조금 늦게 알아챈것이다. 그녀를 감싼 아르는 결국 깊은 상처를 또 입고 말았다. 하지만 아트힌에게 그녀를 눈짓해 보호하라고 명했다. 아트힌의 드러난 눈동자는 내키지 않음을 확실히 내보이면서도 결국 따랐다. 아르는 비틀대며 일어났다. 시미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가?" 아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뒤에서 또 한마리의 크라스트마밈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윽!' 아트힌도 아르를 걱정스레 보다가 그제서야 눈치를 챘는 지 곡도를 고쳐 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머니!!' 그때였다. ========================================================================= 어제 올렸어야 할 분량이 여기까지 입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 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곧 페르노크이야기로 넘어가겠군요.^^
번  호 : 1780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3일 08:30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26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35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악몽을 ........꿨다....... 심연 속에 떠돌던 그날의 기억. 꿈속에서 그날은 다시 반복됐다. 그것은...... 악몽이었다. -너까짓 놈때문에 내 인생은 엉망이 됐어!- 한 맺힌 목소리. -아이만 내 놓으라고? 그럼 난?- 슬픈 목소리. -그토록 떠받들던 날 이토록 짓밟다니!!- 갈라진 목소리. -네녀석만 아니였다면 난!!- 하지만 낭랑한 목소리. 그녀가 봉을 들어올린다. 그녀의 권위를 상징하는 봉을...... 기묘한 문자가 새겨진 봉. 그 안에는 그녀만이 아는 은밀한 힘이 숨겨져 있다. 땅을 집는 곳에 박힌 핏빛 보석. 그 안에 새겨져 있는 문자들..... 그녀가 봉을 내리찍는다. 지독한 아픔...... 광기에 젓은 여자. 울지 않는 ...... 아기. 하지만 피로 얼룩진 아기. 지독한 아픔. 한쪽 팔에서 피가 튀고 다른 팔에서도 피가 튄다. 한쪽 다리에서 피가 튀고 다른 다리에서도 피가 튄다. =아파!! 아파!! 그만해요! 그만해!= 아기의 눈이 떠진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본 광경...... 자신의 얼굴을 내리찍기 위해 달려드는 핏빛 보석. 그리고...... =어머니!!!= 갑자기 진땀을 흘리는 '아가'를 걱정스레 지켜보던 시미레는 부드럽게 그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때 갑자기 '아가'의 눈이 떠졌다. "아가?" 아직 정신이 혼미한지 멍하니 자신을 보는 '아가'의 빰을 보듬어 본다. '부드러운 목소리다.' 아르는 눈을 살짝 감았다. 그리고 느꼈다. '부드러운 손길이다.' "아가?"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아르를 보며 당황해 했다. 그러다 손에서 팔찌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아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의 '아가'는 반짝이거나 색이 선명한 보석류를 좋아했던 것이다. 아르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팔찌를 가만히 보았다. 뫼비우스처럼 약간 비틀어져 선이 만나는 팔찌였다. 검붉은 빛을 띄우는 데 무슨 재질인지 알수가 없었지만 무척 고가품으로 보였다. 둔탁한 반사광을 내뿜는 굵직한 팔찌. 가만히 쳐다만 보는 '아가'에게 웃어 보이며 시미레는 직접 끼워 주었다. "선물이란다, 아가. 맘에 안드니? 너무 수수한가?" 아르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다시 빼드는 팔찌가 너무나 화려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끼고 나중에 케르가를 통해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야 웃는 구나." 실제 아르는 웃지 않았지만 그녀는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아르는 한기를 느끼며 주위를 살폈다. '이래서.....' 속으로 한탄하며 아르는 시미레를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급히 걸어갔다. 시미레는 '아가'가 추워서 그런가 하며 조용히 따라왔고 덕분에 둘은 마차가 있는 곳에 금방 당도했다. 시미레의 호위 기사로 따라온 이들은 별다른 반응없이 돌아오는 그 둘을 마중했다. 아르는 계속 투덜댔다. '나오기 싫었다고.' 아르는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호위기사들은 아르를 경계하며 시미레를 쨉싸게 낚아채갔다. 하지만 아르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마차에 묶여 있는 말중 가장 앞에 있는 커다란 말을 해방시켰다. 다시 검집에 단검을 꽂은 아르는 시미레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미레는 주위의 만류에도 그 손을 잡았다. 그런 그녀를 자신의 뒤에 태웠다. 주위에서 아르에게 뭐라 항의했으나 아르는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를 묶은 천을 풀렀다. 자신을 무시하는 꼬마에게 따끔한 경고를 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기사들에게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기사들이 주위를 살피는 동안 아르는 시미레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하고는 묶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어리벙벙해있는 기사들의 옆을 지나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달렸을때 뒤에서 비명이 들려 왔다. 하지만 아르의 말은 속도를 더 냈을 뿐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이건......?' 아르는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바람의 벽을 망연히 보았다. "마법?" 아트힌의 의아함 음성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느껴지는 이상한 진동. 아르는 자신의 왼쪽손목을 보았다. 쉴새없이 스스로 진동하는 물체가 들어왔다. '팔찌?' 시미레를 한번 본 아르는 그녀가 무사함을 확인하고 그녀가 준 팔찌에 대해 의문을 어느정도 풀었다. '주인이 위험해지니 힘을 쓴건가? 수호의 주술이라도 걸려있나보군.' 그녀가 준 팔찌는 계속 진동을 했고 바람의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주위에서 수 많은 몬스터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때로는 몸을 날려 벽에 충돌하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수록 바람의 벽은 진동과 함께 더욱 두터워졌다. "굉장하군요. 마법이 담긴 팔찌인가 보군요. 의외군요. 바람의 힘이 담긴 팔찌면 녹색이나 연푸른색을 띄는 것이 보통인데 선명한 붉은 빛이라니." '선명한 붉은 빛?' 분명 그가 본 팔찌는 검은빛이 도는 와중에 붉은 빛이 담긴 색을 가졌었다. 아르는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다. 진홍빛 팔찌가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고 있었다. '......!' 자신의 피로 젓어있던 팔찌였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서 그 피는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건 더더욱 붉은 빛을 띄우는 팔찌...... '흡수된건가?' 더이상 아르는 생각을 진행시킬수 없었다. 그 셋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오른 것이다. '이것도 팔찌의 힘인가?' 아르는 곧 아니라는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팔찌에선 더이상의 진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쨋건.....' 발밑으로 지나가는 성벽을 보며 아르는 시미레의 손을 잡았다. 착지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살았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땅을 보며 아르는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안전하게 착지했다. 물론 시미레도 배려하면서.... 옆에 있던 아트힌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아실분은 아실 팔찌의 정체^^ 아르의 배경은 다음회나 다다음회에 다 완성되겠네요.^^ 그 다음은 페르노크입니다. 왕따 격파!! 페르노크의 왕따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 군요. >o< 조회수가 많이 올랐더군요*^^* 물론 다른 분들에 비하면야 별거아니지만*^^*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21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4일 07:00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2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27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50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피한건가?' 사라진 아트힌으로 인해 생긴 여파를 무시한체 아르는 시미레의 손을 놓았다. 그녀에게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시미레!" 케르가는 다급히 성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투만이 안전을 위해 마법의 착지 장소를 성벽 밑 넒은 장소로 정했기 때문이다. 부인을 꽉 안은체 아무말 없이 있는 케르가에게서 참아왔던 불안을 느낄수 있었다. 아르는 고개를 숙인 그대로 손에 쥐어 있는 검은색끈을 들어 이마를 싸맸다. 그러자 아직은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귀걸이가 감춰졌다. "아르군!!" 케르가보다는 한발 늦었지만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투만을 보며 아르는 천천히 쓰러졌다. 그의 몸은 아직도 많은 피를 멈추지 않고 뿜어내고 있었다. 급히 그를 안아 올린 투만은 미묘하게 진동하는 팔찌를 눈치챌수 있었다. 하지만 의아함은 잠시, 바람의 벽을 생각해 내며 '곤크'에 배치 되어 있는 의무실로 워프해갔다. 생각보다 훨씬 높은 마법을 구사하는 그에게 놀라며 케르가와 이노는 물어가며 의무실로 향했다. 성벽에 남은 것은 남은 전투 준비로 한창인 용병들 뿐이었다. 꿈....... 나는 어릴때부터 묘한 꿈을 많이 꿔왔다. 그중에서도 많이 꾸는 꿈은........ 언제나 날 혼란과 슬픔에 빠지게 했다. 남자가 있다. 아름다운 남자다. 고요한 숲....... 그는 뒤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바위에 몸을 기댄체 미동 없이 존재한다. 아니다. 바위가 아니다. 아주 가끔씩 오르락 내리락 거림으로써 그것은 자신이 무생물로 인식됨을 거부한다. 그 흔들림에 맞쳐 남자의 몸도 조금씩 움직여 진다. 하지만 남자의 초점은 미동이 없다. 어느 순간 남자의 반쯤 감긴 눈이 크게 떠진다. 붉은 빛이 남자를 감싼다. 남자가 떨리는 눈동자로 허공에 주시한다. 남자의 입이 열린다. 낮은 목소리. 희미한 목소리. "............" 하지만...... 나로써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그렇게 난 눈을 뜬다. 여긴...........? 아르의 눈에 하얀 벽이 들어왔다. 네 귀퉁이에 지금은 꺼져 있는 마법의 등도 보였다. '새벽...아니면 아침.....' 쌀쌀한 공기가 낮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윽!' 아르의 웃옷은 벗겨져 있었지만 그의 맨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붕대가 태반인 자신의 몸을 무심히 본 아르는 옆에 개있는, 아마도 자신을 배려하여 준비했을 펑퍼짐한 웃옷을 입었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몸을 감싸는 촉감이 좋았다. 아르는 여전히 자신의 이마를 감싸고 있는 익숙한 천의 감촉을 느끼며 투만의 배려를 고마워했다. 원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런 천따위는 제거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아르의 팔목을 감싸고 있는 천조차도 그대로인 것은 투만이 손을 쓴것이 분명했다. 아르는 옷과 같이 놓여 있는 단검 두자루를 허리에 차고 문을 나섰다. 아르는 미글이 사주었던 말이 있는 마굿간을 향했다. 말은 아르를 알아보고 반가워했고 아르는 안장을 찾아들었다. "가려는 겁니까?" 안장을 올린 아르는 뒤를 돌아 투만을 마주했다. 변함없이 미소짓고 있는 그가 보였다. "민느일행은 집으로 휴가갔고.... 쓸쓸한 배웅이군요." 아르는 그제서야 민느가 얼마동안 안 보였음을 깨달았다. 그런 아르에게 약간 웃어보인 투만은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저한테 책임지고 잡아두라곤 했지만....... 아마도 허.락.받.으.려.고. 간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후후." 아르의 손놀림이 상당히 빨라졌다. 투만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며 잠깐 뒤로 물러섰다. 그리자 앞으로 나선 이가 있었다. 케르가였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싶소만." 아르는 마저 말을 정비하고 뒤를 돌았다. 케르가는 일단 고개를 깊숙히 숙여보임으로 아르를 당황케하고는 입을 열었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고맙네." 아르는 별내색없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엔 약간의 불쾌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례를 하려고 하는 건가?' 그것은 싫었다. 평소라면 받았을 테지만, 아니 아예 구해주질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그녀를 구하고 받은 돈이라니.....아르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의 왼쪽 손목에 이질감을 알아차렸다. "아내와 난 몬스터에게 아들을 잃었다네. 특히 아내는 바로 눈앞에서....... 그후 시미레는 정신이 나가고 말았지. 시미레가 웃는 모습을 본건 그후 어제가 처음이지. 그래서 말인데......" 아르는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줄것을 주고 빨리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들어 팔찌를 케르가에게 보인후 오른쪽 팔로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케르가의 말이 떨어졌다. "자네...... 우리 아들이 되지 않겠는 가?" 아르는 멍하니 팔찌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떨어뜨렸다. 그러다 케르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진심이다...... 저 남자." "아내가 자네를 아들로 착각하기때문만은 아니네. 나도 자네에게 웬지 모를 혈육의 정을 느끼고 있고......" 케르가의 집안이 어떤 집안인가! 「카르민」바로 밑을 차지하고 있는 신분, 「이브겐」이다. 황위 계승권은 없어도 충분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집안인것이다.그런 집안에서 이름밖에 모르는 용병단의 꼬마를 양자고 들이겠다고 아니, 들어와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의 패닉상태에도 케르가는 자기 할말만을 계속했다. "자네에게는 실례겠지만, 아내의 상태가 저러니 자네 이름이 아니라 죽은 아들 이름으로 해될것 같네만..... 양해해주었으면 하네." 아르는 머뭇거리다 허리춤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여기서 케르가는 한가지 사실을 알수 있었다. 아르가 재력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음을. 오리혀 풍족함을. 아르가 꺼낸 펜은 하위 귀족 층도 쓰기 어려운 '묵'인것이다. 아르가 쓰는 모습을 지켜보던 투만은 한마디했다. "아르는 보시다시피 풍족합니다. 그는 일급 몬스터헌터니까요." 아르는 흠짓하며 투만을 보았다. 투만은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 그는 아르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는 케르가에게 눈을 돌렸다. 케르가는 놀랍게도 태연히 고개만 끄떡이고 있었다. "그럴테지. 어제 슬라임과 그릭을 잡는 모습을 보고 예상은 했었네. 그냥 죽이는 건 보통 전사도 할수 있는 일. 죽일수는 있어도 구할수는 없다......" 투만은 예상했던듯 아르를 보았다. 아르는 가만히 자신이 쓴 메모를 보고 있었다. 몬스터 헌터가 무엇인가? 앞서 케르가가 언급했듯이 몬스터를 죽이는 건 검이나 마법을 배운자는 누구나 할수 있다. 하지만 슬라임의 '락팔어'이나 그릭의 '그릭' 처럼 시체에서는 찾아낼수 없는 것, 시체에서 나온것은 가치가 없어지는 것등.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들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이들을 말한다. 좀더 간단히 말하자면 몬스터에게서 얻는 광물이던 액체건 모든 것들을 통칭, '후카'라고 하는 데 바로 이것을 사냥하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조금 언급했듯 시체에서는 '후카'가 소실되거나 가치가 없어진다. 때문에 살아있을 때,싱싱한 몬스터와 대결하면서 채취해와야한다. 위험한 일이다. 능숙한 고수 조차하기 힘든 일이다. 죽일수는 있어도 구할수는 없다. 이것은 몬스터 헌터의 대단함을 표하는 말이다. 몬스터 헌터는 대략 50여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헤아릴수 없이 많은 마법사와 연금술자들의 중요한 재료를 구하는 이가 겨우 50명이란 소리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일급 몬스터 헌터는 겨우 3명이다. 10% 도 안되는 3명. 살면서 유희 중인 드래곤을 만나는 것보다도 만나기 힘들다는 일급 몬스터 헌터이 다. 그런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는 태연히 자신의 아들로 와달라고 하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의 주가를 알고 자신에게 무상으로 귀속되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 다. 하지만 케르가의, 부모의 정을 운운하는 케르가의 눈은 절절했다. 아르는 버릇처럼 왼쪽 귓가의 귀걸이를 쓰다듬었다. 바로 이 귀걸이다 몬스터 헌터의 증표이다. 물론 이것이 몬스터 헌터의 중표하는 것을 알아보는 이도 드물지만 알사람은 아는 증표였다. 이 귀걸이를 매개체로 하여 각 몬스터 헌터는 자신만의 이공간을 가진다. 생각해보라. 늘쌍 전투를 치루는 그들이 그때그때 모은 '후카'를 신경쓰며 지낼수 있겠는가? 50명밖에 안되는 지라 몬스터 헌터의 길드는 단 한군데 밖에 없다. 물론 스스로 판매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도 제값을 줄수있는 이가 있을 때다. 때문에 생긴것이 바로 이 '이공간' 이 공간은 주인만이 열고 닫을 수 있으 며 각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다고 한다. 또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넓어 마음껏 저장할수 있지만 빼낼때는 주인의 의지로 물체가 나온다고 하니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이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몬스터 헌터중에서도 극소수라고 한다. 이공간의 매개체인 귀걸이는 줄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 그 공간에도 주인이 있는 것이다. 즉, 공간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사용할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이공간이 다. 아르가 이공간을 사용했을 때 알아본이가 적은 것도 바로 이 이공간 자체를 아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아르는 앞에서 있는 남자가 자신의 실력을 원하는 것이가 아닌것이가는 이미 따지지 않았다. 아니라는 것을 알기때문에...... 케르가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은체 아르의 답을 기다렸다. 투만은 어느 판단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르는 더이상의 망설임 없이 '묵'을 들었다. 케르가는 자신의 앞에 내민 아르의 메모를 긴장한체 읽었다. 그리고 ........ 웃었다. 무뚝뚝한 그가 정말로 행복하게 웃었다. 그것은 아르 밖에 볼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아르도 마주 웃었다. 슬퍼보이지만 아주 그러지만은 않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이는 셋이었다. 케르가. 투만. 그리고 아트힌.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 이름은 뭔가요, 아버지.- ================================================================= 하하하하하하하. 아르의 배경이 완성됐다!!!>o< 아르가 귀족이 됐습니다. 그리고 밝혀진 아르의 비상한 신분! 몬스터 헌터. 이 세계에서는 이 몬스터 헌터가 드레곤만큼이나 희귀한 존재지요. 그중에서도 일급 몬스터 헌터는 더하구요. 아르가 왜 별다른 짐없이 다니는 지 궁금했던 분들^^ 이제는 호기심이 풀렸는 지. 아르의 이름 참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성은 일단 케르가고 장남이니 라이고 신분은 이브겐 이고.... 즉 한가지 이름만이 아직...... 케르가. ( ). 라. 이브겐. 좋은 이름이 있으면 알려주~~~ 일단 나름대로 정하긴 했지만 다른 좋은 이름이 있었으면.......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2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4일 07:01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6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6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2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46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내가 원하는 것은 보조, 내가 바라는 것은 빛의 힘. 라*이*트*" 어두운 방안에 낮은 목소리가 퍼졌다. 그 울림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희미한 빛이 퍼졌다. 동그란 구의 형태를 한 빛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그 빛의 주인이라 짐작되는 이가 보였다. 커다란 침대에 홀로 앉아 있는 그는 무릅을 세워 두팔로 감싼체 쭈그리고 있었다. 마법을 아는이가 봤다면 경악할 포즈였다. 마법이란 정해진 손짓과 정해진 주문, 정해진 배열등으로 생성되는 하나의 예술. 그런데 그와같은 방자한 포즈로 기초적이지만 하나의 마법, 예술을 완성시켰다는 것은 여간한 마법사는 꿈에도 못 꿀 일인것이다. 그렇게 방자한 포즈를 취하던 이가 고개를 들어 자신이 만들어낸 예술을 바라봤다. 희미한 빛이 그의 얼굴을 밝혔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가 비춰졌고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비춰졌다. 남자는 손을 빛을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빛의 구는 남자의 손에 내려 앉았다. "예쁘다." 남자의 무심한 눈동자에 미소가 흐르는 듯했다. 그는 페르노크. '희대의 천재'라는 엄청난 별칭의 소유자였다. 여기서 속인들은 방금 벌어졌던 오만 방자한 예술을 납득하게 된다. 하지만 일말의 사건과 연관이 있는 이는 경악을 하게 될것이다. 그는 기억상실이 아니였던가! 잠깐 책을 본걸로 마법을 사용할줄 안다면 어느 누가 마법을 못 쓰겠는가? 겉보기엔 주문과 손짓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과정은 말로 설명하려면 끝이 없는 수많은 복잡한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정설을 무시한 페르노크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책들이 보였다. 두터운 책이다. 알사람은 알 교과서라고 불리는 기초적인 마법서였다. 그는 대뜸 교과서의 맨 뒷면을 펼쳤다. 여짓껏 적혀져 있던 주문은 「공격」,「방어」,「보조」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펼친 페이지에는 「치유」라고 써있었다. 이것은 제 6학기에서도 말기에 가야 극소수의 아이만이 겨우 완성시킨다는 마법 으로 제 5학기의 학생들에게 진정한 마법의 수준을 보여주기 위해 간략히 적혀진 것이었다. 모든이가 알고 스스로도 알고 있듯 페르노크는 이제 제 5학기의 학생 이다. 하지만 그 페이지를 펼쳐든 그는 너무나 당당했고 어찌보면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손에 조그만 손칼이 들려졌다. 은으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정교하고 아름답게 세공된 손칼이었다. 필히, 장식이 주 임무였을 그 손칼은 지금은 주인을 잘못 만나 날이 예리하게 서있었다. 물론 손칼이라는 본 주제를 벗어나지 않아 길이는 남자의 손만해서 예리하게 날이 서있어봤자 별다른 위협감은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은장도 같단 말이야......" 남자는 의미없는 혼잣말을 해댔다. 그리고는 결국 손칼의 이름을 '은장도'라고 혼자 정해 버렸다. 마법서를 보다말고 갑자기 손칼을 뽑아든 저의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페르노크의 왼쪽 손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누가 보면 또 자살하려는 건 줄 알겠군." 마조히스트(아픔을 즐기는 변태)가 아닐까 싶게 자신의 몸에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낸 그의 표정은 섬짓할 정도로 태연했다. 그는 곧 오른 손을 펼쳐 왼쪽 손목의 상처위에 갖다 댔다. 아까와는 달리 상당한 집중을 보이며 캐스팅하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은 빛덩어리로 인해 비쳐지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은 치유, 내가 바라는 것은 복귀의 힘. 리*커*버*리*" 녹색 빛을 은은히 품어내던 오른손을 신기한 눈빛으로 보던 그는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자신의 왼쪽 손목을 눈앞으로 들었다. 신선한 피만이 상처의 존재를 되새겨줄 뿐 그의 손목은 좀전과 다를 바 없었다. 피가 이불로 떨어지기 전에 그는 재빨리 옆에 준비해놓은 수건으로 말끔히 손목을 닦아냈다. "일단.... 성공인가." 페르노크는 만족한듯 뒤로 누었다. 그는 자신이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이몸'으로 들어와 마법을 사용해야하는 최악의 교과시간임에도 그는 오리혀 마법이라는 '이몸'이 잘했던 분야를 새롭게 배울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전의 것까지 한번에. 복습의 시간을 준비한 선생님은 이사실을 짐작도 못할테지만 말이다. 그는 아이들이 가장 자신있게 완벽하게 할수 있는 주문만 터득했다. 어중간하게 할수있는 마법을 아이들이 시전할때마다 괴로운듯 비틀리는 마나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완벽한것만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또 막상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는 시간이 다되서 건너뛰게 됐다. 즉 그의 기억상실(?)을 알고 있은 이들에게 좋은 연막을 칠수 있게 된것이다. 오늘 터득한 마법은 흐름을 이미 터득했기에 쉽게 배울수 있었지만 그냥 책으로 본것은 어떻게 될지 알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시전 못한 마법인 「치유」를 시도한것이다. 다른 마법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고급마법을 시전하진 않았을 테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현재 교과서 밖에 없었고 파크다 선배에게 부탁하자니 전후사정이 들통날까 염려가 되고 이레저레 사정에 의해 「치유」에 도전한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구심이 들것이다. 처음 도전함에도 아무런 망설임없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그의 행동에 대해서 말이다. 그의 뇌리에는 유능한 의사(?) 휴로버가 계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게 됐다. 자신이 마법주문의 첫 음을 내밷음과 동시에 서로 떨어지려하는 마나와 붙으려고 하는 마나등을 느낀 것이다. 그는 마법주문을 욈과 동시에 마나가 하고자 하는 바를 도왔고 결과는 지금 깨끗하게 되어있는 손목에서 알수 있었다. "이 사람..... 아니. 난 마나에게 사랑을 받는 건가?" 다른 이들은 달랐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른이들은 손동작으로써 마나를 배열하고 있었다. 가만히 존재하는 마나를 스스로의 정신력과 계산에 의해 배열했었던 것이다. 헌데 자신은 마법주문과 동시에 마나가 알아서 움직이고 싶어하는게 아닌가?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마나를 느끼던 그는 또 다시 손칼을 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상처를 냈다. 누워서 해서인지 그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이번엔 그는 손칼을 내려 놓지 않았다. 그저 손칼을 쥔 오른손을 침대에 내려 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손동작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문만을 외었다. 그러자 마나는 손동작이라는 일종의 계약체계가 없어도 알아서 서로를 배열했다. 그리고 눈을 감은 페르노크도 알수 있을 녹색 빛이 품어졌다. 페르노크는 아픔이 가심을 느끼고 미소지었다. 그것은 마나를 향한 웃음이기도 했고 자시 자신을 향한 웃음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수건을 들어 피를 닦아 냈다. 손칼을 집에 꽂고 안 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만년필처럼. 그리고 침대에서 벗어나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기숙사에 딸려 있는 하녀가 열심히 씻고 닦고 향수까지 뿌렸으나 욕실에서는 아직도 피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상관하지 않았다. 솔직히 게름직하나 어쩌겠는 가? 그는 수건을 세면대에 놓고 대충 빨았다. 빨래에 내 놓을려해도 피는 웬만큼 없애고 내 놓아야 될 것 아닌가. 걸래 짜듯 꼭 짠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놓은 페르노크는 자신을 따라 다니는 빛덩어리를 이끌고 책상쪽으로 걸어갔다. 책상옆에는 높이가 제법인 책장이 있었다. 그곳에 꽂혀 있는 책들은 이미 방안에 박혀 있던 3일 동안 질리도록 읽은 그였다. 이상하게도 희대의 천재라고 불렸다던 '그'의 책장에선 마법에 관련된것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겨우 몇권있는 마법관련 서적은 교과서에 불과했다. 또 그 책장에 책이 많이 꽂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중에 교과서를 제외한다면 겨우 네권이나 될까? 게다가 그 네권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검술 교본이었다. 지금의 페르노크에게는 더나할나위없이 즐거운 책이었지만 말이다. 덕분에 이곳의 검술은 대충 꾈수 있었던 「지금의 페르노크」였다. '그'의 이상한 독서취향을 이해할수 없었지만 별로 상관은 하지않았다. 마법을 할려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교과서의 배움은 마법을 시전함으로써 이미 무시해버린 그였다. 마나를 다스리는 것이 너무나 쉬운 그에게 마법을 시전하기위한 즉 마나를 배열, 다스리기 위한 다른 학습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어떤식으로 마나를 다스렸는 지는 모르지만 자신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행할것이라고 마음먹는 페르노크였다. 자신만의 방법. 즉, 마나와 친구가 되는 것을 택한 페르노크는 전의 '그'가 행했던 방법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책상에 올려 놓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도데체 관리를 어떻게 했던 것인지...... 검에 몸을 담고 있는 그로써는 슬플정도로 검은 망가져있었다. 필히 보검이 속했을 호사로운 검이 말이다. 방에 묵혀 있던 삼일동안 뼈빠지게 다듬은 덕분에 어느정도 제모습을 찾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그에게 가장 기쁘고 보람찬 일은 이 검을 다듬는 것이다. 다시 '가장 기쁘고 보람찬 일'에 빠져드는 그를 방해하는 소리가 있었다. -똑똑- 「몸」이 반응하는 걸보아 누구인지 쉬이 짐작할수 있는 페르노크였다. "소울러......인가." 검을 꽂고 일어난 그는 곧 문을 열었다. 소울러에게 열쇠가 있음을 알고 있는 그로써는 그가 늘 노크를 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늘 물어볼 상황이 아니였기에 속으로 삼킬뿐이었다. 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연 페르노크에게 놀라며 들어온 소울러는 어딘지 모르지만 비릿한 피냄새가 맡아짐을 느꼈다. 그는 쨉싸게 페르노크의 왼쪽 손을 들어올렸다.페르노크는 갑자기 자신의 손을 들어올리고는 안심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는 소울러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미 면역이 된터라 피냄새에 둔감해져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소울러는 아무말 없이 손을 놓았다. "용건은?" 짤막하고 차가운 말에도 소울러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발끈하고 '개'를 운운할걸로 예상했던 페르노크로써는 의외였다. "말하고 싶은게 있어서 왔다." "말해." 역시 차가운 말투였지만 소울러에게는 오리혀 기쁜것 같았다. '반응이 파크다선배같군.' 페르노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에 소울러가 앉았던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에서 소울러는 웬지모를 위압감을 느꼈다. "난 네가 싫었다." 그도 별로 세세한 타입은 아니였던 모양이다. 페르노크는 계속 해보라는 태도로 몸을 앞으로 숙여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넌 맘에 든다." 의외였는 지 페르노크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미안했다. 남이 널 괴롭히도록 부추긴건 아니였지만 어쨌건 미안했다. 이말을 하고 싶었다. 그럼." 그리고는 소울러는 뒤돌아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다시 뒤돌아 보고 경고했다. "그동안 넌 내가 널...... 그 상태에 빠지게 종용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다. 즉, 내가 지금의 네가 마음에 들었다해서 다른 이들까지 그러리라 보진 말아라." 여전히 자리에서 읽어나지 않고 듣기만 하는 페르노크에게 쓴미소를 지어보이며 마지막 경고를 하는 소울러였다. "오늘 점심........ 제그가 상당히 가슴에 품어 놓은 것 같더군. 조심해라." 그리고 나가려는 그를 저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잠깐." 그리고 다가오는 페르노크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소울러는 의외의 기습에 무방비로 당했다. "쿨럭!...쿨럭!" 복부를 부여잡고 기침을 하는 그를 내려다보던 페르노크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용서해주지." '내가 기억하는것은 이게 전부니까.' 그리고는 내미는 페르노크의 손을 잡으며 소울러는 씩 웃었다. "고맙군. 이렇게 힘이 세면서 그동안 왜 당했는 지 모르겠군." "글쎄." '요령이지.요령.' 페르노크로써도 의외인게 '이몸'은 힘이 셌다. 별다른 근육은 없지만 구석에서 발견한 손때 탄 운동기구들은 그가 나름대로 많은 단련을 했음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그'는 마법이 싫었던 모양이다. 기사를 하고 싶었을 런지도 모르지,라고 생각해보는 페르노크였다. 하지만 생.각.보.다.였지 특출하게 센것은 아니였다. 스승없이 단련시키기에는 지식도 끈기도 기본 체력도 모자랐던 같았다. 그래도 또래녀석들에비해 어느정도 중상위권정도의 힘과 체력은 갖춘 모양이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의 성품이 그를 그 지경에 이르게 한것 같았다. 하여간 어느정도의 힘에 그것을 요령껏 조절할줄 아는 데다 사용할 배짱도 되는 이가 한데 어울렸으니 이와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한말 빈말이 아니니까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제그? 각오해두지." 나가려던 소울러는 아차하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뭐지?" "네 방 열쇠." 페르노크는 받을 생각은 안하고 평소 궁금했던 바를 물어보았다. "그러고보니 이거 왜 너한테 있는 거지?" 하지만 물어보고 아차싶었다. 소울러가 이상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니? 네가 제그한테 빼앗긴거잖아? 제그는 나한테 선물했고." "아 그랬지...... " 그리고 뭔가 물어보려는 소울러를 가로막았다. "이건 내가 선물로 주지. 언제든지 놀러오라고. 아 점호시간이군. 빨리 가보라고. 그럼 이만." 얼떨결에 방밖으로 떠밀려난 소울러는 닫힌 문을 멍하니 보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열쇠로 눈을 돌렸다. "뭐..... 잘됐으니까 된거지." 그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꿔고 있는 점호 순서를 피해서. ========================================================================= 다시 페르노크이야기입니다. 비밀군이 좋아하겠군요^^ 페르노크 이야기가 연재되는 와중에도 공모합니다. 아르의 새로운 이쁜이름!!!!! 케르가.( ).라.이브겐 제발 좋은 이름 좀 보내주시고.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23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4일 07:01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3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28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소울러가 나간 후에도 페르노크는 잠들지 않고 검만 다듬었다. 얼마나 그랬을 까? 검을 내려놓은 페르노크는 아직도 자신의 옆에 떠있는 빛을 의아하게 보았다. 그는 마법을 유지시키기위한 제어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라이트'가 「보조」마법인 터라 예초에 어느정도 유지성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페르노크는 따로 지속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빛은 여전히 약간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고 페르노크는 그 마나를 느끼기위해 눈을 감았다. ".......원래 마나가 스스로를 보충하는 건가.......?" 답은 '아니다'였으나 페르노크로써는 알길이 없었다. 끊임없이 스스로 엮어가면서 빛을 발하고 있는 '라이트'를 별다른 생각없이 보던 그는 침대로 걸어가 누었다. "내일 전투를 위해 자볼까......" 그리고 나서 그는 '라이트'를 해체시키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곧 방안엔 어둠이 깔렸다. "제그.......라......훗." 페르노크는 아침부터 기분이 나빴다. 한때(?) 여자였던 그로써도 주체할수 없을 만큼 긴 머리카락으로 고민해야만 했던 것이다. 전의 '그'를 의식하여 파크다 선배가 일러준데로 머리를 푸르고 다녔지만 언제나 묶음으로써 머리를 처리했던 그로써는 은근한 스트레스감이였다. 페르노크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노려 보았다. 고귀했던 이상을 조금은 본떠 빈부격차가 비춰지지 않게 전 학생이 똑같은 옷을 입게하는 '이므르'의 교칙에 따라 그의 옷차림은 여느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의 허리까지 칠렁거리는 머리카락도 여느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옆에 있는 간단한 책등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작은 가방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단지 그의 신발이 평상시 신던 딱딱한 구두가 아닌 점과 그의 안주머니에 만년필마냥 얌전히 있는 '은장도' 만이 달랐을 뿐. 페르노크는 넉넉한 아침 시간을 이용해서 어제 밤에는 생각 못했던 일을 벌리기로 했다. 그의 깔끔히 정리 되어 있었던 선반은 곧 난장판이 되었고 가지런히 있었던 옷가지도 바닥에 던져지는 운명이 되었다. "으.... 없다." 무엇을 찾는 진 모르지만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페르노크의 시야에 보통크기의 손수건이 들어왔다. "아쉬운데로...." 고급천으로 되었을 것이 분명한 손수건을 가차없이 두쪽으로 찟어낸 그는 그 두조각을 묶어 길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거울로 걸어가 세면대에 잠깐 올려 놓았다. 빗을 찾아든 그는 성의 없는 손놀림으로 머리를 빗었고 두손으로 끌어 모아가지고는 높게 묶어버렸다. "편하군."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얼굴이 대폭 드러나면서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확실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 속 깊은 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전투욕은 지금은 무시하기로 하자. 잔머리를 물로 대충 정리한후 가방에 마법서를 집어넣은 그는 곧 방을 나섰다. 아침 먹을 시간인것이다. "페르노크군?" 파크다였다. 그는 머리를 묶어 올린 페르노크에게 놀라고 있었다. "그 머리....." 페르노크는 자신의 묶여진 머리를 의식하며 대답했다. "너무 귀찮아서요. 많이 이상합니까?" "아니....." 확연히 드러난 아름다운 얼굴에 눈동자....... 의외로 어울리는 군, 라고 생각하면서도 염려할수 밖에 없는 파크다였다. "하지만 너무 변하면 위험해. 전에.... 부상으로 인해 페르노크군은 지금 주목 받고 있다고." 그 일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봤던 페르노크는 시원스럽게 답할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난 이게 좋아요. 남 시선 의식하고 사는 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파크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곧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 집에 연락했으니까 곧 사람이 올거야. 그때까지는 어느정도는 의식하고 자중하도록하고." "명심하지요." 파크다는 뭔가 더 말하려 하는 듯 했으나 좀 떨어진 곳에서 그를 호출하는 선생님에게 갈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곳으로 가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럼 조심하고." 그로써는 차마 말할수 없는 상황에대한 당부였을 것이다. 알았다고 끄덕이는 페르노크가 묘하게 싸늘하게 느껴졌지만 신경쓸 여력이 없는 파크다였다. 어제 점호에 걸린 학생의 선도를 그를 호출한 선생님이 부탁한것이다. 파크다는 선도실로 향하면서 페르노크의 일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아침 먹고 바로 수업인가.......하면 아니다. 한시간정도의 자유시간이 있었다. 혼자만의 썰렁한 아침을 느긋하게 즐긴 페르노크는 교실에 잠깐 들어가기로 했다. 나중에 접한 마법에 정신이 나가 읽어보리라 한 역사를 교실에 두고 온것이다. 교실에 가서 책만 꺼내가지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를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왜 벌써 나가냐, 페르노크?" 뒷문을 막아선 이는 제그였다. 물론 그만 있는 게 아니였다. 따돌림의 대명사는 쪽수가 아니던가? 반 아이들 대다수가 그를 조소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고 덩치있는 이들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페르노크는 항상 밥을 먹고 교실에 박혀 있는 이라 그를 밟을 시간을 정하는 것은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이를 알리 없는 페르노크로써는 기막힌 타이밍을 한스러워할 뿐이었다. 그는 태연히 손에 든 역사책을 어깨에 가볍게 얹으며 말했다. "비켜." 차갑지만 낮은 목소리. 그 안에 담긴 위압감을 느끼기엔 평소 페르노크가 보였던 행동이 너무 어리숙했다. 조그만 목소리에 겁먹었다고 지레 짐작한 제그는 크게 웃어보이며 주변의 아이들을 선동했다. "비켜달라신다. 저 위대한 '카르민'께서 나같은 천한 평민은 비켜나란다." 그러자 주변의 아이들은 웃었고 그 웃음에 기운이 나는지 제그는 한손에 잡고 있던 주머니를 끌렀다. 그리고 쏟았다. "나가고 싶어? 그럼 먹어." 발밑을 기어다니는 벌레를 페르노크는 의외로 태연히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감싸는 불쾌감은 더이상 설명할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언급하진 않겠다. '어제 그 벌레군. 아무리 봐도 파리랑 닮았단 말이야. 저 다리도 벽에 달라붙을 수 있는 구조일까? 그럼 점프해서 벽에 달라붙나? 하지만 기어다니기만 하는 데?' 그의 생각은 안타깝게도 더이상의 진전을 할수 없었다. 벌벌 떨며 울먹일 그를 예상했던 이들의 기세가 흉흉해져 버린것이다. '음?' 갑자기 느껴지는 기척에 페르노크는 쨉싸게 몸을 숙였다. 거의 동시에 그의 얼굴이 있었던 곳으로 제법 강한 힘이 실린 주먹이 날라왔다. 페르노크는 단숨에 뒤로 뛰었고 그를 반원으로 포진하고 있었던 이들의 진형은 흩트러 졌다. 창가에 붙은 페르노크는 한숨을 내쉬며 자기자리에 교과서를 곱게 올려 놓았고 그 여유에 많은 이들은 울컥해 버렸다. "....해." 뭔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아이들은 조용해 졌다. 그 조용한 와중에 페르노크의 낮은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유치해." ===================================================================== 제가 가장 싫어하는 짓걸이지요. '따돌림' 이라는거. 이 이야기도 곧 끝나고 방학이 되겠군요. 그담은 아르의 이야기. 아르도 이 '이므르'에 입학하게 되지요. 13살이구 제 3기 니까 말입니다. 벙어리에다 출신모르는 아르가 갑자기 귀족이 되서 '이므르'에 온다면 그가 사귈 친구는 평민일까요, 귀족일까요? 아르의 이름을 공모합니다. 카르가. ( ). 라. 이브겐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 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24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4일 07:01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1/3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3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페르노크는 자신이 고아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카르민'의 부모님과 두 형과 누이.... 그외에 많은 형제들이 있었다. 나는 의아해 했지만 묻지 않았다. 무표정했지만 그는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페르노크는 자신이 검에 몸을 담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귀족의 기본 교양인 검술의 선생님조차 없었다. 나는 의아해 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가 '이므르'에서 벌린 일들을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물었고 많은 것을 들었지만 그에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유시리안은 달랐다. 유시리안은 그를 알았다. 나보다도 더......... 왜일까? 나는 알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나와 그의 차를....... 그는 믿는다. 의문을 품은 체 납득해버리는 나와는 달리 그는 무조건 믿는다. 그것이 그와 나의 차이. 좋아하는 자와 사랑하는 자의 차이.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안것같다. ........나는 그것을 너무 일찍 안것같다. 페르노크의 영원한 친구 페르노크의 영원한 조언자, 정보길드의 창시자. 요크노민.마.크리터.의 회고록 중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침자율시간을 유익하면서도 나태하게 보낸다. 한마디로 평화롭게 보낸단 소리다. 하지만 어느 일에나 예외는 있는 법인가 보다. 삼층의 중간 쯤에 자리잡은 제 5학기 교실에선 지금 아수라장을 방불케하는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까아!!" 많은 이들이 난리통의 근원지를 피해 교실 구석 혹은 복도로 피신했다. 예상치 못한 싸움이었다. 그 여파는 주모자들은 당황하게했다. 그들이 예상한것은 여느때와 다를 바 없는 일방적인 구타였던 것이다. "왜 벌써 겁먹은 건가?" 그들이 예상한것은 겁에 질린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페르노크였던 것이다. 지금과 같이 정확하게 급소를 골라가며 타격하고는 차갑게 말하는 페르노크는 그들을 예상에 없었던 바였던 것이다. "웃기지마!!!" 지극히 도발적인 그의 말에 발끈하며 두명이 동시에 그에게 달려 들었다. 둘다 검사 지망생으로 제 6학기에는 검술전문으로 빠질 이들이었다. 페르노크는 창가에 거의 붙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물러날 수 없었다. 한명의 주먹을 가볍게 흘리고 발을 뻗어 그의 복부를 찬 페르노크는 몸을 회전하며 다른 발로 또 다른 이의 목을 쳤다. 콜록이며 배를 부여 잡고 있는 이의 등을 팔꿈치로 마무리한 페르노크가 조소와 함께 자신들을 보자 울컥했으나 차마 덤벼들지는 못했다. "이제 끝인가?" 대답이 없는 그들을 잠시 보던 그는 자기 책상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를 보며 한 이가 제그에게 불평했다. "그러게 소울러 오면 하자고 했잖아." 제그는 발끈하며 그에게 말했다. "소울러녀석 어제부터 이상했다고! 식당에서 말리질 않나...... 차라리 없는 게 나!" 하지만 아직은 기세가 남아 있는 학우들의 전의를 생각해서 그리 큰 목소리로 말하진 않은 제그였다. 역사를 집어드는 페르노크의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노려보는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말이다. 뒤에서 목을 부여잡고 있던 이가 의자를 집어들고는 페르노크에게 달려 들었다. 원래는 자국이 남지 않는 곳만 타격하는 것이 그들의 원칙이었으나 아픔보다는 자존심이 상한 그의 눈에는 더이상 배는 것이 없었다. 퇴학을 당할수도 있건만 그는 당장의 일밖에 생각 못하는 소인배였나보다. 페르노크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그를 어이없게 생각하며 잽싸게 몸을 턴했고 그는 자신의 속도와 큰 동작을 커버 못하고 앞으로 고푸라졌다. 도데체 뒤에서 흉기를 휘두르면서 고함을 지르는 이는 뭐란 말인가. 페르노크는 잠깐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넘어져 신음하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달려드는 다른이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다들 요령이 없단 말이야.' 그는 의외로 싱거운 싸움에 조금 씁쓸해(?) 하며 다시 달려는 이의 옷을 잡고 유도의 기술로 넘어뜨렸다. 책상이 도미도처럼 두어개 나란히 쓰러져 버렸다. 슬슬 지겨워진 페르노크는 머리부터 잡자라는 생각에 제그에게 달려들었다. 제그가 당황해 할새도 없이 옆에 있던 이가 마법을 구현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격, 내가 바라는 것은 바람의 힘. 에*로*우*" 마법은 예상하지 못했던 페르노크는 정면에서 정통으로 맞아 버렸다. 물론 순간 팔을 교차해서 '기'를 일으키며 막았지만 순간 마비된 팔은 어쩔수 없었다. 「치유」마법을 쓴다면 괜찮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버린다. 희대의 마법사 페르노크에게 마법공격이 통하리라 생각 못한 이들이 잠시, 놀라 공격을 멈춘것은 그에겐 행운이었다. 하지만 곧 우월감에 가득 찬 이들이 달려 들었다. 페르노크의 눈에 낭패감이 스쳤다. '빌어먹을!' 공격을 간신히 피하며 그는 점점 구석으로 몰렸다. '나도 마법을 쓰면......' 그 생각까지 미친 페르노크였지만 곧 고개를 내저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기억상실'인 것이다. 여기서 마법을 쓴다면 「치유」마법을 안쓴 보람이 없어져 버린다. 하다못해 검이라도 아니 몽둥이라도 있었으면 했지만 청소는 전부 '이므르'에 고용된 청소부가 하기때문에 교실에는 빗자루조차 없었다. 제그는 그제서야 앞으로 나서며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페르노크는 고개를 숙여 피하려다 곧 이어질 반격을 떠올리며 몸을 옆으로 돌려 피했다. 그리고 동시에 발을 띄어 돌려차기를 제그에게 먹였고 옆구리에 타격을 입은 제그는 뼈가 부러지는 듯한 아픔에 비명도 못지르고 업드렸다. 일단 머리는 쳤으나 전투불능으로 보이는 페르노크에게 더이상 주늑들지 않는 이들은 여전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몸을 피하며 차차 타격을 입어가는 그를 보며 그들은 더욱 혈안이 되서 달려 들었다. '제기...' 점차 '몸'의 한계를 느끼는 페르노크였다. 이상태라면 팔의 마비가 풀려도 반격은 힘들어질것이다. 이런식으로 맞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페르노크는 그냥 마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격. 내가 ........ " 주모자뿐만 아니라 방관자 또한 희대의 마법사가 마법을 쓰려하자 기겁했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더욱 공격을 퍼붓는 이가 있었고 방어마법을 구현하려하는 이가 있었다. 하지만 발만으로도 어느정도 공격을 퍼부을수 있는 페르노크였다. 그러면서도 집중을 할수 있는 페르노크였다. 때문에 두 그룹은 다 실패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하지만 다른 수단을 취한 이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격, 내가 바라는 것은 바람의 힘. 버*디*윙*" 제그였다. 그도 마법사 지망생인것이다. 아무리 페르노크여도 동시에 두 마법을 구현할수는 없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그는 막 발을 들어 한명의 무릎과 턱을 가격한 참이었던 것이다. 즉 한발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그에게 거센 바람이 불었고 제그가 예상했던 타격을 훨씬 넘어선 결과가 벌어졌다. -챙!!!!!!- "까아아악!" 창가를 뒤에 두었던 페르노크는 유리를 깨며 허공에 잠시 떠있었다. 그리고.... "아냐. 난 단지 넘어지라고!!!!" 이 교실은 3층이었다. 제그는 현실을 회피하려 했지만 그건 그가 주범이었기 때문이었고 조금은 책임이 적은 다른 이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밑을 보았다. ======================================================================= 요즘은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고 있지요. 아침 8시나 9시에 잠들고 낮 2시나 3시에 깨서는 (어쩔때는 6시에.....) 그림도 그리고 TV도 보고 하다 밤12부터 소설을 쓰고 올리고 그러다 자고.....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요^^;;; 액션씬을 좀더 잘 쓰고 싶었는 데..... 휴~~ 아직 끝난게 아니니까....^^ 아르의 이름을 공모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케르가. ( ), 라. 이브겐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 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68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5일 09:14 
등록자 : KREUZ1           조  회 : 22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2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2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4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왠만한 귀족들도 소유하기 힘든 호화로운 마차가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많은 길을 급히 달려온 양 원래의 위용을 깍아내리는 먼지들이 가득 쌓여 있는 마차는 무수한 여관을 지나 도시 귀퉁이에 자리잡아있는 건물로 향했다. 한눈에 다 들어 올 수도 없는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보였고 굳게 닫힌 문은 그 건물의 폐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굳게 닫힌 문은 마차가 채 당도하기도 전에 열려 버렸다. 그것은 그 마차의 주인의 신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설사 예약을 한 방문이라도 이런식으로 간단한 확인 절차조차 없는 무조건적인 출입은 드물었다. 황족정도는 되야 이런 출입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마차에 달린 창문에는 고급품이 분명한 커텐이 늘어져 있었고 그안에 새겨져 있는 자수는 주인의 높은 안목을 대면하는 듯 했다. 그리고 살짝 쳐진 커텐 사이로 두 남자가 보였다. "이제야 도착한 모양입니다." "아...." 신분의 차가 분명한 대화를 잠시 나눈 두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듯 창밖의 건물에 눈을 돌렸다. "그 얘는 여전 할테지."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그의 모습은 무척 싸늘해 보였으나 마주한 남자는 상냥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쉬지 않고 달려 오셨습니다." "그래도 늦었지." 상당히 자조적으로 보이는 남자의 이름은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 그 지체 높은 오르세만가에 장남이자 그 명예 높은 '휴첼'기사단의 부단장인 남자 였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능력을 십분 이용하여 완벽한 카리스마를 만들어내는 남자였다. 금발에 금안은 그를 더욱 신비한 인물로 만들게 했고 그는 자신의 외모 또한 이용할줄 알았다. 언제나 냉혹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미남자의 지금 얼굴은 너무나 밝았고 흥분해 있었으며 따뜻하기까지 했다. 그의 앞에 있는 남자는 그의 보좌였다. 일반적으로 '카르민'의 보좌 정도 되려면 중상위 귀족쯤은 되야 가능한 일이었다. 몸종또한 그랬으니 보좌는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좀 달랐다. 그는 '오르세만'가에 종속된 집사집안의 장남이었고 테밀시아의 어릴적 전용하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똑똑했고 영리했으며 사리에 밝았다. 한마디로 유능했다는 말이다. 실력을 우선으로 꼽는 테밀시아는 그를 일찌감치부터 보좌으로 점찍었었고 그가 그에 합당한 실력을 길렀을때 망설임없이 그를 자신의 보좌으로 임명했다. 일대의 파란이 일었으나 테밀시아의 고집은 꺽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른 결과는 지금과 같다. 건물 정문을 지났음에도 한참을 달렸다.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테밀시아가 놀라 몸을 반쯤 일으켰다. "뮤비라! 저길!" 뮤비라는 자신의 주군의 놀란 모습에 당황해 있다가 그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색 제복을 입은 이가 허공에 떠있었다. 아니 떠있기만 했다면 테밀시아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곧 추락해버렸다. 은빛 잔상을 허공에 남기면서. '자살인가....?" 자신이 본 광경만으론 그의 주군이 놀란 것이 설명되지 않는지라 뮤비라는 다시한번 그 장면을 곱씹어봤다. '은빛!?' 뮤비라는 창밖으로 급히 눈을 돌렸으나 이미 허공에는 아무도 없었다. "페르!?" 희귀하기 그지 없는 은발이다. 자신의 동생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은발을 본 테밀시아의 눈은 불안하게 떨렸다. 뮤비라는 그런 그의 어깨를 감싸주고는 마부에게 더 빨리 달릴것을 명했다. 건물은 그들을 향해 더욱 빨리 다가왔고 그 은발의 사람이 추락했을것으로 보이는 장소도 가까워졌다. 그러자 보이는 부러진 나뭇가지들...... "페르.....?" 그리고 보이는 높게 묶은 은발을 한 소년. 그는 마차가 다가오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은체 오른 손을 왼쪽 발목에 갖다 대고 있었다. "힐링?" 그가 알고있는 소년도 구사못하는 고급 치유마법, '힐링'. 찰과상등에 효과 있는 것이 '리커버리'라면 뼈가 어긋낫다던가 부러졌다던가 할때 효과가 있는 것이 '힐링'이다. 앞서 말했듯이 '리커버리'보다는 '힐링'이 더욱 난이도 높은 마법이었고 그가 알고 있는 '페르'는 이제야 '리커버리'를 성공시킨 소년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치유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이가 '그'가 아니라고 판단한 뮤비라였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주군을 보았다. 이미 냉정한 상태로 돌아와 있는 그였다. 비록 얼굴은 그에게 묻고 있었지만 눈은 창밖에 고정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 또한 뮤비라와 같은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그렇게 평정을 되찾은 그들은 눈앞의 소년에게 다른 면에서 흥미를 가졌다. 힐링의 노란빛이 사라지자 소년이 취한 행동은 곁에 떨어진 나뭇가지 중에서 제법 굵직하고 휘어있지 않은 것을 골라 드는 것 이었다. 그리고 나뭇가지의 왼쪽 끝부분 부터 오른손을 갖다대고 오른쪽 끝부분까지 쓱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손을 따라 나뭇껍질이 벗겨지고 마치 목검처럼 가지런해지더니 맨 끝부분에 가서는 뽀족하게 되버렸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힘을 주고 찌른다면 상당한 피를 볼것같았다. 하지만 다행이도 소년의 손길이 한번 더 그 곳을 거치자 어느정도 투박해졌다. 손에 맞는 지 확인하듯 소년은 두어번 휘둘러 봤다. 그리고 만족했는 지 자신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봤다. 그 시선을 따라 두 사람도 올려다 보니 삼층쯤에 깨진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년의 시선이 위로 향하자 일제히 안으로 들어갔고 소년의 곁엔 많은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년의 눈에는 그것이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년에게서 뿜어지는 살기에 단련된 기사인 테밀시아와 뮤비라 또한 일순 긴장했다. 그들조차 그랬건만 다른 이들은 어쩌겠는 가 창밖으로 구경만했던 다른 반이들조차 기겁하고 교실로 들어가 버렸고 그에게 몰려들던 이들도 한걸음씩 물러났다. 소년은 두손을 합장하고는 중얼거렸다. 마법에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뮤비라는 그를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플라이." '비행' 마법중에 중하위에 속하는 마법이었다. 테밀시아는 이제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양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뮤비라의 어깨에 기댄체. 한때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인줄로만 알았던 테밀시아에게 아직은 안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뮤비라가 그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어릴때 같이 많이 놀러다니고 그러다 야영도 하고 했던 그들에게 서로의 체온은 상당한 안정효과를 가져다 주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이미 평정을, 아니 냉정을 취한 테밀시아는 굳이 밀쳐내지 않았고 그런 상태였기에 언듯 보였던 소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는 기억상실이고 뭐고 잊기로 한 페르노크였다. 한마디로 꼭지가 열렸다고나 할까? 주문만 알아두었던 '힐링'을 성공시키며 그는 복수에 불타오랐다. 어긋난 뼈를 치료시키는 과정은 말로 설명할수 없는 고통이 따랐고 그의 분노게이지는 점점 더 치솟았다. 내려올 생각은 안하고 창밖만을 내다보는 이들이 그의 신경에 더욱 거슬렸다. "다 죽여버린다." 적당한 나뭇가지를 골라잡은 그는 눈은 이미 뵈는 게 없어보였다. 「치유」에 「보조」에 「비행」까지 사용한 그의 손에 들린 급조 목도에는 '기'까지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 모습이 주모자들에게는 사신처럼 느껴졌음은 물론이었다. 놀라웠다. 저게 사람의 몸놀림인가 싶었다. 2층까지 자란 나뭇 가지에 손을 집고 몸을 회전시키더니 곧 그 바로 밑의 나뭇가지에 발을 올린 모습은 정말이지 경의로왔다. 하지만 아직은 굵직하지 못한 그 나뭇가지는 갑자기 실린 압력을 지탱하지 못하고 부러져 버렸다. 몸을 구부리고 떨어지던 그는 등에 커다란 나뭇가지를 박아버렸고 그 충격으로 튕겨나간 몸은 결국 발부터 떨어졌다. 하지만 그 고통이 제법이었는 지 그는 엎들인 상태에서 발목만을 부여잡고 있었다. "신관을 불러야 되지 않을까?" 어떤이가 중얼거린 말에 발끈하는 이는 제그였다. "미쳤어!? 뭐라고 말하고 부를건데? 저희가 폭행하려다 마법을 사용해서 밀어버렸어요? 아님 녀석이 그냥 발광하더니 떨어졌어요? 이미 마나의 흔적이 남아버렸는 데 지금 여기서 6써클의 마도사를 속일 만큼 마나컨트롤이 되는 사람있어?"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그는 '카르민'이었다. 평민인 자신들이 집단폭행한것이 드러나면 바로 퇴학인 것이다. 귀족들이 평민을 집단폭행했을 때와는 달랐다. 그들은 정당방위가 되지만 자신들은 아닌것이다. "하지만......" "저녀석이 알아서 핑계되고 치유받을 거야. 여짓껏 그랬잖아!!" 그랬다. 오늘이 처음도 아닌데..... 그때마다 알아서 핑계대며 치유마법을 받던 '그'였다. 하지만..... "하지만 여짓껏 반항한적도 없잖아." ...... 지금의 페르노크는 '그'가 아닌 것이다. "앗!!" 창밖을 보던 이들이 갑자기 일제히 떨어져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제그를 둘러싸던 이들이 물었으나 다들 창백하게 질려 있을 뿐 대꾸를 못했다. 제그는 의아해 하며 창문을 등지고 있는 한 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니 물어보려했다. 그러다 자신을 덥치는 그림자에 창문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비행 마법?" "말도안돼!!" 차갑기에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 그의 살기가 제그를 비롯한 다른이들의 몸을 구석구석 찔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와중에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나무로 되어있는 가늘고 늘씬하지만 단단해보이는 ..... 칼의 형태를 띈 막대기 를 들었다. 그리도 교실로 가볍게 착지했다. 몇몇 아이들은 기겁하고 복도로 피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살아돌아온 그를 비웃었다. 그의 살기를 제대로 느끼고 인정하기에는 그들은 아직 치기어린 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들고 온것이 공격마법이 아닌 생소한 나무막대기라는 점도 작용했다. ====================================================================== 이제 광란의 시간이지요? 하지만 죽는 얘(?)는 없을겁니다. '그'의 형이 왔잖습니까^^ 참! 이건 아버지의 아이디를 제가 사용하는 거니까요(그것도 몽땅그리 저만 사용 하지요.^^) 쪽지로 보내셔도 상관없어요^^ 편지로 보내도 상관없고..... 아르의 이름을 공모합니다. 케르가.( ).라.이브겐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69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5일 09:14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15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그럼 교장실로 먼저 갈까요?" 뮤비라의 말에 그제서야 위에서 눈을 뗀 테밀시아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럼.....?" "이사장실로 간다." 뮤비라는 더이상의 반문 없이 마부에게 명했다. 테밀시아는 그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다 물었다. "안 말리는 건가?" "말려도 듣지 않겠지만 나쁜생각은 아니라고 봅니다. 페르노크님은 심약하신 분. 그런 병명을 안은 체 계속 이곳에 있게 할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뮤비라의 뜻밖의 호응에 완전히 안심한 테밀시아는 이제는 멀게 보이는 아까 그 장소를 뒤돌아보았다. '말려도 듣지 않는 다라.......' 그말은 맞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다. 뮤비라의 조언이나 만류는 이미 테밀시아의 생각 안에 포함 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인 터라 굳이 그의 말을 따를 필요없이 그를 납득시키면 됐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일뿐. 납득할수 없는 일부분에는 뮤비라의 설득에 결국은 한수 져버리는 테밀시아였던 것이다. 뮤비라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말이다. 테밀시아의 독선에 가까운 생각을 이런식으로 제어할 수있는 이는 뮤비라밖에 없었다. 가주인 아버지조차도 그에게 언제나 몇수 접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단지 보좌에 불과한 뮤비라는 많은 거물에게 관심과 호의를 받고 있었다. 테밀시아는 자신의 고집불통 보좌를 한번 보았다. 푸른 머리결을 지닌 깊은 남색의 눈동자의 그는 어느새 준비했는 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살펴보고 있었다. "뭔가?" 뮤비라는 어찌 생각하면 건방지게 느껴지는 태도, 그러니까 계속 서류를 뒤젓이면서 대답했다. "페르노크님의 휴학 신청 서류입니다." 이번만큼은 상당히 놀란 테밀시아였다. 그런 그에게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은 체 뮤비라는 계속 말했다. "어차피 그럴 생각으로 오신것 아닙니까." 여전히 상상을 초월하는 눈치를 가진 그였다. "아...뭐 그렇지." 피식 웃으며 테밀시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크다는 선도실이라고 팻말이 붙어있는 방에 노크하고 들어갔다. 한 남자아이가 이미 상당한 매를 맞았는지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파크다는 그 모습에 그가 평민이라고 판단했다. 귀족이라면 저정도로 맞지 않았겠지, 파크다도 별수 없는 귀족인지라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선도의 역활은 원래 사감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감이 잘 보이거나 밋보이거나 건질 것 없는 평민에게 시간을 할애할리 없었다. 하위 귀족이라면 명예가 훼손된다는 조언의 값을 약간 받아낼수 있고 상위 귀족이라면 호탕한척 봐주면서 점수를 딸수도 있지만 평민은 애초에 명예에는 관심이 없을 뿐더러 점수를 따봐야 별다른 이로운 점이 없는 것이다. 그런 속셈을 뻔히 꿔고 있는 파크다로써는 귀중한 아침시간을 이런 곳에 허비한다는 생각을 안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 가. 그는 기숙사장인것이다. "이름이?" 그제서야 고개를 든 소년은 빰을 맞았는 지 얼굴이 상당히 부어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별다른 흥분이나 울분없이 고요했다. "소울러." 파크다는 사감선생님에게 받아온 생활 수첩에 이름을 쓰면서 물었다. "간밤엔 어딜 갔다 온 겁니까?" 소울러는 침묵했다. 파크다는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소울러는 고개를 숙인체 가만히 있다가 파크다에게 물었다. "어떤 대답을 하면 빨리 보낼 줄 겁니까?" 파크다는 건방진 말에 어이없어 했고 그런 내색을 알면서도 소울러는 재차 물었다. "전 빨리 가봐야 합니다.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그는 상당히 이런 일에 익숙해 보였다. 확실히 선생님들은 이런 취조를 상당히 귀찮아 했고 때문에 왠만큼 괜찮은 대답이 나오면 그냥 얼마간의 구타와 얼마간의 정학정도로 끝내고 말았다. 그것이 일종의 관례가 된지도 오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그것을 입에 담는 자는 전례에 없었다. 파크다는 상당히 재미있어 하면서 물었다. "왜 빨리 가봐야 한다는 겁니까?" 소울러는 그의 여유있는 모습에 다급한 심정을 내보였다. "왜 그것까지 말씀드려야 하는 겁니까? ...... 전 간밤에 술을 마시고 싶어서 밖으로 나갔었습니다. 이정도면 됐겠지요? 삼일 근신하겠습니다." 확실히 이런 대답이면 삼일정도의 형벌만 취해진다. 파크다는 이런 식으로 대답까지 게다가 그 대답에 따른 처벌까지 꿰고 있는 소년에게 더욱 흥미가 돌았다. "이렇게 하지요. 왜 빨리 가봐야 하는 이유가 납득이 가면 보내주겠습니다. 하지만 납득이 안간다면 지금부터 근신을 명하겠습니다." 소울러는 마침내 한계를 보이며 성질을 냈다. 관록의 차이인것이다. "늦으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른단 말입니다. 페르노....." 아차,하며 입을 다물었으나 페르노크와는 일련의 사고로 안면을 트고 지내는 파크다는 그것을 예리하게 집어냈다. "페르노크군이.......뭘 말입니까?" 소울러는 고개를 숙인체 묵비권을 행했다. 소울러써도 어쩔수 없었다. 어제의 제그의 태도로 봐서 분명 오늘 뭔가 일을 칠것이 분명했다. 그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여짓껏 상당한 횟수의 집단폭행이 벌어졌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늘 그와 유사한 일이 벌어것이다. 그때가 확실히 오늘 언제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렇기때문에 교실로 가 어느정도 중재를 해야하건만 재수없게도 한잔 거하게 걸치고 오는 사감과 부딪쳐 버린것이다. 소울러는 점점 초초해 졌다. 지금이라도 파크다라는 앞의 선배에게 말하고 나가고 싶었지만 만일 그렇다면 '카르민'을 치는 제그 일행에게 해가 갈것이다. 소울러에게는 제그도 소중한 친구였던 것이다. 소울러는 계속 침묵하며 그 때가 지금이 아니기만 빌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파크다도 페르노크가 관련된 이상 대충 넘어갈수 없었던 지라 둘은 계속 침묵으로써 시위했다. 그리고 정적은 깨졌다. "사감 선생님!!" 문이 열리면서 한 학생이 들어온 것이다. 그는 방안에 예상했던 이가 없자 놀라 다급히 물었다. "선생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 강한 기세에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던 소울러도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는 거냐?" 급히 달려 왔는 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학생은 그에게 떨어진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물음의 주인공에게. "소울러 큰일났어!!" 그는 소울러의 클레스메이트였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무슨일이냐고." 소울러는 예상되는 바가 있었는 지 몸을 반쯤 일으키며 재차 물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답을 들었다. "반에서 지금!! 페르노크가!!" 파크다는 놀라 더이상 듣지 않고 문가에 있는 그를 밀치고 뛰어나갔다. 소울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잠시 숨을 몰아쉬고 이어말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난동 부리고 있어." -퍽- 어깨를 부여잡고 한 소년이 주저 앉았다. 그런 그에게 확인사살격인 발길질이 날아왔다. "크윽!!!" 신음성을 지르며 떨어대는 그를 지나 다른이에게 달려가는 '가해자'. 아까와는 반대로 마법을 써도 똑같이 되갚아 주는 그에게 더이상 마법을 쓸 생각도 나지 않았다. 상당한 유혈이 났음에도 그는 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만해!" 방관자였던 한 소녀가 연약한 비명을 질렀다. 순간 멈짓하는 '가해자', 페르노크를 보고 용기를 얻었는 지 그녀는 말을 이었다. "계속 이러면 너한테도 안 좋아. 네가 아무리 '카르민'이라고 해도 이렇게 많은 얘들을 때리면 너도 퇴학일거야! 그럼 너한테도 불명예가 되잖아. 제발 진정해. 얘들도 이렇게 사과하잖아." 그녀는 눈물을 글렁이며 두손을 맞잡고 간절히 얘기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얌전히 듣는 페르노크의 손에는 다른이의 피가 제법 묻어 있었고 그의 '흉기'에도 비슷한 양의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다른이의 피보다는 그의 피가 더 묻어 있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그'는 보통이보다 조금 힘이 셌을 뿐 다른면에서는 조금 뒤쳐지는 면이 있었다. 아무리 머리와 감각이 판단을 내렸어도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별수 없는 법인것이다. 때문에 그도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 아이들이 마구잡이로 던진 의자에 머리를 보호하다 왼쪽 팔목이 조금 금갔고 그들이 시전한 '공격'마법을 대부분은 '방어'마법으로 막았으나 그들이 모두 마법만 하는 것도 아니고 아까와 같이 주변 기기를 던지거나 육탄전으로 공격해 왔기에 모든 마법을 커버할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의 가슴엔 매직 미사일을 정통으로 맞아 흐르는 핏줄기도 있었다. 상당히 참혹한 그의 모습을 눈앞에 두고 소녀는 가슴아파했다. 페르노크는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두고 '흉기'를 어깨에 얹고 있었다. 그가 아는 「방어」마법은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마법서 '교과서'에 명시되어있는 중하위까지가 전부였다. 그것은 마법 공격을 어느정도 커버할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으로 1써클 방어 마법과 2써클 방어 마법,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마나 컨트롤을 지닌 사람의 「공격」마법을 방어하는 마법이 전부였다. 이중에 페르노크보다 마나 컨트롤이 능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가 막지 못하는 마법 공격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마법'방어만 될뿐 '물리'공격은 방어할수 없는 것이다. 「방어」마법의 중상위는 '물리'공격에 대한 방어였고 상위는 둘을 한번에 방어하는 것었다. '원래'의 페르노크는 이미 「방어」마법을 모두 마스터한 상태였으나 그 마법서는 길드에서 빌린것으로 소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때문에 지극히 짧은 시간만 그것도 교과서로만 마법을 익힌 '지금'의 페르노크는 별수 없이 「공격」마법을 막다가 물리공격을 막다가 갈팡질팡해야 했고 때문에 어느정도 타격은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소녀의 글렁거리던 눈물은 마침내 볼을 타고 흘렀다. 페르노크는 다시 원래의 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광끼 어렸던 분위기도 어느정도 가셨다. 소녀가 미소를 지었을 때 페르노크도 마주 웃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지나야." "지나.... 한가지 모르는 게 있는 데." 페르노크는 다시 방긋 웃어보였다. 분명 밝은 미소였지만 지나는 약간 굳어버렸다. 페르노크는 '흉기' 목도를 어깨에서 떨어뜨리고 뒤에서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오던 제그의 복부를 쳤다. 뒤도 돌지 않고 정확하게 그를 친 페르노크에게 경악하며 지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설득했다. "너희들도 그만해!...... 페르노크 제그가 워낙 다혈질이라서....." 페르노크는 다시 웃어보이며 아까의 말을 이었다. "난 정당방위야, 지나양."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 마법을 쓰려고 캐스팅 자세에 있던 이에게 먼저 라이팅볼을 날렸다. 전기 쇼크로 기절하는 그를 보며 무심히 있는 페르노크에게 지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만해! 제발!! 페르노크, 너도 저애들과 똑같아! 너도 똑같은 사람이야! 넌 저애들을 더이상 때릴 권한이 없어! 너도 똑같은 녀석이니까!" 페르노크는 복부를 감싸고 뒹그는 제그의 등판을 지긋히 밟으며 말했다. "입닥쳐, 지나양." 그 살기등등한 모습에 지나는 일순 물러났으나 더이상 일방적인 학대를 지켜볼수 없다는 희생어린 각오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해, 불쌍하지도 않아? 네가........그렇게 잔인한 앤줄 몰랐어." 결국은 목소리가 떨리더니 울음을 터뜨리는 지나였다. 페르노크는 제그를 더 꽉 밟으며 낮게 말했다. "이런 .....마리아 나셨네. 안그래, 제그? 여기는 원래 집단 구타는 선이고 일방적인 저항은 악인가보지?" 지나는 마리아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자신의 선의를 짓밟는 말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수있었다. "여긴 원래 마법으로 사람을 창밖으로 밀어도 되는 곳인가 보지?" 그 말에 잔뜩 굳어버린 제르를 멀찍이 차버리고 지나를 보며 물었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여긴 원래 의자를 사람에게 던지는 게 정의인가보지?" 지나는 얼어서 고개를 떨궜다. "대답할수 없다면 입닥치고 구석에 박혀있어요, 지나양." 우아한 어투로 말하는 그를 감히 마주볼수 있는 자는 없었다. ===================================================================== 하하. 좀 개운해지는 기분^^ 다음은 대충 예상할수 있겠지요? 다음회도 당연히 페르노크이야기입니다^^ 요즘은 자꾸 새벽에 올리는 군요. 밤낮이 뒤바뀐 생활은 좀 힘든 것같아요. 언니는 저보고 새벽에 한회 올리고 낮에..... 그러니까 일어나서 한회올리고 하라는 데....-.- 좀..... 무리가 아닐까나.... 아르의 이름을 공모합니다. 케르가. ( ). 라. 이브겐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70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5일 09:14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6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이제 곧 방학이고 페르노크군의 병명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태라......" "그래서 휴학이 불가능하다 이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렇군." 페르노크의 병명을 공개한다면 그에게 닥칠 암살기도가 심심치 않아질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그를 아끼는 테밀시아로써는 공개를 꺼렸고 병명도 모호한 상황에서는 휴학이 불가능했다. 테밀시아는 생각 외로 강경히 나오는 이사장을 보며 불쾌한 빛을 내보였다. 솔직히 합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어도 '카르민' 정도면 그냥 통과되는 것이 비공식 관례였다. 게다가 이사장은 페르노크의 병명을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우습게 보는 건가.......날.' 싸늘한 테밀시아의 눈길에도 이사장은 별로 거리낌없었다. 이사장도 그만의 관록이 있었던 것이다. 가주도 아닌 이에게 벌벌 떨 근본이었다면 이자리에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테밀시아였다. "그럼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공손한 어조에 이사장은 쇼파에 깊숙히 몸을 기대며 허락했다. "해보게." 테밀시아는 그 자세 그대로 두손만 깍지진체 물었다. "제 동생이 왜 '저상태'가 됐는 지 알고 싶습니다만." 이사장은 미묘하게 굳어 버렸다. 아주 작은 순간이었고 곧 여유를 되찾았으나 그 순간을 노칠 테밀시아가 아니였다. "또 한가지. 제 동생을 치유한 신관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굳은 그를 보며 테밀시아는 원래의 표정 그대로 일어났다. "감사의 인사를 해야지요." 이사장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페르노크의 '처지'에 대해서. 하지만 그는 그 문제를 두각 시킬 필요성을 못느꼈다. '따돌림'이라는 게 명성 높은 '이므르'에서 벌어졌다는 게 알려지면 학원의 주가가 떨어질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성은 둘째치고 '그'는 '이므르'의 중요 고객의 줄이 아니던가. 그 후 끊길 자본을 생각하니 암암리에 묻어 둘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사장은 강직한 휴로버를 생각하며 다급히 테밀시아를 잡았다. "그는 지금 없다네. 잠깐 앉지. 아직 얘기가 덜 끝났지 않는 가." 학원에 파견된 신관은 그 정해진 기간까진 절대로 그 곳을 떠나지 않는다. 방학때 조차도 말이다. 만일 기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본 신전으로 간다면 아예 그 신전에서 발도 들이지 않는다. 또 언제 사고가 날지도 모르기때문에 그가 사고자하는 것이 있을 때도 다른 이를 시키는 것이 원래 법도였다. 대부분의 귀족은 잘 모르는 분야였겠지만 테밀시아는 알았다. 그랬기에 그는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신관이 지금 없답말입니까? 제가 알던 것과는 다르군요." 애써 미소를 짓던 이사장은 파랐게 질려있다가 말했다. "오늘부터 휴학할텐가?" 원래 목적은 그것 하나였기에 가뿐히 고개를 끄떡여 보이며 서류를 내미는 테밀시아였다. 이사장은 그것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음같은 말을 내밷고. "알았네." 이사장방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하는 테밀시아를 만류하고 밖에서 기다기던 뮤비라는 무성의하게 서류를 들고 나오는 테밀시아를 반겼다. "잘 된 모양입니다." 테밀시아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들고 가방에 잘 챙긴 뮤비라는 곧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테밀시아는 별 반응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페르노크님의 학급은 Z 입니다." 알아서 설명해주며 안내하는 뮤비라를 따르며 테밀시아는 계속 말이 없었다. 뮤비라도 별 말없이 걸었다. "페르노크가 왜 그런 상태가 됐는 지 알아봐." "네. 페르노크님을 진찰했다는 신관님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말에 냉기어린 목소리로 테밀시아가 말했다. "지금 없다고 하더군." 뮤비라는 그런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휴로버 신관님은 지금 도서실에 계시다고 하더군요." 테밀시아는 뮤비라의 놀라운 정보력과 사고력에 또다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은 페르노크님을 먼저 만나지요." "크윽!" 가슴의 상처를 헤집은 이때문에 페르노크는 뒤로 물러설수 밖에 없었다. 그때를 노치지 않은 이가 시전한 「공격」마법이 페르노크의 오른손을 강타했고 페르노크는 결국 목도를 놓쳐버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목도를 집어든 이가 페르노크의 발목을 향해 그것을 휘둘렀고 케스팅하던 페르노크는 무릎을 꿇게 됐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따랐다. 페르노크는 마나를 운용하며 「치유」마법을 시전했다. 다른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제그는 결국은 쓰러진 페르노크에게 비틀댔지만 당당하게 걸어갔다. "웬일로 반항을 다하더니 결국은 이꼴이지? 큭큭." 희미한 오렌지빛이 페르노크의 발목을 감쌌다. 고개를 숙인 페르노크의 어깨가 떨리자 제그는 두려움이 원인이라 판단하고 크게 비웃었다. "하하하하.결국 그 꼴이면서.... 이봐 우는 거야,어?" 반면 페르노크의 숙인 얼굴은 잔뜩 찡그려 있었다. 울음과는 다른 뭔가의 이유로. '젠장 아파죽겠네. 이 자식은 뭐라고 시부렁거리는 거야. 윽 고치는 게 더 아파.' 지금 그가 쓰는 것은 '힐링'이었다. 그의 목도를 사용한 이가 전 힘을 다 쏟았기 때문인지 그의 발목에 금이 가버린것이다. 아까와 비슷한 고통속에서 치유하고 있던 페르노크는 그나마 공격이 끊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머리를 제그가 발로 찼다. 옆으로 형편없이 쓰러진 페르노크는 다시금 분노를 불살랐다. '발목만 나면 저녀석....... 죽.인.다.' "이봐, 말 좀해봐. 어떻게 보상할거야? 우릴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소중한 아침시간도 빼앗고 말야.어?" '빌어먹을. 누가 먼저 시비 걸래? 마법만 익숙했다면 너흰 다 죽었어.'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거냐?" 제그의 발이 옆으로 쓰러져 있는 페르노크의 가슴을 찼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가슴에 나있는 상처를. "크윽!" "뭐야, 기절한줄 알았잖아." 짐직 상냥한 음성으로 말하는 제그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였다. 지나나 여타 다른이는 아예 겁을 먹고 사라져 있었고 주모자인 아이들만 남아 통쾌함속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 "뭐? 크게 말해야지, 페르노크군.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페르노크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대며 비웃는 제그는 다음 순간 당황해 버렸다. 페르노크의 손에 어느틈엔가 제그의 목을 감싸고 조여댄것이다. "죽인다." 나직한 음성이 제그의 귓가에 파고 들었다. 제그는 진땀을 흘리며 그를 달래보려했다. "이이봐, 사람을 죽이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아무리 네가 '카르민'이여도 말이야. 제발 진정해." 하지만 그의 눈은 다른이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명령을 받은 이는 목도를 들고 페르노크의 뒤로 몰래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던 이도 곧 멈춰섰다. 페르노크가 뒤를 돌아보며 노려봤기 때문이다. 페르노크의 살기어린 눈을 정통으로 마주한 그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죽인다." 다시 나직히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제그는 또한번 경악했다. "이봐!!!!" 페르노크의 손에는 어느새 '은장도'가 들여있었던 것이다. "걱정해줘서 고마운데말야....." 냉철하게 가라앉은 페르노크의 목소리가 제그의 귀에는 희망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난 정.당.방.위.야." 목소리는 가라 앉았어도 눈은 여전히 정상이 아닌 페르노크였다. 그리고 제그의 목줄기로 '은장도'가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눈을 질끈 감은 제그는 온 몸이 마비된것처럼 움직일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그는 닥쳐올 고통, 어쩌면 죽음이 될지도 모르는 고통을 떠올리다 눈을 조금 떠보았다. 그리고 올려보았다. 두 남자가 있었다. 한명은 피가 조금 감도는 은발을 하고 있는 남자, 페르노크였다. 그리고 한명은 ..... "그만둬라." 모르는 이였다. 제그도 몰랐고 페르노크도, 다른 이들도 모르는 이였다. "누구....?" 페르노크의 질문에 조금 움짓한 남자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넌....." 그런 남자의 뒤에서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페르노크님." 분명 페르노크와는 안면이 트인듯한 말을 하는 그였으나 페르노크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아까의 남자와는 다르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페르노크의 상태만을 훑어보았다. "신관을 불러야겠습니다." "아...." 먼저 온 남자는 그제서야 페르노크의 '은장도'를 쥔손을 놔주었다. 죽다 살아난 기분으로 제그는 페르노크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고 페르노크는 그런 그를 노려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먼저온 남자가 페르노크의 상처를 보기위해 웃옷을 벗긴것이다. 다시 상처를 건들여진 페르노크는 신음했고 그 소리를 들은 남자는 무표정한 그 얼굴 그대로 제그들을 노려보았다. 페르노크와는 질적으로 다른 압력이 그들을 짓 눌렀고 다시 신음을 내밷는 페르노크에게 주위를 돌리는 남자에게 그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품었다. 페르노크는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금안..... 생각보다 이쁘네. 금색도....하지만.' "왜 말린 겁니까?" 원망보다는 미련이 담겨있는 어조에 남자는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네 칼.....을 더럽힐 필요없다." 하면서 조그만 손칼을 잠깐 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 아직도 굳게 '은장도'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본 페르노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진 칼집에 도로 꽂아 놓고 다시 품에 집어 넣은 페르노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남자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남자가 대답하려 했을 때 교실문이 다급히 열렸다. "페르노크군!" "파크다선배?" 그리고 뒤를 이어 들어온 이를 보았다. "소울러?" 소울러는 교실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먼저 놀랐고 가슴에 피가 한가득인 페르노크를 보고 놀랐다. 마지막으로 피와 더불어 여기저기 멍들어 있는 자신이 친구들에게 놀랐다. "제그?" 소울러는 급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파크다는 페르노크를 부축하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이제 오신 모양입니다." 남자는 별다른 반응없이 파크다를 대했다. "다른 볼일로 집에 없었다." "그렇군요. 일단 자리를 피하지요." 남자는 고개를 조금 끄덕여 보이더니 페르노크의 상의를 들어 한쪽 팔에 걸치고 다른 팔로 부축하며 파크다에게 말했다. "도서실로 가지." 의외의 장소에 조금 놀란 파크다는 의아한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납득한듯 먼저 앞장섰다. 교실을 나서고 얼마안가 페르노크가 물었다. "누구십니까?" 그도 알아챈 것이다. 교실에서 남자의 정체를 묻는 다면 자신의 상태가 남들에게 드러날것임을. 다른말로 남자가 '그'과 긴밀한 관계였음을 말이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답했으나 페르노크는 그가 웬지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테밀시아다.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너의 형이지." ".........형?"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이가 급히 오고 있었다. 펑퍼짐한 신관복을 펄렀이면서. ====================================================================== 이제 학원물은 그만~(-.-;;;;;;) 생각해보니 아르는 이제부터지만......^^;;;;;;; 개인적으로 학원물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학교를 등장시키는 작가^^ 물론 스토리전개상 필요한거지만요^^;;;;; 아르의 이름을 공모합니다. 케르가. ( ).라. 이브겐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71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5일 09:15 
등록자 : KREUZ1           조  회 : 223 건           
제  목 : [나유/펌] 아해의 장-3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7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38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만발까지는 아니여도 눈에 띄게 피어있는 많은 종류의 꽃들이 화사해 보였다. 꽃뿐만이 아니였다. 곳곳에 있는 나무들도 푸른 잎사귀를 맘껏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제법 많은 꽃들이 있음에도 향기가 별로 나지 않았고 많은 나무가 있음에도 잎사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그 곳은 따스했다. 아직은 싸늘한 3기임에도 따스했다. "그렇게 된건가...." 그 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꽃에 손수 물을 주고 있었다. 물론 이 많은 꽃과 나무에 물을 다 줄수는 없는 노릇이다. 취미삼아 이런식으로 물을 줄뿐 다른 때는 정령으로 해결하는 것이 다반사다. 분명 '한'남자만 있었음에도 그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대화'를 했다. "아니...... '물건'은 이미 그를 주인으로 인정한 거다. 빼앗으려면 그를 죽이는 수 밖에 없지. 하지만 '그분'의 명에는 '물건'이 주인으로 인정했다면 더이상 관여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남자는 물을 뿜어 내던 '아쿠아 스톤'에 '멈춰라'는 명령을 내리고 걷기 시작했다. "일단 그 '물건'은 방관한다. 행적만 알아두면 언제든지 가져 올수 있으니까." 어느 정도 걷다가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눈을 잠깐 감고 '기'를 정해진 법칙대로 응용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문이 생겼다. "'그'의 '물건'은 아직 두개가 남아있다. 찾도록." 그리고 사라졌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학원 '이므르'는 막강한 배경과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다. 그 배경과 자본의 결실이 불과 몇몇 세력자의 뱃속에만 들어가버리는 건 아니였다. 덕분에 넓은 교정안에는 많은 시설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보통 수업을 듣는 교실과 기숙사를 제외하고도 마법을 연마하는 연마(魔)장, 검법을 연마하는 연무(懋)장, 마상전투나 마(馬)법등을 연마하는 연마(馬)장 등이 있었다. 여기서 연마(馬)나 연마(魔)는 구분이 쉽지 않기 때문에 연마(魔)가 공식적 이름이나 연법장이라고 불린다. 또한 식사를 할수 있는 식당과 더불어 상당한 군것질거리를 수용하고 있는 매점이 있었다. 연마(馬)장에서 쓰이는 말을 관리하는 축사도 있었는 데 그곳에 관리되고 있는 말들은 모두 주인이 있는 말들로 학교에서 말을 대량으로 입수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알아서 준비해오는 것이 관례였다. 자신만의 애마가 있을 법한 나이의 소년, 소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 역사만큼이나 방대한 량을 자랑하는 도서관은 왕궁의 그것과도 비견할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또하나, 마법이 별로 발달하지 못한 '욤'제국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마법길드의 분점의 장소가 바로 '이므르'의 바로 옆이었다. 때문에 여간한 귀족은 꿈에도 꾸지 못할 마법의 생활화가 이곳에서는 쉽게 이루어 지고 있었다. 마법길드로써도 마법에 재능이 있는 이들을 바로 자신의 길드에 수용, 육성할수 있어 이로왔다. 최고의 마법사, 페르노크또한 이 '이므르'출신이었고 마법길드에 '준소속'이 아닌였던가! 마법에서 두각받는 이만 차출되어 육성되는 것은 아니였다. 무에 있어서 뛰어난 자와 학식에 있어 뛰어난 자도 각각 기사단과 학자길드에 수용, 육성되곤 했다. 학식에 있어서는 각기 시험이나 선생님들의 추천을 통해 접수되지만 무에 있어서는 그것이 잘 안된다. 때문에 각 기사단에서 불시에 사람을 파견, 판단하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연마(馬)장으로 갈텐가 연무(懋)장으로 갈텐가?" "부단장은 어디가 좋겠습니까?" "글쎄......" 잘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는 두 젊은이가 적당히 떨어져 있는 두 건물 사이에서 고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는 비슷해 보였으나 말을 들어봐서는 계급의 차가 제법인 모양이다. 부단장이라 불린 여성은 무리지어 가는 학생을 발견했다. "무슨 볼거리라도 있나.....?"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남자는 어려보이는 학생들을 보고는 대충 짐작한 바를 말했다. "견학인 모양입니다." "견학?" 온갖 사무에 바쁜 그녀가 이렇게 몸소 온 것은 휴식을 취하라는 단장의 세심한 배려덕이었다. 그녀는 용병출신으로, 단장과의 인연으로 기사로 된 케이스인지라 '이므르'에 대해서는 상식, 지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게다가 갑자기 파견된 덕에 '이므르'에 대해 알아볼새도 없었던 것이다. 그점까지 배려한 단장이 '이므르'출신의 기사를 딸려 보냈지만 말이다. "각 '장'마다는 나이제한이 있습니다. 그중 연마장이 가장 낮습니다만, 14살 그러니까 제 2학기때 부터 승마법을 배웁니다. 마상시합등은 제 5학기, 18살 부터구요. 지금 저 학생들이 향하는 곳은 연마장인데 지금 가는 걸 보니 견학하러 가는 겁니다. 수업을 받는 거라면 벌써 '장'에 도착해 있어야 되니까요." 부단장은 이해했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연마장에 가보지." 지금 연마장을 사용하는 학생들은 제 5학기인 모양이었다. 지금 수업중인 것이 마상시합인 걸 보면 말이다. 남녀 구별이 잘 안가는 중무장을 한 두 학생이 각기 창과 검을 들고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서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무기를 선택하는 데 그 선택의 제한은 거의 없었다. 물론 대부분이 창아니면 검이지만 말이다. 투구까지 눌러써 두 학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음은 당연했다. 그 반의 학생들은 각기 두패로 나뉘어 응원하고 있었다. 물론 시합의 집중성을 위해 큰소리는 못내지만 두패로 서있는 모습에서 그 점을 충분히 판단할수 있었다. 마상시합은 동시에 두 반이 받는데, 6기부터 이 두반은 서로 팀을 짜고 시합을 한다. 3기에 수업이 시작하고 8기에 방학이 시작하는 걸 고려하면 제 3기동안 수업을 받고 연습을 하고 제 2기 동안 나름대로 실전식으로 복습하는 시스템인것이다. 그렇게 팀을 이루어 시합을 한후, 진팀은 수업후 연마장을 정리해야 한다. 때문에 상당히 치열한 싸움이 되는 것이 마상시합이었다.견학하는 패거리와 거의 동시에 들어온 부단장은 의아한지 부하 기사에게 물었다. "마상시합은 연령제한이 18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도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예, 확실히....." 그러는 동안 다시 맞붙은 두 학생. 하지만 멀리서도 확실히 알수 있듯 그 두 학생의 체격차는 상당했다. 그렇다고 한명이 다른이에 비해 유난히 큰것은 아니였다. 보통 표준체격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확연한 차를 보이는 다른 한명의 체격은....... 아무리 잘 쳐줘야 제 1학기에서 제 2학기정도? 다른 말로 13살에서 14살정도로 밖에 안보였다. 보통 동급생과 비교해 작다고 쳐주는 이도 그정도로 작진 않았다. 그 의문은 옆에 견학온 이들도 가진 모양이었다. "우리 나이정도로 보이지 않니?" "하지만 우리는 승마도 못 배우는 걸?" 그 중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저 선배 알아." 아이들은 물론 두 기사의 시선까지 집중되버린 지라 수줍은 많은 나이의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와중에 시합은 끝나버린 모양이다. "S반 승!" 한 쪽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놀랍게도 그 작은 체구의 학생이 이긴 모양이었다. "이런....." 남자기사는 혀를 차는 부단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부단장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가득 품은 얼굴로 답했다. "시합을 못 봤잖는가." 확실히 시합에 집중해야할 두사람이 다른곳에 정신을 뺀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금방 끝난것은 전혀 뜻밖인 것이다. 물론 보통 시합보다는 빨리 끝나지만 이렇게 빨리 끝나지는 않는다. 그것이 말해주는 바는 압도적인 실력차라 할수 있는 데,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으니 임무상, 직업상 아쉬울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 선배가 유니펠스야." 두 기사는 못 알아 들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알아 들은 모양이다. "뭐!?" 그리고 뭐라고 더 말하고 싶어하는 그들을 막는 이가 있었다. 바로 그 왜소한 체구의 학생, 유니펠스. 단지 말에서 내려 같은 반으로 걸어갔을 뿐이데도 그 모습에서 풍겨지는 은밀한 박력에 수다많은 학생들이 입을 다문것이다. 물론 승리를 거두고 온 그를 반기는 같은 반의 학생들의 환호성이 상당히 시끄러웠지만 말이다. 특히나 먼저 걸어나가 그를 반기는 이가 있었다. 전통 황족의 외형인 보라색 머리카락의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상당한 키에 마른 몸매의 소년이었다. "역시 유니펠스야!" 상당히 친해보이는 듯한 말투였으나 유니펠스는 별다른 말없이 투구만 벗었다. 질끈 묶은 흑발을 보였다. 똑같이 시합을 한 다른 반의 이도 투구를 벗었는 데 워낙 집중을 한터라 얼굴엔 땀으로 가득했다. 시합중의 집중도 그 땀의 원인이겠지만 불패의 유니펠스와 대결한다는 압력도 작용한 듯 했다. 같은 반의 이들은 별다른 야유 없이 그를 맞았다. 똑같은 시합을 했음에도 유니펠스의 얼굴엔 땀이 거의 없었다. 여기서 둘의 실력차를 어느정도 예상할수 있었다. 유니펠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에게 투구를 던지고는 그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시합장에 얼굴을 돌렸다. 아니 자신에게 걸어오는 애마에게 얼굴을 돌렸다. 덕분에 두 기사는 물론 다른 학생들도 그의 얼굴을 볼수 있었다. 다시 풀러버린 턱정도오는 단정한 흑발, 이마를 감싼 검은 천, 하얀 얼굴.... 그리고 주홍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소년이었다. 하지만..... 체구와 마찬가지로 얼굴도 아무리 잘 쳐줘야 13살정도였다 그 기묘한 아름다움에 숨을 죽이며 아까 말을 꺼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 저 선배가 바로 케르가. 유니펠스. 라. 이브겐. 이라고. 성장하지 않는 소년......유니펠스란 말이야." ======================================================================= 시간이 흘렀습니다. 장장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유니펠스가 누군지는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89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6일 08:57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4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물론 두 기사는 그 소년에게 관심이 갔다. 하지만 그 관심을 덥어버리는 이가 등장해 버렸다. "황족?" 바로 그 유니펠스를 반기는 보라색 눈동자의 소년이었다. 황실에서는 초대 황제의 모습을 이어받은 보라색 눈동자의 황자를 황위 후보로 둔다. 초대황제의 머리카락은 보라색이 아니였기에 머리카락이 보라색인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눈동자는 매우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갈것이다. 왜 머리카락의 색에는 별다른 제재가 없는가? 그것은 그 다음 황제 자이젠의 그것이 초대황제와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점으로 많은 이가 자이젠을 배척했으나 곧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으로 조건이 그에게 맞게 변해 버렸다. 즉, 눈동자로만 정통성을 따지게 된것이다. 현재 황실에서 정통성이 인정받은 황족은 단 세명이었다. 현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제 7황자. 황태자는 특별한 감정을 배제하기위해 학원따위는 가지 않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황자가 바로 제 7황자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수 있었다. 제국을 순식간에 혼란, 그러니까 내전에 빠뜨릴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제 7황자말이다. 하지만 그둘의 눈앞에 있는 황자는 너무나 천진난만해 보여 정치적 요소를 전혀 발견할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니, 이번 여름 방학에도 집에 갈 생각이야?" 대꾸 없이 고개만 끄떡이는 왜소한 소년의 모습이 기사들의 눈에는 더나할나위 없이 방자해 보였다. "뭐지, 저 꼬마...." 그들의 약간은 거친 음성을 알아들은 제 1학기의 학생들이 그제서야 그들의 존재를 알아챘다. "누구세요?" 특별히 목적,신분 등을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부단장은 일단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저 꼬...소년이 누군지 아니?" "아! 유니펠스 선배님이요?" 일단은 다수가 모이니까 용기도 솟는지 아이들은 별다른 경계없이 답해주었다. "케르가. 유니펠스. 라. 이브겐, 유니펠스 선배님이신데요?" 그저 이름을 밝힌 것만으로 그의 존재를 알아차릴거라 생각했는지 아이들은 그밖의 설명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모르겠다는 뜻의 질문을 다시 던진 부단장의 말에 곧 주저리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유니펠스 선배님은요, 무지 강해요, 그치?" "응. 한번도 진적이 없는 걸요!" "필브리안 선배님과 가장 친하시고요." "아니야! 필브리안 선배님하고만 친한신거야!" "맞다. 필브리안 선배님하고만 친하지. 다른 사람은 거의 무시하는 걸." "무시가 아니라 상관하지 않는 거야!" 말은 많았지만 결국은 별 소득이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수 있었다. 저 유니펠스라는 소년이 제 7황자, 필브리안과 절친한 사이라는 것! 부단장은 부하 기사에게 유니펠스의 차출여부에 대해 말을 꺼냈다. "저 정도라면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기에 충분하지 않는가?" 그녀는 뜻밖에 고개를 단호히 젓는 부하를 볼수 있었다. "유니펠스군의 이름을 한번 되새겨 보십시요." "이름?.....유니펠스.....케르가. 유니펠스. 라. 이브겐.......케르가?" 그제서야 눈치를 챈 상관에게 부하는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키텐' 기사단장, 케르가경의 장자입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부단장은 아쉬운듯 입맛을 다셨다. '배경을 제외하고도 괜찮은 인재 였는 데......' 그 둘은 들을 수 없는 대화가 유니펠스라는 소년과 제 7황자의 사이에서 계속 진행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화도중에도 유니펠스는 고개만 끄떡일뿐이어서 두 기사의 심중을 상당히 상하게 만들었다. "그럼 나도 같이 가자,응?" 유니펠스는 조금 놀란듯 필브리안을 보았다. 그런 반응을 뻔히 보면서도 필브리안은 밝게 웃으며 졸라댔다. "방학동안 심심하단 말이야. 유니한테 기마도 배우고 좋잖아. 응?" 유니펠스는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그러자 필브리안은 약간 칭얼거리며 더 달라붙었다. "잉~! 그러지 말고.... 아! 유니는 마차 안타고 가니까 신경쓰이는 거야? 상관마! 나도 유니랑 같이 여행길로 말타고 갈거니까. 이날을 위해 기마연습 얼마나 많이 했는 데~~응?" 유니펠스는 모든 귀족들과는 다르게 특별히 마차나 경호를 붙이지 않고 혼자 말을 타고 모험가 마냥 집으로 돌아갔다가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그의 실력을 알고 있는 이들도 걱정을 할 만큼 그 길이 험했지만 유니펠스는 언제나 상처하나 없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다른이들도 그길을 쉽게 보는 것은 아니다. 수도에 자리잡은 '이므르'와 유니펠스가 방학을 보내는 별장사이에는 '이카미렌'산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에 있는 본가를 굳이 마다하고 꼭 별장으로 방학을 보내러 가는 그의 심보는 알수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재미있는 방학을 보내리라 마음 먹은 필브리안에게는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유니~~~"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분명히 유니펠스의 외견이 확연히 어려보였으나 지금 모습에서는 그 점을 발견할수 없었다. 아니 오리혀 유니펠스가 성숙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복잡하게 보던 두 기사는 결국엔 별다른 인재를 발견하지 못하고 연무장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유니는 나랑 같이 방학 보내는 게 싫은 거야?" 계속 거절하는 유니펠스에게 이제는 서움함을 느끼는 필브리안이었다. 기어이 풀이 죽어버린 그를 무시하는 건지 유니펠스는 그저 자신의 애마를 씻길뿐이었다. 그 모습에 더 서운한지 필브리안은 서럽게 칭얼거렸다. "난 유니가 젤루 좋은데........ 가족보다두 유니랑 방학을 보내고 싶을만큼....... 근데 유니는 아닌 모양이네......." 만일 그것이 능청이거나 연기였다면 아무 하자 없이 무시할수 있겠지만 아니였다. 진심으로 이 18살 먹은 소년은 서럽게 울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유니펠스는 허락을 해버렸다. 다시 헤벌쭉해지는 친구를 속으론 어쨌는지는 모랐으나 겉으로는 별다른 변화없이 지켜보는 유니펠스였다. ======================================================================= 이번 회를 올리는 데 제법 공백기가 있었지요? 그러니까 31회 올리고........말입니다. 스토리는 다 정해 놨는데 어디서 부터 진행 시킬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이제는 모든 정리가 끝나고 남은 건 연재뿐^^ 언제한번 연참이나 할까.......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90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6일 08:57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34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케르가경은 좋은 인재를 아들로 뒀군." "그러게말입니다. 케르가경은 그걸 알고 받아 들인 걸까요?" "받아 들이다니?" 두어명을 눈여겨 보고 돌아오는 길에 부단장은 계속 아쉬웠던지 유니펠스의 이야기를 꺼냈다. 확실히 보진 못했지만 그의 실력은 이미 충분히 알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자 아닙니까? 유니펠스군이 아까 저 아인진 몰랐지만 케르가경이 양자를 들였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특이하게 양자의 이름을 원래 친아들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양자........란 말이지? 그럼 희망이 조금은 있는 건가?" 기사는 쓰게 웃으면서 답했다. "글쎄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만...." 하지만 부단장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않하는 게 좋을 텐데......." 쓸모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번더 말해보는 그였다. 계속 눈을 빛내는 그녀를 보면서 유니펠스의 앞길이 조금 골치 아파 질것이라 짐작할수 있었다. 제 7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제 7기 말에는 '이므르' 학생들의 외출이 자유로왔다. 거리에는 방학 준비, 즉 가족들에게 줄 선물등을 고르는 데 한창인 학생들 사이에 마찬가지로 분주한 이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요! 뭐가 필요하십니까?" 상점에 들어와 이것저것 뒤젖이는 그에게 마침내 주인이 다가왔다. 많은 손님으로 분비는 마당에 이런 애까지 챙긴다는 건 상당히 거추장스런 일이지만 계속해서 꼼꼼히 살피는 그에게 신경이 자꾸 가버리는 것이다.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린 소년은 놀랍게도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고를 만한 아동틱한 옷이나 화려한 옷대신 완벽한 실용성 여행복을 가르켰다. "이거 말입니까?" 소년은 고개를 끄떡이며 그것을 챙겨주길 기다리는 듯했다. "여기 있습니다. 또 필요하신 건 없으신지요?" 그의 예의상 말맺음에 소년은 옆에 있는 큰 사이즈의 색만 다른 똑같은 옷을 가르킴으로서 답했다. 상인은 그 후에도 이것저것 뒤따라 다니면서 소년이 가르키는 것을 챙겨들어야 했다. 상인은 그 소년이 상당히 여행길에 능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초보 모험가나 여행자로써도 갖지 못할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됐습니까?" 이제는 계산대로 향하는 소년에게 상인이 물었다. 그의 말투는 이미 친절을 생명으로 하는 상인의 말로 변해 있었지만 소년은 아는 지 모르는 지 고개만 끄떡이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상당한 값을 부르려 했던 상인은 결국 처음부터 제값을 부를 수 밖에 없었다.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 그 제값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비가 걸린후 제값만 받을수 있을텐데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격이 되 버릴테니 말이다. 소년은 상당한 무게의 짐을 태연히 받아들고 나가버렸다. 밖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다른이가 보였지만 상인은 더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니. 여기 사오라는 건 다 사왔는 데......." 말을 흐리는 그에게 유니펠스는 옷보따리를 내려놓고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저기 유니가 가르쳐준 가격이랑 많이 틀리던데?" 유니펠스는 별다른 반응없이 그를 보다가 팔짱을 꼈다. "요즘 가격이 많이 올랐나봐. 유니가 가르쳐준 가격은 반년전 가격이잖아?" 유니펠스는 손을 내밀었다. 필브리안은 맑은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왜? 사온거 보자고?"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였고 필브리안은 등에 매고 온 짐보따리를 건네 주었다. "여기." 그것을 받아든 유니펠스는 열어보면서 다른 손을 내밀었다. 필브리안은 다시 물었다. "뭐?" 하지만 유니펠스는 계속 짐만 살필뿐 대꾸하지 않았다. "계산서 달라는 거야?" 고개를 끄떡이는 유니펠스에게 더할나위없는 천진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건네주었다. 유니펠스는 꼼꼼히 내용물을 살펴보고 나서야 필브리안이 내미는 계산서를 받아들었다. 그것을 잠깐 계산하면서 보던 유니펠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바가지를 쓴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필브리안은 그제서야 생각난듯 손뼉을 치고 말했다. "아참! 식료품은 대충 샀으니까 이제는 생필품 사러 가야겠네? 비누, 수건, 약, 램프, 초......라고 했지? 좀 있다 만나!" 한참 메모에 써진 것을 읊던 필브리안은 손을 척 올려 인사하며 걸어갔다. 하지만 곧 멈춰 설수 밖에 없었다. "왜그래, 유니?" 유니펠스는 고개를 천천히 저어보이며 그의 등에 사온 짐을 올려놓고는 자신도 다른 짐을 들고 앞장서 걸었다. "같이 가자고? 혼자 가는 거 겁나?" 유니펠스는 앞의 질문에 고개를 끄떡였으나 받아들인 필브리안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유니는 대인 공포증이 있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같이가자! 내가 살 데 먼저 갈까?" 유니펠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가야할곳이 가깝다고 판단했다. 고개를 저으며 다른 방향으로 걷는 유니펠스의 뒤를 필브리안이 쫓았다. "그럼 무기점 먼저네?" 고개를 끄떡이는 유니펠스의 옆에 보조를 맞쳐 걸으며 필브리안은 즐거워했다. 그로써는 처음 떠나는 여행인 것이다. 그것도 친구와 함께 가는. 원래 자신의 검이 있는 필브리안이었으나 너무나 화려했기에 유니펠스가 허락하지 않았다. 유니펠스가 가지고 있는 그의 검은 실전용 검으로 보통 용병들이 많이 쓰는 검인데, 강도면에서도 상당한 성능을 자랑한다. 왠만한 용병들이 잘 쓰는 검이었기에 특별히 눈에 띄이지도 않고 좋았다. 하지만 필브리안이 가지고 있는 오만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져 있는 검은 소매치기나 노상강도의 최고급 먹이가 되기 쉽상이었다. 또 그검을 소유할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필브리안을 알고 있는 유니펠스로써는 당연히 다른 검을 권할수 밖에. "이검은 어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검만은 못했지만 왠만한 평민은 엄두도 못낼 검을 들고 필브리안이 물었다. 유니펠스는 고개를 저어보이며 다른 롱소드를 꺼내들고 날을 튕기며 감정했다. 이것저것 들어보이던 필브리안은 곧 싫증이 났는 지 유니펠스의 옆에 다가가 그가 하는것을 구경했다. 무기점 주인은 제법 괜찮은 물건만 골라내며 살피는 꼬마를 신기하게 보다가 다가갔다. "그 물건이 마음에 드는가?" 바로 내려 놓는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오래 고려하고 있는 모습에 그가 물었다. 하지만 의외로 빠르게 답을 받았다. 바로 내려놓고는 뭔가를 원한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꼬마에게 결국은 웃어 보였다. "알았네. 따라오게." 하면서 앞장서는 그를 태연히 따라나서는 유니펠스의 뒤를 필브리안이 따랐다. 집안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 복도에 선 주인이 벽의 어느면을 밀자 바닥이 조금 밀리며 계단이 나타났다. "따라오게." 밑으로 내려선 필브리안은 상당히 기대했다가 별다른 무기가 없는 지하의 광경에 실망했다. "에? 뭐야?" 하지만 주인과 유니펠스는 말없이 벽쪽으로 걸어갔을 뿐이었다. 사면의 벽에 걸려 있는 각종 무기들을 보는 유니펠스의 눈이 상당히 빛났다. 그는 곧 그중에서 단검 하나와 롱소드 하나를 꺼냈다. "그게 좋나?"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걸음을 옮겨 방안을 둘러보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흐르는 그의 모습은 오랜 시간을 같이 있었던 필브리안에게도 생소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렇것이 필브리안과 함께 있을때 유니펠스가 가끔이나마 지었던 미소는 친구로서지 전사로서 지은 미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유니펠스는 구석에 걸려있는 단검보다는 길고 롱소드보다는 짧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집과 손잡이는 그을림투성이어서 별다른 특징은 없었지만 유니펠스는 가슴 설레이는 뭔가를 느낄수 있었다. "아! 그건 웬지 열수가 없더군. 그래서 손질도 제대로 못했지만....... 뭐, 대장장이로써도 날리는 내가 보기엔 뭔가 있는 것 같더군. 그래서 일단은 여기에 보관하고 있었지." 그의 말을 경청하던 유니펠스는 가만히 검집을 어루만지다가 계단을 나섰다. "다 고른 건가?" 고개를 끄떡임으로서 답한 유니펠스의 뒤를 필브리안이 따랐다. 필브리안은 롱소드를 건네 받으며 물었다. "내건 이거야?" 그 검은 정교한 세공이 손잡이에만 새겨져 있고 검집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니펠스는 고개만 끄떡이고 그에게 그것을 넘겼다. 예상보다 좋은 무기를 정비한 유니펠스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보였다. 보통 무기의 두배가까이 되는 가격을 셈하고 나온 둘은 다시 시장을 돌아다녔다. '열수없다.' 사온 검을 들어올리는 왼쪽 손을 잠시 내려다 보더니 다시 하얀 천을 들어 검집을 닦아내기 시작하는 이가 있었다. 그의 왼쪽 손목에는 그의 일부인양 붉은 빛 금속성 팔찌가 걸려있었다. ======================================================================= 오늘도 올렸습니다. 조금 쉬다가 올려서그런지 전에는 하루만에 조회수가 100을 넘기더니 이제는 조금 늦어지더군요^^ 이제는 빨리 꾸준히 올리도록하겠습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91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6일 08:58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1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2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유니는 왜 말을 직접 씻기고 먹이고 그래?" 왜소한 몸집에 걸맞지 않게 거구의 말을 애마로 가지고 있는 유니펠스였다. 방학식도 마치고 이제는 출발하는 것만 남은 상태에서 축사에 박혀 말을 먹이고 있는 유니펠스가 불만인지 필브리안은 자신의 말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어고 필브리안은 하늘만 올려봤다. "어라? 날씨가 안좋은 것 같다, 유니." 그말엔 반응을 보이며 덩달아 하늘을 바라보던 유니펠스는 자신은 축사안에 있음을 돌천장을 보며 깨달았다. 마저 먹이고 나온 유니펠스는 밖에서 자신의 말과 함께 놀고 있는 필브리안을 손짓으로 불렀다. "왜?" 꼬리가 있다면 틀림없이 마구 쳤을법한 얼굴로 신나게 달려오는 필브리안의 뒤로 그의 말이 따라왔다. 자신의 앞에 선 그를 잠시 보던 유니펠스는 필브리안의 말을 축사안에 들여다 놓고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내일 출발할거야, 유니?" 따라가며 묻는 그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며 하늘을 손으로 가르키는 유니펠스였다. 그 손을 따라 덩달아 하늘을 한번 보던 필브리안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져 있음을 깨달고 인상을 찡그렸다. "힝~, 역시 비가 오려나봐." 유니펠스가 한번 더 고개를 끄떡였지만 고개를 잔뜩 올리고 있던 필브리안은 못 봤다. 봐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말이다. 어느새 당도한 건물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의 뒤로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먼저 출발한 얘들은 비맞으면서 가겠네?" 한참 계단을 오르다가 텅빈 기숙사의 썰렁함에 질린듯 필브리안이 말했다. 그 말때문인지 잠시 멈춰선 유니펠스를 의아하게 보다가 막 당도한 층이 유니펠스의 방이 있는 층임을 깨달았다. 황족인 필브리안은 최정상층의 가장 호화로운 방이였고 최고 귀족 '카르민'의 바로 밑의 신분 '이브겐'인 유니펠스의 방은 바로 이층 밑이었다. 신분에 따라 방의 배치가 틀려지는 '이므르'였던 것이다. "오늘은 같이 자면 안돼? 어차피 선생님들도 이제는 상관안하잖아." 유니펠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실망한 듯 고개를 수그리는 필브리안의 머리를 좀 만지작 거린후 자신의 방쪽으로 걸어가버렸다.남은 필브리안은 유니펠스가 만진 머리쪽을 한번 건들이다가 빙긋 웃으며 올라갔다. "일단, '키텐'으로 가보셔야 되지 않습니까?" 방안으로 들어선 유니펠스이 귀에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유니펠스는 별다른 반응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싸 놓은 보따리를 지나 옷장으로 간 그는 그 안에서 우비라고 불리는 로브를 찾아 들었다. 검은색의 수수한 디자인을 한 그것을 입은 유니펠스는 방문 옆에 달려 있는 전신 거울을 통해 옷매무새를 제대로 했다. 그리고 나간 그의 방안, 책상위에는 메모 한장이 남겨 있었다. -아버지께 잠시 갔다오겠음 By 유니펠스- 거리에는 비가 옴에도 상관하지 않는 많은 이가 있었다. 여전히 번화한 그곳을 흑마를 탄 한 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별로 눈에 뛸 상황은 아니였다. 마차도 지나가고 말을 탄 귀족, 용병, 상인등도 수없이 지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흑마를 탄 이는 손쉽게 주변의 시선을 끌수 있었다. 어느집이건 아직은 말 곁에 두지도 않을 나이의 소년이 왠만한 나이의 성인들도 꺼릴 거구의 말을 타고 있으니 말이다. 능숙하게 말을 몰며 가던 소년은 갑자기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 이때문에 멈춰 설수 밖에 없었다. "여~ 이말 멋진데? 안그래?" 막아선 남자의 일행이었던지 다른 남자가 켈켈거리며 다가왔다. "그러게. 꼬마야." 자신의 동료에게 답하고 소년에게 고개를 돌린 그는 소년이 답이 없음에도 게이치 않고 말했다. "이 말 어디서 훔쳤지?" "어린나이에 수단이 대단하네? 하지만 그 나이에 그러면 쓰나."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잘못 걸린 소년의 팔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말은 계속 되고 있었다. "절도범은 노예로 끌려가도 할말이 없는 거라고." "범죄자니까말이지." "꼬마야. 노예가 되고 싶진 않겠지?" "어린 녀석을 좋아하는 변태는 얼마든지 있다고." 그들의 속셈은 비단 말뿐만이 아니였나 보다. 비가 솟아지는 마당에도 후드속에 보이는 소년의 하얀 얼굴을 확연히 보였다. 살짝 내리쓴 눈동자를 감싸는 길고 검은 속눈썹때문에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도 소년은 '상품'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이들을 피해 다시 걸으려 했으나 남자들은 상당한 몸놀림을 가지고 있었다. "어딜!" 다시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그들에게 짜증이 나는 지 소년의 미간이 조금 찡그려 지는 듯했다.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 보면 상당히 흉악한 상황이었으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고요했다. 말을 탄 소년과 마찬가지로 검은 색 후드를 깊이 눌러쓴 남자였다. 호리호리한 몸집을 지녔으나 상당한 키를 가지고 있는 그는 행패를 부리는 남자들의 곁으로 태연히 걸어왔다. "그만들 두시죠. 이 말은 상당한 성질을 가진 듯 보이군요. 주인이 아니라면 여기 이 소년이 그 말을 탈수 있을 리 만무하겠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은 자꾸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두 남자를 사납게 노려보며 앞발을 조금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두남자를 걷어 찰것처럼 보였다. "뭐야, 넌!" "상관말고 꺼져." 일이 잘풀린다 싶었는 데 난데없이 끼어든 불청객때문에 두 남자는 심히 불쾌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였다. "또 소년의 로브를 보니 최상품이군요. 아마 상위 귀족 자제쯤 되나 보군요. 귀족의 자제를 노예로 납치해가면......... 두분의 앞날이 상당히 귀찮아 지겠지요?" 그 말에 두남자는 주저하면서 소년의 로브를 살펴 보았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그둘은 조금씩 물러서더니 한마디 남기고 사라졌다. "뭐야, 훔친게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할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소년은 여짓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남자는 소년을 한번 올려다 보더니 곧 원래 있었던 골목길로 들어가 버렸다. 주변에서는 감사의 인사도 안하는 소년을 욕을 했다. 물론 큰소리로 한것은 아니였다. 소년은 귀족이었으니까. '잘못 본건가....... 필의 눈동자색.......' 소년은 잠시 남자가 사라진 골목길을 보다가 가던 길을 갔다. 소년이 사라진 직후, 그 남자가 골목길에서 나왔다. 남자는 소년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곧 사라졌다. ===================================================================== 남자의 정체는? 알사람은 알겠지요? 어제 저녁 6시에 잠들어서 오늘 아침 7시에 눈뜬 승림입니다. 스스로 놀라며 일어나 글을 올립니다.하하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89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6일 08:58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6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6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1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44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일반적으로 황궁이 있으며 제국의 핵심인 수도에 주리를 튼 세력이 막강하다. 특히나 무가 임에도 수도에 본가가 있고 기사단 임에도 그 본거지가 수도에 있다면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유니펠스의 본가도 수도에 있었고 황실과도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게다가 그의 가문의 기사단인 '키텐'의 본거지 또한 수도에 있었다. 그것도 본가와 멀지않은 곳, 즉 황실 근처에 말이다. 이는 유니펠스의 가문, '케르가'가 포함되어 있는 세력이 감히 입에도 담을 수 없을 만큼 막강함을 뜻한다. 왠만한 귀족은 물론 황족조차 함부로 할수 없는 가문이 바로 '케르가'다. 특히나 이번 가주 케르가. 다르. 라. 이브겐. 때에 와서는 그 위세가 더 당당해 졌다. 수많은 공적을 세운 그의 기사단 '키텐'은 이제는 기사지망생의 제 1순위 지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 '키텐'은 별로 위용이 넘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병사와 같았고 자유로왔다. 확실히 '키텐'의 기사들은 평민이나 용병출신이 많았다. 원래 왠만큼 실력이 받쳐 준다면 기사가 되는 것은 그럭저럭 쉬었다. 하지만 겨우 반정도가 귀족이라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일이라 할수 있다. 오년전만해도 '키텐'도 다른 기사단과 다를 바 없었다. 바로 그 오년전부터 갑자기 실력만으로 뽑는 경향이 생기더니 이제는 실력파만이 들어올수 있는 곳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버렸다. 때문에 겉보기에는 허술해 보여도 함부로 침범할수 없는 곳이다. 때문에 갑자기 내리는 조금은 으산한 비줄기 속에서 말을 탄 한 이가 들어 왔을 때도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았다. 누가 감히 '키텐'에 단신으로 쳐들어 오겠는 가. 태평하게 비를 맞고 서있는 이들을 헤치고 거구의 말을 유유히 관사쪽으로 다가갔다. 완전히 현관쪽으로 왔을 때야 경비같은 자가 다가와 용건과 신분을 물었다. 그때까지도 다른 기사들은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말을 타고 있는 이가 생각보다 어리게 느껴 졌지만 세상에는 얼마든지 작은 체구의 이가 있는 법이었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경비는 쳐다 보지도 않고 그는 위를 올려다 보았다. 커다란 나무가 관사를 둘르고 있었다. 빗줄기가 그의 얼굴에 부딪쳐 왔지만 그는 별로 상관하지 안았다. 조금은 흥미를 가지고 보고 있었던 기사들이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 올려 보았다. "자네....!" 그가 보고 있었던 곳은 그들의 '마스터', 기사단장 케르가공의 집무실이었다. 의문을 가진 기사가 다가오기도 전에 말을 타고 있던 이는 말의 등에 발을 올려 힘껏 튕기고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놀랍도록 빠르게 나무를 두어번 튕기며 3층의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기사가 놀라면서도 뛰어들었다. "무모한!" 창문을 깨며 들어가는 그의 신형을 보고는 몇몇 기사들도 그제서야 알아챈듯 계단으로 혹은 똑같은 방법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물론 방자하게 나무밑이나 담벼락에 기대서 그 광경을 구경하는 이도 있었다. "멍청이들." 나무밑에 있는 남자가 작게 중얼 거리자 얼마 안떨어진 담벼락에 기대 있던 남자도 덩달아 말했다. "바보...." 조금은 무료한 듯 검을 조금 휘둘러 보이는 남자도 있었다. "여태 눈치 채지 못한 것들에게 뭘 바라겠어." "아아." 그렇게 세남자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달려 가고 있는 대 여섯명의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마스터!!" 자객의 뒤를 따라 나무를 타고 온 기사가 검을 뽑아들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의 후각을 찌르는 비린내에 놀랐다. 그의 시야에 등을 돌리고 서있는 검은 로드의 자객이 보였다. "이녀석!!!" 검을 곤두세우며 달려드는 그를 천천히 돌아본 자객은 손에 쥐여 있던 단검으로 그의 검을 가볍게 튕겨냈다. '강하다!' 하지만 긴장도 잠시 그는 자객의 검에 묻어 있는 핏줄기를 볼수 있었다. "마스터~!" "무슨일인가?" 조용한 어조가 절규하는 기사의 귓가를 파고 들었다. 잠시 굳어 있던 그가 돌아본 곳에는 태연히 서류를 뒤젓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마.....스터?" "왜 그러지, 차터르경?" -힉- 검을 휘두루는 소리에 놀란 기사가 다시 검을 곤두세우고 뒤를 돌아 보았지만 그가 볼수 있었던 건 피를 떨꿔낸 단검을 집에 꽂아 놓는 모습이었다. "아......" 그리고 그제서야 검은 로브의 자객 발치에 있는 시체 한구를 볼수 있었다. 목을 절단 당한듯 피를 뿜어내고 있는 시체의 몸뚱이는 서있는 자객이 두르고 있는 검은 로브보다 훨씬 자객틱한 옷으로 감싸져 있었다. -쾅!- "마스터!!" 문이 열리며 다른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무슨일인가?" 이번에는 대답이 빨리 돌아왔기 때문인지 로브의 자객에게 달려드는 기사는 없었다. "누구......?" 먼저 들어와 있던 차터르가 물었다. 그러자 '자객'은 약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후드를 벗어 보였다. '어린애?' 하지만 못 알아보는 것은 차터르뿐이었던지 다른 기사들은 곧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유니펠스님." 원래는 '군'을 붙여야 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마스터의 아들이 아닌가? 자리에 앉아 있던 마스터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켜 유니펠스의 옆으로 걸어갔다. "시체를 치우게." 익숙하게 뒷처리를 하는 동료를 보며 짐직 멍하니 있던 차터르에게 마스터, 케르가가 말을 꺼냈다. "차터르경은 모르겠군. 내 아들이네. 유니, 요번 제 5기에 뽑힌 기사라 널 못 알아본거다. 이일 가슴에 품지 말아라." 고개를 끄떡이는 소년의 머리를 조금 부벼준 마스터는 그만 나가 보가고 명했다. "지금 쯤이면 녀석들 얼굴이 달아올라 나오겠구만." "멍청이들이라니까. 유니펠스님도 못 알아보고....." "아아" 셋이 친구인지 삼층 창문을 보면서 세 기사가 한마디씩했다. "안목이 조금만 높았다면 나무에 은신해 있는 자객을 봤을 텐데 말이지." "조금만 더 높았다면 유니펠스님이 올라가자 창문을 깨고 자객이 먼저 들어간걸 알았을 텐데.....말이지?" "아아." 무성의한 대답을 일삼던 남자가 하늘을 올려보더니 한마디했다. "그치는 군." ======================================================================== 음냐..... 채팅을 했습니다. 세이에서...... 컴맹인지라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들어갔지요. 인사를 하고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 데요....했더니 욕을 하면서 알아도 안가르쳐준다.......반말을 하더군요...... 괘씸한.......정말 기분이 나빴답니다. 적당히(?) 되받아 쳐주고 나왔지만 여전히 기분이 안좋군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936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7일 23:33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13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23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정말이지....." 밖에 나온 차터르는 동료 기사들의 상당히 차가운 눈초리를 받아야만했다. 하지만 그도 할말은 있었다. "내가 뭐 자네들도 따라 오라고 했나..... 게다가 난 유니펠스님의 얼굴을 모른다 쳐도 자네들은 아니지 않는가?" 지극히 타당한 말이기에 그들은 이마만 집을 뿐이었다. 차터르는 그 모습을 상당히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물었다. "꼭 여자애 같더구만..... 마스터의 아들은 18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말에 동료 기사들은 낄낄대면서 답해주었다. "아, 물론이지. 마스터 아들은 18살이야." "에? 그럼 저 여자앤?" 아까와는 강도가 다른 웃음을 짓던 동료 기사가 다시 덧붙여 주었다. "그 18살 아들분이지." "왠만하면 좀 알아듣게." 주변의 지원을 받으며 그 기사는 한참을 웃어 졋겼다. "이봐, 좀 자세히 얘기 해달라고!" 하지만 그의 말은 철저히 무시됐다. "그러고보면, 우리들도 처음에 유니펠스님을 뵙을땐 저랬지?" "난 유니펠스님이 처음 왔을때부터 봤으니까..... 어린 모습보다는 저 얼굴에 남자라는 것에 놀랐지." "나도 그때 있었어. 마스터가 미쳤나 했지, 하하." 차터르가 그들이 떠드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 질문을 던졌다. "이상해...... 아무리 마스터 아들이라해도.....너무 존대해주는것 아냐? 고작 앤데.......?" 웃음을 멈춘 기사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 보자 차터르는 당황해 버렸다. "뭐,뭐야?" "음....... 자네, 그말 린과 젠, 틸 앞에서 했다간 뼈도 못추린다구." 한 기사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공감하며 고개를 지긋이 끄떡여 보였다. "엑! 그 형제들이 따르는 괴물도 있었어?" "엣취!" "감긴가?" "이런.... 제 7기가 끝나가는 무렵에 비 좀 맞았다고 감기면 '키텐'의 수치라고, 틸." "그냥 갑자기 으스스해진거니까.......감긴 아닌것 같은데, 린." 린이라 불린 담에 기대있던 남자가 살짝 웃었다. "뭐, 그럼 다행이구." 제채기를 한 검을 휘두러던 남자가 이제는 나무 밑에 누워버린 이의 곁으로 갔다. 두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는 포즈가 영락없는 낮잠 포즈였다. "땅도 축축해 졌는데 잘거면 들어가서 자지, 젠?" "아아."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린이 웃으며 말했다. "곧 유이펠스님이 나오실텐데 기다려야지." 틀린 답이 아니였던지 누운이에게서 반문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구나. 유니펠스님 참 오랫만에 보는 거지?" "이제 제 5학기니까...... 뭐, 보기 힘든건 사실이지." 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나무쪽으로 걸어왔다. "정말 변한게 없으시다니까, 유니펠스님." "그러게." 젠은 답이 없어으나 눈을 뜸으로써 대화에 참여했다. "5년.....인가." 젠이 오랫만에 내밷은 말에 둘은 이제는 한두방울 떨어지는 비를 주시했다. 린이 자신의 풀러져 헝크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한마디했다. "소나기였군." "경들, 내 아들일세." 하며 그들의 마스터는 한 소녀를 데리고 왔다. 마스터가 드디어 미친 걸까? 그의 부인 뒤를 이어서? 충분히 들리는 수군거림을 무시한체 마스터는 말을 이었다. "케르가. 유니펠스. 라. 이브겐이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소녀를 조금 밀며 뒤로 물러선 마스터의 얼굴은 2년전과 같았다. 무뚝뚝한 가운데 밝고 부드러운 면이 스며 있는 얼굴..... 소녀는 한걸은 앞으로 나오더니 깊숙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나이답지 않은 차분함이 소녀를 감싸고 있었다. ..........5년전 3기때의 일이다. ========================================================================= 으아아아아아아악~~~~~~~~~~!!! 너무.......짧다....ㅠ.ㅠ 죄송..... 늦게 올리고....짧게 써 버렸습니다. 여유분이 없는 터라 이상하게 쓰이면 그 날은 못올리거나 짧게 올리거나..... 그럽니다. 오늘도 아침에 많이 써올리고 작성완료만 누루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 하하 맘에 안들어서 싸그리 지워버렸습니다^^ 이제는 대충 글발도 서니까..... 내일은 많이 올리겠습니다....(아마도;;;;)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com
번  호 : 17937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7일 23:3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1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30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저 애가 마스터 '아들'이라고?" "아." 구석에서 무심히 인사하는 소녀를 보는 두 남자가 있었다. 다른 기사에 비해서도 보통 평민에 비해서도 불량한 차림새에 거친 무구를 착용하고 있는 두사람은 좋게 말해서 용병, 솔직히 말해서는 그냥 잡배거리, 즉 건달로 보였다. 하지만 둘의 잘 짜여진 근육질의 몸매나 준수한 용모는 그 차림새를 커버하고도 남았다. 둘다 적발에 쪽빛눈동자를 지닌 미남자에 키도 체격도 비슷해 주위에서 형제라고 종종 오인하기도 했다. 이름도 비슷한 쿠린서, 크젠서 여서 이름을 밝힐때도 성까지 밝히지 않으면 완전히 둘이 형제라고 믿어 버리는 실정이었다. 또 둘다 별다른 부정도 하지 않아 둘이 형제가 아님을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둘다 귀족 출신임에도 이상할정도로 품위가 없어 대다수의 명예 높은 기사들의 비난을 사고 있었는 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력은 높아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그것보다 젠, 오늘 어때?" "어제와 같아." "한가하군. ......그럼 '머무는 공간'에 가자." "그러지." 이미 둘의 관심은 그 소녀를 떠나 있었다. 둘이 자주가는 단골 술집, '머무는 공간'은 용병들의 주 모임터로 귀족들은 눈길도 안주고 지나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싸구려 술집임에도 술맛은 제법이어서 둘의 단골 술집이 된 곳이었다. 그 둘은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한 그곳에 갔다. 술이 진짜 목적은 아니었지만...... 할일, 그러니까 신입 견습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술집을 향하는 둘의 모습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땅을 보며 말없이 걷던 젠의 귀에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 소동이지?" 젠가 앞을 보자 사람들이 제법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가.....볼까?" 린가 묻자 젠는 고개를 조금 저었다. "그럴 기분 아니다." 하지만 린은 그 모습에 오리혀 소동쪽으로 가봐야 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가끔은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려봐야돼!.......너나 나나....." 조금은 씁쓸히 말을 흐리는 친구를 보며 젠은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린은 씩 웃으며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몰려있긴 했지만 워낙에 체격에 키가 받쳐줘서 둘은 앞으로 나갈수있었다. 소동의 주범은 저 날렵하게 생긴 청년과 쪼금한 꼬마인 모양이었다. "무슨일이야?" 린이 옆사람을 툭툭 치며 물었다. 그 사람은 한창 재미있게 보던 와중에 옆에서 건들이자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짧게 설명했다. "소매치기." "아아." 뻔한 상황이 아닌가? 여행가인 청년을 만만히 보고 덥친 꼬마 소매치기. 그러나 잘못 걸려 낭패보는 꼬마 소매치기. 뭐 대충 스토리가 잡힌 린은 별다른 일이 아니자 이내 흥미를 잃었다. "어이, 젠. 더 있을거야?" 하며 옆을 돌아본 린은 의외로 흥미어린 눈빛으로 상황을 보는 친구를 볼수 있었다. "젠?" "재미있게 됐군." "어?" 젠은 린 쪽을 돌아보며 꼬마쪽을 손으로 가르켰다. "봐라." 꼬마쪽을 주시하던 린의 눈빛도 젠의 것과 같아졌다. "꼬마야, 사람을 잘못 골랐다. 인생선배가 이참에 네 버릇 좀 고쳐주마." 꼬마는 고개만 저을뿐 겁에 질렸는 지 입도 못 열고 있었다. 동정이 갈만도 하건만 어디에서 열을 받고 왔는 지 청년의 얼굴은 상당히 흉악해져 있었다. "훗날 이 몸을 감사히 여길것이다." 하며 날린 그의 주먹은 꼬마의 왼쪽 빰으로 향했다. ''퍽'하는 음성과 함께 꼬마의 몸의 허공을 날았고 이내 추락했다. 꼬마는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런 꼬마의 얼굴은 피로 물들져 있었다........' 라는 상황을 예상했던 주위사람들은 뜻밖의 결론에 조용해 졌다. "어쭈?" 모든 힘을 다 쏟진 않았으나 여간한 성인 남자도 막지 못하는 자신의 주먹을 간단히 한손으로 막아버린 꼬마에게 놀라며 주먹을 뺐다. 아니 빼려고 했다. "어어?!" 어떻게 한걸까? 청년은 눈깜짝할 새에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꼬마가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몸을 턴하면서 그를 매다 친거지만 그 과정을 제대로 본 이는 별로 없었다. "역시!"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꼬마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았다. '역시'라니........ 이 상황을 짐작했다는 말인가? 꼬마는 조금은 당황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며 말을 꺼낸이로 짐작되는 자를 봤다. 쉽게 그를 발견할수 있었던 것은 꼬마외에 다른이들도 의아하게 한 남자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 여짓껏 꼬마가 등을 돌리고 있던 방향에서 푸르다 못해 조금은 어두워보이는 눈동자가 장난기를 머금으며 꼬마를 보고 있었다. 꼬마가 자신을 보자 그는 씩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기사의 예법대로 공손히 인사했다. "대면은 처음이군요. 나이트, 보샨드. 쿠린서. 마. 키텐이 인사드립니다." 보통 용병들은 자신의 신분대신 속한 '단'의 이름을 댄다. 신분이라 해봐야 어차피 평민...... 오리혀 긍지있는 '단'의 이름을 대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트는 아니였다. 대부분이 귀족 출신이기때문에 신분대신 자신의 '단'을 말하지 않는다. 나이트이고 귀족인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이트라도 귀족 출신이 있는 반면 간혹이지만 평민출신도 있다. 그중 거의 모든 평민 출신의 기사들은 '단'의 이름을 쓰기 때문에 그들과 차별적인 우월감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때문에 보통 나이트면서 '단'을 붙이면 평민 출신이라고 단정 짓는 게 거의 법칙화 되어있었다. 물론 '성'이 있음으로 해서 이미 평민과의 차별을 두었지만 귀족 출신의 계급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였다. 같은 귀족이라도 신분의 차는 분명하게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같은 기사끼리는 출신과 신분의 차를 따지면서 우월감 내지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만 보통 평민들 사이에서는 기사라는 신분 자체가 이의를 갖지 못할 까마득한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높디 높은 기사가 소매치기 꼬마한테 정중히 인사하는 모습에 경악할수 밖에 없었다. "이런식으로 대면 하게 될줄이야.....유니펠스님." 답이 없자 린은 그 마스터의 '아들'이 못볼꼴을 보여 당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일만 잘만 이용한다면......그렇다면......' 그런 그의 옆에 젠이 걸어와 같이 인사했다. "체니수람. 크젠서. 마. 키텐 인사드립니다." 그들의 상관급이라 할수있는 유니펠스가 답이 없자 둘은 고개를 들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인사로 계속 숙이고 있는 것은 둘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에 곧 허리를 폈다. 그리고 꼬마, 아니 마스터의 '아들' 유니펠스를 보고 놀랐다. 여전히 침착을 가장한 냉정을 취한 상태에서 둘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둘이 자세를 가다듬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인사를 무시당한 둘은 조금은 기분이 상했었지만 그의 뜻밖의 공손한 인사에 풀어져 버렸다. 인사말은 없었지만 말이다. 청년은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덤벼들려 했었지만 '키텐'의 기사가 둘씩이나 공손히 인사하는 것을 보곤 놀라 멍하니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린은 그런 그를 챙겼다. 그가 이일을 이용하기 위해선 이 사태를 확실히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무슨일인 겁니까?" 바로 무례하다며 검을 뽑아들줄 알았던 기사가 뜻밖에 공손이 물어오자 청년은 당황해 더듬거렸다. "에.....그러니까 저 녀석....아니 저분이 내....아니 제 돈 주머니를 딴 녀석......아니 저........" 린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가 더듬거리며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젠이 결론을 지었다. "다른 소년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실질적으로 훔친건 그 소년이고 도망가다 돈을 넘겼는데 동료, 그러니까 이분이 실수로 주머니를 받다 넘어져서 걸렸다?" "아...네." 그러면서 땅에 꽂히면서 떨어뜨린 돈 주머니를 가슴에 품었다. "그렇군요. 이거 폐를 끼쳤습니다." 린이 부드럽게 사과하며 약간의 돈을 쥐어 주었고 이미 그둘의 신분에 주눅이 들었던 청년은 별말없이 물러났다. 소동이 가시자 사람들은 이내 제 갈길을 갔다. 소녀는 길게 늘어진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린과 젠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주시했다. 일단은 약점을 잡았지만 상관의 '아들'이 아닌가. ======================================================================== 소녀라고 오인받고 있는 유니펠스^^ 갑자기 이야기는 5년전으로 갑니다. 유니펠스의 성장과정이 드러나는 거지요. 완전히는 아니고 이곳에 맨처음 왔을때일만. 이런식으로 듬성듬성 지난 5년의 이야기가 조금씩 나올겁니다. 빨리 유니펠스의 이야기도 쓰고 페르노크의 이야기도 쓰고 싶네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938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7일 23:3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3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3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16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23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집에 돌아가시는 길이셨습니까?" 마스터의 '아들'인 소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장 섰다. 젠은 평소답지 않게 공손하고 기사다운 모습을 취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의아하게 보고 있었다. 그런 젠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린은 걷기 시작했다. 소녀는 내키지 않는 지 가만히 있다가 이내 따라갔다. 린은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수도의 지리가 아직은 설익으시죠?" 린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내면에 무슨 속셈이 있는 지 젠은 쉽게 짐작할수있었다. 소매치기들은 보다 효율적은 도주를 위해 지리를 꿔기전에는 거사(?)를 치르지 않는 법이었다. 때문에 이 소녀는 이미 수도의 지리를 상당수 마스터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린은 지금 기반을 다져 놓고 있는 것이다. 뜻밖에도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무대답이거나 긍정을 표할줄 알았던 린과 젠은 조금은 놀랐으나 괴이치 않았다. "그럼 잘 아시고 계신단 말씀입니까?" 소녀는 이번엔 끄떡였고 조금 앞질러 걸었다. 속도와 보폭을 넓힌 그녀는 이내 린을 따라 잡았고 그보다 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정확히 마스터의 자택이 보이는 길로 접어들었다. 린은 행동으로 답한 그녀에게 조금은 감탄하면서도 기회를 노렸다. 원래 그렇게 기회주의자가 아니였으나 지금의 그로써는 자존심따위는 접어둘만큼 시급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건 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소녀는 자택이 보이자 걸음을 멈춰서서는 그들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그 자택을 가르켰다. '길을 아니 그냥 돌아가라는 뜻이군.' 린은 조금 살벌한 웃음을 띄고는 말했다. "오늘일은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지요?" 유니펠스는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속이 꿰뚤리는 느낌에 린은 조금 아찔해졌다. 유니펠스는 아무런 답 없이 돌아서서는 곧장 걸어갔다. 그 모습을 린과 젠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역시......" 린이 속삭이듯 내밷았다. "난 예의 하곤 안맞아." 그러다 익살스런 표정으로 젠을 보았다. "뭐..... 필요에 의해선 언제든 할수 있지만." 그리고는 뒤돌아 걸었다. "가자. '머무는 공간'으로." 젠은 그런 린의 뒤를 따르면서 한번 더 뒤를 돌아 소녀를 보았다. 어떻게든 자신들과 인연을 맺을 그녀를. "아....." 젠의 음성에 돌아본 린이 물었다. "무슨일이야?" "아니. 아무것도." 하고는 그냥 걸었다. 그의 뒤에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대로를 걷는 많은 사람들중에서 흑단발의 소녀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로 끝에 그녀의 집이 있음에도...... "우리 왔다!" "여! 어서와. 운이 좋았어. 지금 좋은 술이 들어왔다고." 안면이 튼 듯 종업원이 밝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회색 머리카락에 둘과 같은 쪽빛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다. "그래? 얼른 내와." 린이 특별히 양을 주문하지 않아도 이미 그 남자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린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자신의 이마를 두손으로 감쌌다. 젠은 맞은 편에 앉아서 술을 기다렸다. "자. 술 나왔습니다!" 줄거움이 가득한 종업원의 말소리가 병과 잔을 내놓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왜들 그래?" 분위기가 전과 다르자 그가 물었다. 린은 아주 심각한 분위기로 물었다. "실은 우리 마스터가 양자를 들였는데 말야." 종업원은 둘사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린을 주시했다. "헤? 케르가 공께서?" "쉿!" 별로 숨길 일도 아니건만 린은 기밀인양 다급히 입을 막았다. "조용히 들어." 입이 막힌 종업원은 그 상태에서 고개만 끄떡였다. 다시 한번 확인한 린은 그를 놔주고는 의자를 더 끌어다 붙였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양자 이름이 유니펠스라고. 그것도 유니펠스. 라!" 확실히 이 이름은 의외였다. 케르가 공의 진짜 아들의 이름이 아닌가? 게다가 아무리 장남이 죽었다 해도 차남은 차남이다. 장남이 죽었다고 마가 라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 양자라 받아들인 것은 거의 형식. 완전히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조용히 들어! 게다가 그 '아들'이 말야." 종업원은 시덥지 않은 농담일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린은 알기 때문에. 하지만 내용이 점점 묘해 지는 것을 보곤 점차 긴장하며 들었다. "여자라고." "에엑!!!" 왠일인지 린은 그의 입을 막지 않았고 덕분에 종업원은 수월하게 경악성을 지를수 있었다. "아 미안!" "아니 별로." 린의 눈동자에는 이미 심각함은 걷어지고 여느때의 장난기가 돌았으나 종업원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종업원은 혼자 심각해 하며 물었다. "그럼 케르가 공이 미쳤다는 거야?" "글세." 이제는 완전히 갖고 노는 투로 술을 마셨으나 의외로 종업원은 둔했던 모양이다. "이를 어째....."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케르가 공이었다. 때문에 조금만 냉정해 지면 곧 알수 있는 린의 장난에 금반 걸려 들어버리는 것이다. 린으로써는 재미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여기서 의문점은 젠이 말리지 않았다는 건데....... 실은 그도 즐기고 있었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종업원의 모습을 말이다. ====================================================================== 좀 늦었지요? 뭐.... 그래봤자 하루지만은^^ 쓰다 보니 린과 젠이 좋아지는 군요^^ 요즘은 마커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르도 그리고 페르노크도 그리고.......... 다른 캐릭은 아직 못 그렸지만 언제가는 그리겠지요. 다음은 유시리안을 그릴 차례^^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939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7일 23:34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1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31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갑자기 한손으로 턱을 괴고 구경하던 젠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젠은 잽싸게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뒤를 돌아 보았다. 한 거구의 남자가 그들의 테이블을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젠은 그 남자의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겨 자신의 술자리를 지켰고 사정없이 바닥으로 내팽겨쳐진 남자는 신음성을 흘리면서도 일어났다. 하지만 의외로 젠에게 상관하지 않고 날라온(?) 장소로 달려갔다. "싸움인가?" 린은 태연히 술을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어, 그럼 안되는 데." 종업원은 빠르게 소동쪽으로 달려갔다. "오늘따라 구경 많이 하게 되는 데?" 하며 린도 다가갔고 그뒤를 젠이 따라갔다. 쉽게 짐작할수 있듯이 싸움이었다. 세 남자를 상대로 로브를 깊게 쓰고 있는 이가 싸우고 있었다. "틸!! 뭐하고 있는 거냐." 어쩔줄 몰라하며 서있는 종업원을 발견한 주인은 그를 재촉했다. "아, 네!" 틸은 당황하며 그들의 속으로 끼어들었다. "그만 두세요. 영업집이란 말입니다." 체격 좋은 틸은 이런 소동을 자주 말려 본듯했다. 타이밍 좋게 네명의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조금씩 그들을 밀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익숙해 보였다. "넌 뭐야?" 세명의 남자가 발끈하며 틸에게 달려드는 것과는 반대로 로브의 사람은 점잖게 뒤로 물러서 매무세를 정돈하후 말했다. 차분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똑같은 취급당하는 건 싫으니 물러서지요. 앞으론 상대를 가리면서 시비를 걸도록 해요. 실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오래 살지요." 하면서 자리에 앉은 그에게 세 남자는 더욱 발끈했다. "우리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는 거냐!! 네놈이 갑자기 주먹을 휘두른 거잖아!" 틸의 저지 속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파고 들었다. "제가 로브를 쓰든 말든 그 쪽이 상관할 분야가 아니지 않습니까?" 시비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수 있게 해주는 말이었다. 틸은 요령 좋게 세 납자를 밖으로 몰았다. "자자, 진정들 하세요. 자꾸 이러시면 출입 금지라구요." 그 말에 멈칫하는 걸 보니 그들은 이곳의 단골이었던 모양이다. "쳇, 두고보자." 뻔한 대사를 남기며 사라지는 그들에게 로브의 남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시 술을 홀짝이는 그의 모습이 린과 젠의 마음에 제법 들었다. 다들 흩어지는 속에서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두 남자에게 그가 눈을 돌렸다. "두분도 제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린이 별다른 반응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젠은 잠시 그를 보다가 린쪽으로 걸어갔다. 둘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던 로브의 남자가 뭔가를 발견한 듯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고 둘에게 다가가 사이에 섰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둘이 자신을 올려다 보자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두 분은 '키텐' 기사 신지요?" 린은 자신의 걸친 간소한 무구위에 새겨진 문장을 한번 내려다 본후 씩 웃으며 답했다. "그런데……?" 로브의 남자는 조금 목례를 해 보이며 말했다. "실례가 되더라도 물어보고 싶습니다만 양해를." 상대가 기사임을 안다는 걸 고려했을 때 그의 언동은 상당히 건방진쪽에 속했다. 린은 흥미가 도는 지 예의 장난기 도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마스터, 케르가 공께서 양자를 들이셨지요?" 고개를 숙인체 술잔을 조금 돌리며 듣고 있던 젠의 눈빛이 조금 예리해 졌다. 명예 높은 기사단 '키텐'의 일이 쉽게 가쉽거리가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소뮨으로 안것치곤 너무 빨리 안 것 같군." 바로 소개 받은 이가 자신들이 아닌가! 아무리 빨리 돈다고 해도 정도가 심했다. 린의 장난기 넘치는 눈동자는 여전했으나 분위기는 어딘지 틀려졌다. 말없이 있던 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로브의 남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답했다. "아, 소문으로 안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묻고……." 로브의 남자는 자신의 목쪽으로 다가온 검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어디서 들었는 지 답해주실까?" 린은 여전히 웃으며 물었다. 유혈상태를 예상하며 당황해 하던 주위의 용병들은 린의 분위기에 장난이군, 하며 다시 자신들의 관심분야로 돌아갔다. 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굳이 들은 출처를 따지자면 케르가공께 들었다고 해야 겠군요." "뭐?" '키텐'에 잠입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럼 질문해도 될까요? 아……유니펠스군의 인상은 어떻던가요?" "뭐?" 뜻밖의 질문에 검을 내려 놓으며 린은 조금 어벙하게 반문했다. 로브의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케르가공의 양자인 유니펠스군의 첫인상이 어떻가 묻고 있는 겁니다." 가만히 있던 젠이 그를 올려보았다. "그건 왜 묻지?" 젠의 나직한 못소리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필요해서입니다. 어떻습니까?" 유니펠스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별로 내키지 않아한다. 자신은 그들을 모르건만 그들은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그것이 싫은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키지 않는 것이지 무섭다는 건 아니였다. 때문에 아버지의 제안을 흔쾌히까지는 아니여도 선선히 받아들일수 있었다. 자신을 친자식으로 생각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거절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어머니를 위한 꼭두각시로 생각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때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유니펠스는 아버지 밑에 있는 많은 기사들 앞에 섰다. 허리를 숙이고 들어 올릴 때 그는 기사들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알아낼수 있었다. -마스터가 미쳤나?- -마스터가 이상해 졌다.- -양자라니?- -여자애가 아닌가!- -이름은 왜?- -마스터가 미쳤다.- -마스터가…….- -미쳤다.- 티안나게 이를 물며 그들의 치욕스런 시선을 견뎌냈다. 자신을 여자라 생각하는 그들의 안목을 욕하며 견뎌냈다. 누군가 보내는 묘한 추파도 견뎌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끝났을 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얼마간은 피곤해 질거란 생각이 들었댜. "마스터, 이번 안건은……." 아버지가 단을 떠나 있던 공백동안 일이 상당히 쌓였던 모양이다. 그는 아버지가 불러준다는 마차를 마다하고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길을 알겠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고개를 끄떡여 보이며 그는 자신의 왼족 귓가를 가리고 있는 천을 들어보였다. 그는 '평범한' 또래의 소년이 아닌 것이다. 여간한 여행가도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많은 길을 떠돈 그인 것이다. 납득한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그는 '키텐'을 나섰다. 나오는 동안에도 그를 묘한 시선으로 보는 이가 있었다. 무시했지만 기분은 나빴다. 못들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유니펠스의 청력은 보통을 상회했다. "제법 귀여운데……. 쿡쿡." 돌아볼까 생각했지만 이미 그의 얼굴은 알고 있었기에 불필요한 행동이라 판단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제법 많은 수를 들렀던 '자이젠'이다. 이미 왠만한 뒷길도 꿰고 있는 유니펠스에게 유면한 '키텐'의 마스터, 케르가의 본가는 손쉽게 찾아갈수 있는 곳이었다. 어느새 접어든 시장의 소란스러움이 기분좋게 다가왔다. 서로 관심없이 지나가는 사람 속에서 유니펠스는 편안한 기분을 취할수 있었다. 특별히 짐을 들고 다니지도 않지만 어린 그의 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는 없었다. 때문에 유니펠스는 자신이 성인이 되는 날까지 자신이 소매치기와 인연을 못맺으리라 생각했었다. "죄송합니다." 때문에 갑자기 자신에게 부딪혀 온 소년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때문에……. "잡았다! 이 망할 꼬마놈!!" 자신의 멱살을 잡고는 너무나 기뻐하는 청년을 어이없이 볼 수밖에 없었다. "아직 경험이 미숙한 모양이군. 주머니를 노치다니." 그 말엔 유니펠스도 찬성이었다. 겨우 챈 주머니를 고작 넘어졌다고 노치다니……. 하지만 다시 줍는다고 얼쩡거리다간 필시 잡혔을 것이니, 순순히 물러선 그 판단력은 괜찮다고 평해 줄수 있었다. 하지만……. "그 꼬마녀석도 안됐군. 얼빵한 동료 때문에 겨우 훔친물건도 노치고 말이지." 이 말엔 찬성할수 없었다. 이 얼빵한 청년이 고작 유추해낸 것이라곤 이런 삼류틱한 스토리인가. 유니펠스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일을 넘어갈것인가, 궁리하는 모습을 청년은 어떻게 판단했는지 잡은 멱살은 더욱 세게 쥐었다. "도망갈 궁리하지마라." 호흡이 조금 곤란해 지자 유니펠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의 손을 가볍게 쳐내고는 옷을 가다듬는 꼬마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는지 청년이 말했다. "꼬마야, 사람을 잘못 골랐다. 인생선배가 이참에 네 버릇 좀 고쳐주마." 유니펠스는 빈약한 자신의 상상력에 무한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는 청년의 한심함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의 한심스러워하는 표정만큼은 제대로 읽었는 지 청년은 이내 주먹을 휘둘렀다. 옵션으로 이런 말까지 주절거리며. "훗날 이 몸을 감사히 여길것이다." 맞아주는 취미가 없었던 지라 유니펠스는 다가오는 주먹을 막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곱게 막기만하는 취미도 없었기에 망설임없이 그를 바닥과의 해후를 시킬수 있었다. '이 녀석에게 인생공부 좀 시켜줘야겠군.' 깊은 내면에서 화풀이거리를 찾았다 기뻐하는 것을 덮으며 주먹을 쥔 순간, "역시!" 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장난기가 가득 배인 목소리. 하지만 생소한 목소리였다. ========================================================================= 어제는 못 올렸습니다. 죄송^^ 필을 이렇게 저렇게 그려봤는데 별로 이미지가 팍! 떠오르지 않아 일단은 접었습니다. 린과 젠을 먼저 그릴까, 아트힌을 그릴까......고민중^^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합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956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8일 18:15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1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06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유니펠스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이라 추정되는 한 남자를 보았다. 주위에서도 의아한 시선을 그에게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 유니펠스가 싫어하는 상황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는 나를 안다. 왠지 한수 지고 들어가는 느낌. 미미하지만 불쾌감을 품은 유니펠스의 앞에 그가 걸어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대면은 처음이군요. 나이트, 보샨드. 쿠린서. 마. 키텐이 인사드립니다." 유니펠스는 가벼워 보이는 남자를 한번 훑어 보았다.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용병인 남자였으나 그의 소개에 따르자면 그는 '키텐' 나이트다. 결국 찾고자 했던 문양을 무구에서 찾아낸 유니펠스는 그가 진짜 '키텐' 나이트임을 확인했다. '일이 귀찮게 됐군.' 이제부터 인생에 대해 학습시키려 했던 계획도 무산이 됐고 자짓하면 손버릇 나쁜 아이로 찍히게 생겨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성질대로 행동하기엔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이 앞섰다. "이런식으로 대면 하게 될줄이야.....유니펠스님." '나야말로다.' 가볍게 느껴지던 남자의 눈빛이 일순 깊고 어둡게 보였다. 유니펠스가 그의 눈빛에 주의하고 있을 때 다른 남자가 다가왔다. "체니수람. 크젠서. 마. 키텐 인사드립니다." 마찬가지로 정중히 인사하는 그의 모습은 처음 남자와는 다르게 진중해 보였다. 비슷한 생김에 비슷한 차림임에도 확연히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어떻게 답해줄 형편도 아니였고 된다해도 답할 상황이 아니였다. 이 둘이 융통성 없는 기사라면 분명 이 자세 그대로 있을 것이니 그로써는 어떻게 해야할지 조금은 고심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비웃듯 둘은 알아서 일어났고 때문에 더 이상의 고민없이 마주 인사를 할수 있었다. 조금은 불쾌해 보였던 둘은 당황한 듯 했다. 그러다 처음에 인사했던 쿠린서라는 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니펠스한테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봉변에서 벗어났는 지 평생 모를 청년에게. "무슨일인 겁니까?" 유니펠스는 자신이 아니라 그 청년에게 상황을 묻는 저의가 무엇인지 짐작할수 있었다. '이 남자도 그 같잖은 스토리를 믿어 버리는 건가…….' 한심하단 시선을 보냈지만 쿠린서란 남자는 흥미진진하단 눈빛으로 청년의 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나마 진중해 보였던 크젠서라는 남자가 결론을 봄으로써 유니펠스의 실망을 샀다. "다른 소년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실질적으로 훔친건 그 소년이고 도망가다 돈을 넘겼는데 동료, 그러니까 이분이 실수로 주머니를 받다 넘어져서 걸렸다?" 참고 있었던 한숨이 터졌다. '끼리끼리 노는군.' 그가 한탄하고 있는 새에 일은 마무리 된 모양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묻지 않고. 유니펠스는 청년을 내 던지는 바람에 흩뜨러진 머리를 쓰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이런 뭣같은 경우가 있나…….' 한스런 심정으로 그의 에스코트를 얼떨결에 받아들여 버렸다. 실제론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 아니였는 데 말이다. 쿠린서란 이가 이것저것 물어왔다. 귀찮은 마음에 답하고 생각해 보니 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 '돈이라면 넘쳐날 만큼 있단 말이다, 빌어먹을.' 소매치기라는 오명을 어떻게 풀어야 될지 막막했다. 솔직히 남들이 자신을 어찌 생각하든 하등 상관 없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지 않는 가? 명예따윈 상관없지만 '부모님'의 명예는 지켜드리고 싶었다. 하지만……그에겐 변명할 수단이 없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지요?" 말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불쾌해 졌다. 그래서 뚫어져라 보았다. 대개 찔리는 자들은 이런 식으로 보면 캥겨하니까. 역시나 이 남자도 였다. 그런데…… 착각일까? 쿠린서의 뒤에 서있는 크젠서라는 남자의 얼굴이 왠지 슬퍼 보였다. 조금만 더 그 얼굴을 본다면 원인 모를 슬픔에 빠져들 것 같아 변명도 하지 않고 그냥 뒤돌아 버렸다. 소매치기따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말할 기회는 유니펠스를 떠나 버렸다. '할수 없지……. 계속 찜찜하면 입을 막으면 되고. 일단 볼일부터 보러 갈까.' 다행히 원래 목적지에서 완전히 겉돌진 않았다. 샛길로 빠지면서 다르지만 같은 두 기사를 떠올려 봤다. ======================================================================== 이미지는 잡히는 데 그대로 그려지지가 않는 이 심정.......참담합니다. 몇번을 망쳐야 이거다! 싶은 그림이 나올지....... 전에 한번 봤던 크루세이더를 빌려 보았습니다. 몇번이고 계속 보면서 쏠쏠한 재미를 느끼고 있지요. 사고싶슴다.....돈만 된다면^^;;;;;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957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8일 18:16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2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06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유니펠스는 걷고 있던 샛길보다 더 비좁은 길에 접어들었다. 두어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에는 악취가 진동을 했다. 곳곳에 묻어있는 오물들이 행인들의 발길을 끊게 만드는 골목길에 발을 들여 놓으며 후드를 썼다. 빠르게 걷는 유니펠스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꺽고 꺽고 꺽고……. 얼마나 걸었을까, 유니펠스가 멈취선 곳은 허름한 집이었다. 떨어질 듯 문 위에 매달려 있는 간판에는 간신히 알아볼 희미한 글씨로 '여관'이라 적혀 있었다. 유니펠스는 문을 여는 대신 그 앞에 서서 손을 들어보였다. 영문모를 행동이었지만 반응하는 이는 있었다. 검은 옷차림을 한 장신의 복면인이 그의 뒤에 나타났다. 무릎을 꿇는 그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은 유니펠스는 자신의 왼손을 왼쪽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나서 복면인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분명 빈손이었던 그의 손에는 복면인의 체구에 맞는 로브가 들려있었다. 복면인은 고개를 한번 깊히 숙인 뒤 일어나 로브를 걸쳤다. 후드까지 쓴 모습을 확인한 후 유니펠스는 형식만 갖춘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거기엔 싸구려 문고리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런 문양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유니펠스가 천을 들여 보였을 때 보였던 귀걸이에 새겨져 있는 문양의 밑부분과 같았다. 유니펠스와 복면인이 들어선 곳은 분명 '여관'이었으나 흔히 보이는 풍경은 없었다. 점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인정도는 있어야 되건만……. 또한 테이블도 계산대도 없는 모습은…… 폐허를 방불케 했다. 유니펠스는 복면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복면인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 손을 잡았고, 그것의 이끌림에 따라 걸어나갔다. 은밀히 내장 되어있던 마법진이 발동했다. 매계체는 유니펠스가 가진 귀걸이. 복면인은 순간 바뀐 풍경에 조금 당황해 했으나 자신을 계속 이끄는 손길을 느끼고 냉정을 되찾았다. 상위 귀족의 집무실처럼 보이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발코디로 보이는 싱그러운 수풀들은 계절감을 상실케했고 잔뜩 꽃힌 책들은 여간한 귀족들의 서재를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구석에 놓인 작은 책상은 복잡한 종이투성이었고 편안해 보이는 쇼파는 이미 한 사람에게 의해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이블까지 덮고선 곤히 잠든 사람은 체격으로 보나 골격으로 보나 남자였고 이끌림에 의해 다가가 본 얼굴 또한 남자였다. 유니펠스는 복면인의 손을 놓고 자고 있는 남자의 이블을 걷어냈다. 강도가 약했는지 아무련 반응없이 남자는 자고 있었다. 피곤에 절은 듯 보이는 남자는 제법 나이를 먹은 듯 보였고 흰머리도 상당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니펠스는 그의 어깨를 흔들다 결국은 그를 밀어 소파에서 떨어뜨려 버렸다. "뭐, 뭐야!?" 남자는 놀라 눈을 떴고 유니펠스를 발견했다. 반가운 듯 웃어보이는 그를 보는 유니펠스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오랫만에 보는데……. 여전하군."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쇼파에 몸을 묻었다. 편안히 몸을 뻗으며 그는 물었다. "용건이 뭐지, 아르?" 유니펠스, 아니 아르는 주홍빛 눈동자를 싸늘히 빛내며 맞은편 쇼파에 앉았다. 그 뒤로 복면인, 아니 아트힌이 섰다. 아르는 테이블 위에 흐트러져 있는 종이중 아무거나 집어들었다. 펜이 없음을 발견한 아르는 또 왼손을 들어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내린 왼손엔 '묵'이 들려 있었다. -잠적한다.- 남자는 잠시 아르의 눈을 마주보다가 말했다.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 아르는 고개를 끄떡였고 남자는 미간을 주물렀다. "얼마나?" 아르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가?" 끄떡이는 모습을 확인한 후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터운 책속에서 초라해 보이는 작은 책자를 꺼낸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묵'을 꺼내 뭐라 적었다. "수입이 상당수 줄겠군." 다시 책자를 원래 자리에 꽂아 놓은 남자는 아르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잠적은 마음대로지만 계약은 지켜야지." 아르는 준비해 두었던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남자는 그것을 열어 안을 확인하다가 피식 웃었다. "왜 이러나, 아르." 아르가 의아해 할 새도 없이 남자는 테이블에 내용물을 쏟아 버렸다. 금화 하나에 은화 열닢, 그 밖에 동전들을 확인한 아르의 눈망울이 커졌다. -다시오지.- 아르는 주머니에 그것을 대충 쓸어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인데 빨리 해결하고 오라고." 아르는 주머니를 품에 넣으며 아트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트힌이 그손을 맞 잡자 곧 마법진이 발동을 하더니 아까의 같잖은 여관이 나타났다. "아까 그 소매치기 짓인 모양입니다." 아르는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시장으로 한번 더 가 보시겠습니까?" 다시 끄떡이며 아르는 앞장서 걸었다. 문을 나서자 아트힌은 어느샌가 사라졌고 아르는 거친 발걸음으로 아까 그장소로 향했다.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경험이 없어서다. 단순한 사고인가……? 아니면…….' ======================================================================= 졸.......렵.........다. 요즘은 서치아이에 빠져 있습니다. 눈이 넘 피곤한 나날이지요. 기다리신 분껜 죄송한 삼일이었습니다. 여유분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원래 있지도 않았지낭...;;;;; 여유분을 어느정도 만들어 놓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리....... 요번엔 아직 안나온 캐릭을 그려 봤습니다. 넘 멋져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958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8일 18:16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3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02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아르가 지녔던 주머니에는 그간 그가 의뢰받은 '후카'들이 있었다. 일급 몬스터 헌터인 아르가 의뢰 받은 '후카'는 왠만한 귀족도 엄두 못내는 고가의 물건인, 온전한 '락팔어'가 두 개나 있었고 '그릭'이 네 개가 들어있었다. 분명 아까 소매치기가 놓치고 간 주머니보다 고가이긴 하지만 무게는 월등히 적었다. '프로의 감일까?' 아르는 아까의 사건을 다시 꼼꼼히 되집어봤다. 아무리 잡히기 일보직전이었다 곤해도 애써 훔친 주머니를 미련없이 버리고 갔던 소년의 모습이 아까와는 다르게 판단 되었다. 별다른 짐 없는 어린아이인 아르인지라 소매치기와는 여짓껏 인연이 없었다. 때문에 이와 같은일을 당해 버린 것이다. 직업적 본능에 충실한 소매치기소년에게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 그가 당할 일에 애도를 표하도록 하자. '세상사는 왠만큼 다 겪은 줄 알았는데……. 요즘 일들을 보면 아직 멀었나보군.' 이제는 날다시피 뛰며 골목을 빠져 나가는 그였다. "에게……. 이게 뭐야." 좁다른 골목길에 몸을 집어 넣은 채 주머니 속의 내용물을 손에 떨어 놓았던 리카는 작게 혀를 찼다. "확실히 예뻐 보이긴 하지만……." 빛만 아니라면 있는 지도 모를 투명한 유리, 두 개. 깨알만한 루비가 네 개. "괜히 바뀌치기했나……? 하지만 왠지 감이 팍 왔었단 말야……." 다시 원래 있었던 주머니에다 집어넣고 품에 넣었다. "이정도로는 두목에게 보고도 못하잖아." 그는 다시 거리로 나갔다. "할수 없지. 맞기 싫으면 한탕 더 뛰는 수 밖에." 원래는 돈만 챙기고 주머니, 즉 꼬리 밟힐만한 건덕지는 버려야 하지만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조각에 섞이고 나면 찾기 힘들 것 같은 깨알만한 루비조각을 다른 동전들과 함께 담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별수 없었다. 유리조각따위 가지고 있어봤자 짐만 되지만 혹시 수정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버릴순 없었다. "뭐, 수정이 아니더라도 이쁘니까." 헛탕을 친 그의 얼굴은 상당히 맥 빠져 보였으나 몸놀림은 경쾌했다. 소매치기를 한다는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상대가 일단 뜨내기여야 했고 돈도 어느정도 있어보여야 했다. 하지만 배터랑 여행자나 모험가라면 자신을 지킬 무술이나 노하우 정도는 있기마련이므로 갓 시작한 녀석을 선발해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소매치기는 안목이 낮아 잘 걸린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틀린 관념이다. 여행자나 모험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은 자신의 주머니가 털렸다는 데 수치를 느낀다. 즉 남들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로써는 자신의 명예로운 선택의 길의 시초를 소매치기따위에게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헌데 왜 모두 소매치기의 안목을 그리 판단하는냐? 당연하거다. 소매치기를 당당히 잡을 수 있는 자가 뭐가 아쉬워서 쉬쉬하겠는가? 큰소리로 호들갑 떨며 자신은 이런 녀석들에게 당하지 않는다 은연중에 자랑하지. "리카, 오늘 소득은 어때? 듣자하니 아까 한탕했다는데?" 리카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멈춰 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주 다정하게 말했다. "베풀며 살자고, 응?" 척보기에도 커다란 손이 좁은 리카의 어깨를 천천히 짓눌렀다. 리카의 가냘픈 몸이 눈으로 보기에도 가여울정도로 떨어대고 있었다. "주,주,주머니를 놓쳐서 헛,헛,헛탕 쳤,쳤어요." "저~런~." 어깨에서 손이 떨어지자 리카는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퍽.- "아악!!" 시장 한 복판은 아니여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다닌는 길가였다. 그들은 이내 모여들며 관심을 보였다.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벽에 쳐박힌 리카는 아픈 등을 감싸지도 못하고 잔뜩 구부린체 부르르 떨었다. "정,정,정말입니,니다." "왜 이러실까? 뒤지면 곧 알게 되는 데……." 아주 거구는 아니였으나 힘 꽤나 쓰게 생긴 남자는 자신을 보며 숙덕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글쎄 이 꼬마가 제 지갑을 훔쳤지 뭡니까, 여러분." 이내 주변에선 납득하고 리카를 욕해댔다. 그런 분위기에서 남자는 당당하게 리카에게 다가가 몸을 뒤졌다. "어라? 주머니가 두 개……?" 리카는 원래 자신의 주머니를 애타게 보았다. 그 시선에 남자는 씩 웃으며 그것을 챙겼다. "이건 든 것도 없는 것 같군, 선물이다." 하며 무게감이 거의 없는 주머니를 미련 없이 리카의 품에 넣었다. "아……!" 리카의 눈엔 이내 눈물이 고였다. 리카는 가난했다. 흔한 관념으로써의 가난이 아니였다. 그는 고아였고 어릴 때부터 두목이라 불리는 흉폭한 사내의 밑에서 컸다. 소득없이 그가 두목한테 간다면 지금 맞은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구타당할 것이다. 게다가 방금 남자가 자신을 완전히 몰아세우고 갔기 때문에 얼마간은 시장바닥에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망각의 존재인 사람도 얼마간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테니 말이다. 벌써부터 두목의 주먹이 몸에 닿는 듯 했다. 힘들게 몸을 일으키며 일단 자리를 피해야 겠다, 생각한 리카의 앞에 누군가 섰다. "……?" 하늘색 웃옷에 검은 바지를 입은 꼬마였다. 꼬마의 허리에는 필히 장식용일 단검 두 개가 메달려 있었다. 또래 치기 어린 꼬마들 앞에선 상당히 위협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그였으나 리카의 눈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긴 앞머리가 어느새 불기 시작한 바람에 흩뜨러지자 꼬마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주머니는 저 사람에게 넘어 간건가?' 꼬마가 자신을 다시 쳐다보자 리카는 약간 웃어보이며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단정한 꼬마와 비교되는 자신의 허름한 옷차림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꼬마는 리카를 잠시 쳐다보다 남자의 뒤를 쫓았다. "앗, 꼬마야!" 남자의 잔혹성을 알고 있기에 꼬마가 걱정됐다. 하지만 꼬마는 필시 자신을 악으로, 남자를 정의로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남자가 설정하고 연출한 장면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말해도……믿지 않겠지만……." 리카는 입술을 잠시 물었다가 꼬마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 조회수 좀 많아졌음 좋겠다......ㅠ.ㅠ 그림도 잘 그려졌음 좋겠다......ㅠ.ㅠ 머니도 좀 생겼으면 좋겠다......ㅠ.ㅠ 하지만 가장 원하는 건 멜한통........^^;;;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7959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8일 18:16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11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어?" 평소보다 빨리 나온 젠과 린이 향한 곳은 의외로 '단'이었다. 둘의 뒤로 척보기엔 성별구분이 불가능한 후드를 깊게 쓴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듣기 힘든 젠의 탄성(?)에 린이 관심을 보였다. "왜 그래?" "저기." 젠이 가르킨 곳을 보자마자 누군가 날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플……라이는 아닌 것 같지?" "아닙니다. 마나의 응용이 없었어요." 목소리로 분간하건데 남자인 로브의 사람이 답했다. 내용으로 듣기엔 또라이가 아닌가……싶은 말을 하는 그였지만 어조에 장난기가 배였있었기에 오해 없이 농담이라 판단할수 있었다. 곧 이어 린의 시선이 '가해자'로 짐작되는 이를 찾아 해맸다. 그런 그에게 친절히 가르쳐 주는 젠이었다. "유니펠스님?" "아아." 둘의 말에 로브의 남자의 고개가 번쩍 들어졌다. 그는 여짓껏 '가해자'엔 관심을 두지 않고 '피해자'인 남자한테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군?!" 리카는 경악에 몸이 굳었다. 빠르게 겄는 남자와 그를 빠르게 쫓는 꼬마의 뒤를 쫓는라 숨이 찼었음에도 그는 한동안 숨을 멈췄다. 그에게 있었서는 절대자로 느껴졌던 남자의 최후가 그를 너무나 황당하고 경의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꼬마를 말리려 따라나섰으나 그러지 못했다. 말로서 말리면 남자까지 알아차릴 것이고 쫓아가 말리자니 저 놈의 꼬마 녀석의 발이 여간 빠른 것이 아니였다. 인적이 뜸해지자 꼬마녀석이 더 빨리 움직였다.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꼬마가 어느정도 남자와 거리를 유지한체 걷고 있어기 때문에 여짓껏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리카 자신은 너무 멀리 있었으니 몰랐을 테고. "무슨 일이냐, 꼬마?" 의외로 남자는 상냥하게 물었다. 하지만 리카는 알수 있었다. 그는 이미 두목에게 귀뜸 받은 것이다. 남자가 노예상의 수족이라는 것을……. 얼핏 봤을 때도 꼬마는 예쁘장했고 때마침 주위엔 사람이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안타까워했지만 리카는 자신이 표적이 되지 않게 몸을 숨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꼬마가 남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의미 인지 모르겠구나." 하면서도 남자는 꼬마의 손을 맞잡고 묘하게 쓸어내렸다. 꼬마의 얼굴이 어떤지는 알수 없어으나 겁먹고 있을 것은 분명 했다. 꼬마가 손을 뿌리치는 것이 보였다. 남자가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헌데 남자의 얼굴이 왠지 당황하는 듯 보였다. 꼬마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구걸하는 거면 좀더 공손하게 하는 법을 배워야 겠구나."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음성은 조금 흔들리는 게 화가 난 듯 했다. 꼬마가 한숨을 쉬는 것이 리카가 있는 곳에서도 보였다. ……그 다음에 리카가 볼수 있었던 것은 날라가는 남자였다. 그리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꼬마와……. 리카가 있는 곳에선 꼬마의 붉은 팔찌는 보였으나 그것이 작게 진동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르군?!" 꼬마는 골목길 끝편에 서있는 세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교롭게도 꼬마를 아는 이가 지나가다 본 모양이었다. 꼬마, 아니 아르는 간단히 목례를 해 보였다. 그리고 기절한 남자에게 다가가 몸을 뒤졌다. '아, 저건!' "내 주머니다!" 핫, 입을 막았지만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완전히 얼어서 서있던 리카는 이내 인간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인 호기심이 돌았다. 침을 한번 삼키고 코너쪽으로 고개를 조금 빼낸 리카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의 바로 눈 앞에 서있는 꼬마였다. "힉!!" 뒤로 넘어진 리카에게 아르는 손을 내밀었다. 이미 꼬마가 원하는 바를 알아차린 리카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그건 내주머니야! 나도 빼긴 거라고! 그러니까 난 지금 돈이……." 얼굴을 감싼 리카의 손을 잡아 당긴 차가운 손이 있었다. 리카는 잔뜩 겁 먹고 눈을 감고 있다가 이내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눈을 떴다. "어?" 그의 눈엔 자신의 손에 들어온 낮익은 주머니가 들어왔다. "혹시……?" '이걸 되 찾아 줄려고?' 감동한 얼굴이 된 리카의 눈앞에 아르는 손을 내밀었다. "다시 달라는 거야?" 리카는 주눅이 든체 물었고 아르의 눈은 의아함으로 커졌다. 그 모습에 자신의 말이 틀렸음을 알고 안도했다. 하지만 거두지 않는 손에 부담감을 느꼈야 했다. "뭘 달라는 거야?" 아르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르키고 나서 리카의 손에 쥐여 있는 주머니를 가르켰다. "니 주머니?" 놀랍게도 바로 알아들은 리카에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 아르의 뒤에 후드를 깊히 눌러쓴 사람이 다가왔다. 리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생각난 듯 품안에서 평범한 주머니를 꺼냈다. "이거?" 아르가 고개를 끄떡이자 리카는 미련 없이 그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혹시 아까……?" 다시 끄떡이는 아르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으나 무섭게 느껴지는 리카였다. "저……미……안." 아르는 주머니를 열어 들여보고 확인을 하더니 품에 넣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될까요, 아르군?" 로브의 사람에게서 그 음침해 보이는 모습과는 상관없이 장난기가 가득 베인 목소리가 새나왔다. 아르의 무표정에 희미하지만 분명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오래만입니다……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요?" 아르는 고개를 끄떡였고 남자는 웃었다. 남자가 몸을 조금 트자 그에게 가려졌던 두 남자가 아르의 시야에 들어왔다. 한명은 기절한 남자를 툭툭 쳐보고 있었고 한명은 그런 그를 보고 있었다. "전 저분들과 '키텐' 기사단에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로브의 남자는 둘을 손으로 가르키며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르군은……?" 그의 호칭에 조금 인상을 써보였다. 처음에는 반가움에 넘어갔었으나 잘못된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르의 조금 굳어진 얼굴에 로브의 남자는 잠시 웃더니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실례를 범했습니다, 유니펠스군." 목소리로 짐작했듯이 젊은 남자였다. 장난기가 가득 담긴 초록색 눈동자만 뺀다면 전체적으로 지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호리호리한 몸매는 그가 학자일 것이다 확신을 주었는데 리카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직접 겨룬 아르는 말할 필요도 없고 린과 젠은 아까 주점에서 그의 활약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르, 아니 유니펠스는 어느새 '묵' 이라는 고급 마법펜을 들고 또 어느샌가 나타난 종이에다 뭔가를 끄적거렸다. 그리고 남자에게 건네주었는데 그것을 본 남자는 한참을 웃어젓혔다. -부관이 또 이를 갈고 있겠군요, 투만- =======================================================================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제 생애에서 두번째로 우울한 생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글을 쓰면 다 샌티멘탈한 분위기가 나올것 같군요. 여유분도 다 바닥이 났고 ....... 언젠가는 연참을 하리라 마음만 먹을뿐 현실은 냉혹하기만 합니다.ㅠ.ㅠ 여기에 그림을 올리는 방법이 있을까요? 알면 멜이나 아무거나로 가르쳐 주십시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com
번  호 : 17999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9일 23:40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6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12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쳇, 강도질도 하나……?" "말을 삼가해라, 린" "알았어." 저쪽에서 로브의 남자, 투만과 마스터의 아들 유니펠스, 그리고 처음보는 꼬마 하나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젊군. 마스터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안내는 하지만……." "수상한건 수상하다 이 말인가?" "이름도 안밝히는 녀석을 누가 신용할성 싶어?" "그런가……." "뭐야, 젠은 안그래?" 젠은 기절한 남자를 발로 밀어 제대로 눕히는 친절(?)을 베푼 뒤, "저 남자 얼굴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남자의 옆구리를 적당한 강도로 차며, "투만. 마. 곤크…… 혹, 투만. 장. 곤크." " '장' 이라면……마스터?" "아." "젠이 그 사람 얼굴을 어떻게 알아?" "우연히 봤다." "그래……?" 건성으로 답한 린은 신음성과 함께 깨어난 남자를 봤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장정 둘에 놀란 듯 했다. "어떻게 할까? 심문할까?" "글쎄." 꿀리는 게 많았던 남자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고 그 모습에 쿡 웃으며 린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와있는 유니펠스와 투만을 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유니펠스님?" 아까와는 다르게 자신의 의중을 묻는 모습에서 잠시 의아함을 가진 유니펠스였으나 별로 따지지는 않았다. 소매치기 소년에게서 의아한 점에 대한 해답을 얻어낸 유니펠스는 굳이 이 남자를 벌해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약육강식의 세상이 아닌가. 소년이 힘이 없어서 당한 것 뿐이다. 남자를 보내주고 나서 유니펠스는 '키텐'으로 가겠다는 투만과 동행하기로 했다. 때문에 더 이상 안내가 필요 없어졌음에도 린과 젠은 둘의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 그 소년도 참 재미있습니다." 유니펠스는 그 말에 어벙하면서도 나름대로 양심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소매치기 녀석을 떠올렸다. 오늘 유니펠스가 겪었던 일을 한번도 되집어 보면 이상한 점이 떠올려 질것이다. 떨어뜨린 주머니 때문에 소매치기 일행이라고 오해를 받았던 유니펠스의 품안에 놓여져 있었던 주머니. 빈곤한 평민은 들고 다닐 생각도 못할 어느 정도는 거금인 돈이 있었던 그 주머니는 무엇이란 말이가? 소년을 찾아 헤매면서도 유니펠스는 그것이 의문이었다. 투만과 인사를 나누고 물어본 유니펠스에게 돌아온 답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 사람꺼 훔치고 뛰는 데 네 개 웬지 끌리더라고 그래서 글루 갔지. 바뀌치기는 그 전에 훔첬던 상인 껄로 바꿨고 떨어뜨린건 순전히 실수로……. 그 상인은 주머니 차체가 고급품이라서 버리지 않았거든." "두번째 훔친……그러니까 떨어뜨린 주머니로 바꾸지 않은 이유가 뭐죠? 상인 쪽 주머니가 더 두둑했을 텐데?" "그건…… 저애꺼 냄새가 상당했거든요. 그래서 일종의 대가로 많은 걸 ……." 스스로는 나름대로 값을 치뤘다고 생각하고 있는 소년을 잠시 접어두고 유니펠스가 돌려 받은 주머니 내용물을 살펴보던 투만은 크게 웃었다. 금화 두 개도 안되는 값을 치루고 이 소년은 황족 보다도 호화로운 생활을 평생 누릴뻔한 것이다. 이 사실은 모르는 편이 이 소년에게는 득이 되겠지, 생각하며 투만은 잣아들고 있었던 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그런 그를 어리벙벙한 얼굴로 쳐다보는 소년에게 유니펠스는 무엇인가를 넘겼다. "어? 이건……!" 놀라는 소년을 뒤로하고 유니펠스는 낯익은 두 기사쪽으로 걸어갔다. 투만은 소년에게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물었다. "그 건 뭐지요?" "바꿔치기한 주머니예요." 감동한 얼굴로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소년을 보며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고 유니펠스의 뒤를 따랐다. "모르는 게 약이지요, 쿡쿡." 유니펠스는 원래 주머니를 손에 넣자마자 몬스터 헌터 본거지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지기를 만난 이상 예정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대가입니까? 의뢰물입니까?" 유니펠스는 두 번째에서 고개를 끄떡였고 투만은 또 물었다. "대가는 필요 없는 겁니까?" 다시 끄떡이는 유니펠스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두 기사를 고려해서 뒤로 밀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평생에 몬스터 헌터를 보기란 평민이 황족을 보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일급 몬스터 헌터를 보는 것은 유희중인 드래곤을 보는 것보다 드문일이고 말이다. 때문에 몬스터 헌터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비밀스런 존재였고 학식이 깊은 투만으로써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묻고 싶은 것 투성인 것이다. "어머님은 여전하시고요?" 유니펠스의 얼굴에 미소가 스치는 것을 투만은 놓치지 않았다. 유니펠스는 손을 내밀어 한 건물을 가르켰다. "저곳이군요." 투만을 안내하고 유니펠스는 빠져 나왔다. 투만이 볼일을 보고 오라고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버지 또한 유니펠스의 '본업'을 알고 있었기에 꺼릴것이 없었다. 투만이 몇일 '케르가'가의 본가에서 머물다 갈거라는 말을 들은 유니펠스는 상당히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다시 오셨군요, 유니펠스님." 상냥한 음성이지만 거북했다. 아니 상냥했기에 거북했다. 이유 없는 친절은 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온 유니펠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의 남자는, '처음부터 추파를 보내던 녀석이군.' 갈색의 부드러운 머리결을 지닌 그는 정중히 인사를 하면서 많은 여자를 홀렸을 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키텐' 나이트 이샤드. 캠. 마. 스타민이라 합니다." 그의 어두운 갈색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으나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임으로써 인사를 나름대로 정중히 받았다. 캠은 유니펠스의 인사법을 보며 표현이 불가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일어나 유니펠스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유니펠스는 더 상대할 의무가 없는지라 바로 몸을 돌려 갈길을 갔지만 캠의 시선은 계속 그를 따랐다. 시선뿐이라면 상관 안하겠지만 슬며시 따라 나서는 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뒤를 돌아본다고 해도 멀찍이 따라오는 이에게 뭐라 시비걸수도 없고 따돌리자니 뒷수습이 상당히 귀찮고…… 생각해 보라 고작 13살짜리 꼬마가 기사를 따돌릴수 있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인가? '여기서 따돌리면 완전히 소매치기로 찍히게 되겠지.' 유니펠스는 일부로 저택쪽으로 향하면서 지름길인 외진 골목길로 들어갔다. '뭔가 속셈이 있다면 따라오겠지.' 천천히 걷는 유니펠스의 등뒤로 캠이라 추정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유니펠스님." 좀 놀란 듯 자신을 돌아보는 꼬마 레이디가 귀여웠지만 일단은 자제해야 했다. "이렇게 외진길은 위험합니다." '너같은 녀석 때문에 위험한거야.' 어물쩡 자신과 동행을 하려 하는 캠 때문에 속을 썩이면서도 표는 안내고 묵묵히 걸었다. 캠은 자신을 무시한 체 계속 가던 길을 가는 모습이 더 귀엽게 느껴졌다. "달콤한 열매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드시겠습니까?" 깨끗한 주머니에서 단단한 껍질에 싸인 노란색 열매를 꺼내든 그의 모습은 어린아이를 귀여워하는 순수한 중년의 남성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수면의 열매……잖아.' ====================================================================== 드디어 변X의 마수가 유니펠스에게>O< (<ㅡ -''-?) 빨랑 빨랑 린,젠,틸 이야기 완결짓고 필이랑 여행도 가구 그리고 외전도 넣고 그러고 싶습니다. 외전 많이 만들어 났는데 아직 나오지 않은 인물들꺼라...ㅠ.ㅠ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000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9일 23:41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6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6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7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02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차라리 이번에 정리하자, 란 생각에 껍질을 벗겼다. 아직 세상사를 다 알진 못하는 유니펠스였지만 이미 이런 류의 일쯤은 꿰고 있었다. 순순히 먹는 모습에서 말로 표현할수 없는 희열을 느끼며 다시 걷는 소녀의 뒤를 따랐다. 곧 그녀가 쓰러질 것을 알기에 투철한 기사도로서 모른척 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소녀는 곧 쓰러졌고 그는 근사한 포즈로 그녀를 받아들었다. "피곤하셨던 모양이군요,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캠은 상냥한 음성으로 말하며 유니펠스를 안아들었다. 유니펠스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으나 흥분한 캠은 보지 못했다. "린이고, 젠이고 몽땅 그렇게 가버리고 나만 깨졌잖아." 듬직한 체격에 회색 머리결을 지닌 청년이 자신에게 꼬리치는 작부들을 헤치며 걸어가고 있었다. "신경 쓰여 견딜수가 있나……." 어느 정도 어두침침해진 골목길을 해치며 '키텐'으로 향하던 청년의 눈에 익숙한 장면이 들어왔다. "쳇……!" 사람 좋기로 유명한 틸은 이름 값만큼이나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두 친구들로부터 상당한 놀림감이 되고 있지만 말이다. "귀족들이란 것들은 달라붙는 여자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맨날 싫다는 사람들만……." 멀리서도 남자의 고급스런 무구가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기사 서임쯤은 받은 자일 것이다. 틸도 어른이기에 어느 정도 현실을 봐가면서 나섰다. 괜히 나섰다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도와주려고 했던 이한테까지 불똥이 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라는 말을 뼈져리게 알고 있는 이라고 할까? 만일 틸이 조금 몸을 튼 남자의 손에 들린 이를 못 봤다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 작은 몸집의 아이를 못 봤다면 말이다. "뭐하시는 겁니까?" '제길, 린이나 젠만 있으면…….' 캠은 흠짓 놀랐다가 이내 평온을 찾으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나의 레이디께서 어디가 안 좋으신지 갑자기 쓰러지셨다. 지금 집으로 모셔 드리려는 참이지. 자네는 뭔가?" '거지말이다!' 꿀릴게 없다면 평민따위에게 전후 사정을 소상히 고할 턱이 없었다. 게다가 틸은 알고 있었다. 이 기사는, "아, 실례했습니다. 나이트 캠 경은 분명 아직 레이디가 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아직 레이디가 없다는 걸. 캠은 얼굴이 굳으며 기사들의 사생활을 소상히 알고 있는 청년을 훑어 보았다. 어두운터라 얼굴이 잘 안보이는 마당에 자신을 알아보다니 ……. '기사인가……?' 훈련을 어느 정도 받았다면 어둠속에서 상대를 알아보는 것은 쉬웠다. 물론 이 '어느 정도'라는 것은 기사들을 상대로 한 기준이고 평민이나 문관들로써는 채울수 없는 혹독한 훈련이었다. 암살자들이나 수호자들은 그 '어느 정도' 를 우습게 여기겠지만 말이다. 캠도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기사인지라 청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낯선 이다.' "자네 소속은 어찌 돼는가?" 체격으로 봐선 기사로 봐도 무관하므로 이런 질문을 던졌으나 틸로써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기사인줄 아는 건가?' "아……저." "뭐야, 평민인가?" 싸늘해지는 음성에 틸은 잠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입막음해도 별 상관 없겠군." "예?" 캠은 살기어린 눈동자로 틸을 보면서 말했다. "죽기 싫다면 꺼지란 말이다." 이정도 되면 틸로써도 오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캠경이야 말로 그 소녀를 내려 놓고 가시지요. 명예로운 '키텐' 나이트꼐서 어린 소녀를 납치하시려 하다니……. '키텐'의 명성에 먹칠이 가는 일입니다." 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씩 웃었다. 틸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서면서 경계했다. "좋은 걸 상기시켜 주었군." 캠은 유니펠스를 벽에 기대어 누인후, 검을 뽑아들었다. "살려두면 후환이 따르겠지." 그리고 달려들면서 소리쳤다. "죽어라!" 틸은 몸을 조금 틀며 공격을 피해냈다. 그 유려한 움직임에 캠은 경계하며 살기를 돋구었고 틸은 무기없는 상황을 한탄하며 주변에 쓸만한 것 이 있나 곁눈질로 살펴 보았다. 그런 틸의 동향을 눈치챈 캠은 품에서 단검하나를 꺼내 던졌다. "일단 무기가 있어야 명목이 서겠지." 주는 무기니 마다 않고 받아들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명목?" 캠은 몸을 날리며 단숨에 찌르기를 넣었다. "난 강도에게 습격을 받은 거다!!" 뒤로 발을 놀리며 피하는 그를 끝까지 쫓아가던 캠은 다음 순간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단순하긴 하지만 찌르기는 그가 가장 잘 쓰는 검법이었다. 때문에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검이 자신을 향해 찌르며 들어오는 데도 냉정을 잃지 않은 틸은 일단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돌려 검 옆으로 이동했고 캠이 주춤한 틈을 타 다시 한번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돌려 캠의 옆으로 이동했다. 캠은 자신이 뛰어오던 속도와 회전을 넣어 더 강력해진 틸의 힘에의해 뒷목언저리에 타격을 입었다. 보통사람이라면 단번에 기절할 충격이 캠의 몸을 훑어내렸으나 일단은 기사인 캠은 기절하지 않고 검을 추스렸다. 하지만 그 짧은 틈을 예리하게 노린 틸은 단검을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아까 보였던 순박한 얼굴이 지금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것이 되어 캠을 마주하고 있었다. 캠은 손에 쥐여 있었던 검은 크게 휘둘러 일단 틸을 떼어냈으나 자신이 졌음은 알고 있었다. 이는 엄청난 불명예였다. 한낫 평민따위에게 그것도 기사서임을 받은 자가 일방적으로 몰리다니. '죽이면 되는 거다.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검은 틸의 급소만을 노르며 달려들었다. "비겁합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기사로써 무인으로써 당연한 것을!" 맞는 말이었지만 쓸모있는 말은 아니였다. 긴 캠의 검에 몰리던 틸은 마음을 굳게 먹고 캠의 안쪽으로 빠고 들었다. "죽음을 자초하는 군!" 하지만 캠이 자신의 검이 긴점을 유용하게 활용하기엔 틸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캠은 손쓸틈도 없이 틸의 무릎에 자신의 복부를 내주어야했다. 틸로서는 죽일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상대는 기사. 귀족을 죽인 죄는 무거운 것이다. 목숨을 장담 못할 만큼. 틸이 기사라면야 결투라 해도 되겠지만 그는 그저 덩치좋은 종업원에 불과한 것이다. '이걸로 기절만 한다면……!' 그가 현재 가장 바라는 것은 이 기사가 빨리 기절하는 것. 그의 바람이 하늘에 통한 것일까? 캠은 신음성과 함께 기절해 버렸다. 싸우느라 위치가 틸이 아이를 등지는 쪽으로 변했다. 틸은 몸을 돌려 단검을 허리춤에 대충 꽂으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어?" 아이는 일어나 있었다. 그것도 차가운 눈동자로 틸쪽을 노려보며. '이 애…… 암살자인가? 이 기사를 노리던……? 내가 쓸데 없는 참견을 한것인가?' 망설이는 틸에게 아이는 단검을 뽑더니 달려들었다. "저기……!!" 뭔가 사죄의 말이라도 할까하던 틸은 미처 반응할새도 없이 자신의 코 앞에 다가온 아이를 봐야만 했다. ======================================================================== 동생이 소설을 쓰는데 언니라고 하나 있는 것(?)이 읽지도 않고.... 서운한 마음에 강요에 강요를 해서 읽으라고 했지요. 헌데.......읽고 난 언니는 빨리 쓰라고 거의 협박을 하고......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고...... 언니가 말하더군요. 자기가 이렇게 뒷이야기가 궁금할줄 알고 안 읽은 거라고.^^;;;; 언니때문에 연재 속도가 무지 빨라질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하하....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001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9일 23:41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07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크윽!!'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틸의 뒤에서 신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을 강한 힘으로 밀 듯이 돌며 자신의 등뒤로 이동한 아이가 느껴졌다. 얼떨결에 후방을 아이에게 빼앗겨 경계했으나 아이는 뒤에서 그를 껴안 듯 감쌌을 뿐이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아이를 황급히 돌았을 때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이건…… 어떻게 된……." 자신의 발밑까지 축축하게 적시는 피 웅덩이들에 의해 정신을 차린 틸은 급히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등에 생긴 커다란 상처. "애야!!" 분명 기절시켰다 생각한 기사는 목에 깊숙히 찔린 단검 때문에 원통한 눈을 치켜뜨고 죽어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피가 가득 머금어진 장검이 쥐여 있었다. 틸은 아이가 자신에게 달려들어 검을 내지를 때 들렸던 신음성을 떠올렸다. "날 감싸다?" 전후 사정을 추정하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기사의 목에 꽂힌 단검을 뽑아들고 아이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집에 집어 넣었다. "정신차려!!" 틸은 아이를 업으려다 등의 상처가 생각나 안아들었다. 일단 이 아이는 귀족을 죽였으니 들통나면 곤란하단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이 대충 걸쳤던 로브를 아이에게 씌우며 틸은 급히 자신이 일하고 머무는 주점으로 뛰어갔다. 너무나 급했고 너무나 당황했기에 틸은 그만 그것을 놓쳐 버렸다. 자신의 허리에 달린 기사의 단검을…… '키텐'은 비상이 걸렸다. 기사가 그것도 귀족출신의 기사가 시체로 발견 된데다가 마스터의 양자, 유니펠스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누군진 몰라도 귀찮은 짓을 했어." 덕분에 ''목격자를 찾아라'라는 임무를 떠 맡아버린 기사들이 고생이었다. 그 고생하는 기사들 중엔 린과 젠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릴 넘치는 임무도 아니고 그저 뒷거리 작부들을 상대로 조사하는 일이 괄괄한 린의 성격에 맞을리 없었다. "그보다 틸녀석 많이 삐졌나, 통 연락이 없네?" "저녁에 한번 가볼까?" "그러자!" 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린은 반갑게 애기했다. 자신들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뒷거리 여자들은 그 둘의 관심 밖이었다. "아~. 오늘도 성과없는 하루였어." 일단 '키텐'에 가서 요 이틀동안 되풀이 됐던 일상을 보고 한 뒤 둘은 나왔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건성건성인 두사람은 다른 기사들보다 월등히 이른 귀가시간을 가졌다. 때문에 듣지 못했다, 그 소식을. "틸녀석 어디 아픈건지도 몰라." 린의 의견을 받아들인 젠은 일단 시장으로 향했다. 틸이 좋아하는 사과라도 사들고 가기위해서 였다. 때문에 보지 못했다, 동료 기사들을. 그렇게 둘은 아무것도 모른체 지기를 보러 향했다. "여~! 틸 우리 왔다." 언제나와 같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둘은 곧 이상한 점을 알아 차릴수 있었다. "왜……이리 썰렁한 거지?" '머무는 공간'은 용병들 전용 바였다. 때문에 언제나 시글벅적했다. 특히 이런 늦은 시간에는. 눈쌀을 찌푸리는 둘의 뒤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만취한 남자였다. "아까 ……딸꾹,난리도 아니였다고, 딸꾹." "그게 무슨 말이지?" 젠도 어지간히 긴장했는 지 급히 물었다. 그가 린보다 빨리 말을 꺼낸 것은 흔한 일이 아니였다. "쿡쿡." 남자가 내미는 손을 보고 인상을 찌프리면서 린이 지갑을 뒤젓일 때 젠은 그의 복부를 사정없이 발로 찼다. 벽에 가 부딪히는 남자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젠의 얼굴은 여느때와 같았으나 갑자기 심하게 맞은 남자로써는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묻고 있다." "크윽!" 보기 흉하게 뻗어있는 남자의 발목을 발로 약간 짓누르면서 젠이 말했다. 남달리 '감'이란게 예리한 젠은 가슴속에서 자꾸 새나오는 불길한 느낌 때문에 상당히 날카로와져 있었다. 보기드믄 젠의 모습에서 린은 뭔가를 느꼈는 지 불안해 했다. "키,'키텐' 기사단에서 갑, 갑,갑자기 쳐들어 와선……." "'키텐'?!" "네,네 분명히 '키텐' 이였습니다요." "갑자기 와선, 뭐?" 린의 반문에 말이 끊기자 젠이 조금은 짜증스럽게 남자를 닥달했다. 남자는 킥소리도 못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틸새끼를 잡아갔습니다요!" 젠은 남자의 턱을 발로 강하게 차올리면서 손으론 자신의 품을 뒤져 은화를 두닢 꺼냈다. "틸에게 '새끼' 이라 하지 마라." 그리고는 이가 부러진듯한 기절한 남자에게 은화를 넘지며 나갔다. "정보료는 주지." 빠르게 달려가는 젠의 뒤를 급히 따르면서도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한번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틸이 왜 잡혀 갔는지는 안 물어봐?" 린이 따라가며 묻자 젠이 아차, 하며 돌아보았다. "너도 열받으면 막가는 성미라니까." "어차피…… 지금 '키텐''에서 누군갈 잡아갈 일이라면……." "그 원인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 린의 눈동자가 어둡고 예리해졌다. "누구 밀고냐가 중요한거지." 대화가 끊겼고 둘은 여간해선 들어가지 않는 향락가, 그러니까 지름길로 접어들었다. 둘이 이 길을 잘 가지 않는 이유는 더럽다거나 질 낮다는 것 따위가 아니라 딴 길보다 더 오래 걸린다는 것 때문이었다. 즉 둘에게 매달리는 여자들을 떼내는 것이 여간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둘을 감히 멈춰서게 할 여자는 없었다. 살기등등한 둘의 모습을 그녀들을 겁먹게 한 것이다.
번  호 : 1800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09일 23:41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17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틸은 그렇게 동경하던 '키텐'에 들어서며 상당히 감개무량했다. 비록 지하감옥으로 바로 끌려가긴 했지만 말이다. "린……젠 녀석들 놀라겠는걸." 양팔은 각기 다른 쇠사슬에 채워져 있었고 발은 어느 정도 여유, 그러니까 간신히 걸을 정도의 여유만 남겨진 사슬로 채워져 있었다. 몰골은 나름대로 볼만한 것이 전혀 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기세등등한 기사들은 그가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얼마든지 무력을 행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꼬마는 괜찮을까……." 고개를 돌리며 문쪽을 바라보던 틸은 빙긋 웃었다. "주인 아져씨께 맡겨두긴했지만 역시 믿을 만한 녀석들이 최고지."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이제는 자신의 얼굴보다도 익숙한 이들이 보였다. "……!" 뭔가 말을 하려다 둘은 급히 틸에게 뛰어 왔다. "어떻게 된거야?" 늘 냉철한 젠도 늘 속모를 린도 당혹과 슬픔, 분노 등에 휩싸여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 와중에 틸은 웃으며 반겼다. "여~! 왔어?" " '왔어?' 가 아니잖아!" 린은 철창만 아니였다면 당장에라도 목을 조를 것 같은 얼굴로 틸을 보았다. 틸은 철창이 순간 고마워졌다. "어떻게 된거냐?" 젠이 침착하지만 충분히 분노를 읽을 수 있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틸은 씩 웃으며 말해다. "마침 잘됐다. 둘에게 부탁 할 것 이있었는데 ……." "부탁?" "탈옥이라면 얼마든지." 젠이 한쪽 손을 검손잡이에 갖다대며 말했다. 틸은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자신이 이 말을 꺼낸다면 둘은 아마도……. "내 옆방에 혼수상태의 한 꼬마가 있는 데, 그애 좀 부탁한다." "제정신이냐?" "미쳤군." "그딴 애 걱정되면 니가 나가서 보살피라고!!" "네몸이나 걱정해라." 조금씩 틀리게 반응하지만 이럴줄 알았다. "하지만……." 젠이 가로막으며 다시 물었다. "그보다 어떻게 된일이냐? 캠경은 왜 죽인거고?" "그게……." "……해서 일단 내 방으로 데리고 왔다가 방이 깨끗하지 못해서 빈 방에 옮겨 놓았거든? 근데 응급처지는 했는데 생각보다 상처가 커서 의사를 불렀어. 신관을 부르고 싶었는데 주인 아저씨가 맡긴 돈을 안 줘서……." "그러니까……." 혼란스런 얼굴로 린이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확인을 한건 젠이었다. "캠경을 죽인건 그 꼬마녀석이다, 이거냐?" "아……그렇게 되나?" "그렇게 된다." 린과 젠이 굳은 얼굴로 틸을 노려보았으나 틸은 헤맑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꼬마는 내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까 보답으로 치면 되잖아." "말도 안돼!" "헛소리." 린과 젠의 단호한 말에 틸은 다시 웃었다. 린이 말했다. "어차피 다 죽어가는 꼬마녀석 때문에 건장한 네 녀석이 죽는 다는건 셈이 안 맞아." "벌은 죄지은 자가 치루는 거다." 젠의 말까지 듣고 난 틸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일단 기분은 좋아." 둘의 의아함을 틸은 내버려 두지 않았다. "꿈에도 그리던 '키텐'에도 들어와 보고 '키텐'의 기사와 대련(?)도 해보고." "멍청이." "바보." "헤헤." 린과 젠은 순수한 자신의 친구를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저녀석이 철창안에만 안 들어가 있었어도 내손에……으득.' 똑같은 생각을 했을까? 둘은 동시에 이를 갈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틸은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 꼬마를 부탁해." "부탁이라고? 너 죽……." 발끈하는 린의 입을 막으며 젠이 말했다. "알았다. 꼬마는 우리가 돌보지." "젠!!" 린의 몸을 손으로 돌리며 젠은 계속 말했다. "염려말고 있어라." 의외로 순순히 응하는 젠의 모습에 상당히 불안해 하며 틸이 물었다. "저기……젠 뭘 어쩌려는……?" 하지만 젠은 듣지 않고 린을 끌고 나가버렸다. "불……안 한데?"
번  호 : 1801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0일 20:17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4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4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00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젠!! 어쩌려는 거야?" "아까 말했을 텐데. 벌은 죄지은 자가 받는 거다." 하며 젠은 급히 발을 놀렸다. "아하!" 린은 두말 않고 따랐다. "근데말야." "아?" "누구……밀고지?" "틸은 바보니 자수했을 지도." "에? 그럼 기사단이 출동했을리 없잖아?" "……그렇군." "뭐, 그건 나중에 따지고 일단 살리고 보자." 젠은 속도를 늘리는 것으로 답했다. 둘이 '머무는 공간'에 도착했을 때 보인 것은 '키텐'의 동료 기사였다. "어?" 린이 먼저 발견했으나 젠이 먼저 반응했다. 뒤에서 약간의 차로 따라오고 있는 린을 손짓으로 저지한 것이다. "왜?" "쉿." 젠의 '감'을 잘 아는 린은 별 말없이 몸을 숨기고 동료 기사를 주시했다. 그는 주점의 대문이 아니라 뒷문에 서 있었는데 그문은 여관쪽과 이어져 있었다. 여관이라 봤자 주인 내외와 종업원 등이 거주하는 방이 대다수 였지만. 눈에 익은 뚱뚱한 남자가 나와 기사를 반겼다. "주인장 아냐?" 기사는 예의를 갖춰 인사하곤 들고온 주머니를 술집주인에게 넘겼다. 술집 주인은 입이 찟어져 그것을 받아들고는 연달아 고개를 꾸벅였다. "뭐야?" 린의 영문모를 의문에 젠이 낮은 음성으로 답해주었다. "포상금." 린은 살기를 내 뿜으려는 자신의 몸을 양팔로 감싸고 젠에게 기댔다. 젠도 마찬가지였는지 린을 한팔로 감싸며 자신의 살기를 감추었다. 기사가 가고도 둘은 한참 그러고 있었다. "죽.인.다." 린의 끊어질 듯 내밷는 말에 젠은 고개를 끄떡이며 이미 들어가고 없는 문쪽을 노려 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둘이 있는 골목길 앞쪽으로 한떼의 용병들이 지나갔다. "어이, 재미있는 구경이 생겼다는 데?" "뭔데?" "킥킥, 한 미친새끼가 귀족기사를 죽였다 잖아?" "헤에?" "지금 '키텐' 앞 광장에서 처형준비를 하고 있다는 데?" "진짜 미친 새끼네, 지가 기산줄 알나? 기사를 죽이게?" "크크. 뭐 어때 우리는 구경만 하면 되지. 가지." 그 무리에게 달려들려는 린을 뒤에서 안 듯이 양팔로 감싸며 말렸다. "살리는 게 우선이다." 린은 작은, 하지만 섬뜩한 음성으로 젠에게 말했다. "저 새끼들 얼굴 잘 기억해놔." "물론이다." 린은 심호흡을 한번 깊히 하고 조금 몸을 틀며 괜찮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가자." 둘은 급히 여관문쪽으로 향했다. -쾅쾅- 막 나왔던지라 술집주인은 금방 문을 따주었다. "누구……히익." "왜 그래, 아저씨?" "아,아닐세." 찔리는 게 있었던지라 둘의 얼굴을 보자 당황했으나 말투를 들어보니 모르는 것 같았기에 진정할수 있었다. "왠일들인가?" "틸녀석……일 알지?" "아,알지. 유감이네." "응……유.감.이.야. 아저씨." "그래서 여긴?" "아, 틸녀석 소지품이라도 가져갈까 해서." "그런가? 들어오게. 마침 난 나가려던 참이라. 나갈때는 주점쪽 문을 이용하게나 여긴 잠그고 갈테니." "왜, 틸녀석 처형장이라도 가나?" 완전히 굳어 있는 술집 주인을 무시한체 둘은 올라갔다. 일단 오른쪽 방에 들어가 보았다. 한찬 정사중인 남녀가 있었다. "아니군." 문을 닫고 왼쪽 방쪽으로 갔다. "이새끼들 뭐야?" 남자가 허리춤을 천으로 감싼채 고함을 지르며 나왔다. 하지만 린은 단검을 목에 갖다대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꺼져." 남자는 질린체 방으로 들어갔고 둘은 왼쪽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창문쪽 침대로 걸어가자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어……?" "유니펠스……?" -철썩- -철썩- "일어나란 말야!!" -철썩- "유니펠스!" "린, 진정해라." "빌어먹을 일어나!" '아……프다.' 고통에 눈을 떴으나 별로 초롱초롱해 보이지는 않았다. "정신 들었으면 얼른 일어나!" 린은 거칠게 간신히 정신이 든 유니펠스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유니펠스는 불쾌감에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뿌리쳤다. "린." 다시 유니펠스의 멱살을 잡으려는 친구의 어깨를 잡고 말리며 한걸음 걸어나간 젠은 몸을 수그리고 작게 떨고 있는 유니펠스에게 말을 걸었다. '아프다.' 등에서 아려오는 고통에 유니펠스는 계속 몸을 떨어댔다. "먼저 제 친구를, 틸을 구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린이 다시 나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니펠스의 얼굴을 들어올리고는 고함을 질러대는 린을 젠이 간신히 말렸다. "빌어먹을 자식아, 왜 네놈 때문에 틸이 죽어야 되냐? 니까짓게 아무리 잘났어도 틸이 네놈 때문에 죽을 이유는 없어! 네놈은 제국체로 준다고 해도 틸과 안바꾼다고!!" "린……." 유니펠스는 눈을 크게 뜬체 린을 올려다 보았다. 유니펠스가 덮고 있었던 더러운 이불에 린의 눈에서 흐르는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틸……살려줘. 틸을……." 유니펠스는 땀 때문에 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굴 살려달라는 건지…….' 젠의 침착하지만 조금은 떨리고 있는 음성이 영문몰라하는 유니펠스의 귓가에 울렸다. "틸은 당신을 캠으로부터 구해주려 했던 우리 친구입니다. 덧붙이자면 당신이 죽인 캠 때문에 지금 처형을 받기 직전에 있지요." 그제서야 유니펠스는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일이 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젠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당신이 행방불명 됐던 요 이틀동안 캠의 일이 많이 불거졌습니다." '이틀이라.' 생각을 가다듬던 유니펠스를 부여잡으며 린이 말했다. "당신이 소매치기짓을 했다는 거나 강도짓을 했다는 거나 모른척 할테니까 틸을 살려내!" '강도……?' "틸은 당신이 자신을 살려 줬기 때문에 보답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짓지도 않은 살인죄로 지금 '키텐' 앞 광장에서 처형을 ……." 젠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유니펠스를 봐야만 했다. "무슨……!" "여긴 삼층이라고!" 린과 젠이 놀라 창문쪽으로 달려갔을 때 보인 것은 마치 날라가듯 빠르게 '키텐'으로 뛰어가는 유니펠스의 모습이었다. 단, 거리를 뛰어가는 게 아니라 건물들의 옥상을 옮겨다니며 뛰는 것이었지만.
번  호 : 18016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0일 20:17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2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2/2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26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일이 꼬였다. 유니펠스가 만든 시나리오는 이런 것이 아니였다. 수면의 열매를 먹은 것처럼 캠이란 녀석을 따라갔다가 깨끗이 처리한다였는데……. 왠 녀석이 끼어들고 조금씩 꼬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녀석이 캠을 쓰러뜨리면 오늘은 일단 넘어가는 거였으니까. 헌데 녀석은 실전 경험이 없었나보다. 확인도 제대로 안하고 뒤돌아서다니……! 작게 일어나는 살기에 눈을 떠보니 녀석 뒤로 검을 휘두르는 캠이 보였다. 그때 뇌리를 스친 시나리오. 망설임을 없었다. 캠의 목을 깊숙히 배고 끼어든 녀석을 감싸듯 캠의 검을 맞는다. 일단 시나리오대로 되긴 됐는데……. 문제는 이 끼어든 녀석이었다. 생각보다 반사신경이 좋고 방어력도 제법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녀석을 끼고 돌 때 좀 늦어버렸다. 게다가 계산한 거리만큼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상처가 예상외로 깊이 났다. '등 뒤에서 습격하는 이를 죽여보니 캠이었다.' 란 완벽한 시나리오가 너무 깊히 난 상처 때문에 정신을 잃으면서 어그러진 것이다. 정신을 잃은 기간이 너무 길어졌던 것은 아마도 입안에 넣고 있었던 열매가 녹으면서 였을 것이다. 때를 봐서 밷어내려던 것이 그만 문제를 어렵게 만든 것이다. '죽지마라.' 소탈해 보이던 녀석의 얼굴이 스쳐갔다. '제길.' 기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어려서 두 친구를 만나고 그 꿈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친구들과 함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임무를 수행하고……. 병약한 아버지를 편안히 모시고……. 내꿈은 단지 그것뿐. 큰공을 세워 가문을 일으키겠다거나 하는 거창한 야망이 아니였다. 그저 그것뿐 이었는데……. 강한 기사들과 검을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집에 돌아갔을 때 떵떵거리는 아버지도 뵙고 싶고……. 그저, 그저 그것뿐이었는데……. 너무 멀었다. 현실처럼 다가왔던 기사의 길은 너무나 멀었다. 분명 매번 우승함에도 떨어지는 기사시험. 항의하러가면 돌아오는 것은 매질뿐. 그렇게 기사의 꿈을 안고 '자이젠'에 들어와 몇 년을 보냈던지. "그래도…… 일단 한가지는 이룬건가." 그래, 강하진 않았지만 기사와 검을 겨러봤고 감옥이지만 꿈에도 그리던 '키텐'에도 들어가 봤다. 아버지는……분명 친구녀석들이 잘 보살펴 드릴거다. "흐리네……." 고향 하늘은 맑았다. 별도 잘보였고 늘 파랬다. 물론 비도 오고 눈도 왔지만 맑았다. 동료가 되고 싶었던 기사들의 말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 원한을 청산하리니……" 그들이 양갈래로 터있었기에 그 끝편에 있는 관이 아무 문제 없이 보였다. 틸이 죽고나면 그 관은 호화로운 무덤으로 향할 것이다. '내가 죽이지도 않았지만……미안하진 않아요. 당신이 잘못한 거니까.' 그러고 보니 한가지 공을 세우고 간다. '키텐'에 저 버러지 같은 작자를 청소하고 가니까. 눈앞에 걸려있는 밧줄너머로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주인 아저씨……" 묘한 흥분을 눈에 담고 있던 그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돌아서는 모습에 틸은 알아차릴수 있었다. '그랬구나…….' 뒤에서 누군지 모를 이가 틸의 몸을 앞으로 밀었다. 틸은 자신의 목에 걸리는 밧줄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았다. 그리고 어둠. 자신의 눈을 감싼 검은 천 때문에 틸은 볼수 없었다. 흐린 하늘도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밧줄도 자신을 밀고한 주인 아저씨도……. "크윽!" 발밑이 꺼지면서 틸의 발은 허공을 바둥거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틸은 멍해지는 청각속에서도 몇분안에 죽을 것인가 내기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그 잔인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틸은 '소리'에 집중하지 않을수 없었다. 듣고 싶은 목소리가 언제 들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평생에 단 둘뿐인 친구들의 목소리가. 하지만 그의 귀에 들린 소리는 아주 예리한 바람소리와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위의 숨소리였다. "엇!?" 그리고 갑자기 밑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몸을 느낄수있었다. 꺼진 발판으로 떨어지려는 자신의 허리를 감아 옆의 마루로 착지시켜주는 손길과. "누구냐?" 주위에서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틸은 자신의 몸에 기대는 작은 몸뚱이를 느낄수 있었다. 거칠게 헉헉대던 그 작은 이는 이내 떨어져 틸의 시야를 방해하던 천을 잡아챘다. "넌!!" 창백한 얼굴에 맺혀 있는 땀방울과 애처러울정도로 들썩이는 몸, 푸른빛 입술은 동정심을 사기에 충분했으나 기사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본 것이다. 갑자기 위에서 나타난 그가 뛰어내리면서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던 것을. 그리고 그 손에서 발동 돼 죄인의 목에 걸린 밧줄을 끊은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을. "마법사?" 웅성거리는 사람들속에서 기사들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둘을 둘러샀다. "왜 왔어?" 고함을 지르는 틸의 모습에 조금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기사들이었다. "바보같이 왜 왔냐구!!" 눈물까지 글썽이는 틸을 멍하니 보던 이의 왼쪽 손목에서 붉은 팔찌가 작게 진동을 했다. 그리고 작은 바람의 장벽이 틸의 뒤에 생겼고 그것의 발동과 동시에 화살이 날아와 팅겨나갔다. 그 화살을 보고 정신을 차렸는지 작은 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자네는 뭔가? 왜 죄인을 감싸려는 거지?" 연륜있어 보이는 기사가 물었으나 답이 없었다. 작은 이는 허리에 매달린 두 단검중 하나를 뽑아들었다. 굳은 피가 묻어있는 날이 보였다. 움짓한 기사들은 검을 곧추들었고 그는 그 단검을 멀리 던졌다. 그 의아한 행동에 기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단검의 행방을 눈으로 쫓았다. 단검은 그들의 뒤에 있던 관에가 박혔고 관 주위에 있던 자들은 놀라 물러섰다. 돌로된 관에 깊숙히 박힌 검의 모습은 상당히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의 경악을 무시한체 작은 이는 틸의 손을 묶고 있는 쇠사슬에 다른 단검을 갖다댔다. 눈을 지긋이 감았던 그는 갑자기 번뜩 뜨면서 검을 내렸고 쇠사슬은 '스겅'하는 깨끗한 음성과 함께 잘려나갔다. "지금이라도 도망쳐, 꼬마야!" 손이 자유를 되찾자 틸이 제일 먼저 행한 것은 작은 이의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러다 작은 이의 어깨너머로 축축하게 적어있는 것들을 알아차렸다. 틸은 어깨에서 손을 떼내고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붉게 적은 손이 틸의 눈에 자극적으로 들어왔다. 틸의 발작(?)에 조금 놀랐던 작은 이는 순간 씩 웃으며 손을 들어 틸의 머리를 부벼댔다. 분명 엄청난 나이차와 엄청난 체격차가 있는 모순된 장면임에도 아무도 어색함을 못 느꼈다. 그만큼 틸의 모습은 순박해 보였고 그만큼 작은 이의 모습은 성숙해 보였다. 그는 곧 틸의 앞에 서 검을 내리잡았다. 공격보다는 방어의 자세였다. 틸은 자신의 앞에 있는 그의 뒷모습에서 확실히 상처가 터졌음을 알았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피방울들이 먼지투성인 마루를 섬뜩하게 만들고 있었다. "꼬마야, 생각은 고맙지만 한명이라도 사는게 좋지 않니?" 이러다간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다. "소년. 자네가 캠경을 죽였는가?" ======================================================================= 살다보니 연참도 다 하는 군요. 원래 한 회가 더 있지만( 그게 린,젠, 틸 이야기의 완결입니다^^) 내일올리겠습니다. 아직 마무리가 들되서^^ 원래 연참은 별로 염두에 없었는데 이 세명 이야기가 너무 질질 끌리는 것 같아서 이틀내로 마무리 지을려고 연참을 하게 됐습니다. 각 회의 분량은 원래 하루하루 올리려던 분량이라서 조금 들쑥날쑥 할겁니다. 내일이면 이 세사람이야기도 끝나고 페르노크 이야기로 들어가겠지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017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0일 20:1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234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그가 던진 단검을 뽑아들고 살펴보던이는 캠경의 시신을 검시했던 남자였다. 소년은 고개를 끄떡였고 남자도 고개를 끄떡였다. "어쩐지 저 청년이 가지고 있던 단검과 상처가 안 맞는다 생각했지." 남자는 소년의 뒤로 흘러내리는 피방울들을 발견했다. "캠경에게 입은 상처인가……?" 뚝, 뚝, 뚝……. 차가운 3기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상처를 입은데다 체온마저 빼앗기기 시작한 소년의 안색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자신의 물음에 고개를 끄떡이는 소년의 모습을 확인하고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상처가 등에 있는 거지?" "제가 답해 드리지요." 날라오듯 틸과 소년의 뒤쪽에서 등장한 두 남자를 본 기사들은 적잖이 동요했다. 친숙하진 않지만 익숙한 동료 였던 것이다. "린, 젠?" 린은 소년의 뒤, 틸의 옆에 올라가 말했다. "이 소년에게 들은 말로는 이쪽이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기습했답니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반격했지만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였답니다." "에엑?" 당황하는 틸을 쨉싸게 막아선 것은 의외로 소년이었다. 한발 뒤로 가 틸의 손을 사정없이 밟은 것이다. 린은 속으로 '나이스!'를 연발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평소 이 소년에게 신세를 지던 틸이 지나가다가 그것을 발견, 데리고 와 응급처치밑 치료를 했다는 군요." "그런……! 명예로운 기사, 캠경이 기습을 할 리가 없잖는가?" "그런 소년이 자기손으로 등에 상처를 내고 이런 쇼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때 관옆에서 울먹이던 캠경의 여동생이 소리쳤다. "돌아가신 오라버니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아주세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기사들은 동료 기사인 린과 젠에게 경고하며 달려들었다. "자네들은 나서지 말게!" 소년은 무기가 없는 틸 앞에 서서 먼저 달려오는 기사의 검을 막으며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센 바람에 기사는 날려지며 광장 구석으로 떨어져버렸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소년은 절대 틸의 앞을 이탈하지 않으며 기사들을 막으면서 린과 젠의 합류를 막았다. 틸은 울먹이며 소년을 껴안 듯 감싸며 소리쳤다. 그의 눈에는 빗줄기에 섞여 내리는 소년의 피가 너무나 선명히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들하세요! 제가 죽였어요! 제가 죽였다고요!!" "바보!" 린이 그런 틸을 꿀밤 먹이면서 일부로 큰소리로 말했다. "이 분이 캠경을 죽여도 뭐라 할사람은 절대 없단 말이다." 그 말에 다른 기사들도 주춤하며 영문을 몰라했다. 젠은 린의 말을 이었다. "또한 이분의 말을 안 믿을 이도 없지." 자꾸만 들먹이는 '이분'이란 호칭에 계속 주춤거리는 마당에 광장 저쪽에서 말을 몰고 두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난리들인가?" "마스터!" 아들의 실종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조금 늦게 처형장으로 들어오는 길인 '키텐'의 마스터. 그를 보고 당황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안도했다. "그게 저 소년이 갑자기 끼어들어 난동을……." "유니!" 그들의 근엄한 마스터는 피와 비에 젓은 소년을 보며 놀라 달려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버지를 보며 유니펠스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어느새 비가 잣아들고 있었다. "도데체 왜…… 크윽!!" "몰라서 묻는 거냐?" "커억!!" 고작 두명이 시비를 걸어왔을 때는 비웃기만 했던 용병일행들은 이내 피에 절어 벌벌 떠는 신세가 되 버렸다. "그쯤하지." "아직 멀었어!" "시간에 늦을 생각이냐?" "쳇." 무슨 시간인진 몰라도 광명처럼 들리는 단어였다. 주로 자신들을 상대하던 남자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던 남자에게 걸어가면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역사적인 날이니까 이쯤 해두는 거라구, 쳇. 아직 멀었는 데 ……'미친 새끼'란 말을 입에 담은 죄는 크단 말이다." 소름 돋는 소리를 들으며 거친 용병들은 채찍 앞의 노예마냥 떨어댔다. 그러면서도 안도를 하고 있었던 그들 앞에 여지껏 가만히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히익!" 제풀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용병들은 안쓰럽게(?) 쳐다보던 남자는 발을 들어 몇번 친절히 차주었다. "시간이 없으니 내 몫은 아쉽지만 이걸로 계산하지." 이미 어느정도 마비됐던 신경이 마구 울어대면서 용병들을 새로운 고통에 빠지게 했다. 이제는 거의 실신해가는 그들을 뒤로한채 적발의 남자는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좀 늦은 것 같군, 서두르자." "아." 그리고 뛰어가는 둘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번  호 : 18019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0일 20:18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225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키텐'에선 흔하진 않으면서 드물지도 않은 행사가 한창이었다. 기사서임식. 이번 신임 기사는 단 한명이었다. 듬직한 체격에 맞지 않지만 어울리는 순진한 얼굴의 소유자인 그 기사는 꿈에도 그리던 '키텐'의 문장을 걸치고 벅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스터, 케르가 공의 선언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있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구석진 곳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작은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소년은 약간 삐딱하게 서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그에겐 그 누구보다도 부드럽게 느껴졌다. "틸녀석, 의외로 딴짓하네?" "딴짓이 아니라 녀석의 '기사서임'이겠지." "그런가……." 그때 젠이 물었다. "유니펠스님의 '그 일'은 뭐에 쓰려고 했었나?" 린은 쑥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당연한거아냐?" 그리고 마스터에게서 검을 받아드는 친구를 보았다. "저녀석 기사서임이지." "역신가." 그리고 돌아서는 젠의 뒤를 쫓으며 린이 물었다. "어디가는 거냐?" "아직 빚이 남았으니까." "아……." 린은 웃으며 그 옆에 섰다. "주인아저씨 말이지?" 문을 나서기 전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주춤거리며 유니펠스에게 다가가는 친우가 보였다. "전화위복……인가." 린의 중얼거림을 들은 젠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틸을 마주하는 유니펠스라는 작은 소년을 보았다. "틸녀석, 유니펠스님을 주군으로 삼겠지?" "아…… 분명." 둘은 마주보며 씩 웃었다. "뭐, 괜찮은 주군이군." 그리고 둘은 문을 나섰다. 초라한 여관방 어디선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고 있을 '밀고자'를 찾아서. "유니펠스군은 인복이 많은 모양입니다." 유니펠스의 곁에서 기사서임을 함께 보던 투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유니펠스는 삐딱하니 서서 그를 올려보았다. " '난 한 일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작정인가요?" 정확히 집었는지 반응이 없었다. 투만은 웃으며 긴장과 회한, 그리움, 기쁨……복잡한 심정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신입 기사를 보았다. "물론 유니펠스군은 그를 기사에 서임시키겠다는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였겠지요. 그저 사실 그대로, 느낀바 그대로를 말했겠지요.전……." 투만은 유니펠스를 한번 내려다 보며 웃었다. "그점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투만은 이쪽을 바라보는 기사를 보고 다시 유니펠스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확실히 전후사정을 애기하던 유니펠스의 서술점은 객관적이엇다. 사실그대로 일뿐. 더하거나 덜한것도 없는 그대로 일뿐. 헌데도 그는 한 청년을 구했고 한 청년의 꿈을 이루어 줬다. 기사인 캠의 잘못이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법도가 있는 세상에서 기사에게 덤벼든 죄는 작은 것이 아니였다. 캠경의 집안에서는 불명예다 해서 그 죄라도 틸에게 묻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유니펠스는 아버지에게 몇마디의 메모를 넘겼고 그것을 본 아버지, 케르가공은 틸를 기사로 서임하겠다 함을로써 틸이 캠경에게 달려들었던 것을 마치 기사들관의 결투였던 것마냥 넘겼다. 틸은 목숨을 건진것뿐만 아니라 기사라는 명예를 입은 것이다. -'키텐'의 기사는 평민들에게 당하고 사는 모양이군요.- "아, 유니펠스님!" 건물에서 나오는 그를 제일 먼저 발견한 이는 틸이었다. 젠은 누워있어고 린은 그런 그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린의 손을 잡고 일어난 젠은 자기들 쪽으로 걸어오는 유니펠스에게 정중히 인사했고 린도 젠보단 늦었지만 마찬가지로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제일 먼저 허리를 숙였던 틸은 바로 앞에 유니펠스가 오자 일어났다. "이제 떠나시려는 모양입니다?" 젠의 물음에 유니펠스는 작게 고개를 끄떡였다. 틸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또 '이카미렌' 산맥을 걸쳐서 가실 생각이세요?" 가장 단거리를 추구하는 유니펠스는 언제나 높고 험한, 몬스터 소굴인 '이카미렌'을넘었다. 기사단조차도 '효율성'에 입각해 돌아가는 그곳을 말이다. 유니펠스는 좀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이미 포기하고 있었던 세사람에겐 뜻밖의 소식이었다. "그럼 돌아가실겁니까?" "정신차리셨군요." "린!" 젠의 제재에도 아랑곳 않고 린은 유니펠스의 어깨를 두들겼다. 유니펠스는 별반응 없었지만 그들을 주시하던 다른 기사들은 경악하면서 '무례한!'을 외쳐댔다. "어? 근데 유니펠스님 무기 새로 장만하셨어요?" 새로운 애검을 내려다 보는 유니펠스의 어린 얼굴에는 순수한 검사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유니펠스는 궁금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기사들에게 그것을 뽑아 들어 보였다. "헤~? 이건……꼭 거대 송곳 같네요!" 아주 적절한 표현이긴 했지만 듣기 좋은 표현은 아니였다. 젠은 틸에게 작은 꿀밤을 먹였고 린은 발을 살짝 밝아주었다. 틸이 뭐라 항의하기 전에 린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건 '스틸레토'라는 단검이지." "찌르기용이다." "과거 가죽 갑옷이 다였던 때에는 실력이 없는 자의 손에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던 검이야." " 때문에 한때 금지됐었다." "뭐 지금은 금속 갑옷이 흔하니까 제재도 없지만 반대로 금속갑옷이 흔하기에 쓰이지도 않아."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하지 않으면 있으나마나니까." "헤에~" 린과 젠의 설명을 들으며 틸은 멍해있다가 한가지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럼 유니펠스님, 이거 별로 쓸모없는 검이란 뜻인가요?" 검사에게 그의 애검을 쓸모없는 검이냐고 묻는 행위는 철없는 어린애라도 하지 않는 짓이거늘……. 젠은 다시 틸에게 꿀밤을 먹였고 린은 엉덩이를 차주었다. "멍청이." "바보." 틸도 무례를 깨달은 듯 유니펠스의 안색을 살폈으나 별다른 변화는 발견하지 못했다. "쓸모가 없다는건 어디까지나 실력이 없는 자에 한해서라고." "이해가 안 된모양이군." 젠은 유니펠스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검을 건내 받았다.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 모습에 린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도 놀란 얼굴로 유니펠스를 돌아보았다. "이거 마법무구입니까?" 유니펠스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떡였다. "무슨 마법이 걸린건지는 아십니까?" 그점에선 유니펠스도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보채는 틸에게 젠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검 전체에 새겨진 문양이 모두 '룬'이다." "'룬'?" "머법을 담은 문양, 문자따위를 통칭하는 말이지." "무슨 마법이 있는지 알아볼수 있어?" "그것까진 모르겠군. 나쁜 쪽의 '룬'이 아니란 것은 알겠지만." 하며 검을 유니펠스에게 넘겼다. "오늘은 이미 늦었고 내일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유니펠스는 끄떡임으로 답하고 나서 허리를 약간 숙여 인사했다. 그만 가봐야 할 시간인 것이다. "이번엔 '이카미렌'산맥을 돌파하지 않으신다니 따로 걱정을 않하겠습니다." 린의 인사였다. "몸조심하시고요, 약 많이 챙겨가시고요, 돈도……." 틸의 인사는 미처 마무리되지 못하고 젠에 의해 끊겼다. "안녕히." 유니펠스는 말에 올라타면서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내 '키텐'을 나섰다.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유니~!" 혼자 두고 갔음에도 기분이 좋아보이는 필브리안 때문에 다소 당황했지만 꾸려논 짐을 마지막으로 체크하는데는 별 하자가 없었다. "유니야~, 이것 봐!" 끝까지 체크를 끝낸다음에야 유니펠스는 그가 내미는 것을 보았다. 손가락 부분은 없는 검은 가죽 장갑이 필브리안이 내민 손에 껴 있었다. "멋지지?" 황홀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 보는 필브리안을 보며 유니펠스는 피식 웃었다. 그것을 봤다면 무척 행복해 했을 필브리안이었지만 아쉽게도 장갑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다. "이거 마법 걸린 장갑이래." 필브리안은 그것이 선물을 받은 물건임을 은연중에 표현했다. "힘을 늘려주는 장갑이래, 마법을 쓰듯이 마나를 운용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힘이 는데! 대단하지?" 건틀렛에 주로 걸어놓는 마법이었으나 유니펠스가 생각하기에도 필브리안에게는 투박한 건틀렛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보기에는 그냥 고급 장갑으로만 보이는 그것이야 말로 필브리안에게 딱이라 생각하며 누가 줬을까 조금 궁리해보는 유니펠스였다. "아! 또 손가락 부분이 없어서 굳이 벗지 않아도 된데. 그리고 진짜 손가락부분까지 있어야 되는 경우엔 다른 장갑을 안에다 끼면된데, 검은 색이라 어느 색도 어울릴거라고 했어! 멋지지?" 유니펠스가 고개를 끄떡여 주자 필브리안은 너무나 기뻐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떠나는 거지?" 유니펠스가 다시 고개를 끄떡이자 필브리안은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잘자!" 혼자 남은 유니펠스는 침대 위에 올려 놓은 뽑히지않는 검을 들어 올렸다. '가지고 갈까?' 흥미가 생겨서 사긴 했지만 솔직히 뽑히지 않아 몽둥이로 밖에 쓸수 없는 검은 쓸모가 없었다. '모르겠군.' 왠지모를 끌림이 자꾸 유니펠스를 사로잡았다. '모르겠어…….' ======================================================================== 기분 좋은 날입니다. 추천도 받고...ㅠ.ㅠ 감개가 무량.....이주영님, 김기태님 정말로 감사... 빨리 빨리 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정말로 유감스럽게도 전 내일 오티를 갑니다^^;;; 돌아오면 신속 정확하게 올리겠습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036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1일 07:42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243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더운 기운을 품었지만 땀에 찌든이에게는 더할나위없이 반가운 존재가 불어왔다. 암살자를 대비해 작게 만든 창문 틈을 비집고 바람이 불어오자 정면으로 그것을 맞이한 소년은 눈을 감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곧 부자연스럽게 끊긴 바람때믄에 그는 불쾌한 얼굴로 눈을 떴다. 창문을 닫은 남자가 그의 눈에 매정하게 보였다. '쳇……암살자한테 죽기전에 쪄죽겠다.' 소년은 차가워 보이는 눈매로 남자를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무뚝뚝한 남자는 이미 서류쪽에 눈을 돌렸기 때문에 노려봐 봤자 소용없었기 때문에다. 불쾌하겐 보였지만 여전히 당당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던 다른 남자는 문 듯 미소를 지었다. 남색눈동자가 무척 포근해 보였다. '전엔 바싹 얼어서 일부로 수면의 열매를 먹였었는데…….' 옆에서 금안의 주군이 자신을 힐끔보는 것이 느껴졌다. 왠지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왜 웃는거야?' 답은 여전히 미소. 테밀시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자랑하는 뮤미라의 그것을 정면으로 대하고도 어깨를 으쓱이며 무심히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뮤비라가 그런 미소를 지을 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그의 머리속에서 구상되고 있음을. 또 그 사건들이 자신에게 절대 유해한 것이 아님을. 때문에 안심하고 신경을 끊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소년은 결국 약간의 신경질과 함께 눈을 떴다. "아직 멀었습니까?" 소년에게 눈도 돌리지 않은채 테밀시아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니." "쿡." 갑자기 입가를 막으며 고개를 돌리는 뮤비라를 불쾌한 빛을 가리지 않고 돌아봤다. "아, 이런 무례를……죄송합니다, 페르노크님." 하지만 그의 입가는 여전히 실룩대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별볼일 없는 창문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왠만큼 터진 공간이었으면 그도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훈련이란 것이 익숙한 그의 정신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밀페된 공간에 장정한 남자 둘과 함깨 갇여(?) 있는 경우는 조금 달랐다. 체온이 맞다아 있어 온도도 점점 올라가는 데다 일체, 공기의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있어야 되는 경우는……고역이었다. 페르노크는 이마에 달라붙는 은색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고개를 뒤로 젓혔다. 땀에 절은 그의 하얀 목덜미가 요염하게 보일법도 하지만 곁에 있는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저녀석들만 없으면 마법이라도 쓰는건데…….' 「보조」계열 중에서 이런 경우에 쓰이는 잘잘한 마법을 이미 터득한 상태였던 페르노크로써는 더 열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더위에 져서 마법을 사용했다간 더더욱 「천재」마법사 취급을 당할 것이다. 그로서는 아무리 마나와 친해져 마법을 다룰수 있다고 해도 역시 일순위는 검이었기 때문이다. 파크다의 선배에 의하면 준소속이라도 '길드'에 종속되 일생 마법에 몸 바쳐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자중에 자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더우시면 「냉각」마법이라도 쓰시지요?" 친절히 말하는 뮤비라를 페르노크는 의아하게 보았다. "리커버리를 쓰실 수준이라면 「보조」계열의 간단한 「냉각」마법쯤은 쉬우실텐데요?" 조금 굳는 그의 모습에 뮤비라는 생긋 웃어보이며 테밀시아에게 이것저것 서류를 넘겨주고, 받아 다시 검토하는 것에 관심을 돌렸다. "봤습니까?" 차가운 목소리에 뮤비라는 조금 놀라 눈앞의 소년을 쳐다 보았다. 그가 아는 소년은 언제나 소근소근 말했고 그나마 못알아 들은 그가 반문을 하면 얼굴을 붉히며 고개만 저을뿐 다시 말하진 못하는 이였다. 헌데 지금 눈앞의 소년은 차갑고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예." 테밀시아도 이내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들어 동생을 보았다. 그의 동생은 상당히 오만해 보이는 포즈, 즉 팔장을 끼고 등을 의자에 깊숙히 빠묻는 포즈를 취한체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죠?" 뮤비라는 공손히 답했다. "그간 깨달음이 많으시구나, 했습니다." "거짓말." "네?" 하지만 이미 페르노크는 뮤비라에게 관심을 끊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그에게 뮤비라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기억상실 걸린 녀석 데리러 온 녀석이 그 꼴을 보고 그 딴 생각을 했다고?' 얼마나 침묵이 깔렸을까? 뮤비라가 땀에 절은 체 인상을 찌푸리고 앉아있는 페르노크를 한번 보고 테밀시아에게 말했다. "많이 더우신 모양인데, '윈디' 라도 꺼낼까요?" "안돼." 페르노크는 생소한 단어에 궁금증 치밀었지만 별로 묻고 싶진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을 뭘로 생각했는지 뮤비라는 테밀시아를 놀리듯 말했다. "작년처럼 페르노크님이 감기에 걸리실까봐 그러시는 거죠?" 페르노크가 눈을 뜨며 자신을 쳐다보자 테밀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서류에 집중했다. 뮤비라는 쿡쿡대며 페르노크에게 말했다. "기억나십니까?" 페르노크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고 뮤비라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원래 이런 '귀족용' 마차에는 신선한 공기를 위해 '윈디'를 꺼내 놓습니다. 작년에 페르노크님께서는 '이므르'에 입학하시고 처음으로 여름방학때 본가에 오시기로 했습니다." "처음……?" 뮤비라는 조금 헷갈리는 얼굴로 답해 주었다. '진짜 기억상실……인가?' "그동안은 '길드'에서 마법을 배우셨습니다." "그런가……." 조금 복잡한 얼굴로 페르노크는 뮤비라에게 계속 말하라고 시선을 던졌다. "그때 테밀시아님이 마중을 나갔었지요. 헌데 몸이 많이 약해지셨던 페르노크님은 계절에 맞게 온도를 조절하는 '윈디'의 찬바람에 감기에 걸리셨었습니다. 테밀시아님께서는 그 때문에……." "그만." 뮤비라는 테밀시아의 제지에 미소를 띄며 입을 다물었다. 페르노크는 상당히 부드러운 시선을 테밀시아에게 보냈다. '의외로 상냥하네.' 이내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한 모양이군." 서둘러 내리는 테밀시아의 모습은 냉엄한「카르민」, 고위 중앙 귀족도 몇수 지는 '지배자'의 모습을 찾아볼수 없었다.
번  호 : 18037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1일 07:42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78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어서오십시요." 하인들이 나와 인사를 했고 테밀시아는 고개만 약간 끄떡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페르노크와 뮤비라가 따랐는 데 페르노크는 이상한 점을 알수 있었다. 바로 자신에게 인사하는 하인들이 없다는 것. 페르노크의 속은 평범한 여고생이었기에 특별히 인사등을 원한것은 아니였다. 자신보다 윗사람인 테밀시아가 있어서 그 밑의 사람 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게 아닐까 조용히 예상해 보았던 페르노크는 자신의 뒤에 있는 뮤비라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빌어먹을......." 뮤비라는 반사적으로 앞의 소년을 보았으나 위치상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그가 들었던 말이 헛소리였는지 진짜인지 파악할수 없었다. '도데체 이자식은 어떻게 처신했던거야. 별의 별놈이 성질건들이고 있어.' 페르노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면서 테밀시아에게 굽신거리는 것들을 기억해 두었다. 테밀시아는 앞에 있었기에 동생의 상황을 알수 없었다. 그저 집사의 보고에 정신이 팔렸을뿐. 그동안 무슨일들이 있었는 지 집사는 테밀시아를 한참 서있게 했다. 뮤비라는 어느새 테밀시아 옆에 가서 집사의 보고를 같이 듣고 있었고 하인들은 허리를 약간 숙인체 둘의 가방과 페르노크의 짐들을 마차에서 가지고 와 옆에 서있었다. 그때 페르노크는 나직이 말했다. "씻고 쉬고 싶습니다." 그의 존재를 모르진 않았으나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던 이들은 그제서야 그를 돌아보았다. 테밀시아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더니 이내 인상을 굳히고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뭐야?' 인상을 쓰는 그를 보며 페르노크는 아까의 느꼈던 호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테밀시아는 그 표정 그대로 집사와 머슥이 서있는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마주 인상을 쓰며 그를 보았던 페르노크와는 달리 그들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여짓껏 방으로 안내도 하지 않고 뭐하고 있었던 거지? 당장 목욕물 준비하고 방으로 안내해라." 페르노크의 얼굴이 조금 풀리며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다시 한번 쓸어 올렸다. 뮤비라는 옆에 있던 소년을 호명하며 안내를 명했다. 소년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곤 들고 있던 짐을 한번 추수리고는 앞장서 걸었다. 그 뒤를 따르는 페르노크에게 여전히 인사하는 이들은 없었다. ======================================================================== 집의 컴이 먹통이 됐습니다. 토요일날이나 일요일날 복귀되니 그때 많이 올리겠습니다. 지금은 PC방이지요. 잠시 짬을내서 씁니다. 아주 조금이라 죄송......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038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1일 07:4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74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으리으리한 본관을 지나 아름다운 정원에 접어들었다. 성인의 발놀림으로 10분을 걸으면 당도할 거리에 '페르노크' 의 전용 거주지라는 별채가 자리잡아 있었다. 삼층으로 되어있는 건물은 잘사는 평민의 집만했는 데 '이곳'에 와서는 큰 건물만 봐왔던 페르노크에겐 적당히 아담한 사이즈로 보였다. 오랜 세월을 보냈는지 집은 관상용 넝쿨로 완전히 둘러싸여져 있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수 없었다. 지붕은 반듯하게 기울어진 삼각모양을 하고 있어 햇살 좋은날에 올라가 낮잠을 자기 딱이었다. 정원을 빠져 나오자 적당한 크기의 공터가 별채 앞에 있음을 알수 있었다. '검술 연습하기엔 딱이군.' 울창한 나무가 공터를 포함한 별채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정면에 나있는 길쪽에만 있지 않는다면 눈에 안띄게 연습할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뮤비라에게서 받은 열쇠를 무성의하게 문에 꽃아 돌렸다. 그리고는 한걸음 옆으로 물러서 페르노크가 먼저 들어갈수 있게 자리를 텄다. 더위에 찌들었던 페르노크는 집안에 한걸음 집어넣기가 무섭게 상쾌함을 느낄수 있었다. 집안에선 시원한 바람이 쉬지않고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 아니다. 반사적으로 말은 튀어 나왔으나 페르노크는 곧 아님을 알수 있었다. 마나의 작용이라면 그것의 운용이 보일터였다. 지금 페르노크의 눈앞에 보이고 있는 마나는 고요하기만 했다. '뭐지?' 페르노크의 뒤를 따라 안에 들어온 소년의 남색 머리카락이 바람에의해 복잡하게 흩날렸다. 소년은 짐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고 이 집의 구조를 몰랐던 페르노크는 그냥 따라가 보았다. 이층에 당도한 소년은 한손에 들려 있던 짐을 내려 놓고 다른 손에 쥐여 있는 짐을 들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페르노크는 따라가 볼까 하다가 이층을 둘러보기로 했다. 넓게 터있는 창문밖으로 발코디가 보였는데 그것에 비치는 광경이 아까의 건물이나 정원이 아닌걸 보아 발코디는 별채의 뒤쪽으로 나있는 모양이었다. 묘한 구조였으나 별로 신경쓰이진 않았다. 밖의 풍경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깨끗한 연못이 넓직히 펼쳐져 있었는 데 나가서 내려다 보니 아름다운 물고기떼가 노닐고 있었다. 발코디로 들어오기전에 보았던 선반쪽으로 가 열어보자 여러 가지 병들이 보였는 데 아마도 이 물고기들의 밥인 듯 싶었다. 페르노크는 그것을 가져다 연못위로 뿌려보았다. 이내 몰려드는 물고기들이 보기 좋았다.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페르노크가 돌아보자 남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공손히 서 있었다. "짐정리가 끝났습니다." 또래 소년들 답지 않게 침착히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의 윤기도는 남색머리카락은 주인의 콧날근처까지 내려와 이마며 눈이며 가려댔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음침해 보였다. 턱을 괴고 소년을 보던 페르노크는 이내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알았습니다." 소년의 어깨가 움칫 하며 한번 흔들리는 듯 싶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페르노크는 일층부터 집안을 구경할 셈으로 소년의 뒤를 따라 계단으로 접어들었다. '블루 블랙이 이런 색일까?' 페르노크는 소년의 특이한 머리색을 뒤에서 충분히 감상했고 그 시선을 느껴야만 했던 소년은 바싹 긴장을 해야했다. 헌데 페르노크는 한가지를 잊고 있는 듯 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이야 말로 이 '특이한' 세상에서도 '특이한'색임을 말이다. 소년은 긴장감에 뻣뻣이 걸어 내려가다가 결국은 발을 헛 딧고 말았다. "앗!" 눈을 질끈 감은 소년은 곧 닥쳐올 격한 충격을 각오했다. 허나 고요함만이 소년을 반길뿐이었다. "후~." 뒷통수 쪽에서 들려오는 안도의 숨결에 소년은 용기를 내며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하얀 손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을 순차적으로 짐작해 낸 소년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려한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 있는 소년과 그뒷쪽으로 마구 허공을 맴돌고 있는 빛나는 은색 실타래들이었다. "괜찮습니까?" 그 다음에 소년이 인식한 것은 차갑지만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페르노크는 놀랐는지 멀뚱이 있는 소년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힘이 빠지고 있는데도 제대로 일어설 생각을 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안부를 물었지만 그나마 씹혔고 매정하게 뿌리치기엔 소년이 가냘퍼 보였다. "저기……." 소년은 순간 정신을 차린 듯 눈을 크게 떠 보였으나 오리혀 그것이 나쁘게 작용해 버렸다. 좀더 설명하자면 놀란 소년은 페르노크의 손을 크게 뿌리쳤고 반쯤 앞으로 고꾸라진 폼을 하고 있던 그는 어떻게 해볼틈도 없이 허공으로 떠 버린 것이다. "어?" 페르노크는 뿌리쳐진 손을 다시 길게 뻗었으나 아슬아슬하게 지나쳤고 난간을 잡고 있던 손마저 놓쳐버렸다. -우당탕- 둔탁한 아픔을 느끼며 페르노크가 눈을 떴다. 무의식중에 잡어버렸는지 소년은 그의 품안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페르노크가 감싼기 때문에 다른 외상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페르노크는 피가 흐르는 자신의 오른손을 한번 내려다 보고 작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리고는 사람이 오기전에 해결해야 한다 마음먹었다. "일단 이녀석 먼저……." 키는 비슷했는데도 소년은 너무나 가벼웠다. 일단 이층 쇼파에 눕히고 나서 페르노크는 방을 뒤져 보았다. 그는 아직 어디가 침실인지 몰랐던 것이다. "취미생활하는 곳인가…… 이층은?" 마법서적으로 꽉찬 서재를 보면 그건 아닌 듯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였다. "일층은 별거 없었던 같고……." 삼층으로 급히 올라가는 그의 손에선 이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다락방처럼 보이는 안락한 방안 한가운데 푹신해 보이는 침대가 있었다. 옆에 연결되어 있는 작은 문은 지금의 페르노크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날르는 듯 한번에 이, 삼칸씩 뛰어내리며 이층으로 내려갔다. 기절한 듯 보이는 소년의 머리에선 피가 나진 않았지만 그 상태가 더 위험할수 있다는 것을 페르노크는 알고 있었다. "환자를 막 움직이는 건 안 좋지만 별수 없지." 조심스레 소년을 안아든 페르노크는 진동이 최대한 닿지 않게 배려하며 계단을 올라섰다. "휴~ 이젠 뭘해야 하나." 일단 소년을 눕히고 이리저리 살펴본 결과 작은 찰과상에 불과함을 알아냈수 있었다. 안도한 페르노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침대 옆에 주저 앉다가 축축히 이마를 적시는 불쾌한 이물질을 알아차렸다. "이런……." 너무 놀라 아픈것도 잠시 잊었던 만큼 팔의 통증이 몰려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치유, 내가 바라는 것은 복귀의 힘. 리*커*버*리*" 은은한 녹색빛이 그의 오른손을 감싸며 기분좋은 온기를 머금었다. 얼마나 그랬을까? 페르노크는 고통이 완전히 가신 얼굴로 이젠는 피만 묻어있는 손목을 보았다. "왠지 여기 와선 정상적인 상태 유지하기가 어렵군." 페르노크는 신음성을 흘리는 소년의 얼굴을 보다가 이내 손을 내밀어 캐시팅에 들어갔다. 녹새빛이 마찬가지로 소년의 다친 부위를 감쌌고 소년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해 졌다. "어딜가나 인간관계는 피곤해……." 페르노크는 침대에 업들여 잠에 빠져 버렸다. 그가 잠들고 얼마지나지 않아 소년은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잠들어 있는 이를 보았다. '기억상실은 거짓이었나?' 통증이 말끔히 가신 몸상태에 놀라며 다시 호흡을 가다듬어 보았다. 그가 깨어난 것은 삼층 침대로 옮겨 질 때. 페르노크의 조심스런 손길을 느꼈을때였다. "쓸데없는 친절……." 방안을 휩쓸고 다니던 바람이 이내 소년의 머리카락을 들어올려 버렸다. 드러난 그곳에선 깊은 남색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쓸데 없는……쓸데 없는……." 중얼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고 있음은 알아챌 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번  호 : 18039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1일 07:43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6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6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80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저애가 이번 우승자라며?" "사람 무시하고 있어." "뭐라 말을 걸어도 대꾸도 않하고말야." "혼자 잘났지." 웃기지마. 누가 그딴 질문에 대답할성 싶어? 그딴……「패거리」에 들라는 질문따위에……! "애들아!! 긴급 뉴스! 인태 선배가 재한테 교재 신청했대!!" "어머, 그래서?" "이게 더 황당해! 거절했댄다?" "뭐야?" 닥쳐. 누가 그딴 자식과 ……. '나와 다니면 너도 콧대가 서겠지? 우리 상부상조하자고.' 하는 녀석따위와 누가!! "저애가 그얘야……." "저애가……." "저얘가……." 시끄러! 남에 일에 왜 상관하는 거야? 아니 누구 일에 상관하든 나완 상관없어! 난 내버려둬, 내버려둬!! "페……님. 페르노크 도련님." 어깨를 흔들어 주는 고마운 손길에 페르노크는 간신히 가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색 실타래가 그의 눈앞에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그 사이로 가을하늘빛 눈동자가 걱정을 머금은채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 페르노크는 기분이 좋아졌다. "아 …… 네." 허리를 펴며 침착하게 말하는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낀 소년은 일어서 낮게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목욕물이 나왔습니다, 도련님." "알았어요……." 말을 흐리는 모습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린 소년은 처음으로 웃으며 말했다. "요크노민입니다, 도련님." 페르노크는 일어서며 계단쪽으로 걸으며 말했다. "머리는 괜찮습니까, 요크노민?" "……예." "다행이군요." 앞장서 걷던 소년의 어깨가 아까와 마찬가지로 움칫하는 것을 발견한 페르노크는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예?" 정색하며 반문하는 그에게 더 이상 물어본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린 페르노크는 고개를 저으며 됐다고 했다. "노민! 창문을 닫아라." 요크노민은 답없이 그말을 따랐고 명령한 여자는 요크노민의 침묵이 익숙한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도련님, 미지근한 물로 하시겠습니까, 시원한 물로 하시겠습니까?" 이상한 돌맹이를 들고 여자가 물었다. 페르노크는 일단 욕조에 있는 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적당한 온도, 그러니까 미지근한 느낌이 그의 손을 감쌌다. "이대로 하겠습니다." 여자는 조금 눈쌀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숙이며 들고 있던 돌을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녀의 손에 넘겼다. "차가운 물로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려 했습니까?" 여자는 이상한 질문을 다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소녀의 손에 들린 돌을 가르켰다. "'워티'로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페르노크는 흥미가 도는지 손을 내밀어 그것을 달라고 했다. 여자는 의아해 하면서도 그것을 건네 주었다. 돌맹이는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는데 전체적인 색이 하얀색이어서 무척 이뼈 보였다. 아주 조금 반투명해서 간신히 안을 들여다 볼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짓푸른 보석이 들어 있었다. 작은 크기가 아니여서 보석안에 새겨진 '룬'어를 알아볼수 있었는데 페르노크의 눈에도 익숙한 '룬'어가 간간히 보였다. '「냉동」계열의 '룬'과「가열」 계열의 '룬'이 전부 써있네. 그럼 이건 따뜻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건가?' 페르노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었다. "예, 이건 귀족가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알겠습니다." 여자는 다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을 내밷았다. "아랫것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도련님." 페르노크는 돌을 계속 살펴보다가 그말에 놀라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눈에 섞인 우려를 읽은 페르노크는 그녀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 걱정하는……' "당신은 제게 무엇입니까?" 여자의 눈은 당장에 울것처럼 변했으나 페르노크로써는 어쩔수 없었다. "정말로 잊으신겁니까, 저마저?" "죄송합니다." 여자는 당장에 고개를 마구 젓더니 힘들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뇨, 도련님이 더 힘들실텐데……전 도련님의 유모랍니다. 젓먹이일 때부터 제손으로 도련님을 키워왔지요……." "유모……?" 멍한 눈빛의 페르노크를 대면한 여자는 결국 눈물을 떨꾸었다. 그 모습에서 유일한 친구였던 친구가 겹쳐졌다. 그애도 늘 찟어진 내 교과서와 더러워진 책상, 상처투성인 내 몸을 보며 저렇게 울어었다. 그녀자신도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날 위해 울었었다. "미안해요. 기억은 안나지만……." 난 언제나 그녀에게 말했었다. "전 당신이 좋네요." '짜증나." "절 위해 울어주시고." '왜 항상 날위해 울지?' 이상한 것은 모진말을 들은 그애도 위로의 말을 들은 이 여자도 똑같이 웃는 다는 것이다. 내가 물으면 그녀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왜……웃으시나요?" '왜 웃지?' "여전히 상냥하시군요, 기억은 사라졌어도……." '……는 언제나 상냥해.' 그러면 나는 언제나 인상을 쓰며 그 앞에서 사라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사라질 상황이 아니였다. "혼자 목욕하고 싶네요, 나가주시겠어요?"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끄떡이는 페르노크를 못미더운 듯 보다가 뒤에 와 서있는 요크노민에게 명했다. "도련님 시중을 봐 드려라." 혼자하겠다고 '명령'할까 하다가 자신을 생각하는 그녀의 씀씀이에 돌을 꾹 쥐면 참았다. ……돌? "아, 이거." 그녀는 공손히 받아들고는 계단쪽으로 걸어갔다. 페르노크는 문 듯 생각난 듯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아랫것들에게 높임말을 쓰는게 아닙니다." 페르노크는 결국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름이 뭐지?" "로레나자입니다, 도련님." "가봐요." 그녀는 다시 돌아간 페르노크의 말투에 한숨을 쉬며 내려갔다. "한명쯤은 '이몸' 편이 있었군." 먼저 머리를 감던 페르노크는 다시 한번 귀찮음을 느꼈다. 그러다 생각났는지 요크노민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까보니 욕실이 따로 있던데 왜 여기서 씻어야 되는 거죠?" 요크노민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곳은 샤워 용인데 도련님은 지금 피로하신 상태기 때문에 약탕에서 목욕하시도록 테밀시아님이 배려하신겁니다. 약탕으로 목욕을 할 때는 햇살을 잘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발코디가 나있는 이층에 통을 가져다 놓은거죠." 만일 요크노민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었다면 그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한다는것에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그를 몰랐기에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끝냈다. 그러다 생각났는지 다시 물었다. "요크노민은 뮤비라를 많이 닮았군요." "……." 별 생각없이 던진 말인지 페르노크는 답은 기대로 않하고 물속으로 잠수했다. 그 모습을 보며 요크노민은 몸을 작게 떨곤 속삭였다. "제가 닮았을 리가 없잖습니다……그런 위대한 형님을……." ====================================================================== 히잉~ 어떤 독자님께 삼연참한다고 했는데 ...... 죄송...... 다음회는 조금있다가 올리겠습니다. 기다렸다 삼회 한꺼번에 올릴까하다가 그냥 먼저 두회올립니다. 컴도 복구됐고 이제는 맨날 올릴테니 용서를.......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07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3일 09:47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2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45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이날 페르노크를 가장 당혹하게한 때는 식사시간이었다. 엄청나게 긴 식탁은 이미 상상했던 바였다. 그 위에 쌓여져 있는 진수 성찬도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비록 이집은 뷔페식으로 그 긴 식탁에서 음식을 덜어 둥그런 식탁에서 식사한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었다. 그가 당황한 것은……. "이쪽은 카한세올, 네 둘째 형이다. 인사해라." "……?" "왜 그러지?" "아……죄송합니다. 제가 차남이라고 들었었기 때문에……. 처음 뵙겠습니다, 카한세올 형님." "건방진……." "카한세올! 페르의 상태는 이미 들었잖느냐!" 카한세올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페르노크에게 한마디 하려다 테밀시아의 가드에 입만 비쭉이며 고개를 돌렸다. 계속 마주하기엔 테밀시아의 압력이 너무 컸던 것이다. "나중에 설명해주마." 어리벙벙해 있는 페르노크에게 테밀시아는 작게 말하며 앞서 걸어갔다. '어떻게 된거야……?' 식사를 시작하고도 그 둘째 형이라는 작자는 계속 페르노크를 힐끔거리며 노려보았다. 간만에 기분이 좋았던 페르노크는 점점 불쾌해지더니만 처음의 하인들의 '무시'까지 연상되면서 완전히 열받아버렸다. 그래도…… "맛있다." 음식을 먹으면서 나름대로 기쁨에 젓은 그였다. '라면따위완 비교도 안되네.' 중요한 양식으로 쓰이던 라면을 가차없이 배신(?)하면서 말이다. "페르노크……." "예?" "아니다." 평소 고기나 야채등은 손도 안내고 단것만 골라 먹던 페르노크였다. 그럼에도 살은 안찐다고 뭇 여성들의 시기 대상이었던 그가 이것저것 맛있게 먹어대는 모습은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기억을 잃더니 천박해 졌군." 한입크기로 고기를 썰던 페르노크는 카한세올을 돌아 보았다. 그의 맞은편에서 좀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카한세올은 그의 시선을 느끼자 살짝 웃어보였는데, 그 누가봐도 그 미소는 좋아보이지 않았다. 경멸과 조롱의 미소……. 페르노크는 내심 욕을 해대면서도 똑같은 미소로 그를 마주하는데 성공했다. 잔뜩 굳은 그의 얼굴을 보고 통쾌해 하며 썰은 고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킥킥." 작은 웃음소리가 묘하게 페르노크의 귓가에 정확하게 꽂혔다. 페르노크가 돌아본 곳에는 고개를 약간 숙인 체 식사시중을 돕고 있는 남색 머리결의 소년이 서 있었다. '요크노민?' 페르노크의 시선을 느꼈을까? 요크노민의 고개가 들려지면서 페르노크와 눈이 마주쳤다. 비록 머리카락에 다 가려졌지만 분명 눈이 마주쳤다, 느껴진 페르노크는 작게 미소를 지은 뒤 식사에 열중했다. 요크노민이 그런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음을 모르고……. 주인님들의 식사가 끝난 뒤 요크노민은 다른 시종들로부터 뒷정리를 떠맡아 버렸다. 약한 그는 언제나 모든 시종들의 노예였다. 그는 강한 형과는 달랐다. 언제나 당당한 형과는 달랐다. 결국 시녀가 하는 부엌의 걸레질까지 맡아버린 요크노민이 숙소로 돌아온 시간은 제 11시를 넘어서였다. 형의 배려아닌 배려덕에 그는 독방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배려가 절대 고맙지 않았다. 아니, 오리혀 원망스러웠다. 특별 대우를 받는 그에게 다른 시종들의 질시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크노민은 열여덞살임에도 갸날프기 그지 없는 자신의 몸뚱이를 내려다 보았다. 역시 마른편에 속하는 페르노크의 품에도 한번에 안길만큼 그는 가늘었다. 그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너무나 서글펐다. 듬직한 몸매, 강한 힘, 명석한 두되의 소유자인 형과는 너무나 달랐다. 숙소로 돌아가는 어두운 길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곧 알아차릴수 있었다. 요크노민의 얼굴은 점차 무표정해졌다. "요크노민, 형도 돌아왔는데 이제는 좀 두둑하겠지?" "……." 주인들 앞에선, 아니 하다못해 힘이 강한 노예앞에서도 기를 펴지 못하는 시종들. 그들은 유일한 '약자' 요크노민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다. 과묵한 요크노민이 자신의 형에게 고자질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들에게 더 이상 꺼릴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퍽- 요크노민의 침묵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그들은 언제나 똑같은 시비를 걸었고 또, 때렸다. 요크노민의 갸냘픈 몸이 거친 구타를 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을때야 그들의 손길은 멈췄다. 하지만 요크노민에게 있어서 더욱 소름끼치는 순간은 맞을때가 아니였다. 요크노민의 작은 몸을 더듬으며 돈이 될만한 것들을 앗아가는 손길. 요크노민이 가장 치욕스럽게 느끼는 손길이었다. "쳇, 역시 '충견'의 가족은 들고다니는게 달라도 다르다니까." 그의 형이 이번에 주군을 따라 '이므르'로 외출을 했을때 잠시 짬을 내서 사왔다는 목걸이……. 욤국의 유일한 마법길드가 있는 '자이젠'에서만 구할수 있다는「수호」의 주술이 걸려있는 조그만 남색 보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가 어느새 우악스런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반항을 하면 더 심한 구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요크노민의 어깨를 정답게 두들기고 사라졌다. 이미 익숙해진 일상들……. 남겨진 요크노민의 무표정한 얼굴에선 분노만을 읽을수 있었다. "크윽……." 구토가 날정도로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요크노민은 힘겹게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그는 그저 빨리 들어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노민?" 언제나 부드러운 목소리……지금은 당황한 목소리가 요크노민의 귓가에 울렸다. "형……님." "어디가 아픈게냐?" "아뇨……아뇨……." "거동이 불편해 보인다, 어서 들어가자." 들어가? 밝은 안으로? 그럼……상처가 보이겠지……비참하게 맞고 다니는 몰골이 모두 미춰지겠지……. "노민?" 거칠게 자신을 뿌리치는 손길에 조금은 상처를 받으며 뮤비라는 한걸음 물러섰다. "할말 없습니다. 가보시지요." "노민아……." "……쉬고 싶습니다." "알았다." 뮤비라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요크노민의 앞에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가보마, 쉬어라." "……네." 부드럽게 미소짓는 형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요크노민은 간신히 답했다. 같은 남색인데도 그의 것은 부드럽다……. 같은 남색인데도 그의 것은 강인하다……. 같은……같은……핏줄인데도 그는……그는……. 요크노민은 사라지는 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푹숙였다. 그는……다르다……. ===================================================================== 여기서 잠깐! 독자를 무시하는 질문 한가지를 던지겠습니다. 요크노민은 누굴까~~~요? ............................... 딩동댕! 바로 페르노크의 영원한 벗, 페르노크의 영원한 조언자........ 짬짬이 나왔던 회고록의 작가, 요크노민입니다^^ 페르노크의 이야기가 상당히 길게 늘여지지 않을까 조금 심려해보며....... 낼도 올리겠습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076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3일 09:47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3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38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노민." 음침해 보이는 남색의 머리카락의 소년이 돌아보자 로레나자는 조금 의아하게 그를 보다가 간식바구니를 넘겼다. "어디가 아픈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바구니만 받아 들었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던 로레나자는 자신의 본론만을 말했다. "그거 도련님께 가져다 드려라. 식성이 변한것 같지만 그 입맛이 어디 가겠니." 천을 덮어놨어도 단내가 풀풀나고 있는 바구니의 내용물을 쉽게 짐작할수 있는 요크노민이었다. 고개를 숙여보이고 돌아서는 요크노민을 걱정어린 시선으로 잠시 보던 로레나자는 이내 자기 할일에 몰두했다.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것은 페르노크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거기 파이 아직 멀었나? 도련님은 애플파이를 좋아하신단 말이다. 어서 서둘러." 요크노민은 왠지 허전한 목덜미를 왼손으로 쓸어 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어딘선가 무언갈 휘두르는 둔탁하면서도 시원한 소리가 들려왔다. "......?" 정원을 지나고 어느정도 울창하게 나있는 나무를 지나, 별채 앞 공터에 도착한 요크노민은 땀에 젓어있는 둘째 도련님을 발견할수 있었다. 혹시나 싶어 그의 주위를 둘러보던 요크노민은 달리 휘두를만한것이 없자 고개를 갸웃할수 밖에 없었다. "뭡니까?" 그제서야 요크노민을 발견했는지 돌아보며 묻는 페르노크였다. 요크노민은 들고오던 바구니를 들어보였다. 호기심이 생겼는지 페르노크는 곧 다가와 받아 들었다. "에?" 각종 케이크와 파이, 초코렛, 캔디........ "음......이 통은 뭐지?" 묘한 통에 들려있는것을 열어보자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아이스크림이 위용을 드러냈다. 단것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았던 페르노크는 작게 혀를 차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냉동 '룬'이 새겨져 있군.' 페르노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광적으로 단것을 좋아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던 요크노민으로써는 의외였으나 별로 놀라진 않았다. 변한것이 한두개야지....... "이거......혼자 다 먹어야 됩니까?" 요크노민은 뜻대로 하라는 듯 말없이 페르노크를 보았고 페르노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요크노민을 잡아 끌었다. "같이 '처리'해주시겠습니까?" "예?"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요크노민의 대답(?)이 금방 나왔다. "남기면 로레라자가 또 걱정할것같고.....먹자니....." 인상을 잔뜩 치푸리는 모습에서 그의 속을 짐작할수 있었지만 요크노민은 할일이 많은 몸이었다. 비록 원래 그가 해야할 일들은 아니였지만........ "전....." "할일이 남아있나요? 아침시간은 끝난것으로 알고 있는데..... 듣자하니 요크노민이 하는 일은 식사시중이라면서요?" "아......" 공식적인 일이라면 그것이 다였다. 그밖의 로레라자의 잔심부름하고...... 하지만 그는 모든 하인들의 '노예'....... 가장 일찍 일어나야했고 가장 늦게 자야했다. 하지만 그것을 어찌 이 앞의 세상모르는 도련님에게 말할수 있단 말인가? 말한다해도 이해하기보다는 하인들의 '명령'이 자신의 '부탁'보다 중요한것이냐며 울먹이거나 화내거나.......둘중 하나 일텐데. "들어가요." 페르노크는 친구와 닮은 로레라자가 우는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아직까지는. "음.......이거 맛있는데. 요크노민도 먹어봐." "아.....네." 솔직히 말해서 맛은 있었지만 어디 제대로 느낄만한 상황인가. 정상적인 관계라면 감히 쳐다도 못보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 죽어야 하는 절대적인 '상하'관계였다. 지금은 편하게 대하라지만 언제 '심심풀이'가 끝나 원래대로 돌아갈지 알수 없었다. 요크노민은 자신의 나이를 묻고는 대답을 듣자 곧장 말을 놓는 도련님을 보면서 어찌해야할바를 몰랐다. 그쪽에서 반말을 하는것은 당연한것이다. 갑자기 존대말을 했을땐 경악을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지금 세삼 말을 놓아도 별 상관은 없었다. 헌데......... "말 놓라니까?"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나 있는지...... 의외로 순진한 도련님을 보며 요크노민은 당혹감에 아예 입을 다물었다. 저 도련님은 침묵을 어색해 하지 않으니까....... 이제는 맛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아이스크림을 떠먹다가 페르노크가 혼잣말인지 아닌지 모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테밀시아 형님께 그일을 듣지 못했네........" 자신을 쳐다보는 요크노민을 느끼면서 다시 한입 떠먹고는 중얼거렸다. "카한세올 형님말이야." 요크노민의 무표정은 변함없었으나 내심 당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페르노크가 일부로 말을 돌린것이지만 요크노민으로써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카한세올의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는 가쉽거리였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금기였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함부로 입에 담았다간 목이 달아나는 것은 순식간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페르노크의 연상은 다른곳으로 샜다. "형님하니까 생각난건데......" 하면서 유심히 자기를 살펴보는 눈길에 요크노민은 고개를 더욱 숙였다. 하지만........ "....!!" "역시 닮았어." -탁!- 반사적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들어올린 손을 일단 쳐냈으나 곧 상대가 누구였느지 깨달은 요크노민은 잔뜩 긴장했다. 페르노크는 조금 붉어진 오른손을 왼손으로 몇번 주무르다가 굳어있는 요크노민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저......." 올것이 왔다, 요크노민은 곧 닥칠 불호령을 예감했다. "미안." ".....?" 요크노민이 올려다 본 페르노크의 얼굴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페르노크는 캔디하나를 집어올리고는 일층에 딸려있던 간이 부엌쪽으로 걸어갔다. 놀라 굳어있는 요크노민을 뒤로한체. 믿겨지지 않았다. 저 위대한 「카르민」이 종복따위에게........ 이것저것 뒤지고 있는 페르노크의 모습을 지켜보는 요크노민의 입가엔 그 스스로도 인식 못하는 미소가 배여있었다. -미안,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게 있을 텐데.......미안해.- 비록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소를 띄고 있는 요크노민의 모습은 결코 음침해 보이지 않았다. ======================================================================= pc방입니다^^ 다음 강의때까지 시간을 때우려 왔지요. 집에 인터넷을 깔고 나선 pc방 가는 돈이 그렇게 아까울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할일이 없는데........ 여유분 애진작에 연참할때 사라졌고 이제는 직석에서 쓰고 있습니다^^;;;; 여유분 있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077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3일 09:4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5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5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66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어째 다 과자류냐……이 통엔 비스킷, 옆의 통엔 초코 쿠키…… 그 옆의 통엔……뭐더라……아, 치즈 케잌이었지……." 부엌의 선반에 자리잡고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통들을 열어 보던 페르노크는 이내 질려버렸다. "비스킷이나 쿠키까지는 그렇다치고……." 페르노크가 내려다 본 통안에는 딸기가 얹어진 생크림 케잌이 들어 있었다. 막 만든 듯 윤기가 도는 딸기와 부드러워보이는 생크림이 무척 맛스럽게 보였지만 실제 만든 시기는 일년전, 페르노크가 오랜만에 집에 왔을때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페르노크가 입맛이 동할리 없었다. "아무리 보존 마법이 걸려있다해도 말이지." 곤혹스런 얼굴로 그것을 보던 페르노크는 결국 뚜껑을 닫고 올려놓았다. "더이상 살펴볼 것도 없겠군." 선반쪽 통들에게서 관심을 땐 페르노크는 선반 옆의 조그만 문을 발견했다. 벽과 유사한 색이고 따로 손잡이가 달려있지 않아 발견하지 못했던 듯 싶었다. 페르노크는 문을 뒤로 밀어보고 당겨보다가 옆으로 밀었다. 드르륵, 시원한 소리와 함꼐 문이 열렸다.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여긴 뭐하는데야?" 벽에 마법등이 켜져 있어 결코 음침해 보이지 않았다. "요크노민!" 이내 낯익은 소년이 다가왔다. "여기가 뭐하는데인지 알아?" "도련님께서 마법을 연마하시던 곳입니다." 말로만 들었던 지하실이지만 요크노민은 그곳이란걸 알수있었다. 마법의 폭주로 건물이 쓰러지지 않게 계단부터 결계의 '룬'으로 뒤덮혔다는 지하실……지금 그의 앞에 있는 계단에도 알아볼수는 없지만 자잘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교과서에 있는 '룬'만을 알고 있었던 페르노크는 「결계」의 '룬'은 못 알아봤다. 하지만 그것에 배여있는 마나로써 그것이 하는 역할을 짐작할수 있었다. 페르노크는 내려가 보기로 결심했다. 마법을 싫어했을 '그'의 마법연구실이 어떻게 생겼을지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한걸음 내려서려던 페르노크의 눈에 마찬가지로 궁금해하는 소년이 보였다. "내려가 보자." "네?" 요크노민의 질문은 철저히 무시됐다. 요크노민은 강하게 하지만 천천히 자신을 당기며 내려가는 도련님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보통 집의 지하실처럼 얼마안돼는 계단을 내려선 페르노크의 앞에 보통 집의 지하실과는 다른 철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도련님의 암호로만 열수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몰라." "네?" "기억나지 않아." 왠지 분해 보이는 모습에 의아해하던 요크노민의 손을 페르노크가 잡아끌었다. "올라가자." 요크노민은 순순히 그의 이끌림을 따랐다. "궁금했는데……." 요크노민이 돌아가고 페르노크는 상당히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의 일년만에 돌아온 그에게 찾아오는 이가 한명도 없다는 것이 '그'의 사교성을 짐작케 했다. "열수없었어……." 열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열수 없었다. 그 문은 알고 있는 것일까? 페르노크가 '페르노크'가 아니라는 것을……. "단순한 암호로만 열수있다면야 열수도 있겠지만……아니야." 집안에 부는 바람도 그 문을 지키고 있는 '무엇인가'도 마나와는 달랐다. "어쩔수 없지……." 무료함에 지친 페르노크는 서재에서 책을 보기로 했다. 먼지하나 없는 깨끗한 서재는 마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 처럼보였다. 주인인 '페르노크'가 겨우 일년전에 와봤다는 곳이니만큼 별로 놀랄일도 아니였지만 페르노크로써는 왠지 싸늘하게 박히는 풍경이었다. 왠지 '페르노크'는 이곳을 싫어했을거란 느낌이 들었다. 온통 마법서적으로 둘러싸인 서재가……. 페르노크는 대강 제목만 읽다가 자신이 가지고 온 고대책을 발견했다. 짐가방에 있던 것을 요크노민이 정리하면서 이곳으로 가져온 모양이다. 페르노크는 이미 다 읽어버려 욀정도인 그몇권의 책들을 아련한 눈빛으로 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룬어가 아닌다?" 구석에 박힌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가죽으로 덮힌 두권의 책이었다. "'「정령」에대한 탐구' 라?" 둘중 두터운 책의 제목을 읽다가 다른 책으로 눈을 돌린 페르노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처음본다……." 많은 책들을 제목만 읽고 지나치던 페르노크가 처음으로 뽑아든 책은 얄팍한 두꼐의 낡은 노트와 같은 책이었다. 그 표지에는 아주 생소한 단어가 쓰여있었는데 페르노크로써도 알수가 없는 단어였다. 페르노크가 '이곳'에 들어와 처음있는 일이었다. 일단 표지를 열자 여전히 알 수 없는 단어들 및에 띄엄띄엄 주석이 달려있음을 알수있었다. "「정령어」라……."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해보이며 옆에 꽂혀있던 '「정령」에 대한 탐구'를 뽑아들고 서제를 나서는 페르노크였다. "……." "응?" "……은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글쎄……." 꿈……. 꿈인줄 알면서도 빠져든다. 너무나 그리운 '친구'의 얼굴, 목소리, 눈빛……. "난 사랑받는 아내가 되고싶어."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친구'의 표정…….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될거야." 너무나 사랑스런 그녀를 누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저렇게 밝게 웃는 그녀를 누가 슬프게 하겠는가? ……그때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은 뭐가 되고 싶어?" "……난……" 낯선 천장이 보인다. 빛에 눈이 부셔 눈물이 났다. "……글쎄……." 부시식 일어나 봤다. 오랜만에 그녀를 봤다. 너무나 오랜만에 그녀를 봤다. 투툭…… 작은 소리를 내면서 눈물이 떨어진다. 생각나질 않는다.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 "도련님 일어……." 요크노민은 그저 로레라자의 명으로 늦잠을 자는 도련님을 깨우러 갔을 뿐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요크노민은 슬퍼보이는 그를 뒤로한 채 한마디만 남기고 내려갔다. "일어나셨군요."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것이 있는……거죠?' ======================================================================= 어라 왠지 샌티멘탈틱........^^;;; 터프한 그녀의 슬픔이 무엇일까나~ 요크노민은 점차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그녀는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하는 시기를 맞게 됩니다 페르노크의 유일한 '친구'라는 그녀는 누굴까나~ 지금으로써는 알수읍지요~~ 이 세계에 와서 겪는 페르노크의 내면적인 갈등을 드디어 쓰게 되서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물론 본인은 유쾌한것을 좋아하기때문에 오늘처럼 샌티한것은 별로 나오지 않을겁니다 페르노크는 역시 터프해야 페르노크니까요 훗.훗.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078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3일 09:49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5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9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남자라는 것에 정신이 팔려 다른 것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다른사람의 몸에 들어왔음에도……. 진짜 내가 어떻게 됐는지 알수없음에도……. 마치 현실도피를 하듯 나는 내 성의 전환에만 정신이 팔렸었다. 그때는 왠지 몰랐었다. 왜 그랬는지……몰랐었다.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문 듯 왜 그랬는지 생각났다. 별로 생각해내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그일'로 인해 생각나 버렸다. '그일'은 지금도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일이지만……. ……. 처음이다. 이런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는……. 요크노민조차도 믿어주지 않았던 내 이야기를. 처음이다……이사람이 처음이다……. ……유시리안……. 언젠가 주절거린 페르노크의 잡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이제 단 것은 싫다구……." "쿡쿡." "웃지마, 노민!" "미안합니다." "또……. 쳇, 벌을 주지." 아마도 내 존대말에대한 항의였을 것이다. 어차피 나지도 않는 위엄을 잔뜩 내세우며 저 도령이 내릴 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의외로 무서운 벌이 내려졌다. "이 것, 다 먹어 치울 것!" "에!?" '이것'이라니……. 나는 나도 모르게 로레라자 아주머니가 도령에게 가져다 주라고 명했던 바구니를 내려다 보았다. 여지없이 단 것 투성인 바구니가 그 내용물을 당당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토록 음식 바구니가 무서워 보일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나도 지쳤다구, 벌써 일주일째야. 차라리 보통 과일이나 음식을 가져다 줬으면 좋겠다구." 도령은 너무나 홀가분한 얼굴로 쇼파에서 일어나 부엌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난 상당히 절망스런 심정으로 쿠키 하나를 집었다. 억지로 먹으면서 내심 로레라자 아주머니와 주방장 모두를 저주해 보았다. 그러다 웃어버렸다. 물론 속으로……. 내가 언제 이렇게 사치스러워 졌던가……. 로레라자 아주머니나 ……형님이 없을때면 늘쌍 굶주리지 않았던가……. 형님……. 삼일전 첫째 도련님을 따라 수도로 다시 가면서 내게 인사를 하러 왔던 형님은 없어진 목걸이를 눈치채고 씁쓸히 웃었었다. 너무 아팠다……가슴이 너무 아팠다. 버린 것이 아니라고 몇번이고 소리치고 싶었다. 억지로 웃음짓는 형님에게 몇번이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하고 나면……? 목걸이의 행방을 물으면……?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 형님에게? ……싫다……싫다! 거짓말이라니……형님에게 거짓말이라니……. 아무말도 할수 없지만……그래서 형님을 슬프게 해버리지만 그래도 이건 나만의 애정표현……속이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애정표현. 그것이 형님을 슬프게 해버리지만……. "자." "……?" 앞에 놓여진 잔을 보았다. 시원한 노란빛 음료가 담겨져 있었다. "그거 다 먹으려면 속이 좀 거북해질 것 같아서 시원한걸로 준비해 왔어." ……이사람은 저렇게 차가운 얼굴로 사람 복장을 긁는다. "목걸이……." "……!?" "없네, 어울렸는데……." "……." 어떻게 안것일까? 빼앗기지 않을려고 옷안 깊숙히 숨겨놨었는데……! "하긴 남자애가 목걸이를 하는것도 이상하지." 혼자 마무리지으며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왠지 나를 배려하는듯한 느낌이 배여나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저자식은 맨날 우울한 얼굴을 짓고 그래? 뭔 말을 못하겠잖아!' 페르노크는 속으로 투덜거려보며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쿠키를 집어들고 먹고, 집어들고 먹고 하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목걸이는 빼앗긴걸까?' 계단을 굴렀을때 노민의 품안에서 튕겨나갔던 목걸이는 정말로 그에게 어울렸다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페르노크는 그날 이후로 자꾸만 욱씬거리는 오른팔을 내려다 보았다. '「리커버리」는 완벽하게 들어먹었는데…….' 혹시……. 갑자기 머리를 거칠게 젓는 페르노크를 요크노민은 볼수있었다. '상상하기도 싫군…….' 페르노크는 갑자기 목이 타옴을 느꼈다. 부엌쪽으로 향하는 그를 묵묵히 보던 요크노민은 다시 끝없어 보이는 과자들을 내려다 보고 한숨을 쉬었다. '검을 휘두를수 없다는건 상상도 하기 싫어.' 하지만 음료수가 담긴 병을 들어올리는 그의 오른손은 조금씩 더 아프게 욱씬거리고 있었다. "마법이 있는데 뭐가 문제겠어." 페르노크는 그제서야 잠시 잊고 있었던 마법을 생각해내며 씩 웃었다. 자신을 원망스럽게 돌아보는 남색머리카락의 소년이 있음을 모르고.(^^) ===================================================================== 슬슬 진짜 사건을 하나 만들어 볼까나~ ㅋㅋㅋ 페르노크의 오른손 사건은 별로 심각하지 않습니다^^;;;; 페르노크 본인이 가볍게 넘긴만큼 가벼우니까 별로 심려하지 않아도 될겁니다^^ 빨리 100회를 넘기고 싶습니다 그때쯤이면 어디까지 진행이 됐을까요? 상상해보면 즐겁기 그지 없습니다^^ 어느날 일어나 컴을 켰을때 100회가 올라와 있다면 (물론 내용은 제가 원한데로지요^^;;) 상당히 묘하지만 상쾌하고 개운하지 않을까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잠시 X소리좀 했습니다....ㅠ.ㅠ 가능할리가 없겠지요....... 압니다, 알다구요. 그저 쓰고 쓰고 쓰고 올리고 올리고 올리고 할수밖에 없겠지요 어느 독자분과 주말에 연참을 약속했는데 가능하려나 모르겠습니다 .............................................................. 할겁니다, 할거라구요.....ㅠ.ㅠ 님 할테니 흥분마시길...ㅠ.ㅠ(순전히 작가의 짐작....아니라면 면팔릴일...^^;) 근데 삼연참까지는 기대하지 마시길......... 혹여 제가 잠시 미쳐 그 양까지 쓸지도 모르지만....... 다음의 연재를 위해 아껴둘겁니다............................ 웬지 그러면 언니한테 혼날것 같다는.......불길하고도 확연한 예감이......;;;; 어,어쩌면 삼연참이 될지도....;;;; 하하.......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왠지 잡담이 무~~지 길어진 느낌.......;;;; 돌맞는거 아닌가 몰러....... 퍼옴이의 덧. 어제 못올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번  호 : 1813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4일 19:59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58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페르노크는 요즘 기분이 나빴다. 큰형인 테밀시아가 수도의 본가로 떠나고 나서부터 더했다. 점차 아파오는 손목의 통증 때문에 더했다. 어디 호소할 곳도 모르는 상태에서 점차 페르노크는 저기압이 되어갔다. "본채에 간다는건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야." 페르노크는 현재 점심식사를 위해 본채에 있는 식당으로 향하는 중이다. 여전히 모든 이들은 그를 본척도 하지 않았다. 존재가 무시당한다는 것이 미움을 받는 것보다 괴롭고 짜증나는 일이라는 것은 알사람은 다 알 것이다. 페르노크는 갑자기 서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바삐 걷는 하인들을 주시했다. 페르노크는 의아했다. 무엇이 저들을 저리 만들었을까? 무엇이 '나'를 이리 짜증나게 만들었을까? "도련님?" 페르노크를 모시러 왔던 요크노민은 갑자기 그가 멈춰서자 의아해 했다. "한가지만 묻자." 요크노민은 물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만히 숙여 보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확인한후 페르노크는 손가락을 세 개 펴보였다. 그리곤 하나를 접으며 물었다. "내가 안보여?" "네?" 황당한 질문에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개을 숙이며 얼굴을 붉히는 요크노민을 페르노크는 계속 주시하며 답을 요구했다. 요크노민의 얼굴이 이내 제 색을 찾으며 높낮이 없는 톤의 대답이 나왔다. "아니요." 페르노크는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하나를 접었다. "내가 누굴 때리적이 있었어?" 이미 황당한 질문을 들은 상태였기에 요크노민은 평온한 상태에서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요." 페르노크는 입가를 조금 쓸다가 다시 하나를 접으며 물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맞은 적이 있었어?" "……아니요." 페르노크는 이제는 주먹이 쥐어진 손을 내리고 가던 길을 가며 한마디 했다. "누구지?" "……." "알겠어." 페르노크의 마지막 한마디가 너무나 싸늘하게 느껴졌다. '요크노민이 내게 말을 못한다는건 상대가 나보다 높은 인물이어서 일 것이다. 데체……' "병신이 되서 돌아오더니만 먹을때만 나타나는 구나." 카한세올……형님. "식사하러 가십니까, 카한세올 형님." 페르노크는 의례적으로 말을 건넸고 카한세올은 답이 없었다. 그에겐 아직 해야 할말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미숙하던 네가 이제는 병신이 돼 그 잘난 마법도 못 쓰게 된 상태에서 할수있는것이라곤 가문에 빌붙어 먹고 노는 것 밖에 없겠구나." 페르노크는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걷기만 했다. 대꾸가 없다는 점에서는 전의 '페르노크'와 다를바가 없었기에 카한세올은 위화감 없이 말을 이을수있었다. 비록 일주일 정도지만 집에 돌아온 후의 페르노크를 가장 많이 대면했던 요크노민은 지금 페르노크가 상당히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있었다. 그랬기에 조금 긴장하며 카한세올이 이쯤에서 입을 다물길 바랬다. 그가 본 페르노크는 보통땐 상냥하지만(……) 열받으면 아주 싸늘해지면서도 호전적으로 변했다. 일화로 그가 오고 삼일후의 일을 들 수 있다. 언제나 집안에만 박혀있던 그가 왠일인지 아침부터 산책을 한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그를 발견한 것은 원래 이 별채을 담당하던 정원사의 명령으로 잡초를 뽑고 있었던 요크노민이었다. 테밀시아와 뮤비라가 아침일찍 떠났기에 더 이상 요크노민을 놀려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간식거리를 가지고 갈때외엔 별로 마주칠일이 없었던 페르노크는 조금 멍한 얼굴로 화초사이를 걷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굳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할 필요성을 못느꼈기에 그냥 하던 일만 했다. "도련님." 정원사의 목소리에 요크노민은 얼마전 그에게 맞았던 어깨를 자기도 모르게 감싸줬다. "뭡니까?" 차갑지만 조금은 멍한 목소리가 답을 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런지요?" "말해봐요." 도데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요새 요크노민을 가까이 한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런데요?" 요크노민은 뜻밖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긴장했다. "그녀석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실은……." 작아진 목소리……. 요크노민은 입안이 바싹 타오르는 걸 느꼈다. "도벽!?" 페르노크의 커다란 반문이 정원사를 찔끔하게 만들었는지 그의 만류가 서툴게 들려왔다. "쉿!" 요크노민은 가슴이 아프게 욱씬거림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어딘가 묘하게 평온……무감각하다는것도 느낄수있었다. "몇달전에 본채에 목걸이가 하나 없어진적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요크노민 소행이었답니다." "목걸이?" "예, 테밀시아님이 누군가에게 선물한다고 구한, 귀중품이었지요. 부르는게 값이라는……." "음……." 아니야……아니야…… "……니야." 핫, 서둘러 입을 막았으나 이미 들었는지 페르노크의 고개가 요크노민이 있는 쪽으로 돌려졌다. 허나 그는 잠시 요크노민쪽을 보았을뿐 곧 정원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알아낸거지?" "그게 요크노민 녀석이 자기 구역도 아닌데 대신해주겠다며 집무실을 청소했거든요. 수상하다 싶어 집사님께 말씀드려 요크노민녀석의 방을 뒤져봤는데 거기서 나왔다는 거 아닙니까." 그날……요크노민은 죽고싶다는 감정이 뭔지 깨달았었다. 끝까지 동생을 믿었던 뮤비라의 눈동자와 굳은 얼굴로 목걸이를 받아들던 테밀시아 도련님과 겉으론 경악한채, 배은망덕한 녀석이라고 욕하면서 속으론 걸려들었다 킬킬대는 하인들을 보면서 …… 요크노민은 죽고 싶었다. 청소를 떠 밀어버린 그 하인……. 그와 짜고 목걸이를 훔쳤던 ……정원사……. 본디 돈 몇푼 훔쳐 달아나려 했던 그는 뜻밖에 귀중품이 눈에 들어오자 이성을 잃고 손을 댔다가 결국 일이 커지자 요크노민에게 뒤집은 것이다. 요크노민은 아니라고 몇번이고 소리쳤지만…… 뮤비라 의외엔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번  호 : 18133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4일 19:59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2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39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요크노민은 고개를 푹 숙인체 있다가 페르노크의 차가운 음성에 들게 됐다. "그래서?" "네?" 요크노민은 고개를 들어 페르노크를 보았다. 나무사이로 그의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 "요크노민이 그렇게 '멍청한 도둑'이라면 당연히 상종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때 요크노민은 페르노크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반말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왠지 당신이 걸리는군." 페르노크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일었다. 한기를 느낀건 정원사 본인뿐만이 아니였다. 상관없는 요크노민도 작게 몸서리를 쳤다. "무,무슨 말씀이신지……?" 페르노크의 발이 정원사의 발목에 꽂혔다. "첫째," "크윽!" 페르노크는 조금 몸이 꺽인 정원사를 냉정하게 보면서 말을 이었다. "말을 할 때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군.." "그, 그것은……." "그것은? "헤헤, 저와 같이 미천한 놈이 어찌 페르노크 도련님과 눈을 마주할수 있겠습니까요." "그런가?" "헤헤, 그럼요……!" 정원사는 무릎쪽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는 결국 엎어지고 말았다. "둘째," 정원사는 잔뜩 질린 얼굴로 페르노크를 올려다 보았다. "왜 지금 자네가 여기 있는거지?" "네? 그야 제가 이곳 담당이기 때문이습죠." "바로 그거야." "네?" 페르노크는 정원사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는 말을 이었다. "이곳 담당이면서 지금 뭐하는거지?" "그게……." "이곳엔 직무태만이란 단어가 없는가?" "아,아니 저……!" 페르노크는 무릎을 올려 정원사의 복부를 찼다. "힉!!!" 엎들여 몸을 부르르 떠는 정원사의 귓가에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그는 긴장하는 정원사의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 말했다. "일.부.러. 노민에게 들리게 얘기하는 저의가 뭐지?" 정원사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페르노크는 몸을 일으켜 멍하니 자신을 보는 요크노민 쪽으로 걸어갔다. "얘기할게 있으면 들어주지." ……하는 그의 얼굴은 아까와는 다르게 상냥해 보였다. 하지만 정원사를 심문(?)할때의 얼굴은……. "아, 아직 네녀석에게 남아있는게 있었구나. 그 반반한 얼굴말이다. 그걸로 계속 테밀시아 형님을 홀리면 되겠구나." ……지금과 같았다. "전 얼굴이라도 된다지만 형님은 큰일이시군요." "……뭐?" 카한세올의 얼굴은 결코 못생긴 얼굴이 아니였다. 청순형……이었던 페르노크의 미모엔 못미치지만 그는 결코 딸리는 얼굴이 아니였다. 카한세올은 자신의 준수한 얼굴을 구기며 아직은 그보다 작은 동생을 내려다 보았다. 동생의 얼굴은 믿겨지지 않게 너무 싸늘했다. "아, 하긴 형님도 재주 하나 있긴 있군요." 정말 다행이라는 듯 페르노크는 미소지어보였다. 작게 박수까지 치며 그는 계속 말했다. "남을 모욕하는 재주말입니다." "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둘째형을 보며 말했다. "계속 그러시면서 우월감속에 사시죠."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식당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그것을 돌리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겨우 우월감을 느끼는 '잘나신' 형님."
번  호 : 18134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4일 20:00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57 -아해의 장- (쓴이 신승림) -짝!- 페르노크는 화끈거리는 왼쪽볼을 무시한체 싸늘하게 카한세올을 노려 보았다. "건방진 자식!" 카한세올은 다시 손을 들었고 페르노크는 이번엔 단호이 그것을 막았다. 카한세올은 뜻밖의 저지와 그것에서 느껴지는 굳은 힘에 놀라 페르노크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시야에 페르노크의 차가운 눈동자가 들어왔다. 페르노크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참는건 한번뿐입니다." 그리고는 카한세올을 지나 식당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도련님……." 로레라자가 놀라 자신을 쳐다보자 페르노크는 뭔가 변명이라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로레라자가 바로 자신의 입을 가로막고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뒤에 있는 카한세올을 보고나서……. '저저식이군.' 페르노크는 그제서야 자신의 왼쪽 볼을 쓰다듬었다. '여짓껏 '그'를 때린녀석이.' 페르노크는 이젠 익숙해진 뷔페식 식사를 시작했다. 자신의 앞에서 카한세올의 식사를 덜어내는 하인들을 노려보면서. 뒤에서 직접 덜어가는 자신을 힐끔 보며서 씩 웃는 카한세올을 노려보면서. '남이 덜어주는걸 바라는건 아니지만…….' "왜 그러지, 페르노크?"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한세올 형님." 다시 여유를 되찾은 듯 보이는 카한세올에게 무심히 대꾸하는 페르노크의 속은 그리 평온하진 못했다. '그런 것이 원래 '관습'인데 그러면 열.받.지.' 식사후 페르노크는 다시 별채에 틀어박혔다. 얼마전부터는 간혹 산책을 하러나오곤 했지만 처음에 돌아왔을 당시엔 집안에 박혀 나올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왜 그런지 원인을 아는 이는 없었지만 관심을 갖고 궁금해 하는 이도 없었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요크노민조차도 별로 궁금해 하지 않았으니 말다한 것이다. 하긴 요크노민은 그가 박혀있는 원인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궁금해 하지 않은거지만 말이다. '책만봐서 뭘 아나……?' 요크노민은 마법이나 검술등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었지만 모두 스승없이 배우긴 힘들다는 것은 알고있었다. 페르노크는 가끔 쿠키를 먹으며 쇼파에 편히 누워 책을 보고있었다. 첫날 발견한 '「정령」에대한 탐구'였다. 요크노민이 알기론 페르노크는 벌써 두 번째 저책을 정독하고 있었다. 늘 로레라자의 심부름으로 간식을 나르고 늘 페르노크의 '부탁'으로 같이 먹어치우는 처지가 된지 벌써 일주일채였다. 여전히 말이 없었고 여전히 앞머리는 길었고 여전히 음침해 보였지만, 페르노크는 더더욱 그를 편해 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권유로 서재에서 책을 골라 같이 독서를 하고 있었다. 본디 책을 좋아했기에 요크노민은 즐겁게 페르노크와 시간을 보낼수있었다. 점심식사후, 저녁시간전까지의 페르노크와의 시간은 요크노민에겐 유일한 낙이 되었다. 물론 그 시간의외엔 온갖 잡일을 도맡아 처리해야 했지만. "노민." "예?" "여기서 학자나 마법사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되지?" 일주일째 두터운 책을 붙잡고 있었던 페르노크가 얄팍한 책을 집어들면서 물은 질문이었다. "주인님이나 테밀시아 도련님께 말씀드리면 되지만……." "아버님은 여행중이시고 형님은 수도로 일하러 가셨지." "예.……카한세올 도련님께 말씀드리면……." "알았어." 페르노크도 이제는 알수있었다. 카한세올 이야기만 나오면 머뭇거리는 요크노민을. 페르노크는 여전히 알아볼 수 없는 정령어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 읽었던 '「정령」에대한 탐구'에서는 「정령」의 종류, 성향, 능력등이 열거되어 있을 뿐이었다. 두꺼운 만큼 자세하게 설명되어있어 정령에 대해선 대략 알수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정령어를 알면 정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건가?" 느닷없는 질문이었으나 독백에 가까웠다. 요크노민은 귓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듣기론 정령에게 '인정'을 받아 '맹약'을 맺어야 한답니다." "'인정'? '맹약'?" 요크노민은 다시 고심하는 페르노크를 보며 생각했다. '갑자기 정령에 대해선 왜……?……그런가.' 요크노민이 자신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지도 모른체 페르노크는 딴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마법을 사용할수없으니 다른곳에서라도…….' 확실히 정령이 마법을 처음부터 배우는 것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뮤바라 형님이 말씀하시기엔 한순간에 될지도 모르고 평생을 들여도 안될지도 모르는게 「정령사」라 했다. 하지만 페르노크가 마법을 아주 손쉽게 구사할수있다는 것은 이미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두렵지 않으십니까?" "응?" 요크노민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드문일이기에 페르노크는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모르실텐데……가족도, 친구도, 그리고 능력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실텐데……두렵지 않으십니까?" 다음순간 요크노민은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페르노크가 묘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후회했다. "글쎄……." 페르노크는 다시 비슷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내 좀 해주겠어?" "네?" "카한세올 형님께 부탁 좀 해야겠어." 요크노민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앞서 걸었다. 그뒤를 페르노크가 따랐다. '두려운게 있다면 언제 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 페르노크는 문을 닫으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 몸은 내것이 아니니까.' 갑자기 바람이 거칠게 몰아쳤다. 페르노크의 머리끈이 바람을 타고 허공을 맴돌았고 그의 머리결도 마찬가지로 바람을 탔다. 은빛 실타래가 제자리를 못찾고 있을 때 페르노크의 귓가에 가냘픈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들의 …… 우리들의……이여.」 "뭐……뭐지?!" "네?" "방금……!" 바람이 멈추며 은빛이 정리되면서 허리가에 내려 앉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위로 머리끈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받아들며 페르노크가 물었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아뇨." 뭔가를 더 묻고 싶어하는 요크노민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자신도 몰랐기에. "……가시죠." "아……응." ---------------------------------------------------------------- 약속대로 연참은 했지만 좀 찜찜하네요. 원래 공백기없이 쓰다가 올려야지 쌈박한건데..... 좀 몸이 안좋아서 금욜도 토욜도 빼먹었다가 삼연참이라니...... 이거야 완전히 빠진날거 올린식.......헤헤....;;; 쓰는데야 뭣빠지게 썼지만 그래도 좀 미안함이...^^;;;; 페르노크에게 이이상의 힘을 준다는것을 참으로 많이 망설였지만 뭐 어때, 주인공인데.....라는 생각에 다른 각성을 맞이하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주인공이 능력이 많으면 좀 골치아파져요 싸울때 이것저것 다 사용해야 하니까..... 나중에 페르노크가 싸울때는 그런일이 없도록할겁니다^^ 제가 연중할까 많은 분들이 걱정하는것 같은데 지금 기분으론 절대 없는 일이랍니다^^ 스스로 100회를 목표로 신나게 쓰고 있고 100가 되면 그담엔 200회 목표.... 뭐 이런식으로 계속 쓰게되지 않을까나~ 하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스토리 진행되는 것도 즐겁고요 빨리 외전도 쓰고 싶네요^^ 외전을 쓰게 되면 하루에 연참으로 완결을 지어야 겠습니다 안그러면 기다리는 분들이 못견디겠지요? ^^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13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4일 20:01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1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61 -아해의 장- (쓴이 벗.신승림) 「카르민」가의 본가는 수도 자이젠에 있었다. 식구들은 모두 지금 페르노크가 머물고 있는 곳에 거주했지만 가문의 위용을 위해 수도에 저택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원래 원칙상으론 테밀시아는 감히 귀족원에 등장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의 아버지인 카르민 공이 부재 중 이라해서 예외는 없었다. 감히 「카르민」에게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뿐……. 테밀시아는 자신이 아주 사소한 실수라도 한다면 곧 제 일선에서 물러서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카르민」인 테밀시아는 아버지의 부재를 완벽히 커버하고 있었다. 그런 테밀시아였기에 그의 아버지인 카르가 공은 홀가분히 떠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현재 그가 어디 있는지 아는 이는 없었지만 가끔 편지나 인편으로 생존을 알려오곤 했기에 테밀시아는 굳이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테밀시아가 왠만큼 나이가 되면 유유자적하게 여행하며 노후를 보내겠다고 말해왔었기 때문이다. 테밀시아가 20대를 넘어서는 날 그에게 「카르민」공의 자리를 넘기겠다는 유지와 같은 말은 남긴 뒤 그는 진짜 사라졌고 테밀시아는 굳이 그를 찾지 않았다. 아버지를 찾는 데 드는 인적, 물적 자원을 차라리 가문에 투자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테밀시아는 아버지 걱정보다는 자신에게 내려진 직무에 충실할 뿐이었다. "뮤비라, 이 사안이 좀 걸리는데?" 언제나 부드러운 말투로 다가와 설명혹은 질문등을 해댈 뮤비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테밀시아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뮤비라가 어느샌가 밖으로 나갔음을 알아 차렸다. 뮤비라가 자신에게 아무말없이 나가는 경우는 없었기에 테밀시아는 의아해 하며 밖으로 나갔다. 한창 직무중일 뮤비라가 밖으로 나갔다 해도 멀리 나갈 리가 없었기에 머리도 식힐겸 찾아나선 것이다. 뮤비라는 정원에 놓인 분수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멍하니 분수대를 보는 모습은 뮤비라 답지 않았기에 테밀시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안그래도 뮤비라가 본가로 출발하기 전부터 이상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에 테밀시아는 더욱 조심스레 그를 대했다. 이런 상태의 뮤비라를 건들이면 자신도 별로 편안하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뮤비라의 등까지 칠렁거리는 머리카락은 단정히 묶여 있어 그의 동생의 것처럼 음침해 보이지 않았다. 또한 동생과는 달리 듬직하면서도 날렵한 몸매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같이 검술을 시작한 뮤비라였으나 어느샌가 두뇌쪽으로 그는 빠져버리고 자신만이 계속 검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테밀시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는 뮤비라가 자신보다 성취가 빨랐음을……. "……노민녀석……." 뮤비라의 작은 속삭임이 곤두선 청각에 들려왔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테밀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뮤비라가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검을 뽑아들고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역시…….' 자신을 발견한 뮤비라는 깊은 남색의 눈동자에 어려있던 경계심을 푸르며 생긋 웃어보였다. "이런, 잠시 농땡이 좀 폈다고 쫓아온겁니까?" 장난기 어린 그의 말에 테밀시아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주군은 땀 쏟으며 일하는데 부하라고 하나 있는 녀석이 감히 말없이 나가버려서 말이지." 마법기구 '윈디'가 있는 집무실이 더울리가 있겠는가. 뮤비라는 크지도 작지도 않는 웃음소리를 내며 테밀시아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곤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용서를." 테밀시아는 피식 웃으며 뮤비라가 서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역시 몰래 연마 하고 있었군.' 그 반사 신경이라니……. 테밀시아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검의 길을 걷는 뮤비라의 행동이 의아했으나 그가 말하기 전까진 함묵하기로 했다. 뮤비라가 뒤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테밀시아는 멈춰섰다. 정확히 뮤비라가 서있던 곳이었다. 테밀시아는 뮤비라가 바라보던 곳을 보며 물었다. "또 뭣 때문에 그런거지?" 뮤비라는 작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덥고 본 일도 많은데다 잡일도 많아서 말입니다." 테밀시아는 뮤비라의 심중을 배려하여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잡일?" 뮤비라는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희극적으로 품안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들었다. "황실 계승 제 7위 자하사. 마린나샤. 란. 카르민 공녀께서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 경께 드리는 사모의 글입니다." 테밀시아는 단숨에 무표정해진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오르세만'가에 필적하는 가문 '자하사'. 이 두가문 사이에 오가는 혼담은 이미 공공연한 일이었다. '자하사'가에서 입지가 두터운 장녀, 란과의 혼약은 테밀시아 로써도 달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지기반을 위해 좋다는 것이지 테밀시아의 마음이 그녀에게 향했다는 것은 아니였다. 비록 그녀가 아름답고 젊으며 지나치게 영리하지도 않은데다 테밀시아를 사랑하고 있다곤 하지만 말이다. 테밀시아는 무성의한 손길로 편지를 찟어 내용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아직은 그녀의 입지와 마음이 필요했기에 다음에 그녀를 본다면 이 편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편지를 꼼꼼이 읽는 테밀시아를 보면서 조금씩 욱씬거려오는 가슴의 통증에 뮤비라는 괴로워했다. 가끔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읽어내린 테밀시아는 조용히 뒤에 서있는 뮤비라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우습군." 차가운 목소리. "이것도 편지라고 썼나? 모든 싯구는 갖다 붙였군. 뭐, 영리하지 않다는 증거이니 다행이지만 말야." 뮤비라는 그것을 곱게 접어 집어넣은 다음 품안에 넣었다. "마린나샤 공녀는 테밀시아님이 직접 정하신 상대가 아닙니까? 좀더 상냥하게 대해주는 편이 좋을거라 생각합니다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예?" 갑자기 진지해진 테밀시아의 얼굴에 뮤비라는 당황하면서도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 아니 아무것도……." 부드러운 미소의 포커페이스를 마주한 테밀시아는 드물게 말을 흐리며 분수를 바라보았다. "영리하지 않는 부인을 얻게다는 뜻은 백분 이해합니다만, 내조를 위해선 조금쯤은 사리가 분명한 부인이 좋지 않을까요?" 테밀시아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영리한 여자는 필요없어." 뮤비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멍청한 사람은 혐오스럽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자하사'가는 어디까지나 정적. 일시의 휴전으로 그 집 여자가 필요할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바라지 않아. 오리혀 자신의 가치를 잘 이용하는 여자라면 골치아프지." "안됐군요." 뮤비라는 작게 속삭였다. 혼잣말처럼. 하지만 테밀시아는 그것을 들었고 물었다. "누가?" "그녀 말입니다. 진심으로 테밀시아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던데." 테밀시아는 좀처럼 보기 힘든 뮤비라의 감정적인 말에 의아해 하면서도 답했다. "난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냉정한 말에 뮤비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테밀시아가 그녀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지않다는 걸로 받아들였던 뮤비라는 이어지는 말에 조금 놀랐다. "언젠가 '자하사'가에 간적이 있었는데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더군. 그때 우연히 들었는데, 그 여자가 이렇게 말했지. '테밀시아라는 고가의 '악세사리'를 구해서 기쁘다고." 악세사리, 여자를 돋보여주는 물건. 뮤비라의 얼굴이 테밀시아의 것과 같이 싸늘해지자 이번에는 테밀시아가 씩 웃었다. "다루기 쉬운 여자는 편하지. 그런 목적으로 내 옆에 오는거라면 참아줄수있어. 하지만 똑똑한체 내일에 참견하는 것은 참을수없어." "그렇군요." 뮤비라의 싸늘한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대며 테밀시아는 짓궂게 말했다. "뭐, 내조는 뮤비라로 충분하니까." 뮤비라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같이 장난스레 말했다. "이런 저도 언젠가는 내조를 받을 처지일텐데……언제까지 테밀시아님의 뒷정리를 하면서 지낼수야 없지요." 순간 테밀시아의 얼굴이 굳었다고 생각한 것은 단순한 착각일 것이다. 왜냐면 그는 지금 너무나 능글맞게 웃고 있으니까. "이런, 봐둔 여자라도 있는 모양이지?" 뮤비라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테밀시아의 눈초리가 상당히 매서워 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단순한 착각일 것이다. 왜냐면 그는 지금 너무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이런, 우리사이에 드디어 비밀이 생겨버리는 구나." 장난임을 아는 뮤비라는 허리가 끊어지게 웃어버렸다. 그런 뮤비라를 보는 테밀시아의 눈매가 웬지 따뜻해 보였다. ===================================================================== 허걱..... 드디어 야오이 등장인가? ㅡ.ㅡ;;;;;; 뭐, 언젠가 지나가는 말처럼 올린적이 있었지만 제 설은 약간의 야오이가 겸비된 설 아니겠습니까? 하하......(내심 독자들이 떨어져 나갈까 두려워하고 있음....) 테밀시아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그 여자를 원합니다. 또 그 여자 역시 자신을 돋구기 위해 테밀시아를 원하지요. 서로의 목적을 위해 맺는 인연이니 의외로 잘어울릴지도.... 뮤비라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테밀시아를 보필하고요^^;;; 뭐야, 싱겁잖아? 18금을 원했는데! 하시는 분껜 죄송^^;;;;; 페르노크의 각성의 계시를 좀더 여운있게 하기위해 테밀시아와 뮤비라의 이야기를 집어넣었습니다. 앞으로의 스토리에 상당수 차지할 테밀시아와 뮤비라의 복잡 단순한 관계입니다^^ 다음이야기는 아마도.....틀림없이 페르노크 이야기가 아닐까나~ 생각해보는 벗입니다^^;;;; 아참, 제 닉은 '바람의 벗'으로 약자로 '벗'이라 합니다^^ 처음부터 말할걸~ 후회하고 있지만 이제부터도 늦지 않았으니까요^^ 참고로 제가 드래곤 광팬이라는 걸 알아두십시요^^ 전 드래곤이란 생물을 무지 좋아합니다^^ 진짜 참고로 알아두세요^^....ㅋㅋㅋ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퍼옴이의 덧. 현재 나우와 하이텔에서는 100회기념 인기투표중입니다.^^
번  호 : 1815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5일 09:57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2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25 -아해의 장- (쓴이 벗. 신승림) "형님은 언제 오신다고 했지?" 카한세올이 책상에 두발을 올려놓고 술을 홀짝이는 모습에서 그의 집무실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니였다. 그곳은 엄연한 '주인'이 있는 곳이었고 '주인'이 있는 중엔 카한세올은 감히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도 못냈었다. "일주일안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충실히 답하는 집사의 눈가는 언잖은 듯 찡그러져 있었다. "그래?……나가봐." "예." 정중히 나가는 집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카한세올은 이내 안락의자에 몸을 파묵었다. "쳇, 이녀석이나 저녀석이나 마음에 안든단 말야." 카한세올은 벽에 걸려있는 가족 그림을 보았다. 단란한 느낌의 그림이었다. 당당하신 아버님, 우아하신 어머님, 강인한 형님, 아름다운 동생...... 다들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쨍그랑!- 벽에 마시던 술잔을 집어던진 카한세올은 회의적으로 웃었다. "크크크……새삼스레……크크……" ……하지만 그곳엔 카한세올은 없었다. 그곳엔 직계 가족만이 있을뿐……. "첩의 자식따위가 뭘 바라겠어." 한때는 그도 그 사이에 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불가능함을 알았기에. -똑똑- "들어와." 나직한 음성으로 답하자 이내 문은 열렸다. 그림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카한세올은 발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멈추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네 쪽에서 날 찾을 줄은 몰랐군……. 무슨 일이냐, 사랑하는 동생아?" 아름다운 동생……. 지금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당당해 보이는 그가 거슬렸다. "마법사나 학자님을 뵙고 자문할것이 있습니다. 형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요." 가주와 장남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비록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어도 카한세올이 차남이니까. 카한세올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답을 기다리는 동생을 보았다. 그의 가여운 동생은 정말로 모든 것을 잊은 모양이다. 감히 둘째형에게 이런식으로 건방지게 고개를 쳐들고 말하다니……. 불쌍한 동생은 정말로 모든 것을 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교육시키는 수밖에." "네?" 카한세올이 짓는 기분나쁜 미소에 페르노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카한세올은 부시시 일어나 손목을 천천히 돌리며 중얼거렸다. "인생공부를 말이다." 그리고 빠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조금 경계를 하고 있었던 페르노크는 손쉽게 피할수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손 윗사람에 대한 예의란걸 가르켜 주려는 거다." 무슨 소리인지, 페르노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들은대로 말한 것 뿐이데……갑자기 주먹을 휘두르다니……. '뭐가 뭔진 몰라도……뭐 잘된거지." 페르노크는 빠르게 뒤로 두어걸음 물러섰다. '이참에 이쪽 인간관계부터 청산해 볼까.' 페르노크가 재차 공격을 피하자 카한세올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못본새에 제법 단련한 모양이구나. 그래서 그렇게 건방을 떨었나?" 카한세올의 움직임이 판이하게 달라지며 매우 정확한 공격이 들어왔다. 페르노크는 손을 교차시키며 그의 주먹을 막았고 카한세올은 조금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검에서는 형에게 한수 지지만 권에 있어서는 우위를 점하는 카한세올이었다. 기술뿐만아니라 힘에 있어서도 카한세올을 당해낼자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건성이라곤 하지만 나름대로 정식이었던 공격을 막아내다니……. "제법 발악하는 구나……뭘로 단련을 한거지?" 페르노크는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답해주었다. "검." "푸하하하." 한참을 웃던 카한세올은 한순간 냉기를 뿜으며 말했다. "웃기는군." 그리곤 먼저 방을 나서며 말했다. "따라와라." 페르노크는 둘째 형이란 작자와 담판을 짓기로 결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따라오지 말라해도 따라갔을 터였다. 바로 따라나서는 페르노크를 힐끔 보며 카한세올은 콧웃음을 지었다. '검 두어번 휘둘렀다고 기고만장해 있는 꼴이라니……. 그 건방진 콧대를 꺽어주지.' 둘이 도착한곳은 본체에서 조금 떨어진 연무장이었다. 가문 소유의 연무장이라 삭막한 기사들의 것과는 달랐지만 나름대로 위엄을 갖춘 곳이었다. "받아라." 하며 카한세올이 던진 것은 묵직한 목검이었다. 목검이라지만 마법으로 코팅을 했기에 어느정도의 강도는 가지고 있었다. 즉, 맞으면 상당히 아플거란 소리다. 물론 목검자체도 맞으면 아프겠지만 코팅이 되어있는 목검이라면 그 정도는 더했다. 페르노크는 그정도까지는 몰랐지만 마나가 응집되어 있는 검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페르노크가 신기하게 목검을 이리저리 살펴볼 때, 카한세올은 열걸음 정도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검을 겨누곤 말했다. "덤벼라." 순간 페르노크의 얼굴에 희색이 돌아 보인 것은 착각일 것이라고 카한세올은 생각했다. 자세를 취하는 페르노크의 뒤로 요크노민이 초조하게 서있었다. ===================================================================== 하하^^ 독자님께서 얼른 페르노크가 카한세올을 혼내줬으면 좋겠다고 했습죠^^ 글쎄 어떻게 될까나~ 그건 다음회에서 알겠지요? 예사외로 이번 페르노크 이야기는 쓰기가 힘듭니다 전의 유니이야기에서는 린,젠과 유니의 얽힘, 린과 젠과 틸의 얽힘, 틸과 유니의 얽힘등등 여러가지 만남을 정돈하면서 쓰느라 힘들었지만 이번 페르노크 이야기처럼 어렵지는 않았던것 같은데 말입니다^^;;;; 페르와 테밀시아의 얽힘, 페르와 노민의 얽힘, 노민과 뮤비라의 얽힘, 뮤비라와 테밀시아의 얽힘, 페르와 카한세올의 얽힘....... 인간관계가 더 어렵지요? ^^ 그 와중에 페르가 이세상에 와 겪는 갈등도 나올것이고 각성도 나올것이고......힝~~ 페르의 이야기가 좀 덜 마무리된체 아르이야기로 넘어갈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그래도 각성까지는 나오고 넘어갈 예정이지만 말입니다 페르노크이야기가 끝나고 아르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외전 하나를 집어넣 생각입니다. 하루에 연참으로 끝낼 생각이구요 왠만큼 써놨습니다^^ 휴~ 처음엔 잡담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점점 길어만 가네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153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5일 09:5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6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6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22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0 -아해의 장- (쓴이 벗. 신승림)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페르노크였다. 정공법으로 먼저 내려친 그의 검을 카한세올은 아주 여유롭게 막아냈다. 하지만 페르노크의 공격은 거기서 끊기는게 아니였다. 카한세올이 막아내면서 생긴 반동을 최대한 이용하며 자신쪽으로 끌어들인 뒤 반보 물러서면서 이번에는 밑에서 올리는 식으로 치고 들어간 것이다. 여유롭던 카한세올은 조금 놀라며 급히 물러났고 페르노크는 집요하게 그를 추적해 들어갔다. 여유를 부리느라 타이밍을 놓친 카한세올은 계속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힘으로 반격해 들어갔다. 페르노크가 휘두른 검을 약간 스치듯 맞으면서 몸을 비틀고는 옆으로 샌 검을 위에서 내리 누르는 식으로 잡아버린 것이다. '제길…….' 낭패다, 생각했다. 카한세올은 반대로 기선을 잡았다, 판단했고 그것은 오판이 아니였다. 만일 자신의 몸이었다면 이쯤 힘은 어느정도 커버할수있을 것이다, 생각하면서 페르노크는 이를 앙물었다. 그리고는 쨉싸게 손을 놀려 버티지 않고 검을 내리면서 오리혀 카한세올의 균형을 흐뜨렸다. 아차, 카한세올이 당황해 몸을 추스릴 때 페르노크는 의외로 공격하지 않고 뒤로 두보 물러섰다. 검에 무지한 요크노민이 봐도 완벽한 타이밍이었는데 말이다. 카한세올이 모욕을 받은 거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릴 때, 페르노크도 뭔가 문제가 있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카한세올이 여유고 뭐고 먼저 공격에 들어갔다. 페르노크는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흘리는 데 주력했을뿐 반격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거의 대부분 몸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움직여 피해냈다. 아까의 그 용맹스러웠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기에 요크노민은 의아함과 함께 실망감을 안았다. 카한세올의 얼굴에 우월감이 어린 미소가 진하게 흐르더니 그의 검이 예리하게 페르노크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갔다. 페르노크는 급히 몸을 옆으로 틀어 피했으나, 카한세올이 원했던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했다!' 페르노크의 얼굴에 낭패감이 흘렀다. 찌르기를 빙자한 속임수였던 것이다. 곧장 방향을 틀어 복부를 노리는 검을 손에 든 자신의 검으로 막는데는 성공했지만 상황을 오리혀 나빠졌다. 페르노크가 막아낼것까지 계산에 넣었었던 카한세올이 그 공격에 자신의 힘을 모두 집어 넣었기 때문이다. "크윽!" 페르노크의 호리호리한 체구가 허공을 붕 뜨더니 연무장 벽에 부딪치면서 멈췄다. 어느새 구석까지 몰려있었던 것이다. 왼손으로 간신히 검을 잡고 서 있는 모습에서 페르노크의 패배를 알수있었다. "제법 흉내는 냈다만 주제를 알아야지." 카한세올은 웃으며 연무장을 나갔다. 원래는 더욱 '교육'시킬 예정이었지만 의외로 선전한 페르노크의 모습에서 썩었지만 남아있는 무인의 호승심을 충족시킨 탓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제길……." 카한세올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검을 떨어뜨리며 페르노크는 주저 앉았다. 요크노민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답하는 페르노크에게 묘한 서운함을 느낀 요크노민이었다. 하지만 곧 페르노크의 음성에 배여있는 고통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페르노크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고통으로 잠시 잠았던 호흡을 되돌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이없는 대련이었어." 그리곤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대충 정리했다. 손 뒀다 뭐하나, 싶은 생각에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페르노크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고 있었는데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요크노민이 페르노크의 손을 살펴보고 있을 때 위에서 페르노크의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내 생애 이렇게 황당한 패배는 처음이야." 그리고는 요크노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왼손을 떨어뜨렸다. "이건!?" 요크노민은 놀라 짧게 신음을 삼겼다. "며칠전부터 욱씬거려왔지만……." 변명처럼 페르노크가 말했지만 욱씬의 단계를 넘어서 보이는 그의 손목을 보는 요크노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로레라자 아주머니께 말씀드려야……아니 먼저 신관을…… 아니 일단은 '포션'이라도!" 드물게 당황하며 침착을 잃은 요크노민의 모습을 좀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오른쪽 손목이 너무 아파왔다. 이제는 눈에 띄게 부은 손목이 애처롭기보다는 괴기스러워 보였다. ===================================================================== 음냐~ 본의 아니게 하루 쉬게 됬습니다^^;;;; 정말로 의도한바가 아니랍니다^^;;;; 안기다렸어!......라고 말씀하신다면 저야 '허걱!'이라 답할수밖에 없군요.....ㅠ.ㅠ 실은 앞의 잡담에서 말했듯이 페르노크이야기가 잘 안풀려서 일주일정도 잠적할까 고려중이러든요^^;;;;; 에구...... 독자분이 멜로 그럴수록 써야된다고 했지만서도..... 어쩔까나~ 정말로 뜻밖이죠? 페르노크의 패배...... 울 언니도 어이없어하더이다.... 그래요, 제가 죽일 X이지유........ 버트! 모든건 좀더 지켜본 연후에....ㅋㅋㅋ(?) 아참! 한가지 말씀드릴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해의 장이 무슨 뜻이냐 묻더이다 그래서 이제사 공식(?)적 답변을 해드립니다. (물론 멜로 물어오신님들께는 답멜로 답해드렸지요^^) 아해=어린아이 장=이야기 로 아해의 장은 아이의 이야기라는 뜻이랍니다^^ 그냥 아이의 이야기라고 할까나~ 처음엔 고민했으나 지가 아해라는 단어를 좋아해서리....ㅋㅋㅋ 또 많은 분들이(간혹 아닌분들도 계시지만) 오해하고 계시는 점! 페르노크와 아르는 동시대사람이 아닙니다 아르의 이야기에서 나오지요? 페르노크와 유시리안의 '계속되는 전설'과 페르노크와 유시리안의 노래...... 즉 아르의 시대가 페르노크의 시대보다 뒤라는 얘기지요 아~~ 점점 길어져만 가는 잡담 왠지 재미있네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154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5일 09:5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23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67 -아해의 장- (쓴이 벗. 신승림) 몇일간은 붕대를 묶고 있으라는 조치를 받은 페르노크는 계속 저기압이었다. 신관이 와서 어느정도 치료는 해주었지만 뼈와 관련된 것이라 시급한 상처가 아니라면 왠만큼은 자생치유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말을 할 때 신관은 여느 귀족집 자제처럼 페르노크가 때를 쓰며 아프다고, 완치시켜달라고 울줄알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온실속 도령일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끄떡이며 수긍했고 신관은 상당히 묘한 기분으로 그집을 나올수 있었다. 주로 쓰이는 손이 묶이자 당장 불편한 것이 한두개가 아니였다. 때문에 로레라자는 페르노크의 시중을 요크노민 보고 들라고 배려해주었다. 심심했던 차에 페르노크로써는 달가운 일이었다. 서재에서 자잘한 자료를 찾아 나름대로 '정령어'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던 페르노크가 어느날인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이제는 어느정도 말이 튼 요크노민은 편안한 어조로 되물었다. 전 같았으면 페르노크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묵묵히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페르노크의 눈이 붕대로 감싸진 오른손을 향했다. "언제 다쳤을까?" 그리곤 쇼파에 털썩 누워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는데……." 하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요크노민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먼저 제그 일당(?)이랑 싸웠을 때……좀 다치긴했어도 오른손을 젤 아끼는라 상처는 없었는데……. 다친 손은 왼손이었고……그나마 테밀시아 형님의 닥달로 휴로버 신관님이 완치시켰잖아? 음……검술 연습을 했을땐 전혀 무리를 하지 않았으니까…….' "간식을 받아오겠습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가 듣든 안듣든 말하며 일어섰다. 그때 페르노크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아!" 그리곤 요크노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난데없는 페르노크의 함성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 다녀와." "……네." 요크노민이 문을 닫고 나가고 패르노크는 무의식중에 다친 오른손을 왼손에 맞 부딪쳤다가 상당히 아파하고 난뒤에 제정신을 찾았다. "그렇군……." 요크노민이었다. 페르노크가 다쳤던 것은 요크노민때문이었다. "그때 찰과상만 입은게 아니였군." 그때……. 계단을 구른 요크노민을 감쌌을 때……. 페르노크는 어이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둔감한 자신에 대한 조소였다. 뼈에 금이간것도 모르고 겉의 상쳐에만 신경을 빼앗기다니……. "큭큭……진짜……생애에 이렇게 바보같은 짓을 한적은 없었던 것 같군." 그리곤 정신을 집중시키며 왼손을 오른손에 가져다 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치유……." 마나가 비틀리며 오렌지 빛이 그의 왼손에서 발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복귀의 힘." 이제는 빛이 이동을 하며 오른손, 정확히는 붕대가 감겨있는 곳에서 빛이 발했다. 그것은 이동하면서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힐*링*" 빛이 갑자기 환해지더니 또 갑자기 사라졌다. "후~." 페르노크는 완전히 통증이 가신 오른손을 거칠게 흔들어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여전히 차가웠다. 실망이었다. 웬지 당당해 보이던 그에게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내 자신이 우스웠다. 카한세올이 누구인가? 하인들에게 있어선 테밀시아 도련님보다도 두려운 존재이다. 적어도 테밀시아 도련님은 잘못을 하지 않은 이상 처벌하지 않으니까. 카한세올 도련님처럼 마음에 안든다고 때리지 않으니까. "정말로요?" 주방 문을 반쯤 열었을 때 안에서 요란한 외침이 들려왔다.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섰고 때문에 계속해서 로레라자의 경악성을 들어야만 했다. "어쩜……그렇게 상냥하신 페르노크 도련님께서……." "그러게 말이야. 나도 처음봤을땐 믿겨지지가 않더라구." "어쩜……어머, 노민 왔구나." 문가에 서있었던 요크노민은 본의아니게 엿들은 꼴이 되자 사죄하며 들어왔다. 로레라자는 웃으며 아니라고 답해주었고 옆에서 만들어진 간식을 싸고 있었던 소녀를 재촉했다. 이제는 질리다 못해 둔감해져 버린 요크노민이 새삼 질릴정도로 그것들은 달.아.보.였.다. 요크노민이 그것들에 계속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자 로레라자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이 다치셨으니 특별히 주문한거란다." "네……." 하지만 별로 달가와 할것같진 않네요, 라고 생각하며 바구니를 들었다. 문을 나서는 요크노민의 뒤로한체 로레라자는 떨던 수다를 이어서 했다. "얌전하신 도련님께서 어쩜 그런 난폭한 짓을 하셨을까?" "말도마, 보니까 피투성인데 정작 그분은 상처도 별로 없더라니까?" "그럼 도련님께 맞은 사람의 피란 말이에요?" '에?!' 요크노민은 놀라움에 몸이 굳었고 둘의 이야기는 계속 됐다. "그래, 손에는 살벌하게 생긴 막대기를 쥐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피를 털어내는데……! 휴~." "기억을 잃으시더니 초초하신 모양이네요." "그렇다고 그렇게 사람이 변하나?" "그건……." "듣고보니까 맞은 녀석들이 시비를 건 모양인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애들싸움이!!" 요크노민은 간신히 몸을 움직여 방을 나왔다. 그래서 였을까? 그래서 그렇게 자신감에 넘쳤던 것인가? 단지 애들싸움에 좀 이겼다고 해서? 요크노민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속으로……. 그 웃음은 조소였고 그 조소는 자신을 향한것이었다. 바보같았다. 어차피 페르노크와 싸운 이들은 페르노크의 신분 때문에 제대로 힘도 쓰지 못했을 텐데……. 고작 그들을 이겼다고 그렇게 사람이 달라졌단 말인가? 그리고……그리고 그런 유치한 자에게 마음을 열려고 했단 말인가? 요크노민은 한참을 그렇게 서서 웃었다. 노래소리. 처음듣는 가락이지만 구슬픈 음성. 바구니를 들고 정원을 지나치던 요크노민은 뜻밖의 소리에 멈춰섰다. 정원이 내다보이는 일층 테라스. 그 테라스에 놓여진 흔들의자가 흔들거리며 노래는 계속 됐다.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그 노래는 멜로디 뿐만아니라 가사조차 생소하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흔들거리는 의자밖으로 가느다란 은발이 삐져나와 있었다. 약하게 허공을 맴돌던 그것은 어느새 멈췄고 그와 동시에 노래도 멈췄다.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조심스레 그곳으로 걸어갔다. -투툭……- 빛을 받아 눈부신 은발과 마찬가지로 눈이 부시는 맑은 물방울이 그의 빰을 타내려가 무릎에 떨어지고 있었다. "……." 뭔가 입을 열고 소리내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요크노민이 있는 곳에선 들리지 않았다. 요크노민은 좀더 다가갔고 단 한마디만을 들을수 있었다. "보고싶다……." 요크노민은 순간 멈춰섰다. 아주 근접한 거리에 페르노크가 있었지만 멀게만 느껴졌다. 페르노크는 감겨져 있던 눈을 뜨더니 요크노민을 발견했는지 벌떡 일어섰다. 건물안으로 들어가버리는 페르노크의 뒷모습이 요크노민의 맑은 남색 눈동자에 들어왔다. ===================================================================== 기분이 안좋은 날입니다...... 이렇게 안좋기는 고 1때 이후로 처음이네요...... 인간관계라는거......정말 힘든것같습니다....... 아참, 한가지 물어도 될까요? 폭멜이 뭔가요? .................. 잡담을 쓸기분도 아니네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15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5일 09:5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25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27 -아해의 장- (쓴이 벗. 신승림) "왠지 굉잖히 오랜만에 돌아오는 것 같은데?" 테밀시아는 커다란 정문을 통과하면서 말했다. 뮤비라는 예의 미소를 지으며 답을 대신했다. "페르는 잘 지냈나 모르겠어." 동생을 염려하는 모습에 뮤비라는 또 한번 웃고는 창밖을 보았다. '노민…….' 언제나 미안함만이 가득하다. 하나뿐인 사랑하는 동생. 아무리 다가서려고 해도 멀리 물러서 버리는 동생. 뮤비라는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붉은 보석을 만져보았다. 물방울마냥 밑은 둥그스름하게 두툼한데 위로갈수록 가늘어지면서 길쭉해지는 모양을 하고 있는 보석이었다. 뮤비라는 신기하게도 언제나 똑같은 온도를 지니고 있는 보석을 자주 만지작 거렸다. 무슨 버릇마냥. 뮤비라는 평상시처럼 그것을 만지작거리더니 왠일인지 옷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테밀시아의 얼굴이 잠깐 굳었으나 곧 본래의 얼굴로 돌아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보석중에서 가장 진귀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드래곤의 피'일 것이다. 하지만 뛰는 자위에는 언제나 나는 자가 있는 법. 그 '드래곤의 피'중에서도 최고봉이라 꼽히는 보석이 다섯 개 있었다. 마치 각 종족을 대변하듯 그 다섯개는 각기 드래곤의 색체를 띄고 있었고, 때문에 그 다섯개에는 색에 맞는 드래곤의 이름을 붙이는 명예를 안았다. 예를 들면 골드 드래건의 색인, 황금빛을 띤 '드래곤의 피'는 '골드의 피' 블루 드래건의 색인, 푸른빛을 띤 '드래건의 피'는 '블루의 피' …… 이런식으로 말이다. 이 다섯가지는 감히 가격을 매길수도 없는 값어치를 지녔고 그 희귀함은 ' 드래곤 하트'를 능가했다. 그 대부분이 각기 드래곤의 손에 있음을 고려한다면 인간사에서는 평생에 보기힘든 전설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즉 그 보석이 인간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한손에 꼽힌다는 말이다. 그러했기에 뮤비라가 그렇게 대놓고 걸고 다니는 것이다. ……그렇다. 뮤비라가 걸고 있는 붉은 보석이 바로 '레드의 피'인 것이다. 이름이 붙은 '드래곤의 피'에는 각 드래곤들이 마법을 하나씩 걸어놨기 때문에 '레드의 피'는 보기드문 훌륭한 마법아이템이었고 값어치를 감히 따질수 없는 진귀한 보석이었다. 하지만 뮤비라에게는 그저 테밀시아에게 받은 선물이라는 것이 중요할뿐. ……혹은……그의 사랑하는 동생이 도둑으로 몰리게 했던 흉물이라는 것……. 뮤비라는 언제나 이 목걸이를 하고 다녔지만 동생 즉, 요크노민과 있을때면 몸깊숙히 숨겨버렸다. '레드의 피'는 그렇게 뮤비라의 애증을 받고 있는 물건이다. 페르노크는 괜히 일을 크게 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붕대를 벗지 않았다. 여러 책을 읽은 결과 「치유」마법이 고위 마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겪는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 묻지 않느냐."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그안에 배인 상냥함을 읽을 수 있었던 페르노크로써는 진짜 굳은 테밀시아는 처음보는 것이었다. "페르." 말의 억양이 없어지고 이제는 완전히 심문하는 식이다. "계단에서 굴렀다니까요." "손목은 그렇다 치고 복부쪽의 상처는 어떻게 된거지?" 페르노크가 이렇게 잡아떼는 것을 전부터 보아온 요크노민은 새삼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의아했다. 전에는 카한세올의 보복이 무서워서 라지만 지금은 무엇 때문인가? 요크노민이 보기엔 전과 같은 이유는 지금의 페르노크에게 대입한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패했어도 페르노크는 여전히 당당했기 때문에. 갑자기 페르노크가 정색을 하더니 테밀시아에게 물었다. "테밀시아 형님, 제가 절 친자를 말씀드린다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역시 누가 널 그렇게 한 거군." 말실수였을까? 하지만 페르노크는 별로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예,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하실겁니까?" 테밀시아는 여전히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몇배로 값아준다." 페르노크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정말 보기 드믄 웃음인지라 테밀시아도 잠시 거기에 정신이 쏠렸었다. 페르노크가 말했다. "그래서 말씀드릴수 없는 겁니다." 요크노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착한척인가.' 테밀시아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페르노크는 재빨리말을 이었다. "제손으로 값아줄겁니다." 테밀시아는 뮤비라 앞에서만 간혹 짓던 웃음을 마주 지으며 페르노크의 머리를 약하게 쥐어박았다. "알았다." 페르노크는 이내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라." '말해봐라'가 아닌 '말해라'……. 뮤비라는 풋,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테밀시아가 이런식으로 확실하게 '부탁'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은 보기 드믄 일이기 때문이다. 뮤비라가 속으로 웃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테밀시아는 페르노크에게만 집중할 뿐이었다. =============================================================== 연참은 좋은거겠죠? 음냐...... 오늘도 기분이 껄떡지근 합니다.... 액땜을 해야하는거 아닌지 몰러........계속 안 좋은 일만 터지고리...... 페르노크가 부탁할건 뭘까나~ 짐작이 가신다면야 할말읍습죠. 레포트쓰랴 소설쓰랴 정신이 읍네요.ㅡ.ㅡ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19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6일 20:0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6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6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26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61 -아해의 장- (쓴이 벗. 신승림) '역시……선생님 일쯤은 테밀시아 도련님이 오고나서 부탁해도 되니까 가만히 있었던 거로군…….' 요크노민은 도저히 컨트롤할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계단에서 감싸준 페르노크에게 고마웠다. 정원에서 믿어준 페르노크에게 감동했다. 카한세올에게 진 페르노크에게 실망했다. 학원에서의 난동을 듣고 난 후엔 조소했고 테라스에서 눈물을 흘린 모습을 본후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자꾸 치미는 답답함에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하인하나 나간다고 해서 뭐라할 일들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요크노민이 슬슬 뒤로 빠지는 찰라에 페르노크가 입을 열었다. "운동기구 좀 구할수 없을까요?" "운동기구?" "네, 힘이 부족해서요. '아령'……그러니까 근력을 기를만한 무거우면서도 한손에 들수있게 손잡이도 있고……음…… 크기도 적당히 작아야 하고……." 테밀시아는 순간 얼마전 공납 받은 팔찌가 생각났다. 마법이 걸려있긴 했지만 솔직히 쓸모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석에 박아두고 관심을 끊었던 물건이었다. "마침 알맞은 물건이 하나 있다. 곧 보내지." 페르노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기뻐보였다. 테밀시아는 처음으로 보는 동생의 기쁜 낯에 당달아 기뻐하다가 쉬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테이블 구석에 놓인 바구니를 보았는데 그안에서 진동을 하는 난내에 조금 인상을 찌푸리렸다. 그를 눈치챈 뮤비라는 먼저 페르노크에게 말했다. "환자이신 몸인데 단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페르노크의 군것질 매니아 성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테밀시아는 동조의 낯빛을 띄며 동생을 보았다. 뮤비라는 테밀시아의 그런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눈을 돌렸다. 일단 말을 꺼냈으니 나머지는 테밀시아가 해결할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묘한 점을 발견했다. 그의 동생이 어정정한 위치에서 서서 테밀시아를 쳐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입술을 조금 깨물고 있는 것이 무슨 결단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뮤비라가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을 때 테밀시아도 마찬가지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동생이 왠진 몰라도 반갑고도 긴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니?" 테밀시아와 뮤비라는 거의 동시에 각 동생들에게 물었고 동생들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여전히 긴장한 빛을 띠고 있었다. 테밀시아는 의아함을 접고 당장의 문제를 거론했다. "당분간 단 것은 자중하도록 해라." "예."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나오는 대답에 테밀시아는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뮤비라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생에게 더욱 의구심을 가졌지만 테밀시아가 방문을 나서자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테밀시아는 방밖으로 걸어나가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요크노민은 오늘부터 페르노크가 낳을때까지 페르노크의 시중만 들도록해라. " "네." 요크노민은 기계적인 음성으로 답했다. 그 음성은 마치 노예의 것과 같아 뮤비라는 가슴이 아려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페르노크는 궁금한 듯 물었다. "노민은 로레라자한테 이미 날 도우라고 명받지 않아어? 새삼스레 왜……?" 답하는 요크노민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생동감이 돌았다. 그래봤자 아까와 비교해서지 보통 사람에 비한다면 무감각했지만 말이다. "그건 비공식적인 것으로 제가 명받은 일을 끝내고나서 추가적으로 해야하는 일입니다. 24시간 페르노크 도련님의 곁에 있지 않은 이유가 그러해서지요. 테밀시아 도련님은 지금 제 공식적인 일을 페르노크 도련님의 시중으로 바꿔 24시간 곁에 있도록 한것이구요." 요크노민의 설명을 들은 페르노크는 뭐가 불만인지 작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풀더니 머리를 글적였다. "뭐……잘 된거니 넘어가고 ……." 그리고는 진저리를 치며 바구니를 보았다. "드디어 저것을 끝낼수 있음을 기뼈하자고." 요크노민에게 대부분 밀어버렸지만 그동안 페르노크가 먹은 단 음식들도 만만치 않았다. 즉, 그도 질려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다친 뒤 나오는 것들은 경악의 경지였다. 그나마 적게 먹었던 페르노크가 그러하다면 대부분을 처리했던 요크노민은 어떠하겠는가? 요크노민은 정말로 치가 떨린다는 얼굴로 바구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동시에 씩, 웃었다. 서로의 생각에 빠져서 옆의 이도 웃었다는 건 몰랐지만 말이다. ================================================================= 드디어 결정했습니다! 페르노크의 이번 이야기에서의 매듭을! 요크노민과의 화합을 끝으로 매듭을 지을까합니다. 각성까지는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미쳐가고 있는지라 안되겠습니다. 많은 얽힘은 천천히 풀기로 하고 일단 하나를 해결한뒤 외전을 쓰고 그다음 고대하던 아르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196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6일 20:0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2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4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테밀시아가 보낸 물건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무겁고 부피는 작은 물건이 올줄 알았지만 생김이 이러할줄은 몰랐다. "팔찌아냐?" 기묘하게 휘어진 팔찌는 무척 투명했다. 휘어지고 곡선져서 반대편 풍경이 그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투명했다. 유리같이 투명하지만 분명 촉감은 금속의 것이었고 실제로도 금속이라고 한다. "예쁘긴한데……." 페르노크는 팔찌를 껴보면서 말했다. "가볍잖아." 요크노민은 팔찌와 함께 딸려온 설명서를 건넸다. 페르노크는 그것을 받아 읽다가 눈을 형형히 빛냈다. "신기하군." 그리곤 궁금한 듯 팔찌를 보고 있는 요크노민에게 말했다. "이건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무거워지는 거래. 따로 사용방법은 필요없고 생각으로만 어느 정도 무거워져라, 하면 그 무게만큼 된다는데?" 그리고 마저 읽으면서 계속 말했다. "만든 마법사는 죽기직전에 이것을 만들었다고 해. 때문에 뭔가 특별한게 있을거라 추정하고 연구해 봤지만 이런 작용밖에 없어서 실망했다고 하네. 죄인을 묶을 수갑으로 쓸까도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의지를 따르는거고 주인이라는 개념이 없는 아이템이라 거기에도 쓸수가 없었데." 다 읽었는지 접어서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나머지 팔찌도 다른 손에 끼고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일단 10 Kg정도가 좋겠다.' 갑자기 그렇게 가벼웠던 팔찌가 묵직해져왔다. "이거 진짜 신기하다." "무거워 졌습니까?" 요크노민도 이런 물건은 처음보는 지라 신기한 듯 했다. 페르노크는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냥 호기심으로 해보려는 거였다. '발도 그정도 무게가 좋겠다.' 마법 아이템이긴 하지만 엄연히 팔찌가 아닌가? 때문에 그 누구도 발까지 무게를 단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페르노크가 생각한 것은 달랐다. '팔찌긴 하지만 엄연히 마법 아이템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페르노크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기뻐 할수있었다. 그의 발에도 손과 같은 무게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령'은 필요없겠군." 페르노크는 만족감에 몇번 팔을 휘둘러 보았다. 조금 힘들었지만 견딜만했다. "아!"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탄성을 지르는 페르노크에게 놀라 묻자 곧 답이 나왔다. "이 모양 어디서 본거다 싶었더니……뫼비우스군!" "뫼비우스요?" 페르노크는 팔찌가 걸린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띠를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하면서 팔찌를 빼들어 한 쪽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그 방향대로 움직이더니 이내 팔찌의 겉과 속을 모두 한바퀴 돌아 제자리로 온다. 요크노민은 신기해 했고 페르노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식으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말하는 거야. 신기하군. 여기도 뫼비우스라는 개념이 있는 건가?" "예?" '여기도'? 요크노민은 귀에 거슬리는 어감에 의아해 했고 페르노크는 조금 당황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리고는 다시 팔찌를 꼈다. "수련이나 시작해 볼까." 그리고는 재빨리 정원으로 나가버렸다. 요크노민은 아직 낫지도 않은 몸으로 수련을 하겠다는 페르노크를 간신히 튿어말렸다. 페르노크는 작게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바로 수련을 시작하면 의심을 받을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전속 하인이 되었기 때문에 페르노크의 거처에 방을 배속받았다. 방은 로레라자나 다른 하인들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페르노크 자신이 정해주는 거기 때문에 페르노크는 상당히 고심했다. 일층은 부엌과 쇼파와 테이블이 있는 거실과 흔들의자가 있는 테라스가 전부였기 때문에 애당초 논외였고 삼층은 전체가 페르노크의 침실였기에 논외였다. 결국 남은 것은 이층이었는데 이층은 서재와 욕실, 그리고 빈방이 하나가 전부였다. 선택할 거리도 없이 빈방을 내주어야겠지만 문제는 그방이 말그대로 황폐하다는 데 있었다. 가구하나 없이 황량한 방에 지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네 방에서 가구를 옮겨오도록 해야겠다." 하지만 페르노크를 무시하는 하인들이 그의 말을 들을지가 미지수였다. 요크노민은 일단 이부자리와 옷가지만 가지고 오겠다고 했고 페르노크는 그러라고 했다. 요크노민은 허락이 떨어지자 곧 방을 나섰지만 자신을 따라오는 페르노크에게 경악해야만 했다. "그냥." 왜 따라오냐고 들어가 쉬시라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이거였다. 페르노크는 별 생각없이 요크노민의 뒤를 따랐지만 어느정도는 호기심도 일었었다. 척보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시를 받는 처지인 것 같은 요크노민의 처소가 말이다. 한편 요크노민은 초조했다. 요즘들어 자신을 등쳐먹는 하인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형님이 오셨으니 더더욱 행포를 부릴것이 아닌가? 평소라면 그 혼자가 있을때만 나타났지만 페르노크라면 있든 말든 상관안하고 나올 가망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가 실제 보았듯 약하면서(?) 오기만 많은 페르노크가 가만히 있을 가망성은 극히 적었다.
번  호 : 18197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6일 20:0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2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1 페르노크는 무척 불편해 하는 요크노민이 어딘가 이상했다. 때문에 갑자기 생각난 듯, "아참, 그걸 잊었네!" 하고는 몸을 뺐다. "미안, 뭘 좀 잊고 있었어. 가지고 들어와. 먼저 가있을깨." 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처소로 걸어갔다. 역시 그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평소처럼 뭔가를 주면 그들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요크노민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급히 오가느라 뮤비라가 이번에는 동생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이럴때는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주면 되지만 그나마 요즘 설치며 계속 가져가는 그들에게 모두 빼앗긴지 오래였다. 이처럼 완전히 빈털털인적도 없었던 것같았다. 그들이 요크노민을 발견한 것 같다. 요크노민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점점 무감각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조금은 질려 있었던 그의 얼굴은 점차 무심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무표정해졌다. 바로 그때, 그들은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뭘 또 받으셨나?" "……."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침묵하는 요크노민에게 이상하게도 그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요크노민이 의아하게 생각할 때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차하며 이상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다 한명이 멈춰있는 요크노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돈이 없다면 다른 방법도 있지만 말야."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요크노민을 보며 그들은 계속 웃어 댔다. 무감각하게 있던 요크노민조차 소름이 끼칠정도로 묘한 웃음이었다. 요크노민의 눈이 순간 커졌다.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던 남자의 손가락이 슬며시 움직이면서 요크노민의 어깨를 쓰다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크노민의 무심이 깨지면서 조금씩 인상을 찌푸렸다. "이녀석 의외로 이쁘장하게 생겼단 말야?" "그 피 어디가겠어? 이녀석 형님도 그 잘난 외모로 큰 도련님 꼬셔 호강하고 있잖아?" 그리고는 가만히 있던 요크노민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단순히 옷만 벗겼다면 요크노민은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늘쌍 그랬으니까. 늘 요크노민의 무언가를 강탈하기 위해 몸을 뒤져댔으니까. 요크노민은 그제서야 그들이 평소에 자신을 등치던 이들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원래라면 이 안쪽으론 들어오지 못할 하급중에서도 하급 시종이었다. 요크노민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말고 있을 것이가, 아니면 소리쳐 도움을 청할것이가? 전자의 길을 택한다면 모멸감을 받을 것이나 남에게 알려지지는 않을 것이고 후자의 길을 택한다면 수치스럽겠지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고민 사이에 그들은 이미 행동에 들어가버렸다. 요크노민은 일단 반항해 보기로 했다. 사람을 부르기엔 그의 자존심이 너무 컸고 그냥 당하기엔 그의 자존심이 너무 굳샜다. 요크노민의 반항은 이미 예상안의 일인지 그들은 오리혀 좋아했다. 요크노민은 가냘픈 몸을 비틀며 그들을 물고 발로 찼댔으나 그들은 이미 그쯤의 반항은 이골이 난듯했다. 요크노민은 결국 소리를 지르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일에 능숙해보이는 그들은 요크노민의 그런 기색을 금방 눈치챘고 적절한 대응도 했다. 요크노민은 자신의 입을 막은 그들의 손을 물어보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음을 알고 절망했다. 거칠게 그의 옷자락을 벗기던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위로 그림자가지자 멈칫했다. "뭐……?" 돌아본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주먹을 보아야 했다. "개자식." 억양없는 욕설이 이빨이 부러진 남자의 귀에 파고들었다. 다른 두명은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상대를 살폈다. 그리곤 반가운 낯을 했다. 비록 기습을 당해 놀라긴 했지만 상대는 지금 상대하는 녀석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소년이 아닌가! ……그들은 아직 몰랐던 것이다. 외각에서만 일하는 그들은 아직 몰랐던 것이다. "페……." 요크노민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숨을 몰아쉬느라 말할수 없었다. 아까 남자가 입을 막을 때 코까지 막아버렸었던 것이다. 차가운 눈동자가 자신들을 향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여유로웠다. 아무리 그래봤자 어린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이 아닌가? 게다가 하나이다. 뿐만아니라 오른손엔 붕대까지 감싸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곧 그 생각을 없애야만 했다. 소년은 강했다. 적어도 힘만 믿는 그들보다는 강했다. 적절하게 힘을 줄주도 알았고 급소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감도 빨랐고 반응도 빨랐다. 그리고, "페르노크 도련님이십니다, 그만 두십시요." 요크노민의 무감각한 목소리가 크게 다가왔다. 그들은 곧 멈짓하더니 소년의 눈치를 슬슬 살펴 보았다. 소년은 아까와 똑같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보았지만 그들에게는 한층더 예리하게 다가온 모양이다. 파랗게 질려 도망가는 걸보니 말이다."괜찮아?" "도……련님……." 페르노크는 차가운 눈으로 도망가는 사내들를 노려보다가 요크노민을 부축해 그의 처소로 들어갔다. 일단 옷도 입어야 했고……또 요크노민이 너무 위태로와 보였기 때문이다. 크지 않았지만 작지도 않은 요크노민의 방에 들어가 페르노크가 제일 먼저 한일은 요크노민의 옷가지를 챙겨 던져주는 것이었다. 요크노민이 걸치고 있던 옷은 이미 반 이상이 찟겨져 바닥을 뒹굴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요크노민은 아무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넝마가 된 옷가지를 벗는 모습을 확인한후 페르노크는 등을 돌려 요크노민의 나머지 옷을 챙겨 큰 옷에 올려놓고 질끈 묶어버렸다. 그리곤 그것을 어께에 지고 나섰다. "이블은 됐어. 이곳을 나가자구." 하며 옷을 다입고 주춤해 있는 요크노민을 재촉했다.
번  호 : 18198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6일 20:09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2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7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페르노크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둘은 계속 침묵했다. 하지만 요크노민은 꼭 해야 할말이 있었다. 머뭇거리다 기어이 입을 연다. "오늘일……." 페르노크가 뒤돌아보자 요크노민은 그의 눈동자에 초점을 맞췄다. "비밀로 해주십시오." 무표정했던 페르노크는 갑자기 차갑게 웃는다. 요크노민은 흠짓하며 고개를 숙인다. 자신의 처지를 그제서야 떠올린 것이다. 자신은 그의 하인이다. 그는 귀족중에서도 최고위 귀족의 차남 '마'이다. 그런 그에게 고작 하인인 자신이 그에게 부탁이 아니라 '통보' 혹은 '명령'을 한 것이다. 요근래 그가 잘 대해 줬다고 자신의 처지를 그만 잠시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돌아갈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그렇게 자신을 다잡았을면서. 그만 실수해버리고 만 것이다. 요크노민은 고개를 숙인체 곧 들려올 냉소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냉소는커녕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지 않았다. 요크노민이 용기를 내 고개를 들었을대 페르노크는 입을 열고 있었다. "넌 가만히 당할 생각이었냐?" 요크노민은 묵묵히 있었고 페르노크는 계속 말을 했다. "왜 처음부터 반항하지 않았지? 처음부터 소리치고 사람을 불렀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거 아냐?" 요크노민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페르노크는 그런 그가 답답한지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말해봐." 페르노크의 목소리는 억양없이 흘러나왔다. "당하고 있는 꼴을 보니 하루 이틀도 아닌 것 같더군. 그러고 살고 싶나?" 요크노민의 눈이 점점 떨려왔다. "어차피……." "똑바로 크게 말해."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페르노크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어차피 난 그런 당하면서 살 팔자야! 난! 난……형님과는 다르다구……." 처음으로 말을 놨다. 그누구에게도 말을 놓지 않던 요크노민이 생애 처음으로 말을 놓아봤다. 그것도 까마득히 높은 사람에게. 요크노민은 그것을 깨달지 못한 모양이다. 한번 터진 그의 감정은 거잡을수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라고 이러고 살고 싶은 줄알아? 나도 형님만큼 잘나지고 싶어! 형님만큼 강해져서 아까같은 녀석들은 모두 없애버리고 싶다구!……나라고……나라고……흐윽." 요크노민은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뿌리쳐진 손을 약하게 쓰다듬던 페르노크는 뚱한 음성을 말했다. "아까 일이랑 네 형님이랑 무슨 상광이냐?" 요크노민의 흐느낌이 잣아들고 있다고 생각하는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네 형님이 잘났건 못났건 나완 상관없어. 난 그저……" 페르노크는 다시 앞서 걸으며 말을 이었다. "그저 네녀석이 멍청하게 당하니까 화가날뿐이라구." 요크노민은 멍하니 있다가 얼른 페르노크의 뒤를 따랐다. 형님이야기를 꺼내면 모두들 동정과 이해를 겸비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이곤 했던 것이다. "넌 되고 싶은게 있냐?" 요크노민은 갑작스런 페르노크의 질문에 눈을 크게 떴다.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의 형님조차도. 하인주제에 꿈이 어디있겠는가? 아니 꿈이 있다고 해서 이루어 질 리가 있겠는가? 물론 꿈이 빨래를 가장 잘하는 하인이 되고 싶다, 라던가 청소를 가장 잘하는 하인이 되고 싶다라면 이루어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요크노민이 답이 없자 페르노크는 조소했다. "뭐야, 꿈도 없는거냐?" 요크노민은 입은 다시 굳게 닫혔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 꿈이란 단어는 깊히 각인됐다. '내 꿈은…….' ==================================================================== 생각보다 일찍 컴이 복구됐습니다*^^* 실은 어제 고쳐졌지만 음.....정리할게 있어서 못올렸습니다^^ 외전은 방금 다 쓰고 올리는 길입니다 다음에 올릴때는 페르노크이야기의 매듭과 외전이 나올겁니다 에구~ 여유분이 많은면 뭐합니까? 이렇게 연참으로 날려버리는데...... 음냐.......^^;;;; 실은 더 올릴생각이었는데 올리는 도중에 자꾸 다른 글이 껴서 담에 올릴려고 합니다^^;;;; 요크노민의 꿈을 짐작할수 있겠지요? 아마도......^^;;;; 음, 외전은 좀더 다듬어야 겠지만...... 맘에 쏙든다고 해야 하나....ㅋㅋㅋ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223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7일 19:24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3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25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날이 내 일생을 바꾼 날이 아닌가 싶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많은 일들이 나를 바꿨지만 그 날이야 말로 결정적인 날이라 생각한다. 그 날 내 일생의 최고의 '지기'가 생겼으니까. 그 날……내 꿈을 고백한 바로 그날……. -페르노크의 영원한 벗 페르노크의 영원한 조언자 정보길드의 창시자 요크노민.마.크리터의 회고록중에서 그는 곧 수련을 시작했다.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무척 진지해 보였다. 난 계속 묘한 파동이 이는 가슴에 두근거려야 했다. 꿈이란 돌맹이가 일으킨 파동은 생각보다 더욱 컸다. 계속 해서 검을 휘두르던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넌 강해지고 싶지 않냐?" "네?" "그따위녀석들에게 당하고도 분하지도 않냐는 말이다." ……그 파동이 잠시 나를 어떻게 한 모양이다. "도련님도 그렇게 강하시진 않잖습니까?" "뭐?" "그따위 녀석에게 당한 저도 저지만 도련님도 카한세올 도련님께는 형편없이 지셨잖습니까." ……분명히 나를 어떻게 한거다. 그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피식거렸다. "어차피 어제도 도련님도 자신의 위치에 그들이 물러선 것 아닙니까." 나는 조금 미쳤던 것 같다. "어차피 도련님도 뒷 배경없으면 그저그런 소년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니 아주 많이 미쳤던 것 같다. 말해 놓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것같다. 그는 계속 피식거리더니 말했다. "저항할 정신도 안 박힌 녀석에게 그런 소릴 듣게 될줄은 몰랐는걸?" 날 비웃는 소리는 이미 익숙하다. 새삼스러울것도 없다. 헌데……왜 이리 분한것일까? "게다가 현실에 안락한 녀석에게 말야." 그리곤 돌아선다. 돌아서는 모습이 너무나 차갑다. 어제 날 힐난할때의 눈보다도 차가웠다. 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정말이지 내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나도 꿈이 있어!" 그가 돌아봤다. 그의 눈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뭔데?" 내가 간직하고 있던 꿈. "마스터." "뭐?" 그가 놀란다. 난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정보 길드를 만들거다. 그리고 마스터가 될거야!" 비웃을줄 알았다. 그깟 ' 말', '문서' '따위가 무슨 값어치가 있느냐. 내가 이 말을 처음 꺼냈을 때 그 당시 들었던 모든 이가 비웃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정보가 나중에 많은 사람들을 휘저을 시대가 분명히 올거야! 전쟁도 정보가 있다면 훨씬 쉽게 이길수있어. 황실에서부터 거지까지 정보로 생활하고 있단말야. 스스로 모를뿐이지!" 하지만 모두 비웃었다. 때문에 난 그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설명했다. 그는 무척 놀란 듯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거……." 그리고 웃었다. "멋진데!"
번  호 : 18224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7일 19:25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3/3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99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산만한 거리에 한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소년이 서있었다.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인지라 그 산만함은 여간한 도시의 것을 넘고도 남았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여유있게 서서 분수대를 구경하는 소년은 상당히 눈에 띄었다. 게다가 소년이 입은 푸른색옷은 여행복용으로 만들어져 단순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지만 그 재질은 최상품의 것을 윗돌고도 남아 소년을 더욱 눈에 띄게 만들고 있었다. 주위에서 자신을 힐끔 거리며 지나가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밝은 낯빛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나이답지 않게 너무나 순진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노리는 이들이 있었다. 어딜봐도 부티나는 그의 호주머니를 말이다. "앗!" 소년은 보랏빛 눈동자를 크게 뜨며 자신에게 부딪혀 온 꼬마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괜찮니?" 소년은 꼬마의 옷에 묻은 먼지를 떨어주며 웃었고 꼬마는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하고는 사라졌다. 꼬마가 사라지고 소년은 분수대에 앉았다. 기다리는 이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이내 나무 위에 있는 새의 둥지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슬아슬한곳에 용케 자리잡은 둥지가 신기했다. 멍하니 그곳을 올려다 보는 소년의 어깨를 누군가 두둘겼다. 소년은 활짝 웃으며 옆을 보았다. 의외로 어린 아이가 옆에 서있었으나 여전히 반색하는 걸 보면 기다리던 이가 맞는 모양이었다. 어린 아이는 소년의 옆애 앉아 들고온 짐을 제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소년은 싱글벙글하며 구경했다. 아이가 사온 짐에는 먹을 것들이 태반이었는데 육포등과 같이 오래가는 것들이 아닌 몇일안에 먹어버려야 하는 것들이었다. 차례대로 정리하는 모습에서 노련함을 엿볼수 있었으나 아이의 어린 모습에서 그 것은 상당히 반감되 있었다. 정리를 마친 아이는 일어나 짐을 묶은 끈을 어깨에 걸쳐서 들어 올렸다. 그리곤 가자는 뜻인지 소년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한 뒤 일어났다. 그리곤 옆을 내려다 보던 그의 얼굴엔 처음으로 웃음이 가셔져 있었다. 그리곤 울쌍이 되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짐이 없어졌어, 유니." 본래 짐은 한참 전에 없어졌으나 모든게 신기해 죽을 지경인 소년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유니라 불린 아이는 살짝 인상을 구겼으나 익숙한지 별로 놀라진 않는 기색이었다. 그는 소년의 짐에 있던 물건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일 쯤은(?) 이미 예상했던 바라 아주 필요한, 그러니까 마을에 도착하지 않는 이상 구하기 힘든 것들은 대다수 그의 짐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부피가 좀 되는 식량들은 굳이 청년이 들어야 된다고 우겨서 별수 없이 넘겨 주었고 그 결과는 그냥 지나쳐도 됐을 이 도시에 들어오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는길에 거지를 빙자한 등치기한테 식량을 몽땅 줘버린 것이다. 그가 자리를 비운 아주 짧은 새에 말이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이 도시가 있어 걱정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아예 곧 사라질 음식만 사가지고 온 것이다. 쇼핑을 돕겠다고 소년이 떼를 썼지만 그의 장보는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로써는 그냥 기다리고 있으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잠깐 동안에 또 이런 일이 생겨 버리다니……. 한참 소년의 짐들을 떠오려 보던 아이는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어떤 물건이 떠올랐다. '텐트…….' 휴대용 텐트로 방수, 방한이 되는 고가의 물건이 바로 소년의 짐에 있었던 것이다. 울먹이는 소년을 물끄러미 보던 아이는 이내 얼굴을 풀고 짐을 챙긴 뒤 앞서 걸었다. 저 귀족 도령이 텐트도 없이 야영을 할수 있을 리 없었고 그도 정신적으로 지쳐버렸기 때문에 그냥 하루 여관에 묵기로 정한 것이다. 소년은 여관으로 향하는 아이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미안, 유니." 유니펠스는 뒤를 돌아보더니 풀이 잔뜩 죽어있는 친구, 필브리안을 보고 그만 웃어버렸다. 그 모습에 방금 전 사건을 잊었는지 필브리안은 덩달아 생긋 웃었다. 볼까지 조금 붉힌채. 유니펠스는 한숨을 작게 쉬며 못말리겠군, 하는 눈빛으로 필브리안을 보았다. 제법 고급으로 보이는 여관 앞에 당도했다. 지은 죄가 있던지라 필브리안은 먼저 나서서 여관 값을 내겠다고 했다. 유니펠스는 만류하려다 그냥 그가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필브리안이 너무 기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벌써 그 일을 잊어 버린 듯 했지만 말이다. "어라?" 특등실 두 개를 주문한 뒤 셈을 하려고 품안을 뒤지던 필브리안은 너무나 당황하며 유니펠스를 보았다. 유니펠스는 이마를 집고 벽에 기대 있었다. 이미 필브리안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갑이 없어졌어, 유니." ================================================================== 세상물정 모르고 순진하기만한 필때문에 유니가 고생이 많죠? 곧 여행의 대명사 길동무, 즉 동료가 늘겁니다^^ 간만에 유니이야기를 쓰니 기분이 좋군요^^ 페르이야긴 요번엔 좀 힘들었어요. 다소 무겁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음.....이번 아르의 이야기는 어디쯤에서 끊을지 고민중입니다^^;; 늘 그게 고민이군요..... 하하 아, 그 홈피 주소는 myhome.hananet.net/~af39 랍니다^^ 어제 문을 열어서 좀 썰렁한 면도 있지만 금방 흥성해 질것같아요 참 잘되어 있거든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ps. 아해의 장 묶음것 원하시는 분은 멜로 연락주세요^^ 단, 배포는 안됩니다!
번  호 : 1822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7일 19:25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71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유니펠스는 다시 울먹거리는 필브리안의 등을 두어번 토닥인 뒤 품에서 지갑을 꺼내 셈했다. 필브리안의 하는 행동거지를 보면서 눈을 험악하게 빛내던 여관 주인은 유니펠스가 내미는 돈에 입이 벌어지면서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식사를 먼저 하시겠습니까, 목욕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이미 물주는 꼬마다, 판단한 주인은 그를 향해 물었고 꼬마는 덜떨어진 소년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먼지투성인 옷을 내려다보며 머뭇거렸다. 이미 답이 됐는지 아이는 주인을 돌아보았고 주인은 웃으며 확인했다. "목욕, 먼저이시군요." 그리곤 종업원에게 특등실 욕실을 준비하라 명했다. "미안……."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 걔단을 오르던 필브리안은 잔뜩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고 유니펠스는 그런 그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유니펠스가 앞서 걸어가 두어 계단 위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등실은 각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는데 특별히 거기엔 「워티」가 있었다. 「워티」로 온도를 조절한 물은 언제나 쾌적했다. 유니펠스는 때문에 항상 「워티」를 애용했다. 유니펠스는 깊은 욕조안에 잠수해 들어갔다. 그의 단발머리가 물 속에서 어지럽게 흩뜨러졌다. "푸핫!" 죽었나, 싶을 정도로 오래 물속에 있었던 유니펠스가 마침내 나왔다. 욕조 앞에 걸려있는 커다란 거울에 비취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유니펠스의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하다. '자라지 않는다……5년전부터…… 키도……머리카락도……모든게 변하지 않는다…….' 주위에서 뭐라 수근거리는 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딴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몸이 자라지 않는데 무심할 이는 없을 것이다. 유니펠스는 다시 물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자신의 몸상태를 알아챈 것은 3년전 이었다. 원인을 알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것은 2년전 이었다. 계속 이 상태 일수 있다는 마법사의 말을 들은 것은 1년전 이었다. 유니펠스는 자신의 맨 이마를 한번 더듬어 보았다. 불쾌한 감촉이 느껴졌다. 크게 대인듯한……이질적인 피부의 감촉. 유니펠스는 거칠게 고개를 저은 뒤 욕조에서 나왔다. 그에겐 이미 쾌적한 온도의 물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끈을 무엇보다 먼저 집어든 그는 이마를 가리고 대충 옷을 걸치고 나왔다. 돈을 전부 잃은 그의 친구는 분명 허기에 지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 이었다. 그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처량하게 앉아있는 앳띤 미소년이 보였다. "유니~." 그를 발견한 소년은 너무나 밝게 웃으며 뛰어왔다. 유비펠스는 자신의 귀걸이를 한번 쓰다듬으며 소년 모르게 그 안의 공간에서 보석을 끄집어 냈다. "뭐야?" 보라빛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자신에게 건넨 보석을 받아드는 모습은 나이를 불문하고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유니펠스는 그냥 앞서 계단을 내려갔고 필브리안은 보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따라 갔다. "나 주는 거야, 유니?" 그가 고개를 끄떡이자 헤벌쭉해져서 햇빛에 비쳐본다. 그의 눈동자와 같은 맑은 보라빛 보석이었다. 유니펠스는 그런 그를 돌아보더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니펠스로써는 필브리안에게 금품을 준다는 것은 상당히 불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계속 여행을 같이 해야할 친구가 아무런 금품없이 돌아다닌다면 상당히 피곤해지기에 별수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냥 먼저가 식사주문을 하고 있으면 될 텐데도 굳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여행을 하다보면 예상외의 일이 많이 벌어진다. 어느 정도의 돈은 필히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해 따로 갖고 있게 했던 자신의 돈주머니는 불과 이틀새에 잃어버렸지만 말이다……. "유니." 빵을 쪼게 먹던 유니펠스 앞에서 계속 보석만 만지작거리던 필브리안은 생각난 듯 말을 걸었다. 유니펠스가 자신 쪽을 쳐다보자 필브리안은 웃으며 손가락에서 반지하나를 뽑아 건냈다. 붉은 빛을 띄는 옥가락지였는데 별로 굵직하진 않아 부주의 한다면 금방 부서질 것 같아 보였다. 유니펠스는 그 반지가 용케 필브리안의 손에서 살아남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거 유니 줄게!" 유니펠스는 필요 없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지만 필브리안은 막무가네였다. 유니펠스는 어쩔수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필브리안은 방긋 웃으며 설명했다. "이거, 내가 선물 받은 건데, 사용자의 생각을 대신 말해주는 거래." 그리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유니펠스를 봤다. 유니펠스는 말을 해준다는 소리에 마찬가지로 호기심이 동해 반지를 살펴보았다. 필브리안은 신나게 덧붙여 설명했다. "일단 말하고 싶은 말을 생각으로 강하게 염하면 된다는데? 아, 그리고 왼쪽 검지에 끼는 거래." 유니펠스는 그말대로 하고는 오른손을 반지위에 포개곤 눈을 감고 염했다. '필.' 일단 친구의 애칭을 염했으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자눈을 떴다. 그러자 친구의 실망한 얼굴이 들어왔다. "안돼?"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였고 필브리안은 미안하다며 어쩔줄 몰라했다. 유니펠스는 고개를 저어보이며 식사에 열중했다. 필브리안도 배가 고팠는지 보석은 품안에 넣고 빵을 집어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필은 조심스레 물었다. "유니, 내일 아침에 출발할거야?" 그가 끄떡이자 다시 물었다. "저기……잃어버린 건 언제 살거야? ……오늘 살거야?"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필브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사올게, 유니는 쉬어." 나름대로 배려하는 그에게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며 유니펠스는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하지만 필브리안은 그런 유니펠스는 보지 못하고 점원에게 상점이 어디있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유니펠스는 고개를 푹 숙인체 머리를 집었다. "갔다올게!" 필브린안은 신나게 나갔고 유니펠스는 힘없이 손을 저어 인사했다. 나머지 손으론 여전히 머리를 집은체 말이다. ====================================================================== 정말이지 고생이 많지요^^ 어느 분께선 바보왕자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으시더이다.....^^;;; 제가 페르노크와 아르, 필을 그렸답니다^^ 예전에 말했었지요? 음.....이번에 스캔을 해서 보고 싶다는 분들께 멜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배포는 저만 할거구요, 받은 분들은 보시기만 하기로 했습죠^^ 누구든 보고 싶으시다면 멜주세요, 받고 싶은 인물과 함께요^^ 물론 다 보고 싶으시다면 다 보내드립니다^^ 지금은 이들밖에 없지만 곧 다른 인물도 그릴거랍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26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8일 20:22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5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22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에? 이게 내꺼라구?" 유니펠스는 애써 한숨을 참으며 아직도 머뭇거리는 필브리안의 손에 그것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발밑에 깔려 엄청 쫄아있는 이를 내려다 보았다. 고운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검녹색 눈동자를 지닌 그는 남자의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망각해 하기 충분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겁에 질려있는 얼굴이 무척 애처로와 보였으나 그를 내려보는 유니펠스의 눈초리엔 차가움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유니펠스가 가슴에서 발을 떼자 그는 눈치껏 도망치려 했으나 만만치 않아보이는 어린아이가 송곳처럼 생긴 단검을 뽑아들자 발이 굳어버렸다. "유니, 왜 검을 뽑아들고 그래?" '먹이감'이었던 소년은 여전히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린아이와 굳어있는 소매치기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묻고 있었다.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이들은 갑자기 칼부림이 날것같자 한걸음씩 물러섰다. 현행에서 붙잡힌 도둑은 피해자의 마음대로 처리할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겐 소년을 말릴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이봐……." 남자는 자신의 것과는 지극히 대조적인 어린아이의 주홍빛 눈동자를 두렵게 응시하며 뒷걸음 치기 시작했다. "유니야, 이불도 사야 되는 거야?" 필브리안은 남자와 유니펠스를 차례로 둘러보다가 둘의 사이로 보이는 이불가게가 눈에 띄자 물었다. 일단 도망못가게 단검을 뽑긴 했지만 필요이상으로 상대가 겁먹자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던 유니펠스에겐 이번만큼은 필브리안의 둔감함이 고맙게 느껴졌다. 유니펠스는 고개를 저으며 망토등을 파는 가게를 가르켰다. "이블대신 저걸 쓰는 거야?"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이며 필브리안의 짐속에 있었던 망토를 떠올렸다. 여름이다 보니 망토를 두르지 않고 그냥 짐속에 넣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친구의 손을 잡아 끌며 유니펠스는 가게로 발을 돌렸다. 단검은 이미 자신의 검집에 얌전히 꽂인지 오래였다. "어……?" 어리벙벙한 얼굴로 남자는 돌아서 걷는 두 소년을 보았다. 의외로 싱겁게 일이 끝나자 모두들 안도하면서도 조금은 아쉽게 흩어졌다. 그리고 남은 남자는 검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틀 동안 쓴 돈이 혼자 왕복하는 데 들었던 돈의 두배가 드는군.' 유니펠스는 다시 싼 필브리안의 짐을 내려다 보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옆에서 구경하다 어느새 잠든 친구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유니펠스는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그는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 보통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아주 미세한 이질감. 방안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짐 또한 그가 내려놓은 그대로였다. 헌데도 그건 '느낌'이 들었다. '느낌' 혹은 '감'으로 살아남아 왔던 일급 몬스터 헌터인 그는 신경을 곤두세운체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내 긴장을 풀고 침대로 가 앉았다. 그에게 든 '느낌'은 '있었던'이지 '있는'이 아니였던 것이다. 즉, 누군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뜻. 그건 긴장할 필요가 하등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차피 하루 머물렀다 떠날 곳이니 상관없다, 생각한 유니펠스였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서던 그는 짐과는 별도로 떨어진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검을 발견했다. 그에겐 막대기와 다를바없는 뽑히지 않는 검이었다. 막대기에 불과한 그것을 가지고 온 것은 자기 답지 않은 짓이었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인 것이다. 그것을 잠시 보던 유니펠스는 곧 짐으로 걸어가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그리곤 침대로 가 누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동료와의 여행은 초반부터 쉽지가 않았던지라 그는 정신적으로 지쳐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걱정해보며 잠을 청했다. ========================================================================== = 늦었지요? 음......제 오른손이 삔게 아니라 인대가 늘어난거랍니다........ 갑자기 안쓰면 안될것같아서 일단 한회 무리해서 써봅니다. 의사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했기때문에 한주정도 설은 못올리게 됐습니다. 계속 치료받아야 되거든요^^;;;;; 새로운 뭔가가 있는 듯한 캐릭이 나왔지요?^^ 이 캐릭은 굉잖히 중요한 캐릭이랍니다>o< 이 인물에 관한것은 제가 손이 다 낫고 풀기로 하지요^^;;;;;; 금 꼭!!!!!기다려 주시구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266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8일 20:22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60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아침에 일어나 식당을 내려섰을 때 유니펠스는 그곳에 어수선함을 알수 있었다. 단순히 손님이 많아 생긴 그런 것이 아닌 뭔가의 화제를 두고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유니펠스는 저쪽에서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있는 남자에게 굳이 다가가 무슨일인지 알아볼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저 소란이 좀 가셔져 있는 자리에 앉아 뒤따라오고 있는 친구에게 자리를 권했을 뿐이었다. 그와는 달리 친구는 왜 이리 소란스러운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유니, 무슨 일이까?" 유니펠스는 종업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그에게 건네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이거랑……이거랑……이거주세요." 평소 좋아하던 메뉴를 시키며 유니펠스에게 의향을 물은 필브리안은 자신과 똑같은 메뉴로 하나 더 시켰다. 유니펠스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길 뿐 관심을 안보였기 때문이다. 필브리안은 그런 친구의 행동이 알아서 주문하라는 뜻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주문을 하는 동안에도 저편에서 남자는 계속 뭔가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가서 듣고 올게!" 주문을 마친 필브리안은 곧 그곳으로 뛰어갔다. 유니펠스는 그것을 그냥 지켜보면서 북적통에 또 소매치기 당하지 않을까, 주의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왠지모를 불안함이 몸을 엄습함을 느꼈다. 그 불안함은……그때와 매우 유사했다. '어머니'와 '곤크'에서 나와 호수에 있었을 때……. 그 야성의 존재들이 덮쳐왔을 때……. 바로 그때와 같은 '예감'. 유니펠스가 그 '감'에 신경을 곤두세울 때 그의 뒤에서 그를 툭 치는 이가 있었다. "헤헤, 유니야." 필브리안은 보통때와는 달리 놀라며 반응하는 친구 때문에 덩달아 놀라버렸다. "유,유니?" 주변에서는 갑자기 살벌한 단검을 뽑아 곁의 사람의 목에 가져다 대는 진풍경에 놀라 조용해졌다. 유니펠스는 자신의 목에 들어온 검은 안중에 없고 친구가 어디 아픈가만 살피는 필브리안 때문에 자신이 한 행동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유니펠스는 미안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보이며 검을 거두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오랜시간 함께 있었던 필브리안은 그안에 내포된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당황하며 손을 저어댔다. "왜 그래, 유니?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정말 영문 모르겠다는 그의 얼굴을 보며 유니펠스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필브리안은 다시 헤벌쭉해져서 말을 늘여 놓았다. "아참! 유니, 저사람이 말야 '이카미렌'산맥의 줄기를 돌아가다가……." 하지만 그의 말이 미처 시작도 되기 전에 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왔고 배가 고팠던 필브리안은 그것에만 열중하게 됐다. 자신이 한 행동과 불안한 '예감'으로 필브리안의 수다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유니펠스는 굳이 먹고있는 그를 닥달해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들은 그냥 그렇게 아침을 하고 길을 떠났다. "아, 맞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이카미렌'산맥을 지나다가 거대한 늑대떼를 봤다는 거야! 양도 무척 많았는데 그 남자가 말하길 자기는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봉변을 면했다던데……." 높은 언덕배기에 말을 탄 두 남자중 나이가 더 있어보이는 남자가 말을 타고 있는게 신기한 나이의 소년에게 말을 늘여놓고 있었다. 그둘 밑에는 그들이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가로지르며 날렵하게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는 늑대떼들이 보이고 있었다. 필브리안은 자신이 들은 말을 실상으로 보니 신나는지 손벽까지 치며 구경하고 있었고 유니펠스는 머리를 집고 그런 친구를 보고 있었다. 그런건 빨리 말했어야지! ……말할수만 있다면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얼굴을 하고. 그 늑대들은 늑대과에서도 고위로 취급되는 '이누카'로 왠만한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데다 몸집은 완전히 성장한 말의 두배를 웃돌았다. 몬스터로 지정한다면 상위에 들고도 남을 괴력과 점프력, 스피드와 날카로운 이를 지니고 있는 짐승이었다. 그들은 동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동물이었기에 건들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모든 이들이 말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처럼 무리를 지어 가는 그들은 인간들의 군대를 능가하는 위협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한 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아무리 유니펠스라도 필브리안까지 보호해가며 무사히 피신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늑대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한 이동이 아니였던 듯 뻔히 보이는 둘은 무시하고 달리고 있었다.
번  호 : 18267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8일 20:2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7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7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59 "어!" 필브리안은 갑자기 놀라 언덕 밑으로 말을 빠르게 몰았다. 얌전히만 있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았던 위험에 그가 스스로 뛰어들자 유니펠스는 놀라 같이 말을 몰아 다가갔다. 필브리안은 자신의 가까이로 친구가 오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저기 사람이 있어, 유니!" 하며 말을 멈추지 않는 필브리안의 어떻게 말릴 길이 없자 유니펠스는 한숨을 쉬며 자신이 더 앞으로 나갔다. 마술이 월등히 뛰어난 자신이 뭔가를 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위험해, 유니!" 뒤에서 당황한 필브리안의 목소리가 유니펠스의 귀에 황당하게 들려왔다. 유니펠스의 눈에 다리를 다쳤는지 넘어져 있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멍청이.' 유니펠스는 하다못해 기어갈 생각도 하지 못한체 완전히 질려 자기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늑대떼를 보는 그를 보며 속으로 욕설을 내밷았다. 다행히 늑대들의 이동방향은 동쪽으로 지금 유니펠스가 뛰어드는 방향이 남쪽임을 고려하면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그들과의 충돌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다. 유니펠스는 다리에 힘을 주어 고삐를 한손으로 잡고 몸을 비스듬히 밑으로 기울었다. 멍해있는 멍청이를 집어들기 위해서였다. 유니펠스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는 마술을 가지고 있는 필브리안은 한참 뒤에서 놀라 소리치고 있었다. 보통인의 안목밖에 갖추지 못한 그가 보기엔 금방이라도 유니펠스가 낙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게 치켜뜬 필브리안의 시야를 거대한 늑대들이 가로막았다. 그들은 바로 옆에 있는 필브리안을 힐끔 보면서도 그이상의 관심은 가지지 않을 체 계속 발을 놀려 빠르게 지나쳤다. 필브리안은 순수한 동경의 눈으로 빠른 그들을 보면서도 걱정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안타깝게 그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 친구를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 늑대들의 이동속도는 갑자기 더욱 빨라지더니 금방 마지막의 늑대도 지나갔다. "아!" 필브리안은 한손에 아까 그 멍청이로 추정되는 사람의 허리를 잡고 나머지 한손으론 고삐를 쥐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함박 웃음을 지었다. "유니!" 유니펠스는 아직도 멍하니 있는 사람의 몸뚱이를 땅에 던지듯 내려놓더니 자기도 말에 내려 한쪽 무릎을 끓고 땅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이동속도를 알려주듯 그들이 남긴 발자국은 땅을 거의 흠집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수가 수인지라 그 흔적은 눈에 쉽게 들어왔는데 아마도 그들이 자취를 남기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일거라 유니펠스는 추측해 보았다. 필브리안은 그런 친구를 살피다가 신음하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터번을 쓴 사람은 여행길에 알맞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몸에 굴곡이 진걸 보아 여자인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필브리안은 조심스레 물었고 그녀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예, 구해주셔서 ……크으……정말 감사합니다." 자신의 다리를 한손으로 지긋이 눌르며 그녀는 인사를 마쳤고 필브리안은 그 손틈을 새어나오는 피에 놀라 친구를 불렀다. "유니, 이사람 다쳤나봐!" 땅을 살펴보다가 '이누카'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던 유니펠스는 친구의 부름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가왔다. "'힐링 포션'은 유니한테 있지?" 상처를 먼저 살펴보려 했던 유니펠스는 친구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떡었다. 그러자 필브리안은 잘됐다는 듯 웃었다. 여자는 놀라 말했다. "그런 고가의 물건을! 구해주신건 만으로도 감사한데……. 그런건 좀더 위급할 때 쓰세요. 전 찰과상에 불과한걸요." "하지만……." 필브리안은 여자가 너무 정색하며 거절하자 어쩔줄 몰라했고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던 유니펠스는 배낭에서 붕대를 꺼내들었다. 그도 '포션'이라는 고가의 물건을 이런식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뼈에 이상이 있다면 별수없었겠지만 여자의 말대로 찰과상에 불과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소독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술을 붓고 응급용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준 뒤 유니펠스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검녹색의 눈을 한 그녀가 어딘지 낮익어 기분이 깨름직했다. ========================================================================= 왠지 정말 오랫만이라니 생각이....... 일주일도 아직인데........왜 그런 생각이 들까요? 이 설을 기억해 주시는 분이 있을까........하는 일종의 건방진 생각마저 서슴치 않고 뇌리에 떠오르고 있습니다.......;;;;;;;;; 손 조심하라고 격려 멜을 주신 모든 분께 정말 감사.ㅠ.ㅠ 아르의 그림을 먼저 다시 배포하겠다고 했는데......... 손을 그동안 안써서 그림이 생각대로 그려지지않아 좀더 연습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다 나은 것은 아니라 양이 그다지 많지 않죠? 크게 무리하지 않으면 그럭저럭 쓸수 있어 그냥 올립니다^^ 흐름이 깨지지 않았을까 너무 걱정되네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그림을 받고 싶으신 분은 언제라도 멜 주십시요^^
번  호 : 18268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8일 20:2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06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자신의 이름을 에리하 라 밝힌 그녀는 어느샌가 둘의 동행이 되어있었다. 유니펠스는 속으로 계속 게름직해 했으나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말을 잃어버리고 다리를 다친 여자를 그냥 두고 올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유니펠스로썬 두고와도 별 상관이 없었으나 필브리안이 그렇지 못했다. 어차피 다음 도시까지만이라 생각한 유니펠스가 허락했고 필브리안은 평소완 조금 다르게 기뻐했다. 어딘가 들뜬 듯 보이는 친구의 모습을 의아하게 보았지만 알수 없었던지라 유니펠스는 어깨만 으쓱이며 말에 올라탔다. 필브리안은 그 모습을 보고 주저하며 에리하에게 말했다. "유니가 저보다 말을 잘 몰아요, 그러니까 유니뒤에 타시는게 좋겠네요." 에리하는 단숨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어요!" 그러다 유니펠스와 필브리안의 시선을 집중해 받자 고개를 숙였다. 터번 때문에 알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얼굴이 붉어져 있으리라. 하지만 할말은 끝까지 했다. "전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요…… 그러니까 기댈수 있는 분이었으면 좋겠는데……." 점점 숙여지는 고개와 마찬가지로 목소리는 수그러 들었다. 필브리안은 활짝 웃으며 그녀의 말을 마무리 지어주었다. "그럼 제가 키가 더 크니까 제 뒤에 타시면 되겠네요." "네!" 번쩍 고개를 들며 에리하가 냉큼 대답했다. 그녀가 둘러쓴 터번은 그녀의 모든 머리카락을 감싸고도 남아 코와 입을 살짝 가려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개를 들자 그것이 조금 풀러져 내렸다. 필브리안은 눈을 동그랐게 뜨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 하얀 귀공자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듯 보였다. "이쁘시네요, 레이디 에리하." 스물이 갓 넘어보이는 에리하는 확실히 예뻤다. 검녹색 눈동자는 묘한 광색을 들여내며 짓푸른 녹음의 숲을 연상케 하고 있었으며, 약간 그을린 듯한 피부는 무척 깨끗하고 고와보였다. 분홍빛 입술은 다소 얇은 듯 했지만 미소와 윤기를 머금고 있어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유니펠스는 역시 어디선가 본 듯 한 얼굴이라 생각했지만 고개를 한번 갸웃하는 걸로 고민을 끝냈다. 관심을 두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는 성미였기 때문에 고민해봤자 아무것도 나올리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의 생각을 누군가 안다면 저런 미인을 잊다니!, 하겠지만 유니펠스는 외모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에리하는 필브리안이 내미는 손을 잡고 그의 말에 올라탔다. 여전히 붉혀진 얼굴로 올라타면서 그녀가 말했다. "레이디라니요, 그냥 엘이라고 불러주세요." 상대방이 애칭으로 불러다라 한다면 이쪽도 마찬가지로 애칭을 가르쳐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이다.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난 당신에게 호감이 전혀 없습니다, 친한척하지 말아주세요…… 이런 뜻으로 받아 들여져 버린다. 헌데 필브리안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 지 활짝 웃기만하고 자신의 예칭은 허락하지 않았다. 단지, "헤, 전 필브리안이에요, 이쪽은 유니펠스구요." 하며 웃었을 뿐. 에리하는 조심스레 필브리안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의 얼굴에선 순수함만이 가득했을 뿐, 앞서 말한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모르는 것이리라, 에리하는 그렇게 판단했다. 솔직히 그런 기본 상식을 모르는 것은 말이 안됐지만 순수함이 가득한 필브리안의 얼굴을 보면 그런생각도 합당하게 들어버리는 것이다. 유니펠스는 앞서 출발했고 그뒤를 조심스레 말을 몰며 필브리안이 따랐다. '늦었어……오늘은 야영을 해야겠군.' 아직 해가 뜨겁게 내리째고 있었으나 다음 도시로 들어가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두 개뿐인 텐트를 생각하며 유니펠스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풀러졌다. 이미 늦은 일 아닌가? 유니펠스는 뒤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남녀의 말소리를 귓가에 흘리며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았다. 시간을 추정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앞으로의 예정에대해 생각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해가 떨어질 무렵이면 '이카미렌'의 줄기 중 하나인 깊은 편에 속하는 숲에 당도할 것이다. 그곳에서 하루 보내고 아침에 일찍 출발하면 점심이 조금 지나 다음 도시에 도착할 것이다. 대충 이렇게 정한 유니펠스는 새삼 어이없어했다. 그 혼자만의 여행길이었다면 도시를 걸쳐가기 위해 이렇게 무진 애를 쓰지 않았을 것이었다. 혼자였다면 '이카미렌' 의 본 줄기를 넘어 '곤크'를 잠시 들른 뒤 여유있게 작은 숲을 지나 별장에 당도했을 것이다. '곤크'에 머무는 사흘정도의 시간을 고려해도 보름이 채 걸리지 않을 짧은 길이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유니펠스는 여짓껏 건량으로만 때웠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고 부피만 차지하는데다 금방 썩어버리는 과일따위는 거추장스럽기만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은……. 여짓껏 보낸 사흘이란 시간은 유니펠스에게 있어선 불필요한 날에 불과한 것이다. 뒤에서 여자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불안하게 들려왔다. ==================================================================== 이~상한 분위기의 두 남녀! 훗.훗.훗. 연참 한 두 회의 조회수가 놀랍게도 100이 넘더군요!! 님들아~잊지 않아주셨군요....ㅠ.ㅠ(?) 오늘 조회수를 처음부터 봤는데 허걱!!! 벌써 거의 다300이 넘더군요>O< 역시 사람은 열심히 하면 된다니까~! 캬캬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289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9일 09:06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2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6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야영이요?" 유니펠스의 짐작대로 저녁놀이 내려앉기 시작했을 때 숲에 도착할수 있었다. 유니펠스가 숲안으로 좀더 들어간 뒤 짐을 푸르자 에리하가 물어왔다. 낯짝이 조금 굳은 걸 보아 그리 반기는 눈치가 아니였다.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이며 필브리안이 내리는 짐 속에서 텐트를 꺼냈다. 일인용에다 두 개뿐인 텐트를 보는 에리하의 얼굴은 생각보다 태연했다. '당연하다는 건가……?' 유니펠스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식량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몇 개 끄집어냈다. 필브리안은 텐트를 치는 일을 무척 재미있어 했기 때문에 곧장 그일을 맡아 해치웠다. 그리곤 좋아하는 과일을 냉큼 들어 한입 베어물곤 무척 행복해 했다. 유니펠스는 빵을 꺼내 적당히 떼어먹었다. 에리하는 누구도 자신에게 식사를 권유하지 않자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엄연히 레이디 퍼스트라는 기본 예의가 있지 않는가? 유니펠스는 그녀의 그런 내색을 눈치챘지만 굳이 배려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그녀는 귀족의 여인네들이 아니라 세상을 아는 여행가인 것이다. 자기 밥도 못챙겨 먹는 여행가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다. 필브리안은 과일을 먹으며 해실거리는 폼새가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았기에 에리하는 주저하다 손을 뻗쳐 빵을 집었다. 헌데 유니펠스가 빵무더기에서 따로 빼 자신의 손수건 위에 올려놓은 두 개의 빵중 하나를 집어가는 것이다. 유니펠스는 뭐지? , 생각했을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의외의 곳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엘, 그건 유니꺼에요." 에리하는 흠짓 놀라며 얼른 빵을 유니펠스의 손수건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겨냥이 잘못된건지 빵은 흙바닥을 구르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에……!" 필브리안은 얼른 집어들어 살펴보다가 흙투성인 걸 보곤 울쌍을 지었다. "유니, 어쩌지?" 유니펠스는 빵을 받아들어 옆에 바닥에 내려놓고는 다른 빵을 집어 먹었다. 그 무덤덤한 모습에 에리하는 주저하는 듯 하면서 변명했다. "미안해요……. 큰 빵에 손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구석진곳의 작은 빵을 집는 다는게……유니님껀줄 몰랐네요……정말 죄송해요." 유니펠스는 아무런 반응없이 먹어만 댔고 필브리안은 눈을 동그랐게 뜨면서 말했다. "유니는 유니펠스에요, 엘. 뭔가 착각하신 모양이네요." 하며 헤맑게 웃는 그의 모습을 에리하와 유니펠스 모두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행길에 애칭을 허락하지 않는 다는 것은 당신은 나의 동료가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없이 웃는 필브리안의 모습에서 그런 의도를 찾아보긴 힘들었기 때문에 에리하는 실수했다고 얼버무리는 길을 택했다. 식사시간이 지나고 필브리안은 두 개의 텐트를 보았다. 그리곤 에리하에게 물었다. "엘, 텐트주세요, 제가 칠게요." 척보기에도 별다른 짐이 없는 에리하였다. 에리하는 당황하며 말했다. "말에 매여있었는데 말이 도망가는 바람에……." 그러자 필브리안은 아, 하곤 자신의 텐트를 양보했다. "그러시구나, 그럼 제 텐트를 쓰세요." "그렇게까지 할필요는……." 하지만 필브리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저쪽편에서 다람쥐가 기웃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그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에리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앞에 앉아있었던 주홍빛 눈동자의 소년이 일어서자 그를 올려다 보았다. "주무시게요?" 척보기에도 자신보다 10살정도는 어려보이는 아이에게 꼬박꼬박 존대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예의 발라보였다. 그에 비해 손윗 사람의 질문에 대꾸도 않고 텐트와는 다른 방향으로 사라지는 유니펠스의 모습은 무척 건방져 보였다. 에리하는 유니펠스가 땔감거리를 들고올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다람쥐와 함께 노는 필브리안을 상냥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유니펠스는 음식을 치워 놓지도 않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그 자리를 정리했다. 에리하는 그제서야 생각났듯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치워 놓는다는걸……." 유니펠스는 여전히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음식 주머니를 꼭 매어 원래 있던 짐더미에 넣어놨다. 그리고는 장작거리를 몇 개 쌓어놓고는 불을 지폈다. 여름이라 몸을 덥게하기 위한 불이 아니라 야생동물을 대비한 불이었다. 능숙하게 불을 지핀 그는 아직도 잘 놀고있는 친구에게 다가갔다. 헌데 그가 다가자 다람쥐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도망을 가버렸다. 마치 육식동물을 본 약한 동물같이……. 필브리안은 울쌍이 되서 다람쥐가 사라진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뒤를 돌아 유니펠스를 보았다. "잉~다람쥐가 가버렸어, 유니." 유니펠스는 별로 놀라지 않으며 필브리안이 보던 나무를 힐끔 보았다. 그러다 텐트를 가르켰다. "그만 자라고?"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였고 필브리안은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리곤 자신의 배낭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로브를 꺼냈다. 자신의 텐트를 에리하에게 양보했으니 로브를 덮고 자야했던 것이다. 에리하는 미안한 얼굴로 텐트에게 자라했으나 로브를 덮고 자보고 싶었던 필브리안은 웃으며 거절했다. 눕자마자 곤하게 잠들어 버린 그를 내려다 보다가 에리하는 텐트로 들어갔다. 그런 둘의 모양새를 보던 유니펠스는 복잡한 눈빛을 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 요즘 글의 속도가 느리다는 지적을 제법 받았습니다..... 이제부터는 핀치를 좀 올릴 생각이랍니다^^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290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9일 09:07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3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90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에리하가 일찍 일어난 것은 순전히 새의 날개짓 때문이었다. 그녀는 텐트에서 나오기위해 천을 올리다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십여마리의 새가 한 이를 둘러싸고 퍼덕이는 광경을. 새들의 날개짓으로 생기는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결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고 그가 내뻗은 손에는 두엇의 새가 올라타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던지는 빵부스러기를 받아먹기도 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웃음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아……." 에리하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성 비슷한 감탄을 내밷았다. -멋지군.- 흠짓! 말한 내용과는 다르게 메마른 목소리. 에리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본곳에는 필브리안과 유니펠스가 내려놓은 배낭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잘못들은 건가……?' 그리고 다시 그 '광경'을 보기위해 고개를 돌렸다. "앗……!" 새들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고 그는……유니펠스는 무감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옆에 있던 텐트가 열리며 필브리안이 나왔다. "음……잘잤어, 유니? 잘잤어요, 엘?" "네?……네." 조금 넋이 나가있어 보였던 에리하는 곧 대꾸했으나 필브리안은 그것을 받아들일 틈이 없이 유니펠스에게 뭐라 항의하고 있었다. "유니가 나 텐트로 옮긴거지?" 유니펠스는 흙이 묻어있는 자신의 손을 가볍게 털며 근처에 보아두었던 시냇가로 몸을 돌렸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에리하는 어제 자신이 떨어뜨린 빵이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에리하는 도시에 가까워짐에 따라 초조해 하는 것 같았다. 둔한 필브리안조차 눈치챌 정도로 말이다. "왜 그러세요, 엘?"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필브리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더 묻지는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태우고 승마를 하는 터라 그것에 온 정신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에리하는 조금 울적한 눈빛을 그에게 보냈으나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가 건방진 꼬마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고 말이다. "유니, 아직 멀었어?" 유니펠스는 주변을 둘러보고 하늘을 올려다 본 뒤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럼 밥은 마을에 들어가서 먹을거야?" 고개를 끄떡이려던 유니펠스는 처량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친구를 발견하고는 말을 멈추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헤헤." 바로 앞의 언덕만 넘으면 약간의 평지를 지나 도시가 있음을 알고있는 유니펠스였다. 때문에 복잡하게 자리를 마련하기보다는 풀밭에 앉아 보따리만 풀어 먹도록 했다. 신나게 빵을 집어드는 필브리안을 뒤로하고 유니펠스는 자신의 애마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애마는 주인이 주는 밥 의외는 거의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제때 제때 꼭 챙겨주어야 했다. 주변에서는 그러다 네가 죽으면 말보고 따라 죽으라는 말밖에 더 되나, 라는 식의 거친말도 서슴치 않았지만 유니펠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말은 인간보다 수명이 적을뿐더러 그가 자랑하는 '감'이 자신이 확실히 더 오래 살것이라 그에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유니펠스는 몸을 곤추세웠다. 긴장한 듯 인상을 찌푸리던 그는 갑자기 단검을 뽑아들고 필브리안에게 달려들었다. 빵과 과일을 양손에 집어 맛있게 먹고 있던 필브리안은 눈을 휘둥그래 뜨면서도 입안의 것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리고나서야 물으려는 그의 의도는 유니펠스가 검을 휘두르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챙!챙!챙!- 분명 필의 옆에 허공을 벤 유니펠스의 단검은 세 번의 금속성을 자아내며 멈췄다. "아……?!" 당황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필브리안의 앞을 가로 막으며 경계하던 유니펠스는 곧 습격자가 단 한명임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알아낸 그는 재빨리 습격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으나 공교롭게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에리하가 진로내에 서 있어 한 박자 늦고 말았다. 유니펠스는 에리하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몸을 틀어야만 했던 것이다. '크윽!' 위치가 파악됐음을 눈치챈 습격자는 벌써 도주해 버렸고 유니펠스는 에리하와 어깨가 약간 부딪쳐 뒤쫓을 타이밍을 잃고 말았다. 나무를 향해 몸을 달리던 중에, 그러니까 허공에서 그녀와 부딪였던 터라 땅으로 내려서 균형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유니펠스는 땅에 내려서면서 이미 일이 늦어 버렸다는 걸 판단했다. 때문에 그는 착지하자마자 에리하에게 다가가 빰을 올려부칠수 있었다. ========================================================================= 음......겨우 사건다운 사건이........;;;; ..........속도....속도......(중얼중얼중얼)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291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9일 09:07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4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유니!" 필브리안이 당황해서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유니펠스와 부딪힘으로 해서 넘어졌었던 에리하는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빰을 맞자 당황한 얼굴로 유니펠스를 바라봤다. 냉정한 주홍빛 눈동자는 그녀에게 '멍청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쯤은 쉽게 알수 있었다. 한번 노친 습격자는 앞으로 더욱 경계하며 노릴 것이다. '습격자를 잡으려면 첫 번째에 잡아야 한다.' 는 것쯤은 여행자인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너무하잖아……!'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반성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하잖아, 유니!" 유니펠스는 좀 뜻밖이라는 눈으로 친구를 보았다. 그의 친구는 드물게 화를 내고 있었다. 눈물이 그렁한 눈을 그에게 고정시킨체 . "다들 무사하면 된거잖아,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그토록 순진한 필브리안을 에리하는 따스한 눈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엘은 다리가 다쳐서 못 움직인 거잖아." 그건 아니였다. 조금만 그녀가 몸을 틀어서도 아니 엎들이기만 했어도 유니펠스는 앞으로 나갈수 있었다. 그 사실은 유니펠스뿐만 아니라 에리하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하는 굳이 그런 말을 꺼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단지 자기가 잘못한거라고 필브리안에게 말할뿐. 그러다 자신을 보는 유니펠스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는 그녀를 내려보다가 암기가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갔다. 유니펠스가 그녀의 앞에서 떨어지자 필브리안은 부어오른 빰을 하고 있는 에리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놀라셨죠?" 묻는 그에게 애써 웃어보이며 에리하는 암기를 살펴보고 있는 꼬마아이를 힐끔 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필브리안은 서둘러 말했다. "유니는 제가 걱정되서 그런거예요, 엘." 에리하의 눈이 조금 빛난 듯 싶었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필브리안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신경쓰지 않아요." 그 미소를 본 필브리안은 얼굴을 붉히며 헤헤거렸다. 예리하는 자신의 꼭 감아묶은 머리가 뭔가 허전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와! 엘 예뻐요!" 그녀의 투명한 초록빛 머리결이 풀러져 내리는 터번과 함께 천천히 허리까지 내려 앉았다. 암기를 살펴보던 유니펠스는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니, 엘 머리 좀 봐!" 친구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니펠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필브리안과 함께 지낸지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솔직히 순진하다 못해 어리숙한 필브리안이 여짓껏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유니펠스의 덕이라 할 수 있었다. 잦은 습격자……즉, 암살자의 속에서 그가 살아남은 것은 말이다. 황실에서는 특별한 경호를 붙여주지 않고 있다. 현재 황태자의 수작일까? 아니면 황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귀족층의 수작일까? 그런 정치적 수법까지 꿰진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제 2 황위계승권인 필브리안의 신변은 절대 위험하다는 점이다. 유니펠스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유니펠스는 일단 암기를 귀걸이 안에 넣어놨다. 그리고 친구를 돌아봤다. 친구는 밝게 웃으며 한여자의 머리결을 신기한 물건을 보듯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치근덕 거린다고 볼수도 있는 광경이었지만 그의 얼굴에 배인 미소가 너무 천진스러워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길다란 머리결을 당황하며 다시 터번으로 감싸려는 그녀를 필브리안이 막았다. "이게 훨씬 예뻐요, 엘." 에리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끝내 머리를 터번으로 감춰버렸다. 그리곤 흘끔 유니펠스의 기색을 살폈다. 별다른 반응없는 그를 알아차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주 순간의 일이라 별 관심없었던 유니펠스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말에게 걸어가는 유니펠스의 귓가에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재미있군- 메라른 목소리……. 유니펠스는 긴장하며 왼손을 단검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음을 알고 헛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유니펠스는 말의 갈귀를 쓰다듬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의 친구는 아직도 뭔가를 먹으며 에리하라는 여자와 담소를 즐기로 있었다. 방금 전의 습격자의 일은 완전히 잊은 듯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는 유니펠스의 얼굴엔 이렇다 할 감정은 배여있지 않았다. ====================================================================== 사랑 앞에선 우정이고 뭐고 없는 것이냐~필! 본격적인 사건을 드디어 시작해 볼까나..... 혹 오늘 글을 읽고 이거 완전히 3류로맨스 소설 쓰는 거 아냐? 하시분들은 아직 절 모르시는 거랍니다^^ ㅋㅋㅋ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29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19일 09:07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6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4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니펠스는 순간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습격자가 사라진 방향에서 였다. 묘한 살기가 유니펠스의 예리한 신경을 거스리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 그것이 명백한 시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유니펠스는 도리혀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놓친 습격자를 처리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지만 곧 그 판단을 접어야만 했다. 끈적한 적의가 일대를 휘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설마........' 그의 짐작을 확인시켜주듯 그의 귀에 익숙한 몬스터의 괴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괴음은 야성의 그것이 아니였다. '누군가에게 조정당하고 있다!' 유니펠스는 그 누군가가 아까 기척을 느꼈던 곳에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만 처치한다면 알아서 이들은 흩어지리라. 유니펠스는 뭣도 모른채 웃으며 먹고 있는 친구에게 급히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옆의 큰 나무위에 뛰어올랐다. 각기 가지를 튕기며 상당한 높이, 즉 몬스터들이 냄새를 못맡을 만큼의 높이에 올라선 뒤에야 그는 친구를 가지에 내려놓으며 그가 균형을 잘 잡도록 도와 주었다. "유니?" 필브리안은 묻고싶은게 많다는 얼굴이었지만 유니펠스에겐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밑으로 내려가 멍하니 있는 에리하를 안고 마찬가지로 위로 데리고 갔다. 짐을 챙길 여유까지는 없었던 지라 또다시 아까운 것들이 날라가는 군, 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 아깝다는 뜻은 아니였다. 일단 목숨이 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묶어 놓은 말들의 고삐를 끊었다. 그들에게 생존 본능이 남아있길 빌면서. 그리고 자신의 애마의 안장에 매여있는 그 '몽둥이' 에 불과한 검을 발견했다. 그것을 내려다 보다가 바람을 일으켜 친구에게 올려보냈다. 그에겐 막대기나 다름 없었으니 무기는 되지 않고 그렇다고 버리기엔 그 '끌림'을 무시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니펠스는 애마를 한번 가볍게 쓰다듬어주곤 빠르게 앞으로 뛰어갔다. 아니 날라간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의 발은 거의 허공에 있었고 나무와 나무사이를 가볍게 튕기며 앞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어?!" 필브리안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날라오는 검을 황급히 받아들었다. 에리하는 조금 겁나는 듯 몸을 움추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필브리안은 그 검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천진스러워 보이는 웃음에 에리하는 더더욱 의아해 했다. "걱정도 되지 않으세요?" 필브리안은 검을 꼭 끌어 안고 고개를 저어보였다. "유니니까요." 그리고 그는 다시 웃어보였다. 에리하는 뭔가 물어보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그들이 있는 나무가 거칠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뭐야!?" 에리하는 간신히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밑을 내려다 보았다. "히이잉!!!" 단발마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오자 필브리안은 그제서야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무슨 일이에요, 엘?" 고개를 든 에리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필브리안을 마주 보았다. 필브리안은 여전히 영문몰라하며 고개를 갸웃대고 있었다. "몬……몬스터떼가……!"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꺄악!" 다시 나무가 거세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 일의 진척이 드디어............ㅠ.ㅠ 속도속도속도속도...ㅋㅋㅋ(아...또 발작 일기전에 이만...)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360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0일 09:5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7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27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 무렵 유니펠스는 벌써 언덕꼭대기까지 다다라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시인했다. '일행이 있었군.' 그의 청각이 한차례의 비명소리를 잡아낸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몬스터들이 흩어지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가 시전자로 추정되는 습격자를 발견해 쫓고 있는 데도 말이다. 언덕 중턱에서 발견한 습격자는 발각됬음을 알아채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주했고 때문에 유니펠스는 그를 쫒으며 본의아니게 자꾸만 친구와 떨어져 버렸다. '양동작전이었군.' 분명 그는 친구를 보통 몬스터라면 알아채지 못할 높이에 대려다 놓았다. 그럼에도 비명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몬스터를 지휘하는 이가 따로 있을 뿐 만 아니라 바로 필브리안 근처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미꾸라지녀석!' 별 기술 없어보이는 녀석이었건만 도망은 정말 빠르게 쳤다. 단 한순간이라도 습격자가 뒤를 돌아본다면 유니펠스는 고전할 필요없이 단숨에 그의 숨통을 끊어줄수 있을것이었다. 하지만 습격자는 죽어라 도망만 쳤고 때문에 유니펠스는 짜증나는 추격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도중에 비명소리가 들려와 그는 상당히 초조해 갔다. '칫!' 갑자기 유니펠스가 뽑아들었던 검으로 허공을 크게 베었다. 더 이상 그를 쫓기엔 친구가 걱정됐던 터라 좀 무리를 해서라도 끝을 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의 왼쪽 손목에서 진홍빛 팔찌가 크게 진동을 했고 그가 낸 검풍은 팔찌가 보조해주는 바람을 타고 습격자의 등을 빠르게 추적해 갔다. 뒤도 안보고 도망만 치던 그는 당연히 그 바람의 검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덕분에 등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추락할수 밖에 없었다. 유니펠스는 확인사살을 위해 땅에 떨어진 습격자에게 다가갔다. 아주 조심하는 눈치도 아니였지만 아주 마음을 놓은 눈치도 아니였다. 단검을 뽑아들고 빠르지만 가벼운 걸음거리로 쓰러져있는 습격자에게 다가가던 유니펠스는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화약냄새!?' 그것을 눈치챔과 동시에 빠르게 몸을 뺐지만……. -꽝!!!!!- 작지 않은 폭음이 숲 사이를 흘러나갔다. "윽!" 필브리안은 자꾸만 기울어지는 나무를 느끼면서도 그것에 꼭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몸으로도 육관으로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나무는 계속 기울어지고 있었다. -꽝!- 하는 소리가 밑에서 진동과 함께 들릴때면 나무는 그것에 호응하듯 땅으로 땅으로 다가서버리는 것이다. 옆에서 에리하가 거의 기절 직전에 가있는 것과 비교하면 필브리안은 아직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에리하는 그 몬스터떼를 직접 봤고 필브리안은 아직 못봤다는 것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필브리안에게는 믿는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꽝!!!!!- 이번엔 상당히 소리가 컸다. 필브리안이 놀라 움추릴정도로 큰 소리였다. 하지만 진동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필브리안은 겁도 없이 고개를 들어 언덕배기에 촘촘히 나있는 나무숲을 둘러봤다. 에리하는 그 큰 폭음에 비명만 지를뿐 이었다. "아……." 그가 기억하기론 그의 친구가 사라졌던 방향에서 거센 불길이 치밀고 있었다. "유니……?" 그가 기억하기론 그의 친구는 바람을 사용하긴 하지만 불과는 인연이 멀었다. "유니……!" 필브리안이 멍하니 일어서려하는 동시에 나무는 마침내 땅과의 해후를 끝마쳤다. "꺄아악!" 에리하의 비명도 몬스터들의 울음소리도……점점 시야에서 벗어나는 불길을 보는 필브리안의 귀엔 들려오지 않았다. "유니!!" 그리고 그의 몸에 거센 충격이 몰려들었다. ======================================================================== 에구 힘들어라......온몸이 쑤십니다요.....ㅠ.ㅠ 이제 진짜 속도 걱정하지 않아요 되겠지요^^ 에구허리야.........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 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361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0일 09:5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6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6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10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스륵- 마치 실크가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몬스터들의 경악어린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크게 치켜뜬 보랏빛 눈동자에 그들의 독성어린 핏덩이가 치밀고 들어와도…… 필브리안은 멍하니 있었다. -찰싹!- 누군가 그의 빰을 거세게 갈겼지만 필브리안은 여전히 멍해 있었다. 그러자 그 누군가는 뭐라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필브리안이 반응이 없자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댔다. 그리고……. "에……?" 필브리안은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막고 뒤로 어거추줌 물러섰다. "쳇, 역시 정신적 쇼크가 필요했었구만." 장난기가 잔뜩 어린 목소리가 필브리안의 귓가에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낯선 어조였다. "엘?" 진녹색 눈동자가 생긋 웃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흔들며 묻어있던 갖가지 몬스터들의 체액을 털어냈다. 그리곤 그 체액을 배출하는데 큰 몫을 했을 거라 추정되는 검을 내려다 보았다.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아 있는 것에서 그 검이 명품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빠르게 허공을 벤 후에야 검집에 꽂았다. 아마도 검을 꽂기 전에 하는 습관인 모양이었다. 필브리안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전에 에리하가 보고 놀랐을 몬스터떼가 보였다. 대부분 양단 되어있다는 점이 달랐지만. 그 근처엔 깨끗하게 양단된 몬스터들과는 달리 우악스럽게 찟겨진 몸뚱이도 보였다. 필브리안의 말이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몬스터들에게 먹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쪽 너머로 사람의 얼굴이다, 추정되는 것이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비록 그 몸뚱이는 몬스터들 사이에 파묵여 있었지만 말이다. 필브리안은 다소 질린 듯 햐안 얼굴을 더더욱 하얗게 만들며 이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 추측되는 이를 올려다 보았다. 그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의 여자는 땅에 떨어진 터번을 집어들고 있었다. "아!?" 필브리안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커진 눈동자는 그녀가 막 허리에 매고 있는 검에 박혀 있었다. 그 검은, "그건 유니건데요?" 유니펠스가 필브리안에게 맡겼던 '몽둥이' 검이었다. 에리하는 피식 웃으며 터번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는 대신 몸에 묻은 핏덩이들을 닦아 냈다. "내꺼야." "유니꺼에요!" 에리하는 발끈하는 그를 귀엽운 강아지를 보듯 내려다 보다가 일으켜 세웠다. "일단 네 친구녀석 먼저 찾아봐야겠다." 그때서야 필브리안은 아까 본 불길이 생각났다. "아! 어서가봐요!" 그리곤 황급히 발을 놀렸다. 걱정과 초조함이 그의 뇌리를 지배해 갔다. 때문에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유니펠스조차 뽑지 못했던 검을 그녀가 뽑아들었다는 것을. 그녀가 갑자기 말을 놓기 시작했다는 것을. "음……이정도 폭탄이면……." 그들이 도찾한 곳에는 잔뜩 패인 땅과 근처에서 불길을 뿜어내고 있는 나무들만이 있었다. "시체 보존도 힘들겠는데?" 그리고 그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필브리안의 무릅이 꺽이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좀 떨어진 곳에서 재미있는 것을 구경하듯 둘러보고 있던 에리하가 그 모습을 보더니 얼른 다가와 부축했다. "왜그래?" 정말 알수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에리하에게 필브리안은 울어보였다. "흑흑, 엘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유니가 안보인단 말이에요! 으앙!" 에리하는 태연히 대답했다. 장난기가 가득한 어조라 현실감이 떨어진 대답이었지만 말이다. "원래 불구경은 재미있는 거라고." 필브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고 에리하는 씩 웃어주었다. "그리고 시체도 안 보이는데 뭐가 문제야?" "아……!" 그리고 필브리안은 마주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지." 에리하는 그를 일으키며 쾌활하게 말했다. "일단 도시로 가자. 여기 있다간 계속 엇갈릴거야. 도시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올거다." "네!" 필브리안은 친구가 무사하다는 말에 모든 게 만사혈통이라는 얼굴로 앞서 걸었다. 그런 그를 붙잡는 소리가 있었다. "히이잉." 귀에 익은 말의 울음소리. "아!" 돌아본 필브리안의 눈에 거대한 흑마가 들어왔다. "유니 말 이다!" 하지만 말에게 뛰어가던 필브리안은 그에 미처 다다르기도 전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실수로 넘어진 것치곤 기운없이 풀썩 쓰러진거라 에리하는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필브리안?" 쓰러진 필브리안을 제대로 눕혀놓자 그가 흐르는 진땀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에리하는 그런 그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을 올려다 보았다. 흑마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양 그는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이봐, 말군. 이녀석 중독인데?" 흑마는 차분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에리하는 자신보다 큰 필브리안을 무슨 물건을 드는양 가볍게 들어올렸다. "몬스터의 피에 있는 독성에 당한 것 같아." 그러면서 흑마의 등에 척 올려놓았다. "한시가 급하긴 하지만……." 갑자기 사나워지는 흑마의 눈을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주인외의 다른 이는 태우기 싫지?" 그러면서 고삐를 쥐고 잡아끌며 걸어갔다. 흑마는 조금 반항하다가 위에서 주인의 친구의 신음소리가 들리자 순순히 걸어나갔다. 그것을 보며 에리하는 웃었다. "한시가 급하니까 봐달라고. 주인친구는 괜찮잖아?" 그리고 갑자기 흑마의 뒤로가 좀 세게 쳤다. 흑마는 사태의 시급함을 알아챈건지 단순히 엉덩이가 아푼건지 모르지만 빠르게 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옆에서 에라하가 고삐를 쥐고 똑같은 속도로 뛰고 있었다. ==================================================================== 이제 라니안에서의 속도도 연재속도와 같아지는 군요*^^* 줄님 홈피에선 원래 같아구*^^* 요즘은 홈피 돌아다니는 재미로 컴을 한다는;;; 이제 속도가 완전히 굿이군요*.* 그럼 많은 감상과 비판(비방이 아닌)부탁드립니다. one224@hanmail.net
번  호 : 1836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0일 09:59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1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67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이봐, 주인장. 방하나만 줘." 건방진 말투의 손님은 왠 이쁘장해보이는 남자하나를 들고(?) 방 하나를 요청했다. 여관주인은 헤헤, 거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부부방으로 드릴까요?" "마음대로해." 여관주인은 부티나보이는 손님을 눈짐작해보며 최고급 방으로 안내했다. "말도 부탁해." "예, 최상의 건초를 내놓지요." "건초? 그건 필요없고 그냥 편하게 쉬게만 해둬." "예? 아, 예." 그녀가 알기론 그 건방진 흑마는 주인이 주는 먹이외엔 먹지 않았다. 그가 나가고 에리하는 신음하는 필브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멍청이. 몬스터의 피가 눈으로 들어갔군만. 실명할지도 모르겠는데?" 에리하는 유니펠스의 것으로 보이는 배낭을 거리낌없이 뒤졌다. 그의 말에 매여있던 것을 여관에 들어설 때 미리 챙겨 놓은 것이다. 한참 뒤적거리던 그녀는 곧 찾던 것을 찾았는지 무언가를 끄집어 냈다. '포션' 상자였다. 그녀는 그것을 서슴없이 열었다. "부자녀석이군. 힐링 포션에 리커버리 포션……아, 여기있군. 큐어 포션." 그것만 끄집어 낸 그녀는 다른 고가의 포션들은 길가의 돌맹이 보듯 관심을 두지 않으며 무성의하게 다시 배낭에 쑤셔 넣었다. "이봐, 이거 마시고 자." 하며 필브리안의 빰을 쳐댔으나 이미 기절해 있는 그가 일어날 턱이 없었다. "별수없군." 필브리안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 앉은 그녀는 일단 통을 열었다. 싸한 냄새가 진동했다. "뭐……이경우엔 접촉 부위만 해독하면 되는 거니까……." 만일 독을 마신것이라면 그것을 마셔야겠지만 상처따위에 투입이 된거라면 그 부위에만 발라주면 됐다. 물론 보다 빠른 완치를 위해선 마셔주는 것이 좋지만 말이다. "일어나면 마시라고 하고." 그녀는 일단 깨끗한 붕대에 그것을 흠뻑 발라 필브리안의 눈에 감았다. 그리고 그 옆의 대야에 담긴 시원한 물에 수건을 적셔 그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아직도 신음하는 그를 내려다 보는 에리하의 얼굴은 무척 슬퍼보였다. 그녀가 내밷는 말과는 달리. 그러다 그녀는 검을 뽑아들었다. 유니펠스가 산 그 검이었다. 그 검은 유니펠스의 손에서와는 다르게 그녀의 손에선 너무나 매끄럽게 뽑혀나왔다. "마스터." 문 듯 그녀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갑자기 검날에 손을 쓸어냈다. 하얀 손에서 붉은 피가 뿜어내리고 있었다. 깊은 상처였지만 그것을 내려다 보는 에리하의 얼굴은 너무나 무심해 마치 남의 상처를 보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그 피를 한껏 검에 묻혔다. 몬스터의 체액이 조금도 묻지 않았던 검에 그녀의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그리고 이내 사라졌다. 그녀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시 깨끗해진 검을 허공에 휘두르고 나서 꽂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고 가만히 오른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문을 통과할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정도로 극도의 비만인 남자가 몇몇의 용병들과 함께 들어왔다. "무슨일이지?" 에리하는 살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하지만 그 살기를 느낄 근본도 못되는지 그 남자는 당당히 소리쳤다. "너희가 불을 낸 녀석들이냐?" 에리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무슨 불?" 남자는 시치미 떼지 말라는 얼굴로 볼살을 씰룩해보이며 말했다. "저 앞의 내 산에 난 불 말이다! 불이 난 뒤 들어온 이방인은 너희뿐이야!" "그게 어쨌다는 거야? 누가 냈는지 알게 뭐람." "뭐야?" 에리하는 안되겠는지 검을 반쯤 뽑아들며 몸으로 살벌함을 표현했다. "그딴 빈약한 추리로 이 몸을 귀찮게 했겠다?" 남자는 뒤로 주춤 물러서면서도 반문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럼 아니란 말인가?" 에리하는 당연하지 않냐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이지." "그런……." 남자가 당황해 무언가 더 말해보려 할 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본위아니게 그를 구제했다. "음……? 엘, 무슨 일이에요?" 에리하는 검을 다시 집어 넣고 침대가로 급히 걸어갔다. 필브리안은 시야가 어둡자 당황해 하며 허공을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약 효과 무지 좋구만, 금방 깨어나네?" 에리하는 허우적거리는 필브리안의 손을 잡아 내리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 너희가 불낸게 아니란 말이지?" 남자는 자신의 존재가 무참히 씹힌 것에 분노하며 크게 말했다. 필브리안은 놀라며 되 물었다. "무슨 불이요?" 어조만 달랐을 뿐 앞의 건방진 여자와 똑같은 반문을 하는 필브리안이었다. 남자는 둘이 짜고 자기를 놀리는 양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내 산에 난 불 말이야!" "네?" "아까 그 폭발로 산불이 난 모양이야. 근데 저 바보녀석이 우리가 낸 불이라고 우기잖아?" "아……." 에리하는 아직 필브리안을 몰랐던 것이다. 너무나 순진해 유니펠스를 무척 고생시킨 전적이 있는 소년임을 말이다. 필브리안이 조심스레 이 말을 꺼내기까진. "그거 저희가 낸거나 마찬가지잖아요?" ======================================================================== 간신히 올리네요 곧 시험이라 저도 정신이 없군요^^;; 대부분의 멜에 곧 시험이라고 하소연할정도.....;;; 어쩜 몇일 잠적할지도........하하;;;;
번  호 : 18363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0일 09:59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2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230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죄송해요……." "됐어, 바보녀석." 곳곳에서 생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더러운 밀집으로 바닥이 가려져 있는 방안. 그안에 전혀 어울리 않는 고귀해 보이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붕대로 눈을 감고 있어 제대로 얼굴을 볼수는 없었으나 그 매끄러운 턱선하며 하얀 피부하며 상당한 미안임을 짐작할수 있게 하는 이였다. 투명스럽게 대꾸하는 또다른 한명은 어두운 방안에서도 환해 보이는 투명한 초록빛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지만 저희 때문에 불이 난 건 맞잖아요?" "그래, 네 녀석 때문에 소가 죽기도 했지." "네?" "네 녀석이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소가 죽기도 했다고, 멍청아." 필브리안은 순진했지만 멍청이는 아닌지라 에리하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폭탄은 유니 때문에……"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네?" "이런 말 들어봤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필브리안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니 아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잘난 몸이신진 모르겠지만 모든 일이 자기 때문에 생긴거라 생각한다는 건 오만이라고, 얼간이." 필브리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기분이 상하신 듯 해요……?" "원래 더럽고 어두운곳은 기분 나쁜 법이야." "그런가요?" "그래." 에리하는 품안에 넣어 놨던 '큐어 포션'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필브리안의 입가에 갖다 대주었다. "마셔, 해독제야." "해독이요?" "그래." 필브리안은 순순히 유쾌하지 않는 맛의 포션을 마셨다. 에리하는 적당한 양을 마시자 병을 떨어뜨렸다. "이제 붕대를 풀어도 되겠네." "벌써요?" "이 '포션' 무척 고급이라 효과가 즉석에서 나타나거든. 만일 이걸로 해독이 안됐다면 신성마법을 쓸 수 있는 신관을 찾아야 겠지." "네……." 에리하는 붕대를 무성의하게 마구 풀어버렸고 필브리안은 잠시 눈을 감은체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보여?" "예." "실명은 면했군, 축하해." "감사해요." 필브리안의 해맑은 웃음을 바라보던 에리하는 이내 지저분한 시트에 몸을 던졌다. "쳇, 되는 일이 없구만. 내 검도 빼기고……뭐 그녀석들이 뽑을수 있을리 없으니 상관은 없지만." "저기……." "뭐야?" 에리하는 주저하는 필브리안의 눈을 바라보며 투명스레 물었다. 필브리안은 헤벌쭉 웃으며 마찬가지로 시트에 걸터 앉았다. 에리하가 누운 시트의 옆에 놓인 시트였다. 반 지하였던 터라 붉은 노을이 필브리안의 보랏빛 눈동자에 어려 기뵤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필브리안으로써는 눈만 부셨던지 그는 좀더 벽에 붙어 빛이 내리쬐어지는 곳에서 벗어났다. 그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면서 에리하는 조용히 기다릴뿐 재촉하지 않았다. 마침내 필브리안은 적당한 위치를 포섭했고 무릅을 모아 가지런히 앉았다. 그리고 에리하와 눈을 마주쳤다. 검녹색 눈동자는 노을빛이 부시지 않는지 동공의 축소도 없이 깊은 심연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던 필브리안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에리하는 눈을 크게 떠보이다가 이내 웃었다. 하지만 필브리안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였다. "참, 제 소개 먼저 하는 것이 예의겠죠? 전 필브리안이라고 해요. 필이라고 부르세요." 애칭의 허락……. 에리하의 얼굴에서 표정이 잠시 사라진 듯 했지만 착각이었던 듯 그녀는 만연에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알았지?" 필브리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충실히 대답했다. "엘과는 다른 걸요." 에리하는 마구 웃어대다가 갑자기 수그러 들었다. 그리고 장난기가 배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락샤사, 샤라고 불러도 좋아." 필브리안은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도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지요?" "누구긴 누구야, 락샤사라니까." "락샤사는 어떻게 엘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락샤사는 깔깔대다가 대답해 주었다. "이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여자의 몸을 내가 잠시 지배하고 있는 거야." "그렇군요." 락샤사는 갑자기 웃음을 지우면서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기분 나쁘지 않아?" 필브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아뇨." "이상하군. 둘은 연인이 아니던가?" 필브리안의 얼굴이 붉게 보이는 것은 결코 노을탓이 아니리라. "음……어떻게 엘의 몸을 지배했는 지가 궁금하긴 해요." "그야 이 여자가 나보다 약하니까." "약해요?" 필브리안은 한참 고개를 갸웃하다가 결국 다시 웃었다. "그러니까 약한 엘을 보호하기 위해 지배한거로군요! 샤는 친절하시네요." "좋을 대로 생각해." 에리하……아니 그녀의 몸에 깃든 락샤사는 쾌활하게 웃었다. "어둡고 더러운건 기분 나쁘지만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좀 참아주기로 하지." "왜 얌전히 있는게 좋아요?" 락샤사는 누운체 필브리안에게 돌렸던 고개를 제대로 한 뒤 눈을 감았다. "여기서 도망가는 건 쉽지만 그러면 이 도시에 있을 수가 없잖아. 그렇게 되면 네 친구와 만날 방도가 없어지지. 네 친구가 알아서 재주껏 찾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잠시 침묵이 깔렸다. 필브리안은 다시 물어왔다. "근데 샤의 원래 몸은 어디있어요?" 대답하는 락샤사의 목소리가 왠지 메마르게 느껴졌다. "돼지 손에." 다시 침묵이 깔렸다. 가지가지 보석으로 치장되어있는 방안에서 숨쉬는게 신기해 보이는 비만의 남자가 쇼파에 편안히 앉아있었다. "흐흐." 그의 입에선 끊임없이 만족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횡재다, 횡재!" 그의 손에선 뽑히지는 않았으나 마법사의 감정으로 최고의 명검임을 입증받은 검이 들려있었다. ========================================================================== == 진.......짜..........간신히.......올렸습니다...........
번  호 : 18440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1일 22:4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8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8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2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25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욤력이 욤국보다 먼저 생겼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욤력이 먼저 생긴 것인가? 위대한신 욤. 이므르. 라. 제노스라민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전설 중 나는 바로 욤력의 시작점에 해당되는 전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대들은 상상도 못할 잔혹이 불과 수년전에 존재했었음을 아는가? 거대한 제국은 독선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수많은 소국을 죄였다. 제국은 대륙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어 그곳을 통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를 할수 없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동맹조차 맺지 못했었다. 제국은 강인했을 뿐만 아니라 교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괴로움은 그것이 아니였다. 제국은 너무나 거대했기에 오리혀 현실감이 없었다. 진정으로 우리를 괴롭혔던 것은 이종족, 요마들이었다. 그들은 흉폭한 기질을 내면에 품고 있을 뿐만아니라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지혜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혜로운 자를 '장'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그 '장'이란 신과 같았다. '장'은 너무나 지혜로웠다. 대 현자조차 그를 예측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강했다. 그의 이름은 '나찰', 그를 따르는 종족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할수 있는 일이란 하루하루 살아남음을 감사히 여기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강인한 이를 기다렸다. 어느새 우리들 사이엔 전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찰에게서 우리를 구원해줄 '왕'이 나타나리라……. 그때 나타난 이방인의 기사가 나타났다. 그는 저 위대한 산, '이카미렌'에서 내려왔다. 그는 당장에 '나찰'을 찾았다. 그리고 하루만에 그는 '나찰'을 검에 봉인하여 돌아왔다. 그가 나타나 '나찰'을 찾고 '나찰'을 봉인하고 우리들을 구원한 그 날……. 우리는 그날을 기점으로 '기'를 정한다. 전설에 따르면 바로 그 '날'이 욤력의 기원이다. 여기서 '수년'이란 어구가 사용됨에서 나는 이 전설의 나타난 때가 욤력이 생기고 욤국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일것이라 조심히 추측한다. 사라진 제국의 기록에 보면 확실히 그때 '나찰'이라는 이종족이 활동을 했었다는 걸 알수 있다. 그들의 행위는 몬스터보다 월등히 지헤로왔을뿐 그 기질에 있어 다를바 없었기에 제국에서는 그들을 '요마'라 명명했었던 것 같다. 초기 욤국의 기록은 알려지지 않은 장인이 성안 벽에 남긴 글만이 남았는데 그 글을 판독하길, '이므르께서는 늘 '나찰' 과 함께 하신다." 추측하건데 초대 황제께서는 그 '요마'의 왕이 봉인된 검을 애용했던 것 같다. 또다른 기록이 있다. '이므르께서는 '나찰'과 함께 사라지셨다' 이 기록은 전의 기록보다 훨씬 후에 새겨진 것이라 학자들은 말한다. 내용을 분석하건데 초대 황제께서 승하하시고 그 검또한 사라진 것으로 사려된다. 여기까지가 여짓껏 학자들이 내새우는 학설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찰'이란 존재는 원래부터 없었고 제국에게 수탈당하는 소국들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가상이 아닐까? 한창 요란을 떨던 공포의 대상인 '나찰'을 없애음으로 민심을 얻고자 함이 아닐까? '이므르' 제 456기 졸업생 앤스크. 파크다. 라. 제모아의 졸업논문 중에서 하루가 지났다. 다시 노을이 질 무렵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판결이 났다, 따라와." "웃기는군. 판결은 누가 내리는 건데?" "그, 그야 당연히……." "법정은 괜히 있는 건 줄 아나? 아직 호출도 받지 않았는데 개뿔이 판결이야?" "시,시끄럽다!" 락샤사는 더욱 몰아붙일까 하다가 뭔가 생각에 잠기더니 그만두었다. 필브리안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샤?" 락샤사는 용병의 뒤를 순순히 따라가면서 필브리안에게 말했다. "그냥 따라가보는 게 좋겠지? 어차피 행패 부리면 곤란한건 우리잖아." "그렇군요." 그들이 끌려(?) 간 곳은 전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깨끗한 감옥이었다. 의외의 광경에 락샤사는 의아해 했지만 용병은 아무말 없이 그냥 나가버렸다. 사방이 철창이라 프라이버시(?)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감옥이었기에 락샤사는 굳이 그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유니는 무사할까요? 벌써 이틀인걸요." "어제 사라지고 하루 지났으니 이틀 이긴하군." 필브리안은 시무룩해져서 침대에 앉았다. 락샤사는 철창 너머의 광경을 좀더 구경하다가 필브리안의 옆에 앉았다. 침대는 두 개였기에 굳이 자신의 옆에 앉을 필요가 없는 그가 그런 행동을 보이자 필브리안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락샤사도 이런곳에서 러브모드를 취할 생각은 아니였던 듯 낮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이상해, 이곳." "네?" "전부 예뻐." "네?" 락샤사는 필브리안의 얼굴을 자신이 아닌 바깥쪽으로 돌렸다. "봐, 죄수가 전부 예쁘다구." "와~, 그러네요!" 락샤사는 그대로 뒤에 누워버렸다. 필브리안의 목덜미도 같이 잡아당기며 누웠기에 필브리안은 얼덜결에 그의 옆에 눕게 되었다. "어쩌면말야……." 필브리안은 락샤사를 보며 다음말을 기다렸지만 락샤사는 좀더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기다려야 되니까……지금 알아봤자 소용없어." 그리곤 말이 없었다. 궁금해진 필브리안이 아무리 다그쳐도.
번  호 : 18441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1일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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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2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82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어찌 생각하면 향긋한 약재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접착제라도 바른 듯 떨어지지 않았다. 할수없이 주위에 귀를 기울여 본다. 물속을 헤엄칠때처럼 모든 소리들이 울려온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는 고요함과 평온함이 실려있다. 손끝이 움짓 움직인다. 그것을 기점으로 갑자기 온몸에 지독한 고통이 몰려왔다. "크윽!" 그리고 눈이 떠진다. 고통이 배여 있음에도 기묘한 주홍빛 눈동자는 깊히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그 고요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스르륵 일어섰다. 왜소한 몸의 소년은 먼저 이마를 집어 봤다. 익숙한 천이 집혀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침대 밑에 가지런히 놓여진 자신의 신발을 찾아 신었다. 그리고 침대 옆의 선반에 개져있는 웃옷을 입었다. 웃옷은 벗겨져 있었지만 붕대로 완전히 감싸져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낯부끄러울 것은 없었다. '여기는…….' 그리고 여러개의 침대가 늘어져 있는 방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병원인가…….' 주인 없는 침대가 없는 모습을 보던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서던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오, 정신이 든겐가?" 돌아보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아 이 병원의 의사인 모양이었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인 소년은 품안을 뒤졌다. 하지만 노인은 웃으며 만류했다. "사례라면 내가 아니라 자네를 데리고 온 이들에게 하게나. 그들이 셈을 대신 치뤘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는 결국 작은 보석을 끄집어 냈고 의사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보였다. 노인은 다시 한번 웃더니 말했다. "지금도 고통스럽겠지만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마침 '리커버리 힐링'이 조금 남아 있어 그나마 괜찮은 걸세. 전신 화상을 입었으니 세균에 감염되지 않게 특별히 청결에 주의해야 될거야." 고개를 끄떡여 보이는 소년을 내려다 보던 그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간호사의 부름에 그냥 돌아섰다. 짧막한 말을 남기면서. "올라가 쉬게. 이틀동안 혼수상태였어." '이틀?!' 소년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곧 빠르게 돌아서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돌아본 의사를 뒤로하고. 유니펠스는 일단 병원을 나선 뒤 길복판에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방향을 가늠해 보는 것이었다. '저쪽이 성……. 그렇다면 문은 남쪽이군.' 일반적으로 성은 북쪽에 문은 남쪽에 있다. '욤'국의 수도가 위대한 '이카미렌' 산맥의 북쪽에 있음을 본딴 것이다. 유니펠스는 급히 남쪽으로 뛰었다. 그 도중에 갑옷을 잘 차려입은 남자와 부딪쳐 넘어질뻔한 헤프닝이 있었지만 유니펠스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필!' 유니펠스는 온몸에서 다발적으로 퍼지는 고통을 무시하며 복잡한 사람들 틈을 벗어나고자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한산한(?) 지붕 위에서 빠르게 성문을 향했다. 그가 지나가는 지붕위에 한두방울씩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제길, 뭐야!?" 이노는 자신에게 부딪쳐 온 꼬마가 사과도 없이 지나가자 불쾌감을 가지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러다 퍼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주위에선 갑자기 자신의 몸을 뒤지는 이 기사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미쳤군.' 주변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며 이노는 혼자 좋아라 웃기만 했다. "뭐야, 소매치기는 아니였군." 그리고 꼬마가 사라진 쪽을 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이미 늦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 지체했다간 돌아올 몰매가 그만큼 늘어날 상황이었던 것이다. "늦었잖아, 이노!" "헤헤. 미안,미안." '웃는 얼굴에 침 못 밷는다' 는 말은 어딜가나 통하는지 잔뜩 골을 내고 있었던 그의 일행들은 살짝 그를 어루만져 주는 것으로 끝냈다. "너무하잖아, 조금 늦은 것 같구……. 게다가 때린 곳만 계속 때리다니!" "시끄러, 네녀석이 지금 입 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노는 결국 속으로만 몇번 투덜거리고 말아야 했다. "네녀석 때문에 늦어진 일정을 생각하면……." 이를 갈기 시작하는 그들의 주위를 얼른 돌릴 요량으로 이노는 웃으며 말했다. "헤헤, 좋은 일 한 셈 치자구. 아, 생각난 김에 병원이나 가볼까?" 하면서 앞장서 걷는 그의 뒤로 검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뽑을 것이냐 말것이냐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이노가 성큼 걸어가는 방향에는 이 시가지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 있었다. 인자한 노의사가 경영하는 병원이.
번  호 : 1844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1일 22:44 
등록자 : KREUZ1           조  회 : 15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28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26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유니펠스는 쓰러진 나무와 섞어가고 있는 몬스터들과 생소한 사람의 시체를 가만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목적지'의 풍경이 그를 당혹케 했던 것이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 것이 있다면 친구의 시체는 이 풍경에 일조하고 있지 않다는 것. 맨처음엔 당황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친구의 모습이 없자 안심하고 여유롭게(?)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굉잖한 솜씨. 깨끗하게 토막난 모습을 보며 그는 한사람의 솜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유니펠스는 이제 나무가 쓰러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자신이 올려놓은 높이에 해당되는 가지를 찾았다. '여기가 발검의 시발점이군.' 필브리안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니펠스로썬 에리하를 생각해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검사가 도와줬다고 가정한다면 발검의 시발점은 이곳이 아닌 주변 어딘가 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동방향이……내가 폭탄을 맞은 곳인가.' 유니펠스는 다시 빠르게 그곳으로 뛰어갔다. 조금은 안심한 탓일까?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유니펠스는 힘껏 뛰어가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앉아서 몸을 떨었다. 그제서야 생각난 듯 자신의 상처들을 보던 그는 귀걸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리커버리 포션'이 귀걸이에서 손을 땐 유니펠스의 손에 들려나왔다. 그는 단숨에 붕대를 풀어보리고 터져서 피가 새나오고 있는 상처에 발랐다. 곧 아픔은 가셔지고 상처는 눈에 뛰게 아물어갔다. 다친 곳에 전부 그것을 발라 상처는 완전히 낳았으나 이미 피가 잔뜩 배여져 약간은 호러틱한 옷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니펠스에겐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일단 자신이 폭탄을 맞은 곳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하지만 그 일대가 산불로 그을러져 있어 그 이상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친구의 종적이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그다지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친구 혼자라면 몰라도 대단한 검사로 추정되는 여행자 에리하가 곁에 있었으니 알아서 앞의 마을로 갔을 것이다. 그리곤 쓸만한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유니펠스는 그렇게 속편히 생각하고 다시 마을로 빠르게 뛰었다. 친구의 무사함도 기쁠뿐더러 시체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애마도 무사한 것 같아 마음이 무척 가벼웠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마을에 도착한 그는 여관을 돌아다녔으나 친구의 종적은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보라색 머리결의 소년과 후드를 칭칭 감은 여자라는 독특한 고객들을 여관장들이 기억 못할리 없었기 때문에 그로썬 다른 여관들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유니펠스는 시가지의 중심까지 도착한 다음에야 조금 쉬기로 했다. 이틀동안이나 혼수상태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지라 그르써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나절 거리인 산을 한시진도 걸리지 않게 뛰어서 왕복하다보니 피로도가 더했다. 중심부에 있는 분수대에 앉아서 그는 조용히 물줄기들을 보았다. 일단 반쯤은 살펴보았으나 아직 반이 남아있기에 걱정하진 않았다. 그때 뒤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해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으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유니펠스의 얼굴엔 호기심이라 불리는 감정이 한조각도 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일순 그는 당황하고도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의 애마의 울음소리가 거칠게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 거칠면서도 도도한 그의 애마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남자들이 있었다. "새끼, 니가 아무리 발악한다해도 넌 이 몸의 말이 되는 거야!" 짐은 없지만 안장이 매여 있는 모습, 끝까지 거부하는 몸놀림에서 말에게 주인이 있음을 알수 있을 텐데도 패거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대머리의 남자는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주변에서도 한번 잡아타면 말이 꺽이리라 예상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유니펠스는 좀더 앞으로 나가려 발을 놀렸으나 워낙 감싸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더딜 수밖에 없었다. '쳇!' 그 와중에도 몸놀림이 상당한 대머리의 남자는 애마의 등에 올라탔다가 거칠게 몸부림을 치는 말에 의해 바닥으로 곧두라 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유니펠스가 그들을 발견하지 전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는지 말은 무척 지쳐보였고 대머리 남자의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비단 그 남자뿐만이 아니였다. 일부러 지치게 만들 요량이르 그들이 낸 자잘한 상처들로 말의 몸뚱이는 검붉게 보이고 있었다. 말은 이번엔 확실히 할 요량이었던지 앞발을 크게 들어올려 남자를 내리 찍으려 했다. 대머리 남자는 황급히 몸을 돌렸으나 자신이 있던 곳이 말의 발에 의해 상당히 파인 것을 발견하고 분노했다. "이 새끼가!!" 하면서 그는 큰 검을 뽑아들었다. 말은 경계하는 눈치로 뒤로 몇걸음 물러섰으나 구경꾼들이 너무 많아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튕기는 게 귀여운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며 그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는 힘으론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자신의 검을 단 한손으로 막아든 꼬마아이 때문에 경악해 해야만 했다. 꼬마의 손에는 단지 한 자루의 짧막한 검이 들려있었을 뿐이었다. 조금 숙이고 있던 꼬마가 고개를 쳐들며 대머리의 남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검을 흘리며 남자의 검신을 따라 올라가 그대로 남자의 목에 갖다댔다. 덕분에 뒤에서 꼬마를 치려고 다가오던 대머리 남자의 부하들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당황하고 있을 때 말만은 반갑게 꼬마의 옷들을 물기도 하고 어깨에 코를 갖다대기도 했다. 믿겨지진 않았지만 꼬마가 그 말의 주인임이 입증되는 순가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인정하지 않았다. "흥. 네 말이다, 이거냐? 하지만 내 눈에 든 것이 실수라면 실수다." 그는 빠르게 몸을 뒤로하여 꼬마가 갖다댔던 단검의 사정 범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검을 치켜들었는데 꼬마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의 주홍색 눈동자는 말의 온몸에 자잘히 퍼져있는 상처들과 거기서 배어나오고 있는 핏방울에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가 꼬마를 벨만큼 다가왔을 때 꼬마는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왼손만을 뒤로 뻗었다. 그리고……. -퍽!!- ……남자는 검을 든 자세 그대로 옆의 벽에 가 박혔다. 그런 그를 중심으로 벽을 거미줄 모양으로 파열되고 있었다. "대장?" 그의 부하들이 그를 부르며 뛰어갔다. 남자는 그 상태로 기절해 있었다. ========================================================================== == 월요일부터 시험이었습니다 금요일날 끝났지요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번  호 : 18443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1일 22:44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4/30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52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대머리 남자의 부하들은 눈을 부라리면서도 차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양 꼬마는 말의 갈기만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다 품안에서 무엇인가를 빼들었는데 보기드믄 '리커버리 포션'이었다. 어느 정도 관록 있는 여행자나 구해 쓰는 물건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의 상처에 듬쁙 발랐다. 말은 어리광을 피우듯 여짓껏 아무렇지 않게 견디던 고통을 호소했다. 꼬마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병을 전부 비웠고 말의 몸뚱이는 이미 흘러내린 피를 제외하곤 깨끗하게 나았다. 꼬마는 말과 눈을 마주치다가 몸을 반바퀴 돌리면서 오른손을 휘둘렀다. -퍽!- 대머리 남자의 부하 중 한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몸을 숙이며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던지라 꼬마의 낮은 사정 거리안에 그의 목이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기절한 두명을 들쳐업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후……." 작게 한숨을 쉰 유니펠스는 이내 말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흉흉한 기세에 이미 구경꾼들은 달아나 있었다. 주위를 한참 둘러보던 유니펠스는 애마의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무엇인가를 묻는 주인의 모습에 명마인 흑마는 고개를 숙이며 주인의 가슴을 코로 약하게 밀었다. 그리곤 안장쪽을 주인이 있는 곳으로 돌렸는데 올라타라는 뜻인 듯 싶었다. 유니펠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의 고삐만을 쥐었다. 흑마는 곧 어디론가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여기는 석방이 금방 되나봐요." 밖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필브리안이 두손으로 머리를 배고 침대에 누워있는 락샤사에게 말을 걸었다. 락샤사는 관심없는 듯 보였으나 필브리안이 그의 대꾸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마지못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필브리안은 웃으며 어느 방향을 가르켰다. "저기 있던 사람은 어제 잡혀 왔는데 오늘 나가잖아요? 게다가 저 쪽에 있던 사람도 지금 나가고 있고요." "아아. 뭐, 둘이야 특별히 예뻤으니까 금방 나가지." 필브리안은 알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예쁘면 죄가 가벼워지나요?" 락샤사는 귀찮다는 듯 몸을 돌려버리면서 말했다. "원래, '사람은 예쁘고 봐야한다' 고들 하잖아?" 필브리안은 락샤사의 등을 보면서 여전히 알수 없다는 얼굴로 고민해댔다. "유니가 많이 늦네요." 필브리안은 결국 포기한 듯 다른 화제를 찾았다. 락샤사도 그 점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번엔 대답을 금방 내밷았다. "확실히 하루 여관에서 쉬고 다음날 찾기 시작한다고 해도 많이 늦군. 우리가 머물렀던 여관에 가면 일어났던 소동을 들을수 있었을 텐데……." 필브리안은 몇번이나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많이 다친건 아닐까요?" "글세, 모르지." 필브리안은 거의 울먹이는 얼굴이 되서 말했다. "힝, 그런 대답이 어디있어요?" 락샤사는 몸을 다시 돌려 그런 필브리안을 올려다 보았다. 자수정빛 눈동자가 물기를 가득 머금고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락샤사가 몸을 돌린 이유는 다른데에 있었다. "쉿." 필브리안은 눈을 동그랐게 뜨며 두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락샤사가 계속 가만히 있자 못 참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락샤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씩 웃었다. "밖이 소란스럽다. 침입자인가……잘하면 소동 틈에 탈출할 수도 있겠군." "네? 하지만 말썽 일으키면 안된다고 샤가 그랬잖아요?" 락샤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아, 그러긴 했지만 소동의 주인공만 아니면 돼." "네?" "남이 소동을 일으킨 것에 섞이면 눈에 띄지도 않고 효과적이지. 우리만 탈출하면 눈에 띄니까 다른 녀석들도 다 풀러주는 게 좋겠군." 그리곤 자긴의 한손을 허공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문쪽에 해당되는 철이 그의 손과 순간 공명하는 듯 가느다란 음을 밷아내더니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비단 그들의 감옥방문만이 아니였다. 다른 이들이 갇혀 있던 일시에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누가 탈출의 주모자인지 가리기 위한 수법이었으나 필브리안의 눈엔 너무나 멋지게만 보였다. "와, 샤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뭐, 나야 이쪽과는 가까운 사이니까." 락샤사는 벽에 해당되는 철장을 한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 샤 몸도 찾으러 가야죠?" 락샤사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필브리안이 놀라 물으려 했지만 락샤사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앞으로 나갔다. "그건 언제해도 늦지 않아, 지금은 탈출이 먼저다." 하지만 필브리안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였다. "몸이 돼지 손에 있다면서요!" 그리곤 무작정 앞으로 나가버렸다. 락샤사는 그의 허리를 한손으로 가볍게 잡아당겼다. "어디가는 거야?" "샤 몸은 내가 찾아올게요!" 락샤사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내몸이 뭔지나 알아?" "돼지우리에 가면 있을 거 아녜요?" 결국 락샤사는 크게 웃고 말았다. "알았다. 일단 몸 먼저 찾기로 하지. 계속 돼지 손에 있는 건 나도 불쾌하니까." ========================================================================== == 겨우 겨우 올리네요^^ 즐독하시길.........
번  호 : 1849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2일 23:02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3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3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29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이들이 감옥을 조심스레 나오고 있을 무렵 소동의 주범자는 태연히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한마디 말도 없이 대문을 박살내며 들어오는 그를 감히 말리려 드는 이는 없었다. 그에게 대항했다가는 주변에 지저분하게 파편이 나있는 문짝 꼴이 되리란 것을 쉽게 짐작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쳐들어 와 놓고 여전히 말이 없는 침략자가 얼른 용건이나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던 그 침입자는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에선 거대한 흑마가 위엄있게 걸어오고 있었다. "앗! 저말은!?" 알아본 이가 있자 침입자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아차, 하며 입을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그의 목엔 찌르기에 적합해 보이는 단검이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히익!" 남자는 벌벌 떨며 자신의 자식또래로 보이는 이 무서운 침입자를 내려다 보았다. 무엇인가 묻고 있는 시선에 그는 그냥 주저리 떠들어 댔다. "아, 그게 저말은 얼마전에 팔려온 노예들을 따라온 녀석이라 기억하고 있습죠! 척 봐도 명마라 주인님도 탐내셔서 가둬놨는데 몇시간전에 벽을 부수고 도망가버렸지 뭡니까? 근데 이상한건 제 주인들은 안 찾아가고 그냥 혼자 도망갔다는 거 정도일까요? 여기까지 따라온 걸 보면 충성심도 제법인 것 같은데 말입……." 그러다 남자는 '주인들' 면에서 눈동자를 더욱 매섭게 하는 침입자를 알아보았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아, 그 녀……분들 말씀이군요? 그러니까 저쪽 옆문으로 나가면 창고가 있거든요? 그 창고 지나면 건물이 하나 있는데 거기 지하실에 있습죠." 그제서야 침입자는 검을 떼어 놓으며 남자가 가르킨 옆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어 젓혔는 데, 침입자는 물론 모든 사병들도 황당해 할 일이 그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노예가 도망간다!!" 사병들은 입구에 서있는 침입자 때문에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뒤에서 소리를 치던 인간이 급히 뛰어오며 멀뚱히 서있는 사병들을 닥달했다. 살덩이가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남자였다. "뭣들 하는거야? 얼른 잡아!!" "하,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이라니? 얼른 못해!!" 평소라면 농담이라도 한마디 짓거리면 뛰어갈 녀석들이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 그제서야 남자도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솔직히 둘러볼 것도 없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꼬맹이, 길 막지 말고 얼른 안 비켜?" 사병들은 처절하게 손짓 발짓으로 남자에게 제스처를 보냈으나 생긴 것 만큼이나 남자는 둔한 모양이었다. 문안의 풍경을 지켜보던 침입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사병들은 파랗게 질려서 어쩔줄 몰라하는 와중에 그 비만의 남자는 얄박한 머리를 나름대로 돌리고 있었다. '호오, 저녀석도 제법 만만한데……." "흠흠, 너 때문에 내 귀중한 재산 목록들이 도망쳐버렸으니 당연히 갚아야겠지?" 침입자는 싸늘한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 은연중에 풍기는 살기가 그냥 하인들 조차도 소름끼치게 만들었건만 남자는 정말 둔했다. "뭐, 네정도의 마스크면……어느정도는……."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옆의 기둥이 잘려나가자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침입자가 왼손을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는 손을 조금 더 옆으로 움직여 남자쪽으로 고정시켰다. 실제 그의 팔찌의 효력은 더욱 뛰어나 방향을 굳이 맞추지 않아도 알아서 주인의 의지대로 바람을 내쏘지만 그것을 남자가 알턱이 없었다. "히익!……하하 이거 왜 이러시나? 우리말로 하세, 말로." 침입자, 유니펠스는 점점 더 짜증이 일음을 느꼈다. 저 돼지인지 분간이 안가는 남자는 분명 마음에 안든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소비할 정도로 그의 비중이 중요하지는 않다. 그렇게 판단한 유니펠스는 획 돌아 남자가 말해주었던 건물로 뛰어갔다. 그런 그를 뒤에서 지켜보던 비만의 남자는 얼굴을 시벌겋게 붉히며 사병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뭐해!! 당장 잡아들여!" 하지만 사병들이 주저하자 결국 최후의 수단까지 써버렸다. "잡는 녀석은 수당 인상이다!" 궁핍한 생활 찌들어 있던 사병들은 본능이 주는 두려움을 애써 떨꾸고 고함을 지르며 침입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비만의 남자는 흐흐, 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정도 마스크면 최상급이다. 노친 노예들이 문제가 아니야. 흐흐."
번  호 : 18493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2일 23:02 
등록자 : KREUZ1           조  회 : 15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4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4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1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44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유니펠스는 빠져나가는 미소년, 소녀들을 역류해 가며 계단을 내려섰다. 그리고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보인 풍경은 문짝이 떨어져 나간 악취미의 철장 감옥뿐. '도망친건가…….' 유니펠스는 다시 계단을 급히 올라섰다. 아직 멀리 도망치진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긋난다면 찾기는 더욱 힘들어지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발걸음은 한결 더 빨랐다. 아직도 헤매는 예쁘장한 이들을 거칠게 밀며 앞으로 나가던 유니펠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흉흉한 기세로 무기를 곧추들고 있는 사병들을 발견했다. 유니펠스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지면서 나머지 단검도 뽑다 들었다. '시간이 없는데…….' 필브리안은 몰라도 에리하까지 곁에 있는 마당에 이 근처에서 알짱 될 리가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지리에 둔한 필브리안이 그다음 행선지를 알턱도 없고……. '젠장!' 사병들을 처치하는 것은 쉬운일이나 그 와중에 시간을 너무 빼앗긴다. 유니펠스는 팔찌를 떠올리며 거기에 의지를 불어넣었다. 거센 진동이 그의 팔에 울리더니 그와 비례하듯 거친 바람이 사병들의 몸을 강타했다. 일제히 벽과의 조후를 강렬하게 했으나 '인상'에 대한 집적은 그정도에서 끊기지 않는 모양이다. 다시 부시시 일어나 유니펠스를 둘러싸는 걸 보니. 유니펠스는 그냥 뚫고 지나가려 했으나 그들이 거리까지 쫒아온다면 자신은 발견하지 못하고 사병들만 본 필브리안 일행이 더 멀리 도망칠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수도 없었다. 모두 죽이고 간다면 그 다음은 국법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말이다. 필브리안이 자신이 여기있음을 알기만 한다면……. 하지만……. 유니펠스는 차마 입을 열어보지도 못했다. 그는 현실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다음 순간이었다. "필!!!" 차분하면서도 톤이 낮은 음성이 크게 건물에 퍼졌다. "여기 있군." 하며 락샤사가 집어든 물건은 분명 검이었다. "에? 샤의 몸은 안찾고 유니 검은 왜……?" "내검이라니까." "그런게 어디 있어요!" 분명 돼지 손에 있다고 했던 락샤사가 왠 화려한 건물로 들어갈때부터 고개만 갸웃하던 필브리안은 내심 기대했던 돼지도 안보이자 더욱 알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또한 그 와중에 락샤사가 검을 집어들자 참을 수 없어 물어본 것이다. 그가 해준 대답은 더욱 아리송송 했지만. "이제 샤 몸 찾으러가요." 어차피 유니펠스가 오면 돌려 받을 것이다, 생각한 필브리안이 진짜 해야할 일을 재촉을 해댔으나 락샤사는 웃으며 됐다고 했다. 필브리안은 고심하다고 물었다. "혹시 이게 샤 몸이에요?" 정상인이라면 생각도 못할, 아니 생각을 한다해도 스스로 거부해 버릴 질문을 끄집어 내는 필브리안에게 락샤사는 '딩동댕'이라고 말해주었다. 필브리안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헤~. 그럼 신검인건가요, 이거?" 의지가 있는 검이라니……. 호기심에 찬 필브리안에게 락샤사는 웃으며 이렇게만 말했다. "글세." 그리곤 급히 몸을 돌리며 필브리안의 손을 잡았다. "일단 나가자구." 필브리안은 많이 궁금했던지 울쌍을 지었으나 지금은 질문을 할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이끌림 대로 따라 뛰었다. "나가면 어디로 갈거예요?" "일단 여관이나 잡아두지." "우린 탈옥한 거 잖아요?" "죄없으니까 됐어." 그리곤 더욱 빨리 뛰었다. 벌써 건물 외각이 나타났다. 락샤사가 가볍게 점프해 담위를 타넘으려는 순간이었다. "필!!!" 그 목소리에서 나는 그리운 느낌에 락샤사는 멍하니 담 위에서 안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필브리안은 신나게 웃으며 그를 잡아 끌었다. "유니인가봐요!" 정신이 든 락샤사는 의아한 얼굴로 필브리안을 보았다. "하지만 네 친구는 벙어리잖아?" 하지만 그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필브리안은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래도!" 그리곤 따라 내려온 락샤사를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유니인걸요!" 하며 먼저 뛰어갔지만 금방 락샤사가 따라잡았다. "이해하긴 힘들지만 ……."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소리를 필브리안은 노치고 말았다. "알듯해……"
번  호 : 18494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2일 23:0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5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5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3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35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한편, 사병들은 갑자기 울려온 목소리에 당황해 하고 있었다. 침입자가 입을 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려온거야?" 두려움조차 섞인 목소리가 어느 사병의 입에서 터져나오고 삽시간에 그의 심리는 퍼져 나갔다. 그 당혹감은 유니펠스에게도 똑같이 찾아오고 있었다. 분위기상 당당히 있어야 했으나 스스로도 처음 듣는 목소리에 얼덜결해야만 했다. 그가 아는 아트힌의 목소리는 이런 목소리가 아니였다. 그의 것은 좀더 부드러운 톤을 가졌다. 이처럼 다소 차가운 듯 고요한 목소리가 아니였다. 유니펠스가 당혹해 하는 것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던 아트힌이 모습을 드러낼까 고민하던 차에 낭랑한 목소리가 반갑게 들려왔다. "유니!!" 유니펠스의 몸이 그쪽으로 확 돌려지면서 굳었던 얼굴이 다소 풀렸다. 하지만 곧 다시 굳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그의 친구가 나타난 곳이 사병들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었던 것이다. "잡아!" 이런 쪽으론 잔뼈가 굵은 사병들은 순식간에 필브리안의 몸에 칼을 위협적으로 가져다 댔다. 유니펠스는 무표정 그대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찾았으니 한시름 놨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인 것이다. 그는 차분히 팔찌에 의지를 불어넣었다. 아니 넣으려 했다. 고참 사병, 즉 눈치가 남다른 이가 유니펠스의 동향을 보고 재빨리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헛튼 수작하면 이판사판이야! 이녀석 목숨은 없는 걸로 치겠다!" 하며 위협적으로 필브리안의 목에 검을 곧추세우는 그의 모습에 유니펠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의 그림자, 아트힌은 여간한 일이 아니고선 나타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만큼 주군을 믿는 다는 뜻이기도 했고 왠만해선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자 함이었다. 그런 그가 늘쌍 말썽을 불러 일으키는 왕자 때문에 사람이 많은 이 곳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또, 그런 것은 유니펠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였다. 유니펠스는 친구가 조금이라도 말썽을 벌려 저 검과 사이가 멀어지길 기다렸다. 말썽은 그의 순진한 친구의 마크가 아니였던가. "유니! 방금 유니가 말한거지? 유니 목소리는 나이대론가봐? 아니, 좀더 어른스러웠어! 나 유니인줄 바로 알았다니까!" 필브리안은 자신의 목에 가까이 밀착해 있는 날이 선 검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젠 말할 수 있는 거야?" 당연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유니펠스는 침묵했고 필브리안은 신나게 떠들어 댔다. "참! 근데 여긴 이상해, 유니. 이쁜 사람은 금방 석방되는 거 있지? '엘'이 그러는데 '인물값' 하느라 그러는 거라던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여기서는 이쁘면 무죄인가봐, 유니." 조금씩 입매가 떨리는 사병들을 보아하니 이번만큼은 필브리안의 수다가 반가웠다. "근데, 이상한 건 '엘'은 이쁜데 왜 석방이 안되는 걸까? '엘'이 그러는데 그건 자기가 싸가지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교육시키려는 거라고 하더라? 여기선 인성교육도 같이 하나봐?" 마침내 주위에서 하나둘씩 웃기 시작했고 필브리안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사병만이 입을 틀어막으면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손으로 검을 들고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유니펠스는 세게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갔다. 그가 서있던 곳에 잔상이 남을 정도의 빠르기라 사병들의 반응은 한발 느렸다. 사병들이 유니펠스가 사라졌음을 느낀 때는 그가 필브리안의 곁에 서있던 사병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을 때였다. 검을 들고 있던 사병은 황급히 검을 세워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유니펠스는 가뿐하게 사병의 복부를 차고 단검의 손잡이로 그의 뒷목을 쳐 기절시켰다. 그리곤 거의 동시에 복부를 찼던 손으로 친구를 감싸 뒤로 빠졌다. 나름대로 반응이 빨랐던 사병하나가 뒤에서 검을 크게 휘두르며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니펠스는 친구를 뒤로 밀며 더 앞으로 가다가 몸을 턴하여 쥐고 있던 단검으로 사병의 검을 튕겨내려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음을 그 다음에 알아챘다. "하여간 트러블 메이커라니까." "엘!" 필브리안은 반가운 음성으로 그를 불렀으나 유니펠스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을 뿐이었다. 락샤사는 빙긋 웃으며 필브리안을 보다가 유니펠스의 시선을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러지?" 하지만 유니펠스는 단검을 다시 크게 휘둘러 락샤사의 옆에서 치고 들어오던 사병을 기절시켰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수에서 밀리니까 일단 물러나지?" 락샤사는 또다시 덤벼드는 다른 사병을 손에 쥔 검을 막대기 삼아 휘둘러 가격, 기절시킨 뒤 경계하는 다른 이들을 둘러보다가 유니펠스에게 말했다. 유니펠스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작게 끄떡이며 몸을 돌려 뛰었다. 락샤사는 어벙하게 있는 필브리안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간 크게도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숙소를 정한 그들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필브리안은 자꾸만 친구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요리를 주문하는 한 순간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유니. 한번만 더 말해봐, 응?" 하지만 유니펠스는 작게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가만히 그 광경을 구경하던 락샤사는 유니펠스의 손에 우연히 눈을 돌렸다. 그리고 계속 재촉하는 필브리안의 어깨에 손을 집고 그를 말렸다. "그만해라, 필." 유니펠스의 눈이 묘한 빛을 띄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필'이라……. 하지만 락샤사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네 친구가 말을 할수 있게 된 것이 아니다." 필브리안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깐!!" 락샤사는 유니펠스의 손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 반지……." 그제서야 유니펠스와 필브리안도 반지에 눈을 돌렸다. "앗!?" 그냥 보기에도 금이 잔뜩 가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깨질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반지는 산산조각이 나서 테이블 한귀퉁이에 어지럽게 자리를 차지했다. 유니펠스와 필브리안의 시선이 동시에 락샤사에게 향했다. 하지만 락샤사는 혼잣말로 중얼 거릴 뿐이었다. "아직까지 남아 있었을 줄이야……." "샤……아니, 엘! 무슨 말이에요?" 다급히 호칭을 바꾼 필브리안이였으나 너무나 그 언행이 어색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으나 유니펠스는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어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락샤사는 파편의 한조각을 집어 올리고 그것을 눈 앞까지 올려 보았다. 그러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건 페르가 만든 거다." ========================================================================= 100 회 이벤트는 뭐가 좋을까요^^;;;;
번  호 : 1849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2일 23:0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6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6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4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62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페르요?" 필브리안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락샤사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아, 모르겠군……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러면서 파편을 조금 어루만졌다. "그래도 당시엔 제법 유명했었는데 말이야." "잘 모르겠는 걸요? 마법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라면 이름이 안 알려졌을 리 없는데……?" 락샤사는 작게 실소하며 파면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생각난 듯……. "녀석은 늘 제멋대로 였으니까……만들고 싶을 때 만 만들고…… 또 늘 이상한 것 만 만들어 댔으니까……."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알려지지 않았겠지." 필브리안은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분 이야기 해주세요!" 락샤사는 자신들이 주문한 엄청난 양의 음식을 생각하고 그 것이 나올 때까지의 시간을 생각한 뒤에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이건 사교성 나쁜 녀석이 흑마법사녀석에게 저주를 받아 말을 못하게 됐을 때 만든거야. 녀석은 제법 재주있는 마법사였거든. 당시 마법이 상당히 보편화 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야." "마법이 보편화 되어있는 시대라면……꽤 옛날이 아닌가요?" 락샤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그렇지. 원래 말이 별로 없는 녀석이라 처음엔 별 상관 안하다가 '말'이 급히 필요하게 됐어. 때문에 바로 이 반지를 만들기 시작했지. 다른 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그 녀석은 그런 기발한 생각을 자주 해내곤 했거든." "어, 그럼 이 반지는 그 분의 '유품'인가요?" 락샤사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파편을 꾹 쥐었다. "앗, 샤……피가!!" 다급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필브리안에게 눈길 한번 돌리지 않으며 락샤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다 작게 실소했다. "녀석은 급히 쓸것만 만들 요량으로 그냥 몇 개만 만들었어. 근데 황당한 것이……간절히 말을 한다는 '의지'를 부여하던 터에 마나가 활성화 되면서 저주가 깨진거야." "네?"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 마법이 극히 희귀화 된 현실에서 그 정도의 설명을 알아듣길 원하는 것은 과욕이었던 것이다. 락샤사는 응고되가는 피방울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만드는 도중에 일이 꼬여서(?) 말을 할수 있게 됐다는 뜻이야. 즉, 기껏 만든게 전~혀 쓸모가 없게 됐다는 뜻이지." "에?"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조금은 알아듣는 모양인지 황당함과 미소가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페르도 황당해 하다가 중얼거렸어. '아, 그렇군……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군.' 무슨 뜻인지 알수 없지만 녀석은 뭔가를 깨달은 듯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었고 주위에선 아이템을 살펴보다가 물었지. '이거 어떻게 할거야?' 페르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버려.' 했어." "에?" 마법이 희귀한 현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아무리 보편화되어 있다고 해도 마법 아이템이 그렇게까지 가치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브리안은 황실도서관에 있는 고서 중 아이템을 만들 수 있었던 마법사의 명단으로 된 책을 보았었던 터라 그 황당함은 더했다. 그들은 명단을 황실에서 만들어 보관 할 정도의 '특별한' 존재들이 아닌가? 락샤사는 핏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제멋대로 라고 했잖아." "그, 그래도……." 필브리안은 웅얼거리다가 갑자기 크게 물었다. "그런데 이건 왜 깨졌어요? 이젠 쓸 수 없나요? 몇 개 만들었다는데 몇 개나 만들었어요?" "왜? 구해서 이 친구한테 주게?" 필브리안은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락샤사는 저편에서 가지고 오는 식사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 "급히 쓸 생각으로 막 만들었다고 했잖아? 그건 일회용이야. 때문에 이젠 쓸 수 없어. 열 개정도 만들었을걸?" 고심하는 필브리안의 앞에도 식사가 놓여졌다. 유니펠스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스프를 떠먹었지만 필브리안은 멍한 얼굴로 기계적으로 빵을 떼어먹을 뿐이었다. 유니펠스와 마찬가지로 관심 없다는 얼굴로 스프를 먹던 락샤사가 몇 마디 덧붙였다. "원래는 그걸 만들고 쓸데 쓰고 영구반지를 만들 예정이었지만…… 뭐, 만들어 봤자니까." "어디다 쓰려고 했는데요?" 락샤사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빵에 손을 가져다 댔다. "몰라도 돼." ======================================================================= 페르가 누군지 당연히 아시죠? 하지만 몇백년이 지난 아르의 시대에선 감히 대마법사의 애칭을 거론하는 이가 없기때문에 알수 없는 거죠^^ 페르시대에는 마법이 정말 보편화 되어있죠? 마도시대라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요 17~18 정도면 간단한 건 해낼 정도니까 말다한거죠^^ 반면에 아르의 시대는 마법사가 정말 희귀해요 투만은 정말 대단한거랍니다^^ 페르시대와 아르시대의 차이점은 앞으로도 몇가지 나올겁니다만 원래 이 세상은(판타지 말이에요) 진화가 느리니까 (결단코 저만의 생각입니다) 많은 점이 달라지진 않을겁니다^^
번  호 : 1852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3일 23:04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7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7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5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09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나가 버렸다구요?" 이노는 당황한 음성으로 되물었고 자상해 보이는 노의사는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런……." 웬지 아쉬워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본 일행은 일제히 놀려댔다. "역시 너 꼬마한테 관심이 있었던 게로구나?" "이 로리타 녀석!" 이노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변명했다. "아니야, 아니라구. 그냥……." "그냥, 뭐?" 이노는 땀을 삐질 흘리며 볼을 긁어댔다. 스물은 거뜬히 넘어보이는 그가 그런 짓을 하고 있음은 어떻게 보면 별로 볼만한 광경은 아니였지만 순수해보이는 눈매가 그것을 커버해 주고 있었다. "낯익어서." "뭐?" 이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노의사는 가만히 그들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건넸다. "뭔가요?" 그들은 얼덜결에 받아들면서 물었다. "그 애가 내게 주고 간 것 이네만, 내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겠는가. 아마도 자네들이 오면 전하라고 준 것 일걸세." 이노가 들고 있던 그 작은 보석을 일행의 여자가 순식간에 가로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와~, 이거 최상품인데?" 하며 태연히 자신의 품에 집어 넣었다. "사, 사라?" 이노가 당황해 사라를 불렀지만 그녀는 웃으며 말했을 뿐이었다. "이걸로 미뤄진 일정에 대한 보답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할말이 없어진 이노는 볼을 긁적이며 노의사에게 인사하고 병원을 나왔다. "어떻게 할래?" "뭐가?" "출발하기에 적합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노는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시장쪽으로 발을 옮겼다. 여행길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대충 다 산 그들은 성문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헌데 이노가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그에게 부딪쳐 오는 이가 있었다. "엇?" "앗!" 넘어지려는 인영을 이노가 반사적으로 잡아 세웠다. "노예……?" 노예의 각인이 이마에 찍힌 마른 미소년이었다. 그는 이노의 입에서 새어나온 단어를 듣고 빠르게 자신의 이마를 감쌌다. 벌벌 떠는 그를 내려다 보는 이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일행이 말했다. "소동이 일어난 모양인데?" "응?"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이들이 보였고 뒤에서 개인 사병으로 보이는 이들이 그들을 쫓고 있었다. 이노는 소년을 자신의 몸 뒤켠으로 돌려 사병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해준 다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냥……갑자기 문이 열려서 도망쳤어요. 다들 같이…… 처음엔 안 쫓아오더니 갑자기 몰려와선 잡아가는 거예요." "어디서 왔지?" "모르겠어요. 정신이 없어서……저쪽 무척 큰집에서 나왔는데……." 이노는 자신의 망토를 소년의 몸에 둘러주곤 일행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마저 말을 이을수 없었다. "꺄악, 이애 넘 이쁘다! 어디 좀 보자!" "사……라……." 사라는 거칠게 소년의 얼굴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당황한 소년은 굳어 있었고 사라의 빛나는 눈동자에 질린 일행들은 감히 말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꼬르륵- 소년의 배에서 작지 않은 소리가 새나왔다. 그가 얼굴을 붉히자 사라는 더욱 꺄대며 당장에 그를 끌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디가?" 일행이 당황해 그녀를 쫓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식당." "사라! 이노 다음엔 너냐?" 사라는 눈을 씰룩거리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테이, 너 지금 굶주린 어린애를 내버려 두잖말이야?" 테이라 불린 남자는 실소하며 말했다. "넌 몇일 전 이노가 '다친 애를 내버려 두잖말이야?'라는 질문에 '들어올 구석 없는 녀석은 내버려 둬도 돼!' 라고 했잖아?" 하지만 사라는 듣고 있지 않았다. "사라!" 사라는 신경질 적으로 대꾸했다. "시끄러! 그녀석은 지저분하고 화상투성이에 '못난이'였잖아! 그렇게 불만이면 테이, 너도 언제 한번 시간 끌어라?" 그리곤 도착한 식당에 내큼 들어갔다. "에구." 테이는 이마를 집고 한숨을 쉬었다. 이노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계속 이마를 집고 있던 그는 곧 식당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이노의 귀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근데, 유니. 언제 떠날거야?" 무의식 중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린 이노의 눈에 익숙한 검은 천이 들어왔다. "어?!"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유니펠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얼빵하게 생긴 청년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낸 유니펠스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 이노는 자신의 실례를 깨달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둘의 거리가 상당했던 터라 일행들은 이상한 눈으로 이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노는 일행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지 태연히 유니펠스 쪽으로 걸어갔다. 락샤사는 힐끔 그를 보았으나 별 다른 반응없이 고기를 썰었고 필브리안은 유니펠스가 어딘가를 보자 따라 그곳을 보았던 터라 다가오는 이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기……저 기억 나십니까?" 이노를 따라온 일행들은 핏 웃으며 놀려댔다. "뭐야, 그 진부한 꼬심은?" "역시 로리타!" 유니펠스는 이노를 말없이 올려다 보다가 획 돌아 식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이노는 얼굴을 잔뜩 붉힌채, 채였다는 둥의 소리를 지껄이는 동료들을 무시하고 유니펠스에게 서둘러 말했다. "5년전 곤크에서 잠깐 뵙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5년전 곤크……거기서 이노는 출병하지 않는 마스터와 케르가에게 항변하던 철부지 귀족으로 자리를 매궜었다. 갑자기 유니펠스의 눈매가 조금 매서워졌다. 하지만 등뒤에 있던 이노는 눈치챘지 못했다. "저기, 아르군 맞……." 이노는 갑자기 목에 붙은 단검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라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하지만 단검을 쥐고 있는 유니펠스는 주위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노와 눈을 마주쳤을 뿐이었다.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젖는 모습에 이노는 기억을 더듬어 다른 이름을 찾아냈다. "유니펠스……군?"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이며 단검을 집어 넣었다. 사라는 황당해 하며 말했다. "뭐야, 고작 이름 좀 기억 못했다고 그 난리를 쳤단 말이야?" 하지만 유니펠스는 다시 몸을 돌려 식사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런데 유니, 그 피는 뭐야?" 그제서야 발견한 듯 필브리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갈색톤의 옷이라 늦게 발견한 것이다. '리커버리 포션' 으로 완전히 낫고 냇물에 얼굴을 씻은 유니펠스에게서 지난 부상의 흔적은 고작 옷뿐이었다. 필브리안은 생각에 잠긴 눈치더니 곧 크게 소리쳤다. "역시 그 폭발 때 다쳤구나?" 유니펠스가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필브리안은 황급히 다가와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폭발?" 사라와 테이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저쪽 앞산에서 난 폭발말이야?" "에? 병원에서 나갔다더니……일행 찾아 간 것 이구만?" 필브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네?" 사라는 필브리안의 순진한 눈동자를 보고 화색이 되서 다가갔다. "그러니까……." 은근히 필브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저 친구가 폭발로 다친걸 구해준 '은인'이 바로 '우리' 란 말이지." 필브리안은 사라를 올려다 본 그 상태로 방긋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라는 본격적인 '얘기'에 들어갔다. "그래서 말인데……." 뒤에서 테이와 이노가 황당해 하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 아직도 100 회 이벤트에 대해 고민중.....-''-
번  호 : 18523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3일 23:04 
등록자 : KREUZ1           조  회 : 14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8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8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6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52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런데……." '이카미렌' 산맥에서 새어나온 산줄기를 타고 오르면서 필르리안이 물었다. "정말 이걸로 된 건가요?" 당초 몬스터가 나올 위험이 있는 '이키미렌' 산맥과 관련된 산줄기는 모두 돌아서 갈 예정이었던 것에 비교하자면 훨씬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테지만……. 필브리안은 유니펠스를 힐끔 보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알아낼수 없는 무표정을 하고 있는 친구가 여느때보다 이상하게 보였다. "아직도 아파, 유니?" 유니펠스는 고개를 저으며 익숙한 몸놀림으로 발을 디뎠다. 락샤사는 그런 유니펠스를 잠깐 돌아보았는데 하필 그때 그가 고개를 올려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유니펠스는 피하지 않고 락샤사의 눈을 응시했다. 락샤사도 한참 그런 그를 내려다 보다가 위에서 필브리안이 재촉하자 건성으로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필브리안은 락샤사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필브리안은 걸린다는 얼굴로 사라를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단지 동행만 하자니……. 게다가 그것도 '곤크' 까지만……." "뭐, 어때?" "하, 하지만……." "저 여자가 '미소년이랑 동행해 보는게 소원이었어!'……라 잖아." 필브리안은 사라의 어조를 따라하는 락샤사를 보며 크게 웃어 버렸다. 그것을 돌아본 사라가 재빨리 필브리안에게 다가와 그를 잡아 끌었다. 그리곤 의아하게 왜그러냐고 묻는 필브리안을 무시하고 일행들에게 여기서 야영하자고 제안했다. 마침 평지였고 근처에 시냇물이 있는 데다 마른 나무가지가 늘어져 있어 장작 구하기도 쉬운 무난한 야영지 였기에 다들 찬성하며 짐을 풀렀다. 이노는 주춤 거리며 유니펠스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사라는 좀 제멋대로 그렇지 좋은 애니까 이해해 주세요."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이며 배낭을 내렸다. 사라는 이노에게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나처럼 사리에 맞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노는 포기했다는 얼굴로 "그래, 그래." 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라는 신나게 지시를 내렸다. "자자, 야영준비나 하자구. 테이는 사냥해 오고 이노는 돌 주워와. 꼬맹이랑 계집애는 장작 구해오고 나랑 필은 물떠오자!" 필브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전 필브리안이에요, 사라. 유니는 꼬맹이 아니고 유니펠스구요 엘은 계집애가 아니라 에리하라구요." 하지만 사라는 듣고 있지 않았다. "자자, 여기 물통." 그리곤 팔짱을 끼며 시냇물 쪽으로 향했다. 유니펠스와 락샤사는 서로를 마주보다가 거의 동시에 돌아서서 숲으로 들어갔다. 유니펠스야 당연히 말이 없었고 락샤사도 먼저 말을 꺼내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그들 사이엔 들어가고 줍고, 돌아오는 와중에 일말의 교류도 없었다. 사라는 당당하게 자기는 요리를 못 만든다고 선언했고 필브리안에겐 애당초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유니펠스와 락샤사는 서로를 먼저 보다가 동시에 이노와 테이를 주시했다. 이노와 테이는 서로를 마주보다가 한숨을 쉬며 잡아온 짐승을 들고 시냇물로 갔다. 이노는 깨끗이 씻긴 고기를 마찬가지로 깨끗한 나무에 끼어 굽기 시작했고 테이는 냄비에 물을 담아 스프를 끊이기 시작했다. 사라는 콧노래를 부르며 빵을 돌렸다. 유니펠스가 떠나오기 전에 떨어진 식량을 조달하려 했지만 일정이 잔뜩 미뤄진 사라 일행이 자신들이 다 대겠다며 그냥 끌고 나온 것이다. 대신 유니펠스는 식비를 냈고 덕분에 사라에게 상당한 귀여움을 받을 뻔했다. 하지만 특유의 냉랭함으로 그녀를 떨꿔 놓는데 성공했고 이제는 반대로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뭐, 유니펠스는 그게 더 편한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식사를 돌리고 각자 양껏 먹고 나서 였다. 사라는 또한 당당히 "알아서들 해." 하며 자신의 모포를 덮고 잤고 나머지 일행은 다시 서로를 봤다. 그 다음에 자리를 떠난 것은 테이였다. 그 또한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는 사내였던 것이다. "난 요리했어." 그리곤 사라와 똑같이 잠에 들어버렸고 그 광경을 보던 필브리안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해 올게요." 이노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그는 필브리안의 보라빛 눈동자가 전해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귀족'출신의 견습기사였던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제가 해오겠습니다." 이런 것을 한번 해 보고 싶었던 필브리안은 단호하게 고집을 피우며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유니펠스와 함께 여행을 할 때는 굳이 설거지가 필요한 식사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는데다 문제만 없다면 하루 걸러 한번은 마을을 거치는 코스였기 때문에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필브리안이 계속 고집을 피우자 이노는 별수 없이 함께 가자고 했다. 신나라 따라 나서는 필브리안을 보던 유니펠스와 락샤사는 거의 동시에 모표 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모포는 같은 일행임을 고려한 이노의 배려로 필브리안의 모포를 사이에 둔 위치에 있었다. 유니펠스는 두손을 깍지져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락샤사는 앉은채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전화위복인가…….' 빡빡했던 예정이 상당히 느슨해 졌다. 위험은 따르지만 산을 타면서. 견습기사들과 함께 하는 길이니 주산맥도 아니고 줄기의 끝에 불과한 이곳을 넘는 데 그리 큰 위험은 없으리라. 유니펠스는 눈을 감았고 락샤사는 필브리안이 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깨끗해진 그릇을 신나게 들고 오는 필브리안이 보였다. "샤……엘! 나 잘한다고 칭찬 받았어요!" 락샤사는 대꾸없이 이노쪽을 보았다. 몇일 밤샘한 사람같이 피로해 보이는 모습에서 그는 전후 사정을 알수 있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는데…….' 락샤사의 본체가 검임을 안 필브리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의지가 있는 검이라면 신검이잖아요? 그럼 도둑들이 많이 노릴테고 나라단위로 노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정체를 숨기는 거 도와드릴게요! 걱정마세요!!" 하며 활짝 웃는 녀석에게 뭐라 할말이 없어서 이렇게만 말해 주었다. "친구한테는 어쩔려고?" 그제서야 침울해지며 필브리안은 작게 웅얼거렸다. "이해해 줄거에요." '그렇다기보다는 알아채겠지.' 락샤사는 그렇게 확신하며 고맙다고 했고 필브리안은 다시 활짝 웃었다. 락샤사는 눈을 감고 있는 꼬맹이를 돌아보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벌써 눈치 챈 것 같은데.' 그리고 뒤로 누웠다. '오리혀 꼬일 것 같군. '적'이라 판단했다면…….' ============================================================== 100 회 이벤트는요. 역시 제일 무난한 인기 투표로 낙찰 됐답니다^^* 100 회가 올려지고 나서 일주일정도 기간을 갖을 생각인데요 아직 못정한것은....... 제가 원래 쓰던 멜의 용량이 불안해서...... 다른 멜을 사용할까....말까..... 하는 건데 뭐, 아직 두회나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하지요^^; 많은 참여 부탁해요 뭐, 다 100 회 나오고 나서지만;;;;;; ^^
번  호 : 18524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3일 23:05 
등록자 : KREUZ1           조  회 : 15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99                                       
                          
제 목 [연재] 아해의 장-99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74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필브리안은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일찍 자라는 이노의 조언에 따라 모포를 덮고 누웠다. 그리곤 한번 숨을 몰아쉬기도 전에 잠에 들어 버렸다. 이노는 한숨을 쉬며 불침번을 서려 했지만 락샤사는 그에게 자라고 했다. 잠이 안 오니 자신이 맡겠다고. 이노는 불신어린 눈으로 괜찮다고 했지만 락샤사는 발검을 한번 함으로써 일축시켰다. 잠에 든 이노를 보고 락샤사는 자신의 모포에 앉아 장작을 모닥불에 던졌다. 마른 장작이 타는 소리가 경쾌했다. 유니펠스의 눈이 조용히 떠졌다. '자객인 건가 ……?' 순진한 황족 친구를 사귀다 보니 자연히 그쪽으로 생각이 갈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정리해보려는 유니펠스의 귀에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아니 전에 들어본……메마른 목소리. "아니니까 안심해, 유니군." 유니펠스의 눈이 크게 커졌다. 그 다음엔…… -챙.- 요란하지 않는 작은 파성음. 실전 경험이 많아 보이는 저쪽의 견습기사들의 신경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잡음이 어느새 락샤사의 코앞까지 온 유니펠스의 단검과 락샤사의 본체의 사이에서 울려왔다. 굳이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터라 유니펠스의 장검은 여전히 락샤사의 손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 있는 필브리안은 여전히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이노는 갑자기 목이 타 눈을 떴다. 때문에 그는 볼 수 있었다. 고요하고 매끄러운, 그러면서도 치열한 전투를. 둘은 춤추듯 모닥불을 중심으로 조금씩 돌면서 검을 나누고 있었다. 락샤사는 자신이 처음에 유니펠스를 보며 강자의 '눈'임을 알아챈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안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방심했다면 지지는 않았어도 고전은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무대는 점차 자고 있는 필브리안 쪽으로 옮겨졌다. 필브리안의 몸을 건너뛰며 검을 교환하던 그들은 다시 모닥불로 이동했다. 이노는 숨을 멈추고 그들에게 눈을 고정했다. 아름다운 검무. 조금 떨어진 두 사람은 검을 다잡으면서 마지막 일격을 예고했다. 이노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한번 삼켰다. 막 둘이 발을 떼 놓으려던 찰나였다. "유니!, 샤!" 무언가를 느낀 걸까? 잘 자고 있던 필브리안이 갑자기 깨어나 소리쳤다. 그가 깨어남을 본 락샤사는 태연히 검을 내렸다. 그제서야 이노는 락샤사가 여지껏 검을 뽑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지만 굳이 검을 뽑지 않았다 해도 락샤사가 베고자 하면 벨 수 있는 고수임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락샤사가 검을 내리는 모습을 본 필브리안은 유니펠스에게 얼른 다가가 그 앞에 서서 다급히 말했다. "샤는 수상한 사람 아냐, 유니. 샤는……샤는……." 락샤사는 피식 웃었고 유니펠스는 필브리안 너머로 그런 그를 보았다. 필브리안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며 쩔쩔맬 때 둘은 시선을 마주치며 서로를 탐색했다. 락샤사는 내렸던 검을 수평하게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잡아 당겼다. 뽑히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발검. 유니펠스는 단검을 내려 놓았다. 그제서야 이노는 유니펠스 또한 단검을 뽑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검의 주인인가?' 유니펠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락샤사는 검을 다시 검 집에 집어넣고 웃었다. "아, 아." 유니펠스는 필브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을 읽을 줄 아는가?' "뭐, 일단은." 유니펠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잘됐군.' 락샤사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그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마음을 읽힌다는 것은 제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꺼리는 일 일 것이다. 물론 그가 남이 자신을 꺼림을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 능력을 알았을 때의 반응 중 눈앞의 유니펠스와 같은 반응을 보인 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스터……페르…….' 필브리안은 락샤사가 갑자기 내밷는 말소리를 듣고 그를 돌아보았다. "잘됐다니 기쁘군." 그로선 처음 듣는 무척 메마른 목소리. 톤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 또한 그 말을 들은 친구가 짓은 얼굴 또한 그에게 있어선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뭔가 그리운 듯 내리깐 눈동자엔 스스로도 모를 물기가 어려 있었다. 필브리안은 멍하니 그런 둘을 보았고 이노는 자신의 본 검무를 속으로 곱씹으며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 늦었지요? 죄송.....ㅠ.ㅠ 과제가 웬수지요.....ㅠ.ㅠ
번  호 : 1852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3일 23:05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2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0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00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9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09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필브리안은 자라는 '권유'를 빙자한 '협박'에 못 이겨 잠에 들었다. 늘 제 시간에 자던 이가 갑자기 늦게 자면 피로감이 더해지는 법이다. 자지 않는다면 지금은 모르되 내일 여정을 못 견뎌 낼 것이 뻔했다. 그가 잠든 모습을 확인한 유니펠스는 가만히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벌레를 쫓는 것만이 아닌 야행성 몬스터를 쫓는 용도까지 겸비하고 있어 불의 강도는 보통 숲에서의 그것보다 강했다. 락샤사는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이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지배' 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원래 '마스터'가 생기면 남을 지배할 '겨를'이 없어지기 때문에 자연히 그 능력은 봉인 돼 버린다. 하지만 락샤사의 마스터는 괴짜였다. 그는 락샤사에게 자유를 주었다. 내키는 대로 몸을 지배하도록 허락했고 굳이 자신에게 복종되길 원하지도 않았다. 락샤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샤라 했던가?' 락샤사는 자신의 곁에 유니펠스가 있음을 그제서야 새삼 깨달았다. "락샤사, 샤라고 불러도 좋아." 대꾸하는 그의 얼굴은 상당히 익살스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내심 작게 동요하고 있었다. 원래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누가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지껄이던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었다. '락샤사………라.' 유니펠스는 잠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나찰 ……의 다른 이름이군.' "풋, 고대어에 능통하군. 뭐, 나찰이 어쨌건 내 이름은 락샤사니까." '고대어는 나보단 필이 더 잘 알지. 이름가지고 뭐라 시비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난.' 락샤사는 순진해 빠진 황자를 돌아보며 웃었다. "지식의 활용도 차이인가, 큭큭." '단순히 눈치가 느린 거겠지.' 락샤사는 유니펠스를 돌아보았다. 주홍빛 눈동자가 모닥불을 비쳐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다. "익어." '뭐?' 락샤사는 의아하게 커지는 눈동자를 애써 피하며 중얼거렸다. "눈에 익어." 유니펠스는 입을 다물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시끄러웠던 시절……기억은 안 나지만……." 락샤사의 목소리가 점차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네 모습, 눈에 익어." 유니펠스는 할말없다는 듯 고개만 으쓱였다. 락샤사는 풋, 웃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한말 신경 쓰지마." 유니펠스는 일어서 자신의 모포 쪽으로 걸어갔다. '불침번 교체할 시간 되면 깨워라.' 그리고 누워 버리는 유니펠스에게 락샤사는 별다른 관심을 안보이며 건성으로 답했다. "아아." 필브리안은 영문은 모르겠지만 유니펠스와 락샤사의 분위기가 무척 부드러워 진 것을 알아채고 기뻤다. 해보고 싶었던 고기 굽기나 설거지 따위도 해보고 가끔 나오는 몬스터와 싸우는 이들도 구경하고……그가 기대했던 여행길이란 생각에 무척 즐거웠다. 문제가 있다면 하나, 친구들과 얘기 좀 하려고 하면 꼭 나타나 끌고 가 버리는 사라라는 알 수 없는 존재이자 조금은 피곤한 여자정도 였다. 하지만 여행길에는 원래 고난과 역경이 따르는 법이다, 라고 웃으며 말하는 락샤사의 말에 꿋꿋이 버텼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친구, 유니펠스가 갑자기 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 것이 마음에 걸려 감기기운 있냐고 물었다가 오랜만에 웃는 친구 얼굴도 보고. 정말 따라나서길 잘 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는 필브리안이었다. 셋이서 웃는 모양새를 은근히 노려보던 사라가 다시 필브리안을 끌고 갔고 필브리안의 얼굴은 좀 전과는 달리 굳은 의지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락샤사의 조언(?)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는 모양이다. 유니펠스는 끌려가는 친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주위를 살폈다. 간간히 몬스터가 덮쳐오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하류 몬스터였기에 크게 신경쓰이진 않았다. 이름을 부여받는 몬스터는 '후카'를 건질 수 있는, 인간의 눈으로 봤을때는 유용한 몬스터 뿐이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존재이기에 대부분은 그냥 하류 몬스터를 반긴다. 유니펠스 같은 몬스터 헌터야 에너지 낭비일 뿐인 하류 몬스터들을 귀찮아 할 뿐이다. 유니펠스는 야영이 끝나고 다시 하루를 이동하고 다시 야영을 하고 또 다시 이동하는 지금까지 락샤사와 많지는 않지만 원만한 대화를 했다. '묵' 이 필요없는 상대는 그에겐 처음이었기에 새롭고 편했다. 락샤사는 가만히 유니펠스의 질문이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간간히 대꾸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주거나 했는데 그것은 일행으로 하여금 그를 '광녀'라 판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실력을 아는 이노는 조용히 그들을 주시할 뿐이었지만 몬스터가 나와도 몽땅 그들에게 맡기기에 락샤사의 실력을 모르는 동료들은 상당히 불안해 했다. 미치는 것이 전염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미신에 약한 그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뭐라 딱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혼자 떠드는 데도 꼭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간간히 유니펠스라는 꼬맹이가 고개를 끄떡이거나 웃음으로써 그에게 답해주지 않는가? 또한 간간히, "그 쪽으론 '후카'가 지나갔던 모양인데 돌아가지." 이런 식으로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에 더욱 뭐라 할 수 없었다. 여기서 '후카'란 일일이 몬스터의 이름을 나열하기 귀찮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카'가 있는 몬스터를 통칭하는 속어였다. 여기엔 숨겨진 비리가 있다. 락샤사는 굳이 몬스터를 피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그 몬스터가 유무는 알 수 있다 쳐도 그놈이 '후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뛰어난 전사이지만 몬스터 헌터는 아닌 것이다. 간간히 대화를 나누던 중에 유니펠스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락샤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쪽 방향은 안 좋아 '그릭'의 흔적이 남아있다.' 락샤사는 똑같이 주위를 살피다가 물었다. "몬스터가 지나갔다는 건 알겠는데 종류는 어떻게 알았지?" ''그릭'은 눈이 껍질로 겹겹이 쌓여 있어 먼지가 쌓이면 앞을 보기 힘들다. 때문에 자주 나무에 껍질을 비벼 먼지를 털어내지.' 그리고 손으로 조금 헐거워진 나무를 가르켰다. 락샤사는 그곳을 보다가 다시 유니펠스를 보았다. "헌터인가?" 유니펠스는 미동없이 속으로만 답했다. '일단은.' 락샤사는 다시 물었다. "네 '밥' 인데 그냥 피하려고?" '필이 있다, 그리고 찾아가며 죽일 만큼 궁색하지 않아.' 락샤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고 앞에서 겁없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이들을 불렀던 것이다. 그 것이 그가 단지 '광녀'에 불과한 이라는 오명을 벗게 해주는 게기가 됨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말이다. 방향을 꺽고 한참을 걸어나갔다. 점차 평지화 되더니 몬스터도 잠적을 감췄다. 그리고, "와, 마을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산골 작은 마을이 모습을 나타냈다. ======================================================================== ㅠ.ㅠ 드디어 드디어 100 회군요.............ㅜ.ㅜ 자~ 그럼 이벤트를 게시하겠습니다^-^ 여기서 주목~ 이벤트는 먼저 말씀드린것과 같이 인기투표입니다. 가장 좋은 캐릭 한명과 가장 싫은 캐릭 한명을 적어 저에게 멜로 보내주시면 되요^^ 제가 말한 멜로 보내신 것만 집계에 넣겠습니다. 쪽지나 나우누리 멜로 보내주시지 말고요 이 멜로 보내주세요 귀찮더라도 부탁드립니다^^ 원래 쓰던 멜은 용량이 간당간당해서 다른 멜로 쓰려구요 qkfkasodma@hanmail.net 입니다^^ 한타로 '바람내음'이지요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조마조마) 공지로 올려야 하는 건가......@.@;;;;;;;;;;;
번  호 : 18545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4일 10:35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1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01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13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50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노민, 이것 도련님께 갖다 드려라." 남색 앞머리가 눈 밑까지 내려온 소년이 고개를 숙이며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바구니에선 전에 한시 풍기던 단내대신 신선한 과일향을 품어내고 있었다. 요크노민의 가려진 눈동자가 잠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말없이 돌아서는 그를 보며 풍만한 몸채의 여인, 로레라자는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노민……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옆에서 같이 과일을 챙기던 하녀에게 그녀가 물었다. 요크노민의 또래로 보이는 하녀는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렸고 아직 어린 여자아이에게 물을만한 질문이 아니였음을 알아차린 로레라자는 됐다고 할 일이나 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문을 닫고 사라지는 요크노민을 힐끔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말야." 그러다 할 일이 잔뜩 쌓여있는 현실로 돌아왔다. "도련님께 드릴 고기파이는 다 되가?" 요크노민은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편안한 작은 별채로 들어섰다. 쇼파에 느긋하게 누워 책을 보고 있는 낯익은 또래의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집안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바람이 요크노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창 더운 제 8기에 걸맞지 않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과일이야, 페르." "아아." 건성으로 대답하며 출렁거리는 은발을 대충 쓸어 넘기는 그의 모습이 그렇게 편해 보일 수 없었다. 요크노민이 내려놓은 바구니에 자연스레 손을 내밀어 촉감에 의지해서 좋아하는 과일을 추려내는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요크노민은 피식 웃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펼쳐진 채 두고 갔으나 바람에 의해 덮어진 자신이 보던 책에 손을 펐었다. 약간 숙여진 그의 상체에 작은 남색 보석이 박혀있는 목걸이가 흘러나왔다. 얼마전 그가 직접 되 찾은 물건이었다. "노민, 일주일동안 생각해 보았는데." "날짜 감각 정확하군. 그래 일주일동안 뭘 생각했는데?" 페르노크는 책에서 눈을 떼고 일어나 앉았다. "정확할 수밖에. 네가 검을 배우기 시작한 날부터 생각한 거니까." 요크노민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뒤로 편안하게 기댔다. "일주일밖에 안 됐나? 몇 달은 지난 것 같구만. 지옥이었지." "시끄러. 그 정도는 기본이야, 기본." "예, 예. 기본입니다, 기본.……그래서 뭘 생각냐고?" 페르노크는 과일을 한입 크게 배어 물고 천천히 씹어 삼키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상당히 재능이 있는 거 같아." "누가, 뭐에?" "네가, 검에." 요크노민의 얼굴은 쑥수러움에 붉어졌다. 하지만 페르노크의 얼굴은 마치 초록색을 보면서 초록색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듯 한 평범함의 극치를 달리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더 강도를 높이는 것이 어떨까 싶어." 요크노민의 얼굴은 당장에 핼쓱해 졌다. "안돼." "돼." "못해." "내가 하라면 하는 거야."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고 잠시 이유 모를 전압이 흘렀다. 요크노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 나한테 감정 있냐?" 항복의 뜻임을 아는 페르노크는 씩 웃으며 없다고 했고 그 대답에 요크노민은 이마를 감쌌을 뿐이었다. 페르노크는 다시 과일을 베어 물고는 책에 눈을 돌렸다. 요크노민은 긴장한 낯빛으로 페르노크가 보고 있는 책의 남은 분량을 봤다.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요크노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페르노크는 읽던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훈련에 들어가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과일을 다 먹자마자 책을 덮으며 일어섰다. "시작하자." 요크노민은 항의성 깊은 시선을 페르노크에게 보냈다. "아직 다 안 읽었잖아?" 하지만 페르노크는 구석에 고이 모셔둔 목검 두 개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페르!" 페르노크는 현관문을 열며 단 두마디를 했고 요크노민은 망자의 얼굴을 하고 일어서야만 했다. "두 번 읽고 있었던 거야. 너 나가고 다 읽었다고." 요크노민은 신음도 나지 않는 듯 검을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페르노크는 그 옆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똑같이 시작했음에도 그는 지친 내색이 없었다. 요크노민은 부럽다는 듯 그를 올려보았다. 마침내 스스로 정한 수량을 채운 페르노크는 검을 멈추고 손목을 돌리며 풀어주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는 요크노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많이 힘드냐?" 그 뜻이 무얼 의미하는 지 아는 요크노민은 아주 처량하게 고개를 끄떡였고 페르노크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여 손을 모아 캐스팅에 들어갔다. 이처럼 「치유」마법을 남발해 가며 검술 훈련을 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요크노민은 몸이 가뿐해져 감을 느끼며 작게 신음했다. 페르노크는 제자리에서 뛰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요크노민의 부름에 멈춰 섰다. "괴물." "왜?" "보통 마법사는 마법 한 두개 쓰면 지친다고. 보통 검사도 그 정도 훈련했으면 지치고." 페르노크는 씩 웃었다. "쳇, 불공평해. 어째서 넌 검술도 마법도 보통 이상 인거냐? 마법은 그렇다 치고 검술은 또 언제 익혔어?" 페르노크는 조금 고민하는 눈치더니 요크노민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그러니까……검도부의 유령회원이었어." "검도부? 네 세계에도 그런게 있었냐?" "응, 여기와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눈매에 떠오르는 그리움의 파편을 읽고 씁쓸해졌다. 그가 자신의 '꿈'을 밝혔을 때 그는 정말 당혹한 말을 들었다. "힘들게 밝혔으니 나도 한가지 고백할게." 라는 말과 시작한 그의 말은 너무나 믿어지지 않았다. "난 원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죽은 몸이라도 돼냐?" 요크노민은 그 때부터 아예 말을 놓기 시작했고 페르노크는 흥쾌히 받아들였다. "비슷해." 그는 조금 웃다가 말을 이었다. "난 여기와는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자랐고 죽을 예정이었어." 요크노민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페르노크를 봤고 그는 좀더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난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아니야. 이 몸의 주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정신 차려보니 내가 이 몸에 들어와 있었어."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얼굴의 요크노민을 한숨과 함께 보던 페르노크는 쉽게 설명할 길을 찾아냈다. "내가 전의 '페르노크' 처럼 보이니?" 단호히 고개를 젓는 그에게 피식 웃어주며 말했다. "아직도 이해가 안가냐?" 요크노민은 뭔가 고민하더니 그를 봤다. 뭔가 초조해 하는 듯한 페르노크가 눈에 들어왔다.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밷았다. "믿을게." 페르노크는 피식 웃으며 고맙군, 했고 그에게 휘두르던 목검을 던졌다. 의아해 하는 요크노민에게 그는 짧막하게 답해 주었다. "수직베기, 10000번." 그 날부터 요크노민은 '지옥'이라 칭하는 훈련을 시작했던 것이다. 회상의 끝이 별로 좋지 않았던지라 요크노민의 갸날픈 몸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다 페르노크가 의아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끼고 얼른 얼버무렸다. "어떻게 다른데?" "음……설명하기 힘드네. 어쌨든 난 이름만 올라가 있었고 가끔 돈 맞고 시합에 나갔지. 참가해주는 비용 외에도 우승하면 타는 상금의 반을 배당 받아서 제법 짭짤했어……그땐 고기 집에 가기도 했었지." 요크노민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용병이었던 거야?" "용병?" "응, 돈 받고 싸우는 사람들." "그걸 용병이라고 해?" "응." 페르노크는 작게 그 단어를 몇 번 중얼거렸다. "왠지 친숙한데, 용병이라." 요크노민은 핏 웃더니 다시 일어났다. 그리곤 나무에 걸쳐놓은 수건을 꺼내 들어 땀을 닦았다. "그땐 용병이었어도 지금은 「카르민」이야. 황족 다음가는 신분이라고." 페르노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일어섰다. 그리곤 자신의 목검을 들고 다시 단순한 움직임을 반복했다. 앞으로 내리그었다가 올려들고 내리 그었다가 올려들고 ……. 요크노민이 뭐 하는 거냐 물었을 때 그는 근력을 키우는 거라고 했다. 몸이 머리를 따라주는 것이 당장 필요하고 시급한 일이라고도 했다. "페르." "왜?" 요크노민은 조심스레 물었다. "돌……아가고 싶어?" 페르노크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검을 내리 그었다가 다시 올리며 답했다. "응." 요크노민은 머뭇거리면서도 물었다. "왜?" 페르노크는 다시 검을 내리그으며 답했다. "보고 싶은 이가 있어." "보고 싶은 이?" "응." 그 뒤 요크노민은 침묵했고 페르노크도 굳이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외전을 쓸 생각이었는데 잘 안써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 먼저 결국 올립니다. 외전은 다음기회에^^ 이벤트 참가 많이 해 주시구요 기간은 다음주 월요일.....(내일이 아니라.....그 다음주 월요일까지요) 까지 입니다^^(이라사님 기대하고 있습니다^^)
번  호 : 18546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4일 10:35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9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2                                      
                          
제 목 [연재] 아해의 장-102 올 린 ID 드레곤7 작 성 시 각 2001/5/15 이 름 신광선 조 회 수 120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어디가?" 검술 훈련이 끝나고 요크노민이 나갔다 오겠다는 말과 함께 나가려 하자 페르노크가 무심하게 물어봤다. "원래 숙소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잘 갔다와." "아." 요크노민은 씩 웃으며 나갔지만 씻기 위해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페르노크는 보지 못했다. 삼일 전 아침까지만 해도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이 혼자 밖을 못나가게 했다. 항의하는 그에게 페르노크느는 냉정히, "넌 약해서 안돼." 라고 했었다. 그러면 요크노민은 별수 없이 가만히 주저앉아야만 했었다. 하지만 삼일 전 오후, 음식을 가지러 나간 요크노민이 그 새 자신을 강탈하기 위해 다가온 이들을 쉽진 않았지만 물리치고 돌아 왔었다. 그때 페르노크는 말없이 「치유」마법을 써 주었다. 그 뒤, 그는 나가려는 요크노민을 막지 않았다. 요크노민은 그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그 다다음날. 즉 어제 자신이 빼앗겼던 물건 중 유일하게 그들의 수중에 있었던 목걸이를 찾아오는 쾌거를 거두웠다.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요크노민은 그것이 훈장이라도 되냥 당당히 걸고 다녔고 그것을 본 뮤비라의 얼굴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 졌다. 페르노크는 웃으며 역시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해주었고 요크노민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요크노민이 나가고 페르노크는 욕조에 들어가 가만히 누워있었다. "보고 싶은 이……라." 물속으로 깊히 들어가는 페르노크의 귀에 작고 희미하지만 강렬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들의 …… 우리들의 ……이시여.」 페르노크는 급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소리를 낼만한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냐?" 페르노크는 차갑게 허공을 보며 물었지만 그의 예상대로 답은 없었다. 페르노크는 별 기대 하지 않으며 작게 말했다. "정체를 들어내라." 그때였다. 갑자기 욕조의 물이 분수처럼 허공을 치솟더니 페르노크가 놀라자 부드럽게 내려 앉았다. "뭐……뭐야?!" 내려 앉은 물줄기는 천천히 페르노크를 중심으로 돌았다. 당황한 페르노크가 황급히 욕조를 나오자 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 졌다. "도데체 ……?" 멍하니 있는 페르노크의 몸을 맴돌던 바람이 한차레 휘감았다. 물기가 바람을 타고 사라지면서 체온을 가져갔기에 페르노크는 그 서늘함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만히 고인 물을 내려다 보던 페르노크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조금 물에 담갔다. "후……." 별 다른 변화가 없자 긴장이 풀린 페르노크는 가만히 욕조에 손을 집고 주저 앉았다. "헛걸 봤나?" 그러다 문 듯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손가락을 담갔을 때 당연히 생겨야 할 파문마저 일지 않았던 것이다! 페르노크는 빠르게 문쪽으로 이동했다. 한손으론 문고리를 반쯤 돌리면서 몸은 욕조를 향한 그는 다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무튼 이상한 곳이라니까……적응되려다가도 안 된다구.' 짧게 불만을 터뜨린 그는 아직도 땀내가 절절히 배여 나오는 몸뚱이를 내려다 보았다. '설마 동생의 안전을 위협하는 물건을 가까이 뒀겠어? 무지가 죄지, 무지가 죄야.' 자동 샤워기인지도 모르잖아, 중얼거리며 페르노크는 다시 욕조로 걸어갔다. 그리곤 물속에 주저없이 들어갔다. 다시 물이 치솟아 올라 그를 중심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페르노크는 자신이 무심결에 키워드를 말함으로써 자동 샤워기가 가동한 것이라 판단하고 속편히 앉았다. 물속에선 웬지 모를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역시 속편하게 자동 비누기능도 있는 모양이군, 했고 물줄기는 그런 그의 몸 주변을 한참 배회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의 몸에서 땀 냄새가 사라짐을 느낀 페르노크는 개운한 기분으로 욕조를 나왔다. "무지가 죄야, 이런 편한 걸 몰랐다니." 그가 나오자 물줄기는 천천히 가라앉아 다시 고요하게 욕조 안에 자리잡았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은 페르노크가 일층으로 내려 왔을 때, 요크노민이 거칠게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요크노민은 헝크러진 옷을 재빨리 정돈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페르노크는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보다가 주방으로 걸어가며 평이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했냐?" "아니!" 페르노크의 킥킥 대는 소리를 들으며 요크노민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페르노크는 안에서 차가운 음료를 가져와 그에게 건넸다. "그럼 됐어." 그리곤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 페르노크를 조금 멍하게 보던 요크노민은 곧 고개를 저으며 그가 가져다 준 음료를 단숨에 마셨다. "안 물어봐?" 페르노크는 물어온 요크노민을 힐끔 보면서 말했다. "말하고 싶으면 해. 들어 줄테니." 요크노민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반쯤 남았던 음료를 마저 마셨다. 이번엔 다른 원인으로 붉어진 듯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다. 아직 말하기 싫어." 페르노크는 서재쪽으로 걸어가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평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해결되고 말해." 요크노민이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은 그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임을 페르노크는 알아 챈 것이었다. 만일 이미 해결이 된 일이라면 요크노민은 누구보다도 스승인 페르노크에게 먼저 상황보고를 했을 것이다. 요크노민의 짧막한 대답을 들으며 페르노크는 서재문을 닫았다. "그러지." ========================================================================= 그새 서로를 잘 간파한 둘이지요?^^ 페르노크에게 일어난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후후......제가 체육대회때문에 너무 피곤해서 올리는 게 좀 뜸하지요? 다음주에 끝나니까 그뒤엔 많이 써서 올릴게요^^ 죄송해요 이벤트는 아직도 기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안보내주신분들은 얼른 보내주세요^^
번  호 : 18547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4일 10:36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3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요크노민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요 근래 들어서 갑갑하게 느껴지고 있는 앞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페르노크가 장만해준 책상 앞에 가 앉았다. 그 위는 두터운 책 몇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략」, 「보다 효율적인 승전법」…… 요크노민의 취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책들이었 다. 요크노민은 서랍에서 두터운 책을 한권 꺼냈다.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책이었다. 요크노민은 짧게 말을 내밷았다. "주인이 명하노니, 펼*쳐*라*." 마법으로 잠근 장치를 한 책이었다. 널리 쓰이는 마법으로 원한다면 서점에서 구입할 때 요구하면 부과세를 받지 않고 걸어준 다. 그만큼 어려울 것이 없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간단한 도구와 짧은 주문과 값싼 매개체만 있다면 얼마든지 걸 수 있는 마법이었으니 말이 다. 요크노민이 펼쳐든 책 안은 그의 필기체로 빼곡히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요크노민은 형이 구입해준 '묵'을 꺼내 백지부분의 맨 앞에 글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페르노크는 돌아가고 싶어한다. 내가 정보길드를 만든다면 그가 귀환할 수 있는 방법 또 한 알아 낼 수 있을까? 하지만 난 녀석이 가길 원하지 않는다. 녀석은 보고 싶은 이가 있다고 했다. 연인인 걸까? 녀석의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슬퍼 보였다. 형님께 갔었다. 형님은……」 일기였다. 요크노민은 거기까지 쓰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아까 그의 형의 모습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페르노크와의 훈련이 끝나고 잠시 들리라는 형, 뮤비라의 전언에 그의 처소로 향했다. 뮤비라의 처소는 테밀시아의 처소인 별채의 바로 옆 건물이다. 건물이라고 해봐야 뮤비라의 방과 서재, 부엌등만 있는 작은 일층 집이다. 테밀시아의 화려한 별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테밀시아와 함께 보내다 보니 그의 처소는 단지 그의 침실에 불과했다. 본래 그는 요크노민과 같은 처소를 쓰길 원했으나 아버지, 집사의 반대로 그러지 못했다. 요크노민은 사이가 안 좋아 보이는 두 부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누구도 그의 의문에 답하려 하지 않았기에 알 수도 없었다. 그저 그는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라 부르는 형님의 낯선 싸늘한 얼굴과 아버지를 보며 '집사'라 부르는 테밀시아 도련님의 매서운 얼굴을 보며 긴장해야만 했다. 뮤비라가 요크노민을 부른 이유는 별게 아니였다. 테밀시아가 페르노크의 근황을 궁금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자 했음이었다. 그리고 눈에 띄게 밝아 보이는 동생의 일도 알고 싶었기에 부른 것이다. 요크노민은 언제나와 같은 조용한 걸음걸이로 뮤비라의 처소 앞까지 왔다. 하지만 뮤비라는 처소에 없었다. 그의 부재에 요크노민은 조금 당황했다. 언제나 그를 부를 때면 먼저 간식따위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뮤비라였던 것이다. "테밀시아 도련님께 갔나?" 요크노민은 고민하다가 정원을 산책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감히 테밀시아 도련님의 처소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엄격히 구분하는 뮤비라에게 폐가 갈거라 판단 한 것이다. 정원의 구석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또한 그 나무만큼은 못했지만 제법 큰 나무들이 연못을 둘러싸고 있어 여름에 휴식을 취하기엔 이상적인 조건을 만들고 있었다. 자연히 요크노민의 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의외의 광경을 보게 됐다. 형님이었다. '뭐야, 여기 계셨잖아?'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가까이 가던 그는 또다시 의외의 광경을 접하게 됐다.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형, 뮤비라의 무릎에 언제나 근엄한 테밀시아 도련님이 머리를 베고 누워있는 것이다. 요크노민은 뮤비라의 처소에서 그냥 그를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그때였다. 잠깐 스쳐 본 형님의 얼굴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요크노민은 그 자리에서 굳어 형님을 지켜보았다. 너무나 슬픈 얼굴, 하지만 너무나 부드러운 얼굴. 복잡하고 상반된 감정이 놀랍게도 하나의 얼굴에서 모두 들어나 있었다. 또한 그 얼굴은 요크노민에겐 처음이 아니였다. '페르와 …… 같다.' 아까의 페르와……, 라고 생각하던 요크노민의 눈에 또다시 놀라운 모습이 들어왔다. 뮤비라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는 것이다. 뮤비라는 그것이 고이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테밀시아 도련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너무나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요크노민은 자신이 본 그 광경을 잊기로 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요크노민은 돌아서서 아주 조심스레 뮤비라의 처소로 돌아갔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있었던 요크노민은 한참 후에 돌아온 뮤비라를 태연히 마주 할 수 있었다. 뮤비라에게 테밀시아 도련님이 들으면 기뻐할 이야기만 골라 해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뮤비라 새끼, 어차피 지는 하인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야?" "미쳤던 녀석주제에 감히말야." "솔직히 아직도 미쳐 있잖아?" "하긴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는 소린 못 들었지." 요크노민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아까의 형님을 떠올려 보았다. 불쾌했다. 잊어야 할 광경을 떠오르게 만든 그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요크노민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요크노민의 존재를 모르다가 그의 말소리에 알아채고 놀라 돌아보았다. 왜소한 몸집의 소년이었음을 안 그들은 긴장한 낯빛을 풀려 화를 냈다. "새까! 놀랬잖아!" "가만 저 녀석 미친새끼 동생아냐?" "꼴에 핏줄이다, 이거지?" 웃어 졌이는 두명의 하인을 보면서 요크노민은 아까와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쳐." "뭐?" 벙찐 얼굴의 두 하인은 다시 되물었다. 요크노민은 성심성의껏 다시 말해 주었다. 토씨하나 안 틀리게 똑같이. "입닥쳐." 그들은 힘 꽤나 쓰는 녀석들이었다. 요크노민은 간신히 그들을 물리쳤다. 마침 옆에 굵은 나뭇가지가 있어 다행이었다. 페르노크가 가르쳐 준 것은 단지 검술만이 아니였다. '호신술' 이라 말한 괴이하지만 너무나 실용적인 체술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요크노민은 검술과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깨달은 상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고전은 했지만 싸워서 이길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힘이 딸리는 그가 이길수 있을리 만무했다. 요크노민은 쓰러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그들을 내려다 보며 거칠게 물었다. "형님이 미쳤다는 소리가 뭐지?" 테밀시아가 엄하게 '함구'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아무리 아프다 해도 말할수 없었다. 고통이 죽음보다 무서울리 없었기 때문이다. 요크노민은 눈쌀을 찌푸리며 그들을 채근했지만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요크노민은 모르지만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호기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때문에 처소에 들어가고 나서야 몸차림이 헝클러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급히 정리하고 있을 때 하필이면 페르노크가 나왔다. 막 샤워를 했는지 요크노민과는 상반되게 깨끗한 차림이었다. "당했냐?" "아니!" 발끈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페르노크가가 소리죽여 웃어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럼 됐어." 차가운 음료가 정신또한 차갑게 만들어 주었다. "안 물어봐?" 물어보면 뭐가 답하지?, 페르는 알고 있을까?, 형님일을? "말하고 싶으면 해. 들어 줄테니." 요크노민은 순간 페르노크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페르노크라면 함구하고 있는 하인들의 입을 열게 할수 있을 것이다. 페르노크라면 그를 귀여워하는 테밀시아 도련님에게 직접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크노민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하지만 그 이상 자신을 싫어하기 싫어다. 그는 아직 자신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음료를 벌컥 들이켰다. "아니다. 아직은 말하기 싫어." 페르노크의 별 뜻없는 눈동자가 너무나 매섭게 느껴졌다. '이래서 죄 짓고는 못 산다는 건가…….' 페르노크는 돌아서 버렸다. '나에게 실망한 걸까?' 불안했다. "그럼 해결되고 말해." 요크노민은 머리속이 차분히 정리되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알아내리라. 그 정도도 못하고 어떻게 정보길드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지." 요크노민은 일기의 뒷부분을 고심하다가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페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르보다는 행복하리라 생각한다. 형님은 보고 싶은 이의 얼굴을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 페르가 날 믿어주듯이 나도 형님을 믿는다. 형님이라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나도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겠다.」
번  호 : 18548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4일 10:36 
등록자 : KREUZ1           조  회 : 21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4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서재에 들어선 페르노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 말도 안 나오는지 이마를 집고 벽에 기댄 그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누가 이 상황 좀 내게 설명 해줘……." 서재 안은 날라 다니는 책들로 정신이 없었다. 부자연스러운 일이란 것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너무나 천천히 날라다니고 있어 그 기괴함이 더했다. 페르노크는 질린 듯 그 모양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젠 몰라." 그리곤 떠다니는 책들의 제목을 집중해서 살폈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건져내 나갈 요량이었던 것이다. 아예 이해하길 포기한 모양이다. "휴로버 아저씨가 준 책이 어디 있을 텐데……." 그때의 고대책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람이 부드럽게, 하지만 빠르게 불더니 소용돌이 모양으로 책들이 허공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류에서 몇권의 책이 이탈하여 페르노크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 페르노크는 얼떨결에 두터운 책들은 한 손으로 받아버렸다. 앗차! 다른 손으로 얼른 마저 받치려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책들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어, 그에겐 무게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의아함마저 들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바람의 기류에 따라 허공을 부유하던 자신의 머리카락이 어느새 허리 아래로 차분히 가라앉아 있음을 알아 차렸다. 바람이 멎은 것이다. 그리고 페르노크의 눈앞에 여전히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책들이 소용돌이 치던 모습 그대로 한 권씩 빠져 나와 책장에 가지런히 꽂이는 광경이었다. 페르노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자신의 앞에 여전히 떠있는 책을 내려보았다. 그가 찾던 책이었다. "이것도 내가 모르던 기능인가?" 페르노크는 골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을 느꼈다. "뭐, 편하긴 하군." 그리곤 예정을 변경하여 그냥 서재 안, 안락의자에 앉아 독서하기로 했다. 의자로 향하는 그의 뒤로 조용한 바람이 계속 일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의자에 앉고 나서야 그것을 눈치챘다. 그가 그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그것은 페르노크의 어깨위로 자리를 바꿔 일었고, 페르노크는 혹시 유령이 아닌가 고심 했야만 했다. 자신의 어깨 쪽만 시원한 바람이 맴도는 경험은 페르노크에겐 그리 나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묘한 생각이겠지만 페르노크는 웬지 '귀엽다'고 떠올렸고 그와 동시에 그의 어깨에는 투명해서 윤곽만을 알아 볼 수 있는 작은 물체가 나타났다. 페르노크는 너무 놀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물체가 웃고 있다고 느꼈을 때 그것은 색을 머금기 시작했고 좀더 선명해졌다. 그것은 아직은 투명해서 건너편의 풍경을 투과시키는 모양새였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들어 내고 있었다. '뭐……뭐야?!' 페르노크가 속으로 크게 외칠 때 그 물체는 귀라 추정되는 것을 손이라 추정되는 것으로 막았다. 페르노크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귀엽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자 그 물체도 까르륵 웃는 모양을 해댔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습이 묘하게도 더 귀엽게 느껴지는 페르노크였다. 그래서 좀더 유심히 살펴 볼 수 있었다. 작은 몸뚱이에 걸 맞는 작은 얼굴 안에는 신기하게도 눈, 코, 입에다 귀, 머리카락까지 조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초록빛을 띄고 있어 어찌 생각하면 괴이하게도 생겼지만 이리저리 떠돌면서 거꾸로 있다가 앉았다가 누웠다가 하는 모양이 그 점을 간단하게 제압하여 귀엽다는 느낌만 들게 해주었다. '뭐지, 이건?' '이건'이라는 물체를 지칭하는 말에 그 물체는 토라진 듯 고개를 획 돌렸다. 페르노크는 그 모습에 다시 작게 웃었고 그 웃음소리를 들은 물체는 자신이 삐졌음을 잊고 같이 까르륵 웃어댔다.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그 물체가 더더욱 귀엽게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톡톡 건들였다. 물체는 조금 멀찍이 밀려났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 모양이 마치 주인과 공놀이를 하는 강아지같이 신나보여 페르노크는 또 피식 웃었다. "이름 있어?" 물체는 고개를 크게 끄떡였지만 페르노크의 시점에서는 너무나 작은 끄떡임이라 간신히 알아 볼 수 있었다. "뭔데?" 물체는 페르노크가 그 질문을 해 준 것이 기쁜 듯 페르노크의 주위를 어지럽게 날라다니다가 그의 눈앞에 와 멈췄다.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페르노크를 보고 생긋 웃은 물체는 빠르게 돌아서더니 두 손을 허공에 뻗었다. 그러자 아까와 같은 바람이 한차레 방을 휘감더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메모지와 잉크가 날라왔다. 물체가 잉크를 향해 오른 손이라 추정되는 것을 휘둘어 보이자 뚜껑이 열리면서 잉크들이 허공을 맴돌았다. 가느다랗게 소용돌이 모양으로 맴돌던 잉크는 다시 물체가 두손을 휘젓자 메모지쪽으로 이동해 충돌해 버렸다. 물체는 작업(?)을 끝내고 뿌듯한 얼굴을 하고는 페르노크 쪽으로 그것을 보냈다. 페르노크는 그것을 소리 내 읽어 보았다. "「실베스트르」?" 물체는 페르노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기쁜지 빠르게 고개를 끄떡이며 웃었다. "음……그나저나 뭐냐, 넌?" 물체는 같이 고심하는 얼굴을 하다가 최종에는 그냥 웃어버림으로 끝냈다. 설명하길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깨가 마음에 드는지 그곳에 앉아서 같이 책을 들여다 보는 물체, 아니 실베스트르를 보고 페르노크는 작게 어깨를 으쓱 였다. 실베스트르는 덕분에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용케 균형을 잡았다. 그리곤 자신을 째려보자 한번 웃어줌으로써 상황을 종료시켰다. 페르노크는 이미 실베르트르의 성격을 간파한 것이다. 둘은 곧 독서에 빠져들었다. "서재를 나와도 되는 거야?" 졸음이 밀려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하던 페르노크는 계속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실베스트르를 발견하고 의아하게 물었다. 페르노크는 그가 서재에 '설치' 된 '기능'인줄 알았던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팔짱을 끼는 그를 보고 페르노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계단쪽으로 발을 디딜 때였다. "뭐야, 아직 안 잤어?" 친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마찬가지 잖아, 노민." 실베스트르는 페르노크의 긴 머리카락 틈에 숨어 들어갔다. 수줍음이 많은 모양이다, 고 생각한 페르노크는 굳이 그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노민은 주전자에 물을 채우기 위해 나왔던지 그것을 들고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하며 별 뜻 없이 물었다. "나쁘진 않아." 요크노민은 페르노크를 힐끔 돌아보며 덧붙여 말했다. "애완 동물을 얻은 꼬마 같아." 페르노크가 아주 적절한 묘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을 읽었는지 실베스트르가 약간 세게 페르노크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다. 페르노크는 그런 그를 꺼내들어 눈앞까지 올렸다. 뽀로퉁한 얼굴의 실베스트르를 보며 페르노크는 다시 피식 웃어 버렸다. "맞아, 이 녀석이야." 요크노민은 계단의 중간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굳이 뒤를 돌아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봤자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뭔데?" 페르노크가 다람쥐나 새등을 꺼내들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실베스트르." 요크노민은 주방쪽으로 사라지졌고 페르노크는 그를 기다리면서 고민했다. "이름이 길다. 실이라고 하자." 실베스트르는 마음에 드는지 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고 동시에 요크노민이 올라왔다. 어두운지라 그는 페르노크의 잔영 만을 볼 수 있었다. "이름이 뭐라고?" "실." "괜찮네." 요크노민은 잘 자 라는 인사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곤 침대에 누우면서 중얼거렸다. "잘 못 들은거군. 실베스트르라고 들은 것 같았는데." 그리고 불을 끄며 다시 중얼거렸다. "하긴 애완 동물에 「바람의 수장」의 이름을 붙일 리가 없지." 다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무슨 동물이었지?" ========================================================================== == 너무 늦었지요? 슬럼프랍니다...........ㅠ.ㅠ 잘 안 써지네요 실베스트르는 실프의 다른 말이랍니다 아실런지.........^-^ 저의 세계에서는 정령의 말에 대한 정의가 좀 다릅니다. 앞으로 설명이 나오겠지만요. 정령왕은 '수장'이라고 불립니다. 혹은 장, 혹은 왕, 혹은 마스터.........이런식으로 불리지만 뜻은 같습니다. 또한 굳이 하급 정령, 중급 정령, 상급 정령의 이름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이름은 실베스트르(실프). 다른 판타지에선 하급 정령으로 통하지만 제 세계에서는 실프라는 이름이 왕의 이름입니다. 그 밑으로 정령들은 힘이 갖기 다르긴 하지만 이름 또한 각기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정해진 이름이긴 합니다. 에 그러니까............-''-...........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혹은 본문에서 나오겠군요^^;
번  호 : 18640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6일 16:31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5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무더운 여름답지 않게 서늘한 공기가 맴도는 집안에서 묘하게 따뜻함을 느끼며 페르노크는 눈을 떴다. 아직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를 두어번 깜박인 뒤 오른손으로 눈을 비비고 일어서려던 페르노크을 꼬옥 잡고서 잠에 빠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다시 눈을 두어번 깜박이던 그는 다음 순간 짧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를 벗어났다. "뭐야?!" '무언가'는 많이 줘봐야 14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페르노크의 외침에 깼는지 소녀의 눈이 떠졌다. 페르노크는 다시 경악해야만 했다. 그녀는 동공이 없는 녹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곧장 시선을 페르노크에게 주더니 밝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페르노크에게 다가왔는데 놀랍게도 허공을 떠도며 다가왔다. 그 모습이 눈에 익어 페르노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실?" 소녀는 꼬리를 치며 활짝 웃었는데 그 모습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너무 귀여워 페르노크도 덩달아 웃어 주었다. 그러다 또다시 이상한 점을 알아 차렸다. 꼬리? 페르노크의 눈이 자신의 뒤쪽으로 가 있자, 실도 몸를 돌려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페르노크는 그녀의 뒷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부드러운 녹음의 빛을 띄고 있는 범의 꼬리가 그녀의 짧은 치마 밑으로 흘러나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연한 녹색빛을 띄고 있는 피부는 괴이해 보이기보다는 숲을 연상케 하는 묘한 향수를 자아내고 있었고 발목까지 늘여뜨러져 있는 윤기 도는 녹색 머리카락은 꼬리를 교묘하게 감춰주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을 타고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바람? 페르노크는 방안의 바람이 멈춰 있음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실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레 허공을 맴돌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 또한 좌우. 위아래로 흔들거리며 허공에 떠 있었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어제 그녀가 작은 모습으로 날라다니던 모습을 신물나게 봤기 때문에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아 이런 말을 했을 뿐. "크게도 되네?" 실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페르노크에게 다가와 그의 무릎에 앉았다. "정말 애완동물이군." 실의 눈꼬리가 삐쭉거리며 입매도 따라 씰룩거리는 것을 발견한 페르노크는 한번 웃어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노민에게 뭐라고 설명하지……?" 실은 알아서 하세요, 하는 얼굴로 페르노크를 마주했다. 페르노크는 실이 자신의 무릎에 앉아 있다는 것을 망각한 것인지 일부로 그런 것인진 모르겠지만 벌떡 일어남으로써 그녀를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바람을 타며 길게 누운 그녀는 그 상태로 뒹굴 거리면서 페르노크를 바라보았다. 페르노크는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말했다. "일단 씻고 올게." 실은 당연하다는 듯 페르노크의 뒤를 따라나섰다. 끈질기게 욕실까지 따라온 실이 페르노크가 옷을 벗는 것을 보고 따라 벗어버리려 하자 페르노크는 만류하며 잠시 고심해야 했다. '몸'은 남자라도 '영혼'은 여자인 그가 여성의, 그것도 꼬마아이의 알 몸 때문에 당황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여성'인 실의 알몸이 아니라 '꼬리'가 나있는 실의 알몸이었던 것이다. 그 꼬리의 연결부위(?)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 상상도 안됐기 때문에 그는 성급히 그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생각을 읽은 실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페르노크는 그 모습에 작게 웃었지만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적응이 빠르다 해도 그가 '이곳'에 넘어온 지는 겨우 한달 남짓 인 것이다. 페르노크는 옷을 마저 벗으려다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실을 보게 됐다. 그에겐 상관 없었지만 '어린 정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어 페르노크는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했다. 당연한 일인진 모르겠지만 실은 고개를 마구 저으면서 거부했다. 페르노크는 아침부터 꼬마애 때문에 골치를 썩고 싶지 않았던 지라 다소 차가운 얼굴로 다시 나가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실은 페르노크의 차가운 모습에 놀라 울먹여 댔다. 페르노크는 상의를 어깨에 걸치며 실에게 걸어갔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춘 뒤 말했다. "실, 내 '몸'은 '남자'의 몸이야." 실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페르노크는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성에게 몸은 함부로 보여주는 게 아니야." 실은 알지는 못하지만 알아는 듣겠다고 고개를 다시 끄떡였다. 페르노크는 마무리를 짓고자 하는 마음에 문을 가르키며 말했다. "실은 '이성', 나와는 다른 '성'인 여자니까 나가 있어." 이 부분에서 페르노크의 얼굴이 더더욱 구겨졌지만 그의 단호함은 한결같았다. 실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설레설레 저어댔다. 페르노크는 다시 똑같은 말을 차마 꺼내고 싶지 않았던 터라 정말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실은 머뭇거리다가 상의를 벗었는데 그 나이때의 여자보다 한층 밋밋한, 흡사 남자아이의 것과 같은 가슴이 들어났다. 페르노크는 실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허리를 피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무슨 뜻이야, 여자가 아니라는 거야?" 실은 페르노크의 전자 질문에 정말 난처한 얼굴을 하다가 후자 질문이 따라붙자 반갑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페르노크는 그랬구나 하는 얼굴로 확인 차 다시 물었다. "그랬군. 남자였구나?" 하지만 페르노크는 다음 순간 더욱 헷갈리는 광경을 접해야 했다. 실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것이다. 그리곤 다시 치마를 내리려 했는데 그 '연결부위'를 보고 싶지 않았던 페르노크는 얼른 실의 손을 잡고 만류했다. 그리고 정말 설마, 설마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정말 적응 안되는 세상이다, 세상이다, 하지만 설마 이런 경우가 있겠는가? 아무리 상식 의외의 것들이 벌어지는 세상이라지만 설마 이런 경우가…….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곱씹으며 페르노크는 물었다. "중성이니?" 다음 순간 페르노크는 벽과의 해후를 온몸으로 하면서 이 '이상한 세계'에 대한 통탄을 긴 한숨으로 대신 해야 했다. 실이 너무나 반갑다는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떡인 것이다. ========================================================================== ==== 제가 무리를 해가며 올린 이유는 오늘이 이벤트 발표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소설의 패러디를 건국기를 쓰시는 이라사님이 보내주셨기 때문이죠>O< 정말 멋진 패러디더라구요 님들도 즐독 하시길 빕니다^^
번  호 : 18642 / 20368    등록일 : 2001년 05월 26일 16:32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6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어찌되던 씻고 보자는 마음으로 욕조로 들어간 페르노크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제는 물이 솟아 올랐었는데……. 고요한 욕조안의 물을 내려다 보던 페르노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부지런히 씻었다. 곧 아침 식사시간인 것이다. "실은 뭘 먹어?" 결국 욕실에 남은 실에게 페르노크가 물었다. 실은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이 기쁜지 활짝 웃으며 꼬리를 흔들다가 그의 질문에 고개를 휘휘 저어댔다. '하긴……유령이 무슨 밥이겠어.' 실은 실룩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댔다. 그가 마음을 읽을수 있다는 것을 떠올린 페르노크는 "유령이 아니라는 거야?" 하고 물었다. 실이 끄떡이자 페르노크는 작게 한숨을 쉬며 욕조 안에 잠수해 들어갔다. '노민에게 물어볼까……?' 욕조에서 빠져나온 그는 큰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으며 욕실을 나왔다. 늘 바로바로 따라붙던 실은 무슨 일인지 주춤거렸지만 페르노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목욕하고 싶은 거야?" 그는 벽에 달린 장치를 조작하여 물을 새물로 갈았다. "하고 나와. 아, 옷은 조금 있다 갖다 줄께." 그리곤 나가 버렸다. 뒤에 남은 실은 순진해 보이는 웃음기를 주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 보았다. 그와 동시에 욕조의 물이 치솟더니 욕실 안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실 이라고……?」 공기를 통해 웃음기가 동반된 희미한 음성이 공명되었다. 실의 무표정한 얼굴이 순간 싸늘해지면서 다리를 꼬며 앉았다. 물론 공기 중에 떠다니면서. 그런 그의 주변을 부유하던 물방울들 중 몇몇의 크고 작은 것들이 엉켜 붙어 한 형상을 만들어 냈다. 처음 나타났던 실과 비슷한 크기를 하고 있었던 그것은 다음 순간 지금의 실만큼 커졌다. 동공 없는 짙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중성이라지만 여성스런 실과는 달리 그는 건장한 15세 정도의 소년으로 보였다. 실과 비교하여 짧은 어깨까지 흘러내린 푸른 머리켤은 물기를 잔뜩 머금어 촉촉하게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연한 푸른빛을 띈 피부를 가진 그의 상체는 고작해야 천 한자락이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흘러내려 허리띠에서 고정시킨 것이 다였다. 하의는 실과는 달리 펑퍼짐하고 긴 바지를 입었는데 발은 맨발이었다. 꼬리 따위는 없었지만 손에 물갈퀴가 있어 사람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왠 시비지?」 싸늘한 얼굴답게 싸늘한 공명음을 내는 실을 바라보며 푸른 소년은 피식 웃었다. 「무슨 속셈인지 듣고 싶군.」 실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속셈?」 푸른 소년은 말돌리지 말라는 얼굴로 구체적으로 물었다. 「『맹약』 도 맺지 않은 상대에게 애교를 피우며 붙어 있는 속셈말이다.」 실은 조소를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나야말로 '네레이데스'……바다의 님프가 왜 고작 욕조의 물에 빌붙어 있는지 궁금하군.」 바다의 님프, 바다의 정령……. 모든 물의 어버이, 모든 물의 고향, 모든 물의 목적지……'바다' 그것의 힘을 이어받는 유일한 정령. 「파도의 존재」 운디네의 이름을 잇는 자. 「물의 수장」 운디네, 혹은 네레이데스라 불리는 '존재'가 고작 욕조에 몸을 담고 있다니. '상식'을 아는 이가 듣는다면 대경하고도 남을 소리였다. 네레이데스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그리고 실이 문을 열려는 순간. 문이 갑자기 열리며 페르노크가 들어왔다. "실, 여기 옷……?" 서로의 '존재감'에 취해 그가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페르노크는 자신을 보고 굳어 있는 두 아이를 보며 덩달아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익숙한 실을 보고 물었다. "친구니?" 실은 어느새 활짝 웃는 모양으로 페르노크에게 다가가 볼을 비벼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네레이데스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욕조에 걸터앉았다. 페르노크는 그런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네레이데스는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떠다니던 물방울들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 냈다. 「네레이데스」 실은 그 형상을 보고 아주 짧은 시간 미간을 찌푸렸다. ' 네레이데스는 '딸'만이 이어받는 칭호이거늘…….' 실의 그런 내색을 눈치는 챘으나 네레이데스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허공을 부유하는 물방울들을 보다가 혹시나 하고 물었다. "어제 목욕을 도와준게 너야?" 네레이데스의 장난기가 어린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페르노크는 실을 볼때의 얼굴, 즉 귀여운 것 을 보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 난 페르노크." 네레이데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페르노크는 처음엔 물기가 잔뜩 베인 네레이데스의 피부에 놀랬고 그 다음엔 물갈퀴가 있는 손에 놀랬다. '이 녀석은 또 뭐지……?' 페르노크는 돌아서면서 말했다.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자." 그리곤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버렸다. 남은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말을 꺼내봤자 서로에게 불리하다는 걸 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냥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여기서 먹겠다고, 페르?" "응, 노민도 여기서 같이 먹지." "그럼 그러지. 음식을 갖고 올게." "됐어. 여기 부엌에도 음식은 많아. 그걸로 때우자." 그리고 둘이 있는 이층을 향해 페르노크가 소리쳤다. "내려와." 둘은 다시 서로를 보다가 주섬주섬 내려왔다. 과일 바구니와 어제 받아온 빵을 들고오던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외침에 따라 고개를 계단 쪽으로 돌렸다. 페르노크는 그런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실하고 그 애 친구야." 그리곤 쨈과 버터, 우유와 주스가 담긴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요크노민은 일단 바구니를 갖다 놓자는 생각에 둘이 나타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테이블 쪽으로 갔다. 페르노크는 실과 네레이데스를 보고 손짓으로 불렀고 요크노민은 테이블에 바구니를 내려놓고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페르노크는 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요크노민에게 소개를 해주었다. "이쪽은 내 친구, 노민. 노민, 저쪽은 내 애완 동물 실과 그 친구…… 이름이 기니까 넬이라고 하자. 괜찮지, 넬?" 네레이데스는 고개를 끄떡임으로써 괜찮다고 답해 주었다. 요크노민은 입을 벙긋벙긋하다가 페르노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저 표범이 실이야? 생각보다 크네. 근데 저 거북이가 표범 친구라는 거야?" "에?" 페르노크가 미처 의아함을 표출하기도 전에 요크노민은 음식을 둘러보고 자기 할말만 했다. "고기가 필요하겠는데? 재들이 어떻게 빵을 먹냐? 아, 거북이라면 과일은 먹겠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페르노크는 조금 멍하게 있다가 나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괜찮아, 실은 음식을 안 먹어도 된다고 했고 넬은……." 넬은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넬도 필요 없데. 앉아서 먹기나 하자구." 요크노민은 실과 그의 친구라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테밀시아 도련님이 선물해 줬나 보지?" 페르노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맞받아 쳤다. "아니, 갑자기 나타났어." 그는 이미 둘을 이해하길 포기했기 때문에 담담하게 요크노민과 이야기 할 수 있었다. 한편, 두 정령의 수장들도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봐, 넬……풋…….」 '실'을 놀린 바 있었던 넬은 별다른 반박은 못하고 머리가 글적였다. 「난 넘어가고 넌 어쩔 생각인 건데?」 「왜 넌 그냥 넘어가야 한다는 거지?」 실은 마음놓고 떠다니며 말했다. 「그야 난 이미 저 인간한테 '인정'받았고 넌 내 친구일 뿐이니까.」 「지금 거처 문제를 논하는 게 아니잖아.」 그러다 피식 웃어버리는 넬이었다. 「애완 동물로 '인정'받은 게 자랑스럽냐?」 실은 얼굴을 차갑게 굳이다가 페르노크가 이쪽을 힐끔 본다는걸 알고 순식간에 풀어 버렸 다. 「너도 맨처음부터 그 사이즈로 나왔다면 '애완 동물'이었다고!」 '그 사이즈'라, 넬은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요크노민이 페르노크의 시선을 따라 둘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거북이는 졸려운가 본데? 하품을 해." 페르노크는 마시던 주스를 뿜을 뻔했지만 노련한 반사신경으로 가까스로 그것만은 면했다. 대신 사례가 들긴 했지만 말이다. 퍼옴이의 덧. 드디어 전부 따라잡았습니다. 앞으로는 작가님께서 올리시는 대로 족족 퍼오도록 하겠습니다.
번  호 : 18846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02일 10:36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7                                      
                          
[연재] 아해의 장-107 2001/05/30 18:41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70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한시간 뒤부터 훈련 시작이다." 기침을 힘들게 하면서도 페르노크는 꿋꿋이 아침을 해치우고 이 말을 남기며 일어났다. 페르노크가 깨기도 전에 일어나 홀로 훈련을 한 시간 정도 하는 요크노민은 눈에 띄게 체력이 좋아지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말에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을 본 페르노크는 비슷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슬슬 '진짜' 훈련으로 넘어갈까, 노민?" 요크노민은 조금 질린 얼굴로 페르노크를 올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좋아." 요크노민의 강자에 대한 집념이 남다르다는 걸 요근래 깨달은 페르노크는 그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같이 고개를 끄떡일수 있었다. 요크노민은 일어나 테이블을 대충 정리했다. "아까 보니 빵이 다 떨어졌더라? 과일은 어제 갖고 와서 괜찮지만 채소류는 얼마 안 남았어. 일단 주방으로 갔다가 마당 쓸어야 겠다. 빨래는 수건이 밀렸으니까 시녀를 불러야 겠어. 침실은 네가 정리해라." "그러지." "아! 그러고 보니 내 방에다 두고 온게 있다! 주방 가기 전에 내 숙소 먼저 들린다?" "마음대로." 이제는 태연히 자기 할 일을 정하고 페르노크에게 간단한 것을 미루는 요크노민이었다. 원래 전용시종이란, 주인이 일어나자마자 세안 준비에 의복 준비를 해야 한다. 본관에서 밥을 먹게 된다면 음식을 주인의 식성에 맞게 덜아 다 줘야 하며 다 먹었다면 식후 나오는 디저트 외에도 주인이 즐겨 마시는 차 따위를 대령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그날 내 놓은 빨래 등은 그날그날 깨끗이 해서 본래 자리에 갖다놔야 했다. '빨래가 밀렸다'는 말은 감히 시종의 입에서 내밷을 말이 아니였던 것이다. 게다가 주인에게 '시킨다'는 것이 어디 시종으로써 할 도리인가? 하지만 요크노민은 아주 태연하게 행하고 있었고 받아 들이는 이도 자연스러웠다. 이는 둘이 완전무결한 '친구'임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닫히는 문을 페르노크는 조금 걱정스런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실을 보고 그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페르노크는 실에게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넬은?" 실은 '난 몰라요.' 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고 페르노크 또한 덩달아 어깨를 으쓱였다. "침실이나 정리할까?" 요크노민은 자꾸만 자기를 쫓아오는 거북이 때문에 조금 곤란했다. 까닭는 모르겠지만 그 거북은 보통 거북이보다 훨씬 빠랐기 때문에 속도상의 문제는 없었지만 그것이 더욱 튄다고나 할까? 요크노민은 앉아서 손바닥 만한 거북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묘한 색일세? 초록이 아니라 파랑…… 아니, 하늘색의 거북이라?" 그리곤 집어들었다. "왜 쫓아오는 거지?" 그리곤 발을 놀려 자신의 전 숙소로 향했다. 넬은 꼼지락거리며 따스한 요크노민의 손길을 즐겼다. 왠지 어두운 기운이 스며있어 흥미로움에 구경 차 따라 나서긴 했지만 그 이상 관여할 생각은 없었던 지라 '따뜻하겠다, 자버릴까?' 고민하는 넬이었다. 그러다 바닥으로 곤두라 치는 것을 느끼고 얼른 물을 일으켜 몸을 띄었다. 그리곤 짜증난다는 눈길로 요크노민을 째려보려 했다. 하지만 그가 올려다 본 곳에는 차가운 남색의 머리결을 지닌 소년대신에 왠 몽둥이를 쥐고 있는 망가진 얼굴의 청년이 있었다. 그러다 청년이 내려다 보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내려보니 그새 눈에 익은 소년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어제는 잘도 망신을 줬겠다?" 그리곤 꼬마를 집어 어깨에 걸쳐 들고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넬은 황급히 물을 불러 그것에 몸을 실고는 그 뒤를 따랐다. 「재미있겠는데?」 정령만이 알아 들을 공명음을 짧게 중얼거리면서. -찰싹!- 요크노민은 양쪽 뺨에 불이 이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깨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상당히 불쾌했다. "드디어 깨셨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결코 아닌 남자의 음성이 주위를 둘러보는 요크노민의 귀에 들어왔다. 요크노민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입을 열었다. "전 페르노크 도련님의 명으로 숙소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곤란하지요. 늦어지면 불똥이 뛰는 것은 저뿐만이 아닙니다." 어둡고 눅눅한 기운이 스며있는 바닥에 쓰러져, 그것도 포박당한 상태인 요크노민이 당황하는 내색없이 곤란한 말을 내밷자 남자는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퍽- 요크노민은 남자의 발길질은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아직……약해……난……아직 약해…….' 무력감보다는 호승심이 일어나는 자신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할수 없었던 요크노민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 모습이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 착각한 남자는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길질을 했고 요크노민은 갑작스런 타격에 기침을 해대야 했다. "요즘 기세등등 이던데, 노민?" 다정스럽게 애칭을 내밷는 남자를 아무 내색없이 무표정하게 보던 요크노민은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페르가 말하길, 갑자기 당당하게 나가면 오리혀 반발이 더 셀 것이다…….' 겁에 먹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였던지라 남자는 벽에 달린 횃불을 두 개정도 켰다. 좀더 사실감있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였다. 요크노민은 흠짓 몸을 떨었다. 페르노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까짓 것에서 겁먹고 꺽인다면……이 열배 이상의 훈련을 각오하도록.- 지금까지도 겨우 버텨왔다. 헌데 그 열배라니……. '사양하겠어.' 요크노민이 잠시나마 몸을 떨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을 얻은 남자는 몇번 밟아주는 것으로 일차를 마쳤다. 그도 하인인지라 짬을 낼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가 아무리 요크노민을 오래 괴롭히고 싶다곤 하나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 시간대가 겹치지 않는 친구가 그 대신에 충분히 요크노민을 괴롭혀 줄 것이었다. 남자가 나가고 잠시 후 다른 이가 들어왔다. 요크노민은 다소 멍하니 그를 올려보았다. '이 새끼 얼굴도 기억해 놔야지.' 복수는 천천히 해도 된다. 하지만 탈출은 당장 해야 한다. 페르노크가 구해주기 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건 열배의 훈련 또한 요크노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다른 남자는 요크노민에게 앙심이 많았던 앞의 남자가 앞서 요크노민을 넋이 빠지게 괴롭힌 줄만 알았다. 그는 안쓰러운 마음에 수건에 물을 묻여 요크노민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군.' 요크노민은 속으로 열심히 빈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요크노민은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는 반동으로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일이 쉽게 됐는걸?' 뒤로 묶여진 손이 문제였다. 요크노민이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날카로운 물건 따위는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은 그저 쾌쾌한 곰팡이 냄새만이 나는 텅 빈 작은 방이었을 뿐이었다. '으으, 정말 싫지만……저거 뿐인가?' 요크노민은 묶인 다리를 의식하며 천천히 다시 누웠다. 그리고 굴러서 벽에 붙었다.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몸을 일으킨 요크노민은 머리로 횃불꽂이를 요령있게 건들여 횃불을 떨어 뜨렸다. '불이 꺼지기 전에 어서……!' 요크노민은 겁도 없이 손을 불 쪽으로 가져다 댔다. 살이 데이는 고통이 닥쳐왔지만 요크노민은 한참 손을 불에 대고 있었다. 마침내 반대방향으로 밀던 양손이 떨어져 나가면서 탄 끈이 바닥에 추락했다. "제길, 아파죽겠네." 그리곤 발을 재빨리 풀렀다. 횃불이 다른 지푸라기에 이동하기 전에 얼른 밟아 꺼야 했던 것이다. 예상과는 다르게 지푸라기 바로 옆에 떨어진 횃불은 요크노민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발에 칭칭 감긴 끈을 푸르는 요크노민 뒤로 횃불이 점점 커져 작은 몸집의 그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다 풀렀다!" 서둘러 뒤를 돌아 보았으나 이미 불은 수그러 들어 완전히 꺼진 상태였다. "어? 잘못 봤나? 분명, 이쪽에 옮겨 붙었었는데?" 하며 살펴보니 틀림없이 그을림 자국이 있었다. 요크노민은 방안이 눅눅한 것을 보아 불이 쉬이 옮겨 붙지 않았던 것이다, 라고 판단하고 서둘러 문쪽으로 뛰어갔다. 잔뜩 데이다 못해 타기까지만 손이 무척 아파왔지만 그런 것 쯤은 나중에 페르에게 고쳐달라고 하면 된다, 고 생각하는 요크노민이었다. '역시 잠겨있군.' 요크노민은 허리춤에서 가는 철사를 꺼내 이리저리 열쇠구멍을 쑤셔댔다. -철컥-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요크노민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방안에 투명한 기운이 맺이더니 곧 어떤 형상을 띄고 나타났다. 파란 잔영으로 보이는 흐릿한 소년의 모습. 소년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독한 놈이구만. 게다가 멍청하기까지 해.」 소년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물기가 가득 머금어진 지푸라기가 들어왔다. 「내가 없었으면 도망은커녕 젖은 짚 때문에 질식사 했겠구만.」 소년이 허공에 손을 두어번 휘젓자 나머지 횃불의 불씨조차 사그러 들었다. 「어디서 되바라진 기술은 배웠지만, 역시 애송이야.」 그리곤 소년은 일순 사라졌다. ======================================================================= 요즘 너무 뜸하게 올리지요? 죄송합니다. 글이 잘 안써지고 있는데다 제가 개인적인 일로 좀 힘든상태거든요 곧 제 속도를 내겠습니다. 적어도 다음주부터는 전처럼 하루한편연재를 목표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__)(--)
번  호 : 18847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02일 10:37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8                                      
                          
[연재] 아해의 장-108 2001/06/01 18:27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09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헤, 이게 무슨 꼴이냐?" 말은 태연하게 하지만 페르노크는 다급히 캐스팅에 들어갔다. 요크노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사그라드는 통증을 만낏 했다. "살았다." 페르노크는 가만히 멀쩡해진 자신의 손을 살펴보고 있는 요크노민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연장이냐?" 요크노민은 단호이 답했다. "응." "알았다." 페르노크는 일어나 벌써 저녁노을이 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노을이 다 지면 찾아 나설 생각이었는데." 그리곤 흠짓, 하는 요크노민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운이 좋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페르노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표범을 손짓으로 부르는 모양을 보던 요크노민은 또 다른 펫, 거북이가 안 보인다는 것을 알고 물었다. 페르노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욕실'이라고 답했는데 그 말을 들은 요크노민은 상당히 멍한 얼굴을 해야 했다. "욕조에서 거북이를 기르겠다는 말이야?!" "씻을 때는 나오게 하면 되고, 물 갈은 다음에 다시 집어 넣으면 되지." 솔직히 요크노민은 '거북이'라고 하나 페르노크의 눈에는 어린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욕실에서 물과 노닥거리고 있는 넬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실은 표범의 모습이라니 같이 방에 있어도 별 이상한 점은 없겠지만 거북이라면 다르지 않는가? 게다가 물과 근접한 곳에 있고 싶다는 넬을 굳이 말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를 알리 없는 요크노민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뭐라 더 물으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페르노크가 눈을 비비며 욕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이, 훈련은 안 해?" "내가 알기론 어디에 사는 누구의 손은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화상으로 말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다 나았잖아?" "마법이 전지전능할 순 없는거야. 오늘은 쉬도록." 왠만해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페르노크인지라 요크노민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수긍하지 않을수 없었다.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페르노크는 실을 불렀다. "실." 실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페르노크의 곁으로 다가와 그 주위를 정신없이 떠다녔다. 페르노크는 웃통을 벗으면서 말했다. "작은 사이즈로 돌아가라." 실은 눈을 껌벅이며 페르노크의 눈치를 봤다. "화난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실은 이미 페르노크가 헛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에 안심하고 처음의 크기로 돌아갔다. 페르노크가 손을 내밀자 그 위로 사뿐이 내려 앉은 실은 활짝 웃으며 그를 올려 보았다. "혹시 넬도 이 사이즈 변할 수 있어?" 페르노크는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 앉아 욕실 전체를 부유하고 있는 물방울들을 보고 있는 넬에게 물었다. 넬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는데 실은 뭔가 불만에 어린 얼굴이었다. "그럼 변할래?" 넬은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목욕하려고 하는데 물 좀 제자리에 놔주겠어?" 넬이 고개를 끄떡이며 일어섬과 동시에 허공의 물들은 욕조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급격한 빠르기에도 물방울들은 바깥으로 튀지 않고 욕조 안에 잘 자리잡았다. "고마워." 그리고 욕조 쪽으로 걸어갔는데 넬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넬이 크기를 줄이지 않았으나 페르노크는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였다. 그는 허리끈의 매듭에 손을 대다가 갑자기 넬을 잡아끌었다. 넬이 당황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페르노크는 고개를 숙여 넬의 어깨에 얼굴을 갖다댔다. 실의 눈매가 매서워지며 넬을 향했으나 넬은 놀라 그것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음……그때 향기는 넬에게서 났던 거구나. 실한테서 비슷한 향기가 나긴 했지만 달랐거든." 얼굴을 뗀 페르노크는 궁금한 점이 풀려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향기?」 실과 넬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다. 「『정령의 냄새』를 맡는단 말인가?」 정령사들 중에서 그것을 맡을 수 있었던 이는 그 무궁한 역사상 단 둘뿐이었다. 한 '존재'는 그들의 창세주. 또 한 '존재'는 저 옛날 '나찰'이라 불렸던 아름다운 이. 창세주야 그들의 '주인'이기에 당연한 일이라 치면 사실상 역사상 단 하나 뿐인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존재'는 단 한 속성의 냄새만을 맡을 수 있었다. 『정령의 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그들의……. "놀랐어? 미안. 그럼 나는 씻을테니까 나가 있든가, 저쪽에 있……." 페르노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넬은 한쪽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페르노크의 주위로 물방울들이 치솟아 소용돌이 모양을 띄더니 어제처럼 그의 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편하군." 페르노크는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넬을 보고 고맙다고 했다. 넬은 페르노크의 얼굴에 희미하게 배인 미소를 보고 배시식 웃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실과 같은 크기로 변했다. "귀엽다." 표정은 거의 없었지만 눈동자 만큼은 상냥하게 웃고 있었기에 넬은 한껏 미소지을수 있었다. 실은 투덜거렸다. 「뭐가 좋냐? 너도 이제 '애완동물'로 전락한 거라구.」 「실은 그렇게 만족하고, 자랑스러워하던 '펫'이 되었으니 나도 만족하고 자랑스러워 해야 도리가 아니겠어?」 실은 또다시 투덜거렸지만 페르노크가 문밖으로 나가자 입을 다물었다. "난 먼저 잘게. 오늘은 왠지 피곤하네." "아, 나도 피곤해서 지금부터 잘 참이었어. 잘자……근데 실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어? 보이지 않네? 목욕하고 싶은데 넬은 아직도 욕실에 있어?" 페르노크는 자신의 양 어깨에 자리잡은 실과 넬을 번갈아 보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대답을 기다리는 요크노민에게 답했다. "아아, 넬은 지금 없어. 잠시 나간 모양이야." "그래? 그럼 잘자라."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페르노크의 어깨를 툭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간발의 차이로 허공으로 몸을 띄워 요크노민의 손길을 피한 실은 다시 페르노크의 어깨로 올라와 앉았다. "너희가 그 사이즈 일 때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넬과 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고개만 갸웃해댔다. 페르노크는 추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지라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 다음카페에 '아해의 장' 카페가 생겼답니다>O< 당장 가입하고 오는 길이에요^^ 내일 중이나 소설을 올리게 되지 않을 까 싶었는데 그 카페를 보니 기뻐서 얼른 써서 올려요^^ 많이들 가입해주세요>O< 전 '페르노크'나 아르의 닉네임으로 가입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제 닉인 바람의 벗으로 해버렸어요^^ 자료실에 전에 배포하던 그림을 몽땅 올려놓고 오는 길이에요 저와 친분이 있는 분들께서 보내주신 축전도 올리고>O< 우울한 일이 있었는데 기뻐서 많이 희석 됐네요^^ 주소는 http://cafe.daum.net/fantasy00/ 이구요^^ 오늘 만들어진 거라 썰렁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제 제가 악착같이 활동할거니까요^^* 헤헤
번  호 : 19162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0일 23:51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2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09                                       
                          
[연재] 아해의 장-109 2001/06/05 21:54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36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다음날 아침, 요크노민은 뮤비라의 전갈을 들었다. 테밀시아의 약혼녀, 마린나샤의 가문 '자하사'가 주체하는 파티에 추대받았으니 점심 식사 후, 준비하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명목상 두 집안의 친교를 위한 파티라고는 하나, 대마법사가 될 것이 분명한 페르노크라는 인재의 갑작스런 휴학이 궁금했던 것이다. 유약하지만 마법사란 본디 위협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것을 모르진 않으나 거절한다면 다음은 뻔했기에 테밀시아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 요크노민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페르노크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형님은 왠만해선 나를 내보내려 하지 않던데 왠 파티?" "약혼녀의 집안에서의 청이기 때문에 거절한다면 아직도 경계를 하냐는 둥 말이 많아지거든." "헤에. 근데 내가 '이 상태'라는 건 알려지면 안되는 거잖아? 가서 나를 아는 녀석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는거지?" "아, 그건 괜찮아. 넌 그 집단에서도 '따'였기 때문에 친구가 없거든. 친한척 다가오는 녀석만 경계하면돼. 십에 십은 널 괴롭히던 녀석일테니까." '따'라는 유쾌하지 못한 단어를 요크노민에게 가르쳐준 것은 페르노크였다. 페르노크는 피식 웃으면서 농담투로 말하는, 하지만 '현실'을 얘기하는 요크노민을 보았다. "충고 고맙군." "뭘. 아, 실을 데려가는건 어때? 표범을 애완동물로 삼고 있는 걸 본다면 섯불리 다가오진 못 할텐데?" "글세. 구경거리가 될 것 같고. 굳이 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페르노크는 큰 사이즈로 변해서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올려 놓고 생글생글 웃는 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 그건 그렇군. 아, 나도 파티 간다." "노민도?" "수행하는 시종은 필수거든." "잘됐네. 가면 맛있는 거 많겠구만. 가서 영향섭취 좀 해줘야 겠어." "나도 기대하고 있다." 페르노크는 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요크노민에게 말했다. "그럼 아침 훈련을 시작할까?" "좋아! 어제 못한 만큼 해야지." 페르노크는 열심히 목도를 휘두르는 요크노민을 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라면 같이 훈련을 하지만 오늘은 다른 볼일이 생각난 것이다. 부엌에 있는 지하, 마법 연구실을 잇는 계단. 그 계단의 마지막에 자리잡아 있던 문. 페르노크를 거부하던 그 문에서 실과도, 넬과도 달랐지만 '향기'가 났었다. "음." 페르노크는 잠긴 문을 보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분명 희미한 '향기'가 나고 있다. 숲의 '향기'인 실의 것도 아니고 바다의 '향기'인 넬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비슷한 '향기'였다. "여기에도 내가 모르는 장치가 되어 있는 건가? 마나와는 상관없는 장치가?" 방안을 휘감고 있던 공기는 실의 것이었다. 욕실에서 몸을 씻겨주던 물방울은 넬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페르노크'가 보호하고자 했던 것을 지켜주는 이 문은? 페르노크는 문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다 옆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쩔까?" 옆에서는 페르노크의 눈에만 보이는 마나의 '존재'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 '존재'는 안개처럼 형상되어 있는 몸뚱이에서 한자락의 마나를 새어내어 문을 건드렸다. 그러자 그냥 보통 문으로 보이던 그것에 엷게 발라져 있는 흙더미가 보였다. "헤, 이건 마법으로 눈가림을 해 놓은 거구나?" 그 '존재'가 웃고 있다고 느끼며 페르노크는 마주 웃어주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문에 발라진 흙을 조금 긁어보았다. 부드럽고 엷은 갈색의 모래가 손가락 끝에 조금 묻어 나왔다. 페르노크는 그것을 코에 가져다 대봤다. 희미하게 '향기'가 나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흙을 좀더 묻여다가 검지와 엄지를 문지르면서 촉각을 느꼈다.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만일 여기에도 그 '장치'가 되어 있는 거라면…… 실과 넬 처럼 귀여운 애가 있는 걸까?" 마나의 '존재'는 별 대답이 없었다. 페르노크는 고민하다가 별 생각 없이 흙을 문지르던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그 손톱을 튿었다. 깊히 고민할 때 의례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흙의 껄그러움이 느껴질때서야 앗차, 하며 손을 뗐지만 미량의 흙이 이미 입안을 지나 식도너머로 건너가 버린 상태였다. "음……흙이 단데?" 하지만 더 먹을 생각은 없었던 터라 팔짱을 끼며 문을 보았다. 그러다 별 기대없이 문고리에 손을 대고 비틀었는데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헤?" 동시에 문에 묻어 있던 흙들이 바닥으로 일제히 떨어져버렸다. 페르노크는 믿겨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옆에 맺여있는 마나를 돌아보았다. 마나는 앞서 새어나온 것을 조금 흔들어 보이며 자신은 아무짓도 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페르노크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땅에 떨어진 모래들은 밝히는 감촉도 없이 부드러웠다. 안에는 훵한 공간만이 있었다. 방안은 처음엔 어두웠으나 페르노크가 들어가자 마자 환한 불이 켜져 밝아졌다. 방안은 페르노크의 생각보다도 훨씬 엉망이었다. 시약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 추정되는 실험기구가 벽장에 아무렇게나 진열되어 있었고 서재처럼 이론적인 것이 아닌 실질적, 전문적인 마법서들 역시 구석에 아무렇게나 쳐박혀 있었다. 필기따위를 하는 곳이라 추정되는 책상은 찟어진 책이나 종이들로 지저분했고 내부의 마법 제어와 동시에 밖으로 영향이 가지 않게 만들어진 바닥의 마법진은 더러운 이물질로 거의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따위로 효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마법에 대한 반발은 충분히 나타낼 수 있었다. "멍청한 '페르노크'야……." 페르노크는 이 방을 봄으로써 확실히 알수 있었다. '페르노크'가 마법을 싫어했다는 것을. 페르노크는 벽에 진열되어 있는 실험기구를 매만져 보았다. 먼지가 묻어나왔다. "어째서……어째서……." 그리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그리곤 손안에 있는 그것을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보호마법이 걸려 있었는지 깨지지는 않았다. "여기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던 거냐? 이것을 치울 만큼의 용기도 없었던 거냐?" 일반인은 못 알아 볼 마법진에다 더러운 짓은 잔뜩 해 놓으면서 누가 보더라도 알아챌 실험기구들은 건들이지 못한 '페르노크'의 소심함과 그에 맞먹는 작은 반항에 페르노크는 한숨만이 나왔다. 아주 작은 반항이었지만 그것이 그만큼 처절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페르노크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처절함에 동조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멍청이." 나직이 중얼거린 그는 곧 방문을 나섰다. 구석에 쌓인 마법서들에 무척 끌렸지만 이제는 언제든 들어올수 있지 않은가? 일단은 파티갈 준비 먼저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 귀족 페르노크의 행동범위는 어디까지 였을까요? 집, 학교 그리고 파티 따위의 사교장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여짓껏 페르노크의 왜소함과 소심함을 알고 있는 이도 집, 학교, 사교장이 전부겠지요? 이제 페르노크의 이미지 타파는 이번 파티가 끝입니다. 본연의 페르노크 대신에 지금의 페르노크가 완전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지요^^ 늦어져 죄송합니다^^ 실은 좀더 썼다가 연참을 할까 했습니다만, 그냥 꾸준한 연재로 대신하려 합니다^^ 아해의 장 카페의 회원이 벌써 60명이 넘었답니다>O< 무척 기쁘네요^^ 제가 거기서 릴레이 소설 첫 타자를 맡아 끊었답니다^^ 바로 어느분이 이어주셨는데 무척 재미있더군요^^
번  호 : 19163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0일 23:51 
등록자 : KREUZ1           조  회 : 15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0                                      
                          
[연재] 아해의 장-110 2001/06/10 17:12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14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어? 왜 거기서 나와?" "방안에 들어가 봤어." "헤에, 어때?" "별 볼일 없어." "그래?" "응. 궁금하면 가서 봐." "나중에." 왠지 불쾌해 보이는 페르노크를 보며 요크노민은 잠시 고민을 했다. 그는 페르노크가 순간의 기분에 휩싸이는 타입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주 극소수의 경우, 극적으로 휩싸여 버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페르노크가 원래 분위기가 안 좋았던 '자하사'가의 파티에 지금 기분으로 간다면 파토를 내도 단단히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티……갈거야?" "가라며? 가야지." "그럼 준비하자." "왠 준비? 점심 식사 후에 출발이라며?" "그러니까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넌 말했듯이 '따' 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트집이 잡일 테지만 잘 차려입고 잡이는 게 낫잖아?" "그, 그런거냐?" "그런거지." 요크노민은 거침없이 말한 뒤 일단 목욕 먼저하라고 페르노크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페르노크의 곁에 늘 부유하던 실이 아까부터 안보인다 싶었더니만 넬과 욕실에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이가 좋네?" 실은 갑자기 들어온 페르노크에게 활짝 웃으면서 다가갔는데 넬은 뭔가 떨떠름한 얼굴로 있다가 마찬가지로 웃으며 반겼다. 페르노크는 태연히 옷을 벗으며 말했다. "지하에서 둘과 비슷한 향을 맡았어." 둘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을 확인한 페르노크는 욕조에 들어갔다. 예의 물보라가 일어나면서 페르노크의 몸을 씻기기 시작했다. "둘과 비교했을 때 희미했지만 말야. 그리고 둘과는 향이 달랐어." 「희미했다는 것은 '서열'이 낮다는 뜻일테고.」 「향이 달랐다? 우리 계열 외에 것도 맡을 수 있다는 말이야? 」 둘이 서로를 보며 눈만 껌벅껌벅 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던지 페르노크는 피식 웃었다. 그 소리에 둘은 동시에 페르노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할 정도로 페르노크의 미소를 좋아하는 둘이었다. 덩달이 헤벌레, 해 있는 둘을 보며 다시 작게 웃은 페르노크가 말을 꺼냈다. "난 오늘부터 내일까지 집에 없어. 파티가 있다는데 얼굴 도장만 찍고 와도 그 정도는 걸린데. 사이좋게 있어." 하지만 둘은 동시에 고개를 저어댔다. "왜? 둘은 사이 좋잖아?" 페르노크가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로 자신들을 내려다 보자 실이 먼저 반응했다. 넬의 등을 마구 두들긴 것이다. 넬은 알았다는 얼굴로 손을 휘 저었는데 페르노크의 몸 주위를 배회하던 물들이 허공에 글씨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동행. "풋." 페르노크는 둘의 단순명료한 화법에 진 듯 킥킥대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알았어. 대신 큰 사이즈로 변하면 안된다." 둘은 맹렬한 기세로 고개를 끄떡이며 웃었다. 페르노크는 자신의 몸에서 땀냄새 따위가 완전히 가셔지자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섰다. 이번에는 작은 사이즈의 둘을 어깨에 올린체 였다. 그가 침실로 돌아왔을 때 요크노민은 테밀시아가 보낸 파티복을 다듬고 있었다. "왔어? 일단 옷 먼저 입어보자." "에?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잖아? 벌써 입을 필요가……." "말 많네, 입어!" 페르노크는 어련히 알아서 할까, 란 얼굴로 자신을 보는 요크노민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구." 페르노크의 은발에 맞춘 새하얀 옷이었다. 어깨라인과 소매가 푸른 비단으로 겹쳐 있었는데 옷의 재질이 뻣뻣하면서도 시원해, 보는 이와 입는 이 모두가 청량함을 느낄수 있게 만든 옷이었다. 페르노크는 특히 시원한 재질이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굵직한 사파이어로만 된 브리치를 왼쪽 가슴에 꽂았다. 그리곤 머리를 풀어내려 길게 늘여뜨렸는데 이점에선 페르노크가 불만을 표했지만 요크노민은 간단하게 무시했다. "올리면 너무 튀어." 조용히 먹고만 오자는 계획을 이미 암암리에 짜 놓은 둘에겐 튀는 것 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었기에 페르노크는 얌전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가죽으로 된 하얀 장화를 신고 하얀 장갑을 낀 후에 아까 브리치와 세트로 된 반지를 꼈다. "이제 됐냐?" 요크노민은 위아래로 보다가 작게 투덜거렸다. "너무 하애서 튄다. 자기 어필이 중요한 파티라지만……." 페르노크는 자신의 꼬라지를 살펴보면서 동의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어깨에 외출용 망토를 걸쳐준 뒤 말했다. "나가자. 연습 끝날 때쯤 연락이 왔는데 지름길인 다리가 끊겨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좀더 일찍 나오래. 점심은 가는 도중에 먹게 될거라는데?" 그러고보니 요크노민도 이미 옷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그는 페르노크의 옷 옆에 걸쳐져 있던 자신의 망토를 찾아 걸치며 앞서 걸었다. 하늘색과 남색이 적절하게 조화된 그의 옷도 상당한 고가로 보였다. 게다가 어릴적부터 상위계층과 접하며 살아온지라 자신도 모르는새에 예법이 몸에 배인 요크노민은 예법의 예자도 모르는 페르노크보다도 더욱 귀족적으로 보였다. "형이 준비해준거냐?" "응, 뮤비라형님이." "센스 좋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페르노크는 자신의 양 어깨에 자리잡은 두 애완동물에게 속삭였다. "아까 한 말 잊지마. 크게 변하면 안된다?" 둘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페르노크가 본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밀시아를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어……?" 요크노민이 갑자기 멈칫 했다. 페르노크는 의아한 눈으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니야." 요크노민의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눈동자가 묘한 이채를 발한다고 페르노크가 생각할 무렵이었다. 요크노민이 복도를 청소하고 있는 하인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랫 만 이네요!" 그 누가 보더라도 순수하게 반가워하는 어조였지만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에게 이러듯 말을 트고 지낼 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요크노민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요크노민의 인사에 몸을 돌린 하인은 굳은체 머뭇거렸다. 어제 요크노민에게 발길질을 해댔던 바로 그 하인이었다. 쭈빗거리며 간신히 인사하는 그를 힐끔 보며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페르노크는 말해보라는 얼굴로 요크노민을 보았다. 이미 분위기가 이상함을 눈치챘기에 섯불리 나서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요크노민은 눈을 묘하게 빛내며 물었다. "만일 저를 감금, 폭행한 이가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페르노크는 앞서 말한 감금까지는 몰라도 폭행에 있어서는 걸리는 점이 있었기 때문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할수 있었다. "그 자를 잡아다 네가 처분하도록 할거다." "그럼 제가 그자를 죽여도 상관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처분이 그렇다면. 헌데 그건 왜 묻지?" "아뇨, 갑자기 궁금해 져서요." 요크노민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자신을 긴장한 낯빛으로 보고 있는 하인을 한번 본 뒤 갈길을 재촉했다. 물론 진땀을 흘리는 하인을 보며 잠시 조소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한참을 걷다가 요크노민에게 말했다. "'어제'일의 연장인 것 같으니 묻지는 않겠어. 알아서 해봐." "고맙군. 그러지." 그리고 조금 앞서 걸어나와 앞에 있는 문을 열었다. 주인에게 그런 수고를 끼치는 것은 시종된 도리가 아니였던 것이다. 페르노크는 이제는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마찬가지로 우아하면서도 시원한 재질의 파티복을 차려입은 테밀시아와 뮤비라가 방안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정은 들었을 테지? 가자." "예, 형님."
번  호 : 19164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0일 23:51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1                                      
                          
[연재] 아해의 장-111 2001/06/10 17:17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11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페르노크는 전처럼 있으나 마나인 작은 창문 두 개만이 달린 마차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찜통은 아니였다. 오리혀 상쾌한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있었다. "이번에는 「윈디」를 써도 될 것 같더구나. 요새 요크노민과 체력 단련을 하고 있다지?" "예." 페르노크는 시원한점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듯 씩 웃으며 답했다. 마주한 둘의 옆으로 뮤비라와 요크노민이 앉았다. 원래 시종이라면 다른 마차나 마부석에 가서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것이 도리지만 테밀시아와 페르노크, 그 누구도 그런 것을 바라지않았기 때문에 동석을 하게 된 것이다. 마차는 열명이 타더라도 남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넷이 탔다고 해서 불편한 점은 없었다. 뮤비라는 마차 구석에 부착되어 있는 상자를 열고 그 안에서 시원한 음료를 꺼내 테밀시아와 페르노크에게 건넸다. 상자 안에는 영구마법이 걸려 있어 늘 저온을 유지한다는 걸 저번 행진으로 알고 있었던 페르노크는 이번에는 태연히 받아 들수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요크노민에게 그것을 건넸다. 요크노민은 고개를 저으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도련님께서 드시지요." 페르노크는 둘 외의 사람이 있을 때면 존대어를 쓰는 요크노민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게 편히 사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요크노민에게 한수 접을 수 밖에 없었다. 페르노크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하면서 억지로 요크노민에게 그것을 건넸다. "내가 생각이 없어서 그런다." 그리곤 양 어깨에 앉아 있다가 이번에는 무릎에 앉아 있는 실과 넬을 내려 보았다. 둘은 한쪽씩 자리를 차지하고 슬슬 잠들 태세였다. 둘이 자신의 생각을 읽을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페르노크는 속으로 말을 걸었다. '피곤하니?' 페르노크가 자신들에게 말을 걸자 기쁜 듯 둘은 고개를 번쩍들고 맹렬한 기세로 가로저었다. 하지만 눈에는 졸음이 차있었다. 페르노크는 혼잣말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둘의 자는 모습을 제대로 본 일이 없네? 무척 귀여울 것 같은데?' 둘은 활짝 웃으면서 빠르게 누었다. 굳이 어딘가에 기대거나 올라가 있을 필요는 없는 둘이지만 페르노크와 붙어 있는 것이 좋은지 왠만해선 어깨나 머리등에 자리를 잡고 앉는 둘이었다. 페르노크야 무게감도 없겠다, 귀엽겠다, 해도 없겠다 그냥 넘어가고 있었고 말이다. 페르노크는 흘러내린 망토의 끝자락에 정교하게 놓아진 수를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가 재차 거절하자 굳이 권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차 벽에 기대서 음료수를 마시던 그는 앞에 있는 뮤비라 형님이 잠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몇일 전부터 무척 고단해 보였던 터라 시종의 의무를 논하며 깨울 생각은 눈꼽 만큼도 들지 않았다. 요크노민은 티 안나게 형님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음료를 다 마시고 나서 통은 무성의하게 밖으로 던짐으로써 처리한 요크노민은 이번에는 페르노크가 자고 있음을 보게 됐다. 실상 페르노크는 잠잘때나 보통얼굴이나 다를 바가 없어서 모르는 이가 보면 그냥 눈만 감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지만 요크노민은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요크노민이 다시 페르노크에게 눈을 돌릴 때 우연히 마찬가지로 시선을 돌리던 테밀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요크노민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렸다. 테밀시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뮤비라가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요크노민은 예의고 뭐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테밀시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형님은 오직 테밀시아 도련님의 명만을 받고 일한다 알고 있습니다만." 동생인 나보다도 훨씬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둘이지 않는가? 테밀시아의 늘 차갑고 냉철했던 눈빛은 많이 누그러져 고민과 걱정, 염려라는 감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요즘은 일이 별로 없었는데 잠을 별로 자는 것 같지 않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테밀시아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한단계 앞서 준비하던 뮤비라지만 그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해서 이런식으로 자신이 피곤한 상태임이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무리를 하지는 않았었다. "전 페르노크 도련님의 처소에서 함께 하기 때문에 형님과의 왕래가 뜸했습니다." "그런가……." 잠귀 밝은 뮤비라가 바로 옆에서 말을 하고 있음에도 깨어나지 않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듯 테밀시아의 얼굴이 그리 좋지 못했다. 요크노민은 테밀시아가 뮤비라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문밖을 향하는 것을 보고 마차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조금 뒤 요크노민의 귀에 작게 옷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크노민은 그 자세 그대로 눈 만 떠서 앞을 응시했다. 테밀시아가 잠들어 있는 뮤비라의 몸위로 자신의 망토를 덮어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원래 망토의 많은 용도중에서도 귀족가에서의 망토의 쓰임은 자신과 시종의 구별에 있었다. 여행자들의 로브와는 다른 철저한 자신의 특별함을 보이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고로 시종은 망토를 허락 받지 못했다. 때문에 추운 날 마부석에 앉아 있어야 하는 시종은 쉽게 감기에 걸려버리곤 했다. 물론 지금 한여름에 「윈디」까지 써서 더위를 가시게 한 이 마당에 감기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였지만 몸이 피로한 상태에서는 선선한 것보다는 약간은 따스한 것이 좋을 듯 싶었던 것이다. 요크노민은 그 광경을 색다른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테밀시아 도련님이 뮤비라 형님을 아끼는 마음이 남다르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는 불과 이틀전 그 '광경'을 봤었던 것이다. 너무나 편하게 잠들어 있는 테밀시아 도련님과 너무나 부드럽고 슬픈 얼굴로 그를 내려다 보던 뮤비라 형님을. 요크노민은 다시 눈을 조용히 감음으로써 둘의 '무언가'를 넘겨 주었다. '뮤비라 형님은……아주 슬픈 것만은 아닐지도.' 요크노민은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자는가?" 혹시 자고 있을 경우를 배려해서 깨어 있는 사람만이 간신히 알아 들을 크기로 말하는 테밀시아의 세밀한 점에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요크노민은 슬며시 눈을 떴다. 테밀시아는 조용히 물었다. "요즘 페르노크는 어떤가?" 요크노민은 '요즘'의 페르노크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의 페르노크'는 말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아주 아끼고만 있지도 않고 적당히 참을 줄도 적당히 화낼 줄도 알고 자신을 숨기려 들지 않고 당당하고……. "좋으십니다." 테밀시아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요크노민도 아까처럼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또다시 작게 천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번에는 눈을 뜨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마차가 멈추었을 때는 마차 안의 네 사람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가장 예민한 테밀시아가 조용히 눈을 떴다. 묘한 살기가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척 피곤해 보이던 뮤비라는 자연스럽게 허리에 매단 검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눈을 떴다. 마부의 곤혹스런 음성이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 마차를 타신 분이 누군줄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마침 지금 다들 주무시고 계시는 듯 하니 괜히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다른 마차를 노리십시오." 마부답지 않은 차분함이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테밀시아와 뮤비라는 굳이 파티복에 피를 묻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로를 방해하고 있는 이가 조용히 꺼져준다면 크게 인심을 써 그냥 보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나……랄까? "시끄러! 너야말로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이곳을 지나갈때면 우리에게 통성례와 약간의 인사를 하는 것이 법도란 말이다!" 테밀시아는 실력발휘를 잠깐해서 내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문을 나서려는 찰나 갑자기 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테밀시아와 뮤비라의 귀에 익숙한 마부의 미명은 아니였기에 여유있게 문을 열고 나가볼수 있었다. 밖에서는 놀라운 광경이 둘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덩치가 산같은 근육질의 남자와 그를 주시한 다섯명정도의 가죽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바람에 의해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순간에 숲 저너머로 날라가 버렸는데 둘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척 화가 난 얼굴의 작은 녹색 생명체가 허공을 휘젓음과 동시에 벌려진 일이었다. 「페르 깨면 어쩌려고, 시끄러운 호비트.」 그리곤 손을 탁탁 떨면서 마차안으로 유유하게 날라와 자고 있는 페르노크의 무릎에 앉아 그의 얼굴을 다시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 옆에는 누워있는 포즈 그대로의 넬이 마찬가지로 페르노크를 올려보고 있었다. 테밀시아는 앞 뒤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한 뒤 뮤비라를 보며 말했다. "암살자는 아닌 모양이군." "그정도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아니긴 합니다만. ……대체 무슨 현상인거죠?" 테밀시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듯 마부는 알아서 말을 재촉했다. 뮤비라는 자신의 몸에 걸쳐져 있는 망토를 잘 접어 테밀시아에게 건넸지만 테밀시아는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 버렸다. 뮤비라는 좀 당황하는 눈치더니 이내 웃으며 자신의 몸에 그것을 둘르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자신을 걱정스레 살펴보는 테밀시아의 시선을 만낏하면서.
번  호 : 19171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1일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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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2                                      
                          
[연재] 아해의 장-112 2001/06/10 17:21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 '오르세만'가의 테밀시아, 페르노크 도련님 입장하십니다." 주위가 술렁이며 막 열린 문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속을 알 수 없는 냉정한 남자 테밀시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교계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법 전성시대라, 일컬어지는 현재에서도 '천재'라 불리는 페르노크는 모습은 별로 들어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유명세가 있었다. 비록 그것이 조소를 겸비한 관심이라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페르노크는 뜸금없이 휴학을 하고 창창대로였던 학교를 나와 한달동안이나 집에 틀어 박혀 있어 몇몇 '오르세만'을 경계하는 이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페르노크는 예의 무뚝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요크노민을 한번 돌아 보았다. 요크노민은 턱질로 남모르게 음식이 있는 구석을 가르켰다. 눈치봐서 그곳으로 가자는 뜻이었다. 페르노크는 흥쾌히 고개를 끄떡이며 테밀시아를 한보 뒤에서 뒤따라 갔다. 테밀시아는 단숨에 인간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에 잠겨 버렸는데 페르노크는 요령좋게 슬슬 빠져 나와 아까 요크노민이 가르쳐준 곳으로 걸어갔다. 물론 양어깨에 실과 넬을 대동한 채였다. 요크노님은 벽에 붙어 주인의 호출을 기다리는 다른 시종들과 함께 있었다. 뮤비라는 시종이 아닌 보좌였기 때문에 테밀시아의 곁에서 간혹 자신에게 말을 건네오는 이들을 응수해주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가 부르기 전에 알아서 구석을 돌아 음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둘은 거의 동시에 테이블에 도달했는데 서로를 보는 순간 작게 속삭이며 대화를 나눴다. "생각보다 주목을 많이 받는데, 페르?" "그치? 몰래 보고 있는 시선이라니. 이건 변태라고, 변태." "좀더 있다가 몸을 뺐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다시 좀 돌아다닐까?" "넌 사교계에 안면이 없다구, 테밀시아 도련님 옆에서 있지 않는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 질 걸? 그냥 여기 있는 게 좋겠다. 먹는 거 가지고 뭐라고 시비 걸 녀석은 없겠지, 뭐." "하긴,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 는데." "뭐?" "먹을 때는 짐승도 안 건드린다는 뜻이야." 둘은 접시에 자신의 취양껏, 소신껏 음식을 담아 테라스로 빠지기로 작당을 했다. 단것에 전적으로 질린 둘이었기에 주로 육류나 과일, 채소 등을 담았다. 그리고 슬금슬금 테라스로 걸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따라붙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을 느낀 페르노크의 미간이 요크뇌민만이 겨우 알아볼 정도로 작게 찌푸려 졌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한 상태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우호적인 인물이길 빌었다. 다행이 별 일은 아니였다. "이런……점심을 거르시더니 많이 출출하신 모양이네요." 뮤비라였던 것이다. 갑자기 빠진 페르노크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묘한 시선으로 대하는 귀족들이 싫었던 것이다. 주군, 테밀시아의 주변에 몰려드는 혼잡한 인파틈으로 그의 몸을 만지작 거리는 이상한 놈팽이마저 있었으니 말 다한 것이라 할수 있었다. 일전에는 테밀시아가 고위 간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술자리로 이어졌었는데 그때, 그 간부의 아들놈이 뮤비라를 희롱한 일이 있었다. 주군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참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 뮤비라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손속을 매섭게 하여 그놈을 기절시켰었다.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술자리를 빌어 장래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이 분명한 테밀시아와 아들을 대면시켜 안면이라도 터보자는 순수한 아버지의 배려로 온 철부지 귀족녀석이 술기운이 돌자 개같은 성질을 참아내지 못한 것이라 할수 있다. 최고위 간부들에게서 크게 인정을 받는 뮤비라는 의외로 중하위 귀족들에게서는 '충견'이나 '걸레'등으로 불리며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 뮤비라의 곱상한 외모와 천출을 믿고 깝죽대다가 죽기 직전까지만 구타를 당한 이도 드물지 않았다. 뮤비라는 결코 그런 것을 참아 넘기는 타입이 아니였던 것이다. 또한 어디까지나 '정당방위'기 때문에 특별히 해가 되지도 않는데 참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뮤비라였다. 그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 말로만 접하고 봤어도 멀찍이서 얼굴만 봤던 '오르세만'가의 라, 테밀시아를 가까이서 접한 감격과 긴장 탓인지 쭈빗하게 있던 그였다. 헌데 술이 적당히 들어가자 갑자기 테밀시아의 옆에 서있던 뮤비라의 손을 거칠게 잡아당겨 자신 쪽으로 끌어드였던 것이다. 뮤비라는 살풋 웃으며 "여기서 멈춘다면 실수로 넘어가 주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그녀석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테밀시아의 눈이 매서워지고 있음을 느낀 것은 고위간부뿐인지 아들녀석은 아버지의 만류에도 뮤비라의 허리에 손을 감고 킥킥대며 천박한 놀림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도 아니고, 순결한 처녀처럼 굴지 마시지? 큭큭." 실상 그녀석은 뮤비라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고 자신에게 넘어온 것이라는 허황 된 공상을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좀더 아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뮤비라의 그 미소가 폭풍의 전야마냥 공포스럽기만 했다. 그 또한 최고위 간부를 꿈꾸는 고위 간부였던 것이다. 나름대로 뮤비라를 인정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정해 놓았던 그는 뮤비라에 대한 것을 알아볼때마다 극에 극인 평판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해야 했다. 최고위 간부들은 껄껄대며 그에게 말해주었다. "밑의 버러지 말들엔 신경쓰지 말게나. 분명한 것은 자네가 절대 적으로 돌리지 말아야 할 사람 중에 뮤비라군이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지. 뮤비라군은 절대 화를 내지 않는 '바보'라고 소문이 나있네만 실상은 달라. 내색이 없을 뿐이지 알고보면 테밀시아 경보다도 잔혹해지는 남자일세. 내, 뮤비라군을 짧지만은 않은 시간동안 보았네만 특히나 주위해야 할 때는 바로 저런 웃음을 지을때지." 그들이 이야기 하는 테라스 밑에는 너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체 서류를 뒤젓이며 걸어오고 있는 뮤비라가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생긴 모양이구만." 최고위 간부는 허허대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 버렸고 이미 볼일이 끝났었던 고위 간부도 인사를 하고 나왔었다. 전해 듣기론 그때 뮤비라는 자신의 주군, 테밀시아가 일으킨 일들의 뒷수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좀 과격한 해결방법을 썼던 테밀시아에게 정부가 준 벌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따지러 왔었다고도 했다. 일년동안 국경수비대장을 맡을 뻔했던 테밀시아의 처분이 한달간 근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은바 있었던 고위 간부는 아들의 꾸중하며 그 무례를 대신 사과했다. 그때 뮤비라가 짓고 있었던 미소와 지금 그가 짓고 있는 그것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타는 아비의 심정을 모른 체 아들은 뮤비라를 놓을 생각을 하지 않으며 더 농도 깊은 이야기를 서슴없이 내뱉기만 했다. 뮤비라는 예의 미소를 지으며 한손을 들어 애송이의 빰을 조금 쓰다듬었다. "거치군요." 그리고 나머지 한손으로 녀석의 복부를 쳤다. 호흡을 순간 멈추며 앞으로 고꾸라진 애송이의 뒷목을 발로 지긋이 밟으며 뮤비라는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가장 혐오스럽답니다." 그리곤 밑에 밟혀 있는 이가 벌레라도 되듯 몇번 더 꽉꽉 밟다가 놓아주었는데 이미 녀석은 기절해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테밀시아는 싸늘한 눈초리로 간부를 향하다 앞에 놓여진 술을 들고 한 마디 했다. "좋은 아들을 두셨군요." 고위 간부는 아직 철없는 아들을 너무나 서둘러 대면시킨 것 같다고 몇번이고 사과를 했었다고 했다. 그 이후 고위 간부는 상납 받았던 값진 보석 중에서도 진상인 것을 테밀시아에게 몇 번이고 선물했다고 한다. 요크노민에게 그말을 들은 바 있었던 페르노크는 굳이 뮤비라가 따라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 "뮤비라 형님도 배가 고프셨던 모양입니다." 요크노민은 웃음기를 내비치며 말했고 뮤비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기도 하구나. 나도 뭐 좀……." "뮤.비.라." 뮤비라는 상당히 불만스런 오오라를 내뿜는 테밀시아를 돌아보며 말을 정정했다. "음……아직 할 일이 남은 듯 하구나. 맛있게 먹거라. 도련님께서도 ……." 그리곤 웃으며 테밀시아의 곁으로 걸어갔다. "재미있는 커플이라니까." 페르노크의 중얼거림에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찔려옴을 느끼는 요크노민이었다. 둘은 테라스로 가 이것저것 먹어대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너말야, 다른 세계에서 왔다면서 마법은 어떻게 하냐? 그쪽에는 마법같은 건 없다며?" 페르노크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요크노민을 보았다. "그거 그냥 주문만 알면 되는 건 줄 알았다, 난? 근데 책을 보니까 아니더라? 회복마법도 상당히 어려운 거라고 하더라고? 포즈도 꼭 잡고 해야하는 거라고 하고." 요크노민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있다가 말했다. "너 그 말 어디서 하지 말아라. 몰매 맞는다." 페르노크는 한숨같은 웃음을 짓다가 말했다. "하지만 어쩌겠냐. 진짜인걸. 그리고 보이는 걸……." "보여? 뭐가?" "아아." 페르노크는 자신의 앞에서 '존재'하고 있는 마나를 가르키며 말했다. "저 친구가." 요크노민은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리 저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러다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페르노크는 테라스에 놓아진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물었다. "왜 그래?" 요크노민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너 말야……." "이~런~,이~런~." 둘은 동시에 문을 열고 나타난 한 인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요크노민의 말에 정신을 기울이고 있던 터라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 페르노크는 눈가만 조금 찌푸릴 뿐 아무 내색도 없었다. 페르노크의 앞에 함께 앉아 있었던 요크노민은 황급히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귀족이었던 것이다. "어디 있었나하고 찾아 다녔잖아, 페르." 생긋 웃는 그는 가느다란 금발이 어울리는 미안의 소년이었다. 딱 페르노크 또래로 보이는.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의 경고성 충고를 잊지 않았기에 더불어 반가워하지는 않았다. 앤 또 뭐야? 하는 얼굴로 요크노민을 잠시 보았을 뿐. 하지만 이미 대답은 나와 있었다. 요크노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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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3                                      
                          
[연재] 아해의 장-113 2001/06/10 17:24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96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페르노크는 잠시 요크노민의 변모를 보다가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말할까 하다가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기에 가만히 있었다. 알아서 그가 지껄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적 '죽마고우'를 이렇게 박대하기냐? 네가 왔다기에 나는 굳.이.굳.이. 찾아왔는데 말이야. 저번 파티때 보여준 춤 솜씨도 다시 구경해 볼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고. 어때? 이번에도 멋지게 한판 벌여 주겠지?" 페르노크가 알기로 '페르노크'는 댄스는 절.대.무.적.잼.병.이라고 했다. 오죽하면 지도교사와 아버지, 심지어는 테밀시아 형님마저 포기했다고 할까? 페르노크는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소년을 보다가 불쾌감이 치솟는 것을 느끼고 접시를 들고 그를 지나쳐 파티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요크노민도 그 뒤를 따랐다. 소년은 페르노크가 겁에 질려 도망가는 거라 생각했는지 상당히 음침하게 웃어댔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완벽한' 강자로 보이는 줄 아는 모양이다. 페르노크는 접시를 서빙하는 하인에게 넘겨주고 음료쪽으로 걸어갔다. 요크노민은 그 뒤를 따르면서 작게 속삭였다. "이제 슬슬 시작인 모양인데? 너 적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여기 있어야 하잖아. 괜찮겠어?" "물론. 기분은 더럽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야." 페르노크는 앞의 테이블에서 푸른색 음료가 담긴 컵을 두 개 집어 들어 요크노민에게 건넸다. "시종은 주인 앞에서 식음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란다, 페르야." 하면서도 목이 칼칼했기에 받아 들는 요크노민이었다. 식음이 불가한 것은 순전히 그 시종의 주인의 심술 때문이지 정해진 법은 아니였다. 그러므로 주인이 권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다. 아니 오리혀 주인이 하사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건방지다는 면목 하에 상당한 구타와 구박이 이어지는 것이다.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이 벽에 붙어서 음료를 마시며 춤을 추는 이들을 구경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게 누군가? 저 고귀하신 '오르세만'가의 마, 페르노크가 아닌가? 시종이나 쳐박혀 있는 벽엔 왠 일로 와 있는 건가? 자신의 신분을 망각했나?" 페르노크는 붉은 머리에 탁한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수많은 주근깨가 인상적인 소년을 쳐다보다가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평소 자신의 주근깨로 덮여진 얼굴에 자격지심이 상당했던지 소년은 당장에 이렇게 쏘아 붙였다. "뭐야? 내 얼굴이 보기조차 역겹다는 거냐?" 그리고는 거칠게 페르노크의 멱살을 쥐어 올렸다. 페르노크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런 그를 내려다 보다가 가볍게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시끄러운 녀석이네." 비명을 지르는 소년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이런 말을 내밷은 페르노크는 뿌리치듯 그를 놔주었다. 소년은 벌겄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지다가 눈물이 조금 고인 눈동자를 치켜 뜨며 페르노크를 노려보았다. 페르노크는 태연히 무시하며 요크노민에게 정원이나 걷자고 말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더 소산스러워 지기 전에 자리를 피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소년의 비명으로 주위의 관심을 사버린 페르노크는 거북한 시선과 짜증나는 수근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테밀시아와 뮤비라는 가주를 만나러 갔는지 파티장에는 없었고 때문에 페르노크의 얼굴을 모르는 적지 않은 수의 귀족들은 그의 신상을 아는 이들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페르노크는 차가운 표정 그대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과 눈을 마주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페르노크는 뒤에서 시끄럽게 꽥꽥되는 소년을 돌아보며 한마디 해주었다. "교양이 없군." 소년은 단번에 얼굴을 붉히며 뭔가 말을 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가 더 망신을 당하기 전에 누군가가 그를 막아서며 대신 말을 해 주었다. 아까 그 금발의 소년이었다. "그쪽이야말로 천한 하인들과 어울리더니 교양이란 걸 잊은 모양이야?" 페르노크는 피식 웃으며 요크노민을 돌아보았다. 요크노민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얼굴로 공손한 '척' 하고 있었다. 금발의 소년은 정색하며 말했다. "게다가 원래 '친구'였던 알렉에게 큰 실례를 저지르고 말이지. 역시 「카르민」의 오명이란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 같아. 이번에 그 대단하시다는 테밀시아님도 함께 온 모양인데……어때? 이쯤에서 무릎 꿇고 사과한다면 굳이 알리진 않겠어." '페르노크'가 극적으로 테밀시아 형님을 두려워 했다는 것을 요크노민에게 전해 들은 바 있었던 페르노크는 앞의 소년이 '페르노크'를 조금은 아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과는 별 상관 없었지만 말이다. 페르노크가 반응 없이 차갑게 자신을 보고만 있자 금발의 소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테밀시아란 이름에 경기를 일으키는 페르노크였 던 것이다. 페르노크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수가 있었다. 「카르민」이자 '희대의 천재'인 그를 대놓고 시비를 건다는 것은 다소 무리일지라도 그의 근처 인물을 건들이는 것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심하기 짝이 없는 '페르노크'는 뭐라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금발의 소년은 요크노민의 앞에가 그의 빰을 내리쳤다. 요크노민은 멀뚱이 곧 다가올 그 소년의 최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피하지 못했다. "어찌 상전을 이리 모셨단 말이냐? 이런 천박한 이들이나 벌레처럼 붙어 있는 벽따위에! 네가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구나. 내가 단단히 교육시켜 주겠다." 아주 잘못된 말은 아니였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뻔히 시비인줄 알면서도 묵인해 주었다. 이미 향락을 다 부려본 그들에겐 남의 괴로움을 지켜보는 것을 즐거움의 일부분으로 삼은 지 오래였던 것이다. 요크노민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을 뿐 사과의 말이나 용서의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페르노크는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요크노민의 빰을 보면서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 없는 '진짜' 기사들이나 전사들이 본다면 페르노크의 눈이 적을 베기전의 전사의 눈이라는 것을 알아 볼수 있었을 것이다. 요크노민은 그까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페르노크를 알기 때문에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었다. 금발의 소년은 페르노크를 보면서 양해를 구해왔다. "내가 대신 교육시켜 주겠네, 페르. 친구끼리 이정도야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페르노크는 아무말도 없었다. 어떻게 요리해 줄까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금발의 소년은 더욱 매서운 손길로 요크노민의 빰을 후갈리려 했다. 만일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얌전히 맞아 심상이었다. "천박하기는 형제가 똑같구나! 너도 네 형처럼 몸을 팔아 이 자리에 왔느냐? 그러려면 좀더 교양과 요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요크노민의 손이 소년의 손을 막아냈을 때, 그리고 요크노민의 눈이 아주 매서워 졌을 때였다. -짝!- 페르노크의 손이 가차없이 금발의 소년의 빰을 강타했다. 그나마 자리를 봐서 좀 봐주었던 터라 붓는 것으로 끝났다. 금발의 소년은 감히 자신의 손을 막은 시종과 감히 자신에게 손을 댄 「카르민」 중에서 누구에게 먼저 화를 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시종에게 이를 들어 내기로 했다. "천박한 시종주제에 감히 내 손을 막았다?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게구나!! 그리고 페르……." 하지만 소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페르노크가 잘랐기 때문이다. "내 친구에게 손 대지 말아라." "친구……?" 금발의 소년은 키득키득 웃다가 결국 폭소해 버렸다. "이런……하는 행동이 천박해 졌다 싶었더니만……노는 물이 더러워 진게로군?" 그리고는 요크노민의 팔을 뿌리치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가 잡았던 자신의 손목을 닦아 냈다. "똑같이 질이 낮아졌어. 이래서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한다고 하는 거야, 페르."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의 앞에 서서 그와 소년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태연히 말했다. "그래서 너와 안 사귀는 거다." 소년은 뜻밖의 반론에 눈을 크게 떴고 주위에서는 웃음을 참는 소리가 요란했다. 소년의 얼굴이 우락부락 해지더니만 곧 크게 쏘아붙였다. "쳇! 그래서 남창의 동생과 사귀는 거냐? 형제는 닮는 법이고 친구는 똑같아 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내가 널 남창 시종 취급해도 할말이 없겠다?" 페르노크는 차가운 얼굴 그대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입을 열려는 순간 요크노민이 어조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친구는 동격이라는 말씀이군요." 금발의 소년은 크게 웃으며 바로 그거라고 했고 요크노민은 수긍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군요." 금발의 소년은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페르, 네가 벌레만이 붙는 저 벽에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가는……." -퍽!- 손바닥이 아닌 주먹으로 페르노크가 쳤던 바로 그 부위에 강한 타격을 집어 넣은 요크노민은 조금 지끈거리는 자신의 주먹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감히 시종 따위가 귀족에게 손을 댄 장면에서 구경거리를 넘어선 분노를 느끼며 주위에서 뭐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금발의 소년은 자신의 입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얼굴을 굳이며 요크노민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서 주먹을 꼭 쥐려는 그에게 요크노민이 말했다. "페르와 내가 '동격' 이라며? 감히 「카르민」에게 손을 댄 죄를 이 정도에서 봐준다는데 어디다 눈을 치켜 뜨는 거냐!" =================================================================== 요크노민은 불과 일주일새에 많이 변했습니다. 혹은 천성이 그런 것일수도......ㅡ.ㅡ;;;;
번  호 : 19173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1일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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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4                                      
                          
[연재] 아해의 장-114 2001/06/10 17:28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21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페르노크는 쿡쿡 대며 고개를 돌렸고 금발의 소년은 자신이 한말에 자신이 당한 꼴이라 망연자실해 있었다. 주위에서도 결국엔 웃음을 터뜨렸다. 허나 그 중에서 얼굴을 굳이며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소년의 아버니였다. "네녀석! 감히 시종주제에 누구에게 손찌검을 하는 거냐!! 당장 이놈을 끌고가 저 손목을 잘라버려라." 소년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아프다고 칭얼댔는데 가히 볼게 못되었다. 페르노크는 웃음기가 담긴 눈으로 소년의 아버지를 보았다. "제 친구의 손목을 잘라내겠다 하셨습니까?" 소년의 아버지는 비록 「카르민」에는 못 미치나 나름대로의 세와 지위가 있는 귀족이었다. "자네도 저런 천출과 상종하며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페르노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으며 은연중에 살기를 퍼뜨리자 그는 멈칫하며 믿기지 않는 다는 얼굴로 페르노크를 보았다. 페르노크는 천천히 다시 물었다. "제.친.구.의.손.목.을.잘.라.내.겠.다.하.셨.습.니.까.?" 그리고는 아버지의 옆에서 계속 칭얼거리는 금발의 소년쪽으로 걸어가더니 단숨에 발길질을 했다. 복부를 맞은 소년이 비명도 못지르고 하얗게 질리는 모습을 본 페르노크는 다시 물었다. "그.럼.제.발.목.도.잘.르.실.생.각.입.니.까.?" "자,자네……? 하, 하지만 자네와 저 천한 시종과는 격이 다른……!" "노민은 제 친구입니다. 친구는 동격이지요." 소년의 아버지가 쭈빗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페르노크는 말했다. "이렇게 하지요. 노민과 아드님이 결투를 하는 겁니다. 귀족끼리는 그렇게 분쟁을 해결한다고 하더군요? 어떻습니까? 노민과 제 손발을 자르시겠습니까? 아니면 평생 검 잡아 본 시간이 한달도 되지 않는 노민과 어릴적부터 검술 훈련을 받아온 아드님과의 결투를 통해 해결하시겠습니까?" 소년의 아버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소년이 냉큼 답해버렸다. "좋아! 결투하자!! 내가 이기면 너와 저녀석의 손발을 자르는 거다!" "노민이 이기면?" "내가 무릎 꾾고 사과하지!" "로, 로디야" "아버지 괜찮아요! 제가 질 것 같습니까?" 로디의 아버지는 왜소하기 그지 없는 요크노민과 검술선생이 칭찬하는 검술 솜씨를 가진 자신의 아들과 서슬이 퍼런 「카르민」의 둘째 자제를 보고 나서 내키지 않는 허락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페르노크가 제지했다. "그 따위 조건으로는 대결을 허락할 수 없어." "뭐?" 로디와 그의 아버지 뿐만아니라 요크노미 조차도 놀라서 페르노크를 보았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귀족으로써 가장 수치스런 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뭘보냐는 얼굴로 그들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무릎 꿇건 말건 나한테 돌아오는 건 없어. 하지만 넌 나와 노민의 발과 다리를 얻지. 불공평하잖아?" "그, 그래서 지금 나보고도 지면 발다리를 자르라는 거냐?" "그까짓 것도 필요 없어. 먹지도 못하는 건데." "그럼 어쩌라는 거야!?" "간단해. 네가 노민의 '시종'이 되는거야." "뭐?" 주위에서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크노민도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는 눈길을 보냈지만 페르노크는 아주 담담히 이런 말만을 다시 내뱉았을 뿐이었다. "왜? 자신이 없는 모양이지?" "흥! 내일 오전 11시에 연무장에서 보자!" "그러지." 로딘은 만류하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좋다고 했다. 페르노크는 씩 웃으면서 격려차 요크노민의 어깨를 두들겼다. 요크노민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난 저런 시종 필요 없다고." "왜? 재미있잖아? 돈도 많겠다. 지위도 제법 되겠다. ……시종의 것은 주인의 것 이라지? 잘 됐네!" 뒤에서 부들부들 떨며 로딘이 몸을 돌려 휑, 가버렸고 그의 아버지 또한 머뭇 거림 아들의 뒤를 따랐다. "형님께 가자." 페르노크는 아무렇지 않게 요크노민을 이끌었다. "너 혼나지 않겠어?" 이젠 그냥 말을 놓는 요크노민을 주위에서 경악에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왜?" "괜히 일 벌렸다고." "괜찮아. 자기가 벌린 일을 책임 질 수 있다면 그 누구도 꾸중할 자격따윈 없어." "그럴까……." 테밀시아는 느닷없이 적당한 검을 구해달라고 하는 동생을 알수 없다는 눈으로 보면서 사연을 물었다. 페르노크는 아주 간단하게 답해주었다. "노민이 쓸거에요." "노민?" 테밀시아의 예리한 눈이 가냘픈 요크노민에게 가서 꽃였다. 요크노민은 고개를 정중히 숙여 보였을 뿐이었다. 뮤비라가 의아하게 물었다. "노민이 검을?" "네. 결투해야 하거든요." "결투?!" 이번에는 두사라이 동시에 물었다. "내가 알기론 결투는 귀족가에서……그것도 기사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게서만이 이루어지는……?" "제가 아는 바와 같군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 싸움이지요." "누군가 요크노민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거냐? 아니면 요크노민이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거냐? 아마도 전자의 경우 겠구나. 시종이 명예를 훼손하면 당장에 혀를 잘랐으면 잘랐지 결투를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형님의 짐작이 맞아요. 어떤 녀석이 요크노민의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테밀시아는 뭔가 더 물으려다 고개를 저으며 뮤비라에게 지시했다. "뮤비라가 같이가서 좋은 검을 찾아다 줘." "예." 동생의 일인지라 어차피 테밀시아가 명하지 않았어도 자진해서 따라 갔을 뮤비라였다. 테밀시아는 파티까지 와서 쌓인 서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일어나 말했다. "아니. 나도 같이 가지." "이검은 어떻습니까? 저 소년이 쓰기에 무게도 적당하고 길이도 적당하고……." "다른 걸 보겠어요." 애들 결투라고 해서 진검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요크노민의 수중에는 목검밖에 없었다. 그나마 집에 두고 온 실정이었기 때문에 페르노크는 이왕 이렇게 됐으니 집에서 진검 훈련을 할 때도 쓸수 있는 좋은 것을 사자고 했다. 그래서 아주 꼼꼼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페르노크가 알기론 요크노민의 힘은 체격을 보면 절대 믿겨지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페르노크는 그를 한마디로 '악력'이라고 칭했는데 요크노민은 체구에 걸맞지 않은 체력 또한 가지고 있어 검을 배우기에 참으로 적절한 타입이었다. 비록 잘 못먹어서 체구는 작지만 그 와중에서도 모진 일을 해치웠기 때문에 힘도 체력도 상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크노민의 그런 점을 모르는 상인이나 뮤비라, 테밀시아는 자꾸 가볍고 짧은 검을 찾아 들었던 것이다.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을 데리고 좀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길이가 80cm는 되보이는 검을 찾아 들었다. 푸르스름한 날이 무척 예리해 보였다. "네 시종이 될 녀석이니까 몸에는 장애를 만들면 안되겠지?" 하면서도 그검을 자꾸만 어루만지던 페르노크는 한번 들어보라고 했다. 검의 무게는 2kg이 안되는 터라 요크노민에게는 전혀 부담감이 없었다. 이제 양 팔과 발에 30kg씩 무게를 달고 다니는 페르노크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주일을 주기로 10kg 씩 늘려왔던 것이다. "브로드 소드 아니냐?" "브로드 소드요?" "양날검을 말하는 거란다. 여기 손잡이가 독특하게 주먹을 감싸는 형식으로 있지? 이 검은 주먹도 적절하게 써먹는 검이기 때문에 주먹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되어 있는 거란다. 기마전에서도 보병전에도 쓰이는 검이지." "흠……이걸로 하자!" 테밀시아는 셈을 치루고 나와서 말했다. "장인의 집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니? 돈걱정은 할 필요 없으니까." "아뇨. 이걸로 충분해요." 싸구려는 아니지만 보통 검 이상은 안돼는 지라 험한 용병들이 쓴다면 일년이나 이년안에 바꿔고나 다시 대장간에 맞겨야 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굳이 그 검을 고르며 숙소로 돌아가길 재촉했다. 숙소라고 해봐야 그 파티 주체 가문이 마련해준 방이었지만 말이다. 테밀시아는 그 곳에서 내주는 저녁은 별로 먹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도시 최고급 식당으로 가길 바랬다. 그건 다들 마찬가지라 이견은 없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도중에 페르노크는 거친 흠집투성인 갑옷을 엉기성기 차려 입고 싸구려 검을 찬 남자 무리를 볼수 있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시선을 따라 그들을 보다가 설명해 주었다. "용병이야. 왜? 친밀감이라도 드냐?" "아아." 페르노크는 쾌할하게 웃고 있는 그들에게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다가 기어이 누군가와 부딪였다. "아, 죄송합니다." 페르노크는 얼른 사과하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곱디 고운 백금 머리카락의 남자가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부드러운 보라색 눈동자가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음유시인의 목소리가 그럴까? 페르노크 일행이 지나가고 나서도 그들을 쳐다고도 있는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푸른 옷을 입고 검푸른 망토를 걸친 짧고 약간 삐친 검고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반바지차림에 샌들이라 여자로도 보일 수 있었지만 그의 철저히 무표정한 얼굴고 정중하고 무게감 있는 행동거지가 남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하고 있었다. 수중에 검은 없었지만 위협감이 충분히 드는 남자였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찾아다녔잖아, 리안." "……아니……아무것도……." ========================================================================== 새로운 캐릭인가? 그냥 지나가는 조금 폼잡는 엑스트라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
번  호 : 19286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6일 09:34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7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5                                      
                          
[연재] 아해의 장-115 2001/06/14 02:26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35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많은 귀족들과 무의미한 인사를 나누던 테밀시아는 곁에 있던 뮤비라의 부재를 느꼈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훵해지는 느낌에 테밀시아는 얼른 주위를 살폈다. 많은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남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짙푸른 바다의 색……. 테밀시아는 오랫동안 귀족들에게 시달리면서 터득한 노하우를 이용하여 쥐도새도 모르게 빠져 나왔다. 빠져 나오느라 정신이 팔린 새에 뮤비라의 모습을 놓쳐버린 테밀시아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그런 그에게 조용히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수줍은 음성. 아니 수줍음을 가장한 음성이 테밀시아의 속을 한바탕 뒤집기에 충분했다. "마린나사 영애. 오랜만입니다." 자연히 손을 내미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가볍게 맞추면서 테밀시아는 그 냉혹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마린나사의 붉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보면 조금이나마 따스해 지는 이 남자를 아껴주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의지가 솟아나는 순간이었다. 마린나사는 살풋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저희 아버지가 억지를 부렸다지요? 죄송해요. 요양중이라는 동생 분까지 오시라고 해서요." "아닙니다." 테밀시아는 짜증스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시늉을 해야 했다. 마린나사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이 아름다운 금안의 청년에게 흠취해 버렸다. 그의 짜증나는 눈빛이 이미 홀려버린 그녀의 눈에 동생을 걱정하는 자상한 형의 모습으로 비쳤다고 해서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저 테밀시아의 매력이 강했고 마린나사의 미적집착이 강했다고 할 수밖에. 마린나사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의아하게 물었다. "항상 곁에 있으시던 분이 안 보이는 군요?" 많이 마주쳤던 뮤비라의 이름조차 외우지 못하는 그녀를 테밀시아는 가증스럽다는 듯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 눈길이 함부로 자리를 비운 부관을 향한 짜증으로 비췄을 뿐이었다. 테밀시아는 자신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여자들을 은글슬쩍 보며 우월감에 찬 미소를 지으는 여자를 목전에 두는 것이 짜증이 났다. 또한 이럴때면 자신을 감싸주고 커버해주던 뮤비라의 부재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들어 낸다면 정치인으로써 탈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에 보내주신 편지, 잘 읽었습니다." 그 단순한 말에도 마린나사는 쉽게 감격했다. 사실 그 글을 쓰기 위해 보지 않던 시집을 몇권을 읽었는지 모른다. 마린나사는 테밀시아가 그 글에 대한 여타 말이 없었지만 알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갔다. 테밀시아는 차라리 여자를 동정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 듯 들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이 짜증스럽지만은 않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천성이 냉혹한 테밀시아는 극소수의 마음을 연 상대만이 아니라면 동정은 고사하고 미움이라 할 지라도 한 줌도 주지 않았다. 지금 테밀시아가 마린나사에게 가지고 있는 것을 단 한마디로 말하자면 '무관심'이었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나는 걸지도 모른다. 관심이 없음에도 자꾸 마주쳐야 하고 관심이 없는 상대로 인해 자꾸 피해를 입어야 하는 상황이 말이다. 차라리 동정을 하던가 미워라도 했다면 이토록 짜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테밀시아는 생각해 봤다. 그러는 동안에도 테밀시아를 향해 마린나사는 끊임없이 수줍게 이것저것 말을 늘여 놓았으나 당연히 다른 생각을 했기에 그는 반응이 없었다. 마린나사는 그것조차 냉혹한척 상처 많은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테밀시가는 다시 짜증을 감추기 위한 행동, 머리를 쓸어 올림으로써 주의를 돌리려 했다. 일단 결혼하기 전에는 잘해야 한다. 아직은 그녀의 호감이 필요할 때이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의 눈에 익숙한 바다의 머리결의 보이자 그동안의 결심은 별소용이 없었다. "제 동생이 안보이는 군요. 찾아 봐야 겠습니다. 몸도 안 좋은 애가……." 마린나사는 상냥한 면모가 보이는 테밀시아에게 다시 한번 반하면서 순순히 자리를 뜨는 실례를 허락해 주었다. 테밀시아는 동생보다도 그 바다의 색에 취해 성큼성큼 그쪽으로 갔다. 뮤비라와 만나면 그다음엔 동생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헌데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뮤비라는 페르노크와 그의 동생과 함께 있었다. 저 동생을 끔찍히 아끼는 뮤비라는 동생이 말을 걸고 간혹 웃어보인다는 사실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기억상실에 걸렸던 그인데 왜 그렇게 혈육에 애착을 갖는지 알수가 없었다. 진짜 가까운 아버지는 그토록 싫어하면서……. 동생이 함께 밥먹길 청하자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응하는 모습이 왠지 싫었다. 소란틈에 나타나는 삼류쓰레기를 피해 구석으로 간 것 까지는 이해도 갔고 용납도 했다. 하지만 함께 식사까지 하려는 거면 얼마나 자신의 곁을 떠나 있으려 했다는 건가? "뮤.비.라." 자신의 죄를 알기는 아는지 땀을 삐질 흘리면서 동생에게 사양의 말을 황급히 내뱉고 돌아오는 그를 보면서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어 버렸다. 그토록 그가 원하던 시간이 아니였던가? 동생과의 시간은……. 테밀시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헌데 뮤비라가 그 말을 들은 모양이다. '진짜' 기분 좋을 때의 미소를 환하게 지으며 테밀시아를 보고 있다. 테밀시아는 짧게 불평해 봤다. 그냥 단순한 말 돌림 용이었다. "아까 그 여자를 만났어." "마린나사님 말씀입니까?" 작게 속삭이는 뮤비라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응……아직 네 이름도 모르더군." 불쾌한 낯을 하고 있는 테밀시아를 보며 어쩔수없지요 하는 얼굴로 뮤비라는 다시 웃었다. 조금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테밀시아는 그것을 보면서 기분이 좋지 못했다. "가주가 안 보인다 했더니 몸이 피로해 집무실에서 잠시 쉬고 있다고 한다. 먼저 가볼까? 아니면 기다릴까?" 뮤비라는 전자를 택했다. -똑똑.- "들어오게." "피곤하신데 폐를 끼치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뮤비라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자하라가의 가주는 피식 웃으면서 둘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뮤비라는 테밀시아의 뒤에 섰을뿐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는 「카르민」의 가주와 자리를 함께 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자하라 공은 뮤비라를 인정하는 소수의 최고위 귀족의 한사람으로써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았지만 뮤비라는 스스로 몸을 낮추기를 바랬다. 자하라 공은 피식 웃으며 앞에 앉은 테밀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린나사는 만나 봤는가?" "예." "무뚝뚝하기는. 마린나사는 그점이 더 좋다지만……." 인품있는 미소를 지으며 가주는 뮤비라를 돌아보았다. 재주는 있으나 신분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는 이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는 남자였다. 언제나 웃지만 속을 알 수 없지만 그 점이 오리혀 마음에 들었다. 극의 극인 평판은 그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것일거라고 그는 추정하고 있었다. 앞에서 냉혹한 눈동자를 숨기지 않고 숨박히는 박력을 품어내는 남자보다야 낫지 않는가? 자하라가의 가주는 피식 웃으며 전부터 생각하고 준비해왔던 것을 뮤비라에게 말했다. "뮤비라경." '경'이란 엄연히 기사 서임을 받은, 즉 성인 귀족남자를 칭하는 말로 뮤비라를 칭할 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만큼 그를 인정하고 존중해 준다는 뜻인 것이다. 뮤비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자네도 이제 슬슬 가정을 만들 때가 되지 않았나?" 뜻밖의 말에 뮤비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자하라 공을 보았다. 그는 왜 놀라냐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차갑게 눈을 빛내며 테밀시아는 앞에 앉아 있는 자하라공의 눈을 응시했다. "뮤비라의 중재를 맡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오리혀 어색하게 들려왔다. 뮤비라는 혼란스런 눈을 감추기 위해 테밀시아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테밀시아의 질문에 자하라공은 태연히 그렇다고 하며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퍽 많은 시간을 들여 이 중재를 준비했던 터였다. "내 동생녀석의 란(장녀)이 혼기가 찼다더군. 예쁘고 영리한 아이라 내조걱정은 안 해도 될 걸세." 하며 뮤비라를 올려 보았다. 뮤비라는 금새 마음을 추스려 부드러운 미소를 회복한 상태였다. "전 테밀시아님의 내조를 해야 하는 몸이라서요." "풋."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테밀시아는 안도감과 더불어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허나 뮤비라와 눈을 마주한체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자하라공의 생각은 달랐다. '진심이다……이 사내……." 목소리는 한없이 장난스럽고 몇번 권하면 어쩔수 없다는 듯 응할 듯했지만 그 말을 하는 눈은 한없이 진지하고 진실했다. 자하라 공은 냉혹한 눈동자의 젊은이를 힐끔 보았다. 부관의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이는지 보기 드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하라공은 자신의 부관의 '진심'을 모르는 젊은이를 보고 잠시 고민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놓치기 아까운 인재였다, 뮤비라는. 해서 좀더 걸고 넘어지기로 했다. "허허, 테밀시아경에게는 마린나사가 있지 않는가? 그러지 말고 만나나 보게. 자네가 테밀시아경을 잘 보좌하기 위해서 자네를 받춰줄 이도 필요할 걸세." 왠지 상처받은 듯한 뮤비라의 눈동자를 대하는 자하라 공의 마음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마린나사가 있다……라.' 테밀시아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짜증날 때면 하는 테밀시아의 버릇이라는 것을 아는 뮤비라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매듭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자하라공은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였다. "말로써는 아무리 해봤자라네. 내 자리를 주선해 줄터니 만나나 보게." 그리고는 뮤비라가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테밀시아에게 오르세만가의 가주의 안부를 묻으며 방향을 돌려버렸다. 당혹해 하는 뮤비라의 시선을 애써 못 본척 하면서 말이다. '뮤비라도……가정을 가져야 할 나이지. 「카르민」의 아내라니……얼마니 좋은 기회인가……빌어먹을.' ======================================================================= 요크노민의 대결은 아마도( ") 다음회에 나오지 않을까요( ")~
번  호 : 19287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6일 09:34 
등록자 : KREUZ1           조  회 : 15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6                                      
                          
[연재] 아해의 장-116 2001/06/15 02:06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61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날 저녁 페르노크는 자신의 방과 문이 연결된 방에서 쉬고 있는 요크노민을 불렀다. 아직 검은 페르노크에게 있었다. 요크노민은 검을 주려고 그러는가 보다 하고 별 생각없이 페르노크의 방으로 들어갔다. 페르노크는 웬 얄팍한 책들 들고 있었는데 요크노민이 오자 씩 웃으며 시작하자고 했다. 요크노민은 무슨 소리냐고 했지만 페르노크는 조용히 하라는 말만 할뿐이었다. 그리고는 얇은 책을 끝까지 읽고 덮더니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참 뭔가를 연창하던 그는 갑자기 두손을 내리면서 양쪽으로 벌리며 룬어를 내뱉았다. "펼*쳐*지*리*라*" 그의 앞에 연한 황금빛의 원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위에 순식간에 글씨가 써지고 있었다. 페르노크가 뱉아내는 말과 동시에. "강*화*. 수*호*. 마*법*. 화*염*. 바*람*. 물*. 대*지*. 번*개*" 그리고 나서 그가 마법을 시전함과 동시에 그의 옆, 허공에 떠다디던 검이 마법진 한가운데의 빈 공간에 떨어짐지고 그 안에 마지막 단어가 들어갔다. "부*여*" 그러자 사방으로 퍼지던 황금빛이 검으로 모이더니 그 안으로 스며든 듯 자취를 감췄다. "페, 페르. 방금 그거 뭐야?" 페르노크는 잠깐만, 하더니 검을 들어 한참을 살펴보다가 씩 웃으며 요크노민에게 건넸다. "마법검 만드는 마법이 서재에 있더라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집어왔지. 책에 껴있는 메모지를 보면 전의 '페르노크'가 마법길드의 고문서에서 발견하고 들고 온 건가봐. 다시 돌려는 줘야 하겠지만 파크다 선배의 말로는 길드소속의 대여기간은 무한대라서 언제 돌려주던 상관은 없다고 하더라구? 아! 이게 중요한게 아니지. 여기에 보면 고대에 영구적으로 마법을 부여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한게 나와 있는 데 실제 성공한 사례가 있는 건만 간단한 진과 주문, 설명과 함께 묶어 놨드라고? 하지만 책이 얇은 거 보면 알겠지?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었어. 어쨌건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잘됐지, 뭐." "그러니까 간단하게……지금 이 검에 마법을 건거라고? 영구적으로?" "응! 생각보다 쉽던데?" 요크노민은 영지 하나는 거뜬히 사고도 남을 마법검을 받아들고 무척 감격해 했다. 그도 이제는 검을 아는 전사였던 것이다. 검에 마법을 거는 것은 간단했다. 첫째는 신전으로 가서 고사제들에게 상당한 돈을 주고 강화 마법을 받는 것이 있고 둘째는 마법길드에 마찬가지로 돈을 주고 마법 하나를 부여받는 것이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가장 좋은 검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나쁜 방법인데 바로 던전, 고대 유적을 뒤져보는 것이었다. 살아돌아오기 힘들지만 살아온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랐기 때문에 상당한 매력을 가지는 방법이었다. 왜냐면 앞의 두 개의 방법은 아무리 조심해서 쓴다고 해도 반년에서 일년이면 마법의 효력이 다해서 다시 제 부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인데 마법이 아무런 징조없이 갑자기 수명을 다해서 싸움중이면 꼼짝없이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던전에 있는 고대 유물이라면 영구적인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 아무리 펑펑 쓴다고 해도 평생을 쓰고 후손이 대대로 쓴다고 해도 끊임이 없었다.마법 길드에서는 한때 자존심을 걸고 고대 유적지를 탐색, 마법검 생산에 대한 자료를 구해 연구한 적이 있었다. 결국 한 개의 마법이나 많게는 다섯 개의 마법을 영구적으로 부여하는 방법을 알아냈는데 한번 검을 만들면 부여한 마법수에 비례하여 적게는 5년에서 극단적으로는 평생을 마법을 못쓰게 되, 결국 활성화 시키지는 못했다. 차라리 몇번 마법을 부여하고 말지 평생 마법을 수모하며 굳이 만들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을 연구하면서 급격한 발달을 이룬 분야가 있었기에 그다지 손해는 아니였다. 바로 마법 아이템이었다. 마법 아이템이나 마법 검이나 같은게 아니냐는 말을 하는 이가 있지만 실상 판이하게 달랐다. 마법검은 좀더 큰 마나와 좀더 세밀한 기술과 좀더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그 차이에 하나였지만 돌따위에 룬으로써 마나를 대처한 마법 아이템과 철이나 미스텔에 룬으로써 마나를 고정시키는 마법검은 그 만드는 목적과 과정부터가 다른 것이다. 헌데 지금 눈앞의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 부여를 했다고 했다. 그것도 영구적인 마법 부여를! "근데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데?" 그럼에도 요크노민이 별다른 놀람 없이 이렇게 태연히 묻는 것은 이미 페르노크를 인간으로 보기를 포기 했기 때문이다. 페르노크는 그런 요크노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냥 제일 좋은 걸로 했어. 음……여기 이 룬은 「강화」인데, 내 생각에는 검의 수명을 늘려주는 게 아닌가 싶어." 「강화」가 걸린 검은 절대 부러지지도 녹슬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수호」는 검을 부딫일 때 생기는 충격같은 걸 어느 정도 흡수 해주는 거라고 생각해." 「수호」가 걸린 검은 충격을 흡수해 주는 것은 서비스고 온갖 저주와 사령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또한 제 2써클 정도의 마법은 자체적으로 커버해주기 까지 한다. "여기 「마법」은 나도 모르겠는데……뭐, 뭔가 기능이 있겠지." 「마법」이 걸린 검은 주인이 마법을 사용할 경우에 그 위력을 몇배로 늘려준다고 한다. 주인이 마법사가 아니여서 그냥 마법이 부여된 아이템을 쓴다고 해도 그것에 따른 위력을 높여준다고 한다. 게다가 제 6써클의 마법은 의식하는 한 막아준다고 한다. "여기 화염, 바람, 물, 대지 는 그 속성에 따른 공격 마법인 것 같은데…… 나중에 공터같은 데서 해보자." 「화염」,「바람」,「물」,「대지」,「번개」는 페르노크의 예상대로 각 속성의 공격 마법인데 원래 하나 이상은 검에 부여하지 않았다. 물론 마나가 딸리기도 하고 기술이 딸리기도 했지만 검이 버티질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동시에 「강화」걸어버렸기 때문에 검의 내구성 문제는 전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페르노크의 또다른 만행, 「마법」덕분에 각 마법들이 몇배는 증가될 것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페르노크는 자신의 앞에 있는 거대한 '존재'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요크노민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검만 연신 보고 있었다. 황제도 구하지 못할 검을 얼덜결에 받아든 그는 자신의 행운이 믿겨지지 않는지 검신에 아주 작게 새겨진 룬어를 어루만지며 어쩔줄 몰라했다. 고대 유적에도 8개나 되는 마법부여가 된 검은 없었던 것이다. 내일 결투를 위해서 일찍 자라며 그를 몰아낸 페르노크는 검의 효능을 빌어 싸워 이기진 말라고 당부했다. 그쪽에서 인정하지 않고 시종이 되지 않을 거란 거다. 요크노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런 시종은 필요없다고 다시 말했지만 페르노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새로 맛들인 마법 부여의 마법사를 뒤지고만 있었다. 요크노민은 결국 항복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도 페르노크는 한참 그 책을 읽어 댔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주문이 완전하게 외어 졌을 때야 자리에 누웠는데 실과 넬이 졸려운지 배개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보였다. 페르노크는 둘을 톡톡 치면서 커져서 자라고 했다. 작은 체면 자다가 깔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둘은 단숨에 커져서 페르노크의 양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 페르노크는 작은 소년, 소녀의 모습인 둘의 머리를 양손으로 쓸어주며 잠을 청했다. ===================================================================== 드디어 내일이 결투! 페르노크가 이번에 알게된 마법은 전적으로 그의 친구 '마나'의 도움이 컸답니다. 페르노크 혼자서 했다면 아마도 앞의 선배들의 전처를 밟아 몇년간 마법을 쓰지 못하거나 평생 못쓰게 됐을 겁니다^^ 역시 친구는 잘둬야 한다니까, 하하^^ 앞으로 페르노크가 이 마법을 어떻게 쓰는지가 사뭇 기대되는 군요^^ 뭐, 상당히 유용한 마법 아닙니까? 하하^^
번  호 : 19288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6일 09:35 
등록자 : KREUZ1           조  회 : 19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7                                      
                          
[연재] 아해의 장-117 2001/06/16 06:38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33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온 이들은 거의 없었다. 어제 밤 파티에서 짝을 맞춰 밤을 지새웠다거나 술에 취해 아직도 비몽사몽인 것일테지만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아침 식사 후 페르노크는 요크노민과 산책을 하기로 했다. 결투시간까지 시간이 남아돌았는데, 훈련을 하기에는 눈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원도 아름다웠다. 한참을 걷던 둘은 어느새 정원 끄트머리, 담 앞까지 도착해 버렸다. 슬슬 돌아서 가볼까 하는 둘의 눈앞에 한 인영이 담을 넘으며 나타났다. '도둑?' 하지만 화려한 복장에 복면조차 하지 않은 모습에서 그냥 파티의 괴짜 손님일거라 생각했다. "헤? 이 시간에 일어 나 있는 손님이 계실 줄은 몰랐는데요?" 또한 도둑이 먼저 말을 걸어 올 리가 없지 않는가?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은 그냥 간단한 인사를 하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헌데 그 남자가 왠지 자꾸 눈에 익어 보여 페르노크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고야 말았다. "혹시 어디서 만났던 적이 있던가요?" 이성적으론 아니다, 였다. 페르노크가 이곳에 와서 걸친 곳은 학원 '이므르'와 오르세만 가의 저택과 바로 이곳뿐이었으니 말이다. 헌데도 자꾸 눈에 익어 궁금했던 것이다. 그쪽에서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전 남자인데요?" 페르노크는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 되받아 쳤다. "전 변태가 아닙니다." 남자는 웃는 얼굴 그대로 공손히 사과를 했다. "실례를 범했군요. 숙녀 분이 실 줄은……."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쿡쿡 댔다. 남자는 자신의 결 좋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장난기 넘치는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그 정도에서 무너질 사람이 아니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착각을 한 모양이군요. 사람을 잘 못 본 모양입니다." 그리곤 짧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남자는 곧 뒤따라오며 말을 붙여 왔다. "이런, 또 결례를 범했군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도 그쪽이 눈에 익습니다만……." 페르노크는 그제서야 그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전 남자입니다만." 남자는 졌다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리곤 순식간에 웃음을 접고 말했다. "실은 전 눈에 띄어선 안 되는 사람이거든요? 절 보셨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만." 페르노크는 수상하다는 눈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말했다. "전 제게 폐가 되는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안심하십시오."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페르노크는 은발에 진초록 눈동자를 가진, 흔히 말하는 '튀는' 미소년이었다. 게다가 곁에 있는 요크노민도 의식은 못하고 있지만 길게 내려와 있는 음침한 분위기를 몇 번의 언행으로 '우수에 젖은' 미소년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둘이 함께 있다면 굉장히 눈에 띈다는 말이었다. 그런 그들이 정원 귀퉁이에서 멀뚱이 서 있는다면 상당한 눈길을 끌게 된다. 때문에 어린 귀족 영애가 다가오는 것은 별수 없고, 피치 못할 일인 것이다. "두분, 거기서 뭘 하고 계시나요?" 나릇나릇한 목소리가 어울리는 순진한 눈빛의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은 뻔히 앞에 보이는 백금발의 남자를 보며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분' 이라니? 요크노민은 자신을 '분'에 넣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소녀의 눈길이 자꾸 자기에게 오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페르노크는 여자의 시선은 상관하지 않고 남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요?" "「투명화」 마법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마법이지요." "하지만 특정 인물에게 보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캐스팅 하는 모습을 못 봤는데 어느 틈에 하신 겁니까?" 남자는 생긋 웃다가 페르노크에게 다가가 천천히 이마에 자신의 이미를 갖다 댔다. 페르노크는 피할 수 있었지만 그냥 묵묵히 있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이 맞았는지 남자의 생각이 페르노크에게 직접 전달 됐다. 「이건 '비밀'입니다만……마법 길드 제 2 도서실, 2-8 책꽂이, 위에서 두 번째 오른 쪽으로 174번째 책 안 219페이지에 보면 있답니다. 부제가 아마 '실용적인 투명화 마법의 고안'이라죠? 캐스팅은 저 귀족영애가 다가올 때 했지요.」 그리곤 살짝 윙크를 하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페르노크는 물론이고 상당히 애로틱한 장면을 목전한 요크노민까지 얼마간 패닉 상태에 있어야만 했다. 때문에 멍하니 있는 두 사람에게 겁을 먹고 도망간 영애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투가 시작됐다. 연무장은 유희거리를 찾아 해매는 정신나간 귀족들이 간식까지 챙겨서 구경을 왔다. 페르노크는 밖에 구경하는 곳에 있기보다는 보다 생생하게 제자의 활약을 볼 수 있는 시합장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원래라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페르노크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애들 싸움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 보기 안 좋습니다." 결국 페르노크와 리안의 기사로 보이는 전사 한 명이 시합장 구석에서 관람을 하기로 하고 시합이 시작 됐다. 왜소한 몸체의 요크노민을 보면서 리안은 자신감에 찬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애들 싸움' 이라지만 결투는 결투! 진검으로 하는 거다?" 요크노민은 당연한걸 묻는 다는 듯 아직 키가 안 맞아 허리에 차지 못하고 들고 온 검을 뽑아 들었다. 서늘한 검날이 리안이 당혹해 하는데 이어 요크노민의 안정된 포즈에 완전히 리안을 주늑 들게 했다. 뮤비라는 맨 첫줄의 의자에 앉아서 동생의 당당한 모습에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리안은 다시 한번 왜소한 요크노민을 위아래로 쳐다보고 마른 침을 삼킨 뒤 자신의 검을 뽑다 들었다. 앞에 요크노민이 들고 있는 척보기에도 싸구려로 보이는 검과는 달리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보검이었다. 하지만 그 예리해 보임에 있어서 훨씬 뒤쳐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요크노민이 들고 있는 것은 「강화」 가 부여 되어 있는 마법검 인 것 이다. 테밀시아와 뮤비라는 그것을 알아 보았다. "마법검?" "하지만 어제 보았을 때는……." "신관에게 가서 잠시 부여받은 건가? 하지만 여기 근처에는 신전이 없는데?" 둘은 동시에 페르노크를 떠올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페르노크가 기억을 찾는다고 해서 부여 마법을 쓸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여 마법을 한번 써서 잘못 되 평생 마법을 못쓰게 된 예는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특히 마법길드 측에서는 '희대의 천재' 페르노크에게 절대 부여 마법을 쓰지 말라고 알려 주려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마법 길드에서도 「부여」마법 연구 자료가 소실된지 꽤 됐다고 했다. 둘은 일말의 가능성을 지우고 결투에만 집중했다. 리안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앞의 쪼금한 녀석은 어디서 나오는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밀어쳐도 유유히 피해 버리거나 너무나 간단하게 막고 반격까지 해댔다. 이래서는 완벽한 자신의 패배였다. 리안의 얼굴이 형평없이 구겨지더니 갑자기 검을 크게 휘둘러 거리를 넓혔다. "사가." 그리고 자신의 기사를 불렀다. 페르노크의 인상이 찌푸려지면서 항의했다. "뭐하는 짓이지?" 리안은 아픈 얼굴로 자신의 오른팔을 감쌌다. "실은 어제 계단을 굴러서 오른팔을 뼜거든. '대행인'은 법적으로 인정되어 있다고. 「결투에서 부득이하게 상대가 다쳤을 경우, 대행인이 결투를 이어받을 수 있고 그 결과에 대행인을 쓴 이는 절대로 받아 들인다.」" 요크노민은 갑자기 너무나 강해 보이는 기사가 앞에 나서자 당황하며 페르노크를 돌아보았다.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에게 진짜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오른손을 움켜잡았다. 급소에 해당되는 곳을 꾹 눌렀던 지라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고 검을 떨구고야 말았다. 뮤비라가 갑작스런 동생의 신음에 놀라 일어났다. 하지만 뮤비라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페르노크가 더 빨리 입을 열었다. "이거 놀랍군. 실은 내 친구 노민도 어제 우연잖게 계단을 굴러서 오른 손을 삐었거든. 누굴 '대행인'으로 하지?" 하면서 고개를 돌린 쪽에는 그의 형이자 '휴첼' 기사단장인 테밀시아가 있었다. 사가의 얼굴엔 두려움과 경의감이 떠올랐고 리안은 궁지에 몰린 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씩 웃으며 말했다. "대행인은 내가 하지." 그리고는 요크노민이 떨어뜨린 검을 집어 들었다. 주위의 경악을 흘리며 검을 들어올린 페르노크에게 리안은 걷잡을 수 없는 희열을 느껴야 했다. 어제 소동 후에 아버지로부터 "결투는 신성한 것! 네가 약속한 벌은 받아야 만 하는 거다." 라는 믿기지 않는 말을 들었던 터라 혹여 시종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었던 것이다. 그것도 시종의 시종이라니! 농담도 아니다! ======================================================================== 이벤트........라기보다는 그냥 작명하나를 받고자 합니다(ㅡ.ㅡ;;;) 페르노크의 영혼인 '여자아이'의 이름을 공모합니다. 너무 예쁘지 않고 남자이름이라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고 법명틱한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물론 한국이름이어야 겠지요? 그동안 신비감 조성을 빙자한 게으름으로 정하지 못했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잘 안떠오르더라구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번  호 : 19394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9일 20:0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52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8                                      
                          
[연재] 아해의 장-118 2001/06/17 17:47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86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페르노크와 사가가 서로를 노려보며 검을 곤두세울 때 일순 페르노크의 모습이 사라졌다. 빨랐기에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다음 순간 나타난 곳은 사가의 앞이었다. 사가가 간신히 막은 검 사이로 페르노크의 뭔가 불만 어린 얼굴이 보였다. '아직도 멀었어.' 본래 실력이라면 이 정도의 검사는 적수가 되지 못 했어야 했다. 움직일 때는 환영이 남을 정도여야 했다. 그만큼 페르노크가 깨달았던 경지는 높았었던 것이다. "마법검?" 사가의 놀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페르노크는 일단 떨어져서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안심하시죠. 전 비겁하게 결투 때 무기의 효력에 기대지 않습니다. 노민도 물론이구요." 그리고 나서 밑으로 검을 내리더니 그대로 달려나왔다. 사가는 뒤로 물러서면서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위로 치솟던 페르노크의 검과 맞부딪였다. 하지만 사가가 힘으로는 우세했다. 사가가 내리찍는 힘을 조금 버티다가 페르노크는 순간 힘을 빼며 검을 내리고 뒤로 빠졌다. 사가는 일순 앞으로 균형이 쏠렸다. 뒤로 물러났던 페르노크는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와 찌르기를 넣었다. 사가는 자신의 목 앞에서 멈춰있는 검을 보고 자신의 검을 떨어 뜨려야 했다. "졌습니다." 당연히 자기를 주목할 줄 알았던 동생이 검을 주어들며 한 말은 테밀시아에게 초조함이라는 단어를 알려주었다. 저 아이가 무슨 배짱으로 저러는 것일까? 테밀시아는 답답하기까지 했다. 옆에서 뮤비라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동생을 주시하는 것이 보였다. 뮤비라로서도 황당할 것이다. 눈에 뻔해 보이는 로디라는 아이의 속임수에 빠져들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동생에게, 또 적절한 대응으로 받아쳐줄 듯 싶었던 테밀시아의 동생에게. 두 형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페르노크는 검을 세웠고, 요크노민은 얌전히 물러나 구경을 했다. 페르노크의 모호한 폼이 더욱 둘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지만 요크노민은 전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테밀시아는 그 다음 순간 분명히 보았다. 앞으로 나와 있던 발을 순식간에 튕기며 앞으로 나가는 동생의 모습을. 그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지만 타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속도로 기사를 육박해 나가는 동생의 모습은 테밀시아에게 믿기지 않는 진실로 다가왔다. 뮤비라가 옆에서 작게 탄성을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물론 자기가 저 기사라면 저 정도의 속도로 무너지지 않을 것 이란걸 확신하는 테밀시아였지만, 약하다 못해 「윈디」의 바람에도 한 여름에 감기에 걸려 고생했던 동생이 아닌가? 이건 객관적인 탄성이 아닌 주관적인 탄성이었다. 앞의 기사도 상당한 역량이 있어 보이지만 테밀시아의 기사단 '휴첼'에 온다면 말석을 못 벗어날 실력이었다. 때문에 겨우겨우 그 기사를 이긴 페르노크의 실력이 감탄까지 흘릴 정도로 높게 평가되지는 않는 것이다.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애당초 이상한 점은 많았다. 생전가야 큰소리 한번 못 내던 아이가 반 아이들을 상대로 피튀는 싸움을 하지 않나, 갑자기 체력 단련을 한답시고 운동기구를 구해달라고 하지 않나, 그 좋아하던 군것질도 하지 않았고 별로 즐겨하지 않던 육류를 취하며, 누군가와 친하게도 지냈다. 보기 좋은 것은 부인 할 수 없으니 묘한 이질감에 테밀시아는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낮게 신음하는 그를 돌아 본 뮤비라는 살짝 웃으면서 달래주었다. "무슨 일이 있던 테밀시아님의 사랑스런 동생, 페르노크님입니다." 테밀시아는 복잡한 눈으로 뮤비라를 봤다. 물론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위안이 되지 않았다. 테밀시아는 활짝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자신의 동생쪽으로 돌리는 뮤비라를 보았다. "아?!" 뮤비라는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테밀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연무장 안을 보았다. 그의 동생이 기사의 목에 검을 갖다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겼네요?" 뮤비라는 기쁘지 않냐는 얼굴로 테밀시아를 돌아보았다. 테밀시아는 잠깐 웃어 보이며 뮤비라의 머리를 부벼주었다. 뮤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는 것을 알아차린 테밀시아는 씩 웃으며 말했다. "골목싸움에서 이긴 꼬마같다, 뮤비라." 뮤비라는 머슥하게 웃으면서도 반박을 잊지 않았다. "좋은 건 좋은 겁니다. 표현은 자유지요." 테밀시아는 뭔가 다시 반박할 말을 찾다가 연무장 쪽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졌음을 시인하지 못하고 건방지게 대들고 있는 꼬마가 보였다. "페르!" 급히 동생을 불렀지만 이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는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다. 뒤늦게 동생이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조차도 테밀시아에게는 의아하게 다가왔다. 그가 알고 있는 동생은 신경이 그렇게 예민하면서도 감각은 둔한, 묘한 꼬마였던 것이다. 또한 자기에게 달려드는 검을 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손으로 잡으려는 무모함을 보이는 꼬마도 아니였다. "저 아이……누구지……?" 테밀시아의 딱딱한 음성에 부드럽게 답해주는 이가 있었다.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 당신의 동생입니다." 뮤비라였다. 테밀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홀가분한 얼굴로 웃었다. 뮤비라는 그 모습을 보고 생긋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새 시종, 잘 써야 한다." "페르……그러니까 난 저런 시종은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로디는 둘의 대화를 듣다가 눈앞이 깜깜해져 옴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그가 한 행동은 ……. "으아아아악!!" 검을 곤두세우고 등을 보이고 있는 페르노크에게 달려드는 거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페르노크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약 간의 상처는 각오해야 할 정도로 거리가 근접해 있었다. 페르노크가 양손을 들고 막아내려고 했을 때였다. -휘잉!!- 거센 바람이 일면서 로디는 벽까지 밀려나 크게 부딪였다. 결국엔 기절을 했는지 일어나려는 기색도 없었다. 벙쪄 있는 사람들 사이로 페르노크의 나지막한 음성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 좀 과격한 것 같아. 하지만 고마워." 정령을 부리는 건가? 마침내 저 '희대의 천재'는 정령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는가? 주위의 경악이 보이지도 않는지 페르노크는 기절해 있는 로디의 곁으로 걸었갔다. "거참, 방자한 시종일세. 주인이 생겼으면 공손히 인사를 해야 할 일이지, 누워서 자고만 있다니." 허공에서 갑자기 물방울이 고여지기 시작하더니 세수대야를 가득 채울만한 물이 일순간에 로디의 얼굴에 떨어졌다. 다시 놀라는 사람들 틈으로 페르노크의 음성만이 들리고 있었다. "고마워, 넬." 신음하는 리안의 앞에 허리를 숙인 페르노크는 짧막하게 말했다. "이봐, 시종? 얼른 주인에게 인사드려야지?" "악취미야, 페르." 요크노민이 뒤에서 충고 해주었다. 로디의 아버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둘에게 다가와 아들의 무례를 용서받으려 했는데 그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무장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다급히 들어왔다. "주인님! 주인님!" 여느 귀족과 마찬가지로 구경을 하고 있었던 자하사 가주는 지긋이 몸을 일으켜 말했다. "왜 그러는냐?" "큰일 났습니다! 골드의 피를 도둑맞았습니다!!" 자하사 가주는 단숨이 파래진 얼굴로 경비병으로 보이는 이의 뒤를 따라 달려나갔다. 전설 속에서만 접했던 '골드의 피'란 단어에 다른 귀족들도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 뒤를 따랐음은 물론이었다. "요즘은 '드래곤의 피'가 인간들의 손에서 돌아 다니는 모양이네요." 우르륵 몰라가는 귀족들을 보면서 뮤비라가 자신의 목걸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테밀시아는 피식 웃다가 동생을 내려다 보았다. 얼덜떨한 얼굴로 몰려나가는 귀족들을 보고 있던 동생에게 뮤비라의 동생이 뭐라고 말을 건네자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내려가보자." "도둑이라……." 페르노크는 약간 멍한 기분으로 또다시 즐거움을 찾아 나가는 귀족들을 보았다. 옆에서 요크노민이 작게 말을 걸어왔다. "그자가……?" 페르노크는 앞에서 멍하니 있는 리안을 가르키며 고개를 저었다. 약속한 것이다, 자기에게 해만 없다면 입 다물어 주기로. 그것을 상기한 요크노민은 곧 입을 다물었다. 침묵하는 둘을 앞에두고 리안의 아버지는 파라게 질린 얼굴로 페르노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별다른 감정이 없는 페르노크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페르노크군, 도디를……." 하지만 페르노크는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재빨리 책임전가를 해버렸다. "로디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제 친구 노민입니다." 그리고는 요크노민을 앞으로 끌어다가 물러났다. 리안의 아버지는 고작 시종에게 사정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도 자식 생각에 어렵게 입을 열으려 했다. 하지만 요크노민이 빨랐다. 페르노크를 조금 원망스런 눈으로 보다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전 시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빌려드리지요." 자신을 시중들기 위해 따라오거나 할 필요는 없지만 분명한 자신의 시종임을 밝힌 말이었다. 요크노민은 원래, 없었던 일로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행인을 쓰고, 졌음에도 시인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전의 결심이 뇌리에서 떠난 버린 것이다. 또, 귀족 시종이라니……. 재미있지 않는가? 로디는 패배감에 이를 악 물었을 뿐 더 이상의 발작(?)은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속에는 그의 검술을 늘 칭찬하며 천재라고 치켜주던 검술교사만이 가증스럽게 떠다닐 뿐이었다. 당장 돌아가서 그녀석부터 짜르리라, 다짐하는 로디였다. 그 뒤 그는 고지식 때문에 미움을 사 쫓겨났던 기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엄청난 노력을 퍼부은 끝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뭐, 아직은 먼 훗날 일이다. "기분이 좋아보이는군, 리안." 검고 푸른 삐친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가 무심한 어조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리안이라 불린 백금발의 남자는 장난기가 가득 머금어진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아아." 하고 답을 했다. 뭔가를 회상하듯 피식거리던 그는 갑자기 소리를 쳤다. "아! 이름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다!" 갑작스런 외침이었음에도 앞에 있던 남자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앞과 마찬가지로 무심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뿐. "안에 아직 있을 텐데,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리안은 조금 고민하는 듯 하더니 손에 쥐여 있는 황금빛 보석을 튕겨 올리며 말했다. "아니, 어차피 또 만날텐데 그때 하지." "느낌이야?" "응. 하지만 '운명'이 아니라도……." 리안은 황금빛 보석을 해에 비춰보며 씩 웃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거니까." ===================================================================== 정말 죄송합니다(--)(__)(--) 새벽에 올렸다가 찝찝한 마음에 지워버렸습니다. 새벽에 읽으셨던 30여분은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제가 그동안 무지 열심히 써서 만들었던 제 비축분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유도 알수없고, 그냥올리려고 보니까 없어져 있더군요. 분명 저장하기를 눌렀고....지운적이 없었던 지라 전 지금 황당하기만 하답니다.;; 그래서 어제 일단 남아 있는 분량만을 올렸습니다. 어디까지였냐하면 결투가 끝나고 경비병이 도둑맞았다고 하는 데 까지였습니다. 하지만 제 원래 예정은 리안의 말이 끝났을 때였기 때문에..... 올리고 나서 한참 고민한뒤 그냥 지우기로 했습니다. 다시 써서 올려야 겠다고 생각한거죠. 헌데 당시 새벽 4였는 데다가 제가 상당히 정신적으로 충격을 먹은 상태여서 글이 써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끄고 누웠는데 깨보니...ㅡ.ㅡ;;;;; 하하^^;; 서둘러 써서 올립니다. 에구...;; 내 비축분.......ㅠ.ㅠ 엄청난 양이었던 지라 그냥 멍하니 있던 걸 생각하면...크윽.....
번  호 : 19395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19일 20:0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19                                      
                          
[연재] 아해의 장-119 2001/06/19 16:19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03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페르노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 남자를 보며 아차, 할 수밖에 없었다. 진작에 이 두 사람을 고려하지 못했던 자신을 욕하며 당황했다. "형님……." 이제는 입에 완전히 붙어 버린 '형님'이란 소리에 내심 쓴 미소를 짓는 페르노크였다. 분명 이상한 점을 알아 차렸을 텐데도 변함없이 차가운 듯 따뜻하게 자신을 대하는 테밀시아의 태도에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몰라볼 정도로 실력이 늘었더군나. 그동안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지?" "예……'이므르'에서 당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분명 '페르노크'도 나름대로 노력을 했었다. 고로 아주 거짓말은 아니였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눈이 흔들리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테밀시아는 그런 페르노크의 머리를 조금 부벼주었다. 뮤비라의 머리를 부볐을 때의 조심스런 손길과는 다르게 조금은 거칠었다. 하지만 그만큼 귀여워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지라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물론, 페르노크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테밀시아 형님…….' 도둑을 수색하는데 자문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테밀시아와 뮤비라를 찾았다. 둘은 각자의 동생들에게 희마한 미소를 지어 주며 자신들을 찾는 이에게 가버렸다. 페르노크는 멍하니 그 둘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요크노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페르……." 페르노크는 씩 웃으면서 요크노민을 돌아 보았다. "괜찮아."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놀렸다. 요크노민은 '고독'이라는 익숙하지만 잔인한 감정이 돌아선 페르노크에게 배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겨우 입을 연 요크노민을 페르노크가 돌아보았다. 고독해 보이는 등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너무나 태연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무표정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처세술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요크노민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는 페르노크에게 조금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나갈까?" 아까 보았던 도둑이라 추정되는 백금발의 남자가 넘어왔던 담으로 가보았다. 하지만 둘은 동시에 몸을 돌려야 했다. 이미 루트 확인을 하고 위해 많은 경비병이 그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크노민은 그냥 정면돌파를 하자고 했다. 어차피 손님의 외출을 막을 귄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게 그의 의견을 뒷받침해주는 근거였다. 페르노크는 로레라자에게 당부 받았던 말이 있었던 지라 조금 고민했다. 그녀는, "도련님, 기억을 잃으셨으니 에티켓같은 것도 기억 못하시겠지요? 그럼 이건 알아두세요, 파티장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그 집을 떠나서는 안돼는 거랍니다. 왜냐면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도 밖을 돌아다닌 다는 것은 파티가 재미없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죠. 아셨죠?" 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노크의 고민을 길지 않았다. 그는 파티가 재미없었던 것이다. 둘은 곧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중간에 테밀시아에게 말을 할까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왠지 얼굴을 대하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 버렸다. 밖은 여름축제가 한창이었다. "축제라니……'가는 날이 장날' 이라더니만 운도 좋다니까?" "'가는 날이 장날'?" "아아, 지금 같은 경우를 빌어 말하는 거야. 우연히 나왔는데 축제라니……." "운이 좋은 걸 말하는 거야?" "글세……. 지금 이 거리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도 그 말이 대입된다고 말하면 이해하기 편하려나?" "모르겠다." 이해를 포기한 요크노민과 설명을 포기한 페르노크는 작심해서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놀았다. 갑자기 나와서 돈이 없어 곤란했지만 페르노크가 끼고 온 반지를 팔아 치움으로써 하루 경비를 마련했다. 둘은 축제날에만 파는 이벤트 음식따위를 사먹거나 싸구려 기념품을 구경했다. 곳곳에서 소매치기야,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페르노크는 스스로의 감각과 두 애완 동물을 믿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페르노크의 두 애완동물이 지금 있다는 것을 모르는 요크노민은 페르노크만을 믿었지만 둘 다 여유만만이라는 것은 똑같았다. 둘은 한창 노닥거리다가 시장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적당한 곳으로 가자. 너무 비싼 곳 말고." 최고가의 반지를 팔아치웠기 때문에 돈걱정은 없었지만 있을 때 아끼자는 생각이었다. 파티하는 동안 내내 나와서 놀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순전히 물가를 모르는 페르노크의 착각이었다. 현재 페르노크의 수중에는 금화 100닢이 있었다. 보통 평민 네식구가 한 달을 풍족하게 먹고사는데 드는 돈이 고작해야 은화 20닢이라는 것과 은화 50개의 가치를 지닌 것이 금화 1닢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 착각의 정도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은화 1닢은 동화 50닢의 가치를 지니는데, 지금 페르노크가 향하는 식당은 일 인분을 풀 코스로 시킨다고 해도 동화 50닢이 넘지 않는 곳이었다. 요크노민은 조금 걱정스럽게 페르노크를 봤는데 다행히 그도 금화가 그럭저럭 비싼 돈일 것이다 생각을 하고, 그래봤자 한국 돈으로 십 만원 정도일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잔돈으로 바꿨다. 여기서의 금화나 은화등은 한국 돈, 백원정도의 크기와 무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양이 좀 많더라도 품에 넣고 다니는데는 하등 문제가 없었다. 페르노크는 그렇게 바꾼 동화 50닢중 30닢을 요크노민에게 건넸다. 요크노민은 자기에게 있다가 도둑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했지만, 페르노크는 이 식당에서 그 만큼의 식사를 하고 없애버리면 된다고 태연히 말했다. 그러니까 식비를 요크노민이 가지고 있다가 내라는 소리였던 것이다. 요크노민은 그제서야 받아 들었다. 식당 안은 나름대로 부산하고 활기찼다. 또 제법 깔끔하기도 해서 보통 중하위층이 즐겨 찾는 곳이라는 걸 쉽게 알아 볼수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척 보기에도 최고급의 천으로 만든 옷을 빼 입은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은 무척 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결투를 한다고 좀 편안한 복장의 옷으로 입어서 이정도지 원래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밥 먹는데 누가 빤히 본다는 건 소화에 상당한 지장을 주는 것이니 말이다. 힐끔 힐끔 둘은 보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틈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둘 다 아침을 이르게 먹고, 결투를 한데다 축제에 끼어 들어 노느라 점심때를 기장 지나쳤기 때문에 상당히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양껏 먹고 셈을 치르려 했을 때, 요크노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값이 치뤄야 할 값보다 조금 모자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페르노크에게 돈을 좀더 내놓으라고 했다. 둘을 몰래 힐끔 보던 이들도 셈을 치르기 위해 페르노크의 옆에 서 있었는데, 이곳 화폐 단위를 모르는 페르노크는 별 경계 없이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금화 속에서 동화를 골라 건네주었다. 옆에서 놀라는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것을 모른 체 말이다. 후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거리에서 파는 주스나 파르페를 사먹자고 페르노크가 제안했다. 요크노민도 별 반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곧 거리로 나와 돌아다녔다. 아까는 흔하게 보이던 음료수판매소가 영 보이지 않아 둘은 상당히 헤매고 돌아 다녔다. 그러다 돌아다니며 주스를 파는 수레가 저쪽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고 반갑게 다가가 두 잔을 시켰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큰 건물 틈으로 위치한 지라 온통 그늘이었다. 밖에서 이쪽을 본다면 뭐가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모를 정도였다. '아까는 이 위치가 아니었는데……더워서 잠시 그늘로 온 건가?' 페르노크가 먼저 한 모금을 마시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쌀을 찌푸렸다. "맛이 이상한데?" 바로 앞에 주스를 판 장본인이 있다는 것을 망각한 모양이다. 헌데 묘하게도 그 장본인은 잔뜩 얼어 있을 뿐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요크노민은 그 장사치가 초보인 모양이다, 라고 판단했고 자기도 한 모금 마시면서 편을 들어주었다. "그럭저럭 먹을 만 하구만, 뭐." "그런가?" 하면서도 페르노크는 다시 마시지는 않았다. 목이 말랐던 요크노민은 단숨에 다 마셔버리고는 갑자기 어지럽다고 하면서 쓰러져 버렸다. 페르노크는 놀라서 그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지만, 뒤에서 내리치는 몽둥이에 같이 쓰러지고야 말았다. 실과 넬은 페르노크가 기절한 마당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힘을 쓰면 오리혀 페르노크에게 폐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좀더 두고보기로 했다. "빌어먹을, 간이 다 쪼그라들었다!" 순해 보이기만 하던 주스장사치는 옆에서 나타난 남자를 보면서 그렇게 말을 내뱉았다. 나타난 남자는 씨익 웃으면서 쓰러진 두 아이를 어깨에 들쳐 맸다. 상당한 힘이었다. "뭐야? 돈만 갖는 거 아니였어?" "그러려고 했는데, 이것들 상당한 물건 아니냐?" "호오? 그러고보니……." 씩 웃는 둘의 얼굴은 아까 음식점에서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을 자꾸 힐끔거렸던 이들의 얼굴과 같았다. ================================================================== 사라진 비축분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크윽...... 덕분에 어제는 못올렸군요.....크윽......... 생각보다 페르이야기가 조금 더 길어질 듯 싶습니다. 뭐, 이번 소동은 금방 끝날테지만요......그냥 생각보다 길다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페르의 이름을 같이 고민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감동감동....ㅜ.ㅜ) 비축분의 증발로 멍해진 머리가 조금은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번회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귀족꼬마의 이름인 로디를 제가 그만 리안이라고 해버렸지 뭡니까? 몇몇 분들의 지적으로 겨우 알게 됐습니다(하아...정신이 없다니까....@.@) 그래서 서둘러 수정을 했습니다. 그럼 이만^^
번  호 : 19488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22일 23:0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7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0                                      
                          
[연재] 아해의 장-120 2001/06/20 00:55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24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으윽……." 페르노크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제길……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둠이 깔린 생소한 천장과 차가운 돌들로 이루어진 바닥, 철장으로 되어 있는 벽등을 보면서 페르노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는데 덕분에 머리의 통증이 더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통증에 머리를 감싸려고 하다가 자신의 손이 결박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빌어먹을……." 옆에서 기절한 듯 자고 있는 친구, 요크노민을 발견한 페르노크는 일단 그의 몸 상태를 눈으로 대충 점검해 보았다. 다행이 잠만 든 모양이었다. 페르노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좀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옆에서 자신의 주위를 떠돌고 있는 실과 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희들도 왔구나. 여기가 어딘지……아니, 길을 알고 있니?" 둘은 걱정스레 보다가 아는 것을 묻자 알려줄수 있다는 기쁨에 신나게 고개를 끄떡였다. 페르노크는 피식 웃으면서, "그럼 최악은 아니구나." 라고 했다. 헌데 그말에 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뭐가 최악이 아니라는거냐, 멍청이!" 그러고 보니 철장밖에는 다른 철장들이 있었고 그 안에는 다른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페르노크의 혼잣말에 답한 것으로 보이는 이는 오만해 보이는 눈동자를 하고 있는 파란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잘 차려 입은 모습이 귀족일거라는 추측을 하게 했다. 페르노크는 앞서 들은 말은 흘려들으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어디다 반말인가!" 여자아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상종하기 싫다는 제스처였다. 페르노크는 마음대로 하라는 얼굴로 다시 묻지 않았다. "노민! 노민!" 약발이 센 모양인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넬, 부탁해." 그 말을 들은 넬은 너무나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고 그와 동시에 요크노민의 얼굴쪽으로 물이 고여 떨어졌다. 얼음물에 가까운 온도를 지닌 물이었던 지라 요크노민이 깨어날 기미가 곧 보였다. "으음……." "정신이 드냐, 노민?" 요크노민은 완전히 정신이 든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페르노크에게 눈을 고정했다. "여기가 어디냐?" "나도 몰라. 뭐, 좋은 곳이 아닌건 확실하지?" 요크노민은 좀더 궁리를 하는 듯 하더니 페르노크에게 물었다. "돈은 당연히 없겠지?" "아마도." 요크노민은 고개를 끄떡이며 자신이 추측한 바를 늘여 놓았다. "아무래도 네 돈을 노리고 한 짓 같은데……. 내 생각에는 돈만 가지고 가려다가 보니까 상품값이 제법 나갈 것 같아서 팔아치우려고 한 것 같아." "흐음……." "이미 팔린 모양이군. 아마 우리를 덮친 녀석들은 그냥 뒷골목 건달들일거야. 중간 노예상에게 팔린 상태인 것 같아. 곧 상품으로써 제단에 오르겠지." "누구 마음대로." 페르노크는 좀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가 가지고 왔던 단검은 이미 그의 품에서 떠난 상태였고 요크노민 또한 그랬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가 한쪽 무릎을 꿇는 식으로 앉았다. 그리고는 바지를 조금 들어 올려 그 안에 잘 자리잡아 있는 짧은 검을 꺼냈다. '이므르'에서 위험하게 사용할 뻔했던 '은장도'였다. "헤에? 그런 것도 갖고 다녀?" "혹시나 해서. 여기는 내가 있던 곳보다 위험이 많은 것 같으니까." 그리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줄을 끊었다. "쳇, '농땡 사부'에게 당한 게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이야." 투덜거리며 요크노민의 손을 결박하고 있던 줄 또한 잘라냈다. "'농때 사부'라니?" "순 깡패 놈팡이가 있어.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까? 그냥 강행돌파?" "눈에 띌 필요는 없으니까 될 수 있는 데로 조용히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형님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얼른 빠져나가는 게 중요해. 복수는 해도 나중에 하자." "성미에 안 맞지만……사정상 이번엔 그냥 지나가지. 괜히 이번 외출로 난리가 나면 축제고 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갈게 뻔하니까." 둘의 대화는 어쩔수 없이 옆의 철장에 있던 소녀의 귀에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옆인데다가 그녀가 앉아있는 침대가 둘의 철장과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위도 조용했고 말이다. 소녀는 당장에 비웃음을 지므며 말했다. "우습지도 않구나. 누가 내보내 주기나 한데냐? 이제 보니 멍청이가 둘이군?" 하지만 요크노민과 페르노크는 들은 시늉도 하지 않았다. "일단 철창을 나와서 한 놈을 잡은 뒤에 출구를 물어보고 빠져나가자." "마법으로 하면 요란하지 않을까?" "글세……. 별로 요란할 것 같지는 않은데?" "시험해볼 수도 없고……." "어떻게 할까?" 요크노민은 조금 고민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종결을 냈다. "여기서 소란이 나봤자 한두명 정도 몰려오겠지. 그 녀석들을 잡아다 물어보면 되겠네." 그 말을 끝으로 페르노크는 캐스팅에 들어갔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격, 내가 바라는 것은……." 둘의 하는 꼴을 같잖게 지켜보던 소녀는 황급히 말을 걸어왔다. "이봐! 나갈거면 나도 구해줘!" 마법까지 하는 걸 보니 나름대로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탈출이었던 것이다. "난 「쟈르카」 영애라구! 구해주면 사례는 하겠어!" 캐스팅을 하고 있던 페르노크가 답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고 요크노민은 과묵한 나름대로 과묵한 성격이었던 지라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바람의 힘. 윙*커*트*" 대기가 진동을 하더니 페르노크의 앞에 서서히 공기가 빨려 들며 두개의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그리고는 철장을 향해 날라갔는데 마치 두부를 검으로 벤 듯 철창의 서너개가 위아래로 잘려 떨어졌다. 예상외로 소음이 없었기 때문에 둘은 조용히 일을 진행 할 수 있었다. "이봐! 나도 같이 데리고 가!" 오만한 소녀의 명령에 페르노크는 인상을 약간 찡그리면서 물었다. "너, 뭐 할 줄 아는 거 있어?" "어디다 반말이냐! 건방진 녀석!" 페르노크는 고개를 지긋이 끄떡이고는 요크노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요크노민은 오만하지만 아름다운 소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철부지." 발끈하는 소녀를 나몰라라 하면서 둘은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물론 귀여운 두마리(?)의 펫(?)도 같이. ==================================================================== 역시 능력이 좋다보니까 탈출도 가뿐하지요? 하하^^ 그나저나 페르는 이미 지나의 일로 들어났지만 상당히 인정이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그건 노민도 마찬가지군요. 인간 불신에 걸린 녀석이라서 그럴까요? 하하^^;
번  호 : 19489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22일 23:0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32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1                                      
                          
[연재] 아해의 장-121 2001/06/21 17:07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251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빠르게 외길을 뛰던 둘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앗! 탈출……!!" 하지만 그가 말을 미처 다 꺼내기도 전에 페르노크가 빠르게 다가가서 입을 막으며 '은장도'를 갖다 대는 것으로 그 소동은 일단락됐다. 사실 페르노크는 실과 넬 덕분에 안내자가 없어도 탈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크노민에게 뭐라고 설명할 길도 없는데다가, 자신이 기억하고 있다고 하기엔 이미 뱉어 놓은 말들이 걸렸다. 때문에 은근히 누군가가 잡히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길은 실과 넬의 가르침에 따라 바로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밖으로 안내해라." 경비병으로 보이는 남자는 잔뜩 질려서 굳어 있었다. 페르노크의 눈짓을 알아챈 요크노민은 재빨리 남자의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경비병을 더욱 위협하여 앞으로 나 갈 수 있었다. 한참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걸어 왔을 때였다. 페르노크는 경비병을 벽으로 몰아 세우고 단숨에 뒷목을 가격하여 기절시켰다. 황당해 하는 요크노민을 잡아 끌고는 벽이 패인 곳에 바싹 붙었다. 긴장하는 페르노크의 분위기에 따라 요크노민도 입을 다물고 벽에 붙었다. 곧 발소리가 들리며 몇몇 검을 든 남자들이 나타났다. 입을 굳게 다물며 그들을 지켜보던 둘의 귀에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맞게 가고 있는 거 확실해?" "맞다니까! 내가 잠입까지해서 확인한 길이라구! 입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잠입?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은 서로 눈을 마주하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다가 잠시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참! 그나저나 거리가 난리가 아니던데?" "난리?" "응, 귀족 도령이 행방불명 됐다나?"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은 다시 눈을 마주쳤는데 이번에는 쓴 미소를 짓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 뒤로는 조용히 걷기만 하던 사람들은 곧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이 있는 쪽으로 왔다. "어?" "왜?"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이쪽 구역 경비병이야." "헤? 어이, 클랜! 너 이런 일까지 했냐?" "미쳤냐? 다른 침입자가 있었나 본데?" "먹이 빼앗기는 거 아냐?" "우리 임무에 빼앗길 먹이가 어디있냐?" 숙덕거리던 남자들을 보다가 페르노크가 앞으로 나왔다. 요크노민도 그들의 대화를 같이 듣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나왔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저쪽이 밖으로 나가는 길입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남자들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경계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페르노크는 다시 조용히 물었다. "저쪽이 나가는 길입니까?" 클랜이라 불렸던 적색머리의 남자가 되 물었다. "누구냐?" "미아입니다만?" 뒤에서 요크노민이 킥킥 댔다. 클랜은 멍하니 있다가 곧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니까 저쪽으로 곧장 가다가 오른쪽으로 빠지면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가 있거든? 거기로 나가면 곧장 거리로 빠질 수 있어." -퍽! 뒤에서 그의 동료로 추측되는 이들이 동시에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말을 믿냐!?" "루트를 말해주면 어떻해!?" "크윽……아프잖아, 이 자식들아!!" 투닥거리는 셋을 뒤로하고 페르노크는 클랜이 알려준 길로 향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나머지 남자들이 얼른 막아섰다. 페르노크가 평이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막아서십니까?" 클랙을 한번씩 더 쥐어 박아준 두 명의 남자가 곧 살벌한 음성으로 심문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에 대한 경계심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넌 누구냐?" "……같은 물음에 또 답하기 싫군요. 이제 길을 찾았으니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웃기지마!" "얼른 잡아!" 하지만 동시에 그 둘의 머리를 쥐어 박는 사람이 있었다. 클랜이었다. "이 자식들 감히 나를 때리다니!! 게다가 월권까지 할 생각이냐?" 아무래도 지휘자는 클랜이라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이 바보자식아! 이런 노예상들의 '창고'에서 태연히 돌아다니는 놈이 수상하지도 않냐!?" "길을 잃었다잖아!" "그게 말이 되냐!!" "안 될건 뭐있어?" "우리말고 다른 침입자 일 수 있잖아!! 게다가 바로 앞에 경비병이 쓰러져 있다구!!" 그제서야 클랜은 바닥에 쓰러진 경비병과 태연한 모습의 두 소년를 보았다. 무기가 없는 경비병의 모습과 그의 것으로 짐작되는 장검과 단검을 각각 찬 그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던 클랜은 이렇게 물어왔다. "그거 이 녀석 무기 아니냐? 이 녀석 기절 시킨거 니네가 한 짓이냐?" "맞습니다만?" "침입자냐?" 황급히 검자루를 쥐며 묻는 클랜을 보며 결국 둘은 웃어버렸다. "쿡쿡……. 침입자라기보다는 탈출자입니다만?" 뒤에서 클랜의 동료들이 머리를 감싸며. "위엄이 안선다니까, 위엄이." "저런 녀석이 하필 대장이라니……." 하고 있었다. 하지만 클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탈출자?" "네, 깨보니 여기더군요. 그래서 나가려고요. 뭐가 잘못 됐습니까?" 클랜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곧 이 둘이 납치됐다가 팔린 것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는 동정심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충격이 컸겠구나?" 뒤에서 크응, 거리는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페르노크는 다시 피식거리며 말했다. "좀 놀라긴 했습니다. 그럼 이만." 하지만 클랜이 얼른 붙잡았다. "니네끼리 가다가 길이라도 잊어 먹으면 어쩌려고 그래? 게다가 가는 길에 다른 경비병을 만날지도 모르잖아? 우리랑 같이 가자. 어차피 우리도 일 끝내고 바로 나갈 거니까, 그동안 보호해줄게." 척보기에도 일격에 당한 듯 보이는 경비병이 발치에 쓰러져 있건만 클랜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페르노크는 조금 고민하는 눈치더니 요크노민은 돌아보았다. 요크노민이 살짝 고개를 끄떡이는 것을 확인한 페르노크는 클랜의 호의에 응했다. "우리는 '곤크' 용병단이야. 이번에 어떤 귀족 의뢰로 집나간 딸을 찾아와야 하거든? 근데 추적하는 도중에 노예상에게 잡혔다는 정보를 입수한거야. 별도 비용으로 사가지고 올수도 있긴 하지만 그럼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그래서 이렇게 구하러 온거야." "클랜. 카!!"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을 줄줄이 늘여 놓는 클랜을 뒤에서 밟아 버리고 싶다는 얼굴로 동료들이 안타깝게 보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자신들의 긴장을 늦춰주려는 클랜의 배려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뭐?" 난데 없는 인사에 클랜이 당황하며 되물었지만 페르노크는 더 이상 클랜을 보고 있지 않았다. "노민, 내 짐작이 틀리길 바란다만 ……귀족 딸이라는 여자말이다……." "나도 네 짐작과 같은 짐작을 하고 있다만, 마찬가지로 틀렸으면 한다." '그 여자가 아니길…….' 둘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며 짜증이 솟는 눈을 교환했다. 아쉽게도 둘의 짐작은 맞아 떨어졌다. "흐음 ……아버지가 말인가?" "예, 아가씨." "좋아, 돌아가주기로 하지."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이 있었던 철창 바로 옆에 있던 파란머리 소녀는 도도한 얼굴로 자신을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클랜은 이 자리에서도 반항하면 어쩌나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정도에서 만족하고 얼른 철창을 잘라냈다. 순수한 검기를 이용한 것으로 그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순진해 먹은 것과는 달리 실력은 괜찮은 모양이다, 페른노크는 생각했다. 철장에서 빠져나온 소녀는 멀뚱히 서있는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을 그제서야 발견했다. "너희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소녀는 클랜을 획 돌아보았다. "이것들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클랜은 당황하며, "네?" 하고 반문했고 소녀는 한층 더 높아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이것들이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묻지 않느냐?" 클랜은 얼덜결에 말을 늘여 놓았다. "그러니까 여기로 오는 도중에 만난 아이들인데 나가다 일이 생기면 안될 것 같아서 데리고 왔는데요?" 소녀는 차갑게 웃으며 페르노크의 앞으로 걸어갔다. "흐응? 그렇게 잘난척을 하더니만 그껏 나의 탈출에 빌붙는 건가?" 그리고는 손을 번쩍들어 페르노크의 빰을 내리쳤다. -짝. 유쾌하지 않는 소리가 들리며 페르노크의 빰이 조금 돌아갔다. "이정도에서 봐주지." 그리고는 클랜쪽으로 가려는 그녀를 뒤에서 잡아끄는 거친 손길이 있었다. "뭐, 뭐야?" 페르노크였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소녀를 보다가 나머지 손으로 그녀의 빰을 내리쳤다. "건방진 계집이군." 그리고는 자신이 앞서 걸어가 버렸다. 소녀는 처음으로 맞아본 색다른 경험과 생소한 아픔에 눈물을 글렁이며 소리쳤다. "저것을 잡아들여!!" 하인다루듯 명령하는 그녀에게 짜증내는 다른 동료들의 분위기를 눈치챈 클랜이 서둘러 중개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 매매로 곧 사람들이 들어올겁니다. 그러니 이 일은 나가서 처리하시지요." 소녀는 다시 잡힐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서두르기 시작했다. "좋아, 하지만 나가자 마자 저것들을 잡아 들여야 한다?" "이쪽으로." 답을 회피하는 듯한 클랜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던 소녀는 서두르는 그를 뒤쫓아 뛰기 시작했다. 일단은 나가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던 다른 이들은 속으로 이런 결심을 불끈하고 있었다. '잡기는 뭘 잡아! 바로 도망 시켜 줄 테다!!' ========================================================================== 뜻밖의 인연이 생겼지요? 페르노크와 '곤크' 용병단과의 첫 대면이네요^^ 아르는 이미 초장부터 만났는데 말이에요^^ 제가 요즘 몇일간 밤을 새다시피하면서 글을 새벽부터 올렸어요^^ 그러다 오늘은 푹 잤는데요 덕분에 아침에 들을 못 올렸지요^^ 하루한회 연재가 깨진거냐는 멜들이 겨우 깨어난 제 눈에 들어오더군요^^ 제 답은 이겁니다^^
번  호 : 19490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22일 23:04 
등록자 : KREUZ1           조  회 : 158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2                                      
                          
[연재] 아해의 장-122 2001/06/22 03:38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95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한편, 먼저 나온 페르노크는 미처 보지 못했던 방을 발견했다. "뭐냐?" 궁금한 마음에 슬쩍 열어봤다. 방안에는 노예들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단검이나 옷가지들이 보였다. 바로 잡혀 들어온 녀석들을 제외한 '상품'들은 '포장'을 당하기 때문에 이런 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 단검?" 돈은 상관없지만 호화로운 단검등은 추적의 덜미를 잡힐 수도 있었다. 때문에 팔 때 단검 값까지 합하여 팔아 버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 속사정까지야 알지는 못하지만 일단 들어가서 그것을 집어왔다. 옆에 요크노민의 검도 보였다. 요크노민의 검은 겉보기에는 싸구려였기 때문에 뽑아보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뽑아 보았다면 부르는 게 값인 마법검을 이런 곳에 버려 둘 리 만무했다. 페르노크는 그것도 집어들었다. 그리곤 병사에게 빼앗았던 검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요크노민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 그만 나와." 페르노크가 나오자 다른 이들은 서둘러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클랜이 넌지시 물었다. "뭐냐?" "저희 검입니다." 그리고는 요크노민에게 그의 검을 건냈다. 요크노민은 내심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지라 반갑게 받아 들었다. 클랜은 호화로와 보이는 페르노크의 단검을 보고 조금 놀랐다. '혹시 귀족이라도 되는 건가……? 설마……그렇다면 용병들에게 존대를 할 리가 없지. 그냥 주어온 걸거야.' 뛰어가던 그들의 앞쪽에서 많은 인기척이 들렸다. 다음 매매를 위해 '상품'을 가지러 오는 모양이었다. "쳇." 클랜과 동료들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능숙한 대처를 했다. 재빨리 벽으로 붙었다는 소리다. 클랜이 귀족영애를 챙겨서 같이 벽으로 붙었는데 상황파악 못하는 소녀는 크게 호통을 쳤다. "지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클랜이 재빨리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앞에서 빨리 뛰어오는 소리와 더불어 검을 뽑아드는 음향까지 나는 걸 보면 말이다. "멍청이." 짧게 페르노크가 내뱉은 말에 주위에서 열렬히 호응하는 기색을 보였다. 입이 막히자 바둥거리던 귀족 영애는 검을 뽑아든 무리들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제서야 안색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헌데 두리번거리는 그들을 보면서 연약한 귀족 영애가 필요이상으로 질렸던 모양이다. "나를 지켜야 한다, 너희들!" 설마 상황파악이 가능하고도 소리를 내겠냐는 생각에 입을 막았던 손을 뺐던게 화근이었다. 파랗게 질린 클랜과 그의 일행이 영애를 살벌하게 노려보았지만 영애는 감히 자신에게 추파를 보낸다며 다시 화를 버럭 내려 했다. 하지만 클랜이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기에 그런 소동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미 때는 늦어서 완전히 발각 됐지만 말이다. 하지만 클랜이 막고 싶었던 최악의 사태는 막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동료들이 완전히 열 받아서 영애를 내버려두고 그냥 가버리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현 '곤크' 마스터는 상당히 자존심이 강해서 이런 취급을 당한다면 신용이고 뭐고 그냥 버려 두고 와서 뭐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클랜의 이런 행동은 영애 쪽에서 본다면 상당히 고마운 것이었다. 하지만 입을 막은 손을 전투를 위해 클랜이 빼자 영애가 한 행동은 상당히 배은망덕 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단숨에 돌아서 클랜의 다리를 걷어 찬 것이다. 키가 압도적으로 큰 클랜의 빰은 영애의 손 높이로는 감히 칠 엄두를 못 냈기 때문에 다리를 걷어찬 듯 싶었다. 평소 그녀는 자신을 불순하게 보는 천박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었다. 단숨에 하인들을 불러 그 천박한 자의 몸뚱이를 가죽채찍으로 내려치기를 꺼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적진(?)에서 자신을 구해주려는 자이기에 이 정도에서 끝내주는 거였지만 당한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한 행위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순진해 빠져 놀림을 당하는 클랜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타격을 입은 것은 자존심이 아닌가? 클랜은 내심 이를 갈았지만 때와 장소를 구분할 줄 아는 이였다. 게다가 자신이 대놓고 으르렁거린다면 십이면 십, 영애 따위는 버리고 가자고 동료들이 들고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착한 클랜으로서는 험한 꼴을 당할 것이 분명한 영애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클랜의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영애는 자신쪽으로 달려드는 경비병을 보며 비명을 질러댔다. 클랜은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비명소리에 잠시 그녀를 기절시키는 것에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보았지만 워낙 상황이 다급했기 때문에 행동까지는 가지 못했다. 경비병의 수는 다섯으로 생각보다 적었다. 클랜과 두 동료외에 그들의 부하인 세명의 부하만 참전하더라도 여섯이기에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그들은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이번 마찰이 문제가 아니라 소란을 듣고 달려올 이차 원군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주 빠르게 그들을 기절시키고 있었다. 어중간히 타격을 입혀면 그 아픔에 내지르는 비명에 지원군이 더욱 빨리 올 것이기 때문이다.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은 가만히 구경만 했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워낙 용병들의 신속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페르노크는 잠시 역할분담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아직도 비명을 유감없이 지르며 적들을 부르고 있는 귀족영애를 돌아 보았다. "시끄러워." 귀족 영애는 차갑게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천박한 자'가 있었다. 귀족 영애는 두려움이고 뭐고 다 잊고 샛된 고함을 질렀다. "감히 네가……!! 뭐하나? 어서 이 것을 잡……!" 하지만 그녀의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페르노크가 은장도를 지긋이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 "뭐, 뭔가? 나, 나를 위협하려는 건가?" "글세." 그러면서 그녀에게 다가서는 페르노크의 모습은 과히 살벌하다 할 수 있었다. "어쩔까?" 그러면서 그녀의 목에 은장도를 갖다 붙이는 페르노크의 모습은……. "페르, 강도같아." 요크노민이 조용히 평해 보았다. 페르노크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면서도 은장도를 거두지 않았다. 적어도 이것을 갖다 붙이고 있을 때는 조용한 것이다. 그새 이미 경비병을 처리한 용병들은 짜증나는 귀족 영애를 처리(?) 해준 페르노크에게 고맙다는 시선을 유감없이 보내고 있었다. 일이 종결되고 페르노크가 은장도를 걷어내자 귀족 영애는 떨던 몸을 추스리며 소리쳤다. "감히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나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 페르노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앞으로 뛰어갔다. 밖에서 이미 자신 때문에 난리가 난 듯 하니 서둘러 나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와 목적은 다르더라도 빨리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것은 같았던 용병들도 매우 긴밀하게 움직였다. 덕분에 곧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제 저희는 가봐야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페르노크가 공손하게 클랜에게 말했다. 클랜이 웃으면서 잘 가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귀족 영애가 얼른 끼어 들면서 소리질렀다. "도망 치려는 거냐? 내 너를 어버지께 끌고 가 여짓껏 일을 다 말씀 드릴 것이다!" 그러면서 클랜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이 자들을 잡아 들여 나와 함께 아버지께 가자." 클랜은 매우 짜증난다는 얼굴을 유감없이 내보이며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페르노크가 더 빨랐다. "이 계집의 아버지는 어디 있습니까?" "어? 어. 그러니가 이번 '자하라'가의 파티에 초대받아서 그곳으로 갔는데……." "그럼 근처군요? 길을 몰라 그러니 그곳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서둘러 가봐야 하는 마당에 일일이 길을 물어가면서 가기엔 시간이 너무 걸렸다. 때문에 안내를 부탁한 것이지만 내심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면 귀족 영애가 보일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신분에 모든 프라이드와 체면, 자신감등을 걸고 있는 여자니 상당히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리라 생각됐던 것이다. 클랜은 자신이 곤란함에 처하자 도와주고자 하는 소년의 마음에 깊이 감동했다. 물론 헛물 켠거지만 말이다. "그건 안돼,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 속삭이는 클랜을 보며 페르노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수 있었다. "진짜 그곳으로 가봐야 해서 그럽니다. 부탁이니 안내 좀 해주세요." 클랜은 단호한 페르노크의 자세에 별수 없다는 얼굴로 앞장 서 걸어갔다. 요크노민은 상당히 재미있다는 눈으로 클랜을 보았다. 그러다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재미있긴 하지만.' ====================================================================== 오늘은 새벽에 올립니다=.= 배가 고픈데 졸렵군요. 하지만 배가 너무 고픕니다......(고민...) 밥을 먹으면 적어도 세시간동안은 자지 말아야 되는데 졸렵고 자자니 너무 배가 고픕니다...... 이럴땐 어쪄면 좋을까요? 하암..........ㅡ.ㅡ;;;
번  호 : 19512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23일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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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3                                      
                          
[연재] 아해의 장-123 2001/06/23 02:18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79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자하사'가의 저택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 있었다. 정원을 헤집고 다니는 소란스런 경비병들의 움직임으로 제대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내가 설마하니 정원에서 길을 잃었을라구……." 페르노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워낙이 작은 목소리였는데다가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에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귀족 영애는 꼿꼿이 든 얼굴에 오만을 한가득 담고서 그 안으로 발을 디뎠다. 하지만 경비병으로 보이는 이들의 제지에 그 걸음은 단 두 걸음도 이어지지 못했다. "누구십니까? 이곳은 '자하라'가문의 개인 저택입니다.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귀족 영애는 오만한 눈동자 그대로 인상을 약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는 「자르카」가의 영애다. 아버님을 뵈러 왔으니 물러나라." 경비병은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십니까? 신분을 증명할 물건이 있으신지요?" "뭐라고?" "죄송합니다만, 이곳은 개인 저택입니다. 다른 귀족을 만나러 오신 것이라면 그 분의 저택을 이용하시지요. 또, 가족이라면 응당 초대권이 있을 실 테지요?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모멸감에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을 늘여 놓았다. "무, 무슨 소리냐? 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 무슨 신분증이 필요하단 말이냐? 아버지를 뵈면 내 신분은 당연히 들어 나는 것을!" 경비병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눈은 싸구려 창녀를 보는 듯했기에 귀족 영애는 더할나위 없이 불쾌했다. 경비병은 귀족 저택을 담당하면서 그네들이 사창가에서 하루 노리개로 삼았던 창녀들을 심심치 않게 상대해 왔다. 도도하게 나타나 상대했던 귀족들을 부르면서 가정의 화목을 깨고 한자리 차지하려는 그녀들을 많이 봐왔던 그였기에 자연히 눈초리가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가만히 있던 페르노크가 평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 외출을 했습니다. 이만 들어가 봐야겠군요. 비켜 주시겠습니까?" 귀족 영애는 울분을 페르노크에게로 돌리며 매섭게 쏘아 붙였다. "네가 감히 어디를 함부로 들어가겠다 말겠다는 거냐? 이곳이 천것 따위가 드나들 ……." 미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경비병은 화들짝 놀라며 고함을 질렀다. "돌아오셨다!!" 마침, 그는 페르노크가 나갈 때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까지 하면서 문을 열어 주었던 경비병이었던 것이다. 황급히 굽신 인사를 하며 문을 여는 경비병과 살짝 목례를 함으로써 인사를 한 페르노크를 번갈아 보던 클랜들과 귀족 영애를 뒤로하고 요크노민이 뒤따랐다. 페르노크는 귀족 영애를 잠시 돌아보며 말했다. "아버님 성함을 말씀 주시면 불러 드리지요." 얼굴이 새파래진 그녀를 힐끔 보며 너무나 공손한 태도로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장난기가 가득 머금어 져 있었다. 그녀의 뒤로 확실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분위기로 대충이나마 파악 한 용병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귀족 영애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다가 곧 눈물까지 글렁이며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대려 했다. "자, 자르카. 브……."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녀를 알아보는 이가 나타났다. "이라즈!!" 그녀는 순식간에 울음을 터뜨리며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자르카 공은 단숨에 그녀를 안아 들며 반겼다. "이것아, 겁도 없이 어딜 나가니. 내 그 마법 반지, 사주마. 사주면 될 것 아니냐." "으앵, 아버지. 저 것들이 마구 때리고 욕하고……훌쩍……으앙!" "뭐라고!?" 단숨에 눈을 부리며 용병들을 노려보는 아버지에게 이라즈는 냉큼 또 일러바쳤다. "또 저 경비병은 아버지 만나러 왔다고 했는데도 무슨 잡상인 취급하며 내쫓았어요!" 가장 만만한 것이 경비병이라 단숨에 자르카 공의 분노는 그에게 쏟아졌다. "네 눈이 썩은 것 같으니 내 도려 내주마!" 경비병은 파랗게 질려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자르카 공은 전혀 듣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한 걸음 나와서 짧막하게 말했다. "이 경비병의 눈을 도려내라고 하셨습니까?" 자르카 공은 건방지게 나서는 꼬마를 힐끔 보며 사납게 짖어댔다. "네 차례는 이 것 다음이다, 저리 박혀 있어라." 페르노크는 다시 평이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도려내려 하시는 지요?" "봤으되 모르는 걸 보니 썩은 거다! 친절을 베풀어 친히 환부를 도려내 주겠다는 거다!" 자르카 공의 말을 들은 페르노크는 뒤에서 떨고 있는 경비병을 힐금 보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뭐?" "이 분의 눈은 정상이니까요." 자르카 공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페르노크를 노려보았다. 클랜들은 이미 페르노크가 귀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명문집안인 자르카 가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때문에 안타깝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주위에서 단숨에 달려오고 있는 병사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헛소리냐?" 자르카 공의 고함에 페르노크는 태연히 답했다. "저는 알아봤거든요." 자르카 공이 분노에 몸을 떨며 마침내 페르노크에게도 검을 대려 했을 때였다. "페르!!" 귀에는 익지만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목소리였기에 자르카 공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그가 생각한 목소리의 주인공과 다가오고 있는 청년은 동일 인물이었다. 그의 출현도 기가 막힌 데 뒤에서 그에 응하는 소년의 말 또한 걸작이었다. "아, 형님." 페르노크는 차갑게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는 테밀시아를 지긋이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설핏 웃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은 처음 알았다. "죄송합니다. 축제구경을 갔는데 일이 생겨서요."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단어를 테밀시아는 놓치지 않았다. "일? ……혹시 암살자라도……?" "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구요." 그러면서 몸을 반쯤 돌려 벙쪄 있는 클랜들을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저분들이 도와주셔서 살았습니다." 귀족과 연관관계가 많은 '곤크'의 용병, 클랜과 그의 동료들이 당대 세력가인 '오르세만'가의 실질적인 가주 테밀시아를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그의 바로 밑 동생의 얼굴까지는 모르더라도 그 명성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달의 요정에게서 받은 것이라 칭하는 부드럽고 고운 은발, 짙디짙은 녹색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 소개를 잊었군요. 제 이름은 페르노크이고 이쪽은 저의 친구, 요크노민입니다." "페, 페르노크?" "네?" 더듬거리는 클랜일행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페르노크의 귀에 별로 달갑지 않은 호칭이 들어와 버렸다. "'희대의 천재'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 '희대의 천재'라……. 당장에 얼굴이 굳어버린 페르노크였지만 워낙이 표정이 없었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이는 없었다. "에……또……'희대의 천재'는 몰라도 제가 페르노크인건 맞습니다." 그러다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경비병을 발견한 페르노크는 아차, 하며 자르카 공을 돌아 보았다. "이제 제 말을 알아 들으셨습니까?" 하지만 자르카 공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였던 모양이다. 그 냉혹하기로 소문난 테밀시아가 있음에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그 대상이 테밀시아가 아니라 페르노크였기에 가능한 것이었겠지만.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나의 지체가 낮아 경비병이 못 알아 본 것이니 남 탓하지 말라는 건가?" 싸늘한 가시가 잔뜩 박힌 말을 태연히 받아 들며 다시 튕겨 보내는 신기를 보여주는 페르노크였다. " 전 아비의 지체에 빌붙지 않습니다." 철모르는 이라즈가 당장에 쏘아 붙였다. 앞의 테밀시아에게 상당히 위축되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여력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볼품없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은 거라고 말하려는 거냐?" 하지만 그녀는 막상 내뱉아 놓고 후회를 해야 했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이에게 마구 하대를 하다니. 이라즈는 테밀시아를 힐끔 보며 눈치를 살폈다. 원래 차갑게 굳어 있었던 테밀시아의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페르노크는 더 이상 떠들 가치를 못 느꼈기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무성의하게 답해 주었다. "아주 바보는 아니군." 말귀는 알아듣는다, 를 아주 가분 나쁘게 돌려 말하는 페르노크였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이라즈가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얼른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내 딸이 자네에게 누를 끼친 것 같구만." "모두에게 민폐를 끼쳤죠." 그러면서 자신들을 보는 페르노크에게 주춤거리긴 했지만 만족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클랜들이었다. "말발 끝내주는 데?" "크크, 역시 말싸움 구경은 재미있다니까?"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할 때가 구경의 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숙덕대는 동료들의 말소리를 들으면서 클랜도 내심 인정했다. '정말 말 잘한다.' 자르카 공은 약간 굳은 웃음을 띄면서 사과를 했다. "미안하게 됐네. 자식 교육을 잘 못 시킨 나의 탓이니, 나를 봐서 그만 용서해주지 않겠나?" "저한테 사과하실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라즈 영애께 맞은 따귀는 제 손으로 갚아 주었고 이라즈 영애 덕분에 적에게 들켜서 일을 그르칠 뻔한 것은 저쪽 용병님들이 해결해 주셨으니까요." 딱딱한 어투에 공손한 어휘, 가시 돋친 의미를 함축한 이 말에 자르카 공은 더 이상의 대화의 여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딸의 손을 잡은 뒤 '자하라' 가의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 낄낄대는 용병들이 있다는 건 알지 못했지만 알아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클랜이 유쾌하게 말을 꺼냈다. "그럼 임무 완성이니까 남은 돈으로 술이나 거하게 하자구!" "크하하하! 이 순간을 위해 잠입에 침입에 난입까지 했다는 거 아니겠어!" "흐흐, 대외적으로는 경매로 산 것으로 되어 있으……." 재빨리 함부로 나불대는 동료의 입을 틀어막은 클랜은 사라진지 오래인 자라카 공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멍청이! 일을 그르칠 뻔했잖아!!" "술은커녕 이번 급료까지 날라갈 뻔했잖아!!!!" "크윽……미안하다구. 흥분을 했더니만." 페르노크는 그들의 대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듣고 있다가 점점 짙어지는 의혹을 참을 수 없어 물어 봤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대외적으로는 경매로 산 것으로'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뜻밖의 적(?)을 만난 그들은 쭈빗 굳어서 눈치만 살폈다. "흐음……. 또 제가 잘 못들은 게 아니라면 그 '창고'에서는 '체면'이 어쩌고 하시면서 별도 비용을 받지 않으셨던 걸로……." "크악!! 돌리지마! 간 떨려서 못 듣겠다!" 클랜이 발작을 일으키자 페르노크는 다시 피식 웃어버렸다. 요크노민도 마찬가지였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가, 클랜이라는 남자는. 클랜은 발작의 여파를 더해 페르노크의 어깨를 덥썩 잡고는 애절하게 말했다. "우리는 술에 목숨을 건 남자란다. 너도 남자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 이건 사나이들의 로망이다!!" '죄송하지만 남자가 아니여서 모르겠습니다.' 페르노크의 눈에 잠시 씁쓸한 빛이 스쳐지나갔지만 클랜은 그것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목숨을 버렸다!! 사나이로써 네가 발설하지 않을 것을 믿겠다!!" 그리고는 횡하니 거리저편으로 뛰어가 버렸다. 클랜에게 가려져 보지 못했지만 그의 동료들도 이미 슬금슬금 내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편에서 클랜에게 손짓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페르노크는 다시 핏 웃다가 뭐가 생각났는지 클랜을 부르며 그에게 뛰어갔다. 따라오는 추적자(?)를 확인한 클랜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축 늘어져서 그에게 다가갔다. 페르노크는 그 모양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서둘러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검집 체 빼든 페르노크는 그것을 클랜에게 건넸다. "도와주신 보답입니다. 그럼."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뛰어가는 페르노크를 조금 멍하니 보던 클랜은 슬그머니 단검을 뽑아 보았다. "앗!?" 눈을 비비고 다시 검을 살폈지만 그가 확인한 바는 바뀌지 않았다. "이, 이봐!!" 다급히 페르노크를 불렀지만 그는 한번 뒤를 돌아보며 목례를 꾸벅하고는 다시 뛰어갈 뿐이었다. 클랜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결국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내 이름은 클래너. 카. 곤크. 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곤크'로 와라!!" 페르노크는 한번 뒤를 힐끔 봤을 뿐 아무 제스처 없이 가버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 클랜이었다. 의아함을 품은 동료들이 다가와 물었다. "뭐야, 클랜?" "크크크." "크, 클랜?" 클랜은 키득거리다가 눈을 번쩍 뜨며 앞에 있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다. "마법검이야!! 마법검이라구!! 마법검이라니까?" "으아아아, 이게 미쳤나!!!!" 붙잡힌 이와 붙잡고 있는 이만 빼면 다들 냉정한 이성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차분히 클랜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냥 룬 아이템아냐?" "아니라니까!! 이건 부여 아이템이야!! 마법검이라니까!?" 하며 클랜은 페르노크가 준 단검을 뽑아 보였다. "봐!! 룬 아이템은 양각으로 '룬'이 새겨지잖아. 이건 음각으로 새겨졌다구!! 부여 아이템이라니까!!" 그제서야 단검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던 동료들은 클랜의 행운을 같이 기뻐해 주었다. "으악!! 왜들 때리고 그래!!" "입 닥치고 맞아라." "쿡쿡." 페르노크는 다시 피식 웃었다. 사나이의 로망이라고 공금횡령을 드라마틱하게 포장하며 당당해 하던 클랜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밝은 모습에 덩달아 웃으며 생각했다. '이 정도면……여기 있어도 되지 않니……? 너도……즐거워하잖아…….' ======================================================================== 페르의 이번 이야기는 끝~~~!!!! 에구....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 슬럼프에 걸려 허덕이다가 겨우 마음잡고 썼는데 그 비축분이 날라갔다거나.......ㅠ.ㅠ 크윽........음음.....마음을 가라앉이고...... 출판제의를 받았습니다. 아직은 어떻게 될 지 모르겠군요^^; 그저 기쁘기만 합니다^o^
번  호 : 19528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24일 09:5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0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4                                      
                          
[연재] 아해의 장-124 2001/06/24 05:38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53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태어나 처음으로 소리를 인지했을 때 들린 것은 나를 저주하는 어머니의 음성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촉각을 인지했을 때 느껴진 것은 나를 구타하는 어머니의 손길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시각을 인지했을 때 보인 것은 나를 증오하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물을 인지했을 때 알아 낸 것은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간 황무지였다. 보통 인간들은 태어났을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또 그것이 정상이라고도 했다. 헌데……난 어째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일까……. 잊고 싶음에도……. 내가 버려진 곳은 '버려진 땅' , 인육을 즐기는 몬스터, '멜토르'의 본거지였다. 메마른 테두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늪지가 시작되는 곳…… 절대 인간이 살수 없는 곳. 들어 올 수도 없는 곳. 나는 그곳에 버렸졌다. 나의 친어머니에 의해서. "이런, 이런. 살다 보니 별걸 다 보게 되는군. 이런 곳에서 아기라니……. " 내가 두 번째로 들은 소리는 호기심을 가장한 무심한 음성이었다. 그 누군가는 나에게 다가왔다가 놀라는 음성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갓 난 아기가 아닌가? 그런데 눈을 뜨고 있다니?!" 내가 두 번째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내려다보는 털로 뒤덮힌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내 말을 알아듣는 거냐?" 나는 어떻게 답해 할지 몰랐다. 난 갓 태어난 아기에 불과 했으니까. 그때까지 난 내가 말을 할 수 없음을 알지 못했다. 내 눈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그는 나를 집어들었다. "답은 없지만 알아는 듣는 것 같군." 어차피 한 조각의 천도 없이 버려졌던 지라 나는 새삼 추위나 아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누군지 대단하군. 사지가 비틀렸어. 머리에서 피도 나는군. 이렇게 피가 흐르는데 아직도 살아 있다니 묘한 꼬마구나." 만일 내가 마법사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면 그를 그 생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동정을 하지 이런 식으로 호기심만을 발설하지 않았을 테니까. 놀랍게도 남자는 나의 몸뚱이를 자신의 망토로 싸주었다. 나는 그 때 따뜻함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하지만 그가 내게 준 것은 편안하고 따뜻한 안식이 아니였다. 어찌 보면 몬스터보다도 끔찍하고 위험하며 잔혹한 …… 그런 고통. 그가 내게 준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와 '계약' 하지 않겠나?" "……야……유니야!" 기묘한 주홍빛 눈동자가 얇게 드러났다. 필브리안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일어났다!" 뒤에서 그런 그의 뒷통수를 약하지 않게 내리치는 이가 있었다. 후드로 가려졌지만 아름다운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였다. "뭐하러 깨우냐?" "하지만 밥은 먹어야지요." "자고 일어나면 식욕이 없는 법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한가지에 전념하게 내버려두는 게 좋아." "하지만……." 필브리안은 유니펠스를 깨우던 자세, 즉 유니펠스의 귀 가까이에 입을 갖다대고 있던 자세 그대로 락샤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유니펠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귀가 따가웠던 것이다. '시끄러워…….' 부시시 일어나는 그를 힐끔 보며 락샤사는 필브리안을 끌어당겼다. "자자, 일어났으니까 가서 레이디나 보살펴라. 저기서 널 애타게 보고 있잖냐." 필브리안은 발끈하는 포즈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냉큼 다가온 사라에게 부질없이 끌려갔다. '고맙군.' "천만에." 락샤사는 침대에 걸터앉아 유니펠스의 이마를 집어 보았다. '뭐하는 거지?' "너답지 않게 못 일어나길 레 어디 아픈가 했지. 미열이 있군. 좀 더 쉬겠어? 아니면 뭐든 먹고 약을 먹겠어?" '먹고 자겠어.' "살 찐다구." 락샤사는 피식 웃으면서 유니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니펠스는 다소 어색했던지 멀뚱이 그 손을 보다가 이내 잡고 일어났다. '친절하군, 의외로.' "페르가 아픈 사람한테는 최소한의 친절은 베풀라고 했어. 나중에 돌려 받는 데나? " '돌려 받는다?' 락샤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약간 휘청하는 유니펠스를 부축해 주었다. "나도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뭐, 나쁠 건 없잖아?" 둘이 식당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일행들이 음식을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따로 뭔가 주문하겠습니까?" 이노가 공손히 둘에게 물었다. 필브리안은 둘의 등장을 그제서야 알아차리고 쪼르륵 달려가려 했지만 사라의 날쌘 손동작으로 그러진 못했다. 사라에게 잡힌 망토를 보며 필브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왜 잡으세요?" 사라는 씩 웃으면서 답하지는 않았다. 물론 손을 놔주지도 않았다. 둘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락샤사가 종업원을 불렀다. 그러자 사라가 냉큼 말했다. "사람 먹을 만한 건 시켜 놨으니까 굳이 더시킬 필요는 없다구. 괜히 돈만 들지." 마지막 말은 이노를 노려보면서 마무리 지었다. 노자를 전부 치뤄 주겠다는 말은 이노가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노도 억울했다. 굳이 이 세명을 일행에 집어넣겠다고 한 것은 사라인 것이다 게다가 그전에 시간 없다고 재촉해 댔던 것도 사라였다. 그뿐 아니라 유니펠스가 낸 돈을 받아 챙긴 것도 사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입밖에 꺼내놓는다면 두고두고 걸고넘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락샤사는 사라의 눈 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업원을 굳이 불러 세웠다. "따뜻한 야채 스프 하나랑 사과 하나 갖다 줘." 종업원은 묘한 주문에 의아해 했지만 군말 없이 메모해갔다. 필브리안이 물었다. "사과?" "열 있을 때 좋대." "헤? 누가 열 있어요?" 락샤사는 유니펠스를 힐끔 보았다. 유니펠스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테이블에 엎들여 있었다. 필브리안이 그 모습에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어왔다. "유니, 어디 아파?" 물론 유니펠스는 답이 없었고 필브리안은 글렁이는 눈으로 락샤사를 보았다. 락샤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열이 조금 있어." 사라가 단숨에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내뱉았다. "그러니까 꼬마애는 집에 붙어 있어야하는 거라구. 괜히 고집 부려서 따라 나서면 주변 인물만 고생이라니까." 필브리안이 울컥하며, "유니는 꼬마 아니에요!" 하고 소리쳤지만 사라는 그저 귀엽다며 필브리안의 머리를 부비적 거렸을 뿐이었다. 유니펠스는 시원하게 느껴지는 테이블에 볼을 갖다댄 체 눈을 감았다. ======================================================================== 유니펠스가 어떻게 그 어린나이에 그렇게도 강해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에 대해 "당연히 판타지 주인공 이니까"라고 간단히 정의지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유니펠스라는 녀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괴로움과 그리움, 그의 진짜 강함과 약함을 알아야 할 겁니다. 이유 없이 강할 수는 없는 거지 않겠습니까? 유니펠스는 그 강함을 갖추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리혀 그것도 모자를 수 있겠군요. 유니펠스는 정령도 못 다루고 마법도 못합니다. 오직 검을 휘두를 뿐이죠. 하지만 그는 강합니다. 어머니께 처참히 버림을 받았음에도 당장에 자신의 길을 걸을 정도로 그는 강합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을 버린 친모가 아닌 자신을 사랑해줄 '어머니'를 그리워 하고 있는 거지만요. 그는 겨우 찾은 '어머니'라는 존재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비록 그 '어머니'가 친모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자식'으로써 사랑해 준다는 이유 한가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구하고 따랐지요. 유니펠스가 강해져야만 했던 이유를 좀더 공감해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진짜' 세월을 알아주시길 바라며....
번  호 : 19565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25일 17:03 
등록자 : KREUZ1           조  회 : 165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5                                      
                          
[연재] 아해의 장-125 2001/06/25 10:49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34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와의 시간은 끔찍이도 길었다. 상대적인 '느낌'이 아닌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그가 자신의 '공간'이 바깥보다 두 배정도 느리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몸의 성장이 안의 시간을 따르는 것은 아니였다. 그랬기에 더 길게 느껴졌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곳에서 비틀린 사지를 고치는데 일년을 허비했다. 물론 사지가 멀쩡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몸을 고치는 동안 그는 나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내가 아직 문자를 몰랐기 때문이다. 일년동안 그는 늘 옆에서 책을 낭독해 주었지만 그 것은 흔히 아기들에게 들려주는 우화나 동화는 아니였다. 몬스터들의 종류, 생활습관, 방식, 식성, 버릇, 약점. 왜 그런 것을 읽어주는 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일년동안 그가 읽어주는 책 열 다섯권을 외워야 했다. 각 책들의 두께가 30cm는 되는데다 거대한 방패 만한 크기를 가졌음을 고려하면 그리 적지만은 않은 수였다. 솔직히 그가 그렇게 인내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묘하구나." 무엇이? 나는 눈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때는 이미 문자를 터득하여 혼자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넘기는 것은 하지 못해 그가 나에게 쥐어준 '룬' 아이템을 사용했지만 말이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서 울지 않지? 아무리 이성을 가지고 있어도 대화 수단이 없으면 울 수밖에 없는데……." 나도 알 지 못하는 것을 그라고 어찌 알겠는가? 그때까지도 나와 그는 내가 말을 하지 못함을 알 지 못했었다. 그저 내가 아직 아기라 말을 못하는 것이고,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어 울지 않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내가 몸이 나았을 때, 그리고 걷는 다는 것이 뭔지 알게 됐을 때, 그는 나를 지하에 가뒀다. 바닥은 온통 자갈투성 이었는데 자갈은 거칠다 못해 뽀쪽하고 예리했다. 그리고 너무나 뜨거웠다. 한곳에 오래 발을 디디고 있으면 그 뜨거움에 날 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날뛰는 동안에 발 따위가 가차없이 으깨져 버렸다. 극심한 고통에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막 울고만 싶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어머니란 존재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이 너무 슬퍼서……그럼에도 그리워서……그냥 울고 싶었다. 헌데 눈물은 나와 주었지만 '울음'은 나와 주지 않았다. 목에서 막혀 나와 주지 않았다. 그 막힘에 가슴 쪽으로 되돌아간 '울음'은 다시 나의 숨통을 옭아 매겄만 끝내 나와 주지 않았다. 그 때, 난 처음으로 포기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말'이라는 것을 입에 담으려 시도해보았다. 그때서야 언어를 머리 속으로 알고 있는데도 입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잘못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지 않았다. 말도 울음도 ……그 어떤 소리도 내 목을 통과하지 못했다. 짧은 신음소리만이 나와 그 어두운 공간을 조금 메웠을 때의 절망감이란……. 울었다. 어머니의 나를 증오하는 얼굴을 보았을 때 이후로, 처음으로 울었다. 짐승의 울음소리만도 못한 신음성을 흘리며 울었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나는 눈물만 흘렸을 뿐, 소리내 울지는 못했다. 왜 그때는 그것이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전에 울었을 때는 눈물보다는 피가 입으로 들어와 몰랐었는데, 그때서야 눈물이 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갑지 않은 '배움'이었다. 눈물이 자갈에 떨어져 묘한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는 것을 그때는 보지 못했다. 그곳의 뜨거움으로 인한 땀과 새로움 '깨달음'으로 인한 눈물로 탈진해 기절했던 걸로 기억한다. 또한 깨어났을 때의 변함없는 어둠과 열기도 기억한다. 빛 한줄기 새어들지 않는 그곳에서 그는 가끔씩 음식을 주러 왔을 뿐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 어디다 발을 내딛어도 가차없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흘렀다. 그럼에도 뜨거움에 다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피가 너무 흘러 과다출혈로 기절했을 때,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내려와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그후 내 몸에 녹색 빛이 스며들었고 고통이 가셔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리커버리」, 치료마법이었다. 더 나중에 알았지만 현 대륙에서 치료마법을 할 줄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그는 내 생각보다도 대단한 인물이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정신이 들기도 전에 그는 다시 나가 버렸고 나는 그곳에서 견뎌내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곳에서 가볍게 이동 할 수 있게 됐을 때 그가 내려왔다. 그는 그 어두운 곳에서 빠르고 정확하고 소리 없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가차없이 구타했다. 나는 처음엔 반항할 생각이 들기도 전에 기절을 했었다. 깼을 때는 , 이미 몸은 치료가 되어 있었다. 내가 깸을 안 그는 다시 공격해왔다. 나는 맞고 기절하고, 맞고 기절하고를 반복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예고 없이 나에게 다가와 때렸고 내가 쓰러졌을 때는 기척 없이 물러났다가 슬그머니 다가와 때리기를 반복했다. 그 동안 밥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 그럼에도 뜨거웠기 때문에 땀이 마구 흘렀다. 탈진과 고통으로 기절했다가 그의 마법으로 일어날 수 있을 정도만 치료 되,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보통 인간이라면 이미 죽었을 터인데 어떻게 내가 살아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만은 확실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기진맥진이 되고 죽기 직전이 됐을 때야 나는 그의 주먹을 처음으로 피할 수 있었다. 그는 그제서야 나에게 물과 음식을 주었다. 하지만 휴식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음식을 먹음과 동시에 나를 구타했고 나는 다시 맞아야 했다. 한가지 나를 지탱시켜 주는 것은 그에게 맞다가 기절하는 간격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 또한 그의 갑작스런 기습 공격을 피하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 그것은 맞는 요령이 생김과 동시에 맷집이라는 것이 는다는 뜻이었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나의 '육감'이 는다는 뜻이었다. '육감'은 살아가기 위해 가장 절실히 필요한 감각이라고도 했다. '육감'이 극도로 발달된 사람은 예언자가 되기도 한다고도 했다. 그는 나에게 '때리는 법'을 알고 싶으면 '맞는 법'을 깨달으면 된다고 했다. 또한 '피하는 법'을 알고 싶으면 '육감'을 키우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때리는 법'과 '피하는 법'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 생각으로 얼마나 지났는 지도 모를 시간을 버텼다. 뜨거움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기에 차라리 맞고 기절이나 하고 있을 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했었다. 이미 시간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에 나는 세월을 세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던 모양이다. 내가 그의 곁을 떠날 때 나의 나이가 몇 년, 몇 달, 며칠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던 걸 보면 말이다. 지하에서 그렇게 맞고 기절하고 피하면 밥을 얻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뜨거움이 나에게 '괴로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 뜨거움은 서서히 나의 몸 안에 들어와 고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의 안의 뜨거움이 더해졌을 때, 점차 굶는 일이 드물어 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를 때릴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소리로 어디서 공격이 들어오는지, 어느 정도 강도인지, 페인트인지 정공인지, 발인지 손인지를 알 수 있었고 또 경험으로 어디를 맞으면 더욱 아픈지, 어디를 가격하면 호흡이 곤란한지, 기절을 하는지, 아프고 휴울증이 없는지 등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알게되니 공격을 넣는 것은 쉬웠다. 게다가 시야가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 족히 계속 지내다 보니 청각이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좀 더 나중에는 그 빛 한줌 없는 곳에서 사물을 뚜렷하게 구별 할 줄도 알았다. 그는 약하게나마 한 대를 맞고 나더니 그날은 위로 올라가 음식을 가져왔을 뿐, 다시 훈련을 하지는 않았다. 무척 달콤한 시간이었다. 이미 나에겐 자갈바닥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던 터라 나는 처음으로 쭉 누어서 자보았다. 무척 편했다. 늘 긴장해야 하기에 벽에 붙어서 쭈구리고 선잠에 들었던 것에 비하면 비단 침대와 다를 바 없었다. 한참 자다가 왠지 모를 한기에 눈이 떠졌다. 본능에 따라 몸을 굴렸는데 내가 있었던 곳에 정확하게 무언가가 꽂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도 퍼런 서슬을 뽑내고 있는 단검이었다. "큭큭……대단하군. 일단 통과다." '육감'에서도 통과를 했다는 뜻이었다. 그 뒤 그는 매일 나에게 검을 휘둘렀다. 여지껏과는 전혀 다른 속도가 나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알려주었다. 물론 그 동안의 훈련이 있었던 터라 대부분 스치기만 했지만 그 아픔의 강도는 여지껏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상처가 생겼다고 해서 중단하고 치료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훈련이 끝난 뒤 나에게 약초를 던져주며 어디서 자라는 것인지, 약으로 쓰일 때의 시기는 언제인지, 독으로 쓰일 시기는 언제인지, 먹는 것인지, 바르는 것인지, 찰과상에 쓰이는지, 으깨서 쓰는 건지, 쪄서 쓰는 건지, 달여서 쓰는 건지, 내상에 쓰이는지, 해독으로 쓰이는지 등등을 소상히 알려주고는 나에게 눈으로써 모양을 기억하게 하고 코로써 향을 기억하게 했고 손으로써 감촉을 기억하게 했다. 그리고는 유사한 독초들과 뒤섞어 던져주고는 사라졌다. 나는 그것들을 간신히 가려내서 몸을 치료했으나 처음에는 독초를 잘 못써서 죽기 직전에 가서야 그에게 구원을 받기도 했었다. 매일매일 약초를 달리했고 독초도 달리했다. 내가 약초와 독초를 완벽하게 구별하게 됐을 때부터 그는 나에게 독초의 쓰임까지 알려주었다. 내가 몸으로 직접 알아냈던 것도 있던 터라 약초의 배움보다는 독초의 배움이 잘 와 닿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새로운 배움에 대한 집착이었던 것 같다. 점차 그의 구원을 받는 시간이 뜸해졌다. 그리고 몇 달이라 생각되는 시간동안 단 한번도 그의 구원을 받지 않았을 때, 나는 그의 검을 잡아서 막고, 발 걸기로 그를 넘어뜨릴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얼마 만인지 기억은 못하지만 무던히 오래있었던 그 지하에서 데리고 나왔다. ====================================================================== ...........ㅡ.ㅡa .......용케 살아 있지요?
번  호 : 19648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28일 21:05 
등록자 : KREUZ1           조  회 : 13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6                                      
                          
[연재] 아해의 장-126 2001/06/26 07:02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33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식사 나왔습니다!" 유니펠스는 멍하니 눈을 뜨고 앞에 놓여진 스프를 보았다. 입맛이 돌지 않았지만 식욕이 없다고 해서 먹을 것을 마다할 정도로 그는 귀하게 크지 않았다. 간간히 떠먹던 유니펠스는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억 한켠에 고이 쑤셔두었던 유년시절이 자꾸만 떠오른다는 것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니 불안해하는 건지도 몰랐다. "괜찮아, 유니?" 필브리안이 사라에게 붙잡혀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영 신경이 쓰이는 듯 자꾸만 물어댔다. 락샤사는 차라리 필브리안이 사라에게 잡혀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저 철없고 기본 배려라는 것을 모르는 귀족도령이 자유의 몸(?)이라면 유니펠스가 제대로 숨쉴 틈도 없이 시끄럽게 굴테니 말이다. 환자에게 안정이 제일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순간 락샤사는 진실로 필브리안이 그 걸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필아,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지?" 필브리안은 걱정스런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답했다. "좋은 약과 주의의 보살핌이요!" "틀렸어. 휴식과 안정이야." "에? 그런가요? 하지만 제가 아플 때는 모두 옆에서 한시도 안 떨어지고 괜찮습니까? 하고 몇 번이나 묻고 묻고……그러던 걸요?" "그래서 편했냐?" 그제서야 필브리안은 아, 하는 얼굴로 미안한 듯 유니펠스를 힐끔 보았다. 유니펠스는 맺히는 땀을 닦아내며 작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지러운지 한쪽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몇 번이고 머리를 흔들어 대는 모양이 보기 안쓰러웠다. 필브리안은 냉큼 다가가 유니펠스 옆에 앉고는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앗!" 자기도 모르게 짧게 소리를 질렀다가 제풀에 놀라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 필브리안이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락샤사에게 말했다. "샤, 열이 아주 높은 데요?" 락샤사는 그러냐?, 하면서 유니펠스의 이마를 집었는데 불과 몇 분 새에 열이 심하게 높아진 것을 알고 놀라며 말했다. "이봐, 억지로라도 먹어.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으니까." 유니펠스는 끄떡이면서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혹한의 추위에서도 태연히 야영을 하며 살아왔던 유니펠스가 고작 며칠의 강행군으로 지칠 리가 없었다. 그것도 여름에 하는 행군이 아닌가? 락샤사는 잘은 모르지만 유니펠스의 마음속에서 간혹 떠오르는 '이번엔 쉽게 가는군.' 이란 말을 들어 왔기 때문에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유니펠스는 겨우 스프 한 접시를 비우고 위로 올라가겠다고 일어났다. "가서 자고 있어. 약을 지어 올 테니." 락샤사는 필브리안에게 조용히 부축만 하라고 지시한 뒤 식당을 나섰다. 이노가 그의 뒤를 따랐다. "같이 가죠!" '광녀'와 별로 함께 하고 싶지 않았던 그의 다른 일행은 식사를 마저 하면서 내심 투덜거렸다. "이래서 애들이랑 다니면 안 된다니까." "잘 따라온다 했더니만……." "에리하 양은 저 두 분과 계속 함께 여행을 하셨습니까?" 같은 검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써 에리하에게 경의감을 품었던 이노는 막상 둘만 있게 되자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런 이노가 간신히 내뱉은 말에 락샤사는 무척 성의없는 답변을 해주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네?" 핏 웃으며 락샤사는 고개를 돌렸고 이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했다. "만일 내가 저녀석들과 함께 여행을 해왔다면 어쩔거지?" 이노는 뜻밖에 말을 걸어오는 락샤사를 동그랗게 뜬눈으로 보다가 헛기침을 한번 했다. "처음부터 여행을 함께 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뭐?" 락샤사는 짜증난다는 눈초리로 이노를 쳐다보았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락샤사에게는 이런 빙글빙글 화법은 맞지 않았다. 때문에 그냥 이노의 마음을 읽고 그냥 먼저 대답해 버렸다. "알았다." "네?" 이번에는 이노가 당황했다. 뭘 알았다는 건가? "필말이야." 이노는 더욱 당황했지만 락샤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여자는 그 순진하기만 한 소년이 정당한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단 두 명뿐인 황자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그럼에도 그렇게 대해 왔다는 건가? 당혹해 하던 이노는 락샤사가 갑자기 멈춰 서자 뭔가 하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락샤사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나 있는 숲이 있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보니 나무 사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직은 풋내가 나는 남자였지만 탄력있는 근육과 거침없는 검놀림이 그 점을 커버해주고 있었다. 이노는 이 여자 타입이 인가,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 남자를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한치의 변함이 없었기에 그런 생각은 접어야 했다. 락샤사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상하다……?" "네?" "흐음……." 락샤사는 몸을 돌려 마을 사람이 알려준 약방으로 향했다. 이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입니까?" "저 녀석……웬지……아냐, 착각이겠지." 그리곤 입을 다물어 버리는 락샤사에게 이노는 더 묻질 못했다. 유니펠스는 자꾸만 옛일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돌아봐도 즐거웠던 기억 따윈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납득이 가질 않는 것이다. 왜, 자꾸 떠오르는가? 눈을 감고 지끈거리는 머리의 고통에 힘들어하면서도 스륵, 잠들어 버리는 유니펠스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감각 따위는 전혀 없다가도 어느 날 자란 몸뚱이를 보며 생각을 해봤다. ……'바깥'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지하를 나온 뒤, 한 것은 별거 아니였다. 훨씬 더 날카롭고 훨씬 더 위험한, 온 바닥이 바늘로 뒤 감싸진 방안에 갇혔을 뿐. 여전히 어두웠고 여전히 살벌한 방안에서의 생활은 뒤에서 나를 사정없이 밀어버린 그의 손길부터 시작했다. 물론 잽싸게 피했지만 문제는 바닥의 생소함. 나는 걷는데 온 신경을 써야만 했다. 또한 그 바늘들은 아파 올 정도로 차가웠다. 자갈밭에서 단련이 된 바가 있었던 지라 조금만 주의한다면 바늘의 위를 걸어 다닐 수는 있었지만 그 차가움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내 안의 열기와 바늘에서의 한기에 몸 안이 뒤틀리는 듯, 아파 왔지만 그는 나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두려움은 없었다. 고통스러웠을 뿐이다. 간혹 공격을 성공시킬 때에도 그는 나와는 달리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는 바늘 위에서 평지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해야 본능으로 움직이고 감각이 예리하기 짝이 없는 몬스터들에게 걸리지 않고 다가갈 수 있다고 했다. 몬스터를 죽이는 것은 멀리서는 불가능하다고, 전에 나에게 암기시킨 약점만이 그들을 '프로'로서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몬스터 헌터'라는 것을 밝혔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지는 몰랐지만 정말로 강한 족속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중에 세상을 나와서 그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을 때는 무척 당황스럽고 실망했지만 말이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바늘 위에서의 훈련 중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가 더 이상 나에게 마법을 시전해 주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상처는 보통보다도 심각한데 그는 나에게 아무런 것도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전에 던져주었던 약초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살아 남았을까? 나의 머리속에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치료마법을 쓴다면……? 저번 지옥에서 질릴 정도로 들어 왔던 주문이 아닌가? 질릴 정도로 봐왔던 마법이 아닌가?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가 했듯이 두 손을 내뻗어 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고통에 정신까지 이상해 진 것인가? 나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봐도 주문은커녕 비명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다. 절망했다. 삶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이러다 죽는 건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늘에 찔린 자잘한 상처와 그가 가하는 구타에서 점점 지쳐가고 반응조차 무뎌지고 심지어는 그 차가움마저 무디게 다가오고…… 그러다 어지럼증을 느끼고 쓰러졌을 때, 그는 쓰러진 나를 그냥 내려다 보다 나갔을 뿐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할 의무는 없었기에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하다못한 원망이나, 증오조차도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였다. 그는 그고 나는 나이기에. 그리고 눈을 감았을 때 나는 죽음이라는 감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급속히 식어 가는 체온을 느끼면서도 포근함을 느끼는 묘한 상황이 어느 정도 계속 되다가 그나마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아졌을 때 나는 의식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군. 바로 그때 나는 그것을 보았다. 남자가 있다. 아름다운 남자다. 묘한 숲....... 그는 뒤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바위에 몸을 기댄 체 미동 없이 존재한다. 아니다. 바위가 아니다. 아주 가끔씩 오르락내리락 거림으로서 그것은 자신이 무생물로 인식됨을 거부한다. 그 흔들림에 맞춰 남자의 몸도 조금씩 움직여진다. 하지만 남자의 초점은 미동이 없다. 어느 순간 남자의 반쯤 감긴 눈이 크게 떠진다. 붉은 빛이 남자를 감싼다. 남자가 떨리는 눈동자로 허공에 주시한다. 남자의 입이 열린다. 낮은 목소리. 희미한 목소리. "............" 하지만...... 나로써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그렇게 나는 눈을 떴다……. 기적……. 나의 손에선 눈에 익은 녹색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그 빛은 곧장 나의 상처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그가 해주었을 때보다 훨씬 가쁜 해짐을 느꼈다. 또 뜨거움이 내 안에 고였듯이 한기가 나의 안에 고이기 시작했다. 뜨거움과는 달리 급속도로 안으로 고이더니 곧 동화 되 버렸다. 방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한기에 떨지 않게 된 것이다. 다시 나는 잠이 들었다. 내가 일어난 것은 전과 비슷한 서늘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서늘함은 내 몸에 자리잡은 한기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몸을 돌렸다. 바늘이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그 동안 나를 살려주었던 '감'에 의존해 몸을 한바퀴 더 돈 뒤에 앞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한번 더 돌았을 때 박혔던 단검과 맨 처음 피했을 때 박혔던 단검을 양손에 쥐고 아마도 그일 침입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역시 강했다. 몇 번의 부딪임 뒤에 나는 기어이 바늘이 잔뜩 박혀 있는 벽에 가 부딪이고 말았다. "죽음을 택했던 것치고는 괜찮은데?" 여전히 호기심을 가장한 무심한 목소리다. 그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기절한 건가?" '일부로' 자연스럽게 기를 숨기지도 내뿜지도 않고 있는 나에게 그가 다가와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상태에서 양팔을 단숨에 그의 목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 위치에 휘둘렀다. "크으……!?"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나는 다시 형편없이 바닥에 쳐 박혔다. 하지만 전과는 달랐다. 마법을 깨달음으로써 '마나'라는 것을 느끼게 됐기에 그것의 흐름에 몸을 타고 자연스럽게, 가볍게 바닥으로 내려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실은 아까 벽에 부딪혔을 때도 그랬지만 그를 유인하기 위해 일부로 크게 부딪인 척 했었다. 그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깨달은 모양이구나. 자신의 상처쯤은 치료할 줄 알아야지 제 구실을 하는 법이다." 그의 말은 진실이기도 했고 거짓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치료마법을 구사할 수 없는 이는 제 구실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물론, 이 생각도 세상을 보고 느끼고 나서 든 것이다. 나에게 세상의 잣대란 오직 그였기에 그의 말이 진실인 줄만 알았다. 그때는 나의 막 깨달은 마법은 고작해야 세상을 살아 나가기 위한 단순하고도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뒤 나는 암실에서 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바늘 위를 평지처럼 노닐 수 있었고 한기를 완전히 품었으며 그의 공격을 막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격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의 훈련이 끝난 것은 아니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의 기술을 배우기 위한 바탕이 마련된 것뿐'이었다. ========================================================================== = ㅡ.ㅡa 요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내 세계관은 별거 없는 보통 판타지인가? 나름대로 궁리해보았습니다. 과연 판타지중에서 나와 같은 세계를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세계관에 목숨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몬스터 헌터라는 직종과 용병이라는 직업의 전문화, 만들어낸 몬스터들과 후카......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는 세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제 눈에 띈것은 세계관도 별거 없는 소설......이란 구절이었습니다. 아, 역시 그냥 보통 배경이구나...... 다시 줏대 없는 생각을 고착시켜버렸죠. 요즘와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과연 별거 없는 세계인가? 대답은 "아니다". .................뭔말인지ㅡ.ㅡa
번  호 : 19649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28일 21:05 
등록자 : KREUZ1           조  회 : 146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7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점차 열이 높아갔다. 락샤사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약을 먹이고 재우는 수밖에는 없었다. 필브리안은 굳이 우겨서 유니펠스의 병 수발을 들었다. 차가운 물을 대야에 채워 자주 땀을 닦아주면서 안타까워했다. 락샤사는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없이 방을 나왔다. 왠지 자신이 아는 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없는 이들이 떠오를 때면 슬퍼지는 거라고……페르가 그랬지……." 메마른 목소리였지만 말을 내뱉는 그의 얼굴은 물기가 가득 머금어져 있었다. 문에 기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평범해 보였지만 허공을 바라보며 내쉬는 한숨은 고통이 배여 있는 것 같았다. "마스터……페르……." "멍청하긴! 물놀이하다가 감기 걸리는 바보가 어디 있냐? 그것도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월 감기를!" 페르는 '개'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뭐냐고 물어보면 아주 당황하는 얼굴로 고민하다가 짐승이라고 했다. 어떤 짐승이냐고 물어보면 '식용으로 기르지만 먹기 전에는 충분히 귀여워 해주고 가끔 자연사 할 때까지 아껴주기도 하는 짐승으로 체신 머리 없는 개일 경우엔 도둑이든 주인이든 꼬리치면서 재롱부리는……에…… 윽, 나중에 알려줄게!' 하고 다음을 기약할 뿐이었다. "하, 하지만……." "하지만 이고 뭐고 시끄러!" "쿡쿡……." "웃지마, 이카!" "하지만 페르, 어제 환자에게 안정과 휴식이 중요하다고 한 게 누군가 생각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다구." 짙은 초록 눈동자에 고집스런 빛을 띄고 손으론 짧은 은발을 거칠게 긁적이면서, "그건 '환자'한테 하는 말이고 '바보'한테는 통용 안돼!" 페르가 말한다……. 귀에 울리는 유시리안의 울음을 가장한 웃음소리가 지금도 생생히 들려오는 듯 하다. "저기……샤……?" 락샤사는 흠짓 하며 문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문이 안 열려 곤란해하고 있었던 필브리안은 그제서야 나와서 멀뚱이 서있는 락샤사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뭐하고 있었어요?" "아무 것도. 넌 왜 나왔지?" "아! 유니가 물을 찾아서요." "정신이 들었나?" 그렇게 금방 깰 것 같지 않았는데……? 필브리안은 활짝 웃으면서 그렇다고 말하고 밑으로 내려갔다. 락샤사는 궁금한 마음에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는 유니펠스가 보였다. "깼나?" 유니펠스의 기묘한 주홍빛 눈동자가 락샤사를 향했다. "의외군. 좀더 잠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하며 자신의 이마를 집는 락샤사를 유니펠스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락샤사는 순간 흠짓 하며 유니펠스에게서 떨어졌다. 처음 느끼는 '지독함'이 에리하라는 '육체'를 투과하여 락샤사라는 '정신'에 까지 미친 것이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음을 억지로 막아내며 유니펠스를 내려다보았다. 유니펠스의 힘없는, 하지만 보통 때와 다를 바 없는 저음의 '음성'이 락샤사의 '정신'에게 들려왔다. '만져서 '느끼는' 타입이라면 지금의 난 건들이지 않는 게 좋아.' "왜지?" 다시 만지고 싶은 마음은 추어도 들지 않았지만 알고는 싶었다. '내 정신이 지금 '그때'를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지.' 왠지 뇌리에 박히는 말이었다. ' '내 정신이 그때를 배회하고 있다'……라…….' "어느 때를 말하……." 락샤사는 다시 잠든 유니펠스의 몸에 이불을 잘 정리해 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와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눈이 아프다……뿐이었다. 지독히도 아팠다. 얼마 만에 보는 빛인지……. 하지만 빛에 대한 애착이 없는 나는 그냥 아플 뿐 감격이라든지 회환에 잠긴다 던가 하지는 않았다. 그런 나에게 그는 예의 그 호기심을 가장한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었다. "재미없는 녀석." 그리고는 나의 눈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다시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빛에 놀랄 정도로 적응이 됐다. 한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나름대로 주위를 간파하려 애썼던 지라 나의 시력은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보통 인간으로써는 가질 수 없는 시력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다. 그가 말하길 이제부터는 '몸'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에 잘 먹어야 한단다. 언제나 굶주림에 찌들었기 때문인지 나에겐 식탐이 없었다. 극히 소량만 먹는 나를 의아하게 보던 그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떡이며 이렇게 말했다. "하긴 갑자기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지." 처음 나에게 읽어주었던 책들을 다시 한번 정독시킨 그는 다른 곳으로 연결된 어느 '공간'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전에 내가 있었던 곳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의 방은 사방이 바늘이었는데 이곳은 책이라는 것뿐. 그는 나에게 그 책들을 읽으라고 했다. 책들의 수효는 정말 엄청났을 뿐만 아니라 그 종류도 너무나 다양했다. 역사, 수학, 인문, 지리, 사회, 고대, 각종 언어, 마법서적, 기사도, 예절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요리에 심리학 등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삼류 로맨스 소설까지 있었다. 나는 아무 책이나 먼저 보려다 내가 모르는 문자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각 종 언어를 배웠으며 심지어는 룬어까지 배웠다. 그 뒤로 고대어에 파고들었었지만 끝내 해독할 수 없었다. 그도 그것만은 자기도 모른다고 시인했다. 지하를 나온 뒤로 나에게 공급된 음식은 늘 기름진 맛좋은 것들이었다. 그가 말하길 자기가 훈련시켰던 녀석은 극소수지만 살아남은 이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마법을 깨달게 하는 부분에서 죽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눈으로 묻는 나를 보며 그는 웃었다. "나도 이상한 놈이지만 너도 이상한 놈임은 틀림없어." 그리고는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네가 그 방들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는 줄 아나?" 나는 길어야 삼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썼고 그는 웃으면서 "「베크라」방에서 5년, 「아퀘」방에서 반년이다. '밖'의 시간으로." 「베크라」? 「아퀘」? 그는 나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설명해 주었다. "「베크라」방은 불을 뿜는 몬스터, 베크라의 치아가 깔린 방이다. 몬스터가 죽어도 열기는 사그라 들지 않기 때문에 무척 뜨겁지. 앞서 훈련을 받았던 이들은 여기서 반 정도가 죽었다. 여기서 견뎌낸다면 견뎌낸 시간에 비례하여 몸 속에 '불'에 대한 저항성이 생긴다. 만일 그 몬스터를 만나 싸우게 된다면 녀석이 뿜는 불에는 피해를 입지 않는 다는 거지. 뭐, 어디까지나 '비례'니까……. 여지껏 네가 가장 오래 버텼다. '이곳' 시간으로는 10년이나 버틴거니까. 나도 그 정도는 버티지 못했어. 최고 기록이라고 불리는 나의 기록도 6년이 고작이다. 겨우 참아 낸 거지. 헌데 넌 7년이 조금 지나고 나서부터 전혀 뜨거워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그렇다면 내 몸 속에 뜨거움이 고이기 시작한 때는 아마도 7년이 지난 후였을 것이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퀘」방에서는 치료마법도 써주지 않기 때문인지 반대 속성에 대면하게 되었기 때문인진 모르지만 거의 죽었어. 이 훈련을 이 정도를 버틴 건 네가 처음일거다. 난 그곳에서 네 달을 버텼지. 앞의 몬스터와는 극 속성에 해당되는 '얼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몬스터다. 추운 지방에 살면서도 털이 별로 없는 몬스터지. 척 보기에는 커다란 새처럼 생겼다. 그 방에 있는 것들은 그것의 털이지. 그 속성은 마찬가지로 몸에 저항력을 높여주는데, 이 몬스터는 왠만한 공격마법은 들지 않는다. 이 정도면 알겠지? 바로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준다는 말이다. 물론 추위에 대한 저항력도 마찬가지지만. 아마도 평생가야 감기 걸리는 일은 없을걸?" 그는 조금 웃더니 나를 보았다. "나도 거의 죽기 직전에 마법을 깨달고 나온 거다. 그곳에서 마나를 느낀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면 그 방을 이루는 털 자체가 마나를 밀어내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방안에는 마나가 거의 없거든. 아마 '밖'에서 마법을 쓴다면 이곳보다 효과가 좋을걸? 자, 이제 '진짜'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가 말을 돌리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좀 멍했다. 11년이다. 내가 저곳에서 보낸 시간이. 헌데 나의 몸은 고작해야 6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이곳의 시간이 더 길다고 해서 몸의 시간까지 그것에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너에게 나의 모든 기술을 알려주마." 그의 말에 정신이 퍼득 들었다. "그 대신……." ========================================================================== ========= 늦게 올려 정말 죄송합니다(--)(__)(--) 크윽...배가 아프군요......크윽..... 그럼 .....
번  호 : 19672 / 20368    등록일 : 2001년 06월 29일 14:52 
등록자 : KREUZ1           조  회 : 204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떠나라." 갑작스럽긴 하지만 아주 짐작을 못했던 말은 아니였다. 점차 그보다 사냥해 오는 '후카'의 수가 많아 졌을 때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일인 것이다. "너와 지긋지긋한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20년이 넘어간다." 그가 감상적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호박색 액체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내가 사냥하고 가공한 '후카'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에게 밥값으로 반 이상을 넘겨왔음에도 그것들의 양은 상당했다. 몬스터가 득실대는 '버려진 땅'이기에 가능한 양이었다.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그에게 던졌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 안을 성의 없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가 직업정신상 아주 예리하게 그것들을 감정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킥킥대다가 자신의 허리에 달려있던 주머니를 내게 던졌다. '후카'의 가치만큼의 보석이 그 안에 들어 있으리라. 나는 그것을 일단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내 '공간'으로 들어갔다. 묘한 마법 진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의 집은 겉보기에는 그렇게 작고 초라할 수가 없었다. 내가 10여 년을 암실에서 수련하다 나왔을 때 가장 먼저 외워야 했던 것은 각기 마법 진에 딸린 공간의 용도였다. 저쪽 거실 귀퉁이 벽에 새겨진 마법진은 서재로 통하는 곳이었고 저쪽 부엌 벽에 새겨진 마법진은 식품 보관실로 통하는 곳이었다. 쇼파가 덩그러니 놓여진 테라스에 새겨진 마법진은 그의 침실로 통하는 곳이고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 새겨진 마법진으로 통하는 곳은 나의 공간이었다. 깨끗하지만 허름한 옷가지와 약초들, 서재에서 잠시 가지고 나온 책들과 작은 침대가 전부인 공간이었지만 나의 유일한 휴식처였던 곳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인 모양이다. 침대 밑에서 그가 예전에 던져준 가방을 꺼냈다. 그 안에 옷을 몇 개 개어 넣고 입던 옷은 그냥 버렸다. 그가 굳이 빨아서 쓸 일도 없었고, 어차피 버려질 물건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 이곳에서만 나는 희귀한 약초를 몇 개 집어넣고 나서 벽에 걸린 로브를 꺼내 손에 들었다. 그리고 나와 테이블에 놓인 보석이 든 주머니를 품에 넣은 다음 부엌 쪽에 나 있는 식품 보관실로 들어가 건량과 수통을 꺼내 챙겼다. 그리고 나서야 그의 앞에 섰다. 그는 내가 짐을 싸는 그 짧은 시간동안에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들이킨 듯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자신의 앞에 선 나에게 그는 아주 평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먼저 나가자마자 욤 제국의 수도 '자이젠'에 가라. 서재에서 지도를 봤겠지? 그걸 챙겨가도 좋다. '자이젠' 에 가서 이 주소로 찾아가라." 그는 나에게 작은 종이쪽지를 던졌다. 마나의 흐름을 타고 던진 탓에 그것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날라 왔다. 나는 그것을 잡아 보지도 않은 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가면 문을 세 번 두들기고 기다려라. 한참 있다가 다시 두 번을 두들겨라. 그때 누군가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이걸 보여주도록." 그가 그 다음에 내게 던진 것은 내가 그에게 건넸던 '후카' 중 최상품에 해당하는 '락팔어'로써 나도 최 근래에 와서야 겨우 체득하게 된 상품이었다. 그는 내가 그 기술을 마스터했을 때 절대 남용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는 자기 할말은 끝났다는 뜻인지 다시 술을 따랐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용건이 남아 있었다. -물어볼게 있어.-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뭘?" 그는 여전히 무심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술이라 부르는 액체를 마시고 있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무슨 소리야?" 평정을 잃은 그의 목소리가 생소하게 울렸다. -이상하잖아? 난 어린아이도 아닌 갓난아기 였다구. 헌데 어떻게 그런 훈련을 견딜 수 있었던 거지? 어떻게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손에 들려 있던 술을 단 숨에 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피하려는 건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흠짓 떨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지금은 소실된 마법이지만 한 200년 전쯤에는 상당히 알려졌던 것이 하나 있지." 나는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다가 다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 마법의 이름은 「리치」. 불사의 몸이 된다는 마법이지만 그 줄기를 타고 소소한 마법들이 만들어졌어. 그 중의 하나를 너에게 썼지. 시술자가 지정한 시일까지는 죽지 못하는 마법,「핏세션」. 생명을 고정시키는 마법." 그의 설명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직도 복잡한 얼굴로 술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나를 힐끔 보던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때문에 네가 그 훈련을 하는 동안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거지. 사람에 따라 부작용은 달라. 내가 생각하기로 너에게 미친 부작용은……." 왠지 서늘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내 예상을 뛰어넘은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소실." 나는 분노가 치민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때 알았다. 울지 못했던 「베크라」에서의 참담함과 캐스팅하지 못했던 「아퀘」의 절망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허리에 찬 단검에 손을 갔다 댔다. 그리고 그의 목에 그것을 단숨에 갔다 댔다. 증오스러웠다. 심정을 숨기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한숨처럼 또다시 말을 내뱉었다. "나는 계약을 충실히 이행한 것밖에 없어. 그러니 이제는 네가 계약을 지킬 차례이다." 그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단검을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맞는 것이다. 수단이 어찌했던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던가. 그는 무심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핏 웃었다. -난 아직 당신의 조건을 듣지 못했어.- "별로 어려운 건 아니야." 그는 갑자기 손을 꾹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주먹틈새로 비릿내를 풍기는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꾼 문 그의 입술 또한 같은 현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읽었다. 증오라는 감정. ========================================================================== ======= 크윽.....간신히 세이브~~후우...;;;
번  호 : 19744 / 20368    등록일 : 2001년 07월 02일 23:08 
등록자 : KREUZ1           조  회 : 15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29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물 속에 한참 들어가 있던 유니펠스는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왔다. 가라앉은 호흡은 그가 여지껏 잠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겨 지지 않게 하고 있었다. 락샤사는 아직도 유니펠스보다 밑에서 발을 담그고 있었다. 가끔가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육체'인 에리하의 미성을 타고 들려왔다. '처음 듣는 노래군.' 깊게 떠돌아다니진 않았지만 넓게는 다녔던 유니펠스였다. 음유시인들이 부르는 노래정도는 웬만큼 꿰고 있었다. 락샤사는 쿡 웃으면서 말했다. "200년 전 노래다. 여기선 이미 소실됐겠지. 페르의 이름조차 잊혀진 시대아닌가, 쿡쿡." 그리고는 다시 흥얼거렸다. 유니펠스는 물을 몸에 끼얹으면서 락샤사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 반지……열 개정도 만들었다고 했던가?' 락샤사는 흥얼거리면서 유니펠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침묵했다. "찾고 싶어?" 유니펠스는 다시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둘의 대화가 방해받을 요소는 전혀 없었다. '솔직하게는 찾고 싶어.' "그래봤자 일회용이야. 다 찾아도 겨우 열 번밖에 말하지 못 한다구." '그 열 번이라도 …… 잡고 싶어.' 락샤사는 후드를 푸르며 묶인 머리를 풀어 버렸다. "페르는 그 뒤 그 반지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처분했어야 했어. 우리는 그냥 간단하게 마법상점에 팔아 버렸지. 모두 한 세트로 팔았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어. 전에는 마을마다 마법상점이 있었는데 지금 안보이더군." '수도에만 한 곳 있어.' "그래? 그럼 거기서 한번 알아봐. 그래봤자 200년 전 일이니까 알기 힘들걸?" 유니펠스는 물 속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곤 마른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수건으로 몸을 닦아냈는데 락샤사가 그 모양을 지켜보다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엄청나군." 유니펠스의 몸에 나 있는 흉터를 보고하는 말이었다. 훈련 당시 생겼던 것은 마법으로 치료 되 없지만 예전의 '곤크'에서 어머니를 구하다 생긴 커다란 상처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워낙 큰 상처라 마법으로도 흉터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유니펠스는 별다른 대꾸 없이 상의을 걸쳐 입었을 뿐이었다. 하의는 갈아입지 않은 상태에서 락샤사의 옆으로 다가간 그는 갑자기 단검에 손을 갖다 대며 옆을 보았다. 그의 시야가 머문 나무에서 머쓱한 미소를 띈 한 청년이 나타났다. 걸어나오면서도 락샤사를 힐끔 보며 얼굴을 붉히는 꼴이 그의 심중을 잘 드러내 주고있었다. 락샤사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변태?" 청년은 당장에 얼굴을 붉히며 부인했지만 락샤사는 이미 그렇게 판단해 버린 듯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유니펠스는 단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상태로 락샤사의 옆에 앉았다. 청년은 둘의 싸늘한 반응에 주춤거리다가 걸어왔다. "저, 저기 전 그냥……."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는 듯 한참 더듬거리는 그에게 결국 눈길을 돌린 락샤사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유니펠스를 톡톡 건드렸다. 유니펠스는 뭔가 하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락샤사는 청년을 눈짓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너랑 닮았다." 유니펠스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말하며 청년을 돌아보았다. 윤기 도는 갈색머리카락의 청년은 순박해 보이는 갈색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나이(?)에 비해 턱 선이 날카로운 편인 유니펠스에 비해 청년은 둥근 얼굴형을 가지고 있었다. 전혀 닮았다는 개념이 대입되지 않는 둘이었기에 락샤사의 말은 헛소리로 들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락샤사의 말을 공교롭게도 같이 들었던 청년은 유니펠스와 같은 의아한 얼굴로 락샤사를 쳐다보았다. 락샤사는 둘의 시선을 받으면서 태연히 말했다. "검 쓰는 거 말야. 닮았어." 유니펠스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청년은 펄쩍 뛰며 말했다. "말도 안됩니다!! 제가 쓰는 검법은 저의 아버님께서 독자적으로 만드신 거란 말입니다!" 유니펠스는 굳은 얼굴 그대로 청년을 돌아보았다. 청년은 여전히 펄쩍 뛰면서 말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비교 당한 자체가 모욕적으로 들린 탓이다. "비록 저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제가 완전하게는 배우지 못 했지만 다른 검과는 전혀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비슷하다고 취급당할 수는 없단 말입니다." 락샤사는 문제의 발언을 한 사람 답지 않은 태연함과 뻔뻔함으로 되 받아쳤다. "아니면 말지, 난리 부리긴." 그러자 되려 무안해졌던지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괜히 발끈을 해서……." 락샤사는 됐다는 뜻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청년은 머뭇거리다가 돌아서 가버렸다. 유니펠스는 돌아서 가버리는 그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락샤사를 돌아보았다. '정말인가?' "뭐가?" '정말 닮았나?' "그래. '느린' 검 놀림. 너에 비해 많이 떨어지지만 저 애송이 말대로 전혀 다른 체계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 유니펠스는 굳은 얼굴로 일어나 여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락샤사가 그와 속도를 맞춰 옆에서 걸으며 물었다. "왜 그래?" '계약이…….' "뭐?" 유니펠스는 갑자기 멈춰서 뒤를 고개를 돌렸다. 아직 걸어가고 있는 청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니펠스는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이 생각나서…….' ========================================================================== ====== 고민 중입니다.....ㅡ''ㅡ 음......여러분......페르의 이야기와 아르의 이야기가 완전히 분리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지금 출판을 할때 페르의 이야기와 아르의 이야기를 1, 2부로 나눠서 연재하는 것에 대해 고려하고 있습니다만...... 물론, 그렇게 된다면 페르의 시대가 앞인 고로 그게 1부가 되서 앞으로 연재를 할때 페르 이야기만 나오게 된다는........ 음........ 어쩌지.............
번  호 : 19804 / 20368    등록일 : 2001년 07월 04일 23:06 
등록자 : KREUZ1           조  회 : 181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130                                      
                          
[연재] 아해의 장-130 2001/07/04 12:24 신광선(드레곤7)님 올림 읽음 12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락샤사는 유니펠스의 굳은 얼굴을 보고 더 묻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유니펠스는 아직 하의를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방으로 향하면서 락샤사에게 한 마디 했다. '저 남자……이름이 뭔지 알아?' "아니. 궁금하면 알아다 주지." '부탁해.' 락샤사는 돌아서면서 손을 두어번 휘저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유니펠스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옷을 마저 갈아입고 아직 자고 있는 친구를 힐끔 보았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 지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보자니 덩달이 미소가 떠올랐다. 유니펠스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기댔다. 이 현실이 현실 같지 않았다. '만약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강해지는 걸 택했을까, 목소리를 택했을까?' 그때 그의 목을 베지 않았던 것은 스스로도 선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괜찮아, 유니?" 필브리안은 어느새 깼는지 구석에서 앉아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자신의 음성에 반응하여 고개를 든 친구는 살짝 고개를 끄떡임으로써 답을 해 주었다. 필브리안은 다행이다, 하며 웃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끄집어냈다. "왜 이노씨는 유니에게 아르라고 했던 거야? 그리고 유니는 왜 그렇게 반응했어? 아르라는 사람을 싫어해?" 유니펠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을 뿐 굳이 팬을 꺼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필브리안은 무척 궁금했지만 말하기 싫은 것처럼 보이는 친구를 굳이 닥달하려 하지 않았다. 씻기 위해 일어난 필브리안은 유니펠스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려다 그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냥 혼자 나갔다. 유니펠스는 친구가 나가자마자 다시 무릎에 고개를 기댔다. "그러고보니 이름이 없구나?" 어깨에 짐을 매고 나가려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이름이란 단어는 책을 통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단 둘이서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기에 별 생각 없이 넘겼었다. 그도 그 점에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만들어 두는 게 편할 거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왔고 그 뒤로 그 곳을 찾지 않았다. 아직도 그가 그곳에서 사는지 아니면 떠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였다. 처음으로 늪지를 빠져나와 처음 그를 만났던 내가 버려진 황량한 들판을 지나 앞으로 나갔다. 빠르게 나오려면 나올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에 천천히 걷기만 했다. 이미 그 곳에서는 내가 서열 1이었기 때문에 나를 덮쳐오는 몬스터는 없었다. 때문에 걷기만 했는데도 이틀만에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 황량한 들판을 걸어 나오자 처음 보는 푸른 숲이 있었다. 책에서 그림으로만 접했던 숲이었다. 이곳 가지들은 쭉쭉 늘어져 있는 늪지와는 달리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진흙이 바닥인 그곳과는 달리 부드러운 풀들로 덮여 있었다.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계곡이 전부인 그곳과는 달리 이곳에는 시냇물도 많았다. 빠르게 흐르는 물들을 떠다 마시고 다시 앞으로 걷던 나는 여지껏 봤던 것과는 다름 물을 만날 수 있었다. 잔잔히 고여있는 물들……책에서 읽었던 호수였다. 너무나 고요해 감히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간간히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다가갔다. 한참을 둘러보다가 밑을 내려다 보았다. 어떤 아이가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꿇어앉아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잔잔한 물 속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비춰진다는 글귀를. 거칠게 흐르는 계곡만을 보아왔던 터라 실감이 나지는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알 것 같았다. 한번도 잘라본 적이 없는 긴 머리카락이 검은 색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나는 내 눈동자가 주홍색이라는 것을 알았고 내 피부가 하얗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직 내가 어리디 어린 몸이라는 것도 알았다. 엉덩이 밑을 한참 내려가는 긴 머리카락이 물에 닿았다. 덕분에 나 모습은 다시 흐릿해졌다. 세수를 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목욕을 했다. 옷을 벗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몽땅 젖어 있었다. 그래서 그냥 그 상태로 수영도 했고 목욕도 했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아 올라왔다. 원래라면 한 마리만 잡았을 텐데 왜 두 마리를 잡아 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둘 다 손질해서 불을 피워 구웠다. 마른 가지가 많아서 장작을 구하는 것은 손쉬웠다. 물고기를 올려놓고 옷을 갈아 입은 뒤 젖은 옷을 나무에 걸어 두었다. 늪지와는 달리 시원한 바람이 많이 불었기에 쉽게 마를 것 같았다. 적당히 뒤집어가며 고기를 익혀갔다. 제법 익어서 막 입을 대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기척을 보니 사람이었다. 어머니와 그 외의 사람은 처음 보는 것이라 가슴이 뛰어왔다. 가볍게 걷던 사람은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이야, 이런 산 속에서 꼬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처음 듣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 사람은 내 앞에 털썩 앉아서는 한 마리 남은 물고기를 집어들고 물었다. "내가 먹어도 되지?" 내가 답하기도 전에 덥썩 물어뜯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보다가 그냥 내 몫의 물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깊은 산 속이었음에도 가벼운 산책차림이었고 허리에 찬 검도 그냥 호신용 같아 보였다. 또 별다른 짐 하나 없었다. 신발도 여행자의 것이 아니라 가벼운 슬리퍼 같은 거였고 맨발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것까지 살펴볼 정신이 없었다. 모든 게 다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고기를 다 먹고 호수로 가서 물까지 떠 마신 다음에 내 옆에 와 다시 앉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에게 물었다. "참! 너 이름이 뭐냐?" 나는 고개를 젖는 것 외에 다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나를 한참 보다가 말했다. "알려주기 싫은 거야?" 다시 젖는 나를 보며 그는 이렇게 다시 물었다. "이름 몰라?" 이번에는 끄떡였다. 그는 짙은 녹색의 눈동자에 장난기를 가득 머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지어줄게!" 생각보다 쉽게 얻는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내가 자신을 보자마자 웃으며 말했다. "아르! 어때?" 순식간에 말하는 그를 보며 대충 짓는다 라는 느낌이 마구 들었다. 불신감에 어린 시선을 그에게 보내자 그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을 쓸어 넘기며 시선을 호수 쪽으로 돌렸다. 그래도 계속 내가 자신을 보니까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차피 곧 바뀔 테니까……." 그 말을 내뱉는 그의 모습이 왠지 밝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락샤사가 들어왔다. 후드를 왼손에 묶어 버리고 아름다운 초록빛 머리카락을 유감없이 내보이며 돌아다니는 그에게 흠모의 눈길을 보내는 동네 총각이 많았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였다. 락샤사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유니펠스를 의아하게 보다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이름 알아왔어. 그보다 식사하러 내려오래." 유니펠스는 고개를 끄떡이며 일어났다. '이름은?' 락샤사는 평이한 어조로 답해 주었다. "베락스. 유카. 라. 제피모(평민)." 유니펠스는 갑자기 얼굴을 굳힌 체 멈춰섰다. -내 이름을 안 알려줬지? 그의 무심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내 이름은 베락스. 유카. 라. 제피모다. ========================================================================== === 수정을 하느라 당분간 소설을 못 올릴 것 같습니다. 오늘은 많은 분들이 소설이 안올라와 슬프다는(;) 멜을 보내주셔서.....; 결국 분리시키는 것으로 낙차을 봤습니다. 앞으로 아해의 장의 연재는 페르만 나올 것이며 페르부분이 끝난 다음에 아르 이야기가 나올겁니다. 아르이야기를 오늘로 끝내느냐, 아님 이번 파트까지만 연재하느냐는 아직 고민 중이고요. 출판삭제를 하게 될때는 아르이야기까지 다해서 지울겁니다. 언제 수정이 끝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이번주 일요일전까지 끝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주쯤에는 다시 성실연재(;)로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번  호 : 20049 / 20368    등록일 : 2001년 07월 13일 23:00 
등록자 : KREUZ1           조  회 : 133 건           
제  목 : [나우/펌] 아해의 장(또다른 외전)-1                           
                          
외전- 두번째 이야기('페르노크') (바람의 벗. 신승림) 후들거리는 다리로 휘청 거 리면서도 열심히 걸음을 놀리는 은발의 소년이 있었다. 옷 속에 숨겼지만 라인이 보이는 얄팍한 책이 부자연스러웠다.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진땀으로 보이는 땀방울들이 잔뜩 맺혀 있었다. 가쁜 호흡을 겨우겨우 해내며 사람의 이목을 피해 건물 밖으로 빠져 나오자 안심이 된 듯 벽에 기대서 한참을 심호흡해댔다. '드디어 찾았다! 이거면……이거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생긋 웃기까지 한다. 긴장으로 잔뜩 떨려오던 다리가 진정이 되자 힘들게 다시 발을 놀렸다. 기숙사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퍽!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조금 늦어 버렸다. 은발의 소년은 바닥에 쓰러 져 채인 왼쪽 다리를 감싸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는 내 말이 우습다 이거냐?" 서둘러 고개를 저었지만 소용없을 거란 걸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소년은 곧 잇따를 고통을 떠올리며 눈을 꼭 감았다. 여지없이 몸 곳곳에 고통이 닥쳐왔다. "크윽." 비명을 지르면 더욱 심한 구타가 따를 거란 걸 알았기 때문에 입술을 꼭 깨물며 간신히 참아 냈다. "하긴 '희대의 천재'의 귀에 나 같은 꼴통의 말이 들리 지 않겠지." 하필이면 오늘 오는 순서가 제그였다. 소울러라면 이렇게 패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입술이 찟어졌는 지 비릿한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제그는 그를 싫어했고 늘 폭력적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다. "쳇, 네가 좀만 더 늦었으면 꼼짝없이 사감한테 걸릴 뻔 했다구. 나를 기다리게 만들다니!" 혼자 중얼거리던 제그는 갑자기 씨익 웃더니 움추리고 있는 소년의 어깨를 두들 겼다. 흠짓하며 소년이 그를 올려다보자 손을 내밀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열쇠 내놔, 페르노크." 페르노크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제그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뭘 멀뚱히 보는 거야! 문밖에서 있는 건 위험하니까 열쇠 달라는 거야! 뭐 불만 있냐?" 페르노크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품안을 겨우겨우 뒤져 자신의 열쇠를 내 놓았다. 제그는 씩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오늘이 아쉽게도 이번 여름학기로써는 마지막이구나." 그렇다. 내일부터는 방학인 것이다. "이번에는 집에 돌아간다며? 뭐, 다음 겨울학기에서도 잘 해보자고. 참, 나도 고향에를 내려가는데 식구들에게 선물을 좀 줘야 되지 않겠냐?" 페르노크는 얼른 고개를 끄떡이며 선반에 가서 용돈으로 집에서 부친 돈을 내밀었다. 제그는 그것을 태연히 받아들며 킥킥대고 방을 나갔다. 나가는 제그를 보며 페르노크는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번에는 쉽게 넘어간 것이다. 조금 맞고 돈을 준 것으로 끝났으니까. 열쇠를 빼앗긴 것이 걸리긴 했지만 그쯤은 감수 할 수 있었다. 전에는……. 페르노크는 몸을 부르르 떨며 몸서리를 치더니 품에 고이 품었던 것을 끄집어냈다. 얄팍한 노트와 같은 것이었다. 제목이 써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얇은 책인 모양이었다. '이거면……이거면…….' 책을 쥐고 있는 페르노크의 손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집에서 마중 나온 이는 놀랍게도 그의 큰형이었다. '이므르'에 들어오고 4년 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형은 키가 불쑥 컸고 날렵하게 다져진 근육질의 몸매가 무척 강인해 보였다. 전보다도 강인해 보이는 형의 모습에 잔뜩 주눅이 들어버린 페르노크였다. 예리한 금안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르노크님." 주춤거리며 다가오지 않는 그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는 미청년이 있었다. 차분한 남색 눈동자와 잘 정돈 된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페르노크는 그가 뮤비라라는 자신의형의 심복임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특유의 미소가 아니었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타시지요." 공손히 자신에게 마차에 타기를 권하는 뮤비라를 보면서 힐끔 형의 눈치를 보는 페르노크였다. 그 모양새를 눈치챘는지 테밀시아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타라." 페르노크가 주춤거리면서 올라탔고 뒤를 따라 두 사람이 타자 마차는 출발했다. 4년만에 귀가였다. "애물단지 데리고 왔다며?" 비죽거리며 웃는 저 남자가 그 카한세올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뮤비라와 맞먹을 정도로 잘 웃던 그가 아니었던가? 쭈빗거리는 자신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는 저 남자가 정말 그 상냥한 둘째형이 맞단 말인가? 페르노크는 눈앞이 조금 휘청 거 린 다고 생각했다. 단 한순간뿐이었는데도 카한세올은 그것을 어떻게 알아봤는지 대뜸 손바닥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말했다. "뭐야? 열이 있잖아!" 페르노크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옆에서 그런 그를 단숨에 채가는 손길이 있었다. 테밀시아였다. 그는 카한세올과 마찬가지로 손바닥을 페르노크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가 집사를 불러 주치의를 불러오라고 했다. 또 요크노민이라는 또래로 보이는 소년에게 짐을 정리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무뚝뚝하지만 약간 큰 목소리로 페르노크를 다그쳤다. "언제부터 열이 있었던 거냐!" 페르노크는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서면서 겨우 답했다. "마차……에서……." 카한세올이 픽 웃는 것이 보였다. "바보는 고칠 수 없다더니 맞는 말이군. 고작해야 「원디」따위에 열이 나다니." 그리고 돌아서는 그를 물기가 배인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늘 자신의 편이 되 주었던 카한세올이었는데……. 페르노크는 타인의 집에 온 것 마냥 어색해 견딜 수가 없었다. 열은 점점 심해졌다. 겨우 집에 돌아왔는데 붙어 있는 곳이라고는 침대뿐인 이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페르노크는 눈물을 글썽이다가 기어이 떨 꾸고 말았다. 4년이다. 고작해야 몇 달 있으면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이 곳을 떠났던 이후로 4년이 흘렀다. 그 동안 너무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았다. 자신도……다른 사람들도……. 이제는 가족이라기보다는 타인과 같은 식구들이 생소하여 무섭기까지 했다. "만일……만일……." 만일 자신이 처음 '명상' 시간에 '마나'를 느끼지 못했다면……. 늘 생각했었다. 적어도 지금보다 ========================================================================== = 지금의 여자아이가 몸에 들어오기 전의 '페르노크'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제가 원고 수정을 하느라 연재를 하지 못했네요^^;;;; 이제 다시 연재 시작입니다^^ 그럼^^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만일……만일……." 만일 자신이 처음 '명상' 시간에 '마나'를 느끼지 못했다면……. 늘 생각했었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았으리라, 라고. 열 때문에 혼탁해져가기 시작하는 정신은 어느 샌가 4년 전 어느 날로 돌아가 있었다. 아직 친구는 없었지만 적도 없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행복했던 때였다. "마나를 느낀다, 그것은 지금 너희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명상'을 담당하던 선생님은 할 일이 별로 없는 과목 담당임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좋았다. 그래서 다들 잠자는데 이용하는 그 시간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단지 좋아하는 선생님께 이쁨을 받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다. 그것이 잘 못 됐던 걸까? "선생님." "오! 뭔가, 페르노크군?" "이 안개 같은 것이 마나 인가요?" "……!!!" 그것은 마나 였다. 안개처럼 흐리면서도 촉촉하게 세상을 감싸고 있는 '무언가'는 마나 였다. 페르노크는 최단기간에 마나를 느낀 아이가 되 버렸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그것이 무섭기만 했다. 왜냐면 그가 좋아했던 선생님의 눈빛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차갑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었던 것은 마법 길드라는 곳에 불려갔을 때였다. "네 제자냐? 쿡쿡. 너 같은 3류 마법사에게서 이런 천재 제자가 나오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게 딱 들어맞는 구나."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마법사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그렇게 이죽거리며 페르노크의 손목을 잡아끌고 들어갔다. 그 때 선생님이 지었던 눈빛은 훌륭한 제자를 둔 '스승'으로써가 아니라 재능이 더욱 뛰어난 '라이벌'을 보는 눈빛이었던 것이다. 그 것이 더욱 무섭기만 한 페르노크였다. 그렇게 페르노크는 마법길드에 들어가 훈련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렵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별로 없었던 그였다. 그러던 중 그는 그도 모르는 새에 '희대의 천재'라는 별칭을 받게 됐다. 다시 정상적인 학교생활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가 낄 만한 곳은 없었다. 모두 슬금슬금 피하기만 했고 말을 걸어오는 이도 없었다. 무서웠다. 그때 페르노크 나이 15살이었다. -찰싹. -찰싹! 페르노크는 점점 아파지는 볼의 통증에 눈을 떴다. 이미 옛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둘째형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켜올린 손을 내려놓은 그는 페르노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형?" 카한세올은 아무런 답 없이 흉폭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페르노크를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그리고 페르노크의 거주지인 별채의 마당까지 그를 끌고 나오더니 거칠게 뿌리쳤다. 가뜩이나 열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던 페르노크는 형편없이 바닥에 쓰러 졌고 카한세올은 그런 그를 냅다 걷어찼다. "너를 너무 사랑하는 이 형이 체력 단련 좀 시켜 주마." 페르노크는 '이므르'에서와 똑같은 패턴이 이어지자 믿을 수 없다는 경악에 어린 눈동자를 해 보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원인을 알 수 없는 구타뿐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풀려난 페르노크는 꾹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지긋 지긋 했다.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지켜보고 있었던 로레라자가 페르노크를 얼른 일으켜 집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서 씻기고 「포션」을 발라 상처를 치료한 뒤 페르노크가 즐겨 찾는 사탕 등을 옆에 놓은 뒤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나갔다. 페르노크는 멍하니 있다가 스르륵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 곳에는 그의 유일한 탈출구가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이것만 있으면……." 페르노크는 그 얄팍한 책을 꼭 안고 눈물을 떨꾸었다. 지하실로 이동하는 페르노크의 안색은 사뭇 비장해 보였다. 벌써 집으로 돌아 온지 두어 달이 지나 내일이면 '이므르'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페르노크는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던 '그 일'을 해치울 심상이었다. '그 일'만 성사가 된다면……. "지금보다는 좋아 질 거야."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자신을 독려하는 페르노크였다. 그가 꺼낸 것은 길드에서 훔쳐내 온 그 얄팍한 책이었다. 그 안에는 길드 내에서도 희박함을 자랑하는 '부여 아이템'의 제조법이 서술되어 있었다. 페르노크는 이 마법을 사용했다가 평생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선배 마법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 마법을 접하게 되었다. 이 말을 해줄 때의 선배 마법사의 비릿한 웃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서는 왜 그러냐고 묻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일 이 마법만 성공시킨다면……. "더 이상 나는 '희대의 천재'가 아니야." 마법을 쓰지 못하는 '희대의 천재'라는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 아닌가? 페르노크는 입술을 꼭 깨물다가 떨리는 손으로 책을 펼쳤다. 이론상으로는 이해가 가는 마법이지만 실전에서는 어떠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페르노크였다. 페르노크는 두 손을 모아 쥐고 한참 동안이나 주문을 외웠다. 점점 마나가 통제하기 힘들어 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파이어볼 같은 마법을 쓸 때는 느낄 수 없었던 '한계'였다. 때문에 페르노크는 가빠 오는 호흡을 다듬을 새가 없었다. 조금만 머뭇거리면 겨우 구사한 주문이 흐트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한마디만 내뱉는다면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을 것이다. 페르노크는 '한계'에 맞닿아 점차 몸으로 퍼지기 시작하는 고통 속에서도 이 희망 한가지로 웃을 수 있었다. 주문이 끝나 시동어를 말할 순간이었다. 페르노크는 떨리는 음성으로 모아 쥐었던 두 손을 양쪽으로 활짝 펼치며 가슴 깊이 새겨두었던 룬어를 내뱉았다. "펼*쳐*지*리*라*" 희열에 들뜬 페르노크의 음성이 지하실내에 울렸지만 그뿐이었다. 페르노크는 경악에 찬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실……패?" 좋지 못한 뜻의 단어가 페르노크의 떨리는 입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은 곧 페르노크 자신에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욱……!!" 검붉은 핏덩이를 뱉어내며 페르노크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제어에 실패한 마나가 급속하게 대기로 퍼지면서 페르노크에게까지 그 여파가 덮쳐온 것이다.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는 카한세올을 페르노크는 본 것 같았다. "제……발……." 무언가 그에게 꼭 말하고 싶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페르노크였다. 그는 결국 자기도 모르는 본심을 끄집어내며 정신을 잃었다. "절 미워하지 마세요." 카한세올은 자신의 품에서 기절을 하고만 동생을 내려다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 났다거나 짜증이 났다거나 한 것은 아니 듯 보였다. "꼭 이래야 합니까?" 웬지 떨리는 카한세올의 음성이 아주 작게 새어나왔다. "꼭 이래야 합니까?" 카한세올은 빰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얼른 훔쳐내며 페르노크를 부축해 세우고 업었다. 그리고는 지하실을 올라서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씁쓸해 보였다. ================================================================================= 이번 외전은 짧게 끝내기로 했습니다. 원래라면 본문의 이벤트 하나만큼의(한 20회 정도?) 양을 썼을 때지만 제가 쓰면서 너무 답답하고 페르가 불쌍하고...... 그래서 그냥 짧게 끝내려구요. 앞으로 간간히 나오기야 하겠지만 말이죠^^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렇게 생난리를 치면서 돌아 온 뒤로는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나가게 된 페르노크였다. 당연한 거라 할 수 있겠지만 테밀시아의 명 때문이었다. 페르노크는 스스로 저지른 바가 있기 때문에 묵묵히 받아 들었다. 축제를 좀더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자신의 행동만큼은 책임지자는 주의였기에 그냥 꾹 참았다. 그래도 재미없는 파티에 계속 참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테밀시아에게 그냥 돌아가겠노라고 청했다. 테밀시아는 약혼자 된 입장으로 무성의하게 도중에 나올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페르노크가 돌아가려면 혼자 가야한다고 안 된다고 극구 만류했지만 페르노크는 지루한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고 또래 애들이 자꾸 시비를 걸어오는 와 무시하는 것도 피곤하다고 이유를 늘려 놓으며 기어이 허락을 받아 요크노민과 먼저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페르노크는 올 때와는 다르게 잠들지 않으며 요크노민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크노민은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꺼내보기로 했다. "페르." 한가롭게 음료수를 홀짝이던 페르노크가 자신을 돌아보자 요크노민은 좀더 고민을 하다가 결국 입을 뗐다.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게……누구야?" 페르노크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가 거의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워 졌다. "내 유일한 친구……." 페르노크는 자신의 무릎에서 수근거리며 자기들끼리 잘 놀고 있는 실과 넬을 내려다보고 작게 웃었다가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렸다. "유일?" 페르노크는 픽 웃으며 눈을 살짝 감았다. 요크노민은 그런 페르노크를 보다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페르노크의 모습을 보자니 덩달아 이것저것 생각해 보게 되는 요크노민이었다. 페르노크와 함께 돌아와 각자의 형에게 꾸중을 받으며 배정 받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요크노민은 방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로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요크노민은 그의 심정을 떠보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하대했다. 그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디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요크노민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로디가 있는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할 말이 있었어 왔을 거 아냐?" 요크노민은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약 기운 때문에 지끈거려 오는 머리에 손을 집었다. 로디는 그런 요크노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체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에 의해서 침묵이 어쩔 때는 그 어느 말보다도 독촉에 유용하게 쓰인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로디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시종의 시종이라니……내 인생도 이제 끝이군." 혼잣말 같지만 그것은 대화였다. "뭐,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텐데." 요크노민이 창 밖에서 시선을 놓지 않은 체, 무성의한 어조로 답하자 로디는 울컥하며 빠르게 쏘아붙였다. "네가 뭐가 될 수 있다는 거지? 고작해야 제피모(평민)로밖에 살 수 없는 주제에!" 요크노민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로디를 돌아 보았다. 로디는 말할 게 있으면 해보라는 얼굴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알았어." 뜬금 없는 말에 로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무슨 뜻이야?" "내가 너의 주인으로써 걸맞게 되면 되는 거잖아?" 로디는 분노로 낯을 붉히며 소리쳤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잖아!" 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주인이라는 명목 하에 나의 신분을 채갈 생각 인 거냐?" 요크노민은 뜻밖의 소리라는 듯 눈을 크게 떴지만 머리카락에 가려 로디는 보지 못했다. "결국 그 정도였……!!" 요크노민이 냉큼 말허리를 잘랐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난 그런 생각 따위 안 해봤다." 로디는 수긍이 가지 않는지 불만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내가 제피모(평민)인 게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신분을 바꿀 수밖에." 역시, 하는 얼굴을 하는 로디를 철없는 아이 보듯 하면서 태연히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그 따위 생각, 하지 않았다고." "그럼?" 요크노민은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계속 말했다. "신분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면 내가 올라갈 신분을 새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거다." "만들어?" 요크노민은 불어오는 바람을 마음껏 맞다가 번개를 맞은 듯 서 있는 로디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도와주지 않겠나?" 페르노크가 갑자기 웃는 바람에 요크노민은 회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페르노크는 계속 작게 웃고 있었는데 왠지 광기에 차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요크노민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그래, 페르?" 요크노민의 말에 정신이 든 것인지 페르노크의 눈동자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아, 잠시 옛날 일을 생각하고 있었거든." "어떤 옛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냐?" 요크노민은 정말 놀랐었던지 눈을 크게 뜨면서 다소 투명스럽게 물었다. "아아……나는 고아야." 페르노크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요크노민은 경청하는 자세로 페르노크를 주시했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모아다 길러주는 곳이 있는데, 고아원이라고 불러. 난 그곳에서 컸지." "이곳에서도 그런 곳에 있어. 신전에서 그런 아이들을 길러주지." 요크노민은 일반 상식이 부족한 페르노크에게 평소 많은 설명을 일일이 해주곤 했었다. 페르노크는 설명 고맙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원래 나는……." 갑자기 마차가 멈춰서버려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은 둘의 귀로 이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그 마차잖아! 잘도 사람을 집어 던졌겠다?" =========================================================================== 그동안 컴이 고장났던 관계로 소설을 못 올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죄송하구요^^; 이제부터 열심히 써 올릴게요^^ 출판일이 좀더 늦춰질 것 같습니다. 몇번 더 수정을 해야 한다는 군요. 원래 몇번 왔다 갔다 하는 거랍니다.......... 그럴거면 출판일을 알려주지 말지........ 공연히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날짜에 맞춰서 지우셔도 되고 그냥 나중에 다시 공지가 올라갈때 지우셔도 됩니다. 저는 다음에 지우려구요. 그럼 이만...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때 그 마차잖아! 잘도 사람을 집어 던졌겠다?" 페르노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요크노민에게 무슨 소리인지 아냐고 물었지만 같이 잠들어 있었던 그도 몰랐기 때문에 고개를 젓기만 했다. "이보시오. 그러니까 왠만하면 다른 마차를 노리라니까요?" 마부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노크가 궁금한 마음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요크노민도 뒤를 따랐다. 마부와 테밀시아가 붙여 준 두 명의 기사가 놀라서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어 둘은 완전히 밖으로 나와 버린 상태였다. 강도로 추정되는 십 수명의 남자들은 마차 문이 열리자 일제히 경계를 했지만 곧 만족스런 웃음만을 지어 보였다. "이거, 상당한 물건을 잡은 모양인데?" 어딜 봐도 귀족 집 자제 분이 분명한 두 사람이었기에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쯤이라면 몸값을 받아 낼 수 도 있을 듯 싶었기에 그들의 눈은 이내 흉흉해 졌다. 페르노크는 요크노민보다 한발자국 앞으로 나와 그를 가려 주었다. 분위기로 보아 이미 사태는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취해진 행동이었다. "됐어, 실." 나직하게 울리는 페르노크의 목소리는 킬킬대며 웃고 있던 강도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던 두 기사와 마부, 요크노민에게는 정확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넷 중에서도 요크노민만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실이라니, 페르?" 파티장에서 난리를 치며 친구임을 밝힌 둘은 꺼릴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남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냥 말을 놓기로 했다. 워낙 유명했던 사건인지라 두 기사도 마부도 알고 있었기에 "건방진!"을 읊으며 발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정을 알 리가 없기에 요크노민 역시 귀족집 자제라고 생각했기에 그도 먹이에 하나로 치부시켜 버리는 강도들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페르노크가 너무 태연히 답하자 요크노민은 아무런 의심 없이 현 상황에 정신을 돌렸다. 다른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기색을 살펴본 뒤에야 페르노크는 허공을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발끈하는 실을 봄으로써 저 강도들이 처음에 언급한 말들을 이해 할 수 있었기에 고마움에 대한 표시를 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강도들이 덤벼들었다. 아무리 실력이 월등한 기사라고는 하나 스물에 가까운 인원을 믿고 몰아붙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 기사의 실력은 예상을 훨씬 넘어선 높은 곳에 있었고 의외지만 마부 역시 능숙하게 검을 휘둘러 댔다. 역시 「카르민」이란 생각이 들뿐이었다. 그들은 마부조차도 경호원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마부의 여유자적했던 태도의 이유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 덕분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강도들은 작지 않은 부상들을 입으며 조금 후퇴를 해야만 했다. 마부는 둘째 치고서라도 현재 경호를 담당 받은 두 기사들는 실력 높기로 명성이 자자한 '휴첸'의 상위 서열을 가진 이들이었다. 마스터인 테밀시아가 소중한 동생을 안심하고 맡길 정도이니 둘의 실력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정말로 마음만 먹는다면야 이쯤의 오합지졸은 쉽게 끝장을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은 별도로 받은 명령에 묶인 몸이었다. -심약한 동생에게 살인을 보이지 말아라. 라는 절대적인 마스터의 명령 덕분에 치명상이 아닌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강도들이 포기하지 않고 약간 물러선 곳에서 기회를 노리는 것일 테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페르노크는 여전히 요크노민의 앞을 막아선 체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굴에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핏방울들이 튀어 묻기도 했지만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체, 그저 앞만을 보고 있는 그를 두 기사와 마부는 물론이거니와 요크노민 마저도 넋이 나갔다고 생각해 버렸다. "페르. 괜찮아?" 요크노민이 뒤에서 살짝 흔들며 물었고 기사와 마부도 그의 상태에 내심 신경을 쓰던 터라 페르노크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 세웠다. 페르노크는 천천히 손을 들어 빰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 내었다. "괜찮아." 작게 한숨을 쉰 뒤, 그는 아직도 칼을 곤두세운 체 기회만 엿보고 있는 강도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무리인 건 이미 알고 있을 테죠? 괜한 피 보지 말고 그냥 다른 마차를 노리시죠." "웃기지마! 이런 부상까지 입은 마당에 그냥 보내 줄 성 싶으냐?" 무표정하게 말하던 페르노크의 얼굴이 단숨에 싸늘하게 변했다.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은데요." 강도들은 움짓하며 얼덜결에 칼을 더욱 곧추 들었다. "내 말은 우리를 보내 '달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당신들을 그냥 보내 '주겠다'는 뜻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리고는 한 손을 앞으로 내밀어 짤막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격, 내가 바라는 것은 바람의 힘. 파*이*어*볼*" 페르노크는 구현된 마법을 자신의 머리위로 이동시킨 체 강도들을 보았다. "굳이 덤비고 싶다면 어쩔수 없지요." 욤 제국에서는 그리 흔하지만은 않은 마법사를 보자 강도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하다가 결국은 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페르노크는 그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마법을 해제 시키며 마차에 올라탔다. "가죠."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기사와 마부에게 투명스레 말하는 페르노크의 앞에 앉으며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피 보는 게 싫었던 거지?" 요크노민의 낮은 물음에 답은 마침 마부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밖의 세 사람은 아쉽게도 듣지 못했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살인은 최고 죄에 해당돼." 요크노민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자신의 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곳에서는 흔한 일이지. 특히 저런 강도들에게 습격을 당했을 때는 당연한 일로 치부돼. 오히려 지금처럼 살려서 돌려보내는 것이 의외로 여겨지지. 페르가 살았던 곳은 무척 평화로운 곳인 모양이야?" 페르노크는 그냥 픽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며 피가 마구 튀던 좀전의 싸움을 떠올려 보았다. 손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이 역하게 느껴져,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잊으려 했다. 넬이 그런 페르노크를 올려보다가 조심스럽게 그 자국을 작은 두 손으로 문지르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물방울이 페르노크의 손에 묻어 있던 핏자국을 흔적 없이 지워내 주었다. 곧 넬은 페르노크의 얼굴 앞까지 올라와 그의 얼굴에도 똑같이 손을 문질러 주었다. 페르노크는 고맙다는 눈빛을 해 보이며 살짝 웃었다. 별로 밝지 않은 미소였지만 넬은 같이 맑게 웃어 주었을 뿐이었다. "아까 하던 말이나 계속 해봐라." 벌써 강도의 일은 잊은 듯 보이는 요크노민을 보면서 역시 살아온 환경의 영향은 엄청나다고 생각해 보는 페르노크였다. "나는 고아원에서 컸지만, 원래부터 그곳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야. 건강했던 부모님과 부유한 친척들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었으니까. 원래라면 그냥 그대로 평범하게 컸겠지. 그날……내 생일에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5살 때 일이지." 더러운 세상을 그때 처음 알았다. 부모님이라는 강하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울타리가 허물어 졌던 그날 페르노크는, 아니 무하는 처음으로 본연의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아니 접해야만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 무하를 우리가 길러야 한다는 겁니까? 우린 애가 셋이나 된다구요!" "하지만 고모네가 가장 부자잖아요. 집도 크구요. 게다가 무하가 어디 빈대 역할만 한답디까? 지 애미, 애비 유산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녀석인걸. 그 돈 이자만 해도 얼마냐구요. 저도 애가 한 명만 없었어도, 아니 집이 조금만 넓었어도 제가 길렀을 거라구요." "하지만……!" "여보, 잠시 나 좀 봅시다." 무하는 친척들의 그런 수작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꼬마아이를 주위에서는 곱지 못한 눈으로 힐끔대며 수근거렸지만 아이는 상관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제 엄마를 닮아 하얀 피부를 가졌고 제 아빠를 닮아 짙고 결 좋은 검은 색 머리카락을 가져 무척 곱게 생겼기에 평소 친척들에게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아이였건만 지금은 그저 짐덩이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무하가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하는 현관문을 열고 눈이 쌓여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생전에 무척 아끼고 보살피던 정원이었다. 이 아이는 이 정원을 다시는 못 보리란 것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엄마……아빠." 부모님의 죽음을 부정도 해 볼 직한 나이였건만 무하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른스럽다 생각되기보다는 되려 불쌍하다고 여겨지는 아이, 무하였다. ================================================================================== 지금 제게 바이러스 멜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제는 5개나 왔고 어제는.....몇개가 왔더라.....5개정도는 너뜬히 왔던 것 같은데.... 오늘은 아직까지 4개밖에 안왔군요^^; 종류도 다양하고.......수신거부에 넣어 버리면 될라나? 덕분에 용량이 꽉차서 다른 메일들이 돌아갔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멜 용량이 너무 찼네요........ㅠ.ㅠ 이걸 어쩌나........ 제가 새로운 메일을 만들었는데...... 괜찮으시다면 이리로 보내주셨으면...... ssl224@hanmail.net 입니다.... 제 이름의 이니셜로 했지요. 물론 전의 메일도 매일 확인하고 있어요^^ 아직은 용량이 좀 남아 있구요. ps. 판타지 러브님아......제가 답멜을 보냈는데 자꾸 되돌아오네요.....ㅠ.ㅠ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무슨 이야기가 왔다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부모님의 장례식이 끝난 뒤, 무하는 고모네로 이사를 가야 했다. 무하는 짐을 싸라는 고모의 말에 말없이 옷과 필수품 등을 챙기고 안방으로 들어가 부모님의 최근 사진 한 장만을 들고 나왔다. 어린 몸이 들기에는 무척 무거워 보이는 짐가방을 모르는 척 하면서 고모는 무하에게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며 눈을 빛냈는데, 어린 무하도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선물하기 좋아하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드렸던 보석이었다. 무하는 닫히는 문 사이로 고모가 서랍장을 뒤지는 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려 차로 걸어갔다. "고모가 먼저 가래요." 운전사는 짐 가방을 꼭 안으며 말하는 무하가 안쓰러워 보였기에 두말 않고 차를 몰았다. 무하는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답지 않게 차분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보이는 아이였다. 한참 후에 택시를 잡아타고 온 고모는 무하를 쏘아보았지만 고모부의 짜증 섞인 음성에 참아 내야만 했다. "왜 애를 갖고 그래? 당신이 애한테 먼저 가라고 했다며!" 하지만 추위에 벌벌 떨면서 겨우 겨우 왔던 고모의 분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지, 먼저 가라고 하진 않았단 말이에요!" "당신이 말을 잘 못 했겠지! 그리고 애는 왜 먼저 보낸건데?" "그건……." 무하는 말없이 두 사람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고모부의 앞으로 가 차분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잘 못 알아들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고모부는 차분한 무하와 아직도 씩씩거리는 부인을 보면서 다르게 생각해 버렸다. "아니다. 무하가 그럴 리 있겠니. 피곤하지? 들어 가 쉬거라." 무하는 공손하게 목례를 하고 자신의 방이라고 안내 받았던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옆방과 건넛방 두 개, 총 세 개의 방에는 사촌들의 방이었다. 그녀의 방은 그네들의 놀이방이었던지 장난감이 가득했는데 무하는 그것들에게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여러모로 피곤했던 무하는 일단 좀 자자고 마음먹고 구석에 놓여진 침대에 가 누웠다. 그러다 무언가를 잊었던 모양인지 벌떡 일어나 짐 가방을 급히 뒤졌다. 잠시 뒤 무하는 찾은 물건을 들고 침대로 가 옆에 놓인 테이블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부모님 사진이 끼어진 액자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언제 어느 때에 자던 꼭 부모님께 이런 인사를 해댔던 무하였다. 그녀는 그제서야 안도한 듯 평화로운 얼굴로 잠을 청했다. 새근새근 잘 자던 무하가 깬 것은 잠을 충분히 잤기 때문이 아니었다. 세 명의 사촌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 였다. "뭐야?" 무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세 사촌은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여기는 우리 장난감 방이야!" "넌 왜 여기 있어?" "새로 온다던 장난감이 너야?" 무하는 조용히 그들을 말렸다. "시끄러워." 또래 아이들치고는 너무 어른스러웠던 그녀였던지라 왠지 주눅이 들어버린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하는 그런 아이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친척과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이 아이들도 서로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무하였다. "나는 이무하, 너희 사촌이고 5살이야. 여기가 너희 장난감 방이었지만 이제는 내 방이야. 내 방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거구. 새로 온 장난감이 뭔지는 모르지만 나는 사람이니까 장난감이 아니야. 이제 내가 묻을게. 너흰 누구야? 왜 내 방에 허락 없이 들어왔지?" 아이들을 쭈빗거리며 가장 큰형이라고 추정되는 아이의 뒤로 숨어 들어갔다. 6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심술궂게 말했다. "여긴 우리 방이야! 우리꺼란 말이야! 이 거지야!"" 뒤에서 아이들이 형의 말을 따라하며 거지라고 소리쳐 대자 무하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일어 났다. 그리고 가장 맏이로 보이는 그 남자아이의 앞에 가 섰다. "너희가 누구냐고 물었어." 남자아이는 크게 소리쳐 말했다. "나는 이세훈이다! 너보다 하나 많아!" 무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반박했다. "한 살 더 많다는 거겠지, 바보야." 세훈의 얼굴이 단숨에 빨게 지면서 무하를 떠밀어 버렸다. "나 바보 아니야! 이 거지야!" 무하는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가 조금 열 받은 얼굴로 세훈의 앞에 다시 가서 섰다. 그러자 세훈은 겁먹으면서도 오기로 마구 소리쳤다. "거지! 거지!" 무하는 오른 손을 들어올리면서 조용히 말했다. "거기서 한번 더 말하면 가만 안 둔다." 세훈이 한 걸음 물러서면서 입을 꾹 다물자 무하는 고개를 끄떡이면서 시계를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가서 밥이나 먹자, 세훈아. 너희들 이름은 뭐야?" "나 하나 많은데……." 세훈이 우물우물 말했지만 무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난 세호, 앤 세진."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세호를 보며 무하는 살짝 웃어 보였다. 외동딸이라 동생이 갖고 싶었던 그녀였기에 '동생이 생긴다면 이런 기분일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자니까?" 무하가 세훈의 손을 잡아끌자 다른 아이들도 쭈빗쭈빗 따라 나섰다. 돌아서는 무하의 얼굴은 단숨에 무표정해졌지만 아이들은 보지 못했다. "엄마, 밥 줘!"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세훈은 무하의 손을 뿌리치며 음식을 만들고 있는 엄마에게 가 매달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무하는 그것을 덤덤히 보면서도 욱씬거리는 가슴을 조금 쓸어 보았다. 자신의 자리를 몰랐기 때문에 그녀는 고모네 식구들이 다 앉고 남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하지만 식구대로 맞춰 놓았던지 의자는 남지 않았다. 고모부가 그것을 알아채고 고모를 나무랐다. "무하 의자를 챙겨 놨어야지. 사람이 정신이 없어!" "어머! 무하야, 고모가 경황이 없었구나. 어쩌지……?" 무하는 벽에 기대서서 무표정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죠, 뭐." 그러자 고모부가 고모를 보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고모가 한발 앞서 말했다. "그러면 되겠구나! 내일 의자를 사오마. 오늘만 참으렴." "네." "여보!" 고모부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불렀지만 고모는 능청스럽게 받아 쳤다. "얼른 드세요. 무하가 기다리잖아요." 결국 무하는 입맛이 없다며 밥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뜬 세호의 자리에 앉아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 아참! 페르의 이름을 지어주신 자스민님께 늦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페르는 역시 어릴때나 커서나 똑같네요^^ 부모님의 물건을 탐내는 고모를 골탕 먹이고 자신을 무시하려는 아이들을 기선제압하고^^ 무하의 시절은 그리 짧게 지나진 않을 거에요. 아무리 그래도 19년의 인생인걸요^^ 이번 파트는 페르의 회상씬으로 도배(?)가 될듯...^^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벽에 꽂아져 있던 동화책을 뽑아 보던 무하는 문이 열리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세호였다. "뭐해?" 세호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물어오자 무하는 책을 덮으며 일어나 그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앞으로는 노크를 먼저 하면서 '나 세호야.' 라고 말해야 돼." 주춤거리며 들어오던 세호는 무하의 말에 알았다고 고개를 크게 끄떡여 보였다. 무하는 옆에 놓여져 있는 작은 의자를 세호에게 밀어 주었다. "세호는 몇 살이야?" "네살." "나보다 한 살 어리네? 그럼 이제 누나라고 불러." "누나?" "응. 남자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를 그렇게 부르는 거야." 세호는 한참 꼼지락거리다가 무하를 올려보며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 무하는 웃어 보이면서 답해 주었다. "왜?" 얼른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양이 귀여웠던지 무하는 다시 웃었다. "저기……이제 누난 우리랑 같이 사는 거야?" "왜? 싫어?" "아니!" 발끈하며 크게 소리치던 세호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무하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응. 이제 같이 사는 거야." "쭉?" "아마도……." 무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기대에 반짝이는 세호의 얼굴을 보니 왠지 가슴이 아파왔다. "헤헤, 쭉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형아도 그랬으면 좋겠데." "그래?" 그건 의외였는지 무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세훈 형아도 누나 좋데." 무하는 다시 활짝 웃었다. "나도 너희 다 좋아!" "넷이 그렇게 사이가 좋아요?" "그렇다기보다는……셋이 무하 말이라면 꼼짝도 못하는 것이, 혹시 맞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니 까요?" "설마……애들이 맞고 가만히 있겠어요? 그냥 애들끼리 마음이 잘 맞는 거겠죠." "그런 거면 좋겠지만……." 새해였다. 크리스마스 전날이 생일인 무하가 부모님을 잃고 처음으로 맞는 새해였다. 고모부가 장남인지라 세훈네의 친척들이 몰려왔다. 부엌에서는 고모를 비롯한 부인네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거실에서는 고모부를 비롯한 남정네들이 고스돕 등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훈과 무하, 세호와 세진은 계단에서 얼굴을 빼꼼 빼들며 그네들을 엿보고 있었다. 유치원을 다니는 세훈이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왔기 때문에 넷의 얼굴엔 약간의 비장함 마저 있었다. "세훈아, 진짜로 귀신이 있데?" "그렇다니까! 애들도 다 있데. 그리고 선생님도 있다고 했단 말이야!" 특히 무하는 입술까지 꼭 깨물고는 주먹까지 쥐고 있어, 긴장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훈이가 다시 장담하듯 말했다. "분명히 제사를 지낼 때 돌아가신 어른들이 오셔서 음식도 드시고 격원도 해주고 그런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번에 무하 부모님도 오실거야." "내가 볼 수 있을까?" 무하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오자 세훈은 자신의 가슴을 큰 동작으로 두들기면서 자기만 믿으라고 했다. 12시가 되자 상이 차려지면서 다들 안방으로 몰려들어갔다. 넷은 조심조심 밑으로 내려가 조금 열려진 안방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른들이 절하는 것이 그 틈으로 보였다. 한참 그 곳에 서있던 세훈은 손뼉을 치면서 침울해 있는 무하에게 말했다. "여기보다는 현관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 거기가 더 빠르잖아!" "응." 무하는 입술을 다시 꾹 깨물면서 현관 쪽으로 뛰어갔다. 약간 열려져 있는 현관문을 활짝 열자 찬기운이 몰려들었다. "춥다." 세호가 가볍게 입은 옷을 원망하면서 오돌오돌 떨자 무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세호는 펄쩍 뛰면서 다시 열라고 했다. "하늘나라는 무지 멀데! 그러니까 여기까지 오면 무지 힘드실거야. 문 여는 것도 힘들지 몰라! 그러니까 열어 나와해. 난 괜찮아, 누나!" 무하는 웃어 보이면서 현관 앞에 앉았다. "괜찮아. 문 여는 게 힘드시면 노크하실 거야. 그럼 그때 내가 열어 드리면 되는 거야." 그러자 다들 수긍한 얼굴로 무하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 까? 안방에서 어른들이 식사하며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호가 안절부절못하면서 무하를 힐끔 보며 말했다. "누나네 부모님 아직 안 왔는데 벌써 식사하시네." 무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괜찮아. 음식은 많은 걸! 우리가 차려 드리면 돼!" 다시 네 명은 현관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네들은 식사를 끝내고 상을 들고 나오는 고모에게 발견돼, 꾸지람을 받을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너희들 자지 않고 거기서 뭐하는 거니!" 세훈이 얼른 일어나서 답했다. "무하네 부모님 기다려요!" 고모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무하를 보다가 계단을 가르키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얼른 올라가서 자!" 세훈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지만 무하가 일어나자 결국 따라 일어났다. 무하는 울쌍이 된 세호를 쓰다듬으며 계단으로 향했다. 무하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세훈은 마구 투덜대기 시작했다. "쳇,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하는 침대에 가 앉으면서 말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아직 하늘나라에 도착하지 못했나봐. 그래서 밑으로 못 내려오는 거야." 세호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왜? 아직 하늘나라 안 갔으면 바로 여기로 오면 되잖아?" 무하는 자신의 옆에 앉은 세훈과 앞에 앉은 세호, 세진을 차례로 돌아보고는 답해 주었다. "하늘나라에 도착해서 쉰 다음에 올 수 있는 거야. 힘들게 가고 있다가 도중에 쉬지도 못하고 여기로 오면 힘이 다 빠져서 다시 하늘 나라에 갈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오늘 오지 못 한 거야." "그럼 내년에는 올 수 있어?" "응, 올 수 있을 거야."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는 세 명의 아이를 보면서 무하도 웃을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하는 '웃을 수 있었다'. ======================================================================= 늦었습니다.....ㅠ.ㅠ 죄송.... 내용은 다 정해 놨는데도 글이 안 써지는 군요^^; 얼른 얼른 써졌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무하는 자신들의 방은 내버려두고 굳이 자기 방에서 잠을 청하는 세 남매를 둘러보다가 세진이 차버린 이불을 주어다 다시 덮어주고 나왔다. 목이 말랐기 때문에 부엌에 가서 물을 마실 생각이었던 것이다. 계단 끝에서 보니 고모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틀 전 밤에 선잠에 들었던 고모가 목이 마른데 무서워서 내려갈 수가 없다고 칭얼대는 세호를 대신해서 내려온 무하의 인기척에 깨서 마구 짜증을 부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무하의 걸음새가 조심스러워졌다. "기분 나쁜 아이에요." "왜 또?" 짜증 섞인 고모의 음성과 마찬가지로 짜증스럽게 반문하는 고모부의 목소리가 무하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녀는 이미 둘이 화제를 삼고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하는 아주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 물통을 꺼냈다. 어차피 사랑 받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별 동요 없이 볼일을 볼 수 있었다. 무하에게는 오히려 세 남매와 친하게 지내는 상황이 뜻밖이었다. 물을 마시고 나오는데 고모와 마주쳤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면서 투덜거렸다. "깜짝이야! 불이라도 켜고 다녀라. 네가 도둑이니?" "'정말 기분 나쁜 아이야'……죠?" 속으로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던 고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무하는 차분하게 목례를 하며 그녀의 곁을 지나 계단을 올라섰다. "아!" 고모의 어깨가 순간 흠짓 했지만, 무하는 모르는 척, 살짝 웃으며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곤 올라가 버렸다. 새벽 늦게서야 잠이 들어었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일어난 무하는 자신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세진을 조금 떨어뜨려 놓고 방을 나왔다. 크게 기지개를 피며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던 그녀는 막 짐 가방을 들고 세호 방에서 나오는 고모를 만날 수 있었다. "고모,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무하를 가증스럽다는 듯 쳐다보던 고모는 가방을 들고 거실로 내려가 버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다가 문 듯 가방에서 떨어진 물건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옷이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세진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아이의 방답게 그리 깨끗한 편은 아니었던 지라 바로 발치에 장난감이 채였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왠지 위화감이 든 무하는 잠시 그 자리에게 입가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세진의 옷장을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하복만 남아 있을 뿐, 동복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왠지 한기에 무하는 살짝 몸을 떨었다. "무하야, 잠깐 고모와 어디 좀 갔다오자." 부엌에서 우유를 꺼내 마시던 무하에게 고모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무하는 아무 대꾸 없이 우유팩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따라 마신 빈 컵을 싱크대에 올려 놓은 뒤, 이층으로 올라갔다. 무시당한 것이라 판단한 고모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발소리를 거칠게 내면서 뒤따라 올라갔다. "고모 말을 뭘로 듣는 ……!" 하지만 차가운 얼굴로 입가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무하를 보자 왠지 말문이 막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하는 조용해진 고모를 한번 본 뒤에 계단을 마저 올라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아직도 자고 있는 세 남매가 보였다. 잠버릇이 험한지 세진의 이불은 어제 밤과 마찬가지로 형편없이 구석에 박혀 있었다. 무하는 한번 웃더니 이불을 들어다 다시 세진의 몸에 덮어 주었다. 나름대로 얌전히 자는 세훈과 세호의 이불까지 손봐 준 뒤에야 무하는 외투를 챙겨 방을 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무하의 몸에 아까 세진의 방에서 느꼈던 한기가 다시 온몸에 침투해 왔다. 무하는 자기도 모르게 방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 알 수 없는 한기에 떨리는 손으로 부모님의 사진이 끼어져 있는 액자를 들어 안의 내용물만을 꺼내 품에 넣었다. 그리고 무겁게 느껴지는 걸음새로 방을 나왔다. 계단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모는 내려오는 무하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무하는 저항 없이 그녀의 이끌림대로 집을 나와 차에 탔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차는 떠나기 시작하자 무하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좀처럼 이동하지 않았다. 한참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아담한 건물 앞이었다. 무하는 건물 앞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별다른 반응 없이 보면서 고모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걸어가는 도중에 고모가 설명을 하는 소리가 원하지 않아도 귓가에 들어왔다. "고모네는 이번에 해외로 피서를 가게 됐단다. 네가 오기 전에 예약을 해 놨기 때문에 아쉽게도 너는 함께 못 간다. 일주일정도 걸릴 테니 선생님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네." 그리고 '원장실'이라는 표지가 붙은 방에서 만난, 선생님이란 칭호를 받은 여자는 상냥해 보이는 미소를 가득 띈 체, 무하를 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뒤룩뒤룩 살이 찐, 개기름이 번지르하게 흐르는 중년의 남자가 탁한 눈으로 무하를 보며 자꾸 침을 삼켜대고 있었다. 무하는 대조적인 둘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기가 온몸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무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고모는 무하에게 너무나 드문 미소를 보여주면서 차에 올라탔다. 들어올 때, 한글을 웬만큼 읽는 무하는 건물의 대문 옆에 써져있는 '천사 고아원' 이라는 글씨를 보았지만, 그 뜻을 알기엔 그녀는 너무 어렸다. 무하는 품안에 있는 부모님의 사진의 존재를 느끼며 떠나는 고모를 배웅했다. 차가운 바람이 무하를 한번 휘감고 지나갔다. "여기가 이제부터 네가 지낼 곳이란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이 무하에게 주어졌다. 무하는 상냥하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는 선생님을 올려다보다가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제부터 제가 지내야 하는 거죠? 고모가 피서에서 돌아오실 때까지 있는 곳이 아닌가요?" 여자 선생님의 얼굴이 급속하게 굳는 것을 보면서 무하는 고개를 돌렸다. "미, 미안하구나. 선생님이 말실수를 한 모양이야." "괜찮아요. 저야말로 꼬투리를 잡아서 죄송합니다." 공손한 무하의 말에 선생님은 겨우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선생님은 미화라고 해.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선생님한테 말하렴. 힘이 닿는데 까지 도와주마."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나가자 방안에 있던 두 명의 아이가 무하에게로 다가갔다. 둘 다 곱상하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저기……." 무표정한 얼굴로 둘을 응시하던 무하는 살짝 웃으며 자기 소개를 했다. 괜히 분위기 잡으며 혼자 다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 무하야. 이무하. 5살이구. 너희는 누구니?" 무하가 웃자 긴장이 풀린 듯, 먼저 말을 걸었던 여자아이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난 미라야. 그리고 앤 선희. 우리도 5살이구." "무하야." 그네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던 무하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미라였다. "저기……너 고모가 다시 데리러 온다고 했어?" 무하는 고개를 원 상태로 한 뒤에 나지막하게 답했다. "그러길 빌어." 미라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기 때문인지 무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시무룩하게 있었다. "난 안 믿어!" 갑자기 들려오는 샛된 소리에 둘은 동시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인형을 들고 있는 선희가 보였다. "난 안 믿어!" 선희가 다시 소리를 지르자 이번에는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죄다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주시했다. 말이 없고 약간 신경질적이던 선희는 자신을 보는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하만 보며 계속 소리질렀다. "난 부모님이 여기다 두고 갔단말야! 고모가 왜 데리러 오겠어? 정신차려, 이 바보야!" 무하가 천천히 일어나서 선희에게 걸어가자 미라가 안절부절못하며 따라나섰다. "야! 저기 고아원 애들 있다!" 무하가 선희 앞까지 걸어가 뭔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 불청객이 끼어 들었다. 온전하게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아이들이었다. 그네들은 밥 먹고 할 일이 너무 없는 무리였던 지라 고아원 아이들을 놀려먹기를 즐겨하는 녀석들이었다. 고아원 아이들은 이골이 났다는 얼굴로 무시했지만 무하는 그 광경을 처음 접하는 지라 선희에게 할말도 잊고 그쪽으로 시선을 멍하니 두었다. 불청객들은 고아원 아이들에게 모래를 마구 뿌려댔다. "너희들은 병신이래! 그래서 부모가 버리고 간 거래! 몰랐지~?" 그제서야 고아원 아이들이 반응하면서 마구 달려들었지만 불청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을 갔다. 씩씩대며 고아원 아이들이 자리에 주저앉자 다시 나타나 놀려대는 불청객들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네들은 이 '병신'들을 상처 입히는 효율적인 방법을 이미 터득한 상태였다. "병~신! 병~신! 엄마가 버리고 간 병~신~!" 아예 노래를 부르는 그네들을 보면서 몇몇 아이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져서 울먹였고, 몇몇 아이들은 다시 발끈 해서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천천히 앞으로 나오고 있던 한 여자아이에게 저지 당해, 어리벙한 얼굴로 그 아이를 보기만 해야 했다. 여자아이는 발끈하던 아이들이 수그러들자 다시 앞으로 나왔다. 남자아이도 아니고 작은 여자아이가 나왔다고 해서 도망갈 불청객이 아니었다. 오히려 뻔뻔하게 팔짱을 끼면서 뭐냐고 반문하는 그들을 여자아이는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하야, 어쩌려고 그래!?" 무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미라를 힐끔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불청객에게 주었다. "부모님이 버리고 간 게 병신이라면……."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오는 무하였다. 왠지 모를 박력에 불청객들은 한 걸음 물러서려다 오기로 버텨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없는 난……등신인가?" 이번에는 한 걸음 물러선 불청객들에게 무하는 다시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조심하는 게 좋아." 무하는 불청객들의 눈을 똑바로 올려보면서 픽 웃어 보였다. "죽음은 공평해서 사람을 가리지 않거든." 주춤거리다 도망가는 불청객들을 씁쓸하게 보면서 무하가 몸을 돌리자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이 보였다. 무하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아이들을 조용히 재끼면서 선희의 앞으로 걸어갔다. "나도 믿진 않아. 하지만 믿고 싶어. 그게 잘 못 된 걸까?" 선희는 울면서 무하에게 매달렸다. "선희 부모님은……일년 전에 살림이 피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고 여기에다 맡기고 갔데……." 옆에서 미라가 울적하게 말했다. 무하는 다시 서글프게 우는 선희를 보듬아 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선희는 곧 여기를 떠나겠네? 그래도 놀러와야 해, 알았지?" 선희는 멍하지 무하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푹 파묻고 울어댔다. 선희가 부모님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떠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그날은 무하의 고모가 그녀를 데리러 오기로 한 바로 그날이었다.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글이 안 써졌거든요.......ㅠ.ㅠ 이제 좀 풀리네요. 고아원에서 어떻게 일을 풀어나가야 할지...막막.....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막혔거든요^^ 그럼...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선희가 떠나고 무하는 고아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무하는 이미 "고아원"이라는 곳이 부모님이 없거나 부모님께 버림받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이 곳 아이들을 몇몇 별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상한 눈으로 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하는 현관 앞에 서서 계속 고모의 차가 떠났던 방향만을 바라봤다. "돌아가고 싶어?" 투박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지만 무하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대로 입을 열었다. "민재냐?" 민재라고 불린 또래아이에 비해 덩치가 좋은 남자아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무하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무하는 민재가 자신보다 두 살이나 많았지만 그 가 거부했기 때문에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무하는 처음 온 날의 사건 이후로 고아원 아이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리더로 취급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전에 또래 아이들을 이끄는 역할을 도맡았던 민재가 현재 누구보다도 무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특별히 이쁨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며……왜 가고 싶은 거야?" 무하는 민재의 옆에 같이 앉아서 여전히 도로를 보며 답했다. "그래도 그곳이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민재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으면서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선생님이 그랬어. 누군가 "있어야 할 곳"은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이 있는 곳이라고……." 무하는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어렵다……." 민재는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응……. 어려워." 그 뒤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체 현관에서 밤늦게 미화 선생님이 찾으러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고모는 오지 않았다. "뭐라고?" 처음 왔을 때 본 원장이란 남자는 여전히 호감이 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하는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말을 되살리면서 겨우 평정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모가 절 잊은 모양이에요.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원장은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띄우며 잔혹하게 말을 내뱉았다. "애당초 네 고모는 여기에 널 두고 간 거란다. 못 알아듣겠니? 그럼 좀더 정확하게 알려주지. 넌 버려진 거란다." 그건 무하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기 보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 증거로 무하의 품에는 부모님의 사진이 들려 있지 않는가? 무하는 단지 버려졌다고 해서 손놓고 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알고 있어요. 제가 돌아가면 고모가 싫어할 테죠. 하지만 그건 원장님이 상관 할 바가 아니니 고모의 주소나 알려주세요." "네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는 거란다. 이렇게 까지 밖에 할 수 없는 고모의 입장도 헤아려 줘야지." '나는 아직 아이잖아? 왜 제가 어른들의 입장을 이해 해 줘야 하는 거지? 고모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내 입장은? 내 심정은 어떻게 되는 거지?' 무하는 마른침을 한번 삼킴과 동시에 꺼내고자 하는 말을 순환시켰다. "이미 말했잖아요. 원장님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알았어요. 알려주기 싫다면 제가 알아서 하죠." 차분하지만 싸늘하게 들리는 말을 내뱉고 무하는 돌아서 나가려 했지만 원장이 잽싸게 그녀를 막아섰다. 무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원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하의 어머니는 생전에 무하에게 뜻 모를 소리를 많이 꺼내던 분이었다. 그 뜻 모를 소리중에서 무하는 하나만은 지금 이해할 수 있었다. -무하야, 사람을 판단할 때는 외모를 봐서는 안 된다. 사람을 판단 할 때는 말이야, 눈을 보는 거야. 외모와는 달리 눈은 '진짜 심성'을 투영 시켜 주거든. 거짓말을 못한다고 해야하나? 무하는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불쾌감을, 원장의 눈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는 무하를 당혹스럽게 쳐다보면서 원장이 다가섰다. "왜 그러니?" 무하는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원장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묘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원장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겨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가겠어요." 구역질을 애써 참으며 무하는 문쪽으로 단호하게 몸을 돌렸지만 원장은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 앞을 가로막아 섰다. "꼭 고모를 찾아가고 싶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란다. 뭣하면 집까지 데려다 줄 수도 있어." 무하는 원장에게 풍기는 역겨움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 방법이 뭔가요?" 원장은 약간 떨리는 손으로 무하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떼다가 뒤로 넘겨주면서 웃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란다. 무하는 착한 어린이니까, 원장 선생님의 말만 잘 들으면 돼." 무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늘 포커페이스였던 무하로서는 드문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원장은 무하가 물러선 만큼 앞으로 걸어와 허리를 숙여 무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낮게 말을 했다. "무하는 피부가 참 곱구나. 선생님이 많은 아이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하얗고 깨끗한 피부는 본적이 없단다. 무하가 크면 남자들을 많이 울리고 다니겠구나." 무하가 찌푸린 얼굴에서 점점 무표정으로 변해 가는 것을 보며 원장은 다시 그 역겨운 미소를 띄었다. 무하의 경계심이 칭찬으로 인해 사그러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무하도 훗날에야 '농땡 사부'라 불리는 남자에게 들어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화가 위험수위를 넘어서면 무표정해지면서 반대로 손속이 흉폭해지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원장은 이번에는 칠렁거리는 무하의 흑발을 조금 들어올리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슬며시 쓸어내렸다. "피부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도 곱기 그지없구나. 이렇게 진한 흑색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이 윤기라니!"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던 손은 이번에는 무하의 손을 타고 올라오더니 목을 타고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는 턱을 들어 올려 무하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게 한 원장은 다시 뭔가 지껄이려했다. 하지만 무하는 더 이상 들을 생각이 없었다. 원장은 쑥스러워한다고 생각하며 진절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을 뻗으려 했지만 무하는 잽싸게 뒤돌아 안쪽으로 걸어갔다. 민재가 참고하라며 알려줬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에 급히 뛰지 않았다. -원래 쫓기는 자는 절대 급하게 행동해서는 안돼는 거야! 왜냐면 쫓는 자를 흥분시키기 때문이지. 원장은 무하가 소파 쪽으로 향하자 급할 것 없다는 생각에 머리를 쓸어 올리며 뒤따랐다. 무하는 아까 봐두었던 화분이 놓여진 책상 쪽으로 걸어가 뒤돌았다. 겨우 5살된 무하가 부담 없이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사기로 만들어진데다 선인장이 심어져 있어 맞는다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 같은 화분이었다. 무하는 다시 자신의 앞까지 걸어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기 시작하는 원장을 무표정하게 올려다보다가 한쪽 발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발에는 딱딱한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무하의 감촉에 도취되어 있던 원장은 결국 아랫도리에 급심한 고통에 의해서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원장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가 결국 시벌게 진 얼굴로 손 하나를 번쩍 들며 일어났지만 무하가 그보다 한발 빨랐다. 옆에 있던 화분을 번쩍 들어 원장의 머리에 사정없이 내리찍은 것이다. 꽤 많은 양의 출혈을 보이며 쓰러진 원장은 귓가에 들리는 서늘한 목소리와 그것이 의미하는 살벌한 뜻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그랬어. 어린이를 이상하게 더듬는 '짐승'은 변태라고. 또 변태는 '쓰레기'니까 페기처분 해야 한다고 했어." 무하는 옆에 있던 원장의 골프채를 집어들고 있었다. ================================================================================ 이벤트를 합니다^^* 자세한건 공지를....^^ 중요한것! 상.품. 있습니다^o^ ps. 요 근래에 저에게 메일을 보내주셨던 분들께 사과의 말을 올립니다..ㅠ.ㅠ 제가 아주 울적하고 안좋은 일이 있어 밝은 내용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답멜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제 조금 나아졌기 때문에 글도 올리고 메일도 보내고 하려구요. 정말 죄송합니다.(--)(__)(--)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미화는 상냥한 여자였다. 많지 않은 월급에 만족하며 진심으로 아이들을 아끼는 그녀는 아이들에게 인기인 일 수밖에 없었다. 착한 마음씨에다 단정한 용모는, 출신을 알 수 없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혼담이 들어오게 했지만 그녀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두 거절해버렸다.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 곳에서 계속 일해도 상관없다는 조건을 들고 왔던 혼처까지 거절했던 터라 아무도 믿진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 미소에 전에 없던 명랑함까지 들어가 있어 보는 사람이 훈훈함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선생님!" "아, 민재야." 그녀를 지금 부르는 민재라는 아이는 7살이지만 덩치가 무척 컸고 골목대장 역은 맡고 다니는 싸움꾼으로 유명한 아이였다. 무척 무뚝뚝한 아이였는데 요즘은 곧잘 웃고 애교도 피우곤 해서 미화는 무척 기뻤다. "무하가 원장에게 할 말 있다고 간 뒤로 안 보이는데, 혹시 못 보셨어요?" 민재는 원장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벌레를 본 듯, 인상을 찌푸려댔다. 미화는 원장의 손버릇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얗게 질려서 원장실로 냉큼 뛰어갔다. 민재가 자신을 뒤따라오는 것을 보고 돌아가라고 소리쳤지만 오히려 민재가 그녀를 앞서 갈 뿐이었다. -벌컥! 민재는 문을 부수 듯 거칠게 열어 젖기고 나서는 완전히 굳어서 눈만 크게 껌벅여 댔다. 곧이어 도착한 미화는 민재의 그런 모습에 뭔가 불길함을 느낀 듯 얼른 방안으로 들어섰는데, 마찬가지로 굳어서 눈만 껌벅이는 신세가 되 버렸다. 비린내가 흐릿하게 풍기는 방안에서 머리에 모래 따위가 묻은 원장이 기절해 있었고 그 위로 골프채를 들고 있는 무하가 있었다. 무하는 잔뜩 치켜올린 골프채를 여지껏 해 왔던 것과 같이 밑으로 힘껏 내리쳤는데, 그 것은 정확히 원장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이미 기절했는지 작게 신음소리만 내뱉는 원장을 멍하니 보던 미화는 민재보다 한발 빨리 움직여, 무하를 막았다. "무하야! 뭐 하는 짓이니?!" 무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다그치는 미화를 처음에는 무덤덤하게 보다가 이내 슬픈 낯빛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변태는 쓰레기라고 했어요." 왠지 미화에게서 엄마의 자취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그녀를 올려 볼 수가 없는 무하였다. 민재가 다가와서 그런 무하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무하는 골프채를 힘없이 떨어뜨리며 민재와 미화를 지나 문밖으로 나갔다. "전 고모의 집으로 갈 거 에요. 주소는 모르지만……찾아갈 수 있을 거 에요." 터덜터덜 걸어가는 무하를 멍하니 보던 민재는 얼른 뒤따라가 무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돼?" 무하는 다소 힘이 빠진 모습이었지만 변함없이 차분한 눈동자로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는 민재를 주시하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민재는 기다렸다는 듯 크게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털석. 민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려온 힘없는 소리에 둘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주저앉아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있는 미화가 보였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민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민재가 자신을 돌아보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무하는 민재의 손을 차분하게 뿌리치고는 말했다. "누군가 '있어야 할 곳'은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이 있는 곳이라고 네가 그랬지?" 민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자 무하는 말을 이었다. "그럼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라고 생각해?" 민재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무하는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놀러……올거지?" 민재가 짧게 물어왔다. 무하는 웃으며 '당연하지' 라고 답해주었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단 미화는 아직도 떨리는 손을 겨우 끌어 잡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양복을 잘 차려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원래 좀 전부터 저쪽 복도 끝에서 걸어왔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이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미화 선생님? 여기서 뭐하십니까?" "……!" 미화는 눈을 크게 뜬 체 남자의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그 남자는 원장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미화의 반응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던 남자는 원장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형님, 접니다." 민재와 미화는 어찌 할 바를 모른 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무하는 차분하게 문 쪽을 볼뿐이었다. 곧 예상했던 경악성이 들려왔다. "형님!?" 남자는 금방 문 밖으로 얼굴을 들이 내밀며 고함을 질렀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미화가 불렀던 구급차 소리가 그제서야 들려오면서 고아원은 갑자기 부산스러워 졌다. 그 와중에도 묘하게 고요하던 복도에서 무하의 차분하다 못해 싸늘한 음성이 퍼져 나갔다. "제가 그랬습니다." "감금 조치인가……. 뭐, 생각보다 약하군." 무하는 독방에서 작은 창 밖을 보며 마치 딴사람 이야기인 마냥 무덤덤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미화는 마구 당황하며 소리쳤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니!" 무하는 동동 구르는 미화를 보며 살짝 웃었다. 엄마를 연상시킬 정도로 상냥하고 조용하던 그녀가 마치 세호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왠지 재미있었던 것이다. "지금 웃음이 나오니?"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주저앉는 미화에게 무하는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할거니……이제?" "고모네 갈 거 에요." "고모네. 고모네……. 왜 '우리 집'이라고는 하지 않는 거니?" "진실이 아니니까요." 미화는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입을 벙긋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갈 생각인데……?" "길은 기억하고 있어요. 여기까지 오는 길이 멀긴 해도 단조롭더군요." 이 곳으로 올 때, 괜히 차 밖만 보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말도 안돼! 여기서 거기까지 걸어가겠다는 거니?" "어쩔 수 없잖아요. 전 돈도 없고……가진 이동 수단이라곤 다리밖에 없으니 그걸 사용하는 수밖에." 하며 무하는 천천히 일어나 가슴을 쓸어 옷 위로 부모님의 사진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어려운 결심을 이행하기 위한 일종의 '각오'였다. "전 갈게요." 감시 역이 미화였던 것이 무하로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미화는 문밖으로 나가는 무하의 손을 얼른 잡아끌면서 품에 넣어 두었던 돈을 집어 주었다. "꿔주는 거니까!……꼭 돌려주러 와야해? 그리고 이거……내가 몰래 알아온 건데 너희 고모네 주소야." 무하는 자신의 손에 잡힌 녹색 지폐들과 쪽지를 보다가 결국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제가 다시 오길 바라는 건……민재 때문인가요?" 미화가 얼굴을 확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자 무하는 의아한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전 민재가 선생님께 뭔지 모르겠어요. 짐작도 가지 않지만……. 짐작도 되지 않는 건 아마 민재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민재는 답답하고 화가 날 거 에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에." 고개를 숙인 미화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민재는……민재는……." 무하는 지폐를 품안 깊숙이 집어넣으며 문을 나섰다. "전 남의 일에 관심 없어요. 저한테 관심을 전부 쏟는다고 해도 살아갈 길이 막막하니까요.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도 전 상관하지 않아요." 미화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단어를 알고 있니? '미혼모'." 무하는 얼굴을 갸웃하며 답했다. "아뇨." 미화는 살짝 웃었지만 그 모습은 우는 것만 못하다고 무하는 생각했다. "그 단어를 알게 될 때……무하가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될 거야. 조심해서 가렴." "……네." 어쩌면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무하는 그냥 돌아섰다. 그때의 그녀는 남의 생각이나 심정을 배려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미화가 건네준 돈으로 택시를 잡아탄 무하는 창 밖을 내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몰래 도망을 나오는 것이라 다른 아이들과 인사는커녕 얼굴도 못보고 나온 것이 못내 걸렸던 것이다. 또, 앞으로 고모네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꼬마아이가 무슨 한숨이냐?" 운전기사 아저씨가 무하의 한숨소리에 고개를 돌려 비정 대듯 말했다. "한숨이라는 거……몰라도 좋을 나이인데 말이죠……?" 무하는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체로 힘없이 운전기사를 마주봤다. 신호가 바뀌고 뒤에서 차들이 빵빵거리며 재촉해대기 시작하고서야 운전기사는 앞으로 고개를 다시 돌려 운전을 시작했다. "너도 개 같은 일을 경험한 모양이다?" "'도'?" "난 보증 서준 친구 놈이 도망갔다. 덕분에 지금 쪽박차고 택시나 몰고 있는 거 아니냐?" 무하는 다른 것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저씨도 '있어야 할 곳'을 잃어 버리셨군요." 운전기사는 피식 웃으며 무하가 주었던 쪽지의 주소를 다시 확인해 보고 우회전을 했다. "그건 아니다. 집도 가게도 다 잃었지만 토깽이 같은 마누라가 있거든." 여우같은 마누라가 아니던가? 무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운전기사는 껄껄 웃으며 속도를 더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주소……부자촌 아니냐?" "잘은 모르겠지만……고모가 사는 곳이에요." "고모가 사는 곳을 왜 니가 찾아가냐? 놀러가려면 그쪽에서 데리러 와야 하는 거 아니냐?" "고모가 절 버려서, 제가 찾아가는 거거든요." "빌어먹을, 있는 놈이 더 하다니까. 절대 가서 기죽지 말고! 다시는 그 고모라는 여편네랑 같이 나들이 같은 거 나오지 말아라! 알았냐?" "네." 무하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으면서 답하자, 운전기사 아저씨는 덩달아 웃으면서 훨씬 보기 좋다고 말해주었다. "이 곳이냐?" "네." 무하는 입술을 꼭 깨물고 택시 문을 열었다. 주택에 환하게 켜진 불이 왠지 무하에게 낯설게 다가오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걱정이 됐는지 떠나지 않고, 차에서 내려 무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딩동! "아빠다!" 현관문이 활짝 열리면서 웬 아이가 쪼르륵 달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 보는 아이였다. 무하는 순간 흠짓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 누구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무하를 보는 아이의 뒤로, 따라나온 웬 여자가 고운 톤의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 집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니?" 무하는 집을 한번도 살펴보고, 확신을 가진 뒤에야 물을 수 있었다. "전 이곳에서 신세지던 아인데요." "아! 전에 살던 사람이랑 안면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헌데 어쩌지?" 무하는 불길한 예감에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꾹 쥐었다. "전에 살던 사람들, 일주일쯤 전에 집 내 놓고 이민 갔거든." =============================================================================== 철저하게 버려진 무하입니다......ㅡ.ㅡ; 이제 어떻게 될까요?( ")~~ 하아... 드디어 수정을 끝냈습니다. 졸려 미칠 것 같네요. 며칠 밤샘 작업을 했더니 지금 기절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래도 올려야 될 것 같아서(웬지 안 그러면 짱돌이 날라올것 같았습니다;;) 조금 무리를 해 봅니다. 무하의 앞길이 상당히 막막해 졌지요? 뭐, 그래도 어떻게든 살길이 생기겠지요. 하아...무책임한 말을 남기며...졸려 죽기전에 가서 좀 자렵니다.... =.= ps. 이벤트 벌써 참여 해주신 분들이 계시더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답니다*^^* Ip address : 211.245.12.18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어떻게……할 생각이냐?" 태호는 이렇게 밖에 묻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지만 그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처음 보는 꼬마에게 이렇게 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스스로도 의아할 뿐이었지만, 왠지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지금 꼬마가 입고 있는 상처가, 이제는 아물었지만 전에는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상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태호 자신도 '있어야 할 곳'이 없었던, 아니 잃어 버렸던 고아였던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밑바닥부터 바둥바둥 살아온 인생이라, 그 누구보다도 고생이라는 단어를 많이 접해 보았던 남자였다. 덕분에 앞으로 무하가 살아 나가기 위해 겪어야 할 고생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하가 앞으로 힘들겠지만, 잘 살아 남으리라는 걸 태호는 직감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모네가 이민을 갔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차분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따위를 하며 돌아선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며, 돌아서는 꼬마를 차에 태워 한강에 데려다 주는 동안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안절부절못했던 자신에 비해 침착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강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못 했던' 태호와 아무 말도 '안 했던' 무하는 한시간이 지나도록,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지금까지 시간을 보냈다. 그 정막이 숨막혔던지 태호는 결국 먼저 말을 꺼냈지만 생각해 두었던 위로의 말이 아닌지라 스스로를 책망하기 시작할 때, 여지껏 그 일만을 생각해 왔던 무하가 덤덤하게 입을 열어 답해 주었다. "강원도……가실 일없나요?" 너무나 덤덤하게, 지나가는 말처럼 꺼내 놓은 무하의 질문에 태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무하는 자신의 품에서 미화가 건네주었던 몇 장의 지폐를 몽땅 꺼내 태호에게 주었다. "가시는 길에 저도 데려다 주지 않으실래요?" "강원도 어디 말이냐?" "태백산……기슭에……." 분명 그곳이라고 했다. 단 한번밖에 듣지 못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지명, 태백산. 바로 그곳이 무하의 부모님이 묻어있는 곳이었다. 태백산 기슭에 들어서자 무하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방향을 알려주었다. 태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아 주었다. 친척들의 차에서 내려 걸어올라 가기 시작했던 곳에 도착하자 무하는 자신을 내려 달라고 했다. "이제 됐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인사하는 무하에게 씁쓸한 미소로 답해 준 태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 곳엔 왜 온 거냐?" "부모님을 뵙고 싶어서요." 태호는 침묵을 지키다가 옷을 여미는 무하의 행동에 곧 그녀가 떠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빠르게 다시 물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건데?" "모르겠어요. 그럼……." 제법 험하던 길에 한 걸음 내딛으며 무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엄마……아빠……무하가 왔어요.' 자신의 가슴께를 쓰다듬으며 사진의 존재를 확인한 무하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결심을 다졌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이걸로 된 건가……?" 태호는 입술을 꾹 깨물다가 피식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한 빈털터리 주제에 지금 남 걱정을 할 때야?" 태호는 훌훌 털어 버리자고 마음먹으며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서 차 키를 돌리려는 그의 눈에, 이제는 나무사이로 겨우 보이는 꼬마아이가 들어왔다. "푼 돈 받고 강원도까지 데려 다 줬으면 할만큼 한 거야, 태호!" 하지만 차마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동정에서 비롯된 도움은 위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잖냐, 태호야……." 힘없이 중얼거리던 태호는 결국 차를 돌려 산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무하는 떠나가는 차를 한번 돌아본 뒤, 이곳까지 데려 다 준 그에게 마음속으로 다시 감사의 말을 읊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아직 많이 남은 부모님의 무덤 쪽으로 향했다. 겨우 5살 난 아이의 걸음으로는 한참 걸리는 산기슭에 자리한 두 무덤은 서늘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하는 그 두 무덤을 보자마자 힘이 났는 지 강한 걸음으로 뛰어, 단숨에 그 앞에 도착했다. "엄마! 아빠!" 숨을 몰아쉬며 무하는 작게 웃었다. "저 왔어요!" 그리고는 그 앞에 푹 쓰러 져 한참을 헐떡거렸다. 점심쯤에 고아원을 떠나서 저녁쯤에 고모네의 집이었던 곳에 도착하고, 그 뒤에는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를 시간을 길에서 허비해 가며 이 곳에 도착한 무하다. 겨우 다섯 살의 몸으로 몇 끼니인지 모를 식사를 넘겨가며, 익숙하지 않는 차에 시달리다가 무리하게 산을 타고 올라온 터라 지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호흡이 가라앉은 지 한참이 됐음에도 무하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잔뜩 쌓여 있던 눈이 시리게 느껴지기보다는 포근하게 느껴져 일어나기 싫었던 것이다. 점점 몸이 굳어간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무하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무하는 자신의 빰을 툭툭 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뭐지?' 얼룩무늬를 가진 커다란 개였다. 무하가 고개를 약간 들며 눈을 뜨자 자신의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무하 빰을 발로 살짝 건드리는 개의 행동이 왠지 재미있어, 무하는 자기도 모르게 생긋 웃어버렸다. 그런 무하를 내려다보던 개는 무하의 옆에 길게 누워버렸다. 털이 몸에 닿자, 눈과는 차원이 다른 포근함과 안락함이 느껴졌다. 무하는 어느 샌가 개의 안쪽, 가슴가에 몸을 파묻었다. 그런 무하를 가만히 보던 개는 까슬한 혀로 무하의 빰을 핥고는, 무하의 머리위쪽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내려놓았다. 무하는 깊히 잠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쳇! 저 망할 누랭이는 맨날 시비란 말이야! 무시할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고……." 무시하기엔 너무 흉폭했고, 죽이기엔 그럴 '권리'가 없었다. 원래 이 '구역'은 녀석의 것으로 그는 잠시 머무르는 '식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자란 갈색 머리카락이 지저분해 보이는 남자는 계속 투덜거리며 빠르게 발을 놀려댔다. 어른 허리까지는 족히 빠질 높이까지 쌓인 눈 위였지만 남자의 몸은 신기하게도 발목까지만 눈 속에 들어가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너무나 가뿐한 걸음걸이를 하고 있어, 남자를 평범한 부랑자(?)로 생각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저분한 차림새하며 너저분한 생김하며……그 어딜 봐도 호감을 가지기엔 무리가 있는 남자의 손에는 토끼 한 마리가 들려 있었고, 허리에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남자는 그 '망할 누랭이'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씩씩하게 앞으로 직진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꺽어 옆으로 새기 시작하는 것이 결코 그 '망할 누랭이'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고 남자가 계속 중얼거렸지만 그 속을 알 길이 없었다. 조금 돌아가던 그는 작은 발자취가 자신이 피해왔던 방향쪽으로 나 있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방향으로 봐서 운이 아주 좋지 않은 이상 '망할 누랭이'와 해후할 가방성이 백이었던 지라 남자는 잠시 애도를 표하고 지나치려 했다. 누가 '망할 누랭이'한테 걸려 그 짧은 생을 마감한다고 해도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밀렵꾼이겠지. 알게 뭐람." 하지만 그는 그 자취가 너무 작다는 것에 자꾸 눈이 갔다. 또, 그쪽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니 얼마 전에 생겼던 무덤 두 개가 떠올랐다. 관을 묻던 순간에 그 곳을 지나쳤던 것도 인연이라고, 자꾸 신경이 쓰이자 남자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그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지껏 이동했던 그 빠른 속도는 장난이었던 듯, 발자취를 쫓는 남자의 신형은 벌써 보이지 않고 있었다. -------------------------------------------------------------------------- 잠시 퀴즈~ 이 남자는 누굴까요? 하하,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부지런히 얼른얼른 써야 겠네요. 다시 판타지 세계로 돌아고파요...ㅠ.ㅠ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어라?" 기척을 숨기며 접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 나와 버려 화근이었다. 깃털이 물에 내려앉는 소리도 어렵지 않게 듣는 '망할 누랭이'가 그 소리를 놓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망할 누랭이'의 서늘한 빛을 발하는 눈이 서서히 떠지는 것이 보였다. '쳇!' 그렇게 '망할 누랭이'의 뭣 같은 성질을 잘 알고 있으면서 경악성을 흘린 이유는, 마찬가지로 '망할 누랭이'의 뭣 같은 성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처음에 도착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시체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그 옆에 앉아 있는 '망할 누랭이'였다. 배고프기 전까지는 사냥도, 먹지도 않는 이상한 성미를 가진 '망할 누랭이'를 떠올리며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던 그였다. '신경이 쓰여서 와보긴 했는데, 벌써 죽었군.' 어차피 죽었으면 썩어 한줌의 흙이 되나 범에게 먹혀 그것의 피와 살이 되나 피차 일반이라 생각한 남자는 '망할 누랭이'가 자신을 눈치채기 전에 자리를 피할 심산으로 조심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헌데 돌아서기 직전에 꼼지락거리며 '망할 누랭이'의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드는 꼬마를 보고 만 것이다. 그것은 저 뭣 같은 '망할 누랭이'가 꼬마를 죽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얼어죽지 않게 품고 있다는 것은 내포해 주는 것이라, 나름대로 '망할 누랭이'를 알고 있다 생각했던 남자에게는 경악성을 흘리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눈에 띄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던 자신의 말을 충실하게 따르며 살기를 띄고 일어서는 '망할 누랭이'가 보였다. '젠장!' 남자는 일단 저 녀석의 눈에 띈 이상 편하게 빠져나가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헌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망할 누랭이'가 계속 남자 쪽을 노려보고 일어서면서도 바로 달려들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 있었던 지라 남자는 얼떨떨해 하며 자기도 모르게 '저 녀석이 철이 들었나?' 라는 헛소리를 뱉어냈다. '그럼 그냥 몸을 빼 볼까.' 남자는 계속 '망할 누랭이'를 주시면서도 점차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으르렁거리는 녀석의 경고음이 들려왔다. '나보고 어쩌라고!?' 남자는 녀석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는 지라 온갖 짜증을 얼굴로 내보였다. 감히 입으로 뱉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열 받는 다 해도 '집주인'이 아닌가? '세입자'가 감히 뭐라 할 군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자는 '세입자'라기 보다는 밀린 방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며 쫓겨나지 않으려 바둥거리는 '빚쟁이'에 불과하지 않던가? 남자가 자신의 의도대로 멈춰 서자 '망할 누랭이'는 꼬마 여자의 몸을 훌쩍 뛰어 넘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남자의 눈에 '망할 누랭이'의 몸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았던 꼬마아이의 모습이 확실히 보여졌다. 시력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남자는 꼬마아이가 생각보다 깨끗한 차림이라는 것과 눈과 대조적으로 짙은 흑발에 눈과 구별이 안갈 정도로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남자에게 '망할 누랭이'는 코끝으로 여자아이를 톡툭 밀어 보였다. "지금……나보고 이 아이를 보살피라는 거냐?" '망할 누랭이'는 두어 걸음 더 물러서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살벌한 이를 들어 내며 안광에 살기를 내보였다. 따르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라는 것을 남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알았다구!" 무하가 눈을 뜬 곳은 집이라 부르는 것도 무색한 동굴 안 이었다. 하지만 동굴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안이 완전 개조되어 '본판'을 제외하고는 다른 살림집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무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자 옆에서 퉁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냐, 꼬마?" 무하는 갑자기 들린 소리임에도 놀라지 않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의 원판을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수염과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자란 남자가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옷을 입은 체, 물을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하는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전 이 무하라고 합니다. 누구세요?" 남자는 의외라는 듯, 헝크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겨우 보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호오? 예의는 똑바로 박힌 애구나. 그래, 남에게 '무언가'를 묻기 위해선 자기도 '무언가'를 밝혀야 하는 법이지! 난 하 류다. 난 수련을 하기 위해 여기 왔지. 넌 여기 왜 왔지?"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요." "엄마, 아빠라……. 혹시 그 두 무덤의 주인이 신가?" 류는 별로 섬세한 성격의 남자가 못 됐다. 하지만 무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네. 이 곳은 아저씨의 집인가요?" "그래. 멋지지?" "네." 자랑스럽게 씨익 웃는 류의 모습에서, 이곳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무하였다. "그나저나 난 배고프다. 넌 어떠냐?" 무하는 자신이 밥을 먹었던 때가 언제인지 떠올려보다가 그냥 본능에 충실히 답하기로 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요리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제가 뭘 할 줄 알길 바라세요?" 무하의 질문에 류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빨래!" 둘의 기묘한 동거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무하에게는 산에 들어와 접한 이 두 생물처럼 알기 힘든 것이 없었는데, 그중 하나는 류였다. 무하는 그를 접한 지 이틀 되는 때에서야 겨우 류라는 남자를 대충 파악 할 수 있었다. 그는 상당한 독불장군이었는데, 뭔가 문제만 생겼다 하면 혼잣말로 몇 시간이고 투덜거리는 좀팽이이기도 했다. 무하가 고작 이틀동안 들었던 그의 투덜거림의 주체는 대부분 '망할 누랭이'였는데, 그 것이 무엇인지는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모르면 물어라. 모르는 게 부끄러운게 아니라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것이 부끄러운 거다.' 라고 말했던 어머니의말에 따라 무하가 '망할 누랭이'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흥분해서 마구 설명을 늘여 놓았다. "'망할 누랭이' 말이냐?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내가 이곳에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이 곳의 주인으로 살았던 것 같더구나. 아마도 몇 백년은 족히 삭았을 영수급 괴물 호랑이이다. 쳇, 처음에 날 밀렵꾼인줄 알고 죽이려 들더라구! 물론 이 '천재'께서 훗, 하고 공격을 넘겼는데 그만 실수로 눈에 미끄러져 버렸지 뭐냐? 근데 치사하게 그 틈에 나를 공격하더라니까? 쳇! 그러다가 나한테 검이 있는 걸보고 일단 살려준다고 다시 눈에 띄면 죽인다고 경고하더니 가더라. 뭐? 아, 내가 어떻게 그 놈 말을 알아들었냐고? 네게 아무리 설명을 해줘 모를 것이다. 나의 수준의 반정도가 되면 기와 안광으로써 상대의 의도쯤은 얼마든지 알아챌 수 있거든. 아아, 암튼 나는 수련하기 위해 온 것이라 녀석의 경고를 무시하고 여기에다 자리를 잡았는데 그 녀석 맨날 나만 보면 잡아먹으려 든다구! 뭐? 걸리적거리면 죽이면 되지 않냐구? ……흠흠, 그래도 녀석이 주인장이고 난 침입자인데……예, 예의상 그럴수는 없지. 절대! 실력이 딸려서가 아니라……흠흠, 어디까지나 예의상이야! 예·의·상·" 그리고는 휙 돌아서서는 평소 안 하던 명상에 들어가는 그를 여전히 이해 할 수 없는 무하였다. 그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명상'이라는 것을 진득하게 못하는 남자였던 것이다. 그래도 10분 정도만 참고 명상에 빠지게 되면 옆에서 말을 걸어도 못 알아듣는 집중력을 발휘했지만 말이다. 어쨌던 그는 언제나 자신을 '천재'라고 칭하며 낄낄대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지껏 무하가 접하지 못했던 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아 무하에게는 나름대로 편한 사람이었다. 또 하나는, 처음에 '개'라고 생각했던 정체 모를 동물이었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 감이 안 잡힌 무하는 그 동물에게 어머니가 동생을 낳으면 부르려고 지어 놨다던 '가하'라는 이름을 선물해 주었다. '아름다운 강'에 어울리지 않는, 황소만한 덩치를 지닌 얼룩무늬의 동물이었지만 녀석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무하도 덩달아 뿌듯했다. 누런 색 바탕에 검은 가로무늬에 가진 가하는 부드러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덩치는 황소만해서 무척 컸는데, 아직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는 무하였지만 그 덩치가 범상치 않은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지 전에 무하가 혼잣말로 부모님 무덤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리자 자신의 등을 내밀더니 무하를 태워 무덤까지 데려다 주기까지 했었다. 그 뒤로 가하가 아주 좋아진 무하였다. 가하에 대해선 여전히 파악할 수가 없었지만 답할 수 없는 동물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라,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월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 카페들어가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패러디도 재미있고, 작가님아~방에 써있는 글도도 재미있고*^^* 이라사님의 특별 단편을 기다리는 낙도 쏠쏠하구요^^ 류라는 남자에 대해서의 설명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모델이 따로 있지만....밝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에 못이겨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하여간 제 주변에 류와 똑같은 인종이 있다는 건만 알아주세요^^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류는 신출귀몰한 남자였다. 그건 가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가하는 무하가 빨래를 하러 시냇가로 오면 어느 샌가 나타나 함께 있어주다가 빨래를 널고 무하가 밥을 먹으러 들어갈 때쯤이면 사라지는 나름대로의 규칙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류는 말 그대로 신출귀몰한 남자였다. "뭐하냐?" 무하는 산 중턱에 위치했을 거라 짐작되는 류의 동굴 집밖에서 멍하니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언제 왔는지 류가 머리를 긁으며 앉아 있었다. "그냥……생각하고 있어요." "꼬마는 생각 많이 하면 머리 벗겨진다." "처음 듣는 말이네요." "네가 처음 들었어도 불변의 진리다! 근데 무슨 생각하고 있었냐?" 무하는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감싸며 고개를 다시 원상태로 돌렸다. "그냥 이것저것……. 한달 동안 정리할 시간조차 없이 너무 갑작스레 많은 일들이 생겨버려서…… 이 기회에 생각해보고 있어요." "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말로써 내뱉는 것이 정리하기 쉬운 법이다. 내가 들어 줄테니 한번 읊어 봐라." 그것은 남에게 무관심한 류가 처음으로 무하에게 보인 관심이었다. 무하는 이 관심이 너무나 생소해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하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먼저……부모님이 돌아가셨구요……그 다음엔 고모네 갔구요…… 그 다음엔 고아원에 갔구요……그 다음엔……." 하지만 아이의 문장력이라는 것이 그리 뛰어나지만은 않은 터라 아주 짧막하게 장소 이동으로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보냈는지를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말을 잇기가 힘들었지만 점점 갈수록 말이 잘 새어나온다는 것을 느끼고 무하는 스스로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 뒤로 운전기사 아저씨가 '어떻게 할거냐'고 물었어요. 전 그냥……머리 속이 멍했는데, 갑자기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져서…… 여기에 태워달라고……다행이 아저씨가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엄마, 아빠를 보자 이제는 뭘 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빠져서 그냥 누워버렸는데, 무지 졸렵더라구요. 그래서 자고 일어나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자려는데 '가하'가 와서 옆에 있어 줬어요. 따뜻하고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리고 깨보니 아저씨네 집이었구요." "뭐, 한마디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 거구나?" 무하가 근 한달 동안 겪었던 일들을 단 한마디로 축약시킨 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일 네가 깼을 때, 나의 집이 아니라 그냥 산 속이었다면 어쩌려고 했냐? 지나가는 인적도 거의 없는 이 곳에서 덩그러니 남아서 말이다." "모르겠어요." 무하는 세운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걸 고민하려 구요." "왜 고민하려는 건데?" "아저씨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죠? 그럼 언젠가는 제가 떠나야 된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생각해 두려구요. 이제 갈피를 못 잡고 멍하니 있는 것 따위, 절대 싫으니까." 류는 '기특한 말을 다 하는 군.' 이라고 말해 줄 심상이었지만 그 전에 묘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망할 누랭이'가 분명했다. 녀석이 오래 전부터 자신의 처소를 알고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류는 '빌어먹을!'을 속으로 연신 외친 다음에 퉁명스런 어조로 무하에게 말했다. "고민할 것 없이 여기서 살아라. 뭐, 나야 네가 빨래도 해주고 하니까 별로 불편할 건 없거든. 먹을 거야 널린 게 식량이고……." 무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는 어디론가를 보며 투덜거리고 있는 류를 주시했다. "진심이 아니잖아요." 투덜거리느라 무하의 말을 못 들은 듯, 약 30초동안 먼 산을 바라보며 투덜거리던 류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뭐?" "진심이 아니잖아요."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지라 무하는 그냥 덤덤히 답해줄 수 있었다. 류는 무하의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예리한데, 꼬마. 그래, 고민의 답은 언제쯤에 나올 것 같아?" "지금요." 류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으면서 물었다. "뭐지?" "강해 질 거 에요. 누군가에게서 버려졌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해 질 거 에요. 그게 제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에요." "호오! 훌륭하다!……그런데 어떻게 강해 질 거냐?" 무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류를 올려다보았다. 류는 그런 무하를 내려보다가 문 듯 몸소리를 치면서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키며 물었다. "나?" "혼자 있는 게 좋으시죠? 빨리 그 '상태'로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잘 부탁드려요." 류는 벌떡 일어나며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보다는 본능이 중요한 남자였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청각이 으르렁거리는 범의 소리를 포착한 것이다. "알……았다." 무하는 그렇게 스스로의 말솜씨와 친구의 도움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유난히 눈이 많이 온 태백산을 등산지로 결정한 모험심 가득한 세 명의 등산객들이 있었다. 그네들의 등에는 등산의 어디에 필요한 도구인지 모를 길죽한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정말 여기에 주리를 뜰고 있다는 것이 맞소?" "맞다니까! 내가 전에 똑똑히 봤다고. 호도 그런 호가 없어! 말해도 믿지 못할 걸? 덩치가 말야……!" "됐소. 그 말 한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이우." "헌데 하필이면 이런 날을 택했소? 눈 때문에 걷기가 너무 힘들구만!" "바보녀석! 이런 날이어야 다른 등산객들이 없지!" "아……! 그런 거유?" "됐으니까 입 닥치고 걷기나 해!" 아무래도 이 세 명의 등산객들은 순수한 의도로 태백산을 찾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세 남자가 내려다보이는 좀더 높은 봉오리쪽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높게 묶어 올린 웬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가벼운 남방차림에 짧은 바지를 입은 여자아이는 좋게 봐도 7살 안팎으로 보였는데, 눈빛만큼은 서늘한 것이 전쟁을 겪고 있는 군인의 것과 같았다. 쌓은 눈의 높이로 봐서는 전신이 다 빠져 있어도 시원치 않으련만, 아이는 발목정도까지만 눈에 묻혀서는 그 위에 꼿꼿이 서있었다. 아이의 눈빛에 걸 맞는 도구는 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 투박한 나뭇가지뿐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나름대로 다듬어져 있는 목검이었다. 아이는 검을 천천히 세우면서 중얼거렸다. "또……군." 그리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아이의 나이를 고려 해 봤을 때, 녀석의 성취는 과히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까이 근접해서야 아이의 존재를 겨우 눈치챈 등산객들이 당황해서 등에 매달려 있던 것을 뽑아들었다. 아이의 짐작대로 총이었다. 잽싸게 몸을 틀면서 눈 속으로 들어가 몸을 감춘 아이는 자신의 감각대로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사라진 아이의 존재에 '귀신인가?'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며 등산객들은 긴장하여 총을 꾹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뺐다. 그와 동시에 바로 그들의 뒤에서 빠른 인기척이 들렸다. "으아악!" 잽싸게 뒤를 돌아보며 총을 쏘려던 그네들보다, 갑자기 나타난 아이가 더욱 빨랐다. -퍼억! 순식간에 세 명의 등산객들을 기절시킨 아이는 그네들을 가파른 산기슭 밑으로 굴렸다. 눈 때문에 속도는 나지 않았지만 꾸준히 밑으로 밑으로 굴러 떨어진 이들은, 정확히 약초꾼의 길로에서 멈췄다. 그것을 확인한 아이는 멀찍이서 걸어오고 있는 약초꾼까지 확인을 한 다음에 몸을 돌려 유유자적하게 자신이 갈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어느 샌가 아이의 옆에 거대한 범이 나타났다. 아이는 방금 전까지의 싸늘한 얼굴이 거짓말인냥 화사하게 웃으며 범의 목을 껴안았다. "가하!" 가하라 불린 태백산맥의 주인은 아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며 부드럽게 미소했다. "이제 슬슬 '농땡 사부'를 찾으러 가야겠다." 그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듯 안광을 밝히는 가하를 보며 아이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무하가 이 산에 온지, 벌써 2 년이 지났다. 정식으로 배우게 되고 나서부터 알게 됐지만 류는 상당히 뺀질거리는 남자였다. 처음 수련을 시작했을 때도 무하의 첫 과제는 어디선가 노닥거리고 있을 류를 찾는 것이었다. 이제는 새삼스런 일도 아닌, 이 우습지도 않은 '과제'를 푸는 것은 전적으로 가하의 도움이 컸다. 무하가 사라진 사부를 찾으러 동굴 집만 나오면, 어느 샌가 나타나서 친절하게 안내해주길 꺼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망할 누랭이'가 가하를 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안 무하는 류에게 무언가를 배우고자 할 때면 가하를 데리고 가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상태였다. 오늘도 슬며시 나타난 가하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따뜻한 털에 볼을 부빈 무하는 자연스럽게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전에는 가하가 몸을 숙여 줘야 탈 수 있었지만 이제는 가뿐했다. 무하가 단 시간내에 빠른 발전을 보이는 것을 보며 류는 자신의 '가르치는 재능'을 발견했다며 뿌듯해 했었다. 가하는 이미 류가 어디에 박혀 놀고 있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망설임 없이 뛰어나가기 시작하는 가하를 전적으로 믿으며 무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딜 보나 눈에 익은 아름다운 산 풍경이었다. 이 깨끗한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드는 무하였다. 가하가 멈춰 섰다. 의외로 동굴 집이었다. "'농땡 사부'가 웬일로 집에 붙어 있는 거지?" 가하를 전적으로 믿기 때문에, 류가 이 곳에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무하였다. 가하는 그런 무하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안이 집이던 어쨌던지간에, 근본은 동굴이었기 때문에 가하가 들어가도 비좁지는 않았다. "'농때 사부'! 웬일로 집에 붙어 있어요? 어디 아파요?" "사부를 놀리는 게 아니다. 무하, 거기 앉아봐라." 무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류는 안 어울리게도 예의에 예민했기 때문에 그래야 했던 것이다. "무하, 네 나이가 벌써 여덞이다." 무하는 중간에 끼어 들어 말을 끊는 취미는 없었기 때문에 류가 자신의 할말을 이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건 곧 네가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는 뜻이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 곳에선 학교를 다닐 수 없다. 고로, 내가 생각해 본 결과 넌 서울로 다시 올라가는 게 좋겠다." 이번만큼은 안 끼어 들 수가 없었다. "사부님!" 류는 한 손을 내밀어 무하를 말리며 자신의 말을 계속 했다. "난 널 학교에 보낼 재주가 없다. 고로 넌 전에 다니던 고아원이라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무하는 입술을 꼭 깨물며 자신을 자제하면서 류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의무교육이 끝날 때쯤이면 내가 데릴러 가겠다. 그 전에는 한 달에 한번정도 들리마. 넌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으니까." "전 의무교육 따위 필요……!" "아니. 전에도 말했잖느냐. 넌 '강해지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거지, '살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날 때…… 교육은 반드시 필요 한 거야. 내 말 듣거라." 무하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가하의 털을 만지작거렸다. "알겠습니다." ========================================================================== 무하와 '농땡 사부'와의 만남과 수련동안의 에피소드등은.... 다음을 기약하며 넘겼습니다.^^ 판타지 세계에 갔을때, 학교생활을 할때...중간중간에 회상씬의 회상씬으로 등장 할 겁니다^^ 나중에 재미있게 봐주시구요^^ 여튼, 이렇게 해서 무하가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전의 고아원에는 이미 등록(?)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곳으로 택한거죠. 또 변태원장이 집적된다고 해도 무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못 주므로(워낙이 강해졌으니까요) 그냥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한겁니다^^ 그럼...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엄마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면서! 이 마마보이들!" "우린 우리가 다 알아서 한다, 바보들아!" 무하는 의외의 풍경에 '천사 고아원'의 대문 앞에 멈춰 서서 구경을 했다.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또래아이들에게 대드는 모양은 그녀가 떠나기 전과 같았지만 뭔가 입장이 달라졌다고 할까? 결국 놀림을 당하던 아이들이 마구 소리치며 떠나고, 놀리던 아이들은 새로 등장한 무하에게 관심을 돌렸다. "누구야?" "거지인 가봐?"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는 여자아이의 말에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보는 무하였다. '농땡 사부'가 사다주었던 두꺼운 갈색 스웨터와 검은 색 바지는 오는 도중에 조금 헐거워지긴 했어도 깨끗한 편이었고, 옷 따위를 집어넣은 가방은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다소 특이점이 있다면 등에 맨 투박한 목검이었는데, 무하는 별다른 점을 그곳에서 느낄 수 없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무하의 관점이었다. 웬만큼 더러워진 것은, 더럽다 취급도 안 하면서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부의 밑에서 크다보니, '더럽다'는 판단여건이 자연히 다른 이들과 달라진 것이다. 게다가 목검이야 늘 들고 다니던게 아니던가?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게, '농땡 사부' 류의 밑에서 큰 무하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 사고방식은 어디까지나 사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남을 보고 제멋대로 판단을 하다니……역시 아직 어려서 그런가?" 무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역시 '농땡 사부'의 밑에서 커서 그런지 비비꼬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남의 빈정거림에 예민한 아이들은 당장에 모래를 던지며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무하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모래를 피하며 현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끝까지 상종을 하는 것보다는 날쌔게 피해서 분통을 터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으로 약을 올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류에게서 배운 것이다. "너……넌!?" 생각대로 원장은 무하를 보며 기겁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는 것이 아직도 그때의 고통을 생생히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며 무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원장 선생님." "그……그래."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학교를 들어갈 때가 되서요." "그……그러니?" "서류 상의 일은 원장선생님께서 알아서 잘 해주시리라 믿을게요." "그……그게 말이다……." "제 방은 어디죠?" "그……그러니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다." 무하는 원장이 방을 안내해줄 아이를 부를 때까지 소파에 앉아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화분이 하나도 없네요, 원장 선생님." 무하는 흠짓 하는 원장을 보다가, 소파에 앉느라 등에서 풀러 손으로 들고 있었던 목검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았다. "뭐, 별로 상관 없지만요." 원장의 얼굴이 새파래지고 있을 때,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원장 선생님, 부르셨어요?" 곱상하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원장을 별 거리낌없이 대하는 것을 보아하니, 원장의 마수가 그 아이에게는 미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 여기 이 아이가 앞으로 너와 같은 방을 쓰게 될 무하란다. 무하야, 여긴 설희라고 한단다." 설희는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안녕?" 무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앞장서 원장실을 나갔다. 설희가 쪼르륵 따라나오자, 천천히 문을 닫으면서 원장을 보며 한마디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파래지는 원장의 얼굴을 힐끔 보며 문을 완전히 닫은 무하는 두 손을 꼭 잡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설희에게 말을 건넸다. "방은 어디지?" "아……! 따라와." 그 뒤로 방으로 갈 때까지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무하는 눈에 익은 건물들을 돌아보다가 옆에서 걷고 있는 설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참 예쁘게 생긴 아이였다. 유리같이 투명한 피부와 옅은 갈색 눈동자, 약간 곱슬거리는 부드러운 머리결에 작은 체구가 인형 같아 보였다. 이 정도면 원장의 마수가 뻗칠 만도 하건만, 다행이 아직까지는 무사한 모양이었다. 어느 방문 앞에 도착하자 설희는 작고 귀여운 손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그 손을 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무하였다. 그녀의 손은 사시사철 안 가리며 고진 수련을 겪는 새에 이미 투박하고 굳은살로 무장이 되어 있어, 절대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손이었다. 선천적으로 하얀 피부는 여전했지만 상태는 좋지 않아 거칠었고, 오는 도중에 먼지를 뒤집어써서 머리카락은 제 색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씻고 싶어." 혼잣말이었지만 설희는 살짝 웃으면서, 공동 세면실로 무하를 안내해 주었다. "고마워, 방은 찾아 갈 수 있으니까 볼 일 봐." 그렇게 말하며 들어간 무하는 차가운 물을 아무렇지 않게 몸에 뿌리면서 몸을 씻어냈다. 겨울이면 늘 얼음 목욕을 하던 무하에게 이 정도는 차가운 측에도 끼지 못했던 것이다. 비누와 샴푸 등을 찾아내서 오랜만에 정성껏 몸을 씻은 무하는 가방에서 다른 옷을 꺼내 입고 나왔다. "어?" 문을 열고 나온 무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이런 의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작은 소녀가 보였기 때문이다. "설희? 볼 일 보라고 했잖아?" 설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뭐……기다려 줘서 고마워." 그 말에 설희는 고개를 번쩍 들어 눈을 크게 뜨고 무하를 보다가 이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무하는 자기도 모르게 설희의 머리를 부벼 주었다. "그만 들어가자." "무하……." "응?" 설희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궁금한 마음에 무하가 고개를 돌려 설희의 눈을 직시했다. 설희는 무하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쁘다……!" 바로 이 아이가 무하의 소중한 사람, 이계에 떨어진 무하가 아니, 페르노크가 그리워했던 이인 것이다. "……크! 페르노크!" "으응……?" 약간 멍한 눈을 부시시 뜨면서 대답 아닌 대답을 하는 페르노크를 보며 요크노민은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깼냐? 무슨 잠을 그리 곤하게 자냐?" "잤었나……?" 꿈은 꿈이되, '허상'이 아닌 '과거의 파편'인 길고 긴 꿈이었다. 페르노크는 고개를 두어번 저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립지 않은 추억을 되 집는 것이란 단순한 악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깨기 전에는 가하도 봤고 설희……그녀도 봤기에 나름대로 여운을 즐길 수 있었다. 요크노민은 평소와는 달리 계속 멍하게 있는 페르노크를 살피다가, 자는 것을 깨워서까지 이뤄야 했던 본분을 되살리며 물었다. "하루 쉬고 갈래? 아니면 그냥 강행할래?" "전에는 하루만에 도착하지 않았던가?" "출발 시간이 있잖아. 게다가 중간에 강도 때문에 지체한 것도 있고. 또 그때는 테밀시아 도련님을 믿고 다소 험해도 지름길로 강행했는데 지금은 안전한 길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더 걸리지. 아무튼, 어떻게 할래?" 페르노크는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둑어둑한 숲 속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강행하면 집에는 언제쯤에 도착할 수 있지?" 요크노민는 페르노크와 마찬가지로 저택을 나온 일이 전무했기 때문에 정확한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다고 하는 그를 대신해서 옆의 기사가 답해 주었다. "강행하면 내일 점심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새벽쯤에 마을에 도착 할 수도 있긴 합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페르노크는 별 머뭇거림 없이 결정했다. "그냥 여기서 야영을 하지요." 귀족 도령들은 워낙이 곱게 자랐기에 숲 따위에서 자는 것은 절대로 못할 것처럼 구는 것이 일반사였다. 때문에 태연히 야영을 정하는 그에게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마부 또한 놀랍다는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준비하고 모시러 오겠습니다." 기사들은 그렇게 말하고 각자의 일을 정하고 흩어졌고 마부는 남아 주위를 경계했다. 페르노크는 마차가 멈추자 밖으로 나와 몸을 쭉 폈다. "밤이 되니까 무척 어둡구나." 달빛에 의존한다는 말이 새삼 생각났다. 산에서 수련을 했던 짧지만은 않았던 시절에는 뼈저리게 경험했던 것이 도시에 내려오면서 가물가물해 졌던 것이다. 심호흡을 깊게 하는 페르노크의 낯빛이 왠지 편안해 보였다.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가다가 뿌리가 땅위까지 돌출 되어 있는 커다란 나무를 발견하고 감탄하며 그 돌출 되어 있는 뿌리에 걸터앉았다. 요크노민도 밖은 생소한지라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기사가 나뭇가지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그는 나와 있는 페르노크에게 의례적으로 목례를 해 보이고 빠른 손놀림으로 나뭇가지를 정리하여 붉은 돌처럼 생긴,「화이어」라고 불리는 룬 아이템으로 불을 피웠다. 페르노크는 그것을 처음 보는 지라 가까이 가서 물어보았다. "그건 뭐죠?" 기사는 의아한 얼굴로 페르노크를 올려보다가, '귀족 도령은 이런 것은 모르는 게 정상인가?' 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킨 뒤 설명해 주었다. "불을 피우는 아이템입니다. 나뭇가지를 룬어가 새겨진 곳에 갖다 대고 「화이어」라고 읊으며 불이 붙죠." 페르노크는 기사에게서 그것을 받아들고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물었다. "읊기만 하면 불이 붙나요?" "예." 그때 다른 기사가 작은 짐승 세 마리 정도 잡아 왔는데, 이미 물가에 가서 정리를 해왔던 터라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에게는 그냥 고깃덩어리로만 보였다. 마부가 마차 뒤쪽으로 가 조리기구를 들고 왔다. 조미료와 소스 등도 있었던 터라 고기 굽는 냄새가 군침 돌았다. 페르노크는 고기가 익혀지자 물러나 보초를 서면서 육포를 띁는 기사와 마부를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 물었다. "왜 같이 안 드십니까?" 요크노민이 앞에서 잘 익은 고기를 집어들며 대신 답해 주었다. "넌 '카르민'이고 저들은 기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밥 먹는데 그런 게 어디 있냐?" 그리고는 기사들과 마부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순순히 따르지 않자 명령이라고까지 하는 그의 태도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앉아서 같이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르노크와 요크노민 단 둘의 식사만 준비했기 때문에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번엔 내가 사냥 해올게요." 기사들이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했지만 페르노크는 막무가네로 단검을 들고 숲으로 들어 가버렸다. '농땡 사부'는 그에게 자신의 식량정도는 직접 구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는 훈련 후에는 늘 사냥을 하러 숲 속을 헤매야 했었다. 굶어 죽기 싫다면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가하가 전부 해줬지만 말이다. 옛 생각에 페르노크는 픽 웃으며 단검을 고쳐 들었다.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페르노크는 인기척을 지우며 소리가 난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다 다시 들리는 소리로 생각보다 동물이 크다고 판단했다. 잘못하면 상처 입은 동물에게 공격을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페르노크는 두 나무의 기둥을 발로 튕겨가며,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미 예전의 감각을 거의 다 되찾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다행이 동물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에 놓칠 걱정은 없었다. 단검을 머리위로 들어올리며 기회를 노리던 페르노크는 순간 경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경악성 또한 막아야 했다. '뭐야, 저건?!' 페르노크는 처음 보지만 그건 그릭이라 불리는 몬스터였다. 다 큰 하마와 같은 크기에 눈이 있을 곳이라 짐작되는 곳에는 예리하게 반짝이는 붉은 빛만이 서려 있었고 그 빛에 반사광을 일으키는 맹수의 이빨과 같은 것이 빛 주위를 잔뜩 둘러싸고 있었다. 털인지 가시인지 분간이 안가는 온몸을 둘러싼 무언가는 달빛을 튕겨 내어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어 괴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향하자 페르노크는 잠시 갈등했다. 혼자 처리할 것이냐, 일행과 같이 처리할 것이냐에 대한 갈등이었다. 페르노크는 일단 무성하게 나 있는 나무들의 가지를 이동하면서 그 짐승의 뒤를 따라갔다. 혼자 처리하다가 부상을 입었을 때 다른 맹수가 온다면 큰일이기 때문에 그냥 일행과 함께 처리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일행이 있는 쪽에 근접해 지자 기사들이 이미 몬스터의 접근을 눈치채고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크노민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낮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방향은 페르가 간 방향인데……!" 기사들이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냉정을 되찾으면서 먼저 저 녀석 먼저 처리하고 보자고 의견을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모양을 보면서도 페르노크는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맹수와 기사들이 붙게 될 때 뒤에서 같이 공격할 셈으로 가만히 검만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때 요크노민이 검을 앞으로 내뻗으면서 크게 외쳤다. "「불 *」" 검 끝에서 화염이 일더니 순식간에 검신을 뒤덮이더니 일순간에 몬스터에게 쏘아져 나갔다. 페르노크가 빠르게 캐스팅을 마치고 시동어를 뱉어냈다. "파 * 이 * 어 * 볼 *" 처음 화염을 이겨낼 듯 싶었던 몬스터는 이차로 덮쳐온 불길에 완전히 불타버렸다. 다행이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터라 페르노크는 안심하며 다시 사냥을 하러 숲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서 마법사가 있다며 찾으려는 기사들은 요크노민이 간신히 뜯어말리고 있는 걸 그가 알 턱이 없었다. "페르 일 거에요. 저 방향은 페르가 갔던 방향이라구요!" -------------------------------------------------------------------------- 졸렵..........다...............=.=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근데 저 맹수는 뭐야?" 결국 조금 뒤에 사냥을 해 가지고 온 페르노크가 자신이 한 일이라고 자백(?)을 함으로써 일은 일단락이 됐고 다시 맛있는 시식타임을 맞을 수 있었다. 페르노크는 아직도 저기서 연기를 품어내고 있는 몬스터를 보며 물었다. 비위가 약한 '페르노크'였기에 자리를 옮기려고 했던 기사들은 태연한 그의 모습에 놀라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요크노민은 자신이 봤던 그 몬스터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언젠가 읽었던 몬스터 도감을 기억해 냈다. "눈을 감싼 뿔 등을 봤을 때. '그릭' 일걸? '후카'를 가진, 이름을 부여받은 몬스터." "몬스터? 괴물이란 뜻이야?" "뭐, 그렇지." "후카는 또 뭐야?" "마법사들이나 연금술사들이나 장인들이 아이템을 만들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들었어. '몬스터 헌터'라는 직종이 있는데, 그네들만이 '후카'를 구할 수 있다고 해." "왜? 저기 시체에서 꺼내오면 되는 거 아냐?" "아아, 그게 그렇지가 않아. 몬스터가 죽으면 그 안에 있던 '후카'도 소실 되 버리거든. 또, 엄청 많이 지쳐도 그렇게 된다고 해. 때문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끄집어내야 되는데 그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몬스터 헌터'는 드래곤보다 더 희귀한 종족이라고 들 해." "흐음……. 저런 몬스터가 이 곳에는 많아?" "많은 편이지. 그래서 숲 같은 곳은 조심해서 다녀야 해. 하지만 수는 얼마 없고 늘 혼자 다니기 때문에 실력만 조금 있다면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래……."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이 건네는 주스를 마시며 알 수 없는 세계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봤다. 기사들과 마부가 불침번을 정하고 교대로 잠이 들었을 때, 마차에서 잠을 청하던 요크노민은 페르노크가 뒤적거리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잠이 안 와?" "아까 많이 잤으니까." "그래……." "뭐……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아니……응." 머뭇거리던 요크노민은 이내 단호하게 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페르노크는 몸을 요크노민쪽으로 돌리고는 한쪽 팔에 머리를 기대었을 뿐,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요크노민에게는 충분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잠시 머뭇거리던 요크노민은 아주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그……네 '보고 싶은 이'라는 사람……." 페르노크는 미동도 하지 않으며 요크노민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어떤 사람이야?" 잠시 침묵이 깔렸다. 페르노크는 좀 전의 꿈을 되살리다가 이내 웃어버렸다. 그 웃음에서 가득 배어 나오는 씁쓸함에 요크노민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귀……여운 사람이지." 페르노크는 눈을 살짝 감았다. "그래……귀여운 아이야……. 부끄럼을 많이 타는 예쁘게 생긴 아이지. 내가 8살 때 처음 만났는데,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8살 때부터 교육이 시작되거든? 그때 설희와 나는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다녔어. 날 무척 따르는 아이였어." "흐음……소꿉친구 인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때 같은 반의 한 아이가 사고로 죽었는데, 그 아이의 부모님께서 슬퍼하는 설희를 보고 감격하셨는지, 양녀로 삼아 버렸어. 그 뒤로 그 집은 이사를 갔고, 난 편지로만 설희의 소식을 접했지. 헤어진지 10년이 되어 '고등학교'로 불리는 고등 교육기관에 입학을 했는데, 그때 설희를 다시 만날 수 있었어. 10년이 지나도……설희는 똑같았어. 여전히 귀여운 아이였지." 페르노크는 갑자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인상을 썼다. "왜 그래?" 요크노민은 놀라서, 얼른 일어나 페르노크 쪽으로 뛰어갔다. "아……아니야.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이제 괜찮아." "내참, 놀랬잖아."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페르노크가 애써 괜찮다고 미소짓는 걸보고 요크노민은 못 본 척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아직도 불편해 보이는 페르노크를 배려하여, 바로 자리에 누워 이렇게 말했다. "피곤하다, 그만 자자." "그래." 그렇게 마차 안에는 정막이 깔렸다. 아침이 됐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하며, 페르노크는 조용히 일어났다. 진짜로 피곤했는지, 부지런한 요크노민이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페르노크는 천천히 마차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잠을 청했던 두 기사와 마부가 인사를 건네 오자 적당히 답하며, 어제 앉았던 나무 뿌리에 가 앉았다. 신선한 공기가 가득 차 있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숲을 보며 새삼 자신이 있는 곳이 다른 세상이라는 걸 생각해 내는 페르노크였다. "시냇가가 어디죠?" 아침 준비를 하고 있던 기사 한 명이 안내를 하겠다고 일어나자 얼른 말리며 길만 알려달라고 했다. 기사가 대충 말해준 방향대로 발을 놀리며 작게 흥얼거리기 시작하는 페르노크의 귀에 자신의 소리가 아닌 다른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입을 다문 페르노크였지만, 그 쪽에서도 페르노크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노래 소리 대신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야영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누가 있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씻으러 가는 와중에 누군가를 만나야 할 이유가 없는 터라 페르노크는 자신의 갈길을 재촉하려 했다. 천천히 발을 옮기는 그의 주위로 부드럽지만 강한 바람이 불어오자 묶지 않은 머리가 바람을 타고 허공을 배회했다. 페르노크는 이질적인 자신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주다가 그 것과 대조를 이루는 짙푸른 숲의 구성원들을 새삼 보게 됐다. 계속해서 서걱거리는 바람의 소리가 들려와 페르노크는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그때 그 누군가가 페르노크의 '영역' 속에 파고들었다. "안녕하……어?" "아……?" 페르노크도 눈을 뜨고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이상한 의문성을 내뱉고 말았다.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이거……자주 뵙는데요?" 약간 놀란 듯 보였던 것이 거짓인 것 마냥,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는 그에게 페르노크는 덤덤하게 답해주었다. "그러게요. 도둑씨." =================================================================================== 간만이에요>O<ㆀ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러게요. 도둑씨." "이런,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에요." "'골드 드래곤의 피'는 예쁘게 생겼던가요?" "네, 태양에 반사되어 뿜어지는 빛이 예술……이런, 하하." 분명 유도심문에 걸린 것임에도 남자의 '이런'이라는 자각의 음성과 '하하'라는 얼버무림의 미소가 너무나 여유로워, 일부로 걸려준 것처럼 느껴졌다. 페르노크도 그 점을 알아챘지만 상관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물건을 훔쳐간 것, 다른 말로 하면 그에게 폐를 끼친 것이 아니니 상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페르노크만의 사고방식이었지 다른 이들에게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점을 페르노크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도둑이라 밝히는 남자의 근거 모를 당당함이 이상하기만 했다. 때문에 입가를 매만지며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생긴 '건' 멀쩡한데……." 아주 작게 중얼거린 페르노크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남자가 들은 모양이었다. "생긴 '것도' 멀쩡하다고 해 주시죠. 흐음, 나름대로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데 '멀쩡' 단계에서 머무르다니 조금 유감이네요." 라고 말하는 남자는 확실히 '멀쩡'을 훨씬 웃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화사한 백금발과 어울리는 깨끗한 피부에, 부드러우면서도 여유로운 미소가 계속 머금어져 있는 입매나, 어딜 봐도 보통 이상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깊은 보라색 눈동자는 약간 가벼워 보이는 분위기를 띄는 남자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반전시켜주고 있었다. 숲이라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문양이 자수되어 있는 하얀색의 옷과 허리에 매여 있는 보검급의 검도, 그에게서 풍기는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한 몫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 통성명도 하지 않았죠? 전 유시리안이라고 합니다. 리안이라고 불러주세요." "페르노크입니다. 페르라고 불러도 좋아요." 이곳에서의 애칭의 허락은 상대에게 일종의 '신뢰'가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는 뜻이라는 걸 요크노민에게 들은 바 있는 페르노크였다. 유시리안이라는 남자는 페르노크의 '허락'에 생글생글 웃으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걷다가, 이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페르노크는 이 세계에 들어와 처음 접하는 이 곳의 노래에 관심을 가지며 귀를 기울였고, 그 낌새를 알아챈 유시리안은 더욱 곱게 노래를 뽑아 냈다. 시냇가에 도착한 페르노크는 일단 큰 바위에 걸터앉았다. 노래를 끝까지 듣고 씻을 심상이었던 것이다. 유시리안은 자연스럽게 페르노크의 옆에 앉았다. 몸 상태가 안정되자 노래 소리가 더욱 좋아졌다. "노래를 참 잘하시네요. '가수'……음유시인이신가요?" '가수'의 이곳 단어를 겨우 떠올리는 페르노크였다. 유시리안은 자신의 허리에 매여있는 검을 한번 돌아보더니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아뇨, 용병입니다." 확실히 '강자'의 느낌이 풍기는 남자긴 했다. 페르노크는 바위에서 훌쩍 내려와 물 쪽으로 걸어가서 이내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까지 감을까 하다가 집에 도착하고 나서 씻기로 하고, 그냥 세수만 하고 나오는 페르노크에게 유시리안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집으로 갑니다." "집이 어디인데요?" "모릅니다." "몰라요?" "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 곳 지리를 페르노크가 알 턱이 없지 않는가? 유시리안은 처음과 일관된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페르노크를 가만히 보다가 이마를 약간 긁적였다. "혹시 집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 아니에요?" "……!" 페르노크는 놀란 얼굴로 유시리안을 보다가 물었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데요.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런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보죠?" "물론이죠! 이렇게 멋진 남자에게 뭔들 알려주기 싫겠습니까?" 페르노크는 팔짱을 끼며 뚱한 어조로 말했다. "전 남자인데요?" "하하, 이거 전에 만났을 때와 같은 패턴이 되 버리네요. 실은 제 질문을 받고 고민하다가 곤란한 듯 말하길 래,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가르쳐 주기 싫었다면 그냥 딱 잘라 '몰라도 돼요.' 라고 했겠죠." "예리하시네요." "어디 있는 지 모른다면……풀네임을 알려주시겠어요?" 귀족의 풀네임은 신분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밝히지 않는다면 묻지 않는 것이 예의다. 그 때문에 유시리안이 머뭇거리면서 묻는 것이기겠지만, 그런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묻는 다고 보기에는 생긋 웃는 모습이 너무나 천연덕스러웠다. 그런 '상식'적인 예의 면에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는 페르노크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입니다. 근데, 풀네임을 알면 집을 알 수 있는 모양이죠?" "호오? '오르세만' 가의 자제 분이셨군요. 물론 풀 네임을 알면 집을 알 수 있죠." '오르세만' 가의, 그것도 '가주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마(차남)라는 것을 알 았으면서도 유시리안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시킨 것에 대한 만족정도를 내 보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태연하게 설명까지 덧붙이기까지 하는 걸 보면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특히나 '오르세만' 정도의 명문가라면 야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열심히 설명을 하던 유시리안이 갑자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다소의 시간을 그 쪽을 보는데 투자하더니만, 빠르게 페르노크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만 가 봐야 겠네요. 나중에 뵈요, 페르." "그러죠, 리안." 페르노크의 답을 듣자마자 급히 반대편 쪽으로 몸을 날리는 유시리안이었다. '농땡 사부'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몸놀림이라 감탄이 일었다. 페르노크는 주위에서 즐겁게 까르륵거리는 실과 넬을 보고 한번 웃어주고는 마차가 있는 쪽으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한편, 급히 신형을 움직이던 유시리안은 자신을 호출한 이가 보이자, 더욱 빨리 다가가 한마디 내뱉었다. "왜 불렀지?" 냉기가 도는 음성이, 아까 페르노크와 대화를 했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원래 이런 식의 언행을 하던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찾으신다. 딴 곳으로 새는 것은 임무가 끝난 뒤에 하지." 유시리안은 냉냉한 분위기 그대로 몸을 돌려 '아가씨'라 불리는 의뢰인이 있는 마차로 걸어갔다. "나의 임무는 '경호'지 '애 보기'가 아니야. 다시 한번 이따위 볼일로 나를 '절대호출'하면……." '절대호출'이란 용병이 의뢰 중 부재할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피리처럼 생긴 마법 아이템의 이름으로, 말 그대로 어떤 사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절대호출'을 당하면 30분 안에 의뢰주의 곁에 가야 한다. 만일 무시를 한다거나 30분 이내에 가지 않는다면, 그 30분을 경계로 용병에게 육체적 고통이 가해지는데, 점점 정도가 심해지기 때문에 서둘러 가는 것이 이로웠다. 물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주 위급한 순간에만 쓰는 것이다. '절대호출'은 의뢰가 끝난 뒤 부수는 것으로, 일회용이었다. 만일 의뢰주가 내어주지 않으려고 수를 쓴다고 해도 의뢰한 기간이 끝나면 자동으로 부서지기 때문에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딴 데 가있었던 유시리안의 잘못을 생각하면 방금의 그의 행동은 적반하장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절대호출'이 딴 일에 정신이 팔린 용병을 불러들이는 일에도 쓰이기는 하지만 '임무'에 불필요한 일로는 부를 수 없는 것이 룰이었다. 유시리안이 방금 언급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즉, 자신의 임무는 '경호'이니 의뢰주가 위험에 빠지지 않았음에도 '절대호출'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잠시 돌아보며 차갑게 노려보던 유시리안은 뒷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돌려 마차 앞으로 가 노크를 했다. "불렀다지?" "예……. 다른 용무중인 줄 알았다면……." "됐어." 마차 옆에 기대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유시리안을 보았다. 전에 '자하사' 가의 벽 쪽에서 유시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 남자였다.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에 가벼운 가죽 샌들을 신은 그는 짧은 머리사이로 무심한 눈동자로 유시리안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이내 평이한 음성으로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아……." 그제서야 씨익 웃는 유시리안이었다. "아주 좋아!" 화사한 그의 미소를 대하면서도 남자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흥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숙이며 무심하게 눈을 감는 그의 옆에서, 유시리안은 방금 전의 냉랭한 모습이 거짓말인양 생글거리며 마구 말을 늘어놓았다. "'그'를 다시 만났어! 역시 생각대로야! 다시 만날 거라고 했지? 이름도 물어봤고 애칭도 '허락' 받았고 풀 네임도 들었다구!" "축하해." 여전히 무표정한 대다가 눈까지 감고 있어, 무성의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의 무심한 어조에 유시리안은 더욱 밝게 웃어 보였다. 가이번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체, 둘의 모양새를 보고 있었다. 유시리안이라는 남자는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행진은 아니지만 경호라는 직무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도 사람을 대할 때의 확연한 차별도 자기 마음대로 일행을 데리고 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아가씨가 전적으로 보이는 호의를 무관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불쾌했다. 유시리안의 일행이라는 남자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유시리안이 부재중일 때면 어디선가 나타나 아가씨를 경호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유시리안 외의 사람은 말 그대로 상대하지 않는 무심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아직 이름조차 모르겠는가? "이제 출발해야겠습니다, 아가씨." "잠깐만요! ……유시리안님 식사는 하셨나요?" "출발하지." 가이번은 자신을 보며 말하는 유시리안에게 인상을 찌푸려 보이며 다시 아가씨에게 물었다. "출발할까요, 아가씨?" "……네." 시무룩한 아가씨의 음성에 가이번은 유시리안을 매섭게 쏘아보았지만, 유시리안은 자신의 일행이라는 남자에게 뭔가를 떠들기에 바빴다. ==================================================================================== 연참입니다>O<ㆀ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꾸 생글거리는 유시리안에게 남자가 아주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미쳤나?" "아니. ……아주 좋은 예감이 들어서 말이지." "흐음……." 그때 옆쪽에서 말들의 울음소리와 그네들을 달래는 마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두 마차의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았는지, 이내 마차가 나타났다. 그 안의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듯, 약간의 핏자국을 가진 화려한 마차였다. 마차뿐만이 아니라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기사가 둘이나 되, 그 주인의 지위를 대충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할지 알려주고 있었다. 자이번이 모시는 '자르카'인 아가씨도 수행하는 기사로는 그, 단 한사람밖에 없었다. 물론 그 외에 '경호원'으로 고용한 용병과 견습기사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가이번은 정중한 어조로 기사들에게 통성명을 하고 물었다. "앞의 마을로 가시는 모양입니다?" "예, 그 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잠시 쉰 뒤에 별장으로 출발하려 합니다." 그 말은 가이번으로서는 뜻밖이었다. 마을까지의 거리를 고려했을 때, 거의 점심때쯤에나 도착할 수 있었다. 헌데 아침을 그곳에서 한다니? 가이번이 그 점을 지적하며 걱정해 주자 기사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를 손짓으로 가리키더니 설명 아닌 설명을 해 주었다. "저희 도련님께서 제대로 된 식사로 허기를 채우고 싶으시다고 해서요." 철부지 도령이 분명하다고 판단하며 가이번은 안쓰럽다는 시선을 기사에게 보냈다. 하지만 기사는 아까와 같은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마차가 앞뒤로 갈려야 할 소로였기 때문에 가이번은 조심스럽게 마차 안에 있다는 '도련님'의 신분을 물었다. 하지만 기사가 답하기도 전에 마차 안에서 그를 호출했다. 창문을 통해 뭔가 말을 들은 기사는 정중하게 가이번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희 도련님께서 괜히 마차를 앞뒤로 바꾸거나 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니 그냥 이대로 가자는 군요." "그럼 그러지요." 어차피 단 세 가문밖에 받지 못한 신분인 '카르민'이 아닌 이상 '자르카'인 아가씨와 마차 위치를 앞뒤로 바꿀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 판단했다. 유시리안은 얼떨결에 동행하게 된 이들을 찬찬히 보다가 내심 고개를 끄떡이며 고개를 돌렸다. 곧은 눈동자와 단련된 몸, 실례가 되지 않게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 일단 '적'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당장 시급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역시……." 유시리안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경계태세를 하고 있던 가이번과 두 기사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모시는 이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봐, 샤. 누가 더 많이 '사냥'하나 내기할래?" "왜 그래야 하지?" "재미있잖아!" "'흥미'라는 건가? 관심 없다." 그제서야 다른 이들은 유시리안의 일행이라는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샤'……아마도 애칭이리라.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하, 먹이가 둘이나 되는 구나!" "그렇군요, 두목. 게다가 제법 두둑해 보이지 않습니까?" 원래라면 귀족의 마차보다는 상인의 마차를 노릴 테지만, 한창 불경기라 그런 건 가리지 않는 강도들이었다. 얼마가 되든 수입만 나오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안전한 길로 돌아왔는데……." 가이번은 상당한 수의 강도들에게 질려 작게 투덜거렸다. '안전한 길'이라는 인식을 이용한 것을 보면 제법 머리도 있는 모양이었다. 가이번은 유시리안과 '샤'라는 남자, 그리고 자신 외에는 버벅거리면서 검을 뽑아드는 경호원들과는 달리 차분하게 마차 입구를 막고 서며 검에 손을 대고 있는 두 기사를 보고 그네들의 경험이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어수선한 와중에 마차는 급히 멈춰졌다. 앞에서 매복이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계속 돌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앞에 웅덩이이라도 파져있다면 낭패인 것이다. 크게 들썩이는 마차 때문에 아가씨의 놀란 비명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그것까지 신경 써줄 정신이 없었다. 강도들이 면전에 도달하자 가장 빨리 움직인 자는 유시리안이었다. -스겅! 아주 깔끔한 소리가 났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목표물이 됐던 강도의 목이 바닥을 구른 것이다. 유시리안은 아주 냉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나." 샤라고 불린 유시리안의 일행이 그 다음으로 움직였다. 바로 앞에서 달려드는 강도에게 손을 내뻗은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물방울이 맺혀지더니, 곧 강도의 미간을 꿰뚫고 뒤에 있는 강도의 목까지 뚫더니 다시 그 뒤에 있는 나무에 가 박혔다. 놀라운 수계 마법이었다. 시동어조차 없는 그 초월적인 마법을 보며 유시리안은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쳇, 둘이잖아." 샤는 아주 무심한 얼굴로 다시 손을 내 뻗었을 뿐이었다. 가이번이 크게 소리쳤다. "되도록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 말에 샤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가볍게 뛰어 마차 위로 올라가더니 털썩 앉아 버렸다. 그 모습에 가이번이 발끈하여 뭐라 따지려 했지만 도처에서 날라드는 흉기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런 그의 머리 쪽으로는 싸움에 완전히 관심을 끊은 샤가 무심한 눈으로 아수라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뒤의 마차도 사정은 다를 바 없었지만, 근처에 시체라고는 한구도 없다는 점이 달랐다. 가이번이 마음 약한 아가씨를 위해 살인을 자제하듯, 그 두 기사도 안의 도련님을 위해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 모양새를 우연치 않게 보게 된 가이번은 짧게 혀를 찼다. 그가 모시는 건 그래도 연약한 레이디지 않는 가? 한바탕 혈전이 지나고 강도들이 잠시 물러섰을 때서야, 유시리안은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마차 위에 올라가 있는 샤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냐?" "죽이지 않고 상처정도에서만 끝난다면 다시 덤벼들텐데…… 굳이 기운 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겠냐, 연약하신 의뢰주의 주문인데." "난 네가 자리를 비울 때만 잠시 대신해 주는 거지, 이들의 고용인이 아니다. 내가 이들을 위해 싸울 이유가 있나?" 무심한 얼굴에 걸 맞는 무심한 어조로 답을 하는 샤를 보며, 주위에서 피로를 풀면서 곧 다시 쳐들어 올 강도떼들을 경계하고 있던 이들이 분노를 터뜨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마차 안에서 아가씨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얼른 이 곳을 떠나요! 얼른!" "하, 하지만 아가씨……!" "지금 전속력으로 도망가면 되잖아요! 빨리 마을로 들어가요, 제발!" "하지만 앞의 도로에 고랑이 파져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면……." "얼른 가요! 명령이에요!" "……네." 가이번은 별 수 없다는 얼굴로 전진을 명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두 기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렇게 되서 저희는 이곳을 뜰 겁니다만……어찌 하실 생각입니까?" "……." 두 명의 기사라면 엄청난 전력이요, 든든한 아군이 되리라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두 기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무언의 말을 나누다가 마차 안의 도련님에게 물었다. "도련님……." "두 분 판단을 믿겠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새어 나왔다. 이미 전후 사정을 안에서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들은 기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피에 절은 모습을 하고 있는 마부에게 전진할 것을 명했다. 마부는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앞의 마차를 노려보다가 이내 마부석에 앉아 말들을 달래며 행군할 준비를 했다. 그 모습에 가이번은 크게 안도하며 자신들의 마부를 재촉했다. 말이 고통스럽게 우는소리가 한바탕 들리더니 곧 빠른 속도로 마차가 이동했다. 그 뒤로는 두 기사가 호위하는 마차가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다. ====================================================================================== 삼연참입니다>O<ㆀ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 갑작스런 행진은 역시 좋지 못한 판단이었다. 그 것을 깨달은 것은 인위적으로 파져있는 깊은 구덩이에 마차 바퀴가 빠진 뒤였다. 바퀴가 빠질 때 생겼던 충격으로 놀란 아가씨의 비명이 크게 주위로 퍼졌고, 그것이 신호가 된 양 강도들이 뒤쪽을 제외한 삼면에서 포위하듯이 나타났다. 뒤에서 따라오던 마차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멈춰 설 수 있었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가이번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기사들을 보자, 기사들은 괜찮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고 빠르게 마차 안의 도련님께 안위를 물었다. 어지간히 놀란 듯,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래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게 어디냐는 얼굴로 가이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불경스런 생각이지만 아가씨가 비명만 지르지 않았더라도 강도들이 이 '기회'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고, 운만 따라준다면 빠르게 마차를 빼내어 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였다. -덜컥. 기사들이 막아서고 있던 마차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의 도련님을 보호하던 다른 '병력'이 있었나 싶었지만, 예상외로 나오는 이는 곱상하게 생긴 '도련님' 그 자체였다. 갑자기 선풍이 불어 그의 결 좋은 은빛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그는 시아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평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당히 피곤한 귀가길이군요." 제법 농을 해가며 마차 밖으로 나온 귀족 도련님은 안에서 따라나오는 다른 이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화려한 의상과 곱게 자란 티가 여력한 남색 머리카락의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허리에 찬 검을 보면 의외로 한 가닥 하는 전사일지도 모른다. 주위를 침착하게 돌아보던 도련님은 자신의 앞으로 나와 방어를 해주려는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를 가로막으며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갔다. "아……페르!" 유시리안이 그제서야 밖으로 나온 도련님에게 시선을 줬는지 탄성과 같은 음성을 내뱉었다. 은발의 도련님은 고개를 돌려 유시리안을 보더니, 작게 미소하며 말했다. "자주 뵙는군요, 리안." "그러네요. 일단은 목적지가 같은 모양이에요. 뭐, 저쪽 마을에서부터는 갈라지겠지만……. 아,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마을에 도착해서 먹으려고요." "저도 먹지 않았는데, 도착하면 같이 먹죠!" "그럴까요?" 유시리안의 존댓말 아닌 존댓말을 들으며 가이번을 비롯한 일행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시리안은 그 누구에게도 존댓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자르카'인 아가씨에게조차 말이다. 샤라 불린, 유시리안의 일행은 마차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유시리안에게 다가갔다. "'그'인가?" "아아, 페르! 이쪽은 제 친구 락샤사라고 해요. 샤, 저쪽은……." "크아악! 저것들이 감히 우릴 무시해!" 강도들은 발끈하며 달려들려 했지만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버 * 디 * 윙 *" 갑자기 구현된 마법으로 된 바람때문이었다. 갑작스런 마법에 가이번 일행은 주위를 돌아보다가, 이내 손을 앞으로 뻗고 있는 '페르'라는 도련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바람은 일정한 범위에서 몰아치다가 사라졌는데, 덕분에 바닥에는 흙투성이로 된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그 경계선은 두 마차를 감싸고 있는 양상을 하고 있었다.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은 페르노크는 차분하기에 더욱 두렵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경고했다. "이 경계를 넘어서는 자는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어째 저번이랑 비슷한데, 페르?" 페르노크의 뒤에서 웃던 요크노민이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페르노크는 자신의 주위에서 막 화를 내려고 하고 있는 두 펫에게 괜찮다고 속삭여 주었다. "마법사다……." "마법사……." 술렁거리기 시작하는 강도에게 페르노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말했다. "그냥 돌아가시죠." "우리가 후퇴할 때 마법을 쓸 생각이 아니냐!" 안 속는다고 외치는 강도들에게 페르노크는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답해 주었다. "제 눈에서 얼쩡거리지만 않는다면 마법을 쓸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계속 얼쩡거린다면야……." 그러면서 캐스팅에 들어가려는 그를 강도들은 기겁하며 말렸다. "간다고! 간단 말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주위를 정리한 페르노크는 유시리안에게 자신의 뒤에서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요크노민을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제 '지기', 요크노민입니다. 구면이죠?" "그렇군요." 락샤사는 무심한 어조로 페르노크에게 인사를 건넸다. "락샤사라고 한다. 원한다면 샤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페르노크는 샤의 무심하면서도 깊디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다가 말했다. "페르노크라고 합니다. 페르라고 불러도 좋아요." 페르노크가 '애칭의 허락'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요크노민은 처음 보자 마자 '허락'을 하는 그의 모습이 상당히 묘하게 느껴졌지만,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는 생각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서로간에 통성명을 하고 있을 때 강도가 진짜 물러났는지를 경계하던 기사가 서둘러 떠나기를 권했다. 페르노크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떡이며 마차에 올라탔고 요크노민이 그 뒤를 따랐다. 가이번의 지휘하에 아가씨의 마차가 들려지고, 웅덩이를 돌과 나무 따위로 메워서 페르노크의 마차도 무사히 함정을 지날 수 있었다. 마을이 멀찍이서 보이기 시작했다. =============================================================================== 꺄>O<ㆀ 락샤사의 등장입니다! 많은 분들이 헷갈려 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요 락샤사는 (락 샤 샤 )가 아닌 (락 샤 사 )라구요 엄연히 두번째 글씨와 세번째 글씨가 다릅니다! 지금의 몸은 남자지요? 헤헤^^ 성격은 아르때와는 좀 달라보이죠? 하지만 본질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아르때는 좀더 말이 많았을 뿐이죠^^ 본질은 그대로 냉소적이며 무감각적인 녀석이니까요^^ 아아, 그리고 이벤트 마감합니다. 오늘까지만 소설을 받구요, 내일부터 투표에 들어갑니다. 카페에 가서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저에게 메일로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소설의 제목을 보내주세요. 자세한 기간은 이벤트 공지에 있습니다. 오늘 이후에 올라오는 소설은 이벤트 신청작으로 보지 않겠습니다. 결과 발표는 이벤트 공지란에 자세하게 나와 있죠? 헤헤^^ 많이 참여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O<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가이번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강도 덕분에 많이 지체한 터라 벌써 점심때가 다됐던 것이다. 게다가 저 아름다운 귀공자의 일행은 그의 고집으로 인해 아침부터 굶주렸을 것이라 여간 시장한 것이 아닐 터였다. 겁에 잔뜩 질렸던 아가씨가 많이 진정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는 것을 도운 가이번은 그녀를 페르노크에게 안내해 주었다. 각자의 수급끼리 아직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제서야 생각났던 것이다. 마차에 내리자마자 자신에게 다가온 유시리안과 그에게 끌려온 락샤사라는 남자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페르노크는 그제서야 베일을 곱게 쓴 귀족 아가씨에게 관심을 가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페르노크라고 합니다." 여전히 풀네임을 밝히지 않는 그에게 다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아가씨는 잔뜩 굳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레이디?" 입조차 떼지 못하는 그녀에게 페르노크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했다. "아……저, 전……." 페르노크는 차분하게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고, 포기 해버린 페르노크는 일행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페르노크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자 그 옆으로 요크노민이 앉았다. 그 모습에 다들 요크노민이 페르노크와 비슷한 신분의 도령일거라고 추측했다. 페르노크의 앞쪽으로 유시리안이 앉고 그 옆으로 락샤사가 앉자, 네 개밖에 없었던 그 테이블은 자리가 꽉 찼다. 페르노크는 옆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기사와 마부에게 다른 자리에 가서 식사를 하라고 권하고, 종업원이 가져다 준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요크노민이 옆에서 재미있다는 얼굴로 식당 안을 살펴보다가 페르노크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저 아가씨, 눈에 익지 않냐?" "글세……. 뭐, '자하사' 가의 파티에 초청 받았던 아가씨인가 보지." "흐음……그렇게 생각 하냐? 난 짐작 가는 여자가 있는데?" 그 말에 페르노크는 메뉴판을 유시리안에게 건네고 관심을 가지고 아가씨를 뜯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크노민은 킥킥대다가 다시 속삭였다. "왠지 불쾌한 기운이 감 돌지 않냐?" "제길……." 페르노크는 무엇을 떠올렸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유시리안이 적당히 주문을 하고 나서, 페르노크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왜 그러나요?" "아뇨. 기분 나쁜 일이 생각나서요. 저 아가씨의 이름이 뭔지 아나요?" 페르노크가 옆의 테이블에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묻자 유시리안은 덩달아 목소리를 죽이며 답했다. "이라즈 영애죠. '가라슨' 가의 따님이시랍니다." "하아." 한숨을 깊이 쉬는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을 보며 유시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던 락샤사는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밥 안 먹을 건가?" "아아. 뭘로……?" 유시리안이 자신의 의향을 묻자, 음식의 종류에 대해 많이 못하는 페르노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알아서 시켜 달라고 했다. 유시리안은 냉큼 이것저것 주문했는데, 락샤사가 추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술도." "어떤 종류?" "아무거나."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페르노크가 물었다. "용병이시면 주로 하는 일은 뭔가요?" "저한테 관심 있으십니까?" "용병이란 '직종'에 관심이 있습니다만." 생글거리는 유시리안의 얼굴을 보면서 주위의 그를 아는 이들은 차라리 공포스럽다는 생각을 해보다가 아주 덤덤하게 맞받아 치는 페르노크를 존경스럽다는 시선으로 보았다. 단 한사람, 이라즈 영애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녀는 배일로 얼굴을 감춘 체, 질투에 어린 눈으로 페르노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파란만창 했던 가출이 허무하게 끝나고 아버지의 명으로 집으로 돌아가 근신을 하기로 한 그녀는, 자신을 호의하기 위해 급히 고용된 용병 유시리안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스스로의 외모에 가지는 자부심이 상당했던 그녀는 맹렬한 대쉬를 서슴치 않았건만 돌아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무관심일 뿐이었다. 하지만 원래 모두에게 냉랭한 그였기에 나름대로 이해를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일행이라고 데리고 온 남자를 대할때는 그렇게 명랑할 수가 없었지만, 그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을 그렇게 대해주지 않을까 몰래 기대도 하고 있던 터였다. 헌데 갑자기 나타난 저 거친 귀족 도령에게는 안하던 존대까지 해가면서 나릇나릇하게 대해주다니! 물론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도령이라는 건 전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으로 알고는 있지만, 유시리안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신분이 높은 자에게 대하는 공손함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쯤은 이라즈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라즈의 내뿜을 길 없는 분노는 유시리에게서 페르노크에게로 옮겨갔다. 유시리안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만으로도 용서가 안되건만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태도라니……! 원래 귀족끼리 길에서 대면하고 식당까지 동행하게 된다면,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것이 언급 할 필요도 없는 기본 상식이었다. 헌데 태연하게 용병, 그것도 상대 귀족에게 고용된 용병과 자리를 함께 하다니……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 도령이었다. 이라즈는 아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예의가 없으신 도련님이군요." 물론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봤자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고려하기엔 질투의 감정이 너무 컸다. 나지막하다고는 하지만, 옆의 테이블에서 페르노크의 호위기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가이번의 귀에는 충분히 미치고도 남았다. 다른 말로 가이번과 테이블을 함께 한 페르노크의 호위기사의 귀에까지 들렸다는 것이다. 그 둘은 불편한 얼굴로 서로를 보다가, 이내 한 명이 고개를 끄떡이며 일어나 페르노크의 옆으로 가 뭐라고 속삭였다. 페르노크가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본 이라즈는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음식으로 돌렸다. 베일은 이미 내렸지만, 전과는 달리 화장을 짙게 했기 때문에 자신을 못 알아보리라 생각한 것이다. 또, 실제로도 베일을 내릴 당시 눈이 마주쳤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물론 그때 페르노크는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고 욕설을 내뱉고 있었지만 말이다. 페르노크는 유시리안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사를 의아하게 보았다. "무슨 일……?" "이런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원래 귀족끼리 식당을 동행하게 되면 같은 테이블에서 먹는 것이 기본 에티켓입니다." 네 까짓 게 감히 나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것이냐, 소리를 친다고 해도 당시 귀족들의 언행을 보면 무리가 아니었기에 기사는 앞에 '죄송'하다는 토까지 달았지만 페르노크는 그저 그의 지적에 감사를 표하며 이라즈를 돌아볼 뿐이었다. 그 누가 보더라도 무표정한 얼굴이었건만 유시리안은 정확하게 그의 심정을 읽어냈다. "짜증나시는 모양이네요." "예리하시군요." 부정을 하지 않는 그의 말은 굳이 소리를 낮추지 않았기 때문에 이라즈의 귀에까지 충분히 당도했다. 얼굴을 굳이는 그녀에게 페르노크는 굳이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그냥 말했다. "서로 소화 안되게 하지 말고, 편하게 따로 먹자구요, 이라즈 영애." 이라즈는 단숨에 새파래진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신을 알아 봤다는 것에 대한 놀람과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그것을 가이번은 잘못 판단한 모양이었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아무리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나, 그런 행동은 아가씨에 대한 모독입니다. 당장 사과를 하지 않으면……!" "왜요? 결투라도 신청하시렵니까?" 가이번은 시뻘게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지만 페르노크는 종업원이 가지고 오는 음식에 관심을 돌린지 오래였다. "어차피 식사하면 헤어 질 인연입니다. 서로 신경 쓰지 말도록 하죠. 괜찮지요, 이라즈 영애?" "……예." 페르노크는 두툼한 고기를 썰어다가 맛있게 씹어 먹었다. 집에서 먹던 음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정 반대의 의미로 자신이 '원래' 먹던 음식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행복한 기분을 맛 볼 수 있었다. "귀족인데……이런 음식을 잘 드시네요? 그럼 왜 굳이 마을로 와서 식사를 하자고 고집을 부렸습니까?" 페르노크는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샐러드에 포크를 가져갈 뿐이었다. 유시리안은 굳이 다시 답을 추궁하려 들지 않았다. 옆의 테이블에서 겨우 화를 식히고 앉은 가이번이 우연잖게 그 질문을 들었기에 앞의 두 기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까탈스런 귀족 도령이라 식사를 가리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생각보다 털털한 성격을 가진 도령이라 궁금했던 것이다. 두 기사는 처음 만났을 때의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실은 저희가 먼저 건량 등으로 식사를 했거든요. 막 사냥을 하려는데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죠. 그리고 자신만 먹으면 된다는 걸 알고는 그냥 떠나자고 한 겁니다. 괜히 시간 끌면 식사 때를 놓쳐버려 여러모로 피곤해 진다고……." 그 '여러모로 피곤해 지는 일'은 귀족 도령이 신경 쓸 바가 절대 아니었음에도 수하를 위해 그런 판단을 했다는 것에 가이번은 내심 감탄했다. 그의 그런 내색을 눈치챘는지 두 기사는 다시 한번 느긋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 연참입니다.......(철푸덕)>O<ㆀ 이벤트 마감은.......145회의 잡담에 잘 써놨죠? 그럼((((((((((((((((((((((((((^o^)->개운하게 사라진다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완전히 무시당한 이라즈는 얼굴을 붉히며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페르노크와 유시리안이 웃는 소리가 자꾸만 가슴에 콕콕 박혀왔다. 물론 그들의 웃음 속에는 요크노민의 것과 무심한 음성의 락샤사의 말이 섞여 있었지만, 질투에 먼 여인의 귀에는 그런 불순물들은 자동으로 걸러지는 법이었다. "그럼 이 곳에서 갈라지게 되겠군요." "식사를 끝냈으면 그만 출발하죠. 갈 길이 멀잖아요." 유시리안의 아쉬워하는 음성이 들려오자 이라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락샤사가 술을 음미하며 마시다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난 안 끝났어." 페르노크 일행이 식사를 끝내지 못한 것이라면 상관하지 않고 떠났겠지만, 락샤사는 그녀의 막강한 전력 중의 하나면서 정식으로 고용되지는 않은 동행인이었기 때문에 별 수 없었다. 가이번을 제외한 그녀의 일행들은 은근히 고소하다는 얼굴로 이라즈를 보고 있었다. 비롯 하위라지만 귀족 기사인 가이번은 그나마 이라즈에게 대접을 받고 있지만, 다른 일행들은 인간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안함 때문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배일로 가리며 이라즈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갑자기 일어났다. 마차에 가 있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본의 아니게 멈춰서야만 했다. 그녀가 일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들린 검을 뽑는 소리 때문이었다. 놀라서 고개를 그쪽으로 돌린 그녀는 약간 씁쓸해 하는 페르노크와 평범해 보이는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뛰어나가는 요크노민을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페르노크의 바로 발 밑에 떨어져 있는 암기를 발견했다. 암살자? 그녀도 '자르카'라는 고위 귀족의 자제였지만 계승권은 없기 때문에 암살자를 맞아본 적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필요이상으로 놀라서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런 그녀의 앞을 가이번이 뛰어와 막았다. 표적은 아니었지만 어떤 여파가 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페르노크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것은 이라즈가 일어나려고 테이블에 손을 집었을 무렵이었다. 단숨에 몸을 틀며 '실드'를 외치려 했지만 그 보다는 그의 어깨에 앉아있던 실이 더 빨랐다. 실이 두 손을 휘젖는 것과 동시에 페르노크의 앞으로 바람의 장벽이 생성된 것이다. 덕분에 암기라 추정되는 무언가가 진로를 방해받아 바닥으로 떨어졌고, 옆에서 요크노민이 검을 뽑아들며 암살자가 있는 곳이라 짐작되는 벽을 향해 달려갔다. 얼핏 보기에는 무모해 보였지만, 그의 검은 보통 검이 아니었다. -스겅! 부드럽지만 매서운 소리가 들리면서 벽이 베여 지는 것을 봐도 확실히 보통 검이 아니었다. 벽이 잘려 나가면서 밖의 풍경이 보였지만, 이미 도주했는지 암살자는 보이지 않았다. 잠입으로 행한 '시도'는 두 번의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를 하던 성공을 하던 일단 도주를 하는 것이 일종의 살아남기 위한 룰이었던 것이다. 쫓으려는 기색을 보이는 요크노민을 페르노크가 차분하게 불러 세웠다. "노민." 요크노민이 일종의 광기를 보이면서 자신을 돌아보자 페르노크는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쫓지마라." "……." 요크노민은 한마디의 반박도 하지 않은 체, 작게 한숨을 쉬며 페르노크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요즘 들어 잦아졌어. 차라리 한 놈 잡아다가 고문이라도 하는 게 어때?" "어차피 알아 낼 수 없을 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당하자니 열 받는다구." "왜, 오히려 감각을 키우는 훈련이 되서 좋은데?" "진심이냐?" "진심이겠냐?" 자연스럽게 농담이 오가는 두 사람의 말속에 상당한 정보가 들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시리안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녀석'이 누굴 노리나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헌데 자주 겪으시는 일인 모양입니다?" "알아채고 있었습니까? 전 살기가 느껴지지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어요. 역시 아직 멀고 먼 모양입니다. 아, 이런 일이야 심심치 않게 생기는 일이죠." 페르노크는 자리에 앉으면서 자신의 어깨를 조금 어루만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넬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넬의 행방은 굳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페르노크가 굳이 요크노민을 잡아 세운 것은 그가 힘들게 쫓아 봐야 아무 소득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끝까지 쫓아간다면 요크노민은 처참한 모습을 한 시체 한 구를 발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실과 넬의 손을 더럽히는 것 같아 페르노크는 영 기분이 게름직했다. "미안하다……." 아주 작게 속삭인 그의 음성은 막 돌아온 넬의 기분을 아주 좋게 만들어 주었다. 생글거리며 자신의 빰에 얼굴을 부비적 거리는 넬에게 페르노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원래대로 되지 못했어. '거의'이긴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야……." 좀처럼 닦여지지 않는 감각, '육감'에 페르노크는 초조함마저 안고 있었다. 자신만 원래대로 돌아가면 더 이상 실과 넬의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페르……마(차남)죠?" 페르노크는 갑작스런 유시리안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렇다고 답을 했다. "능력이 특출난 마는 라의 질투를 사는 법입니다." 유시리안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린 페르노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님은 아닙니다." 신뢰가 가득 배인 페르노크의 음성에 유시리안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떡였다. 형제애가 그리 발전하지 못한 귀족 가에서는 듣기 힘든 발언이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는 페르노크의 눈동자를 보자니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유시리안은 다른 가설을 꺼내기로 했다. "그렇다면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로……페르를 경계하는 다른 귀족 가의 소행일지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암살자가 이렇게 빈번해서야……도련님께 말씀드려 보는 게 어때?" "안돼." "왜 안돼? 이렇게 매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곧 지쳐 버릴 거야. 무슨 일이 생기고 나서는 늦는다구." "괜찮아. 말했잖아? 좋은 '훈련감'이라고. 형님께 말하면 당장 내 거처에 호위병들이 붙을 거야. 그런 건 절대 사양이라고." 확실히 요크노민도 사람이 북적대는 건 싫었다. 그는 약간의 인간 혐오증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결혼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란 말까지 가혹 내뱉는 그였다. 페르노크는 인상을 찡그리며 '평안'과 '안전'을 저울질하고 있는 요크노민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게다가 점점 반응하는 감이 빨라지고 있어. 아주 만족스럽다고." 결국 요크노민은 저울질을 그만 두었다. 자신이 무슨 결론을 내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은 것이다. 그는 페르노크가 자신의 '예전' 힘을 빨리 되찾길 원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혹독한 수련이라도 견뎌낼 각오가 되어 있기에 지금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숨과 함께 포기의 의사를 밝혔다. 둘의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눈치챈 유시리안이 이렇게 물어왔다. "요크노민씨는 왜 페르의 형님에게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쓰십니까? 친구 분이 아니십니까?" "친구입니다." 페르노크는 냉큼 답을 하며, 마지막 고기조각을 입에 집어넣었다. 유시리안은 웃으며 디저트를 먹겠냐고 물었고 페르노크는 고개를 끄떡임으로써 답을 했다. "여기 아이스크림……." 보통 디저트로는 차나 주스, 아이스크림 따위를 주문하기 때문에 무난한 아이스크림을 택한 유시리안이었지만 그 것은 힘들게 기침을 토해내면서 손을 마구 저어대는 페르노크를 발견함으로써 선택을 달리 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스 네 잔." 겨우 겨우 진정한 페르노크에게 무언가 묻는 얼굴을 해 보였지만, 페르노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의아해 하는 유시리안의 눈에 표정변화가 거의 없었던 요크노민이 하얗게 질린 모습이 들어왔다. 어깨를 으쓱임으로써 궁금증을 넘긴 유시리안은 말없이 페르노크만을 보고 있던 락샤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뭘, 그리 봐?" "……." 락샤사는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조금 놀란 듯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그 모양새에 유시리안이 뭐라 물으려다 그냥 말았다. 그가 묻지 않아도 설명할 만한 것이면 알아서 해줄 것이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물어도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 힘들기 때문이다. "바다의 님프……." "응?"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락샤사는 다시 고개를 들어 페르노크를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놀란 빛이 유시리안에게는 신기할 뿐이었다. 자신이 아는 락샤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응이 없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페르노크는 락샤사의 손에 올라가 있는 넬의 모습에 조금 뜻밖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장난기가 넘치는 넬이지만 페르노크 외의 사람에게는 스캔쉽을 시도(?)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에게만 보이는 듯하던 넬을 정확하게 쳐다보던 락샤사라는 남자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에게 '넬이 보이십니까?'라고 묻기에는 주위의 눈이 너무 많았다. 넬이 누구냐고 묻는다고 해도 그에게는 설명해줄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락샤사가 자신의 눈을 주시하다가 왼쪽 어깨로 고개를 돌려 실을 똑바로 쳐다보았을 때는 나름대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페르노크였다. "어떻게……?" 뭔가 묻고 싶었던지 입을 떼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술을 한 모금 마시는 락샤사였다. 그도 페르노크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페르노크도 아주 궁금한 얼굴은 하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유시리안은 둘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지만 굳이 꺼내지 않는 화제를 끄집어 낼 생각은 없었기에 모르는 척 해주었다. 결국 식사를 마치고 페르노크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유시리안은 자신을 재촉하는 이라즈의 가냘픈 음성을 싸그리 무시하며, 페르노크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내용의 인사를 했다. "암살 기도가 많으신데, 호위기사가 불편하신거라면 괜찮은 용병을 고용하시죠." "용병이요?" "네. '카'등급의 용병이라면, 한명만 고용해도 암살자쯤은 얼마든지 커버해 줄 겁니다. '카'등급 용병은 여간한 기사들보다도 '감'이 발달되어 있죠. 참고로 전 '카'등급의 용병입니다." 생글 웃는 유시리안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보던 페르노크는 이내 피식 웃었다. 그가 웃자 유시리안은 완전히 확정된 것 마냥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제가 이번 의뢰가 끝나면 찾아가죠!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 급료는 많아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기로 하고, 그때까지 '훈련' 열심히 하세요." "……저기 말입니다." "네?" 페르노크는 화사하게 웃는 유시리안을 한참 보다가 결국 '그러죠.'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둘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재회를 기약하며 헤어졌고 그렇게 되리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재회는 상당한 시일이 걸려서야 겨우 이루어진다.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O<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는>O<ㆀ 크윽! 죽여주시옵소서>O<ㆀ 아아! 이벤트 발표를 해야 하는데......>O< 카페에 발표를 해 놓겠으니.... 메일로 주소 좀 알려주세요>O<ㆀ -아해의 장- (바람의벗. 신승림) 그 후로의 길은 너무나 평화롭고 조용하여 예정보다 이른, 초 저녁쯤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페르노크와 요크노민를 로레라자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도련님!" "뭘요. 아, 이거 선물이에요." 로레라자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페르노크가 내미는 반지를 받아들었다. 나무로 깍아 만들어진 축제기념품이었는데, 마음에 들어 사왔던 것이다. 로레라자는 눈물을 글렁이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오겠다고 말하며 나가버렸다. "페르노크." "응?" "잠깐 나갔다 올게." "……?" "그때 일을 매듭짓고 싶어." "좀 쉬고 하지 그래? 내가 있던 곳에는 이런 말이 있어. '급할수록 돌아가라'. 이 말은 조급하게 마음을 먹으면 되려 잘못 된 길로 들어설 수 있으니, 오히려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차분하게 정리해가며 걸어가라는 뜻이야. 내가 보기에 넌 무척 초조해 보여." "……알았어." "먼저 씻어. 난 조금 누워있고 싶다." "그러지." 페르노크는 소파에 길게 누워 기지개를 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실과 넬이 날아다니며 까르륵거리고 있었다. 잠시 이 풍만한 평온감에 푹 빠져 있던 페르노크는 양손을 들어 올려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여전히 이질적으로 곱지만, 나름대로 굳은살이 배겨져 있었다. "정작 나한테 해야 할 말이잖아? '급할수록 돌아가라'……." 손으로 두 눈을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페르노크는 곧장 일어나 구석에 잘 모셔져 있는 목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실과 넬이 자연스럽게 구경하는 포즈를 잡는 것을 보고 잠깐 웃은 페르노크는 곧 자세를 바로하고 눈을 감았다. 기를 고르게 퍼뜨리며 적기를 잡아 눈을 번쩍 뜬 그는 검을 자연스럽게 내리긋는 것으로 검무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러우면서 율동적인 '흐름'을 보이는 검무. '농땡 사부'가 이것을 펼쳐 보였을 때,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던 일이 생각났다. "멋지지 않냐?" 으쓱거리는 류의 모습에 왠지 거부감이 생겨버린 무하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었다. "검무는 멋지지만, '시전자'의 외모가 영 딸리네요." "별 수 없잖니, 그건." "……?" 웬일로 자신을 낮추는 말에 호응하는 류의 생소한 모습. 무하가 놀라 눈을 크게 뜨기도 전에 류는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처럼 '천재'는 범인들을 위해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낮춰줘야만 하는 '의무'가 있거든. 하아, 죄 많은 인생이여! 나는 왜 그런 '의무'에도 충실하는 성실성과 근면성까지 갖춘 것인가?" "네네, 그러시겠죠." 몸을 돌리는 무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류는 한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하가 구석에 가 앉아서 상당한 시간을 쉬었을 때야 제정신이 든 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 검무는 내가 가장 자랑하는 것이지. 이 검무를 익히기 위해선 제일 먼저 마스터해야 할게 있다. 그걸 마스터하지 못하면 이 검무를 펼친다는 건 평생 꿈도 꾸지 말아야 하지." "그게 뭔데요?" 류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어조가 무하를 새삼 긴장하게 만들었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그 '긴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래다!" "……." 당시 헛소리로 치부해 버린 그 말을 나중에서는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었다. 그 검무는 '멜로디'라는 파동을 타는, '음'이 본바탕이 되는 검법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무하는 상당한 시일이 걸려서야 겨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타는 '멜로디'에 따라 나타나는 천차만별의 변칙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검무는 '농땡 사부'의 유파가 독자적으로 창안한 것이었다. 단 한 명의 후계자에게만 전수되어지는 검무였다는 것을 무하가 안 것은 그 검무를 터득하고도 한참 후였다. 페르노크가 지금 타고 있는 '멜로디'는 유시리안이 숲에서 들려주었던 이곳의 음악이었다. 가사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 매력적인 '멜로디'만은 뇌리 깊숙이 각인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페르노크가 잊지 않으려고 마음속에 새겨두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만일 유시리안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페르노크가 펼쳐내고 있는 검무에서 자신의 '멜로디'를 읽어낼 수 있었으리라. -짝! 짝! 짝! 검무의 흠취 해 있었던 페르노크는 당황하며 검을 멈췄다. 왠지 모를 '깨달음'을 맛보고 있었던 터라 불쾌하기 그지없었지만, 표정관리만큼은 철저하게 하여 너무나 무덤덤해 보였다. 박수를 치고 있는 이는 처음 보는 남자였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경륜이 있어 보이는 그는 박수치는 것을 멈추는 대신 페르노크에게 걸어왔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구나. 처음 보는 검법인데, 스승이 누구냐?" "누구십니까?" "하하,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구나. 나는 케블이라고 한다. 너의 스승이 누구냐?" "말할 의무는 없습니다." "흐음……. 헌데 내 청을 하나 들어 주지 않겠나?" "이 곳에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그야 걸어서 왔지, 설마 날아 왔겠느냐?" "용건을 묻는 겁니다." "아아, 그런가? 저녁 식사 후 산책 겸 걷고 있었다." 이 곳은 엄연히 페르노크의 처소 앞, 그의 개인 정원 안이었다. 즉, 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함부로 들어와 나다닐 수 없는 일종의 '사유지'라는 말이다. 헌데 고작 산책이라니! 페르노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캐블을 보았다. 상당히 막가는 남자가 아닌가? 불청객 주제에 청 따위를 논하다니……. "그럼 계속 산책을 하시지요." 굳이 '영역' 문제로 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페르노크는 그냥 눈감아 주기로 하고 돌아서 거처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캐블은 아주 당당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내가 청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산책이나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평이한 어조에 가득 배여 있는 싸늘함에 캐블은 의외라는 얼굴을 하다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청을 들어주면 산책을 하지. 둘의 의견에 가장 적합한 타협점이 아니냐!" "둘 다 제 의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데, 어떻게 타협점이라고 하는 겁니까? 혹시 타협이라는 단어를 잘 못 아시고 계시는 게 아닌가요? 가다가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고 물어보시지요." 캐블은 얼굴을 붉히다가 보편적인 반응을 보였다. 즉, 크게 소리를 쳤다는 말이다. "어린것이 공경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구나! 네 에비, 어미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어른이 하라면 하는 거지, 웬 말이 그리 많으냐!" 그 말은 페르노크에게는 상당히 의외였다. 이 곳은 노소보다는 신분, 계급의 우열에 좌우되는 곳이 아니던가? "캐블씨는 '카르민' 입니까?" 같은 계급끼리는 노소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물은 거지만 캐블에게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였다. "내가 '카르민'이냐고? 껄껄, 물론 아니지. 단 세 가문밖에 차지하지 못한 '카르민'을 내가 무슨 재주로 차지하겠냐? 나는 검사다. 내가 청하고 싶은 것은 너와의 대련이지. 너도 검사라면 거절하진 않겠지?" 일종의 도발이었지만, '농땡 사부'라는 위대한 호칭을 가진 사부에게서 자라고 배운 페르노크에게는 웃기지도 않는 재롱에 불과했다. "물론 거절할 겁니다. 피곤하군요." =============================================================================== 올렸어요>O<ㆀ 카페에 이벤트 결과 올렸으니... 보시고, 제게 주소를........^^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하지만 역시나 캐블은 막부가내인 남자였다. "좋아, 그럼 시작하자!" "뭘 시작한다는……!" 페르노크는 다음 말을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캐블이 갑자기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페르노크는 들고 있었던 검으로 그의 공격을 흘리며 몸을 반 바퀴 턴했다. 캐블의 매서운 공격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페르노크는 황당함과 짜증에 인정사정 없이 검을 휘둘렀다. 만일 이 자리에 테밀시아가 있었다면, 페르노크의 실력이 불과 며칠전의 결투때보다도 훨씬 향상되어 있다는 것이 놀랐을 것이다. 페르노크의 강공에 캐블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공격에 들어갔다. 캐블이 상당한 실력을 가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지만, 역시 '농땡 사부'에 비하면 한참 뒤진다고 생각하는 페르노크였다. 하지만 모처럼의 강자와의 대련이기에 신나기도 했다. 캐블은 나이를 고려한다면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눈앞의 꼬마에게 경악을 하고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벌린 대련이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페르노크의 부드러운 검격을 받아치던 캐블은 결국 '힘'을 능가하는 '무언가'에 의해서 허공으로 튕겨 날라 가버렸다. 나무에 몸을 부딪치면서 멈춘 캐블은 울컥하고 한 모금의 피를 내뱉었다. '내상?!' 페르노크는 들고 있던 목검을 어깨에 걸치면서 말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있죠. '천외천(天外天)'. 자만은 금물입니다." ''천외천'이라니?' 생소한 단어에 눈을 치켜뜨며 페르노크를 보았지만, 때마침 몸을 돌린 페르노크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쿡쿡." 캐블인 한참을 쿡쿡 대다가 몸을 일으켰다. "매정한 꼬마로구만. 그대로 들어가 버리다니." 페르노크로서는 난데없이 검을, 그것도 진 검을 휘두르며 강제로 대련을 벌린 그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만일 진짜로 정중하게 대련을 마친 것이었다면 그에 따른 예의를 잊지 않았을 것이었다. 혼자 나서다 다친, 나이 헛 먹은 중년의 아저씨에게 베풀 예의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 페르노크였다. 예상보다는 그럭저럭 괜찮게 움직이는 몸을 이끌고 정원을 나가려는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캐블님?" "아, 로레라자요?" "어머! 정말 캐블님이세요? 세상에, 이 피 좀 봐! 어쩌다……?" "허허, 웬 소년과 대련을 했다오. 방심하기도 했지만 그의 실력이 보통을 상회하더군." "이곳에서요? 그럴 리가……?" "로레라자는 알지 모르겠구려. 은발의 녹색 눈동자를 한 곱상한 소년이었는데……. 이곳의 호위병이라도 되오? 나이는 어리지만, 그 정도 실력이라면 납득이 안가는 바도……." "뭐라구요?!" "왜 그러시오?" 캐블이 정말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을 보자 로레라자는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답했다. 지나가는 하인에게 캐블의 부축을 부탁한 로레라자는 이제는 어둠에 묻혀있는 페르노크의 아담한 처소를 돌아보았다. 입술을 꼭 깨물며 끌어 모은 로레라자의 두 손안에는 페르노크가 선물한 나무 공예품이 들려 있었다. "신체 쪽에서는 거의 되 가지만……역시 감각, 육감을 키우는 것이 힘들군. 막무가내로 훈련만 해댔으니……. 이제는 명상도 하면서……." 이래저래 계획을 세우던 페르노크는 점점 졸려움이 몰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졸려……." 목욕을 하고 나온 요크노민은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페르노크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봐, 페르. 들어가서 자라고." 하지만 페르노크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페르노크의 밑에서 몸을 쭉 펴고 누워 있었던 표범, 실이 요크노민을 슬쩍 올려다보다가 일어나서 코로 그를 밀었다. 상관말고 들어가서 자라는 뜻이었다. 요크노민은 자신을 밀고 다시 페르노크의 밑으로 쭉 눕는 실을 보고 조금 고민하다가 그냥 뒤돌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암살자가 걱정됐기 때문에 방으로 들어가길 권했지만, 범상치 않아 보이는 표범이 있는 이상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피곤하군." 한숨이 나왔다. 소중한 사람은 언제나 형님 하나 뿐이었던 요크노민에게 있어서 페르노크는 두 번째로 생긴 소중한 사람인 동시에 피곤한 존재였다. 강한데다, 더 강한 테밀시아 도련님의 곁에 있는 형님은 걱정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피곤하지 않았지만, 페르노크는 강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같아 걱정되어 피곤했다. 그 피곤이 달갑긴 하지만, 역시 걱정한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테밀시아 도련님처럼 든든한 가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사무치게 느껴져서 괴롭기도 했다. 요크노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 쓰지 못했던 일기장이 보이긴 했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에 침대로 직진해 버렸다. "강해진다면……널 지켜줄 수 있을 까, 페르?"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내뱉는 그의 모습은 진한 존재감을 담고 있었다. 둘은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잠들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다는 소리다. 페르노크가 그것을 안 것은 자신의 처소로 잠시 들린 테밀시아를 보고 나서였다. "벌써 오셨어요?" "벌써라니?" "……어제 저희가 도착했는데……?" "이런,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너희는 이틀 전에 도착했단다." "헤에? 근데……뮤비라는요? 보이지 않네요?" "뮤비라는……." 테밀시아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주먹을 두어 번 접었다 폈다 하다가 입을 열었다. "선을 보러 갔단다." "선이요?" "그래. 그것도 '카르민'의 신부감을 보러 갔단다. 하하……." 페르노크는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형의 눈을 직시하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형님……." "아, 난 집무가 밀려서 말이다. 그만 일어나겠다." 테밀시아는 태연하게 말하며 일어났지만, 페르노크는 깊은 눈동자로 형의 흔들리는 눈을 마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방밖으로 나가는 테밀시아의 모습을 보면서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안녕히……."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튀어나와 식도를 막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턱 막혀오고, 엄청난 통증이 발끝부터 시작해서 다리를 타고 가슴을 타고 목을 타, 머리에 당도했다. 해결할 일이 있다며 나간 요크노민의 부재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고요한 집안에 페르노크의 몸부림치는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옆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과 넬이 있었지만, 역시나 그들의 입에서는 아무런 음성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바닥에 넘어져서 몸부림을 쳤다.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이 어느새 머리를 쥐어 띁고 있었지만 그는 자각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인가? ……마침내 페르노크는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으아악!" 비명 후의 정막은 페르노크가 간신히 토해낸 숨소리로 깨졌다. 고통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이유로 눈물이 났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도 몰랐지만 분명 확실한 '무언가'였다. 곧 페르노크는 그 '무언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 것은 '예감'. 너무나 섬뜩한 '직감'. 무엇에 대한 예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운 예감이었다. 페르노크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이의 이름을 읊고 있었다. "설희……설희……." 어지럽게 날라 다니던 실과 넬이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때의 페르노크는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섬뜩한 고통스러움를 견뎌내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었을 뿐. 그때의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행동이었다. ========================================================================== 사건의 암시임이야......(여인천하의 경빈 어조) 글 올렸어요>O<ㆀ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요크노민은 즐겁게 현실을 직시 할 수가 없었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하인들의 숙소였다. 그는 자신을 감금했던 두 하인만, 서로의 이름으로 불러냈다. 내용은 '요크노민을 감금했던 일로 페르노크 도련님이 나서실 것 같으니 미리 입을 맞춰놓자'로 지금의 그들이 아무리 바빠도 무시 할 수 없는 사항을 잘 짚어냈다고 할 수 있다. 예상대로 쉽게 둘만을 불러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공손하게 묻는 거 아닙니까?" "아, 안돼!" 말해 줄 듯 머뭇거리다가도 옆 사람의 눈짓을 보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그네들의 행실을 벌써 몇 십분째 보고 있자니 자연히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저 좀 따로 보시죠." 요크노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구타했던 남자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는 그를 샛길쪽으로, 즉 남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서 거두절미하고 마구 팼다. 당연하게 하인이 비명을 지렀지만, 요크노민은 아주 공손한 한마디의 말로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 "시끄럽게 하면 혀를 자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맞은 것의 딱 열 배로 되돌려 준 다음에 손을 툭툭 털고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끙끙대는 하인에게는 이미 관심을 끊은 지 오래였다. "자! 이미 전의 분이 다 말씀해 주었답니다. 하지만 그 분이 거짓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니 한번 더 듣기로 하죠. 만일 틀리는 점이 있다면……." 요크노민은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걷어내며 아주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페르노크의 것을 닮아 싸늘하고 아비의 것을 담아 냉엄한 남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을 발하며 하인의 정신을 조였다. "그, 그러니까 테밀시아 도련님이 일곱 살 때였어. 그때 집사님이 뮤비라님을……."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 시간은 요크노민의 얼굴에서 핏기를 가져가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계속 침묵하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하인이 주저하자 요크노민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독촉했다. "계속해." 존댓말 할 여유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인은 그 상황에서도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테밀시아 도련님이 뮤비라님의 행방을 알아내서 지하 감옥으로 갔는데……." 다시 자신의 눈치를 보는 하인에게 요크노민은 울컥하며 소리쳤다. "갔는데?" "갔는데!……갔는데……이미 뮤비라님은 정신이 나가 있었던……." 하인은 요크노민이 내는 큰소리에 놀라서 얼떨결에 덩달아 따라 목소리를 높였다가 금방 수그러들며 말을 간신히 이었다. 요크노민은 이마를 손으로 덮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알고 싶었던 '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테밀시아 도련님이 직접 뮤비라님을 안고 자신의 처소로 데리고 가 간호를 했는데……정신을 차린 뮤비라님은 기억상실에 걸렸습니다. 그 뒤로 뮤비라님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구요." 힘들게 말을 잇던 하인은 겨우 크게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드디어 이야기가 끝난 것이다. 요크노민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계속 한숨만 쉬다가 중얼거렸다. "아버지……당신은……." 요크노민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그런 그에게 하인을 매달리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발설했다는 걸 알면 저희는 죽습니다!" "이거 놔……." "요크노민님! 제발!" "나에게 '님'을 붙이지마! 알았으니 이거 놓으라고!" 거칠게 하인을 뿌리치며 요크노민은 히스테리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푹 숙인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요크노민은 힘들게 걸음을 옮겼다.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간신히 억누른 체, 그렇게 요크노민은 휘청거리며 걸어나갔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냉정하고 엄격한데다 애정표현이 전혀 없었던 아버지였다. 자신이 두 살때 돌아가셨다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어느 면이 좋았던 것일까? 형님이 생각났다. 아버지의 아들이 맞나 싶게 부드럽고 애정 넘치던 형님이었다.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게 맞나 싶게 강하고 당당하던 형님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만 빼면 늘 우아하고 기품이 흐르는 형님을 떠올리니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러고 보니 테밀시아 도련님도 생각났다. 늘 무뚝뚝하고 차가운데다 위압감이 흐르는 도련님이지만 서툴게라도 꾸준히 내보이는 애정표현이 귀엽게 느껴지는 도련님이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형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주는 고마운 도련님이었다. 자신에게 있어 그 세 명은 그런 존재였다. 냉정한 아버지를 나름대로 아비로써 따르고 따스한 형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실질적인 가주인 도련님을 경의로써 대하는 것. 그것은 요크노민으로서는 단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 구도였다. 하지만 지금은……혼란스러웠다. "아버지. 전……전……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결국 요크노민은 외진 복도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페르노크는 말했다. '타인에게서 얽혀진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에 자신을 대입시켜 휘둘려 지는 것은 스스로 바보이길 자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그렇다면 자신은 앞으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아버지로써 형님을 형님으로써 도련님을 도련님으로써 대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그대로, 그냥 그대로 지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요크노민은 입술을 꼭 깨물며 주먹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단 한번의 행동으로 손에서 피가 흐르게 됐지만 요크노민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페르. 만약에 말이야. 아주 만약에……만약에……." 요크노민은 급하게 몸을 일으켜 뛰기 시작했다. 발이 엉키면서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지만 용케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는 계속 뛰어갔다. 자신의 아버지의 처소로. -쾅! 갑작스런 아들의 방문에도 집사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엄격하고 절제된 그의 목소리에 요크노민은 후들거리는 발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만약에 말이지, 페르. 아주 만약에…….' "드릴 말씀이 있어 왔어요, 아버지." "말해 봐라." "전에 페르노크 도련님께서 손뼈에 금이 가 신관을 찾은 적이 있었죠?" "그런데?" '아주 만약에……내가 형님과 똑같은 '죄'를 짓는다면……그렇다면…….' "실은 제가 도련님과 대련 중에 한 겁니다." '그렇다면 말이지, 페르.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할까?' -짝! 화끈거리는 빰은 별로 아프지 않았다. 그보다는 페르와 훈련을 마치고 생기는 근육통이 훨씬 아팠다. 그보다는 그 동안 하인들에게 당했던 구타가 훨씬 아팠다. 그럼에도……. -툭. 왜 눈물이 나는가……? "아버……." "밖에 누구 있는가?" 급한 발소리와 함께 경비병와 하인들이 나타났다. 요크노민은 아버지의 분노가 서린 눈동자를 똑똑히 보았다. 또한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는 경멸을 보았다. 때문에 너무 아팠다. "당장 이 놈을 지하 감옥에 가둬라!" "네?" 당황한 경비병들과 하인의 음성에 집사는 더욱 냉혹한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당장 이 놈을 가두라고!" "네!" 반사적으로 답하며 자신을 붙잡는 그네들을 뿌리친 요크노민은 눈물이 글렁거리는 눈으로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결국 고개를 저으면서 발을 옮겼다. 다시 자신을 붙잡는 경비병과 하인에게 격동적으로 고함을 지르는 그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내 발로 걸어가겠어!" 그리고는 고개를 획 돌려 아버지를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내 바로 걸어가겠다 고요, 집·사·님·" 페르노크가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사건이었다. ======================================================================== 요크노민이 진실을 알게 됐습니다>O<ㆀ 성.실.연.재. 경례!(-.-)\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페르노크는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실? 넬?" 그제서야 그 둘의 부재를 눈치챈 페르노크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둘이야 간혹 사라졌다가 어느 샌가 나타나곤 했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느 새 날이 저물었는지, 그가 있는 곳에서 내다보이는 테라스 밖의 풍경이 저녁노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자신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들을 닦아 내며 테라스로 걸어나갔다. 여름이라 저녁때면 선선하게 느껴져야 마땅할 바람이 너무나 차갑게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아름다운 저녁노을이었지만……아까 전의 그 섬뜩한 '예감'이 떠오를 뿐이었다. "노민……."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는 집안을 떠올리며 페르노크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가, 다음 순간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노민!" 자신이 아침에 형님을 배웅하고 바로 통증을 느꼈던 것을 생각하면, 요크노민의 부재가 너무 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안했다. "노민!" 수련장으로 쓰던 마당에 나왔다가, 정원을 돌아다니며 요크노민의 이름을 부르던 페르노크는 결국 요크노민의 원래 처소에서 주방까지 헤매고 다녔다. 그 어느 곳에서도 요크노민을 발견할 수 없었던 페르노크는 결국 자신의 처소로 발을 옮겼다. 슬슬 절정에 이르기 시작하는 저녁노을이 깔린 정원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페르노크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원의 끄트머리, 페르노크의 저택 앞에 서 있는 누군가는 아주 잘 들어왔다. "카한세올……형님?" "그래……. 나의 사랑하는 동생." 이제는 보랏빛이 약간 머금어져 있는 노을에 젖어있는 카한세올의 얼굴은 왠지 생소하기만 했다. 그 원인을 페르노크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평소 조소와 자조적인 미소가 섞여 있던 카한세올의 얼굴이 슬픔과 죄책감에 침식당해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페르, 나는 말이다……나는……." 페르노크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계속 똑같은 어구만을 반복하던 카한세올은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당도한 페르노크를 보고 결국 이렇게 말했다. "사랑 받고 싶다." -두근. 두근. 소울러때처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을 느끼며 페르노크는 당혹해 했다. 그 것을 어떻게 봤는지 카한세올은 정말 힘들게 미소지었다. "그래서……그래서……." 심장이 맥박이 귓가에 강하게 울렸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머리가 아팠다. 섬뜩한 '직감'이 다시 페르노크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지만, 그는 카한세올이 힘들게 내뱉는 소리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간과해버렸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그것이 페르노크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푹! 극심한 통증에 페르노크의 고개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그는 목을 치밀고 올라오는 구토를 막지 못했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토해낸 토사물은 다름 아닌 핏덩이었다. 고개를 숙인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뚫고 튀어나온 검의 끝자락이었다. "……!" 점점 안으로 들어가며 모습을 감추는 검이 페르노크의 눈에 생생하게 박혀들어 왔다. 검이 뽑힘과 동시에 앞뒤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는 완전히 보라색으로 돌변한 저녁노을 속에서도 그것은 이질적으로 붉었다. 지독한 고통을 겨우 겨우 견뎌내며 몸을 돌린 페르노크는 자신을 찌른 이를 확인했다. 거의 동시에 입 속에서 캐스팅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가만히 당해 줄 정도로 그는 착한 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푹! 또 다른 고통의 음향이 페르노크의 왼쪽 어깨를 꿰뚫은 단검에 의해 생성됐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멍한 눈으로 자신에게 해를 가한 이를 보고만 있었다. 천천히 검이 뽑혀지고 다시 핏줄기가 전보다 더 거세게 뿜어짐에도 페르노크는 미동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고통마저 초월하여, 그저 멍하니…… 멍하니 자신에게 해를 가한 이를 보고만 있었다. 멍해 있는 그의 귓가에 카한세올의 울음이 가득 배인 음성이 스쳐지나갔다. "미안……. 정말 미안……." 페르노크를 찌른 이는 피에 잔뜩 절은 검을 들며 너무나 화사하게 웃었다. "호호호!" 페르노크의 멍한 눈동자에 점차 습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로레……라자?" 왼쪽 어깨를 찌르던 로레라자의 희열 섞인 미소가 가득 머금어져 있는 입매에 계단에서 떨어질 때 보았던 여자아이의 웃던 입매가 겹쳐졌다. 광기 어린 로레라자의 눈동자에 생각나지 않던 여자아이의 눈동자가 겹쳐졌다. 흥분 때문에 약간 실룩해져 있는 코에 생각나지 않던 여자아이의 코가 겹쳐졌다. 충족감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볼 살에 생각나지 않던 여자아이의 볼이 겹쳐졌다. 마침내 로레라자의 얼굴에 생각나지 않던 그 여자아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페르노크는 자신의 눈에서 겨우 고여 있던 물기가 흘러내림을 알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들게, 너무나 힘들게 단어 하나를 토해냈다. 그 단어는 자신을 밀었던 그 '생각나지 않던 여자아이', 아니 '생각해 내기 싫었던 여자아이'의 이름이었다. "설희……?" 엄청난 출혈을 감당하지 못한 페르노크가 혼절에 가깝게 쓰러져 버리자 로레라자는 광기로 번뜩이는 눈을 카한세올에게 돌렸다. "아직도 망설이는 거냐?" 카한세올은 쓰러 진 페르노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깨물다가, 입술에서 피가 배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오, 어머니." "호호, 그래.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 그 잘난 '오르세만' 가의 모두에게 복수하자꾸나. 너를 서출이라 무시한 그들에게 복수하자꾸나. 너를 낳았음에도 버림받아야 했던 어미의 복수를 하자꾸나. 인정받은 아들은 테밀시아와 이 꼬마녀석, 그리고 너뿐이니……. 이제 테밀시아만 죽이면 네가 가주인거다! 이보다 통쾌한 복수가 어디 있겠니? 호호호!" "네…….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카한세올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아직도 피를 뿜어내고 있는 페르노크를 보았다. 자신에게 잘 달라붙던 귀여운 동생.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감지한 카한세올은 재빨리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의 어머니인 로레라자는 자식의 동행은 아랑곳하지 않은 체, 다음 지시를 내리기에 바빴다. "뮤비라가 없을 때가 기회다! 뮤비라 녀석, 늘 테밀시아에게 붙어 있어 계획을 방해하더니……!" "……." "뭘 꾸물대는 거냐! 다른 사람 눈에 띄기 전에 이 녀석을 숨겨야 한다. 내가 어제 확인을 했는데, 지금 지하 감옥에는 아무도 없더구나. 그 곳에 데려다 놓아라!" "그럼 페르노크를 살려……." "물론! 이 녀석만큼은 확실하게 죽여놔야지! 가증스럽게 너의 자리를 뺏은 녀석이 아니냐? 하지만 지금 죽으면 곤란해. 당장 죽이지 못하는 게 한이구나! 하지만 내버려둬도 죽겠지. 호호!" "……." 그들의, 아니 로레라자의 계획이 제대로 수행이 되려면 페르노크는 지금 당장은 죽으면 곤란했다. 로레라자의 계획은 '가주자리를 노린 페르노크가 테밀시아를 살해했으나,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죽는다'였기 때문에, 사망시간이 얼추 비슷해야 했던 것이다. "이 정도 출혈이면 확인 사살은 안 해도 되겠지만……. 그동안 고용했던 자객의 말로는 마법이라는 게 녀석에게 건재한다니까 안전 책은 써야겠구나." 로레라자는 품에서 힘들게 구한 마법 아이템을 찾았다. 그리고 거칠게 페르노크의 팔을 잡아 당겨 그것을 채웠다. '마력 봉인구'라 불리는 그것은 마력 응용시 필요한 모든 능력을 봉인시키는 것으로, 마법사 범죄자를 체포할 때 쓰이는 도구였다. 카한세올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페르노크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지하감옥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지하감옥으로 들어간 카한세올은 방안에 페르노크를 아주 조심스럽게 눕혔다. "미안하다……정말 미안하다……." 카한세올의 볼에는 언제부터인가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 '보고 싶은 이'라는 사람……어떤 사람이야? 요크노민의 목소리가 울린다.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도 모르는 그 질문에 어디선가 답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있다. -귀……여운 사람이지. -……헤어진지 10년이 되어 '고등학교'로 불리는 고등 교육기관에 입학을 했는데, 그때 설희를 다시 만날 수 있었어. 10년이 지나도……설희는 똑같았어. 여전히 귀여운 아이였지. -여전히 귀여운 아이지. -여전히 귀여운……. -여전히……. -……. ================================================================================== 지금 몇번째 지웠다가 다시 올리고 하고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힘드네요....ㅠ.ㅠ 로레라자는 페르노크가 이 집에 들어와 맨 처음에 마음을 주었던 여자입니다. 또한 어딘지 모르게 페르노크의 '그녀'를 닮아 페르노크가 은근히 신경쓰던 여자이지요. '페르노크'를 유일하게 아껴주던.......아니 아껴준다고 생각했던 여자입니다. 하지만 결국엔 여지껏 자객을 보냈던 배후의 인물이 그녀로 밝혀지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타격을 입히기까지 하는 잔인한 인물로 탈바꿈 됩니다. 페르노크가 '잊어버리려 했던 사건'이 이번 '사건'으로 드디어 불어져 나옵니다. 바로 페르노크가 사랑했던 '그녀', 설희의 다른 모습. 그녀의 배신 이라고 할까요? 하하^^; 요크노민의 회상록에 '그 일'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이 사건은 페르노크가 이곳에서 겪었던 '왕따 사건', '결투 사건', '납치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페르노크에게 정신적 타격을 안겨줍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필이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두 사람 중 한사람인 요크노민이 근처에 없는데다가, 테밀시아는 뮤비라의 선 문제로 심란해 있고....... 또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두 '존재' 모두 부재 중이죠. 페르노크가 '직감'해던 그 섬뜩함은 요크노민의 사건이 아닌 이일의 대한 것이었던 겁니다. 왜 테밀시아가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서 직감했는지, 또 왜 요크노민이 감금을 당하는 순간 에 '직감'을 했는지는 위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죠? 그는 동시에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두 사람을 미묘하게 잃어버린 겁니다. 또, 로레라자는 이 두사람이 페르노크의 옆에 없을 때를 노린 것이니..... 직접적으로 로레라자가 나서게 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죠. 뭐, 그런겁니다^ㅡ^ 그럼...... -아해의 장- (바람의벗. 신승림)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무하는 설희의 변치 않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시 만난 설희는 여전히 투명한 피부와 곱슬거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작은 인형 같은 소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하지 않는 순진한 갈색 눈망울이 무하에게 그녀가 변하지 않았음을 믿게 해주었다. 그녀를 고등학교에서 만난 것은 단순한 인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운명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이루라.' '농땡 사부'의 가르침을 따라 무하가 약속대로 의무교육이 끝났을 때 자신을 데리러 온 사부에게 이 곳으로 진학하기를 청했고 이루었다. 그 덕분에 설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설희는 어릴 때와 똑같은 순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무하에게 매달렸다. "무하다! 헤헤, 무하다!" 주문처럼 반복하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대학교를 갈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등학교도 그다지 오고 싶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약간 맛보고 있는 검무가 너무나 매혹적이라 학업에는 그다지 마음에 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헌데도 고등학교에 온 이유는 학창시절이라고 불리는 일생의 중요한 시기를 그녀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무하는 설희와 같은 반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뜻밖의 반가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민재?" "역시 무하구나!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소문?" "웬 멋진 여자가 다른 여자아이들의 환심을 두둑이 샀다는 소문이다." 여전히 덩치가 큰 민재였다. 아니 그보다는 듬직하게 변했다고 해야 하나? "무하야, 누구야?" 설희가 옆에서 꼼지락거리면서 낯을 가리는 것을 본 무하는 느긋하게 웃어 보이며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민재. 나와 같은……. 아니 어릴 때 헤어진 소꼽친구야." 같은 고아원 출신인 설희에게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주위의 눈도 있고 해서 그냥 그렇게 대충 설명하고 넘어간 무하였다. 민재는 물론이거니와 설희도 현재 부모님이 계시는 '정상적인' 가정의 자녀가 아닌가? 설희는 얼굴을 붉히며 민재를 보고 인사했다. 고개만 숙여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무하는 다시 웃으며 마저 소개 해 주었다. "민재야, 이쪽은 설희. 마찬가지로 어릴 적 친구야." 대충 눈치를 챈 민재는 피식 웃으며 설희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그것은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을 그녀도 알아차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낸 제스처지만, 설희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그렇게 셋이 만났고 그렇게 셋은 미묘하게 어그러졌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생글거리던 여자아이들이 한결같이 자신을 무시하며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왜 그런 건지는 몰랐다. 그리고 그것에 신경 쓸 생각도 없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수련의 강도가 현격하게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설희는 그대로였으니까. 하지만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면서, 단순한 무시정도가 아닌 직접적인 피해로 나타났을 때는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무하는 자신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는 이 불쾌한 사건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아 계집! -원장한테 몸 파는 창녀! -죽어버려! 쓰레기! 책상 위에 잠시 올려놓고 갔던 참고서가 찟겨져 있고, 매직으로 써놓은 글들이 어지럽게 책상 위를 자리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까지도 별 반응이 없었던 무하는 일순간 필름이 끊겨 버렸다. 찟겨진 종이조각 사이로 그녀의 부모님 사진이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갈기갈기 찟겨진 체로! 무하는 자신의 분노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 반의 모든 책상을 뒤집어 버리고 손에 잡히는 데로 집어던지고, 칠판은 의자를 던져 부숴 버리고……. 그 뒤로 무하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 방향은 더욱 역겹게 흘러버렸다. 바로 그 여파가 설희에게 미친 것이다. 무하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는 설희를 보고 더욱 발광했음은 물론이었다. 무하는 점점 지쳐갔지만 언제나 순수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을 옹호해주는 설희를 보고 간신히 지탱해 나갔다. 그렇게 이년하고도 육 개월이라는 시일이 흘렀다. 성적표를 받는 날이었다. 무하는 '농땡 사부'와의 내기를 했기 때문에 정말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다. 내기의 내용은 '전교 10등 안에 들면 마지막 육 개월 동안은 자유롭게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무하는 설희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기 때문에 정말 죽도록 공부를 했고 생각보다 결과는 좋았다. 중상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녀가 전교 5등을 한 것이다! 무하는 성적보다는 앞으로 설희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늘 자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던 설희였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뭐야! 도대체 뭘 할 줄 몰라! 그렇게 무서우면 애당초 끼질 말던가! 신경도 안 쓰잖아!" "하지만 설희야……."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내가 좀더 약점을 캐볼 테니까, 너희들은 좀더 분발해! 알았어?" "……!" "왜 대답이……무하야……."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모든 게 다 부서져 버렸다. 그녀는 마지막 발작을 하듯 마구 폭언을 내쏘았다. "너 같은 건 아무 것도 몰라! 언제나, 모두 너를 위해 돌아가는 세상이니까! 너 같은 건 아무 것도 모른다구! 난 늘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바둥거리면서 살아왔는데 넌 모든 게 너무 쉽게 이루어지잖아! 난 원장에게 몸을 팔아가면서 고아원 생활을 풍족하게 보내려고 바둥댔는데, 넌 아무런 대가 없이 원장을 쩔쩔 매게 만들었지! 나는 그 년이 죽는 순간에도 웃지 못하고 억지로 울면서 그 년의 부모님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바둥댔는데, 넌 애당초 양부모님은 필요 없는 것처럼! 너 혼자만 효녀인 것처럼! 난 민재 선배의 마음을 얻으려고 그렇게 바둥댔는데! 어째서 민재 선배는 나를 믿어 주지 않는 거야? 넌 창녀인데! 원장에게 몸을 판 창녀가 맞는데! 왜 나는 믿어주지 않는거야? 왜! 어째서! 넌 모든 게 쉬운거지? 어째서? 널 저주해! 널 경멸해! 역겨워!" 아니야! 아니야! 설희야, 그게 아니야……! 산산이 부서졌다. 무하를 지탱해주던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졌다. 무하는 조용히 돌아섰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뒤에서 그녀가 내뱉는 말들이 하나하나 비수가 되어 온몸에 꽂이고 있었다. 비수가 꽂인 몸은 산산이 부서져 쓸모 없어진 유리조각처럼 상처입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 뒤로는 암흑뿐이었다. 페르노크는 자신의 육신의 유무조차도 감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정막 속에 잠겨 있던 페르노크의 '감각'이, 청력이라는 '감각'이 작동했다. 페르노크는 자신의 '세계'가 깨질까 두려워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 보다는 들려오는 소리가 더욱 크고 처절했다. 페르노크는 결국 그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농땡 사부'의 밑에서 자란 그에게는 '도망'이나 '회피'는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잔뜩 젖어있는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인식함과 동시에 온몸을 닥치기 시작하는 지독한 고통에 페르노크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미안하다……정말 미안하다……. 카한세올은 희미하게 신음하는 페르노크를 보다가, 어머니 몰래 숨겨온 물건을 품에서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런 손길로 페르노크의 상의를 벗겼다. 의외로 페르노크의 몸에는 흉터가 많았다. 적시에 「치유」마법을 받지 못해서 생긴 흉터들이었다. 하지만 그 흉터는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을 처참하게 적시고 있는 핏줄기 때문이었다. 카한세올이 꺼낸 물건은 바로 '힐링' 포션이었다. 그는 아주 섬세한 손놀림으로 페르노크의 양어깨를 관통한 상처에 발랐다. 피가 대충 멈추기 시작하자 이제는 본격적으로 들이붓기 시작했는데, 상처가 너무 커서 지혈 외의 효력은 발휘하지 않았다. 카한세올은 안타까움에 다시 눈물을 떨꾸었지만, 다음 순간에 놀라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고양이가……쥐 생각하는……건가? 쿨럭, 왜 울지?" "페르? 정신을 차린거야?" 페르노크는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선을 넘으면 통증이 갑자기 몰려드는 이상한 체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고통이 닥친 것이다. 고통으로 혀를 깨물지 않게 입술을 꾹 깨문 페르노크의 극단적인 처치는 그의 입술을 잔뜩 찟어 놨는데, 그 정도의 고통은 양어깨에서 닥쳐오는 고통에 묻여 느껴지지도 않았다. "로레라자가……하아, 왜……?" "그녀는 내 어머니니까." 페르노크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하지만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런가……." "어머니는 이 곳의 시녀였어. 아버지가 취중에 어머니를 범해 나를 낳았지. 하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첩으로 들이지 않았어. 나만 받아 들인거지. 어머니는 모멸감에 집을 떠났다가 네가 태어날쯤에 돌아왔다고 해. 아버지는 어머니인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너의 유모로 삼았지. 난 어머니라는 존재는 이미 죽은 줄로만 알았어.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어머니는 나를 '오르세만' 가의 가주로 만들고 싶어해. 그게 나를 '마'로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이자, 직접 키워주지 못한 자식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하고 있어." 페르노크는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눈으로 카한세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가주 자리는 탐나지 않아. 나는……사랑 받고 싶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래. 어머니가 원한다면 뭐든 할 수 있어. 나는 단지 어머니에게 사랑 받고 싶을 뿐이야. 단지 그 뿐인데……정말 미안하다, 페르." "왜……처음부터 마력 봉인만 해도 됐을 텐데……." "캐블을 아나?" "아……!" "나의 사부지. 어머니는 사부를 압도적으로 이긴 너의 검술 솜씨를 경계한 거야. ……그만 가봐야 해. 이제는 나의 자랑스런 형님을 처리하러 가야지. ……정말 미안해. 너만은 어떻게 해서든 살려놓을 거니까……." 카한세올은 무언가 더 하고 싶어 보였지만 결국 입을 다물고 가버렸다. =================================================================================== 설희의 본색이 들어남이야......(여인천하 경빈의 어조....맛들인듯;;) 이제 여유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카한세올의 발소리마저 멀어지자 페르노크는 고통에 다시 신음을 흘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랑 받길 원하는 마음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도 그저 설희와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이니까. 서로를 위해주며 서로를 사랑하며, 그저 그렇게 있고 싶었을 뿐이니까. 페르노크는 거추장스럽게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차지하고 있는 마력 봉인구를 내려다보다가 테밀시아가 선물해 주었던 팔지를 발견했다. 그의 서툴기만 한 애정표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던 페르노크는 힘들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멈췄던 상처가 다시 도지기 시작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아무 것도 잃기 싫다는 마음에 오기로 일어서는 그였다. 문 근처로 가까이 간 페르노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에 있는 어느 방인 모양이었다. "페르?" "노민?" "너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야?" "너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야?"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묻던 페르노크와 요크노민은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럼 아까 그 중얼대던 소리가 확실히 카한세올이었군." "아아." "……갈거야? 들어보니 상처도 상당한 것 같던데……. 이곳까지 비린내가 풍겨." "갈 거야." 페르노크는 힘들게 뒤로 물러섰다가 죽을힘을 다해 문에 몸을 부딪었다. 굳건한 문은 약간의 흔들림만 보여주었을 뿐, 열릴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온몸을 덮치는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페르!" 기겁한 요크노민이 문으로 걸어가려 했지만, 그의 손발이 벽에 매여져 있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죽어 가는 최초의 친구의 이름을 무력하게 부르는 것밖에는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조감과 무력감에 요크노민은 몸부림을 치며 친구의 이름을 불렀지만 굳건한 수갑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문이 부딪이는 소리와 함께 친구의 억눌린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페르!" "괜찮……쿨럭!" 요크노민은 마구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를 저주했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힘이 있었다면!' 요크노민은 손목에 수갑이 파고들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자신의 무력감이 스스로에게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조차 용서되지 못할 만큼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별다른 소음이 없는 그 곳에서 바닥에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요크노민의 귀에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그 것은 힘이 떨어진 페르노크가 기는 소리였다! 요크노민은 자신의 사지를 옮아 매고있는 수갑들을 광기어린 눈으로 보다가 손목을 탈골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 무력하게 앉아서 울고만 있는 건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개를 푹 숙여 자신의 웃옷을 입으로 꽉 붙든 요크노민은 손목을 거칠게 움직였다. 속으로 셋을 세며 손목을 움직이려던 요크노민을 멈추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바로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페르노크가 드디어 성공을 한 모양이었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쉰 요크노민이었지만, 그것으로 안심하지는 않았다. 지하에 가득히 퍼지고 있는 피비린내가 안심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크노민은 벽에 무언가가 부딪이는 소리와 약간씩 끌리는 소리를 들으며, 페르노크가 겨우겨우 앞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너무나 무력하다……. 요크노민은 흐느낌이 밖으로 새지 않게 웃옷을 더욱 꾹 물며 눈물만을 흘렸다. 강해지고 싶다……! 그렇게 요크노민이 강하게 '염' 하는 순간이었다. 「울보네?」 그것은 비정거림도 아니었고, 동정도 아닌……그저 덤덤하디 덤덤한 '울림'에 불과했다. 때문에 요크노민은 그 순간이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큰 전환점이 되리란 걸 짐작도 하지 못했다. "누구……?" 「힘을 원해?」 "……응!" 악마인가 싶었지만 요크노민은 거짓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좋아! 너 마음에 들었어!」 다음 순간 요크노민이 있는 방안에 붉은 빛으로 가득 메워졌다. 「나는 「화염의 수장」불칸. 그대 나와의 '맹약'을 원하는가?」 요크노민은 갑자기 나타난 붉은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는, 잠자리의 날개의 것과 흡사하게 생긴 붉은 날개가 달린 작은 생명체를 멍하니 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그의 말을 깨달고 놀라서 뒤로 주춤했다. 그 작은 존재는 요크노민이 답을 안 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성인 여성의 몸체만큼 커져서 허리를 숙여 요크노민과 눈 높이를 마주하며 다시 물었다. 그녀가 커짐에 따라 빛이 하얗게 탈색이 됐지만 요크노민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맹약'을 원하냐니까?」 요크노민은 커진 불칸의 다시 놀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작았을 때는 잘 안보이던 불칸의 외모에 놀란 것이다. 불칸은 화려한 적금발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데다 하얀 도자기에 붉은 기운이 도는 듯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동공이 없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매우 화사한 미인이었다. 게다가 조각을 한 듯한 고혹적인 굴곡이 져 있는 몸매가 붉은 비단으로 된 드레스에 감싸여 있어 요염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봐!」 "……아. 응, 원해." 「좋아! 이제 넌 내 '맹약자' 인 거다?」 "으응."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맹약식'이지만, 그래도 '맹약식'은 '맹약식'. 요크노민은 갑자기 자신에게 덮쳐오는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버렸다. 온 몸이 다 타 사그러 들 것 같은 뜨거움을 요크노민은 이를 앙물며 버텨내려 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주어들은 바로는 '맹약자'가 된다고 해도 '맹약식'을 버텨내지 못하면 온몸이 말라붙어 죽는 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무력감따위 느끼고 싶지 않아! 강해져서……내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 형님도, 페르노크도……모두!' 인간 혐오증이 있는 요크노민에게 그 이상의 소중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였다면 아버지가 들어갔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미래를 맡긴 로딘이 생각난다. 요크노민은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그를 포함시켰다. 페르노크가 오기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생각났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 다시 겪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일들이었다. 요크노민은 온몸을 비틀며 견뎌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됐어! 이제 '맹약식'은 끝났어. 용케 살아 남았네? 여지껏 '맹약자'들은 다들 정신력 소모로 죽었거든.」 "그, 그래?" 「응. 참! 나 그 목걸이 마음에 들어! 그 안에 들어가 있을래.」 "어? 하지만 원래 정령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원래가 어디 있어? 내 마음이지!」 "그, 그래? 앗! 보석이 붉어졌잖아?" 「그야 내 기운이 원래 보석에 담겨 있던 물의 기운보다 강하기 때문이지. 뭐, 불만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엄 없는 '맹약자'였다. 한편, 페르노크는 두 번의 부딪힘으로 완전히 기력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오기로 이를 악물고 기어서라도 뒤로 물러나 겨우 서서 문으로 달려 들려했다. 친구인 '마나'와의 '소통'을 강제로 차단시킨 마법 봉인구가 있는 이상 마법은 물 건너 간 것이고, 양 어깨가 복귀불가능으로 망가진 이상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결국 남는 것이라고는 순수한 육체적 힘뿐이었기에 페르노크는 고통을 참아 가며 문을 향해 뛰어갔다. 헌데 여지껏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살짝 부딪였음에도 문이 힘없이 열리는 게 아닌가? 평상시라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그였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페르노크는 비틀거리면서도 확실하게 걸음으로 옮겨 밖으로 향했다. 그는 극심한 고통에 떨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양 손목에서 테밀시아가 주었던 팔지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주위가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그 팔지가 전과는 전혀 다른 핏빛을 띄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아차리지 못했다. 페르노크는 그저 힘겹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가 지하 감옥의 문을 열고 나감과 동시에 감옥 안에 깔려있는 어둠 한편에서 누군가가 윤각을 나타냈다. 어둠에 동화되어 있었던지라 완전한 모습은 알아 볼 수가 없었지만, 양손을 끌어 모아 무언가를 안고 있다는 것만은 확인 할 수 있었다. 그 안의 무언가는 인형 마냥 힘없이 축 쳐져 있었지만 분명한 생명체로, 보통 사람은 범접조차 못할 「수장」급의 정령들이었다. 정령 쪽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이라면 그네들의 모습이 전설 속에서 묘사되는 「바람의 수장」과 「물의 수장」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헌데 그 거대한 '존재'를 오만방자한 포즈로 안고 있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쳐져 있는 두 존재에게 말했다. "지금은 너희가 나설 때가 아니란다. 실, 넬." 이제는 닫힌 지하 감옥 문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획 돌렸다. 그의 품에 힘없이 안겨 있던 두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휘둥그레진 두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놀랬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아주 재미있다는 말투로 둘에게 말했다. "새로운 '맹약자'가 탄생하려는 모양이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이 보고 있던 쪽에서 붉은 빛이 일어났다. 그 빛은 점차 하얗게 탈색되어 갔는데, 그 강렬함은 오히려 더해지고 있었다. 셋이 있는 쪽까지 미친 빛은 그들을 비춰 주었는데, 둘을 안고 있던 이의 모습이 너무나 성스러워 감히 표현할 길이 없었다. 허벅지 쪽까지 흘러내린, 이 어둠 속에서도 그 윤기를 자랑하는 흑발과 곧게 뻗은 콧날, 붉기 그지없는 요염한 입술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눈동자. 그것은 역사에서 기술하는 가장 '고귀한 혈통'만이 가질 수 있다는 주홍색 빛을 띤 눈동자였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예기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한 깊이와 모든 것을 투영시키는 맑음이 공존하는 그 눈동자는 현재 아무런 빛도 담고 있지 않았다. '생명체'라면 당연히 담고 있을 빛을 말이다. 때문에 약간은 공허하게 느껴지는 눈동자였다. 그는 요염하기 그지없는 붉은 입술의 양 꼬리를 짐직 올려 보이며 흔히 '미소'라고 말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그와 그의 손에 안겨 있었던 두 존재는 점점 흐릿해지면서 사라졌다. ================================================================================= 아르의 등장?...............ㅡ.ㅡa 마음대로 생각하시길~~( ")~~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미안해……. -……사랑 받고 싶어. "쿨럭!" 몇 번째 토하는 핏덩이인지 세보지는 못했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상당한 수를 차지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페르노크는 벽에 기대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는 이미 감각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양 어깨에서 점점 심하게 몰려드는 고통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지만, 그 보다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는 감정이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그 감정이란 '동지감'. ……동병상련의 안타까움. -……단지 어머니에게 사랑 받고 싶을 뿐이야. 단지 그 뿐……. 아련하게 후벼지는 오래된 상처. -너 같은 건 아무 것도 몰라! 언제나, 모두 너를 위해 돌아가는 세상이니까! 너 같은 건 아무 것도 모른다구! 정말로 몰랐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그녀에게 자신이 증오 어린 대상에 불과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아니,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건 그녀였다. 왜냐면 그는 그녀에게 어두운 건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강하게 그녀를 지탱해주려고만 했으니까. 그러니까……아무 것도 모르는 건 그녀다. 결국 모든 게 그의 탓, 감추려 들기만 했던 그의 탓인 것이다. 페르노크는 쓰게 웃었다. 지독하게 아팠지만 나오는 건 웃음밖에 없었다. 그는 힘들게 벽에 기대 앞으로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카한세올 형님……당신을 구역질 날 정도로 너무나 잘 이해합니다. 너무나 잘 이해해서…….' "쿨럭!" 페르노크는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다시 핏덩이를 토해냈다. 그는 눈물로 흐릿해진 초점을 애써 맞춰가며, 자신이 토해낸 핏덩이를 보았다. '……구역질이 납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고 일어났다. 기어서 가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걸어야 속도가 붙는 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커브를 돌자 테밀시아의 거처가 보였다. 그의 거처에 딸린 정원이 그리 넓지 않다는 사실에 페르노크는 신께 감사했다. '잃고 싶지 않은 게 있습니다.' 페르노크는 힘들게 앞으로 한발 딛으면서 동시에 풀석 쓰러져 버렸다. '지키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달이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기어이 들어온 중매자리에 가야'만' 했던 뮤비라를 씁쓸하게 배웅한 테밀시아는 서재에 틀어박혀 술을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스스로가 이기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은 마린나살와 약혼까지 한 주제에 고작 선만을 보러간 뮤비라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본래 그런 것 따위에 의존하여 괴로움을 잊고자 하는 '멍청이'가 아니었지만, 도무지 맨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술에 잔뜩 취해 머리가 지끈거리는데도, 정신만은 말짱한 상태에서 테밀시아는 기계적으로 술을 목구멍에 쏟아버릴 뿐이었다. 눈을 감으면 그때, 그 어두운 지하에서 아주 희미하게 퍼지던 뮤비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테밀시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똑똑. 흐릿한 시선을 문에 주며 들어오라 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고민하는 테밀시아였으나, 문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열렸다. "카한세올……?" "……." "네가 나를 먼저 찾다니, 별일이구나. 앉거라. 함께 술이라도 마시지 않겠니?" "……." 카한세올은 침묵을 지키며 테밀시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정적만이 흐르던 테밀시아의 서재에 그의 거칠면서도 절도 있는 발소리가 울렸다. 테밀시아는 자신이 들고 있던 병 안에 술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술이 진열되어 있는 벽장 쪽으로 걸어갔다. "어떤 술을 좋아하지? 이번에 들어온 술이 제법……!" 테밀시아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와장창! 벽장이 깨지면서 그 안의 술병마저 산산조각이나 내용물을 토해냈다. 테밀시아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을 뽑아들며 몸을 빼냈다. "카한세올?" "……." 카한세올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체 검만을 휘둘렀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닌 몸에 배인 검술을 펼쳐내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수련의 시일이 짧은 것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날카로움이 배여 있었다. 테밀시아는 바싹 긴장을 하며 그의 공격을 피했지만, 만취한 몸으로 맨정신의 전사를 상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테밀시아는 벽에 몰아세워졌고, 카한세올은 입술을 깨물며 검을 크게 들었다. "카한세올!" 테밀시아는 의아함에 크게 동생의 이름을 불렀지만, 동생은 여전히 침묵만을 고수할 뿐이었다. "카한세올……." -투둑. 고급 양탄자 위로 소금기가 감도는 맑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카한세올은 떨리는 손으로 용케 검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테밀시아는 지금 검을 휘두르면 동생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취중이라 자칫하면 동생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기에,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동생이 너무나 슬픈 눈을 하고 울고 있지 않는가? 카한세올의 입이 힘들게 열렸다. "죄송……합니다." 테밀시아는 자신의 목을 향해 예기가 실린 검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가 저리 슬픈 것일까? 동생은 왜 저렇게 슬프게 울고 있는 것일까? 그 다음 순간이었다. -챙! 달빛이 은은하게 서린 은빛 실타래가 테밀시아의 망막에 비춰졌다. 바람이 불지 않는 밀실에서 급히 뛰어왔음을 상징하듯 나풀대는 그 은빛사이로 적지 않은 혈향이 배여 있다는 것을 테밀시아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쿨럭!" 피를 토하며 문 쪽으로 다시 힘없이 쳐박히려는 그를 빠르게 잡아당겨 품에 안은 테밀시아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짧은 단어를 내뱉었다. "페르……?" 페르노크가 서재 안으로 힘들게 왔을 때는, 카한세올이 테밀시아의 목을 향해 막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자신도 믿겨지지 않는 속도로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몸으로 막을 생각이었지만 우연잖게 팔찌에 부딪여, 상처는 모면할 수 있었다. "페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두 형을 향해 페르노크는 자신이 내 보일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선보였다. "그만……카한……. 쿨럭!" 다시 피를 토하는 그를 보며 다시 한번 구슬픈 물방울을 떨꿔 낸 카한세올은 힘없이 검을 쥔 손을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으려 했다. "뭐 하는 거니! 카한세올!" "어머니……." 풍만한 몸채에 인자한 미소가 가득하던 로레라자의 얼굴이 왜 그리 표독해졌는지……. 페르노크는 욱씬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카한세올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손에 힘을 꾹 쥐었다. 사랑 받고 싶다는 소망이 그의 흔들리던 마음을 굳게 만들어 준 것이다. 비록 그 굳은 방향이 그릇됐다 할 지라도 카한세올에게는 그것을 바로 잡을 여력이 없었다. 페르노크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내 * 가 * 명 * 한 * 다 *" 로레라자가 눈을 크게 뜨며 고함을 질렀다. "괜찮아, 카한세올! 녀석은 마법을 쓸 수 없어!" 분명 오른 손에 건재해 있는 마력 봉인구를 보면, 그녀의 판단은 잘 못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 대 * 멸 * 하 * 라 *" 하지만 마법은 '구현됐다'. ==================================================================================== 절정? 종반? 모르겠군요......아무튼 이번에 '그 일'은 다음회로 정리가 됩니다. 카한세올이 어떻게 될지...... 페르노크가 어떻게 될지...... 테밀시아가 어떻게 될지...... 요크노민이 어떻게 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왠지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뮤비라의 선 문제는 어떻게 될지..... 다음 회에서 정리가 되긴 하지만.... 역시 많은 여운과 앞으로의 해결방안이 나오겠지요..... 고로!!! 이라사님 약속 지키셔야죠! ^ㅡ^ 저 연참했습니다^^+++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카한세올은 자신의 주위로 돌고 있는 새하얀 기류를 멍한 눈으로 보았다. 순결한 색을 지니던 그 기류는 카한세올의 발끝부터 시작해 서서히 돌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더해짐에 따라 카한세올은 거친 비명을 질러댔다. "크아악!" 마침내 카한세올의 목까지 그것이 잠겼을 때였다. 그의 발 쪽을 휘감고 있던 기류부터 시작하여, 마치 물에 떨어진 잉크의 분산처럼 붉은 '색'이 순백의 기류에 퍼져 나갔다. 카한세올은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지, 헛바람을 삼키며 고개를 뒤로 젖였다. 페르노크는 자신이 불러일으킨 '현상'에 넋을 잃고 멍하니 고통에 몸부림치는 카한세올을 보았다. 붉게 물든 기류에서 혈향이 진하게 뿜어지고 나서야 페르노크는 겨우 신음소리를 뱉어낼 수 있었다. "아……." 그의 참혹하게 찟겨진 양어깨의 상처에서 뿜어지는 핏줄기가 팔을 타고 팔찌에 흡수됨에 따라 그것이 일으키는 진동이 거세지고 있었지만, 그때의 페르노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넋을 잃고 있었을 뿐. "아……." 페르노크는 다시 한번 멍한 신음성을 토해내다가, 힘들게 카한세올의 앞으로 기어 나갔다. "아……." 뒤로 크게 젖혀져 있던 카한세올의 고개가 제자리를 찾더니,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순식간의 일이라 페르노크는 카한세올의 얼굴에 배여 있던 고통을 읽지 못했다. "미안……하다." 믿을 수 있겠는가? 온 몸이 분해 되 가고 있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정말……미안하다." 마침내 붉게 물들은 기류가 카한세올의 얼굴을 덮었다. 페르노크는 마구 떨면서 고개를 천천히 젓기 시작했다. 기류는 처음 시작과는 반대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점차 사라지던 그 것은 회오리처럼 순식간에 위로 말려들면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사라진 그 자리에는……'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 쪽으로 가져다 댔다. 크게 진동하던 팔찌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신 남은 건 투명하던 몸체에 가득 머금어져 있는 '핏빛'과……. "아……아, 아악-!" 처참하게 울리는 페르노크의 비명을 타고 두 팔찌가 다시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재 안에서 울리는 날카롭고 높은……슬픈 '공명음'. '주인'의 감정에 '공명'하여 토해내는 두 팔찌의 비명과 페르노크의 비명이, 눈 부실정도로 밝은 달 밑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단지 어머니에게 사랑 받고 싶을 뿐이야. 단지 그 뿐……. 어둡다……아니 밝다……아니 어둡다. 생각해 보니 너무 밝아서 어두운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책이 한 권 나타난다. ……나는 이 곳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펼친 책 안에는 나에게 경악만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내가 깨어나고 단 하루만의 일……. -왜 그러는가, 페르노크 군? 어깨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접촉과 상냥하고 자비로운 음성. ……미화 선생님의 것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의 목소리가 더욱 굵고 낮았지만. 미화 선생님의 것을 닮은 그 목소리는 내가 '현실'이라는 지독한 '수라'를 인정해야만 했던 '자각의 계기'를 조금의 여유도 없이 가져다주었다. -자네 고대어로 된 책을 그리 열심히 보는 겐가? 혹시 읽을 수 있는 건가?" 고대어? 읽을 수 있냐고? 이건……'한국어'잖아?! 그 안에 적혀 있는 것들은 '읽을 수'는 있으되 '이해할 수'는 없는 묘한 문장들이었다. 마치 시집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오묘하고도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아득한 느낌을 주는……그런 문장들의 집합체였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건한 충격을 받으면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가 없었다……. 몇 번의 탐독이었을까? 나는 그 문장들을 하나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마법의 '주문'들. 현존하는 마법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차원적인 운용들의 서술. 나는 그것을 깨달은 것과 동시에 그것을 더 이상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었다. 인간이란 호기심에 살고, 호기심에 죽는 저차원적인 동물을 말함이다. 이미 '직감'을 했으면서도 나는 페이지를 넘기고야 말았다.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이번에는 진짜 암흑이다. 빛 한줄기 없는 그곳에서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닌 '배척하는' 소리였다. -너 같은 건 아무 것도 몰라! 언제나, 모두 너를 위해 돌아가는 세상이니까! 너 같은 건 아무 것도 모른다구! 어둠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면서 그녀가 나타났다. 거대한 모습으로 한 그녀의 인형 같은 얼굴 위에 악귀의 형상이 겹쳐지는 것이 보였다. 건드리지마……그녀를……. 설희를 건드리지마!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악귀가 나의 '의지'를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그녀라고? 설희라고?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걸 깨달은 자가 왜 그런 소리를 하지? 이미 네가 알던 것들은 '무너져 버렸어.' 악마의 조롱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그 어두운 세계는 다시 한번 무너져 버렸다. 이번에는 하늘도 보이고 땅도 보이고 건물도 보이고 자동차도 보이고……자동차? 돌아왔다! 나는 어느새 뛰고 있었다. 저 편의점을 지나서 다음 골목길에서 꺽은 다음 뛰어가면……무도관이다! 사부! ……아무도 없었다. 늘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던 생도들도 구석에서 책 따위를 읽으며 농땡이를 피우던 사부도……. 아무도 없었다. 늘 활발하던 무도관을 짓누르고 있는 정막을 느끼고서야 나는 '생각해 냈다.' 아……그랬지……. 설희에게 모진 말을 듣고 돌아온 날, 나는 썰렁한 무도관을 보아야 했다. 그리고 마루에 고이 접어져 있는 하얀 봉투를 발견했다. '농땡 사부'의 편지였다. -난 깨달았다! 고로 떠나야 한다. 너도 깨달으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을 거다. 그때 보자, 사랑하는 제자야!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사부는 이곳에 없다. -선생님이 그랬어. 누군가 '있어야 할 곳'은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이 있는 곳이라고……. 그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설희도 잃었다. 사부도 사라졌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다음 순간, 나는 학교로 가있었다. 그리고 걷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만나고 교실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왜? 바로 집으로 가도 되는 거였는데, 왜? 나는 갑자기 지끈거리는 머리를 오른 손으로 집었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그랬기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내가 교실로 향했던 이유는 그녀에게 말을 '해주기 위해'. 교실이 삼층이기에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 쉬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나와 있었지만 계단을 오르는 것은 수월했다. 모두 전염병 환자를 보듯 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의 '행동'의 결과. 위에서 친구와 함께 수다를 떠느라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여자아이…… 설희가 있었고 결국엔 살짝 부딪치고 말았다. 그냥 지나가다가 스치듯 부딪친 거였지만 설희는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어대며 몸서리를 쳐댔다. -꺄악! 창녀와 부딪쳤어! 더러워! 더러워! 그 때문에 발을 헛 딛어 버려서……아니 가슴이 너무 욱씬거려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발을 헛 딛어 버려서 계단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보았다. 너무나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 ……내가 교실로 향했던 이유는 그녀에게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모두 사라져 버렸어. 이제 만족하니? 이제……행복하니?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말이지……나는 어디에 있어야하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딜까? 모르겠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어. '이곳'은 아니야. 눈을 감았음에도 모든 게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을 감았음에도 보였다. 카한세올 형님……. -……단지 어머니에게 사랑 받고 싶을 뿐이야. 단지 그 뿐……. 약을 발라주며 울고 있던 그의 주위에서 갑자기 순백의 기류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의 피를 빨아들이며 붉게 변하고 있는 기류들은 보기에도 저주스러워 보였다. 가위에 눌린 듯 움직이지 않는 몸이 저주스러웠다. 그 게 아닌데……. 난 그 주문이 그저 '파이어볼' 급의 공격 주문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카한세올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너무나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서야 모든 게 편해진 듯,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그의 고함에 나의 사지가 찟겨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몰려드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서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기류에 휩싸이는 그의 얼굴이……나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나는 어느새 기류에 휩싸여 분해되고 있었다. 몸부림조차 칠 수 없는 압도적인 고통에 나는 되려 멍하니 있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설희와 나를 떠났던 사부가 생각났다. 어느 새 고통은 사라지고 나는 다시 계단을 떨어지고 있는 그 때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딜까? 모르겠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어. '이곳'은 아니야. -'이곳'은 아니야. 묘한 멜로디를 들으면서 페르노크는 눈을 천천히 떴다. 너무나 '서글픈' 멜로디기에 눈가가 흐릿해 지고 있었다. ……그건 단지 멜로디가 너무 서글펐기 때문일 것이다. 낯설기만 하던 천장이 눈에 익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페르노크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 녀석'의 세계로 온 것은 내 의지였어……." 감기는 그의 눈 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망 친 거였어. 그곳에서……설희에게서……." 페르노크는 거칠게 눈물을 훔쳐내며 일어났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이미 치유 마법으로 완치가 된 모양이었다. 페르노크는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은장도'를 꺼냈다. 며칠 날을 다듬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그 날은 예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게 다 주인을 잘 못 만난 탓이다. ============================================================================= 그렇습니다. 카한세올은 페르노크에 의해 죽게 되는 거죠. 페르노크가 처음으로 이 곳에 와 읽었던 '고대책'은 놀랍게도 한글로 만들어진 책이었습니다. 언령 마법인거죠........ 로레라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다음에 나올것이고..... 뮤비라의 일은 아쉽게도 이번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은장도를 뽑아든 페르노크의 '결정'이 무엇일지는 다음에 나오겠지요^^ 그럼....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요크노민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소하게 꾸며진 방안은 주인의 성품을 나타내는 듯 보였지만, 그 주인은 당대 세력가인 '오르세만' 가를 차지하려한 야심가가 아니었던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마는 요크노민이었다. "로레라자 아주머니." 침대에 꼿꼿하게 앉아 늘 갖고 다니던 목걸이를 내려보고 있는 그녀를 요크노민이 조용히 불러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늘 닫혀 있던 목걸이는 그녀에 의해 열려서 활짝 웃고 있는 소년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렸을 적 카한세올이었다. "나는 죽게 되겠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생기가 없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요크노민은 일주일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그녀의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젖도 제대로 못 물리고 카한세올을 뺏겼어. 아들로 '인정'만 받으면 뭐해? 어미가 옆에 있어 줄 수 없는 것을. 난 쫓겨나다시피 이곳에서 내몰렸어. 나가서 안해 본 일이 없어. 결혼 할 기회도 있었지. 하지만 늘 이 아이가 눈에 밟혀서……결국 받아들이지 않았어. 결국 돌아왔지만……이 아이의 옆에 있고 싶어서 돌아왔지만……. 나는 이 아이의 옆에 있을 수 없었어. 오히려 이 아이의 자리를 빼앗은 본처의 자식의 유모가 되어야 했지. 그 원통함을 네가 알까? 나의 아이는 젖도 제대로 못 물리고 버려 둬야만 했는데 울며 보채는 아이를……나를 내쫓은 그 여자의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그 원통함을 네가 알까?" 로레라자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꾹 쥐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요크노민은 기어이 입을 열었다. "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녀석이 의지하고 따랐던 형의 변모에 괴로워해야 했다는 것과 사랑했던 당신의 손에 죽음 직전까지 이르는 상처를 입고 그 보다 더 깊은 마음의 상처에 평생을 괴로워해야 할 것이라는 것뿐입니다." 요크노민은 자신의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쫓겨나다시피 내몰렸다구? 웃기지마! 당신은 단지 작은 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해 분했던 것 뿐이잖아! 아들을 빼앗겼다고? 웃기지마! 당신이 진정으로 아들의 곁에 있고 싶었다면 하녀로라도 이 곳에 있어야 했어! 페르가 당신 아들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웃기지마! 본부인이 세 번째로 나은 자식도 '인정' 받지 못해서 '성'을 부여받지 못했어! 당신 아들의 풀네임이 뭐지? 오르세만 카한세올 아(셋째 아들) 카르민이야! 왜 밑은 보지 못하는 거야!"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도 요크노민은 점점 격해지는 감정을 컨드롤 할 수 없었다. "……죽게 되겠냐고? 물론이지! 페르에게 평생의 상처를 안겨준 당신따위! ……만일 가주님이나 테밀시아 도련님이 당신을 살려준다고 해도……내가 죽여 버릴 거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되려 살기가 넘쳐 났다. 로레라자는 목걸이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들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하인들에게 마저 무시당하며…… 힘으로라도 자신을 강하게 보이려고 바둥대던 아들을 보았던 그때부터……이미 나는 산목숨이 아니었단다. 그때부터 나는 이미 산 시체와 다를 바 없었지. 이제와 새삼 목숨따위에 애착은 없다." 요크노민은 더는 로레라자와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가기 직전에 요크노민은 로레라자를 돌아보며 차갑게 한마디를 남겼다. "이거 알아? 당신의 아들이 죽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당신'이야." 거칠게 닫이는 문소리에도 로레라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을 떨꾸었을 뿐. 요크노민은 오늘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페르노크의 침실로 향했다. 벌써 '그 일'이 있고 일주일이 흘렀건만 페르노크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가끔 발작적으로 비명을 질러 댔을 뿐. ……특이사항이라면 그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크게 진동을 하며 '공명음'을 일으키는 두 팔찌정도랄까? 이런 미묘한 평온이 지독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하게는 몰랐다. 지하에서 '만난 힘'으로 수갑을 끊고 탈출해, 테밀시아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기 때문이다. 문가에서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로레라자 아주머니와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한 페르노크와 그를 안고 침통한 얼굴로 눈물을 떨꾸고 있는 테밀시아 도련님과 주위에 울리고 있는 묘한 '공명음'. 그가 본 것은 그게 전부였다. 페르노크가 깨어난다면 듣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해주고 싶은 말도 많았다. 페르노크의 침실 앞에 도달한 요크노민은 심호흡을 하며 목에 걸린 붉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그것은 그의 형이 선물한 푸른 보석의 목걸이었지만, 모종의 '사건'을 통해 붉게 물들어 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요크노민에게 잘 어울렸다. 보석에서 은은히 배여 나오는 온기가 기운을 불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크노민은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 쉰 다음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서글픈 멜로디를 타던 '공명음'이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울적함과 차가움이 배인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그리고 나서야 뜻밖의 광경을 목전하고 말았다. -스걱! 부드러운 파공음이 들린 후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은빛 호선들이 그것이었다. "페르?!" 허리까지 곱게 내려오던 머리를 시원하게 싹둑 잘라버린 페르노크는 막 들어온 친구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요크노민은 자신도 모르게 흠짓했다. 원래 무표정하긴 하지만, 약간의 장난기와 상냥함을 담고 있던 페르노크의 얼굴이 정말, 말 그대로 '무'표정 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감정도 배여 있지 않는 그의 싸늘하기만 한 얼굴을 대면한 요크노민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감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목걸이를 한번 꾹 잡은 다음에 입을 열었다. "일어났네?" 페르노크는 아무 말 없이 은장도를 다시 품에 갈무리한 뒤, 요크노민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따라 나온 요크노민에게 페르노크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떠날 거다." "뭐?"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걷기만 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이 정문임을 알아챈 요크노민은 급히 그를 따라갔다. "왜 그래, 페르?" 페르노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페르!" 묵묵히 걷던 그는 정문에 도달하고 나서야 요크노민을 돌아보았다. "난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테밀시아 형님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난 카한세올 형님을 죽였다." "페르, 하지만 그건 별 수 없는……." "내가 '이 녀석'이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 거다." "……?" "나는 '이 집의 식구'를 죽인 원수인 거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거잖아!." "그게……문제야. 난 동생을 죽인 '살인자'에게 테밀시아 형님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싫어." "……." "결국 이 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거야." "돌아……올 거지?"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침묵하던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번에는 페르노크였다. "검술은……나보다 테밀시아 형님이나 뮤비라가 더 잘 가르쳐 줄 거다. 넌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열심히 배우도록 해." 그리고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그가 조금 멀어지자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듯, 요크노민은 급히 그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그를 붙잡았다. 무표정하게 자신을 보는 페르노크에게 그는 힘들게 말했다. "그거 알고 있냐? 이 곳에서는 이런 말이 있어. '이름은 '예언' 이다'. 이름을 지어 줄 때의 마음은 의미를 부여하고 운명에 참견하지!" 페르노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요크노민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너는 이제 '페르노크'야! '페르노크'는 신성어로 '사랑 받는 자'란 뜻이지! 그러니까……!" 요크노민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그러니까……그러니까……." 요크노민은 아주 힘들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눈……하지마. 버림받은 눈 따위……하지 말라구……!" 페르노크는 계속 떨면서 우는 요크노민을 한번 세게 안아준 다음에 미련 없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하염없이 우는 요크노민을 누군가 안았다. 요크노민은 그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안겨 우는 것을 보니 말이다. 요크노민의 등을 어루만지는 이는 적금발을 한 여인이었다. 살짝 감겨 있던 여인의 눈이 천천히 떠지며 요크노민을 너무나 다정한 빛으로 바라보았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묘한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였지만, 기이하게도 동공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주는 증거였다. "불칸……." 요크노민은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기운 내, 노민. 이대로 영영 헤어 지는 것도 아니잖아?" "응……!" 요크노민이 괜찮다며 겨우 웃고 나서야 불칸은 목걸이로 돌아갔다. "요크노민?" 목소리는 같았지만 분위기가 영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전의 것이 장난기가 가득 넘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이 잔뜩 배인 음성이었다면 이번 것은……뭐랄까, 사무적으로 들리는 차가움이 서린 무뚝뚝한 음성이랄까? 요크노민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그 주인이 원래 듣던 목소리의 주인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시리안씨." "이거, 잘 됐네. 페르에게 안내 좀 해주겠어? 약속대로 내가 찾아왔다고 해죠!" '페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그의 눈동자가 처음 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며 요크노민은 암울한 얼굴을 해야 했다. 무언 가를 느낀 것일까? 유시유시리안이 급히 요크노민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왜 그래? 페르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 역시 암살자 때문인가?" 요크노민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의 신변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 그건 페르에게 들으셔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페르에게 듣겠어. 그는 어디 있지?" 요크노민은 눈을 감았다. 필사적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떠났어요." "어디로!" "……몰라요. 그냥 떠났어요." 요크노민이 이어지는 침묵에 의아해하며 눈을 떴을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 일단 사건 종결.........이라고 해야 하나요? 이렇게 해서 페르노크는 떠납니다. 뭐, 녀석이라면 어딜가든 살아 남을 수 있겠지요( ")~~ 어제 소설을 열심히 정말 열심히 썼습니다. 새벽 4시까지 썼는데....... 컴이 다운되서 죄다 날라갔습니다....... 여유분이 이제 없군요......쿠쿠...........ㅠ.ㅠ 라라라( ")~~~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무척 더운 오후였다. 「윈디」로 시원한 집무실을 맹랑하게도 바람을 쏘이겠다는 이유로 벗어난 뮤비라는 되려 나오자마자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땀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다시 들어갈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주군, 테밀시아를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뮤비라는 뒤에 있던 나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선 따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테밀시아가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것쯤은 물론 알고 있었다. 실제로 마린나사와의 결혼이 거론되면서 정설로 굳어지고, 약혼식까지 치뤄 졌을 때도 선 따위……결혼 따위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한 명분 또한 없었는데다, 가주가 직접 나서서 진행시키는 중매를 거절한 '위치'조차 되지 못했기에 별수 없이 상대방이 있다는 저택으로 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 버렸다. 뮤비라가 꿀리길 바라지 않았던 테밀시아는 '오르세만' 가의 문양이 찍힌 마차를 준비시켰지만, 뮤비라는 단연코 거절해 버렸다. 자신은 그 마차를 탈 자격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테밀시아는 씁쓸해 하며 뮤비라의 뜻대로 따라 주었지만, 실상 뮤비라의 생각은 달랐다. 마차를 타는 것보다는 말을 타는 쪽이 갔다'오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선을 받아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뮤비라가 그 저택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이는 놀랍게도 그의 이번 선 상대방이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현숙한 몸가짐이 돋보이는 그녀는 뮤비라에게 공손하게 예의로써 인사를 하고 안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뮤비라 님? 전 자하라 카시안 란 카르민이라고 합니다." 뮤비라는 불편한 얼굴을 감추며 미소를 지었지만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씁쓸해 했다. 카르민인 그녀가 한낮 제피모에 불과한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상냥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것은 자하라 공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쪽에서 거절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뮤비라였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카시안. 저는 뮤비라 라 제피모라고 합니다." "테밀시아 경의 '천재' 보좌관 뮤비라 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생각보다 미남이시네요." 명랑하게 웃는 그녀를 보면서, 만일 이런 자리가 아닌 상태에서 봤다면 충분히 호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뮤비라였다. 아니, 이미 호의를 가졌는지도 몰랐다. 그러기에 뮤비라는 사랑 받을 자격이 충분한 그녀가 자신과의 결혼으로 사랑 받지 못하는 불행한 생을 보내지 않길 바랬다. 뮤비라는 그녀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카시안 님과의 이번 혼담을 받아 드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카시안은 별로 놀라지 않으며 뮤비라의 곧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앞에 놓여져 있는 차를 음미해가며 한 모금 삼켰다. 그녀의 그런 덤덤함에 뮤비라는 차분하게 미소를 지었을 뿐, 마찬가지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닮은꼴의 두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저는……석녀(石女)입니다, 뮤비라 님." "……!" "아이를 낳을 수 없지요. 그럼에도 저를 원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그것은 저를 '아내'라기 보다는 '연줄'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죠." "……." "저는 여자로써 '문제'가 있는 몸이기 때문에 많은 귀족 영애들로부터 은근한 무시를 당해 왔습니다. 때문에 평민임에도 귀족들 사이에서도 당당하게 자리하시는 뮤비라 님을 저는 오래 전부터 흠모해 왔습니다." 뮤비라는 뜻밖의 고백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러다 자신도 그녀가 털어놓은 '진실'에 합당하는 무언가를 꺼내야겠다고 판단했다. "저는 당신을 일생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카시안님께서 석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저에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누구인지는 일생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말씀드리진 못하겠습니다만……저는 그 분보다 당신을 사랑할 자신이 없습니다. 카시안님께서는 사랑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의 밑에서 일생 사랑을 받지 못하는 건……카시안님께는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라 생각합니다. 카시안님을 위해서……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서 이 혼담은 없는 일로 할 생각입니다." "그 분도 마찬가지인가요?" "아니오……. 그 분은 저의 마음을 모르십니다. 저의 철저한 짝사랑이지요." 뮤비라는 쓰게 웃었다. 카시안은 그런 뮤비라를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생긋 웃었다. "다행이에요." "네?" "제가 흠모하고 상상해 왔던 그 모습 그대로 이시네요" "레이디 카시안!" "전 이 혼담을 깰 생각이 절대 없습니다." "카……!" "오래 전부터 뮤비라님을 가슴에 품어 왔습니다. 저를 아내로 맡아주세요. 어차피 저는 '아내'로써도 '여자'로써도 사랑 받지 못하는 몸입니다. 그럴 바에는 사모하는 분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뮤비라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 뜻밖의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고심했다. 아니 하려 했다. 하지만 그 보다는 카시안의 행동이 더 빨랐다. 빠르게 일어나 뮤비라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카르민의 란(장녀)이 제피모 따위에게 무릎을 꿇다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지 압니다. 저를 설득하실 작정이시겠지요? 제발 부탁입니다. 곁에 있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처음의 여유 있던 언행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당황하며 카시안을 일으키기 위해 어깨에 손을 대었을 때, 뮤비라는 그녀가 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서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 절박함과 그 애처로움, 그리고 그 절망감까지…… 너무나 자기 자신을 닮았다고, 뮤비라는 생각했다. 그랬기에 더 이상 그녀를 내칠 수가 없었다. 뮤비라는 나무에 몸을 기댄 그대로 밑으로 주저 앉아버렸다. "거절 할 수가…… 없었다."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뮤비라는 안타까운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렇게 예정대로 삼일을 보내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합하여 총 6 일만에 저택으로 돌아온 뮤비라는 너무나 어둡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놀라야 했다. 그리고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테밀시아가 자신을 갑자기 끌어 앉을 때의 설렘과 걱정으로 미칠 것 같았던 심정이란……! 죽었다고 하염없이 중얼거리며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다가, 6일만에 잠이 든 테밀시아에게 자신의 결정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막막하지만 했다. 카시안과 결혼을 하게 되면 그녀의 저택으로 가서 '카르민'을 이어받게 된다. 그것은 즉 이 곳을, 그러니까 테밀시아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말과 동일한데…… 뮤비라는 힘들어하는 테밀시아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자신 따위의 존재가 그에게 의지처가 될 리는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괴로워하는 그의 곁을 지금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테밀시아 도련님께 말씀드리면 잘됐다고……지금 당장 식을 올리라고 할 테지……." 그제서야 테밀시아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실감난 뮤비라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에 입술을 꾹 깨물며 신음했다. "형님?" 고개를 들어보니 사랑하는 동생 요크노민이 보였다. 근래 들어 많이 밝아진 동생이 웬일인지 너무나 힘들고 슬퍼보여 뮤비라는 손을 내밀어 동생을 품에 안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형님, 저 강해지고 싶어요." 뜬금 없는 동생의 말에 뮤비라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차분하게 답해주었다. "그래? 그럼 이 형이 검술을 가르쳐 주마.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학원에 보내주겠다." "형님의 밑에서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그래. 그러려무나." 요크노민은 뮤비라의 품에서 그의 온기를 한참 느끼다가 문득 그를 올려보며 물었다. "형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니다. 안 좋은 일은 무슨……. 오히려 좋은 소식이 있는 걸? 이 형이 결혼을 하게 됐단다." "네?!" 당장에 품에서 떨어져 자신의 눈을 경악에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동생에게 뮤비라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왜? 이 형은 결혼을 하면 안돼는 것이냐?" "아니오. 헌데 상대는……?" "아아, 자하라 가의 장녀 되시는 분이지." 요크노민은 입을 굳게 다물며 뮤비라의 슬프면서 깊은 눈동자를 계속 마주했다. 그의 진심을 알고 싶은 듯 보였다. "어째서……?" "아아, 자하라 공께서 나를 좋게 보신 모양이더구나. 직접 중매를……." "그런 걸 묻는 게 아닙니다!" "……?" 생전가야 큰소리 한번 치지 않던 요크노민의 흥분된 모습에 뮤비라는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형님께서……형님께서 사랑하는 분은 테밀시아 도련님이 아닙니까! 헌데 어째서……어째서……!" 뮤비라는 크게 놀라 요크노민의 어깨를 굳게 붙잡았다. 그리고 애써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 그게 무슨……?" 하지만 요크노민은 뮤비라에게 잡힌 어깨로부터, 그가 떨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뮤비라의 말을 자르며 자신의 말을 이어 할 수 있었다. "어째서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하시려는 겁니까?" 뮤비라는 결국 슬픈 눈동자를 반쯤 감으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땅바닥에 한 두방울씩 물방울이 고이기 시작했다. "카시안 님의 간절한 애원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솔직하게 말하마. 테밀시아 님의 전정을 위해서 란다. 제피모 따위의 신분으로는 그분의 뒷처리만을 할 수 있을 뿐, 그 분의 도움은 되지 못해……. 노민아, 이 형이 카르민이 되는 거란다. 그래서 그 분과 동등한 위치에서 그분의 절대적인 편이 되고자 하는 거란다. 그것을 위해서 그분의 곁을 떠나야 한다고 해도……그래야 한다 해도……!" 뮤비라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을 토해냈다. 요크노민은 그런 그의 어깨를 아직은 약한 두 팔로 끌어 앉았다. 그가 소중하디 소중한 형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함께 울어주는 일밖에 없었다. ============================================================================ 크윽~!!!! 돌더미가 날라오는 군요>O<ㆀ 죄송합니다! 최근에 상당수의 메일들의 최대의 관심사였던 테밀시아와 뮤비라 커플은 이렇게 해서 서로의 짝(?).......이라기 보다는 안사람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테밀시아가 마린나사와 결혼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뮤비라임이 변하지 않듯, 뮤비라가 카시안과 결혼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테밀시아임이 변하지는 않습니다만... .........으아악! 사시미만은 내려주세요>O<ㆀ 뮤비라가 테밀시아의 곁을 떠나 '카르민'이라는 신분을 업고 보좌가 아닌 한사람의 동등한 정치인으로써 테밀시아의 앞에 나타날지는.... 저만이 알고 있죠! 하하하...........(퍽!) 흠흠....;;; 실은 제가 새벽까지 쓰던 이번 연재 분량이 컴이 다운되는 불상사로 인해 날라가버려서......오늘은 연재를 안하려 했습니다만..... 그냥 또다시 밤을 새고 말았습니다;;;;;;;졸려버........ㅠ.ㅠ 이만.... 이라사님^ㅡ^+ 오늘 컴백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님을 독촉하면서 제가 연재를 안할수 없는 노릇이라 이틀 날밤새면서 쓴 겁니다+.+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페르노크가 집을 한참 벗어나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다. "돈이 없군." 결국 그는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집과 상가를 지나 숲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사는 곳에는 돈이 필수지만, 숲은 무료로 베풀어주기 때문이었다. 숲은 페르노크에게 있어 익숙한 존재였다. '농땡 사부'와 처음 만나고 수련했을 때 대부분을 야생의 생활로 보냈기 때문이다. 일단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는 사냥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무기하나 없는 상태를 한탄하며 날카로운 돌맹이를 찾아 몇 개 주웠다. "이럴 때 강도라도 나타나면 좀 좋아. 강도니 무기가 있을 테고 돈도 조금 있을 테고……." "죽고 싶지 않으면 돈 될 것 내놓고 가시지!" "……세상 살기 참 편하군." "무슨 헛소리냐!" 페르노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이 들려 있던 날카로운 돌을 땅으로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강도는 페르노크가 멍청하여 무기가 될만한 것도 버린다고 킬킬댔지만 실상은 달랐다. 페르노크는 그저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손목을 천천히 돌리면서 강도의 상태를 정검했다. "검은 내가 갖고 주머니가 두둑한 걸 보니 제법 있는 것도 같고……. 얼굴을 가린 두건은 내가 쓰면 되겠군." "이 자식이!" 강도치고는 제법 괜찮은 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여비가 떨어진 모험자가 두건을 두르고 노상 강도 짓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실력이 상당할 수도 있지만 페르노크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강도가 검을 가로로 베어 오며 달려들자, 페르노크는 뒤로 조금 물러섰다가 수도로써 강도의 손목을 쳤다. 검을 쉽게 놓치는 것을 보면 위의 가설은 말짱 헛 이었나 보다. 모험가들의 손에서 검을 떼어 내는 것은 이 정도로는 절대 무리였으니 말이다. 페르노크로서는 잘 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페르노크는 그의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가격을 할 생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갑자기 팔찌가 크게 진동을 하면서 바람이 뿜어져 나와 강도의 몸을 덮친 것이 그것이었다. 페르노크는 강도가 나무에 크게 부딪쳐 기절하는 것을 보고 조금 멍하니 있다가 팔찌를 내려보았다. "뭐……야?" 그제서야 자신의 팔찌가 붉게 변색되어 있음을 알아차린 페르노크였다. 그 동안은 워낙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멜로디가 아주 작게 흐르고 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아 차렸다. 그에 따라 두 팔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진동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페르노크가 두 팔찌를 의아하게 보다가 그것을 빛에 비춰 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물결치듯 움직이는 '무언가'를. "……?" 페르노크가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갑자기 두 팔찌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주위를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동시에 나타나 그의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하는 '두 존재'가 이 세계의 것이 아님을 페르노크는 느낄 수 있었다. "너희는 뭐지?" 「피로써 이어지는 영원한 우리의 주군이시여. 우리는 '동시'에 깨어나 그대의 수족이 된 이들.」 「우리는 마법사와의 '계약'에 의해 팔찌에 종속된 정령들입니다. 우리를 '깨우기'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조건은 단 하나. 우리를 '동시에' 깨우는 것. 우리를 깨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주군이 될 자의 '신선한' 피가 팔찌 안에 담는 것. 우리는 주군의 감정에 '공명'하며 주군의 의식에 '반응'하여 행동하는 수족.」 둘 존재의 의식이 아름다운 성가대의 하모니처럼 페르노크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나에게 충성한다는 거지?" 「주군은 우리를 '동시에' 깨움으로써 우리를 엮어 주는 '매개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서열'이 달라, 한 쪽은 죽을 사랑을 하는 이. 주군의 존재는 우리를 한 '계약자'를 가졌다는 이유 하에 '대등'하게 만들어 주어, 한쪽이 소멸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서열'을 받은 정령들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둘 다 서열을 받은 존재. 하지만 속성과 서열이 달라, 함께 할수록 서열이 낮은 한쪽은 죽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한 주군을 '동등하게' 섬기면 서열에 상관없이 '대등'하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속성은 바람. 저의 서열은 제 3위로, 제 10위인 저의 반려보다 높은 데다 저의 반려는 저보다 약한 속성인 물이기에 계속 함께 한다면 얼마 못 가 소멸되었을 겁니다. 주군께 감사드립니다.」 「주군께 감사드립니다.」 제 1위인 각 속성의 「수장」급 밑으로 '서열'을 받은 정령들은 단 열 하나에 불과하다. 수장까지 합한다면 고작해야 12뿐인 이 극소수의 '존재'들은 속계의 평가 기준으로 따진다면 최고위급 정령을 뜻한다. 그것은 서열을 받지 못한 무수히 많은 정령들을 지배하는 막강한 힘과 센다는 것이 무의미한 세월을 보냄으로써 얻은 지혜와 확고한 자아를 가진 존재를 말함이다. 역사상 '서열'급의 정령과 계약을 맺은 이가 손에 꼽을 정도라면 말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헌데 그 '서열'급인데다 제 3위라니! 게다가 약하다는 그의 반려도 제 10위나 되지 않는가! 정령에 대한 책을 읽은 바 있는 페르노크는 그네들이 하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조금 얼떨떨해 하면서 이 행운을 받아 들었다. "헌데 이 멜로디는 너무 튀는 걸? 안들리게 할 수는 없는 건가?" 「이 멜로디는 주군의 감정에 우리가 '공명'하여 생기는 것으로, 주군의 감정이 살아 있는 한 없어 지지 않습니다.」 "곤란한데……." 볼을 긁적이는 그에게 정령들은 마지막으로 말을 하고 사라졌다. 「주군의 감정이 격해지면 그에 따라 격해지고, 들리는 범위도 넓어집니다. 허나 주군의 감정이 평온하다면 그에 따라 멜로디는 평온해지고 들리는 범위도 좁아지죠. 그것은 주군의 '피'로써 '맹약'이 된 결과. 살아 있는 이상 없어지니 않는 '맹약'의 결과.」 결국 페르노크는 주위에 흐르는 멜로디를 무시해버리고 기절해버린 강도쪽으로 걸어갔다. 별 감흥 없이 강도를 내려보던 페르노크는 그의 얼굴을 가린 길고 검은 천을 끌러내 어깨에 걸치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품에 넣은 다음, 마지막으로 그의 검을 왼손에 들고 유유자적하게 발길 닿는 데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뒤에 남겨져 있는 강도는 이미 그의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 아르가 가지고 있던 팔찌는 바로~ 이 두 팔찌 중에서 바람의 정령이 봉인(?) 되어 있던 팔찌였던 겁니다^ㅡ^ 그렇다면 왜 아르가 가지고 있었을 때는 멜로디가 들리지 않았느냐! 그건 두개를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ㅡ^ 아르 시대에서 전설이 된 페르노크의 설명은 (나중에 나오겠지만) 늘 주위에 은은한 멜로디가 흐르는 전설의 마도사.......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원인은 늘 자신의 감정에 공명하는 두 정령때문이었던거죠. 또, 늘 은은하다고 하는 것은 페르노크의 감정이 평심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구요. 뮤비라의 결혼건은 나중에 불거질 것이고.... 로레라자는 죽은 목숨입니다^^; 왜냐면 가주가 죽이지 않더라도 요크노민이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했기때문이죠^^; 감기가 걸렸습니다. 된~통!......죽을 맛이군요...........ㅠ.ㅠ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저녁노을이 질 무렵, 페르노크는 야영을 결정했다. 마침 옆에 시냇가가 있어서 강도에게서 빼앗아온 검은 천을 빨았다. 다 빨은 다음에 꾹 짜서 근처 나무에 널어놓은 그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나와도 돼. 실, 넬."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던 바람 속에서, 그의 밑에서 흐르고 있던 시냇물에서 서서히 어떤 실루엣이 잡히더니 곧 선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녹색을 띄고 있는 작은 소녀의 형상을 한 이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파란색을 띄고 있는 작은 소년의 형상을 한 이가 그들이었다. 주빗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망설이는 이들에게 페르노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밀었다. 비록 한줌의 미소도 보이지 않는 그였으나, 둘은 내미는 손위에 쪼르륵 올라갔다. 페르노크는 둘을 어깨 위로 올려놓고 마저 세수를 했다. 머리까지 감은 그는 잠시 바람에 머리와 천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어깨에 올라와 있는 실의 덕분에 그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긴 천을 머리에 감았다. 천이 길었기에 매듭을 짓고 남은 여분이 허리 밑까지 길게 늘어졌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려 뒤에 조금이라도 보일 소지가 있는 은발이 확실하게 가려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눈까지 그것을 끌어내린 그는 자신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은발과 녹색 눈동자가 가려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냥에 들어갔다. 그것은 형인 테밀시아가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보장이 절대 없었기 때문에 예방책으로 한 행동이었다. 토끼 한 마리를 잡고 오는 길에 장작을 주어온 그는 시냇가에 두 개를 내려놓고, 일단 장작 먼저 정리를 하고 불을 피웠다. '농땡 사부'에게서 야생에서 불을 피우는 법쯤은 배워뒀기 때문에 별 문제 없었다. 불이 꺼지지 않게 장작을 더 집어넣은 그는 은장도로 토끼를 먹기 좋게 정리했다. 그것 또한 '농땡 사부'에게 배운 솜씨였다. 나무 꼬챙이를 날카롭게 잘라 고기를 꽂고 굽기 시작한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 지리를 아는 것도 아니고……. 지리상으로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욤 제국의 수도가 자이젠이라는 것과 학원 '이므르'가 그곳에 있다는 것뿐이니 말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또 지리를 안다고 해도 길을 정할 '목적'이 없기 때문에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아……." 고기를 한입을 뜯어먹던 페르노크는 갑자기 몸을 급히 옆으로 돌렸다. 실이 이미 쳐놓은 방어 막 아래에 근육질의 남자가 휘두른 검이 막혔다. 그 와중에도 페르노크는 자신이 실과 반응이 비슷했다는데 의의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뒤, 강도에게서 뺏은 검을 뽑아들었다. 나름대로 손에 맞는 검이라 대충 할 만하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휘둘러오는 검을 여유 있게 막았다. "강도인가?" 페르노크가 싸늘하게 묻자 남자는 발끈하며 크게 반박했다. "웃기지 마라, 이 강도!" "뭐?" 페르노크는 남자의 검을 튕겨 내며 앞으로 한 걸음 나가 검을 빠르게 그었다. 남자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가 오기로 다시 달려들며 고함을 질렀다. "낮에 빼앗긴 동료의 검을 돌려 받아야겠다!" "그건 곤란해." "흥! 본색을 드러내는 군!" 페르노크와 근육질의 남자가 그렇게 설전을 펼치고 있을 때, 남자가 튀어나왔던 방향에서 몇몇 사람들이 대거 등장했다. 페르노크는 기죽지 않고 그네들의 전투력을 살펴보려 했다 일단 남자가 둘에 여자가 하나인 건 알았지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남자 때문에 자세하게 살펴보기는 무리였다. "쳇!" 페르노크는 뒤로 물러서면서 실과 넬을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잠깐만요!" 근육질의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 중에 마른 남자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말했다. 나름대로 신망 받는 남자였던지 근육질의 남자는 짧게 반문할 뿐이었다. "쳇! 네가 멍청하게 검만 안 뺏겼음 이런 일도 없잖아!" "그, 그건……." 얼굴을 잔뜩 붉히는 마른 남자를 다독이던 여자는 근육질의 남자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나마 페론은 마법지향이라고 치자! 순수 검술 지망생인 너는 왜 여지껏 결판도 못 내고 질질 끌고 있었냐?" "그건! ……흠흠." 근육질의 남자는 결국 머쓱해 하며 잠시 뒤로 물러섰다. 물론 경계하는 것을 늦추지는 않았다. 페르노크는 검을 평면으로 해서 어깨에 얹었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검을 집어넣고 얼른 원래 자리로 갔다. 네 명의 사람이 당황해서 페르노크의 뒤를 따라갔을 때, 페르노크는 이미 타버린 고기들을 내려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먹을 때는 개도 건들이지 않는 법인데……." 싸늘한 그의 말투에 네 사람은 움짓 해며 괜히 찔려했다. "이 검은 내 거야. 내가 정당하게 힘으로 갖은 거라고. 고로 관심 끊도록 해." 갑작스런 기습에 음식을 날린 페르노크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그랬기에 자연스럽게 입에서는 반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래 자신보다 나이가 많으면 일단 존댓말을 해주던 그였으나 역시 열 받으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인 모양이다. 근육질의 남자가 같잖다는 눈으로 페르노크를 쏘아보았다. "강도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 검은 페론이 정당하게 돈주고 산 것이라고!" 하지만 페르노크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를 무시했다. "다시 사냥을 해야 하나? 그럼 장작도 새로 구해야 하잖아? 쳇!" "저기 식사는 저희가 준비할게요. 아직 저희도 식전이거든요." 여자가 나서서 상황을 타파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페르노크가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수 쓴다고 생각한 다른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가 오해를 하는 거라면 사과하지. 그러려면 확실하게 밝혀줬으면 좋겠어. 그 검은 어디서 입수한 거지?" "나를 덮친 강도한테서." 확실하게 상황파악을 한 네 명을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당당해 보이는 페르노크의 태도에서 강도를 연상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오히려 지금 그가 변명처럼 내뱉은 말이 잘 어울렸기에 네 명은 그냥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우리 동료의 것이고……." "뺏긴 놈이 잘 못한 거지. 내 식사는?" 다른 세 명이 자포자기하며 식사준비를 하기 위해 흩어지려고 할 때, 근육질의 남자는 납득이 안 가는지 반론했다. "쳇! 그럼 네 식사를 태운 건 네가 잘 못 간수해서 라고 봐야 하는 거잖아!" 페르노크는 편하게 자리잡고 앉으면서 냉랭한 어조로 받아 쳐주었다. "이런 경우에는 '시비 건 놈이 잘못' 이라고 하는 거야." 근육질 남자의 마지막 발악은 그대로 허물어 져 버렸고, 결국 그도 다른 동료들처럼 자신이 맡은 일을 하러 자리를 떠났다. "저희 통성명이나 하죠? 전 라미라고 해요. 이 쪽은 페른이구요, 저기 인상쓰고 있는 덩치는 케릭, 옆의 먹기만 하고 있는 녀석은 바사론이죠." 케릭을 비롯한 자신들을 몇 마디의 말로 완전히 넉다운 시킨 주인공답지 않게 침묵만을 고수하는 페르노크에게 완전히 질린 라미는 결국 어색함에 못 이겨 먼저 통성명을 제안했다. 페르노크는 별 생각 없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이 라미를 무시하는 것 같이 보여 케릭은 발끈하며 뭐라고 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바사론이 만류했다. 그때, 페르노크는 요크노민의 말을 되새기고 있던 중이었다. -이 곳에서는 이런 말이 있어. '이름은 '예언' 이다'. 이름을 지어 줄 때의 마음은 의미를 부여하고 운명에 참견하지! -너는 이제 '페르노크'야! '페르노크'는 신성어로 '사랑 받는 자'란 뜻이지! -그러니까 그런 눈……하지마. 버림받은 눈 따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페르노크는 라미를 보며 말했다. "노크." 예의하고는 거리가 먼 그의 대답을 들은 케릭은 결국 이렇게 쏘아붙이고야 말았다. "헷? 이름이 노크야? 문 두들기는 그거?" 그 말에 페르노크는 속으로 역시라고 중얼거렸다. '페르노크'는 '사랑받는 자'. 그는 자신이 '페르노크'임을 인정하면서 그 이름의 '운명'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페르라는 애칭이 익숙하기에 뒷의 두 글자를 따서 급조한 이름을 댔지만……역시 우습기만 했다. '나는 '사랑 받는 자'가 아니니까…….' "역시 이상한가? 그럼 무하라고 하지." 정리되지 못한, 도망친 그 운명을 상징하는 이름을 입에 담은 그의 심정이 어떠할 지는 그 누구도 알 지 못할 것이다. 그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네 명의 일행은 그의 말에 확실히 '본명'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뭐라고 캐묻기에는 명분도 자격도 없었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무하씨. 저기……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페르노크……아니 무하는 페른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스프를 천천히 마시기만 했다. 원래 숫기가 없던 페른은 다시 주저하며 망설였지만, 라미가 옆에서 응원해 주었기에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저……이 멜로디……." 무하는 들고 있던 스프접시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잘 먹었다. 빛은 서로 없어진 셈이니 이만 가보겠어." "아! 저기 말하고 싶지 않으신 거라면 하지 않아도 되요! 마저 드세요! 원래 ……이 자리도 무하씨가 먼저 맡아 놓은 곳이잖아요." 무하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다고 생각한 페른은 괜히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무하는 예의바른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다시 자리에 앉는 그에게 라미가 물었다. "저희는 모험가인데, 무하씨는 무슨 일을 하세요?" "……용병." 네명은 수궁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리 습격을 한 강도라지만, 쓰러뜨리고 나서 소지품을 '전리품'으로 챙겨오는 것은 절대 '실리주의'인 용병이 아닌 이상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임무 중 이신가요?" "……." 무하가 입을 다물자 라미는 어색함에 질식할 것 같다는 말이 생각나며 진땀만을 흘렸다. 보다못한 페른이 나서려 했지만 그보다는 무하가 더 빨랐다. "아니오. 난 지금 '프리'로 그냥 여행 중이오." 하오체로 말투가 변해 가는걸 보면 화가 조금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프리'란 단독으로 움직이는, '단'에 소속되지 않은 용병을 말하는 것으로 일전에 유시리안에게 들은 단어였다. 그때 유시리안도 '프리'라고 했었다. '프리'는 용병 등급 '하' 쯤은 되야 할 수 있는 것으로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을 내포하는 말이었다. 때문에 네 명은 조금은 감탄한 얼굴로 무하를 보았다. 인식을 달리하고 보니, 수상하게만 보이던 그 두건도 패션의 일종으로 보였고 머리카락과 눈은 가려졌지만 깨끗한 피부와 깍은 듯한 매끄러운 턱 선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여행이라면……어디를 목적지로……?" 최종지를 정하지 않고 떠도는 것을 모험이라고 한다면 여행은 최종지가 결정된 것을 말함이었다. 그랬기에 라미의 물음은 지극히 지당했다. 물론 그것에 답을 하고 안하고는 순전히 무하 마음이었지만 말이다. 무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수도라고 말했다. 일전에 유시리안이 말하길, '프리'인 용병은 일거리를 용병길드라는 곳에서 받는다고 했다. 또 그 용병길드의 본점은 수도 '자이젠'에 있다고 했고, 더 나아가 어느 정도의 보수가 적당한 것인지 까지 아주 소상히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한편, 무하의 답에 네 명의 모험가들은 서로 수덕대기 시작했다. "난 절대 반대야! 저 녀석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 "원래 넌 말발 딸리는 상대는 다 싫어하잖아! '프리' 용병이 흔한 줄 알아? 그것도 혼자서 수도까지 가겠다고 하는 '실력자'라구!" "하, 하지만 우리만으로도 가는 데는 문제 없잖아!" "가는 길이 편하잖아!" 거의 케릭과 라미의 설전이었던 그 분쟁에 페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기…… 전 라미 의견이 괜찮다고 생각해요." 라미는 페른의 뜻밖의 참견에 화색을 드러내며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꼈다. "그렇지? 와! 역시 페른이야!" "쳇, 지금 연인사이라고 유세하는 거냐?" 케릭이 괜히 심통을 부리자 라미는 혀를 내밀려 약을 올렸고, 페른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결론이 안 날 것같자 가만히 듣기만 하던 바사론이 나서서 결론을 내렸다. "나도 '프리'급의 용병과 동행하는 건 찬성이야. 수도가 가까운 것도 아니잖아? 물론 우리끼리도 갈 수는 있지만 기왕이면 편하게 가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일단 저 사람 생각을 들어봐야 하지 않아? 사람 앞에 두고 이런 식으로 수덕거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쳇!" 케릭은 불만 어린 얼굴을 하긴 했지만 굳이 바사론의 말에 반론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를 살피던 라미는 얼른 무관심하게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는 무하에게 물었다. "저희 목적지도 자이젠인데 동행하지 않으시겠어요? 서로 편하고 좋을 것 같은데……?" 무하는 머리와 눈동자를 가린 천을 한번 더 앞으로 내린 뒤, 옆에 있는 물통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답했다. "그러지." 사실 상황이 꽤 괜찮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무하였다. 그는 수도까지 가는 길을 몰랐던 것이다. ============================================================================ 이번 회에 대해 할 말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페르노크의 말발은 살아있다!" .............................................(퍼퍼퍽) ㅠ.ㅠ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저희야 배를 타느라 처리했다지만…… 무하씨는 왜 말이 없어요?" "……." 아침이 되고 출발을 하기 앞서 마을로 들어가 말을 사자고 한 라미네들은 무하가 자신도 사야겠다고 말했을 때의 황당함을 잊어 버릴 수가 없었다. 라미는 추궁 아닌 추궁을 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고 일행은 역시 과묵한 남자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혹시 말을 탈줄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라미의 쾌활한 농담에 다른 일행들도 작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프리'급의 용병이 말을 탈줄 모르겠는가? 무하가 그 질문에 침묵을 하더라도 그것을 긍정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무하는 아주 오랜만에 입을 열어 그들의 몸을 굳게 만들어 버렸다.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는 코너를 돌아 바로 보이는 마시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잔뜩 굳어서 서 있는 네 명의 젊은이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가하를 타고 함께 돌아다녔으니 말쯤은 탈 수 있겠지, 뭐. 문제는 돈이 되느냐……인데.' 그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일단 마음에 드는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르고 다녔지만 그다지 마음에 드는 말이 없었다. 또, 간혹 마음에 드는 녀석이 나타나면 돈이 모자라 그냥 지나쳐야만 했다. 역시 돈이 없으면 서글픈 것이다. 작게 한숨을 쉬던 그의 귀에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별 생각 없이 그쪽으로 발을 옮긴 무하는 건장한 남자들이 붉은 빛이 도는 갈색 말을 두고 한바탕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됐다. 이미 자신의 말을 고르고 동행하고 있던 페른이 고개를 갸웃하는 무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내기가 벌어진 모양이네요. 저 말은 야생마인 모양인데요? 야생마는 사납지만 한번 길을 들이면 말을 아주 잘 듣는데다가 힘도 좋고 속도도 좋아서 상당히 고가품 이거든요. 게다가 주인을 가리기까지 하죠. 저기 돈을 받고 있는 사람이 보이죠? 저 사람한테 돈을 얼마 주고 길들이는 것을 '시도'해 보는 거 에요. 그리고 길을 들일 수 있다면 저말은 그 사람의 것. 못 들인다면 돈만 날린 셈이 되는 거죠." "그럼 저 사람은 어떻게 야생마를 잡은 겁니까? 성질이 사납다면서요?" 무하의 존댓말에 페른은 조금 얼떨떨해 하다가 곧 정신을 수습하고 설명해 주었다. "야생마가 좋아하는 풀에 수면제를 발라두면 되죠." "아……!" 무하는 돈을 받고 있는 남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남자의 옆에 붙어 있는 종이에 써있는 액수만큼의 돈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돈을 받았다. "시도 해 보시렵니까?" "예. 제 차례가 언제쯤입니까?" 본래 야생마를 길들일 때는 순서가 늦는 것이 유리한 법이라 다들 신청은 했으면서 순서를 미루기에 급급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뒤로 줄을 선 신청자들을 보았다. "알아서 정하시죠." 무하는 그네들에게 걸어가 물었다. "알아서 정하라지 묻겠습니다. 전 늦게 신청을 했으니 나중에 해야 하는 겁니까?" 당장에 사나워 지는 그들의 눈초리를 의아하게 보던 무하는 다시 물었다. "제가 먼저 해도 됩니까?" "당연하지!" "난 맨 처음에 신청해서 순서를 제일 마지막으로 딱! 정해 놨다구!" "먼저 해야지! 늦게 온 주제에!" 무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몸을 획 돌려서 말 쪽으로 걸어갔다. 사나워 보이는 말의 눈초리를 응시한 무하는 녀석이 '부당'하게 끌려왔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하는 말이 앞말을 크게 들어올리며 자신을 내리 찍으려는 것을 보면서도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가기만 했다. 마침내 말의 앞발이 사납게 밑으로 내려왔지만, 결과는 상당히 의외였다. 발을 내린 말이 검은 두건을 눌러쓴 수상하게 생긴 남자의 어깨에 자신의 코를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에 말들이 보이는 애정의 표시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닌 이들은 이 어이없는 결과에 멍하니 있었다. "그래, 그래." 더 이상한 것은 그 남자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녀석의 어리광을 받아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하는 말에게만 아주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 나도 '야생'의 존재란다. 너와 '동류'지." 무하는 야생마의 목에 걸려 있는 사슬을 불쾌한 얼굴로 보다가 돈을 받던 남자에게 말했다. "이제 이걸 풀러주십시오." "아, 알았소이다!" 남자는 잔뜩 긴장하며 사슬을 풀렀지만 무하나 말이나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럼 이제 마구를 사러 가야 하는 건가?" 무하는 자신의 옆에서 얌전히 따라오고 있는 야생마의 목을 가볍게 두들기며 마구를 파는 곳을 찾기 위해 근처를 둘러보았다. 그 기색을 눈치챈 페른이 얼른 나서서 안내를 했다. '돈이 될 런지…….' 페른의 뒤를 따르던 무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결국 가게를 처분하려는 곳을 발견해, 아주 싸게 살 수 있었다. 돈이 아직 제법 된다는 사실에 놀라며 페르노크는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반지의 값어치를 새삼 깨달았다. 겨우겨우 길을 떠나게 된 일행은 불안한 눈으로 말에 올라타는 무하를 주시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무하는 가볍게 말에 올라타고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일행을 돌아볼 뿐이었다. "안 갈 생각이오?" "아? 가, 가요!" 무하는 그들이 자신의 승마실력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먼저 말을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길을 모르니 가야할 방향 또한 모르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앞서 달리면서도 불안하게 뒤를 돌아본 일행은 매끄러운 승마솜씨를 보이고 있는 무하에 놀라며, 역시 자신들이 착각한 것이다라고 생각해 버렸다. 하긴 프리급 용병이 말을 못 탄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겠는가? 무하는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이 상당한 녀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가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일행을 따라 달리면서도 계속 말의 이름을 고민했다. "'농땡 사부' 이름이나 붙여 볼까? 하 류라……악취미야." 계속 고민하던 그가 말의 이름을 결정한 것은 한 무리의 몬스터들이 덮쳐왔을 때였다. 그때 그 누구보다도 빨리 반응하여 한 마리의 머리를 박살내 버린 녀석이 바로 무하의 말이었던 것이다. 야생에서 살다보니 몬스터들과의 접전이 많아던 모양이었다. 무하는 종횡무진으로 달리던 가하 위에서 놀던 전적이 있던 터라 녀석의 페이스에 어렵지 않게 맞춰 주었는데, 그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은 무하가 말을 이끄는 것이라 착각하고 놀라워 할 따름이었다. 그네들은 야생에서 생존해 온 말들을 타 본적은커녕 본적도 없었던 것이다. 역겨운 듯, 머리가 터져 죽은 몬스터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무하는 일단 말을 이끌어 그 장소를 벗어난 다음에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결정했다. 넌 마르스다. 군신 마르스." 그리고는 다시 그 광경이 떠오르자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기억에서 떨쳐내려는 무하였다. 그리고 주위 일행의 의견은 전혀 묻지 않고 물가로 내려가 마르스의 몸을 씻겨냈다. 다른 이들은 이 정도 피에 질색하며 말을 닦아내는 무하를 의아롭게 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케릭의 눈은 조금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름대로 순조로운 길을 보낸 지 한나절이 지났다. 언덕을 다 오르고 나자 밑으로 마을이 보였다. 몬스터나 강도들을 만나고 일전을 치뤘을 때보다는 가뿐했지만, 제법 노곤했던 라미 네는 서둘러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케릭이 일행을 황급히 막아섰다. "왜 그래? 빨리 가서 목욕도 하고 싶고, 맥주도 마시고 싶다구!" "저기……." 케릭은 평소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마을을 힐끔 보다가 큰소리로 말했다. "야야, 우리한테 돈이 어디 있냐! 있을 때 아껴야지! 여름인데다 마을 근처라 몬스터도 없는데, 이만큼 적절한 야영지가 어디 있겠냐?" "뭐?" 황당해 하는 일행을 무시하고 얼른 말에서 내린 케릭은 자신의 말에 매여 있던 짐을 끌러내려 버렸다. 라미와 페른, 바사론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케릭을 따라 말에서 내려 능숙하게 각자 할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말을 끌고 물가로 데리고 가, 물을 먹이는 페른과 사냥을 하기 위해 단검 따위를 정검하는 바사론, 빵과 과일 등을 준비를 하는 라미와 장작을 주으러 숲으로 들어가는 케릭을 본 무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해야만 했다. 역할이 아주 잘 정해져 있어서 뭔가 마땅히 거들만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빈 물통을 들어서 물가로 갔다. 음식을 하기 먹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기도 했고, 물이끼가 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잘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통을 필요이상으로 깨끗하게 닦고 물을 가득 채웠을 때도 다들 일이 안 끝난 것을 본 무하는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하류 쪽에서 말을 돌보던 페른이 웃으며 말했다. "할 일이 없으시다면, 요리할 때 필요한 돌을 주어 주시겠어요?" 무하는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인 뒤에 적당한 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페른이 말들을 풀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 끈을 길게 해서 묶어 놓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라미가 음식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와 드릴까요?" "응? 아니 됐어. 앉아서 쉬어!" 하지만 페른은 라미가 깍고 있는 과일 중 하나를 들어서 같이 깍기 시작했다. 라미는 생글 웃다가 바로 앞에 돌을 가져다 놓은 무하를 보며 고맙다고 했다. 무뚝뚝하게 그냥 돌아서 물가로 가버리는 그를 보면서 라미는 페른에게 작게 속삭였다. "처음에는 말이 꽤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하지만 좋은 분 같아요." "헤에, 페른이 그런 말을 할 정도야? 이거 질투 나는데?" "질, 질투라뇨!" 얼굴을 잔뜩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는 페른에게 라미는 시원스럽게 웃어주었다. 그때 요리할 때 쓰기에 적당한 돌을 들고 무하가 나타났다. "아, 여기 놔주세요!" 무하는 라미가 가르키는 곳에다 돌을 내려놓고 나서 물었다. "뭐, 더 할 일은 없소?" "아, 네. 이제 됐어요." 그러고 보면 상당한 미성이다. 용병이라기보다는 아직은 설익은 음유시인의 것과 같이 매끄럽고 듣기 좋은 '무언가'가 느껴지는 목소리라고 할까? 하지만 평소에는 잔뜩 서린 차가움이 그런 면을 완전히 덮어버려 그리 잘 느낄 수 없었다. ================================================================================== 책이 나왔습니다ㅡ.ㅡ; 제가 전부터 말했습니다만..... 처음 출판사에서 말했던 삭제 공지를 올렸었는데 예정일이 늦춰져서 삭제 공지는 지우고, 직연하는 곳에서 삭제되는 날은 책이 나오는 날이라고 했었습니다^^ 갑작스레 지워서 당황하시는 분이 계시길레....ㅡ.ㅡ;; 변명차 꼬리말을 붙입니다^^; 책의 글씨가 여타 책에 비해 작은 편이고 두께도 제법 되서 무척 기쁘답니다. 오래동안 글을 못올렸습니다^^; 죄송한 마음은 산같습니다만.... 안써지는 걸 어쩌겠습니까......ㅠ.ㅠ 아아, 물론 투정 부리는 겁니다^^ ps. 이라사님, 저 소설 올렸어요+.+ 얼른 건국기 올리시구, 그림 줘요!+.+ 그럼...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무하는 몸을 돌려 물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넙적한 돌에 앉아서 깨끗한 물줄기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이 세계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적어도 여지껏 그가 봐왔던 것들은 그러했다. 물론 인간이란 어느 세계든 똑같아서 깨끗한 녀석도 있고 더러운 녀석도 있지만 그 외의 것들은 깨끗했다. 예를 들면 화창하게 푸른 하늘이라던지 울창한 숲이라던지 청량한 공기라던지……또 지금 보고 있는 일급 식수와 같은 시냇물이라던지……. 무하는 자기도 모르게 시냇물에 발을 담갔다. 두툼한 가죽 신발이 불쾌한 색을 내며 젖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왠지 발을 빼기가 싫어, 괜히 시냇물에 들어가 버렸다. 제법 깊은 곳이라 곧 허리까지 잠기는 곳에 도달했다. 수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대로 있었을 뿐. 둔탁하게 느껴지는 시원함을 눈을 감은 체로 느꼈다. 농땡 사부와 산에서 수련을 했을 때가 생각났다. "수련의 대명사는 바로 얼음 마찰이라는 거다!" 무하는 얼음을 마구잡이 식으로 깨버린 사부를 올려보며 말했다. "저보고 저기로 들어가서 목욕을 하라는 건가요?" "그렇지! 이건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뼈를 깍는 수련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싫다면 수련 따위는 관둬라!" 왠지 마지막 말을 강조하며 눈을 번뜩이는 사부를 보면서 무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했다. "근데 왜 저만해요?" "나는 이미 초월했기 때문이지!" "겸손은 무도 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고, 자만은 무도 하는 자가 버려야 할 기만이라면 서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즉시' 할 수 없는 범인들을 위해 선사가 남긴 말! 나 같은 '천재'한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지." "……." "뭐냐, 그 불순한 눈초리는?" "무하씨! 식사 준비가 다 됐는데요!" 눈을 천천히 떴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불까지 지펴 놓고 고기를 굽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무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거리로 그들에게 걸어갔다. "날씨가 무척 덥지요?" 물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 같았다. 무하는 페른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며 그가 내미는 과일을 받아들었다. 아름답기만 한 숲의 풍경을 보면서 과일을 먹으니 그것도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자꾸 주위을 돌아보는 그에게 라미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주위에 몬스터라도 있나요?" 물론 나름대로 굴러먹은 모험가인 네 사람이 감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몬스터가 이런 작은 숲 따위에, 그것도 바로 마을 근처에 있을 턱이 없었다. 그녀의 말은 그저 무난한 농담에 불과했던 것이다. 무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주위를 계속 돌아보며 과일을 베어먹을 뿐이었다. 그의 계속되는 탐색에 라미네들은 결국 긴장을 해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에요?" 아무리 긴장하고 살펴도 주위에 아무 것도 없자, 라미가 언성을 높였다. 무하는 과일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내가 어디를 보는데 허락을 맡아야 하는 거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무하는 무안해 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다시 주위를 구경했다. 계속되는 그의 모습은 계속해서 다른 이들의 신경을 긴장시켰지만 그건 '이해의 차이'일 뿐, 누구를 탓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네들에게 별거 없는 풍경이 무하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는 것을 탓할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만일 라미네들이 오염된 도시에 있었다면 무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원래' 베풀어져 있는 것에는 무감각한 법이다. 식사를 마치자 금방 해가 져, 사방이 어두워졌다. 일행은 잠을 청하기로 하고 불침번을 정했다. 무하가 먼저 나서서 제일 먼저 서겠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그 뒤의 순번을 정한 뒤, 잠을 청했다. 가벼운 모포를 덮은 그들의 중앙에는 벌레를 쫓기 위한 모닥불이 운치 있게 타오르고 있었다. 무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불을 보자니 극악의 응급처치가 생각났다. 베인 상처나 찔린 상처, 즉 흉기에 의한 상처를 입었을 때 불로 지짐으로써 지혈을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무하는 단단하게 자리잡은 가슴을 한번 쓸어 보았다. 상처 하나 없는 '정상적'인 몸이었지만 여지껏 느껴왔던 어떤 것보다도 깊고 진한 통증이 배여 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평온하게 웃고 있던 카한세올의 얼굴이 갑자기 끔찍하게 일그러지며 내지르는 고함소리.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우욱……!" 꿈속에서 들었던 카한세올의 비난 어린 목소리가 '귀'가 아닌 '가슴'에서 느껴졌다. "살인자……인가." 무하는 쓰게 중얼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어깨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침이 됐음을 무의식중에 느낀 라미는 흠짓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두 번째 불침번 담당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자신이 잠시 깼다가 잠들었을 것이라 생각한 그녀는 진땀까지 흘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첫 번째 불침번이었던 무하가 아직도 잘 타고 있는 모닥불을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밤을 새신 거 에요, 무하씨?" 무하는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는 라미에게 무하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고개를 원상태로 돌리기만 했다. 라미는 무하의 빰에 묻어있는 물기를 자신이 잠이 덜 깨서 헛것을 본 것이라 단정지었다. 그리고는 시냇가로 척척 걸어가 세수를 하고 나서 아직도 자고 있는 일행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일어나! 이 잠보들아! 어서!" 무하는 아주 조용히 일어나 시냇가로 갔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서 물을 떴다. 시냇물은 너무 맑았다. 무하의 손이 조금 떨렸다. 여기에 세수를 하면 물을 더럽히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거칠게 세수를 했다. "아침은?" "마을가서 먹자고. 오래간만에 맥주도 마시고 싶고. 배타고 내린 이후로는 못 마셨잖아." "맥주? 하하, 좋지. 아침부터 맥주 마시고 만취해서 마을에 하루 머물면, 기껏 아낀 숙박비는 말짱 헛이겠구나?" "뭐, 그 정도까지 마시진 않고……적당히, 적당히 지! 하하!" 케릭의 넉살에 라미는 피식 웃으며 바사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이 일행의 리더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사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떡이자 케릭은 환호성을 지르며 아주 빠른 속도로 짐을 정리하고 불에 모래를 붓고 말 쪽으로 달려갔다. 라미는 뒤늦게 소리쳤다. "세수는 하라고!" 무하는 명랑한 그들의 모습을 멀찍이서 보고만 있었다. 페른이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자기 몫으로 일전에 산 물통을 챙기고 자신의 말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동행'일 뿐, '일행'이 아니라는 '선'을 확실하게 긋고 있는 그의 행동에 왠지 씁쓸해 지는 페른이었다.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o<ㆀ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게 되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추석 이후에 돌아옵니다^^;; 컴에 문제가 생겨 여분이 다 날라갔다는 게 그 이유중 하나입니다만...........ㅠ.ㅠ; (아주 주된 이유조....ㅠ.ㅠ) 정말 개인적으로 안 좋은일이 겹쳐서.....; 머리속이 혼탁해서 글이 잘 안써지네요. 그래도 글을 써보겠다고 바둥바둥 댔는데....... 어제 다 날라간 디스켓을 허무하게 보면서.....결심했다는.... 조금 쉬라는 신의 게시야+.+......;;;;;;;;; 고로.......저는 조~금 쉬고 다음주 쯤에 찾아 뵙겠습니다^^;;;;;;;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들이 도착한 마을은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어느 집 처녀가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하루아침에 퍼질 정도는 아니지만 삼일정도면 퍼질 정도의 크기랄까? 때문에 라미 네는 제법 많은 이목을 사면서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여관을 쉽게 찾아서 들어간 그들은 맥주와 식사를 시켜 놓고 여유 있게 여가시간(?)을 보냈다. 바사론과 페른은 지도를 꺼내고 다음 행로를 결정하고 있었고 라미는 검을 꺼내서 손질하고 있었으며, 케릭은 마구 쑤셔놓은 짐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하는 그저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눈이 가려져 감고 있는 건지 뜨고 있는 건지 조차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자고 있을 것이라 추측하는 그들이었다. 아무리 잠이 안 와 혼자 불침번을 다 섰다고 해도 아침이면 잠이 쏟아질 것이 당연한 자연의 이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란스럽게 굴지는 않도록 '나름대로' 자제를 해주었다. 그들이 들어간 여관의 종업원은 단 한 명으로 예쁘장한 여자아이였는데, 아이라고 치기에는 제법 나이가 되는 18살의 소녀였다. 다른 말로 하면 꽃다운 나이이고, 또 다른 말로 하자면 벌레가 많이 꼬일 나이였다. 때문에 아침부터 술에 만취해 있는, 앞날이 심히 걱정되는 청년들이 있다고 해서 그리 한탄한 일이 아니었다. 소녀는 그 청년들이 주문한 맥주를 들고, 재촉하는 그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있는 테이블이 바로 라미 네들이 앉은 테이블의 옆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왜냐면 소녀가 접시에 있는 맥주를 들고 위태롭게 걷다가,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는 청년의 손길에 놀라 그것을 떨어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참으로 뜻밖의 사건, 술 벼락을 맞은 무하와 케릭은 조금 멍하니 자신의 젖은 옷을 내려보았다. 소녀의 어쩔 줄 몰라하는 목소리는 낄낄대며 둘을 놀리는 청년들의 목소리에 잠식 당한지 오래였다. 무하는 천천히 일어나 소녀에게 물었다. "욕실은?" "지, 지하에 있어요." "갈아입고 있을 옷 좀 부탁하지." "아, 네! 곧 가지고 올게요!" 소녀가 서둘러 주방 쪽으로 사라지고 남은 건 여전히 멍해 있는 케릭과 옷을 대충 털고 있는 무하와 얼굴이 굳은 바사론과 라미, 당황한 얼굴로 일행을 살피는 페론과 여전히 둘을 비웃고 있는 청년들뿐이었다. 마침내 케릭이 제정신을 차려서 살기를 퍼뜨리며 일어났다. "'난 죽었소' 라고 복창해라." 낄낄대던 청년들이 입을 다물며 불안한 얼굴로 케릭과 그의 주변에 있는 네 명의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일행들을 보았다. 긴장하는 그들을 보며 라미는 피식 웃어 버렸다. 역시 애(?)는 애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술 좀 뒤집어썼다고 화낼 건 없잖아, 케릭?" "그까짓 것에 화를 내는 게 아니오. 사과조차 할 줄 모르는 버르장머리에 화를 내는 거요." 뜻밖에 대꾸한 이는 덤덤하게 옷을 털던 무하였다. 그는 상당히 차가운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굳어 있는 청년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라미도 동행인에 불과한 무하에게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뭣했기에 입을 다물었고, 식당 안에 묘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함에 따라 아주 희미하게 들리던 멜로디가 확실하게 들려왔다. 페른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무하를 보았지만, 그에게 감히 묻지는 못했다. 그때였다. -벌컥! "여기 시원한 맥주하고 안주 좀 내와!"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갔던 소녀가 나오면서 활짝 웃었다. 그 둘은 경비대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어서 오세요! 야간 근무 이셨나봐요?" "아아." 소녀는 붙임성 좋은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쪼르륵 사라졌다. 자리를 잡고 앉은 둘은 그제서야 식당 안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의아해 했다. "여어! 릭! 이번에도 이란 꼬시러 왔냐?" "……." 평소라면 당장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유들유들하게 답할 릭이 잔뜩 굳어서 한쪽만 쳐다보자 둘은 그 쪽으로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형편없이 젖은 꼴을 하고는 릭을 보고 있었다. 수상하게 보이는 검은 두건을 머리 깊숙이 둘러싸고 있어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충분히 그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사과도 못하나?" 경비대원이 물어보려 하던 찰나 그 묘한 대치는 낯선 남자로부터 깨져 나갔다. 잔뜩 굳었던 청년들은 오히려 그의 말에 긴장이 풀린 듯 평소처럼 유들유들하게 말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봐, 형씨. 내가 형씨께 부운 것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해야 하지?" "난 말장난을 싫어한다." 경비대원은 간단하게 오가는 대화 속에서 현재 상황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쉽게 간파 해 냈다. "얼른 사과 드려라, 릭." "끼어 들지 마요!" "릭!" "끼어 들지 말라니까!" 릭이 잠깐 고개를 경비대원쪽으로 돌리며 인상을 썼을 때, 앞에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검은 두건의 남자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나는 건방진 애송이에게는 매 이상의 효과적인 교육방법은 없다고 알고 있지." 그 말은 아주 적절한 경고라고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릭은 한창 치기 어린 나이라는 점이라는 것과 그의 주변에 그와 동조할 친구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릭은 인상을 팍 쓰며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하지만 돌아오는 건 여지껏과는 다른 직접적인 '행동'이었다. 릭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을 때는 이미 그의 배에 수상하기 그지없는 검은 두건의 남자의 주먹이 꽃인 뒤였다. "말 그대로다." 평이하다 못해 살벌하게 들리는 단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뒤에서 달려오는 릭의 친구의 턱을 발로 날려버렸다. 릭이 주저앉는 것과 동시에 그의 친구가 옆에서 의자를 휘둘러오자 마침내 남자는 허리에 싼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경비대원들이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을 때, 예리하게 잘려 나간 의자가 바닥에 허망하게 떨어진 때와 동일했다. 무하는 계속해서 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의자를 휘두르려다 헛탕 친 녀석의 배를 찌르고 옆에서 달려드는 녀석의 허리를 베어 들어갔다. 벽으로 쳐박히는 동네 꼬마(?)들을 보고 당황한 경비대원들은 멍하니 구경만 하는 라미 일행에게 다급히 외쳤다. "이봐, 좀 말려봐! 일행이잖아!" "저, 저희는 잠시 동행하는 사이일 뿐이라 구요! 게다가 프리급 용병을 무슨 수로 말려요!" 프리급이라는 말에 다들 일순 흠짓 했다. 프리급이라면 용병단에 들어가서도 적어도 '하'등급은 따낼 수 있는 실력자라는 뜻이었다. 헛기침을 하던 릭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얼른 무하에게 달려들었다. 무하는 그런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검을 왼쪽 뒤로 크게 젖혔다가 빠르게 그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제대로 박히던 안 박히던 결과는 죽음 뿐이라, 경비대원 중 한 명이 기겁하여 휘둘리는 무하의 검을 덥썩 잡아버렸다. 그리고 뜻밖의 사실을 깨달고 더 당황해 버렸다. "검을 뽑지……?!" 그의 손에 검집이 끌려나온 것이다. 그것은 여지껏 저 살벌한 검사가 검을 뽑지 않은 상태에서 검집만으로 청년들을 때리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베는' 것이 아니라 '구타'하는 것을 말이다. 검에 은은한 검광이 배여 있었기 때문에 삼류 검사에 불과한 그들로써는 알아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목을 향해 가던 검집을 경비대원이 빼버려 살벌한 날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릭은 새파랗게 질려서 눈을 크게 치켜 떴다. 무하는 짧게 욕설을 뱉어내며 왼손으로 주먹을 쥐어 검날을 막아 버렸다. 릭은 자신의 얼굴로 튀는 핏방울을 떨리는 손으로 만져보다가 뒤로 주저앉았다. 무하는 깊히 베여 피가 흐르는 왼손을 별다른 감흥 없이 내려보다가 주먹을 펴며 밑으로 떨어뜨렸다. 피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소리와 잔뜩 가라앉은 멜로디만이 식당 안에 흐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페른이었다. "괜찮으세요?" 후들거리는 다리로 무하의 옆으로 뛰어가 리커버리의 캐스팅을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반응한 것은 케릭이었다. "헤에? 죽이려던게 아니었네?" "난 이깟 일로 살인할 정도로 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 무하의 다소 격하게 들리는 답을 들은 케릭은 입을 다물었고, 경비대원은 검집을 떨리는 손으로 무하에게 넘겼다. 무하는 오른손에 쥐어진 검을 들어올려 경비대원의 손에 들려진 검집에 꽂은 다음, 그것을 받아들어 허리에 찼다. 페른의 리커버리는 완전하게 들어갔지만, 워낙이 상처가 깊었기 때문에 지혈외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무하는 품에서 작은 검을 꺼내들었다. 화려하게 세공 되어 있는 그 검은 손바닥만한 장식용 손 칼이었다. 무하는 그것을 상처 위에 얹고 짧은 단어, 하나를 읊었다. "리 * 커 * 버 * 리 * " 녹색의 빛이 은은하게 상처 주위를 맴돌다 사라지자, 상처의 흔적조차 없어진 왼손이 나타났다. "부여 아이템?" 바사론이 멍하니 읊었다. 음각으로 새겨진 룬어를 보아 분명 저 손 칼은 부여 아이템이었다. 고대 유적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몇 안 되는 부여 아이템. 마법사인 페른도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그는 여지껏 「치유」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아이템에 대해 보기는커녕 듣어 본 바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혈이 되어 있다지만 이토록 강렬한 효과를 보이는 마법이라니! 무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은 체, 손 칼을 품안에 넣었다. "씻고 오겠어." 막 식당 안으로 들어온 이란의 손에 들린 옷을 건네 받으며 말하는 무하에게 릭은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든 듯 급히 말을 걸었다. "저기!" 무하가 자신을 돌아보자 그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 그리고……" 허리를 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하는 가볍게 목을 꾸벅여 보이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 추석이 지나 올린다고 했지만.........보드도 바꿨고......새마음 새 기분으로 일단 한회 올려보고자........쿨럭.....;;;;;;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지하로 내려가자 양쪽으로 갈려 있는 두 개의 문이 보였다. 남자용이라고 써져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하가 문을 닫고 한걸음 내딛는 순간, 욕조 안에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던 물방울들이 일순간에 허공을 치솟아 올랐다. 당황하고 있는 그들의 수장, 네레이데스의 파동덕분이었지만 무하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무하는 자신의 주위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넬과 실에게 미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애써 웃어 보려해도 가슴 한 구석에서 아련하게 욱씬거려 오기만 할뿐이었다. 괜찮다고 애써 중얼거려주며 옷을 벗는 그의 양어깨에는 참혹한 상처의 자취를 알려주는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옷을 정리하려고 집어드는 순간 작은 손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까 그 엄청난 효과를 보였던 그 손 칼, '은장도'였다. 무하는 음각으로 새겨진 룬어를 매만지다가 옷 속으로 잘 갈무리해 놓았다. 그것은 무하가 집을 나온 직후에 만든 부여 아이템이었다. 전처럼 갑작스레 상처를 입고, 마나와의 접속을 단절 당했을 때를 대비해서 만든 「치유」아이템인 것이다. 그것을 만들며 이제는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무하였다. 노력 없이 얻은 능력이기에 그 값어치를 모르고. 값어치를 모르기에 함부로 쓰고, 함부로 쓰기에 이런 비극을 만들어 버린 것이라 생각했기에 진정으로 그 값을 알게 되기까지는 마법을 자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무하가 두건을 벗지 않은 상태에서 욕조 안으로 들어가자 허공을 맴돌던 물방울들이 하나하나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무하는 천천히 채워지는 수면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깊은 피로감이 온몸을 잠식해 가고 있었지만, 그는 자지 않았다. 잠시 잠에 들 때면 자신을 보며 살인자라 소리치는 카한세올의 모습이 보였던 탓일 것이다. 아니, 아마도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는 그녀……설희의 모습이 보이는 탓 일 것이다. 무하는 곧 욕조에서 나와 구석에 놓인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냈다. 그의 집에 있었던 것보다도, 기숙사에 있었던 것보다도 느낌이 별로 인 비누로 몸을 씻은 그는 욕조에서 떨어진 곳에 걸려 있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냈다. 문이 열리면서 케릭이 들어왔다. 마저 식사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포만감에 가득 찬 그는 옷을 걸치고 있는 무하에게 가벼운 질문을 해대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다 씻은 거냐?" "아아." 무하는 허리띠를 질끈 묶고는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사람을 죽여 본적은 있나, 피를 좋아하지 않는 용병씨?" 분명 농담인 것을 앎에도 무하는 피가 싸늘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케릭은 경직되어 있는 무하를 보며 되려 당황했다. 아까의 무하의 모습에 내심 감탄 했기 때문에 던졌던 농담이었는데, 상대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기……." "있지……." 쥐어짜는 듯한 무하의 답을 들은 케릭은 더욱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하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케릭은 그의 발걸음세가 비틀거리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곧 자신의 착각으로 치부하며 씻는 것에 열중했다. 식당으로 돌아온 무하를 반기는 것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릭 일행이었다. 무하는 순간 식은땀을 흘리며 두건 위로 이마를 긁적였다. "뭐지?" "헤헤, 뭐가요? 아, 여기 앉으세요! 식사는 마저 하셔야 지요, 무하님!" "그냥 무하라고 불러라." 무하는 갑작스런 존칭에 어색해하면서 말했다. 헌데 이상하게 더욱 눈을 반짝 이는 것이 아닌가? "역시 겸손하기까지!" "겸손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는 거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뭐가요?" 다시 시치미를 떼듯 반문하는 릭에게 신경을 끊기로 한 무하는 샐러드를 뒤적거리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밥 먹는 데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역시 거슬리는 일이었다. "나한테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 건가?" 노골적인 시선에도 식사에만 열중하다가 순간 생각난 듯 묻는 무하의 철심 같은 신경에 다들 혀를 찼다. 물론 무하도 릭도 상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프리 용병은 무슨 일을 하나요?" 궁금했던 점이 많았던지 릭이 대뜸 물어왔다. 무하는 입가를 쓸며 생각을 잠시 하더니, 간단하게 답해주었다. "이것저것, 능력에 닿는 일을 하지." "그럼 얼마나 받으세요?" "일한 만큼 받지." 남이 보기에도 무안할 정도로 무성의한 답이었지만 릭은 만족한 듯 헤실 거렸다. "저기……." "용병이 되고 싶나?" 말을 자르며 묻는 무하의 질문에 릭은 흠짓 하며 답을 하지 못했다. 무하는 그런 그를 보다가 고개를 다시 숙여 식사에 열중했다. "전……안될까요?" "안 되는 건 없어." "그럼……!" 얼굴을 붉히며 얼른 반문하려는 릭의 말을 무하가 끊었다. "왜 용병이 되고 싶은 건지 물어도 될까?" 아닌 듯하면서도 대답하는 사람을 고려해주는 질문이었다. 현 상황에서 '왜'냐고 묻는 다면 릭으로서는 싫던 좋던 답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릭은 조금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용병이에요." "그럼 아버지께 물어보는 게 낫지 않나?" "돌아가셨어요." "……그런가." "아버지가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용병이란 것을 저도 해보고 싶어요." "……." 무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빵을 찢어 먹었다. 간혹 주스를 마시며 계속 먹는 그에게 릭은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직 그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미네도 무하의 답이 궁금했던 듯 은근히 둘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물론 같은 마을 출신이자 릭과 같은 꿈을 갖고 있는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무하를 보고 있음은 당연했다. 그런 대단히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무하는 꿋꿋이 식사를 마저 끝내고 입가를 훔치며 일어났다. "난 네가 용병이 될 수 있을지 안될지는 잘 모르겠다." 릭은 고개를 숙이며 실망에 찬 얼굴을 감쳤다. "넌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용병은 로망에 가득 찬 직업이 아니야. 그저 해결사에 불과할 뿐. 되고자 하면 될 것이고 하기 싫다면 안 하는 단순한 직종일 뿐이다." 그렇게 말을 마친 무하는 여관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 뒤로는 깊이 생각에 잠긴 릭과 그런 그를 불안과 우려를 담고 보는 친구들이 있었다. 무하는 동화속 한 장면 같은 평화로운 마을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구경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집들, 비스듬하게 각도를 이른 지붕들, 펑퍼짐한 옷을 차려입은 여인들……. 중세시대의 영화를 보는 듯한 묘한 생동감이 흐르는 광경들을 보며 무하는 모처럼 평온이라는 단어를 만낏 했다. 이곳에 와서는 거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조금은 멍하니 서 있던 그의 귀에 말이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스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말들과는 월등히 다른 생동감이 마르스의 모든 것에 배여 있었기 때문이다. 무하는 발을 돌려 마르스에게 향했다. 왠지 녀석의 울음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구간을 열자 마르스가 그를 발견하고 반가운 듯,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울음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지?" 마르스는 무하의 질문을 알아듣는 것인지 어쨌는지 자꾸 자신을 묶고 있는 끈을 이로 잡아당기며 갑갑한 마구간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하는 그제서야 마르스가 야생마였다는 것을 떠올리며 끈을 풀러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마르스는 여전히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자꾸만 자신을 툭툭 치면서 고개짓으로 길가를 가르키는 마르스를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무하는 대뜸 그를 올라탔다. "달리고 싶은 거냐?" 마르스는 여전히 초조해 보이는 울음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무하는 별다른 행로를 정하지 않고 마르스가 달리고 싶은 데로 내버려두었다. 갑자기 말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무하를 보며 라미네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뭐……. 곧 오겠지." 라미는 간단하게 고민을 매듭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지하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케릭이 나왔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거칠게 털면서 나온 그는 페른이 아직 입도 대지 않은 맥주를 낚아 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캬아! 시원하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는 그에게 라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하려 했지만 페른이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참았다. 케릭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물었다. "무하는?" "말을 타고 나가셨는데, 곧 돌아오시겠죠." 페른이 답해주자 케릭을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녀석, 무지 음침하지 않냐?" "별로. 조금 무뚝뚝하긴 하지만." "흐음." 케릭은 수건을 어깨에 걸치며 과자를 집어먹었다. 마을을 떠난 지 얼마 안되기 때문에 특별히 보충해야 하는 물자가 없어 꽤나 한가하게 간식만 먹던 그들은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나며 무기를 정검 했다. "뭐야?" 케릭이 짜증 섞인 음성으로 묻자 바사론이 얼른 검을 뽑아들며 창문으로 붙어 밖을 살폈다. 아직 안에 있던 릭들은 그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물었다. "왜들 그러세요?"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수다를 떨던 경비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창문 밖을 살펴보던 바사론이 나지막하게 답해주었다. 좋은 답은 아니었다. "몬스터다." 창백하게 굳은 릭들은 무시하고 케릭이 차분하게 물었다. "종류는?" "하류다." 하류란 함은, 후카가 없는 몬스터를 뜻하는 것으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몬스터들의 총칭이었다. 이름을 부여받은 몬스터와 비교해보면 약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라 케릭은 이를 갈면서도 내심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수는?" "23." "빌어먹을!" "몬스터들이 그 정도로 뭉쳐 다니지 않잖아!" "나한테 물어 봤자지." 신경질적인 라미의 말을 냉정히 끊으며 검을 천천히 뽑아드는 바사론이었다. 페른은 서둘러 경비대원들에게 물었다. "마을에 있는 경비대원들의 수는 얼마나 되나요?" "이 작은 마을에 얼마나 있겠어. 야간하고 주간하고 각각 다섯뿐이라고!" "얼른 소집하시고 마을 사람들을 대피……." "그런 말할 때가 아니다. 23정도면 해 볼만하지." 이렇게 말하면 바사론은 문을 박차며 뛰어 나가 버렸다. 그 뒤를 라미와 케릭, 페른이 급히 따랐다. 그들을 멍하니 보고 있던 릭은 갑자기 입술을 물며 밖으로 서둘러 뛰어 가버렸다. "릭!" "어디 가는 거야?" 하지만 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빠르게 뛰어가기만 했다. ============================================================================ 많이 늦은 듯 하지만.....redangel님 생일 축하합니다^^ 슬슬 스토리에 박차를 가해야 할텐데....약간의 복선을 까는 정도밖에는 진전이 없군요. 서둘러야 하건만......ㅡ''ㅡ;;;; 모두 추석 즐겁게 보내시길 빌어요^^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케릭과 바사론은 정말 정신없이 몬스터들을 베고 또 벴다. 하지만 이름을 부여받은 몬스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지간한 힘으로는 벨 수 없을 정도로 녀석들의 가죽은 질겼다. 의외로 근육질의 케릭보다 바사론의 힘이 더욱 강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검술에 있어 바사론이 더욱 힘을 중시했다. 약간 마른 편에 속하는 그가 휘두르는 검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반면에 케릭의 것은 힘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스피드에 더욱 주력하는 검술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우위를 점하는 지는 분별하기가 힘들었다. 단 둘 다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둘이 날뛰고 있을 때, 후위에서 페른이 마법으로 지원을 하고 있었고 그런 페른은 라미가 지키고 있었다. 네 명의 실력은 웬만한 모험가의 것을 뛰어 넘었지만 역시 고전 할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를 벴다고 해도 한번에 치명상을 입지 않는 이상 녀석들은 몇 번이고 다시 덤벼드는데다가, 수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치명상쯤은 상관하지 않는 것이 몬스터들의 질긴 점인 것이다. 즉 처음부터 완벽하게 죽이지 않는 이상은 무한대의 몬스터와 싸운다고 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녀석들의 가죽과 근육은 무척 질겨서 한번에 양단 한다는 것은 웬만한 고수라도 해내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녀석들도 생명체라 계속해서 상처를 입히면 출혈로 죽기 마련이었기에 실력과 체력이 받춰 준다면 죽일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페른 일행은 그 실력과 체력이 받춰 주는 전사들이었기에 고전은 할지언정 착실히 하나하나 죽여가고 있었다. 페른이 캐스팅을 하고 있을 때, 앞쪽에서 한 몬스터가 예리한 이를 벌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때마침 불행히도 라미는 그의 오른 편에서 달려오는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의 다 되가는 캐스팅과 몬스터의 다가오는 속도를 비교해 본 그는 그냥 캐스팅을 계속 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 판단이 섰다해도 고도의 집중력을 보이며 캐스팅을 계속하기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님에도 페른은 차분하게 그것을 해냈다. 그것은 페른이 상당한 경험과 관록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파 * 이 * 어 * 볼 *" 역시 그의 판단이 맞아 떨어져 몬스터는 그의 코앞에서 까맣게 타들어 가며 쓰러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급히 몸을 돌렸지만 바로 앞으로 침을 흘리며 다가오는 몬스터를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이미 늦은 것이다. 페른이 순간 눈을 지끈 감았을 때, 그의 몸으로 역겨운 체액이 쏟아졌다. "아……?" 눈을 뜨자 손을 덜덜 떨고 있는 릭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낡았지만 손질이 잘 되어 있는 검이 보였다. "아, 아버지의 검이죠. 아직은 쓸 만합니다." 릭은 간신히 여유를 부려보았다. 페른은 살짝 웃는 것으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하고 황급히 캐스팅을 시전 했다. 아직도 살아있는 몬스터는 많았던 것이다. 라미는 릭에게 페른의 곁에 있으라고 한 뒤에 잠시 호흡을 골랐다. 릭은 간신히 한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했다. 아까는 몬스터가 완전히 신경을 다른 곳으로 쏟고 있었기 때문에 손 쉬었지만 자신을 노리고 있는 몬스터를 직접 상대하기에는 아직 담력도 실력도 부족했던 것이다. 릭은 거의 본능적으로 한 녀석의 몸을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불행히도 깊이 베지는 못하고 누가 보더라도 가벼운 찰과상에 그치고 말았다. 공연히 신경만 날카로워진 몬스터가 릭의 허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크아악!" 몸을 틀었지만 뒤에서 달려들던 몬스터에게 어깨를 물려버렸다. 으드득 소리가 나면서 뼈가 부스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릭에게 있어 더욱 불행한 일은 간신히 피했던 찰과상을 입은 몬스터가 다시 몸을 돌려 달려들었다는 것이었다. 릭은 다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둔하기 그지없는 놀림이었다. 릭이 자신의 목을 향해 점프하는 몬스터를 보며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스강!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몸이 양분되어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지금 죽은 몬스터는 이 난리통이 벌어진 이후에 처음으로 즉사한 녀석일 것이다. "역시 다른 방향에서도 침입하고 있었군." "무하님!" "님은 빼." 적기운이 도는 갈색 야생마을 탄 무하의 손에는 예기가 감싸여 있는 검이 끈적거리는 몬스터의 체액에 젖어 있었다. 가려졌기에 그가 무슨 눈을 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드러난 다른 이목구비를 봐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빠르게 릭의 옆으로 말을 몰아 검으로 릭의 어깨를 물고 있는 몬스터의 머리를 찍었다. 무하가 검이 박힌 상태에서 반 바퀴 정도 돌리자 몬스터는 피 거품을 물며 축 늘어졌다. 릭은 몬스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밑으로 주저앉았다. 무하는 릭 근처에 있는 몬스터를 막아내며 물었다. "왜 왔지?" "아, 아버지가 겪은……크윽! '지옥'이라는 것을 알고 싶……큭!" '지옥'이란 용병의 은어로 '전장'을 뜻함을 아는 무하는 혀를 차고는, 고통으로 덜덜 떨며 간신히 답하는 릭을 한 손을 들어 막으며 말에서 내렸다. 막 도착했을 마르스의 몸은 묘하게도 몬스터들의 체액으로 번질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무하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스는 무하가 내리자마자 난폭하게 몬스터 사이를 날뛰기 시작했다. 그의 거친 굽에 찍혀 고통스런 신음을 뱉어내던 몬스터들은 다시 한번 내리 찍는 굽에 머리가 터져 죽어버렸다. 한편, 무하는 어깨를 감히 건들이지도 못하는 릭을 대신해서 웃옷을 찟고 상처를 살폈다. 상당수의 몬스터가 득실대고 있는 곳에서 벌어질 만한 성질의 장면은 아니었지만 무하는 상관하지 않았다. "멍청한! 자신을 직시할 수 없다면 겸손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아니냐!" 하지만 릭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무하의 뒤로 동시에 달려드는 두 마리의 몬스터를 보면서 크게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했다. "위……!" 그가 입을 채 열기도 전에 무하는 몸을 뒤로 틀며 검에 가속도를 주어 크게 베었다. 형편없이 피를 뿜어내며 한 마리의 몬스터가 허리가 절단 되 바닥을 뒹굴었고 다른 한 마리는 먼저 달려들던 몬스터가 갈리면서 생긴 틈을 타 옆으로 몸을 빼냈다. 만일 지금 달려들던 것이 몬스터가 아닌 부드러운 가죽과 근육을 가진 인간이었다면, 그럴 틈도 없이 둘 다 양분되었을 것이다. 무하는 검 집을 왼손에, 검을 오른손에 든 상태로 일어났다. 그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으르렁거리고 있던 몬스터가 달려들었다. 무하가 몸을 오른쪽으로 반 바퀴 돌리며 녀석을 향해 검을 그었을 때, 바로 옆에서 다른 몬스터가 이를 세우며 치고 들어왔다. 무하는 검 집으로 그 몬스터의 머리를 찍어 거리를 확보하면서 검으로는 원래 노렸던 녀석의 목을 절단했다. 그리고 다시 반 바퀴 돌며 검 집에 의해 진로가 막힌 몬스터의 목을 쳐냈다. 그 몬스터의 목이 상당히 멀찍이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전부터 날뛰고 있던 라미네들이 그 외의 몬스터들을 모조리 처치한 것이다. 무하는 주위를 한번 쓱 돌아보고는 다시 릭의 어깨에 눈을 돌렸다. "뼈가 상했군." 마침 근처에 있었던 바사론이 릭의 상처를 같이 살피더니 말했다. 무하는 일단 오른손에 든 검을 한번 크게 허공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말라가던 체액들이 튕겨 나와 검 날이 깨끗해졌다. 무하는 천천히 검을 검집 안에 밀어 넣었다. 검 날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무하의 주위를 흐르던 투기가 수그러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하는 릭의 상처를 살펴보다가 혼절해 가는 그의 빰을 세게 내리쳤다. "고통에서 도망치려 하지 마라. 이 고통이 네가 원하던 용병이라는 것의 정체라는 것을 알도록." 상당히 냉정한 그의 말도 릭은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깊히 새겨듣는 듯 했다. 바사론은 릭의 어깨를 좀더 세심히 보살피며 말했다. "이래서야 6서클의 마도사나 신성력이 있는 신관이 걸어주는 힐링이 아니고서는 손을 쓰기 힘들겠는데?" "페른은?" "5서클이야. 마스터는 아니지만 그 나이치고는 대단한 거라고." 무하는 작게 한숨을 쉬며 품에서 은장도를 꺼냈다. 바사론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 부여 아이템이 얼마나 큰 효력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6서클 이상은 힘들……." "힐 * 링 *" 결국 바사론과 뒤늦게 나타난 페른, 라미는 다시 한번 무하의 작은 손 칼이 지닌 효력에 대해 놀래야만 했고, 케릭은 상처하나 없는 릭을 보며 꽤 실력이 있는 녀석인 모양이라고 착각해야만 했다. "원래 이 마을은 몬스터의 등장이 빈번했나……라고 물어도 경비대원의 수를 보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군." "……." 릭은 신기한 듯 자꾸 어깨를 쓰다듬었다. 바사론의 질문은 옆에 있던 경비대원이 대신 해 주었다. "예.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흐음……." 솔직히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긴다 할지라도 바사론이나 다른 일행이 어떻게 도움을 줄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험가이지 정부측 관료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모험가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다. "수도를 가면 민원을 넣는 곳이 있지. 그 곳에 갑자기 몬스터들이 대거 침입했다고 보고한다면 보상 및 조치를 취해 줄 걸세. 성벽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갈 수도 있을 테고." "고작 한번 몬스터들이 침입했다고 해서 이사라니요! 이 곳은 저희가 태어난……!" "다시 저 정도 수의 몬스터가 침입한다면 이 마을은 전멸이야. 이 곳에 검을 다루는 이라도 있는가?" "그건……." "일단 나라에 말해보는 것이 좋겠지. 마침 우리가 가는 곳이 수도인데, 민원을 넣으러 가겠다면 동행해도 좋아. 우리와 가면 위험이 좀 덜하겠지." "……." 따뜻한 차를 홀짝이는 무하를 힐끔 보며 릭이 말했다. "제가 갔다 올게요!" "네가?" "네!" 무하는 고개를 약간 들어 릭을 보다가 물었다. "어깨는 괜찮은 건가?" "네! 아주 가뿐합니다!" "다행이군." 그리고는 신경을 끊고 다시 차를 마셨지만 이미 주위의 시선은 그에게 쏠려 있었다. "한가지 물어도 될까?" "……?" 바사론이 자신을 쳐다보며 묻자 무하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면서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 손 칼, 어디서 구한 건가?" "……." 다들 그것이 궁금했던지 말없이 무하의 답을 기다렸다. 특히 페른은 더 했다. 주위가 정막에 쌓이자 전에 들리던 그 고요한 멜로디가 은은하게 울렸다. 참으로 신비로운 남자가 아닌가? 거의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해보는 일행들이었다. "글쎄." 무하는 결국 모호한 말만을 남기고 일어섰다.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 실은 연참을 해보려고 열심히 썼는데....쿨럭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지 않아서......다 지웠다는...( '')~ 흠흠. 하루 연재는 아직 불가능....왜냐면 8일부터 시험기간이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완전 잠적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흠흠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릭은 라미네에게 동행을 허락 받고, 다음날 마을 촌장에게 가서 탄원서를 받아 챙겼다. "그럼, 내가 없는 동안, 이란을 잘 보살펴 줘라." "풋, 이란이 네 애인이라도 돼냐?" "당연하지." 하는 말만 들어보면 능글맞기 그지없음에도 얼굴은 새빨게 져서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란 또한 옆에서 반박을 해댔지만, 잔뜩 붉어진 얼굴이 설득력 없게 만들고 있었다. 무하는 자신의 주위를 배회하는 실과 넬에게 손을 내밀고는 둘이 그 위에 앉자 어깨로 손을 갖다대서 둘을 어깨 위로 올라가게 했다. 그 다음에 마르스의 위로 가볍게 올라탔다. 그를 본 바사론도 날렵하게 말 위에 올라타 일행을 독촉했다. "그만 가자고." "아아." 릭은 아버지의 말이라는 검은 털을 가진 말에 올라타며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는 릭을 보며 무하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말을 못 타나?" "에? 아니오!" "그런데 왜 긴장하지?" "아……!" 그 말을 끝으로 무하는 말을 몰아 바사론의 옆으로 갔다. "행로가 저쪽 길인가?" 무하가 가르키는 방향을 본 바사론은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 방향은 어제 마르스가 갑자기 달려나갔던 바로 그 방향이었다. 그 답을 들은 무하는 두건 위로 이마를 긁적이며 바사론의 옆에서 떨어졌다.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는 일행이 무하에게 시선을 집중했지만 그는 특유의 무관심으로 말갈기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대충 긴장을 푼 릭을 힐끔 보며 바사론을 먼저 출발했다. 마을을 벗어나고 5분도 채 달리지 않았을 때였다. 먼저 달리던 바사론은 역한 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점차 진하게 풍기던 냄새는 코너를 돔과 동시에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심해졌다. 냄새뿐만 아니라 시야에도 그다지 좋은 풍경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썩은 내장을 쏟아내고 있는 십여 구의 몬스터 시체들이 벌레를 불러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바사론이 얼떨결에 멈춰 서자 다른 이들도 코너를 돌며 멈춰 섰다. 마지막에 도착한 릭은 곧장 말에서 내려 코너를 다시 되돌아가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바사론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멍하니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자신의 낯익은 일행들 틈새로 검은 색 두건을 눌러쓴 정체불명의 남자가 보였다.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마를 긁적이며 이 진풍경을 구경하다가 바사론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그의 쪽으로 맞췄다. 맨 앞에 있던 바사론이 뒤를 돌아보자 자연히 일행의 시선 또한 무하에게로 맞춰졌다. 무하는 바사론을 멀뚱히 보고 있다가 자신을 보는 일행을 쭉 돌아보며 물었다. "내게 무슨 할말이라도?" 그의 지극히 정상적인 질문에 바사론은 제정신이 든 듯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며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려 시체들을 살펴보았다. 썩은 내가 유난히 진동을 하는 무더운 여름이었기에 늘 무뚝뚝했던 바사론의 얼굴도 약간은 질려 있었다. 옆에서 함께 둘러보던 페른이 조용히 의견을 꺼냈다. "한사람의 솜씨 같지요?" "아아." 둘은 거의 동시에 무하를 돌아보았다. 스스로도 의식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었기에 곧 머슥하게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했지만 말이다. 다 토했는지 릭이 창백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애써 몬스터들을 돌아보다가 무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무하님……이 아니라 무하씨." "……?"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묻지 못했는데, 분명히 '다른 방향에서도 침입'하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 "이 녀석들……무하씨가 처리한 거죠?" "……." 눈을 빛내는 릭을 묵묵히 보던 무하는 이 난장판을 벗어나기 위해 말을 재촉하며 답했다. "글쎄……." 꼬박 한나절을 달린 라미일행은 적당한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떼우기로 했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가로운 행로였다. 식사도 간단하게 마을에서 챙겨온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 되는 것이었기에 다들 한가하게 자리에 앉아서 편히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무하가 뭘 발견했는지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갔다. "곧 오겠어." 이렇게 말하며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릭이 조용히 바사론에게 물었다. "저기, 원래 프리급 용병은 저 분처럼 강한가요?" "설마." 바사론의 간단한 답변 뒤로 케릭의 엄청난 수다가 따라붙었다. "난 프리급 용병을 본적은 없지만 하급 용병은 본 적이 있거든? 전혀 급이 달랐다구. 전·혀·" "네에……." "신기한 점이 많은 분이에요. 평소에는 안 들리는 것 같지만…… 저 멜로디, 바로 옆에 있으면 아주 약하게 들려요." 페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헌데 주위에서 무하의 칭찬을 할수록 릭의 눈동자는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바사론은 조용히 말함으로써 릭의 눈을 당장에 흐리게 만들었다. "그가 너를 제자로 받아줄 것 같은가?" "모르는 거잖아요!" "흐음." 주위의 부정적인 반응에 릭의 어깨가 힘없이 쳐졌다. 하지만 그는 곧 오기를 가지고 말했다. "열심히 하면 꼭 받아 줄 거에요! 무하님은 상냥하신 분이니까요!" "글쎄……." 결국 라미 일행은 그에게 고개를 돌린 체 음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문 듯 페른이 물었다. "근데 무하씨는 어딜 간 걸까요?" 일행에게서 한참 떨어진 무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나무에 기댔다. 피로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아무리 무거운 피로감이라 할지라도 역시 깊이 잠에 들 수는 없었다. 무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그의 앞쪽으로는 물이 잠시 고였다가 흐르는 연못 비슷한 곳이 있었다. 오면서 봐두었던 곳이었다. 무하는 잠시 자신의 얼굴을 가린 두건을 매만지다가 이내 벗어버렸다. 햇빛 아래 드러난 그의 머리카락은 숏커트치고는 길고 단발치고는 짧은 어중간한 길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두건을 둘렀을 때를 제외하고는 며칠 간 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카락은 은은한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가닥가닥 바람에 흩날리면서 부드러움을 선보이던 짧은 머리카락 밑으로 깊은 녹색 눈동자가 모습을 설핏 드러냈다. 그 짙은 녹색 빛은 거대한 상처와 고통, 그리고 고독을 담아내고 있었다. 무하는 두 눈을 잠시 손으로 문질렀다가 곧 머리를 물에 담갔다.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번쩍 고개를 쳐든 그는 몸을 반 바퀴 돌렸다. 그가 피한 곳으로 화살하나가 박혔다. 무하는 그 화살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것이 날라 온 방향을 주시했다. 척 보기에도 상당히 부유해 보이는 건방진 눈빛을 한 청년이 활을 들고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쳇! 놓쳤군!" "하지만 훌륭한 솜씨이십니다, 도련님." "하하,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물론입죠." 무하의 눈이 매섭게 휨과 동시에 그의 주위로 희미하게 흐르던 멜로디가 거칠어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팔찌가 한차례 진동을 했다. 그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청년은 활에 가볍게 화살을 매기며 말했다. "여기는 우리 가문의 사유지이자, 나의 사냥터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건 내 사냥감이란 말이다." 무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물기를 잔뜩 머금어 평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은 축 쳐져 그의 매력적인 녹음의 눈을 가려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은 높았는지 청년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제법 반반하게 생긴 '사냥감'이로구나. 안 그런가?" "역시 도련님은 안목도 탁월하십니다!" "하하……!" 제법 호탕하게 웃으려 하던 청년의 시도는 무산 될 수밖에 없었다. 목이 잘리고도 웃을 수 있는 이는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옆에서 따라 웃으려 하던 남자는 눈을 크게 치켜 뜨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다리 사이로 구린내 나는 무언가가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리 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덜덜 떨며 가해자로 추측되는 은발의 남자를 찾아보았다. 의외로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절망적인 사실을 추측하게 해주었다. "마, 마법사?!" "……."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를 지켜보는 무하의 심정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진동을 하면서 매서운 바람을 내뱉은 정령의 팔찌를 내려다 보았다. "왜……?" 약간 떨리는 그의 음성에 반응하듯 그의 주위가 붉게 물들이며 두 정령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스터에게 뭐라 말을 하려다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물의 정령이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내젓자, 그의 앞에 존재하던 물들이 갑자기 치솟아 올라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무하가 당혹한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무슨 짓이야!?" 「저희는 로드를 지키는 정령입니다」 「이는 당연한 것.」 「로드, 당황해 하지 마시길.」 "다시는 이런 짓 하지마! 절대로!" 무하는 절망적인 얼굴로 두 시체를 보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몬스터와의 일전에서는 아무말도 없으셨지 않습니까, 로드?」 "앞으로는 내가 명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서지마! 절대로!" 다시 강조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보던 두 정령은 공손히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고 사라졌다. 두 구의 시신을 떨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기에 무하는 두 정령이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옆에 있는 작은 존재들과 공명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수장께 경배를.」 「수장께 경배를.」 실과 넬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서로를 잠시 보다가 둘에게 말했다. 「너희는 앞으로 너희 주인을 '절대적'으로 지켜라. '능력껏'이 아니다. '절대적'으로다.」 「부족한 힘은 우리를 통해 보충해도 좋다.」 두 정령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서로를 보다가 다시 한번 경배를 표하며 사라졌다. 「현명하신 수장의 뜻대로.」 「현명하신 수장의 뜻대로.」 그리고 나서 실이 손을 내밀어 두 시신을 가르키자, 그것들은 순식간에 분해 되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무하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자 실은 생긋 웃으며 그의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잊으시길, 나의 페르.」 무하의 눈이 조금 멍해 진 듯 했으나 착각이었는지, 순식간에 영롱하면서도 슬픈 빛을 발했다. "아, 일행들이 기다리겠군." 무하는 머리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물방울들이 햇빛을 반사시키며 사방으로 튀었다. 실이 무하의 머리에 손을 대자 물기가 순식간에 말랐다. 무하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빠르게 두건을 감았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뛰어가는 그를 뒤에서 보는 두 존재의 눈에 조금은 씁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 일'도 지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왜 그들의 사랑스런 이는 스스로 '그 일'을 잊는 것을 거부하는 것인지…….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의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실과 넬이었다. '도망'치지 않아서 괴로운 것보다는 어떻게든 '행복'한 것이 낫지 않는가? ……자신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둘은 그의 의지를 반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괴롭게 사는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스스로'의 행동과 의지에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로 인해 그가 괴로워하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강제로 지웠지만……그것이 '그를 위한'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괴로워하는 그를 보기 싫은 '자신들을 위한' 행동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둘이었다. ============================================================================ 하루 하루 연재는 어떻게 했었는지...... 오늘도 올려보겠다고 벌써 날밤을 새고 있다는....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이 상당히 심각합니다만.... 잠들면 학교 갈 시간에 맞춰서 못 일어 날 것 같군요....훗.......;;;;; 뭐, 그런 겁니다.........=.=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웅장하다, 화려하다 등으로 표현이 가능한 저택 안에서 한 남자가 말을 타고 나왔다. 남자의 인상은 한마디로 '저택에 어울리는 남자'랄까? 기품 있는 몸가짐과 잘 다듬어진 몸매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보검과 부드러움과 강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미소. 그 어느 것 하나 그가 기사라는 것을 의심치 않게 하고 있었건만, 그는 귀족도 기사도 아니었다. 바람에 휩싸인 짙은 바다 빛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저택을 돌아보는 그의 눈에는 지독한 고독이 배여 있었다. "그런가……. 이거 축하해야겠는데? 뮤비라가 결혼을 하다니!"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매혹적인 금발의 미남이 근래에 들어 드믄 미소를 보여주며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여버리는 상대방 남자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목소리만은 들뜬 듯 하다. "정식으로 자하라 공께 말씀을 드려야 된 답니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 런지요?" "아아, 물론이지!" 묻는 이나 대답하는 이나 눈동자가 슬프게 떨리고 있음은 똑같았지만, 서로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데 급급했기에 상대방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애써 내는 밝은 목소리만을 듣고 액면만을 믿어버리고 만다. 요크노민은 이제는 자신의 거처가 된 페르노크의 거처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삼일이다. 페르노크가 그렇게 떠난 지 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생겨버렸기에 페르노크가 돌아온다면 상당히 얼떨떨해 할 것 같았다. 그가 온다면 해줘야 할 말도 많았다. 일단 잘 다녀왔냐는 말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뮤비라 형님의 결혼 날짜가 급하게 잡혔다는 말을 해주어야겠다. 이유를 묻는다면 상대측 여자가 하루라도 빨리 날짜를 잡길 원했다고 답해줘야 된다. 아, 그보다는 테밀시아 도련님의 결혼 날짜가 잡혔다는 말부터 해야 될까? 날짜는 넉넉하게 잡았기 때문에 뮤비라 형님보다 훨씬 늦게 하게 됐다는 말을 해야 하니까, 형님의 이야기 먼저 하는 게 좋겠다. 로레라자는 처형당했다는 말도 해줘야 될 것이다. 형님이 오고 나서야 잠에 든 테밀시아 도련님이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그녀를 죽여버렸다는 말을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카한세올 도련님의 그림이 담긴 목걸이는 테밀시아 도련님이 챙겨갔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 그리고 뮤비라 형님이 결혼을 하게 되면 나만을 데리고 이 집을 나가기로 했다는 것도 알려줘야겠다. 그 전에 그가 돌아온다면…….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요크노민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 것을 닦아주는 부드러운 손길은 그의 '맹약자' 불칸의 것이었다. 「이번 '맹약자'는 눈물이 많네?」 불칸의 말에 정신이 든 것인지 요크노민은 눈물을 단숨에 훔치고 일어났다. 불칸은 매혹적인 붉은 눈동자에 웃음 가득 담아 미소 지었다. 요크노민은 벽에 걸린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페르노크가 만들어 준 바로 그 마법검이었다. 요크노민은 더 이상 목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또 연습하는 거야?」 불칸이 맹약을 맺은 뒤로 가장 많이 본 것은 검을 휘두르는 맹약자의 모습 일 것이다. 요크노민은 입을 굳게 다물고 검을 휘둘렀다. "놀랍구나." 요크노민은 갑자기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서 멈짓 했다. "도련님." 황급히 인사를 하는 요크노민에게 테밀시아는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다가갔다. "뮤비라는 아까 떠났단다. 배웅을 안한 모양이구나." "……네." "왜냐고 물어도 될까?" ……역시 형제라는 것일까? 그의 동생이 불과 하루 전에 릭이라는 용병지망생에게 물었던 '상대방을 배려하는 질문'을 테밀시아도 똑같이 입에 담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테밀시아의 미세한 배려를 눈치채고 저도 모르게 살짝 웃어버렸다. 그러다 질문 자체를 생각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슬픔으로 일그러진 요크노민의 얼굴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보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한걸 물은 모양이군." 테밀시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정확히는 사라진 그의 동생의 거처를 보고 나서 말이다. "그럼 이건 답해주겠나. 내가 페르를 찾으려는 걸 말리라 한 것이 너라고 들었다." 요크노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테밀시아를 보았다. 입술을 한번 깨물며 크게 숨을 들이킨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페르는 이번 일로 상처를 많이 입었어요. 자신을 귀여워 해주고 아껴주던, 아니 아껴준다고 생각했던 로레라자에게 배신을 당했고 자신의 손으로 형을 죽였죠." "그것도 형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지." 테밀시아의 표정은 전처럼 냉혹하게 변했지만 눈동자만큼은 괴로움에 젖어 있었다. 요크노민은 동생을 이해하고 있는 테밀시아를 보며 힘들게 입을 떼었다. "페르는 자신을 '살인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또한 테밀시아 도련님께는 도련님의 가족을 죽인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요크노민은 페르노크의 '세계'에서의 '살인자'와 '이 곳'에서 '살인자'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살인자'라는 의미는, 이유 없이 단순한 '즐김용'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뜻하지 전쟁이나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진 살생까지 살인으로 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세계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심지어는 실수로라도 사람을 '죽였다'면 무조건 살인자로 치는 듯 했다. 요크노민은 착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녀석은 '원수'인 자신에게 '형'인 테밀시아 도련님이 '고맙다'는 말을 하길 원하지 않아요. 아니 두려워하고 있다고 봐야 할 거 에요. 스스로의 상처를 하나하나 헤집으면서 곱씹고 곱씹고……그러다 올 겁니다." 마지막 말은 과연 누굴 위해 하는 말일까? 요크노민은 이때만큼은 테밀시아의 눈을 마주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돌아 올 겁니다. 상처를 헤집다가 스스로를 '용서'하고 '아물게'한 뒤에 분명히……! 그러니까 그냥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믿고 그냥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테밀시아는 요크노민의 떨리는 눈과 굳게 쥔 손을 보고, 그가 스스로에게 '믿자고'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 차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요크노민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아픔과 괴로움을 보기만 해야 했던 요크노민의 심정이 어떠했을 까? 절대 자신보다 덜 괴로웠을 리 없다고 테밀시아는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페르노크의 떠나는 모습까지 지켜봐야 하지 않았던가? 이를 악물며 울음을 참아 내던 요크노민은 테밀시아의 위로 아닌 위로에 기어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지막이야……우는 건 이걸로 끝이야! 이제는 다시 올 녀석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강해지는 것에만 열중하겠어! 이걸로, 이걸로……!' 테밀시아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요크노민의 울음을 못 본 척 해주면서도 그의 어깨에서 손을 얹어 계속 '위로'를 해주었다. 릭은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매끄럽고 부드러우면서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절로 흐를 것 같은 슬픔이 배여 있는 노래 소리 였다.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가사로 이루어진 곡을 부르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남자, 무하였다. 드물게 밝은 달빛 아래서 낮게 흥얼거리는 그의 모습에서는 릭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고독이 흐르고 있었다. 릭은 천천히 눈을 다시 감았다. 장작 타는 소리와 잘 어우러진 노래 소리에 흠취 하며 그는 다시 잠을 청했다. 생전 처음으로 오른 여행길의 첫날밤의 일이었다. ========================================================================== 시험입니다..........시험이에요...........시험이라니...............훗( '')~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현실도피를 하고 있.....!(퍼퍼퍼퍼퍼퍼퍼퍼퍽!)..................ㅠ.ㅠ 약간의 잠적을 위한 연참을 할까 생각했습니다만.................. 그냥 중간기간에 한번 더 올리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그럼 다들.............ㅠ.ㅠ 살아있으면(?) 만나겠지요(?) ps. 전에 했던 이벤트 당첨자님들! 소설책이 너무 늦었지요? 실은 제가 주소 적어 놓은 것을 잃어 버려서요;; 수첩체 없어졌다는.......쿨럭 다시 메일로 주소와 우편번호! 가장 중요한 본인 이름! 을 보내주세요 메일이 오는 즉시 우체국 달려가서 부치겠습니다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말을 탄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귓가로 바람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목뒤를 답답하게 가리고 있던 두건 자락이 거칠게 나풀거리며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온 몸에 부딪치는 강렬한 바람들도 기분 좋고, 순식간에 지나치는 주위 사물들도 좋다. 밑에서 울려오는 진동쯤은 리듬을 탐으로써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라고 적어도 무하는 생각하고 있었다. "제발 조금만 쉬었다 가요!" 그랬기 때문에 앓는 소리를 하는 릭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많이 피곤한가?" "엉덩이도 아프고 허리고 아프고……온 몸이 욱씬거린다구요!" 장난이 아니라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는 릭을 난감한 얼굴로 페른이 보다가 바사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사론은 잠시 생각을 하는 눈치더니 약간의 휴식을 결정했다. 살았다! 라고 소리치며 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릭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끙끙댔다. 무하는 여전히 이해 할 수 없었지만 급할 것도 없겠다, 굳이 쉰다는 걸 재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말에서 내려 바닥에 앉았다. 물통 주둥이에 입을 대어 몇 모금의 물을 마신 뒤 뒤에 있는 나무에 편하게 기대서 쉬는 무하를 보며 릭 뿐만 아니라 페른이나 라미도 대단한 체력이라고 내심 감탄했다. 무하는 그들 일행 중 가장 마른 페른보다도 가는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하는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만낏 하며 눈을 감았다. 낮잠을 자며 딱 좋을 날씨다. 하지만……. "제길, 또야?" 케릭의 거친 투덜거림과 함께 평온은 깨졌다. 무하는 허리춤에 매어 놓은 검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빠르게 일어났고 릭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버지의 것이라는 낡은 검을 쥐었다. 바사론과 케릭, 라미는 이미 검을 뽑아 쥔 상태였고 페른은 빠르게 캐스팅을 하고 있었다. 그루룩 거리는 탁한 울음소리와 함께 한 쪽에서 네 마리의 몬스터가 달려들었다. 그들의 출현과 동시에 페른의 캐스팅이 끝났다. "파 * 이 * 어 * 미 * 사 * 일 *" 구현된 미사일은 다섯 개였다. 각각에 꽂히고 남은 하나는 제일 앞에서 달려오고 있는 녀서에게 가 박혔다. 화상을 입고 주춤하는 녀석들에게 돌진하는 것은 검사 네 명이었다. 미숙하기 그지없는 릭은 당연히 페른의 옆에서 주위를 경계하기만 했다. 미숙한 녀석이 끼어 들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게 케릭의 직설적인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실력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릭은 조용히 케릭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게다가 네 마리 정도라면 이들의 실력으로는 문제 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걱정도 되지 않았다. 릭의 예상대로 쉽게 해치우고 나서 돌아온 네 검사들은 서로의 의견을 꺼내고 있었다. "이거 너무 자주 아니야?" "그러게. 평소라면 한번정도 있을까 말까한 몬스터의 기습이 벌써 다섯 번째라고! 평소보다 다섯 배나 많다는 소리잖아!" "뭔가 이상한데?" "마을을 기습한 수보다는 적어서 다행이지만……." 페른이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라미에게 상처여부를 묻자 그녀는 씨익 웃으면서 괜찮다고 답해주었다. 릭은 이 커플을 보면서 언발란스 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무하는 벌써 다섯 번째 뽑아든 검을 전과 같이 무게 있는 몸가짐으로 천천히 검 집에 밀어 넣었다. 검 집까지 사용하기 때문에 전투가 끝난 다음에는 다시 허리에 검을 매야 하는 무하였다. 그는 천천히 검을 허리에 끈으로 고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라면 평소보다 다섯 배는 더디게 이동하겠군. 하지만 싸우는 동안 물자 등을 잃어 버렸어. 다음 마을까지 서두르지 않으면 곤란하겠는데." "그렇겠지." 바사론은 자신의 말에 매달려 있는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다시 한번 다음 마을을 확인했다. 여행 중에 꼭 필요한 필수품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안장에 꽉 묶어 두었던 터라 아직까지도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다른 기타 생필품처럼 두 번째 전투에서 모조리 잃어 버렸을 터였다. 그때는 도주가 최선책이라고 모두 생각했을 정도로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떼거지로 기습했던 것이다. 새벽부터 해서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동안 다섯 차례나 기습을 받는 다는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다. 일행들의 얼굴이 굳는 것은 당연했다. 무하는 몸에 들러붙은 체액을 털며 바사론의 옆으로 걸어갔다. 지도를 보기 위해서였다. 전체적인 지명이나 지리 등은 하나도 모른다 쳐도 수도의 이름쯤은 알고 있었고 전에 머물렀던 마을 이름도 알아두었기 때문에 지금의 루트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가깝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습격을 받는 다면 언제 도착할지 막막한데?" 바사론은 놀란 눈으로 무하를 돌아보았다. "……?" "지도를 볼 줄 아시오? 아니, 글을 읽을 줄 아시오?" 이곳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것까지 고등 교육에 속하는 걸까? 속으로 곱씹어 보며 무하는 어깨를 으쓱 였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답하며 마르스 쪽으로 걸어갔다. "글쎄……." 바사론은 무하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다시 지도에 집중했다. 지금 문제는 무하가 어떻게 글을 배웠느냐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성적인 판단은 경륜 있는 모험자들만이 내릴 수 있었고 작은 마을 촌뜨기에 불과한 릭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와! 무하님……이 아니라 무하씨는 글도 읽을 줄 아세요? 어디서 배웠어요?" "……." 무하는 입가를 쓰다듬으며 적당한 답을 찾고자 했지만 릭은 이미 그의 답따위는 기다리지도 않은 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혹시 무하니……씨는 기사이신가요? 명예를 존중할 줄 알며 약한 자를 보호할 줄 아는……!" "절대 아니야." 간만에 제대로 된 대답을 듣게 된 릭은 그 내용에 상관없이 또 다른 감동에 젖어 있었다. 무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에 올라탔다. "이러고 있을 세가 없잖나? 어차피 이런 일이 처음이라면 안전할 길 또한 모를 터. 빨리 강행돌파 하는 것이 상책 아닌가?" "아아." 바사론은 무하의 말에 긍정을 표하며 지도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 "강행돌파라……." 케릭은 뭐가 마음에 든 것인 씨익 웃으며 말을 재촉했다. 승마가 익숙하지 못한 릭은 조금 긴장하며 출발했는데, 다행이 무하가 옆에서 보조를 맞춰주며 언제 덮칠지 모르는 몬스터들을 경계해주었기 때문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만일 자신이 이런 행동을 보임으로써 릭이 더욱 감격하면서 꼭 제자로 들어가리라 다짐하고 있는 걸 안다면……아마도 무하는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을 것이었다. 얼마나 말을 달렸을까? 무하가 갑자기 맨 앞에서 달리고 있는 바사론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안 그래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던 와중에 더욱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충분히 눈에 띄었지만 그의 말은 보통 말과는 다른 야생의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납득하는 일행들이었다. 바사론은 자신의 옆에 붙은 무하에게 시선으로 용건을 물었다. 무하는 아무런 답 없이 검을 뽑아들며 더욱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오른쪽을 크게 베어나갔다. 수풀로 가려져 있던 오른쪽이 훤히 드러나면서 석궁을 조이고 있는 어떤 이가 보였다. 차림새로 보아 산적인 듯 했다. 이는 마을에서는 좀 떨어 졌지만 그리 멀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단서였다. 갑자기 자신의 행적이 드러나자 정찰조로 보이는 그 산적은 기겁하며 돌아서 달려갔다. 하지만 자신들을 노린 이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진땀을 흘렸다. 그는 산후 조리 중인 아내가 있는 몸이었던 것이다. 아내에게 맛난 걸 사주고 싶어서 혼자 몰래 나왔던 그는 공연히 나왔다고 내심 절규했다. 말까지 탄 전사들에게서 무사히 도망치기는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심 억울한 감도 있었다. 척 보기에도 별다른 짐 없고, 게다가 한가락 해 보이는 전사들을 혼자 몸으로 습격할 생각은 절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보낼 생각이었는데……! "저 새끼를!" 케릭이 당장에 도주하는 산적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무하가 뭐라고 외쳤지만 이미 멀찍이 떨어진 케릭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또 들리더라도 무시했을 게 뻔했다. 무하는 가볍게 혀를 차며 케릭의 뒤를 쫓으며 일행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산적이 혼자 몸으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걸 보면 이 근방에는 몬스터가 없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흩어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냥 무시하면 됐을 것을……!" 무하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희미하게 느껴진 살기가 과거 그를 덮치던 암살자들을 떠올리게 해 몸이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만일 조무래기 산적인줄 알았다면 건드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체가 드러난 산적이, 그것도 혼자서 습격할 터도 없는데 굳이 죽이겠다고 멋대로 이탈한 케릭의 막무가내 성질에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야생의 말이라 보통 말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마르스는 되려 숲에서 더 팔팔하게 날뛰었다. 보통 말이라면 주인이 명한다해도 기피할 길을 평지 마냥 뛰어넘으며 케릭을 뒤쫓았기에 손쉽게 따라 잡을 수 있었다. 마침 케릭은 제풀에 지쳐서 넘어진 산적을 요리하려 하고 있었다. "으아악! 살려줍쇼!" "이 몸께 덤벼든 게 평생의 실수라고 생각해라!" 케릭은 몰인정한 말을 차갑게 내뱉으며 검을 크게 내리 그었지만 중간에서 막힐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무하가 그 검을 맞받아 친 것이다. 내리쳐지는 검을 막아내는 불리한 자세였음에도 묵직한 반동을 주며 튕겨 내기까지 하는 무하의 힘에 놀라면서도 짜증을 내는 케릭이었다. "왜 방해하는 거야!" "살인하는 게 취미인가?" 케릭은 무하의 저지에 이를 갈면서도 그의 실력을 알기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하는 덜덜 떨고 있는 산적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살기 위해 눈치를 갈고 닦았던 산적은 당장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살려줍쇼! 저는 이제 막 아이를 낳은 아내가 있는 녀석입니다! 제발 살려줍……!"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세 명의 남자는 등골이 쭈빗 서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루룩……그루룩."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약간의 침묵을 고수하던 그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케릭이었다. "제길! 몬스터다!" ============================================================================= 생각해 봅니다..... 어째서 산적들은 죽을 상황에 처하면 자기 오기만을 기다리는 노모가 계시다고 하고, 굶주리고 있는 마누라와 토깽이 같은 자식들이 있다고 애걸하는지. 또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의 주인공들은 어째서 그런 녀석들의 말을 당.연.한.것.처.럼. 믿지 않고 되려 비웃는지.......... 참, 재미있는 현실이 아닙니까^^? 아......또 생각해 봅니다...... 어째서 시험이라고 당당하게(?) 써갈긴 녀석이(네네, 바로 저입죠) 바로 다음날에 소설을 올리는 것일까.......훗........ 원래 세상은 요지경인 법이죠...........................훗....... 만일, 지금 장난하는거야! 라고 불쾌하게 생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가차 없이 리플 다세요........T^T 당장에 잠적해 버리겠습니다.........ㅠ.ㅠ 그럼...... [연재] 아해의 장-168 -아해의 장- (바람의벗. 신승림) 케릭은 피라미 산적 녀석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다는 것을 노련한 경험으로 판단 할 수 있었다. "서둘러! 일행과 합류해야 한다!" 돌아서는 케릭을 보면서도 무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인기척으로 볼 때 몬스터의 수는 셋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조무래기에 불과한 산적이 당해 낼 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뭐 하는 거야!?" 케릭의 다급한 어조에 잠시 그를 돌아보았던 무하는 결국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닥에서 이를 딱딱거릴 정도로 떨고 있는 산적을 보았다. 산적은 절망적인 얼굴로 무하를 올려보고 있었다. 눈앞의 두 전사가 자신을 살려 준다고 해도 곧 덮쳐올 몬스터들에게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적이라는 건 자주는 아니더라도 일생의 한번은 분명 있는 모양이었다. 두건을 눌러쓴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가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타라." 눈만 동그랗게 뜨는 그에게 무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서두르는 모습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그의 어조에 산적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침착해 졌다. 그리고 구명줄로 보이는 전사의 손을 잡았다. 강한 반동으로 몸이 일으켜지고 떠지고 말에 올라 타짐에도 그는 차분한 정신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멀찍이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전사가 돌아보면서도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전처럼 두렵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혼자 남겨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꽉 잡아라." 여전히 차분한 남자의 말에 그는 침착하게 남자의 허리를 부여잡을 수 있었다. 이미 꽉 붙잡았음에도 남자는 말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검 집까지 왼손에 잡아든 체 물었다. "난 무하. 그쪽은?" "가반이오. 반이라고 하지!" 죽을지도 모르건만 왠지 쾌활해져 자기도 모르게 평소 말투로 대답한 반이지만, 무하라는 남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반은 통성명을 하고 나서야 주위에 묘한 멜로디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마을에서 축제를 할 때 몰래 아내와 내려가 들었던 음유시인의 것보다도 훨씬 감미로운 멜로디였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그것을 듣자 반은 점점 마음에 평온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이었다. "눈감아."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무하가 명령했다. 반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 다음 순간 무언가를 베는 예리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작게 들리던 그루룩 거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말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그는 무하의 허리춤을 더욱 꽉 붙잡았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베어지는 소리, 또한 몬스터들의 격한 울음소리가 거칠게 두근대는 심장소리와 함께 반의 귓가에 울렸다. 말이 앞발을 크게 치켜올렸는지 순간 몸이 뒤로 젖혀졌다. 반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눈을 떠버렸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오른 쪽에서 날카로운 흉기과 같은 이를 크게 벌리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를 볼 수 있었다. "으아악!"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무하라는 남자가 왼쪽에서 달려드는 다른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른쪽 팔 하나는 감수해야 할 터였다. 아니, 그 정도의 대가로 목만 부지 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눈조차 감지 못한 반의 시야에 무하의 오른쪽 손이 보였다. 그의 손의 연장선에는 검이 예리하게 쭉 뻗어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던 몬스터는 그대로 입안에 검을 받아들여야 했다. 뒷목쪽으로 검의 끝부분이 튀어 나왔지만 질긴 몬스터답게 그냥 죽지는 않았다. "히익!" 무하라는 남자는 몬스터가 자신의 오른팔을 잘려나갈 정도로 깊이 물어뜯었음에도 비명한줌 지르지 않았다. 되려 비명을 지른 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반이었다. 천운이랄까? 오른쪽에서 달려들던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해 손을 뻗기 전에 왼쪽에서 달려들던 녀석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다친 상태에서 전투를 치루지 않아도 됐다. 무하는 검을 비틀어 날을 위로 세운 뒤 크게 위로 쳐냄으로써 몬스터의 머리를 양분해버렸다. 몬스터의 머리가 갈라짐으로써 오른팔을 빼낼 수 있었던 무하는 검에 묻은 피를 허공으로 털어 내고 검 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엄청난 출혈을 보이는 오른손을 보고 가볍게 혀를 찼다. 반은 무하가 자신의 엄청난 상처를 보면서 보이는 반응에 얼떨떨해 했다. "일단 합류해야겠군. 다른 녀석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작게 중얼거린 무하는 반을 뒤에 태운 체로 숲을 달려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케릭은 멀찍이서 산적녀석을 태우고 있는 무하를 보며 황당해 할 수밖에 없었다. 신관도 아니고 기사도 아닌 용병이 보일만한 광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에서 말을 되돌릴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기마에 타고난 천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숲에서 몬스터들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날랜 말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무하가 빨리 자신의 뒤를 쫓아오길 바라며 계속 달려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행에게 도착하고 나서야 무하가 뒤쫓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이미 당한 것일까? 일행들도 당황하며 숲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냉철한 바사론이 막았다. "케릭, 몬스터의 수는?" "셋이었을걸?" "그 정도의 수에 당할 리가 없으니 그냥 기다리지. 공연히 움직였다가는 되려 합류하기가 힘들어 질 거야." 다들 납득하는 얼굴로 말을 다독거리며 숲 쪽을 주시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릭이 초초한 얼굴로 바사론을 보았다. "저기……그래도 한번 가보는 게……." "넌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하는 남자의 실력을 의심하는 거냐? 그는 혼자서 십여 마리의 몬스터를 처리한 실력자야." "그때 그 몬스터들이 무하님의 솜씨일지 어떻게 알아요?" "감으로." "……." 바사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무하의 작품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묵묵히 숲 쪽을 주시했다. 그리고 곧 힘찬 말발굽소리와 함께 점프해서 길가로 접어든 무하를 반길 수 있었다. "무하님!" 릭이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 보다는 훨씬 전투 경험이 많은 다른 이들은 피비린내를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다쳤는가?" 바사론의 질문에 무하는 태연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처참하게 피로 물들어진 손을 보면서 다들 신음성을 흘렸지만 무하만은 별 반응 없이 태연했다. 그는 품에서 예의 그 손 칼을 꺼내 들어 상처에 갖다댔다. 그 손 칼의 엄청난 위력을 아는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걱정 어린 눈으로 무하를 살폈다. 살이 뜯겨나간 상처를 치유할 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무하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두건의 끝자락을 붙잡아 입에 물고는 마법을 구현했다. 희미한 신음성이 흘러나오면서 식은땀을 흘리는 무하의 모습을 안타깝게 보던 릭은 무하가 손 칼을 다시 품에 넣기가 무섭게 질문했다. "괜찮으세요?" "아아." 드물게 답해주면서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인 무하는 뒤에서 굳어 있는 반을 팔꿈치로 툭툭 건들었다. "근처에 몬스터들이 더 있을 지도 모르니 마을까지 동행하겠나?" "음……. 마누라한테 맛난 것도 사다주고 싶으니 그럽시다." 케릭이 달갑지 않은 눈치로 말했다. "살려주기까지 했는데 보호까지 하자는 거냐?" "이왕 살려준 목숨이니 이제와 죽게 내버려 둘 필요는 없지 않나?" "쳇!" 바사론이 조용히 물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나?" "피곤하니 한시라도 빨리 마을로 들어가야지." 바사론은 두 말 없이 출발했다. 한시라도 빨리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는 그도 이견이 없었던 것이다. 무하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치유 마법을 쓰면 지독한 고통이 몰려들고, 마법이 끝나면 상처에 비례하는 피로감이 잇따른다. 방금 그가 입은 상처는 결코 가벼운 측에 속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 피로는 어느 때보다도 심했다. 하지만 입술을 잠시 깨물며 말을 독려하는 무하였다. 이 정도 피로에 무너질 정도로 약했다면, '농땡 사부'의 밑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무하는 갑자기 사라진 '농땡 사부'를 떠올리며 잠시 씁쓸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일행들은 당황해야 했다. 그 마을은 성벽이 있는 영지 안의 마을이었는데,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이다. "뭐지?" 케릭의 당혹스런 혼잣말에 바사론이 침통한 음성으로 답해주었다. "몬스터가 이곳에도 습격한 모양이군." "그런……!" "뭐, 지금 몬스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열어달라면 열어주겠지."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냈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겪어보지 못한 공포를 겪었던 탓에 마을 사람들은 '외부'에서 '무언가'가 '들어온다'는 것에 노골적으로 진저리를 쳤던 것이다. 그것이 몬스터든, 사람이든 말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도 마을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쇼! 우리는 문을 열 생각이 없수다!"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어이없는 말에 바사론 등은 멍하니 성벽 위를 올려보았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척 봐도 지쳐 보이는 이들을, 그것도 몬스터가 득실대는 길거리로 내치다니! 바사론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일행의 얼굴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무하는 무거운 피로감에 젖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일행 중 '휴식'이 가장 시급한 이는 바로 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지?" "지금 돌아가자는 건가! 그게 말이 된다고 보나?" 바사론은 드물게 격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무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답했다. "안 열어 주겠다는 거, 공연히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저런 인간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맘 편히 쉴 수도 없을 것 같고." 냉소적인 어조로 답하는 무하를 보며 일행은 침묵했다. 성벽 위의 경비대장도 떨떠름했던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이 상황이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몬스터가 침입했다고는 하나 같은 사람마저 내치다니! 하지만 이번 몬스터 기습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영주의 신경질적인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무하의 뒤에 앉아 있었던 반은 무하의 주위에 흐르던 고요한 멜로디가 싸늘하게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변화에 왠지 머리카락이 쭈빗 서는 반이었다. 그는 결국 말에서 뛰어내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낯익은 사람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야! 같은 사람을 몬스터 마냥 내쫓다니! 그러고도 사람이냐?" "어……? 반?" 반을 알아본 마을 사람을 비롯하여 경비대원들은 가볍게 동요했다. 반은 마을 근처에서 산적질을 하고는 있지만 마을 안에서는 되려 좀도둑을 잡아주는 상당한 의리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적질을 하는 그가 어째서 전사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 있는 건지 당최 짐작을 하기가 힘들었다. 다행이 그들이 안 되는 머리를 쥐어짜지 안도록 반이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이분은 나를 엄청난 몬스터 무리한테서 구해준 은인이란 말이야!" 상당한 허풍에 무하는 내심 쓰게 미소했지만 겉보기에는 그렇게 덤덤할 수가 없었다. 케릭은 굳이 이 상황에 끼어 들어 그때 몬스터는 세 마리 였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산적질을 하는 반과 척 보기에도 여행자나 모험가로 보이는 무하를 보고 둘의 '만남'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던 경비대장은 죽이기는커녕 살려준 데다 구해주기까지 했다는 것에 놀라 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또 잘하면 다음에 몬스터가 침입했을 때 도움을 줄지도 모르지 않는가? 게다가 그는 반에게 신세를 상당히 진 남자였다. 뜻밖의 도움으로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바사론 들은 곧장 여관을 잡아 쉬기로 했다. 특히 무하의 피로는 심했다. 전투도 전투였지만 치유 마법의 휴울증은 무시할 것이 못됐던 것이다. 반은 잘 아는 여관으로 일행을 안내해서 무하에게는 특별히 독방을 잡아 주었다. 그의 은인은 무하이지 다른 일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되려 그를 죽이려 들지 않았던가? 때문에 바사론들은 그의 행동을 그대로 묵인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반이 오히려 마을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해준 은인인 셈이니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 반의 행동은 '원수를 은혜로 갚았다' 정도랄까? 무하는 반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약간 비틀대는 걸음거리로 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터라 다행이 꿈조차 꾸지 않고 깊이 잘 수 있었다. ……라고 무하는 생각했겠지만 그의 뒤통수 쪽에서 수면 마법을 건 실과 그것에 동조한 넬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 시험을 보며... 신승림 시험.........하아......얼마나 끔직한 단어인가. 공부하는 것과는 상관 없이....... 암튼 엄청난 위압감을 가진 단어로세. 백지.........하아......얼머나 절망적인 단어인가. 받아볼 교수님의 황당함과는 상관 없이........ 암튼 엄청난 불행을 가진 단어로세. 컨닝........오오.....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인가. 걸릴때의 절망감과 실행할때의 긴박감과는 상관없이....... 암튼 엄청난 유혹을 가진 단어로세. .........나는 미쳤어~>O<ㆀ [연재] 아해의 장-169 -아해의 장- (바람의벗. 신승림) 꼬박 하루동안 잠들었던 무하가 밑으로 내려 왔을 때는, 몬스터들이 다시 공격 하다 물러난 직후였다. 전투에 합류한 바사론과 케릭 등은 막 내려오는 무하를 힘없이 맞아주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영지의 경비대원들의 실력이야 볼 보듯 빤한 것. 팔자에 없는 지휘까지 해가며 전투에 임했던 그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특히 공격마법을 쏟아내면서도 간간이 치유마법마저 시전 해야 했던 페른의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무하가 내려오는 것조차 맞아 줄 겨를 없이 바빴다. 성벽을 타고 오른 몬스터를 처리하느라 다친 라미에게 치유마법을 쏟아 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마법의 강도는 상처를 낫게 하고도 넘쳐 날 정도라 페른의 얼굴에는 계속해서 진땀이 쏟아지고 있었다. 라미는 안쓰러운 얼굴로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어했지만, 치유 마법을 시전 받고 있는 와중에 입을 열면 효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무하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혀를 찼다. 그가 계단을 다 내려옴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반이 들어왔다. 경비대원도 동행한 체였다. "아! 일어 나셨수!" 고개를 끄떡임으로써 답을 한 무하는 일행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몬스터가 또 습격 했수다. 이거 마누라는 괜찮을는지……." 초조해 보이는 반의 모습에 무하가 물었다. "본거지가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나?" "그러니까……말을 타고 달리면 한나절정도 걸릴 정도에 있수다." "아내가 있는 곳이 동굴이나 오두막 정도인가?" "아니오. 나무 위에 집을 지어 놨지. 내가 없을 때 산짐승들이 덮치면 곤란하지 않겠수? 나말고 다른 녀석들도 여인네들 집은 위에다 지어 놨수. 하지만……몬스터들은 후각이 뛰어나지 않소? '먹이'가 나무 위에 있는 걸 눈치채면 나무를 무너뜨려 포획한다고 들었수다." 점점 풀이 죽어 가는 반을 보며 무하는 다시 입가를 쓸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물었다. "집이 나무 위의 어느 정도, 그러니까 지면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지?" "에또……사다리 길이가……. 아, 25M정도요." 이 세계의 나무는 엄청난 굵기와 높이를 자랑한다는 것을 무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하는 안심하라는 듯 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럼 됐군. 몬스터가 냄새를 맡는 범위는 반경 10M정도니까. 나무 위에 있는 한 안전해. 자네 아내, 산후 조리 중이라고 했지? 그럼 움직일 레야 움직일 수 없을 테지?" "……!" 반박에 환해지는 반의 얼굴을 보며 덩달아 기뻐하던 경비대원이 문듯 무하에게 물었다. "근데 몬스터의 후각 범위는 어떻게 아슈?" "책에서 읽었지." 무하는 간단하게 답하고 일행이 앉아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합류했다. "식사는?" 바사론이 물었다. 무하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답하고 페른 쪽을 돌아보았다. 이미 마법이 끝났는지 페른은 테이블에 업 들어 있었고 라미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무하는 미간을 주무르며 바사론에게 물었다. "다시 올 것 같나?" "몬스터가 전멸하지 않는 한은." "이쪽 피해는 얼마나?" "몬스터들 중 성벽을 타 넘을 수 있는 녀석들도 있더군. 다행이라면 그 수가 적다는 것 정도랄까? 이번에 라미가 맡은 쪽으로 서너 마리가 올라왔는데 움직일 공간이 너무 적어서 고전했지. 그 외는 별다른 피해는 없어. 대부분 위에서 밑으로 화살이나 독을 탄 음식, 뜨거운 물들을 부어가며 처리한 것뿐이니까. 아, 물론 페른의 마법 덕을 톡톡히 봤지. 하지만 페른의 피로가 심해서 하루는 푹 쉬어야 할텐데, 내일 녀석들이 공격하지 않으란 법이 절대 없기 때문에……." "난감한 상태……인가." 무하는 작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몬스터들의 수는?" "계속 몰려드는 것 같아. 우리가 오기 전에 습격했던 몬스터의 수는 이십여 마리였는데 이번에는 사십여 마리더군." "두 배인가……. 내가 알기로는 몬스터들은 세력권이라는 것이 강해서, 종류가 다르면 여간해서는 뭉쳐 다니지 않는다고……." "빌어먹을!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무하의 말을 자르며 케릭이 히스테리 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누군가 조정이라도 하고 있는 기분이라고!" "몬스터들을 누가?" 케릭의 고함을 바사론이 냉정히 끊었다. 케릭이 술을 들이키며 분을 삼키는 것을 확인한 바사론은 무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수도에는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별로." "우린 아니다. 하지만 이 마을을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지 않나?" "하고 싶은 말은?" "몬스터들의 습격이 가라앉거나, 경비원들의 대처능력이 향상될 때까지 남을까 하는데, 자네는 어찌 할 생각이지?" 무하가 잠들고 나서 반이 경비대원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허풍 반에 진실 반을 섞어가며 수다를 떨어, 그를 완벽한 영웅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여관 일층 식당은 지금 무하를 한번 보겠다는 생각으로 죽치고 앉아 있는 사람들 투성 이었다. 또한 바사론과 경비대장의 대화로 무하가 일행이 아닌 동행인이라는 들었기 때문에 그의 앞으로의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실정이었다. 무하는 주변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입가를 쓸며 생각에 잠겼다. 뭐가 좋다고 몬스터들을 죽이기 위해 남아야 한단 말인가? 먹기 위해 잡는 산짐승마저 정도이상은 잡지 않는 무하였다. 살기 위해 벤다고는 하지만 몬스터를 죽이는 것 마저 그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 일' 때와는 차원이 달랐지만, 적지 않은 죄책감마저 들곤 했다. 그렇다고 '몬스터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소' 하고 돌아 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위에 그의 답을 기다리며 침묵이 깔리고 다시 멜로디가 흐르고, 그 와중에 종업원이 무하 앞으로 식사를 가져다 놓았다. 접시가 놓이는 소리에 무하는 입가를 쓸던 손을 내려 빵을 집으며 말했다. "남지." "몬스터다!" "성문 쪽으로 몬스터들이!" 경비대원들의 경고종이 시끄럽게 마을을 뒤흔들었다. 여관에서 마르스의 몸을 씻겨주고, 바람에 털을 말리고 있는 녀석 옆에서 검 날을 갈고 있던 무하는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후로 세 번째로 맞는 습격이었다. 성벽 위에서 질린 얼굴로 밑을 내려보고 있던 사람들은 무하를 보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무하는 혀를 차며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흔히 '경공'이라 불리는, 하지만 '농땡 사부'는 '꼬리 남기지 않고 튀기'라 부르는 무예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그냥 계단을 이용한 것이다. 공연히 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이미 튈 대로 튄 바사론 일행과 무하였지만 말이다. 그 유명세에는 릭도 적잖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도 촌동네이긴 하지만 한마을에서 알아주던 녀석이었고, 용병인 아버지 밑에서 커 나름대로 체계적인 검술을 닦은 데다 이 마을까지 오는 동안 겪은 전투 때문에 경비대원보다는 괜찮은 실력을 보였던 것이다. 밑에서 성문을 공격하는 녀석을 상대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무하와 바사론, 케릭은 성벽을 타고 올라온 녀석들을 상대했다. 라미는 페른의 옆에서 그를 호위하기로 했다. 무하가 깨어난 뒤에 벌어진 전투 중 두 번째의 전투에서 성벽을 타고 올라온 몬스터에게 페른의 목이 날라 갈 뻔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가장 큰 전력이 되고 있는 페른의 호위는 필수적인 것이었고, 인도적으로 말하면 접근전에서는 가장 무력할 수밖에 없는 페른의 호위는 당연한 것이었던 것이다. 무하가 성벽 위로 완전히 올라 왔을 때, 두 마리의 몬스터가 막 성벽 위에 올라와 활동하려 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한 마리를 검 집으로 강하게 밀어붙여 벽에 붙어 있게 한 뒤, 다른 한 마리의 목을 검으로 베었다. 일격에 죽는 역사가 없었던 몬스터들의 명성(?)에 흠이 가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무하의 힘이 엄청난 것이라 생각했던 바사론들은 몇 번의 '과정'을 봄으로써 정교한 기술의 생성물임을 알게 됐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무하가 한 마리의 목을 베는 동안, 빠르게 접근한 바사론이 검 집에 밀려 벽에서 바둥대고 있던 몬스터를 베었다. 무하와는 달리 몇 번의 칼 놀림이 필요했는데, 그 또한 여간한 검사는 따라잡을 수 없는 기술과 힘을 필요로 했다. 그나마 바사론은 이 사태를 맞이하면서 본의 아니게 경험을 풍부하게 쌓으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무하는 멀찍이서 기어오르고 있는 몬스터를 발견하고 날쌔게 달려갔다. 일단 올라오면 한 마리의 몬스터라도 제 몫을 단단히 하기 때문에 올라와 설치기 전에 죽여야 했던 것이다. 바사론도 다른 몬스터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참 달려가던 무하는 자신이 갈 방향에 페른이 있는 것을 보고 난간으로 점프했다. 한 발이 채 올라가기 벅찬 아슬아슬한 폭의 난간이었지만, 그는 날렵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뛰어갔다. 페른의 옆을 지나칠 때, 무하는 온몸에 전율이 이는 '무언가'를 느껴야 했다. 그것은 맨 처음 그가 마법을 대면하고 마나를 만났을 때 느꼈던 것과 같았다. 마나의 뒤틀림, 친구의 존재……. 무하는 언제나 자신의 주위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마나를 느꼈고 보았었다. 마법을 스스로 금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서 조용히 마나의 '존재감'과 마법으로써 구현되는 '존재감'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무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밖으로 헤어 나오려 바둥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가슴을 지긋이 눌러보며 그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갑자기 난간에서 비틀대다 가슴을 움켜쥐는 무하를 보며 주변에서는 당황했다. "왜 그러세요!?" 막 마법을 구현한 페른이 급히 물었지만 무하는 답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난간에서 벗어나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하씨!" "까악!" 다행이라면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있는 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랄까? 하지만 엄청난 높이를 자랑하는 성벽 앞에서 그 '다행'은 무산되고 있었다. 무하의 검은 두건의 끝자락이 머리카락 마냥 허공에서 거칠게 펄럭이고 있었고 의식을 잃은 듯 그의 몸은 아주 작은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무하는 가벼운 인형이 떨어지는 듯한 이질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의 팔에 껴 있던 붉은 팔찌가 크게 진동하며 무하의 주위로 붉은 바람이 회오리 마냥 형성됐다. 그리고는 떨어지는 무하를 부드럽게 받아 땅으로 착지시켰다. 고개가 옆으로 젖혀진 무하의 입가에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하의 세계에서는 이 상황을 두고 이렇게 명명할 것이다. '주화입마' 라고……. ============================================================================== 나는 야~ 잘난 주인공 괴롭히기가 취미라오~~흥얼흥얼.... (라고 노래부르며 도망가고 있는...........난 도미했소~!!!)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전투가 어찌어찌 끝나고 바사론 일행이 병동에 실려간 무하를 찾아갔을 때도, 무하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라미가 신관에게 묻고 있을 때 페른은 마법으로 무하의 몸 상태를 정검 했다. 신관은 바로 답하지 않고 페른이 '탐색'이 끝나길 기다렸다. 페른이 창백하게 질려서 자신을 보자, 신관은 비로써 입을 열었다. "몸의 마나가 완전히 뒤엉켰습니다. 교황이나 대사제가 아니고서는……." "죽는 단 말씀입니까!" "죽지는 않을 겁니다!……하지만 제대로 몸을 운신하기가 힘들……." "말도 안돼요!" 릭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무하님은 엄청난 검사란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엄청난 분이란 말이에요!" 우연히 이 영지를 지나치다 발이 묶인 신관도 무하의 그 동안의 활약상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도 착찹한 심정이었다. 릭이 자처하여 무하의 간호를 맡기로 했다. 하지만 난관이 있었다. 진땀을 흘리는 무하의 몸을 닦아내야 하건만, 그의 두건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비밀과 상처가 많은 것이 용병이라면 프라이버시가 강한 것도 용병이었다. 때문에 다른 이에게는 사소한 것이라도 본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일 수 있다고 아버지에게 누차 들어 왔던 릭이었다. 무하에게는 얼굴을 가려주는 두건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일 수도 있었기에 함부로 그것을 벗길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깨어나서 자신의 몸 상태를 알게 될 때의 무하의 반응조차 상상이 안가는 마당에 그의 프라이버시를 건드린다는 것은 불 난데 부채 질 하는 격이 아니고 뭐겠는가? 릭이 그렇게 계속 갈등할 때, 어디서 불어 왔는지 모를 부드러운 미풍이 무하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얼마 뒤에 무하의 몸에 녹색의 빛이 아주 미약하게 발하기 시작했다. 릭은 일단 물을 먼저 길어 오자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무하의 몸은 침대에서 종이 한 장의 두께만큼 떠올랐다. 그 상태에서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녹색 빛은 무하의 온몸을 계속 헤 젖고 다녔다. 발끝에서부터 무하의 몸을 감싸던 그것들은 곧 얼굴을 향해 치솟았고, 곧 무하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다가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무하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해졌고, 빛과 바람도 사라졌다. 그리고 무하의 눈이 희미하게 떠졌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미소짓고 있는 친구가……마나가 보였다.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실과 넬에게 웃어주려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 깊은 곳에서 욱씬거려 왔던 것이다. 무하의 고통을 아는지 마나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무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릭이 물이 담긴 대야를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 왔을 때, 무하는 이미 기력을 어느 정도 되찾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무……무하님!" 무하는 검을 허리에 매면서 답했다. "님은 빼." 릭은 일어나는 무하를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비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하!" 그리고 대야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체 무하에게 달려가 그를 꼭 껴안았다. 그의 입은 계속 밝은 웃음소리를 뱉어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계속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려내고 있었다. 무하는 영문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굳이 릭을 밀쳐내지는 않았다. 누군가 걱정해준다는 것은……기분 좋은 일이다! 다들 묘하게 놀라고 감격해 하며 자신을 맞는 것을 보면서도 무하는 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특히 그 중에 자신을 치료했다고 하는 신관의 놀라움과 감격은 정말이지 얼떨떨한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설명해 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볼을 약간 긁적이며 넘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또 푹 쉬라고 떠밀려서 독방에 갇히다시피 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알아볼 도리가 있을 턱이 있겠는가? 무하는 창가에 앉아 밤 공기를 맘껏 들이켰다. 왠지 몸이 평소보다 훨씬 가뿐했다. 기분도 '그 일' 이후로 가장 가벼웠다. 검무가 하고 싶었다. 그때 본의 아니게 멈춰야 했던 검무가 생각났다. 편하게 느껴지던 유시리안이 부르던 멜로디에 맞춰 '만들어진' 검무가. 검을 뽑으니 잘 갈아 놓은 검 날이 예광을 발하고 있었다. 손잡이를 슬며시 꺽으며 발을 내딛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의 춤은 계속 됐다. 부드러운 발놀림과 매끄러운 손놀림. 살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검무라기 보다는 칼춤에 불과해 보이는 유흥적인 요소가 다분한 움직임들. 허공에 불꽃의 자취와 같은 잔상을 남기며 한참 검을 휘두르던 무하는 어느 순간에 멈춰 섰다. 창가 쪽에 서 있던 그에게 구름에 가려졌던 달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하는 차가운 달빛에 취해 창틀에 가 앉았다. 그리고 낮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시리안이 부르던 그 노래다. 왠지 모르게 편했던 유시리안이 떠올랐다. 섬세한 얼굴과는 달리 매서운 손속을 가진 남자. "그러고 보니 찾아온다고 했었는데……." 무하는 창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뭐하고 있을까, 그 사람……." "뭐 하는 거냐?" "샤인가?" 어울리지 않게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어지간히 보기 거슬렸는지, 말이 없던 락샤사가 기어이 입을 열었다. 유시리안은 그제서야 초점 없던 눈을 평소와 같은 영롱함으로 채워 나갔다. 그리고 단숨에 일어나 가뿐하게 목운동을 하며 문을 열었다. 어제 머물렀던 여관은 제법 고급이었기에 문은 매끄럽게 열렸다. 유시리안은 그것이 좋은 징조인 것 마냥 좋아하며 기지개도 크게 펴보였다. "뭐 하는 거냐?" "역시 '삐진다'는 건 '받아주는 이'가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겠지?" "……?" "그러니까 일단은 찾는 게 우선 이겠지?" "……." "벌칙은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어." 유시리안은 아주 개운한 얼굴로 드물게 웃음을 보였다. 락샤사는 한치의 변화도 없는 얼굴로 그런 유시리안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누가 멍하니 있었다고 그래? 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잠시 고뇌하고 있었던 것 뿐이야!" 드물게 명랑한 음성으로 답한 그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던 것이다. "고뇌한 결과물이 그것뿐인 건가?" "샤. 원래 시작이 힘든 거야. 때문에 다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 거지." 빵에 버터를 바르며 유시리안이 답했다. 락샤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포도주를 한 잔 부어 마셨을 뿐이었다. "어떻게 찾을 생각이지?" 락샤사가 이런 식으로 먼저 질문을 연달아 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유시리안은 성심을 다해 답해주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 "어차피 그와 내가 이 짧은 기간동안 우연히 만났다는 것은 운명이라는 증거라고. 꼭 만나게 되어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리고는 식사에 열중하는 그에게 락샤사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유시리안은 빵을 내려놓고 과일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일단은 내 일에 열중할 생각이야. 그가 내 일에 관심을 많이 보인 것을 보면…… 이 일을 하다보면 꼭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거든." 이렇게 정의 내리는 유시리안의 얼굴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순간 자리도 모르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떠날 거라면 조금만 기다렸다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을 막 꺼냈을 때였다. -탁! 둘의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누군가 반쯤 마신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뭐야? 실연 당한 거냐? 크크크." 락샤사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술을 홀짝였지만 유시리안은 싸늘하게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꺼져라." "이 형님이 몸소 위로 해 줄 수 있는데 말이지! 크크크!" 그 남자는 남색가인 모양이었다. 유시리안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는 두 번 경고는 하지 않았다. "까아악!" 바닥을 구르는 남자의 수급을 발견한 여종업원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주위에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유시리안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자신의 보검을 검 집에 밀어 넣었다. 정막감이 가득한 분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자리에 앉아 술을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꺼지라고 경고했었다." 이미 죽은 고인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락샤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술만 들이킬 뿐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처지가 된 남자의 일행으로 추측되는 여섯명의 남자가 검을 뽑아들고 유시리안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 기세는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그가 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유시리안은 귀찮다는 얼굴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꺼져라." "이 새끼가! 우리 일행을……!" 앞서 말했듯이 유시리안은 두 번 경고는 하지 않는 남자였다. -스겅! -투툭. 거의 동시에 난 소리. 하나는 검을 뽑는 소리였고 하나는 아까와 같이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였다. 검을 비스듬히 들고 있는 유시리안은 잔뜩 질린 눈으로 보고 있던 남자들은 곧 일제히 도망가 버렸다. 유시리안은 검을 다시 집어넣고는 아주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마저 식사를 시작했다. 그는 겨우 두 구의 시체 때문에 비위가 뒤집어 질 정도로 곱게 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지?" "일단 의뢰를 받아야겠지? 수도로 가자." 락샤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술을 홀짝였다. 그는 상당한 애주가였던 것이다. ============================================================================== 유시리안은 상당히 잔혹한 남자입니다. 하지만 이 세계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을 무조건 범죄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되려 이 세계의 사람답다고 볼 수 있겠죠. 일단 리안의 목적지가 수도로 정해 졌습니다. 페르도 일단은 목적지가 수도이긴 합니다만...... 어느 마을에서 발이 묶였죠? 쩝....................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무하가 성벽에서 떨어진지 이틀이 지났다. 그 동안 무하는 방안에 갇힌 상태로 보내야 했다. 신관의 절절한 경고와 그의 발작(?)을 보았던 이들의 한결같은 만류에 의해서 였다. 하지만 주요 전력이었던 그가 오래도록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공백은 생각보다 컸던 것이다. 결국 일시간 요양을 한지 이틀만에 전투에 복귀해야 했다. 무하는 차라리 그것이 달가웠다.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몬스터들과의 사투가 달가운 것이 아니라 흥겹지 않은 싸움의 결과를 입에 담는 일행들을 가만히 봐야했던 것에서 벗어난 것이 달가웠다. 정신없는 전투 끝에 몬스터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절망적이었다. 전멸시키지 전까지는 계속해서 몰려들 몬스터들의 성질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무하는 체액으로 흠뻑 젖은 꼴로 몬스터들이 돌아가는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무하님." 무하는 고개만 슬쩍 돌려 자신을 부른 이를 보았다. 릭이었다. 릭은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무하가 뭐라 한다고 해도 굴하지 않고 꼬박꼬박 '님'자를 붙였다. 이제는 마음대로 하라며 포기해버린 무하였다. "경비대장이 보자는 데요?" "알았다." 무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허리에 매며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릭이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그런 릭의 뒤를 따랐다. 귓가에 몬스터들의 단발마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밑으로 내려 갈수록 들려오는 부상자들의 신음소리와 더불어 무하는 점점 현실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무하님?" 릭의 음성이 없었다면 무하는 계속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넌 부상자를 돌봐라. 경비대장이 어디 있는 지 말만 해라. 내가 알아서 찾아가겠다." "아, 네. 영주님의 성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셨어요." "성이라……." 영주라는 것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가 습격하고 나서부터 코배기도 보이지 않았던 터라 죽었다고 생각했던 무하였다. 중앙에 있는 성은 그림에서 보던 것처럼 몇 개의 유폐 탑이 있다거나 몇 십분을 걸어야 끝이 보이는 정원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되려 별장이라 불리는 무하의, 아니 페르노크의 거처가 더욱 화려하고 웅장했다. 때문에 성의 규모나 분위기에서 비롯되는 위압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덤덤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멈추십시오." 무하는 자신을 막아서는 건장한 두 명의 청년을 보았다. 그들의 상처 하나 없는 몸뚱이에서 한번도 성벽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무하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꺼내버렸다. "이 곳은 아직도 병력의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군. 요양 중인 사람까지 불러들이는 것을 보고 나는 엄청 모자란 줄 알았지." 둘의 얼굴에 단박에 피가 쏠렸다. 그들은 상당한 돈을 영주에게 바치고 안전한 호위직을 맡은 이들 인 것이다. 얼굴을 붉히는 그들을 보며 무하는 본론을 꺼냈다. "경비대장의 호출을 받고 왔다. 무하라는 녀석이 왔다고 전해라." "아……!" 무하를 실제로 본 일은 없지만 그에 대한 소문만은 누차 들어 왔던 두 사람이다. 바로 그 소문에 의하면 무하는 검은 두건을 눈 밑까지 눌러쓰고 두 팔에 각각 핏빛 팔찌를 끼고 있는 엄청난 검사라고 했다. 그들의 앞에 있는 남자도 검은 두건을 푹 눌러쓴 사람이 아니었던가? 또한 이 좁고 닫혀 있는 공간에서 무하라는 이름을 사칭할 이가 있을 턱이 없을뿐더러, 경비대장이 좀 전에 무하라는 이가 찾아 올 것이라고 언질을 해 주었기 때문에 둘은 곧장 길을 터 주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자진해서 경비대장에게 안내해 주겠다고 나섰다. 무하는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약간 꾸벅여 보였다. 성은 겉보기와 마찬가지로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보통의 성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성의 정원은, 암살자를 대비하여 비비 꼬여져 있는 오르세만 가의 저택과는 달리 단조로웠다. 그 예로 금방 도착한 경비대장의 처소는 성문에서도 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경비대장은 무하에게 자리를 권했다. 무하가 자리를 잡고 앉자 그는 이미 준비해 놓은 찻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을 채웠다. 무하는 그것을 받아들고 향을 맡아보았다. 그리 고급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은은했다. 경비대장은 먼저 통성명을 했다. 같이 전투를 치루기 시작한지 제법 됐지만 그 동안 호칭상의 불편이 없었기에 통성명까지는 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새먼이라 하오. 다들 샘이라 하지. 당신의 이름은 아오. 워낙이 유명하니까." "……." 무하는 그가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본론에 대해 이것저것 짐작해 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쓰름한 것이 좋았다. 만일 달짝지근한 차였다면 한 모금이상은 마시기 힘들었으리라. 샘도 무하가 본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실은……영주님께서 당신을 고용하길 바라시오." "……?" "높은 봉급과 대우를 약속한다고 하셨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군. 난 용병이오. 그러니 의뢰 할 것이 있다면 보수와 그에 해당하는 요구사항을 들어야지 봉급과 대우 따위를 들을 필요는 없소." 샘은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했다. 빙글빙글 돌리는 것을 불쾌해 한다는 것을 알아 챈 것이다. "영주님께서는 당신을 호위 기사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시오. 요즘 몬스터들이 갑자기 들고 일어났으니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것 일 테지. 한번 잘 생각해 보시……." "거절하겠소." 그렇게 말한 무하는 다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알싸한 향이 마음에 들었다. 샘은 그의 거절에도 그리 당황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짐작했던 것이다. 마법으로 다른 영지들과 통신을 해 본 결과, 전 대륙에서 몬스터들이 갑자기 대대적으로 습격을 감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앞으로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검사들을 고용하는 횟수가 부지기수로 늘 것을 알려준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중앙의 고위 귀족의 호위 기사로도 충분히 대우받으며 들어갈 실력자가 촌 동네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목받지 못하는 영지의 귀족에게 소속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 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영주가 성화라 말이라도 꺼내보자는 생각에 했던 제의인 것이다. 무하는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마신 뒤 일어났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아아. 바쁜데 괜히 불러서 미안하오." 무하는 오른손을 가볍게 저어 보이며 방을 나섰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영주 방으로 들어간 샘은 곧 영주에게 호통을 받아야 했다. "고작 그런 일도 제대로 못하나!" "죄송합니다." 영주는 신경질적인 인상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띁어 댔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있어 달라고 하란 말이다! 이런 빈약한 성벽으로 여지껏 버텼던 것도 다 그 새끼 덕분이라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쓸모 없는 녀석!" 결국 영주는 옆에 있던 꽃병을 샘에게 집어 던져버렸다. 사기로 만들어진 꽃병은 샘의 얼굴에 부딪치면서 깨져버렸다. 샘은 적지 않은 출혈을 보이며 휘청거렸지만 영주는 신경질을 부리기에 바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곳에 붙잡아 둬! 못한다면 넌 죽어!" "……." "나가!" "편히 쉬십시오." 당연한 것처럼 샘의 인사를 씹은 영주는 작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지. 너 병신을 믿고 가만히 있는니, 내가 나서야지! 그 용병이 어느 여관에 묵고 있다고 했더라?"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영주가 내뱉는 욕설들이 들어야 했던 샘은 씁쓸함에 한숨을 쉬었다. 그는 품을 뒤져 담배를 꺼내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화이어」로 불을 붙인 그는 크게 한 모금을 빨아들었다. 입에 물린 담배를 손으로 집으며 크게 숨을 몰아쉰 그는 터벅터벅 발을 옮겼다. 현실이 참으로 암담했다. 몬스터들은 쉴 새 없이 습격하는 마당에 성안에 고립 되서 음식도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치유할 약도 시급한데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불행히도 그 모험가 일행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평소에는 방문자들이 들 끊었는데 왜 막상 필요할 때가 되니까 없는 것인지……. 불행 중 다행이라면 신관이 한 분 계시다는 건데, 아쉽게도 그리 큰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물론 그나마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지만 말이다.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지원병을 기다리며 버텨내는 것도 아니었다. 즉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의욕도 들지 않았다. 그나마 반이 그 모험가들을 이끌고 오지 않았다면 성벽을 탈 줄 아는 몬스터들에 의해 영지는 벌써 반 이상이 시체 더미가 됐을 것이다. 아니 전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피곤해 보이우, 샘씨." "반……."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우? 샘씨가 쓰러지면 앞으로가 더 힘들어지잖수." "하아. 쉬고야 싶지만 현실이라는 게 영 안 따라 줘서 말이지." "샘씨도 편히 살 팔자는 아니우." "하하." 성을 나온 무하는 여전히 조금 멍하게 여관으로 향했다.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었고 공기는 잔뜩 침체되어 있었다. 왠지 모를 무거운 정막감에 무하는 계속 멍하니 걷기만 했다.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무하는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주인을 맞은 마르스가 반가운 듯 무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벼 댔다. 무하는 그런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다가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불쑥 올라타, 고삐를 손에 잘 맞게 움켜쥐고 발로 툭 쳐 앞으로 나갔다. 막 여관을 벗어나려는 찰나에 안에서 라미가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무하에게 걸어와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이거 아침이에요! 아침 못 드셨죠?" "고맙소." 적지 않은 양의 음식이 담겨 있는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있는 끈을 안장에 잘 고정시킨 뒤에 빠르게 여관에서 벗어났다. 물통은 언제든 필수였기에 한쪽 허리에 매여 있었다. 새벽녘에 몬스터들이 덮쳤기 때문에 식사도 못하고 전투를 했건만 시장기는 별로 느끼지 못하는 무하였다. 그냥 입맛이 없다고 해야 할까? 거리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마르스는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뛰던 무하는 자신이 성벽 쪽으로 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동안 전투 등으로 많이 들낙날락거더니 몸이 그쪽 방향에 익은 모양이었다. 점차 진해지는 비린내를 맡으면서 또다시 멍해지는 무하였다. 그는 부상자를 수용하는 천막 앞에서 마르스를 멈춰 세웠다. 그 천막 안에서는 피고름냄새가 지독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고통이 잔뜩 배여 있는 신음소리는 약과였고 비명소리와 저주를 뱉어내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무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손 칼을 꺼내, 그것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것은 전신에 섬세한 세공으로 불사조가 새겨져 있는 예술품이었다. 무하는 천천히 그 검 집을 벗겼다. 새파랗게 선 날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빛났다. 별다른 특징 없는 날에 음각으로 새겨진 룬어만이 개성을 드러내 주었다. 무하는 그것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리커버리」,「힐링」……." 조용히 중얼거린 그는 고개를 천막 쪽으로 돌렸다. 그곳은 여전히 기분 나쁜 오라로 뒤덮여 있었다. 무하는 다시 은장도를 내려보다가 결국 천막 쪽으로 발을 옮겼다. 샘은 앞에서 걸어가는 남자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전투를 막 치뤘는 데도 다른 곳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군! 제길! 기운이 남아도나? 그리고 왜 하필이면 성벽 쪽으로 갔데? 언제 몬스터들이 덮쳐 올지 모르는 데! 싸움에 미친거 아냐?" 쉴새 없이 투덜대고 있는 남자는 척 보기에도 다른 이들과는 다른 재질의 옷으로 치장한 귀족틱 하게 생긴 남자였다. 신경질적으로 찟어진 눈과 약간 튀어나온 입술이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하는 그는 바로 겁쟁이로 유명한 영주였다. 그런 그가 지금 향하는 곳이 성벽이라는 걸 안다면 영주민들은 배를 끌어안고 웃고 말 것이다. 내심 떨면서 아닌척하랴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영주민의 생각은 정확했다. 영주가 계속해서 불평을 내뱉는 것은 자신이 떨고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한 허세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앞에서 활기차게 걸어오고 있는 피투성이의 남자들을 보았을 때 오줌을 질릴 뻔했다. 하지만 옷은 형편없이 찟겨지고 지저분한 핏덩이가 움직일 때마다 길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거의 좀비를 연상시키는 이들이 즐겁게 노래까지 부르면서 걷고 있는 광경을 봤을 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었다. 샘도 놀라서 멈춰섰다. "어……?" 그러다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걸어오고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자네는 분명 아침에 몬스터한테 오른팔을 뜯기기 직전까지 물렸던 재믹 아닌가?" "아! 대장님!" 반갑게 인사하는 그를 보면서 영주와 샘은 거의 같은 타이밍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가 반갑게 인사하며 흔드는 손이 다름 아닌 오른손이었기 때문이다. "그 손 어떻게 된 건가? 의사는 분명 절단해야 한다고……?" "하하! 그 분이 고쳐 주셨답니다! 여기 이 친구도 마찬가지죠!" "진짜 놀랬다고! 그렇게 큰 상처가 순식간에 아무는 것이!" "아아! 그러니까 말이야!" 자기들끼리 흥분해서 무언가 화제를 두고 떠드는 이들을 보다 못한 샘이 나서서 물었다. 그의 옆에 있는 영주는 아직도 그들이 좀비인지 아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로 잔뜩 얼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분이 누구냐고?" "그 분이요!" 어째서 모르냐는 얼굴로 답하는 재믹의 밝은 낯짝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샘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누구!?" "그러니까 무하님이요!" 약간의 침묵 끝에 영주와 샘은 동시에 괴성을 질렀다. "에?!" ============================================================================= 평소보다 좀 많이 올려봅니다. 음 다섯페이지에요.....A4로^^ 앞으로는 이정도 양으로 올릴 생각이랍니다^^ 진행이 질질 끌리는 것 같아서 다음 회에서는 확! 매듭을 지어버릴 겁니다. 이 영지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행실'로 불행을 가져오게 할 생각이구요^^ 후후.... 그럼 즐겁게 읽어주세요~ PC.애칭이 륜< ㄹ ㅠ ㄴ> 인 이름을 모집합니다. 이게 결정되는 날 소설 올립니다^^;; 제발 부디 좋은 이름을.......쿨럭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큰일났다!" 남은 두 명의 부상자들을 치유해주던 무하는 갑자기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본래 하던 일을 마저 끝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작게 숨을 몰아 쉬었다. 마나 소모가 거의 없는 부여 아이템이라 치유한 것에 따른 피로감은 없었지만 아침에 치룬 전투에 대한 피로감이 상당했다. 그것도 공복에 치뤄진 전투가 아니었던가? 무하는 허리에 매달려 있는 물통을 들어 물을 마셨다. 밖에서 한차례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 상태로 가면 짐만 되리라 생각했다. 조금씩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심호흡하는 그에게 무언가를 내미는 이가 있었다. 올려보니 릭이었다. 그의 눈에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존경과 경의가 넘쳐나고 있었다. "뭐지?" 릭이 내미는 작은 물병을 받아들며 묻자 신나라 답했다. "「스테미너 포션」이라는 건데요! 피로를 회복시켜주는 거래요!" "……고맙다." "헤헤." 쑥스럽게 웃는 릭을 잠시 보다가 병 뚜껑을 열고 푸른색 액체를 한입에 털어놓았다. 언젠가 먹었던 우황청심원과 유사한 맛이었다. 잠시 그대로 있자, 단전 부근에서 열기가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그 열기는 온몸으로 퍼져 기분 좋은 느낌을 갖게 했다. 무하는 천천히 손을 들어보았다. 좀 전까지 느껴지던 짓눌리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전에 성벽에서 기절하고 일어났을 때와 같은 가뿐함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이거 정말 좋구나." 드물게 밝게 느껴지는 무하의 음성을 듣자 릭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볼을 긁적이며 실실 웃다가 문 듯 손바닥을 한 쪽 주먹으로 가볍게 치며 말했다. "아참! 무하님!" "……?" "성벽 위에서 난리가 났어요! 웬 마차가 이쪽으로 빠르게 오고 있는데 그 뒤로 몬스터들이 쫓고 있는 모양이에요! 다들 문을 열지 말지 고민하고 있어요!" "……!" 무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막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랐다. 다들 어쩔 줄 몰라하며 성벽 밖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몬스터들을 피하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마차가 보였다. 거의 근접해 있어 얼마 안 있어 당도할 듯 싶었다. 성문을 연다면 쉽게 들어올 수 있겠지만 그 뒤로 바싹 쫓고 있는 몬스터들이 문제였다. 하지만 마차가 들어오고 바로 성문을 닫은 다음에 성문 위에서 공격하고 들어온 몇 마리는 그 곳에서 처치한다면 인명피해 없이 끝날 수 있을 듯 했다. 무하는 당장 성문을 여는 장치에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문을 열어!" "하, 하지만……!" 갈팡질팡 못하던 그들은 곧 이를 악 물고 장치를 돌렸다. 무하는 검술로 안되면 두 팔찌에 있는 정령을 이용할 생각까지 하며 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각인 시켰다. 미약하게 팔찌가 진동하는 것을 그들의 대답이라 생각한 무하는 검 손잡이를 꾹 쥐었다. 성문이 며칠만에 열리기 시작했을 무렵 날카로운 남자의 음성이 그것을 막았다. "뭐 하는 짓이냐! 당장 그만 두지 못해!" "영, 영주님!" 당황한 그들이 장치에 손을 떼자 바퀴는 순식간에 되돌아가, 문이 빠르게 닫혀 버렸다. 영주는 십년감수했다는 얼굴로 가슴을 쓸다가 무하를 보며 마구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지위를 하는 것이냐! 당장 내려오지 못해! 몬스터가 쳐들어오고 있는데 성문을 열려 하다니! 네놈은 몬스터들의 앞잡이인게로구나!" 사람들은 근심과 염려를 담아 무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곧 놀라운 광경을 봐야 했다. "당장 문을 열지 못해! 밖에 사람이 있단 말이다!" 처음으로 듣는 무하의 고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영주가 알 턱이 없었다. 그는 감히 자신의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 겁 모르는 애송이에게 독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애송이는 그의 말에 전혀 귀 담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로 고개를 돌려 성벽 밖을 살피는 걸 보면 말이다. "뭐 하느냐! 저 몬스터들의 앞잡이를 당장 잡아 들여! 저런 새끼는 화형 시켜 버려야 한다!" 무하는 마차가 거의 근접한 것을 보고 다급하게 문을 열라고 말했지만, 다들 주저했다. "저기 있는 몇 사람을 살릴려고 다른 이들을 죽일 셈이오?" 주저하는 이들 중 한사람이 나서서 반대의견을 꺼냈다. 무하는 다급해 하던 동작을 일순 멈추고 말한 이를 보았다. 그는 무하의 시선에 주눅이 들어서 사람들 속으로 슬며시 들어가 버렸다. 무하는 계속 욕설을 퍼붓는 영주와 그의 옆에서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샘, 그리고 문을 열라는 자신을 원망스럽게 보고 있는 영주민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닥쳐." 이미 앞서 행한 행동에 위압감을 느끼고 눈치를 보고 있던 영주는 무하의 나지막한 제지에도 쉽게 입을 다물었다. 무하는 성벽 위에서 마을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뛰어내렸다. "으아악!" 비명성이 감도는 가운데 그는 몸을 약간 구부리며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보통인간으로써는 할 수 없는 착지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당신들은 처음부터 그랬지. 나와 페른들이 처음 왔을 때는 주변에 몬스터는 보이지도 않았는데도 문을 열려하지 않았어. 그러다 반이 우리가 강하다는 걸 알려주자 그제서야 열었지. 뭐, 좋아. 그렇게 라도 살겠다는 데 어쩌겠어. 다들 그런 식으로 해서 잘 들 살아 남아 보라구. 단!" 침묵이 깔리는 와중에 그에게 마르스가 다가왔다. 그는 마르스의 위에 훌쩍 올라타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끼리 살아남아라. 난 가겠어." 그리고 나서 계단 쪽으로 마르스를 몰았다. 마르스는 날렵하게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런 그의 뒤로 거의 절규하다 시피 그를 붙잡아 세우려는 이들이 있었지만 무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계단을 다 올라섰을 때, 마차는 바로 성벽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좁은 성벽 위에서 불편하게 움직이는 마르스를 달래며 왼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머리 위로 붉은 팔찌가 엄청난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진동은 마차가 열리지 않는 성문 앞까지 도달해 기어이 멈춰섰을 때쯤에 최고조에 달했다. 무하는 몬스터들이 마차를 향해 뛰어들었을 때, 왼손을 밑으로 크게 휘둘렀다. 엄청난 바람이 칼날이 되어 몬스터들의 몸을 꿰뚫었다. 절경이었다. 다섯 마리의 몬스터가 동시에 피를 뿜어내며 뒤로 날라 가는 모습은. 성벽 위에서 무하가 만들어 낸 그 절경을 본 이들은 탄성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곧 크게 놀라야 했다. 막강한 아군이라 생각했던 그가 말을 부드럽게 이동시켜 밖으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말려보려는 이들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런 게까지 살아남고 싶다면 살아남아야겠지. 너·희·들·끼·리·" 그리고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그에게 뭐라고 말을 붙일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이는 없었다. 단 한 명만 빼고. 무하는 자신의 말고삐를 붙잡는 이를 돌아보았다. 릭이었다. "저도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무하는 망설임 없이 등뒤를 가르켰다. 릭은 밝게 웃으며 무하의 뒤에 잽싸게 올라탔다. 그리고 마르스는 성벽 밖으로 도약했다. 이번에는 몬스터가 우굴대는 쪽이었다. 그들이 땅으로 내려서기 전에 무하의 왼쪽 팔에서 팔찌가 다시 크게 진동했다. 그러자 마르스의 몸이 바람의 막에 쌓여 천천히 밑으로 내려섰다. 마차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이 보였다. 호리호리한 무하의 몸과는 달리 날렵하다는 느낌이 드는 몸을 가진 남자였다. 앞에 앉은 마부는 이미 오는 도중에 죽은 모양인지 고개가 기형적으로 꺽여 있었다. 안에서 나온 남자는 순수한 도약으로 마차 위에 올라갔다. 날렵한 몸매와 마찬가지로 날렵한 행동을 보여준 그가 휘두르는 무기는 놀랍게도 그의 체격과 거의 맞먹는 엄청난 크기의 도였다. 그 도는 상당히 묘하게 생겼는데, 손잡이부터 해서 날 끝까지 전체가 단색으로 빛마저 빨아 드릴 것 같은 흑색이었고 손잡이와 날의 경계 부근에 붙어 있는 손바닥의 반 만한 보석도 그와 마찬가지로 흑색이었다. 무게도 상당해 보이는 그 도를 너무나 가뿐하게 휘두르며 몬스터를 도륙 하는 그의 솜씨는 확실히 보통이 넘었다. 무하는 릭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 검을 뽑아들고 몬스터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다행이 마차를 쫓아온 몬스터는 열 마리 안팎이라 곧 마무리가 되었다. 맨 처음 무하가 절반을 죽인 셈이었기에 쉽게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몬스터를 처치하고 나서야 마차 위에 있던 남자가 무하를 돌아보았다. "형씨, 강한데?" 장난기가 배여 있는, 남자치고는 고음인 음성. 능글맞으면서 부드러운 유시리안의 것과는 달리 차갑게 느껴지는 장난기였다. 그는 마차 위에서 폴짝 뛰어 내렸다. 그리고 그 거대한 도를 가뿐하게 왼손으로 수평하게 들더니 오른 손을 흑색 보석에 갖다댔다. 그러자 도에 암흑빛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보석만 남고 자루와 도신이 사라졌다. 무하는 의외의 광경에 놀라 남자의 손에 남은 흑색 보석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는데, 곧 더욱 놀라운 광경을 접해야 했다. 그 흑색 보석이 그의 손으로 빨려들어가더니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남자는 태연이 무하에게 다가왔다. "난 라이시륜. 시륜이라고 불러도 좋다." "……무하. 이쪽은 릭." 반갑게 인사하는 시륜의 외모는 아름다웠으나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갈색피부였기에 그래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무하는 이쪽 세계로 건너와서 한번도 갈색 피부의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깨끗한 초컬릿 빛 피부도 그러거니와 그것과 잘 어울러진 무릎까지 내려오는 결 좋은 검은 색 머리카락은 그의 손에 들려있는 암흑빛 도와 같은 색이지만 그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윤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시니컬한 장난기가 머금어진, 고양이 눈같이 동공이 얇은 마름모꼴로 된 황금빛 눈동자는 그의 전체적인 '만들어진 듯한 미모'에 생동감이라는 것을 휘감게 해주고 있었다. 그는 무하와 마찬가지로 두건을 쓰고 있었지만 얼굴을 가리지 않고, 이마 위로 머리카락을 묶듯이 감싸 놓아서 앞머리도 차분하게 내려와 있고 뒷머리도 두건에 묶여 정리된 체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는 무하에게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성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문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무하님!" 몇몇 사람들이 다급히 무하를 불러댔지만 그는 그쪽을 보려하지 않았다. "모처럼 성문도 열렸으니 가서 쉬시오. 그럼." 무하는 말머리를 성문과는 다른 쪽으로 획 돌려 달려가려 했다. "잠깐!" 시륜이었다. 힐끔 보니 그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안에서 크지도 적지도 않은 가방을 매고 나왔다. 그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는 마부에게 한치의 시선도 주지 않고 말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말을 고정시키고 있는 가죽끈을 들고 있던 거대한 도로 슬쩍 잘라내고는 말의 고삐를 잡고 훌쩍 올라탔다. "나도 같이 가지." "휴식은 영지 안에서 취하는 게 더 빠를 거요. 또 그곳이 더 안전하겠지." "저런 곳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마음대로 하시오." 무하가 먼저 달리기 시작하자, 시륜도 곧 따라붙었다. 둘이 달리기 시작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성문이 완전히 열리며 사람들이 우루룩 몰려 나왔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체액을 뿜어내고 있는 몬스터들과 목이 꺽인 인간의 시체, 그리고 망가진 마차뿐이었다. "어느 쪽으로 갈 생각이오?" 한참 달리다가 시륜이 물었다. "일단 수도를 생각하고 있소." "나와는 좀 다르군. 하지만 갑자기 몬스터들이 들끓으니 웬만하면 함께 행동하는 것이 좋겠지. ……나도 수도까지 함께 갑시다." 혼자 중얼거리더니 결론을 봤는지 동행을 청하는 시륜이었다. 무하는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며 말을 멈췄다. 시냇가였다. "물통이 비었소. 채우고 갑시다." "아아. 그러고 보니 나도." 셋은 말에서 내려 시냇가로 갔다. 릭은 먼저 세수를 하고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다. 물통의 주둥이를 비틀어 연 무하는 그것을 씻어냈다. 그러다 묘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히 비어 있을 물통에서 물이 계속 나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미지근한 물이 아닌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넬을 보았지만 그는 실과 노닥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물통을 내려보다가 오른손에서 아주 미세하게 진동하는 핏빛 팔찌를 발견했다. '……아! 오른쪽 녀석은 분명 '수' 계통 이랬지.' 이런 쓸모까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무하는 꽤나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어찌됐든 앞으로 물 걱정은 안 해도 것이다. "아아. 배고프다." 시륜은 투덜거리듯 말하며 자리에 풀썩 앉았다. "급할 것도 없는데 밥이나 먹고 가지?" 하고는 등뒤로 손을 뻗었다. 그의 등에는 아직 안장에 매지 않은 가방이 들려있었다. 가방을 풀어 안쪽을 뒤적거리던 시륜은 안에서 또 다른 보따리를 꺼냈다. 풀어보니 음식이 들어 있었다. 음식을 보자 그제서야 공복기를 느낀 무하는 마르스 쪽으로 걸어가 안장에 매어 놓은 음식 주머니를 꺼냈다. 릭은 혼자만 빈손이라 조금 머슥한 듯 머리를 긁적였지만, 둘은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풀어 집어먹었다. 육포와 빵, 마른 과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조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릭은 왜 안 먹냐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집어먹기 시작했다. 무하가 물었다. "수도로 가는 길을 아시오?" "몇 번 가봤으니까. 어? 당신은 모르는 건가?" 무하는 과일을 입에 넣고 씹으며 태연히 고개를 끄떡였다. "지리에 약해. 지도도 없고." "방향치?" 한번도 못 가본 곳을 모르는 것을 방향치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역시 곤란한 질문일 때의 답은 이 정도가 적절하다. "글쎄……." 이제는 귀에 아주 익어버린, 하지만 달갑지만은 않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음식의 반이 소모 됐을 때였다. "그루룩. 그루룩." "……." "……." "……." 세 명의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침묵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륜은 남은 음식을 주머니에 쓸어 남고 얼른 가방에 쑤셔 넣었고 무하와 릭은 물병을 얼른 허리에 묶어 놓았다. 가뜩이나 생필품이 부족한 마당에 이 이상 잃어 버리면 상당히 곤란할 터였기에 전투 준비보다는 그런 쪽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물품을 챙긴 뒤에는 얼른 말에 올라탔다. 몬스터들이 '음식'을 위해서 습격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성벽 전투로 충분히 깨달고 있던 터라,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루트만 벗어나면 전투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지껏 비 전투 요원(?)과 함께 움직여 온 시륜도 질릴 정도로 느끼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 충분한 경험 덕에 셋은 몬스터들과의 대면을 피할 수 있었다. =========================================================================== 혜영이는 언제나 msn으로 나를 닥달한다. 협박도 한다. 애걸도 한다. ......정말 처절하다...ㅡㅡ;;; 어느새 녀석의 공로는 인정되어 리플에 차차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혜사모의 시작.....퍼퍼퍽.....흠흠 소설을 올리려는 순간 혜영과 대화를 했습니다... 여전히 처절했습니다... 정말 처절했습니다... 진실로 처절했습니다... 맹세컨데 처절했습니다... ......할말을 잃을 정도로 처절했습니다... ............................................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 몬스터들…… 그 영지로 가고 있는 걸까요?" "아마도." 릭은 자꾸 신경이 쓰이는 지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영지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하는 다소 차갑게 답해주었다. 그깟 영지에 쓸 마음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무하와 마찬가지였는지 시륜도 물만 홀짝 일뿐, 예의상 할 법한 걱정의 말 따위는 입에 담지 않았다. 다음 영지는 말을 타면 반나절을 조금 넘겨서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는데도 아직까지 길가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몬스터를 피하기 위해서 빙 돌았기 때문이었다. 공연한 헛수고를 한 셈이었던 세 사람은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져 있었다. 저녁노을이 곱게 펼쳐진 매력적인 풍경도 그리 시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저녁노을 뒤에는 밤이 뒤따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세월동안 단 한번의 어긋남이 없었던 자연의 법칙은 지금도 유감없이 적용되어 곧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쯤에서 자리를 잡지?" "아아." 시냇가를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가 없자, 그냥 마른풀이 깔린 곳에서 자리를 잡기로 했다. 사냥은 무하가 나서기로 했고 시륜은 일행과 말, 짐을 맡기로 했다. 언제 몬스터가 덮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사냥을 보내는 것이나 혼자 짐을 지키고 있게 하는 것도 아무래도 릭이 부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대신 릭은 마른풀이 자라 있는 한 쪽 땅을 헤집어 젖은 흙이 표면에 나오게 하는 작업을 했다. 장작을 피울 때 주위로 불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해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처음 불침번은 무하가 서기로 했다. 릭의 감각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불침번에서 제외시키기로 했다. 대신 아침에 말을 돌보는 것은 그가 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그룹이 움직일 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되려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곤히 잠든 릭을 힐끔 본 무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울컥하는 기분으로 나온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연히 릭까지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였다. 하지만 살기 위해 발악하는데 급급한 그 곳에 계속 있었다면 발목을 잡혀 수도로 갈 일이 막막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럭저럭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혼자 고요한 숲에 있다 보니 다시 그때 일이 생각나려 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도망치려하지는 않았다. 언제고 이 일을 회상하면서 가슴이 아프지 않을 때, 머리 속이 혼탁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그 일을 곱씹었다. 머리 속을 장악하고 있는 단 한 단어. '살인자'. 무하는 몸을 움추렸다. 차라리 그때 실수로라도 죽였던 것이 로레라자였다면 이렇게 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죽인 것보다는 카한세올이라는 이를 죽였다는 자책감과 자괴감 때문에 괴로운 무하였다. "어이, 무하." "……!" 흠짓하며 고개를 드는 무하를 보고 있는 것은 시륜이었다. 그는 반쯤 일어나 물통을 입에 물고 있었다. 물을 들이키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려왔다. "믿고 자도 되는 거냐?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서로간에 말을 놓기로 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륜의 입에서는 반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믿고 자라." 시륜은 피식 웃으며 배를 대고 누웠다. 그리고는 턱을 괴고 무하를 보았다. 무하는 굳이 그의 시선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얼굴은 왜 가리고 다니냐?" 불쑥 묻는 시륜을 돌아보며 무하는 덤덤히 되물었다. "넌 왜 두건을 하고 다니나?" "패션이지!" "마찬가지다." "……쳇!" 시륜은 몸을 반 바퀴 돌리더니 팔 베개를 한 체 잠을 청했다. "아아, 피곤하다. 이것들은 왜 갑자기 들고일어나는 거래?" "나한테 대답을 원하는 건가?" "됐다, 됐어." 락샤사는 왠지 들떠있는 유시리안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이 최저이지 않았던가?" "근데, 왠지 기분이 좋아!" "……별나군." 락샤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답하자 유시리안도 덩달아 주위를 보았다. 그리고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자 되물었다. "뭐가?" "보통 이런 광경을 두고 기분이 좋다고 하지는 않을걸?" "……?" 다시 돌아보았지만 역시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백여 구의 몬스터 시체들이 조금 색다를 뿐 그다지 수상한 점은 찾기 힘들었다. 락샤사는 계속 주위를 살피는 유시리안에게 관심을 끊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시리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체액 덤벅이 된 검을 툭툭 털어 검 집에 밀어 넣고는 락샤사의 뒤를 따랐다. "영지가 멀지 않았지?" "이 숲만 벗어나면 곧 보일거다." "저 몬스터들, 그 영지를 덮치고 있던 중이였을까?" "아마도." "음……." 백여 마리의 몬스터를 단 둘이서 몰살시킨 것치고는 지친 기색 하나 없는 그들이었다. 유시리안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나가다가 살아서 그루룩 거리는 몬스터를 발견했다. 그는 마치 앞을 가로막는 풀을 베 듯 녀석의 목을 가차없이 쳐냈다. 그리고는 체액이 얼굴에 튀자 얼굴을 찌푸리며 닦아냈다. "왠지……." "……?"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문지르고 있던 유시리안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기분 좋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왠지……기분 나빠." "……." 그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여간 위급한 순간이 아닌 이상 나오기 힘든 전속력으로 달리는 그를 락샤사는 별 반응 없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유시리안을 따라 잡기 시작했다. '변덕 장이 녀석.' 유시리안이 영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굳건한 성벽을 자랑하며 무사함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유시리안의 불쾌함은 가셔지지 않았다. 영지 따위 전멸 당하건 말건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영지가 보이자 속도를 줄여 천천히 걸었다. 락샤사는 별말 없이 그와 속도를 맞춰주었다. 가까이서 본 성벽은 멀리서 보이던 굳건한 모습과는 달리 많이 망가져 있었다. 바로 밑에는 썩은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고, 성문은 몬스터들의 발톱으로 잔뜩 긁혀져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 보였다. 성문 앞에 멈춰 있는 마차를 보니 안쪽은 잘 모르겠지만 마부는 이미 죽어서 서서히 썩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이 영지가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시리안은 성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세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소용없수. 영주가 문을 절대 열지 말라 했수다." 탁한 남자의 음성이 윗 쪽에서 들려왔다. 올려다보니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덥수룩한 수염의 남자가 보였다. "젠장. 하필이면 이딴 곳에 오셨수? 바로 옆 영지도 멀지 않은데……." 거친 말투. 그 것으로부터 남자가 영주의 명에, 아니 이기적인 영주민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음식도 이제 얼마 안 남았수다. 부상병도 들끓고 있지. 이게 죄다 영주 탓이우." "영주 탓?" "영주가 성문을 걸어 잠가, 몬스터에 쫓기는 타지인들을 안 받아들었기 때문이라는 거유." "타지인을 안 받아들인 것과 음식이나 부상병 문제가 무슨 상관이 있지?" "그 때문에 그분이 떠났수다! 우리의 은인이신 그분이!……일주일 전 일이외다." "그분?" "산적인 나 같은 놈도 살려주시고 구해주신 분이외다. 치유 마법도 우리 같은 녀석들에게 마구 써주시고 가장 앞장서 싸우시고……. 헌데 그분이 정나미가 떨어져서 떠나신 이후로는 우릴 도와주시던 모험가 일행도 신관도 죄다 떠나 버렸지," "흐음……." "아!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외다! 얼른 옆 영지로 가시우! 사람 같지 않은 쓰레기들이 있는 곳보다야 날 거유." "아아, 난 피곤해. 옆 영지까지 돌아갈 여력따위는 없다고. 당장 성문 열어." "난 이 영지 사람이 아니외다.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수. ……아! 밧줄을 던지겠수다. 그걸 타고 올라 오시겠수?" "뭐 하는 건가, 반!" "보면 모르우!" "뭐야?" 유시리안이 미처 답하기도 전에 반이라는 남자의 뒤에서 영주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다가왔다. 유시리안은 아무 말 없이 위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미쳤나? 식량도 이제 바닥인데, 누굴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부상병들에게 먹일 음식도 없어서 지금 반 이상이 굶주리고 있는데!" "그래서 또 외면하자는 거요!? 그렇게 겪고도 모르우? 처음부터 타지인들도 수용했다면 그분도 모험가 분들도 신관님도 안 떠났수!" "쳇! 알게 뭐야! 지금 그런 거 따질 형편이냔 말야!" 영주민들이 반이라는 남자가 들고 있던 밧줄을 뺏어 드는 것까지 본 유시리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락샤사를 보았다. 그는 전과 똑같은 무표정으로 위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래?" "뜻대로." "쿡. ……부셔 버려." 그 말에 락샤사는 성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 쪽에서 물방울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소용돌이를 이루며 급속히 확장됐고, 곧 엄청난 속도로 성문에 날라가 박혔다. -콰쾅쾅! 엄청난 소리가 나면서 성문은 갈기갈기 뜯겨져 버렸다. 먼지조차 일으키지 않고 습기를 머금으며 바닥으로 정신없이 떨어지는 파편들 사이로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내밀고 있는 락샤사의 모습이 사신의 것 마냥 섬뜩하게 보였다. 하지만 진짜 사신은 따로 있었다. "아주 훌륭한 영지야. 정말 훌륭해." 차갑다. 천천히 치는 박수도 내뱉고 있는 목소리도, 그 목소리가 뜻하는 내용도 모두 차가웠다. 유시리안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정말 훌륭해."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유시리안의 주위로 엄청난 속도로 소용돌이치는 물줄기가 생성되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도도하게 내리깐 그의 눈은 앞서 느꼈던 차가움과는 차원이 다른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물줄기들은 영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순식간에 감싸안았다. 완전히 휩싼 다음 순간, 물줄기들은 성벽에 흡수 된 듯, 종적을 감췄다. 그 순간 유시리안의 눈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 품을 수 없는 광기가 어렸다. 그러자 동시에 성 벽안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사사삭! 얼음이 어는 소리. 불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영주민들을 보면서 유시리안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옆 영지로 가자, 샤." "……." 락샤사는 답은 하지 않았지만 몸을 돌리고 있었다. 유시리안은 발을 떼어놓으면서 이미 파손된 성문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을 검지 손가락으로 슬쩍 튕겼다. 그 간단한 행위. 동네 꼬마들이 벌칙 삼아 종종 써먹는 그 유흥적인 행위는 영주민들에게 엄청난 절망을 안겨주었다. "……!" "……!" 모두 할말을 잃고 그 행위가 불러들인 결과를 보기만 했다. 괴음이 고막을 강하게 때렸지만 그 누구도 귀를 막지 못했다. 그 간단한 행동을 할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성벽이……?" "성……벽이!" "아아악!" 현실을 깨달은 이들은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성벽이 일제히 무너진 것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파편이 되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들을 저 흉악한 몬스터로부터 지켜주던 방어막이 허무하게 허물어진 것이다. 그 장난기 가득한 행위 한번으로! 반은 절망감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 이미 은연중에 예상했던 건지도 몰랐다. 기본적인 도리를 저버린 이들에게 신의 가호가 따를 리 없다는 것을. 그것을 깨달은 반은 주저앉아 절망감에 우는 이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할 일을 깨달았다. 그는 달렸다. 이미 박살난 성문을 지나 숲으로 달렸다.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그의 행위를 발견하지 조차 못했다. 그들은 멍하니 절규하는 것 외에 아무런 행동도 판단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헉! 헉!" 호흡이 가빴지만 반은 멈추지 않았다. 친숙한 숲이 눈에 들어왔다. 그 분……무하를 만났던 곳에서 잠시 멈춰서 호흡을 고른 그는 다시 뛰었다. 그만이 아는 지름길로 그는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달리는 그의 눈에는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기 위해 역겨운 그곳에 있었지만,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가고 죽어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귀엽기 그지없는 부인이 있었고 딱 한번 안아본 작디작은 아기가 이었다. 정신없이 뛰던 그의 후각조차 잡아 끌 정도로 강한 냄새가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비린내. 반은 순간 오줌을 질릴 뻔했지만, 호흡을 가다듬으며 뛰는 가슴을 두어 번 문질렀다. 그리고 그 비린내가 풍기는 쪽의 반대편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성욕도 물욕도 아닌 호기심이라 지만, 지금 반에게 가장 큰 욕망은 '안전'이었던 것이다.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서 죽어도 가족과 함께 죽겠다는 것. 다행이 비린내가 풍기는 쪽은 지름길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비린내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순간 극도의 긴장이 풀려버려 반은 발을 헛 딛게 됐다. 돌에 찍히고 썩은 가지에 긁혀가며 구르던 반은 옆에 있는 나무를 겨우 붙잡고 멈춰 섰다. 중간에 그런 식으로 멈추는 게 더 위험할 수 있었지만, 반에게는 그런 걸 따질 정신이 없었다. 그는 엎드려진 상태에서도 팔을 딛어 기어가다가, 발작적으로 일어나 다시 뛰었다. 여지껏 눈에 익었던 곳과는 무언가가 다른 익숙한 곳에 도달한 반은 눈가를 거칠게 부볐다. 남편이 되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다른 나무와 같으면서도 그리운 향내가 나는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다행이 주변에 비린내나 썩은 내가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이곳은 안전했던 모양이다. 반은 위를 향해 소리쳤다. "여보! 미라나! 하하하! 남편 오셨다! 하하하! 반이 왔다고!" 하지만 위에서는 정적만이 흘렀다. 반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몸도 불편하면서 공연히 피신 가겠다고 움직인 건가? 어디로 갔지? 피신처라면 동굴일텐데. 동굴은 몬스터들이 주로 쓰는 서식처라고! 무식한 두목이 우리 미라나를 위한답시고 데리고 간 거 아냐?' 불안하게 이것저것 추측을 하던 반은 다음 순간 크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몬스터들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그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올 테면 와보라지! "하하하하!" 쾌활한 그의 눈에는 다시 따뜻한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물에 잠긴 그의 눈동자에는 나무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사다리가 각인 되어 있었다. 반이 맡았던 강한 비린내의 근원지. 그곳에는 유시리안과 락샤사라는 잔혹, 무심한 두 남자가 벌린 대량 학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정확히 일 백 오십 칠 구의 몬스터 시체가 자연의 섭리를 따라 자신을 섭취할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컴이 안켜져서...거진 써 놓고도 못 올렸네요;; 간만에 만난 혜영씨는 제가 그동안 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ㅡ.ㅡ; 농담으로 이틀동안 잘거라고는 했지만......ㅡ.ㅡ;; 무하가 영지를 떠난 뒤와 유시리안이 온 뒤에는 약간의 차가 있습니다. 일주일정도? 왜냐면, 무하는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유시리안은 급할 것이 없기 때문에 락샤사랑 유유자적하게 걸어왔거드요; 가다가 간만에 몬스터 만나면 유흥거리 삼아 죽여주고 가다가 간만에 몬스터 만나면 심심파적 삼아 죽여주고 가다가 간만에 몬스터 만나면 스트레스 해소 삼아 죽여주고 가다가 간만에 몬스터 만나면 연습상대 삼아 죽여주고.... 뭐, 그런겁니다.......훗( '')~ 몬스터는 전멸해야 다시 안 덤빕니다. 유시리안은 이미 몬스터를 앞서 말한 이유(?)로 락샤사와 사이좋게 전멸시켰죠. 때문에 그 영지는 이제 안전합니다. 하지만 영지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죠? 정신적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느낄겁니다^^ 아, 그리고 사담인데 유시리안이 왜 기분이 나빠졌냐면요...... 샤보다 죽인 수가 많았거든요^^ 헌데 자신이 처리한 녀석이(리안은 검, 샤는 마법이기때문에 누가 처리했는지 압니다) 완전히 죽지 않은걸 보고 열받은 거죠.......훗..... 무하가 간 영지를 일단 코스 삼긴 했는데.... 무하가 아직 거기 있을까요? 훗....( '')~ ps. 마린님, cake 몇월호에요? 좀 알려주셨으면.....ㅡ.ㅜ;;;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제피모는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한 귀족 출신도 벌벌 떨며 마실, 특정 지역에서만 나는 열매 '야매'로 담근 과실주 '야매주'를 냉수 마냥 들이붓고 있는 남자가 있다. 옆에 굴러다니고 있는 술병만 해도 웬만한 애주가들은 그대로 녹여버릴 고가의 희귀한 술들이 태반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과 잔이 하나에 불과한 것을 보면, 혼자 그것들을 처리했음이 분명하건만 남자의 눈에는 한치의 주기(酒氣)도 없었다. 그는 의자 뒤로 깊이 몸을 묻고 한숨을 삼켰다. 취하고 싶었지만 혹독히 단련된 정신력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늘……인가." 그 무지막지한 술들로도 동요시키지 못했던 남자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오늘……." 오늘……. 바로 오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난다. 약혼이라는 명목아래에 그의 평생의 한번이라 여기는 사람이 떠나는 날이다. 남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채광 좋은 방을 어둡게 만들고 있던 커튼을 거칠게 걷어 냈다. 갑작스런 빛이 빠르게 방안에 침투했다. 생명체라면 그 갑작스런 빛의 침입에 의당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가늘게 떠야 하건만, 그는 눈을 혹사시키며 고집스럽게 앞을 주시했다. 고집스런 그의 시야에는 작은 건물이 들어가 있었다. 그가 거처하는 곳과는 비교자체가 안되지만 아담한 것이 나름대로의 매력을 갖고 있는 곳이다. 그 건물은 남자가 어렸을 때 직접 명하고, 관리하여 지은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소중한 이를 그곳에 모셔 '놓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곳이 비게 된다. 그의 가장 소중한 이가 자신의 소중한 이를 만들어 그곳을 떠나게 된다. 바로 오늘. 창문에 손을 딛고 밑을 내려보고 있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욱……!" 자제가 안 되는 자신이 싫었다. 그를 사랑하기로 한 그때부터 그가 떠나는 날을, 바로 오늘 같은 날을 각오하고 있었다. 웃으면서 보낼 줄 수는 없어도 행복하길 빌어 줄 수는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요, 위선이었다. 지금만 해도 웃으며 떠나는 그를 맨 정신으로 볼 자신이 없어 술이나 마시고 있지 않은가? 비록 취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의 흔들리는 눈에 문을 열고 나오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부드러운 미소에 냉혹한 성질을 숨겨 놓고 있는, 그의 하나뿐인 영원. 소중한 이가 생겨 떠나는 이치고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아프게 다가왔다. 비록 축복은 해줄 수 없다고 해도, 그가 행복하길 비는 마음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어두운 얼굴이 너무 싫었다. 그가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이 보이자 남자는 황급히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숨고 나서 자신이 왜 그랬는지 스스로 의아해 했지만, 별수 없는 반사행동이었다. 그를 본 것만으로도 가쁘게 뛰는 가슴이 두렵기까지 했다. 남자는 옆에 놓여 있는 물병을 머리 위로 올려, 뒤집어 버렸다. 차가운 물방울들이 황금빛 머리카락을 타고 맑은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매끄러운 뺨을 타고 날카로운 턱 선을 지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조금 멍하니 보던 남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어차피 돌지도 않았던 술기운을 몰아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 한 것이다. 그는 옷을 벗으며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적당히 시원한 물이 욕조 안을 채우고 있었다. 탄력 있고 단단하게 다듬어진 근육이 남자의 강함을 조금이나마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강함은 비단 육체뿐만이 아닐 터였다. 그것은 확고한 빛을 발하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알려주고 있었다. 뮤비라는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약혼이 너무 급히 잡혀진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주군, 테밀시아에게 미처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기 전에 통보 먼저 들어왔으니……. 그의 손에는 가벼운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모든 것을 그쪽에서 준비하기로 했기 때문에 챙길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가방 안에는 카시안이 그에게 보낸 예물이 있었다. 다는 것만으로 무거울 것 같은 굵직한 보석으로 구성된 장식구들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뮤비라의 몸에 달린 장식구는 일전에 그의 주군이 선물해준 레드 드래곤의 피 뿐이었다. 일생을 두고 절대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그것을 예물을 걸친다는 명목 하에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뮤비라는 목걸이를 한 손으로 꾹 쥐고 눈을 감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크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절망? 그런 짧은 단어로 지금 뮤비라의 심정을 대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결심한 일을 번복할 정도로 심지가 약한 뮤비라가 아니었다. 또, 일순의 감정상의 문제로 번복할 정도로 짧게 생각해서 각오한 결심도 아니었다. 뮤비라는 가방을 어깨에 매고 문을 열었다. 지금 떠난다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 올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머뭇거려지지 않는다면 거짓이리라. 이 건물은 테밀시아가 직접 관리하며 지어준 것이니까. 하지만 뮤비라는 모든 갈등을 떨쳐내며 문 밖으로 발을 딛었다. 카시안의 애정 때문에 결정한 결혼이 아니었다. 그의 전정을 위한 결혼이었다. 세 가문 밖에 없다는 카르민이 되어, 세 개로 갈린 힘들 중 둘을 그에게 넘겨주기 위한 결혼이었다. 혈통 따위는 재껴 버리고 가주가 되리라! 가주가 되어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리라! 그것이 뮤비라가 각오한 결심이었다. 그 때문에 테밀시아의 곁을 영영 떠나게 된다고 해도 후회는 없었다. "왔어?" 뮤비라가 인사를 하기 위해 테밀시아의 처소를 찾았을 때, 그는 막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 내고 있었다. 뮤비라는 화사하게 웃으며 테밀시아의 옆에 놓인 수건을 들고 그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테밀시아는 수건으로 닦아 내는 것을 귀찮아하는 남자였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마른다……라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랄까? 하지만 그 마르는 와중에 감기에 걸릴지 모르는 터라 늘 뮤비라가 닦아주었다. 테밀시아는 언제나와 같이 고개를 약간 숙인 체 뮤비라의 손길을 느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약혼 축하해, 뮤비라." 생각보다 밝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톤 정도는 되기에 안심하는 테밀시아였다. 뮤비라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나 그의 행동 하나 하나, 그의 말 하나 하나가 공기를 타고 느껴졌었다. 그만큼 '특별'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축하 인사는 받지 않겠어요." 의외의 대답. 테밀시아는 순간 고개를 들어 뮤비라의 바다빛 눈동자를 보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냉혹함을 감춘 부드러운 눈동자였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 냉혹함 뒤로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미처 무엇인지 깨달기 전에 뮤비라가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다시 덮어버렸다. 그로써는 상당히 당황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테밀시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뜻이지?" "축하 인사는 뒤로 미뤄주세요." "결혼 때 하라는 건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장난기가 섞여야 하건만……. 테밀시아는 속으로 한탄했지만 지금처럼 평소와 같은 목소리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아뇨. 제가 자하라 가의 가주가 됐을 때 듣겠습니다." "……!?" 테밀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뮤비라는 그것을 막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테밀시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것은 친구의 포옹과 다를 바 없었지만 뮤비라에게는 스스로 감탄할 만큼 대단한 행동이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무언가를 짓누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전 뮤비라입니다. 뮤비라는 누구의 것이지요?" "……나의 것." "맞습니다. 그것을 절대 잊지 말아주십시오." 뮤비라는 천천히 테밀시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테밀시아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하얀 수건이 천천히 떨어져, 고개를 숙인 체 무릎을 꿇고 있는 뮤비라의 머리에 가 살짝 앉았다. 마치 신부의 배일처럼……. 뮤비라는 천천히 테밀시아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가 댔다. "당신께 나의 의지를 맹세합니다. 나의 로드이시어." 화려한 미사여구가 필요 없는 오히려 짧기에 절대적인 마스터의 맹약. 자신의 모든 것, 그것이 재산이던 명예 던 심지어는 목숨이던 아니 그것이 설령 영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것'이라면 절대 '로드'를 위해 쓰겠다는 의지의 맹약. 기사의 충성처럼 강요 할 수 없는 평생의 단 한번의 맹약. 뮤비라는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것은 몇 안 되는 상호적인 맹약 중 하나기에, '로드'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루어 질 수 없었다. 답을 내려야 하는 테밀시아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침착했다. 마치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덤덤했다. 그럼에도 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대의 의지가 진실로 나에게 향한 것임을 인정한다. 나의 의지의 반려여." 항상 함께 하는 의지, 때문에 의지의 반려라 불리는 절대적인 '종'. 백년동안 단 네 번 이뤄졌다는 의지의 맹약은 이렇게 조용히 맺어졌다. 아무도 없는, 그다지 크지 않은 조용한 거처. 그것도 한쪽은 여행 복 차림이고 한쪽은 목욕가운을 걸친 우습기 짝이 없는 몰골로 이루어진 이 다섯 번째 맹약이 앞서 성립된 그 어떤 맹약보다도 격렬하게 제국을 휘감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맹약을 한 장본인들마저도 말이다. "생각보다 넓네." 수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초라한 행색의 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초라하다' 보다는 '더럽다' 정도? 이제는 굳어서 움직일 때마다 덩어리째 떨어지는 체액과 피딱지들과 흙먼지가 잔뜩 엉켜 붙은 몸뚱이와 옷.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로 꼽힐만한 행색을 한 세 남자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비록 그중 두 명의 목적지에 불과했지만, 일차적으로 따지면 일단은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셋 다 좋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생각보다' 라니?" "응? 뭐가?" "방금 '생각보다' 라고 했잖아?" "잘 못 들었겠지." "그런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군. 서둘러 내려갈까?" 그나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두 명의 남자 뿐으로, 나머지 한 명은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나머지 한 명 제외한 두 명의 남자가 몬스터의 루트를 알면서도 수도까지의 최단 거리를 고집했기에 여지껏 몬스터 숲을 헤치고 왔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 두 남자가 월등히 강했기에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목숨이 열 개라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신체의 어딘가는 시원하게 사라져 있는 상태로 있는 가……. 제멋대로인 한 남자와 설득 당한 다른 남자, 이 둘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을 실컷 해본 남자는 다름 아닌 릭이었다. 제멋대로인 남자는 먼지에도 아랑곳 않고 한가하게 자리에 누워 있었고, 설득 당한 남자는 마치 수도를 처음 보는 양 계속해서 밑을 내려보며 구경하고 있었다. 용병인 그가 용병길드가 있는 수도를 안 와 봤을 턱이 없기에 그의 행동은 이해 불가능이었지만, 진짜 처음인 릭이 수도에는 관심 없고 바닥에 자빠져 헉헉대는데 정신이 빠져 있는 것을 보면 다 그렇고 그런 법(?)이다, 라고 넘어갈 수 있었다. 시륜은 몸을 반 바퀴 굴러 자리를 잡더니 두 팔로 턱을 괴고, 옆에 누워 호흡을 고르고 있는 릭을 보며 말했다. "나도 서둘러 가고 싶긴 하지만, 이쪽이 문제지." "……그렇군." "요즘 젊은애들은 체력이 약해서 문제라니까." "……그렇군." 전자의 대답 앞에 깔린 침묵이 헉헉대는 릭을 살피는 시간에 대한 공백이라면, 후자의 대답 앞에 깔린 침묵은 자신의 나이를 고려 해 조금 망설인 것이었다. 물론 그런 속내를 나머지 두 남자가 알 턱이 없지만 말이다. 무하는 호리호리하긴 했지만 키가 퍽 장신이었고, 목소리가 조금 앳띠긴 했지만 경륜이 제법 되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침착함이 배여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를 이십대 말이거나 삼십대 초반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한편, 힘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릭은 기가 차 미칠 지경이었다. 용병인 아버지 밑에 커, 여간한 군인보다 월등한 체력을 자랑으로 여겼던 그다. 헌데 이 괴물 둘은 순식간에 자신을 연약한 요즘 젊은이들로 밀어붙이고 납득해 버리는 게 아닌가? 저들의 기준에서 '요즘 젊은이'가 아니려면 최소 파 등급의 용병은 되야 할 것이다. 아니, 또 모른다. 자기 기준이 절대 기준이라 생각하는 시륜이라면 자기 정도는 되야 보통으로 쳐줄지도. 그럴려면 하 등급은 되야 하지 않을까? 어느새 호흡이 안정됐지만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다. 그의 옆에 누워있던 시륜은 언제 일어났는지 무하의 옆에 가서 대뜸 손을 내밀었다. "뭐지?" "물 줘." 함께 다니는 며칠의 시간동안 무하가 가지고있는 팔찌의 위력을 심심치 않게 보아온 시륜 이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무하가 건네주는 물통을 받아 몇 모금 마신 시륜은 릭에게로 걸어갔다. 그은 계속 낑낑대고 있을 뿐, 일어날 시도조차 못하고 있었다. 시륜은 가차없이 릭의 얼굴에 차가운 물을 들이부었다. 보통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행동이었지만, 릭은 익숙한지 발끈조차 하지 않고 스르륵 일어났다. 공연히 반발했다가는 어떤 식으로 보복을 당할지 상상도 안 갔다. 시륜에게 있어 릭은 보살펴야 하는 애물단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무하를 대할 때와 그를 대할 때에 노골적으로 차별적인 행동을 보여 왔던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자존심상 반박도 못하고 있는 릭이었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무하는 똑같이 대한다는 것 정도? 물론 둘에게 똑같이 무뚝뚝한 것뿐이지만, 그것에라도 위안을 삼지 않고서는 처량함에 지쳐 홧 병이 도져 버릴 것이다. "피곤한 건 알지만, 여관에서 편히 쉬는 것이 더 낫을 거다." 물벼락을 맞고 끙끙대며 일어나는 릭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무하는 천사 그 자체였다. 시륜은 말에 폴짝 올라타 무하에게 물통을 던졌다. 무하는 그것을 허리에 묶으며 마르스 쪽으로 걸어갔다. 릭도 비틀대며 마르스 쪽으로 걸어가면서 내심 훌쩍였다. 야생마인 마르스는 무하 외의 사람이 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릭만 다가오면 살벌하게 눈을 치켜뜨곤 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구박만 받는 릭은 이제는 그냥 포기 상태였다. 무하는 잔뜩 지친 릭이 말에 올라타는 것을 도와 준 다음에 앞서 달려가고 있는 시륜의 뒤를 쫓았다. ============================================================================= 수정하다가 쓴겁니다. 전 이미 수정에 들어갔고 때문에 연재가 느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수정보다 쓰는 것에 맛들였지만.... 별 수 없지요. 아, 혜사모의 가입에 대한 문의가 잣더군요(히죽) 혜사모에 가입을 하기 위해서는 "혜영양 찬양가" 가를 '직접' 작사, 작곡하여 음성 메일로 혜영양에게 보내면, 혜영양이 직접 심사하여 자신의 추종자를 꼽아 줄겁니다. 후후후.........탕!..........철푸덕(윗쪽에서 들려오는 소리)"헛소리한 대가다." 아무래도 혜영양인듯.......쿨럭 그럼 이만^ㅡ^ ps. 이라사님! 올렸어요! 그림 줘요! 그림! +.+ [연재] 아해의 장-175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들은 그리 좋은 여관을 잡을 수는 없었다. 고급 여관에서 상거지 행색을 한 그들을 받아줄 턱이 없었던 것이다. 또, 자신들의 인식을 달리해줄 특수 아이템,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침대로 들어가기 전에 목욕을 먼저 하겠다는 약속 하에, 그럭저럭 쓰러지지는 않을 것 같은 여관에 자리 잡은 처량한 세 남자였다. 무하는 욕실로 들어가는 릭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테이블에 앉아버렸다. 다른 남자의 알몸을 보는 건 둘째치고, 이런 여관의 욕실이 그리 클 리가 없기 때문에 혼자 여유 있게 쓰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얼굴을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슷한 이유였는지 시륜이 그의 앞에 같이 자리잡았다. 주인의 딸로 보이는 여자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뭐 드시겠어요?" 말 자체로 보며 별 하자가 없었지만, 문제는 말투였다. 노골적으로 깔보는 시건방진 말투에 무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두건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뭐 먹을까?" 무하가 질문을 했지만 시륜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여자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싸구려 여관의 딸로 살면서 오기만 넘치는 거지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냥 흘려버린 것이 있었다. 바로 시륜의 흔하지 않은 황금빛 고양이 눈이었다. 무하는 그동안 시륜의 성질머리를 잘 보아 왔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저 여자를 그가 알아서 해결해 주리라 믿고 메뉴판에만 정신을 쏟았다. 이런 말은 뭣하지만, 성질이 뭣 같은 일행이 있으면 귀찮은 일에 잘 휩쓸리긴 하지만 분명 쓸모는 있다. 역시 '개똥도 쓰기 나름'인 세상이다. "어이, 무하." "……?" "길드에는 언제 가볼 생각이야?" "글쎄. 일단 탄원 먼저 넣고 가봐야겠지. 왜?" "내 생각에는 탄원을 넣어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데?" "역시 그럴까?" "아아. 몬스터가 대대적으로 난리를 부리고있다면 어차피 탄원도 봇물 터지듯 밀려들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작은 마을의 탄원쯤은 그냥 씹어버리지 않을까? 영주가 있는 마을도 넘쳐나는데." ……무하가 판단하기로 시륜이 선택한 방법은 분명 '무시'였다. 그것도 철저한 개무시. 여자의 얼굴이 시뻘게지는 것을 힐끔 본 무하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꽤나 적절한 방법이었다는 칭찬의 제스처였다. 이런 여자는 바락바락 대드는 타입은 많이 대해왔겠지만 이런 식으로 고난위도의 방법을 당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적응이 없기에 더욱 쉽게 열이 뻗치겠지만 가만히 있는 손님에게 시비를 건다는 것은, 손님으로 하여금 그 여관을 울궈 먹을 수 있게 하는 빌미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별 도리가 없을 터였다. 만일 종업원이라면 해고당하는 것을 끝으로 끝나겠지만 딸내미라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둘이 그렇게 정답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욕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릭이 나왔다. "배고파요!" 목욕을 하면서 기운을 제법 차렸는지 당장에 밥을 찾는 그를 보며 시륜은 알게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같은 일행이 식사를 원하는데 계속 무시하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시뻘게진 얼굴로 이를 갈고 있는 여자를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는데 아쉽게 됐다. 무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먼저 씻겠어." "아아." 무하는 시륜의 시쿵둥한 답을 들으며 욕실로 향했다. 자신을 구박하는 시륜과 함께 있자니 왠지 자리가 불편해 지는 릭이었다. 밥을 먹자고는 했지만 먼저 주문하기도 뭣했다. 일단 그가 연장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여지껏 구박 당해 온 게 은연중에 발휘해 왠지 주눅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배고프다며?" "예? 아, 예." 다급히 메뉴판을 뒤적이던 릭은 슬쩍 말했다. "근데 무하님 오시길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먼저 시켜 놓으면 알아서 오겠지." "네에……."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메뉴판에 온 신경을 쏟는 릭에게 시륜이 넌지시 물었다.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예? ……아." 한참 머뭇거리던 릭은 뚫어져라 자신을 보며 독촉하는 시륜의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무하님께 검을 배우고 싶어요. 전 용병이 되고 싶거든요." "무하가 가르쳐 준다고 했단 말이야!?"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시륜을 못마땅한 얼굴로 잠시 보던 릭은 마지못해 답했다. "아직 말도 못 꺼냈어요." "그럼 그렇지." 노골적인 무시를 당하면서도 반박할 말이 없는 처량한 릭이었다. 릭은 울쌍이 되서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작지만 그래도 마을에서는 제법 알아주던 싸움꾼의 체면이 사정없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생각 외로 무하는 일찍 나왔다. 채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나왔다면 말 다한 것이다. 무하는 자리에 앉아 시륜에게 들어가라고 말했지만, 그는 청결과는 그리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던지 막 나오는 밥을 택했다. 여자가 자신을 진짜 거지 취급하건 말건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음식의 맛은 최하였다. 빵은 너무 푸석했고 스프는 물에 무언가 타고 끓인 건 분명했지만 너무 묽었다. 고기는 고약한 냄새가 나서 여간한 비위가 아니면 먹기 힘들 듯 보였다. 시륜은 노골적으로 짜증을 부리면서 뒤척거리고 있었고 릭은 익숙했기에 별 반응 없이 먹고 있었다. 그리고 무하는 약간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꿋꿋이 먹어댔다. "릭." "네!?" 한창 식사를 하는 중에 부른 것이라 놀랄 수도 있겠지만, 정도 이상의 반응이라 되려 더 놀라 버리는 무하였다. "뭘 그리 놀래?" "아, 아뇨. 잠시 딴 생각 좀 하고 있었거든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탄원을 넣으러 가자고. 특별히 할 일 없지?" "네." 할말이 끝났는지, 무하는 주위에 신경을 끊고 먹는 것에 집중했다. 함께 다닌 지 제법 됐음에도 너무나 무관심하고 무뚝뚝한 무하를 보는 릭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라면 탄원을 넣는 것과 동시에 무하와의 인연은 끝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험가인 페른 일행이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 다 주기로 했지 무하가 그러기로 한 것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그는 값비싼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몇 안 되는 프리급 용병이 아닌가? 시륜은 입만 벙긋 벙긋 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릭을 재미있다는 눈으로 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이, 무하." "……?" 불길한 미소를 짓는 시륜을 보며 릭은 입안이 바싹 말라붙었다. '저 사람이 왜 또 저러나?' 진땀을 흘리는 릭을 보며 씨익 웃는 시륜이었다. "이 녀석이 네 제자가 되고 싶다는데?"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는 무하를 차마 마주 할 수 없었던 릭은 고개를 푹 숙이며 진땀만 흘려 댔다. "안돼." "……!" 예상하고 있었던 답이었지만 기분이 울적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한번의 거절로 물러설 릭이 아니었다. "자질이 부족할 지 몰라도, 저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 있어요!" "자질도 노력도 문제가 아니야." 무하는 물을 들이킨 다음에 말을 이었다. "나의 유파는 단 한 명의 제자만 받아들인다." 유파라니! 그것은 무하가 정식 검술을 배웠다는 것을 알려주는 단어였다. 여기서 시륜과 릭은 또 다른 의문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통이 있는 고급 검술을 바탕으로 세력을 갖는 집단, 유파의 일원이라면 그것이 문하생에 불과할 지라도 제국의 근위 기사 자리 정도는 꿰차고 있어야 정상이다. 헌데 이 남자는 단 한 명의 제자, 즉 후계자이면서 기껏 용병에나 머물고 있지 않은가? 둘의 생각이 급격히 확장되는 것을 막은 것은 이어지는 무하의 냉정한 말이었다. "그 한 명의 제자로, 나의 유파의 또 다른 후계자로 네가 적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구나." 요크노민같은 경우에는 기본적인 체력훈련과 유파 외의 호신술을 알려 주었을 뿐이었기에 괜찮았지만, 릭이 원하는 건 그런게 아닐 터였다. 그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닌건 아닌 것이다. 무하는 마지막 빵을 집어들고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지. 피곤하군." 올라가는 그의 뒤로는 의미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욕실로 가는 시륜과 시무룩해져서 음식을 뒤적거리고 있는 릭이 있었다. 날이 밝았다. 어제 무하가 미리 말해 두었기 때문에 다들 일찍 일어나 있었다. 시륜도 무하가 길 안내를 부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했다.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 여관을 나왔다. 무하는 유시리안이 알려 줬던 용병 길드의 위치를 다시 곱씹어보며 시륜의 안내를 따라 탄원을 넣는 건물로 향했다. 탄원이 넣은 다음에는 용병 길드로 갈 생각이었다. 유시리안이 워낙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조금 고생을 하겠지만 무난하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길드에 가입한 후에는 바로 등급 조절 신청을 해서, 프리급으로 올라갈 생각이다. 그래야 고급 의뢰를 받을 수 있다. 현재 돈이 바닥이었기 때문에 필히 그래야 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삼층 짜리 건물에 도착했다. 황실에서 한때 백성의 불만은 듣고 해결해 준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며 지어 놓았던 건물이다. 물론 그것은 이 건물을 짓도록 명한 황제 대에서만 이루어졌었다. 헌데 현 황제가 득위를 하자마자 다시 그 건물, 탄원소를 운영하게 명한 것이다.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은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바로 그 점을 황제가 노린 것이다. 탄원소에는 사람들이 무척 붐비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어차피 그곳에 탄원해 봤자 불만이 해소 될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백성들이 아닌가? 아침부터 붐비는 탄원소를 보며 제일 먼저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륜이었다. 릭은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 청년일 뿐이고, 무하는 그 어떤 기현상을 보더라도 이 세계가 원래 이러려니 하는 남자였던 것이다. "몬스터 사태 때문인가……?" "아마도……." 무하는 긴 줄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떤 일로 이들이 이곳까지 몰려드는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탄원을 넣기 위해서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난 용병 길드에 가보겠어. 오는 길은 알겠지, 릭?" "네? 네……." 주눅이 든 듯한 릭이지만 무하는 그것을 배려해 주지 않았다. 시륜은 염려의 말을 해주었다. "길드는 제대로 찾아 갈 수 있겠어, 방향치씨?" "아마도……." 시륜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릭에게 말했다. "그럼 난 살 것들이 있어서." "아, 네!" 반가워하는 릭을 보며 그냥 있어볼까, 하는 심술궂은 생각을 잠시 해보는 시륜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바쁜 몸이었기 때문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긴 줄 앞에서는 속절없이 물러서야 했다. 용병길드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매끈하게 닦여진 바닥에 제법 고가로 보이는 장식품들로 치장되어 있는 벽에, 제법 잘 꾸려 놨다고 봐줄 만 했다. 건물은 5 층으로 나뉘어 있어, 각 업무가 신속하게 처리되고 있었다. 무하는 안내를 맡은 사람에게 물어, 가입 신청이 2 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무하가 가입 신청을 하는 곳에 가서 안내자에게 말을 걸자, 그는 무하를 위아래로 살펴보다가 말했다. "무엇을 다루시오?" "검." "손 좀 내밀어 보겠소?" "……." 그는 무하의 곱상한 손을 들여 보다가 이내 조소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가보시오." "실력으로 봐주시오. 사정이 있는 '몸'이니." 용병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복잡한 과거, 비밀 얽힌 사연들이다. 안내자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내였기에 무하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손짓으로 어떤 문을 가르키며 들어가라 했다. 유시리안의 말에 따르면, 경력 있는 용병이 일차 심사를 보는데 떨어져도 다음 기회가 있다고 한다. 그건 실력을 보여주는 것인데, 어떤 방으로 안내를 받게 된다고 했다. 그 방은 이공간으로 들어가는 마법진이 있다고 한다. "과연……!" 무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발동되는 마법진을 감탄어린 눈으로 보았다. '페르노크'의 거처 지하에 있던 마법진에 비하면 단순하고, 서린 기운도 약했지만 무시 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리안이 마법진이 발동되면 이공간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이공간 안에는……." 무하는 말을 매듭 지을 수 없었다. 갑자기 깔린 어둠 속에서 누군가 무하에게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하는 움직일 생각도 안하며 자신의 말을 생각으로써 이었다. '분명 다섯의 환영이 덤벼든다고 했지. 환영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 무하는 환영 따위에 휘둘릴 만큼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다섯 개의 살기를 느끼면서도 별 감흥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 다섯 개의 살기가 그의 몸을 날카롭게 스쳐지나갔지만 그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지 계속 그대로 있었다. 다음 순간 사방이 밝아지면 처음 방안의 모습으로 변했다. 마법진의 한가운데는 아까는 보이지 않던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무하를 보고 있었다. 무하는 그녀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천천히 목례를 하고 물었다. "합격입니까?" "……추, 축하드립니다." "등급 조절을 신청하고 싶습니다만." 그 말에 여자는 조금 샐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길드 소속, 카 등급 마법사 사라가 증언합니다. 성함이?" "무하." "길드 소속, 무하가 카 등급으로 승급 됐음을 증언합니다." 사라의 말은 뭔가 잘 못 됐다. 무하는 지금 길드에 소속되기 위해 테스트를 걸친 것이고, 등급 조절은 아직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라는 이미 무하가 길드에 소속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현혹되지 않는 정신을 갖춘 자가 일차에서 떨어질리 없다고 판단 한 것이고, 그리 틀리지만은 않은 판단이었다. 무하는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다시 목례를 하며 나왔다. 사라의 말은 마법구를 통해 바로 길드 소속란에 입력이 되었기에, 밖에서 기다리던 남자는 놀란 눈으로 무하를 보아야 했다. 그는 무하에게 길드 소속의 증표를 건네주었다. 만일 단에 소속이 된다면 단의 증표를 받게 되겠지만, 이곳은 길드였다. 용병길드의 상징인 '교차된 검과 지팡이'가 양각으로 새겨진 메달이 무하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 것이 띄고 있는 검은빛은 무하가 카 등급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무하는 무난히 일이 끝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죄송합니다ㅡ.ㅜ 제가 좀 아팠습니다;;; 덕분에 수정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끙끙대기만 했다는.....;;; 흠흠.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일층으로 내려오고 있는 무하의 귀에 약간 앙칼진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다고 했잖아!" "하 등급도 없어서 못 쓰고 있습니다. 돈이 썩어 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아야죠." 두 여자의 접전이었다. 내용을 보아하니 한 명은 고객으로 카 등급을 원하는 모양이고, 다른 한 명은 용병 길드의 직원인 모양이다. 무하는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다' 라는 부분에만 귀를 쫑긋 세우며 밑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하 등급이라면 지금 남은 인원이 딱 셋 있습니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단 말이야!" "몬스터 사태로 금화를 수레 체 퍼부어도 카 등급을 고용하는 게 어려워 졌습니다. 이쪽에도 사정이라는 게 있다구요." "이……!" 손님으로 보이는 여자는 뭐라고 더 말해보려다, 그래 봤자 변하는 건 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나갈 생각은 없는지 손톱을 뜯으며 초조하게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보인 여자의 외모는 생각 외로 앳띠었다. 잘 쳐줘서 봐도 18살을 넘지 못할 듯 보이는 그녀는 무척 귀여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동그랗고 큰 눈은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녀를 순진하게 보이도록 해줄 것 같았다. 날렵한 코며 작고 붉은 입술은 도토름해서 남자들의 보호심리를 작동시키게 하는 얼굴이었다. 무하는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나가는 문이 그쪽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용이 괜찮다면 의뢰를 맡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현재 무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재정적 빈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색 고향'으로 갈려면 카 등급이 아니고서는……. 하 등급이라도 스물 이상은 족히 되어야……." 무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회색 고향'이라면 북쪽 미지의 대륙, 바로 밑에 있는 '북쪽 설원' 안에 존재하는 늪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설원지대를 통과해 온 이도 없거니와, 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다 하여 미지의 대륙이라 불리는 땅덩이 바로 밑에 존재하는 늪지대답게 온갖 위험이 난무하는 곳이라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 귀여운 여인이 왜 그 살벌한 곳으로 가려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돈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것만은 납득할 수 있었다. 누가 그 사신의 땅을 자처해 가겠는가? 하지만 무하는 내심 미소했다. 그의 다음 목적지이자, 시륜의 원래 목적지가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릭은 몰라도 무하는 시륜과 함께 그곳까지 가기로 이미 약속을 해놨던 터였다. 상당한 실력자이긴 하지만 시륜 혼자서 그곳까지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무리 지어 가기에는 그곳을 가는 이유가 너무 개인적이라 난처해 할 때 마침 마찬가지로 실력자이자, 혼자 움직이는 무하를 만난 것이 그에게는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실력자가 쓸데없는 말은 삼가는, 비밀유지에는 더 없이 좋은 남자라는 것은 말 그대로 금상첨화였다. 아무리 목청을 돋군다 해도 없는 건 없는 것! 레일리아는 애써 다듬은 손톱이 사정없이 뜯겨 나가고 있음에도 그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평소 지식만큼이나 외모에 신경을 쓰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상황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필히 회색 고향으로 가야 했다. 아니, 가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했다. 그러려면 그녀를 보호해줄 전사가 필요하다. 그것도 막강한! ……하지만 평소에도 고용하기 힘든 카 등급의 용병이, 현재 몬스터 사태를 맞이하여 한가한 몸으로 있을 턱이 없었다. 평소의 몇 배 이상 되는 보수와 대우를 받고 어디선가 싸우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그들을 불러올 수 있는 이는 황제뿐일 것이다. 물론 초 일류급 근위 기사들을 수백이나 거느리고 있는 황제가 그들을 불러올 턱이 없지만 말이다. "용병이 필요합니까?" 레일리아는 차분하고도 무게 있는 목소리에 안색이 환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보인 것은 장신이긴 하지만 마른 몸을 가진,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수상한 남자였다. 단숨에 얼굴이 굳은 레일리아를 태연히 앞에 두고 남자는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좀 전에 들었습니다. 회색 산맥으로 가신다구요? 저에게는 카 급 전사 일행이 있습니다. 저희 둘을 고용하고 싶으시다면 내일까지 저희가 머무는 여관으로 와……." 남자가 뭐라 더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레일리아는 듣지 않았다. '카 급 전사' 라는 말에 이미 이성을 반쯤 상실한 상태였던 것이다. "좋아! 지금 당장 계약하자! 단, 실력이 확인 된 시점에서 계약금을 주겠어!" "그럼 내일 여관으로 오십시오. 일행도 지금 볼일을 보고 있는 중이니. ……아, 그러고보니 그 친구도 계약건을 물고오면 어쩌지……." 갑자기 말을 흐리는 남자에게 레일리아는 확실히 못 박아두고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내일이야! 실력이 확실하다면 저희 측으로 오는 것으로 약속 된 거다!" 서둘러 빠져나가는 그녀를 보며 '아직 통성명도 안 했는데……' 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남자는 물론, 무하였다. "뭐야?" 생각 외로 시륜은 반기지 않았지만 무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난 돈이 없어. 때문에 겸사겸사 의뢰 받은 거야. 어차피 가야 하는 거, 돈도 받고 그쪽에서 주는 음식 먹고 불침번도 널널하게 서고……. 좋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시륜도 상당히 계산적인 남자였기 때문에 무하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릭이 끼어들었다. "저는요?" "……."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라 무하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시륜이 해주었다. "넌 네 마을로 돌아가야지. 여기까지 데려다 준걸로 고마워 할 수 없는 거냐?" "무, 물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전……!" "그래? 그럼 더 할 말 없지?" 냉정하게 릭의 말을 끊으며 화제를 원래대로 돌리는 시륜이었다. "그래서 내일 언제 온다는 거야?" "아침일걸?" "흐음……." 분명 아침에 올 것이다. 그녀가 원한 건 자신이 아닌 카 급 전사 시륜이었기 때문에, 그가 다른 의뢰를 받아들인다면 난처해지는 건 그녀 쪽이니 말이다. "보수는?" 역시 '사회'에 속해 있는 생물체는 금전에 약할 수밖에 없는 법인 모양이다. "원하는 만큼 준다는데?" "하긴……. 회색 고향은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곳이니까." "그 생환이 힘들다는 곳에는 왜 가려는 거냐?" "비밀이야."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딱 잘라 말하기 싫다는 의사를 보인 시륜에게 굳이 더 묻지 않는 무하였다. 한편, 릭은 어이가 없었다. 생환이 어렵다는 그곳을, 단지 여기까지 동행했다는 이유로 함께 가길 강요했다는 것인가? 릭은 굳이 자신의 생각을 속으로만 묻어두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무안함뿐이었다. 예상외로 무하가 답했기 때문이다. "나도 회색 고향이 어떤 곳인지는 대충 알고 있어. 때문에 한번쯤은 가보고 싶었지. 마침 강한 녀석이 함께 가자고 하니, 잘 됐잖아?" "……." 릭은 퍼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하와 시륜은……꽤나 잘 통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릭의 앞에서 둘은 보수를 받으면 일단 이 썩어 가는 여관부터 벗어나자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의 옆에는 메뉴판을 가지고 온 여관집 딸이 있다는 것을 잊은 듯이 말이다. 식은땀을 흘리는 릭은 보이지도 않은지 둘은 자신들의 대화에 푹 빠져 있었다. "보수를 받으면 내가 한턱 내겠어! 음식 잘하는 곳을 알고 있거든!" "어떤 음식을 취급하는 곳인데?" "코스 별로 있는데 역시 스페셜 코스가 최고지! 일단 시작은……." ……절로 한숨이 나오는 릭이었다. 아침이 채 되기도 전에, 무하는 욕실로 들어갔다. 다른 녀석들이 들어오기 전에 얼른 씻고 나갈 생각이었다. "이것도 습관 되겠군." 얼굴을 가리는 것. 그것은 형, 테밀시아가 자신을 찾을 것을 예상하여 행한 것이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번도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한 것을 보면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가리고 있는 것은 이미 그것이 편해져서일까? 무하는 거추장스럽게 시야를 가리는 두건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옆에 있는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뿌옇게 물기가 앉은 그것을 손으로 문지르자 대충 얼굴을 감별할 수 있었다. 이질감.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제일 먼저 느껴야 하는 씁쓸한 감정에 무하는 쓰게 미소했다. 그 미소는 눈가에만 살짝 어렸다 사라졌을 뿐, 그의 얼굴 전체에 퍼지지는 못했다. "얼굴이 보기 싫은 것인가? 내 것이 아니라서?" 무하는 미지근한 물 속으로 잠수했다. 막 갈아서 깨끗한 물이 기 분 좋았다. 귓가에 멍하게 울리는 소리들 중 불쾌한 것이 감지되자 무하는 벌떡 일어났다. 그 소리는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발 소리였다. 무하는 욕조에서 나와 가운을 대충 걸치고, 얼른 두건을 머리에 쌌다. 전에 미리 빨아 두었기에 망정이지, 더러운 천을 뒤짚어 쓸 뻔했다. 무하가 그것을 묶음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어? 무하?" 시륜이었다. 그쪽에서도 아무도 없을 때 씻고 싶었던 것인지 누군가 있다는 것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원래라면 안에 인기척을 분간할 수 있었겠지만, 워낙 기척이 미미한 무하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무하는 매듭 밑으로 길게 늘어지는 천들을 머리카락인 것 마냥 두 손을 이용해 등뒤로 넘겨버리고 바구니에 담겨 있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시륜은 어깨를 으쓱이며 상의를 벗었다. 의외로 그의 몸은 무하의 것처럼 말라있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곳에는 반드시 존재하는 근육이 그를 녹록하게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게 했다상의를 벗자, 그의 팔에 장식구가 많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의외군." 척 봐도 고가로 보이는 것들을 하나도 아니고 다량으로 달고 다니는 모습은 확실히 의외였다. 무척 궁핍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유품이야." "아아." 시륜이 장식구를 벗어 모두 상의에 올려놓았을 때쯤에 무하는 옷을 전부 꿰어 입었다. "그럼 먼저 가겠어." "아아." 시륜이나 무하나 이곳에서 하나만 남는다는 것이 달가운지 무척 서두르고 있었다. 무하는 매듭 밑으로 내려오는 두 가닥의 천 조각을 가지고 돌고 있는 두 펫(?)에게 손짓하여 자신의 어깨로 얌전히 올라가게 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에서 혼자 펄럭이는 두건은 상당히 괴기스럽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더러운 테이블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레일리아의 모습이었다. "일찍 오셨군요?" "눈이 일찍 떠진 것 뿐이야." "실례지만 나이가?" "16살! 뭐 잘 못 됐어?" "16살이라……."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 판단되자 무하는 더 이상 꺼릴 것이 없어졌다. 그는 레일리아의 앞에 태연히 앉아, 말했다. "난 무하. 그쪽은?" "……!"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기사가 발끈해서 검 자루에 손을 갖다 댔지만 무하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레일리아는 얼굴을 붉힌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매서운 눈으로 무하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네 일행이 카 급이 아니라면 네 녀석 입을 짓이겨 놓겠어!" 무하는 거친 그녀의 말에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여기 주스 한잔. 아, 뭐 먹을 건가?" "……필요 없어." ……정정하겠다 답한다기보다는 무시해버렸다는 말이 더 적절할 듯 싶다. 이를 가는 듯한 느낌이 도는 답변이 되돌아 왔지만 무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귀족이 행차해서인지 빠르게 가져온 주스는 예전의 쉰 듯 한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신선한 것이었다. 주인장 식구들이 먹을 것이었다던가, 지금 가서 사왔다 에 표를 주고 싶은 맛이었기에 무하는 나중에 일행이 오면 모처럼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올 것 같으니 뭐든 시켜 보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그때까지 이 앞의 귀족 소녀가 계속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주스를 다 마실 때쯤 해서 시륜이 욕실에서 나왔다. 제일 먼저 물기를 가득 머금은 흑발이 눈에 들어오는 이 미남자는 레일리아의 마음에 약하게나마 고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어서 보이는 기이한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는 한층 더 레일리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자로써 매력적인 미남보다는 강한 실력을 갖춘 카 급의 전사가 훨씬 더 절실했다. 때문에 그녀는 더듬거리지 않고 태연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이 사람에게 들었어. 카 급 전사라며?" "아, 일단은." 척 봐도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그녀에게 존댓말을 할 리 없는 시륜이었다. 그는 무하와는 차원이 다른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의 무하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레일리아가 그를 카 급 전사라고 알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그 멋진 버르장머리를 커버해 줄만한 실력이 있는 남자로 인식되어있다는 소리다. 때문에 그의 반말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레일리아였다. "이 사람한테 들었겠지? 나는 회색 고향으로 가야돼. 나의 호위를 의뢰하겠어." "말해두지만, 난 비싸." "얼마든지 내겠어!" "좋아. 그럼 금화로……." 무하는 직접적인 돈 문제가 나오자 주스를 마저 들이켰다. 하지만 대화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시륜이 알아서 바가지를 씌우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그 가격으로 하지! 뭐, 목숨 값치고는 싼거지만 특별히 그쯤 해 두겠어." 금화 만 오백 닢이라는 경의적인 돈을 뜯어내고는 아주 인심썼다는 듯 말하는 시륜의 얼굴은 역시 철면피였다. ================================================================== 카페에 먼저 올립니다. 즐독해 주세요^ㅡ^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귀족인 그녀로써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엄청난 금액인지라, 이런 제재를 걸었다. "단! 두 사람에게 주는 총 금액이야. 나로서는 실력자만을 고용하고 싶으니까." 시륜은 잠시 멍하니 그녀의 말을 해석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무하를 힐끔 보며 말했다. "공짜로 일할 생각이야?" "……." 즉, 자기 몫에서 한푼도 뺄 생각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무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물론 아니지. 공짜로 그곳에 가느니 안가고 말겠어." 이건 순전히 앞의 앉아 있는 귀족 소녀에게 하는 말이었다. 무하는 공짜든 아니든 이미 그곳을 함께 가기로 약속한 몸이지 않는가? 시륜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곳도 앞의 귀족 소녀에게 하는 말이었다. "네가 안 간다면 나도 안가. 살아서 돌아올 확률이 줄어드니까." ……릭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귀족 소녀를 동정했을 것이다. 결국 레일리아는 한 사람 당 만 오백닢이라는 거금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녀는 그냥 마음 편히 비싼 드레스 몇 벌 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하는 속으로 고소했다. 이름조차 모르지만, 앞의 소녀가 지금 생각하고 있을 법한 것들이 훤히 보였던 것이다. 그 작은 반지 하나가 엄청난 고가였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게 된 그다. 그것은 이런 '바깥' 세상에서는 엄청난 고가물이 그쪽 세계에서는 굴러다니는 작은 보석에 불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하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녀를 잠시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여덞살이 된 무하는 원장실에서 힘없이 나오는 예쁘장한 아이를 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때문에 농땡 사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뭘 보냐?" 한달 만에 재회한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어이없을 정도로 평이했다. 때문에 무하는 그를 오랜만에 만났다는 느낌을 전혀 가지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더러워요." "보기 싫으냐?" "네." "더러운 것이 보기 싫다는 거냐? 별거가지고 고민하는 구나." 무하는 그제서야 사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사부는 언제나 생각을 많이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하지만 통렬한 뜻이 담겨있는 말들을 내뱉는다.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지 않냐! 왜 이곳에 서서 굳이 저 광경을 보고 있는 거냐?" "……!" "가장 현명한 답은 원래 단순한 법이다. 보기 싫다면 보지 마라. 그래도 보인다면 눈을 감아버려라! 그럼 무슨 수로 네가 저 광경을 볼 수 있겠냐?" "……!" 무하의 크게 확장된 동공이 차차 가라앉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원장실로 돌렸다. 농땡 사부는 한달 만에 본 사부에게 큰절은 못할 망정 무시한다고 투덜댔지만 굳이 무하의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 인사를 강요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실하고 넬 쪽이 더 귀여워.' 내심 중얼거리던 무하는 종업원이 다시 가져다 준 주스를 홀짝였다. 그로서는 일정이나 행로 등은 들어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무관심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 어때?" 갑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묻는 시륜을 보며 내심 당황한 무하는 얼떨결에 답했다. "좋을 대로." "역시! 자, 됐지?" "……."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녀의 얼굴이 불만으로 가득 찬 것으로 봐서는 역시 시륜이 제 멋대로 행로 및 모든 걸 정한 모양이었다. 들어보지 않아도 정상인으로서는 이해 불가능의 루트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분명 단시간 코스임은 분명할 것이기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었다. 특별한 목적도 동기도 없는, 말 그대로 정처 없는 여행길이었기에 서두를 필요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답다고 해야 하나? 일단 목적이 잡힌 이상 그것을 신속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성질에 맞는 무하였다. 바로 그 점을 시륜이 이용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그리 제재를 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시륜이 잡은 루트는 의외로 정상적이었다. 적어도 전처럼 몬스터가 한창 활기를 치는 곳을 횡단 해 간다는 말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 '의외로'에서 그칠 뿐, '지극히' 정상적이지는 못했다. 무하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굳이 눈여겨보지 않아도, 주변 풍경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현실감 없는 강렬한 햇살과 풍경 자체를 일그러지게 보이게 할 정도로 일어나고 있는 아지랑이들. 강한 바람에 서서히 이동하는 거대한 모래의 파도. "왜 하필 사막이야!" 이를 악 물고 버티던 레일리아가 결국 불만을 토해냈다. 그녀로서는 상당히 잘 버텨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점을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시륜에게는 없는 듯 했다. "여기를 지나는 게 가장 빠르니까. 시간이 없다며?" "그건……!" 비꼬는 듯한 말투에 발끈해 보았지만 마땅히 이을 말이 없었다. 레일리아는 애꿎은 물만 들이키며 이를 갈았다. 역시 세상은 공평한 모양이다. 강한 실력과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시륜에게도, 분명 흠 잡을 것이 존재하니 말이다. 그의 뭣 같은 성질머리를 조금이나마 바로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이중에는 무하 밖에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중재하는 무하를 보는 다른 이들의 반응은 그리 탐탁치 못했다. 무하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둘은 상당히 죽이 잘 맞는 파트너였던 것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시륜, 이 루트를 잡은 건 네가 잘못 한 거야. 사막에 익숙한 사람은 이 중에 없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없다 잖아? 난 의뢰인의 조건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야." "알아. 그러니까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는 거지. 하지만 낮에 움직여야 하는 건 용납이 안 가는데? 원래 밤에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한시가 급하다고 들들 볶은 건 저쪽이라고!" "그렇다면 더더욱 밤에 움직여야지. 레일리아가 지친다면 더 더디어지지 않겠어?" "갑자기 웬일이셔? 역시 여자에게는 약한 건가? 하지만 밤에는 기운이 뚝 떨어져서 이동하는 게 힘든 건 마찬가지야." 여기까지는 좋았다. 여기까지만 듣는 다면 무하라는 남자에게 레일리아가 반해도 상관없을 듯 했다. 하지만 이 뒤로가 문제다. "난 더운 게 더 힘들어. 추운 게 훨씬 나." 결국 자기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더 열 받는 건 그 말을 듣고, 사막의 행군의 리더인 시륜이 휴식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열 받다 못해 황당한 것은 둘의 이어지는 대화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고파." "아, 점심때가 지났군!" ……할말없게 만드는 두 사람이었다. 무하는 자기 몫으로 온 빵을 찢어 먹고 있었다. 간혹 물을 들이키면서 부지런히 먹는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시륜이었다. "릭 녀석, 잘 돌아갔을까?" "아마도……." "흐음……. 걱정도 안 되는 모양이지?" "……." 무하는 빵을 마저 다 씹어 삼킨 뒤에야 시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도 무하에게 말 거는 것에 그리 집중하고 있지는 않았다. 자기 몫의 빵을 열심히 먹고 있었을 뿐. "아마도 릭은 돌아가지 않았을 거다." "……?" "용병이 되고 싶다고 나를 쫓아 온 녀석이야. 탄원은 핑계에 불과하지. 하지만 나에게 거절당했다고 해서 용병이 안될 녀석은 아닌 것 같거든." "……흐음." 시륜은 잠시 무하에게 고개를 돌렸을 뿐, 이내 무관심하게 물을 들이키며 다시 빵에 온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무하는 말을 이었다. 늘 차분하면서 무뚝뚝한 어조가 웬일인지 시니컬하게 변해 있었다. "용병이 무슨 용사쯤 되는 것이라 착각하는 녀석이니 말이야." 시륜은 다시 고개를 돌려 무하를 보았다. 하지만 두건 밑으로 드러난 얼굴로는 무하의 표정 따위를 살필 수가 없었다. 시륜은 슬쩍 어깨를 으쓱이고는 남은 식사에 열중했다. 욤 제국의 북쪽 끝에 존재하는 늪지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마을을 지나, 두 달 정도를 북단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안전 코스는 평소에도 시간이 많이 걸릴뿐더러, 그나마 몬스터들이 들고일어난 현 상황에서는 얼마나 걸릴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레일리아는 시간이 촉박했고, 때문에 그 기간을 논하는 와중에 나름대로 안전 코스을 말하는 시륜에게 비난을 퍼붓는 만행을 저질러 버렸다. 그것이 그녀가 지금 생고생을 하고 있는 직접적인 이유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들은 사막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로, 숲이나 초원에서 들끓었기 때문에 사막은 현재 가장 안전적이며 빠른 길로였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다들 시륜의 독재적인 리더에도 따라야 했던 것이다. 솔직히 레일리아의 고생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철없는 투정에 불과했다. 그녀는 낙타가 알아서 끌어주는 마차 안에서 윈디를 설치한 상태로 유유자적하게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익숙하지 못한 낙타를 다루며 땡볕을 지나야 했다. 때문에 되려 그들의 불만은, 편한 상태임에도 쉴새 없이 불만을 늘여 놓는 레일리아에게 향했다. 그래도 시륜은 그들과 같이 낙타를 몰며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는 더위를 타지 않는지 땀조차 흘리지 않은 채로 편하게 이동하고 있는 것이 달랐을 뿐. 무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계약금으로 반액을 미리 받지 않았다면 그냥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힘들다거나 지친다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친다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쫑알대는 레일리아의 수다가 짜증났던 것이다. 그 수다가 유쾌한 내용이라면 그나마 괜찮았겠지만, 철부지 티가 팍 나는 투정이라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사부의 말을 떠올리면서 마차에서 멀어져, 맨 뒤로 빠졌다. '더러우면 눈을 감아라. ……괜히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알아서 피해라, 라는 뜻이겠지?' 맨 앞에 나서기에는 지리를 너무 몰랐기에 맨 뒤로 빠진 것이다. 그 뒤에는 낙타에 겨우 매달려 가고 있는 인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사가 아닌, 레일리아의 하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게다가 무언가로부터 습격을 당한다면 가장 쉽게 당하는 자리에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신 사납게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살피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다 비싼 돈을 주고 고용했다는 카 급 전사의 '덤'이 다가오자 시쿵등한 얼굴을 해 보였다. 능력 있는 전사라면, 레일리아가 절대 자신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에 무하의 실력을 알아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하는 주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하지 않고 다시 물을 홀짝였다. 그는 자신이 시륜 같은 괴물이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수 현상이 일어나기 전에 물을 마셔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꽤나 많은 양을 마시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다는 것은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바보녀석! 나중에 물이 떨어졌다고 달라고 한다고 해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거의 동시에 자신의 물통을 품에 깊숙이 감췄다. 그런다고 해서 큰 물통이 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방어하는 모습을 확실하게 각인 시켜 주기에는 제법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사막을 횡단하기 시작한지 삼일이 지났다. 다들 몰라보게 더러워져 있었고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들의 주인, 레일리아가 또다시 무리한 요구를 해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뭘 잘 못 말했어? 목욕하고 싶다구! 목욕!" "하지만 아가씨, 여기는 사막입니다." "누가 몰라? 하지만 고귀한 레이디는 언제 어느 때든 몸을 단정히 해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내 말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그, 그게……!" 그녀의 호위 기사는 세 명이나 됐다. 카르민인 페르노크가 자하라 가의 파티에서 돌아올 때 거느렸던 기사가 둘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무척 많은 수였다. 게다가 얼마 없다는 카 급 전사도 있었고, 십 여명의 하 등급 용병이 있었다. 다수의 파 등급 용병까지 있는 것을 보면, 엄청난 전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말이 새삼 필요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전력들이 겨우 한 소녀의 철없는 요구에 안절부절 못 하는 꼴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시륜은 이런 건 호위 기사가 알아서 하라며 관심을 끊고 있었다. 자신이 레일리아에게 뭐라 말만하면 옆에서 감히 레이디에게 무엄하다라는 둥의 말을 꺼내기 일쑤였던 기사들을 도와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그에게는 짜증부리는 레일리아에게 물 먹이는 것보다는 꼬장꼬장한 기사들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멋진 성질머리였다. 하지만 무하는 기사들이 난처해하는 것보다는 레일리아의 입을 막는 것이 더 구미가 당겼 던 모양이다. "너 바보냐?"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요구 때문에 벌써 몇 시간이나 행군이 지체됐는지 모른다. 그 점이 무하는 짜증났다. 도대체 뭐 하자는 것인지……. 뒤에서 존재감 없이 뒤쫓아오기만 했던 무하의 갑작스런 등장은 갈팡질팡하던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뒤에서 웃으며 구경하고 있던 시륜과 계속해서 투정을 부리던 레일리아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뭐?"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한 레일리아는 멍하니 반문했다. 무하는 똑같은 어조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바보냐?" "……!?" 황당함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레일리아에게 무하는 차갑게 말했다. "아니면 바보짓 하지 말고 출발하지." "너……!" "시간이 없다고 한 건 이쪽이 아니야." 레일리아가 힘들게 입을 열려하는 노력은 알아주지 않고 무하는 매정하게 돌아서 뒤쪽으로 향했다. "너 거기서!" 무하는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낙타에 올라탔다. 레일리아는 마차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왔다. 그녀로서는 이런 모욕을 그냥 넘길 아량을 베풀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시륜이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무하는 자신의 낙타 앞으로 곧장 걸어온 그녀를 싸늘하게 보았다. 두건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레일리아는 고작 마차에서 행렬 뒤쪽으로 걸은 것으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가고 있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뭐?" "쓸데없는 말하고 싶지 않군. 아니면 의외로 시간이 남아돌았나 보지?" "이……! 당장 꺼져! 너처럼 쓸모 없는 녀석 따위, 애당초 필요 없었어! 꺼져!" 흥분하는 레일리아를 낙타 위에서 내려보고 있던 무하는 시선을 좀더 뒤로 주어, 그곳에 있는 시륜에게 물었다. "……라는 데?" "쿡쿡." 시륜은 배를 움켜쥐고 소리가 거의 안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쿡쿡……아아. 그럼 우린 해고당한 건가? 뭐, 이쪽이 잘 못해서 잘린 것도 아니니 계약금은 돌려주지 않겠어." 그러며 원래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고쳐 메었다. 무하는 그런 그를 만류했다. "나와 함께 할 이유가 너한테는 전혀 없지 않나? 우린 동행인일 뿐이니까." 그러며 낙타에서 내려왔다. 낙타에 달려 있던 간단한 짐 가방을 메고는 시륜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향이나 알려주면 좋겠군." "안 되지. 넌 나와 함께 '그 곳'에 가기로 약속했잖아? 그럼 '그 곳'에 갈 때까지는 나의 일행이야." 레일리아는 결국 한 발 물러서야 했다. 그녀가 섭외에 성공한 카 급 전사는 시륜 한 사람 뿐이었던 것이다. "둘 다 그만 둬! 난 너희에게 거금을 주고 의뢰한 의뢰자야! 내가 해고하기 전 까지는 아무도 못나가!" "난 해고 당했는데?" "그, 그건……!" "지금 재계약을 원하는 건가?" 무하는 너무나 무뚝뚝하게 시륜보다 더 바가지를 씌우기 시작했다. 그의 일탈은 곧 시륜의 일탈을 뜻했기 때문에 레일리아는 이를 갈며 그에게 금화 오백 닢을 더 얹어주기로 했다. 뒤에서 시륜이 배를 다시 끌어안고 괴롭게 몸을 떨어댔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 라니안은 언제 고쳐질까요? 라라라...( '')~~ 여튼 올립니다^ㅡ^ 즐독하세요~ ps. 참고로! 이번에는 그!!! 누.구.도. 저를 독촉하지 않았습니다!!!! +.+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사막에서 슬슬 벗어나기 시작했다. 열흘하고도 이틀이 걸린 이 강행군은 처음 몇 일을 제외하고는 아주 쾌속으로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레일리아가 떠들 기력까지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이루어 진 것이니, 상당히 아이러니 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조금 우회를 해서 마을을 들린 뒤, 설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재정비를 할 예정이다. 언제나와 같이 선두에서 맘껏 독재하고 있는 시륜과 후방에서 맘 편히 따라오고 있는 무하는, 입장은 달랐지만 서로가 제멋대로 위치를 정해 편하게 행군하고 있음은 똑같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시륜이 무하를 찾았다. 무하는 낙타를 탄 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행군이 어느새 중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속도로도 금방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앞으로 나간 무하가 본 것은 쓰러져 있는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흙투성이임에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요염함과 성숙미가 흐르고 있었다. 주변에서 군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무하는 덤덤하게 물었다. "뭐냐?" "주웠어." "그런데?" "금화 천 오백 닢짜리야." "뭐?" "현상금 붙은 범죄자란 말이지." "……뭔가, 돈벌기 쉬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동감이야." 둘은 이상한 눈으로 침을 삼켜대는 사내들의 동향은 아랑곳 않고 여자를 묶어 마차 위에 올려놓았다. 익숙하지 않은 낙타를 몰고 가는 것도 힘든데, 짐까지 관리하면서 행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시륜이 여자(실제로는 '돈'이라고 말했다)의 감시를 부탁했기 때문에 무하는 다시 뒤로 가지 않고 마차 옆에서 이동했다. 곱지 않은 레일리아의 시선은 당연히 무시한 체였다. 한밤중이 되어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때문에 다들 멈춰 불을 지피고 술을 마시며 몸을 따뜻하게 하기로 했다. 불은 챙겨온 아이템으로 피울 수 있었다. 불을 피우는 것에 불과한 파이어보다 한 단계 윗 급인 이 아이템, 히터는 무하의 세계에서는 난로라 불리는 것과 흡사했다. 사막에서 보내는 밤도 이번이 마지막이기에 레일리아는 잠깐 밖으로 나왔다. 모래가 밟히는 촉감이 전에는 더없이 불쾌했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운치 있게 느껴졌다. 그녀는 팔에 걸쳐진 쇼올을 몸에 둘렀다. 잠시 산책을 즐길 생각으로 그녀는 목적 없는 발걸음을 시작했다. 무하는 '덤'이라는 이유로 여자의 관리를 맡게 됐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여자를 자기 몫으로 받은 히터 옆에 눕히고 여분의 망토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언제 그녀가 깰지 몰랐기에 음식은 따로 챙겨 두고 자신의 몫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먹어치운 그는 물을 마시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전에 보고 놀랐던 무수히 많은 별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박혀 있는 하늘이었다. 그 하늘을 보면 이 곳이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별자리는 하나도 없고, 무수히 박혀 있기만 한 별들. 물론 이 곳에도 별자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 곳'의 것일 뿐이었다. 무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작게 몰아쉬는 한숨 속에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 사실을 깨달은 무하의 고개가 자연히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초점 잡히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깼나?" "……여기는?!" 무하의 차분한 목소리에 정신이 팍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려 했던 여자는 복부를 감싸며 도로 누웠다. 어딘가 다친 모양이었다. 무하는 치료는 시륜과 상의한 다음에 할지 말지 여부를 가리기로 판단했다. 그녀는 불쌍한 여행자가 아니라 도망치는 현상범이기 때문이다. 되려 몸이 낫는다면 계속 끌고 다니기에 불편할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무하는 그녀에게 관심을 끊고 물을 마시기 위해 물통의 주둥이를 비틀었다. 여자는 자신의 복부를 감싸다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바로 자신의 손이었다. 그녀의 양손은 쇠사슬로 연결된 족쇄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뭐야!?" 앙칼진 여자의 음성에 무하는 물통에 입을 댄 상태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자신의 손을 결박하고 있는 족쇄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본 그는 고개를 원상태로 돌린 뒤, 물을 마저 마셨다. 여자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무하를 노려보았다. 적당히 목을 축인 무하는 물통의 주둥이를 슬쩍 닦은 뒤, 마개로 꽉 비틀어 막았다. 그리고 나서야 여자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천 오백 닢." "……?" "너에게 붙은 현상금이다." "……!" 그녀는 크게 동요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금 뒤 그녀는 어설퍼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이 신지……?" "진실은 서로 아니까 그만 하지." 여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표독스럽게 변했다. 하지만 유일한 그녀의 상대, 무하는 이미 관심을 끊고 히터의 온도를 조절하고 있었기에 별 소용은 없었다. "시륜 녀석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건지." 이질적인 하늘을 올려보기 싫었던 무하는 히터 앞에 손을 내밀어 열을 쪼이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순식간에 처량한 여인의 표본이 될 법한 얼굴을 지으며 울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여자를 어찌 상대해야 할지 막막해 지는 무하였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돈을 건 자에게 자신을 넘길 녀석의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무하는 속으로만 곱씹으며 순순히 답해주었다. 이름을 알려달라는 것 가지고 티격티격 해 봤자 남는 건 없기 때문이다. "무하." "멋진 이름이네요!" "고맙군." 무언가 오버하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감탄이었다. "제 이름은 슈린이에요. 슈린 란 제피모죠. 슈라고 불러도 좋아요." "영광이군." 슈는 갑자기 눈을 내리 깔았다. 그녀의 고혹적인 매력이 흙투성이인 몸뚱이 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슈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리려는 순간, 무하의 뒤에서 세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시륜이나 무하처럼 레일리아에게 고용된 하 등급의 용병들이었다. 하나같이 단단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강해 보이는 전사들이다. 무하는 이미 셋의 접근을 알고 있던 터라 별 반응 없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슈의 안색은 지극히 나빠졌다. 그녀는 산전 수전 다 겪은 여자였다. 즉, 저 세 명의 남자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떠올려 지고 마는 것이다. 그녀의 예감을 확신시켜 주는 것은 그들의 욕망어린 눈동자와 허리끈을 만지작거리는 행위였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이 왜 접근을 했는지 뻔한 이 상황에서 무하만은 예외였다. "무슨 일이지?"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물음이었지만, 세 남자와 한 여자를 어리벙벙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질문이기도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질문이 멀쩡한 사내의 입에서 나올 법한 것이냔 말이다. 하지만 무하의 기색을 보았을 때, 진실로 무슨 일인지 묻고 있는 듯 했다.용병들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새끼! 알면서 뭘 묻냐?" "네가 고자가 아니라면 알 거 아냐?" 무하는 그들의 말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노골적인 경멸감을 내보였다. "꺼져." 하지만 그들은 무하의 기색을 읽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준에서 판단해버렸다. "자식! 혼자 먹으려는 거냐? 이런 일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덤' 주제에 어딜……!" 하며 슈에게 다가가는 그들이었다. 슈는 이를 갈며 살기를 뿜어냈지만 그들에게는 자신의 이런 반응이 더 즐거우리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반 여행자라도 거친 용병들에게 대우받기는 힘든 세상이다. 되려 아무 관심을 갖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최선일 정도다. 헌데 그녀는 일반 여행자 조차 되지 못하는 현상범이 아닌가? 죽여서 데리고 간다고 해도 어떻게 데리고 논다해도 돈이 떨어지는 현상범이 아닌가? 애당초 인격적인 대우 따위는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순번까지 정했는지 한 남자가 자신의 허리춤을 풀기 시작했다. 슈는 표독스런 얼굴로 욕설을 퍼부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시도는 멈춰져야 했다. 그녀의 앞에 도달한 첫 번째 남자의 목에, 언제 다가왔는지 무하가 검을 뽑아 갖다대었던 것이다. "……?!" "뭐……?!" 남자는 지레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스스로 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슬쩍 검에 배이고 말았다. 가느다란 선혈과 따끔한 아픔이 남자의 이성을 유감없이 날려주었다. "꺼지라고 했다." "썅! 이 새끼가 끝까지……!" 목이 슬쩍 베인 남자의 다음 순번이었던 남자가 무하의 뒤에서 거칠게 욕설을 퍼부으려 했지만 그도 슈처럼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했다. 무하가 검을 쥐지 않은, 검 집을 들고 있던 왼손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크게 휘둘렀던 것이다. 뒤에 있던 남자는 자신이 하려던 욕설을 미처 끝마치지도 못하고 뒤로 날라 가, 나무에 부딪쳐 고통에 떨어야 했다. "세 번 말해야 알아듣나?" "……빌어먹을!" 두 남자가 뛰다시피 돌아가자 무하는 슬쩍 검을 치웠다. 검이 목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남자도 번개같이 일행에게로 뛰어갔다. 슈가 멍하니 무하를 보고 있는 와중에,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더러운 새끼들……." 그리고는 히터 앞에 다시 주저앉았다. 어중간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슈는 그동안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알아차렸다. 고요한 멜로디……. 그 차분함에 취했는지 왠지 눈물이 나는 슈였다. "목마르지 않나? 낮에 땀을 많이 흘렸는데……?" 무뚝뚝한 음성이지만 그렇게 친절 할 수가 없었다. 슈는 이을 악물며 간신히 고개를 끄떡였다. 무하라는 남자는 물통을 던지지 않고 직접 들고 입구를 열어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다친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슈는 시원한 물을 힘들게 마시며 쏟아지려 하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 냈다. 무하는 물통을 돌려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바닥에 누웠다. 피곤했던 것이다. 현상범을 지키는 감시병치고는 너무 허술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에 더욱 눈물을 참아 내기 힘들었다. 슬쩍 눈가를 비비던 그녀는 갑자기 일어나는 무하의 행동에 놀라서 멈짓했다. 그가 품을 뒤지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슈는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온갖 저주를 곱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건네주었을 뿐이었다. "뭐……?" "식사다." 다시 돌아서 원래 자리로 가 눕는 그를 보며 결국 슈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숨죽여 우는 그녀를 무하는 모른 척 해주었다. ……용병들이 다가왔을 때부터 무하의 가까이에 서 있었던 여자가 있었다. 결 좋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동그란 눈동자가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쇼올이 허술 하게 풀어지고 있음에도 넋을 잃고 어딘가를 주시했다. 그곳에는 어느 새 잠이 들었는지, 가슴이 주기적으로 오르내리는 한 남자가 있었다. ================================================================= 그동안 제가 안 좋은 일들이 많아서 소설의 진전이 없었답니다....죄송...... 소설의 라인은 이미 다음 이벤트까지 구체적으로 정리가 됐음에도 더디게 된 이유가 그런 것이죠. 워낙이 제가 심약하다 보니까...(어디선가 날라오는 비수를 유유히 피하며) 정신적으로 압박감을 받으면 몸에 영향이 생기는 그런 연약하기까지한!!!!! (어디선가 무더기로 쏟아지는 돌들을 필사적으로 피하며) 훗!!!!!!!!!! 진실은 변하지 않습.........(탕!......총까지는 못 피하는...) 풀썩................. [연재] 아해의 장-179 -아해의 장- (바람의벗. 신승림) 시륜은 새벽쯤에야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뭐라 항의하는 기사들을 몇 마디의 말로 마무리 지어 버렸다. "내 임무는 회색 고향에서의 호위야. 특별히 길 안내까지 무료로 해줬는데 잔말이 너무 많군." "……." "어이, 무하!" 할말을 못 찾고 있는 기사들은 본척만척 하며 마차 옆에 기대 있는 무하를 찾아가는 시륜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보는 무하의 얼굴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지만, 뭔가를 느꼈는지 시륜이 물었다. "왜 그래? 묘한 얼굴을 해가지고……?" "……." "……?" "후우. 이런 사막에서 한나절이나 사라진 너의 재주에 놀랐을 뿐이다." "하하!" 무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낙타로 걸어갔다. 낙타가 그를 위해 몸을 숙일 필요 없이 훌쩍 올라탄 그는 뒤쪽으로 이동했다. "어? 왜 뒤로 가?" "밤에 슈가 깼다. 빈 수레에 묶어 놨지. 수레는 뒤에 있고." "흐음. 그럼 수고해." "아아." 무하가 천천히 뒤로 걸어가는 것을 본 시륜은 마차 문을 두어번 두들긴 뒤에 말했다. "이제 출발하지. 점심때쯤이면 마을에 도착할 거다." "예." 희미한 대답을 용케 알아들은 시륜은 출발을 명했다. 슈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수레에 결박해 놓은 족쇄를 신경질적으로 보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하를 반겼다. "무하씨 왔어?" "……." 무하는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생각을 해보며 낙타의 방향을 제대로 돌렸다. 행군은 앞에서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무하씨는 나이가 몇이야?" "……." "얼굴은 왜 가리고 다녀?" "……." "하긴 용병들은 비밀 투성 이니까." "……." 살갑게 구는 그녀가 적응이 안 되는 무하였다. "무하씨는 등급이 어떻게 돼?" "글쎄……." 계속 무시하기도 뭣해서 입을 열긴 했지만 뭐라 해줄 답을 해줄 말은 없었다. 어정쩡한 무하의 답에도 슈는 뭐가 좋은지 마냥 웃기만 했다. 마을에 도착했다. 사막을 나오자 마자 급속히 기온이 정상궤도로 돌아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두텁게 겹쳐 있었던 옷들을 벗어버리며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사막에서 용케 버틴 것에 대한 환호성이었다. 게다가 도적이나 몬스터들의 습격을 단 한차레도 받지 않은, 더위만 빼면 말 그대로 환상적인 행군이 아니었던가? 의외로 마을은 컸다. 사막의 여행자들을 주로 상대하는 모양인지, 제법 큰 여관도 있었다. 레일리아는 그 곳을 전부 예매하여, 대규모의 일행들에게 휴식을 선물했다. 용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맥주를 시켜 댔다. 선두 그룹의 일행들이 그렇게 한창 요란을 떨기 시작했을 무렵에야 후방 쪽에서 도달했다. 그 정도로 대규모의 행군이었던 것이다. 그 후방 그룹에는 무하와 슈도 포함되어 있었다. 슈는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실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무하는 시끄러운 식당으로 올라와 식사를 시켰다. 제대로 된 식사가 그리웠던 터였다. 한참 식사중인 그에게 시륜이 다가왔다. 그의 양손에는 각기 맥주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한잔을 무하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기 맥주 맛이 일품이야." "고맙군." 시륜이 가지고 온 성의를 생각해서 한 모금 마셨지만 밥이 더 고픈 무하였기에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시륜은 옆에 놓인 과일을 허락 없이 집어들어 베어 먹었다. "슈……현상금 헌터 길드에 돌려줘 봤자 개인에게 떨어지는 돈은 얼마 없지?" "슈? 아아, 그 여자 말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개인이 실력으로 붙잡은 것도 아니고, 쓰러 진 걸 주운 것뿐이니까." "흐음……." 무하는 무슨 꿍꿍이냐고 눈으로 물어오는 시륜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답하며 다시 질문을 했다. "언제 회색 고향으로 출발할 거래?" "글쎄. 나야 리더가 아니니까 모르겠지만 며칠정도는 쉬었다가 출발하지 않겠어? 익숙하지 않은 사막 횡단에 용병들이 지쳤으니까. 뭐, 저쪽에서 급하다며 출발하자고 한다면 출발하겠지만 제정신이라면 그런 짓은 안 하겠지. 지친 몸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 회색 고향은." "회색 고향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야? 원래 목적지도……." "회색 고향……. 돌아오지 못하는 사신의 늪지를 칭하는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겠지. 하지만 살아서 돌아 올 수는 있어. 극소수의 연구자들만 아는 것이지만, 그 곳은……." 시륜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몬스터들의 고향이야." "……!?" "이번 사태가 벌어진 상태에서 그곳이 어떻게 변했을 지 무척 궁금하군." 씨익 웃으며 맥주잔을 들어 보이는 시륜에게 응해 자신의 맥주잔에 손을 가져가 들어올리는 무하였다. 천천히 그것을 마시는 그의 눈에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아이였다.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행동 하나 하나에 품위와 예절이 배여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여관 주인의 아들은 아닐 듯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힐끔 보는 용병들의 시선에 움찟하는 것을 보면 그리 큰 강단은 없는 모양이었다. 무하가 한쪽을 계속 주시하자 시륜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그 다음에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아, 저 꼬마? 의뢰인 남동생이래."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매군." "늦동이니까." "흐음……." 관심을 끊고 다시 맥주에 주의를 돌리는 무하와는 달리 시륜은 계속 미소를 지으며 말을 뱉어냈다. "웃긴 건 저 꼬맹이가 차기 가주란다. 즉 라(장남)라는 거지." "그래?" "내가 보기엔 저 꼬맹이가 가주가 되면 그 가문은 틀림없이 망할거다." "……?" "아주 치마폭에 쌓여 있더군. 의뢰인이 사막을 횡단하는 동안 단 한번도 마차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던 걸 보면 몸도 약한 모양이야. 또래 아이라면 생소한 곳에 도착하면 구경하겠다고 호들갑 떠는 것이 당연한데, 저 심약하신 귀족 도령께서는 바로 침실로 직행하시더군." "……." "차라리 레일리아? 그 맹랑한 의뢰인이 가주가 되는 것이, 그 가문을 위해서는 좋을 듯 싶은데 말이지." "……." 무하는 반쯤 비운 맥주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자신들의 대화를 그 꼬마아이가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에게 시선을 거둔 그는 시륜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래?" "사뮤에르." 방금 흥분했던 것이 거짓인양, 시륜은 무심하게 답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여관에 자리를 잡은 지 하루가 지났다. 레일리아는 기사들을 시켜 물자 보충을 시작했다. 사뮤에르라는 사내아이는 다시 방에 틀어박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용병은 잠에서 아직도 빠져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슈였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다가 아주 날렵한 몸놀림으로 뒷문쪽으로 향했다. 무슨 심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일리아가 슈의 감시를 맡던 무하를 데리고(실제로는 끌고) 나가 버렸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녀의 현상금을 기억하는 시륜이나 용병들이 잊은 것이 있는데, 그녀의 본래 직업은 도둑이었다. 하지만 그리 스케일이 큰 도둑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 그런 고액의 현상금이 붙었느냐 하면, 그녀가 귀족 남자와 사기 결혼을 하려다 그것이 들통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시륜이나 용병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녀에게 현상금이 붙게 된 이유 뿐이라 굳이 가둬놓은 상황에서 감시가 비어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슈는 뒷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복부가 욱씬거렸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무하가 어제 밤에 대충 치료를 해주고 갔기 때문에 좋은 약도 발라져 있고 깨끗한 붕대도 감겨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빠른 몸놀림으로 여관에서 벗어나려던 그녀를 붙드는 소리가 있었다. "어디가시나, 이쁜이?" "……!" 걸걸한 목소리. 돌아보니 지난밤에 그녀를 덥치려 하던 첫 번째 남자였다. 그의 목에는 무성의한 반창고가 붙어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기분을 더더욱 더럽게 만드는 듯 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목을 만지작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잠시 인상을 찡그리던 그는 이내 씨익 웃으며 슈에게 다가왔다. 슈는 그가 하 등급의 용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이 하 등급이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 가슴에 붙은 용병길드의 팬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무하의 것과는 달리 적색 빛을 띄고 있는 그것이 남자가 하 등급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슈는 아주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시면서 뭘 물어요?" 막 깨어나 안정이 안되었던 그때와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이용할 줄 아는 프로였던 것이다. 남자는 교태 어린 슈의 목소리와 얼굴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주 만족스럽게 웃는 것을 보면 말이다. 슈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손짓하며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 요염함에 취한 남자는 멍청하게 웃으며 슈의 뒤를 천천히 쫓았다. 혼자서 먹을 요량으로, 함께 결탁(?)했던 동지들에게는 일말의 기별조차 넣지 않은 체 말이다. 슈는 굵은 나무에 기대어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여전히 멍청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 스스로는 호탕한 미소라 생각 할 것이다. 슈는 나무에 기댄 체 천천히 몸을 이동했다. 나무를 중심으로 전에 있던 나무의 반대편으로 몸을 감춘 슈를 가만히 보던 남자는 이내 침을 삼키며 한계라는 듯 서둘러 따라갔다. 하지만 그를 반긴 것은 매서운 채찍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감싼 가죽 채찍을 당황한 눈으로 보다가 얼른 검으로 쳐내려 했다. 하지만 그 검은 장검이었고, 때문에 단검보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차를 노련한 슈가 놓칠 리가 없었다. 슈는 채찍을 든 체, 굵은 가지를 터넘었다. 그리고 강하게 그것을 잡아당겼다. 남자의 몸이 서서히 들려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며 몸부림 쳤지만 뭘로 만들어 졌는 지 채찍은 잘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절망하는 남자의 눈에 표독스런 슈의 얼굴이 들어왔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죽어버려!" 남자의 눈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을 때였다. 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숙였다. 무언가 그녀를 향해 날라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있었을 법한 높이에 화살이 박혔다. 돌아보니 죽어 가는 남자의 일행들이었다. 혼자 먹겠다는 야망을 가진 동지가 좀 고생하는 꼴을 보고는 싶었지만,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늦게 손을 쓴 것이었다. 슈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나름대로 전투를 할 줄 아는 전사였지만, 하 등급의 용병 둘을 상대하기에는 모자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겁하잖아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유혹적인 목소리에 남자들의 눈에 묘한 빛이 서렸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동류였던 것이다, 앞서 죽기 직전까지 갔던 남자와. 하지만 다른 점은 있었다. 바로 앞서 자신들과 동류였던 녀석의 처절한 응징을 지켜봤다는 것이다. "헛튼 수작 부리지 마라!" "어머, 수작이라니요?" "쿡, 우리가 널 어떻게 믿지? 너 같은 계집을 안느니 차라리 작부의 집에 찾아가는 게 낫겠다. 적어도 목숨의 위험은 없으니 말이다." "하하하!" 갑자기 슈가 크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호탕한 웃음이었다. 순식간에 웃음을 멈춘 슈는 다시 고혹적인 모습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한낮 계집의 위협이 무서워 품지도 못한다는 말씀이군요?" 맞는 말이니 만큼 찔렸고, 찔리는 만큼 화가 치밀었다. 또 화가 치미는 만큼 오기가 났다. "킥킥. 하긴 너 같은 계집을 굴복시키는 맛도 쏠쏠할테지!" 활을 들고 있었던 남자는 그대로 있고 한 남자만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낭패였다. 차라리 둘이 동시에 덤비는 것이 처리하기에 좋았다. 순번도 그때 그대로인지, 지금 달려오고 있는 남자는 무하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졌던 이였다. 형편없이 당했던 모습을 보았던 슈는 내심 안도했다. 이 남자는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저기서 활을 들고 있는 남자! 슈는 여관을 빠져 나오기 전에 품에 넣어 두었던 작은 식칼을 슬며시 꺼내 들었다. 오기에 가득찬 남자는 슈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은 듯 했다. -푹! 슈는 힘껏 식칼을 남자의 배에 찔러 넣었다. 남자가 크게 놀라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지만 그녀는 그딴 것에 동정을 삼을 수 있을 만큼 곱게 굴러먹은 이가 아니었다. 되려 잽싸게 활을 든 남자의 눈을 차단했을 뿐. 하지만 활을 들고 있는 남자도 눈이 있고, 코가 있으며 직감이라는 게 있는 용병이었다. 그는 단숨에 붉은 무언가를 보았으며 익숙한 혈향을 맞았고 멈짓하는 친구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다. 그는 분기를 터뜨리며 활에 화살을 재었다. "독한 계집! 죽어라!" 그가 활시위를 한껏 당겨 막 놓았을 때, 갑자기 그의 몸을 뒤로 거칠게 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덕분에 활은 엉뚱한 방향으로 힘껏 날라가 버렸다. 뒤로 넘어진 남자의 눈에 보인 것은 검은 천자락이었다. 그를 잡아당긴 누군가는 이미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자 몸을 반쯤 일으킨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크게 내려쳐지는 검은 채찍과 그것에 한 손이 봉해진 남자, 무하였다. "당신까지 나를 잡아드릴 생각인가! 결국 나를 죽여야 한다는 건가!" 슈는 왠지 모를 배신감이 치밀어 마구 고함을 질렀다. "말해봐, 무하!" 무하는 왼 손에 감겨진 채찍을 힐끔 내려보며 말했다. "너는 네가 살기 위해 두 남자를 살해 한 건가? 그렇게 까지 살아야 한다는 건가?" "당연하지!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본능이 아니던가? 나는 그덕분에 여지껏 살아 남을 수 있었어!" "왠지……." 무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채찍은 그의 왼손을 점점 조여왔다. 무하는 발을 굽히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날다시피 빠르게, 그녀의 앞에 도달했다. 당황하는 그녀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 넣은 그는 천천히 밑으로 숙여지는 그녀의 상체를 지탱해 주며 속삭였다. "……부럽군." 그 희미한 소리를 들으며 슈는 기절했다. 무하는 죽기 직전인 두 남자를 보다가, 다른 한 남자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그 남자의 뒤쪽에 있는 레일리아에게. "마법사를. 여기서 하 등급의 용병을 구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하시고." 레일리아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뒤에 있는 기사에게 명했다. "마법사를 데리고 와." "네." 기사가 빠르게 여관으로 향하는 것을 본 무하는 슈를 어깨에 짊어 맨 체, 발을 놀렸다. 활을 들고 있던 남자의 곁을 지날 때, 남자는 발악하듯 말했다. "그 여자를 어쩔 셈이냐!"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을 냉정히 보던 무하는 차분히 말했다. "너희는 슈를 놓쳤고 난 그녀를 붙잡았다. 누가 현상금에 대한 '권리'가 있는지 생각해 보도록." 다시 걸음을 옮기는 무하의 냉정함에 그는 몸을 떨었다. 무하의 말인 즉 슨, 이제 슈에 대한 권리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니 함부로 권리침해를 하면 '당연히' 그에 따른 보답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여관으로 들어온 그를 반기는 것은 예의 그 시니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륜이었다. "혼자 먹을 거냐?" "삼 할 주지." "반 줘." "사 할 주지." "좋아!" ……벙쪄 있는 주변 인물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둘이었다. ========================================================================= 내일이 수능이네요^^ 제 소설을 보시는 분들중에 수험생들이 계시다면........... 부디 제 소설을 보시고 힘내시길....(음, 건방지다는 건 압니다.( '')~~~) 전 수능을 보기 전날에 잠에 들면서 중얼거렸지요. "드디어 해방이야." .......... 뭐, 그렇다는 겁니다 -아해의 장- (바람의벗. 신승림) 슈가 정신을 차리고 본 것은 구석에 앉아 있는 무하였다. 그는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눈가가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일어났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점에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잠든 그의 주변으로 아주 평온한 멜로디가 약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슈가 언젠가 밤에 완전히 반해 버렸던 그 멜로디였다. 슈는 멍하니 그 멜로디에 취해 있다가 이내 벌떡 일어났다. "너……!" 하지만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무하의 뒤편으로 보이지 않았던 시륜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깨끗한 갈색 피부라 선 듯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뭐라 고함을 지르려는 슈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슈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지만 끝내 조용히 투덜대보았다. "쳇, 잘해줄 때는 언제고 돈이 걸리니까 바로 붙잡네." "죽을 뻔한 거 살려 줬더니 말이 많군." "……." 무하와 같이 있었을 때는 잘 몰랐던 면모가 확실히 드러났다. 시륜은……참으로 시니컬한 녀석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무하와 함께 있을 때 시륜이 내숭을 떨어서 시니컬해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죽이 잘 맞아 차가움보다는 황당함을 느껴야 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라는 점이다. 슈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지만 시륜의 말이 맞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둘이 떠드는 소리에 깼는지 무하의 어깨가 조금 움직이면서 고개가 들려 졌다. "아, 깼어?" 시륜의 질문에 고개만 끄떡여 보인 무하는 곧바로 슈에게 시선을 돌렸다. 슈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렸다. 붙잡아 줘서 고맙다고 비꼬아야 할지, 살려줘서 고맙다고 감사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던 것이다. 시륜은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희미한 횃불만이 존재하는 어두운 지하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의 고양이 눈은 상당히 매력적이었지만, 슈의 눈에는 짖궂은 아이의 것으로만 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이상, 어색, 요상, 축축한 분위기에 무하만은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씻고 싶지 않아?" "……." 잠시 침묵이 깔렸지만 슈는 예리한 사고력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그 질문을 정리 분석하여 그에 합당한 최고의 답을 내놓았다. "씻고 싶어!" "하하하!" ……그리고 시륜은 웃었다. 무하가 문밖을 감시하고 있는 것을 조건으로 슈는 지하 욕실을 쓸 수 있었다. 지하실과는 다른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욕실은 최고급 여관의 것 답게 제법 호화로웠다. 슈는 여름이긴 했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조에서 냉수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여유를 만낏 했다.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무하는 까맣게 잊은 체 말이다. 남성의 온갖 상상력을 발휘시키는 여자 욕실 앞에 서 있는 무하는 변태로 오인 당해도 할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가 감시를 위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오인은 당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좀 묘한 것은 사실이었다. 주위에서 낯을 붉히며 힐끔거리는 것과는 무관하게 무하는 두 펫과 노닥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손바닥에서 부비적 거리는 실과 넬을 보듬어주기도 하고 툭툭 쳐서 허공으로 보내기도 하고……. 실과 넬은 오랜만에 무하가 자신들과 놀아주자 기뻐서 까르륵거려 댔다. 무하도 오랜만에 즐거웠는지, 그의 주위를 맴 도는 공명음이 가볍고 활기차게 들렸다. 늘 차분하면서도 가라앉은 음과는 달리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 까? 주위에서 너무 오래한다고 내심 중얼거릴 쯤 해서야 욕실의 문이 열렸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금발 머리가 제일 먼저 띄었다. 먼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 것은 매우 아름답게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슈는 엉덩이 밑으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무하에게 사과했다. "미안. 너무 오래 걸렸지?" "별로. 식사하겠나?" "응! 배고파!" 감시자라기보다는 연인과 같은 둘의 모습에 여인네들은 은근한 로맨스를 기대하는 눈으로 둘을 주시했다. 식탁에 앉아 주문은 슈에게 맡긴 체, 무하는 매듭이 허술해 진 두건을 다시 꾹 묶었다. 내심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슈가 자청해서 묶어 주겠다고 수작(?)을 부렸지만 무하는 당연 거절했다. "시륜씨는?" "신출귀몰한 녀석이니까……. 뭐, 레일리아와 앞으로 행군을 의논하러 가지 않았을……." "라이시륜이야, 내 이름은." 갑자기 뒤에서 불쑥 나타난 시륜은 슈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배고파." 그리고 냉큼 종업원에게 같은 음식으로 1 인분 더 가지고 오라고 주문했다. 애칭의 허락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시륜의 말에 슈는 새침한 얼굴로 답했다. "전 슈린이에요." "아아, 반가워. 레이디 슈린." 냉큼 무하의 앞에 놓인 물 컵을 채가 꿀꺽 꿀꺽 마시며 대충 인사하는 시륜이었다. 슈는 괜히 심통이 나서 앞에 놓인 물을 벌꺽 벌꺽 들이켰다. 무하는 가만히 말했다. "둘 다 목이 탔던 모양이지?" "……." "……." 식사가 왔다. 말 따라 배가 고팠는지, 먹성스럽게 음식들을 해치우는 시륜과 슈는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는 것도 같았다. 물론 무하도 만만치 않게 먹고 있긴 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랄까? 그도 모르는 새에 그의 행동에 귀족의 예절이 배여 버린 모양이다. 시륜은 어느 정도 허기가 가셨는지 음료를 마시면서 단숨에 불만을 뿜어냈다. "저 계집 아이, 또라이 아냐? 바로 출발하자 신다! 주위에서 안 된다고 말려도 통 알아들을 생각을 안 해! 게다가 더 웃긴 건 그 애가 계속 고집을 부리니까 기사 나으리들이 나한테 출발 준비를 하자는 거야! 주인을 모시려면 똑바로 모셔야지! 오냐, 오냐 하는 꼴이라고는!" "진짜 멍청하네?" "그치?" "처음부터 그런 곳에 가자고 한 것 자체도 문제가 있지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전문가의 말을 무시하는 건 말도 안 되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서로 흥분해서 레일리아와 멍청한 기사들에게 험담을 쏘아대는 시륜과 슈는 의외로 잘 어울렸다. 무하는 가만히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말했어?" 그 질문에 흥분하던 시륜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니컬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의 흥분은 잊은 것처럼 앞에 놓인 주스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신 뒤, 냅킨으로 입가까지 닦아 낸 후에야 답해주었다. "'그렇게 죽고싶으면 혼자 죽어.' 라고 해줬지." "잘했어!" "……." 당연히 호응한 것은 슈였고 입을 다문 것은 무하였다. 하지만 무하도 그리 나쁜 답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지 별다른 힐난 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왠지 골치덩이가 하나 늘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결국 출발은 일주일 뒤가 됐다. 들어가서 힘만 쓰면 되는 용병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바쁘고 촉박한 기일이었다. 얼마나 걸릴 지 모르는 회색 고향에서 먹을 음식들과 음료, 제일 중요한 물과 해독제, 해열제, 치료약, 포션 등을 준비해야 했으며 옷이나 천막 등도 다시 정비해야 했다. 하지만 무하나 시륜, 슈와는 상관 없는 것들이었다. 건조하기 그지없던 공기가 아침부터 조금씩 촉촉하게 젖어들더니 결국 한 두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랑비와 비슷한 약한 빗줄기라 행동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하는 창가에 자리 잡은 테이블에 앉아 안개처럼 내려오는 빗방울을 구경했다. 멀찍이 보이는 사막에 내려앉고 있는 빗방울들은 너무나 경의로운 장면이었다. 턱을 괴고 그것을 구경하는 무하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작은 시선을 눈치챘다. 슬쩍 돌아보니 작은 소년이 있었다. 레일리아의 동생, 사뮤에르였다. 그는 무하가 자신을 발견하자 움찔하며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누나의 것을 닮아 결 좋은 갈색머리가 귀여운 소년이었다. 무하는 굳이 가서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 무하를 사뮤에르는 슬쩍 뜯어보았다. 제법 장신이긴 하지만 마른 몸매를 가진 남자. 언뜻 보기에는 약한 학자와 같은 몸을 한 그가 강해 보이는 것이, 어린 사뮤에르로서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자꾸만 눈이 가버리는 것이다. 그토록 무섭고 엄한 누나, 레일리아조차 말 한마디로 꼼짝 못하게 한 남자라 더더욱 눈길을 끄는 건지도 모른다. 멀미 때문에 마차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지만, 누나가 목욕을 하겠다고 굴었을 때의 일을 안에서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때 누나가 목욕을 하겠다고 철없는 고집을 부렸던 것이 멀미와 더위 때문에 괴로워했던 자신을 배려 한 것이었다.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면서 누나에게 면박을 준 그가 밉기까지 했었지만 슈라는 현상범 여자를 상냥하게 배려해주는 모습에 왠지 감동해버린 것이다. 용병들은 자신을 관찰하는 눈으로 보는 이를 싫어한다. 뭐, 그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판단여하가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매력적인 여성도 아닌 꼬마에 불과한, 그것도 남자가 힐끔거린다면 완강하게 거부할 터였다. 때문에 사뮤에르의 행동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만일 무하가 조금만 '상식적인' 용병이었다면 사뮤에르의 안전은 보장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해가 많은 건지, 무관심 한 건지는 분간할 수 없지만, 여튼 그런 무하의 면모덕분에 마음놓고 관찰할 수 있었던 사뮤에르였다. 그렇게 평화롭고 조용하게 하루가 저물었다. 날이 밝았다. 무하는 약간은 찌푸둥한 몸을 일으켜 밑으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자 슈가 그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이미 지하실이 아닌 하나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주위에서 불만을 토했지만 무하는 당연히 무시해 주었던 것이다. '도망쳐도 내 '돈'이 도망치는 거니까 상관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는 그에게 뭐라고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서 와, 무하씨!" "아아." "라이시륜씨는 아직도 자고 있어. 안 내려오는 걸. 아참! 무하씨, 여기 놀라운 게 있어!" "……?" "놀라지 마! 여기에 말이지……." 한껏 목소리를 낮춘 슈가 희극적으로 포즈를 취하며 속삭였다. "아이스크림이 있다구!" "……." "놀랐지? 놀랐지? 나 방금 먹어 봤는데 무지 맛있어! 먹어볼래? 먹을 거지? 시킬까?" "……여기 주스 한잔." "어? 왜? 여기 진짜 맛있다구!" 무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확고하게 싫다는 것을 표현했기 때문에 슈는 결국 자기 것만 하나 시켜야 했다. 무하는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빗줄기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슈는 아이스크림을 세 개나 먹어치우고 쪼르륵 위로 올라가 버린 지 오래였다. 비는 어제보다 조금 굵어져서 안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리 굵다고는 할 수 없는 어중간한 굵기였다. 무하는 여전히 사막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올 때, 사막은 여전히 더울까? 아니, 후덥지근한 걸까? 사막에서 사는 생물들은 비가 올 때 어떻게 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며 시간을 보내던 무하는 어제와 유사한 시선을 느꼈다. 돌아볼 것도 없이 사뮤에르다. 어제와 같이 무관심하게 있으려던 무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제와 같이 움찔하는 꼬마아이에게 슬쩍 손짓을 했다. 그 뒤 무하는, 쭈빗 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온 그에게 앞자리를 권해주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줄곧 무하에게 시선을 두던 사뮤에르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무하와 마찬가지로 그곳의 풍경에 흠취 해 버렸다. 집안에서만 고이고이 자라온 사뮤에르가 처음으로 밖으로 나와 여유 있게 풍경에 젖어드는 순간이었다. "사막을 횡단할 때는 그곳이 지옥처럼만 느껴졌겠지?" "……." "하지만 이렇게 헤쳐 나와서 보니, 아름답지 않니?" "……." "조금 머리가 여물고 글이 들어간 사람이라면, 그것을 인생에 비유하겠지만……. 난 그냥 이대로 즐기는 것도 꽤나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무하는 입을 다물고 창 밖을 하염없이 보았다. 언제 나갔는지, 넬과 실이 빗줄기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모든 비가 둘과 조화를 이루며 무대의 한 배경화를 만들어 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비록 무하가 보고 있는 광경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을 사뮤에르였지만 그도 즐거운 기분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주 긴 시간이 흘렀을 때, 날이 어두워져 실과 넬이 무하의 곁으로 돌아오고 찬바람이 들어와 창문을 닫게 되었을 때, 사뮤에르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으로 향하던 무하는 분명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 배가 아픕니다. 등이 아픕니다. 허리가 아픕니다. 훌쩍.... 나이는 못 속입니다... -아해의 장- (바람의벗. 신승림) 사흘째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한번 비가 내리면 적어도 일주일은 내린다고, 여관 종업원이 말했다. 비는 서서히 굵어져 이제는 꽤나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밖으로 나간다면 금방 흠뻑 젖을 정도로 굵어진 빗줄기 속에서도 인부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 들어와 술을 들이키거나 따뜻한 차를 마시기도 했지만 곧 나가서 다시 할 일을 했다. 그들이 할 일은 오늘로 모두 마무리된다. 때문에 그들의 손길이 더 빨라지는 건지도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맛있는 식사와 뜨끈한 술과 포근한 잠자리를 즐기고 싶은 것이 모두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비를 막는 아이템, 언 레인을 지닌 채 그들을 감독하던 레일리아는 마무리만 남겨두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도 힘만 쓰지 않았을 뿐 바쁘게 보냈던 것은 마찬가지였던 터라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그녀는 구석에 앉아 크림을 듬뿍 넣은 차를 음미했다. 몸이 풀리는 느낌이 좋았다. 밖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의 강도가 여느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높아진 것이다. 인부들의 손이 더욱 빨라졌고, 결국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거의 동시에 빗줄기가 엄청나게 굵어졌다.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커다란 우박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레일리아는 그 기세에 놀라 종업원에게 물었다. "여긴 원래 비가 이렇게 내리나?" "아, 아니오! 이, 이런 적은 없었는데……!?" 종업원도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레일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놔주고 다시 차를 즐겼다. 계단 쪽에서 작은 몸을 가진 아이가 쪼르륵 내려오는 것을 본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의 사랑스런 동생이었던 것이다. "이리와 앉으렴, 에르." "네, 누님." 사뮤에르는 갑자기 불어난 식당의 인원에 주춤하면서도 누나의 앞에 앉았다. 그가 앉자 종업원이 냉큼 레일리아와 같은 차를 대령했다. 사뮤에르는 살짝 미소를 지은 채 그것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라이트 마법이 시전 된 것 마냥,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번개가 친 것이다. 사뮤에르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아무리 품위와 예의로 무장한다고 해도, 그는 평범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고로 평범한 아이는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진리를 레일리아는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진리를 용납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그것에 자신의 동생이 포함되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녀는 장차 가주가 될 동생이 좀더 강단 있는 사내로 크길 바라는 평범한 누나였던 것이다. "사뮤에르." 딱딱한 누나의 어조에서, 애칭을 말하지 않는 누나의 말에서 사뮤에르는 누구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 수 있었다. 때문에 입을 굳게 다물며 버티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애처로운 노력은 허무러져 버렸다. -콰콰콰쾅! 엄청난 천둥의 소리. 사뮤에르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확실히 천둥소리가 엄청나기는 했다. 간 큰 용병들조차 움찔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여장부, 레일리아는 크게 노했다. "사뮤에르! 무슨 추태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곧 사방이 다시 환해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며 천둥소리도 곧이어 울려왔다. 사뮤에르는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귀를 막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는 이제 겨우 일곱 살 된 꼬마에 불과했던 것이다. 레일리아가 엄하게 소리를 치려 했을 때였다. -뚜벅뚜벅. 다 큰 어른조차 동요할 정도로 엄청난 번개와 천둥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발놀림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예의 수상한 두건을 한 남자, 무하였다. 그는 엎드려 떨고 있는 사뮤에르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작은 몸체를 한 사뮤에르는 너무나 쉽게 허공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가 놀라기도 전에 무하는 그를 안아 들었다. 사뮤에르의 엉덩이와 허벅지 쪽을 한쪽 팔로 고정시켜 주고 다른 팔로 그의 등을 감싸 앉은 무하는 천천히 자신의 지정석, 창가의 의자로 가 앉았다. 천둥소리가 그 어디보다도 확실하고 크게 들리는 곳이었다. 사뮤에르는 무하의 가슴에 얼굴을 푹 묻고 울먹였다. 비록 호통을 쳤지만 동생을 사랑하는 레일리아는 벌떡 일어나 무하에게 화를 내려 했다. "천둥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아주 차분한 무하의 목소리. 사뮤에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하를 보았다. 두건으로 감춰있던 두 눈동자가 밑에서 보니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한치의 동요 없는, 너무나 고요히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 사뮤에르는 무하의 가슴에 얹은 자신의 손을 통해, 무하의 심장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평온한 고동이었다. 그것에 동화된 듯 사뮤에르의 몸에 떨림이 잦아들었다. 소란스러웠기에 듣지 못했던 무하의 멜로디에 취한 것일 수도 있었다. 사뮤에르가 진정된 듯 보이자 무하는 그의 고쳐 앉았다. 그리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름답지 않니?" 번개가 다시 쳤다. 사뮤에르가 무하의 말을 듣고 막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경의로운 자연의 빛 타래. ……아름다웠다. "지독하게 아름답지?" 사뮤에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저것이야말로 위험한 것이란다." "……?" 천둥이 울렸다. 사뮤에르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움추렸다. 무하는 그런 사뮤에르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천둥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 "사람이란……생명체란 무서울 정도로 대단해서 '소리'로는 죽지 않거든." "……?" "하지만……." 다시 번개가 쳤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전기들의 집합체인 저것으로는 잠시 닿는 것만으로도 위험하지. 아름다운 만큼 위험 한 거란다." "……!" "담력이라는 것, 강단이라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아니?" "……?" "위험한 것을 알지만 아름답기에 보고 즐기는 것을 강단이라고 하는 가? 아니다." "그……럼요?" "아름다운 것을 알고 즐기면서도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 위험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이 담력이라는 것이다. 위험하지만 아름답기에 즐기다, 그것의 본질을 잊는 자는 그냥 단순한 멍청이일 뿐이다." "……." "또한 흉악하지만 아름다운 것. 흉폭하지만 우직한 것.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담력이라 하는 거다." 다시 천둥이 울렸지만……사뮤에르는 비명을 지르지도, 움추리지도 않았다. 사뮤에르가 언제 무하의 품에서 잠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를 안고 있던 무하조차 몰랐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뮤에르의 고개가 무하의 가슴에 기대졌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뮤에르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이루워졌을 뿐이었다. 무하는 자고 있는 사뮤에르를 배려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 앉아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레일리아를 무심히 지나 계단으로 향했다. 레일리아가 벌떡 일어나 뭐라 말하려 했지만 무하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 것으로 그것을 막았다. 섬세한 아이가 잠들고 있는 것이다. 식당은 묘하게 고요했다. 무하가 계단 위로 올라가서야 식당 안에는 전과 같은 활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곧장 내려온 무하가 자신의 앞자리에 앉아서 술을 즐기고 있던 시륜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상하다." "뭐가?" "이 번개. 자연의 것이 아니야." "……!" "누군가 저쪽에서 마법으로 싸우고 있는 것 같다. 마나가 비틀려 있어." "……놀랍군." 시륜도 그것을 알고는 있었다. 단지 멀찍이서 싸우고 있는 누군가 때문에 자신이 동요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 한 것 일뿐. 그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야. 게다가 이곳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그래서?" "내가 가서 보고 오겠다. 떠날 채비를 꾸리는 게 좋겠군. 만일 내가 한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는 다면 먼저 출발하고 있어라. 시간이 촉박하다고 했으니, 공연히 남의 싸움에 휘말려 전력을 잃을 수는 없지. 표식을 남기면 알아서 쫓아가겠어." 이미 무하는 언 레인과 파이어를 챙겨 놓은 상태였다. 이런 빗줄기에서 함부로 나갔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시륜은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떡이긴 했지만 행동만은 확실했다. 그는 둘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레일리아와 기사들을 독촉했고 인부들에게 최대한 쉬고 있으라 명했으며, 용병들에게 말을 준비시키라고 했다. 무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곧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시륜이 잠시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무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하는 오랜만에 경공을 쓰고 있었다. 나무 가지를 힘차게 튕기며 앞으로, 앞으로 빠르게 나가던 그는 점차 심하게 비틀리는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여지껏과는 다른 엄청난 번개가 내려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던 그는 검을 잠시 옆으로 내려놓고 몸을 숙였다. 곧 100M쯤 앞에서 엄청난 번개가 내려꽂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지만 그것에 정신을 빼앗길 틈이 없었다. 뭔가 결판이 나도 난 듯 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비틀림이 없는 것을 보니 말이다. 무하는 기척을 숨기며 빠르게, 그러나 조용하게 번개가 꽂혔던 장소 쪽으로 접근했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그가 스스로 맡은 임무는 탐색이지, 처리 및 싸움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검게 변질된 그곳에서는 고기 탄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무하는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고기 탄내를 풍기는 물체가 잘 알아 볼 수는 없지만, 분명 사람의 형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하가 있는 곳은 번개의 영향권 바로 옆이었다. 때문에 번개의 영향이 그나마 덜 받은 시신을 보게 되었기에 그것이 사람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바깥쪽이 이 정도라면 안쪽은 볼 것도 없다. 무하는 갑자기 구역질이 몰려와 속을 진정시키는데 집중해야 했다.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그러고 있던 무하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위쪽에서 인기척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청난 시체무리를 본 무하는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해버렸다. 평소라면 그가 늦게 반응을 했어도 그것을 커버해주고도 남을 든든한 방어막, 실과 넬이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번개가 내려치는 것과 동시에 재미있다고 밖으로 놀러 나가 버렸기 때문에 무하의 곁에 없었다. -퍽! "크윽!" 무하의 몸이 뒤로 넘어지면서 그의 몸을 중심으로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엄청난 힘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하의 몸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 마법 인 것이다! 무하는 몸을 비틀며 마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마법의 시전자가 더욱 빠르게 반응했다. 나무 위에 있었는지, 위에서 가볍게 뛰어 내려와 무하의 목을 거칠게 붙잡은 것이다. 어두웠기에 그의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었다. 긴 머리를 가졌는지, 무하의 얼굴에까지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닿았다. "사제인가?" 너무나 언발란스하지만 무척 멋진 목소리였다. 낭랑하며 감미로던 유시리안의 것과는 달랐지만 허스키 한, 깊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혼자 묻고 혼자 답했다. "아니군." 동시에 무하의 목을 조이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무하는 호흡을 조절하면서도 괴한을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무하가 알기로는 사제란 신을 받드는 신자였다. 목사나 승려와 같은 존재라 봐도 무방한, 한번 꽈서 말하자면 선(善)의 편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야 살기를 푸는 괴한이라니. 충분히 수상하다! -번쩍! 마나의 비틀림이 필요 없는, 자연의 번개가 쳤다. 사방이 일순간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둘은 서로의 모습을 탐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괴한은 창백한 안색의 청년이었다. 엄청난 마법을 써댔던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목소리와는 잘 어울리는 이였다. 정열의 색인 붉은 눈동자임에도 냉랭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일순 휘어졌다. 미소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무하의 앞에 나타났다. 마법을 쓴 듯 했다. 무하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검을 뽑아들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청년의 몸놀림이 빨랐던 것이다. 그는 엄청난 힘으로 무하의 오른 손을 붙잡아 발검을 못하게 했으며 동시에 무하의 두건을 빠르게 벗겨냈다. 그의 눈이 무언가 탐색하는 듯 무하의 얼굴을 살폈지만 이내 실망한 빛을 내보였다. "아니군……." 무하의 팔찌가 엄청난 강도로 진동을 하더니 그의 주위로 바람의 칼날이 회오리 쳤다. 남자는 차분하게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뒤로 불러서 바람의 공격을 피한 그는 다시 한번 발을 튕겨 나무 위로 올라섰다. 뒤를 돌아보지 조차 않은 상태에서 줄을 탄 듯 부드럽고 유유히 이루어진 동작이었다. 무하는 검을 뽑아들고 남자를 공격하려 했지만 그는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그리고 냉랭한 눈동자에 장난기를 머금으며 웃더니 말했다. "사제가 아닌 이와 싸울 필요는 없겠지." 그의 등뒤로 무언가가 활짝 펴진 듯 했지만 무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나중에 보자고, 이쁜이." 남자의 몸이 슬쩍 허공에 날아올랐을 때, 다시 한번 번개가 쳤다. "날……날개?" 하지만 확실하게 확인하기 전에 남자는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것 또한 마법이었다. 무하는 빗줄기 속에서 두건을 주울 생각도 못하고 남자가 사라진 쪽만을 멍하니 보았다. =================================================================================== 연참~~~ 연참~~~ (호들갑, 오도방정, 촐싹촐싹, ..........그리고 발광.....ㅡㅡ;) 라리라리라리라리~~~ 축배를 들어라~~ (ㅡㅡ;;;)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테밀시아는 상당히 화가 난 듯 보였다. 뮤비라가 결혼식을 치루고 그가 집을 나가고 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뮤비라의 결혼에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반려'였기에 참을 수 있었다. 삶의 반려 따위는 하찮은 것. 삶을 연명해 나가는 소소한 의지 하나 하나가 그의 것이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만일 그것이 아니었다면 질투로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견뎌냈고 앞으로도 견뎌내야 했다. 지금 그가 화가 난 이유는 멍청한 황제 때문이었다. 처음 등국을 했을 때는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는 황제였지만 지금은 그냥 여색에 빠진 멍청한 녀석에 불과했다. 전에도 호색한의 기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여자를 취한 것으로 만족할 뿐, 그 여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발악하지는 않았기에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리 급히 어딜 가시나요, 나이트 테밀시아?" 감히 말 붙일 생각조차 못하는 경의의 '독재자', 테밀시아를 나릇나릇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부르는 이는……. "신 테밀시아, 황후 전하를 뵈옵니다." 바로 현 욤 제국의 국모, 욤 에일라야 란 제노스란(황후)이었다. 바로 그녀가 황제를 바꾸게 만든, 두 번째 황후인 것이다. 확실히 그녀는 인형 같은 궁녀들로만 이루어진 후궁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 나릇나릇함 속에서도 들어나는 야성적인, 길들여지지 않은 들고양이 같은 매력은 그녀를 황제가 정복하고 싶어하는 제 1의 미녀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지금의 황제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기 위해 존재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에일라야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이들은 많았지만 테밀시아는 아니었다. 그는 애당초 현 황제에 대한 경의와 충성심이 없었던 남자인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은근히 든든한 우방이 되어 주고 있는 이 중 하나가 에일라야이었던 것이다. "후후. 황제께서는 지금 후원에 계시답니다.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해 궁에 오신 거라면 그곳으로 가셔야 할 거에요." "후원은 황실의 소유. 신하 따위가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곳이라 알고 있습니다. 홀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알았어요. 그럼 제가 그렇게 전해 드리죠." 자신에게 끈적한 호의를 보여 주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이용가치가 충분한 여자가 아닌가? 게다가 마린나사처럼 자신의 안주인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입장이니 꽤나 산뜻한 관계가 아닌가? 테밀시아는 싸늘하게 웃으며 발을 옮겼다. "신 테밀시아,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척 봐도 방탕하게 놀다 왔음을 알 수 있는 헝크러진 옷차림. 두 시간이나 기다렸던 테밀시아의 얼굴은 어떠한 정보도 알아 낼 수 없을 만큼 싸늘하면서도 무표정했다. 황제는 조심스럽게 테밀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발악했지만 그것은 이미 멍청이가 되 버린 그로서는 무리였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하는 대신들과 자신에게 아부하는 신하들을 대하듯 이 남자를 대할 수가 없는 자신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결국 오기를 부려 일부로 차갑고 거만하게 테밀시아를 대했다. "감히 이곳까지 짐을 부른 용건이 뭔가?" "황공하옵니다. 실은 요즘 대륙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그 일 따위는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고작 그 딴 일 때문에 짐을 부른 건 아니겠지?" "고작이라……." 테밀시아는 속내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 때문에 황제는 당황했다. 하지만 테밀시아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이렇게 말함으로써 정도 이상을 넘어서는 것을 자제했다. "황공하옵게도 그 일로 찾아 뵈온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신이 폐하께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뭐, 뭔가?" "저희 휴첸 기사단이 현재 몬스터의 습격을 가장 무 방비하게 받고 있는 '하츠민'에 파병되길 청하고자 하오니, 부디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츠민! 그것은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천민의 마을의 이름이었다. 단지 마을의 이름에 불과했지만 이미 모든 이의 뇌리에서 짐승 이하의 더러운 단어로 인식된 지 오래인 이름이었다. 제피모 조차도 입에 담지 않으려 하는 천박한 단어를 고귀한 폐하의 안전에서 거론하는 테밀시아의 꿍꿍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지지도를 넓히고자 한다면 습격을 받고 있는 귀족들을 돕는 것이 나을 것을 왜 하필이면 하츠민따위에 파병을 원하는 것인가? 황제는 예상치 못했던 천박한 청에 인상을 찌푸렸다. "뜻하는 데로 하게. 어차피 휴첼이야 마스터의 명이 절대적인 기사단이 아니었던가?" 은근히 비꼬는 황제의 말에도 테밀시아는 간단하게 답했을 뿐입니다. "황공하옵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예를 취하고 밖으로 나가는 그 젊은 청년을 보며 불안함에 휩싸여야 하는 황제였다. 저 애송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의 목줄기를 물어뜯는 행위로 보인다고 중얼거리는 황제의 눈은 예전의 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폐하." 나릇나릇한 목소리. 그 목소리로 인해 황제의 이성은 마비되어 버렸던 것이다. "오오, 라야." 황제의 뇌리에서 테밀시아 일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츠민!?" 예상대로 기사들의 반응은 거부였다. 하지만 테밀시아는 그들의 거부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몬스터들이 무서운 것이냐?" 그 도발성 말 하나에 눈빛이 달라지는 기사들이었다. 평소라면 그딴 말에 넘어갈 리가 없지만, 그 말을 입에 담는 이가 그들의 절대적인 마스터라면 다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독재자' 테밀시아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이들인 것이다. 테밀시아는 조용히 말했다. "하츠민. 천함의 모든 것을 칭하는 단어임을 나도 안다. 하지만 몬스터따위에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는 인간, 지성적 생물에 대한 모욕이다. 사고 할 수 있는 자는 살아 남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하츠민을 택했다. 가장 천하다 불리는 그들도 지성체,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테밀시아는 지금 자신이 내뱉는 말들이 훗날 그의 가장 큰 세력권을 만들어 주는 주축대가 되리란 것을 짐작이나 할까?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한 이 것을 증명할 것이다. 몬스터가 무서운 이는 빠져도 좋다. 하지만 보호해야 할 대상이 하츠민, 천한 자이기에 싫다면 휴첼을 떠나라. 그런 자는 이곳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마스터의 명을 받듭니다!" 기사들의 충심어린 눈동자를 테밀시아는 만족스럽게 보았다. 테밀시아가 하츠민을 택한 것은 실은 뮤비라가 낸 아이디어였다. 뮤비라가 그에게 한 말은 짧은 한마디뿐. '하츠민을 보호하십시오.' 그 것만으로도 테밀시아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계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움직인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츠민이라니! 보통 귀족이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을 해댈 단어가 아닌가? 하지만 테밀시아는……그는 '제피모'인 뮤비라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움직일 수 있었다. 제피모를 사랑하면서 이미 신분의 우월감을 버린 그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훗날 그를 위협하는 최대의 세력을 누를 수 있게 된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시일 뒤에 말이다. 뮤비라의 결혼식이 끝난 뒤, 요크노민은 형과 함께 자하라 가의 저택으로 들어왔다. 물론 대우를 받는 것 따위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줄 형의 지도와 좀더 넓은 세상으로 뛰어들기 위해서 이 곳으로 왔을 뿐이다. "저 음침한 자식은 뭡니까?" "카산! 그런 말은 실례다! 당장 사과해!" ……때문에 저택을 들어오자마자 이런 소리를 들어도 별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장녀인 카시안의 엄한 명령에도 카산은 불만 어린 눈으로 입을 굳게 다물기만 했다. 단 세 가문만이 받은 카르민, 최고위 계급의 일환인 그가 한낮 제피모따위에게 흥쾌히 사과를 한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것이리라. 보통의 제피모라면 이런 식으로 갑작스런 수직상승이 되었을 때 보일 반응은 두 가지 일 것이다. 하나는, 원래라면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엄청난 위치에 있던 도련님께 말 한번 제대로 못하고 움찔대기만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쭐함이 지나쳐 건방지게 구는 것. 하지만 요크노민은 '보통의 제피모'가 아니었다. 그는 카르민 중에서도 위세가 가장 높은 오르세만 가의, 가주 계승권이 있는 마(차남)인 페르노크와 지기인 것이다. 또한 그의 형은 제피모임에도 카르민의 보좌가 되었고 정치계에서 월등한 실력을 자랑하는 이였던 것이다. 그런 '보통의 제피모'가 아닌 요크노민이 보인 반응은 이것이었다. -서걱! 묘한 소리. 실타래가 잘리는 듯한 부드러우면서도 살벌한 소리. 몬스터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터에 이곳까지 말을 타고 온 요크노민의 허리에는 당연히 장검이 매여 있었고, 품에는 단검이 들어가 있었다. 그 중에서 단검을 꺼낸 요크노민은 단숨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낸 것이다. 끌어 모아 묶어 놨던 뒷머리를 자른 그는 그것을 쥔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아귀를 풀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머리카락들은 부드럽게 양탄자 위로 내려앉았다. "이제 됐습니까?" 여전히 앞머리는 길었지만, 훨씬 산뜻해 보이긴 했다. 뜻밖의 행동에 할말을 잃은 그들 사이에서 요크노민은 꺼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제 방은 어디입니까, 형수님?" 카시안은 형수님이라는 단어에 행복해 하며, 요크노민을 방으로 직접 안내를 해주었다. 본관에 임시로 정해 놓은 그의 방이었다. 그의 정식 처소를 마련해 놓았지만 아직 청소 등이 안되어 있어 그 곳으로 안내한 것이다. "그럼 쉬세요, 도련님." "감사합니다." 문이 닫이자 요크노민의 주위가 붉게 일렁이더니 거대한 '존재감'을 띈 여인이 나타났다. 「머리는 왜 잘랐어? 예뻤는데…….」 요크노민은 아무 답도 하지 않고 침대로 가 누웠다. 여인은 부드럽게 허공을 날아 요크노민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그의 팔을 옆으로 벌려 머리를 베었다. 그녀는 잠시 요크노민의 얼굴을 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걷어냈다. 감겨 있던 그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빠져들 것 같은 깊디깊은 남색 눈동자가 드러나자 여자는 만족스러운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서야 같은 출발점에 놓인 기분이야." 「무슨 소리야?」 불칸의 요염한 붉은 눈동자에 순진함이 떠오르자 요크노민은 살짝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어느 샌가 그에게도 배여 버린 지기의 말버릇을 읊조렸다. "글쎄……." 페르……. 요크노민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아직도 잔영을 이루며 그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은빛 실타래들.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차가운 얼굴을 하며 떠난 지기. 감추려 애썼지만 너무나 확실히 보였던, 슬픔과 고독이 머금어진 녹색 눈동자. '이제는 울지 않는다, 페르. 나도 너처럼 '출발' 하겠어. 그러니까……울지 않는다.' =================================================================================== 어제 오늘....죈종일 아프군요. 약을 먹고 누워있어도 가라앉지 않는 복통덕에 미치기 일보 직전입니다. 요크노민이 카르민이 되었습니다~! 불칸과의 분위기가 묘하죠? 후후후... 테밀시아가 장차 어떻게 될까요? 후후후...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 요크노민을 부르러 온 이는 뜻밖에도 시녀가 아닌, 자하라 가의 꼬마 아가씨였다. 여섯 살 정도 된 아이는 신기한 물건을 보는 눈으로 요크노민을 탐색하다가 식사시간이 됐음을 알려 주고 사라졌다. 요크노민은 붉게 변한 목걸이를 쓰다듬으며 방에서 나왔다. 계단에 접어들자 한 아가씨가 먼저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하라 가의 만(차녀) 아가씨였다. 요크노민은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내려갔다. 원래라면 서로 같이 내려가겠지만 귀족 아가씨가 제피모따위와 함께 내려가고 싶어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요크노민이 섬세하게 배려해 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녀, 카오쟌은 요크노민과 함께 내려가고 싶은 마음에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 그녀는 엄청 낯을 가리는 부끄럼쟁이 아가씨였던 것이다. 언니와 같이 뮤비라의 팬인 그녀는 그의 동생인 요크노민에게 하대를 할 생각이 전혀 없건만 차마 입이 안 떨어져 본의 아니게 무시하고 있는 지금 상황이 조마조마했다. 한편, 요크노민은 앞서 걷고 있는 그녀가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 전의 일을 생각나게 했기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버리는 요크노민이었다. 얼마 전의 일이란, 바로 페르노크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말함이었다. 그때 그도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페르노크의 시선에 긴장했었던 것이다. 덕분에 페르노크의 강하면서도 상냥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만일 그때 발을 헛 딛지 않았다면……둘은 어떻게 되었을 까?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막 자신이 발을 헛딛였던 일을 생각해서일까? 왠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카이쟌의 몸이 휘청거린다고 느껴졌다. 요크노민이 좀더 살펴보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 그녀의 몸은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간만의 차로 스쳐지나가고 말았다. 급한 마음에 몸을 앞으로 뻗은 요크노민은 그녀를 붙잡을 수는 있었으나 자기도 균형을 잃어 버리는 형편이 되 버렸다. 계단을 구르는 동안에 카이쟌를 감싸주던 요크노민은 끝까지 그녀를 보호해주었다. 카이쟌은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의외로 고통이 없었기 때문에 곧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앗!" 카이쟌은 자신의 밑에 깔려 있는 요크노민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얼른 옆으로 비켰다. 계단 모서리에 머리를 찍혔는지 요크노민의 볼을 타고 핏방울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단지 앞머리를 쓸어 올려 이마의 상처를 손끝으로 살짝 확인해 보았을 뿐이었다. 덕분에 들어 난 매력적인 그의 눈동자에 카이쟌이 쏙 빠져 버린 것은……불가항력이다. "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당황한 그녀를 보며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피식 웃어버리는 요크노민이었다. "시, 식당 가시던 중이죠?" "네. 하지만 치료를 하고 갈 테니 먼저 가십시오." "아니에요! 저 이래뵈도 치유마법은 쓸 줄 알거든요!" 카이쟌은 얼른 리커버리를 시전 했다. 이미 흘러버린 핏방울 어쩔 수 없지만, 상처는 깨끗하게 나았다. 겨우 이십대 초반인 그녀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엄청난 실력임을 알 수 있었다. 요크노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하시군요!" "뭐, 뭘요." 아첨으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요크노민처럼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카이쟌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저기……피." "아! 감사합니다." 요크노민은 응고되어 가는 피를 얼른 닦아냈다. 둘은 조금은 편한 기분이 되서 같이 식당으로 향했다. 좀 전과는 달리 나란히 걸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주 화제는 요크노민의 형, 뮤비라의 이야기였다. 둘 사이에서 그의 화제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로가 알고 있는 면모가 묘하게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요크노민은 사적인 뮤비라를 알고 있다면, 카이쟌은 공적인 뮤비라를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화제가 끊이질 않았단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식사 시간쯤 해서 서로의 애칭까지 허락했다. 뜻밖에 좋은 친구를 만난 듯 해서 기분이 좋아진 요크노민이었다. 요크노민은 외향적으로만 봤을 때, 냉정히 말하자면 약골로 보인다. 성장기 때, 제대로 먹질 못해서 인지 고생을 해서인지 키도 평균이하이고 몸은 깡말랐다. 게다가 음침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왠지 괴롭혀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버리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조금만 접해도 그것이 오산임은 곧 드러난다. 그는 과묵한 타입이었지만 '누군가'의 영향으로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는 않았다. 앞머리사이로 가혹 들어 나는 깊은 남색 눈동자는 지적 여 보였고, 행동 하나 하나에 예의와 기품이 서려 있다. 그것이 귀족 도련님을 가까이 모셨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는 하나, 어지간한 도령들보다 훨씬 품위 있을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 싶었다. 그러니까 이런 언 벨런스 한 모습에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한다고 해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카산이 그랬다. 그는 요크노민이 싫었다. 약간의 시스터 콤플렉스 끼가 있는 그에게는 카시안의 남편인 뮤비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그에 빌붙어 온 동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가주 계승권이 있는 마였다. 가주 계승권은 라와 마, 그리고 란에게만 부여되는 혜택이다. 가주란 그 가문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자 였기 때문에, 계승권이 부여되는 라(장남)와 마(차남), 란(장녀)은 태어난 순서에 맞춰 붙여지지는 않는다. 가주가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가문 내의 아이들 중에서 '끼'가 보이는 아이들을 직접 뽑아 계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계승권의 아이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가주가 물러서면서 시험을 치거나 지목을 한다. 이때 시험을 통과한 이가 없다면 그 세 명 외의 다른 아(셋째 아들), 만(차녀), 안(셋째 딸)에게 기회가 넘어간다. 지목을 한다면 그 세 명에게는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시험을 치루기 때문에 기회가 아주 안 오는 일은 없다. 지목을 하는 경우라면 테밀시아처럼 완벽하게 자타로부터 공인을 받은 유능하고 탁월한 후계자가 있을 때이기에 반발은 없다. 결국 귀족들이 유흥으로 낳은 아이는 많아도 자식이라 인정받는 이는 단 여섯 명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여지껏 모든 가문을 통털어 아와 만, 안 쪽에서 가주가 나온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셋은 그저 귀족으로써 자신의 혜택을 즐기는 것에서 만족해야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자하라 가문은 엄청나게 비대한 가문이었다. 고로 가주가 계승권의 아이들을 뽑을 때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여해야 했다. 비대한 가문을 잘 꾸러갈 실력자가 가주가 되야, 가문이 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 가주, 자하라 공은 당대 가주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로 꼽히는 이였다. 그런 그가 지목한 이는 자신의 아들과 카시안, 카산이었다. 모든 이가 가주의 아들, 라가 가주가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다. 그가 테밀시아처럼 탁월한 능력가라는 건 아니었다. 단지 다른 유력한 계승권자들이 별 볼일 없었기 때문이다. 카시안만은 예외지만, 그녀는 결혼을 하여 성을 바꾸게 된다면 계승권에서 밀려나는 처지였다. 카산은 어려서는 영특한 아이로 탁월한 식견과 지식,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던 아이였지만 언제부터인가 비뚤게 나가 버려서 이제 와서는 완전히 논외가 되 버린 남자였다. 헌데 이변이 생겼다. 카시안이 성을 바꾼 것이 아니라, 남자 쪽에서 바꾸며 데릴사위 식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로써 유력한 계승권자가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세력권에서 제외되던 카시안의 위치가 높아져감에 따라 카산은 점점 소외되어갔다. 하지만 애당초 그쪽과는 담을 쌓았던 카산이 그 점 때문에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랑하는 누나의 지지기반이 두터워 지는 것이 뿌듯했다. 그의 불만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누나의 별 볼일 없는 남편과 감히 신분상승을 노리고 빌붙어 온 꼬마녀석이었다. 게다가 그 남편이라는 녀석은 사교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걸레'인데다, 그 동생은 시종 출신에 음침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아닌가? 가주라는 위치에 관심을 끊은 지 오래긴 했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만은 높은 카산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끼어 든 불순분자를 용납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요크노민이 본 카산의 인상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밖으로 샌다는 그의 눈은 '진짜 고생'이 무엇인지 아는 눈이었다. 그것은 그가 밖으로 나가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며 도락에 빠지는 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의 손은 형의 것처럼 굳은살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것은 그가 검에 열중해 있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의 몸은 형의 것처럼 날렵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눈에는 예기가 발하고 있었다. 많은 것을 알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내다보는 그런 빛이었다. 사납게 올라간 눈꼬리와 날카로운 콧날, 턱 선과 걸걸한 말주변 덕분에 사납게 보이게 했지만, 분명 그에게는 도락에 빠진 귀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때문에 카산의 얕은 도발에 넘어가지도 않을뿐더러 그리 기분도 상하지 않는 요크노민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뮤비라는 뭐가 그리 바쁜지 전보다도 보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익숙하지 않는 저택 안에서 요크노민은 혼자 있어야 했다. 친해진 쟌(카이쟌의 애칭)이 자주 놀러오긴 했지만 그녀는 한창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려야 할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때문에 그리 오래 있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수줍음이 심해서 많은 말을 나눌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 심심하지는 않았다.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던 것이다. 카시안이 검술을 배우는 그를 배려해 마련해준 별채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요크노민을 질리지도 않는지 뻔질나게 찾아오는 그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카산이었다. 늘 짜증만 부리고 무시하고 도발하기만 하지만 그가 마음에 든 요크노민에게는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었기에 늘 덤덤했다. 그런 태도를 비굴함에 찌든 전형적인 시종의 모습이라고 카산이 오해하든 말든 말이다. 하루는 웬일인지 카산이 오지 않았다. 요크노민은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라고 생각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며칠 전에 형, 뮤비라가 알려준 검법이 잘 안되었기에 그것을 연습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번 집중을 하면 주위는 보이지 않는 요크노민은 수 백번, 수 천번 검법을 이어서 하고 또 이어서 했다. 마음에 들 때까지 몇 번이고 하던 요크노민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들 정도로 매끄럽게 연결이 되자 손을 멈췄다. 아침에 시작한 것이 벌써 점심때가 훌쩍 지나 있었다. 준비해 두었던 수건 쪽으로 가는 그의 눈에 익은 남자가 들어왔다.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은 멍하니 있던 남자, 카산은 요크노민의 물음에 움찔하며 제정신을 찾았다. "아……." 그리곤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카산?" "너……."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몸을 돌려 뛰어가 버렸다. 요크노민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의아한 얼굴로 카산의 뒷모습을 보았다. "왜 저러지?" 점심식사를 본의 아니게 건너 띈 요크노민은 꽤 허기졌다. 하지만 이 정도의 허기쯤은 별 문제 없었다. 굶기를 밥먹듯이 하던 때가 있었는데, 고작 한끼 굶은 것쯤이야……. 게다가 별채에 마련된 주방에는 그를 기다리는 간식거리가 많았다. 하지만 요크노민은 주방에서 물통만을 꺼내 들이키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페르노크와 마찬가지로 그는 군것질거리는 딱 질색이었던 것이다. 시원한 물을 들이키고 나서 통을 옆으로 치운 그는 다시 검을 고쳐들었다. 헌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이가 있었다. "배 안 고프냐?" 카산의 목소리였다. 요크노민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답했다. "고픕니다." "……." 카산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머슥하게 내밀었다. 바구니에서는 빵과 과일, 고기 등등 군침도는 음식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카산은 바구니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뺨을 글적이며 말했다. "나도 아직 식전(食前)이다." 그 날도 요크노민은 검을 휘둘며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요크노민은 검을 연마하면서도 주위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카산의 조언 덕이었다. 그때 카산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눴다. 카산은 요크노민에게 좀더 넓은 세상을 알려주었고 좀더 밑바닥 인생을 말해주었다. 그의 말을 듣던 요크노민은 이런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꿈에 대해, 페르노크 이후로 처음 남에게 고백했다. 카산은 요크노민의 야망을 듣고 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난 뒤에, 그는 요크노민에게 이렇게 말했다. "멋지구나." 그 말을 한 뒤로도 한참을 침묵하더니 힘들게 입을 열었다. "현재 정보에 그나마 밝은 조직이라면 도둑길드밖에 없을 거다. 용병길드도 정보 면에서는 도둑길드에 몇 수지지." 아무리 밑바닥 인생을 꿰고 있는 카산이라해도 그 정도까지 안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도둑길드라는 것은 거의 공공연한 비밀로써, 그 존재여부도 확실하지 않는 비 확인 조직이 아닌가? 헌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확신'을 가지며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요크노민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많은 것을 묻는 눈을 하는 요크노민을 보며 카산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품을 뒤져 동전 만한 작은 메달을 꺼냈다. 검은빛을 띈 그것에는 보석과 짧은 단검(암살용으로 쓰이는 단검이었다)이 새겨져 있었다. 요크노민으로서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이게 뭐……?" "도둑길드 소속 증표지." "……!?" 휘둥그레진 요크노민의 눈을 보며 카산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도둑길드의 등급과 차이는 용병길드의 것과 같아. 카, 하, 파, 타, 차.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지지. 메달의 색 구별도 용병 길드의 것과 같아. 카는 검은색, 하는 붉은색, 파는 푸른색, 타는 노란색, 차는 회색. 마스터의 것은 황금으로 되어 있고. ……도둑길드는 용병길드와는 달리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 도둑길드의 정식 명칭은 '레타 사잔 아나'. 신성어로 '밤을 훔치는 자'라는 뜻이지. 뭐, 길기 때문에 레타라 불러." "……그, 그럼?" "나의 또 다른 이름은 산 카 레타." "……!" 정말로 뜻밖의 인연. 아니, 운명이라 칭해야 하는 것인가? ======================================================================= 병원을 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 수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정녕.......저의 길은 그곳밖에 없는 것이란 말입니까......ㅡ.ㅜ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고도 카산은 한참을 볼을 긁적였다. 과격한 언사를 서슴치 않았지만 그 행동 이면에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그답지 않았다. 하지만 요크노민은 그것을 고려할 정신이 없었다. 이 뜻밖의 인연이 그에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저도 길드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들어갈 수 있습니까? 있지요?" 흥분한 요크노민을 손을 내밀어 잠시 진정시킨 뒤 카산은 차갑게 말했다. "지금 길드에 들어오려 하는 저의가 뭐지?" "……." 요크노민은 자신이 꿈을 진실 되게 밝혔기에 카산이 자신의 진실을 알려 주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어줍잖은 거짓으로는 통하지 않는다면 방법은 진실을 말하는 것밖에 없다는 걸, 다행히도 그는 알고 있었다. "제가 가질 겁니다." "……." "……." 할 말은 다 했으니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의 침묵이 흘렀다. 카산의 입매가 실룩거린다 싶었을 때였다. "하하하! 당돌한 꼬마로군! 하하하!" 카산은 배에 손까지 얹은 채로 웃어젖히다가 결국에는 요크노민의 어깨까지 퍽퍽 치기 시작했다. "좋아, 마음에 들었어! 내가 책임지고 가입시켜 주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제게 갑자기 잘 대해 주시는 겁니까?" 카산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냥 일어났다. "그럼 난 가보겠어. 저녁에 길드에 가봐야 하니까. 곧 좋은 소식을 알려주지." "……안녕히 가십시오."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굳이 헤집을 필요가 없었다. 두어걸음 내딛던 카산은 힐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길드원이라면 일단은 주위를 경계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어.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는 언제 기습당할 지 모르거든." "아……! 감사합니다!" 카산은 요크노민의 인사를 흘리며 건성으로 한 손을 들어 보였다. 한참을 걸어, 처소로 향하던 그는 일순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멀찍이 요크노민의 별채가 보였다. "왜……잘 대해 주냐고?" 피식 웃던 카산은 몸을 천천히 돌렸다. 약간은 상한 듯한 담록색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잠시 흩뿌려졌다가 주인의 어깨에 얌전히 가라앉았다. 다시 걸어가는 카산의 발놀림은 여전히 거칠어 보였으나 그의 눈은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조금 멍했다. 요크노민……처음부터 왠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었다. 아니, 머리카락을 자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뒤로는 급격히 매료되어 가는 것에 반발하여 싫어하는 것이라 애써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도둑길드의 카,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아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단지 제피모라는 이유로 요크노민을 싫어했다는 게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다. "반발……인가?" 씨익 웃는 카산의 얼굴은 왠지 개운해 보였다. 그는 냉철하고 현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인간이었다. 인간이란 급격한 변화에 두려워하는 동물이다. 그랬기에 요크노민을 싫어하려 했던 것이라 냉정하게 자기를 평하는 그였다. 그런 냉정함을 오늘에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집중하여 검을 휘두르는 모습. 그것은 언젠가 감동하며 보았던 한 기사의 모습과 겹쳐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엄청난 발전이라니! 겨우 몇 시간을 연습하는 동안에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도 전사였다. 그것도 누구 못지 않게 꾸준히 정진하는 전사였다. 또한 검을 다루는 검사였다. 그랬기에 요크노민의 대단한 소질을 소름끼치도록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 냉정해져서 이야기를 나눴다. 한마디 한마디에 넘쳐나는 야심과 겸손, 긍지와 확신. 카산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어려서는 배움이라는 것에 열의를 가졌다. 그 점을 높게 평가받아 마까지 되었지만, '교과서 지식'에 대한 열의는 금새 허물어져 버렸다. 때문에 모두들 자신을 비뚤어진 반항아 취급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 '열의를 가질만한 것'을 찾는 것. 너무나 오래 걸렸지만 이제는 찾은 것 같았다. "정보 길드라……재미있겠는걸?" 이 끈기 없는 천재를 알아보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깨운' 요크노민. 그야 말로 무하가 말했던, '흉악하지만 아름다운 것. 흉폭하지만 우직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강단 있는 사람이 아닐까? 일주일 후, 요크노민에게 또 다른 이름이 생겼다. 민 차 레타. 그것은 최후의 레타 마스터이자 최초의 크리터 마스터의, 공식적인 첫걸음이었다. * * * * * "……." "……." 침묵과 정적이 감도는 늪지. 물론 벌레와 새, 짐승의 소리로 채워져 있긴 했지만 이질적인 정막 또한 돌고 있었다. 갑자기 쳐들어온 이방인. 각 맹수들의 서열과 세력이 확고히 자리잡은 이 늪지에서는 이방인이란 새로운 식구를 뜻했으며, 그것은 또한 새로 서열을 정리해야 함을 뜻했다. 회색 고향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리이자 법, 약육강식! 그것은 서열을 정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즉, 자신의 서열을 확고히 하고자 맹수들이 이방인들에게 결투를 청하는 (물론 의사소통이 안 되는 종족, 인간한테는 습격이라 인식되고 있다)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돌아오지 않는 곳' 이라는 명예로운 호칭까지 붙여졌지만 말이다. 이방인, 레일리아 일행은 지친 몸을 간신히 누일 만한 장소를 찾았다. 어디가 늪일지 모르기에, 한걸음 한걸음을 주의 깊게 밟아야 하는 그들의 신경은 이미 곤두 설 대로 곤두섰고 지칠 1대로 지쳐 있는 형편이었기에 그 초라한 장소는 낙원과 다름없이 느껴졌다. 발을 쭉 뻗고 물통을 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과 절망이 교차되고 있었다. 물이 얼마 안 남은 것이다. 빨리 계곡을 찾아야 한다. 물론 습지라 나무를 벗겨 어떻게든 구할 수도 있겠지만, 독물에 해박한 사람이 없는 이상 안전한 계곡을 찾는 편이 좋다. 벌써 늪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흘렀다. 처음에는 독촉에 독촉을 해대던 레일리아도 입을 다문 지 오래였다. 왜 함께 왔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동행하고 있는 꼬마, 사뮤에르는 거의 실신지경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레일리아만 챙길 뿐, 그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뮤에르가 가문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 지 알려주고 있었다. 덩달아 용병들도 사뮤에르를 천대했다. 레일리아가 동생을 필사적으로 챙기려 들었지만, 그녀도 이틀 전에 독사에게 물려 기진맥진한 상태라 본의 아니게 동생을 소홀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풀이 죽어 있는 사뮤에르를 챙기는 유일한 이는 바로 무하였다. 그는 지친 사뮤에르를 업어 주었고 자신의 귀한 물까지 아낌없이 제공해 주었다. 물론 그에게는 흔한 것이 물이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 턱이 없었다. 그가 굳이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알리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그런 식으로 나오는데 시륜이 참견할 턱이 없었다. 그는 단지 '아는 것이 힘' 임을 내보이며, 간간이 자신의 물통을 무하의 오른손에 쥐여주었다가 돌려 받았을 뿐이었다. 무하의 오른손에 채워진 팔찌에 물의 정령이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는 무하의 팔찌의 정체까지는 몰랐지만, 그가 제공하는 신선한 물의 도움만은 은밀히 받고 있었다. 무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한 사뮤에르는 자리를 잡자마자 혼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무하는 그런 사뮤에르의 음식을 따로 챙겨두고, 자신의 몫의 음식을 먹었다. 이제는 준비해온 음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충분히 준비한다고 준비했지만 생각보다 설원이 넓었던 것이다. 또, 처음 준비 없이 맹수의 습격(결투지만 이쪽 입장에서는 엄연히 습격이다)을 받아 대부분을 잃어 버렸던 것이다. 야성의 눈을 한 시륜은 이런 상황이 꽤나 재미있는지, 일행 중 가장 활기찼다. 뭐, 의외로 덤으로 딸려 온 무하도 평소와 다른 바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말이다. "도대체 이 곳에는 왜 들어온 걸까?" 물을 마시고 있는 무하의 옆에서 슈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침 무하도 그것이 궁금하던 차였다. 그는 물통의 입구를 쓰윽 닦아서 슈에게 건네며 시륜을 찾았다. 레일리아와 기사들과 심각하게 이것저것을 상의하던 시륜은 곧장 무하의 곁으로 왔다. 얼굴을 보니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지루했던 모양이다. "이 곳에 왜 들어왔냐고? 내가 어떻게 알겠냐만은……무슨 약을 찾으러 온 것 같아. 지들끼리 말하는 걸 들어보니 말이야." "약? 그럼 그냥 부하를 시켜도 될 것을 약한 동생까지 끌고 들어온 이유는 뭐래?" 물을 꼴깍 꼴깍 들이키던 슈가 냉큼 물었다. "낸들 알겠냐?" "그럼 네가 이곳을 오려고 한 이유는 뭐지?" 무하가 조용히 물었다. 주위의 귀를 배려한 것이다. 시륜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비밀."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얼른 말해봐, 응? 뭔데? 뭐야?" 꽤나 궁금했는지 슈가 냉큼 끼어 들어 물어댔지만 시륜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대신 물만 몇 모금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을 뿐. 무하는 굳이 깨묻고 싶지는 않았는지, 지쳐 있는 사뮤에르의 이마를 닦아주다가 신발을 고쳐 신었다. 진흙에 자꾸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끈이 허술 해져 있었던 것이다. 시륜이 문 듯 물었다. "참! 묻고 싶었는데. 네 말은 어떻게 했어? 마르스였던가?" "떠나기 전에 헤어 졌어." "헤어 지다니? 팔았다는 거야?" 시륜을 추궁하던 슈가 무하에게 관심을 돌렸다. "아니. 말 그대로 헤어졌지. 마르스는 나의 것이 아니라, 친구였을 뿐이니까. 녀석은 친구인 나를 위해 수도까지만 동행해 주었던 것 뿐이야." 무하는 나무에 등을 기대며 나름대로 성심껏 답해주었다. 그의 답을 들은 시륜의 고양이 눈동자에 이해하기 힘든 미소가 서렸다. 슈는 여전히 이해가 안가는 얼굴로 이것저것 물었지만 무하는 굳이 했던 대답을 또 하려 하지는 않았다. "자자!" 갑자기 시륜이 박수를 치며 주위 이목을 집중시켰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자 만족스런 미소를 띈 시륜은 짧게 용건을 밝혔다. "환영 군이 도착했군. 반갑게 맞아들일까?" 이제는 시륜의 화법을 대충이나마 간파한 사람들은 잔뜩 굳어서 짐을 꾸렸다. '환영 군'이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도사리고 있는 몬스터, 야수 등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무하는 사뮤에르의 식사를 가방에 대충 쑤셔 넣고 그를 등에 업었다. 슈는 레일리아와 기사들에 의해 무기를 빼앗겼기 때문에 비무장 상태였기에 필사적으로 무하의 옆에 붙어 있었다. 이제는 그녀가 살던지 죽던지 간에 한푼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인식한 용병들이 그녀를 보호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점에서는 무하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시체로 가져간다 해도 돈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하는 알게 모르게 그녀를 많이 배려해주고 있었다. 용병들을 앞과 뒤에 두고 걷고 있는 레일리아의 안색은 눈에 띄게 안 좋았다. 가장 최상급의 실력자이기에 그녀의 바로 옆에 위치한 시륜과 그의 '떨거지들'인 무하, 슈 등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하가 사뮤에르를 업고 다니는 것처럼은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엄연히 레이디인 것이다. 그것도 전통 있는 가문의 레이디. 그래도 다행인 것은 레일리아는 다른 또래의 레이디와는 달리 여장부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절대 우는소리는 하지 않는데다가 주위를 독려 할 줄 아는 여자였던 것이다. 결국 괄괄한 성품의 그녀가 받은 조치는 신관에게 스테미너 힐링을 받은 것뿐이었다. 물론 그것조차 받지 못한 이들이 부지기수였지만 말이다. 시륜이 한 손을 들음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경고했다. 며칠간의 고생으로 그 경고가 몬스터들이 덮쳐오기 직전에 내려지는 것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알게 된 이들은 잔뜩 긴장해서 무기를 뽑아 들었다. 무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뮤에르를 슬며시 땅에 내려놓고 슈에게 맡겼다. 그리고 둘의 앞을 막아서며 곧 있을 습격을 경계했다. 세 기사는 레일리아의 앞뒤에서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역시 사뮤에르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사뮤에르는 그것을 보면서도 서글픈 미소를 잠시 보였을 뿐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았다. ……왠지 '페르노크'의 유년을 보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도 저런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카한 형님도…….' 소외된 이들의 기분이란 게 어떤 것인지 무하는 잘 몰랐다. 물론 그의 짧지만은 않은 생도 주목받지는 못하는, 아니 나쁜 의미로 주목을 받는 생이었지만 스스로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주위에서 어떤 식으로 대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태도와 정신으로 살아 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와서는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닮은 꼴'인 카한세올이 자신과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주위를 대하며 받아야 했을 상처들이 과연 어떤 것일까? ……이런 생각이. 시륜의 경고는 여태껏 그랬듯이 정확했다. "카오오오!" 투기로 가득 찬 야수의 울음이 주변에서 들려온 것이다. 무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용병뿐만 아니라 기사도, 시륜도 그것을 알아차렸기에 대응하기보다는 몸을 피하기로 했다. 여지껏 야수들은 대응을 할때는 바로 덤벼들었지만, 몸을 피할때는 거의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것을 몰라 무턱대고 돌진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 곳'의 순리를 깨달은 상태였다. 헌데 이변이 생겼다. 천천히 몸을 빼내는데, 미리 경고음을 냈던 야수들이 돌진해 온 것이다! 무하는 슈와 사뮤에르를 자신의 뒤로 밀며 검을 고쳐 쥐었다. 레일리아는 초점 흐린 눈으로 자신에게 돌진하는 야수들을 보았다. 기사들이 그 앞을 막아섰으나, 막힌 야수의 뒤에 있던 또다른 야수가 제지를 뿌리치고 다시 자신에게 돌진하는 것도 보았다. 레일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독기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이다. 무하는 레일리아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야수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들은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는 야수가 아니던가? 헌데 다른 일행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고 레일리아에게만 달려가는 모습이라니?! 여지껏 이런 일은 없었다. 이 모습은 마치……. "누군가에게 사육 당한 야수인가?" "자객……?" 시륜과 무하가 동시에 이런 말을 내뱉으며 서로를 보았다. 시륜은 미리 돌진한 상태였고 무하는 슈와 사뮤에르를 보호하기 위해서 뒤에, 다른말로 하면 레일리아 곁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시륜은 자신과 레일리아 사이를 벌리고 있는 야수들을 보며 고개를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하는 혀를 찼다. 누군가의 '의도'대로 가장 강한 시륜이 레일리아의 곁을 멀찍이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무하는 위태위태한 레일리아를 힐끔 보고 다시 시륜을 보았다. 시륜은 슬쩍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그는 무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하는 막 야수에게 물릴 뻔한 레일리아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검을 곤추 세웠다. 야수들이 본능적으로 멈짓하자, 무하는 레일리아를 어깨에 들쳐 메고 일행에게서 벗어났다. 그러자 야수들이 그녀를 쫓아 사라져 버렸다. ========================================================================== 제가 그동안 많이 아팠습니다. 처음에는 오기다, 버티자! 했는데.......좀 심했죠........ 염려의 메일을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드려요^^ 제가 자리에 제대로 못 앉아 있는 관계로 답메일을 못했습니다....ㅡ.ㅜ 하지만 정말 감사했답니다^ㅡ^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얼떨결에 레이디를 납치(?) 당한 기사들은 분노하며 당장 쫓으려 했지만, 시륜이 말렸다. "무하 녀석이 알아서 돌아 올 거야. 이 편이 다른 일행들에게는 더 안전해." "우리가 보호해야 할 분은 레이디 레일리아란 말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만히 있어! 네까짓 놈들보다 무하 곁에 있는 게 더 안전 할 테니! 너희도 목적지쯤은 알고 있겠지? 그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레이디께서……!" "네놈들의 레이디께서도 목적지쯤은 알고 있을 거 아냐!" "……." 순전히 기백에 눌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슈는 멍하니 기사들과 시륜의 접전을 보다가 이렇게 평했다. 솔직히 시륜의 거친 언동은 당장 기사들에게 칼을 맞아도 할말이 없을 만큼 무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어물쩡 시륜의 의도대로 진행되는 것은……. 그녀의 판단대로 '기백'의 차이라 봐도 무관할 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게는 지금 무하가 맡기고 간 사뮤에르라는, 보호와 배려 등을 퍼부어야 할 짐덩이가 있었던 것이다. 슈는 기운 없는 한숨을 쉬며 사뮤에르를 재촉했다. 하지만 지칠대로 지친 사뮤에르는 자신의 힘으로 발을 놀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것을 본 시륜은 기사들에게 명했다. "업어." "……." 지켜야 할 레이디를 갑자기 잃은 기사들은 갈팡질팡하며 시륜의 명에 따랐다. 시륜이 물었다. "목적지가 어디야?" "늪지의 중심지. 회색 열매가 열리는 곳." 회색 열매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설'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에 나온 일이 없는 약초이자 독초였다. 건강한 사람이 취하면 독으로 작용하고 병약한 사람이 취하면 약으로 작용한다는 이 열매는 신기하게도 효력이 완전히 여문 뒤, 단 이분밖에 작용하지 않는다. 이 회색 열매는 겉보기에는 울퉁불퉁한 검회색의 흉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일정 주기가 되면 그 단단한 껍질이 일순간에 붉게 물든다고 한다. 그 붉게 물든 시기가 바로 열매가 '약초나 독초로 효력을 발하는 시기' 인데, 그 지속시간이 지극히 짧아 이분 이상이 안 간다는 것이다. 이제서야 레일리아가 귀족 영애의 신분으로 이곳까지 온 이유를 알 듯했다. 마법을 이용한다고 해도 이분 내에 완전히 섭취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니……. 또한 병약한 사뮤에르가 이 강행군에 포함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열매를 섭취해야 할 당사자일테니 별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열매가 열리는 곳이 어디인가? 회색 고향의 중심부,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태고 나무'. 바로 그 태고 나무에 기생하는 식물의 과실이 회색 열매가 아니던가? 회색 고향이 목적지였던 시륜은 남들보다 이 곳에 대해 해박했다. 덕분에 이곳이 중심지로 향할수록 점점 더 살벌해지는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여야만 했다. "……젠장!" '대충 따돌렸군.' 무하는 나무 가지 위에서 훌쩍 내려왔다. 그의 어깨에는 예의 그 레이디, 레일리아가 들쳐있었다. 무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힘없이 쓰러져 있는 그녀를 잠시 내려보다가 실에게 잠시 그녀를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자리를 떠났다. 주위도 살펴볼 겸, 음식도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뮤에르의 적은 량의 식사가 가방에 들려 있었기에 한끼정도는 어떻게 해결한다고 쳐도 그게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시륜이라면 어설프게 그 자리를 지키느니, 목적지로 향하겠지. 그 편이 만나기 쉽고, 일을 완수하기 빠르니까." 일행과 동떨어져 나왔으니 뭐든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나무 가지 사이로 이동하며 간단한 사냥을 한 그는 대충 손을 본 뒤에 오른쪽 팔찌의 정령을 불러 깨끗이 씻어서 원래 있던 곳으로 향했다. 레일리아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옆쪽으로는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장작이 타고 있었다. 식은땀으로 체온을 빼앗긴 덕에 한기를 느끼며 일어난 그녀는 장작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어느 정도 체온이 돌아오자 주위를 돌아보았다. 장작에 의해 밝혀지는 빛의 범위 내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예의 젖은 흙과 풀들뿐……. 레일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며 좀더 자세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누, 누구 없……!" "정신이 들었나?" 다행히도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한 저음의 음성. "무하……?" 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무하는 가볍게 밑으로 뛰어내렸다. 누군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레일리아는 안심했다. "다들 어디 있지?" "아마도 목적지로 향했을 거다." "아마도 라니? 목적지라니?" "쉿!" 무하는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대고는 그녀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컸다는 것을 깨달은 레일리아는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며 주위를 살폈다. 특별한 훈련도 받지 못한 평범한 레이디에 불과한 자신이 주위를 살펴 봤자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턱은 없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기분 상 그렇게 라도 해야 편해질 것 같았다. "흥분하지 마라. ……아까 맹수들이 너만 노리더군." "……." 의외로 그녀는 침착했다. 이미 그런 일쯤은 예상했다는 듯……. 아니 예상이라기 보다는 익숙하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무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본인이 알고 있다는 말은 쉬워진다. "네가 일행에 포함되어 있으면 공연한 목숨만 나가떨어지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따로 나온 거다. 그냥 야수의 습격이라면 되려 인원이 적은 편이 좋겠지. 그쪽 목적은 야수 퇴치가 아닌 다른 무언가 인 것 같으니까." "……." 무하는 장작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꽤나 많이 쌓여 있는 장작더미를 보는 레일리아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회색 고향은 늪지대다. 즉, 그리 장작불이 필요한 싸늘한 기온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독기에 시달리는 그녀를 위해 무하가 일부러 준비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나는 아이템이 있을 것이다. 바로 히터. 하지만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늪지대에 도착하자마자 짐꾼들에게 죄다 맡겨버린 상태라 무하의 수중에는 없었다. "배고프지 않나?" "고파." 귀족답지 않게 투정 따위는 거의 부리지 않는 레일리아였다. 무하는 아직 굽지 않은 고기를 여지껏 다듬었던 나뭇가지에 찔러 넣었다. 꼬치처럼 길쭉한 가지에 줄줄히 달려 있는 고기는 별다른 양념은 하지 않았지만,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갔다. 주변의 야수들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레일리아는 역시 아직은 16살에 불과한 레이디였다.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며 고기를 뚫어져라 보는 그녀는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보였다. 무하는 가방에서 사뮤에르의 몫이었던 음식을 꺼냈다. 그리 딱딱하지 않은 빵과 마른 과일과 육포, 비스킷 등이 레일리아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독기 때문에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라 무척 시장한 상태였다. 허겁지겁 그것을 먹는 모습이 보기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말해보겠어? 목적지가 어디지?" 빵을 죄다 먹어치운 레일리아에게 물통을 건네며 물었다. 레일리아는 물을 몇모금 마시고 나서야 답했다. "목적지는 이 곳의 중심지야." "중심지라……. 길은 아나?" "그럼! 내가 리더 하는 행군인데 설마 그것도 알아두지 않았으려고!" "다행이군. 지금은 그냥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지. 그런데 이 곳에서 중심부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별로 남지 않은 건 확실해!" "……아주 안심이 되는 말이군." "나한테 무기를 주면 안돼?" "……." "사람 무시 하지 말라고! 이런 곳에서는 도망가 달라고 애원해도 안 도망간단 말야!" "……." "라이시륜!" "……." "쳇!" 완벽하게 무시당한 슈는 팔짱을 끼며 불만 어린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시륜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중심부에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들떠 보였다. "라이시륜씨는 순전히 독재에 횡포자야! 카 등급 전사면 뭐해? 인격이 안 되 먹었는데! 무하씨는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인간적으로 완성된 남자라고! 친구면 좀 닮은 점이라도 있어야지. 가까이서 뭐했어? 그 인격의 반이라도 배워보지?" 계속 투덜대는 슈의 의견에 반은 동의하지만 반은 부정하는 일행이었다. 동의하는 반은, 라이시륜이라는 남자가 '독재에 횡포자' 라는 것과 '인격이 안 되 먹었다' 였다. 진짜 리더인 레일리아의 부재 이후로 그 점은 더욱 확연히 드러났는데, 오죽하면 자긍심 높은 기사들마저 더러워서 피한다는 심정으로 뒤쪽으로 물러났겠는가? 하지만 확실히 행군은 안전하고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실적' 때문에 일행들은 불만도 표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고 있는 형편이었다. 부정하는 나머지 반은 '무하씨는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인간적으로 완성된 남자' 라는 부분이었다. 그들이 본 무하라는 남자는 라이시륜과 '동류'였다. 즉, 하등 나을게 없다는 말이다. 되려 라이시륜이라는 녀석마저도 한 수 양보할 정도가 아니었던가? 이래저래 몸은 편해도 정신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고달프게 시달리는 일행이었다. "배고파." "……." "발 아파." "……." 무하는 아까부터 중얼중얼 투덜대고 있는 레일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냥 쉬자고 하던가, 계속 궁시렁 대고 있는 폼이 영락없는 꼬마다. '알아서 신경 써달라는 건가?' 바로 부정하는 무하였다. 알아서 신경 써주길 바랬다면 힘든 척을 하지, 저렇게 궁시렁 대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쉬지." "응!" 당장 얼굴이 환해지면서 바닥에 풀썩 앉아버리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무하는 일전에 과일 나무를 지날 때 따두었던 열매를 그녀에게 건넸다. 배가 고팠던 것은 사실이었는지 얼른 받아들고 한입 베는 모습이 16살 소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무하는 자신에게 독이 든 열매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알려주었던 실과 넬에게 작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앉았다. 실과 넬은 무하의 무릎에 앉아 레일리아와 무하의 행동을 시늉하며 놀았다. 실은 레일리아처럼 과일을 계속 먹는 시늉을 했고, 넬은 무하처럼 주위를 경계하는 시늉을 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나올 법도 하지만, 무하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단지 손으로 둘의 볼을 툭툭 쳐보았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둘은 신나서 활짝 웃었지만 말이다. 레일리아는 언제나와 같이 쉴 때도 주위를 살피는 무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검은 두건을 눈 밑까지 눌러 써서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지만, 단아한 턱 선이 대충 '원판'을 짐작케 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애써 밑으로 내렸다. "무하는……."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입은 열었지만 할말이 마땅치 않았다. 슬쩍 고개를 드니 자신에게 고개를 돌린 무하가 보였다. 레일리아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마침 적당한 질문이 떠올랐다. "용병이지?" "……." 아는 걸 왜 묻냐는 의미의 침묵이 흐르자 레일리아는 점점 더 어색해 했다. 평소 여장부 같던 모습과는 달리 평범한 16살 소녀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무하에게는 의아하기만 했다. "그런데……?" 레일리아가 너무 어쩔 줄 몰라하자 무하는 무심히 입을 열어, 답해주었다. 자신의 답에 레일리아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지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레일리아는 반쯤 줄어든 과일을 만지작 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무슨 등급이야?" "……." 묘한 의미의 침묵. 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의 무하를 레일리아는 초조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글쎄." 결국 꺼낸 것은 애매 모호한 답변. 레일리아가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 무하는 한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며 주위를 살폈다. "이동하지." "으응." 레일리아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무하는 그녀가 자신의 실력을 몰라 저렇게 불안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다." "뭐?" 무하는 작은 소리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카 등급이라고 했다." "……!?" "그러니까 안심해도 좋아." "……?" 레일리아는 무하가 무슨 소리를 하나 멍하니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일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말이었음을 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무하의 작은 배려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훨씬 차분하게 발을 옮겼다. 무하가 그녀의 그런 모습을 자신의 실력을 알아 안심한 것이라 생각했다고 해도 별 수 없는 것이다. =========================================================================== 시험기간....입니다......고로......아시죠?(히죽) 말없이 이주 잠적하면 안 될 듯 싶어...... 얼른 한회 써봅니다. 수습이 안되는 스토리 진행이 아주 힘들군요.....;; 몽땅 정리하려고 보니 그것대로 문제가 있고....... 음....... 그럼 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겁없이 쌓여 있는 과제물들을 하늘을 대신하여 처단하기 위해.....이만~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중심지에는 무슨 볼 일인거지?" "그건……." 무하가 갑자기 몸을 낮추었다. 레일리아도 얼떨결에 상체를 숙였다. 무하는 천천히 검자루에 손을 가져대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멈칫했다. 그리고 슬쩍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레일리아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수가 많아." 나지막한 음성으로 레일리아의 의문에 답해준 무하는 슬쩍 위를 올려보았다. 역시나 높고 굵은 나무들로 가득했다. 무하는 레일리아의 옆으로 슬쩍 다가가 그녀의 입을 한 손으로 막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다음 순간……. "……!?" 단숨에 나무 가지 위로 올라갔다. 연이어 더 높은 곳으로 계속 뛰어 오르던 무하는 어느 정도 높이에 이르자 멈춰, 레일리아가 기둥을 붙잡게 해준 뒤 밑을 살폈다. 다행이, 그의 예상대로 조류나 나무를 탈 수 있는 종류의, 예를 들면 뱀이나 표범 따위의 야수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기척이 사라진 둘을 찾아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은 한참 주변을 배회하다가 이내 종적을 감췄다. 잔뜩 긴장한 레일리아는 그제서야 한숨을 쉬며 다른 이유로 긴장했다. 높이가 너무 높았던 것이다. 고소 공포증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질릴만한 높이건만, 무하는 이 참에 주위나 살피자는 심보였는지 주위를 계속 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 가지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앞뒤로 굵은 가지들이 많이 우성져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이라면 시도하지 못할 법한 일이었다. 그는 엉거주춤 서 있는 레일리아를 잡아주어, 옆에 앉게 했다. 일단 앉고 나자 생각보다 자리가 나쁘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던 말을 계속 할까? 중심지는 가서 뭐하거지?" 어색함에 질식할 것 같았기에 레일리아는 얼른 이것저것 말했다. "그, 그러니까 회색 고향의 중심지에는 태고 나무라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지?" "태고 나무……. 아아, 전에 읽은 적이 있어." "그 태고 나무에 기생하는 많은 식물 중에서 나는 열매가 있는데, 그걸 회색 열매라고 하거든?" "독이나 약으로 쓰이는 변덕스런 열매 말인가?" "응! 그게 필요해서 왔어!" "흐음……." "……그런데 그게 그렇게 흔한 정보였던가?" "뭐?" "우리 가문에서도 어렵게 구입한 정보인데……?" 무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중얼거리는 레일리아를 애써 외면했다. 솔직히 무작위로 책만 읽어 나갔던지라 자잘한 지식은 제법 되도, 그 지식의 희귀성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때문에 간간이 곤혹스런 상황에 직면하게 됐지만 늘 어영부영 넘겨버리곤 했다. "우연히 들은 것뿐이다. 그럼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아……." 레일리아는 서둘러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신이 알아두었던 지리적 특징과 대조해가며 방향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검은 늪지대를 지나면 그 뒤로는 회색으로 된 수풀지대가 나온다고 했는데……." "검은 늪지대라……."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라는 어마어마한 설명이 딸린 이 곳의 지리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설명이 엄청나게 부풀린 과장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물론 그 악명에 걸맞게 살아서 돌아온 이는 얼마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늪지대를 지나서 그 뒤로 무슨 세계가 펼쳐져 있는 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진짜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란, 그 늪지대의 건너편 세계가 아니런지……. 극소수의 살아 돌아온 이들은 바로 몬스터 헌터들이었다. 그나마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과히 그런 악명을 떨칠 만 하다고 할 수 있다. 살아 돌아온 이들의 설명으로 만들어진 지도가 몬스터 헌터 길드에 깊숙이 잠들어 있었고, 레일리아는 바로 그 지도라는 정보를 어렵게 구하여 이 험한 길에 나선 것이다. 드래곤 보다 희귀하다는 몬스터 헌터의 길드는 어디 있는 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레일리아의 가문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하에게는 위와 같은 판단을 하기 위한 바탕 지식이 희박했고, 때문에 그냥 말 그대로 '어렵게' 구한 모양이라고 그냥 어물쩡 넘어가게 됐다. 그는 멀찍이서 보이는 검은 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저긴가?" "……." ……그 '점'은 척 보기에도 멀었다. 물가를 발견했다. 꽤나 넓은 계곡이었다. 레일리아는 환호성을 지르며 세수를 했고, 무하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쉬었다. '점'을 향한 지 꼬박 이틀이 지났다. 간혹 만나는 야수나 몬스터를 피해, 돌아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최단거리를 목적으로 이동했기 때문인지 바로 코앞이 검은 늪지대다. 무하는 계곡 너머로 보이는 검은 땅덩이를 주시했다. 저 진흙탕 속에서 위험한 늪을 알아서 피해야 한다는 것이 막막할 뿐이었다. 무하가 늪지에 대해 알 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무하는 굵직한 나무로 주의를 돌렸다. 나무 가지와 가지 사이로 이동을 한다면, 땅에 발을 딛을 필요도 없이 끝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연히 든 생각이지만 꽤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한 무하는 한참 물놀이를 하고 있는 레일리아를 힐끔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단련된 전사도 아닌 평범한 귀족 소녀에 불과한 그녀가 나무를 탈 수 있을 리도 없고……. 고생길이 훤한 무하였다. "라이시륜씨……." "왜?" "여긴……혹시 늪지대야?" "그럴걸? 왜?" "……." 슈는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르켰다. 한 용병이 볼일을 보러 일행을 이탈했다가 늪에 잠기고 있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이 금방 다른 용병들이 밧줄을 가져와 끄집어냈지만, 다른 이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시륜은 너무나 시쿠둥하게 말했다. "내가 가자는 곳만 알아서 잘 따라오면 안 빠져. 멍청한 녀석은 자기 머리를 원망하며 생매장 당하는 수밖에." 슈는 냉정하다 못해 살벌한 시륜의 말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 그런게 어디 있어!" "그럼 어쩌라고? 의뢰를 맡은 이상 '신용'상 어떤 일이 있어도 완수하는 게 용병 아닌가? 이딴 일로 시끄럽게 굴지 말았으면 좋겠군." 슈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용병들은 쓰게 웃고 말았을 뿐이었다. 기분은 나쁘지만 맞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시륜이라는 남자에게 유일하게 이의를 표하는, 정확히는 말이라도 걸 수 있는 이는 슈뿐이었지만, 슈 또한 그다지 효력이 있는 이는 아니었다. 용병뿐만 아니라 인부와, 재미있게도 기사까지도 얼른 중심지에 도착해서 레일리아와 재회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실정이었다. 적어도 레일리아가 있다면 고용인에 불과한 시륜이 나설 리도 없을뿐더러, 좀더 사람들을 배려해가면서 나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늪지대에 들어선 지 하루가 지났다. 예상보다도 전진 속도는 더뎠다. 레일리아가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몸을 사렸기 때문도 있었지만, 나무들이 생각만큼 촘촘하게 박혀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하 혼자였다면 별 상관없었겠지만 레일리아는 아니었다. 결국 나무 위로 이동하는 것은 거의 포기상태였고, 천천히 확인해가며 걷게 된 것이다. 확인해 가면서 간다고 해도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경우는 무하는 처음이었고 레일리아도 늪지에 대한 간단한 상식만 알고 있을 뿐, 무하와 마찬가지로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늪지에 살고 있는 몬스터가 없는지, 하루동안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 정도랄까? 그게 어디냐만 말이다. 무하는 쉬기 위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운 좋게도 넓고 평평한 바위를 발견한 것이다. "다리 아파." 레일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리를 주무르는 게 보였다. 무하는 나무를 이동하기 위해 안아드는 것도 거부한 레일리아가 자신이 안마를 해주겠다고 해서 허락할 리 없다고 판단하고 그냥 누워버렸다. 몹시 피로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약간은 상쾌한 기분이랄까? 농땡 사부와 함께 수련한답시고 태백산맥을 헤집고 다녔을 때가 생각나서 일지도 모른다. 생애에서 두 번째로 행복하던 때. 물론 첫 번째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기억도 잘 안 나는 유년시절이다. 막연한 그리움과 따뜻함만이 느껴지는 추억일 뿐이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때를 제외하고 가장 행복했던 농땡 사부와 가하와의 생활들이 자꾸 떠올라, 힘들지만 지치지는 않았다. "농땡 사부." "사부는 놀리는 게 아니라고 했지! 왜 불렀냐?" "농땡이 치는 사부를 농땡 사부라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요! 태백산맥은 가하의 영역이 아닌가요? 이렇게 마음대로 헤집고 다녀도 되는 거 에요?" "하하하! 제자야, 네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인데! 내가 놀고 싶어서 돌아다니는 줄 알냐? 모두다 너의 수련을 위해서야! 너의 수련!" "……." "뭐냐? 그 불순한 눈초리는?" "아뇨, 별로." 왠지 사부가 가하를 다루는 법을 터득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라는 생각을 해보는 무하였다. 무하는 자신이 등을 대고 있는 바위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뭐랄까……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무하는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했다. 물위에 있는 배를 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레일리아는 자신의 굳은 다리를 주무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주위는 조용했다. 여지껏 회색 고향으로 깊숙이 들어가면서 느낀 점은, 이곳이 뭔가 체제가 완벽하게 잡혀 있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일정 '선'을 지나면 다른 야수가, 또 일정 '선'을 지나면 다른 야수가 덮쳐오는 것을 보아, 분명 영역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잡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역의 완벽한 '왕'이 있다면, 그 위대하디 위대한 '왕'의 주위에 무언가가 살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 터였다. 가하의 주위도 그랬다. 가하와 함께 산을 달릴 때면 야생의 범들도 경의를 담아 길을 비켜 주었고 경쾌하게 노래하던 새 또한 날개 소리 하나 하나에 주의했으며 벌레조차 속삭임을 멈추고 침묵으로써 왕을 접대했었다. 그만큼 가하는 절대적인 권력자였다. 또 그만큼 강했다. 무하는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수련을 하면서 더더욱 가하의 힘을 느꼈던 그다. 그토록 강하던 농땡 사부조차도 불평은 해대지만 한편으로는 경의를 보일 만큼 강한 존재였다. 무하는 천천히 검자루에 손을 가져댔다. 뭔가 불길했다. 애써 가라앉힌 호흡소리가 귓가에 울릴 만큼, 이질적인 정막감이 너무나 불길했다. 그는 아주 천천히 레일리아에게 걸어갔다. 자신의 발을 주무르고 있던 레일리아는 그제서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무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하가 레일리아의 바로 옆까지 걸어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용히 일어나도록 부축해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레일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나 버렸다. "내가 일어 날 수 있어!" 그녀가 다소 큰 목소리로 말하며 일어남과 거의 동시에 발 밑이 크게 흔들렸다. "크르르륵!" 낮은 울음소리가 공기 자체를 진동시키며 울려 퍼졌다. 무하는 긴장하며 레일리아를 옆으로 끌어 당겼다. 레일리아도 그때만큼은 순순히 무하의 옆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어디서 들어올지 모르는 공격에 잔뜩 곤두 서 있을 때였다. "……!?" "꺄악!" 갑자기 그들이 서 있던 바위가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무하는 자신들이 걸어 왔던 길이 점점 검은 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며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레일리아의 허리를 끌어 안고 발을 힘껏 튕겨 사라져 가는 길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경공까지 사용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괴현상이 무엇으로 인해 생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색으로 물들어 가는 길에 대해서만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이 늪지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 무하는 레일리아를 어깨를 메고 거의 잠겨 버린 '땅'을 마지막으로 튕겼다. 다행이도 바위 근처에는 없던 나무가 길 끝 쪽에는 있었기에 나무 가지위로 올라가 몸을 피신시킬 수 있었다. 무하는 가지 위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점프해서 다른 나무로 이동하고, 또 이동하는 식으로 빠르게 이상한 장소를 벗어났다. 그 무엇인가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 호기심을 충당시키기에는 위험요소가 너무 컸다. 때문에 그냥 조금 돌아서 지나가려 했다. 만일 레일리아의 울음 섞인 애원이 없었다면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반지?" "으응……. 훌쩍." "……하아." 그 난리 통에 그녀의 반지를 떨어뜨린 것이다. 무하는 한숨을 작게 쉬고는 냉정하게 말했다. "얼마나 비싼 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숨 값보다는 싸겠지. 그냥 간다." "안돼!" "……." 무하는 재고의 여지조차 없다는 듯 차갑게 레일리아를 보며 팔짱을 꼈다. 그 냉기에 레일리아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지만, 고집을 꺽지는 않았다. "그건 우리 엄마 유품이란 말야! ……딱 하나 있는 거란 말야." "……." 유품이라는 단어에 언젠가 찢겨졌던 부모님의 사진이 생각났다. 그녀가 찢었던……. 무하는 레일리아를 들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레일리아는 불시에 당한 일에 멍하니 있었고, 어느새 높은 가지에 올라서 있었다. "여기 있어." "하, 하지만!" "같이 있으면 걸리적거려. 늪으로 빠진 거라면 가망이 없으니까 포기해. 만일 그 녀석이 가지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슬쩍 가져와야 하니까 홀가분하게 움직일 수 있는게 좋겠지." 그리고 나서 무하는 짐을 레일리아에게 맡기고 빠르게 나무 가지 사이를 이동하며 사라졌다. =====================================================================================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직 시험기간 중입니다.....;; 이제 반 치뤘습니다..... 뭐, 그렇다는 겁니다.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부딪치고 싶지 않았던 상대다. 무하는 속으로 작게 한탄했다. 영 꺼림직 했던 것이다. 상대를 확인조차 못하고 정신없이 도주만 했을 정도로 그 존재에게는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하아." 기억을 더듬어 아까 그 장소 가까이에 접근한 무하는 나무 위에서 그 곳을 살폈다. 멀리서 꼼꼼히 보고 나서야 그곳이 거대한 늪 호수임을 알 수 있었다. 무하와 레일리아가 쉬고 있었던 곳은 다름 아닌 호수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검은 늪지대의 왕의 몸뚱이 위였던 것이다! 무하는 용케 자신들이 살아 남았었다고 생각하며 내심 식음땀을 흘렸다. 만일 아무것도 모른 체 그 위에서 불이라도 지폈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 무하는 어떻게 할까 고심하다가 나무 위에서 뛰어 내려왔다. 그는 자신의 가족인 가하의 지성과 지혜와 관륜과 예리함과 초월함을 믿기로 했다. 그의 짐작이 맞다면 이 거대한 존재도 가하처럼 '영물'급에 해당하는 고등 생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하처럼 서로의 의사가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농땡 사부는 분명 그에게 자신의 경지의 반정도만 와도 눈으로써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었다. 무하는 농땡 사부가 무예나 지혜에 해당하는 것들에 대해서 거짓말을 토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무하는 천천히 늪 호수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정중히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그것은 윗사람에게 하는 '절'에 불과했지만, 다른 이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한낱 괴수에게 절이라니! 「아까와는 달리 예의가 있어 보이는군. 갑자기 남의 몸 위를 올라타는 것은 그리 좋지 못한 버릇이라고 보네만.」 팔지 안에 있던 정령들이 간혹 말을 걸어 올 때처럼 들리지 않으나 들리는 '울림'이 직접 뇌리로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그 음성과 더불어 호수에 잔잔히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언가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듯한 파문이었다. 이윽고 바위 같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고,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것만을 내놓았는지 깊은 흑색 눈동자가 드러난 바위 속에서 천천히 떠졌다. 「나는 현무(玄武) 서열 11위, 흑비령이라고 한다. 인간 소년, 너의 이름은 뭐지?" "현무? 북방의 신(神)?" 「호오? 제 1기 마도(魔道)의 폐망 이후로 접하지 못했던 호칭이군. 하지만 정확하게는 북방의 신(臣)이지. 그런데 나는 이름을 물었는데?」 "아! 죄송합니다. 저는 무하라고 합니다." 「무하라……. 멋진 이름이군. 너는 알고 있을 지 모르겠지만, 잊혀진 고대어의 뜻으로 무하란…….」 "춤추는 강………입니까?" 「놀랍군. 고대어를 아직도 기억하는 이가 있었던가? 그 분에 의해서 소멸된 언어일텐데……?」 고대어가 한국어와 한문 등의 혼합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무하는 새삼 '고대어'라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 분?" 「몰라도 되네. 그런데 아까는 인사도 없이 바삐 가더니 어찌 다시 돌아 왔는가?」 "찾을 물건이 있어서 돌아왔습니다. 혹 반지를 못 보셨는 지요?" 「반지라…….」 왠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리는 모습이 불안했다. 하지만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상대는 무하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지혜롭고 오래된 고등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가 남의 물건에 눈독을 들여 거짓을 토할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눈으로 볼 때, 보석이란 조금 희안하게 생긴 돌맹이에 불과하지 않던가? 눈이 스르륵 감기면서 무언가가 늪 호수 위로 솟아올랐다. 흙 따위가 잔뜩 묻은 바위와 흡사한 무언가 위에 희미하게 빛을 머금은 작은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하는 그것이 레일리아의 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며 그 것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댔을 때, 갑자기 앙칼진 울림이 들려왔다. 「싫어!」 「하지만 우리의 것이 아니야.」 「그래도 싫어!」 「비호!」 다른 존재가 더 있었던 모양이다. 무하는 반지를 내버려 둔 체 둘의 목소리로만 느껴지는 공방을 지켜보기로 했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주어서 비령한테 준거란 말이야! 잃어 버린 녀석이 잘못이지!」 「주인이 찾는 것을 봤으면 돌려줘야지.」 「싫어!」 「나중에 다른 걸 주면 되잖아.」 「하지만 비령은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하잖아. 어떻게 구해!」 「그럼 언제 같이 나가자. 겨울이라면 이 곳도 휴식기니까.」 「진짜지?」 「그래, 그래.」 둘이서의 접전이 끝난 모양이었다. 맨 처음의 울림이 들려왔다. 「말썽이 일어나서 미안하게 됐군. 가져가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무하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 늪 호수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 천천히 파동을 그리던 호수는 일순 고고한 흑 빛을 머금으며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 흑 빛의 주인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늪지 안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고고한 흑 빛을 뿜어내고 있는 이의 모습은 인간으로 치면 여성의 것과 유사했다. 한 오라기의 천도 안 걸친 몸뚱이는 풍만한 곡선을 나타내고 있었고, 길게 흩날리고 있는 흑발은 그녀의 발 밑을 훨씬 내려서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슬픈 오라를 풍기던 소년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그런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는 이가 있었다. 그녀와는 달리 백색 빛을 발하고 있는 백발의 남자였다. 그는 눈을 감고 여자의 향내를 맡다가 속삭였다. 「뭘 생각하지?」 「알면서 뭘 물어?」 여자는 피식 웃으며 남자에게 기댔다. 남자는 여자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묘한 소년이었다.」 「어떤 식으로 묘한?」 「알면서 뭘 물어?」 둘은 서로를 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미 존재가 '지워진' 우리를 알고 있는데 다, 인간이면서 엘프처럼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라…….」 이 종족 중 가장 존경을 받는 이는 누구인가? 물론 두 말할 것도 없이 드래곤을 꼽을 것이다. 그들은 지상에 '드러나 있는' 생명체 중에서 최고의 힘을 가진 존재임과 동시에 무한한 삶을 보장받은, 타고난 지혜와 지식과 식견을 갖춘 존재였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물질계만 놓고 본다면 그 다음은 엘프일 것이다. 엘프들은 힘과는 상관없는 다른 능력으로써 존경을 받는 생명체였다. 그들은 속칭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진 이들로써 모든 종족을 친구로 받아들이며 모든 종족의 언어를 이해하는, 고고하면서도 소탈한 성품의 생명체였다. 타고난 아름다움과 더불어 하위 정령쯤은 능히 다를 수 있으며, 정진한다면 서열급의 정령과도 맹약을 맺을 수 있을 만큼 탁월한 정령술을 자랑하는 종족이었다. 서열급과의 맹약이란,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지지 못한 타 종족들로써는 도저히 넘보지 못할 '고귀한 힘'을 말하는 것과 다름 없었기에 그들은 다른 종족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헌데 폐쇄주의의 대명사 인간이 어떻게 '열어 놓은 마음'을 소유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를 두고 여자와 남자가 '묘한 소년'이라는 별칭을 붙여 버린 것이다. 하지만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세월을 살아온 그들에게 이런 잠깐의 호기심이 오래 갈리 없었다. 게다가 비호에게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다. 「비령, 약속 잊으면 안돼?」 그는 다짐을 받아 놓으려는 듯 여자, 비령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물었다. 비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구.」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상한 소리?" 시륜은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지긋이 갖다대며 주위에 침묵을 강요했다. 반사적으로 물었던 슈도 입을 굳게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공식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슈는 도둑길드, 레타 사잔 아나의 일원이었다. 때문에 그에 합당한 훈련을 거친 상태였고 '작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청각과 시각은 여간한 전사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예리한 상태였다. 순수하게 시각과 청각으로만 논한다면 그녀가 카 급 전사보다 한 수 위 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다른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그래?" "희미하지만 분명히……." 시륜은 눈을 감고 한참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그 바람에 그의 긴 흑발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슈는 무하와 마찬가지로 두건을 두르고 있는 시륜의 모습을 새삼 살펴보았다. 머리를 모두 감싸며 눈까지 푹 내린 무하의 것과는 달리 시륜은 이마 위에서, 양끝을 목 뒤쪽으로 감싸 내린 식으로 묶여 있었다. 그 두건은 귀를 거의 덮고 있었고, 두건의 앞쪽으로 긴 앞머리가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여성틱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별로 그러지는 않았다. 두건의 재질이 투박한데다 색 또한 무하의 것처럼 흑색이었고, 워낙 시륜의 얼굴이 냉혹한 빛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의 이런 망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시륜의 머리카락이 제자리를 찾을 때쯤해서 그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때 녀석들이다." "그때? 그 녀석들?" 슈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체 시륜은 급히 뒤쪽으로 뛰어갔다. 정확히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났던 두 기사들한테로 말이다. 자신을 발견한 두 기사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시륜은 소리쳤다. "그때 녀석들이다! 사육 당한 야수!" 무하는 서둘러 레일리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근래 조용해서 잠시 간과 한 점이 있는데, 레일리아와 자신이 애당초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온 이유는 다름 아닌 암살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암살자가 자신들의 종적을 놓쳐서 여지껏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무하의 존재 때문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면 문제는 심각해지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만은 피할 수 있길 빌며 급히 뛰어가는 그의 발길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소리가 있었다. "꺄악-!" "……빌어먹을!" 무하는 아예 검을 풀러 한 손에 꾹 쥐었다. 검은 아직 뽑지 않았다. 단 손잡이를 신속하게 뽑을 수 있도록 약간 꺽어 놓았을 뿐이었다. 정찰조이었는지 다행히 야수의 수는 다섯에 불과했다. 물론 그 정도도 평범한 소녀를 죽이기에는 모자름이 없었지만 레일리아는 나무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적의 수가 몇이건 간에 아직까지는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야수들이 나무 둥지에 머리를 거칠게 박아 대, 나무가 점점 기울어져 가는 상황이라 그리 낙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무하가 막 도착했을 때, 레일리아의 생명을 보전시켜 주고 있던 나무는 완전히 쓰러지고 있던 참이었다. 무하는 막 딛은 나뭇가지를 강하게 박차며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리고 입을 꾹 틀어막은 체 떨어지고 있는 레일리아를 향했다. 절대적인 공포 앞에서 비명조차 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던 레일리아는 갑작스런 충격이 닥쳐오자 그 고통에 신음했다. 중력의 법칙을 따라 밑으로 떨어지던 몸뚱이가 갑자기 다시 솟아 오르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눈을 크게 뜬 그녀는 익숙한, 그리고 듬직한 남자를 발견하고 안도했다. 물론 그녀의 안심한 이성과는 달리 몸만은 아까의 공포를 못 잊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만 말이다. 안전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서자마자 무하는 레일리아에게 안부를 물었다. "다친 곳은?" "없……꺄악!" 둘이 올라탄 나무가 크게 흔들렸다. 체력이 남아도는 야수들이 표적을 금세 바꿔 다시 부딪쳐 온 것이다. 무하는 혀를 차며 균형을 잃고 비명을 지르는 레일리아를 끌어안아 몸을 바로 해 주었다. 레일리아는 무하의 옷을 꾹 잡으며 가급적 밑은 보지 않으려 했다. 무하는 저번처럼 나무 위로 이동하여 야수들을 피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주지 않았다. 레일리아가 무하의 옷을 꾹 끌어 잡다가 품에 넣어 두었던 그녀의 반지를 밑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앗!" 떨어지는 반지를 향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그녀를 간신히 막으며 무하는 반지가 어디에 떨어지는 지를 확인했다. 정말 불행히도 반지는 막 위를 향해 위협적인 괴성을 질러대던 야수의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미, 미안." 무하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고작 다섯이라지만, 그 정도도 숙련된 용병 세명 정도는 있어야 무난하게 해치울 수 있는 수였다. 물론 무하 정도의 전사라면 쉽게까지는 아니라도 물릴 칠 수 있지만, 문제는 저 수가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야수들이 곧 닥쳐 올 텐데……. 애시당초 무하와 레일리아만 일행을 벗어난 것은 그 많은 수의 야수에게서 효율적으로 도주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지금 와서 야수들과 대립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투요원이 단 한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지금 물러서고 나중에 일행과 합류하여 다같이 토벌한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 많은 야수들 중에서 누가 반지를 삼킨 녀석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 최대한 빨리 해치우고 도주하는 길밖에 없는 건가……?' 무하는 재빨리 다른 나무로 이동했다. 정확하게는 아직 밑둥이 건재한 나무로 말이다. 그는 레일리아에게 기둥을 꼭 잡고 있으라고 한 뒤 빠르게 밑으로 내려갔다. 야수의 본 진이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해치워야 했다. 무하가 막 검을 뽑아 들려는 순간이었다. "크아악!" "그루룩! 그루룩!" 엄청난 소음들과 함께 야수의 본 진이 들이닥쳤다. 중간에는 야수뿐만 아니라 몬스터까지 새롭게 가세한 위협적인 군단이었다. 무하는 혀를 차며 검을 뽑았다. 일단 반지를 삼킨 녀석만 처리할 생각이었다. 녀석만 죽인 다음, 레일리아와 도주하여 본 진을 따돌린 뒤에 이 곳을 찾아와 반지를 되찾으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판단에 또 다른 변수가 끼어 들었다. 본 진의 뒤편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온 것이다. 현 상황을 잊고 살펴본 뒷 쪽에서는 익숙한 갈색 피부의 청년이 보이고 있었다. "시륜……?" "어이, 무하! 귀족 꼬마랑 같이 이쪽으로 오라고!" 시륜은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야수들을 도륙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주변에는 그 동안 그에게 당했던 스트레스를 유감없이 해소하고 있는 용병들과 기사가 있었다. 무하는 일단 반지를 삼킴 야수의 목을 베었다. 뱀의 머리와 목, 도마뱀의 몸을 가진 야수는 녹색 체액을 뿜어내며 명을 마감했다. 미처 넘기지 못한 반지가 체액 덩어리에서 비쭉 모습을 들어 내자 무하는 그것을 얼른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나무 위로 빠르게 올라가 레일리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옆의 나뭇가지로 이동했다. 대 여섯 개의 나뭇가지를 빠르게 도약하여 야수의 본 진을 통과한 그는 일행의 곁으로 안전하게 착지했다. "살아 있었군! 오랜만이다!" 시륜의 인사를 받으며 내려던 그는 레일리아를 보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드는 야수들을 향해 몸을 반 턴 시켰다. 그리고 뽑아 든 검을 비스듬히 내려쳤다. 거의 동시에 한 야수의 목이 깨끗하게 잘려 바닥을 굴렀다. 의외의 실력을 보이는 무하에게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무하는 검 집으로 한 야수의 머리를 밀어내며 다른 야수의 몸뚱이를 검으로 베어 넘겼다. 레일리아를 향해 무모하게 달려들던 야수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갑작스런 실력자의 등장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야수들의 사정까지 봐가며 싸울 정도로 용병들은 녹록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에 어떤 녀석 때문에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그들을 반 광인 상태에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야수들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휘체계를 잃은 군대와 같은 양상이었다. 점점 혼란해 하던 야수들은 급기야 사방으로 도주했다. 시륜은 냉정하게, 뒤쫓으려는 용병들을 막았다. 무하는 허공을 검으로 빠르게 휘둘러, 그 것에 묻은 체액을 떨쳐냈다. 그리고 천천히 검 집에 검을 밀어 넣었다. 전투는 끝난 것이다. 뒤에서 경쾌한 발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 무하씨 아냐!" 슈였다. 무하가 돌아보자 자신의 무기를 되찾았는지 채찍을 들고 웃고 있는 슈가 보였다. 순간 무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녹색 체액이 묻은 다른 용병들의 무기와는 달리 그녀의 채찍에서는 붉디 붉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필요도 없이 '사육자'를 해치운 주인공이 바로 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무하는 지독한 녹색 체액의 냄새보다는 희미하게 나는 그 혈향이 소름끼쳐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일행은 다시 합류하게 되었다. 그들이 레일리아라는 리더를 얼마나 환영하며 반겼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이거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삼일정도 꾸물꾸물거렸네요.....;; 글이 안써질때는 역시 어찌 해볼 방법이 없다는....... 쿠울럭.......;;;; 헌데 안쓰면 안쓸수록 어째 더 안써지는게......;;; 허허허.... 아해가 안올라 와....삶의 낙을 잃었다는 메일을 보내주신 분들......;;; 쿨럭...;; 인생은 아름다운 겁니다( '')~~~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생각해 봤는데 말이지." "……?" 한가롭게 걸어가던 시륜이 불쑥 입을 열었다. 무하가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륜은 그를 뚫어져라 보면서 말했다. "너랑 나, 둘 중에서 누가 강할까?" "글쎄……. 너 일 것 같은데?"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바로 하는 무하를 시쿵둥하게 보던 시륜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씨익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랑 대련해 볼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불필요한 기력 소비야. 게다가 난 광대 마냥 눈 요기 감이 되고 싶지는 않아." "흐음……." 수긍을 했는지 시륜은 깨끗이 물러났다. 하지만 둘의 대화는 주변인물들의 호기심을 잔뜩 키워버리고 만 상태였다. 특히 시륜과 리더인 레일리아의 호기심을 말이다. "한 번 대련해봐라. 원래 수준급의 검사끼리는 대결을 통해 많은 걸 알게 되고 얻게 되고 그런다던데!" 슈가 얼른 끼어 들었다. 싸움꾼인 용병들은 물론이거니와 무하의 의외의 선전을 보았던 기사들마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시륜과 무하는 무관심했다. 원래 관심이 없었던 무하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새 시들해진 시륜은 확실히 변덕장이였다. "별로." "관심 없어." 시륜과 무하의 이어지는 대답에 되려 눈빛을 번뜩이며 잔뜩 흥분해 버리는 일행이었다. "한 번 해보라니까? 솔직히 둘만한 실력자들이 만나게 될 기회는 거의 없다고!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난 실력자라고 불릴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무하의 답에 이어 시륜이 말했다. "만일 이 녀석하고 대련을 한다고 해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이서 할 테니까 관심 끊어." "쳇!" 슈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지만 더 이상 권하지는 않았다. 이미 이 두 사람의 성질머리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하지 않겠다고 한 이상 몇 날을 애걸해도 건지는 것은 한 터럭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벌써 저녁 식사 때였다. 구석에서 간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있던 무하에게 문 듯 생각났는지 시륜이 물었다. "너보다 강한 사람을 많이 봤다고?" "아아.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때 내가 엄청나게 약했다고 해야겠지만……. 지금의 나와 비교한다 해도 우위를 점하는 실력자들을 꽤 봤지." "호오! ……누군데?" "나의 사부, 가하와 형님. 그리고 뮤비라." "그렇게 말해서는 모른다구." "하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어. ……아! 리안과 샤도!" "헤에. 많긴 많군." "세상은 넓으니까. 아, 너도 포함 돼." "영광이군." "사실을 말한 것 뿐이야." 시륜이 관심을 끊고 식사를 계속하자 이번에는 슈가 물어 왔다. "무하의 사부님은 어떤 사람이야?" "……." 무하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괴짜." 슈는 약간 멍하니 무하를 보았지만 그는 한없이 진지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무언가 더 묻기 위해 슈가 입을 열었지만 무하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식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늪지의 끝이 보이는 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레일리아는 회색 수풀 지대를 눈앞에 두고 휴식을 결정했다. 시륜이 일행을 이끌 때와는 달리 몬스터와 적지 않은 만남을 가졌기에 일행들은 잔뜩 지쳐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편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시륜이 들었다면 콧웃음을 지었겠지만 말이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였기에 가능한 반응일 것이다. 사뮤에르는 다시 만난 무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막 만났을 때는 후방에서 일이 잘못 됐을 시에 도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지쳐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무하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무하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사뮤에르의 머리를 부벼주고 야영할 준비를 했다. 사뮤에르는 그런 무하의 뒤를 따라 같이 장작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륜이 웃으며 말했다. "영계한테 인기가 좋은데, 무하?" 무하는 어깨를 으쓱 였을 뿐이었다. 레일리아는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지만 말이다. 비록 왜 흥분 하냐며 시륜에게 면박을 받았지만, 누나로써는 합격점이 아닌가? 일전에 무하와 대립이 있었던 용병 셋은 그의 등급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알아서 눈치를 봤지만, 무하는 그들의 존재를 잊은 듯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면 무하의 그런 태도가 그들을 매우 안심시켜 주었던 모양이다. 무하는 자신의 옆에 꼭 붙어서 잠든 사뮤에르의 머리를 쓸어 주며 타고 있는 장작불을 멍하니 보았다. 그의 양어깨에는 실과 넬이 꼭 붙어 있었는데, 오른쪽에 앉아 있던 넬은 순간 허공에서 파닥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무하의 어깨를 툭치며 옆에 앉은 것이다. 슈였다. "잠이 안 와? 피곤할 텐데……." "별로……." "무하씨는 늘 잠을 얼마 안 자는 것 같아. 불면증이야?" "글쎄……." "흐음……." 슈가 입을 다물자 주위에는 정막이 깔렸다. 불침번을 무하가 서기로 했기 때문에 깨어 있는 사람은 무하와 슈 밖에 없었다. 사람 외에는, 어느 새 장작 쪽으로 날아가 놀고 있는 실과 넬을 들 수 있지만. 슈는 가만히 눈을 감고 무하의 주위에서 작게 들리는 멜로디를 감상했다. 듣고만 있는 것으로도 취해 눈물이 날 것 같은 조용하면서 슬픈 멜로디였다. 주위가 아주 조용해 져야만 간신히 들리는 희미한 멜로디였지만 이렇게 옆에 가까이 앉아 집중하면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슈의 머리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무하의 어깨에 닿았다. 무하는 잠시 슈를 내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원래대로 했다. 슈의 어깨가 아주 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 챘기 때문이다. "무하씨한테 들리는 멜로디는 너무 슬퍼." "……."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거야." 겨우겨우 뱉어내는 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슈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무하씨는 사랑해본 적 있어?" "……." "난 있어. 지금도 사랑해." "……." "이제는 옆에 있을 수 없게 되 버렸지만 너무 사랑해." "……있어. 아니 있었어." 정말 무하가 한 말이 맞는지 슈는 몇 번이고 생각해야 했다. 평소의 무뚝뚝하면서 무덤덤하던 무하답지 않은 차갑게 굳은 목소리. 하지만 슬픈 목소리. "이제는 사랑하지 않아." 고집스런 어조로 그렇게 내뱉은 무하는 두 팔에 걸려 있는 팔찌를 내려보았다. 자신의 피를 잔뜩 머금은 정령의 팔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서로가 파멸로 갈 뿐인 사랑을 하고 있다는 두 정령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쪽이 죽어간다는 생각에 괴로웠을까? 아니면 서로의 마음이 그만큼 진실하다는 생각에 행복했을까? 무하는 행복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슈는 겉보기에는 담담하고 차분하기 그지없는 무하를 보면서, 왠지 울고 있는 자신보다 훨씬 슬피 울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무하와 슈가 장작 너머로 보이는 위치에 레일리아가 누워있었다. 곤히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갑자기 무언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몸이 돌아감과 동시에 그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녀의 눈에는 음유시인이 읊는 노래 중에서 약방의 감초마냥 등장하는 '질투'라는 감정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노래하는 지독하고 파멸적인 것이 아닌 무언가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이라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런데 사부와 형은 알겠고, 뮤비라는 사람은 누구냐?" 행군이 시작되자마자 시륜이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고, 상당한 뒷 북이었지만 무하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답해주었다. "형님의 친구." "흐음……. 그 형님이라는 사람은 네 친형이냐?" "……아아." 내심 고소를 지었지만 분명 테밀시아는 그의 '가족'이었다. "그럼 혈통 덕인가? 너희 부모님도 강하시냐?"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질문이라면 답은 '아니다' 이었다. 기억이 잘 나기도 하지만, 분명 이런 쪽의 '강함'을 갖추신 분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노크'의 부모님이라면 답은 '모른다' 이었다.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의 뜻을 가진 답이었지만 시륜이나 다른 일행들은 다르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또, 그렇게 판단하기에 족한 대답이기도 했다. "미안." "……?" 의외의 답에 조금 고민해 보던 무하는 이내 이들이 '페르노크'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라 판단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정정해 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정정하는 것이 더 우습게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사과를 한 시륜은 다시 질문했다. 그의 뇌리에는 자신과 같은 레벨이라고 생각했던 무하가 봤다는 강자들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 리안하고 샤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용병이야." "흐음. 이름이 어째 애칭 같은데……. 친구?" "우연히 만난 사이인데……." 친구라……. 생각해보니 묘한 사이이기도 했다. 직접 본 적도 한 손에 꼽는데 다가, 이야기를 나눈 시간조차 한시간도 못 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유시리안이 도둑이었으니까 그리 좋은 인식도 생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두 번째 만났을 때 꽤 반가웠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그의 강함을 볼 수 있었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사람을 베던 모습……. 그러고 보니 또 다른 의문이 든다. 슈의 채찍에 피가 흐르는 모습조차도 역겨웠건만 왜 그의 살육장면에서는 그의 '강함'만이 보였을 까?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기는 무하를 지켜보던 시륜이 잠시 후에 다시 물었다. "리안과 샤라는 사람이 용병인데다 그렇게 강하다면 이름이 꽤나 알려졌을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려주겠어? 내가 아는 사람일 지도 모르니까." 뭔가 감을 잡은 듯한 시륜의 말에 무하는 잠시 기억 속의 유시리안을 정리해보았다. "리안은 매우 예의가 바른 사람이야. 사교성도 좋고 장난기도 많고 상냥한 남자지. 실력은 정말 대단하고……. 아, 외모도 무척 뛰어나. 등까지 내려오는 백금발을 가졌는데, 무척 아름다웠어. 샤는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꽤 재미있는 사람이야. 마법을 쓰는 것 같은데 스펠도 안 읊고 바로 시동해버리지. 써클이 쾌 높을 것 같던데……." "……." 시륜은 뭔가 헷갈린다는 얼굴을 했다가 곧 고개를 저어버렸다.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닌 모양이군. 내가 들었던 그 녀석은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녀석이니까." "그럼 아닌 모양이네." "아아. 뭐, 그 녀석도 실력만은 끝내주지만 말야. 샤라는 사람은 아예 감 잡히는 데도 없고. 역시 세상은 넓다는 말이 맞았어.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이 이렇게 많다니!" 시륜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입가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간혹 갸웃 거렸다. 무하는 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 너무 안써져~!!!! 쿠에에에엑....>O< 훌쩍.... 훌쩍.... 교정본이 도착했습니다.... 얼른 봐야 하는데.....ㅜ.ㅜ 잠이 쏟아지는 군요......;; 이럴때는 그냥 자줘야...쿨럭... 얼른 보고 넘겨야 2권이 나올터인데... 2권 이벤트도 하고 싶지만....(어차피 참가 해주실 분도...없을테고...;;) 으으으.......하는 일 없이 바쁩니다....ㅠ.ㅠ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회색 수풀 지대로 들어서, 중심부로 가는 동안 단 한차례의 습격도 없었다. 암살자라는 존재도 최 상위 서열 급의 맹수라는 존재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작은 짐승이나 새, 벌레조차 보이지 않았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에 수풀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 무거운 적막감이 일행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무하의 멜로디만이 약하게 퍼지고 있어, 그나마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이상해……." 레일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매우 작은 소리였지만 맨 뒤에 있는 일행들조차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주위는 조용했다. 말 그대로 바늘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의 침묵과 정적. "그때 그 곳 같지 않아, 무하? 반지를 떨어뜨렸던 곳 말이야." "……." 무하는 고개를 끄떡임으로써 답했다. 레일리아로서는 누구라도 입을 열어주길 바랬지만 누구도 감히 이 정적 속에서 입을 열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무하나 시륜은 단순히 입열기가 귀찮아 보였지만 말이다. 무하는 주위를 더 둘러보다가 시륜을 보았다. "이 수풀 지대 자체가 어떤 존재의 보금자리라고 본다면……." "아무리 멍청한 놈이라도 무식할 정도의 넓은 보금자리를 가지지는 않아. 자신이 누울 수 있는 장소와 그 최 근방 정도를 불침입 지대로 만들지……. 만일 이 지대가 어떤 녀석의 보금자리라면……." "단순하게 몸 채가 크다……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어쩔 때는 가장 단순한 게 가장 명쾌한 답이 되는 거지. 여지껏 일들을 보자면……. 중심부로 갈수록 급이 높아지는 것 같으니까 가장 중심부에 있는 놈을 가장 센 놈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흐음……." 무하는 비령을 떠올려보았다. 이 회색 고향의 생태계를 대입해보면, 그 엄청난 넓이의 늪 호수를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그가 단지 서열 2위에 불과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회색 고향의 지배자는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단 소리인가? 그렇다면 그의 성역에 해당되는 보금자리에 침입한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만으로도 좋은 끝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신용이 생명인 용병들이 배신하고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무하는 원래 이곳을 단신의 몸으로 찾아오려 했던 시륜을 새삼 돌아보았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볼일로 이곳을 찾아오려 했단 말인가? 하지만 물을 수도 없었다. 은밀히 물어도 답해줄까말까 할 판에, 지금처럼 조용한 와중에 물어보면 생각도 할 필요 없는 것이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듯 하던 시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어이, 레일리아." "왜?" "확실히 해두고 싶은게 있어서 말이지. 나와 무하한테 들어온 의뢰가 분명 '회색 고향에서의 호위'였지?" "그런데?" "흐음……. 아니야, 됐어."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무하가 갑자기 시륜의 어깨를 잡았다. 시륜은 무하의 무언의 질문에 씨익 웃으며 답했을 뿐이었다. 무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려놓았다. 그런 둘의 모양새를 지켜보던 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둘은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답했을 뿐이었다. 레일리아도 뭔가 불안한 눈으로 둘을 보았지만, 물어 본다고 답을 줄 인물도 아니고 용병인 이상 신용에 해가 갈 일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그냥 덮어버렸다. 게다가 수풀 지대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태고나무의 위용에 정신이 팔려, 냉정히 이것저것을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태고나무! 전설 속에서나 접할 듯한 거대한 고목! 제 1기 마도 때부터 존재해 왔다고 하는, 창세신이 심었다는 나무는 지상에 그 위용을 반도 드러내지 못한 상태였다. 거대한 산봉오리 마냥 그 끝이 구름을 파고 들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늪지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지 않았을까 의문이 듬 직도 하지만은 그럴 정신마저도 빼앗긴 상태였다. "엄청나군……." "아아." 무하와 시륜이었다. 시륜은 갑자기 피식 웃더니 무하를 툭 쳤다. 멍하니 태고나무를 보고 있던 무하는 시륜의 갑작스런 행동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시륜은 명쾌하게 말했다. "이 지대의 지배자는 아무래도 저 녀석인 모양이야." "……!" 무하는 다시 한번 그 거대한 고목을 보았다. "생태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건 맹수지만 결국 최종 지배자는 밑바닥에 있는 생산자란 말이지……." "뭐?" "아니, 아무 것도."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수십의 인간들이 보이고 있는 태고나무의 가지. 그 위에 길고 고운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를 경의 하듯 태고나무는 가지를 구부려 앉기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남자의 살풋 감겨져 있던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고귀한 혈통을 잇는 자, '훼오트라 아나'만 이 가질 수 있는 황홀한 주홍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그늘이 그의 새하얀 피부에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의 고고한 자태는 절로 경의를 표하게 하고 있었다. 바람이 그를 감싸고 지나갔다. 흑발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는 자신의 흑발 사이로 보이는 한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만큼은 그의 공허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무하……." 그는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손에서 펴져 있는 검지 손가락이 똑바로 무하를 가르키고 있었다. "아니……. 페르노크." 순간 하늘 위에 유유히 떠다니던 구름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회색 고향을 늘 감싸고 있던 구름이 밖으로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던 태고 나무가 작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태고적부터 누적되어 온 그 나무의 엄청난 기운이 서서히 주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건 시험이다. 탈락은 죽음뿐." 그의 몸이 서서히 떠올랐다. 대기가 그를 떠받쳐 올려주고 있었다. 그의 주위는 흩날리고 있는 흑발로 부산스러웠다. 그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살아 남아봐라, 페르노크." 시륜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의 커진 눈동자가 태고나무를 향하다가 이내 하늘을 올려보았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다들 의아해하면 덩달아 위를 올려보았다. "……!?" "아……!?" "하, 하늘이!" 회색 고향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무언가에 밀려나듯, 태고나무를 중심으로 밖으로 내몰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맙소사……!"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시륜마저도 할말을 잃고 하늘, 아니 온통 뒤엉킨 태고나무의 가지들을 보았다. 회색 고향의 하늘 전체가 태고나무의 가지로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우……움직인다!" 하늘을 가리며 엉켜 있던 거대한 가지들이 천천히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일행들은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가지들이 서서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사뮤에르는 그것을 보다가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로서는 이런 상식 외의 일을 소화해 나갈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도만 달랐을 뿐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륜이 갑자기 소리쳤다. "뛰어!" 그리고 빠르게 태고나무의 본체로 달려갔다.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 라는 이론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가지들이 본체는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으로 행동한 것뿐이었다. 게다가 나뭇가지의 범위가 회색 고향 전체였기 때문에 벗어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꺄악!" 하늘에서 가지들이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레일리아는 바로 자신의 앞에 박힌 가지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간발의 차로 몸이 꿰뚫리는 것을 모면한 것이다. 잔뜩 굳어 있는 그녀를 잡아 끈 것은 무하였다. "서둘러!" 드물게 언성을 높이는 그의 모습에서 사태의 심각함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일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힘껏 달렸다. 그 옆에는 두 기사 중 사뮤에르를 여지껏 보살폈던 한 기사가 그를 업고 달리고 있었다. 다른 기사는 레일리아의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시륜은 달리면서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유유자적하게 구경하고 있다고 보인다 해도 이의를 달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시륜의 얼굴에서는 좀 전의 당황한 기색은 찾아 볼 수 없고, 되려 호기심과 약간의 장난기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거의 동시에 내리 꽂이는 가지들을 요령껏 피하며 외쳤다. "이거 지금은 직선적이라 다행이긴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이었다. 이미 바닥에 꽂였던 가지가 땅을 파고 들며 일행을 추적하다가 위로 솟구 친 것이다. 제일 먼저 솟아오른 가지는 공교롭게도 사뮤에르를 업고 있던 기사 바로 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사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점프했기에 겨우 꼬치가 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륜은 중얼거렸다. "추적이 시작되면 큰일이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반 수 이상이 바닥으로 내리 꽂이거나,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가지에 꿰 뚫려 명을 달리한 상황이었다. 레일리아의 손을 잡아 끈 채, 앞으로 날아가듯 달리던 무하는 옆에서 자신을 향해 뻗쳐오는 가지를 피해, 레일리아를 앞으로 밀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덤블링을 하여 뒤로 또 물러나야 했다. 그가 발을 딛은 곳에서 가지가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두 번에 걸친 주춤거림 덕분에 무하는 일행과 꽤 넓은 거리를 떨어져 버렸다. 때문에 서둘러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의도와는 달리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마치 잘 짜여진 군대처럼 나뭇가지들이 무하를 몰아세웠기 때문이었다. 무하는 피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했다. 검을 뽑는다해도 건장한 장정 다섯 명이 감싸야 겨우 덮일 것 같은 굵은, 그것도 척 보기에도 엄청난 기운까지 응축되어 있는 가지를 쳐 낼 재주가 없었던 것이다. 또, 쳐낸 수 있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최단거리로 강행하여도 며칠이나 걸려서 겨우 반만 올 수 있었을 만큼 광활한 회색 고향을 모두 덮고도 남을 만큼의 엄청난 가지들을 무슨 수로 다 쳐낼 수 있겠는가? 무하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의 주위에서 실과 넬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 현상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지, 쉽게 힘을 개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조금만 힘을 보탰어도 무하는 지금쯤 태고 나무 본체에 도달해 있었으리라. 점점 뒤로 밀려나기만 하던 무하는 되든 안되든 검을 뽑아들어야 했다. 사방에서 한치의 틈도 없이 그를 향해 나뭇가지들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시체조차 산산조각이 나, 남지 않을 터였다. 먼저 가장 먼저 자신에게 근접한 가지를 힘차게 베었다. 생각보다 무난하게 잘렸지만, 잘린 체로 계속 다가오니 전혀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하는 바로 뒤에서 덮쳐오는 가지를 베었지만, 밑에서 크게 진동이 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땅을 뚫고 굵직한 나무가 솟아올랐다. 이미 그것은 포획물을 건졌던지, 흙과 피로 더러워진 시체가 꿰뚫려 있었다. 땅을 파고들어 오는 동안 떨어져 나갔는 지, 한쪽 팔이 뜯겨져 있었고 다리는 기형적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게다가 얼굴은 이미 헤져서 흙으로 지저분해진 살점만 보일 뿐이었다. 무하는 그 다급한 와중에도 그것으로부터 눈을 떼어놓지 못했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그는 자신의 머리 위로 빠르게 내리 찍혀지고 있는 나뭇가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입을 틀어막고 시체만을 떨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실과 넬이 옆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 했다. 무하가 정신을 수습한 것은 사방에 쳐진 물의 결계 때문이었다. 나무들이 사방에서 결계를 비집고 들어오려고 꿈틀대는 모습은 보통 정신으로는 도저히 직시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하는 그런 것보다는 자신의 바로 앞에서, 간만에 큰 사이즈로 변해 엄청난 힘을 뿜어내고 있는 넬에 놀랐다. 게다가 그뿐만 아니라 실조차 커지더니 두 손을 사방으로 펼쳐 보이고 있었다. 실이 힘을 개방하자, 사방에서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바람의 칼날이 나무들을 갈기갈기 찟어 놓기 시작했다. 간혹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과 능력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여지껏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앞에 두고 있는 얼굴 같기도 했고, 사랑하는 이를 어쩔 수 없이 배신할 때의 얼굴 같기도 했다. "실……넬?" 덮쳐오는 나무의 기운이 약간 수그러든 듯 하자 실과 넬은 거의 동시에 무하에게 고개를 돌리며 뭐라 외쳤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무하의 주위의 마나가 기형적으로 비틀리면서 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외친 것은 마법 주문이었다! "무슨……!?"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무하의 몸은 결계 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결계가 존재했었던 공간에 나타난 이가 있었다. 바로 태고나무에 앉아 있었던, 주홍빛 눈동자의 남자였다. 그가 나타나자 나무들은 결계가 사라졌음에도 주위를 둘러쌓을 뿐, 덮치지 않았다. 되려 주위의 불순한 것들로부터 보호하듯 조심스레 그를 감싸고 있었다. 남자는 긴 흑발이 가라앉자 감겨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고귀한 주홍빛 눈동자가 드러나자 실과 넬은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남자의 눈은 여전히 공허했다. 둘의 건방진 방해에 대한 분노도, 일의 실패에 대한 실망도. 그 어떠한 것도 담겨 있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가 실과 넬에게로 향했다. 긴장한 기색이 뚜렷한 둘을 한참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희를 그의 곁에 있게 하는 게 아니었다." 실과 넬은 그의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명했다. "돌아가라" 실과 넬은 깊숙이 고개를 숙인 다음에 서서히 자연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그렇게 서로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남자는 나뭇가지들이 만들어내는 결계 안에서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꿈틀대고 있는 나뭇가지만 보였을 뿐이건만 그의 눈에는 그 외의 것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번은 실과 넬을 봐서 넘어가겠다, 페르노크." 곧 그의 모습도 실과 넬처럼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나뭇가지들은 본래의 자리를 찾아,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대의 커튼이 올라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 실과 넬이 이렇게 해서 페르노크의 곁을 떠나게 된겁니다^ㅡ^ 아아, 드디어 2권 교정본 수정도 다 끝났고, 이제 소제목만 정하면 됩니다^ㅡ^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일행들은 다행히 태고나무의 뿌리 쪽에 생긴 틈새로 피신 할 수 있었다. 태고나무의 거대한 줄기에 기생하고 있는 식물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틈새의 입구는 여간해서는 발견하기 힘들었으나 시력이 좋은 시륜이 용케 발견했던 것이다. 다행히 틈새에 들어서자 가지들의 위협이 사라졌다. 살아 남았다고 안도하기보다는 앞으로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걱정이 더 드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워낙 죽음을 당한 수가 많았기 때문에 인원파악 자체를 안하고 있던 일행 중에서,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 무하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 챈 사람은 레일리아였다. 자신을 앞으로 밀었던 것까지는 알았지만 뒤에서 곧장 따라오고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계속 달려왔던 그녀는 가쁜 소리로 소리쳤다. "무하는!?" "죽었나보지." 시륜의 답이 바로 이었다. 레일리아는 그의 멱살을 잡으며 히스테리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함부로 말하지마! 당신 친구잖아!" "쿡." 그녀의 손을 뿌리친 시륜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녀석과 나는 동행이었을 뿐이야." 늘 차갑게 말하던 시륜이었지만 이때만큼 소름끼치도록 싸늘한 적은 없었다. 다른 일행뿐만 아니라 슈조차도 몸을 웅크리며 시륜에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오직 레일리아만이 그런 시륜의 뺨을 올려치기 위해 손을 들었다. 물론 시륜의 간단한 저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시륜은 붙잡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옆으로 뿌리쳤다. 힘 약한 소녀에 불과한 그녀는 옆으로 형편없이 고꾸라졌다. "적당히 까불었으면 좋겠어, 의뢰인씨." "이……!" 발끈한 레일리아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시륜은 틈새 위로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슈가 두려움에 질린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그는 전사일 뿐, 용병이 아니었다. 때문에 최악의 순간에서도 의뢰인을 배신하지 않는 용병과는 달리 목숨이 달렸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다. 전사에게 필요한 것은 실력이지 신용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슈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시륜이 이탈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시륜은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틈새 안에서도 날렵하고도 정확한 놀림으로 올라갔다. 약하게 비치던 빛이 그의 몸 덕에 가려졌다가 곧 틈새 안을 비추어 주었다. 시륜이 떠난 것이다! "이, 이제 어떻게 해." 슈는 채찍을 꾹 집었다가 위의 동향을 보고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새삼 날렵하게 뛰어갔던 시륜에게 감탄하며 힘들게 올라간 그녀는 바싹 긴장하며 틈새 밖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비명을 질렀다. "무하씨!" 무하를 향해 사방에서 나뭇가지들이 덮치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금방 나갔던 시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슈는 자기도 모르게 틈새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누군가 밑에서 저지했다. "죽으려고 환장했어!?" 이름은 모르지만 용병 중 한 명 인 것 같았다. 그새 나뭇가지들은 굉음을 내며 무하에게 박혀 들어갔다. 무하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슈는 덜덜 떨며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혼란 상태에 빠진 슈는 밑에서 누가 기어 나와 자신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슈의 옆자리를 차지한 레일리아는 가지들이 일제히 한 방향에 쏠려 있다는 것을 알고 전후 사정을 대강 알아 챌 수 있었다. "무, 무하가 저기 있는 거야?" "아! 레, 레일리아님." "무하가 저기 있는 거냐니까?" "그, 그게……." 그때였다. 둘의 위쪽에서 부자연스런 빛이 순간 번쩍이더니,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미처 자리를 못 잡고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슈는 얼른 레일리아를 감싸 밑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다행히도 떨어지는 물체를 중간에서 낚아챈 손이 있었다. 깨끗한 갈색 피부의 시륜이었다. 그는 왼손으로는 태고 나무의 줄기에 기생하는 넝쿨 식물을 붙잡고, 오른 손으로 떨어지려 했던 물체, 무하를 잡아챘다. 대단한 균형감각이었고, 대단한 힘이었다. 무하의 몸은 정신을 잃었는지 축 쳐져 있었다. 시륜은 무하를 잡아 당겨 품에 안고나서 밑으로 내려왔다. "간거 아니었어?" "내가 왜?" "아, 아니……." "가지를 타고 이동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올라갔을 뿐이야. 시간을 못 맞출 줄 알았는데 다행이군." 안전하게 착지하는 순간 무하가 꿈틀댔다. 잠시 기절했던 모양이다. 시륜은 그를 조심스럽게 나무에 기대게 해주었다. 무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지기가 무섭게 누군가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밝은 목소리,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그에게 안겨든 이는 다름아닌 레일리아였다. 그녀는 무하의 옷가지를 꼭 잡으며 흐느꼈다. "정말 다행이야!" 무하는 얼떨떨한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레일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여 주었다. 아마도 그녀가 이번 괴현상으로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슈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냥 보기에는 상당히 로맨틱한 장면이라 감수성 예민한 여인의 마음을 족히 감동 시킨 모양이었다. 시륜은 그 광경을 놀리기보다는 호기심을 채울려 했다. "마법사였냐, 너?" "……?" "텔레포트 마법이잖아?" "……!" 무하는 빠르게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바람에 레일리아가 뒤로 두어걸음 밀려났지만 그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레일리아는 그제서야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며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공연히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는 슈를 발견하고 더더욱 낯을 붉혔다. 시륜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당황한 듯한 무하에게만 신경 썼다. 정신없이 주변을 살피던 무하의 눈길이 멀리서 흉흉하게 꿈틀대는 나뭇가지에게로 향했다. "왜 그래?" "실……넬……!" 시륜의 질문에 답할 새도 없이 그는 그 나뭇가지들을 향해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뒤에서 시륜이 굳게 잡아당기며 만류했다. "왜 그러는 거야!?" "놔!" "미쳤냐, 너!?" "놓으라고!" "너……!" 시륜이 뭐라 말하려 할 때, 땅에 그늘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가지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을 때와 같은 우중충한 그늘……. 본래의 회색 고향의 음양이었다. 옥신각신하던 둘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보았다. 발작적으로 공격해오던 나뭇가지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 무하는 시륜을 뿌리치고 아까 그곳으로 달려갔다. 시륜이 뒤에서 뭐라 투덜거리며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잠시나마 기절했던 사람답지 않은 몸놀림으로 빠르게 그곳에 당도한 무하는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며 정신없이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놀라운데……?" 거의 동시에 도착한 시륜은 나뭇가지들의 거친 자국들이 무하가 서 있었던 곳을 중심으로 한, 원형에만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보고 짧게 휘파람을 불렀다. 실드를 쳤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었지만 마나의 운영은 텔레포트의 것만 빼고는 없었다는 것을 시륜도 알고 있었다. 그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무하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만 가자." 무하의 떨리던 눈이 시륜의 변함없는 목소리에 잠잠해졌다. "이제 괜찮아." "……아아." 실과 넬은 늘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니까 괜찮다, 곧 돌아 올 테니. ……무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좋아하는 거죠?" "……?" "무하씨 말이에요." "무, 무슨……!" "호호, 역시 사랑에 빠진 소녀는 귀여운 법이군요!" "사, 사랑이라니! 나, 난……!" 슈는 방긋 웃으며 레일리아를 내려보았다. 귀족만 아니었어도 머리를 부벼 주고 싶을 만큼 지금의 그녀는 귀여웠다. "파이팅이에요!" "너도……." "네?" 레일리아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말했다. "너도 무하 좋아하잖아." "……풋!" 슈는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노력에도 레일리아는 그 기색을 어렵지 않게 알아채고 발끈했다. "뭐가 웃겨!?" "아아, 저도 무하씨를 좋아하기는 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써 라구요. 친구!" "하지만……. 어제 보았는걸……." "풋!" 다시 발끈하는 레일리아를 보며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참은 슈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무하씨는 어딘지 모르게 의지가 되는 남자니까……. 뭐, 그런 거 에요." "응, 정말 의지가 되는 남자야." 레일리아의 볼이 발그레지는 것을 보며 슈는 다시 한번 어렵게 웃음을 삼켜야 했다. 혹시 이 순진한 여장부의 이번 핑크빛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하씨가 고생이겠지……라고 중얼거려보는 슈였다. "회색 열매는 어디서 열린 데요? 태고 나무라고 해도 이렇게 넓어서야……. 게다가 딱 익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면서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이제부터 찾아봐야 하는데……. 나도 이렇게 클 줄은 몰랐거든." "흐음……. 그래도 기생하고 있는 식물 중 과일이 달린 게 많아서 식량 걱정은 안 해도 되서 다행이에요." "불행 중 다행이지?" 시륜이 끼어 들었다. 초를 치는 그의 말에 다들 인상을 찌푸렸지만 반박은 하지 못했다. 일행이 반 이하로 줄어들고 물자도 잃어 버린 데다가 찾아야 할 물건은 어디에 있는지 감도 못잡고, 찾아야 할 장소는 땅부터 하늘까지라고 봐도 무관하니……. 겨우 식량 걱정이 없다고 위안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열매를 찾고 나서도 걱정이었다. 이곳까지 오는데도 그 많은 인원이 빠듯하게 돌아갔는데, 이제는 전투요원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 레일리아가 그 점에서는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마법사와 신관이 전의 사고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걱정이 안될래야 안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륜은 피식 웃으며 무하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래도 무하의 옆에 있으면 어느 정도 독기가 수그러들기 때문에 다들 가능한 둘이 붙어 있길 빌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무하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도 전과는 달리 무겁고 싸늘하면서 어두웠기에, 혼자 두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잔뜩 흐려져 버려서 더더욱 둘이 함께 있기를 선호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저래도 누군가 말을 걸면 대답도 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도 하기 때문에, 누군가 옆에 붙어 있으면 어두운 분위기가 그나마 완화되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문제아로 찍힌 둘은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상기하며 웬만하면 서로의 옆에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 "회색 열매 말이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찾아야 이곳을 떠나지." "흐음……. 어디 있을까?" "회색 열매는 덩이뿌리니까 나무 근처 땅에 있겠지. 태고 나무 근처, 회색 수풀지대는 건냉하니까, 온난 다습한 태고 나무의 근접한 곳에 있겠지. 그러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지도……. 뭐지?" 무하는 자신이 말을 할 때마다 하나둘씩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떡 벌리며 경청하는 일행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시륜마저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아냐?" "책에서 읽었는데?" "어떤 책인데?" "기억 안 나는데……. 한꺼번에 너무 많이 봐서 내용은 몰라도 제목은 기억 안나." "흐음. 아쉬운 데……." 다들 시륜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떡였다. 무하는 좀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제목은 고사하고 책 표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내용에는 약초와 광물에 대해 적혀 있었어. 그림도 첨부되어 있었지만, 직접 봐도 못 알아 볼 걸?" "흐음……." 시륜은 못 내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다가 일어났다. 한시가 아까운 때다. "정보가 들어왔으면 움직어야지!" 일행들은 전보다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일어났다. 최악까지는 아니지 않는가? 인간은 작은 희망에도 큰 위로를 받는 동물이다. 밤이 되자 다들 틈새 안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틈새 안을 가로지르고 있는 태고 나무의 잔뿌리를 기준으로 남녀가 갈려서 잠을 청했다. 늘 누나와 함께 하던 사뮤에르가 이번에는 무하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레일리아도 굳이 그를 자신의 옆에 두려 하지 않았다. 헤어져 있던 짧은 시간동안 동생은 많이 변해 있었다. 무하는 뿌리에 기대앉아 있었고 시륜은 그의 다리를 베고 잠에 빠진 상태였다. 그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흑발이 다소 산만하게 주위에 늘여져 있었지만 스스로 상관을 안하니 다른 이들도 신경쓰지 않았다. 전보다도 말이 없어진 무하에게 다가오는 이는 이제는 시륜과 사뮤에르 밖에 없었다. 물론 슈 또한 태연한 척 말을 걸어오기도 했지만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만큼 무하가 접근하지 말라는 오라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슈는 누운 상태에서 작게 물었다. "무하씨, 자?" "……아직." 잔뿌리 위로 슈의 얼굴이 빼꼼 올라왔다. 말이 잔뿌리지 어른 키 만한 두께를 가진, 어지간한 나무보다도 굵은 뿌리였다. "물어 볼게 있는데……." 무하의 숙여져 있던 고개가 천천히 들려 졌다. 그는 고개를 조금 돌려 슈를 보았다. "무하씨……. 좋아하는 여자 있어?" "……." 갑자기 주변에서 용병들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금새 전보다도 짙은 침묵이 깔렸다. 그냥 보기에는 매우 깊이 잠든 듯 보였다. 비록 슈의 눈에는 그들의 귀가 약 1. 5배는 커진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음……. 그럼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은 어떤 거야? 역시 쭉쭉빵빵의 글래머?" "나한테 관심 있나?" "에?! 그, 그게……!" "미안하지만 난 여자한테 관심 없다." "에?! 그, 그럼!" "……?" "무하씨……. 동성애자?" 갑자기 기침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졌다. 물론 금방 정적에 휩싸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기침소리가 귀에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정정하지……. 여자한테도 남자한테도 관심 없어." "흐음……." 뿌리 저편으로 사라질 듯 보였던 슈가 갑자기 나타나며 다소 큰 소리로 물었다. "앗! 저번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그럼 그 사람은 뭐야?" "……'있었다'고 했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잠시 침묵하던 그는 고개를 원래대로 숙이며 나지막하게 답했다.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말임에도 슈는 흥분해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어떤 타입이야? 짜게 굴지 말고 좀 알려 주……." "시끄러워." 낮은 음성이었지만 슈는 흠칫했다. 가늘지만 위협적인 살기가 그녀의 신경을 휘감은 것이다. 게다가 들리는둥 마는둥 하던 멜로디마저도 예리하고도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 살기의 주범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무하였다. 그 어떤 싸움과 전투 속에서도 품은 적이 없는 살기였기에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슈는 아차 하며 무하의 기색을 살폈지만, 짙은 어두움과 가려진 두건 때문에 아무 것도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잔뜩 기가 죽어서 잔뿌리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슈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움찔하면서 숨소리를 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무하의 가느다란 살기가 서서히 사그러 들었다. 그의 한숨소리가 틈새 안에서 작게 울렸다. "미안하다." 슈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답을 하지 않았다. 무하는 고개를 젖혀 뒤에 있는 뿌리에 기대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지났을 까? 슈마저도 잠들었을 법한 긴 시간이 지났다. "내가 사랑한 그녀는……." 슈가 듣고 있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그냥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의 친구를 사랑했어." 잠이 들었는지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증오했지." 무하의 고개가 약간 옆으로 숙여졌다. 그는 눈을 감으며 마저 말했다. "……그 뿐이야."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 마냥 나지막하고 담담했던 그의 작은 속삭임과 같은 독백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하마저도 잠들었는지 이제는 평온한 숨소리만이 틈새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는 이가 있었다. 시륜이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 무릎까지 내려오는 흑발이 부산하게 흐트러졌다. 그는 옆에서 잠들어 있는 무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아한 턱 선과 매끄러운 콧날, 깨끗한 피부를 가진 그의 눈동자는 매우 깊은 녹색이라고 한다. 어쩌다 옆에서 자고 있는 꼬마에게 들은 정보로는 말이다. '단지 동행일 뿐…….' 스스로 입에 담았던 말을 되새기며 시륜은 쓰게 웃었다. 그의 일생에서는 친구따위는 없었다. 신뢰를 가진 동료도 없었으며 사랑하는 연인도 없었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고 또, 그것이 편했다. 타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생각 따위는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 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남자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려 했던 것일까?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너와 난 너무 닮았고……너무 달라." 시륜은 자신의 어깨에 두루고 있던 망토를 천천히 끌러, 무하의 몸에 덮어주고 일어났다. 그리고 틈새 밖으로 날쌔게 올라갔다. 아까 올라갔을 때보다도 훨씬 빠르고 훨씬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 졸렵습니다.........역시 밤을 샌다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못 됩니다.... 그래도 190회를 올리며 하루를 마감(?)할 수 있어 다행이군요.... 아아, 이제 수마의 품에 안기렵니다......(__)zZ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밖은 무척 어두웠다. 햇빛보다도 약한 달빛이 태고 나무의 방해막을 뚫고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웬만한 숲보다도 훨씬 어두웠다. 하지만 시륜에게는 그런 것쯤은 아무런 장해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태고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회색 고향을 찾아오려 했던 이유…….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단순한 유희거리를 찾기 위해서였지만 부수적으로는 어떤 고서의 구절을 쫓아서 였다. 얼떨결에 다른 혹들이 따라붙었지만 제법 두둑하게 벌었고,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본래 목적을 이룰 생각인가?" 흠칫! 시륜은 약간 움찔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무하였다. 그는 시륜이 자신에게 덮어준 망토를 한 손에 걸친 채로, 시륜과 마찬가지로 태고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잠시 불어, 시륜의 긴 머리카락과 무하의 두건 자락을 잠시 가지고 놀다가 사라졌다. 시륜은 이내 피식 웃으며 태고나무를 올려보았다. "아아." "뭔지는 모르지만 몰래 가려는 걸 보면 위험하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나를 끌어들인 것을 보면 전자겠군.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혼자 한다고 하지는 않겠지?" "……쿡, 그래그래." "내가 이곳을 오려 한 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는 우연히 들은 이야기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이고 또 하나는……." "……?" 태고나무 줄기에 기생하고 있는 수많은 식물들을 디딤축으로 삼아 빠르게 위로 올라가면서 시륜이 본래 목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다른 식물을 밟고 위로 솟으면서 다시 이어서 말했다. "또 하나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지." 무하가 잠시 뒤 처졌다가 얼른 따라붙었다. 그 와중에도 한숨을 쉬는 무하를 보며 시륜은 짓궂게 웃었다. 하지만 왠지 그 모습이 평소의 차가움과는 달리 밝아 보였다. "전자의 이유나 들어보자. 우연히 들었다는 이야기가 뭐지?" "그리 대단한 건 아닌데. ……태고 나무에 '핵'이 있다는 이야기." "핵?" "태고 나무의 거대함을 봐라. 이게 어디 보통 식물이냐? 게다가 그 무궁무진한 세월을 살아 남았잖냐? 내가 들은 바로는 이 태고나무를 다스리고 보호하는 힘의 조절체가 있다는 거야. 때문에 그 긴 세월을 살아올 수 있었다는 거지. 그 조절체, 즉 핵만 손에 넣으면 태고나무를 지키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지." "그래서 그 핵을 가지려고 온 거야?" "아니." "에?" "내가 무슨 재주로 그걸 손에 넣냐? 핵이란 태고 나무의 의지와 일맥상통하다고. 내가 원하는 건 다른거야." "다른 거?" "태고나무는 제 1기 마도때 창세신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야. 즉 그 의지체가 창세신의 작품이라면 그가 남겨 놓은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거의 소멸된 제 1기 마도의 자료 중에서 이런 구절이 있거든. '덩치가 비대하다는 것만으로 살아 남을 수는 없다. 지혜롭고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창세신께서는 그것을 유념하셨고, 당신께서 직접 심으신 태고 나무에게 스스로의 덩치를 보호할 '뇌'를 부여하셨다. 또한 그 뇌를 지켜줄 '두개골'을 배치하셨다. 그것은 나무의 가지이되, 머리의 현명한 힘의 조절로 태고 나무의 정수를 이어받아 그 어떤 금속보다도 강하고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 무하보다 앞서서 올라가던 시륜는 갑자기 태고 나무의 한 가지에서 멈췄다. 무하가 따라 멈추자,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다루지도 못할 '뇌'가 아니라 그 강함만으로 필요가치가 있는 '두개골'이지. 몰론 진짜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마도의 최절정이라 불리던 제 1기의 희소 자료라면 한번 시도는 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 "흐음, 다 좋은데……. 그 두개골은 뭐라 칭송한다해도 나뭇가지잖아?" "그렇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그것을 가지려면 베어야 한다는 뜻이지?" "그렇……." 시륜도 무언가 감을 잡은 듯 말을 흐렸다. 무하는 친절하게 확인사살을 날려주었다. "어떻게 베어 갈 생각이지? 어떤 금속보다도 강하다면서?" "흐음……." "결국 목적 중 후자의 것만 이루고 돌아가는 건가?" "내 도는 물질계의 것이 아니니……. 혹시 또 모르지." 시륜은 오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 잠시 흑 빛이 감돌더니 언젠가 보았던 흑색 보석이 나타났다. 그것은 처음 시륜을 보았을 때 보았던 도에 박혀 있던 보석이었다. 시륜은 왼손을 오른 손바닥 위에, 정확히는 보석 위에 얹었다. 그런 다음에는 천천히 왼손을 옆으로 벌렸는 데, 흑빛이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서 일렁이더니 곧 완연한 모습을 갖추며 그때 보았던 도가 생성됐다. 시륜은 도를 왼손으로 가볍게 두어번 휘둘었다. 그는 양손잡이였기 때문에 어떤 손으로든 자유자재로 무기를 다루곤 했었다. "하지만 이런 나무의 정기를 받아왔다는 녀석을 자를 수 있을까? 또 자른다고 해도 정제를 해야 하는데……. 너 그 무식하리 만치 거대한 도로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겠냐?" "……." 시륜은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 뒤로 벌렁 누워버린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무하에게 던졌다. 잡아채 보니 무하의 것과 같게 생긴 용병길드 메달이었다. "네가 떨어뜨린 거다." "……!" 품을 뒤져보니 메달이 보이지 않았다. "프리 등급은 아직 카 등급에 들어가지 못한 하 등급의 용병들이 주로 입에 담는 말이지. 실력을 숨기고 싶었던 건가?" "별로……." "……." "두개골을 찾으러 가는 건 그만 둘 셈인가?" "글쎄……. 갑자기 맥이 빠져서 말이야. 잠시 쉬면서 생각해 보려고." 그 말에 무하도 시륜의 옆에 주저앉았다. "내가 이 고서 등을 접하게 된 일부터 생각해보니……. 뭔가 계획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기분 더럽군." "계획적이라니?" "잠시 나를 부재중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녀석들이 흘린 정보 같다는 소리다. 나는 고서나 신물에 미친 녀석으로 유명하거든. 이런 식의 위험하면서도 확신이 없는 일에는 내가 직접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는 녀석들의 소행 같은데.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 인상을 찌푸린 채 이것저것 골똘히 생각하던 시륜이 문 듯 옆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무하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 그것을 무하가 보고 고개를 갸웃하자 시륜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너는 늘 아무 것도 묻지 않는군." "묻길 원하나?" "글쎄……." "배려 없는 질문만큼 무례한 것은 없지. 난 그렇게 생각한다." "멋지군." 시륜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물었다. 담배였다. "피겠어?" "아니." 무하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의 담배는 상당한 고가로써, 중하위권의 귀족들도 어쩌다 한번 필뿐 애호하지는 못하는 상품이었다. 게다가 시륜이 물고 있는 것은 종류가 얼마 안 되는 담배 중에서도 가장 최고급품으로 꼽히는 락아타 제국의 상품 였다. 락아타는 욤 제국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제국으로써, 욤 제국과 가장 대립이 심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물자이동만큼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담배를 포함한 많은 락아타제 상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시륜은 「파이어」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고 함께 한숨을 몰아쉰 그는 무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배려 없는 질문이라……." "……?" "나도 하나 해도 될까? 그 배려 없는 질문이라는 것." "마음대로." "네가 사랑한 여자가 왜 너를 증오 한 거지?" "정말 배려 없는 질문이군. 무례해." "미안." 둘의 음성은 한치의 고저도 없는, 무덤덤하면서 차갑게 울리고 있었다. 무하는 아까 시륜처럼 뒤로 누어버렸다. 그리고 로레라자가 찔렀던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감싸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사랑한 나의 친구가 사랑보다는 우정을 택하는 남자였기 때문이지." "……그런가." 민재……. 그가 자신을 사랑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남녀간의 사랑으로써……. 하지만 그는 무하가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선을 넘지 않으려 자중하면서도, 무하의 모든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는 설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용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다가가려 할수록 점점 차가워지기만 하는 민재의 태도에 상처 입은 설희는 그 아픔을 무하에게로 돌려버렸다. 점점 망가져만 가는 악순환. 그 와중에 민재는 졸업을 했고 장학금을 쫒아 지방 대학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끊겨 버린 소식. 설희의 아픔은 점점 커졌고 그것은 증오로 발전하고 말았다. "누가 피해자인가……. 그녀는 나의 친구녀석에게 실연을 당했고, 녀석은……그의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했으며, 나는 그녀에게 배신을 당해야 했다. 모두다 상처를 입었는데 과연 누가 피해자일까? 누가 잘못한 것일까?" "당연한 거 아냐?" 무하의 눈이 떠졌다. 언제 다가왔는지 시륜의 얼굴이 바로 앞에 와 있었다. 그의 고양이 눈동자가 약간의 광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피해자는 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시륜의 얼굴이 멀어졌다.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아 드리며 고개를 돌렸다. 무하는 상체를 일으키고 시륜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불안하게 떨리는 무하의 음성에 시륜은 짜증난다는 듯 담배연기를 거칠게 내뱉었다. 그리고 바로 돌아 무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바보녀석!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다! 배신을 당한 건 너 뿐이잖아!" "……!" "그깟 실연은 누구나 살면서 몇 번은 당하는 거다! 또 그 정도에서 포기해 버릴 정도라면 진짜 소중한 게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너는? 단지 한 사람을 사랑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모든 증오를 받아내고 친구를 잃고……. 너 자신의 감정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신당하고 상처입고!" "……." "멍청한 녀석." 침묵이 흘렀다. 고요했던 멜로디가 다소 혼란스럽게 변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났다. 높은 곳이라 그런지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어, 시륜의 긴 머리카락이 담배연기와 함께 흩날리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시륜이었다. "그래서 떠난 거냐? 네가 있던 곳을?" "그녀 때문에 나는 두 번 죽을 뻔했다." 이미 무하의 뇌리에서 설희와 로레라자는 한사람이었다. 너무나 닮은꼴이었던, 그를 배신하고 그를 증오하던 그 두 명의 여인은 그에게는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리고…… 나는 형을 죽이고 말았지." 형을 죽인 자신과 '공범'이었다. 칼을 쥐고 있었던 것은 그, 그가 내밀고 있는 칼날로 카한세올을 밀어 넣은 것은 그녀. 둘은 그렇게 공범이었다. "그 여자는?" "모르겠어.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나와버렸으니까." "나라면 제일 먼저 죽였어." "넌 내가 아니니까." "쳇!" "한가지는 확실해." "……?" "내가 죽인 것이 형이 아니라 그녀였다면……. 나는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았을 거야. ……그것만은 확실해." "……바보녀석." 레일리아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눅눅한 땅속기운이 기분 나빴지만 그녀의 혼자 힘으로 틈새 밖으로 나가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틈새 안에는 그녀와 사뮤에르, 그리고 기사 한 명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틈새 위에서 비치는 햇빛을 보니 벌써 날이 밝은 듯 했다. 평소라면 제일 일찍 일어났을 그녀였지만, 피로가 제법 쌓였던 모양이다. "누님." "아, 일어났니? 누나가 좀 늦잠을 잤구나." 사뮤에르는 잔뿌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위치가 꽤 높았기 때문에 레일리아는 얼른 일어나 동생을 내려 놓으려 했지만, 동생이 좀더 빨리 입을 열었다. "누님, 이번에 열매를 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시집가는 건가요?" "누, 누가 그런 소리를 하……!?" "저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사뮤에르가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 "제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쯤은 들을 수 있어요. 약혼자가 정해 졌다면서요?" "……." "저도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저를 가주로 만들기 위해서 서둘러 다른 계승권자들의 결혼을 처리하려 하고 있다는 것 쯤은……." "……." "계승권자 중에서 남자는 저뿐이니까 누님들만 결혼을 시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계시다는 쯤은 알고 있어요." "……." "하지만 다들 수근거려요. 나 따위가 가문을 이끈다면 당장 쇠퇴할거라고……." 사뮤에르는 여전히 답이 없는 누나를 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저 나가 볼게요. 더 쉬세요. 어쩌면 오늘 중으로 열매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자에르 경이 그랬어요. 이 근처에서 덩이뿌리가 많이 보인다고 하더라구요." 잔뿌리 너머로 훌쩍 사라지는 동생을 보면서 레일리아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 이제 다음 회나 다다음 회쯤이면 늪지에서 벗어날 수 있겠군요........ 헤고......... ㅡㅡ; 여러모로 힘들었던 늪지입니다ㅡㅡ; 제가 늪에 대해 무지해서 말입니다........(머엉) 오늘도 태양은 뜨고, 저는 잡니다. 하루를 마감(?)하며.... 모두들 좋은 하루 되세요. 저는 좋은 꿈꾸러 갑니다.(__) 아참, 책은 26일이나 27일날 나올거라고 하더군요.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무하는 낮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한참 땅을 헤집고 있는 일행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시륜이 비스듬히 누워 한가로운 낮잠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땡땡이를 치는 둘을 보고 울컥한 이들은 많았지만 그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경호. 이런 노동에는 나서든 말든 자유였던 것이다. 물론 다른 용병들도 원칙상으로는 그 둘과 같이 행동해도 됐지만,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많이 헤집어야 하지 않는가? 그들은 편안한 잠자리가 그립고 제대로 된 식사가 그립고 무엇보다도 술과 여자가 그리운, 한창 나이의 사내들이었던 것이다.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둘에게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사뮤에르였다. 지상에서 그들이 있는 가지까지의 길은 보통 나무처럼 직선이 아니라, 약간 가파른 고개와 같았기 때문에 나무를 못타는 이라도 얼마든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뮤에르는 무하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그에게 기댔다. 무하는 그의 어깨를 끌어 안아주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는 무하의 배려에 사뮤에르는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그는 작은 손으로 무하의 망토를 꼭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무하는 사뮤에르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을 뿐이었다. 사뮤에르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역시 꼬맹이라고……생각하시죠?" "나도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너무 보고 싶어."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무하의 어조임에도 사무치게 느껴지는 그리움에 사뮤에르는 멍하니 그를 올려보았다. 부드러운 멜로디가 멍하니 있는 사뮤에르의 귓가에 울렸다. "이런 나를 꼬맹이라고 생각하니?" "아, 아뇨!" 당황하며 답한 사뮤에르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밑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사뮤에르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가주로 만들고 싶어하세요. 저 외에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유독 귀여워서 그런다고 주변에서 말이 많아요. 특히 란이신 레아누님이 가주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아주 많아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누님을 얼른 시집 보내려고 하세요. 데릴사위를 들이지 않는 한, 란이 가문에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 데릴사위를 주지 않을 법한 세력가와 혼담을 진행시키고 있어요." "……." "이번 늪지에서의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는 즉시 혼담을 진행시킬 거래요." "가주가 되고 싶지 않은 거냐?"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시륜이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사뮤에르는 흠칫 놀라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두 사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들 제가 가주가 되면 저의 가문은 쇠퇴할거래요." "그래서 가주가 되고 싶지 않은 거냐?" 시륜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하는 말없이 사뮤에르의 답을 기다렸다. "저는…… 무능하지 않아요. 약하지도 않아요." 많은 해석을 내포하고 있는 그의 말에 시륜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저는……." 사뮤에르의 눈동자와 시륜의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가 마주쳤다. 밑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가 될 겁니다." 거의 동시에 환호성이 들려왔다. "찾았다! 회색 열매다!" 열매는 아직 검회색이었다. "정말 흉직하게 생겼다, 그치?" "아아. 나도 한번 먹어 볼까? 요즘 심신이 허약해 져서……." "미친! 설명 못 들었어?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독으로 작용한데잖아!" "쩝……." 용병들이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레일리아가 나타났다. "이게 회색 열매야?" "네, 도감에 실린 모습 그대로입니다." "언제 붉어질까?" "주기가 일주일이라고 들었으니……. 일주일 안으로는 변할겁니다." "이제 일주일이면 이 지긋지긋 한 늪지를 떠날 수 있단 말이지?" "언제 붉어 질지 모르니, 늘 옆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 틈새랑 멀지 않으니 순번을 정해서 지키고, 레일리아님과 사뮤에르님께서는 항시 이 곳에 있어셔야 합니다. 단 2분동안만 붉어진다고 하니까요." "알았어." "……." 무하와 시륜은 열매를 구경하고 있었다. "정말 못 생겼다." "아아……." 검은 색 곰팡이가 돋은 듯한 회색바탕의 열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썩은 내가 맡아지는 듯한 악취미적인 모습이었다. 무하는 주위에 열매가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하나를 따보았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은 무의식중에 혐오감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시륜은 옆에서 같이 열매를 관찰하고 있었다. 무하는 시륜에게서 단검을 빌려 한쪽 끄트머리를 슬쩍 잘라보았다. 워낙 생긴 게 혐오스럽게 생긴 덕에, 붉게 변했을 때의 효력에 대해서는 알려졌지만 원래 모습이었을 때의 효력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드러난 속살은 의외로 붉은 빛이었다. 잘 익은 수박과 비슷한 색이었지만 몬스터의 체액처럼 끈적거렸다. "잘 녹은 딸기 사탕같군. 독이 있을까?" "먹어보고 싶냐?" "……." 시륜은 땅에서 줄기에 매달려 있는 열매에 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이내 무하를 올려보며 말했다. "독은 없다는데?" "……." "못 믿겠냐?" "식물과 대화를 할 줄 알아?" "그건 기업비밀." 누가 보더라도 먼저 무하에게 먹여 보려는 심보로 보였다. 무하는 짐에서 숟가락을 꺼내 열매 안을 휘저어 보았다. 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물엿을 휘젖고 있는 듯한 느낌만 들뿐. "대체로 독이 있는 생물은 외모가 아름다운 법이지. 독사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이건 생김이 흉직하니 되려 몸에 좋은 것일 수도." 무하의 말을 받아 시륜이 마무리 지었다. 그는 슬쩍 윙크를 하며 열매의 내용물을 찍어 먹어보았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지어 보이는 시륜을 보며 무하도 한 술 떠먹었다. 주위에서 기겁하는 게 보였지만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맛있는데!" "맛있군!" 홍시의 맛과 비슷했다. 입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달콤한 향내를 풍기는 열매였다. 시륜은 밑에서 하나를 따, 아주 작은 구멍을 내고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무하도 옆에 앉아 맛있게 시식을 하고 있었다. 둘의 괴이한 모습을 보다가 다른 이들은 진저리를 치며 틈새로 돌아 가버렸다. 레일리아도 비위가 거슬렸는지, 일단은 그냥 돌아갔다. 오직 사뮤에르만이 둘의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둘은 썩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거지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사뮤에르는 조심스럽게 둘에게 다가갔다. "맛있으세요?" "응." 무하가 한 술 떠서 사뮤에르에게 내밀었다. 사뮤에르는 쭈빗 거리면서도 그것을 받아먹었다. "맛있어요!" 셋은 그렇게 배부를 때까지 몇 개의 회색 열매를 거덜 냈다. "이건 어떻게 번식했을까?" 포만감에 찬 세 명은 밖으로 드러난 태고 나무의 뿌리 위에 드러누워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뜬금 없는 무하의 말에 할 일 없는 시륜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씨가 없는 건 확실하고……. 하긴 생각해보면 동물이나 벌레조차 없는 이곳에서 씨가 있어봤자 뭐 하겠냐만……." "흐음……." "아아, 알게 뭐냐. 살아 남을 길이 있었으니 살아 남았겠지." 그 말을 끝으로 셋은 조용히 열매를 지켜보았다. 언제 붉어질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붉어 졌을 때는 맛이 어떨까?" "몰라. 나는 건강하기 때문에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시륜, 네가 붉어졌을 때 이걸 먹으면 맹 독으로 작용하겠지." "아쉽기도 하고……." 날이 저물었다. 레일리아와 사뮤에르는 이제부터 회색 열매 근처에서 숙식해야 했다. 회색 고향은, 특히 태고 나무 근처는 밤이 되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열매가 붉어지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장작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나무라면야 넘칠 정도로 많았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낮에 감시했던 시륜과 무하는 밤에는 그냥 편하게 잠잘 수 있었다. 아무 짓도 안하고 열매만 봐야 했기 때문에 금방 지칠 수밖에 없는 감시원들은 순번을 자주 바꿨고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서 잘만 자고 있는 둘은 상당히 얄밉게 보여질 수밖에 없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슈의 순서가 됐다. 막 잠이 들려던 찰라였기 때문에 짜증을 내면서 일어난 그녀는 장작불 옆에 털석 앉았다. "현상 수배범으로 잡아 놓고 일도 시켜 먹네, 쳇!" "쿡." "에? 안 잔거야?" "잘 만큼 잤어." 시륜이었다. 그는 슈의 옆에 주저앉고는 모닥불에 장작을 몇 개 더 집어넣었다. 슈는 잠시 그가 누워있었던 곳에 시선을 주었다. "무하씨가 안 보이네?" "녀석은 나보다 훨씬 전에 깬 것 같던데? 그 녀석 불면증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잠을 못 자는 것 같았어." "흐음……." "……의왼데?" "뭐가?" "무하한테 관심이 많지 않았던가?" "누, 누가!? 난 단지 순진한 귀족 소녀를 돕고 싶은 마음에……!" 슈는 무슨 헛소리냐며 냉큼 상황 설명을 하다가 곧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정보는 새어나간 상태였다. 시륜의 황금빛 눈동자가 빛나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보인 것이다. "호오! 레일리아가 무하한테 반했었군! ……구경이나 갈까." "응?" "아까 무하 녀석, 산책 간다던 레일리아를 호위로 따라갔거든." "산책이라니! 언제 열매가 붉어 질지 모르는 상황에!" 시륜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보였다. 왠지 짓궂은 웃음이었다. "그것 때문에 더 심숭생숭 해진 걸지도. 듣은 바로는 회색 열매 일이 끝나면 바로 약혼하게 된다고 하던데. 무하 녀석을 좋아한다면 더더욱 괴롭겠지." "아아……." 태고 나무의 근처를 걷는 두 남녀가 있었다. 남자는 수상해 보이는 검은 두건을 눈까지 깊숙이 두르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차분함이 돋보이는 몸가짐하고 있어 진중 해 보였다. 여자는 동그란 눈동자가 순수해 보이는, 엿띤 미모를 지닌 미인이었다. 아직 여인이라기 보다는 소녀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한 어린 규수였다. 그녀는 흐트러진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내며 입을 열었다. "나 어제 무하가 말한 거 들었어." "……." 그 말을 끝으로 어느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이 아니라 동경 같은 거지만……." 레일리아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분은 얼마 전에 약혼해버렸어. 무지 분했어. 그 분에게 선택받은 여자는 나도 알고 있는 여자인데……. 전혀 그 분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거든. 본인 스스로는 그분을 사랑한다고 믿는 것 같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어." "그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했고?" "아닌 것 같아. 그냥 흔하디 흔한 귀족가의 정약 결혼 같은 거였어." "그럼 똑같은 거네. 굳이 여자를 탓할 이유도, 남자를 탓할 이유도 없어." "응, 그 말이 맞아. 하지만 분했어." 레일리아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앉지 않고 줄기에 기대버리는 무하를 조금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보았다. "아버지는 에르를 가주로 만들고 싶어해. 당신께서 데릴사위로 들어와, 기죽고 살다가 아내가 죽고 나서야 대접을 받았으니까……. 데릴사위 따위는 죽어도 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 "들었어." "그것을 알기 전까지는 나도 가주가 되고 싶었어. 유력한 계승권자였으니까. 잘 해나갈 자신도 있었어!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혼자 상상해 봤어. 그 분의 아내로 들어가 사랑 받고 내조하고……그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이런 말이 절로 새어나왔다. "계산이 빨랐군." "응. 내가 생각해도 계산이 빨랐지. 하지만 그 생각을 했을 당시에 그 분은 약혼을 해버리셨어. 내가 한 발 늦었지. 그 분은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검술, 냉철한 사고력를 겸비한 정말 대단한 분이셔. 이름 정도는 들어 봤을 거야. 오르세만 가의 차기 가주, 테밀시아라고……." "쿨럭!" 무하는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한껏 감상에 젖어 있던 레일리아가 당황해서 등을 두들 기며 괜찮냐고 물었지만 그의 기침은 한동안 멈추지 못했다. "정말 괜찮아?" "아아. 흠흠, 그……사람의 이야기라면 나도 들었지." 이야기라기보다는 직접 대화하고 느꼈다고 해야겠지만……. 이라는 뒷말을 삼키며 레일리아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남의 입에서 형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건 상당히 묘한 느낌이었다. "나 돌아가면 바로 혼약이야기가 나올거야. 아버지는 적어도 오르세만 가 정도는 되어야 우리 가문에 구색이 맞는다고 생각하시거든." 이쯤 되자 레일리아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 세 가문밖에 받지 못했다는 카르민……. '분명 하나는 오르세만. 또 하나는 자하라. 마지막 하나는…….' "여지껏 말 안 해서 미안. 우리 가문은 가야다. 나의 풀네임은 가야다 레일리아 란 카르민이야. ……놀랬어?" 그녀의 조심스러운 어조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무하였다. 카르민인 것을 밝혔으면 그 동안 무례했던 것을 사과하라는 둥의 거만함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 아무래도 그 분의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될 것 같아." 그제서야 그녀가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알 듯 했다. 이 여자는 위로를 받고 싶은 거다. 이유도 방법도 급도 다르지만 실연이라는 것을 당한 이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갖고 있는 거다. 그렇게 무하는 생각했다. "괴롭겠네? 사랑하는 사람의 근친과 결혼하고 함께 지낸다면……." "아니야!" "……?" "사랑이 아니었다니까! 그건 동경이었어! 진짜야!"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진정해." 발끈하며 변명비슷한 말을 늘여 놓는 그녀가 이해가 안됐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듯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레일리아를 보며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하는 무하였다. 비록 그 모습을 고개를 숙인 레일리아는 못 봤지만 말이다. '근친과 결혼하는 거라면 나와 레일리아가 어떻게 엮기는 거지?' 가문에서 가주, 라, 란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무하, 아니 페르노크였다. 그렇다면 레일리아가 그의 밑의 사람이 된다는 건데……. '뭔가 복잡하군.' "오르세만 가의 누구와 혼담이 오가고 있는데?" "늪으로 떠날 때 아버지가 시작한 혼담인데……. 지금쯤이면 끝났을 거야. 그쪽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돌아가면 바로 약혼을 하게 되겠지." 굉장한 인연이다……라고만 생각하던 무하의 귀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재수 없는 둘째, 페르노크 따위와!" "……!" 이번에는 기침 따위를 할 여유도 없었다. 멍하니 있는 그를 발견하지 못한 레일리아는 작은 소리로 이어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아, 하지만……. 저 나……." "이봐, 얼른 와! 열매가 변했다!" 시륜이었다. 날랜 그가 슈를 대신해서 달려온 것이다. 멍하니 있는 무하를 제치고 레일리아는 서둘러 열매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시륜도 그 뒤를 따르려다 묵묵히 서 있는 무하를 보고 그를 불렀다. "어이, 무하!" "……아아." 그제서야 정신이 든 무하도 빠르게 틈새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애당초 열매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금새 도착할 수 있었다. "차라리 전에 것이 먹기 쉬웠지 않나 싶다." "몸에 좋은 것은 입에 쓴 법이지." "킥킥킥." 시륜과 무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용병들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사가 어렵게 말했다. "2분이 지나기 전에 어서 드셔야……."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붉게 변한 열매는 전과는 달리 매우 아름다웠지만 단면으로 잘라내자 원래 껍질의 모양새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즉 회색 열매는 일정 주기, 일주일마다 한번씩 겉과 속이 바뀌었던 것이다. 껍질의 혐오스러웠던 모습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안쪽의 맛깔스러웠던 붉은 빛이 밖으로 밀려나온 것. 다시 말하자면 그 혐오스러웠던 껍데기의 모습으로 가득찬 내용물을 먹어야 한다는 것인데……보는 것만으로도 토가 나올 지경이었던 것이다. 시륜은 레일리아와 사뮤에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입에 가져가는 것을 보다가 옆에 붉겨 변한 열매를 하나 따, 단면을 잘라보았다. 그리고 장작불에 가까이 가져가 그것을 살펴보았다. 곰팡이와 생물의 배설물과 인간의 구토물을 한데 섞어 놓은 듯한 모습이 비위에 거슬렸지만 당장의 호기심으로 그것을 억누를 수 있었다. "안에서 움직인다." "에?" 왠지 모르지만 아까부터 멍하니 있는 무하는 반응이 없었고, 대신 슈가 되물었다. 시륜은 열매를 가르키며 다시 말했다. "안에서 움직이고 있어." 붉은 내용물이 끈적했다면 검회색의 내용물은 묽었던 것이다. 그것이 미치도록 역겨웠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용병들은 낄낄대며 레일리아와 사뮤에르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간간히 맛이 어떠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레일리아 아가씨는 어디가 안 좋아서 먹는 걸까? 튼튼해 보이던데……." "글쎄……. 확실한 건 우리가 알아서는 안 되는 종류의 병이라는 거지." "흐음……. 그런데 무하씨는 왜 저래?" "……." 시륜도 그게 궁금했는지 멍하니 있는 무하를 돌아보았다. "아! 열매 색이 변한다!" 레일리아와 사뮤에르는 간신히 먹던 것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원래대로 돌아간 열매를 아무 생각 없이 보던 시륜은 순간 감탄성을 질렀다. "아아!" "왜 그래?" "회색 열매가 어떻게 번식하는 지 알았어. 봐!" 열매에서는 원래의 색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원래 껍질에 붙어 있던 곰팡이 같은 것이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게 회색 열매의 씨앗이었어!" "균(菌)류였던가……. 포자는 아닌 것 같은데……." 여지껏 멍하니 있던 무하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틈새 쪽으로 걸어갔다. 시륜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어디가냐?" "짐싸러. 이제 끝이잖아? 이 지긋지긋한 늪지도." "아아." 뒤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무시해주는 둘이었다. ====================================================================== 드디어드디어드디어!!! 늪지의 일 끝났습니다^^ 레일리아가 무하, 아니 페르노크와 약혼에 성공할 수 있을 까요^ㅡ^? 이는 작가만이 알고 있습니다! 음하하하!! 아해의 장 193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마을에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에서 생환해온 이들을 성대히 반겼다. 그들이 묵었던 여관을 다시 비워주고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면서 조금이라도 그 곳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안달했다. 굳이 그들이 듣고자 발악하지 않았어도 용병들은 그 곳에서의 모험이라면 모험인, 일정을 상세히 떠들어댔을 것이다. 그들은 평생 자신의 전적에 회색 고향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기록이 새겨졌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크게 떠벌리면서도 무하와 시륜 이야기를 빼먹는 것을 잊지 않았다. 때문에 동네 처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두 영웅(?)을 혈색이 되서 찾아다니다, 결국 포기하고 다른 용병들의 이야기를 다시 경청해야 했다. 그런 사정은 전혀 모른 채, 졸지에 영웅이 된 두 남자는 여관의 지붕에 앉아서 술과 음료, 음식 따위를 즐기고 있었다. 늪지에서의 눅눅한 바람과는 달리 약간은 메마르고 쌀쌀한 바람이 기분 좋았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이 편하긴 했어." "아아." 와인을 병 채 마시며 둘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이 편하긴 했다. 놀랍게도 레일리아에게 이동의 반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제 1기 마도의 유물로서, 단 세 개밖에 없다는 반지였다. 목걸이에 걸어서 깊숙이 감추고 있었던 그녀는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 일행을 모아, 그것을 꺼내 사용했다. 반지의 효력은 사용자가 한 번 간 장소를 반지에게 기억시켜, 언제든 원하면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으로써 굳이 사용자가 장소를 세세하게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하고 편한 아이템이었다. 바로 성내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중간에서 여유롭게 쉬고 돌아가자는 레일리아의 의견에 따라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물론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은 약혼을 준비하고 있을 집을 조금이라도 늦게 가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을 쉽게 짐작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간에 쉽게 늪지를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기 때문에 다들 이의를 달지는 않았다. "넌 이제 어떻게 할거지?" "뭐가?" 무하는 뒤로 누우면서 말을 이었다. "레일리아에게 의뢰가 분명 '회색 고향에서의 호위'라고 확답까지 받아 놓은 녀석이 갑자기 딴청이냐?" "킥킥. 일도 끝났겠다 보수도 마저 받고 가야지. 내가 이 곳에 온 거 자체가 누군가의 수작이었다면……." 시륜은 무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할 건데?" "흐음……." 무하는 마땅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정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용병길드에 가서 의뢰를 받아 돈을 벌어야 겠다는 정도의 목적이라도 있었지만 지금 평생 걱정 없이 쓸 정도의 돈이 들어온 이상 이제 어찌되든 상관없고……. 한가하게 관광이나 즐길까 싶기도 하지만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어야 갈 수 있지 않은가? 지금 무하는 아무나 붙잡고 여기서 유명한 곳이 어딥니까? 했다가 상대방이 회색 고향이 가장 유명하죠 라고 답하면 무작정 그곳을 찾아갈 정도로 무지한 것이다. "모르게……. 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감탄성을 흘리는 무하를 멀뚱히 보던 시륜이 물었다. "뭐야?" 하지만 무하는 답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약혼! 난데없는 소리라 충격 먹고, 갑작스런 휴식이라 잠시 잊었지만……분명 레일리아는 페르노크와 약혼을 하게 됐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 문제의 페르노크는 지금 오르세만 가에 없는 사람이지 않는가? 페르노크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가문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그가 지금 가출 중이라는 것을 발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감추자면 약혼을 거절할 핑계거리가 없고……. 또 마땅한 핑계가 있다고 해도 똑같은 위치의 세력가에서 들어온 약혼 건을 먼저 거절한다는 것은 그쪽에서 보면 상당한 모욕이기에 선전포고와 마찬가지가 되 버린다. 게다가 약혼을 받아들인다 해도 장본인이 없는 데, 급히 치루자는 상대편의 요구에 뭐라 응해야 한단 말인가? 이래저래 오르세만 가로써는 낭패인 일이었다. '내가 간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 거절을 하면 형님께 피해가 가고, 허락을 하면…….' 하지만 집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정도는 알아둬야 할 듯 싶었다. '일단 집으로 몰래 들어가서 노민을 만나자.' 그게 최선의 방법인 듯 싶었다. 무하는 옆에서 자신을 멀뚱히 보고 있는 시륜에게 말했다. "일단 급히 어딜 가야 할 것 같다. 그 뒤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지." 시륜은 어깨를 으쓱이며 일어났다. "뭐, 나와 같이 가겠냐고 물으려 했지만, 네가 갈 곳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급히 돌아가 봐야해." "생각해 줘서 고맙군." 시륜은 잠시 웃다가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무하는 천천히 뒤로 누었다. '돌아오지……않을 셈인가?' 평소라면 자신의 양옆에서 웃고 있어야 할 실과 넬이었다. '이젠……정말 혼자인 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간 줄 알았던 시륜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어이." 놀라서 눈을 번쩍 뜨자 시륜의 길고 가느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하의 머리 위에 서서 그를 내려보던 시륜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어두운 와중에 그의 황금빛 눈동자만 선명하게 보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 "난……." 무하는 가만히 누워있는 그 상태 그대로, 머뭇거리는 시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휴……. 아니, 아니다." 상체를 불쑥 든 시륜은 빠르게 창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무하는 멀뚱히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엉뚱한 녀석." "여기 있었네!" 긴장이 풀려 있었던 건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데도 두 번이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니……. 이번에는 슈였다. 역시 현직 도둑답게 기척이 거의 없는 그녀는 가볍게 뛰어와 무하의 옆에 앉았다. "라이시륜씨는 지금 밑에서 돈 내놓으라고 성화야. 뭐, 성화라고 해봤자 이쪽에서는 끽 소리도 못하고 내놓겠지만……." "알만 하군……." "그럼 이제……나는 감옥에 가게 되는 건가?" "……." "뭐, 상관없어. 죽는 것보다는 나을테니까." 진심인 듯 슈의 얼굴은 밝은 편이었다. 무하는 그녀를 힐끔 보았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하씨. 기분이 어땠어?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증오했을 때……." "……." 무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 뚜벅뚜벅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슈가 당황해서 그를 쫓았다. "미안! 무신경한 질문이었지? 미안!" 하지만 무하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창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슈가 다급히 창 쪽으로 왔을 때, 무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그냥 놔주겠어. 레일리아의 목숨을 노리던 암살자를 죽였으니 잘만하면 대가를 받게 될 지도 모르겠군. 이제 넌 자유야." "잠, 잠깐! 무하씨!" 하지만 무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 버렸다. 슈는 자신의 이마를 약하지 않게 때리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냥……." 드물게 밝은 달을 바라보며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이제는 같은 처지니까……. 그도 이제 나를 증오 할 테니까……." 무하가 내려섰을 때, 마침 시륜이 레일리아에게서 남은 의뢰금을 기어이 뜯어내고 있었다. 그는 막 내려선 무하에게 받은 두 개의 주머니 중 하나를 던졌다. 받아드니 꽤나 묵직했다. 안을 보니 대부분 작고 세밀한 세공이 곁들어 있는 보석들이었다. '들고 다니는 것도 꽤나 일이겠어…….' 주위에서 둘의 돈주머니를 탐욕스런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둘이 합당한 대가를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람의 욕구라는 게 그렇게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탓이었다. 무하는 시륜에게 자신의 주머니를 건네며 말했다. "여기서 네 몫을 떼어 가. 슈를 놔주기로 했다." "아아, 그 계집의 몸값 중 사할 말이지?" 시륜은 두말 않고 무하의 주머니에서 그만한 값어치를 지닌 세공품을 꺼냈다. 섬세함이 돋보이는 머리핀이었다. 그가 그것을 꺼내들자 무하는 주머니의 입구를 다시 끈으로 묶었다. "이거 가지고 다니는 것도 귀찮겠는걸?" "그러고 보니……." 등에 매고 있던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이는 시륜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같이 나가지." "무하도 가는 거야!?" 시륜이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작별을 고할 때는 시쿵둥하던 레일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었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은 아랑곳 않고 자신만을 뚫어져라 보는 그녀에게 무하는 고개만 끄떡임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 하지만……!" "……?" "그, 그게……." 무하는 말을 버벅거리는 레일리아를 보며 고개만 약간 갸웃 했을 뿐, 굳이 물으려 하지 않았다. 시륜은 피식 웃으면서 레일리아와 무하를 번갈아 구경했을 뿐이었다. "이 근처에 볼 일이 없는 거라면……난 바로 수도로 들어 갈 거니까 내일 같이 가는게 더 편하지 않아?" "……." 수도에서 별장까지 곧장 향한다면 일주일 안으로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을 끝낸 무하는 시륜을 보고 말했다. "배웅하지." "아아." 레일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며 자리에 앉았다. 누나의 생각지도 못한 귀여운 면모를 본 사뮤에르는 자기도 모르게 방긋 웃어버렸다. 레일리아는 동생의 미소는 보지 못하고 앞의 주스를 홀짝이며 숨을 돌렸을 뿐이었다. 다른 용병들이 고개를 돌리고 키득거리는 것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상당히 진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이상한 여관 내의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하와 시륜은 밖으로 나왔다. "어디를 가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수도와 가까운 쪽이라면 내일 같이 가는 것이 좋지 않아?" "수도 근처이긴 하지만……. 혼자 움직이는 편이 빨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시륜은 자기 몫으로 할당받은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앞의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 듯 싶었지만, 귀여울 정도로 티가 팍팍나던 꼬마 귀족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났던 것이다. "넌 레일리아를 어떻게 생각하지?" 뜬금 없는 질문에 무하는 별 생각 없이 답했다. "의뢰인." "그 외에는?" "귀족 여자." "그 외에는?" "또 뭐가 있나?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시륜은 말의 목에 얼굴을 묻고 킥킥대며 소리 없이 웃어댔다. 무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시륜을 지켜봤다. 괴로워 보일 정도로 웃어대던 시륜은 겨우 겨우 진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묻자." "……?" "난……." 지붕에서와 같이 한참 머뭇거리던 시륜을 무하는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난 너의……." 말의 목 언저리에 두고있던 시선을 무하에게로 옮긴 시륜은 결국 힘들게 말을 내뱉었다. "난 너의……친구인가?" "아니."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무하의 답은 빠르게 나왔다. 하지만 그 뒤의 말도 빠르게 나왔다. "지기이다. 나의 두 번째 지기." "……." '지기'. 믿을 수 있는 자, 믿음을 줄 수 있는 자. 의지 할 수 있는 자, 의지하게 할 수 있는 자. ……이러한 철저한 상호주의의 친구관계를 말한다. 지기란 또 다른 의미로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 자, 내가 배신하지 않을 자 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설희는 무하의 지기가 아니었다. '내가' 배신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나를' 배신한다면 그것은 지기가 아니니까……. 시륜의 황금빛 눈동자가 기분 좋게 휘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무하의 바로 앞으로 달려왔다. 그는 있는 힘껏 무하를 껴안고 속삭였다. "나에겐 첫 번째 지기다, 넌." 무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굳이 그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첫번째'. 그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막하고도 두려운, 철저히 혼자인 세상에서 절대적인 내 편이 생긴다는 것.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으며 의지 할 수 있는 이가 생긴다는 것. 또한 그도 나를 믿고 의지한다는 것. 고독한 인생에서 절대적인 '아군'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떨리고 얼마나 기쁜 일인지……누구보다도 무하가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 포옹을 푼 시륜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경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빠르게 말의 위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고삐를 돌려 출발시켰다. "이거 너에게 줄게." 말이 뛰기 직전에 뒤를 돌아 무하를 보며, 자신의 팔에 달려있던 수많은 장식구 중에서 하나를 던지는 시륜이었다. 받아들며 그를 올려보니, 그는 슬쩍 윙크를 하며 고개를 앞으로 돌려버렸다. "이, 이봐!" 유품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당황해서 쫓으려 했지만 시륜은 이런 말만 남기고 빠르게 달려가 버렸다. "그건 내가 만든 거야. 신경 쓰지 말라구." 멋진 기마술을 보이며 사라지는 시륜을 끝까지 배웅하고 나서야 그가 던지고 간 것을 내려보았다. 그것은 몇 겹으로 둘러져서 팔에 감겨 있었던 것이지만 분명 목걸이었다. 흑색 실로 세밀하고 꼼꼼하게 꼬아져있는 줄에 정교함이 돋보이는 목공예품의 메달이 달려 있는 멋진 목걸이었다. 아름답다기 보다는 멋진 그것의 중앙에는 거대한 나무가 섬세하게 음각으로 깍여 있었고, 메달 둘레는 나뭇잎이 양각으로 깍여 있었다. 밑에는 무엇이라 글씨가 써져 있었지만 생소한 글이었다. 웬만한 글은 다 읽을 수 있었던 '페르노크'가 정령어 외에 못 읽는 두 번째 글씨였다. 무하는 어깨를 잠시 으쓱인 뒤, 그것을 목에 걸어, 메달을 옷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혹시 끊어지거나 없어질지 몰라 걱정이 되었지만, 수도에 가서 마법사에게 보조 마법을 받기로 하고 걱정을 접었다. 그 정도는 혼자 할 수도 있지 않을 까 싶었지만, 불행히도 무하가 알고 있는 마법 주문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무작정 금할 것만이 아니라 공부도 해야 할 것 같은데. 금하기만 해서는 되려 그것에 대해 더 무지해 지니까……. 집에 돌아가면 몰래 지하실에 가서 마법서라도 좀 읽어봐야…….' 무하는 마지막으로 두 번째 지기가 사라진 쪽을 한번 본 뒤,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 이제 수도로 돌아가는 군요! 테밀시아와 페르노크가 과연 만날까요^ㅡ^ 약혼 건은 어떻게 되려나.....키득키득..... 오늘 2권이 나온다는데....이미 나왔는지......아닌지 잘 모르겠네요..... 음.....한번 책방을 가봐야......중얼중얼 곧 200회에요. 그래서 이벤트에 대해 곰곰히 생각을 해봤는데...... 하나는 그냥 투표....인데..... 가장 잘 어울리는 커플과 가장 잘 안어울리는 커플..... 각기 점수 10점으로 마음대로 정하는 건데....... 각 1점시 열커플을 정할 수도 있고.....뭐, 그건 마음대로.......인것과!!! 또다른 이벤트는 패러디와 마찬가지로 상품이 걸려 있는...... 물론 상품은 아해의 장 2권이구요^^ 내용은 상품이 걸려 있는 만큼 고난위도! 바로 아해의 장 캐릭터 두명이나 세명(원래 다섯명이었는데 줄여서 네명이었다가 다시 줄여서......) 을 그려서 칼라까지 마무리 한 다음 보내주세요......인데... 몇몇 분들이 해주시겠다고 응원은 했지만.....ㅡㅡa 고민이 되는 군요. 아직 200회까지는 좀 남았으니까 고민 해야 겠습니다만...... 그림이 가장 유력하고 확정이다.....라고 해둬야 겠군요^^ 그럼.... 아해의 장 194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묘한 식당의 분위기를 무시한 채 이층으로 올라간 무하를 기다리고 있던 이가 있었다. "사뮤에르?" "……." 얼굴을 붉히며 주저하고 있었지만 분명 뭔가 할말이 있는 눈치였다. "라, 라이시륜에게도 말하고 싶었지만……감사해요."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무하씨를 만난 이후로의 모든 일에 감사드려요. 많은 걸 가르쳐 주셨고 보여주신 걸 감사드려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영광이야." "……." 다시 머뭇거리기 시작하는 사뮤에르를 무하는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저를……에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애칭의 허락이지만 뭔가 달랐다. 사무에르의 말의 진정한 뜻은 '내가 당신을 믿어도 될까요?' 이었던 것이다. 무하는 흥쾌히 응했다. "그러지, 에르." 배신이란 듣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무하는 상대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한 그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사뮤에르는 활짝 웃고는 계단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처소는 최고층에 있었던 것이다. 무하는 잠시 올라가는 그를 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막 방문을 열려는 그의 귀에 사뮤에르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이 은혜를 꼭 갚을 겁니다." "은혜라니 무슨……?" 하지만 돌아보았을 때 사뮤에르는 이미 보이지 않았었다. ************************************************************************ 세상물정 모르는 이가 본다면 분명 궁궐이라고 착각해 버릴 거대한 저택. 바로 자하라 가의 본가였다. 본가라고는 하지만 가주는 경치 좋은 별장에서 지내기 때문에 직계가족만 머물고 있었다. 그 곳에서 지내는 몇 안 되는 식구 중에서 이번에 새로운 일원이 된 한 소년이 구석진 벽 쪽에 붙어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담치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상당히 많이 해봤는지 훌쩍 넘어가는 모습이 능숙했고 재빨랐다. 그는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을 확인하고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형식상 본가는 수도에 있기 때문에 저택 바로 근처가 번화가 였던 것이다. 결 좋은 남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세 좋게 뛰던 그는 사람의 수가 많아져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자 그제서야 천천히 걸었다. 한껏 기지개를 펴며 유유히 걷던 그의 앞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말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대로임에도 마구잡이로 달리는 모습에서 그 기수가 귀족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경고음 하나 없이 달리기만 하는 말 덕분에 사람들은 혼비백산 몸을 피했다. 그도 다를 바 없었다. "앗!" 어머니의 빠른 손길을 미쳐 소화해 내지 못한 한 꼬마가 넘어져 버렸다. 다행히 기수가 사람을 밟고 지나갈 정도의 악인은 아니었던지 급히 말을 세웠다. 말의 앞발이 심하게 들려지고 심하게 투레질을 하는 바람에 기수의 몸이 뒤로 떨어져 버렸다. 주위에서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안전하게 착지하는 모습이 꽤나 훈련을 한 전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젠장! 갈 길이 바쁜데 버러지 같은 것이 거슬리게 하는 거야!" 다치지는 않았지만 기분만은 최악이었는지 거친 말이 그 기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모두 움찔하며 눈치를 보는 와중에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채찍을 힘껏 쳐들어 꼬마의 어깨를 내리쳤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말 중 '바쁘다' 라는 것은 정말이었는지 그것으로 끝내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렇고 그런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일을 냉정한 눈으로 보던 소년, 요크노민은 어깨를 으쓱이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에게 치기 어린 영웅심은 존재하지 않았단 것이다. 게다가 고작 한 대 맞은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한다면 되려 이쪽이 이상해지는 일이었다. '녀석이라면 또 모르지.' 만나지 못한지 꽤 된 지기를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어느 곳이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위대하디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 거주하시는 수도에서도 분명 뒷골목은 존재했다. 아니 그 어느 지역보다도 어두운 지하세계가 수도의 밑바닥에 존재했다. 힘만이 법인 그 곳의 주거지인 뒷골목에 접어든 요크노민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모습. 뒤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껄렁껄렁한 휘파람을 불러대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확인한 요크노민은 다시 앞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익숙한 모습. 어느 샌가 그의 앞쪽에도 막대기를 두어번 휘둘러보는 남자들이 요크노민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검을 슬쩍 뽑아 들었다. 이 밑바닥이라는 곳은 '외각'으로 가면 갈수록 급이 떨어지고 질이 나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묘한 자격지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신들의 영역에 누군가가, 그것도 멀쩡해 보이는 꼬마가 들어오면 거친 환영을 해주는 것이 이제는 아예 관습과 같이 되 버린 상태였다. 여기서 한가지 의아점이 든다. 왜 수시로 드나든 것으로 보이는 요크노민의 앞을 막아 선 것일까? 요크노민은 먼저 앞쪽에 있는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들은 꼬마의 맹랑한 행동에 콧웃음을 치며 막대기를 휘둘렀다. 아니 휘둘기 위해 높이 쳐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으아악!" 이 비명소리의 주인은 요크노민의 공격을 받던 앞쪽 사내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동료를 보며, 요크노민의 뒤쪽에 있던 사내들이 내지른 비명이었다. 벌벌 떠는 그들을 요크노민은 유유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어올리며 그들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기가 질린 이들은 도망가기 위해 빠르게 달렸지만, 얼마 못 가 자신이 방금까지 침을 뱉어대던 땅바닥에 뒹구는 신세가 되 버렸다. 요크노민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어차피 내버려두어도 녹따위는 생기지 않는 마법검이었지만 그래도 관리를 잘 해 두고 싶었다. 그는 다시 경쾌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뒹구는 시체에는 이미 신경 끊은 지 오래였다. 아마 저들의 친구들도 시체로 뒹구는 몸뚱이에서 쓸 만한 것을 꺼내 슬쩍 할 뿐, 장사를 지낸다거나 애도를 표한 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이 바닥이 다 이런 법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앞서 제시한 의문의 답이 바로 이것이다. 요크노민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얼굴에 썼다. 그것은 이마와 눈, 코의 중간정도를 덮는 하얀 마스크였다. 귀족으로써의 다른 얼굴이 있는 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얼굴 및 모든 것을 비밀에 붙여야 했다. 마스크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녀석이 있다면 그때 가서 손봐주면 되는 거다. 처음 레타에 들어갔을 때 그것을 걸고넘어진 녀석의 목을 베려 한 이후로 누구도 시비를 걸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때 그 녀석이 지금은 요크노민의 친한 동료가 되었으니, 역시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부지런히 걷던 요크노민은 거리의 한 귀퉁이에 있는 주점에 들어갔다. 순수 통나무 벽으로 되어 있는 꽤 멋진 주점이었다. 곳곳에 쳐져 있는 거미줄과 소복히 쌓여 있는 먼지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여어! 민 아냐?" "여전히 여기서 사는 구나, 록." "여기 술이 맛있잖냐! 너도 여전하구나, 그 마스크." 바로 남자가 요크노민, 아니 민의 마스크를 걸고넘어지다가 목이 날라갈 뻔했던 불운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그의 등급은 하로 막 올라가기 전이었던 파였기 때문에, 민에게 더 이상 시비를 거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파 등급으로는 녀석이 최상위였고, 하 등급쯤 가면 밑에 녀석이 어떤 녀석이건 관심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요크노민의 등급이 파로 불쑥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검 실력이 뛰어나면 올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도둑 길드. 즉, 그쪽 분야의 실력과 실적이 뛰어나야만 올라 갈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단지 요크노민의 검술만은 인정받았기 때문에 시덥지 않은 것으로 괜히 시비를 걸어서 린치를 가하지는 않은 것으로 끝났을 뿐이었다. "맞다, 카나하고 미리 녀석이 네 상판때기 보겠다고 벼르고 있던데 조심하라고. 그 자매, 네 추종자 아니냐." "추종자가 아니라 맹신자겠지." 굵직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민은 자신의 뒤에 접근한 기척을 못 느꼈음을 반성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산." 민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는 헤어밴드로 이마의 전부와 눈의 일부분을 덮고 있었다. 집에서의 약간 무기력한 듯한 모습과는 전혀 달리 생기가 도는 모습이 보기 좋은 그는 민과 록의 자리 사이에 있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리고 민을 보며 말했다. "주위 경계가 미숙하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보모 납시셨군." 산은 양손에 들고 있던 찻잔 중 하나를 민에게 건네며 록을 돌아보았다. "네 마누라보다는 나아." "으윽! 마, 마누라라니! 산 형님! 그, 그게 무슨 망말……!" "마앙말?" "히익!" 록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이는 이가 있었다. 주위 경계가 카 등급 못지 않은 록의 등을 이토록 쉽게 뺏을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디, 딜린." 금방이라도 녹아 흐를 듯한 아름다운 금발머리가 매력적인 20대 초반의 청년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검녹색의 록의 머리카락을 부비며 말했다. "그렇게 내가 반가워, 허니?" "히익! 저리 꺼져, 변태!" "어머! 그렇게 과도하게 애정표현을 하면 내가 감격하잖아." 하며 록의 목을 세게 조르는 딜린을 보며 민과 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딜린이 진짜 남색가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미인계를 사용해서 여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행위를 즐기는,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였다. 그런 그가 유독 록에게 애정공세(?)를 지독하게 펼치는 이유는 순전히……. "그만 하는 게 어때, 딜린." "그러다 록 녀석 죽겠다." "하하! 미안, 미안. 이 녀석은 반응이 너무 재미있어서 말이야. 한번 하면 자제가 안돼." ……순전히 재미있어서 란다. 덕분에 록만 미칠 노릇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행동을 멈춘 딜린은 민과 록의 사이, 산의 앞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오라버니! 여기 아이스크림요!" 단 것을 유독 좋아하는 딜린을 보며 잠시 지기를 떠올려 보는 민이었다. "옛다. 네 녀석이 가게 아이스크림이란 아이스크림은 죄다 바닥 내서 이번에 새로 많이 구입했다. 다 네 녀석 때문에 사들인거니까 죄다 먹어치우지 않으면 죽을 줄 알아!" "꺄! 그렇게 까지 나를 생각해 주다니……. 역시 오라버니밖에 없어! 나의 자기는 늘 나를 구박하고 외면하고 심지어는 밤까지 쓸쓸하게 보내게 하거든." "……크아악!"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분에 겨워 입만 벙긋거리다가 결국에는 고함을 내지르는 록이었다. 하지만 역시 연륜이 다른지, 오라버니라는 칭호를 받은 가게의 마스터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맞받아 주었다. "밤이 쓸쓸하거든 오라버니한테로 오렴. 기꺼이 위로해 주마." "……!" 가슴을 두들기며 뭐라고 말하려는 록을 가로지르며 딜린이 답했다. "매력적인 제안 고마운데, 역시 아내로써 지조를 지켜야지. 미안, 소박 맞으면 오라버니께 갈게." "크윽……!" 여전히 입조차 벙긋하지 못하던 록이 드디어 발작을 일으켰다. "누가 아내야! 내가 미쳤다고 사내새끼를 아내로……! 그리고 소박? 당장 가! 가버려!" "까아! 지금 나 소박 놓는 거야? 그럼 드디어 내가 마누라라는 걸 인정하는 거네?" "누가 마누라야!?" "음……. 여전히 인정 안 하려는 구나. 나는 어쩌다 저런 무심한 남자한테 반해서……. 흑흑." "크아악!" 민과 산은 실소를 머금으며 둘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딜린은 자기와 닮은 녀석은 싫다며, 능글거리는 녀석은 피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조금만 처신을 잘하면 저렇게 놀림을 당하지 않을 것인데……. 다혈질인데다 남색이라면 질색하는 록에게는 바라기 힘든 일이 아닐까 싶었다. 저렇게 평생 짝짝꿍으로 노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민이었다. 저렇게 똑같은 화제로 계속 실랑이를 벌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궁합이 잘 맞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카나하고 미리가 어떤 방법으로 도전해 올까?" "왠지 즐기시는 것 같습니다?" "부정할 수는 없군." 민은 악의 없이 산을 쏘아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스크를 쓰는 대신 앞머리를 양옆으로 쓸어 넘겼기 때문에 깊은 남색 눈동자는 확실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얼굴 전체에 문신을 새긴 이가 희귀하지 않을 정도로 괴이한 인물이 많은 바닥이라, 되려 깔끔한 마스크를 한 민은 남녀노소 안 가리고 인기가 많았다. 왜소한 몸매와 작은 키를 가진 앳띤 소년인데다 정식 검술을 배운 것이 확실한 검 솜씨와 정중하면서도 재치 있는 말재주 덕이었다. 게다가 마스크를 썼음에도 드러나는 단아한 얼굴선도 한 몫 했다. "아! 잊을 뻔했다! 이번에 도전자가 나타났데!" "도전자?" "아아, 벌써 레타 사잔 아나의 날인가?" "이번에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래?" "그게 너도 아는 녀석……." "무슨 말이야?" 정신없이 떠드는 이들 사이로 파고들며 묻는 이는 당연히 신참 민이었다. "레타 사잔 아나. 밤을 훔치는 자라는 뜻으로 우리 길드의 공식 명이라는 건 알고 있지?" "물론." "그리고 길드가 단순하게 레타라고 불린다는 것도 알고 있지?" "물론." "레타 사잔 아나의 날이란 '레타'라는 길드를 '사잔 아나', 훔치는 자의 날이란 뜻이야. 즉, 길드를 훔치는 자의 날이란 뜻이지." "그게 무슨……?" 복잡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해 주려 노력하는 산을 무시하며 딜린이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길드 마스터에게 길드원이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라는 거야. 승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레타 사잔 아나. 바로 우리 길드의 마스터 자리지!" "헤에?" "하지만 이년에 한 번 있는 행사고 도전자는 거의 없어. 도전자가 승리하면 마스터지만, 패하면 죽음이거든. 마스터는 패하면 장로의 위치로 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게다가 그 도전이라는 것이 어떤 테스트에 통과해야 되는 건데……." "그 문제의 테스트라는 것이 마스터가 만드는 거거든. 즉, 마스터가 그 테스트라는 것을 드래곤의 레어에서 보석을 훔쳐와라……라고 정해도 도전자는 그것을 해야만 하는 거라고. 그런 테스트에서 이겨야 마스터와 싸울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그 테스트에서 살아 남은 이는 여지껏 아무도 없었지." 얌전히 듣고 있던 민은 찻잔을 슬며시 들어 입을 축였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의 얼굴이 찻잔으로 인해 상당수 가려졌다. 하지만 그의 심중을 충분히 알아 챌 수 있는 자가 이 중에는 한 명 있었다. 바로 산이었다. 그는 차를 마시는 척하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민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그는 민이 이 길드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도운 조력자이었던 것이다. 산은 슬쩍 손을 들어 민의 어깨에 얹었다. 민이 들고 있던 찻잔을 약간 내리며 그를 보자, 보일 듯 말 듯 웃어주는 산이었다. 응원의 제스처이었으리라. 민의 차분한 눈동자에 위험한 미소가 잠깐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 한 건 있다는 데 같이 할래? 경험도 쌓을 겸." "나는 차 등급인데? 록과 딜린이라면 최하 파 등급의 건수 일 거 아냐?" "그러니까 같이 하자는 거지! 경력에 추가되잖아!" "흐음……." 민은 산 의외에는 존댓말을 하지 않는 오만한 성격이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면이 더 마음에 든다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오만함을 마음에 들어하는 이는 많아도 그 것의 원인을 아는 이는 한 명 뿐이었다. 물론 그 한 명은 산이었다. '이미 다른 조직원은 자신의 밑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건방진 녀석.' 민을 보는 산의 입가에는 즐거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그가 검을 쥔 이후에 세 번째로 짓는 미소였다. 첫 번째는 레타라는 길드의 존재를 알았을 때. 두 번째는……. "그런데 산." "……?" "누님……꼬리는 좀 밟았어?" "……." "전혀 못 밟은 모양이구만. 미안하네, 공연한 질문을 해서." "아니……." 뭔가 어두운 화제인 것 같았다. 민은 세 명의 남자를 살펴보다가 그냥 차를 홀짝이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잠시 물은 것만으로도 어두워진 산을 보면, 자세한 사정을 묻는 다는 것은 매우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 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은 배려에 감사해하며 산은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언젠가는 밟히겠지! 돈도 꽤 풀었으니까! 자자, 그 건수가 뭔지나 들어보자고! 우리 민을 이상한 곳에 쓰는 건 아니겠지?" "오오, 열렬해라! 우리 민이래! 허니, 우리 딜린이라고 해봐." "미쳤냐! 누가 허니야! 죽을래!?" 산은 이마를 감싼 밴드를 두어번 쓸어 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두번째는 그녀를 만났을 때. =========================================================================== 늦었습니다......죄송합니다(__);; 안 좋은 일이 많았습니다....; 200회 이벤트를 확실하게 그림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몇몇 분들께서 이미 스케치를 그렸고 채색을 입히는 중이다...라는 메일을 보내오셔서요....; 제가 200회를 쓰는 동시에 이벤트는 시작할 겁니다^^; 기간은 일주일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요. 늪지에서 한가지 이야기가 빠졌기 때문에 *****->이런 커트로 끊었습니다. 밑에서는 간만에 전환해서 요크노민 이야기가 나옵니다. 산에게도 로맨스가!! 아참, 요크노민과 카산의 길드 내에서의 이름은 민과 산입니다.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데 지문에서는 요크노민, 카산이라고 나오면 되려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둘이 '변신(?)'을 하고 있을때는 이름을 길드 내 이름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테밀시아의 이야기가 나올 예정입니다...만 요크노민의 이야기가 조금 더 나올지도......음 아직 안 써서 잘 모르겠습니다. 좀더 고민해야 겠지만... 요크노민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봤자 조금일테고 곧 테밀시아로 전환할 겁니다. 그 뒤에 슬그머니 집안사정을 알아보러 무하가 나타날테죠. 시륜의 정체를 골똘히 생각하신 메이플님! 저에게 다채로운 즐거움을 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상.당.하.시.군.요. (씨익) 그럼(__) 아해의 장 195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오르세만 가를?!" "그래. 수도에 있는 본가는 아니고, 넉넉잡고 이주일 정도 걸리는 지방에 있는 별장인데, 듣기로는 가주나 라, 마, 아가 모두 그곳에서 산다고 하던데?" "암……살 의뢰인가?" 약간의 공백이 있는 물음이었지만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저 아직 암살 따위는 해보지 못한 초짜라 약간의 긴장과 흥분을 가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산이 뭐라 설명하기 애매모호한 눈으로 민을 힐끔 보았지만 다들 그것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아마 그의 보모 기질이 되살아 난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딜린이 답했다. "아니. 이번에는 무슨 물건을 가져다 달라는 거야." "물건?" "응. 귀족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인물이 그곳에 살고 있거든. 혹시 들어 봤나? '희대의 천재' 페르노크." "……조금은." 딜린은 설명하길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꽤나 수다스럽게 떠들어 댔다. 물론 부지런히 아이스크림을 입에 퍼 나르는 잊지는 않았다. "어떤 마법사의 의뢰야. 녀석의 거처에서 마법서를 훔쳐 달라는. 서점에서 파는 마법서는 난해하고 복잡하며 상태도 안 좋잖아? 하지만 그는 마법 길드의 준 소속이니까 잘 정리된 마법서를 대량 소지하고 있을 거라는 거지. 마법사란 족속들은 주문하나에도 목숨을 거니까." "흐음……." "말이 별장이지 가주 계승권자가 세 명이나 사는 곳이라 경비가 웬만한 귀족 본가보다 더해. 덕분에 의뢰 급을 파 등급으로 올려졌지. 어때 해보겠어? 경비만 잘 파악해 두면 식은 죽 먹기라고." 민은 마법서라는 말에 약간 움찔하다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물었다. "괜히 초짜인 내가 끼어 들었다가 봉변 당하는 거 아냐?" "그때는 어떻게든 되겠지. 마법서 하나 하나에 추적장치라도 달지 않는 이상 위험은 없어. 게다가 펼쳐 볼것도 아니니까 보호 마법 때문에 봉변을 당할 일도 없지. 걱정마." 민은 차를 입안에 마저 털어놓고 꿀꺽 삼키고 나서 말했다. "그럼……신세지겠어." "괜찮겠나?" "뭐가 말입니까?" 활발한 록과 딜린이 사전 조사를 하겠다고 나가 버리고 민과 산이 주점에 남았다. 애써 꺼낸 질문의 답이 시원치 않자 산의 미간이 다소 찡그려 졌다. "그 곳에 가도 되겠냐는 말이다. 별로 유쾌하지 못한 추억이 있는 곳이 아 니었던가?" "……." 18년이다. 그 곳에서 보낸 시간이……. 그 동안 즐거웠던 기억이라고는 겨우 두 달 남짓 하는, 페르노크와의 생활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의 즐거움만으로 그 긴 시간동안의 괴로움이 덮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지기의 물건을 훔치러 가는 길이 아닌가? 그런 산의 배려와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민은 태연했다. "괜찮습니다. 제게 많은 것을 준 곳입니다. 폭 넓은 배움과 귀족의 예절, 그리고 밑바닥에서 살아 남는 법을 알려준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둘도 없을 '지기'와 '영원'을 선사한 곳이었다. "어차피 그 녀석, 서재의 책은 죄다 읽었으니까 몇 권 가지고 온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어요." "그런가……. 록과 딜린이 있으니까 위험한 건 없을 거다. 게다가 파 등급의 일이라면 네 경력에 많은 도움을 주겠지." "아니오." "……?" 민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의뢰에 '성공'하는 건." "네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 민은 아무 답 없이, 약간 고개를 숙이며 예의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 그 곳은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천민들의 마을이었다. 그곳을 단순히 마을이라고는 평할 수 없었다. 가장 천하 자들의 본거지이기도 한 그곳은 온갖 쓰레기와 오물로 더러웠고, 먹는 자와 먹히는 자로 극단적으로 나뉜 약육강식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곳은 수도에 존재하는 뒷골목보다도 훨씬 더 음침했으며 음험하고 잔인한,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인 곳이었다. 곳곳에 썩어 가고 있는 시체 따위는 발에 차이는 돌맹이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곳, 바로 하츠민이었다. 온 대륙을 긴장시키고 있는 몬스터 사태는 이 더러운 바닥에도 어김없이 닥쳐왔다. 죽음을 각오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뜻밖의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믿겨지진 않지만 저 오만한 귀족의 최고봉 카르민 출신의 기사가 바로 그 구원자였다. 기사단만으로는 역부족이라, 이 바닥을 뒹구는 '먹는 자'를 일거 포섭해서 함께 몬스터를 도륙 하는 저 황금빛 눈동자의 귀공자가! "오늘은 수가 삼백십칠마리였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하츠민 전체를 덮을 만큼의 수가 몰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흐음 ……." 몬스터의 체액을 건성으로 털어 내며 부단장의 보고를 듣고 있던 테밀시아는 검을 뽑아 검 날을 살펴보았다. 그의 검은 분명 양각이나 음각따위로 룬어가 새겨져 있지 않은 평범한 검이었다. 하지만 은은하게 금빛 기운이 서려 있는 보검이었다. 개국 공신인 오르세만 가의 초대 가주가 건국 황제 이므르께 직접 사사 받았다는 골드 드래곤의 검. 물론 검에 서려 있는 금빛 기운 때문에 와전된 전설에 불과하겠지만 그 성능만은 확실했다. "내일은 일절 쉰다." "예?" "모레 결판을 낸다. 모레부터는 완전히 전멸시킬 때까지 전투를 멈추지 않겠다. 그렇게 전해라." "알겠습니다." 부단장이 나가고 테밀시아는 낡아빠진 침대에 누웠다.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새벽부터 싸워야 하는 것을 감안해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을 테지만 내일은 완전히 쉰다고 해두었기 때문에 조금은 여유였다. 죽이면 죽일수록 점점 수가 늘어난다면 차라리 하루 쉼으로써 체력을 회복하고 한번에 결판을 내는 것이 좋다. 다행이 아직까지는 성벽을 오를 수 있는 몬스터가 포섭되어 있지 않았기에 결정할 수 있었던 사항이었다. 하츠민의 마을 주제에 무슨 성벽이냐 싶었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하츠민의 시작이 나라 감옥에도 들어갈 자격이 없는 천한 것들을 대거 가두는 대형 감옥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말이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 내부의 천한 것들로부터 외부의 선량한 이를 보호하기 위한 성벽이었지만, 그것이 어떠하던 간에 지금 크게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제 이 짓도 모레로 끝이군." 그 정도라면 더욱 수가 많아 질 것이 자명한데, 테밀시아의 말은 분명 '확신'이었다. 저 도도하리 만치 당당한 카르민의 기사는 이미 승리를 확정짓고 있는 것이다. 쉴새 없이 몸을 혹사시킬 때는 미처 쳐들어오지 못했던 아련한 잔영이 더더욱 진하게, 그리고 강하게 머리 속을 파고들어 왔다. 시리도록 짙은 바다 빛. "괜찮아. 나의 것이다. 나의 것이다." 자괴하는 스스로를 달래는 안타까운 목소리가 초라한 그의 처소에 맴돌다 사라졌다. "나의 것이다……." 두 손으로 눈을 덮어보던 그의 귀에 차분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 테밀시아는 상체를 일으키며 답했다. 그는 방심 따위는 하지 않는 남자였다. 때문에 그의 손이 검의 손잡이 부분을 꾹 쥐고 있었던 것이다. 문이 열리고 낯설지만은 않은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남자였다. 그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테밀시아를 보다가 천천히 방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테밀시아는 날카로운 눈으로 갑작스런 방문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그 방문자는 분명 몬스터와의 전투 때 옆에서 활약하던 남자였다. 드문 청자색 머리카락을 가진 복면의 남자라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것이다. 문 듯 테밀시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워낙 깔끔한 색인 흑색으로 차려 입은지라 특별히 행색이 더럽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비릿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을 보아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잔뜩 머금어져 있는 듯 했다. 귀족 출신의 기사로써는 드물게 실전 경험이 풍부한 테밀시아는 그 비릿한 무언가가 사람의 몸을 쉴새없이 휘젓고 다니는 피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도 매우 신선한 피! 그렇다고 검을 당장 뽑아 들지는 않았다. 암살자 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흐리멍텅한 눈은 분명 그에게 할말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건이 뭐지?" "……." 괴이한 방문자의 흐린 눈이 갑자기 번쩍이면서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냈다. 테밀시아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자신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막아냈다. 언제 뽑았는지 남자의 손에는 단검이 하나 쥐여져 있었다. 테밀시아는 검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악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순진하게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순간 힘을 높여 검을 튕겨 내고 빠르게 검을 내리그었다. 남자는 가볍게 뒤로 피하고 나서도 두걸음 더 뒤로 물러선 뒤, 단검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두 손을 위로 들었다. 공격 의사가 없음을 보인 것이다. 그것을 본 테밀시아는 검을 집어넣지는 않았지만 공격하기 위해 휘둘지도 않았다. "당신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소." 뜻밖의 미성이 남자의 가려진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약간은 탁한 듯한 했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테밀시아는 이 의외성을 재미있어 하며 침대에 앉았다. 검은 여전히 살기를 머금은 채로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암살 대상 1위. 하지만 동시에 기피 대상 1위."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 곳을 보호하기 위해 온 이유가 뭔지 알고 싶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좀 늦은 감이 있지 않나? 내가 이곳을 온지 꽤 시간이 흘렀다고 보는데?" "아니, 지금은 적기라고 생각한다. 이제 군을 물러나게 할 생각인 것 같으니까." "흐음……." 남자는 묵묵히 테밀시아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테밀시아는 먼저 질문을 던졌다. "내 이름은 이미 안다니 묻지. 네 이름은?" "휘란." 의외로 순순히 나온 답에 테밀시아는 꽤 놀란 눈빛을 했다. 흥미가 다분히 섞인 눈빛이었다. "내가 이 곳을 보호하는 이유라……." 테밀시아는 자신의 영원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만일 그가 하츠민이었다면 사랑하지 않았을까? 이토록 안타깝고 미칠 것만 같은 감정을 품지 않았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답은 '아니오'다. 카르민인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제피모 따위는 하츠민과 다를 바 없는 천한 자에 불과하다. 바로 그런 제피모를 사랑한다. 천한 하츠민따위를 보호해서 뭐 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그에게 천한 제피모를 사랑해서 뭐 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진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랑해서 뭐 하는 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문제를 내지. 누군가 몬스터 따위에게 무방비하게 죽어간다. 몬스터따위는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냉정하던 휘란이 거칠게 답이 아닌 답을 뱉었다. "하지만 하츠민이다. 그 누군가는 하츠민이야! 천하디 천한 버러지란……!" "하츠민이기 전에 인간이다!" "……!" "하츠민이기 전에 지성체란 말이다. 얼마든지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자란 말이다." 침묵이 깔렸다. 그 것을 깬 자는 휘란였다. "우습군. 성인군자인가? 아니면 위선자?" "둘 다 아니야. 나는 특별히 구세주로 위선 떨 생각도 없을뿐더러 신분 따위는 사라져야 한다, 사람은 다 똑같이 존귀하다라는 둥의 주장을 펼칠 생각도 없다. 단지 그 어떤 자라도 살아남을 자격은 있다는 것 뿐. 그냥 그뿐이다." 휘란의 청자색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구석으로 걸어가 자신이 던졌던 단검을 집어 소매에 넣었다. 팔목에 검 집이 고정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난 하츠민 출신이야. 내가 더럽다고 생각되나?" "별로. 머리카락이 예쁘다는 생각은 들어." "쿡쿡." 실소를 머금던 휘란은 자신의 얼굴의 반을 덮고 있던 복면을 끌어내렸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이제 막 십대 후반 정도 되는 어린 소년의 것이었다. 페르노크의 또래 정도랄까? 청자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창백한 얼굴빛을 가진 휘란은 페르노크와 비슷한 키와 체구를 가졌다. "휜이라고 불러도 좋아. 나 당신 밑으로 들어가고 싶어. 받아주겠어?" "난 능력 좋은 녀석만 받아." "능력이라면 이미 증명했을 텐데?" "약해." "흐음……." 휜은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숙이면서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오다가 당신을 노리는 암살자 두 명을 죽였어. 약한가?" "글쎄……." 테밀시아는 내심 실소를 머금으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냉정하게 그의 동향을 살폈다. 한참 고민하던 휜은 소매에서 아까 그 단검을 꺼내 테밀시아에게 던졌다. 테밀시아는 자신의 머리 쪽으로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며 날라 오는 단검을 보면서도 태연히 휜만을 주시했다. 단검은 둘의 예상대로 테밀시아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 뒤의 벽에 박혔다. 잠시 후 단검의 날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핏방울이 돌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리는 방안에 휜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는 세 명이야. 약한가?" "아니." 테밀시아의 답을 듣자 휜은 기쁜 듯 맑게 웃었다. 그 소년다운 천진한 미소를 보며 집나간 괘씸한 동생을 떠올려 보는 테밀시아였다. 그것이 그의 그림자, 휘란 카 레타와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사백여 마리의 몬스터를 전멸하는 쾌거를 이루고 수도로 돌아 온 것은 이틀 후의 일이었다. =========================================================================== 뉴!뉴! 뉴 페이스~~! 이거 200회까지 진짜 카운트 다운이네요^^ 부지런히 쓰면 다음주쯤이면 이벤트가 시작 되는! 내일 게임CD를 하나 사러 갑니다^^ 오옷! 설레요^^ 파이널 판타지 8인데 아실분은 아시겠지요?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 새로 다온 게임도 있다던데... 아직 공략집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마그나카르타? 뭐더라? 음... 좋은 게임은 많이 나와야 하는 겁니다, 암암(__)(__) 아해의 장 196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수고했네, 테밀시아 경." "황공하옵니다." 본래라면 황제페하의 광활한 덕망에서 비롯된 승리라고 아부성 언사를 입에 담아야 했다. 비록 그것이 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황제는 건방진 기사를 내려보며 내심 비웃었다. 소소한 언행에 반항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 정치인이 되기에는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역시 젊기 때문일 것이라 중얼거리며 그는 테밀시아를 내보냈다. 황제의 몇 안 되는 충신 중에서 이번 테밀시아의 뜻밖의 행동으로 그의 명성이 높아졌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고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에일라야의 교묘한 방해로 그 뜻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황제를 만난 테밀시아는 황성에서 한창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던 연회에 출석해야 했다. 한쪽에서는 목숨을 걸고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한 달이라는 기간을 두고 파티를 열고 있었다니……. 굳이 검소나 절약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눈살을 찌푸리던 테밀시아는 이내 고소를 지었다. 만일 자신이 기사가 아니었다면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정도'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지냈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기사가 되기를 잘했다고 몇 번이고 곱씹는 테밀시아였다. 당대 세력가인 오르세만 가의 유력한 가주 후보이자 고위 정치인, 강력한 기사단의 단장인 테밀시아는 당연히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은 조용히 있고 싶다는 생각에 구석에 서 있었지만 말이다. 좋아하는 술을 가볍게 마시고 있던 테밀시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귀족들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도 귀족의 일환으로써, 또 정치인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가져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굳이 아웃사이더로 지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테밀시아였다. "이번에 공이 컸다고 들었소, 테밀시아 경." "과찬이십니다." "이번 일로 휴첼 기사단의 실력도 향상되었다는 소문이 들린다오." "원래 소문이란 부풀리기 마련이지요." "하하. 겸손이 과하시오." 호탕하게 웃는 눈앞의 남자는 그럭저럭 괜찮은 축에 속했다. 테밀시아의 세력권내에서도 꽤나 입지도가 높으며 사교성이 좋고 능력도 걸출하다는 평을 받는 이브겐이었다. 이브겐이라면 자르카 밑의 신분으로 그럭저럭 상위권에 속했다. "천한 것들 사이에서 고초가 심하셨겠습니다." 이브겐 따위와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 질투가 일었는지 옆에 있던 자르카 신분의 남자가 끼어 들었다. 테밀시아는 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과연 테밀시아 경은 인내심도 대단하시군요!" 아부성 발언이었지만 테밀시아는 겸손의 말을 꺼내며 무난히 넘겼다. 한동안 실속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삼아 몸을 빼내었다. 실제로도 몹시 지친 상태였다. 화려한 분수대 근처를 느긋하게 걸었다. 이제 겨우 저녁노을이 질 무렵이라, 낯간지러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이 이 곳을 점령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부드러운 붉은 빛을 머금으며 부숴지는 물줄기가 제법 운치 있었다. 분수대에 앉아서 잘 다듬어진 숲과 같은 황성의 정원을 감상했다. 지겹도록 봐온 곳이지만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하아……." 왠지 한숨이 나왔다. 정말 지친 모양이었다. 고작 며칠 전투를 치룬 것 가지고 지치다니……그 답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것을 느꼈는지 쓴미소를 약간 지어 보였다. 가만히 있자니 점점 피로에 잠식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산책을 하기로 했다. 천천히 걷고 있자니 노을이 점점 보라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감상적이 되가는 것 같군." 작은 속삭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웃음기. 하지만 그의 행동은 전혀 달랐다.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을 뽑아 옆으로 휘두른 것이다. -챙! 챙! 독을 머금은 녹색 암기가 그의 검에 막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조금 풀려 있었던 테밀시아의 얼굴이 원래대로 냉혹하게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암수에 당할 정도로 풀리진 않았어." 그의 모습이 흐릿해 진다 싶었을 때, 나뭇가지에 앉아 평화롭게 쉬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 올랐다. 무성한 나뭇가지들 속에 은신해 있던 암살자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도주하려 했지만 어느새 바로 앞까지 접근해 온 노련한 기사의 검에 기어이 한 명의 목을 내어주어야 했다. 순식간에 당한 동료의 죽음에 애도할 새도 없이 남은 이들도 그의 공격에 노출 되야 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 듯이, 그들은 독이 발라져 있는 단검을 휘둘렀다. 테밀시아는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히는 단검을 피하기 위해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잡고 몸을 반 턴 시켰다. 그 잠깐의 틈을 노칠 암살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빠르게 테밀시아에게 던졌다. 나무 줄기에 부딪치면서 약간 생긴 틈을 노린 행동이었다. 테밀시아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들어 단검을 쳐 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빠르게 행동하는 이가 있었다. 휜이었다. 그는 테밀시아를 향해 날라 오던 단검을 여유 있게 쳐 내고 발목쯤에 있던 나뭇가지를 빠르게 올라가 그 반동을 이용해 위로 솟구쳤다. 그가 올라감과 동시에 바닥으로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두 구의 시체가 떨어졌다. 정확히 목의 급소가 깔끔하게 베여 진 시체였다. 테밀시아는 왼손으로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고 밑으로 가볍게 내려갔다. 꽤 조용한 전투였는데 누군가 용케 알아채고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테밀시아는 굳이 다가오는 이가 누군지 확인하지 않고 검을 검 집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막 다 들어 갔을 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테밀시아님!" "……!" 테밀시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일순 크게 동요되는 듯 하더니 이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는 눈을 천천히 내리 감았다가 다시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뮤비라……." 다친 곳이 없는 지, 테밀시아의 몸을 살펴보던 청년, 뮤비라는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다치신 곳은……?" "없다. 당연하잖아?" 테밀시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가 묘하게 떨린다고 느껴졌다. 어느새 숨었는지 휜은 보이지 않았다. 뮤비라는 주위를 경계하며 테밀시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세 구의 시체를 차갑게 보던 뮤비라의 어깨를 테밀시아가 뒤에서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려는 뮤비라를 막으며 테밀시아는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결혼 생활은 재미있어?" "생각보다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그래." 뮤비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너무 그리웠기 때문에 막상 얼굴을 보려니 겁이 났다. 겁쟁이가 되 버린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뮤비라가 뭐라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뮤! 여보?" "아……! 지금 갑니다." 애칭……. 테밀시아는 씁쓸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뮤비라는 그런 테밀시아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함께 파티장으로 가시죠, 테밀시아님." "아니……. 부인과 함께 들어가. 조금 더 산책하고 싶어." "하지만……." "이런 일들이야 빈번한데, 뭘. 신경 쓰지마." "……." "어서 가봐. 부인이 기다리잖아?" 테밀시아가 재차 권하자 뮤비라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카시안의 목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뛰어갔다. 놀라는 부인을 두고 이곳까지 뛰어온 그를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 한숨을 쉬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며 묘한 현기증을 일으켰다. 감히 뮤비라의 애칭을 입에 담는 여자. 너무 소중해서, 너무 안타까워서 감히 입에 담지 조차 못했던 그의 애칭을 거리낌없이 뱉어내는 여자. 그의 아내……. '괜찮다. 나의 것이다. 나의 것이다.' 암시처럼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달랜다. 이 주체할 수 없는 질투도, 살의도 곧 가라앉을 것이고, 스스로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처음 겪는 일이기에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뿐이다. ……그렇게 테밀시아는 생각했다. "쿡쿡." 갑작스런 웃음이 위에서 들려왔다. 암살자라면 이런 식으로 자신을 노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올려보았다. 휜이었다. 살기가 머금어져 더욱 광채를 품어내는 황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휜은 어깨를 으쓱으며 말했다. "당신 바보 아냐?" "……."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살기를 품어내면서, 여전히 경솔하게 입을 열지 않는 그에게 감탄하며 휜은 말을 이었다. "가지고 싶다면 뺏으면 되잖아?" 그의 손에는 암살자가 던졌던 단검이 들려져 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암살자가 상당히 애지중지 한 물건인지 손질도 잘 되어 있었고, 검 자체도 고급이었다. 휜은 섬세한 세공이 곁들어져 있는 그것을 던졌다가 받고 나서는 그것을 꾹 쥐고 말했다. "그리고 놓치지 않으면 되지." 테밀시아의 주위를 차갑게 감싸고 있던 살의가 서서히 걷어졌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나의 것이다." 휜의 조롱 어린 청자색 눈동자가 의아한 빛을 띄었다. 테밀시아는 고개를 바로 하며 발을 움직였다. 비린내가 동하는 이곳을 벗어나 정말 산책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 장소를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부터 나의 것이었고, 앞으로도 나의 것이다." 그러니 뺏을 것도 없는 것이다. ……속으로 말을 잇는 테밀시아였다. 사라지는 그의 뒤를 천천히 쫓으면서 냉혹한 지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테밀시아를 잠시 살펴보았다. 이해할 것 같으면서 할 수 없는 사내다. 사사로운 정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을 것 같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는 누구보다도 정열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터럭 만한 배려도 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오만한 얼굴을 하고서 누구보다도 깊은 배려심을 갖고 있다. 희생이나 인내 따위는 필요 없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아프게 참아 낸다. 정말 모를 사람이었다. 냉혹하지만 무정하지 않으며 오만하지만 거만하지 않다. 자신감에 차있지만 자만하지 않으며 과감하지만 참을 줄도 안다. 휜은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재미있지.' 휜이 봤을 때 테밀시아는……재미있는 남자다! "집으로 돌아간다." "네." 마차에 탄 테밀시아는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마부에게 명했다. 부드럽게 출발하는 것을 느끼며 두 개의 서류에 시선을 옮겼다. 그중 하나는 부관 선별에 대한 서류 및 프로필이었다. 아직까지 공석인 그의 부관 자리를 노리는 이들은 많았지만, 테밀시아는 마땅히 누구를 지목하지는 않았다. 그 누구를 뮤비라 만큼 신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어영부영 이상한 녀석이 명예를 노리고 밑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내키지는 않더라도 후임을 정해야 했다. 이번에 집으로 돌아가면 그 사안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그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을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다른 서류의 안건이었다. 이는 최악의 타이밍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동생이 가출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이 들어온 약혼 제의였던 것이다. 같은 카르민 계층에서 온 것이라 조건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 배경을 제외하고 여자만 보더라도 꽤 좋은 상대였다. 차기 가주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예쁘장한 외모와 현명한 성품과 가족을 위할 줄 아는 심성, 그리고 밑의 사람을 거느릴 줄 아는 여장부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염려되는 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의 여자라면 의당 야심이 있을 터였다. 그런 여자가 유력한 가주 계승권자인 남편을 둔다면 얼마나 뒷 수작을 부릴 것인가? 그렇다면 형제간의 골이 깊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터였다. 하지만 그 점에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테밀시아가 본 그의 동생은 아내가 부추킨다고 해서 있지도 않은 허황된 야심을 키울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억상실이 걸리기 전의 동생이었다면 좀더 고려해 보았을 테지만 말이다. 때문에 그 정도의 여자는 최적의 결혼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조건을 따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쪽에서 임자가 있고 나서야 조건이니 뭐니를 따질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상대편의 대면 때 얼굴을 비추지 않은 상태에서 약혼을 성사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게다가 거절을 하려면, 동등한 계층 내에서의 제의니 그에 합당한 이유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 합당한 이유를 곧이곧대로 가출해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문 계승권자인 마가 가출을 했음에도 찾으려 하지 않는 테밀시아의 행동에 비난이 일 것이기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비난 따위는 그냥 넘긴다고 해도, 일이 표면화되면 동생의 행방을 찾아야만 했고 찾으려 수색을 편다면 집을 나간 동생의 뜻을 거슬리게 되는 것이 되 버리고 만다. 그뿐만 아니라 동생의 안전마저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희대의 천재'라는 위명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닌 것이다. 이래저래 문제가 복잡했기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음료수 마셔도 되지?" "아아." 마차 안에는 그 외에 또 다른 인물, 휜이 있었다. 테밀시아는 그가 익숙하게 마차 안을 헤집으며 음료수와 간식 따위를 꺼내는 모습을 보다가 문 듯 물었다. "귀족 마차의 구조를 잘 아는 것 같군?" "많이 타봤으니까." "많이 타 봐?" 하츠민이 귀족 마차를 어떻게 많이 탈 수 있었던 것일까? 잠시 생각하던 테밀시아는 이내 고개를 끄떡이며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을 재미있게 관람하던 휜은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약간 빈정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쿡쿡.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합석한 건 아니었지. 이쯤에 숨어서 의자에 앉으면 단숨에 목을 스윽. 그리고 끝." 키득키득 웃던 휜은 의자에 뒹굴 거리며 말했다. "당신에게도 많이 갔을 텐데 용케 살아 있네? 마차에 숨어들 정도의 암살자라면 카 등급이라고. 고지식한 기사 따위가 그들의 은신을 알아 챌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유능한 부관이 있었거든. 나보다도 훨씬 감이 예민했지." "흐음." "이제는 네가 있으니까. 마차에 숨어드는 자객의 기척은 아직 힘들거든." 휜은 활짝 웃으면서 답했다. "맡겨 달라고!" 그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는 것이 가장 기쁜 것 같았다. 테밀시아가 황성에서 막 집으로 향했을 때, 그의 동생의 별채에는 묘한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찾아온 주인의 지기와 불청객 둘이었다. "헤에? 희대의 천재께서 부재중이라니……. 혹시 가출했다고 하는 소문이 맞는 걸까?" "귀족 나으리께서 뭐가 아쉬워서 가출하겠냐?" "흐음……." 민은 록과 딜린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이미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기에 대화를 나누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소문이라니?" "아아. 마스터가 그러더라고. 오르세만 가의 아가 죽고, 마는 집을 나갔다고. 하지만 헛소문일 거라고 하던데? 가주 계승권자들끼리의 사투야 흔한 이야기지만, 이미 오르세만 가는 라로 가주를 정했다고 하니까." 딜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록이 별 생각 없이 말했다. "마와 아가 이인자 자리를 두고 싸웠나 보지, 뭐." "그럼 마가 왜 가출을 하냐?" "그거야……." "그거야?" "아! 이번에 가야다 가에서 정약 제의를 해왔다며? 사랑의 도피를 한 거 아냐?" 처음 듣는 놀라운 소식에 민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정신이 록과 딜린에게는 없었다. 록은 자신이 내 놓은 멋진 가능성에 흠취해 있었고 딜린은 냉정한 철퇴를 가하려는 중이었던 것이다. "쯧쯧.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냐?" "으……." 할 말이 없어진 록이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해 하자, 딜린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 귀여운 자기.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누가 자기야! 내 얼굴이 어디가 빨개졌다는 거야!" 발끈한 록이 몰래 잠입했다는 것도 잊고 소리를 버럭 지르자, 딜린은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경계했다. 민도 마찬가지였다. "……터프한 허니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라고. 안 그러면 덥쳐 버리고 싶어지니까." 장난기가 다분히 섞이긴 했지만 진지한 충고였다. 딜린은 록이 경솔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떡이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록은 작게 사과했다. "미안." "쉿!" 딜린이 얼른 검지 손가락을 록의 입술에 갖다댔다. 분명 주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한 사과였기에 록의 눈이 의아함에 커졌다. 딜린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사랑하는 사이에 사과는 필요 없는 거야." "크아……!" 고함을 지르려다 간신히 눌러 삼킨 록은 키득거리는 딜린을 무시하기로 하고, 민에게 말했다. "흩어져서 서재를 찾자. 먼저 찾는 쪽은 그냥 마법서나 찾고 있고, 못 찾은 쪽은 이 장소에 다시 온다. 그 뒤에 찾은 녀석이 간 방향으로 간다. 나는 삼층을 살펴보지." "나는……." 딜린이 이어서 말하려 했지만, 민이 먼저 말했다. "내가 일층을 맡겠어." "그럼 내가 이층." 이상할 정도로 페르노크의 거처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찾아다녀야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페르노크가 있었을 때, 이 곳을 드나들던 이는 이미 고인이 된 로레라자라는 유모와 다른 집안으로 가버렸다는 요크노민이라는 시종밖에 없는 것이다. 서재가 이층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민이 일층을 맡은 이유는 진짜 알짜배기 마법서가 알려지지 않은 지하에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부엌에 있는, 지하실로 통하는 문은 특별히 숨겨 두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터랑인 두 사람이 본다면 바로 알아 챌 터였다. 그는 페르노크가 유일하게 보지 못했던 지하실의 마법서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층을 무성의하게 둘러보던 민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 속이 복잡했기 때문에 걷기라도 해야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약혼이라니……. 페르노크가 가출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약혼건을 받아 드리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테밀시아의 입장도 잘 알고 있었다. 페르노크의 행방이라도 알면 연락이라도 해보려만……. "아……?" 민의 눈이 의아하게 떠졌다가 이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쥐새끼가 또 있었군." 그는 지기가 주었던 국보급 검을 뽑아들었다. 지하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 요크노민의 무대는 계속 된다~! ........(무슨 CF 선전....) 아아, 늦었습니다...;;; 죄송, 죄송...;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쿨럭; 아해의 장 197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계단 너머로 보이는 지하는 라이트라도 켜져 있는지 꽤 밝았다. 민은 기척을 죽이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에게서 기척 죽이는 법만은 확실하게 배웠기 때문에 민의 얼굴에서는 긴장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저 약간의 조심스러움만 띄고 있었을 뿐. 문 바로 앞까지 온 그는 검을 쥔 손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그리고 방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아주 작은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렸다. 책을 넘기는 소리였다. 전문적인 마법서들은 종이가 두껍고 질감이 뻣뻣해서 두께에 비해 장수는 많지 않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기에 넘기는 소리가 꽤 요란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호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서를……? 마법사인가?' 이리저리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애를 쓰던 민이 갑자기 벽에 붙어 있던 몸을 옆으로 굴렸다. 거의 동시에 벽이 예리한 무언가에 베였다. 다행히 몸에 상처는 없었지만 목을 덮고 있던 머플러와 셔츠가 조금씩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불필요한 파괴는 없는 깔끔한 흔적만 남긴 솜씨를 본 민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마법사!?' 그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검을 굳게 쥐고 지하로 뛰어들었다. 안에는 왼손을 내밀고 있는 웬 남자가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고, 모자까지 깊이 눌러썼기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밋밋한 가슴과 말랐지만 넓은 어깨를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가 마법사라고 확신한 민은 그에게 캐스팅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접근했다. 지기의 마법서를 보호하겠다는 목적이 있어서인지 평소보다도 기민한 몸놀림이 나와주었다. 그는 육탄전에 약한 마법사가 자신의 검에 의해서 양단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챙! 하지만 살이 베이고 뼈가 부숴지는 소리가 아닌, 금속과 금속의 마찰음이 지하 내에 울렸다. 마법사라 추정되는 남자가 놀라운 반사속도로 검을 뽑아, 민의 검을 차단한 것이다! 민은 이를 악 물고 강하게 괴한의 검을 밀어냈다. 하지만 상대는 되려 검을 자신 쪽으로 당겼기에 순간 균형을 잃을 뻔했다. 민은 빠르게 몸을 숙여 상대가 휘두르는 칼집을 피했다. 괴한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던 검을 밑으로 내리그은 것이다. 상상외의 실력! 민은 자신이 그보다 약하다는 것과 실전 경험이 떨어진다는 것과 상대를 마법사라 속단하고 방심한 것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는 지라, 숙인 상태에서 남자의 발목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자 남자는 민을 내리치는 것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 그의 손을 피했다. 잠깐의 소강상태. 잘려 나간 셔츠의 사이로 보이던 민의 붉은 목걸이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불칸이 나오려 하는 것이다! "……!" 남자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민은 볼칸이 다른 이의 눈에는 붉은 새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새에 그가 놀란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남자가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검을 떨어뜨린 채 천천히 민에게 걸어왔다. 민은 주춤거리며 그를 경계했지만 그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볼칸이 빠져 나왔기에 원래대로 푸르게 변한 목걸이가 그의 손에 잡혔다. 모자를 푹 눌러써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 쪽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노……민?" 이번에는 민이 놀래야 할 차례였다.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그의 남색 눈동자가 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페……." 하지만 민이 말을 마저 꺼내기도 전에 불칸이 감히 자신의 맹약자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건방진 녀석에게 화염을 쏟아 부어 버렸다. "앗!" 민이 당황해서 불칸을 말리려 했지만, 그 보다 먼저 주위에 물방울이 일렁이면서 화염이 수그러들었다. 안도하는 민과는 달리 불칸은 경악했다. 아무리 힘을 많이 주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수장의 힘을 무산시키는 물의 정령이라니!? 하지만 이내 그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물의 정령이 서열급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힘을 반도 안 넣은 상태였으니, 서열급이라면 충분히 무산시킬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동시에 눈앞의 괴한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었다.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 서열급 정령이었기에 쉽게 그 주인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적이 아닌 것을 확인한 불칸은 다시 목걸이로 돌아갔다. 둘의 재회를 중간에 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노민이구나. 뭐냐, 그 마스크는?" "너야말로. 그 수상한 두건은 뭐냐?" 모자를 걷어낸 그를 지켜보던 민은 웃으며 농담조로 물었지만 예상외로 그는 웃지 않고, 두건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에게 풍기는 냉소적인 분위기에 민은 씁쓸해 했다. "페르……." "무하다." "……?" "무하라고 불러라." 민이 뭐라 말하기 전에 무하는 몸을 돌려 잔뜩 쌓여 있는 마법서쪽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임에도 너무 덤덤한 그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변함없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벌써 집에 돌아올 생각이 들었다는 건 아닌 것 같고……. 마법서를 보러 온 거냐?"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있을 줄 알았는데……." "형이 결혼했거든. 데릴사위가 된 거지. 나도 함께 갔고." "아아. 뮤비라씨 말인가……. 의외 군. 그 사람은 형님 곁에 평생 있을 것 같았는데……." 고개를 약간 갸웃하면서 꺼내는 무하의 말에 민은 흠칫하며 답을 꺼렸다. 마침 그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한 무하는, 원래부터 답을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니었기에 아직 못 본 마법서를 들어올렸다. '이게 마지막이군.' 무하는 옆에 잠시 풀러두었던 배낭에 그것을 집어넣고 일어섰다. 때마침 민을 만났으니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내자는 생각이었다. 피차간에 그 동안 일이 많아 보였던 터라 꽤 시간을 잡아먹을 듯 싶었다. "아, 맞다! 네가 떠나고 가야다 가에서 약혼 제의가 들어왔데! 일이 곤란하게 됐다고!" "알아." "뭐?" "그래서 잠시 들린 거야. 너한테 사정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네가 없어서 당황했었지. 너도 이곳을 떠났었다면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네?" "불행히도. 아! 이러고 있을 틈이 없어. 위로 올라가자. 내 동료가 위에서 기다리다가 이곳을 발견할 지도 몰라." "동료?" 민은 자세히 설명할 새가 없는지 빠르게 계단 쪽으로 향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뒤에서 어깨를 으쓱이던 무하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삼층으로 갔던 록이 아직 오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민을 보던 무하가 물었다. "동료라니?" "아아. 나 이번에 레타 사잔 아나라는 길드에 들어갔거든. 그 곳 동료야." "레타 사잔 아나?" 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 록이 내려올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었지만, 매우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무하는 새삼 그가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마스크부터가 그랬지만 눈에 띄게 향상된 실력도, 암살자 수준까지 도달한 은신술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여자는 누구지?" "뭐?" "적금발의 미인. 네 목걸이에서 나타난………. 왜 그리 놀라는 거지?" "너……불칸이 보여?" "……?" 민은 당황해서 더 말하려 했지만 위에서 우당탕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올라 가보자!" "아……." 계단으로 향하는 민을 따라가며 무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 위에서 잔다고 했지." "그 여자?"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자꾸 따라오는 여자가 하나 있어." 민은 자기가 많은 일을 겪은 만큼 무하도 많은 일을 겪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층을 올라가자, 책을 챙기던 딜린까지 놀라서 서재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뒤에 녀석은 누구냐?" "친구." "흐음? 일단 올라가자." 딜린은 모자는 걷었지만 검은 두건을 푹 눌러쓰고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무하를 위아래로 보다가, 자기가 그런 말할 군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신경을 껐다. 일단 위에 일이 시급했다. "무슨 일이냐, 록!?" 요란한 소리는 났지만 여전히 경비병들의 접근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딜린은 안심하고 큰소리를 냈다. 페르노크라는 작자가 집에서 푸대접을 받는 녀석이라는게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내심 생각하는 딜린이었다. 셋은 빠르게 윗 층으로 올라서다가 굳듯이 멈춰 섰다. 록의 목을 채찍으로 휘감고 있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가로 비치는 달빛으로 보이는 날씬하고 가는 몸을 지닌 여자가, 건장한 사내의 목을 채찍으로 휘감고 한쪽 벽에 쳐 박은 광경이 그리 흔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크윽……!" 만일 얌전히 목이 감겨 있었다면 벽에 부딪치면서 목뼈가 부러졌을 테지만, 파 등급은 괜히 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왼손을 사이에 껴놓아 조임을 완화시켰기 때문에 록은 무사할 수 있었다. 곧 상황파악을 한 딜린이 단검을 뽑아들고 여자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아무리 악력을 가진 여자라도 한 쪽에 신경을 쓰면서 제대로 된 방어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계속 채찍을 들고 있는 다면 딜린의 단검에 의해서 목줄기가 따질 것이고, 채찍을 놓는다면 록이 자유를 되찾을 것이었다. 딜린은 어느 쪽이던 상관없었다. 여자는 채찍을 푸르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딜린의 위로 덤블링 해서 민과 무하가 있는 쪽으로 갔다. 그리고 무하에게 빠르게 말했다. "볼일 끝났지? 어서 가자!" "왜 흥분을 하는 거지?" "빨리 가자고!" 무하가 여자를 상대 할 때, 민은 방안에 불을 켰다. 빛이 밖으로 새어갈 우려가 있었지만, 창문 덮개를 닫은 딜린이 눈짓으로 지시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켤 수 있었다. 주위가 밝아지는 동시에 여자는 히스테리적으로 소리쳤다. "켜지마!" "역시……." 뒤에서 록이 목을 매만지며 일어났다. 그가 힘들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여자의 몸이 굳었다. 딜린이 록의 말을 이었다. "슈 누님……." 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의아하게 보던 무하가 방안에 있는 두 남자에게 물었다. "슈와 무슨 사이지?" "동료이자 동생이다." "……." 무하는 자신의 지기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두 남자를 보며 물었다. "너희도 도둑인가?" 슈가 흠칫 하는 게 느껴졌지만 무하는 개이 치 않았다. 누차 말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면 상관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록과 딜린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답을 꺼렸다. 누가 자신을 도둑이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겠는가? 하지만 눈앞의 저 이상한 남자는 슈 누님과 안면이 있는 듯 했고, 그녀가 도둑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별로 꺼리지 않는 듯 했다. 딜린이 답했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흐음……." 무하는 자신의 옷을 붙잡고 있는 슈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동생들을 피하려 하는 거지?" "……." 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극도로 겁을 먹은 듯한 그녀를 가만히 보던 무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둘을 놓칠 새라 딜린과 록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영문을 모르는 민은 고개를 갸웃하며 불을 끄고 계단을 내려갔다. 무하는 슈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따뜻한 차를 끓여서 건넸다. 약간 떨기까지 하는 그녀에게는 따뜻한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님……." 록이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딜린이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한참 찻잔만 만지작거리던 슈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산은 잘……지내?" "잘 지낼 것 같아?" 딜린이 차가운 어조로 답하자 슈는 한숨을 깊게 쉬면서 다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왜 떠났는지 영문이나 알고 싶다더군." "……잖아." "뭐?" "그가……그런거 물을 리가 없잖아." "약혼녀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런걸 물을 리가 없다니요?!" "이제 나를 사랑할 리가 없잖아! 나를……증오할텐데……." 슈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진다 싶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한편, 딜린과 록은 영문 모를 소리만 계속하는 그녀를 난감하게 봐라 보고 있었다. 찾은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가야 했다. 눈에 띄게 어두워져 가는 산 형님을 위해서라도,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를 단단히 하고 있는 슈 누님을 위해서라도. ========================================================================= 산의 그녀는 슈!? ........(광고 문구.....?) 이거이거 늦어버렸습니다^^; 200회 이벤트까지는 이제 진짜 얼마 안남았군요! 벌써부터 그림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고... 우편을 통해 보내주시는 분도 있고^ㅡ^ 아아, 행복합니다^^ 아해의 장 1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슈의 울음소리와 희미하게 들리는 묘한 멜로디만이 정막을 깨고 있을 때, 무하가 한숨을 쉬며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일단 무슨 사정이 있는 지 듣고 싶군. 서로 말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는 것 같아." "난 할말없어! ……그냥 무하씨하고 지금처럼 여행할래. 가고 싶지 않아!" 무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슈가 발작적으로 답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던 무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슈의 말을 답답한 심정으로 듣고 있던 록과 딜린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 "그러니까 지금 우리보고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바람 나서 사랑의 도주라도 하고 있다고 산 형님한테 말하라는 거야?" 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지켜보던 무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때 나에게 그런 질문했던 건가?" "……." "아니, 굳이 나에게 물을 필요도 없었겠군. 네가 사랑하는 사람도 너를 증오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으흑……!" 다시 눈물을 떨꾸는 슈를 보며 록이 발끈해서 무하에게 말했다. "산 형님이 왜 슈 누님을 싫어한다는 거야! 생포를 조건으로 현상금도 걸고, 사방으로 찾아다녔는데! 슈 누님! 산 형님이 얼마나 힘들어하는 지 아는 거야?" "현상금이라……. 나는 생포가 조건이었는지는 몰랐는데……." 무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던 민이 물었다. "네가 잡은 거야? 저 슈라는 사람." "그렇다고 봐야 하는 건가?" 록과 딜린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생포가 조건이라면 의뢰인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포함으로 잡은 녀석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몰랐다면……? 충분히 끔찍한 상상이 가능했다. 무하는 둘의 살기를 받으면서도 무심히 흘렸다. 그 대신 슈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두려운 건가?" "……!" "너를 증오하는 연인을 만나는 게 두려운 건가?" 침묵을 지키는 슈를 보며 무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복받치는 분노와 슬픔을 참아 내기 위해서였다. "시시하군." 그는 천천히 슈를 지나 문가에 기대있던 록과 딜린을 지나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허리에 제대로 고정시킨 뒤,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딜린이 민을 보며 물었다. "저 녀석 뭐야?" "지기." "여기를 잘 아는 것 같은데?" "……."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는 민을 대신해서 무하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있던 녀석이 내 친구거든. 비밀친구." "흐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록은 이상한데 신경 쓰는 딜린에게 짜증을 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슈에게 눈을 돌렸다. 다시 정막이 흐르자 민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될까?" "……." 딜린과 록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무언의 말을 나누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슈 누님은 네 보모, 산 형님의 약혼녀야. 결혼도 멀지 않은……. 헌데 갑자기 슈 누님이 행방불명 되셨어. 사이도 좋았고 싸운 적도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얼마나 걱정했었는데……. 그럴 리는 없지만 유괴 당한 걸지도 모른다면서 현상금도 걸고……." 비록 그 자리는 피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무하는 꽤나 기가 세던 슈가 저리도 약해진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쪽에서 이쪽을 증오한다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이쪽에서 무언가 배신을 했다거나 해야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물론…… 자신의 경우는 예외지만 말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어차피 이 곳에는 경비 따위 오지 않으니까 안심하고 아무대서나 숴." 그리고 나서 민의 팔목을 끌어당겼다. "할 얘기가 있어." 밖으로 나가는 민과 무하를 보다가 다시 슈에게 시선을 돌린 딜린과 록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질린 얼굴로 찻잔만 꼭 쥐고 있는 슈를 보자니 절로 한숨이 났던 것이다. "얘기라도 해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 아냐? 이대로라면 누님이 뭐라고 하던 끌고 가겠어.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약혼녀의 행방불명으로 힘들어하는 산 형님밖에 없으니까." 벽에 기대 있던 몸을 움직여 슈 앞의 의자에 앉은 록이 말했다. 딜린은 여전히 벽에 기대 있었다. 슈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찻잔 속에서 부드럽게 출렁이고 있는 차를 내려보았다. 산은 무신경하면서도 놀랄 정도로 섬세하기도 했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놀랄 정도로 다혈질이기도 했다. 슈는 그런 산이 좋았다. 슈는 자신의 젊음과 외모, 매력을 충분히 이용하는 여자였다. 때문에 그녀는 상당한 사기꾼으로써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둑으로써 그녀의 실력이 뒤떨어진다는 건 아니었다. 단지 미인계가 더 잘 통했다는 것뿐. 채찍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여장부, 슈는 산 앞에서만큼은 요조숙녀였다. 내숭은 여자의 필수 조건이라던가? 산이 어설픈 모습으로 길드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부터 반했던 슈다. 선배로써 그를 이끌어주면서도 애정공세를 꺼리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나중에 산이 말하길 처음부터 슈에게 반했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감미로운 청혼과 반지……. 곧 이을 결혼을 의심치 않았던 슈는 어느 날 마스터의 부름을 받았다. "결혼한다고?" "응." "앞으로 활동은 안 할 건가?" "벌어야 먹고살지." "하하! 역시! 그럼 좋은 건수 하나 물어줄까?" "……?" "결혼하기 전에만 할 수 있는 '활동'." "사기 결혼 말이야?" "감이 좋군! 역시 슈야!" 꺼려졌지만 꽤 짭짤한 보수가 눈독이 났다. 그 정도라면 사치라고 넘긴 고가의 결혼반지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는 놀랍게도 카르민인데다 가주 계승권까지 가지고 있는 귀공자였다. 준 재벌 급의 상인이나 하급 귀족들은 상대 해 봤어도 이런 거물은 처음이었다. 마스터가 좋은 건수라고 넘겨준 게 이런 허무맹랑한 일일 줄이야……. 이미 되어 있다던 준비는 너무나 철저했다. 마치 오랜 시간을 들여서 준비한 것처럼. 슈는 순식간에 몰락해 가는 이브겐 출신의 한 가문의 양녀, 슈리나단으로 탈바꿈되었다. 그 뒤로는 자르카라 해도 서지 못할 중매를 카르민과 서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만나게 된 카르민의 귀공자마저도 그녀에게 반했다면서 구혼을 해왔다.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게 되어 되려 불안해 질 정도였다. 귀공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산이 아니었다면 진심으로 빠져들 만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콩깍지라는 무적의 아이템까지 적용된 낭군이 있는 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다독였다. 저 남자는 돈만 뜯어내고 끝낼 남자다…… 라고.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려야만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그에게 빠져든 상태라는 것을……. 언제나 웃는 낯으로 자신을 반기는 산에게 미안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귀공자와의 인연을 끊고 싶었다. 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고작 이 정도였나 하고 자책도 해봤다. 그러는 중에 결혼식이 앞당겨졌다. 몰락해 가는 가문이라는 이유로 당할 괴롭힘이 걱정됐는지 귀공자는 매우 성대하게 식을 준비해 주었다. 그 배려가 왠지 산을 떠올리게 해 두근거리면서 미안하고 착찹했다. 놀랍게도 가주가 직접 와 주례를 서주었다. 마지막 의례적인 절차로 반대하는 이가 없는지 묻는 순서가 되었다. 그때의 당혹과 놀람, 두려움을 어떻게 말할까? "저 여자는 사기꾼이요!" 그 말을 한 남자는 언젠가 그녀가 사기를 쳤던 하급 귀족이었다. 인과응보라는 것일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슈의 손을 꾹 잡아주며 귀공자는 맑게 웃었다. 안심하라는 듯이……. "나의 연인을 모욕하는 겁니까?" 울화가 치밀어 나섰던 하급 귀족남자는 싸늘한 귀공자의 물음에 파랗게 질려서 뭐라 말을 얼버무리며 퇴장해 버렸다. 하지만 이미 주위에서는 그 일을 두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슈는 떨리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산을 사랑한다는 것을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왜 이 남자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인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결혼식은 끝났다. 귀공자의 방에서 테라스를 내다보고 있던 그녀의 앞에 산이 나타났다. 평소와는 달리 조금 들뜬 모습의 산은 고백할 게 있다고 속삭였다. 변함없이 애정에 찬 음성을 듣고 있던 슈는 더 이상 그를 기만할 수 없다고 다짐했다. "미안, 산!" "응?" "정말 미안!" "왜 그래, 슈?" "나 그 남자를 반한 것 같아! 아니 확실하게 반했어! 하지만 너도 사랑해. 정말 미안!" 굳어 있던 산이 입을 여는 모습을 보며 슈는 잔뜩 겁에 질렸다. 이기적인 자신을 얼마나 욕할 것인가……. "슈……." "미안!" 결국 슈는 자신에게 손을 내뻗고 있던 산을 뒤로하고 그 곳을 뛰쳐나와 버렸다. 그 뒤로 목적 없이 헤매다가 자신에게 고액의 현상금이 붙었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슈는 자신의 사기 결혼이 드러나, 명예 회복을 위해 귀공자가 현상금을 내건 것이라 생각했고 더더욱 깊이 숨게 됐다. 깊이 깊이……결국에는 사막까지 흘러간 그녀는 멋도 모르고 모래 귀신이라 불리는 몬스터의 거주지에 빠져 중상을 입고 겨우 빠져 나왔다. "……그 뒤에 기절을 했는데 깨보니 무하씨가 고용된 일행 속이었어. 이미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건 들통 난 상태였고……. 몇몇 용병이 범하려고 하는데 무하씨가 막아줬어. 그 뒤로도 계속 지켜줬고……. 좋은 사람이야." "그럼 무하라는 남자도 좋아하게 됐겠네?" 비꼬는 딜린의 말에 슈는 울컥하며 답했다. "무슨 소리야! 난 산을 사랑한단 말이야!" "그럼 좀 잘해 줬다고 반해 버린 귀공자는 뭐야? 신분이나 명예 때문에 반한 거였어?" "나도 몰라……. 모르겠다구!" 신경질적으로 답한 슈는 결국 위로 뛰쳐 올라가 버렸다. 뒤에 남겨진 딜린과 록은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이 된 거구나. 역시……라고 해야 하나?" "너는 뜻밖이다. 도둑 길드라……." "하하. 그런가?" 그 동안의 일을 간략하게 주고받던 무하는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들어온 약혼 제의……. 곤란하게 된 거지?" "아아. 매우 곤란하게 된 거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평범한 방법은 네가 돌아와서 그 여자랑 약혼을 하는 거다." 무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두어번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역시 그런가……. 그럼 이 수 밖에는 없겠다." "……?" 민은 일부러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거절해 버려. 단, 네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에서……. 라는 조건이 붙지만." "흐음……. 그럼 그 여자가 이 곳에 왔을 때까지 여기 숨어 있어야겠군." "그리고 나서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지." "아아." 무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계속 지하에서 마법서만 읽고 있었더니 몸이 굳어버렸던 것이다. 팔목을 몇 번 휘두르던 그는 바닥에 잠시 내려놓았던 배낭을 고쳐 맸다. "무거워 보인다?" "짐이 많거든." 방금 넣은 책뿐 아니라 의뢰비로 받은 보석, 옷과 음식 등으로 배낭은 포화상태였다. 민은 약간 뚱한 음성으로 물었다.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는 배낭을 사면 되잖아. 부피 압축 배낭도 있다고." "어디서 파는데?" "마법 상점에 가봐. 별에 별게 다 있으니까." 성심성의껏 답해주던 민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페르노크, 아니 무하가 떠나고 얼마나 슬퍼하고 그리워했던가? 헌데 겨우 만난 지금, 너무나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만나면 할 말이 너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보니 묻는 말에만 답할 정도로 아무 할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언제나 있던 녀석과 언제나와 같은 대화를 하는 느낌. 나쁘지 않다……라고 생각해 보는 민이었다. "그만 들어가자. 너무 늦었다." 앞장서 들어가는 무하의 뒤를 쫓으며 민은 밝게 미소지었다. 날이 밝자, 딜린과 록은 챙긴 마법서적을 들고 슈를 닥달 했다. "빨리 가자니까!" "싫어!"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슈를 보며 딜린이 조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도망 다닐 거면 산 형님이 누님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고 다녀. 산 형님, 식사도 제대로 안 하시는 모양이던데. 누님이 바람을 핀 거 가지고 산 형님이 고생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냉정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웃으면서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했던 록도 인내심이 바닥 났는지 무신경하게 소리쳤다. "딜린 말이 맞아! 산 형님이든 귀족 도령이든 양자 택일해! 다른 녀석이 좋아졌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둘 다 좋은 걸 어쩌냐는 말은 나빠!" 슈는 기가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답도 못했다. 아직 사정을 모르는 민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물었다. "귀족 도령?" "슈 누님이 사기 결혼을 하려고 했는데 그 상대한테 반해버렸데!" 록의 답에 슈의 어깨가 흠칫 했다. 민은 록의 간단한 답만을 들은 상태였기에 그 답에서 유추 할 수 있는 사실을 꺼내 다시 물었다. "그럼 산은 실연 당한 게 되는 건가?" "그런데 산 형님도 좋고 귀족 도령도 좋단다!" 록은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거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말에 민의 눈동자에 불쾌감과 혐오감을 적절히 섞어진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 그에게는 산은 무하 다음으로 생긴 지기였으며 은인이었던 것이다. 뭔기 힘들어 보인다는 건 느꼈지만 이런 황당한 이유일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그 귀족 도령은 누군데?" 차갑게 변한 민의 질문에 록은 가물가물한 이름을 애써 기억해 냈다. "그러니까……. 음……. 아! 카산! 자하라 카산 마 카르민! 맞아, 그 사람이야!" "……." 잠시 멍하니 있던 민의 입술에서 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쿡……쿡쿡!"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벽을 붙잡고 힘들게 몸을 떨어댔다. 흐느끼는 것도 같았고 웃음을 참고 있는 것도 같았지만, 앞의 소리로 짐작해 보건데 후자의 경우 인 듯 싶었다. 민에게서 카산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던 무하는 내심 고소를 지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슈 혼자 쇼를 했다……랄까? 다르게 생각하자면 슈의 감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똑같은 남자에게 똑같이 반했으니 말이다. 뭐, 끝까지 눈치 채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그리 신통한 감은 아니지만……. 민은 곧 되돌아오겠다고 말을 남기고 슈와 록, 딜린과 함께 가버렸다. 뒤에 남겨진 무하는 무거운 배낭을 떠올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민이 말했던 배낭이나 사 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배낭은 지하실에 둔 채 금화과 은화를 몇 닢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어지간한 물가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마법 물품이기 때문에 혹시 생각보다 비쌀 경우를 생각해서 보석도 하나 챙겼다. 상점가에 접어든 무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일전에는 무일푼이라서 이런 곳에 안 들리고 바로 숲으로 들어갔었던 터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 뒤에 는 마시장만 들려서 바로 나왔고, 그 뒤에는 몬스터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도로 도착한 이후로는 구경할 틈도 없이 바로 사막으로 향했으니……. 그 전에 요크노민과 함께 축제 때 돌아다닌 적이 있긴 하지만 축제 때만 열리는 행사장이나 기념품점만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런 곳은 처음이라고 봐도 무관한 것 이다. "아, 저기가 마법 상점인 모양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상점을 발견한 무하는 얼른 그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막 문이 닫히는 상점 앞을 지나가는 남자 둘이 있었다. "원래는 내가 네 공백을 메워야 하지 않던가?" "이번 의뢰는 몬스터부터의 호위니까 인간만 득실거리는 이곳에서는 곁에 있을 의무 따위는 없다고." 고저 없는 질문에 꽤 명랑한 음성으로 답하는 남자는 주위 시선을 긁어모으는 화려한 미남이었다. 양팔에 걸쳐놓은 붉은 쇼올과 대조적인 백금발이 매력적인 그는 자신의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뭔가 불만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내 귀걸이는 어디로 사라진 거야?" "몬스터 때문에 거칠게 움직였으니까." "마음에 들던 거였는데." "똑같은 걸로 사면 되잖아." "형태만 같으면 뭐해. 느낌이 다른 걸." "저기 보석점이다." 화려한 간판이 돋보이는 보석점을 손짓으로 가르키는 남자는 옆의 미남과는 달리 '멋지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흑색과 청색이 섞인 짧은 머리카락도 그러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은 눈동자와 약간 날카로운 턱 선도 그러했다. 장신에 쭉 빠진 몸매, 그리고 무슨 재질인지는 모르겠지만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검청색 망토가 잘 어울러져 있어 '멋지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런 미남이었다. "아, 들어가자!" 집중되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 과연 저 둘의 정체는!!?? ........(광고 문구...) 알사람은 아실테지요...( '')~~ 슈는 산의 정체를 몰랐던 겁니다^^ 산은 공식적으로도 슈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서 (만일 뒷골목에서만 아내로 맞는다면 분명 정략결혼을 해야만 되겠지요) 그동안 많이 준비해 두었던겁니다. 결혼식날 그것을 고백할 생각이었던 거죠. 일단 둘은 해피엔딩인거죠? 하하하! 저도 해피엔딩을 쓰기도 한단 말입니다!!! 크하하핫!!!! 아해의 장 199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경량화와 부피 압축이 전부 되어 있는 배낭을 산 무하는 흡족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들고 다니던 배낭은 무게는 둘째치고 부피가 커서 감당 불가능이었던 것이다. "뭐 좀 먹고 가야겠다. 아, 음식을 좀 사가야겠군. 부엌에 있는 음식은 죄다 군것질 거리라……" 소름이 돋은 듯 잠시 떨던 그는 이왕이면 맛있는 것이 먹고 싶어서 괜찮은 식당을 물색하고 다녔다. 그 동안 딱딱해진 빵과 비스킷과 육포 따위로만 연명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배낭이 쌌기 때문에 금화도 그대로 남았고 보석도 마찬가지라 돈걱정은 없었다. 식당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걷던 그는 5층 짜리 대형 식당겸 여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정도 크기를 유지하려면 그만큼 인지도가 높고, 맛도 좋으리라 생각한 그는 그 곳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그곳이 당대 세력가인 오르세만 가와 어떻게든 줄을 대려고 온 하위 귀족이 주 손님인 고급 식당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간간이 오르세만 가의 초대를 받고 온 상위 귀족들도 납시는 곳이니 일반 평민으로써는 감히 발조차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척 보기에도 떠돌이로 보이는 녀석이 들어가려 했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당연히 점원들의 저지를 받는 처지가 되 버린 무하는 황당함에 말도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그 곳 운영이 잘못 됐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맛도 중요하지만 분위기도 중요하다. 특히나 계급적 우월감이 심한 귀족들에게는 자신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고급점' 이라는 인식이 꽤나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런 곳에 평민이 드나든다면 손님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예약 손님이 오시기로 해서 식당 전체가 들뜬 분위기이었다. "식당은 밥을 먹는 곳이 아니었던가?" 자신을 밀어내는 점원에게 불쾌한 음성으로 말한 무하는 그를 거칠게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억지로 들어가 봤자 이런 곳에서 평민에게 내놓을 음식이 뻔했던 것이다. 차라리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무하였다. 돌아서는 그를 붙잡는 이가 있었다. "혹시……무하?" 막 도착한 마차에서 내린 한 소녀였다. 무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역시 무하구나! 이 곳에는 무슨 일이야?" "레일리아?" 활짝 웃는 소녀는 다름 아닌, 수도에서 헤어 진 레일리아였다. 그녀는 무하의 앞으로 뛰다시피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밥 먹으러 왔어? 그럼 같이 먹자!" "아쉽게도 문전박대를 당해서 못 들어가." "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귀빈이 도착했다는 소리에 날라 온 사장은 무하의 말에 가슴을 졸이며 냉큼 끼어 들었다. "귀하신 분을 못 알아 봐서 죄송합니다. 사죄의 뜻으로 식사라도 대접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렇게 말하는데 같이 먹자!" 레일리아는 막무가내로 무하를 잡고 식당 안으로 들어 가버렸다. "그런데 진짜 이곳엔 어쩐 일이야?" "글쎄……." "또 글쎄……야? 제대로 된 대답 좀 해보라고! 아, 이거 맛있다! 먹어봐!" 자신의 앞쪽에 있던 접시를 밀어주는 레일리아를 보며 주위의 호위로 온 이들은 마치 신혼부부를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호위 기사가 전과 다른데?" "응? 아아. 그들은 회색 고향에서 돌아오자마자 에르의 호위 기사로 들어갔어." "흐음……." "점점 내 영역이 줄어들고 있는 거지. 뭐, 각오는 했었던 일이야."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그녀를 보며 내심 감탄하는 무하였다. 회색 고향에서 그녀가 얼마나 계산이 빠른 현실적인 여자인지 느끼긴 했지만 그것 외에도 대범함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여자라면 어딜 가든 사랑 받으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안심이 됐다. 그가 본 바로는 레일리아라는 여자는 파혼 당했다고 해서 좌절할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약혼일 때문에 온 건가?" "응. 집에 도착하자마자 쉴 새도 없이 이 곳으로 내 쳐졌어." "약혼……할 생각이야?" 묘한 공백을 사이에 둔 질문. 레일리아는 그 공백을 깊이 새겨두었다. 달콤한 상상에 젖어 있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걱, 걱정마. 나, 난……." "……?" 두 집안의 계급이 동등하기에, 그녀가 자신과 약혼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파기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긴장하며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무하였다. 그런 둘을 보며 주위에서 어떤 망상에 사로 잡혔는지는 뻔했다. 그들은 동시에 이런 절규를 목 밑으로 꾹꾹 삼켜야 했다. '뭐야, 저 분위기는!?' 결국 무하는 레일리아의 답을 듣지 못했다. 계속 더듬거리던 그녀가 결국 비밀이라면서 얼버무렸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곁에 그런 관계로라도 있고 싶은 걸까?' 그녀가 자신의 형을 사랑한다고 알고 있었던 무하는 이런 착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그녀가 일찍 도착했으니 그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짐을 싸두고 도망칠 루트를 정해 놓고……. "벌써 가게?" "할 일이 있어. 그럼……." 아쉬워하는 레일리아를 뒤로하고 무하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 나왔다. 이대로 라면 요크노민이 도착하기 전에 일이 시작 되 버릴 것이다. "좀더 있다 가지……." 레일리아는 아이스크림을 거칠게 뒤적거리면서 투덜댔다. 이번 일만 끝내고 바로 수소문할 생각이었던 그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서 얼마나 기뻤던가? 혹시 자신의 약혼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닐까 하는 낭만적인 착각에 빠져 들떠하던 그녀의 기분을 가차없이 다운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저 꼬마?" 한없이 차갑고 냉소적인 목소리.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태도. 여자인 자기보다도 예쁜 외모에 제멋대로인 성격.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남자!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불성실한 태도를 임하는 당신이야말로 꼬마야! 책임감 없는 인간!" "계약 내용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의뢰인이라니……. 최악이군." 도발 아닌 도발에도 변함없이 냉랭한 그의 답에 레일리아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물론 그녀도 의뢰 내용이 '몬스터로부터의 호위' 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빠져나가는 건 계약을 떠나 기본적인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런 상식적인 이야기가 눈앞의 남자에게 통할 리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레일리아였다. 공연히 대꾸해봤자 좋은 소리를 들을 일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대충 마무리 짓기로 했다. "지금 기분 좋으니까 잡치게 하지 말고 가." "기분이 좋다라……. 왕자님을 꿈꾸는 꼬마의 얼굴을 하고서 뭐가 기분이 좋은 걸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그에게 레일리아는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입을 열고야 말았다. "당신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멋진 남자를 만났거든! 같잖은 당신 실력보다도 훨씬 강한 남자인데다, 상냥하고 매너 있고……. 암튼 당신과의 비교자체가 그에 대한 실례일 정도의 멋진 남자야!" 남자의 고혹적인 눈매에 차가운 비웃음이 서렸다. 레일리아는 오기로 말을 꺼냈다. "지 잘난 맛에 사는 당신 따위하고는 비교자체가 안 되는……!" "쿡쿡." 그는 더 들을 생각도 없는 지, 자신의 일행과 함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사랑에 빠지면 곰보 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말이 생각나는데?" "그런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시쿵둥하게 답한 그의 일행은 메뉴판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둘의 말을 들어버린 레일리아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니야! 무하는 정말로 너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남자라고! 기생처럼 생겨먹어서 성질머리만 더러운 너 따위하고는! 유시리안!" 유시리안은 새로 산 귀걸이를 귀에 끼다가 잠시 멈칫했다. 락샤사가 뭔가 하고 그를 보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나머지 귀걸이도 마저 끼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턱을 괴고 작게 중얼거렸다. "무하라……. 왠지 좋은 느낌이 나는 이름." "오르세만 가에는 언제 들어가는 거지?" "내일이나 모레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락샤사는 망토를 정리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의 처소가 보고 싶었던 거라면 그냥 들어가도 될텐데 왜 돌아가는 거지?" "그의 집은 무단침입하고 싶지 않아. '정당한 루트'를 통해 가고 싶어." 레일리아는 유시리안의 가장 싫은 점은 바로 저 이중성이라고 생각했다. 극단적으로 친근한 태도와 극단적으로 냉랭한 태도로 나뉘는 이중성 말이다. 만일 그가 호의를 보이는 측에 속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기분이 나쁜 것일지도……. 기사를 시켜 오르세만 가에 기별을 넣은 레일리아는 마침 실질적인 가주, 테밀시아가 오늘 저녁에 저택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속시간은 내일 오후로 잡은 그녀는 이럴 줄 알았으면 무하가 머무는 곳이라도 알아 둘 걸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일단 급한 불 먼저 끄고 볼일인 것이다. 한때 사랑했다고 믿고 있었던 이를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레일리아는 밤잠마저 설쳤다. 무하를 만남으로써 그 감정이 동경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만 소중하게 품고 있던 감정임은 변함이 없기에 공연히 설레이는 것이었다. ……자신의 진짜 약혼자 후보는 안중에도 없는 레일리아였다. "이렇게 입는 거였던가?" 무하는 옷장에서 깔끔한 정장을 꺼내 입었다. 거친 질감의 여행복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새삼 전에 입던 옷이 고급품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하는 고급 옷은 복잡한 방법으로 입어야 하기 때문에 되려 여행복 쪽이 마음에 들었다. 또 그는 검은 계통 쪽 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흰색 계통이 대부분인 정장들은 취향에 맞지 않았다. 뭐라 불평을 하던 입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의 처소가 워낙 외진 쪽에 있었기 때문에 언제 레일리아가 도착할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서둘러서 본관의 응접실 근처에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손님은 그곳에서 맡는다고 요크노민에게 들었던 것이다. 무하는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다음에 약간 주저하다가 손을 들어 두건을 묶어 놓은 매듭을 끌렀다. 결 좋은 은발이 부드러운 자태를 드러냈다. 거추장스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자신의 녹안을 바라보던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약간 눌린 머리카락을 쓸어 보다가 결국 고개를 거칠게 좌우로 흔들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만 가볼까." 무하는 옆의 의자에 걸쳐놓았던 하늘색 쇼올을 한 손에 걸치며 밖으로 나갔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정원을 통해서 가야겠군." 그는 옷에 찢겨지지 않게 조심하며 작은 숲과 다를 바 없는 정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10분쯤 걷자 본관이 나타났다. 한번 가 본적이 있는 응접실은 분명 이층이었다. 그곳에서 카한세올에게 마법사나 학자를 초빙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 뒤에는 시비가 붙었고 그 뒤에는……. 무하는 다시 상념에 젖으려는 자신을 경계하듯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몰래 들어가기 위해 주위를 살피던 중에 막 현관에 도달한 레일리아와 그녀의 호위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늦진 않았다. ========================================================================= 그들의 정체는 유시리안과 락샤사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재회가 이루어 질 것인가!?......(여전히 광고 문구....)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199회 입니다! 크하하핫!!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면서 되려 쓰기 힘들어지더니만!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고진감래라!! 크하하핫!!! .. 아해의 장 200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니까, 그 녀석!" "고정하십시오. 흥분하신 상태로 오르세만 경을 만난다는 건 실례입니다." "알고 있어!" 레일리아는 심호흡을 몇 번 하다가 마중 나온 집사의 안내를 따라나섰다. 귀족 예의에 민감한 그녀가 남의 집 현관 앞에서 저토록 광분하는 이유는 불과 5분전 일 때문이었다. "함부로 어딜 돌아다닌다는 거야!?" "답할 의무 따위 없어."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걸리면 목이 잘려도 할 말 없다는 거 알아!?" "그쪽이 걱정해 줄 일이 아니잖아?" "네 녀석이 걸리면 이쪽도 곤란해진단 말야!" "그거야 그쪽 사정이지." "뭐야!? 그따위로 하려면 당장 나가!" 레일리아의 발악을 그럭저럭 무난히 넘겨주던 유시리안에게 가느다란 살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 노련한 살기에 기사들이 바싹 긴장해서 레일리아의 앞을 막아섰을 때, 유시리안의 입이 열렸다. "계약을 깰 생각인가?" "하, 하지만!" 살기라고는 하지만 위협용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가 뿜어내는 살기는 위협적이었다. "더 할 말 없다면 이만 가보겠어. 가자, 샤." 그가 정원의 한쪽으로 나있는 길로 빠지는 것을 지켜보던 레일리아는 잔뜩 얼어붙은 입을 간신히 놀렸다. "볼일 끝나고 바로 이쪽으로 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금방 그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왜인지는 몰라도 카 급 용병 유시리안은 계약 조건으로 돈 이외 것을 걸었다. 그것은 '오르세만 가를 들어갈 때 자신도 동행시켜 줄 것'으로 이해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했다. 언젠가 엄청난 덤탱이를 썼던 두 용병보다야 낫지 않는가? 게다가 계약당시에는 둘 중 한 명만 카 급인 줄로만 알았음에도 계약을 했을 만큼 카 급 용병은 귀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여지껏 만났던 카 급 용병들은 좋게 말하면 개성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었다. 또 그 제멋대로인 카 급 용병들 중에서도 유시리안은 특히나 정도가 심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갑자기 사라지다니……! 그것도 명성 높은 오르세만 가의 저택에서! 걸리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만일 걸린다면 그 자리에서 처형을 당해도 할말이 없는 엄청난 무례였다. 게다가 그 여파가 자칫하면 그녀에게까지 미칠 우려가 있었다. 물론 그의 실력으로 봤을 때 걸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집사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선 레일리아는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금발의 매력적인 미남을 발견하자마자 건방진 용병일 따위는 머리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말았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그녀는 응접실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무언가를 읽고 있던 테밀시아가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강렬한 황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자 일순 현기증이 이는 레일리아였다. 테밀시아의 연한 붉은빛 입술이 열리며 낮은 톤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디 레일리아." "아……." 크게 뛰는 가슴을 가다듬으며 레일리아는 간신히 인사를 받았다.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트 테밀시아." "앉으시지요." 테밀시아가 권하는 자리에 우아하게 앉은 레일리아는 하녀가 내오는 차를 천천히 마시면서 심호흡을 했다. 사랑은 아니라지만 동경하는 대상이다. 게다가 테밀시아라는 남자는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여자의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테밀시아는 읽고 있던 서류를 덮고 의자 옆에 대충 던져놓았다. 골치가 아팠다.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말해야 좀더 효과적으로 넘길 수 있을까? 동생이 집을 나갔다는 말은 못하고, 싫다는 말은 동생 본인이 직접 해야한다. 다행히 급히 이곳을 찾아온 여자답지 않게 여유를 가지고 차를 즐기고 있어 생각을 풀 가동 시킬 수 있었지만 이렇다 할 뽀족한 수가 없었다. 방법이 한가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웬만해서는 뒤로 넘겨두고 싶었다. '적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가 생각한 방법은 다름 아닌 가야다 가주에게 되려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가주 계승권자인 마에게 딸을 보내는 저의가 무엇이냐, 오르세만 가를 삼킬 속셈이 아니냐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야다 가도 오르세만 가 와 마찬가지로 카르민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야다 가주가 이 약혼 건을 서두르는 이유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눈에 거슬리는 란을 처분하고 싶다는 속셈. 그러면서 자신의 가문에 뒤쳐지지 않는 집안을 물색하고 있다는 것을. 때문에 레일리아와 같은 참한 여인은 달가운 일이기에 놓치기 아깝다는 식의 말꼬리를 남겨놓을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쪽에서는 굳이 마가 아니어도 된다는 식으로 알아서 말을 돌려 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온 이상 그녀의 말을 존중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대리인이 왔다면 바로 그 방법을 쓸 수 있었겠지만 본인의 면전에서 그런 면박이나 항의를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이 권력 따위에 눈이 먼 여자로 보이냐고 반박한다면 이쪽에서는 뭐라고 답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동상이몽 속에서 초조하게 시간은 흘렀다. 약간의 담소와 향긋한 차와 달콤한 다과를 즐기면서도 상대방을 탐색하던 둘은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레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페르노크님께서는 안 보이십니다?" "죄송합니다. 녀석이 숫기가 없어서……." 내키지는 않지만 그쪽에서 페르노크라는 남자에게 실망하게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앞의 레이디는 그것을 알아서 잘 받아들여 주는 것 같았다. 미간을 약간 찌푸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겠지요." 한편, 무하는 응접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놀란 하인들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볼일만 마치고 바로 도망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응접실에 이르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집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행방불명이었던 무하가 나타났다는 사실에는 전혀 놀라지 않고 사무적인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테밀시아님께서는 지금 손님을 맞고 계십니다. 나중에 오십시오." 정말 이 남자가 요크노민과 뮤비라의 아버지란 말인가? 무하는 집사를 새삼 뜯어보다가 말했다. "그 안의 손님이 나와 관련 된 손님입니다. 비켜 주십시오." "나중에 오십시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하는 융통성 없는 집사를 보며 얼굴을 약간 찌푸리다가 재차 말했다. "비켜 주십시오." "나중에 오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으리란 걸 깨달은 무하는 차갑게 명령했다. "누구 앞을 막는 거냐? 당장 비켜." 본의 아니게 몬스터를 상대로 전투를 치루면서 분위기가 더욱 전사틱 해진 무하였다. 그 삭막한 음성만으로도 보통 사람 정도는 충분히 기죽게 할 수 있을 만큼. 집사도 순간 움찔하긴 했지만 여전히 굳건하게 문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안 그래도 형님을 뵈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리움과 죄책감이 뒤섞여 제정신이 아닌 무하였다. 그는 집사를 냉정하게 뿌리치며 노크했다. 그가 노크를 한 순간부터 손님을 가려서 들어 놓는 집사의 권리는 사라졌다. 그 뒤는 테밀시아의 선택과 답이 있을 뿐이었다. 집사는 맥없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 테밀시아의 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무하는 달랐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이런 무례라니! 집사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방안으로 들어가 버린 이에게 큰소리를 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레일리아와 헤어 지고 알아두었던 페르노크의 거처를 찾아가던 유시리안은 묘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인기척이 드문 정원 쪽으로 빠지는 것을 보면 불청객인 걸까?" 잠시 그 인기척을 민감하게 살피던 그는 딴 곳에 한눈을 팔 때가 아니라는 듯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했다. 그가 이 곳에 무언가를 포획하러 온 것이라면 그 묘한 인기척의 주인이 자신의 목표물을 선수쳤을 지도 모른 일이기에 따라가 확인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구경을 온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루트'로 나가고자 한다면 마음놓고 구경할 시간도 적을 것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인기척이 희미해지다 못해 완전히 느껴지지 않았을 때쯤 넝쿨로 뒤덮여 있는 아름다운 삼층 집이 나타났다. "이 곳이 그의 처소구나……." 유시리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담한 집을 살펴보고 있었다. 외부와 격리 된 듯한 집이었지만 그에게 어울렸다. 그가 본 페르노크는 사람들과 대하는 일에 서툴렀다. 아니 서툴다기 보다는 익숙하지 않다고 봐야 할까? 그보다는 즐기지 않는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유시리안은 흔들의자가 있는 일층 테라스를 보다가 천천히 집 문 앞으로 걸어갔다. 러브레터를 펼칠 때처럼 설레였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손잡이를 돌렸다. 가볍게 당기자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는 달리 쾌적한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그의 뒤에서 락샤사가 그 특유의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작군. 오르세만 가의 마의 거처라고 보기 힘들어." "응……. 하지만 그에게 어울려!" 유시리안은 활짝 웃으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있었던 곳을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락샤사는 별 관심 없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유시리안의 뒤를 따랐다. 유시리안은 어떤 방문을 열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서재 같은데 책이 별로 없네?"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 가보자 반 이상이 비어 있는 책장들이 보였다. "책은 있었던 것 같은데……." 책장에는 책이 꽂히고 앞에 남은 여백의 공간에 먼지가 더 쌓여 있었다. 그것은 분명 그 곳에 책이 꽃여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의아했다. 하지만 어차피 주인 없는 서재였다. 유시리안은 관심을 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거울 앞에 가 섰다. "어……?" 잘 개어 있는 여행복이 거울 옆 의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왠지 모를 전율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났다. 의자에 걸어가 그것을 집어들었다. "……." "뭐지 그건?" 뒤따라온 락샤사가 물었지만 유시리안은 어깨를 으쓱임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그로써도 마땅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깊은 자수정 빛 눈동자가 작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시 입가를 매만지던 그는 순간 옷을 내려놓고 방안을 빠르게 뛰쳐나갔다. 예상 밖의 행동을 보이는 유시리안의 뒤를 익숙한 듯, 일말의 변화조차 없는 얼굴로 락샤사가 따랐다. 급히 나가는 둘의 발치에는 미처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검은 두건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페르……!?" 형, 테밀시아의 놀란 눈동자를 애써 외면한 무하, 아니 페르노크는 곱게 차려입은 레일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놀랐는 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페르……." "당신이 저와의 정혼이 오가고 있는 분이시군요?" 그녀가 알아들을 지도 몰라 낮은 톤으로 말하던 페르노크는 자신의 말을 끊고 도도하게 일어선 레일리아를 가만히 주시했다. 레일리아는 당사자를 직접 만났다는 것에 안도했다. 방금까지 상대했던 남자는 너무 힘든 타입이었다. 소문이라는 게 믿을 건 못 되지만, 눈앞의 '희대의 천재'라고 불리는 남자는 마법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 빼고는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기로 유명한 남자였다. 게다가 정약설이 돌자마자 그에 대해 철저하게 알아본 그녀였다. 그녀가 알아본 그는 소문 그대로의, 아니 소문 이하의 남자였다. 고작 제피모따위에게 구타 및 갈취를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 그것이 레일리아가 본 페르노크의 실체였다. 하지만 그녀가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소문이나 자료 외의 것. 바로 눈앞의 본인이었다. 차분하고 깊으며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녹색 눈동자의 소년이라기 보다는 남자에 가까운 이. 굳게 다문 입가가 비굴해 보이지 않는 다는 것과 자신을 보는 눈빛이 결코 주눅들어 있지 않다는 것……. 불행히도 레일리아는 그것들을 보지 않았다. "저는 당신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계산이 빠르면서 사리가 분명한 여자였지만, 그 이전에 들뜬 풋사랑에 심취되어 있는 소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과의 정약을 받아 드리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저의 남편이 적어도 사람의 눈치나 보는 비굴한 남자가 아니길 비니까요. 또 저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례하다 싶을 정도의 거절의 말을 들었음에도 눈앞의 남자가 약간의 당황만 보였을 뿐 충격이나 슬픔 따위는 내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조금이지만 자존심이 상한 레일리아였다. '하긴 마법 외에는 모든 것이 평균 이하라는 녀석이 여자 보는 눈이나 있겠어?' 나름대로 추측해보며 테밀시아를 돌아보았다. "저의 말을 곡해하지 마시고 받아들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이트 테밀시아." "염려 마십시오. 레이디 레일리아." 동생을 노골적으로 깔아뭉개는 말을 들은 테밀시아의 기분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것을 걸고넘어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일단 무난하게 넘겼다. 타 가문의 레일리아만 아니었다면 그는 갑자기 나타난 동생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반가움과 약간의 질책을 내뱉으며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형이기 전에 한 가문을 책임지는 가주였다. 아직 정식으로 가주에 임명 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가주의 자리를 그에게 넘긴다고 공포했기에 가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중책의 자리에서 있는 그가 타 가문, 그것도 라이벌 급의 가문의 란을 앞에 두고 집안의 사사로운 일들을 겉으로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의 안타까운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페르노크는 레일리아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좋은 만남 반가웠습니다. 저는 급히 볼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럼." "페르!" "……." 테밀시아의 부름에 잠시 머뭇거리던 페르노크, 아니 무하는 결국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굳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 집사를 무시하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천천히……. 그러다 뛰기 시작했다. 테밀시아의 강렬한 황금빛 눈동자가 애틋하게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본 무하였다.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하지만 그 사랑은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내는 포근한 애정은, 현재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 '페르노크'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미안했다. 외동딸이었던 무하에게는 익숙하지 못한 형제애……. 그것도 윗사람으로부터 받는 형제애는 생소하기만 했다. 형제라고 불릴 만도 했던 세훈은 그녀에게는 동생이나 마찬가지였고 나이가 많은 민재는 동등한 친구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테밀시아의 애정이 생소하면서도 포근했으며 감사했다. 또 한없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 따뜻한 정이 정체 모를 불청객에게 향해지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때문에 착한 동생이고 싶었다. 언제고 진짜 주인이 이 몸을 도로 찾아가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착한 동생으로 남고 싶었다. 스스로의 존재의 가치를 '만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최악. 자신의 손으로 그가 사랑하는 '진짜' 동생을 죽여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힘없이 중얼거리던 무하의 몸이 흐릿해 진다 싶더니 곧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시동어조차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텔레포트였다. 분명한 탈출을 위해 그가 지하에서 열심히 익힌 마법이었다. 타인에게 적용시키는 마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가 사라짐과 거의 동시에 정원 한 쪽에서 두 남자가 날 듯이 달려나왔다. 앞장서던 백금발의 남자는 수려한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나가 비틀렸었는데……." 하지만 그에게 시급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급히 달려오느라 약간 흘러내린 붉은 천을 제대로 추스리며 한층 차분해진 발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했다. ……그가 방금의 안타까운 간발의 엇갈림을 깨달은 건 아주 가까운 미래의 일이었다. 눈물 겨운 200회입니다...허허허...; 이벤트 공지는 따로 올릴게요^ㅡ^ 두근두근... 아해의 장-이벤트 공지 이번에 200회를 맞아 이벤트를 두가지 합니다~! (두두둥~!!) 하나는 그냥 소설 속 인기도도 알아 볼 겸, 재미 삼아(이게 본심이다) 하는 건데요^ㅡ^ 바로 캐릭터간의 커플링입니다! 독자님께서 생각하시는 커플링(예를 들면 무하&레일리아, 페르노크&유시리안 등)을 최대 점수 10점, 최하 점수 3점으로 해서 저에게 메일로 보내주시면 되는 겁니다^^ 가장 잘 어울리는 커플링과 가장 안 어울리는 커플링을 각각 10점 만점으로 해서 저에게 메일로 간단한 이유와 함께 보내주시면 됩니다^ㅡ^ 저의 메일은 ssl224@hanmail.net 입니다^^ 결과 발표는 밑의 이벤트와 함께 합니다^^ 당연히 기간도 같구요^ㅡ^ 또다른 이벤트는 일전에 했던 패러디 이벤트처럼 상품이!!! 걸려 있는 이벤트입니다! 아실분은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ㅡ^ 바로 그림 이벤트이지요! 그림 이벤트의 자세한 내용을 공개(이미 했지만...;)하겠습니다~! 바로 아해의 장 캐릭터를 그려서(캐릭터 수는 제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점점 줄어들더니 ... 결국에는...;) 칼라까지 마무리 해서(어떤 님께서 연필로 명암을 넣으시기도 했는데... 이것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아해의 장 카페(http://cafe.daum.net/fantasy00)의 자료실에 올려주세요. 기간은 오늘로 부터 일주일입니다. 오늘이 18일이지만 곧 자정인 것을 고려해서 이벤트는 26일날 마감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그림을 자료실에 올려주시고 27일부터 일주일간 저에게 메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투표해 주시면 됩니다. 이 또한 10점 만점으로 투표해 주세요. 아아, 상품이 있는 이벤트라고 했지요? 상품은 대강 짐작 하셨겠지만! 바로바로 아해의 장 2권입니다^ㅡ^ 그럼 다들...;;; 차, 참여.....해, 해주시겠지요........;;; 믿습니다! 아해의 장 201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짐을 챙기고 나선 무하는 본의는 아니겠지만 자신을 도와준 레일리아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든 나름대로의 감사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그 여관에 있겠지?" 정확히는 식당 겸 여관이지만 굳이 따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무거워진 가슴을 애써 무시하며 여관으로 향하는 무하였다. 그때 레일리아는 이미 여관을 떠나, 테밀시아가 권해준 아름답고 적당한 크기를 가진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은 오르세만 가가 귀한 손님이 왔을 경우 접대하기 위해 따로 집밖에 장만한 거처였다. 즉, 오르세만 가를 찾는 이들 중 손님으로 인정받은 소수의 귀족만이 그곳에 머무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레일리아도 손님으로 인정받아 그곳에 삼일 정도 머물며 여독을 풀다가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편안한 거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리 편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짜증을 부리고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소원대로 오르세만 가도 실컷 돌아다녔잖아?" 워낙 성질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천하의 레일리아마저도 벽에 기대있던 락샤사를 슬쩍 건드리며 작게 물어보고 있었다. 락샤사는 그런 레일리아를 무관심한 얼굴로 슬쩍 내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원래대로 해버렸다. 그런 모습에 레일리아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지만 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동료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재수가 없다니까……." 실오라기 같은 살기마저 뿜어내고 있는 유시리안을 의식했는지 그리 크지 않게 투덜거리는 레일리아였다. "나 가겠어." 유시리안은 자신으로 인해서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벌떡 일어나 옆에 풀러 놓았던 검을 집어들며 말했다. 그의 이탈은 전력 상 많은 차질을 빚었기 때문에 레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가자, 샤!" 락샤사는 벽에 기대 있던 몸을 제대로 세워, 천천히 문 쪽으로 향했다. "무슨 헛……!" 유시리안의 냉혹했던 눈동자가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음을 본 레일리아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저 남자는 저리도 분노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을 물어 볼 용기가 평범한 귀족 소녀, 레일리아에게는 없었다. 그녀가 굳어 있는 새에 유시리안은 문을 거칠게 닫고 나와버렸다. 유시리안은 자신의 짧지 않았던 생애동안 이토록 화가 나는 일은 한 손에도 채 꼽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바로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신경 쓰이던 인기척, 신경 쓰이던 마나의 비틀림. ……그 모든 것을 감지하고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는 것을 느꼈음에도 그냥 넘겨버린 자신에게 화가 났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계속 이런 기분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스스로도 감당 할 수 없었다. 그가 감정을 삭히는 동안 락샤사는 하늘을 살피고 있었다. "비가 올 것 같다." 유시리안은 심호흡을 깊이 하다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먹구름이 천천히 고이고 있었다. "언젠가는 꼭 만날 테니까! 이번 것까지 쳐서 단단히 받아내지, 뭐." 허리 밑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던, 재질을 알 수 없는 붉은 비단자락을 어깨까지 올린 다음에 발을 놀렸다. "여관이나 잡자." 주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홀딱 젖을 것이 분명했다. 유시리안과 락샤사는 한참 걷다가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여관을 발견하자 냉큼 들어 가버렸다. 그들이 들어가기가 무섭게 하늘에서는 마른번개가 천둥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워지는 바람에 잘 보이지 않던 인형들의 모습이 잠시 밝게 비춰지다가 곧 어두워졌다. 막 여관을 지나가던 한 남자 또한 번개 빛에 의해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갔다. 가뜩이나 사방이 어두운데 검은 계통의 옷을 입어서 그 모습은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는 발견하기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머리에까지 검은 두건을 했으니……. "누구냐!?" 아직 비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계속 해서 천둥 번개가 몰아쳐,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던 기사들은 갑자기 어둠 속에서 뛰어온 남자를 필요 이상으로 경계했다. 조금만 더 여유로왔다면 그 수상해 보이는 두건을 기억해 냈을 것이었다. "무하가 찾아왔다고 레일리아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뜻밖의 공손한 답이 돌아오자 그제서야 여유를 찾은 기사들은 바로 어제 만났던 그를 기억해 냈다. "아아, 자네로군. 잠시 기다리게." 잠시 후, 무하의 방문을 알리러 간 기사대신에 레일리아가 쪼르륵 달려나왔다. "이 곳은 어떻게 알았어, 무하? 얼른 들어와!" 아늑한 분위기의 거실과는 달리 사람들 사이에서는 썰렁한 느낌이 감 돌고 있었다. 무하는 그것을 감지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앉아! 뭐 마실 거라도 줄까?" "괜찮아." 쇼파에 편하게 앉는 무하의 앞자리에 레일리아가 앉았다. 그녀는 무하의 뜻밖의 방문에 흥분한 상태였다. "이 곳은 어떻게 안 거야?" "전의 그 여관을 찾아갔더니 알려주더군." "헤에? 무슨 일로 찾은 건데? 그냥 나 보고 싶어서 찾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꽤 기대를 갖는 눈치였다. 하지만 무하는 다른 생각에 잠기느라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냐고 묻는 다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서라고 해야겠지만……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무엇에 대한 감사냐고 묻는 다면 이쪽으로써는 아무 답도 할 수 없게 되 버린다. "분위기가 왠지 썰렁한데?"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무하는 일단 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실망하는 눈치인 레일리아가 보이긴 했지만 그는 이유도 짐작하지 못했다. "좀……재수 없는 인간이 분위기를 흐리고 가서 말이야." "재수 없는 인간?" "으으. 생각하기도 싫고 입에 담기도 싫은 인간이 있어!" "흐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입에 담기 싫다고 하는 레일리아를 독촉해 들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다시 말이 끊긴 무하는 괜히 관심도 없던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는 레일리아와 무하 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른 기사나 시종들이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그 까닭까지는 모르겠지만 한결 편해졌기에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읊조린 무하였다. 활짝 열려 있는 테라스 창문 쪽에서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무하는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거친 바람이 거실 안으로 밀려들면서 무하의 두건 자락을 휘저었다. 레일리아는 한 편의 그림을 보는 기분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검은 하늘을 쪼개는 황금빛 번개와 바람에 펄럭이는 검은 천 자락, 그리고 테라스 밖을 향해 있는 남자의 얼굴……. 그리고 부드러운 멜로디. 레일리아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 네가 좋아." 막 창문을 닫으려던 무하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한 것 인지 슬쩍 자신을 돌아보는 그가 왠지 야속했다. "널 좋아해, 무하." "……."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기대와 흥분,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는 저 눈빛을 보며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무하의 입이 약간 벌려 지는가 싶었지만 이내 굳게 다물어졌다. 레일리아가 어째서 자신을 좋아하게 됐지는 지는 모르겠다. 그럴만한 일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지 않았던가? 침묵을 지키는 무하의 곁으로 레일리아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어디가 좋냐는 말은 하지 말아죠. 나도 모르겠어. 그냥 너만 보면 가슴이 막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즐겁고 들뜨고 그래. 나 약혼도 깼어. 아, 그렇다고 너보고 책임지라는 소리는 아니야. 책임 전가 따위는 절대로 안 해. 그냥 네 마음이 듣고 싶어." 레일리아에게 등을 돌리고 고개만 약간 그녀에게 향해 있는 상태로 계속 있는 무하. 그 바로 뒤에 레일리아가 멈춰 섰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 무하의 드러난 얼굴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속은 어떨까? "무……." 레일리아의 입이 다시 열리려는 순간 무하는, 이제는 줄기를 이루소 있는 빗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테라스의 난간을 넘어 숲과 건물 사이에 어느 정도 넓이를 차지하고 있는 풀밭에 가 멈춰 섰다. 더 이상 그녀의 말이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레일리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을 때, 무하는 검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 그리고 그는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언젠가 유시리안이 불렀던 노래로 만들어진 그만의 검무였다. 춤을 추듯 부드럽게 율동 짓는 손과 발……. 그 뿐 아니라 몸뚱이 전체, 목과 머리까지……모든 것이 검무, 검의 춤을 추고 있었다. 가볍게 발을 튕기며 몸을 반 턴시켰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빠르게 한바퀴 턴하는 몸놀림에 젖어있던 천 자락들이 머금었던 물방울들을 토해냈다. 비스듬히 숙여지는 고개와 더불어 들어 나는 단아한 목선, 그 위를 바로 덮는 검은 두건 자락……. 본디 그것은 천이 아닌 머리카락이었을 것이다. 레일리아는 그 어떤 검사보다도 강인한 기도와 정신을 뿜어내는 '검'과 그 어떤 무희보다도 감미롭고 애수에 사로잡힌 즐거운 '춤'을 눈물이 배인 눈동자로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는 어째서 검무를 펼치는 것일까? 왜 아무 답도 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저런 의문이 계속해서 레일리아의 머리 속을 휘 젖고 다녔지만 그녀의 눈만은 무하의 검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름답지만 슬픈 검무였다. 하지만 즐거운 듯 보였고 강한 느낌이 뚝뚝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유희적인 무희의 춤이 아닌 분명한 검이었다. 검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녀였지만 무하의 움직임이 너무나 매끄럽고 다채롭게 변한다는 것은, 그것에 배여 있는 기도와 기백이 강인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 까? 무하의 움직임이 멈췄다. 레일리아의 눈동자가 의아함에 크게 떠졌을 때, 무하는 자신의 두건을 거칠게 벗어 재꼈다. -번쩍! 번개가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구름 속으로 자태를 감췄다. 하지만 레일리아가 그것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그것……빛을 부드럽게 반사시키는 은빛 실타래. "……!" 두건이 쥐여진 오른 손을 바로 하며 무하는 천천히 레일리아가 있는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른 손을 왼쪽 가슴, 심장 위에 갖다대고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것은 전통 귀족 예법. 레이디에게 기사가 바치는 공손함과 정중함의 극치를 나타내는 예법.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레일리아의 귀에 차분한 무하, 아니 페르노크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다시 뵙습니다, 레이디 레일리아." "아……." 그제서야 그와 눈앞의 남자의 목소리가 같음을 느꼈다.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그제서야 그와 눈앞의 남자의 분위기가 같았음을 느꼈다. "저는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이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하지만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뒤를 이은 천둥소리가 울렸다. 자신이 왜 정체를 드러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았다. 그것이 카르민인 자신을 차고 용병인 자신에게 고백한 레일리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검무 또한 그러했다. '희대의 천재'인 자신을 차고 검사를 지망하는 자신에게 고백한 레일리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왜 그것이 예의냐고 묻는 다면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그도 스스로를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악이 어린 레일리아의 눈동자를 보면서 페르노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전의 만남은 매우 뜻깊었습니다. 레이디 레일리아 만큼의 여인은 찾기 힘들겠지만 세상은 넓다는 것을 되새기며 치졸하게 저 자신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좋은 남자는 지천에 허다하니 좋은 인연 맺으시길 빌 필요도 없겠지요." 그가 꺼내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레일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차인' 남자가 '찬' 여자에게 정중하게 건네는 작별의 인사. 그는 스스로 당혹하고 민망해 할 자신을 위해서, 그가 '차인'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간곡하게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배려가 좋아……. 그런 마음이 좋아…….' 레일리아는 그에게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가슴 깊이 되새겼다. 그 배움은 남을 배려 할 줄 아는 것. 위선적인 배려가 아닌 적당한 배려, 도가 지나치치 않은 상냥한 배려……. 눈에 고여 있는 무언가가 또르륵, 볼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레일리아의 입이 열렸다.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페르노크님……. 과찬의 말씀에 이기적인 저의 거절이 부끄러워집니다. 부디 행복하시길. 부디 좋은 인연 맺으시길……." 그것은 찬 여자가 차인 남자를 위로하며 작별을 고하는 인사. 페르노크의 녹안에 잠시 부드러운 기운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그는 다시 한번 정중히 인사를 하고 두건을 둘렀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아직도 울고 있는 레일리아의 머리를 따뜻하게 부벼 주었다. 약하게 떨리던 레일리아의 몸이 결국 무너져 버렸다. 그런 그녀를 내려보던 무하는 몸을 돌려 숲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떠나는 기색을 눈치챈 레일리아의 고개가 절박하게 들려 졌지만 끝내 붙잡을 수 없었다. 이미 작별인사를 주고받았다. 무엇으로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 ……그렇게 레일리아의 소중한 풋사랑은 끝났다. =========================================================================== 이벤트 커플링에서 뜻밖의 커플이 탄생했습니다. 바로 락샤사와 유시리안...ㅡㅡ; 그것도 워스트 커플에서...ㅡㅡ; 이유는 동성애는 싫다는...ㅡㅡ; 으윽, 둘은 그냥 친구라구요! 100% 친한 친구, 오래된 지기! 쿨럭...; 둘의 커플링도 가능했군요...(머엉) 아해의 장-202 -------------------------------------------------------------------------------- Ip address : 211.243.19.1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자신의 거처에서 창 밖을 보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음침하게 눈을 덮고 있는 남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소년이었다. 밖에서는 일주일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직도 그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지나가면 드디어 본격적인 가을이 오는 것이다. 그렇게 욤 제국은 급격한 기온의 변화가 특징인 곳이었다. 창 밖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의 뒤에 요즘 한창 닭살을 날리고 있는 커플이 있었다. 오랫동안 친정에 머물러 있다가 요즘에야 돌아온 새 식구, 슈리나단이 돌아 온 것이다. 물론 모두 설정상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무하씨가 레일리아를 안고 사라졌거든? 그 뒤로는 라이시륜씨가……." 자신의 연인은 이야기보다는 드디어 돌아온 자신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슈리나단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밖을 보고 있는 소년조차도 알 수 있건만 말이다. 카산은 슈리나단의 손을 슬며시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조심스러운 행동에 자기 일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둔한 슈리나단도 얼굴을 붉혔다. 둘의 그런 닭살모드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남에 처소에서 그러는 겁니까?" "그야 여기가 슈에게는 가장 편하니까." "주인은 불편합니다. 자기 처소로 가서 하세요. 안 말립니다. 애를 앞에 두고 뭐 하는 겁니까?" "애? 누가?" 카산의 장난기 어린 반문에 요크노민은 맥없이 웃고 말았다. 슈린나단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무하의 무용담을 계속 듣고 싶기도 했지만 그 이야기 속의 영웅이 괴로워했을 것이 눈에 훤해 들을 수가 없었다. 무하와의 재회로부터 벌써 1주가 지났다. 막 집에 도착한 요크노민은 카산으로부터 레일리아와 페르노크의 혼담이 깨졌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을 듣자마자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서둘러 그곳으로 가봤자 이미 지기는 떠나있을 것이란 걸……. 이틀동안 거처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자신을 걱정해서 둘이 귀찮을 정도로 찾아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멍함'이란……. 너무 급히 뛰어왔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늦게서야 돌아보는 '여유'였다. 그의 지기가 많은 상처를 입고 많은 변화를 가졌다지만 여전히 '멋진' 지기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터라 생긴 여유일지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요크노민 자신도 몰랐지만 결코 지금의 상태가 쇠퇴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되려 모자란 어떤 부분이 꽉 채워진 느낌이 들어 즐거웠고 상쾌했다. "오늘 형님이 돌아오시는 날이지요?" "매형 말이냐? 아까 이곳에 오면서 누님이 매형 온다고 부산떠는 모습을 봤으니까……. 시간을 봐서는 지금쯤이면 도착했지 않을까?" 요크노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형님을 뵙고 싶었던 것이다. 그 동안 뵈면서도 스스로의 조급함에 제대로 된 대화도 못 나눴기 때문이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한 카산과 슈리나단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리나단의 오해 덕분에 해피 앤딩의 바로 직전에서 멈춰야만 했던 두 연인. 못 다한 이야기와 고백, 그리고 애정의 확인을 거치느라 정신이 없어 빼먹었지만 그들은 길드에도 가봐야 했다. 행방불명으로 되어 있는 슈리나단, 또는 슈의 귀환을 보고해야 했고 둘을 걱정하고 있을 동료들과 동생들에게도 가봐야 했다. 멍하니 있는 요크노민이 걱정이 되 생각이 났음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형님께 가 볼 겁니다. 두 분은 길드에 가실 겁니까?" "그럴 생각이다. 오늘은 아마 들어오지 못 할 것 같다. 환영 파티가 거하게 열릴 것 같으니 말이다. 록과 딜린도 함께 할 건데, 늦게라도 좋으니 너도 오거라." "그러죠." 요크노민은 공손히 목례를 하고 나서 먼저 거처에서 나왔다. 며칠 안 본 새에 뮤비라의 안색은 많이 안 좋아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변함없이 애정 어린 미소를 동생에게 보여주었다. "초조함을 떨쳐낸 것 같구나, 노민." "……!?" 자신의 속을 완전히 꿰뚫은 형의 말에 요크노민은 미처 답을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떠보였다. 그 모습에 뮤비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부벼 주었다. "넌 내 동생이란다, 노민." 그제서야 요크노민은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뮤비라는 요크노민을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카시안이 그를 위해 장만한 장소였고 실제로 그의 마음에 가장 드는 장소였다. 그곳은 결계 마법이 이중으로 쳐져 있어 안에서의 소리는 밖에서 절대 안 들리고, 밖에서의 소리는 안에서 잘 들렸다. 보통 서재라 할 때, 책을 읽는 장소로 꼽지만 실상 뮤비라에게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그의 야심을 알고 있는 카시안이 그를 위해 마련해 준 은신처와 같았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도록, 그러면서 밖으로부터의 적, 안으로부터의 적으로부터 그 자신을 보호 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오늘 요크노민은 그 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모두 형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해 주는 몇 안 되는 극소수의 존재 중 하나인 형에게까지 숨겨가며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형이라면 도둑 길드의 존재를 알고도 놀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런 지도 몰랐다.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세 카르민의 수장 중 한 분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있던 보좌관이었으니 말이다. 처음 시녀가 가지고 온 향 좋은 차가 식어갈 무렵, 뮤비라는 서재의 각 벽을 둘러싸고 있는 책장 중에서 한 곳에 다가가 어떤 책을 꺼내들었다. 별 특징 없는 평범한 책이었다. 뮤비라는 그것을 가지고 다시 동생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 보였다. 그곳에는 마법 진이 세밀하게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뮤비라는 테밀시아가 선물해 주었던 레드 드래곤의 피를 마법 진 가운데에 올려놓고 그 위를 오른 손으로 덮었다. 그러자 마법 진이 그의 손을 타고 올라가 순식간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뮤비라의 심장 바로 위에 멈춰있었다. "형님?" 느닷없는 행동을 하는 형을 가만히 불러보았지만 아무 답도 내려지지 않았다. 요크노민는 진중한 형의 얼굴을 보고 얌전히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뮤비라가 지금 꺼내든 것은 그가 17살 때 테밀시아와 함께 몰래 떠난 여행에서 구한 마법 아이템이었다. 한창 치기 어린 나이라 아무 것도 모르고 깊은 동굴에 들어갔다가 저주에 걸릴 뻔하며 구한 귀중한 물품 중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쌍으로 있었는데, 둘은 각기 하나씩 갖고 있기로 했다. 하지만 발동시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발동에 실패 시에는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물건이었기에 여지껏 금했던 것이다. 목걸이는 뮤비라가 마법진을 금할 때 '열쇠'로 지정한 것이었고, 오른 손을 얹은 것은 이제부터 '진짜' 소유하겠다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뮤비라는 심장이 있는 곳, 그러니까 마법 진이 멈춰있는 곳에 오른 손을 갖다대었다. 그러자 금빛 마법 진이 다시 오른 손바닥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 순간만 옮겨진 것일 뿐, 앞으로는 계속해서 심장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었다. 그는 양손을 합장했다가 동시에 양쪽으로 벌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붉은 검 신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보석 하나 박혀 있지 않음에도 아름다운 붉은 검. 그 붉은 검은 검의 전체에는 가는 선으로 새가 그려져 있었다. 깃털이 불의 형상을 하고 매서운 눈은 묘하게 자애로와 보이며 위압감과 기품이 서려 있는 새였다. 마치 살아 있는 새가 검에 잠시 깃 들어 있는 듯했다. 새의 머리가 새겨져 있는 쪽이 자루였다. "휴우……." 뮤비라는 검을 쥔 상태에서 처음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도 긴장을 했었는지 알게 모르게 진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다행히 나를 받아주었구나. 이 검은 에고로, 자아가 있는 검이지. 만일 내가 인정받지 못했다면 심장에 있는 마법 진이 심장을 완전히 으깨놓았을 거란다. 그것이 두려워 여지껏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지." "헌데 왜……?" 뮤비라의 눈에 서려 있던 기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가 여지껏 스스로 금했던 일을 한 이유는 순전히 동생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지금 하고자 하는 내가 이것을 발동시킨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실패할 때는 심장뿐 아니라 사지가 찢겨질 만큼의 위험한 일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형님께서 각오 하셨듯." 약간 굳어 있던 뮤비라의 얼굴이 천천히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란다. 동생아, 이 형은 해냈다." "……!" 그랬다. 뮤비라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 그러니 용기를 내라는 것. 요크노민은 활짝 웃었다. 휴첼 기사단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을 보고 있던 테밀시아가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 새롭게 보좌관이 된 청년이 얼른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지만 테밀시아는 아무 답도 않고 그냥 그대로 잠시 있었다. 그러다 심호흡을 깊이 하며 가슴에서 손을 뗐다. 아직도 자신을 걱정스레 보고 있는 청년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몸을 돌렸다. 이번에 그의 보좌관이 된 청년은 한창 득세중인 파만 가의 라였다. 파만 루카다 라 자르카라는 풀네임을 갖고 있는 그가 테밀시아의 보좌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가문 덕이 컸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친목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을 살피러 온 테밀시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잘생기신 기사 분이 시군요. 하지만 충성을 마치는 로맨스의 대명사 '기사'라기 보다는 '지배자'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려요. 당신이 있을 곳은 좀더 위로군요." 테밀시아는 '귀족'으로써 가장 최고봉인 카르민의 일원이었다. 또한 세 카르민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오르세만 가의 실질적인 가주였다. 그런 그가 어디를 더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그제서야 루카다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보좌관 후보 중에서 가장 자세히 본 사람일 것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학자풍의 마른 몸과 고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평범한 코와 두툼하지도 얇지도 않는 입술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남자였다. 어깨를 넘어서고 있는 진회색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묶여 있고 손에는 책이 들려 있어 눈 여겨 보지 않는다면 학자풍 샌님으로 판단하기 족했다. 하지만 좀더 관심을 가지고 본다면 가늘고 매서워 보이는 눈매와 그 안에서 빛나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강하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펼쳐져 있는 책을 덮고 노골적으로 테밀시아를 위아래로 살펴보고 있더니 손가락을 경쾌하게 튕기며 말했다. "좋아요, 합격이에요! 제가 당신의 보좌관이 되어주죠!" ……. 엄청 인심쓰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하는 그를 테밀시아는 묵묵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색한 시선은 아랑곳 않고 그는 책을 어깨에 얹으며 물었다. "자자, 당신 집에 가봐야 겠지요? 제가 일할 곳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니까." "……따라와라." 어차피 가문의 세력도를 따졌을 때, 후보 중 제일 조건이 좋은 사람은 그였던 것이다. 하지만 루카다는 얼마 안가 자신의 능력과 강함을 유감없이 보여주어 시쿵둥한 테밀시아의 시점을 확 바꿔놓았다. 바로 마차를 탄 순간이었다. "어? 불청객이 있네?" 그가 말한 것은 마차 안에 몸을 감추고 있었던 휘란이었다. 갑자기 나타날 불청객들을 경계하는 의미로 기척을 완전히 죽여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마차 안의 다른 동업자와 타깃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실력자가 아니라면 나타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약간 살려 놓은 기척도 같은 동업자 급이 아니면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것이었기에 루카다의 말은 상당히 파문이 큰 언사였던 것이다. 아직 완전히 마차에 들어오지 않았던 루카다의 손을 잽싸게 끌어당겨 안으로 쳐 넣은 다음 문을 닫은 것은 휜이었다. "뭐야, 이 자식?" "호오? 그림자였던가요? 그럼 이거 실례했군요!" 하며 한 손을 번쩍 들어 보이고 웃는 루다카의 모습을 벙찐 얼굴로 보고 있던 휜은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테밀시아를 돌아보았다. "뭐야, 저 얼간이는?" "내 보좌관이 될 지도 모르는 녀석." "테밀시아님의 보좌관, 루카다입니다. 하하! 잘 부탁해요, 그림자씨" 동시에 튀어나온 두 답을 듣던 휜은 고개를 약간 갸웃하다가 말했다. "난 휘란. 그림자가 아니야." "전 루카다. 얼간이가 아니랍니다." 헤실 웃는 루카다의 얼굴을 정체 모를 무언가를 탐색하는 눈으로 살피던 휜의 입이 열렸다. "네 녀석의 근처는 이상한 녀석만 꼬이는 모양이다." 테밀시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넘겼지만 루카다는 냉큼 끼어들었다. "휘란 씨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하하하!" 뜻밖에도 휜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루카다는 뭐가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한참 웃던 휜은 배를 움켜쥔 상태에서 답했다. "그렇지. 나까지 포함해서지. 하하!" 그리고 복면을 끌어내리며 말했다. "너도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휜이라고 불러도 좋아." "하하! 감사합니다. 루카라고 불러 주세요." 둘이 그렇게 서로를 탐색하고 있을 때, 둘의 유일한 연관 다리인 테밀시아는 의자에 앉아 구석에 쌓인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 이벤트 마감 및 투표 시작입니다! 많이 참여해 주셔서 감사해요~! 투표는 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메일은 ssl224@hanmail.net 이구요. 10점 만점으로 주세요. 만일 A님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헌데 B님 그림도 괜찮다. 그럼 점수는 A님의 그림에 7점! B님 그림에 3점! 이런 식으로 준 점수의 합이 10이어야 합니다. 만일 점수가 오버가 되었다면 그 표는 무산 시키겠습니다^^ 멋진 그림 감사하구요~! 투표도 참여 많이 해 주세요^^ (투표 기간은 일주일, 2월 3일까지입니다.) ps. 커플링 이벤트 결과는 일주일 뒤에 그림 이벤트 결과 발표와 함께 발표하겠습니다^^ 아해의 장-203 -------------------------------------------------------------------------------- Ip address : 211.243.9.11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요크노민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택을 빠져 나왔다. 혼자서 일을 벌린다 라는 압박감과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여부에 따른 불안감 등을 완전히 극복하기에는 그의 나이가 아직은 어렸던 것이다. 또 원래 사람은 '혼자'라는 것에 극도로 약한 존재이기도 했다. 든든한 아군이 둘이나 있다는 생각에 요크노민의 마음은 훨씬 가볍고 여유로웠다. 가장 사랑하는 형과 최초의 지기라는 존재는 그의 안에서 절대 작은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동안 힘이 되어 주었고 앞으로도 힘이 되어줄 두 번째 지기의 행복 또한 요크노민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카산이 어딘지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까닭조차 짐작치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나마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의지하게 만들 수 없었다는 점에서 반성을 해야 하긴 하지만 말이다. 먼저 간 카산과 슈리나단의 환영 식이 얼마나 독하게 벌어질 지는 눈에 훤했다. 누가 먼저 술에 죽느냐를 내기하며 통 채 퍼마실 녀석들의 광란을 떠올려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한숨도 나와야 했다. 그 들이 얌전히 자신들끼리만 마시고 끝낼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그도 걸고 넘어지리라. 뿐만 아니라 요즘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작정하고 있다는 카나와 미리도 염두 해 두어야 했다. 취한 와중에 어떤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각오를 해야 하는 광란의 저녁을 떠올리며, 저택을 나오기 전에 형에게 넌지시 물었던 것을 되새겨 보았다. "주량 말이냐?" "예." "흐음……. 취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구나." "아……." "테밀시아님과 대작을 한 적이 있었는데, 둘 다 술이 동날 때까지 취하질 않아서 결국 승자를 모르고 끝냈지." "……!" ……를 되새겨 보자니 안심해도 좋을 것도 같고……. 요크노민은 묘하게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형을 닮은 소년이었던 것이다. "누님! 이제 집 나가면 안돼! 카산 형님이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렸는지 아슈?" "암암, 아무리 밤일이 시원치 않더라도 도망가면 안되지!" "이 자식들이! 닥치고 술이나 먹어!" 벌써 문 밖으로까지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넘쳐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산은 호기스럽게 답하는 슈의 옆에서 푸근하게 웃고 있으리라. 어느새 마스크를 쓴 민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슬쩍 문을 열고 가자 그에게 요란하게 다가오는 여자 둘이 있었다. "민님!" "이번에 파 급 일을 해내셨다면서요!?" 카나와 미리였다. 왜소한 체구의 요크노민 보다도 작은 그녀들의 나이는 이제 겨우 15살이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뒷골목에 버려져, 술집의 마스터에게 길러진 그녀들은 놀랍게도 하 등급의 실력을 갖춘 도둑이자 암살자였다. 쌍둥이는 아니지만 같은 장소에 버려져 있었고 같은 은인 밑에서 커왔기에 누구보다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많은 둘이었다. 묘하게 생김도 비슷하고, 체구도 비슷하며 스타일도 비슷한 둘은 취향마저도 같아서 민에게 동시에 구애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둘의 사이에 무슨 이변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되려 민을 화제 삼아 더욱 사이가 좋아졌다 고나 할까? 동글동글한 흑색 눈동자와 양 갈래로 높게 묶어 땋아 내린 긴 흑발머리가 귀여운 둘이 왜소한 체구의 민의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주인공들이 있는 자리로 이끌자 주위에서는 부러움의 휘파람소리가 요란했다. 어려서부터 뒷골목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갈망하는 안식처'에서 자란 둘은 주위에서 뭐라 하건 끄떡도 안 하는 당찬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에는 이곳 마스터, 키안 뿐이었고, 지금은 민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차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이자 은인인 키안과 첫사랑인 민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는 제멋대로라는 것은 아니었다. 실력 있는 데다 귀엽기까지 한 그녀들의 인기는 과히 하늘을 찌를 만 했지만, 둘은 고산에서 피는 꽃과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들은 도둑질보다는 암살 쪽에서 실력이 두드러 지는, 하 등급의 자객이었던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고, 살인을 밥먹듯이(실제로 밥벌이다) 하며 마음에 안 든다면 뒷골목 사람답게 조용히 처리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살벌한 소녀들이었으니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다들 오늘은 끝까지 간데요. 민님도 그러실 건가요?" "그러실 거죠?" "물론! 오늘 민이 망가지는 모습을 꼭 보고 말테다!" "나는 현모양처로써 하니가 하는 것을 내조할……." "누가 현모양처야!" "아잉, 그런 식으로 발끈하면 부끄러워지잖아." "크아악! 코맹맹한 소리 내지마, 이 미친 자식아!" 중요한 민의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미리와 키나는 주위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소녀들이었다. "그럼 민님은 오늘 내내 계시는 거네요!?"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와아!" 귀엽게 환호성을 지르는 둘을 보고 다시 주위에서 요란하게 휘파람을 불며 야유했지만 역시나 그녀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민은 그녀들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의 앞에 앉아있던 산과 슈를 보았다. 행복해 보이는 둘의 모습을 보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민은 확인하듯이 슈에게 물었다. "이제는 도망가지 마십시오. 뭐든 같이 해결해야지요." "응!" 슈의 환한 웃음을 보던 록이 들고 있던 술잔을 높게 쳐들면서 외쳤다. "코 꿰인 슈 누님을 위하여!" "위하여!" 여기저기서 정신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술잔에 솟아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들어올린 채로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얼른 애 타게 술을 바라는 배속에 쳐 넣는 것이 도리인 것이다. 미처 술잔이 없어 함께 축배를 들지 못한 민에게 미리가 얼른 잔을 가져다주었다. 카나는 먹음직한 안주를 끌어다 민의 앞에 놓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슈는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놀려댔다. "너희 그러다 누가 민의 부인이 될래?" "둘이 같이 될 거 에요! 그치?" "응!" 산과 슈는 고개를 약간 돌린 채 웃음을 참았고 록은 마시고 있던 맥주를 뿜어내 버렸다. 딜린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끄떡 거리며 턱을 쓸어 댔다. "독점욕이 없는 사랑이라……." 뭔가 멋들어진 말까지 곁들이던 딜린은 이내 관심 끊고 민의 빈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민의 술잔을 먼저 채우고 싶었던 미리와 카나가 동시에 뽀루뚱 한 얼굴로 항의했지만 그는 씨익 웃으며 민과 가벼운 건배를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얼른 자신들의 잔을 들고 같이 건배하는 귀여운 두 소녀들을 보며 또다시 웃어 보이는 딜린이었다. 그는 두 소녀가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민이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산이 내용물을 다시 채어 넣었다. 다시 울상이 되는 미리와 카나였지만, 차마 산에게 항의를 할 수 없어 얼굴만 찡그리고 말았다. 간간이 먹어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많이 마시게 된 경우는 없었던 터라 민은 약간 주저하며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번뜩인 미리와 카나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산은 그런 둘에게서 슬며시 눈을 돌려 자신의 연인을 보았다. 동료들의 야유를 일일이 답해주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민님! 이번엔 제가 따르는 술 드세요!" "아, 응." 귀에 들리는 미리의 음성. 또 옆에서 다음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키나의 손에 들린 커다란 맥주통……. 분명 작정을 한 것이리라. 산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뭐, 이미 경고 해뒀으니 알아서 하겠지.' 주저하면서도 끝까지 잔을 비우는 민의 모습이 못내 불안했지만 기세 등등하게 주위의 만류를 잘라내는 미리와 카나의 앞에서 뭐라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둘이 민을 제외하고 따르는 마스터는 호황 중인 가게 일에 정신이 없고,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딜린은 재미있겠다는 얼굴로 옆에서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보다는 술이 약한 록이 벌써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골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꽤 심심한 모양이었다. 민은 맛도 없는 술을 왜들 달게 마시는 지 알 수 없었다. 쓰기만 하고 목에 넘어가면 화끈거려 오지 않는가? 뮤비라 형님과 함께 마셨던 와인의 부드러우면서도 알싸한 맛과는 거리가 멀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채우는 족족 마셔대는 민이었다. 하지만 자기 혼자 죽어라 마실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던 지라, 자신이 한 잔 마실 때면 꼭 미리와 키리에게도 한 잔씩 따라주었다. 그녀들이 민이 주는 술을 안 마실 리가 없었다. 눈 속임 따위는 애당초 민의 앞에서는 할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결국 비슷한 양을 서로서로 마시면서, 테이블에 흘리는 술이 늘어나고 안주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 많아질 무렵 미리와 카나는 테이블에 쓰러져 잠을 청하고 말았다.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고 있는 아내를 여전히 콩깍지 씌인 눈으로 미소지으며 지켜보고 있는 산을 무시하고 자신을 계속 보고 있는 딜린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이 내 주량이 둘보다 센 모양이야." 그가 자신이 취하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딜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도 늘 가려 있는 민의 얼굴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차 등급이 파 등급의 일을 해냈다고 말들이 많더라? 길드 마스터가 너에게 타 등급의 일을 맡겨볼 생각인 것 같던데?" 딜린은 길드 마스터와 묘하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길드 마스터의 의중을 그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채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소식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시급한 일이라고 민은 생각했다. 하지만 딜린이란 사람은 가벼워 보이는 언사와 외모와는 달리 출신도 모호하며 그 속내를 쉬이 짐작할 수 없는, 만만치 않은 남자였다. 화려한 금발 밑에 가려져 있는 싸늘한 빛을 띄고 있는 연한 갈색 눈동자가 못내 걸리는 민이었다. 그 장난기가 넘치는 듯 차가운 눈동자를 보자니 자꾸 누군가가 생각나려 했지만 뿌연 무언가가 가린 듯 끝내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은 이 위험한 느낌이 드는 남자가 적대 관계가 아니라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어? 그렇게 자꾸 보면 우리 하니가 질투하잖아." 무의식중에 그에게 자꾸 눈길을 줬는지 딜린이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했을 때 의당 발작을 해대던 록이 자고 있기에 재미가 없어졌는지 이내 시쿵둥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했다. 민은 고개를 약하게 저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흐음……." 뭔가 정적이 흘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분명 착각이었다. 주위에서는 아직 술에 쓰러지지 않은 거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 지도 모르고 잔을 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한 착각이 아니기도 했다. 농담처럼 물었던 딜린의 눈에 잠시 예리한 무언가가 머물렀다 사라졌기에. "내 남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 인 줄 알아? 딸꾹! 놀라지 말라고. 우리 멋진 산께서는 말이지 그 위대한……." "그래. 위대한 슈님의 남편이시지." 산은 얼른 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함으로써 그녀의 뒷말을 막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뒤를 이어 말했다. 그 모습에 주위에서 야유에 야유를 퍼부었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민은 산의 멋진 상황대처에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물론 그의 순수한 감탄마저도 주위에 휩쓸려 야유를 보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딜린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록의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게 한 뒤, 한 손으로 그의 몸을 지탱해 주며 발을 딛었다. "그럼 나는 록과 오랜만에 밤을 즐겨 볼 테니까 너도 양쪽에 끼고 재미있게 놀라고." 슬쩍 윙크를 날리며 사라지는 딜린을 멍하니 보다가 자신의 양쪽에 들러붙어 잠들어 있는 미리와 키나를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을 여기에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여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한다면 그건 인간 이하인 것이다. 그렇다고 둘을 한꺼번에 옮길 수도 없고, 둘 다 자신에게 기대 있었기 때문에 한쪽만 옮기면 나머지 한쪽이 바닥을 뒹굴 처지였다. 민은 여전히 주사를 부리고 있는 슈를 막아내고 있는 산을 한번 보다가, 음흉한 눈으로 두 소녀를 힐끔거리는 뭇 사내들을 보다가 곧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마스터. 여기 당신 딸 중 하나만 옮겨 줘." "나머지 한 명은 데리고 살 거냐?" "재미없는 농담이라는 거 알지?" "하긴 우애 좋은 자매를 굳이 갈라놓을 것 없이 둘 다 데려 가면 되겠구나. 이 녀석들 사이가 좋아서 서로간에 질투도 안하고 내조도 잘 할거다." "극단적인 반어법으로 들린다." "하하!" 마스터, 키안이 둘 중 하나를 안고 걸음을 옮기자 민도 다른 한 명을 업고 뒤를 따랐다. 주위에서 즐거운 밤 되라고 놀려댔지만 둘 다 피식 웃으며 상대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던 민이 문 듯 물었다. "그런데 마스터. 정말 딜린이 록과 밤을 즐겨?" "풋!" 어깨를 들썩이며 힘들게 걸음을 옮기던 키안이 결국 대소하며 말했다. "물론 아니지. 딜린이 가장 싫어하는 게 남색이거든. 이 곳이 워낙 살벌한 곳이라 이유 없는 살인도 빈번하지. 때문에 술에 취해서 돌아다니는 건 죽여달라고 몸부림치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아……." 이리저리해도 역시 둘은 친구였던 것이다. ========================================================================== 헤고....; 슬럼프였습니다; 한 줄 쓰고 끙끙. 한 줄 쓰고 끙끙. 세 줄 쓰고 헤헤. 헤고.....ㅡㅡ;;; 아해의 장-204 -------------------------------------------------------------------------------- Ip address : 211.243.9.14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같은 방을 쓰는 둘을 침대에 나란히 눕히고 내려왔을 때는 산과 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어이 술에 절어 넉 다운이 된 슈를 산이 업고 나갔다는 설명을 들으며 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상태로 본가를 갈리는 없을 테고 아마 이 뒷골목 쪽에 마련해 둔 은신처로 갔을 것이다. 이제야 겨우 만난 부부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을 생각도 없었기에 뒤따라 내려온 키안에게 인사를 하고 그냥 돌아가려 했다. 그런 민을 막는 녀석이 있었다. "뭐지?" "네가 록을 깼다는 그 애송이냐?" "……." 상대할 가치도 없는 시시한 시비. 평소의 민이라면 그냥 돌아서거나 적당히 대응해 줬을 테지만, 오늘은 무슨 생각인지 묵묵히 침묵만을 지키며 끝까지 듣고 있었다. "지금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민에게 결국 사내는 크게 윽박질렀다. 그는 민보다 두달 정도 빨리 들어온 신참이었지만 벌써 차 등급에 들어선 자였다. 하지만 그 빠른 진급도 실적으로 따지면 늦은 것이었다. 실적으로만 따지면 벌써 차등급이 되고도 남을 정도로 많으나 침착하지 못한 성미 덕분에 사고도 많이 쳐 진급이 늦은 것이다. "주둥이가 들러붙었냐?" "……." "어이, 제그. 겁먹은 것 같은데 뭘 계속 다그치나. 선배로써 잘 다독여 줘야지? 킬킬." 주변에서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제그는 흉폭한 빛을 발하는 진 갈색 눈동자를 가진, 깡마른 몸의 사내였다. 스물이 조금 안 되는 그는 손속이 잔인하여 암살자로는 약간 부적격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있어서의 문제는 없지만 그 방법이 잔인한 만큼 시간을 많이 소모하고, 또 시간은 많이 잡아먹는 만큼 잡힐 확률도 많았다. 실제로도 감옥까지 잡혀간 적이 있어 문제가 됐던 남자다. 다행이 길드의 이름은 거명 하지 않고 원한 관계이거나 결투라고 둘러댔기에 그리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손속이 잔인한 것과는 별도로 두뇌 회전이 빠른 남자였다. 또 그는 자신의 거처를 절대 밝히지 않는 행동으로도 꽤 유명했다. 자신의 뒤를 밟는 이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살해하는 그의 광적인 모습에 다들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덕분에 이제는 그의 뒤를 밟거나 하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 그가 묘하게 착해지는 때가 있는데 바로 미리의 앞에서였다. 그가 반한 이성, 즉 미리의 앞에서만 쑥맥으로 변하는 것은 꽤 유명한 사건이었다. 길드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민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전에도 이런 시비는 많이 걸려왔지만 무시를 하거나 차갑게 쏘아붙이던 민이 오늘은 왠지 얌전히 듣고만 있자 되려 입을 다물어 버리는 제그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눈에 일렁이는 질투가 사그라 든 것은 아니었다. 막 그가 입을 다물었을 때, 숍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 불청객은 우람하다 못해 답답하게 느껴지는 근육 덩어리가 뼈를 감싸고 있는 거한 이었다. "누가 제그냐?" "뭐야, 넌?" 엄청난 체격 차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으며 태연히 묻는 제그의 배짱은 민마저도 감탄할 지경이었다. 거한이 제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깡마른 몸에 재수 없는 눈빛을 싸가지 없는 말투를 보니 네 녀석이 맞구나. 감히 내 부하들을 죽였겠다?"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워낙 흔한 일이 되 나서 말이지." 그 말에 거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리고 손에 든 거대한 도끼를 내리 찍기 위해 들어 올렸다. 갈망하는 안식처의 주인, 키안의 말이 없었으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여기서 싸움은 금지라고 했을 텐데?" 무미건조한 얼굴로 경고하는 키안이었지만 사내는 슬며시 도끼를 내려놓았다. 만일 여기서 싸움을 벌린다면 키안의 술과 요리에 푹 빠져 있는 뒷골목의 절대 다수의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가자!" "쿡." 제그는 비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도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자신이 먹은 음식을 셈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그 뒷모습을 뭔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보고 있던 민에게 키안이 말을 걸었다. "너 답지 않았다." "……." 침묵하던 민은 돈을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고 말했다. "다음에 오지." 그리고 얼른 숍을 나가버렸다. 키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그와 민이 놓고 간 돈을 챙겼다. "내가 뒷골목 녀석을 죽였다면, 둘 중 하나겠지. 하나는 의뢰. 또 하나는 내 뒤를 밟은 것." "내 부하가 네 뒤를 밟을 리가 없지. 좋아. 의뢰인을 말하면 곱게 죽여주겠다." "농담하는 건가? 의뢰인을 말하는 건 절대 금기야." "죽는 녀석에게는 금기는 필요 없지. 좋아. 곱게 말하기 싫다면 힘으로라도 알아내겠다." 거한은 도끼를 크게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생각 외로 그 몸놀림이 빨랐다. 제그는 뒤로 물러서기보다는 앞으로 덤벼드는 쪽을 택했다. "사지 중 몇 개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다!" 검을 뽑기는 했지만 힘이 응축되어 있는 도끼와 정면충돌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그는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리며 그가 내리찍는 도끼를 피했다. 그리고 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베려 했다. 어중간한 곳을 노려봤자 힘이 부족한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죽이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한은 생각보다 빨리 땅에 박힌 도끼를 뽑아내 옆으로 휘둘렀다. 제그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힘과 속도였다. 제그는 자신이 휘두르는 검이 한 박자 늦음을 빠르게 간파하고 얼른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거한의 도끼가 그보다 조금 빨랐다. "크윽!" 오른 손에 꽤 심한 부상을 입고 만 제그가 상처를 추스리기도 전에 거한의 도끼가 다시 빠르게 다가왔다. 그것은 그의 오른 손을 노리고 있었다. 완전히 절단 낼 생각인 듯 싶었다. 제그는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그쯤은 예상하고 있었던 지 도끼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계속해서 물러나던 제그가 어느 순간 멈춰 서서 외쳤다. "파 * 이 * 어 * 볼 *" "마, 마법……!?" 그것은 1써클의 공격마법이었지만 시전자의 써클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이었다. 기초적인 마법이라 하여 무시 할 것이 못된다는 말이었다. 제그가 마법을 쓴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그의 검 솜씨가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꽤 알려져 있지만 마법이라니?! 제그는 갑작스런 공격에 의한 고통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한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 신음하며 자신의 오른 손을 내려보았다. 아직도 피가 넘쳐흐르고 있는 모습이 깊은 부상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치유, 내가 바라는 것은 복귀의 힘. 리 * 커 * 버 * 리 *" 상처가 얼마나 아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을 보아 꽤 효과가 좋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제그는 오른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펴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라지고 시체만 남은 그 곳에 어둠 속에서 녹아 나오듯 한 인형이 스르륵 나타났다. 민이었다. "마법사였나……?" 욤 제국에는 마법사가 흔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마법사 쓸 줄 안다면 당장 마법 길드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 착실하게 마법을 배우고 연마할 수 있다. 그 곳에서 어느 수준에 올라섰다면 당장 귀족 가에서 제의가 쏟아진다. 실력만 확실하다면 황궁에 고용되는 것도 꿈만은 아니었다. 그런 마법사가 고작 뒷골목의 암살자라니?! 게다가 치유 마법! 그것이야말로 제그가 수준 급 마법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치유 마법은 일종의 '벽'이었다. 마법사에의 첫 번째 벽. 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 갈 수 있는 그릇이 만들어지느냐, 아니냐는 바로 치유 마법의 시전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공격성이 다분한 하위 마법. 비록 그 효과가 시전자의 써클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공격성은 공격성이었다. 바로 그 공격성에 흠취 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품과 정신 세계가 달라진 하위 마법사가 자신의 오염을 떨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릇을 만들어졌는지 여부의 판가름이었다. 즉,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그 단계를 뛰어넘어 좀더 위로 도약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또 다르게 보자면 마법 길드에서 두 손 벌려 환영해줄 만한 인재라는 뜻이었다. 그런 인재가 고작 뒷골목의 삼류 건달이라니……. 민은 제그가 사라진 방향을 묵묵히 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이벤트 집계 결과를 드디어 공개하겠습니다~(우와와와~;;;) 먼저! 저의 단순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시작되었던 커플링 이벤트! 그 중에서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커플! 그 5위! 꽤 의외였지만! 무하&레일리아 커플이 차지했습니다!^ㅡ^ 뭐, 확실히 둘이 붙여 놓으면 잘먹고 잘 살수야 있겠지요^^; 그리고 4위! 놀랍게도! 라이시륜&무하 커플이 차지했습니다!^ㅡ^ 이 둘은 친구라구요! >ㅇ<;;;;;; 이 커플을 지지해주신 분들의 말씀 중 인상에 깊은것... 헤어질 때 그냥 헤어져도 되는데 왜 껴안았겠느냐! 그게 남자의 흑심(?) 이라는 것이다! .......쿨럭입니다....; 자자, 3위! 정말......이지.......;;;; 요크노민&페르노크 커플이 차지했습니다...;;;; 둘은 정말정말정말정말로 친구라구요....ㅡ.ㅜ;;;; 왠지....이 둘의 지지자들은... 무척...이나... 열광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쿨럭...;;; 그럼 2위! 1위와 끝까지 접전을 펼치던 이 커플! 누군가 칭하던 '작가공인커플'(;)!!!! 바로 테밀시아&뮤비라가 차지했습니다~! 너무 멋지고 애절한 사랑이라는 평이 절대적이었습니다. 항간에는 뮤비라가 테밀시아의 결혼식때(테밀시아는 아직 결혼을 안했죠) 난입을 할 것이라...라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훗...그건 작가만이 알고 있습니다^ㅡ^+(;;;;;;) 그럼 대망의 1위!!!!! >.< 이쯤되면 누군지 짐작하시겠지요? 바로바로바로 '작가공인커플'(;) 제 일순위!(;) 페르노크&유시리안이 차지했습니다>.< 엇갈리는게 안타깝다 못해 열받는다(;)라는 메일이 속속 도착하며...; 열성적인 지지를 받은 이 커플은...; 감히(?) 작가의 생명에 위협이 도달할정도의 막강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외 생각보다 훨씬 세밀한 커플링이 속속 도달했습니다. 열거하자면^^ 유시리안&레일리아(둘이서 짝짝꿍 페르노크를 안주 삼아 어울릴거라나요?;), 실&넬(로리로리로리~!), 페르노크&테밀시아(이건 완전 변태입니다...ㅜ.ㅜ;), 레일리아&사뮤에르(이건 범죄에요!!), 아르&페르노크(아르를 잊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ㅡ.ㅜ 하지만 아르라고 했다간 칼 맞아요;), 요크노민&카산(벌써 이들까지 눈독을 들이셨단 말입니까?!), 카한세올&페르노크(크윽!!!), 집사&유모(극악무도의 커플!), 테밀시아&사뮤에르(냉혈공과 연약수라니요!!!!), 페르노크&사뮤에르(제가 언제 제스처를 주었다는 겁니까!!??), 불칸&요크노민(그나마 정상....ㅡ.ㅜ), 카산&슈(가장 정상!), 유시리안&락샤사(이 녀석들이 6위입니다; 어째서! 왜?), 무하&페르노크(재미있을 것 같다는 평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요크노민&카이쟌(둘이 똑같이 뮤비라를 안주 삼아 사귀겠지요;), 이정도 였습니다^^ 그럼 안 어울리는 커플! 제 5위!! 놀랍게도 페르노크와 요크노민!! 쫙 갈린 여론이 작가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둘이 함께 있으면 음침해 진다면서.... 반대를 하시더군요; 허허허. 제 4위!! ....쿨럭. 페르노크&유시리안! 남자 커플은 싫다는 평과 둘이 붙여 놓으면 너무 짝짝꿍이라 싫답니다; 허허허...(머엉) 이야 말로 각기각기 나뉜 평!;; 제 3위!! 슈&카산! 어째서!!@ㅡ@;; 평범한 커플이라 싫다니요! 원래 사랑은 평범한 듯 잔잔한 것이 좋은 겁니다...ㅡ.ㅜ;;; 어디에 나오는 만화처럼 될 것 뻔히 아는데 이래저래 방해요소만 많고 질질 끌리는 건 절대 싫다구요>ㅇ<;;; 진정하고 2위를 보자면!!! 바로바로 뮤비라&카시안입니다. 아.내.인.척.하는 카시안 낭자를 모두들 증오하고 계시더이다...; 흠흠. 그럼 2위를 아주 큰 점수차이로 떨치고 영광의 1위를 차지한 커플! 바로 레일리아&무하입니다! ......이유는....ㅡ.ㅜ;;; 투표해주신 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머엉) 그 외에도 꽤 재미있는 커플링이 있었습니다. 라이시륜&레일리아(레일리아만 당하다 끝날 것 같은 커플이랍니다), 유시리안&레일리아(서로 갈구다 끝날 것 같은 커플이라는 군요;), 무하&설희(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그치요?), 농땡사부&가하(하하하! 의외로 잘 어울리는 커플 아닙니까? 하하), 페르노크&락샤사(그냥 싫다는 데요?), 레일리아&요크노민(마찬가지로 싫답니다;), 무하&고아원 원장(최악의 커플이지요), 유시리안&락샤사(둘이 붙여 놓으면.... 싸늘하고 냉기만 돌것 같더이다), 테밀시아&마린나서(....;), 요크노민&락샤사(ㅡ.ㅜ;;??), 슈&무하(음..각기 짝이 있지만 꽤 어울리지 않습니까?) 라이시륜&무하(어, 어째서?), 이라즈&페르노크(둘이 붙여 놓으면...완전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되겠죠....;), 요크노민&불칸(수장이면 다냐? 실과 넬처럼 작게나 있지 크게 변해서 노민 유혹하고 난리야!......랍니다;) 그리고 작가에게 식음땀과 웃음을 선사한 커플링! 바로 바람의 벗&페르노크!......하하. 한사코 괴롭히려 드는 작가와 당하는 페르노크는 극악의 커플링이다...라는 군요 하하^^ 재미있게 보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ㅡ^ 그럼 두번째! 상품이 걸린 이벤트의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당첨자 님께서는 저에게 주소와 본명을 메일로 보내주시면 ...아시죠? 후후후~! 제 3위! mallang 님! 제 2위! 라밋샤 님! 제 1위! Dian 님! 이 세분은 근소한 차이로 순위가 갈렸습니다^^(약 1점차 랄까요^^) 빠른 시일안에 저에게 메일을 보내 주시길...^ㅡ^ 아해의 장-205 -------------------------------------------------------------------------------- Ip address : 211.243.9.3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수도에 있는 테밀시아의 집무실은 요 근래 들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새로운 부관이 들어온 뒤부터인 이 현상은 이제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니 까요. 좀더 정중히 그러면서 약간 거칠게 하는 거라고요!" "알았다고!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 봤어?" "너무 빨라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니까요!" 벌써 한 시간째 이런 대화가 계속 되건만 테밀시아는 의문 하나 표하지 않고 자기의 일만 보고 있었다. 가끔 루카다를 불러 이것저것 시키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방관의 태도를 취하는 그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갑옷이 걸려 있는 옷 걸이를 향해 장갑을 벗어 던지는 연습을 하고 있는 휜의 모습은 뭐라 한마디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결투 신청하는 것을 연습하고 있는 거랍니다." 집중하고 있는 휜을 대신해서 루카다가 싱글거리며 답해주었다. 테밀시아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관심을 끊고 서류에 집중했다. 이번에 그의 기사단에게 호위를 요청한 것들이 많아 그것들을 추스리기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츠민을 보호한 이후로 자꾸 밀려드는 요청 건들이었다. 무턱대고 거절하기도 그렇고 받아들이기도 그랬기에 심사숙고해야 했던 것이다. 루카다는 휜에게 반복 연습을 지시하고 테밀시아의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펜을 꺼내 써 갈기기 시작했다. "거절의 말은 이 정도로 하면 되겠지요? '저희 기사단을 과대평가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또한 경의 기사들의 용맹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전의 전투로 부상이 많은 저희 기사단보다야 경의 용맹한 기사들이 훨씬 쓰임이 클 것 같습니다. 그럼.' 어때요?" "아아, 좋군. 그대로 보내." 테밀시아는 거절할 대상의 요청 건을 죄다 루카다에게 맡기고 자신이 걸러낸 서류를 뒤적거렸다. 대충 걸렀음에도 양이 많은 것을 보니, 재조정이 필요한 듯 싶었다. 하지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그는 진지하게 장갑을 던지는 연습을 하고 있는 휜에게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걸 배워서 뭐에 쓰려는 거지?" "너 때문이야!" "나?" 어리둥절 하는 테밀시아의 옆에서 루카다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휜은 이를 갈며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다시 손에 낀 장갑을 천천히 벗어 투구가 걸려 있는 곳에 집어 던졌다. "무슨……?" "오오! 그겁니다!" 테밀시아가 뭔가 되물으려 했지만 루카다의 탄성에 묻혀 뒤를 이을 수 없었다. 휜은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집어들었다. 좀 전까지의 불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뿌듯한 미소였다. 테밀시아는 의심쩍은 눈길을 루카다에게 보냈지만 그는 휜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환호성을 지르며 한번만 더 해보라고 권하고 있는 루카다와 아까와는 달리 자신만만해 하며 장갑을 다시 끼고 있는 휜을 번갈아 보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신나 하는 것 같아 그냥 다시 서류에 눈을 돌렸다. "오오! 이제 잘하시는 데요!?" "원래 배우는 게 빠르다고." "딱 세 번만 더 해보시고 이제 다른 걸로 넘어가죠." "다른 거?" "예! 이번에는 결투 시에 기품 있게 검을 뽑고 위압감 있게 들어올리는 법입니다!" "그거야 쉽지!" ……테밀시아의 집무실이 전처럼 조용하기는 아예 그른 듯 싶었다. 휜이 난데없는 결투 신청 연습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그가 테밀시아의 거처를 별 생각 없이 구경하고 있을 때, 테밀시아의 보좌관을 지망하는 귀족 청년과 마주친 일이 있었다. 그 청년은 시골 귀족으로 순전히 출세하기 위해서 어렵게 이곳을 찾아온 것이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막 루카다가 테밀시아의 거처 근처에 비어 있던 작은 별채에 자신의 짐을 옮기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었다. 이리저리 인맥을 뒤져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허탈하게 돌아가야만 했던 그가 공연히 휜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테밀시아가 사다 준 고급 옷을 입고 있었던 휜이 그의 눈에는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보좌관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뭐야, 이제 보니 테밀시아 경도 남색에 취미가 있었던 모양이지?" "……?" 애당초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웬 녀석이 뭐라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휜의 귀에 들려왔다. 자신을 보고 비아냥거리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휜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본 청년, 투이르는 조소를 한껏 지으면서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휜은 아무 답도 하지 않은 채 얼굴만 찌푸렸다. 귀족 식 인사를 그가 알 턱이 없었고, 또 안다고 해도 인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투이르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확실히 생기고 봐야 하는 모양입니다. 예의조차 모르는 자가 보좌관이 되다니." "……?" 휜은 뭐라 쏘아붙이려다가 뒤에 이어지는 보좌관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저 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던 것이다. "확실히 외모는 중요하지요. 인간처럼 탐미에 미친 종족도 없으니까요. 때문에 인간에게 외모란 선천적 재능이자 무기이지요." 뒤에서 들려오는 명랑한 음성. 루카다였다. 그는 천천히 휜의 옆으로 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겠지요?" 부드러운 미소와는 달리 확실한 조롱. "뭐, 뭐……!" "짐은 다 옮긴 거야?" "예. 원래 몸만 와도 되지만 어머님께서 하도 성화여서요." 자기는 완전히 무시하고 둘이서 대화를 진행하는 둘의 모습에 투이르는 이를 갈더니 이내 손에 낀 장갑을 벗어 휜에게 던졌다. 얌전히 맞아줄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었던 휜은 그것을 손으로 쳐내 버렸다. 경건한 결투 신청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모습에 투이르는 분노했다. "왜 살상 능력도 없는 장갑을 던지는 거지? 던지려면 최소한 단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아?" 대화라기보다는 혼자 중얼거리는 휜에게 루카다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귀족에게는 쓸데도 없는 허영이 많은데, 이것도 그 중 하나죠. 결투 신청이라고 하는 건데, 자신의 명예를 손상한 것에 대해 응징을 하고자 하는 거 에요." "헤에. 말로만 들어 봤는데……. 꽤 실용성 없는 짓이군." 둘의 대화에 투이르는 무언가 감을 잡았는 지 경멸조로 말했다. "천한 제피모였던 것이냐? 장갑을 던진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군. 제피모 따위가 이곳에 있다는 건 시종이라는 뜻이겠지? 다른 이의 시종을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는 일. 흥! 운 좋은 줄 알아라." 원래는 무례한 일을 벌린 시종은 주인이 아니라도 그 자리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세력하나 없는 시골 귀족이 세력가의 집에서 마음대로 횡포를 부릴 수는 없었다. 원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하지 않던가? 투이르가 돌아서 그냥 가는 것을 무심히 보는 휜과는 달리 루카다는 제동을 걸었다. "제가 듣기로는 경께서 주군을 모욕하셨습니다. 하지만 알아서 꼬리를 말고 가시니 굳이 거론하지 않기로 하지요." 루카다가 누구를 주군으로 모셨더라? 엉뚱한 고민을 하는 휜과는 달리 투이르는 좀더 현실적인 일을 걸고 넘어졌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살벌하게 들리는 그의 반문에도 루카다는 활짝 웃으며 답했을 뿐이었다. "그럴 리 가요! 저는 저의 주군이신 테밀시아님을 남색가라 모욕한 경의 언사를 말씀 드렸을 뿐입니다." "그, 그건……!" 당황하는 투이르에게 루카다는 확인사살을 날렸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남색을 즐긴다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무리에 저의 주군을 낀다는 것은 확실한 모욕이며 무례임을 경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 그게……." "그 모욕에 대한 결투를 청하러 조만간 가겠습니다. 부디 그 동안 검을 조금이나마 연마하시길. 아! 유서라도 미리 만들어 놓으시는 것도 좋을 듯 싶군요." 유서라니! 물론 결투 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런 말을 노골적으로 하는 것은 상대의 실력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뜻이었다. 볼품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투이르는 자존심 빼면 시체인 남자였다. 그런 그가 왜 당장 결투를 청하지 않는 지를 의아해 할 겨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지! 자네야말로 유서를 만들어 놓는 게 좋을 거야!" 획 돌아서는 투이르에게 또다시 경악할 만한 말이 들려왔다. "물론 제가 주군의 명예를 회복 시켜 드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주군의 절친한 친구 분께서 하시겠다는 군요. 바로 여기 계신 이분 말입니다." "……!?" "에!?" 황당한 얼굴을 하는 휜에게 루카다는 슬쩍 윙크를 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이 있다는 것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테밀시아는 가끔 자신을 불만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는 휜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참! 잊을 뻔했군요." 루카다가 손가락을 튕기며 외치더니 서랍에서 편지를 꺼내 테밀시아에게 건넸다. "집사님이 아침에 건네주더군요. 락아타 제국에서의 초대장이라고 합니다." "락아타 제국?" 오르세만 가는 워낙 명성 높은 가문인지라 해외에서도 적지 않은 초대장이 날라 오곤 했다. 사실 이런 식의 외교 관계도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때문에 해외 인사들과의 두툼한 인맥을 유지하는 것은 스스로의 기반을 굳이는 일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해외에서 이런 초대장이 날라 온다고 해도 그리 특이한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대장을 보내온 곳이 문제였다. 적대 국가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우호 국가도, 중립 국가도 아닌 제국, 락아타. 바로 붙어 있는 국토간의 일 때문에 소소한 마찰은 늘쌍 있을 일이고, 요즘은 조용하지만 중소규모의 전쟁도 꽤나 빈번한 곳이었다. "오만한 락아타 제국에서 허례식 초대장을 보낼 리도 없고……." 잠시 고민하던 테밀시아는 초대장을 책상 위로 던져 놓으며 말했다. "가지." "준비하겠습니다." "나도 갈래! 락아타는 일 때문에 몇 번 가봤지만 제대로 구경해보지는 못했거든." "그래라." "자! 가고 싶으면 좀더 연습에 박차를 가해야겠군요. 해결할건 하고 가야죠?" "좋아! 일주일 안으로 끝내버리자고!" 락아타의 초대를 받아들인 그날로부터 일주일 뒤, 휴첼의 기사단장으로써 황성의 호출을 받은 테밀시아는 정식으로 갑옷을 차려 입고 말에 올라탔다. 평소라면 일행이 많기에 마차를 탔겠지만, 그 일행이라는 작자들이 오전에 일이 있다며 함께 나가 버렸기 때문에 혼자 유유히 말을 타고 가기고 한 것이다. 휴첼의 문장이 새겨진 청색 갑옷은 고풍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보통 귀족 기사들의 장식용 갑옷들과는 질과 급이 달랐다. 셀 수 없는 격한 전투를 겪으면서 몇 번이나 피를 흠뻑 먹었던 갑옷인지라 고풍스러움 내면에 흉흉한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용병의 것 마냥. 그렇다고 광기에 젖어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주인을 닮은 그 것은 절제된 살기를 머금고 있을 뿐, 스스로의 살기에 파묻혀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허리에 얌전히 매여 있는 황금빛 검도 마찬가지였다. 오르세만 가의 가보인 그것은, 선대 그 누구보다도 테밀시아의 손에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갑옷과는 달리 검신 자체에 배여 있는 광기가 주인의 손에 의해 절제되어 있었다. 투구 대신 끼고 있는 서클렛. 청색과 백색의 절묘한 조화가 이루어져 있는 그것은 테밀시아의 선조가 고대 던젼에서 구했다는 마법 무구였다. 갑옷과 망토의 왼쪽 가슴 쪽에 새겨져 있는 휴첼 기사단의 문장. 그것은 고귀한 혈통을 잇는 자, 훼오트라 아나가 손수 만들어 주었다는 문장이었다. 청색으로 된 묘한 생물.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훼오트라 아나는 이렇게 답해 주었었다. '지워진 존재 중 하나' 라고. 그것은 거대한 뱀과 흡사했지만 뿔과 수염, 발이 있었고, 지성과 기품이 있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구름들 사이로 보이는 발에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담아내고 있는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고작 문장에서 이런 기운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은 정교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훼오트라 아나가 준 그대로를 표현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장인이 몇 년을 공들여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고고해 보이는 존재는 그 문장이 새겨진 갑주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남자.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이었다. 오만한 황금빛 눈동자에 서려 있는 따뜻함과 냉정함이 혼합되어 있는 묘한 기운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존재. 황성으로 들어가는 그에게 문지기들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떡임으로 인사를 받은 그는 감히 '광대하다'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넓은 황성의 정원과 멀리 보이는 성을 보았다. 감흥 없이 잠시 그것들을 보던 그는 이내 말을 몰았다. 황성에서 거주하는 근위 기사들이 경례하는 것에 응하며 안으로 들어선 그는 높은 옥좌에 앉아 궁녀들이 손수 따주는 포도 알을 먹고 있는 왕을 꼿꼿이 보았다. 그리고 일곱 걸음을 옮긴 뒤,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의 예의로써 인사를 했다. 기사로써 온 테밀시아는 앞으로 흘러나온 망토를 뒤로 넘기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기사의 표본이라 할 정도로 교과서 적인 인사였지만, '그'라는 이유만으로 그 인사는 오만해 보였고 박력이 배여 있었다. 그것이 거슬리는 황제였다. 자신을 부른 용건을 말하길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테밀시아를 한참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조소를 지었다. 제까짓 놈이 아무리 날뛰어 봐야 어차피 수많은 신하중 한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가축'말이다. "근래 락아타 제국에서 서신이 왔소. 이번에 연다는 대규모 연회의 초대장이었소. 경에게도 갔으리라 생각하오." "……." 침묵으로써 답하는 테밀시아의 모습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말이……!" 소리 높여 추궁하려던 황제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지만 테밀시아는 굳이 올려보려 하지 않았다.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에일라야, 그녀인 것이다. 현 황후, 에일라야는 진노한 황제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안마를 하듯 움직이는 손가락이 요염한 율동을 보여주었다. 황후라기 보다는 정부와 같은 모습에 주위의 신료들의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황제의 풀어진 얼굴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테밀시아의 세력권 안의 귀족들은 보이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의 매력적인 수장은 가끔씩 불안하리 만치 오만한 태도를 보여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 하지만 그 점마저도 그의 매력으로 보인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락아타 제국의 초대에 황태자가 응하기로 했소. 이제 겨우 16이 되기에 아비로써 걱정될 수밖에 없지. 게다가 근래 몬스터 사태로 밖은 위험하기 그지없으니……. 마침 경도 락아타의 초대에 응해 갈 채비를 하고 있다니 태자와 동행하여 호위에 힘쓰도록 하시오." "황공하옵니다만 저는 오르세만 가의 대표로써 초대를 받았기에 휴첼 기사단을 동원하지 못합니다. 저 개인만으로 태자 마마를 호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근위 기사단만으로도 충분……." "나는 이미 명을 내렸소." "……저 개인에게 내리신 명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건방진……!" 옥좌를 거칠게 내리치며 일어나는 황제는 또다시 뒷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거친 행동으로 연약한 황후가 넘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황후, 괜찮으시오?" "예. 조, 조금 놀랬을 뿐입니다." 약하게 떨면서도 웃음을 지으려는 사랑스러운 황후를 보자 황제의 뇌리에는 조금 전의 사소한 일 따위는 자리잡지 못했다. 그는 얼른 이번 알현을 끝내려는 마음에 조급한 명을 내려버렸다. "경 개인에게 내리는 명이니, 태자의 안위에 힘써야 할 것이오. 만일 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 시에는……." 일어나려던 황후가 비틀거리자 얼른 부축해 주며 황제는 그대로 알현장에서 나가 버렸다. 그와 함께 나가던 황후가 테밀시아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은 것을 황제를 제외한 모두가 볼 수 있었다. =========================================================================== 실수입니다!!! 전회에 올린 1등...;;; Dain 님이십니다요;;;; 그런데.... 왜들 주소를 안 알려주세요....ㅡ.ㅜ 책받기 그렇게 싫으십니까요? 허허허.... 줘도 안 먹는데.....ㅡ.ㅜ 그럼~ㅡㅡ/ 아해의 장-206 -------------------------------------------------------------------------------- Ip address : 211.243.9.14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오늘도 황후 전하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네요." "뮤비라." 황성의 정원을 여유 있게 즐기며 걸어가던 테밀시아아게 말을 거는 미남자. 뮤비라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가득 짓고 있었다. 결혼을 한 후에도 성에서 매일 마주치지만, 그 만남이 그렇게 안타깝고 그리울 수가 없었다. 테밀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늘 손에 들고 있는 서류더미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보며 의아해 하는 테밀시아를 보고 뮤비라는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카시안님과 함께 초대받아 온 것이라 서요." "아아……." 뮤비라는 자신의 부인의 애칭을 입에 담지 않았다. 테밀시아의 앞에서만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늘 타인을 부르듯 존칭을 붙이며 거리감을 유지했다. "누구의 초대인지 안 물어 보세요?" 장난기가 섞여 있는 질문. 그런 뮤비라의 머리를 부벼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물었다. "누구의 초대지?" "바로 에일라야 황후 전하의 초대랍니다. 전부터 '누구'에게 관심이 많았던 그분께서 저에게 물어 볼 것이 많은 모양이에요." "사생활 침해 아닌가?" "원래 사랑에 빠진 여인에게는 법을 적용시킬 수는 없는 거랍니다." "사랑? 하하. 농담이겠지? 그 여자는 단지 애욕 상대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라고." 냉랭한 테밀시아의 말에 뮤비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봤을 때, 테밀시아는 자신의 매력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듯 했다. 물론 그와 가장 밀접하게 있다고 볼 수 있는 여자들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혹은 상대에 대해서 냉혹했다. 그 모습이 왠지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몸부림으로 보여 가슴이 아팠다.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있을까, 이 남자는? 까마득히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있었지만 그가 누군가를 사랑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유일한 지기라는 가면으로 그의 옆에 붙어 있는 자신에게는 늘 상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써 일뿐. 만일 이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면 낭만적으로, 너무나 순수하게 빠질 것이라 막연히 짐작해 보며 다시 씁쓸하게 웃어보는 뮤비라였다. "어디 아픈 건가?" 기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테밀시아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집어보았다. 다행이 열은 없는 듯 했다. 혹시나 다른 곳이 아픈가 해서 살펴보는 테밀시아의 시선에 뮤비라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전혀 이상 없어요." "건강은 있을 때 지키는 거야." "염려 마세요. 이래뵈도 꽤 건강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 그런데 부인은?" "볼일이 있어 먼저 출발했거든요. 곧 카시안 님께서도 도착하실 겁니다." "그런가……." 뭔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테밀시아를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테밀시아 경. 여기 계셨군요. 이번 여행의 일정에 대해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 가지." 테밀시아는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뮤비라에게 손을 두어 번 저어주며 근위 기사의 뒤를 따랐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뮤." "벌써 오셨습니까? 카시안님."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 해주는 남편을 보며 약간 어색한 얼굴을 하던 카시안은 이내 체념의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애칭을 허락해 주지도 않았고, 그녀의 애칭을 묻지도 않았다. 애칭의 허락이라는 것이 부부의 사이에 가장 기본 되는 첫 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허락 받지도 못한 애칭을 함부로 입에 담는 그녀의 행동은 묵인하면서도. "황후 전하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제가 많이 늦은 모양이에요." "아니오. 알현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 것뿐이죠." 다과상은 후원의 정원에 차려져 있었다. 하기의 마지막 비가 그치고 찾아온 가을의 좋은 날씨였기 때문이었다. 암살자의 위험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황후는 막무가내였다. 겉으로야 근위 기사들을 믿는다고 하지만, 포기하기 힘든 날씨였던 것이다. 뮤비라의 예상대로 황후, 에일라야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황족을 기다리게 한 것은 무례. 뮤비라는 허리를 약간 숙여 정중히 사죄했다. "귀하신 몸, 기다리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알현이 일찍 끝난 것을 요. 앉으세요. 오늘은 날씨가 좋아 가만히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군요." 우아한 듯 쾌활한 답변. 에일라야 자신을 잘 내포해 주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를 권하고 나서야 뮤비라는 아내에게 의자를 빼주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사이 좋아 보이는 그 모습에 에일라야는 부러운 시선을 잠시 보냈다. "금술이 좋아 보이십니다. 여느 귀족 가의 부부와는 달리……. 흔하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군요." "과찬이십니다." 격식 차리지 않은 말. 그것을 두고 천박하다, 교양이 없다 하지만 황후인 그녀에게는 되려 매력으로 작용하는 요소였다. 세상이라는 것이 공평해서, 무조건 곡해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미화시키려 드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귀천에 상관없이 공정한 황후, 그 지고의 자리에서도 털털한 성품과 활발함을 갖춘 매력적인 여인. 동전의 양면과 같이 '천박한 정부'와 함께 늘 그녀를 따라 다니는 미사여구였다. "차 향이 좋아요. 저는 뜨거운 것을 잘 못 먹지만 이것은 뜨거워야 제 맛이라 서요. 어서 드시라 권하고 싶군요." 에일라야는 아직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찻잔을 들어올리며 권했다. 향을 음미하기 위한 침묵이 잠시 맴돌았다. "그 분의 심기는……어떠하신 가요?" 낮게 물어오는 질문. 뮤비라는 그녀가 볼을 붉히며 묻는 것을 보며 테밀시아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애욕의 상대라…….' 이번만큼은 테밀시아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가 보기에 에일라야의 눈에 배여 있는 감정이 거짓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이 진실이던 거짓이던 테밀시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밀시아에게는 자신의 가족 외에는 모든 타인이 '이용가치'의 유무로 구분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뮤비라는 자신만큼은 그에게 '가족'과 마찬가지이리라 잠시 사치스러운 생각을 해보았다. 의지의 반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답을 기다리고 있는 에일라야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황족에게 답을 늦게 한다는 것은 실례지만 생각할 시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괴이치 않는 듯 보였습니다." "다행이군요." 에일라야의 눈이 기분 좋게 휘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그녀는 본격적으로 물었다. 어차피 자신이 금안의 도도한 지배자, 테밀시아에게 흠뻑 취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니,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눈앞의 남자는 테밀시아의 유일한 지기이자 가장 가까운 측근. 이제는 다른 세력권의 수장의 사위가 되었지만 그 근본까지 변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분은 언제나 매력적인 분이시지요. 위험할 정도로……. 폐하께서는 그 지엄한 옥좌를 수십 년을 지켜오신 분. 그 분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랍니다." "반역이라도 할 것이라 생각하시는 걸까요?" 황족의, 그것도 황비의 앞에서 반역이라는 불경한 단어를 입에 담다니! 그것은 무례의 차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일라야는 생긋 웃으며 말을 받아주었다. "글쎄요. 그 분께서는 굳이 옥좌에 앉지 않으셔도 얼마든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분. 귀찮게 옥좌를 찬탈하려 하지 않아도 이미 정상에 서 있으신 분. ……아닌가요?" "어차피 신하일 뿐입니다. 정상이라니요? 농담이 과하십니다." 아무리 에일라야의 앞이라 해도 말의 경중을 신중히 가려야 했다. 소소한 말 한마디에 얼마든지 절벽 아래로 떨어 질 수 있는 것이 정치인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가?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스스로를 낮춰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법이다. 테밀시아는 굳이 자신을 낮추려 들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우위에 두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 적절한 대응이 그를 '지배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면서도 반발을 사지 않도록 해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뮤비라 경께서는 그 분과 십대의 후반을 함께 모험을 즐기며 보내셨다지요? 어떤 모험을 겪으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모험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는 붙지 않습니다. 고작 2년 동안 유랑을 했을 뿐인 것을 요." 오르세만 가의 가주, 즉 테밀시아의 아버지가 집을 떠나 행방불명이 되면서 실질적인 가주 권은 테밀시아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당시 20살이었던 테밀시아는 집은 커녕 수도에도 없었다. 18살 때 뮤비라와 함께 집을 나와 세상을 떠돌아 다녔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출로 시작한 짧고 치기 어린 여행이었지만, 그것의 진정한 묘미를 알아버린 테밀시아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정식으로 청을 넣어 몇 해 간 떠돌기로 했던 것이다.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만남을 마주했다. 지금은 심장 위에 새겨져 있는 마법 진. 그 마법 진에 잠들어 있는 붉은 검 또한 뜻 깊었던 여행 중에 건진 무수한 것들 중 하나였다. 신분에 상관없는 많은 이들을 만났고, 그들의 삶을 보고, 듣고, 경험했다. 그 것에서 배운 값진 배움에 비하면 이 고대 검은 추억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기대에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에일라야를 보며 뮤비라는 잠시 고민했다. 물론 둘의 여행은 귀족 가에서 커, 귀족 가에서 죽을 단순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갈 그녀들에게는 매력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둘만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정처 없는 유랑 길이었기에 힘들었던 건만 기억에 남을 뿐. 마땅히 해 드릴 이야기가 없군요. 저는 황후 전하께서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궁금한 걸요. 그 분께서 황후 전하를 뵈었을 때, 이미 황후 전하께서는 그 분을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요." "그건……. 마찬가지로 별 이야기 거리가 아니라 입에 담기가 뭣하군요. 아, 차가 식습니다." 에일라야는 눈앞의 남자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상대 입에 담고 싶지 않아 하는 혼자만의 소중한 것을 방패막이로 쓰다니…….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남자의 깊은 내면에 고요히 깃들여 있는 거대한 감정을. "카시안 부인." "예, 황후 전하." "당신은 외 사랑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요?" "외……사랑 말입니까?" 당황하며 남편을 돌아보는 카시안. 총명한 그녀로서도 에일라야가 묻는 질문의 주체를 알 수 없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남편을 둔 자신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테밀시아 경을 사모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황후 자신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누군가를 혼자 평생 사모하리라 맹세한 남편을 말하는 것일까? 그 어떤 이의 사랑이던 답은 하나이다. "슬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작게 답하는 카시안에게 미소를 보이는 에일라야. 고개를 숙인 체, 찻잔을 내려보고 있던 카시안은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뮤비라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띄어 있는 미소는 명백한 비웃음. 뮤비라는 잠깐 커진 눈으로 그런 그녀를 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마주하면서 또다시 눈앞의 남자의 견고한 '가면'에 내심 혀를 차보는 에일라야였다. "하지만 외 사랑이라도 스스로가 그 상대에게 무언가 '의미'가 된다면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슬프고 불쌍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사랑하는 이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 완벽한 외 사랑이 아닐까요?" "……그렇겠지요." 에일라야의 눈에 일순 표독한 기운이 서렸지만 이내 사그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잘 숨길 줄 아는, 아니 숨겨야만 살아 남는 후궁 출신이었던 것이다. 가장 무난한 예를 들자면, 후궁이면서 비를 모시는 입장을 들 수 있다.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티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목이 잘릴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가장 천한 후궁 출신으로써 다른 이들의 괴롭힘을 받으며 버텨온 독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만일 상대가 뮤비라가 아니었다면 방금 잠시 표출한 불만의 기도 들키지 않았을 것이었다. 뮤비라는 쿠키를 집어드는 에일라야에게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차의 향을 음미했다. "외 사랑은 슬픈 것이 아니랍니다." "네?"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티타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허리에 매여 있던 검을 손질하며 침묵을 지키던 뮤비라가 입을 열었다. 남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카시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일생의 하나뿐인 영원……. 그것을 찾는 것이, 또 그것을 확신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저는 알고 있어요. 때문에 외 사랑이라 할 지라도 그것을 찾았고, 그것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아련한 눈을 하는 남편을 슬프게 보던 카시안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것은 외 사랑을 하고 있는 저에게 하는 말인가요? 당신은 이미 행복하니까 슬프다고 여기지 말라는……그런 말씀이신 가요?" "……." 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뮤비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고 결혼해 달라고 애원하던 그때와는 달리 왜소해 보이는 모습. 하지만 뮤비라는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여타 미사어구로 꾸며진 위로의 말이 아닌, 자신의 마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그녀가 곡해하고 있는 자신의 말을 냉정하게 수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요. 제가 한 말은 저의 경험, 저의 현실일 뿐. 카시안님께 대입시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천천히 떨리기 시작하는 카시안의 어깨를 조금은 안타까운 눈으로 보던 뮤비라는 말없이 검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작게 미동하는 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둘은 그렇게 침묵을 지켜갔다. 한참 후, 마부가 도착을 알렸다. 뮤비라는 먼저 내려 카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줍게 손을 얹는 그녀를 무심히 보던 뮤비라는 작게 속삭였다. "그러기에 저는 행복하지만, 당신은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밖에 없겠군요." 카시안이 그것을 들었던 안 들었던 상관없었다. 뮤비라는 아내에게서 눈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광대한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늘 이 곳을 보며 되새긴다. 이곳을 가지고 말 것이라고. ===================================================================================== 무하는 언제 나와요? 라고 물으신다면 저의 답은 오직 하나! 나올때 되면 나옵니다.(퍼퍼퍽!) 흠흠. 저는 주인공 이야기도 아주 좋아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아해서요^^ 좀더 많은 이야기를 풀고 싶은데... 하하^^ 아해의 장-207 -------------------------------------------------------------------------------- Ip address : 211.187.67.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어이, 민!" 깔끔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소년을 부르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자, 검녹색 머리카락의 평범한 외모의 남자가 손을 휘휘 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 곳에서 만나는 건 처음인데?" "이쪽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이곳이 네 루트였나?" "그 중 하나지." 민은 특별한 자신만의 루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영역 권이 강한 뒷골목의 구성원치고는 드문 케이스였다. 그랬기에 이 곳에 들어온 지 얼마 안돼 거의 대부분의 지리를 알게 됐지만 말이다. 현재 민은 어지간한 뒷골목 패거리보다도 많은 샛길을 알고 있었다. 길도 많이 잃어 버렸었지만 그때마다 무슨 수를 쓰는지 재주도 좋게 잘 헤어 나오곤 했다. "요즘은 계속 의뢰에 실패하고 있다며? 컨디션이 안 좋은 거야?" "구차하게 무슨 컨디션……. 그냥 실력이 부족한 것 뿐이야." "이봐. 나를 누른 솜씨로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돼?" "검과 이 일과는 무관하니까." "아주 무관하지는 않는다고!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별로. 그보다 그날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딜린과 보낸 밤이 꽤 격렬했던 모양이……." "크악! 너까지 헛소리할래!?" "하하." 자연스럽게 갈망하는 안식처로 향했다. 그곳은 전직이 황실 요리사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음식솜씨가 좋은 곳이었다. 물론 술맛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비록 민은 아직 술맛까지는 제대로 즐길 수 없었지만. "제그 녀석 근래 더 흉폭 해졌다고 하던데, 조심하라고." "……녀석이 왜?" "낸 들 알겠냐? 암튼 넌 미리 때문에 녀석한테 찍혔으니까 당분간 뒤통수를 조심해야 할거다." "흐음……." 코너를 돌자 바로 갈망하는 안식처의 간판이 보였다. "마스터, 우리 왔어!" "어이!" 인사하며 들어가기가 무섭게 둘을 반기는 이가 있었다. 할 일 없이 아이스크림을 동 내고 있던 딜린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뜨고 있던 수푼을 들어올리며 인사할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뒤의 발언이었다. "하니! 그날 무리시켜서 미안해. 이제 일어난 거야?" "무슨 헛소리야! 누가 무리를 해! 숙취 때문에 고생한 것뿐이라고!" "쿡쿡." 민은 키득거리며 딜린에게로 걸어갔다. 그 동안에도 그의 입담을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도 성공을 해야 할텐데 말이야, 하니." "성공?"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걸어가던 록에게 딜린은 윙크를 하며 말했다. "우리들의 베이비 말이야. 이번에 나, 배란기였으니까 성공할 가능성이……." "죽어!" 주먹을 굳게 쥐고 달려드는 록을 가볍게 피하며 딜린은 흐느꼈다. "흑흑. 이래서 믿을 남자는 없다는 거구나. 이제 와서 매정하게 버리기야? 나는 그렇다 쳐. 우리 애는?" "크아악!" "딜린, 여기 부탁한……. 아, 록과 민도 와 있었구나." 주방에서 막 나온 마스터, 키안이 소동을 잠재우며 테이블로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자, 이번에 네가 부탁한 생 아이스크림이다. 특별히 내가 만든 거라고." "와아! 고마워, 마스터! 우리 뱃속의 애가 자꾸 이게 먹고 싶다고 하지 뭐야?" "으으……!" 자신의 가슴을 팍팍 치며 답답해하던 록도 이내 체념하고 딜린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제서야 씨익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음미하는 딜린이었다. 민은 알아서 차를 가져다주는 키안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받아들었다. 씁쓸한 맛이라 민 외에는 잘 찾지도 않는 차였지만, 워낙 단골이라 키안이 일부로 구해 놓은 것이었다. 대부분 키안의 식단에 맞춰서 자신의 식사를 정하는 것에 비하면 딜린이나 민은 일종의 특별대우를 받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았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뻔질나게 드나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참, 민. 근래 제그 녀석이 더 날뛰고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록에게 들었어. 갑자기 왜 그런데?" "어떤 미친 녀석이 제그 뒤를 밟았대." "그거야 종종 있는 일이잖아?"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던 록이 그제서야 궁금증을 내보였다. 그의 앞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맥주가 놓여져 있었다. 그것을 꿀꺽꿀꺽 들이키다가 질문을 하는 록에게 딜린은 막에 입에 넣었던 수푼을 흔들어 보이며 답했다. "자세히는 말이 돌고 있지 않지만, 그 미친 녀석이 웬일로 성공했다고 하더군. 성공 말이야, 성공." "호오?" "그래서 제그가 집에 꿍쳐 둔 보물을 발견하게 된 모양인데. 손대려다가 걸려버린 거지. 제그는 녀석을 은신처 밖, 완전 외각으로 끌고 가서 갈기갈기 찢어 죽인 모양이야. 내가 알 수 없는 건, 그리 실력이 좋다고 볼 수 없는 제그의 손에 꽤 실력자일 듯 보이는 그 미친 녀석이 죽임을 당한데다가 외각까지 얌전히 끌려갔다는 건데……. 의외의 실력자일지도 모르겠어, 제그 녀석." "흐음……." 차를 마시며 민은 생각했다. '내가 알 수 없는 건, 당신이 어떻게 그 사건을 그토록 잘 알고 있느냐 하는 거야.' 순간 딜린과 눈이 마주쳤다. 민의 하얀 마스크 속에 유독 돋보이는 짙푸른 남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딜린은 피식 웃으며 아이스크림으로 주의를 돌렸다. 둔한 록은 알 수 없겠지만, 이미 민과 딜린은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있으며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에게도 나는 알 수 없는 녀석이겠지, 딜린?' 민은 약하게 김을 뿜어내고 있는 찻잔을 내려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당장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보물이라…….' 뜻하지 않은 난제의 키워드를 들은 기분이었다. "요즘 의뢰에 자꾸 실패하고 있다며? 마스터가 타 등급 일을 맡기기로 한 것을 철회하고 밑바닥부터 시작하라고 하더군." "어차피 그 때 파 등급의 일은 일도 아니었잖아. 사전 조사만 철저하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해." 덤덤한 민의 답을 들으며 딜린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깝게 됐다고 위로하는 록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민은 말없이 차를 마시며 머리를 복잡하게 굴려댔다. "아! 나 이번에 의뢰 받으러 왔는데! 돈이 떨어졌거든. 그럼 난 레타에 다녀올게." 맥주를 한번에 다 마신 록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딜린은 한 손을 저어 보이며 다녀오라고 인사했고, 민도 마찬가지로 손을 저어 보였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찻잔의 달그닥 거리는 가벼운 마찰음과 유리 그릇과 스픈 사이로 울리는 파경음이 정적을 깨고 있던 어느 순간에 딜린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군, 민." "별로. 그쪽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일 테니까." "난 궁금한 게 많은데?" "의외 군. 뭐가 궁금한데?" "굳이 물어봐도 알아내고 싶지는 않아. 물어서 알아낸 정보는 그리 쓸모가 있지 않거든." "멋진 말인데. 두고두고 새겨 두겠어." 평소 나누던 담소와 전혀 다르지 않는 어조와 행동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뜻은 생각하기 따라서 무궁무진하게 깊었다. 딜린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멋진 말을 알려준 대가로 한가지 듣고 싶은 게 있어." "물어서 알아낸 정보는 쓸모가 없다며?" "이건 합당한 '대가'를 치룬 정보니까 다르지."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는 민에게 딜린은 뻔뻔하다 싶을 정도의 얼굴로 넉살좋게 대꾸했다. 민은 굳이 재촉하지 않고 몇 모금 남지 않은 차를 천천히 식도 너머로 넘겼다. 딜린은 약간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듬뿍 퍼 입에 날랐다. 그리고 나서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일부로 의뢰를 실패하는 이유, 아니 저의가 뭐지?" "과대평가 해주니 고맙군." "질문을 바꿀까? 네가 길드에서 노리고 있는 게 뭐지? 어울리지도 않는 뒷골목 생활을 유희거리 삼아 해보는 귀족도령이 아닌 건 확실한데 말이지." "나도 하나 묻고 싶군. 일부로 스스로를 가볍게 보이려 하는 저의가 뭐지?" "……." "질문을 바꿀까? 네가 스스로를 숨김으로써 얻으려는 것이 뭐지? 어울리지도 않는 연기자의 생활을 유희거리 삼아 해보는 삼류 건달이 아닌 건 확실한데 말이지." 약간의 정적. 딜린의 어깨가 천천히 들썩여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입에서 억눌린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하더니 결국 거침없이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쿠, 쿡……하하하!" 민은 웃고 있는 딜린을 무시한 체 얼마 안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계산대로 가는 그의 뒤로 계속 웃어대는 딜린이 있었다. 마스터 키안은 요리를 손보느라 주방으로 들어가 있었고, 묘하게 한가한 숍에는 웃어대는 딜린과 돈을 꺼내놓는 민만이 있었다. 알아서 셈을 치룬 민이 문을 밀고 나가려던 찰나에 막 웃음을 멈춘 딜린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상관하지 않아.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과 겹쳐질 리가 없으니……. 뭐, 상관없겠지." 민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 물론 잠시 고민은 했었다. 여기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밝히고 본격적으로 그를 끌어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는 산과는 달랐다. 믿을 수 있다는 느낌과 확신이 없었다. 때문에 그냥 나와버렸다. 너무 성급하게 가서는 안 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나온 민은 잠깐 뒤를 돌아 숍의 문을 보았다. "헛걸음은 아니었어. 모은 키워드는 두 개인가……." 보물,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 민은 작게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와 같이 발길 닿는 대로 걷던 그는 오랜만에 낯선 길로 접어들었다. 근처의 어지간한 샛길은 꿰고 있었기 때문에 흔히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별 생각 없이 걸음을 놀리던 그의 귀에 흔한 소음이 들려왔다. "못 보던 얼굴이지?" "이렇게 곱상한 얼굴을 어떻게 잊겠냐? 크크. 취기에 품은 계집년들도 이만큼 곱상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 흔한 소음 속에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희롱 당하는 이의 대꾸가 없다는 것 정도. 희롱 당하는 이가 뒷골목에서 닳고닳은 녀석이라면 애당초 이런 희롱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칼부림 소리가 들려왔을 테고, 이제 막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은 녀석이라면 두려움과 치기 섞인 반박의 소리가 들려왔을 터였다. 간혹 있는 일이지만, 길을 잃어 잘못 이곳에 접어든 평범한 녀석이었다면 울먹이며 비켜 달라고 했을 테고 말이다. 헌데 마치 희롱하는 두 사내가 벽을 대고 말하고 있는 것 마냥 아무런 대응도 나오지 없지 않는가? 민은 끼어 들 생각은 없었지만 이 묘한 현상이 궁금해 슬며시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뒷골목에서는 적당한 무관심과 적절한 방관이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또한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하는 것이 암암리에 정해진 법칙이기도 했다. 그래야만 살인이 흔한 이곳에서 복수라는 피 바람이 몰아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복수라는 단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어느 패에 소속된 사람이 개인적인 원한과는 상관없이 다른 패에 소속된 사람에게 살해당했다면 그것은 실추된 명예를 위한 복수가 성립된다. 일전의 제그의 일도 그러했다. 단 그는 개인적인 원한, 혹은 자신만의 법칙에 의한 살해였기에 대대적인 복수가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그가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일명 '독립파'의 일환이었기에 무난하게 넘어간 것이기도 했다. 만일 그가 어느 패에 소속된 상태라면 상당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리라. 이 바닥이라는 곳의 생리상 어느 패에 들지 않은 상태에서는, 카 등급의 실력이 없는 한 이모저모에서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패에 들어감으로써 제한 받는 것도 제법 있고 의무로써 행해야 하는 것들, 이를테면 일정한 회비를 내는 것들이 꽤 있지만 그만큼 보장받는 것도 많았다. 일단 실력이 모자른 녀석들이 '패'라는 보호막을 두르게 되는 것이 그 첫 번째였다. 영역 안에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습격이나 암살 등에서 멀어지게 된다. 선배들로부터 기술을 배울 수 있으며 무기를 조달 받을 수도 있다. 버거운 의뢰를 받았을 때는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때문에 초짜 일수록 패에 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어느 정도 실력이 쌓아졌다고 해도 탈퇴는 불가능. 처음부터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실력과 힘이 없다면 패에 드는 것만이 길이었던 것이다. 또 패에 드는 것이 힘을 쌓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선배들의 도움은 매우 유용한 거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독립파는 극소수 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실력이 정말 뛰어난 카 등급의 대다수가 독립파라는 것이었다. 산도 몇 없는 독립파 중에 하나였고 슈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민도 독립파였다. 자신의 패가 없는 민은 당연한 말이지만 누군가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또 그와 친분이 있는 자들은 그의 도움을 빌릴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게다가 인간 혐오증인 그는 자진해서 누군가를 돕는 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검에 손을 대고 있는 이유는 희롱 당하고 있는 아이의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새하얀 백발……. 그의 첫 번째 지기의 눈부신 은발과는 분명 다르지만 아련한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 순백의 색.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창백한 안색. 그것은 자신을 희롱하고 있는 두 사내 때문이 아닌 다른 내적 요소, 즉 자신의 신체의 연약함 때문인 듯 싶었다. 하지만 민에게는 그런 것까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농도 짙은 희롱을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만 있는 아이와 자신의 손으로 자른 머리카락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던 지기가 자꾸 겹쳐져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가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두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뽑아든 검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얼마 안 되는 핏방울과 주변에 시체가 없는 것을 보아, 상흔을 입히는 정도에서 끝낸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전투에서 살인을 범할 정도로 심약한 사내가 아니었다, 민은. 검을 가볍게 휘둘어 피를 마저 떨꾼 다음에 천천히 검 집에 밀어 넣었다.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검은 부드럽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제서야 눈앞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칼부림에 놀랄 만도 하건만 작은 체구의 아이는 그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담고 있었을 뿐이었다. 민은 뜻밖의 모습에 놀라 물었다. "무섭지 않니?" 하지만 아이는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뜬금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드디어 만나게 됐군요." "……?" 노파의 것과 같은 새하얀 백발의 작은 아이. 이제 겨우 10살 정도 되 보이는 어린 외모에 차분하게 감겨져 있는 눈이 이질적인 키르바나와의 만남이었다. ========================================================================== 언제나 메일로 힘을 주시는 레니엘님^ㅡ^ 생일 축하드립니다^ㅡ^ 하루 꼬박 새서 겨우 한회를 마련한...; 선물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연참이었으면 좋았으련만... 한회쓰는데도 힘들었어요...;; 정말로 축하드립니다^ㅡ^ 아해의 장-208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민은, 아니 요크노민은 처소에 들어오자마자 욕실로 직행했다. 이제는 꽤 쌀쌀해졌기에 따뜻한 물을 욕조에 한가득 채우고, 옷을 벗다 문 듯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알이 잔뜩 배겨져 있던 팔에 서서히 근육이 잡혀가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가늘기 짝이 없었다. 깡마른 체구와 창백한 안색, 음침하게 내려앉은 남색 머리카락. 슬쩍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옆에서 어느 샌가 나타난 적금발의 매력적인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고 있었다. 강렬한 적색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화염의 수장, 불칸이었다. "뭘 그렇게 유심히 보는 거야?" "전에는 이런 내 모습을 보자면 형님과 다르다는 자괴감이 들었었는데……." 나직이 답하던 요크노민은 옆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이제는 별 느낌이 없어. 그냥 이 녀석이 나구나……정도랄까?" 그는 옷을 마저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 불칸은 욕조 옆에 앉아 턱을 괴고 요크노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작게 가슴이 뛰었다. 한번 끼얹은 물을 머금어대다가 결국에는 감당치 못하고 뱉어내는 남색 머리카락. 어찌 보면 검은 색으로도 보이는 부드러운 그것을 보자니 절로 손이 갔다. 조심스레 손을 가져대 쓸어 보았다. 천천히 떠지는 눈. 그것은 불칸이 너무나 좋아하는 남색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빛을 띄고 있었다. 길고 검은 속눈썹으로 감싸져 있는 그것을 가만히 보자면 바다 속을 유영하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지곤 했다. "이상한 아이였지, 그 키르바나라는 아이?" 중저음의 목소리. 노래를 불러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 요크노민의 말을 조금 늦게 이해한 불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확실히 묘한 인간이긴 했지." "백발이라……. 처음 봤어, 그런 머리." 다시 감기는 눈동자. 불칸은 아쉬운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만났다니?" 의아하게 묻는 민에게 웃어 보이는 아이. "오래 전부터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답니다. 만나 뵙고 싶었지만 아직은 운명의 안배가 따르지 않아 그럴 수 없었지요. 이제야 만남이 허락 됐네요, 청염(靑炎)의 운명을 걷는 자." "무슨……?" 키르바나는 창백한 얼굴에 맑은 미소를 가득 담았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가는 백색의 머리카락의 바람에 흩날리며 민의 시야를 방해했다. 비현실적인 모습에 민은 가만히 침묵했다. 한참 골목의 저편을 향하던 키르바나는 여전히 감겨진 눈을 한 채 민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힘없는 백색 머리카락이 그의 등 편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여기서 계속 지체할 수 없겠군요. 좀 전의 그들이 패를 몰고 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저의 은신처로 자리를 옮기죠." 먼저 발을 옮기는 키르바나의 뒤를 민은 말없이 따랐다. 감긴 눈 속으로 무엇이 보인다는 것일까? 눈을 감았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똑똑히 걷고 있는 모습은 또 무엇일까? 은신처라면서 함부로 타인을 끌어들여도 되는 것일까? 또 청염의 운명이라니? 의문점을 애써 삼키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키르바나를 쫓아갔다. 꽤 많은 샛길을 알고 있는 민에게도 생소하기 그지없는 낯선 장소가 계속 됐다. 미로처럼 잔뜩 꼬여 있어 주의하지 않으면 금방 길을 잃을 듯 싶었다. 뒷골목에서 길을 잃는 다는 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길을 잃었다고 해서 주위에 물을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칫하면 자신의 구역에 생판 모르는 녀석이 들어왔다고 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즉 어지간해서는 성하게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이 바로 뒷골목이었다. 가끔 보이던 사람마저도 종적을 감췄을 무렵, 키르바나는 낡은 집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한쪽 벽이 무너져, 집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한 폐가였다. 키르바나는 여전히 차분한 발걸음을 놀려 한쪽 벽 근처로 걸어갔다. 바닥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으며 벽에는 검은 그을림이 가득 이었다. 어디선가 악취와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고 집 전체에서는 질퍽한 무언가가 잔뜩 묻어 나오고 있었다. 키르바나는 그런 주위 풍경에도 아랑곳 않고 벽 가까이에 가 섰다. 그리고 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번째 방문자를 환영합니다." "……고맙군." 약간 주저하던 민은 그에게 가까이 걸어가 그 손을 붙잡았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키르바나가 웃는다고 느끼는 순간, 주위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요란하게 화려하지도 지나치게 수수하지도 않는 아득한 공간이었다. 민은 방금 현상이 마법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 이곳이 이공간을 활용한 곳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기와 함께 읽었던 많은 책들 중에서 마법 서적이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있는 곳은 이 은신처에서 거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인 모양이었다. 약간 긴 테이블을 경계로 저편이 주방이었고, 이쪽으로는 푹신해 보이는 쿠션이 얹혀져 있는 소파가 있었다. 저편에 보이는 문 쪽이 침실일 듯 싶었다. 전체적으로 그리 큰공간은 아닌 듯 싶었다. "앉으세요." 소파에 앉아 한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하는 키르바나를 말없이 보다가 그가 가르킨 쪽으로 앉았다. "먼저 궁금한 것을 참고 이곳까지 와주신 것을 감사드려요. 정식으로 인사하죠. 저는 키르바나 마 제피모입니다. 어머니께서 재혼하셔서, 더 이상 마는 아니지만 형이 끝까지 마라는 단어를 고집해서요." "나는 민 차 레타. 뒷골목에서 살면서 레타의 일원이 아니라니 좀 의외 군." "형이 레타의 일원이죠. 보시다시피 앞을 볼 수 없는 지라 레타에 들기에는 부적격이었어요." "앞이……안 보이는 건가?" 키르바나는 대답대신 미소를 보였다. 밝아 보이는 모습. 꽤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감히 동정 따위는 할 수 없었다. 민은 고개를 끄떡이며 그냥 넘어갔다. 스스로를 불쌍하다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베푸는 동정은 쓸데없는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청염의 운명이 뭐지?" "당신의 운명에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무수히 많은 존재들의 운명도 그것에 붙여지는 이름도, 전 차원 계를 감싸는 기(氣)와 같이 무한하죠. 또한 똑같은 사람의 운명을 읽는다해도, 그것을 '읽는 이'에 따라 붙여지는 이름은 각양각색. 가장 처음에 이름을 붙인 자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지만 말입니다." "읽는다? 예언자인가?" 키르바나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웃음을 지었다. 허리 밑으로 내려가는 긴 백발이 앞으로 흘러나왔다. 윤기는 돌지만 생기는 돌지 않는 머리카락과 병약해 보이는 안색은 아이를 한없이 어둡게 만들었지만, 그 스스로 짓는 미소와 힘이 담겨 있는 목소리가 아이를 맑게 바꿔주고 있었다. "예언자라는 거창한 호칭을 받을 만큼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건 저에 관련된 소소한 것들 뿐. 이것은 살아 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한 가닥의 지푸라기." 그것은 겸손의 말이 아니었다. 또한 자조적인 한탄도 아니었다. 단지 진실 그대로를 읊고 있는 것 일뿐. 민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너는 강하구나." 키르바나의 얼굴에 은은하게 감 돌고 있는 미소가 일순 사라졌다. 그렇다고 무표정했다는 건 아니다. 진지하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키르바나는 다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강한 거 군요. 약하지 않았던 거에요." 민은 어깨를 약간 으쓱였을 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약간 멍하니 있던 키르바나는 이내, 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좀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에?" "오늘은 그만 돌아 가셔야 겠네요. 이곳을 당신께 알려 드린 것으로 오늘의 인연이 끝나버렸어요." "무슨……?" 말을 끝낼 수조차 없었다. 처음 이공간에 들어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주위 풍경이 변한 것이다. 얼떨결에 공간으로부터 추방을 당한 민은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처음 들어왔던 곳과는 다른 외각의 으슥한 곳. 다행이 민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이 나가는 출구였던가? 역시 묘한 곳이야, 이 바닥은." 중심부 쪽으로 들어가지는 방향을 돌아보며 중얼거리던 민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골목에서 빠져 나왔다. 갑작스럽고 묘한 만남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고 묘한 이별이었다. 뭐, 키르바나가 넌지시 건넨 암시에 의하면 곧 만날 것도 같지만 말이다. 드물게 찾아온 방문자를 내쫓은 이공간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진한 갈색 눈동자는 평소와는 달리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고 손에는 먹음직한 음식과 과자 따위가 들려있었다. "형 왔다, 키르." 언제나 살벌하면서 잔혹하게 울리던 남자의 음성이 이토록 따뜻한 느낌을 자아내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병약한 안색의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형님." 남자는 양손에 잔뜩 들려 있는 짐들을 주방에 옮겨 놓고 아이가 앉아 있는 소파의 옆에 앉았다. "오늘은 어떻게 지냈니?" "즐겁게 지냈어요." "다행이구나." 안심한 듯 작게 한숨까지 내쉬는 남자는 다름 아닌 제그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동생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눈이 안 보이는 대신 소리에 예민한 동생을 배려한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왔단다. 지금 먹겠니? 아니면 식사 후에 먹겠니?" "지금 요!" 이때만큼은 키르바나도 또래의 아이처럼 천진스러워 보였다. 그것이 제그를 더할 나위 없기 기쁘게 해주었다. 그는 약간 거칠게 동생의 머리를 부벼 주고 일어났다. 약한 라이트만 켜져 있는 아득한 이공간 안에서 이불을 목까지 덮어쓰고 자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깡마른 몸이 이불 속에 가려져 지금은 그저 작은아이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안쓰럽게 보이는 것은 형이라서 일까? 제그는 작게 중얼거려보았다. 공연히 잘 덮여져 있는 이불을 정리해주고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겨주면서 동생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의 눈은 너무나 따뜻했다. 한참을 그렇게 동생의 옆을 지키고 있던 제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실을 나왔다. 주방에서 술을 꺼내 소파에 털썩 앉은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이므르에서 퇴학을 당하고 길드의 가입에 대한 자격을 박탈당한 뒤로 늘은 것이라고는 간혹 마시던 술에 대한 애착뿐. 아니면 손에 묻히는 피의 양일까? "인과응보라는 것일까?" 자조의 미소를 짓던 제그의 눈에는 작게 일렁이고 있는 광기가 새겨져 있었다. 자신이 무고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스스로가 잘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화풀이라는 것을 슬플 정도로 잘 자각하고 있었다. 열등감일지도 모른다. 권력, 능력, 재물, 용모……그 모든 것을 갖춘 녀석이 자신의 발에 밟히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 또 자신의 현실성 없는 협박에 울음을 삼키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의 열등감을 보상받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모든 것이 한동안 꾸었던 꿈처럼 몽롱하기만 하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틀어 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녀석의 인생을 틀어 지게 만든 장본인은 자신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가슴에 아무런 쾌감도 슬픔도 분노도 억울함도, 그 어떠한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조금은 철이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토록 자신을 냉정히 볼 수 있는 것도, 구차한 원망 따위를 접게 된 것도 최근래의 일이다. 얼마나 저주했던가, 그 녀석을! 얼마나 증오했던가, 그 녀석……페르노크를! =========================================================================== 늦었습니다; 후후후...(뭘 잘했다고 웃어! 퍼퍼퍼!) 흑흑흑...(뭘 잘했다고 울어! 퍼퍼퍼!) ....어쩌라고!!! 흠흠... 그동안 좀.... 일들이 많았습니다. 심신이 완전히 녹초가 되버려서 도저히 글에 손을 댈 수가 없었지요. 이제 개강이고 정신 차려야 하기에... 후후...; 아해의 장-209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퇴학이라니요!? 학우들간의 사소한 다툼입니다!" "집단 구타가 학우들간의 사소한 다툼이란 말인가?" "집단 구타라니요? 부상자는 이쪽이 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막 겪은 뒤의 일들은 모든 것이 다 이질적이고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귀에 똑똑히 박혀 들어오는 차가운 교장의 통보. 그의 유일하다 시피 한 친구, 소울러의 거친 항의와 냉랭한 학교측의 태도에 이미 제그는 포기하고 있었다. 아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힘없이 고개를 숙이는 자신을 안타깝게 보는 소울러에게 감사의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일 입을 연다면 모든 이에 대한 저주와 증오만을 토해 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직 길이 있었다. 마법 길드! 애당초 그곳에 들기 위한 방편으로 이므르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곳에만 든다면 그가 가장 안타깝게, 절실히 원하는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기에……. 그랬기에 스스로를 애써 달래가며 참고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길마저 이 잔인한 학교측에서 폐쇄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오르세만 가와는 상관 없이, 그들이 칭찬을 바라며 비굴하게 꼬리 치는 하찮은 짐승들과 같이 행한 행동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오르세만 가의 그 녀석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먼저 벌렸던 일들은 이미 그의 머리 속 깊은 곳에 매장된 지 오래였다. 자신에게 자격박탈을 선서한 교사의 입을 찢어 버리기 위해 제그는 난폭하게 달려들었다. 주위에 있었던 교사들이 그를 거칠게 잡아끌었지만 제그는 그 교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기만 했다. 하지만 검법 교사까지 있는 자리에서 그가 오래 버틸 수 있을리 만무했다. 결국 그는 한 서린 저주를 퍼부으며 교장실에서 쫓겨나야 했다.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욕설과 증오를 내뱉는 제그에게 가해진 것은 교사진들의 몰인정한 구타였다.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그에게 마법 선생님은 마나 봉인마저 하려들었다. 제그는 비참하게 웃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것이 비록 한없이 진지하고 깨끗한 감정은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 또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야수 같다며 활짝 웃으며 그렇게……반했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녀가 지금은 마나 봉인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이다. 함께 오르세만 가의 녀석을 미워하며 욕하던 그녀가 이제는 그들이 원하지도 않는 앞잡이가 되어 한때 연인이라 불리던 이를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는 제그를 구해준 이는 의외의 사람이었다. 소울러마저도 선생님들의 저지에 손쓰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의외의 사람은 차분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제그를 구해주었다. "그를 퇴학시키고 마법 길드의 가입 자격마저 박탈 한 이유는 '집단구타'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 그 내용의 합당함도 있었지만 그 말을 입에 담은 인물이 가지고 있는 힘이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제그는 일전에 이성을 잃은 페르노크의 손에서 목숨을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마법사로써의 길을 보호해준 남자를 멍하니 보았다. 보장되었던 미래에 대한 박탈과 연인의 배신 속에서 뜻하지 않은 구명은 그에게 더 몸부림 칠만한 힘을 뺏어 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어째서……?" "……." 멍하니 묻는 제그를 내려보고 있던 의외의 구원자, 테밀시아는 이내 나직이 답했다. "나는 내 동생을 사랑한다. 때문에 내 동생에게 상처 입힌 너를 용서할 수 없어. 하지만 이상한 일이지. 저 여자를 보며 웃던 네 모습이 나의 다른 동생을 떠올리게 해. 나는 너를 구해준 것이 아니다. 너에게서 떠오르는 내 동생을 구해준 것 뿐." 울음보다 못한 웃음. 분노보다 못한 웃음. 그가 알고 있는 동생은 그런 웃음을 늘쌍 짓고 있었다. 인위적인 모습 뒤로 감히 헤아릴 수조차 상처를 안고, 그렇게……. 제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것은 귀공자의 말에 의한 것이기도 했고 그 외의 것이기도 했다. "동생이라……." 순간 씁쓸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그에게도 그런 소중한 동생이 있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고, 배신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자라길 바라고 있는 동생이 있다. 약하면서도 강한, 하지만 상처 많은 동생이. 그제서야 제그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으아악-!" 그는 절규하며 바닥을 거칠게 내리쳤다. 동생을 위해서 마법사가 되고자 했다. 근본 모르는 하츠민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모진 구박을 견뎌내던 동생을 위해서 이므르에 왔다. 졸업만 하면 성공이 보장되는 이곳을 졸업해 당당하게 동생을 그 마의 소굴에서 빼내기 위해……. 망가졌다. 그것이 망가져 버렸다. 자신의 생명과 그것에 준 하는 것은 보호해준 저 남자의 영향하에 철저하게! 그를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이 분했다. 이미 두 가지의 은혜를 입었기에 차마 그를 원망할 수가 없음이 분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와는 상반된 내용의 것이었다. "지금 병 주고 약주는 거야!? 내가 왜 이 꼴이 됐는데!? 당신의 잘난 권력 때문에 퇴학에 자격박탈에! 이미 마법 따위는 소용도 없게 됐어! 길드에 들어가지 못한 마법사는 마법사가 아니야! 마법 따위 이제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 가! 가서 마음껏 위선에 흠취 하라고! 나는 불쌍한 인생하나 구해줬다 면서 뿌듯해 해보라고!" 카르민의, 그것도 인정받지 못한 귀족도 아닌 다음 가주가 될 이에게 꺼내는 이 말들은 귀족이어도 용납이 되지 않을 모욕이었다. 그것을 제피모인 자신이 내뱉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제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자제할 줄 알았다면 애당초 이 자리에 없었으리라. 파랗게 질린 이들 사이에서 테밀시아만이 평온했다. 그는 차가운 황금색 눈동자로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르는 제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제그는 그 차가움이 단순히 버러지만도 못한 제피모를 경멸하는 것이 아닌, 차분하게 듣고 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미워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그 진중한 모습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테밀시아는 흐느끼는 제그를 한참 내려보다가 손을 들어 약하게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말했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일까? 내가 알고 있는 길드는 분명 마법사들이 만든 회합이지 마법사를 만들어 낸 곳이 아니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이 남자는?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좀더 뒤에 일이었다. 그때의 제그는 한없는 절망감과 배신감, 그리고 원망과 증오에 사로 잡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일곱 살 때 겨울이었다. 어머니가 동생을 낳았다. 주위에서 불쾌하게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그는 마냥 좋기만 했다. 일곱 살 정도의 나이 차 있는 어린 동생이라면 누구나 귀엽고 사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그것을 곱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지는 이제 겨우 일곱인 제그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년하고도 조금 전에 행방불명 됐던 것이다. 거상이지만 나이가 많은 아버지가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를 후처로 삼았을 때부터 주위에서 많은 비난이 있었다고 했다. 약자의 입장이라 뒤에서만 욕하고 무시해대던 그들에게 표독스러운 어머니가 잔인하게 보복했다는 것은 제그는 잘 몰랐다. 그는 또래의 아이들처럼 새로 생긴 동생과 무엇을 하고 놀까 정도밖에 사고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런 그가 진지하게 스스로가 '형'이라고 자각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동생이 보고 싶었다. 갓 태어났기 때문에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을 곱게 받아들이기에는 그는 아직 어렸고 또 장난기도 많았다. 어머니의 산후 조리를 돕던 여인네들이 잠시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새에 제그는 방안으로의 침입을 시도했다. 물론 그곳에 경비병을 세워둘 리가 없기 때문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역한 비린내와 약한 향수 냄새가 섞여 있는 방은 후덥지근했다. 겨울인지라 산모의 몸에 찬 기운이라도 들어갈까, 문을 열어 환기를 하지 못한 탓이었다. 대신 뿌려 놓은 향기가 되려 비위에 거슬렸지만 원래 인간의 후각이라는 것이 쉽게 마비되는 민감한 녀석인지라 그리 신경 쓸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제그는 살금살금 침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거상인 아버지의 집은 터무니없이 넓었고 그의 어머니의 방 또한 넓은 욕실과 거실이 딸려 방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침실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던 제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린 그의 이성을 완전히 집어삼키기에 충분한 경악스런 광경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갓 태어난 동생을 집어던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마의 아이야! 악마가 내 몸을 빌어 태어난 거야!" 히스테리 적으로 소리치는 어머니를 보며 제그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빠르게 행동했다. 어머니의 손에서 바닥으로 내리 쳐지는 동생을 잡아낸 것이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더욱 크게 소리쳤다. "악마에게 홀린 거야! 악마에게 조정 당하고 있어!" 과도를 집어들고 달려드는 어머니를 피하며 제그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는 아직 어렸고, 어머니의 약한 힘을 감당할 정도의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이 주위에 있던 하녀들이 곧 몰려왔고 제그와 그의 동생은 무사히 구출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어머니는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동생만 보면 죽이려 들었다. 결국 동생은 어머니의 젖 한번 물어보고 못하고 유모의 손에서 커야 했다. 그나마 유모마저도 아비 모르는 녀석이라며 냉랭하게 대했다. 제그는 동생과 노닥거리는 평범하고 즐거운 것을 고민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동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할까, 어떻게 하면 저 광폭한 어머니와 냉정한 유모의 사이에서 잘 키울 수 있을 까를 고민해야 했다. 아홉 살 때였다. 어머니가 재혼을 했다. 상대는 귀족이었다. 제피모와 귀족의 결합이라니!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였다. 어린 제그조차도 남자가 무엇을 노리고 어머니와 결혼을 했는 지 알 수 있었다. 남자의 그 궁색한 살림이라니! 그는 귀족은 귀족이되, 인정받지 못한 귀족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가주의 자식도 아니어서 성마저 이어받을 수 없는 하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어머니가 노린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아버지에 비하면 생생한 젊음을 간직한 남자. 건장한 체격과 귀족다운 행동거지. 그리고 그의 아들이 가질 수 있는 '가주 계승권자의 자격'이 탐이 났을 것이다. 물론 그 남자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그나 그의 동생, 키르바나에게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지만 이제 태어날 둘 사이의 아이는 다르다. 귀족이라니! 이 얼마나 꿈만 같은 일인가? 남자에게는 이미 제그보다 두 살 많은 아들이 있었다. 아비를 꼭 빼 닮은 아이는 다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의외로 제그가 생김이 비슷했다. 그것이 아이는, 커크런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녀석인지 모를 녀석이 자신과 닮은 생김새를 해 가지고 형이라 부르는 모습을 너그럽게 받아 드릴 수 있는 열한살의 꼬마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새 아버지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어머니, 그리고 갖은 트집으로 괴롭히려 드는 형 사이에서 제그에게는 동생, 키르바나 만이 유일한 가족이었고 희망이었으며 안식처였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또 다른 동생이 태어났다. 이번 동생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확실하게 갖춰진 행운아였다. 천한 제피모라며 구박하던 형마저도 그 동생에게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오빠였다. 독점력마저 가지고 있던 그는 제그가 자신의 동생을 만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꼭 빼닮아 벌써부터 장래가 기대 된다는 귀여운 여동생이었으나 제그는 눈에 차지도 않았다. 형이 접근금지를 하지 않았더라도 가까이 할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오히려 어머니를 닮은 여동생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저 아이도 어느 정도 나이만 든다면 자신의 동생을 어머니처럼 내치고 악마라고 부르짖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직도 눈을 못 뜨고 있는 약한 동생을 꼭 안아보는 제그였다. 그의 동생은 이상한 면이 많았다. 제그마저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아이였다. 노파의 것 같은 힘없는 백발 머리도 이상했지만 어린 나이에도 투정한번 부리지 않고, 말이 없었으며 어떤 놀라운 상황이 눈앞에서 일어나도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렸다. 이제 겨우 네 살의 나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모습들. 그것을 주위에서는 점점 나쁜 쪽으로 상상하며 몰아세웠다. 한창 철없는 나이인 커크란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기분 나쁜 머리카락. ……이 녀석 악마의 자식이라며?" 동생과 둘이 있는 제그에게 커크란은 짓궂게 물었다. 새 아버지가 들어온 날부터 말수가 없어지고 얌전하기만 했던 제그가 그때만큼은 단호하게 답했다. "키르는 저의 동생입니다." "그럼 네 녀석도 악마의 자식이라는 거냐?" 평소에는 뭐라 트집을 잡고 욕하고 때려도 말없이 받아 드리던 제그가 건방지게 눈을 부릅뜨고 말대꾸를 하는 모습을 그냥 보아 넘길 정도로 커크란은 호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만히 있는다면 동생은 악마의 자식으로 낙인이 찍혀 모진 수모와 고통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 제그가 평소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을 턱이 없었다. "제가 악마의 자식이라면 이리란도 마찬가지겠지요." "네, 네까짓 게 감히 누구 이름을 입에 담는 거야!?" "저의 아비 다른 여동생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겁니다. 또는 같은 배에서 태어난 여동생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죠." "이, 이……!" 평소와는 달리 거칠고 천한 단어를 거침없이 입에 담는 제그의 모습은 약간의 광기마저 담고 있었다. 커크란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가 이내 오기를 부리며 허리에 차고 있던 채찍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이제 승마를 시작한 그에게 아버지가 선물한 말채찍이었다. "천한 것이 감히!" 아직 열살도 안된 아이에게, 게다가 동생에게 채찍질이라니!? 아무리 좋게 봐도 아이들끼리의 다툼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채찍질은 교양 있는 집이라면 하인에게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그것은 노예와 가축에게만 주어지는 형벌이었다. 제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솟구치는 분노와 수치심, 굴욕감을 표현하기에는 그에게 힘이 부족했다. 잘 먹어 체구가 크고 여유 있게 운동을 하며 몸을 단련시키고 있던 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직 눈조차 못 뜬 동생에게 채찍이 가해지지 않도록 품에 꼭 끌어안는 것밖에 없었다. 그토록 맞아 본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노예처럼! 게다가 가해자는 형이다. 서로 인정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형제였다. 어째서 형이 동생을 악마의 자식이라 매도하며 매를 드는 것인가? 제그는 그것으로 인해 키르바나가 입을 상처를 생각하니 살이 찢어지는 아픔보다 더한 고통이 가슴속을 울리고 지나갔다. 그 모습을 발견한 하인들과 어머니가 달려왔을 때, 제그는 동생을 꼭 끌어안은 채 혼절해 있었다. 그 후, 어린 나이에 상처를 많이 입었는지 키르바나는 그 뒤로 제그의 앞에서밖에 입을 열지 않았다. 제그는 어리고 약한 아기 새를 보살피는 어미 새의 마음으로 동생을 계속 보듬어 주었다. 그렇게 둘은 고립무원 속에서 쓸쓸하게 유년 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 해기님! 드디어 약속을 이행 할때가 온 것입니다~! 크하하하하~! 저의 선택은 간~단~하게 4연참으로 하겠습니다+_+ 자자, 어여 쓰세요. 어여~ 크하하하하~! 아해의 장-210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제그가 마법에 대한 자신의 소질을 알게 된 것은 열 세살 때였다. 갑자기 시장에 가보고 싶다는 키르바나를 데리고 시장에 나갔었다. 무슨 목적지가 있는 것 마냥 보이지도 않는 눈을 해 가지고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 발을 옮기는 동생을 쫓아 도착한 곳은 작은 식당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동생은 놀랍게도 정확히 그곳을 가르키며 말했다. "형님. 저기서 밥 먹고 가요." 하지만 이런 일은 자주 있었다. 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조용히 있었던 동생은 가끔씩 어디론가 가자고 하고, 무언가를 하자고 나서곤 했다. 또 그럴 때면 제그가 뭐라고 하던 막무가내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시켰다. 아이답지 않은 동생을 염려하고 있던 제그는 별 제재 없이 그것을 따라주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그 자신도 아이답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했다. 식당 안은 허름했고 손님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저기 앉자." 제그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안 쪽으로 걸어가려 했지만, 동생은 그것을 조용히 거부했다. 그리고 천천히 한 명뿐인 손님의 곁으로 걸어갔다. 두터운 망토와 후드까지 깊이 눌러쓰고 있어 수상해 보이는 손님을 경계하며 동생의 뒤를 따르던 제그는 결국 동생에게 의문을 표해야 했다. "키르바나?" "……?" 갑자기 자신의 앞으로 걸어온 묘한 아이와 그의 형으로 보이는 또 다른 아이를 번갈아 보던 그 손님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가?" "아저씨께서 찾고자 하는 것이 어디 있는 지 알아요." "……!" 잠시 가만히 키르바나를 보고 있던 손님은 후드를 뒤로 젖히며 물었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아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충분한 위엄이 서려있었다. 약간 바랜 금발과 진한 녹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근엄한 남자였다. 남루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귀족이라고 하면 믿어 줄 수 있을 듯한 기품이 서려있는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얀이라 밝혔다. "형님을 봐주세요." "무슨 소리지?" 입으로는 되물으면서도 자신을 날카롭게 살펴보는 얀의 시선에 제그는 움찔했다. 그는 제그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눈 높이를 맞췄다. "이름이 뭐지?" "제그입니다." "제그라……." 제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크게 떠졌다. 동공이 급격히 축소되고 약간 벌려진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동생을 걱정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는 입을 이로 꾹 물고 갑자기 닥쳐온,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견뎌냈다. 원인 모를 고통을 당하며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 했던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나 버렸다. 형, 커크란이 가했던 채찍……. 처음으로 받았던 육체적 고통. 그때의 굴욕감이 다시 심연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제그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을 잠식하던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는 깊이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고는 매섭게 얀을 쏘아보았다. 얀은 꿈쩍도 않고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소질은 있구나." "헉헉! 소질?" "그래." 무엇에 대한 소질 말인가? 제그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얀은 자신의 짐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싸인을 갈기더니 봉투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봉투의 경계면 중간에는 목걸이를 갖다대자, 그것의 문양이 종이 위에 모양이 새겨지면서 봉투가 봉해졌다. "소개장이다. 네가 열 네 살이 되는 해에 이므르를 가보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다." 제그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키르바나가 옆에서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너는 마법사로써의 소질을 갖추고 있다. 많은 이들이 마법을 정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나에 대한 응용력과 운용력, 그리고 지배력이 부족해지면 생기는 고통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내가 방금 너에게 한 것은 마나를 강제로 몸 속에 이입시켜 그것에 대한 '느낌'을 억지로 몸에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마법을 배우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이지. 하지만 네가 그 과정에서 겪을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너에게는 억지로라도 깨울 소질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견뎌 내는 것을 보니 소질이 제법 되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나서는 키르바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네가 나에게 줘야 할 것을 주겠니?" "예. 그녀는 여전히 기품 있고 매력적인 자태로 언제나 그곳에 존재해 있어요." "그곳……인가?" 키르바나는 살짝 웃음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얀은 약간 떨리는 눈으로 남쪽을 응시하다가 일어났다. 옆에 있던 검을 허리에 차고 배낭을 한쪽 어깨에 걸쳐 매며 그는 바삐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잠깐 뒤를 돌아 키르바나를 보았다. "너의 이름은 뭐지?" "키르바나. 당신과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재회하게 될 것 같군요. 많은 것을 포기하신 분.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얻으신 분." 얀은 환하게 웃으며 문 밖으로 나갔다. 그는 제그에게 처음 생긴 은인이었다. 제그는 그의 모습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자신에게 살아갈 길을 마련해 준 사람. 마법사인지 검사인지, 귀족인지, 여행자인지……그 어떤 것 하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없지만 소중한 은인. 인자한 미소와 여유 있는 행동거지, 그리고 강한 의지가 서려 있는 녹색 눈동자. 집으로 돌아오니 건들건들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형이 보였다. 저 형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미워했던가? 저 경멸 어린 갈색 눈빛을 보면 주체 할 수 없이 떨려오는 가슴이 이제는 묘하게 차분하고 고요했다. 아니 되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렸을 때의 일이라 서였을까? 아니면 그런 하인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서 일까? 여지껏 형이 자신에게 가했던 채찍질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제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지금도 체격은 왜소했지만 힘은 형 못지 않았고, 검을 배우는 데는 게으른 형보다 한발 앞서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막 떠올린 그때의 굴욕이 거대한 분노로 제그를 휘감고 있었다. "아예 집을 나가지, 왜 들어 왔냐? 여긴 사람의 집이지 악마의 집이 아니야!" 늘 듣는 소리였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늘 울먹였다. 우리는 인간이라고, 형과는 한 가족이라고. ……그리고 늘 맞았다. 하지만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떠나야 하는 자신의 뒤에 남을 동생을 위해서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이곳은 저희들의 집입니다. 더부살이하는 주제에 말이 많군요." "뭐, 뭐야!?" "악마의 집에 빌붙어 사는 당신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단자 인 겁니까?" "이, 이 새끼가!" 제그는 키르바나의 앞을 막고, 커크란이 휘두르는 목검을 피해 그의 손목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현재는 목검이 없었고 또 마땅한 호신술을 배우지 못한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생각지 못한 발악에 놀란 것일까? 커크란은 손목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목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검사로써 실격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까지 따질 정신이 그들에게 있을 턱이 없었다. 제그는 목검을 얼른 집어들어 그 끝으로 커크란의 복부를 찔렀다. 목검인지라 생명에 지장이 있을 턱이 없었고, 어린아이의 소행인지라 뼈에 이상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못한 고통을 맛본 커크란은 이성을 잃고 마구 울어댔다. 열 다섯 살이나 먹은 녀석의 모습으로는 그리 탐탁치는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면역이 없는 것에는 누구든 약한 법이다. 늘 가해자의 입장에서 때리는 것만 해왔던 커크란에게 고통을 인내하길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 이었던 것이다. 제그는 그런 커크란을 경멸어린 눈으로 내려보았다. 처음으로 되어본 가해자의 입장은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는 동생을 안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늘 아이에게 무관심한 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소동에도 얼굴 한번 내밀지 않았다. 제그는 철저히 독해지자고, 거칠어져 날뛰자고 다짐했다. 처음으로 동생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가 아닌 공격을 해본 그날 제그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것이 제그의 반항의 시작이었다. 열 다섯 살 때였다.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던 '희대의 천재'가 돌아왔다. 그 동안 길드에서 친히 길드장에게 배웠다는 마법사. 하지만 그것은 그의 엄청난 마법적 소질보다는 오르세만 가가 가지고 있는 힘 덕이라고 제그는 생각했다. 그 자신도 처음부터 마나를 느낄 수 있었기에. 비록 남의 힘을 빌어서 마나를 강제로 '각인' 시킨 것이지만 그것을 학교측에서 알 턱이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길드에 뽑혀 나간 것은 페르노크, 그 혼자였다. 하지만 질투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길드에서 박혀 답답하게 마법을 배우느니 조금이라도 친구를 사귀면서 앞으로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친구, 소울러와 사귈 수 있었기 때문에 되려 혼자라는 페르노크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이므르에 오고 그 마의 소굴에서 혼자가 되어있을 키르바나를 생각하니, 더더욱 그가 불쌍하다고 여겨졌었다. 하지만 녀석의 그것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깨져버렸다. 녀석의 녹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은인과 같은 녹색. 그의 은인, 얀의 눈동자 색은 얼핏 보면 흔한 초록 같이 느껴지지만 아니었다. 무척 진해서 빛마저 흡수 해버릴 것 같은 녹색. 왠지 모를 청량함을 불러일으키는 녹음의 색. 흔한 듯 보이면서 절대 흔하지 않은 그 색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라니! 겁먹고 외로워하며 조급하게 주위를 살피는 그 비굴함! 그것을 보는 순간 제그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꾹 쥐었다. 정신 차리라고 죽어라 패버리고 싶은 묘한 충동이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그도 아니면 얀과 같은 그 눈동자를 뽑아버리고 싶다는 잔인한 충동. 페르노크는 카르민이었다. 그것도 인정받지 못한 새 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가주 계승권자 였다. 능력 또한 출중했다. 오죽하면 별칭이 '희대의 천재'이 겠는가!? 그뿐 아니다. 녀석은 생김새도 제법 반반했고 몸이 마르긴 했지만 키도 꽤 컸고 어깨도 제법 벌어져 있어 체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녀석을 둘러싸고 있는 저 연약함과 비굴함, 소심함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비조차 모르고 어미에게는 악마 취급을 받으며, 형제에게는 모진 수모를 당하고 눈마저 안 보이는 동생, 키르바나는 저렇지 않았다. 저렇게 연약해도, 소심해도 하등 탓할 것이 없어 보이는 동생도 강하게 스스로를 이겨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이 무슨 권리로 저렇게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의 동정을 사고 싶은 것인가? 저 모든 것을 가진 귀공자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제그의 분노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정말 불쌍한 자신의 동생. 그럼에도 강해지기 위해, 자신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 않고 웃기만 하는 동생. 아니, 웃을 수밖에 없는 동생. 그런데 그런 동생과는 달리 모든 것을 가지고, 늘 웃고만 있어도 모자랄 듯한 녀석이 무슨 권리로 저렇게 비참한 듯, 스스로를 동정하고 자신을 봐달라는 듯 어깨를 움추린단 말인가? 동생에 대한 걱정과 연민이 비정상적으로 굴곡 되어 증오로써 페르노크에게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냉정하게 판단할 만큼 제그는 성숙하지 못했다. 그 맹렬한 감정이 저 어깨를 움추리고 발발 떨고 있는, 토끼의 흉내를 내는 가증스러운 맹수에게로 향해졌다. 아니, 맹수라기 보다는 여우랄까?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싹튼 귀족에 대한 증오와 밑은 보지 못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자들에 대한 혐오로 인한 비뚤어진 시각이라도 제그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열 여덟 살의 여름……. 퇴학을 당했다. ========================================================================= 2연참~ 2연참~ 룰룰룰 아해의 장-211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집에 도착했다. 비참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도착한 집은 여전히 마의 소굴로만 느껴졌다. 다음에 오게 될 때는 당당한 길드 원의 자리에 서서 이곳을 마음껏 비웃어 줄 것이라 생각했고 이번 일만 없었더라도 그의 소망대로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틀어 지고 망가지고 부서져 버린 지금에서는 작은 비웃음이라도 되받아 칠 여력이 없었다. 그런 제그가 다시 흉흉한 기세를 떨치고 일어나게 된 까닭은 그의 유일한 가족. 동생, 카르바나 때문이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카르바나를 괴롭히고 있는 형제들에 대한 분노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제그에게는 형제가 셋 있었다. 위로는 20살의 형, 커크런이 있었고 밑으로는 11살 되는 키르바나와 이제 겨우 9살 되는 이리란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가족'이라 인정한 이는 키르바나 밖에 없었고, 그는 가족 구성원 중 가장 약자였다. 자신만을 아끼는 커크란의 비호아래서 컸기 때문일까? 이리란은 또래 귀족 아이들보다도 도도했고 근거 없이 건방졌다. 그런 그녀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장난감, 키르바나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을 리 없었다. 제그가 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 되던 날이었다. 어디선가 불쾌한 파공음이 들려오고 있어, 뭔가 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어머니가 차를 즐기는 다과실이었다.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은 그의 절망적인 현 상황 모두를 망각하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광경이었다. "이랴! 이랴!" 너무나 해맑게 웃는 이리란의 얼굴과 신나 보이는 제스처. -찰싹! 찰싹! ……그리고 잇따른 예리한 채찍 소리. "……." "넌 말이니까 울어야지!" 다시 내리쳐지는 채찍……. 비록 그것이 가죽으로 이루어진 형벌용 채찍이 아닌 거친 천을 여러 번 꼬아 만든, 일명 아이들 놀이용 채찍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따른 굴욕감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그는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손목을 왼손으로 꾹 쥐었지만, 그것마저도 떨리고 있어 별 소용이 없었다. 평생 지금의 광경을 잊지 못할 것이다. 눈이 안 보이는 오빠의 목에 가축용 목걸이를 걸고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며 앞으로 가라, 울어라 종용하고 있는 소 악마의 모습을!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 주위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고 되려 간간이 웃는 시종마저도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마저도 소파에 앉아 자애로운 얼굴로 자신의 딸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째서?! 어머니이지 않는가? 직접 배앓이를 해 낳은 자식이지 않는가!? 믿겨지지 않는 그 광경을 보던 제그의 눈이 천천히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누가 자신을 악마의 자식이라 칭할 지라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악마조차도 질식할 듯한 악의와 증오, 그리고 분노가 제그의 왜소한 몸뚱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허리에 매어진 장검으로 향했다. 그리고 굳어 있던 몸을 힘들게 움직였다. 한발을 떼어놓자 다음은 쉬웠다. 살기를 뿜어내며 다가오는 제그를 본 어머니는 얼굴을 찌푸리며 뭐라 말하려 했다. 이리린은 제그 쪽으로 등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정신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에 바빴을 뿐. 그녀가 다시 채찍을 높게 쳐들었을 때였다. 뜻밖의 고통이 그녀의 등뒤를 내려쳤다. 이리린은 순간 멍하니 고개를 쳐들었다가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아픔이 느껴지는 지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어째서 아프지? 채찍을 들고 있었던 건 난데. 그것을 내리치고 있던 건 난데…… 왜 내가 아픈 거야!? 입으로 계속 치밀어 오르는 비린내 나는 무엇인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눈은 위와 같은 질문을 계속 해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귀에 들려 온 것은 자신의 물음이라면 언제나 나릇하게 알려주던 어머니나 큰오빠의 음성이 아니었다. "악마의 자식이라고?" 언제나 자상한 큰오빠를 괴롭히던 악마의 자식! 결국 제 버릇 못 고쳐 쫓겨난 인간 쓰레기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이리린의 귀에 잔인하게 계속 꽂혔다. "네 년은 악마 그 자체다! 버러지 같은 년." 처음 듣는 욕설이지만 그것을 인식할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팠다. 등이 너무 아팠다. 아니, 이제는 어디가 아픈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런 그녀의 귀에 억눌린 신음을 내뱉던 어머니의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악-!" 제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검을 내려보며 광기 어린 미소를 비추고 있었다. 그는 등에 긴 검 상을 입고 혼절하고 있는 이리린을 내려보며 말했다. "악마의 피도 붉구나. 그대로 죽어버려, 쓰레기. 네년이 살아나면 내가 몇 번이고 죽일 테니 그냥 곱게 죽어버려!" 그 뒤에는 검을 그대로 검 집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 소란 통에도 아까와 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키르바나에게로 걸어갔다. 분명 자신의 저주를 듣고, 피비린내를 맡았을 키르바나의 침묵이 못 견디게 불안했다. 첫 살인일지도 모르는 좀 전의 일은 그의 뇌리에 자리잡지 조차 못할 하찮은 일이었다, 그의 동생의 일에 비하면. 동생이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을까,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까……상상만으로도 슬프고 절망적인 두려움을 안고 제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키르야." "……." "형 왔다." 얼른 졸업해서 함께 나가자고 약속했었다. 때문에 지금의 몰골로 키르바나의 앞에 나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도 그를 피하기만 했다. 만일 지금의 일이 없었더라면 언제까지고 겁쟁이 마냥 계속 도망 다녔을 것이다. 어쩌면 영악한 자신의 동생이 이 점을 노리고 이리린의 마수에 걸려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제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미 동생에게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런 능력이 있건 없건 키르바나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동생이며 유일한 가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을 갖추고 강한 성격을 가졌어도 키르바나가 11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은 변함이 없었다. 비록 보지는 못했더라도 등을 적시고 있는 따뜻한 액체가 무엇인지 옆에서 쓰러져 신음만 내뱉고 있는 동생이 왜 그런지 어머니가 왜 비명을 질러대는지 모를 리가 없는 그가, 11살에 불과한 그가 지금 이 현상을 자아낸 형을 무서워 한다해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제그는 두려웠다. 사랑하는 동생이 자신을 무섭다고 내치지는 않을까, 유일한 동생이 자신을 버리지는 않을까……너무나 두려웠다. 피에 젖어 있는 키르바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백발에 묻어나고 있던 선혈이 그의 볼에 투툭 떨어졌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키르바나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곧 그는 불안해하고 있을 형에게 너무나 밝고 해맑은 미소를 활짝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그 미소는 제그가 이므르의 겨울 방학을 보내고 떠난 뒤,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소란스럽게 사람들이 몰려들어왔지만 제그는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단지 동생의 목에 걸려 있는 불쾌한 물건을 뜯어낸 뒤, 더 마른 듯한 그를 안고 진저리 나는 그 장소에서 벗어났을 뿐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아니요. 절 버리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 저를 곁에 있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기다리라 말하신다면 그 어떤 일을 당해도, 무수한 시간이 흘러도……언제나 기다릴 겁니다." 제그의 눈에 억눌러져 있던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키르바나의 볼에 떨어져 흘러내렸다. 우는 법조차 잊은 키르바나가 겨우 울음을 터뜨린 듯한 모습……. 둘을 스쳐 하인들과 주의치가 바쁘게 다과실로 들어갈 때, 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죽어버리겠어!" 커크란이 검을 들고 날뛰었다. 자신의 방에서 키르바나를 치료해 주고 있던 제그는 차가운 얼굴로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평소 커크란이라면 미친 놈 마냥 날뛰는 제그의 앞에서 이런 짓은 못 할 테지만 지금 그의 눈에 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휘두는 검은 어린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정교해져 있었고 제법 매서운 기세가 서려 있었지만 아직은 미숙했다. 하지만 살기와 광기로 젖어 있었기에 매우 위협적이었다. 자신들을 향해 검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커크란을 아무 반응 없이 보던 제그는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짧은 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실 * 드 *" 마법사로써의 제그는 이제 겨우 말을 하는 꼬마수준 밖에는 안됐다. 치유 마법을 깨달아야만 겨우 진짜 배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학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이를 고려한다면 수재라 불려서 무리가 없지만, 아직은 미숙한 제그의 힘으로 펼친 실드지만 커크란이 깨기에는 무리였다. 적어도 마법사가 펼친 실드를 깨려면 검이라는 것에 대해, 무라는 것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이해하고 깨달은 전사 수준은 되야 했던 것이다. 헌데 겨우 수박 겉 핥기 수준으로밖에 검을 파고들지 않은 커크란이 그것을 해낼 리 만무하지 않는가? 그것을 예상하고, 처음부터 실드를 시전 하는데 운용력을 전부 쏟지 않았던 제그는 다른 한 쪽 손을 위로 뻗어 공격 마법을 펼치려 했다. 그때였다. "멈춰라!"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제그의 웃음을 만들 수 있고, 순수한 호의를 받을 수 있는 이는 오직 키르바나 뿐이었지만, 제그를 말릴 수 있는 이는 또 한 명이 있었다. 그것은 미우나 고우나 자신을 낳아 준 여자, 어머니였다. 제그는 실드를 유지하며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피로 얼룩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헝크러진 머리카락과 퀑해진 눈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피눈물은 그녀를 실성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무시하거나 흉보지는 않았다. 딸이 사경을 헤매는데 어떤 부모가 평온할 수 있겠는가? 제그의 차가운 눈을 보며 그녀는 쉬어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저주한다. 저 악마의 자식도 저주한다. 나가라. 여기에 더 이상 너희가 있을 장소는 없다." "……." 이미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를 포기한 제그였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직 키르바나 뿐이었다. 눈마저 안 보이는 그가 자신 같은 연고지 없는 풋내기 마법사와 함께 떠난 다면 얼마나 고생을 할까? 어머니에게마저 버림받았다고 얼마나 괴로워할까? 그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듯 아파 왔다. '이 아이를 위해서 좋은 일은 어느 쪽일까?' 고민하는 제그의 손을 키르바나가 갑자기 꼭 잡았다. 스스로 육체적 접촉을 거의 안 하는 그였기에 제그는 당황해서 내려보았다. 늘 무표정했던 키르바나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을 열어 말했다. "같이 가요, 형님. 버리지 말아주세요." 제그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깃 들었다. 그는 작디 작은 키르바나를 품에 안아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아직도 검을 들고 노려보고 있는 커크란이 보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떠나자. 함께 떠나자. 진작 이랬어야 했어……. 늦어서 미안하구나." 어머니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제그는 낮게 말했다. "내 몸에 흐르는 당신의 피를 이제는 완전히 잊겠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잠깐, 방금까지 어머니라 불렀던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버리려 하는 자식의 뒷모습조차 보지 않고 있었다. 흥분해서 피눈물을 쏟아내는 커크란에게만 온 신경이 쏠려 있을뿐. 그렇게 냉정한 어머니, 아니 여자였다. 자신의 자식을 악마라 매도하며 죽이려 들었던 악녀였다. 돈을 보고 남자와 결혼하고, 명예를 보고 또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온 여자다. 그렇게 두 인생을 망가뜨린, 그러면서도 죄책감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다. 눈을 감으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만일 다음에 당신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을 죽이고 말 겁니다.' 18살의 여름……집을 나왔다. 있으나 마나했던 울타리였지만, 그것의 소멸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세상은 제그가 짐작했던 것보다도 차가웠다. 등에 업혀져 있는 따스한 온기만이 그를 지탱해 주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막막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어디로……. 만일 마법 길드의 가입 자격이 아직도 유효했다면 그곳으로 갔어도 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곳에서 주어지는 소소한 일을 해내며 적은 월급과 식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법도 계속 배울 수 있었을 것이고 치유 마법을 깨달아, 계속 정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그는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이들에 대한 증오로 미쳐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성을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키르바나 덕이었다.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몇 번이고 곱씹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사랑스런 동생 덕이었다. 제그의 발은 자연 수도로 향해졌다. 그가 알고 있는 곳은 이므르가 있는 수도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아는 사람도 있었고 제법 깊게 사귀었던 이도 있었다. 자존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제그가 지금 그것을 스스로 꺽어서 라도 살아 남기 위해 바둥대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자존심보다 더욱 소중한 존재가 생겼기에. 한 마을의 농가나 주점 등에서 며칠 일해서 벌은 돈으로 근근히 먹고살며, 계속 수도로 향했다. 일주일을 일하고 일주일을 걷고, 일주일을 일하고 일주일을 걷고 하는 동안 한 달이 흘렀다. 이미 제그에게서 풍기던 풋내기의 느낌은 사라지고 없었다. ========================================================================= 3연참~ 3연참~ 룰룰랄랄 아해의 장-212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새로 고용된 주점에서의 일이다. 이제는 숙달된 주점에서의 일은 더 이상 고단하지 않았다. 술을 나르고 안주를 나르고, 마루를 쓸고 닦고 주문을 받고 주방에 알리고……정신없는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한창 주기가 오른 남자 손님이 가는 제그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농을 걸었다. "사내새끼가 무슨 손목이 이리도 가느냐? 남장 여자 아냐?" "손님, 취하셨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시비였고 새삼 열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 슬며시 손을 빼내며 껄껄 웃으며 끝냈으니까. 하지만 이번 남자는 좀 틀렸다. "낄낄. 어디 남자가 맞는지 확인이나 해보자!" "하하! 좋지!" 남자와 함께 술을 마시던 다른 이도 웃으며 호응했고, 술에 이성을 잃은 몇몇 손님마저도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주점 주인이 나와서 그만 하라고 호통을 쳤지만 취한 녀석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제그가 어찌 해볼 틈도 없이 그의 몸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남자가 집어다 던지듯 올려놓은 것이다. 안주 그릇이 밑으로 떨어져 깨졌지만 남자는 좋아라 웃기만 했다. 제그는 발로 그의 안면을 차버리고 옆에 있던 남자의 일행의 복부를 팔꿈치으로 가격하고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내려왔다. 꽤 정교하며 날렵한 공격이었지만 술에 취한 이들의 눈에는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으로만 보였다. "오오! 꽤 앙탈을 부리는데?" "쿨럭! 그, 그러게? 하하!" 주위에서 야유를 퍼부었다. 우연이라지만 저 작기만 한 꼬마한테 나가떨어진 것에 대한 야유였다. 둘은 얼굴을 붉히면서 더욱 열이 올라 제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이들에게 간단히 잡힐 제그가 아니었다. 그를 놓치는 횟수가, 쫓아다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주위에서 둘에게 퍼붓는 야유를 거세만 갔다. 상황이 이리 되자, 둘은 이제는 장난이라기보다는 분노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써 제그를 포획하려 했다. 처음에 시비를 건 남자가 손에 집히는 술병을 제그를 향해 던져버렸다. 술에 취한 자가 던졌다 보기에는 정확한 겨냥이었다. 마침 그들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던 제그였기에 이대로 두었다가는 꼼짝없이 그것에 맞을 듯 보였다. 그때였다. "뒤요, 형님!" "……!?"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병은 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챙그랑! 다시 고개를 돌려 산산조각이 난 병 조각을 보다가 무표정해진 얼굴로 자신을 향해 오는 두 남자를 보았다. 그러다 자신에게 경고 성을 날렸던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으로 쫓았다. 그가 예상했듯이 하나뿐인 가족, 키르바나였다. 늘 방에서 얌전히 있던 그가 갑자기 밑에는 왜 내려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제그는 부상을 면할 수 있었다. 제그를 쫓던 남자들은 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자 덩달아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약해 보이는 백발의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창백한 안색과 처음 보는 기이한 백발. 남자들의 흥미를 사기에 충분한 요소가 아이에게 있었다. "헤에? 귀여운데, 제법." "그만 두십시오. 제 동생입니다." 제그는 얼른 둘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둘의 흥미와 다른 이들의 관심 모두가 키르바나에게 쏠려 있었다. 키르바나의 근처에 있던 남자들이 그를 끌어당겼다. "꼬마야. 나이가 몇이냐?" 키르바나는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함구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거의 제정신이 아닌 남자들은 키르바나를 더듬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아이가 자신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달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이성을 잃고 있었다. 제그가 얼른 그들에게서 동생을 뺏어 안았다. "그만 두십시오." "꼬마는 어른들이 하는 일에 끼어 드는 게 아니야!" 어딘가 광적으로 보이는 얼굴과 목소리들……. 모두 약간씩 미쳐있는 듯 보였다. 비정상적인 웃음과 눈빛들이 탐욕에 젖어 키르바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갑자기 그들이 왜 이러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알 필요도 없었다. 제그에게 중요한 것은 키르바나의 안전뿐이었으니. 그는 키르바나를 자신의 뒤로 돌려세우고 낮게 말했다. "올라가 있어라." "……네." 망설이는 듯한 답이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앞이 보이는 사람보다도 빠르게 계단 위로 올라가는 키르바나의 모습은 이미 익숙했기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곳이 많았지만 제그에게는 상관없었다. 그는 키르바나의 뒤를 따르려는 남자들의 앞을 막아 섰다. "그만 두십시오." 세 번을 이은 경고. 앞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그들은 제그에게 주먹을 내뻗으며 고함을 질렀다. "꺼져!" 피할 새도 없이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진 제그를 지나 그들은 정신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듯한 모습……. 불길함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석에서 술을 홀짝이며 이쪽을 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시선을 잡아끌기 충분한 미인임은 분명했지만 제그의 얼굴은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본 듯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싸늘한 조롱을 담아내고 있는 청자색의 눈동자. 슬쩍 꼬리가 올라가 있는 붉디 붉은 입술이 소름끼쳤다. 잠깐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 제그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계단 난간을 붙잡고 남자들보다 위쪽으로 뛰어 올랐다. 천성적으로 몸이 날랜 그였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맨 앞에서 돌진해 오는 남자를 발로 밀어버렸다. 그가 발을 헛딛고 넘어지자 뒤따라 오던 이들도 엉켜서 같이 굴러 떨어졌다. 제그는 빠르게 밑으로 내려와 쓰러져 있는 남자의 허리에 매여져 있는 장검을 뺏어 들고, 다시 계단 중간쯤에 올라가 섰다. "그만 두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어." "저 새끼가!" 무엇 때문에 굴렀는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눈앞에서 알짱대는 꼬마의 짓거리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직전에 덜미를 붙잡힌 야심가 마냥 불쾌함에 열을 내고 있었다. 제그는 그들이 자신의 바로 앞에서 휘둘려지는 검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저벅저벅 올라서는 모습에 질려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했다. 멀찍이서 그런 자신을 안주거리 삼아 술을 홀짝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울컥! 제그의 손이 무자비하게 옆으로 그어졌다. 그러자 비명이 바로 이어졌다. "크아악! 저 빌어먹을 새끼가!" 생각보다 쉽게 베인 남자의 팔……. 제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뒤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깊게 베여 계단 아래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음에도 남자의 눈에는 광기만이 보일 뿐이었다. 비명도 처음뿐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제그는 코너 바로 직전에 멈춰 섰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 다가오던, 공격하던, 홀렸던 지간에 그는 동생을 보호해야 했다. 그는 검을 뒤쪽으로 크게 끌어다가 앞으로 찔러 나갔다. -푹! 검이 살에 박혀 들어가는 느낌! 생각보다 덤덤한 자신에게 놀라며 제그는 남자의 몸에 박혀 있던 검을 옆으로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당사자나 다른 남자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계단 위로 올라가려고만 들었다. 엄청난 고통이 남자를 잠식했을 것이 분명함에도 탐욕에 젖은 눈으로 전진함 하는 그에게 질리면서도 제그는 검을 다시 굳게 잡았다. 이 비상식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 남으려면 더욱 독해져야 하고 더욱 냉정해 져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깨달은 것이다. 그는 검을 다시 힘껏 휘둘었다. 터럭만큼의 반항조차 하지 않고 욕망에 미쳐 계단만 오르고 있던 남자. 그의 목이 그의 의지를 배신하고 계단 밑으로 계속해서 굴러 떨어졌다. 목이 잘려도 잠시 동안은 의식이 있다고 했던가? 계단 밑에서 몇 번이나 구르는 남자의 눈에는 '어째서?' 라는 경악이 담겨져 있었다. 목숨이 달아나는 순간에 제정신이 들기라도 한 것일까? 제그는 미친 듯이 남자들의 목을 베었다. 아무리 반항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검에 실력이 없었던 제그가 그들을 도륙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미쳐서 그것을 해냈다. 주위에 피가 흥건할 때에 여자가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매력적인 하얀 손을 들어 그의 턱 선을 애무하듯 어루만졌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나와 함께 가자." ……처음으로 살인을 한 날. 제그는 동생과 함께 수도의 뒷골목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말 악마일지도 모른다, 그 여자…….' 제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며 쓰게 웃었다. 그때 피로 얼룩졌던 자신의 손을 보며 얼마나 자괴 했던가? 아무리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지만 살인을 하기에 18살은 너무 어린 나이였다.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그가 이 광란의 살육을 모를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제그는 또다시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맹렬한 증오와 분노, 그리고 공포로 미쳐 가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이는 키르바나 뿐이었고,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이도 키르바나 뿐이었다. 그런 그를 잃고도 계속 살아남을 자신이 제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르바나였다. 피가 계단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소리가 아직도 쉴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고, 지독한 비린내가 후각을 잠식하고 있는 그곳에 한없이 투명한 백색 이미지의 아이가 나타났다. 비린내 때문일까? 하얗게 질린 키르바나는 정확히 형, 제그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르……." 신음 같은 부름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키르바나는 피바다를 서슴없이 건너 그 중심에 서 있는 형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형의 두 손을 꼭 잡고 떨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해요." 자신의 손이 피로 더럽혀 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키르바나는 굳게, 더욱 굳게 형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제그는 어느새 자신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맙다, 키르. 고맙다." 제그는 동생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맹세했다. 이 온기를 자신이 지켜 내고 말 것이라고.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고……. 맹세했었지." 제그는 절대 그날의 맹세를 후회하지 않았다. 되려, 이제는 몇이나 죽였는지 모를 살육자인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미쳐가던 그를 붙잡아 주었다. 이곳에서는 자신보다도 더더욱 추하고 광란의 삶을 살아온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다들 거칠고 언제 서로에게 칼을 겨눌지 모르는 사이였지만 제그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행운아라고 느꼈다. 그들에게는 평생 갈구한다 해도 얻지 못할 것을 자신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는가? '있어야 할 곳'. 편안하고 평온하며 안락하고 안전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할 보금자리를.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낀 날 제그는 많은 것을 떠올렸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타인을 가했던 일, 타인에게 당했던 일. 처음으로 친구를 만들었던 일, 처음으로 적을 만들었던 일. 호의를 베풀었던 일, 적대를 보냈던 일. 호의를 받았던 일, 적대를 받았던 일. ……많은 후회와 반성과 회한이 뒤따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을까? 제그는 치유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 마법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있었던 제그가 뜻하지 않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음은 아무리 길드 가입 자격증이 없어졌다하나, 그곳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곳에서 이 일을 알게 된다면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제그는 마법사로써의 일보 성장에 기뻐했을 뿐, 길드를 유념하지는 않았다. 그는 손대지 않았던 마법서적을 사들이며 홀로 정진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일들을 돌아보는 동안, 그 짧지 않은 세월을 돌아보는 동안 자신에게 호의 섞인 충고를 해준 몇 안 되는 사람 또한 되새겼었다. 생판 남일뿐더러, 동생을 괴롭힌 주범이기까지 한 자신에게 또 다른 동생이 떠오른다는 이유만으로 호의를 베풀었던 못 말리는 '형', 테밀시아. 그가 없었다면 치유 마법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말린다는 명목 하에 자신의 마나를 봉인하려 했던 연인을 그가 말려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일까? 내가 알고 있는 길드는 분명 마법사들이 만든 회합이지 마법사를 만들어 낸 곳이 아니야. 그 몇 마디가 마법 길드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잠재웠을 지도 모른다. 이미 마의 소굴에서 벗어난 자신이 굳이 마법 길드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고 제그는 생각했다.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키르바나와 둘이서 이렇게 오손도손 살 수 있는 현재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그렇게……. 어째서 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이후에 마법에 대한 진보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전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껴서 일까? 그의 정신이 마나를 보다 넓고 정교하게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지고 눈이 트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의 감정의 골이 모두 채워지고 에리하게 세워져 있던 복수의 칼날이 모두 무뎌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잘못된 시각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만들었던 적과 보지 못했던 아군을 다시 가려냈을 뿐. 지금도 변함없이 어머니에 대한 살의를 키우고 있었고 커크란, 이리란에 대한 증오도 잠재우지 않았다. 하지만 전처럼 그 살의와 증오에 잠식되지는 않았다. 옆에서 키르바나가 그를 지탱해 주는 한 다시는 그런 광인으로 전락되지 않으리라. "그녀인가……." 이공간의 입구가 부자연스럽게 일렁이더니 청자색 눈동자의 미녀를 등장시켰다. 허리 밑까지 아름답게 늘어져 있는, 윤기 도는 청자색 머리카락과 어울러진 상아색 피부의 여인. 핏빛처럼 붉은 입술과 고르고 새하얀 치아가 색정적으로 보이는 그녀는 불공평하게도 몸매마저 완벽했다. 약간 흠이 있다면 가슴이 작은 것을 들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녀가 일부로 스스로의 가슴을 단단히 묶어 놨기 때문이었다. 일을 할 때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는 맨손으로도 몬스터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했고 그만큼 프로정신이 강했던 것이다. 그런 면은 존경할 만 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존경하지는 않는 제그였다. 여자는 거실에 앉아 있는 제그를 발견하고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저번 의뢰를 오늘 끝냈다는 소식을 들어서 말이지." 자신의 옆에 찰싹 붙어 앉는 여자를 보는 제그의 얼굴은 별 변화가 없었다. 이 여자가 자신에게서 뭘 원하는 지 제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이세란." "아이!" "……아이." 무심히 그녀의 애칭을 따라 부르자 환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제그는 다시 한번 이 여자의 속셈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처음 이 여자와 몸을 섞었을 때도 그랬다. 갑자기 자신의 입술을 훔치며 달라붙어 오는 아이세란을 안았을 때도, 순수하게 이 여자가 자신을 원해서 그런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첫 만남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그 조롱 어린 미소를 짓던 얼굴이 유혹적으로 달라붙는 것을 순수하게 받아 드릴 정도로 제그는 순진한 남자가 아니었다. 아이세란은 어느새 제그의 앞에 서서, 그에게 자극적인 키스를 해오고 있었다. 제그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이며 스스로에게 경계하라 명했다. 독을 품은 것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위험하다……라고. 들뜬 신음성을 흘리는 아이세란을 품으로 끌어당기면서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름답기에 즐기면서도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그래야 키르바나를 지킬 수 있다고. ========================================================================= 4연참~ 4연참~ 룰룰랄랄 해기님+_+ 얼른 패러디 줘요~! 크하하하하하하~~~ 아해의 장-213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휜이 일을 잘 마치고 왔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정에 맞게 알아서 돌아왔음은 분명했다. 뿌듯해 보이는 얼굴에 목적한 바를 잘 달성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었지만 테밀시아는 별 관심 없었다. 락아타로 가는데 뜻하지 않은 혹까지 붙어서 이것저것 검토해야 할 것들이 산재했던 것도 있지만 어련히 알아서 했겠냐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루트가 몬스터 사태 이후 가장 잠잠한 곳이라고 합니다만 세상 물정 모르는 황태자님께서 이런 거친 코스를 잘 버텨 내실지 모르겠습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라 했잖아. 황제가 되려면 참을성도 많아야지." "근위대 외에도 체력 약한 마법사, 신관들도 함께 할 것이고 딸려 올 시종들이나 요리사, 재단사 등도 있으니 조금은 조정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곳을 통해서 이 관문을 지나는 것이 무난하다고 봅니다." 지도와 각종 서류들을 펼쳐 놓고 루트를 정하는 테밀시아와 루카다였지만, 이내 테밀시아는 포기하고 떨어졌다. 일전에는 뮤비라가 알아서 다 정해, 통보하는 식으로 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익숙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루카다가 무능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뮤비라가 비상식적으로 유능했고, 무엇보다도 테밀시아의 심중을 잘 꿰뚫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좀더 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쓰게 웃는 테밀시아의 얼굴을 힐끔 본 루카다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알아서 정해 올 테니 그런 얼굴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테밀시아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자 루카다는 피식 웃었다. 지배자라 불리는 저 도도한 남자에게 이런 둔한 면이 있을 줄을 몰랐다. 의외의 발견이 재미있기만 하다. '지배자' 테밀시아와 그의 보좌이자 제피모이 며 '걸레'라는 불명예스런 호칭이 붙은 뮤비라 사이의 무성한 소문을 믿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 뮤비라라는 남자의 자리에 앉아 사무를 보는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씁쓸하게 웃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면 믿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 것이다. 루카다는 같은 남자의 몸을 가진 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개인 취향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또 그 정도의 미모라면야 남녀노소 안 가리고 달려들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그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의 취향은 더러운 호칭과는 달리 청초해 보이며 부드러운 뮤비라보다는 좀더 오만하고 강인하며 거칠고, 그러면서도 감싸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냐?" 불쑥 튀어나와 퉁명스레 묻는 소년. 다른 생각에 흠취해 있었던 루카다는 평소와는 달리 소스라치게 놀라, 한 걸음 뒤로 가며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아……. 아무 것도." 두근두근. 루카다는 평소와 달리 거세게 뛰는 심장을 오른손으로 지긋이 눌러보았다. 이 고동이 단순히 놀라서 생긴 고동인지, 아니면…….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휜을 돌아보았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저어 보였다. '악취미다, 이런 전개는…….' "이봐. 락아타에 가면 자유롭게 놀러 다닐 수 있는 거야? 귀족 연회에 내가 참석할 수 있을 리가 없고, 만일 호위로 가는 거라면 꼼짝도 할 수 없는 거 아냐?" 걱정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심각하게 물어오는 휜을 보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자신을 느끼고 다시 흠칫 놀라 버렸지만 말이다. "휜은 정식으로 함께 가는 일원이 아니니까 일정이 어떻게 되든 괜찮아요. 뜻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저희와 궁에 가고 싶으면 몰래 숨어들면 그만이고, 아니라면 밖을 마음껏 구경 다니셔도 되는 겁니다. 연회는 한달 동안이나 계속 되니까 기간은 충분해요." "헤에! 진짜? 나 가보고 싶은 곳 많아! 락아타 하면 상거래로 유명하잖아? 수도에는 매일같이 장이 서고, 일주일에 한번 오래된 물건이나 쓰던 물건을 내놓고 파는 칠일장도 있데! 장은 한번 가봤는데 칠일장은 한번도 못 가봤거든!" "칠일장이면 되는 겁니까?" "아, 이제부터 알아봐야겠다! 하하!" 휜은 쾌활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럴 때만 그 또래의 소년답게 보이는 그였다. 루카다는 다시 자기도 모르게 부드러워지는 입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건 건 나답지 않아." 테밀시아는 약간 낯이 붉어진 루카다를 지켜보다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휜과 그, 둘만이 아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것을 저 남자에게도 알려준다면 좋겠지만……그렇게 되면 약속에 위배된다. 게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루카다라면 곧 알아차릴 것이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의 그 아담한 건물이 보였다. 욱씬거리는 가슴에 한 손을 갖다대며 테밀시아는 쓰게 웃었다. ***********************************************************************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저 별들 중에서……." 낮게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두운 숲 속에 흐르고 있었다. 목소리를 따라 가보면, 제법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준비한 장작불을 뒤적거리는 남자가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부르는 노래는 쓸쓸하게 느껴져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 분위기의 노래를 부른다고 보기에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남자의 태도나 모습이 너무 무덤덤해 보였지만 일단 느낌은 그랬다. 불 위에는 잘 다듬어진 고기가 자글자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다. 허리에 매여 있는 물통을 빼내, 입에 가져다 대자 맑은 물이 쏟아져 내렸다. 깊은 산의 약수처럼 달고 맛있는 물이었다. 충분히 목을 축인 남자는 장작을 불 속에 몇 개 집어던진 뒤, 고기를 끄집어냈다. 며칠 동안 내리 걸은 덕에 피곤이 식욕을 이기고 있었지만, 자기 관리에 능한 그는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부지런히 고기를 뜯어먹은 그는 일전에 들렀던 마을에서 산 망토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비록 넓고 깊은 숲은 아니지만 혼자서 무방비 하게 자기에는 위험이 따르는 곳이건만 그는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다행히도 야수의 접근 없는 안전한 밤이 지나갔다. 새들의 아침 인사가 시작될 무렵 남자의 눈이 떠졌다. "방향을 잃은 것인가." 기지개를 피며 중얼거린 남자는 부지런히 짐을 챙기고 일어났다. 대충 물통의 물로 세수를 마친 뒤, 아침 식사는 거르고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물통에서 그가 세수를 할 정도의 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소리를 들어보니 아직도 많은 양의 물이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저번 마을에서 사흘만 걸어가면 이웃마을이 나올 거라고 했는데." 걸으면서도 목을 움직이거나 팔을 가볍게 휘둘며 몸을 푸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다시 작게 흥얼거리며 발길을 재촉했다. "……유난히도 작은 별이 하나 있었다네. 그 작은 별엔 꽃이……." '꽃과 어린 왕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잔잔한 멜로디도 멜로디이거니와 가사가 너무 애달팠기 때문이다. '있어야 할 곳'을 알면서도 떠나야 했던 어린 왕자와 겨우 깨달았음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꽃. 그 애절한 닮은꼴의 사랑이 눈이 시리도록 슬프다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결과는 해피 앤딩.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꽃이 다시 살아나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적어도 스스로가 '있어야 할 곳'을 알고 있지 않은가? 서로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신은……그곳조차 모른다. 그런 곳이 자신에게 생길 수 있을지 조차도 믿지 못하고 있다. 한숨을 내쉰 그는 발길을 더욱 재촉했다. 이런 생각을 해봤자 자신에게 상처로만 돌아올 뿐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마을이 보이기까지는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던 그가 뜻하지 않게 멈춘 이유는 갑자기 날라 온 돌맹이 때문이었다. 살상력은 없더라도 전통으로 맞으면 피는 볼 듯한 예리한 돌맹이가 그의 머리를 향해 날라 온 것이다. 물론 얌전히 맞아주는 취미를 키운바 없었던 그였기에 유유자적하게 피해버렸지만 말이다. 뒤따라 날라드는 돌맹이들을 여유 있게 피하며 그 주범으로 보이는 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것은 달려드는 것보다도 위압감이 있었다. "뭐 하는 짓이지?" "으윽. 꺼져, 불한당!" "……?" 유아틱한 공격답게 유아틱한 외침이었다. 뿐만 아니라 생김새마저도 유아틱했다. 범인은 이제 겨우 8살쯤 되 보이는 꼬마였던 것이다. "일단 근처에 마을이 있는 건 확실한 모양이군." 주춤하는 아이에게 그는 물었다.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 용감한 소년. 난 그냥 여행자 일 뿐이야. 그나저나 마을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하지?" 돌을 던졌음에도 차분한 그의 태도에 아이는 찔끔하며 물었다. "정말 뢰의 사자(死者)의 동료가 아니야?" "뢰의 사자(死者)? 그건 뭐지?"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은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미안해요!" "괜찮다. 마을로 가는 길을 알려주겠니?" "응! 내가 안내할게요!" 천성이 쾌활한 성품이었는지 아이는 이내 웃으며 앞장서 걸어갔다. "여행자라면 많이 돌아다녀 보셨겠네요?" "그다지……." "으음. 저희 마을은 요, 자수로 유명해요! 어른들이 그러는데 황제께서도 찾으시는 명품이래요!" "대단하구나." "헤헤." 감격이 섞였다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아이는 긍지 서린 얼굴로 웃었다. 그러다 무엇이 생각났는지 손뼉을 마주 치며 물었다. "아참! 제 이름은 레너에요. 아저씨는 요?" 남자의 고개가 슬쩍 들려 졌다.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마을을 살펴보며 그는 무심히 답했다. "무하." 혼자서 여행한지가 벌써 며칠인지 모른다. 특정한 루트 없이 마을과 마을 사이를 찾아다니며 다니는 여정. 물론 목적지는 있었다. 수도의 용병 길드가 바로 그곳이다. 물론 평생 사치만 안 한다면, 놀고먹어도 좋을 재물이 수중에 있긴 하지만 어딘가에 정착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의뢰를 받고 떠돌 생각이었다. 전에 약혼 건만 아니었다면 시륜과 함께 떠돌았을 테고 그것도 꽤나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후회 해봐야 소용없었다. 뜻한 바는 아니지만 처음부터 동행을 만나고, 함께 다녀서 일까? 주위가 유난히 조용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주위에서 보내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고, 탐색어린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된다. 굳이 주위와 맞춰가며 쉬어 갈 필요도 없었다. 단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자문을 청할 수 없어 곤란했지만 그럭저럭 혼자 다니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오랜만에 만나는 인간은 꽤 반가운 존재였다. 그 존재가 비록 수다쟁이에 8살밖에 안 되는 꼬마라지만 말이다. 무하는 그답지 않은 대꾸도 간간이 해주며 레너의 뒤를 따라갔다. 자신의 마을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레너의 설명답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그을림 없이 깨끗했고, 한가운데 보이는 공원의 잔디는 아직도 연두빛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곳곳에서 실 더미를 들고 바삐 가고 있는 아가씨도 보였고 한가롭게 담배를 피고 있는 아저씨도 보였다. 몬스터가 극성이지만 원래 산적이나 강도 떼들의 습격이 많았던 만큼 성벽도 견고했고 준비도 철저했기에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하는 그곳에서 미묘하게 흐르는 불안함과 긴장감을 민감하게 감지했다. 그는 자신이 무심코 흘린 단어를 되새겼다. "뢰의 사자라……." 레너가 흠칫하며 자신을 올려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하는 그가 또 오해하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게 뭔지 물어도 되겠니?" 안심한 듯 한숨을 쉰 레너는 주위를 몇 번이고 둘러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마을에 사는 번개 술사에요. 말 그대로 번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무지 강해요. 근데 성격도 더럽고 돈만 밝히는 못된 녀석이에요. 울 엄마의 돈도 꼬박 꼬박 뜯어가고요, 옆집 아줌마 네도 돈도 뜯어가고요. 암튼 마구잡이로 돈을 뜯어내는 순 강도라니까요. 촌장 할아버지가 보다 못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용병을 고용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강도녀석이 할아버지네 가서 행패를 부리다 갔어요. 게다가 동료를 불렀으니 헛튼 수작 말라고 협박까지 했다고요!" "흐음……." 번개 술사라는 단어는 처음 접하는 것이지만 대충 어떤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입가를 매만지고 있는 무하에게 레너는 자신의 가슴을 팍팍 치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 없어요! 조금만 더 크면 제가 없애 버릴 거 에요! 에헴!" "멋지구나." 확실히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레너는 자신의 각오를 지켜 보였다. 온다는 동료를 막기 위해서 마을밖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돌맹이도 레너가 직접 날카롭게 깨뜨린 것이라 했다. 무하는 대견하다며 레너의 머리를 부벼 주었다. 늘 말썽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는 말만 들어왔던 레너는 신나서 헤죽 웃어 보였다. 내리막길을 모두 내려가자 활짝 열린 성문이 보였다. 적어도 이곳의 민심은 언젠가 시륜을 만났던 그곳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좋은 느낌이 나는 곳을 들렸다고 무하는 생각했다. 레너는 자신이 잘 아는 곳을 안내해 주겠다며 무하의 손을 잡고 마구잡이로 끌어당겼다. 따라 가보니 작은 빵집을 겸하는 여관이었다. 식당은 없어서 다른 곳을 찾아야 했지만 빵 맛이 좋기 때문에 제법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마침 갓 구운 빵 냄새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너는 활기차게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엄마 저 왔어요!" "우리 아가 왔니? 잠깐 거기 있어라. 마침 빵이 다 구워졌단다." 부드럽고 나릇나릇한 목소리가 주방으로 보이는 쪽에서 새어나왔다. 레너는 가게 안에 있는 작은 테이블 중 하나를 꿰차고 앉아서 명랑하게 답했다. "네에!" 가게자체가 좁은 그곳은 한쪽 벽 전체가 진열장으로 되어 있어, 열 종류의 빵이 깔끔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다른 한 쪽으로는 세 개의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각기 두 개의 앙증맞은 의자가 놓여져 있었는데, 이곳의 단골 계층을 알 수 있는 좋은 단서였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곳에 주인의 섬세한 손길이 닿아져 있는 곳이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무하에게 레너는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멋지죠?" "그래. 멋진 곳이구나." "헤헤." 다른 어른들 같으면 꼬마가 까분다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어린이 재롱 보듯 장난 섞인 맞장구를 쳤을 텐데, 눈앞의 아저씨는 한없이 진지하게 답을 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꼭 어른 대접을 해주는 것 같아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 벗이 미쳤습니다..... 제가 드디어 미친겁니다....ㅡㅡ;;; 허허허..... 아해의 장-214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결국 레너의 집에서 묻게 된 무하는 아침 일찍부터 방에 쳐들어와 막무가내로 자신을 끌어내는 레너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왜 그러는 거지?" "오늘은 각 집에서 자수품을 내거는 날이에요! 한 달에 딱 한번 있는 날이라구요! 구경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 할 걸요?" 자신을 끌어내는 레너를 번쩍 들어 어깨에 앉힌 뒤,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쾌활하다 못해 정신 산만한 레너와 함께 있자면 뭐가 뭔지 모르는 새에 끌려 다녀버리기 때문에 이렇게 라도 해야 했다. 영문모르고 남에게 끌려 다니는 건 무하의 취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수라……." 어차피 급한 일도 없고, 되려 넘쳐나는 것이 시간인데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 영감, 저런 꼬챙이랑 싸우라고 우리를 불렀단 말이야? 지금 우리를 얕보는 건가?" "뭐, 어떠냐? 우리야 꼬챙이 건 비계 건 처리해서 돈만 타면 그만인데." 딱 보기에도 건장해 보이는 근육질의 사내, 둘. 아마 촌장이 고용했다는 용병인 모양이었다.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마을을 위해 그들을 고용한 촌장의 용기는 무척 존경할 만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웬만하면 좀 더 돈을 들여서 괜찮은 녀석들을 고용하면 안 됐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하는 손에 들려 있던 천 자락으로 고개를 돌리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상한 검은 비단에 검붉은 수가 정교하게 놓여 있는 것이 마음에 쏙 들어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을 뿐인데 왜 갑자기 나타난 용병이, 그것도 뢰전의 사자를 처리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나타난 용병이 자기에게 시비를 거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옆에서 그가 사준 사탕을 열심히 먹고 있던 레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기를 뽑아드는 용병 둘에게 물었다. "아저씨들은 누구세요?" "우리는 용병이다. 뢰전의 사자라는 녀석을 처리해 달라는 간곡한 의뢰를 받고 왔지." "넌 뭐냐, 꼬마?" 레너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무하를 올려보며 말했다. "이 사람들 바보?" "부정할 수 없는 게 안타깝구나." 발끈하는 둘에게 레너는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사람 잘 못 봤어요. 이 아저씨는 저희 여관에 머무는 여행자라구요. 그것도 바로 어제 온." "……." 동시에 얼굴을 붉히는 둘을 무시하며 무하는 천의 주인에게 물었다. "좀 더 낮출 수는 없습니까?" "참내, 이 정도 품목은 수도의 귀족 가에서 쓰는 고급이라고요. 이 가격이면 거저 라니까?" "흐음……." 다시 꼼꼼히 천을 살피기 시작하는 무하. 레너는 사탕을 빨면서 완전히 무시된 두 용병을 동정 어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 미안합니다." 처음에 시비를 걸었던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무하는 뜻밖이라는 듯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다시 시비를 걸었으면 걸었지 사과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영감이 말했던 인상착의하고 너무 닮아서." "인상착의요?" 무하의 옷은 보통 여행자들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검은색 상의에 검은색 조끼를 겹쳐 입고, 바지는 회색에 검은 가죽으로 된 부츠를 신은 모습. 어두운 색은 원래 여행자들이 즐겨 입는 계통이었다. 때가 타도 별 티가 안 나는데다가 화려한 색의 옷은 비싸기 때문이다. 걸치고 있는 진회색 망토도 그러했고, 매고 있는 갈색 배낭도 그러하고 어딜 보나 평범한 차림새일 뿐이었다. 진 갈색 가죽띠에 매여 있는 검은 그럭저럭 쓸만한 수준 일뿐, 관리를 잘 못한다면 금방 바꿔야 싸구려에 불과했다. 발목 쪽에 고정시켜 놓은 은장도는 매우 고가의 예술품이었지만 그것이 보일 리가 없지 않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무하는 어디서 보건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을 뿐 어디하나 튀는 구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헌데 인상착의라니? 되려 무하라는 남자를 외형적으로 설명하고자 할 때는 마땅히 고를 말이 없지 않는가? 의아해 하는 무하에게 해답을 준 이는 레너였다. "아! 그러고 보니 뢰전의 사자도 두건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무지무지 튀는 수가 놓여진 하얀 두건인데……." "우, 우리는 두건을 하고 있다는 소리만 들었거든. 이 마을에서 두건을 하는 녀석은 그녀석 밖에 없다고 영감이 그랬거든." "하긴 그딴 녀석하고 조금이라도 비슷한 모습을 하려는 사람은 없으니까." 납득이 가는지 레너는 제법 심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는 동안에 무하는 가격을 깍고 깍아서 결국 그 천을 사버렸다. "눈이 높네요, 아저씨!" 천 자체는 매우 아름다웠다. 불꽃으로 된 털을 가진 새를 섬세하게 수 높은 검은색 비단. 귀족들의 정장 복을 입었을 당시 한 손에 걸치는 천, 툰으로 쓰면 딱 일 천이었다. 검다 못해 청색으로도 보이는 그것은 분명 장사치의 말대로 귀족 가에서나 쓰일 법했다. 때문에 매우 고가이기도 했다. 좋게 말해도 부티나 보인다 하기 힘든 무하가 무난하게 셈을 치루고 천을 챙기는 것을 보면서 레너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천은 어디다 쓰시게요?" "선물." "선물요? 아! 뇌물로 쓰려는 거죠?" 비단을 잘 싸서 배낭에 집어넣은 무하는 레너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인 뒤 말했다. "선물은 선물. 뇌물은 뇌물이야." "네?" 두 용병은 계속 머뭇거리다가 이내 제안을 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뭣했던 모양이다. 하긴 공연한 사람을 붙잡고 생 쇼를 한 것이니 그 민망함이 오죽하겠는가. "사죄의 뜻으로 우리가 밥 사겠습니다.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신경 쓰지 않으셔도……." "어차피 그 녀석 잡을 때까지는 무전취식이거든. 쿡쿡." ……참으로 용병다운 용병이었다. "겨우 잡아서 의뢰인에게 데리고 갔거든? 그런데 발끈하면서 되려 화를 내는 거야!" "그야 가출한 아들을 찾은 거였는데 반 죽여서 데리고 갔으니까." "푸하하! 아저씨들 정말 바보다!" 마크와 호다라고 이름을 밝힌 두 용병에 의해서, 무하는 얼떨결에 촌장의 집에 초대되어 버렸다. 벌써 몇 십분이나 둘의 수다를 듣고 있었는지 모른다. 마을 토박이인 레너는 둘의 이야기를 열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차마 돌아가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직 해도 될 말과 자제해야 할 말의 구별조차 못하는 꼬마를 거친 용병의 옆에 두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 굳이 꼽자면 촌장이 내놓은 차가 입에 맞아서이기도 했다. 씁쓰름한 것이 언젠가 새먼이라는 경비대장에게 얻어먹었던 것과 같은 맛이었던 것이다. 벌써 세잔 째 차를 비우는 그의 모습에 촌장은 웃으며 말했다. "젊은이들 입맛에는 안 맞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따로 챙겨 드릴까? 이번에 잎을 많이 거둬서 말이오." "아닙니다. 이 이상 폐를 끼질 수는 없지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이 차의 이름을 알 수 있을 까요?" "흔히들 키우는 차 잎이라 되려 상점에서는 구하기 힘들 거요. 화림이라 불리는 차지." 촌장은 차의 이름을 외워두기 위해 입안으로 몇 번 읊어 보는 무하를 보다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좀 싸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젊은이답지 않게 진중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마침 뒷마당에서 차 잎을 말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분이 많았다. 촌장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고도 두 용병의 수다는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는데." "응?" "내 친구 중에 먼저 하 등급이 된 녀석이 있거든? 그런데 그 녀석이 이번에 회색 고향을 다녀왔다는 거야!" "쿨럭!" 갑자기 사레가 들었는지 괴롭게 기침하는 무하였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세 명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겨우 진정한 그의 귀에 이어지는 대화가 박혀 들어왔다. "아아, 그 소문이라면 들었어. 각 단에서 생존자들을 포섭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하던데? 녀석들 한번 다녀오고 나서는 몸값이 껑충 뛰었었다고 모두 부러워하더라고." "그래. 내 친구 녀석도 범크에 포섭 됐다고 자랑하더라." "헤에. 좋겠군. 범크라면 곤크하고 쌍벽을 이루는 대(大) 용병단이잖아?" "그래. 쳇, 운이 좋은 녀석은 뭐가 되도 된다니까. ……아, 녀석이 그러는데 엄청 강한 전사가 둘이나 동행했다 나봐. 아마 둘 다 카 등급 전사일거라고 하더군. 보수를 받고 바로 일행에서 빠져 나와서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어지간한 카 등급 용병들보다도 훨씬 강할 거라고 하더라."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던 레너가 무언가를 묻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쾅! 요란한 소음과 불안정하게 들썩이는 문짝. 그리고 희미하게 들리는 비명과 잇따라 들리는 고함소리. 안에 있던 네 명의 남자(레너도 일단은 남자니까)는 서로 마주보다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문가에 형편없이 나뒹굴고 있는 촌장을 발견한 마크는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영감! 영감!" "쿨럭!" 헛기침을 내뱉으며 괴로워하는 그를 조심스럽게 눕힌 마크는, 범인이라 추측되는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싹 마른 몸에 조금이지만 곡선이 있는 범인은, 놀랍게도 여자였다. 등까지 칠렁이는 머리카락이 매력이라면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독한 향수냄새와 화장품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뽑아든 마크와 호다는 찬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체구가 상당한 촌장을 문에 쳐 받을 정도라면 악력이 상당할 테지만 깡마른 몸을 보자면 믿겨지지 않았다. 마법인 걸까? 허리에는 천으로 칭칭 싸져 있는 검이 있었는데, 둘은 그것을 단순한 위장용이라 판단했다. "두건……." 나지막한 무하의 목소리를 들은 둘은 그제서야 여자의 머리에 매여져 있는 두건을 발견했다. 여지껏 보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로 화려한 두건이었다. 둘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뢰전의 사자?" 여자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싸구려 공명심이 도진 모양이다. 뭐가 자랑스럽다고 남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좋아하는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무하의 미간이 슬슬 찌푸려지고 있었다. "너희가 나를 잡기 위해 고용됐다는 용병들이냐?" "잡는 게 아니라 처리하기 위해 고용 된 거다." "찾는 수고를 덜어줘서 고맙구만." 마크와 호다는 검을 위협적으로 휘둘며 천천히 간격을 좁혀갔다. "흥! 너희 같은 피라미를 고용할 줄 알았으면 일부로 경고할 필요도 없었다!" 뢰전의 사자라 불리는 여자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으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마크! 적은 술사다. 시간을 줘서는 안돼!" "알고 있다고!" 둘은 동시에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무하는 빠르게 일그러지는 대기를 감지하고 레너와 촌장을 집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엄청난 번개가 땅으로 내리 박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연의 번개라기 보다는 마나의 구동에 의한 인위적인 번개였기에 그 위력은 시술자의 컨트롤에 따라 달라진다. 다행이 여자의 컨트롤이 능숙하지 않은지, 번개의 대부분은 목표물 없는 땅에 꽂혀 대로 흡수돼 사라졌다. 하지만 일부분은 마크와 호다에게 정확히 맞춰졌지만 둘은 능숙한 몸놀림으로 그것을 피하며 여자에게 접근했다. 술사가 마법사에 비해 엄청난 컨트롤과 속도를 자랑한다지만 한번 대규모적인 구동을 일으켰다면 그 뒤에 반드시 틈이 생긴다. 둘이 노리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 그것은 매우 적절한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크아악!" "으윽!" 놀랍게도 번개의 공격이 바로 이어졌다. 둘은 황급히 팔을 교차시켜 그것을 막았지만, 번개는 그런다고 막아지는 속성의 공격이 아니었다. 살이 타는 섬뜩한 소리가 귀에 울렸다. 둘은 황급히 허리띠에 고정시켜 두었던 리커버리 포션을 상처에 부었다. 하얀 기포가 일어나며 상처가 아물어지는 것이 보였다. 벌어졌던 살이 모아지고, 뜯겨 나간 자리에 새살이 돋는 아픔은 상상을 초월했다. 때문에 싸우는 도중에 포션을 쓰는 것은 거의 금지하다 시피 되어 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어쩔 수 없었다. 둘은 상처로 인한 아픔과 치유로 인한 아픔을 이중으로 겪으면서도 생생한 적을 경계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자신들을 공격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두 용병의 얼굴을 구경만 할뿐, 공격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언제든 끝낼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빌어먹을!" 여유를 부리는 그 모습에서, 쥐를 잡아 가지고 놀다가 먹는 고양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들을 가지고 논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부로 손을 델 수 없는 자신들이 분통할 따름이었다. =========================================================================== 쓰면서도 뭔가 아니다 싶은것이... 고민하다가 약속때문에 올립니다. 나중에 출판을 할 때는 이부분만 대폭 수정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가까운 시일내에 마음에 드는 수정이 이루어진다면 수정본으로 올리겠습니다. 어떤게 수정을 하던 내용 진전은 이거와 똑같지만요. 그럼^^ 아해의 장-215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집 전체가 진동을 할 정도의 격한 충동이 가시자, 촌장과 레너를 감싸고 있던 무하는 고개를 들고 밖의 동향을 살폈다. 비명이나 신음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다행이 잘 피한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고통에 질린 비명소리가 집안까지 울려왔다. 움찔하며 떨떨 떠는 레너의 머리를 잠깐 부벼 준 무하는 검 자루에 손을 갖다대며 문손잡이를 천천히 비틀었다. 레너는 강하다 보기 어려운 무하가 전투를 각오하고 나가려는 모습을 보고, 얼른 그의 옷자락을 잡아 쥐었다. 제대로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벌벌 떨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 만류가 제법 굳건했다. 자신의 옷을 꾹 잡고 놓지 않는 레너를 대견스러운 듯 보다가 천천히 그 손을 뿌리쳤다. 감동에 젖어있기에는 상황이 급박했던 것이다. "괜찮다." 기겁하며 다시 자신을 붙들려는 레너에게 무하는 차분히 한마디 해준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아이가 뛰쳐나올까 염려되어 밖에서 굳게 잠그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옆에 있는 빗자루를 문에 엇갈려 놓는 것으로 충분했다. 최소한의 할 일을 마친 뒤, 돌아본 마당의 풍경은 참혹했다. 아직도 작은 불꽃을 뿜어내고 있는 나무들과 곳곳에 타버린 풀들. 꽤 많은 양을 이루고 있는 핏방울과 포션을 썼는지 고통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용병. 그리고 주위에 작은 번개를 소환해서 그들을 놀리고 있는 번개술사. 힘겹게 피하던 용병들은 갑자기 뛰쳐나온 무하를 돌아보며 황급히 소리쳤다. "얼른 들어가!" "위험해!" 하지만 들어 가란다고 해서 들어갈 거였으면 애당초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무하는 검을 천천히 뽑으며 뢰전의 사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 침착함이 거슬리는 듯, 그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원래 누군가와 싸울 때, 상대방이 악을 지르는 것보다 침착한 편이 더 위압감을 받기 마련인 것이다. 번개술사는 자신이 잠시나마 위압감을 받았다는 것이 거슬리는지, 다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두 용병을 가지고 놀 때와는 질적으로 틀린 엄청난 뇌전이 그녀의 주위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무하는 몸을 낮추고 경계했을 뿐, 다가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술사인 그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가격을 하는 것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술사에 대한 지식은 단편적으로 책에서 접했을 뿐, 자세히는 모르는 무하로서는 주의에 주의를 기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저런 양이라면 그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전으로 알고 있는 용병들과는 달리 그는 모든 것에 집중하며 그 흐름을 파악하려 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행위였지만 무하에게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그 무식하다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주의력에는 용병들은 혀를 내둘렀다. 저 녀석은 초보임이 틀림없다.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아주 초보는 아닌 모양이지만 마법사 아니, 술사를 상대한 적은 없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은 몸을 간신히 이끌며 검을 곤추들었다. 초보자가 저렇게 필사적으로 덤벼드는데 가만히 있어서야 프로로써 면목이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저 망할 뢰전의 사자가 초보 녀석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이라면 공격의 기회가 있다! 여자의 주위에서 형성되고 있던 번개가 극에 달했을 때, 무하의 몸이 빠르게 그녀에게 접근했다. 거의 동시에 뇌전이 그의 몸을 향해 정확히 쏘아졌다. 무하는 들고 있던 검을 땅에 꽂아버리고 몸을 한껏 낮춰 달렸다. 번개가 검을 타고 땅으로 흘러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여자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당황한 여자가 다시 번개를 부르려는 순간, 무하의 주먹이 그녀의 복부에 사정없이 꽂혔다. 인정사정 없는, 하지만 정확한 주먹질이었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그녀를 따라붙어 다시 한번 복부를 내리친 무하는 마지막으로 주먹을 들었다. 아직 정신이 붙어 있는 그녀를 기절시키기 위해서였 다. 하지만 술사도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뒤로 힘껏 덤블링을 해서 피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허리에 매여 있던 검을 뽑아들고 빠르게 외쳤다. "뢰(雷)!"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번개가 형성되어 무하에게 쏘아졌다. 그 다급한 순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하는 멍하니 여자를 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술사조차도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검?" 무하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접근하고 있었던 두 용병이 얼른 그를 끌어당겼다. 무하가 자리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강력한 번개가 그 자리에 내리꽂혔다. "왜 멍하니 있는 거야, 멍청아!" 힐난하는 마크는 쳐다도 보지 않은 체, 무하는 술사의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룬어로 뢰가 새겨져 있는 검……. "빌어먹을! 번개술사가 아니었잖아!" 속은 것이 분한지 마크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지만 마법검의 성능 여하에 따라 술사보다도 힘든 적을 만난 것일 수도 있는 지라, 조심스럽게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낭패 어린 신음성을 흘렸다. "젠장. 부여 아이템이다." 룬 아이템이라면 수십 차례 사용했을 때 효력이 떨어지지만 부여 아이템은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제조가 불가능한 것을 떠올렸을 때 저것은 분명 고대의 것이고, 고대의 부여 아이템은 영구적인 효과를 자랑으로 하는 국보급 보물이었 다. 무하가 그것을 알아보고 굳어버렸던 것일까? 마크는 무하라는 남자를 새삼 다시 보았다. 그 정도로 상황파악이 빠르다면 생각 외로 실전경험이 많은 녀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당한 전력이 되줄 수도……. 생각이 완성되기도 전에, 초보자라 생각했던 무하가 천천히 일어났다. 얼핏 보기에는 여유 있어 보이는 몸가짐. 하지만 순간 오싹할 정도로 분노 어린 행동. "그 검……어디서 난거지?" "눈이 썩은 녀석은 아닌 모양이구나! 이건 내가 고대 유적에서 직접……!" "헛소리 집어치워." 손가락 하나 하나를 천천히, 그리고 강하게 끌어 쥐어 주먹을 만들면서 그는 술사, 아니 여자에게로 걸어갔다. 아직도 번개에 맞은 영향이 미쳐 있을 검은 쥐지 않고 맨손으로 적에게 가는 모습이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강한 분노가 감히 그를 막지 못하게 했다. 여자는 무하가 내뱉은 말에 당황하며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묻지. 그 검 어디서 났지?" "이, 이건 내가 고, 고대 유……."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 검……." 싸늘한 예기가 여자의 전신을 죄여왔다. 약간 숙여져 있던 무하의 고개가 들려 지면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어디서 났지?" "히익!" 잔뜩 질려 뒤로 물러서던 그녀는 결국 형편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무하는 뚜벅뚜벅 그녀에게 걸어가, 아직도 꾹 쥐고 있는 검을 뺏으려 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외쳤다. "뢰(雷)!" 바로 앞에서 내리꽂히는 번개가 있음에도 무하는 검을 뺏어 드는 데만 집중했다. 오직 한 점으로만 집중된 번개는 살상력을 띄고 목표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해!" "멍청이!" 어차피 늦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크와 호다는 무하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다음 순간이었다. 무하의 몸 주위로 순식간에 핏빛 바람이 일어났다. 그것은 번개마저도 빠르게 흡수해 버리고,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번개의 위력을 가장 잘 아는 여자뿐아니라 마크와 호다마저도 믿겨지지 않는 현실을 앞두고 멍하니 입만 벌렸다. 그렇게 모두 굳어 있는 와중에 무하만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다. "레타의 일원이냐?" 여자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속삭인 질문. 그로서는 단순히 도둑이었냐는 뜻으로 내뱉은 질문이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비밀의 쇠사슬로 엉켜 있는 그 이름이 외부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는 것. 그것은 당사자는 별 뜻이 없더라도 길드에게는 처분의 대상자가 되기 충분한 문제였던 것이다. 레타의 일원인 여자는 자신의 번개가 허무하게 막혔던 일과 외부인의 입에서 나온 금어로 인해 혼란에 빠져버렸다. 무하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마법 검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검을 빼앗기고도 멍청히 있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검 손잡이 뿐 아니라 검 집을 칭칭 둘러싸고 있는 천 조각을 거칠게 풀러 내렸다. "와!" 상황을 잊고 감탄성을 올릴만한 화려한 검이었다. 저런 싸구려 악당에 불과한 여자의 손에 있기에는 너무 과분한 보물이다. 기이학적인 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으며, 그 무늬의 흐름이 손잡이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흐름이 절정이 닿는 곳에는 손가락 두 마디는 족히 넘어 보이는 짙푸른 보석이 박혀있는 데, 그 광채가 고아해 자신의 값어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예술품에 가까운 그것은, 새겨져 있는 룬을 제외하고서라도 국보급에 가까웠다. 무하는 검 신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다가, 진중한 자세로 그것을 검 집에 밀어 넣었다. 들어가면서 들려야 할 최소한의 마찰음조차 없는 매끄러움. 그것은 세공을 제외한 검 자체가 보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황실이나 카르민 계층에 있어야 마땅할 그것이 어찌 저런 여자의 손에 있단 말인가? 호다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도둑?" 흠칫! 여자의 몸이 순간 굳었음을 세 명의 남자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무하는 자신이 풀러놓은 천 조각을 주워들어, 다시 검을 칭칭 감쌌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에 잘 고정시켜 두었다. 단검이라 원래의 장검과 함께 매여 있어도 부담스러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묘한 눈으로 보는 이들을 무시한 채, 땅에 꽂여 있는 검을 뽑아 살펴보았다. 강력한 뇌력을 직통으로 맞아서 인지, 원래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날에 자잘한 금이 가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일단 그것을 챙겨두었다. 무기점을 발견하는 즉시 새로 구입하리라 마음먹었다. 무일푼일 때 생긴 것이라 아껴서 사용했지만, 검 자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거액이 손에 들어와 좋은 검으로 바꿀 생각이었기에 별 아쉬움은 없었다. 마크가 순수한 탐욕으로 물어왔다. "그 검을 어찌 할 생각입니까?" 만일 판다면 평생 사치 부리며 놀고먹을 수 있는 거액이 들어올 것이고, 전투에 사용한다 해도 유용하기 그지없을 물건이었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이리라. "주인에게 돌려줘야지요." "주인이요?" 뜻밖의 말에 멈칫했다가, 곧 뻔한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무하는 속물적인 그를 나무라듯이, 당연한 거 아니냐며 되 받아쳤다. "하, 하지만 주인을 어떻게 알고……?" "제가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검의 주인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누구보다도 이 물건의 소유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무하였다. 기억하다 뿐이겠는가? 바로 그 자신이 직접 건네주지 않았던가? 언젠가 자하라 가의 파티에서 몰래 나와 축제를 즐기던 날. 유괴라는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가지게 된 날. "클래너 카 곤크……. 인연이란 참으로 미묘한 거군요." 무하의 낮은 중얼거림을 들은 마크와 호다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수 없지 않은가? 대 용병단, 곤크에서 카 등급을 획득한 사람이라면……. "저 도둑은 어떻게 처리하지?" 애써 미련을 떨친 호다가 아직도 멍하니 있는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고개가 점차 숙여지더니 이내 번쩍 들어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그 금어를!" "……?" "뭐?" 자신이 내뱉은 말의 파동을 모르는 무하와 아예 듣지를 못한 마크와 호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여자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더욱 악에 바쳐 소리쳤다. "네 녀석이 일원일 리가 없어! 일원이라면 '동류'를 알아보고도 '이단' 앞에서 공격하지 않아! 그렇다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무슨 소리……?" "배신자? 하지만 배신자의 말로는 죽음. 아니면 반병신의 길뿐. 네 녀석처럼 사지 육신 멀쩡한 녀석이 배신자일리는 없고……. 스파이냐?"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절대는 여자에게 무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단지 친구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인데……." "길드 존재를 아는 이라고? 하지만 길드원은 타인 앞에서 금어를 입에 담지 않아. 네가 아는 녀석은……." 여자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무하는 자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꺼냈다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집어 보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요크노민의 신변 이야기는 꺼낸바 없었다. 이 정도라면 그의 일이 발각될 위험은 없을 것이 라 판단하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붙잡고 고문을 한다고 해서 입을 열 무하가 아니었기에, 요크노민의 신변은 절대 안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여자는 살기 어린 핏빛 눈으로 무하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은 전음처럼 무하의 뇌리에만 울렸다. "네가 아는 녀석은 스파이구나!" 다음 순간 여자는 품에서 손바닥의 반 만한 종이를 꺼내 부욱 찢었다. "스크롤!" 주춤거리며 몸을 낮추는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자의 주위로 금빛 마법진이 형성되며 곧 그녀의 신형은 사라졌다. 텔레포트의 스크롤이었던 것이다. 무하는 문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흥건히 젖어있었다. "……엄청난 살기였다." 몬스터에게 조차 찾아 볼 수 없었던 살기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던 무하에게 이토록 강렬하고 섬뜩한 살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사부나 그 외 검도부에서 검을 겨루었던 이들에게 느껴지던 것은 단순한 투기 일뿐. 자신을 노리던 살수들에게조차 이런 살기는 접하지 못했었다. 심지어는 자신을 찔렀던 로레라자에게도. 그녀에게 느껴졌던 것은 살기가 아닌 증오뿐. 보수나 감정상의 일이 아닌 순수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죽이겠다' 염하는 그녀의 기는 그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무하가 걱정하는 것은 그녀에게 살인 경고를 받은 자신이 아닌, 자신으로 인해 위험에 빠질 뻔한 지기였다. 다시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다고 새삼 다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약간은 미련해 보이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닥친 엄청난 위험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 아닌가? ======================================================================== 이야이야. 제가 다시 잠적했다고 걱정하시던분들...;; 지은 죄가 많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하하~~ 왼쪽 손가락에 났던 상처가 도져서 자판을 치기가 힘들었습니다; 피묻은 자판을 닦으며 섬뜩해야 했던 저를 이해해 주시고;; 지금은 간소하게 붕대로 손가락을 묶어버리고 쓰고 있다죠^^ 이제 상처도 거의 아물어가고(잘못 건드려 다시 도질뻔했지만;) 신체건강.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ㅡㅡa) .... 어, 어쨌건! 그런 겁니다! 아하하하하~~ 아해의 장-216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테밀시아는 황태자와 함께 수도를 나섰다. 물론 그것은 황제가 처음에 요구한, 휴첼 기사단의 호휘 하에 이루어진 합류가 아니었다. 테밀시아 개인이 황태자의 일행에 끼어 들었을 뿐. 예상했듯이 근위병, 마법사, 신관, 함께 가는 몇몇 귀족과 그에 따른 시종, 요리사 등등 인력과 그네들의 드레스와 정장, 락아타에 가져가는 선물 등이 마차 몇 대를 차지하는 대규모의 행진이었다. 이쯤 되면 뜨내기 산적보다는 인간을 신분 고저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몬스터 무리를 경계해야 했다. 대규모의 일행에 질려서인지 루카다가 정한 루트가 완벽해서인지, 근래 대륙을 괴롭히고 있는 몬스터 떼는 만나지 않았다. 약간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몬스터들이 기사가 있는 영지고 변방의 마을이고 무차별로 공격하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후자의 경우라고 판단해도 좋을 듯 싶었다. 단박에 자신의 유능함을 드러낸 루카다는 그 뒤로 이 무리의 행진을 리더 할 수 있었다. 물론 리더를 한다고 해도, 어차피 정해진 루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돌발상황에서 판단여하를 가리는 역할일 뿐. 그렇다고 무시할 것은 못 됐다. 어디까지나 동행 입장일 뿐인 그들이 행군을 지휘하게 된 것은 주객전도라 보아도 무관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도 있었지만 루카다는 예의 철판 안면으로 싸그리 무시해 주었다. "행군의 리더를 맡아도 얼굴 한번 못 보는군요." "……?" 오랜만에 책을 읽고 있던 테밀시아는 루카다의 투정아닌 투정에 고개를 들었다. 의문을 나타내는 그에게 루카다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황태자 전하 말입니다." 테밀시아의 얼굴에 냉소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희미할 뿐 아니라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눈썰미 뛰어난 루카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 하긴 저 정도의 인물이라면 황족으로서나 장차 황제가 될 황태자로서나 꺼려지겠지. 꺽일지 언정 굽히지는 않을 위인이니…….' 다시 책으로 주위를 돌리며 테밀시아는 짧게 말했다. "자네를 만날 담력이 없는 것뿐이다." "예?" "몰랐나? 황태자는 낯을 많이 가리시거든." 루카다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고개를 슬쩍 돌려 창문 밖 풍경을 보던 그의 눈에 묘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일이 쉽게 됐는데. 그녀가 왜 그렇게 자신했는지 알 것도 같군.' 루카다는 갑자기 유쾌한 듯 생긋 웃더니 독서삼매경에 빠진 테밀시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동족혐오라는 말을 아십니까?" "……." 침묵. 테밀시아는 싸늘한 눈으로 루카다를 응시했다. 그것은 평소의 싸늘함을 무장한 무뚝뚝함이 아니었다. 차가운 눈빛. 처음으로 테밀시아라는 남자를 제대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빙긋 웃었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지만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어 즐거웠다. "테밀시아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테밀시아님과 같은 이가 나타난다면……." "죽일 거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테밀시아는 짧게 답했다. 루카다는 웃음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어째서 지요?" "위험하니까."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리며 답하는 테밀시아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울렸다. 좀 전의 싸늘함이 거짓인 것 마냥 그는 여느 때의 자신으로 돌아가 있었다. 루카다는 유쾌하게 웃었다. "저는 즐거울 것 같습니다. 아군이라면 함께 정치와 세태를 논하거나 작은 담소를 나누면서 즐거워 할 것 같고 적이라면 서로의 목줄기를 노리며 즐거워 할 것 같습니다." "너답군." "하지만……." 루카다는 의자에 몸을 푹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그것이 테밀시아와의 대화를 위한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절정 기사인 테밀시아의 귀에는 그의 속삭임이 확실히 들려왔다. "연적의 입장에서 만나게 된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죽여버릴 겁니다. 잔인하게……영혼조차 소멸시킬 정도로 철저하게 처리할 겁니다." 루카다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났다.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 듯한 느낌. 그 서늘함, 그 맹목적적인 살기. 하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웃음으로 덮여 사라졌다. '다행이 이번에 만난 저의 '동족'은 연적이 아니더군요.' 테밀시아는 그런 루카다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이후에 시선을 돌렸다. 그와 루카다는 달랐다. 서로 걸어야 할 길도 생각하는 것도 인격도 모든 것이 달랐다.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도 달랐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인지는 모른다. 아니 애당초 그런 것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뭐, 백 사람이 있으면 백가지 정의가 있는 법이니까." 루카다는 갑작스런 테밀시아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테밀시아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누구든 빠져 들 수밖에 없을 만큼. 그 중에서도 중증으로 그에게 빠져든 남자를 그는 알고 있다. 온화한 금속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 자하라 뮤비라 라 카르민. 가주 계승권자로써의 '라'는 아니지만 성을 부여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강한 사람. '그래. 이번에 만난 동족은 다행이 연적이 아니야. 정말 다행히도 말이지.' 유쾌하다. 이처럼 유쾌한 적은 없었다. 루카다는 자꾸만 입술을 비집어 나오려 하는 웃음을 억누르며 즐거워했다. 락아타로 가는 행군이 있기 바로 전 날, 그를 만났다. 먼저 약속을 정한 것은 자신임에도 행군에 대한 회의 때문에 지체하고 말았다. 나름대로 서둘러 달려갔지만 약속시간에서 5분 정도 늦어버렸다. 언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못 옆에서 부드러운 추기의 바람을 맞으며 미소짓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 동안 먼발치에서나 몇 번 봐왔던 남자, 뮤비라였다. 여지껏 달려왔던 것과는 달리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사색에 잠겨 있는 듯 보이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도 있었지만 정식적인 첫만남을 좀더 여유 있게 가지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바람이 한차례 불고 지나갔다. 그에 따라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가 고개를 돌렸다. 짙고 깊은 남색의 눈동자. 입가에 매달려 있는 미소가 부드럽게만 보인다. 루카다는 뮤비라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뒤를 이을 보좌관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 알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뮤비라는 대외적 평판은 최악인 남자였다. 카르민이자 젊고 강한 기사이자 실질적인 가주, 그 별칭마저 경의가 서려 있는 '지배자' 테밀시아에게 몸을 팔고 그 위치에 올랐다는 '걸레'. 벌써 몇 사람에게 몸을 내어주었는지 모른다는 더러운 소문의 주인공. 하지만 루카다는 그에 대해 표면적인 것 의외의 것도 깊숙이 조사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의 놀라운 능력을 알고 있었다. 거칠고 제압되지 않는 '지배자'가 만들어 내는 사사로운 트러블을 완벽하게 무산시킬 수 있는 능력. 엄청난 신분 차에도 굴하지 않고 직언을 올리는 담력. 자신에게 추근덕 거리는 이들을 가차없이 응징하는 결벽성. 게다가 지금은 관뒀지만 검에도 상당한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완벽. 이 단어는 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 능력과 유능함과 성품을 제외하고 외적인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사람들의 호감을 끌만한 미모를 지닌 그다. 깊은 남색 눈동자는 언제나 차분하고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물론 그 미소가 자신에게 추근덕거리던 이들을 응징할 때도 떠나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 그리 믿을 만한 것은 못되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쳐두자. 보기에는 그러니 말이다. 루카다는 뮤비라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상대를 평가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리 떨어지지 않는 유력 가문의 장자로 태어나 아무런 하자 없는 인생을 누려온 그다. 동생들과 사이가 안 좋은 것만 빼면 매끄러운 조약돌처럼 그가 지나온 길은 평탄하다. 그 사이가 안 좋은 것이 도가 지나쳐 간간이 암살자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실부인의 자식은 그뿐이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깔끔한 인사가 오갔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따위의 입에 발린 말은 일체 오가지 않는 담백한 인사. "제가 뮤비라님을 청한 이유는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무엇을 묻고 싶으신 겁니까?" 여유 있게 미소지으며 묻는 뮤비라. 그 미소가 아름답다는 것은 루카다도 인정했다. 확실히 이 정도의 외모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홀릴 만 하다는 생각이 문 듯 들었다. 물론 그가 파악한 뮤비라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할 위인이 아니었지만. "뮤비라님께서는 반역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반역?" "예. 황권이 황족이 아닌 다른 가문에게로 넘어가는 것 말입니다." 자신이 내뱉는 말이 얼마나 엄청난 도발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어야 했다. 그가 선택한 주군의 유일한 지기, 뮤비라의 생각을. 뮤비라의 얼굴에는 아무런 반응도 살펴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연못가를 내려보기 시작했다. 그 침착한 반응에 루카다도 다소 흥분되었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뮤비라의 입가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소가 새겨지고 있었다. 루카다는 그것을 보며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겉보기에는 부드러운 그것을 접하면서 어째서 소름이 돋는 것인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뮤비라라는 남자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거물이다! "어느 가문으로 넘어가냐에 따라 틀리지요." 루카다를 돌아보며 생긋 웃는 뮤비라. 루카다는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동류다! 나의 '동족'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루카다의 얼굴에도 뮤비라와 같은 종류의 미소가 새겨지고 있었다. 마차 밖으로 획획 지나가고 있는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수려하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소년은 매우 잘생겼다. 동그랗고 순수해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와 실크 같은 흑발, 그것들과 화려한 조화를 이루는 깨끗하고 하얀 피부. 이제 십대 중반쯤 됐을까? 하지만 몸에 자연히 배여 있는 기품과 우아함이 소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딜 보나 귀공자의 모습이었고 곱게 자란 티가 확연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거만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에게는 터럭만한 생기조차 없었다. 그 무기력한 모습이라니……. 보는 이마저 지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곧 국경에 도착할 겁니다. 피곤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괜찮아요." 변성기가 지났을 텐데도 그는 아직도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문 가까이에 다가왔던 기사가 멀찍이 떨어지고 다시 정적이 깔렸다. 소년은 무기력한 시선으로 계속 창 밖을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사람은 두렵기만 한 존재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변할지 모르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에게 타인과의 만남은 공포였고 타인과의 접촉은 독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 그리고 바로 그 여자가 새어머니가 된 날 그는 스스로 외부와의 끈을 끊어버렸다. 무기력한 나날들. 언제 죽임을 당하던 상관없는 지루하고 지겨운 나날들. 그 속에서 그의 정신은 점점 황폐화 되어가고 있었다. 인간 불신증, 혹은 접촉 공포증. 그리고 자폐증. ……나날이 망가져 가는 소년의 이름은 욤 훼이바트 라 제노스. 바로 욤 제국 황태자의 이름이었다. =================================================================================== 졸렵다. 피곤하다. 할일은 많다. 오늘은 몇시에 잘 수 있을까? (언젠가 썼던 일기 구절) 아해의 장-217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국경에 도착했다. 이국의 황족이, 그것도 황태자가 대규모로 들어오는 것이 빨리 끝날 리 없었다. 물론 여타 기사단이 들어가는 것보다는 빨리 끝날 테지만 만 하루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원래 하루 정도는 그곳에서 쉬었다가 들어갈 예정이었기에 그리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애당초 그것까지 계산에 넣어 처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실에 자리를 잡은 황태자는 시녀들이 갈아 입혀 주는 대로 옷을 입고 음식을 먹은 뒤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창 밖으로 강한 햇살이 넘어오고 있었지만 멍하니 풀린 동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얼핏 보면 인형이나 시체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이 없는 소년이다.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도 훼이바트는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었다. 주위에서 다시 옷을 갈아 입히고 그를 침대로 인도할 때도 그는 말없이 무기력하게 그것을 따르기만 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눈을 감지는 않았다. 잠이 오지 않은 것도 있지만 눈을 감아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딘가 모자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머리를 지닌 소년으로 신성어에도 학식이 깊으며 룬어도 제법 알아 볼 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수학, 역사 등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그는 살아가는 법에 철저히 무지한 이였다. -똑똑. 노크소리. 훼이바트의 눈동자가 천천히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창문 쪽이다. 침대에서 부시시 일어난 그는 느릿느릿 창문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걸쇠를 풀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거의 동시에 안으로 쓰러지듯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훼이바트는 공허한 눈동자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사람을 주시했다. 암살자 일지도 모르건만 너무나 태연, 아니 무관심한 모습이다. "여어. 정말 미안하지만 약 좀 빌릴 수 있을까? 붕대나 깨끗한 천이라도 상관없는데." 약간 쉬었지만 분명 여자의 목소리다. 훼이바트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감지하고 침대의 옆에 있는 붉은 끈을 잡아당기려 했다. 시녀를 부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챈 여자가 그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그리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허튼 수작하면 재미없는 줄 알아."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훼이바트의 얼굴은 여전히 공허하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그 묘한 침착함에 여자는 주춤하며 물러섰다. 눈앞에서 검을 들이대고 협박하는 이에게 저토록 무심한 이는 두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하나는 이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엄청난 실력자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에 집착이 없는 녀석이라는 것. 눈앞의 꼬마를 살펴보자니 후자 같았다. 그런 녀석이라면 전혀 위협거리도 되지 않는다. 여자는 훼이바트를 침대의 끈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밀어 넣고 방을 뒤졌다. 주객전도였지만 훼이바트도 여자도 상관치 않았다. 선반에서 약상자를 찾은 그녀는 상의를 벗었다. 허리에 가볍지만은 않은 상처가 있었다. 다행이 피는 멈춰 과다출혈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았다. 이를 꾹 물고 소독약을 부운 다음 약을 꺼내 힘들게 뚜껑을 열었다. 그때 그녀에게 어떤 약병을 내미는 이가 있었다. 훼이바트였다. "뭐야?" 경계 어린 질문에 아무런 답도 없이 침대로 걸어갔다. 혹시나 사람을 부를지도 몰라 다급히 따라갔지만 그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을 뿐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는 모습까지 본 여자는 황당함에 그를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이미 잠들어 버린 것이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냐며 투덜대던 여자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약병을 새삼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리커버리 포션이었다. 훼이바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옆에 꼭 붙어 자고 있는 이가 있었다. 어제의 침입자로 추측되는 여자였다. 건강한 살색 피부에 분홍색 입술이 어찌 보면 귀엽고 어찌 보면 성숙해 보이는 연령 예측 불가의 그녀는 세상 모르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훼이바트는 곧 자신을 씻기러 올 시녀들을 떠올리며 어찌 할지 잠시 고민했다. 세상에 관심을 끊은 뒤로 처음 하는 고민이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여자는 한참만에 눈을 비비며 어렴풋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는 자신을 깨우고 있는 훼이바트에게 밝게 웃어 보이며 와락 껴안아 버렸다. "좋은 아침. 자기!" 깊은 키스로 마무리 지은 여자는 상대가 반응이 없자 눈을 제대로 떴다. 공허한 보라색 눈동자에 약간의 당혹을 담고 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으악!" 여자는 당황해서 버둥대다가 침대 밑으로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훼이바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려다보자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 미안! 착각해 버렸어. 아하하……." 훼이바트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문 쪽에서 정중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기침 하셨는지요?" 당황해서 옷장 쪽으로 숨으려는 여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긴 훼이바트가 침대 밑을 가리켰다. 뜻밖의 도움에 놀랐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얼른 숨은 그녀 쪽을 보고 있는 훼이바트의 공허한 눈동자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여관에서 자랑하는 곳은 지하에 있는 대형 목욕탕이었다. 냉, 온의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데다가 미녀들의 마사지까지 받을 수 있는, 목욕탕이라 부르기가 아까울 초호화 시설이 갖추워져 있는 곳. 테밀시아는 새벽부터 그곳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원래 교태 어린 미소를 겸하고 있는 여자들은 이 미남자에게 혹해서 한층 업그레이드 된 색기를 보이고 있었다. 관심 없는 얼굴로 냉탕에 잠수해 있던 테밀시아는 문 듯 이상한 기색을 느끼고 천천히 일어났다. 화려한 금발에서 떨어져 내리는 맑은 물방울들이 건장한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테밀시아는 옆에서 대령하는 욕의를 걸치고 냉랭한 얼굴로 욕실을 나왔다. 음료가 대령되어 있는 휴게실로 나온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이 느꼈던 기색을 예리하게 탐색했다. "살기." 낮게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한숨을 쉬고 시야를 방해하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휜이었나. 평소와는 달리 살기가 넘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나?" 시종이 건네는 옷을 받아 입고, 마지막으로 망토를 걸치던 테밀시아는 흠뻑 젖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새삼 인식했다. 쓴 미소가 자기도 모르게 입가를 맴돌다 사라졌다. "이런 건 내버려두면 알아서 마른다고……." 시종이 수건을 내밀었지만 테밀시아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위로 향했다. 그의 머리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뮤비라 뿐이다. 자기자신에게 조차도 허락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급 목재로 된 계단을 올라 자신의 거처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휜이 살기를 폭발적으로 뿜어낸 곳이었고 루카다의 거처였다. 근위 기사들이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도 만만치 않은 절정 기사들이라 살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휴첼의 기사단장인 테밀시아의 보좌관의 방에서 살기가 새어나왔다고 해서 냉큼 들어가 버린다면 그것은 당사자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테밀시아를 본 그들의 얼굴에 난감함이 걷혀지는 것이 보였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테밀시아는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을 뽑아들은 뒤, 노크를 했다. 물론 답이 없더라도 들어갈 생각이지만 일단 에티켓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의외로(테밀시아에게는 예상했듯이) 답이 빨리 돌아왔다. "누구십니까?" "나다." "아, 들어오세요." 언제나와 같이 차분하고 웃음기 배여 있는 답변에 기사들은 안심하고 돌아갔다. 자신들이 느꼈던 살기가 예사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루카다의 실력을 믿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착각이지만. 루카다는 '정치인'인 테밀시아의 보좌일 뿐 '기사단장'인 테밀시아의 보좌관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테밀시아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익숙한 비린내였다. 새삼 당황할 것은 없었다. 루카다는 척 보기에도 무사했고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휜만 봐도 상황이 무난히 종결됐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보시는 데로 입니다." 씨익 웃는 모습이 태연스럽기만 하다. 그것이 불만이었던지 휜의 입에서 곱지 못한 소리가 나왔다. "저 멍청이 좀 어떻게 해봐! 자기한테 암살자가 왔는데도 누가 보냈는지 묻지 않고 그냥 웃기만 하잖아!" "저 때문에 열 받은 휜이 저 치들에게 화풀이하다 죽여버린 거구요." 하하, 웃는 모습이 어찌 보면 얄밉기까지 했다. 하지만 테밀시아는 그 모습에서 깊이 갈무리된 슬픔과 분노를 볼 수 있었다. 그 익숙해 보이는 모습에서 일말의 동질감마저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휜이 흥분해서 내뱉는 소리가 방안에 울리고 있었다. "마침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이번 녀석은 꽤 등급이 높은 녀석이었다고! 네 녀석이 무슨 빽이 있다고 암살자씩이나 오는 거냐? 그것도 고급 암살자가!" "확실히 이번에는 좀 위험했지요. 하하."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답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자라온 휜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처음이 아니군." 생긋 웃음으로써 답하는 루카다의 멱살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어째서? 네 녀석이 정치 쪽에 들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잖아? 네 녀석이 치정 문제에 휩쓸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이거, 이거……. 너무 하잖아요, 그런 말은. 상처받는다 구요." "하지만 네 녀석을 찾아오는 여자 한 명 없었고, 편지 한 통 없었잖아?"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루카다였다. 휜이 눈쌀을 찌푸리며 뭐라 더 추궁하려하자, 그는 얼른 선수를 쳤다. "걱정해 주는 겁니까? 이거 영광인 걸요!" "누가 네 녀석 따위를!" 휜은 얼른 복면을 끌어올리며 몸을 돌렸다. 열려져 있는 창문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휜의 뒷모습을 보는 루카다의 얼굴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묻고 싶군. 어째서 너에게 암살자가 오는 거지? 냉정히 말하면 자네를 거물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잖아? 물론 암살자가 오는 것이 꼭 정치 쪽으로 관련되는 건 아니지만 익숙할 정도로 자주 접한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하하. 왜 그렇게 진지해 지는 겁니까?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것뿐입니다. 사무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할 테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난 지금 자네 신변을 걱정하는 거야!" 루카다의 눈동자가 일순 크게 떠졌다. 천천히 본래대로 돌아간 그것은 매우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자아냈다. 어떻게 저 남자는 그 차가운 얼굴로 이토록 훈훈한 말을 꺼낼 수 있는 걸까? 누군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이 이렇게 따뜻한 일일 줄은 몰랐다. 단 한번도 그런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에게 갑작스런 호의는 너무나 자극적인 일이었다. "아……!?" 그는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무언가를 멍하니 닦아 내다가 이내 웃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 한 적도 없었지만 이토록 그 선택에 만족하고 자부심을 느낀 적은 없었다. 당황하며, 새삼 어디 다친 것이 아닌가 자신을 살펴보고 있는 테밀시아에게 루카다는 활짝 웃어 보였다. "휜도 그렇고 테밀시아님도 그렇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시하는 테밀시아를 보며 루카다는 다시 한번 맑게 웃었다. "정말 사람 울리네요. 하하!" 식사를 마치고 바로 국경을 넘었다. 수도까지는 아직 일주일 가량이 남았다. 이제부터는 락아타 제국의 철저한 경호 아래에 가기 때문에 굳이 험한 루트를 잡지 않아도 됐기에 그 정도 인 것이다. 락아타 제국은 욤 제국과 비등한 국력과 국토를 가진 대국이다. 그런 곳에서 타국의, 그것도 제국의 황자 경호를 소홀히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완벽한 경호 아래에서 욤 제국의 황태자, 훼이바트는 평온한 여정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사귀게 된 동행인은 그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세가'라 밝힌 시린 푸른빛 눈동자의 여자였다. 그녀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사람답게 거칠고 천방지축인 면이 있긴 했지만 유쾌하고 명랑한 성품의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아는 것이 많았다. 물론 그 아는 것이 역사라던가 수학, 국어, 사회 등등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교과서적인 것이 아닌 진정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인간의 애증에 대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것은 교과서 지식에는 밝지만 삶에 대해 무지한 훼이바트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것이고, 덕분에 비공식 손님으로써 세가는 황태자와 함께 마차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비공식도 그냥 비공식이 아닌 황태자와 세가 둘만의 '초대'였지만 둘은 개이치 않았다.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스스로를 죽이기만 해? 한번쯤은 큰소리도 내고, 한번쯤은 미쳐도 보고 그래야지." 세가는 늘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것이 예리한 칼날이 되어 훼이바트의 가슴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던 벽을 허물어갔다. 그녀는 무거운 장식이 잔뜩 달려 있는 예복을 입어, 가뜩이나 가는 몸뚱이가 애처롭게까지 보이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 옷이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면 입지마. 시종들에게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 '다른 옷을 가져와라!'. 무거워서 어디 입겠어? 차라리 그 옷에 달린 보석을 날 줘. 적선하는 셈치고. 하하!" 그러면서도 진짜 장신구를 빼, 건네면 당황하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중에 걸리면 난 절도범이 되 버리는 걸. 하하! 그리고……이상하지? 너에게는 이런 거 받고 싶지 않아." 그녀답지 않게 낮게 중얼거린 뒤, 창문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새빨갛게 물들어진 얼굴을 보자니 죽어 있다고 생각했던 가슴 한쪽이 아련하게 지끈거렸다. 그 통증은 피를 타고 심장으로 전해서 그것을 쥐 흔들었다. 훼이바트는 자신을 죽이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느껴지는 심장 고동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세가에게 다가갔다. 그의 접근을 알아챈 세가가 의문을 표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못했다. 다소 거친 그녀의 입술을 너무나 부드러운 훼이바트의 입술이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크게 떠진 세가의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 훼이바트의 심장소리가 그 위에 얹어진 손을 타고 세가에게로 전해졌다. 네 살 연하에게 가슴이 뜀을 느낀 세가의 얼굴의 점점 더 붉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수도에 도착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더더욱 죄송한 것은...; 제가 오늘부로 잠시 잠수 하겠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동안 뜸했던 연재는 잠수와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통보를 하고 당분간 마음편히 휴식을 가지면서 머리도 정리하고 그럴려구요. 언제 돌아 올지 모르겠습니다만...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당분간 안녕히...(__); 아해의 장-218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락아타 제국 스스로가 장담했듯이 연회는 화려했고 규모도 엄청났다. 검소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에 무관심한 훼이바트나 테밀 시아조차도 감탄할 정도였다. 연회에 있어서의 사치스러움은 국가의 재력 및 위력 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과시이기 때문인지 꽤 과용한 듯 싶었다. 게다가 이번 연회는 락아타 제국의 황태자가 정식으로 정해진 것을 축복하는 의도로 벌어 진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가 더했다. 하지만 주체인 황태자와는 관계없이 진행되는 일들이 태반이었다. 남녀간의 구애 활동이 그 중 하나였다. 이 경우도 그러하다. "훼이. 안녕하신 가요?" 락아타가 자랑하는 금발의 미녀, 레미나라는 근래 들어 이국의 황태자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허락 받지도 못한 애칭을 멋대로 부르면서 유혹하는 모습이 천박해 보일 법도 하지만, 타고난 미모가 모든 것을 덮어주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도 그리 호락호락한 위치의 남자가 아니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창 유혹중인 이국의 황태자, 훼이바트는 인간 기피증과 무기력한 것, 그리고 무관심한 것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평균 이상의 황족이었다. 물론 사람을 다스려야 하는 황태자로써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 세 가지가 가장 큰 문제점이었지 만 말이다. 어쨌든 지간에 머리 좋고 박식하며 미남인데다 강대국 욤의 황태자라 는 지위까지 갖춘 그는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가 높았다. 그것은 그와 함께 동행하여 입성한 금안의 '지배자'. 그 호화로운 명성에 걸맞는 위험한 매력의 남자, 테밀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연약해 보이는 외견과 공허함을 갖추고 있는 훼이바트와 강인한 체격과 인정받은 실력, 그리고 냉엄함을 가지고 있는 그는 서로 극과 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력 형성 및 주위 귀족들과의 연 계, 그리고 대세를 정확하게 읽어 나가는 모습을 보자면 테밀시아가 황태자로 보 이기까지 했다. 극과 극으로 보이는 두 남자의 모습은 상당한 이슈가 되었지만 둘 다 피차 그런 것에는 관심 없었다. 훼이바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이며 짧게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레미나라." "레미라 불러달라니까요. 후후." 레미나라는 스스로의 매력을 잘 아는 만큼 그것을 충분히 이용할 줄도 아는 여자 였다. 그녀에게 남자를 함락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고, 그녀가 내뻗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은 남자가 없었다. 때문에 무료하기까지 한 사교계에서 지금처럼 반응이 없는 이국의 황태자는 그녀의 신선한 자극제였던 것이다. 물론 그 지위와 외모 등에도 끌렸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황태자도 황태자였지만 감히 '지배자'라는 별칭을 달고 다니는 저 금안의 귀공자도 끌리는 상대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이 그에게 다가가기를 경계하고 있었다. 레미나라는 자신의 육감을 신봉하는 여자였다. 게다가 훼이바트를 끌어당겨야 할 이유도 있었다. 공허한 눈동자로 연회를 보고 있는 두 살 연하의 소년을 보며 레미나라는 생긋 웃었다. 이번 내기도 이쪽이 이길 듯 싶었다. "인기 좋군요, 황태자 전하." "그렇군. 저것도 인기라고 볼 수 있다면 말이지." 구석에 기대 잠시 쉬고 있던 테밀시아와 루카다의 대화였다. 연회에 와서야 겨우 훼이바트 황태자의 얼굴을 보게 된 루카다는 간단한 말로 그 소감을 말했다. "재미없어 보이는 분이군요." 진심이라는 것이 딱 보이는 얼굴로 말하는 그였다. 마침 근처에 근위 기사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당장 결투 신청을 받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불경한 말이었다. 물론 그 정도도 생각 안하고 그런 말을 입에 담을 루카다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의 옆에 있었던 휜은 공감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재미없는 타입이야. 암살 의뢰도 들어오지 않은 무능한 황태자라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밑의 수하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할걸? 물론 암살자를 우려해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저쪽은 그런 타입이 아니라 정말 '재미없는' 타입이라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테밀시아가 작게 웃었지만 훼이바트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둘은 보지 못했다. 그 뒤로 휜은 바로 연회에서 빠져 나와 수도를 구경간다고 사라졌고 루카다는 국제 인사들을 유념해서 기억해 두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테밀시아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들을 일일이 상대하면서 아직도 등장하지 않은 주인공, 황태자에 대해 이리저리 추측해 보고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의 소유한 황족이 바로 황태자가 되는 욤 제국과는 달리 락아타 제국은 황제의 독단으로 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황제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락아타 황족들의 현실이었다. 황족들끼리의 암투도 치열했으며 모략과 암살은 다반사였다. 그렇게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한동안 피 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이제는 관례화 되 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을 핍박했던 이들과 반정의 위험이 있는 이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것이 황태자 자리를 사수하는 방법 중 하나 였던 것이다. 보라색 눈동자의 소유자가 한 대에 한 명 이상 나온 적이 드문 욤에서는 그다지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었지만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권력이란 달콤하며 위험한 것이고, 그러면서도 매력적인 힘인 것이다. 테밀시아는 피식 웃다가 문 듯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니 발코디 밖에서 누군가 난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좀더 집중해서 보니 그가 똑바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까지 보였다. 어둠에 묻여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냉랭하면서도 무언가 강렬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는 흑색 눈동자. 테밀시아가 자신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고 슬쩍 입가에 미소를 담는다. 그것은 경계나 적의 등의 마이너스적인 미소가 아닌 순수한 호의를 담고 있는 미소였다. 일순간이지만 부드럽게 변했던 눈동자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발코디 문을 열고 나왔다. 창백해 보이는 피부와 대조적인 짙은 흑발, 그리고 흑안. 그것들은 건물 내부를 환히 밝히고 있는 라이트의 빛을 탄력 있게 반사시키며 맘껏 멋을 뽐내고 있었다. 보라색과 하얀색이 적절히 배열된 예복, 그리고 어깨에 두른 예식용 검은 망토. 그쯤 되면 아무리 둔한 이라도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보라색은 락아타 제국에서 신성시 여기는 고귀한 색으로 황제와 황태자밖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주위에서 들려오는 웅성임을 무시하고 그는 테밀시아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그 눈동자에는 여전히 냉랭함이 돌고 있었지만 좀 전의 강렬한 무엇인가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대면은 처음이지만 자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접했었지. 나는 락아타 시오니타 라 제노스. 자네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본인의 입으로 듣고 싶군."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 혹은 테밀시아 장 휴첼이라고도 불립니다." "정치인으로써나 나이트로써나 정상에 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호칭이군. 둘 다 멋진 이름이야." "과찬이십니다." 정치적 암투를 모두 짓누른 최고의 '정치인'만이 오를 수 있는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한 시오니타다. 그가 자신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모자르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다. 게다가 황족끼리의 암투라는 것은 보통 귀족들끼리의 암투보다 훨씬 치열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 점에서 테밀시아는 눈앞의 남자를 충분히 높게 평하고 있었다. 눈앞의 황태자는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호의를 베푸는 순진한 이가 아니었다. "그럼 연회를 충분히 즐기길 바라네." "신경 써주셔서 황송합니다. 제노스께서도 즐겁게 보내시길." 제노스는 '황태자'의 신성어이자 정식 언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실과 종교가 일체 되던 시기가 멀어지면서 '황태자'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황제와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근래에 들어서는 신성어로써 상대를 칭하는 이는 그네들에게 인생을 바친 충실한 수하들 정도밖에 없다. 혹은 진정으로 당신을 '인정'합니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테밀시아가 낮게 말한 그 단어에 시오니타는 흡족한 미소를 잠깐 내보였다. 자신을 그런 호칭으로 사용한 이는 재상 외에 그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직 은 '가면'을 벗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인정한 남자가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약간 끄떡여 보이고 는 자신이 말 걸어주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다른 귀족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테밀시아는 들고 있던 잔을 그를 향해 약간 들어 보였다가 입에 가져다 댔다. 락아타 제국의 앞으로가 상당히 기대된다. 물론 '제노스'에서 '라민'이 붙는 날은 아직 멀고도 멀었지만 말이다. 옆에서 존재감을 지우고 있던 루카다가 불쑥 물었다. "이번 피의 숙청은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치뤄질 것 같군요." "아아." "위험한 사람입니다. 훗날 그가 '라민'을 마저 부여받는 날,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이 좋겠습니다." 테밀시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루카다를 돌아보았다. 우호 관계를 맺든 적대 관계를 맺든 그것은 자신들이 판단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대한 제노스라민께 서 선택하는 것이고 그 선택에 전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신하된 자로써, 그리고 기사된 자로써의 의무였다. 그것이 세간에서 말하는 '충(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테밀시아는 스스로도 자신이 그것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루카다는 그것을 직설적으로 끄집어 낸 것이다. 저 당돌하기까지 한 보좌관의 머리 속에 지금 어떤 구상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며칠 전 그가 입에 담았던 '동족 혐오'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 뒤를 이어 중얼거렸던 말까지도. '그런가……? 뮤비라였던가?' 확실히 둘은 닮았다. 외모나 성격 등이 아닌 좀더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닮았다. 테밀시아는 다시 한번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말했다. "다행이군." "네?" "만난 '동족'이 연적이 아니라서 말이야." 뮤비라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휜이 아님은 확실히 알고 있다. 눈을 크게 떠 보이던 루카다가 이내 평소의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인다. "예, 정말로." 서로만이 알법한 의미의 미소를 짓고 있던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주위가 묘하게 조용해진 까닭이다. 대륙 내에 존재하는 극소수의 제국 중 두 곳, 욤과 락아타. 그곳의 차기 지배자인 두 황태자가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자신의 앞에 서 있던 관심 없는 훼이바트와 그런 그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 시오니타. 속 모르고 보기에는 치열한 탐색전 같지만 실상으로는 둘 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시오니타는 훼이바트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그 너머에 있는 테밀시아를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얼굴에 생기 넘치는 미소가 잠깐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비등한 실력을 갖춘 기사들이 서로가 만날 수 있었음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듯한 미소였다. 물론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져 본래대로 돌아갔기에 테밀시아 외에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루카." "예, 테밀시아님." "그때의 대답을 수정하고 싶다." "……?" "동족을 만났을 때, 그가 영역밖에 있다면 죽이지 않겠다." "어째서 입니까?" "재미있으니까." 자국에 있는 녀석이라면 위험분자다. 하지만 타국에 있는 녀석이라면 서로가 충분히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테밀시아는 자신의 활동 영역을 일찌감치 욤이라는 제국에 한정시켜 놓았다. 그는 시오니타 또한 자신의 활동 영역을 락아타라는 제국에 한정시켜 놓았음을 확신했다. 만일 그가 대륙으로 영역을 정했다면 자신에게 보였을 감정은 호의가 아닐 터이다. 락아타로 한정해 놓았기 때문에 타국의 '동족'에게 미소를 보인 것이다. 또한 자신이 마주 미소를 보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영역을 파악했을 것이다. 때문에 변함없이 호의를 보이는 것이다. 지루했던 연회가 갑자기 즐거워지고 있었다. =========================================================================== 돌아 온 것입니다. 아하하~ 일단 하나 연재>.< 아해의 장-219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훼이바트는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에게 배속 된 곳은 귀빈관이었고 그의 프라이버시가 철저히 지켜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고 있었다. "세가." "훼이!" 부드럽게 안겨오는 여자. 훼이바트는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지루했지?" "아니. 하나도!" 약간 몸을 떨어뜨린 세가는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기다리는 것도 의외로 재미있어. 계속 설레이고 그 설레임에 빠지고 나면 시간은 한순간에 흘러 나버려.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는 말을 처음 실감……." 사랑스러운 말만 골라 담는 입술을 덮으며 훼이바트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지금 와서는 이해가 안가지만 그는 스스로를 시체라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대했다. 시체는 주관이 없고 시체는 말이 없으며 시체는 반항하지 않는다. 그렇게 무심히 스스로를 죽이는 나날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왔던 자신을 이제와 생각하면 불쌍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제 괜찮다. 어차피 스스로를 동정해 봤자 남는 것은 비참함밖에 없다. 이제 새로 부여받은 삶을 즐기면 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이 여자가 꼭 필요하다. "세가.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훼이바트는 새삼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고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해댔다. "함께 욤 제국으로 가주지 않겠어?" 확신에 가까운 기대를 가지고 한 말이었기에 세가가 일순 어두운 얼굴을 하는 것을 보게되자 가슴이 욱씬거렸다. 가벼운 어지러움까지 도는 것을 느끼며 그는 두려움에 질려갔다. "저……." "미안."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입을 여는 훼이바트보다 빨리 사과의 말을 뱉는 세가. 훼이바트는 그녀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이 점점 심하게 떨린다는 것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백했다. 자신에게 삶을 부여할 수 있는 이는 그녀뿐이라는 것을 그는 서툴게, 그러나 필사적으로 열성을 다해 고백했다. 세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지만 그녀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난 욤에서 죄를 저질렀어. 때문에 그곳으로 갈 수 없어. 그곳에서 내가 잊혀질 때까지는. 적어도 2년 정도……." 훼이바트는 물에 빠진 이가 구명줄을 발견한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2년 후에는 나와 욤으로 갈 수 있는 거지?" "응……. 하지만 황태자가 그 동안 혼자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곧 아름답고 우아한 귀족 아내가 생기겠지. 그럼 당연히 나도 잊혀지는……." "그렇지 않아!" 소리를 질러놓고 스스로가 놀라는 훼이바트였다. 자신이 이토록 크게 목소리를 내어 본 적이 언제던가?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도 함께 이곳에 있겠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지만 현실성이 있었다. 욤 제국의 이므르와 마찬가지로 락아타 제국에도 화이라라는 교육 기관이 있다. 락아타 제국은 대륙의 중심과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도 화이라에 유학을 오는 경우가 많았다. 훼이바트는 이므르조차 가지 않은 사람 기피증이었지만 세가와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2년쯤은 그곳에서 버틸 수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 세가는 중요한 여자였다. "그러니까 함께 있자." 다음날 테밀시아는 갑작스런 소식을 들어야 했다. "유학?" "예. 갑자기 발표하셨다는 군요. 화이라에서 한 2년쯤 유학을 하시겠다고." "그 자폐아 황태자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 "세간에는 레미나라라는 여자에게 홀려서 그런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레미나라, 테밀시아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황태자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 집요하게 접근하는 여자의 이름쯤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외어지게 되 버린 것이다. 하지만 테밀시아는 황태자가 그녀에게 무관심했음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남녀간의 일이 변덕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황태자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그건 황족끼리의 이야기. 내 사정 밖의 일이다. 황제가 알아서 하겠지." 자신이 명 받은 것은 락아타로 오는 동안의 신변 보호일 뿐. 소소한 것까지 맡겨버리기에는 그의 위치가 높았던 것이다. 그 점을 두고 테밀시아는 정말 다행이라고 몇 번이고 곱씹었다. 만일 그에게 완전한 호위라는 의무가 씌워졌다면 그는 지금쯤 뜬금 없는 황태자의 변덕에 휘둘려 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2년 동안 같이 락아타 제국에서 황태자의 호위를 맡게 됐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임무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신뢰를 받는 기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테밀시아를 락아타 제국에 묶어 두기에는 안성맞춤인 것이다. 물론 황제의 옆에 에일라야가 있는 이상 그럴 위험은 없었다. "두달 동안 벌어지는 연회다. 또 언제 마음이 변할 지 모르지.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자폐아라도 황태자는 차기 황제. 정황을 알아두도록 하죠."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허락을 내리던 테밀시아가 막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휜을 발견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건 것은 루카다였다. "바쁘시네요, 휜. 구경은 재미있으십니까?" "재미있어! 아, 루카. 오늘이 칠일장이래!" "그래요? 재미있겠는데요?" 눈을 반짝이며 즐거워하는 휜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살인 기계와 다를 바 없는 암살자이지만 역시 소년은 소년인 모양이다. 드물게 신나 보이는 휜을 보며 덩달아 즐거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루카다였다. 아마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사온 물건을 꺼내 보이며 일일이 설명하던 휜이 갑자기 커텐 뒤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루카다님, 계신가요?" "아……. 제 손님이군요. 밖에서 만나고 오겠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이는 시녀복장을 한 여자였다. 원래라면 타 제국이라고는 하나 카르민의 거처에 감히 노크를 하고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테밀시아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계급 의식이 투철하지 않는 비모범적인 귀족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자신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말이다. 잠시 후 루카다가 들어왔다. 여자가 갔음을 감지한 휜이 커텐 뒤에서 나오며 물었다. "벌써 하나 건진거야?" "하하. 질투해주시는 겁니까?" "재미없는 농담이야." 얼굴을 약간 찡그린 휜을 보며 루카다는 즐거운 듯 웃었다. 그러다 테밀시아를 돌아보고 말했다. "황태자께서 의외로 행동이 빠르시군요." 락아타 제국의 명품, 담배를 즐기고 있던 테밀시아가 고개를 들어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벌써 화이라에 등록 수속을 밟으셨다는 군요. 테스트에 합격, 이미 등록허가증 을 받으셨다는 데요? 꽤 똑똑하신 모양입니다. 게다가 락아타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달라는 요청까지 끝냈답니다. 지금쯤이면 이미 거처까지 정해졌을 지도 모르겠군요." 테밀시아가 놀란 것은 황태자의 영리하고 빠른 행동이 아니라 그 빠른 행동을 거의 동시에 잡아낸 루카다의 능력이었다. "벌써 정보원을 만든 건가?" "네? 하하. 아니요." 루카다는 자신이 내려놓았던 서류를 들어 뭐라 끄적이다가 테밀시아의 질문에 웃어 보였다. 그리고 들고있던 묵을 휘휘 저어 보이며 답했다. "만든 게 아니라 심어놓은 정보원입니다." 테밀시아가 놀라움을 표할 겨를도 없이 루카다의 말은 이어졌다.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의 유학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일을 이렇게 벌린 이상 욤의 체면 때문이라도 유학을 필히 해야 겠지요. 이미 황제의 권한 밖까지 밀려나버린 사안이군요. 하하, 일이 재미있게 되가는데요?" 루카다는 다시 정신없이 무언가를 쓰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휜, 같이 가라. 암살자란 국경을 가리지 않잖아?" 테밀시아의 뜻밖의 명령에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던 휜은 이내 씨익 웃으며 루카다의 옆으로 걸어갔다. 루카다도 놀란 눈으로 테밀시아를 보다가 자신의 곁으로 온 휜에게 웃어 보였다. 그것은 그가 매일같이 짓고 있는 가면 같은 미소와는 다른 성질의 웃음이었다. 훨씬 보기 좋다고 속으로 중얼거려보는 휜이었다. 다시 시작되는 연회. 레미나라는 범이 날개를 달은 듯 의기양양해져서 훼이바트 의 옆을 사수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의 유학 결정이 자신 때문이라는 소문이 그녀의 귀에까지 닿은 것이다. 또 그것 외에는 달리 들만한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 소문은 이미 사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저리 기고만장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훼이바트는 한순간의 유희였지만 일이 이리 된다면 내기에서 이기는 것은 물론이요, 대(大) 욤 제국의 제노스란이 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레미나라는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굳힐 만한 이벤트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훼이바트의 후계자, 즉 아들을 낳는 것. 그럴려면 일단 숱한 밤을 함께 보내야 할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한번이라도 밤을 보낸다면 다른 남자와 접해 아이만 얻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일단은 한번의 밤을 함께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을 위해 어느 때보다도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교태를 부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아직까지도 반응이 없는 훼이바트를 보면서도 여유만만 이었다. 이미 손아귀로 떨어진 떡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완벽한 착각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런 모습을 멀찍이서 재미있게 구경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매력적인 남자와 보라색 정장이 어울리는 남자. 바로 테밀시아와 시오니타였다. 꽤 친해진 듯 테라스에서 독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던 그들은 바로 자신들의 앞에서 재미있는 극을 벌리는 레미나라와 훼이바트를 안주 삼고 있었다. "저 여자는 형님의 정부였지. 형님이 버림받은 모양이군." "곧 숙청이 이뤄질 테니 버림받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긴……쿡쿡. 계속 붙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처리하기 쉽게." 단숨에 잔을 비우는 시오니타를 힐끔 본 테밀시아는 술병을 들어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단 다시 원샷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반정도만 채웠다. 그것을 눈치챈 시오니타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년에게는 내기가 삶의 활력소다. 나 또한 그 도마 위에 올라갔었지. 그녀의 승리였다. 나는 이용당했고 버려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형님의 총애를 받는 그녀에게 휘둘려질 수밖에 없었어. 일부러 그녀에게 우롱 당하면서 칼을 갈았다. 숙청을 할 때 네년도 명단에 넣어주마 라고." 테밀시아는 자신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을 떠올려보았다. 비록 이용당하는 것은 그들이었지만 그 의도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했다. 그는 자존심 강한 시오니타가 느꼈을 굴욕감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빠르게 발을 떼었다만 소용없어. 이국의 황태자비가 된다해도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본능적으로 살기를 느낀 것일까? 레미나라의 눈동자가 순간 시오니타에게로 향해졌다. 시오니타는 미소를 보이며 잔을 슬쩍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한번에 술을 식도 너머로 밀어 넣었다. 일순 굳던 레미나라는 애써 고개를 훼이바트에게로 돌렸다. 두달 후, 테밀시아는 황태자 시오니타의 배웅을 받으며 락아타를 떠났다. 황태자의 일행은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테밀시아와 루카다, 단 둘만의 조촐한 파티로. 황태자에게 딸려 온 시종이 워낙 많았기에 애당초 아무 것도 챙겨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의 소수 파티를 더 선호할 테밀시아를 알았기에 시오니타도 별도의 시종을 주지 않았다. 자국의 신하가, 그것도 올 때 호위까지 한 신하가 떠남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훼이바트에 대해 숙덕이는 이들이 많았지만 당사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훼이바트가 사람을 꺼리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또 배웅은 시오니타로 충분하다. 닮은꼴끼리 만나면 지기가 되거나 천적이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법도. 시오니타는 전자에 해당되는, 테밀시아의 절친한 친구로 자리잡았다. 굳이 지기라 칭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지기로써 존재하는 둘이었다. 그런 둘의 헤어짐에 굳이 '이방인'인 훼이바트가 끼어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잘 가게. 언젠가 있을 대관식 때 보지." "몸조심하게. 피의 숙청을 무사히 끝내길 빌겠어." 남이 듣는다면 경악하며 비난하기 십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둘. 물론 그들의 주위에 루카다 밖에 없기에 꺼낸 말이었지만. 가벼운 포옹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표한 둘은 곧 각자의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서로 갈 길로 향했다.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조금 먼 미래의 일이다. ========================================================================= 2 연참>.< 아해의 장-220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전 대륙에 암암리 뻗어 있는 대(大) 길드, 레타 사잔 아나. 그것은 용병 길드와 마찬가지로 대륙적으로 뿌리 내리고 있는 몇 안 되는 길드 중 하나였으며 그 어떤 것보다도 역사가 길드였다. 별로 좋지 못한 성격을 지닌 이 길드가 그토록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인 비밀 유지와 외지인을 상대로 했을 때만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굳건해 지는 길드 원들의 단합에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배신자와 첩자에 민감했고 잔인했다. 하지만 배신자라면 바로 처분하면 그만이지만 첩자는 문제가 달랐다. 그들은 언제 관군이나 타 길드의 간섭을 끌어올지 모르는 해악이었지만 자신을 숨기는데 이골이 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때문에 평소에는 잠잠하던 길드가 뭔가 계기, 혹은 도화선이 될만한 사건만 생기면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이를 잡아내듯 샅샅이 뒤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가한 뒤 죽여버리곤 했다. 그때 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당시 마스터의 눈밖에 나간 상태거나, 위협이 될만한 적수들이 대다수였다. 결국 이 웃기지도 않는 헤프닝은 마스터의 정적 제거로써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이골이 난 첩자 제거 소동은, 이번에 직접 첩자를 목격했다는 여자와 그 여자의 패거리만 날뛰었을 뿐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마스터의 정적들이 죽어 나가는 것으로 끝나려 하고 있었다. 이골이 나다 못해 지겨웠지만 역시 그냥 대충 흘리기에는 사건의 무게가 무거웠다. 이때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바로 첩자로 몰려 죽기 십상이었기에 거의 대부분 술에도 입을 끊고 약도 하지 않으며 소란이 잠잠해 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찔리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주위에 적이 많은 편인 독립파들도 술 대신 음료와 다과로 목을 축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중에 산과 슈, 민은 물론, 록과 딜린도 있었다. "분위기가 뒤숭숭해." "어쩔 수 없지.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이니까." "배신자는 무슨……. 떨어져 나가는 건 마스터의 눈에 거슬린 이들뿐인데."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고 하던데? 직접 첩자를 눈으로 본 여자가 있다고……." "그래 봤자야. 자신의 적이 대충 떨려 나갔으면 마스터가 알아서 일이 커지기 전에 마무리 지을게 뻔해. 되려 밖으로 나가 있는 그 첩자인지 뭔지 라는 녀석을 잡으러 사람을 외지로 보내면 눈에 띄어 버려. 잡지도 못한 첩자들에게 걸려 어떤 빌미를 사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고. 아마 안만 대충 쓸면 일을 매듭지을 거야." 딜린의 넓은 안목이 곁들여 있는 설명을 듣자니 납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를 홀짝이던 민이 문 듯 물었다. "이번에 처분되는 위인들은 어떤 부류의 인간이지?" "반골 기질이 다분한 위인들이지. 레타 사잔 아나의 규모 정도면 음지뿐 아니라 양지에서 활약해도 충분하다는 '양지 진출론'을 놓고 마스터에게 항변하는 녀석들이야. 타당하기도 하지만 개방되면 지금처럼 마스터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기는 힘들어져. 또한 관병들의 시비에 일일이 대응해야 하고……. 마스터로서는 귀찮은 일이다 이거지. 또, 그런 위인들일수록 아는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으니 더더욱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열등감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필요악이니까." "흐음. 한마디로 떨려 나는 건 의견이 맞지 않는 '똑똑한' 녀석이다, 이거지?" 민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차를 음미하듯 살짝 감기는 눈동자가 고아해 보인다. 물론 마스크를 쓰여 놓은 상태라 신비감이 그의 전신을 싸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그는 창백하고 깡마른 소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태도 하나 하나에서 새어나오는 자신감과 당당함, 그리고 귀족 예법은 충분히 그를 신비롭게 하고 있었다. 딜린은 그런 그를 냉철한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정밀한 사물을 분석, 정리하듯. 감길 듯 감기지 않은 민의 눈동자가 갑자기 번뜩 떠졌다. 그것은 정확히 딜린의 눈과 마주쳤다. 둘은 거의 동시에 생긋 웃어 보였다. 나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라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계속 되는 와중에 허위 우정만이 겉돌고 있었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만……." "방법이 문제지. 정보가 부족해. 누가 처리대상인지 조차도 파악이 안되고 있다." 짜증나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 목을 뒤로 크게 젖히고 생각에 잠겨 있는 이 는 다름아닌 민이었다. 그의 앞에서 상담 역할을 해주고 있던 이는 아직 학원도 등록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의 소년, 키르바나였다. 인상적이었던 첫 만남 이후, 민은 자주 키르바나를 찾아왔다. 손님이라 해봐야 형과 관계를 맺는 불쾌한 여자, 아이세란뿐이었기 때문에 민이 올 때면 매우 반가와 하는 키르바나를 보자니 자꾸 발길이 향해졌던 것이다. 또 키르바나에게 이것저것 많은 조언과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아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키르바나는 이 바닥에 대한 일은 거의 대부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조직의 심층 진행도 알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입에 담지 않지만 이렇게 민이 물어올 때나 자문을 청할 때는 주저 없이 알려주는 것이다. "처리대상 명단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것만 알면 되는 건가요?" "음……. 일단 그것을 알면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잖아?" 이제 놀랍지도 않다. 저 정보망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민은 애써 자신을 달랬다. 배려 없는 질문만큼 무례한 것은 없다고 말했던 자신의 지기의 말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형이 아닌 타인과의 대화가 생소하면서 신기한지 이것저것 이야기를 많이 하려 하는 키르바나가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을 보면 그에게 그리 달가운 루트가 아닐 것이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자신에게 아픔까지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말해줄 것이라 생각하며 조급함을 버리려 하는 민이었다. 키르바나는 명단이 적혀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두루말이를 민에게 건넸다. 두루말이 안에는 십여 명의 사람이 써져 있었다. 안의 내용을 쭉 읽던 민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딜린은 없군. 하긴 당연한 건가. 그가 쉽게 꼬리 밟힐 리 없지.' 적도 아니며 동지도 아닌, 위험한 존재. 그를 생각하면 입안 한 켠이 써진다. 물론 산, 록과 함께 어울리면서 정이 든 것도 있다. 그 때문에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딜린을 죽을 수 있을 만큼 의 실력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원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런 정당한 실력 외의 요소가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딜린도 제법 민에게 정이 들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또한 위험한 존재인 민을 계속 관찰하느니 처리하는 편이 더 쉬울 테니까. 미묘한 균형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관계를 유지해 가고 있는 지금 상황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현 상황을 즐기고 있는 자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민은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을 한다 한들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때이다. "은신처를 마련해야 겠구나." 자신 있는 미소를 내보이는 민. 그의 머리에는 이 목록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계획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몇 달간이나 이 뒷골목을 배회하며 인간 관계를 넓히던 민이었다. 그것은 산조차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시켜온 그만의 일보였다. 덕분에 목록 안에 써진 인간이 누구인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제거 대상 자체가 오지랖 넓은 인간이기에 유명하기도 했지만 그와도 일면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이다.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벌써 이 목록의 반정도가 처리되었다. 이 정도 시기가 적기다. 나머지 처리대상들도 스스로의 위험정도는 감지하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민은 키르바나의 머리를 가볍게 부벼 주며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다. 또 오마." "예, 일이 잘 성사되길 빌게요." 입구가 일렁이며 민을 내보내자 키르바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민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어떻게 실행시킬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성공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청염의 운명을 걷는 자이니까. 유희로써 다가왔다가 진정으로 빠지고 만 화염의 여인이 그의 실패를 용납할 리 없으니까. 또 그에게는 스스로의 길을 닦을 만한 '강함'이 있으니까. 키르바나의 고민은 자신의 형을 그의 성공가도에 동참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럴려면 일단 만남이 있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자신의 형이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고민이 되었다. 자신 때문에 원치도 않은 여자와 관계하며 피를 묻히는 형. 물론 형이 그것을 원하지도 않지만 꺼리지도 않는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이 더욱 괴로워 할까봐 숨기고는 있지만 형이 치유마법을 사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치유마법. 열 명의 마법사 지망생 중 한 명이나 제대로 구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높은 벽. 그것을 뛰어 넘은 형은 충분히 양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실력이 갖춰져 있다. 마법 길드에서 유능한 스승과 귀중한 마법 서적을 마음껏 지원 받으며 길을 닦아 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더욱 지금의 형의 모습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충돌이 있어야 합쳐지든 부서지든 결과가 있는 법이겠지. 일단은 충돌인가……." 장녀인 카시안은 노쇠한 어머니를 대신하여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시집을 가, 집을 떠날 것이라 생각했기에 어머니가 하고 있었던 것이 데릴사위를 들이면서 그녀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어머니는 쉬길 원했고 카시안은 조금이라도 집안에서의 권력을 잡고 싶었다. 때문에 무난하게 권리를 이양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 이 과정에서 많은 마찰을 겪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에게 행운이 따른 것이라 생각해도 좋았다. 물론 그녀의 능력이 그 과정에서의 불필요한 마찰을 죽여 놓았음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카시안의 권리 및 의무 중에는 하인이든 노예든 노리개든 새로운 인력이 집안에 투입되는 과정에서의 판단여하 및 조절이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거처에 하인을 들이고 싶다면 그녀에게 보고,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인이요?" "예. 둘 정도 제 거처에서 쓰고 싶습니다." "둘이나요?" "적은 수라고 생각합니다만." "그야 그렇지만……." 그녀만 해도 자신의 몸종을 둘 거느리고 있었고 옷을 관리하는 하녀만 셋. 음식 시중을 드는 하녀만 하나에 타 심부름을 시킬 때 필요한 하인은 넷이나 되었다. 가족 중에서 하인을 쓰는 것을 싫어했던 카산에게도 총 다섯의 하인이 붙어 있었고 결혼을 하고 나서 아내의 시중을 들 시종이 필요하다고 세 명의 하녀를 받아갔다. 동생, 카이젠 또한 하녀가 두 자리에 넘어가고 있었으니……. 분명 둘은 많은 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거처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꺼려, 한 명의 하인도 시종도 들이지 않던 요크노민이 갑자기, 그것도 밖에서 들어와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여부조차 모르는 타인을 들이겠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들어온 이는 신분 검사도 철저히 해야 하고 하인으로써의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한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절차라는 것은 무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잘 아는 녀석들이니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곤두세우실 필요는 없어요." "예, 간단한 신분 검사만 하도록 하지요. 아, 도련님의 거처를 증축해야 겠군요. 지금으로썬 좁지 않아요?" 잠시 생각하던 요크노민은 그렇게 해달라 답하고 나왔다. 운이 좋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제거대상 중 가장 세력이 넓은 아레를 찾아갔을 때는 마침 제거자가 덮친 상황이었고, 이미 약에 당해 죽임을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그에게 아레는 충성을 맹세했던 것이다. 가장 발이 넓고 인지도도 높았던 아레의 충성맹세는 곧 그의 패거리에게 퍼져 요크노민, 당시 민에게 뜻하지 않은 부하들이 생길 뻔했다. 서둘러 수습하여 부하가 아니라 친한 친구로 지내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장기적인 계획이 무너질 뻔한 상황이었다. 그의 당황 및 속셈을 눈치챈 아레가 선뜻 자신의 말을 바꾸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레는 둘만의 술자리에서 다시 한번 충성 맹세를 했고 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안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명했다. 또한 아레의 양지 진출론에 대한 찬성과 자신의 계획의 일부, 즉 자신이 기 길드를 가질 것이며 때를 보아 밖으로 나갈 생각이라는 것을 밝혀 다른 네 명의 제거대상을 설득해달라 말했다. 하지만 연락을 넣었을 때는 이미 셋이 당한 상태였고 남은 한 명도 중상을 입고 있었다. 되려 일이 잘되려는 지 남은 한 명, 테사라는 아레의 의형제였고 뜻밖의 구명줄 에 기꺼이 몸을 맡기기로 했고 민은 순조롭게 두 명의 수하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잠적에 들어가기 앞서, 리더를 갑자기 잃고 우왕좌왕하는 세 패거리를 흡수했고 믿을 수 있는 이에게 뒷일을 맡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행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 축배를 들기에 앞서 그들의 신분조작이 필요했다. 그것은 나름대로 전과가 있다 말할 수 있는 산이 해결해 주었다. 자신이 써먹었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순식간에 전직 암살자 및 도둑 두 명은 몰락 귀족 및 기사가 되었고, 오르세만 가에서 하인이었던 요크노민과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쌓았다는 눈물 겨운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연장자인 아레가 30세인데다 테사다가 27살이었으니 신분과 연령마저 초월한 우정이라 할 수 있었다. 조금만 비뚫어지게 생각하면 충분히 의심이 가는 관계였지만 카산뿐 아니라 뮤비라까지도 보장하고 나섰기 때문에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결국 길드에서는 두 명의 위험분자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지만 원래 전부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깊숙이 숨은 것이라 판단, 그대로 난리는 사그라 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첩자 제거에 나섰던 인력들을 불러오는 것으로 일은 완전하게 일단락 되었다. 그때서야 마음놓고 축배를 들 수 있었던 민, 그리고 산이었다. ============================================================================ 3 연참>.< 아해의 장-221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한편, 팔자에 없는 대귀족 카르민의 하인 교육을 받고 있던 아레는 자신과는 달리 익숙하게 맡은 일을 해내는 동생의 모습이 의아한지 물었다. "자네 익숙해 보이는 군?" "저야 워낙 험하게 큰 녀석이라서요." 씨익 웃는 모습에서 이미 자신의 과거를 훌훌 털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레는 그 웃음이 너무나 부러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누명을 쓰고 처형당할 뻔했던 자신의 과거를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인데도 어찌 해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저희 주군은 언제 오신다는 겁니까? 대뜸 여기로 가라 하시더니 연락이 끊겼잖아요?" "곧 뭔가 연락이 오시겠지." "귀족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떠돌기는 했지만 민 녀석, 아니 주군은 정말 귀족과 연관이 있긴 한 모양입니다." "그것도 그냥 귀족도 아닌 카르민과 말이지?" 둘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일을 계속 해치웠다. 계속 이야기를 하다보면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나올 것 같아서 이기도 했지만 일을 더디게 하면 고참이라는 하인 놈팽이가 와서 채찍을 휘둘며 유세를 떨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그딴 녀석, 목 한번 그어주면 되지만 애써 가짜 신분을 만들어 이곳으로 보낸 주군의 뜻에 거슬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알랑거리는 꼴을 보자니 성질 죽이기가 힘들어, 애초에 원천봉쇄 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즉 일을 열심히 하는 쪽을 말이다. 하지만 시비를 걸려 마음먹었으면 보조개도 곰보로 보인다는 옛말(?)이 있지 않던가? "이 멍청한 자식! 이 얼룩 안보여?" "그건 얼룩이 아……." "어디다 말대꾸야!" 여느 때와 같이 채찍이 휘둘려지고 아레의 어깨에 적중했다. 아레가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부여잡자 그제서야 만족했는지 녀석은 어서 닦으라고 명하고 사라졌다. "눈은 장식 모양이군." "괜찮으십니까, 형님?" "괜찮아." 사디스트 경향이 있는 녀석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부로 엄살을 부렸던 아레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약골 녀석이 아무리 발악을 해봐야 아레에게 서 저 여유를 빼앗긴 어려울 것이다. 테사라는 감독 하인이 지적한 곳을 보다가 킬킬댔다. "형님. 저건 어떻게 메꾸실 겁니까?" 약간 배여 그늘이 져 있는 그 부위은 어거지로 얼룩이라 말해도 될 듯 싶은 곳이 었다. 한숨을 쉬는 아레에게 광명의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다 수고가 많았다. 오늘로 도련님의 거처에 배속 받게 되니, 따라와라. 짐은 이미 그곳으로 옮겨 놨다." 깐깐해 보이는 집사가 이리도 반가와 보일 때가 없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문 제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주군께서는 이곳 도련님과 자신들을 친구 사이라고 위장했다고 했다. 하지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도령과 어떻게 친 한 척을 한단 말인가? 물론 넉살 좋은 테사라라면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래저래 고민하는 중에 새로 지은 집 냄새가 풍기는 곳에 도착했다. 정원이 다 른 곳에 비해 매우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곳. 암살 위험이 없는 귀족들이나 만들 수 있는 정원이었다. 실세가 있는 귀족이라면 정원은 은신이 불가능하게 엄폐물 이 없고 조금은 황량한 짜임새를 가진다. '돈으로 이곳 도령을 꼬들긴 걸까?' 암살 위협이 없는 귀족은 가주 계승권이 없는 귀족. 다른 말로 하면 레타의 카 등급 암살자인 아레와는 인연이 먼 귀족이라는 것이었다. 사전 지식이 없다는 것은 임기응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아레는 작게 한숨을 쉬며 동생의 넉살을 믿기로 했다. 집사는 입구까지만 둘을 안내했을 뿐, 바로 돌아서 가버렸다. 어차피 서로간에 안면이 있는 사이이고 또 따로 요크노민 도련님이 그리 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레와 테사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을 열자 바로 보이는 테라스에 한 소년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밖으로는 연못이 있는 지 물이 흐르는 소리가 조용한 거실 안에 울리고 있었다. 둘이 들어왔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한참이나 밖을 보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우리는 몇 년간이나 신분과 연령을 초월한 우정을 쌓아온 사이가 아니던가? 처음 뵙겠다?" 조소가 어려 있는 싸늘한 말투. 아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테사라가 그 모양을 보고 얼른 끼어 들었다. "친구가 왔는데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쿡쿡." 조소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소년이 고개를 약간 돌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역광 때문에 그의 얼굴은 검게 보여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암살자의 눈썰미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레는 분을 삭히기 위해 고개를 숙인 상태였고 테사라는 도둑 출신이라 불가능했다. 아레는 귀족이 싫었다. 자신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나 몰라라 했던, 한때 주군이라 믿었던 이도 귀족이었다. 그는 오만방자한 그 족속이 싫었다. "무릎을 꿇어라. 주인을 대면하고도 무례하게 서있다니 아직 교육이 덜 된 것 같군." 도발적인 언사였다. 방금 전에는 우정이 어쩌고 하면서 말을 끊더니 지금은 주인 운운이다. 하지만 테사라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어차피 귀족이 아닌가? 제 멋대로에 철없이 건방진 귀족이 아니던가? 저런 행포답지 않은 행포쯤이야 이미 익숙한 일이다. 헌데 옆에 있는 형님이 똑바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황하며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테사라를 무시한 채 아레는 귀족 소년을 쏘아보았다. 그는 기사였다. 비록 지금은 죽은 자로 되어 불명예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는 기사였다. 그런 그가 주군 외의 사람에게 무릎을 꿇을 리 없지 않은가? 술자리에서 그의 과거를 들은바 있었던 테사라는 작게 속삭였다. "주군께 누가 되는 행동입니다!" 작지만 힘있고 옳은 소리. 아레는 이를 악 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둘이 고개까지 푹 숙였을 때야 귀족 소년은 천천히 테라스에서 벗어나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훗날을 위해서는 자존심쯤은 꺽을 줄도 알아야 한다. 마음만 꺽기지 않는다면 그깟 무릎쯤이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꿇을 수 있지. 자, 고개를 들어라." 좀 전과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강한 어조. ……익숙한 말투. 아레와 테사라는 설마 설마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주군!?" "주군!?" 하얗고 깨끗한 마스크와 예의 아름다운 남색 머리카락, 강렬한 남색 눈동자. 그리고 적색 목걸이. 귀족 소년, 아니 요크노민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레와 테사라는 멍하니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정신 차릴 기색이 안 보이는 둘의 앞에서 요크노민은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창백한 안색을 가진 어린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큰 흉터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과는 다르게 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와 여전히 강렬한 남색의 눈동자. 창백한 안색만 없다면 어리고 앳띤, 남색가의 구미에 맞을 소년의 얼굴. "다시 소개하지. 나는 요크노민 마 카르민." 가주 계승권도 없고 합법적이지도 않은 루트를 통해 카르민에 오른 요크노민이 다. 앞에 성을 붙이지 않은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성을 붙인 상태에서 '마'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다면 그것은 가주 계승권자라는 뜻이다. 자하라의 성을 사용하 고 싶으면 마를 버려야 하는데, 요크노민은 거침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자신은 뮤비라 형님의 동생이기에. 소년의 얼굴이나 남자의 눈빛을 가진 강한 이. 요크노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혹은 민 차 레타라고도 불리던가? 하하." 아레와 테사라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요크노민에게 진정으로 강한 세력이 생기려는 순간이었다. ********************************************************************** 요크노민이 아레와 만나기 바로 직전, 다른 장소에서의 일이다. 깨끗한 숲이 보이는 작지 않은 마을. 견고한 성벽까지 가지고 있기에 몬스터 사태 가 한창임에도 여유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숲, 푸르름의 고향에 바로 붙어 있는 관광지였다. 때문에 선물용 물품을 파는 가게와 독특한 식단으로 꾸며져 있는 식당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멜은 그곳에서 꽤 유명한 만두집을 경영하고 있는 남자였다. 처음 장사를 시작했 을 때, 그는 오후 12시부터 딱 100개의 특대형 만두를 한정 판매하는 특별한 이벤트를 매일같이 했었다. 그것이 선전효과가 되서 지금은 크고 깨끗한 건물을 사, 제법 돈을 벌어 드리고 있었다. 이제는 전통이 되버린 한정판매의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특대형 만두는 크기뿐 아니라 맛 또한 특별했다. 어떤 것은 매운 향료가 잔뜩 들어가 있었고 어떤 것은 달았다. 소스도 특이한 것을 잔뜩 써서 특별한 기대감을 가지고 사게 만드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훨씬 맛좋은 것을 먹기도 하고 어쩔 때는 최악의 콤비를 가진 재료를 쓴 것을 먹기도 하지만 그것 나름대로의 재미 덕에 사람들이 계속 찾아왔다. 물론 가격은 다른 만두보다 훨씬 비쌌지만 말이다. 멜은 특대형 만두를 가게 밖,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가게의 벽을 한쪽만 터놓아서 길 가던 사람들을 상대로 팔 수 있게 계산대와 진열장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그는 일부러 달아 놓은 종을 쳤다. 그것이 신호였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뿌듯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 멜이었다. 종업원을 시켜도 되지만 이 일만은 꼭 자신이 직접 했다. 만두가 반쯤 팔렸을 때였다. 줄을 서 있는 이들을 헤치며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왔다. 멜은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 "이봐, 아무리 먹고 싶다 해도 순번은 지켜야지. 물론 멜 표 만두가 새치기를 해서라도 먹고 싶을 만큼 맛좋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자 새치기를 당해 불쾌감을 내보이던 이들이 일제히 웃어댔다. "하하하!" "멜 아저씨. 넉살은 여전하우." 하지만 앞으로 나온 이만 침묵을 지키며 만두에 손을 댔다. 멜이 얼른 설명했다.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특대형 만두는 한사람 당 하나밖에 못……."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청객은 만두를 입에 가져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만두에 집어들었다. "이, 이봐!" 멜은 당황해서 불청객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온통 흙투성이인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그는 후드까지 눌러써 신체부위 중 어느 하나도 살펴볼 수가 없었다. 드러나 있는 손마저 장갑으로 가려져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저기 찢기고 바래진 로브를 본 멜은 얼른 불청객을 쫓아내려 했다. 그에게 있는 상인으로써의 직감이 눈앞의 녀석이 거지임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 당장 꺼지지 못해! 만두집이라고 만만하게 본 모양인데, 잘 못 알아도 한참 잘 못 안 거야! 어이, 이 녀석 얼른 쫓아내!" 하지만 멜이 뭐라 하든 말든 거지(라 추정되는 녀석)는 벌써 네 개의 만두를 먹어치우고 다섯 번째의 만두로 손을 뻗고 있었다. 뒤에 있던 이들은 얼굴을 찡그리고 뭐라 수근대다가 몸집 좋은 종업원이 나오자 기대감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원래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싸움구경이 아니던가?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그들의 바람은 이루워지지 못했다. 식당 안에서 맑은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만 하십시오. 굶주린 자에게 한줌의 자비를." 평소라면 무슨 헛소리냐며 쏘아붙일 멜이 웬일인지 쩔쩔매며 가게 안을 돌아보았다. "하, 하지만 저런 녀석에게……." "저 분의 계산은 제가 대신 치루겠습니다. 그러니 배불리 드실 수 있게 해주세요." "아, 예.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멜은 안쪽으로 들어가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건네는 돈을 받아들었다. 요즘 사람답 지 않은 친절이 의아했던지 밖에 있던 이들이나 안에 있던 이들이나,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으로 쫓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신관인 것이다! 고귀한 신의 목소리를 쫓는, 자비와 선의 존재. 게다가 젊고 아름다운 신관이다. 막노동을 하는 이들로써는 꿈도 못꿀 깨끗하고 하얀 피부에 지성과 자애가 담겨져 있는 맑은 눈동자를 가진 신관의 모습에 다들 넋을 잃고 빠져들고 있었 다. 갑작스런 시선 집중에 얼굴을 붉히는 모습까지 아름답게 보였다. "일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배를 채우는 녀석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습니다. 저런 녀석은 그런 자비를 빌미 삼아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 갈 녀석입니다." 갑작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신관의 앞에 앉아 있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신관의 일행에게로 눈을 돌렸다. 신관과는 달리 갑옷을 갖춰 입은 전사다. 갑옷에 중재와 치유의 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그냥 전사가 아닌 성기사임이 분명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신관의 존재만큼 성기사의 존재도 희귀하며 특별한 것이다. 게다가 방금 꺼낸 냉정한 말이 왠지 모를 공감을 형성시키고 있었다. 아름다운 신관은 다소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아율 형제. 이런 작은 친절마저 없다면 세상이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겠어요? 너무 따지지 말자구요." 활짝 웃으며 장난스레 말하는 모습에 아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불만이 가시지는 않았는지 불만 어린 눈으로 거지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직도 만두를 입에 넣고 있었다. 벌써 아홉 개째다. 많이 굶주린 모양이었다. 아율의 앞에 앉아 있던 다하나가 걱정스레 말했다. "저러다 체할텐데……. 천천히 드시지 않고." 거지는 배가 찼는지 아홉 번째 만두를 끝으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뒤에 있던 손님이 얼른 만두를 사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모든 이의 시선은 거지에게로 향해 있었다. 저토록 고귀한 친절을 받고 얼마나 감격해 할 것인가? 당장이라도 신관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감사의 말을 해도 모자랄 판에 거지는 로브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물병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병은 작은데 뭐가 그리 마실게 많은지 한참 꿀꺽꿀꺽 들이키던 그는, 이내 가벼운 심호흡을 뱉으며 병에서 입을 뗐다. 그리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더니, 병 주둥이를 닫고 다시 품에 넣었다. 그 모습에 다들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단 말인가? 성기사의 말따라 저런 녀석에게 자비 따윈 베풀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다하나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런 거지를 볼뿐이었다. 배불러 보이는 모습을 보니 돈을 대신 낸 보람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거지는 흘러내리려는 배낭을 고쳐 매고 품을 뒤적이며 다하나에게로 걸어갔다. 혹시 몰라 검 자루에 손을 대고 경계하는 아율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뚜벅뚜벅 다가온 거지는 품에서 꺼낸 무엇인가를 그들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은화 두닢이었다. ========================================================================= 4 연참>.< 아해의 장-222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겨우 동전 20닢의 계산을 치루었던 다하나는 그 거금에 놀라 얼른 손을 내저었다. 거지……아니, 로브를 입은 이가 입을 열었다. "호의 감사합니다. 제 계산을 해주셨으니 신관님의 계산을 제가 하는 것뿐입니다." 무뚝뚝하긴 하지만, 다하나의 호의를 좋게 봤음을 알 수 있는 따뜻함이 배여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둘이 먹었다 한들 동전 30닢이 넘지 않았다. 때문에 거절하기 위해 말을 꺼내려 했지만 로브를 입은 이의 물음이 한 박자 빨랐다. "곤크가 어딘지 아십니까?" "아……. 저기 푸르름의 숲을 지나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려 걸어가려는 그를 다하나가 얼른 붙잡았다. "잠깐! 이 은화는 가져가세요." 그들의 주위에서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 입을 떡 벌린 채 보고 있던 이들은 신관의 뜻밖의 거부에 또다시 놀라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은화 두닢이라니! 그 정도라면 고급 식당에 가 풀코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음식을 떵떵거리며 먹을 수 있는 가격이 아닌가? 설마 거지라고 생각했던 이의 품에서 그런 돈이 나올 줄 누가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게다가 음식을 먹을 때와는 달리 침착하고 정중한 몸놀림까지……. 주위의 이런 반응과는 상관없이 신관은 은화를 얼른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뒤에서 아율이 아쉬운 입다심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되려 생사람을 거지로 몰아붙인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할 판인데 이런 거금은 받을 수 없다. 남자는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은화 두닢을 내려보다가 다하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은화를 든 손을 내밀어 도로 가져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완강히 거절하는 다하나를 보면서도 그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남에게 호의를 베풀 줄만 알뿐, 받을 줄 모르는 이는 진정으로 자비로운 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쪽에 불과한 자비일 뿐. 반쪽 짜리 자비는 위선에 불과합니다." 다하나는 멍하니 남자를 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은화 두닢을 받아들었다. 대신관님 께도 들었던 말이었다. 진정한 호의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지, 그것을 거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어두움을 감춰졌음을 안도하는 위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가, 감사합니다." 은화를 받아든 다하나에게 다시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건넨 남자는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은화를 내려다보던 다하나는 갑자기 가게를 뛰쳐나와, 걸어가는 남자의 로브 자락을 잡아당겼다. "저희와 동행하시지 않겠어요? 폐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동행인의 생각을 묻지 않고 그리 정해도 되는 겁니까?" 남자가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뒤에서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뛰쳐나온 다하나를 따라온 아율이었다. 다하나는 당황해서 얼른 사과했다. "아, 아율 형제.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하지만 저희가 가고자 하는 곳도 곤크이고 그리 멀지도 않으니까……." "뭐,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 어깨를 으쓱이는 아율. 그가 냉정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뒷끝 없는 성격임을 알기에 다하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 다하나의 손을 천천히 뿌리치며 남자가 말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왜지요? 그리 멀지도 않은데?" "거리가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차분한 어조로 답하던 남자는 갑자기 다하나를 앞으로 강하게 밀쳤다. "무, 무슨 짓……!?" 아율이 얼른 넘어지는 다하나를 부축하며 고함을 질렀지만 앞의 광경을 보는 순간 그런 소리를 목안으로 순식간에 넘어가 버렸다. 언제 뽑아 들었는지 검을 뽑아들고 무언가를 막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공격을 하는 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햇빛에 희미한 반사광을 보이는 무기, 그것이 질기면서 예리한 은사라는 것! "암살자!?" 신음과 같은 경악성을 뱉은 아율은 얼른 다하나를 자신의 등뒤로 보냈다. 기사인 자신과는 달리 육체적인 싸움에 절대적으로 약한 다하나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였다. "식당 안으로 가 있으십시오." "하지만!" "있어 봤자 방해입니다. 어서!" 둘의 대화가 진행되는 사이에도 남자의 보이지 않는 싸움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는 먼저 땅을 튕기며 은사의 주인이 있을 법한 곳으로 날 듯이 달려갔다. 뜻밖에도 그 장소에는 단단해 보이는 돌 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는 가벼운 기합성과 함께 검을 벽을 향해 강하게 찔러 넣었다. 튕겨 나가며 손목이 상할 것이라 예상했던 주위 사람들을 배반하며 검은 부드럽게 벽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자는 한번 더 강하게 땅을 박차더니 크게 점프하듯이 계속 검을 올렸다. 이층 건물의 한쪽 벽면이, 마치 종이를 칼로 한번 그어 내린 듯 갈라지는 모습은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검이 벽의 높이 이상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옥상을 부수며 나타난 이가 있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암살자였다. 낮임을 고려해서 회색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그는 왼손을 제거상대를 향해 빠르게 휘둘렀다. 그의 오른손은 그것에 연결되어 있던 은사가 남자의 검에 묶여 있었기에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자였는지 그 모습이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날라 오는 은사를 피해 몸을 회전시키며 밑으로 내려왔다. 그의 검에 묶여 있던 은사를 손에서 떠나보낸 암살자는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암기 다섯 개를 날려보냈다. 막 바닥에 착지한 남자는 다시 앞으로 덤블링을 해서 그것을 피했다. 연속적으로 다섯 번 덤플링해 그것을 피한 남자의 몸은 아율의 바로 앞까지 와서 멈췄다. 그 와중에 후드가 벗겨졌다. 하지만 안에도 검은색 두건을 깊이 눌러썼기에 얼굴을 살펴 볼 수는 없었다. 바로 반격할 태세를 갖추던 남자는 한숨과 함께 검을 검 집에 밀어 넣어야 했다. 언제 도망쳤는지 암살자의 모습이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순식간에 매듭지어진 전투. 끼어들 틈을 노리던 아율은 허무함에 입을 다셨다. 만두집 안으로 피해 있었던 다하나가 뛰쳐나오며 남자에게 물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 질문에 남자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가 괜찮다고 답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이번에는 한 명만 나왔고 또 금방 도망가 버려 상처를 입지 않았던 것이 다. 평야에서는 음식은 고사하고 다쳤는지 조차 살펴 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수가 덤벼왔고 싸우다 도망치기를 수차례 반복해야 했던 것이다. "저는 중재와 치유의 신을 모시는 신관, 다하나라 합니다. 상처가 있으시다 면……." "괜찮습니다. 다행이 수가 적었기 때문에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용병, 무하라고 합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이제 제가 동행을 거절한 이유를 아시겠지요? 호의는 감사드립니다." 다하나는 아쉽지만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 혼자만의 여행도 아니고 나이트 아율과의 동행이었다. 자신의 독단적인 선택으로 인해 아율이 다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비전투 일행인 자신이 끼어 들어 봤자 눈앞의 남자, 무하에게는 방해만 될 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어째서 암살자가 자네를 노리는 거지? 꽤 등급이 높아 보이던데." 아율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답을 기대하고 물은 질문은 아니었다. 용병이란 원래 비밀이 많은 족속들이 아니던가? 극비 임무를 맡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비록 자세한 것은 생략되어 있는 답이었지만. "곤크에 가면 끝날 겁니다." "곤크?" 무하는 고개를 끄떡이며 로브 안에서 덜그덕 거리는 단검을 쓰다듬었다. 피로 얼룩진 더러운 헝겊으로 칭칭 감겨 있는 단검이다. "물건만 건네주면 저들도 포기하겠지요.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길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신에게 물건을 탈환 당했으니 길드의 체면 및 자존심상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주인에게 돌아가기 전까지 되찾아 오기 위해 저렇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들이 한번 주인에게 탈환 된 것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지기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몇 번이나 길을 잃고 헤맸는 지 모른다. 길을 묻고 싶어도 계속 마을이 없는 쪽으로 내몰려 그럴 겨를도 없었다. 단지 수도 근처에 있다는 말만 어렴풋하게 듣고 북쪽으로 정신없이 내달렸을 뿐. 그렇게 헤매기를 두 달째. 이제 겨우 끝이 보이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그나마 버티던 정신력도 고갈 되 버릴 터라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하는 휘청이는 몸을 애써 독촉하며 북쪽으로 향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원인제공자 클래너를 향해 이를 갈면서.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했으면 남에게 도둑을 맞는단 말인가?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어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제는 물건을 돌려주러 간다기 보다는 클래너를 한방 먹이기 위해 간다고 봐야 할 듯 싶었다. ========================================================================== 5 연참>.< 아해의 장-223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대륙에는 무수한 용병단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규모조차 천차만별이었고 각기 가지는 성질조차 천차만별이었다. 하루에도 몇 개씩 생기며 몇 개씩 사라지는 흔하디 흔한 용병단. 그들 중에도 오랜 전통과 노하우를 자랑하는 곳은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거대하고 의뢰인의 뿌리가 깊은 대(大) 용병단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기사 지망생은 많지만 기사가 되는 이는 적 듯이 말이다. 그 중에서도 곤크는 욤 제국에 단 둘밖에 없는 대 용병단이었다. 주로 귀족을 고객으로 가지고 있으며 계급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완벽한 능력주의의 용병 단. 특히 현 곤크 마스터의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고 평가되고 있었다. 그에 따른 자존심 또한 높고 굳건해서 어지간한 귀족도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려 몸을 사릴 정도였다. 때문에 현재 용병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하는 곳을 곤크로 꼽고 있었다. 무하가 찾아가고자 하는 이는 그 곤크에서도 카 등급을 차지하고 있는 클랜이다. 성격도 털털하여 부하도 잘 챙기고 동료끼리 돈독한 친분관계를 다지고 있는 남자. 그런 그가 근래에 꽤 암울한 오라를 풍기며 다니고 있는 것은 곤크 내에서도 유명했다. 털털하다 못해 가볍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였고, 곤크 내에서 딱 열 명밖에 없는 카 등급의 소유자였다. 원하든 원치 않든 도마 위의 단골 손님이었던 것이다. 특히나 그는 몇 달 전 부여 아이템, 마법 검을 선물 받은 일로 매우 유명해 진 상태였다. 바로 그 마법 검을 도둑맞은 일로 울적해 하고 있으니 어찌 유명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툭하면 멍하니 하늘을 보며 '내 뢰검. 내 뢰검, 내 뢰검.' 하며 넋을 잃고 중얼대니……. 폐인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를 걱정한 동료들은 현상금을 걸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검도 아니고 부여 아이템씩이나 되는 검을 헌터들이 되찾아 서 가졌으면 가졌지 돌려줄리 만무했기에 포기해야 했다. 홧김에 술이나 마시자 고 술집을 향하는 동료들이었다. 폐인 클랜은 구석에서 술마저 끊고 멍하니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이제 그만 훌훌 털어 버려라." "그렇게 집착해봐야 다시 찾기는 글렀잖아." "애 진작에 가진 적이 없다고 생각해버려." 들리지 않는지 검은 오라만을 발산하는 모습에 다들 혀를 찼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평생 떵떵거리며 먹고 살만한 재산이 일순간에 날라간 것인데 어찌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올 뿐이다. 기력 없이 술만 축내고 있는 그들에게 문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별 구경거리가 되지 못했다. 곤크에 들어온 무하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며 클랜을 찾았다. 푸르름의 고향을 통과해 오면서 수 차례 습격을 받았던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애물단지를 벗어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원이 풀릴 때까지 녀석을 패버리고 편히 자고 싶었다. 음식도 독이 들어갔을지 여부를 걱정하지 않고 맘껏 먹고 싶었다. 그럴려면 이 망할 단검을 얼른 내버려야 했다. 다행이 클랜의 종적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꽤 유명인사였는지 물어보기 위해 말을 거는 사람마다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사람이 많은데다가 쟁쟁한 용병단인지라 암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 휴식답지 않은 휴식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쳐 있었던 무하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일러주었던 술집이 보였다. 크고 번잡한 곳이었다. 무하는 한숨을 내쉬며 문을 밀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뒤로 두발자국 정도 물러났다. 한줄기의 살기가 그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다가왔던 것이다. 문이 박살이 나며 두 명의 자객이 무하의 목 줄기를 노리고 달려왔다. 무하는 검을 들어 그것을 막으며 작게 욕설을 뱉었다. 바로 앞인데! 끝나지 직전이건만! 파편이 난무하는 와중에서 사람들은 단순한 싸움인 줄 알고 구경하고 한편에서는 내기 판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덤벼드는 암살자로 인해 고전을 겪고 있던 무하로서는 이가 갈리는 현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가 잔뜩 빠진 검에 금까지 가기 시작했다. 급히 구한 검이라 품질이 그리 좋은 것이 아닌데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한번의 보살핌도 줄 수 없었던 급박감 때문에 수명이 훌쩍 줄어 든 것이다. 자신의 목 줄기를 노리고 다가오는 단검을 튕겨 내며, 측면에서 덤벼오는 이의 복부를 검 집으로 찔렀다. 상대는 날라가기 직전에 무하의 검 집을 붙잡고 비틀었다. 얼떨결에 놓쳐버린 검 집과 함께 벽으로 가 꽂히는 모습이 얼핏 보였지만 그것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정면의 상대가 튕겨진 단검을 빠르게 회수해 다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간신히 막은 뒤 몸을 회전시켜, 자객의 머리를 발로 찼다. 휘청거리는 그의 급소를 다시 발로 찬 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그의 뒷목을 칼등으로 내리쳤다. 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모습을 보고 호흡을 고르게 하던 무하는 왼쪽에서 쏘아지는 살기에 몸을 틀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고쳐 들기에는 늦었음을 냉정하게 판단, 덤블링 하 듯 뒤로 몸을 내뺐다. 무하의 검 집은 어디다 던져두었는지 암살자는 자신의 검을 들고 빠르게 접근했다. 무하는 후들대는 손으로 검 자루를 애써 움켜쥐고 빠르게 휘둘렀다. 좀 전의 침착하게 상대를 제압하던 모습과는 꽤 서두는 모습이었다. 암살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클랜의 모습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서 이 녀석을 처리하고 저 녀석에게 망할 단검을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는 죽기 직전까지만 패버리고 싶었다. ……두 달간의 추적과 습격은 무하의 정신을 극한까지 몰고 간 모양이다. 때문인지 기절한 듯 보였던 암살자가 다시 단검을 고쳐들고 옆에서 빠르게 접근하고 있음을 늦게 알아차렸다. "앗!" 짧은 경악성과 함께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검 집채 뽑아 막았다. 예리하게 세워졌던 암살자의 단검은 무하의 단검을 칭칭 감싸고 있던 헝겊을 찢으며 어긋났다. 그러자 더러운 헝겊은 바닥으로 천천히 떨어졌고 단검의 본디 화려하고 고풍스런 모습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주위에서 탄성을 지르는 그 순간 무하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짜증이었다. 어째서 기절하지 않고 깨어나 귀찮게 만드는 거냔 말이다! 그 다음 순간의 일은 이미 그의 의식 밖의 일이었다. 온갖 짜증을 한 단어에 압축시켜 뱉어내 버린 것이다. "뢰(雷)!" 비록 이성을 잃은 상태라지만 살심을 품지는 않았기 때문에 형성된 뇌전의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물론 암살자들을 기절시키기에는 충분했지만.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것도 아니고 해서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거지만 확실히 효과는 좋았다. 무려 두 달간이나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던 무하는 후들거리는 몸을 악으로 버텨내며 클랜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고도 짜증나게도 그는 미처 한 걸음도 딛기 전에 저지를 당해야 했다. 클랜의 일행으로 보이는 한 용병이 무하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무하가 의문을 꺼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검 어디서 났지?" 어느새 주위는 정막해져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들려오는 검을 쥐는 소리. 주점의 단골 손님 클랜과 그 일행들이 왜 요즘 저기압에 빠져 있는지, 마찬가지 로 단골 손님인 동료 용병들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곤크라는 울타리 안의 가족이었다. 무하는 주위가 살벌해 지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한 오해. "내가 도둑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네 손에 쥐여진 검이 증명하고 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일까?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클랜을 제외 한 주점의 모든 이들이 검을 뽑아들었고, 클랜의 동료들은 검 날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미처 진실을 밝힐 틈도 없이 무하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이들의 검을 막는데 급급했다. 뒷걸음질치다 결국 주점 밖으로 밀려난 그는 이를 악 물었다. 은혜를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뭔가 착각……!" "더러운 입 닥쳐!" 무하가 클랜의 단검과 자신의 장검으로 자신을 공격해 오는 이들의 검을 간신히 막고 있을 무렵, 클랜의 동료들은 클랜을 향해 소리쳤다. "이 멍청아! 네 검이잖아! 어서 정신 차리지 못해!" 멍하니 벽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던 클랜이 그 말을 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무하 쪽으로 돌렸다. 아직도 멍하니 풀려 있는 그의 눈에 무하의 손에 쥐어져 있는 화려한 단검이 박혀왔다. "내 뢰검!" 클랜은 순식간에 검을 뽑으며 무하에게 달려들었다. "이봐, 난……!" 무하는 당사자가 오자 강하게 다른 이들의 검을 튕겨내고 서둘러 사정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클랜은 다른 이들보다도 더욱 광분하여 달려들 뿐이었다. 문자 그대로 문답무용……이랄까? 카 등급인 클랜이 나서자 다른 이들은 한 걸음 물러서 방관했다. 그들 중 가장 고위 등급이면서 의뢰 수행시 리더인 클랜이 저깟 좀도둑하나 잡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클랜은 신뢰받는 실력자였다. 한편, 무하는 당사자마저 배은망덕하게 놀자, 돌려주는 거고 뭐고 마법 검을 사용해서 반쯤 죽여 놓고 가버리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자신이 도둑이라면 미쳤다고 단검을 들고 당사자 앞에 나타났겠는가? 그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남자였던가? 이런 녀석 때문에 두 달씩이나 그 생고생을 했다니! 분노 수치가 높아질수록 점점 손속이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클랜 역시 자신의 검을 훔치고도 모자라 겁 없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도둑에 대한 분노 수치가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몇 번이고 손속을 주고받을 때 였다. "하압!" 가벼운 기합성과 함께 둘 사이를 파고드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곧장 검을 클랜에게 향하여 찔렀고 마침 클랜의 허리 쪽으로 검을 휘둘던 무하와 협공을 하게 됐다. 하지만 녹록치 않은 실력을 지닌 클랜은 가볍게 뒤로 발을 놀려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는 몸 자세를 낮추고 갑자기 추가된 적을 살폈다. 그러다 뜻밖의 사실을 깨달고 어이없는 질문을 던졌다. "성 기사?" 치유와 중재의 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갑옷, 축복이 서려 있는 순백의 검……. 분명 성 기사였다. 그것도 견습이 아닌, 분명한 신의 가호를 받은 정식 기사. 그 것은 약하게 순백으로 빛나고 있는 검 신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헌데 어째서 성 기사가 도둑의 편을 든단 말인가? "당신 뭐 하는 짓이야! 왜 방해하는 거야?" 평소라면 공손하면서도 존중 어린 태도를 보였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도둑 맞은 단검이 눈앞에 있는데다가 막 잡기 직전에 훼방으로 극도의 분노에 휩 싸여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의 그런 태도에 성 기사는 매서운 눈으로 검을 바로했다. 그리고 말했다. "암살자를 저지하는데 왜 이유가 필요하지?" "암살자? 난 용병이다! 곤크 소속의 용병이란 말이다!" "호오? 곤크가 언제부터 암살 의뢰도 받았지?" 도발적으로 검 끝을 움직이며 성 기사는 약한 살기를 뿜어냈다. 극도로 떨어진 체력을 조금이나마 회복시키며 무하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나이트 아율." "이것도 인연인데요, 뭘.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갑자기 끼어든 성 기사. 그는 바로 며칠 전의 만두집에서 만났던 신관의 일행, 아율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의 파트너는? ……이라는 의문을 제시하기도 전에 흉흉한 용병들을 헤치고 나타나는 아름다운 신관, 다하나가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예.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라고 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 겁니까?" 부드럽게 응대하며 무하의 몸을 살펴보던 다하나는 많은 상처들을 발견하고 얼른 기도에 들어갔다. 성 기사에 이어 신관까지 도둑을 감싸는 모습이 어이가 없는 듯, 클랜이 외쳤다. "언제부터 성 기사와 신관님께서 도둑을 감싸주게 되었습니까?" "도둑이라니?" 마찬가지로 어이가 없는 얼굴을 하며 되묻는 아율이었다. 기도에 들어가 묻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다하나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 상처가 깊지 않아 금방 아물자, 다하나는 땀을 닦으며 클랜을 돌아보았다. "이 분은 도둑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단지 물건을 돌려주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했어. 덕분에 암살자에 게 시달리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다고."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클랜은 무하의 손에 쥐어져 있는 단검을 똑바 로 가르켰다. "뭘 돌려주러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검은 분명 내 것이야! 내가 몇 달 전에 선물 받는 검이라고! 여기 증인들도 많지 않나!" "맞아! 이 녀석이 선물 받는 모습까지 바로 내 눈으로 봤다고!" 주위에서 호응하는 모습을 당혹스럽게 보는 다하나와 아율을 뿌리치고 무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한계에 달한 체력 때문에 그 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다. 클랜은 핏기 서린 눈으로 그런 무하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무하의 지친 모습마저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연극으로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귀족답지 않은 털털함과 정확한 상황 파악, 적응 등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귀족 소년. 귀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그의 마음에 들었던 소년이 선물한 검이다. 검 자체의 가치만 따져도 엄청났지만 그에게는 그 의미가 더욱 소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도둑 맞았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비어 있는 머리맡을 보고 얼마나 경악했던가?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는 클랜의 모습은 그의 동료들에게조차 생소한 것이었다. 살기 한줌 한줌이 예리한 칼날이 되어 자신에게로 쏘아지고 있건만 무하의 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클랜과의 사이가 네 걸음 정도 남았을 때서야 멈춘 그는 간신히 쥐고 있던 단검을 무성의하게 던졌다. 설마 그것을 던질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여 헛손질하면서 겨우 그것을 받아든 클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무하를 보았다. 그것은 그들을 감싸고 있던 클랜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물건……돌려줬다." 짧게 말한 무하는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움켜쥐고 휘청휘청 주점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클랜을 막 지나려는 그 순간 무하의 입 이 다시 열렸다. "줬다 다시 뺏는 취미는 없다." 낮은 목소리. 바로 옆의 클랜의 귀에나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고 낮은 목소리. 클랜은 순간 그 목소리가 귀에 매우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 검은 두건을 깊이 눌러쓴 남자는 주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봐, 잠깐!" 얼른 따라 들어 가보니 구석에 박혀 있는 검 집을 주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을 따라온 클랜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검을 검 집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에 그것을 묶었다. "호, 혹시 너 페……?" "무하다." 마무리로 매듭을 지어 꽉 묶은 무하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있는 클랜에게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무하다." 그리고 천천히 주먹을 풀며 클랜에게 다가갔다.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클랜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아직도 둘러싸 구경하고 있던 이들이 영문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무하씨?" 무하의 모습까지 나타나자 다하나가 조심스레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답도 없었다. 그저 낮고 작으며, 위압감 느껴지는 목소리로 클랜에게 말했을 뿐. "기껏 준 물건을 도둑 맞은 것도 모자라, 되찾아서 장작 두 달간이나 시달리며 돌려주러 오니까……." "저, 저기?" "고맙다고 백 번 감사는 못할 망정 감히 살수를 뻗어?" 등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클랜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뒷걸음질치는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잔말 말고 딱 죽기 직전까지만 맞아라." 무하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음은 행동만이 있을 뿐. 처절한 비명을 뒤로하며 클랜의 동료와 다하나, 아율은 다른 주점을 향해 발을 놀 렸다. 백 번 맞아 죽을 짓을 했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뭐, 마법 검을 되찾은 게 어딘데. 안 그래?" "그럼, 그럼. 저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지. 암암." 듣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을 절감할 비명이 다시 들려오자 그들의 발걸음은 왠지 더 빨라지는 듯 했다. "싸, 싸게 먹히는 거겠지?" "그, 그럼." ……레타에서 막 철수 명령이 떨어졌을 무렵의 일이었다 ============================================================================ 6 연참>.< 아해의 장-224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2년 후> 대 제국, 욤은 세 가문이 카르민 계층의 영광을 안고 있다. 제피모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위 계층이었으나 그 세 가문에서도 서로간의 급의 차이가 분명 있었다. 경제력 및 정치적 영향력 등, 세력이라는 급의 차이인데 늘 미묘하 게 차이가 났고 언제나 신경전이 멈추지 않았다. 세력의 판도는 언제 바뀔지 알 수 없는 여인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으나 분명한 것은 현재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가문이 오르세만이라는 것이다. 10년 정도도 유지하기 힘든 정상의 자리를 벌써 두 대에 걸쳐 유지하고 있는 오르세만의 기세는 지금도 사그라들 기미가 보 이지 않았다. 특히 다음 가주로 지명 받은 테밀시아는 그 어느 때의 가주들보다도 높은 프라이 드와 맹렬한 야심, 그리고 그것을 이룰만한 능력을 갖춘 남자였다. 신의 축복과 보살핌을 받지 않는 한 그토록 완벽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외모마저도 출중하여 강렬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남성이었다. 그의 객관적인 면만 본다면 신은 공평하다는 말을 입에 담는 이는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 그가 이번에 자하라 가의 가주의 장녀와 혼인을 하게 된다. 약혼을 하고나 서 벌써 3년이 흘렀으니 늦은 감이 없지 않은 결혼이었다. 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완벽한 남자 테밀시아와 결혼하는 행운의 주인공은 앞서 말했듯이 자하라 가주의 장녀, 마린나사였다. 당대 가주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 칭송 받는 자하라 가주의 골치덩이 중 하나인 그 녀는 귀족 자제다운 허영심을 두루 갖춘 여자였지만 분명 아름답기는 했다. 하지 만 그 아름다움도 테밀시아의 완벽한 남성미에 비하면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았기 에 다들 혀를 찰 뿐이었다. 왜 저런 여자를 맞이하는 지 알 수 없다는 주위 평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와 의 결혼을 추진하는 테밀시아의 속을 아는 이는 몇 없었지만 다들 축하는 아끼지 않았다. 저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날 테밀시아의 후예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말이 다. 그렇다고 마린나사가 타 귀족 여성에 비해 떨어지는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 다. 단지 테밀시아가 너무 뛰어났을 뿐. 만일 뮤비라가 여자였다면 벌써 아내로 맞았을 것이라 쑥덕이는 주위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테밀시아는 늦은 감이 있는 결 혼은 신속하게 진행시켰다. 지방에 있는 오르세만 가의 진짜 본가가 아닌 수도에 있는 형식적인 본가에서 치 루게 되는 결혼식은 의외로 검소하게 치뤄지고 있었다, 물론 어지간한 귀족으로서 는 꿈도 못 꿀 화려하고 웅장한 결혼식이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위치와 권세를 생각했을 때 검소하다 평해야 하리라. 긴장했을 아내의 옆에 있어야 할 신랑, 테밀시아는 자신의 방에서 검을 내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없더라도 마린나사가 긴장할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만일 긴장을 하고 있다 해도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탄 탄한 정치적 입지를 위해 받아 들이는 여자일 뿐이다. 그녀 또한 자신을 진심으 로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굳이 사랑에 빠진 척 연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테밀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검을 만지작 거리던 그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소파에 푹 묻힌 그의 몸은 어느 때보다도 지쳐 보였다, 그에게 흐르는 권태와 피로가 그를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이리라. 천천히 눈을 뜨고 두 손을 들어 눈앞으로 올렸다. 굳은살이 잔뜩 박힌 단단한 남자의 손. 일어나 벽에 걸린 거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의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 남자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뭐가 그리도 지루하지? 뭐가 불만인가? 새삼 결혼에 대한 불안, 실망, 권태가 들기라도 한 것인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결혼'이라는 이름을 빌은 '계약'일 뿐이다. 서류에 서명하듯, 부관에게 답하듯 '예'라는 답만 반복하다 오면 그만 아니던가? 하하."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지만 어째서 자신이 이리도 흔들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절대로 사랑 받지 못할 여자에 대한 동정 따위가 아닌 지독히 이기적인 감상에 젖어 있다는 것을. "뮤비라……." 자신의 몸을 옭아매는 짙은 바다의 이미지를 뿌리치듯 고개를 저은 테밀시아는 옆에 걸려 있는 백색 망토를 둘렀다. -똑똑. 망토의 매무새를 정돈하며 들어오라 답한 그의 눈에 루카다가 보였다. "자네를 만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군." 평범한 얼굴에 예리한 눈빛만이 특징이던, 아직은 치기 어린 면모가 가시지 않았던 청년 루카다. 2년이라는 세월은 그를 성숙하고 완성미 넘치는 남자로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입가에 가시지 않는 미소가 자신의 영원을 닮았다고 생각되는 남자. "결혼을 앞두니 테밀시아님께서도 센티멘탈 해지신 모양입니다. 하하. 어울리지 않아요, 테밀시아님께서 세월 타령을 하시는 것은."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조금은 빈정거리는 듯한 말을 뱉은 루카다는 신랑 복장이 잘 어울리는 테밀시아의 모습을 위아래로 보았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 지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그것은 눈앞의 상대에 의한 것이 아닌 무언가를 연상하여 회상한 것에 의한 것이라 초점이 약간 흐려져 있었다. '그가 여자였다면…….' 테밀시아가 의아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왜 그러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어깨를 으쓱이며 망토 위에 오르세만 가의 펜던트를 걸친 테밀시아는 문 듯 생각났는지 물었다. "그런데 어제부터 휜이 보이지 않는 군?" "'일'이 있어서요." "흐음. 무리 하지 말라고 전해주게." "그러지요. 소귀에 경 읽기겠지만요." 슬쩍 윙크를 하며 평소와는 조금 다른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모습. 그런 루카다를 보는 테밀시아의 얼굴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서렸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문 쪽으 로 걸어갔다. "뮤비라 경께서 도착하실 때가 되었군요." "……아." 그의 소식에는 늘 보일 듯 말 듯 따뜻한 반응을 보이던 테밀시아가 약간 쓰게 웃자 루카다는 들고 있던 베일을 내밀며 말했다. "상관없지 않습니까? 결혼을 하든 말든, 두 분은 의지의 반려이시니까요. 그 어떤 맹세로도 덮을 수 없는 반려니까." "……고맙네." 자신의 속마음을 예리한 루카다가 읽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다가 직접적으로 이런 언급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페이스가 무너져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테밀시아는 감사의 미소를 보이 고 베일을 받아들었다. 신부의 베일은 신랑이 직접 씌어 주어야 하는 것이 관례다. 처녀로써의 마지막 모 습과 아내로써의 처음 모습을 신랑만이 봐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행위였지만 테밀시아에게는 그리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 정도랄 까? 신부실로 가는 길은 의외로 한가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객들은 다 식장으로 향해 있을 시간인 것이다. 루카다도 먼저 식장으로 가고 테밀시아의 발걸음 소리만이 투박하게 울리는 복도에 타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는 계단에서 들려오는 소리. 주인의 성품을 대면하듯 힘있고 절도 있는 걸음 소리를 듣고 있는 테밀시아의 싸늘했던 얼굴에 부드러운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춰, 소리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연인을 기다리는 것 마냥 애틋해 보인다. 밑을 보며 천천히 걸어오던 이가 자신의 위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고개를 들었다. 2년이라는 세월에 따라 아름다움만 더해진 남자……. 바쁜 일정 때문인지 약간 마른 듯한 몸이 안타까워 보이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테밀시아님." "뮤비라."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부른 그들은 서루에게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대로 멈춘 채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있는 둘. 먼저 움직인 이는 테밀시아였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베일을 슬쩍 들어 보이며 웃었다. "오늘부터 나도 유부남 신세야."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답니다. 조금만 인내하면 익숙해지고, 곧 지루한 일상처 럼……그렇게 지나치게 될 겁니다." "그건 경험자로써의 조언인가?" "진리입니다." 동시에 장난기 섞인 웃음을 터뜨린 둘은 곧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누구 때문인 지는 모르겠지만 계단을 오르는 그들의 발걸음은 갓난아이가 기어가는 속도보다 도 더뎠다. 어쩌면 둘 모두의 탓인지도……. "오늘 페르노크님만 계셨다면 더 바랄게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벌써 이년인가……." 잠시 흐르는 어색한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페르노크가 어디선가 무사히 살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굳이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만큼 페르노크는 그들에게 신뢰받고 있었다. 침묵은 평소와 같이 테밀시아에 의해 깨졌다. "네가 결혼을 하기 위해 떠났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 테밀시아님께서는 막 목욕을 하고 나오셨었죠." "기억하는 거야?" "후후." 뮤비라는 얼굴을 약간 숙인 채 묘한 미소를 지었다. 슬픈 듯 보이기도 하고 그리운 듯 보이기도 하는 묘한 미소를……. 한가지 분명한 것은 후회라는 요소는 한 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수건이 흘러내려서 뮤비라의 이마에……." 갑자기 말이 끊기자 뮤비라는 의아한 눈으로 테밀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 의 손에 들린 베일을 내려 보고 있는 중이었다. '신부의 베일 같았지.' 피식……쓴 웃음이 흘러나온다. 아찌 해볼 수 없는 씁쓸함이 몰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남자였다. 바로 곁에 있는 뮤비라조차 눈치 채지 못랄 정도로 얕은 한숨을 뱉어낸 그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암울한 그늘을 걷어냈다.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보지 못한 뮤비라가 옆에 있는 데 어두운 얼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어둡게 있으면 내색은 안 해도 뮤비라가 계속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 신부 방입니다." 신랑과 신부,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인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굳게 닫힌 두꺼운 문안에 그의 신부가 순백의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노크를 하기 위해 테밀시아가 손을 들어올리는 것까지 본 뮤비라는 돌아서 식장으로 가려 했다. 테밀시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강하지만 애처로워 보이는 뮤비라의 뒷모습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뮤비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이한 부름. 자꾸만 고이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걷던 뮤비라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시선을 덮는 새하얀 잔상이 있었다. "아……?" 안개 낀 듯 뿌연 시야 속에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테밀시아가 있었다. "이건……."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베일이 뮤비라의 얼굴과 몸을 덮고 있었다. 멍하니 테밀시아를 보던 뮤비라는 흠칫 하며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테밀시아님?" "역시……." 테밀시아는 베일을 천천히 걷어 내며 웃었다. 그리고 뮤비라가 뭐라 더 묻기 전에 돌아서 신부의 방으로 걸어갔다. "테밀시아님……." 알 수 없는 행동. 알 수 없는 말. 알 수 없는 미소. 그럼에도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건 확실했다. 뮤비라는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베일의 감촉이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애절한 무엇인가를 불러내고 있었다. 뮤비라는 드물게 활짝 웃으며 계단 밑으로 내려갔 다. ========================================================================= 7 연참>.< 아해의 장-225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대신관이 성수를 뿌리며 물었다. "그대들은 존귀한 창세신의 가호아래 존귀한 인연을 맺음을 맹세하는가?" "예." 대신관이 곱게 갈은 에메랄드 가루를 뿌리며 물었다. "그대들은 자애로운 치유와 중재의 신의 가호 아래 자애의 인연을 맺음을 맹세하 는가?" "예." 대신관은 성수로 키운 백합을 선사하며 축복했다. "그대들에게 순백의 영광이 함께하길. 그대들에게 화목의 따스함이 함께하길." 테밀시아는 백합을 받아들고 베일을 쓰고 있는 여자에게 몸을 돌렸다. 여자 또한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백합이 여자의 머리 위에서 천천히 내려와 그녀의 손에서 멈췄다. 여자가 백합을 받아들자, 테밀시아 는 베일을 천천히 벗겼다. 길디 긴 베일의 앞쪽은 여자의 가슴 쪽까지 내려와 있었고 뒤로는 땅에 끌리고 있었다. "나의 아내가 되어주어 감사하오." 정중하지만 정이 섞여 있지는 않은 목소리. 하지만 허영심만 넘쳐나는 마린나사의 가슴에 미치기에는 약했다. 그녀의 작은 머리는 앞으로의 화려한 오르세만 가에서의 삶을 상상하는 데에도 벅찼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멋진 남자 의 얼굴이 다가오는데 정신을 팔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마린나사는 들뜬 가슴을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 생각 외로 거친 입술 감촉이 느껴졌다. 확실히 몬스터 사태에서 가장 바쁘게 뛰고 있는 휴첼 기사단의 단장 의, 그것도 정치가로써도 두각을 보이고 있는 남자의 입술이 부드러울리 만무했다. 그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는지 마린나사는 기대가 깨진 기분을 맛보았다. 스스로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벌써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 무도회의 여운을 함께 했던 귀족 기사는 좀더 부드럽고 감미롭게 키스 할 줄 아는 남자였다. 하지만 테밀시아라는 남자는 약간의 마주침 이후로는 아무 것도 없다. 곧 떨어지는 감촉에 마린나사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고 활짝 웃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에 대해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던 테밀시아의 눈썰미에는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테밀시아는 백합을 쥐고 있는 마린나사의 순을 내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저런 여자에게 순백의 백합이라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고개를 객석으로 옮긴 테밀시아의 눈이 일순 떨렸다. 그것은 마린나사의 반응을 눈치 채고 싸늘한 조소를 짓고 있는 뮤비라 때문이 아니었다. 결혼식 당일 날 갑자기 쳐들어 와 놀라게 만들었던 아버지의 자리가 어느새 비워져 있어서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사랑 없는 결혼을 축복할 생각은 없지만 이 '계약'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길 빌어는 주겠다고 말했었다. 부부의 퇴장이 이루어 져야 함에도 멍하니 서 있는 남편을 힐난하듯 마린나사가 옆에서 툭툭 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테밀시아는 백합을 쥐고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린나사에게 걷기를 권했다. 부부의 연을 맺은 남녀의 퇴장에 다들 일어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구석에 서 있던 루카다와 뮤비라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테밀시아의 시선이 아까 보았던 창문 쪽으로 다시 향했다. 잘못 본 것일까? '페르…….' "드디어 오늘이군요." "오늘인 겁니까?" "네, 지금쯤이면 시작했을 수도. 후후." 미소 짓는 루카다의 얼굴에 석연치 않은 기색이 가시지 않음을 감지한 뮤비라가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네? 아, 아닙니다." 어색하게 웃던 루카다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테밀시아님의 유일한 오점이 될 일이군요." "아마도 그렇게 될 듯 싶군요. 하지만 테밀시아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결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마 일부로라도 해결하려 들지 않을 걸요?" "네?" "정숙하지 못한 아내는 충분히 내칠 수 있는 죄목이지요. 하지만 그분께서는 애당초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를 정확히 꿰고 있지 않던가요? 제가 보고한 마린나사님의 정부만 해도 벌써 다섯을 넘어가고 있는 걸요." "그 정도입니까?" "하하. 제가 체크하기 시작한 것은 일년 전 쯤이니까, 더 넘을 지도요." 어두워지는 뮤비라의 얼굴을 보던 루카다는 일부로 밝게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테밀시아님께서는 저 여자에게서 자신의 후계자가 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는 것이죠." "네?" 이 남자는 어째서 남녀 관계에 대해서만큼은 이리도 둔할까? 하긴 이러니 저 테밀시아님의 한없이 깊은 애정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는 거겠지. 테밀시아님께서는 유독 이 남자에 관한 일만 둔하고, 아아, 복잡한 커플이라니까. 속으로 중얼거리던 루카다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또한 그리 다를 바 없는 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아마 테밀시아님께서는 아내의 몸이 정숙치 못하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은 척해서 다시는 접하지 않을 생각일 겁니다. 후계자가 태어나면 아무래도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겠죠. 어리석은 여자이긴 하지만 권력에 민감한 귀족 계집이니까." "하지만 후계자가 없다는 건……." 루카다는 씨익 웃으며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뮤비라의 어깨를 툭 쳤다. "괜찮습니다. 테밀시아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요. 하하!" 그보다는 당신의 후계자가 여지껏 없음을 걱정하라고, 이 사람아. 루카다는 다시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 뭔가 창문 가에서 움직였 다 느끼고 뚫어져라 창 밖을 쳐다보았다. 착각이었는지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 다. 하긴 휴첼의 기사단이 전부 들어와 있는데다가 각 기사단장과 절정 기사들이 초대되어 있는 이곳에 간 크게 나타날 자객이 있을 턱이 없지 않지 않은가? 지금 루카다에게는 있는지 없는 지도 모르는 자객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신경 은 멀리서 한창 작업 중일 휜에게 가 있었던 것이다. '어서 돌아오시라고요, 휜.' 연회가 한창일 오르세만 가의 복잡한 정문을 빠르게 빠져나오는 이가 있었다. 무가의 귀족보다도 큰 키와 날렵하게 단련된 체격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남자였다. 예식에 참가했던 것인지 하얀 정장을 입은 모습이 귀족 티가 잘잘 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경비병의 눈을 피하며 정원 은밀한 곳을 통해 빠져나가 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윤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던 남자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풀이 우성지고 그늘진 곳으로 몸을 숨겼다, 곧 나타날 담만 통과하면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약간 거칠어져 있었던 호흡이 이내 가라앉았다. 남자는 일단 눈에 띄는 하얀 정장을 벗어버렸다. 그러자 좀 전과는 달리 검은 색으로 도배한 옷이 드러났다. 그는 벗은 옷을 잘 싸서 등 뒤에 매고 있던 작은 배낭에 쑤셔 넣은 뒤, 품에서 검은 천을 꺼냈다. 작게 한숨을 쉬며 단발도 커트도 아닌, 모호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남자. 깊은 녹음을 간직한 눈동자와 좀 전에 벗었던 정장보다도 눈에 띄는 윤기 도는 은발의 소유자. 이 두가지만 보면 마법 수련 때문에 형의 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희대의 천재' 페르노크가 연상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비쩍 마른 몸에 처진 어깨를 가진, 연약하기만 한 마법사 페르노크와는 달리 그는 전사로써 단련된 몸과 힘, 감각을 지닌 강한 남자였다. 때문에 은발로 인해 고개를 돌려 혹시나 하더라도 나머지, 분위기며 체격을 보면 아니군, 하고 고개를 저어버릴 것이다. 차분한 눈매와 고요하고 맑은 고독의 눈동자. 남자의 몸을 휘감고 있는 무거우면서 진한 감각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그것은 곧 남자의 손에 들려진 검은 천으로 가려졌다. 풀러지지 않게 보조 마법까지 걸은 그는 주위 기색을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담을 뛰어넘어 저택에 벗어난 그를 맞이하는 또다른 남자가 있었다. "여어. 구경은 잘하고 왔냐?" 쾌활한 음성으로 물어오는 이에게 막 담에서 뛰어내린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끄떡이는 것으로 답했다. "신부는 예쁘더냐?" 이번에는 저으며 걸음을 옮기는 검은 두건의 남자. 그 뒤를 얼른 쫓으며 악의 없는 말을 계속 해댔다. "하긴 형을 뺏어간 여자인데 곱게 보일 리가 있겠어? 쿡쿡. 이제 네 차례구나, 페르노……." 순간 실언을 뱉을 뻔한 남자는 얼른 입을 막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 얼른 자신을 돌아보는 두건의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나지는 않은 듯 보이지만 분명 경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 실수였다, 무하." "같은 실수는 번복하지 않는게 좋을 거다, 클랜." "명심하지." 클랜은 쾌활하지만 가볍지 않는 남자였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하는 두 번 경고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던 클랜은 자신의 이마를 꾹 쥐어박았다. 그렇지 않아도 말이 없는 녀석인데 이로써 일주일 정도는 입을 열지 않으리라. 2 년전 처음 만났던 페르노크를 떠올려 보았다. 꽤 키가 큰데다 어깨도 제법 벌어졌지만 약해 보이는 체격과 창백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은 안색을 가진 소년. 성질 머리 있어 보이는 귀족 계집에게 겁 없이 손찌검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고 카르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 예의 바름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마법 검까지 선물 받지 않았던가? 그 과분한 호의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마음에 드는 존재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2년이 지났다. 그 동안 소년은 청년이 되고, 키는 훌쩍 커 자신과 같아진데다 체격 또한 어느 전사와 비교한다 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다져졌다. 감각은 카 등급의 암살자조차 감지 할 정도로 예민해졌으 며 검술은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단지 그가 자신을 학대하듯 몰아 세운 결과일 뿐이다. 클랜의 눈에는 그의 모든 변모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말수가 점점 사라지더니 이제는 하루에 한 마디 이상 뱉는 것을 보기 힘들 정도다. 그나마 과거를 아는 자신에게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여는 듯 보이지만 뚜렷한 경계의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식으로 파트너가 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잠도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는다. 몸은 버틸 수 있을 지 몰라도 정신력이 문제다. 걱정이 되어 몰래 수면제를 먹여 재웠더니 악몽과 가위에 시달리다가 더욱 지쳐 깨어나는 게 아닌가? 몰래 약을 먹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조용히 말하던 모습이 너무나 슬퍼 보였다.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들었을 때는 되려 욕을 먹는 것이 낫겠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고함을 질렀는지 모른다. 테밀시아의 결혼식도 가고 싶어만 하고 가려하지 않는 그를 억지로 끌고 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가족이 좋은지 평소보다 밝아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놓였나 보다. 생전 안 하던 실언을 다하고……. 클랜은 한숨을 푹 내리쉬고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제법 멀리 떨어진 페르노……무하를 발견하고 얼른 뛰어갔다. "같이 가자고!" ======================================================================== 8 연참>.< 아해의 장-226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락아타에서 욤으로 건너가기 직전. 2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던 황태자가 갑자기 행진을 멈추고 휴식을 명했다. 아마도 공공연하게 알려진 그의 연인이 피곤하다고 했으리라. 늘 멍하니 있던 황태자가 활기를 찾은 것까지는 좋지만 여자에게 휘둘려서야 제 아비의 전처를 밟기밖에 더하겠는가? 혀를 차면서도 명에 따를 수밖에 없는 신세가 고달팠다. "세가. 많이 피곤해?" "아니. 미안, 나 때문에……. 그냥 가도 괜찮은데." "아니야. 2년 동안이나 못 간 고국인데 며칠 늦는게 대수겠어?" 웃으며 부드럽게 세가를 안는 훼이바트의 모습은 2년 전과는 달리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그동안 삶이 어떤 것인지 새로이 배웠다. 죽어가던 나날들로부터 벗어나 얼마나 행복한 세월을 보냈던가.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비로써 세가를 맞는 것뿐이다. 황제가 될 이로써 백성을 긍휼히 보살피겠다는 둥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0점이었지만 사랑에 빠진 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되지 않겠는가? 세가는 언제나 자신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훼이바트에게 어느 때보다도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자니 절로 행복감에 취하게 된다. 훼이바트는 세가를 끌어안고 입술을 맞추었다.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키스. 세가는 멀미가 이는지 자신을 꼭 끌어 안고 있는 훼이바트를 천천히 재치고 밖으로 나왔다. "잠깐 산책 좀 할게. 훼이는 위험하니까 여기 있어. 곧 돌아 올게." 2년동안 계속 되 왔던 몬스터 사태 때문에 이미 작고 이름 없는 마을들이 사라져 국경이 살벌한 경계 체제였다. 이래서야 2년이 지났다고는 하나 다시 잡히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훼이바트는 2년간의 기다림이 허무하게 끝나길 바라지 않았다. "근위 기사." "예, 황태자 전하." "세가를 보호하라." "하, 하지만 저희의 임무는……." "명령이다. 여기는 병사들이 있어 괜찮아. 하지만 세가 근처에는 아무도 없지 않느냐. 어서 가라." "저희는 황태자 전하를 보호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명령이라 했다. 언제 자네가 나에게 불복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올랐지?" 완강하고도 싸늘한 명령. 근위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황태자의 정부의 신변이나 지킬 수밖에 없었다. 궁으로 돌아가면 당장 배속을 바꿔 달라 하리라 다짐하면서. 훼이바트는 하인이 대령한 시원한 주스를 마시며 작게 숨을 몰아 쉬었다. 이제부터 그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출신 모르는 계집을 비에 앉힐 리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명에 불복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신분 조작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황제와의 사돈 관계는 여러모로 유리하다. 대부로 나서 줄 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카르민 계층이 적당할 듯 싶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고고한 척 하지만 이미 권력이라는 금단의 열매에 중독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오르세만 가의 테밀시아 경이 생각나는 군." 유일하게 안면이 튼 상대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되려 이용하기에 용이 할 수 있다. 야심이 그득찬 자 일수록 이번 기회가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잘 알테니 말이다. 그가 좋겠다고 판단하며 다시 주스잔에 입을 가 져다 대는 훼이바트의 귀에 낮은 미성이 들려 왔다. "테밀시아가 뭘?" 장난기 섞인 싸늘한 목소리.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보 통 마차에 비해 월등히 넓다고는 하나 방 하나에 못 미치는 좁은 마차 안에서 목 소리의 주인공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건 예사 일이 아니다. "근위……!" 급히 근위 기사를 부르려던 훼이바트는 아차 한 얼굴로 일어났다. 근위 기사는 그의 명으로 자신의 곁을 떠나 있는 것이다. 일개 병사가 황태자의 마차에 감히 들어 올 수는 없는 일. 서둘러 나가야 했다. 약한 병사라도 근위 기사가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 정도는 벌어 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훼이바트는 단 한걸음도 제대로 딛지 못했다. 좀전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라 추정되는 이가 엄청난 힘으로 그를 뒤로 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몸이 휘청인다 싶었을 때는 이미 입까지 틀어 막혀 있었다.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 훼이바트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예리한 흉기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훼이바트는 절규했다. 2년 전이라면 기꺼이 목을 내놓아 주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마무리 짓는 다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며 한줌의 반항조차 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살아간다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살고 싶다. 두려움에 떨리고 있는 그의 눈에 복면을 쓴 작은 체구의 사람이 들어왔다. 복면 틈으로 보이는 청자색 눈동자가 싸늘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잘가라고, 황태자 전하. 뒷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으음!" 경악성마저도 희미한 신음성에 머물뿐. 자객은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수다쟁이가 아니었다. 살수가 말이 많으면 일이 실패할 확률은 대폭 증가한다. 그는 단숨에 훼이바트의 목을 베었다. 훼이바트의 눈이 일순 떨렸다 이내 멈췄다. 아련히 흐려지는 눈동자.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라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승에 서 마중 나온 어머니의 모습이라도 보고 있는 것일까? 냉정한 살수는 이미 죽은 몸뚱이에는 시선 한줌 주지 않고 탈출 준비를 했다. 멍청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순진한 황태자가 근위 기사들을 내쳐주어서 일이 훨씬 쉽게 돌아갔다. 근위 기사가 주위에 없으니 혈향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일개 병사가 굳게 밀봉된 마차 안에서 흐르는 혈향을 눈치 챌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자객은 소파를 밀어내고 특별히 공급받은 마법 아이템으로 바닥에 구멍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이런 방법 역시 근위 기사가 없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근위 기사중 한사람이라도 주변에 있었다면 그가 아무리 인기척을 숨기려 해도 시원한 마차의 공기가 밖으로 세워 나와 금방 들통났을 것이다. 사냥감이 도와주어 일이 수월하게 됐다. 빠져 나오는데 성공한 자객은 얼른 행렬에서 벗어났다. 근위 기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숲을 통해 국경을 넘을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았던 그는 번화로운 거리에 슬며시 끼어 들어 유유자적하게 걸었다. 원래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야 하는 법. 곧 시끄러워 질 테니 당분간 여기 있다가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어설프게 관문을 넘어 돌아가려면 수소문에 당장 걸릴 것이고 아까처럼 숲이나 인간이 없는 쪽으로 돌아가려면 추적에 걸려 버릴 것이다. 이럴 때는 속 편하게 저들의 추적망이 넓어지기를 기다리는 편이 최고다. 어차피 급할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복면과 은신복을 눈에 띄는 아무 식당에 들어가 직원 모르게 난로 불에 태워 버린 그는 평범한 여행복 차림을 하고 여관에 들어갔다. 경비도 넉넉하게 받았겠다, 휴가 받은 셈치고 푹 쉴 생각이었다. 씨익 웃는 그의 청자색 눈동자가 매혹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 버린 한 소년의 삶. 그것이 두 제국의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 신성 제국 욤이 격분했다. 그들의 황태자가 살해를 당한 것이다. 그것도 타 제국의 영토 안에서! 욤 제국은 황태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락아타에 과중한 책임을 물었고, 락아타 제국은 황태자가 근위 기사를 물렸기 때문이라 반박했다. 논쟁은 점점 과열되었고 결국은 황태자가 살해를 당함과 동시에 몸을 감춘 그의 정부가 락아타 제국 내에서 만난 여자였음을 거론하면서 락아타에서 살해 한 것이라는 설이 정설화 되며 사태는 전쟁으로 불거지고 있었다. 갑작스런 전쟁설. 몬스터 사태 때문에 최악에 다다른 백성의 사정은 아랑곳 않은 황족들의 자존심 싸움에 민심은 점점 흉악해져 갔다. 귀족들이 이 전쟁으로 인해 공을 쌓고 좀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분노했다. 황태자의 죽음이 애국적으로 봤을 때 자존심 상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그들에게 시급한 것은 당장 내일 먹을 식량이지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황태자의 복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전쟁에서 이긴다 한들 그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잠시간의 흥분뿐. 이기든 지든 그들에게는 과분한 세금과 그 밖의 의무, 그리고 무분별한 파병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반대한다 한들 귀족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다시 한번 욤 제국의 백성들을 분노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명실공히 최고의 기사단이라 꼽히는 휴첼 기사단이 전쟁에서 제외 당한 것이다. 그것이 휴첼 기사단장, 테밀시아 경이 공을 쌓는 것을 경계한 황제와 귀족의 한심한 자태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은 무식하고 배운 것 없는 촌부라도 알 수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하츠민을 시작으로 몬스터 사태에 피해를 입고 있는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뛰었던 휴첼 기사단은 그 어느 기사단보다 인기가 높았으며,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그것은 군대의 사기와 효율성, 위력을 동시에 높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전쟁에서 제외가 되었다니……. 허울 좋은 국방 수비대를 맡아, 전쟁이 일어나는 서쪽과 떨어진 남쪽으로 내쳐진 휴첼 기사단은 의외로 유연하게 대처했다. 테밀시아가 기사 단장이 아닌 귀족의 최고봉 카르민의 일원으로써 영향을 발휘해 항명할 수 있었음에도 순순히 명에 따른 것이다. 어쩌면 이미 자신에게 떨어질 명령을 예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전쟁터가 아닌, 남쪽으로 행군하는 그들에게 환호성과 꽃을 바친 백성들은 동시 에 황제에 대한 울분을 토해 냈다. 그들이 남쪽으로 감으로써 전쟁이 더욱 길어질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 9 연참>.< 아해의 장-227(수정본)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역시 수도라 그런지 시끌벅적 한데? 시장도 꼬박꼬박 서고 말이지." 선전포고가 오고가고, 병사를 차출하는 일이 한창이기 하지만 문화의 중심지 수도는 아직까지는 여유가 흘렀고 번화했다. 이들에게는 이 전쟁이 수도까지 번지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또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인데, 실감도 나지 않는 전쟁을 걱정 해봐야 소용없기도 했다. 음식과 음료를 파는 작은 수레에 서 있는 두 명의 남자는 막 수도로 올라왔는지 그런 분위기 감탄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덩치가 있고 성격 좋아 보이는 남자 혼자 흥겨워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의 동행인으로 보이는, 검은 두건을 둘러쓴 남자는 관심 없는 듯 눈앞의 음식을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시원한 음료와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구이. 이카미렌 산맥을 지나오면서 제대로 된 음식 을 먹지 못했던 그들에게는 충분한 만찬이었던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음식점에 가서 먹어도 됐지만 만들어 오는데 걸리는 시간조차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굶주려 있었다. 대충 배를 채웠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먹을 줄 시간이다. 물론 당장 산 구이는 다 먹고 난 뒤의 일정이지만. 수도를 처음 온 촌뜨기 마냥 감탄을 내뱉던 남자는 약간 식은 구이를 한입에 쑤셔 넣더니 우걱우걱 씹다가 음료수와 함께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포만감 어린 탄성을 내지르더니 소매로 대충 입가를 훔치면서 말했다. "북서쪽 120 m. 상, 황. 하, 검. 금화 40 닢." 관심 없는 얼굴로 얼마 안 남은 구이를 한 입 베어 무는 무하를 힐끔 본 클랜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6대 4다." 그리고는 답을 듣지 않고 먼저 뛰기 시작했다. 목표물 사이에 방해물인 인간이 많긴 했지만 카 등급인 그에게 그 정도 헤쳐 나가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무하는 나머지 구이를 입에 밀어 넣고 음료수까지 다 마신 뒤에 주머니에서 동전 세 개를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제서야 몸을 돌려 한참 뛰어가고 있는 클랜을 확인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젖던 그는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같은 카 등 급인 그에게도 사람을 헤치고 가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었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뛰면, 늦게 출발한 만큼 지게 된다. 때문에 선택한 방법은……. "우와! 엄마, 저 사람 봐!" ……즐비해 있는 가게의 천막 위를 달리는 것이었다. 천막이 금속으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밟으면 당연히 밑으로 꺼지는 것이 도리이건만 그의 몸은 가볍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 듯이 이동하고 있었다. 클랜을 추월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가 말한 금화 40닢 짜리가 자신을 추격자의 존재를 깨닫고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무하는 속도를 더욱 내어 도망자마저도 추월했다. 땅에 착지한 그는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무릎을 세웠다. -퍽! 무게감 실린 타격음이 시원하게 울리면서, 미처 피하지 못한 도망자는 자신이 달려온 속도만큼의 고통을 받으며 허리를 꺾었다. 무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으며, 구부정하게 있는 그의 뒷목을 팔꿈치로 가격했다. 순간 그의 눈이 풀리며 푹 쓰러져 버렸고 일은 간단하게 종료됐다. 때아닌 추격 극에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구경했고, 그 바람에 더욱 속도가 떨어져 버린 클랜은 상황이 종료됨 과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쳇! 졌잖아."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품을 뒤지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녀석의 앞에 서, 품에서 꺼낸 종이 뭉치를 이리저리 넘기다가 웃으며 한 페이지를 찢어 냈다. "찾았다. 현상수배범 제 1264094호, 메사트 아 제피모. 절도, 살인, 강간범. 금화 40닢." 씨익 웃으며 종이를 무하에게 건네 재차 확인받은 그는 가방에서 밧줄을 꺼내 녀석의 몸을 묶은 뒤, 어깨에 맸다. 본래라면 죽여서 머리만 가져가도 됐지만 무하가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서 행동해 준 것이다. 용병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지만 그들은 지나가는 돈(?)을 모르는 척 무시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법 짭짤한 벌이가 된다, 현상수배범 체포는. 둘이 파트너가 된 이후로 잡은 현상수배범이 몇이나 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적지 않다는 건만은 확실하다. 대체로 범인들을 기억하는 것은 클랜이었고, 잡는 것은 무하였다. 무하가 타인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데에 취미가 없다는 것과, 그들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활보한 다는 것이 그 원인이다. 클랜보다는 무하의 몸이 날랬던 것이다. 먼저 잡는 쪽이 벌이의 6할을 차지한다. 하지만 돈에 전혀 궁색하지 않는 둘이기에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 쪽이 현상수배 길드에 수배범을 모셔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길드까지, 축 늘어져 무거운 녀석을 매고 간다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헤고, 또 이 짐 덩이는 내 차지군. 쳇! 번화가만 아니었어도." 한탄하는 어조로 투덜대기는 하지만 얼굴에 가득한 미소가 장난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무하는 짐을 매지 않은 클랜의 다른 쪽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럼 잘 데려다 주고 선물 받아 와. 난 '음유시인의 모임'에 가 있을 테니까." "방은 잡지 마. 바로 의뢰인한테 가 봐야 하니까. 식사는 시켜 놓는 게 좋겠어." 고개를 끄떡이며 무하가 먼저 자리를 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용히 살고픈 무하로써는 자신들을 구경하며 쑥덕이고 있는 무리들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클랜은 짐을 한번 더 추스른 뒤에 자리를 떴다. 그래도 길드가 가까워서 다행이다. 한층 더 흉흉해진 민심은 귀족들마저 몸을 사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집안에서 자숙했으며 사치품을 들여오는 것을 자제했다. 정신을 못 차려 보석과 비단을 들여오는 귀족의 마차는 여지없이 털렸으며, 의적이라는 이름 하에 도둑들은 백성들의 보호를 받았다. 때문에 귀족들은 더더욱 몸을 감추고 재산을 깊숙이 숨겼다. 하지만 아무리 자숙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경우에 그들은 꿍쳐 놨던 재물을 풀어 비싼 용병을 고용했다. 그 중에서도 귀족을 주로 상대하는 대 용병단, 곤크는 인기 절정이었다. 때문에 근래 들어 곤크는 카 등급은 물론이거니와 차 등급마저 숨돌릴 새 없이 바빴다. 특히나 2 년 전부터 발발(勃發)한 몬스터 사태로 인해 수배는 뛰어 오르고 있던 카 등급의 몸값은 전시 체제가 돌입되면서 황족나 카르민, 혹은 거상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만큼 비싸졌다. 그도 그럴 것이 원하는 이는 많은데 카 등급은 겨우 열 명 안팎밖에 되지 않았으니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의해 값이 더욱 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돈보다는 목숨이 중한지라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의뢰가 몰려들었다. 이래저래 돈은 많이 드나 그만한 값어치를 톡톡 히 하기 때문이다. 곤크에서는 1년 전쯤에 매우 독특하고도 찾아보기 힘든 파트너가 만들어졌다. 무하 카 곤크와 크래너 카 곤크. ……믿겨지지 않겠지만, 카 등급끼리 파트너를 짠것이다. 본래 실력의 평균을 맞춰 짜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것은 매우 파격적 인 일이었다. 파트너란 말 그대로 의뢰 수행을 함께 하며, 손발을 맞추는 것을 뜻했다. 헌데 카 등급이 파트너를 짰으니, 겨우 열 한 명밖에 없는 카 등급이 동시에 의뢰를 수행한다고 해도 열 개밖에 받아 드릴 수 없는 비효율적인 현상이 발생 되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그 파트너의 의뢰 수행 능력은 확실했지만 그것만으로 이 비효율성이 완전히 커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재 행방이 묘연한 마스터를 대신에 단을 이끌고 있는 부관도 나름대로의 판단 하에 행한 일이다. 먼저 그 둘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말수가 극히 적으며 차가워, 의뢰인과 적지 않은 마찰을 빚는 무하와 함께 할 수 있을 정도로 털털하고 능청스러운 이는 클랜 정도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는 것은 공식적인 설명이고, 툭 터놓고 말하자면. 실력은 뛰어나나 뺀질이 인 클랜의 능력과 노동력을 최대한 많이 짜내기 위해서다. 솔직히 말수가 적은 것은 무하 뿐만이 아니었고 그것은 되려 과묵한 인상과 더불어 신뢰성을 안겨 주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용병에게 중요한 것은 실력과 실적이지, 인품과 성격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무하는 그 어떤 등급의 용병들보다도 성실하며 말없이 주어질 일에 충실한 일 벌레다. 어느 정도가 하면, 입단 직후부터 하루도 쉴새 없이 일한 그에게 일부로 내린 휴가마저 거절하고 의뢰를 받을 정도다. 이래저래 호의를 받는 타입인 것이다. 반면에 클랜은 책임감은 강해서 일단 일을 맡으면 완벽하게 끝내긴 하지만, 금전적으로 궁하지 않아서인지 어지간해서는 일을 받지 않으려 하는 뺀질이 근성이 다분한 남자다. 타고난 성품이 좋지 않았다 면 좋지 못한 인상을 받기에 충분한 타입인 것이다. 다른 녀석과 파트너가 된다면, 상대가 누구이건 자신과 동류로 만들어 놓고 같이 노닥거릴 클랜이었지만 무하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타인의 악영향에 쉽게 감화될 위인이 아닌데다가, 지은 죄가 있었던 클랜이 뭐든지 알아서 한 수 양보하곤 했던 것이다. 그 상하 관계를 예리하게 집어내, 클랜의 실력과 노동력을 실컷 우려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낸 부관의 능력은 매우 뛰어난 것이다. 클랜과 무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부관의 그 능력에 감탄을 퍼부을 것이다. ……라는 것은 곤크 내의 속사정이고 타인들, 특히나 의뢰인들에게는 강한 신뢰와 선전 효과를 빚고 있었다. 이런걸 두고 일거양득이라 하는 것이리라. 어찌됐든, 곤크는 물론이거니와 현 용병 체계에는 없는 이 카 등급 커플이 수도에 나타난 이유는 물론 의뢰 수행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민심이 흉흉했기에 수도에 있는 귀족들은 본가가 있는 지방으로 갈 엄두를 못 내고 발이 묶여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굳이 본가로 갈 필요는 없지만 각자마다 사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피치 못하게 돌아가야 할 일이 생기는 귀족이 있었다. 그들은 용병을 고용했고, 그런 의뢰는 하급에 속하는 흔한 의뢰였기 때문에 하 등급도 잘 맡지 않는다. 그런 것을 유일한 카 등급 페어가 맡을 리 없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한가지 요소를 집어넣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신분이다. 뭐, 그런 자잘한 일이야 이쪽에서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무하는 음유시인의 모임이라는 간판이 붙은 정갈한 여관에 들어갔다. 그곳은 식당을 겸하고 있으며 용병, 모험가 등의 부류가 주로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상 돌아가는 정보가 오가는 곳이고 요리도 술도 괜찮아, 무하와 클랜은 수도에 올 때면 이곳을 애용한다. "여! 무하 아닌가?" 푸짐한 뱃살이 특징인 인상 좋은 마스터, 파만이 반갑게 맞았다. 용병들에게는 꿈의 등급이며, 귀족들도 함부로 굴지 못하며 근위 기사급의 실력과 명예를 가지고 있는 카 등급 용병. 전 대륙을 뒤져도 백이 될까 말까 한 실력자들이었기 에 무하는 본의 아니게 용병 계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게다가 무하는 유일한 카 등급 페어의 일환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자신의 가게의 단골이라는 것은 충분한 자랑거리였다. 무하는 언제나와 같이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클랜이 안 보이는구먼?" "곧 올 겁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냉랭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차분한 어조와 무뚝뚝한 듯 부드러운 음성. 정말 느낌 좋은 남자다. 파만은 자신의 배를 호기 어린 태도로 쳐 보이며 말했다. "이 몸이 직접 요리 해주지! 기대하고 있으라고!" 무하는 의례적으로 목례하고는 구석진 자리로 가 앉았다. 마스터가 인상 좋은 것도 좋고 요리 솜씨가 훌륭한 것도 좋지만, 이 곳에 오면 시선 집중이 되 버려 불편했다. 물론 그런 거야 신경 안 쓰면 그만이지만 직업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기척을 감지, 경계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터라 그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곳이 카 등급 페어의 단골집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온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무하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어 보려고 이리 수작, 저리 수작을 거는 것이다. 이 정도는 귀여운 쪽에 속한다. 게 중에는 카 등급의 실력을 알고 싶다며 덤벼드는 이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클랜이 처리하지만 말이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무하가 혼자 있을 때는 어떤 말도, 수작도 걸지 못하던 이들이 클랜과 동행일 때면 갑자기 드세게 접근해 왔던 것이다. 아마 클랜이 함께 할 때는 무하의 그 이질적이며 서늘한 분위기가 중화되는 모양이다. '차라리 혼자 있을 때가 편하지.' 수작 거는 사람도 시비 거는 사람도 없기에 그리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클랜을 귀찮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과거를 알면서도 묵인해 주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그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로 가득이었다. 눈이 마주치기 가 무섭게 얼른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하다. 무하는 단검을 꺼내 손보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의뢰인이 최대한 빨리 와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그 동안 검을 돌볼 새가 없었던 것이다. "어이, 파만! 뱃살은 여전하신가?" 익살스런 농담. 클랜이다. 고개를 드니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클랜과 파만이 보였다. 파만의 손에 들려 있는 음식은 클랜에게로 인수되었고, 곧장 무하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옮겨졌다. "배고프다, 그치?" 무하는 대답 대신 포크를 들었다. "바로 의뢰인에게 가 봐야 겠지? 집이 어딘지는 알아?" "……." "아, 하긴 무하는 방향치니까." "처음 가는 곳을 모르는 것뿐. 방향감각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래그래. 그 처음 가는 곳이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많아서 탈이지." 무하는 더 이상 답을 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 치웠다. 시간이 촉박한 듯 보이는 의뢰인이다. 한숨 자고 나면 바로 출발일 터, 당분간은 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힘들 것이다. 있을 때 충분히 먹어 주는 것이 좋다. 그러한 진리를 마찬가지 로 잘 알고 있던 클랜도 눈앞의 음식에 집중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주위에서 유명 인사인 둘을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보수로 움직이는 카 등급은 용병들에게 있어서 우상과 같으며 또 한편으로는 질시의 대상이니 트러블은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다. "호오! 네 녀석들이 바로……." 클랜의 두 배는 되어 보일 법한 근육질에 예리한 살기가 넘실 흐르는 거한은 시시껄렁한 시비조차 끝맺지 못하고 뒤로 쓰러져야 했다. 그런 그를 향해 다른 이들은 고개를 설레 저었다. 식사를 할 때 저들을 건드리는 것은 금기다. 그 어떤 시비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저 냉정한 검사, 무하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식사 때면 신경이 예민해 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지껏 밝혀 진 바 없었다. 하루는 클랜이 무하에게 그 까닭을 물었지만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마디 남겼을 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지 않는가?" ……여하튼 때문에 모두들 여간해서는 식사 때를 피하는 것이다. 물론 간간이 무하와 싸워 보고자 일부러 그때를 노려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간이' 이다. 누구든 말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기절하는 것 은 원치 않을 테니 말이다. 아해의 장-228(수정본)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까마득한 바위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돌맹이의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상상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 높이를 떠올리며 소름 돋아 할 것이다. 하지만 상상이 아닌 실제 높고 가파른 산 위에서 밑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될까? 간발의 차로 떨어 졌을 때를 상상하며 소름 돋아 할까? 이래저래 근심을 떨치지 못할 거라면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그 몇 안돼는 사람 중에 포함되어 있는 무하는 평소와 같은 냉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되려 고개를 올리며 하늘을 보았다. 저녁노을이 차분히 물들고 있었다. 의뢰인이 급히 서둘었기 때문에 험한 지형을 마다 않고 강행하고 있는 중이라, 아직도 야영하지 않고 행진하고 있었다. 흘려듣던 말로는 의뢰인의 아버지가 위급하다던가? 뭐, 이쪽에서는 보수만 받고 의뢰만 해결하면 끝이지만. '아버지라…….' 한줌의 기억도 나지 않는, 이제는 그리움의 음영만 남아 버린 부모님. 그에게 아버지란 농땡 사부였다. 말없이 사라진 스승님. 아니 아버지. 그때……그가 도장에 있었다면 조금은 일이 달라졌을까? 그에게 매달려 실컷 울고 분해하다가……. 그러다 마음이 풀리고 안정될 수 있었을까? 이런 곳에 떨어져 로레라자를 만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때도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지……." 나지막한 중얼거림. 클랜이 힐끔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못할 사연들이 많은 용병들이다. 먼저 입을 열기 전에는 묻지 않아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인 것이다. 또 그것이 아니라도 클랜은 남의 상처를 함부로 헤집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무하를 따라 하늘을 올려 보다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만 야영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호위에 참여하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연 클랜의 말이었다. 리더격인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행은 바삐 준비를 시작했다. 최단거리의 강행군을 고집한 의뢰인 덕에 현재 험준한 바위산을 넘고 있는 중이기에 조금이라도 넓은 자리 확보가 시급했던 것이다. 카 등급인 무하와 클랜은 야영 준비를 하는 대신 의뢰인의 마차 옆에서 보초를 섰다. 아무리 마법으로 경량화가 되어 있으며 충격 완화에 내구성을 높인 마차라 도 거친 암산을 넘는데는 그리 탁월한 수단은 아니라 봐야 했다. 그럼에도 군소 리 않고 빨리만 가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면 흔하지는 않지만 레일리아처럼 여장부 기질이 있던지. 무하는 전자라 생각했다. 사막을 횡단할 때, 즉 낙타라는 교통 수단을 사용하기 용이 할 때야 동생 때문이라도 마차를 탔지만 레일리아는 늪 따위의 짐승을 사용 하기 힘든 환경에서는 굳건히 걷는 방법을 택하는 강단이 있는 여자였다. 지친 동 생을 독려 해 가면서 힘든 소리 한번 안하고 말이다. 만일 그녀라면 바삐 가 달라 고 하면서도 시간을 지체하게 만드는 마차를 타기보다는 말을 타거나 제 발로 걸 었을 것이다. 그 편에서는 레일리아가 한결 강한 여자라 생각 됐다. 바위가 많고 지세가 험하며 경사가 급하여 행군하는데 힘이 들기는 하나 유해한 짐승이나 곤충, 혹은 몬스터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요리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각하며 새삼 허기짐을 느꼈다. 귀족이던 용병이던 사람이기는 마찬가지. 마차 문이 슬며시 열리며 안쪽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 쪽을 보고 있는 무하를 발견하고 얼굴을 붉혔다. 얌전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대부분의 기세고 철딱서니 없는 귀족 여자도 아니면서 레일리아처럼 타고난 강단이 있는 것도 아닌, 또 다른 타입의 여자. 나쁜 인상도 좋은 인상도 받지 못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심이 없었던 무하는 이내 고개를 돌렸고 주춤하던 그녀는 그제서야 다시 움직였다. 마차의 곁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주위를 경계하느라 미처 에스코트하지 못할 때, 슬쩍 손을 내밀어 부축해 주는 이가 있었다. 클랜이었다. 그녀는 거친 용병이 보이는 뜻밖의 정중한 모습에 당황하다가 이내 그 손을 잡고 마차 안에서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수줍은 듯 간신히 들려 오는 작은 목소리에 클랜은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만 약간 숙여 보였다. 기사였던 아버지는 레이디를 대하는 예의에 대해 민감했기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을 뿐이다. 이제 20살 정도 되 보이는 여자의 이름은 브리아.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동그랗고 맑은 눈동자. 포동한 몸에 너무 꽉 끼지 않는 편안해 보이는 옷차림이 어울리는 귀여운 여자였다. 주위를 구경하는 척하면서 자꾸만 클랜을 힐끔거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그녀를 보며 무하는 내심 웃어 버렸다. 저 여자가 한창 바쁜 카 등급을 둘이나 대동시킬 수 있는 권력자 가문의 딸이라면, 안타깝지만 그녀의 풋사랑(확실히는 모르지만)은 안될 공산이 매우 컸다. 하지만……. 무하는 한참 동안 클랜을 보았다. 밝게 웃는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고독. 진한 슬픔. ……놀라울 정도로 자신과 닮은 그 어두운 빛. 고개를 드니 달이 보인다. '이곳에도 달이 있다. 별도 있고 태양도 있어. 그렇다면 이곳에도 우주가 있으며 행성도, 위 행성도 존재한다는 뜻일까? 이곳도 지구처럼 둥굴고 땅과 땅이 이어져 있는 걸까? 그렇다면 이곳은 다른 차원이 아닌 다른 행성이 아닐까? 그럼 화성 정도? 아니면…….' 혼탁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진다. 이런 망상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은 이미 2년 전에 머리가 터질 만큼 해 봤다. 그러다 답은 없다. 지독한 공허와 허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원시인들에게 종교가 싹튼 것은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가 싹텄기 때문이라 한다. 어째서 살아 존재한 지 수많은 시일이 지난 뒤에야 사후 세계를 떠올렸을까? 무하는 그들이 '삶'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식욕, 수면욕, 성욕만을 채우는데 급급한 것만이 아닌 한층 높은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또한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또 어떠한 법칙으로 흘러가는 곳인지 따위의 고차원적인 생각이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것에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그것이 자신이 미치지 않고 살아 나갈 최선의 방법일 것이라고. 다시 클랜을 돌아보았다. 그는 식사를 받아 독을 여부를 검사한 뒤, 귀족 여자에게 건네고 있었다. 볼을 붉히며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드는 여자도 보였다. 하지만 이미 닫힌 클랜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이곳이 어떤 곳이든, 이곳에도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본능이 아닌 감정이.' 다시 하늘을 올려 보았다. 달빛이 밝다. 그날처럼……미치도록 밝다. "마차를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장 등반에는 어렵지만 어떻게든 가지고 가야 그 뒤가 편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좁은 길에서 마차를 끼고 간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날이 밝고 다시 출발하게 됐을 때, 클랜은 마차를 버리기를 요구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로 옆으로는 가파른 절벽까지 있어, 아차 했다가는 마차와 함께 사람까지 휩쓸려 추락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에 반박하는 기사의 주장에도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었다. 당장의 문제야 해결할 수 있지만 바위산을 지난 뒤 바로 가로 질러가야 할 숲에 서 곤란해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유력한 가주 계승권자는 아니지만 혹시나 있을 암살자의 위협과 가장 현실적인 산적, 몬스터의 위협이 따를 경우, 마차가 없을 때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원래 보통 귀족들이라면 마차가 갈 수 없는 길은 애당초 피해서 간다. 만약 귀족 아가씨가 가장 빠른 길을 고집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트러블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 이다. 뭐, 이제와 책임을 따져 봤자 어찌 할 수 없는 일이고 쓸데없는 시간 낭비 일 뿐이다. 불필요한 시간 낭비가 계속 되자 무하는 마차 안의 아가씨에게 말했다. "당신이 결정하는 게 좋을 듯 싶군요. 시간이 촉박하다 한 것은 당신의 요구. 돌아간다 해도 저희들은 상관없습니다." 잠시 흐르는 침묵. 곧 이어 마차 문이 열리고 브리아가 나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는 유모의 손에는 작지도 크지도 않는 짐 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가장 필요한 생필품과 귀중품만 챙겨 온 듯 싶었다. 다른 마차에서 따라 오고 있던 하인들이 곧 마차 안으로 들어가 다른 짐들을 꺼내 왔다. "가죠." 짧지만 단호한 한 마디. 클랜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이 곳을 벗어나, 숲을 조금 가면 작은 영지가 있습니다. 다행이 꽤 견고한 성벽도 있는 곳이라 합니다. 이곳을 빠져나가면 그곳에 들려 마차를 다시 장만하기로 하죠." 그리고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지금은 길이 좁아 안되지만 곧 이 길의 1.5배정도 되는 길이 지속될 겁니다. 그때까지만 걸으십시오. 그 정도 길이면 말이 겁먹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겁니다." 브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떡였다. 투박하지만 자상한 말이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베여 나왔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처음 짓는 미소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이 더 잘 어울렸다. 클랜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의외로 씩씩하게 구경까지 해가며 가는 유모와는 달리 브리아는 입술을 굳게 깨물며 낭떠러지와 다를 바 없는 밑은 내려보지 않으려 처절하게 애를 썼다. 그 모습이 애처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사는 마차에 매어 놓은 말을 챙겼다. 마차는 불가피하게 버린다 쳐도, 산행길을 오래 못 버틸 것이 뻔한 레이디에게 말 정도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브리아의 등반으로 행군의 속도는 매우 더디게 이루어졌다. 앓는 소리 안 하려 애쓰고는 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애처로와, 아무도 힘든 일정을 불평하지 않았다. 네 사람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어 졌을 때, 기사는 브리아에게 말을 타고 가기를 권했다. 이대로는 속도고 더 떨어질 뿐이기에 다들 그러길 바랬다. 이대로는 속도고 더 떨어질 뿐이기에 다들 그러길 바랬다. 말은 못 탄다는 유모 때문에 브리아는 혼자 말을 타고 최대한 낭떠러지에서 멀리 떨어져 걸었다. 한결 속도가 빨라졌다. 아해의 장-229(수정본)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휴식 시간이다. 계속 자신을 보며 말없이 질문을 건네던 무하에게 클랜은 결국 항복을 하고 말았다. 무하는 머뭇거림 없이 물었다. 이미 몇 번이고 곱씹었던 질문이다. "괜찮겠어?" "……괜찮지 않으면?" 평소와는 달리 쓰게 웃는 클랜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고 생각은 하지만 자신은 저런 미소조차 지을 수 없지 않던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지.'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둘은 별로 볼 것도 없는 낭떠러지에 시선을 두고 길지 않은 휴식 시간을 낭비했다. 다시 행군이 시작됐다. 지금은 걷는 것으로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지만, 길이 조금만 무난한 곳에 들어서면 암살자나 산적 떼로 바쁠 터였다. 차라리 힘은 들지만 목숨의 위험은 없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브리아는 사정이 달랐다. 암살자나 산적이 들이닥칠 때는 안전한 마차 안에서 쟁쟁한 일행이 그들을 물리칠 때까지 소리만 죽이고 있으면 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마차도 버리고 왔기 때문에 다음 마을로 갈 때까지는 고생길이 훤했다. 브리아는 이미 젖은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 냈다. 너무 더웠다. 조금 쉬었다 갔으면 좋겠지만 금방 쉰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말을 타고 가지만 다른 이들은 말을 이끌며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는 그녀에게 물통을 건네는 이가 있었다. 귀족의 것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마법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물통. 그것을 멀뚱히 보다가 건네는 이를 돌아본 브리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클랜이었다. "더우신 모양인데 좀 드십시오. 시원해서 한결 나을 겁니다." 슬슬 낭떠러지가 끝날 무렵이라 다들 습격자에 대비하느라 신경이 예리할 때였다. 유모조차 브리아에게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클랜의 작은 호의는 너무나 고마운 것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 뚜껑을 연 브리아는 안에서 흐르는 냉기에 놀랬다. 냉각 룬은 새겨져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한 모금 마시니, 시원함이 몸에 쏴악 퍼지는 느낌이 상쾌했다. 브리아는 주위를 경계하는 클랜을 힐끔 내려보다가 물통을 꼭 잡으며 생긋 웃었다. 뚱뚱한데다 귀염성 없는 성격 때문인지 계획적인 접근 외에는 작은 호의 한번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마차에서 내려 설 때도 그러했다. 레이디에 대한 의무감이 투철한 기사 외에는 누구 한사람 나서서 손을 내미는 이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투박하지만 따뜻해 보이는 클랜은 여지껏 보아 왔던 그 어떤 남자보다도 멋있는 사내였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병약하신 아버지께서는 어떻게든 딸을 시집보내고 삶을 마감하시려 들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을 원하지 않는 남자의 아내로 들어가 그의 첩들과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은 절대 싫었다. 차라리 기도원에 들어가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나선 길에 처음으로 누군가 의 순수한 호의와 배려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그가 본성이 착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브리아는 옆에서 걷고 있는 클랜을 내려보았다. 강한 걸음걸이로 걷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 보았다. 뭔가 말을 걸어 보고 싶었던 브리아는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저기……." "위험합니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클랜은 거칠게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거의 동시에 그녀의 위에서 작은 돌멩이가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사람 머리 만한 돌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몸을 굴린 클랜이 아뿔싸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낭떠러지 바로 옆에까지 간 상태였다. "으아악!" 산에 대해 전문가이기에 선두를 지키고 있던 무하가 그 소동을 알아채고 황급히 달려왔을 때 그곳에는 깨진 돌들과 그것에 맞아 숨진 말만이 있을 뿐, 브리아의 모습도 클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클랜!" 당황하며 주위를 돌아보던 무하의 귀에 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도움조차 청할 여유가 없을 만큼 전력을 다하고 있는 도중에 흘러나오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서둘러 낭떠러지 쪽으로 뛰어가 보니 팔을 뻗으면 간신히 닿을까 말까 한 곳에 클랜과 브리아가 매달려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을 잃고 있는 브리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 나머지 한 손으로 튀어나온 바위를 붙잡아 간신히 버티고 있는 클랜이 있었다. 무하는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클랜의 다른 손이 자유로운 상태라면 검 집을 내밀 수도 있었지만……. 클랜의 굳게 물은 입술이 찢겨져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젠장!" 신경질적으로 땅을 한번 내리친 무하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밧줄을!" 영문 몰라 하던 이들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밧줄을 찾으러 갔다. 하지만 그것을 기다리기에는 늦은 듯 싶었다. 클랜이 신음을 흘리며 밑으로 미끄러졌던 것이다. 그의 손톱이 부러지면서 바위에 적지 않은 핏자국이 새겨졌다. 극심한 고통에 클랜은 더욱 입술을 꽉 물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기절한 브리아가 깨어나면 일이 커진다. 그녀가 깨어나 침착하게 클랜의 목을 끌어안아, 그의 다른 손을 해방 시켜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조용히 기절한 상태로 얌전히 있는 것만을 바랄 뿐이다. 다행이 중간에 솟아 있던 바위 덕분에 멈출 수 있었지만 이미 한참을 흘러 내려가 버렸다. 기사가 서둘러 건네준 밧줄에 고리를 만든 무하는 그것을 밑으로 내렸다. 클랜은 그것을 한 손에 잡고 브리아까지 지탱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부러진 손톱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게다가 브리아는 적당히 살이 있는 여자다. 클랜은 고리 속에 브리아의 허리를 고정시켜 올려 보냈다. 레이디의 몸이 뽀족한 바위에 해라도 입을까, 밧줄은 천천히 끌어 올려졌다. 기사들이 밧줄을 올리는 동안 무하는 클랜에게 물었다. "올라 올 수 있겠어?" 카 등급인 클랜에게 이 정도 절벽을 올라오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좀 전과는 달리 짐도 없고 두 손도 자유로웠으며, 무엇보다도 두 발을 지탱해 주고 있는 지지대가 있었다. 클랜은 고개를 끄떡이고는 심호흡을 하며 다음 발을 디딜 곳을 확인했다. 그리고 힘차게 발을 튕겼을 때, 불행히도 그가 딛고 있던 바위가 부서져 버렸다. "아악!" 손을 뻗고 무엇이든 잡으려 했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클랜!" 무하는 고함을 지르며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무하의 주위로 붉은 안개가 서리는 듯 하더니 그것은 일순간에 추락하는 클랜을 향해 쏘아졌다. 근 2년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의 정령. 어지간해서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힘이긴 하나 친구의 목숨을 구하는데 머뭇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갑자기 자신의 몸을 감싸고 올리는 부드러운 바람에 당황하던 클랜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맞이하는 무하를 보고 이내 사정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고맙다." 클랜은 아직도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이들을 의식하며 작게 속삭였 다. 무하가 무슨 방법으로 자신을 올라오게 했는 지는 알 수 없다. 노련한 용병들의 눈을 피해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마법사가 얼마 되지 않는 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무하가 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희대의 천재'가 아니던가?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무하를 확인한 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브리아에 게 걸어갔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 기절한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유모가 물수건을 이마에 얹는 둥 걱정스레 간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클랜은 브리아의 옆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살펴보았다. 다행이 레이디의 소중한 얼굴에 상처 하나 없었다. 몸에는 잔 상처가 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에서 끝난 것이 다행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의성이 짙은 낙석 더미를 살펴보다가 위를 올려 보았다. 그의 짐작대로 자객의 짓이라 해도 이미 찾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행동에 예리함은 별로 없었다. 그보다는 신음 흘리는 브리아가 걱정이었다. 이곳은 위치 상으로 좋지 못하다. 적을 물리치는데 문제는 없지만, 그녀를 보호하는 데는 차질이 많다. 최대한 신속하게 이곳을 빠져나가야 되지만 정신을 잃은 그녀를 말에 묶어 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어쩔 수 없는 한숨만 나왔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기사들과 무하도 옆에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주위에서 용병들은 자신의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에게 일의 일정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 됐던 것이다. "업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깨어나면 난리를 치려나?" 기사와 유모가 브리아를 대신하여 무하의 발언에 반발했다. 감히 레이디의 몸을 업겠다니! 물론 노여워하는 그들을 사그리 무시하는 무하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레이디에 대한 공경이나 예의 등이 각인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목숨보다야 한번 업히고 마는 게 좋지 않은가? 그것은 지극히 현명한 생각이었지만 현실이 받아 주지 않았다. 클랜마저도 얼굴을 붉히며 어떻게 그러냐고 반박하는 마당이다. 무하는 굳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제의다. "그럼 난 주위를 살펴보고 오겠어. 클랜은 여기 있도록 해." 클랜은 어리둥절하며 동행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약간 허리를 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약하지만 무시 할 수 없는 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리아였다. 실신한 그녀의 손에 클랜의 웃옷이 굳게 쥐여져 있었던 것이다. 순간 클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흠흠, 그럼 난 여길 지킬게." 얼굴 보기가 민망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는 클랜을 향해 주위에서 작게 쿡쿡 대는 소리가 들렸다. 특히나 유모의 반응은 더 했다. 말에서 짐을 꺼내 오겠다는, 자리를 피해 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드러나는 말을 해대며 사라졌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피 거품을 뿜어내고 있는 말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정도로 강심장이 일리 없다. 짐을 꺼내는 것은 다른 용병들의 차지이리라. =========================================================================== 수정편이라고는 하지만 전과는 똑같은 면이 거~의 없지요? 클랜의 실연편을 쓰면서 부터 계속 생각해 왔습니다. "이건 내 글이 아니야!!!" ...라고요. 때문에 열장 넘게 써 놓았던 것을 싸그리 지우고 다시 시작합니다. 연재도 늦었고 쓰는 데도 오래 걸렸지만 이제야 제 글인 것 같아 기쁩니다.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그럼^^ 아해의 장-230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무하는 클랜과 브리아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바위산 정상에 있었다. 그의 비약적으로 좋은 시야에는, 브리아의 땀을 조심스레 닦아 내는 클랜의 모습이 그대로 포착되었다. 숲 너머로 고개를 돌리니, 작게 성벽이 보였다. 브리아가 정신이 들면 바로 가야 할 영지다. 꼭 필요한 곳이고, 꼭 가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괜찮을 리가 없지……." 한숨을 쉬는 그의 주위에는 부서진 함정 장치가 널브러져 있었다. 차라리 브리아 가 기절을 한 것이 잘 된 일이다. 일행이 앞으로 좀더 갔다면 연속적으로 발동되게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왕 발동된 김에 팔찌의 힘을 빌어 쉽게 해제한 그는 내친 김에 숲 쪽까지 훑어보기로 했다. 일행이 내려다보이는 방향과 동떨어진 곳으로 간 그는 힘껏 땅을 튕기며 높은 바위 위에서 뛰어 내렸다. 누가 본다면 자살을 한다고 고함을 지를 법한 행동. 하지만 무하의 신형은 바위 산 중턱에 자라고 있는 나무를 가볍게 밟으며 부드럽게 숲 속으로 들어갔다. 녹음이 우거져 있는 숲으로 착지한 그는 동시에 다시 날아, 높은 가지 위로 올라갔다. 눈을 감고 신경을 분산시켰다.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의 기척이 포착되고 약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수풀들의 속삭임이 포착된다. 그 속에 섞여 있는 불순한 기운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동물들과 배척하는 수풀들의 기운이 그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리 살기를 숨기고 있어도 그들이 머물고 있는 터전의 주인들이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들이 들어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연에게는 암살자든 용병이든, 귀족이든 제피모이든 똑같은 이단자 인 것이다. 그들의 환대를 받는 존재는 말로만 들었던 엘프나 요정 정도이리라. 무하가 한가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같은 인간인 자신을 왜 그들은 환대하고 받아 주는 가 하는 것이다. 농땡 사부와 함께 태백산에서 수련을 하고, 자연의 기운을 처음 깨달았을 때 느낀 것은 친숙함과 포근함이었다. 그것은 농땡 사부를 둘러싼 기운도 마찬가지였고, 가하를 감싼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 기운 은 모든 이들을 다정하게 끌어안는 것이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밀협꾼이나 관광객들을 향한 기운은 훨씬 냉정했다. 왜 저러는 것이냐 물었던 어린 무하에게 농땡 사부는 웃으며 말했었다. 저들도 눈이 높은 것이다, 라고. ……거기까지 회상한 무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사부는…….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그리고 검 집 채 뽑아 들었다. 지금은 '일'을 해야 할 때다. 기척을 줄이고 간 곳에는 역시 은신복을 입고 숨어 있는 집단이 있었다. 수는 열 일곱. 이쪽 일행과 맞아떨어지는 수다. 아니, 아까 함정이 건재했을 때를 생각한다면 이쪽 보다 많은 수라 봐야 할 것이다. 무하는 미리 주어 왔던 돌맹이에 적절한 기를 부여하여 그들의 급소를 향해 던졌다. 동시에 네 명의 수가 기절하여 쓰러지고, 나머지가 갑자기 나타난 그를 경계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또다시 네 명이 돌맹이에 급소를 맞아 쓰러졌다. 순식간에 절반에 가까운 수를 잃은 그들은 사방으로 퍼졌다가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다. 그 대응은 매우 침착하게 이루어진 듯 했으나 인기척 하나 나지 않고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적에 대해 매우 당황한 상태였다. 본능을 웃도는 감각으로 신속하게 공격은 했지만, 무감각에 가까워 침착과 냉정을 잃지 않는 무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싸움에서 평정을 잃었다는 것은 이미 졌음을 뜻하는 것과 같다. 무하는 검을 뽑지 않은 상태에서 쉽지도 어렵지도 않게 그들을 제압했다. 그 스스로가 만든 검무를 한 번 춘 것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것은 다수의 적과 싸울 때 사용하기에 용의 한 검무였다. 원래 살던 세계에서는 깡패들에게 둘러 쌓였을 때나 사용했을 뿐, 그리 많이 써먹지 못한 것이었는데 이 세계로 들어와 용병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검무로 자리잡게 됐다.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검무, 유시리안의 노래로 이루어진 검무는 되려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하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힘들어 할 때, 그 자신을 위해 펼치는 검무다. 싸움 따위에 더럽히고 싶지 않다. 또 지금 사용한 검무로도 충분히 적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한번은 클랜이 다수를 손쉽게 제압하는 무하에게 이 검무를 배우길 청했었다. 늘 실전에 써먹을 때만 봐 왔기 때문에 자신도 충분히 배울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른 변초가 사라진 정식 검무를 봤을 때는 고개를 저으며 순순히 물러났다. 변초가 사라진 그 검무는 단순한 유희의 춤에 불과한 듯 보였던 것이다. 클랜은 무하의 순수한 경험과 감각에 따른 검무였다고 결론지으며 자신의 검법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무하는 기절한 자객들의 혈을 잡아 구석에 던져 놓았다. 이틀 정도는 풀리지 않으리라. 그늘 밑이니 죽지는 않겠지, 라고 편히 생각한 무하는 슬슬 일행에게로 가 보기로 했다. 늦은 자신을 찾으러 다른 일행이 정상으로 올라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동, 내가 바라는 것은 도약의 힘. 텔 * 레 * 포 * 트 *" 고(高) 써클의 마법의 구현임에도 그것은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다. 서로 통하는 마법진이 있는 저급도 좌표를 설정하는 중급도 아닌 기억에 의한 고급 텔레포트. 그것은 레일리아가 가지고 있던 마법 반지에 아이디어를 빌려, 장소를 기억하게 하는 아이템을 그가 만들어,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무하가 걸고 있는 평범해 보이는 은빛 귀걸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가 지금 이동하고자 하는 곳은 클랜의 모습이 내려다 보였던 정상 쪽이었다. 곧 바닥에 금빛 마법진이 아롱지더니 곧 그의 모습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그가 쓰는, 타인에게 적용하지 않는 극소수의 마법 중 하나, 텔레포트였다. "늦었어." "미안." 얼굴이 새빨간 클랜이 항의성 짙은 어조로 말했다. 물론 진심이 아니었고 쑥스러 움을 조금이라도 커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일종의 농담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무하는 대충 답하고 자신의 보고를 기다리는 기사들에게 상황을 대충 말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보고였지만 말이다. "위에 함정이 제법 설치되어 있었지만 해제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한번 더 훑어 봤는데 더 이상 보이지 않더군요. 이 바위산에서는 더 이상의 낙석은 없을 겁니다." *** 습격자가 없는 숲을 빠져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행은 예상을 훨씬 못 미치는 시간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리둥절 하는 일행들 사이로 오직 무하만이 덤덤하게 있었다. 기절한 브리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저편으로 기울기 시작한 무렵이었 다. 서서히 붉은 빛이 하늘에 서리려는 그 순간 오직 무하만이 행군을 주장했다. 습격자가 있으면 어쩌냐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상식적인 반박에도 막무가내였고, 클랜의 상처를 한시라도 돌봐야 한다는 말을 슬며시 꺼내 브리아의 마음을 흔들기까지 했다. 그제서야 붕대가 감겨 있는 클랜의 손을 본 브리아가 새파랗게 질려 일행을 재촉했고, 일행은 얄밉다는 눈초리로 무하를 노려보며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일이 어찌 됐던 간에 습격자 없이 안전하게 그리고 빠르게 영지로 도착한 그들은 불평, 불만 없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저녁노을이 한창인 무렵, 마을은 저녁 짓는 냄새로 가득했다. 초긴장 상태에서 겨우 벗어난 일행은 그제서야 허기를 느꼈다. "일단 자리를 잡고 영주께 인사를 드리죠?" 작은 마을이다. 이런 곳에서 귀족이 오고갔다면 필히 영주의 귀로 들어갈 터였 다. 헌데 인사 한마디 없이 지나갔다면 필히 자존심 상해 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간에 좋은 일이 아니었다. 또 이참에 영주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받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슬슬 제대로 된 음식이 그리워지고 있던 참이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일행들을 가만히 보던 브리아는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옆에 있는 클랜과 무하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것은 클랜에게 한 말이나 진배없었다. "클랜씨의 상처가 심하니까 영주께 가서 마법사나 신관을 소개받죠? 작은 영지이 지만 마법사 정도는 있을 거 에요. 괜찮으시다면……식사도 함께 하는 것이." 저녁노을 속에서도 눈에 띨 정도로 얼굴이 빨개진 브리아는 힘들게 뒷말을 이다. "저희와 함께 가는 것이 치료받는데 좋으니까." 평소라면 그런 제의를 마다할 클랜이 아니었다. 치료 때문이 아닌 호사스러운 식사 때문이다. 치료야 남의 눈 없는 데서 무하에게 부탁하면 끝이지만 귀족의 식사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물론 돈을 주면 먹을 수는 있지만 요는 공짜라는 거다. 게다가 그들의 고객이 평범한 귀족이 아닌, 쟁쟁한 대 귀족 이지 않는가. 카 등급이란 명호는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아니, 이곳은 안 된다. "호의는 감사드립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곳은 좀 불편해서요." "아, 예…….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안쓰러울 정도로 실망하는 모습에 어지간하면 허락할 만도 하련만 클랜은 단호했다. 무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거냐.' 안쓰러웠다. 실망하여 풀이 죽어 있는 브리아가 아닌 거절하고 쓰게 웃는 클랜이. 그 웃음이 처절하도록 안쓰러웠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아무 것도 끝나지 않고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게 될 것 같았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한 걸음의 전진도 후진도 없이 그대로……. 잠시 고민하던 무하가 무언가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실례합니다." 식당의 울타리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며 인사를 건넸다. 정확히는 브리아를 향해서 였다. 최고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고품질의 옷을 입고 검소한 브릿치를 가슴에 달은 한 남자였다. 투정을 부리는 말의 목을 쓰다듬은 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 곳 영주, 플레트라 합니다. 산책을 하던 중에 이곳에 손님이 들어오셨다 는 소식을 듣게 되서 마중을 나왔습니다만." 영주라니!? 너무 젊지 않은가? 이제 겨우 서른이 될까 말까 한 젊은이다. 물론 그의 눈에 담겨 있는 깊은 지성과 관록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젊다. 아직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나이가 아닌가? 좌중의 의문을 쉽게 알아챈 그는 필요하지 않은 부연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저의 아버지는 정정하십니다. 가주의 눈에 제가 들어갔을 뿐이고, 마침 이 영지 의 주인 자리가 비어서요." 그 말은 이 남자가 최저 마 이상의 가주 계승권을 획득했다는 뜻이다. "초면인 지라 레이디의 성함을 알지 못하는군요. 저의 무지를 용서하여 주시고 새로이 깨우쳐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브리아라 불러 주세요." 익숙하게 내미는 브리아의 손을 잡고 살짝 입을 맞춘 플레트는 차분히 웃으며 말했다. "마침 저녁 식사시간이군요. 최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저의 초대에 응해 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기사 님들도 함께……." 부드럽고 예의 바른 말투로 일을 진행시키던 플레트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모두의 관심이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굳어 있는 클랜이 있었다. "클래너씨? 클래너씨 맞지요?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냉큼 달려가 손을 맞잡고 흔드는 플레트. 무하는 한숨을 쉬며 클랜의 어깨를 두어번 두들 겼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굳어 있던 클랜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며 한숨과 같은 말을 꺼냈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플레트씨."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결국 클랜은 브리아와 함께 플레트의 초대를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상처를 본 플레트가 놀라며 얼른 자신의 성으로 가자고 재촉했던 것이다. 인간성 좋고 거만하지 않으며 검소한 플레트에게는 친구의 폭이 넓었고, 그 중에는 신관도 있었다. 마침 그 신관이 플레트가 영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왔던 것이다. 신성 마법도 쓸 수 있는 친구니 상처를 잘 돌봐 줄 거라며 순수한 선의를 베푸는 그에게 차마 거절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게다가……. "아내가 크래너씨를 보면 반가워하겠군요. 고향 친구를 1년만에 보는 거니까요!" 아내라……. 명랑하게 말하는 플레트를 보며 쓰게 웃을 수밖에 없는 클랜이었다. 그 뒤로 무하가 따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도 플레트에게는 구면이었던 것이다. "두 분은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예에. 뭐니 해도 파트너니까." 무하는 억지로 답하는 클랜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길 끝 쪽으로 보이는 아담한 성이 눈에 들어왔다.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돼, 클랜. 이대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해. 평생 이대로 '정 지'되어 있어야 한다고.' "지금의 나처럼 말이지." 갑작스런 무하의 말에 바싹 긴장하고 있던 클랜이 돌아보았다. 자괴와 고뇌, 슬픔이 어려 있는 어조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여전했다. 굳게 다물어 있는 입가와 날카로운 턱선……그 무뚝뚝함 그대로. "클랜. 괜찮겠냐는 질문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지금의 네가 부럽다는 말만은 하고 싶다." "뭐?" 뜬금 없는 말. 놀리는 거냐고 윽박지르고 싶지만 무하라는 남자가 농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자신의 일을 무하가 잘 알고 있는 것에 반해, 자신은 그의 일을 잘 모른다. 원래 그의 이름이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 이었다는 것만 빼고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때문에 그 말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도 없다. 성문 앞에 마중을 나와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옆에서 플레트 가 브리아에게 설명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제 아내입니다." 아아, 레나……! 굳어 버린 클랜이 성문 앞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말의 덕이었다. "여보. 반가운 손님을 모셔 왔다오." 얼른 말에서 내려 아내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한 플레트는 장난기 가득한 손놀림으로 클랜을 가르켰다. 환하게 웃던 레나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가능하면 평생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죄책감, 원망, 미안함……모든 것이 뒤엉킨 레나의 시선에 클랜은 애써 웃었다. "오랜만……이야." "으응." 둘이 어색한 인사를 마주 받을 때, 플레트는 브리아에게 자신의 사랑스런 아내를 소개하고 있었다. 때문의 둘의 복잡한 시선을 눈치 챈 이는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무하 밖에 없었다. ========================================================================== 레나의 재등장...이라고는 하지만; 일단은 첫등장이라고 해두자구요; 아해의 장-231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식사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성안 숙소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의 고향 친구인데 그냥 보낼 수 없다며 플레트 가 붙잡았던 것이다. 그 호의를 거절한 명분이 클랜에게는 없었다. 멍하니 있는 클랜을 한차례 보던 무하는 조끼를 벗으며 일어났다. "먼저 씻는다." 본래 임무인, 브리아의 호위에 차질이 가지 않도록 같은 방을 쓰기로 했던 것이다. 무하의 존재마저 잊고 있었던 클랜은 움찔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는 욕실로 들어가 있었다. 클랜은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거칠게 헝크러 뜨렸다. 고작 얼굴을 본 것뿐 아닌가. 말을 오래 한 것도 아니고 눈을 마주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동요하는가. 클랜은 그런 자신이 바보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침대에 벌컥 누웠다. 깨끗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머리 속을 떠도는 것은 일년만에 재회한 레나의 잔영 뿐이다. 플레트에게 향하던 그 환한 시선…….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건 아니겠지?" 스스로에게 반문 해보았으나 답은 알 수 없다. 고요한 방에 작은 물소리만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하였다. '내가 설희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의 클랜처럼 마냥 굳어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동안 무수히 생각 해 왔던 것의 일편이나마 털어놓고 진실로 알고 싶었던 것을 묻고, 듣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아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 도……. 그래도 저렇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저대로 라면 일년의 시간이 희석시 켜 주었던 상처를 헤집는 것으로 끝나지 않겠는가? 일년 전의 일이다. 당시 파트너가 아니었던, 무하는 동행을 청한 클랜과 함께 길을 나서고 있었다. 클랜은 평소와는 달리 급히 말을 몰고 있었고 무하는 그런 그가 의아했다. 시급한 의뢰를 수행 중인 것도 아닌데, 느긋한 성품의 클랜이 식사할 때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서둘러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 영 낯설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물어 볼 마음은 들지 않는지 그는 갑자기 자신을 끌고 나온 클랜을 묵묵히 따라갔다. 어딘지 모르게 들떠 보이는 모습이 대충 행선지를 짐작하게 해주었기 때문도 있었다. '고향에 장래를 약속한 연인이 있다고 했었지.' 술만 들어갔다 하면 연인 자랑에 정신이 없는 클랜이었다. 한 일년 정도만 일하면 집과 땅을 장만해서 호의호식 시켜 줄 수 있다며 활짝 웃던 그였다. 그 이야기를 용병단의 일환이 된 뒤, 반년 정도 지나 들었으니 아직 때가 아닐텐데……. 단순히 보고 싶어 가는 것일까? "이번에 말이야." 클랜은 여전히 앞만 보고 서둘면서 입을 열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무하가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고향 마을 근처에 몬스터가 나타났데. 걱정이 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그는 힘들게 다음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번에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곤크로 데려 올까……하고. 헤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마찬가지로 아들을 잃었던 퇴직 기사 밑에서 커 왔던 클랜의 꿈은 화목한 가정이었다. 아버지로 여기고 있는 기사와 아내,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조용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런 꿈의 일부분이 클랜의 양아버지가 몇 년 전 천명을 다한 것으로 인해 망가져 버렸다. 그래서일까? 클랜은 누구보다도 순수하게 연인을 그리워했고 연모했다. 동료들이 그런 그를 놀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존경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무하는 알고 있었다. 그 또한 그러했고 말이다. '드디어 결혼인가.' 대충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일년 뒤 결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결혼 선물로 준비해 왔던 것을 빼먹지 않고 배낭에 잘 챙겨 오길 잘했다. 등에 메여 있는 작은 배낭의 거의 느껴지지 않던 무게가 새삼 인식 됐다. 그는 진심으로 클랜이 행복하게 되길 빌었다. 물론 저런 일편단심의 남자를 배신할 여자가 있을 턱은 없겠지만. 벌써 단을 떠난 지 삼일이 지났다.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고 강행한 그들에게 기쁜 광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클랜이 늘 입에 담던, 마을 근처에 있다는 사과나무 두 그루가 보였던 것이다. "이제 곧 이야, 무하!" 늘 쾌활했지만 지금처럼 환희에 젖은 적은 없던 것 같았다. 무하는 클랜 몰래 배낭에서 축하 선물을 꺼냈다. 그의 연인이 있는 자리에서 주리라. 사과나무를 지나자 작은 마을이 보였다. 성벽이 없기에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마을이었지만 겉보기에는 매우 평화로와 보였다. 게다가 클랜에게 듣은 것과는 달리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듣기 싫은 소음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 아니라 웃음과 즐거운 수다가 흐르고 있다는 소리다. 클랜도 그것이 의외였는지 눈을 멀뚱히 뜨고 고향을 보다가 이내 웃으며 말을 재촉했다. 아슬아슬하게 보냈던 편지가 제때 연인의 손에 들어 간 모양이다. 환하게 웃는 클랜의 모습을 무하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 무표정과 무뚝뚝함에 다정한 축복의 인사가 담겨 있다는 것을 모를 클랜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저 왔어요!" 마침 아는 어른이 지나갔는지, 클랜이 얼른 말에서 내려와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어째서 인지 몇 년만에 찾아온 클랜을 보는 마을 어른의 얼굴이 불편하기만 했다. "와, 왔구나." 쩔쩔 매다가 바쁜 일이 있다며 얼른 돌아서는 그를 클랜은 멀뚱히 보기만 했다. 그러다 뭐 용변이라도 급하셨던 모양이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고는 자신과 양아버지가 살던 곳을 소개 시켜 주겠다며 걸음을 놀렸다. 한시라도 빨리 연인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어울리지 않게 내숭이다. 무하도 말에서 내려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클랜의 집은 외각에 지어진 작은 통나무집이었다. 한껏 들떠 있던 클랜도 이 집을 보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아버지의 죽음을 유연하게 받아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휘휘 저으며 얼른 우울한 감정을 떨쳐 냈다. 모처럼 아버지와의 장소를 찾아왔는데 우울한 얼굴을 보일 수는 없다. "이 곳이 내가 살던 곳이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지겹게 들었던 묘사 그대로의 집. 무하는 왠지 긴장되는 스스로를 느끼며 손을 내밀어 문을 만져 보았다. 꺼슬꺼슬한 나뭇결이 느껴졌다. 문틀에 칼로 그은 듯한 흔적이 십여 개 있었다. 생일 때면 여기서 키를 쟀다는 클랜의 말 대로다. 슬쩍 미니 낡은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한번도 들리지 않았다니 그럴 만도 했다. 먼지가 쌓여 있긴 하지만 정리는 잘되어 있는 집안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 뿐이라 아버지와 함께 잤다는 나무 침대. 자신을 조각하겠다고 설치다 기이학적인 무언가가 남았다는 의자 다리. 겨울이면 감자 따위를 구워 먹는 재미로 살았다는 작은 난로. 잘 포개져 있는 두 개의 그릇과 수저. 말썽 부릴 때면 머리를 한 대씩 맞았다던 후라이팬. ……신기할 정도로 클랜의 설명 그대로다. 그만큼 그리워했다는 뜻일 것이다. 무하 또한 사부와 가하와 보냈던 동굴, 산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세세하게 설명할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그리웠고 행복했다. "먼지가 좀 쌓였지만 금방 치울 수 있을 거야. 며칠 자는 것쯤이야 문제 될 게 없지. 하하!" 먼지 따위로 클랜의 보금자리를 비하할 생각은 없었다. "멋진 곳이다." 진심이 우러나오는 목소리. 클랜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식사는 레나네 집에서 먹자고! 우리 레나가 얼마나 요리를 잘 하는지는 먹어 봐야 안다니까!" 식사보다는 레나가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지만, 보기 싫지 않았다. 안 그런 척 하지만 충분히 흥분에 쌓여 있는 클랜의 모습을 보자니 부럽기까지 하다. 배낭을 내려놓으려다 도로 맨 무하는 앞서 걸어가는 클랜을 서둘러 따라갔다. 짐조차 내려놓을 여유가 없는지 그의 등에도 무하처럼 배낭이 들려 있었다. 조금 걷자 초록색 지붕의 이층집이 보였다. "저기가 레나의 집이야!" 자신이 직접 발랐다는 초록색 지붕을 가르키며 클랜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레나의 집으로 향할수록 점점 커지던 소란스러움은 이내 절정에 달했다. 어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집 근처에서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온다는 연락 때문인가?" 고개를 갸웃뚱 하던 클랜이 좀더 서둘러 다가가자, 마을 사람들은 흠칫하며 반구 형태로 그를 피했다. 소란하던 주위가 이내 정적에 쌓였다. "저기……." 누구한테 랄 것도 없이 입을 연 클랜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친구들을 불안하게 보았다. "무슨 일인지 알려주십시오." 어쩔 줄 몰라 하는 클랜의 귀에 낮은 무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중하지만 위압감과 무게가 실려 있는 물음. 그것은 무하의 기분이 점점 하락해 가고 있음 을 알려주고 있었다.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은 생판 타인인 무하가 보기에도 충분히 불쾌했던 것이다. 그가 그 정도이니 그들과 친하게 벗했던 클랜은 어떻겠는가? 그는 입조차 열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크, 클랜. 오랜만이야." 한쪽에서 주저하는 목소리로 누군가 인사를 건네 왔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클랜의 얼굴이 그제서야 밝아졌다. "정말 오랜만이지? 이번에야말로 청혼하러 오셨다." 한껏 쾌활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그것은 기대했던 상대의 반응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말을 건네 왔던 청년은 클랜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왜 이제야 왔어." "응?" "어서 돌아가. 이미 늦었어." 클랜은 영문 모를 소리에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되물었다. "무, 무슨 소리야?" "오늘이 레나가 청혼 받는 날이야. 그래서 다들 나와 있는 거고. 어서 돌아가." 클랜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불안하게 떨릴 때, 견고한 목재의 문이 열렸다. 레나와 함께 칼로 낙서했던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목재의 문. 순간 그는 친구가 자신을 놀린 것이라 생각해 버렸다. 레나가 자신을 버릴리 없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첫사랑이었고 서로 외에는 그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그런 다정한 연인이 아니던가?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도 어려서부터 자신을 사위로 점찍고 정겹게 대해 주셨다. 그런 그들이, 이미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을 버릴 리 없는 것이다. 문을 열고 나온 자신의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자 클랜은 너무나 간절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자신의 생각을 확신시켰다. "갑자기 조용해졌네? 무슨 일이라도……. 자, 자네!" "아버님! 오랜만입니다. 제가 이번에 레나에게……." 언제 불안에 떨었냐는 듯 반갑게 인사를 건넨 클랜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우리 사위, 우리 사위하며 반기던 레나의 아버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님?" 그때 집 문이 열리며 두 남녀가 나왔다. 서로를 보며 행복과 기쁨에 젖어 있는 두 남녀. 젊고 기품 있어 보이는 남자와 아름답고 착해 보이는 여자. 그야말로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깊은 애정이 서려 있는 눈동자가 불길하 게 다가온다. 둘은 주위를 휘감고 있는 흑색 오라를 느끼지 못하고 서로에게 푹 빠져 있었다. 둘만의 세계에 감히 침입한 불쾌한 남자의 음성이 아니었다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었으리라. "레나……."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동자에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크게 떠진 경악의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몸뚱이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듯한 남자……클랜이었다. "오, 오랜만이에요. 아! 여기는 제 어릴 적 친구, 클래너에요. 지금은 곤크에서 용병질을 하고 있지요." "호오. 곤크라면 대 용병단 말입니까? 대단하군요!" 상냥한 음색의 칭찬이 이어졌지만 클랜의 귀에는 '친구'라는 단어와 '용병질'이라 는 단어만이 울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자신들이 친구가 되었던가? 언제부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비하시키는 단어를 입에 담았던가? 언제부터……언제부터 그녀가 변질 됐던가!? 레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쪽은 나의 약혼자, 플레프씨. 오늘 청혼 받았어. 곧 결혼할거야." 그러니 방해 말고 사라져 달라고……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내가……." 힘들게 입을 열던 클랜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짓눌리는 듯한 몸을 힘들게 돌렸다. 끝없는 늪지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듯한 발을 옮기며 그는 토하듯 말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군." 차마 축하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행복 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배신감과 슬픔이 이성을 잠식시키기 전에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그는 묵묵히 서 있는 무하의 곁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발을 놀리는 클랜의 모습은 이내 작아지고,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하는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레나라 불린 여성을 보고 있었다. 클랜의 한결같은 설명 때문인지 처음 봤음에도 낯익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돈 꽤나 있는, 학식 깊은 집안의 자제일 것이다. 고운 손과 지성 깃든 눈동자, 기품 있는 몸가짐이 그것을 짐작케 해준다. 아마도 그는 레나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랬기에 레나가 그의 앞에서 클랜을 '친구'로 소개했고, 특별한 감정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클랜의 일을 비하시켜 소개했을 것이다. ……다시 레나를 돌아보았다. 멀어지는 클랜의 모습을 안심한 얼굴로 보고 있는 모습. 그녀는 클랜이 카 등급이라는 것까지는 몰라도 제법 높은 등급의 용병이라 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클랜의 광분과 난동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상처 입고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죄책감은커녕 안도감을 느끼다니……. 무하는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멀어지는 클랜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모든 이들이 그제서야 남은 그의 일행을 인식했다. 살기도 비난의 말도 없는 모습에 적잖이 안심한 그들은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무하를 지켜보았다. 무하는 품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빼냈던 클랜의 결혼 선물이다. 그는 천천히 주머니 입구를 봉하고 있는 끈을 풀렀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주머니가 여자의 머리 위쯤에 도달했을 때, 그는 그것을 뒤집었다. -촤르륵. 부드러운 소리가 일며 내용물이 사르륵 빠져 나와 여자의 몸을 덮었다. 그것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루였다. 곱게 차려 입은 여자의 옷 위에 앉아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 무엇을 갈았는지 정갈한 붉은 빛과 푸른빛, 그리고 녹빛과 투명한 빛을 뿜어낸다. 순간 상황을 잃고 탄성을 지를 정도다. 멍하니 자신의 몸을 덮은 가루를 바라보는 레나의 귀에 냉혹한 남자의 목소리가 꽃였다. "그것은 축복의 가루입니다. 저의 친구와 그의 연인을 위해 제가 마련한 것이지요. 이미 쓸 곳이 없어졌으니 맹세를 깨고 행복을 손에 넣은 분께 바치겠습니다." 그는 심장에 손을 얹고 정중히 인사했다. 그 지독하리 만치 완벽한, 아니 과분한 정중함이 되려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것은 단지 그녀가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증거로 그녀의 옆의 남자는 순수하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무하는 한층 더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배신자에게 축복의 말을 한다는 건 신에 대한 모독. 빈말로도 당신의 행복을 빌어 드릴 수가 없군요. 저주를 붓지 않은 것을 과분하게 여기시길. 그럼." 너무나 혹독한 말이었다. 또한 저주보다도 더한 악의가 배여 있는 말이었다. 창백하게 질려 떠는 레나의 얼굴을 싸늘하게 보던 무하는 돌아서, 상처 입고 홀로 걸어가고 있을 파트너의 뒤를 쫓았다. ……그것이 일년 전 이야기다. 그 뒤로 어두워진 클랜을 지켜보던 무하가 파트너 제의를 했고, 그것은 부관의 치밀한 계산 하에 승인되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참견하지 않고 묵묵히 곁을 지켜주기만 하는 무하와 함께 하면서 클랜은 점점 밝아져 갔다. 그것이 정말로 상처가 아물어서 인지 주위의 걱정하는 지기들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클랜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그렇게 여지껏 지내 왔다. 그것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려는 상황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이제 자신이 끼어 들 수준은 벗어났다고 생각됐다. 아니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것은 클랜이 해결하고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주제넘게 남이 끼어 들 일이 아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무하는 두건을 두르며 밖으로 나왔다. 언제 나갔는 지 클랜은 보이지 않았다. =========================================================================== (머엉)... 졸렵습니다 =.= 아해의 장-232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달이 밝았다. 날씨는 제법 선선했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매우 좋은 밤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던가? 클랜의 눈에는 모든 것이 어두웠고 서글펐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어느 샌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어두운 정원은 담력 약한 자의 눈에는 두려운 장소였지만 그에게는 시간을 축내기 적당한 장소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하는 무하와 한방에 있는 것은 상당히 견디기 힘든 일이다. 적어도 그가 잠들기 전까지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발을 옮기는 클랜의 귀에 작은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해맑고 고운 톤의 노래 소리 심란한 클랜의 가슴에 파고들기에 족한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발이 소리의 진원지를 향하는 것을 느꼈다. 잔디를 밟으며 성벽 코너를 돌은 클랜이 본 것은 이층 발코디에서 달을 보고 있는 한 여자였다. 노래 소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브리아…….” 그녀가 저리도 아름다웠던가? 달을 보며 맑게 곡조를 뽑아 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눈물이 넘실거렸다. 나잇살이나 먹어 주책이라며 스스로를 비웃었지만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브리아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여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노래가 혼탁해진 가슴을 파고들어도 아니었다. 그냥……. “클랜씨?” 위에서 갑작스레 들려 온 브리아의 목소리에 클랜은 스스로가 울고 있었다는 것도 있고 고개를 들어 버렸다. 눈물은 이미 뺨을 촉촉이 적시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 보였던 것일까?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려 보지만 브리아가 놀라 발코디 밖으로 몸을 내미는 모습이 보인다. “무,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 아니요. 그냥…….” 클랜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다. “그냥 슬퍼서……. 너무, 너무 슬퍼서.” 울고 싶었다. 일년 전 그때부터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울면 실연 당했음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그녀가 자신을 저버렸음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비참해 질 것 같아서. 그런 보잘 것 없는 오기로 인해 울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비참해 지는 걸까? 실연쯤이야 누구든 당하는 것이 아니던가?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한다지만 누구든 한번쯤은 겪는 일이 아니던가? ……아버지의 목소리 같았다. 이미 떠나셔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도 볼 수 없는 아버지의.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주는 것 같았다. 어리석은 고집에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는 아들을, 그래도 사랑한다고 안아 주는 것 같았다. 그저 귀족 아가씨가 잠들기 전에 변덕으로 부른 노래에 불과했는데. 그저 그뿐인데…….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일년 동안 참았기 때문일 것이다. 흐느낌 없이 한참을 오열했다. 언제 내려왔는지 브리아가 옆에서 연신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너무 슬퍼 마세요. 하지만 슬프시다면 얼마든지 우세요. 참는 건 좋지 않아요. 지쳐 갈 뿐인 걸요. 실컷 우시고 훌훌 털어 버리세요. 그게 클래너씨다워요.” “노래…….” 참을 수 없는 오열을 뱉어 내며 클랜은 간신히 말했다. “불러 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런 청에 브리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음을 뽑아 내기 시작했다. 좀 전과 같은 곡이다. 죽은 아내를 묻고 부른 한 기사의 노래. 무뚝뚝하고 말에 서툴러 생전에 단 한번도 사랑의 밀어를 입에 담지 않았던 기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흘려 보낸 깊은 애정, ‘기사의 애가’ 그대 살아도 내 가슴에 담으리. 그대 죽어도 내 가슴에 묻으리. 그대여, 떠나지 마오. 삶도 죽음도 함께 해주오. 나의 죽음을 염려 마오. 우리 아이의 가슴에 살도록 하오. 그대와 나, 우리 아이의 가슴에 살도록 하오. 그대여, 떠나지 마오. 삶도 죽음도 함께 해주오. 함께 해주오. “나의 양부는 뼈 속까지 기사였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시면서도 너무나 의연하게 받아 드리셨죠. 슬퍼하는 저를 책망하시며. 저는 철부지였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대들어 버렸으니. 어째서 그리도 태연하냐고, 자식을 두고 가는데 눈이 감기냐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저를 두고 가는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이렇게 못나 빠진 아들을 꾸짖어 주길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발코디 밑, 성벽에 기대 클랜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클랜의 옆에서 자애로운 얼굴로 경청하는 브리아가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날이 어느 정도 밝아져 있었다. 아마도 그 밤중부터 함께 있어 주었던 모양이다.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마음이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지기들에게도, 무하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클랜의 소중한 비밀이 조심스럽게 열리 고 있었다. “하지만 뼈 속까지 기사인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평소와는 달리 너무 로맨틱했어요. 하하. 솔직히 너무 안 어울렸다고요.” 브리아는 미소지으며 물었다. “뭐라 말씀하셨는데요?” “글쎄, ‘기사의 애가를 알고 있니, 나의 아들아?’라고 말씀하셨다니까요? 하하!” 결국 클랜은 또다시 눈가를 손으로 덮어야 했다. 무뚝뚝하지만 자상했던 아버지. 쑥스러움을 누구보다 많이 타서 생일 선물 하나 건네주기를 첫사랑의 상대에게 러브레터를 건네주는 것마냥 힘들어했던 아버지. 죽는 순간에조차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쑥스러워 그리도 뺑 돌리셨다. 그런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했다. 지금도, 앞으로도 쭉 사랑할 것이다. 그리워 눈물이 나지만 아버지의 아들이라 당당히 말하려면 이쯤은 견뎌 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냥……너무 우스워서, 그래서 나는 것이다. 브리아는 작게 후렴구를 불러 보았다. “그대와 나, 아이의 가슴에 살도록 하오.” 클랜이 젖은 눈으로 브리아를 돌아 봤을 때, 그녀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 클랜은 서둘러 일어나며 말했다. “그, 그만 올라 가셔야지요. 제가 계속 붙잡고 있었네요. 푹 쉬셔야 하는데…….” “예.” 무하는 창문 가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징그러울 만치 박혀 있는 하늘의 별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전에는 저 하늘만 보면 자신이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며 괴로워했었다. 하지만 지금은……그저 공허할 뿐이다. 정이 든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듯 멍하니 있을 뿐.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점점 무감각해지는 자신을 느낀다. 하루하루의 생활 모두가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보듯, 스스로를 보고 있다. 무기력과는 조금 다른 생활. 그래서일까? 그의 감정에 공명하여 나는 멜로디가 이제는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보다도 작게 울린다. 분노하여도 슬퍼하여도 이제는 그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이 점점 사라져(無)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무감각하게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 ‘원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걷는다고 하던가.’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을 몰아 세우는 것도 무력함을 되새기는 것도.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추수 릴 여유가 없었다. 잠이 들면 아직도 그녀가 자신을 몰아세운다. 그것은 괜찮지만 그 다음에는 여지없이 카한 형님이 나타난다. 그 평온한 미소. 죽음이라는 안식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맑은 미소. 하지만 죽어 가고, 또 죽는 그를 볼 때마다 나날이 자기 자신이 죽어 가고, 또 죽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이래서 떠나는 이보다 남는 이가 괴롭다 하는 것일까? 이럴 때면 검무를 춰 본다. 언젠가 만났던 아름다운 용병이 불렀던 음악을 토대로 만들어 낸 검무. 이제는 노래까지 완벽하게 떠올릴 수 있다.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던 것이 자꾸만 끄집어내 지면서 뇌리에 각인 되 버렸다. 그녀의 배신을 떠올리기 바로 직전에 만났던 그. 카한 형님을 죽이기 바로 직전에 만났던 그. 즐거웠다고 생각한 시절의 바로 끝에 존재하는 그. 그랬기에 그 자리가 컸던 것일까? 사부에게 배우거나 자신이 만들었던 검무 중 그 어떤 것보다도 그에게 안정감과 즐거움, 깨달음을 알려주는 검무. 그것을 펼칠 때만은 공명의 소리가 확실하게 들려 온다. 반경 2 m 정도에 있는 사람이라면 귀기울이지 않아도 쉽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하게, 그리고 강하게. 그 순간만이 무감각해져 가는, 인형이 되어 가는 그를 겨우겨우 사람으로 지탱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죽어 가는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듯한 그 느낌을 맛볼 때마다 무하는 완전한 절망은 없는 것이라고 몇 번이고 곱씹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고 보니 그와 헤어진지 벌써 2년이 다 되가는 군.’ 산 건너편에서 일출의 진풍경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용병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만나지 못하는 걸까. 2년이나 욤에서만 활동했는데…….” 하긴 만난다고 서로를 알아 볼 수나 있을까? 특히 그는 자신을 못 알아 볼 것이다.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은발과 눈동자는 두건으로 가렸고 체격조차 완전히 변해 버린 데다가 타인의 앞에서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자신을 무슨 수로 알아 볼 수 있을까. “그래도 언젠가는…….” 이제는 완전히 떠오른 태양을 보며 무하는 속삭이듯 말했다. 언젠가는……. 무하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려졌다. 잠시 후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클랜이다. 붉게 충혈 된 눈동자와 약간 부은 듯한 눈가……. 하지만 그 얼굴만은 유난히 환하고 밝았다. 1년 전 클랜의 모습 같아 보기 좋았다. 자지 않는 무하를 보고 클랜이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무하의 불면증은 진저리 쳐지도록 잘 알고 있었지만 안쓰러운 건 변하지 않는다. “또 못 잔 거냐?” “자긴 했어.” 클랜은 무하가 두 시간도 제대로 못 자고 깼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와 파트너가 된 1년 동안 내내 그러했으니까. 새삼 고소가 지어진다. 유일한 카 등급 페어니 확실한 능력 보장이니 뭐니 화려한 겉포장이며 지독한 헛소리다. 상처받은 자들끼리 모인 것에 불과하지 않던가? 서로를 누구보다도 깊이 배려 할 수 있고, 간섭하지 않을 수 있는 자들끼리 모인 것에 불과하지 않던가? “네 얼굴을 보니 이제 파트너 해지해도 괜찮을 것 같구나.” 여느 때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차분한 어조의 목소리로 무하가 말했다. 클랜은 저도 모르게 그런 무하의 목을 조였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웃기지 마라! 이 형님 아니면 누가 너 같은 우중충한 녀석과 어울리겠냐?” 그러다 무하의 어깨에 이마를 갖다 댔다. 예전에는, 불과 1년 전에는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낮은 멜로디가 들려 왔었다. 차분하고 슬프며 고독한 멜로디. 그것을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슬픔이 밀려 왔었다. 아득한 슬픔과 그리움에 목이 매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되려 슬퍼, 목이 매인다. 바보다, 이 녀석은. 매사에 너무 진지해 스스로를 좀먹는 멍청이다. “바보 녀석.” 무하는 그런 클랜의 머리를 몇 번 부벼 주고 일어났다. 상냥하고 자상한 클랜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째서 방금 그 단어를 입에 담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좀...사정이 있었습니다... ... 신뢰가 찢겨져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근래 처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 아해의 장-233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그 동안의 강행군에 지쳤던 것일까? 브리아를 깨우러 간 유모는 진땀을 흘리며 신음 흘리는 그녀를 발견해야 했다. 마침 성안에 머물러 있던 신관이 적절한 치유와 조치를 해주어 금방 열도 가라앉고 의식도 차렸지만 하루는 푹 쉬어야 한다는 선언을 받았다. 브리아는 이틀만 더 강행하면 도착한다며 출발을 고집했지만, 플레트와 신관의 강력한 반발로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묶여야 했다. 무리하다가 길에서 쓰러지면 약도 없다는 말에 더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브리아는 결국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쌓인 피로를 풀기로 했다. 플레트가 가져다 준 책을 읽으며 적적한 시간을 보내던 그녀의 귀에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듬직한 체격의 상냥한 푸른 눈동자를 지닌 클랜이 들어왔다. 그의 깊은 성품이 배여 있는 맑은 눈동자에는 보기 힘든 죄책감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웃으며 반기던 브리아는 그것을 눈치 채고 근심 서린 어조로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그 말에 클랜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브리아.” “네?” “피곤하신데 저 때문에 밖에서 밤을 보내셔서……. 정말 죄송합니다.” 남이 들으면 뭔가 야릇한 상상을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지만 다행히 그 말을 들은 브리아 뿐이었고, 그녀는 그의 말뜻을 백분 이해했다. “아니에요! 제가 마음대로 있었던 건데요! 제가 클랜씨를 좋아해서 있었 던……!” “에?” 클랜은 멍청한 표정으로 지으며 멍하니 반문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브리아는 자신이 한 말을 깨닫고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뿐 뭐라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매우 무드 없는 고백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붉게 물들여진 브리아의 얼굴을 보던 클랜의 얼굴이 일순간 달아올랐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에 당황하던 클랜은 멍청한 소리를 내뱉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 저. 그, 그런 쉬십시오.” ……정말 멋대가리 없는 사내다. 정원으로 빠져 나온 클랜은 계속 뛰는 가슴을 손으로 내리 누르며 심호흡했다.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 것은 익숙하지 못한 일이다. 어려서 마을에 있었을 때는 레나 외의 여자는 보지도 않는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가 없었고 그것은 곤크에 있었을 때도 같았다. 레나에게 실연을 당한 이후로는 일에 미쳐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도 없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레나 외의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한 미소만 짓게 했던 레나의 속삭임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었다. 당혹스러웠고……기뻤다! “후우…….” 가슴의 고동이 조금 진정 될 때쯤, 클랜은 자신이 하고 온 멍청한 소리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나서 그가 한 행동은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 것이었다. 누가 고백을 받은 순간 그따위 말을 한단 말인가?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자괴감에 휩싸여 있던 클랜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돌아봤을 때, 그의 시야에 아름다운 귀공녀가 들어왔다. “레나…….” 허리까지 풀러 내리던 긴 생머리를 맵시 좋게 틀어 올리고, 고상한 무늬가 새겨 진 비녀를 꽂은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장식구와 어울리는 고상한 옷차림과 화려하지 않은 목걸이, 귀걸이, 그리고 결혼반지. 그녀를 본 순간에서야 클랜은 어제 밤 이후로 자신이 그녀를 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브리아의 노래를 들은 순간부터……. 자신의 슬픔을 생각했고 자신의 그리움을 생각했고 아버지를 생각했으며 마지막으로 브리아를 생각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클랜은 다시 가슴이 두근거림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정말 오랜만이야.” 브리아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자괴 하던 클랜의 귀에 부드러운 듯 떨리고 있는 레나의 음성이 꽂혔다. 그녀의 존재를 또다시 잊고 말았던 클랜은 자신의 감정을 종잡을 수 없어 혼란해 했다. 그러는 클랜의 상태를 보지 못한 레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언제고 당신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길 원했어. 생각보다 빨리 만날 수 있어서 기뻐.” “아아…….” 이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토록 괴로웠는데…….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원망과 분노,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그리움에 울고만 싶었건만. 원 없이 울어 버려서 그러한 것일까? 눈물에 그리움과 못난 원망을 흘려 보내서 그러한 것일까? “그이의 청혼을 받아들일 때, 난 당신을 원망했어. 그가 편지라도 한 통 보내 주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단 한 통이라도……. 그렇게 당신을 원망했어.” 클랜은 담담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자신의 잘못도 있는 것이다. 너무 믿었다. 아니, 그녀가 자신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같기 때문에 편지 따위가 없더라도 언제나 한결같을 줄만 알았던 것이다.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레나의 말을 계속 됐다. “하지만 말이야. 난 곧 그것이 나의 치졸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됐어. 당 신이 그렇게 돌아간 날, 당신의 편지가 도착했어. 그 안에는 당신의 한결같은 사 랑과 신뢰, 그리고 당신이 꿈꾸고 있는 우리들의 결혼과 가정에 대해 절절히 써져 있었어. 마지막에는 곧 돌아와 청혼할 것이라는 말까지 적혀 있었지…….” 처음으로 보냈던 편지다. 몬스터 때문에 놀랐을 그녀를 안심시킬 겸 미리 보냈던 편지. 그것이 늦게 도착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와 무슨 소용일까? “난 당신을 쫓아갈 수도 있었어. 당신이 그렇게 사라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당신을 쫓아가 앞의 치졸한 변명을 늘여 놓으며 용서를 구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지.” 레나는 클랜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난 그이를 택했던 거야. 당신을 만나고 싶었던 것은 이 말을 하고 싶어서야.” 그녀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클랜은 동요 없는 자신에게 놀라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때 당신을 ‘친구’라 소개했던 것 미안해. 당신이 ‘용병질’을 한다고 했던 것도 미안해. 당신을 ‘옛 연인’이라 소개했어야 했어. 당신이 ‘용병’ 이라고 말했어야 했어. 난 나 자신이 당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했다는 것을 인정했어야 했어. 그이의 앞에서 당당하게 저 남자보다 당신을 사랑했기에 당신을 택했다고 말했어야 했어. ……미안해, 클랜.” 클랜은 슬쩍 고개를 저어 보였다. 레나는 늘 당당했었다. 그리고 늘 당당하길 원했다. 지금 그녀는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다. 당당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내가 협박이라도 할 것 같았어, 레나?” “…….” “부정하지 않는군. 당신은 지금 내가 플레트씨에게 당신과 나의 과거 사이를 폭로할까 두려운 것뿐이야. 하루만 있으면 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더 있게 되니까, 플레트씨와 대화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 버려서……. 그래서 두려움에 선수를 치는 것뿐이야.” “…….” “부정하지 않는군.” 클랜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미소도 아니었고 애정에 어린 따스한 미소도 아니었다. 그저 입 꼬리만 양쪽으로 슬쩍 올린 형태의 움직임에 불과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던 클랜은 평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과 나의 일은 흔하디 흔한 남녀의 사랑 놀음에 불과했어. 그저 그뿐이었던 거야. 하지만 난 성인 군자가 아니야. 당신 행복을 빌어 줄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아. 아니, 당신이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당신이 나와 같은 배반에 고통스러웠으면 좋겠고 당신이 나와 같은 괴로움에 세월을 보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남의 불행을 빌고 자신은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당신을 저주하지 않겠어. 내가 행복해 지고 싶으니까. 나를 버린 여자를 저주하기 위해 나의 행복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담담하지만 지독한 한이 서려 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이십년을 한결같이 사랑한 자신의 마음을 일순간에 버린 여자를 향한 증오였고 지난 일년간의 괴로움과 고통의 토사물이었으며, 너무나 솔직한 본심이었다. 레나는 그 지독한 악의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클랜은 다시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환한 미소다. “이상하지? 난 평생 생각하지도 꺼내지도 못할 것 같은 폭언을 입에 담은 것인데, 너무나 개운해. 처음으로 나의 깊은 내면을 본 기분이야. 이제 홀가분하게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이미 당신을 잊어 가고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나서 클랜은 맑게 웃었다. 겨우 1년 전의 웃음을 되찾은 것 같다. 겨우 진짜 웃음을 지어 보는 것 같다. 그래서 기뻤다. 진심으로 그녀를 잊을 수 있음이 기뻤다. 그는 헝크러진 적발을 정리하며 저택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잠시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나의 이름은 클래너 카 곤크입니다. 클래너라 불러 주십시오. 레나벌 부인.” ‘애칭 허락의 철회’. 클랜은 확실하게 레나를 자신의 안에서 밀어낸 것이다. =========================================================================== 이제 4권 수정에 들어가야 됩니다. 전에 생겼고 당했던 문제는 아직도 해결의 조짐이 안보이고 갈수록 심화만 되고 있는데... 허허... 많이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__) 아해의 장-234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흔하디 흔한 몬스터의 습격을 몇 차례 받으며 나름대로 무난한 일정이 끝났다. 그 동안 클랜은 브리아의 옆을 떠나지 않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세심하게 주위를 살폈다. 암살자의 습격이 없었던 것은 그의 덕이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내내 행복한 듯 미소를 지었고 밝은 웃음을 잊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일행의 분위기는 급격히 상승 됐다. 그 기세를 몰아 순식간이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한 건지도 모른다. 일행 중 단 한사람, 무하만이 클랜을 어두운 눈으로 보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클랜의 모습은 너무나 이질적이었고 과장됐으며 허위적이었다. 물론 그의 모습에서 전과는 다른 밝은 기운과 기쁨, 그리고 호쾌함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의 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슬픔이 그의 눈에는 똑똑히 들어오고 있었다. 클랜은 무하의 그런 시선을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무하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묻지 말아 달라는 처절한 거부를 읽을 수 있었다. 도착한 저택은 수도에 있었던 그녀의 명분상 본가와는 격이 달랐다. 화려함만이 강조되어 있던 그곳과는 달리 이곳, 실질상 본가는 위엄과 장엄, 그리고 고상함 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 그것이 클랜에게 브리아의 높은 신분을 각인 시키고 있었다. “무하!" “……?"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아름다운 아가씨. 무하는 자신을 아는 듯 친근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았다. 가주가 병상이라 그런지 정숙하게 차려 입은 옷차림과 화려하지 않은 검소한 장식구가 깔끔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정말 오랜만이야! 두건이 아니면 못 알아 볼 뻔했어! 에르가 당신을 봤으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녀석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든." 에르? 무하는 눈앞의 아가씨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못 알아 봤어. 정말 오랜만이군, 레일리아.” 2년 전 그렇게 헤어졌던 레일리아인 것이다. 이제는 이름 뒤에 부인의 호칭을 달렸을 그녀는 그때와는 달리 매우 성숙하고 차분하게 보였다. 하지만 동그랗고 총기 넘치는 브라운 눈동자만큼은 여전했다. 적당한 재치와 지혜, 그리고 천진함이 두루 섞인 눈동자. 에르도 많은 컸을 것이다. 한창 성장한 나이의 소년이 아니었던가. 레일리아는 여전히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 이별을 한 사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그 적당한 넉살은 꽤 느낌이 좋은 것이었다. “며칠 있다 갈 거지?” “글쎄. 일정을 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서." “며칠 있다가 가. 집이 좀 어수선하긴 하지만……." 갑자기 말을 흐린 레일리아는 주위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이번 고비를 못 넘기실 것 같아. 에르가 가주를 이어 받게 될 거야. 그걸 두고 지금 말들이 많아." “아쉽겠군." 레일리아는 생긋 웃었다. 그때의 포기한 듯한 미소와는 다른 당당한 미소다. 2년의 시간은 16살의 소녀를 숙녀로 만들기에 충분한 세월인 것이다. 날씬한 몸매에 제법 곡선 진 몸매가 도드라진 화사한 미녀로 자란 그녀를 보자니 새삼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을 알고 있는 세 사람 중 한명이자 자신의 아내가 될 뻔했던 여자. 그때의 이별은 무하에게도 인상적인 것이었다. 고백을 들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적지 않은 이에게 고백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도망 와, ‘페르노크'를 버리고 ‘무하'로 돌아간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미 과거의 일이다. 그때의 비에 젖어 울던 소녀도,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어 돌아선 소년도 이제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 뒤에서 레일리아를 불렀다. 아쉬운 눈빛을 보내며 그 쪽으로 우아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가야다 레일리아 란 카르민…….’ 자신이 카르민임을 밝히면서 놀랐냐고 걱정하던 천진한 소녀. 유력한 가주 계승권자이면서 여자이기에 일방적으로 밀려났다고 씁쓸해 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에르……. 자신을 두고 쑥덕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모른 척 외면하던 소년. 가주가 되고 싶다며 벌써부터 남자의 얼굴을 보일 줄 알았던 어린 아이. 그들 남매와의 일을 생각하던 무하는 갑자기 아찔해 졌다. 그리고 빠르게 클랜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왜 이 집에 있겠는가? 이곳은 한 가문의 실질적인 본가였고 현재 가주의 위중으로 온 친지가 모이고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 이방인이 끼어 들리는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브리아는 카르민이었던 것이다! 무하의 시선을 느낀 클랜은 터덜터덜 걸어왔다. 이미 알고 있는 표정이다. 하긴 카 등급에서 한참이나 활약했던 그라면 단 셋뿐인 카르민의 문장정도는 가뿐히 외우고 있을게 뻔했다. “나란 녀석은 참 바보다." “……." “겨우 레나를 잊었지만 결국은 이 모양이야." ……그때 지었던 클랜의 미소. 무하는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은 미소라고 생각했다. 무사히 임무를 마친 무하와 클랜은 곤크에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며칠 쉬었다 가도 괜찮았을 테지만 클랜이 원치 않았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길 원했고 이 이상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원했다. 무하는 언제나와 같이 그의 행동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막 배낭을 어깨에 매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브리아가 들어왔다. "돌아가신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예." 클랜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가망 없는 애정이다. 보통 귀족조차 넘볼 수 없는 카르민의 귀공녀가 아닌가? 하지만 이제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아마 평생을 이렇게 보내지 않을까……클랜은 두려운 상상을 해보았다. 브리아는 무하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클랜에게로 달리듯 다가왔다. "어째서 벌써 가세요? 여독이라도 풀리면……!" "이 정도 일정은 저희에게는 하루 훈련과 같습니다. 풀리고 말 것도 없어요." "하, 하지만!" 무하는 천천히 돌아서 방밖으로 나왔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배려해 준 것이다. 그가 나가고 남은 두 사람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 못하고 이래저래 딴말만 해대며 속만 태우고 있었다. "역시 저의 착각이었던 거군 요. 저란 여자는 늘 그래요." 끝끝내 가겠다고 말하는 클랜은 슬픈 눈으로 보던 브리아가 고개를 떨꾸며 힘없 이 말했다. 뜬금 없는 소리에 클랜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의 그런 의아한 눈빛은 브리아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경악과 당혹으로 바뀌어 갔다. "저는 클랜씨가 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바보 같다고 생각하시죠?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느꼈어요. ……비록 제가 클랜씨께 품고 있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호감이라 할지라도……. 우습죠? 저란 여자가 이래요. 혼자 착각에 빠져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헤어나오질 못해요." "레, 레이디 브리아. 그, 그런……." 브리아의 어깨가 안쓰럽게 떨리기 시작했다. 클랜이 당황하여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을 때도 그녀의 말은 계속 되고 있었다. "아버지를 뵈었어요. 시집을 가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다 큰 딸이 아직도 결혼하 지 못하고 혼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클랜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녀는 귀족이다. 그것도 귀족의 영수, 카르민이다. 서둘러 결혼을 한다 해도 자르카 이하로는 가지 않을게 분명하다.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라는 것인가? 제피모에 불과한 자신이 어떤 말을 입에 담아야 한단 말인가? "저는 아버지께 말씀 드렸어요. 저를 사랑해주고, 제가 사랑할 수 있는 분과 함께 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런 분이 있을 리 없으니 기도원에 가겠다고." "……!" 브리아의 고개를 들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고 격해져 갈 때, 클랜은 복받치는 감정에 떠밀려 그녀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저는 어떠한 약속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부유하고 평온하며 화려한 생활……그리고 명예. 그 어떤 것도! 그런 무능한 남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만은 신께 맹세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제가 만난 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고 상냥하며, 매력적인 여자라는 것을. 그런 당신에게 굳게 닫혀 있던 제 마음이 열려졌으며 결국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을. 그 어떤 신 앞에서도 당당하게 맹세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클랜의 어깨를 브리아가 부드럽게 감쌌다. 클랜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쥐어짜듯 간신히 말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브리아." *** 곤크로 돌아가는 길은 평온했다. 카 등급인 둘이 그깟 몬스터 몇 마리를 두려워 할 리 없었고 암살의 위험도 없었으니 돌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무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이는 클랜을 볼 수 있었다.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이리라. 하지만 클랜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그 어떤 물음도 필요 없는 듯 했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났듯 본인이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평생 그녀만을 그리워하든, 잊고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살기로 했든 그것에 대한 평가는 본인 스스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지은 무하가 클랜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장작을 지펴 벌레를 쫓고 있던 그에게 클랜이 수줍은 듯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붙여 왔던 것이다. “우리말이야……." “……?" “리아하고 나……. 평생 서로만 보기로 했어. 함께 일생을 곁에서 지낼 수는 없더라도……마음만은 항상 서로만을 보기로." 무하는 순간 좀 전의 자신의 결론을 잊고, 클랜의 뒤통수를 내리칠 뻔했다. 저 정도의 각오라면 뭔들 못하겠는가? 야반도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클랜 정도 실력이라면 어딜 가든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헌데 뭐가 ‘마음만은'이냔 말이다. 그런 무하의 사정을 모르는 클랜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나서……. 다음에는 우리 둘 다 같은 계층에서 태어나 떨어지지 말고……." 촉촉이 젖어 들던 목소리가 완전히 잠기더니, 결국 고개를 떨꾸고 말았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클랜의 어깨를 가만히 보던 무하는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욕을 뱉으며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 기분 더러운 밤이다. ============================================================================ 소설 파일에 있던 이 뒷이야기를 먼저 읽은 언니가 물었다. "그냥 야밤도주 하면 되지 않아?" 나는 답했다. "그럼 이야기가 안돼잖아." "아아!" ....우린 이러고 논다. 아해의 장-235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선전포고가 오고가기가 무섭게 국경에서는 크고 작은 소모전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전투는 말 그대로 소모전일 뿐 서로의 전력을 쏟아 붓지 조차 않고 탐색을 계속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대대적인 전투에 들어 갈만한 대의명분의 부족이었다. 락아타 제국에서는 타국의 황태자가 암살당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있었고, 욤 제국에서는 황태자가 근위 기사를 물린 것에 대한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적당한 우위에서 선 타협이었다. 귀족들의 기호품의 질과 마법에 대한 발전이 뛰어난 락아타, 신성 마법을 구사할 줄 아는 신관이 압도적으로 많은데다 실질적인 마법에는 뒤떨어지면서도 고대 서적과 유물이 많은 욤. 서로간의 발전 분야가 다른데다가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은 바가지를 씌운 교류를 오갔을 뿐이었지만 이번 사건을 빌미로 우위에 서서 교섭을 하게 된다면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이득이란 귀족에 국한 된 것이지만 말이다. 이토록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전투가 대규모로 확산 될 리 없었다. 아직까지는 생각 있는 귀족이 존재했고 배움이 깊은 제피모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욤에서는 테밀시아가 좌천과 다를 바 없는 변경수비로 떨려나간 것이고, 락아타에서는 황제의 출병에 반발한 황태자가 감금을 당한 것이다. 또한 많은 제피모 출신의 학자들은 난데없는 인사이동으로 중앙에서 밀려났다. 더욱 가관인 것은, 소모전뿐인 전쟁인데다 각 국에서는 서로의 영토를 벗어나지 조차 않았건만 영문 모를 세금 인상이었다. 그것들 중에서 국고로 들어가는 것은 백분지 일도 안 된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힘이 없음을 통탄하며 피눈물을 삼켜야 하는 그들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그러던 중에 소문이 돌았다. 어떻게 시작된 소문인지는 몰랐다. 아마도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고픈 처절한 바람에서 생겨난 소문일지도 모른다. -금안의 ‘지배자’가 돌아오면 모든 게 해결 될 거다. 아주 허황된 소문은 아니었다. 몬스터 사태의 발발 때는 모든 영주민들을 성안으로 이주 시켰으며 하츠민조차 보호한데다 현재에는 이전에 비해 수배나 뛰고 있는 세금이 오르세만 가의 영지에서만 제자리다. 또한 지금과 같은 귀족을 위한 전쟁 때, 최고위 귀족인 카르민 출신이자 한창 전성기인 휴첼 기사단의 마스터인 그가 별 볼일 없는 변방으로 밀려났다는 것은 그가 이 전쟁을 반대한다 는 뜻이기도 했다. 어찌 희망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그는 변방에 밀려났음에도 몬스터를 격파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진정한 '지배자’가 아닌가! 그러한 사정은 락아타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욤보다 더했다. 어째서 타국의 황태자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하여 자신들이 고통을 받아야 하냔 말이다. 다 그 황태자가 멍청해서 근위 기사를 물린 탓이 아닌가! 게다가 여색에 빠져서! 그뿐인가? 황태자의 여자마저도 사라졌다고 하던데 그것이야말로 준비된 암살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에게는 하루속히 감금된 황태자가 일선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뻔한 욤 제국의 도발에 말려들지 않고 냉정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이라고 믿으며. 많은 용병들이 소모전에 고용되었다. 2년 동안 해결조짐이 보이지 않는 몬스터 사태로 인해 지배층에 대한 원성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강제로 징집한다면 되려, 모인 상태로 거병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들을 아예 끌어 모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긁어모으는 대상이 제피모 중에서도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이라는 것이 조금 달라졌을 뿐. 하여튼 대규모로 용병을 포섭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가장 쓰기 편한 것은 용병단이었다. 귀족들은 자기 몫으로 내놓아야 할 군사를 그 용병단을 전체 고용하여 국경으로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현재같이 정국이 불안정하고 민심이 흉흉할 때 자신의 금쪽같은 기사단을 내놓을 골빈 귀족은 절대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용병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죽어갔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전쟁 의뢰를 받지 않는 용병단이 있었다. 대 용병단, 곤크였다. 다른 용병단이라고 해서 소모된다는 것을 뻔히 아는 전쟁 의뢰를 받고 싶었겠는가? 귀족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곤크쯤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들은 귀족을 주 고객으로 삼으며 까다롭고 강한 마스터를 둔 강력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는 대 용병단이었다. 그런 그들에 대한 선망과 질투의 감정이 이제는 강한 원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같은 용병이 아닌가? 누구는 하루살이처럼 소모되고, 죽음조차 하나의 숫자로 매겨지는 무가치한 전쟁에 참여하고 누구는 여전히 귀족의 의뢰를 받으며 지낸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곤크의 근처에 있는 마을에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고 있었다. 전쟁 참여를 당당하게 거부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곤크에 들어가길 원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을 욕하면서도 그들을 선망하는 모순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드리고 있는 현실이란 참으로 우스운 것이다. “어째서 내가 탈락이냐고!” “병신. 실력이 안 되니 떨어졌지.” “방금 나불된 자식! 당장 나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주정은 이제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소소한 싸움은 구경꾼마저 없을 정도다. 하지만 선전포고가 있을 당시 의뢰를 받아 나갔다가 한창 소모전인 지금 돌아온 두 용병에게는 낯설기만 한 현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나오면서 본 싸움이 이걸로…….” “여섯 번째다.” 애써 명랑한 채 웃는 파트너가 마음에 안 드는지 중간에 말을 끊어버리는 무하였다. 클랜은 그런 그의 의중을 알 수 있었기에 웃고 넘어갈 수 있었다. 자기도 답답하게 사는 주제에 남의 일에 민감하게 굴기는……이라고 비꼴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클랜이 마음의 상처라는 것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저런 실력을 가지고 뭘 믿고 곤크에 들어가려 한 거지? 중소 용병단에서의 파 등급정도는 되어야 차 등급으로라도 들어올 수 있는데 말이야.” “가서 말해줘라.” “싫어. 원래 실력 없는 녀석들이 더 발끈하는 법이거든. 꼬마가 꼬마라는 단어 에 반발하듯 말이지.” 클랜은 유들유들하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슬슬 해가 질 것 같지? 여기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가자.” “지금 출발하면 밤이 되기 전에는 도착할 텐데?” 무하의 반문에 클랜은 발작하듯 큰소리를 내었다. “돌아가면 또 일이잖아! 하루쯤은 쉬어야지!” “…….” 클랜은 아직도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는 주점으로 불쑥 들어갔다. 이 마을은 곤크의 용병들과 의뢰인, 용병 지망생의 방문이 쉬지 않는 곳으로 여관이 많았다. 좀더 뒤져보면 조용한 곳이 한둘쯤은 있으련만 클랜은 일부로 활기찬 곳을 찾았다. 조용한 것은 인제 질린다. 주위가 조용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짧지도 않았다. 험란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순탄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 상념이란 마이너스 감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그것이 싫었다. 하지만 조용함을 깨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고 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가 필요하다. 무하는 그리 좋은 상대가 못된다. 그런 그의 심정을 헤아린 걸까? 활기는 좋아하지만 소란은 싫어하는 무하가 아무 런 이견 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여기는 이번에 생긴 곳 같은데? 이 길은 몇 번 다녀봤지만 여긴 처음 봐.” 클랜은 주점 안을 둘러보다 말했다. 주점은 이미 정원 초과였다. 배가 고팠던 클랜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혈안이 되서 테이블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클랜에게 종업원으로 보이는 소년이 다가왔다. “식사를 원하십니까? 숙박을 원하십니까?” “둘 다. 식사를 먼저 했으면 좋겠다.” “보시다시피 자리가 없습니다. 합석도 괜찮다면…….” “괜찮아.” 클랜보다 시력은 떨어졌지만 요령 좋은 소년은 곧 두 사람이 앉을 여유가 있는 테이블을 찾아냈다. 쪼르륵 달려가 합석을 허락받은 그가 둘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빨리 나오는 걸 걸로 많이 갖다 줘.” 클랜은 동화를 하나 던지며 말했다. 물론 그것은 팁이었다. 소년은 잽싸게 그것을 받아들고 씨익 웃으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클랜이나 무하나 이런 식의 모호한 주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번화롭다 못해 번잡한 이곳에서는 지금의 선택이 탁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걸 먹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클랜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할 때 무하는 어깨에 멘 배낭을 의자 밑으로 내려놓고 있었다. 2년 전에 산 이 배낭은 아직까지 쓸만했다. 여전히 무게는 적게 느껴졌고 충분한 양의 짐이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레일리아한테 받았던 보석…….’ 무하는 무심한 눈으로 배낭을 내려보았다. ‘이 안 어디 있을 텐데.’ 땡전 한 푼 없어서 강도를 털어 겨우 버텼던 때가 있었다. 말 살돈이 없어서 야생말을 꼬들겨 타고 다닌 때가 있었다. 레일리아에게서 받은 의뢰비로 한숨 놓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그동안 의뢰비 받은 것도 다 못쓰고 있지만.’ 카 등급의 의뢰비는 바로 밑의 하 등급과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년에 두 번만 일해도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사정상 뭐 빠지게 일해야 했지만. 게다가 무하가 좀 열심히 일했는가? 거의 미친 듯이 일했다. 쓰다 남은 돈을 대충 쑤셔 넣은 것도 모아보면 저택 몇 채는 사고도 남을 거다. ‘언제 한번 배낭 정리나 할까.’ 무하는 자신의 검을 내려보았다. 이참에 좋은 검을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2년 전에 샀던 그저 그런 검으로 여태껏 버텨왔지만 애착이 아니라 무관심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검인 이상 매일 손질을 잊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도 검사인 이상 좋은 검이 탐났다. 게다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혹여 안 좋은 추억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불렀다. 클랜은 자주 그랬다. 그 세심한 배려가 고마울 뿐이다. “검을 살까하고.” “검?” 무하의 허리에 매인 검을 보던 클랜은 장검과 함께 매여 있는 자신의 단검을 돌아보았다. ‘희대의 천재’인 무하가 준 마법검. 매우 고맙게 받기는 했지만, 선뜻 주는 모습에서 그런 검쯤은 오르세만 가에 널려 있는 줄 알았다. 아무리 가출을 했다지만 그 정도 하나 집어오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오르세만 가에서도 흔한 물건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사줄까? 이 검 보답도 하고 싶고.” 무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검은 내가 보답으로 준 것. 그것으로 끝이지 더 이상의 소용은 없다. 너보다 는 내가 여유 있겠지. 내가 사겠어.” 두말할 여지가 없는 거절이었다. 클랜은 자신이 뢰검에 대한 보답을 운운할 때마다 무하가 불쾌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 이상 말한다는 것은 무하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 졸려다 =.= 수정하다가 글쓰다가 밤 샜다 =.= 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 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 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 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 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자고싶다 ...=.= 친구 만나기로 했으니 나가봐야(;ㅡ;) 아해의 장-236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헤에? 여유 많아 좋으시겠네.” 혀가 꼬인 발음. 합석한 여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 술에 잔뜩 절여져 있는 모습이 한두 잔 걸친 게 아닌 것 같다. “누구는 동생 약값 없어 어떻게든 용병단에 들려고 발악하는데……. 참 좋으시겠어?” 잔뜩 비아냥거리는 소리. 근래 들어 지겹도록 빈번히 일어나는 작은 소란 중 하나일 뿐이었다. 클랜과 무하는 서로를 한번 보고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취하려면 곱게 취할 것이지……. 만약 다음 순간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계속 무시해 주었을 것이다. “음식 왔습니다!” “겨우 제대로 된 걸 먹는데? 오! 빨리 나온 것치곤 괜찮지 않아?” “지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이깟 밥이 문제냐고!” 환희하는 클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섭게 쏘아붙이는 여자의 음성이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주점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바로 뒤를 잇는 또 다른 소음. -와장창! 테이블을 뒤집어 버린 여자는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고 사납게 말했다. “이깟 밥이 문제냐니까!?” 잠시 굳어 있던 클랜과 무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형편없이 더러워진 음식을 보았다. 이곳까지 오는데 족히 일주일은 제대로 못 먹었다. 루트를 잘못 잡아 마을을 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건량이나 육포 따위는 널널하게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굶지는 않았지만. 용병들에게 소중한 것은 목숨 다음으로 돈, 돈 다음으로 ‘제대로 된’ 음식이다. 그런데……. “이 계집이!” -짝! 특히나 아침 이후로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클랜의 분노는 더했다. 천성이 너그럽고 상냥한 그였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다. 신성한 음식을! 그것도 용병이 되겠다는 자가! 가뜩이나 휘청거리던 여자는 형편없이 나가떨어졌다. 클랜은 검 집채 뽑아들어 소리쳤다. “너도 검사라 자부하는 자라면 검을 함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거다. 게다가 용병지망생이라면서 감히 음식을!” 꾹꾹 눌러 두었던 클랜의 깊은 한이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터지고 있었다. 의자에 멀뚱히 앉아 있던 무하는 한숨을 쉬며 몸을 뒤로 깊이 젖혔다. 정말이지 되는 일이 없군. “약 값은 없지만 밥값은 있나보지. 그쯤 해둬.” “하지만!” “이러고 있을 틈에 1분이라도 빨리 다시 주문하는 게 어때? 배고프다고.” 무하는 구석에 박혀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자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쓰러진 테이블을 제대로 세웠다. 바닥에는 더러워진 음식물이 나뒹굴고 있었지만 몬스터 사태 때 성벽에서 몬스터의 시체를 옆에 두고 음식을 먹은 일이 빈번한 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기.” 아직도 검 집을 들고 씩씩되는 클랜을 대신해 무하가 종업원을 불렀다. “방금 음식값은 저 여자한테 달고 우린 똑같은 걸로 다시 갖다 줘.” 그리고 잠시 바닥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두개 꺼내 건네며 말했다. “바닥 먼저 치워줘.” 몬스터와의 접전 때는 접전 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왕이면 깨끗한 곳에서 먹는 게 더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몇몇 취객들의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킥. 더러운 곳에서는 못 드시겠다, 이건가?” “오오, 고귀하신 분들. 어찌 이런 곳에 납시셨나이까?” “하하!” 시답지 않은 조롱. 하지만 그들은 곧 입을 다물고 눈만 크게 치켜떠야 했다. 그들이 자리 잡고 있던 테이블에 나무젓가락이 날라 와 깊이 박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도 화를 식히지 못하고 있었던 클랜의 짓이 아니었다. 얌전히 앉아서 차분한 얼굴로 클랜과 여자를 보고 있던 무하의 짓이었다. “정말 시끄럽군.” 아차, 싶었다. 클랜은 얼른 자리에 앉아 허허 웃었다. 지금 무하는 속된 말로 꼭지 돌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얌전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평소에는 무덤덤하던 무하가 진짜 화를 내면……. 클랜은 2년 전 무하에게 말 그대로 ‘비오는 날에 먼지 날리듯’ 맞은 일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기에 원망은 하지 않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몸서리 가 쳐진다. 무하가 진짜 화가 나면 당시 열 받게 한 근원들에게 처절한 응징을 내리기 때문에 몸성히 있고 싶다면 그 근원에 포함되지 않아야 했다. 때문에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는 것이다. 다행히 무뢰한들은 두터운 테이블에 박힌 젓가락, 그것도 나무젓가락을 보고 완전 기가 죽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상태면 무하가 자기 자신을 추스르기에 충분하다. 클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무하의 화난 모습은 충분히 무섭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사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무하가 화를 내면 그때 맞았던 부위가 욱신거리는 것 같다. “너 지금 여자를 쳤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 구석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던 여자가 부어오른 뺨을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변함없이 혀가 꼬이긴 했지만 전에 비하면 듣기 수월한 발음이었다. 발끈했지만 무하를 보고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클랜의 사정을 알리 없는 여자는 이제는 조롱조로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겉만 멀쩡하면 뭐해, 속이 썩었는데. 네가 저 귀족 놈팡이들과 뭐가 달라!” 여자는 킬킬 웃다가 결국 크게 깔깔대며 실컷 웃었다. 어느 새 냉정을 되찾은 무하는 음식을 들고 오고 있는 종업원을 보았다. 얼른 먹고 씻고 쉬고 싶었다. 음식을 본 클랜은 어느새 미소 지으며 화를 푼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하다 싶을 정도로 뒤끝 없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계속 웃던 여자는 열 받아서 씩씩대고 있으리라 생각한 두 남자가 어느새 차려진 음식에 몰두하고 있음을 알고 분개했다. 평소라면 이런 시시껄렁한 시비는 걸지 않았을 테지만 그녀는 오늘 매우 기분이 저조했다. 동생의 병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는데 돈은 없고…….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검술은 차가운 반응과 함께 거절당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외모라도 예쁘면 몸이라도 팔아 보련만 그녀는 평균점에 간신히 도달할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탈락시킨 곤크의 그 남자가 미울 뿐이다. 그녀의 눈에는 지금 음식을 먹고 있는 두 남자나 곤크의 그 남자나 똑같아 보였다. ……결국 결론을 말하자면 그녀는 매우, 많이, 심하게 취한 것이다. “아악!” 비명과 같은 고함을 지르며 다시 테이블을 엎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는 이가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테이블 저편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검은 두건의 남자다. 검은 두건이 눈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땅이 보이더니 천정이 보였다. 동시에 손목과 어깨, 등 쪽에서 진한 통증이 밀려왔다. 검은 두건의 남자가 손목을 꺾어 그녀를 바닥으로 메친 것이다. “경고하지. 한 번 더 날뛰면 며칠 밥 못 먹게 해주겠어.” 많은 면으로 상상이 가능한 협박이었다. 말에 가득 배여 있는 ‘진심’에 질려 고개를 끄떡였다. 클랜은 휘파람을 짧게 부르고 다시 음식에 열중했다. “여기 국물은 얼큰한데? 무하, 얼큰한 거 좋아하지 않아?” “…….” 대답대신 얼른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드는 무하였다. 그런 둘을 두고 다른 이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들었지?” “분명 무하라고 했어. 그치?” “설마…….” 겨우 열 한명 있는 카 등급을 이렇게 쉽게 볼 수 있을 리 없다며 애써 고개를 저었지만 다들 둘의 모습을 뜯어보고 있었다. 용병계의 유일한 카 등급 페어. 그들의 특징 사항이라면 뢰검이라 불리는 마법 단검과 다른 장검 두개를 지닌, 적발의 청안을 가진 클래너. 장신의 마른 몸에 검은 두건을 두른, 말 수 적은 무하. “……하하, 설마.” “그, 그치?”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둘은 일어났다. 이제 먹었으니 올라가 쉴 차례다. “하루 숙박하려고 하는데.” “예. 여기에 이름 쓰시고요, 방은 어떤 것으로?” “독방 둘. 조용하고 외진 곳으로 부탁해.” 이런 주문은 클랜이 맡아서 했다. 무하가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뭐,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둘이 계단 위로 사라진 다음에 사람들은 숙박 기록장이 있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려 들었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단어는 세 개였다. ‘클래너 카 곤크’. 무하는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 밤은 길다. 이렇게라도 몸의 피로를 풀어줘야 했다. 물의 온도의 조절쯤이야 숨쉬는 것보다도 쉬웠다. 오른쪽 팔찌에 있는 정령에게 부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는 오랜만에 설희나 카한 형님 외의 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생각 역시 밝은 쪽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씁쓸하지만 말이다. -리아하고 나……. 평생 서로만 보기로 했어. 함께 일생을 곁에서 지낼 수는 없더라도……마음만은 항상 서로만을 보기로. -그리고 나서……. 다음에는 우리 둘 다 같은 계층에서 태어나 떨어지지 말 고……. “멍청이!” 무하는 짧게 욕설을 뱉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몰아쉬다가 천천히 욕조 속으로 잠수했다. 물 속에서 그의 짧은 은발이 부드럽게 유영한다, 그들이 부럽다. 마음이 통할 수 있었음에 부럽다. 서로만을 바라보기로 했음에 부럽다. 다음 생애조차도 사랑하기로 맹세했음에 부럽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싫다. 다음 생을 기약하고 현생은 눈물로 얼룩지게 함이 싫다. 무엇보다도 용기 없는 그들이 싫다. 레일리아는 카르민인 자신을 차고 용병인 자신을 따라오려 했다. 그런 대담성과 용기를 갖추고 있었다. 돈과 명예보다 사랑하는 이의 옆에 있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브리아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클랜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욕조 위로 불쑥 나온 무하는 무심히 의중을 입에 담았다. “그게 아니라면 클랜의 짐이 되기 싫다는 것일 수도.” 클랜을 위해서는 차라리 후자편이 좋을 것이다. 무하의 차분한 녹안에 싸늘하면서 뜨거운 무언가가 어렸다. “이런 결론은 싫어. 절대로.” 천천히 욕조 밖으로 나와 욕의를 걸쳤다. 그러다 왼쪽 가슴을 쓸었다. 심장을 간신히 빗겨간 상처의 흔적. ‘그녀’의 배신의 각인. “……절대로 싫다.” ========================================================================== 구루 공유를 했다. 베르세르크를 주고 (무지막지하게) 하드한 (야)애니를 받았다. 두근두근(순진한척...ㅡㅡ;) ..................................................5분만에 껐다.(25분짜리) 당시 배가 고팠다. 하지만 토할 것 같아서 먹지 못했다. 다음 날에야 겨우 무언가를 먹을 수 있었다. 다음에는 좀더 소프트한(?) (야)애니를 받아야 겠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벗) 당시 혜영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악의 없이 웃는 녀석이 비틀린 내 눈에는 무지 얄밉게 보였다. 애니를 지우는게 아니었다(휴지통까지 말끔히 비운 상태-이럴때만 빠르다.) 좋은 거라며 보내서 보게 하는 건데...ㅡ_ㅡ(물귀신 벗) 후후후... 혜영아. 다음 기회를 꼬옥 노리마. 나 뒤끝 엄~청 무지, 어마어마하게 긴거 알지? ㅡ_ㅡ(방향 어긋난 화풀이?) 아해의 장-237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황제는 불안했다. 자신의 자식 중에서는 유일하게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황태자의 죽음으로 잠시 정신을 놓아 황제의 개인 사병은 물론이거니와 근위 기사의 대다수를 전방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아들의 죽음임에도 혼절할 때까지 울었던 에일라야가 처절하게 복수를 울부짖었기 때문에 행한 일이었지만 막상 이성을 차리고 보니 성급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현명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았지만 수십 년이나 옥좌를 지킨 황제였다. 귀족이 황제에게 충성하는 존재가 아닌 것쯤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경솔했어. 경솔했음이야.” 이제 와서 되돌기에는 너무 늦었다. 황제의 탄식이 계속 되고 있는 그 순간 다른 장소에서의 일이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다.” “이 정도 규모의 움직임은 마스터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현재 마스터께서 부재중이시기 때문에…….” “나는 기다리고 있겠다. 나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판단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저희를 위협하시는 겁니까?” 나름대로 공소했던 말투가 싸늘하게 변하자 고압적이던 사내의 음성이 누그러졌다. 솔직히 아쉬운 쪽은 그쪽이었다. “충고하는 거다.” “판단도 저희가, 그 책임도 저희가 지는 겁니다. 외부인의 충고는 필요 없습니다. 또한! 공자의 지위는 저희의 판단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에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무례하군!” 마스터보다야 다루기 쉽겠지만 그 부관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그 누구보다도 마스터의 오만이 밴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공자의 지위가 대(大) 귀족 카르민의 일환인 자하라 가의 ‘라’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뿐. 공자께서는 아직 ‘장’의 호칭을 달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 불쾌하게 인상을 찌푸리는 거만한 공자의 얼굴을 내심 즐기며 부관은 싸늘한 얼굴 그대로 말을 이었다. “또한 최근에는 가문 내의 입지가 약해졌다는 정보를 입수한바 있습니다. 저희 곤크는 정보에 꽤 밝죠.” “누가 그딴 걸레 따위에게 밀려 난다더냐!” “저는 ‘왜’ 입지가 약해졌는지 까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런 능구렁이 같은 작자가! 공자라 불린 자하라 가의 라, 비레오가의 얼굴은 그의 미숙함을 드러내듯 발끈한 기색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부관은 조소를 품으며 이어 말했다. “그럼 공자께서는 2년 전 집에 들인, 뮤비라 경께 밀려…….” “입 닥쳐라! 건방진 것도 정도껏이다! 지금 네가 입에 담은 모욕만으로도 목을 치기에 충분하거늘!” 부관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감돌았다. 부드러운 성질의 것이 아닌 경멸과 냉기가 도는 섬뜩한 성질의 것이었다. “저 또한 2년 전 회색 고향에서의 일을 들어 알고 있지요.” “……회색 고향이라니?” 냉정한척 되물었지만 역시 그는 경륜이 부족했다. 거친 용병생활을 지내다가 부관에 오른, 한마디로 산전수전 다 겪은 부관에 비하면 노인 앞에서 세상 다 산 얼굴 하는 꼬마와 같았다. 한마디로 같잖다는 것이다. “말했지 않습니까? 저희 곤크는 정보에 꽤 밝다고.” 부관은 이쯤에서 한수 양보하기로 했다. 협박조에 발끈하긴 했지만 상대는 카르민이다. 적당히 물러나야 한다. “물론 그만큼 입도 무겁지요.”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접대의 미소를 짓는다. “그, 그럼 좋은 답을 기다리고 있겠네. 또한 이 의뢰가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해서…….” “의뢰 보안은 당연한 겁니다.” 안심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품에 넣어둔 의뢰서를 꺼냈다. 혹여 의뢰를 받지 않는다 해도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처음에는 구두로 계약조정이 오간다. 그 뒤에 반 이상의 타협을 보고서야 의뢰서를 내놓는 것이 관례였다. 원래 귀족들은 뒤가 늘 구리니 말이다. 의뢰서가 부관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 비레오가가 갑자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관은 그 모습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쥐새끼가 있지 않은가!” 비레오가는 상당한 검술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는 냉큼 밖으로 튀어나갔다.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은 후에 물을 생각이었다. 당장 급한 불 먼저 꺼야 하는 것이다. 깨진 창문을 보며 부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계속 모르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의뢰서를 받는 즉시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의뢰서를 받은 뒤 첩자를 죽인다면 그 보상을 받게 되지만, 그 전이라면 단순한 단 내의 문제로 치부되어 그에 따른 보상이 없다. 뼈 속까지 용병인 부관은 공짜로 일 해줄 마음이 절대 없었던 것이다. “저 애송이 솜씨로는 무리일 테고. 나중에 와서 또 항의하는 거 아냐? 그래 봤자 지. 아직 나한테 의뢰서가 넘겨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첩자 제거의 의무가 없거든. 공짜 노동은 딱 질색이야.” 부관은 어깨를 으쓱이며 창 밖을 보다가 순간 생각 난 듯 손뼉을 딱 치고 말했다. “아! 유리창 파손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서를 만들어야지.” ……그는 절대 손해 보는 남자가 아니었다. 비레오가는 자신의 검술이 근위 기사보다 약간 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병으로 치면 간신히 카 등급이 될까 말까 정도? 그런 자신이 고작 첩자 따위 때문에 이렇게 고전을 겪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첩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소모품에 불과한 것. 물론 그들의 고도의 변장술과 은신술은 인정 할만 하지만 실력은 자기보다 한참 하위일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따라 잡지조차 못한데다가 점차 그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지금 현상은 절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젠장!” 검으로 제압하건 뭐건 따라잡고 나서의 일이 아닌가. 벌써 성벽이 가까워졌다. 이대로라면 확실히 놓친다. 성벽 근처에는 바로 푸르름의 고향이 있으니! 마음이 급해서인지 비레오가는 발을 헛딛고 지붕에서 떨어져 버렸다. 물론 바로 자세를 잡았기 때문에 부상은 면했지만 첩자를 놓친 건 확실했다. “뭐, 뭐야?” 갑자기 떨어진 그 때문에 놀랐는지 퉁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두건을 두룬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검은 두건? 비레오가는 황급히 물었다. “무하인가?” “……그런데?” “지금 첩자가 저 방향으로 달려갔다. 잡아다오.” 그 말에 곤크를 목적으로 한 첩자가 도망쳤다는 소리인 줄 알고 황급히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성벽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검은 옷차림을 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이해가 안 가는군. 곤크에서 뭘 캐낼게 있다고?’ 생각을 길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힘껏 발을 튕김과 동시에 무하의 몸은 화살과 같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 그것은 무하가 평소에 자신의 능력을 백분 발휘하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뒤에서 클랜이 뒤따르고 있는 듯 인기척이 느껴졌다. 클랜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빠르게 쫓아오는 또 다른 기척도.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감각이 그 와중에도 그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뒤쪽은 신경 쓰지 않고 막 성벽을 넘는 첩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막 밑으로 뛰어내린 첩자를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붙잡은 것이 찢겨져 놓치고 말았다. 무하는 곧장 밑으로 따라 뛰어내렸다. 소속감이 강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자신의 이름 뒤에는 ‘곤크’가 붙는다. 그럼 그것에 대한 의무는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검을 뽑을 틈도 없었다. 상대는 한낱 첩자라 보기에는 무리가 따를 정도의 실력자였다. 무하조차도 간신히 따라잡을 정도였다. 겨우 그보다 한발 앞서 나왔을 때, 무릎을 곧추세우고 그의 복부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충격을 먹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도 빠르게 몸을 일으키는 것이 확실히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다. 보통 이정도면 기절했었는데 말이다. 목을 가격할 생각으로 손날을 세웠다. 빠르게 휘둘렀으나 상대는 이미 한발 뒤로 물러선 상태였다. 덕분에 무하가 가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복면뿐이었다. 허공에 찢겨진 검은 천이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 첩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당혹스러운지 일그러져 있지만 의외로 준수한 생김이다. “……!” 무하는 어째서인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공격하려 들었던 손을 그대로 정지시켰 다. 첩자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던 것이다. 2년에 걸친 용병 생활로 인해 자신과 안면이 튼 사람은 많지만……뭔가 오래전의 인연 같아 손이 멈춰졌다. 그에게 있어 오래 전의 인연이라면 페르노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때. 그때 성벽 위로 클랜과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제야 도착했나 싶지만, 실제로는 무하와 첩자의 접전이 짧았던 것이다. 첩자는 다급한 얼굴로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댔다. 하지만 뽑는 것은 주저하는 듯 했다. “비켜! 곤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낮은 저음의 목소리. 무하 또한 다급해졌다. 낯이 익다. 공격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녀석이다. 누구지? “비켜!” 첩자는 숲을 향해 뛰었다. 한 박자 늦게 무하가 따라붙었다. 그 와중에 첩자는 필사적으로 목을 감싼 천을 끌어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듯이. 이상한 일이다. 첩자한테 얼굴쯤이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지 않던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상 얼굴에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텐데? 무하는 자신이 페르노크였을 때의 극소수의 만남들을 일일이 떠올렸다. 누구지? 가느다랗고 긴 금발……. 고민하다가 일단 잡고 보자는 생각으로 검 집채 뽑아들던 무하의 눈에 첩자의 검이 들어왔다. “노민?” ========================================================================== 우울하다. 일전의 나를 울적하게 만들었던 신뢰라는 놈이 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언니, 믿고 싶어요. 정말로 믿고 싶단 말입니다. ...... 어쩌면 무기한 연중이라는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혜영아. 신경써줘서 고맙다. 감사의 연재^^ 나 착하지? (우엑...ㅡㅡ;) 아해의 장-238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물론 노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저 검은 분명 그에게 선물한 마법검. 일생 떨어뜨리지 않겠다던 그의 검이 아닌가? 노민이 타인에게 그것을 뺏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무하의 약간 큰 중얼거림은 간신히 첩자의 귀에 들렸다. 그가 바싹 긴장하여 촉각을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숲이 바로 앞이기에 약간 망설이던 그는 이내 뒤를 돌려 무하를 보았다. 무하의 어깨너머로 달려오고 있는 클랜과 목표였던 비레오가의 모습이 보여 잠시 망설였지만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이대로는 몸을 피하기 힘들다. 비레오가를 따돌리는 건 쉽지만 이 두건의 사내가 달라붙어서는 실패할 공산이 크다. 그의 포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주군을 아시오?” “주군?” 무하는 놀라 되물었다. 요크노민이 검을 빌려줄 정도라면 굉장히 아끼는 수하일 것이다. 이정도의 실력을 갖춘 데다 ‘주군’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의 충성심을 가진 수하가 있다니. 노민 녀석도 노력하고 있구나! “주군을 아신다면 포기해 주시오. 한시가 급하오.” “알았다. 노민에게 전해라. 무하가 언제든 도울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 말을 끝낸 무하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동시에 첩자의 발밑에 금빛 마법진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 빛이 급격히 진해지자 다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런 그의 귀에 비레오가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이다! 당장 공격해!” 하지만 무하는 그 소리를 못들은 듯 가만히 첩자를 보고 있었다. 첩자의 눈동자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 당신은 페……!” 미처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텔레포트 마법이었다. -퍽! “일부로 놔줬지! 개자식!”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멍하니 첩자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다가 무방비하게 한대 맞고만 무하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입술이 찢어진 것이다. 그것에 발끈한 클랜이 얼른 무하의 앞을 막아섰다. 처음 보는, 귀티 나는 남자는 금방이라도 무하를 찢어죽일 듯이 분노하고 있었다. 멍하니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무하는 이내 입술을 훔치며 일어났다. 얼떨결에 한대 맞고 말았지만 그리 괴이치 않아하는 듯 보였다. “가자, 클랜.” “첩자를 놔주다니! 네 놈도 한 통속이구나! 당장 네 놈들 마스터에게 항의하겠다!” 무하는 그제서야 남자의 존재를 알아챈 듯 ‘아!’ 하고 감탄성과 같은 한음절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대뜸 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당신을 잊을 뻔했군.” -퍽! 한걸음 정도 물러났던 것으로 끝났던 무하와는 달리 그는 몇 걸음이나 물러나다가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무하는 당한 것만큼만 돌려주는 착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당한 것의 몇 배를 되돌려 주는 성격이었다. 비레오가는 얼얼한 뺨을 만져보다가 발끈하며 일어났다. 이런 모욕이! 천한 용병 따위가! 하지만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무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저 마법이 무슨 마법인지 몰랐어. 그래서 ‘경계’했을 뿐이야. 저것이 공격 마법이라 나에게 부상을 안겨줄 위험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잖아?” 거짓말이다! 클랜은 단박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희대의 천재’인 그가 공격 마법과 이동 마법을 구별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을 티낼 정도로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신의 웃음을 비레오가에게 보이지 않도록 했을 뿐. “마법은 시전 중에 건드리면 깨지게 되어 있어!” “시전 중에 건드렸다가 폭주하는 마법도 있다. 신중해야 살아남는 게 용병이야.” “그 ‘신중’이 지나쳐 ‘아둔’이 돼 버린 거다!” “그렇다면 ‘신속’이 지나쳐 ‘성급’이 돼 버린 네 녀석이 잡지 그랬나?” 차마 자신의 실력부족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이를 가는 비레오가를 무심한 눈으로 보던 무하는 몸을 돌려 멀찍이 보이는 곤크의 성벽을 향해 걸었다. 어지간히 멀리도 왔군. “네 놈 마스터에게 알릴 것이다. 무하라면 카 등급 페어의 일환! 그 정도 마법을 파악하지 못할 리 없어!” 화풀이 할 곳을 찾지 못해 발악하는 비레오가에게 무하는 마지막 일침을 날렸다. “난 당신에게 고용된 적 없어.” 클랜은 한참 걸어와서 물었다. “네가 한 거지, 텔레포트?” “…….” “뭐, 곤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로딘이었어.” “응?” “정말 강해졌군. 단 2년 만에.” “아는 녀석이었던 거냐?” “주군이라니.” “에?” “정말 잘됐다, 노민. 정말로.” 클랜은 무하가 혼잣말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머쓱히 웃었다. *** 자하라 가의 한 쪽에 자리 잡은 아담한 처소. 그 처소의 주인이 그 안에서 지금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아니, 생각에 잠겨 있다고 봐야 할까? 아니, 그도 아니다. 그는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정좌하고 앉아 있기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의 키는 꽤 커 보인다. 적당히 벌어진 어깨는 마른 축에 속하는 그의 몸을 왜소하게 보이지 않게 해주고 있었다. 또한 막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헐렁하게 걸친 옷 사이로 물기를 머금고 있는 탄력 있는 근육이 남성적 강함들 드러내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물기에 젖어 더욱 짙게 보이는 남색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여 등을 덮고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곧은 이마와 날카로운 콧날이 이지적으로 보인다. 굳게 다물어져 있는 붉은 입술은 남색 머리카락과 보기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차분히 눈을 감고 있는 그 모습에서 아직 어린 청년의 것이라 보기 힘든 위엄과 의지가 엿보인다. 그런 그의 옆에 아름다운 적색 이미지의 미인이 앉아 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 애틋해 보인다. 반쯤 뜬 동공 없는 눈동자는 루비보다도 붉은 적색으로 일렁이고 있다. 연한 붉은 기운이 도는 도자기와 같은 피부를 덮고 있는 비단 같은 붉은 머리카락은 금방이라도 화기를 머금을 듯 하다. 그런 둘의 뒤에 두 남자가 서 있다. 진중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와 유쾌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다. 둘의 얼굴은 기다림에 지친 듯 초조함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차분한 분위기가 흐르는 앞의 두 존재와는 다른 모습이다. 둘은 결국 속삭이듯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많이 늦지?” “아무래도 미행을 하는 거니까요. 만약 주군의 예상이 맞다면 곤크까지 가야할지도 모르니까요. 게다가 탈출하고 오는 시간도 있을 테고.” “흐음.” 둘은 동시에 주군의 모습을 힐끔 본 뒤 다시 소곤거렸다. 그들의 주군은 언제나 관대했다. 이정도 수다는 그에게 있어서 무례 축에도 못 낀다. 주군은 능력을 우선시 했으며 항상 냉철과 이성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에 있어서는 엄했지만 수하의 실수는 너그러이 넘겨줄 줄 알았다. 게다가 비록 비합법적인 수단을 써서 오른 것이라고는 하나 카르민의 위치에 올랐으면서 자신의 꿈을 이룩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만 할 뿐,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 모습이라니. 알면 알수록 빠져든다. 또한 신기한 분이기도 하다. 주위에 자신들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저 붉은 새. 털 하나하나가 불꽃으로 이루어진 듯 보이는 저 신묘한 새는 주군의 말만을 듣고 주군 또한 그 새의 말을 알아듣는 듯 보였다. “저 새는 도대체 뭘까요?” “영물인 것 같긴 한데 말이야. 저 새를 대하는 주군의 모습이 꼭 연인을 대하는 듯 보인단 말이야?” “형님 보기에도 그래요?” 그때 붉은 새의 고개가 둘을 향해졌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고작 새의 시선임에도 왜 움츠려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주군의 입이 열렸다. “불칸. 나의 수하들을 위협하지 말아줘.” 새의 고개가 다시 주군을 향해졌다. 무표정에 가까운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의 얼굴이 일순 깨지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후.” ……정말 알 수 없는 주군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바닥에 황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하나의 마법 진을 형성했다. 강렬한 마나의 비틀림이 이어지면서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싹 긴장하여 검을 뽑아들고 있던 두 수하, 아레와 테사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검을 내려놓았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들의 주군, 요크노민도 고개를 돌려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보았다.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이 이내 밝은 미소로 덮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군.” 마법진과 함께 나타난 남자는 곧장 요크노민을 향해 왼쪽 가슴에 오른 손을 얹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인사했다. 가늘고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이 숙여지는 고개에 따라 흘러내렸다. 요크노민은 그의 모습을 따뜻하게 보다가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로딘.” 2년 전의 결투로 시종이 된 로딘. 그때의 철없고 교만했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보래야 찾을 수 없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의 표본이었다. “이 검을 되돌려 드리기 위해서라도 돌아와야지요.” 로딘은 자신의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을 끌러 공손히 받쳐 올렸다. 그것을 받아 허리에 맨 요크노민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들어야 할 말이 많을 것 같구나.” ============================================================================ 핸드폰은 매일 꺼놓고, 켜져 있어도 받지 않는다.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고 음성을 남겨도 답이 없다. 메일을 보내도 답메일 한통 없고 주위에서는 사기 당한거라 말한다. ....당사자만이 내 말을 알아 들을 겁니다. 전에 보냈던 메일과 오늘 보낸 메일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더군요. 저도 나름대로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소식 끊고 지냈던 친척들을(백이냐?) 포섭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만나게 될지도... 그 전에 아직도 믿으려고 애쓰고 있는 저에게 연락 주십시오. 독자라 말씀하셨으니 늦어도 열흘 안에는 이 글을 보시겠죠? 열흘 안으로 답이 안오면 아해의 장 무기한 연중 들어갑니다. (출판사에 말해 출판도 안하는 쪽으로 추진할겁니다. 하려면 확실히 해야하니까) 그래도 연락 안 주시면 정식으로 공지 올리겠습니다. 그럼. 아해의 장-239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찢겨진 복면과 갑작스런 텔레포트 마법으로 인한 등장. 이 두개의 키워드만으로도 많은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기에 무사함을 알 수 있었지만 좀더 로딘의 몸을 살펴보았다. 기사라는 존재는 보통 인간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이 인내심과 절제력이 강했기 때문에 세밀한 관심이 필요했다. 다행히 로딘은 격한 움직임으로 약간의 땀만 흘릴 뿐, 고통으로 인한 증상은 없었다. 안심한 요크노민은 의자를 권하며 먼저 앉았다. “주군의 예상대로 그자는 곤크로 갔습니다. 대량의 용병을 끌어들이기로 구두 계약을 한 것까지는 확인 했습니다만 그자의 실력이 생각보다 높아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자는 카 등급 실력을 갖췄다고 하더구나. 또한 형님의 존재로 입지가 약해져 약이 바싹 올라 있는 상태지. 좀더 주의해야 될 것이다.” “예. 헌데 그자와 곤크의 부관 사이에서 신경 쓰이는 대화가 오갔습니다.” “……?” “의뢰를 확실히 하기 위해 위협을 가하는 그자에게 곤크의 부관이 한 말입니다만. 2년 전 회색 고향에서의 일을 들어 알고 있다고. 그러면서 입이 무겁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런 신경전까지도 머릿속에 담아둔 로딘의 세밀함은 무시할 것이 못됐다. 물론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감도 잡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말은 굳이 알려봤자 소용없음이 뻔함에도 로딘은 서슴없이 그런 판단은 주군에게 맡겼다. 요크노민은 회색 고향이라는 단어에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던 그가 로딘에게 재차 확인했다. “2년 전, 회색 고향에서의 일이라 했단 말이지?” “예.” 요크노민의 입술이 슬쩍 옆으로 올라갔다. 짐작 가는 게 있는 것이다. 페르노크, 자신의 최초의 지기는 정녕 그에게 소중하고도 고마운 존재다! “잠시 형님에게 다녀와야겠다. 로딘. 수고했다. 그만 쉬도록 해라.” “예.” 문 밖으로 나가려는 요크노민을 자리에 일어나 공손히 배웅하던 로딘이 불렀다. “주군.” “……?” “무하라는 남자를 아십니까?” 뜻밖의 질문. 그것은 반가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무하! 검은 두건을 두른……?” “예. 그가 주군께 전하라한 말이 있습니다.” 수하들의 앞에서 만큼은 냉철한 모습을 잃지 않던 요크노민이 잔뜩 흥분해서 로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기가 언제든 도울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요크노민의 눈동자에 진한 그리움이 고였다.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데는 지기의 도움이 컸다. 도움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꿈을 최초로 인정해 주었을 뿐 아니라 검을 알려주었고 되는대로 살아온 그에게 꺾기지 않는 법을 알려주었 다. 또한 스스로도 감당 못했던, 깊게 패인 열등감을 메워주었다. 그뿐인가? 그를 지키지 못한 스스로의 무력감에 강해질 수 있었고 자신의 영원, 불칸을 만날 수 있었다. 로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가 저를 탈출 시켜 주었습니다. 저에게 빌려주신 주군의 검을 보고 말입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고문을 당하고 있었을 겁니다. 저에게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해 준 이가 그였습니다.” 요크노민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는 나의 지기다.” 믿을 수 있고 믿음을 줄 수 있으며,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하게 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다. 전시가 되면서 뮤비라는 어느 때보다도 바빠졌다. 그의 입지가 넓어지면서 생기는 부수적인 노동이 아닌 그림자로써의 노동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그것을 노동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서재에 틀어박혀서 얼굴 보기 힘든 남편을 처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카시안 은 멀찍이서 걸어오고 있는 시동생의 모습에 얼른 몸을 돌렸다. 누구에게 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고 남들의 눈에만큼은 행복한 부부로 있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녀가 사라지자 뮤비라는 펼쳐 두었던 자하라 가문의 문서를 덮었다. 자신이 야심을 펼치기 위해서 이곳을 왔다는 것을 알고, 이해해주며 자신만의 비밀장소를 만들어주기까지 했던 카시안이 근래 들어 묘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에게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굳게 닫아 두었던 서재 문을 기척 없이 열고 그 틈으로 한없이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그녀의 모습에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석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아기에 열중했을 테지. 그랬다면 지금처럼 그녀의 눈을 피해 간신히 일을 하며 밤을 지새우는 일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석녀가 아니었다면 그녀와 최소한의 부부 생활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생을 아들처럼 사랑하고 있긴 하지만 정말 자신의 핏줄기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동생 외의 누군가를 혈육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무리였다. 때문에 따로 첩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깊게 한숨을 쉬어보았다. 루카다로부터 속속 도착하는 정보와 자신이 감지한 정국의 형태를 감안하며 여론을 조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그 혼자였다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똑똑. “형님.” “들어와라.” 지쳐 보이던 뮤비라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담겼다. 아들과 같은 동생인데 오죽하겠는가. 또한 현재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정보 길드를 꿈꾸며 각 정보에 밝으며 여론 조작에 용이한 인력마저 수하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요크노민은 약간 열려 있는 문을 보고 형수의 존재가 방금까지 형을 압박하고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실재로 피곤해 보이는 형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괜찮으십니까?” 근심 섞인 어조로 물어오는 동생을 보자니 뿌듯한 웃음이 어린다. 이제는 어른 티 가 난다. 전에는 늘 흔들리는 차가운 눈을 하고 아무도 믿지 않았던 작은 아이였는데……. 강해지겠다며 울던 꼬마에 불과했는데. 2년이란 세월이 그리도 길었던가. “괜찮다. 앉거라.” 뮤비라는 소파로 걸어가며 말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푹 묻으며 눈가를 문지르는 모습은 어딜 보아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가져온 소식이 형에게 기운을 불어주었으면 할 뿐이다. “희소식이 있습니다.” 뮤비라는 기대와 신뢰 어린 눈으로 동생을 보았다. 그것이 요크노민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가 움직였습니다. 예상대로 곤크였습니다.” “호오!” 뮤비라의 눈이 번뜩였다. 드디어 한 발을 내밀 때가 온 것이다. “또 다른 희소식이 있습니다. 이용하기 나름인 정보죠.” ‘이용’을 잘 할 자신이 둘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물론 그 자신감은 실력과 능력 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가 2년 전 회색 고향에서 ‘무언가’를 벌였다고 합니다. 나름대로의 확실한 정보통을 가지고 있는 곤크의 부관이 입에 담은 말이고 그에게 먹혀들었으니 확실합니다.” “무언가?” “2년 전 회색 고향에 들어갔다가 살아온 용병이 적지만 제법 있습니다. 그들은 카르민의 일환인 가야다 가의 란의 호위로 그곳을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란의 이름은 레이디 레일리아. 기억나시는 게 없으십니까?” 같은 계층인 카르민의 행적쯤이야 민감하게 체크해왔다. 때문에 뮤비라는 기억을 더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답을 꺼낼 수 있었다. “페르노크님과 약혼 건이 오갔던 레이디군.” 요크노민은 예리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때가 그녀가 회색 고향을 찾아간 시기. 즉 2년 전이었죠.” 뭔가 감이 잡힐 듯 말 듯한 얼굴로 뮤비라는 침착하게 동생을 보았다. 아직은 그 에게 전해진 단서가 적었다. “그때 암살 기도가 있었다는 것은 생존한 용병들조차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 “그녀를 직접적으로 호위했던 기사 둘과 카 등급의 용병 둘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죠. 물론 가신인 기사들은 함묵했고 용병들 또한 침묵했기에 완전히 어둠에 묻힌 사건입니다.” 그랬다. 분명 당사자인 그녀와 기사 둘, 용병 둘만이 알고 ‘있었던’ 정보다. 그것은 무하와 요크노민의 인연이 없었다면 지금껏 계속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둘은 둘도 없는 지기였고 서로의 최대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요크노민은 이 소중한 인연을 한시도 감사히 여지기 않은 적이 없었다. 뮤비라의 얼굴에 천천히 진한 웃음이 배였다. 이는 실로 일거양득인 정보다. 그는 가주가 되기 위해 주군의 곁을 떠나기로 한 남자다. 비록 외사랑이라지만 자신의 영원이라 확신한 존재의 곁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렇게까지 해서 차지하고자 한 가주자리다.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보는 ‘진짜’ 가주 계승권자가 없을 리가 있겠는가. 마인 카산은 관심 없어 한다지만 자신의 자리일 것이라 추호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라, 비레오가가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특출 난 라이벌이 없었던 그는 평균 이상의 능력을 소유하지 는 못했다. 물론 검사로써의 그의 능력은 제법이었으나 그 정도로 가주가 될 수는 없었다. 가주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쪽의 능력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가 일생을 두고 쌓아온 실적과 지지기반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뮤비라정도의 ‘불청객’만 오지 않았더라도 그가 가주가 되는 것은 불변했을 것이다. 뮤비라는 차근차근 가문 내에서의 자신의 인지도를 키워나갔다. 비레오가가 귀찮다 마다하는 모든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으며 굳은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완벽하고 훌륭하게 해냈음은 물론이었다. 그런 모습이 한동안은 제피모주제에 카르민의 여자를 취한 그가 스스로 몸을 낮추는 것으로 비쳤었다. 하지만 비레오가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역할과 책임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사이엔가 그에게 서류를 가져오는 이들이 줄었고 자신이 손을 댈 수 있는 범위조차 줄었다. 즉 그의 영향력이 작아진 것이다. 검에 취해 있다가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비레오가는 얼른 자신의 책임을 되돌려 받으려 했지만 문제는 그의 능력이었다. 뮤비라가 순순히 그 책임을 넘기기는 했지만 그것이 도리어 그에게 독으로 작용한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좋은 것은 깨닫지 못하지만 나쁜 것은 매우 빠르게 깨닫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무에만 취해 있었던 비레오가가 일가의 세무와 행정을 맡기에는 무리가 따랐고, 어떻게 겨우 해낸다 해도 그것은 뮤비라가 했던 것에 비해 형편없었던 것이다. 비레오가는 주위의 불만을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그는 행정과 관련된 소소한 서류상의 문제는 뮤비라에게 맡기고 검술로써 해결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쪽을 택했다. 억지로 세무와 행정 따위의 책임을 떠맡고 있는 다면 자신의 인지도가 오히려 악화 될 것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뮤비라로서는 좀더 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서류를 도맡아 하길 바랐지만 이정도로도 충분했다. 결국 ‘문’쪽은 뮤비라가, ‘무’쪽은 비레오가가 처리하면서 팽팽하게 세력싸움 을 하는 양상이 되 버린 것이다. 그것이 벌써 2년째 유지되어 왔다. 서로에게 치명타를 가하지 못하고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이 말이다. 뮤비라는 드디어 히든카드를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물론 증거가 없기에 지금 당장 써먹을 수는 없지만 ‘타이밍’을 잘만 맞춘다면 그 효력이 배는 되리라. 요크노민은 뮤비라가 내리는 지시를 받아들고 웃으며 나갔다. 형의 성공은 기쁘다. 형의 성공 자체로도 기쁘고, 그 영향으로 이익을 얻어낼 자기 자신 때문에도 기쁘다. 또한 형의 성공으로 인해 절대적인 지지기반을 다질 테밀시아 때문에 기뻤고 자신의 형의 성공으로 인해 기뻐할 지기 때문에 기뻤다. 물론 아직은 이른 감이 없지 않은 기쁨이지만 요크노민은 그것을 충분히 만낏 했다. ========================================================================== 자야지... 어제도 세시간밖에 못잤는데... 그러고 보니 그제도... 그러고 보니 그그제도... 나... 용케 버티는군... 왜 전화는 안울리지... 하하... 아해의 장-240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요크노민이 나간 뒤, 로딘은 한참동안이나 제 자리에 서있었다. 아레와 테사라가 그런 그에게 한차례씩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는 뜻이다. 아레와 테사라는 그런 그를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슬쩍 할일을 찾아 나갔다. 로딘은 둘이 나가고도 한참 있다가 한숨과 함께 상념에서 벗어났다. “분명 페르노크였어.” 시동어 조차 없는 텔레포트를, 그것도 고급의 것을 해낼 수 있는 이는 그가 아는 자에 한해서는 페르노크 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군과 지기 사이라면 야 두말할 여지도 없다. 어째서 그가 용병 길드에 있는 것인가. 그가 마법 수련을 위해 은신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믿은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용병이 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자신의 기사와 펼친 결투에서의 기량은 무시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보다 강했다.” 자만은 버린 줄 알았는데. 로딘은 쓰게 웃었다. 엄격한 스승의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마친 그는 20세의 나이에 당당하게 기사단의 일환이 될 수 있었다. 기사란 성인이 된 귀족 남성이 약간의 돈을 쓴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감투였지만 기사단의 일환이란 그렇지 않았다. 단에 들어가야지만 비로소 진짜 기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들어가는 과정은 까다롭고 청렴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비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순수한 힘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최연소 기사의 출연에 다들 감탄을 아끼지 않았지만……스스로는 아직도 멀었다 생각해 왔는데. 로딘은 마법사인 페르노크에게 눌렸다는 자괴감보다는 그런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직도 거만하게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꼬마에 불과했던가.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다고 하지만 반성은 그렇지 않다. 로딘은 고개를 거세게 흔든 뒤, 차분해진 눈동자로 어딘가를 곧게 주시했다. 의지 서린 눈동자. 그것은 그의 주군의 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로딘은 요크노민의 처소에 마련된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기사단으로 가봐야 했다. 가문에 딸린 기사단이면서 최강의 힘을 자랑하는 휴첼과 황제의 직속 기사단이면서 휴첼에 뒤지지 않는 힘을 자랑하는 근위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단, 키텐. 로딘은 바로 키텐의 소속된 기사였다. 그동안 비네오가를 감시하느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필히 가봐야 했다. “보기 싫은 얼굴을 또 봐야겠군.” 중얼거리는 모습이 왠지 못마땅해보였다. “이게 누구신가?” 예상한 만남이었고 예상대로 짜증이 났다. 로딘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그의 바로 위 선배로써 겨우 22세의 나이로 기사단에 들어온 커크란이었다. 본래 기사단에 들어오는 이들의 평균 연령이 28세에서 30세쯤이니, 그도 매우 빠르게 들어온 편이다. 하지만 ‘최연소’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빼앗긴 그는 로딘을 눈의 가시로 여겼다. 로딘의 나이는 겨우 20세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로딘은 알고 있었다. 단지 호칭을 빼앗겼다고 해서 이 남자가 자신에게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커크란은 열등감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는 기사단 중에는 몇 없는 비리 기사였다. 거부인 부모가 돈을 퍼부어 한자리 꿰어 찬 녀석에 불과했다. 그런 녀석이 비슷한 나이임에도 당당히 실력으로 들어온 자신을 질시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됐다. ‘그때 페르노크의 심정이 지금과 비슷할까? 약한 이들이 별의 별걸 다 들고 일어나 시비를 걸때…….’ 이렇게 생각하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페르노크’는 강하기에 소외 된 것이 아니라 약하기에 소외 된 것이니까. 지금의 로딘은 자신이 무시했던 2년 이전의 ‘페르노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페르노크는 너무 강한 남자인 것이다. 예전의 약하고 희미한 이미지 따위는 모두 소거시켜 버릴 정도로 강렬한. 로딘은 차가운 눈으로 커크란을 보다가 고개를 설레 저으며 그를 지나쳐 가려했다. 어차피 상대도 자신의 응대를 바라고 시비를 거는 건 아니다. 처음부터 한번도 제대로 응대해 준적이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적당히 해두지 않으면 로딘이 진짜 화를 낼지도 모르기 때문에 늘 알아서 꼬리를 말았었다. “지금 무시하는 거냐!” 왠지 질기게 따라붙어 시비 거는 모습이 평소답지 않았다. 로딘은 그에게서 술 냄새가 풍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낮부터 술이라니. 실력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그 시간에 검을 한번이라도 더 휘둘러야 하는 게 아니던가? 로딘은 그렇게 해서 강해졌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둔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기절도 해봤고 쓰러져도 봤다. 그럼에도 신관의 치유한번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최연소 기사라는 명예로운 호칭 뒤에는 이러한 뼈를 깎는 노력이 숨어 있는 것이다. “저는 당신을 경멸합니다.” 한번도 상대하지 않았던 로딘의 입에서 나온 것은 혹독한 비난뿐이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커크란조차 주춤할 정도로 그는 냉랭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눈동자. 그 경멸 어린 시선에 커크란은 이성을 잃고 검을 뽑았다. 그는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남자였다. 그런 걸 두고 ‘자격지심’ 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단 내에서 기사들끼리의 정식 결투가 아닌 이런 난잡한 싸움은 금지되어 있다. 로딘은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대처하는 성격이었다. 나이가 어린 만큼 철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배는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만 두십시오. 취하셨습니다. 저와 결투를 하고 싶으신 거라면 제정신일 때 정식으로 청해주십시오.” 정중한 충고.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것은 비웃음보다도 더한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죽어!” 커크란은 이제 살기마저 띄우고 시작했다. 로딘의 얼굴이 굳었다. 살기라니! 이건 결투에서도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슬슬 분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는 애써 그것을 억눌렀다. 주군을 조금이라도 잘 보필하려면 문제를 일으켜서 는 안 된다. 문제를 일으키면 자유를 구속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주군의 팔다리 역할을 하던 자신이 묶임으로써 적지 않은 불편과 피해를 보게 된다. 그것은 주군에게 누가 되는 일. 기사의 불명예다. “왜 입만 살았나! 덤벼! 덤비란 말이야!” 커크란의 검을 피하며 로딘은 갈등했다. 기사가 검을 뽑았다면 명예가 걸린 일. 이런 트러블에 명예를 걸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검을 뽑지 않고 피하는데 주력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더구나 상대가 살기까지 뿜어내는 기사라면. 다행이 로딘의 자존심과 명예는 무난하게 지켜졌다. “뭐하는 짓인가! 나이트 커크란!” “마, 마스터!” 커크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로딘은 안도한 얼굴로 정중히 인사했다. 50대 초반의 지긋한 키텐 단장은 근엄한 얼굴로 커크란과 로딘을 번갈아 보았다. 일의 진행을 추측하기 위함이었다. 안색만으로도 일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놈은 파랗게 질려 있고 한 놈은 안도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커크란. 그대는 자신의 위치를 간단히 버릴 수 있는 배포를 지닌 남자였군.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난 자네가 그렇게 대단한 기사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완벽한 반어법. 커크란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제가 취중에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 모습에 로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마스터라지만 주군이 아닌 자에게 무릎을 꿇다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키텐 단장은 그의 그런 기색을 눈치 채고 내심 미소 지었다. 검에 대한 맹신과 레이디들의 치마 속에 푹 빠져 있는 다른 기사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높은 긍지와 자부심이 이 젊다 못해 어린 청년의 얼굴에 서려있다. 젊을 적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커크란. 자네 문제는 차후 결정하기로 하겠네. 가서 근신하게.” 굽신거리고 사라지는 커크란을 키텐 단장은 못마땅하게 지켜보았다. 윗사람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자신의 기사단이 더럽혀져 가는 것이 눈에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자네가 매사에 융통성 있게 처신하는 겸손한 사람이라 믿었네만.” 키텐 단장은 일부러 실망한 얼굴로 로딘을 보았다. 로딘은 별 반응 없이 말했다. “저는 겸손한적 없습니다. 또한 거만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자기 자신을 알뿐입니다.” 도도한(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로딘이 공손하게 극존칭을 사용하며 극진히 받드는 이는 그의 주근 요크노민뿐이었다. 그는 다시 정중히 인사하고 뒤돌아 갔다. 몇 걸음 옮기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마스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스터. 혹시 무하라는 남자를 아십니까?” “무하라……. 흔한 이름은 아니군.” “곤크의 용병입니다. 검은 두건을…….” “설명할 필요 없네. 알고 있어. 카 등급의 전사라면 기사든 용병이든 할 거 없이 파악해 두는 것이 기사단장의 의무중 하나니까.” “카……등급이요?” “그래. 특히 무하라는 사내는 인상적이라 잘 기억하고 있어. 유일한 카 등급 페어 중 한명인데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부지런하다더군.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나?” “아니요. 아무 것도……. 그럼.” 카 등급이라. 한참 걷던 로딘은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등급이 어느 정도일까?” “제가 보기에는 하 등급의 중하위권 정도 같군요.” “……!” “놀라게 해드려 죄송하군요. 나이트 로딘.”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과하는 이는 주군을 꼭 닮은 남자, 뮤비라였다. 로딘은 주군의 그 뛰어난 검술이 눈앞의 남자에게서 기인했음을 알고 있었다. 공손히 인사하는 그에게 뮤비라도 마주 인사했다. “20세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지금의 등급도 경악을 금하지 못하겠군요. 앞으로 가 기대되다 못해 두려운걸요?” 농담조지만 그것은 충고였다. 로딘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감을 상실했음을 예리하게 간파한 것이다. 자신감을 상실하다 못해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뮤비라는 살짝 고개를 숙여 작별을 고하고 걸어갔다. 로딘의 옆을 스쳐가기 직전에 그는 단 한마디를 입에 담았다. “제 동생을 잘 부탁합니다.” 로딘은 그제서야 웃을 수 있었다. ========================================================================== 제가 거론한 연중이 독자분들께 많은 놀람과 불쾌감을 안겨주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글을 포기하고자 할 때, 적어도 그 작가의 독자라면 한번쯤이라도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주시면 안되는 겁니까? 제가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잠적하는 것도 아니고...무엇보다도 아직 연중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험한 메일들을 보내며 뭐라고 하셔야 속이 풀리십니까? 저는 분명 연중을 하게 되면 공지에 사정을 다 밝힌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 '사정', 즉 연중 이유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건데... 어떻게 이유가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저에게 그런 메일들을 보낼 수 있는 겁니까? 그런 메일들을 보내서 속이 풀리셨습니까? 그런 메일들은 제가 공지를 올린 다음에 보내주십시오. 그때는 '제 사정'이 독자분들께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생각, 달게 받아드리겠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연재를 하는 나우누리와 라니안의 조회수(독자분 수)를 고려했을때, 저에게 온 메일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기운 내라고 응원해 주시는 절대 다수의 분들께 속으로나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해의 장-241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에 짓눌린 어깨를 하고 있던 로딘이 한결 경쾌하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그때의 철부지 꼬마가 이제는 어엿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군.” 고작 차 등급의 상위정도 밖에 안 되던 실력이 2년 만에 하 등급 중위라. 단순한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엄청난 상승이었다. 로딘 또한 하늘이 부여한 재능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노력을 아끼지 않으니……. “정말 앞으로가 두려운 청년이야.” 다시 앞을 보며 걸었다. 걱정할 건 없었다. 저 천재 기사의 주군은 사랑하는 동생이었고, 어린 시절의 결투 때문이 아닌 진정으로 충심을 다 하고 있으니까. 그의 발전은 이쪽의 귀중한 전력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부지런히 걷으며 뮤비라가 속삭였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저 그래. 여전히 몬스터를 절단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지. 유일한 문제라면 지겹다는 것 정도일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청력을 가지고 있는 뮤비라가 아니라면 듣을 수 없는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가늘고 톤이 높은 여자의 목소리. 루카다의 수하다. 도청의 위험이 있는 마법구로는 극비의 기밀사항을 논하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녀가 존재하는 것이다. “곧 황명이 갈 것이라 전하십시오. 그자가 곤크에 갔다 전하면 알겁니다.” “루카가 당신이 황명을 거론하면, 테밀시아님이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 달랬어.” 뮤비라의 얼굴이 연한 미소가 서렸다. “바로 시작 하겠다고 전하십시오.” 대답은 없었다. 그것은 사라진 인기척만으로도 충분했다. 뮤비라는 잠시 자리에 서서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때마침 불어온 약한 바람이 그의 더욱 길어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노닥거리다 사라졌다. “부상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드디어 움직일 때다. “그 분께서요!?” 샛 된 음성. 그것은 당혹과 경악을 적절히 담고 있었다. 야성적인 눈동자를 약하게 떨며 자리에 주저앉은 여자. 사랑하는 이만이 지을 수 있는 안타깝고 그리운 표정을 아련히 지으며 자신에게 소식을 날라준 남자를 올려보았다. “어느 정도라고 하던가요?” “손쓰는 게 늦어 상당히 악화 되었다 합니다. 제때 치유만 했더라도 그 정도까지 는 안갔을 거라고 하더군요.” “어째서 손쓰는 게 늦었다는 겁니까? 휴첼에 마법사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마법사가 신관에 비해 치유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출병에서는 신관의 지원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뮤비라는 최대한 절제된 ‘듯한’ 음성으로 답했다. 이정도가 이 여자에게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깨지지 않는 가면의 소유자인 자신이 이정도로 ‘흔들리고 있음’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창백하게 질려 그를 보고 있는 여자, 에일라야는 입술을 꼭 깨물며 일어났다. 이대로 주저앉고 있을 수는 없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는 건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저에게 오신 거겠죠?” 뮤비라는 잠시 주저하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이 강직한 남자가 연적과 다를 바 없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다니! 에일라야는 상황이 생각보다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오만한 남자가……. “주군을 치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성마법을 허락받은 신관들뿐입니다. 그런 신관들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은 황제 폐하뿐이십니다. 황후 전하! 황제 폐하를 움직일 수 있는 분은 오직 황후 전하뿐이십니다. 부디 신관의 지원을 청해주십시오.” 그 말을 당혹스럽게 듣던 에일라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제께서 그분의 완쾌를 바라실리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남자가 예상보다도 훨씬 냉정을 잃었구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보다 도 무모한 일을 벌리려 하다니. 안쓰러운 마음에 고개를 떨꾸는 그녀에게 뮤비라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아무리 그분의 존재를 위험하다 느끼시는 폐하라 하실 지라도 전쟁 이 길어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강한 기사를 잃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겁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용가치가 많을 테니까요. 황후 전하! 이대로 뒀다가 그분이 부상보다는 그 틈을 노린 암살자의 손에 먼저 죽을 겁니다!” 순간 흠칫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암살자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에게 암살자란 약간 거슬리는 존재에 불과한 것은 그분이 정정할 때의 이야기다! 지금이라면……. “당장 폐하를 뵈러 가겠어요!” 결국 냉정을 잃고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이는 뮤비라 였다. 들어올리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띈 가면의 것이었다. 무릎에 묻은 흙을 건성으로 털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훗날을 위해서는 이깟 무릎쯤이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꿇을 수 있다. 마음만 꺾이지 않는다면 이깟 무릎 꿇는 게 대수일까.” 불어오는 바람을 깊이 들이쉬며 살짝 눈을 감았다. “피비린내가 나는 군.” 한편 당시 황제는 자신의 경솔함을 한탄하며 술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몇 없는 근위기사의 존재가 불안할 뿐이었다. 전이라면 철옹성 같은 경계 하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게 다 여색에 빠진 업이다. “황후의 눈물에 혹한거야. 황후의…….”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황제의 눈동자는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한때 그는 총기 넘치던 황자였다. 권위라는 것에, 여자라는 것에 매혹되어 정신이 썩어나갔을 지라도 아주 바보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의 자신의 행적을 돌이켜 보던 그의 귀에 가냘픈 흐느낌이 들어왔다. “폐하!” ……점점 차가워지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단 한순간에 흐리멍텅해 진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걸 두고 구제불능이라 하는 것이리라. “오, 라야. 무슨 일이오?”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물어오는 황제에게 달려가 안기는 에일라야였다. “폐하. 무섭사옵니다. 무섭사옵니다.” “왜 그러시오, 라야. 무슨 영문이오. 자자, 고개를 들어보시오.” 사랑하는 이의 울음이 안쓰러워 황제는 부드럽게 다독였다. 에일라야는 눈물 넘치는 눈동자로 황제를 올려보았다. “폐하. 테밀시아 경께서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소문이 파다합니다.” “……!” 그깟 건방진 애송이 녀석 때문에 이리도 불안해한단 말인가! 황제의 눈이 질투로 어둡게 일렁거렸다. “폐하. 테밀시아 경께서는 황실에 충성하는 강한 기사. 이번 부상으로 혹여나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저희는 어찌 되는 겁니까? 이미 많은 근위 기사들이 전쟁에 참여하여 우리 태자 전하의 복수에 전념하고 있는데……. 테밀시아 경마저 안 좋은 일을 겪으면 몬스터사태는 누가 호전시킵니까? 언제 이 황성에도 몬스터가 들이닥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두려워 몸이 떨립니다. 아아, 두렵습니다.” 몬스터로부터의 지킴이 역할 때문에 그의 안위를 걱정한 것인가. 황제는 안심한 얼굴로 에일라야를 내려보았다. 이토록 사랑스럽고 정숙한 아내를 잠시나마 의심했던 것이 미안했다. 황제는 에일라야의 이마에 키스하고 속삭였다. “걱정 마시오. 만일 몬스터가 들이닥친다 하여도 짐이 라야를 지켜줄 것이오.” “정말이옵니까?” “물론이오! 짐을 믿으시오.” 겨우 진정한 에일라야가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을 때 황제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 면……. 사실이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을. 의자에 몸을 푹 묻고 한숨을 쉬는 황제였다. 그런 그의 귀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심복 중 한명인 토안 공이었다. 자르카 출신의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밝았고 여론에 민감했으며 수단에 강해, 황제의 조언자로 자리매김한 남자였다. “페하! 급히 아뢸 말이 있사옵니다!” “오오, 토안인가.” “큰일 났습니다!” “……?” 토안은 주위를 살피다 황제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거의 동시에 황제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졌음은 물론이었다. “이런 쳐 죽일! 당장 비네오가를 불러들여라!” 거병이라니! 감히 가주조차 아닌 애송이 따위가 황위를 넘본단 말인가! 토안은 고개를 조아리며 나갔다. 정보원과 같은 그의 퇴장은 이쯤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카르민의 눈밖에 나가봐야 좋을 것 하나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정치판이라는 것이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어다 하는 것이 원칙이지 않던가. 뭐든 적당히, 적당히가 좋은 것이다. 나무가 무성한 정원을 여유롭게 걷던 토안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얍삽하 게 빛나던 작은 눈동자가 갑자기 빛을 잃고 흐려졌다. 제법 그 놀림이 빠르던 몸뚱이는 나무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줄 몰라 했다.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눈동자로 앞을 보는 그의 귀에 은밀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했느냐.”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를 보며 상대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쿡쿡. 곧 황제가 너를 부를 것이다. 테밀시아의 부상에 대한 진위를 묻겠지.” 어디서 들려오는 목소리일까? 너무 매혹적이며 위험한 목소리다. 혼이 빨려드는 느낌. 상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채 계속 속삭였다. “테밀시아의 부상은 거의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자의 습격으로 독에 당해 운신이 힘들 정도다. 그것이 혹여 다른 정적들에게 알려질까 함구하고 있다.” “테밀시아의 부상은 거의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자의 습격으로 독에 당해 운신이 힘들 정도다. 그것이 혹여 다른 정적들에게 알려질까 함구하고 있다.” “그래. 그거다. 쿡쿡.” 한참 키득대던 목소리가 더욱 낮게 그리고 색스럽게 울렸다. “가라.” 멍하니 있던 토안은 퍼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왜 여기에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볼을 긁적이며 발을 옮기려던 그는 아차 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황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폐하께 테밀시아의 부상을 알린다는 것이! 이 정신 좀 보게!” 그가 향하는 곳에는 황제가 방금까지 술을 취하고 있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고 없는 숲 속에 훌쩍 나타난 한 인영이 있었다. 날렵하다 못해 나비가 날라다는 듯한 몸놀림으로 그는 가볍게 그곳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근위기사가 득실거릴 때도 부담 없이 들낙 거리던 곳이다. 이제는 숭숭 빠진 그물 과 같은 이곳을 드나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었다. 훌쩍 담을 넘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마차가 있었다. 귀족의 것이라는 게 분명한 화려한 마차. 그 문에는 단 세가문밖에 부여받지 못한 카르민 중 가장 그 역사와 전통이 깊은 자하가 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서슴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물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확인해 두었다. 마차 안에는 노련미가 흐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남색 이미지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차분히 서류를 뒤척이던 그는 휜을 보고 빙긋 웃었다. “확실하게 해뒀어.” “대단하십니다.” “뭘,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특유의 거친 말투. 휜이었다. 복면을 벗어내자 아름다운 얼굴의 청자색 눈동자를 가진 휜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과 같은 마르고 작은 몸을 가진 그는 성장이 끝난 것 같다고 투덜대는 것이 일과였다. “휜님의 능력. 정말 많은 도움이 되는 군요. 없으면 곤란할 지경입니다.” “당신 말이야.” “예?” 휜은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루카다의 칭찬에는 뻔뻔하리만치 우쭐대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휜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푹 묻으며 말했다. “당신이 더 대단해.” 그리고는 한참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 “이 능력을 알고……아무렇지 않게 대할 뿐더러 이용까지 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필사적으로 숨기려 한 힘이다. 타인의 의식을 조정할 수 있다는 능력은 확실히 꺼려질 법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남용하다 들켰을 때의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가셔지지 않는다. 하츠민 내에서조차도 따돌려지던 때가 있었다. 인간이 천하게 취급하는 최하위 계층에서도 그는 가장 천한 취급을 받았다. 게다가 그로 인해 만나야 했던 한 여자……. 자신과 똑같은 청자색 눈동자로 자신에게 명하던 그 여자.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세게 저었다. “제가 아닙니다.” 갑자기 들려온 뮤비라의 목소리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휜이 고개를 들었다. “제 동생이죠. 당신의 능력을 듣자마자 이 생각을 해낸 이는.” 뮤비라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동생이야말로 대단한 아이랍니다.” “당신……팔불출이란 소리 듣지 않아?” “종종 듣지요.” “쳇.” 휜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정을 멍하니 보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녀석……. 내가 없는 틈에 암살 위협이나 받고 있는 건 아니겠지.” 뮤비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휜은 눈을 감으며 외면했다. 아아, 정말이지. 동생에게 암살기도나 받으면서 실실대는 멍청한 녀석이라니까! 바보에 얼간이! 뭐가 그리 좋은지 자신만 보면 활짝 웃는 냉혹한 검은 눈동자. 건성으로 묶었는데도 껄렁해 보이지 않는 이지적인 회색 머리카락.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자신을 대해주는……. “쳇, 그냥 바보야! 그냥 바보.” ========================================================================== 희소식이랄까요. 어제 새벽에 연락이 왔습니다. 공연한 소동을 일으킨 죄로 연중 대신 잠적이라도 해야 되는게 아닌지(퍼퍼퍽) 흠흠.... 다들 격려해주시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중하거나 말거나 반응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메일이라던가...ㅡㅡ)이 일어나서 당혹스러울 정도였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해의 장-242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바로 그 시간, 뮤비라가 그리도 자랑하는 동생은 뒷골목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갈망하는 안식처가 목적지였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 한참 걷다가 누군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선다는 것을 느낀 민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상대가 누군지 짐작 간다는 모습. “오랜만이군.” “……그렇게까지 오랜만이라고 볼 수는 없을 텐데.” 딜린이다. 2년이라는 세월이 그냥 스쳐지나 간 듯 여전히 잘생긴 얼굴에 아름다운 금발이다. 입가에 걸린 진한 미소마저도 변함없다. 민은 약하게 실소를 흘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의 루트는 불규칙한데…….” “감이 좋거든.” “역시 나를 기다린 건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어차피 갈망하는 안식처에서 볼 텐데?” “귀가 많으니까.” 딜린의 앞까지 걸어간 민은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전에는 한참 올려다봐야 했었 는데 이제는 훌쩍 커버린 키가 대등한 시선을 만들어 주었다. 딜린은 피식 웃으며 길 쪽을 고갯짓 했다. 걸으며 이야기 하자는 뜻이다. 둘은 동시에 걸었다. “곧 ‘그날’이다.” “2년 동안 성공한 의뢰는 단 하나뿐인 무능한 차 등급 애송이는 무슨 소리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 “그런가? 그럼 2년간 발톱을 숨기고 몸을 움츠린 야수는 알아들을 수 있겠지?” 민은 피식 웃었다. 이 남자와의 이런 말장난도 벌써 2년째다. 아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하지만 어느 사건을 계기로 한편이 되어준 남자. 하지만 동업자가 아닌 계약자일 뿐. 같은 목적을 두고 잠시 손을 잡은 것일 뿐이다. 로딘의 일할만큼도 믿을 수 없는 여전히 위험한 남자. 민에게 있어 딜린은 그런 존재였다. “시작하기 전에 확인해 둘 것이 있다.” 말을 툭 꺼낸 딜린은 한참 침묵했다.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그의 눈이 한층 더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그때의 일……. 네 짓이 아닌 게 분명한가?” “다신 그따위 소리 입에 담지 마라. 경고했다. 네 그 말은 나를 버러지만큼도 못 한 존재로 하락시키는 것과 같다.”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낮은 음성 속에 진득하니 고여 있는 분노만은 진실이었다. 딜린은 한층 차가운 눈으로 그런 민의 눈을 보았다. 분노와 누군가 를 향한 안타까움, 비애를 읽을 수 있었던 딜린은 한숨을 쉬며 앞을 돌아보았다. “사과하지.” 갈망하는 안식처가 보이기 시작했다. “민님, 오셨어요!” 반갑게 인사하는 ‘한명’의 음성. 카나……. 귀여웠던 소녀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우울함과 매서움이 서린 얼굴로 오랜만에 웃는 모습이 안쓰럽다. 어려서부터 양 갈래로 높게 묶어 땋아 내렸던 긴 흑발은 턱을 간신히 닿을 정도로 짧게 잘려져 있다. 살수 특유의 잔혹함이 서려 있긴 했지만 명랑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애수에 젖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복수 할 때가 다가오네요.”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며 웃음 짓는 모습이 광기어려 보인다. 민은 저도 모르게 그런 카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참아줘서 고맙다.” “아니요. 제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 에요. 제 실력이 부족해서…….” 단 2년 만에 카 등급으로 진입한 그녀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 는 뼈저린 한이 서려 있었다. 민이 한숨을 지었을 때, 마스터 키안이 주방에서 나왔다. “왜 거기 서있어?” “지금 막 왔어.” 딜린과 민이 자리 잡고 앉자 카나는 팔에 걸치고 있던 검은 망토를 두르며 말했 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라.” “예.” 명랑한척 인사하며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키안은 씁쓸하게 지켜보았다. “일인거야?” “카 등급은 괜히 되는 줄 아나? 그만큼 실적을 쌓았으니까 되는 거야. 만년 차 등급씨.” 딜린이 농을 걸었다. 민은 피식 웃으며 넘겼다. 어느새 차와 아이스크림을 쟁반 에 담아온 키안도 농담조로 말했다. “카나는 여전히 너에게 ‘님’자를 꼬박꼬박 붙이는 군.” “나를 형부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계속 그럴 거라 생각해.” “미리의……말이지.” 키안은 쓰게 웃으며 테이블 빈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공연한 소리를 했군.” “아니. 맞는 말인걸.” 민의 사과에 손을 저으며 한숨 섞인 답을 했다. 품에서 담배를 꺼내 피어 물며 물 었다. 지독하게 비싼 담배지만 키안은 그것을 애용할만한 재력이 있었다. 알부자란 말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결혼은 안 할 생각이야? 한창 나이일 텐데…….” “그 아이들 때문이라 생각하는 거라면 그만둬. 아내라는 단어에 아무 끌림이 없 을 뿐이야.” 곤란할 때도 많았지만 항상 웃음을 안겨주던 두 아이, 미리와 키나. 생각해보면 2년 전 그때가 즐거웠다. 자상한 산 형님과 호탕한 슈 형수님, 쾌활한 록과 능글맞은 딜린, 그리고 다정한 키안과 명랑한 두 소녀. 이 멤버 그대로 웃으며 왁자지껄 보내던 그때가. 이제는 깨어진, 그리운 멤버. ‘그 아이만 있었다면 지금 현재를 가장 기쁘게 생각했겠지.’ 민은 쓰게, 그리고 슬프게 웃었다. 여느 때와 같은 록과 딜린의 재롱(?)을 보며 웃다가 숍을 나온 민이 향한 곳은 으슥한 골목길이었다. 물론 이 바닥 어느 곳이 안 그러겠냐만은 이곳은 그 정도가 더했다. 코너를 돌던 민이 갑자기 몸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쳐 뒤로 숨었다. 그가 가고자 한 낡은 건물에 한 여자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워 누군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정체는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민은 자신의 증오를 애써 억눌렀다. 다행이 그는 자신의 감정 컨트롤에 능했기 때문에 여자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슬쩍 몸을 돌렸다. 여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주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제그 녀석도……힘들겠구나.’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미녀라 한들 증오하는 이와의 관계가 어찌 즐거울 수 있을까. 미칠 것 같은 자괴감과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며 평정을 가장해야 하는 그의 심정을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그와 키르바나의 처소인 이공간의 입구에서 잠시 망설이던 민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열쇠가 되는 룬어를 읊조렸다. 짐작대로 정사의 흔적이 완연한 침대 위에 제그가 형편없이 널 그러져 있었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가만히 있는 모습이 피곤해 보였다. 그것이 좀 전의 행위로 인한 육체적 피로 때문이 아닌 정신적 피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민은 잘 알고 있었다. “민이냐?” “…….” 묻지 않아도, 답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쯤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많은 것을 공유한 사이였다. 아픔과 슬픔, 분노와 증오, 굴욕감과 열등감. “한심하다.” “…….” 제그는 눈을 가리던 손을 내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혐오감과 굴욕감 어린 눈으로 더럽혀진 침대를 보며 그는 웃었다. 우는 것만 못하는 얼굴로 한참 쿡쿡대던 그는 완전히 일어나 옆에 걸쳐져 있는 옷을 대충 꿰어 입기 시작했다. 크긴 했지만 여전히 마른 몸뚱이. 민과 마찬가지로 길게 길러 등을 덮는 머리카락은 묶이지 않은 상태로 헝클어져 있다. 잔인한 손속과 난폭한 언사는 그대로이나 그런 것 하나하나가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친구이기 때문이리라. “귀하고 바쁘신 분께서 이 버러지 같은 남창의 처소에 어쩐 일인가?” “난 바쁘긴 하지만 귀하진 않아. 그리고 넌 버러지가 아니다.” “남창은 맞잖아?” “…….” 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세란, 한 여자에게 만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몸을 팔며 살아가는 제그다. 그는 도리어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려는 이를 혐오했다. 싸구려 동정은 집어 치우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긍정하지는 않지만 침묵으로써 ‘인정’하는 민은 제그에게는 괜찮은 존재였다. 제그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꺼내 마셨다. 목이 탔는지 한참 마시던 그는 남은 물은 죄다 머리 위로 쏟아냈다. 차가운 물이 방울방울 머리카락과 볼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차가움을 느끼며 화를 삭이다가 민을 돌아보았다. 흉흉하게 빛나고 있는 갈색 눈동자가 섬뜩했다. 광기라 칭해도 부족함이 있는 안광을 민은 담담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드디어 ‘그날’ 다가왔구나.” “응.” “쿡쿡. 이딴 짓하는 것도 곧 끝이겠군. 몸을 파는 것도. 너와 시답지 않은 싸움을 해대는 것도.” “그렇겠지.” “쿡쿡.” 대외적으로 알려진 제그와 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제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민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증오의 관계였다. 천적이라는 것이 여기에 대입되는 듯 보이는 관계. 마주치면 피를 볼 때까지 싸웠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질 낮은 욕설을 퍼부으며 으르렁 되곤 했다. 매사에 차분하고 냉랭한 민이 제그와 마주치기만 하면 당장 사납게 변하는 것이 의아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칼부림조차 꺼리지 않는 둘의 극악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라 면 지금 둘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속을 털어 놓지 않는 제그가 굴욕감과 분노를 마음껏 드러내고 있는 것이나, 타인에게 뚜렷한 선을 긋는 민이 그에게 순수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나. 단순한 친구를 넘어서 지기에 가까운,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 ……진실은 언제든 뜻밖의 모습으로, 갑작스럽게 드러나는 모양이다. “이제 드디어 복수 할 수 있는 거구나.” 제그는 눈가에서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씁쓸함은 딜린과 같았고 그 끝없는 증오는 카나와 같았다. 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검은 눈망울이 귀여웠던, 천진한 미소가 사랑스러웠던 소녀의 모습을……. 이제는 없는 미리의 모습을. =========================================================================== 피곤한 하루다. 초조함과 불안이 허무로, 허무가 기대로, 기대가 분노로 변해간 하루다. 극한 감정의 변화가 너무나 피곤하다. 아해의 장-243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제그가 잠을 청하고 민은 소파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심신이 지친 제그에게 잠을 권한 것은 그였다. 주인이 잠든 방안에서 두 손을 맞잡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 듯 입을 연다. “그만 나와도 될 것 같구나.” “형님은 깊이 잠드셨군요. 너무 지쳐있으시니까.” 어린 아이답지 않은 차분함이 이질적인 백색 소년, 키르바나가 구석에서 슬쩍 몸을 드러냈다. 그가 기척을 숨기면 아무도 그것을 알아챌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예지력 외에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능력이다. 그것 또한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능력이었다. 만약 이 능력이 없었다면 진작 어머니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테니. 형이 아무리 보호해 주려 바둥댄다 해도 그 또한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키르바나가 스스로 기척을 죽이지 않았다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키르바나는 영특할 뿐 아니라 교활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이였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히 분석할 줄 알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다. 대륙의 세를 읽는 둥의 거창한 규모는 아니라지만 상당한 예지력과 완벽하게 기척을 죽일 수 있는 은신력. 그가 선택한, 두 가지 능력을 최대한 사용한 방법은 바로 첩보였다. 물론 작은 소년의 몸으로 많은 곳을 포괄적으로 어찌 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포괄적인 것을 관리하는 ‘중점’을 첩보하는 것은 가능했다. 보다 정확하게 분석된 정보들을 주워듣고, 그 정보를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고 하는 그의 노력은 과히 무시할만한 것이 못됐다. 특히 정보 길드의 설립을 목표로 하는 민에게는 그랬다. “이번에는 딜린님의 도움이 크겠군요.” 키르바나는 천천히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너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나?” 하지만 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민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 여자가 그의 정체를 모른다면, 너 또한 모르겠지.” “예.” 키르바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그 여자의 또 다른 정부라는 건 알고 있어요.” 민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딜린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딜린과 제그를 볼 때마다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호감 관계를 전제로 한 관계가 아닌, 단순한 계산 관계. 그것을 두고 제그는 극단적으로 ‘남창’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지만……. “더러워요.” 키르바나의 음성에 혐오감이 진하게 섞여있었다. “키르?” “더러워요. 역겨워.” 고개를 푹 숙이고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약하게 떨었다. “더러운 여자야! 추잡해!”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민마저도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고 약한 소리.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키르바나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며 쓰게 웃어야 했다. ‘그래,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잠시 천장을 올려보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리를 죽였지. 독점욕이라는 이름 하에…….’ 그녀의 이름은 아이세란. 풀 네임은 아이세란 장 레타. 현 레타의 마스터이자 청자색의 매력적이지만 위험한 눈동자를 가진 마녀다. 제그의 여자, 아니 제그를 자신의 남자로 두고 있는 그녀는 비상식적인 독점욕을 갖췄다.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 벗어나려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는 독점욕. 버리는 한이 있어도 남 주지는 않겠다는 묘한 집착. 민은 씁쓸히 웃었다. 솔직한 심정을 토하자면 아이세란의 그러한 집착과 독점욕이 그의 일을 한층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다. 미리의 죽음에 분노한 딜린이 그와 한편이 되어 주었고 제그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한번에 가장 큰 고민거리가 해결된 것이다. 하지만 미리의 죽음은……. 미리의 죽음 앞에서 냉정하게 자신의 이득을 평하는 자기 자신이 싫었다. 스스로에게 환멸감을 느끼며 순수하게 분노 ‘할 수 있는’ 제그와 딜린은 한편 으로 부럽게까지 생각했다. 남창과 같은 그들의 처지를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부럽다고, 너무나 부럽다고……. 그런 자신이 악귀같이 느껴져 소름이 돋는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자신이 그 여자 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증오를 이용하는 자신을 향해 분노와 경멸을 뿜어낸다.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의 또 다른 자신. 남몰래 자괴하고 회의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 있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야누스의 존재.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존재니까. 그 어떤 인간이라 하더라고……. ‘너는 어떠하지, 페르? 너 또한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가? 그 무심한 듯 상처 입은 얼굴 뒤에는 어떤 얼굴이 숨겨져 있는 거지? 응, 페르?’ *** 푸르름의 고향이라 불리는 숲이 있다. 1년 내내 푸른 잎사귀가 그런 호칭을 부여했다. 그 숲 너머로 견고한 성벽이 보인다. 그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는 건물이 바로 대 용병단 곤크다. 몬스터가 떼거지로 몰려든다 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자 많은 용병 지망생들의 목표인 곳. 유일하게 전쟁터에 파병되지 않은 강한 세력을 갖춘 곳이며 자부심 높은 이곳이 근래 조금 시끄러웠다. 얼마 전 부관이 이러한 통보를 내린 것이다. ‘차 등급 270명, 타 등급 140명, 파 등급 30명을 전쟁에 투입한다. 자하라 가의 라의 의뢰에 따라’ 라고. 자기 몫의 파병을 마친 자하가 가가 갑자기 그만한 인원을 대량으로 사드려 전쟁에 보내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고급 인력에 해당돼 차 등급이라도 상당한 몸값을 받는 곤크의 인원을. 하지만 그 이유가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명령’이 아닌 ‘의뢰’로써 이미 그것을 받아드렸다는 것. 즉 원하지 않더라도 의뢰를 기다리고 있던 순서에 따라 전쟁으로 보내진다는 것이다. 일단 통보를 내린 부관은 리더를 정하기 위해 명단을 훑어보고 있었다. 곤크에서 는 드물게 맞춰진 대규모 그룹이기에 리더를 뽑는데 꽤 고민을 해야 했다. 그만한 인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보호 할 수 있을 정도의 리더쉽을 갖춘 사람은 불행히도 그 중에 없었다. 게다가 파병된 인원들 중 가장 높은 등급은 겨우 파 등급인데다가 그 수까지 많아서, 특출 나게 타인을 이끌 수 있는 인재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하 등급은 되어야 이 정도 인원을 감당할 수 있을 텐데……. “젠장. 내가 왜 이런 걸 고민해야 하는 거야. 이런 건 마스터가 해야 하는 거라 고. 난 조언의 역할 정도밖에 없는데.” 명단을 신경질적으로 뒤적거리던 부관은 이내 한숨과 함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스터가 볼일이 있다며 갑자기 사라진지 벌써 삼년이 다 되간다. 그동안 그 사실을 극비리에 붙이고 혼자서 두 사람 분의 일을 도맡아 해왔다. 그런 것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원래 마스터의 종잡을 수 없는 제멋대로인 면에 반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제멋대로라도 묘하게 책임감이 강하고 곤크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자리를 비운다 해도 일년을 넘지 않았는데…….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이제 좀 돌아와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짜증만이 있을 뿐. 그가 알고 있는 마스터는 죽여도 죽지 않을 강한 존재. 스스로 자해라도 하지 않는 한 그의 목숨에 뭔가 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자해하는 취미가 없기에 그런 일도 없겠지만.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마스터가 오기 전에 이쪽이 과로사하고 말 것이다. 불을 붙이고 문득 돌아본 곳에 있는 것은 깨끗한 유리창. “쿡쿡.” 일에 찌들어 있던 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를 귀찮게 하고 있는 전쟁 파병을 위한 전력을 의뢰한 애송이 귀족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첩자를 뒤쫓다 놓치고 돌아온 그는 부관에게 씩씩대며 따라 들어온 무하를 가리키고는 따졌었다. 흥분해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요는 무하가 그 첩자를 놓아 주었다는 것이다. 무하는 그가 뭐라 지껄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태연하게 임무완료 보고를 했다. 그러고 보면 그도 의외로 한 성질 하는 남자다. 결국 악을 쓰다가 유리창 값만 물어주고 돌아간 비네오가가 얼마 안 있어 황제에게 불려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곧장 들어온 그의 연락. “풋.” 부관은 아예 배를 움켜쥐고 키득댔다. 분명 뮤비라 경과의 짜증나는 대립을 완전 매듭짓기 위해 필요했을 전력이, 황제의 앞에서 전쟁의 파병을 위한 전력으로 맞바꿔졌기 때문이다. 하기사 근위 기사단을 거의 다 내보내고 거병을 염려하고 있을 황제의 앞에서 그 외의 어떤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뮤비라 경과의 매듭을 말한다다는 건 자신의 무능을 입증하는 꼴밖에 안된다. 비레오가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축척해 온 자금이 바닥을 보이게 되어 미치기 직전이겠지만 말이다. 앞서 말했지만 곤크는 다른 용병단보다 도 몸값이 월등히 뛰어난 고급 인력인 것이다. “하하. 재미있긴 하지만 덕분에 리더를 맡을 고(高) 등급이 필요해 졌다고. 뮤비라 경과의 싸움이었다면 저 등급으로도 충분했다지만 전쟁은 아니거든.” 물론 그것에 대한 대가도 톡톡히 받아낼 생각이었다. 적어도 하 등급은 투입해야 할 텐데, 그들의 몸값은 2년 전의 카 등급 값보다도 비싸다. 부관은 자신의 골을 썩게 만든 주범자의 현 처지를 실컷 비웃음으로써 분을 풀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자본력도 죄다 쥐어짜주지. 짓궂은 생각을 하며 웃음을 흘리는 그였다. 마스터의 부재로 인해 과로사 하기 직전인데다 그동안의 스트레스 때문에 안 그래도 안 좋은 성질이 극에 달한 그가 이렇게 좋은 스트레스 해소 거리를 놓칠 리 만무했다. 쿡쿡대며 즐거운 상상을 즐기던 그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레오가는 그 노크의 주인공에게 고맙다 백번 절을 해도 모자를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광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직전인 부관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노크 소리에 이어 반가운 목소리도 들려왔다. “무하입니다.” “오오, 들어오게.” 부지런하다 못해 일벌레이며 책임감 강하고 예의 바른데다 무엇보다도 열 한명 밖에 없는 카 등급의 무하는 부관에게 있어 언제나 환영받는 존재였다. 타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입이 무겁기 때문에 많은 상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남자다. 부관은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자부했다.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왔습니다.” 차분하게 말을 꺼냈지만 조금 긴 침묵을 지키는 무하였다. 부관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무하는 이리저리 돌려서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다. 그런 그가 이토록 침묵한다는 것은 그만큼 말하기 어려운 화제이기 때문이리라. 낮게 심호흡을 하던 무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먼저 저희 페어에게 휴가를 주셨으면 합니다.” 일벌레 무하가 처음으로 요청한 휴가였다. 부관이 뭐라 답하기 전에 무하는 자신 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놀람으로 인해 커졌던 부관의 눈동자가 곧 장난기가 어리더니 그것은 침울함으로 이어졌다. 무하가 말하는 클랜의 이야기는 그가 그렇게 반응하기에 충분한 성질의 것이었다. =========================================================================== 레포트...레포트...레포트... 으윽....ㅡㅡ; 네개나 했는데 아직도 세개나 남았습니다. ㅡ; 다음 주면 시험...후후후...방학!+_+(시험은 염두에 없다;) 놀자! 자자! 놀자! 자자!.....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오늘 오랜만에 게시판을 돌아다니다가 아해의 장에 대한 글이 올라온걸 봤습니다. 어디에 있더라...ㅡㅡa 뭐, 암튼. 이드. 신무, 이세계 드래곤 등과 함께 아해의 장이 글 속에 열거 되어 있는 목록에 들어가 있던데. 왜 이런 글들이(초등학생수준의 글이라던가...ㅡㅡa) 라니안(아아, 라니안 게시판이었다)에 연재 되는지 알수 없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저는 아해의 장에 대한 추천이나 비평, 비난글같은 것을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놀라웠어요. 오! 저런 글들과 나란히 써질 정도로 욕을 많이 먹었던가? 그렇다면 그 글은 어디에 올라왔지? ....라는 것! 도대체 어디에 써진 겁니까 ㅡ; 쓴 분은 읽지는 않았는데 남들이 많이 말한 글도 목록에 넣었다고 했거든요. (참고로 아해의 장은 보지 않은 글) 그렇다면 목록에 들어갈 정도로 글이 많이 올라왔다는 건데... 저도 보고 싶어요. 혹시 아해의 장에 대한 비평이나 비난 등등이 올라온 게시물을 보신분~ 저에게 주소를! >.< 저도 보고 싶어요. (혹시 오해할까 하는 말이지만 순수하게 궁금해서 이럽니다) 아해의 장-244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곤크가 자랑하는 견고하고 높은 성벽 위에서 하늘을 올려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하기다운 뜨거우면서도 건조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그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검고 긴 두건 자락이 허공을 배회한다. 벌써 세 시간 째다. 그 자리에서 그 상태 그대로 저녁노을을 지켜보았고 지금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는 늘 그랬다. 의뢰 수행 시에는 일에만 몰두하지만 이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노라면 어느 샌가 성벽 위로 올라가 하늘을 물끄러미 보곤 했다. 특히 저녁노을 이 질 무렵이면 여지없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쥐어짜면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이 마녀의 입술과 같은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침묵했다. 그런 그를 보자면 장신의 몸뚱이가 너무나 왜소해 보여 꼭 안아주고픈 충돌이 인다. 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곤크 내에서도 월등히 뛰어난 전사임을 앎에도 한 없이 약해 보여 보듬아 주고픈 충동이 인다. 그 슬픔을 감싸주고 그 고독을 지워주며 그 아픔을 대신하고픈 충동이 인다. 하지만 그뿐이다. 감히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는 범인들에게는 그저 그뿐. 한번의 시선과 한번의 동정과 한번 의 연민.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남자 역시 본능적으로 타인의 손을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타인의 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기다리고 있는 ‘타인의 손’이 자신들이 아니라고 자각할 뿐. 그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아니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이는 없었다. 그것은 아득한 추억처럼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일으키는 향수적인 무엇인가지만 정작 그것을 인식하고자 하면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아니. 이 모든 것이 그를 지켜보는 이들의 착각일 지도 모른다. 그는 단 한번도 자신에 대해 말한 적이 없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은 적이 없다. 그저 하늘을 올려볼 뿐. 단지 저녁노을이 좋아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밤하늘이 좋아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를 우상화 시키는 타인들의 왜곡된 시선이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늘을 보고 있는 그의 귀에 자신의 것보다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하!” 밤임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적발이 인상적인 남자, 클랜이다.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와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지어보이던 그가 왜인지 화가 나있었다. 그 까닭을 아는지 무하는 침착하게 그가 곁으로 오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방금 부관에게 들었어!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지만 무하는 답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클랜이 알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무하에게 확인을 하고 싶은 것에 불과하다. “정말이냐? 네가 그런 부탁을 했다는 게 정말이냐고!” “정말이다.”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는 클랜과는 달리 무하는 침착했고 덤덤했다. “너 미쳤어!?” 무하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클랜 쪽으로 발을 옮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뒤편에 있는 계단 쪽을 향해 말이다. 클랜의 옆을 지나치면서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출발은 모레다. 준비 할게 있으면 해둬라.” “안가! 아니 못가!” “이미 끝난 이야기다.” “너와 난 파트너가 아닌가? 왜 일방적으로 그런 걸 정한거야!” 더 이상 답 없이 계단을 내려가려는 무하의 팔을 잡아채며 클랜은 거칠게 말했다. “너 사람을 죽일 수 있어? 그것도 수십, 아니 수백의 인간을 벨 수 있겠어?” 무하는 침묵했다. “죽일 수 없겠지. 넌 2년 전과 똑같아. 아무도 못 죽여. 상대가 범죄자임에도 기 절 시키는 것으로 끝이지. 그래서? 그곳에서도 그게 통용될 것 같아서 그래?” “…….” “죽고 싶은 거냐? 죽고 싶어서 그렇게 발버둥치는 거냐고!” “…….” 계속되는 무하의 침묵에 클랜의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섰다. “왜 안가도 좋을 전쟁 따위에 지원한거냐고!” 그렇다. 무하가 부관에게 가서 청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리더가 될 고 등급의 용병이 필요했다지만 카 등급을 소모할 생각은 애당초 하지조차 않았던 부관에게 무하가 직접 청을 넣은 것이다. 그 아비귀환 속으로 집어넣어 달라고.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그곳에 가게 해달라고. 부관에게 나중에야 그 이야기를 들은 클랜은 미칠 지경이었다. 의뢰 중에도 살인 하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전투를 일삼는 무하가 어째서 그런 곳을 자청해 가려고 하느냐 말이다! 무하의 손목을 쥔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극도의 흥분과 혼란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도 있었을 텐데 무하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작은 한숨과 함께 그의 입이 열렸다. “가서 죽으려는 게 아니야.” 자살 따위를 할리 없지 않은가. 단지……. “그럼 뭐냔 말이야!” 클랜은 이제 눈물까지 보이려 했다. 이 불쌍한 귀족 소년은 도대체 얼마나 자기 자신을 몰아세워야 속이 풀리는가. “클랜,” “…….” 무하의 부름에 답할 수 없었다. 목이 메여 온 것이다. 하지만 이은 그의 말은 전혀 생각 밖의 것이었다. “기사가 되라.” “……뭐?” 클랜이 멍청히 되물을 때야 그에게 잡힌 자신의 팔을 빼내는 무하였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기사가 될 수 있어. 이른바 전쟁 영웅이던가.” 다시 멍청하게 서 있는 클랜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는 몸서리를 치며 정신을 차렸다. “미쳤어? 전쟁에만 나가면 영웅이 되는 줄 알아? 전쟁에만 나가면 기사가 되는 줄 아냐고!” “카 등급.” “뭐?” “현재 전쟁에 투입된 전력은 다 하위 등급이야. 넌 카 등급. 그것도 배터랑이지.” “이봐.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전력이 하위라 해도 말이지. 이번 전쟁에서는 근위 기사들이 있다고.” 농담조이긴 하지만 짜증이 섞여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클랜이 봤을 때 무하는 현실 모르는 귀족 도령이 불과했다. 아직도 말이다. “곤크가 이번에 파병 되는 이유는 근위기사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포석이야. 완전히 불러내지는 못한다 해도 이정도 전력이 투입되면 반 이상은 무대에서 내려오겠지. 그 정도도 충분해.” “하하…….” 아직도 어이없어 하는 클랜에게 조용히 마지막 말을, 그리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기사가 되면 청혼 할 수 있겠지.”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무하가 어째서 그러한 일을 벌였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그것들을 깨닫고 난 그는 눈물 섞인 웃음을 짓다가 분노했다. 어째서 자신 때문에 그런 말도 안돼는 희생을 하려는가! 시체만 봐도 구토가 나서 억지로 인내한다는 걸 누가 모르는 줄 아는가! 헌데 왜! 수많은 상념들이 그를 쥐 흔들었다. 이건 아니다. 아닌데……뭐라고 말해야 하는데. “겨우! 겨우 그깟 일 때문에 전쟁터를 간다는 거냐?” 클랜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그것뿐이었다. 다음 순간 무하가 엄청난 힘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채 벽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겨우? 겨우 그깟 일이라고?” 둘의 주위에 멜로디가 강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무하의 분노가 깊이 배여 있는 멜로디는 듣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너한테는 브리아와의 일이 겨우 그깟 일이었나? 그 감정이? 그 슬픔이?” 실수 한 것이다. 클랜은 인정해야 했다. 무하의 희생과 배려를 순수하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했어야 했다. 적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당황해서 헛소리를 뱉지는 말았어야 했다. “어째서 ‘겨우 그깟 일’이지? 왜 다음 생애를 기다리겠다는 거야?” 클랜을 밀어붙이는 무하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숨이 가파 올 정도였다. 빠져 나오고자 했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무하의 이어지는 소리를 듣자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런 건 절대 싫어! 나는 그녀가 배신하지만 않았다면 절대 놓아주지 않았어!”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도망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부님께 검을 배우고 방학마다 산으로 가 가하를 만나 놀고……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아니! 그녀가 나에게 가졌던 감정이 처음부터 왜곡된 것만이 아니었다면! 그녀 가 나를 증오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런데 왜? 서로 사랑하는데 왜 다음을 기약해야 하지? 짝사랑이 아니잖아! 배신당한 것도 아니잖아!” 그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미워해 왔다고 한다. 그토록 어렸을 때, 그때부터 싫어해 왔다고 한다.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계기는 민재 때문이었지만 이미 그녀 속에는 미움이 깊이 싹을 틔워져 있었는데. 클랜이 힘들게 기침을 하지 않았다면 멱살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클랜이 뱉은 세 마디의 말에 분노하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을 고르는 클랜을 말없이 보다가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어느새 멜로디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 파병단의 대장은 너. 부대장은 나다.” 방금 전까지의 격한 음성이 거짓인양 언제나와 같은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 클랜은 그것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동요 없는 발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곧 들리지 않았다. 정막이 흐르는 성벽 위에서 클랜은 혼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사라…….” 뒤로 몸을 기대 고개를 들어올린 그는 심호흡을 깊이 했다. “리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설레인다. 두근두근, 격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오른손 으로 누르며 가만히 읊조려본다. “리아……. 리아…….” 함께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남은 생애를 곁에서 함께……. 그리고 이틀 후, 드디어 대 용병단 곤크에서 파병이 이루어 졌다. ============================================================================ 연중 한다고 한지 삼일만에 연락이 와서... 나의 오해였나 내심 미안하게도 생각했던 것이...완전히 사라지려고 하네요. 오늘 세시간 동안 기다리다 왔습니다. 물론 대답을 들은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그야 들을 수가 없었죠. 아예 제 연락을 씹으셨으니까요. 하지만 일주일전부터 계속 말해왔습니다. 오늘 거기서 1시에 기다리겠다고. 만약 못 올 것 같으면 연락 달라고 분명 말했습니다. 그것도 몇번이나 문자로 보냈고 음성도 남겼습니다. 설마 일주일동안 핸드폰을 한번도 확인하지 않지는 않았겠지요. 전에 전화했을때 분명 전원이 켜져 있었고, 그것을 확인한 다음에 다시 시간 장소 등을 문자로 보냈으니까... 못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못 볼 수가 없었겠지요. 어째서 다시 만날 날을 정하기도 한 날부터 연락이 또 뚝! 끊긴겁니까? 저를 가지고 노는 겁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해도 이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이 그날 이후로 꼭 한달째입니다. 바로 다음날 다시 만나서 돌려주겠다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변명조차 한마디 없이 이렇게 시간만 끄실겁니까? 지금 대학교가 기말고사 시즌이지요? 기말 고사 끝나고 다시 열흘 유예기간 갖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특정한 분을 위협해주길 바래서 이러는게 아니니 전과 같은 메일은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아해의 장-245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욤 제국은 물론이거니와 전 대륙적으로 뻗어 있는 지하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길드가 있다. 존재의 유무마저 알려져 있지 않은 그 광대한 길드의 이름은 레타 사잔 아나. 통칭 레타라 불리는 그곳은 쉽게 말하면 도둑 길드라 할 수 있었다. 소매치기부터 시작해서 황성마저 터는 대도까지 지상에서 활약하고 있는 도둑들의 거의 대부분은 이곳 소속인 것이다. 그곳은 매우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여타 길드들이 쉽게 생기고 사라지는 것과 는 달리 그 역사가 지속적으로 꾸준히 이어져 온 것이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 다. 권력이 고여 있으면 썩는 법. 레타에서는 ‘레타 사잔 아나의 날’이라 불리는 이벤트가 2년마다 한번씩 꾸준히 벌려지고 있어, 권력쟁탈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마다 권력층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 계’의 역할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정말로 지도층이 부폐 한다면 얼마든지 갈아 치울 수 있다는 그런 ‘경계’말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도 점점 퇴색되어 지금은 50년 동안 단 한번도 권력쟁탈이 이루 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스터 레타와 대결 전에 그가 제시하는 조건을 달성해야 하는데 그 조건이란 것이 항상 터무니없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황성의 옥쇄를 훔쳐오라는 조건을 달기도 했었다. 결국 그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고 개죽 음을 당하기 일쑤였고, 그러는 와중에 점점 레타 길드원은 레타 사잔 아나의 날 에 도전자는 ‘멍청이’라 인식해 버린 것이다. 항상 득실댔던 도전자가 점차 줄 어들더니 결국에는 한명 있을까 말까한, 의미자체가 사라져 버린 행사가 되어버리 고 말았다. 바로 그 레타 사잔 아나의 날이 돌아왔다. 지난 2년 전 그 날에 산채로 기름에 튀 겨지는 최후를 맞이한 ‘멍청이’를 보고 아마도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한명의 ‘멍청이’가 나타났다. 어이없게도 차 등급의 애송 이었다. 그것도 2년간 단 한번의 실적밖에 세우지 못한 무능력한 애송이 말이다. 게다가 독립파이기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불쌍하기까지 한 처지였다. 마스터 레타, 아이세란은 언제나와 같이 신중했다. 물론 그 바탕에 자신감과 오만 함이 깔려 있음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정부의 한사람이 자, 가장 신뢰하는 남자 딜린이 이번 도전자와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를 통해 몇 번인가 이번 도전자에 대해 들은바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번 도전자, 민 차 레타는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남자이며 산 카 레타의 비호 아래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쭐대는 애송이였다. 또한 자신의 또 다른 정부 제그와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으며, 그 이유는 제그로 인해 죽은 미리라는 계집 때문이라 했다. 아이세란은 조소를 지었다. 어떤 도전자가 온다 해도 이길 자신이 있긴 했지만 이번 상대는 너무 쉬웠다. 그 애송이의 생각은 뻔하다. 미리를 죽인 자신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다. 때마침 산 카 레타가 일로 인해 부재중이라 제멋대로 날뛰는 것에 불과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말이다. 침대에 몸을 쭉 뻗은 아이세란은 옆에 앉아 있는 딜린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 조건은 어떤 게 나을 거라 생각해?” “그거야 마스터께서 정하시는 거 아닙니까? 우매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딜린이란 남자는 이런 면이 좋았다. 그 준수한 용모도 금방이라도 녹아들 듯한 금발도 좋았지만 누구 앞에서건 여유와 능청을 잃지 않는 성품이 좋았다. 저 오만한 남자가 자신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음에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옷을 입었을 때는 몰랐지만 가운만 대충 걸치고 있는 딜린의 몸은 단단한 근육으 로 되어 있었다. 제대로 수련한 몸이다. 아이세란은 그것조차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길고 하얀 손을 내밀어 딜린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탄력 있는 근육이 손끝 에서 느껴졌다. “마스터. 곧 이벤트가 시작됩니다만.” “상관없어.” 자신의 무릎 위로 올라앉는 그녀에게 곤란한 듯 말은 했지만 딜린의 손도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살짝 닿았던 입술이 격렬한 엉킴으로 번졌다. 아이세란의 가슴에 간신히 걸려 있는 가운을 끌어내리며 속삭였다. “정말 곤란합니다. 이러다 진이 빠지면 어쩌려구요?” “상관없다니까? 어차피 나한테 까지 오지도 못할 테니.” 붕대가 풀려 풍만함을 도도하게 드러내고 있는 가슴에 키스하며 딜린이 물었다. “어떤 조건을 내실 겁니까?” 어찌 보면 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아이세란은 신경 쓰지 않았다. 딜린이란 남자 는 호기심이 많아서 늘 이것저것 캐묻곤 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다. “아직 생각을 안 해 봤는데.” 딜린의 입술에 짧게 키스하곤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고룡 이카미렌의 레어에 다녀오라고 해볼까? 물론 돌아오진 못하겠지만.”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녀를 보며 딜린은 싱긋 웃었다. “너무 싱겁잖아요? 모처럼의 ‘멍청이’인데.” “그런가? 그럼 뭐가 좋을 거라 생각해?” “민은 독립파인데다 사교성도 그리 좋지 못해서 적이 많지요. 특히 제그와의 사 이는 극악이구요. 그걸 이용하는 게 어떨까요?” “어떻게?” 흥미가 돌았는지 아이세란의 눈에 잔혹한 장난기가 맴돌았다. 딜린의 눈동자도 잔 인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레타 사잔 아나의 날은 정오부터 시작해서 자정에 끝나지요?” “응. 그리고 그 자정 전까지 조건을 달성하면 나와 결투하게 되지.” “그렇다면…….” 딜린은 천천히 아이세란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좀 걷기로 했다. 뒷골목이지만 새벽의 청량함은 똑같았다. 하기의 무더운 공기도 지금은 시원하게 변해 있었다. ‘내 역할은 끝냈다, 민.’ 딜린은 잠시 발을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벽돌집. 저 안에 레타 마스터가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솔직히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지금의 마스터가 그에게 이로웠다. 민은 믿을 수 없 는 녀석이다. 서로 간에 쌓인 정 때문에 이렇다할 결정타를 내리지 않고 지금껏 미기적거린 것 일뿐. 영악한 민이 이번 일을 해결하면 어떻게 나올지 그도 짐작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 마스터가 그에게는 쉬운 상대였다. 특히 그의 ‘책 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하지만 미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이곳에 박아둘 생각인걸까, 나의 로드는.’ 그분의 연락이 끊긴지도 꽤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취하던 그분이었는데. 딜린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만약 자신이 이번 일로 인해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로드는 게이치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되려 자신이 책임 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가 향하는 바를 거슬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화를 낼 분이었다. 그분은 그런 분이었다. 임무보다는 자신의 수하를 생각하는 분. 그런 분이기에 존경하고 따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그분은 딜린에게 있어 서 아버지와 같았다. ‘설마 어디에 감금이라도 당한 걸까?’ 스스로 생각은 했지만 비웃음만 흘려지는 가설이었다. 그분은 언제나 자신이 하 고 싶은 바대로 살아가는 자유로운 분. 그리고 강한 분. 그런 분을 감히 감금할 수 있을 만한 실력자가 있을 리……. “설마!”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미 생각해 낸 것. 불안은 떨어지지 않았다. “한번 조사해 볼까…….” 아이세란의 거처를 잠시 보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 보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그에게 있어 ‘과거’의 사람이 되 버린 것이다. 그 무렵의 민은 제그의 숙소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정부 중 한사람인 제그의 처 소에 있는 다는 건 위험부담이 많았지만 딜린이 그 여자를 붙잡아 두기로 했기 때 문에 안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오늘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침대의 임자인 키르바나는 지금쯤 형의 옆에서 곤 하게 잠들어 있을 것이다. 머리맡 테이블에 그의 마스크가 올려져 있었다. 민은 그것을 집어 손으로 쓸어보았다. 딱딱한 재질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문 쪽에서 갑자기 들려온 낮은 목소리는 제그의 것이었다. 쉰 듯 한 낮은 톤의 음 성은 일부로 비아냥거리지만 않는다면 제법 무게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문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제그가 보였다. 눈가까지 헝클어져 있는 갈색 머리카락 사이 로 침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비쳤다. “미리의……꿈이었다.” 그의 젖은 목소리에 따라 잔인한 영상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귀엽게 미소 짖던 얼굴은 등 뒤까지 비틀려 있었고 나비처럼 춤추듯 팔랑거리던 두 손과 발은 비정 상적으로 꺾여있었다. 아름답고 천진했던 흑빛 눈동자에는 구더기가 기어 다녔고 낭랑한 음성을 자아내던 입 안에의 혀는 잘려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낡은 인형이 구석에 박혀져 있듯 절망적인 모습으로 죽은 지 열흘 만에 발견되었 다. 참혹한 죽음. 살인이 빈번한 이곳에서도 태연히 넘기지 못할 잔인한 살해. 저도 모르게 마스크를 꾹 쥐었다. 하얗게 될 때까지 그것을 힘주어 쥐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쉬어본다. 2년 전 일이다. 그 안타까움 죽음도 그 치 떨리는 한도, 그 끓어오르는 분노도 벌써 2년째다. ============================================================================ 시험...시험...시험... 시험인데도 핸드폰만 보고 있다. 물론 벨은 울리지 않는다. 우습다. 지금 상황이 너무 우습다. 쿡쿡... 아해의 장-246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처음에는 몰랐다. 그저 그녀의 죽음이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정신 이상자의 짓이 라고만 여겼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것의 ‘진실’이 드러난 것은……. “내가 미리에게 왜 반했는지 아나?” 당연히 알지 못했다. 둘의 본격적인 만남은 미리의 죽음을 매개체로 해서였다. 그런 둘이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리 없지 않는가. 간혹 그녀의 이름만 거론 되서 분노와 안타까움, 그리고 죄책감을 보이던 제그였다. 그것은 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죽음을 순수하게 슬퍼할 수도 분노할 수도 없는 자기 자신 이 혐오스러워 그 화제를 피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드디어 모든 것을 청 상할 때인 것이다. “키르를 주기 위해 과자를 사가지고 오는 도중이었지. 헌데 누군가 내 뒤를 쫓더 군.” 느릿느릿 다가오며 한숨과 같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에게 있어 소중했을 추억. “당시 내 뒤를 쫓는 사람이 제법 있었어. 과자 때문에 움직이기가 편하지 않아 서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나타났지.” 침대에 털석 앉았다. 민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 죽여줬다. 경계하는 나에게 웃으며 말하더군. ‘그 과자 하나만 주라’ 라고.” 시작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제그에게 있어서의 의미. 처음으로 가슴 설레이는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 적어도 그의 마나를 봉인하려했 던 그 마법 선생보다는 가슴 뛰고 순수하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 한참 침묵하던 둘의 정적을 깬 사람은 제그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카나에게 청혼할 생각이다.” “뭐?” 고개를 휙 돌려 제그를 보았다. 그의 고개도 민을 향해 있었다. 진심이다! 제그의 진지한 눈을 마주하는 순간 민은 직감했다. 그가 아는 제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와 연인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극도로 피하 고 있었다. 그것이 미리에 대한 마음이 식지 않아서인지, 아이세란 때문인지는 모 르겠지만 연인이 된다는 건 좀더 진지하고 솔직해야 하는 거라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카나에게 사귀자는 말도 아니고 청혼을 하겠다는 것은 분 명 오랫동안 고민해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인지 물어봐도 될까? 한가지만은 분명하게 들어둬야겠다.”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내는 제그에게 민은 낮게 물었다. “미리와 닮아서냐?” “아니다.” 딱 잘라 말하는 제그. 그 정도의 질문은 이미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답은 하지 않았다. 민 또한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선뜻 꺼내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정적이다. 고개를 원래대로 돌린 제그를 잠시 보았다. 차분한 듯 침묵하 고 있는 그 위로 그때의 모습이 겹쳐졌다. 피를 토하는 오열……. -쾅! 조용한 숍 안에 거친 문소리가 울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제그였다. 막 수습해 온 시체 앞에서 키안과 카나는 서로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눈물만 떨꾸고 있었고, 우연히 시신을 발견한 장소에 있었던 민과 산은 우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미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시신에서는 아직도 구더기가 기어 나오고 있 었다. 키안과 카나, 민과 산. 이렇게 네 명만이 숍 안에서 미리의 시신을 지켜보 고 있을 뿐, 다들 구역질을 해대며 밖으로 빠져 나간지 오래였다. 그중에는 미리 에게 목을 매던 남자들도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민과 산만이 제그를 돌아봤을 뿐, 키안과 카나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어차피 곧 구역질을 하며 나갈 것이라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솔직히 시체 썩는 냄새가 태연 히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모든 사람은 경악에 눈 을 부릅떠야했다. “아아아-!” 제그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은 오열과 함께 미리를 끌어안은 것이다. 그 썩은 진물이 흘러나오는 그녀의 몸을 으스러질 듯 끌어안으며 하염없이 울고 있 는 것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리야.”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미안하다 중얼거리며 울고 또 울던 그는 천천히 미리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화, 내가 바라는 것은 복귀의 힘. 리 * 서 * 스 *” 미리의 몸에 새하얀 빛이 일렁거리더니 우두둑하고 뼈마디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 려왔다. 구더기가 흰 빛에 닿자마자 바삭거리며 사라졌고, 어느 샌가 미리는 생전 의 모습과 비슷하게 돌아와 있었다. 잘려나간 혀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것은 손상된 생물을 최대한 깨끗하게 해주는 마법. 참혹한 죽음을 당한 가족을 위해 적어도 제대로 된 모습으로 남길 바라며 한 마법사가 만들어 낸 마법이었 다. 실용적이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긴 했지만 치유마법을 시전 할 수 있는 이만 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제그가 키안을 돌아보았다. 아직 그의 수 준으로는 시전하기 힘들었던 마법이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애써 참아내며 그 는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땅에 박으며 쉰 목소리로 쥐어짜듯 사죄하는 그를 이해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처참한 시체를 원래대로 복구 시켜주었으니 이쪽에서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저 때문입니다. 저 때문에 미리가…….”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기절한 것이다. 키안은 얼떨떨한 얼굴로 제그를 보다가 그를 부축했다. 위에 눕힐 생각인 듯 싶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큰 충격 을 받았던 터라 자신의 거동조차 쉽지 않았다. 민이 다가가 그를 받아들었다. 작 은 몸의 민이었지만 제그도 마찬가지로 왜소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었다. 위로 올라가는 그들의 모습을 카나가 묘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제그의 옆을 민이 지키고 있었다. 계속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하는 그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끔씩 이마에 얹은 물수건을 갈아주며 마스크 안으로 고인 눈물을 남몰래 닦아내던 그가 인기척을 느낀 것은 새벽이 될 무렵이었다. 작은 노크 소리와 이어지는 목소리. “나다. 좀 들어가겠어.” 답을 기다리지 않고 들어온 이는 딜린이었다. 늘 미소를 잃지 않던 그의 눈이 새벽의 희미한 밝기로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것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깊은, 한 없이 깊은 증오와 분노. 딜린은 침대에 누워있는 제그를 한번 본 뒤, 바로 시선을 민에게 돌렸다. 그 순 간 잠시 변했던 그의 눈빛을 민은 놓치지 않았다. 제그를 보는 안타까운 동정의 눈빛……. “묻고 싶은게 있다.” “……?” “똑바로 대답해.” 언제 뽑은 것일까? 딜린의 허리에 매여 있던 검이 민의 목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딜린의 온 몸에서 살기가 풍겨 나왔다. 민은 자신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음을 알아차리지 조차 못했다. 드디어 서로의 긴장을 유지시켜주던 정이 바닥 난 것인가. “네 짓이냐?” “……?” “미리의 일. 네 짓이냐고 묻는 거다. 미리가 죽게 됨으로써 생기는 이득이 너에겐 분명 있어. 일단 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가 미리의 죽음으로 인해 네 편이 될 수 있겠지. 그 다음은 제그. 복수심에 불탈 그 녀석을 네 편으로 끌어드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 둘의 불화의 이유인 미리가 사라졌으…….” 여전히 정보에 빠른 딜린이다. 허나 이번만큼은 그것에 감탄할 수 없었다. 민은 그의 말을 놀란 눈으로 듣다가 이내 분노했다. 뿌드득 이를 갈며 딜린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칼날이 목을 약간 베었지만 개 이치 않았다. “다시 한번 지껄여봐! 내가 뭘 어쩌고 어쨌다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 면 짓이겨 놓겠어!” 그 기세가 강해 딜린의 몸이 휘청거렸다. 둘은 동시에 뒤로 넘어졌다. 민은 딜린의 몸 위에서 계속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네 녀석이 정 수상하고 걸리적거린다면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야! 제그가 마음에 들고 탐이 났지만 그쯤은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어! 네가 말했던 그 어떤 것도 미리와 맞바꿀만한 가치가 없단 말이다! 내가 뭘 어쨌다고!?” 아직도 의혹 섞인 눈으로 민을 올려보던 딜린은 자신의 뺨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마스크 안으로만 흘러들어갔던 민의 눈물이 투툭 흘러내린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흘러 딜린의 얼굴을 적셨다. 비통함에 일그러진 민의 눈동자를 본 딜린은 한숨과 함께 그의 손을 천천히 걷어냈다. 흥분이 한풀 꺾인 민은 순순히 손을 풀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위를 올려보았 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침묵이 흘렀다. 딜린은 창가에서 점차 밝아오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민은 가만히 천장을 올려보고 있었다. 제그는 침대에 누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안정이 좀 됐는지 헛소리를 더 이상 내지 않았다. “내가 왜 미리를 죽였다고 생각한 거지? 내 실력은 그녀에게 미치지 못해. 그 정도는 알고 있잖아?” 침착해진 민의 질문에 딜린은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정보를 흘리는 건 가능하지. 난 그쪽으로 생각한거다. 미안하다.” “그녀?” 또다시 침묵. 하지만 전처럼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세란 장 레타. 현 레타 마스터.” 잔뜩 잠긴 목소리. 딜린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제그는 천정을 가만히 올려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반응 없는 딜린과는 달리, 민은 그가 꺼낸 이름에 놀라고 있었다. 레타 마스터……. 그의 첫 번째 목표. 하지만 왜 그 이름이 지금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정부다.” 달라지지 않은 어조. 여전히 반응 없는 딜린과 묵묵히 자신의 놀람을 삼키는 민. 제그는 지금의 침묵이 반가웠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 다.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불쾌했던 것이다. 자신을 옭아매는 그 여자의 속박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자신의 ‘물건’이 다른 곳으로 굴 러가려는 꼴을 못 보는 어린아이지.” 그의 목소리가 점차 떨리더니 결국 눈물을 떨꾸어냈다. “나 때문이다.” 민은 불칸이 서려있는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감정을 다스렸다. 지금이라도 제그의 멱살을 쥐고 한바탕 욕하고 싶었지만 참혹한 시신을 끌어안고 울던 그를 본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딜린은 여전히 말없이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레타 마스터가 될 거다.”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꼭 해야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죽음 을 각오한 복수에 일렁이고 있는 제그와 말없이 살기를 풍기는 딜린에게 선수를 빼앗길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다. 이들이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버려 가며 복수를 다짐하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원래 목표인 것이다. 현 레타 마스터를 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 ‘치 고’가 ‘죽이고’로 바뀐다 해도 새삼 달라질 것은 없었다. 새삼 잃을 것 따윈 없었다. 그 때문에 이 말을 꼭 해야 했다, 그들의 희생을 묵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 민의 뜻을 알아챈 것일까 딜린이 겨우 미소를 지어보였다. “도와주지.” “나 또한. 그 년을 죽이는 걸 나에게 양보한다면 얼마든지 도와주겠어.” “저도요.” 갑자기 끼어든 미성. 세 명의 남자는 흠칫 놀라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 렸다. 문이 열리며 카나가 들어왔다. 언제나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 은 무표정으로 변해 있었고 그 눈동자에서는 진한 살기가 감돌았다. “미리를 죽인 년. 절대 살려두지 않겠어.” 카나의 뒤쪽으로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산과 키안, 그리고 언제 왔는지 모를 록 이 보였다. ……그것이 대략 2년 전 사건이다. “오늘 드디어 모든 게 끝나는 구나.” 제그의 목소리. 민은 그제서야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그는 그런 민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겨우 머릿속이 깨끗해 질 것 같아.”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민은 그런 제그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가슴 쪽에 늘어져 있는 붉은 보석이 보였다. 들어 올려 입을 맞추고 이마에 갖다댔다. 정열적인 연인의 키스가 느껴졌다. ===========================================================================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연중을 하지 않게 되더라도 사정을 밝혀두는 편이 좋을 것이란 결론이 나왔습니다. 때문에 왜 제가 지금 협박을 하느니 어쩌느니 둥의 소리를 듣게 됐는지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5월 16일. 그동안 메일을 몇번인가 나누었고, 함께 만화책을 내자는(그사람이 그림, 제가 글) 제의를 한 언니와 만났습니다. 그날은 목요일이었고 저는 당시 학교가 체육대회라 집에 있었기 때문에 곧 만났죠. 고깃집에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언니와 마음이 잘 맞고 말아 잘 통하며 서로 생각하고 원하는것이 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사람과 작업을 하면 즐겁고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언니는 저에게 카페에 올렸던 그림 몇개를 주었고, 저는 그 대가라긴 뭣하지만 제가 가지고 온 설정집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설정한다,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가져갔던 것이었는데 언니는 그것을 하루만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가서 읽고, 캐릭터의 이미지를 잡아 내일 보여주겠다고 하더군요. 언니와 함께 자취하는 또다른 사람의 애인이 와 있기 때문에 그날은 작업실을 보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만나서 작업실도 보고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도 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돌아와서 제 이야기를 들은 친구나 언니(친언니)가 저에게 설정집을 건네준 것은 경솔했다고 하더군요. 집도 모르고 이름과 핸드폰 번호밖에 모르는데 뭘 믿고 줬냐고... 저는 그 언니가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한번 마음에 든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계속 마음에 들어하는 녀석입니다) 괜찮다고, 내일 가서 받으면 된다고 했지요 다음날 이었습니다. 금요일...문자로 몇시에 만날까요, 라고 보냈지만 답이 없었습니다. 한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전화를 했습니다. 받더니 수업시간이라고 끊더군요. 저는 수업시간이 끝나면 저에게 다시 전화를 할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갔고, 토요일, 일요일이 갔습니다. 월요일날 전화를 해보니 전원은 꺼져 있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메일을 보냈습니다. 만약 작업할 생각이 없어진거라면 설정집이나 돌려달라고, 주소와 핸드폰 번호를 적어보냈습니다. 솔직히 메일을 보내고 나서도 교통사고가 났을까, 핸드폰을 분실한건 아닐까 걱정했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을까, 메일을 확인했음에도 아무런 답이 없더군요. 전화도 답메일도...아무것도... 후후.. 그렇게 20여일이 지났습니다. 저는 지쳐갔고 주위에서는 사기 당한 거라고 한결같이 말하더군요. 연중 공지를 올렸습니다. 삼일만에 연락이 왔더군요. 해외(싱가폴)를 갔다 왔다고 하더군요. 학생이 학기중에 해외라...그것도 20일이나? 하지만 믿으려 했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믿으려 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 하자는 저에게 지금은 막 해외 다녀와서 바쁘다, 토요일에 전화할테니 일요일이나 월요일날 만나자... 라고 하더군요. 알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토요일에 전화가 안왔습니다. 일요일에도, 월요일에도... 전화를 해보았으나 받지 않더군요. 문자를 남겨도 소식이 없더군요. 화요일이었던가... 음성과 문자를 남겼습니다. 6월 16일 일요일 1시에 논현역(거기서 처음 만났죠)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사정이 있어 핸드폰을 꺼두었다 해도 일주일 가까이나 되는 시일동안 확인 안할리 없으니, 그날 시간이 안되면 별도로 연락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연락이 안왔고, 저는 그날 그곳에서 세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계속해서 아닐거다, 아닐거다 했던 제가 머저리였죠. 저는 제 자식을 뺏기지 않을 겁니다. 때문에 그 설정집의 글을 먼저 쓸 작정입니다. 설정집이 있으면 문체를 제외하고는 워낙 세세하게 적혀있기에 스토리 구성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설정집이긴 하지만 그것을 넘겨준 것만도 큰 위험이죠. 그만큼 그 사람을 믿었던 건데... 그 사람이 정말 사기를 치고 그것을 저에게서 도둑질 해간거라면 지금쯤 그것으로 만화를 그리던, 글을 쓰던 하고 있겠죠? 소용 없게 만들어 줄겁니다 만약 기말고사가 끝나고 열흘동안 연락이 없다면(기대는 별로 안하고 있습니다) 아해의 장은 연중, 그 설정집의 글을 쓸겁니다. 설정집을 뺏기긴 했지만 그걸 쓴 사람은 저입니다. 설마 제가 잊어버렸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짓을 저지른걸까요? 라니안 님께 제 소설 게시판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비밀번호를 달것이고, 열흘이 지나도 연락이 안오면 그때 공개할 겁니다. 연락이 와서 설정집을 받게 되면 게시판을 없앨 생각입니다. 그것은 아해의 장의 후속작이기 때문에 그 탄생일은 아해의 장의 완결 뒤가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제 자식을 뺏길 생각이 개미 눈물 만큼도 없습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다른 독자분들께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로써 제 글을 뺏기고 싶지 않습니다. 설정집의 글을 쓰고 난 뒤에 아해의 장을 쓸 생각입니다. 출판을 안한다는 말은 한마디로 말하자면....공갈이었습니다( '')~ 그 사람을 향한 공갈이었죠. 저의 독자라고 했고, 실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확실히 독자긴 하더라구요. 하하... 아해의 장-247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레타 사잔 아나의 날. 무의미한 그날에 갑자기 대규모의 인원이 몰려들었다. 물론 평소에도 적지 않은 인원이 모여 구경하곤 했지만 이토록 많은 인원은 이 날이 ‘의미’를 잃은 뒤로는 처음이었다. 뒷골목에 존재하는 가장 큰 공터. 그곳이 이 행사가 시작되고 마무리 되는 곳이었다. 구석에 마련된 네 마리의 말과 그것들과 연결된 밧줄이 이번 행사의 마지막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번에는 기름이 펄펄 끓는 솥이 준비되어 있었고, 자정에 실패한 도전자가 산채로 튀겨졌었다. 이번에는 사지가 찢겨나가는 꼴이 연출되리라. 공터의 끄트머리에 있는 저택의 지붕에 아이세란이 나타났다. 도도한 청자색 눈동자의 미녀. 붕대로 단단히 묶어두었단 풍만한 가슴을 노출 시키며 몸에 달라 붙는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트여 있어 움직이는 데는 그리 불편함은 없었다. 허리에는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지만, 그녀 자신과는 잘 어울리 는 단도가 세 개 달려 있었다. “오늘의 도전자가 있는가.” 곳곳에서 퍼지는 비웃음. 오늘의 멍청이를 기대하는 눈치다. 한쪽 인파가 갈리면 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 색과 푸른 색이 적절히 섞인 옷과 검청색 망토를 걸친 한 남자였다. 방어능력은 별로 갖추지 않았을 법한 옷차림이었다. 등을 덮는 남색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여 그가 걸을 때마다 칠렁거렸다. 굳게 다물려 진 입술을 진한 붉은 빛이었는데 새하얀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짙은 남색 눈동자 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날렵한 몸은 제법 장신이었다. 그는 깔끔한 이미지를 갖췄을 뿐, 지금까지의 도전자처럼 화려하다거나 흉흉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고 그 외의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꽤 유명인 이었다. 주위에서 휘파람을 부르며 조소를 날리는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민 차 레타. 가입한지 2년이 지나도록 의뢰 한번 성공 못한 얼간이었다. 그의 뒷배경인 카 등급의 산마저 없는 지금 그를 보호해줄 방패막은 없다고 봐야 했다. 저 얼간이가 무슨 배짱으로 이 자리 에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의 유희거리쯤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세란 역시 민의 등장과 함께 파생되는 비웃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조소를 품고 있으니 두말 할 것도 없었다. “그대가 도전자인가? 이름은?” “민 차 레타.” 무릎을 꿇지 않는 오만함. 아이세란은 피식 웃으며 그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청자색 눈동자와 남색 눈동자가 서로를 주시했다. 순간의 착시일까? 아이세란의 청자색 눈동자 속에서 동공이 급격히 확대 되는 것 같더니 민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네 이름은?” “민 차 레타……입니다.” “쿡, 쿡……오호호호!” 아이세란의 얼굴에 만연히 비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정복욕이 강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자존심이 강한 남자는 재미있는 장난감에 불과했고 열등한 남자는 쓰다버릴 일회용에 불과했다. 그녀에게는 타인을 그렇게 대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녀의 비웃음이 계속 되고 있을 때 민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마치……며칠 전 휜이 황성에서 토안의 의식을 조정할 때와 같은 현상. “민님이 왜 저러죠?” “…….” “……설마.” 당혹스럽게 묻는 카나에게 아무 답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딜린과 바싹 긴장하는 제그.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걸까? 카나는 다급히 제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왜 저러시는 거야?” “저 마녀는…….” 제그는 처음 그녀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미친 듯이 키르바나를 뒤쫓던 남자들과 그때의 처절한 살육을……. “타인의 의식을 조정할 수 있어.”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지.” 제그의 말에 이어 딜린이 말했다. 그는 좀처럼 짓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딱딱하게 굳은 민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에요? 그게 가능해요?”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이는 제그를 대신해서 딜린이 빠르고 낮게 설명했다. “저 눈동자를 지닌 자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 타인의 의식을 조정해서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리지.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눈을 마주해야 한다는 거지만……한번 조정한 대상이면 목소리도 충분히 뜻대로 할 수 있다더군.” 그 말에 제그와 카나는 파랗게 질려서 민을 돌아보았다. “마, 말도 안돼요! 그럼 청자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무조건 그런 능력이 있다 는 건가요?” 믿겨지지 않는지 카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딜린은 쓰게 웃을 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 사이로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작게 속삭이고 있는 미성. “청자색 눈동자의 사람이 그런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이 청자색 눈동자를 가진 거다.” 딜린과 제그, 카나는 흠칫하며 각자의 무기에 손을 대며 한발 물러서 경계했다. 둘의 뒤쪽에 있었던 작은 몸집의 사람은 그런 셋의 모습에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키득거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한마디로 비웃었다는 거다. 검은 복면으로 코와 입, 턱을 가린 그는 온 몸을 검은 색으로 도배하고 있었다. 그 위로 덮고 있는 망토마저도 검은 색이었다. 후드까지 푹 눌러쓴 그는 충분히 수상해 보였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지금 모인 모든 사람들 또한 수상한 이에 속했다. 되려 검은색으로 도배한 그가 깔끔해 보일 정도다. 허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세란은 절대 무시 할 수 없는 여걸이었다. 어디에 그녀의 정보원이 심어져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딜린은 죽이기로 결정, 카 나에게 눈짓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상대가 한 발 빨랐다. “난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저 마녀의 눈에 띄면 또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 단 말이다. 그러니 입 닥치고 얌전히 있어.” 어디서 꺼낸 것일까? 독이 발라져 있는 단도가 카나의 목에 걸쳐져 있었다. 암살 자다! 그것도 카 등급인 카나가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암살자! 카나가 인질로 있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말이 따르면 그 또 한 아이세란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 같으니 그것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멍청이는 독립파에 무능하고 유일하게 한편인 녀석이 멀리 의뢰를 나가 없 다고 하던데…….” 그는 키득거리며 딜린과 제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도 아닌 것 같군.” 카나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번 일의 실패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었다. 미리의 복수가 달려있는 일이다. 미리가 유일하게 사랑한 민의 목표가 달성 되느냐 마느냐의 중요한 순간이다. 자신이 인질만 되지만 않으면 딜린과 제그의 능력으로 충분히 이 수상한 녀석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카나는 최대한 단도로 부터 목을 떼어내며 왼쪽 손가락을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껴져 있 던 반지에서 독이 묻은 짧은 침이 튀어나왔다. ‘나도 무사할 수는 없겠지.’ 입술을 깨물고 왼손을 뒤로 휘둘려 하기 직전이었다. “뭐, 굳이 도와줄 필요가 없었잖아.” ‘에?’ 카나의 목에 걸쳐져 있던 단도가 사라졌다. 어디에 넣은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 로 그 행동이 기민했다. 로브를 입은 이는 카나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그만 반지 치우지 그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카나가 기이하게 손을 움직이자 침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 다. 동시에 제그가 그녀를 빠르게 잡아끌어 자신의 뒤쪽으로 밀어 넣었다. 경계를 푸르지 않은 셋을 보며 로브를 입은 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부탁을 받고 왔어. 일의 성공 여부는 저 녀석에게 맡기되, 실패 시 죽음은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 말이지.” “민님은 강해! 당신 도움 따윈 필요 없어!”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카나가 앙칼지게 반박했다. 상대는 키득대며 고개를 민 쪽으로 돌렸다. “설마 이 날을 노렸을 줄이야. 듣던 거 보다 영악한 녀석이잖아.” “그 힘을 지닌 사람이 청자색 눈동자를 지닌 거라니. 무슨 뜻이지?” 딜린이 물었다. 그에게 있어서도 아이세란의 힘은 이해 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말 그대로야. 제 1기 마도 때부터 존재해왔던 또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면 무난하겠군. 이제 멸종 가까이에 놓여있긴 하지만. 아마 살아 있는 수는 열 손가락 안쪽일걸?” 시니컬한 어조.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딜린은 문득 궁금해 졌다. 이 사람은 저 마녀에게 무슨 짓을 당한 걸까? 하지만 선뜻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는 타인의 과거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때였다. 갑작스런 환호성. 고막이 터져나갈 것 같은 커다란 탄성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몇 년 동안이나 그 행사에 참여했던 딜린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아이세란이 드디어 ‘조건’을 발표하는 것이다! “나는 그대의 정확한 자질을 평하고자 그대에 대해 약간의 조사를 했다. 그대는 독립파이다. 또한 성품의 괴팍하여 친우가 없다 들었다. 그대는 카 등급의 독립파 를 배경으로 두고 기고만장해서 타인을 얕보는 자라 들었다.” 신랄한 말. 그것은 그 어느 길드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레타만의 특징이었다. 도발과 시비, 그리고 싸움이 빈번한 이곳의 마스터는 누구보다도 강하며 누구보다 도 제멋대로다. 세치의 혀로 사람을 농락할 줄 아며 한손으로도 상대를 죽일 줄 알아야 했다. 또한 언제나 냉정해야 했고 잔혹해야 했으며 내면에 광기가 도사리 고 있어야 했다. 아이세란은 가장 전형적인 ‘레타 마스터’의 모습을 갖추고 있 었다. 민은 아무 반응 없이 딱딱한 모습 그대로 아이세란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동 공이 확대된 청자색 눈동자로 그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웃고 있었다. 이깟 녀 석 따위에게 ‘힘’을 쓸 것도 없지만, 그 오만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앞서 말 했듯이 아이세란은 정복하는 것과 독점하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슬 슬 일상이 지겨워지는 마당에 새로운 자극제가 필요했다. 사지가 절단 나는 것보 다는 자신의 장난감으로 놀아나는 편이 좋을 것이라 제멋대로 생각해버린 아이세 란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모든 레타 길드원과의 전투를 명한다. 그대는 그대에게 도전하는 이가 없어질 때까지 싸워라. 또한 그 싸움이 종결하면 내가 지정하는 한명의 전사와 싸워야 한다. 그대의 강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나와의 결투가 성립되는 순간이다.” 아이세란은 손을 뻗어 길드원들에게 외쳤다. “이 도전자의 자질을 실험하고 싶은 이가 있는가?” 이것이 딜린이 제시한 ‘조건’이었다. 민이 계획했고 딜린의 입에서 실행된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변수가 둘 있었다. 하나는 아이세란. 그녀가 민에게 흥미를 보여다는 것이다. 그녀와 오랫동안 살을 섞어온 딜린은 그녀의 속셈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싸움이 적당히 무르익으면 기권을 ‘명령’할 셈인 것이다. 물론 도중에 기권을 했다 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레타 마스터의 권리. 뒤의 일은 뻔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 하나, 민이 정신을 빼앗긴 것이다. 이대로 라면 첫 번째 계획이 성공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하겠소!” 저쪽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무기를 번쩍 들며 말했다. 자신 만만한 웃음이 그 얼굴에 만연히 흘렀다. 아이세란은 진득한 미소를 흘리며 민에게서 눈을 돌렸다. 민의 몸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싸워라!” ========================================================================== 다들 응원해 주시고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로 시험이 끝나네요. 죽어라 써야겠습니다. 시험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후후후... 그래도 백지는 안냅니다( ")~ 그게 어딥니까... ( '▽');;~ 가루나님. 추적해 주신다는 말씀에 감격감격... 염치 없이 메일로 번호 적어 보냈습니다. 혹시 안 갔다면 다시 리플을...쿨럭... 염치 없습니다 ㅠ.ㅠ; 죄송...; 죽어라 아해의 장도 쓰고 회귀의 장도 쓰고 있는데... 감이 안와서 하루에 한장도 못쓰고 있어요; 덕분에 계속 밤을 새우고 있긴 하지만 기분은 최근 한달 중에서 최고입니다>.< 드디어 뭔가가 정해져서 실행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다들 감사해요. 아군이 있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군요. ;ㅡ; 4권에 대해 다들 궁금해 하시던데... 일단 1차 수정해서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이제 슬슬 저에게 2차 교정본이 올 때네요. 곧 나올겁니다^^; 아해의 장-248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아이세란의 허락이 떨어졌다. 지원한 남자가 무기를 번쩍 들고 달려들었지만 민은 여전히 고개를 아이세란에게 고정 시킨 채 멍하니 서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가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네까짓 놈을 주군이 상대해 줄 성 싶으냐!” 민의 근처 인파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아레였다. 아이세란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 녀석이 살아 있었구나! 이번 도전자 녀석이 살려준 거였나. 어쩐지 저 녀석 패거리가 붕괴되지 않는다 싶더니만!’ 그녀가 경악을 하든 말든, 아레는 눈앞의 적에 집중했다. 그는 자신의 검을 힘껏 휘둘러 지원자의 검을 튕겨냈다. 그 반탄력에 의해 지원자는 두 걸음 정도 물러섰으나 아레는 몸을 약간 숙여 충격을 소화시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앞으로 걸음을 놀리며 검을 가로 그었다. 근육이 갈라지며 지원자는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져 버렸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아이세란은 자신이 그를 죽이도록 사주했음이 비공개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정도의 냉정조차 없었다면 여태 이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 다. 그녀는 그저 그의 난입에 분을 표했다. “무슨 짓이냐!” “마스터께서는 타인의 도움을 금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소. 나는 위배된 행동을 한 바 없소.” 아레의 당당한 말에 아이세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맞는 말이었다. 독립파인데다 평판이 안 좋은 민에게 설마 동조자가 있겠냐는 생각에 안일하게 대처한 것이다. 하지만 곧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저자가 따르는 녀석은 자신의 꼭두각 시가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민이 기권을 함으로써 그의 목숨이 이손에 달렸을 때, 저 녀석이 주인의 목숨을 대신해 죽도록 종용하면 끝이다. ……놀라울 정도 로 잔인하고 정확한 판단과 처분이었다. 아이세란은 주춤거리는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도전자를 옹호하는 이도 함께 쳐라!” 그것은 ‘명령’. 이미 그녀에게 정신을 지배당했던 바가 있던 이들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한번 지배 된 이들은 목소리로도 재 지배가 가능함을 딜린에게서 들은 바 있었던 제그와 카나는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현재 모인 사람 중에서 몇이나 그녀의 조정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당하는 것이니 말이다. 다행이랄까? 카나와 제그, 딜린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신 주위에서 광분한 이들이 검을 뽑아들고 아레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제그는 그 광경을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왜 나는 저들에 속하지 않을 걸까?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딜린이 피식 웃었다. 그녀와의 안면이 없는 카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둘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그런 둘에게 해답을 안겨준 것은 새로이 끼어든 로브를 입은 이였다. “너희들에게도 마수가 뻗긴 했을 거야. 하지만 너희에게는 그녀의 속박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열쇠가 있었던 거지.” “열쇠?” 딜린이 뭔가 묻으려 했지만 그들의 주위 인파들이 자꾸만 앞으로 밀려들어 그럴 틈을 잡지 못했다. 홀로 검을 들고 있는 아레에게 수많은 인간들이 들었다. 다들 내놓으라 하는 레타 일원들이었다. “아레!” 제그가 다급히 가려는 순간, 아레는 자신의 검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우리의 주군과 검을 나누고 싶은 자는 우리를 먼저 상대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아레 근처의 모든 이들이 자신의 무기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에 호응하듯 아레의 반대편에서도 검을 일제히 들어올렸다. 테사라였다. 곧 사방에서 검들이 올라왔다. 록과 슈가 지난 2년간 만들어 온 패거리들이었다. 천성이 독립파이긴 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인 복수다.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만든 패거리는 소 수였지만 그 질만큼은 다른 패거리보다도 우수했다. 말 그대로 소수 정예인 것이 다. 그만큼 그들은 이 바닥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고막이 터져나갈 듯한 함성이 울렸다. 곧 대규모의 싸움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핏줄기와 혈향. 조정 당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마치 좀비처럼 느렸기 때문에 그들의 목을 쳐내는 일은 어렵 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쪽 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 당초 이 행사는 마지막 레타 마스터와의 결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별로 주목 받지 못 하는데다가 바로 이 자리를 위해서 모든 패거리를 긁어온 것이다. ……이것이 민이 지난 2년간 쌓아온 업적이었다. 그것은 아이세란의 두 번째 실수였다. 도전자를 치는데 레타 길드원 전원과의 싸 움을 걸어 놓고는 정작 그와 싸워야 할 길드원을 모으지는 않은 것. 뒤늦게 그것 을 깨달은 아이세란은 입술을 꾹 깨물며 분해했으나 이미 ‘조건’을 제시한 이 상, 더 이상의 간섭은 할 수 없는 게 법칙이었다. 그것은 딜린이 교묘하게 말을 꾸민 것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딜린은 애당초 지원자는 입맛 돋음 거리로밖에 취 급하지 않고 주 이벤트를 다른 것으로 준비한 것처럼 그녀를 구슬렸었다. 그녀의 조정을 받는 마지막 레타 길드 원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아레를 포함한 민의 세력권 내의 사람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올리며 포효했다. 아이세란 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함성이 수그러들었다. 아직까지 마스터는 그녀. 그녀 의 명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나의 정보가 허술했음이구나. 그대는 독립파가 아니었어.” 그 순간 아이세란이 본 것은 딜린이었다. 그는 힐책어린 그녀의 시선을 여유 있 는 웃음으로 맞받아쳤다. 그 모습에 아이세란은 씨익 웃으며 제그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주이벤트는 이것이었으니까. 그녀의 시선이 제그로 향함과 동시에 딜린은 민을 살펴보았다. 뒷모습만 보이지만, 아직도 아이세란과 눈이 마주쳤던 그자세 로 굳어 있는 것을 보면 대충 상태가 짐작이 갔다. ‘너를 믿겠다, 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제그. 그대를 호명한다.” 아이세란이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제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그는 일부로 땅을 보며 걸어 나왔다. 만약 자신마저 그녀에게 정신을 뺏긴다면 일이 완전히 틀어져 버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못되었다. ……그는 아직 자신이 그녀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어 있음을 알지 못했다. 민과 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걸어온 제그가 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덤벼라.” 하지만 민은 여전히 아이세란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심 마른 침을 삼키며 그 런 민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완전히 지배된 것일까? 민이 계속 가만히 있자 아이세란이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도전자가 아니었던가? 싸…….” “재미없군.” 얼른 아이세란의 말허리를 잘랐다. ‘싸워라’라는 말이 그 입에서 나오면 곤란하다. 진심으로 살기를 담아 덤벼드는 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분명 검으로만 싸운다면 이쪽이 질 것이다. 일부로 실력을 감추기 위해서 의뢰도 망치고 얼간이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민은 강하다. 녀석의 강함은 누구보다도 제그가 잘 알고 있었다. 제그에게 제대로 된 검술을 가르쳐준 이가 바로 민이기 때문이다. “그만 두겠어.” 검을 검 집에 밀어 넣으며 돌아섰다. 자신이 기권하는 식으로 된다면 민에게 남 은 과제는 이제 하나뿐이다. 아이세란과의 결투. 그것을 위해 타인의 앞에서 2년 간이나 싸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괜찮겠지. 녀석이라면.’ 여지껏 그녀의 힘에 지배되지 않은 이를 본적이 없지만, 그래도 녀석이라면 괜찮 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그가 보아온 민은 그런 신뢰를 받기에 충분한 남자였다. 재미있는 이벤트가 자신의 의사에 상관없이 끝나려는 것을 용납할 아이세란이 아 니었다. “제그! 무슨 짓이냐! 나는 너에게 도전자와의 결투를 명했다!” 고압적인 어조에 일순 분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꾹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그녀 를 노려보며 한바탕 저주를 퍼붓고 미리와 똑같은 꼴로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애 써 그것을 인내했다. 자신의 힘이 그녀에게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 다. 물론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달려들어 그녀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죽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자신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것도 알았다. 죽고 싶지 않았 다. 아니, 죽어서는 안됐다. 그에게는 보살펴야 할 동생이 있는 것이다. 앞조차 보지 못하는 약한 동생이. 동생에 대한 애정이 그녀에 대한 증오보다 컸기에 그 는 당장의 충동을 참아낼 수 있었다. “멍청히 서 있는 녀석과의 싸움이 재미있을 리 없지. 당신 도전자잖아? 당신이 해결해.” 아이세란은 분노어린 눈으로 제그를 노려보았다. 지배욕이 강한 그녀에게 있어서 오늘과 같이 예상 밖의 일이 자꾸 일어난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처리 된 줄 로만 알고 있었던 아레와 테사라의 생존으로도 충분히 틀어진 마당에 제그마저 멋 대로 놀아나려 하고 있다. 그때 그 계집의 죽음 이후로 얌전하기래 정신 차린 줄 알았더니 아직 아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모든 일이 재미없어졌다. 새로운 지배욕을 일으켰던 도전자의 일도 그녀석 의 뒤처리에 대한 일도, 모든 것이 재미없어졌다. 아이세란은 갑자기 몰려온 권태 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제멋대로인 제그에 관한 것만 이 맴돌았다. 아직도 반항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때의 계집으 로는 약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마침 좋은 미끼가 있었군. 키르바나라 했던가.’ 아이세란은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제 모든 게 시들해졌다. 더 이상 시간 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 도전자. 운이 좋구나. 나의 실수와 제그의 변덕으로 인해 내가 마스터가 된 이래 처음으로 나와의 결투를 하게 된 자이니 말이다. 검을 뽑아라. 그리고 덤 벼라.” 기권을 하라 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지루해졌다. 단순에 목을 딸 생 각으로 단도를 뽑아들었다. 민도 부자연스런 동작으로 검을 뽑았다. 어찌 보면 긴 장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세란의 힘을 알고 있는 이들은 염려 어린 얼굴로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로브를 입은 이의 긴장은 타인의 것보다 심했다. 그는 딜린이나 카나, 제그 처럼 무작정 민을 믿을 만큼 그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아이 세란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망할 년.’ 그때의 끔찍했던 악몽들……. “이봐.” 주먹을 꾹 쥐고 그녀를 향한 살기를 간신히 죽이고 있다가 자신을 툭 치는 관심 없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카나였다. 같은 편으로 오인 받지 않기 위해 제그는 멀 찍이 자리를 잡고 있어, 근처에는 딜린과 그녀 밖에 없었다. “저 마녀를 잘 알아?” “유감스럽게도.” “저 마녀의 힘도?” “뼈저리게.” “절대적인 건 아니지? 인간의 힘이잖아. 정신력이 강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 는 거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력이라……. “정신력이라는 것은 상처 입은 자가 그것을 극복했을 때 생기는 것. 마녀의 힘 은 상대의 상처를 비집고 그것을 확장 시켜 상대의 정신을 좀먹게 하고, 그 틈에 그를 제압하여 조정하는 거다.” 이가 갈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실제 당해봤으니까, 몇 년간이나 그녀의 꼭두각시 로 놀아났으니까. “단순히 자신의 상처를 극복한 것으로 생긴 정신력으로는 마녀의 힘을 극복할 수 없어.” 아니, 도리어 그런 정신력을 가진 자는 마녀가 이용하기 쉽다. 직접 겪어보지 않 았던가. 마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그것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슬쩍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청자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도 믿을 수 있는 자의 존재.’ 아이세란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의 검이 민의 목을 노리고 예리하게 뻗어졌다. 민은 부드럽게 몸을 턴하며 그것을 여유 있게 피했다. 그리고 회전하는 힘을 더해 아이세란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방어도 아닌 회피, 거기에 말로나 가능할 법한 유연한 반격. 과연 그것이 차 등급의 실력인가 싶었다. 모두의 탄성이 어이지는 와중에 둘의 검이 계속 마찰음을 내며 부딪치고 있었다. 붉은 이미지의 아이세란과 푸른 이미지의 민의 격돌은 음유시인의 노래 속에나 존 재할 법한 아름다움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은 둘의 실력이 비등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차 등급인 민에 대한 멸시가 어느 샌가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세란은 자신보다 민의 검술이 약간 뛰어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만약 그녀 가 암살로써 그를 노렸다면 애당초 이 결투는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 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여자였다. 차 등급 따위를 굳이 암살 술로써 죽 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덤벼라’라고 명령했기 에 이러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 어차피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세란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뻗어오는 검을 황급히 피해냈다. 그리고 다음 순 간, 아직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그녀가 폭주했다. 검 날에 의해 그녀의 볼에 긴 상처가 생겨버린 것이다. 마스터가 된 이래로 상처를 입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 던 자존심에 금이 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경고다! 기권해라!” 그것은 명령이었다. 깨끗하게 죽여주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산 채로 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겪게 해주리라. 아이세란의 명령을 들은 민은 공격을 위해 들었던 검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제그 와 딜린, 그리고 카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민을 믿는 것과 별도로 지 금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로브를 입은 이는 몸을 낮추고 기민하게 앞으로 나갔다. 승부에 관여는 하지 않지 만 목숨은 지킬 것. 그것이 그가 인정하고, 그를 인정해준 남자 뮤비라의 부탁이 었다. 게다가 지금이라면 아이세란의 힘에 굴복 당할 리 없었다. 충분히 도와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양 손을 움찔 움직이자 어느새 단도가 나타났다. 몸을 한 껏 낮추고 앞으로 튀어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사방이 붉게 물들었다. “……?” 앞을 보니 민의 주위로 붉은 기류가 꿈틀대고 있었다. 민이 왼손을 옆으로 들어올 리자 붉은 기류가 일순 소용돌이모양으로 뒤틀리며 모이더니 곧 그의 손 위로 붉 은 새가 나타나 앉았다. 보이기는 보이되 감히 그 형상을 살필 수는 없는 고고한 정열의 새. 하나하나의 털은 불꽃으로 일렁이고 그 눈동자는 끝없는 화염을 토하 며 붉게 빛나고 있다. 그 형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엄과 힘이라니. 새 의 부리가 열림과 동시에 일대에 정신을 뒤흔드는 듯한 울림이 퍼졌다. 귀로 들 을 수 있는 게 아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울림.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울리고 칼을 떨어뜨리는 이조차 많았다. 그 와중에서 민만 이 평온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기권은 할 수 없어. 난 도전자거든.” 그제서야 타인들은 민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방금 전투로 인해 헝클어진 남 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이지적인 눈동자. 그 깊은 청의 색이 화염의 새로 인 해 붉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냉혹하게 빛나는 화염의 눈동자. 모든 이들은 그 빛 에 굴복당해 버렸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자도 있었다. “청염의 길을 걷는 자……인가.” 제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청염의 마스터. 그것이 최후의 레타 마스터의 별칭이었고, 최초의 크리터 마스터 의 칭호였다. =========================================================================== 건국대 행정학과를 다니시거나, 다니는 친구분 있는 분 계십니까? 00학번이라면 더 좋습니다. 부탁드립니다(__) 그 사람을 잡기 위해서 도움을 청합니다. 지금 고소 여부를 두고 문의 중에 있습니다. 내일이면 확실해 지겠지요. 일이 극단적으로 커지기 전에 잡고 싶습니다. 건국대 행정학과를 다니시거나 다니는 친구분 있으시면 연락 좀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__) 아해의 장-249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두 제국간의 조금은 거창하고, 조금은 소소했던 전쟁이 끝나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욤이 드디어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테밀시아 장 휴첼. 혹은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이라 불리는 남자. 변방으로 밀려나 몬스터를 격파하던 그가 드디어 중앙에 복귀, 전쟁에 투입 된 것이다. 세간에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어 운신이 힘들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다들 헛소문이라 치부하고 있었다. 설마 한 손에 꼽히는 휴첼에 치유마법을 쓰는 마법사 하나 없겠는가. 설마 세 가문 밖에 받지 못한 카르민 계급에 신성마법을 쓰는 신관 하나 없겠는가. 그것이 절대 다수의 제피모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황제의 정확한 정보통이라 불리는 토안 경이 물고 온 정보라는 것도 그러했고, 황제의 경계로 인해 휴첼이 신관 지원을 받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남동쪽의 변방에서 서쪽 변방의 전쟁터로 가는 길이 멀다고는 하나 그 걸리는 시일이 뛰어난 기동력을 자랑하는 휴첼답지 않게 유독 긴 것도 걸렸다. 마스터인 테밀시아가 마차를 타고 움직인다 는 소식이 그들의 판단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지배자’ 테밀시아는 정말로 최악의 부상상태인 것이다! 그러한 판단, 소문 따위는 모두 비공식적인 것. 공식적으로는 ‘건재’한 테밀시 아의 투입을 빌미로 황제는 전쟁에서 활약하고 있던 자신의 근위기사의 거의 대부분을 불러들였다. 당장 테밀시아가 투입되지 않았음에도 신속히 그들을 불러 드린 것에 대한 반발은, 새로이 가세한 곤크 용병단으로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근위기사들의 질적 우수와 대 곤크의 수적 우수는 대충 비등하게 쳐줄 수 있었기에 대부분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대 곤크의 질적 급수는 다른 용병단에 비할 게 못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 납득한 이들이 ‘대부분’이라 하나, 납득하지 못한 이들도 ‘일부분’ 존재했고 그 일부의 하나가 바로 처음부터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타 용병단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전쟁터에 투입된 곤크의 용병들은 동료라 볼 수 있는 타 용병단의 용병들에게서 배척당하는 처지였다. 투입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랬다. 용병들이 주로 모이는 음식점. 귀족 출신의 기사들이 가는 곳과는 질이 다른 곳이었으나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곳에는 그곳에 없는 자유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술주정 하나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고 세상에 대한 욕을 한다고 해서 결투를 하자고 장갑을 던지는 이도 없었다. 맥주는 어딜 가나 똑같은 맛이었고 음식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또 무엇보다도 값이 쌌다.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 자유롭다 못해 시끄러운 곳이 어쩐 일인지 싸늘하게 식어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모든 이들이 차가운 눈초리로 한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었고 간간히 나오는 것은 욕설뿐이었다. 얼굴과 몸 곳곳에 흉터가 도사리고 있는 이들이 가끔씩 허리의 검까지 어루만지며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은 여간 살벌한 게 아니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봐도 기가 죽을 법한 그 분위기 속에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다섯 명의 인원은 평온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관심한 얼굴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끼리 전투 이야기까지 간간히 나누면서 말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지금 이 상황이 별일 아닌 걸로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상대를 부추기는 것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얌전히 있는 것 일뿐. 어쩌겠는가? 따돌림은 당하고 싶어서 당하는 게 아니다. 무하는 주위의 살벌한 기색에 불편한 낯빛을 하는 차 등급 네 명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이런 분위기가 식사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신경을 쓰면 소화불량밖에 더 걸리겠는가. 자꾸만 생기는 시비와 마찰, 그리고 싸움으로부터 하위 등급을 보호하고자 일부로 동행까지 했는데 이런 식으로라면 차라리 숙소에서 식사를 시켜 먹는 편이 좋았을 것 그랬다. 시켜 먹는 음식에 질린 이들만 추려서 클랜과 나누어 데리고 온 것인데 별 효과가 없는 모습을 보니 공연히 시간 낭비만 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저래서야 오랜만에 먹는 정식(定食)의 맛이나 느낄 수 있겠는가. 자신의 한숨에 움찔하며 눈치를 살피는 그들을 보자니 또다시 한숨이 밀려들었다. 애써 고개를 옆으로 돌려 외면했다. 고개를 돌린 김에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보려 눈에 불을 켜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클랜 쪽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귀족들이 들어가는 곳에 갈 걸 그랬다. 그렇게 되면 귀족의 앞잡이라고 또다시 욕을 먹겠지만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지 않은가. 그들이 그런 대접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곤크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곤크는 유일하다시피 전쟁에 참여하지(강요당하지) 않은 용병단이었기에 질투와 경멸을 동시에 받는 곳이었다. 아무리 용병단의 힘이 크다 하나 그들이 귀족의 의뢰를 받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전쟁으로 인해 급격히 줄어든 용병과 바닥으로 치닫는 민심이 그들의 쓰임을 더욱 크게 해주었고 덕분에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용병단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는 약간의 질투와 시기만을 살 뿐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고 나서야 투입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평판이 어찌되겠는가? 곤크에서 전력을 보태자마자 전쟁이 끝났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바로 그 점이 싫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하는 것이리라. 그들 때문이 아닌, 이제 곧 합류할 테밀시아 경 덕분인데 그들이 그 시류를 타고 급격히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배가 아프고 미치도록 증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하는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출신 탓에 이런 대접을 받는다면, 어찌 해볼 수 없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 신경 끄는 게 상책이다. “신경 쓰지 말고 먹어. 그래서야 다음 전투에 나갈 수 있겠어?” 카 등급의 대 선배에게 들은 말인데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 명은 음식 에 집중했다.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할 수 있으나, 카 등급의 위력과 지위는 그만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무하도 눈앞의 고기를 써는데 신경을 돌렸다. 얼른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머? 분위기가 왜 이렇게 험악해요?” 문이 열리면서 손에 빵 바구니를 들고 있는 한 아가씨가 들어왔다. 거친 용병들이 있는 식당에 거침없이 들어오는 모습이 퍽 당차보였다. 용병들 틈에서 황급히 빠져나와 그녀를 맞는 이가 있었다. 여자의 딱 두 배쯤 되어 보이는 덩치의 순해 보이는 얼굴의 용병이었다. “어쩐 일이야?” “빵이 맛있게 구워져서, 오빠들하고 같이 드시라고요.” 아가씨가 수줍게 웃으며 내미는 바구니를 받아드는 용병의 얼굴로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전쟁 통에 사귀게 된 사이 같은데 아직은 애들 소꿉장난처럼 아기자기해 보이기만 했다. 주위에서 부러움과 야유의 휘파람 소리가 쏟아졌다. 그에 비례해 둘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는데 상황을 잊고 곤크의 용병들마저 웃을 정도로 그 모습이 푸근해 보였다. 무하는 둘의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웃음도 야유도 없었다. 그저 둘의 앞날을 점쳐보든 진지한 눈으로 둘을 보았을 뿐.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순수하기만 하다. 아마 둘은 서로를 아껴주며 오래토록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왠지 안심이 된다. ……그는 세상에서 배신이 라는 단어를 제일 싫어하는 남자였다. 차 등급의 일행을 숙소로 데려다 주고 한결 여유 있게 산책을 즐겼다. 같은 용병을 보호해줘야 하는 입장이 우습기도 않았지만 이것은 매우 절실한 문제였다. 일전에 한 용병이 아무 생각 없이 평소 때처럼 술을 마시고 주사를 피우다 누구인지 모를 패거리에게 몰매를 맞고 실려 온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이렇게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데다 영 미덥지 않을 때는 무하나 클랜이 동행했다. 그 중에서도 무하는 부장으로써 함께 온 이들을 관리, 보호하는 책임이 컸다. 오죽하면 일행들이 전투에 투입될 때, 그는 뒤에 남아 곤크의 부상자들을 돌보며 보호하는 역을 맡았겠는가. 그것은 무하를 죽여야 하는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으려 는 클랜의 의도가 다분히 섞여 있는 명령이었지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한명은 부상자를 돌봐야 했고, 현재같이 동료라 칠 수 있는 이들마저 적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는 실력자가 한명이라도 남아 부상자들을 보호해주어야 했다. 이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이는 이중에서 클랜과 무하 밖에 없었고, 경험이 풍부한 클랜은 전투에 가담해야 마땅했기에 남은 무하가 뒤를 맡은 것이다. 그 때문에 타 용병단에서는 무하를 실력 없어 부상자 뒤치다꺼리나 하는 녀석쯤으로 알고 있지만 그런 거야 이쪽에서 상관할 바 아니지 않는가. 무하는 전투에 가담하지 못하는 대신 세밀한 배려와 치료를 아끼지 않았고 책임감 있는 보호도 꺼리지 않았다. 때문에 같은 곤크 내에서도 카 등급이면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그를 욕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정성어린 치료와 보호를 감사히 여겼을 뿐이다. 떨어져 가는 약과 붕대를 보충하기 위해 보급소로 걸어갔다. 그를 노려보고 배척 하는 타 용병단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 정도에 움찔할 무하가 아니었다. “지혈제와 해열제, 소독약, 붕대를 주십시오.” 보급원이 주는 것을 받아 어깨에 맸다. 순간 휘청할 정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 다. 적지 않은 수가 죽었지만 부상자는 그보다 몇 배나 많았고, 약의 부피는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정도를 버거워 할 무하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무게가 몇 배는 나감을 알면서 그냥 갈 정도로 힘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다. 자루를 내려 주둥이를 벌리자, 약재 대신 들어가 있던 돌멩이가 우루룩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조롱어린 웃음이 튀어나왔다. “유치하군.”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타 용병단 이들에게 나직이 한마디 한 무하는 자루를 집어 들어, 보급원에게 던져버렸다. 피하면 될 것을 얼떨결에 받아든 그는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다가 이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꼴이 웃겨서라도 웃음을 터트릴 법도 한데, 좀 전과는 달리 주위는 싸하게 조용해졌다. 그 와중에도 무하는 보급원의 멱살을 쥐어 올리는 여유를 부렸다. “용병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뭔지 알고 있나?” “예?” 비굴하게 울리는 목소리. 무하는 평이한 어조로 스스로의 질문에 답했다. “목숨이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들릴 법한 정적 속에서 말을 이었다. 둘의 발치에는 자루에서 쏟아져 나온 돌멩이가 형편없이 구루고 있었다. “그 목숨을 가지고 이따위 장난을 해? 약에 수작을 걸다니, 이 장난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나?” “조금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뭘 그래요.”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지 .” 무하는 자루 안의 것을 몽땅 쏟아내고 보급소 안으로 직접 들어갔다. 당황해서 쫓아오는 녀석 따윈 알바 아니었다. 잘 정돈된 수납 덕분에 약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자신이 찾았던 것들을 자루 안에 쓸어 넣은 뒤, 장부에 그것을 적었다. 극소수의 글씨를 아는 자가 보급원을 맡았던 것을 고려하면 그의 방금 행동은 예사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에까지 생각이 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뼛속까지 용병인 그들에게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무하의 힐난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침묵했다고 한다. =========================================================================== 요즘 저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정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봐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회귀의 장을 쓰고 있을 때면 모락모락 살기가 피어져 오릅니다. 그 분을 잡아다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다거나... 그 분을 잡아다 뇌수가 터져나올때까지 돌멩이로 찍어버리고 싶다거나... 그 분을 잡아다 성이 풀릴때까지 칼로 푹푹....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분을 향한 살기... 가끔 광기에 서려 웃고 있는 제 자신을 인지하고 섬뜩함에 몸서리를 칩니다. 멀쩡한 사람... 미치는 거 순식간이군요... 후후후... 아해의 장-250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아해의 장- (바람의 벗. 신승림) 약재를 들고 털레털레 숙소로 향하던 무하의 귀에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뭔가 소란이 벌어진 듯 했다. 이 흉흉한 전장의 요새 안에서 일어날 소란이라면 싸움 밖에 없었다. 또 지금 표적이 되고 있는 이들은 곤크정도밖에는……. 멀뚱히 서 있던 무하는 제길, 짤막하게 푸념을 뱉으며 소란의 진원지를 향해 달려갔다. 바쁘고 피곤한 하루가 되 가고 있다. “크아악-!” 막 코너를 돌았을 때,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피일!” 둘이서 짝을 짓고 나간 파 등급 중 한 명이었다. 파 등급쯤 되면 자신의 몸은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하의 눈앞에 벌어진 장면은 잔인했다. 한명에게 뒤를 제압당해 있고 또 다른 한명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피일의 팔이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는 것이다! 실실 웃으며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리는 녀석은 분명 본 적이 있 었다. 이름까지는 모르겠지만 대 용병단 중 하나인 범크 소속이라는 건 기억난 다. 그러고 보니 다른 녀석들도 다 범크 소속이다. 귀족을 주 고객으로 하는 곤크와 앙숙인, 제피모를 주 고객으로 하는 범크. 용병 단끼리의 뿌리 깊은 앙심은 알 수 없지만, 이 곳에 파견 되고 일주일이 지나는 동 안 가장 많은 시비가 붙었던 곳이 범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악 질로! 피일의 발치에 형편없는 모습으로 구루고 있던 다른 곤크의 용병이 신음하다가 무하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거의 울 듯한 음성으로 처절하게 소리쳤다. “부장!”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범크의 두 용병은 키득대며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다섯 명의 동료들에게 눈짓했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친애하는 대! 용병단, 곤크의 부장 아니신가?” “전쟁 한번 참여하지 못하는 무능한 용병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오?” “아아! 약 심부름을 나온 게로구먼!” 팔이 부러진 피일을 보고 굳어 있던 무하는 비아냥거리는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분노 어린 눈동자를 그들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한 걸음 내딛었다. 같은 속도로 그의 오른 팔이 움직여 졌다. 손아귀에 검 자루가 쥠과 동시에 또 다른 발이 내딛어졌고 그것은 전의 딛음과는 달리 강하게 땅을 박찼다. 날 듯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피일의 옆까지 도달한 무하는 검 자루의 끝으로, 피일을 패던 이의 목을 찔렀다. 그리곤 손을 비틀어 검 집을 곧추들고 피일을 붙잡고 있던 이의 어깨를 내리쳤다. 순간적인 동작. 깔끔하게 들어간 공격. 두 명의 용병이 각기 부상 부위를 감싸며 비틀거릴 때, 무하는 땅에 쓰러지는 피일을 부축했다. 식은땀과 피투성이인 피일은 흐릿한 눈으로 무하를 보다가 흉하게 울어버렸다. 억울했다. 원해서 여태 전쟁 참여를 안 한 것도 아니고, 이제와 참여하게 된 것도 아니다. 어째서 적을 앞에 두고 동료들에게 구타를 당해야 하는가? 무하는 변함없이 차분한 얼굴로 피일을 내려보다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말 없는 위로……. 고마운 순간이었다. 예상 밖의 무하의 선전에 멈칫하던 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그래도 부장은 부장이다 이거지? 하지만 우리는 하 등급이라고!” “빌어먹을 귀족들이 하 등급까지 전쟁에 투입시켰단 말이다!” 치졸한 분풀이. 무하의 눈이 예리하게 가늘어졌다. 피일을 바닥에 누이고 빠르게 턴하며 검 집을 내리 긋는 그의 손속에 인정이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당한 만큼은 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두 명의 검을 튕겨냈다가, 다시 검을 올리며 되돌렸다. 튕겨졌던 검이 반대 방향에서 오는 강한 타격에 심하게 진동하 자 둘은 그것을 못 견디고 놓쳐버렸다. 무하는 그 틈을 노려 빠르게 돌려차기를 넣었다. 한명의 목을 친 뒤 연이어 돌려차기를 넣어 다른 한명의 얼굴을 찼다. 말 그대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비틀대는 두 명을 뒤로 하고 다시 턴하며 검을 내리 그었다. 이번에는 맞은편에서 오던 세 명의 검이 동시에 비틀렸다.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검을 바닥에 팽개친 무하는 검 집으로 한 명의 쇄골을 내리친 다음, 다른 한 명의 허리를 올려쳤다. 그 틈에 검 집을 쥐고 달려드는 마지막 한명의 공격을 가볍게 튕겨내고 복부를 찔렀다. 단 한번의 발검도 없는 깨끗한 전투. 무하는 싸늘한 얼굴로 고통에 질려 있는 그들을 보았다. 평소라면 내키지 않는 폭 력에 눈살을 찌푸릴 법도 하지만 이쪽은 팔이 부러지지 않았던가. 저 정도 아픈 것쯤은 당연한거다. “이야! 이거 부장다운 솜씨인데? 이쪽은 하 등급인데 말이야.” 단 한번의 가격임에도 움직이지 못하고 맞은 곳만 감싸고 헐떡이는 이들. 전투에 무지한 이들이 본다면 단순한 엄살이라 보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가격당한 부위가 정확하게 급소였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보고 감탄성을 내는 이의 목소리. 마찬가 지로 익숙했다. “범크의 대장…….” 밑의 부원들끼리의 싸움은 자잘하게 많았지만 대장급끼리는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부원들끼리의 싸움은 그네들끼리의 말썽이라 치부되지만 대장들끼리의 싸움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싸움은 완벽한 ‘패’를 형성하는 결말을 일으켜 버린다. 때문에 다들 부원들의 싸움을 침묵으로써 넘길 뿐이었다. 하지만 무하는 당장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상대의 시비를 단순히 대장이라 는 이유로 넘겨버릴 정도로 성격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일은 일년 전, 부인을 잃고 부양가족이 셋이나 있는, 하루하루가 버거운 남자였다. 말 그대 로 몸이 재산인 것이다. “이봐. 지금 싸우자는 건가? 용맹한 범크는 오는 시비 안 막는다구.” 얼굴 만연에 조소를 띄고 있는 범크의 대장, 테호르. 그는 천성이 다혈질인 남자 였지만 책임감 하나만큼은 강해서 스스로에 대한 자제심이 강했다. 그런 그가 상 대를 도발하는 모습은 의외였지만, 그에 대해 조금만 안다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 니었다. 그는 범크의 그 어떤 이보다도 귀족을 싫어하고 덩달아 곤크도 싫어하는 남자였다. 무하는 찌르기 상태로 멈춰있던 검을 천천히 바로 했다. 그리고 바닥에서 억눌린 신음을 내뱉는 피일을 살펴보았다. 다른 파 등급의 동료가 다가와 부상 부위를 살 피고 있었다. 그가 단검을 갖다대 옷을 찢어 고정시키는 동안 피일을 입술에서 피 가 나도록 이를 악물며 비명을 삼키다 결국 기절해 버렸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 켜보던 무하가 테호르 쪽을 돌아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행이군. 이쪽도 마찬가지거든.” 무게 실린 발을 내딛는 무하. 테호르도 얼른 몸을 낮추며 손을 검 자루에 가져다 댔다. 무하의 몸이 한껏 낮춰지며 몸에 속도가 붙으려는 찰나! “멈춰!” ……클랜이었다. 테호르도 무하와 같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카 등급이자 대장인 클랜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하 역시 일순 불타올랐던 화를 억누를 수 있었다. 급히 뛰어오는 클랜의 모습을 보며 깊이 심호흡했다. 싸우는 게 문제 가 아니다. 피일의 부상을 돌봐야 한다. 마침 약재를 받아오는 길이 아니던가. 하 지만 길에서 치료를 할 수는 없었다. 세균 문제도 있지만 주위가 모두 적이기 때 문이다. 무하는 조심스럽게 피일을 업었다. 피일은 기절한 채로 신음을 연신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도착한 클랜이 테호르를 노려보며 무하에게 물었다. 무하는 피일을 고쳐 업으며 발을 옮겼다. 물론 한마디 남기는 걸 잊지는 않았다. “용맹한 범크 용병단에게 물어봐.” 사람 좋은 클랜이 드물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테호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장소는 이동하여 근처 주점이었다. 테호르는 연신 식은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홀짝이고만 있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근래 곤크가 많은 시비에 휩쓸리고 있다. 물론 무능력한 우리가 제대로 대처하 지 못한 탓도 있겠지. 나는 그 유치한 시비에 범크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근데 내가 착각을 했던 모양이야?” 테호르는 딱딱하게 굳은 클랜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얌전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다더니, 딱 그거였다. 클랜과는 제법 안면이 터 있었다. 같은 선봉장이다 보니,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마주치게 되고 알게 됐던 것이다. 바로 옆에서 그의 전투장면을 보았기에 클랜의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곤크는 싫어하지 만 말이다. 게다가 하 등급마저 넣지 않은, 고작해야 파 등급이 전부인 곤크에서 유일하게 투입한 ‘고급’, 그것도 최고급 인력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때문에 대놓고 우린 당신들을 경멸하오,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 부장 말이야.” “말 돌리는 건가?” 클랜이 미간을 찌푸리며 직설적으로 꼬집었지만 테호르는 꿋꿋했다. “의외로 강하더라? 등급이 어떻게 돼?” “동료가 품에 칼날을 품고 있는 한 절대 전투에 투입 될 리 없으니 관심 끊어. 요새 안에서도 온통 적뿐이니 호위 하나는 필히 필요하거든.” “흠흠.” 평소라면 능글거리며 말을 피했겠지만 바로 정면에서 걸린 터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헛기침만 뱉으며 고개를 돌릴 뿐. 클랜은 그런 테호르를 싸늘한 눈으로 한동안 노려보았다. 그런 일이 있고 바로 다음 날이었다. 전방에 락아타 국의 병사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직 화살이나 마법이 도달할 위치는 아니지만 맹렬한 기세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제법 많은 수의 기사들의 지휘 아래 에서! 곧 있으면 테밀시아 경이 오는데, 라며 욕을 내뱉는 이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긴장감이 보였다. 다행인 것은 병사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정도일까? 적어도 요새 공략을 노리고 오는 적군은 아니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 그러는 와중에 눈으로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그들이 다가왔다. 그런 초긴장 분위기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있었다. 어딜 가나 자기 페이스인 남 자, 무하였다. 그는 자신이 행하고, 그것에 따른 책임이나 의무가 아닌 이상 주위가 어떤 상황이라도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알고 도 고민을 하지 않는다고 해아 할까? ……뭐, 그걸 두고 ‘관심 없다’고 말하는 거겠지만. 무하는 부지런히 성벽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곤크에서 온 급보를 클랜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초긴장 상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숙소까지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이는 없기 때문에 직접 가기로 한 것이다. 급보라면 한시가 급한 일이니 어떤 상황에서건 전해줘야 했다. 클랜은 곧 찾을 수 있었다. 그냥 동떨어져서 외롭게 있는 부대를 찾으면 되는 거였으니 문제 될게 있을 턱이 없었던 것이다. “급보?” 클랜은 서둘러 낙인이 찍힌 편지 위에 자신의 메달을 갖다댔다. 둘이 반응을 하며 편지가 열렸다. 심각한 얼굴로 암호로 된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클랜을 관심 없는 눈으로 보던 무하는 성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전쟁에 참여해서 정작 전쟁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성을 지키는 전쟁도 아니었고, 근처에 시체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작은 고개만 지나가면 썩은 내가 진동하는 사람과 말의 시체가 쌓여있을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무하는 조금은 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꾹 쥐었다 풀렸다 하는 용병들과 어느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향해 기도하는 이들. 농담으로 어떻게든 긴장을 풀러보려 하는 이들. 역시 현실감이 없다. 갑자기 어지럽다고 느껴진다. 그때와 같다. 처음 몬스터 사태를 대면했을 때, 그 인정 없는 성에서 의 전투를 끝내고 계단을 내려갈 때 느꼈던 비현실성과 극명한 괴리감. 그러는 와중에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것이 모든 이를 긴장시키는 와중에 무하만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깊이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미 이런 일쯤은 적응 된 줄 알았는데……. “에?” 클랜의 묘한 음성. 몇 번이고 편지를 되 집어 읽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내용이 길래? “엑?!” 이번에는 옆에서 기괴한 감탄성이 들려왔다. 그쪽을 돌아보니 테호르가 있다. 용병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기사들의 명으로 인해 그들은 늘 최전방에서 싸웠던 것이다. 그가 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성벽 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락아타 기사들과 그 뒤를 열심히 쫓는 병사들. 하지만 무엇보 다도 황당함과 경악을 지니고 들어오는 광경은 그들의 앞에서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한 마리의 말과 그것을 타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설마 돌격 군의 최전방을 맡은 이들이 한 말에 같이 타서 올리는 없고……. 어이없음에 헛생각을 하고 만 무하의 귀에 지극히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추측이 들려와다. 클랜과 테호르,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쫓기는 건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는 둘을 향해 뒤에서 화살과 창을 던지고 있었다. 확실했다. 그들은 지금 락아타 국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쫓기고 있었고, 이쪽으로 도망쳐 오고 있었다. 이쪽에서 응원을 갈 수도 없는 것이, 저들이 락아타 국에 쫓긴다 하여 이쪽 편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그들이 성공적으로 이쪽으로 도망 온다면 화살 따위로 지원 해줄 용의는 있었다. 이쪽 지휘자 쪽의 생각도 별 다를 바 없었다. 소규모로 파견된 병사들을 처리해 이쪽에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끌 수 없을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이게 함정이 아니라 누가 보장하겠는 가? 주 전력이었던 근위 기사들이 돌아간 마당에 확률 없는 모험은 할 수 없었다. 락아타 국의 갑작스런 행보가 이쪽을 겨냥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이들은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누군가의 목숨이 달린 상황이라는 것쯤은 그들에게 있어서 관심 끌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한번의 전투로 세 자리의 수가 죽어나가는 마당이다. 그 중에 둘 정도 올라간다 해도 표조차 나지 않는다. 저들이 귀족이라도 그러하다. 아니, 도리어 귀족이라면 이쪽을 넘어온다 한들 도와주고 싶지 않다. 이 빌어먹을 전쟁도 다 귀족 때문에 질질 끌고 있는 게 아닌가.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둘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졌다. 약 200m 정도의 거리 안으로 접근해 오자 락아타 기사들의 추적이 더욱 맹렬해졌다. 병사들을 다독이며 제재했던 속도를 완전히 풀어버린 것이다. 급격히 그 폭이 줄어들어다. 전의 것이 생포를 목표로 한 공격이었다면 이제는 살상을 목표로 전환 된 듯 싶었다. 이쪽으로 넘어가는 것보다야 차라리 죽여 버리겠다고 판단 한 것이리라. 그 모습에 이쪽에서는 도움을 줘야 하는 건지 아닌지를 두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함정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함정이 아니라 해도 저들을 도와줄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때 용병들 틈에서 그리 크지 않은 외마디 음성이 들려왔다. “릭!?” 주위가 워낙 조용했기에 그 소리는 제법 멀리 퍼졌다. 또 그 소리의 진원지를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주위 용병단과 일정한 간격으로 동떨어져 있는 외로운 용병단, 곤크. 그 앞에 서 있는 두 남자 중 검은 두건을 지끈 묶고 있는, ‘부장’이라 불리는 남자. 주위에서 쏠리는 시선 속에서 그는 기민한 동작으로 성벽의 난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에 밑으로 뛰어내렸다. 자살!? 경악하여 성벽을 내려보았을 때, 그는 이미 저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릭-!” ========================================================================= 쉬어가는 코너~ 벗의 별명은 무엇일까요? 1. 겔뱅쟁이 벗(겔벵=게으름뱅이) 2. 갈굼쟁이 벗 3. 땡깡쟁이 벗 4. 농땡쟁이 벗 5. 잠수쟁이 벗 6. 잠적쟁이 벗 7. 복수쟁이 벗(와신상담이 삶의 교훈라는 소문이...) 8. 성실쟁이 벗 자~! 골라요, 골라~! *** 저에게 있어 '그 일'(주-감히 호칭을 붙일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이 점점 정리? 확산? ..... 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뭐가 되든 되겠죠... 쿡쿡...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개미 눈물 만큼도 없으니까... 이제 아해도 썼겠다 회귀를 쓰러...;ㅡ; 아, 바쁘다...바쁘다....쿡쿡.....(살기에 번뜩이는 눈으로 어딘가를 노려보는..) 아해의 장-251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저편에 보이는 요새를 향해 다급히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며 힘껏 달려가는 말의 노력에도 아랑곳 않고 추적자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간간이 날라 오던 창이 이제는 위험수위까지 근접해 왔다. 허리에 감겨 있는 베르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스승님의 원수도 못 갚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는 말을 독려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슬슬 화살 거리에 들어서는데 저쪽에서 과연 도움을 줄지 알 수 없다.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나 추적자나 ‘적’에 불과 할 테니. 하지만 그 거리에만 접어든다면 추적자의 움직임에도 제한이 갈 것이 분명하다. 현재 희망 은 그것 하나였다. 다시 한번 힘차게 말의 배를 치려던 릭의 뒤편으로 뜨거운 기운이 일렁였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법! ‘빌어먹을!’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고개를 푹 숙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곧 격렬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죽는 건가, 생각하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슬쩍 눈을 뜨는 릭의 귀에 낮고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이다.” 끊임없이 율동 하는 붉은 물의 장막이 그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충돌에 의한 격렬한 흐름을 타고 펄럭이는 검은 두건자락……. “설마……?” 오른 손을 앞으로 힘껏 뻗고 있던 남자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여유군.” “네?” 다음 순간 남자의 오른 손이 비틀리는 듯 하더니 이내 세 걸음 정도 뒤로 튕겨 나갔다. 동시에 붉은 장막이 사라졌다. 이미 막혀진 마법의 여파는 그리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화살 거리 밖에 병사들을 두고 검을 뽑아들며 돌진하는 기사들이 문제였다. 뒤로 날라 가듯 튕겨지긴 했지만 충격을 받는 것은 아닌지, 남자는 빠르게 검을 뽑아들며 릭의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말의 엉덩이를 세게 치며 말했다. “일단 달려라.” “아!?” 뭐라 묻기도 전에, 아니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말은 고통스럽게 울며 앞으로 달렸다. 릭은 얼떨결에 고삐를 꾹 쥐며 앞으로 가는데 집중했다. 낙마라도 하면 짐만 될 뿐이다. 저 남자가 자신이 아는 그 분이 맞다면. 말은 순식간에 성벽 밑에 도착했다. 하지만 들여보내 줄지는……. 릭의 고민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성 위에서 밧줄로 된 사다리가 내려왔다. 올려보니 강렬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다급히 외치고 있었다. “일단 올라와!” 떨어질 듯 말에서 내린 릭은 베르나를 먼저 보내려다 그녀가 치마를 입고 있음을 깨닫고 먼저 사다리를 잡았다. 뒤에는 쇠붙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릭?” 올라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릭을 베르나가 의아한 음성으로 불렀다. 움찔! 정신이 든 릭은 얼른 사다리를 올라타기 시작했다. 괜찮을 거다, 그 분이 맞다면. 후들거리는 손을 억제하며 겨우 올라서자 붉은 머리의 남자가 얼른 잡아 당겨주었 다. 곧 이어 올라오는 베르나는 막 착지한 릭이 잡아주었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 기 위해 노력했다. 죽기 직전에서 겨우 살아난 심장은 쉽게 제 박자를 맞추지 못했다. 마치 살았음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잠시 거칠게 호흡하던 릭은 이내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것도 있지만 그간의 힘들었던 도주로 인해 온 힘을 쥐어짰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정의 베르나도 옆에 주저앉아 울먹이고 있었다. 그제야 살았다는 것이 실감나는 모양이었다. 힘들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자 와락 안겨오며 오열한다. 당혹스럽지만 뿌리치지 못하는 그의 귀의 예의 낮고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란이 보면 통곡하겠구나, 릭.” “……!” 위에서 들려온 음성을 타라 주저앉은 상태 그대로 고개만 위로 쳐들었다. 성벽 난간에 다리를 딛고 앉듯이 착지한 검은 두건의 남자가 보였다. 위치가 위치인 터라 그 차분한 눈동자가 고스란히 보였다. 음영에 가려져 색까지는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처절히 슬프면서 인자한 눈빛이다. 어딘지 모르게 무기물의 물체를 보는 듯한 느낌도 묻어났지만……. “여, 역시!” 반색하며 몸을 일으키려다 아직도 자신을 껴안고 있는 베르나를 인식했다. 그 다음 순간 새삼 머리 속에 파고드는 그 분의 말……. “아악! 아, 아니에요!” 릭은 당황해서 얼른 베르나를 뿌리치고 두 손을 정신없이 저으며 말했다. “베르나는 스승님의 딸이라고요! 전 절대 바람 같은 거 안 펴요!” 주위에서 키득대는 소리에 자신이 방금 말했던 것을 되 떠올린 릭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붉어졌다. 무하는 가볍게 성벽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왼 손에는 클랜이 늘어뜨렸던 사다리의 끝 부분이 들려있었다. 오른 손에는 피가 조금 흐르고 있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것이 아니라 벽을 딛고 날듯이 온 것임을 본 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변명하는 릭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베르나를 힐끔 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지는 것이라면 음유시인들은 그것을 노래하지 않을 거다.” “아앗! 정말 아니라니까요!” 계속되는 릭의 부인에 무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였다. 그리곤 한층 듬직해진 릭의 어깨를 두들기더니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편지 전달이라는 임무는 끝났고 언제 덮쳐질지 모르는 숙소를 지키러 가봐야 됐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이 죽는 것을 볼 수 없어 나서기는 했지만 눈에 띄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자, 잠깐만요!” 오랜만에 만난 무하가 가버리려는 것을 그냥 보고 넘길 릭이 아니었다. 얼른 따라가려다 문득 성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겨우 살아서 통과해 온 곳이 아니던가.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밖의 모습에, 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자신을 뒤쫓아 오다 화살 경계 지역 밖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끝까지 추적해 왔던 기사들까지 무사히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부상을 입었는지 어딘가를 감싸고는 있었지만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째서……?” 고개를 다시 돌리자 계단 저편으로 한참 내려가고 있는 무하의 모습이 보였다. “왜 죽이지 않았는지가 궁금한가?” 릭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클랜이 말을 받아넘겼다. 화들짝 놀라며 자신을 주시하는 릭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클래너 카 곤크다.” “아, 저는 릭입니다. 용병 지망생이죠.” 곤크라는 말에 클랜을 보는 릭의 눈이 많이 바뀌었다. 용병 지망생에게 곤크나 범크의 이름은 절대 작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왜 죽이지 않았을까요? 욤은 락아타와 전쟁 중이잖아요? 게다가…….” 게다가 며칠간이나 죽도록 쫓아왔던 악마 같은 작자들이다. 피 말리는 그때의 일 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들의 뼈를 갈아 마시고 싶을 정도다. 적어도 두 명 정 도는 싸늘하게 식어 바닥을 장식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주먹을 꾹 쥐고 제법 살기를 퍼뜨리는 릭을 보며 클랜은 피식 웃었다. 릭이 고개를 돌려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는 한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성 밖 저편으로 돌렸다. “게다가 자네 원수이기도 하고?” “…….”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클랜은 무하가 대충 내려놓고 간 사다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자기 원수는 자기가 갚아야지. 타인의 손을 빌리려 들면 쓰나.” 게다가 자신의 원수조차도 죽이지 않는 무하의 손을 빌리려 들다니 꽤나 발칙하지 않는가. 릭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옆에서 베르나가 그런 릭을 톡톡 건드렸 다. 고개를 돌리자 한쪽 방향을 손가락질 한다. 척 보기에도 기사임을 알 수 있는 고풍스런 문양의 갑옷을 입은 남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적에게 쫓겨 들여보내주 긴 했지만 이쪽 편이라는 확신이 없는 릭을 살펴보러 온 모양이었다. 릭은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아.” 건성으로 인사를 받아넘기며 릭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것은 무례한 행동이긴 했지만 릭은 제피모, 그는 귀족이기에 아량껏 넘겨야 했다. “먼저 생존을 축하하네. 하지만 이쪽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네만.” “아, 예.” “자리가 좀 뭣하니 옮기지. 따라오게.” 앞장 서는 기사의 뒤를 따르며 정리한 사다리를 내려놓는 클랜을 한번 돌아보았 다. 저 사람은 그 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분은 프리라고 했는 데……. 하긴 그 정도 실력이면 곤크라도 못 들어가겠는 가만은. 옆에서 베르나가 불안한 듯 손을 꾹 잡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산 넘어 산이라던가. 하지만 일단 살았으니 된 거다. 릭은 한숨 놓은 얼굴로 베르나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순간 무하의 말이 떠올라졌으나, 웃어넘겨버렸다. 베르나는 스승님의 딸일 뿐이다. 서로 간에 친구의 감정만 있을 뿐이다. 숙소에 도달한 무하는 클랜과 함께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검을 풀러 침대 위에 올려놓고 상의를 벗었다. 땀으로 젖은 옷이 힘들게 벗겨졌다. 옷을 벗자 진한 비린내가 풍겼다. 좀 전의 전투로 인해 왼쪽 팔에 작은 상흔을 입은 것이다. 별로 대단할 것은 없지만 일단 제대로 치료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현재와 같이 고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경호원’인 자신의 부상은 다른 녀석들의 부상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배낭을 한참 뒤져 소독약을 찾아냈다. 정리는 제때 해두었으나 역시 양이 많아 찾기가 힘들다. 서랍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약을 묻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댔다. 이정도 작은 상처는 그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기분까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상처를 입었다는 느낌뿐 아니라, 작은 상처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 이 ‘타인의 몸뚱이’라는 느낌이 더러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소독을 마치고 몸을 숙여 발목에 묵어 놓은 은장도를 뽑아들었다. 힐링과 리커버리, 그리고 새롭게 부여한 큐어. 이 세 개의 주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부여 아이템. 무하가 늘 간직하고 다니면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리 * 커 * 버 * 리 *” 순식간에 낫는 모습. 언제 보아도 신기하다. 팔을 몇 번 휘둘러보다가 일어나 다른 옷을 꺼내 입었다. 전의 것은 피가 묻어서 입을 수 없었다. “그럼 붕대를 갈러 가볼까.” 오늘도 바쁜 하루다. ========================================================================= 수정~ 수정~ 수정~ @ㅇ@ PS. 회귀의 장 설정집을 되돌려 받았습니다. 다들 기뻐하며 경배...(퍼퍼퍽) 아해의 장-252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소동이 일어난 날 저녁이었다. 겨우 성벽에서 돌아온 클랜이 피곤한 얼굴로 무하에게 편지를 건넸다. 무하가 전달했던 길드의 편지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최대한 몸을 사리고 전력을 아껴라’.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무하가 설명을 원하는 얼굴로 클랜을 올려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임으로써 자기도 아는 바 없다는 뜻을 전했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하자고.” 똑똑하다 못해 영악한 부관이다. 어련히 알아서 명을 내렸겠는가. 지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클랜은 막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 청년 말이다. 심문은 끝난 모양이야. 단지 곧장 이곳을 빠져 나가라는 명을 받았어. 마법사와 신관까지 대령해서 심문했으니 더 할 말은 없겠지만 그런 불순 분자가 있는 걸 용납 못하는 것 같아.” “그래.” 무관심한 어조. 클랜은 상체만 벌떡 일으켜 무하 쪽으로 돌렸다. “욤 출신의 전직 용병의 밑에서 수련했다는군. 전쟁이 터져서 불똥이 튄 거래. 첩자로 몰린거지. 단지 욤 출신이라 그렇게 몰렸다 보기엔 미심적긴 하지만 말이 야.” “……?” 무하는 자신에게 설명을 늘여 놓는 클랜은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클랜은 다시 누워버렸다. “그냥 그렇다고.” 무하는 금새 잠에 들은 듯한 클랜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무하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물론 릭이었다. 숙소에서 식사 중이었던 무하는 릭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릭은 동경하던 상대를 오랜만에 만난 흥분을 자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끝났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무하는 아직 식사를 못한 릭을 위해 일인분의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손수 건네는 무하에게 또다시 감동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주위 용병단의 푸대접과는 달리 상부에서의 대우는 제법 좋았다. 식사도 별 껄끄러움 없이 넘길 수 있을 정도였 다. 릭은 먹으면서도 무엇이든 물어보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했지만 묵묵히 음식을 먹는 무하의 분위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물론 그것은 릭의 착각이었 지만 말이다. 무하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했다. 상대가 다가온다면 받아주 긴 하지만 먼저 다가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설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저기, 무하님!” “님은 빼.” 반 이상 비운 접시 위에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허리에서 물통을 꺼내 마셨다. 그것을 본 릭의 눈에 잔잔한 미소가 배여 들었다. 2년 전 그때와 같은 물통이다. 절대 마르지 않던 마법의 물통. 그 시원하고 달콤했던 물맛과 라이시륜 씨의 구 박 속에서 생고생을 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도 그거 쓰시네요.” “바꿀 이유가 없잖아.” 물이끼가 끼는 것도 아니고 물이 섞지도 않는데 바꿀 이유가 뭐 있는가. “저기…….” “배 안 고픈가?” “아! 예.” 그제야 허겁지겁 음식을 입안에 우걱우걱 쑤셔 넣기 시작했다. 곧 목이 메여 가슴 을 두들기며 앞의 컵에 담긴 물을 마셔야 했지만 말이다. “저 오늘 다시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여기 기사양반이 오늘 오후 중으로 나가라 고 했거든요. 첩자가 아닌 걸 알겠지만 민간인을 이곳에 둘 수는 없다고. 웃기 죠? 그 ‘민간인’을 전쟁 통에 몰아세우지 못해 안달인 작자들이 말이에요.” 무하는 말없이 샐러드를 뒤적거리다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다 가 릭은 풀이 죽었다. 그의 영웅은 그때보다도 더 말이 없고 무뚝뚝했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거지?” 좀 전의 속도에 비하면 한 없이 느릿한 움직임으로 음식을 먹던 릭의 귀에 차분 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하가 고개를 자신 쪽으로 들은 채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는 릭을 보고 있었지만 실재로는 어제 저녁의 클랜을 생각하고 있었 다. 타인, 아니 자기 자신에게 조차 무신경해지고 무기질화 되어 가는 자신을 안 타깝게 여기고 있던 클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라는 안타까운 소망 을 릭의 상황설명으로 대처한 그를 말이다. 릭은 단숨에 신이 나서 마구 말을 꺼 내 놓기 시작했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하님과 그렇게 수도에서 헤어지고 막막하게 나라 의 답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베르나를 만나게 됐어요. 베르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소개해 주어서 그 분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죠. 스승님은 락아타의 수도에서 살 고 계셨거든요. 잠시 들리셨던 건데 운이 좋았어요. 그렇게 2년 동안 있었는데 갑 자기…….” 릭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곧 침묵했다. 소름이 돋는 듯 부르르 떨던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왔어요. 스승님은 저에게 문……아니, 베르나와 함께 도망치라고 소 리치셨어요. 그는 너무 강했어요.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었지만 스승님은 그의 공 격을 막는 데만도 힘이 붙이셨어요.” 릭의 눈에 강한 공포가 어렸다. “저희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어요. 스승님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 었어요.”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귀신같이 우리를 추격해왔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무하는 제법 실력을 쌓은 듯한, 게다가 아직도 치기어린 감이 없지 않은 릭이 저 토록 기겁할 정도의 실력자가 궁금해졌다. 물론 겁에 질린 릭에게 그에 대해 물 을 정도로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살아서 여기까지 왔지 않니.” 서툰 위로가 먹힐지는 알 수 없지만 뭐라 한마디 안 해줄 수가 없었다. 릭은 단숨 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단호하면서도 처절한 부정에 무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서 도망 친 게 아니에요. 그가 저희를 놔 준거죠. 그는……. 떠는 것밖 에 할 줄 모르는 저희에게 ‘귀찮아졌다. 꺼져.’라고 말하며 사라졌어요.” 다시 입술을 꾹 깨물던 릭은 두 손의 나이프와 포크를 힘껏 쥐며 약하게 떨었다. 이번에는 공포보다는 치욕감이 강했다. 그가 강한 것은 분명하다. 어제 등 뒤에 서 시전 된 마법을 느꼈을 때보다도 엄청난 두려움에 잠식됐을 정도로. 어쩌면 스 승을 죽였을 지도 모르는 자의 앞에서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목숨구걸을 하지 않 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이제 제법 실력이 쌓아졌다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만에 빠져있었던 릭에게 강한 충격과 수치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강해요, 무하님.” 오랜만에 타인에게 호기심을 가졌지만 무하는 기꺼이 그것을 포기했다. 클랜이 알 았다면 땅을 치고 통탄하겠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는 릭을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무관심한 얼굴로 접시 안의 내용물만 천천히 비우기 시작하는 무하였다. 릭은 떨리는 몸을 간신히 억제하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질 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온 몸을 휘감아버린다. “무하님. 혹시…….” “……?”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릭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우걱우걱 음식을 먹어치웠다. 물어봐서 뭘 어쩌겠다 는 것인가. 또 답을 들으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대책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편 이 좋다. 점점 고개가 숙여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는 음 식이 아닌 자신을 죽이려 들던 그 남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냉랭한 얼굴로 여유 있게 카 등급이었던 스승님을 몰아세우던 모습과 굳어서 어 쩔 줄 몰라 하던 자신을 향해 짓던 조소. 뼈저린 실력차를 느꼈다.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태산을 본 듯한 막막함과 스스로에 대한 경멸. 릭은 저도 모르게 이 를 갈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도주하던 베르나와 자신을 귀신같이 추적해 오던 그는 무심결에 욤 어 로 지른 고함을 듣더니 멈춰 섰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차가움과 싸늘함이 두 렵게만 느껴지던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장난스럽게 어루만지다가 검집에 집어넣었 다. “녀석도 감금당한 마당에 굳이 움직여줄 이유는 없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영문 모른 채 서로를 끌어안고만 있는 릭과 베르나를 보고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다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여지껏 그가 지었던 차갑고 굴욕감 느껴지는 웃음이 아니었다. 좀 전과는 극적으로 다른 부드 러운 미소를 머금는 모습이 소름 돋을 지경이다. 릭은 자신이 그에게서 느꼈던 수 치와 분노를 잊고 멍하니 그를 올려보았다. 그는 오른 손을 허리에 가볍게 얹으 며 릭을 향해 상체를 약간 숙였다. 그리고 물었다. “페르노크를 아나?” 그 순간 릭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짓고 있는 저 미소는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을 위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입에 담은 사람을 향한 미소였다. 입에 담기만 해 도 행복한 듯 그는 생글 웃어댔다. 결국 자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 릭 은 비참함에 악을 썼다. “알 리가 없잖아!” 그는 완전히 흥이 깨졌다는 얼굴로 손을 대충 휘휘 저어보였다. "귀찮아졌다. 꺼져." 그리고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백금발이 가닥가닥 곱게 흩날리는 모습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토록 자신의 존재가 가치 없음을 절실히 보여준 남자도 드물었다. 그가 여지껏 보아왔던 강자들은 한손에 꼽지만 나름대로의 위치가 있었다. 스승님에게는 성실 한 제자였고 무하님에게는 보호해 주어야 할 일행이었다. 심지어는 밉살스런 시륜 씨에게 조차 ‘짐짝’으로나마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이라는 존재는 완전히 잊은 듯한 모습. 나름대로 용병을 지망하며 검을 익힌 녀석이 결국 검 한번 못 뽑아보고 끝난 게 아닌가. 2년을 헛산 거다. 릭은 자신을 줄곧 보고 있는 무하에게 쓰게 웃어보였다. 그의 이름도 모르는데, 페르노크라는 사람은 찾아서 무엇 하려는 건지.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지기만 한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 수정하느라 너무 바쁩니다. 편집자 분이 또 바뀌어서 그 스타일을 알 수 없기에 더욱 꼼꼼히 읽어봐야 하거든요. 헤고...ㅡㅡ; 당분간은 연재를 제대로 못할 겁니다. 회귀의 장 일도 끝났...겠다... 수정을 부지런히 하고... 헤고... 할일이 많군요... 아해의 장-253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식사가 끝나갈 무렵, 릭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하님.” “님은 빼라니까. ……왜?” 이제는 거의 포기한 목소리로 지적한 뒤 묻자 릭은 좀더 소리를 낮췄다. “이 곳에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 할 수 있는 마법사나 마법진 같은 거 없나요?” “물자 이동을 위해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용병이나 일반 병사는 가까이 갈 수 없어. 기사나 가능하지.” “부탁하면 어떻게 안 될까요?” “누구에게?” “그건…….” 릭은 초조하게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말했다. “빨리 수도로 가봐야 해요. 전해줘야 할 게 있어요.” 그리곤 한참 머뭇거리다 우울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스승님의 유지죠.” 무하는 물통을 들어 몇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스승님이라……. 그날은 급히 도장으로 뛰어갔다. 드디어 음악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흥분한 탓이었다. 그것은 농땡 사부가 일전에 알려주었던 검무에 한걸음 다가갔다 는 걸 의미하기에 더욱 들떠 있었다. “사부!” 가방을 푸르며 단숨에 들어간 도장 안에는 손님이 한분 있었다. 하얀 수염이 목까 지 내려오는 근엄한 분위기의 할아버지였다. 그 앞에서 농땡 사부가 지겹다는 얼 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무하를 반겼다. “웬일로 네가 흥분을 다 하는 거냐. 와서 앉아라.” 얼른 이번의 깨달음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사부는 자신의 검무를 타인의 앞에서 논하는 걸 매우 싫어했던 것이다. 무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단 사부의 옆에 공손히 앉았다. 그런 무하를 노인은 불만 어 린 눈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할아범. 이 녀석이 내 제자야.” 농땡 사부는 짜증어린 목소리로 무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노인의 눈이 더욱 매서워졌다. “누구 마음대로 제자라는 것이냐!” “물론 내 마음이지.” “네 이놈!” 자신이 끼어들 곳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무하는 물러가 있겠다고 나직이 말하 고 일어나려 했다. 노인은 그런 무하의 팔을 낚아채듯 순식간에 잡아당겼다. “어딜 도망가는 게냐!” 무하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농땡 사부의 옆자리에 얌전히 내려와 있었 다. 농땡 사부가 노인의 팔을 내리치고 무하를 옆에 앉힌 것이다. 눈 한번 깜박 일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의 제자한테 무슨 짓이요? 늙으려면 곱게 늙어야지, 원.” 사부의 뜻밖의 거친 언사에 무하는 놀랐다. 무하가 아는 사부는 예의에 민감해서 절대 저런 언사는 입에 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은 무하와 다른 반응이었 다. 이미 그 정도쯤은 익숙한듯 이를 갈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 녀석 성질머리는 나이가 들어도 고쳐지지가 않는 구나! 제자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 “시끄러, 할아범! 당신만 안 왔어도 이런 말 안해! ……호오. 지금 ‘제자 앞’ 이라고 했지?” “누, 누가!” 크게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노인의 앞에서 다시 여유를 되찾은 사부는 씩 웃으며 앞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당주는 나야. 할아범이 상관할 일이 아니지. 무하는 내 제자야. 외부인은 우리 유파의 일에 상관하지 말아줘.” “뭐, 뭐라?” “외부인이라고 했어. 외부인. 사부님의 친구라 해도 내 일에 관련할 자격은 없 단 말이지, 할아범.” 맞는 말이었는지 반박하지 못하고 찻잔만 노려보던 노인은 대번 그 화살을 무하에 게로 돌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무하가 반문하자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크게 소리쳤다. “네가 검무를 배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단 한 사람에게만, 후계자에게 만 계승되는 검무를 생판 남인 네가 배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고 묻는 거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인지라 사부를 슬쩍 올려보았다. 사부는 차를 마시고 있었 다. 그러는 와중에도 노인의 추궁은 계속 되었다. “난 저 놈의 사부에게 약속을 받았단 말이다! 내 손주에게 검무를 계승받기로! 헌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끼어들어 일을 망치냔 말이다! 고아 녀석 기 른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 놈은 늘 제멋대로였어. 어른 말은커녕 사 부 말도 제대로 안 듣고 늘 오만불손에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었다고!” “난 당신 말만 안 들을 뿐이야. 남의 유파 검술 훔쳐갈 생각만 하는 늙은이를 존 중해줄 이유가 뭐에 있나?” “이, 이……!” 무하는 계속 끼어들 생각조차 못하고 사부만 올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노인은 수도를 내뻗었다. 무하가 봤을 때는 사부는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음에도 노임의 예 리한 손은 계속 허공으로 빗나기만 했다. 사부의 얼굴에 조소가 스며드는 게 보이 는 순간 노인은 잔뜩 경계하며 다섯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사부는 움 직이지 않고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뿐이었다. “무하야. 저 늙은이는 말이다. 우리 유파의 검법을 훔치려고 일생을 걸은 미치광 이란다. 내가 사부의 제자로 들어갔을 때, 사부 몰래 나를 죽이려 했을 정도지. 자기 아들이 내 사부의 제자가 되길 바랐거든. 쿡쿡. 하지만 나의 사부는 눈이 정확해서 말이다.” 킬킬대던 사부는 무하의 머리를 거칠게 부비며 말했다. “물론 내 눈도 정확하지. 저 늙은이한테 한마디 해줘라. 이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이다.” 무하는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노인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사부를 올려보았다. “네가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다 해도, 이 사부의 안목은 믿지 않니?” 어떻게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저런 말을 뻔뻔스레 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무하가 그 오만한 말에 넋을 잃고 있을 때, 노인은 다음에 손주와 오겠다며 요란 스럽게 나가버렸다. 노인이 나가자마자 사부는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왜 말하지 못했지?” “…….” “네가 방금 그 늙은이에게 아무 말도 못한 것은 이 사부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과 같다. 너를 제자로 맞은 사부에게 네 스스로 욕을 한거다!” 말을 차분하지만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무하는 그런 그를 물끄러니 올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자였네요.” “응?” “내쫓기 위해서 호신술만 알려준 것이라 생각했어요. 진짜 제자는 아니라고.” 고개를 숙이는 무하에게 사부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나를 뭐라고 부르냐?” “농땡 사부.” “그래. 사부! ……이제와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늘 생각하는 거지만, 농땡 사부는 무하의 고민을 늘 가벼운 말 한마디로 날려버리 곤 했다. 고민하고 있던 무하가 바보라는 듯 말이다. 무하는 물통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사부인가…….”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뒤 노인이 손자를 데리고 왔다. 배움에 전혀 의욕이 없 던 그 손자는 무하에게 절대 제자 그만 두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버렸고 노 인 혼자 바보가 되어 덩그러니 도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농땡 사부는 크게 웃으 며 실의에 빠진 노인에게 제자 자랑을 늘여 놓으며 약을 올렸고, 그가 돌아간 뒤 에도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릭.” “예?”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믿고 배움을 준 사부에 대한 모욕이 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릭은 무하가 독심술도 할 줄 아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잠시 고민을 했다. 곧이어 들려온 무하의 말이 아니었다면 아무 그렇게 단정 지었 을 것이다. “나는 그런 실수를 저질렀었지. 너는 그러지 말아라.”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갑자기 농땡 사부와의 일이 생각나 말해봤을 뿐. 하지만 시무룩하게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을 보자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실수를 이미 저질렀을 지도 모른다. 무하는 작게 한숨을 쉬 며 물을 몇 모금 더 들이켰다. 언제 마셔도 달고 시원한 물은 그의 기분을 한결 좋게 만들어주곤 했다. “오늘 갈 때 배웅 나가마. 이곳에 들렸다 가라.” 아직도 시무룩하게 뭔가를 고민하는 릭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경우에는 누군가 끼어드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사부가 죽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잠시 고민해 봤지만 농땡 사부가 죽어 있는 모습은 절대 상상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나 사라지기 직전이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낄낄대던 분이 아니던가. 세상 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분명 있는 것이다. * * * “부장!” 팔을 다친 녀석의 붕대를 갈아주던 무하는 허겁지겁 달려오는 피일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앞으로의 생계에 지장 없게 하기 위해 몇 없는 힐링을 쓰고 금방 병석에서 일어난 피일은 전투에 참여하는 건 무리더라도 무하의 심부름을 하면서 제 노릇은 하고 있었다. “상부에서 대장 와보라는데요.” “클랜은 성벽 순찰 가서 오려면 멀었는데.” “그럼 부장이 가보세요. 어차피 지시 사항같은 건 누가 들으나 마찬가지니까.” “아아.” 상부라면 아직 돌아가지 않은 근위기사를 말하는 것이다. 황제가 괜찮다 싶었던 녀석은 죄다 회수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기사는 그리 질이 좋지 못한 녀석뿐이었 다. 몸을 사리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테밀시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결단력이 지극히 부족한 그는 주위의 비웃음만 사고 있을 뿐이었다. 뭐, 몸은 편하지만 말이다. 무하는 앞의 환자의 붕대를 마저 꼼꼼히 감은 뒤, 피가 묻은 손을 수건으로 대충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 걸까? 문을 밀치고 천천히 걸어갔다. 부산스러운 분위기. 벌써 일주일째 전투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상층부를 맡고 있는 기사가 적의 도발에도 움직이 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남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서둘러 오고 있을 휴첼 기사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태도가 너무 소극적이라 욕도 많이 먹고 있 다. 용병들이야 돈도 받고 일도 안하고 좋기만 하지만 기사들은 공을 세울 기회 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상층부에서는 무턱 대놓고 움직였다 가 전력이 줄어드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주 전력이던 근위 기사들이 대거 빠져나 감으로 현재 요새 내의 전력이 많이 줄었음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듯 싶다. 곤크의 투입으로 어느 정도 보충은 됐지만 어디 근위기사만 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릭이 떠난 지도 일주일째다.’ 언제나 고맙다고 하는 이해 안 되는 녀석. 2년 동안 변한 건 덩치뿐인지, 치기 어린 면도 순수한 면도 그대로였다. 지금쯤이면 스승님의 유지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던 때도 있었다. 제자라니…….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유파에서는 자를 단 한사람 받아들이고 계승하기 때문에 무하가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면 무하 대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농땡 사부는 그것을 알려주면서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라고 했다. 후대에 어찌되든 억지로 제자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그런 식으로 짧은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진심으로 가르치고 싶은 녀석이 생기면 그때 가서 하라고 말해주었 다. 또한 무하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대에서 끊겼을 지도 모른다면서 웃기도 했 다. 갑자기 못 견디게 그 분이 보고 싶어졌다. 사부라면 이 어리석은 제자가 지 금 품고 있는 고민을 단 한마디로 날려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고민하고 있던 녀석을 바보로 느껴지게 하면서 통쾌하고 예리한 말을 뱉어냈을 것이다. ‘어디로 떠나신 겁니까, 사부.’ 머리는 상념에 젖어 있어도 몸은 제대로 길을 찾아갔다. 요새 내에서도 중심부에 해당되는 성. 무하는 눈앞에 나타난 성을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이곳이 바로 상층부가 머무는 곳이다. 전에는 많은 근위기사가 기거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바쁜 사람 오라, 가라하며 한가롭게 있는 근위기사 한명이 남아 있는 곳. 물론 그 외에 참모나 기사들이 많긴 했지만 말이다. “곤크의 부장. 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한가한 듯 잡담을 나누고 있는 문지기들에게 말하자 음흉한 얼굴로 키득거리며 들 어가라 손짓했다. 들어가는 무하의 등 뒤로 2층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가 면 좋은 구경할 거라는 둥 물건이 처치 곤란일거라는 둥의 음란한 조롱은 귓등으 로도 듣지 않으면서 말이다. 막 2층이 들어서자마자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밑에서 문지기들이 떠들었던 대로 남녀가 몸을 섞고 있는 것일까? 잠시 멈칫했던 무하가 다시 발을 옮긴 것은 그 신음 소리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런 쪽으로는 무지했건만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는 익숙했다. 그것은 억눌린 비명이었다. 고통을 삼키는 그런 것이 아니 라 비명을 지르는데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런……. 뭔가 불쾌한 예감이 온몸을 관 통했다. 소리가 새어나오는 방문 앞에서 도달한 무하는 머뭇거림 없이 열었다. 만약 자신 의 착각이라면 사과하고 나오면 그만 아닌가. 차라리 착각이길 바랐다. 문이 열리 자 신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문에 채인 무언가를 무심결에 내려보았다. 바구니 와 바닥에 더렵혀진 빵들.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 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이내 찰싹, 하고 뺨 때리는 소리가 난다. 다시 우당탕 물건 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천이 찢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잔뜩 흥분해서 기이한 웃음소리를 연실 흘리는 근위기사 한명이 이어 눈에 들어왔 다. 그리고 완전히 열린 문 안으로 찢겨진 상의를 필사적으로 잡으며 몸부림치는 여자가 보였다. 일전에 주점에서 봤던 여자다. 순박한 인상의 용병과 행복하게 웃 던 그 여자. 그 순간 무하의 이성은 멀리 사라졌다 “개자식!” ========================================================================= 드디어 끝났다... 4권 수정... 후우... 아해의 장-254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무하가 숙소를 떠나고 얼마 안 있어 클랜이 돌아왔다. 환자를 돌보고 있던 피일이 얼른 상부의 명을 전했다. 무하가 대신 갔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클랜은 심히 불안한 얼굴로 숙소에서 나왔다. 무하는 극소수의 일만 제외하면 언제나 이성적이고 차분하며 냉정하기까지 한 남자다. 하지만 극소수의 예외가 있다. 클랜은 현재 상부층의 기사를 잘 알고 있었다. 실력과는 상관없이 색을 밝히고 거칠기 그지없는 녀석이다. 일전에는 클랜을 불러 놓고 옆방에서 여자를 탐하다 나오기까지 했다.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호탕한 듯 비웃음을 짓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만약 그런 경우를 무하가 직면한다면 가만히 넘어갈지 말지 알 수 없다. 클랜이 급히 발을 놀리고 있을 때, 옆의 골목길에서 한 무리의 용병이 뛰어나왔 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치고 만 클랜과 그 무리의 한명은 서로 짧게 사과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며 앞을 보고서야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범크의 대장, 테호르였다. 그도 클랜을 알아보고 인상을 슬쩍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옆의 부하의 독촉에 급히 몸을 돌렸다. 클랜은 그들이 상층부가 기거하는 중심부 성으로 간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와 목 적지가 같았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뛰어 그들을 따라잡았다. 중심부로 가는 걸 보면 전투가 벌어진 것은 아니고, 현재 그곳에 무하가 있기 때문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봐! 무슨 일 있어?” 제발 무하와 관련된 일이 아니길 빌며 소리쳐 물었다. 날래게 뛰던 테호르는 클랜의 참견에 인상을 쓰며 답했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무슨 일인데 그래?” 무하에 관련된 일은 아닌 모양이다. 일단 안심한 클랜은 재차 물었다. 테호르는 앞에서 거치적거리는 남자를 거칠게 밀치며 무지막지하게 뛰었다. 답을 할 여유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가보면 알겠지, 속 편히 생각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중심부에서 뭔가 일이 터지긴 터진 모양이라는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미로처럼 지어진 요새의 길을 굽이굽이 돌고 돌자 드디어 중심부에 도착했다.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려주듯,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테호르와 범크의 용병들은 몰려있는 다른 용병들을 마구잡이로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클랜도 그 무리에 얼른 속했다. 뒤에 있어야 뭔 일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테호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문지기에게 소리쳤다. “이실은 어디 있어!?” “예?” “빵집 아가씨, 이실! 고다의 애인 말이야! 여기 기사 새끼가 불러들였다며!” “그, 그게…….” 문지기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문이 크게 덜컹 거렸다. 무언가가 거세게 부딪친 듯한 모습. 움찔 몸을 떠는 문지기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야?” 클랜이 다가와 묻자 문지기가 반색했다. 그러고 보니 문지기의 한쪽 눈에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한번 들어갔다가 당하고 나온 듯싶었다. 아예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벌벌 떠는 꼴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곤크의 대장이죠? 어서 좀 말려줘요. 아까부터 계속 저 소리가 난다구요!” 다시 쾅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문짝이 박살이 나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 은 바지만 대충 걸치고 있는 우스운 몰골에 화려한 검만 굳게 쥐고 있는, 한명 남 은 근위 기사였다. 바닥을 여러 번 구루다 벌떡 일으킨 그는 얼른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거의 동시에 성 안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기사에게 달려갔다. 주위에 강렬한 멜로디가 들리기 시작했다. -챙! 기사가 얼른 검을 내밀지만 않았다면 정통으로 목을 맞을 뻔 했다. 만약 그랬다 면 비록 상대가 검을 뽑지 않고 검집 채 내려치고 있었다지만 그 부상의 정도는 보통을 넘었을 것이다. 기사의 모습을 본 고다가 괴성을 질렀다. 그는 단숨에 검 을 뽑아들고 달려들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검을 휘둘렀던 이가 훨씬 더 빨랐다. 막힌 검을 놓고 부드럽게 몸을 돌려 기사의 배를 돌려 찬 것이다. 곧 죽어도 기사 라고 검을 놓치지 않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남과 거의 동시에 떨어지는 자신의 검 을 잡아채고 앞으로 달려갔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휘든 그의 검에 손목을 맞 은 기사는 기어이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가 그냥 기사가 아닌 근위 기사임 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어리벙벙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그의 몸에 적지 않은 상처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곳곳에 들은 피멍 과 터진 상처들……. 그나마 여지껏 버텼던 것은 그가 나름대로의 실력을 갖춘 기 사였기 때문인 것이다. 기사가 검을 놓치자마자 공격하던 이도 검을 옆으로 던지듯 내려놓더니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날려버렸다. 휘청이는 사이에도 무릎으로 복부를 올려치고 팔꿈치로 내리치고……. 말 그대로 신들린 듯이 패는 공격자의 모습에 고다마저도 넋을 잃 고 멍하니 보기만 했다. 클랜은 흠칫 공격자의 신변을 파악했다. 한번 화나면 눈 에 뵈는 게 없는 남자, 무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런 ‘상태’의 무하에게 한번 비 오는 날 먼지 날 때까지 맞은 경험이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무하!” 이제는 얼굴만 마구 패고 있는 무하의 뒤로 가 얼른 붙잡았다. 하지만 그쯤은 상관없는지 도망가는 기사의 뒤를 쫓으며 이제는 발로 차기 시작했다. “제발 정신 차려!” “난 제정신이야.” 다급히 소리치는 클랜이 무색할 정도의 차분한 음성이 광기 어린 발차기를 계속하고 있는 무하의 입에서 나왔다. 이제는 성안으로 필사적으로 기어가는 기사를 따라가려는 무하를 필사적으로 막으며 소리쳤다. 무하가 이성적이던 어쨌던 다급한 상황에서 작은 목소리가 나올 리 없지 않은가. “상대는 기사야! 너 미쳤냐!?” “여기 기사는 아무 여자나 강간해도 되는 거였나?” 영문 몰라 하던 이들 순간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기사를 노려보았고, 그 일로 급히 뛰어 왔던 범크의 용병들은 아차! 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고다만이 황급히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뒤에서 무하가 차분히 말했다. “2층이야.” 고맙다는 인사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무하는 날 듯이 뛰어가는 고다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성 안쪽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기사의 목덜미를 잡아 채 뒤로 당겼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는 모습이 흉하기 그지 없었다. 피범벅 인 손을 다시 들어올리는 무하의 팔을 클랜이 황급히 잡아챘다. 무하의 싸늘한 눈이 자신을 향하자 클랜은 급히 말했다. “미쳤어? 우리는 지금 곤크 소속으로 온 게 아니야. 귀족과 트러블을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 “더 잘 됐어. 단에게 책임전가가 안 되니까. 비켜.” 클랜은 놓칠 뻔한 무하의 손을 굳게 쥐며 이제는 속삭이듯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너와 난 파트너가 아니던가?” “…….” “이제 됐어. 충분히 팼다고. 그만 하자, 응?” 무하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클랜은 주위를 감싸고 있는 멜로디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씁쓸히 웃었다. 저 멜로디를 듣고는 싶었지만 분노하여 나온 것을 원한 건 아니었다. 무하는 뒤에 떨어져 있는 검을 주어 천천히 허리에 맸다. 한숨 돌린 기사가 주저앉은 그 상태로 크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횡포냐! 당장 참수다! 참수!” 범크의 대장, 테호르의 눈매가 예리하게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깜박할 뻔 했네.” 뽑아져 있는 검을 서늘하게 들어올리며 살기를 뿜는 그를 본 기사는 새파랗게 질려 자신의 검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 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던 무하는 피에 젖어 미끄러운 손으로 간신히 검을 고정시키고 뚜벅뚜벅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를 발견한 기사의 얼굴이 밀랍처럼 변했지만 이제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멜로디가 사라졌음을 알고 한숨 놓는 듯 했다. 그러나 클랜은 달랐다. 격한 감정이 사라졌다 해서 매운 손속이 가셔진 게 아님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하?” 조심스러운 그의 부름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일이었다. -퍽! 기사의 얼굴은 더 이상 가실 핏기가 없어보였다. 흰자위만 보이던 눈이 천천히 감기며 뒤로 털썩 쓰러져 버렸다. 기절 한 것이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용병들은 윽, 하며 신음을 터뜨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픈 한방이었다. 무하가 기사의 급소를 아주, 매우, 몹시 세게 걷어 차버린 것이다. 차가운 눈으로 기절한 기사를 내려보다가 나직이 중얼거린 무하의 말은 방금 현장을 목격한 모든 이로부터 다른 건 몰라도 절대 강간만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고자나 되 버려, 버러지.” ========================================================================== 여기서 문제! 기사는 고자가 됐을까요? 안됐을까요? . . . . 답은 기사만이 알고 있습니다. 아해의 장-255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무하가 한 강간범을 구타하는 그날로부터 일주일전, 수도의 뒷골목이다. 그곳은 요즘 분위기가 묘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몇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레타 사잔 아나의 날’을 걸쳐 마스터가 교체 된 것이다. 게다가 선대 마스터의 처참한 죽음 역시 한 몫 했다. 대부분의 선대 마스터는 장로로 물러나 막강한 권력을 휘둘던 것을 보면 확실히 지금의 현상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들 현 마스터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깊은 경의감과 존경심 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이름조차 경건한 ‘청염의 마스터’. 모든 역사를 뒤져도 열손가락 안으로 꼽히는 수장의 맹약자!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묘한 분위기란 여지껏 뿔뿔이 흩어져 있던 레타 내의 패거리가 한 구심점을 가짐으로써 생기는 기류였다. 이제는 민 장 레타의 이름을 가지게 된 민은 자신이 즐겨 마시는 화림을 홀짝이 며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제대로 차 맛을 즐기지도 못했다. 소 파에 몸을 푹 파묻고 있었던 그는 슬쩍 일어나 자신이 현재 있는 레타 마스터의 서재를 돌아다녔다. 그 깊은 포만감과 만족감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테이블을 손으로 쓸어보던 민은 쓰게 미소 지었다.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미리가 죽음으로써 가지게 된 자리라 보아도 무관하지 않는가. 복수를 위해서 아 이세란을 노린 게 아니다. 아이세란을 죽임으로써 생기는 이득에 ‘복수’라는 항 목을 추가시킨 것뿐. 민은 미사여구나 되먹지 못한 감성으로 자신을 곱게 포장하 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항상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싶었다. “미리…….” 얼마나 사죄해야 그녀에 대한 죄악이 씻어질 수 있을까? 카나는 민이 다른 여자를 가지지 말아 달라고 했다. 평생 미리만을 떠올리며 살아 달라고 했다. 민은 본래 다른 여자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또한 미리를 잊을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인간을 혐오하기에, 불칸을 사랑하기에, 그리고 미리에 대한 죄책감에 그러한 것이다.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흔들리면 안 된다. 어둡게 잠식하면 안 된다. 그 아이가 눈치 채 버릴 것이다. 강하고 잔혹하며, 약하고 따뜻한 그 아이가. 그 황홀한 위용을 드러낸 불칸을 보는 아이세란의 얼굴은 패배감에 일그러져 있었다. 두려움도 공포도 없이 그저 패배감과 굴욕감뿐. 마스터에서 물러나 봐야 장로가 될 뿐이니까. 하지만 그 얼굴이 언제까지 유지 될 수는 없었다. 환호하는 이들 사이에서 익숙한 몇몇 얼굴이 나타나 새 마스터의 곁으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죽였던 계집이 자매라는 암살자와 그녀의 아비, 자신의 정부인 제그와 딜린. 그 외에도 슈와 록, 멀리서 임무 수행중이라는 산이 있기도 했지만 아이세란의 눈은 제그와 딜린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뇌리를 꿰뚫는 섬뜩한 한마디. 속았다! 분노와 증오가 들끓는 와중에 민의 나직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나는 나의 친우들에게 복수의 기회를 허락한다.”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자동으로 장로의 지위를 받게 된 아이세란에게 처형의 명 을 내릴 수는 없었다. 복수의 기회를 내리는 것이 레타 마스터, 민이 부여할 수 있는 최대의 권리였다. 아이세란은 노성을 지르며 무기를 주워들었다. 카나가 먼저 달려들었다. 미리를 죽인 여자! 그것을 제그와 딜린, 키안은 침묵 속에서 지켜보았다. 살기 어린 눈으로 한손에 무기를 어루만지면서. 악에 바친 카나의 공격이 처절하게 이어졌지만 아이세란은 역시 강했다. 복수의 기회를 주었다 해서 얌전히 죽임을 당하라는 건 아니다. 상대가 그럴 ‘능력’이 될 때야 겨우 복수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카나가 그토록 실력을 갈고 닦았던 거다. 지금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는 이들만 처리하면 장로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이세란은 필사적이었다. 비록 속아서 패했다고는 하지만 얌전히 당해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자신을 곱게 죽일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분노로 냉정을 잃은 암살자쯤이야 문제될게 없다. 아이세란의 눈에 짙은 조소가 담김과 동시에 그녀의 단검이 카나의 틈을 비집고 그 목줄기를 노렸다. 그녀는 자신의 승리를 자신했다. 그 다음 순간이었다. 검은 망토를 둘러싼 한 사람이 카나와 아이세란의 사이에 불쑥 튀어나왔다. 너무 빨라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몸놀림! 누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그 사람 은 카나의 복부와 아이세란의 복부를 양손으로 거칠게 밀었다. 그것은 밀었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의 강한 타격을 두 여자에게 안겨주었다. “뭐야!?” 뒤로 크게 밀려난 카나가 앙칼진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사정이 좋다고 볼 수 있 었다. 아이세란은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양 손에 주는 타격의 강도를 달리했던 것이다! 카나는 그것을 알아보고 멈칫했다. 갑작스런 방해자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음을 안 것이다. 제그가 달려와 카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질린 안색에 진한 근심이 담긴 눈동자. 카나는 자신이 죽음 직전에서 벗어난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분해.” 낮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렁였다. 제그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토 닥여 주었다. 민과 딜린은 갑작스런 방해자의 등장에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네가 아는 녀석이야? 서로 모르는 이임을 눈치 챈 둘은 다시 고개를 방해자에게로 돌렸다. 후드까지 눌러써 정체를 알 수 없는 방해자. 그는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최악의 경우에 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온, 바로 그 사람이었다. 딜린은 당사자인 민이 그를 모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이세란을 일격에 상당한 타격을 안겨 줄 수 있는 실력자가 많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의 정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역시 세상에는 숨은 강자가 많은 모양이다. “이야, 이야. 이거 재미있는 구경을 했어.” 방해자의 입에서 조롱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뜻밖의 미성. 그것을 들은 아이세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휜!” 방해자는 키득키득 웃더니 곧 후드를 뒤로 넘겼다. 증오스런 청자색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의 실크 같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색정스럽게 느껴지는 그는 계속 조소를 짓고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웃던 그가 웃음을 멈추고 아이세란을 똑바로 쳐다보았을 때, 다들 헛바람을 삼키며 경악해야 했다.청자색 눈동자! “살다 보니 이런 구경도 다 해보는 걸?” 휜은 피식 웃으며 예의 비웃는 어조로 말을 했다. 아이세란은 이를 갈며 그런 휜 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 한편에 불안이 스며들고 있음을 본 이들은 의아한 눈으로 휜을 보았다. 같은 청자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끼리는 뭔가 다른 영향이 있는 것일까? “청자색 눈동자의 사람이 그런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이 청자색 눈동자를 가진 거다……라고 했던가.” 딜린이 한숨과 같은 속삭임을 뱉어냈다. 그것을 들었는지 휜의 눈에 미소가 스쳤다. “같은 종족이어도 나는 어렸어. 성인이 아니었지. 게다가 열쇠도 없었어.” 아이세란은 더 이상의 것은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살기를 뿜었다. 휜이 말하는 것 은 그들의 종족의 기밀이다. 죽어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경건한 비밀인 것이 다. 휜은 그 살기를 온몸으로 받으면서 아랑곳 하지 않았다. 되려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이미 많은 사람에게 입을 열었어. 당신의 속박에서 벗어난 뒤로 말이지.” 지배당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본래 기억이 소멸되어야 하지만 같은 능력을 가진 종족으로써 기억의 제압은 면한 것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상처가 되 어 휜에게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속박에서 벗어났 어도 그는 여전히 암살자로서 살아왔기에.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저 마녀의 집착과 독점욕으로 인해 자신을 처음으로 인간대접 해준 할아버지를 죽 여야 했다. 차라리 하츠민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존 재들이지만 그곳이 마음 편했다. 적어도 마녀의 속박 속에 있는 것보다는 말이 다. 아이세란의 청자색 눈동자의 동공이 확대됐다. 그것은 정확히 휜을 향했다. 휜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동공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는 단지 웃었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성인이야.” 열여덟 살이 되어 마녀의 속박에서 벗어 난 뒤에야, 자기들의 종족의 성인이 그 나이임을 알았다. 그는 바로 하츠민으로 돌아갔다. 복수를 생각하기에는 지금 당 장의 자유가 너무 달콤했던 것이다. 그리고 테밀시아를 만났다. 마치 형처럼 자상 하게 대해주던 그를. 하츠민인데도 인간대접을 해주던 이상한 귀족 기사. 살인 인 형으로 조롱당하던 그를 아껴주던 할아버지 같은 남자. 그리고 루카다……. “그리고 이제 열쇠도 있어.” 작은 속삭임이 끝남과 동시에 휜의 동공이 확대됐다. 아이세란의 얼굴에 식은땀 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세란의 동공이 천천히 축소되기 시작했 다. “어째서! 가만히 있으면 레타는 너의 것이 될 텐데! 어째서!” 마지막 발악. 아이세란의 눈동자는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빛까지 잃 은 눈동자. 그녀는 이제 생각만 할 수 있는 시체에 불과했다. 아니,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휜이 승리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자신 이상으로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휜이 어린 아이가 아니기만 했다면 지배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세란은 휜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열쇠를 만들지 않으면 그가 지배에서 벗어나리란 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에게 다음 레타 마스터 자리를 약속했다. 실제로 지배에 벗어나고도 복수하러 오지 않은 것을 보고, 그리고 암살자로 활약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내 건 조건을 받아드린 것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휜은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만히 있는 아이세란의 속에 그녀의 영혼이 몸부 림 치고 있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때문에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녀 가 자신에게 레타를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네가 준 것 따윈 필요 없어.” =========================================================================== 이제 5권을 향해 행진~!!! ......그런데 왜 이리 잠적이 하구 싶누...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아해의 장-256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그렇게 마스터가 되었다. 청염의 마스터라는 명예로운 호칭과 함께 모두의 경의 속에서 마스터가 된 민은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진정으로 ‘마스터’가 되는 순간 벗으리라. 아직은 귀족으로써의 자신의 신분도 유용하게 쓸 필요가 있었다. -똑똑. “나다.” 노크 소리와 동시에 들린 목소리. 딜린이었다. 들어오라는 민의 답이 떨어지지 문이 열렸다. 매력적인 금발의 소유자 딜린은 약간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그의 의외의 모습에 민이 의아한 눈길을 보냈지만 쓰게 웃기만 한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의논 할 것도 있고.” 자리를 권하자 망설임 없이 깊이 몸을 파묻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남자에 대한 처리는 이미 결정해 둔 상태였다. 위험할 정도로 영악한 남자. 같은 목적을 위해 함께 움직이긴 했지만 동료는 아니었다. 하지만……. “질문 먼저 하겠어. 날 어쩔 생각이지?” 뭘? 이라고 묻기에는 이미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민은 한숨을 쉬며 화림을 한 모금 꿀꺽 삼켰다. 딜린에게 차나 무언가를 권하기에는 둘의 입맛이 대조적이 었다. 달은 것은 질색인 민와는 달리 그는 단 것이 껌벅 죽기 때문이다. 차를 접시 위에 내려놓은 뒤 딜린을 곧은 눈으로 주시했다. 딜린 역시 차분한 눈동자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라고 하면 믿으려나?”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네가 농담을 할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어째서?” 자신이 어떻게 처분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딜린은 당당했다. 알건 알아야겠다는 그의 의지를 읽은 민은 쓰게 웃으며 손에 들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터놓고 말하면 부러워서 랄까?” “부러워?” “아아.” 자신과는 달리 순수하게 분노하고 슬퍼한,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네가 먼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먼저 배신하지 않겠다. 네가 배신을 한다면 그 뒤로는 길드의 규칙에 맡기겠어. 하지만 그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친구인 너에게 베풀 수 있는 내 최대의 배려다.” 그리고……. 괴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민을 보며 딜린은 안타까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민이 한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는 멍청하지 않을뿐더러 눈치 또한 빠른 남자였다. 민은 스스로가 가진 이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상황이 괴롭고 모두가 자신을 신뢰하고 따라준다는 것이 못 견디게 미안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포기 못하는 자기 자신이 경멸스러운 것이다. 딜린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의논 할 것이…….” -똑똑. 민과 딜린은 동시에 문 쪽을 돌아보았다. “마스터, 손님이 왔습니다만.” 서로를 잠시 돌아보고 딜린이 고개를 끄떡하고서야 들여보내라고 말했다. 딜린이 자신의 용건을 나중으로 미룬 것이다. 문이 열리면서 순박하게 생긴 청년이 하나 들어왔다. 보통 마스터를 만날 때는 주위에서 이미 용건을 묻고 자객일 경우를 대비해 마스터 곁에서 호위를 하지만 레타는 달랐다. 마스터는 레타의 최강자다. 또 베일에 감싸진 이곳을 찾아올 정도라면 안면이 제법 트였다고 봐야 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신경 쓰지 않는다. 민은 그 청년과 만난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바가 없었 다. 청년은 기가 죽은 듯 주위를 살피다가 민과 딜린을 두고 누가 마스터인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걸 본 민은 그가 자신과 초면임을 알 수 있었다. 마스크를 쓴 자신이나 화려한 금발의 딜린이나 한번 보면 잊기 힘든 타입이기 때문이다. “이름 먼저 밝히는 게 어때?” 정체를 알 수 없기에 자리를 권하지는 않았다. 청년은 먼저 입을 연 민을 보다가 얼른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스승님께서 이곳에 이것을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민은 그것을 봉하고 있는 문장이 눈에 익음을 깨달았다. 황급히 그것을 뜯어 내용물을 읽어 내렸다.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그래,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게로군!” 그것은 보고서였다. 결과만 짤막하게 써져있는 보고서. 민은 맨 밑에 급히 써내 린 추가 글을 읽고 눈살을 찌푸렸다. “‘추적당하고 있음. 발각될 확률 큼. 만약의 경우 제자와 딸을 보내겠음. 대신 부탁함.’” 민은 새삼스런 눈으로 청년을 살펴보았다. 아직 세상물정 잘 모르는 순진한 면이 있는 것 같지만 잘 다져진 몸을 보니 제법 단련은 한 모양이었다. 허나 레타에서 써먹을 곳이 있을 런지……. “그는 어찌 됐나?” “예?” 잔뜩 긴장해 있던 청년은 얼떨결에 반문하고 말았다. 민은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자네의 스승 말이야. 어찌 됐나?” “아…….”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는 모습으로 충분히 답이 됐다. 민은 그것을 잘 접어서 품에 넣었다. “자네는 자네의 스승이 뭘 하는 사람인지 아는가?” “전직 카 등급 용병이셨다고 하셨습니다.” “용병이라. 뭐,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용병이었을 지도 모르지.” “예?” 민은 손을 건성으로 저어보이며 답을 거부했다. 대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용병 지망생인가?” “예!” 기운찬 대답. 몬스터 사태 이후로 용병이나 기사가 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세상 이다. 실력의 평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민은 청년을 위아래로 잠시 살펴보다가 딜린을 보았다. 그는 흥미 있는 얼굴로 민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깨를 으 쓱여 보이며 청년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에 묻고 있지?” “음유시인의 모임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이곳으로 오는데 도움을 주신 분이 추천해 주셨지요.” “도움? 이 편지에 대해 말을 했나?” “아니요! 스승님께서 절대 비밀이라고 하셔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예전에 잠시 여행을 같이 했던 분인데 우연히 만나게 되서……. 급히 수도까지 가야 한다고 하니까 이곳까지 텔레포트 시켜 주셨습니다.” 딜린과 민은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텔레포트라니! 그게 어디 동네 꼬마 이름이 던가! 이 청년이 아는 사람은 적어도 치유마법의 벽은 깬 마법사인 게 분명했다. “대단하군.” “예!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전 그 분이 마법까지 하실 줄은 몰랐어요! 검술이 보통 이상이셨거든요! 게다가 프리 급 용병이시고요. 지금쯤이면 카 등급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국경에 파견된 곤크에 부장이니까!” “……!” 딜린과 민은 다시 서로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검사라는 뜻인가? 하지만 둘 다 수준급 이상이 되는 것은 절대 무리다. 물론 간단한 마법 정도야 누구든 쓸 수 있다. 마나를 깨닫기만 하면 당장 2클래스의 마법까지는 무리 없이 시전 할 수 있으니까. 물론 자질이 부족하면 두통과 현기증으로 고생하고, 최악의 경우 바보가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게다가 곤크라니! 몬스터 사태 이후로 가장 인기가 높은 용병단이 아니던가! 마치 자기 자랑을 하는 것 마냥 들떠서 어쩔줄 몰라 하는 청년을 보다가 다시 서 로를 마주 본 뒤, 딜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용병의 이름이 궁금하군.” “마찬가지다.” 그 말에 청년은 좋아라 대답했다. “무하에요! 무하.” 민의 눈이 부릅떠졌다. 왜 녀석이 전쟁터에 있는 거야! “그 분이 없었다면 진작 죽었을 거 에요. 락아타에서 기사들이 병사를 거느리고 추적해 오는데 마법까지 썼거든요. 그 분이 요새에서 나와 막아주지 않았다면 스승님의 편지를 전달하지 못 할 뻔 했어요.” 어떻게든 무하를 높게 평가하고 싶어 하는 청년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을 아직 듣지 못했군.” “아! 저는 릭입니다.” 릭은 완전히 긴장을 떨친 듯 활짝 웃었다. 스승님이 알려준 곳으로 무작정 들어가긴 했는데 너무 어둡고 음침한 곳이라 은근히 겁도 먹었었다. 함께 오려고 했던 베르나를 여관에 두고 오길 잘했다고 곱씹으며 걷는데 결국 길을 잃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이상한 사내들이 둘러싸며 시비를 걸어왔었다. 다급한 마음에 ‘이곳’ 이름을 대며 가야한다고 소리쳤는데 산만한 덩치의 사내들이 깜짝 놀라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이곳까지 안내 해준 것이다. 원래는 비밀에 붙여져 있던 이곳이 새 마스터가 들어오면서 공개해 버려서 모두에 게 신성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걸 릭이 알리 없었다. 그는 단지 그토록 무섭게 보이던 이들이 공손하게 변해 안내해주는 것을 보며 그들의 우두머리의 거처인 모양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또 이런 험악한 곳의 우두머리라면 덩치도 산이고 근육질에 머리는 대머리고 인상은 더럽고 애완동물은 몇 미터는 되는 뱀에다 양 옆에 미녀를 끼고……걷잡을 수 없는 상상을 해대며 방에 들어왔을 뿐. 뜻밖의 호리호리한 청년 둘만이 있는 터라 놀랐지만 말이다. 둘 다 늘씬한 몸에 매끄러운 이목구비를 가진 데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였다. 한 사람은 마스크를 써서 잘 모르겠지만 다른 한쪽은 놀라울 정도로 미남이었다. 보기 드문 아름다운 금발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다. 무엇보다 전혀 빈틈이 보이 지 않는 강함이 넘실댔다. 이 사람이 마스터일거라 단정 짓기가 무섭게 질문을 던진 자는 마스크를 쓴 남자였다. 화들짝 놀라며 편지를 주섬주섬 꺼냈다. 실내가 적당히 어두운데다 색이 워낙 짙어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이 흑발이 아니다. 푸른 빛이 머금어진 진한 남색이었다. 그런 머리카락은 시골 촌뜨기인 릭에게는 생소했다. 그의 주위에는 머리를 일주일이 한번 감을까 말까한, 지극히 서민적인 사람들뿐이었던 것이다.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누가 마스터일까? “편지에는 자네와 딸을 부탁한다고 써져 있네. 일단 음유시인의 모임에 계속 머물러 있게.” 릭의 고민이 계속 되는 와중에도 민은 차분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일단 이 청년을 내보내고 딜린과 이야기를 마저 나눈 뒤, 형님께 가봐야 한다. 이 편지의 내용을 가장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걸어갔다. 맨 위의 서랍을 열어 금화와 은하가 적당히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를 꺼낸 뒤 릭에게 건넸다. “이것으로 당분간 지내게. 수고했네.” 키가 훌쩍 큰 민은 어렵지 않게 릭의 어깨를 두들겨 줄 수 있었다. 릭이 나간 뒤, 딜린이 입을 열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지.” “아아. 의논할게 있다고 했던가.” 고개를 끄떡이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전부터 고민해 왔던 일이다. 만약 로드가 그곳에 있는 것이라면……. “잠시 이곳을 떠나 있으려 한다.” 민은 어이없는 눈으로 딜린을 보았다. 그 정도 자유는 레타의 일원 누구에게나 있다. 이곳은 ‘단’이 아니라 ‘길드’인 것이다. 하지만 딜린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쩌면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위험한 곳이라도 가려는 건가?” 민이 다급히 물었다. 그에게 있어서 딜린은 믿을 수는 없지만 2년간이나 동고동락 해 온 친구였다. “상황에 따라 위험할지도 몰라.” 딜린은 뜻밖의 걱정 어린 민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덧붙였다. “난 나의 로드를 찾으러 간다. 내 짐작대로라면 나 또한 위험해. 그곳은 ‘열려 져’ 있지만 동시에 ‘닫혀져’ 있기 때문이지.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 도망갔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야.” “뭐가 의논할 거라는 거야! 그냥 통보잖아!” 울컥 내뱉는 민에게 손가락을 까닥 까닥여 보이며 씨익 웃는다. “너는 이렇게 납득하고 있으면 되지만 다른 녀석들은 안 되잖아? 의논이라기보다 는 부탁이라고 해야 하나? 알아서 말 좀 꾸며줘.” “골치 아픈 일은 나한테 떠넘길 심사야?” “역시 예리한데?” 농담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딜린의 웃음 뒤에 감춰져 있는 뭔가 강한 각오가 느껴져 입을 열 수 없었다. 역시 딜린은 끝까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딜린이 나가고 민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서둘러 형님께 가서 편지를 전해 야 하고 계획을 아주 약간 수정해야 한다. 그 ‘약간’으로 인해 다른 착오가 없 게 하기 위해 다시 골머리를 썩여야 하며 릭의 앞으로의 행보도 결정해 주어야 한 다. 제그와 카나의 결혼 일정에 대해서도 같이 머리를 굴려야 하며 그들의 거처 도 생각해야 한다. 너무나 할일이 많음에도 움직일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 모양이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을.”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형님께는 뭐라 말하지?” =========================================================================== 졸렵다. 배아프다. 에고에고...=.= 졸렵다. 배아프다. 에고에고...=.= 졸렵다. 배아프다. 에고에고...=.= 졸렵다. (...무한 반복 중...) 아해의 장-257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어제부터 곤크는 푸대접을 받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난동’을 부렸던 그들의 부장의 일로 용병들 사이에서 되려 칭찬이 자자하다. 게다가 부장의 뜻밖의 정체가 밝혀져서 그 파동이 제법 컸다. 클랜이 그 유명한 카 등급 페어의 한명이 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파트너가 함께 전쟁에 참여했을 줄은 몰랐던 것 이다. 검은 두건이야 근래 들어 많은 용병들이 하고 다니는 유행품과 같은 것이 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본인이라니 새삼 다시 보게 된다. 게다가 자신들을 괴롭히던 주범격인 범크 소속 용병의 애인을 구하기 위해 저 근위기사를 두들겨 패다니! 속이 다 시원한 일이 아닌가! 주위에서 뭐라 수군대던 무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환자를 돌보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녀석에 게 주위는 물론 당사자도 모르게 마법을 걸어주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얌전히 있을 리 없는 근위 기사가 조용히 있는 것이랄까? 이대로 넘어갈리 없다는 것이 주위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그들은 어쩌면 아직 도 의식이 안 돌아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조용히 추측하며 킥킥대기도 했다. 클랜도 어지간해서는 숙소를 떠나지 않으며 무하의 곁을 지켰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기사들이 참수하겠다고 쳐들어올지. 물론 무하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의 추적을 손쉽게 따돌리고 요새 밖으로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말이 다. 긴장 속에서 점심이 지났다. “빌어먹을 새끼!” 중심부 성에서는 아침부터 저 시끄러운 욕설과 고함이 멈추지 않았다. 가끔씩 기물을 파손하는 소리도 들렸다. 물론 이어서 차마 내지르지 못할 신음이 들려왔 지만 말이다. 그 다음에는 여지없이 이 괴음이 들려왔다. “신관 데리고 와! 신관!” 그러면 바로 옆방에 있던 신관이 지겹다는 한숨과 함께 그에게 가 신성 마법을 시전 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대책 밖에 되지 못했다. 피멍이나 상처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유되었지만 그곳만큼은 신관도 진통을 억제시키는 정도밖에 해주질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또다시 그 ‘빌어먹을 새끼’를 향한 욕설이 터져 나왔고, 그것으로 부족해 무엇이든 때려 부순 다음에는 몸을 움직인 대가로 진정시켰던 통증이 불거져 나오고 그 다음에는 다시 신관……. 이렇게 악순환을 보내고 있는 근위 기사를 보며 많은 기사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억제하지 못했다. 지금도 보라. 안쓰러운 마음에 서로 술을 들이키며 킬킬대고, 개중에는 노래마저 부르고 있지 않은가. 자신들의 부상을 염려해 전투를 최대한으 로 억누르고 있는 근위기사를 향한 감사한 마음이 지금의 안타까움을 극적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록 덕분에 공도 못 세우고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지만 말이다. 술을 들이키며 어제 상관의 추한 모습을 회상하며 킬킬대다가 기물파손 하는 소리 가 들리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침묵한다. 그리곤 예외 없이 이어지는 신음소리 에 다시 킬킬대는 것이다. 이 얼마나 뜨거운 동료애인가. “빌어먹을! 빌어먹을!” 기운이 쇠했는지 침대에 앉아 고통스런 얼굴로 욕설만 내뱉던 근위기사는 자신이 집어던지는 바람에 바닥을 구르게 된 서류더미 속에서 어제 그 망할 녀석을 불러 들이게 한 기밀문서를 발견했다. 그의 눈에 광기가 어리더니 얼른 그것을 들어 펼 쳤다. 그리고 천천히 곱씹어 읽더니 크크크,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기밀문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추신 글을 소리 내 읽었다. “곤크, 범크 제외? 쿡쿡.” 그리곤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의 눈에는 그 문서가 무하로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저, 대장.” “응?” 피일은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상부층에서 오래요.” “날?” “예.” 그것은 클랜은 물론 무하도 의외였는지 환자의 열을 재다 말고 다가와 다시 물었 다. “클랜을?” “예.” 피일은 죽을 맛이라는 얼굴로 어렵게 고개를 끄떡였다. 클랜과 무하는 서로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그리고 뭐라 말을 하기 위해 동시에 입을 열었을 때 숙소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집합 명령은 벌써 옛날에 떨어졌다고.” 퉁명스런 목소리의 주인공은 테호르였다. 뭔가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그는 클랜을 향해 말했다. “언제고 저 고자 녀석의 머리를 해부해 보고 말거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풋!” 농담 같지 않은 호칭에 다들 상황을 잊고 키득키득 거렸다. 클랜도 웃다가 되물었다. “왜 그러는데?” “정찰. 북쪽 지역에 락아타 녀석들이 소집하는 듯한 기색이 보인다고 가서 알아 보래.” “그 정도야 늘 있는 일이잖아. 왜 짜증내고 그래?” 테사라의 얼굴은 점점 더 찡그려졌다. “대장급만 오래.” “뭐!?” 정찰에 대장급이 한명정도는 끼는데 당연했다. 하지만 모두를 대장급이라니? 대장급의 몸값이 얼마라고 생각하는 건가. 재수 없어 정찰 때 죽으면 엄청난 인력 낭비이지 않던가. 혹시 정찰을 핑계로 한 보복행위가 아닐까? 그러나 보복행위라면 범크와 곤크의 대장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끝이어야 했다. 어째서 전 용병단의 대장급들을……? “적이 밀집되어 있을 경우 대장급정도가 되어야 살아서 올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게 말이 된다고 봐? 오히려 그런 위험이 있는 곳은 대장보다는 부장을 보내려 하지 않던가?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였냐?” 흥분한 테호르에게 두 손을 뻗어 진정하라고 다독인 뒤 무하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고 테호르와 클랜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무하는 클랜이 자신을 보자 나직이 말했다. “내가 간다.” “대장은 나야, 무하.” “이 일의 당사자는 나야.” “명령 들었잖아? ‘대장’만 가라고 했어.” “난 너와 같은 등급이야. 자격은 충분하다고 보는데?” “하지만 대장은 나야.” 무하는 어느새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다가 다시 클랜을 돌아봤다. “밤에 가는 정찰은 내가 적격이라고 보는데. 어차피 자지도 않으니까.” “단 두 시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좋아.” 클랜은 무하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안타까운 듯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넌 자야해, 무하.” “난 괜찮아.” 어차피 속죄할 방법 없이 헤매고 있는 게 아니던가. 죽인 형에게 지은 죄와 살아 있는 형에게 지은 죄. 그 두 죄를 감당할 길이 없어 도망친 게 아니던가. 그럼에 도 목숨은 끊지 않는다. 아직도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제대로 잠을 못 자 는 고통스런 하루하루더라도, 웃음을 지으려고 하면 가슴 깊은 곳이 베어지는 아 픔이 계속되더라도 살고 싶다고. 이렇게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카 한 형님을 죽여 가면서까지 연명한 목숨이다. 살고 싶어 발악하다 짓게 된 죄의 대가다. “난 괜찮아…….” 클랜은 토하듯 내뱉는 무하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기로 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짓눌리는 듯한 압박과 고통이 따른다.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냐고, 그의 상처조 차 모르면서 닦달해버릴 것 같다. 클랜은 애써 웃으며 무하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문가에 서 있는 테호르에게 걸어갔다. 무하는 그런 클랜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기분이 좋지 않다. 일전에 피일의 일 과 어제 강간범의 일만 빼면 늘 그저 그랬던 기분이 왠지 좋지 않다. 뭔가 원인 이 있어서가 아닌 가슴을 스쳐지나가는 직감으로서. “클랜.” “응?” 돌아봄과 동시에 자신을 향해 날라 오는 무언가를 받아 챘다. 손을 펴보니 적옥 의 가락지였다. 순수한 적빛을 뿜어내는 그것은 제법 두꺼웠다. 클랜은 그것이 무 하가 짧은 은줄에 꿰어 끼고 다니던 세 개의 귀걸이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물건을 던진 당사자, 무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 하자 곧 답이 떨어졌다. “신호탄이다. 가지고 가. 상황이 위험해 지면 깨뜨려.” “어이. 신호탄은 이쪽에도 있…….” “가지고 가.”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몸을 돌려 환자에게로 갔다. 클랜은 이렇게 작은 걸 어떻게 끼라는 거냐며 투덜대며 혹시나 해서 약지에 넣어보았다. 중간쯤에서 막히는가 하더니 적빛이 은은하게 감돌며 클랜의 손가락에 맞게 커졌다. ‘마법 아이템!’ 무하가 누군지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씨익 웃으며 그것을 왼손 검지에 찔 러 넣었다. 아까와 같이 반지가 빛나며 크기가 커졌다. “고맙다.” 반지를 낀 손을 흔들어 인사 한 뒤, 먼저 나간 테호르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 식빵에 계란 후라이를 얹어서 먹고... 식빵에 치즈를 얹어서 먹고... 식빵에 셀러드를 얹어서 먹고... 식빵에 마요네즈를 발라서 먹고... 식빵에 딸기 잼을 발라서 먹고... 식빵에 땅콩 버터를 발라서 먹고... 랄랄랄... ...그러다 순두부 찌개에 혹해 밥을 먹은 애통함이여... 아해의 장-258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언제나와 같이 모두가 잔 다음에도 무하는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곳곳에 횃불이 올라왔다. 물병을 천천히 흔들다가 가끔 마시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던 무하는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한 밤이다. 걸을 때마다 나무로 된 바닥이 삐그덕, 삐그덕 울어댔다. 덜컹 문을 열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건냉한 공기가 느껴진다. 자꾸만 답답하 게 가라앉는 가슴을 달래고자 하늘을 보았다. 그것은 여전한 모습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그 위용을 지켜보다가 이번에는 요새 안쪽을 돌아보았 다. 곳곳에 올라온 횃불이 어두운 시야를 트여주고 있었다. 그 순간 무하는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와는 어딘지 다른 듯한……. 땅을 박차고 숙소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했다. 전투 를 노골적으로 피한지 벌써 며칠째. 헤이에 질대로 헤이에 진 군기덕분에 근래에 는 곳곳에서 술주정을 하는 용병이나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없 다. 너무 조용하다. 주위를 다시 살펴보았다. 분명 곳곳에 횃불이 있긴 하지만 뭔 가 다르다. “그래. 수가 너무 적어.” 순간 뒤에서 붉은 빛이 지상을 비쳤다. 무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남쪽 하늘에 붉은 빛의 기둥이 일순 치솟더니 천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피일!” 빠르게 밑으로 내려간 무하는 숙소 문을 거칠게 열어 재끼고 피일을 찾았다. 타인 에게 무관심한 무하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피일!” 검을 매어두었던 끈을 푸르며 다시 크게 소리쳤다. 이층에서 우당탕 소리가 울리 더니 잠옷 바람의 피일이 뛰어내려왔다. 프로답게 손에는 흉흉한 검이 곱게 들려 있었다. “부장, 무슨 일……?” “클랜이 정찰 간 곳이 어디지?” “예?” “클랜이 정찰 간 방향이 어디냐고!” “부, 북쪽입니다.” 끈을 모두 푸른 뒤 왼손에 굳게 쥐고 입을 열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무하 와 피일이 문 쪽을 봤을 때, 이미 그들을 확인한 방문자는 뒤편을 보며 소리쳤다. “여긴 있다!” 거친 발소리가 들리며 대 다섯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무하와 피일을 보 고 동시다발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요새에 사람이 없어!” “오늘 대장이 불려간 용병단만 남아 있다고!” “방금 그 붉은 빛은 뭐지?” 무하와 피일은 서로를 멍하니 보다가 순식간에 움직였다. 피일은 잠자고 있는 동 료들을 깨우러 위로 달려갔고 무하는 벽에 걸려 있는 검을 한 자루 더 꺼내 허리 에 매기 시작했다. 범크의 용병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했다. 무하가 그 런 그들을 향해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나직이 설명했다. “저 붉은 빛은 내가 클랜에게 준 신호탄이야. 위급해 지면 쓰라고 준거지. 뭘 의미하는지 알겠지? 대장끼리 갔는데 위급한 상황이라는 거야. 또 한 가지.” 제대로 검을 고정 시킨 뒤 손에 들린 검을 뽑아 날을 확인 한 뒤 다시 밀어 넣었 다. 이번에는 사람을 베야 할 것 같다. 쿵쾅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이번에는 제대로 무장한 피일과 다른 동료들이 급히 내려왔다.무하는 나직이 계속 말했다. “클랜은 북쪽으로 정찰을 간다고 갔어. 하지만 신호탄은 남쪽에서 터졌지. 무슨 소리인지 알겠지?” 문 쪽에 서 있는 범크 녀석들을 밀치며 나갔다.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저 반지의 효력이 얼마나 갈지는 만든 무하조차도 잘 모른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부장!” 재빨리 무기를 점검하는 피일과는 달리 다들 이들은 불안한 얼굴로 무하를 불렀다. 무하는 그들이 기다리고만 있다가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망가질 것이란 것을 직감했다. “함정이다. 상부층이 우릴 버린 거다. ……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중심부로 가 봐라. 기사들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봐. 그리고 텔레포트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곳까지 확인해봐라. 범크. 우리는 요새 안을 잘 모른다. 맘껏 돌아다닐 상황이 못 됐기 때문이지. 너희는 요새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성문 앞에 집합시켜. 최악의 경우 뭉쳐 있는 편이 좋을 테니.” “부, 부장은 어딜 가는 겁니까?” 무하는 검을 고쳐 쥐고 몸을 낮췄다. 뛸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말보다는 경공이 빠 르다. “생존자를 데리고 오겠어.” 그리고 다음 순간 땅을 박차고 지붕 위로 올라가 성벽을 향해 빠르게 뛰었다. 정 확히는 붉은 빛이 솟았던 곳을 향해. 무하가 떠나고 정확히 한 시간이 흘렀다. 범크가 요새에 있는 모든 인간을 닥치는 대로 성문 앞으로 집합시켰지만 모인 수는 천이 넘지 않았다. 범크의 인원 삼백 에 곤크의 인원 삼백 오십, 그리고 자잘한 용병단의 인원들. 수가 너무 적다. 그렇게 많았던 병사들이 어떻게 이토록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마법진이 있는 곳을 살피고 온 곤크의 용병들은 그곳이 완전히 망가져 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빌어먹을! 버리고 간 건가? 그러고 보니 모여 있는 용병단들은 모두 외각에 숙소가 있었다. 의도적이었던가!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지금 락아타에서 쳐들어온다면 이쪽으로서는 대책 없이 전멸 당할게 분명했다. 이제야 왜 대장들을 정찰에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리더가 없는 것이다! 이 혼란에 빠진 무리들을 이끌어줄 머리가 없단 말이다! 이대로라면 우왕좌왕하다가 당하고 말 것이다. 카 등급인 대장들은 모두 정찰을 나가서 생사를 알 수 없는 데다, 유일한 카 등 급 부장, 무하는 지원을 나가 역시 생사를 알 수 없다. 그 외에 하 등급은 범크 에 제법 있었지만, 그것이 되려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차라리 한명만 있다면 모를 까 하 등급이 열명이나 되는데 누가 리더를 맡는단 말인가? 무하가 지시하고 간 것을 행하고 나니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몇 명 은 지금이라도 빨리 뒤에 자리한 산을 타고 도주하자고 했고 몇 명은 무하가 생존 자를 데리고 돌아오기를 좀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또 몇 명은 텔레포트 마법진 을 어떻게 복귀해보자고 했고 또 몇 명은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성벽을 지킬 방 도를 생각해 보자고 했다. 단 열명이서도 그렇게 혼란해 했는데 천에 가까운 수가 오죽하겠는가. 구심점 없 이 모두 각기각기 흩어져 자신들을 버리고 간 기사를 저주하고 이 사실을 알려주 지 않고 자기들끼리 가버린 다른 용병단들을 욕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각기 미친 듯이 떠들어 대고 욕하고, 또 곳곳에서는 싸우기까지 한다. 어떤 이는 구석 에서 울먹이며 가족의 이름을 부르짖기도 했다. 이토록 미쳐가는 군중 속에 암담한 외침이 울렸다. “락아타 군이다!” 성벽 위에서 밖을 살피고 있던 곤크의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몬스터 사태를 걸쳐 각기 개인 모두가 냉정한 판단력과 행동력을 가진 알짜배기였다. 게다가 귀족의 의뢰를 수행할 때면 암살자와 자객들의 추격 속에서 의뢰인을 보호해야 할 때도 적지 않았다. 물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잠식되어 아무 것도 못하 고 멍청히 있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산을 타고 도망치자.” “어둠을 타야해! 날이 밝으면 이쪽에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 챌 거다!” 대장뿐 아니라 부장까지 없는 곤크의 용병들이 유일하게 사태를 파악하며 서둘렀 다. 하지만 그들은 근래에 와서야 배척을 면한 아웃사이더들이었다. 모두들 곤크 의 말을 듣는 것을 꺼렸다.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무의식적인 배척이었 다. 곤크 용병들은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고 쓰게 웃으며 무기를 챙겼다. 싫다는 타인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가겠어. 그쪽은 마음대로 해.” 우물쭈물하는 용병들 틈에서 고함을 지르는 이가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병력이 몇인 줄 알아? 겨우 천이야! 그런데 이따위로 놀아야겠 어?” 사람들을 헤집고 나오는 이를 알아본 누군가가 낮게 말했다. “고다. 하지만 저들은 귀족의 앞잡이야! 우리를 버리고 간 녀석들의 앞…….” “앞잡이라서 같이 버려진 거냐?” “그, 그건!” 고다는 이실의 손을 굳게 잡고 다른 손으로는 검을 초조하게 어루만졌다. 두렵 다. 지금 모든 상황이 두렵다. 아군에게서 버려지고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다. 적 어도 이실만은……. “아!” 피일이 한쪽을 가리키며 탄성을 질렀다. 성벽 저편에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달 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적? 그러나 달려오는 방향은 락아타 군이 오는 쪽과는 다 르다. 락아타 군은 북쪽에서 오고 있지만 이들은 남쪽에서 달려오고 있다. 남쪽! “부장!” 곤크의 용병들이 서둘러 성벽 쪽으로 달려갔다. 무하의 주위로 붉은 기류가 생성 된다 싶었을 때, 그는 순식간에 허공을 날라 성벽 위로 착지했다. 왼쪽 손에 낀 팔찌가 작게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이는 없었다. 그런 것에 눈이 갈 리 없 지 않은가! 무하의 양 어깨에 들쳐 있는 두 대장이 있는데! “대장!” “대장!” 곤크와 범크의 용병들이 순식간에 무하의 곁으로 달려들었다. 진한 피비린내가 불 안하게 진동했다. 무하 또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지친 듯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그의 몸뚱이도 두 대장처럼 피로 덤벅이었다. 불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 보며 먼저 말 걸기를 꺼리고 있을 때 피일과 고다만이 두 대장을 편히 누인 뒤 상 태를 확인했다. 둘 다 참혹했지만 클랜은 더욱 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테호 르는 기습에 복부를 관통당하고 과다출혈로 기절해 있었지만 클랜은 최후의 최후 까지 살아남기 위해 미친 듯이 싸웠으니. 피일은 미리 챙겨온 지혈제와 붕대를 꺼냈다. 이대로는 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을 알고는 있지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막 상의를 벗기려는 피일의 손을 막는 이가 있었다. 무하였다.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는지 호흡이 골랐다. 땀이 쉴 새 없이 흐르고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는 끔찍할 정도로 진했지만 그의 목소리 는 침착했다. “생존자는 둘 뿐이었다.” “아…….” “이들을 공격한 건 락아타 군이 아니야. 아군이었다.” 경악과 슬픔, 분노 어린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무하는 마른 침을 삼키고 클랜과 테호르를 살펴보았다. “치료할 새가 없었다. 북쪽에서 땅이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락아타의 군은 정말로 밀집되어 있었다. 자칫하면 요새가 포위 당 할 거라 생각했지. 일단 이곳 에 도착하는 게 중요했다.” 피일은 무하가 출혈로 제정신이 아니라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수 적은 무 하가 저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며 부상자를 치료하려는 걸 막고 있겠는가. 피일은 애써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하려 노력했다. “예. 잘하셨어요. 저라도 그랬을 거 에요.” 무하는 깊이 숨을 몰아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제정신이야, 피일. 그러니 겁먹을 거 없어.” 클랜과 테호르가 누워있는 곳으로 두 걸음 옮긴 뒤 왼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리곤 오른 손을 오른 발목 안쪽으로 집어넣어 작은 검을 꺼냈다. 설마 짐이 될 것 을 우려해 죽이려는 것인가!? 고다와 피일이 황급히 무하의 다음 행동을 막기 위 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무하는 예의 차분한 몸놀림으로 그 검을 테호르의 복부 에 갖다댔다. “리 * 커 * 버 * 리 *” 순식간에 상처가 아무는 것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 외에 상처가 없었던 테호르는 의식을 찾으려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갑작스런 마법에 모두들 멍하니 있 을 때 무하는 검을 다시 클랜에게 갖다 댔다. “힐 * 링 *” 부러지고 어긋난 뼈가 우두둑 끔찍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리 * 커 * 버 * 리 *” 테호르와는 달리 무하가 지원을 갔을 때까지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던 클랜은 기 진맥진하여 말을 못하고 있을 뿐 의식은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상처가 낫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물었다. 고다가 테호르를 보살피는 동안 피일은 듬 직한 대장과 부장에게 지금의 최악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클랜은 분노 어린 신음성을 내뱉다가 억지로 그것을 억눌렀 다. 지금은 분노하기 보다는 이곳을 서둘러 벗어나야 할 때다. 육체적으로는 고통 이 없지만 정신은 혹독하게 당한 그대로인 클랜은 심호흡을 몇 번하며 냉정을 되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정신이 완전히 든 테호르가 말했다. 그도 고다에게서 상황을 들은 상태였다. “이상하군. 이쪽은 천 밖에 없는 어째서 락아타에서는 아직도 쳐들어오지 않은 거지? 마치…….”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성벽 너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군을 상대 할 때와 같아. 대규모의 적을 사방에서 기습해서 몰살시키려는 그 런 움직임이야.” “뻔하잖아.” 클랜이 퉁명하지만 역시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욤 쪽에서 미끼를 던진 거지. 이쪽에 드디어 대규모로 집결했다. 오늘 저녁에 도착해서 피로하기에 하루 쉬고 내일 총돌격할 예정이다, 라고. 락아타로서는 솔 깃할 먹이잖아?” 그도 비틀거리며 일어나 성벽 너머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미끼로 남겨 진거야. 우리가 저들의 공격으로 전멸당할 무렵에 욤에서 는 저들을 되려 포위하겠지. 우리는 버림 수였던 거야. 빌어먹을!” “곤크가 남게 된 건 나 때문 일거다.” 무하는 은장도를 그대로 오른손에 쥔 채 나직이 말했다. 클랜은 뭐라 말하고 싶었 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같은 곤크이자 파트너인 자신이 말을 해봤자 형식 뿐인 위로밖에 안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때 비꼬는 듯한 음성이 날라들었 다. 테호르였다. “어차피 곤크가 안 남으면 그 수만큼의 다른 용병이 남았을 거야. 그리고 정확 히 말해야지. 너 때문이 아니라 그 고자 녀석 때문이야.” “그런가.” 클랜은 테호르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테호르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지만 그의 얼굴을 쑥스러움으로 붉어져 있었다. 무하는 은장도를 쥔 채 성벽 밑으로 내려왔다. “부상자를 치료하겠어. 치료가 끝나는 즉시 산을 타고 도주한다.” 드디어 혼란이 멈췄다. 그들을 이끌어줄 냉철하고 강한 지도자가 셋이나 돌아온 것이다. 무하는 자신에게 오는 부상자들을 닥치는 대로 치유했다. 피일이 옆에서 왜 여지껏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냐고 물자 그는 당연하지 않냐는 말투로 답했다. “상처가 쉽게 나아봤자 다시 전쟁터로 가기 밖에 더하겠어?” =========================================================================== 말이란 정말 어려운 녀석이다. 언어란 정말 난해한 녀석이다. 그것을 적시에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스스로 의식하는 자(사기꾼)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자(군자) 뿐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난 빵 안 먹었는데...; 이렇게 먹을까 저렇게 먹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순두부를 먹었다는 애통한 어제의 일을 이야기 했던 것 뿐...ㅡㅡ;) 아해의 장-259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무하가 모두의 부상을 낫게 하고 서둘러 요새 뒤쪽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락아 타 군의 동태를 살피러 갔다 온 클랜이 안 좋은 소식을 전했다. “이쪽이 눈치 채지 못했다 생각하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어. 이미 뒤편까지 둘러싸고 있고. 아직은 앞 쪽에 군대가 많긴 하지만 주위로 분산시키고 있어.” “우리가 살아서 산으로 도주하기 위해서는 앞 쪽의 군대가 분산되지 못하도록 누 군가 항전을 해야 해.” 테호르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 무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아군이 자신들 을 미끼로 던지고 간 상황이 매우 불쾌했다. 이렇게 죽기 위해서 그렇게 발버둥 쳐온 게 아니다. “누가 항전을 한단 말이야. 지금 수가 겨우 천이야. 전부가 돌진해도 포위망을 뚫을까 말까라고! 게다가 버림 수로 버려진 우리가 또다시 누군가를 살기 위해 버 린단 말이냐?” 클랜이 주위가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테호르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 를 저었다. “100이 희생하면 900이 살 수 있어.” “전부 살아서 간다.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있으면 포위망이 더 두터워지기 전 에 도착할 생각을 하라고. 어서 뛰어!” 클랜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크게 소리치며 뛰던 속도를 더 높였다. 살고 싶다! 모두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각자의 가족을 떠올리며 후들거 리는 다리를 애써 독촉한다. “어머니……. 어머니…….” 누군가 중얼거린 안타까운 목소리. 어느 샌가 모두의 입에서 자신이 그리워하는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무하만이 침묵했다. 누구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아무도 없는데. 이곳에서 그가 미련을 가질 수 있는 누군가 가 있던가? 아니 그것은 본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부르고 싶지만 그런 존재가 없다. 무하는 그것에 진한 슬픔을 느꼈다. 멀찍이서 둔탁한 격돌음이 들려왔다. 락아타 군이 드디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먼저 문을 열기 위해 마법을 시전 한 것이다! 방어 마법이 걸려 있는 문이 그것으 로 박살날 리는 없지만 그 효과음으로서도 욤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에 일부러 그리하였을 것이다. 확실히 요새 내에 남아 있는 천 명 남짓한 용병들은 크게 당 황했다. “빌어먹을! 예상보다 더 빠르잖아!” 크게 소음을 내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사방에 어느 정도 분산시켜 놓았다는 것 을 뜻하는 게 아니던가! 테호르와 클랜은 서로를 낭패한 얼굴로 보았다. 테호르 는 이제라도 버림수를 두자고 했고 클랜은 조금이라도 더 서두르면 되지 않겠냐 고 반박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둘의 설전이 계속되고 있 을 때, 다시 한번 크게 격돌음이 들렸다. “빌어먹을!” “클랜.” “응?” 여지껏 가만히 있던 무하가 차분한 음성으로 클랜을 불렀다. 모두가 혼란해하고 보고싶은 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 때 그만은 이질적으로 조용했다. 클랜이 자신 을 보자 그는 오른 손에 쥐고 있던 은장도를 던졌다. “빌려주겠어. 가지고 가라.” “응?” 다음 순간 클랜은 경악성을 질러야했다. 무하가 곧장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 어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랜은 황급히 무하의 팔목을 잡아챘다. “뭐하는 짓이야!?” “누군가는 막아야 하잖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하의 차분한 음성이 클랜의 속을 한바탕 뒤집었다. “웃기지마! 혼자서 뭘 하겠다는 거야! 죽고 싶어서 그래?” “죽지 않아.” 무하는 씁쓸하게 말했다. “웃기지마! 이대로 산으로 가는 거야! 산으로 가면 되는 거라고!” 클랜은 더 이상 무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무하의 팔을 붙잡은 채로 앞으로 거칠게 뛰어갔다. 놓치지 않으려는 듯 손아귀에 힘을 잔뜩 주고는 고함을 질렀다. “산으로만 가면 돼! 너 혼자 뭘 어쩌려는 건데! 현실을 봐! 네 알량한 영웅정신 은 필요하지 않다고!” 영웅정신? 무하의 눈에 조소가 스쳤다. 그런 것이 자신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독히 이기적이며 독선적이라는 것 또한. 그런 자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자괴하면서도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 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무하는 클랜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리곤 클랜의 멱살을 곧장 잡아채 낮게 말했 다. “난 죽지 않아. 영웅정신? 그딴 것과는 상관없어. 알아? 난 죽지 않아. 이렇게 죽으려고 형을 죽이면서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란 말이야!” “무……하.” 죽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살고 싶어 발악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지 않던가. 살 고 싶어서 형을 죽였고 그런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그렇게 이중적인 자신을 알고 있다. 형을 죽였음에 자괴하는 자신과 그럼에도 살았다고 기뻐하는 자신이 있다. 도망쳐 온 주제에 설희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고 소망하는 자신이 있다. 이런 녀석이다. 클랜이 생각하는 것만큼 멋지고 진지한 녀석이 아닌 것이다. 비겁하고 겁쟁이다. “가라. 은장도를 절대 잃어버리면 안돼. 빌려 준거니 돌려 받을 거다.” 무하의 과거를 알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알고 싶지는 않았다. 무하 자신 이 그것을 감당하고 웃어 넘길 만큼 성장했을 때 술 한 잔과 함께 듣고 싶었다. 이건 아니었다. 클랜은 돌아서 가려는 무하를 다시 붙잡았다.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가 보기에는 무하는 자살을 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혼자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어느새 발길을 멈춘 천여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섬뜩한 격음이 들려 오고 있는 와중에 그곳만은 숨 막히게 고요했다. 무하의 희생으로라도 살고 싶다 는 본능적인 바람과 자신들이 욤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짓을 타인에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는 이성적인 바람이 거칠게 맞붙고 있는 와중에 무하만이 자신의 생각 을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클랜.” “……?”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낮은 속삭임. 클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하는 페르노크. 오르세 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 그리고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마법사. 무하가 군중을 피해 건물 위로 날아오르고 빠른 속도로 성벽을 향해 뛰어가는 것 을 보면서도. 테호르는 클랜을 독촉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무하가 가서 어떻게 활약을 해줄지는 모르지만 이미 두터워진 포위망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최대한 빨리 가서 뚫어야 한다. 미친 듯이 뛰어가는 무리 속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이가 있었다. 그는 순식간 에 멀리 사라진 무하 쪽을 한번 보고 저편에 달려가고 있는 일행들을 한번 본 뒤 몸을 돌려 달렸다. 일행의 반대편, 성벽이 있는 쪽을 향해서. 락아타 군의 상부층에서는 이상한 예감에 불안한 눈으로 성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일제히 파이어 볼을 만들어 집어 던지기 시작한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 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모습이 기분 나쁜 추측을 하게 했다. 혹시……. “함정인 거 아냐?”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있는 가능성을 거침없이 내뱉는 남자. 그 음성에는 재미있 어 죽겠다는 듯 웃음이 잔뜩 배여 있다. 모두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보았지만 당 사자는 주변 반응엔 관심도 없이 오직 조용한 성벽만을 보고 있었다. 기사 단장이 자 이번 야습의 사령관인 아클렌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질책했다. “입 닥치게!” “쿡쿡.”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드는 사내였다. 실력만큼은 자신을 넘을 지도 모른다고 감탄 했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마음에 안 드는 성격을 가졌다. 솔직히 아클렌은 이번 야 습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의 참모인 하벨이 확실한 기회라며 어거지로 몰아붙이지 만 않았더라도 결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참모로써의 하벨의 능력이 사령관 인 아클렌의 반대를 억누를 정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사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클렌은 차라리 하벨의 능력이 엄청나 자신이 꿀리는 정도였으면 했 다. 이름만 참모일 뿐, 공을 세워 영토를 늘리기 위해 황제에게 부탁해 끼어든 삼 류 황족. 그 주제에 없는 참견, 있는 간섭 다 하며 일을 망치기까지 하는 무능한 쓰레기. “아아, 지금쯤 우리 뒤편으로 욤의 군사들이 역 포위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 지.” “입 닥치라고 했지!” 똑같은 추측을 했음에도 그것을 입에 담는 사내에게 화가 났다. 품고 있던 불안 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아클렌은 말 머리 를 돌리기 위해 손을 올렸다. 하벨이 옆에서 팔짝팔짝 뛰었지만 사령관으로써의 그의 직감이 이건 아니라고 재차 경고하고 있었다. 이 일로 하벨이 황제에게 확실한 기회를 제 발로 찬 역적이라고 자신을 고자질 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만약 성벽 위에 누군 가가 나타나지만 않았더라고 그는 군대를 다시 집합시켜 본거지로 돌아갔을 것이 다. “그것 보게! 내 말이 맞지 않는가!” 득의양양한 하벨의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아클렌은 억지로 성벽에 나타난 이에게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편에 울리는 불안을 억제하지 못하고 여지 껏 거슬리는 말만 했던 사내에게 명했다. “군사 뒤편으로 가서 동향을 살펴보고 오게.” “쿡쿡.” 기분 나쁜 비웃음을 흘렸지만 확실히 행동은 빨랐다. 그 밀집되어 있는 속에서도 용케 말을 돌려 뒤로 빠르게 달려간 것이다. 조금은 편해진 기분으로 성벽 위에 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누군가를 주시했다. 그는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했 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아클렌의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 르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간단한 마법은 사용할줄 알았던 아클렌은 그것이 마법 방어의 주문임을 알 수 있었다. 많은 마법사들이 방어 주문을 외우는 터라 그는 여유 있는 눈으로 성벽 위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마법사였던가.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무하는 갈망했다. 언제고 자신에게도 ‘있어야 할 곳’이 생길 것이라 바랐고 늘 갈망했다. 형을 죽였으면서도, 가족이라 생각했던 테밀시아 형님의 진짜 형제를 죽였으면서도 그렇게 이기적인 바람을 한시도 지우 지 않았다. 언제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고 누군가와 행복하게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그러나 간절히 바랐다.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자신을 알고 있다. 그런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겁하고 겁 많은 자신을 무관심이라는 갑옷 안에 보호하고 있다. 형을 죽이고 살아 있는 자신을 탓하면서도 죽음을 피한다. 이렇게 이중적이다. 대신 속죄할 방법을 찾고 있다. 죽인 형에 대한 속죄와 진짜 형제를 죽임 당하게 한 테밀시아 형님에 대한 속죄의 방법을. 죽음이라는 방법만은 피하면서 다른 방도를 구하고 있다. “죽고 싶지 않아.”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삶을 원한다. 아니,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자신이 살아 있 음을 느끼고 싶다. 정말 살아 있는 게 맞을까? 왜 이 몸에 들어 온 걸까? 이건 모 두 꿈이 아닐까? 죽어서 꾸고 있는 꿈이 아닐까? 느끼고 싶다. 살고 싶다. 언젠 가 생길 ‘있어야 할 곳’을 위하여! 성벽 너머로 득실대고 있는 군대를 본다. 저들은 저승사자다. 목숨을 갈취하기 위 해 그 무기를 번뜩이는 사자들이다. 그러니까 살기 위해 저항할 것이다! 무하는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깊이 내리 쉬고, 들이 쉬었다. 정적이 흐른 뒤에 생 성된 거대한 기류. 그것은 마나의 뒤틀림 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무하의 검 은 두건 자락의 끝부분이 움찔 흔들린다. 그리고 이내 펄럭인다. 천천히 그 율동 은 천 자락 전체를 뒤덮는다. 천천히 그 속도가 빨라진다. 검은 두건 자락이 허공 을 미친 듯이 배회할 때, 무하의 입이 열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격…….” 죽일 것이다. 살해 할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일 것이다. 형을 죽게 한 이 저주스런 힘으로. 무하의 입술이 불안하게 떨렸다. 쥐어짜듯이 주문이 새어 나온다. “내가 바라는 것은 불의 힘…….” 형을 죽여서 연명한 목숨이다. 살해자라는 자괴와 테밀시아 형님에 대한 자책으 로 떠돌아 다닌 지 2년이다. 많은 이들의 목숨이 날라 가는 순간을 두 눈으로 똑 똑히 지켜보았다. 그 애통한 장면을, 그 덧없는 찰나의 시간을 각인시켰다. …… 그리고 악몽을 꾸었다. 주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하의 두 손이 무겁게 위로 올라왔다. “내가 갈망하는 것은 파멸.” 7 써클 이상의 공격 주문! ‘마스터’라 불리는 극소수의 마도사들이 구현하는 처 참하고 지독한 지옥의 일면! “내가 갈구하는 것은 화염의 힘.” 눈앞의 저승사자들의 모습이 일그러진다. 볼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서야 제 모습 을 찾았지만 다시 일렁거린다. 그리곤 제 모습을 찾지 못한다. 주체할 수 없는 떨 림이 온몸을 침범한다. 이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다. 살인을 할 것이다. 여지껏 보 았던 그 어떤 살인자보다도 많은 살인을 할 것이다. 그 끔찍한 악몽 속에서 미쳐 간다 해도 당장의 삶을 위해서. 단지……살기 위해서! “헬 * 파 * 이 * 어 *” ……그리고 지옥이 강림했다. ==========================================================================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성공이라는 것은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여유있는 삶을 바란다면... 그 역시 밑은 보지 못한 눈 먼 맹인의 어리석음일까요? 왜 이렇게 사는게 힘들까요... 아해의 장-260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처음에는 몰랐다. 너무 작은 불의 화살이 땅을 내리 꽂았을 뿐이었으니. 모든 이들은 필사적으로 마법 방어의 막을 두텁게 겹치는 마법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의 화살이 땅을 파고 들고도 한순간은 마법사의 필사적인 주문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여겨질 정도로 주위는 조용했다. 하지만 느꼈어야 했다.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질적인 적막을. 땅 속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모든 이로 하여금 휘청이 며 주저앉게 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순식간이었다. 시끄럽다 생각되던 마법사의 주문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엄청난 괴음과 함께 땅 이 시뻘겋게 변질 되고 있었다! 붉게 넘실되고 있는 그 땅의 파도 속에서 사람들 은 괴음마저 삼킬법한 처참한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엄청난 열기가 마법 방어막 안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클렌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 는 눈동자 속에 그 지옥을 담아내야 했다. 마법 방어막으로 들어오려 몸부림치는 병사들의 손을 잡아당겨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눈은 이 지옥을 소환한 악 마에게 향해졌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8써클 마법이라고? 인간이 그 것을 사용할 수 있던가!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정보를 조작한 것인가! 그의 눈 동자에 박혀 있던 악마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온몸을 떨어댔다. 인간이 8 써클 마법을 사용했으니 엄청난 정신력 소모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현기증에서 두통이 아니던가. 미칠 정도의 마법이었다면 애당초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통 때문에 고통스러운가? 이쪽은 온몸이 타들어가고 있다! 아클렌은 말을 박차 고 날아 올랐다. 절정 기사인 그에게 성벽까지 날라 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 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치유 마법의 벽은 깨지 못했지만 어지간한 마법은 구현 할 수 있는 마검사였다. “이 악마!” 착지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달달 떨고 있는 악마의 목을 향해 검을 힘껏 그었 다. 당장 눈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분노가 모든 것을 이기고 있었다. 찰나의 시 간. 아클렌은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방금까지 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하던 악마가 위장용이 분명한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게다가 들어 올린 악마의 얼굴에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물기. ……눈물일 리 가 없어. 저것은 땀이다. 애써 외면하며 검을 힘껏 튕겨내며 다시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악마는 가볍게 검 을 휘둘러 아클렌의 검을 튕겨냈다. “그만해.” 악마의 입에서 새어나온 뜻밖의 침중한 음성. 그것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건 싫다. 하긴…….” 악마는 성벽 너머의 지옥의 광경을 보며 자조적인 음성을 뱉어냈다. “하나가 더 보태진다 해도 달라진 건 없겠지만.” “이……이 악마!” 뜻밖의 젊은 목소리에 놀라 잠시 멈춰있었던 아클렌은 거친 공격을 계속해서 퍼부 었다. 아무리 젊은 나이에 마스터가 된 마도사라도 방금 마법 구현으로 엄청난 정 신력 소모를 했을 것이다. 절정 기사인 자신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런 아클렌의 생각을 비웃듯 악마는 여유 있게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뿐만 아니 라 반격의 순간까지 만들어 냈다. 하지만 악마는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가지고 노는 것인가! 아클렌은 호흡을 고르고 온 몸의 기운을 터뜨렸다. 그의 검에 싸늘한 검기가 어리 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악마는 자세를 바로하며 검을 고쳐들었다. “난 죽지 않아.” 그것은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짙은 물기를 떨꾸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발버둥 쳐서 살아남았으니까. 절대 죽지 않아.” 적어도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그 순간까지는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아클렌은 그 소리가 헛소리로 들렸다. “죽어!” 검기가 스며든 검을 높이 쳐들고 날듯이 접근했다. 악마 또한 자세를 낮추며 그 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둘이 격돌 하려는 바로 그 순간 이었다! “부장! 뒤를!”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푹! 끔찍한 소리와 함께 무하는 성벽 안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왼쪽 가슴에 대형 화살을 꽂은 채로. “부장-!” 함께 몸을 날려 무하의 손을 잡아챈 남자. 무하의 뒤를 쫓아 온 피일이었다. 그 는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힘껏 벽에 갖다 박았다. 하지만 단검은 힘없이 튕 겨 둘은 하염없이 밑으로, 밑으로 떨어졌다. 피일은 절망하며 무하의 몸을 끌어안 았다. 적어도 떨어질 때의 타격을 줄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들을 수 있었 다. 그 작은 소리를. “……내가 바라는 것은 도약.” “부장?” “텔 * 레 * 포 * 트 *” 금빛 마법진이 허공에 생성됐다. 그리고 눈부신 빛을 자아내며 사라졌다. 추락하 던 두 남자와 함께. “헤에. 난리도 아닌데?” 마법사까지 놓친 아클렌은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빈정대듯 그 참혹 한 현장을 보며 웃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그가 군사 뒤편으로 정찰을 보낸 그 사내였다. 아름다운 얼굴 만연에 재미있어 죽겠다는 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보자니 화가 솟구쳤다. “뭐가 재미있나, 유시리안!” 유시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을 타느라 흐트러진 백금발을 쓸어 넘겼다. 마법 방어 막 안에 있었던 아클렌조차도 갑옷이 그을렸는데 그의 화려한 옷에는 아무런 흔적 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아클렌을 보며 빈정댔다. “그러고 있을 틈이 있다면 부상자나 어서 수습하는 게 낫지 않아?” “부상자? 이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을 것…….” 아클렌은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고 주위를 살폈다. 지옥 한가운데 있던 병사들이 전부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마법사들이 서 둘러 포션을 돌리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아클렌을 스쳐 지나가며 유시리안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얼굴로 말했 다. “겨우 화상 정도야. 그것도 재미있지만 땅에 닿은 부분 외엔 정도가 심하지도 않아. 쿡쿡. 마법을 시전 한 자는 천재가 아니면 바보가 분명해. 헬파이어를 쓰고 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면’ 천재이고, 아무도 죽이지 ‘못했다면’ 바보겠 지. 아아, 뒤쪽을 살펴보느라 그 마법사 씨를 보지 못한 게 한이 되는군.” 쿡쿡 웃다가 발치에서 화상으로 고생하고 있는 녀석의 몸을 툭툭 찼다. 무슨 짓이 냐고 소리치려다 입을 다무는 아클렌. 유시리안이 차고 있는 녀석이 하벨이기 때 문이다. 좀 전에 필요이상으로 공포에 질려 마법 방어막 뒤쪽으로 도망을 치는 것 까지는 봤는데 멍청하게 방어막을 벗어났던 모양이다. “이 멍청이가 잘못 된 정보를 물어 온 모양이다.” 유시리안의 얼굴에는 여전히 재미있다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좀 전과는 달리 싸늘해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클렌은 한 박자 늦게 남자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 그럼!?” “함정이다. 뒤쪽에 욤의 군사들이 포위해 오고 있었어. 지금은 갑작스런 마법으 로 멈춰 있지만 곧…….” 뒤에서 엄청난 함성이 진동했다. 동시에 금속끼리의 마찰음과 비명소리가 터져 나 왔다. 유시리안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공격해 올 거야.” 기습을 강행했다가 주 전력의 대부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의 활약으로 인해 부상당하고 우왕좌왕하던 락아타 군은 재차 역 기습을 당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분포되었다 불길한 비명과 불길만을 보았던, 정확한 사정 을 모르는 락아타 군들도 자신들의 포위층보다 훨씬 두꺼운 적을 만나 제대로 대 항도 못해보고 목을 내놓아야 했다. 그들의 눈에는 악마처럼만 보이는 아름다운 적의 사령관, 테밀시아는 냉랭한 얼굴 로 얼굴에 튄 핏자국을 쓸어내고 있었다. 피식 미소를 지으며 멀찍이 보이는 성벽 을 주시했다. 저쪽에 자신이 상대해야 할 사령관이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 다. 방금의 그 알 수 없는 마법으로 잠시 주춤하고는 있었지만 적의 동태를 살펴본 결 과 그들의 소행이 아니라 판단했고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는 만족스럽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발밑에 쌓여가는 락아타 군복을 입은 시체들로 말이다. “싱겁군.” 테밀시아는 피를 갈구하며 울어대는 검을 어루만지며 나직이 말했다. 그의 앞에 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분통하고 억울한 말일 것이다. 물 론 테밀시아가 그런 그들의 기분까지 세세하게 신경써줄 남자일리 없었다. 슬슬 반격이 있을 줄 알고 전세를 가다듬고 있었는데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았 다. 이미 이들이 냉정하게 함정이나 다른 꿍꿍이를 만들 여유가 없음을 잘 알고 있는 테밀시아는 피에 젖어 거치적거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싱거워.” 그러다 싱긋 웃는다. 이 단순하다면 단순할 수 있는 계획을 교묘하고도 완전하게 만들어낸 두 형제를 떠올린 것일까? 그 작고 연약했던 동생조차도 영악했고 교활 했다. 그 답답하리만치 원칙주의인 집사의 자식들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적의 반격을 계속 기다려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테밀시아는 손을 번쩍 쳐들어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 시킨 뒤 외쳤다. 강한 외침. “공격!” 다시 처참하고 유쾌한 살육의 시간이 도래했다. ======================================================================== 같은 살육이라도 이토록 다를 수 있지요. 한쪽에는 미치기 직전의 몸부림이건만 한쪽에서는 유쾌하기까지한 전적입니다. 이것이 토박이(?)와 이방인(?)의 차이일까요? 아해의 장-261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지금쯤 시작했겠군요.” “아아.” 모처럼 집에 들어간 요크노민은 뮤비라와 함께 와인을 마시며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술맛을 즐길 줄 알게 된 요크노 민은 곧잘 형과 대작을 하곤 했다. 여전히 독한 술을 싫어하지만 말이다. 이곳저 곳에서 진귀한 술이 선물로 들어오는 형의 서재에는 요크노민의 취향에 맞는 술 이 즐비해 있었다. “네 도움이 컸다.” 뮤비라가 자랑스럽다는 눈길을 보내자 요크노민은 쑥스러움에 웃음을 지었다. 지 금은 붉어진 그의 얼굴을 가려줄 마스크가 없었다. “레타라는 길드의 저력은 놀라울 정도구나.” “예. 이번에 휜이 데리고 나간 자들은 키르의 말에 의하면 알짜배기들이라고 하 더군요. 하지만 지금으로도 충분히 제 꿈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미련도 아쉬움 도 없어요.” “휜님은 자신을 따라 나온 이들로만 무언가를 만들 작정인 것 같았다. 공밥을 축 내긴 싫다고 하더구나.” “강한 사람이죠.” 뮤비라가 갑자기 미소를 지어 보인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모습. 요크노민의 의 아한 시선을 보내자 와인을 한 모금 축이며 답했다. “이제는 갈라진 레타의 전력이 그 분께로 쏠려 있는 게로구나. 큰 힘을 얻으신 게야.” “그렇군요.” 기뻐하는 형의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난 뒤로는 늘 우울했던 마음이 한결 가셔지는 듯 했다. 마스터가 된 기쁨도 드디어 꿈에 거의 도달했다는 승리감도 그 아이의 한마디에 날라 가버리고 남은 것은 지 독한 자기혐오와 서글픈 죄책감 뿐이다. 그 강하고 잔혹하며, 약하고 따뜻한 그 아이의 한마디로 인해서. ‘미안하구나. 키르.’ 문득 천장을 올려본다. 형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다. 아무리 형이라도 말할 수 없 다. 이 일만은……. 둘만의 비밀. 둘만의 죄. 그렇게 둘만의 가슴 속에 묻어놔야 한다. 속죄할 방법이 없는 지독한 죄악을 평생 가슴 한 구석에 박아두어야 한다. 그것만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것만이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벌. ‘미안하다, 미리.’ 뮤비라는 조용히 동생의 아픔을 지켜봐 주었다. 아무리 어른이 되었다 하나 자신 의 눈에는 언제나 작은 아이로만 비치는 안타까운 동생을. 마스터가 되고 제그의 처소로 갔다. 그곳만이 민이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직도 남의 집만 같은 자하라 가의 처소는 불편하기만 하다. 어딘가 에 감시의 눈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도사리는 곳. 형이 아니었다면 진 작에 나왔을 곳이다. 제그는 아직 광장에 있고 오늘의 축제에 참여하지 않은, 아니 제그의 반대로 참여 하지 못한 키르바나만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데다 아직도 작 고 여린 키르바나는 유리꽃처럼 소중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민이 처소를 들어가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에 앉아 있던 키르바나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고맙구나.” 민은 진심으로 기뻤다. 많이 지치긴 했지만 그쯤은 상관없다. 드디어 마스터가 된 것이다! 자신이 꿈꾸는 길드의 마스터는 아니지만 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인 가! 잔뜩 흥분한 민은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꺼내 마시며 상기된 얼굴을 진정시키 고자 했다. 극에 다른 흥분과 승리감이 그의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키르바나의 얼굴에 감도는 싸늘하고 잔혹한 무언 가를.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물통을 내려놓고 키르바나의 앞에 가 앉았다.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해준 고마운 소년.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큰 도움이 되어준 아이의 말이다. 경청할 준비 를 하는 민에게 키르바나는 언제나와 같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미리를 죽은 건 접니다.” ……민에게서 기쁨도 흥분도 승리감도 앗아간 짧은 말. 평생 그의 가슴속에 아프 게 박혀있을 진실. 어느새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경악으로 인해 경련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치켜 뜬 눈으로 키르바나를 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차분한 얼굴로 방금 자신이 꺼낸 말 의 무게조차 모른 듯한 그런 천연덕스런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 아이를. “지……지금 뭐라고 했지?” “제가 죽였어요. 아이세란에게 미리의 이야기를 한 건 바로 접니다.” 힘들게 쥐어짜듯 말하는 민이 무색할 정도로 태연히 내뱉는 모습. 왈칵 분노가 솟구쳤다. 그것은 키르바나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이기 도 했다. 키르바나에게 화를 낼 자격이 있던가. 이득을 본 건 자기이지 않던가. 모두가 상처를 입고 증오를 키워나갈 때도 냉정히 자신의 득실을 따지며 한편으로 는 좋아하지 않았던가. 민의 처절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을 때, 키르바나의 입이 열렸다. 그것은 여전히 덤덤하고 차분한 음성을 자아냈다. “후회하지 않아요. 내가 못할 짓을 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형님을 위해 서만 살아갈 거니까. 형님을 위해서는 그런 여자 몇이든 죽일 수 있으니까.” “형을 위해서라고?” “형님이 그 여자 때문에 당신과 반목하니까. 당신과 함께 한다면 앞으로 성공할 것이란 게 보이니까. 그러니까 원인을 부셔버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게 제 예상대로 됐지요. 형은 당신과 한배에 타게 됐고, 당신은 형의 도움과 딜린이라 는 수상한 자의 도움까지 더불어 받게 됐어요.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요. 지금 이 순간까지도.” “…….” 맞는 말이다. 그래서 할 말이 없다. 지난 2년간 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진실. 자신이 얻게 되는 득실에 대한 비겁한 감정. 주먹을 꾹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 고드는 게 느껴졌다. 그 아픔이 이성을 유지시켜주었다. 이대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끈을 끊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너무나 같다. 키르바나와 자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잔인하며 비 겁하다는 것을. 키르바나의 고집스런 목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형님을 위해서라면 내 손에 얼마든지 피를 묻 힐 수 있어. 나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오고 나 때문에 살인을 하고 나 때문에 마법 사로서의 성공대로까지 포기한 형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고개를 푹 숙이며 차갑고 잔인한 말을 뱉어내는 키르바나를 지켜보던 민의 얼굴 이 천천히 평소대로 돌아왔다. 온 몸을 잠식하던 떨림도 멈춘 지 오래였다. 꾹 쥔 주먹도 어느 샌가 펴고 있었다. “그런 여자 죽었다고 해도 하나도 슬프지 않아. 하나도…….” 민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키르바나는 미간에 꾹 주름을 만들며 어깨를 움츠렸 다. 화를 내리란 것을 알았다. 모든 이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기에. 때리고 욕 하고 침을 뱉으며 저주한다 해도 할말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아니 그쯤은 각오하 고 있었다. 하지만 민의 손은 부드럽게 키르바나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놀라 고개를 드는 키르바나에게 민은 속삭였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키르바나의 왜소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최대한 다정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울어도 돼.” “우, 울지 않아요. 슬프지 않아요. 후회하지 않아!” 민의 옷을 끌어 쥐며 키르바나는 몸부림을 쳤다. 그것은 민에게서 벗어나려는 몸 부림이 아니었다. 스스로와의 참담한 투쟁. 그리고 터져버린 오열……. 2년 동안 이나 혼자서 곪아왔던 상처가 가장 가까운 자의 품에서 터졌다. “괜찮아. 이제 같이 아파하자. 우린 공범자니까. 함께 평생을 두고 속죄하자.” 강하고 잔혹한 무언가를 이제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가면. 약하고 따뜻한 아이 를 감추고 있던 가면이었다. “이번에 미끼가 된 자들이 시간을 최대한 많이 벌어야 할 텐데 말이다.” “그 정도 수면 몰살 될 때까지 버텨줄 겁니다. 대장까지 없앴으니 규모가 거기 서 거기인 소(小) 단들뿐이니 우왕좌왕하는 새에 기습을 당하고 말겠지요. 물론 뒷산으로 도주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역시 소수에 불과할 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괴멸하고 말겁니다.” 회상에서 깨어난 것은 형의 무심한 듯한 자상한 배려덕분이었다. 요크노민은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대답을 한 뒤에 그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쑥스럽게 웃었다. 그에게 있어 뮤비라는 아버지였다.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언제나 듬직해 보이고 싶지만 결국에는 작은 아이임을 알게 되는, 그런 태산과 같은 존재. 요크노민은 새삼 자신이 행복한 사람임을 깨닫곤 했다. 이번 미끼 포획을 떠올리니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페르노크……. ‘아아, 왜 거기 가 있는 거야. 사람도 죽이지 못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게 천운이지.' 형 몰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잔을 들어 와인을 몽땅 비운 뒤 시선을 다시 서쪽 창문 쪽으로 돌렸다. ‘뭐, 상관없지. 형님께 녀석 일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곤크를 미끼에서 제외시켜 야 한다는 것을 설명했을 때는 진이 다 빠졌지만. 어쨌거나 문서 작성까지 확인했 으니 안심이야.’ 그리곤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생긋 웃었다. ‘기사가 곤크에게 악감정을 가지지 않는 한 말이지.’ 귀족과 친분이 두터운 곤크니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벼를 베듯 거침없이 몰아쳐 오는 욤의 군사들. 새로이 합류한 테밀시아가 사령관 을 맡았다는 데에 어쩔 수 없는 반발이 일만도 하건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 이 마치 오랜 시간동안 함께 훈련해 온 듯하다. 그것은 그동안의 상부층의 리더쉽 이 크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사령관인 근위기사의 명예와 체면 은 어제의 사건으로 인해 몽땅 부서지지 않았던가. 그동안 지나치게 몸을 사려왔 던 것도 한 이유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최전방에서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 못한 기사들이나, 변방에서 몬스터나 상대하 던 휴첼이나 욕구불만이긴 매한가지였다. 악귀와 다를 바 없는 잔인한 칼부림 아 래에 쌓아져 가는 것은 락아타 군의 시체였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심점, 아클렌은 자신의 직속 부하들 을 제외하고는 모든 병력이 부상을 당한 상태라 어찌 할 틈도 없이 이만 갈고 있 었다. “어떻게 할래?” 이런 상황인데도 끝끝내 재미있는지 실실 웃는 모습이 걷어 차버리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항복해야 할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방금의 마법사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항전하여 도주할 수 있었겠지만 대부분이 부상당한 지금 다른 수가 없었 다. 하지만 그 책임을 누가 진단 말인가. 아클렌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수 당하 느니 차라리 기사로써 흠모하는 저 금안의 지배자와의 결투를 통해 죽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강인한 황금빛 이미지를 가진 남자, 테밀시아가 주위를 살피며 이쪽으로 말을 모는 것이 보였다. 군의 머리를 노리기 위해 오는 것이리 라. 아클렌은 테밀시아가 자신을 발견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황금빛 눈동 자에 어려 있는 살기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곧장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테밀시아 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부하들이 보였다. 제법 떨어져 있던 테밀시아가 이곳 으로 도달하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속절없이 목숨을 잃 고 쓰러지는 부하들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번뇌하는 아클렌의 옆에서 유시리안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 허리에 매여 있는 두개의 검을 내려 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검과 척 보기에도 값 비싸 보이는 보검. 그 둘을 보는 유시리안의 눈에 갈등이 어려 있었다. 2년 전의 만남이었다. 단 세 번의 만남으로 마음을 뺏겨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도둑맞았 다. 그 순간의 실수가 두 번의 해가 지나는 동안 끊임없이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겪게 했다. 허나 유시리안은 그것을 달가운 마음으로 받아드렸다. 언제고 만나서 이 속앓이만큼의 투정을 부려 줄 테다, 유쾌하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드렸다. 그랬 기에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 -능력이 특출난 마는 라의 질투를 사는 법입니다. -형님은 아닙니다. 그 잠깐의 대화. 적어도 저 사람만은 믿고 따르는 페르노크임을 알기에 선뜩 검 을 쥐지 못했다. 죽일 수는 있다. 그는 자신의 강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 다. ‘역시 페르에게 미움을 받는 건 싫어.’ 고민은 끝. 그럼 행동만이 남았다. 평범한 검을 검집 채 뽑아든 유시리안은 아직도 자신의 발치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벨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상처를 살펴주고 있는 듯한 모습. 아클렌은 자신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테밀시아를 보며 갈등하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당사자인 하벨만이 이 잔인한 남자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두 번의 경고는 하지 않아.” 유시리안은 화상에 들러붙은 옷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는 척하며 속삭였다. “입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하벨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유시리안은 하벨의 손에 자신의 평범한 검을 쥐어주었다. 그 평범한 검을 자세히 보면 윤곽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식하고 보지 않는다면 모를 테지만 그것의 모양은 시시각각으 로 변하고 있었다. 눈에 확 띄게 변하는 게 아니라 아주 미묘한 변화. 마치 유리 통에 꽉 채워져 있는 물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듯한 모습. 범상치 않은 검이었다! 영문을 몰라 하던 하벨의 눈이 급격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의 간사하고 교활하며 아둔한 눈빛이 아무것도 담지 않게 된 것은. 무심하게 유 시리안을 보고 있는 하벨의 모습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다행이 그것을 알아 본 이 는 없었다. “불쾌한 몸뚱이다.” 더 이상 화상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지 부시시 일어났다. 솔직히 하벨이 엄살이 심해서 그렇지 부상의 정도가 컸던 것은 아니었다. 허나 이건 인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짜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유시리안의 기괴한 검이 들려있었다. “왜 이 몸을 ‘지배’하게 한거지?” 무뚝뚝한, 아니 무심한 말투. 흥미에서 비롯된 질문이 아니라 내가 할일이 뭐냐 고 묻는 듯한 모습이다. 유시리안은 하벨의 어깨를 툭툭 치며 씨익 웃었다. “미안, 미안. 네가 해줄 일이 있어.” 하벨의 몸에 들어가 있는 무언가는 지독히 무심한 얼굴로 유시리안을 보고 있었 다. 이쯤이면 무안할 만도 하련만 유시리안은 익숙한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클렌.” “뭐야? ……하벨?” 아클렌이 돌아보자 하벨의 모습은 평소와 같아졌다. 좀 전의 그 무심한 눈동자는 착각이었는지 여전히 간사하고 교활하며 아둔하기까지 한 비겁자의 눈을 하고 있 다. 고통이 심한지 부들부들 떨며 창백한 안색에 식은땀까지 흘려댄다. 그런 하벨 의 어깨를 친한 척 툭툭 치며 유시리안이 말했다. “어이, 하벨. 이대로라면 모두 전멸당하고 말거야. 참모로써 사령관에서 충고해 야 하는 거 아냐? 사령관이 뭐라 반대를 하던 이 기습을 강행했던 것처럼 참모의 명예를 걸고 한마디 해야지.” 아클렌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유시리안과 하벨을 보았다. 둘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유시리안은 하벨을 경멸했고 하벨은 유시리안을 경계했다. 하벨이 가 장 꺼리며 그가 몸을 담고 있는 파와 대립하고 있는 황자. 시오니타가 바로 유시 리안의 고용주였기 때문이다. 시오니타가 황태자가 됨과 동시에 이쪽의 세력은 완전히 풍지박살이 나버렸다. 그 끔찍했던 피의 숙청. 그 중심에서 시오니타와 함께 피바람을 일으켰던 장본인 이 바로 유시리안이었다. 다행히 시오니타가 전쟁을 반대하면서 감금 되어 유시리 안의 기세가 꺽였지만 그 강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더욱 경계하며 피 했다. 게다가 시오니타가 감금되고 난 뒤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불안했다. 잠자는 야수라 판단한 것이다. 뭐, 실제로는 고용주가 감금된 마당에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겠냐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유시리안이 다정하게(?) 말을 걸자 하벨은 겁에 질린 얼굴로 욤의 군사들을 보며 외쳤다. “뭐하는 건가! 당장 항복하게! 이대로 병사들만 잃을 참인가?” “하지만 항복보다는 전사하는 편이 명예로운…….” 명예라는 단어에 민감했던 하벨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아클렌이 잘 알고 있었 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당장 항복하게! 락아타의 전력을 여기서 다 없앨 생각인가! 그것은 황제 폐하 에 대한 불충이야! 이건 참모로써의 충고가 아니야. 황족으로써의 명령이다!” 아클렌은 혼란한 듯 유시리안을 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일 뿐 아무런 답을 주 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벨의 격한 고함은 계속 되고 있었다. “항복하란 말이야! 항복!” 아클렌이 얼굴을 찌푸리며 하벨의 입을 막으려 하는 순간 뒤에서 가슴이 철렁 내 려앉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항복인가?” 흠칫! 뒤를 돌아보니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쥐고 있는 냉랭한 얼굴의 미남자 가 그를 보고 있었다. 온몸을 서늘하게 하는 황금빛 눈동자와 정신을 압박하는 그 거대한 기백!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이트 테밀시아.” 신음성과 같은 호명. 테밀시아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그리곤 검에 묻 은 피를 툭툭 털어내며 물었다. “아니면 결투인가?” 아클렌은 자신이 여지껏 비무장이었음을 깨달았다. 검은 아직도 얌전히 허리에 매 여 있었고 말에서 내린지도 오래였다. 그 다음 순간 느낀 것은 눈앞의 남자가 정 말 기사라는 점이었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단신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 고 달려온 용기와 덕망. 병사가 죽거나 말거나 뒤에서 명령만 하는 다른 사령관과 는 차원이 다른 모습에 일종의 감동을 느껴야 했다. 이왕 패하는 거 저런 사람에 게 당하는 것임을 감사하자. 아클렌은 검을 뽑아 땅에 박고 말했다. “항복이오. 공격을 멈춰주시오.” “항복을 받아드린다. 무기를 버린 자에게 칼을 꽂지 않겠다. 포위망을 푸르고 군 을 소집하라. 그 다음에 이쪽 포위망을 푸르겠다. 그대의 병사에게 명하라. 비무 장으로 모였을 때 치료를 지원하겠다. 그대와 옆의 참모, 그대의 기사단은 나와 같이 입성한다.” 패장에 대한 비웃음도 위선적인 위로도 없다. 짤막하게 본론만 말하는 테밀시아 의 모습은 아클렌에게 진한 전율을 느끼게 해주었다. 때문에 자신의 옆에서 유시 리안이 하벨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을 회수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동시 에 다시 하벨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아프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도. 그 러다 언제 왔는지 알 수 없는 테밀시아의 모습에 잔뜩 질려 침묵하다가 아클렌의 검이 땅에 박혀 있음을 알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는 것도. “누가 항복을 하라고 했나!” “바로 너야. 얼간이.” 검을 어루만지던 유시리안이 피식 웃으며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하벨은 무슨 헛소리냐고 반박하려다 자신을 둘러싼 묘한 기운에 입을 다물었다. 땅을 뒹굴고 있는 병사들이나 패배의 쓴맛을 삼키던 기사들이 한결같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 다. 처음부터 저 비겁자가 황실의 위엄을 앞세워 이 작전을 종용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다시 항복을 명령했다. 참모로 참전했으 면 죽어도 참모다. 중간에 황족으로써의 지위를 내세우다니. 비겁자!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시리안만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연신 그 기괴한 검을 어루만지며. “잘했어, 샤.” ========================================================================== 아르의 장 파트를 읽으셨던 독자분들은 아실겁니다. 락샤사라는 녀석이 마검이라는 걸 말입니다. 녀석은 한 여자의 몸을 지배해서 아르의 일행에 끼어들게 됐었죠. 순진하다 못해 멍청해서 민폐를 끼치던 필브리안에게 유일하게 통렬한 독설을 내뱉는 녀석이기도 했습니다. ^^ 그때 그녀석을 아시나요. ( '')~ 아해의 장-262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무하가 이탈하고 정신없이 후문을 향해 달리던 이들은 얼마 안가 도착할 수 있었다. “먼저 보고 오겠어.” 테호르가 성벽 위를 날래게 뛰어 올랐다. 밖의 동향을 살피던 그는 암담한 얼굴 로 내려와 클랜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이미 포위된 것이다. 주먹을 꾹 쥐며 신의 존재를 찾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사람이라도 사정이 좋을 리는 없었다. 이미 삶을 체념하는 이도 곳곳에 속출됐다. 그것은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분노와 공포라는 감정이 그들에게서 생기를 앗아간 것이다. 클랜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정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잘 들어.” 낮지만 모두의 귀에는 충분히 들어갈 목소리였다. 클랜 외의 사람들은 절망에 잠겨 떠들 기력조차 없었기에 주위가 매우 조용했던 것이다. “우린 살아야 한다. 죽어도 이대로 죽어선 안돼. 저항 하지 않는 편이 우리를 미 끼로 두고 간 욤에 대한 복수가 될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욤을 원망할 자 격이 없다.” 클랜은 스스로를 책망했고 모두를 책망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이들 사이에서 욤에 대한 욕설이 멈춘 지 오래였다. 그래봐야 누워서 침 뱉기이라 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욤이 승리하기 위해 이들을 버렸다면, 이들은 살기 위해 무 하를 버렸다. 클랜은 주먹을 펴 손바닥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보았다. 그것은 깨진 적빛 옥반지 의 파편이었다. 한번 클랜의 목숨을 살려주었던 고마운 녀석이다. 신호탄이라고 말했던 무하의 짤막한 설명이 무색하리 만치 놀라운 효과를 보여주었던 반지. 클 랜은 그것을 깨뜨렸을 때의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순식간에 몸을 감싸던 붉 은 기류와 무하가 지원하기 위해 달려올 때까지의 영겁 같던 시간을 지켜준 붉은 방어막. 클랜은 크게 숨을 들이키며 손안의 것을 버렸다. 이런 귀한 것을 넘겨주면서까지 자신을 살리고자 했던 무하의 따뜻한 마음을 거슬릴 생각 따윈 없었다. 자신이 한 약속은 지키는 녀석이니 분명 살아서 올 것이다. 그런 녀석에게 죽은 시체를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클랜은 대신 은장도를 왼쪽 장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목까지 밀어 손수건으로 동여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려줘야 한다. 그러기 위 해서는 살아야 한다. “우린 죽을 자격이 없다. 그러니 살아야 한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자는 여기 에 남아라.” 검을 뽑아들며 비장하게 말하는 클랜에게서 강한 각오를 느낄 수 있었다. 곧 검 을 뽑아다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테호르가 천천히 문이 열기 시작했다. “무조건 돌파한다. 무조건 산으로 간다. 절대 살아남아야 한다. 돌격!” 천에 근접한 수의 용병들이 일제히 성밖으로 뛰어나왔다. 얼마나 배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얼마나 뛰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말을 탄 적이 얼마 없어 안도했던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이런 생각을 잠시 떠올리는 와중에도 싸움은 계속 되고 있었다. 본래 불타듯 붉은 적발을 가진 클랜의 몸 어 느 한군데도 피에 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죽어!” 누군가 달려드는 것을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또한 본능적으로 상대 가 죽었음을 알았다. 양심의 가책?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죽이지 않으 면 이쪽이 죽는다. 그는 무하가 아니었다. 비록 무하가 꺼리기에 살인을 자제하 고 있었을 뿐이다. 굳이 싫어하지도 않지만 마찬가지로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이 다. 어느 쪽이라 굳이 나누자면 ‘상관없다’ 랄까. 상대가 죽던 살던 클랜의 관 심 밖의 일인 것이다. 악귀의 형상. 붉은 물을 뒤집어 쓴 듯한 몸뚱이와 미친 듯이 목을 베어 넘기는 모 습. 클랜은 어느 샌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적이 줄어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 피의 대상! 클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뛰어!” 앞장서 달려가는 클랜의 뒤를 이제는 칠백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용병들이 따랐다. 클랜은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가차 없이 죽였다. 자신이 무하와의 약속 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들이기에. 주춤거리며 피하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소 리가 말의 울음과 함께 들려왔다. 기사였다! 클랜은 말에 타지 않은 자신이 불리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한다. 바로 200미터 앞에 산이 있는 것이다! 더욱 박차를 가하여 뛰던 클랜의 앞을 어느 샌가 많은 수의 병사가 가로막기 시작했다. 기사의 등장에 용기를 가진 것을 수도 있고, 기사의 협박에 두려움을 가진 것일 수도 있었다. 상관없다! 앞을 막으면 베면 그만이다. 클랜이 검을 힘 껏 쳐들어 오른 편에서 달려드는 녀석을 베었을 때, 왼쪽 편에서 미처 막을 틈도 없이 누군가 검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 막았다. 한쪽 팔이 잘려나가 는 것쯤은 감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맑은 소리가 나며 상대가 튕겨져 나 갔다. ‘아!’ 은장도가 있었다! 다시 오른쪽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클랜은 양손으로 검을 움켜 쥐고 크게 휘둘렀다. 상대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널부러지는 것을 끝까 지 보고 있을 틈이 없었다. 기사가 오기 전에 도주해야 했다. 하지만 불행이도 클랜의 붉은 머리는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기사는 병사들 의 처절한 외침으로 클랜을 쉽게 찾아냈다. 기사의 살기에 절은 고함과 함께 말 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제 산까지는 100미터 남았다! 클랜은 자신이 그곳에 도달하기 전에 기사가 뒤에서 치고 올 것을 알았다. ‘빌어먹을!’ 몸을 뒤로 돌리며 암담한 현실에 욕설을 퍼부었다. 싸워야 한다면 싸울 것이다. 최대한 빨리 치고 도주하면 된다. 산이라면 말을 탄 자에게는 부자유스러운 곳이 다. 이번 한 고비만 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를 꽉 물며 검을 굳게 잡고 자세를 잡았을 때였다. 화려한 금빛이 클랜 의 왼팔에서 번쩍 일어났다. 마법을 쓰는 건가 경계하며 기사가 주춤거리고 있을 때, 그 금빛은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은 시전 중에 막아야 한다 는 것이 정론이었다. 잠시 주춤하던 기사가 얼른 검을 치켜들며 달려들었을 때 클랜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으며 일단 오른 손으로 검을 쥐었다. 은장도가 달아오르듯 뜨겁게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번쩍! 기사와 클랜의 검이 미처 맞닿기 전에 마법진이 완성됐다. 엄청난 빛이 주 위를 밝혔다. 클랜은 마법진 위로 누군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한쪽을 부둥켜 앉고 있던 자가 얼른 안전하게 착지하는 것까지 멍하니 보다가 경악성을 질렀다. “무하!” 참혹했다. 왼쪽 가슴을 관통한 거대한 화살과 온몸을 적시고 있는 엄청난 출혈! 피일은 갑작스런 텔레포트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들 뒤에서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는 이가 있었다. 락아타의 기사였다! “숙여!” 클랜이 빠르게 검을 맞받아치며 고함을 질렀다. 이제는 도주할 수도 없었다. 부상 을 입은 무하를 함부로 업을 수도 없었고 화살을 무식하게 뽑을 수도 없었다. 오 직 이 자리에 서서 버텨야 했다. 말까지 타 속도와 힘이 더해진 기사의 검을 고스란히 맞받아 친 클랜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꽉 문 입술 속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이대로는 다 죽을게 뻔했다. 하지만……. 창백한 안색의 무하를 보며 검을 꾹 쥐었다. 기사가 다시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리고 갈 수는 없다! 그때였다. “두웅-!” 길게 울리는 고동 소리. 기사의 얼굴에 낭패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클랜과 무하, 피일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검을 버렸다. 역습을 시작하던 모든 락아타 군들도 마 찬가지였다. 그들의 사령관이 항복한 것이다. 클랜과 피일은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안도감에 휩쓸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락아타의 기사는 그런 그들을 말없이 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전쟁은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끝났다. 무하가 눈을 뜬 건 어스프름한 새벽녘이었다. 욱씬! 심장 부근이 아파와 손으로 감싸며 일어났다. 풋풋한 풀내음이 한껏 맡아지는 곳. 은장도를 텔레포트의 매개 체로 삼았던 무하는 일행이 무사히 산으로 도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손을 내 리며 그곳을 살펴보자 두툼하게 붕대가 감싸 있었다. 움찔 몸이 움츠려진다. 당시 의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관통해 정신을 마비시켰다. 무하는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한참을 심호흡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렸다. 악마, 그래 악마였다. 단 몇 마디의 말 로 수천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비겁하다. 그 수많은 사람을 불에 태워 죽여 놓고 겨우 화살 하나에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용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릎을 꿇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슴 깊이 치솟는 죄책감과 자괴감, 그리고 슬 픔. 격심한 고통이 되어 스스로를 짓이기는 감정들. “깼나?” 걱정스런 음성이 귀에 울린다. 클랜……. “나는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할 것 같다.” 뜻밖의 목소리가 차분하다. 클랜은 침묵했다. 그러다 애써 입을 열었다. “네 검으로 치료했어. 겨우 심장을 피했거든. 천행이었지.” “아아.” 클랜은 손에 쥐고 있던 은장도를 던졌다. 무하의 무릎 앞에 그것이 떨어졌다. “다른 부상자들도 그것으로 치료했다.” “다행이군.” “…….”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무하도 클랜도 그것이 너무 아프게 느껴졌다. 실낱같은 멜 로디조차 나지 않는다. 그토록 혼란스러워하고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데도 어째 서……. 결국 머리로는 그 고통을 느끼면서도 가슴으로는 받아드리지 못한다는 것 일까? 2년의 세월은 대량 살인을 했음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의 마 음을 좀 먹은 것일까? 이제는 완전히 인형이 되어버렸나? 무하의 목소리가 여전 히 차분하게 울렸다. 아니 그것은 무심한 목소리였다. “나의 마음은……완전히 죽어버린 것일까?” ========================================================================= 아해의 장은 페르의 장(1부)과 아르의 장(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회귀의 장은 전혀 다른 내용이지요^^ 아, 바쁘다. 바뻐. 아해의 장-263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요새 내를 장악하고 있는 욤에 다시 합류할 생각은 없었다. 저주어린 눈으로 멀찍이 보이는 요새를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일단 각자의 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버림 받았던 처사를 마스터에게 고해야 한다. 용병 길드에서 그들 을 도와 줄 것이다. 발언권이 크다 할 수 있는 대 용병단, 곤크와 범크가 미끼 중 에 포함 되었다는 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지만 이쪽으로써는 되려 잘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소규모의 용병들이 항의해봐야 어느 정도의 보상금을 주는 걸로 끝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하는 알지 못하겠지만, 요크노민이 바로 이점을 들며 범 크와 곤크를 미끼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형에게 열변했었다. 물론 그런 점 때문이 아닌 무하가 그곳에 있기에 그런 것이지만 말이다. 이동을 하면서 모두들 무하와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어 했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하는 모두의 접근을 거부했다. 깨어난 그는 지독 히 말이 없었고 어두웠다. 끔찍한 상처를 감쌌던 붕대를 푸르는 순간 드러난 또 다른 흉터에 이목이 집중 됐을 때도 조용하기만 했다. 단지 그 처참한 흉터를 손 으로 잠시 쓸어 보았을 뿐. 그렇게 5 일의 여정이 지났다. 몬스터 사태로 변방에는 마을이 없기 때문에 행군 과 노숙이 계속되는 나날들이었다. 몇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들은 몇 번이나 몬 스터를 만났고 싸우고 도망쳐야 했다. 말도 없는 데다 계속 되는 전투에 이동은 더뎠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 있지 않은가. 그러는 동안에도 무하가 입을 여는 것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새벽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행군하면 정오쯤에는 성벽이 있는 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마지막 불침번이었던 클랜은 멍하니 장작불을 보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 자리에 누워있는 무하를 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어 잠들어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깨어 있다고 확신했다. “벌써 닷새째다.” 별 생각 없이 장작을 불에 올려놓았다. 슬슬 꺼도 좋을 시간에 장작은 타닥타닥 잘 타오르고 있었다. “좀 자야 하지 않겠어, 무하?” 한숨 소리가 약하게 들리더니 무하가 몸을 일으켰다. 두건에 가리어져 잘 알 수 는 없지만 그의 두 눈은 아마도 붉게 충혈 되어 있을 것이다. 두어 시간 정도뿐이 지만 그래도 잠을 들 수 있었던 나날들이 좋았다고 느껴질 만큼 무하는 잠들지 못 했다. 클랜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하의 온몸에서 풍겨오는 진 한 피로감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무하.” “…….” “말 좀 해봐, 응?” 안타깝게 울리는 목소리. 무하는 ‘연기’를 하기로 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 고, 하고 싶지 않은 농담을 입에 담았다. 다행이 그것은 생각보다 잘 나와 주었 다. “날 벙어리로 아나, 클랜?” “벙어리가 된 줄 알았다. 무하.” 이 잠시의 ‘연기’만으로도 주위를 안심시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무하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마치 형처럼 자신을 보살펴 준 클랜에게는 더더욱. ‘그러고 보니 형님이 온다고 했었는데.’ 아마 지금쯤이면 승전에 기뻐하며 혼자 축배를 들고 있지 않을까? 살인을 싫어한 다고 하지만 살인자인 테밀시아 형님도 클랜도 좋아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짜로 싫어하는 게 맞는 걸까? 무하는 자신의 생각이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있음을 깨달 았다. 아니 생각 자체를 지난 닷새간 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죽어 가는 건가. 건장한 육신 안에 뇌는 녹아 사라지고 마는 걸까. “클랜. 너는 네가 살아 있음을 느끼나?” “물론.” 뜬금없는 질문. 하지만 클랜의 답은 금방 나왔다. 불과 닷새 전의 전투로 인해 살 아 있음을 절실히 느낀 그다. 이정도 질문은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허나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까? 클랜은 그것이 궁금했다. “무하.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 뜻밖에도 답이 없었다. 클랜은 그 침묵이 못 견디게 불안했다. “무하?” “살아 있는 걸까…….” 분명 죽었을 것이다. 죽었으니 이 자리, 이 몸뚱이에 빌붙어 있는 게 아니겠는 가. 고작 계단에서 떨어진 걸로 죽었다 보기에는 허무한 면도 있지만. 어쨌건 죽 은 것이다. 한데 왜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걸까? 왜 이렇게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그러다 미쳐가는 것일까.  “난 안 죽어, 클랜.” 설령 평생 잠을 못 든다 해도 죽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웃음도 나오 지 않는 데다 이제는 말조차 잘 나오지 않는 데도 죽지 않는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절대 안 죽어.” 하지만 느낄 수 있을까? 막 닷새간의 공백을 느낀 참이다. 앞으로도 그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과연 느낄 수 있을까? 죽어서 꿈을 꾸 고 있는 게 아니라는 보장을 받을 수 있을까? 무하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 것은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모습으로 무하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무하는 다시 입 을 다물었다.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무하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다들 몬스터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팽팽하지만 약간은 여유 있는 행군. 곧 마을에 도착한다는 즐거움이 도사리는 가운데 이곳저곳에서 이야기꽃이 피었다. 술을 마시고 싶다거 나 목욕을 하고 싶다거나 침대에서 푹 자고 싶다거나 맛난 음식을 먹고 싶다는 등등. 소박한 바람과 행복이 각기의 입에서 번져 나왔다. 만일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이 소리가 없었다면 무하 또한 마을에 가서 무엇을 할까 고민해봤을 지도 모른다. “그루룩…… 그루룩.”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모두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숨 죽여 사방을 경계했다. 몬 스터 사태를 두고 학자와 마법사들이 조사, 발표한 것 중 유일하게 쓸모가 있는 정보는 몬스터들의 ‘루트’에 방해되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공격해 오지 않는 다 는 것이었다. 물론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이탈한 몇몇 몬스터들이 있기에 그리 유용하지는 않지만 대규모의 몬스터 집단과 마주하지 않는 것이 어딘가. “우리를 벗어나 있어.” “다행이군.” 안도하기가 무섭게 한쪽에서 미치겠다며 낮게 으르렁 거렸다. “마을 쪽으로 가고 있어.” “……빌어먹을.” 몬스터와의 직접적인 대면은 피하면서 마을을 향해 뛰었다. 몬스터들은 이미 목표가 정해 졌는지 바로 옆에서 뛰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뛸 뿐. 말 도 없이 닷새간의 여정을 걸쳐 이곳에까지 온 용병들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감히 몬스터들을 어찌 해볼 생각을 하지조차 못했다. 하지만 마을에 들어가지 못 한다면 이들도 굶어 죽을 것이다. 성벽이 없는 마을들은 죄다 이주했기에 각 마을 마다 사람은 많지만 마을 자체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다. 식량 조달을 하려면 또 얼마나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막 전쟁터에서 벗어나 며칠이나 걸어 서 이곳까지 온 그들에게 다음 마을까지 걸어야 한다는 건 끔찍한 고문이었다. “몬스터 보다 마을에 도착할 가능성은 없는 건가?” “없어. 말이 있다며 모르겠지만.” 무하 역시 일행과 보조를 맞춰 뛰면서 몬스터들을 살펴보았다. 신들린 듯 마구 뛰 어가는 그들의 속도는 말을 타도 따라 잡기 힘들 정도였다. 또 한번 전투를 치러 야 하는 가. 반발이 있으면 적어도 금방 물러나긴 한다. 하지만 저항이 없다면 몬 스터들은 마을을 몰살 지경까지 몰아붙인다. 그들이 성벽이 보이는 곳까지 도달했을 때, 이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일단 일행들은 성벽과 조금 떨어 진 곳에서 사태파악을 하기로 했다. 클랜과 테호르가 이번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느냐, 아니면 뒤에서 쳐서 저들을 도우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무하는 관심 없는 얼굴로 성벽 쪽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나는 무하에게 클랜과 테호르가 뭐라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그의 행동이 더 빨랐다. 빠른 속도로 성벽을 향해 뛰어간 것이다. “무하!” 무하는 몬스터들의 몸을 가볍게 밟으며 성벽 위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다시 높 게 허공으로 치솟았다. “저 녀석 왜 저래?” 테호르의 질문에 클랜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마을로 들어갔으니 몬스터에게 당할 일은 없겠지.” 클랜은 어딘지 모르게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하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 것은 지난전투 이후로 없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몬스터와 무하 에게 온 신경을 쏟던 클랜과 테호르는 거의 동시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을 떡 벌리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헛것을 본 건가? 다행이 그들의 정신이 지극 히 정상임을 확인시켜주는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이제는 반갑기까지 한 녀석들이군.” “예. 2년간 마주했으니 아예 친구 같기도 합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저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와 압도적인 기백, 그리고 이런 사태를 눈앞에 두고도 여유로운 모습. 클랜과 테호르는 용기를 내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어떻게 이곳에…….” 무시 할 거라 생각한 상대가 뜻밖에도 질문을 던진 클랜을 내려보며 답해주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황명이 도착했거든. 적의 사령관 얼굴을 직접 보고 싶다나. 어지간히 뜯어 먹고 싶었던 모양이지.” 의외로 친근한 어조. 클랜은 실례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의 모습을 뜯어보았 다. 2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더욱 성숙해 보인다는 것뿐. 저 강한 황금빛 눈동 자도 저 고아한 황금빛 머리도 그대로다.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지만 본능으로 알 수 있는 피비린내. “나이트 테밀시아…….” 저도 모르게 읊조린 호명에 테밀시아는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주었다. 혹시 무하 의 일을 알고 있는 건가, 클랜이 제풀에 찔려할 때 테밀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대를 본 적이 있어. 2년 전 나의 동생이 유괴를 당했을 때 구해주었다는 용병 이지?” “아, 예.” 그걸 도움이라 할 수 있을까? 그때의 작은 호의로 받은 것이 과분할 지경인데 그 형조차 고마움을 표하고 있으니 난처할 지경이다. 대부분의 귀족 가와는 달리 저 진한 형제애. 무하 녀석이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것도 또 다른 형 때문이라 들었 으니. 부럽기까지 하다. “꼬박 이틀을 달렸더니 피곤하기도 하군.” 이쪽은 닷새입니다. 라고 감히 말을 꺼낼 이가 있을 리 없었다. 만일 그 근위기사 였다면 주저 없이 말했겠지만 상대가 달랐다. 누가 못 알아볼까? 저 기괴한 휴첼 문장과 저 강렬한 황금빛 눈동자를. ‘지배자’라 불리는 남자, 오르세만 테밀시 아 라 카르민! “빨리 해치우고 들어가 쉬지.” 테밀시아가 검을 뽑아들며 싱긋 웃었다. 일이 잘 해결되어 기분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또 있을 전투가 전사로써의 본능을 일으킨 것일까? 하지만 클랜은 이 남자 에게 꼭 한 가지 들어야 할 것이 있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막 말의 배를 차려 했던 테밀시아는 여전히 호의적인 눈빛으로 클랜을 내려보았 다. 자신의 행로를 막은 제피모에게 저런 시선을 보내는 귀족이라니. 방금까지만 해도 모든 귀족들을 욕하고 저주하던 용병들은 순식간에 테밀시아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하츠민을 구한데다가 몬스터 사태때 누구보다도 열심 히 뛰어다녔던 이가 바로 저 남자가 아니던가. ……군중 심리란 이렇게 단순한 모 양이다. “이번 미끼 작전을 알고 있었습니까?” “물론. 헌데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클랜은 자신이 미끼가 되었음을 이 남자가 모른다는 걸 그 질문을 통해 알 수 있 었다. 하지만……. “제가 미끼로 버려졌기 때문입니다. 저희 모두가 미끼로 버렸지요.” 클랜의 눈에 치 떨리는 분노와 한이 어렸다. 테밀시아는 차분한 눈동자로 그런 클 랜을 내려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듯한 시선. 클랜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 다. 테밀시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이번 미끼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그 어떤 용병단도 미끼로 남는 이들에 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어.” “그, 그건.” “만일 그대가 미끼에서 제외되어 몰래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후방으로 피신했 다 하더라도 미끼로 남는 다른 용병단에게 알리지는 않았을 거야. 곧 있을 전투에 서 공을 세울 생각으로 가득했겠지. 안 그런가?” “…….” 맞는 말이다. 미끼로 남았기에 귀족들의 처사에 분노하는 것이다. 만일 미끼에서 제외되었다면 이 일로 분노했을까? 클랜은 마음껏 원망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테 밀시아에게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왠지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듯한, 그러면 서도 따뜻한 어떤 느낌이었다. 이 남자는 정말 강하구나……. ‘무하, 아니 페르.’ 성벽 쪽을 돌아보았다. 귀족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리는 무례를 저 지른 것이었으나 테밀시아는 물론 휴첼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과 동 행한 락아타의 포로, 아클렌과 하벨만이 지금의 행동에 놀랐을 뿐. 휴첼의 기사들 은 자신들의 마스터가 의외로 예의나 신분 격차에 둔감함을 익히 겪어 알고 있었 던 것이다. ‘만일 네가 이 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네 고통이 조금은 격감되지 않을 까 싶다. 그렇기에…….’ 클랜은 테밀시아를 슬쩍 쳐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파트너에게 하는 사과였다. “미안하다.” 그는 테밀시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속삭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곧 있을 몬스터와의 전투를 위해 기를 고르던 테밀시아는 자신을 두 번이나 방해 한 클랜은 내려보았다. 다행히 클랜의 행동에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클랜 은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동생…….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에 대한 일입니다.” ========================================================================== 유시리안과의 재회도 머지 않았다는 것이 나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무하의 고생길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 나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누굴 괴롭히지...ㅡㅡ^ 아해의 장-264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무하는 무엇을 봤을까? 그는 오랜만에 슬픔, 분노 외의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호기심, 그리고 호승심. 아니, 감정 자체를 오랜만에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된 이야기.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녀석이지만 분명 그 자 다. 그때의 굴욕감이 다시 떠올려진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건너뛰던 무하는 어느 순간 몸을 낮추고 위를 쳐다보았다. 마 을 한 가운데의 하늘에서 누군가가 밑을 내려보고 있었다. 무하 쪽으로는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였다. 그는 지금도 누군가와 대치 중이었다. 가소로운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을 뻗는다. 마나의 일그러짐. 마법이다! 무하는 왼손을 위로 올리며 의지를 불러 넣었다. 이내 천공을 가르는 번개가 내리 쳐졌다. 무하 쪽을 노린 것이 아니라 상대를 노린 것인지라 파동은 그리 크게 일 지 않았다. 무하 쪽으로 조금 새어 나온 번개는 붉은 바람의 막으로 가볍게 흘렸 다. “아아, 피곤하군. 이 짓도 벌써 몇 년 째인지.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투덜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무하가 온 신경을 남자에게 쏟았기 때문에 들려 온 것이다. 남자를 상대하던 신관들은 신성 방어막을 풀며 헐떡였다. 지리적으로 불리한 그들은 이를 갈며 다시 기도에 들어갔다. 남자는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 는 순백의 기운을 가볍게 피하며 조소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보았다. 신관들의 공격이 바로 코앞에 당도했음에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는 등 뒤에서 오는 기운이 더 위협적이었기에 그리 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박자 늦었다. -퍽! 신관과 대치하면서 남자는 처음으로 타격을 받고 성벽 쪽으로 날라 가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성벽에 거미줄 모양의 금이 생겼다. 격렬한 충격! 신 관들과 성기사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가 새로이 나타난 사람을 돌아보았 다. 검 집채 휘둘렀던 검은 두건의 남자는 주위 시선은 아랑곳 않고 순식간에 성 벽 쪽으로 날라 갔다. 중간 중간에 지붕을 밟긴 했지만 그것은 날았다 표현해야 마땅했다. 성벽에 크게 부딪치고 밑으로 떨어진 남자는 의외로 별 이상이 없어보였다. 어느 정도냐 하면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다였다. 그것은 자신이 나가 떨어질 정도의 가격을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에 대한 놀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가격했을 자를 찾기 위해 고개를 허공으로 돌렸다. 마침 누군가가 지붕을 밟고 밑 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 두건을 눈가까지 뒤집어 쓴 늘씬한 체구의 남자. “헤에. 검 집으로 쳤잖아? 검으로 쳤다면 아무리 나라도 꽤 부상을 입었을 텐데 말이야.” “죽이기 위해 친 게 아니니까.” 뜻밖의 답. 그것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눈앞 의 남자가 자신을 유심히 뜯어보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눈에 좀 익은 남자다. 어디서 봤더라? 근래 하도 많은 신관들을 죽여 어지간하면 기억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신관은 아닌 듯싶고……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고개를 갸웃하다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그를 검은 두건의 남자는 유심히 살펴보 았다. 확실히 그다. 번개로 인한 찰나의 시간동안 보았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다. 창백한 안색과 더불어 그 차가운 붉은 눈동자. 조롱조에 가까운 말투와 시니컬한 미소. 다행이다. 농땡 사부의 가르침 중 하나가 ‘빚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갚아 라’ 다. 가르침을 따를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한숨 놓았다. 그 뒤에 따르는 ‘무 슨 수를 써서라도’는 빼먹더라도 말이다. “빚은 갚았다.” “빚? 뒤에서 기습하는 게 빚을 갚는 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는 남자에게 무하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떡였다. 아니 오 히려 잘 됐다는 모습이다. “다행이군. 확실하게 그대로 갚아줄 수 있어서.” 그 ‘빚’이란 것이 기습으로 인해 당했다는 뜻이란 말인가. 남자의 미간이 좁혀 졌다. 이리저리 생각을 더듬어 보는 듯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무하의 양 팔에 걸려 있는 두 붉은 팔찌에서 고정 됐다. “아아!” 멜로디가 없어서 기억해 내지 못했다. 분위기는 많이 변했지만 특유의 기운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때의 이쁜이로군!” “도망쳐요!” 신관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주위의 구경꾼들을 몰아세웠다. 그들은 어딘지 모르 게 불만스러운 모습이었다. 인자한 미소를 계속 짓고 있지만 초조함을 지울 수 없 는지 연신 뒤쪽을 살폈다. “무슨 일인 거죠?” 조금은 앙칼진, 하지만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 틈에 휩쓸려 있는 한 여자의 것이었다. 곱고 깨끗한 피부와 귀염성 있는 얼굴, 그리고 고상한 옷차림 에 달려 있는 가문 문양을 한 브로치. 척 보기에도 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거칠게 모는 신관들의 태도에 화가 난 듯 보였지만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 생 각했는지 억지로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의 귀족과는 달리 이성적으 로 보였다. 신관들은 서둘러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귀족 여자가 다시 뭐라 말을 하려 했을 때였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라 와 땅에 강하게 부딪쳤다. 먼지가 가라앉자 몸을 한껏 낮추고 상공을 올려보고 있는 남자 가 보였다. 귀족 여자는 그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외쳤다. “무하!” 무하는 순간 경계하는 것도 잊고 옆을 돌아보았다. 짐작했던 대로의 인물이 눈앞 에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했다. “피해.” “응?” 무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늘에서 내리 쏘이는 번개를 막기 위해 왼손 을 위로 쳐들어야 했던 것이다. 붉은 기류가 순식간에 그의 몸을 덮었다. 번개는 여지없이 흘러 땅으로 스며들어갔다. “무하!” 번개가 사라지자 마저 레일리아는 크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려 했지만 신관 들이 그것을 막았다. 무하는 낮은 음성으로 빠르게 말하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붉은 기류가 그런 그의 주위를 덮고 있었다. “밖에 몬스터들이 덤벼오고 있어. 그때 그걸 사용해서 어디든 도망가.” 레일리아는 정신없이 허공을 보다가 옆에서 자신을 붙잡는 한 남자 때문에 시선 을 걷어야 했다. 그리 크지 않는 키를 가졌지만 진중해 보이는 분위기의 남자. 레 일리아가 이곳까지 오게 된 원인 제공자였다. 이미 사교계에서는 노처녀라 불릴 나이인 레일리아에게 과감하게 청혼해 온 이 남자는 의외로 가주의 환호를 받았 다. 하필이면 사뮤에르가 가주가 되기 직전에 둘의 정략결혼을 허락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 자리까지 끌려온 것이다. 이 남자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레일리아에게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었 다.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하고 정부를 거느리며 남편의 정부를 못 본 척하고, 후계자를 낳는 의무만 다하면 서로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생활들은 질색이었다. 그런 레일리아를 가주는 철이 없다 탓했지만 어쩔 수 없다. 단 한번 뿐인 결혼이 지 않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고 싶은 게 어찌 과도한 욕심이라 할 수 있는 가. “레이디 어서 피하십시오. 여기는 위험합니다.” 성기사 중 한 사람이 레일리아에게 정중히 말했다. 그는 레일리아의 브로치가 가 야다 가문의 것임을 알아본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여지껏 거칠게 밀기만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친절을 떨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옆에서 그녀의 정혼자(일단은)도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이런 위험한 자리에 계속 있으려는 레일리아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레일리아는 그런 정혼자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친 뒤 성기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위험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몬스터가 성벽 밖에서 공격해 오고 있는데 어디 가 안전하다는 거죠?” “몬스터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가 바로 레이디 머리 위에 있단 말입니다.” 성기사는 또박또박 따지고 드는 레일리아에게 짜증 섞인 음성으로 답했다. 이런 비상시에도 이치만 따지고 있단 말인가. 이래서 귀족 여자들이란……. 그러나 레일리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지금 저 허공에 떠 있기만 하고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정체 모를 남자보다 당장 들어오면 인간을 잡아먹을 몬스터가 위험하다는 걸 왜 모르는 거죠? 이런 말은 매 우 실례 되겠지만, 기사님이 카 등급의 전사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당장 성벽으로 달려가 몬스터를 막는 편이 사람들의 신변을 위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성기사는 당돌한 귀족 아가씨를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 거렸다. 그들은 사제와 신 자들에 대한 예의는 발랐지만 그 외의 타인에게는 되려 무례한 타입에 속했다. 신 분이나 남녀노소에 구애 받지 않고 오직 신에 대한 잣대로만 타인을 판단하기 때 문이다. 게다가 솔직히 레일리아의 말이 과함이 없지 않았다. 레일리아의 정혼자, 매그람 역시 그녀의 말이 지나치다 생각했는지 팔을 잡아 당 겼다. 하지만 레일리아는 움직이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눈앞의 기사만 들어서 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 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언성을 높인 것이다. “지금 신전에서 막고자 하는 이와 싸우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아시나요? 무하 카 곤크입니다. 카 등급인 그마저도 저렇게 고전하고 있지요. 그런 자를 막기 위 해서는 수가 많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지금 성벽 쪽에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노리고 몬스터들이 들이 닥치고 있단 말이에요!” 그녀의 말이 계속 되는 와중에도 위에서는 엄청난 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앗!” 레일리아는 자신의 주위로 그늘이 생겼음을 깨닫고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보았다. 건물의 한쪽 귀퉁이가 잘려나갔는지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저도 모르 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꾹 감는 순간 그녀를 감싸 안는 이가 있었다. 거칠게 저쪽 으로 떠밀려진 레일리아가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끌어안고 고통스런 신음 을 흘리는 이가 보였다. 내키지 않았던 그녀의 정혼자, 매그람이었다. 레일리아 는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가다듬으며 그의 몸을 살펴보았다. 왼쪽 다리가 돌에 깔려 있는 것을 본 그녀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이성을 잃었다. “신관님! 신관님!” 매그람은 언제나 냉철한 레일리아의 패닉상태를 보고 그 고통 속에서도 웃었다. 바로 옆에 있던 성기사가 돌을 치우고 신관이 치유 마법을 시전해주고서야 냉정 을 되찾은 레일리아는 방금의 추태를 덮으려는 냥 앙칼지게 소리쳤다. “어서 몬스터나 막으란 말이에요! 언제 정신 차리실 건가요!?” 성기사가 발끈하려는 순간 그의 어깨를 진중히 붙잡는 자가 있었다. 또 다른 성기 사였다. “나이트 아율.” 아율은 예의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위의 편성되어 있는 성기사 들에게 명령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성벽으로 가라.” “나이트 아율!” “불복은 기각한다. 가라.” 저편에서 누군가가 사람의 숲을 헤집고 나왔다.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한 신관, 다 하나였다. “신관님께서도 지원을 나가 주십시오. 몇몇은 이곳에 남고. 부탁드립니다.” 다하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신관들의 대부분이 지원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평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분께서는 왜 이리 늦는 거지요?” “알 수 없는 분이죠. 저희로서는…….” 다하나는 곤란한 듯 웃으며 얼버무렸다. 다들 혀를 차며 나가는 동안 다하나와 또 다른 신관 둘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신성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신관만이 남 은 것이다. 카 등급인 성기사만이 남았듯이 말이다. “공중전인가.” 아율은 낭패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장시간은 아니더라도 신성 마법의 힘을 빌려 공중전을 할 수는 있었다. 허나 얼마 버티지 못할게 분명했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 으로 인해 잘 싸우고 있는 무하의 방해가 될 확률이 컸다. “저 분도 오랜만이군요.” “확실히 강합니다.” 다하나의 맑은 목소리에 아율은 탄성 섞인 답을 보냈다. 호승심이 진하게 실려 있 는 아율의 음성에 다하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불리해 보여요.” 간신히 버티고는 있다지만 언제 당할지 알 수 없는 모습. 겨우 추적해서 이 자리 까지 왔는데 코앞에서 놓치게 생겼다. 어지간한 다하나도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왜 그 분은 이리 늦으시는 건지…….” =========================================================================== 좀 전의 잡담에서 말 실수를 했어요. 무하의 고생길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뜻이었는데; 허허허... 연참을 매우 싫어하는 저입니다만... 약속은 지키자, 주의이기에... 라스탈님+_+ 파이팅인 것입니다!!!! 아해의 장-265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제법 버티는데? 이쁜이.” “무하다. 날개 인간.” 생소한 호칭. 붉은 눈동자가 일순 동그랗게 떠지더니 이내 파장대소 한다. 그 사이에 무하는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왼쪽 팔찌에 서려있는 바람의 정령의 힘을 빌어 공중에서 버티고 있지만 그에게도 공중전은 낯설었다. 애당초 날개를 지니 고 태어난 저 남자와는 다른 지상의 동물인 것이다. “하하하! 날개 인간이라! 하하하!” 배가 아픈지 양 팔로 배를 끌어안으며 마구 웃어대는 모습이 천박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무하는 어느새 금이 가버린 검을 내려보며 혀를 찼 다. 원래라면 몇 년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검이 남자의 격한 기운에 의해 가차 없 이 금가고 있었다. 갑작스런 전쟁 준비로 새 검을 준비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나 버텨줄지…….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저편을 노려보았다. 뭔가 일이 제대로 진행되 고 있지 않는 듯한 모습. 그는 혀를 차면서 다시 무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 은 순식간에 좀 전의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뜻밖의 방해가 생긴 모양이야. 쿡쿡.”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방해 받은 것으로 인한 초조함은 아닌 것 같은데……. 남자는 연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숨을 쉬기를 반복했다. 무하는 호흡을 가라앉히고 검을 꾹 쥐었다. 남자는 크게 숨을 몰아쉬 고 여지껏 뽑지 않았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날이 송곳 모양과 같이 생긴 단 검이었다. 그 가늘고 예리한 날에는 조밀하게 룬 어가 새겨져 있었다. 날을 한번 쓸어보던 남자는 어느 순간 짧게 기합을 주며 기운을 불어넣었다. “일이 급하게 됐어. 빨리 끝내야겠다.” 진중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무하는 불안정한 자신의 검을 내려보다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격돌! 남자의 짧은 단검은 무하의 칼날을 타고 오르며 곧장 무하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무하는 날래게 뒤로 피하며 성의 지붕 위에 착지했다. 발이 안전한 무언가를 딛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심되는 일이었 다. 남자는 여전히 허공에 떠서 무하를 내려보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다.” 남자의 투기가 순식간에 그를 뒤덮더니 그의 작은 단검에서 천천히 아지렁이가 일어났다. 그리고 검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무언가가 길게 뻗어 나와 장검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마법 검이었던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남자가 더욱 기운 을 불어 넣으니 반투명한 그것이 점점 빛을 내더니 일렁이는 검기를 만들어 낸 것 이다! ‘마스터!?’ 무하는 얼른 검을 앞으로 내뻗어 기를 부여했다. “합!” 불안전한 검에 불어 넣은 검기가 남자의 강맹한 검기와 맞부딪쳤다. 엄청난 괴성 과 함께 무하는 저편으로 빠르게 날라 가 부딪쳤다. 남자가 부딪쳤던 곳의 바로 반대편 성벽이었다. 거미줄 모양으로 쫙 갈라진 성벽을 주르룩 미끄러져 땅에 다 시 부딪쳤다. “쿨럭!” 울컥,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손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남자와의 격돌보다는 금이 가 있던 검이 더욱 큰 타격이 되었다. 하필 남자와 검을 마주한 바로 그 순 간 박살이 나, 그 파편이 무하의 오른쪽 어깨에 박힌 것이다. 일순 느껴지지 않았던 통증이 몰아쳤다. 무하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힘들게 살펴 보았다. 아니 살펴 볼 것도 없었다. 산산 조각이 나 검 자루만 남아 있었던 것이 다. ‘빌어먹을.’ “어라? 죽지 않았네?” 바로 눈앞에서 둥둥 떠 있는 남자. 순수하게 놀랐다는 얼굴을 해 보이고 있었다. 무하는 파편을 뽑을지 여부를 갈등하다가 남자를 올려보았다. 그는 신기한 동물 을 보듯 무하를 보고 있었다. “참 재미있는 인간이야.” 차가운 붉은 눈동자가 흥미로 인해 반짝이고 있다. “그렇게 싸우면서 살기 한번 일으키지 않다니. 정말 신기하다니까. 저 고귀한 신 관 나으리들께서도 신성마법으로 공격을 할 때면 살기를 쏟아 붇는데 말이야. 재 미있어.” 그리곤 박살이 난 검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실력에 맞는 검을 가지고 다녀야지.” 그리곤 그 기괴한 반투명의 날을 가진 검을 쓰윽 들어 올린다. 무하는 황급히 주 문을 시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듯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입을 열어! 주문을 외우란 말이야! 그렇게 많은 수를 죽여 놓고 새삼 왜 이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덜덜 떨리는 입술 사이로 거친 호흡만이 뱉어진다. 죽지 않아. “내……내가…….” 필사적으로 쥐어짜는 목소리. 무하는 고통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려 했다. 그 때였 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남자가 뒤로 날라 가버렸다. 그리고 무하의 앞을 막고 있는 또 다른 사람. 무하는 멍한 눈으로 그 사람을 올려보았다. 그리운 사람……. 꿈일 까? 그 사람이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더니 작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비현실 적인 순간. ‘정말로……?’ 아, 뒤! 무하가 급히 소리치려 했지만 그 사람의 반응이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뒤를 돌아 검을 받아낸 것이다. 괴력의 남자와도 뒤떨어지지 않는 힘과 체력. 그 리고 기술! 다시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사방을 울렸다. 무하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그 사람을 보았다. 눈이 부셔서 눈물이 왈칵 치밀 것 같은 금발과 강인한 몸놀림, 그리고 자상한 황금빛 눈동자……형님? 직접 허공을 날아 싸우던 무하와는 달리 테밀시아는 철저하게 지상전을 고집했 다. 상대가 이쪽으로 오게끔 만드는 모습. 무하와는 목숨을 건 전투경험이 질적으 로 다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강하다. 소름끼치도록 강하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무하는 형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뭔가에 화가 난 듯한 얼굴과는 달리 냉정한 검 놀림이 인상 깊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시선으로 형 을 지켜본다. 지난 2년 동안 멀찍이서 지켜본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가서 당장이 라도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았던지. 애써 하늘을 올려본 다. 눈시울이 뜨끈해져 버려서 푸른 하늘을 보며 식히려 한다. 검소리가 더욱 요란해져 고개를 돌리니 새로이 참여한 성기사가 보였다. 눈에 익 은 얼굴. 무하는 그가 가끔 만나 함께 술을 마시는, 차가운 듯 털털한 성품의 성 기사 아율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째서 성기사가……?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 게 저편에서 역시나 눈에 익은 얼굴의 사제, 다하나가 마법을 열창하는 모습이 보 였다. 이 둘은 정말 사이가 좋구나. 라는 상황과는 상관없는 생각을 하는 무하는 확실히 고통으로 제정신이 아닌 듯싶었다. ‘파편을 뽑아야…….’ 은장도 회복을 시키면 금방일 테니……어떻게 사용하지? 형님이 바로 눈앞에 계신 데. 무하는 입술을 꾹 깨물며 허리를 숙였다. 피가 투두둑 바닥을 적신다. “이런, 이런.” 곤란한 척하는 여유 있는 목소리. 남자는 자신을 막아서는 이들을 훌쩍 타 넘어 무하의 앞에 와 섰다. 그리고 그 묘한 검을 들어 무하의 목에 갖다댔다. 모두들 멈칫 하여 이를 갈 때 그는 무하의 귀에 입술을 갖다대며 작게 속삭였다. “재미있는 호칭을 붙여줘서 고맙군. 악귀나 마수 사육자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훨 씬 마음에 들어. 내 이름은 하환. 앞에 붙는 이름도 좀 있고 뒤에 붙는 이름도 꽤 있지만 대충 그렇게 불리고 있지. 그쪽은, 이쁜이?” “무하. 아까도 말했을 텐데.”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거든. 내가 물어 본건 진짜 이름인데……. 뭐, 대 충 그렇다 해 둘까.” 그리곤 슬쩍 떨어지며 검을 회수했다. 날이 사라지면서 다시 예의 송곳과 같은 원 래 날만 남은 검을 특이하게 생긴 검 집에 꽂더니 휙 던진다. 얼떨결에 무하가 받 아들자 천천히 허공으로 뜨면서 말했다. “실력에 맞는 검을 가지고 다니라고. 날개 인간이라는 호칭의 답례로 주지.” 순식간에 성벽 위로 착지하더니 신관과 성기사 쪽을 보며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것 하나뿐이야. 반항하면서 생긴 사상자보다는 그걸 넘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비생산적인 종족이군.” “악귀 따위와 합의할 성 싶습니까! 우리는 최후의 한명까지도 막아낼 겁니다!” “웃기는군. 이미 신이 허락한 행위야. 머저리들.” 그렇게 싸늘한 조소를 흘리더니 이내 사라진다. 전과 같은 텔레포트. 무하는 하환 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손에 들린 검을 내려보았다. 어깨에서 타고내린 피로 젖 은 손 안에서 검은 얌전히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상처…….” “……!” 언제 다가온 것일까? 멍하니 검을 보던 무하는 흠칫 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바 로 눈앞에 그토록 미안해하고 그리워하던 형이 있는 것이다. 형은 전과 다를 바 없는 자상한 걱정이 서려있는 눈동자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뚝뚝 피가 흘러 내리고 있는 상처를 그제야 의식했다. 테밀시아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검의 예리한 파편을 조심스럽게 뽑아낼 때까지도 무하는 당황한 눈동자로 그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리 커버리 포션을 꺼낼 때야 움찔하며 거부하려 했지만 자상한 형의 눈동자를 보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편에서 다하나가 달려와 치유마법을 부여하려 했지만 테밀 시아가 손을 저어 그것을 막았다. 어째서……. 찢겨진 옷을 벗겨 약을 발라준 테밀시아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눈으로 무하의 상 처를 지켜보았다. 길게 박힌 파편의 자국 바로 밑에 있는 오래된 흉터. 상처를 지 켜보던 무하는 새삼 그것을 발견하고 얼른 옷을 입었다. 로레라자가 입혔던 상처 의 흔적이다. 부디 형이 왼쪽 흉터를 보지 못했길 빌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 다. “흉터…….” “……!” 두근두근! 이토록 세차게 심장이 뛰던 때가 있었을까. 그럼에도 멜로디가 들리지 않는 걸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못 보……아니, 꼭 화살에 맞은 듯한 흉터던데…….” 뭐라 웅얼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물어본다. 그 목소리가 왠지 떨리고 있는 듯싶었 던 것은 착각이리라. 무하는 형이 로레라자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음에 안도하느 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아, 이건 미끼로 남았다가 적에게 당한 겁니다.” 전과는 달리 낮은 데다 강행군으로 인해 잔뜩 쉰 목소리다. 알아들을 리 없다고 안심하며 답했다. “미끼…….” 괴롭게 울리는 것 같았다. 테밀시아는 고개를 떨꾸고 잠시 숨을 몰아쉬며 연신 머 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다 둘 다 동시에 성벽 위를 올려보았다. 몬스터들의 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사람들의 고함소리도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클랜!’ 무하는 얼른 땅을 박차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팔찌의 힘을 빌리며 훨씬 쉬웠겠지 만 형의 앞에서 그 팔찌를 쓸 수는 없었다. 곧장 형이 따라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 다. 예상했듯이 클랜과 용병들이 몬스터와 전투를 치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 레일리아가 전달을 잘해줬는지 이쪽에서도 지원을 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 된 지 한참 된 모양이었다. 곳곳에 몬스터와 사람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몬스터들이 천천히 밀집하더니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 후퇴에 방해되는 것들은 모조리 물어뜯는 몬스터들의 방향 쪽에 하필이면 클랜과 스무 명 정도의 용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몬스터들의 방향을 파악할 수 없어 주위 를 살피고만 있었다. 높은 위치가 아니라면 몬스터들의 방향을 금방 파악하기 힘 들었다. 무하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려 했지만 손에 설은 작은 단검만이 쥐어질 뿐이었 다. 하환이 사용하는 것은 보았지만 어떻게 하는 지 알 리가 없었다. 가만히 입술 을 깨물었다. 마법을 사용해야 할 때다. 하지만……. 테밀시아도 클랜들의 위기를 눈치 챘는지 수려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하 는 숨을 고르고 손을 뻗었다. 형에게 들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2년간이나 자신 을 보살펴 준 친구가 위험한데 어찌 이런저런 계산을 할 수 있는가. 단지 이번에 는 시전 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좀 전에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주문을 입에 담았 을 때 가슴이 울컥 막혀오지 않았던가. 무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내가…….” 가슴에서 뭔가가 밀려온다. 목을 틀어막고 입을 짓누른다. 온몸에 가해오는 압력 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클랜이 위험하다. “내가…….” “파 * 이 * 어 * 볼 *” 단 한 단어에 쩔쩔맬 때 옆에서 엄청난 화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곧장 붉은 불의 구가 날라 가 몬스터의 밀집된 앞부분에 박혔다. 몬스터들이 멈칫할 때, 클랜들 은 아군이 한 경고를 용케 알아듣고 황급히 루트를 변경했다. 형님이 마법까지 구사할 줄 알았던가. 긴장이 풀린 무하는 성벽 난간에 기대 천천 히 주저앉았다. 상처는 나았지만 식은땀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지독한 피로감 과 형과의 대면으로 인한 격한 호흡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잘 수 있 을 것 같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기에. 그런 무하를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지켜보던 테밀시아는 성벽 가까이 온 자 신의 기사단을 맞아 밑으로 내려갔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지 입을 몇 번이나 우물 거리다 깊은 한숨만을 내쉬며……. 무하는 형의 뒷모습을 애통하게 지켜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땀과 뒤섞인 눈물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미안하다고 곱씹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괜찮다고, 되려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냐고 말할 형을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당신의 동생이 아닙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형으로 생각하지만 난 동생 이 아닙니다. 원수입니다. 당신의 진짜 동생을 둘이나 세상에서 지운 원수란 말입 니다. “욱……!” 거칠게 눈가를 비비며 뒤로 깊숙이 기댔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보기 싫 으면 눈을 감아라……사부님이 하신 말씀. 허나 보기 싫은 게 아니다. 정말로 보 기 싫은 건 비겁하게 흔들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고 절개 있는 발소리. 무하는 낯설지만은 않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을 떠서 확인할 생각이 왜 당시엔 안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그냥 발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 발소리는 무하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실례. 혹시 이런 말을 알고 있소?” 듣기 좋은 자상한 목소리다. 경륜이 배여 있는 어조로 상대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 다. “나는 나무라네. 나는 풀이라네.” “……나무는, 풀은 말이 없지.” 상대의 말을 이어 답한 무하는 천천히 눈을 떠 그를 올려보았다. 어찌 잊을 수 있 을까. 처음 이곳으로와 혼란스러울 때 따뜻하게 감싸주던 말이었는데. 짐작했던 대로 자애로운 미소가 담긴 익숙한 얼굴이 그를 보고 있었다. “휴로버……신관님.” “오랜만이네.” 그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 테밀시아를 만나고 무하의 괴로움이 그칠 거라 생각하신 분들이 대다수... 훗... 제가 그렇게 뻔~해 보입니까? +_+ 후후후... 되려 형과의 만남으로 더욱 괴로워 하는 것을요! 크하하하!! 아아, 이제 정말 얼마 안남았군요. 유시리안과의 재회가. 음... 녀석과 만나면 무하를 괴롭히기가 어려워 진단 말이죠. 이중인격자인 녀석이 무하의 철저한 방패막이가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녀석의 뻔뻔함이 무하에게 옮을 것이니... 아아, 누굴 괴롭히나...후후후... 아해의 장-266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성으로 들어온 클랜은 주위를 살피다 자신들을 치유해주던 신관에게 물었다. 안면 이 있는 신관이었다. 분명 이름이 다하나라 했었는데. “혹시 무하 녀석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막 치유 마법을 시전 한 다하나는 가픈 호흡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아, 무하님은 휴로버 신관님과 함께 어딜 가셨습니다.” “휴로버 신관님이요?” “예. 안면이 있는 사이 같았어요.” “흐음.” 클랜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상처가 아문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씨익 웃었다. “치료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부상이 심한 부하들에게 걸어가며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은 곤크에 들어오기 전에 알던 사람이란 뜻인데.’ 별일이야 없겠지만 요즘 무하는 아슬아슬하여 불안한 상태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설마 페르노크 때 알던 사이는 아니겠지.’ 그때 무하는 휴로버와 함께 마을 외곽을 걷고 있었다. 한산한 그곳에서 침묵하며 걷고만 있었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서로 알 수 없는 듯 보였다. 2년만이다. 아직은 괴로움을 모르던 그 시절에 만났고 함께 지냈다. 그리고 괴로움이 시작되 기 전에 헤어져 버렸다. 너무 어긋나 버린 시점에서의 재회. 달갑다고 해야 할 까? 입 안이 쓰기만 하다. 휴로버는 훌쩍 커버린 페르노크를 돌아보았다. 아니, 무하라 불러달라고 했던가. 반갑게 말을 걸었는데 그때의 어린 소년은 어디로 사라지고 상처 받은 남자가 답 을 해왔다. 그럼에도 반가워 손을 내밀었지만 돌아온 것은 명백한 거부. 홀로 일 어나 숨을 가다듬다가 자신의 이름은 무하라고 한마디 한 뒤, 여지껏 침묵하는 모 습이 범상치 않다. 그래도 함께 걷자는 제의를 무시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파크다 군은 이미 졸업했다네. 자네를 많이 보고 싶어 했지.” “…….” “바로 어느 파에든 들어서 정치 세력에 가담할 줄 알았는데 반년이 지난 지금까 지도 묻혀 있더군.” “…….” 여전히 말이 없는 무하를 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숨을 내쉬었다. 사는 것은 너 무 힘든 일이다. 이토록 많은 번뇌와 고통 속에서 변해가고 망가지고, 그럼에도 살겠다고 바둥대는 그런 악순환이 삶이라는 것일까. 휴로버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믿었다. 하지만 왜들 이리 힘들어하고 변하는 것인가. “학원은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이므르도 선배도 신관님도……. 모든 일들을 잊고 있었습니다.” 지쳐있는 목소리였다. 휴로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무하의 어깨를 다독였 다. 무하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조금 물러나는 것으로 그 손길을 피했다. “시간이라는 것이 흐르고 있긴 한 모양입니다.” “…….” 휴로버는 힘들게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이가 있네. 만나 보지 않겠나?” “……?” “자네는 기억할지 모르겠네만 그는 자네를 잘 알고 있어.” 고개를 끄떡이자 손을 내민다. 다른 손에는 텔레포트 스크롤이 쥐어져 있었다.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멀찍이서 수도가 보이는 걸 보면 아 주 시골은 아닌 듯싶었지만 말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기척으로 많은 수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하는 미심쩍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지 만 휴로버가 자신에게 해를 가할 이유가 없으므로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휴로버는 평범한 통나무집 주점으로 들어갔다. 안은 전체적으로 어둑했다. 종업원 도 없었고 험상궂은 외모의 주인장만이 있었다. 손님이 둘 있었는데 각기 다른 테 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것을 보면 동행은 아닌 모양이었다. 휴로버와 무하가 들어 오자 한 명이 자리에 일어나 손을 들어보였다. 어딘지 눈에 익지만 딱히 떠오르 는 사람은 없는 청년이었다. “오랜만이다.” “…….” 무하는 좀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학교 시절에 안면이 튼 사람은 매우 극소수 다. 이렇게 반갑게 인사할 정도라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이름정도는 기억하고 있 을 터다. “소울러군. 이쪽은 ‘무하’라네.” 청년에게 가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는 휴로버 덕에 금방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학원에서의 ‘페르노크’의 처지를 알려주었던 방문자. 후에는 마음 에 들었다고 화해를 청했던 녀석. 자리에 앉고 간단한 음료를 시켰다. 소울러도 제법 성장했다. 체격은 말랐지만 키 는 꽤 크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무하가 마나를 느낄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어준 마법사였다. 녀석이 시전 한 마법에서 일그러지고 있던 마나를 보았으니까……. 어째서일까? 바로 2년 전 일인데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 어서일까? 아니면 현실감이 없어서? “많이 변했구나, 페……무하.” “…….”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무하를 보며 소울러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 귀족이면서도 아이들의 놀림과 구타의 대상이 되던 약한 아이가 이제는 너무나 강하게 느껴진 다. 그때 욕조에서 손목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같 은 마법사인데 어떻게 저런 몸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렇게 보는 건 2년만이지만 그동안 너에 대한 것을 많이 알아봤었다.” “…….” 그래, 많은걸 조사하고 다녔다. 그리고 경악했다. 카르민의 마이자 ‘희대의 천 재’라 불리던 마법사. 그 창창 대로에서 벗어나 용병 따위로 세월을 보내고 있 는 모습이라니. 무슨 마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대 용병단 곤크의 카 등급으로 나 름대로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모습도 놀랍기만 했다. 이 녀석이 못하는 것은 도대 체 무엇일까? 그러한 열등감이 여지껏 소울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당사 자, 페르노크……아니 무하를 만나기 전까지도 말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어 떤 일을 겪었던 것일까? 저토록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 무하는 자신의 앞에 온 주스 잔을 만지작거리며 소울러의 뒷말을 기다렸다. “우리와 손을 잡자, 페르노크.” 너무 단도직입적이다 못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제의. 그럼에도 무하의 손이 움찔하는 걸 소울러는 놓치지 않았다. “너 또한 야망이 있겠지? 그리고 좌절했겠지? 테밀시아의 존재는 너무 거대하니 까! 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제도 속에서 너 또한 번뇌하지 않았나! 때문에 지금도!” 무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졌다. 소울러는 강한 눈으로 무하를 주시하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소울러는 말을 이었다. “방황하고 있지 않나, 페르노크.” 단정적으로 말하는 소울러를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날개 인간, 아 니 하환을 봤을 때의 호승심도 형님을 보았을 때의 죄책감도 어느새 공허 속으로 빠져들어 사라지고 없었다. 무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울러를 보았을 뿐이다. 아 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러게 보고만 있었을 뿐. 그 동안에도 소울러의 열정적인 주장은 계속 되고 있었다. “우리는 황제가 없는 사회를 원한다. 능력대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사회를 말 이다! 이 망할 신분 제도에서 벗어나고 싶다. 적어도 무능력한 귀족 따위에게 연 인을 뺏기고 아무 것도 못하는 지금의 썩어빠진 사회만큼은 없애버리고 싶은 거 다. 어미, 아비가 노새처럼 죽도록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 틈 속에서 허우적대다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단 말이다. 이 부조리 한 세상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 죽더라도 인간으로서 죽고 싶어!” 무하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하자! 너 또한 그토록 강한 능력을 가졌으면서 결국 그늘에 묻히 지 않았나! 우린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다! 몬스터 사태가 우리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주었지. 민심은 황실을 떠났어. 귀족들의 병력은 몬스터 사태로 인해 약해졌 다. 우린 그동안 병력을 모으고, 키우고 있었어! 비록 하위권에 불과하지만 귀족 또한 가세하고 있다! 지금이 절정이다! 황제의 근위기사들은 전쟁으로 인해 그 수 가 줄었다. 민심은 지배층을 배척하고 있어! 페르노크! 우리와 손을 잡자!” 너무나 갑작스런 이야기다. 요크노민이라면 이들에 관한 것을 알고 있을까? 아까 의 그 많은 인기척은 비밀 군사들이었던가. 신분제에 대한 모순을 느낀 지식층의 반발인가.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그것이 아무리 정의라 해도……. “내 이름은 무하다. 소울러.” “……실수했군. 미안하다.” 무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주스 잔을 들어 천천히 흔들었다. 갈등하는 가? 소울러와 휴로버가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을 동안 무하는 그 의미 없는 행동 을 계속 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주스를 입가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소울러와 휴로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무 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물론 나한테도 야심이 있다. 하지만 그쪽이 생각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야. 보 다 처절하고 보다 세속적인 것이지. 그리고 본능적인 것이기도 해.” 무하가 원하는 것은 삶을 느끼는 것. 그리고 ‘있어야 할 곳’을 소유하고 싶은 것. 출세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무가치한 것이다. “잘못 짚었다.” 소울러가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무하는 단숨에 주스잔을 비움으로써 대화를 마쳤 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곳곳에서 살기가 일어 온 몸을 찔러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발을 떼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이정도 수에 주춤할 무하가 아니었지만 수중에 검이 없었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사용이나 할 수 있을 런지……. 특히나 타인에게 적용 시키는 마법은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텔레포트 정도라면…….’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적당한 허세가 그것을 벌어줄 것이다. 무하는 몸을 돌려 소울러와 휴로버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두건을 풀러 내렸 다. 대충 자른 짧은 은발이 약하게 찰랑거렸다. 주위를 밝히는 듯한 묘한 맑음을 뿜어내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짙은 녹안. 그 안에 잠식되어 있는 깊은 슬픔 과 번뇌, 그리고 고독이 좀 전의 무하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 묘하게 정적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소울러와 휴로버에게 무하는 나직이 말했다. “나를 협박하려는 거냐?” “아…….” 소울러는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왠지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무하는 애써 그것 을 외면했다. “네가 말한 왕이 없는, 능력에 맞는 삶을 지내는 그런 사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념이라고 본다. 하지만 문제가 있지 않던가? 첫째, 백성을 위한 이념이면 서 정작 그들이 몬스터 사태로 인해 괴로워할 때 돕지 않은 것. 모순 적이라 생각 하지 않나? 둘째, 제피모와 하위 귀족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 결국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건, 단순한 역모로 치부될 수 있다. 셋 째, 민심이 황실을 떠났다고 해서 너희 쪽으로 돌아선 건 아니지 않는가?” 관심 없이 들었음에도 대번에 느껴지던 문제점들이다. 굳이 관여할 필요는 없지 만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자신’을 부각시켜 시간을 벌기엔 제격이다. 저들은 아직도 ‘자신’을 ‘희대의 천재’라 알고 있다. 마로 밀려나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가출한 풍운아라 알고 있다. 완벽한 착각. 하지만 그것 을 굳이 정정해줄 필요는 없다. 소울러는 여전히 그 슬픈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애써 말했다. “너와 난 결국 적이 되는 구나.” 마음에 들었던 녀석이다. 그토록 오래 사귀었던 제그보다도 훨씬 강하게 끌렸던 녀석이다. 그 강함에 그 당당함에……. 열등감에 가득 차 있던 제그와는 다른 모 습이 끌렸다. 그랬기에 능력을 제외하고도 함께 걷고 싶었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무하는 좀 전의 광적인 연설과는 달리 약해보이는 소울러 를 그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슬프고도 고고한 눈동자로 묵묵히 보 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소울러. 그래도 이므르에서는 네가 나의 친구라 할 수 있었지. 묵은 감정도 유 일하게 벗어낸 녀석이고. ……한 가지 약속하마. 너의 적이 되지는 않겠다. 이 일 만큼은 철저히 방관자가 되겠어.” 형조차 돕지 않겠다는, 무하로서는 최대한의 호의. 소울러는 놀란 눈으로 무하를 지켜보다가 활짝 웃었다. “고맙다!” 무하가 텔레포트를 하고 사라진 주점 안은 묘하게 고요했다. 한쪽 테이블을 차지 하고 있던 손님이 부시식 일어나더니 소울러와 휴로버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 다. 장신에 기품이 배여 있는 생김이 한눈에도 귀족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결국 실패군요.” “통렬한 충고만이 남은 셈입니다.” 남자의 말에 소울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 게 말했다. “아닙니다. 적이 되지 않은 걸로도 큰 수확이지요. 잘하셨습니다, 소울러군.” “죄송할 따름입니다, 파크다 선배.” 파크다는 예의 냉정한 눈으로 휴로버를 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그가 남기고 간 충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기해왔던 바. 해결책이었던 그가 거 부를 했으니 차선책을 강행하겠습니다.” “허나…….” 내키지 않은 얼굴로 휴로버는 뭐라 토를 달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 고 입을 다물었다. 파크다는 다시 소울러를 보며 말했다. “강행하십시오. 소울러군의 마지막 방학이 끝나기 전에 일이 성사되어야 합니 다. 다시 반년을 기다릴 수는 없어요.” “예.” 소울러가 자리를 비우고 휴로버와 파크다만이 남았다. 휴로버는 파크다를 걱정스 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휴로버 신관님.” “자네는 페르노크를 여전히 동생이라 생각하고 있어.” “…….” 침묵하는 파크다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2년 전 페르노크가 돌연 휴학을 하 고 사라진 뒤로 파크다는 변했다. 꼭 집어 어디가 변했다 보긴 어려웠지만 휴로버 는 느낄 수 있었다. 예리한 칼날이 스며든 듯한 파크다는 어딘지 위태로워 보였 다. 그것이 졸업 후, 대귀족의 배척으로 인해 출사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더욱 커 져감을 보면서도 어떠한 힘이 되어줄 수 없었다. 부디 이 어린 친구가 잘못된 길 로 접어들지 않길 기도할 뿐이다. “그것이 잘못된 집착으로 변질되지 않길 바랄 뿐이네.” ========================================================================== 헤고....피곤하다.... 1권에서의 캐릭터들이 대거 재등장했습니다. 소울러, 파크다, 휴로버... 그들은 평등주의를 외치며 왕이 없는 세상을 이룩하려고 합니다. 몬스터 사태가 일어남으로써 생긴 많은 영향들이 그것을 유리하게 해주고 있지요.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이 사건은 몬스터 사태와 전쟁이 연달아 일어남으로써 생긴,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입니다. 몬스터 사태로 최악에 달한 백성의 사정에는 아랑곳 않고 황태자의 죽음을 필미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전쟁을 치룬 황실에 대한 반발이 불만 많은 지식권자에게 영향을 뻗어, 결국은 혁명이라는 이름하의 궐기를 이룩한거죠. 음.... 이 사건이 어떤 식으로 매듭이 날지는....훗... 저만이 알고 있습니다+_+ 아해의 장-267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마을 외곽으로 텔레포트 한 무하는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어지러웠다. 그리고 불길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듯한 직감이 ‘그 일’ 때처럼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괜찮은가?” 누군가 뒤에서 무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다. 너무도 따듯한 목소리와 손길. 무하는 힘들게 고개를 돌려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허나 완전히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근심 어린 자상한 황금빛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 다. 아아, 형님……! “많이 안 좋으면 신관을 불러 오겠다.” “괘……괜찮습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테밀시아는 훈훈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일 어났다. 무하는 그 모습을 언제까지고 기억해 두기 위해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러 다 테밀시아가 내미는 손을 보고 자신이 아직도 땅에 주저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주저하며 천천히 그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형의 단단한 손아귀의 힘에 왈칵 눈물 이 치솟을 것만 같았다. 애써 그것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이상 형의 모습 을 보면 분명 울며 고백할 것이다. 내가 당신의 동생이라고, 죄송하다고……정말 죄송하다고. 그렇게 가증스럽게 울 것이다. 진짜 동생을 둘이나 앗아간 철천지원 수 주제에 단지 동생의 껍데기를 둘러쓴 것만으로 면죄부를 받은 것 마냥 울어댈 것이다. “부상은……이제 괜찮나?” “예.”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테밀시아는 그런 무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 을 들어 어깨를 두어번 두들기고 걸어가 버렸다. 그제야 눈물이 치밀었다. 무하 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옆의 벽에 간신히 기대 몸을 지탱했다. 형님……. “……?” 얼굴을 감싸다 느낀 묘한 감촉에 손을 떼본 무하는 경악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의 손에는 좀 전에 자신이 풀었던 검은 두건이 쥐어져 있었다! 어떻게 ‘무하’ 인 걸 알았지? 검은 두건을 풀은 그를 어떻게 알아 본 거지? 은발과 녹안을 보았 음에도 전과 같은 눈으로 자상하게……. 울컥! 피를 토해냈다.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과 가슴 깊이 스멀스멀 기어 나 오는 역함이 그의 몸을 압박했다. 무하는 털썩 주저앉고 양팔로 몸을 끌어안았 다. 그리고 또다시 피를 토했다. 그것은 검붉은 핏덩이였다. 전쟁 영웅이나 마찬가지인 휴첼과 마을을 위기에서 구해준 용병 무리는 환대를 받으며 영주의 초대를 받았다. 말을 타고 휴첼이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자 용병들 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지쳤고 피로했으며 굶주린 상태였다. 영주가 베푸는 연회가 그런 그들에게 큰 충전이 되어 줄 것이다. 리더격인 클랜과 테호르가 앞장 섰다. “이봐, 자네 파트너는 어딜 간 거야?” “글쎄.” 어깨를 으쓱여 보인 클랜은 자신들의 앞에서 걷고 있는 휴첼을 힐끔 보며 가만히 한숨을 쉬어보았다. 저들의 당당한 마스터, 테밀시아가 생각난 것이다. 그 당당 한 속에 도사리고 있던 무하와 같은 슬픔과 고뇌가 잊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형제 가 그리도 똑같을 수 있을까. ‘그나저나 이 녀석 정말 어디로……!?’ 순간 클랜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환호하는 사람들 저편에서, 어두운 골목 길 안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 ‘무하?’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은빛 머리카락과 이쪽을 보고 있는 슬픈 녹색 눈동 자. 클랜은 본능적으로 지금 무하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의 그는 두건을 하고 있지 않기에. 성안에 들어선 클랜은 테호르에게 급한 용무가 생겼다고 말하며 얼른 일행에게서 빠져나왔다. 테호르가 투덜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긴 했지만 지금 그걸 신 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가 보았던 무하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던 것이 다. 문 쪽에서 아직 들어서지 못한 용병단들을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을 피해 성벽 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좀 전에 무하가 보였던 골목길을 향해 뛰었다. 다행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웅에게 집중하느라 등 뒤로 달려가는 클랜을 신경 쓰지 않았다. “무하!” 골목길로 접어들자마자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벽에 기대어 클랜을 향해 있 는 얼굴. 기대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눈동자를 가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무하의 맨얼굴이건만 제대로 볼 겨를이 없었다. 그의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 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어디 다쳤어?”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물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흐르며 무하의 눈동자가 드 러났다. 가슴 한쪽이 메여오는 고독한 그 눈동자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또 한편에서 그것을 억누르는 차분한 기운이 돌고 있어, 뭐 라 표현하기 힘든 눈빛으로 무하는 클랜을 보고 있었다. 클랜이 의아한 눈으로 자 신을 보자 힘들게 입을 열었다. 가는 선혈이 흘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말했나?” “……?”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어조. 그럼에도 공명하지 않는 팔찌가 안타까웠다. 클랜이 무하의 팔에 껴져 있는 붉은 팔찌를 내려보며 다른 생각에 잠겼을 때 무하는 힘들 게 손을 뻗어 그런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네가 말했나?” 그제서야 무하의 질문을 되 떠올린 클랜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무 하는 클랜의 멱살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더욱 낮게 물었다. “형님에게 네가 말한 거냐?” “……!” 놀라움으로 크게 떠진 클랜의 눈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본 무하는 멱살을 잡고 있 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 위태로운 모습에 클랜이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지만 무하는 모멸 차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클랜이 멈칫하자 무하는 다시 그 위태로운 걸음을 내딛었다. 한손에 들린 긴 검은 천으로 피를 닦아내며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클랜에게서 멀어졌다. 클랜은 무하가 자신에게 가졌던 신뢰의 한쪽이 깨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결 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란 것 또한. 그것은 그가 더 이상 무하의 지기가 아님을 의 미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가장 큰 의지가 되어주던 지기의 소멸을 처연히 느 껴야 했다. 점점 멀어지는, 지기‘였던’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 * * 테밀시아는 영주가 베풀어준 연회를 즐기면서도 연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득실대는 용병들과 기사들 사이에서 그가 원하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 에게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나이트 테밀시아.” “아…….” 아직은 앳된 기미가 남아있는 소녀. 여자의 풍만함도 어느 정도 갖췄으며 아름다 움과 귀여움이 적절히 조화된 그녀는 분명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 럴 것이 동생의 아내가 될 뻔한 여자가 아니던가.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레일리아.” 당당하게 웃는 모습이 그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 이쪽은 곧 저의 남편이 되실 매그람 씨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금안의 ‘지배자’.” 진지한 얼굴에 정중한 인사. 좋은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여색과 재 물, 권력에 빠져 부인의 속을 썩일 남자는 아니었다. 레일리아 역시 여타 귀족 부 인들처럼 정부를 거느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을게 분명했으니 좋은 부부가 될 것이다. 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만 주위로 눈이 갔다.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절제된 그의 눈동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것을 눈치 챈 레일리아가 뭐라 물으려는 순 간 그들의 뒤쪽에서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눈이 호강하는 걸요. 안녕하세요?”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테밀시아가 흠칫하며 돌아봤을 때, 주위에서는 탄성을 지르 며 새로 등장한 인물을 보고 있었다. 그 투명한 피부나 검은 비단 같은 흑색 머리 카락이나 온 몸을 휘감는 성스러운 분위기보다도 주위의 시선을 잡아끄는 눈동 자. 그 고귀한 주홍빛 눈동자가 순수한 빛에 감싸여 웃고 있었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탄성을 질렀다. 훼오트라 아나! ‘고귀한 자’. 모든 신의 아버지, 창세신의 대사제. 교황의 바로 밑을 차지한 직 책이나 그 이상 가는 위엄과 권위를 가진 자! 그 증표인 주홍빛 눈동자와 흑발은 세인들에게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을 깊이 각인시켜주고 있었다. 창세신의 신전이 세워짐과 동시에 나타난, 약속받은 권위의 상징인 흑발과 주홍 빛 눈동자를 타고난 훼오트라 아나들의 신비로움은 단지 그 외향뿐만이 아니었 다. 온 대륙을 뒤져도 주홍빛 눈동자는 훼오트라 아나뿐이라는 것과 모든 훼오트 라 아나들이 25세를 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 신에게 그 영광된 짧은 생애를 바 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교를 하지 않음에도 한 사람의 훼오트라 아나가 죽 으면 바로 다음 훼오트라 아나가 등장한다는 것. 실로 신의 영역을 배제하고는 설 명될 수 없는 그 신비로움이 그들을 또 다른 신으로 추앙시키곤 했다. 무엇보다도 그 놀라운 신성력! 젊다 못해 어린 그 나이에도 죽은 자를 소생시킬 정도의 엄청난 신성력을 타고난, 그야 말로 선택받은 자! 범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에서 짧은 생을 고고하게 살다 사라지는 모습과 세속에 때타지 않 는 모습. 감히 고귀한 자라 불리어도 넘침이 없는 경의의 대상인 것이다. 비록 황실과 신전이 전과 같이 일체되지는 않았다 한들 그 고귀함이 벗겨지겠는 가. 테밀시아조차도 존경의 눈으로 새로이 등장한 훼오트라 아나를 보고 있었다. 훼오트라 아나는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테밀시아가 그 손을 맞잡자 다시 생긋 웃으며 두어번 흔들다 놓았다. “선대 훼오트라 아나와 인연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그 문양……만 봐도 알 수 있 겠군요.” 겨우 스물이나 됐을까? 그 어린 외모에 신나 죽겠다는 웃음을 물씬 담고 있으니 십대의 소년을 보는 듯했다. 순수하다 못해 순진해 보이는 눈빛으로 테밀시아의 갑옷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보다가 다시 웃어버린다. 테밀시아는 그 문양을 한번 쓸어보다가 훼오트라 아나를 보았다. “지워진 존재 중 하나라 하셨지요.” “그래요.” 훼오트라 아나의 눈이 몽롱해졌다. 무언가를 회상하듯이. “지워진 존재 중 하나죠…….” 뭔가 아는 듯한 답에 다시 질문을 던져보려 했지만 뒤에서 누군가가 급히 다가오 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신관 다하나와 휴로버가 평소 다정하고 자애로왔 던 얼굴을 찌푸리며 낮게 책망했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이번에도 그 사악한 존재를 놓치고 말지 않았습니까.” 훼오트라 아나는 철없는 소년 마냥 혀를 낼름 내밀며 웃었다. “미안. 미안해요.” 테밀시아가 문득 물었다. “그들의 원하는 게 뭡니까? 이미 한번 협상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이던데.” 분명 그리 보였다. 분명 그 남자는 사라지기 전에 그것만 넘기면 모든 일이 끝날 것이라 했다. 또한 신이 인정한 행위라고도 했다. 테밀시아의 질문을 들은 다하나 와 휴로버는 마치 악마의 조롱이라도 받은 것 마냥 불쾌하게 낯을 찡그렸다. 말 을 잘못 했나하고 질문을 철회하려는 순간 훼오트라 아나가 입을 열었다. “아, 그건요!” 검지를 슬쩍 들어올리며 태연하게 설명하려는 그의 입을 황급히 휴로버가 틀어막 았다. 불경스런 행동이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리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신전 내의 일입니다!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입이 막힌 채로 고개를 들어 휴로버를 올려본 훼오트라 아나는 싱긋 웃었다. 직책 과는 맞지 않게 철부지인 소년이었다. 레일리아와 매그람이 영주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떴을 때, 테밀시아는 다시 주위 를 살피기 시작했다. 휴로버와 다하나에게 늦었다는 질책을 받으면서도 철없이 웃 기만 하던 훼오트라 아나는 그런 테밀시아를 발견하고 슬쩍 웃었다. 뭐라 표현하 기 힘든 미소. 그는 한쪽 손을 올려 보이며 충실한 신의 사자인 두 신관의 입을 막았다. 타 신관인데다 한참 고위직인 훼오트라 아나에게 이런 잔소리를 할 수 있 었던 것도 그의 묵인 하에서만 가능했던 것. 훼오트라 아나가 더 이상의 허용을 금하자 둘은 묵묵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거다. 훼오트라 아나는 둘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라스로 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그를 반 겼다. 정원의 수풀들이 바람이 없음에도 살랑거리며 그의 존재를 환영했다. 풀벌 레조차도 그의 존재에 경의를 표하며 침묵했다. 난간에 걸터앉은 그의 눈이 놀랍 도록 냉소적이었다. 방금까지의 철부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피식 웃는다. 소름끼치도록 차갑다. “재밌군.” 그는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흐릿해진 시야가 묘하게 이지적이다. 뭐라 표현하 기 힘든 눈동자. 어둠 속에서도 기묘한 광채를 발하는 주홍빛 눈동자가 다시 미소 를 담는다. “죽도록 바둥대 봤자다. 어차피 그들의 뜻대로 될 터.” 쿡쿡, 웃어댄다. 답답하다 느낀 순간 어느새 주위가 선선한 바람으로 뒤덮인다. 자연의 경배를 받는 존재, 훼오트라 아나의 진면목이 설핏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 다. =========================================================================== 저는 유시리안과 페르노크가 곧 만날 거라 했지, 다음 회에 만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 소리를 그렇게 받아드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만난다고 해 놓고 질질 끄냐는 언사는 저에 대한 모독이며 상당히 불쾌한 발언입니다. ...ㅡㅡ 하도 그런 말을 많이 돌아서 몇자 남깁니다. 아해의 장-268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요크노민 마 카르민은 사교계에서 꽤 유명한 청년이었다. 2년 전 돌연히 나타난 그에 대한 여론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 있었다.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 그리고 광 적으로 싫어하는 이. 그러한 여론자체가 놀라운 것이었다. 제피모에서 카르민으 로 훌쩍 뛰어오른 그에게 모든 이들이 관심을 쏟고 있다는 증거와 같았으니 말이 다. 그 화제의 인물, 요크노민은 연회 구석에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바쁜 형님 을 대신해 참석한 연회는 언제나와 같이 지루하기만 했다. 페르노크와 함께 영양 보충이나 하자며 음식을 축냈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이제는 여유 있게 술이나 마시는 처지라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전쟁이 끝났다는 희소식이 수도에 퍼졌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열린 것이 연회였 다. 정작 전쟁의 주인공들은 아직 수도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아무것도 한 바 없 는 귀족들이 모여서 말이다. 요크노민은 이런 현상을 냉혹하게 직시할 수 있는 남 자였다. 깔끔하게 묶은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다 양 쪽으로 갈려, 각기 볼을 차 분하게 덮고 있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지루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말하 던 그는 한숨을 깊이 쉬며 지나가는 하인의 쟁반에 술잔을 올려놓았다. 이 정도 면 대리 출석 정도는 됐으리라. 기대에 부푼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는 귀공녀들을 무시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연회 장을 나섰다. 아직 낮이건만 벌써부터 쌍쌍으로 죽이 맞아 은밀한 곳을 찾는 귀족 들이 간간히 보였지만 그 또한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었다. 성을 나서 시장의 번잡함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걸었다. 무의미한 대화들만이 오 가는 연회장보다 이곳이 훨씬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레타 마스터이기 때문일까? 지극히 세속적이며 처절한 삶의 투쟁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기 때문일까? 태어 나서부터 보석과 귄력이라는 요람 속에서 자란 귀족들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 는 청년. 가벼운 마음으로 흥얼거리며 걷던 그는 어느 순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와라.” 곳곳에서 흔들리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이런. 아직 애송이들이잖아? 요크노민은 허리에 매인 검을 어루만지며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 어느 순간 그의 앞에 다섯의 사내가 나타났다.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뒤쪽에도 기척이 셋 정도 느껴졌다. 척 보기에도 귀족으로 보이는 청년과 시꺼먼 옷을 입은 살기등등한 다섯 남자의 대립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띄었다. 술렁임과 동시에 사람들은 황급히 그 주위에 서 물러났다. 분위기 자체가 험악했고 모두가 무기를 소지한 지라 자칫 잘못했다 가는 싸움 구경 전에 황천길 구경을 먼저 하기 십상이다. 요크노민은 그런 분위기 를 슬쩍 보다가 눈앞의 사내에게 농을 건넸다. “눈에 띄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지? 관음증 아냐?” 역시나 침묵. 답 대신 검자루에 손을 대며 몸을 낮추기만 한다. 요크노민은 그런 모습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나 한사람 잡기 위해 여덟이나 고용된 건가?” 몸을 드러내지 않은 세 기척들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눈앞의 사내들도 적잖이 동요하는 듯 보였다. 그런 그들을 비웃듯 키득대는 요크노민이었다. “이번에는 네 그림자의 조력을 받지 못할 것이다!” 잔뜩 쉰 목소리로 한 사내가 불쑥 말을 했다. “그림자라…….” 조롱하듯 다시 읊는 요크노민의 모습은 확실히 도발적이었다. 압도적으로 열세한 이 마당에도 저 근거 없는 당당함은 상대를 위축하게 만들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저 귀족 나부랭이가 여지껏 보낸 자객들을 모조리 처리했다곤 하지만 이런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함부로 그림자를 불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림 자는 말 그대로 알려져서는 안돼는 존재이기에. 때문에 무리수를 두고 이 대로에 서 상대를 도발한 것이 아닌가. 또 그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다른 세명 의 인원을 투입하지 않았던가. 주군의 명을 이행하지 못하는 이 불명예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요크노민은 굳어 있는 사내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한 도발에도 상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슬쩍 검을 끌어 올렸다. 깔끔한 소리가 나며 검 날이 비죽 모습을 드러냈다. 그 평범한 검을 힐끔 본 자객들은 저것이 위장임을 간파했다. 아니 간파했다고 착각했다. 바로 다음 순간까지는 말이다. -촤악! 중간은 보이지 않았다. 보인 거라고는 오직 눈앞에서 끝없이 뿜어지는 핏줄기뿐. 그리고 땅을 구르는 동료의 목과 천천히 쓰러지는 몸뚱이 뿐. 그 잔인한 손속에 바싹 긴장하여 가해자를 보았다. 애송이 귀족이 피로 흠뻑 젖어있는 검을 보며 조 소를 짓고 있었다. “뭔가 착각한 것 같군.” 그리고 달려드는 자객의 검을 가볍게 피하며 검을 뒤로 찔렀다. 복부가 관통되며 힘없이 쓰러지는 동료를 경악의 눈으로 보는 자객들에게 요크노민은 친절하게 속 삭였다. “나에게 그림자는 없어.” 늦장을 부리다 연회에 참여하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려운 걸음을 하고 있 던 기사들이 있었다. 근위 기사단의 일원으로 귀족의 우월감과 교만이 뼈 속까지 꽉꽉 들이찬 자들이었다. 이번에 전쟁에서 크게 공을 세운 동료를 기다리며 그 교 만은 극에 다다르고 있었다. 미끼작전에서 훌륭히 그 임무를 수행한 동료 근위 기 사가 안 좋은 일을 겪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별 일 아닐 거라 치부하며 이번 에 필히 훈장을 받을 거라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그들이 거리를 지나다 껄끄러운 대상을 만났다. 휴첼과 더불어 그들의 라이 벌 기사단, 키텐의 기사단장과 한명의 기사였다. 서로가 달갑지 않은지 의례적인 인사만을 나누며 어쩔 수 없이 동행하던 그들은 아슬아슬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번에 전쟁에서 그대의 동료가 큰 공을 세웠다지?” “별로 한 일도 없는 걸요. 그보다는 전력 낭비를 하지 않은 키텐이 더 대단하지 요.” 기사단이 거의 수도를 비웠기에 키텐은 치안을 맡게 되었다. 덕분에 전쟁 참여를 하지 못했고 그것이 키텐으로서는 두고두고 치욕과 한으로 남고 있었다. 공도 세 우지 못한데다 전쟁 참여를 안했다는 이유만으로 비겁자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이 다. 원해서 참여를 안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예의상 칭찬을 건넸던 키텐의 마스터, 사갈은 미간을 찌 푸리며 안보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당장에라도 정신교육 을 빌미로 두들겨 패고 싶을 뿐이었다. 단장과 동행하고 있던 기사, 로딘은 그 모습에 안 들리게 한숨을 쉬었다. 기사단 끼리의 대립은 그에게도 낯선 것은 아니었다. 그리 공감은 안가지만 나름대로 소 속감은 있는 터라 키텐이 한방 먹고 물러서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그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근위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재미있는 소문이 있더군요. 동료분이 한 레이디를 겁탈하려다 고자 가 됐다는 소문인데……. 들어보셨습니까?” “뭐, 뭐……!?” 자신들의 영웅을 모욕하는 애송이에게 장갑을 던지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역시 영웅에게는 이런저런 소문이 뒤따르는 법인 모양입니다. 하하!” “이……. 그, 그렇지. 하하.” 떫은 감을 씹은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걷는 그들을 보자니 절로 웃음이 치밀어 올 랐다. 사갈이 돌아보며 슬쩍 윙크를 하자 겸손하게 목례를 살짝 해 보인다. 재미 있는 청년이 아닌가. 요즘 젊은이답지 않은 진중함과 또래의 치기어린 모습이 적 절히 뒤섞인 모습. 앞날이 기대되는 실력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성미가 마음에 드 는 녀석이다. 성이 보일 무렵, 거리가 어째 어수선 하다는 것을 느꼈다. “응?” 한쪽 방향에서 피 냄새가 진하게 풍겨오자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다가 일제히 그쪽 방향으로 달려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닥 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핏줄기였다. 그리고 대립하고 있는 두 사내와 한 청년이었 다. 치안을 맡고 있는 키텐의 단장, 사갈이 먼저 나서서 둘 사이를 막았다. 이미 땅에 굴러다니는 시체에는 누구하나 시선을 주지 않았다. “멈춰라!” 기사의 등장에 청년은 바로 검을 내리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알아본 근위 기사단의 한 기사가 비아냥 거렸다. “이게 누구신가. 그 유명하신 제피모 출신의 카르민이 아니던가.” 일전에 흠모하던 레이디를 빼앗긴 앙갚음 이었을까? 솔직히 여자 혼자 요크노민에 게 반해 기사를 찬 거지만 원인 제공을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원성을 사 고 있었다. 요크노민은 어깨를 으쓱 일 뿐 별로 신경 써서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저쪽 에서 울컥한 로딘에게 곁눈질을 해서 막기만 했다. “귀족인가. 이들은……?” 기사로서 저런 천박한 조롱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사갈은 근위 기사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 요크노민을 돌아보았다. 암살자들이 백주대낮에 그것도 대 로에서 덮칠 리 없지 않은가. 때문에 저런 질문을 던진 거겠지만 뭐든 일에는 예 외가 있는 법이다. 기사가 막아서는데도 두 사내 모두 독이 발린 단검을 들고 요 크노민에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검을 내렸던 요크노민은 단검을 아슬아슬하게 피 하며 발로 남자의 손목을 올려 차고 솟아오른 단검을 잡아 채 옆으로 던졌다. 또 다른 자객이 그것에 살짝 베여 급사했다. 그것을 본 사갈은 요크노민과 대립하고 있는 이들이 암살자임을 간파했다. 하지 만 이런 대로에서의 싸움은 법에 어긋나는 것. 사갈은 크게 호통을 치며 그들을 말렸다. 물론 말리는 그조차도 암살자가 멈추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딘이 움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푹! 깔끔한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하며 앞으 로 고꾸라지는 암살자와 뒤에서 검을 거두고 있는 싸늘한 얼굴의 로딘을 번갈아 보다가 사갈은 대노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기사가 비겁하게 뒤에서……!” “암살자에게 정정당당이란 단어는 안 어울립니다.” “로, 로딘 군!” 요크노민은 쿡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암살자 앞에서 정정당당을 부르짖다가는 목 먼저 날라 가겠지.” 근위 기사들은 맞장구치는 요크노민을 불쾌한 눈으로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본 래 용건인 연회장이나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치안을 담당하는 키텐의 단 장은 다른 용무가 남아 있었다. “일단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네. 그들이 암살자라는 건 나 또한 증명할 수 있지 만 형식이란 게 있으니 말이야. 양해해 주겠나?” “기꺼이.” 요크노민은 흘러내린 툰을 가다듬고 싱긋 웃었다. 부드러운 듯 도발적인 미소. 형 과 닮았으면서도 어딘지 다른 모습이 확실히 매력적이긴 했다. 오만방자한 귀족들 을 많이 보아온 사갈은 호감을 가지며 몸을 돌렸다. 연회야 어차피 며칠 동안 내 내 할 예정이었으니 딱히 지금 꼭 가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번 일을 먼저 매듭 지을 생각이었다. 만일 근위 기사들이 자기들끼리 떠든답시고 요크노민을 도발하 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걸레의 혈육이니 치정사건 아니겠어?” “쿡쿡.” 요크노민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갈을 향해 화사하 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재미있는 소문이 돌던데 아십니까?” “소문?” 대충 그가 꺼낼 말이 짐작 하면서 되물었다. 역시나 그 소문이었다. “한 고자 기사에 대한 소문인데 말입니다.” 요크노민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듯이 신나게 말을 늘여놓았다. “능력이 없는 한 기사가 용병의 여자를 건드리려다 걸려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 록 맞아 다지 뭡니까? 하하! 그 기사가 어디에 계시는 ‘차인’ 기사와 동료간이 라니. 역시 유유상종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하!” 스르렁, 검이 뽑히는 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근위 기사의 검이 요크노민을 향해 휘 둘러졌다. 요크노민은 조소를 품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챙, 하고 금속성이 울리며 그 검은 요크노민의 바로 뒷통수 앞에서 멈췄다. 그 짧은 순간에 기민한 반응을 보인자는 물론 요크노민의 최초의 수하, 로딘이었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 지 않은 눈으로 기사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비겁한 짓입니까? 그러고도 기사입니까?” “자자. 암살자에게는 정정당당이란 단어가 안 어울린다고 한 사람은 로딘이잖 아?” 요크노민이 태연히 로딘의 어깨를 두들기며 피식 웃자 근위 기사들은 모두 발끈해 서 검을 뽑아들었다. 내심 킬킬대던 사갈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지금 치안 대장인 내 앞에서 횡포를 부리겠다는 건가?” “저자가 우리를 모욕했습니다! 보셨지 않습니까?” “암암. 분명히 보고 들었지. 자네들이 걸……흠흠, 불명예스런 호칭을 입에 담 은 것과 뒤에서 공격한 걸 말이야.” “나, 나이트 사갈!” 요크노민은 툰조차 벗지 않은 정갈한 모습으로 철부지 장난꾸러기를 보는 듯한 눈 빛을 보냈다. 그것이 더욱 신경에 거슬렸던 기사들이 일제히 결투 신청을 하려는 순간 로딘이 요크노민의 앞을 가리며 살기를 풍겼다. “주군께 무례한자는 용서하지 않겠소.” “주, 주군?” 모두가 황당함에 입을 떡 벌릴 때, 요크노민과 로딘만이 태연했다. 그런 둘의 모 습을 번갈아 보던 한 기사가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아. 맞다. 꽤 유명한 이야기였지?” 그의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깃들었다. “2년 전. 시종과 귀족과의 결투. 시종의 시종이 된 자.” 그때의 굴욕은 이미 어릴 적 추억으로 넘긴지 오래였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걷기로 한 인생이다. 후회란 없다. 당당한 로딘의 눈빛을 본 사갈은 요크노민을 새삼 살펴보았다. 당당하고 강하다. “결투를 할 거면 공증인이 되 주지.” 갑작스런 등장인물. 요크노민마저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먼지가 조금 앉 긴 했지만 언제나와 같이 소름끼치는 카리스마의 남자. 금안의 ‘지배자’.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테밀시아님?” 어딘지 피로해 보이는 눈으로 요크노민을 내려보던 그는 말에서 천천히 내려 놀 란 눈으로 자신을 보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결투를 할 셈인가?” “아, 아닙니다.” “겨, 결투라니요. 하하.” 여지껏 그 오만방자함은 어디를 갔는지 당장에 기가 죽는다. 그것이 테밀시아가 가진 위력이리라. 로딘조차도 긴장한 눈으로 테밀시아를 보고 있었다. 어려서는 느끼지 못했던 압도적인 강함이 온몸을 조여 왔다. 테밀시아는 주위 반응에 신경 쓰는 남자가 아니었다. 둔감하다기 보다는 이미 익 숙하다 못해 지겹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잠시 나 좀 볼까, 노민.” “아, 예. 하지만 선약이…….” 하며 사갈을 보자 테밀시아도 따라 그를 돌아보았다. 사갈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 을 내밀었다. “경이 이번에 세운 영웅담은 익히 들어왔소. 오랜만이오.” “오랜만이오. 노민과의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내주셨으면 하오. 이쪽도 꽤 급한 일 이라.” 그 이름도 드높은 오르세만 가의 권력자가 이쪽의 용건을 가로채지 않다니. 듣던 대로 경우가 바른 사내다. 그나저나 애칭을 부를 정도의 사이였던가? 아무리 전 부관의 동생이라고는 하나……. “노민. 용건이 끝나면 처소로 와라. 기다리고 있겠다.” “예. 곧장 가겠습니다.” 테밀시아가 말을 타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먼저 앞장서 걷는 사갈을 따라가다가 슬쩍 자신들 쪽을 보며 수군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의 붉은 입술이 움찔 달싹였다. “세 명이다. 한 놈은 생포. 두 놈은 죽여줘.” 숨어 있던 세 자객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요크노민은 웃음을 지었다. 분명 그에게 그림자는 없다. 하지만 친구는 많았다. 도둑과 암살자들의 길드, 레 타의 마스터. 그의 친구들은 그 어떤 귀족의 수하보다도 암살에 능한 녀석들이었 다. 무엇보다도 생업이니 말이다. 요크노민이 테밀시아를 찾아 갔을 때, 그는 이미 많은 수의 술병을 비운 상태였 다. 주량이 밑 빠진 독이라는 그답게 취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지 괴로워 보였 다. “테밀시아님.” 잠깐 요크노민을 올려본 테밀시아는 손에 쥐고 있던 병의 내용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깨끗하게 마신 그는 병을 건성으로 옆에 밀어 넣 었다. 그리고는 새로운 술병을 집어 들었다. “미끼로 누구, 누구가 남았는지 알고 있나?” “……예.” 그 보고를 듣고 얼마나 분노했던가. 머저리 고자 자식이라며 당장이라도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한 순간의 고통으로 끝내기에는 아깝다고 스스로를 만류했다. 좀 더 치가 떨리는 보복이 생길 거라고. 애써 담담하게 답하는 지금도 속이 부글부 글 끓고 있다. 테밀시아는 병을 휘휘 흔들더니 요크노민을 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황금빛 눈동 자가 요크노민의 남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마찬가지로 그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남색. 테밀시아는 그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곤크가 그 속에 있었다.” “……?” 방금 전 요크노민의 대답을 듣지 못했는지 자신이 할 말만을 한다. 어째서 이 말 을 하는 걸까? 가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불안이 기어 나온다. “곤크를 제외하라는 항목을 갑자기 집어넣은 건 자네라 들었다.” “그건 대 용병단이니만큼 뒷수습과 그것에 따른 반발이 드셀 것이라 판단…….” “알고 있었던 거지?” “……!” 동요한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려 하는 걸 억지로 억제했다. 하지만 경악으로 치 켜떠진 눈은 속일 수 없었다. 테밀시아는 쓰게 웃으며 다시 술을 꿀꺽꿀꺽 삼켰 다. “2년 전 자네가 그랬지. 그 아이는 ‘원수’인 자신에게 ‘형’인 내가 ‘고맙 다’는 말을 하길 원치 않는다고.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랬지?” “……예.” 한숨과 같은 대답. 테밀시아는 쿡쿡, 스스로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리도 망가진 동생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돌아선 자신을 말이다. 자신이 아는 척을 하면 더 아파하지 않을까 두려워 도망쳐 버렸다. 흉터를 자신이 알아볼 까 얼른 옷을 입던 모습을 보며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원망하면서. “얼마나 기다려야 그 아이에게서 형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 위로를 해줄 수 없었다. 보듬어 줄 수도 없었다.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테 밀시아의 눈이 싸늘하게 변모했다. “복수한다.” “물론입니다.” 요크노민의 눈빛도 어느 샌가 차갑고 예리하게 변해 있었다. =========================================================================== 오늘따라 늦었군요. 임청하 팬이기에... 그 분이 나오는 영화를 보다가...ㅡㅡa 아해의 장-269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미끼가 되었던 용병들은 각기 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참혹했던 그날의 일을 모조리 보고했다. 당연하다는 듯 일어난 반발. 특히 무시 할 수 없는 것은 대 용병단 곤크와 범크의 거센 항의였다. 그들이 없었다면 들은 척 만 척 하며 돈이나 몇 푼 주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둘이 낀 이상 문제는 달라졌다. 당장 곤크에서 모든 의뢰를 취소하면 그 피해가 귀족들에게로 돌아가는 데다 가 장 많은 인력을 보유한 범크에서 돌아선다면 이런 흉흉할 시기에 언제 반역이 도 질지 모르는 것이다. 덕분에 황제는 공을 세운 자신의 기사를 욕하며 해결책을 골 몰해야만 했다. 그리고 많은 신료들의 조언을 빌어 생각한 것이 각기 단이 원하 는 것을 하나씩 이루어 주는 것. 소규모의 용병단들이 돈을 원하고 땅을 원할 때, 범크와 곤크만이 침묵했다. 모두 가 그 둘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때 범크가 먼저 입장을 밝혔다. 그들은 다시 요새의 책임자였던 근위 기사의 파면을 원했다. 졸지에 전쟁 영웅에서 파면 기사로 실각된 기사는 억울하다 몇 번이고 항의했지만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복수 보다는 실리를 추구했던 타 용병들과는 다른 후련한 앙갚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곤크는 그제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알렸다. 그것은 당시 곤크 의 리더였던 자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 달라는 것으로 실로 뜻밖의 것이었다. 전쟁 에서 고용된 용병이 공을 세우면 고용인에게 그 공이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기에 그 청은 무마 될 뻔했으나, 대장이었던 클래너 카 곤크가 당시 휴가 중이었고 자 발적인 참여로 지원 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드려졌다. 근위 기사는 클래너가 유일한 카 등급 페어라는 것을 은밀히 알리며 그의 파트너 에게도 기사 작위를 내릴 것을 청했다. 카 등급이란 정말 희귀한 실력자를 뜻하 는 것.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전력 보강이나 하자는 의도였다.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 바로 근위 기사단이었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신변에 위협을 느 끼고 있던 황제는 흔쾌히 그것을 받아드렸다. 그것에 난색을 표한 것은 곤크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카 등급은 귀중한 전력이 었고, 사정상 클래너는 어쩔 수 없다 쳐도 무하까지는 곤란했던 것이다. 게다가 무하 본인이 그것을 거부하고 나섰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클래너로 족하다고 답을 보낸 곤크에게 황제는 친히 편지를 써, 강압적으로 밀어 붙였다. 겉보기에 는 이쪽의 성의를 무시하냐는 정중한 서신이었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감히 이 몸의 호의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냐는 협박이었다. 황제의 친필이기에 거부할 수 없 었던 곤크는 결국 클래너와 무하, 둘을 수도로 보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고 보 름 뒤의 일이었다. 클랜은 황실에서 하사한 정장을 입고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 는 의자의 맞은편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검은 두건의 남 자, 무하가 있었다. 그때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제대로 얼굴을 보기는 이번이 처 음이다. 일행에서 빠져나와 홀로 곤크에 돌아온 무하는 방안에 틀어 박혀 하환이 건네준 검만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클랜은 그 틈에 끼어들 용기가 차마 나 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그와는 달리 무하는 무덤덤했 다. 여태 입을 열고 있지 않았던 것만 제외하면 그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어색한 기류가 둘을 휩쓸고 있었다. -똑똑. 문이 열리고 황실의 집사라 소개 받았던 노인이 들어왔다. 깐깐하게 그는 경멸어 린 눈을 애써 감추며 둘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쯤은 신경 쓰지 않는 클랜과 관 심도 없는 무하이기에 노인은 마음껏 둘을 뜯어볼 수 있었다. “예법은 아십니까?” “아니오.” 객관적으로 들었을 때는 분명 정중한 존댓말이건만 매우 불쾌하게 들렸다. 노인 은 묘한 눈웃음을 짓더니 설명을 늘여 놓았다. “먼저 문이 열리면 세 걸음을 걸어 들어간 다음에 허리를 숙여 이마가 땅에 닿 을 때까지 절을 해야 합니다. 그 뒤로 다시 한 걸음을 걸어 한쪽 무릎을 꿇고 고 개를 푹 숙인 뒤, 황제 폐하의 존귀한 말씀을 들으면 되는 겁니다. 또한 망토로 온몸을 감싸 몸 안의 어떤 부위도 밖에 드러나서는 안 되며…….” 노인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클랜은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집중해서 그의 말을 경 청했다. 그리고 느낀 것은, 황제의 앞에서는 기사도 노예처럼 절해야 하는 구 나……였다. 노인이 재차 설명하며 알겠냐고 물었을 때, 집중했던 클랜은 자신 있 게 고개를 끄떡일 수 있었다. 안심이 안 되는지 재차 묻고서야 노인은 밖으로 나 갔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시종이 와서 둘을 호출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황제를 만 나고 의례적인 치하의 말을 들은 뒤, 원하는 것을 물었을 때 정해진 대로 기사 작 위를 청해야 한다. 그러면 관대하고 너그러우시며 대범하신 황제 폐하께서 기꺼 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드려 그 자리에서 기사 작위를 부여하면 끝나는 것이다. ‘브리아…….’ 두근두근,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기사 작위를 받으면 바로 그녀가 있는 수도원으 로 달려가리라.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배필이 되어 달라 애원하리라. 상기된 클랜의 얼굴을 힐끔 본 무하는 노인이 나간 문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클랜 을 보았다. “전부 틀려.” “응?” 그날 이후로 처음 열린 무하의 입. 클랜은 그것에 감격하여 무하의 말을 미처 알 아듣지 못했다. 무하가 한숨과 함께 재차 말을 하고서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 노인이 말한 예법. 전부 틀리다고. 그건 죄인이 자비를 구할 때 하는 행동이 야.” “……!”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노인의 신참 골탕 먹이기가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무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자 신이 아는 것을 최대한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클랜은 노인이 말한 것과 혼합되 려는 지식을 구별해서 재대로 기억하는데 꽤 애를 먹었지만 얼마 뒤에는 무하가 말한 것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제대로 외울 수 있었다. 그때 시종이 노크를 하 고 들어와 황제의 호명을 전달했다. 바싹 긴장한 클랜이 기계적인 걸음을 옮기다 무하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슨 생 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 마음이 죽어버린 것 같다던 그의 말이 섬뜩하게 되 새겨 졌다. 아닐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죽어줄 녀석일 리가 없지 않 은가. “형님……계시겠지?”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무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혼잣말이기도 하 고 대화이기도 한 안타까운 목소리. 멈칫하던 클랜은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범벅 이 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식으로 가버릴 줄은 몰랐다. 뭐든 좋으 니 힘내라고 해주길 원했다. 어떻게든 데리고 가서 자신의 곁에 둘 줄 알았다. 테 밀시아에게서 느꼈던 따뜻한 애정은 착각이었던 걸까? 희망이 불러온 잔혹한 환상 이었던 걸까? 결국은 더욱 망가져 버린 녀석만 보게 됐다. 이제는 자신에게 마음 을 열지 않는 녀석을 보며 더 이상 손을 뻗지 못함을 애통해 해야 한다. 그나마 도 기사가 되면 만남이 극히 줄어 들 것이다. 이제는 클랜의 영역에서 완전히 떠 나버린 것이다. 거대한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설레임과 긴장감, 그리고 벅찬 감정 속에서 그것을 보았다. 무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사 작위를 받을까? 그 것이 탐났다면 애당초 가출할 리가 없다. 당장 형을 본다는 것만으로 저렇게 동요 하고 있는 녀석인데…….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차있다고는 생각될 수 없으리 만치 조용한 홀 안에 둔탁한 발소리만 이 들려왔다. 클랜과 무하의 딱딱한 가죽 장화가 바닥에 깔린 융단 위를 걷는 소 리였다. 넓은 보폭으로 정확히 일곱 걸음을 걸은 둘은 오른 손을 왼쪽 가슴, 즉 심장 위에 올린 뒤 허리를 약간 숙여 인사했다. 다행이 그것은 그리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가르침을 어기는 이 제자들을 어디선가 보고 있을 황실의 집사 노인은 매우 통탄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 하니 웃음이 슬며시 치밀었다. 아직 예법은 끝난 게 아니었다. 몸을 앞까지 덮고 있는 망토의 왼쪽 자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망토를 넘 긴 오른 손으로 다시 왼쪽 가슴 위를 짚고 고개를 약간 숙여 황제의 말을 기다렸 다. 어찌 보면 어색할 수도 있는 인사였지만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것으로 황제는 만 족했다. 적어도 기본 예의조차 모르는 천박한 용병나부랭이가 기사단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들을 잘 키워서 자신을 지킬 근위 기사단에 넣을 것이 다. 전력이 너무 많이 손실된 근위 기사단이기에 카 등급의 실력자라면 쌍수 들 고 환영할 터였다. “오늘 이 자리는…….” 황제의 말이 시작됐다. 벅찬 마음으로 그것을 듣는 클랜의 옆에서 무하 역시 긴장 한 얼굴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클랜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긴장한 거였지 만 말이다. 이곳 어딘가에 형님이 있을 것이다. 그 자상한 눈으로 여전히 따뜻하 게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미끼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은 슬픈 눈을 하 고 있을 지도 모른다. 소울러와의 일이 생각났다. 무하가 알기로는 소울러나 휴로 버나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손을 뻗은 것을 보 면 이미 준비가 거의 끝났다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일이 성사가 된다면 형님은 어찌 되는 것인가? 현 집권 체제에서 최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형님 은……. 이 자리가 파한 뒤 바로 요크노민을 만나야겠다. 그라면 많은 것을 알려 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대들의 공을 치하하는 바이다.” 주위에서 일제히 박수를 쳤다. 황제가 일어나 둘에게 다가왔다. 훈장을 주기 위함 이다. 클랜은 무하가 일러준 데로 한번 고개를 깊이 숙인 뒤 몸을 일으켰다. 무하 도 한 박자 늦긴 했지만 제대로 일어났다. 황제가 어깨를 두들기며 칭찬의 말을 날리고, 훈장을 손수 가슴에 달아주자 클랜은 그 순박한 얼굴을 붉히며 영광스러 워했다. 그것은 우쭐대기 좋아하는 황제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무하는 황제의 칭찬에도 겸양하지 않고 말없이 훈장만 받는 것이 거슬렸다. 이상하지만 이 천박한 용병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한 귀족 녀석이 연상되는 것 이다. 무하는 몸을 일으킨 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슷한 군 중 속에서도 언제나 한눈에 알 수 있었던 형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 다. ‘무하’가 동생임을 알고 있을 테밀시아 형님이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다 니. 비록 억지로 자신을 데리고 돌아가진 않았다지만 동생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 어 할 텐데……? 왠지 모를 직감이 다시 무하의 가슴을 싸하게 만들었다. 그 감각에 집중하느라 무하는 클랜이 자신을 쿡 찔렀을 때야 황제가 자신에게 뭐 라 나불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불쾌해 했다. 저 자만 아니었다면 이 감 각에 집중하여 뭐라도 좋으니 실마리를 알아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무하의 그러한 분노와 혐오를 알리 없는 황제는 자신의 말을 감히 무시하는 건방 진 용병에게 아량을 베풀어 다시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짐이 그대의 맨 얼굴이 궁금하다 하였다.” “…….” 당혹한 얼굴의 클랜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귀족들의 시선 속에서 무하는 여전히 침 묵했다. 대체 왜 일개 기사의 맨 얼굴 따위가 궁금하냔 말이다! 게다가 형님이 아 니더라도 페르노크의 존재쯤은 다른 귀족들도 알고 있다. 그런 마당에 미쳤다고 대뜸 두건을 푸르겠는가. 황제는 보편적인 지배계층의 산물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지 않았을 때의 분 노와 모멸감을 억제하지 못하는 그런 족속들 말이다. 설령 자신의 의지가 타인에 게 있어 지극히 실례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테밀시아와 같이 개인의 사생 활을 침해하지 않는 배려 깊은 귀족이야 말로 시대의 돌연변이인 것이다. “짐의 부탁을 거절할 셈인가?” 아직 기사 작위가 이루지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는지 그 말이 사뭇 강압적이다. 클랜은 난처한 얼굴로 황제와 무하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무하가 하고자 하는 대 로 가길 원했다. 누군 때문에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이제 보고 싶지 않았 다. 자기 때문에 전쟁을 나갔고 그 때문에 씻지 못할 상처를 안아버렸다. 이제는 조금은 이기적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그런 클랜의 마음이 전달 됐는지 무하의 무 심한 목소리가 홀 안에 조용히 흘렀다. “거절합니다.” “……!” 일대의 경악! 말이 부탁이지 그것이 명령임을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귀족 부인들이라도 그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 을 거절하다니! 저 자는 자기 손으로 기사 작위를 내버릴 참인가! 황제 역시 당혹 감과 분노를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라 하고 있었다. 그는 뜻밖의 상황에 흥분한 심정을 이렇게 밖에 나타내지 못했다. “뭐, 뭐, 뭐라 했느냐!?”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할지라도, 원한다 하여 귀부인을 이 자리에서 벌거벗길 수 는 없는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저의 치부를 가려주는 두건을 벗길 수는 없습니 다.” 무하는 여전히 예법에 맞게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에서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그 가 들먹인 노골적인 예는 방탕한 귀족 부인들의 낯을 붉히게 했다. 그것은 쾌락 과 같은 흥분의 결과물이었다. 저 당당함이라니! 게다가 기사가 될 정도의 실력 을 갖췄다면 정력 역시 남다를 것이라는 묘한 계산 하에 음탕한 시선마저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현상을 전부 목격한 황제는 분노로 붉어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리고 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나가라! 짐은 짐의 명을 불복하는 기사는 필요 없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하는 오른 팔을 심장에 갖다대고 깊이 허리를 숙인 상 태에서 두 걸음 뒤로 물러나고, 휙 돌아 문을 향해 걸어갔다. 황제가 하사한 최고 급 망토는 그의 몸놀림에 따라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펄럭였다. 놀라울 정도로 딱 들어맞는 예법과 극적인 효과를 안겨주는 망토의 움직임. 날렵한 몸놀림과 당 당한 분위기가 그에게 놀라운 카리스마를 안겨주었다. 막 기사라는 영광된 자리 의 바로 직전에서 탈락된 자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것이 황제를 더욱 분노케 했고, 정중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클랜에게 묘한 총애 를 안겨주게 했다. 황제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클랜에게 기사의 작위를 내리기 위 해 말을 걸었을 때, 문은 천천히 열려 무하를 삼켰다. ……유일한 카 등급 페어 는 해체되었다. 문을 나섰을 때까지만 해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만약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 고 있던 한 기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계속 아무 생각 없이 성을 나섰을 것 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자는 무하의 공허를 박살내고도 남을 만큼의 영 향력이 있는 자였다. 이름은 모른다. 아는 것은 오직 둘뿐. 그 얼굴과 그와의 격 돌. “퇴장이 이른데? 기사 작위는 잘 받으셨나?” 비아냥거리는 그 얼굴이 허무 속에서 멍하니 떠다니던 무하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 다. 그 기사는 포로로 온 락아타의 사령관이었다. 무하가 마법을 시전 했을 때, 바로 그 현장을 사수하던 기사였다. 그리고 무하를 악마라 칭한 남자였다. 나이 트 아클렌. 깊이 눌러쓴 두건 속에 가려진 무하의 눈이 처절하게 떨렸다. 자극받은 마음이 슬 프게 울어댔다.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하기의 늦더위 속에서 그만이 추 위에 떨었다. 그것은 자괴와 죄책감 속에서 스스로를 조여 대는 안타까움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아클렌의 독설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래. 수천의 병사를 해치고 얻은 작위가 마음에 차셨나?” 아클렌은 성벽 위에서 울었던 악마를 믿지 못했다. 비록 죽이지는 않았다지만 이 패전의 큰 원인은 그다. 그런 그가 자신들을 동정하여 울었다는 걸 믿고 싶지 않 았다. 그래서 지금 확인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평생 마음에 걸 릴 것 같아서, 패장주제에 굳이 이곳까지 나와 건방지게 지껄였다. 이제는 악마 의 차례다. 패자가 말이 많다고, 전쟁에서는 많이 죽인 자가 승자라고 조롱해야 할 차례인 것이다. ……하지만 악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침묵하다 돌아서 가버리려는 악마의 손을 움켜쥐고 뭐라 더 쏘아붙이려 했다. 허 나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손 안에 잡힌 악마의 손목이 슬프게 떨리고 있었 기 때문이다. 탁! 뿌리쳐진 손 너머로 상처받은 악마의 고독한 눈동자가 보였다. “아…….”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를 해야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그는 기회 를 주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갈 뿐. 따라 잡으려면 따라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실수를 한 것 같다. 아클렌은 멍하니 멀어지는 악마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수천을 해쳤다. 수천……. 각오했던 일이다. 악마라 불렸던 그때 현실을 깨닫고 미칠 것 같은 공포에 떨었다. 그 공포 속에서 실낱같이 남아 있던 마음의 끈이 끊 겨 버렸다. 클랜과 이별하고 홀로 곤크에 가면서 무수히 많은 검무를 추었다. 유 시리안의 노래로 만든 그 검무를. 죽어버린 마음을 되돌아오지 않았다. 공허와 허 무 속에서 둥둥 떠다니기만 했다. 그 마음을 다시 끌고 와 묶을 만한 힘이 없었 다. 끊겨진 끈을 다시 연결 시킬만한 힘도 없었다. 자신을 보며 자책하는 클랜을 보면서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떠나버린 마음은 그에게 뭐든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수천을 해쳤다. 그때의 비명소리가 그를 괴롭힌다. 잠을 자지 못한지 벌써 며칠인 지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여지껏 단 한 순간도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며 여지 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그 중에는 카한 형님의 것도 섞여 있다. 자신을 저주 하는 설희의 목소리도 섞여 있다. 잠식당한다. 죽어간다. 떠나간 마음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그들을 해하고 받은 훈장. 그들을 해하고 받은 작위. 그들을 해하고 받은 보석. 그들을 해하고 받은 비단 옷. 그들을 해하고……. 그 모든 것들이 무하의 몸뚱이 를 짓밟는다. 심장을 움켜쥔다. 아프다. 숨이 막혀온다. 거칠어지는 호흡 속에서 흐릿하게 성문이 보인다. 문지기들이 열어준 문 틈 사이로 간신히 몸을 빼낸다. 숨이 막힌다. 이것들을 벗 어내야 한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부장!” 성문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용병들이 무하를 반겼다. 부장이라는 호칭이 입에 배였는지 전쟁을 함께 겪은 이들은 아직도 무하를 그렇게 부른다. 무하는 식 은땀을 흘리며 거칠게 망토를 뜯어냈다. 황제가 선사한 최고급 망토, 그것은 그들 을 해하고 받은 망토다. 장갑을 벗었다. 예식용으로 받았던 툰도 집어던졌다. 목 을 덮는 컬러를 억지로 찢었다. 숨이 조금 트인다. 가늘게 뚫린 숨구멍으로 처절 하게 산소를 받아드린다. “부장……?” 땅바닥을 뒹구는 그것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달려든다. 무하는 한손을 갖다대 고 필사적으로 읊었다. “파 * 이 * 어 *” 공격 마법이 아닌, 그저 단순하게 불을 일으키는 마법. 최고급 정장의 반이 불살 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엔 단순히 무하가 무 언가에 열이 받은 모습으로만 보였다. 한참 숨을 고르던 무하는 땅에 떨어진 반지와 아직도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 따위 의 보석류를 죄다 풀러 가장 앞에 서 있는 용병에게 던지듯 건넸다. “술 사먹어라.” “예?” 족쇄처럼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훈장을 떼어 이번에는 대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원하는 얼굴을 발견한 그는 후들거리는 발을 애써 놀리며 그에게 다가갔 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그것을 달아주었다. 갑작스런 무하의 행동에 당황한 모두 가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때, 무하의 입이 간신히 떨어졌다. “이건 네 거다, 피일.” “부, 부장. 이건……!” “그때 네가 아니었다면 난 이미 죽었을 거다. 네 경고가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심장을 피할 수 있었지. 인사가 늦었구나. 고맙다.” “하, 하지만……!” 무하는 피일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그를 스쳐 걷기 시작했다. “부장! 어딜 가세요?” 아무 답도 없이 비틀비틀 걸어가는 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들은 서로의 얼굴 을 돌아보았다가 동시에 뛰어갔다. “같이 가요, 부장!” 그들의 대장은 기사가 될 것이다. 기사가 되어 전쟁 승리 기념으로 몇 달 동안 베 풀어지는 연회를 즐길 것이다. 진심으로 잘되길 빌고 있다. 이미 곤크 내에서는 소문이 파다하다. 왜 클랜이 전쟁 영웅이 되길 원했는지. 왜 기사가 되고자 했는 지. 그 절절한 로맨스는 많은 용병들의 공감 하에서, 기사로 전락한 클랜을 응원 해주었다. 하지만 어쨌던 그들은 대장을 잃은 것이다. 적어도 돌아갈 때는 전쟁 을 함께 겪은 이들끼리 가고 싶었다. 그 중에는 물론 부장도 낀다. =========================================================================== 미친 벗이 왜 연참을 하느냐? 이유가 있습니다. 한회 더 남았습니다. 아해의 장-270 -------------------------------------------------------------------------------- Ip address : 211.243.9.5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thrunet) 무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을 쫓아온 동료들에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 있길 원했고 모두의 묵인 하에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카미 렌 산맥을 약간 우회해서 이동하다가 야영을 하는 순간까지도 무하는 침묵하고 다 른 이들은 그가 자신들에게 넘긴 보석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그 묘한 분위기는 유 지됐다. 가던 길에 합류한 무희들에게 비싼 보석을 마음껏 지불하며 춤과 노래를 즐겼다. 장작을 태우고 그 주위를 둘러 앉아 각기 옆에 여자를 끼고 술을 마셨다. 사냥으 로 잡은 큰 사슴을 통째로 구우며 고소한 냄새에 군침을 삼켰다. 즐거웠다. 전쟁 이 끝나고 보름이 지나는 동안에도 이처럼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연신 훈장을 매 만지며 흥겨워 하는 피일도 그 무리에 속해 있었다. 슬쩍 저편으로 가서 무희와 살을 섞는 자들도 있었다. 모두들 그런 이들을 외면해 주며 은밀한 눈으로 잠깐 수풀 너머의 광경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드래곤의 주거지이긴 했지만 이카미렌은 자신의 레어 근처에만 오지 않으면 모든 것을 묵인하는 나름대로 관대한 드래곤이었다. 그러니 가끔 나타날 몬스터만 걱정 하면 된다. 그나마도 몬스터 사태 이후에는 ‘루트’대로 움직이기만 하기 때문 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 소박하고 즐거운 연회는 밤새 계속 될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웃고 즐거워하 고 신나하는 그 속에 무하만이 없었다. 산맥의 한쪽 귀퉁이에서 노닥대는 용병 무리와 한참 떨어진, 이카미렌의 레어 근처에 누군가가 있었다. 가파른 산맥임에도 평지를 걷듯 운신에 지장이 없어 보이는 걸음새가 범상치 않다. 게다가 옷차림도 산행에는 전혀 걸맞지 않았다. 목을 덮는 칼라에 소매가 없는 티는 척 보기에도 고가의 천을 쓴 듯 했고 드러난 탄력 있는 근육을 따라 내려가면 섬세하면서 화려한 수가 놓여진 붉은 비단이 걸 쳐져 있다. 그 길고 아름다운 천 사이로 보이는 하의는 그 복식이 매우 묘했다. 곱게 색을 물들인 얇고 빳빳한 천을 배에서부터 무릎까지 늘여놓았는데, 그 고정 은 허리에 질끈 묶인 천으로 되어 있다. 양 쪽으로 길게 트인 그 사이로 바지가 보였고 그 긴 다리를 따라 내려가면 역시나 거친 산길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 운 가죽 신발이 딱 맞게 신겨져 있었다. 어둡고 험한 산길을 제집 마당 지나듯 거침없이 걷던 남자는 겨우 목적지에 다다 랐는지 흐르지도 않는 땀을 훔쳐내며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허리에 매달린 두 개의 검이 달그닥 부딪치는 소리를 내질렀다. 두 검을 내려본 남자는 그 중에 서 평범해 보이는 검을 톡톡 치며 말했다. “이제 그만 바뀌지 그래?” 자세히 보면 윤곽 없이 율동하던 검이 일순 흔들린다 싶더니만 이내 물로 화해 남 자의 앞에서 크게 일렁였다. 그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흘러, 한 남자의 형상을 만 들어 냈다. 수수한 듯 묘한 복색을 한 남자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뭔지 깨닫게 해주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는 검푸른 망토를 발목까지 늘여 뜨리고 그 안으로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V자 로 파인 티는 그 길이가 길어 원피스처럼 허벅지까지 덮여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 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치 빼어난 각선미가 바지를 입었음에도 돋보였다. 역시나 산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다. 척 보기에는 남녀 구 별이 모호한 그지만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는 지독한 무표정과 무게감 있 는 모습이 남자라 판단하게 해준다. 짧고 약간 삐친 검고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무심한 눈동자가 각기 흑색과 청색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주위를 휘감던 물줄기가 사라지면서 그 눈동자 역시 둘 다 흑색으로 변했 다. 이제 검은 완전히 사라지고 완벽한 한 지성체만이 땅을 딛고 있었다. “이카는 오랜만에 보는 걸?” “결국 그의 힘을 빌리려는 건가?” “아아. 어지간하면 안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못 견디겠어.” 그리고는 그 수려한 얼굴에 짙은 근심을 담으며 중얼거렸다. “뭔가 불안해.” “…….” “들어가자.” 유시리안이 먼저 절벽 쪽으로 발을 한걸음 디뎠다. 그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육 안으로는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락샤사 역시 허공으로 발을 디뎠다. 눈앞의 풍경이 바뀌면서 안락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가고 저편에서는 청량한 폭포수가 흐르고 있었다. 유시리안은 벌써 뛰다시피 집 안으 로 들어가고 있었다. 락샤사도 천천히 집을 향해 발을 놀렸다. “이카! 나 왔어!” 드물게 즐겁게 들리는 유시리안의 목소리가 이 공간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낮은 웃음소리가 이어서 드려왔다. 다행이 잠을 자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번 잠 을 자면 어지간해서는 깨우기 힘드니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시리안과 똑같은 결 좋은 백금발과 매력적인 보라색 눈동자 를 가진 존재가 의자에 앉아 웃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 외에는 늘 냉 소적이고 잔혹한 낯을 하는 유시리안과는 달리 좀더 섬세하고 자애로워 보였다. 지혜롭고 현명한 눈빛은 비슷한 연년배로 보임에도, 마치 그가 유시리안의 아비처 럼 느껴지게 했다. 또 그가 유시리안을 보는 눈빛은 아비가 자식을 보듯 따뜻하기 도 했다. 유시리안은 여지껏 락샤사와 페르노크 앞에서 밖에 지어본 적이 없는 맑 은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앉아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익숙해 보이는 모습. 그 또한 낮게 웃으며 유시리안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꽤 오래 돌아다닌다고 생각했다.” “응. 아직 더 돌아다닐 생각이야.” “그럼 이 아비에겐 무슨 일로 온 게냐?” 아비라니! 고작 두어살 차이밖에 안되어 보이는 둘이건만 가당키나 한 소리던가! “이 아들께서 급히 도움을 청할게 있어 왔지.” 방금의 경악이 무안으로 바뀔 목소리. 장난기로 가득한 유시리안의 목소리가 ‘아 들’이라는 단어를 자아냈다. 아아, 농담이었던가. “도움이라……?” “응. 사람을 찾고 있어.” “나는 나, 너는 너. 하지만 나는 너, 너는 나. 너와 나는 우리가 아니던가. 내 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뭘 어떻게 해서 찾아야 할지 감도 안 잡혀. 경험이 다르잖아?” “어떤 사람을 찾길래 혼자 하길 좋아하는 네가 도움을 청할 정도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유시리안은 머리를 번쩍 들어 그를 보았다. 그리고 신 나 죽겠다는 얼굴로 마구 설명을 늘여 놓았다. “내가 첫눈에 반한 사람이야! 아주 예뻐. 외모도 이쁘지만 둔감한 듯 섬세한 마 음이 예쁜 소리를 내. 강하지만 약해서 불안해.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뭔가 아파 보여서 안아주고 싶었는걸. 여지껏 마음 편하게 찾고 있었는데……뭔가 불안 해.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잠시 기억을 읽겠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이마와 이마를 맞댄 둘은 눈을 감고 이미지를 교류했다. “바람의 기운이 느껴지는 아이로구나. 바다의 기운이 느껴지는 아이로구나. 강하 지만 슬퍼 보인다. 고독에 몸부림을 치고 있구나.” 뭐라 중얼대던 그는 이마를 떼고 락샤사를 보았다. “그가 바다의 수장과 교류하는 걸 알고 있지 않았소?” “그렇다.” “그대는 바다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존재. 어찌 그 냄새로 그를 찾지 않은 게 요?” “나에게 있어 바다의 향기는 나의 향과 같아. 의식 할 수 없어. 난 정령과 가깝 지만 분명히 다른 존재다.” “그렇구려.” 둘의 대화가 오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 수장을 부르면 되지 않겠어? 이카가 그에게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 잖아!” 이카미렌은 고개를 끄떡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디 긴 백금발이 땅에 끌릴 정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가 부리는 바람의 정령이 그 끝자락을 소중히 들어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손을 앞으로 내밀며 속삭였다. “잠시 와 주겠소, 실베스트르?” 잔잔한 바람이 머문다 싶었을 때, 허공 속에서 흐릿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것 은 점차 짙어지더니 풍만한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소녀를 만들어 냈다. 귀여 운 외모와는 달리 서릿발 같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불러낸 자를 주시했다. 저편 으로 범의 꼬리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대와 인연이 닿았던 자를 찾고 있소.” “페르를 말하는 건가.” “그렇게 부르는 것 같구려.” 실베스트르의 눈에 약한 웃음기가 흘렀다. 그 분의 명으로 감시겸 보호를 했던 소 년. 연적인 줄 알고 가슴아파했던 때도 있었다. “분명 나와 인연이 닿았던 자로구나. 이제는 끊겨버렸지만 아직은 남아 있지. 그 의 왼 팔에 나의 수하가 있음이니.” 실베스트르는 작은 손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구나.” -쾅! 실베스트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락샤사가 멀뚱히 그 모습을 보다가 뒤쫓으려 했지만 이카미렌이 만류했다. 2년 만의 재회다. 둘만 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락샤사는 굳이 이견을 달지 않고 자리에 앉 았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실베스트르가 결계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유시리안 을 지켜보다가 웃었다. 이 냉혹한 바람의 수장이 미소를 짓는 것은 참으로 보기 힘든 진풍경이었다. “그래. 그에게도 곧 생기겠지.”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돌아가려는 것이다. 매일 같이 붙어 있었음에도 한시 도 떨어지지 않으려하는 사랑스런 연인이 있는 곳으로. 그 연인의 유일한 걱정거 리 페르노크를 떠올리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처음과 같이 약한 바람이 일 며 완전히 사라졌다. “‘있어야 할 곳’이.” “하아! 하아!” 숨이 차도록 뛰어 본 적이 언제던가. 정령과 마법, 그리고 기를 적절히 조화하며 체력을 아끼고 다녔지만, 솔직히 그의 체력은 인간 수준을 한참 상회하는 것이었 다. 되려 그 조화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 힘들었지. 하지만 지금은 정말 숨이 가 파왔다. 뛴다는 것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어서였다.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오는 나무들을 가볍게 피하며 날듯이 뛰었다. 절벽에 가까 운 산을 간단하게 내려온 그는 바람의 수장이 알려주었던 방향대로 미친 듯이 뛰 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박동이 점점 커져 고막이 터질 지경이었다. 유시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불안했다.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은 묘한 고통이 잠시도 그를 가만 두 지 않았다. 그때 전쟁터에서 심장 부분이 꿰뚫리는 느낌을 받은 이후로 계속 그랬 다. 높은 바위를 한번의 점프로 타 올라 힘껏 박차 올랐다. 설레였다. 드디어 그를 만날 수 있음에. 얼마나 변했을까? 나를 기억은 하고 있을 까? 여전히 예쁠까? 은발임에도 묘하게 흑색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던 소년. 가슴 한편이 즐겁게 저려왔다. “하아. 하아.” 잠시 멈춰 서서 한쪽 방향만을 주시했다. 분명 인기척이 느껴진다. 많은 수의 인 간이 저편에 있다. 그 중에 그도 있는 것이다. 두근. 두근. 힘들게 한 걸음을 옮겼다.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두 번째 걸음을 옮겼다. 심장 이 뛴다. 바로 귀 옆에서 힘껏 뛴다. 두근, 두근……하고. 얼마나 그렇게 걸음을 옮겼을까, 모닥불을 중심으로 떠들고 노는 평범한 인간들 이 보였다. 곳곳에 계집도 있다. 반쯤 베어 먹은 바비큐도 있다. 좀더 살펴보았 다. 아니, 살펴보려 했다. 저 가치 없는 인간 틈에서 그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 만 찾을 필요가 없었다. 바로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고운 은발을 감추었어도 그 슬픈 녹색 눈동자를 가렸어도 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다시 뛰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누 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움찔 뒤를 돌아보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환상이 아 니다! 진짜 그다! 그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그 내 음을 함껏 맡으며 외쳤다. “찾았다!”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일까? 굳은 그의 어깨를 내리 눌렀다. 뒤로 넘어진 그를 내 려보며 활짝 웃었다. “잡았다!” 두건 밑으로 휘둥그레 떠진 그의 눈동자가 참을 수 없이 유쾌하다. 유시리안은 웃 었다. 신나게, 그리고 즐겁게!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재회를 기약했던 그들이었다. 이들이 재회는 오랜 세월을 두고, 두고 음유시인의 입술에서 샘솟게 된다. 이런 힘든 재회가 어디 있 으랴……하고. ========================================================================= 여기까지~! 제가 그동안 아픈 몸 이끌고 죽도록 써놨던 모든 여분을 다 올렸습니다. 차분차분 고쳐가면서 올리려 했지만 완전 극에 달한 건강 상태로 인해 연재할 기력도 없네요. 그래서 그냥 팍~ 올리고. (눈치 채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 잠수를 탑니다. 여기까지가 5권 분량이고 이제 천천히 수정하고 앞으로의 전환을 차례차례 짚으며 건강을 회복해야 겠습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미정입니다. 삭제 공지가 언제 뜰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로 저장하시는 분은 그냥 지금 해두는게 좋을 겁니다. 열이 펄펄 끓는 관계로 이만 쉬러... 수도 한쪽 귀퉁이에 있는 정갈한 여관 겸 식당에 요즘 눈요기 하러 오는 여자들 이 부쩍 늘고 있었다. 비단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한 취미를 가진 남자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들고 있었다. 얼떨떨하지만 장사에 손해가 가는 것은 아닌지라 주인장은 기쁘게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이 묘한 현상의 주인공을 떨떠름 한 표정으로 한번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얼굴로 정말 남자란 말인가. 하긴 하 는 싸가지를 보니 여자라 보기엔 힘들다. 주위 시선을 사로잡고 있으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남자, 그의 이름은 유시 리안이다. 뻔히 어떤 꼴이 되어 뒹굴 줄 알면서도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느 껴지는 매력적인 백금발이나 깊이 생각에 잠긴 자수정 눈동자나 새하얗고 고운 피 부. 감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미모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이미 그 더러운 성질머리 또한 알고 있기에 침을 질질 흘리는 다른 손님들이 불쌍 한 따름이었다. “주인장. 여기 물 주전자 좀 채워줘.” “예.” 늦으면 또 무슨 성질을 낼지 모른다. 여자라면 그날인가 라고 중얼거려보기라도 할 테지만 저 자는 남자가 아닌가. 쳇, 욕구 불만인건가. 궁시렁거리면서도 얼른 차고 깨끗한 물을 채워 건넸다. 벌써 사 일째 묻고 있는 저 손님은 여태 식사 한 끼 한 적이 없는 묘한 남자였다. 그저 방 하나만 잡고 가끔 나와 물만 달라고 했 을 뿐. 그러고 보니 동행인이 한명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 사람의 모습은 통 볼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을 물어볼 배짱이 있을 리 없다. 미련 없이 돌아서 계단 위로 사라지는 남자를 보자니, 가끔 나와 물을 청하는 저 모습 하나 보자고 하루 종일 죽치고 있는 다른 손님들이 다시 한번 불쌍하게 느껴 졌다. 노크 없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약한 공명음과 희미한 숨소리. 유시리 안의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가로 걸어가자 잠 들어 있는 페르노크가 보였다. 그 거추장스럽던 두건은 테이블 위에 잘 개져 있 고 은사 같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있는 대야에 들어 있는 미지근한 물을 창가에 쏟아 붓고 다시 가져온 시원한 물로 채워 넣었다. 마법으로 온도를 보존시킬 수도 있지만 유 시리안은 아주 무더운 낮이나 주인장이 없는 밤이 아니면 시전하지 않았다. 그는 마법보다는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별난 남자였다. 하얀 수건을 물에 헹궈 꾹 짠 뒤 페르노크의 얼굴을 닦아 내었다. 나쁜 꿈을 꾸는 지 자꾸만 식은땀을 흘려낸다. 이때는 유시리안이 나선다. 가만히 페르노크의 얼 굴을 보다가 검게 기웃기웃 대는 악몽의 정(精)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잡아챈다. 바둥대는 것을 꾹 쥐어 본래 세계로 강제 귀환 시키면 적어도 반나절은 편하게 잠 들 수 있다. 그러면 그동안 흘렸던 식은땀을 정성껏 마저 닦아내고 미열이 나는 이마에 연신 수건을 얹어주는 것이다. 안쓰러울 정도로 단단하게 다져진 손을 쓸어보기도 하다가 덥다 싶으면 잠시 바람 의 정령을 소환하기도 하고, 수건이 미지근해졌다 싶으면 다시 헹궈서 얹어주고. 그렇게 하길 벌써 나흘째다. 뭐가 그리도 피곤한지 어설프게 깼다가도 다시 잠을 청하고 마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유시리안은 내내 그런 페르노크를 지켜보았다. 이따금 눈을 떠 흐릿한 시선으로 유시리안을 보다가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 순간, 순간 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잠자고 있는 페르노크를 보는 시간도 대화를 나누 는 시간도. 모두가 너무나 바라던 순간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물론 답을 원하고 내 뱉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입으로 분명 그리 말했다. 묻지 않겠다고. “묻지는 않겠습니다.” “…….” 그 조용하면서도 편안했던 시간. 길지만 짧았던 대화들. 유시리안은 웃었다. 그 흑색 이미지의 소년은 청년이 되어 상처와 고독을 품은 채 망가지고 퇴색되면서 도 여기까지 기어왔다. 그에게 상처가 된 것들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싶지만 지금 은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그리 행한다면 그 또한 그에게 상처가 되어버리 겠지. 유시리안은 페르노크에게 있어 방패가 되고 싶지, 주인에게도 상처를 낼지 모르는 검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억해 주세요.” “……?” “묻지 않는다 해서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것을.” “리안…….” “기다릴게요. 알고 싶으니까, 궁금하니까. 그러니까 기다릴게요.” 그 말에 슬픈 눈을 하다가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만 페르노크가 평생 가슴에 남 을 것 같았다. “리안…….” “……!” 잠시 딴 생각에 잠긴 사이에 깨어난 모양이다. 여전히 흐릿한 눈으로 애써 초점 을 맞춰가며 유시리안을 보던 페르노크는 힘들게 속삭였다. “전 비겁합니다.” 유시리안은 저렇게 힘들게 자신의 고뇌를 털어 놓는 페르노크가 약하지만 강하다 는 걸 알기에 섣불리 나서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진지한 눈으 로 페르노크의 깊은 녹안을 마주했다. “비겁합니다. 형에게 사죄할 생각도 못하고, 미움 받는 것이, 그리고 미움 받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도망쳤어요. 설희에게서 도망쳤듯이. 그 분에게서도 도망치 고 말았습니다. 너무 비겁해요.” 두서없는 말들이었지만 그 속에 절절히 배여 있는 고뇌와 아픔들을 느낄 수는 있 었다. 유시리안은 페르노크의 손을 꾹 잡았다. 근육이 풀려 있는 그 손이 힘들게 마주 잡아 오는 것을 느끼며 더욱 굳게 쥐었다. “살고 싶어서 형을 죽였습니다. 그렇게도 살고 싶다고 몸부림치면서……. 그래 도 지금도 살고 싶다고.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싶다고 바라고 있습니다. 리안, 저는 너무 비겁합니다.” 유시리안은 페르노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비겁한 게 나쁜 겁니까?” “……?!” 페르노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뜻밖의 대답이었던 걸까? 불안하게 입술을 달싹이 는 모습을 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를 죽이려 드는 성인 기사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칼로 그 기사의 등을 찔렀습니다. 정면에서 덤비면 이길 수 없으니까. 이길 수 없 으면 살 수 없으니까. 그 아이는 비겁한 겁니까?” “리안…….” “예. 비겁한 겁니다. 등 뒤에서 기습을 하다니 정말 비겁한 거죠. 저는 그렇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럼 그게 나쁜 겁니까?” “…….” 다시 한번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비겁한 게 어째서 나쁘죠?” 페르노크의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알아듣기 힘든 작디작 은 속삭임. “사부…….” 거의 동시에 그의 눈 또한 천천히 감겼다. 다시 잠에 든 것이다. 유시리안은 자신 의 눈이 인간의 한계를 훨씬 벗어난 경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페르 노크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려 있는 미소가 환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공연 히 웃음이 났다. 이마에 손을 짚어보니 아직 미열이 남아 있었다. 다시 수건을 꾹 짜 이마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그가 잠에 들었던 순간이 떠올랐 다. 그때의 가슴을 꿰뚫던 오열과 함께. 연못에 달이 흐릿하게 떠 있다. 물결 따라 이리저리 일그러지는 그것을 하염없 이, 그러나 관심 없이 보고 있는 두 청년이 있었다. 그들과 몇 십 미터 떨어진 곳 에서 술과 음식, 그리고 여자를 즐기고 있던 용병들은 지금쯤 필사적으로 자신의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을 것이다. 강한 만큼 강한 것에 약한 곤크의 용병들이 유시 리안의 경고를 어길 리 없으니 그렇게 속만 태우고 있을게 뻔하다. 유시리안은 천천히 페르노크를 뜯어보았다. 두건으로 머리카락과 눈가를 가리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자기 자신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 나 그것에 보조마법까지 걸어 풀러지지 않게 한 것을 보고 푸르길 강요하지 않기 로 했다. 대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안색이 안 좋아요.” 두건에 가려져 있음에도 알 수 있는 검게 변한 눈가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란 안색 과 끊임없이 흐르는 진땀들. 애써 꼿꼿하게 앉아 있는 모습 때문에 망설였던 질문 이긴 하지만 더 이상 넘어갈 수가 없었다. 무하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오한이 난 것처럼. “잠을……못자서요.” “잠을요? 어째서……?” 묻지 않겠다했던 그의 과거와 맞물리는 질문이 아닐까 싶어 말을 흐렸다. 하지만 대답은 들어야겠다. 정신적 고통과 싸우고 있는 것에 관여 할 수는 없지만 육체적 으로 한계에 달한 것은 못 본 척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이 유시리안이 재차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는 페르노크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던 것 이다. “시끄러워서요.” “예?” 페르노크의 몸이 이제는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양 팔 로 끌어 앉으며 무릎을 세웠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어요.” “페르?” 페르노크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고이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바로 투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에 참여했었어요.” 유시리안은 붉은 천 자락을 페르노크의 몸에 덮어주었다. 체온을 일정한 온도로 유지 시켜 주는 녀석이긴 했지만 저 추위가 정신적인 것인 이상 효과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떨고 있는 그를 보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 다. “그때 미끼로 버려졌었어요. 그때 도망치기 위해서……살기 위해서 마법을 시전 했는데…….” 유시리안의 눈이 설마, 하는 의혹을 담기 시작했다. 헬파이어를 쓰고도 아무도 죽 이지 ‘않은’ 천재, 혹은 죽이지 ‘못한’ 바보를 그 또한 알고 있었다. 당시 뒤 로 정찰을 나갔다 갑자기 덮쳐 온 헬파이어를 피해 허공으로 날아 얼음 속성의 바 이어를 시전하지 않았던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듯 몸부림치는 발밑의 병사들 을 보다가 제일 먼저 이상한 점을 알아챈 것도 그였다. 단순한 흥밋거리로 그 시 전자가 있을 법한 곳을 잠시 보았을 뿐이었는데. ‘그때도 바로 앞에서 놓친 것이었나.’ 공연히 울화가 치밀려 했지만 덜덜 떨고 있는 페르노크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 다. 게다가 아직 페르노크가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수천을 죽였어요. 죽기 싫으니까. 그들을 죽여 훈장까지 받았단 말입 니다! 욱!” 페르노크는 한손을 들어 입가를 막았다. 구역질과 다를 바 없는 역한 흐느낌이 바 로 입가까지 일순 솟아올랐다. “악마라고 했어요. 절 악마라고 했어요! 그 소리와 함께 그때의 비명들이 매일 귓가에서 떠나질 않아요. 너무 시끄러워.” 귀까지 틀어막으며 그는 발악했다. “시끄러워! 내가 악마라는 건 내가 더 잘 알아! 시끄러워! 시끄럽단 말이야!” “페르노크!” 유시리안은 급히 페르노크의 양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페르노크의 눈이 불안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힐난하 지 말아 달라고. 자신을 괴롭히는 저 소음들 중 하나가 되지 말아 달라고. 하지 만 그 무엇보다도 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위로하지 말라고. 영웅이 라 치켜세우지 말라고. 그러나 유시리안이 꺼낸 말은 힐난도 위로도 아니었다. 그가 꺼낸 것은 진실이었 다. “그때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아무도 죽지 않았단 말입니다!” “……거짓말.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내 눈으로, 내 귀로!” “난 그때 락아타에 있었어요! 저 역시 전쟁에 참여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바로 요새 앞에 있었어요. 보세요! 제가 죽은 사람으로 보입니까?” “거……거짓말.”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페르노크는 떨리는 손으로 유시리안의 몸을 연신 만 졌다. 정말 살아 있는 것이냐고 되묻듯. 유시리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 모두 화상만 입었어요. 화상으로 죽은 사람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약한 화상에 불과했어요. 그것도 지면과 닿아 있던 곳에만!” “하지만 봤어요. 그리고 들었어요!” “바로 그게 증거입니다!” 페르노크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긴장 어린 얼굴로 유시리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 다. “헬파이어가 제대로 구현되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타 죽으니까. 볼 수도 없 고 들을 수도 없어요.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나버리니까.” “하지만……하지만!” 페르노크는 유시리안 등 뒤를 멍하니 보았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던 자신의 친 구, 지기 이상의 존재. 아아, 너였던가. 마나여! “고맙다.” 그 존재가 따뜻하게 자신을 감쌈을 느낀 순간 페르노크는 마구 울어 버렸다. 끊겼 던 감정과의 끈이 다시 단단하게 얽혀지는 것을 느끼면서. 웃지도 울지도 못했던 그 악몽 같던 순간으로부터 한 발짝 내딛었다. 유시리안의 강한 품에 안겨, 마나 의 다정함에 취해. 그렇게 고독으로부터 천천히 벗어났다. 그리고 소음이 걷혔 다. 스스로가 만들어 냈던 족쇄가 가닥가닥 끊어져 내렸다. 그 다음 순간 세상은 어둠에 덮였다. 그것은 정말 오랜만에 다가온 편안하고 감미로운 어둠이었다. 그 리고 약하지만 분명하게 울리는 그것을 들었다. 분노로 인한 격정적인 음이 아닌 정말 오랜만에 듣는 평온하고 고요한 공명음. 아아! 어깨를 빌려 준 채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악몽의 정들을 없애다가 결국 그를 업 고 수도로 횡 하니 왔다. 오랜만에 잠 든 것 같은데 푹 쉬게 해주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나흘이 지났다. 평생을 두고 보았던 악몽의 정들보다도 많은 수 가 페르노크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를 잡듯 그것들을 꾹꾹 눌러 없애며 편 안해 지는 페르노크의 얼굴을 보는 걸 즐기는 것도 꼬박 나흘이 된 셈이다.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락샤사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카미렌이 알아서 손을 쓴 모양이라고 속편하게 생각했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락샤사에게 해를 가할 수 있 을 정도의 존재가 지금의 약해빠진 세계에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제 1기 마도라 면 모를까. 신과 많은 고위 종족들이 하위 종족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던 그때 라면. 유시리안은 다른 것을 고민하기로 했다. 깨어나면 무슨 말을 할까. 다시 만나자 던 약속을 어겼던 그때의 섭섭함과 토라짐은 이미 다시 만났던 그때 털어 놓았 다. 그리고 진심어린 사과도 받아 두었다. 곤크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설 마 카르민의 자제가 가출해 놓고는 귀족과 인연이 깊은 곤크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일부러 귀족과는 연관이 적은 의뢰만 받다가 다른 나라로 건너 간 게 아닌가 싶어 락아타까지 갔었는데. 어쩌다 보니 시오니타 녀석한테 고용당 해 얼마간 일하긴 했지만 녀석에게 의뢰비 대신 그의 행방을 찾는데 협조를 구했 다. 수완 좋은 그 녀석 역시 페르노크를 찾지 못했고 그 화를 숙청 대상들에게 쏟 아 부었다. 덕분에 락아타 내에서는 기피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걸 상관할 유시리안이 아니었다. “어디에 소속되는 건 싫은데.” 긁적이다가 평온한 얼굴의 페르노크를 내려보았다. “파트너가 이번에 해지 됐다니 나와 함께 다니면 좋겠지만…….” 어깨를 으쓱이다 침대에 엎드려 페르노크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굳이 곤크가 좋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 예~ 돌아온 것입니다. 개강과 더불어 바쁜 나날들이지만... 어찌됐던 컴백인 것입니다! 껄껄껄! 성실연재는 무리더라도 최소한 잠수는 그만~ 껄껄! 그럼~! 전보다도 손님이 많이 들어찬 소란스런 식당 구석에 여유 있는 얼굴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퉁명스럽던 얼굴에 연신 부드 러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 미소에 혹한 많은 남녀들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 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장은 모를 것이라 확신했다. 아니, 알아도 신경 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43년 평생을 사람과 부딪기는 여관 겸 식 당인 이곳에서 보냈던 그만의 안목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또 그것은 매우 정확 했다. 계단에서 뚜벅뚜벅 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간혹 나오는, 돈 안내고 튀는 손님 덕에 계단 소리에 민감한 주인장보다도 먼저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는 남자가 있었다. 주인장이 ‘얼굴밖에 볼 거 없는 성질 더럽고 싸가지 없 는 남자’라 찍은 바로 그 유시리안이었다. 저 싸가지에게서 저런 미소를 보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주인장은 손님이 완전히 내려섰음에도 제자 리에서 멍하니 있었다. 다행이 그 손님은 주인장의 배려 없음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유시리안에게로 걸어갔다. 막 목욕을 했는지 물기와 은은한 향내가 묻어 나오는 모습에, 순전히 미를 추구하 여 이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눈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탄성 을 질렀다. 저 화려한 미인만은 못하지만 뭔가 독특하고 신비한 매력이 물씬 묻어 나는 미남이었던 것이다! 아아, 정녕 이곳은 축복받은 곳이니! 모든 이의 머리 속 에 이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어색하네요.” 가끔 목욕을 하기 위해, 그리고 머리를 말리기 위해 두건을 벗은 적은 있지만 그 때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만약 땀에 절은 머리를 감지 않았다 면, 그리고 말릴 시간도 없이 먼저 내려가 버린 유시리안이 아니었다면 늘 그랬듯 이 머리를 다 말리고 두건까지 한 다음에 내려 왔을 것이다. 처음에는 형이 자신 을 찾을까 두른 것이 이제는 습관, 혹은 버릇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거울을 볼 때 마다 이 얼굴에 낯설음을 느끼고 섬뜩해 하는 것이 싫었던 것도 있었지만 벌써 2년이나 지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이 얼굴에 정이 붙은 건 아니었지 만 말이다. 그냥 참을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그저 두건을 함으로 인해 자신을 감 출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녀석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방어막이 되어 준다. 혹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현실에 대한 도피일까? 어쨌든 늘 시야를 어느 정도 방해하던 녀석이 없으니 넓어진 시야가 신기하기까 지 했다. 유시리안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일주일이나 굶었어요. 배고프시죠?” “개운해요.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난 적이 얼마만인지.” 정말 상쾌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는다.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진 못했지만 유시리안 은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꼬박 일주일동안 악몽의 정들을 꾹꾹 눌 러 없앤 노고를 뿌듯해 했다. 악몽의 정들은 자신과 대립 속성에 속하는 것들을 잠식해 버린다. 그 대립 속성에는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웃음 등이 속한다. 당분 간은 잠을 청하지 말아야겠다. 저 희미한 웃음이 그 자신이 의식할 수 있을 만큼 밝고 분명해 질 때까지는 말이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주문해 놨어요. 이곳은 달콤한 시럽이 듬뿍 뿌려진 과일과 초콜릿이 잔뜩 들어 간 케이크가 자랑이…….” 페르노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 모양을 보던 유시리안은 생긋 웃으며 말 을 이었다. “……지만 단걸 싫어하시는 것 같고, 또 오랫동안 굶으셨으니 위에 부담 안가는 스프를 부탁했어요.” “감사합니다.” 진심이 절절히 배여 있는 인사에 유시리안은 유쾌하게 웃어버렸다. “페르. 곤크로 돌아가실 생각인가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테이블 위의 두건을 집어 다시 머리에 두르는 페르노크의 모 습에 유시리안이 물었다. 이제 다시 헤어질 생각 따위는 절대 없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곤크에 소속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아니요. 신경 쓰이는 일이 좀 있어서요.” “흐음. 그럼 저도 동행해도 될까요?” “아…….” 잠시 망설이던 페르노크는 유시리안의 눈을 한번 마주 보다가 그러라고 허락했 다. 유시리안은 이정도의 허락에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좀 전의 망설임이 못 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말입니다.” “…….” 매듭을 질끈 묶은 페르노크는 그 긴 끄트머리 천을 뒤로 훌쩍 넘길 때까지도 침묵 했다. 유시리안은 계속 기다렸다. 허락하지 않는다면 약속을 어겼던 일까지 들먹 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조금은 비겁하게라도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유시리안에 게 있어 비겁한 것은 나쁜 게 아니니까. “리안씨는 소속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만.” “그건 페르도 마찬가지잖아요? 페르가 계속 그곳에 있길 바란다면 저 역시 그곳 에 소속되겠어요. 그 정도는 감수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일주일을 함께 하려고 2 년간 찾아다닌 게 아닙니다. 계속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서 찾아다닌 겁니다. 이 제 겨우 찾았고 다신 놓치……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 곤크에 소속 됐던 것은 클랜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라면 과거라 할 수 있는 일을 일부분이나마 알고 있는 그가 깊은 사죄와 함께 함께 있자고 청했기에 남았고 곤 크 소속이 됐다. 그저 그뿐이다. 곤크의 위명에 반한 것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페르노크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에게 소속이란 것이 어울리 지 않는다는 것을. 유시리안을 보았다. 강한 남자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지금은 정말 절실 히 느껴진다. 형님보다도 강할 것 같다. 그리고 다정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비겁 한 게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안타까운 침묵으로서 답을 대신했던 클랜과는 달리 당당하게 비겁한 게 왜 나쁘냐고 반문했다. 농땡 사부가 생각났다. 언제나 고민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로 느껴지게 하는 통쾌하고 예리한 말을 뱉어내던 그 가. 유시리안도 똑같았다. 그동안 비겁하다 자괴하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는 말 을 해주었다. 그리고 사부와는 달리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한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2년간이나 찾아다녔다고 말한다. “저 때문에 억지로 소속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유시리안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곤크에서 나오죠.”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또 한번 웃었다. 지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지겨우리만치 길었 던 고뇌의 시간에 짓눌렸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면서도 끝까지 떨쳐내지 못했던, 스스로를 좀 먹는 그 독약들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사부가 못 견디게 그리 웠고 가하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들은 ‘무하’로서의 자신만을 알고 그런 자신 만을 아껴주는 존재였다. 형, 테밀시아라는 존재는 아직은 버거웠다. ‘페르노 크’가 아니기에. 그의 동생을 둘이나 앗아갔다는 죄책감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함께 일도 하고, 즐거운 시간도 보내요.” 들떠서 웃기만 하는 저 남자는 어떤 존재가 될까? 또 자신은 그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클랜과의 좋지 못한 끝을 떠올리며 벌써부터 그것을 걱정해 보는 페르노크였다. “페르!” “예?” 갑자기 크게 부르는 유시리안의 목소리에 놀라 반문했다. 유시리안은 안심한 얼굴 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페르노크의 앞까지 걸어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낮아진 눈높이로 인해 페르노크의 그늘진 녹안이 뚜렷하게 보 였다.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 부정하지 못하는 페르노크를 보며 생긋 웃었다. 페르노크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 은 듯 불쑥 말했다. “무하입니다.” “……?” “제 이름은 무하입니다.” 너무 자연스러워 의식하지 못했다. ‘페르’. 요크노민조차도 페르노크의 거부에 입에 담을 엄두조차 못내는 그의 애칭. 그것은 세 번째 지기였다 친구로 돌아가 버린 클랜도 마찬가지였다. ‘페르노크’라는 호칭만으로도 그는 괴로워했고 번뇌 했다. 그런데 유시리안이 처음부터 계속 애칭으로 불렀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 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 거부감조차 들지 않았던 것일까? 유시리안은 페르노크, 아니 무하이길 청하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로서는 뜬금없는 말일 것이다. 다행히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천재라 봐 야 할 정도로 그 두뇌 회전이 기민했다. 때문에 무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 을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뭔가 짓궂은 듯한 미소. 그리고 입을 열었다. “싫어요.” “예?” “페르가 더 어울리는 걸. 무하는……왠지 쓸쓸해요.” “리안!” 무하라 부르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유시리안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무하가 아니 었다. 유시리안은 슬쩍 일어나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페르는 페르. ‘사랑받는 자’ 페르노크라고요.” “…….” * * * 무하와 유시리안이 여관에서 나온 것은 점심을 먹고 시간이 제법 지났을 때였다. “저녁은 먹고 올 것 같아요. 기다리지 마세요.” “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길 바라요.” “……율.” 계속 무하라 불러 달라는 그보다도 유시리안의 고집이 더 질겼다. 그는 도대체 왜 페르라 불리기 싫은 거냐고 반문했고 무하는 머뭇거리다 공연한 핑계를 댔다. 가출을 했는데 페르라는 애칭은 너무 알려져서 안 된다고. 자신이 ‘사랑받는 자’가 아니어서 그렇다는 본심을 말해봐야 유시리안이 당당하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말할게 뻔했던 것이다. 막 만들어 낸 변명은 너무 허점이 많았다. 결국 유시리안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놓은 방안을 받아드려야 했다. “그러면 페르라고 부르지 않으면 되는 거죠? 펠이라고 부를게요!” “그, 그게…….” “아! 대신 절 율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게 말이죠.” “와! 둘만의 애칭이라니! 멋진데요!” “……그러네요.” ……이렇게 말이다. 유시리안의 막무가내 밀어 붙이기에 약한 자신을 발견하는 무 하였다. 뭐, 어쨌든 하기로 했으니 불러야 할 텐데 마냥 어색하기만 하다. 펠이라 부르는 유시리안의 부름에 한 박자 늦게 답하기 일쑤였으니. 그런 무하와는 달리 유시리 안은 냉큼 대답했다. 지금처럼. “예?” 꼬리가 있다면 살랑살랑 치고 있을 법한 얼굴로 얼른 다가오는 유시리안을 보며 결국 쿡쿡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이 웃었다는 것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나 웃으려 하면 가슴이 욱씬거려서 그럴 수 없었는데? 그 모습에 유시 리안은 검지로 무하의 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이 곳이 아팠죠?” “예. ……어떻게?” 답 대신 유시리안은 생긋 웃었다. 일주일동안 죽어라 악몽의 정과 더불어 활기를 치고 있는 그 속성의 정들을 잡아 낸 것이 서서히 효력을 보이고 있었다. 구석에 몰려 있던 반대 속성의 정들이 천천히 그 세력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무하가 웃 는 그 순간순간마다 그 세력의 확장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그것이 유시리안의 눈에는 보였다. “이제는 웃어요. 당신이 웃지 않는다고 해서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 렇죠?” “……예.” 유시리안의 말은 가슴에 박혀들 정도로 예리했다. 언제나 무표정한 자신을 보면 서 슬프게 웃던 요크노민과 씁쓸하게 웃던 클랜이 생각났다. 그리고 얼마 전 만났 던 테밀시아 형님의 안타까운 눈빛도 생각났다. 혼자 그리도 자책하고 괴로워했지 만, 그것은 주위 사람들마저도 슬프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하는 ‘그 일’ 이후로 처음으로 ‘의식’한 상태에서 웃었다. 조금은 서툴게, 그리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자신이 신기한지 연신 그 입가를 만지면서. 그러다 할 말이 생각났는지 유시리안을 보았다. “갔다 와서 무슨 일인지 말할게요. ……들어주시겠어요?” 뜻밖의 말이었는지 유시리안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가 곧 기쁘게 웃었다. 무하 도 덩달아 희미하게 웃었다. 묘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는 많이 웃게 될 것 같다 는 묘한 예감이. 무하가 찾은 곳은 자하라 가의 저택이었다. 그간 잠이 들어 올 수 없었지만 본래 무하는 곤크에 신고를 한 뒤 바로 이곳을 찾으려 했다. 처음에는 성에서 나오자마 자 오려 했지만 락아타의 기사를 만난 뒤로, 그 기분으로 만나봐야 녀석에게 걱정 만 끼칠 것이라 생각되어 일단 곤크로 가려 했었던 것이다. 만나서 형이 요즘 어찌 지내는지 물어야 한다. 요크노민은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잘 지낸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그때 스쳐 지나갔던 불길한 예감은 한때의 착각 이었다, 넘기고 유시리안이 받아올 일거리에 집중하면 된다. 무하는 부디 일이 그 렇게 되길 빌었다. 자신이 나쁜 일에 대한 직감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 욱 그러길 빌어야 했다. 주위를 살펴보다 담을 훌쩍 넘었다. 요크노민의 처소는 몇 번 들른 적이 있었다. 덕분에 전에 로딘을 그곳까지 텔레포트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요크노민은 실세 가 없는 귀족이기 때문에 그 처소에 경비가 거의 없었다. 마치 오르세만 가에서 ‘페르노크’의 거처와 같이 말이다. 본인이 늘 말하듯, 방향치가 아닌 무하는 쉽게 요크노민의 처소에 도착했다. 여기 까지 왔다면 굳이 몸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요크노민의 처소 주위 에는 경비가 거의 없는데다 이쯤부터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별 생각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양 옆에서 강렬한 살기가 느껴졌다. 무하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가 있었던 곳이 움푹 패였다. 강한 검풍! 무하는 허리 의 짧은 단검을 뽑아들었다. 날개 인간, 하환이 그에게 선물한 그 송곳 같은 검이 었다. 아직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단검으로라도 사용해야 했다. 정 안되면 팔찌의 정령들에게 부탁하는 수도 있고 말이다. 순간 이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랐다. 타인의 앞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도 싫어하던 자신이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정령을 사용하겠다고 생각 한 것이다. 물론 마법이 아닌 정령은 가끔 사용해 오긴 했지만 이렇게 스스럼없 진 않았는데……? 무하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양 쪽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그를 강 하게 위협했기 때문이다. 얼른 검을 앞으로 내밀며 자신의 변화에 대한 당혹감을 억눌렀다. 고민은 나중에 해도 괜찮다. 의외로 공격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카산님. 그는 주군의 지기입니다.” “호오?” 귀족 티가 나는 기사와 관록 있어 보이는 남자. 앞서 말한 자는 눈에 익었다. ‘로딘.’ “페……무하. 이쪽 또한 주군의 지기, 카산님이오. 카산님. 저쪽은 무하라 합니 다.” 가벼운 인사가 오갔다. 무하는 강한 기운을 풍기는 카산을 잠시 보다가 요크노민 이 잘 해나가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그는 언제나 무하의 자랑스런 지기였다. “오! 자네가 슈의 영웅, 무하였군! 요즘 노민 녀석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서 말이 지. 결례를 범했네.” “아닙니다. 헌데 노민은?” 어쩐지 이름이 귀에 익다 싶더니만 슈의 남편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요크노민을 노리는 자가 많아 이 둘이 경비를 설 정도라면 녀석은 지금 어쩌고 있는 것인가? 무하가 아는 한 요크노민은 매우 강했다. 게다 가 불칸까지 곁에 있지 않은가. “그게…….” 망설이다가 로딘을 돌아보는 카산을 보자니 불안이 스며들었다. 카산의 시선을 받 은 로딘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지금 어떤 용무 때문에 이곳에 안 계시오. 나로서는 그곳을 당신에게 알려줘도 좋을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소. 내일 다시 오지 않겠소?” 딱딱하다 싶을 만큼 주군의 안위를 생각하는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무하는 요크 노민에 대한 걱정을 떨치고 고개를 끄떡였다. 돌아서는 무하를 보며 한참 망설이던 로딘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땐 고마웠소!” 무하는 잠시 뒤를 돌아 로딘을 보다가 짧게 목례를 하고 가버렸다. 말을 한 로딘 자신도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곤크에서 구해줬던 그때? ……아니면 2년 전 주군과 결투를 하게 했던 그때? 둘 다 일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리는 로딘을 의 아한 눈으로 보는 카산이었다. 그러나 사적인 일일 거라 판단하고 자신의 궁금증 을 애써 지웠다. 대신 다른 의문을 끄집어냈다. “노민 녀석. 갑자기 이유도 말하지 않고 이곳을 지켜 달라는 거지?” “그건…….” 주위를 잠시 경계하다 낮게 답했다. 주군의 지기이자 형이나 다를 바 없는 카산에 게까지 숨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라 하셨습니다.” “위장? 그렇게까지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사건이 있었던가?” 로딘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그 분께 무슨 일이 생겼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쪽에서는 지금 초비상 상태라 고…….” “흐음. 그 분인가.” 카산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근래 매형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더니. “그런데 그건 얼마 전에 그 전쟁 영웅의 거기를……흠흠. 잘라……제거하라 내린 명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 그거까진 저도 잘…….” 로딘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둘 다 민망함에 공연히 다른 곳을 보다가 애꿎은 헛 기침만 해댔다. 로딘은 얼굴을 긁적이다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작게 말했다. 차 마 같은 남자로서 입에 담기 어려운 일이었다. “복수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무엇에 대한 복수인지는 저도…….” “흠흠. 그런가.” 둘은 한참을 다시 민망함에 헛기침해야 했다. 반갑게도(?) 자객이 찾아오지 않았 다면 아마 하루 종일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무하는 자하라 가의 저택을 잠시 보다가 돌아섰다. 몰래 오르세만 가에 가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요크노민과는 달리 실세의 중점인 형님의 거처는 경비가 살벌하기 에 힘들다. 게다가 슬쩍 보고 오는 건, 만나고 오는 것보다도 힘들다. 형님 자체 가 강한 분이 아니던가. 하루만 기다려 보자.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갑자기 허기가 졌다. 일주일 동안 굶었다는 게 실감은 안가 지만 몸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요크노민과 저녁을 함께 하며 긴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지만 그냥 여관으로 돌아가야겠다. 한참 걷다 여관 문이 저편에서 보였을 무렵 코너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딱히 무하의 앞을 막는다기보다는 자기 갈 길을 가기 위해 걷고 있다 마주친 것이 다. 무하는 낯익은 상대의 모습에 차분히 입을 열었다. “길드에서의 일은 벌써 끝나신 겁니까?” “아, 펠!” 유시리안은 생글생글 웃으며 무하가 마저 걸어오길 기다렸다. “마침 의뢰가 들어와서 금방 끝났어요. 곤크에 가서 탈퇴한 뒤 바로 가면 날짜 에 맞게 도착할 수 있을 거리의 마을 일입니다. 근데 늦으실 거라고……?” “노민을 만나러 간 거였는데 부재중이더라고요.” “아, 요크노민 군을 만나러 가셨던 겁니까?” “예. 녀석에게 물어 볼 것이 있어서요. 내일 다시 가봐야겠어요.” 유시리안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지어댔다. 그가 먼저 발을 옮기며 여관 으로 향하자 무하도 뒤따라 걷었다. “배고프시죠?” 농조로 물어오는 유시리안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무하였다. 그거로도 충분히 뜻이 통했는지 유시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아직은 스프나 죽을 먹는 편이 좋겠지만……. 간단한 요깃거리는 괜찮겠지요.” “부디 봐주세요.” “하하.” 음식을 천천히 먹으며 간간히 별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는 시간. 묘하게 편안하 고 안심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사부, 가하와 함께 산에서 지냈던 그때처럼. 제 일 행복했던 나날들.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간은 머리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진은 설희가 찢 어버리고 이제 그분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태백산에 있는 무덤 뿐. 어린 나이의 기억력이란 이토록 조악한 것이다. 그분들을 향한 아득한 그리움보다는 사 부를 향한 의지와 존경이 더했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사부를 따랐다. 혼자 가 아니라는 그 느낌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하지만 설희도 사부도 떠나버렸다. 설 희는 마음이, 사부는 그 육신이. 눈물조차 나지 않는 압도적인 고독감에 떨었다. ‘나는 유시리안에게서 사부를 찾고자 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있어 유시리안의 존재는 사부의 대리인 것인지 무하는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고민을 아무렇지 않게 해소해주던 사부와 비겁한 게 나쁘지 않다 말해준 유시리안. ‘그럴지도 모른다.’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저렇게 똑바로 이쪽을 봐주는 유시리안에게서 자신은 다 른 사람을 찾고자 한다.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2년 동안이나 가슴에 품으며 미쳐가던 악순환에 지쳐버린 것 인지도……. “미안합니다.” “네?” 뜬금없는 무하의 사과에 유시리안은 마시던 주스를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 하는 답답하게 내려 않는 가슴을 애써 한숨으로 넘겼다. “전 지금 당신에게서 나의 사부를 찾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 모습에 의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무하는 씁쓸히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질릴 정도의 고지식함과 섬뜩할 정도 의 냉정함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모습에 유시리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뜻밖의 반 응에 무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자 억지로 입을 다물고 자제했지만 웃 음기는 여전했다. 그러다 간신히 숨을 꿀꺽 삼키고 진정하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 고 나직이 말했다. “의지하세요.” “예?” “모습을 찾은 것만으로도 의지할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믿었던 분이라는 거겠죠? 이쪽으로서는 영광인걸요. 그런 분의 어떤 의지할만한 면이 저에게 역시 있다는 뜻이니까.” “……유시리안.” “율 입니다.” “율. ……감사합니다.” “훨씬 듣기 좋은 걸요.” 다시 따뜻하게 웃는 유시리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야 유시 리안에게서 풍기는 ‘유시리안’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별로 피곤하지 않았는데 눈을 떠보니 새벽이었다. 꿈조차 꾸지 않고 푹 잔 밤은 매우 달았다. 어제보다도 한층 개운한 얼굴로 잠에서 깬 무하는 의아하게 옆을 보 았다. 유시리안이 턱을 괴고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스프름한 새벽 빛 사이 로 부드럽게 미소를 담는 보라색 눈동자가 찬연한 백금발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 내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그의 모습이 묘하게 비현실적이라 멍하니 마주보 고만 있던 무하가 툭 질문을 내뱉었다. “벌써 깨신 겁니까?” “하하하!” 이 사람은 정말이지……. 유시리안은 턱을 괴던 손으로 약하게 입술을 매만지며 웃어버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듯한 무하도 눈가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와 같은 순간이 앞으로 그들의 일상이 되리란 것을 아무도 몰랐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 거리로 나온 둘은 이유 모를 이벤트로 시끄러운 분위기에 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오늘도 요크노민 군에게?” “예. 오늘은 꼭 만나보고 와야겠어요. 이번에 받은 의뢰의 시일도 그렇고, 자꾸 가슴 한쪽이 불안해서…….” 유시리안은 걱정 어린 눈으로 무하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묻지 않는 다고해서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다음 순간 갑자기 사람들이 한 쪽 방향으로 일제히 달리다시피 걷기 시작했 다. 유시리안과 무하는 얼떨결에 그 인파에 휩쓸려 그 방향으로 이동하게 되어 버 렸다. 놓칠 새라 얼른 무하의 손을 잡은 유시리안의 움직임은 어쩔 수 없이 따라 걸어야 했지만 전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많은 인파가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는지 큰 길에 모여들었다. 뜻하지 않게 그곳에 있게 된 무하와 유시리안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앞 쪽을 주시했다. 이와 이 리 됐으니 구경이나 하자는 심사였다. 그들이 보게 된 것은 화려하게 꾸며진 마차였다. 의례용으로 보이는 그것은 화려 함과 동시에 고아함이 깃들여 있었다. 곳곳에 박혀 있는 보석중 하나만이라도 해 도 제피모가 일년은 족히 먹고 지낼 수 있는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보물 상자인 마차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 을 이들은 다음 순간에 어쩔 수 없는 탄식을 내뱉어야 했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 는 이들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다. 오르세만가의 개인 기사단인 휴첼의 그 독특 한 상징 문양을 못 알아 볼 이가 있겠는가. “오르세만……?” 형님! 무하는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그의 손을 놓치지 않고 있는 유시리안도 함께였다. 맨 앞까지 헤쳐 나온 무하는 천천히 옆 을 지나가는 마차를 아련한 눈으로 응시했다. 저 안에 형님이 있는 건가……. “빌어먹을!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저러는지.” “테밀시아 경마저 당하셨단 말인가!” “……!” 옆에서 숙덕이는 소리가 우연찮게 무하의 귀에 들려왔다. 당했다니!? “정말 당하신 걸까?” “당하지 않으셨으면 여지껏 안 나타나실 리 있겠어? 저 머저리 녀석에게 오르세 만 가가 꿀꺽 넘어가게 생겼는데!” “하지만 누가 금안의 ‘지배자’를 해할 수 있단 말인가?!” “황제 짓이 분명해. 그 빌어먹을 황제 자식이 아니면 누가 테밀시아 경에게 위해 를 가할 수 있겠어?” “젠장!” 이와 같은 대화가 계속 되는 동안 무하의 눈은 경악에 흔들렸다. 형님이 당하셨다 니? 그게 무슨 소린가? 머저리한테 오르세만 가가 넘어가게 생겼다니? 그럼 저 마 차는 무어란 말인가? “황제랑 저 머저리랑 손을 잡은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근래 모습을 드러내 지 않고 은신 중이던 저 머저리가 딱 때맞춰 나타날리 없지 않아?” “쳇! 휴첼마저 그 전통이 망가지게 생겼구먼.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면 뭐해. 그들의 마스터가 마법사인걸.” “휴첼 덕분에 그나마 숨통을 틔고 살았는데……. 제 아무리 ‘희대의 천재’면 뭐하겠어.” “욤이 망할 때가 다 된 게 아닌가 싶다니까.” 탄성어린 목소리들. 그늘져 알아 볼 수 없는 눈동자로 멀어지는 마차를 응시하던 무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시 검 좀 빌리겠습니다.” “예?” 그리곤 유시리안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고 순식간에 그의 검을 뽑아들었다. 유 시리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무하는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펠……!” 따라가려고 발을 옮겼던 유시리안은 낭패 어린 음성으로 무하를 불러야 했다. 마 차가 지나가자 갈라져 있던 사람들이 다시 길 가로 복잡하게 들어섰기 때문이다. ‘희대의 천재’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페르노크’의 몸뚱이는 분명 여기 있다. 녀석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육신은 분명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녀석이 저기에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녀석이 형님께 위해를 가 할 수 있었던가! 무하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울적한 얼굴로 말을 몰던 휴첼 기사단 원들은 자신들의 옆을 순식간에 초월해 나가는 무하를 무심한 눈으로 보았다. 만 약 저 마차에 타고 있는 자가 자신들의 로드라면 그렇게 직무태만으로 놀지는 않 았을 테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로드는 어디로 증발했는지 행방불명인데다 죽 었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다. 목숨 바쳐 따른다 했던 주군의 생사도 알지 못하는 와중에 겁쟁이에 머저리 동생 녀석이 와서 그 자리를 덥썩 차지하려 들고 있는 것 이다. 가주 전용 마차를 타고 가주를 정식으로 사사받기 위해서 본가로 가려하는 저 녀석은 성심성의껏 보호해줄 의욕이 날 리 없지 않은가. 때문에 무하는 수월하게 마차 바로 옆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마차가 가고 있었기 때문도 있다. 무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이는 마차 문을 차갑게 노려보며 발을 크게, 그리고 강하게 앞으로 내딛었다. 동시에 유시리안에게서 빌려온 검을 오른 쪽으로 강하게 끌었다가 순식간에 왼 쪽, 마차의 사람이 있을 법한 위치를 향해 박았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마차의 옆 면이 박살나 버렸다. 아직도 주위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그 파편에 붙어 있는 보석에 흑심을 품을 새도 없이 휴첼 기사단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일제히 무기를 뽑은 상태였다. 그런 흉흉 한 분위기 속에서 검을 박은 자세 그대로 있는 무하와 마차 안에 있던 한 청년만 이 멈춰있는 듯 보였다. 검을 강하게 박아 넣으며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 리는 무하에게 휴첼의 기사단원들이 외쳤다. “당장 그 분에게서 물러서라!” “그……분?” 절정 기사들에게도 간신히 들릴 법한 작은 반문. 그것이 일으키는 파장은 실로 큰 것이었다. 실재로는 바로 기습해서 보호해야 할 ‘그분’으로부터 자객을 멀 리 떨어뜨려 놓아야 함에도 복잡한 심정으로 검 자루만 꾹 쥐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무하의 시선은 자신의 검을 의례용 검으로 막아내고 있는 청년 에게로 곧게 향해졌다.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이란 단어가 더 적합할 동안의 남 자. 가는 은 타래가 아름답게 흩어지는 와중에 겁에 질린 듯한 녹색 눈동자가 불 안하게 떨리고 있다.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 앞에 무하는 입술을 꾹 깨 물었다. 온 몸이 오한이 든 듯 파르륵 떨려온다. 꾹 깨문 입술 또한 부들부들 떨 리고 있다. 본능적으로 와 닿는 두려움과 끝 모를 분노가 아프게 정신을 짓밟는 다. ……‘페르노크’? 분명 소울러와 요크노민에게서 들었던 그 이미지 그대로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겁 많은 아이.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는 그 마음에 들지 않은 소년의 모습 그대로 다. 하지만……. “마법사가 검으로 공격을 막았다……?” 죽이겠다는 마음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의 상처는 입힐 요량이었던 공격이 깔끔하 게 막혀 있다. 그것도 바이어가 아니라 의례용에 불과한 검으로. ‘페르노크’의 얼굴에 아차, 하는 당혹이 스쳐지나갔다. 다행히 무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놓쳤다면 아직도 공포와 혼란 속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무하의 눈 이 천천히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가짜구나.” “무, 무슨!?” ‘페르노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청년은 한껏 겁에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이미 무하의 소리를 들은 기사들은 의심쩍은 시선을 그에게로 보냈다. 만약 가짜 라면……절대 용서 할 수 없다! 무하는 차갑게 말했다. “진짜 ‘페르노크’라면 나를 모를 리 없어.” 물론 뻥이었다. 한번 떠보는 것에 불과한, 전혀 사실무근인 떠봄. 반응은 금방 왔 다. 당황한 얼굴로 무하의 얼굴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던 ‘페르노크’는 입술을 꾹 깨물다가 앙칼지게 외쳤다. “난 당신 따위 몰라! 누군데 아는 척을 하는 거야? 비켜!” 겁에 질린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와 연약한 반항. 무하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바로 진짜 ‘페르노크’의 모습이었다. 때문에 휴첼의 기사들은 체념 섞인 얼굴 로 무하에게 검을 겨누었다. 하지만 무하에게는 이미 모든 의문이 사라진 상태였 다. 방금의 망설임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던 것이다. 진짜 ‘페르노크’라면 아 무리 변했다 한들 못 알아 볼 리 없다. 자신과 같은 껍데기를 뒤집어 쓴 정체불명 의 영혼을! 가짜라는 판단이 확실히 든 이상 다음 순번은 당연했다. “형님은 네가 해한 것이냐?” 완전히 가짜라 단정 지은 물음. ‘페르노크’는, 아니 가짜는 영문 모를 소리라 며 반문했지만 무하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무하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믿고는 싶었던 휴첼 기사단원들은 둘의 대립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것은 명백한 직무태만 이었다. 가짜는 그런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살려줘요. 어째서 자객을 보고만 있는 거죠? 전 오르세만 가의 다음 가주란 말……!” “닥쳐.” 차분하지만 위협적인 목소리로 가짜에게 경고했다. 이는 무하의 분노가 극에 달했 음을 알려주는 것과 같았다. 무하는 화가 나면 차분해지는 타입인 것이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단 하나만은 분명하다. 형님이 행방불명이 되자 마자 그 틈을 노려 형님의 자리를 가로채려 하는 이 자는 가짜! 황제와 손을 잡았 다던 ‘머저리’가 바로 이자라면 형님을 위해한 자도 이자라는 소리다. 가짜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페르노크’의 모습을 한 이의 입에서 저런 명이 내 려진 이상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무 하가 검을 더욱 예리하게 가짜의 목에 가까이 가져간 것이다. 휴첼 기사단원들에 게는 한줌의 시선조차 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그 가짜만을 노려보며 나 직이 말했다. “움직이면 죽인다.” 살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믿고 다짜고짜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 해꾼의 움직임을 막은 무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무엇을 원해서 그 껍데기를 썼는지는 나완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형 님의 안전이야. 잘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은 죽일 수 있을 것 같거든.” 가짜는 이를 악 물며 어떻게든 검에서 목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조금의 틈이라도 생긴다면 휴첼의 절정 기사들이 움직일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듯 하다. 무하는 조 소를 지으며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두건을 매만졌다. “나를 모른다고.” 그 틈에 접근하려는 휴첼의 기사단들을 슬쩍 보더니 두건을 큰 동작으로 벗어버렸 다. 휴첼뿐 아니라 가짜조차도 입을 멍청히 벌리며 경악 어린 눈으로 무하를 보았 다. 짧게 빛나는 머리카락은 분명 은색이요, 슬프게 잠긴 눈동자는 분명 녹색이 다. 앞에 있는 가짜와 형제같이 느껴지는 닮은 이목구비. 아니, ‘페르노크’라 기 보다는 테밀시아의 형제로 보이기 충분한 당당함. “똑바로 답하는 게 좋을 거야.” 어디선가 소름끼치는 멜로디가 들려온다. 그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법한……. 그 속에서 무하가 냉랭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테밀시아 형님은 어디에 계시지?” 가짜의 입이 딱딱 떨리더니 이내 샛 된 소리를 뱉어냈다. 당연하겠지만 시치미를 떼는 내용이었다. “몰라! 테밀 형님이 어디 계신지 알았다면 내가 먼저 달려갔어!” 무하조차도 입에 담지 못했던 테밀시아의 애칭이 너무나 쉽게 가짜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그것이 화가 나는 무하였다. 감히……! “이 가짜 녀석이 감히 누구의 애칭을 입에 담는 거야!” “누가 가짜라는 거냐! 이 건방진 녀석! 자객 주제에 어디다 큰 소리인가! 당장 물러서지 못해!” 그러다 아차, 하며 주위를 살피는 가짜의 모습이 거슬렸다. 그래, ‘페르노크’라 면 절대 저런 당당한 말을 꺼내지 못하겠지. 진짜 ‘페르노크’라면. 무하는 씁쓸 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면 자기도 ‘가짜’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쪽은 흐르는 피만은 테밀시아 형님의 동생이다.’ 점점 칼날에서 벗어나려는 가짜를 눈치챈 무하는 얼른 목에 더 가까이 가져다 댔 다. 검이 워낙 보검인지라 슬쩍 닿은 것만으로도 살이 베여져 선혈이 흘렀다. 목 에 난 상처는 그 정도가 어찌 됐든 상당한 위협이 된다. 가짜는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겁에 질린 눈으로 무하를 올려보았다. 닮은 꼴의 둘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 어 서로를 보고 있는 모습은 그리 볼만한 광경이 못 되었다. “형님은 어디 계시지?” 차분하다 못해 냉정하고, 냉정하다 못해 살벌한 무하의 질문이 또 그 붉은 입술에 서 흘러나왔다. 주위에 흐르는 그 섬뜩한 멜로디도 한층 진해져 있었다. 잔뜩 질 린 가짜가 도발적으로 소리 질렀다. “자객 주제에 테밀 형님을 형님이라 부르다니! 네가 ‘페르노크’라 말하고 싶 은 거냐?” 뜻밖의 반박. ‘페르노크’라……. 침묵하는 무하에게서 승기를 잡았다 생각했는 지 가짜는 계속해서 그를 몰아세웠다. “그렇다면 네 스스로 무덤을 판 거다. 방금 네 입으로 그랬지? 마법사가 검으로 공격을 막았다고! 너야 말로 검으로 나를 공격하지 않았나?”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무하의 얼굴에 서리 같은 미소가 스쳤다. 가짜는 물론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휴첼의 기사단원까지도 흠칫할 정도로 서늘한 미소. 그 다 음 순간 모두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치켜떠야 했다. 무하의 몸이 허공에 천천히 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하는 도도하게 고개를 올리며 가짜를 내려보았다. “마법 말인가?” 그러면서 양쪽으로 팔을 벌리자 그의 몸 주위로 열두 개의 파이어 볼이 생성 되 는 게 아닌가! 시동어조차 없는 마법 구현! 게다가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무하 는 정령을 사용한 것이지만 모두들 플라이를 시전한줄 알았다.) 열두 개나! 가짜에게서 한참이나 떨어졌음에도 그 어떤 기사도 무하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정 말로 저 남자가 ‘페르노크’라면……. “다시 묻겠다. 형님은 어디 계시지?” 주군이 그렇게도 아끼는 동생, ‘페르노크’라면……희망이 있는 것이다! 기사들 의 눈에 밝은 빛이 스치더니 곧장 가짜를 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가짜라면, 그래 서 주군에게 위해를 가한 것이라면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말했잖아! 테밀 형님이 어디 계신지 알았다면 내가 그 곳으로 향했을 거라고!” “이……!” 시치미를 떼기로 작정 한 것인가? 겁에 질린 음성이지만 또박또박 반박하는 모습 이라니……. 확실히 ‘페르노크’의 모습과 같긴 하지만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든 다. 기사들은 초조하게 무하와 가짜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이대로는 끝이 없 을 것이다. 그때였다. “펠!” 언제나와 같은 감미로운 목소리에 배여 있는 묘한 느낌을 그때의 무하는 알아차리 지 못했다. 약간 굳어 있는 그의 얼굴조차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유시리안이 란 존재가 마차의 행방을 쫓아 이곳까지 찾아 왔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기사들 의 시선 집중 속에 등장한 그는 훌쩍 마차 위로 뛰어 올라 무하와 가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무하의 2년 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모두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2년 전 당신과 꼭 닮았네요.” 툭 내뱉는 말. 차마 자신의 입으로 ‘진짜’ 페르노크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무하로서는 이보다 더한 도움은 없었으리라. 기사들의 검이 순식간에 가짜에게로 향해졌다. 물론 정체모를 아름다운 남자의 말만 듣고 진짜일 가능성이 일말이라 도 있는 그에게 검을 향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들의 바람이 그 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하고 있었다. “형님이 실종되셨다 합니다.” “테밀시아 경이?” “이 자가 페르노크라고 하는 군요. 형님에게 안 좋은 일이 있다는 소문에 의해 가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웃기는 군.” 유시리안은 무하에게 안 들릴 정도의 작은 음성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이상한 일 이지만 그 음성은 가짜에게는 똑똑히 전해져 좀 전의 파이어 볼을 봤을 때보다도 더한 공포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무하는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주위를 감싸 고 있던 붉은 마법의 결정체도 사그라져갔다. 그것으로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것 은 애당초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능력을 보여줄 무 언가가 필요했을 뿐. “인피면구인가……. 하지만 체격은 물론 음성까지 같아. 그게 가능한가?” 의아해 하는 무하의 어깨를 짚으며 유시리안이 낮게 말했다. “희대의 천재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면 안 되죠. 저건 마법입니다. 일루젼이 란 환영 계열의 마법이죠.” “그럼 그 마법을 해지시키면 진실이 밝혀지겠군요?” “시전자가 원하지 않는 한 풀을 수는 없습니다. 죽기 전까지는 말이죠.” 무하의 얼굴이 묘하게 굳더니 한숨과 같은 말을 건넸다. “형님의 행방을 알아내야 해요.” “그건 간단합니다.” 유시리안은 실례, 하고는 무하의 허리에 매여 있는 작은 물통을 떼어내어, 그 내 용물을 바닥에 쏟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를 향해 낮게 속삭였다. 「그를 불러줘.」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이 떨어짐과 동시에 바닥을 향해 곤두라 치던 물줄기가 하 늘을 향해 역행했다. 절대 자연스럽지 못한 현상. 저 아름다운 남자의 힘인가? 기 사들의 눈에 탄성이 스칠 때, 그 물줄기는 천천히 하나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었 다. 처음에는 검자루를 만들어내더니 연이어 역행해 들어오는 물들이 검 집의 모 습을 만들어 낸다. 의외로 평범한 모습의 검. 결국 그 하나의 검으로 변한 물줄기 는 다시 자연스럽게 바닥에 흘러내렸다. 유시리안은 물통을 바로하고 그 주둥이를 막은 다음 다른 손으로 검자루를 쥐며, 물통을 무하에게 건넸다. 신기해하는 무하에게 피식 웃어보이며 고개를 가짜에게 로 돌렸다. “제가 보기엔 당신과 완전히 다릅니다만. 제가 이상한 겁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 이 이상한 겁니까?” “아마도……둘 다 정상일겁니다.” 진짜 ‘페르노크’의 모습은 저런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페르 노크의 모습을 제대로 아는 자는 극소수. 테밀시아와 뮤비라, 요크노민, 파크다, 휴로버, 소울러. 이렇게 여섯에 불과하다. 그 외에 집단 싸움을 벌였던 이들도 있 지만 이 여섯만이 제대로 된 ‘기억상실증’ 페르노크를 알고 있다. 그러니 진짜 ‘페르노크’의 모습만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나, ‘기억상실증’ 페르노크 의 모습만을 알고 있는 유시리안이나 제대로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시리안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무하를 슬쩍 봤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검을 뽑아 가짜의 손에 억지로 쥐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얼른 그 검을 받아 쥐는 가짜의 모습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짜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변하는 것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유시리안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있었던 쪽 의 기사들은 전자의 이유는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모두가 사태 파악이 안돼 멍하니 있는 그때 유시리안만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이 가짜 녀석의 기억을 읽어줘. 펠의 형은 어디에 있지?” “…….” 정말 알 수 없는 질문. 최면을 건 것인가? 하지만 저 눈동자는 최면에 걸린 멍한 눈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눈이다. 게다가 상대에게 직 접 묻는다기 보다는 제 3자에게 묻는 듯한 말투. 사태 파악이 채 되기도 전에 가 짜의 무심한 눈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의 입안이 바싹 말라갈 무 렵 입을 열었다. “오르세만 가의 수도 저택의 지하.” 흠칫! 무하는 순간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다 울컥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 에서 치밀어 올라 손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그곳. 카 한 형님에게 감금당했던 그곳이 떠올라 진 것이다. 아니다. 그곳은 지방, 오르세 만 가의 본가다. 수도 저택의 지하라 하지 않는가. 이곳은 그곳이 아니다. 무하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음 순간 그는 미친 듯이 오르세만 가의 저택을 향해 뛰었다. 그동안 힘껏 견뎌왔고, 이제는 세월이라는 물결에 의 해 닳아졌다 생각했던 예리한 돌조각이 일제히 박혀왔다. 설희의 폭언과 저주가, 로레라자의 배신과 칼날이, 카한 형님의 자조어린 사과와 죽어가던 그 얼굴……. 모든 것이 다시 되돌아 와 박힌다. 울컥 눈물이 치솟는다. 형님마저 잘못 되면 안 됩니다. 당신의 두 동생을 제가 앗아갔는데 당신마저 잘못 되면 전……. 그때의 무하는 스스로도 감당 못하는 상처 속에서 힘껏 내달리기만 했다. 아픔과 초조함, 불안과 슬픔, 죄책감을 안고 오직 테밀시아의 안위에 미쳐서. 그렇게 뒤 에 남겨진 자는 생각하지 못했다. ============================================================================ 저와 친한 작가님(혼자 친한척 하는 거잖아-퍽-), 라스탈님의 생신을 축하합니다>.<...라는 의미에서의 한 회 더~! 생신 축하드려요~! 무하의 모습을 놓친 유시리안의 눈이 진한 살기에 일렁이고 있었다. 2년 전, 헤어 졌을 때의 일이 생각 난 것이다. 그 짧았던 시간과 아쉬웠던 헤어짐. 그리고 설레 었던 재회의 약속과 안타까웠던 엇갈림들. 비록 스스로가 달갑게 받아드렸던 아픔 이라지만 고통스러웠다. 초조함과 그리움으로 미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서 그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샤.” 왼 손을 앞으로 뻗으며 중얼거리자 가짜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스스로 날아와 잡혔다. 익숙한 감촉을 어루만지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던 유시 리안의 귀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가짜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 마검! 저 검이 저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어요!” 끝까지 가짜가 아님을 주장하는 목소리. 일루젼은 시전자가 아닌 이상 풀 수 없다. 모습이 어떻게 바꿨느냐에 따라 그것 을 풀어낼 방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마나의 움직임에 통탈한 현자라면 모 르겠지만 그런 존재는 이 약해빠진 시대엔 없다. 제 1기 마도 때도 겨우 한손에 꼽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유시리안의 살기 띈 눈 동자가 가짜에게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참이다. 휴첼의 기사들이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유시리안의 왼 손이 허공을 가볍게 갈랐다. 그 손에 쥐어져 있던 기괴한 검은 여전히 검 집 안 에 들어가 있었다. “무슨……?” 알 수 없는 오한이 돌아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고 겨우 물음을 던지려고 하던 바 로 그때였다. 눈앞에 붉은 생명들이 산산이 흩뿌려지면서 천천히 마차 아래로 고 깃덩이가 굴러 떨어졌다. 가주 계승식 때 입는 고풍스러운 옷이 걸쳐져 있는 고깃 덩이. 그것은 방금까지 ‘페르노크’라 불렸던 청년의 절단 된 상체였다. 마차 안 에서 여전히 의자에 반쯤 앉아 있는 허리 밑 상체는 끊임없이 붉은 핏덩이를 쏟아 내고 있었다. 사태 파악이 안 된 채 멍하니 양단된 시체를 보던 기사들을 황급히 정신을 차리 고 유시리안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앞에서 넘실대는 피 속에서도 깨끗한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그에게 튀어오는 피들은 그가 걸치고 있는 붉은 천이 바람에 춤추듯 율동하며 먹어치우고 있었던 것이다. 소름 돋는 광경. 일제히 검을 들어올리는 기사들을 냉랭한 눈으로 힐끔 본 유시리안은 짧게 말을 내뱉고 천천히 뒤돌았다. “머저리들.” 그리고는 순식간에 무하가 사라진 방향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남은 것은 그 생김이 변한 시체와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리고 부산을 떠는 기사들과 혹시나 모를 테밀시아 경의 생환을 기대하며 흩어지는 백성들뿐이었다. 수도 지리는 꽤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설령 이곳을 잘 모른다 해도 오르세만 가 의 수도 저택이 어디 있는지 쯤은 알고 있었다. 수도를 들릴 때면 클랜 모르게 이 곳을 찾아와 가만히 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살벌한 경비 때문에 들어갈 엄두는 내 지 못했지만 공무가 잦은 형님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갔기에 그 모습을 멀찍이 서 이나마 볼 수 있는 것으로 족했었다. 무하는 높은 담을 위에서 넓디 넓은 저택을 둘러보았다. 지하라……. 일단 오긴 했지만 지하가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게다가 지하가 한 두 개인가. 모든 거처마 다 지하는 있을 텐데 어디의 지하란 말인가? “형님의 거처의 지하를 먼저 가볼까?”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려다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얼른 다른 쪽으로 획 돌린다. “저건……?” “서두르자, 노민.” “예.” 서두르자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엄청난 속도로 어딘가를 달려가고 있는 두 사람이 었다. 그러나 그 속도마자도 당사자들에게는 느리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 에 없다. 그분이 실종된 지 벌써 며칠이던가. “살아 계신 건 확실한 거죠?” “물론이다.” 뮤비라는 왼쪽 가슴에 오른 손을 얹어보다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요크노민도 말 없이 그 뒤를 바싹 쫓았다. “왼쪽으로!” 간간히 요크노민이 지정해주는 방향대로 달리면서 둘은 초조함에 안달했다. ‘돌아가시는 않았다. 고대 검의 호응이 그것을 알려주고는 있다. 하지만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뮤비라는 결국 심장 위에 있는 마법진을 손으로 옮겨 붉은 고대검을 꺼내들었다. 죽는 것보다도 처참한 광경을 몇 번이나 봐왔다. 단순히 살아 있는 것만으론 안 된다. 그 분이 여지껏 일궈온 능력도 강인한 육신도 매력적인 외모도 굳은 정신 도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작자들인지는 모르지만 곱게 죽지 못 할 것이다. 어차피 살려둘 생각은 없었지만 죽어달라고 애원하도록 만들어 주리 라. 그 분이 실종된 지 꼬박 8일째다. 하루가 미치도록 초조했던 나날들. 고대검이 생 사여부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정말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어째서 곁을 떠났던 가, 자책하며 동생과 필사적으로 추적해왔다. 일년 전 쯤부터 조금씩 꼬리를 내밀 던 세력을 치밀하게 감시해온 덕에 그들의 소행임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순전 히 요크노민 덕이었다. 뮤비라와 함께 해온 작업들이긴 하나 본격적인 작업이나 책임은 요크노민이 떠맡고 있었던 것이다. 뮤비라는 현재 자하라 가를 꿀꺽하는 일로도 쉴 틈이 없었다. 겨우 찾아낸 그 분의 행방은 놀랍게도 오르세만 가의 지하였다. 등잔불 밑이 어둡 다고 했던가. 바로 그 짝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기업 비밀로 붙이는 요크노민 을 추궁할 마음은 없었다. 당장 원하는 것은 그 분의 안위뿐. 단 둘로도 충분했다. 뮤비라와 요크노민. 그 둘은 당대에 보기 드문 실력자중 손 에 꼽히는 자들이다. 비록 음지에서 움직여 명성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가 바 로 당사자들이다. 때문에 굳이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이 일을 다른 이에게 최대한 감추기 위해 단 둘이 움직인 것이다. 그곳을 지키는 이들이 수십에 달한다는 것 을 알면서도. “지금부터 나타나는 자들은 모두 적입니다.” 본관 중 하나인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요크노민이 뒤에서 외쳤다. 이 곳 하나가 모 두 매수 된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적들의 소굴이었다. 1년 전부터 들어왔던 하 인들의 대부분이 첩자였으니. 일부러 그들의 속셈을 탐색하기 위해 내버려 뒀던 것이 이렇게 화근이 될 줄이야. 설마 이 일을 위해 들어왔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 다. “누구십니까? 이곳은 오르세만 가의 본…….” 놀란 얼굴로 다가오는 노인을 단숨에 베어버린 뮤비라는 차가운 눈으로 사방을 노 려보았다. 약속이나 한 듯 저쪽에서 비명을 지르는 하녀가 있었다. 첩자라는 것 을 알고 있는 상태임에도 순간 움찔 했을 만큼 그 연기가 뛰어났다. 하녀가 있는 쪽을 향해 검을 휘둘자 순식간에 목이 날라 간다. 검기! 요크노민은 형님의 성취 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임을 알 수 있었다. “형님…….”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예.” 동생에게까지 말하지 않았던 성취. 어째서일까? 어째서 형님은 그토록 위대한 경 지에 들어서고도 숨기려 드는 것일까? 더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둘이 구출을 위해 왔다는 것을 그쪽에서 눈치 채면 테 밀시아님께 무슨 위해를 가할지 알 수 없었다. 서둘러 찾아야 했다. 이 곳 어딘가 에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니 곧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뮤비라는 애써 자신을 진 정시키며 요크노민에게 말했다. “넌 저쪽으로. 난 이쪽을 맡으마.” 둘이 양쪽으로 찢어져 첩자들을 제거하며 이동했을 때, 건물 입구에 슬며시 그 모 습을 드러낸 이가 있었다. 검은 두건으로 이마와 눈가를 가린 남자. 그는 뮤비라 와 요크노민이 사라진 방향을 각기 슬쩍 보았다가 지하실을 향해 뛰었다. 시간이 단축되어 다행이었다. 흐릿한 라이트만이 켜져 있는 어두운 곳. 진득한 비린내가 끔찍한 상상을 불러일 으키고 있다. 그 속에 사슬로 사지가 벽에 고정되어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희미 한 빛 속에 보이는 그의 윤곽은 매우 다부졌고 아름답기까지 한 그 근육은 피에 젖어 참혹했다. 기운 없이 푹 숙여져 있던 고개가 천천히 들려진다. 어둠 속에서 도 그 강렬한 황금빛의 존재는 감춰지지 않는다. 까슬까슬하게 메마른 입술이 옴 싹하며 잔뜩 잠긴 목소리를 꺼내놓았다. “시끄럽군.” 상황을 제대로 파악이나 하는 건지, 아니면 드디어 미친 건지 알 수 없는 태연 함. 그것을 증오와 두려움으로 직시하는 또 다른 남자가 어둠에 묻혀 있었다. 단 정한 차림새는 지독한 방안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고 그 깨끗한 얼굴 역시 이질 적이기만 했다. 지적인 눈동자는 분명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던 고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이 차분한 학자풍의 남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문을 가 하고 있었으니,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고 하던가. “미친 겁니까?” “정말 시끄러워.” “미친 거군요.” “하지만 그다.” “천하의 ‘지배자’의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 비명도, 이 발자국도. 그가 만들어 내는 거다.” “…….” “후후후.” 눈살을 찌푸리며 가만히 있던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그 곳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는 복도에 서 있던 장정들에게 위를 살피고 오라고 지 시했다. 방안과는 달리 어느 정도 밝다고 쳐 줄 수 있는 복도에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이의 얼굴은 분명 소울러가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 파크다의 것이었다. 평소 의 차분함보다는 묘한 광기가 도사리고 있어 그 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분 명 그였다. 여섯 명의 장정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안심했는지 다시 고개를 방 쪽 으로 돌렸다. 솔직히 고문을 가하고 말고도 없이 죽이면 그만인 남자다. 정신을 지배해 이쪽의 꼭두각시로 부렸으면 좋으련만 어째서인지 마법이 들지 않으니 방 해가 되기 전에 처지 해버리면 끝이다. 그가 죽고 이쪽이 만들어 낸 2년 전 ‘페르노크’가 가주가 되어 혁명군에게 힘 을 가세한다. 이것이 파크다와 소울러가 만들어 낸 ‘차선책’이었다. 무하가 지 적하고 갔던 데로 제피모와 하위 귀족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혁명군의 문제를 이 걸로 해결할 수 있다. 당대 세력가인 오르세만 가에서 지원을 해주는 데다 계층적 으로도 카르민의 지지를 받는데 어찌 감히 역모라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테밀시아라는 존재는 매우 큰 위험분자다. 그는 몬스터 사태가 일어나면 서 그 인심을 잃지 않은 유일한 귀족이다. ‘지배자’라 불리며 황실 계승 제 7위 인 아내, 마린나사를 맞이하여 그 계승권을 이어받은 절대 권력자. 현 최고 기사 단 휴첼의 마스터. 그 자신의 카리스마조차 엄청나니 경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가 없지 않은가. 소울러를 위시한 혁명군의 리더층들은 여태껏 테밀시아를 살려두고 있는 파크다에 게 불만과 두려움을 표했다. 저렇게 처참한 몰골로 묶여 얌전히 고문이나 당하는 처지인데도 테밀시아라는 존재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건재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고문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음에도 그 태연자약함이라니. 그런 모습을 보는 파크다의 눈에 점점 증오와 두려움이 더해가는 것에 휴로버가 우려를 보였지만 무시했다. 망가지라고 처절하게 매질을 하는 광기가 더해갈 뿐. 그 모습을 보며 휴로버는 깨달았다. 파크다의 골은 너무나 깊다. 그리고 그 골은 어떤 것으로도 메 꿀 수 없다. “우리를 도와주는 겁니까? 물론 테밀시아 경이 말한 이야기가 진실이었을 때의 경우지만요.” 방안에 들어서며 비아냥거리는 말투. 확실히 평소의 파크다가 아니었다. 테밀시아 는 그런 파크다를 무심한 눈으로 한번 보다가 고개를 뒤로 젖혀 벽에 기댔다. 그 간단한 움직임에서 흐르는 오만함이라니. 파크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고 부르르 떨었다. “얼마 전에 무하라는 용병을 만났죠.” 움찔. 테밀시아의 미간이 순간 꿈틀했다. 타인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화제 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파크다는 광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 었다. “그는 잘난 형에게 밀려 하류 인생을 사고 있었습니다. 천한 용병으로서 하루하 루를 시답지 않은 일과로 보내면서 비참하게 말입니다.” 파크다는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았는지 서늘한 날의 단검 이 들려 있었다. “마임에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 절망하고 절규하며 그렇게 말 입니다. 너무 처참하여 눈물이 나더군요.” 광기로 이글거리는 눈이 황금빛 광채의 눈동자에게로 고정되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동생은 쓰레기 같은 삶을 보내고 있을 때 혼자 서 온갖 부와 권세를 누리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까?” 테밀시아는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파크다의 손에 들린 단검이 그런 테밀 시아의 목 가까이에 접근했다. “그러고도 형입니까?” 당신은 형 자격이 없어. 나야 말로 그 아이의 형이다. 피로 이어져 있지 않는다 해도 내가 더 그 아이를 아끼고 있어. 더 이해하고 있다고. 파크다의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테밀시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자네에 대해 알고 있지. 7년 전 동생이 죽었다더군. 자살이었던가? 지금 자네 가 하는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자네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자살이 아니었어!” -퍽! 검 손잡이로 테밀시아의 얼굴을 갈긴 파크다는 마구 소리 질렀다. “자살이 아니었다고! 너희가 죽인 거야! 고위 귀족이라는 이름 하에, 세력가라 는 이름 하에 내 동생을 농락하고 조소하고 상처 입혔어! 그리곤 죽여서 강에 던 져 놓고는 자살이라고 비웃었어! 내 동생은 자살 따위 할 녀석이 아니야!” 한참 가쁜 숨을 뱉어내던 파크다는 진한 살기를 뿜어내며 속삭였다. “당신 같은 작자들이 내 동생을 살해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한껏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기 형제조차도 아끼지 못하고 자기 앞날에 방해가 될 훼방꾼으로만 취급하는 당신들 따위가 알리 없겠죠. 형제를 잃은 아픔을.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고통 을.” “그래도.” 테밀시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당당하고 오만하게 빛났다. “페르는 내 동생이다.” “……!” 파크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엇 때문일까? 증오? 두려움? 아니면 ……질투 인가. 그의 손에 들린 단검이 천천히 높게 치솟는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리 찍혀 진다. 뒤로 한껏 젖혀 훤히 드러난 테밀시아의 목줄기를 향해. 뮤비라와 요크노민은 지하실 쪽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 다. 사방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이들의 몸 곳곳에는 심상치 않은 상처가 도사리 고 있었다. 둘을 이쪽으로 이끈 소리는 이들이 내지른 신음인 듯 했다. “또 한 명이 있는 건가.” 중얼거리던 뮤비라와 요크노민은 퍼뜩 지하실 계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누가 뭐 랄 것도 없이 동시에 그곳을 향해 뛰었다. 안에도 십수 명의 첩자들이 신체 어딘 가를 붙잡고 끙끙대고 있었다. 뮤비라는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안 쪽 깊숙이 뛰어 갔고 요크노민은 그 중 한명의 멱살을 움켜쥐고 낮게 물었다. “누가 왔었지?” “크윽!” 아픔에 질려 답조차 하지 못하는 첩자의 목을 요크노민은 아무렇지 않게 피로 젖 은 검으로 찔렀다. 답을 해줄 사람은 아직도 열명 넘게 있었다. 첩자 따위에게 누 가 아량을 베풀랴. 그의 시선은 막 시체가 된 자의 옆에서 뒹굴던 다른 첩자에게 로 향했다. 그는 요크노민의 시선을 받자마자 겁에 질려 외쳤다. “모, 모릅니다.” “그럼 죽어라.” 그 자의 목까지 따버린 요크노민이 다시 옆에서 뒹구는 다른 이에게로 향하자는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공격했던 자에 대한 일말의 정보라도 쥐어짜려 했다. 상황이 사람을 극한까지 몰고 간다 했던가. 그는 딱 한 가지 특이 사항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검은 두건을 한 자였습니다! 그 이상은 정말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그 말에 요크노민은 당장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둠 속 그 어디에도 그가 찾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뮤비라는 굳게 닫혀 있는 문을 검기로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안했다. 가문 을 날로 먹으려 들었던 그들이 주군을 깍듯이 대접했을 리 없다. 그 분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소름끼치는 피비린내. 그 다음으로 들은 것은 언제나와 같 은 웃음 섞인 목소리. “기세가 무서운데?” “테밀……시아님?” 그리고 보인 것은 자신과 똑같은 붉은 고대검을 들고 웃고 있는 테밀시아의 모 습. 울컥 눈물이 치밀어 공연이 시선을 돌려버렸다. “미안한데 이것 좀 끊어 주겠어? 한번은 어찌 됐는데 기력이 딸리는 군.” 농담조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기운이 넘친다. 감정이 복 박쳐 어쩔 줄 몰라 하는 뮤비라를 위한 작은 배려. 뮤비라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한 눈동자로 피식 웃어버 렸다. 테밀시아의 마음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사람 있는 대로 걱정 시켜 놓고 너무 태연하신 거 아니에요?” “미안, 미안.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뭐, 무사했으면 된 거지.” 고대검의 날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줄기를 무심한 눈으로 보다가 다시 씩 웃어버린 다. 그의 도발에 파크다가 말려들어 잠시 방을 비웠던 게 천행이었다. 억지로 쥐 어뜯은 오른 손이 욱씬거려 왔지만 생명을 구한 값으로 치면 싼 편이 아니던가. 꼼짝없이 목을 내줄 뻔 했다. 뭐, 그 순간을 노리고 일부러 목을 도발적으로 드러 낸 것이지만 말이다. 아깝게 놓쳐버렸지만 평정을 잃은 그에게서 많은 정보를 뽑 아낼 수 있었으니 된 거다. 게다가 뜻밖의 소득도 있었다.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랐었군.” “……!” 사슬을 끊어내던 뮤비라는 흠칫하며 테밀시아를 올려보았다. 테밀시아의 진지한 황금빛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긴다면 굳이 들쳐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테밀시아는 굳어 있는 뮤비라를 대신해서 자신의 사슬을 직접 끊어냈다. 뮤비라 의 검기만은 못했지만 그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디딘 검사였다. 뮤비라는 딱 딱하게 굳은 채로 그런 테밀시아를 지켜보았다. 그런 뮤비라의 머리를 장난스럽 게 헝클이며 낮게 말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가는 테밀시아의 씁쓸한 뒷모습을 보던 뮤비라는 떨리는 입 술을 손바닥으로 억지로 틀어막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 려 했다. “동물은 처음 본 존재를 자신의 어미라 믿고 따릅니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 테밀시아가 자신을 돌아보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은 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제가 처음 본 존재는 테밀시아님이었습니다.” “네가 내 것이라 말했지.” “예. 테밀시아님의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순진하게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순수하게 따랐다. 한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것 이 망가진 것은 언제였던가. 조금씩 그것이 변해가던 것은 언제였던가. 왜 검술 을 숨겼을까? 본능이었다. 그의 앞에서 검을 쥐고 있노라면 가슴 깊은 곳에서 고 통이 밀려왔다. 숨 막힐 듯한 두통에 잠식당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검은 좋았다. 그 새파란 날이 빛에 반사되는 모습에, 그 것이 만들어 내는 소름끼 치는 호선에 매료되었다. 앞의 방해쯤은 견딜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의 앞에서 만큼은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일도 있나보다 넘어갔다. 그것을 두고 테밀시아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며 볼 부운 소리를 했지만 본의가 아니었다. 어쩌다 깨닫게 됐을까? 어쩌다 기억하게 되었을까? 지워졌던 기억들을. 어느 순 간 머리 속에 떠오른 냉혹한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습. 괴로웠다. 아들에 게조차 냉정한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가슴 깊이 고통이 되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어미를 따르듯 순수했던 마음에 조금씩 변해갔던 것은. 고 통스런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테밀시아의 말 덕분이었다. -당신은 더 이상 뮤비라의 아버지가 아니다. 당신은 자격을 잃었어. 뮤비라는 내 거다. 그 누구도 뮤비라에게 해코지할 수 없어. 그리고 검을 닦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게 되었다. 알게 된다면 호승심 강한 테밀시 아가 대련을 신청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상처 입히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어쭙 잖은 마음으로 숨겼고 속이려 들었다. 다행히 묻지 않고 묵인하는 테밀시아 덕분 에 속이지는 않아도 됐지만……. “테밀시아님. 전…….” 힘들게 입을 열려 한다. 이대로 계속 기만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멜로디…….” 문가에 멍하니 서 있던 테밀시아가 갑자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저편에서 뛰 어오던 요크노민이 무사한 테밀시아의 모습에 멈춰서는 것이 보였지만 그가 보고 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둑하지만 희미한 빛으로도 충분히 주위를 볼 수 있는 테밀시아의 눈에 비친 것 은 아무 것도 없었다. 황량한 복도와 호흡을 고르고 있는 요크노민과 뮤비라가 처 리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시체들뿐. 테밀시아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뮤비라를 돌아보았다. 뮤비라의 말에 촉각을 곤두 세우느냐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려 놓쳐버렸지만 그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그 무 엇보다도 그 중시한 자신의 탓이 아닌가. “내가 듣지 않는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지. 뮤비라는 뮤비라. 나의 것이며, 나 의 의지의 반려. 하지만 내가 듣는다면 애써 숨겨온 뮤비라의 상처가 들쑤셔지겠 지. 그렇기에 난 듣고 싶지 않아.” 상처. 테밀시아는 분명 ‘상처’라고 말했다. 비밀이 아닌 상처라고.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인가? 뮤비라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입을 다물어 준 것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희망 없는 이 마음도,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바람도. 그리고 가슴 저미는 고통도. 모두 자신이 택한 길이 다. 뮤비라는 그 고통들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담장을 간신히 넘어 길가로 떨어지듯 내려서는 남자. 어지럽게 휘청 이는 몸뚱이 로 고집스럽게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다 무너지듯 담에 몸을 기댄다. 온 몸이 떨려왔다. 춥게, 아프게. “동생……인가.” 듣고 말았다. 두려웠던 말이다. 무섭고도 무서웠던 말. 형으로 생각한다. 가족으 로 생각한다. 일방적인 감정일 뿐이지만 ‘무하’라는 영혼은 그렇게 생각해 왔 다. 테밀시아에게는 ‘무하’도 ‘페르노크’도 모두 페르노크일 뿐이다. 이 허울 뿐인 껍데기는 얼마나 큰 면죄부가 되는가. 어떻게 변했다 해도, 어떻게 행동한 다 해도 동생이라는 이름 하에 용서 받는다. 사랑 받는다. 그것은 ‘페르노크’ 의 것이다. 무하는 알고 있었다. 만약 무하의 영혼이 사라지고 이 육신에 ‘페르노크’가 돌아온다 해도 테밀시아 는 자신의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것이다. 어떻게 변했다 해도 모든 것을 포 용할 것이다. 그것은 무하의 것이 아니다. ‘페르노크’가 이어받은 혈연이라는 질긴 끈이 만들어 준 것이다. 그것은 ‘페르노크’의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실감 하고 싶지 않았다. ‘있어야 할 곳’이 필요하다. 껍데기니 영혼이니, 모든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편안하게 몸을 누이고 마음을 쉴 곳이 필요하다. 무하가 무하로서, 그리고 페르노크로서 가장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가 애 타게 찾는 ‘있어야 할 곳’. 한때는 그것이 설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부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 어서 ‘있어야 할 곳’은 무하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렇게 모두 떠나간 것이 다. 미련 없이. 마음으로부터 육신으로부터 멀리. 안쓰럽게 몸을 부여잡고 있는 무하의 몸에 어둑한 그림자가 졌다. 힘들게 고개를 들어보니 묘하게 굳은 얼굴로 유시리안이 서 있었다. 압도적인 정막. 둘 사이에 그것이 흘렀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 둘의 곁 을 스쳐 지나갔고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소음을 만들어 냈지만 들리지 않았다. 바 람이 나뭇잎을 간질이는 소리도 날아가는 새가 가혹 내지르는 노래도 들리지 않았 다. 어두웠던 하늘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차가운 눈물이다. 투툭. 투툭. 그리곤 순식 간에 사방을 덮는다. 싸아악, 울음소리와 함께. 무하는 유시리안을 보고 있었다. 유시리안은 무하를 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 고 있지 않고 그냥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냥 있었다. 온 몸이 흠뻑 젖어 옷자락에서 하늘의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도. 유시리안이 먼저 움직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탄식과 안도와 고통이 뒤섞여 아주 무거운 한숨이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서 있는 건 똑같지만 유시리안과 무하는 달랐다. 유시리안은 그것을 즐겼고 무하는 그것을 아파했다. 고독이라는 단어는 똑같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 언제나 유시리안이 먼저 움직였다. 잔뜩 움크리고 있던 무하를 찾아간 것도 유시 리안이었고 일으켜 세운 것도 그였다. 무하는 움직이기 싫어했지만 유시리안은 그 런 그의 손을 잡고 걸었다. 제멋대로지만 제멋대로가 아니다. 무하에게 필요한 무 언가를 충족시켜준다. 망설이는 무하를 뒤에서 밀어준다. 그것이 유시리안이었 다. 여지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유시리안은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무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잡는 것은 무 하의 의지. 그것을 잡고 일어나는 것도 무하의 의지. 깨끗한 하얀 손이지만 강하 다. 무하는 그 손을 한참동안 보았다. 유시리안은 기다려 주었다. 내민 손을 그대 로 둔 채 그대로 기다려 주었다. 그것은 말 없는 독려였다. 무하는 마른 침을 힘들게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유시리안은 무하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무하의 손은 몇 번이고 제자리에서 멈췄다. 하 지만 금방 다시 움직였다. 마침내 무하의 손이 유시리안의 손을 덮었을 때, 유시 리안은 굳게 쥐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낮게 속삭인다. 묻지 않는다고 해서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다. 유시리안은 쓰게 웃었다. 무하가 죄책감에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면서도 그 웃음을 거둘 수는 없었 다. 이것은 유시리안이 부리는 어리광이다. “하지만 나를 두고 가버리는 건 용서 할 수 없어요.” 움찔! 유시리안에게 잡혀 있는 무하의 손이 순간 꿈틀했다. 이제야 생각 난 것이 다. 함께 여관에서 나와 거리를 걸었던 순간을. 테밀시아 형님의 이야기를 들은 뒤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을. 상처를 줬다. 연이어 생각난다. 곧장 따라온 그에 게 도움만을 받고 또 다시 잊어버렸다. 재차 상처를 줬다. 멀리 과거의 일이 생각 났다. 만나기로 약속 해 놓고 떠나버렸다. 오래된 상처를 후볐다. 뭐라 사과를 해야 할까. 그 쓴 상처를 알기에 차마 입을 열 수 없다. 머뭇거리는 무하를 보며 조금은 마음이 진정된다. 자신의 존재가 무하에게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단지 자신보다 테밀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컸을 뿐이다. 지금 은 이것으로 만족하겠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함께 한 세월이 소중함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한 부모보다 처음 만난 여인이 소중한 사람도 있 다. 원래 그런 것이다. “다시는 그렇게 가버리지 말아요.” 제약을 가한다. 그것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무하에게 더할 나위 없는 배려가 된다 는 걸 알고 있기에. 이번엔 이정도로 끝낸다. 하지만 다음은 없다. 유시리안은 이 기적인 자신을 잘 알고 있다. 독점욕도 많고 욕심도 많으며 제멋대로인 자신을. 한마디를 더한다. 그것이 앞으로 무하에게 있어 얼마나 큰 의미가 되어 주는 줄 도 모르고 욕심 섞인 한마디를 더한다. 유시리안의 제멋대로인 이기심은 언제나 무하에게 도움이 되어준다. 그것을 둘은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내 옆이니까.” ……하기를 끝내는 비가 쏟아진다. 2년 전과 똑같이. 조금은 다른 의미로서. =========================================================================== *말랑님! 님께서 보내주신 두권의 작품(!) 잘 받아 보았습니다!! 오오! 존경하옵니다! 감사, 감사>.< *이 글을 부디 읽기 바라며... '아해의 장' 카페 운영자님. 잠수에서 벗어나시라는 말씀까지는 안하겠습니다. 삭제 공지 만큼은 지켜주시겠습니까? 팬페이지에서 삭제가 안되고 있는 모습이 가슴 아픕니다. 정 안되면 저에게도 운영권을 주십시오. 제가 지우겠습니다. 메일을 두번이나 보냈지만 계속 답이 없으시어... 이렇게 지면 상에 실례합니다. 연재란도 잡담으로 지저분해져 있는데 한명뿐인 운영자님이 잠수 중이라 속수무책입니다. 부디 이 글을 읽기 바라며... *이번 화는 김동욱님의 미련한 사랑을 들으며 썼습니다. 한번 그것을 곁들여 봐 보십시오. 느낌이 색다를 겁니다. 전 좋아하는 음악이 생기면(한번 생기면 꽤 오래 간다) 글이 잘 써지더라고요. 그것을 아는 녀석들은(특히 혜사모의 총장, 혜영양) 저를 독촉할때면 좋은 음악 목록을 쫘르륵 곁들여서 한다는; 좋아하는 음악이 두개나 생겼습니다.(한번 생기면 오래 가지만 종류가 많지 않다) 팝송하나와 가요 하나^^ 아아, 기쁩니다. *페르노크가 살인을 하기를 기대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모양입니다. 게다가 실망하실때면 늘 '역시 영혼이 여자라서' 더라구요. 껄껄. 모르시는 말씀. 여자가 더 독합니다. ㅡㅡ 페르노크는 여자, 남자를 떠나서 페르노크일뿐. 그런 말씀은 페르노크라는 녀석을 파악하지 못하셔서 나오는 말입니다. 하기의 비가 한창 내리고 있는 욤. 더위를 움켜쥐고 사라지며 추위를 뿌릴 이 비 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시간이라는 절대 마법이 구현하는 변화 속에 서 그것만은 영원할 듯 하다. 비는 투명하지만 사방을 뿌옇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풍요를 배재한 아릿한 감상을 일으킨다. 그렇게 비란 신기한 존재다. 그것은 하늘의 눈물이지 만, 누구의 마음을 적시느냐에 따라 슬픔의 눈물이 되기도 하고 기쁨의 눈물이 되 기도 한다. 이 경우엔……슬픔일까? 창 밖을 하염없이 보던 파크다의 눈에 씁쓸함이 스친다. 가까운 과거의 자신의 추 태가 생각 난 것이다. 잠시 미쳤던 자신과 그런 자신을 냉정하게 보던 남자. ……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 -똑똑. “네.” 조용히 답하자 문이 열린다. 방금까지의 씁쓸함은 어디로 갔는지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을 만들고 있는 그는 조금은 슬퍼 보인다. 그는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내 도록 훈련을 받았다.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밑에서 컸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의 모 습을 버려야 했다. 언제나 차분해야 했고 냉정하고 과묵해야 했다. 꾹꾹 눌러 삼 킨 자기 자신이 심하게 반항했지만 그것을 무시했다. 그런 그에게 얼마 전의 추태 는 스스로도 놀라운 것이었다. 방에 들어선 이는 예상했던 휴로버 신관이었다. 그는 깨끗한 붕대와 천, 약, 그리 고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침대 가에 있는 테이블에 그것들을 내려놓 은 뒤, 저편 의자 위에 놓여진 대야를 가져다 놓았다. 주전자에 들은 물을 그 안 에 모두 부은 뒤 천을 헹궈, 꾹 짜낸다. “상처를 보세.” 답을 기다리지 않고 상의를 벌렸다. 익숙한 솜씨로 붕대를 풀고 상처 주위를 천으 로 조심스럽게 닦아낸다. 휴로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명에 지장이 될 만 큼 큰 상처를 안고 힘들게 텔레포트 해 온 파크다를 보고도 사정을 묻지 않았고, 깨어난 뒤에 한 번 더 회복 마법을 시전 해야 한다는 것을 거절했을 때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파크다가 하고 싶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파크다는 그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 입을 열어 줄 때까지를. 그 역시 언제까지 입을 다물 생각은 없었다. “테밀시아 경은 확실히 강하더군요.” 휴로버는 상처 주위를 닦던 손을 잠시 멈칫 했을 뿐,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그래도 귀는 열어두고 있었다. “아니.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천을 다시 물에 헹궈, 꾹 짜낸 휴로버는 다시 상처 주위를 꼼꼼하게 닦아냈다. 그 리고는 약을 집어 그 뚜껑을 열었다. 파크다는 손을 들어 그것을 막은 뒤 말했다. “천천히 회복할 시간 따위는 없겠죠. 신성 마법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은 없었지만 뚜껑을 닫는 것으로도 충분히 답이 되었다. 휴로버는 마법을 시전 하기 전에 파크다의 눈을 마주했다. 파크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휴로버 신관님이 옳았습니다. 페르노크는 테밀시아 경의 동생. 아무리 제가 발 악한다 해도 제 동생이 아니었습니다. 전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화를 내고 있었던 겁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테밀시아 경에 대한 질투. 동생, 파랜 일로 나 의 자존심을 짓밟더니 이제는 보복이 두려워 정치권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버린 귀 족에 대한 분노.” 파크다는 좌절이란 게 무엇인지 절실히 느꼈다. 귀족이라지만 그리 높지 않은 계 급을 가지고 있던 그는, 과거에는 능력으로 모든 걸 커버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 해 했었다. 지금 정치를 하고 있는 그 어떤 귀족보다도 잘해나갈 자신 역시 있었 다. 하지만 신분의 한계는 그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낮은 신분 때문 에 동생의 죽음을 보고도 눈과 입, 귀를 닫아야 했고 뻔히 보이는 방해 공작으로 출세가 좌절되었음에도 변변한 반항도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신분만 아니라면, 이라는 자만심 덕이었다. 그것이 무너진 것은 테밀시아 탓이다. 그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 파랜과 닮은 페르노크라는 형제도 능력도 신분도……. 선택받은 인간이란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열등감. 질투. 분노. 그 추잡한 것들이 파크다를 잠시 미치게 했다. 그리고 목숨 을 앗아갈 뻔 했다. 파크다는 훨씬 차분해진 이성으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부끄러 웠다. 대소사를 파악하지 못하고 철없이 굴었다. 사로잡는 즉시 죽였어야 했다. 무언가 를 알아낼 생각도 없으면서 무작정 고문을 가했을 때의 자신은 어딘가 미쳐 있었 다. 그의 도발에 말려들어 방을 비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의 자신은 냉정을 잃 고 있었다. 설마 그 짧은 순간을 틈타 오른 쪽 사슬을 끊어냈을 줄을 몰랐다. 다 시 방에 들어왔을 때 그의 상태를 살폈어야 했다. 그때의 자신은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그에게 마법검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갑자기 나타난 붉은 검을 보았 을 때의 아찔함을 잊을 수 없다. 죽었다 생각한 순간 예전에 구입한 마법 아이템이 작동했다. 신상에 위협이 생기 면 자동으로 지정한 장소나 인물에게 텔레포트 하는 아이템이었다. 파크다는 휴로 버에게 이동하도록 지정했다. 만약 다쳤을 때 신성마법을 시전할 줄 아는 휴로버 에게 가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판단이 파크다의 목숨 을 구해주었다. “저 하나 때문에 이쪽 세력의 존재가 드러나 버렸습니다. 또한 주모자인 저의 존 재 역시 드러나 버렸습니다. 그가 죽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저의 가벼운 입 때문에 많은 정보가 새어나갔습니다. 이 죄를 어찌 갚아야 할지…….” “자네가 정신을 잃은 지 삼일 째지만 아무런 소동도, 소문도 일지 않는 것을 보 면 일단 안심해도 좋을 것 같네. 한숨 돌려도 될 게야.” “그게 더 불안합니다. 그가 이 일을 어떻게 이용하려 들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 다. 제 한계가 느껴집니다.” 휴로버는 더 이상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다. 파크다가 겪은 일들이나 그가 느끼 는 감정들을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지켜보는 것 말고는 어떤 것 도 할 수 없었다. 애써 밝은 얼굴로 파크다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을 뿐이다. 테밀시아의 침묵. 휴로버도 그것이 더욱 불안했다. 파크다의 존재가 확실하게 그 두각을 들어냈음에도 입을 열지 않는 그의 행동. 페르노크의 대역 역시 그 정체 가 드러나 버렸는데도 오르세만 가는 침묵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다. 게다가 불안한 의문점이 남는다.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이쪽 첩자의 존 재가 너무 금방 드러나 버렸다. 테밀시아를 감금하고 있던 장소도 너무 일찍 발각 됐다. 이쪽 정보가 새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쪽 동향이 이미 파악되고 있는 것 인가? 테밀시아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도 불안한 것. 대역의 정체가 진짜에게 걸려들었다는 것. ‘희대의 천 재’ 페르노크의 귀에 들어가 버렸다는 것. 페르노크가 알아차리기 전에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것이 탄로나 버렸다.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옛날 ‘페르 노크’의 모습으로 일부러 바꿔, 진짜 페르노크가 나타났을 때는 그가 거짓인 것 으로 몰아세우려 했는데 그 전에 들켜버렸다. 누구 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 한 진 실은 영원히 묻혀 버리기에 그 날을 고비로 두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아무리 페르노크가 이쪽을 묵인해준다 약조했다 해도 자신의 위치를 탐한 자를 내 버려 둘 리 없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페르노크에게 대역의 배후가 이쪽인 것까 지는 들키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래저래 고민 많은 휴로버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파크다를 보며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완전히 때를 놓치기 전에 최후의 수를 써야 한다. 많은 희생이 따를 수이기에 마지막까지 아껴둔 그 수를. 전면전! 가당치 않다. 그 힘이 전쟁을 통해 많이 줄었다 해도 근위 기사는 막강 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휴첼 역시 마찬가지. 수도 경비를 맡느라 전쟁 참여를 하 지 않은 키텐은 아무런 전력 소모가 없이 그대로 건재하다. 대표적인 이 세 기사 단 말고도 수많은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병력을 무시 할 수는 없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갈아먹어야 한다. 오르세만 가는 실패했다 하지만 가야다 가 가 남았다. 소년에 불과한 가주가 이끌고 있는 이 위태로운 가문. 자하라 가는 무 리다. 계승권을 두고 두 세력이 치밀하게 싸우고 있는 그곳에 공연히 발을 딛었다 가는 본전은커녕 다 잃기 십상이다. 하지만 가야다 가가 남았다. 그러나 정체가 드러나 버렸다. 이대로 여유롭게 시간을 둘 틈이 없다. 단 한번의 실수가 너무나 많은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가장 확률이 적고 가장 위험한, 최악 의 수를 독촉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파크다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저렇 게 자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역모.” 깊이 한숨을 뱉으며 파크다가 말했다. 그리고 질끈 눈을 감는다. 단 한번의 실수 가……. 단 한번의……. * * * 비레오가는 자신의 세력이 급속히 축소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 었다. 그의 적대 세력인 뮤비라의 세력이 일순 확장되어 가고 있으니. 뮤비라는 본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능력은 되지만 신분의 한계 로 출세가 막힌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제피모에서 일약 카르민이 된 뮤비라 는 희망이었고 선구자였다. 더러운 소문을 달고 사던 뮤비라가 결혼하여 자하라 가의 일원이 되었을 때 ‘걸레’라는 호칭은 이미 옛말이 되어버렸다. 남 잘 되 는 꼴을 못 보는 몇몇 사람들 외에는 모두 그 호칭을 잊었다. 진짜 걸레라면 현 가주 중 가장 현명하다는 자하라 가의 가주가 귀한 란을 줄 리 있겠는가. 비레오가는 이를 갈며 카시안을 노려보았다. 본가에 잠시 들렀던 카시안은 그런 비레오가의 모습에 당황한 눈치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다. 남편이 무엇을 노리고 자신과 결혼했는지,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너도 몰랐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비레오가는 가증스럽다는 얼굴로 딱딱하게 되물었다. “그 걸레가 마스터였다는 거 말이다.” 그렇다! 비레오가의 세력이 급격히 축소 된 것, 다른 말로 뮤비라의 세력이 급격 히 늘어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사무 쪽에서 활약하던 뮤비라를 따르던 이 들은 거의 대부분이 학자나 문관이었다. 그는 기사나 무관들에게는 경멸, 혹은 배 척을 받았고, 비레오가가 그런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나 전통 혈족이라는 것 이 귀족 출신의 기사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비레오가는 그것을 백분 활용하여 여태 껏 버텨왔던 것이다. 그 아슬아슬한 세력의 경계가 무너져 버린 것은 며칠 전 테밀시아의 납치 사건 때 였다. 동생과 단 둘이서 구출한 무훈! 게다가 드러난 실력은 놀랍게도 마스터! 그 동안 왜 문 쪽에서만 활약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엄청난 경지! 혈통쯤은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비레오가를 따르던 기사들의 대부분 이 뮤비라의 곁으로 가버렸다. 마스터란 호칭이 가지는 위엄은 그럴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한 말투, 겸손한 태도와 뛰어난 두뇌. 그리고 ‘마스터’! 대체 저 남자의 한계란 어디란 말인가! 마스터는 검기를 다스릴 줄 아는 경지를 뜻한다. 대 제국 욤에서조차 희귀한 마스터는 그까지 포함하여 고작 다섯에 불과 하다. 근위 기사단의 단장, 나이트 뮤린. 휴첼 기사단의 단장, 나이트 테밀시아. 키텐 기사단의 단장, 나이트 사갈. 신전 소속 성기사단의 단장, 타무만. 그리고 이제 그가 포함되었다. 위에 나열된 이들이 증명하듯, 마스터란 한 기사단의 단장 이 되기에 충분한 실력자다. 그런 실력자에게 강자가 따르는 것은 당연지사. 비레 오가는 뭐라 말은 못하고 분만 토하고 있었다. 카시안은 점잖게 찻잔을 내려놓고 타이르듯 말했다. “그 분은 제 부군(夫君) 되십니다. 말을 삼가 해주세요.” 맞는 말이기에 더욱 화가 난다. 비레오가는 억지로 삼키던 차를 거칠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가주 자리를 빼앗긴다. 전부터 그 실 력이 드러나 있다면 어찌 손써보기라도 하련만 이제와 갑자기……. 비레오가의 나이가 이제 서른을 넘어선다. 가주 자리는 최저 서른이 되어야 물려 받을 수 있다. 만약 오르세만 가처럼 가주가 부재중이고 다른 경쟁자가 실종, 혹 은 죽었을 때라면 나이 제한 없이 물려받을 수 있지만 이곳은 사정이 다르다. 뮤 비라의 나이도 얼마 전 생일이 지나 딱 서른이다. 이제 가주 계승에 대한 것이 완 전히 표면에 떠오를 것이다. 이런 시기에 갑작스러운 그의 실력이 드러나 버렸다. 비레오가는 자신을 떠나는 이들을 붙잡을 만한 힘이 없었다. 문 쪽에서는 전에 드러났듯이 뮤비라가 압도적 으로 유능하다. 간신히 무쪽에서 세력을 유지해 왔는데, 그마저도 뮤비라보다 뒤 떨어진다는 것이 이제와 알려져 버렸다. 그렇다고 휘하에 있는 이들에게 과하게 베풀 금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쟁 때 황제의 터무니없는 오해로 겨우 산 비싼 곤크의 병력을 전쟁에 파병해 버렸다. 그 때 거의 대부분의 자금을 털려버린 것이다.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치가 떨린 다. 그 수전노, 찰거머리, 악덕상인 녀석! 곤크의 부관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 떡 일어나 고함을 질러 버린다. 다시는 곤크와 연을 맺지 않으리라 이를 갈면서. “이대로는 두 눈 멀쩡히 뜨고 뺏길 거야.” 도대체 왜 이런 고민을 자신이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현 가주의 아들이자, 계 승권자 중에서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던 라인 자신이 고작 데릴사위에 불과한 뮤비 라에게 밀려나 이렇게 전전긍긍해야 하는 현실이라니. 이를 갈던 비레오가는 발길을 돌렸다. 뮤비라와 대립할 필요가 뭐에 있을까. 가주 를 정하는 것은 현 가주인 아버지다. 자하라 수 장 카르민. 현 자하라 가의 가주이자 당대 가주 중 가장 현명하다 꼽히 는 인물. 뮤비라를 직접 사위로 끌어들였으며 가주 계승권 싸움이 한창인데도 방 관하고 있는 속모를 남자. 비레오가는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는 아들인 그에게조차 냉정했다. 사랑 받는다 는 느낌이라곤 한줌도 없었다. 어머니에게도 그가 태어나자마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귀족의 정략결혼이 어떤 것인지 냉혹하게 알려주었다. 그의 친 누 나인 마린나사에게도 딸에게 보내는 애정 따윈 없었다. 황제의 누이인 어머니의 첫 아이, 마린나사에게 무용지물이나 다를 바 없는 황실 계승권이 넘어갔지만 그 뿐이었다. 마린나사는 아무런 이득도 없이 무의미하게 오르세만 가로 시집가 버렸 다. 계승권조차 남편에게 넘긴 채. 하지만 아버지지 않은가. 아무리 현명하다 해도, 아무리 냉혹하다 해도 혈연만큼 은 사라지지 않는다. 생판 남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비레오가는 그것을 두고 아버지에게 매달려 볼 생각이었다. -똑똑. 언제나 긴장되는 순간. 얼굴에 만연한 미소와는 달리 냉혹한 그 눈동자를 보자면 숨이 멎을 것 같다. 벌써 쉰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저 젊은 얼굴이라니. 특히 눈동자는 나이가 가져다주는 둥글 뭉실한 부드러움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자애 나 자비와는 다른 냉철한 이지의 눈빛. 보면 볼수록 소름 돋는다. 아아, 왜 이곳 에 왔던가. “무슨 일이냐?” 사무적인 목소리. 가슴 깊숙이 울컥하는 감정이 솟는다. 저런 분이셨다. 불쌍한 어머니. 저런 아버지에게 한눈에 반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일생을 희생하셨다. 아버지만큼의 사랑을 자식들에게 베풀며 한 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아 버지만을 보셨다. “가주는 누구에게 물려주실 생각이십니까?” “…….” 울컥하는 마음에 전후 사정 이야기 없이 내뱉었다. 아버지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으시리라. 예상했던 대로 일절 반문 없이 그 소름끼치는 차가운 눈으로 보고만 있다. 더 말할게 있으면 마저 하라는 뜻이다. “알고 있으실 테죠? 이번에 저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제 세력의 태반이 넘어가 버렸고 축척해두었던 금력 역시 황제의 오해로 날려버렸습니다. 이제 어쩌실 겁니 까? 2년 동안 따로 첩도 들이지 않아 후계자도 없는, 남자에게 길들여진 걸레 따 위에게 넘겨주시렵니까?” “사실무근이다.” “……?” “뮤비라가 남자에게 길들여졌다는 말이나 걸레라는 말.”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발끈한 비네오가가 소리를 치자 자하라 가주는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 다. “그게 아니면 무엇이었지? 방금 그러지 않았나? ‘남자에게 길들여진 걸레 따 위’에게 가문을 넘길 생각이냐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니, 뮤비라도 자격이 충분한 게 아니냐?” “…….” 비네오가는 침묵하며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언제나 저런 식이다. 자식을 자식으 로 보지 않는다. 가주 계승권자에 들어선 것도 어머니의 투자 하에 검술을 단련시 켰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었다면 문 쪽에서 뮤비라에게 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금에 쪼들려 세력을 유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 니, 애당초 뮤비라 따위가 가주 자리를 넘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째서 저희를 낳은 겁니까?” “……?” 이번만큼은 자하라 가주로서도 영문 모를 질문인 모양이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 을 보는 아버지에게 비네오가는 원망스러운 마음을 담아 말했다. “자식으로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왜 낳은 겁니까? 아내로 대접하지도 않을 거면 서 왜 결혼 한 겁니까? 왜요!?” 자하라 가주는 차분한 눈으로 비네오가를 바라보았다. 왜냐고……. “네가 자식에게 그런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부모가 강요하는 결혼 따윈 하지 말 고 사랑하는 사람과 해라.” “……무, 무슨?”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직접 입으로 들은 것은 처음이다. 무엇 보다도 아버지에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면 자식을 낳지 말아라. 그래, 뮤비라나 테밀시아나 너와 같은 아이를 만들 지 않기 위해 후계자를 안 가지는 거겠지. 나에겐 그들이 부럽기만 하다. 후계자 만 낳으면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네 어미와 합궁한 나에 비하면 얼마나 강한 이들이냐.” “…….” 듣고 싶지 않았다. 저 눈에 냉혹 말고 또 다른 감정이 섞이길 빌긴 했지만 다른 이를 그리워하는 저런 눈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자식으로 서 사랑을 받고 싶었다. 꾹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핏방울이 식도를 치밀고 들어가 는 게 느껴졌다. 짭짤한 피 맛이 쓰게 혀를 감쌌다. 입안이 너무 썼다. -쾅! 자하라 가주는 굳게 닫힌 문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사랑하지 않는다. 피를 이 어받은 자식이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이 저주받은 피를 이어받은 생명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 녀석은 모를 것이다. 아니 알아서는 안 된다. 그가 라였던 당시, 마였던 녀석이 얼굴이 떠올려진다. 증오스러운 얼굴. 나 다……. 현 자하라 가주의 부모는 인정받지 못한 귀족이었다. 덕분에 인정받지 못한 귀족 의 수치스런 삶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가주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가주자리를 포기하고서라도 차지하고 싶었던 여자가 있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 에 당혹감이 서릴 때의 사랑스러움이 아직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지켜주지 못했다.” 자하라 가주는, 아니 수는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절절함이여. 아직도 숨쉬고 있는 그리움이여. 아아, 이라반……. “나의 영원…….” 냉정을 가장한 가면이 부서지며 애통함의 눈물이 쏟아진다. 밖으로 나온 비네오가는 마구 잡이로 뛰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 다. 자신이 가장 부러웠던 것이 아버지와 사냥 가는 친구들이었다면 웃을까? 아버 지와 함께 농을 주고받으며 웃는 제피모마저 부러웠다. 가주가 될 정도로 성장하 면 돌아볼 줄 알았다. 어리광을 부려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시선. 가끔은 그 눈빛에 증오마저 어린다. ‘아내를 사랑하든 말든 절대로 자식만은 사랑하겠어! 절대로!’ 절대 저런 아버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막 코너를 돌던 순간이었다. -퍽! “윽…….” 누군가와 부딪쳐 뒤로 넘어진 비네오가는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계속 앉아 있는 게 더 창피한 일이 아닌가. 앞을 제대로 못 봐서 생긴 일인 것을. 비네오가 는 자신과 부딪친 사람에게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가 누군지 알기 전에는 분명 사 과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어지지 않았다. 뮤비라다. 굳어 있는 비네오가를 한번 올려본 뮤비라는 쏟아진 서류를 챙기며 일어났다. 비 네오가는 계속 딱딱한 얼굴로 그런 뮤비라를 주시했다. 아버지의 말이 그의 귓가 에 크게 울렸다. -뮤비라나 테밀시아나 너와 같은 아이를 만들지 않기 위해 후계자를 안 가지는 거겠지. 나에겐 그들이 부럽기만 하다. 비네오가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싶었을 때, 뮤비라의 멱살을 쥐고 밀어뜨리고 있 었다. 주워들던 서류를 죄다 떨어뜨리며 뒤로 넘어진 뮤비라의 몸에 올라 거칠게 소리쳤다. “난 너희같이 안 살 거다!” 무슨 소리인가? 뮤비라는 비네오가의 충혈 된 눈을 마주하며 어리둥절해 했다, “난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도 않을 거다! 더 이상 주위에 휩쓸리지도 않을 거 다! 자식을 많이 낳아서 많이 사랑하고 살 거다!” 어찌 들으면 유치한 말.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뮤비라의 가슴을 파고드는 말이었 다. 이미 각오한 일들이지만 타인의 입에서 들으니 새삼 아프다. 흔들리는 뮤비라의 눈동자를 마주 보던 비네오가는 그의 멱살을 잡아 당겨 좀더 눈을 가까이 한 뒤 외쳤다. 이 가증스러운 자의 눈을 기억하리라. 아버지와 같은 길을 향하고 있지만 다른 방법으로 걷고 있는 이 자의 눈을. 그리고 절대 이렇게 되지 않으리라. “절대로! 절대로 너희 같은 삶은 살지 않을 거다!” 마치 추악한 무언가를 만진 것처럼 옷자락을 뿌리친 비네오가는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나 한결 침착해진 발걸음으로 걸었다. 절대 저렇게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리라. 뮤비라는 구겨진 옷자락을 천천히 두들겨 폈다. 그리고 사방으로 쏟아진 서류를 주었다. 그 얼굴은 무표정했다. 비록 그 눈은 힘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 낯은 창백하게 질려 있지만 꾹 악물고 있는 입술만을 붉었다. 각오했던 일이다. 모두가 석녀라는 걸 알고 있는 카시안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첩조차 들이지 않았 던 그다. 주위에서 카시안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라 보기도 하고 남자에게 길들여져서 그런다고 수군대기도 한다. 상관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 말하던 상관 하지 않는다. 그의 주인이 가만히 있는데 타인의 소음 따위를 신경 쓸 성 싶은 가. ‘자식’은 요크노민으로 족하다. 아버지처럼 사랑 없이 자식을 키우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함께 낳은 아이를 ‘자식’이라 생각할 자 신도 없다. 그러니 애당초 자식을 낳지 않는다. 그것이 유일한 양심이다. 뮤비라는 깊이 숨을 들이 쉬었다. 상관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 하나의 사건을 꼭 그때 그때 설명하고 열거하고 꼼꼼히 되짚을 필요는 없지요. 이렇게 조금 시간이 흐른뒤 다른 사람의 시야로 재해석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사건이 미치는 영향들을 설명할때 되짚을 수도 있는 겁니다. 다 글 쓰는 사람 나름 아니겠습니까?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아해의 장은 '장편' 소설이라는 겁니다. 요크노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 꾹 눌러가며 걸음을 놀렸다. 테밀시아의 실종이 납치로 들어나고, 그가 여태껏 감시해왔던 세력의 움직임이 활성화 되면서 그는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요크노민이라는 삼류 귀족과 민이라 는 레타 마스터의 생활을 각기 살면서 더더욱 그의 피로는 누적되어가고 있었다. 삼류라지만 여자들에게 인기였던 그는 빈번히 연회에 초대되었고 대외적으론 백수 였던 지라 거절할 명분이 없어 억지로 참여해야했다. 그나마 출석만 하고 대충 빠 져나오는 데다 시간이 상당수 잡아먹히는데다가 형과의 긴밀한 의논, 이제는 서로 간의 교류를 시작한 휜과의 대면, 레타 마스터로서의 사무에다가 그 세력의 감시 및 키르바나와의 상담을 합하면 제그와 카나의 결혼 문제, 딜린의 부재에 따른 일 행의 안목을 속이는 문제, 이번에 아이를 가진 슈의 투정에 푹 빠져 사는 산 덕분 에 생기는 부차적인 공백 문제 등은 제외하더라도 몸이 버텨낼 수 있는 한계를 훨 씬 벗어나고 있었다. “휴우…….” 현재 요크노민에게 있어 쉴 수 있는 곳은 제그와 키르바나의 은신처뿐이었다. 그나마도 오래 못 있지만 그는 이곳만큼은 하루에 한번씩 꼭 들렸다. 육체적 피로 보다는 정신적 피로가 심했기에 이렇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이 꼭 필요했 던 것이다. 아니면 보통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무의 양에 눌려 과로사 했을 지도 모른다. 씁쓰름한 맛의 차, 화림을 홀짝이며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댔다. 키르바나는 그런 그의 심정을 알겠다는 미소를 슬쩍 짓고 있었지만 얄미워 보일 뿐이었다. 적어도 여유롭게 군것질을 하며 보일 미소는 아닌 것이다. 딱딱한 가면을 벗어 테이블 위 에 올려놓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딱 한 시간만 잤으면 소원이 없다고 몸부림치는 본능을 억누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아직은 느려요. 그러나 곧 태풍이 되어 몰려올 겁니다.” “아아, ‘곧’이 아니면 곤란해. 더 늦으면 난 분명 과로사 해버리고 말거야.” 농담이면서도 농담이 아니었다. 다시 화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뒷맛이 좋은 화림 은 너무 쓰지도, 달지도 않으면서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어 준다. 요크노민은 바 로 그 개운함에 피로를 조금이나마 씻어내려 하고 있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예지력이 없는 나도 그건 알 수 있어.” 단지 몸이 안 따라 줄 뿐이지. 쓰게 웃으며 화림을 한꺼번에 꿀꺽꿀꺽 삼켰다. 어 느 정도 식었기 때문에 혀와 입천장이 데이는 불상사는 없었다. 잔을 탁 내려놓으 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만 더 이 곳에 있는 다면 분명 자고 싶다는 본능 이 이겨버릴 것이다. “오늘 일만 제대로 끝내면 조금은 잘 수 있겠지.” 참으로 가여운 말을 중얼거리며 이공간 밖으로 나가는 요크노민이었다. 반쯤 내리 뜬 청자색의 눈동자는 언제나 오만하고 입 꼬리가 교묘히 올라간 입매는 색기가 흐른다. 작고 가는 몸은 꼭 끌어 안아주고 싶을 만큼 연약하지만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가시를 감당할 수는 없다. 휘란. 휜이라 불리는 존재. 나무 위에 기대 창문 안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 다. 분명 그의 기척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자신의 사무에 집중하고 있는 청년이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휜이 알아차리길 원치 않기 에 저렇게 외면하고 있다는 것쯤은. “바보 녀석.” 파만 루카다 라 자르카. 확실한 가주 후계자였던 그가 가주 계승권을 포기했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파만 가는 수도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다섯 가문의 하나였다. 수도에 저택을 가지 고 있는 것은 귀족의 긍지와 자부심이다. 귀족의 수가 전체 인구에 비해 적다고 는 하나, 수도의 면적은 그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좁다. 때문에 수도 에 저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카르민이나 세력가의 자르카 정도였다. 그렇기에 ‘수도에 저택을 가진다’의 의미는 상당히 컸다. 현재 수도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것 가문은, 세 카르민인 오르세만, 자하라, 가야다. 그리고 세력을 떨치고 있는, 자르카인 파만, 세미트. 이렇게 다섯에 불과하다. 카르민은 둘째치고서라도 자르카이면서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수도에 저택을 가진 두 자르카의 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파만 가의 위세는 한 수 위였다. 바로 그 파만 가의 가주 자리를 포기 한 것이다. -원래 흥미 없던 자리니까요. 그딴 바보 같은 소리를 누가 믿을까. 몇 년 동안이나 암살 기도에 시달려 왔으면 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자리가 아니던가. 인정받지 못하는 귀족은 카와 하 등급 암 살 목록에 삭제된다. 귀족들뿐 아니라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암살자 에게마저 대접 받지 못하는 그런 하류 집단에 스스로 파고 든 것이다. 그것도 유 력한 가주 계승권자였던 그가! 파만 가의 집안 계보는 여느 귀족가가 그러하듯 복잡했다. 특히 파만 가의 가주 가 재혼을 함으로서 그 복잡성은 한결 더해졌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 복잡한 양 상을 피하고자 새 여자를 들인다 해도 첩에 앉힐 뿐인데, 어째서인지 그는 죽은 본처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때문에 본처 사이에서 난 자식과 후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이 치열하게 자주자리를 놓고 다투는 현실이 만들어져 버렸다. 그 와중에 더한 혼란을 준 것은 아버지의 태도였다. 전처가 죽었을 때, 둘 사이 의 단 하나뿐인 소생인 아들에게 가주 계승권의 라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가주 계승권은 그런 식으로 오가면 안 되는 것임에도 그는 그렇게 했고, 그것이 얼마 나 자식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지 생각 하지 못했다. 능력으로 가름되어야 할 계승권이 전처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넘어가버리자 그 의 또 다른 아들들의 반발은 당연히 거셌다. 누구보다도 그의 후처가 가장 분노했 다. 능력으로 나뉜 가주 계승권의 상하위는 경쟁함으로서 극복할 수 있지만 혈연 으로 나뉜 상하위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암살이었다. 능력으로 억누르고 싶어도 애당초 능력 때문에 밀린 게 아니니 불가 피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방관자였다. 아니,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루카다는 혼자서 버텨내야 했다. 버티지 못하면 죽음이라는 다정한 손길이 그를 잡아 끌 것이기에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버텨온 자리인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쉽게 내팽개치다니. 루카다가 파만의 성을 버렸다는 말을 했을 때, 휜이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바보.” “하하.”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속셈씩이나……. 그냥 함께 있고 싶은 것뿐이라니까요.” “하아…….” 휜은 퉁명한 목소리로 좀더 자세한 답을 요구했다. 루카다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 리를 쓸어 올렸다. 땀에 젖은 머리가 자꾸 볼에 달라붙어 신경에 거슬렸던 것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 것도. 그냥 당신을 보고 있었어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음……. 가문을 만들 거라면서요.” “……?”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기를 끝내는 빗소리가 시원하게 주위를 덮고 있는 밤이었다. 둘은 서로의 체온 을 느끼고 있었다. 루카다의 뜬금없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아침까지 그랬을 것이 다. 루카다의 답에 휜은 침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곡선의 실루엣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가는 몸뚱이에 걸맞 은 아담한 가슴과 한손에 들어올 듯한 얇은 허리, 그리고 엉덩이 라인에서 발끝까 지 매력적인 선의 미를 만들어 내는 다리.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 옆의 라이트 구가 켜졌다. 희미하게 보였던 실루엣이 매력적인 자태를 빛의 조명 하에 드러냈다. 가슴을 살짝 덮는 청자색 머리카락과 차가운 듯 미소 짓고 있는 청자색 눈동자가 시야를 자극했다. 침대에 누워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루카다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러다 추궁할 듯 눈을 부리는 연인의 모습에 상체를 일으켰다. 작은 몸뚱이임에도 요염한 미를 자랑하는 휜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 평범했다. 얼굴 생김, 생김을 조목조목 따져보 아도 그랬다. 코도 그랬고 입도 그랬다. 단지 그의 눈만이 영악하게 빛나고 있었 을 뿐이다. 그마저도 지금은 온기와 사랑으로 변해있었지만 말이다. “루카다.” “예.” 휜은 고집스러운 눈으로 루카다를 올려보았다. 청자색 눈동자는 언제나 자극적이 었고 동시에 포근했다. “넌 바보다.” “그래도 좋습니다, 휜.” 그랬다. 휜은 여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휘란은 여자였고, 휜은 남장한 휘란이었 다. 휜은 그렇게 자신을 구별해 놓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세란이 그녀에게 남긴 또 하나의 상처였다. 아이세란은 그녀로 하여금 여자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 었다. 그래야 ‘열쇠’를 못 만들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열쇠란 자신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 여자로서의 자신이 부정된 휜이 누군가를 믿을 수 있을까? 자기 자 신을 사랑하는 자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을 믿는 자만이 타인 을 믿을 수 있다. 물론 여자로서의 자신이 부정된 상태에서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로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부정된 자’로 서 여자를 사랑하는 관계가 진정한 관계라 할 수 있을까? 휜은 그렇게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태,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 아이세란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깊이 패인 골을 스스로의 힘으로 채우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그들의 종족에게 ‘열쇠’라 필요 한 것이다. 겨우 되찾은 자유에 기뻐하면서도 깊게 파인 골이 주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휜이 만난 것은 테밀시아라는 이상한 귀족이었다. 그는 휜을 그 존재 그 자체로 서 보아주었고 인정해 주었다. 그것이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미치기 직전 이었던 휜을 구해주었다. 테밀시아가 칭찬을 해줄 때면 기뻤다. 아버지처럼 여겨졌던 할아버지를 닮은 남자. 휜에게 있어 테밀시아는 또 하나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테밀시아는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휜을 기꺼이 받아주었 다. 그 역시도 두 동생을 각기 다른 이유로 잃고 외로웠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 은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는 관계. 믿지만 자기보다 믿지는 않는 관계. 테밀시아 는 휜의 ‘열쇠’가 아니었다. 루카다를 만났다. 이 녀석은 테밀시아보다도 이상했다. 너무나 따뜻한 웃음을 지 어주었고 마주보면 공연히 가슴이 설레이는 눈빛을 보여주었다. 동생으로서도 아 니고 친구로서도 아닌 호의. 휜에게는 낯선 그의 호의는 언제나 색다른 느낌을 선 사해 주었다. 암살자에게 당하면서도 생글거리기만 하는 녀석의 낯짝을 보고나서 야 알 수 있었다. 아, 난 이 녀석이 좋은 거구나. 테밀시아와 휜만의 비밀. 휜은 휘란, 휘란은 여자라는 것. 테밀시아는 그 비밀을 충실히 지켜주었다. 루카다가 이 사실을 알았던 것은 휜이 자신의 입으로 말을 했 을 때였다. 다른 일에는 예민하면서 이쪽으로는 둔한 남자. 아니, 그보다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봐야할까? 그때야 휜은 깨달았다. 루카다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 한다는 것을. 여자라는 것을 모르면서도 그렇게 한결같이 지켜 주려 했다는 것 을. 골이 메워진다. 고통이 사라진다. 휜은 처음으로 울었다. 그녀에게 이성이라는 것 이 생겼을 때 이후로 처음으로. 기쁘게, 서럽게 울었다. 루카다는 아무 것도 묻 지 않고 휜의 곁을 지켜주었다. 껴안거나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거나 하지도 않 고 그냥 옆에 앉아서. 그렇게 그는 한없이 순수하게 휜을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행복합니다.” “자르카야. 파만 가라고.” “사랑합니다.” “……바보 녀석.” 루카다는 생긋 웃기만 했다. “바빠지겠는데요.” 휜은 얼굴을 천천히 루카다의 어깨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바보 녀석.” 언젠가 뮤비라와 요크노민이 거론했던, 레타에서 휜을 따라 나간 백에 가까운 인 원들. 테밀시아는 그들의 거처만을 마련해 주었을 뿐 그것에 대한 권위를 내세우 려하지는 않았다. 휜이라는 주군을 따라 나온 자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이 미칠 리 도 없을 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휜이 제일 먼저 그들에게 내린 명령은, 백 명의 피를 한 방울씩 떨어뜨려 모은 대 접을 나눠 마시는 일이었다. 그녀는 단 한명도 빠지지 않게 세심하게 그 일을 했 다. 그리고 나서 한 말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가족이다. 피가 섞인 가족. 우리는 우리만의 가문을 만들 것이다. 물론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가문이 평범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다. 우리는 가주를 만들 것이다. 초대 가주는 나다. 나의 밑으로는 타 가문들처 럼 능력에 따라 계승권자를 만들어 유지해 갈 것이다. 하지만 타 가문들처럼 반목 하지 말아라. 다투지 말아라. 시기 하지 말아라. 우리는 뭉쳐야 한다. 그곳을 어 떤 심정으로 빠져나왔는지 평생 잊지 말아라.” 가족! 술렁이는 이들의 마음을 휜은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거의 다 암살자 출신이다. 암살자이면서 가족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휜에게 매 료된 이들은 모두가 외톨이였다. 가족이 생기는 것이다! 그들의 가문의 이름은 ‘씬’. 휜은 스스로의 이름을 휘란 장 씬이라 밝혔고, 그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겨우 숨을 내쉬는 가문. 하지만 곧 이름을 떨칠 수 있 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만한 힘과 능력, 그리고 재력을 갖추고 있기에. 특히 가 장 중요한 ‘배경’도 준비되어 있다.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이라는 절대 권력자의 ‘뒷배’가 말이다. 씬이 세상에 공개 된 날은 그들이 창립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 일이지만, 그들의 활약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가주인 휜이 테밀시아에게 무릎을 꿇고 손목을 그 었을 때부터. “저, 휘란 장 씬이 당신을 나의 마스터로 섬기길 청합니다.” 씬이 하나의 가문이면서 사회에 통용되는 계층과는 다른 또 하나의 계층으로, ‘성’이자 ‘신분’이 되는 단어로, 그리고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매 우 독특한 가문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멀지 않는 미래였다. “같이 시작해요. 같이 걸어가요. 그게 제 행복입니다.” “쳇.” 그렇게 말하면 이쪽에서는 할말이 없지 않냐고 투덜대는 휜에게 루카다는 그저 웃 어 보이기만 했다. 행복하다, 무서울 정도로. 절대 놓치고 싶지 않는 행복감. 휜 은 바보라 하지만 계산이 빠른 것뿐이다. 가주 자리를 맡으면 휜의 옆에 있을 수 없다. 휜의 옆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 행복하게 살고 싶기에 나온 것이다. 계 산이 빠르고 행동이 빠른 것일 뿐. 루카다는 절대 바보가 아니었다. 그냥 연인 앞 에서는 벌어지는 입을 감당 못하는 팔불출 일 뿐이다. “바보 녀석.” 그때의 일이 머리 속을 헤집던 상태에서 벗어난 휜은 낮게 투덜대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루카다가 저토록 정신없이 바쁜 것은 그의 덕도 있었다. 지금 루카다 는 테밀시아의 보좌관뿐 아니라 씬의 총관역도 겸임하고 있는 것이다. 안돼 보여 하나만 선택하면 되지 않냐고 말해보았지만 루카다는 묘하게 미소 지었다. 새로 운 도미노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지만, 만들던 도미노가 차곡차곡 쓰러져 완성되 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는 답을 하면서 말이다. 역시, 바보다. 휜은 중얼댔 다. 그는 훗날 역사에서 그 ‘바보’가 없었다면 씬 역시 없었을 것이라 평하게 되리란 것을 알까? “그럼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갈까.” 한손에 들린 책을 힐끔 본 휜은 짜증난다는 얼굴을 지어보였다. 휜이 독서할 자리로 결정한 곳은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 쬐이는 잔디밭이었다. 옆 에 큰 나무도 있어서 눈이 부실 때는 그늘에서 쉴 수도 있는 곳이었다. 용케 이 런 곳을 찾았다 싶을 정도로 명당인 곳. 하지만 휜의 얼굴을 밝지 않았다. 원치 않는 독서, 아니 공부를 강요당하고 있는데 밝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방금까지 보고 온 루카다의 바쁜 모습을 보면서 다른 짓을 하고 놀 수는 없는 노 릇이기에 어거지로 책을 펼쳐들었다. 한 5분이나 봤을까? 휜은 멀찍이서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깊은 관심 을 보이며 그를 살폈다. 무슨 건수가 없나 하는,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의 눈동자 로. 그러다 씨익 웃고는 뒹굴던 자세 그대로 한손을 들어보였다. 반갑고도 반갑게 도 그가 알고, 그에게 볼일이 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왔어?” 휜의 인사말을 들으며 요크노민은 공연히 울화가 치밀었다. 저 한가로운 모습이라 니! 분명 새로 가문을 만들어 바쁠 텐데 어째서 저 사람은 저리도 태평하단 말인 가!? 물론 뭔가를 보고는 있지만 저건 한 가문의 가주가 처리할만한 서류량이 아 니다. 아직 가주가 아닌 테밀시아님조차도 천장을 찌를 듯한 서류 속에 묻혀 살 지 않던가? 가까이 다가가, 휜이 보고 있던 것이 무언지 알게 된 요크노민은 한대 패주고 싶 은 충동에 주먹을 꾹 쥐었다. 휜이 보고 있던 것은 예법서였다. 그것도 기초 예법 서. 그런 그의 분위기를 눈치 챈 것일까? 의아한 얼굴로 요크노민을 살펴본다. 가볍 게 헛기침을 하여 이성을 되찾은 요크노민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예의상 의 안부를 주고받을 만큼 먼 사이가 아니었다. “교육을 부탁한 녀석을 찾으러 왔다.” “아아, 그 녀석.” 휜은 부드럽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매끄러운 동작. ‘자리에서 일어선다’ 라는 사소한 동작 하나 만으로도 그가 일신에 담고 있는 암살술이 어 느 정도인가를 짐작케 해주었다. 요크노민이 무의식중에 탄성을 질렀을 정도다. 앞서 가는 휜의 뒤를 쫓아가던 요크노민은 자꾸만 그의 손에 들린 기초 예법서가 눈에 밟혀 기어이 입을 열고 말았다. “그 책은 뭐지?” “응?” “갑자기 웬 예법서? 책을 볼 여유가 있다니 좋겠군.” 결국 비아냥거리고 마는 요크노민이었다. 휜의 얼굴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후후후…….” 순간 우둑하며 두꺼운 책 표지의 일부분이 움푹 들어갔다. 뭔가 한이 맺힌 모습이 다. 요크노민이 듣든 말든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는 휜은 상당히 쌓인 듯 보였다. “루카다가 가문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난 능력 외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며 기초 부터 배우라고 책을 한 무더기 갖다 주더군. 좋아, 좋다고. 나도 인정해. 모르면 배워야지 어쩌겠어. 이제 나한테도 딸린 식구들이 있는데 지금처럼 무책임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지. 기초 예법서, 기초 신학서, 기초 역사서, 기초 지리서, 기초 수학서, 기초 병법서, 기초 마법서, 기초……후후. 그 정도는 나도 이해해. 그런데 왜 기초가 달린 건 다 가지고 왔냔 말이야! 기초 문법서, 기초 요리서, 기 초 제봉서, 기초 제초술, 기초……. 그걸 다 못 읽으면 얼굴 볼 생각은 하지도 말 라고 해서 죽어라 읽었더니 이제는 외워보라고……후후후.” 확실히 ‘기초’가 붙으면 무차별적으로 가져 온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는 기초 연애학이라는, 잡지책도 있을 정도였다. 요크노민은 안쓰러운 얼굴로 휜을 보았 다. 루카다로서도 할 말이 있었다. 앞서 휜이 나열했던 기초 예법서, 기초 신학서, 기 초……등등은 이므르에서 제일 저학년이 보는 책이다. 굳이 학교에 나오지 않더라 도 기본 소양으로 부유한 제피모들은 자식에게 읽히는 책인 것이다. 그것을 한 가 문의 가주가 모른데서야 체면이 서겠는가. 그 뒤로 나열되는 뭔가 어긋나는 기초 문법서, 기초 요리서……등등은 휜에게 맞 춘 책들이다. 가주가 되면 이래저래 편지 쓸 일이 많아지다. 그것도 친서로 말이 다. 그런데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을 써서야 되겠는가? 요리서는 그로서도 필사적 인 일이었다. 일전에 휜이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스프를 만들어 그에게 먹였다가 식중독으로 실신 직전까지 몰고 갔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무엇보다 도 휜이 아직 요리에 흥미를 지우지 못한 마당에야 생명이 걸린 일이기도 한 것이 다. 제봉서는 옷감으로 재단하여 옷을 만드는 것을 바라고준 책이 아니었다. 찢어 진 옷을 제 손으로 꿸 수 있길 바라고준 책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세상에 바늘과 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옷이 찢어졌을 때, 접착제 로 다른 천을 붙여 대충 입는 불상사는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제초술. 그것 도 별거 아니었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또 루카다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그가 취미 삼아 기르던 화단의 잡초를 뽑는답시고 귀한 약재가 되는 꽃을 몽땅 뽑아버리는 일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적어도 몸에 향이 묻는다는 이유로, 좀 다르게 설명 하자면 일할 때 덜미가 잡힌다는 이유로 꽃을 방해물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것만은 고쳐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설명하자면 기초 연애학. 그것은 여성으로 서의 자신을 부정당했던 휜으로 하여금 보편적인 세상의 연애가 어떤 것인지 알려 주고 싶은 연인으로서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물론 그 책에서 쓰여져 있는 것처럼 애교나 내숭을 떠는 휜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런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으면 했을 뿐이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어색해 하는 휜에게 필요한 것이 라 생각했던 것이다. 뒤의 잡스러운 책들까지 외우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한번 읽는 것으로 족했다. 루카다가 원한 ‘외울 책’들은 앞서 거론한 정말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소양들이었던 것이다. 예법서는 그중에서도 중요했다. 그것은 가주가 된 이상 고 급까지 완수해야 한다. 어차피 지금 가문을 이끄는데 필요한 것은 암살술이 아니 기에 이 짬에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치라는 것인데 이런 공부가 익숙하지 않은 휜 은 짜증만 냈다. ……뭐, 자기가 아무리 짜증을 내봐야 결국 루카다가 시키는 대로 할 휜이었지만 말이다. 천재라 불리는 루카다에게 기초학도 못 뗀 휜이 어떻게 반항할 수 있겠는 가. 게다가 자기만의 해결 방법인 ‘조정’능력과 ‘암살’능력을 사용할 수 없 는 대상인 데야. ========================================================================== 잠수 했냐고요? 아닙니다. 단지 이 부분을 쓰는데 일주일이 걸렸을뿐. 죽을 맛이었지요. 후후후.... 둘이 도착한 곳은 루카다의 처소였다. 테밀시아의 바로 옆에 있는 아담한 건물은 아직도 사람의 출입이 금해 있는 곳이었다. 루카다의 처소는 테밀시아와 5분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것을 두고 형님이 은연중에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요크노민은 좀더 걸어야 하는 수고가 달갑기만 했다. 책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즐거운지 가볍게 걸어가고 있는 휜을 잠시 보았다. 처음 이미지가 굳어서 소년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다르게 보면 여 자 같기도 하다. 아이세란에게 질려 청자색에 거부감이 일긴 하지만 휜의 것은 느 낌이 달랐다.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안 것은 레타 사잔 아나의 날에 만났을 때였 다. 요크노민이 알아 본 것이 아니라, 불칸이 알려준 것이다. 뭐, 별로 상관은 없 지만 말이다. “책을 읽고 기본 소양을 쌓는 것도 좋지만 가주로서의 사무들은 어떻게 감당하 고 있는 거지?” 일복이 쌓이다 못해 범람하고 있는 요크노민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무 슨 수를 썼길래 저렇게 한가한 것인지. ……이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요 크노민의 한계에 달한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얼마든지 머리를 굴려 루카다라는 존재를 기억해 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휜은 눅눅 한 피로감을 뿜어내는 그를 다소 질린 눈으로 보다가 걸음을 재촉했다. 차마 저 런 상태의 요크노민에게 루카다라는 유능한 관리자가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요크노민은 루카다의 거처에 도착하자 자신의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산처 럼 쌓여 있는 서류를 빠른 속도로 무찌르고 있는 루카다의 모습이 바로 그 답이었 다. 이골이 났는지 읽는 건 분명 정독인데 넘겨지는 속도는 엄청났다. 순간 테밀 시아와 휜이 몹시 부러워지는 요크노민이었다. “방해하게 되서 죄송합니다만 부탁한 녀석을 찾으러 왔습니다.” “아아. 그 녀석 말입니까? 어디에 뒀더라.” 대답은 금방 흘러나왔지만, 읽던 서류를 끝까지 읽고 서명을 한 다음에야 제대로 된 답을 주었다. 루카다의 상황 대처 능력을 일면이나마 볼 수 있었다. “이리저리 관리하기 귀찮아서 음식하고 같이 지하에 감금해 놨습니다. 제 거처 가 그나마 경계를 덜 받는 곳이라 이 건물의 지하에 있습니다. 열쇠는…….” 주머니를 뒤져 작은 구리 열쇠를 꺼내 휙 던지는 루카다였다. 미묘한 균형을 유지 하며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서류 속에서 잘못 움직였다간 매몰되기 십상인지라 다 소 예의에 어긋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또 요크노민이 그런 것에 신경 쓸 위인 도 아니었고 말이다. 휜은 루카다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얼른 선수 쳤다. 언제고 읽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잠시라도 놀고 싶은 것은 별 수 없는 본능인 것이다. “내가 안내해줄게! 녀석 교육 상태도 확인 할 겸 말이야!” “휘란.” “알았어, 알았다니까. 할거야, 할거라고. 하지만 이 일이 더 중요하잖아? 이거 먼저 해결하고 난 다음에 할게.” 애칭이 아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당한 위협이 되곤 한다. 특히 루카다처럼 묘 한데서 딱 부러진 경우에는 더하다. 휜은 얼른 말을 늘여 놓고 요크노민을 문 밖 으로 밀고 나갔다. 루카다가 뒤에서 피식 웃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말이 다. 루카다가 거주하는 저택의 지하는, 페르노크의 본가에 있던 지하처럼 어둡고 칙칙 하지 않았다. 라이트가 곳곳에 걸려 있어 그럭저럭 밝은 편이었고 저편으로는 작 지만 창문도 붙어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감금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곳이었기에 경계가 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루카다가 이곳에 그 ‘교육을 부탁받은 녀석’ 을 감금해 놓은 것이다. 적절하지 못한 요소는 당사자의 ‘탈출하고자 하는 의 욕’을 휜의 능력으로 지움으로서 간단히 해결했다. 한쪽에 쌓여 있는 음식과 저 편이 있는 화장실, 그리고 침대와 세면대가 다인 이곳에서 그 ‘교육을 부탁받은 녀석’은 며칠째 생활하고 있었다.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의문조차 가지지 않은 채로. 그만큼 휜의 능력은 위력적이었다. 교육을 부탁받은 녀석이라 불리는 이는 음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다운 냉막함과 잔인함이 그 얼굴에 서려 있었다. 하지 만 지금은 의식을 제압당해 멍한 눈동자로 초점 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이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확인한 요크노민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소름끼치는 냉소. “재확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휜은 흔쾌히 응하며 사내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깊게 한번 숨을 들이 쉰 다음 사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청자색 눈동자 속의 동공이 급격히 확 대됐다. “네 이름은?” “저의 이름은 마드입니다.” 멍한 눈동자와 어울리는 낮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마드가 답했다. 휜의 질문은 계 속 됐다. “너는 누구의 수하인가?” “저는 자하라 가의 라, 비레오가님의 수하입니다.” “그가 너에게 무엇을 시켰지?” "많은 일들을 시켰습니다.” 한번 침을 삼키고 자신이 명령 받은 일들을 나열하려는 마드를 저지하며 다음 질 문으로 넘어갔다. 이 질문이 가장 중요했다. “2년 전 회색고향에서 가야다 가의 란, 레일리아를 암살하라 한 것도 비레오가인 가?” “예. 비레오가님께서는 가야다 가와 오르세만 가의 화합을 우려하셨습니다. 그래 서 암살자에게 의뢰하여 회색고향에서 제거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조작당한 기억이었다. 이 남자는 회색고향에서의 일은 알지 못하는 조무래 기였다. 일개 말단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비레오가의 의중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뭐, 그건 어찌됐던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이 남자가 비레오가의 수하라는 사실이 고, 비레오가가 실제로 2년 전 레일리아의 암살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제 휜이 암시를 풀면 사내는 진실로 자신이 레일리아의 암살을 명령받았다 믿 게 될 것이다. 그것까지는 별 파장이 생기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스스로 가 그런 명령을 받았구나, 하고 망각 속에 파묻을 테니 말이다. 요크노민과 뮤비 라가 계획한 파장을 일으키기 위한 다음 조건이 충족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휜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후회하지?” “후회합니다. 돈을 위해 어린 아이를 죽이려 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입 니다.” 원래의 그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갓난아이라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그가 보이고 있는 양심 역시 ‘조정’된 것에 불과했다. 휜은 자신의 능력이 잘 먹혀들었음을 확인하고 생긋 웃었다. 요크노민 역시 여유로운 얼굴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바로 이 일을 하기 위해 일전에 대로에서 그를 덮쳤던 암살자들 중 한명만을 생포해왔다. 그의 목숨을 노 리고 왔던 자객이 그를 위해 움직인다.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너는 용서를 받고 싶지?” “받고 싶습니다! 받고 싶습니다!” 마드는 격정을 담아 소리쳤다. 됐다! 요크노민과 휜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자하라 가주가 새파랗게 어린 가야다 가주에게서 비공식적인 항의성 친서를 받은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별 생각 없이 편지를 뜯어 읽던 자하라 가주, 수는 격하게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비레오가를 데려와!” 항상 냉철한 그가 이토록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 때문에 미치는 파장은 컸다. 이래서 얌전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이라 했던가. 비레오가는 공연히 주눅이 들어 아버지의 앞에 섰다. 냉혹하게 자신을 보던 아버 지의 눈빛도 싫었지만 저토록 분노로 일그러진 눈빛도 싫었다. 아니, 그보다는 두 려웠다. 무엇 때문에 저러는 걸까? “왜 그러시는 겁니까?”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이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질식해 버릴 지도 모른 다. 어느새 꾹 쥐고 있던 주먹 안에 땀이 고였다. 그만큼 수의 위협감은 압도적이 었다. “방금 가야다 가주에게서 비공식 친서를 받았다.” “……?” 비레오가는 근 2년 동안이나 외부에 간섭하지 않았다. 내부에 있는 적을 견제하 는 데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아버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답을 기억해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말 없는 위협으로서. 비레오가는 애써 기억을 짜내었다. 가야다 가라. 가야다 가……가야다 레일리아 란 카르민. “……!” 설마!? 비레오가의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읽어냈는지, 수는 책상 위에 던져놓다 시 피 한 친서를 집어 내밀었다. 그가 뿜어내고 있던 위협적인 기운은 어느새 평소 의 냉혹함 속에 가두어져 있었다. 그것이 더욱 소름끼치는 비레오가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받아 든 뒤, 가야다 가의 문장을 확인한 비레오가는 긴장하며 그 것을 펼쳤다. 그는 곧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구기며 소리쳤다. “이, 이건!” 수는 이제 한층 더 분기가 가셔진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싸늘함과 잔인함이 그 ‘의자에 앉는다’라는 간단한 행동 하나에 진득이 배여 있었다. 비레오가는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에 대한 처분까지 생각한 것이리라. “모함이라 말할 참이냐? 직접 찾아가 고해성서를 한 그 배신자가 네 수하가 아니 라고 잡아뗄 생각이냐? 내 앞에서?” “……아니오.” 모욕감과 수치감을 동시에 느꼈다. 조소 어린 아버지의 물음은 발뺌하고 싶다는 욕구마저 억누르기에 충분했다. 친서에서는 ‘유감스러운 일’이라 서두를 달며 자하라 가를 추궁하고 있었다. 가 야다 가주가 칭한 ‘유감스러운 일’은 2년 전 일어났던 일로서, 비레오가의 작 당 하에 일어났던 암살 기도를 칭하는 것이었다. 한 가문의 라와 란을 암살하려 했던 그 일이 동등한 계층의 ‘동료’에게서 일어났다는 것이 매우 슬프고 유감스 럽다며 정식적인 항의가 곧 도달할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자칫하면 비레오가의 목숨을 대가로 사죄를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비레오 가의 목숨만으로 끝난다면 그나마 가벼운 편이다.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현재 제자리를 유지하는 데도 벅차하는 가야다 가로서는 기세를 떨칠 절호의 기회 가 아닌가? 엄청난 재력적 부담과 세력적 양보가 요구될 것이다. 그것을 거부한다 면 일어나는 것은 내전이다. 이쪽이 ‘악’인 일종의 성전 말이다. “네가 암살 기도를 한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귀족끼리 서로 암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니까. 그러나 네 존재가 밝혀져서는 안돼. 그것도 발뺌할 수 없는 이런 수단으로. 너의 잘못은 수하를 잘못 관리했다는 것이다.” “…….” 가야다 가는 현재 세력이 제일 떨어지는 카르민이었지만, 그 세력은 여전히 무시 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러나 권력의 달콤함을 알고 있는 그들이 그 정도에서 만족할리 없었다. 그들은 또 한번의 도약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노린 것 은 가장 흔하고 보편적인 방법이지만 그 효력만큼은 입증된, ‘정략결혼’이었 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혼기이면서 별다른 애인조차 없는 란이 있었다. 그들은 당 대 세력가인 오르세만을 택했다. ‘희대의 천재’ 정도면 꿀릴 것 없는 결혼이었 다. 비레오가는 그것을 알아채고 두 세력의 결탁을 막으려 했다. 그 자신은 이미 약혼을 했기에 택한 방법이 암살.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레일리아가 혼 사를 거부하는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잊었다. 그 일이 설마 2년이나 지나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뒤흔들 줄이야. “아직 희망은 있다.” “예?” 수는 비레오가의 손에 형편없이 구겨져 있는 편지를 가리켰다. “비공식으로 먼저 해왔다. 그것은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 아니, 협 상까지는 못되더라도 극한 상황에까지는 놓이지 않을 것이란 제스처다. 그쪽에서 원하는 바를 이쪽에서 들어주면 물러나 주겠다는 뜻이다.” 그리곤 미간을 찡그렸다. 순식간에 본래의 얼굴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 얼굴에 풍 기는 불쾌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나를 이용하려 드는 건가.” 가주가 되었다 하나, 일방적인 선대 가주의 뒷배 덕분에 된 어린 애송이. 덕분에 가문을 휘어잡지 못한 그가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려 드는 것이 다. 그 정도도 읽지 못할 수가 아니었다. 괜히 당대 가주 중 가장 현명하다, 라 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비레오가는 마른 침을 다시 한번 삼켰다. 아버지는 현명하다. 때에 따라서 얼마든 지 자존심을 굽힐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하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자존심이 약하다 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강해서 그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인 것이 다. ‘이용하려한다’는 것을 알고도 그대로 넘어 가 줄 것인가? 비레오가가 알 고 있는 아버지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자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는 자 신의 목숨을 고스란히 그에게 넘겨줌으로서 가문의 명예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사람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그렇게 냉혹했고, 또 그 판단은 매우 정확 했다. 이렇게 끝날 운명이었던가.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수는 아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열린 것은, 비레오가의 입가에 씁쓸함이 맴돌았을 때였다. “한번만 당해주지.” “……!?” 수는 눈을 감으며 의자 뒤로 깊이 몸을 묻었다. 비레오가는 아버지의 뜻밖의 말 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 말 없는 추방령에 허리를 깊이 숙이 고 방에서 나갔다. 조용히 닫히는 문소리에 수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처음으로 아버지 노릇을 해주마.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다.” 비레오가의 수하를 가야다 저택에 던져 놓고, 다음날 자하라 가주에게 친서가 가 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잠에 든 요크노민은 꼬박 하루를 잤다. 그만큼 그의 피 로는 극에 달했었다. 그보다는 염두에 두고 있던 큰 일이 해결된 것이 탱탱한 긴 장의 끈을 조금은 풀어준 것이 컸다. 잠에서 깨어난 요크노민은 아직도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목욕을 했다. 좀 더 쉬어야겠다고 항의하는 몸을 차가운 물 속에서 기합 준 다음에야 제정신을 차 린 그는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거처에서 나왔다. 생각보다 많이 잤지만 덕분에 머리가 개운했다. 아직 할일이 태산 같은 마당에 하 루라는 휴가는 과함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하루의 공백쯤은 얼마 든지 메꿀 수 있을 듯 하다. “이제 하나 해결하고……다음인가.” 형님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2년 전 자신의 열등한 모습을 떠올려보면 차라리 꿈과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형은 아버지다. 무섭고 고독한 삶에 유일한 휴식처가 되어주었던 분. 의지할 수 있게 해주었던 분. 비록 그 곁에서 쉬려하지도, 의지하려하지도 않았더라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진다. 바람이 분다. 하늘을 올려보니 높고 푸른 그것이 자신을 내려보고 있다. 화창한 날이다. 잠깐의 휴식이 주위를 보는 시선조차 곱 게 만들어 주었다. 그제였다면 하늘을 한번 올려보는 작은 정신적 여유조차 가지 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숨을 깊이 내쉬고 힘껏 발을 내뻗었다. 목적지는 카산의 거처다. “네가 이곳에는 웬일이냐?” 어찌 들으면 달갑잖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반갑게 웃고 있는 얼굴이 그런 오 해를 지우게 해준다. 요크노민은 어딘지 들떠 보이는 카산을 보자 불끈 화가 솟았 다. 방금 전까지의 경쾌했던 기분이 거짓인양 그 화는 매우 격렬하게 일었다. 따 지고 보면 요크노민이 이렇게 하루의 휴식을 눈물나게 기뻐하게 된 것도 다 카산 때문이다. 그의 왼팔인 카산이 부인의 임신 이후 완전 두문불출하며, 부인 곁을 떠나지 않았기에 사무가 걸러지지 않고 올라와 쌓여 버린 것이다. 오른팔인 로딘 이 있긴 하지만, 그에게는 저 불순한 세력의 감시를 명한 터였다. 기사단원으로서 의 의무와 주군의 명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그에게 더 이상의 임무를 부여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한쪽 팔이 바쁘면 다른 팔이 도와야 하는데, 이 왼팔이라는 작 자는 아버지가 된다는 기쁨에 겨워 완전히 나 몰라니. “하도 얼굴 보기 힘들어 와봤습니다.” 일년 전에, 그의 한쪽 팔로서 주군의 맹약을 맺은바 있는 카산이다. 그 뒤로는 공 적인 입장에서는 하대를, 사적인 입장에서는 존대를 해왔다. 다르게 설명하자면, 산에게는 하대를 카산에게는 존대를 해온 것이다. 이곳은 카산의 거처이자, 요크 노민에게 있어서는 ‘적진’인 자하라 가의 저택이었다. 때문에 사적인 모습을 취 했다. 둘은 그 구분을 명확히 해왔다. 찔리는 게 있는지 카산은 어색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체리를 먹고 있 던 슈가 일어나 반겼다. 눈에 띄게 배가 부른 모습. 그녀를 보고 있자면 신비로 울 뿐이다. 자신의 어머니도 이렇게 자신을 열 달간이나 품었을 것이다. “일단 안거라. 차를 들겠니?” “예. 한잔 주십시오.” 카산은 곁에서 대기 중인 시녀에게 차를 내오라 명했다. 시녀들은 요크노민의 식 성은 잘 알고 있었다. 저 잘생긴 귀공자는 단것은 끔찍이 싫어한다. 방안에서 슈의 시중을 들던 두 하녀 중 한명이 나가자, 슈는 남은 하녀에게 따라 가 간단한 간식거리를 가져오라 했다. 물론 그 간식거리는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 었다. 단 것을 싫어하는 요크노민은 간식거리도 꺼려했다. 그는 단맛이 도는 것 은 과일이라도 입에 대지 않았다. 과일 중 달지 않은 것이 어디 흔한가. 덕분에 그가 먹는 것은 상큼한 오렌지와 키위, 파인애플 정도였다. 그 외에는 별로 가리 는 것이 없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한번은 연회에서 어떤 레이디가 요크노민에게 왜 단 것을 싫어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요크노민은 이렇게 되물었다. 왜 쓴 것을 싫어하느냐고. 레이디가 누가 쓴 것을 좋아하겠냐며 어설프게 웃자 그는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그것은 꽤 유명한 일화였고 그 뒤로 누구도 요크노민에게 단 것을 권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방안에 세 사람밖에 남지 않자 요크노민은 눈치 빠른 두 부부에게 감사 를 표했다. 누가 감시자인지 모르는 이 저택 안에서는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했 다. 이런 자연스러운 경계는 요크노민에게는 무리였다.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 었다 자부하지만 아직 이 두사람의 연륜을 쫓아가기에는 먼 것이다. “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쌓였지만…….” 잠깐 카산을 노려본 뒤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저 칼 같은 성품의 카산이 요크노민 의 은근한 비난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자니 웃음이 절로 난 것이다. 아버 지가 된다는 것이 그리도 좋은 것일까? 요크노민은 여체를 접한 적이 없었다. 불 칸과도 키스 이상의 것을 나눈 적이 없다. 불칸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 이 충족되는 그의 영원이었다. 충동적인 성욕이 한번도 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만 그것에 사로잡힌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부부간의 의무라든지, 둘의 결정체 라든지 다 뜬구름 같이 느껴질 뿐이다. “일단 카산 형님께 묻고 싶은 말을 하기로 하죠.” “하하, 부디 그래다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는 카산은 일단 눈감아 주겠다 말하는 요크노민 의 말이 반갑기만 했다. 완벽주의자인 그에게 이런 상황은 처음이긴 하지만 썩 나 쁜 기분은 아니었다. “카산 형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 카산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요크노민의 눈을 바라보았다. 질문을 들을 준비가 되 어 있다는 뜻이었다. 요크노민은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저렇게 직접 적으로 나온 다는 것은 그 사안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형님께서는 자하라 가에 대한 소유욕이 있으십니까?” “그리 단도직입적 인건 아닌 것 같구나.” 토는 달았지만 답을 미루지는 않았다. “없다.” “형님을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 자부하지만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습니다.” “난 가주가 될 생각이 없다. 내가 원하는 삶은 그런 따분한 것이 아니야.” 카산은 요크노민의 재확인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훨씬 더 직설적인 답을 주었 다. 요크노민은 숨을 깊이 마셨다가 뱉어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가주 계승권을 포기해 주십시오.” * * * 가야다 가의 새 가주, 사뮤에르는 비공식 친서를 보내고 하루를 기다렸다. 자하라 에서 어떻게 움직이던 상관없었다. 이미 이 일로 인해서 그는 자신이 최단기간에 해결해야 할 최대의 문제의 해결점을 찾은 것이다. ‘어떻게든 움직여 봐라.’ 사뮤에르는 칼자루를 쥔 승자의 여유로 한가롭게 주스를 마셨다. 차의 떱떠름함에 서 오는 여운을 즐기기에도 술의 알싸함에서 오는 황홀경을 즐기기에도 아직 어 린 그는 시원하고 단 주스를 선호했다. 가주가 되었다 해서 굳이 자신의 기호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런 것은 세월이 자연스럽게 가져다 줄 것이다. 어리고 약했던 아이는 없다. 그는 이제 가주였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위엄과 책 임감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제 금방이 다. 비레오가라는 남자의 수하가 갑자기 나타나 울며 자신의 죄를 이실직고 한 것 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하늘이 그를 도왔다. 현 가주 중 가장 현명하다 불리는 자하라 가주, 수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자식 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아 가문의 명예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자 식의 목숨을 살리는 대신 재물과 권력을 양보할 것이냐는 그가 선택할 문제다. 어 느 쪽이든 좋다. 그로서는 후자 쪽이 좋겠지만……전자여도 손해 볼 것은 없다. 2년 전 회색고향에서 사뮤에르는 분명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사랑하는 누님을 노 린 암살이긴 했지만 그때 그도 누님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죽을 위기를 넘겼지 만 어쨌든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변할 수 있었다. 소년에게 동경할 수 있는 남자는 빠른 성장의 약이 된다. 아름다운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배웠다. 흉악하지만 아름다운 것, 거칠지만 우직한 것.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 이 담력임을, 강단임을 배웠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이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 처럼 꼬맹이여서가 아님을 배웠다. 그의 인생에 있어 그보다 값진 배움은 없었 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그에게 물었다. 진정으로 가주가 되고 싶은 것이냐고. 사 뮤에르를 가주로 만들기 위해 발악하던 아버지가 마지막에 그리도 약하게 물었 다. 사뮤에르는 그때 당당하게 될 것이라 답했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아버지가 환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떠나셨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떻게든 움직여 보라고.” 가야다 가는 지금 세력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다. 가장 강력한 세력의 오르세만, 가장 전통 있는 자하라에게 밀려 한풀 꺾인 가문을 이대로 둘 생각은 없다. 이 일 은 앞으로의 도약을 위한 좋은 첫걸음이 되어 줄 것이다. 꼬박 하루가 지났을 때, 사뮤에르는 다시 펜을 들었다. 자하라 가에서 희생양을 내밀어 그의 단독 소행이라는, ‘비공식적’으로 해온 변명을 들은 뒤였다. 자하 라 가주는 아들을 택했다. * * * 가야다 가에게서 공식적인 항의 친서를 받은 그 날, 뮤비라는 가주의 은밀한 부름 을 받았다. 젊음에서 풍겨오는 미(美)에 경륜이 더해져 완숙미로 진화한 그의 아 름다움은 나날이 더해가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남성적인 매력 역시 떨 어지지 않는 그였지만 어째서인지 모두들 그를 ‘아름답다’ 평했다. 걸레라는 호 칭이 불러오는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뮤비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외모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외모는 눈이 거부할 정도만 아니면 된다는 그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자하라 가주가 사무를 보는 사무실. 그 문은 단조로운 문양이 새겨진 나무였고 지 극히 평범했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평. 주관적으로 묘사하자면 약간 어두운 톤의 나무가 적당한 고풍스러움을 풍기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 새겨져 있는 ‘방음’ 룬의 기운이 예민한 감각에 포착되어 거슬렸으며, 주인의 성품을 드러내 듯 단조로운 듯 심플한 문양은 공연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뭐, 어디까지나 주관 적인 평일뿐이다. 뮤비라는 가슴 깊이 숨을 긁어 밖으로 내쉬었다. 신선한 산소가 동시에 몸 안을 채우는 감각은 조여 오는 신경을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해주었다. -똑똑. “뮤비라입니다.” “들어오게.” 손잡이를 꺾어 천천히 밀었다. 부드럽게, 그러나 듣기 좋은 나무의 마찰음을 내 며 문이 열렸다. 널찍한 책상 너머 의자에 자하라 가주, 수가 앉아 있었다. 역광 으로 그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졌으나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뮤비라에게는 장 애가 되지 않았다. 절대적인 무표정. 어떤 감정도, 어떤 생각도 읽어내지 못할 그 속에서 오직 눈만이 냉랭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좀더 살펴보려 했으나 고개 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버려 그럴 수 없었다. “앉게.” 책상 앞 쪽으로 수의 휴식을 위해, 혹은 사무적인 대화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낮 은 테이블과 편안한 소파. 뿌득, 가죽이 짓눌리는 소리를 가볍게 내며 둘은 자리 에 앉았다. 예의상 차를 권하는 것도 없이 수는 그 차가운 눈으로 뮤비라의 짙은 바다빛 눈동자만을 보았다. 불편한 심정이었지만 굳이 그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 다. “자하라를 가지고 싶나?” “…….” 비아냥거리는 어조다. 그냥 들으면 단순한 질문 같은 데도 심한 모욕을 들은 듯 울컥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버린다. 뮤비라는 자신의 반응이 낯설어 당 황했다. 많은 타인들 앞에서 ‘걸레’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이정도로 울컥하지 는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분명 자신의 마음인데도 뜻대로 컨트롤 되지 않는, 더 러운 기분. 뮤비라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좀 전처럼 새로운 산소가 채워지면서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그는 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예.” 수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걸렸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가져서 무엇을 하려나?” “…….” 정말 이상하다. 극심한 분노와 모멸감이 평정을 앗아간다. 뮤비라는 자신의 절제 를 벗어나려 하는 거친 감정들을 애써 다독였다. 뭔가 이상하다. 뭔지는 알 수 없 지만……. 욱씬! 머리가 아파온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가 머리를 쪼는 듯 하다. 수는 그런 뮤비라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그를 보면서도 염 려의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그렇게 있었다. 그 차가운 눈 그대로. 두통이 점점 심해왔다. 뮤비라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그걸로 가셔지지 않았다. 가슴을 움켜쥔다. 가슴이 아니라 곱게 걸려 있는 레드 드래곤의 피를 움 켜 쥔 것이다. 따스한 기운이 평정을 잃은 감정을 안아주는 듯 했다. 테밀시아의 미소를 본 듯 훈훈해져 온다. 뮤비라는 오기가 치솟아 쏘아보듯 수를 보았다. “제가 가질 겁니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야. 나는 가지겠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어. 가져 서 무엇에 쓰려는 거냐 물었지.” 빈정거림. 뮤비라는 심해지는 두통 속에서 매섭게 수를 노려보았다. 온 몸에 벌레 가 기어 다니는 듯했다. 역함과 구토가 몰려왔다.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냉철 한 뮤비라의 이성이 경각을 알렸지만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살기는 쉽사리 지 워지지 않았다. “오르세만에게, 아니 테밀시아에게 공손히 받칠 작정인가?” 수의 물음은 계속 됐다. 뮤비라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저 자의 목을 비틀고 싶다 는 충동과 그것을 억누르는 이성 사이에서 뮤비라는 갈등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지? “아니요. 세 개로 갈라져 있는 카르민. 그 중 하나인 자하라를 제가 가져 그분 께 바친다 한들 그분께 무슨 득이 될까요? 세 개였던 세력이 두개로 축소 될 뿐이 죠. 전 독립된 세력으로서 그분을 지지할 겁니다. 그러면 그분은 세 개의 세력 중 두개의 힘을 가지게 되는 거죠.” 지금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되돌려 물음을 하자 본능은 급격히 수그러들었다. 밀 려나던 이성이 제자리를 찾아 뮤비라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덕분에 제대 로 된 답을 꺼내 놓을 수 있었다. 그 답을 들은 순간 수의 얼굴은 순식간에 변했 다. 무표정 속에서 진한 조소를 담아내던 눈동자는 평소와 같이 평온 속으로 잠 겨 들었고 그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깃들었다. 말 그대로 순식간의 변화였다. 그 순간 뮤비라는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식은땀이 온몸에서 뚝뚝 흘러내렸다. 호 흡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마치 익사 직전까지 물에 잠겨 있다 겨우 고개를 빼낸 듯한 모습. 수는 여전히 안부를 묻지 않고 그런 뮤비라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뮤비라 의 호흡이 제자리를 찾았을 때서야 입을 열었다. “환족을 아는가?” “예?” “셀족을 아는가?” “……모릅니다.” 수는 평소에 뒤집어쓰고 있던 그 가면 그대로, 마치 책을 읽듯 읊조렸다. “이 두 종족은 고대에 번성하던 존재였다.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닌 그들은 타 종족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었지. 그 능력으로 인해 그들에겐 적이 존재할 수 없었 다. 물론 예외자가 있긴 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지. 환족은 자신보다 하위 종족들 의 의식을 ‘조정’하여 자신의 꼭두각시로 부릴 수 있다.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은, 혈연으로 이어오는 우수성. 즉 그들보다 고위 종족이어야 한 다는 것. 그 것 외에 하위 종족이면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열 쇠’의 존재.” 뮤비라는 경악했다. 그가 아는 누군가의 말과 너무나 일치하지 않던가. 무슨 종족 이라고 말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이런 설명을 해주었던 그 아이도 자신 들을 칭하여 ‘고대 종족’이라 하였다. 자하라 가주가 그것을 어찌 아는 것인 가? 혹시 이번 가야다 가에서 보내온 항의 친서의 배후를 간파하고 있는 것인가? 앞에 앉아 있는 뮤비라가 무슨 생각을 하든, 수는 여전히 그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늘여놓았다. “그리고 셀족. 그들은 환족과는 유사하지만 다른 능력을 지닌 종족이다. 그들은 타인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녔지. 의식을 사로잡고 꼭두각시로 부리는 환족은 자신이 원한 것 이상의 수확은 거둘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셀족은 달라. 그들이 가진 능력은 자신에게 제압당한 타인이,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행하겠다 마음 먹은거라 ‘착각’하게 ‘조종’하는 것.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지녔다.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은 ‘의지’. 셀족은 그것을 타의로 조종할 수 있었지.” 수는 뮤비라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방금까지 나를 죽이고 싶었지?” “……예.” 머뭇거리긴 했지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수는 다시 물었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 하고 있었지? 나의 말에서 무엇을 느꼈지?” “가주님께선 평소와는 달리 무표정하고, 차가운 눈을 하고 계셨습니다. 질문 하 나하나가 저를 모욕하고 비웃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거슬렸지만 그것 이 심화되어 살의로까지 번졌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가주님의 모습이 평소로 돌아 왔고 제가 잠깐 미쳐있었음을 느꼈습니다.” “아니다.” “……?” 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맹렬한 증오 같기도 했고, 씁쓸한 회한 같기도 했다. “나는 평소 그대로였고 질문 역시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어조로 건넸다.” “하지만……!?” 뮤비라가 당황하여 뭐라 물으려 했지만 수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을 잘랐다. “나는 단지 자네의 의지가 나에 대한 살의로 향하도록 조종했을 뿐이다. 단순한 방향지침에 불과했지만, 자네의 정신과 몸은 나에게 살의를 ‘갖도록’ 나를 ‘보 게’ 했다.” 뮤비라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한번 삼켰다. 그리고 토해내듯 물었다. “셀족이십니까?” “자하라는 모두 셀족이다.” “그렇지만 카시안은……?” 수는 다시 그 묘한 미소를 지었다. “환족은 태어나면서부터 능력을 각성하지. 셀족은 달라. 족장이 각성시켜주지 않 는 한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알려주지 않으면 자신에게 그런 능 력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가겠지.” “…….” 지금 이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절망? 허탈? 여지껏 미친 듯이 벌여왔던 일들이 처음부터 헛수고였음을 깨달은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말 해야 하는지 뮤비라는 알지 못했다. 수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자하라 가주는 자하라 가의 자손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인 뮤비라가 가주가 되어 대를 잇 는다면, 상위 종족 셀이 갖는 혈연의 우수성은 여기서 끝이 나버리기에. 비틀리는 입가를 손으로 어루만지는 뮤비라를 속모를 눈동자로 계속 바라보던 수 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나의 대에 란이었던 자를 아는가?” “가주님께서 가주가 되신 날 자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나의 대에 마였던 자를 아는가?” “가주님께서 가주가 되신 날 자살…….” 무언가를 감지한 뮤비라가 말을 잇지 못할 때 수는 그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그 책 읽는 듯한 어조 그대로. “내가 그렇게 ‘조종’했다.” 형제에게 자살을 종용했음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았다. 자신의 형제, 요크노민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뮤비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 습. 수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것이 셀의 법. 족장은 자신의 후계자 세 명에게 능력을 각성시켜준다. 그리 고 서로 싸우게 한다. 어떤 수단으로 상대를 꺾어도 상관없다. 상대보다 능력이 압도적으로 강하여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든, 강자를 조종하여 상대보다 세력이 우 세하든……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족장은 승리가 가름됐을 때, 승자를 뽑는다. 그 리고 각성 ‘시킬’ 수 있는 능력을 물려준다. 그것이 셀의 족장 계승식이다. 승 자는 패자를 죽인다. 자신이 각성시킨 능력자가 아닌 자는 살려두어선 안되지.그 게 셀의 법이다.” 허탈함에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삼키던 뮤비라는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비레오가도 카시안도, 그리고 카산도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 나는 그 누구도 각성시키지 않았다. 내 대에서 셀이란 이름을 아는 자는 나밖에 없지. 장로도 죽여 버렸으니까. 선대 족장 역시.” “…….” “내가 라였을 때……. 셀족의 이 저주받을 능력으로 인해 나의 영원을 잃었다.” 고저 없는 어조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다 한숨과 함 께 손을 떼었다. “이깟 능력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면 이대로 사라지는 것도 좋을 것이 다.” 천천히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 곳에는 교묘한 마법으로서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 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셀의 족장임을 나타내는 문장이. 각성시키는 능력을 물려 받았을 때, 마찬가지로 물려받은 문장이었다. 수가 정해진 룬어를 입에 담자 서서 히 그 모습을 드러났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장. 셀의 문장이다. 수는 작은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등을 그었다. 문장은 붉게 반으 로 갈렸다. 그 틈으로 혈흔이 흘러내린다. 비통하게……. “나 자하라 수 장 셀은 최후의 셀의 족장으로서, 셀의 능력을 영원히 봉한다. 자 하라 가의 또 다른 명예, 그림자의 힘은 나를 끝으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언제고 죽음과 안식의 신의 품안에서 만날 자신의 영원을 위하여. 이 말을 하기 위해 뮤비라에게 란이자 석녀인 카시안을 주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여태껏 악착같이 살아왔다. 수는 기어이 눈물을 떨 꿨다. 보고 있는 가, 이라반이여! 나의 영원이여! 수는 상자를 들어 뮤비라에게 내밀었다. “뮤비라 라 카르민.” “예.” 순간 뮤비라는 수에게서 광기를 읽은 듯 했다. “자하라를 그대에게 주겠다.” 그것은 역사의 표면에 드러난, 다섯 번째 의지의 맹약이 가지고 온 격렬한 폭풍이 었다. 귀족들의 의뢰를 주로 해결하며 주가를 달리고 있는 곤크. 타 용병단의 파 등급 정도는 되어야 차 등급으로 겨우 들어올까 말까일 정도로 그 질이 압도적으로 뛰 어난 이곳에는 열한명의 카 등급이 있었다. 그들은 기사로도 충분히 진출할 수 있 을 만큼 실력이 엄청났다. 물론 현실적인 벽이 높아 기사로 나가봐야 출세하기는 어렵기에 누구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 중에 예외가 한명 생겼다. 이미 그 절절한 로맨스가 용병계에 널리 퍼진 클래 너 카 곤크가 그러했다. 신분의 벽에 갈려 헤어졌던 용병들이 한둘이던가. 클래너 의 일화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곤크로서는 큰 손해였다. 용병계에 두고두고 남을 로맨스를 만든 것치고 는 남는 게 없는 것이다. 고작해야 타 용병단의 배척이 덜해졌다는 것 정도? 그런 걸 뭐에 쓰겠는가. 이제 열 한명에 불과한 카 등급이 열명으로 줄었다. 하 등급 중에서도 카 등급을 넘 볼만큼 실력을 키운 자가 있긴 하지만 카 등급만의 노하우 가 아쉬운 판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요구는 미치고 환장하다 못해 팔짝 뛸 일이다. “다시 한번 말해보겠나?” “곤크를 떠나고자 합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말을 하는 저 남자는 좀 전까지는 부관의 온갖 총애 를 받던 카 등급의 일벌레였다. 저번 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휴가 한번 받지 않고 미친 듯이 일했던 남자인 것이다. 부관은 날뛰기 전에 냉정히 되짚어 보았다. “그런가. 자네는 클랜의 추천으로 들어 왔지.” 클랜에게 검을 돌려주러 왔다가 한바탕 난리를 피웠던 일은 이미 보고 받은 적 있 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카 등급의 일이기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클랜의 추 천으로 들어왔으니, 클랜이 이탈한 이 순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건가? 나름대로 근거 있는 추측이었다. 부관은 한결 차분해져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마스터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지금, 카 등급을 둘이나 잃을 수는 없었다. 다시 마스터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 거리는 부관이었다. 그는 일부러 방금 들었던 말을 듣지 못한 척 말했다. “자네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겠지. 그 동안 너무 빠듯하게 일해 왔지 않는가.” “……?”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잠자코 들었다. 자신의 청을 받아주어 클랜을 기사로 밀어 올려준 부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하에게도 꽤 힘든 일 이다. 그러나 이제는 여유가 필요하다. 일부러 생각할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바 쁘게 움직여 왔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자신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인 것이다. 생 각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손을 뻗어줄 이가 곁에 든든히 버티고 있으 니 말이다. 무하가 무슨 생각을 하던 부관은 자신의 말을 빠르게 매듭지었다. “일 년의 휴가를 주지. 푹 쉬고 돌아오게.” “네?” 무하가 재차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부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괜히 바쁜 척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즐겁게 휴가 보내고 오게나. 다음에 보세.” “…….” 갑작스런 카 등급의 손실이 둘이나 생겨 저러는 것일 것이다. 그 1년 동안 새로 이 구멍이 메워진다면 두말없이 놓아줄 터. 무하는 잠자코 목을 숙여 인사를 한 뒤 방에서 나왔다. 일년인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일이다. 그 동안 실력자 를 포섭할 생각이겠지. 대외적으로 봤을 때도 카 등급 페어로 이름 높았던 이들 이 동시에 빠진 다는 것은 좋지 못하니 말이다. 문을 닫고 나온 무하는 창 밖으로 보이는 숲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품에서 지도를 꺼내 다시 한번 목적지를 확인 한 뒤, 서둘러 계단으로 향했다. 비를 함빡 맞은 그날, 무하는 고열에 시달렸다. 그리고 혼탁한 의식 속에서 사부 를 보았다. 사부는 그 뻔뻔한 낯짝에 웃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움직 이지 못하고 힘들게, 그립게 보는 무하에게 사부는 대뜸 한마디를 한 뒤 가버렸 다. “너 바보냐?” 사부를 부르다 눈을 떴을 때, 유시리안이 눈앞에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눈은 걱정으로 어두웠다. 다음 날 완전히 열이 내린 무하는 유시리안이 받아왔던 의뢰 기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듣고, 유시리안에게 먼저 가 있으라 했다. 자신은 곤크에 들려 탈퇴를 보고 하고 뒤쫓겠다고. 싫다고 함께 가자고 버티는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꼭 지킬 겁니다. 믿어주시겠어요?” 뭐라 더 말하겠는가. 유시리안은 더 고집부리지 않고 먼저 떠났다. 그리고 밤새 이카미렌 횡단하여 곤크에 도착한 무하는 부관에게 뜻대로 탈퇴를 허락받지는 못 했지만 충분한 시일을 약속 받고 지금 나오는 중인 것이다. 기다리고 있을 유시리안을 생각하니 좀 쉬고 가야겠다는 생각은 멀리 떠나버렸 다. 그냥 이대로 출발할 작정으로 무하는 발길을 재촉했다. 거리상으로 봤을 때 서두르면 삼일 후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급한 무하였다. * * * 덜컹이는 마차의 진동마저도 걱정되는 지 내내 침묵하는 남자에게 자꾸만 근심의 눈길을 보냈다. 깊이 눌러쓴 후드 밑으로 파랗게 질린 입술만이 보였다. 안타까움 에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드러난 입술이 설핏 웃었다. 그리곤 힘없 는 팔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강하신 분. 추태를 보였던 자신을 반성하며 고개를 숙였다. “도착했구나. 일단 안심해도 좋겠다.” “예, 마스터.”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천천히 느슨해진다. 이제야 한숨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곳이라면 추격자들이 온다 해도 안심이다. 창밖을 살펴보던 남자도 후드를 더욱 깊이 눌러쓰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긴장이 풀린 것이리라. 검문을 위해 잠시 멈춘 마차 밖으로 검은 두건을 쓴 늘씬한 몸의 남자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 부관의 눈가가 슬쩍 찌푸려졌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소리 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리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일회용 공간 이 동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암살자가 왔을 때는 반격하는 것보다 도망치는 편이 한 결 안전하다. 천천히 문이 열렸다. 속으로 시동어의 첫음절을 읊던 부관은 들어오는 두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지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남자는 둘째 치고……익숙 한 실루엣을 가진, 온 몸에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 그의 놀라움과 의문을 풀어주려는지, 후드를 벗어 내렸다. 부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갔다. “마스터!” 근 2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었던 마스터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자신을 과로사 직전까지 몰고 간 마스터가! 달려가 복부를 한대 패주려 했던 부관은 마스터의 얼 굴을 가까이서 보고 천천히 멈춰 섰다. 오만한 금색 고양이 눈동자도 깨끗한 갈 색 피부도 여전했지만 핏기 가신 입술과 고통을 참고 있는 것에 여력한 얼굴, 그 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식은땀. “오랜만이군. 오래 자리를 비워서 미안하게 됐다.” 당당한 어조는 여전하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경악에 멍해 있던 부관은 이내 끔찍 한 살기를 퍼트리며 외쳤다. “누굽니까!?” “후후.” “누구냐!?” 마스터가 입을 열 것 같지 않자 옆의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려 재차 물었다. 살기 등등한 부관을 보며 곤혹스런 얼굴을 하던 남자는 이럴 때가 아니라 생각했는지 말을 돌렸다. “일단 마스터를…….” “아! 이쪽으로.” 곤크에는 마스터와 부관만이 아는 비밀 마법진이 많았다. 본래라면 둘이 있을 때 만 가동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저 남자는 예외다. 누가 뭐래도 그는 마스터의 후 계자니까. 마스터가 은신처의 소파에 천천히 앉자 그제야 다른 두 사람도 자리에 앉았다. 누 구의 부축을 질색하는 마스터를 위해 끝까지 참고 기다려 준 것이다. “후우. 목이 타군.” “제가…….” “내가 가지고 오마. 너도 지쳐 보인다.” 수려한 미모의 남자는 부관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몸이 불편한 마스터를 모시고 이곳까지 추격자를 따돌리며 오느라 그 역시 녹초가 되 어 있었던 것이다. 본래의 체력이 괴물 급이 아니었다면 여태 버티지는 못했으리 라. “딜린이 그곳으로 와줘서 다행이었다.” “불현 듯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금이라도 되어 있는 건 아닌지……. 한번 든 생 각을 떨치기 힘들어 나선 길이었습니다.” 매혹적인 금발의 소유자, 자칭 록의 달링, 딜린. 언제나 미소를 지우지 않았던 그 딜린이 맞는지 너무나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괜찮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서 몸을 회복시키면 돼. 이곳 은 아무리 그들이라도 올 수 없으니.” 바닥까지 끌리는 칠흑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가 진한 살 기를 담아내고 있다. 회복 하고 나면……. “제가 이곳에 있겠습니다.” “네 임무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딜린의 말을 끊은 자는 그의 마스터가 아닌, 부관이었다. 딜린의 얼굴에 그제야 천천히 본래의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몇 년이나 부려먹었음 됐지요. 뭘 더 욕심내세요?” “변동이 심화되고 있는 레타에 이제와 새 첩자를 들여 놓을 수는 없지 않느냐.” “말했잖아요. 이미 탄로 났다니까요? 중요 정보는 못 캐요.” “네 남편이 레타 마스터의 친구인데 정보 하나 못 빼낼까.” “하하! 록은 고지식해서 그런 거 못해요. 아시잖아요.” 둘의 신경전을 매듭지은 자는 그들의 마스터였다. “딜린은 여기 남거라. 이제 슬슬 들어 올 때도 됐어. 후계자를 언제까지나 밖으 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경험은 여태까지 쌓은 것으로도 충분해.” 편하게 잠시 쉰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멈춘 그들의 마스터는 부관이 건네준 주스 를 꿀꺽 꿀꺽 들이 삼켰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힘의 회복을 두려워해 음식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던 그 족속들이 생각 난 것이다. 부관과 딜린은 피부에 들러붙는 살기로 인해 몸서리를 쳤다. 그러다 그들의 마스 터가 다시 피식 웃음과 동시에 살기가 수그러들었다. “단 것은 죽어도 못 먹었지. 언제나 주스였어.” 영문 모를 혼잣말. 마스터의 얼굴이 그나마 즐거워 보인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 다. ‘나의 지기 녀석은 말이지.’ 웃음이 밀려든다. 의지할 수 있는 자, 의지하게 할 수 있는 자. 믿을 수 있는 자, 믿게 할 수 있는 자. 자신의 유일한 지기를 떠올리며 분노와 증오로 들끊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남자. 귀족들조차 함부로 굴지 못한다는 오만한 곤크의 마스 터. 라이시륜 장 곤크는 그렇게 돌아왔다. 화창한 낮의 하늘 아래, 급한 길을 재촉하는 남자. 건조한 바람에 뭉실 일어나는 흙 구름에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가도 금방 말을 독려한다. 척 봐도 서둘러 어디를 가고 있다는 느낌이 풍기는 그 남자를 보며 통행료로 입에 풀칠을 하는 산 적 어르신들은 고민했다. 혼자인데다 무기라고는 허리에 찬 단검이 다라 덥치기는 좋다. 문제는 어딜 봐도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다. “두목. 저런 녀석이 의외로 짭짤한 법이라니까요.” “요즘 돈 있는 녀석들은 약아나서 저렇게 없는 척 움직인다고요.” 두목 어르신의 마음이 이쪽으로 쏠리려는 찰나, 옆에서 반박을 하는 이들이 등장 했다. “두목. 긴장이나 경계 없이 가는 걸 보면 분명 강자일거에요.” “하긴, 요즘 같은 세상에 혼자 움직이는 걸 보면 분명…….” 귀 얇은 두목 어르신의 마음이 다시 기우려는 데, 저쪽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목 표물이었던 남자와 마주쳤다. 잠깐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함께 길을 가기 시작 한다. 동행하기로 정해진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산적들은 순순히 포기해야 했 다. 척 봐도 새로이 나타난 일행들은 한가닥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먼저 덥쳤다가 나중에 나타난 녀석들에게 당하지 않은 게 어딥니까, 두 목.” “그럼요. 이게 다 두목의 인덕이라니까요.” “그, 그렇지?” 사랑스러운 부하들의 위로로 아까운 마음을 접고 호탕하게 웃어버리는 두목 어르 신. 참으로 사이가 돈독한 산적님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인연이란 건 무섭다니까요.” “거의 2년 만이죠?” 고개를 한번 끄떡여 보이는 남자. 산적들의 도마 위에서 오갔던, 홀로 길을 가던 그 남자였다. 검은 두건으로 머리를 감싼 그는 2년 전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다. 라미는 갑자기 헤어졌던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문 듯 말했다. “그때 마을 기억하세요? 갑자기 떠나셨던 그…….” “인정이 메마른 그 마을 말인가?” 전보다 훨씬 낮아진 목소리는 차분한 듯, 듣기 좋았다. 라미는 쾌활하게 말을 이 어갔다. “저희도 그 뒤로 바로 나와 버렸거든요. 신관님께서도 동행하셔서 한결 편하게 갈 수 있었죠. 그런데 저희가 가고 나서 일주일쯤 있다가 마을을 지켜주던 성벽 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들으셨어요?”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여행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다가 당했다나 봐요. 성 벽을 죄다 얼려서 부셔버렸다나? 대단한 마법사였나 봐요. 마을에 들어오게만 했 다면 큰 힘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흥! 꼴좋게 된 거지 뭐.” 거친 성격의 케릭이 비아냥 거렸다. 무하도 동감이었다. “인과응보군.” “예?” 라미의 반문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라미의 간단한 이야기가 끝난 뒤, 그녀의 연인인 페른의 흥분된 말이 이어졌다. “그 정도의 성벽을 단숨에 무너뜨렸다는 건 어지간한 마법사론 불가능해요! 게다 가 목격자의 말을 들으면 주문은커녕 시동어도 읊지 않았다는 걸요! 도대체 몇 써 클인 걸까요?” 본의는 아니지만 마법을 고레벨까지 구사할 줄 아는 무하도 페른과 같은 의문을 잠시 가져보다가 곧 포기했다. 정상적인 경로를 밟아 구현하는 것이 아닌 그가 어 떻게 그 정도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무하는 2년 전 잠시 동행했던 이들을 돌아보며 잠시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웃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던 그때. 설희의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던 그때. 만 약 유시리안과 재회하지 못한 순간에서 이들을 다시 만났다면 지금처럼 막연한 반 가움은커녕, 괴롭기만 했을 것이다. 유시리안……. “그런데 어디까지 가세요?” 활발한 성격의 라미가 물어왔다. “사이러 마을.” “다음 마을이군요. 자수로 유명한 곳이죠.” 알고 있다. 예전에 뢰전의 사자라는 우습지도 않은 호칭으로 불리는 도둑을 잡은 곳이 아닌가.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귀여운 꼬마가 마을 자랑을 한참이나 늘 여 놓았던 곳. 그 꼬마도 이제 많이 컸을 것이다. 무하가 알고 있는 걸 모르는 페른은 계속 말을 잇고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마을 사람들의 대다수가 장인이라 귀족들의 지원을 많이 받 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옷을 사러 가시는 길입니까?” 박식한 페른이 한 뜬금없는 질문에 무하는 순간 웃어버릴 뻔 했다. 누가 옷을 사 러 거기까지 가겠는가? 생각 난 대로 묻긴 했지만 스스로도 어이없는 질문을 했다 는 생각에 페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내성적인 성격의 마법사 였다. 케릭이 노골적으로 웃어대며 무안을 주자 라미가 편을 들어주고, 그런 라미를 페 른이 말리고 바사론은 주위 경계를 하며 일행이 어찌 놀든 상관 하지 않는……재 미있는 파티. 무하는 설핏 웃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꼬박 삼일 간 강행한 끝에 이제 금방 이다. 유시리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마음을 급 하게 해주는 동시에 따뜻하게 감싸준다. 절로 웃음이 나는 훈훈함. 방과 후에 놀 지도 못하고 도장으로 뛰어가면서 느꼈던 아스라한 그 느낌과 같다. 행복했 다……. “저희는 의뢰로 그곳에 주문해 놓은 신부복을 가지러 왔어요. 알다시피 몬스터 사태 이후로 민심이 극에 달했으니까 이정도의 일도 누군가에게 의뢰해야 할 세상 이잖아요.” 별로 불만이 섞였다거나 하지는 않은 목소리. 극한 민심 때문에 낭패를 본 적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귀족의 의뢰가 늘어 수입이 제법 된다는 것에 대한 메리트 가 컸다. 모험가이긴 하지만 자금을 위해 용병의 일도 한다. 요즘은 보수가 높아 특히나 만족스럽다. “사이러는 귀족들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길목에 산적들이 부쩍 늘었거든요. 무 하 씨처럼 혼자 가다가는 먹잇감으로 딱이라고요.” “누가 먹이감인데?” 라미의 쓸데없는 우려를 지적하는 케릭. 당연하지 않냐며 답하려던 라미도 자신 의 실수를 눈치 채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무하는 강한 전사다. 그 것도 매우 강한. 새삼 그를 살펴보았다. 특유의 분위기와 두건 덕에 금방 알아 봤 지만, 키가 부쩍 컸다. 체격은 여전히 말랐지만 잘 다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확실히 방금 자신이 한 말은 실수였다. “이 고개만 넘으면 마을입니다.” 연인의 무안함을 덮어주려는 의도인지 페른은 고개를 가리키며 크게 말했다. 잘 못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두건 밑으로 보이는 무하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다 사 라진 듯 했다. 페른은 새삼 무하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음을 깨달았 다. 고개에 올라선 일행은 뭔가 일이 잘못 됐음을 깨달았다. 굳게 닫혀 있는 성벽과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녹색 체액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시체 더미들. 그리 고……. “그루룩, 그루룩.” 익숙한 울음소리. 할말을 잃고 서 있는 일행들 중에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케릭이었다. “빌어먹을.” 그를 시작으로 다들 한마디씩 했다. “하필이면…….” “제길.” “곤란하군.” 정보가 될만한 말을 꺼낸 사람은 역시 가장 똑똑한 마법사, 페른이었다. “몬스터…….” 성벽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다섯명의 일행은 의견을 나눴다. 솔직히 나눌 것도 없었다. 달랑 다섯이서 공격을 할 수도 없고, 이곳에 볼일이 있 는 터라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은 몬스터가 물러나면 그때 마을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무하는 당장이라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눌러 참았다. 그가 알고 있 는 유시리안은 강한 사람이다. 이런 몬스터에게 당할 리 없다. 그렇게 생각은 하 면서도 초조함에 입가를 쓰다듬어 보는 무하였다. 드물게 평정을 잃은 무하를 본 페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로 이 마을에……?” “누굴 만나기로 했습니다.” “친인이신 모양이지요?” 마을에 시선을 고정 시킨 채 걱정 어린 질문을 던지는 페른에게 답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다행히 무하가 초조함에 지쳐 폭주하기 직전에 몬스터들이 물러났다. 무하가 서둘 러 말을 몰자 다들 그 뒤를 따랐다. 이곳은 그때 그곳처럼 인정이 메마른 곳은 아 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성벽 위에서 줄사다리가 내려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말은 몬스터가 완전히 물러났다 싶을 때 받아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말에서 내려 사다리를 잡고 올라갈 여유도 없었다. 말 위에서 몸을 날려 사다리 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것도 세 번 정도 딛었을 뿐 거의 날다시피 올라간 것이 다. 다들 입을 떡 벌리고 무하를 보고 있을 때, 그는 필사적으로 의뢰인의 이름 을 기억하려 했다. 그러다 포기하고 유시리안의 이름을 댔다. “혹시 유시리안이라는 남자를 아십니까?” 사람들을 리더하고 있던 우락부락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지나가던 모험자 로, 우연히 들렸다가 몬스터의 공격에 발이 묶인 남자였다. 예전의 무하와 같은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그 싸가……. 흠흠. 알다마다요. 은릴양의 집에 머무는 용병이지요?” 무하는 그제야 의뢰인의 이름이 은릴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고개를 끄떡였다. 앞에 남자가 삼켰던 말은 신경 쓰지도 못했다. 그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었다. 무하가 고개를 끄떡이자 남자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일행이십니까?” “예. 은릴 씨의 집은 어디에 있지요? 지금 가보고 싶습니다만.” 자신의 긍정에 남자의 얼굴이 크게 썩어가는 것을 보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는 몇 번이고 마른 침을 삼키다가 누군가를 불렀다. “마크! 마크!” 저쪽에서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지 친 얼굴로 걸어오던 그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크게 소리치며 뛰어왔다. “무하씨 아니오!” 무하는 낯선 자가 자신을 매우 반기자 어색해 했다.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 만 마땅히 떠오르는 자도 없었다. 그런 무하의 사정을 눈치 챘는지 마크라는 남자 는 자신과 만난 상황에 대해서 매우 상세히 떠들며 아는 척을 해댔다. “반갑소! 일전에 뢰전의 사자 일로 오해가 있었던 그 용병이요! 그때 신세를 톡 톡히 졌소!” “아…….” 그러고 보니 그때 고용된 용병이 둘 있었다. 이름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난 왜 부른 거냐?” 무하와 악수를 거하게 한 마크는 그제야 자신을 부른 남자에게 고개를 돌려 용건 을 물었다. 그 남자는 매우 떫은 얼굴로 무하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 싸가……흠흠. 유시리안 씨의 일행이란다. 아는 사이라니 더 잘 됐군. 안내 좀 해라.” “엑!?” 마크의 얼굴로 앞의 남자와 비슷하게 변했다. 마땅히 끼어들 틈이 없어 올라왔음 에도 옆에서 입 다물고 있던 바사론 일행이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저희는 은릴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가는 김에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요?” “아. 이쪽도 은릴 양에게 볼일이 있다고 했소. 같이 가면 되겠군.” “네?” 무하도 뜻밖이었는지 그들을 마주보았다. 이들도 은릴에게 볼일이 있었던 거였 나? 뭐, 별로 상관 할 일은 아니었다. “척 보니 모험자 같은데 나중에 몬스터가 재차 습격했을 때 신세 좀 집시다.” “물론입니다.” 리더인 바사론이 고개를 끄떡이며 답했다. “어쩌다 같은 일행이 되신 거요?” “오는 길에 만난 겁니다. 저도 같은 사람에게 용무가 있을 줄은 몰랐…….” “아니, 아니. 그 싸……유시리안 말이오.” “전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웃음이 나려고 하는 입가를 매만지는 무하를 어찌 생각했는지 마크는 매우 불쌍하 다는 얼굴로 간간히 혀까지 차댔다. “그런데 왜 여태 이곳에?” 무하의 지나가는 질문에 마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연신 헛기침을 해대더니만 아주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결혼했소.” “축하합니다.” “하하.” 마크의 얼굴은 쉽사리 제 색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 집이오.” 이층집의 아담한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크는 썩은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손을 탁 치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이라면 뒤의 성벽 쪽으로 가서 저기엔 없겠군!” “……?”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마크의 밝아진 얼굴을 보고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마크 는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깊이 쉬더니 씩씩하게 앞으로 걸었다. 그 걸음은 점차 약해지더니 결국 멈춰서 다시 고뇌하는 게 아닌가? 무하는 어차피 집도 알았겠다 이렇게 말했다. “급한 용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희끼리 가 봐도 충분하니 볼일을 보시지요.” “아, 그래도 되겠소?” 활짝 웃으며 반문하는 사람에게 누가 안 된다고 부정하겠는가. 마크는 경쾌한 걸 음 거리로 돌아가 버렸다. 남은 다섯은 잠깐 제자리에 서서 그런 마크를 보며 고 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 앞에 앙증맞게 놓여진 세 칸의 계단을 딛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물 벼락이 쳤다. 처음 발을 놓았던 무하가 고스란히 그 물을 맞게 되었다. “앗! 죄, 죄송해요! 사람이 있는 줄은…….” 문 안에서 누군가가 사과를 하며 튀어나왔다. 아무리 성격 더러운 자라 하더라도 일단 남자라면 헤벌쭉 웃으며 괜찮다고 해버릴 미녀가 앞치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무하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바닥을 닦은 물인지 회색빛인데다 악취까지 났다. 검은 색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매혹적인 미녀를 잠시 보던 무 하는 괜찮다며 그 손길을 피했다. 그 검은 머리카락이 헤어진 지 오래 된 지기 녀 석을 떠올리게 해 화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씻고 싶습니다만, 욕실이…….” “아, 지하에요. 욕조 위에 있는 물빛 돌을 만지면 원하는 온도의 물이 차요. 저, 옷은…….” “짐 속에 있습니다. 그럼 잠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저편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갑작스런 미녀 를 경계하는 라미와 침을 질질 흘리는 케릭, 라미의 뒤에서 별 감흥 없이 순수하 게 그녀의 미모에 놀라는 페른과 바사론을 뒤로하고 무하는 욕실로 내려갔다. =========== 라미네들이 기억 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하가 가출해서 처음으로 만났던 일행들인데... 무하가 고뇌 하고 있을 때의 모습을 알고 있는 녀석이라 할 수 있지요. * 오늘 돌연변이라는 만화를 보았습니다. Makoto Sato 님의 작품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만화였습니다. 제가 사토라레였다면...미쳐버렸을지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재능인지 느꼈달까요... “응? 돌이라고 하더니?” 무하는 얌전히 욕조 위에 있는 앙증맞은 꼬마를 보며 어이 없이 반문했다. 물론 답해줄 이는 없었다. 무하는 그 작은 꼬마를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까르륵 웃는 꼬마를 가만히 보자니 어디서 본 듯도 했다. “그래. 넌 넬을 닮았구나.” 언제나 목욕을 도와주던 귀여운 넬. 그 아이에 비하면 존재감은 한없이 약했지만 진한 향수를 일으키는 꼬마를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일단 너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물 좀 채워주겠니?” 꼬마는 까르륵 웃으며 손뼉을 쳤다. 욕조에 물이 순식간에 채워지는 것을 보고 조 심스럽게 꼬마를 올려놓았다. 꼬마는 욕조 속에서 발장구를 치며 놀았다. 그 모습 이 밝고 사랑스러웠던 넬을 연상시켜 왠지 슬퍼지기도 했다. 젖은 옷은 몸에 달라붙어 벗기 힘들었다. 무하는 시간을 조금 잡아먹은 뒤에야 벗 어낼 수 있었다. 비누로 간단하게 거품을 내 몸을 닦아낸 뒤 욕조 안으로 들어갔 다. 피로한 근육이 물 속에서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고 쉬던 그는 문 듯 두 손을 내밀어 눈앞에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 손 주제에 가늘고 예뻤던 하 얀 손이 이제는 단단히 굳어 있다. 이 몸 안에 들어 온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이 곳에 온지도 2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제야 겨우 시작한 기분이다. 카한세올을 죽 였을 때의 끔찍했던 느낌이 여전히 거북하게 남아 있지만 조금은 숨이 트이는 듯 한 기분.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저편에 달려 있는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비현실적인 은발 과 진한 녹색의 눈동자, 거칠어지긴 했지만 햐얀 피부. 그리고 남자의 몸. 가슴 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탄력 있는 근육의 촉감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 거울 속 얼 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차가운 거울 속의 녀석은 어딘지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있 었다. “언젠가는 네가 나타나 나를 죽일 것 같다. ‘페르노크’.” 두 손으로 거울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너는 어디에 있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왼쪽 팔찌의 정령에게 부탁해 머리를 말린 뒤, 두건을 썼 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섰다. 올라온 무하를 발견한 은릴은 미안한 듯 머쓱하게 웃으며 재차 사과했다. “제가 좀 덤벙대는 성격이라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덤벙대는 사람이 신부의 예복을? 이라는 의문이 잠시 스치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특별한 상황에서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는 사람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검 도부 녀석들도 평소에는 장난기로 똘똘 뭉친 악동이었지만 시합에서만큼은 예리 한 검사였다. “유시리안 씨에게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정이 있어 늦게 도착했습니 다. 무하라고 합니다.” “아……. 무하……씨요.” 은릴의 얼굴에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 어렸다 사라졌다. 관심 없는 타인에 대 해서는 한없이 무심한 무하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잠시 유시리안 을 떠올려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어쩌면 그가 펠이라고 칭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번에는 무하조차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은릴의 얼굴이 변했다. 어딘지 표독스 럽게 느껴지는 차가운 얼굴. 무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뭐라 물으려는 순간 사라져 버렸지만 쉽사리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치미를 뚝 떼는 은릴에 게 뭐라 물을 말이 마땅히 있는 건 아니었다. 은릴은 먼저 식사 중인 네명의 일행에게로 안내했다. 수입이 높은 편인 은릴은 풍 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섯명 정도의 손님쯤은 성대정도는 아니더라도 풍족 하게 대접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무하는 자신의 몫으로 내놓은 식기 앞에 앉아 은릴에게 물었다. “유시리안 씨는……?” 풀네임을 부른다는 것이 상당히 어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타인에게 애칭을 대며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벽에 잠깐 가셨어요. 오실 때가 됐습니다.” 왠지 싸늘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무하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의아한 눈으로 은릴을 보았다. 그러나 매력적인 흑발의 미인은 태연한 얼굴로 자 신을 보는 자들을 마주했을 뿐이다. 무하는 잠시 그런 은릴의 눈을 마주 보다가 신경 끄고 빵을 집었다. 향긋한 빵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급히 오느라 그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한 무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유혹이었다. 빵을 뜯어 한입 넣었을 때였다. “윽, 냄새.” “내장을 뒤집어썼으니 무리도 아니지.” “어쩌겠어. 갑자기 뒤에서 날아 왔는데.” 역한 몬스터의 냄새와 함께 듣는 것만으로 웃음이 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쪽 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던 무하가 뒤를 돌아 봤을 때, 빠르게 그에게 덮쳐오는 이 가 있었다. “이제 왔군요!” 와락 껴안으며 반갑게 외치는 이. 몬스터의 체액이 덩달아 묻어오는 게 느껴졌지 만 무하는 거리낌 없이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렸다. 손가락에 가느다란 그의 머리카 락의 간지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몇 올을 들어 올리며 부드럽게 매만져 보았다. 은발과도 다르고 금발과도 다른 그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손끝에서 느껴진다. “이번에는 약속 지켰습니다.” 무하가 나직이 말하자 그제야 포옹을 푼다. 그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 무하의 몸 을 살펴보고 입을 연다. “피곤해 보여요.” “괜찮습니다.” “아. 묻어 버렸네.” 무하의 옷에 묻는 녹색 내장 찌꺼기를 떼어내며 희미하게 웃어버린다. 그리고 뒤 를 돌아 자신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던 이에게 말했다. “샤. 우리 좀 씻겨줘.” 자기 몸에 묻었을 때는 가자마자 목욕하겠다고 궁시렁 대는 걸로 끝이더니 무하 의 몸에 묻어 있는 건 참지 못하는 건가. 락샤사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던 간 에 행동을 늦추지는 않는, 매우 이성적인 존재였다. -딱! 락샤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무하와 유시리안 주위로 물방울이 아롱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서히 커지면서 둘의 근처를 배회하더니 급속도로 확장되며 엷은 막을 형 성하여 잠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그 짧은 접촉으로 녹색의 체액과 내장 찌꺼 기는 말끔히 떨어져 나갔다. 그것을 확인한 락샤사가 다시 손을 튕기자 물줄기는 순식간에 축소되며 사라졌다. 무하는 신기한 눈으로 깨끗해진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유시리안은 생글생글 웃 으며 물었다. “식사 중이셨어요?” “지금 하려던 참이에요.” “나도 배고픈데.” 은릴이 일어나며 말했다. “금방 차려 올게요. 락샤사 씨의 것도?” “술로.” 무뚝뚝한 답을 남긴 락샤사는 거실 쪽으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식탁에는 이미 남아 있는 의자가 없었다. 유시리안이 그 뒤를 따르며 무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뻔히 무하 몫의 식사가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 게 보이는데도 말이다. 왠지 웃음이 났다. 무뚝뚝한 샤도 제멋대로인 율도 훈훈하게 다가온다. 무하는 저 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밝게 웃었다. -누굴 만나기로 했습니다. -친인이신 모양이지요? -제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 * * 방안에 작게 신음소리가 울렸다. 희미하여 제정신으로 집중해도 들릴까 말까인 신 음소리였지만 유시리안이 눈을 뜨기에는 충분했다. 어둠이 적당히 깔린 방안. 유 시리안은 몸 상태를 점검하여 자신이 두 시간동안 잠들었음을 알아냈다. 소리 없 이 일어난 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무하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역시 나 신음소리의 주범은 그였다. “아직도 인가…….” 낮게 중얼거린 유시리안은 상태가 더 심각해져 무하가 깨기 전에 얼른 손을 썼 다. 손 안에서 바둥대는 악몽의 정을 싸늘하게 보다가 꾹 주먹을 쥔다. 끔찍한 소 리와 함께 터져버리며 사라지는 악몽의 정을 보자니 속이 시원했다. 물론 소멸 된 것이 아닌 본래의 세계로 강제 소환됐다는 것은 알지만 말이다. 한결 숨소리가 평안해진 무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보았다. “괜찮아요, 펠. 이제 괜찮아요.” 그의 속삭임이 들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무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사 라졌다. 악몽의 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못내 불안했던 유시리안은 저편에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턱을 괴고 무하의 얼 굴을 가만히 보았다. 이렇게 보고 있자면 착각에 사로잡힌다. 저 아름다운 청년 의 모습 위로 투명한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달빛을 곱게 뽑아 낸듯한 머리카락 위 로는 칠흑의 밤을 곱게 뽑아 낸듯한 머리카락이, 저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위로 는 상아빛 고아한 백색 피부가, 저 메마른 듯한 분홍빛 입술 위로는 피로 아롱지 는 붉은 입술이. ‘청년’의 위로 ‘소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말해줘요, 펠. 어떤 것이 당신의 진짜 모습인지.” 왜 그렇게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나요? 왜 그렇게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나요? 당 신은 누구죠? 유시리안은 이카미렌과 공유하고 있는 능력 중 ‘진실을 보는 눈’이란 능력이 있 음을 알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왜곡된 진실이라 할지라도. “……!” -쾅! 갑자기 일어난 유시리안으로 인해 의자가 뒤로 넘어져 버렸다. 깊게 잠이 들었던 무하가 놀라 눈을 떴다. 갑작스런 소음에 놀랐던 그는 경악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유시리안으로 인해 다시 한번 놀랐다. “왜 그러시죠?” “아……. 아닙니다.” 착각일 것이다. 유시리안은 애써 웃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잠에서 깨셨군요.” “괜찮습니다. 어디 안 좋으신 건?” “아닙니다. ……아닙니다.” 걱정스런 눈길을 거두지 않는 무하를 보며 유시리안은 재차 말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조금 힘주어 뒤로 밀었다. “주무십시오.” “……율도 주무세요.” “예.” 속으로 수면의 주문을 외워 무하에게 시전 시킨 뒤, 잠든 그를 다시 확인했다. 똑 같다. 수려한 외모의 청년도. 투명한 실루엣의 소녀도.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작 게 움추려 있던 왜소한 ‘소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착각일 것이다. ===================================================================== *저는 올빼미 족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정 지나서 올립니다. *유시리안 녀석이 드래곤, 이카미렌의 아들이라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글쎄요... 후후후 *사정이 어찌됐든! 괴롭힌다! 아자! 기분 좋은 아침 인사를 나누고 일어난 무하는 갑작스럽게 몰려 왔던 수면에 대한 의문을 삼키고 다른 말을 꺼냈다. “괜찮으신 겁니까?” “네?”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는 유시리안은 확실히 연기에 탁월 한 인재였다. 무하는 다소 예리한 눈으로 그런 유시리안을 살펴보다가 안심한 듯 욕실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 무하의 등 뒤에서 유시리안은 생글 웃었다. 세속적인 의미의 늑대와 비속적 인 의미의 여우를 겸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은릴의 집에는 방이 세 개였다. 이층에 두개, 일층에 하나. 일층의 방은 작업실, 이층의 방 중 하나는 침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손님방이었다. 라미네는 여관에 묵기로 하고 가버렸고 무하와 유시리안, 그리고 락샤사도 잠시 고민하다가 여관으 로 향했다. 침대 하나에 세 명의 남자가 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락샤사가 검으로 돌아간 다 해도 사정은 달라 질 것은 없었다. 무하의 가방 속에 있는 담요를 사용할 수 도 있었지만 유시리안은 편안한 잠자리를 고집했고 사일간의 강행군으로 꽤 피로 했던 무하도 그에 따랐다. 무한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양이 들어가는 무하의 배낭 속에는 있을 건 다 있었 다. 옷, 돈, 약은 물론이거니와 오래 보관이 가능한 음식류, 신기한 마음에 여러 개 만들었던 마법 아이템, 각종 주방용품, 생활 잡화, 텐트, 망토, 간단한 공구에 다 꽤 많은 수의 마법 서적까지 빽빽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다. 거의 포화 상태인 그의 가방은 슬슬 좀더 큰 용량이 들어가는 다른 가방으로 교체해 줘야 할 듯싶었 다. 무하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갈아입을 옷을 꺼내다 말고 가방에 다시 한번 보조 마 법을 걸었다. 만약 행로 중에 가방이 찢어지기라도 한다면……. ‘큰 도시로 가면 바꿔야지.’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은 뒤, 하환이 선물한 단검을 허리에 맸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거칠게 머리를 양 옆 으로 저어 당장의 물기를 떨꿔낸 뒤 검은 두건을 한손에 들고 나왔다. 뒤에서 순 서를 기다리고 있을 유시리안을 배려하여 물기는 나가서 말릴 생각이었다. 유시리안은 들어가고 무하는 침대 쪽으로 갔다. 두건을 그 위에 던져 놓고 털썩 앉아 단검을 뽑아보았다. 정교한 룬어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송곳 모양의 검. 새 삼 이곳의 기술력에 감탄하게 된다. 아주 길고 가는 원통모양의 이것에 어떻게 룬 어를 새겨 넣을 수 있었을까? 자세한 기능을 알 수는 없지만 상당한 값어치를 지 니고 있으리라. 창문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검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사용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일전의 하환이 사용한 것을 본 뒤라 그냥 단검으로 사용하 는 게 아님은 알지만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기를 불어 넣어도 보았고 룬어를 일 일이 해독해 보기도 했지만 하환이 사용했을 때처럼 투명한 검은 날이 생성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단검으로만 사용하다 끝나버릴 것이다. 하환은 그에게 이것을 주면서 실력에 맞는 검을 쓰라고 했다. 무하를 높게 평가하 고 준 검이란 소리다. 그런데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데서야 면목이 서질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장검을 구비할 수도 없다. 그것은 선물한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 다. “새 검이 생긴 건 좋은데 말이지.” 사용하지 못한데서야……. 한숨을 쉬며 검 집에 검을 밀어 넣었다. 독특한 날에 걸 맞는 독특한 검 집. 그 섬세하고 절묘한 세공에 세삼 탄성이 인다. 아름다운 검이다. 라미 일행과 같은 여관을 썼지만 식사는 각자 다른 테이블에서 했다. 먼저 자리 를 잡고 식사 중이었던 무하는 당연히 자신들 쪽으로 올 줄 알았던 그들이 우물쭈 물 다른 곳으로 가자 의아해 했지만 유시리안은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자신들 쪽으로 오던 그들에게 유시리안이 위협적인 시선과 당사자들만 알아차릴 살기를 뿜었다는 것이 무하의 귀에 들어갈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라미 네가 눈 치 빠른 모험가들이고 무하가 관심 없는 타인에 대해선 한없이 무심한 녀석인 이 상은 말이다. 덤으로 유시리안이 갑자기 개과천선을 하지 않는 한은. 하지만 목적지가 같은 이상, 여관을 나와 동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하는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드문 무뚝뚝한 사람이고 유시리안의 위협 아래에 라 미 네들은 무하에게 말을 걸 엄두를 못 내고 있고……덕분에 대화는 유시리안과 무하 사이에서만 오갔다. “의뢰가 무엇인지는 들으셨습니까?” “예. 대단한 것은 아니고, 수도까지의 호위를 의뢰해 왔습니다. 여자 혼자 다니 기에는 아무래도 위험하니까요.” 이모저모로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추가 설명이었다. 여자가 혼자 다니다 당 할 위험이라……. 라미는 수도라는 말에 바사론을 돌아보았다. 마침 바사론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 고 있었는지 그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찡그려져 있었다. 케릭이 유시리안을 힐끔 보다가 바사론에게 나직이 말했다. “우리도 옷을 가지고 수도까지 가야하지 않아?” 함께 가면 여러모로 편할 것이다. 요즘 같은 험악한 때에는 일행이 많을수록 좋 은 것이다. 게다가 무하가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그들도 잘 알고 있고 말이 다. 저 락샤사라는 남자도 어제 수계 마법의 응용을 보아 한 가닥 하는 것 같고, 유시리안이라는 남자는 워낙 유명하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지한 무하야 잘 모르지만 카 등급 실력의 프리 등급 인 용 병 유시리안은 유명한 남자였다. 제멋대로인 성격이긴 하지만 확실한 일처리에 빼 어난 외모. 유명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년 전부터 락아타에 있 다고 들었는데 다시 욤으로 건너온 모양이다. 혼자 움직인다고 알려진 그에게 두 명이나 되는 일행이 있을 줄이야. 유명한 것에 비해 개인적인 일은 전혀 알려지 지 않은 비밀스런 남자다. 당사자의 성품은 어떻더라도 그 실력만큼은 공인된 유시리안, 그리고 무하. 동행 만 한다면 그보다 더 든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다가오는 것 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유시리안을 두고 대놓고 동행하자고 할 수도 없고, 이렇 게 우회적으로 떠보는 수밖에 없다. 운 좋게도 그들은 때를 잘 맞췄다. 유시리안이 혼자 있을 때나 락샤사와 함께 있 을 때, 그러니까 무하가 곁에 없을 때 그 이야기를 했다면 매우 깊은 자존심의 타 격과 심적인 상처를 받았을 테니까. 유시리안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무하가 별 생 각 없이 답했다. “그럼 함께 가지. 일행이 많을수록 안전하니.” “그럴까? 말이야 바른 말이라고 많이 움직이는 게 좋지. 특히 의뢰인의 호위라 면…….” 반색하는 케릭을 유시리안이 슬쩍 돌아보았다. 아주 잠깐 보고 다시 고개를 원래 대로 하는데 때마침 무하가 그런 유시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심결에 동행 하기로 했지만 이제 자신은 혼자 움직이는 몸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 다. 그런 심중을 알아챈 유시리안은 자애롭게 웃어보였다. 안도한 무하는 갑자기 조용해진 케릭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창백하게 굳은 그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왜 그래?” “…….” 케릭은 답할 여유조차 없이 질린 얼굴로 유시리안을 힐끔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사람의 얼굴, 표정, 분위기가 저렇게까지 급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케릭의 말없는 답을 들은 무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 유시 리안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걸어갔다. 그런 그들의 뒤로 벙쪄 있 는 네 명의 모험가가 있었다. “문제는 지금 몬스터가 마을을 덮쳤다는 거겠죠. 은릴씨, 이런 상태의 마을을 뒤 로하고 전투원을 여섯이나 동행한 채 떠날 수 있습니까?” 페른의 질문에 은릴은 곤혹스런 얼굴로 망설였다. 사안이 급하여 떠나기는 떠나 야 하는데 양심상 이런 때에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은릴의 조심스런 시선이 유시리안에게로 향했다. 처음 몬스터가 습격했을 때도 그 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결국 마을에서 웃돈을 얹 어주고 나서야 움직인, 전형적인 용병이 아니던가.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행이 오 기까지라고 다짐 받은 상태에서였다. 이제 일행인 무하까지 왔는데 움직여 주겠는 가. 그런 은릴의 시선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유시리안은 모르는 척 차를 마실 뿐이었다. 무하는 굳이 이렇다 할 생각이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냥 정해지 는 데로 따를 생각이었다. 가만히 있던 바사론이 말했다. “동행하기로 했으니 말하겠습니다. 이쪽이 받은 의뢰는 신부복을 받아 올 것. 시 일이 정해진 의뢰입니다. 굳이 남아서 전투를 하겠다면 우리는 신부복만 받아 먼 저 떠나겠습니다.” 만약 있을 때 몬스터가 습격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지만 일부러 남아서까지 싸 울 정도로 한가한 몸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마을이 전멸 될 때까지 공격받은 일은 없었다. 일정 기간동안 습격하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그들의 패턴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덕분에 그리 큰 부담은 생기지 않았다. 은릴 역시 사정이 급하기에 바사론의 말에 얼른 응했다. “함께 떠나죠. 저 역시 시일이 촉박해서…….” 냉정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크게 신세를 지고 있는 마을이긴 했지 만 말이다. 그녀가 가야하는 사정은 개인적인 정은 가차 없이 배제해야 할 공적 인 사무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정과는 달리 바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막 짐을 챙기고 있을 때, 몬스터가 습격해 왔기 때문이다. 유시리안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 리고 있다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무하에게 말했다. “펠은 여기서 은릴을 지키고 있어요. 의뢰인이 죽어서야 죽도 밥도 안 되니까.” “성벽으로 나가서 저지하는 편이 더…….” “제 말대로 해요. 괜히 나섰다가는 그동안 팀워크를 맞췄던 것이 무너지니까 이 편이 더 효율적이에요. 그리고 용병은 보수 없이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정색을 하고 말하니 납득당하고 말았지만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모순점이 쉽 게 보였다. 팀워크가 어쩌고 하면서 무하는 만류하고는 라미 일행은 아무렇지도 않게 끌고 나가버리는 점이나 일종의 파트너로서 움직이는 이상 유시리안이 받는 보수에는 무하의 몫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나. 그러나 불행히도 라미 일행은 싸 가지 없기로 유명한 유시리안에게 대들 배짱이 없었고, 무하는 파트너가 보수를 나눈다는 것을 몰랐다. 그동안 유일한 카 등급 페어로, 파트너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보수를 받아왔던 것이다. 마을로서는 큰 손실인 셈이나 애당초 그 손실을 모르니 네 명의 전력이 더해진 것 으로 기뻐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이렇게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는 것이다. 유시리안의 강압적인 제안으로 본의 아니게 은릴의 호위를 맞게 된 무하는 그녀 의 집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자신이 본래 수다에 취미가 없는 까닭도 있었지 만 활발한 듯 보였던 은릴이 둘만 있게 되자 갑자기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보면 볼수록 두 번째 지기인 시륜이 연상되는 아름다운 흑발의 미녀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무하는 굳이 가까이 가려하지 않았 다. 굳이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대략 일주일 거리인 수도까지의 여정동안 낯붉힐 일만 없으면 그만이다. 은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느질을 하다가 한번씩 무하를 슬쩍 보고, 다시 바느 질을 하다가 무하를 슬쩍 보기를 반복했다. 그 시선이 과히 곱지 않다는 것을 피 부로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환이 준 단검만을 만지작거리며 그것의 사용 방법에 대해 고민할 뿐. 그런 반응에 은릴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지고 있다는 것 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미묘하고도 일방적인 신경전이 흐를 때였다. 갑자기 똑똑, 하고 제법 당 찬 노크소리가 났다. “은릴 누나!”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꼬마의 목소리. 무언가 일이 터진 듯 급하게 들리는 그 목 소리에 은릴이 빠르게 답했다. “들어오렴, 레너.” 왠지 귀에 익는 이름이다, 라고 생각에 잠기는 무하와는 상관없이 문은 벌컥 열렸 다. 열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가 안을 살펴보다가 무하를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 와 와락 안겼다. “와! 진짜 무하 아저씨다!” 뜬금없는 포옹이었지만 피하거나 밀쳐 내지 못한 것은 꼬마가 정확하게 ‘무하’ 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직업상, 특별히 관심이 없는 한은 얼굴이나 이름을 잘 기 억하지 못하는 무하였기에 낯이 익은 꼬마의 얼굴을 뜯어보며 먼저 말을 걸지 못 했다. 이렇게까지 반갑게 맞아주는 녀석에게 차마 누구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다 행히 꼬마는 그런 무하의 모습을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헤헤! 역시 못 알아보는 구나! 엄마도 내가 많이 커서 못 알아보겠다고 했거 든.” 그리고 나서는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 레너야, 아저씨!” 무하는 마침내 꼬마가 누군지, 자신과 어떤 인연이 닿아 있었는지를 기억해 냈 다. 그렇다고 꼬마가 밝힌 이름이나 말과는 달리 작기만 한 몸뚱이를 보고 떠오 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 마을에 들렸을 때의 상황을 곱씹다가 이제는 딱 이 정도로 자랐을 꼬맹이를 기억해 낸 것뿐이다. 물론 그것을 꼬마에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정말 못 알아 볼 뻔했다, 레너. 이젠 어른이구나.” “헤헤. 아버지한테 아저씨가 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안 찾아와서 내가 왔지!” “아버지?” 기억이 잘못 되지 않았다면 레너는 분명 빵집을 경영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컸었 다. 홀어머니인지 아닌 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머무르는 동안 아버지라는 작자를 못 봤으니 으레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라도 가 있었던 것일까? 무하 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얼굴로 레너는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저씨 가고 얼마 안 있어서 울 엄마 결혼하셨거든! 그때 왔던 용병 아저씨 랑.” “용병 아저씨?” 반사적으로 입에 의문이 걸렸지만 머리로는 이미 누군가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분명 마크라는 용병이 결혼했다고 말했었다. 역시나 였다. “마크! 울 아버지야!” 마크 정도면 강한 축에 속하는 용병이었다. 카 등급까지는 못 되더라도 말이다. 특히나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그 힘이 가져다주는 권위가 제법 높을 것이다. 때문 에 일까? 이제는 아들이 된 레너가 자신의 양부에게 가지는 동경과 존경심은 상당 해 보였다. 무하는 자애로워 보였던 레너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 가족의 평소 단란한 모습 을 예상할 수 있었다. 피식 웃으며 레너의 머리를 가볍게 부벼 주었다. “그래, 그래. 좋겠구나.” 레너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무하를 올려보다가 헤죽 웃었다. 괜히 기분이 좋았 다. 무하가 짓는 미소는 그런 파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웃는 것은 처 음 본다. “마크 씨는 강할뿐더러 누구와는 달리 용감한 분이죠. 몬스터가 습격하자 제일 먼저 움직여 마을을 지키셨답니다.” 가시가 느껴지는 목소리. 무하는 예의 무관심한 눈동자로 은릴을 돌아보았다. 평 소와는 다른 마을 누나의 모습에 레너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은릴 은 무하의 얼굴만을 도발적인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는 그 순간 무하가 덤덤한 어조로 물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 *은릴과 무하의 신경전! 그 전초전! *십이국기라는 소설책을 보았습니다. 그 무지막지한 줄간에 글씨 크기에는 넋을 잃고 말았지만 재미있었어요.(하지만 그 두권 분량이 보통 책에 맞춰 글씨를 줄이고 간격도 좁히면 한권이 되지 않을까...하는 의혹이...사야 하는 입장에서는 괴롭다고요. 휴우....-수집벽이 있는 녀석-) 덧붙이 마성의 아이를 구하고 있습니다. 휴우... 영풍문고에는 절판됐다고 하는데... 어떻게 구할 방도가 없을지...;ㅡ; *묵향을 샀습니다ㅡ_ㅡv 통판으로 샀는데 싸게 샀어요. 후후후~ 근데 한권에 오류가 생겨서 곤혹스럽습니다; 어찌 될런지... *내일부터! 전 시험기간에 들어갑니다. 금요일까지죠. 후후후~ 무슨 뜻인지 아시죠+_+? 뜻밖의 반문에 은릴은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무하가 던진 저 간단한 반문이 의 미하는 것을 똑똑히 알아들은 덕분이다. 현재 무하는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처음 몬스터가 습격했을 때는 이 마을에 있지도 않았다. 즉, 그는 용기가 없어 몬스터와의 격전을 피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은릴은 달랐다. 처음부터 마을에 있었으면서도 한번도 격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집안에서 자신이 고용한 용병의 호위를 받으며 한가하게 바느질이나 하고 있다. 다른 여자들은 하다못해 옆에서 부상자를 돌보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하는데 그녀는 나 몰라라 이러고 있는 것이다. 꾹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을 느낀 은릴은 획 돌아서 이층으로 올라가 버 렸다. 무하는 그런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곧 관심 끊고 고개를 바로 했다.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그지만 걸어오는 시비까지 무심히 넘길 만큼은 아 니었다. 특히 저런 류의 빈정거림은 싫어했다. 아니, 그보다는 경멸에 가까웠다. 유시리안의 짜증이 짙을수록 주위 사람들의 정신적 스트레스 강도는 더해갔다. 유 시리안이 화를 속에 눌러두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주위 사람에게 화풀 이 하는 경향이 심했고, 또 그런 자신에게 매우 관대했다. 한마디로, 세상에는 득 될게 없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이 살아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편 하겠지만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일주일 골방에 가둬놓고 내내 교대로 패버렸으면 좋겠지만 유감스 럽게도 유시리안은 강하다. 제국 단위로 봤을 때도 한 손에 들 강자인 그를 시 골 마을의 순박한 청년들이 감당할 수 있으리 없지 않은가. 이래서 사람은 힘이 있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청년들의 가슴을 찢어놓는 것은 저런 싸가 지 없는 녀석을 보는 여자들의 눈이 핑크빛 하트 모양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여기 서 한가지 사항이 추가 된다. 사람은 얼굴이 되고 봐야 한다는 것.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잡설을 재치고 본론을 말하자면, 평소에도 제멋대로에 막나가는 유시리안이 한층 짜증난 모습으로 몬스터들을 난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함께 싸우는 남자들로 하 여금 듬직함보다는 살벌함을 느끼게 하는 손속으로. 깨끗하게 갈라져 양 쪽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몬스터의 벽을 무성의하게 발로 걷어차 성벽 밑으로 떨어뜨린 뒤, 좀더 여유 있는 간격을 확보 하고 다시 베고, 베고……. 한번의 검 놀림에 양 쪽으로 반쪽씩 떨어지는 몬스터의 시체들을 보자면 싸울 의욕도 상실되어 성 벽 밑으로 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었다. 녹색 체액들이 유시리안의 곁을 약간씩 비껴가며 바닥을 적셨다. 그 덕에 깨끗한 옷은 어디까지나 운 또는 그의 회피력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또 다른 능력 덕이 었다. 어제의 뼈아픈(?) 교훈을 되살려 미리 하위 정령을 소환해 명령해 놓았던 것이다. 골드 드래곤인 이카미렌과 능력을 공유하는 그에게 바람 속성의 정령을 부리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뭐든 자신의 손으로 이루는 것을 좋아하는 유시리안 이기에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렇게 유시리안이 광폭한 듯 절제된 칼부림에 취해 있을 때, 그런 그를 주시하 는 자가 있었다. 유시리안이 평소와 같은 성질머리로 전투에 임했다면 충분히 눈 치 챘을 시선의 주인공은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시력으로는 발견하지 못할 높이의 허공에 떠 있었다.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유시리안의 움직임을 살펴보다가 낮게 웃었다. 즐겁다는 의미의 것이 아닌 짜증난다는 의미의 다소 일그러진 미소였다. “시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별게 다 훼방이군.” 별게라고 취부하기엔 너무 강하다는 게 흠이지만. 차가운 핏빛 눈동자의 소유자, 하환은 일순 기지개를 펴듯 몸을 쭉 뻗었다. 순간 긴장한 근육을 풀며 작게 한숨 을 쉬었다. 이 지겨운 짓은 정말이지 그의 취향이 아니다. “어디에 있는 겁니까…….” 입술을 꾹 깨물다가 다시 밑을 보았다. 어차피 순식간에 증가하는 몬스터라지만 이 마을에서만 이렇게 많은 피해를 입어서는 아까운 시간을 잡아먹을 것이다. 게 다가 어차피 ‘볼 것’은 다 봤다. 하환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쫙 폈다. 손바닥 이 향하는 쪽 허공에 무언가가 일그러지며 형성되기 시작했다. 서서히 모습을 드 러낸 그것은 작고 가는 피리였다. -삐이익-! 약속된 신호에 몬스터들이 서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 1기 마도때 조차도 몇 번 쓰이지 않았던 ‘약속된 지배’. 모든 몬스터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피리다. 그만큼 위험한 물건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만드신 창세신의 허가 받은 자 만이 쓸 수 있는 물건이라 걱정은 없다. 이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께 인정받은 행위’라는 뜻이건만 무지한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알 지 못하는 인간은 그렇다 치고 진실을 알고 있는 그들마저 반항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이런 생고생을 하며 아까운 시간만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찾아내야 한다.” 하환은 별 의미 없이 지상을 한번 내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평정을 잃고 흠칫 했다. 그가 지금껏 지켜봤던 살육의 주인공이 정확히 그를 올려보고 있었던 것이 다. 하환이 자신의 시선을 발견한 것을 알아차리자 그는 뭐라 입을 달싹였다. 하 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떡이고 텔레포트 했다. -지겹다. 그만 꺼져. * * * 전투를 끝내고 피곤했을 텐데도 유시리안은 출발하자고 독촉했다. 리더인 바사론 만이 그나마 자신들의 상태를 점검, 별로 피로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동의를 했을 뿐, 다들 유시리안의 말에 반발할 의욕을 잃은 듯 했다. 이런 효과 를 노린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똑똑한 마법사 페른이었다. 물론 그것을 확인해 볼 용기는 없지만 말이다. 다시 몬스터가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전투원들이 빠져나가는 것임에도 묘 하게 다들 반기는 눈치였다. 이제 라미 네들은 대충 감 잡은, 그런 반응의 주된 원인은 유시리안에게 있었다. 그 실력의 공백마저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가 주 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무시해 버리면 그만일 것 을 사사건건 열 받아 하는 그들 역시 정상이라 보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은릴은 의외로 날렵하고 깔끔한 승마 솜씨 보여주어 걱정했던 이들을 안심시켜주 었다. 락샤사는 말을 타기 귀찮다는 이유로 검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것을 모르 는 라미가 그의 행방을 물었다가 유시리안에게 면박을 당해야 했다. 무하나 락샤 사가 묻지 않는 한 유시리안의 입에서 친절한 답이 나올 리 만무하지 않은가. 무 하는 이미 락샤사가 검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궁금할 게 없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한 일행들은 저녁까지 순조로운 길을 갔다. 방금까지 몬스터와 의 혈전을 겪은 것을 생각하면 비현실적이리만치 평온한 시간이었다. 라미와 케릭 은 중간 위치에서 은릴과 더불어 활기차게 떠들며, 말수 적은 바사론과 기마가 서 툰 페른은 맨 뒤에서 조용히 갈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암묵적인 약속 하에 앞에 서 가고 있는 무하와 유시리안을 기꺼운 마음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무 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옳다. 둘 사이에 끼어들려고만 하면 살벌한 눈으로 노 려보는 유시리안을 무시할 정도의 배짱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무하야 먼저 말을 거는 타입이 아니니, 자연히 유시리안과만 대화를 하게 됐고 결국 그렇게 세 패 로 나뉘어 버린 것이다. 누군가와 수다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며 여행하는 것은 농땡 사부 이후로 처음인 무하는 매우 들떠 있는 상태였다. 농땡 사부와의 대화가 스승과 제자, 혹은 부모 와 자식이라는 수직 관계의 대화였다면 유시리안은 대등한 입장에서의 수평 관계 의 대화였다. 그것은 무하에게 있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설희와의 대화는 늘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녀의 생각, 그녀의 고민, 그녀의 일상들을. 민재는 어딘지 어색하기만 했다. 이렇게 입이 아파올 정도로 이야기 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자. 언젠가는 이날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펠?” “……예?” 자신이 예전에 맡았던 의뢰의 이야기들을 이것저것 해주던 유시리안은 갑자기 침 묵하는 무하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청년의 모습 속에서 슬프게, 그리고 두렵게 웃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똑똑히 봤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손을 뻗어 무하의 뺨에 가져다 댔다. 찬바람을 맞고 있어서인지 차가워진 피부의 촉감이 기 분 좋게 느껴졌다. 갑작스런 유시리안의 행동에 무하는 약하게 웃어보였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 날카로운 유시리안의 눈동자가 지금처럼 거북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거북한 것이 아니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이건…….’ 유시리안은 무하를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다. 손을 내려 다시 고삐를 잡았다. “자, 서두르죠.” 자상하게 웃는 유시리안의 얼굴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주 웃어버린 무 하였다. 유시리안은 당장의 저 웃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소녀’도 웃고 있으니. 온 천지에 핏빛 노을이 그려지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유시리안은 첫 번째 불침번을 맡았다. 처음이나 마지막 불침번이 유 리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런 만큼 맡고 싶어 하지만 지금만큼은 감히 나설 수 없었다. 저 남자의 성질머리는 이미 질릴 정도로 보지 않았던가. 먼 저 피하고 만다는 심정이었다. 건드려서 득 될게 없다. 유시리안은 자신의 옆에서 모포를 덮고 잠들어 있는 무하를 보다가 장작을 하나 불 속에 집어넣었다. 악몽의 정이 보이고는 있지만 전처럼 득실대지도, 왕성하게 활동하지도 않는다. 저 정도는 어떤 존재에게나 조금씩 깃들어져 있는 상태다. 문 제는 저 정도를 유지하는 게 힘들다는 것에 있지만 말이다. 다행히 무하의 지금 상태는 괜찮은 편이었다. 검은 두건의 끝자락을 손끝으로 매만져 보다가 뒤의 나무 기둥에 기댔다. 혼자 다 닐 때는 불침번 같은 것은 서본 적이 없다. 다음 마을이 보일 때까지 계속 강행 할 수 있는 체력이 있고, 정 안 되서 숲에서 잠들 때면 위험물의 접근쯤은 눈치 챌 수 있는 감각이 있다. 또 그래 본 적은 없지만 체력, 감각이 다 여의치 않을 때는 락샤사가 있다. 무하와 함께 할 때도 그럴 작정이었지만 무하가 자는 모습을, 분명하게 말하면 악 몽의 정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일부러 불침번을 자처한 것이다. 뭐, 둘의 여행길 에 눈치 없이 끼어들은 모험가 넷을 편하게 두기 싫다는 좀팽이 기질이 발동한 것 도 없진 않지만 말이다. 무하는 가장 마지막 불침번이고, 그가 일어나야 할 시각 이 본래 그의 기상시각이라는 것을 알기에 상관없었다. 무하의 모포를 잘 덮어 준 다음에 장작을 하나 더 집어넣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별이 많았다. 어둠 속을 걷고 있다. 어둠 속에 떠 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어둠 속에 있다. 꿈?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고막이 짓눌리는 것 같다. 그래서 노래를 불러본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저 별들 중에서…….” 홀로 동떨어져 있는 상황이면 여지없이 이 노래가 튀어나온다. ‘꽃과 어린왕 자’. 설희가 알려줬던 노래……. 가늘고 고운 그녀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아스라한 느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싸하게 울려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꽃이여, 내 말을 들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어린 왕…….” “……어.” “……?” 분명 무슨 소리가 났었다.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마치 어두운 방안에 누워있는 데 어디선가 벌레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한 오싹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좀더 집중하자 그 바스락거리는 듯한 작은 소리가 흐릿한 한 단어로 다가왔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 무한히 반복되는 한마디. 섬뜩한 거부감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다가갔다. 다가갔 다는 표현이 과연 맞을까? 스스로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지 만 분명 그 ‘존재’는 가만히 무릎을 감싸며 약하게 흐느끼고 있었고 무하는 불 쾌감과 거부감 속에서도 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무 하가 움직인 것이리라. 그 ‘존재’의 실루엣이 가까워짐에 따라 흐느낌과 같은 속삭임도 더욱 커지고 분 명해 졌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싫지?”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 그 ‘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당초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하는 자신이 식은땀을 흐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마를 흐르는 축축한 물기가 그를 독촉하 고 있었다. 무하는 질문을 바꿨다. “넌 누구지?” “…….” “이봐요!” “……!” 무하가 일어났을 때, 주위는 상당히 밝아져 있었다. 어스프름한 새벽이 껑충 다가 오고 있는 시점. 사물이 보인다. 꿈이 아니다. 이런 판단을 내린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바로 옆에서 나무에 기대 잠들어 있는 유시리안이었다. 흐느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호흡했다. “뭐하는 거죠?” 그를 깨워준 목소리. 무하는 깊이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들었다. 예상했듯이 은릴 이었다. 무하 바로 앞의 불침번이었던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짜증스럽게 무하를 내려보고 있었다. “당신 차례에요.” 퉁명하게 말하고는 저편으로 가 누워버린다. 무하는 식은땀을 천천히 닦아내며 유 시리안 옆에 기댔다. 땀으로 식은 몸에 유시리안의 따뜻한 체온이 옮아왔다. 그제 서야 이곳이 현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릎을 세워 상체를 기댄 채 계속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는 무하의 어깨 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방향을 보아 확인 할 것도 없이 유시리안이었다. 그렇지 만 무하는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유시리안이 걱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음 을 확인하고 나서야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유시리안은 괜찮으냐고 묻지 않았다. 지금의 무하에게 굳이 그 질문을 하여, 거짓 말을 하게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침묵으로서 무하를 안심시켰다. ======================================================================= *예상외로 빠른 컴백? 혹시 이 시간에 기다리고 있는 분이 과연 계실까요? 하하^^ 비축분이 조금 있어서 올립니다. 다음 회가 빠른 시일에 올라 올것이란 기대는 말아 주세요~ 아침이 되고, 점심 무렵에 다른 마을에 도착했다. 은릴이 있던 마을에서 수도까 지 직선상으로 세 개의 마을이 들어가 있었다. 마을끼리의 거리는 제각기였지만 이렇게 저렇게 쪼개어 일정을 짜 넣는다면 이틀에 마을 하나를 걸쳐 일주일째에 수도에 도착할 수 있다. 무하 경우엔 곤크를 들렀다 가기 위해 조금 돌았고, 의 뢰 날짜를 지키기 위해 강행했기 때문에 나흘 만에 도착했다지만 보통은 이레에 서 열흘 걸린다. 유시리안은 처음부터 사이러를 향해 일직선으로 이동한데다 혼 자 움직이기에 매우 빨라, 이틀 만에 도착해 버렸다. 이런 경우는 유시리안 정도 에나 국한 된 일이니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순조롭게 마을에 들어선 그들은 식당을 겸업하는 여관으로 향했다. 마을에 서 이틀 분밖에 식량을 준비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식량조 달을 하러 돌아다녀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출발을 해도 되지만 하루 쉬고 가 도 상관없다. 생각 외로 은릴의 체력이 강하고 승마술도 뛰어나서 시간을 덜 잡아 먹은 것이다. 굳이 불편한 노숙을 자처할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다들 하루 쉬고 가 길 원했다. 대신 아침에 일찍 떠나야 하지만, 식량조달을 미리 해놓으면 문제 될 것은 없다. 당연하다 할 수 있겠지만 식량조달은 라미 네가 떠맡았다. 유시리안은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던 것이다.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유시리안의 파트너인 무하는 그 와 행동을 함께 한다. 그렇기에 그는 잡아 놓은 여관방의 편안한 침대에 누워 별 로 쌓이지 않은 피로를 풀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인용 방을 잡아 함께 방 을 쓰는 유시리안 역시 사정은 같았다. 그 시각에 라미 네가, 자신들이 방금 떠났 던 마을 청년들의 심정을 절실히 공감하고 있다는 것은 그 둘이 알바 아니었다. “펠.” “네?” “술 좋아해요?” “마시기는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왜요?” 무하는 당연하지 않냐는 어조로 답했다. “쓰잖아요.” 그래서 결국 향이 좋은 커피를 마시기로 한 두 사람은 바쁘게 뛰어다닐 라미 네들 은 기억 저편으로 보내버리고 한가롭게 식당 창가 근처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었 다. 그때 그들과 마찬가지로 한가로이 목욕탕에 눌러 있었던 은릴이 다가왔다. 원 형 테이블에 놓여 있는 네 개의 의자 중 하나에 앉은 그녀는 종업원에게 똑같은 주문을 하고 무하를 힐낏 보았다. 무하는 그녀가 다가와 앉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턱을 괸 상태로 커피 향에 취해 있었다. 그것은 유시리안도 마찬가지로 둘 사이에는 기분 좋은 침묵이 흘렀다. 쾌 활한 여행길과 아늑한 휴식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다. 둘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웃사이더들이었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각 별하게 다가왔다. 은릴이 와, 허락도 구하지 않고 끼어들었다 해서 쉽게 깨어질 순간이 아님은 분명했다. 대체로 이런 식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는 어색함과 곤혹 을 동시에 느끼며 자신을 어필하려 든다. 자신의 존재가 철저히 묵살되고 있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은릴이 둘을 번갈아 보며 마땅한 화제를 찾을 때, 마침 그녀가 주문한 커피가 도착했다. 커피만의 독특한 향내가 진하게 맡아지 자 슬쩍 말을 걸었다. “향이 좋네요.” 그녀의 시선은 유시리안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 다. 이 정도는 익숙한 일이기에 개의치 않았다. 본래 강자는 어딘지 고독하면서 도 자신만의 개성이 있기 마련이다. 또 함께 생활한 이틀간의 시간은 그리 가벼 운 것이 아니었다. “커피에 쿠키를 곁들이는 것도 좋은데 조금 시킬까요?” 넌지시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해서 ‘답’을 요구하는 질문으로 번진 은릴은 유시 리안의 얼굴을 계속 주시했다.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불쌍하게도 그녀에게 주 어진 반응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펠. 쿠키 드실래요?” “저는 별로. 상관하지 마시고 드세요.” “저도 됐습니다.” 생긋 웃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좀 전의 자세로 돌아가 버리는 유시리안이었 다. 호의를 베푼 것은 은릴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런 무안뿐이었다. 이래서 건 드려 봐야 좋을 게 없다고 하는 거지만, 은릴은 이조차도 개의치 않는 대범함을 지녔다. 그보다는 이정도의 무시는 당연한거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랄까? 무하는 문득 은릴이라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가닥가닥이 세세하게 분별될 듯 한 흑발과 새하얀 얼굴, 분명 아름다운 여자다. 자신을 볼 때면 어딘지 차갑지만 기 본적으로 타인을 볼 때면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다. 성벽이 있긴 하지만 작은 마 을에서 바느질을 하던 여자로는 볼 수 없는 날렵한 몸놀림과 살상용으로 보이는 실용적인 단검 두 자루는 그녀의 매력을 한층 더 돋구어 주는 듯 하다. 무엇보다 도 그녀의 눈에 어려 있는 서늘한 이지와 깊은 지성이 시선을 잡아끈다. 그런 그 녀가 어째서 자신에게는 좋지 못한 인상만을 보여주는 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열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던가. 무하는 사람들을 판단함 에 있어 자신이 없었다. 믿고 사랑했던 설희는 배신했고, 의지했던 로레라자는 비 수를 꽂았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쓴 상처를 남겨준 이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싫어했던 카한세올은 자신과 닮은꼴이었고 지기라 여겼던 클랜은 자신을 기만했 다. ‘클랜…….’ 가장 힘들었을 때 곁에 있어준 지기였던 남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무하에게 득 이 될 거라 함부로 단정 지었다. 그것은 무하에 대한 ‘믿음’이 아닌, 자기 자신 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을 행함으로서, 자신의 판단을 무하에게 강요 했다. 철저한 오만과 독선. 그것은 친구일 뿐이다. 무하를 도와준다는 것에 자기 만족을 구하는 단순한 친구인 것이다. 지기는 상호적인 관계. 지기라면 무하가 스 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줬어야 했다. 비록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답답하고 힘들고 아프더라도, 지기라면 그것을 견뎌줬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아픔을 조 금이나마 내보이며 의지하고 있던 무하에 대한 지기로서의 예의였다. 무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 어째서, 어째서……라고 탄식해봐야 소용없다. 설 희에게도 로레라자에게도, 그리고 클랜에게도 무하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그들을 대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배신했다. 그것은 이쪽 탓이 아니다. ‘나’로 인한 사 태가 아니라면 이쪽에서 후회하고 되새겨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하가 진정으로 후회하고 죄스러워 하는 것은 두 형에 대한 것이다. 스스로는 모 르지만 결과적으로 두 동생을 모두 빼앗긴 테밀시아 형님에 대한 죄책감.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힘을 남용해, 결국 그 시신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소멸시켜버린 카한세올에 대한 죄책감. 아직도 구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 죄를 갚아야 할 지……. 생각이 어두운 쪽으로 나가자 얼른 고개를 저었다. 분명 고뇌란 사람이 진보하는 데 있어 좋은 수단이다. 그렇지만 자제하고 조금은 풀어줄 때도 필요한 것이다. 2 년 동안이나 찾지 못한 해결책이다. 잠시 커피를 마시는 동안이라도 생각을 접는 것이 큰 죄가 되지는 않는다. “수도에 가면 의뢰가 끝나는 건데. 이번에는 여유 있게 관광이라도 가는 게 어때 요? 일에 쫓기는 것도 좋지만 휴식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하다고요. 펠은 욤을 떠 나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오. 아직…….” 욤 외에 나라 이름은 막 전쟁을 치른 락아타밖에 모릅니다, 라고 덧붙이고 싶은 것을 꾹 삼키는 무하였다. 은릴이 옆에 없었다면 했을 지도 모른다. 그때의 은릴은 곱지 못한 시선으로 무하를 보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멀뚱히 눈을 뜨고 멍하니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주위에 서 마땅히 볼만한 무언가는 없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무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편에서 잠들어 있는 유시리안이 보였다. 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 며 창가로 걸어갔다. 구름이 잔뜩 끼어, 달이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밝음이 있 는 구름 너머에 있으리라 짐작이 될 뿐이다. “너는 누구지?” 흠칫! 어디선가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몸을 홱 돌리며 경계했다. 적어도 방금까지 는 유시리안 외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목소리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낼 수 없 다. 몸을 낮추며 유시리안의 침대 쪽으로 이동했다. 누군지 모를 침입자가 잠들 어 있는 그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주위를 살피며 유시리안의 몸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으로 손을 뻗었 다. 흔들어 깨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닿은 것은 소름끼치는 공백. 유시 리안이 없다? 놀라 침대 위를 보았을 때, 그 곳에는 누군가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 다. “너는 왜 ‘거기’에 있는 거지?” 목소리는 그 누군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하는 두려웠다. 살기도 투기도 없는 그 누군가가 너무나 두려웠다. 그것은 본능적인 거부. 본능적인 몸부림. 뒤 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무하의 침묵과 거부에도 누군가는 반응하지 않았다. 낮고 고저 없는 울림이 무하의 정신을 꾹 쥐어짜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 갑작스런 어지러움에 주저앉았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도 커졌다. “싫어-!” 다시 수도를 향해 출발하는 일행들 사이에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들에게는 묘 한 상하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필요에 의해 리더를 정하는 일반 파티와는 달리 이들에게는 오로지 힘과 박력으로 절대자의 위치를 획득해 횡 포를 부리는 한 남자가 있는 것이다. 본래라면 그의 의뢰인의 발언권이 강해야 겠 지만 제멋대로인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내숭을 떨며 호 의를 베푸는 것은 무하. 결국 일행의 먹이사슬 맨 꼭대기에 군림하고 있는 것은 그인 것이다. 그리고 묘한 침묵은 바로 그 군림자의 어둑한 분위기에서 비롯됐 다. 무하가 기분이 나쁘면 유시리안 역시 저조한 모습을 보인다. 유시리안은 기분이 나쁘면 주위에 화풀이를 해대는 성격이었다. 참아봐야 홧병만 난다는 지극히 이기 적인 근거를 들며 말이다. 그런 성질머리를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라미들로서는 괜 히 꼬투리 잡히지 않게 조용하는 수밖에 없었고, 대화의 상대가 없는 지라 은릴 역시 침묵해야 했다. 해결 방법은 무하가 주위의 분위기를 알아채고 기분을 풀거 나 나쁜 내색을 하지 않는 것뿐인데, 주위에 관심이 희박한 그에게는 무리였다. 결국 아침부터 점심을 먹기 위해 말에서 내릴 때까지 그들은 한마디도 못하고 꼼 짝없이 어색한 행로를 걸어야 했다. “펠. 배고프지 않아요?” “아, 예.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때군요.” 이 보편적인 대화가 출발하고 나서 그들 사이에 처음으로 나온 대화였다. 조금은 숨통이 튀었다. 일제히 약한 한숨을 몰아쉬며 말에서 내리는 일행을 보았지만 영 문은 알 수 없는 무하였다. 식사는 미리 싸온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잠깐 앉아서 쉬기로 했다. “깨끗한 여행길이네요. 몬스터도 산적도 없고…….” 물을 마시며 유시리안이 말했다. 멍하니 있었던 무하는 문득 그런 유시리안을 돌 아보았다. 저 사람은 어째서 2년간이나 나를 찾았을까? 그런 의문이 든 것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자기 옆이라 했다.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을 진심으 로 말해주었다. 무하에게 있어서 ‘있어야 할 곳’은 가장 소중한 것이 있는 곳이 며 평온하게 안주할 수 있는 곳. 유시리안에게 있어서 ‘있어야 할 곳’은 어떤 의미일까? “‘있어야 할 곳’…….” “네?” “……아닙니다. 아무것도.”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밤이 되고 다들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쉽게 사냥한 토끼를 손질하고 불에 올려놓 았다.고소한 냄새와 고기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불에 타는 소리가 식욕을 자극했 다. 고기를 손보던 은릴이 적당히 잘라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들 말을 아끼 고 식사에 열중했다. “설거지는 내가 하지.” 야영 준비에 별로 참여하지 못했던 무하가 그릇을 챙기며 말했다. 이상하게 그릇 을 넘기면서 유시리안 쪽을 힐끔댔던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함께 가죠.” 뜻밖에도 은릴이 일어났다. 반쯤 일어났던 유시리안이 미간을 슬쩍 찡그리는 모습 이 보였지만 은릴은 애써 무시했다. 됐다고 말하는 무하를 무시하고 물가로 먼저 걸어갔다. 물가는 바로 밑이었다. 쌀쌀한 기운이 스며들기에 조금 떨어져서 야영 준비를 했 다. 어둡고 경사진 숲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내려온 은릴은 물가에 서서 무하 를 기다렸다. 그릇을 들고 오느라 조금 늦은 무하는 말없이 물가에 앉았다. 그릇 들을 내려놓고 하나를 들어 물에 담가 설거지를 시작하는 그를 지켜보고만 있던 은릴이 입을 열었다. “오늘 기분이 나빠 보이더군요.” “…….” 무하는 잠깐 올려봤을 뿐 다시 설거지에 열중했다. “아무리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렇게 티를 내야겠어요? 누군가 신경써주길 바라는 건가요? 그런 건 비겁해요!” 무하는 계속 침묵했고 은릴은 계속 말했다. “누군가 신경써주길 바란다면 입을 열어 고민을 말해요. 그리고 상대에게 의견 을 구하던 동정을 바라던 하라고요. 그렇게 말없이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신경써 주고 물어주고 동정할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무하는 네 번째 그릇을 물에 담갔다. “민폐 끼치지 말아요! 당신은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잖아요.” “설거지 하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다섯 번째 그릇을 담구면서 나직이 말했다. 그릇은 이제 두개가 남았다. 설거지는 커녕 자리에 앉지도 않았던 은릴은 그제서야 머쓱히 작업에 참여했다. 그녀가 그 릇 하나를 씻었을 때 설거지는 끝났다. 무하는 익숙한 솜씨로 그릇을 포개 들었 다. “나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 “예?” “광대처럼 떠들고 정신없이 굴어야 일행에게 폐가 안가는 거였나? 단지 말이 없 는 것만으로 폐가 된다면 벙어리는 세상의 해악이겠군.” “그, 그건 달라요!” “신경 꺼줬으면 좋겠습니다, 은릴 씨.” 방금까지의 빈정거리는 어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반말보다도 더한 무시가 느 껴지는 존대를 듣고 나서야 은릴은 무하가 좀 전까지 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을 깨 달았다. “미녀의 관심을 받는 것은 영광이지만 은릴 씨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 무하는 싸늘하게 말하고 저편에 보이는 장작불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남겨진 은 릴은 모멸감과 당혹감에 굳어 그런 무하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무하는 자신에게 필요이상으로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그 간섭하는 존재 가 누구냐에 따라 싫어하는 정도는 천지차이로 갈렸다. 만약 농땡 사부나 요크노 민, 테밀시아 형님 등이 말했다면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을 것이 다. 하지만 그 자신의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는 생판 타인이 왜 신경 쓰게 하냐고 대들면 황당할 뿐이다. 웃든 울든 떠들든 침묵하든 싸우든 다치든 그쪽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함께 공감하는 상대가 아닌 이상 이쪽에서 신경써줄 필요가 없지 않 은가. 그렇게 짜증을 내며 무하가 야영지로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들어 반기는 유 시리안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잠시 염두에 두지 않았던 점을 깨닫고 말았 다. 아……. “함께 공감하는 상대……인가.” 무하는 각자의 그릇을 넘기고 자신의 그릇과 유시리안의 그릇을 챙겨, 유시리안 이 기대있는 커다란 나무쪽으로 갔다. 유시리안이 웃으며 환영해주고 있었다. 그 의 그릇을 넘기고 자신의 그릇은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한참 머뭇거리다 조심스 럽게 입을 열었다. “저……율.” “예?” 웃으며 답하는 유시리안의 얼굴은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기묘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붉은 빛을 머금고 있는 그의 보라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오늘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알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하하.” 유쾌한 듯 웃으며 무하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야 제가 보이십니까?”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소년. 또 꿈이다. 한없이 무언가를 부정하고 있던 소년이 이번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것을 꼭 끌어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년을 보다 차마 떨어지지 않은 발을 떼었다. 무하가 다가가자 몸을 움찔 떨어댔지만 그 역시 이 접근을 기다려 왔는지 도망치 지는 않았다. 소년이 먼저 물었다.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지?” “너는 왜 ‘거기’에 있지?” “너는 왜 ‘거기’에 있지?” 똑같은 질문만 오갔지만 이미 답은 주어졌다. 무하도 ‘페르노크’도 침묵했다. 그리고 동시에 물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번쩍 눈을 떴다. 이른 아침의 빛이 아프게 찔러왔지만 감지 않았다. 격하게 호흡 하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막고 있던 손 위로 따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공포, 혐오, 연민, 경계, 그리고……뭐라 표현 할 수 없는 감정들이 엉망으로 뒤 섞여 가슴을 헤집고 있다. 얼른 몸을 일으켜 옆을 본다. 잠들어 있는 유시리안이 보인다. 현실……. 알고 있 다. 그것은 꿈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현실. 그 어떤 현실보다도 가혹한 올가 미. 하지만……. “너는 왜 ‘거기’에 있지……?” 흐릿한 이미지가 눈앞에서 아른거리지만 무엇인지 읽어낼 수가 없다. “나는 왜 ‘거기’에 있지?” 옆에 누워있는 유시리안의 눈이 차분한 빛을 띄고 떠져 있다는 것을 당시 무하는 몰랐다. ====================================================================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아해의 장이란 이름을 지었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어딘가 미완성인 아이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동성애 코드를 사용하고 있지만 아해의 장은 판타지 소설이다. 많은 인물들이 부닥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십이국기 소설책을 1, 2, 6권 샀습니다. 훗. 요코 양의 성장하는 모습이 너무 뿌듯합니다. 7권은 아직 나올 기미도 안 보이고...휴우... 재정적 여유가 생기면 3, 4, 5권을 사러~ 랄랄랄~ 은릴의 배척은 이제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사자가 신경을 안 쓰니 주위에서 뭐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은릴은 거친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주위에서 뭐라 말하 면 그녀는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배려 없는 인간이란 경멸의 존재 밖에 안 돼요.” 그 말 자체는 옳은 것도 같지만 라미와 페른은 곤란한 낯빛으로 서로를 보았을 뿐 이다.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앞서 가고 있는 무하를 노려보는 은릴에게 라미가 슬쩍 반박했다. “무하씨는 용병이에요, 은릴씨.” “알고 있어요.” 라미는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모험가도 아니고 여행가도 아니에요. 기사는 더더욱 아니죠.” “알고 있어요.” 은릴은 반복되는 설명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모험가나 여행가나 기사나 각기 지키고, 지켜줘야 할 예의가 있어요.” “……?” 저 세상물정 모르는 얼굴이라니……. 라미는 한숨을 쉬며 마저 말을 해치웠다. “용병의 예의는 서로에게 참견하지 않는 것, 간섭하지 않는 것이랍니다. 용병이 갖춰야 할 것은 실력뿐. 타인을 배려하거나 분위기를 띄운다거나 하는 것은 포함 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 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닌가요?” 라미의 말을 자르며 반박했다. 라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페른이 연인 을 도와 가세했다. “기사에게는 레이디에 대한 예의가 필수죠. 하지만 그것이 함께 부대끼며 여행하 는 여행가들에게도 통용되는 것은 아니죠. 그것과 마찬가집니다. 용병들은 철저 히 배타적인 존재입니다. 우여곡절이 많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간섭을 싫어하고, 일이 일인 만큼 의뢰인과의 거리도 유지합니다. 일일이 배려해가며 친해지기에는 감정소모가 많고 일에 지장이 되니까요. 무하씨는 용병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건 의뢰 받은 일만 제대로 하면 의뢰인은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파트너끼리도 서로에 대한 간섭을 극히 제한하는 용병들이다. 하물며 그 대상의 잠깐 스쳐가는 의뢰인에 불과해서야 두말이 필요 없다. 은릴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페른은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기에 그냥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케릭이 슬 쩍 끼어들었다. “그리고 예전에 비하면 저 녀석, 많이 좋아졌잖아?” “그렇지. 분명.” 라미와 페른이 고개를 끄떡이며 긍정했다. 예전에는 노골적으로 자신들과 거리를 두었었다. 다가서면 베일 것만 같은 배척과 진한 고독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말 을 걸면 답이 오긴 했지만 더 이상의 대화가 오고갈 성질의 답은 아니었다. 일정 목적지까지의 동행이고, 용병이기에 묵인했지만 모험가나 여행가였으면 참지 못했 을 것이다. 어제 기분 나쁜 듯 있었던 모습은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다. 처음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 놀랐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무하는 은릴의 배척이 오히려 달가웠다. 쓸데없이 참견해 오는 것보다 훨씬 낫 다. 그녀가 아니어도 머릿속은 충분히 복잡했다.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 는 소년과의 꿈속 만남. 본능으로 두렵고 혐오하고 있다. 너는 누구지? 너는 왜 거기에 있지? 그리고 테밀시아 형님. ‘페르노크’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을 동생이 라며 사랑하는 그분. 이렇게 도망만 다녀서는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만나야 한 다는 것을,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 속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쯤에서 잠깐 쉬죠.” 유시리안이 제의했다. 물론 그것은 무하에게만 하는 제의다. 바사론을 제외한 라 미 네는 이미 발언권을 잃은 지 오래였다. 바사론 역시 유시리안의 결정에 반하 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이런 일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경험이 많은 유시 리안의 결정은 거의가 옳았다. 그럼에도 반발심이 생기는 건 단순한 기분 문제다. 무하가 고개를 끄떡여 동의하자 모두가 말을 멈췄다. 말에서 내려 적당히 풀밭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정말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한 여행길이다. 몬스터도 강도 도 없는 긴 여정은 차라리 불안하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는 어색할 정도다. 몬 스터가 없는 건 그렇다 쳐도 마을을 근처로 이동하는데 강도조차 없다니. 다들 그 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는 있지 만 누군가 입 밖으로 그것을 꺼내는 순간,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는 타박이 주어 질게 뻔하다. 그러다 강도나 몬스터가 습격해오면 말이 씨가 됐다면서 구박할 것 이다. “이대로라면 저녁쯤에 다음 마을에 도착하겠는 걸요.” 지리에 밝은 유시리안이 말하자 무하가 슬쩍 웃으며 답했다. “순조롭군요.” “생각한 것보다 일찍 도착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일은 없을 걸요?” “아, 하긴.” 일찍 마을에 도착하면 뭐하나, 원래 잡았던 일정 시일까지 쉬다가 움직이는데. 유 시리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급할 게 없으니 별로 상관할 바도 아니다. 그 들의 호위 대상인 은릴이 특정한 기일을 잡아 계약한 것도 아니니까. 볼일이 급 한 은릴로서는 손해였지만 말이다. 설마 그 정도 보수로 오는 용병들이 이렇게 거 물급일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응?” 무하와 유시리안이 동시에 어느 한쪽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은 찰 나의 행동. 무하는 자연스럽게 유시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검이 참 좋습니다. 잠깐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유시리안은 평소에 매고 다니는 보검을 건넸다. 무하는 반쯤 뽑아 날을 보며 가볍 게 감탄했다. “멋지군요!” “감사합니다.” 둘이 그렇게 묘한 행동을 할 때 라미 네들도 슬쩍 일어나 각자의 말의 곁으로 가 한쪽으로 몰아 풀을 먹이는 둥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은릴만이 나무에 기대 편 히 쉬고 있었다. 기묘한 시간이 흐르는 찰나, 갑자기 무하 검을 뽑아들고 은릴에 게 달려들었다. 그 기척을 눈치챈 은릴이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무하는 몸을 반쯤 뒤로 돌려 검을 내리 그었다. 짧은 마찰음과 함께 화살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쉬는데 정신이 팔려 주위를 경계하는데 소홀했던 은릴 은 그제야 자신들이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도인가.”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했다. 은릴을 제외한 배터랑급 모험가와 용병들은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강도에도 종류가 있고 그에 따라 질이 다르다. 요즘 날뛰는 강도 들의 대부분은 집도 절도 없는 난민들이다. 그들은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하류 귀족이나 준 재벌급의 상인들을 턴다. 또 조직적으로 힘을 키우는 강도들이 있 다. 그들은 수는 작지만 실력이 나름대로 좋아, 중상위 이하의 귀족이나 거상들 을 턴다. 혹은, 모험가나 여행가를 털기도 한다. 운만 좋으면 어지간한 귀족을 턴 것보다도 짭짤한 수입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금 포위하고 있는 이들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무하네 일행은 누가 봐 도 용병이나 모험가다. 꽤 풍족한 주머니 사정과 비례하여 실력도 높은 무리들 말 이다. 힘없고 머리수만 많은 난민들은 감히 나서지 못한다. “여자를 목표물로 삼다니, 뭔가 이상한데?” “여자는 팔 수 있으니까. 미녀라면 금상첨화일 텐데.” 페른과 라미가 주고받는 대화는 의아한 현상을 목격한 이들의 입에서 나올 법한 적당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도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현실을 생각하 면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여유다. 기습은 이미 물 건너갔다는 것을 깨달은 강도들이 숲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드러내 기 시작했다. 무하는 다시 몸을 돌려 은릴의 곁으로 걸어가, 그 앞을 막아섰다. 그가 받은 의뢰는 ‘수도까지의 호위’. 미우나 고우나 일은 일이다. 은릴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화살을 보다가 무하가 다가오자 얼른 일어났다. 그리 고 침착하게 허리에서 단검을 꺼냈다. 이 상황에서 단검으로 뭘 어쩌려는지 모르 겠지만 폼을 잡는 자세가 능숙해 보여 한숨은 놓았다. 적어도 비명이나 질러대며 아군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여태 호위라고 의뢰를 놓았 던 녀석들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그 추태를 부렸다. 의뢰인에게 화살이 날라 가는데도 태연자약하게 전방을 주시하던 유시리안은 허리 에서 또 다른 검을 뽑았다. 하환이 준, 아직은 사용법을 모르는 단검밖에 없는 무 하가 그의 보검을 빌려갔기 때문이다. ‘나찰’이라 불리는 이 검은 정해진 모습 이 없다. 대검이든 단검이든 레이피어든 주인에게 맞는 형태나 주인이 원하는 형 태로 변한다. “너를 검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만이냐.” 그가 쿡쿡 웃을 때, 접근해온 강도들은 경고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한낱 강도치 고는 그 움직임이 소리 없이 빨랐다. 흡사 암살자처럼. 게다가 정해진 법칙처럼 짐을 내놓고 꺼지라는 경고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유시리안 과 무하. 둘은 직업이 직업인지라 암살자를 많이 겪어왔다. 귀족의 호위를 맡을 때면 항상 마주하던 자들이 아닌가. 무하는 앞으로 나오려는 은릴을 자신 뒤에 있게 했다. 고작 시골 여자에 불과한 이 여자에게 암살자라는 건 뭔가 안 어울리지만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어쨌는지 은릴은 무하를 밀치고 앞으로 달려갔다. 정확히는 자 신을 향해 달려오는 암살자라 추정되는 강도에게로. 무슨 오만인가. 그녀는 강도 가 휘두르는 흉기를 왼손에 들은 단검으로 막아내고 오른손의 단검을 단숨에 찔렀 다. 순식간에 목을 꿰뚫린 강도가 뒤로 쓰러지고 다시 다음 사냥감을 향해 뛰었 다. 수적 열세는 다른 일행이 충분히 메워 줄 것이기에 마음껏 날뛰었다. 그런 자 신을 뒤에서 황당하게 보고 있는 무하를 알 턱이 없었다. 강도들은 네 명이 죽자 미련 없이 후퇴했다.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빠른 후퇴 였고 굳이 뒤쫓을 생각이 없었던 일행은 각자의 상태를 물으며 말 쪽으로 걸어갔 다. 말을 지키며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던 페른과 그런 그를 보호하던 라미가 일행 을 맞았다. 별로 나서지 않았던 유시리안은 강도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음 을 흘렸다. 그의 시선은 곧 은릴을 향했지만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강도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은릴을 돌아본 무하도 별다른 말은 하 지 않았다. 암살자로부터 의뢰인을 호위하는 일쯤은 흔히 맡았다. 암살자의 위협 같은 경우에는 미리 언질을 주는 게 예의지만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다고 해서 의뢰인을 닦달할 만큼 성실한 편은 아니다. 어차피 수도까지는 얼마 남지도 않았 다. 은릴은 피에 젖은 단검을 천으로 꼼꼼하게 닦아내고 있었다. 그 단검에 두 명의 목이 날라 갔다. 라미는 놀랐다는 듯 물었다. “대단하신데요? 굳이 호위를 의뢰하지 않아도 됐을 것 같은데?” “지금처럼 수가 많으면 속수무책인걸요. 별로 대단한 실력도 못되고.” 겸손하게 웃으며 답하는 은릴이었다. “악취가 진동을 하는군.” “그만 이동하죠.” 무하의 혼잣말에 유시리안이 벌떡 일어나며 제의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무하에게 만 건네는 제의였다. 무하가 고개를 끄떡이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시 체가 뒹구는 이곳에 계속 있고 싶지 않았다. 방금 소동 덕에 마을은 밤중에나 도 착할 것 같다. 다들 먼저 출발할 때 드물게 유시리안이 뒤처졌다. 속도를 늦추는 유시리안을 따 라 무하도 뒤로 처졌다. 본래 따로 노는 둘이었기에 일행은 신경 쓰지 않고 앞서 갔다. 은릴이 뭔가 불안한 듯 뒤를 흘낏댔지만 라미의 호의어린 질문에 답하느라 다른데 신경쓸 틈이 없었다. 일행과 상당히 거리가 벌어졌을 때, 유시리안은 훌쩍 말에서 내렸다. 의아한 듯 뭔가를 물으려는 무하에게 쾌활하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때문에 무하는 시체 쪽으로 걸어가는 유시리안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어야 했다. 강도의 복면을 벗기고 옷을 뒤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의구심을 속으로 삼켰다. 시 체에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빼낸 유시리안은 다른 시체로 넘어가 똑같은 행동을 반 복했다. 그러고는 두 구의 시체는 거들떠보지 않고 무하에게로 걸어와 두 손 가 득 들린 물건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것은 고상한 보석들이었다. 팔찌나 목걸이, 혹은 줄에 꿰인 반지나 장신구들. 하나같이 값져 보이는 귀중품이다. 무엇보다도 하나하나에서 흐르는 청명한 기운이 관심을 끌었다. “암살자가 이런 보석을 가지고 다닐까요?” “흐음.” 세상 경험이 부족한 무하였지만 그 질문의 답이 ‘아니다’라는 것쯤은 알았다. 때문에 상식에 어긋난 현재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유시리안은 수수께끼를 낸 꼬마처럼 생글생글 얄밉게 웃기만 했다. “저 녀석이 특이한 취향을 가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녀석도 마찬가지였단 말이죠. 더 뒤져볼 필요도 없겠지요.” 유시리안은 거리낌 없이 보석들을 자신의 작은 주머니에 쓸어 넣었다. 무하가 가 지고 다니는 배낭과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그 많은 보석을 삼켰으면서도 부피감이 없기는 여전했다. 주머니를 다시 웃옷의 주머니에 넣는 유시리안을 어이 없이 보던 무하가 물었다. “가지시는 겁니까?” “전 욕심이 없어서요.” 유시리안은 자신이 뒤지지 않은 다른 두 구의 시체에게 시선을 던지며 동문서답했 다. 굳이 상관할 바는 아니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만 가죠.” “예.” 생긋 웃는 유시리안을 보자니 방금 느꼈던 거리낌을 잊고 마주 웃게 되어 버린다. 말을 몰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휑하니 버려진 시체. 가치 없이 죽어있는 그들 의 운명이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죽음. 깊은 고뇌도 슬픔도 저 렇게 덧없이 버려져 버린다.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끝나버린다. ……무섭다. 다시 앞을 보았다. 뒤를 보느라 속도가 느려져 조금 뒤처졌다. 그래서 보인 것이 유시리안의 등. 잘 짜여진 늘씬한 몸이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는 상당한 장신이 다. 꽤 큰 편인 무하보다도 조금 크다. 그래서일까? 그의 등이 넓어 보인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내 옆이니까. 소중한 말. 고마운 말. 그때의 안도감과 기쁨, 그리고 따뜻함을 기억하고 있다. 눈앞에 그려지는 선명한 이미지로서. ‘고민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현실’의 소년. ……아마도 ‘페르노크’일 그 아이. 그리고 형님에 대한 속죄. 그리고…….’ 그리고 유시리안. 그는 알고 있었다. 무하가 자신에게 기댈 생각을 하지 않고 있 다는 것을.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몸부림치고 발악한다는 것을. 지 켜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을 자신을 쭉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어제, 웃으며 이제 야 자기가 보이냐고 물었다. 말해야 한다. 이 허울뿐인 껍데기에 대해서, 왜 형 을 피하는지에 대해서, 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무하’라 불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결심은 했다. “아…….” 유시리안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잠시 말을 멈춰, 뒤에 처진 무하를 기다려주었 다. 언제나 그랬듯이. 밤중에 가까워서야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이제 한 마을만 더 지나면 수도에 도착 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다행히 열려 있는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방이 세 개밖 에 없었기 때문에 여자 둘이 하나, 남자 다섯이 두개의 방을 쓰기로 했다. 당연 한 것이지만 유시리안과 같은 방을 쓰고자 하는 이는 무하 밖에 없었다. 유시리안이 먼저 씻으러 들어가고 무하는 침대에 앉아 물병을 만지작거렸다. 이 마르지 않는 물병을 만들어 낸 것은 그가 낀 팔찌 중에서 오른쪽 녀석이다. 오른 쪽은 물의 정령, 왼쪽은 바람의 정령. 죽기 직전까지 쏟아낸 피로 계약이 맺어진 녀석들. 그 피는 로레라자가 낸 상처에서 나왔다. 로레라자, 그리고 설희. 메말랐던 가슴이 젖어온다. 그동안 아무리 괴로워도 한쪽이 메말라 있는 듯 느껴 지던 것이 지금은 없다. 모조리 젖어버려 쏟아진다. 곪았던 상처가 터져버리듯, 묶여 있던 생명이 약동하듯 한꺼번에 쓸려나오며 날뛴다. 무하는 소리 없이 울었다. 흐릿한 시선을 팔찌에 고정시킨 채 계속 눈물을 흘렸 다. 내보낼 길이 없어 쌓아두고만 있던 아픔이 서서히 풀려나고 있었다. 낮춘 시선에 익숙한 옷자락이 보였다. 고개는 들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뜻밖에도 평온했다. ========================================================================= 십이국기에 미친 벗이 다음 권에 목말라하다가 원문을 주문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기초조차 제대로 못하는 제가 무슨 소설을 번역하겠습니까; 내용만 알아도 족하겠습니다. 자자, 십이국기에 미치신 다른 분 안계십니까? 원문을 읽어본 분 안계십니까? 라니안 분들은 리플로 "제가 압니다!"라는 의미의 글과 함께 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제가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선물도 준비해 뒀습니다. 그래봤자 가난한 작가인지라 아해의 장이지만.... 싸늘한 공기가 상쾌하게 피부를 감쌌다. 커튼을 치자 따가운 빛이 넘실댔다. 아침 이다. 벌써부터 부산스럽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관심 없는 눈으로 보다가 몸을 돌 렸다.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린 뒤, 녹색 천으로 이마와 귀를 살짝 덮으 며 목덜미 쪽에서 묶었다. 그리고는 단검 두개를 허리에 꽂고 방을 나섰다. 수도 까지의 길은 위험하다. 이제 거의 도착했으니 기습이 더욱 잦아질 것이다. 계단을 내려서자 널찍한 식당이 보였다. 이른 아침이지만 벌써부터 시끌벅적하 다. 득실대는 사람들 속에서 묻혀 있으면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다. 백금을 세밀하게 뽑아낸 듯한 찬연한 머리카락과 오만하고 강한 보랏빛 보석안. 감동스러 울 정도의 신체 균형 때문에 거북스럽지 않은 장신과 그 움직임에 하나하나 녹아 있는 기품. 질투조차 나지 않는, 아름다운 생명체. 의뢰인이냐며 찾아온 그를 본 순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위대한 분과 함께 하는 자, 지혜로운 분과 공유하는 자. 그렇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강한 자. 경외에 찬 눈으로 그를 보던 은릴의 시선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거슬리는 검은 두건으로, 본인의 인품을 알려준다는 눈동자를 가려버린 남자. 주제도 모르고 저 아름다운 분과 대등하게 행동하는 남자. “의지하려는 자는 싫다.” 작게 중얼거리며 계단을 마저 내려섰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처음, 바닥을 닦은 구정물을 뒤집어썼으면서도 화내지 않았던 모습에서 느꼈던 호감은 그 이름을 듣 는 순간 증발해 모습을 감췄다. 스스로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그는 타인에게 의지 하여 살아가려는 ‘그들’과 똑같다.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아갈 생각은 하지 못하 고 속편한 ‘의존’을 하려든다. 강자라는 이유 하나로 책임을 떠넘기려든다. 약 하다는 이유 하나로 의지한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목숨조차도, 자신들의 삶조차 도 떠넘긴다. 그러고는 속 편히 살아가는 것이다. -유시리안 씨에게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정이 있어 늦게 도착했습니 다. 무하라고 합니다. -어쩌면 그가 펠이라고 칭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유시리안은 그를 펠이라 칭했다. 단지 ‘펠이라고요.’라고 재확인한 은릴에 게 화를 냈을 뿐이다. 그는 경멸어린 눈동자로 차갑게 화를 냈다. ‘너 따위가 부 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펠이라 부르는 건 나로 족해. 무하라 불러라.’ 라 말 하며. 맹목적적인 총애와 호의. 얼음덩어리를 통째로 삼킨 기분이었다. 불쾌하고 깊은 감정이 차갑게 가슴을 쥐었다. 그것은 경멸이다. 유시리안에게서 받은 경멸이 무 하에게로 향했다. 감히 네까짓 것이……라고. 저 존재에게 총애를 받을 만큼의 가 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몇 번이고 묻고 싶었다. “아, 은릴씨.” 유시리안과 무하가 앉아있는 곳과 꽤 떨어진 테이블에서 라미가 그녀를 불렀다. 간신히 무하에게서 시선을 뗀 은릴은 웃음을 띄우며 라미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 어갔다. “식사 하셔야지요?” “예. 간단하게.” 라미는 고개를 끄떡이며 종업원을 불렀다. 대충 요깃거리를 주문한 은릴은 라미에 게 물었다. “곧장 출발 할 건가요?” “제가 정할 소관이 아닌 걸요.” 농조로 답한 라미는 쿡쿡 웃었다. 기분은 별로 좋지 못하지만 순탄하고 정확한 일 정을 직면하자면 유시리안의 경륜은 인정해야 했다. 오랜만에 루트나 시간에서 해 방된 바사론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는지 드물게 피식 웃었다. 그 말에 유시리안을 흘낏 본 은릴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긴장감에 숨이 막혀왔다. 그의 눈에서 느껴지는 광기와 싸늘함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근데 저 둘 오늘 좀 이상해요.” “예?”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라미에게 덩달아 작게 반문했다. 라미는 최대한 둘 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말을 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묘해요. 예를 들자면……어제는 친구, 오늘은 지기? 물론 전에 도 단순한 친구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 입술을 물고 테이블을 노려보던 은릴은 고개를 돌려 무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변했다. 선명하게 긋고 있던 ‘선’이 사라지고 부드러워졌다. 게다가 어쩌다 한번 웃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다. 은릴의 눈동자가 샐룩하게 가 늘어졌다. ‘너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어차피 듣지도 못할 질문을 던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시리안이 불쾌한 눈빛으 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그렇게 무하만을 보고 있었 다. 유시리안과 무하 사이의 또 다른 변화를 알아챈 것은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도시락은 챙겼어?” “아까 배낭에 넣어놨어.” “가지고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아? 너무 크잖아.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이 런 걸로 사지 그랬어.” 손바닥만한 작은 주머니를 휘휘 흔들어 보이는 유시리안에게 무하는 짐직 짜증난 다는 듯 대꾸했다. “수도에 가면 바꿀 거야. 아예 집도 넣어 다닐까 생각중이다. 야영할 때 좋게.” “쿡.” 배려하는 듯한 존대어는 사라지고 친근한 평어를 사용하는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도 즐거워보였다. 라미와 페른은 편한 분위기의 무하를 보며 왠지 안심되는 자신 을 느꼈다. 아슬아슬한 곡예사를 보는 듯한 초조함이 드디어 사라진 것이다. 케릭 과 바사론은 미처 그들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슬쩍 술을 챙기려는 시도가 들 통 난 케릭은 바사론에게 혼나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릴은 창백한 얼굴 로 무하를 보았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한 단어뿐. ‘감히……감히…….’ 주먹을 꾹 쥐며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말에 훌쩍 올라타, 한번 더 무하를 쏘아보 고 일행에게 말했다. “서두르죠.” 이번에는 유시리안이 보내는 불쾌한 눈빛을 눈치 챘지만 무시했다. 웃고 싶을 때 웃을 수 있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지금이 너무나 기쁘다. 지 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옆에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정리하 고 있는 유시리안을 보며 다시 웃어버렸다. 어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요크노민조차도 못 믿고, ‘믿어주겠다’라고 했던 이야기를 그는 너무나 쉽게 납득했다. 재차 물어보는 것도 없이 그냥 듣고만 있었 다. 한없이 진지한 눈으로. 무하를 옭아 메고 괴롭히던 배신과 상처가 차분한 소 리가 되어 흘렀다. 그리고 그만큼 고통이 덜어졌다. 마치 유시리안이 흡수해가기 라도 하는 듯 점차 가슴이 가벼워졌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유시리안은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질문 은 끝이었다.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는 듯.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어깨를 가볍게 치는 손이 있었다. 유시리안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별로…….” “넌 너무 융통성이 없어. 그게 탈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웃어버리는 무하의 어깨를 다시 가볍게 툭 치며 손을 거뒀다. “넌 너무 융통성이 많아서 탈이지?” “난 제멋대로인 게 매력이거든.”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제멋대로라는 거야.” 어깨를 으쓱이는 유시리안을 보며 무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미소로써 무하를 지켜보던 유시리안이 입을 열었다. “응?” “배신이라는 것은 분명 열 받는 일이지만 누구나 믿을 수 있는 세상은 따분하다 고 생각해.” “…….” “믿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많은 거야. 내가 봤을 때 펠은 형님을 믿고 있지? 요크노민이란 지기도 있고. 벌써 셋이나 있잖아. 그 정도면 두 번 맛본 배신은 보 상받은 셈이 아닐까?” 태연히 그 수에 자신을 집어넣는 유시리안의 말을 무하가 조용히 정정해 주었다. “정말 많구나. 넷이나 되니까. 그 정도면 인간관계는 성공한 셈이지? 배신당한 수의 두 배나 되잖아.” “복이 과할 정도다. ……그런데 다른 한명은?” “그러고 보니 헤어진 지 오래됐구나.” 은릴을 한번 본 무하는 그리운 눈으로 고개를 바로 했다. “나의 두 번째 지기, 라이시륜.” 오만하고 시니컬한 지기. 넓다면 넓은 세상이지만 분명 인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 다. 그 때문에 기약 없이 헤어졌다. 지금 와서는 조금 후회가 되는 이별이지만 다 시 만날 거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유시리안은 무하에게서 고개를 슬쩍 돌린 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녀석은 아니겠지.” 하지만 동시에 부정의 빛이 실린 미소를 지었다. “그 뒤틀린 녀석이 무슨…….” 혼자 중얼거리던 그는 조소어린 눈으로 어딘가를 보다가 무하에게 시선을 돌렸 다. 한 박자 늦었지만 무하도 잠깐 어깨에 힘을 주었다가 숨을 내쉬며 페이스를 유지했다. “그 검은 아직도?” “응? 아아.” 거대한 송곳처럼 생긴 단검을 내려보며 쓰게 웃었다. 엄지로 칼자루를 쓰다듬는 그에게 재차 물었다. “다른 검이라도 준비해 두는 게 어때? 그래서야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 “그래도 선물을 준 호의가 있는데 다른 검을 사용해서야 면목 없지. 내 무능을 알려주는 것과 같잖아.” “빌려줄까?” ‘나찰’이 아닌 다른 보검을 슬쩍 내밀며 물었다. ‘나찰’에 미치지는 못하지 만 이 한번 나간 적 없는 보검이다. 마법으로 보호된 검과는 다른 순수한 장인의 솜씨. 그래서 더욱 값어치가 있다. 유시리안조차 이 검을 만든 금속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예사 것이 아니라는 것만 짐작할 따름이었다. 이카미렌이 예전에 받 았다며 선물해 준 것이라, 주겠다고는 말 못하지만 빌려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 다. 그조차도 유시리안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경악할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이라 는 것을 무하가 알리 없었다. 그는 그저 검사가 자신의 검을 빌려주겠다고 선뜻 말한 것에 고마워했다. 평소라면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잠시 빌려야만 했다. “잠시 실례할게.” 검 집 채 건네받은 무하는 손에 딱 잡혀오는 감각에 감동하며 새삼 그것을 살펴보 았다. 지금까지 세 번 빌렸지만 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첫 번째는 가짜 페르노크를 만났을 때, 두 번째는 강도인지 암살자인지 모호한 이 들이 기습했을 때, 그리고 지금. 확실히 침을 흘릴만한 보검이었다. 농땡 사부가 본다면 당장 눈이 뒤집혀서 이리저리 만지고 주무르고 껴안고……한마디로 발광하 겠지. 훤히 눈에 보이는 광경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검을 허리에 꽂고 허리를 쭉 편 채 전방을 주시했다. 사각, 사각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확 실히 강도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라미 네들은 아직 눈치 못 챘는지 자기들끼 리 떠들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유시리안은 ‘나찰’을 잡고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 무하조차도 알아듣기 힘든 작은 목소리였다. “너무 많이 죽이면 곤란해. 저 계집 때문에 단순히 휘말렸다지만 저들이 그것까 지 고려할리 없지. 그런 족속들이니까.” “어제 이미 하나를 처리하지 않았나.” “그야 그때는 몰랐으니까. 눈치 챘을 땐 이미 베어버렸어. 그래도 더 죽이진 않 았으니까 나중에 뭐라 지껄여도 괜찮아. 저 계집 탓이니까.” “알았다. 날을 없애겠다.” 누구도 알지 못할 대화가 끝나고, ‘나찰’의 날이 서서히 뭉툭하게 변화할 무렵 그들을 위로 쭉 뻗은 나무 위에서 화살이 빗줄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나하 나에 엄청난 힘이 실린 그 화살은 거의가 은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거의 동시 에 살기의 방향을 읽어낸 무하가 왼쪽 손을 은릴에게로 뻗었다. 핏빛 바람이 은 릴 위의 허공에 소용돌이치며 화살을 튕겨냈다. 무하는 자신이 별 필요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이미 은릴의 주위 로 투명한 방어막이 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까지 구사 할 줄 아는 건가. 화 살의 비는 그 쓰임이 소용없게 되자 금방 그쳤다. 그리고 멀어지는 인기척들. 아 무리 두꺼운 나뭇가지라 해도 저토록 기민하게 이동하다니. 무하조차도 순수한 몸 동작으로는 힘들고 경공을 섞어야 겨우 해낼 수 있는 몸놀림을 제법 많은 수의 자 객이 모두 해내고 있었다. 은릴은 깊이 숨을 내쉬며 멀어지는 인기척 쪽을 씁쓸한 눈으로 잠시 보았다. 다행 히 은릴 쪽으로만 화살이 집중됐기에 부상자는 없었다. 바람의 막과 조금 떨어져 있었던 케릭과 바사론의 말이 작은 찰과상을 입긴 했지만 리커버리 포션으로 금 방 치료했다. 이대로 습격이 끝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직감한 무하는 유시리안을 돌아보며 말했 다. “수도까지만 빌릴게.” “살살 다뤄달라고.” ====================================================================== 무하가 밤에 했던 고백편은 쪼개가면서 두고두고 쓸 겁니다. 껄껄. 한번에 쓸리 없지 않습니까. 숲길을 벗어나서야 다들 한숨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숲은 안전하면서도 위 험하다. 숨기 쉬워 쫓기는 쪽이나 공격하는 쪽이나 잘만 활용하면 안전하지만, 누 군가에게 행적이 포착되면 위험하다. 그쪽에서는 이쪽을 감시할 수 있는데 이쪽에 서는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숲이 그리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제 무하와 유시리안뿐 아니라 모든 일행이, 단순한 ‘사고’가 아닌 은릴을 표 적으로 한 ‘암살’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수도에 거의 도착 했겠다 각기 갈라지는 게 좋지만 라미나 페른이나 케릭이나 바사론이나 그럴 생각 은 없었다. 그들은 용병이 아닌 모험가이기에 이런 일은 제법 좋은 경험이 됐다. 게다가 모험가나 여행가는 비록 동행일지라도 나름대로의 의리를 중히 여긴다. 그 렇다고 말 한마디 없이 그냥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사정까지는 묻지 않겠지만 확실히 해두고 싶군요.” 같은 여자끼리 친밀하게 지냈던 라미가 나섰다. 낯을 가리는 페른은 아직도 은릴 이 편치 않은 듯 하고 수틀리면 성질부리는 케릭은 거칠게 나갈지도 모른다. 매사 에 직설적인 바사론은 더 안 된다. 은릴은 답을 피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불안하게 손가락을 꼼 지락댔다. 이대로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자 결국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호위를 의뢰받은 용병들은 그렇다 치지만 순전히 ‘안전’을 위해 동행한 그들에 게까지 피해를 준 이상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미녀에 대한 본능적인 친절을 베풀던 라미가 딱 잘라 독촉하자 은릴은 어깨를 더 움츠렸다. “제가 수도를 가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요. 제가 수도에서 누군가와 만나 는 걸 곤란해 하는 자들이죠. 절 죽여서라도 그것을 피하고자 할 거라 짐작은 했 어요. 그래서 용병을 고용한 건데…….” 그것은 용병인 무하나 유시리안에게 역시 예의가 아니었다. 산적이나 몬스터에 대 한 호위와 암살자에 대한 호위가 같을 리 없다. 예의를 운운하기 전에 세속적으 로, 보수부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은릴은 그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잔뜩 기가 죽어서 재차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무하나 유시리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제 삼자 인 라미가 화를 냈다. “만약 약한 용병이 오면 어쩌려고 했어요? 저희들은 방금 기습 직전까지도 저들 의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어요! 그런 점을 속이다니! 은릴씨, 세상을 너무 모르는 군요.” 은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의뢰를 속인 것과 같아요. 무슨 뜻인지 모르세요? 유시리안 씨나 무하 씨 가 지금 당장 이 의뢰에서 손을 떼도 할 말이 없다고요! 아니, 위약금을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은릴씨는 은릴씨의 목숨 뿐 아니라 저 두 사람의 목숨까지 담 보로 잡고 속인 거예요!” 어쩌다 동행하게 된 이쪽이야 운이 없다 치면 그만이지만 저들은 용병이다. 신용 에 목숨을 거는 만큼 일단 의뢰받은 것은 아무리 위험해도 해낸다. 그리고 그만 큼 자신을 속인 의뢰인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다. 은릴이 너무 경솔했던 것이다. 더 몰아붙이려는 라미를 저지한 사람은 무하였다. 손을 슬쩍 들어 더 이상의 추궁 을 막은 무하는 고개를 슬쩍 저음으로써 자신들은 상관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용 병으로서는 꽤 관대한 행동이었다. “어제 이미 알아챘어. 새삼스러운 일이란 거다.” 유시리안이 말했다. 본래 의뢰나 신용에 민감한 그였지만 무하가 먼저 괜찮다고 나선 이상 굳이 그에 반발할 생각은 없었다. 생각 의외의 수확이 있었기에 관대해 진 것도 있었다. 이제야 눈치 챈 저들의 둔함과 자신과 무하를 기만하려 든 은릴 의 오만을 비웃을 뿐이었다.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은릴은 뜻밖의 관대한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무하가 실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궁은 여기까지. 느긋하게 가는 것은 그만하고 서두를까?” 같은 의도라도 유시리안의 것은 관대함으로 보였지만 무하의 말은 위선으로 보였 다. 유시리안에게는 ‘관대’라 말할 수 있는 강함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 지라 수모감에 낯을 붉히며 감사의 말을 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무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돌아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말 쪽으로 걸어가 버 렸다. 당사자들이 그냥 넘어간 이상 라미 네들도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갈라질 생각도 없으면서 관계만 어색하게 만들긴 싫었다. 말을 돌보러 각기 무하 쪽으로 걸어가 버리고 공연한 수모감에 무하를 노려보는 은릴의 옆에는 유시리안만이 서 있었다. 그는 은릴의 시선을 따라 무하를 보고 다시 그녀를 내려보았다. “여자들은 관심 끌고 싶은 상대한테 차갑게 구는 경향이 있다더군.” “예?” 유시리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검지로 은릴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그 손은 얼굴선 을 타고 초록색 천으로 반쯤 덮인 귓가를 지나 턱에서 멈췄다. 어색함에 고개를 숙이려 드는 것을 저지하며 위로 올려 자신을 마주보게 했다. “경고하는데, 관심 끄는 게 좋을 거야.” “무, 무슨…….” “기껏 수도까지 호위한 의뢰인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수도에서 살해당하는 것 은 펠에게 있어 유쾌한 일이 아닐 것 같거든.” “…….” 진심이다! 저 광기와 살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은릴은 힘들게 입을 달싹여 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뱉어낼 수 없었다. “경고했다. 그는 내거야.” 오해라고 말할 여유도 없었다. 등 뒤에 흐르는 식은땀이 소름끼쳤다. 뒤끝 없는 라미는 다시 친하게 대해주었지만 은릴은 전체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 다. 유시리안과 무하, 바사론은 본래 그녀와 교류가 거의 없다 해도 케릭과 페른 은 상당히 가까웠는데, 이제는 노골적으로 멀리했다. 완전한 배척은 아니었지만 지은 죄가 있는지라 이모저모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자객의 습격은 자꾸만 반복되어 더욱 설 곳이 좁아 갔다. “차라리 처음처럼 직접적으로 덤벼왔으면 좋을 것을.” 혀를 차는 케릭의 불평에 은릴이 움찔했다. 처음 습격이후로, 그들은 활이나 석 궁, 혹은 함정이나 마법 따위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공격해왔다. 효율성은 둘째, 자신들의 인명피해를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 칼끝은 은릴에게 향해있었지 만 곁다리로 붙어 있는 일행에게 피해가 아주 안 간다고는 할 수 없었다. 비록 은 릴의 마법으로 큰 부상은 없다 하지만 케릭의 불평은 당연했다. 휴식도, 잠도 아 끼며 말을 독려해 간신히 마을에 닿았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지만 다들 침대로 직 행했다. 누구보다도 정신적으로 피곤했던 은릴은 차마 라미가 잠자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 고 식당 구석에 앉아 쓴 와인을 삼켰다. 어차피 이쯤은 각오했었다. 오히려 용병 인 무하와 유시리안의 용서가 뜻밖일 정도다. 그렇지만 역시 차가운 시선 속에 버 티기란 힘든 일이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마에 손을 갖다대던 은릴은 문득 누군가가 계단에서 내 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자는 이들을 배려하는 것인지 발소리는 작았다. 약한 조명 속에서 식당으로 내려온 남자의 얼굴을 본 은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무하였던 것이다. 은릴을 발견한 무하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발을 옮겼다. 은릴처럼 미리 주문을 하지 않는 한 식사나 음료, 술을 즐길 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손에는 늘 가지고 다니는 작은 물병이 들려있었다. 창가에 붙어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은 그는 은 릴 쪽은 보지도 않았다. 피차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은릴은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무하의 태도에 발끈했다. 그것이 억지라는 건 알 고 있었다. 솔직히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배척하는 여자에게 먼저 다가올 자가 누 가 있겠는가. 그것을 잘 알면서도 화가 나는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다. 차가운 시 선 속에서 지치고 괴로웠던 마음이 터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은릴은 자기도 모 르게 일어나 거친 발걸음으로 무하에게 걸어갔다. 천천히 물을 마시며 창 밖을 멍하니 보고 있던 무하는 자신의 앞에 털썩 앉은 은 릴을 보았다. 이어 그녀의 손에 들린, 반쯤 비워진 와인 병을 흘낏 보고 창 밖 쪽 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렇게 무시하지 못해 안달이던 여자가 왜 갑자기 다가온 건 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취한 게 아닌가 싶지만 알 게 뭔가. 맑은 소리를 내는 물병을 기울여 두어 모금 마셨다. “당신.” “……?” 낮고 평이하지만 뭔가 불안정하게 들리는 목소리. 역시 취한 건가? “자신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확실히 취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놓지 않고 경어를 쓰던 은릴이 아니던 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만.”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비겁이라. 무하는 일전에 유시리안이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 다음 순간 저 도 모르게 입을 열어 버렸다. “비겁한 게 나쁩니까?” “뭐?” 은릴은 멍하게 반문했다. 그리고 순간 발끈해서 고함을 지르듯 말했다. “나빠!” 고요했던 식당 안에 묘한 메아리가 울렸다. 무하는 조소했다. 어린 아이가 떼를 쓰는 듯이 말하는 은릴은 호소성은 물론이거니와 타당성도 부족했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사십시오.” “…….”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던 은릴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신은 나빠!” “피차일반 아닙니까?” “당신은 비겁해! 나빠!” 무하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꿈속에서 자꾸 마주하게 되는 소년 이 두려워 잠시 머리나 식힐 겸 나왔는데 기분만 잡쳤다. 더 있어 봤자다 판단하 고 일어나려는 그의 귀에 상당히 거슬리는 말이 꽂혔다. “어차피 당신은 유시리안님께 빌붙으려는 거잖아? 약하니까 강한 존재한테 의존 하는 건 당연해?” “…….” 은릴은 싸늘한 기운에 움찔하여 무하를 올려보았다. 일어난 상태로 굳은 무하는 더 이상 싸늘해질 수 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취기가 한번에 날아 갔다. 침묵과 싸늘함이 공유하는 시간이 흘렀다. 은릴은 주눅이 들려하는 자신을 용납 할 수 없었다. 애써 입술을 깨물며 버티는 그녀에게 무하는 차분해서 더욱 소름끼 치는 어조로 말했다. “그건 당신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까?” “에?” “시골에 묻혀 바느질이나 하며 살아가는 여자가 지나가는 미남 용병에게 반해, 자신의 인생을 구제해주길 바라는 것. 꽤 흔한 이야기지요.” “뭐, 뭐야!?” 은릴은 방금까지 주눅 들었던 반발만큼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무하 를 노려보았다. “당신에 나에 대해 뭘 알아!” “그건…….” 나직이 운을 띄운 무하가 순간 손을 놀렸을 때, 언제 뽑혔는지 모를 보검이 은릴 의 미간에 바로 직전에 멈춰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발검, 엄청 난 컨트롤. 무하가 약하다 깔아뭉개고 있었던 은릴에게는 실로 뜻밖이었다. 무엇 보다도 그 위압! 그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길 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온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운이었다. 은릴은 천천히 거둬지는 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순식간에 온 몸이 식은땀 범벅 이 되었지만 깨닫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을 마무리 짓 는 무하였다. “제가 당신께 하고 싶은 말입니다.” “…….” 획 돌아서 가버리는 무하를 보다가 몸을 지탱해주는 실은 끊긴 것 마냥 자리에 주 저앉고 마는 은릴이었다. 고요한 어둠. 그리고 희미한 조명. 전과는 다른 적막한 침묵. 하지만 존재하는 소 년. 또 그 ‘꿈’이다. 웅크리고 있는 소년과 꼿꼿하게 서 있는 무하는 서로의 존재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질문만이 오갔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물었고 ‘의 미’에 대해서 물었다. 답은 듣지 못했지만 분명 들었다. 소년은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하도 그런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두려 움 속에서도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침묵이 계속 흘렀다. 새벽빛이 스며드는 방안에 두개의 침대가 보인다. 편히 누워서 잠들어 있는 남자 가 하나, 벽에 붙어 있는 침대 안쪽에서, 벽에 기대 앉아 있는 남자가 하나. 분 명 깨어 있는 이는 하나뿐인데도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별난 일이구나. 네가 먼저 질문을 하다니.” “벌써 며칠째 잠자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쿡쿡.” 세운 한쪽 무릎에 팔을 괴며 편안하게 뒤로 기대있던 남자가 키득대며 몸을 웅크 렸다. 그 겨를에 등 뒤로 넘겨져 있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희미한 빛을 받아 매력적인 광채를 내는 백금이다. 슬쩍 뜨는 눈동자가 냉정하다. “글쎄…….” ======================================================================= 현재 정신적 공황에 시달리고 있는 벗입니다. 6권 외전이....외전이....흑흑....날라가 버렸어요. ㅠ.ㅠ 그것도 파일 오류로 인해....완전~히 백지가 되버렸습니다...ㅠ.ㅠ 흑흑. 최상의 컨디션에서 정말 마음에 들게 써진 글들이...모조리...몽땅... ㅠ.ㅠ 그가 보고 있는 남자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겹쳐 보이는 소녀의 모습. 더욱 희미하게 보이는 소년의 모습. 그 어떤 것도 껍데 기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계의 소녀……. 저 소녀가 펠의 본래의 모습인가.’ 그 모습도 아름답다. 왠지 눈을 뗄 수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 스스로에게 솔직하 고 엄격하면서도 둔한 모습. 변덕쟁이에 자신에게만 관대하고 얍삽한 자신과는 너 무 다르다. 그래서 더욱 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만히 그녀와 저 불길한 느낌이 드는 소년을 보고 있자면 그날을 떠올리 게 된다. 겨우 마음을 열고 복잡한 사정을 털어 놓았던 그날을.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가장 절실했던 물음은 이것. 그리움에 눈물을 지으며 사부에 대해 말하고 가하에 대해 말하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부모님에 대해 말하는 그를 보며 가장 불안했던 것은 이것. 그가 원하는 곳은 그곳일까? 가하라는 짐승과 산을 타고 사부와 옥신 각신 살아가는 일상이 그가 원하는 이상향인 걸까? 이곳에서는 그만한 끈이 없으 니까? 형을 죽인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라도 그곳을 그리워하고 그곳을 원하 는 건가? 눈물로 젖은 뺨을 쓰다듬어줄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당장 듣지 않으면 초조함에 본성을 드러내 버릴 것 같았다. 무하라는 영혼을 가진 페르노크라는 존재가 좋 다. 그와 함께 있으면 부족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편하고 따뜻하게 든 다. 이 존재를 놓치고 싶지 않다. 이 존재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 질 수 있을 것 만 같다. 한없이 좁은 시계 속에 들어온 몇 안돼는 존재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존재. 하지만 그 ‘너그러움’은 곁에 있어주는 존재에 대한 너그러움이다. 곁에서 웃음 을 짓게 만들고 편안함에 취하게 만드는 존재에 대한 관대와 애정이다. 그렇기에 무하가 돌아가길 원한다 해도 놓아줄 생각은 없다. 설령 그곳이 그에게 있어 행복 한 장소라 할지라도. 유시리안은 그렇게 이기적인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 고 그런 자신을 똑바로 인정하고 있었다. 무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렁그렁 차올라 있었던 눈물이 또르륵 떨어지 면서 그의 맑고 깊은 녹안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는 곧은 눈으로 유시리안을 직 시했다. 긴장한 듯 보이는 유시리안에게 슬쩍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딘지 쑥스러 워 보이기도 하고 장난기 어려 보이기도 한 웃음이었다. 순간 유시리안은 답을 듣 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가슴에 응어리 져 있던 불안이 그 웃음으로 녹아 흘 렀다는 것을 느꼈기에. 유시리안의 입가에 무하의 것과 비슷한 미소가 실렸을 때, 차분하면서도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가슴에 스며들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당신 옆이라고, 율이 그랬잖아요.” 대답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쿡쿡.” 웅크렸던 몸을 다시 뒤로 기대며 낮게 웃었다. 그래, 그는 분명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이 옆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괜찮다. 설령 저 소년이 저 육신의 진짜 주 인이라 할지라도. 설령 저 육신을 되찾고자 발버둥친다 할지라도. “내가 그렇게 두지 않겠다.” 그것이 정당한 권리라 할지라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올바른 순리라 할지라 도 개의치 않는다. 유시리안은 오만하게 혼자의 법칙 속에서 살아왔다. 정당한 권 리니 순리니, 그가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귀찮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내 옆에 있게 할 거다.” 그가 말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이 옆이라고. 그러니까 놓치지 않는다.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깨어난 무하는 자신을 보고 있는 유시리안을 발견하고 웃었 다. “일어나 있었어?” “좀 전에.” 마주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온 유시리안은 눌려있는 무하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말했다. “배고프다.” “내가 늦잠을 잤나?” “아니. 평소랑 같아. 내가 평소와 달리 배가 고픈 거야.” “하하.”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찌뿌둥한 기분이 덩달아 풀리는 듯했다. “먼저 내려가서 시켜 놔. 금방 씻고 내려갈게.” “얼른 내려오라고. 내가 다 먹어치우기 전에.” “그래, 그래.” 웃음 섞인 답을 던지며 욕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풍덩 담구고 버티다 가 숨을 크게 뱉으며 들었다. 정신이 확 들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가만히 들 여 보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자신’에게 말했다. 처음으로 거울을 보 면서, 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어서 내려가지 않으면 골 낼 거야.” 대충 씻고 서둘러 밑으로 내려가자 저편에서 눈에 확 띄는 미모의 유시리안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가 어디 있는지 쯤은 한눈에 들어오는데도 말 이다. “뭐 시켰어?” “감자 샐러드랑 빵, 과일. 간단하게 먹으려고. 기름진 건 질렸어. 따로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주문해.” “그거면 충분해.” 유시리안이나 무하나 양을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적으면 적은 데로 먹고 많으면 많은 데로 먹는다. 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에 일일이 신경 쓰다간 여행 같은 건 못한다. “점심때는 뭔가 얼큰한게 먹고 싶다.” “그것도 좋지.” “좋지, 라니? 출발 안 해? 아침에 출발하면 내일 오후에는 수도에 도착하잖아.” “바로 출발하기에는 다른 떨거지들의 체력이 딸리잖아. 겨우 그거 강행한 것에 헥헥 대는데. 하루 쉬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 대신 밤에도 강행하면 돼.” “확실히 그편이 낳을 지도.” 유시리안이 정하고 무하가 긍정했으면 그것으로 일정 완료다. 둘에 비해 체력이 딸리는 다른 일행들이 강행군을 고집할리 없고, 고용인을 속인 은릴에게 발언권 따윈 없다. 뭐, 그런 점이 아니라도 유시리안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봐 야 하니까. “참, 보여주고 싶은 게…….” “안녕하세요.” 딱딱한 어조지만 은릴의 목소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올려보니 굳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은릴이 보였다. 정확히 무하를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유시리 안은 불쾌한 낯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옆 테이블에서 유시리안과는 다른 의미로 반응하고 있는 라미가 있었다. 그렇게 무시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무슨 바 람이 분 것일까? “예, 안녕하세요.” 무뚝뚝한 어조지만 별다른 점 없이 인사를 맞받는 무하를 은릴은 알 수 없는 눈빛 으로 노려보다시피 내려보고 있었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제 본 것이 진짜였을까?술에 취해 헛것을 본건 아니었을까? 그녀의 냉정한 이성은 그것 이 진실임을 알려주고 있지만 믿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에 자꾸만 판단이 흐려 진다. 은릴이 무슨 일이라도 칠 것 같은 분위기라 라미는 조심스레 다가와 그녀를 잡아 끌었다. 라미는 무하의 강함을 보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시리안의 성질 역 시 들어 알고 있었다. 은릴이 어째서 무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 만 이런 행동은 현명하지 못하다. 게다가 그녀는 둘을 속이지 않았던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런 라미의 만류에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은릴은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키면서 자꾸만 곤두서려는 신경을 애써 가 다듬었다. 일이 예상 밖으로 흐르면서 자신의 평상심이 흐트러지고 있음을 의식했 다. 이대로는 될 일도 안 된다. 그분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만나도 될 정도로 녹록 한 분이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각기 즐기는 디저트를 음미하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때, 무하가 문득 물었다. “율. 이 검에 새겨져 있는 문양 볼 줄 알아?” “응?” 유시리안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며 멍하니 반문했다. 그런 유시리안을 보며 무 하는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 생각하는 걸 방해한 것 같네.” “아아, 별로.” 어깨를 으쓱이며 씨익 웃고는 몸을 앞으로 숙여 관심을 보였다. “뭔데?” “이 문양.” 무하는 조금 높게 들고 있던 검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는 유시리안을 보면서 잠자코 기다렸다. 한참 살펴보던 유시리안은 검을 내려놓고 물었다. “이거 검은 날이 뿜어져 나왔다고 했지?” “응. 완전한 검은 색은 아니었지만.” “헤에. 죽이겠다고 ‘판단’은 했지만 ‘작정’을 한 건 아니었나 보군.” “응?” “아니야, 아무것도.” “읽을 수 있어?” ‘페르노크’가 가지는 학식이 얼마나 높은지 집을 나와서야 잘 알게 된 무하였 다. 그런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문자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문자라는 뜻 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것을 유시리안은 빠르게 읽어 내린 것으로 보이자 일순 감 탄해버렸다. 유시리안은 단검을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짧게 말했다. “써보면 알 것 같은데.” “써봤지만 모르겠던데?” “실전에서 써봤어?” “물론이지.” 다소 시큰둥하게 물어봤던 유시리안은 이어지는 무하의 답변에 놀라 검을 탁 낚아 채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단검과 무하를 번갈아 보다가 아아, 탄성을 냈다. “펠은 인간이면서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진 존재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 르겠다.” “응?” “이거 골치 아프게 됐는데. 이 좋은 검을…….”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좀더 설명을 원했지만 유시리안은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쉴 뿐 더 이상 말을 하려하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로 한 무하는 디저트로 시킨 화림을 한 모 금 마시며 그 특유의 씁쓸함을 즐겼다. 유시리안은 다시 단검을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를 시작하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살기에 반응하는 검이니 펠이 사용하기는 그른 건가.’ 이 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죽이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것에 반응하게 만들어 진 검인 것이다. ‘속계에서는 만들 수 없는 물건이다. 이카정도는 되어야 가능 할 텐데.’ 그때 성벽 위에 떠 있던 녀석. 무하와 싸우고, 검을 선물해줬다는 녀석과 동일범 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사용된 피리는 분명 ‘약속된 지배’. ……펠은 이상한데서 인기가 많 군.’ “정신을 바싹 차려야겠는걸. 쿡쿡.” 갑작스런 말에 돌아봤지만 유시리안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깐 고개 를 갸웃해 보는 무하였다. 식사대가 훌쩍 지나자 주위는 상당히 한가해졌다. 가끔 들어오는 이는 강행군으 로 피로하여 침대를 원하는 여행자들뿐이었다. 검을 던졌다 받았다 하다가 다시 뜯어보기를 여러 차례 하던 유시리안이 그것을 돌려주자 무하는 자리에서 일어났 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응?” “잠깐 뒤뜰에 가지 않겠어? 장소가 좀 넓어야 되서.” “장소가 필요해? 뭔지 궁금한데?” 호기심 섞인 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하는 약간 낯을 붉히며 헛기침을 몇 번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식사 후에 오는 무료함은 마찬가지인지라 라미 네들도 슬쩍 일어나 슬금슬금 뒤 를 따랐다. 은릴은 라미가 이끌어 억지로 끌려갔다. 무하 따위가 보여주고 싶다 는 것을 훔쳐보듯이 본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지만 어차피 할 일도 없지 않냐는 라미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여관 뒤에 평평하고 제법 넓은 뒤뜰은 마구간과 창고가 양쪽으로 늘어져 있어 한 쪽 면만 개방되어 있는 형태였다. 즉 바깥쪽의 이목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것 이었다. 무하는 청하지 않았음에도 따라온 라미 네를 보며 약간 당황하는 빛을 보 였지만 굳이 들어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유시리안과 눈을 마주하고 여전히 쑥스러운 듯 어눌하게 말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네가 불렀던 노래 기억해?” “물론. 내가 작곡한 노래인걸. 잊을 리 없지.” “에? 그랬어?” 어쩐지 이 노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 했다. 제목이 궁금해 불러보기까지 하 며 알아내려 했지만 다들 모르는 노래라며 고개를 저었다. 좋은 곡이라고, 어디 서 들었냐고 물을 정도였다. 유시리안은 한쪽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야, 혼자 있을 때 아니면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만 불렀으니까.” 무하는 어색하게 웃음을 짓다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럼 더더욱 봐 줬으면 해.” “……?” “그 노래로 만든 검무야.” 유시리안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에 무하는 빌린 보검을 뽑고 검무를 시작했다. 이것은 농땡 사부에게서 배우지 않고 그 자신이 혼자 만들어 낸 첫 검무다. 감정 이 사라지고 흡사 인형처럼 메말라가고 있었을 때 지탱해준 소중한 검무다. 그리 운 팔찌의 공명음을 들려주던 고마운 검무다. 자부심과 위로와 위안을 안겨준 검 무. 춤은 춤이되 춤이 아니요, 검은 검이되 검이 아니다. 이것은 검무다. 내지르고 유 희적인 움직임으로 돌고, 온 몸으로 음을 표현하듯 감미롭고 조화롭게 움직이다가 도 위협적인 기운을 곳곳에 산포한다. 레일리아의 앞에서 이 검무를 추었었다. 그때는 비가 왔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었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울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형님을 만났다. 아무 말 도 하지 못했지만 온 몸으로 그분의 반가움을 느꼈다.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느꼈 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이 검무 속에 녹아들어 있다. 2년 전 유시리안과의 짧은 만 남과 헤어짐 후에, 한시도 그를 잊지 않았다. 이 검무는 그의 것이기도 했다. 이 검무를 출 때마다 그를 생각했다. 고마운 만남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소중한 만남 이다. 허공에 검무가 빚어낸 반사광의 환영이 아롱진다. 범인의 눈에는 아름답게만 보이 는 이 춤사위가 검사의 눈에는 전율스러운 검의 율동이다. 사위에 멜로디가 퍼진다. 깊은 충만함을 실고 고요하면서도 환희 실린 아우성으 로 퍼진다. ……그리고 검무는 끝났다. ====================================================================== 과연 끝낼 수 있을까..... 회의 할 정도로 끔찍했던 시간이 드디어 끝나고, 외전을 마쳤습니다...ㅜ.ㅠ 휴우.... 몇시간 동안 붙잡고 끙끙대며 한줄도 못 쓰던 때는 이제 안녕~;ㅡ; 백업의 중요성을 뼈져리게, 아주 사무치게 느꼈습니다. 수험생 여러분 오늘 파이팅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수험생이 이 글을 볼리 없으니... 보고 있다면 그건 큰일이에요! 0ㅇ0;)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무하를 멍하니 보던 사람들 중에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당연 유시리안이었다. 그는 매우 기쁜 얼굴로 감탄했다. “멋져! 내 노래가 느껴지는 검무야!” 이런 걸 보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노래를 그토록 깊이 이해하고 좋 아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다른데 있었다. “계속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나를.”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속삭임. 일방적으로 찾아 헤맸던 2년이란 세월을 드 디어 보상 받은 기분이었다. 유시리안은 무하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한 뒤, 조 금 힘을 주어 목을 조였다.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노래 덕분에 생긴 검무니까 한턱내야 하는 거 아냐?” “윽, 낼게! 낼게!” 과장되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크게 웃어버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 정신을 차 린 다른 일행들은 하나의 예술을 목견한 느낌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멋지지 않아요, 은……?” 왠지 우쭐한 기분으로 은릴을 돌아본 라미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 에 말끝을 흐렸다. 어딘지 분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째서…….” “예?” 유시리안과 웃고 있는 무하를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지만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는 않았다. 라미가 되물어봤지만 은릴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분을 가라앉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렇게까지 무하에게 민감하게 구는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기 도 했다. 물론 싫으면 하나하나에 시비가 걸고 싶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건 도 가 지나치지 않은가. 주위에서 자신을 어찌 보든 은릴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그 러다 주먹을 꾹 쥐며 무하를 한번 쏘아보고는 돌아섰다. 안으로 들어갈 작정이었 던 그녀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어떤 장면에 멈춰 섰다. 그리곤 불안한 얼굴로 천 천히 뒤를 돌아봤다. 잘못 봤을 것이다. 그것이 여기 있을 리 없다. “아!” 믿겨지지 않고 믿고 싶지 않지만,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 인할 수 있었다. 갑자기 터져 나온 감탄성에 뒤를 돌아본 라미 네들은 창백하게 질린 은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건!” 은릴은 검지로 무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다 차마 뒷말을 잊지 못하고 부들부 들 떨더니 성큼성큼 다가가 무언가를 잡아채며 소리쳤다. “이게 왜 당신에게 있는 거죠!?” 그것은 무하가 늘 걸고 다니는 목걸이였다. 꼼꼼하게 꼬아져 있는 흑 줄에 목 공 예품 메달이 껴있는 목걸이. 혹여 잊어버릴까 끊어지지 않는 보조마법까지 걸어두 고 옷 안에 넣어두었는데 검무를 하는 도중에 밖으로 흘러나온 모양이다. 무하는 놀란 눈으로 은릴을 보고 있다가 그녀가 흥분해서 목걸이를 사납게 잡아당 기자 그것을 탁 잡아 뺐다. 그러자 은릴은 무하의 멱살을 잡아채며 날카로운 음성 으로 물었다. “이거 어디서 났죠?” “선물 받은 겁니다만?” “누구한테!?” 추궁조로 묻자 무하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말할 의무는 없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도둑으로 간주하겠어!” 은릴이 매섭게 쏘아붙였지만 무하는 그녀의 손을 무심히 뿌리치고 옷을 탁탁 털 어 폈다. 재차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무하의 뒤에서 유시리안이 차가운 눈으로 경 고해와 그러지는 못하고 이만 갈았다. 그런 그녀의 기세에 무하는 더욱 답을 꺼렸 다. 이 목걸이는 그의 지기, 라이시륜이 헤어지기 전에 준 선물이다. 녀석과 안면 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묻는 모습이 사나운 것을 보아 원수지간일 수도 있 다. “녀석에게 폐가 될지도 모르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타 종……, 아니 타인에게 넘기지 않는 물건이야. 그것을 건네받았다면 당신에게 줬다는 그 사람은 도둑인거다! 누구지? 이건 절대 용서 받을 수 없…….” 은릴은 자신의 목을 움켜쥔 무하 때문에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살기는 없지 만 그보다 더한 위압감이 사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제 지기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당신 지기는 도둑이야. 그, 그 목걸이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해?” 한풀 꺾기긴 했지만 할말은 했다. 무하는 딱 잘라 말했다. “이건 녀석이 만든 겁니다. 한번만 더 도둑이라는 말을 하면…….” 말을 흐리며 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조금 더했다. 그 어떤 말보다 더 적절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은릴에게는 앞서 무하가 말한 것이 그 위협보다도 경악과 혼 란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마, 만들었다고?” “예. 분명 그렇게 말했고, 전 녀석을 믿습니다.” 은릴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음을 감지한 무하는 목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은릴은 간신히 서서 쥐어짜듯 물었다. “그 사람 이름은?” 무하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판단하고 순 순히 답해주었다. “라이시륜.” 그 말이 신호라도 된 양 은릴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그가 어떻게…….” “시륜을 아십니까?” “시륜?” 애칭으로 부른단 말인가? 멍하니 되묻는 모습에 제대로 된 답을 듣기는 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을 기 약하기로 하고 유시리안을 돌아보며 눈짓으로 들어가자 했다. ‘뭐, 시간은 있으니까.’ 유시리안은 아무래도 익숙한 이름이 걸려, 발을 옮기면서 물었다. “그 라이시륜이란 녀석, 어떤 녀석이야?” “시륜 말이야?” 잠시 그리운 이름을 되새겨 보다가 피식 웃으며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아주 강해. 혼자 움직이는 타입인데도 사람들을 잘 다루지. 어딘지 엉뚱한 면 이 많아. 차가운 느낌은 나는데 장난기는 많아. 아무튼 재미있고 멋진 녀석이야.” 그 지극히 주관적인 설명에 유시리안은 단정 지었다. ‘녀석은 아니군.’ 이어, 외양적인 부분으로 넘어갔다. “생기기도 잘생겼어. 특히 눈동자가 황금빛 고양이 눈인데 아주 멋져. 머리카락 은 무릎까지 오는데 흐트러지지도 않고 고와.” 여기서 유시리안은 조금 고심해야 했다. 어딘지 닮은 것이다. “저기, 혹시 곤크에서 녀석을 본 적 없어?” “응? 아니. 시륜은 용병이 아니라 전사야. 물론 녀석 실력이라면 곤크에서도 카 등급은 충분히 차지하겠지만.” 전사라는 말에 유시리안은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역시 아니군.’ 호기심은 한없이 생기는 것이라 유시리안은 자신이 아는 녀석과 비슷하게 생겨 먹 었으면서도 ‘제대로 된’ 또 다른 녀석에 이것저것 듣고 싶어졌다.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아, 그건…….” “안돼!” 둘의 대화를 잘라먹은 사람은 새파랗게 질린 은릴이었다. 감히 유시리안을 방해 한 대가가 얼마나 무거울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지금 그에 대해 알려져서는 절 대 안 된다. 그들이 마법으로 이곳을 정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자칫하 면 모든 일이 틀어져 버릴 지도 모른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은릴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무하와 유시리안은 무표정한 얼굴 로 그녀를 한번 돌아봤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무하를 싫어하는 것이나 사사건건 시비를 걸려 한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제 지겹기까지 한 일이다. 뜻밖인 것은 유시리안만큼은 절대로 존중 하고 조심하던 그녀가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잘랐다는 것인데. 새삼 그런 일에 신경 쓰일 리 없지 않은가. 그 정도는 일상의 연장선인 것이다. 잠깐 멈춰 섰을 뿐 무반응하게 안으로 향하는 둘에게, 정확히는 무하에게 은릴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에 대해서 누설하면 안돼요!” 무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은릴은 후들거리는 몸으 로 힘들게 일어나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여기서 모든 게 망가질 수도 있다는 두려 움이 몰려왔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막막함과 당면한 문제에 대한 고뇌에 휩싸여 라미가 부축해 줄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방으로 들어온 은릴은 멍하니 침대에 앉아 필사적으로 대책을 쥐어짜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 알려지면……. “무하가 말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만 말하지 않으면.” 하지만 그가 들어줄까? 자신의 지기에 대한 모욕이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까 만 해도 그러지 않았던가. 게다가 사이도 좋지 못하니 일부러 더 발설할 위험도 있다. “그렇다면…….” 결심을 굳힌 얼굴로 일어나 길게 내려온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목에는 수많은 액 세서리들이 껴있었다. 팔찌도 있었고 목걸이를 몇 번 돌린 것이나 반지를 줄에 낀 것도 있었다. 은릴은 그것들을 한번 쓰다듬어보다가 가장 안쪽에서 하나를 풀 었다. 칠흑빛을 띄고 있는 작은 반지가 꼼꼼하게 꼰 흑 줄에 걸려있었다. 그것을 눈앞까지 들어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말하지 ‘못하게’ 하는 수밖에.” 어두운 정적 속에서 소년을 본다. 여전히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넌 누구지?” 알면서 묻었다. “페르노크.” 그리고 처음으로 답을 들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야 서로를 ‘인식’하게 됐 고 ‘인정’하게 됐음을. “너는 왜 거기에 있지?” “싫으니까 피해있는 거야. 거부하고 있는 거야.” 처량한 목소리로 답하는 ‘페르노크’를 보며 무하는 몸서리쳤다. 어쩔 수 없는 거부감과 두려움. 그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물었다.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 거니?” ‘페르노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된 그 얼굴은 2년 전 거울 속에서 보았던 그것이었다. 단지 눈물에 젖어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 “다들 나를 싫어하니까! 나도 싫어! 다들 나를 미워하니까! 나도 미워!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 내가 원해서 마나를 느낀 게 아닌데! 내가 원해서 마가 된 게 아닌데!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닌데!” 그 얼굴이 비통하게 절규한다. “왜 나를 싫어해? 왜 나를 미워해? 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때렸어. 빼앗고 무 시했어!” 무하는 힘들게 말했다. “그렇지만……형이 있잖아. 너를 사랑해주…….” “똑같아!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아! 상냥하게 대해주지 않아! 차갑고 고압적이 야! 싫어, 너무 싫어!” -짝! 이딴 녀석이 테밀시아 형님의 동생이란 말인가? 무하가 지금껏 질투해왔던 그 ‘동생’이란 말인가? 그 다정한 눈빛을, 그 상냥한 배려를 정말 모른단 말인가? “헛소리 하지마!” ……고작 이런 녀석이…….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어스프름한 새벽의 방안.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이쪽을 보고 있는 유시리안의 모습. 그 일상의 광경에 눈물이 난다. 이 일상이야 말로 무 하가 원하던 ‘있어야 할 곳’인 것이다. 분노도 슬픔도 아픔도 포근히 가라앉는 곳.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곳. 그런 존재가 있는 곳. 소중한 존재……. 유시리안은 무하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침대에 한쪽 손을 괴었다. 그리곤 다른 한쪽 손을 들어 무하의 뺨을 쓸어주었다. 손끝으로 묻어나오는 물기가 사라질 때 까지. 무하는 입을 열었다.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작정이었다. 차마 하지 못했던 그것 에 대해. 이제 말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 허무하게 삼켜지는 목소리와 뻐끔거리는 입술. 무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떠 졌다. 벌떡 일어나 몇 번이고 말을 뱉으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졸....렵다.... =.= 아아, 곧 300회네요. 이벤트가 필요해~! 이벤트~! +_+(광기로 번뜩) 그림 이벤트는 자료실이 꽉 차서 불가능하고.... 패러디를 할까... 고민, 고민. 유시리안은 갑작스런 무하의 행동을 멀뚱히 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 무하는 연신 입을 뻐끔거리다가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배낭을 뒤져 묵과 종이 를 꺼냈다. 그리고는 글씨를 휘갈겨 유시리안에게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목소 리가 안나와’라고 써 있었다. 유시리안은 황당한 듯 종이와 무하를 번갈아 보았 다. 불과 어제 밤만 해도 라이시륜이란 녀석을 화제로 떠들고 놀지 않았던가. 뭔 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팠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목소리가 안나온다 하 니 문제의 심각성 같은 게 느껴질리 없었다. “뭐……피곤해서 그런가?” 유시리안의 시큰둥한 반응에 침착해진 무하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외에는 별 다른 이상을 못 느꼈기에 그런가 하고 어깨를 약간 으쓱여 보였다.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 이 광경을 봤으면 지금 너희가 제정신이냐, 날뛰었겠지만 말 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이 일행 중 있기는 했다. “에에? 목소리가 안나온다고요?” 갑자기 말을 안 하는 무하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던 라미는 생각보다 심각한 답에 놀라 되물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당사자는 태연자약하다는 것이다. “뭐, 잠깐 피곤해서 목이 잠겼나 보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는 있는 건지. 유시리안의 저 황당한 답변과 무하의 이어지 는 끄떡임에 바사론마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강행군할 때는 멀쩡한 했던 것 이 하루 쉬고 나니까 잠긴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에 다들 진 저를 쳤다. 그래서인지 누구도 저편에서 이상할 정도로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은릴에게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무하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수도에 도착해서 푹 쉬면 나을 것이라 마음 편히 먹기로 했다. 필담으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 급한 것 은 아니고, 강행하면 새벽녘쯤엔 수도에 도착할 테니까. 잠을 자지 않고 강행하 는 것쯤이야 별로 힘들 것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게 ‘일상’이었으니 까. ‘지금은 다른 ‘일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수도에 간다. 형님이 있는 곳에.’ 그토록 슬픈 눈빛으로 힘들게 기다려주고 계시는 그분께. 차마 앞에 나서지 못하 고 고통스럽게 돌아섰던 나날들이었다. 이제는 무언가 달라질 것이다. 특별히 생 각해 둔 것은 없다. 단지 느낌일 뿐이다. 그런 확실한 느낌이 든다. * * * 황실과 신앙이 일체하던 시기, 황제라는 단어는 없었다. ‘제노스라민’. 절대 권 력을 상징하는 이 경건한 단어만이 있었을 뿐이다. 후계자를 뜻하는 것은 ‘제노 스’로, 황태자라는 단어 역시 없었다. ‘제노스란’은 지금의 황후와 황태자비 를 칭하는 말이고, 그 외의 권위 없는 황족은 ‘제민’이라 불렸다. 그 경건하며 위압적인 단어들은 황실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절대적인 권 력과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이 단순한 ‘계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해버린 것 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신성어로서 상대 칭하는 이는 그네들에게 인생을 바친 수 하나정도 밖에 없다. 그 외에도 진정으로 당신을 인정합니다, 라는 의미로 쓰이기 도 하지만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황제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은 막강하다. 신앙이 나눠지긴 했지만, 여전 히 세속적인 위치에서의 꼭대기를 홀로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위치에 한없이 가까운 계층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카르민! 욤 제국에서는 단 세 가문만이 차지하 고 있는 최고위 귀족 계층! 실질적으로 가지는 힘은 황제를 넘어서기도 하는 그들 은 서로를 견제하며 무구한 세월동안 자리보존을 해왔다. 그 세 기둥중 하나가, 초대 황제 이므르의 시대보다도 훨씬 전부터 막강한 권력 과 전통을 유지해온 자하라 가다. 현 가주는 그 압도적인 세월을 보유한 자하라 가의 어떤 가주보다도 ‘현명한 자’라 칭송받는 자였다. 그런 그가 유독 자신의 후계자를 뽑는 일에만 뭉그적거렸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변이 일어났다. 혈통을 중시하던 자하라 가에서 처음으로 ‘외부인’을 가주로 맞게 된 것이다. 그 이름은 뮤비라 라 카르민. 데릴사위이기에 ‘자하라’라는 성 을 붙이려면 ‘라’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단연 ‘라’를 택했다. 그리 고 이제는 자하라 뮤비라 장 카르민이 되었다. 자하라 가의 일원들만이 모여 ‘선(先) 계승식’을 치룬 뮤비라는 이틀 후에 치러 질 ‘후(後) 계승식’을 앞두고 있었다. 일족의 우두머리로서의 서약을 하는 선 계승식과는 달리, 나라의 한 기둥이자 황제의 수족으로서 그 직무와 책임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후 계승식은 황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규모부터가 달랐다. 그렇다고 새삼 그것에 겁먹었다던가, 기가 죽었다던가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홀 로 방에서 검 자루를 움켜줬다 폈다 하는 것은, 그가 동생이자 아들로 생각하는 요크노민이 물어다 준 정보 때문이었다. 그의 주군, 테밀시아는 이미 들어 알고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선 계승식 때문에 오지 못했을 테고, 곧 이목을 피해 이곳 으로 올 것이다. 뮤비라는 계승식을 치루고 있는 중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 다. 홀로 있는 방안에 금빛 마법진이 기괴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이미 결계를 만들 어, 밖으로 마나의 움직임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기에 걱정할 것은 없었다. 마법진이 사라지면서 그 당당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뮤비라의 로드, 테밀시아였 다. 어둑한 조명 속에서도 광휘에 물들어 있는 듯한 남자. 그 강하고 멋진 황금 빛 눈동자가 저편에 서 있는 뮤비라를 향해 똑바로 꽂혔다. 거추장스런 계승식 의복을 입고 있던 뮤비라는 무릎을 꿇고 절했다. “나의 로드.” “계승복을 입고 있는 수장에게 고두는 어울리지 않아.” 일어나길 권했지만 뮤비라는 고집스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기 위해 일부러 계 승복을 갈아입지 않고 기다린 것이다. 테밀시아는 이런 상황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배포를 지난 남자였다. “카르민 수장의 고두를 받은 만큼 어깨가 무거워 지는 듯싶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로드를 따를 뿐입니다.” 친근한 태도의 뮤비라가 좋았지만, 이런 뮤비라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째서 저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지 뻔히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뮤비라는 지금 자신이 변 심하지 않을 것을 테밀시아에게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계승복을 입고 있는 그 는 이제 테밀시아와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욤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세 세력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 세력의 정점을 나타내는 계승복을 입 고 고두하고 있다. 정중히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이며 테밀시아를 ‘로드’ 라 말하고 있다. 테밀시아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가슴을 잠시 내리눌렀다. 뮤비라의 성공이 기쁘 다. 그의 충절이 기쁘다.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 뮤비라를 내려보았다. 흔들림 없이 깊이 고두하고 있는 뇌 리에 박혀온다. 평생 잊지 못하리라. “그대의 동생에게서 이미 그 소식을 전해 들었겠지.” “예.” 새삼스런 눈으로 뮤비라를 보았다. 이들 형제는 정말 놀라운 일투성이다. 그 형 은 황제와 맞먹는 권력을 가진 자하라 가의 수장이 되었고 그 동생은 지하를 장악 하고 있는 비밀 길드 레타의 수장이 되었다. 그 형은 욤에서조차 다섯밖에 없는 마스터의 한명이고 그 동생은 역사를 통틀어 몇 없는 화염의 수장의 맹약자다. 가 장 놀라운 것은,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힘과 지위를 맨손으로 일군 그 모든 게 자신들의 꿈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요크노민 마 카르민. 뮤비라와 마찬가지로 ‘자하라’라는 성보다 ‘마’를 택한 그는 이제 요크노민 장 레타라 불리고 있다. 그 깡마르고 왜소하던 소년은 어디가 고 이제는 강한 느낌이 풍겨오는 남자가 되어 테밀시아에게 거래를 청했다. 하인 중에서도 그 위치가 낮았던 그가,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하던 테밀시아에게. “그 날이 왔을 때 들어주시면 됩니다.” 격식을 차려, 정중히 청했지만 분명 그것은 ‘거래’였다. 테밀시아는 그것을 받 아들였고 정보를 얻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던 중, 저희 레타가 그들에게 의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야수를 다루는 암살자의 지원. 암살은 도둑 길드 레타의 또 다른 얼 굴. 흔히 받는 의뢰라 놓칠 뻔했지만 지원 시기가 걸린 제 수하가 추적하여 알아 냈습니다.” “시기?” “예. 그것은 삼일 후. 즉, 형님의 후 계승식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카르민의 한 일환인 자하라 가의 새로운 수장이 등장하는 날이다. 황제는 물론 황 태자, 황위 계승권자에 온갖 귀족들이 모인다.그것도 한 자리에. 반역을 꾀하고 자 하는 그들의 눈에는 놓칠 수 없는 먹이일 것이다. 테밀시아는 요크노민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아직도 자세를 풀지 않고 있는 뮤 비라에게 말했다. “일어나 앉아라. 이 상태로 나눌 대화가 아니다.” “예.” 뮤비라는 끝까지 정중함을 잃지 않은 자세로 천천히 일어나, 의자로 걸어가기 전 에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격식을 차렸다. 분명히 해두고 넘어갈 문제였던 것이 다. “몰라보게 컸더군, 노민 녀석. 나에게 거래를 청할 정도로 말이지.” 뮤비라가 자리에 앉자 테밀시아는 그제야 딱딱한 어조를 치우고 친근하게 농을 던 졌다. 뮤비라 역시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동생의 무례, 대신 사과드립니다. 누굴 닮아서 그런지 영악하기 이를 데 없어 요.” “닮긴 누굴 닮았겠어.” 잠시 서로를 보며 웃은 둘은 곧 진지해진 얼굴로 사태를 의논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작정이다. 휜에게도 이미 명을 내려놓은 상태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뮤비라의 답에 테밀시아는 굳은 얼굴로 그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하다 못해 영악한 뮤비라다. 게다가 테밀시아의 행동반경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 고 있는 남자다. 그런 그가 방금 테밀시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 다. 그럼에도 ‘현명한 판단’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네가……위험해 질 거다.” “저도 마스터입니다, 로드.” 자신의 입에 절대 ‘마스터’라는 호칭을 담지 않았던 뮤비라가 장난어린 얼굴로 뻔뻔하리만치 당당하게 말한다. 테밀시아를 안심시키려는 것이다. 또 그것을 모 를 테밀시아가 아니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쳐라. 절대 다치지 마라.” 죽지 말라는 게 아닌 다치지 말라는 말. 죽음은 생각하지도 않는 테밀시아의 말 에 뮤비라는 웃었다. 조금 다치는 게 무슨 대수일까 만은 저렇게 걱정 어린 눈으 로 말해오는데 뭐라 하겠는가. “삼가 받들겠습니다.” ====================================================================== 십이국기 책을 다시 처음부터 정독했습니다. 애니메이션 24화에서 요코가 아직 왕으로서의 위엄을 세우지 못한 장면을 보니 왠지 울컥... 아아, 어서 책으로 보고 싶어요. 7권은 언제 나오려나... 당장 달려가 살텐데...ㅠ.ㅠ 수도는, 특히 황성 주위는 묘한 기류로 뒤죽박죽이었다. 새로운 자하라 가의 가주 의 일로 전체적으로 들떠있는 분위기와 그 내부의 은밀한 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흉흉한 분위기가 물려 기괴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계급도 아 닌 카르민의 교체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입방아꺼리인데, 그 대상이 한때 같은 제피모였다고 하니 어찌 화제가 안 될 수 있겠는가. 그 속에서 묘하게 긴장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황성 근처 여관들을 거의 독차지하고 있는 후드를 깊이 눌러 쓴 괴인들이었다. 세상에 무지한 제피모조차 본능적으로 감지한 ‘위험’과 ‘경 계’가 말없이 퍼지고 있었다. 그런 여관 중 한 귀퉁이에 세 남자가 말없이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없이 우울 한 얼굴로 술을 들이키며 한숨을 안주 삼는 그들과는 아랑곳 않고 주위는 떠들썩 했다. 그런 모습을 힐끗 본 한 남자가 다른 둘에게 말했다. “누가 보면 초상 치른 줄 알겠네요.” “곧 치를 거니까 틀린 건 아니지요.” 삭막하게 들리는 답에 처음 말을 붙인 남자의 어깨가 움츠려졌다. 침묵하고 있던 다른 남자가 질책하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파크다군.” “……죄송합니다.” 파크다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사과했다. 예상 밖의 최악을 달리고 있는 지금 상황이 너무 막막해 화풀이를 하고 만 것이다. 그 심정을 모르 는 바 아닌 휴로버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런 둘 사이에 껴있던 소울러 는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며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 했다. 소용없는 일임 을 알면서도. 어둑칙칙한 그들에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다들 힘들고 지친 일상 속에서 한 가 닥 낙을 찾아 왔다. 종업원처럼 특별한 용무가 없다면 일부러 다가가 기분 잡칠 필요가 뭐에 있겠는가. 그때 여관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종업원의 인사를 무시하며 주위 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방향을 잡고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예 의 칙칙한 세 명의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실례합니다.” 흠칫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검에 손가는 것까지는 간신히 참아낸 세 사람 은 굳은 얼굴로 말을 건 남자를 돌아보았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평범한 축에 속 해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지만 조금만 자세히 본다면 어딘지 인상적인 남자였 다. 보통 키에 깡마른 몸을 보아 전사 계열은 아닌 모양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 험한 냄새가 풍긴다. 등까지 기른 갈색 머리카락은 묶지 않아 헝클어져 있고, 길 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차가운 눈빛이 도드라졌다. 섬뜩한 느낌이 드는 살기 어 린 무표정 사이로 희미하게 반가움이 서려있다. “오랜만이다, 소울러.” 막상 호명 당한 소울러는 누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의아하게 그를 볼 뿐이었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앞머리를 무성의하게 쓸어 올렸다. 확연히 들어난 얼굴이 왠 지 익숙하다고 느낀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다, 제그.” “……!” 몇 년 전에 초라하게 이므르를 떠난 제그. 페르노크, 그리고 파크다와의 일과 미 묘하게 엇갈려 평생 잊지 못할 친구였다. “어떻게 알고 온 거냐?” 뒤늦게 자리에 일어나 그 두 손을 반갑게 맞잡고 물었다. 누구에게도 행적을 알리 지 않은 소울러다. 그러니 찾아왔다고 보긴 힘들지만 우연히 재회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제그의 태도부터가 알고 찾아온 자의 그것이었다. “어찌 어찌 듣고 왔다.” 두리뭉실 답을 피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당장의 반가움에 소울러는 더 묻지 않았 다. 그러나 그것은 소울러만 그랬다는 것이지 다른 이까지 그랬다는 것은 아니었 다. 제그를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이는 이중에서 소울러 밖에 없었고, 그만큼 냉 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이는 많았다. “어떻게 알고 왔지?” 파크다는 냉철한 눈으로 제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뽑지는 않았지만 검 자루가 쥐여져 있었다. 제그는 같잖다는 얼굴로 조소했다. 암살자로서 굴러먹 은 그의 눈에 파크다는 아직 한참 어린 애송이였다. “레타에 의뢰했더군.” 레타를 입에 담을 때는 주의하여 낮게 말했지만 그 태도의 당당함은 변하지 않았 다. 또 그만큼 다른 세 명의 경악은 비례했다. “어, 어떻게…….” 경솔하게 긍정하고 만 소울러는 놀라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파크다는 검을 완전히 뽑으며 제그를 위협했다. “넌 누구냐?” 갑작스런 칼부림에 주위가 조용해졌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파크다는 긴장해 있었다. 휴로버도 몸을 뒤로 빼 잔뜩 경계하기 시작했고 소울러는 중간에 껴서 설마 하는 눈으로 제그를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적의와 경계의 대상자가 되어버린 제그보다도 훨씬 여유가 없어보였다. 제그는 특유의 냉소를 지으며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세 남자를 올려보며 테이블을 톡톡 쳤다. “시선을 끌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그제야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파크다는 이를 갈며 천천 히 검을 집어넣었다. 싸움을 일으키면 수도의 경비대원들이 달려 올 테고 자칫하 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실수는 한번으로 족하다. 일단 검이 사라지자 다들 경계심은 거뒀다. 긴장감은 많이 완화됐지만 관심어린 시선은 여전했다. 파크다나 소울러나, 이런 상황에서 제그에게 레타에 대한 질문 을 던질 정도로 무분별하지는 않았다. 휴로버는 넉살좋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네. 자, 드시게. 내 이름을 말했던가?” “알고 있습니다. 휴로버 신관님. 귀족이 아닌지라 직접적인 치료나 대면을 한 적 은 없었습니다만 멀리서 뵈었죠.” 공손한 어조였지만 어딘지 싸늘했다. 휴로버는 그 말에서 제그가 이므르 출신이라 는 것을 알수 있었다. 자조의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같은 신관이라도 휴로버는 신 성마법을 시전 할 수 있는 고위 신관이다. 그런 그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 은 일부 고위 귀족 자제들로 국한되어 있었다. 마땅히 평등하게 선의와 자애를 베 풀어야 할 신관임에도 그것이 묵인된 인습이었다. 파크다 역시 제그의 말에서 그가 이므르 출신임을 알아듣고 약간 경계를 늦추었 다. 제그와 마찬가지로 제피모이기에 같은 불만을 품고 있었던 소울러는 쓰게 웃 을 뿐이었다. 비록 파크다와 뜻을 같이하면서 상당한 대우를 받긴 했지만 깊은 열 등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연락도 안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 거냐?” 소울러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제그는 피식 웃으며 휴로버가 권한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 “그럭저럭 살아가고는 있다. 아, 곧 결혼도 해.” “결혼!?” 뜻밖의 소식에 목소리를 높이는 소울러를 보며 제그는 쿡쿡 웃었다. 겉보기에 화 목한 대화가 오가자 은근슬쩍 던지던 시선들이 사라졌다. 그것을 예리하게 살펴 본 제그는 냉소를 품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를 휘감고 있는 기류가 차갑게 변 했음을 눈치 챈 파크다와 휴로버는 알게 모르게 무기를 잡기 쉬운 곳으로 옮겼 다. 소울러만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소식에 놀라 들떠 있었다. “결혼이라니? 누구와? 언제? 어떻게 만난 건데?” 내버려 두면 끝이 없을 듯한 질문공세에 제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좀 전 에 얼핏 지었던 냉소는 한 꺼풀 가려진 모습. “물론 내 애인이랑 하지. 만나기는 이므르를 떠나고 조금 지나서인데, 연애로 바 뀐 건 얼마 안됐어. 결혼 날짜는 아직 안정했어. 길일을 택해준다던 녀석이 묵묵 부답이거든. 급할 건 없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있지.” “결혼식에는 꼭 초대해라? 소식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무정한 녀 석!” “미안, 미안.” 제그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소울러가 진짜 그의 소식을 알아보려고나 했을까? 조금이라도 알려했다면, 지금과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애지중지 하는 동생은 여전해?” 소울러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 이 요크노민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세심하게 배려해주고 관심을 갖고 걱정해 주 는 녀석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사이어서 그런 것일까? 단순한 학우와는 다른 무언 가가 있다. 적어도 녀석은 제그만큼 인생의 쓴맛을 맛봤으니까. “글쎄.” 고개를 숙이자 잠깐 쓸어 올렸던 앞머리가 다시 눈가를 덮었다. 그 가려진 틈새 로 살기 띈 눈동자가 천천히 감기고 있었다. 어머니라, 그딴 건 잊은 지 오래다. “이제 말해주겠습니까? 어떻게 알고 이곳에 왔지요?” “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전해주러 왔다.” 처음에 입에 담았던 ‘레타’, 그리고 지금 꺼낸 ‘답’. 그것으로 충분했다. 파 크다는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제그와 눈을 마주 보았다. 무기로부 터 완전히 손을 뗀 상태. 즉, 경계를 완전히 풀은 상태로 얌전히 그가 가져다 줄 ‘답’을 기다렸다. “마스터가 허가했다. 내용이 이상하여 함정인지 검토해본 결과 이쪽에 위해가 될 문제점은 없다, 판단. 청한 시일, 시각에 정확히 실행해 주겠다고 했다.” “…….” 휴로버는 신음하며 이마를 손으로 덮었다. 기다린 그 ‘답’이지만 원치 않았던 최악의 상황을 빚어낼 ‘답’이기도 했다. 이 죄를 어찌 갚아야 할까. 파크다도 소울러도 불편한 얼굴로 제그의 시선을 새삼 피했다. 아무렇지 않게 보 았던 그의 싸늘한 눈동자가 이제는 비웃음을 품은 듯 느껴졌던 것이다. 실제로 슬 쩍 덮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제그의 눈빛은 상당히 매서웠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즐겁군. 한잔 더 주겠어?” 소울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낮게, 그러나 차갑게 말했다. “어째서 네가 거기에 있는 거야?” “살아야 했으니까.” “거기서 뭘 하고 살았는데?”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않나?”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어?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거야?” 아무 상관없는 남을 그것도 비겁한 수단으로 죽여 가면서까지 살고 싶었냐고, 고 작 택한 방법이 그거냐고 들렸다. 그러나 막상 제그가 이를 간 것은 다음 질책이 었다. “나나, 친구들을 찾아왔으면 됐잖아!” 친구라 불렀던 녀석들은 많다. 그들 중 가장 친하게 지냈고, 멋진 녀석이라 인정 했던 녀석은 소울러다. 소울러의 단짝 역시 자신이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런 소울러마저 이므르를 떠난 제그를 찾지 않았다. 찾기는커녕 그 소식을 알아보 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약 제그에 대한 소식을 실낱같은 편린이나마 들었다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감히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집에서 어떤 짓을 벌 렸는지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과연 이 녀석이 편지나 한통 보냈을까? 그도 아닐 것이라 확신한다. 제그는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무정한지 모르겠군.” “……?”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소울러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은걸 간신히 참아냈다. 진심으로 그를 친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제그는 이정 도 밖에 되지 못했다. 요크노민에게서 이미 들어 알고 있다. 소울러가 소속된 조직에서 무슨 일을 꾸미 고 있는지. 무엇을 해내고자 하는지. 하지만 그런 건 기본적인 삶이 보장된 녀석 들이나 꿈꿀 수 있는 사치다. 당장 굶주려 빵 하나를 구걸하고 있는 거지에게 황 제의 부조리를 역설해봤자 공감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황제가 없는 세상? 황제 따위의 유무는 당장 굶주림에 지쳐있는 자에게 중요하지 않다. 황제 가 있다고 해서 그에게 식량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분 차에 의한 불평등을 느낄 수 있는 자들은, 기본적인 위치에 서 있는 자들인 것이다. 당장 밑바닥에서 기고 있는 자는 따뜻하지 않더라도 얼어 죽지 않을 잠자 리와, 맛있지는 않더라도 굶어 죽지 않을 식량이 중요하다. 황제가 없음으로 인 해 생기는 해택이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요크노민은 제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 했다. 그는 정보가 아닌 믿음을 공유하고 자 한 것이다. 그래서 알고 있다. 녀석이 이 ‘의뢰’를 기회로 누구와 무엇을 꾸 미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을. 소울러를 만나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 기밀을 누출할 생 각은 없지만 어느 정도 경고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찾아왔지만 돌아오는 것 은 스스로도 흠칫할 정도의 실망감이다. 아직은 순진했던 그때의 학우는 이제 없 다. 이상주의자들의 달콤한 정의감에 불타고 있는 멍청이만이 있을 뿐이다. “용무는 이것으로 끝이다. 이만 가보겠다.” 될 수 있으면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볼일 따윈 없겠지.’ 여관을 나온 제그는 벽에 기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발견했다. 지기라 불 러도 좋을 친구. 진심으로 그 신뢰에 보답하고 싶고, 힘들어하면 어깨를 빌려주 고 싶은 녀석이다. 제그가 소울러와 친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중요한 정보를 공유 한 간 큰 녀석. 제그는 쓰게 웃으며 그에게 걸어갔다. 요크노민은 제그가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벽에 기대 있다가, 그가 바로 앞을 지나칠 때 어깨동무를 하며 함께 걸었다. “술 사마.” “뒷감당까지 책임져라.” “카나의 잔소리?” “하하. 그거 무서운데.” 아직은 순진했던 그때의 학우는……이제 없다. ======================================================================= 영화 '사토라레'를 봤습니다. 만화책 '돌연변이'의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적절히 혼합해 놓았더군요.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할머니의 수술이 실패로 돌아가고... 옥상에서 오열할 때, 같이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ㅡ; 선대 자하라 가주, 수는 선 계승식이 끝난 직후 모습을 감췄다. 모든 것을 뮤비라 에게 일임한다는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모두가 소동을 일으키는 와중 에 뮤비라는 그 편지를 비레오가에게 넘겼다. 비레오가는 피가 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다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아버지는 끝까지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 지 않았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나나 마린나사는 삶의 의미가 되지 못했다. 마치 아버지의 영혼을 누군가 가지고 가버린 것처럼. 그런 아버지가 나를 위해 가문의 이득과 당 신의 자존심을 포기하셨다. 그것으로 족해.” 뮤비라는 그럼에도 비레오가가 그 마지막 냉정한 편지를 곱게 접어 품에 넣는 것 을 보며 아찔한 고통에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저리 되리라. 주어지지 않는 부정에 목말라하다 결국은 좌절하리라. 뮤비라가 느끼는 고통은 가해자에게 남아 있는 최후의 양심이었다. 그는 수보다 더한 게 없었다. 너무나 똑같았다. 후 계승식을 앞두고 뮤비라는 세 명의 시녀의 시중을 받아가면서 계승복을 입었 다. 수는 이제 선대 가주일 뿐이다. 후 계승식은 황제와 뮤비라만 있으면 치룰 수 있 다. 굳이 수가 없어도 된다. 전권을 이양하고 사라진 만큼 그를 찾을 책임도 필요 도 없다. 편지를 본 순간 뮤비라는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영원을 만나러 가버린 것이라고. 이제 수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것이다. 계승식의 의례복은 엄청난 천의 집합체였다. 가주라면 여자든 남자든 이 차림으 로 계승식을 치루기 때문에 계승복에는 특정한 성적 매력을 나타내는 것이 없다. 오로지 수많은 천의 겹침이 있을 뿐이다. 얍은 옷을 걸치고, 그 위에 또 걸치고, 또 걸치고, 또 걸치고……. 고상한 색감이 겹겹이 어우러져 위엄을 빚어내는 그것 은 입는 이로 하여금 엄청난 부담감을 가지게 한다. 소화해 내지 못하면 옷에 묻 혀 초라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일전에 가야다 가의 계승식을 본 적이 있다. 소년에 겨우 근접한 아이가 계승복 을 입고 있는 모습의 예상도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나타난 그는 모든 이들 이 뇌리에 그렸던 예상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강한 눈빛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그 작은 몸을 움직여 예를 갖추는 모습. 데릴사위의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 대 가주의 노망이라 생각했던 이들을 비웃듯 그 어린 나이에도 이미 가주의 책임 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테밀시아는 아직 가주가 아니다. 실질적인 가주이긴 하지만 아직 가주 대리라는 직책에 머물러 있다. 보통 가주가 되는 나이인 서른을 넘겨 계승식을 하려는 것이 라 말은 하지만 진실로 그러한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뮤비라마저도 모르는 사 항이니 다른 이야 오죽하겠는가. ‘어째서 아직 계승식을 치루지 않으신 걸까?’ 한번 물어 본 적은 있다. 그때 테밀시아는 슬퍼 보이는 얼굴로 웃기만 했다. 그리 고 이렇게 속삭였다. “적어도 계승식은……부모님이 계시는 자리에서 치루고 싶어.” 무슨 뜻이었을까? 테밀시아의 어머니는 지방 별장에 계신다. 비록 정부와 함께라 지만 그것은 귀족 부인들에게는 액세서리와 같다. 굳이 그런 것에 연연할 테밀시 아도 아니고, 계승식이라고 알리면 두말 않고 달려올 텐데? 아버지는 현재 실종 중이라지만, 결혼식 때는 알리지 않았어도 알아서 찾아왔었다. 그것은 소식에 정 통하다는 뜻이고, 계승식을 하면 그때도 알아서 올 게 분명했다. 더 묻고 싶었지만 테밀시아의 그 미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계승식이 아닌 다른 것을 준비해야 할 때다. 뮤비라가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시녀들은 능숙하게 옷을 입히고 매무새를 다 듬고,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천을 전통에 따라 허리띠에 걸어 늘여 놓고 마찬가지 로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보검을 허리끈에 꽂았다. 길게 내려온 소매 끝에 간신 히 보이는 손에 가주의 반지를 끼고 쇄골까지 늘어지는 긴 귀걸이를 걸었다. 천 과 색의 조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목걸이는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긴 남색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틀어 올려, 은과 진주로 꾸며진 관을 고정시키고 다시 자연 스럽게 풀어 내렸다. 이제 계승식에 쓰이는 호사로운 마차를 타고 황성의 정문을 통과하면 된다. 뮤비 라는 무거운 옷을 잘 추스르며 발을 떼었다. 고개를 꼿꼿이 하지 않으면 언제 머 리장식이 흘러내릴지 모르기에 그 움직임은 매우 절도 있었다. 이 차림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연습을 했던가. 이제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제대로 걸을 수 있다. 우습지 않은가. 가주로 결정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이 걸음을 위한 연습 이었다. 귀족의 허례가 질리도록 느껴진다. ‘그래도 이제는 그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뮤비라가 계승복을 차려 입고 있을 때, 수도의 외각 곳곳에 내용을 알 수 없는 큰 짐마차들이 수십 개씩 이동하고 있었다. 이미 뇌물을 먹인 경비대원들의 묵인 하에서 그들은 진하게 풍기는 수상한 냄새에도 검문 한번 없이 곳곳으로 퍼졌다. 그 반대 반향, 즉 황성의 근처에서도 수상쩍은 광경이 일어났다. 근처 식당, 혹 은 여관에 죽치고 앉아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평범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사람 들. 그들의 허리에는 하나같이 단검과 장검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 몸뚱이는 곳곳 에 암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아름다우면서도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묻어나는 뮤비라는 그 복잡, 화려, 정교한 계승복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느 가문 이든, 그 가주는 황제 앞에서 고두하지 않아도 된다. 한 가문의 일원들을 책임지 고 있는 어깨를 함부로 숙이면 안 된다, 라는 의미의 허가였다. 테밀시아는 아직 가주가 아니기에 예를 갖춰야 했지만 이제 뮤비라는 그 예에서 벗어나도 좋았다. 뮤비라는 예전에 테밀시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테밀시아는 그 ‘허가’가 단순히 고개를 숙이면 관이 앞으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생긴 것 일 것이라 말했었다. 문장가가 머리를 쥐어짜며 작성했을 연설을 해대고 있는 황제를 보고 있는 뮤비라 의 머릿속은 이렇게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허무하게까지 느껴졌던 간소한 선 계승식을 보상이라도 하듯 후 계승식은 몸서리 쳐질 정도로 복잡하고 화려했다. 그렇지만 선 계승식 때만큼의 긴장감이나 성취감 은 없었다. 이제 자신이 이끌어야 할 가문의 일원들에 대한 책임감에서 오는 긴장 감이나, 자신을 시험하고 있던 상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성취감 말이다. 그 대 신 경멸, 조소만이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자신을 걸레라 칭하며 노골적으로 모욕하던 자들의 비굴한 눈빛, 어떻게든 마음에 들어보려 아첨하는 자들의 약은 눈빛, 음탕한 눈으로 몸을 더듬는 귀부인들의 눈빛. 그 모든 것들에게 경멸의 웃 음을 지었다. 황제의 연설이 끝나고, 그에게 충성의 서약을 하는 것으로 드디어 계승식이 끝났 을 때야 뮤비라는 겨우 긴장감을 되찾았다. 이제 연회가 시작된다. 그 연회는 한 달이나 계속 된다고 한다. 밖에서는 몬스터 사태 때문에 농사를 제대로 못 지어 굶주리는 백성들이 득실거리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는 방탕함에 다시금 경멸의 미 소를 지었다. 이런 식의 방탕함도 얼마 뒤면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 어떤 식으로든 말이지.’ 연회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내실로 들기 전에 발코니 쪽을 보았다. 아직 해가 중천 이었다. “멋졌습니다, 형님.”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며 대뜸 말하는 청년은 물론 뮤비라의 단 하나뿐인 동 생, 요크노민이었다. 그 외에 뮤비라를 형이라 칭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하녀들이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계승복을 벗기는 모습을 무관심하게 힐끗 본 요크 노민은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제가 형님의 곁에 계속 있을 겁니다.” 이제 후 계승식이 끝나고, 뮤비라는 완전한 가주가 되었다. 표적이 들어가고도 남 았다. 요크노민은 그런 뮤비라를 걱정하여 호위를 자청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를 뮤비라가 아니었다. “그래. 오늘 잘 부탁한다.” 마스터인 뮤비라가 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정공법밖에 없었다면 암살 자는 존재하지 못했다. 암살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레타 소속이고, 뮤비라의 암살 에 대한 의뢰는 상대가 마스터라는 이유로 막고 있지만 혹시 모른다. 개인적인 거 래가 오갔을 수도. 아직 그들은 자신들의 마스터가 어떤 남자인지, 그 마스크 밑 에 어떤 얼굴이 있는지 모른다. ‘마스크…….’ 무심코 얼굴을 매만져 본다. 이제는 살갗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서늘한 촉감 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은 ‘요크노민 마 카르민’인 것이다. 이런 이중생활도 진력이 났다. 이제 곧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날 것이다. ‘그래. 오늘 일로.’ 요크노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그것은 긴장과 흥분, 두려움과 전율이 공 존하는 미소였다. 뮤비라는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녀가 조심스럽게 관을 벗기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를 압박하던 것이 사라졌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흘러 내려 등을 덮었다. 장시간 짓눌려 있었음에도 그 짙은 바다빛 머리카락은 결 좋 게 윤기를 뿜어냈다. ‘지금의 나도 저런 미소를 짓고 있는지 모른다.’ 범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거대한 권력과 세력과 재력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뮤비라가 꿈꿨던 ‘바람’이 아니다. 그 바람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을 위한 제 일보가 시작되고 있다. 어찌 흥분되지 않 겠는가, 어찌 전율스럽지 않겠는가. 그만큼의 긴장과 두려움이 동시에 솟아오르지 만 그쯤은 누를 정도의 정신력은 있다. ‘오늘 저녁. 전진이냐 퇴보냐는 그때 결정된다.’ 뮤비라와 요크노민. 이 너무나 닮은 형제이자 부자는 동시에 생각했다. 테밀시아는 연회장에서도 빼지 않은 애검의 손잡이를 무의미하게 어루만지고 있었 다. 기사는 연회라 해도 검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그들 의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의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대부 분은 연회용의 아름다운 검신을 가지고 오기 마련인데 테밀시아는 언제나 자신의 애검이었다. 그 흉흉한 기운이 도사리는 피에 굶주린 황금빛 검은 그에게 몰려드 는 이들을 어느 정도 걸러준다. 어차피 어지간한 담력으로는 이 금안의 ‘지배 자’에게 다가오지 못하지만, 그 검을 쥐고 있는 그는 누구보다도 위압적이었다. 또 그만큼 다가가고 싶다는 충돌을 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정적과 술렁임이 공존하기 시작하는 연회장의 기류를 눈치 챈 테밀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구석의 발코니에 기대있는 그에게 아직까지 다 가오는 이는 없었다. 그가 중앙에서 피해 있다는 것은 조용히 있고 싶다는 뜻이기 에 누구도 감히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연회장에 일찍 들어서긴 했지만 구석 에 박혀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던 그가 드디어 움직인 것에 다들 이목을 주시 했지만, 마찬가지로 먼저 다가갈 수는 없었다. 저 위험한 매력의 사내가 먼저 말 을 걸어 스스로의 벽을 허물기 전에는 누구도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몇몇 수하들 은 그것이 가능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만 허락된 일종의 특혜였다.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테밀시아님.” 그리고 그 특혜가 허락된 극소수 존재 중, 뮤비라는 단연 유명한 존재였다. 테밀 시아의 보좌관으로서 데뷔했던 그가 이제는 한때 주군이었던 자와 동등한 입장에 서의 첫 대면은 충분한 화젯거리였다. 게다가 냉정하게는 뮤비라가 테밀시아보다 조금 위라고 볼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다들 테밀시아가 과연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주목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 쓰고 제피모 출신의 보좌관을 받아들였고, 그 보좌관을 자하라 가에 데릴사위로 보내기까지 했다. 이미 귀족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호의를 베푼 셈이다. 그럼에 도 정작 뮤비라는 자하라 가에 가자마자 테밀시아의 일에 일절 손을 떼었다. 보좌 관으로서 활약했기에 그의 공백이 주는 차질이 많았음에도 그는 자하라 가의 일에 만 열중했다. 냉정하다 싶을 정도의 그 ‘끊음’에 뮤비라로서는 자하라 가 내에 서의 ‘오르세만의 첩자’라는 색안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테밀시아로서는 입 안이 썼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여전히 친근한 듯 보이지만, 이미 둘은 서로 반 목해야만 하는 위치에서 서로를 보고 있다. 뮤비라가 카르민이 아닌 계층의 가주 가 되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카르민의 세 기둥 중 하나다. 숨 막히는 집중 속에서 뮤비라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테밀시아는 발코니에 기 대어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실낱보다도 더욱 얇은 긴장의 선 이 팽팽하게 조여지는 그 순간, 테밀시아의 얼굴에 설핏 웃음기가 스쳤다. “별로 내키지 않아서.” 그리고는 자세를 바로하고 검을 제대로 맸다. 뮤비라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로 짓궂게 되물었다. “언제는 내키셨고요?” “가끔은 내키기도 해.” 답이 궁한 장난꾸러기가 웅얼거리듯, 테밀시아가 변명하자 뮤비라는 쿡쿡 웃으며 우아하게 자신의 입가를 검지로 쓰다듬었다. 검을 다 맨 테밀시아는 허리를 쭉 펴 며 덧붙였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러시겠지요.” 어련하시겠어요, 라고 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표정이 이미 모든 것을 다 말해 주고 있었다. 테밀시아는 웃으며 그런 뮤비라의 이마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자신들을 주위에서 어떤 눈으로 보고 있든,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든 상관없었 다. 오직 서로를 믿을 뿐이다. “늘 연회에 오면 와인을 찾으시더니?” 테밀시아의 깨끗한 두 손을 보며 뮤비라가 의문을 표하자 그는 시큰둥하게 말했 다. “늙어서 알코올중독자 된다고 누가 구박해서 자제하기로 했어. 술에 취하면 용감 해 진다는 것은 이성과 냉정을 잃은 것을 곱게 포장한 헛소리며, 슬픔을 잊게 해 준다는 것은 순간의 망각에 기대고자 하는 겁쟁이들의 변명이다. ……라고 장황하 게 구박하더군. 뭐, 기쁠 때 마시는 건 괜찮다고 허락받았지만 말이야. 나참, 이 런 것까지 허락받아야 한다니.” 구박한 당사자인 뮤비라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누군지 맞는 말만 했네요.” “맞는 말은 무슨. 내가 술에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보다도 그 ‘누구’가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그러는지.” 테밀시아는 불만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태도 속에 가득한 장난기를 못 읽어 낼 뮤비라가 아니었다. “건강은 있을 때 지켜야 한다는 깊은 배려겠지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고맙게 생 각하시라고요.” 실제로 테밀시아는 술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지도 않 았다. 그것에 의존한 적도 없었고 의존할 수도 없었다. 취해야 뭘 어찌해볼 거 아 닌가. 단순히 그 맛을 즐길 뿐이지만 그것에 미각이 길들어 맛을 못 느끼게 되면 금방 잔을 놓곤 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절제가 강한 테밀시아지만 유독 뮤비라 앞에서 만큼은 끝없 이 마시게 된다. 아직도 누가 술이 더 센가 가르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가 곁에 있으면 기쁘기 때문이다. 기쁨에 취해 마시는 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감미로웠 다. 그 속을 모르는 뮤비라가 근심 어린 얼굴로 술을 절제하라 충고하는 것도 즐 거웠다. 그 모든 상황이 테밀시아의 몇 안 되는 낙중 하나인 것이다. 둘의 소탈한 대화는 조용한 연회장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둘의 대화 속에 뼈가 있음을 확신한 귀족들이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위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 한 것이다. 걔 중에는 여전히 사이가 좋군요, 라고 머리 빈 소리를 했다가 무안 을 당하는 자도 몇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가고 있었다. =========================================================================== 11월 말에 십이국기 7권이 나온답니다! 오오, 할렐루야~! 아사님! 저에게 암울한 삶에 광명을 안겨주셨습니다;ㅡ; 감사합니다>.< 얼른 십이국기 7권을 사서 곱게 포장하여 책장에 꽂아두고 싶군요>.< 레드 드래곤을 읽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이 책으로는 세세하게 나와 있어 재미있었습니다. 음, 역시 저에겐 활자가 맞는 모양입니다. 책을 본다는 건 너무 즐거운 일입니다;ㅡ; 연회가 시작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황제와 황후가 들어왔다. 현재 후계자가 없는 지라 황실은 약간 어두운 분위기였다. 그동안 먼 친척 중에서 보라색 눈동자의 소 유자가 있는지 여부를 찾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아직 황 후가 젊으니 후사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자식이 보라색 눈동자를 지니고 태어날지도 모호하다. 또 타고 난다해도, 그래서는 다음 황제가 너무 어리 게 된다. 가뜩이나 만만치 않은 녀석이 버티고 있는 마당에 자식에게 불안정한 황 관을 내줄 수는 없다. 황제는 경계와 증오의 눈빛으로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그 만만치 않는 녀석을 노 려보았다. 흠 잡을 수 없는 정중한 태도로서 허리 숙여 자신의 등장을 맞고 있는 모습이 위선적으로 느껴져 더욱 화가 났다.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저자는 분 명 쓸 만한 녀석이다. 위험하고 무리한 명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거부하거나 항 의하지 않고 묵묵히 따면서도 법도에 어긋난 명에는 딱 잘라 거절한다. 실력도 쓸 만하고 수하를 제대로 거느릴 줄 알아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는 기사단으로 만들 어 냈다.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밑 사람을 쥐어짜지도 않고, 아부하지 않으 며 사치스럽지 않고, 경박하지 않으며 방탕하지 않다. 그럼에도 어딘지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경계심, 그리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일말의 질 투심도 있었다. 저 힘찬 젊음과 힘, 매력에. 그런 황제의 옆에서 황후는 애정 어린 눈으로, 옆의 남편이 보고 있는 자와 같은 자를 보고 있었다. 지위에 휘둘리지 않고 그 사람 자체를 봐주는 강한 남자. 거만 하지 않으면서도 오만한 점이 미치도록 좋았다. 남편의 입지가 줄어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매력에 흠뻑 취해 그가 원하는 데로 해주고 만다. 남편을 농락하고 그를 위해 행동한다. 그런 자신을 타 신하들이 어떤 식으로 보는지 잘 알고 있지 만 상관없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 다. 마린나사 따위와는 다르다. 그런 생각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 ‘그래, 이름뿐인 아내 따위와는 달라.’ 오늘도 혼자 연회에 온 테밀시아를 보며 황후는 다시금 되새겼다. 마린나사. 선대 자하라 가주의 장녀이며 오르세만 가의 차대 가주 테밀시아의 아 내. 충분히 타 귀족부인들의 화제 속에서 행복한 수다의 장을 만들 수 있었을 그 녀는 결혼 후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유는 그녀의 부 정함에 있었다. 이미 그녀의 음탕한 생활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지극히 귀족 다운 남편의 ‘관대함’으로서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 것을 테밀시아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자를 자신의 아들이란 이름 하에 자라는 꼴을 볼 수 없다고 말하며 첫날밤 이후로 마린나사와 동침하지 않았 다. 또 그녀의 부정함을 꾸짖으며 유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명했다. 실제로 그 가 명한 것은 타 남자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과 그 경망한 입을 함부로 떠들지 못하도록 연회 참석을 금지 한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린나사에게는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의 복에 겨운 불행한 삶을 많은 귀족 부인들은 고소해 했다. 테밀시아 가 후계자를 위해 정부를 만들지 않고, 창부를 멀리한다는 것은 귀족 부인들 사이 에서는 유명한 화제였다. 그런 자를 위해서라면 순결을 지켜볼 법도 하다고 진심 어린 말을 하는 부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그런 고결한 기사의 아내가 전형적인 ‘귀족 부인’이라는 것에 얼마나 샘이 났는지 모른다. 때문에 공연히 위로한답시고 마린나사를 찾아가 은근히 약을 올리는 부인들도 적지 않았다. 후계 자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테밀시아가 부정한 부인을 거부한 이상, 앞으로 어 찌 할지도 상당한 관심거리였다. 지극히 귀족다운 생각과 사고, 그리고 판단. 그 속에서 꽃피우는 향락과 쾌락, 그 리고 나태. 절대 순환의 고리 속에서 이탈한 테밀시아는 그렇게 절대적인 적대와 절대적인 동경의 대상이었다. * * * 시간 자체는 이르지만 해가 짧아서 금방 어두워져 버렸다. 그렇다고 거리가 어두 워 진 것은 아니었다. 대 욤 제국의 수도답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여행자나 모험 가, 상인들도 많았고 가게들도 환한 조명을 켜며 장사를 계속 했다. 추위에 약한 아이나 노인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고, 가족 단위 로 외식을 하러 즐겁게 나오는 이들도 제법 되었다. 아직까지도 몬스터의 습격 없 는 곳이고, 또 강한 경비대원들과 여차하면 기사들까지 포함하여 막강한 전력이 모여 있는 곳이라 밤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비록 뒷골목에는 접근 하지 않지만 말이다. 바로 그 뒷골목 곳곳에서 은밀히 몸을 숨기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도 의 사방으로 퍼져 똑같은 속도로 푸른빛이 꺼지고 있는 메달과 주위 건물의 높이 를 확인했다. 메달은 일정한 시간이 지났음을, 마찬가지로 일정하게 꺼져가는 푸 른빛으로 알려주는, ‘시간의 규칙’이라 불리는 아이템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됐다싶어 메달에만 집중하던 이들은 그 빛이 완전히 꺼지자, 자 신이 지키고 있던 커다란 짐마차의 입구를 열고 옆 건물의 지붕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이제 속으로 오십을 셀 때쯤이면 저 마차 안의 녀석들이 활개를 칠 것이 다. 무작정 미쳐, 부수고 물고 뜯고 먹어치울 것이다. 그 대상에 끼지 않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녀석들이 냄새를 맡지 못하는 높이까지 올라가야 한다. 상당한 높 이까지 올라가야만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 정도는 레타에 소속된 자라 면 문제도 아니다.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소리가 사위를 메웠다. 그것을 들은 것 은 아니지만 마차 안 녀석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크아악!” 야수 특유의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마차 안에서 새어나왔다. 곧이어 마차가 조 금 들썩거린다고 느껴졌을 때, 열려져 있는 문 쪽으로 녀석들이 미친 듯이 빠져나 오기 시작했다. 잠시 방향을 살피던 녀석들은 좀더 향긋한 먹이의 냄새가 나는 큰 길 쪽으로 일제히 내달렸다. 천성이 털털하고 넉넉한 레타의 유명인사, 록은 그 모양을 가만히 내려보다 투덜 댔다.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지? 야수들을 수도에 풀어 달라니, 완전 미친 짓이잖 아.” “백성을 도탄의 품에서 구제하기 위해, 정의의 달콤한 고뇌 속에서 허우적거리 는 영웅들의 의뢰라는 군.” 록과는 대조적으로 잔인하고 냉랭한 제그는 특유의 조롱조로 비꼬아 답했다. 그 의 말투가 어쨌든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닌 이상 록은 상관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그의 말에 담긴 정보를 재해석 했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백성을 구하겠다면서 어째서 스스로 야수를 풀어 괴롭히는 거지?” 제그는 쓰게 웃었다. 굽히고 있던 한쪽 무릎을 펴며 일어나 고개를 돌려 본 곳에 는 밝은 빛으로 호화찬란한 황성이 있었다. “……거야.” “응?” 작게 중얼거린 제그의 말을 놓친 록이 되물었다. 제그는 그런 록을 내려보며 맹렬 한 조소를 품었다. “수단을 위해 목적을 잊은 거야.” 갑자기 수도 곳곳에서 퍼지는 처참한 비명소리와 끔찍한 피비린내에 경비대원들 은 놀라 우왕좌왕했다. 수도의 경비는 키텐 기사단의 지휘 하에 이루어져 왔기에 어지간한 사태가 아니라면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일은 없었다. 능력 밖의 일이 다 싶으면 키텐 기사단으로 달려가면 그만이다. 그런 경험을 살려 경비대원 중 한 명이 급히 키텐 기사단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경비대원이 달려간 키텐 기사단의 저택에는 단 두 명의 기사만이 있었다. 자하라 가주의 계승식 때문에 황성으로 몰린 귀족들 덕에 모두 그곳의 경비를 서 고 있었던 것이다. 혹은 유능한 기사로서 초대권을 받고 연회에 참석하고 있던가. 부패가 거의 없는 삼대 기사단의 일환답게 남은 두 기사는 침착하게 사태를 파악 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자네가 황성으로 가, 단장께 알리게. 난 이자와 함께 경비대로 가겠네.” “조심하게.” 자신의 기마가 좀더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기사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떡 였다. 어째서 수도에 몬스터도 아니고 야수가, 한둘도 아니고 떼거리로, 밖에서 가 아닌 안에서 습격해 오는 것인지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키텐 기사단만으 로는 인원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현재 황성 근처에는 귀족들의 기사단이 많이 있다. 다른 곳도 아닌 수도에 말썽이 생겼다면 분명 도와줄 것이다. 전투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는 기사들을 속일만한 능력이 없는 소울러와 파크다 는 황성의 하인들에게 돈을 듬뿍 먹여 그들의 복장을 얻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연회장 구석에 자리 잡아 연회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옷 안에 감춘 ‘시간의 규 칙’이 꺼진지 제법 되었다. 슬슬 소란이 일어날 시간이다. 대량의 야수로 인해 귀족들의 기사단이 지원을 나가면 황성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혁명군이 덮쳐 올 것이다. 황제를 죽이는 것이다. 황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극에 달했다. 자 하라 가주의 계승식이라고는 하나 이 사치스러운 연회로 인해 특히나 고조되어 있 다. 기사단이 성을 빠져나가면 귀족들의 태반이 모여 있는 이곳을 점령하여 인질로 삼 는다. 무력으로 압박해오면 인질을 하나씩 죽여 위협을 하면 된다. 황제를 죽이 고 효시한다. 민심은 이쪽에 있다. 분노가 극에 달한 그들을 조금만 건드려 주면 알아서 일어날 것이다. 만약 이 일로 자신들이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황제가 죽으면 그 망할 전통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현 황실에서는 보라색 눈동 자의 소유자가 없다. 공석이 되어버린 보좌를 차지하기 위해 귀족들, 특히 카르민 들의 대립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을 따르는 세력들도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귀족 들은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할 것이다. 그들의 한심한 꼴에 백성들은 그간 쌓였 던 분노를 터뜨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검을 들고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죽는다 해도 수지맞는 장사다.’ 소울러는 쿡쿡 웃었다. 하인 복을 입고 있는 그에게 신경을 쓰는 기사는 없었다. 그럼에도 파크다는 소울러를 툭 치며 주의를 주었다. 왠지 진땀을 흘리고 있는 그 는 상당히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 “시선이 느껴진다.” “예?” 마법사인 소울러는 그런 쪽으로는 둔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상당한 검술을 갖춘 파크다는 바싹 긴장하여 시선을 바닥에 주고 있었다. 공연히 분위기를 살핀 답시고 두리번거렸다가는 그 꺼림칙한 시선의 주인에게 걸려버릴 것이다. 고개를 들어 시선의 주인을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하인이 그토록 예민한 감각 을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 ‘찾는다’라는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수상 함을 알려주는 꼴이 된다. “내색하지 말고 하인처럼 굴어라. 계속 이쪽을 보고 있다.” “예.” 영리한 소울러는 놀라거나 긴장하는 내색 없이 지루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숙였 다. 하인들은 웃음이라는 가면 아래에 지루함과 짜증을 숨긴다. 소울러는 그것을 능숙히 따라해 냈다. 그런 그들을 보던 요크노민은 피식 웃으며 주스를 깔끔하게 비웠다. 앞을 지나치 는 하인의 쟁반에 빈 잔을 올려놓고 다시 주스를 집어 들었다. 술을 마셔도 취하 지 않는다지만 기운이 아주 돌지 않는 건 아니다. 곧 닥칠 일을 생각하면 술은 금 하는 게 좋다. 테밀시아처럼. 게다가 저 둘의 행동을 보니, 이 주스를 다 마시기 도 전에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분명 아까 주머니에서 조금 꺼내 본 것은 시간의 규칙. 빛은 나지 않았으니 ‘정해 놓은 시간’은 지났다는 뜻. 그리고 나서 문 쪽을 보았으니 뭔가 소식을 기다리는 거겠지. 무슨 소식일지는 짐작이 가지만.’ 요크노민은 긴장한 분위기가 역력한 파크다에서 시선을 떼고, 그보다 훨씬 자연스 러운 분위기의 소울러를 보았다. 제그의 친구였던 남자. 맺고 끊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제그는 이미 저 남자를 과거의 인물로 머리 저편에 쑤셔 넣은 것 같지만, 요크노민으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소울러라는 이름은 훨씬 전에 들어 본 적이 있다. ‘이므르에서 페르노크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 혼신을 다해 치유해준 휴로버도, 기억 상실증임을 알고 이것저적 신경써준 파크다 도, 페르노크의 변화를 처음으로 눈치 채고 호감을 가진 소울러도. 단순한 우연 의 일치라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어째서 페르노크가 조금이나마 호감을 가졌던 자 들이 하나같이 그의 형을 반목하려 드는 것인지. 잠시 씁쓸해 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리고는 있지만.’ 시선을 돌리며 주스를 한 모금 마시는 요크노민의 눈에 키텐 기사단장에게 급히 다가가는 기사가 보였다. 연회복이 아닌 기사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기사단 에 남아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분명했다. 요크노민은 저편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형님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너 무 붙어있는 것도 수상하게 느껴질 것 같아 일부러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 론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달려갈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지만 말이다. 동생이 다가오자 뮤비라는 대화를 나누던 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미소를 띈 얼 로 걸어왔다. 요크노민은 소소한 대화를 나누듯 평범한 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한 번 쭈욱 보았다. 마치 연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입에서 전 혀 다른 화제가 나왔다. “키텐은 분명 수도 경비를 맡고 있지요?” “그래. 덕분에 전쟁에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키텐 단장님이 많이 투덜대셨지.” 요크노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를 뮤비라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 던 요크노민이 한 곳에 시선을 멈추자 따라 그곳을 보았다. 키텐의 단장, 나이트 사갈이 있었다. 크게 당황한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는 방금 요크노민처럼 주위를 둘러보았 다. 뮤비라와 요크노민은 그와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약간 시선을 돌렸다가 다 시 보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연회장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황제의 의 자가 썰렁하게 놓여져 있었다. 한달이나 계속되는 연회를 끝날 때까지 지키고 있 을 필요가 없으니 대충 인사말만 남기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사갈은 몇 번이고 고심하다가 달려온 기사에게 몇 차례 질문을 던지고 한숨을 쉬 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고개를 꼿꼿이 쳐들며 연회장의 앞부분, 황제의 의자가 놓여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물론 황족만이 오를 수 있는 단상에는 오르지 않았 다. 그럼에도 갑작스런 그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안 좋은 소식이 있소.” 다섯뿐인 마스터 중 한 사람인 사갈이 심각한 얼굴로 운을 뜨자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수도에 야수 떼가 습격해 왔다 하오.” “……!” 순식간에 소란이 번졌다. 드디어 수도까지! ……라는 화제가 대부분이었지만 그것 은 사갈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자들의 말이었다. 제대로 들은 자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갈은 손뼉을 한번 쳤다. 주위가 너 무 시끄러워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몬스터가 아니라 야수요. 그리고 수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갑자기 습격해 왔다 하오.” 사갈은 또다시 손뼉을 쳐야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얼른 뒷말을 이었다. “키텐과 경비대원으로서는 수가 부족하오. 지원을 부탁하고 싶소.” 떠들어 대기 위해 입을 열었던 자들도 이어지는 말에 입을 다물고 굳었다. 아까 운 자신의 기사를 자신의 영지도 아닌 곳을 지키기 위해 소모하고 싶을 리 없다. 이때는 황제가 명하는 것이 좋은데, 하필이면 들어가 버렸다. 사갈은 이런 부탁 을 해야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화가 났다. 하지만 소식을 전해온 기사가 말하길 수가 너무 많다고 한다. 키텐의 기사는 그리 수가 많지 않다. 수도의 백성 들로 이루어진 경비대원은 수는 되지만 실력이 떨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 히 충당할 수 없다. 누구하나 나서는 이 없는 이 정적이 소름끼치게 끔찍했다. 파크다는 인상을 찡그 리며 비어있는 황제의 자리를 보았다. 수도에 말썽이 생겼다면 펄쩍 뛰며 모든 기 사단의 출동을 명해줄 황제였다. 그만큼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는 완벽을 기하고 싶어 하는 소심함을 갖춘 자였던 것이다. 설마 이렇게 빨리 나가 버릴 줄은……. 어이 없이 이대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압박감이 파크다와 소울러의 가슴을 무겁 게 짓누를 때, 냉랭한 어조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휴첼이 가겠소.” 발코니에서 지겨운 얼굴로 연회를 보고 있던 테밀시아였다. 그는 애검을 어루만지 며 싸늘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희미하게 어려 있는 조소 가 자신의 득실을 따지던 귀족들의 가슴을 찔끔하게 만들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이제 막 가주가 되어, 아직 기사단을 움직일 정도의 권력을 잡지 못한 뮤비라였지 만 혼자 움직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테밀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연회는 그대를 위한 것이야. 그대는 여기 있는 게 옳아.” “맞습니다, 형님.” 뒤에서 요크노민까지 말리자 뮤비라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가 야다 가를 제외한 두 카르민의 가문이 나서자 다들 눈치를 보며 자신의 기사단도 보내기로 했다. 가야다 가주는 뮤비라와 테밀시아 등 유력 인사들에게만 대충 얼 굴만 내비친 뒤 바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남아 있는 카르민들이 모두 나선 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 그를 따르면 후에 득이 있을 것이란 약삭빠른 계산이 이 어지는 건 당연했다.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던 소울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파크다에게 속삭였다. “다행입니다.” “…….” 파크다는 굳은 얼굴로 테밀시아를 볼 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테밀시아에 대 한 파크다의 묘한 증오와 열등감을 알고 있는 소울러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 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민심은 분명 우리에게 있어.’ 파크다는 입술을 깨물며 재차 확신했다. ‘분명 우리에게 있어. 저자는 귀족이야. 그중에서도 카르민이야.’ 가슴을 꿰뚫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죠? 그 감기가 매우 독하다던가요? 그래서인지 건강 조심하라는 메일이 잣습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뛰었다. 뒤에서 야수의 헐떡이는 소리가 바싹 들려왔다. 함 께 온 이웃 형은 먼저 저만큼 뛰어 가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은 하지 만 배신감이 치밀었다. “아악!” 공포로 굳어진 다리가 엉키며 넘어진 소년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야수의 넙다란 발이 소년의 등을 강하게 짓눌렀다. 죽음을 직감했을 때, 등이 축 축해지며 무게감이 사라졌다. 발톱에 찍힌 아픔이 오히려 정신을 수습하게 해주었 다. 부들부들 떨며 뒤를 돌아보자, 단칼에 베인 야수가 길바닥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 었다. 돌아보고 있던 소년의 얼굴로 가볍게 핏방울이 튀었다. 누군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던 것이 묻어버린 것이다. 두려움으로 좁아진 시야에 그제야 말의 날 렵한 다리가 들어왔다. 시선을 위로 들어보니 냉엄한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고 있 는 남자가 보였다. 어리고 세상모르는 소년이지만 그 남자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 다. “그, 금안의 ‘지배자’!” 방금까지 느꼈던 공포와 두려움은 어디로 가고 순수한 동경과 열정으로 그 황홀 한 호칭을 입에 담았다. 잠시 이탈한 일행의 뒤를 따르기 위해 말을 돌리던 테밀 시아는 그 말에 힐끗 소년을 내려보았다. 소년은 두 손을 꾹 모아 쥐고 상기된 얼 굴로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 있어라. 밖은 위험하다.” 평소라면 감히 바라보지 못할 ‘지배자’가 직접 말을 걸어주자 소년은 잔뜩 흥분 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테밀시아는 앞서 달리는 일행을 따라 경비대를 향해 내 달렸다. 워낙 명마인데다 그의 마술(馬術)이 뛰어나 금방 사갈의 옆까지 따라잡았 다. 사갈은 전방을 노려보면서 이를 갈고 있었다. “어째서 수도 안에서 야수가!?” 사갈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테밀시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끕시다.” 그리고는 박차를 가하는 그의 모습에 사갈은 혀를 내둘렀다. 테밀시아는 수도에 익숙한 사갈에게 지휘권을 넘겼고, 그 지휘에 기꺼이 따랐다. 같은 삼대 기사단 의 단장이 그런 태도를 취하니 다른 기사단도 아는 척 나설 수가 없었다. 솔직히 사갈보다 이 사태를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봐야 했다. 테밀시 아……. 확실히 한 기사단을 맡을 만한 역량이 넘치는 남자다. 수도의 치안을 맡는 키텐단장 사갈과 황제의 명으로 이곳저곳 파병을 나가는 휴첼 단장 테밀시아는 함께 움직인 적은커녕 안면도 적었다. 때문에 서로의 성품이나 기량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게 다였고, 와전이 많은 구전으로 는 서로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사갈은 지금 테밀시아에게서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냉정과 침착, 그리고 행동력 을 보았다. 그것을 보게 만든 상황은 달갑지 않으나 기분은 유쾌했다. 기사의 가 문에서 태어나 기사로서의 삶 외에는 생각해보지 않은 사갈과는 달리 테밀시아는 오르세만 가의 자제였다. 오르세만 가의 가주는 수준급 마법사이자 학자였으며, 그 동생들은 뛰어난 검사였다. 즉 굳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 는 가문인 것이다. 테밀시아는 강한 기사였고 또 뛰어난 정치가였다. 팔방미인이 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질투가 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묘 한 일이다. 테밀시아란 남자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빠르게 달리던 사갈은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저만치 멀어진 황성 위로 가느다란 실 빛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묘한 함성도 섞여 들리는 듯 했다. 사갈은 인상을 찌 푸리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수도가 야수에게 습격을 받고 있는데 불꽃놀이라니.’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뒤를 보지 않은 사갈은, 그 불꽃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런 것도 올라오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다. 바로 경비대에 도착했기에 이어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음 의식하지도 못했다. 불행히도 그렇게 그는 결국 모르 고 지나쳐 버렸다. 대신 테밀시아가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덮치 려드는 야수를 베었다. ‘뮤비라…….’ 황후의 농염한 살 내음에 취해 있던 황제는 시끄럽게 달려오는 발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하지만 문 밖에 서 들리는 근위단장과 하인의 대화에 더 이상 짜증을 유지할 수 없었다. 황성이 공격당하고 있는 것이다! “페, 폐하.” 불안하게 눈망울을 떠는 사랑스런 아내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다독였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인과의 대화가 끝나고 근위단장이 목청을 높 여 말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라.” 황제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런 일에 두려워해서 는 황제로서의 위엄이 안 선다. 또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현재 황성에는 자하라 가주의 계승식으로 많은 귀족들이 있다. 귀족들에게는 자연히 자신들의 기사단이 있는 법이다. 물론 황성에는 얼마 들어오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 수가 제법 된다. 무엇보다도 마스터인 뮤린과 테밀시아, 사갈이 황성에 있다. 이보다 더 안전한 방 어막이 어디 있겠는가. 문이 벌컥 열리며 뮤린이 들어왔다. “불순한 무리들이 황성을 공격하고 있답니다. 출전을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한다. 그들의 목을 가지고 와라.” “명 받듭니다.” 예를 갖추고 밖으로 나간 뮤린이 몇몇 기사들에게 이곳을 지키도록 명하는 소리 가 들렸다. 그리고 서둘러 뛰어가는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결국 사라졌다. 과묵하 고 딱딱한 성격의 뮤린은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위기가 닥치면 누구보 다도 든든하게 느껴졌다. 때문에 그를 함부로 내친다거나 대우하지 못했다. 기사 는 융통성이 너무 있어도 문제인 것이다. 황제가 그렇게 안도하며 황후를 토닥여 주고 있었을 때, 황후는 좀더 상태를 냉정 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뮤린 경은 안으로 들어가 우리를 경호하라 했다. 어째서 안 들어오는 거지?’ 두려운 추측이 뒤를 이었다. 무기를 점검하는 소리도 없다. 서로 대화도 없고 괜 찮냐는 질문도 없다. 너무 조용하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조심스럽게 남편을 올 려보며 심호흡했다. 의지가 별로 안 되는 남편이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으로 도 족했다. 에일라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대로 있으면 더 위험해질게 뻔했다. “겨, 경들.” “……?” 의아하게 자신을 내려보는 남편은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기사들의 답이 없 었다. 남편의 옷자락을 꾹 끌어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야, 이쪽으로.” 낮게 속삭이며 손을 잡아끌었다. 저 벽의 기둥에 비밀통로가 있다. 기둥까지는 단 여섯 걸음. 그 여섯 걸음만 떼면 살 수 있다. 선조가 언제가 사용할 후대를 위 해 준비해뒀다. 그것은 오직 황제만이 안다. 대대로 황제에게만 전수되는, 욤 제 국의 황기가 새겨진 반지에는 황성 설계도의 영상이 숨겨져 있었다. 눈치 빠른 에일라야는 조심스럽게 발을 떼었다. 맨발이기에 발소리가 들릴 위험 은 없지만 혹시 모른다. 이런데서 죽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다시 한걸음, 한걸음……살길이 가까워진다. 그녀가 그렇게 간신히 걸음을 떼어놓을 때, 황제 는 기관을 움직이기 위한 장치를 건드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기둥이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런, 이런!” 인기척이 없었음에도 등 뒤에서 명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흠칫 놀라며 돌아본 둘 의 눈에 작은 몸에 검은 옷을 입은 이가 보였다. 요염한 청자색 눈동자가 매력적 인 그는 복면 위의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러면 곤란하지.” 명백한 조롱조의 목소리는 매우 맑은 미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 것이 아니라 면 ‘노리개’로서 그 값어치를 재 볼 법한 상품. 지금은 이쪽의 목숨을 움켜쥐 고 있는 사신이었다. 쟁쟁한 근위 기사들조차 소리 한번 못 내고 죽었다. 신분이 내려주는 우월과 권위와 힘이 통하지 않는, 오로지 육체적인 강함만이 통용되는 이런 상황에서의 황제는 무력했다. “기둥에서 떨어져. 그리고 그걸 원래대로 돌려놔줬으면 고맙겠어.” 독이 발라져 있을 것이 분명한 단검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다 받으며, 자객은 장난 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매우 악의적인 장난기였다. 대 욤 제국의 황자로 태어나, 보라색 눈동자 덕분에 황태자로 자라면서 남들에게 명령만을 내리며 살던 황제가 출신성분조차 알 수 없는 자객의 명을 따라야 하는 상황. 어찌 보면 통쾌하고 어찌 보면 굴욕적인 장면이었다. 신분에 따라서 이 장 면을 받아드리는 관점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이라도 뛰어 들고 싶은 돌파구를 자기 손으로 닫아야만 하는 심정은 매우 참 담했다. 뛰어들 수는 있지만 문을 닫기 위해서는 안에서 다시 조작을 해야 한다. 황제는 자신의 느려터진 움직임이 이 자객을 따돌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기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에일라야가 함께 있는 마당 에 성공의 가능성은 완전 무였다. 천천히 닫히는 기둥을 보며 에일라야는 새파랗게 질려 황제를 보았다. 삶에 대한 집착과 비례하는, 느릿한 황제의 손놀림을 짜증스럽게 보던 자객은 기꺼운 마음으 로 그를 도와주었다. -탁! 기관을 돌리고 있는 손가락 틈에 아슬아슬하게 단검이 꽂히자 황제의 행동은 매 우 민첩하고도 정확해졌다. 매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통용 되는 지론이다. 완전히 기둥이 닫혔을 때,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부부가 끝없는 절망에 허덕일 때, 복도 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옷이 부딪치며 나는 소음 도 적지 않게 났다. 시체를 발견했는지 나직한 외침도 들렸다. 달려오는 소리는 더욱 빨라졌다. 황제와 에일라야의 얼굴은 극적으로 밝아졌다. 자객은 화색 도는 부부의 얼굴을 보며 키득댔다. 노골적인 비웃음 속에서 악의가 느껴졌다. “쿡쿡.” 발소리가 점점 커지는데도 느긋한 걸음으로 황제에게 다가간 자객은 자신이 던진 단검을 회수하며, 황제를 올려보았다. 가주가 아닌데도 감히 허락 없이 자신의 얼 굴을 똑바로 보는 불손한 자에게 호령은커녕 말 한마디 못 붙이는 모습에 또다시 그 섬뜩한 미소를 짓더니 창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거의 동시에 문이 발칵 열렸 다. 황제는 아내를 껴안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산 것이다! 지금 온 기사가 누구든 한 계급 승진 시켜 주리라 다짐하며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차가운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쉬는데 죄송합니다만 저희를 따라와 줘야겠습니다.” 황제는 알리 없지만, 방금 말을 꺼낸 이는 파크다라 불리는 남자였다. 딱딱하게 굳은 황제와 황후가 포박되는 것을 창문 밖에서 지켜보던 자객은 공연 히 투덜대고 있었다. “왜 이리 늦은 거야. 나참.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나. 혹시나 해서 루카가 날 보 내지 않았으면 다 틀어질 뻔했네.” 그래도 오랜만에 스트레스는 맘껏 풀 수 있어 좋았다. 처음부터 지고지순한 존재 로 태어나 지극히 떠받들어지던 황제 폐하께서 제피모에게조차 경멸의 대상인 하 츠민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발발대는 꼴을 보는 것은 꽤 유쾌한 일이었다. 이래 서 루카다가 좋다. 그는 휜이 즐거워할만한 일을 잘 구상해 낸다. 뭐, 지금 휜을 극한까지 몰아가고 있는 스트레스의 근원은 그런 루카다지만 말이다. “에고. 루카한테 또 잔소리 듣기 전에 얼른 가자.” 가볍게 지면으로 착지한 휜은 공연히 없는 먼지를 탁탁 털어내며 한탄했다. 분명 지금의 일상은 즐겁다.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이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누구든 죽일 수 있고, 누구든 조정 할 수 있다. 심지어는 가장 끔찍하고 치가 떨리며 소름이 돋고, 싫다 못해 증오스 럽고 두렵기까지 한 공부마저도 감내할 수 있다. “아아, 몸도 못 풀었어.” 작고 날렵한 몸을 쭉 피며, 기지개를 한참 한 휜은 성벽 쪽으로 아쉽게 발을 돌렸 다. 비록 그 발놀림이 매우 느렸다 해도 탓할 것은 못된다.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이다. 빨리 돌아가 봤자 기다리는 건 공부뿐이니까. --------------------------------------------------------------------------- 여지없이 다가오는 기말고사... 그리고 그 전에 밀려오는 레포트... 하아...ㅡㅡ; 미처 대응도 하기 전에 포위당해 감금에 처한 귀족들은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보 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야수가 말썽으로, 참석했던 기사들이 대거 빠져나 가버려 이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수도 내에 주거하고 있 는 그들의 기사들이 많다는 것과 공공연한 비밀로 감춰져 있는 마스터 뮤비라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희망, 뮤비라는 저 구석 쪽에 앉아 차분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어째 서 활약을 해주지 않는 건지 답답했지만 감히 나서서 추궁할 배짱은 없었다. 뮤비 라는 이제 자하라 가주인 것이다. 뮤비라의 옆에는 그와 쏙 닮은 동생, 요크노민이 꼿꼿이 서있었다. 지독히 무표정 한 이 형제는 내심 초조하게 다음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그들 의 기다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쾅! 커다란 연회장의 문이 매너 없게 열리며 한 무더기의 병력이 들어왔다. 생각 얕 은 몇몇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을 보았다가 경악하여 소리 질 렀다. “폐하!”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고 무시하고 있던 대다수의 귀족들이 그 말에 놀라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아슬아슬한 긴장의 침묵이 이어지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소란해졌 다.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이들은 절망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양동작전이었던 것이다. 밖에서 습격하여 근위단장을 유인한 뒤, 안으로 잠입하 여 황제를 잡은 게 분명하다. 황제가 잡혔다. 그것이 주는 파급은 크다. 귀족이 잡혀 있다면 구하기 위해 기사들이 나선다. 하지만 황제가 잡혀, 인질이 되었다 면 이들의 조건을 무조건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 귀족은 많지만 황제는 하나다. 바로 그 차이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공손한 어조로 누군가가 말을 시작했다. 아무리 물어도 침묵을 고수하는 군사들에 게 지쳐있던 귀족들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최소한 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아야 뭐라도 쥐어짜낼 것이 아닌가.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만나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남자를 대놓고 노려보지는 못했지만 빠득 이를 가는 소리 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저희의 목적이 무엇인지,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궁 금하게 여기시리라 생각됩니다.” “반역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누군가가 비아냥 거렸다. 다들 숨을 멈추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 다. 뜻밖의 답변이 어디선가 들려오자 말을 시작한 남자, 파크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귀족 무리들을 보았다. “물론 아닙니다.” “어떻게 포장하던 반역은 반역이다.” 똑같은 목소리. 이번에도 누가 답을 했는지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을 숨기려 드는 건 아닌듯했지만 워낙 귀족들의 수가 많아 묻혀버린 모양이었다. 파크다는 단호하 게 잘라 말했다. “혁명입니다!” 귀족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예의 목소리가 그들 속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래봐야 보좌에 앉는 이가 달라지는 것뿐이다.” “저희는 그 보좌를 없앨 겁니다.” 파크다는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그에 재차 답하는 목소리는 냉소를 머금고 있 었다. “보좌라는 ‘단어’만이 사라지는 거겠지.” 이쯤 되자 귀족들은 자신들 속에 있을 그 대담무쌍한 자를 찾아 한참 두리번거리 기 시작했다. 모두가 주위를 살피는 속에서 가만히 파크다를 보고 있는 두 남자 가 있었다. 닮은꼴의 남자들. 파크다 역시 들어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형제였다. 제피모 출신으로 카르민의 한 기둥이 된 남자와 그가 아들처럼 여기는 동생. 혁명 군 속에서도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스스로 승리를 거머쥔 사람들. “뮤비라 경이셨습니까? 아, 이제 ‘공’이라 불러야겠군요.” 파크다는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 그에게 뮤비라는 냉담하게 답했 다.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전 당신을 무어라 칭하면 됩니까?” 방금까지 답했던 목소리와 달랐다. 차갑지도 딱딱하지도 않고 부드럽고 평이했 다. 파크다는 요크노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뮤비라를 보았다.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소동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파크다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저는 ‘공’이나 ‘경’이 없는 세상을 만들 겁니 다.” “파크다 씨라 부르겠습니다.” 진지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지독히 평범한 어조로 답한 뮤비라는 곧 무관심하게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가득했다. 그 모습에는 다른 귀족 들처럼 분노도 없고, 경멸도 없었다. 좀 전의 목소리처럼 조소도 없었다. 그저 궁 금한 건 다 들었으니 더 물을게 없다는 모습이다. 파크다는 술렁이기 시작하는 귀족들을 한번 둘러보고 결박의 팔찌로 묶여 있는 황 제와 황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결박의 팔찌는 특정한 암호가 불려지지 않는 이 상, 자신에게 속박된 자의 움직임을 묶어 간신히 한 보폭의 걸음만을 떼어 놓을 수 있다. 일정한 수준의 검사나 마법사 정도 되어야 이것을 부술 수 있지만 그 정 도의 능력을 지닌 귀족은 거의 없었다. 황제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사방으로 던지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잔뜩 겁에 질 려 덜덜 떨기만 했는데,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자들 속에 들어오니 조금은 안정된 모양이다. 파크다가 다가오자 긴장하여 몸을 움츠린다. 그 바로 앞까지 걸어온 파크다는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따귀를 갈겼다. 처음으 로 맛보는 모멸감과 수치심에 황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황제의 사 정을 봐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파크다는 노성을 질렀다. “한심한 자!” 이런 자를 떠받들기 위해 자라고, 일하고, 그러다 가치 없이 죽어가는 이들이 얼 마나 많은가. 고작 이 자의 비대한 살을 유지하기 위해, 이 가치 없는 연회를 치 장하기 위해 땀 흘려 일하고 굶주리며 세금을 냈다. 파크다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몸을 홱 돌려 귀족들을 향해 냉랭 히 말했다. “고결한 황족의 피를 이어 받아, 황공하옵게도 황위 계승권자에 속하신 분들은 모두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나올 리 만무했다. 파크다가 매섭게 미소 지으며 눈짓하자 병사들이 무리 속에 파 고들어 이미 파악해둔 열 세 명의 황위 계승권자들 중, 열명을 끌고 나왔다. 이 미 죽은 황태자와 일찍 돌아가 버린 사뮤에르, 야수를 처리하기 위해 자처해 나 간 테밀시아를 제외한 열명이었다. 병사들은 품에서 결박의 팔찌를 꺼내어 반항하 는 귀족들에게 약간의 체벌을 가하여 억지로 끼었다. 귀족들이 없는 위엄 챙기며 노성을 지를 때, 파크다는 뮤비라에게 다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는 세간에 유능한 문관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염 두는 아예 하질 않았다. 하지만 이제 알아 버렸다. 그는 마스터다. “유감스런 일이지만 뮤비라 경께서는 이 자리에서 처리되셔야겠습니다. 당신의 실력은 직접 확인했으니까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파크다는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그런 뮤비라를 살펴보았다. 빈손이라 해도 뮤비라 는 마스터다. 그는 황제의 목에 검을 겨누고 경고했다. “움직이면 친애하는 황제폐하께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겁니다.” “옥체에 불미한 일이 생겨선 안 되겠지요.” 뮤비라는 다시 눈을 감았다. 무방비한 그에게서 짙게 느껴지는 위압감에 마른침 을 연신 삼키던 병사들은 이내 검을 쳐들었다. 그러나 뮤비라의 옆에는 우애 깊기 로 소문난 그의 동생이 있었다. “멈춰라!” 요크노민은 뮤비라의 것과는 느낌이 다른 남색 눈동자로 파크다를 노려보며 소리 쳤다. 가뜩이나 긴장으로 굳어 있던 병사들은 주춤 물러났다. 요크노민은 자신의 옆에 있던 귀족의 장식용 검을 뽑아들었다. 날이 무디어 찰과상을 입히기는 힘들 지만 마스터의 손에 들어가면 예리한 검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흉기였다. 그것 을 알기에 파크다를 선두로 병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요크노민은 그 검을 형에게 넘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목에 갖다대 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검의 날은 무디지만 끝은 예리했다. “형님께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나 또한 자해하겠다. 내가 자해를 하려 하면 형님 께서는 필시 반항하시겠지. 너희들을 섬멸하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상당히 곤란하 게 만들 수는 있어.” 파크다는 겉으론 차분한 얼굴로 검을 겨누고 있지만 내심 진땀을 흘렸다. 일이 그 리 된다면 상당히 정도가 아니라 매우 곤란해진다. 아무래도 제피모인 뮤비라에게 는 황제에 대한 충성보다는 동생에 대한 사랑이 더 할 테니까. 요크노민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형님은 황위 계승자도 아니야. 그런 형님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마스터여서겠 지? 내가 인질이 되겠다. 그럼 형님은 마스터로서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대신 형님께 위해를 가하지 마라.” 파크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떡였다. 크게 동요하고 있는 뮤비라의 얼굴을 보아 확실히 요크노민에게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요크노민은 특별 히 도드라지는 면은 없으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닌 청년이었다. 학 식도 그리 깊은 편이 못되고 검술도 알려진바 없었다. 이므르를 간 것도 아니고, 형을 따라 자하라 가로 들어가 뭐하나 나서는 일 없이 주어진 권리만을 누리며 살 아온 남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뮤비라의 동생’외에는 사적인 것은 하나도 알려 진 게 없었다. 때문에 파크다는 그가 ‘방해 요소’가 되지 못하리라 판단했다. “이리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서로 간에 신뢰를 위해 다소의 무례는 용서해 주십 시오.” 요크노민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뒤에 있는 병사에게 짧게 명했다. “결박하세요.” 순순히 결박의 팔찌를 끼는 요크노민을 뮤비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켜보았다. 그 의 손이 보일 듯 말 듯 움찔하며 갈등하는 것을 눈썰미 좋은 파크다는 놓치지 않 았다. 얼른 눈짓하여 요크노민을 황위 계승권자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데리고 오 게 했다. 그를 거칠게 다루어 뮤비라를 도발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었 다. 황제를 위해 죽기보다는 동생을 위해 사는 것이 뮤비라의 선택임이 역력히 드 러났다. 이에 파크다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분들을 특실로 안내하세요. 마법으로 결계를 치고 호위를 게을리 하지 않도 록 하세요.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걸 잊지 마시고요.” 파크다의 명에 따라 황제와 황후, 황위 계승권자들, 그리고 요크노민은 병사들에 게 이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뮤비라가 잔뜩 굳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본 파크다는 다시 한번 안도할 수 있었다. 인질은 이제 충분하다.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황제가 우리 손에 떨어졌음을 알리고, 병력을 수도 밖으 로 물리길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의 전서를 전달하는 사람은 화풀이와 과시를 겸해서 목숨을 잃는다. 때 문에 파크다는 지원을 받았다. 차마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서 죽으라고 떠밀 수는 없었다. 다행히 목숨을 내걸고 혁명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용감했다. 선뜻 나서 는 남자에게 그 용기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편지를 건네주었다. 얼핏 보고는 기억 에 남지 않는 평범한 남자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영웅 못지않았다.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파크다의 진심어린 말에 지원자는 벅찬 얼굴로 답했다. “산입니다.” 동지들의 눈물 어린 배웅을 받으며 연회장 문을 나서고, 곳곳에서 정중한 경례를 받으며 황성을 나선 열혈 애국자, 산은 막중한 사명감에 몸을 떨었다. 조심스럽 게 가슴을 쓰다듬어, 그 안에 고이 품고 있는 편지의 존재를 확인한 그는 다시 걸 음을 옮겼다. 경비대를 향해 걷던 그가 도중에 좁은 골목길로 빠지는 것을 본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긴 골목길을 걸어가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그것을 경쾌하게 튕겼다 받 은 그의 얼굴은 좀 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준수하고 지적으로 변한 얼굴에 홀가분 한 표정을 한가득 담아 잠시 웃던 그는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마스터가 내린 임무는 수행했고, 이제 사랑스런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차례다. 그곳에서 얌전히 기다리면 된다. 반역도에게 ‘살해당한’ 황제의 복수 를 달성한 금안의 ‘지배자’의 소식을. 자하라 가를 향하는 카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불쌍할 정도로 테밀시아&뮤비라&요크노민의 손에 놀아나는 혁명군...ㅡㅡ; 예상했던 대로 짧은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수도에 도착한 무하들은 성문에서 통행증을 확인 받기 위해 즐비하게 줄을 선 사람들 뒤에 가 섰다. 이제 전시가 아니기 때문에 통행은 꽤 간단해 졌지만 워낙 수가 많아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무하는 성벽에 기대앉았다. 이정도 강행군은 그리 힘든 것도 아니지만 피곤한 건 피곤한 거였다. 여전히 나오지 않는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이제 하루 정도 푹 쉬면 괜찮아 질 것이 라 마음 편히 먹었다. 유시리안도 무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도의 통행을 관리하는 자들은 몇 조로 나뉘어 교대로 낮과 밤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갈 것을 걱정할 필요 는 없었다. “목은 아직도 그래?” 무하는 입을 벙긋했으나 역시 목 밖으로 소리가 되어 튀어나오지는 못하자 고개를 끄떡이 는 걸로 해결했다. 유시리안은 의아한 듯 물었다. “목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 다시 끄떡임으로 답을 대신하자 고개를 갸웃하다가 무하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 벽에 몸을 기댔다. “푹 쉬면 괜찮아 지겠지.” 걱정할 것은 없다. 자신의 눈을 속이고 마법을 걸 수 있는 존재 따윈 없다. 아니, 그런 존 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부정한 기운이 없으니 저주는 아니다. 오랜만에 지기의 이야기를 하며 과거에 빠져 있었더니, 그때의 괴로움까지 되새겨져 그러는 건지도 모른다. 무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그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 다. 그것은 그가 유시리안을 의지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전처럼 혼자 아파하며 끙 끙대지 않을 것이다. 함께 한다면 그것으로 됐다. ‘언젠가 내 이야기도 해야지. 펠은 분명 기쁘게, 그리고 진지하게 들어 줄 거야.’ 무하는 성벽을 올려보고 있었다. 높고 두꺼운 이 성벽 안, 어딘가에 형님이 계신다. 용병 으로 돈을 벌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수도에 들릴 일은 많았다. 곤크에서 그에게 오는 일거 리는 고위 귀족의 의뢰였고, 그들 중 대부분은 수도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세만 가의 저택을 찾는 일은 쉬웠다. 그러나 강한 형님의 감각을 속이고 저택 안, 형 님의 근처에 접근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대신 근처의 식당에서 시간을 축내며, 간혹 지 나치는 형님을 보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형님이 너무 그리웠다. 고작 몇 달 함께 한 시간 이 너무 그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이곳에서 무하는 너무 힘들고 외로웠다. 그것은 사부 도 설희도 없는 저쪽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에서의 무하는 너무 고독했다. 타인의 껍데기 를 뒤집어 쓴 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지쳐갔다. 그래서 차마 만날 수 는 없지만 진정으로 ‘가족’이라 생각하는 테밀시아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그렇게 그리움과 죄책감 속에 갈등하며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나날들이었다. 시간이 흐르 면 흐를수록 서로에게 독으로 작용할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보지 못하고 속수무 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생각해 둔 것은 없었다.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뭔가 각오가 되었 다는 것은 확실했다. 유시리안은 분명 ‘비겁한 것은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 말 하나 로 복잡하게 엉켜있던 머릿속이 홀가분하게 정리된 듯한 기분이다. 은릴의 의뢰는 ‘수도까지의 호위’다. 피곤해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여관에서 푹 쉬고 회복된 뒤 형님을 만나자. 만나면……. ‘그래, ‘형님’이라고 말하자.’ 적어도 그 ‘페르노크’보다는 동생 자격이 충분하다. 가족에게 가족 ‘자격’을 따지자 면, 그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일 거다. ‘페르노크’는 테밀시아를 ‘형님’이라 부를 자격 이 없다. ‘페르노크’에게는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따윈 없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있을 뿐이 다. 그에게는 타인의 상처 따윈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의 상처만이 보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자신이 혼자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아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내 눈엔 괴로워하는 테밀시아 형님이 보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자. 그 것이 비겁한 일일지라도 유시리안은 나쁘지 않다고 말해줄 거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무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쿡쿡 웃어 버렸다. 어린애 같지 않는가. 어느새 이렇게까지 유시리안을 의지하게 된 건가, 하는 생각에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 갑자기 소리 없이 웃어대는 무하의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유시리안은 무언가를 느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성벽 위를 올려보며 수려한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는 피리 소리. 분명 야수를 다루는 암살자들의 특수한 피리가 만들어내는 소리 였다. 하지만 이 소리를 도시에서 들어본 적은 없다. 산이나 숲처럼 사람이 드문 곳에서 나 들어봤다. ‘어째서 수도에서 이 소리가?’ 무하가 따라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얼른 표정을 풀었다. 뭐, 수도에서 소리가 나든지 황성에 서 나든지 알게 뭔가. 누가 죽어나든지 그 대상에 자신이나 무하가 끼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유시리안이었다. 락샤사나 이카미렌은 그런데 통 신경을 쓰지 않으니 그도 신경 쓰지 않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냐고 시선으로 물어오는 무하에게 뭔가 거슬리는 소리가 나서 그랬다고 말한 유 시리안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이어 말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무하가 따라 앉자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해, 그렇게 좀 쉬고 싶었다. 만약 무하의 귀에, 아니 일행의 귀에 이 거슬리는 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다면 유시리안의 그런 소박한 바람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으아악!” “야, 야수가!” 이미 이런 소동을 짐작했던 유시리안은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비명소리가 들려왔을 때 무하가 움찔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어도 저 망할 비명소리가 멀어지거 나 사라지지 않는 이상, 지금처럼 편한 기분 속에서의 휴식은 글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 사람들은 비명소리가 났을 때 일제히 성벽 밖 쪽을 살폈다. 몬스터 사태로 인한 반응 이었다. 그리고 성 밖에 있던 사람들은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려고 난동을 부렸다. 일부 병 사들은 성문을 닫으려고 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그들을 비웃듯 비명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황소만한 야수가 성문 안 거리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무언가를 으그적 씹고는 입가에 튄 피를 혀로 핥은 녀석은 놀라 흩어지는 인간들을 향해 본능적으로 달려들었다. 주인이 눈에 띄는 모든 것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마침 배도 고프 던 참이다. 육질이 연한 인간은 먹기 쉽고 맛도 좋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와중에 성문 바로 옆에 있던 모험가 일행들이 다급히 검을 휘 둘렀다. 야수는 살기를 품은 흉기를 쉽게 피하며 그 날카롭고 강한 이를 드러냈다. 명령 에 의해 절제된 광기를 보이고 있는 야수는 까다로운 상대였지만 고작 하나라면 문제될게 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이 상대해야 할 야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야, 야수 떼가 어째서 수도에!?” 골목 곳곳에서 으르렁거리며 나타나는 야수들을 보며 검을 들었던 모험가들은 뒤로 주춤주 춤 물러났다. 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 덩치며 기세며, 보통 야수와는 달랐다. 수도에는 항시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그 속에는 단순한 학생이나 귀족, 혹은 상인 들도 있지만 모험가나 여행가, 용병들도 있다. 게다가 이 장소는 사람들이 수도로 들어오 기 위해 대기해 있는 성문이다. 무장 상태의 전사는 널리고 널렸다. 처음 나섰던 모험가들 로도 충분할 것 같아 나서지 않았던 그들은 곳곳에서 또 다른 야수들이 나타나자 각기 무 기를 뽑아들고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한가하게 통행증을 확인할 틈이 없었다. 이틈을 타 범죄자들이나 난민이 들어올지도 모르지만 그런 걸 따지는 것도 일단 살고 나서다. 전투원들이 성문 안으로 달려가고 비전투원들이 성문 멀리 도망치는 소란 속에서 무하와 라미 네들은 갈등했다. 당장 달려가 도와주는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무하와 유시리안은 은릴의 호위를 의뢰받았다. 야수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마당에 은릴의 곁을 떠날 수 는 없었다. 바사론은 무기를 뽑고 무하를 보며 말했다. “우린 들어가겠소. 여기서 은릴 씨를 지키시오.” 무하는 어느 틈에 단검을 뽑고 경계태세인 은릴을 한번 보고 무심히 성벽에 기대있는 유시 리안을 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유시리안은 피식 웃으며 검지를 들어 보이더니 모두가 잊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우리가 받은 의뢰는 ‘수도까지의 호위’. 저 여자가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의뢰는 종료 야.” 그 말에 은릴은 움찔하며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면 ‘일’이 끝날 때까지 호위를 의뢰하고 싶지만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그들을 한번 속였다. 게다 가……. 그녀는 무하를 한번 보고 어두운 얼굴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전 안으로 들어가겠어요.” 그리고는 라미 네보다도 먼저 뛰어가 버렸다. 이것으로 ‘의뢰종료’였다. 사갈의 지휘 하에 기사와 병사들이 팀을 이루어 수도 곳곳으로 지원을 나갔다. 안을 훑는 것은 수도 지리에 밝은 사갈과 키텐 기사들이, 외벽을 훑는 것은 성문의 위치 정도나 알 고 있는 타 기사단들이 각기 병사를 나누어 출병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거리는 사람들이 무작정 피하여 조용한 편이었지만, 성문들은 전투원이 있었기에 치열한 혈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사갈은 그 사정을 재빨리 파악하고, 기사들을 나누어 성문 쪽으로 향했다. “아! 저기!” 사갈 옆에서 말을 몰며 주위를 살피고 있던 로딘이 오른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오른쪽으 로 뚫려있는 대로 저편으로 야수들과 사람들의 격돌이 보였다. 척 봐도 정규 기사나 병사 가 아닌 일반인의 싸움이었다. 사갈은 바로 말머리를 돌려 더욱 속도를 높였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에 띈 녀석의 목을 찔러 치명상을 입히고는 바로 다음 녀석을 향해 검을 놀렸다. 이 망할 야수 녀석은 자기가 몬스터인줄 아는지, 어지간한 상처로는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야수가 나타 나면 기사가 먼저 치명상을 입히고 마무리는 경비대원들이 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곧장 사갈을 따라온 기사들은 각기 눈에 띄는 야수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조금 늦게 도착한 경 비대원들은 기사들이 상처 입힌 야수들에게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겨우 도착한 지원에 먼저 싸우던 모험가들은 한숨 돌리며 몸을 뺐다. 보통 야수보다 덩치 도 크고 힘도 센 야수들 덕분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일행 중 마법사가 있 는지 그들은 지붕 위를 올려보았다. 비행 마법을 사용해 올라갔듯이 다시 내려온 마법사 는 얼른 치유 마법 주문을 외웠다. 그러는 동안에 사갈과 경비대원들은 남은 야수들을 모두 처리했다. 사갈은 겨우 회복한 모 험가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곳의 피해가 그나마 축소될 수 있었다. 간단하게 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게 예의다. 모험가들은 야수와의 격전 통에 죽어버린 자신들의 말에서 각기 짐을 빼내던 참이었다. 괄 괄하게 보이는 남자가 투덜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길에서 빌어먹을 암살자, 수도에서는 미친 야수. 화려하구만.” “불가항력이잖아.” 답변해주는 여자의 얼굴빛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피곤해 죽겠는데 정신 사납게 종알댄 다는 짜증이 가득 서린 여자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남자는 계속 궁시렁댔다. “퍽도 불가항력이다. 사서 고생이지.” “시끄러. 몸 사리고 싶으면 집에 박혀 있으면 되잖아. 좋아서 나다니는 거고, 원해서 이 런 일 겪는 거니까 불평하려면 자기 역마살에 하라고.” 결국 성질을 드러낸 여자에게 한풀 꺾인 남자는 시선을 저편으로 돌리며 딴 소리를 했다. “쳇! 하아, 맥주 고프다.” 적당히 넘어가자는 의도였다. 여자는 한번 그를 흘겨보고는 마법사로 보이는 남자에게 관 심을 돌렸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더 할 수 있겠어? 그냥 어디 여관 가서 쉴까?” “괜찮아요.” 좀 전의 남자를 대할 때와는 천지차이인 부드러운 목소리, 걱정스런 표정, 다정한 배려. 여자란……. 사갈이 말을 걸 틈을 못 찾고 있을 때, 모험가 일행 중 유일하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무 기 점검을 하고 있던 남자가 그를 도와주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이쪽이 감사하오. 덕분에 피해가 번지지 않았소.” 사갈은 귀족 출신의 기사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덕망이라는 것이 있는 남자였다. 단장이라 는 직책을 맡기 위해서는 자연히 실력과 덕망이 요구되지만 사갈은 그중에서도 소탈한 성 격으로 유명했다. 지금 그의 태도를 봐도 알 수 있었다. 타 기사단은 여태 야수를 저지하 고 있었던 모험가나 용병들을 마치 자신의 수하처럼 다루는데, 그는 갖춰야 할 예의로서 대하고 있다. “회복했으면 이동하자. 저쪽이 걱정이다.” 사갈의 인사에 간단히 고개를 숙여 보인 남자는 각기 투덜대고, 걱정하고, 안심시키고 있 는 세 일행에게 말했다. 척 봐도 그가 리더였다. 다음 행로를 고민하고 있던 사갈은 그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저쪽이라면?” 하지만 사갈의 말은 다른 세 모험가의 수다에 묻혔다. 그들은 “걱정될게 뭐있냐?” “그럼! 괴물이 둘이나 있잖아.” “분명 괜찮을 거라고 생각 되요.” 리더로 보이는 남자는 별 반응 없이 발을 놀리며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은릴 씨는?” 그 말에 여유를 부리던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짧게 한번 보더니 곧 뛰다시피 걷기 시작 했다. 사갈은 무참히 묻힌 자신의 질문의 답을 그들의 말에서 알아서 유추해냈다. 그리고 그들 이 향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이벤트..... 몇분이나 참여해주실지는 모르겠으나.... 할까합니다. "패러디 이벤트~!" (두둥~) 기간은 넉넉하게 드릴게요^ㅡ^ 아해의 장 카페(http://cafe.daum.net/fantasy00)의 패러디 란에 장편이든 단편이든 하나든 백개든 올려주세요. 기간이 끝나면(아직 미정입니다만...) 투표해서(기존에 있는 패러디도 투표 가능합니다) 상품(!)을 드리겠습니다^ㅡ^ 물론 가난한 작가의 입장에서는 아해의 장 책 밖에 드릴게 없지만요... 기존에 있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올려주셔서 상관없다는 뜻으로서... 정식 기간은 300회를 올리며 알려드리겠습니다; 대로의 교차지역에 이르자 우측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성문이 있는 쪽이다. 막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갈의 눈에 두 마리의 야수에게 공격을 당하기 직전인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말이 발치에서 야수의 발톱에 찢겨 뒹굴고 있었다. 급히 그 쪽으로 말을 몰았지만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던 사갈은 믿겨지지 않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공격을 당하기 직 전이었던 남자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한 야수의 몸 위에 착지하고는 바로 그 목 줄기 를 깊게 찔러 넣는 광경이었다. 그 민첩함이라니!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남자는 절명하 여 고개를 꺾는 야수의 몸 위에서 다른 야수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곤 작게 숨을 내쉬 고는 발을 떼었다. 정지한 듯 보였던 야수의 목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 와 힘, 그리고 기술이었다. 그제야 시야를 넓힌 사갈은 또다시 믿겨지지 않는 광경을 목견했다. 한번에 셀 수 없는 많 은 수의 야수가 성문을 기점으로 곳곳에 쌓여있었다. 살아 있는 녀석은 방금 그 두 마리 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저 남자가 숨통을 끊어 놓았으니 이제 살아 있는 야수는 없 는 셈이다. 저 많은 수가! 사갈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본 남자는 검은 두건으로 눈가까지 가리고 있었다. 두건 밑으 로 드러나 있는 얼굴 라인이 매끄러워 깔끔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그는 검을 검 집에 밀어 넣으며 죽은 야수의 넙적 다리에 걸터앉아 있는 또 다른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안락 의자에 앉아 있는 것 마냥 편히 몸을 펴고 있는 남자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미인이었다. 마치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위해 태어난 듯한 남자. 유약하다거나 여성스럽다는 게 아 닌, 말 그대로 ‘아름답다’였다. 최고 순도의 백금을 가늘게 뽑아낸 듯한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부셨고 순백 피부는 ‘얼굴’이라는 예술을 빚어내기 위한 바탕처럼 느껴졌다. 매혹적인 붉은 입술위로 반듯 한 콧날이 자리하고, 그 양 쪽에 검고 긴 속눈썹 사이로 진한 보라색 눈동자가 시선을 잡 아끌었다. 보라색 눈동자? 순간 사갈은 바싹 긴장했지만, 곧 한숨과 함께 풀었다. 현재 황족 중에는 황제를 제외하고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없다. 즉 다음 보좌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선천적인 보라색 눈동자 외에도 후천적으로 변하는 황족도 가끔 있기 때문에 필사 적으로 황족 계보를 뒤지고 있지만 별 소득이 없다고 들었다. 저 남자는 단순히 보라색 눈 동자를 타고난 제피모에 불과하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가끔씩 황족 외에도 보라색 눈동자 를 타고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 남자의 옆에 질리도록 무표정한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색과 푸른색이 각기 뒤섞여 있는 특이한 머리카락을 가진, 분위기로 남자라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성별이 모 호한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그는 주위에 지독히 배여 있는 핏줄기와는 상관없이 매우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백금발의 미인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그는 한층 그 정도가 더했다. 검 날이 철컥하고 금속성을 내며 검 집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을 때, 그것을 들고 있던 남자는 다른 두 남자의 곁에 도착했다. 백금발의 남자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아. 공짜로 일하는 건 취미에 없는데.” 두건을 두른 남자는 그 말에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곤 새로이 나 타난 사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두 남자도 그 남자의 시선을 따라 사갈 쪽을 보았 다. 사갈 뒤로 달려온 기사와 경비대원들은 경악어린 얼굴로 곳곳에 쌓여있는 이루고 있 는 야수들의 시체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대들의 작품이오?” 직접 두 눈으로 그 실력의 단편을 보았음에도 믿겨지지 않아 물었다. 백금발의 남자는 조 소를 지으며 의자가 되어주고 있는 시체의 배를 가볍게 내리쳤다. “어쩌다 보니까.” 그리곤 느긋한 포즈로 일어나, 사갈이 처음 보았던 남자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다른 손 에 쥐여 있는 검을 한번 들어보더니 무성의하게 저편으로 던졌다. 그 모습에 사갈을 위시한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검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기사는 물 론이거니와 검사의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사라는 것을 뻔히 알 텐데도 저토록 오만방 자한 모습이라니. 만약 눈앞에 쌓여있는 저들의 실력의 증거가 아니었다면 고압적인 말이 튀어 나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생하게 피를 품고 굳어가고 있는 야수들의 시체를 보면 서 감히 나설 수는 없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 역시 끝났네.” “괴물이라니까, 괴물.” “은릴 씨는?” 좀 전의 모험가들이었다. 달려왔는지 호흡이 거칠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계속 떠들어 댔다. “무하 씨, 은릴 씨는요?” 여자의 질문에, 두건을 두른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던 백 금발의 남자는 불쾌한 낯으로 모험가들을 보고 있었다. 착각이겠지만, 왜 돌아왔냐고 힐난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모험가들은 일순 움찔하며 각기 고개를 돌리며 그 시선을 피했다. “그 여자는 싸우다가 저쪽 골목길로 빠졌다.”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무감각한 목소리로 검푸른 옷의 남자가 말했다. 그제야 그를 발견 했는지 모험〉湧?다들 놀라 물었다. 리더로 보이는 무뚝뚝한 남자는 제외였다. “이곳엔 어떻게?” “언제 오셨어요, 락샤사 씨?” “사이러에서 헤어진 거 아니었어요?” 그들과 거의 동시에 백금발의 남자도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제 갔는데?” “내가 ‘오고’ 조금 지났을 때였다.” “꽤 됐군.” 야수의 수가 지겹도록 많아서 락샤사를 불러낸 유시리안은 죽은 모험가의 검을 빼들고 싸 웠다. 그 볼품없는 검으로 싸우느라 짜증난 상태였던 그는 붉은 천을 한번 추스르고 말했 다. “가자.” 완벽하게 무시당한 모험가들은 무안함에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유시리안의 말에 황급히 반박했다. “하지만 은릴 씨는 어쩌고요?” 답은 저편에 있는 세 남자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은릴 씨가 수도의 땅을 밟은 이상 의뢰는 종료야. 게다가 자신의 발로 이곳을 이탈한 사 람까지 챙겨줄 의리는 없지. 특히 저 둘에게는.” 바사론이었다. 확실히 누군가에게 납치 된 것도 아니고 자기 발로 야수를 피해 이곳에서 도망쳤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어차피 수도까지의 동행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용병인 무하와 유시리안은 이미 의뢰를 완수했다. 옛 의뢰자 때문에 휴식을 미루고 그를 찾아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 다. 자신들을 속인 의뢰자라면 더욱이나. “그럼……이만 쉬러가죠. 수도까지 오느라 어제를 꼬박 달렸잖아요.” 라미가 조심스럽게 유시리안을 보며 말했다. “안 말려.” 유시리안은 싸늘하게 답했다. 수도까지만의 동행인건 은릴이나 저들이나 마찬가지다. 더 이상 함께 움직일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모험가들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무하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제대로 된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 다. “우리도 가자. 이제 기사도 왔고 경비대도 왔고, 계속 있을 필요 없잖아?” 좀 전의 싸늘함은 어디로 가고 투정부리듯 말하는 유시리안이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무하는 아무 답도 못하고 웃기만 했다. 확실히 기사단과 경비대가 온 마당에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어보였다. 또 투덜대는 유시리안에게 계속 싸우기를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하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떡이자 유시리안은 웃으며 좋아했다. 그는 무하의 목소 리가 듣고 싶었다. 무하가 불러주는 이계의 노래도 듣고 싶었다. 이런데서 기력 소모하면 목소리가 더디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유시리안은 바로 그게 싫었다. 그만 여관으로 가기로 행로가 잡혀지자, 락샤사는 늘 그랬듯이 본론만 짧게 했다. “어떻게 할까?” 검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묻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뭘? 이라고 되물었겠지만 유시 리안은 간단하게 답해주었다. “그냥 가자.” 모험가들도 가고 용병들도 갈 태세이자 사갈이 급히 끼어들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저들은 분명 강하다. 단 셋이서 저 많은 야수를 죽여 없앴을 만큼 강하다. 게다가 그 중 한명의 실력은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인데 이런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무하는 말에서 자신의 배낭을 꺼내느라 그 말에 반응하지 못했지만 유시리안과 락샤사는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방금 무하를 향해 짓던 다정함은 어디 갔는지 싸늘한 조소가 어려 있는 얼굴로 유시리안이 물었다. “뭐야?” 이번에는 몇몇 기사들이 건방진, 을 읊으며 발끈했다. 존경하는 마스터에게 새파랗게 어 린 것이 버릇없이 구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모욕당한 것보다도 화가 나는 일이었다. 사갈은 그런 기사들을 저지하며 별 동요 없는 얼굴로 용건을 말했다. 하지만 역시 태연할 수만은 없었는지 말투가 반어로 내려갔다. “용병이라 했지?” “그런데?” “의뢰가 있다.” “거절이야.”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던가. 유시리안은 짧고 평범한 말로도 듣는 상대방으 로 하여금 불쾌감과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두리뭉실한 사갈마저도 눈살 을 찌푸렸을 정도였다. 그때 말의 밑에 깔려버린 배낭을 겨우 꺼낸 무하가 유시리안에게 걸어왔다.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물어보는 눈치였지만 유시리안은 그것엔 답 없이 사갈에게서 몸을 돌리며 가자 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사갈과 다른 기사들의 얼굴빛이 안 좋음을 본 무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락샤사까지 발길을 돌리자 신경 끄고 둘을 따랐다. 사갈은 멀어지는 세 남자를 잠깐 보다가 미련을 버리고 말 머리를 돌렸다. 이러는 동안에 도 다른 곳에서 야수들이 날뛰고 있을 것이다. “가자.” 가까운 성문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려다 뭔가 고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로딘을 발견 한 사갈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아, 아닙니다.” 로딘은 황급히 답하고 주위를 돌리려는 듯 했지만, 멀어지는 세 남자를 돌아보고 다시 고 심에 찬 얼굴을 했다. “로딘?” “아. 죄송합니다.” 로딘은 잡념을 떨치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젓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저쪽에 야수가!” 한 경비대원이 급히 말했다. 일단 상처 없는 야수가 보이면 기사에게 알리는 게 상책이 다. 마침 야수의 숨통을 끊어 놓은 로딘은 말머리를 돌려 경비대원이 가리킨 쪽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전투를 치르고 있었던 모험가나, 용병들은 피로와 상처 때문에 뒤로 물러난 상태 였고 일반 백성들은 피신했으니 기사와 경비대원들의 책임이 막중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신전에서 신관을 파견해주어, 피로와 상처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치유를 끝 낸 모험가, 용병들이 하나 둘씩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다. 줄을 기미는 보이지 않고 늘기 만 하는 야수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말이다. 야수의 급소를 배며 로딘은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려하는 자신을 추스르려했다. 하지 만……페르노크였다. 자하라 저택에서 그를 그냥 그렇게 보낸 것을 안 주군은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다시 오겠 다더니 나타나지 않는 그를 말은 안하지만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모른다. 생각 같아서는 당 장이라도 녀석을 주군 앞에 데리고 가고 싶지만……. ‘지금은 지금 일에 집중하자.’ 고작 야수 따위에 상처를 입어 주군께 심려를 끼치면 면목이 서지 않는다. 피를 사방으로 뿜어내면서도 죽지 않는 야수의 목을 내리친다. 2년 전의 자신으로서는 꿈 도 꾸지 못할 실력. 다음 사냥감을 향해 검을 치켜든다. 새삼 페르노크에게 고마움을 느낀 다. 이 실력을 가질 때까지 쌓았던 수련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주군에 대한 충심과 녀 석에 대한 호승심 덕이다. ‘고맙다!’ 하루하루, 스스로의 인생에 자부심을 느낀다! 휴첼은 현 기사단 중 가장 강하다 평가되는 기사단이었다. 특히 그들은 전투 경험이 압도 적으로 많았다. 황제가 억지에 가까운 명령을 내려 파병했기 때문도 있었고 그들의 마스터 가 몬스터 사태 이후로 자진해서 출병했기 때문도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그 어떤 기사단 보다도 몬스터에 익숙했고, 녀석에 비하면 이런 야수는 문제 될게 없었다. 그들은 성문에 모인 야수를 순식간에 처리하고 천천히 이동하면서 다른 곳을 도왔다. 테밀시아는 그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욤에 다섯뿐인 마스터 중 한명이었고 골드 드래곤의 뼈로 만들었다는 구전이 있을 정도의 보검을 다루는 자였 다. 급소를 정확하게 노려 한칼에 한 마리씩 처리해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자, 위험을 무 릎 쓰고 창문을 열어 내다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피에 젖은 황금빛 머리카락과 살기 띈 황금빛 눈동자, 그리고 소름끼치는 곡선을 만들어 내는 황금빛 검. 말 그대로, 금안의 ‘지배자’라 불려야 마땅한 남자! “마스터! 저쪽에!” 수하 기사가 가리킨 곳에는 십여 마리의 야수가 우굴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있 는 건물은……. “신전!” 정확히 말하면, 신전 소속의 고아원이었다. 야수가 좋아할 연한 육질의 아이가 득실대는 곳인 것이다. 테밀시아는 급히 말을 몰았다. 직접 달리는 편이 더 빠르지만, 야수의 급소는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다. 때문에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말을 타고 있는 쪽이 더 편하다. 다행히 아직 먹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나무문을 안에서 가구 로 막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나무 판떼기는 야수가 그 육중한 몸을 부딪쳐 올 때마다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문 저편에서 아이 들의 비명과 울음이 높아졌다. 테밀시아는 뒤에서 따라오는 기사와 경비대원들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야수의 무리 속에 파고들었다. 한번만 더 부딪치면 완전히 박살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뒤의 병력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틈이 없었다. 먼저 한 녀석의 목을 푹 찌르고 바로 뺐다. 붉은 피가 거세게 뿜어져 테밀시아의 몸을 적 셨다. 바로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녀석의 눈을 배었다. 몸부림치며 발광하는 녀석에게서 조 금 떨어져 다른 야수를 공격했다. 눈을 잃은 녀석의 몸부림이 한쪽 측면에서의 공격을 다 소 느슨하게 해주었다. 갑자기 미친 듯 날뛰는 동족을 죽이는데 야수의 신경이 분산된 것 이다. 양 쪽에서 야수 두 마리가 동시에 점프해, 달려들었다. 왼쪽의 녀석을 찌르고 오른 쪽으로 빠르게 그었다. 너무 얕았다. 밑으로 떨어지는 녀석의 목을 위에서 내리찍어 마무 리 지었을 때, 뒤에서 다시 두 마리가 달려드는 것을 느꼈다. “쳇!” 얼른 몸을 돌려 공격하려는 찰나였다. -쾅! -쾅! 왜곡된 마나에 의해서만 드러낼 수 있는 비자연적인 불꽃! 그에게 달려들던 야수 둘이 거 의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불에 그슬린 불쌍 사나운 모습으로 꿈틀대다 결국 움직임 이 멈췄다. 절명한 것이다. 마법! 테밀시아는 옆에서 달려드는 야수의 목을 날리며 주위를 살폈다. 겨우 도착한 지원군이 남 은 야수를 처리할 때, 그는 계속 사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자신과 휴첼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그는 팀을 나눌 때 마법사는 다른 쪽으로 양보했다. 그러니 지금 그를 도와준 마법사는 모험가나 용병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굳이 테밀시아가 찾지 않아도 보수 를 원한다거나 해서 나타날 확률이 높았고, 그런 자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럼 에도 테밀시아는 기사들이 야수를 모조리 처리할 때까지 계속 주위를 둘러보았다. 왠지 모 를 느낌으로. “괜찮겠어, 이대로 가도?” “…….” 분명 자신을 찾고 있을 테밀시아의 모습을 몰래 보면서 무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여관을 가는 도중에 형님을 보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강하신 분……. 테밀시아의 강 함은 지금의 무하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경지였다. 비록 사부님보다 강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집요하게 쫓는 테밀시아의 추적을 피해 무하는 골목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만나고자 한 분이지만 지금은 안 된다. 애타게 그리워한 분이지만 지금은 안 된다. 목에 손을 갖다대고 음을 내뱉어보려 애를 써봤다. 배가 아파올 정도로 힘을 줬지만 신음 성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형님을 만날 수는 없다. 지금 만나면 걱정만 끼칠 뿐 이다. ‘만나면…….’ 잠시 서서 눈을 감아보았다. 여전히 손은 목에 갖다댄 채다. ‘이번에야 말로…….’ * * * “하아, 하아.” 골목길은 끝이 없다. 뛰고 또 뛰어도,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간다. 눈앞에 일렁이고 있는 풍경이 묘하게 비현실적이다. 분명 실재하는 곳에 서 있는 것이지 만 꿈속을 배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늘 가벼웠던 몸이 납덩이처럼 느껴진 다. 현 상황에 대한 부담감이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하다. 그 말없고 끈질긴 시선 에 지치고 몰려간다. 앞에는 사람 하나, 풀포기 하나 없다. 회색 벽과 쓰레기뿐이다. 멸망한 도시를 홀로 떠도 는 것 같은 섬뜩한 두려움이 몰아친다. 그 두려움에 밀려 뒤를 돌아본다. 저 길 끝에서 싸 우고 있는 야수와 사람들의 광경이 보인다. 그렇게 뛰었는데……. 청각을 집중해 보지만 그들이 싸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그들 의 존재를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은릴은 결국 주저앉자 버렸다. 더러운 골목길의 먼지가 옷에 묻었지만 신경 쓸 수 없었다. 방금까지 그녀는 저 뒤에서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들어왔을까? 어째서 이 압박감에서 도망치려 하지 않는 걸까? 뭔가 홀려 있듯 멍했던 은릴은 조금씩 이지를 찾 아갔다. “그래……. 그 분!” 그리고 다시 황급히 골목길의 앞과 뒤를 번갈아 본다. 비현실적인 회색 벽, 생명력이 약동 하는 싸움. 극단적인 그 둘 가운데 서 있는 은릴은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다시 주저앉 아버렸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분을…….’ 어지러운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군요.” “……!”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려온 천진한 목소리. 은릴은 소스라치게 놀라 위를 올려보았다. 그 녀의 머리 위쪽에서, 허공임에도 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하늘 거리는 옷자락과 어우어지고 있는 긴 흑단 머리카락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주고 있 는 가운데 소년은 쿡쿡 웃고 있었다. 그 장난기 섞인 웃음에 충분히 모욕감이 솟을 만도 하건만 은릴은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홍빛 눈동자! 짓누르던 대기가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저편에서 싸우고 있는 소리가 귀에 꽂혀 왔다. 은릴은 몇 번이고 입을 벙긋하다가,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얼른 몸을 웅크려 조아 렸다. “고귀하신 분을 배알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까르륵 웃으며 소년은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섰다. 그러나 그 더러운 바닥에 발을 딛게 할 수 없었는지 대기는 그를 땅에서 종이 한 장 두께로 떠받쳤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머리카 락은 은릴의 것과 같은 색이지만 훨씬 부드러워 보이는 흑색이었다. 하늘색과 하얀색이 섞 여 있는 옷자락과 보기 좋은 조화를 이루는 상아빛 피부는 깨끗했고 그 속에서 웃음 짓고 있는 눈동자는 고귀한 주홍빛이었다. 훼오트라 아나! 은릴은 잔뜩 긴장하여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훼오트라 아나는 다시 쿡 쿡 웃었다. “저 바빠요.” “예?” “몰래 빠져 나온 거라 다들 절 찾고 있을 거 에요.”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은릴은 평소의 침착과 지성을 상실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훼오트라 아나는 자신의 머리 카락을 조금 쥐어 가지고 놀면서 답해주었다. “용건만 간단히! ……라는 거죠.” “아! 시,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제가 황망하여 미처 생각을…….” “그게 용건인가요?” 훼오트라 아나는 천진한 얼굴에 다시 웃음을 담았다. “아, 아니오!” 은릴은 긴장으로 굳어버린 자신의 머리를 풀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몇 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훼오트라 아나를 보았다. “저는 저희 일족의 일로 찾아뵙길 청했습니다.” “일족의 일은 일족 내에서…… 아니었던가요?” 지금 답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은릴은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 고 숨을 토해내듯 낮게 말했다. “지금 일족은 ‘그랜드’를 잃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당연한 순리를 거부하고 새로운 ‘그랜드’를 ‘만들어’ 내는 데만 미쳐있습니다. 일족은…….” “당신은 아니라는 거지요?” 가슴을 꿰뚫는 말. 은릴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꿨다. 훼오트라 아나는 그런 그녀에게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팔을 뻗었다. 매끄러운 턱 선을 쓰다듬듯 잡은 뒤 강하게 위로 들었 다. 은릴의 아름답고 차가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훼오트라 아나의 천진한 얼굴과 마주했 다. “당신은 정상이라는 거지요? 혼자만 틀리기에, 당신은 정상이고 그들은 미친 거지요?” “저, 저는 현실을 똑바로 보게 되었을 뿐입니다.” “당신 혼자만?” “……예.” 은릴은 지려하지 않았다. 훼오트라 아나는 그런 그녀에게서 손을 떼며 한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뿐입니다.” “아니에요! 전……!” 훼오트라 아나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신은 강해요, 은릴. 하지만 폭풍에 꺾기는 것은 갈대가 아니라 대나무입니다.” 은릴은 필사적으로 훼오트라 아나의 뒤를 따르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 져 갔다. 바로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희미해져가는 훼오트라 아나는 마지막으 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정작 그에게는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잖습니까.” 완전히 사라진 훼오트라 아나의 자취를 쫓으려다 그냥 맥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분이 스스 로의 의지로 간 이상 쫓는다고 만날 수 있을 리 없다. “무엇을 물어보라는 겁니까?” 푹 숙인 고개를 따라 긴 흑발이 흘러내렸다. 은릴은 소리 없이 절규했다. “당연하잖아요, 그건…….”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무엇을 물어보라는 것인가. 무엇을……. ================================================================================ 여기까지가~ 6권 분량입니다^^ 라니안의 게시판을 제로보드로 바꿀 생각입니다. 전 리플이 고픈 거랭뱅이인지라... 자꾸 누가 장난질을 해대서 홀리로는 다운을 먹기에 안되지만... 제로는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300회부터는 제로로 바꿀겁니다. 자연히 그 전(299회까지) 회는 전부 삭제됩니다. 출판삭제와 마찬가지죠. 일주일 안에 바꿀겁니다. 따로 모으시는 분은 서두르세요. 수도 안에서의 야수 기습. 무차별 공격을 하던 야수들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쳐 집안에서 덜덜 떨어야 했던 악몽의 밤이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쌀쌀해진 새벽 공기 속에서 테밀시아는 지방은커녕 피한방울 묻지 않은 자신의 검 을 내려보았다. 그런 그의 주위로는 지독한 비린내를 풍기는 야수들의 사체가 늘어져 있었 다. 막 마지막 한 마리라 추정되는 녀석을 벤 참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리 베어도 깨끗한 날이지만, 천으로 한번 닦고 검 집에 밀어 넣었 다. 이제 살아 있는 녀석들을 처리했으니 죽어 있는 녀석들을 처리할 차례다. 지금은 날씨 가 쌀쌀하여 부패가 심하지 않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곳곳에 산재 되어 있는 사체들을 찾는 것도 큰 일일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 테밀시아가 관여할 바는 아 니었지만 말이다. 테밀시아는 낮게 한숨을 쉬며 황성이 있는 쪽을 한번 돌아보았다. 일은 잘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뮤비라는 마스터다. 저들이 자칫하면 자신의 목을 옭아맬지도 모르는 마스터 를 내버려둘 리 없다. ‘다치지 마라.’ 사갈이 다가왔다. “대충 위험한 상황은 끝난 것 같소. 이제 귀찮은 상황만 남았구려.” 테밀시아는 자기 주위에 쌓여 있는 사체들을 한번 쭉 돌아보고는 엷게 웃었다. 야수는 몬 스터와는 달리 먹을 수 있다. 흉폭하기에 잡기 힘들지만 그만큼 꽤나 맛이 좋다. 그렇다 고 방금까지 수도 안 사람들을 먹어치우던 녀석들을 요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배속 에 뭐가 들어있겠는가. 죄다 모아 놓고 성문 밖에서 마법사들이 태워버리는 게 상책일 것 이다. 그것은 매우 피곤하고 귀찮은 일은 분명하지만, 사체를 옮기는 것은 기사인 테밀시아나 휴 첼 단원들의 몫이 아니다. 기사들은 인부를 감독, 관리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 또한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야수를 대비하는 것 일뿐 본래는 문관이 담당하는 일이다. 하지 만 불쌍하게도 사갈은 수도의 경비를 맡고 있는 책임자이기에 몸으로 뛰어 주어야 한다. 그 뒤로는 사망자나 부상자에 대한 포상금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푸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사갈은 한숨과 함께 자신을 찾는 부관을 향해 걸어갔다. 다시 황성을 보지 않기 위해 부단 히 노력하며 테밀시아도 조금 거들어 줄까 하는 마음에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지금 집으 로 가봐야 소용없다. 곧 파문이 일 텐데 소동의 중심지에서 벗어나서야 될 일도 안 된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사갈로서야 대환영일 것이다. 무하의 단골집, ‘음유시인의 모임’을 찾은 두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한 무리의 일행을 보고 잠시 굳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라?” 맥주잔을 번쩍 들고 추가 주문을 하려던 케릭이 굳어 있는 두 사람을 제일 먼저 발견했 다. 이어 그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으로 다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뻣뻣하게 굳어 버려야 했다.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고 있는 유시리안의 사나운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했으 니 당연한 일이었다. 인연이라는 오묘한 섭리에 대해 잠시 곱씹어 보던 무하는 피식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 다. 어쨌거나 안면을 트고, 짧은 시간이나마 동행한 사람들 아닌가. 뜻밖의 빠른 재회긴 하지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관계로 목례를 짧게 하는 것으로 끝내는 무하에 이어 유시리안이 생 긋 웃으며 안부를 물어왔다. “이거 정말 오랜만이네?” 독 맺힌 가시가 쿡쿡 찔려온다. 지은 죄도 없건만 공연히 시선을 돌리고 만다. 지금 유시 리안과 눈을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 “그럼 그쪽도 푹 쉬라고.” 하며 무하의 어깨를 톡 치고 빈 테이블을 향해 걷는 유시리안에게서 더 이상의 방해는 용 납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보였다. 사교성 많은 라미조차도 차마 합석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 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무하는 다시 짧게 목례를 하고 유시리안의 뒤를 따랐다. 그에게 있어서 이들은 무심하게 모른척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것 마냥 합석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 야기를 하며 웃는 사이도 아니었다. 이정도가 적당한 것이다. 둘이 자리를 잡자, 조금 늦게 락샤사가 들어왔다. 잠시 상점에 들른다더니, 손에 고급 술 병이 들려있었다. 검도 먹고 마실 수 있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해보던 무하는 재차 의문 이 치솟아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체로 변할 수 있는 검인 걸까? 검으로 변할 수 있는 인간 일 수도 있고, 날개인간처럼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종족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그래?” 유시리안이 물었지만 지금의 무하는 답할 수가 없었다.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메뉴판을 넘 겼다.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유시리안이 신뢰하는 존재라는 것만이 중요하다. 락샤사는 술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고저 없는 그 특유의 목소리로 말했다. “술값이 올랐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튕겨 거스름돈을 넘겼다. 그는 기본적으로 뭔가를 가지고 다니는 남자 가 아니었다. 필요하면 그때그때 유시리안에게 받는 것으로 족했다. 그에게는 ‘소유욕’ 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전쟁이 막 끝났으니까.” “진짜 주인은 따로 있는데 멋대로 선을 긋고 영역 싸움을 하는 것 말인가? 어리석다.” “무지가 근거 없는 용기를 준거지.” 락샤사는 별 반응 없이 망토를 정리했다. 아무리 화려했던 꽃이라 해도 결국 시들기 마련 이다. 과거의 영광이라는 서글픈 긍지만으로 살아가야 한다. 잊혀졌다. 지워졌다. 그분의 분노를 산 것의 대가. 진실한 주인을 잊은 미물들은 함부로 선을 긋고 소유를 주장한다. 락샤사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문득 입을 열어 말한다.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잔뜩 뒤틀렸어.” 그리곤 관심 없는 얼굴로 술병을 흔들었다. “페르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페르’라는 호칭에 무하는 곤혹스런 미소를 지으며 끄떡였다. 거리낌 없이 그 애칭을 말 하는 락샤사는 유시리안과 마찬가지로 꽤나 마이페이스적인 존재였다. 자신이 소개 받은 이름은 페르노크이고, 허락받은 애칭은 페르라는 그에게 마땅히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있었 다. 유시리안은 보일 듯 안보일 듯 미간을 찌푸리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수도 는 어수선하다. 아니, 어수선 정도가 아니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기류’가 느껴진 다. ‘펠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좋겠는데.’ 나쁜 예감은 잘 맞는다. 낮게 한숨을 쉬며 이것저것 가능성 있는 사건을 생각해봤지만, 무 려 2년간이나 락아타에 있었던 유시리안이 민감한 국내 상황을 유추해낼 수 있을 리 없었 다. 톡톡, 약하게 어깨를 두들기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무하의 차분한 얼굴이 보였 다. 그 다음에 그가 턱짓한 쪽을 보니 종이와 펜을 쥐고 있는 종업원이 있었다. “뭐 먹지?” 꽤 배가 고팠던 무하는 정식을 가리켰고, 유시리안은 삼 인분을 주문했다. 더 필요한 게 없냐는 종업원의 말에 락샤사를 보니, 술병을 슬쩍 들어 보인다. 유시리안은 짧게 덧붙였 다. “술잔 세 개.” 종업원이 가고 유시리안은 락샤사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겠지. 펠의 검 말이야.” 줄곧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기에 무하도 바로 반응을 보였다. 얼른 풀러, 검 집 채 락샤사 에게 넘기고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락샤사는 무심한 눈동자로 대충 살펴보고는 검을 뽑았 다. 빼곡히 새겨져 있는 룬어를 별 어려움 없이 눈으로 읽는 듯 하더니 툭 내뱉었다. “마검이다.” “너와 같은?” “내가 마검이라 불리는 이유는 타인의 의식을 제압하고 몸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검은 진짜 마검. 마족의 검이다.” 본래 마검은 마족이 만든 검을, 신검은 신족이 만든 검을 칭하는 단어였다. 타인의 의식 을 제압하고 몸을 빼앗을 수 있는 검은 마검 중에서밖에 없다. 신족들은 그런 능력을 부여 할 수 있는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의식을 제압, 강탈하는 검은 무조건 마검이라 봐도 무관했다. 이는 제 1기 마도의 쇠퇴이후로 마족이나 천족의 출입이 뜸해지면서 전설 로 변해버린 진실 중 하나다. 대충 읽는 듯 보였던 락샤사는 그 말을 끝으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검신에 새겨진 룬어에 집중했다. 무하는 뭔가 해결책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기를 기대하며 그 모습을 계속 지켜 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종업원이 솜씨 좋게 삼인분의 정식을 날라 왔다. 각기 컵을 놓이 고 나서야 검에서 눈을 뗀 락샤사는 사온 술병의 마개를 뽑아냈다. 진하면서도 은은한 향 내가 순식간에 퍼졌다. 알싸한 알코올 특유의 개성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술을 좋아하지 않 는 무하조차도 그 맛을 기대하게 만드는 매혹적인 향내다. 락샤사는 술을 따져가며 마시지 는 않지만 술 보는 안목은 뛰어난 특이한 남자였다. 주는 술은 불만 없이 마시지만 사오 는 술은 하나같이 진품인 것이 그 증거다. 싸구려 술에 취해 있던 주정뱅이들의 관심이 세 남자가 앉아 있는 이 테이블에 쏠릴 때, 락샤사는 각자의 잔에 가득 술을 부었다. 본래 이 술은 귀족들조차도 밑바닥을 간신히 가 리는 정도의 소량만 따라 향을 즐기며 혀를 축이는 정도로 만족하고, 그것을 교양이라 으 스대는 귀한 술이었다. 그런 것을 락샤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꾹꾹 눌러 따르고, 마지막으 로 자신의 잔을 채운 뒤 무성의하게 몇 모금 마셨다. “이것은 살기에 반응하게 되어 있는 검이다. 지금의 페르에게는 무리야.” “펠은 살기를 내지 않으니까.” “본래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진 존재는 죽이겠다는 판단은 해도 작정을 하지는 못한 다.” 생소한 단어에 의문을 나타냈지만 락샤사는 더 설명하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그가 지금 마시고 있는 술의 값어치를 알고 있는 자라면 펄쩍펄쩍 뛸 것이다. 그리고 그 값어치를 알 고 있는 자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야매주 아냐?” “돈이 꽤나 넘치는 모양이지?” 술을 먹고, 아니 술에 먹혀 이성을 상실한 주정뱅이들이 탐욕에 어린 눈으로 술병을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떨어지는 침 덩어리에 유시리안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목욕 이 취미일 정도로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무하에게 역시 불쾌감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 런 몇몇 술에 먹힌 자들 외에도 많은 수의 사람이 나서지는 못하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들의 잔을 보고 있는 형편이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눈으로라도 먹을 수 있을 것처럼 말이 다. 유시리안이나 무하와 같은 어지간한 자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락샤사 만큼은 잔을 깔끔하게 비우며 첨예한 검 끝에조차 새겨져 있는 룬어의 해독에 집중하고 있 었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빈 잔을 내려놓고 옆의 술병을 기울여 또다시 가득 채운 뒤, 병을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탁, 하고 가벼운 마찰음이 들리며 술병이 테이블 위에 놓 여지는 순간 술에 먹힌 자들은 겁을 상실하여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좋은 건 나눠 먹자고!” 막상 반응을 보인 것은 불쾌해 하고 있던 유시리안이나 무하가 아니었다. 관심 자체를 보 이지 않던 락샤사가 먼저 들고 있던 단검을 들어 가볍게 횡으로 그었다. 검신으로부터 깨 끗한 흑 빛 날이 솟아나며 주정뱅이들의 살갗 바로 앞을 가볍게 지나쳤다. 비명을 토하며 각기 사방으로 튕겨져, 벽에 부딪쳐서야 멈춘 주정뱅이들은 의식을 잃었는지 몸뚱이가 축 쳐졌다. 순식간에 나타났던 흑 빛 날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술에 먹힌 자들의 눈에는 락샤사가 단검을 휘두른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다른 손으로 세 번째 잔을 채우는 락샤사였다. “이걸 바꾸면 된다.” “응?” 네 번째 잔을 채우며 락샤사가 말했다. 고기를 입에 넣던 유시리안이 반색하는 무하를 대 신해서 물었다. “이거.” 락샤사는 건성으로 어디다 할 것 없이 깨알 같은 룬어가 새겨져 있는 검신의 한 부분을 가 리켰다. “이게 살기만 반응하게 해주는 핵심 룬어. 이걸 투기에 반응하게 바꾸면 된다. 대신 그렇 게 되면 위력이 감소하게 될 거다. 검을 죽이는 일이 되는 거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락샤사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유시리안은 검의 주인 인 무하를 보며 결정을 맡겼다. 무하는 고민하고 말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새 검을 사 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역량을 높이 보고 준 하환에게 자신은 무능력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검의 위력을 줄여야 겨우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새 검을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시리안은 야매주를 들이키며 생각에 잠겼다. “살기와 투기. 모두에게 반응하게 바꿀 순 없어? 그럼 검을 죽이는 게 아니라 보완하는 것뿐이잖아.” “가능하다.” 무하가 한순간 느꼈던 실망감이 무색하리만치 답은 쉽게 떨어졌다. 락샤사는 가장 오래된 검, 가장 강한 검, 가장 고귀한 검이다. 그의 손에서는 어떤 신검도 마검도 에고도 얌전하 게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이 정도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밝아지는 무하의 얼굴을 보며 유시리안은 생긋 웃었다. 이로써 무하의 고민 중 하나가 사 라지는 것이다. 자신과 연관되지 않은 고민 중 하나가. “지금?” 락샤사가 물었다. 유시리안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새삼 눈에 띄는 게 걸리 는 건 아니었다. 마검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인간들이 널려있기에 귀찮은 일을 피 하고자 하는 것 뿐. 게다가 이정도 마검이라면 용병이나 기사 나부랭이가 각기 달려드는 정도가 아닌 용병단이나 기사단 단위로 번질 가능성도 농후했다. 락샤사는 일단 검을 검 집에 꽂고 무하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잔을 채웠다. 술병 의 무게감이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그는 잔을 들며 불쑥 말했다. “그런데 저주는 안 풀 건가?” 그 무심한 말투에, 부지런히 요리를 씹어 삼키던 유시리안과 무하는 입안의 것을 삼키고 도 조금 지나서야 반응할 수 있었다. “에?” “……?” ‘침묵의 배려’라는 마법이 있다. 그것은 기밀이 요하는 정보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게 하는 일종의 강제적 제약이다. 그럼에도 배려라 불리는 것은 신체상 하자나 정신적 손상 이 없기 때문이다. 제약을 가하는 대부분의 마법들은 나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침묵 의 배려는 드물게도 무속성의 마법으로, 제 1기 마도 때조차도 그 시전 여부를 구별할 수 없었던 마법 중 하나였다. 또한 현재에 와서는 실전되어 알려지지 않은 마법이기도 했다. 그것은 제약의 마법으로, 저주라 말하기는 과한 점이 있지만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강제적 제약은 저주다……라고 판단한 락샤사는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대뜸 그리 말했 다. 그의 입장에서는 저주에 걸렸으면서도 별다른 저항감 없이 시간을 축낸 무하나 유시리 안이 이해가 안됐던 것이다. 락샤사는 마지막 잔을 따르고, 잔을 무의미하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유리 특유의 마찰음 이 났다. 그것을 신호로 유시리안이 물었다. “저주?” “침묵의 배려.” “…….” 지식으로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던 유시리안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침묵의 배려는 그 강제력이 매우 강하다. 때문에 상대방의 동의 하에 이루어져야 했으며, 일정한 사안에 대해서만 강제력을 적용해야 했다. 상대의 동의 없이 시전을 하면 배려라 는 단어가 붙은 마법답게, 시전자에게 악영향이 간다. 거기다 지금의 무하처럼 목소리 자 체에 제약이 가해진 경우에는 그 영향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제 1기 마도 때조차도 극소수의 종족에게만 개방된 지식이었고, 그것 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침묵의 대가’라는 아이템이 필요하다. 그것은 겨우 다섯 개 뿐인 데, 그것이 없으면 지식으로 알아도 시전이 불가능하다. 유시리안이 그 마법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다섯 개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 는 할 일 없이 이런 짓을 할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왜?” 혼잣말과 같은 질문을 흘리며 유시리안은 락샤사를 보았다. “그들과 접속한 적이 있었나?” “없었다.” 락샤사는 언제나 부연설명이 적었다. 그에게서 원하는 것을 다 들으려면 자연 질문이 는 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했던 유시리안은 그 상황을 모면할 적당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설명 해줘.” 뜻밖에 락샤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찰로 있을 때의 나는 시야가 극히 좁아진다. 바로 옆에 있어서 저주에 걸렸다는 것은 느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다섯은 아니다. 그들의 기운을 못 느낄 정도 는 아니니까.” “침묵의 대가를 타인에게 선물 할 수도 있겠지. 적어도 그들이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덕분에 골치 아파지는군.” 침묵의 배려는 침묵의 대가가 있어야 시전 할 수 있는 마법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침묵의 대가가 필요하다. 같은 존재가 시전한 마법이 아니더라도 침묵의 대가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도와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또 그 것이 그들의 손에 아직도 있는지 여부도 알 수 없고 말이다. “좋아! 일단 이카한테 가보자!”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눈 유시리안은 호쾌하게 결정을 하고 무하를 보았다. 무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런 유시리안을 물끄러미 마주 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카는 지식도 깊고 지혜도 풍부해. 공유하긴 하지만 그것은 본인만큼 될 수 없지. 일 단 가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무하에게 락샤사가 무심히 말했다. “말을 못하게 된 거 말이다. 침묵의 배려라는 마법에 걸린 거다. 침묵의 대가는 침묵의 배려를 시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 그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지워진 존재는 입에 담아선 안돼.” 그것은 무하가 지금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것들에 대한 답이었다. 놀라 휘둥그레 떠진 눈 으로 락샤사를 보자, 유시리안이 옆에서 말했다. “샤는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그것은 유시리안과 이카미렌 외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던 능력이었고, 많은 이들이 이 사실 을 안 순간 락샤사를 기피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내면이 읽혀진다는 것은 끔찍한 공포였 던 것이다. 놀란 얼굴 그대로 유시리안을 돌아본 무하는 이내 웃었다. 그의 속이 무엇이었는지, 락샤 사는 의외라는 듯 희미하게 놀란 낯을 했다.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길이 없던 유시리 안이 락샤사를 보며 답을 재촉했다. 그는 야매주를 마저 마시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무심 히 답했다. “편하게 됐다고 하는군.”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린 유시리안은 결국 배가 아파올 때까지도 멈추지 못했다. 무하가 락샤사 에게 한 ‘말’이 처음 유시리안이 락샤사에게 했던 말과 같았던 탓이다. 역시 자신이 보 는 눈은 정확했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그의 웃음이 잦아들자, 락샤사는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했다. “이카가 누구냐고 묻는군.” 메모도 필요 없고, 펜도 필요 없다. 이렇게 편리한 통역사가 있지 않은가. 조금은 짓궂은 생각을 하며 무하는 다시 웃음을 흘렸다. 겨우 웃음을 멈춘 유시리안은 의자 뒤로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발을 꼬고, 편안한 얼굴로 답했다. “내 아버지야.” 무하는 놀란 눈으로 유시리안을 보았다. 유시리안에게 아버지가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인 데도 전혀 뜻밖의 소리로 들렸다. 그래도 저 얼굴을 보면 유시리안이 얼마나 아버지를 사 랑하는지 알 수 있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저주가 아니더라도 한번은 만나게 해주고 싶었어. 전에 산맥에서 펠을 찾은 것도 다 이 카 덕분이니까.” 씨익 웃으며 슬쩍 검지를 튕겨 무하의 이마에 알밤을 놓는 유시리안이었다. 야수를 마차에 실고 성벽 밖으로 옮기는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불안감에 잠을 들지 못했던 백성들이 그 행렬을 나와 구경했다. 굳은 핏덩어리가 거리를 지저분하게 해놓은 것 을 보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일단 살았으니 된 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야수들을 한자리에 쌓아놓자 마법사들이 거기에 불을 붙였다.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마법의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테밀시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기보다는 전투의 종결 을 지켜보는 의미로서. 급히 말을 몰며 다가온 한 기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키텐 소속의 기사는 경비대의 처소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근위기사가 급 히 사갈을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연회에 정신이 팔려 있는 황성을 수호해야 할 근위 기사가!? 근위기사단은 황족을 수호하는 기사단으로서 휴첼과 맞먹을 만큼의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 하는 엘리트 부대다. 라이벌 관계에 있는 휴첼이나 키텐에게는 어지간하면 손을 벌리지 않 는, 자존심 높은 곳인 것이다. 그런 곳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경비대, 정확히는 키텐에 나 타났다는 것은 실로 심상치 않는 일이었다. 사갈과 테밀시아는 서로의 얼굴을 한번 보다가 급히 말을 몰았다. 혹시나 하고 테밀시아 는 자신의 휘하 기사를 시켜, 숙소로 돌아간 타 귀족들의 기사단을 불러오게 했다. 근위기 사단의 이변은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기에 그의 행동은 넘침이 없었다. 잔뜩 굳어서 말을 모는 상관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다른 기사들도 딱딱한 얼굴이었다. 특 히 상황의 심각성을 가장 넓고 크게 파악할 수 있는 두 단장의 긴장은 그야말로 극에 달 아 있었다. 테밀시아는 황성을 향해 한번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말 모는데 정신을 집중했 다. 창백해진 안색의 신관이 뒤로 물러나며 숨을 헐떡이자 뒤이어 다른 신관이 나섰다. 은은 한 녹색 빛이 신관의 두 손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침대 위에서 정신을 잃지 않기 위 해 필사적인 기사의 몸뚱이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녹색 빛이 감기는 순간 일그러져 있 던 얼굴이 한결 편해졌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마도 마법사의 응급조치와 신관의 신성마법으로 여기까지 호전된 것이지 본래라면 금 방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중상이었다. 비록 기사의 얼굴에는 살았다는 안도는커녕 약한 자신에 대한 비통함이 흘렀지만 말이다. 문이 벌컥 열리며 몇몇 기사들이 들이쳤다. 평소라면 환자가 있는 곳에 마구 들어온다고 화를 낼 신관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말없이 뒤로 물러나 주었다. 야수의 핏덩이로 더럽혀진 기사들 중 한명이 환자 가까이 다가갔다. 키텐단장, 사갈이었 다. “어찌 된 일인가?” 그를 만나기 위해 겨우 버티고 있던 기사는 힘들게 단어를 내뱉었다. “황성이…….” 그리곤 피를 토하며 한참 기침을 하다가 신관이 신성마법을 시전하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습격당했습니다.” “그럼 나이트 뮤린은?” “수가 압도적으로 밀리자, 저에게 키텐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빠져나오는 도중에 매 복하고 있던 자들에게 당해서 겨우 나온 것이라 저도…….” 사갈은 자괴감에 다시 입술을 깨무는 기사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일어났다. “이미 누군가가 지원을 요청하리라 예상에 두었다는 것이겠지. 용케 빠져나왔네.” 뒤를 돌아선 사갈의 눈에 황성의 습격 소식에 웅성대는 기사들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침묵 한 채, 냉정한 눈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전투 때의 그 광폭한 기 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냉철한 이성으로 식어져 있는 황금빛 눈동자. 차림은 사갈이나 타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피에 얼룩진 연회복을 입어 몰골은 흉했으나 강렬한 느낌은 한층 더하고 있다. 금안의 ‘지배자’라 불리는 남자. 슬쩍 내리깔아져 있던 눈동자가 사갈의 시선을 눈치 채고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말했 다. “도착한 서신은 없소?” 같이 도착한 사갈이 알리 없지만, 이곳은 키텐 기사단. 타 기사단에서 타 기사단장이 직접 적으로 휘하 기사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등한 입장에서 사갈에게 간접적으로 묻는 것이 예의였다. 테밀시아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 챈 사갈은 문 밖에서 대기 중인 휘하 기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로딘이 옆의 기사에게 작게 말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사갈은 다시 테밀시아를 돌아보았다. 이미 로딘의 행동으로 답을 들은 테 밀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안 좋군.” 황성이 습격을 당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반역. 수도에 들어올 수 있는 사병 수는 제한되어 있지만, 들어와 있는 사병 및 기사만 해도 상 당수다. 수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외각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력은 그의 수배에 달한 다. 황성을 점거하였다 해도 순식간에 되찾을 수 있는 병력이다. 당연히 황제의 신병을 인 질 삼아 병력을 물리는 서신을 든 사신이 와야 순리거늘 여태 오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잘 못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근위단장 뮤린이 지원을 요청할 정도라면 이미 위기에 몰린 상황일터. 지원이 오지 않는 한 이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쪽은 야수 떼들로 바빴고, 근위기사는 매복을 따 돌리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다. 이미 상황은 끝났을 게 뻔하다. 그런데도 사신이 오 지 않는다. 설마 황제가 죽음을 당한 것인가? “설마…….”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던 사갈이 무심결에 말을 이으려다 얼른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하 는 것은 자유 되,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책임이 따른다. 경거만동하게 입을 놀렸다가 는 훗날 무슨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일이다. 다 같은 짐작을 하고 있으면서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타 귀족의 기사단 장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삼대 기사단의 두 단장인 사갈과 테밀시아만 불안하게 주시했 다. “황성으로……안 가실 겁니까?” 불안하게 침묵하는 기사단장들에게 부상 입은 근위기사가 물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 에 필사적인 호소가 깃들어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동료들은 싸우고 있을지 모른다. “기사들을 정리하여 황성으로 갑시다.” 그의 호소에 흔들린 사갈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테밀시아가 물었다. “이미 점령당했다면 어쩌겠소? 폐하께서 인질이 되어 계신다면? 재차 오는 병력으로 인 해 역적들이 흥분하여 폐하께 위해를 가한다면?” 신중한 그의 질문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된다면 황성을 되찾고 황제를 구한다 해 도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자칫 분위기에 휩쓸려 반역도로 몰릴지도 모른다. 삼대 기사 단의 단장쯤 되면 적이 많은 법이다. 이론을 가한 자의 지위가 지위인지라, 다들 사갈과 그의 눈치만을 살폈다. 공연히 나섰다 가는 삼대 기사단 중 한 명을 적으로 두게 될 수도 있다. 사갈 역시 입장이 난처하여 인상 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서신이 아직까지 오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들도 머리가 있다면 현 수도에 기 거 중인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테니.” 뜻밖의 반박이 저편에서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방 안에 있던 단장들이 일제 히 고개를 돌렸다. 도전적인 눈빛으로 테밀시아를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는 로딘이 있었 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로딘은 자신의 단장인 사갈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 다. “전 황성으로 가겠습니다. 개인행동을 허락해 주십시오.” “자네가 그렇게까지 황제께 충심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 진심과 조소가 뒤섞인 사갈의 말에 로딘은 쓰게 웃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그곳에 제 주군이 계십니다.” 파크다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예상대로 산이라는 동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혁명은 성공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엔 황제의 목을 쳐서라도 민중의 혼을 흔들어야 한다. 황제의 신병이 이 손에 떨어진 이상 귀족 기사들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한다. 만에 하나 과잉 충성을 가진 자가 있더라도 주위에서 말릴게 뻔하다. 혹여 황제의 신병을 손에 쥔 자의 비위를 거슬러 옥체에 흠이라도 간다면 그 책임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풀이 겸 과시 용으로 서신을 가지고 간 사신을 죽인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쪽의 비위를 거스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곧 병력을 수도 밖으로 되돌렸다는 것을 알리는 사신이 올 것이다. 황제의 신병을 확인하고자 하겠지. 착잡하게 주먹을 꾹 쥐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건만 새삼 두려워진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꾹 쥔 손에 땀이 고였다. 파크다는 마른침을 삼키며 발코니로 나갔다. 넓은 정원에는 불을 지피며 경계를 서고 있는 혁명군으로 인해 산만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근위기사 나이트 뮤린이 포위망을 뚫고 황성 안으로 도주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신병을 잡은 이상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지만, 그는 마스터. 방심해도 좋을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도 적막의 압력에 눌려 있다가 타인의 기척을 느끼자 조금은 진정되었다. 한번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쌀쌀한 공기가 폐부를 깊이 찔렀다. 저편에서 황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차분히 몸을 돌려 발코니로부터 나왔다. 소울러가 문가에서 허리를 꺾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문을 집고 있는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본 파크다는 의아한 낯빛으로 다가갔다. 소울러는 담력이 큰 청년이다. 단지 젊음이 주는 무모함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언제나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가 떨다니? “선배.” 힘들게 고개를 들어 불안한 눈으로 파크다를 보았다. 경련을 일으키는 입을 벌려 말했다. “수도에 거주하고 있는 기사들이 공격해왔습니다.” “……!”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사들이 와서는 안됐다. 요구대로 병력을 수도 밖으로 물렸다는 서신이 와야 했다. 황제가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본래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황제의 목숨이 아닌 자신들의 권력이라 할지라도, 표면적으로 황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황제가 인질이 되어 있는 마당에 어찌!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뭔지는 모르지만 어디서부터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곰곰이 따져볼 여유는 없었다. 따지는 것은 나중의 일. 당장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한다. “소울러군! 혁명군을 지휘, 기사들을 저지하십시오. 전 황제를 끌고 성탑으로 가겠습니다.” 이 손에 황제의 신변이 들어와 있음을 무시하는 거라면, 절대 그러지 못하게 해주겠다. 파크다의 눈이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황제와 황후, 황위 계승권자들이 감금되어 있는 방문 앞에는 십여 명의 혁명군이 지키고 서 있었다. 급히 달려오는 파크다를 향해 그들은 정중히 몸을 바로하며 경례했다. “무슨 일이십……?” “문을 여십시오.” 그들의 질문을 자르고 빠르게 명령했다. 허리의 검을 뽑아들고 살기등등하게 문을 노려보는 파크다를 보며 혁명군들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서로를 보던 그들 중 한명이 앞으로 나와 짧게 룬어를 읊었다. 이므르의 소울러 친구인 마법사였다. 철컥 하는 짧은 소리가 문고리에서 들렸다. 약간 틈새를 벌린 문 안이 어두웠다. 파크다는 급한 마음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무언가가 그에게 끊임없이 경고해오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딛자 발밑의 양탄자가 축축한 소음을 낸다. 그리고 끔찍한 비린내……. 스멀스멀 기어왔다. 흑 빛 불안감이 인정하려 들지 않는 파크다의 가슴을 점령하고 흔들었다. 문이 부드럽게 열리다 부자연스럽게 중간에 멈췄다. 뭔가 장애물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세요.”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꾹 쥐고 발을 다시 옮겼다. 방 안은 어두웠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비린내. 그것의 지독함은 섬뜩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다시 발을 내딛었을 때, 문이 탁 닫혔다.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했지만 눈부신 빛이 갑자기 사방을 밝혀 주춤 물러나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의 행동이 가져다주는 대가는 가혹했다. -쾅! 누군가에게 힘껏 발로 차여, 책상에 부딪쳤다. 책상이 충격으로 쓰러지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쿨럭, 기침을 하며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다. 여전히 눈이 아팠지만 엄살을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요란하게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직 눈이 잘 보이지 않는 파크다는 섬뜩한 소음과는 달리 자신에게 고통이 따르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그 의문은 얼마 안 있어 풀렸다. “무슨……!?” 기괴한 붉은 빛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들고 있는 남자. 적염이 일렁이는 짙푸른 눈동자가 차갑다. 그 손에 들린 검은 형체 없는 화염의 검. 이글거리는 화염이 검의 형태를 따라하며 그의 손아귀 속에서 얌전히 혀를 낼름거리고 있다. ……요크노민 마 카르민. 파크다는 불현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잔인하게 살해되어 있는 시체들이 붉은 빛 아래 고통스런 최후를 알려주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 겁에 질린 눈동자, 미처 비명 지르지 못한 입가가 피와 침으로 더러워져 있다. 오줌을 질렀는지 바지춤은 축축하고 피비린내에 악취가 섞여든다. “무, 무슨!” 검을 든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발을 내딛었지만 툭 차여 구르는 것이 있어 멈춰서 버렸다. 베어진 목 위로, 경악으로 부릅떠진 눈과 마주쳤다. 두툼한 볼 살이 더러운 땅바닥에 쳐져 있고 그 절단면에서는 생생한 피가 쏟아진다. 죽임을 당한지 얼마 안 된 시신. 옆에서 무언가가 쓰러진다.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니 여인의 몸뚱이다. 필히 보드랍고 매혹적이었을 몸이 이제는 을싸냥스럽게 바닥을 뒹군다. 파크다는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이 방에 갇힌 사람들 중 유일하게 여성인 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에일라야……황후. “아…….” 다시 땅에 떨어져 있는 머리를 돌아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다. 그 머리는 지고한 욤 제국의 주인의 것. “화, 황제……!” 이가 딱딱 부딪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필히 가해자라 짐작되는 자를 보았다. 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는 청년. 여전히 그 손에서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화염의 검. 차가운 눈동자에 설핏 조소가 스미는가 싶더니 파크다가 쥐고 있던 검에 화염이 휘감아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요크노민의 손에 쥐어져 있던 화염의 검이 사라져갔다. 요크노민의 손에 화염의 검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을 때, 파크다의 검이 완전히 화염에 감싸여 졌을 때, 요크노민은 고함을 지르며 파크다에게 달려들었다. “살인자-!”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기술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파크다의 이해의 영역을 완전히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 동물적인 칼부림은 정확히 요크노민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다. 요크노민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핏덩이가 울컥 울컥 양탄자를 적시고 파크다는 여전히 멍하니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고통스럽게 울음과 비명을 삼키는 소리가 잦아들며 요크노민은 쓰러졌다. 심각한 부상을 입고 쓰러진 그의 모습 하나하나가 자신을 향한 조소로 느껴졌다. 어떻게 된 일이 이해할 수 없었다. 알 수도 없었다. 살육자가 분명한 요크노민이 어째서 자신의 손에 자해를 한 것인지, 그 화염은 무엇인지, 지금 무슨 일이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단지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부릅떠진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는 머리……. 황제가 죽었다. 그 경악 어린 눈동자조차도 자신을 조소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사방에 죽어있는 황위 계승권자들이 크게 웃고 있는 듯 느껴진다. 기사들이 들이치고 있다. 곧 수도 밖에 기거하고 있는 병력들도 몰아칠 것이다. 거리를 봉쇄 될 것이고 도망갈 길은 없다. 황성 안에서, 안으로의 공간 이동은 가능하지만 안에서 밖이나 밖에서 안으로의 공간 이동은 불가능하다. 도망갈 길은 없다. 오로지 죽음. 파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그들을 막기 위해 필요한 황제의 신병이 방금 그의 손에서 떠났다. 황제는 죽었다. 죽은 황제의 몸뚱이는 땅에 묻히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이제 죽은 돼지만도 못한 고깃덩어리다. 파크다는 웃었다. 자신을 비웃고 있는 시체들을 보며 맹렬하게 웃었다. 상관없다. 죽음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다. 이렇게 사느니, 장렬하게 새 시대를 열자라는 마음에서……. 상관없다. 황제는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으니. 이제 보라색 눈동자의 전통은 깨진다. 초대 황제 이므르가 뛰어난 것과 그 후계자가 자애로웠던 것은 그들의 눈동자가 보라색이었다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황실은 보라색 눈동자의 우월성을 믿었다. 또 그것을 무지한 백성에게 주입했고, 교활한 귀족들에게 주장했다. 이제 그 지겨운 전통이 깨진다. 두 명 남은 황위 계승권자.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 가야다 사뮤에르 장 카르민. 내전이 일어날 것이다. 그 내전으로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달파질 수도 있다. 잠시 동안 자신들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알게 되리라. 황제와 귀족들은 자신들의 보호막이 아님을. 저 몬스터 떼들보다도 무자비한 가해자임을. 그리고 스스로 일어나 저 교활하고 탐욕스런 귀족들을 칠 것이다. 그것은 파크다의 승리다. 혁명군의 승리다. 비록 최악의 수단이었지만 그들은 승리하는 것이다. “하하하!” 통쾌하게 웃으며 시체들을 비웃었다. 결국 황제도 귀족도 죽으면 이런 몰골인 것이다. “하하하!” 더욱 크게 웃었다. 소리 없이 열린 문 너머로 죽어 뒹구는 혁명군의 시신을 보지 못한 채. 파크다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황제의 머리를 발견한 충직한 근위단장의 눈에 분노와 증오가 어렸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경이로운 검기가 어린 검이 자신의 목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지 못한 채. “하하하!” 욤 제국의 수도는 이카미렌이라는 높고 험한 산을 포함하고 있다. 골드 드래곤, 이카미렌 의 레어가 있다고 전해지는 산맥의 중심부분이다. 실제로 200년 전 수도의 하늘을 메울 정 도의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은 초대황제 이므르가 나라를 세 울 당시였기에 길조로 여겨졌으며, 항간에 이므르는 골드 드래곤의 유희체일 것이라는 소 문이 돌기도 했었다고 한다. 어찌됐든 그곳은 감히 대규모의 군대나 병력들이 침범하지 못 하는 천연 방어막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또한 얼마나 오래 산 드래곤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질이 괴팍하지 않아 자신의 레어에만 접 근하지 않는다면 어지간한 통행은 상관하지 않았기에 욤 제국의 백성들에게는 은근한 자부 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드래곤은 강력한 생명체이자 제 1기 마도의 생존자, 그 중에서도 골드 드래곤은 ‘현명’이라 칭하는 존재였다. 그런 드래곤이 자국의 영토에 산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인데다가 성질마저 부드러우니 그 정도가 컸던 것이다. 게다가 욤 제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이므르가 이카미렌의 유희체라는 설을 내심 믿고 있었다. 드래곤의 영역에는 몬스터가 많다. 특히 레어를 둘러싼 일정 지역에는 그 수도 많고 질마 저도 높다. 그 일정 지역을 드래곤을 세는 단위인 퀄에서 따, 쿼린이라 칭하는데, 그곳에 는 이름을 부여받은 몬스터들이 대부분이며 마법을 구사하는 녀석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은 어째서인지 쿼린을 절대 넘지 않았다. 대신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하류 녀 석들이 어슬렁거리지만, 그 정도는 어지간한 실력만 있으면 살아서 나갈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카미렌을 횡단하려 들지 않았다. 아주 급한 일만 아니라면 꼭 우 회해서 갔고, 횡단하려는 자들을 경의와 동정이 섞인 눈으로 보았다. 횡단하는 자들은 실 력이 뛰어나 시간 단축 겸 횡단하는 자가 아니면, 돈에 미친 상인에게 고용되어 억지로 들 어가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카미렌을 횡단하려는 자들은 레어와 쿼린을 피하면서 가장 짧고 그나마 안전한 루트를 택하기 때문에, 그 일정 지역에는 적지 않은 여관과 식당, 술집, 그리고 의료소가 있었 다. 이득을 위해 눈이 뒤집힌, 제법 많은 수의 상단과 그 호위 전사들을 주 고객으로 삼 는 그들은 강자를 알아 볼 줄 아는 눈썰미를 제법 갖추었다. 고객을 잘 파악하는 길이 많 은 이득을 남기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하나같이 장담하건데, 분명 저 세 남자는 강자다! “이카는 술을 싫어하지 않았던가?” “이건 좋아해.” “그래? 그럼 한 박스 정도 사가 볼까?” 귀족조차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야매주가 이런 외각에 한 박스나 있을 리 없었다. 입맛 까 다로운 상인들이 가끔 주문하기에 사놓긴 했지만 그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설마 이런 곳 에서 한 박스나 되는 야매주를 구입하려들 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술집 주인장 은 안타까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그거라면 지금 세병밖에 없습니다만 최상급의 술이라면 다른 것도 있습니다.” “야매주로 세병만 줘.” 주인장의 친절한 제의에도 불구하고 유시리안은 냉랭하게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안 해 도 될 말을 한마디 붙였다. “여기가 아니라도 술집은 많으니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주인장은 입을 멍하니 벌리고 서 있다가 재차 재촉당하고 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도시락도 사가자. 집까지 느긋하게 하루는 걸려. 이카는 자기 집에 텔레포트해서 들어오 는 걸 안 좋아하니까 걸어서 가야하거든.” 유시리안이 남의 기분을 신경 쓰는 존재는 이카가 유일할 것이다. 가끔 무하의 기분을 신 경써줄 때도 있긴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남자다. 단지 그 제멋대로 인 이기심이, 정말 기가 막히게도 무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이 되어주는 것 뿐. 상 성이 잘 맞는다는 소리는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리라. “저쪽에서 도시락만 파는 곳을 봤다.” “그래? 그럼 거기서 사자.” 주인장이 건네는 야매주 세병을 가지고 다니는 손바닥만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유시리안 이 답했다. 그리고는 그 작은 주머니에 팔뚝까지 손을 넣어, 세병 치 야매주의 값에 상당 하는 보석을 꺼냈다. 불손한 손님이던 어쨌든 간에 저만한 보석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부자임은 분명했기에 주인장은 공손히 그것을 받아 챙겼다. 술을 즐기고 있던 상인들이 게 스츠름 하게 눈을 뜨고 보석을 감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행동은 신속했다. 보석이 주인장의 손때 묻은 지갑 속으로 사라지자 상인들은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안도의 한숨 을 쉬며 손님에게 인사하려 했을 때, 이미 그들은 돌아서고 있었다. 비록 말은 뭣같이 했지만 거금을 쓰고 가는 손님을 얼른 배웅하는 주인장의 눈에 묘한 광 경이 들어왔다. 두건을 쓴 남자가 검고 푸른 머리카락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의 남자를 돌 아보자, 그가 싸가지 없었던 손님을 돌아보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그 정도는 자기가 내도된다는 군. 네의 아버지를 뵈러 가는 건데 선물은 자기가 사야 되 지 않냐 는데.” 뭔 소린가 싶었는데, 그 싸가지 없는 손님이 다정하게 웃는 게 아닌가. 주인장은 순간 놀 란 자신을 꾸짖었다. ‘뭘, 놀라고 그래! 사람이라면 웃을 수도 있는 거지!’ 처음 만난 자마저 인정하는 우리의 싸가지, 유시리안은 언제나 그랬듯이 주변에는 실오라 기만큼의 눈길도 주지 않고 무하에게 웃음기 섞인 답을 건넸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리고 이카는 그런 예의 같은 건 신경 안 써.” “정말이냐고 묻는다.” “그럼! 누구 아버지인데.” 무례하지만 않으면 예의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피해만 주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하 던 신경 쓰지 않는다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 그는 유시리안이 다치지만 않으면 누구와 싸 우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았고, 도움을 원치 않는다면 어떤 곤란을 겪더라도 참견하지 않았 다. 수 십 만의 생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유시리안의 작은 생채기에 신경 썼 고, 도움을 원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쾌히 응해주었다. 관대하며 자상하고 따뜻한, 그리 고 절대적인 보호자. 그때 죽기까지 쇠약해진 몸으로 그를 찾아간 것을 유시리안의 일생 에 있어서 최고의 선택이자 행복이었다. “수컷은 나를 질시했고, 암컷은 나를 욕망했지.” “……?” “오직 이카뿐이었다.” “……?” 유시리안은 활짝 웃으며 무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락샤사에게 물었다. “도시락 파는 곳은 어디?” “저쪽.” “근데 이카가 언제부터 술은 마셨던 거지?” “몇 년인가 전에 나와 대작한 이후로 가끔 이곳에 와서 마신다고 하더군. 다른 건 별론 데 야매주는 괜찮다고 했다.” “이카는 밖에 나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하잖아. 책 살 때 외에는 잘 나오지 않으면서.” “책을 구할 겸 나와서 겸사겸사 산다고 들었다.” “헤에. 언제 그렇게 대화들을 나누셨어?” 락샤사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무하를 한번 봤다가, 다시 유시리안에게 눈을 돌려 답했 다. “네가 펠을 쫓아 뛰어 나가고는 연락 없이 잠적했을 때.” “아아, 그때? 하하.” 뻔뻔하리만치 웃어재끼던 유시리안은 순간 멈칫하고 락샤사의 눈치를 살폈다. 유시리안은 지독히 무표정한 락샤사에게서 무언가를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늘 그랬듯이 대신 락샤사 가 그런 유시리안의 마음을 읽고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답해주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아. 네가 그 정도로 빠진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 하는 정도였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유시리안. 확실히 그에게도 꼼짝 못하는 상대가 있긴 있는 모 양이다. 천하의 농땡 사부에게는 가하가 있었다. 쿡쿡, 웃는 무하를 보며 유시리안은 궁금 한 낯을 하다가 락샤사를 돌아보았다. 물론 락샤사가 단순한 생각까지 일일이 알려주지 않 는 다는 것은 알았지만 말이다. 그때 마침 무하가 말을 걸었는지 락샤사가 입을 열었다. “빨리 만나보고 싶다는군.” 유시리안은 웃었다. 락샤사의 저 능력을 이렇게 실컷 이용해 먹은 존재는 무하가 처음이 다. 락샤사가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아, 그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제법 있었지만 그의 능력 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존재는 유시리안과 이카미렌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 런 식의 이용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유시리안 경우엔 다른 쪽으로 써먹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속을 읽어달라는 기막힌 요구는 아니었다. 뭐, 목소리가 사라져 본 적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어서 이카에게 보여주고 싶다.” * * * 한가한 공기가 흐르는 시원한 공간. 작고 안락한 집 옆으로는 폭포가 옅게 퍼진 무지개와 함께 청량한 공명음을 자아낸다. 생기가 도는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어디서 쏟아지는지 빛 이 자리하고 그 사이로 작은 정자가 놓여져 있다. 그 지붕의 반을 덮고 폭포의 한줄기가 천천히 굴러 떨어진다. 정자 안은 전체가 커다란 의자다. 신발을 벗는 곳은 저편에 따로 있고, 전체가 높다. 시원 한 나무의 촉감과 인간의 허리통만한 대나무를 반으로 갈라 만든 팔걸이, 낮고 작은 탁상 과 그 위로 놓여있는 필기도구, 그리고 옆에 쌓여있는 두꺼운 책들. 고상한 취미를 엿볼 수 있는 그 사적인 공간의 주인은 이카미렌이라 불리는 경의의 존재. 기둥에 비스듬히 몸 을 기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감상하고 있는 저 아 름다운 존재. 정자의 나무 바닥에 곱게 퍼진 백금의 머리카락은 가끔 간질이는 바람에 움 틀 대며, 깊은 보라의 눈은 반쯤 감겨 이 평온을 즐기고 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을까. 희미하게 미소가 배여 있지만 전체적으로 무표정에 가까운 얼 굴에 약간의 놀람이 섞여들었다. “한번 나가면 쉬이 돌아오지 않던 아이가…….” 희고 고운 손으로 앞으로 그으니,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걸어오고 있는 세 남자의 영상이 담겼다. 타인이 텔레포트라는 무례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카미렌을 배려 한 것이리라. 제멋대로인 게 매력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저 아이가 말이다. 이카미렌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마중을 나가볼까.” 그가 몸을 일으키자 길디 긴 머리를 바람의 정령이 소중히 들어 올려주었다. 그가 제일 처 음 인연을 맺은 정령이었다. 나무 밑창에 간단한 끈으로 고정시키는 슬리퍼를 신고 한가 한 걸음을 놀렸다. 유시리안이 락샤사가 아닌 존재와 함께 이곳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 이다. 저 남자의 분위기와, 그를 맴돌고 있는 두 정령은 기억에 있다. 분명 얼마 전에 유 시리안이 찾아달라고 한 인간이다. “아직 인간이라고 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이대로라면 영영 그대로겠지.” 유시리안이 공유하는 이카미렌의 능력중 하나, ‘진실을 보는 눈’. 동등하게 공유를 하 긴 하지만, 유시리안에게는 제 1기 마도의 생존자인 이카미렌의 능력을 완전히 공유하기에 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많은 일을 몰고 다니는 모양이군.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도 않았고, 침묵의 약속에, 영혼 은 둘이라. 나의 아들이 반한 쪽은 지금 육신을 움직이고 있는 소녀 쪽인 것 같은데. 본 래 육신의 주인은 저 소년이니…….” 느긋한 발걸음이 공간의 끝부분에 이르자, 공간의 한쪽이 열리며 주인의 앞을 텄다. 공간 을 나와 절벽 끝에 선 이카미렌은 절벽 너머를 볼 뿐 더 움직이지 않았다. 거친 바람이 얇 고 치렁거리는 이카미렌의 옷자락을 감싸다 물러났다. 그 차분하고 깊은 눈동자가 일순 다정하게 변했다. 돌아보는 그의 눈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그와 닮은꼴의 아이가 비쳐들었다. “이카!” 유시리안이 천진한 얼굴로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하는 그 모습에 눈 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언제였던가. 중학생일 때였던 것 같다. 어쩌다 알게 된 아이가 무하의 집에 가보고 싶다 며 떼를 썼었다. 막 산에서 와, 도장을 차린 농땡 사부가 그 이야기를 듣고 녀석 낯짝 한 번 보자고 하여 데려갔다. 결국 놀러와 농땡 사부에게 시달리다가 겨우 돌아간 녀석이, 다 음날 학교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너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봐. 가족이 좋긴 좋구나……라 고. 녀석은 아버지가 안계셨다. ‘그때 내 얼굴은 어땠었을까.’ 고개를 돌려 절벽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유시리안과 그다지 나이차 가 없어 보였는데, 자상한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같은 색이어도 이렇게 느낌이 다 를 수 있나 싶은 백금발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길다. 그것이 천 자락과 함께 흩날려 책에서 나 나오는 요정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확실히 인간으로 보기는 힘들어.’ 그 존재에 압도되어 두근거리는 심장과 가까워질수록 절로 숙여지는 고개, 가파지는 호 흡.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벅찬 감동이 밀려든다. 무하는 그것이 제 1기 마도로 부터 살아온, 위대한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경의임을 알지 못했다. 다가갈수록 더 멀어져 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유시리안이 가볍 게 어깨를 툭 쳐주었기 때문이다. 정신이 들어보니, 어느새 이카미렌의 바로 앞까지 와있 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듯 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보라색 눈동자’로 끝날 터인 그 눈동자. 유시리안의 장난기와 상냥함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너무도 닮은 색채 의 그것은 섬뜩하리만치 깊었다. 모든 것이 읽혀지는 듯한 깊고 현명한 눈빛. 얼른 그 시 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계속 마주보고 싶다는 마음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최면술에 빠지는 듯한 몽환감이 피어오른다. 그런 무하를 도와 준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유시리안이 었다. “이카, 이쪽은 페르노크! 내가 그때 찾던 사람이야. 펠, 내 아버지 이카미렌이야."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입을 못 다무는 유시리안을 보는 이카미렌의 눈길이 따뜻했 다. 좀 전의 그 꿰뚫는 듯한 예리함과 흡입력이 한 꺼풀 가려진 느낌이다. 그것은 가하가 무하를 볼 때의 눈빛과 비슷했다. 말을 할 수 없기에 공손히 허리를 숙인 무하에게 가볍게 인사말을 건넨 이카미렌은 먼저 몸을 돌렸다. “들어가자.” 절벽 밖으로 걸음을 놀리며 사라진 이카미렌의 뒤를 락샤사가 따랐고, 유시리안은 무하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끝을 알 수 없는 절벽 밑이 아찔하게 정신을 뒤흔들었지만, 다들 익 숙하게 연결되어 있는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카, 이거 선물.” “야매주구나. 마침 사두었던 게 다 떨어진 참이었다.” 달갑게 받아든 이카미렌은 자신의 거처를 놀란 눈으로 구경하고 있는 무하를 돌아보며 말 했다. “술을 좋아하나?”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기에 답하기가 모호했다. 지금은 고개를 끄떡이거나, 젓는 것 이 할 수 있는 표현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락샤사를 통해 말하는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유시리안이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마시긴 하는데 즐기는 않는데. 쓰다나. 아, 그래도 야매주는 꽤 마셨지?” 하며 무하를 보자, 가볍게 고개를 끄떡인다. 곤경에서 구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미소가 입가에 맺혀있다. 답을 들은 이카미렌은 느긋하게 발을 놀리며 말했다. “그럼 잔은 네 개 준비하지.” 집안을 굳이 표현하자면, 생활의 체취가 배여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널찍한 책상과 그 옆의 책장. 그리고 무엇인가가 잔뜩 써져 있는 양피지와 종이, 펜, 잉크, 손때 묻은 호롱 안의 라이트 구. 여섯 칸짜리 책장에 빼곡히 차 있다 못해 밑에 쌓여 있는 책들. 책상 위 의 식은 차가 남은 찻잔과 작은 바구니의 담백한 쿠키. 깨끗한 나무 바닥, 그 위의 둥근 카펫, 그리고 안락의자. 네모난 공간 안에 단지 그것만이 있었다. 이카미렌은 받아든 야매주를 들고 한쪽으로 걸어 갔다. 공간이 벌어지며 저편으로 식탁이 보인다. 열려진 공간의 틈이 고정되자 이카미렌과 유시리안, 락샤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무하가 따랐다. 그곳에는 부엌만의 냄새가 났다. 물기 젖은 공기와 씻겨진 식기와 그동안 먹었을 음식의 희미한 자취. 이 또한 생활의 체취였다. 이카미렌이 장식장에 진열된 잔을 네 개 꺼내와 널찍한 식탁 위에 올려놓자, 유시리안은 익숙하게 식료품을 두는 창고 문을 열고 먹을 것을 챙겼다. 락샤사는 무심하게 의자를 빼 고 앉았고 무하는 좀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곳이지만 익숙하면서 어딘지 그리운 느낌이 나는 공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무 하는 이곳에 와 한번도 누군가가 진짜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곳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자살이나 준비하고 있던 ‘페르노크’의 화려한 기숙사 방, 가족들마저 믿지 못했 던 ‘페르노크’의 쓸쓸한 거처, 그리고 미치기 직전의 심정으로 잠시 몸만 눕히던 곤크 의 방. 클랜의 고향집은 이미 사용 된지 오래라, 이처럼 따뜻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아 무것도 안하고 편하게 앉아 있는 락샤사도 어차피 마법으로 보관해 깨끗한 잔을 한번 물 에 씻는 이카미렌도 단 것을 싫어하는 무하를 배려해 간식거리를 고르는 유시리안도 이곳 과 잘 동화되어 있었다. 천천히 락샤사의 앞자리에 가 앉으며 무하는 미소 지었다. 은은하고 평온한 멜로디가 그 런 무하를 감싼다. 벌써부터 이곳이 좋아졌다. 이카미렌은 딱 잘라 말했다. “정석 외에는 없어.” 유시리안은 투정했다. “그 소유자들을 어떻게 찾아?” 귀찮다는 빛이 역력하다. 도대체 누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딴 짓을 벌였는지 이가 갈린 다. 이 일방적이고 강력한 강제력이 시전자에게 가져다줄 악영향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 다. 어떤 몰골을 하고 있든 반드시 찾아내 분이 풀릴 때까지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 것이 다. 어찌 다짐을 하던, 당장 중요한 것은 이 빌어먹을 마법을 푸는 일이다. 이카미렌은 미소 띤 눈으로 유시리안을 한번 보았다가, 야매주로 입을 축이고 자신이 아 는 바를 풀어 놓았다. “침묵의 대가는 다섯 개. 그 중 네 개는 사대 군주들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권위 의 상징. 어떤 식으로든 남의 손에 들어갈리 없어. 그들은 지워졌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 니까. 남은 건 하나. 내가 아는 바로는 그것은 엘프들이 가지고 있다.” “엘프? 누구?” “내가 아는 그것의 주인은 이미 죽었어. 때문에 그것이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자식에게 주려 했지만, 사대 군주들이 자신의 권위의 상징으로까지 쓰 는 그것이 그의 자식에게 가는 것을 주위에서 순순히 내버려 뒀을 리 없지. 게다가 그는 엘프의 유일한 규제를 최초로 깬 엘프니까.” “유일한 규제인가…….” 유시리안의 눈빛이 씁쓸하게 변했다. 그 유일한 규제 때문에 배척 받았던 누군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진 자? 악취 나는 헛소리다. “그의 자식은 정당한 권리자임을 주장하며 받아내려 했지. 내가 알기로는 확실히 그의 자 식은 그것을 소유하고 그곳을 나왔어. 하지만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가 그것을 썼다 는 소리는 못 들었어.” 이름 없던 산맥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이곳에 터를 잡고 유희마 저 거의 안한 이카미렌이지만, 귀를 닫아 놓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의 진실로도 많은 것 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의 지혜와 학식을 가진 현명한 자였다. 유시리안이 왜곡된 진실 그 대로를 읽어낸다면, 이카미렌은 왜곡됨 자체를 읽어 순수한 진실을 풀어낼 줄 알았다. 그 런 이카미렌이 한 말이니, 그 엘프의 자식이 이런 짓을 벌렸을 리 없다. ‘게다가 그 엘프의 자식이라면 나도 아는 녀석이니까.’ 확실히 녀석은 그런 짓을 할 녀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녀석이 반지를 타인에게 넘긴 모양이군.” “뺏긴 것일 수도.” “아니, 그 녀석은 내가 알아. 뺏길 리 없지. 자기 손으로 파괴하는 한이 있어도.” “그 아이를 만나봐라. 진실은 그 아이가 알려줄 테지.” 유시리안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녀석은 ‘선택’을 했을까?” “여전히 성인식을 거부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때 이카미렌의 눈이 잠시 무하를 향한 듯 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밖의 시간과 함께 흐르는지, 이카미렌의 레어에 밤이 찾아왔다. 부엌으로 이동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이 열리며 침실로 연결되었다. 무하는 유시리안 의 침실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씻기 위해 공간을 열고 욕실로 사라진 유시리안의 잔영을 그려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하를 위해 열어둔 공간 저편으로, 처음 보았던 그 거실의 광경이 있었다. 왠 지 모를 느낌으로 그곳을 향해 걸었다. 거실에는 락샤사가 술잔을 앞에 두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무하가 나오자 천천히 눈 을 뜨고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검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또 다른 종족인지 알 수 없는 남자. 검일 때는 나찰이라 불리고, 사람의 형상일 때는 락샤사라 불리며, 타인 의 의식을 제압하여 몸을 지배할 수 있으면서 마검은 아니다. ……그리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존재. 문득 생각했다. 괴롭지 않을까……하고. 자연히 그것을 읽은 락샤사는 감흥 없는 눈으로 무하의 눈을 직시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마스터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마스터?’ 굳이 답을 원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무심결에, 반사적으로 되물은 것뿐이었다. 락샤사 는 상관없다는 얼굴로 술잔을 톡톡 건드리며 답했다. “유시리안. 나의 세 번째 마스터.” 유시리안이 락샤사의 마스터가 되고, 지금 무하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락샤사는 이렇게 되물었다. “괴롭다는 게 뭐지?” 락샤사의 눈동자에는 답을 원하는 기색은 없었다. 정말 무심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를 마 주하는 무하는 크게 혼란스러웠다. 괴롭다는 게 뭘까? 배신을 당해서 괴로웠다. ‘있어야 할 곳’을 잃어서 괴로웠다. 형을 죽여서 괴로웠다. 형을 떠나서 괴로웠다. 마음이 죽어가 서 괴로웠다. 정말 괴로웠다. 그럼 괴롭다는 건 뭘까? “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존재는 네가 세 번째다.” ‘응?’ “그 외의 존재들은 장난치지 말라고 했었다.” 상관없다는 얼굴이었고, 또 그것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무하는 슬펐다. 당사자 가 연연해하지 않는 것에 자신이 개입하여 함부로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 라는 것을 알면서도 슬펐다. “유시리안은 둘이나 있었냐고 놀랐었다.” 그 말은 락샤사의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한 존재 중 두 번째가 유시리안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셋이란 숫자가 적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하는 용케 알아듣고 웃었다. 유시리 안은 무하에게도 그랬다. 믿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라도 많은 거라고. 락샤사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유시리안은 어떤 삶을 살아 온 것일까?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락샤사와 무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유시리안이 했던 말이 절실히 다가왔다. 묻지 않는다고 해서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다. 공연히 답답해져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똑같이 흐르지만 기온은 별도로 돌아 가는 이곳의 밤은 시원하고 상쾌했다. 저편에서 폭포수의 경쾌한 낙하소리가 들려와 그쪽 으로 발을 돌렸다. 들어올 때 보았던 폭포는 가까이서 보니 그 높이와 규모가 생각 외로 컸다. 저편으로 정자가 보였다. 은은한 어둠의 빛이 내리깔리는 속에서 운치 있는 모양새 를 뽐내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쪽으로 걸어갔다. 척 봐도 사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기에, 차마 올라서지는 못하고 저편에 서서 지붕을 타 고 흐르는 물방울들을 바라보았다. 흡사 빗방울 같다. 가만히 보자니 함께 젖어들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멋진 곳이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하여 돌아보았다가 안도 의 숨을 내쉬었다. 이카미렌이었다. “이 공간은 내가 직접 만들었다. 이곳에 자리 잡고 나서 조금씩, 조금씩 고쳐나갔지.” 무하는 주위를 한번 쭈욱 돌아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확실히 멋진 곳이다. “리안은 인간이다.” 이카미렌은 정자 쪽으로 걸으며 말했다. 무하가 가만히 서 있자 따라오라는 고갯짓을 해보 였다. “그리고 내 아들이지. 나의 소중한 가족이다.” 신발을 벗고 정자 위로 올라서자 무하가 따라한다. 물방울이 흘러 떨어지는 바로 앞에 가 서며 말을 이었다.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에 숨기지 않겠다.” 손을 내밀어 물에 적셔본다. “수도에 반란이 일어났다. 황제가 죽었고 반란군도 죽었지. 남은 건 옥좌에 누가 앉느냐 를 둔 내전. 그것 임자로 거론될 인간 중 하나는 물론 네 형이다.” 슬쩍 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깊다. 무하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다. 반란군이란 말에 짚이는 바가 있었고, 내전이란 말에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파크다 선배, 소울러……. 그리고 미 끼로 버려졌던 전쟁터에서의 살육. 비록 착각이었지만 그때의 끔찍함이 생생하다. 그 끔찍 함 속에 형님이 끼는 것이다. 그 다정한 금빛 눈동자에 살기를 담고 정갈한 옷에 갑주를 두르고, 피에 젖어 상처를 입는 것이다. 죽음. 소름이 돋았다. 무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서 많이 생각해 보았다. 죽지 않을 것이라고, 살아 있음을 느끼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 을 것이라고. 하지만 형님의 죽음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단 한번도. 깨문 입술은 붉고 꾹 쥔 손은 하얗게 떨린다. 한시가 급하다. 이 저주를 풀지 못하더라도 형님에게 가야한다. 정말로 한시가 급하다. 하지만……. ‘형님이라고 말하고 싶다. 죄송하다고도 말하고 싶다.’ 초조한 마음에 신경질적으로 두건을 쓸어내린 무하의 손가락에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가 은줄에 꿰어 걸고 다니는 붉은 옥가락지였다. 언젠가 의뢰를 맡아 지방으로 내려간 적이 있다. 그곳은 옥 공예품으로 유명한 곳이었는 데, 한 할머니가 광주리에 반지를 담아 팔고 있었다. 큰 값어치는 없는 단순 액세서리인 반지에 관심이 간 것은 그것의 색체가 자신이 끼고 다니는 팔찌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자 신의 핏빛과 말이다. 있는 대로 사가지고 온 다음, 그것을 아이템을 만들 때 사용했다. 내구성이 약한지 일회용 이상은 만들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만들어진 아이템은 늘 은줄에 꿰어 세 개씩 귀에 끼고 다녔다. 하나를 사용하면 다른 것을 꺼내 끼고, 또 하 나를 사용하면 다른 것을 꺼내 끼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는 것 이 신기해 많이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영구적인 것보다 이쪽이 더 재미있었다. ‘샤……아이템…….’ 주인의 마음을 읽고 말을 대신해주는 아이템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길게는 불가능하더라 도 형님이란 단어를 전할 수만 있다면 족하다. 해볼만한 가치는 있다! 이카미렌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집으로 뛰었다. 유시리안은 샤를 보며 물었다. “뭐하는 거야?” “아이템을 만든다는군. 말을 대신해주는 아이템.” “그런 거라면 샤를 통해서 하면 되잖아?” 그 질문의 답은 뒤쪽에서 나왔다. “때로는 자신의 입으로만 전해야 할 말도 있는 거란다.” 이카미렌이었다. 유시리안은 공간 저편의 연마실에서 열개의 반지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는 무하를 보다 다시 물었다. “아이템을 만드는 일은 이제 금기시 되지 않았던가?” “걱정하지 말아라. 지금 저 아이가 걸고 있는 귀걸이도 직접 만든 물건으로 보이는 구 나.” “흐음.” 드디어 결정했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무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남은 반지는 열 개뿐. 이 옥가락지로는 일회용 이상은 만들기 힘드니, 이번에 성공한다면 새로운 재료로 영구적인 아이템을 만들자. 그럼 굳이 침묵의 대가의 소유자를 찾기 위해 힘들이지 않아 도 된다. 깊게 숨을 들이 쉬고 내뱉었다. 부여 아이템을 만드는 것을 말없이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 다. 간단한 마법은 익숙해지면 시동어만으로 할 수도 있고, 시동어조차 없이 할 수도 있지 만 이런 고난위도의 마법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마나를 보며 긴장된 미소를 지었다. 부탁이야, 도와줘. 그리고 두 손을 뻗었다. 아이템을 여러 번 만들었기에 그 기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마법에 있어 실패 한 적은 없다. 늘 마나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무하는 필사적으로 빌었다. ‘말하고 싶어.’ 두 손을 내리며 양쪽으로 벌렸다. ‘펼*쳐*지*리*라*’ 염하자, 말하고 싶다고. 간절히 염하자. 필사적으로 염하자.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말하고 싶어.’ 가슴에 고동이 친다. 묘한 느낌이 온 몸의 세포를 일일이 깨우는 듯 하다. 느껴본 적이 있 는 감각이다. 언제였던가……. 황금빛이 사방을 메우다 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은 것은 붉디붉은 옥가락지와 간절 히 염하고 있는 무하뿐. 그러다 비틀, 쓰러진다. 바싹 긴장하고 있던 유시리안이 얼른 뛰 어가 받아냈다. “괜찮아. 긴장이 풀린 것 뿐…….” 걱정스레 울상을 짓는 유시리안을 보며 무하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순간 멈칫했다. 반지는 아직 그의 손에 들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말이 나온 것이다. 유시리안도 놀 라 무하를 보았다. 락샤사도 뜻밖인지 바닥에 놓여진 반지를 집어 들며 무하를 보았다. 이 카미렌은 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무하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렇군!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군.” 무슨 말인가 하고 무하를 보았지만, 혼자 생각에 잠겨 설명해줄 여지가 없어 보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휴로버 신관이 건네준 고대책. 읽을 수는 있으되, 이해할 수는 없었 던 묘한 문장들.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마법의 주문들임을 알 수 있었다. 고 차원적인 운용의 서술. 그것을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용해 버렸다. 그리고 형을 죽였다. 그 뒤로도 몇 번이고 그 책을 읽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용했기에 형을 죽였다. 그러 니 알아야 한다. 그런 상황이 언제 또다시 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또 이 손으로 소중한 누 군가를 죽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아버렸다. 그것이 언령 마법의 도입부였다는 것 을. 그 뒤로 그 책을 봉했다. 배낭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봉인의 마법을 읊었다. 더 이상 알면 안 된다. 이번에는 그 직감을 외면하지 않았다. 옥가락지를 만지기 전, 언령으로 이 저주를 깰 수 있을까 잠깐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불 가능했다. 형을 죽인 마법이었음을 둘째치더라도 언령 마법은 ‘말’로써 생성되는 마법. 말을 봉인당한 무하가 말로써 그것을 푸는 것은 불가능했다. 초조함이 극에 달할 때 이 가 락지가 손에 만져졌다. 지금 깨달았다. 언령은 의지의 발현. 중요한 것은 의지. 무하는 허무함에 웃었다. 그때 카한세올은 죽지 않아도 되었다. 무하가 어떤 마법을 읊더 라도 죽이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면 죽지 않아도 되었다. 마나의 제어로 헬파이어를 썼음에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던 것처럼, 의지의 제어로 카한세올을 죽지 않게 할 수도 있 었다. 무지했다. 너무도 무지했다. “이건 어떻게 할 거지?” 락샤사가 집어든 가락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무하는 관심 없는 얼굴로 답했다. “버려.” 이제 필요 없어진 물건이다. 유시리안은 무하의 얼굴을 흐르는 식은땀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무하는 웃었다. 울 자격 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지 마.” “울긴 누가 울어?” “웃지 마.” 그렇게 웃지 마. “율.” “응.” “비겁한건 나쁜 게 아니지?” “당연하지.” 무하는 힘없이 웃으며 유시리안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 아이 고대 마법을 쓰는구나.” 조심스레 침대에 무하를 누이는 유시리안의 뒤에서 이카미렌이 말했다. 묘한 어조였고 묘 한 표정이었다. “그들과 함께 지워진 그 마법을.” 유시리안은 무하의 두건을 풀며 굳은 얼굴을 했다. 그리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살 짝 떼어주다가 약하게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함부로 남용할 사람이 아니야, 펠은. 걱정마.” “네 말대로 남용하지 말아야 할 거다. 아니, 아예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구 나.” 유시리안은 이카미렌을 마주보다가 다시 무하를 돌아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잠이 들어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펠은 강해.” “제 1기 마도가 왜 멸망했는지 잊지 말아라.” “흥! 멋대로 건방 떨다가 망한 거잖아. 인과응보지! 펠은 괜찮아. 물론 나도 괜찮아.” 이카미렌은 고집스런 아들의 모습에 설핏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 과 꼭 닮은 백금발을 쓰다듬어주었다. 자신의 아들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면 어떤 결과가 나온다 해도 웃으며 받아들이는 아이 다.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것들은 거침없이 치워가며 힘차게 앞으로만 걸어간다. 끈적하 게 들러붙는 역한 과거 따위는 오만하게 짓밟으면서. 그러면서 이카미렌의 앞에서는 어리 광을 부리고, 그의 기분을 신경 쓰고, 환하게 웃는다. 이카미렌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 하고 사랑하는 아들. 익숙한 듯 편안하게 머리를 맡기는 유시리안에게 이카미렌은 작게 속삭였다. “너만 괜찮다면 됐다.” 아침이 되어 눈이 뜬 무하는 뭔가 달라져 보였다. 뭔가를 더 짊어진 듯 보이기도 했고 뭔 가에 벗어난 듯 보이기도 했다. 무엇인가가 변한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말했다. “형님께 가자.” 가서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도와드려야 한다. 가서 형님이라 말해야 한다. 그리고 죄송하 다고 말해야 한다. 동생을 죽여서 죄송하다고. 원수인 자신에게 형님이 고맙다는 말을 하 길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바람으로 인해 형님은 동생을 둘이나 잃은 격이 되어 버렸 다. 처음부터 속죄의 방법은 자신의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피해자인 형님이 결정할 일이 었다. 이제 됐다. 형님이 고맙다고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괴로움을 안고 곁에 있자. 형님이 자신 의 진짜 동생을 내놓으라고 하면 이제는 저 깊은 곳에서 잠들어 나타나지도 않는 ‘페르노 크’를 깨워 보내자. 녀석이 싫다고 숨더라도 상관없다. 강제로 깨워서 보낼 것이다. 이 제 됐다. “펠?” 유시리안이 왠지 모를 느낌으로 무하를 불렀지만, 무하는 듣지 못했는지 눈을 감고 생각 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시리안의 눈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 는다. 무하가 그러길 원한다 해도 자신이 용납지 않는다. 절대로. * * * 수도는 어수선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낯에는 두려움과 혼란이 깃들어 있고 어느 방향 을 흘낏되며 식은땀을 훔쳤다. 그러나 그 내면에 묘한 흥분과 기대가 도사리고 있음은 부 정할 수 없었다. 황제가 죽은 것이다! 사람들의 공포를 서서히 흥분으로 바꾸는 소식은 무엇보다도 다음 황 제로 거론되는 남자였다. 금안의 ‘지배자’! 고결한 기사이자 청렴한 정치가이자 너그러 운 영주이신 분! 물론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황위 계승권자는 거의 죽었지만 그 말고도 한명이 더 살아 있었다. 가야다 가의 가주, 사뮤에르. 그러나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그 꼬마한테는 가주 자리도 벅차다. 가주가 된 이상 나름대로의 능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디 테밀시 아에 비견될까. 그렇게 일반 백성들은 테밀시아가 다음 황위를 이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귀족들의 견해는 달랐다. 아무리 어리다 한들 카르민 계층의 수장 중 한명. 권력이라는 것 이, 황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그런 그가 이런 절호의 기회 를 놓칠 리 없다. 게다가 사뮤에르를 직접 보고 느낀 자는 그 어린 소년이 얼마나 대범하 고 영악한지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무모할 정도의 인재등용은 가슴 한쪽이 서늘해 질 정도다. 자신을 반대하던 기존의 세력층을 완전히 몰아내고 자신의 수하로 채운 사뮤에르는, 그 인 재등용에 있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길가에서 자신을 모욕한 제피모 학자를 보좌로 임명하여 오른팔로 삼았고, 유력 가주계승권자였던 레일리아의 수하조차 엄선해 그 밑에 두었다. 그들은 유능한 레일리아의 수하였던 만큼 그 능력이 뛰어나 제 몫을 톡톡 히 해냈다. 또한 추한 외모와 거친 언동으로 배척받던 마법사를 가문휘하 마법단장으로 두 었고 과거 회색 고향에서 자신을 지킨 기사들을 각기 기사단장, 부단장으로 삼았다. 마지 막으로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집사의 아들을 새로운 집사로 임명했다. 그렇게 그는 정치적 조언자도, 마법단과 기사단이라는 무력도, 가문 내의 충실한 하인도 갖춘 것이다. 그 극단적인 인선은 기존 세력권들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사뮤에르는 재정적인 면에서 크 게 제한을 당하게 되었다. 다른 수를 내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그를 찾아온 한 남자가 있었다. 자하라 가의 전 가주 계승권자, 비레오가의 수하라 자처하는 자였다. 그 뒤로 이 어진 한차례의 파란. 자야다 가주는 아들을 선택했고, 막대한 재력과 권력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단순한 재력과 권력의 보충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대 가장 현명한 가주라 칭송 받던 그 자하라 가주에게서 받아냈다는 것. 바로 그것에 가치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자 하라 가문 내의 치열한 가주 계승 싸움도 막을 내리고 뮤비라가 선택되기까지 했다. 어찌 보면 현 자하라 가주 뮤비라 역시 사뮤에르라는 가야다 가주에게 약간의 빚을 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이토록 발 빠르고 대범한 사뮤에르다. 어리다고 얕볼 상대가 결코 아닌 것이다. 절대 이 기회를 얌전히 내어줄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본래 사뮤에르의 황위 계승권 순위가 테밀시 아보다 위였었다. 그가 근래 결혼을 통해, 아내의 계승권을 이어받지만 않았더라도 말이 다. 사정이 이러한지라 누구하나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공연히 나 섰다가는 모난 돌이 징 맞는다고 어떤 모략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분명 둘 중 누군가가 황제가 된다. 한쪽에 손을 들었다가 그쪽이 몰락하면 결국 불순분자로 찍혀 나가 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테밀시아나, 사뮤에르가 침묵하고 있는 이상은 더더 욱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온 나라의 이목이 몰린 그 속에서 수도는 일단 소강 상태였 다. 황성 앞 광장. 삼대 기사단 중 하나인 키텐의 문장이 찍힌 격식용 갑옷과 망토를 두른 두 남자가 말에 올라탄 채 한 곳을 보고 있었다. 중년을 훌쩍 넘긴 남자의 입에서 나직이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씁쓸하군.” “예?” 둘이 보는 그곳을 굳이 몰려와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구경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높게 쌓여 있는 시체의 산. 한때 황성을 점령하고 황제폐하와 황후전하를 시해한 자들의 고깃덩어리가 볼쌍스럽게 쌓여 있는 언덕. 굳은 피딱지가 바닥을 더럽히고, 싸늘한 날씨 덕에 그리 썩지 않은 시체가 죽기 직전에 느껴야 했던 고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토 막 나고 갈라진 그것들의 안에서 내장이 쏟아져 나와 차마 맨 정신으로는 똑바로 볼 수 없 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굳은 얼굴에 묘한 흥분을 담아 그것들을 보고 있는 저들은 무엇이 란 말인가. “황제 폐하가 시해 당했음을 애통해 하는 백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좋아하면 귀족 된 입장에서야 씁쓸하지.” 시체 고개를 모여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차례 둘러본 청년은 이내 중년의 남자를 돌아 보았다. 피식 미소를 짓은 키텐의 마스터, 사갈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귀족이면서 도 저들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는 것이 더욱 씁쓸했다. “자네 주군은 어떤가? 차도가 있는가?” 가뜩이나 어두운 낯이었던 청년은 낮게 답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시다고 합니다만…….” 돌보고 있는 의사의 말로는 급소는 피했다고 하지만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계시다. 그렇게 만류했건만 결국 자신이 하겠다고 한 바를 밀고나가 버리셨다. 그토록 이루고 싶으 신 거다, 그 꿈을. ‘새로운 신분.’ 함께 만들자고 손을 내민 그날로부터, 로딘도 똑같은 꿈을 가지게 되었다. 신분 계층에 있 어서 새로운 획을 긋는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이다. 신분 계층에 그 획을 그은 것 은 용병 길드나 마법사 길드정도였다. 그들은 본래 출신성분이 어찌됐든 길드에 가입되었 다는 것만으로, 길드원으로서의 대접을 받는다. 그 외에는 신관정도일까? 몬스터 헌터도 있지만 그들은 전 대륙을 통틀어 50이 채 넘지 않는 엘리트 집단이다. 그들이 가지는 전문 성만 따져도 신분은 초월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는 역사에 남겨질만한 획은 없었다. 바로 그 획을 함께 긋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18세의 소년에게는 충분히 매력 적인 유혹이었다.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주군.’ 고삐를 쥔 손을 꾹 글어 잡았다. 가죽장갑 밑으로 손아귀에 힘줄이 선다. 초조함에 미쳐버 릴 것 같았다. 그런 로딘에게서 시선을 떼고 사갈을 다시 시체더미를 보았다. 그는 기사 집안에서 태어 나 기사로서 자랐다. 그런 그에게 주군에 대한 충성은 동경할만한 감정이었다. 안타깝게 도 주군으로서 섬길만한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욱 로딘이 부러워지 는 지도 모른다. 노골적으로 주군을 우선하고, 기사단을 뒤로 두는 그 태도에도 제재를 가 하지 않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운명을 짊어진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 법이지. 너무 걱정 말게.” 로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쳐주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복도 창가에 기대 테밀시아는 굳게 닫혀있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문 너머에는 부상 입은 요크노민이 있다. 그 맹랑한 청년은 자신의 꿈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였다. 비 록 목숨에 지장이 없다 해도, 자신의 몸에 검을 꽂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일 지……. 그 공포를 기어이 극복하고 일을 성사시켰다. 황제는 죽었고 반란은 어이없을 정 도로 쉽게 와해되었다. 2년 전, 페르노크와 함께 웃고 떠들던 그때의 왜소한 소년의 자취 는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저 문 너머에는 자신이 부상당하는 것보다도 큰 고통을 느끼며 동생을 간호하고 있을 뮤비 라도 있다. 테밀시아는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랑한 두 동생은 각기 죽고, 상 처입어 그의 곁을 떠났다. 그 사무치는 고통과 외로움에 미쳐 로레라자를 단칼에 죽여 버 렸다. 모두 이 여자 때문이라는 증오에 몸을 맡겼다. ……요크노민이 잘못되면 뮤비라는 누구에게 그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증오를 맡길 수 있을까…….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요크노민은 비록 자기 자신의 꿈을 위해서라지만, 결 과적으로 테밀시아를 돕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했다. 이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테밀시아 는 말리지 못했다. 그리고 동생의 계획을 들은 뮤비라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지의 반려……. 자신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인을 위해 바친다는 그 맹 약 때문이었을까? 동생마저 주인을 위해 바친다는 것일까? 아니다. 요크노민이 자신의 꿈을 위해 그러길 원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테밀시아는 쉽게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자꾸만 자신 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만큼 동생이 상처 입음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이 고, 그만큼 뮤비라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 약간 긴 앞머리를 흐트러뜨린다. 눈부신 금발이 어두운 금안을 감춘다. 그 죄책감을 감추고 그 감정을 감춘다. 깔끔한 식당 속에서 은근한 주목을 받고 있는 세 남자가 있었다. 각기 특유의 색채가 있 는 남자들이다.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옷차림에서 나오는 색채가 아닌 그들 존재에서 흘러 나오는 색채가 매력적이다. 차마 나서서 말을 걸 생각은 못하고 있지만 여인들의 시선은 뜨거웠다. 언제나 있었던 시선들인지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무하를 보는 유시리안의 얼굴 은 조금 딱딱했다. 이틀 전 아침 이후로 무하는 어딘지 이상했다. 딱히 어디라고 찍어 말 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어딘가 이상했다. 말이 없는 것이야 뭐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그 렇다 치지만……전처럼 평온한 침묵이 아니라는 것이 거슬렸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무하는 유시리안이 앞에서 테이블을 톡톡 치자 정신을 차렸다. 유시리안은 평소의 다정한 눈빛이 아닌 뭔가 굳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하는 약하게 웃 었다. 컵을 만지작하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가자.” “펠. 전에도 말했었지만.” 반쯤 일어나 있는 무하를 올려보며 유시리안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난 제멋대로인 녀석이야.”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해?” 의아하게 되묻는 무하를 보며 웃었다. “내 예감인데…….” 말끝을 흐리며 무하를 따라 일어나며 계산서를 들었다. 무하는 유시리안이 말을 잇기를 기 다렸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계산대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무하는 욱 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건 별도의 문제야.’ 애써 자신을 다독여본다. 유시리안은 소중한 존재다. 자신을 봐주고 믿어주고 아껴준다. 진심으로 상냥하게 대해주고 거리낌 없이 자신이 무하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해준 다. 제멋대로지만 다정하다. 하지만 이건 별도의 문제다. 먼저 계산하고 나가는 유시리안의 뒤를 따라 걷었다. 유시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 깨달 았다. 그의 뒷모습은 매우 생소하다는 것을. 언제나 그의 옆에서 걸었다. 그가 기다려 주 었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나간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쥔다. 차 가운 금속색의 그것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멈춰 서 몸을 약간 뒤로 돌린 유시리안이 피식 웃었다. 조금 차가웠던 눈동자가, 조금 굳 었던 얼굴이 다시 다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그는 말했다. “아마도 난 그 말을 가까운 미래에 또 한번 하게 될 것 같아.” 그리고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는 무하를 보며 장난스레 얼굴을 찡그렸다. “애정표현은 기쁜데 아프다고. 난 마조는 아니지만 뭐, 펠이 굳이 그걸 원한다면 야…….” “윽!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떼자 쿡쿡 웃는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진 존재는 이카미 렌 외에 무하가 처음이라는 걸 알지 모르겠다. 그만큼 특별하고, 소중하다. 그러기에 더 욱 이기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락샤사가 손을 뻗어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이상하다.” “응?” 매사에 무심한 락샤사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한번 가보는 게 좋았다. 또 그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어차피 중심부 쪽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인파에 묻혀, 육안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기운 에 민감한 유시리안은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아찔할 정도의 혈향. 원한, 그리고 죽음의 냄새였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느낀 락샤사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유시리안은 눈살을 찌푸 리며 붉은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그의 붉은 천은 신선한 적혈만을 좋아하기에 그 썩 은 혈향에는 아무 반응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사람들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무하만이 의아한 얼굴로 이리저리 사람들 틈을 비집 고 들어가려 했다. 유시리안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볼만한 게 못 돼.”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유시리안의 말이기 때문이었을까? 무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아까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이 불쾌하게 와 닿았다. 비슷하 다, 나쁜 일에 대한 직감과. “그냥 가자, 펠.” 어차피 저편에 있는 것이 무엇일지 뻔했다. 유시리안은 전쟁터를 많이 돌아다닌 전사다. 그 특유의 썩은 혈향쯤은 얼마든지 감지할 수 있었다. 저편에 있을 구경거리는 그에게 있 어서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그저 그런 것에 불과했지만, 무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을 뻔히 알고 있는 유시리안은 어떻게든 뒤로 빠지려 했지만, 뒤에서 밀려드는 인파 에 밀려 뜻과는 달리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무엇보다도 무하가 그에게 반하고 앞으로 가려는 게 문제였다. 유시리안은 억지로 뒤로 빠지며 무하의 손목을 잡아끌었지만, 무하 는 부드럽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펠!”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가 두근거려, 율.” 한손을 가슴에 얹으며 무하는 쓰게 웃었다. “아주 나쁜 예감이 들어.” 곧장 뒤를 돌며 말했다. “금방 올게.” 그리고는 사람들 속을 헤치며 앞으로 가버렸다. 유시리안이 혀를 차며 그 뒤를 빠르게 쫓 으려 했으나 락샤사가 그 머리카락을 뒤에서 꾹 잡아버렸다. 생각지 못한 저지에 고개가 꺾여지며 윽, 신음을 흘렸다. “뭐야, 샤!” 락샤사는 대답 대신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끝에는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 는 상점 중, 이층 발코니에 테이블을 놓고 음식을 파는 곳이 있었다. “에?” 그리고 그 테이블에는 한 남자가 차를 즐기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 의자에는 막 샀는지 포장이 되어 있는 책 뭉치가 한 가득이었다. 그는 눈에 익다 못해 반가운 존재였 다. “이카?” 헤어진 지 얼마 안됐는데 앞질러 이곳에 와 있는 걸 보면 텔레포트를 한 모양이다.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는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 놓은 책을 다 읽은 것 일 테지. 반가움 에 잠깐 웃었다가 어느새 무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가볍게 혀를 찼다. 어딜 보나 인간투성이니 여기서는 찾아내기 힘들게 뻔했다. 이카미렌이 있는 곳은 이층이 니 위에서 보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에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정 안되면 전처럼 이카미렌 에게 찾아 달라고 해도 된다. 밀쳐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거친 외마디를 질러댔다. 평소라면 생각하지 못할 행동을 하 면서 뭔가에 홀린 듯 무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가까이 갈수록 가슴의 고동이 격해져 갔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었던 터라 쉽게 앞으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밀쳐내는 손놀 림이 격해짐에 따라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드디어 무하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방해선이자, 구경꾼들의 제일선을 차지하고 있던 자들 을 밀치고 한걸음 내딛었을 때 무하는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바로 눈앞에 고통에 절어 있 는, 딱딱하게 굳은 머리가 있었던 것이다. 크게 벌려진 입속에 썩은 핏덩어리가 고여 있 고, 부릅뜬 눈은 핏줄이 터져 붉었다. 시체 특유의 섬뜩함을 뿜어내는 그것은 목이 반쯤 잘려나가 대롱거렸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육안으로는 차마 대중할 수 없는 높이와 넓이로 시체들이 쌓여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럽게,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댔 다. 무하는 숨을 멈추고 그것을 보다 간신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꾹 쥔 손바닥에 땀이 고였 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불쾌감이 느껴졌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갑자기 숨이 몰 려와 고개를 숙이고 급히 호흡했다. 토할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한꺼번에 고막을 때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하얀 충격 속 에 타인의 어두운 악의만이 쏟아졌다. “계속 이대로 둔…….” “썩을 때까지 계속…….” “주모자들은 저 한가운데에 효시해 놨……” “본보기라는…….” “솔직히 반역이라는 거 할만하…….” “나라도…….” “이 사람이 무슨 화를 입으려…….” “황제도 죽었으니, 이제는 좀 살만…….” “금안의 ‘지배자’께서 황제가 되…….” “그깟 꼬맹이가 뭐 대수라고 그…….”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크게 고함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무하는 고통스럽게 귀를 틀어막았 다. 크윽, 의식하지 못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나무라네. “……!” 모든 소리를 소거시키는 상냥하고 자비로운 목소리. 미화 선생님과 닮았다 생각했던 그 목 소리. -나는 풀이라네. 막 이곳에 오고 혼란스러웠던 무하에게 뭐든 말해보라며 다정히 신경써주었던 사람. -나무는, 풀은 말이 없지. “휴로버 신관님…….” 소울러와 함께 세상을 바꾸자고 했다. 황제가 없는 사회를 원한다고 했다. 능력대로 대우 받으며 살아갈 사회를 원한다고 했다. 망할 신분제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노새처 럼 죽도록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 틈 속에서 허우적대다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했던가……? 그들은 황제가 없는 사회를 원한다고 했다. 방금 사람들은 황제가 죽었다고 했다. 황제는 죽었다. 그리고 그들도 죽었다. 이렇게 눈앞에, 단순히 본보기로써 무의미하게 썩어가고 있다. “소울러…….” 그는 어떤 얼굴을 했던가. 슬픈 미소를 지었었다. 그리고 무하는 그것을 외면했다. 그는 무하와 적이 된다는 것을 슬퍼했었다. 그것마저 외면하지 못했던 무하는 적은 되지 않겠다 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했던가? 무하는 순간 시체가 없는 쪽으로 발을 디뎠다. 뭔가 젤리 같은 촉감의 이질감이 잠깐 스쳤 지만 개의치 않고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사람들이 주모자들은 가운데에 효시되 어 있다고 했다. 뒤에서 뭐라고 고함을 질러대는 것 같았지만 무하는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못했다. 그 젤리 같은 촉감의 이질감을 스친 순간부터, 엄청난 비린내가 감각을 마비시킨 것이다. 금 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기댈 곳은 없었다. 사방이 시체였다. 온 몸이 비틀거린다는 것을 느꼈지만, 실성한 듯이 앞으로 걸었다. 그때는 왜 생각하지 못 했을까? 그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로 인해 형님이 죽을 수도 있었다 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죽도록 힘들었기 때문에, 미치도록 괴로웠기 때문에 생각 하지 못했던 걸까? 바보같이……. 내장을 쏟아내고 있는 시체들을 보며 울고 싶어졌다. 2년 전 인심이 메말랐던 그 마을에 서 병자들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얼마 전 전쟁터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무기를 정비 하는 병사들을 보면서도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진한 괴리감을 느꼈 다. 이것이 죽어서 꾸는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그때 무 하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 철봉 모양으로 만들어진 높은 나무 기둥에 머리가 세 개 매달려 있었다. 휴로버 신관님, 소울러……그리고 파크다 선배. “아…….” 눈물이 고이기도 전에 툭 떨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고통과 공포 속에서 죽 어간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들은 환하게, 통쾌하게 웃고 있었다. 어째서? 황제는 죽었지 만 황제가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신분제도도 사라지지 않았는데……어째서 웃고 있는가? “아, 그래.” 무하는 힘들게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저 높은 곳에 있다. “인간으로서 죽고 싶다고 했었다.” 그래서 웃고 있는 건가. 인간으로서 죽어서?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무하는 울었다. 이것은 현실이다. 휴로버 신 관님도 파크다 선배도 소울러도, 그리고 이 이름 모르는 많은 수의 사람들도 모두 죽은 것 이다. 꿈속의 사람이 죽은 게 아니라, 현실속의 사람이 죽은 것이다. 모든 것이 현실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제거, 내가 바라는 것은 불의 힘.” 그렇기에 더더욱 세상을 위한다는 이상 속에서 죽었을 이들이, 타인의 비웃음 속에서 썩어 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파 * 이 * 어 * 스 * 톰 *” 그러나 마법은 구현되지 않았다. 무하는 이와 비슷했던 때를 기억해냈다. 로레라자가 강제 로 ‘마력 봉인구’를 채웠을 때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처럼 마나와 의 소통이 불가능해진 모양이다. 그리고 이럴 때 가능했던 마법을 그는 또한 알고 있었 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그 마법으로 인해 카한 형님이 죽었는데……. 무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평생 후회만 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도망만 칠 수도 없다. 이제는 앞으로 내딛을 때. 무지했기에 형님을 죽였지만, 이제는 안다. 중요한 것은 의지. “내 * 가 * 명 * 한 * 다 *” 중요한 것은 의지. 이 시체들만 태우리라. “타 * 오 * 르 * 라 *” 조용한 복도에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가벼운 마찰음을 내며 문이 열린 다. 문 저편에서 나온 사람이 누군지, 눈을 감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알 수 있 는 거냐고 물으면 답할 수는 없다. 그냥 그라면 알 수 있다. “언제부터 거기 계신 겁니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물이 날만큼 안심됐다면 웃을까? 천천히 눈을 떠 뮤비라를 본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시린 바람에 머리카락도 옷도 망토도 나불거렸다. 마찬가지로 뮤비라 의 단정하게 빗겨진 머리카락도 연한색의 옷자락도 검은 망토도 나불거렸다. 그것은 테밀 시아의 얼굴을 은밀히 가렸지만, 뮤비라의 얼굴은 대범히 드러냈다. 걱정이 담기긴 했지 만 어둡지 않은 눈동자, 미소가 사라지긴 했지만 딱딱하지 않은 표정……. 테밀시아는 그 작은 하나하나에 위로 받았다. “조금 됐어.” 목소리가 잠겨 갈라진다. 그것이 자신의 거짓말을 증명하는 증거 같아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뮤비라는 쿡 웃으며 문을 닫았다. 환자에게 찬바람은 좋지 못할 것이다. “좀 어때?” “신성 마법으로 위기는 넘겼어요. 이제 자연히 낫길 기다리면 됩니다.” “그래……. 다행이군.” 테밀시아가 등을 대고 있는 창 옆에 손을 대고 잠시 바람을 맞던 뮤비라는 슬쩍 고개를 돌 려 물었다. “그 시체들은 계속 그대로?” “아아.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말들이 많아. 황성이 점령당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까 다들 바싹 긴장한거지.” 귀족 회의에서는 광장에 쌓여있는 시체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이 났다. 말 그대로 본보기 인 것이다. 시체를 수습하려는 자는 같은 반역도로서 처리하기로 했다. 저 고깃덩어리들 은 황성 바로 앞 광장에서 부패되어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동조했 던 자들은 결국 그 몰골에 구토를 할 것이고, 불쾌감만 가질 것이다. 보다 오래 그것을 방치하기 위해서 악취나 진물이 퍼지지 않게 결계를 만들어 두었다. 더 불어 누군가 마법으로 수작을 부릴까, 결계를 이중으로 설정해 두었다. 결계를 가동, 유지 하고 있는 다섯 개의 결계구는 엄중한 경계 하에 보호되고 있다. 느려터진 귀족들이 이런 처리에 있어서만은 놀라울 정도로 재빨랐다. 그 잔인하고 불쾌한 처사에 반발도 있었지만, 그에 반하는 자는 반역도라는 의식이 흐르 고 있었기에 누구도 대놓고 나서지는 못했다. 지금에 있어서, 그 처사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뿐이었다. 테밀시아, 그리고 사뮤에르. 적어도 테밀시아는 죽은 자의 몸뚱이가 어찌 되든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죽은 자보다는 산자가 더 급하다. 당장 심각한 부상을 입은 기사들도 많았고, 혼란에 빠진 귀족 수하들 도 많았다. 물론 민심을 잡기 위해서는 그 사항에 너무 무관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 고 귀족들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귀족들과 제피모들을 채찍과 당근으로서 적당히 조율해 야 하는 것이다. 테밀시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등을 폈다. 바람을 타고 뺨을 살짝 간질이는 뮤비라의 머리 카락을 느끼고 있는 것도 좋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보…….” “테밀시아 경!” 복도 저편에서 기사가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광장에서 급한 호출입니다!” 테밀시아와 뮤비라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가 거의 동시에 달렸다. 광장에는 시체와 결 계, 그리고 결계를 유지하는 결계구가 있다. 광장이 불타고 있다. 연기 한줄기 내지 않고 뜨거운 숨결에 휩싸여 있다. 그것이 타인의 출입을 금한 결계 속에서 뿜어지는지라 누구도 나서질 못했다. 물을 뿌려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계는 물조차도 차단해냈다. 그것은 아직 결계가 제 구실을 해내고 있음을 뜻했 다. 그렇다면 저 불꽃은 무어란 말인가. 시체의 부패를 막고, 타인의 출입을 막고, 마력을 봉 인하는 다중 결계 속에서 어떻게 불이 날 수 있었단 말인가. 제피모와 마찬가지로 시체 산을 구경나온 귀족들은 히스테릭적인 비명을 지르며 공연히 노 예를 구타하고, 기사를 닦달하고, 마법사들을 독촉했다. 그러나 누구도 저 격렬한 불구덩 이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나마 불길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천운이었다. 날씨 가 건조해, 만약 불길이 번진다면 바로 근처에 있는 황성에 피해가 갈 게 분명했다. 그 누구도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동안에도 불꽃은 맹렬한 기세로 시체들을 집어삼켰다. “빌어먹을! 가서 끄란 말이다!” 무자비하게 시종을 몰아세우는 귀족, 비즈타. 그는 이 광장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자였 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추궁이 두려워 저토록 볼썽사납게 구는 것이다. 그의 재촉 에 질린 마법사가 결계의 한 귀퉁이를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 입구에 마법사들이 수(水)계열의 마법을 시전하면 어느 정도는 진압이 되지 않겠냐는 말 에 귀가 쫑긋한 비즈타는 해보라고 허락해 주었다. 결계구를 담당하는 마법사중 한명이 진땀을 흘려가며 구를 컨트롤 하는 동안 곁에 있는 다 른 마법사들은 불을 진압할 만한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일렁이더니 성인 남 성 덩치만한 구멍이 생성되었다. 결계자체는 투명하고 성질이 이질적이라 육안으로 감별하 기 힘들었지만, 구멍 주위로는 공간이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 생성됨을 확인할 수 있 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구멍이 생성되자 주위를 덮치는 역한 비린내와 뜨거운 기운이 그 증거였다. 마법사들은 일제히 그 구멍 안으로 시전 한 마법을 발포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바 로 앞부분은 잠시 불기운이 물러나는 듯 보였지만, 순식간에 다시 그 자리가 화염으로 뒤 덮인 것이다. 비즈타는 바싹 마른 몸뚱이를 경기 일으키듯 바르르 떨어대더니 신경질적으로 연약한 마법 사를 구멍 쪽으로 밀어버렸다. “밖에서 안 되면 들어가서 하란 말이다!” 주위에서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마법사는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불길 속으로 밀려들어가 버 렸다. 끔찍한 비명이 이어졌다. 동료 마법사들이 창백한 얼굴로 비즈타를 노려보며 소리쳤 다. “이게 무슨 짓이오!” “시끄러! 저런 불 하나 못 끄는 무능력자들이!” 그들은 신분여부를 떠나, 마법 길드에 소속된 자. 실력만 된다면 귀족이라 할지라도 얼마 든지 항의를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당장 타죽게 생긴 동료를 내버려 둔 채 저런 머저리를 계속 상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몇몇 동료들이 항의를 할 때, 다른 이들이 마법을 외고 있었다. 구멍 저편에서 비명은 계속 되고 있었다. “워 * 터 * 볼 *” 누군가가 시동어를 읊을 때, 뒤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미처 그를 제지하기도 전에 구멍 쪽으로 뛰어든 그는 계속 비명을 지르는 마법사를 걸쳐 매고 나왔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용기였다. 뒤늦게 기사들이 경계하며 다가왔지만, 이내 상대가 누군지를 깨닫고 정중히 경례했다. 그 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 황제로서 거론되고 있는 남자이며, 기사들의 꿈인 마스터에 오른 자였다. 금안의 ‘지배자’. 테밀시아는 겨우 진정한 마법사를 보며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사인가.” 온 몸이 화염에 뒤덮이는 공포에서 겨우 빠져나온 마법사는 자신을 구해준 이가 누군지를 깨닫자 동경과 경의의 눈빛으로 빠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테밀시아는 그런 마법사의 몸을 살펴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재가 묻은 망토를 털었다. 저 뜨거운 불 속에서 빠져나온 것 치고는 테밀시아도 마법사도 꽤나 멀쩡했다. 뒤늦게 도착한 뮤비라가 얼른 다가와 다친 곳 을 묻자 테밀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을 멍하니 올려보고 있는 마법사에게 물었 다.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자네 발이라도 헛딛었나? 아니면 자살? 왜 저 속에 들어간 거 지?” 자존심 강한 마법사들에게는 모욕이라고 받아질 수도 있는 언사였지만 동료를 구해준 데 다, 상대가 그 이름 높은 금안의 ‘지배자’다 보니 마법사들의 눈에 호의가 가득했다. 물 론 답을 하기 위해 잠시 비즈타를 봤을 때는 악의와 적의가 넘쳤지만 말이다. 그들의 시선 을 눈치 챈 비즈타는 얼른 손 사레를 치며 말을 가로막았다. “공에 눈이 멀었는지, 자기가 들어가 불을 끈다고 하지 뭡니까.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 어버려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답니다.” 테밀시아가 신분여부 보다는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경비를 제 대로 하지 못한 자신이 귀한 마법사를 죽일 뻔 했다는 것이 들통 나면 어떤 낭패를 볼지 두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테밀시아는 다음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가 아닌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마법사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애써 뻔뻔한 표정을 짓는 비즈 타를 번갈아 본 테밀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사태는 어떤가?” 다음으로 미루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자 마법사들은 반박하려던 것 을 참고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말이 설명이지, 그들도 지금 사태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 다. “결계구는 무사한데도 안에서부터 화재가 났습니다. 결계구가 무사하다는 것은 침입자나 마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거지만, 저건 자연발화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 마법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소리를 내며 산을 이루고 있던 시체들이 무너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조금 트인 시야 저편으로 효시된 머리를 올려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 다. 비스타가 발끈하며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침입자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겨, 결계구는 무사합니다. 어, 어떻게……?” 혼란해 하는 마법사 속에 테밀시아는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슬픔이 뒤섞인 눈으로 불꽃 속의 남자를 보았다. 몰라 볼 리가 없지 않은가. 성벽에서의 애처롭게 상처를 숨기던 모습 이나, 자신에게 들킬까 마법을 시전하지 못하고 고뇌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페르…….’ 사라져 간다. 썩은 혈향도 고통스런 육신도 한 맺힌 원혼만을 남겨두고 모두가 사라져 간 다. 그 속에서 무하는 위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나무 기둥 저 위로 세 명 이 웃고 있다. 죽음이란 이 얼마나 달콤한 마법인가.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모두 추억이라는 상자에 보관되어 그리움이라는 열쇠로 열린다. 모두가 시간이라는 풍화작용을 걸쳐 미화되고, 눈 물로서 그려진다. 파크다 선배, 친절하신 분. 어째서 저분이 여기에 계신걸가. 휴로버 신관님과 친했다는 것 을 알고 있었지만……. 기껏 집으로 초청해 주셨는데 결국 찾아뵙지 못했다. 아니, 초청받 았다는 사실자체를 쭈욱 잊고 있었다. 피어나는 미안함도 가식적인 것. 그토록 아무렇지 않게 기억 저편에 묻어버리지 않았던가. 휴로버 신관님, 자애로우신 분. 뭐든 말해보라며 말없이 위로해 주셨던 분. 그리고……이 상론을 펼치는 소울러를 슬픈 미소로서 지켜보셨던 분. 이분은 그저 소울러를, 파크다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불가능한 이상에 빠져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 리는 위태한 그들을……. 그리고 소울러. 그는 뭐라고 말했던가. 적이 되는 거냐며 슬퍼하던 녀석은 마지막에 뭐라 고 말했던가. 결국 나무 기둥은 쓰러지고 그들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무하가 앞으로 손을 뻗자 떨 어지던 속도가 점점 느려지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슬펐다. 무엇이 슬픈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도 슬펐다. 그리 친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얼마 전에 재회하기 전까지는 기억 저편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죽지 않았다면 형님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을 하며 한편으 로는 안도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슬픈 건지도 모른다. 그의 슬픔에 공명하는 구슬픈 멜로디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것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멜로 디. 그것은 사라지는 자를 배웅하는 멜로디. 타들어가는 시체들 위로 시린 푸른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멜로디가 퍼져나감에 따라, 빛 이 작고 밝게 고여 갔다. 그것은 곧 손에 잡힐 듯이 눈부시면서 그 윤곽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는 흐릿한 빛의 결정체로 변모해 애통하다는 듯 시체 위를 배회했다. 기괴하고도 기 괴한 그 모습에 결계 주위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지만 무 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화염에 막 먹히기 시작하는 세 명의 머리만을 보았다. 웃 음 맺힌 그것들이 순식간에 타들어간다. 무하는 울지 못했다.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격렬한 충격이 가슴을 때렸음에도 울 수 없었 다. 운다는 것은 저들을 모욕하는 것. 저들은 스스로의 바람대로 죽었다. 인간으로서 죽었 다. 마침내 그들의 머리 위에도 시리고 맑은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몸 안에서 토해져 나오듯 솟아난 그들의 빛의 결정체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하얀빛을 띄며 금방 육신에서 벗어났 다. 나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떠오르는 그것을 따라, 무하도 고개를 올렸다. 순간 격한 바람이 몰아쳤다. 강하지만 부드러운 그것은 무하의 몸을 감쌌다. 하얀 빛의 결 정체는 바람을 타듯 위로, 위로 올라갔다. 무하의 고개도 위로, 위로 올려졌다. 마치 그들 을 배웅하듯 무하의 두건이 풀리며, 그들을 따라 올라갔다. 은빛 머리카락이 붉은 화염 속 에서, 바람을 타고 짧게 흩날린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오직 하얀 빛의 결정체만을 본다. “그래……. 고맙다고 했다, 소울러는.” 그때였다. 자신의 죽은 몸뚱이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푸른 빛의 결정체가 순식간에 허공 을 덮으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따뜻한 바람에 감싸여 하얀 빛의 결정체를 쫓아 하늘로, 천 천히 높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 속에 무하가 있었다. 영원히 하늘만 향할 것 같았던 무하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다.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 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억누르며 애써 무덤덤하게 고개를 돌렸다. 빛의 결정체들이 하늘로 떠오르며 시야를 방해했지만, 그의 짙은 존재감을 가려낼 수는 없었 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못하듯이. 하늘로 역류하는 빛의 빗속에서 미안하고도 미안 하며, 그립고도 그리운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무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차마 입을 열수가 없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왔는데……. 불길은 계속해서 죽은 자들의 몸뚱이를 먹어치우고, 그 속에서 산자들은 엇갈리는 심정 속 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천천히 오른 손을 들어 심장 위에 가져다 댔다. 두근, 두근 뛰고 있는 이 심장은, 생명의 상징인 이것은 ‘페르노크’의 것.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이것은 서로에게 주고받는 가 장 정중한 인사 예법. 망토의 왼쪽 자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면서 한쪽 무릎을 꿇는다. 망 토를 넘긴 오른손으로 다시 왼쪽 가슴 위를 짚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이것은 황제에 게, 혹은 자신의 주인에게 하는 복종의 예법. 늘 가지고 다니는 은장도를 꺼내 그를 향해 내려놓는다. 그것은 진상의 자세. 리커버리와 힐링, 큐어가 부여 되어 있는 국보급 부여 아이템인 이것은 ‘페르노크’의 것. 부여는 무 하가 했다 해도, 본디 이것은 ‘페르노크’의 것. 부디 무사하시길. 무슨 일이 닥친다 해 도 형님만은 무사하시길. 염원을 담아 진상한다. 바라고 바라던 가족……이 역시 ‘페르노크’의 것. 하지만 녀석에게 넘겨주지 않아. 자신 이 가족이라 생각하는 테밀시아 형님께 동생을 돌려드리는 거다. 절대로 녀석에게 형님을 넘겨주는 게 아니다. “형님…….” 힘들게 꺼낸 한마디에 테밀시아가 웃는다. 슬픔도 안타까움도 접고 순수한 기쁨으로서 웃 는다. 겨우, 겨우 저 아이에게서 ‘형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야 겨우. “어려서부터 넌 나를 무서워했지.” 동생이 꺼낸 작은 칼을 보다가 다시 웃는다. “저 칼로 동급생을 해치려 했던 그때부터, 너는 변했다. 나를 좋아해 주었고 따라주었 고……소중하게 생각해 주었다. 그래, 겨우 나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느낌이었 지.” 천천히 걸음을 뗀다. 그가 딛는 곳은 붉고 푸른 화염의 밭. 그러나 죽은 자를 안식으로 밀 어 넣는 따뜻한 불꽃. 산자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네가 떠나고서야 생각해 냈다. 너는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었지만, 한번도 애칭으 로 나를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무하는 웃었다. 그것은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하는 ‘페르노크’가 아니다. ‘페르노크’에게 허락된 그것이 무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하늘 높이 솟구치는 바람이 둘을 계속 해서 감쌌고, 바람을 타고 오르는 푸른 빛의 결정체 도 그 뒤를 따라 그들을 감쌌다. 테밀시아는 무하가 내려놓은 은장도를 집어 들었다. 이 제 둘은 단 한걸음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테밀시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지. ‘너’에게 애칭의 허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상실증에 걸린 동생은 자신을 좋아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동생은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두려움도 배척심도 경계심 도 잊었기 때문에. 기억을 되찾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를 테밀이라 불러도 좋다, 페르.” 무하는 울었다. 겨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리 없이 오열했다. “테밀 형님…….” 소중히 입에 담고, 그 여운을 즐겨본다. 불을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칠 줄 몰랐지만, 그는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울고 웃으며 순수하게, 조금은 순진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신 에게 과분한 환희라 생각하면서도 솔직하게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 기쁘다. 이제 됐다. ‘자신’이 인정받았다. 가족에게, 하나뿐인 형에게. 그걸로 ‘무하’는 됐다. “저는…….” 저는 당신의 동생이지만, 당신의 동생은 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동생을 둘이나 뺏어간 저 를 용서해주시길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원하는 데로, 저로서는 속죄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뜻하는 데로……, “저는……!” 그때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며 열려는 무하의 입을 뒤에서 누군가가 틀어막았다. 부드럽지 만 굳은 강제력으로서 무하를 막은 그 손의 주인은, 무하를 자신에게로 잡아끈 뒤 말했 다. 무하에게 하는 말인지, 테밀시아에게 하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 신을 받드는 사제 를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독을 품은 껍데기처럼 달콤하게, 그 붉은 입술에 오싹하 리만치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며. “여기까지.” 바람을 타고 흐트러지는 그의 백금발이 아름답다. 적개심으로서 테밀시아를 노려보고 있 는 보라색 눈동자 역시 아름답다. 지옥 속에의 수라가 저러할까. 불꽃 속에서 당당하게 독 기를 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놀랍도록 관능적이다. 테밀시아는 놀란 얼굴로 그런 유시리안과 동생을 보았다. 무하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 에 유시리안이 그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다가오려 하는 테밀시아에게 짙은 거부감을 드 러내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허용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다시 한 걸음 물러났을 때, 둘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갔나?” 두 기운이 사라지자 골목길에 기대 불길 속을 구경하던, 소년에 가까운 모습의 청년이 몸 을 바로 했다. 그 얼굴 전연에 퍼진 천진한 미소와 적당히 섞인 냉소가 기이하게도 잘 어 울렸다. 밤하늘의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걷혀 불꽃을 품은 주홍빛 눈동자와 백옥의 피부가 찬연히 드러났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앞으로 뻗자, 미처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한 푸른 빛의 결정체가 조심 스레 다가와 나선을 그린다.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기며, 장난스레 킥킥 웃는다. “답답하도록 고지식한 형제의 모처럼의 재회인데 이정도 ‘무대’는 되어야지.” 약하게 떨어대는 빛의 결정체를 모처럼의 호의로 어루만져주자 하얗고 맑게 변해 위로 날 아올랐다. 그가 너무도 간단하게 해낸 지금 행동은 의심할거 없는 영혼의 정화. 그것은 오 직 죽음과 안식의 신의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나마 제 1기 마도를 끝으로 그 힘이 급격히 약해진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 것을. 훼오트라 아나. 유일하게 ‘수식’이 붙지 않은 절대신, 창세신을 받드는 대사제. 신의 화 신이라 불릴 정도의 끝 모를 그 능력은 경탄과 찬미의 대상이었지만, 그만큼 두려움의 대 상이기도 했다. 그 힘을 연약한 육신에 담아낸 대가일까. 그들은 언제나 25세를 넘지 못하 고 죽고 만다. “그러고 보니 저 결정체도 오랜만이군.” 언제나 천진한 미소로 위장하던 그가 씁쓸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 기분을 떨쳐내 듯 고개를 두어번 젓고 씨익 웃어 버린다. “자, 그럼.” 이층에 발코니를 만들어 놓은 식당 쪽을 웃음 띈 얼굴로 보며 발을 내딛었다. 그리곤 마지 막으로, 가볍게 하늘을 향해 손을 한번 까닥이더니 식당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꽤나 장난 기 넘치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가볼까.” 그 뒤로 빛의 향연을 일궈냈던 푸른 하늘에 빠른 속도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마침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빛의 결정체가 극적인 광경을 자아내며 모두 떠올랐을 때, 죽은 자의 몸뚱이가 모두 타버렸을 때 하늘에서 뚝뚝,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온몸을 얼리는 시린 빗방울 속에서 사람들은 무언가에게 사로잡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을 볼 수 있었다. 뼛조각마저 타버린 그 화염의 도가니 한 가운데에 고고히 서 있는 금안의 ‘지배자’를! 마치 그를 위해 내리는 것 마냥 빗방울이 거세게 그의 몸 을 식히는 속에서,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내려오는 빗방울을 환영 하듯이. 기적과 같은 그 장면에 다들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랬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수천의 애통 한 영혼과 썩어가는 육신이 빚어낸 서글픈 기적이었다. 비록 눈물을 감추기 위해 빗속에 얼굴을 씻은 진실은 깊이 파묻혀 절대 들어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기적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적은 다른 곳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뮤에르님?” 아직 어리고 작은 소년. 그러나 카르민 계층의 한 기둥을 담당하는 권력자. 언제나 냉철했 던 그의 눈에 그리움이 감돌고 있음을 발견한 호마로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 었다. 물론 사뮤에르의 어린 소년다운 맑음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타인의 앞에 서는 늘 철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저토록 흥분하여 홍조를 이루는 모습 은 그 역시 보지 못했다. 1년 전 오기로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 붙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호마로에게 마음에 든다며 자신에게 오라고 했던 그때의 사뮤에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정말 순진한 모습이다. 부관의 혼란은 어쨌거나 사뮤에르는 사라지는 불꽃을 계속 주시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떻 게 잊을 수 있을까.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은인을. 지금의 수하들을 들일 수 있었던 강 단을 알려준 그 은인을. 본격적으로 황위 계승권을 두고 경쟁하기 위해 황성으로 가다 뜻하지 않게 본 그의 모습 은 여전했다. 아니, 조금 컸을까? 두건 밑으로 보았던 그는 매우 젊어보였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황성으로 가는 것을 조금 미루고 무하를 계속 지켜 본 것은, 자신을 지켜주고 계실 아버지 의 가호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보게 되었으니까. 황제에게 대하듯 테밀시아에게 예를 갖추는 무하의 모습을. 그 둘의 모습은 매우 잘 어울렸다. 테밀시아처럼 하늘을 올려보았다. 호마로가 옆에서 감기 든다며 잔소리를 해댔지만 사뮤에 르는 짓궂게 웃으며 비를 맞았다. 그는 비가 싫었다. 하기의 비는 길고 지루하며, 거칠 다. 두렵도록 크고 우렁찬 천둥소리는 어린 그의 마음을 한없이 두렵게 했다. 그것은 결 국엔 추위를 몰고 왔고 몸이 약했던 사뮤에르는 늘 감기를 달고 살았다. 약하다고 비웃는 친척들의 악의를 못 본 척하며 서러움에 울음을 삼켜야 했다. 적어도 회색 고향에서 회색 열매를 먹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니, 회색 고향을 가는 길에 무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 다. 걱정하는 호마로에게는 미안하지만, 사뮤에르는 이제 이정도 비에 병에 걸리지 않는다. 그 때 이후로 몸도 마음도 강해졌다. 또 그때 이후로는 비가 좋아졌다. 그것은 변화를 가져온 다. 메말랐던 땅에 습기를 뿌리고, 무더운 대지를 식혀준다. 또한 사뮤에르 역시 변해갔 다. 빗물을 먹고 뿌리를 내리는 새싹처럼, 나날이 자라갔다. 깊이 숨을 들이 쉬어본다. 약간 벌어진 입속으로 차가운 빗물이 흘러들었다. 그에 따라 가 슴 한 쪽이 후련하게 쓸리는 느낌이다. 사뮤에르는 담백한 얼굴로 호마로를 돌아보았다. “황위 계승권은 포기한다.” “네?!” 사뮤에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때 무하에게 약속했다. 언젠가 그 은혜를 꼭 갚겠다고. 그러니 됐다, 이걸로……. 미친 듯이 환호하는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사뮤에르를 주시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오늘 사뮤에르가 황성으로 출발했다는 전갈을 받고 행동에 나섰던 그들이지만, 지금 사뮤 에르가 향하는 방향은 분명 가야다 가의 저택이다. “다음으로 미루는 걸까?” “글쎄.” 작은 체구의 소년과 성숙한 여인. 오누이치고는 생김새가 워낙 달라 연상연하 커플이 아닌 가 싶기도 한 두 사람은 묘하게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조소에 가까운 장난기 어린 미소와 싸늘한 눈빛이나 몸에 흐르는 여유와는 달리 빈틈없는 행동거지가 그러했다. 둘은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인파가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사뮤에르가 본격적인 행동 을 펼치기 전에 제거하라는 명령은 받았지만, 마찬가지로 황성에 들어서지 않는다면 내버 려 두라는 주의도 받았다. “루카도 사람을 너무 부려먹는다니까. 그것도 단서를 얼마나 많이 붙여가면서 부려먹는 지 골치 아파.” “그래?” 여자는 투정부리듯 소년을 껴안았다. “그래? ……가 아니라고! 휜이 잘 좀 말해줘. 애인도 만나고 싶고 쇼핑도 하고 싶은데, 루카 때문에 통 시간이 안 나잖아.” “나라고 무슨 힘이 있나.” “루카는 그래도 휜 말은 잘 듣잖아. 응?” 휜은 고소했다. 루카다가 말을 잘 듣는다니, 어딜 봐서 그런가? 루카다가 말을 듣는 상대 라면 테밀시아 정도일 것이다. “아차! 루카가 이제 자기는 휜 꺼니까, 나보고도 휜을 주인으로 모시랬는데…….” 멈칫 손을 떼며 여자, 세가가 휜의 눈치를 살폈다. 루카다는 평소에는 미소 띈 얼굴로 농 담도 잘 받아주고 장난도 잘 치는 만만한 녀석이지만 한번 작심하면 무섭도록 집요해진 다. 세가 역시 그런 루카다의 성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입으로야 투덜대도 성실히 명 을 받아 처리해왔다. 어쨌거나 루카다는 세가의 주인인 것이다. 그 어린 날 노예상에게 팔 릴 뻔한 자신을 구해준 그날부터. 그런 루카다가 자신의 수하이면서 자신에게 말을 막하는 세가는 용납하지만, 휜에게 함부 로 구는 것을 금했다. 그가 일단 명령하면 세가는 복종해야 한다. 그녀는 루카다가 화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루카한테는 말 안할 테니까 걱정 마.” 휜이 킥킥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안심하며 숨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는 멀찍이 멀어진 사뮤에르의 뒷모습을 보며 휜은 팔짱을 꼈다. “아예 마음을 고쳐먹은 쪽이 저 녀석에게 좋을 텐데.” “죽기 싫으면……말이지?” 독이 발라진 단검을 깨끗이 닦아내며 세가가 살기 띈 미소를 지었다. “아아.” 휜 역시 단검을 닦아내며 긍정했다. 루카다가 옆에 있었다면, 사뮤에르가 죽임을 당함으로 써 생길 파동을 하나하나 나열해가며, 왜 그가 얌전히 포기하는 편이 좋은가에 대해 상세 히 설명해줄 테지만, 둘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적은 죽인다, 혹은 죽이라 명 령 받은 자는 죽인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휜은 단검을 집어넣으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저 녀석, 울고 있었어.” 하츠민을 인간대접을 해주던 이상한 귀족 기사, 그 명성과는 달리 형처럼 다정하기만 한 녀석. 그리고 휜의 마스터. 잘못 본 게 아니다. 그의 주인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빗속에 씻겨냈다. 알리고 싶 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침묵하자. 주인이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해주자.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 벗은 외친다. "나는 미쳤어~!" ;ㅁ; . . . .... 어서 제정신을 차려야해....(웅얼웅얼) 비좁은 골목길. 두 명만 나란히 걸어도 꽉 차버릴 것 같은 그 터널에 두 인영이 있었다. 서로를 바로 코앞에서 마주본 채, 아니 노려본 채 고집스럽게 비에 젖어 서있다. 적의나 살기가 없음에도 그 팽팽한 기운에 쥐마저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한 골목길이 무겁게 조용하다. 흡사 눈을 가리고 외줄을 타는 광대의 심정처럼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긴장감이 빗물 사이로 뚝뚝 흐른다. 압사할 것 같은 침묵과 미쳐버릴 것 같은 긴장감을 깬 것은,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있던 남자였다. 차가운 빗속에서도 붉기만 한 입술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거대한 분노를 실고 빠져나온다. 평소 그의 깊고 고요하기만 하던 녹안이 화로 일그러져 있다. “무슨 짓이야?” “내가 할 말이야.” 대답하는 목소리도 냉기가 똑똑 떨어지는 것이, 평소 그 다정하기만 하던 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것이 그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무하가 알 리 없었다. “네가 상관 할 바가 아니야!” “내가 상관 하지 않으면 누가 하지?” 결국 언성을 높이며 서로를 노려본다. 타인은 끼어들 수 없다, 바로 자기 자신이 결심한 일인 것이다. 이제야 겨우 정했는데 방해받았다. 그 무엇보다도, 그때의 용기는 사라지고 치졸한 두려움만이 남아버린 자신이 비참하다. 지독한 허무함과 그것을 덮고도 남을 분노가 가슴을 뒤흔든다. 방해받았다. 그것을 유시리안이 했다는 것에 더욱 화가 난다. 어째서! “이건 내 일이야.” “내 일이기도 해.” “유시리안!” 자신의 풀 네임을 부르는 무하를 매섭게 노려보며 유시리안이 물었다. 여전히 냉기 어린 음성이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지, 펠?” “……!” 무슨 소리냐고 반박할 수 없었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다시 굳게 입을 다물어 버리는 무하를 유시리안은 추궁 어린 눈동자로 계속 노려보았다. 그 집요한 시선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초조함을 애써 떨치며 몸을 돌렸다. “가겠어.” 유시리안이 얼른 손목을 잡아챘다. “어딜 간다는 거야?” “형님께.” “가서 어쩌려고? 전 실은 ‘페르노크’가 아닙니다. 당신을 기만했고 당신의 소중한 것을 앗아갔습니다. 어쩌길 바라십니까? 사라져 드릴까요? 영문도 모르는 네 형을 혼란에 빠져놓고, 자신의 고민을 남에게 맡겨버리고 그것이 속죄인 것 마냥 모두를 기만할 셈이야?” 옳은 말이기에 아팠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혀들었다. 잡힌 손목이 욱씬거린다. 화가 난 유시리안이 힘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하는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누르며 비명 치듯 외쳤다. “비겁한건 나쁜 게 아니라고 했잖아!” 유시리안이 멈칫 한 사이에 격하게 손을 뿌리친 무하는 급히 걸음을 놀렸다. 온 몸이 아팠다. 차가운 비가 예리한 비수가 되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토할 것만 같다. 쏟아져 내리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쌓여 토할 것만 같았다. 힘들게 가슴을 부여잡으며 무하는 고집스레 한발 한발 내딛었다. 저 더러운 땅 속에서 검은 손이 뻗어 나와 발목을 붙잡는 것 같다. 한 걸음 한걸음이 너무 힘들다. “그래서 만족해?” 유시리안이 물어왔다.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떨고 만다. ……토할 것만 같다. “만족해.” 거칠게 몸이 뒤로 돌려진다. 격하게 벽에 부딪쳐 진다. 큭, 신음을 흘리는 무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유시리안이 한치 앞에서 물었다. “그럼 왜 나를 붙잡았어?” “…….” 다시 그 길고 좁은 골목길에 침묵이 깔린다. 그러나 전처럼 서로를 노려보고 있지는 않았다. 무하는 애써 유시리안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 무하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그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맞췄다. “그때 식당에서 왜 나를 붙잡았어?” 무하의 녹안이 힘없이 떨렸다. 유시리안은 늘 가차 없다. 언제나 무서울 정도로 분명하고 날카롭고 예리하다. “그 ‘동생’에게 다정한 형이 상처 입는 게 두려웠던 거지? 그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올지 두려웠던 거지? 그로 인해 사라지는 게 두려웠던 거지?” 부정하고 싶었다. 몇 번이고 입은 열렸지만 힘없이 달싹이기만 할뿐이다. 토할 것만 같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거칠게 잡혀 있는 멱살에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아니, 몸에 힘이 돌지 않았다. 그저 토할 것만 같았다. 붙잡고 있는 멱살을 좀더 끌어당기며 이마를 맞댄다. 오만한 보라색이 어지럽게 눈앞에서 일렁였다. “그래서 나를 붙잡은 거잖아.” 결국 토하고 말았다. 끝없이 쏟아질 것만 같은 토사물. 힘들게 꾹꾹 눌러온 그것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시야를 방해할 정도의 촘촘한 비속에서도 그 낙루(落淚)는 고아했다. 기어이 무하로 하여금 그 지독한 애통을 토해내게 한 유시리안은 그제야 굳게 잡고 있던 멱살을 풀었다. 힘없이 쓰러지는 무하의 몸을 끌어안아 지탱해 주며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은 너무 서툴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서툴다. 언제 웃어야 하는지, 언제 울어야 하는지 모른다. 신물 나도록 어리석은 사람, 짜증나도록 멍청한 사람, 질리도록 고지식한 사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영원. “눈물은 참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야. 봐. 이렇게 쌓여있었잖아? 울고 싶으면 울어, 웃고 싶을 때만 웃어. 누가 뭐라고 하면 차버려. 결혼식에서 서럽게 울어봐, 장례식에서 신나게 웃어봐. 누가 뭐라고 하면 패버려. 옆에서 같이 차주고, 패줄게.” 서럽게 우는 무하의 어깨를 바싹 끌어안으며 유시리안은 계속 속삭였다. “육체가 어쨌다는 거야? 피가 어쨌다는 거야? 혈연이 그렇게 대단해? 나를 낳은 수컷은 나를 질시했고, 나를 낳은 암컷은 나를 욕망했어. 그래서 나를 죽이려 했고, 그래서 나를 범하려 했어. 그게 어쨌다는 거야? 많은 이들이 나를 질시하고 욕망해. 낳아준 녀석들이라고 별거 있어? 내 아버지는 이카뿐이야. 이카의 아들도 나뿐이야. 왜 그렇게 연연해? 가장 괴로운 건 펠인데, 어째서 남을 생각해? 자기만 아껴도 모자를 판에 왜 남을 배려해?” 무하의 어깨가 약하게 들썩였다. 작게 쿡쿡, 웃는 소리가 울렸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이렇게 면박을 준다. “넌 너무 제멋대로야.” “말했잖아. 난 그게 매력이라니까?” 가슴을 약하게 밀며 혼자 서려는 무하를 계속 품에 가두며 경고했다. “다신 그런 짓 하지 마. 말했지? 두 번은 없어. 고작 이렇게 헤어지려고 찾아다닌 게 아니야.” 무하가 가볍게 한숨을 쉬는 게 느껴졌다. 다시 한번 혼자 서려 했지만 유시리안은 놓아주지 않았다. 무하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살 따위를 하는 녀석이 너보다 낫다고 자신할 수 있어? 바로 곁에서 감싸주는 손길도 못 느끼고 혼자 불행에 허우적거리는 녀석이 너보다 살 가치가 있다고 말 할 수 있어? 테밀시아라는 존재가 자신이 살아갈 이유는 되지 못한다 생각한 그 녀석에게 사랑하는 형님을 양보할 수 있어? 그 녀석이 너보다 형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무하는 ‘페르노크’를 보며 고작 이런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 뺨을 때리며 헛소리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상관없어.” “정말로?” 무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 몸은 녀석의 것이야. 녀석이 달라고 한다면 난 줄 수밖에 없어. 그리고 형님도…….” “만약 이카에게 아들이 있어서 나를 밀어내려 한다면 난 녀석을 죽이고서라도 내 자리를 지킬 거야. 녀석보다 이카를 아버지로서 사랑할 자신이 있으니까. 나보다 이카를 아버지라 따르고 사랑할 존재 따윈 없으니까. 상처만 주는 것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어? 한 남자의 정자로 수정되어 한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형제야? 그렇다면 너는 왜 카한세올을 형이라 부르지?” “…….” 순간 말이 막혔다. “왜 카한세올을 형이라 부르는 건 망설임이 없어? 죽은 자이기에 자책의 대상만 되는 거야? 테밀시아를 보며 죄책감에, 그리고 그리움에 우는 건 그가 살아 있기 때문이야?”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시리안은 부드럽게 무하를 밀어, 스스로 서게 했다. 그리고 그 눈을 보며 진심어린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테밀시아를 죽이겠어. 그를 죽였다는 죄책감은 내가 느낄 테니, 너는 나를 말리지 못했다는 자책만 해. 그로 인해 네가 평생 괴로워하고 찾지 못한 해답 때문에 고뇌한다 해도, 이런 식으로 내 앞에서 사라지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 살기마저 느껴지는 유시리안의 모습에 무하는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미처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유시리안은 웃었다. 진심으로, 마음으로부터 웃었다. 어떤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광기에 젖은 듯 보이기도 했고 살기에 미친 듯 보이기도 했지만 어딘지 다정하고 부드럽기도 했다. 정말 알 수 없었다. “말했지?” 점차 약해지는 빗줄기에 들려오는 유시리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다. “나는 제멋대로라고.” 이층으로 발코니가 나 있는 식당 안이 무척이나 황량하다. 갑자기 들어온 소년이 식당을 하루 사버린 것이다. 일년은 족히 지낼만한 보석을 가볍게 던지는 모습에 완전히 홀려버린 주인장은 미친 듯이 손님들을 내쫓았고, 나중에는 셋 남은 손님이 주문한 막대한 음식량을 만들기 위해 주방에 틀어박혀버렸다. 둘 있는 종업원은 한 손님이 주문한 술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광장 쪽의 환성만이 이질적으로 침범하고 있었다. 오늘 산 책을 읽고 있는 백금발의 미남은 이카미렌, 주문한 술이 도착할 때까지 다른 술로 입을 축이고 있는 흑청발의 미남은 락샤사. 그리고 그들이 앉은 테이블의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연신 천진한 웃음을 흘려대는 저 흑발의 소년은……. “즐거우십니까?” “이제 5년 후면 죽을 몸이니 즐겨보려고 애는 쓰고 있어요.” 잠시 책을 내리며 묻는 이카미렌의 질문에 경쾌하게 답하는 저 흑발의 소년은 유일한 주홍빛 눈동자의 소유자. 고귀한 자, 훼오트라 아나. 창세신의 신전에 꼭꼭 숨겨져 특정 행사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 신비로운 분. 뭐, 그와 잠시라도 부딪긴 사람은 호칭이 아깝다며 혀를 차지만 말이다. 어찌 들으면 질문한 자가 미안해지는 내용이건만, 저토록 밝게 말하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이카미렌은 어두운 눈빛으로 훼오트라 아나의 주홍빛 눈동자를 마주 보기만 했을 뿐이다. 뜻밖의 그 밝음에 경망하다 눈을 찌푸리지도 않았고, 뜻밖의 털털함에 뭘 모르는 자들과 같이 감격하지도 않았다. 어둡고, 한편으론 슬픈 눈으로 그저 바라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 어색하다면 어색할 수도 있는 그 자리에서 락샤사는 술을 마셨다. 이카미렌의 시선이 걷어지자 훼오트라 아나는 그런 락샤사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 그가 짓던 천진함도 가끔 짓던 냉랭함도 아닌, 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었지만 그것을 본 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도 없었다. “많이 늦네요. 비가 많이 내리는데 바로 오지 않고.” 창밖을 보며 턱을 괴고 웅얼대는 훼오트라 아나에게 이카미렌이 페이지를 넘기며 짧게 답해주었다. “할 말이 많을 테니까요.” “아버지다 이거죠?” “물론입니다.” 양반은 못 되는 걸까? 문이 열리며 비에 흠뻑 젖은 두 남자가 들어왔다. 날아가 버린 두건 덕에 드러난 은발을 가리기 위해, 마찬가지로 무하를 빼냈을 때 띄었을 백금발을 가리기 위해 둘 다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안에 있는 존재 중 둘을 못 알아 볼 존재는 없었다. “샤.” 망토를 벗어내며 유시리안이 락샤사의 이름을 불렀다. 부름에 응해 고개를 돌린 그에게 유시리안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 모습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락샤사는 손을 허공에 가볍게 흔들었다. 옷과 몸에 덕지덕지 들러붙었던 물기가 순식간에 튕겨져 허공을 배회하다 일순간에 뭉쳐 문 밖으로 날라 가 흩어졌다. 어지간한 이라면 입을 떡 벌리고 놀랐을 광경이었지만 이중에는 그 정도에 놀랄 이는 없었다. “아, 이카미렌님.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무하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다가왔다. 그 뒤로 유시리안이 웃으며 따라왔다. 테이블에 가까이 와서야 또 다른 손님을 발견한 둘은 의아한 눈으로 잠시 그를 보았다가 이카미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황을 묻는 눈빛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하는 순수하게 누구냐는 눈빛이었고, 유시리안은 왜 저 잡것이 여기 와 있냐는 눈빛이었지만 말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 둘의 기색을 눈치 챈 훼오트라 아나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천진한 미소로 가득한 그 모습이 가식으로 느껴져 유시리안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지만 무하는 별생각 없이 마주 인사했다. 둘이 의자에 앉자 훼오트라 아나는 생글 웃으며 발코니 너머의 광장 쪽을 흘낏 봤다. 무하는 자신이 태운 광장의 모습을 씁쓸한 눈으로 보다가 이내 떨쳐내고 의자에 편히 기댔다. 이번 마법은 성공했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했다면, 테밀시아 형님조차 타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형님은 어떻게 그 불길을 걸어 들어오셨을까? 산자는 태우지 않는 불꽃이라 하지만, 실제 손을 대보지 않으면 그것을 알리 없지 않은가? 두건이 날라 가버려 훤히 들어난 은발 밑으로 녹안이 고민에 잠겨 있는 모습을 감상하던 유시리안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물 잔을 두 손으로 쥐고 있는 훼오트라 아나가 그를 보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그런 훼오트라 아나를 마주 보았다. 이 세상일에 무지한 무하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유시리안은 눈앞의 소년이 가지는 주홍빛 눈동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고귀한 자, 훼오트라 아나. 창세신의 화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신비로운 존재. 그러나 유시리안에게는 이카미렌이 눈짓하지 않았다면 절대 자리를 함께 않은 꺼림칙한 존재였다. 거슬렸다, 저 미소가. “실은 두 분께 개인적인 의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런 유시리안의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훼오트라 아나는 생글 웃으며 용건을 꺼냈다. 관심을 가지는 무하에게 유시리안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리고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즉석에서 대답했다. “거절이야.” “락아타로 가시면 알아서 접촉해 오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분들을 도와주세요. 유일하게 사태를 잘 파악하는 분들이니까 개인적으로나마 도와드리고 싶거든요.” “거절한다고 했어.” 찬바람이 부는 대답에도 훼오트라 아나는 생글 웃기만 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구경 잘했어요. 페르노크 씨.” “……!” 흠칫한 무하가 훼오트라 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발코니에 서서 여전히 광장을 꽉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경솔하셨네요. 형님이 꽤나 곤란해지겠는걸요?” “무슨…….” 검을 쥐려는 유시리안의 손 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이카미렌이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카미렌은 모호한 눈으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훼오트라 아나는 무하를 돌아보며 짧게 답해주고 있었다. “시체를 수습하려는 자는 같은 반역도로 본다. ……모르신건 아니죠?” “협박하시는 겁니까?” 딱딱한 어조로 무하가 되묻자 훼오트라 아나는 집개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천진한 얼굴로 웃었다. “협상이죠.” 그 청결한 방안에는 병실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발소리는 물론 숨소리도 조심해야 할 만 큼 조용한 그 안에 가느다란 숨소리가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얇은 비단이 장막을 내리 고 있는 침대에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그 하얀 커튼 사이로, 침대에 누워있는 이의 모습 이 슬쩍 엿보였다. 새하얀 베개에 흐트러져 있는 남색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띈다. 창백한 그의 얼굴로 붉은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그리운 열기에 끌려 떠진 청년의 몽롱한 눈동자에 작은 요정과 같은 연인이 박혔다. 걱정으로 가득한 어두운 얼굴이 사랑스럽다. “불칸.” 목소리가 갈라지는 폼 새가 꽤 오래 의식을 잃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들어도 듣기 싫 을 정도로 퍽퍽한 목소리건만 그의 연인은 무엇이 그리도 반갑고 기쁜지 잠자리 날개를 파 드득거리며 웃는다. “깼어? 바보.” 말을 하는 게 힘들어 피식 웃어보이자, 순간 화염에 휩쓸려 성인의 여성으로 변하여 그 섬 세한 손으로 이마를 쓸어줄며 괜히 툴툴거린다. “이번 맹약자는 정말 바보라니까! 바보에는 약도 없다는데 어쩜 좋아.” “걱정했어?” “바보 따위를 내가 왜 걱정하니?” 그러면서도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은 멈추지 않는다. 눈을 감고 그 애정 어 린 손길을 느끼다가 마른침을 아프게 몇 번 삼키고 물었다. “며칠이나……?” “삼일.” “형님은?” “여태 있다가 광장에 일이 생겼다고 누가 불러서 갔어.” “광장?” “나도 몰라. 나중에 형 오면 물어봐. 아님 카산 시켜서 알아보던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올리고 진한 남색 눈동자를 들어내는 연인이 너무 밉다. 있는 대로 걱정 시키고는 기껏 깨어나더니 돌아가는 상황이나 묻는 저 태연함이 밉다. 깨면 한대 때 려 주려고 했는데 말하는 것도 힘겨워 해서 그것도 못하게 하는 게 밉다. “그렇게 죽으려고 발악하지 않아도, 백년도 안돼 죽잖아. 바보.” “난 바보라 죽는 법도 몰라.” 힘들게 단어를 뱉으면서 불칸을 끌어 앉았다. 따뜻한 온기에 고통이 흡수되는 듯하다. 예 전에는 왜소한 그가 불칸에게 안겼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품에 안을 수 있다. 향기로운 체 취에 흠뻑 취해 부드러운 살갗을 쓰다듬으며 수려한 얼굴에 입을 맞춘다. “그러니까 괜찮아.” “말을 잘해.” 여전히 툴툴대는 것을 보아 한동안은 얌전히 말 듣는 게 이로울 듯싶다. 쿡쿡 웃다가 물었 다. “신관은?” “옆방 있어. 아침에 신성마법을 시전 했지. 요즘은 한번에 이정도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 는 신관은 드물잖아.” “한번 더 받는 게 좋겠어.” 좀더 누워서 쉬고 싶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할 때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걸린 줄을 잡아당기기 위해 손을 뻗는 동안, 불칸은 다시 작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평소라 면 바로 목걸이로 돌아갔을 그녀를 알기에, 가끔은 아파도 괜찮겠다는 괘씸한 생각을 해보 는 요크노민이었다. 환호성을 뒤로하고 테밀시아는 요크노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머릿속은 온통 헝클어져 엉망진창인데도 말을 몰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당당하기만 했다. 습관이란 무서 운 것이다. 하지만 그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을 만큼 뮤비라는 만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침묵을 지 키며 말을 모는 테밀시아를 쫓으며 그도 함께 침묵했다. 다른 이는 몰라도 그는 알고 있었 다. 그 두건의 남자가 누군지……. 비록 빛의 향연이 사위를 덮어, 아주 잠깐 그 모습을 보았을 뿐이지만 테밀시아의 모습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가 아는 바로는, 테밀시아를 저토록 동요시킬 수 있는 존재는 그의 아버지와 두 동생뿐이었다. 그 중 아버지는 정처 없 는 여행 중이고 한 동생은 죽었다. 그러면 남은 이는 단 한명뿐. 위를 올려보니 비가 걷힌 하늘의 틈새로 푸른빛이 보였다. 차라리 비가 계속 왔으면 좋았 을 것을……. 뮤비라는 탄식해 보았다. 최소한 비속에서만큼은 울 수 있을 텐데. 여전히 강한 모습으로, 오만하게 하늘을 꼿꼿이 보며 통탄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텐데. 자하라 저택의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갈리며 주인과 손님을 받아들였다. “노민은 정신을 차렸을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이한 음성으로 테밀시아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여태 침묵하 여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었던 것을 미안해하고 있지 않을까? 뮤비라는 살짝 웃었다. 자신 앞에서까지 의연하게 보이려는 그가 슬퍼서, 자신을 안심시켜주고 싶어 하는 그의 배려가 눈에 보여서 그가 바라는 대로 웃었다. 요크노민의 처소로는 자객이 많이 와 안심이 안 돼 다른 저택에 방을 마련했다. 충직한 하 인, 아레와 테사라만이 저택에서 주인의 수발을 들기로 했다. 환자가 있기 때문인지, 사람 이 별로 없어서인지 너무도 조용한 복도에 그들의 발소리만이 뚜벅뚜벅, 거침없이 강하게 울렸다. 명색이 집주인인지라 앞장서 안내하던 뮤비라가 갑자기 멈춰 섰다. 뒤따라 걷던 테밀시아 가 바로 뒤에 멈춰 서서 의아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았지만 뮤비라는 상당히 긴 시간 을 침묵하며 서 있었다. “뮤비라?” 테밀시아의 부름에 응하듯, 딱딱하게 서 있던 뮤비라가 뒤를 돌았다. 한 보의 차이를 두 고 뮤비라는 테밀시아의 눈을 마주보았다. 약간 붉어져 있는 테밀시아의 눈시울이 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테밀시아님.” “……?” 팔을 뻗어 테밀시아의 양 어깨를 잡은 뮤비라는 다음 순간 강하게 감쌌다. 그리고 속삭였 다. “페르노크님은 테밀시아님을 좋아하고 계세요. 가족인걸요.” 테밀시아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뮤비라 역시 장신이었다. 테밀시아는 그의 어깨에 편히 얼 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뮤비라는 이런 식으로 테밀시아를 안정시키곤 했다. 그러고 보 면 2년 전, 페르노크를 데리러 이므르에 갔을 때도 그랬다. 건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은 발의 소년을 보며 불안해하는 자신을 뮤비라는 이렇게 감싸주었다. 어려서 함께 놀러 다니 며 야영을 했을 때, 서로의 체온에 묻혀 평안하게 잠을 잤던 그때의 추억은 아직도 영향력 이 컸다. 자신을 피하고, 말을 걸 때마다 흠칫 놀라며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한 페르노크를 보며 상 처를 입던 테밀시아를 뮤비라는 항상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것에 얼마나 위안을 받았던가. 익숙한 뮤비라의 체온에 안정을 구하며 테밀시아는 웃었다. “페르가 나를 형이라 불렀어, 뮤비라.” “당연한 일이에요.” “나를 테밀 형이라 불렀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괜찮아.”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작은 검의 표면을 엄지로 쓰다듬어보며 테밀시아는 다시 웃었다. “괜찮아.” 반역자들의 시체를 수습하려는 자 역시 반역자로 본다. 그 선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 가가 반역자들의 시체를 모두 태워버렸다. 그리고 텔레포트로 도망을 쳤다. 그로 인해 수 도의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에도 흠칫 떨어야 했다. 기세가 흉흉한 귀족들이 언제 어떤 빌 미로 자신들을 반역자로 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직되어 있던 수도가 일순간에 열기로 들끓었다. 황위 계승권자 중 한명인, 사뮤 에르가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것은 욤 최초의 금안의 황제의 탄생을 뜻했다! 전쟁은 끝났다 하나, 욤과 락아타의 국경은 여전히 불안정한 기운이 돌았다. 패전한 락아 타에게 황제가 과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그것을 락아타가 아직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전 제국이 들고 일어날 정도의 대규모 전투도 아니었을 뿐더러, 지휘관의 항복으로 인 한 패배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식민지마냥 취급하고 있는 욤의 태도에 락아타는 반발을 품 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수도에서 반역모의로 인해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락아타에서는 이 혼란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곳곳에서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국경지대에 전력을 배치했 다. 황제 자리를 두고 내전이 일어날게 뻔하다 판단한 것이다. 국경지대에 살고 있던 백성들이 불안에 떨 때, 희소식이 들려왔다. 간만에 불안에서 벗어 나 환호성을 지를 희소식. 금안의 ‘지배자’가 다음 황제로 확정됐다는 소식이었다. 뿐 만 아니었다. 뜻밖에 금방 황제가 정해지자, 락아타에서도 주춤하며 병력을 회수하기 시작 했다. 그것만큼 외각에 사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것은 없었다. 그 와중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수배서가 전국에 배보되었다. 반역자의 시체를 태 운 자의 수배서였다. 그런 것은 귀족들이나 관심을 가질까? 애당초 살벌한 수도를 유유히 벗어난 수배자를 평범한 백성들이 언감생심 무슨 수로 붙잡겠는가. 게다가 저 추상적인 모 습의 전단서 라니. 달랑 검은 두건을 뒤집어 쓴 몽타주 하나가 덩그러니……. 터무니없으 리만치 높은 액수가 우스울 정도다. 어쨌거나 귀족들의 성화로 각 성벽마다 덕지덕지 붙이게 된 현상 수배서 옆으로 관병들이 지루한 얼굴로 사람들을 검문하게 되었다. 솔직히 검문도 뭔가 단서가 있어야 하는 것인 데, 그들에게 주어진 단서는 달랑 두건 하나니 검문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어도단이었다. 그리고 그 허술한 경비를 뚫고 바퀴를 돌리고 있는 마차가 하나 있었다. 창세신을 받드는 신전의 마크가 새겨진 마차였다. 황실과 신앙이 분리되던 그때부터, 신전은 세속적 경계 를 떠난, 별도의 치외법권을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검문 따위를 운운하며 멈춰 세우려 하지 않았다. 하물며 위세당당한 창세신의 신전인 데야. “마음에 안 들어.” 인상을 찌푸리며 창밖을 노려보고 있던 남자가 검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백금발 의 수려한 미남이다. 그 앞에서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고 편안하게 쉬고 있던 남자가 쿡 쿡 웃었다. 관병들이 봤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쯤 검문을 했을 검은 두건의 남자였 다. “그쯤 해둬. 의뢰비도 두둑이 받았고, 검문 피할 수 있게 마차도 빌려줬고……. 이왕 이 렇게 된 거 마음 쓰지 말자.” “흐응? 검문?” 말꼬리를 비틀며 백금발의 미남, 유시리안은 무하와 마찬가지로 쿠션 속에 몸을 묻으며 팔 짱을 꼈다. 그리고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 하냐는 눈빛으로 무하를 바라보았다. 그 노골적 인 눈빛에 무하는 다시 쿡쿡 웃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생각 할리 있겠는가. 저 허술하다 못해 웃음이 나는 검문은 피할 가치조차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훼오트라 아나씩이나 되는 존재가 나서서 테밀시아의 동생이 이 사건의 범인이 다, 라고 말해버리면 끝장이잖아?” 나중에야 눈앞의 존재가 훼오트라 아나임을 듣게 된 무하는 두말 않고 그 의뢰를 받아들였 다. 듣기 전까지는 떠오르지 못했지만 예전에 책에서 훼오트라 아나가 어떤 존재인지를 읽 었던 적이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영원불멸한 훼오트라 아나. 수천, 수만년을 이어온 고귀 한 자. 다른 이라면 오르세만 가의 권위로 묵살시킬 수 있을 테지만 상대가 훼오트라 아나라면 불 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훼오트라 아나에게는 그만한 힘과 권위, 그리고 신뢰가 있다. 툴툴 대는 유시리안에게 미안하지만, 이번만 참아달라고 부탁하며 훼오트라 아나가 준비해준 마 차에 올라탔다. 이카미렌은 묘한 미소로 그들을 배웅해주었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응?” 투덜거림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유시리안이 관심을 가지고 되묻자 무하는 고맙다는 의미 로 보일 듯 말 듯 약하게 목례를 했다. 타인에게 굽히는 것을 싫어하는 유시리안임을 알기 에 내심 미안했던 것이다. 계속되는 투덜거림이 그 미안함을 많이 가셔주었지만. 아마 그 것을 노리고 계속 툴툴댔던 것이겠지. 그 짧은 목례를 못 본 척 유시리안은 재차 물었다. “뭐가 궁금한데?” “훼오트라 아나의 이름이 뭐야?” “…….” 말문이 막힌 유시리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약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훼오트라 아나는 훼오트라 아나일 뿐……. 선대 훼오트라 아나가 죽으 면 대략 열셋 정도 되는 훼오트라 아나가 나타난다. 부모가 누군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디서 자랐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뛰어난 신성력을 지녔 다. 바로 대신관에 임명되고, 신전 안에서 귀중히 모셔지다가 짧게는 십년, 길게는 이십 년 정도의 시간을 살다 죽어버리는 것이다. “훼오트라 아나는 훼오트라 아나. 단지 그뿐이다.” 고민하는 유시리안과 기다리는 무하에게 의외의 인물, 락샤사가 답했다. 늘 무심했던 그 얼굴이 어쩐지 차갑게 느껴졌다. 아니, 어딘지 우울해 보였다. “어째서?” “…….” 무하가 다시 물었지만 락샤사는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때문 에 더 묻지는 못했지만 무하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락샤사를 가만히 보았다. 훼오트라 아나는 ‘고귀한 자’라는 의미라고 들었다. 페르노크는 ‘사랑받는 자’, 테밀 시아는 ‘지배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졌다고도 들었다. 하지만 다르다. 페르노크나 테밀 시아와는 달리 훼오트라 아나는 ‘존재’라는 의미의 ‘아나’를 그대로 붙이고 있다. 그 것은 이름이 아닌 단순한 호칭임을 뜻했다. “이름이 없는 건가.” 낮게 중얼거려 보는 무하였다. 훼오트라 아나……그것은 어딘지 슬픈 느낌이 들었다. 락아타의 국경은 욤과 마찬가지로 약간 황량하고 어수선했다. 아직 수습되지 않은 군사들 이 들끓었고, 곳곳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피차간에 도움 안 되는 전쟁이었 지만 패자 쪽의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는지라, 치안이 형편없었다. 마차에서 홀짝 뛰어내린 유시리안은 가볍게 기지개를 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세당당 한 창세신의 마차에서 내리는 미남에게 자연히 이목이 쏠렸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신경 쓰 지 않았다. 무하도 몸을 쭉 펴며 장시간 앉아 굳어버린 몸을 풀어 주었다. “넌 이제 가봐.” 유시리안은 마차를 몰던 신전의 일꾼에게 건성으로 손을 휘휘 저어보이며 식당을 찾아 발 을 옮겼다. 일꾼은 허리를 약간 숙여 인사하고 바로 마차를 몰고 사라졌다. 훼오트라 아나 도 락아타까지만 이들을 태워다 주면된다고 했으니 피차 미련도 볼 일도 없었다. “의뢰인은 수도에서 만나라고 했는데.” 사라지는 마차를 보며 무하는 별 뜻 없이 말했다. 편한 마차의 일정도 좋지만 협박한 녀석 이 마련해준 것이라 그리 내키지 않았었다. “말을 사지, 뭐.” 납득한 무하는 주위에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물었다. “락아타는 욤과 같은 언어를 써?” “북쪽 대륙은 모두 같은 언어를 써. 락아타는 북쪽에서 서쪽까지 걸쳐 있어, 서쪽에서는 락아타 어라는 걸 사용하지만 일단 이쪽은 북쪽 대륙어를 사용해. 뭐, 락아타 어라기보다 는 서쪽 대륙어라고 봐야 맞지만.” 무하는 연신 주위를 돌아보다 중얼거렸다. “외국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난다.” 한국에 있을 때도 외국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대충 들어 온 것만으로도 문화가 엄청나게 달 랐다. 당장 언어만 해도 그랬다. 유시리안은 쿡쿡 웃으며 덧붙였다. “북쪽 대륙이니까. 문화의 이질성을 느끼고 싶다면 동쪽이나 남쪽으로 가야지. 아니면 락 아타의 서쪽으로 내려가 보던가.” “같은 나라인데 서쪽부근으로 가면 뭔가 달라져? 언어가 다르면 문화도 달라지는 거야?” “아, 펠은 모르겠군. 이곳은 ‘기도의 땅’을 중심으로 대륙이 동서남북으로 갈려.” 허공에 네모를 그린 유시리안은 그 가운데쯤에 손가락을 고정했다. “대륙의 중심, ‘기도의 땅’은 엄연히 말하면 땅이 아니야. 그것은 거대한 호수지. 반 경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호수야. 매우 맑지만 끝 모를 깊이 때문에 검게 보 여. 아주 예쁜 칠흑빛이지. 마법사와 정령사가 합심해서 그 끝을 알아보려 한 적이 있었지 만, 꼬박 한 달간 내려가다 포기해버렸다고 해. 유명한 이야기야.” 그러고 보면 세계지도를 한번 본적이 있었다. 한가운데에 푸른 원이 그려져 있고, 십자가 로 푸른 선이 그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곤 붉은 선으로 전체에 X자가 그어져 있었고 각기 북쪽 대륙, 서쪽 대륙 따위의 글이 마찬가지로 붉게 적혀져 있었다. 그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양새라 지도를 제작하는 방법이 뭔가 다를 모양이라고 넘겼었다. 유시리안은 그때 지도의 푸른 선 모양대로, 허공에 십자가를 그렸다. “그리고 그 호수는 네 방향으로 뻗어있어. 가늘게 시작하지만 점차 넓어지는 그것은 일 정 구역을 지나면 바다로 변해. 물에 염분이 섞이기 시작하는 거지. 이를 동해, 서해, 남 해, 북해라고 각기 칭하는데, 이것 때문에 음유시인들은 ‘기도의 땅’을 바다의 근원이 라 부르기도 해.” 그리고 보이지 않는 허공의 지도의 윗부분을 가리켰다. “북쪽이 욤, 그 왼쪽으로 락아타. 락아타는 영토의 대부분이 서쪽에 있어. 욤은 동쪽과 이어져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북쪽에 있지. 이 둘을 합하면 ‘개방된 대륙’의 반 정도는 될 거야.” “개방된 대륙?” “지도가 제작된 대륙을 말하는 거야.” 유시리안은 북쪽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더욱 위로 올려서 잠깐 고정했다가 크게 원을 그렸 다. “동쪽 대륙의 더욱 깊은 동쪽, 서쪽 대륙의 더 깊은 서쪽, 남쪽 대륙의 더욱 깊은 남쪽, 북쪽 대륙의 더욱 깊은 북쪽. 그 누구도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지의 땅. ‘미지의 대 륙’이라고 불리지.” 유시리안은 다시 손을 허공의 지도 안쪽으로 밀어 넣고 설명을 이었다. “어쨌거나, 개방된 대륙은 기도의 땅에서 파생된 네 줄기의 물로 크게 네 개로 갈라져 있 어. 하지만 바다에 의해 갈라진 네 덩어리의 땅을 두고 각기 북쪽 대륙, 서쪽 대륙 등으 로 칭한건 아니야.” 그때 봤던 지도의 붉은 선처럼, 유시리안도 천천히 X를 그렸다. “이 위가 북쪽 대륙, 이 오른쪽이 동쪽 대륙, 이 아래쪽이 남쪽 대륙, 이 왼쪽이 서쪽 대 륙. 이렇게 나뉜 네 개의 대륙은 각기 언어도, 음식도, 복식도……모든 것이 판이하게 달 라. 바다에 의한 단절로 생긴 문화 차가 아니라는 건만은 확실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문화 권이 달라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어. 모든 학자들의 의문이고 수많은 전설을 남긴 주범이 지.” 책으로 읽었을 때는 알 수 없군, 이라 대충 넘겼던 것이 유시리안에게 다시 들으니 신비롭 고 비밀스럽게 느껴졌다. 경청하는 무하를 보며 유시리안은 설핏 웃으며 짧게 덧붙였다. “절대 밝혀지지 않을 수수께끼야.”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까? 어째서 저렇게 단언할까? 무하는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눌러 삼켰다. 유시리안이 밝혀지지 않을 수수께끼라고 말했으니, 자신 역시 그러려니 넘기면 그 만이다. “아, 저기 괜찮았어.” 삼 층짜리 건물을 가리키며 유시리안이 경쾌하게 말했다. 무하와 락샤사는 이견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둠을 준비하는 하늘은 붉은 핏빛이다. 무하에게 있어서 좋지 못한 추억만 가져다주는 저 녁노을은 오늘도 사방을 채운다. 장작을 줍던 손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보는 무하의 얼굴 은 무표정이지만 심장 쪽을, 정확히는 흉터 쪽을 한번 움켜쥐는 손아귀는 아파보였다. 저 녁노을은 그에게 그때의 상처를 일깨워준다. 그때부터 끈질기게도 따라붙어 흉터의 존재 를 두각 시키고 아픔을 되새겨 준다. 숨을 깊게 내리쉬며 고개를 저음으로써 상념을 떨쳐내려 했다. 과거의 상처를 끔찍이도 곱 씹고 곱씹는 것은 자신이다. 저 붉은 저녁노을이 핏빛으로 스산하게 박혀오는 것도 자신 의 편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어리석어 자연스레 고소가 지어진다. “펠, 멀었어?” “아! 가.” 얼른 마른 장작을 마저 주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가보니, 느긋하게 식탁에 앉아 있는 유시리안이 보였다. 맡은 임무는 끝 냈는지 요리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이제 불만 있으면 된다는 걸 안 무하의 몸놀림이 더 욱 급해졌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화덕에 장작을 밀어 넣고 기름을 조금 부은 뒤, 나뭇잎에 불을 붙 여 집어넣었다. 나무들이 금세 타닥거리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먼지 냄새가 나긴 했지 만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집 자체도 폐허 특유의 황량함은 느껴졌지만 그리 더럽지 않은 것이, 유시리안이나 무하와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간혹 사용한 모양이다. 락아타라고 몬스터 사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욤과 마찬가지로 성벽이 있는 영지에 사람들이 몰렸고, 변방 마을은 버려졌다. 불과 2년 만에 벌어진 사태라 각 영지에서는 갑 작스런 난민에 골머리를 썩여야 했고 버려진 마을은 황량하게 허물어져갔다. 그리고 버려 진 마을의 집들은 이렇게 지나가는 방랑자들이 즐겨 이용하게 됐다. 이제는 특이할 것도 없는 일상사였다. 잠잘 곳을 청소한 락샤사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오른쪽 팔찌의 정령에게 부탁해서 냄비에 물을 담아내고 있는 무하 옆에서 유시리안은 요리 재료를 나르고 있었다. 갖가지 양념과 고기, 간단한 야채 등을 보니 국을 끓일 모양이다. 락샤사는 식욕과는 관계가 없는 존재였 기에 멀뚱히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술은?” “꺼내가.” 의외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유시리안은 간만에 해먹는 요리에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 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일어난 락샤사는 유시리안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옷 속 에 손을 집어넣었다. 빼내는 손에 작은 주머니가 들려나왔다. 유시리안과 락샤사의 모든 짐은 이 주머니 속에 들려있었다. 물론 이 안에 락샤사의 짐은 극히 일부였고, 죄다 술뿐 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뭘 꺼내가든 말든 유시리안은 이것저것 만들기에 부산 했다. 요리 는 못한다는 무하는 잔심부름을 하며 기대 어린 눈으로 요리하는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었 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잔까지 꺼내 술을 채워 마시던 락샤사는 문득 물었다. “검은 언제 보완할거지?” “…….” “…….”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이런 저런 일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전투를 치룰 일이 없었기에 깜 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던 게 바로 며칠 전인데 말이다. 서로를 마주본 유시리안과 무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키득 웃었다. “밥 먹고 하자.” “그래, 먹고.” 무심하게 술을 마시는 락샤사를 뒤로하고 둘은 요리를 하는 도중, 도중 웃음을 흘렸다. 정 말 오랜만에 가지는 여유였다. “뭔가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군.” 그냥 듣기로는 불만이 있는 듯한 내용이었지만 고저 없는 어투나 무표정한 얼굴, 그 어딜 봐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때문에 무하나 유시리안이나 부담 없이 후식으로 만들어 놓은 과일주스와 사 온 과자 따위를 오물거리며 구경하는 포즈를 유지했다. 락샤사가 안은 장소가 협소하다고 하여 마을의 중심부 쪽으로 왔다. 대충 어느 정도 공터 를 확보한 락샤사는 그 중심 쪽으로 걸어갔고 유시리안은 무하의 손을 잡아끌어 구석으로 피해주었다. 그리곤 언제 챙겨왔는지 주섬주섬 먹거리를 꺼내들고 오물거리기 시작한 것이 다. 뭐, 말은 꺼냈지만 별로 상관없었는지 락샤사는 경고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방어막을 쳐두는 게 좋을 거다.” 유시리안은 피식 웃으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스펠도 시동어도 없었지만 푸르스름한 기 운이 반구의 형태로 자신들을 감싼 것이 느껴졌다. 무하가 감탄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손이 멈추자 다시 감탄성을 냈다. 물론 무하 역시 바이어 정도는 칠 줄 알았다. 유시리안이 한 것처럼 스펠을 생략하고 시 전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토록 부드럽게 율동하는 마나는 본적이 없었다. 또한 자 신과는 사정이 다른 유시리안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전 하는 것도 신기했다. 무하가 봐왔 던 마법사들은 마나의 구동에 있어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했고 땀에 잔뜩 젖어 헐떡이기 일 쑤였던 것이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무하의 모습에 유시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구경거리는 이게 아니야. 샤를 봐, 펠.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라고.” 그 말에 얼른 광장 저편에 있는 락샤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별다른 점은 없었다. 마검을 두 손으로 든 채,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감고 있을 뿐. 하기를 마무리 짓는 비가 내리고, 추기(秋期)만 되면 아름답게 떨어지는 붉고 큰 꽃송 이들이 바람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꽃이 떨어지면 어른의 두 주먹만한 열매가 급 속하게 자라기 시작해 겨울에 익는다. 겨우내 주된 간식이 되어주는 고마운 열매다. 순간 무하는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 꽃송이 들이 락샤사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락샤사의 주위로 흡사 소용돌이와 같은 기류가 형성 되고 있었던 것이다! 기류가 서서히 빨라지는 듯 하더니 락샤사가 고개를 들더니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몸에서 뿜어진 황금빛 빛이 원을 그리며 빠르게 퍼져 나왔다. 갑작스런 빛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던 무하는 억지로 광장 쪽을 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동자가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이 더했다. 락샤사를 중심으로 퍼진 그 빛의 무리는 광장보다 약간 작은 원을 형성하며 서서히 율동하고 있었다. 방어막 안에 있 기에 느낄 수 없었지만, 광장에 근접해 있던 건물이 부셔져 날라 가는 모습을 보면 저 조 용한 율동이 실은 거친 격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무하가 감탄인지 경악인지 분간하기 힘든 외마디를 뱉으며 방어막 에 두 손을 딛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좀더 자세히 보고 싶은 바람에서였다. “율, 샤의 눈이!” “아아.” 유시리안은 태연하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황금빛 기류가 복잡한 마법진을 허공에 형성시키며 강렬한 기운을 뽐내는 그 속에서 락샤 사의 손에 들려 있던 마검이 떠올랐다. 황금빛 마법진의 중심부에 그 마검이 들어감과 동 시에 진은 칠흑빛으로 변했다. 무속성이었던 마법진이 핵심인 마검의 속성에 맞게 변한 것 이다. 마검을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는 락샤사의 두 눈은 흡사 단백질 인형과 같이 무심했다. 본 래부터 무심한 그였지만 저것은 정말 무기질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드 아이?” “평소에는 감춰 놔. 일종의 봉인이기도 하고. 지금은 알아보는 자가 드물지만 한때는 대 단했으니까. 또……느낌부터가 다르지?” 속모를 흑색이었던 락샤사의 두 눈동자 중 오른쪽이 푸르게 변해 있었다. 쪽빛의 그것은 너무 파래서 빨려 들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 기운! 존재감이 희미했던 락샤사의 그것 이 강렬하게 박혀들었다. 그 무엇보다도 날카롭고, 그 무엇보다도 노련하고, 그 무엇보다 도 차갑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무심’했다. 차라리 저기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더 표 정이 있으리라. 무너지는 담벼락이 더 마음이 있으리라. 본래부터 표정이 없는 락샤사였지 만 지금의 그는 표정이 없는 경지를 넘어섰다.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무심(無心)……. “그래도 봉인한 상태에서는 나름대로 ‘연기’를 하는데 말이야. 저 상태에서는 본질이 너무 강렬하게 들어나 버린 달까.” 태연한 유시리안의 설명 속에서 무하는 멍하니 광장 쪽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가 사방으로 흐트러지는 그 밑으로 반쯤 감긴 눈동자가 허공에 떠 있는 마검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법진이 완전히 검게 물들자, 검을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위 로 올리며 무언가 수인을 맺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진 내부의 기 류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꼿꼿하게 서 있던 마검의 검 집이 스르렁 벗겨졌다. 검 집이 벗겨진 검신을 무엇인가가 부 드럽게 품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보이는 물이었다.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듯한 물……. 그것은 마치 태아를 보호하는 양수와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 검은 새롭게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태아와 같이. 빡빡하게 박혀 있던 마검 내의 룬어가 검붉게 일렁이더니 서서히 검체에서 벗어났다. 깨끗 해진 검체를 중심으로 회오리치던 그것들은 락샤사가 손짓하는 대로 꿈틀거리며 배열을 바 꿔가기 시작했다. 마법진 내의 율동이 그것을 도왔다. 그에 따라 마법진의 기류가 거칠어 져, 광장 외의 건물들이 허물어짐이 더욱 빨라졌다. 이미 부서져 내린 잔재들은 저 멀리 밀려나가고 있었다. 락샤사가 다시 무엇인가 수인을 맺는 게 보였다. 그에 따라 마법진 내의 율동이 절정에 달 했다. 물 속에서 끈임 없이 재배열 되던 룬어 안에 작은 룬어가 생성되었다. 그것은 조심 스레 자신의 위치를 찾아 들어갔다. 이제 절정은 끝나고 결말을 향해 내려서기 시작했다. 룬어들은 떨어져 나왔을 때와 마찬가 지로 검붉게 빛나며 천천히 검신에 달라붙었다. 곧 그것은 움푹 안으로 박혀 들어갔다. 그 패임이 마치 부여 아이템과 같았다. 깊이 자리 잡은 룬어가 그 검붉은 광채를 잃었을 때, 작업은 끝이 났다. 마법진이 사라지자 유시리안도 방어막을 풀었다. 무하는 조심스럽게 광장 안으로 걸어갔 다. 매일 봐왔단 락샤사가 생소한 타인으로 느껴져 어색했다. 그만큼 락샤사에게서 풍기 는 존재감은 평소와 달랐다. 이질감. 그것이 느껴졌다. 좀 전의 그 물과 같은……이 세상 의 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보는 듯한 느낌. 어느새 검 집 안으로 들어간 마검을 내려보고 있던 락샤사가 고개를 돌려 무하를 보았다. 여전히 그 눈동자는 색이 달랐고 여전히 그 존재감은 낯설었다. “내가 두렵나?” 무심한 목소리. 비웃음도, 실망도, 비굴함도, 두려움도……그 어떤 것도 실리지 않은, 그 저 ‘질문’뿐인 질문. 하지만……. “읽을 수 있으면서 왜 묻는 거지?” 무하는 차분히 되물었다. 락샤사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도 묻고 있다. 자신이 두 렵냐고. 섬뜩한 무심으로서 무하의 눈을 마주보던 락샤사는 들고 있던 마검을 쓱 던졌다. 받아들 고 올려보니, 그 눈동자는 다시 흑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풍기던 이질감도 자취를 감췄 다. 무심한 것은 여전했지만 좀 전처럼 존재자체가 그 맹렬한 냄새를 피우지는 않았다. “상관없나 보군.” 목소리도 좀 전과는 달랐다. 평소의 락샤사였다. 무하는 씨익 웃어보였다. “누가 온다.” 유시리안이 둘에게 걸어오며 나직이 말했다. 적지 않은 인기척이 저 너머에서 느껴졌다. “횃불을 들고 있는데?” “살기도 없다.” 무하와 락샤사가 한마디씩 덧붙였다. 딱 그 말이 떨어졌을 때, 저편에서 누군가가 크게 말 을 걸어왔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셋은 서로 한번 마주보았다가 거의 동시에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나서서 만날 필요는 없 지만 굳이 피해서 만남을 기피할 필요도 없었다. “그깟 빛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래요?” “얼른 어디든 들어가서 쉬자니까. 피곤하게 구네, 정말.” “내가 피곤하긴 피곤한가봐. 나의 사랑하는 부하들이 지금 꼭 반항하는 것처럼 들리 네?” “……차, 착각이에요!”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하하하!” ……인간관계를 대충 예상할 수 있는 소리와 함께 횃불을 든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저희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는 용병이지요.” 처음 말을 건 목소리의 주인공만이 광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른 용병들의 대장 격인 듯 보였다. 횃불 밑으로 보이는 얼굴은 상당한 외모의 젊은이였지만, 용병들의 대장은 오 로지 실력으로만 될 수 있는 것. 단순히 다가오는 몸놀림조차도 상당해 보였다. “이쯤에서 강한 마나의 기류가 느껴져서 와봤습니다. 황금빛 빛도 보였고요. 혹 시…….” 댁들입니까? 라는 뒷말을 삼켰지만 충분히 전해져 왔다. 노련한 유시리안이 한걸음 걸어 나와 말했다. “우리도 빛을 보고 와봤다. 왔을 때는 보다시피 이런 몰골만 남아 있더군.” 짐짓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 너무 태연하다. 그리곤 덧붙인다. “볼 일은 그걸로 끝이겠지?” “한 가지 더. 저 모르십니까?” 더 묻지 말고 꺼져달라는 우회적인 표현에도 상대는 여유로웠다. 둔치라서 눈치를 못 챘다 고 보기에는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어딘지 능글맞다. 유시리안은 미간을 찡그리며 상대를 유 심히 보다 짜증을 듬뿍 첨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빌어먹을.” “이제야 눈치 채셨군요, 유시리안 씨. 정말 변함없는 안목이시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노골적으로 속을 긁는 녀석. “네 보모만 하겠냐.” 녀석을 손봐주는 건 별거 아니지만, 녀석 뒤에 있는 보모는 귀찮다. 그 뒤틀릴 대로 뒤틀 린 심보하며 찐득하게 들러붙는 독기하며, 집요하기는 어찌나 집요한지……. 그래도 친구 라 부를 수 있는 극소수의 존재중 하나지만 말이다. 꼭 제대로 된 녀석만 사귈 필요는 없 는 거 아닌가. 그 보모 녀석도 자신을 두고 똑같이 말한다지만 뭐, 알게 뭔가. 뿌득뿌득 이를 갈며 눈앞의 같잖은 애송이의 이름을 또박또박 뱉어보는 유시리안이었다. “물론 너도 마찬가지다, 딜린.” 타닥타닥, 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쌀쌀해진 밤기운을 고려해 뜨거 운 차를 끓인 무하는 자신들이 거처로 정한 폐허에 당당히 끼어든 딜린이라는 남자에게 건 넸다. 유시리안과 락샤사에게도 건넨 다음 자신의 몫을 후후, 불어 마셨다. 그냥 있는 차를 대충 끊인 거라 미식가의 입에는 맞지 않겠지만, 그럭저럭 마실 만했다. 딜린은 무하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통성명했다. 유시리안과 락샤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하는 초면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딜린이라고 합니다.” “무하입니다.” “…….” 간략한 인사말이었지만 어딘지 귀에 익은 어감에 딜린은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생각에 잠 겼다. 생각날 듯 말 듯 어른거려서 더욱 답답했다. 그러다 무하의 두건이 새삼 눈에 들어 와 눈을 가늘게 뜨고 좀더 자세히 뜯어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에 무하가 불쾌감을 내보일 때쯤에서야 아, 하고 감탄사를 냈다. “무하 카 곤크?” “……일단은 그렇게 불립니다만.” “하하! 당신이 그 무하로군요.” 언젠가 레타에서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 애송이의 경외심만으로는 객관적인 측정 이 저어됐던 강자. 하지만 곤크의 카 정도면 실력은 보증 된 것이라, 꽤 인상 깊게 새겨두 었던 이름이었다. 하물며 딜린은 곤크 마스터의 후계자가 아니던가.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딜린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전…….” “딜린 카 곤크. 열명뿐인, 아 클래너라는 녀석이 빠졌으니 이제는 아홉인가? 아홉뿐인 곤 크의 카 등급 용병이자 현 곤크 마스터의 유일한 후계자.” 냉큼 잘라먹으며 유시리안이 참견했다. 자신과 함께 다니기 위해 곤크를 나오려 한 무하 다. 비록 그 망할 수전노 부관 때문에 휴가 형식으로 바뀌긴 했지만, 결국은 나올 곳이 다. 그런 곳의 건방진 후계자 녀석과 동료의식을 싹 틔울 필요는 하등 없다. 예리한 딜린은 유시리안의 말에서 그 경고를 읽었다. 물론 유시리안이라는 남자를 너무 잘 아는 탓도 있었다. “아홉?” “아홉.” 확인하는 딜린에게 유시리안은 딱 잘라 답했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그 답에 딜린은 흐 음, 하고 말을 흐렸다. 부관은 열명의 카 등급이 있다고 했다. 클랜이 나가고 전력을 염려 하는 마스터에게 아직은 열명의 카 등급이 있다고 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뻔히 보였 다. 수단 좋은 부관에게 잡힌 거겠지. 잠시 침묵 속에서 차를 홀짝이는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유시리안 씨는 락아타에 무슨 볼일이십니까? 전과 같은 의뢰?”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 일단 들어보고 결정할 거다.” 비록 무하의 부탁으로 받아들인 의뢰지만 들어보고 결정할 것이다. 그것은 용병으로서 가 지는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용병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돈이다. 그 돈보다 중요한 것이 목 숨이고, 그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신용이다. 그 신용을 좌우하는 의뢰는 함부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 유시리안은 여태껏 쌓아올린 실적과 신용이 높고 견고했다. 그것을 같잖 은 협박 따위에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도우라는 협박은 들었지만 어떻게 도우라는 제시 는 듣지 못했다.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 하던 그것은 유시리안의 선택인 것이다. 무하도 그 것은 묵인하고 있었다. 그 역시 짧지만은 않은 시간을 용병계에서 굴렀으니 당연한 것이 다. 덧붙이자면, 그 때쯤이면 이미 다음 황제가 정해지고 그 계승식을 준비할 테니 설령 훼오 트라 아나라 해도 그 속에 끼어들어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계산도 깔려있었 다. “너는 왜 여기 있는 거냐?” “락아타의 높은 어르신이 불렀어요. 그쪽에서는 마스터를 호명 했습니다만 후계자의 입장 으로 제가 대신했습니다. 덕분에 불쾌한 소리를 듣고 왔지요. 후후.” “왜 뒷말을 잘라 먹냐? 네가 퍽도 듣고만 왔겠다.” 딜린은 답 없이 웃기만 했다. 후계자에 대한 모욕은 용병단에 대한 모욕. 믿지 못하는 용 병에게 일을 맡긴 다는 건은 언어도단. ……이라며 모조리 끌고 와버렸다는 것을 굳이 설 명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덕분에 자신을 모욕한 귀족이 곤혹을 치르고 있을 거라는 말도 물론 할 필요 없겠지. “네가 모욕당했다는 것 하나 때문에, 생각 없이 저 녀석들을 끌고 올 리 없는데.” ……이렇게 눈치 챌 게 뻔하니까. 딜린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물며 그 녀석의 추종자인 네가 함부로 이런 일을 벌일 리 없지.” 어서 불라는 압박이 느껴져 또 한번 피식 웃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용케 눈치 챈다. “녀석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정말 귀신같다. 차를 후룩 마시며 딜린은 뭐라 답을 해야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고민했 다. 마스터의 유일한 친구인……아, 전에 지기가 생겼다고 하셨으니 이제 ‘유일한’은 아 니다. 어쨌거나 오랜 친구인 이 남자는, 부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스터의 ‘천적’이다. 폐가 됐으면 됐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전력상으로 도움이 된다 해도 꼴사납게 감금 이나 당해 있었다며 두고두고 놀려 먹을 테지. 마스터에게는 그편이 더 끔찍할 것이다. “마스터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모욕당하는 걸 싫어하시지요.” “아아. 그 뒤틀린 성격을 모를 리 없지.” 누워서 침 뱉기라는 거 아십니까? 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다. 지금은 되도록 트 집을 잡히지 않는 게 낫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만 역시 유시리안이 한 수 위였 다. “네 녀석이 아무 반박도 안하고 넘어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슨 일이 생기긴 했군. 그 것도 그 녀석의 개인 사정상의 안 좋은 쪽으로.” “…….” 이래서 사람은 안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하던가, 딜린은 한숨을 푹 쉬며 결국 고개를 끄떡이고 말았다. “쿡쿡.” 갑자기 터진 웃음소리에 이목이 집중됐다. 삼킨다고 삼킨 웃음소리지만 그것을 못 알아차 릴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집중된 시선 끝에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무 하가 있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보자 얼른 헛기침을 하며 진정시켰지만 힘들게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아 웃음을 애써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 미안합니다.” 유시리안에게 한번, 딜린에게 한번 번갈아 사과한 뒤, 다시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웃음을 멈춘 무하는 입술을 매만지며 물었다. “걱정되는 거지?” “……누가?” 퉁명하게 말했지만 그것 자체가 부드럽다는 것을 딜린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시리 안은 저런 식으로 자신의 말을 자르는 것이나, 저런 식으로 자신을 떠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남자였으니 말이다. 딜린의 눈매가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유시리안은 무하에게 항변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죽어도 안 죽는 녀석이야. 걱정하는 쪽이 바보라고.” “관심 없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잘 알리도 없을 뿐더러, 걱정되지 않는다면 그렇게 알아 내려고 심문하지도 않을 테지. 안 그래?” “전혀! 어쩌다보니 알게 된 것뿐이야! 악연이야, 악연!” “진짜 악연이고, 마음에 안 든다면 눈앞에 알짱거리게 내버려 둘 율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데?” 다 안다는 듯 얼굴 만연에 미소를 띠며 반박하는 무하에게 유시리안은 두 손을 들어 보이 며 한숨을 쉬었다. “율?” “…….” 딜린이었다. 무하의 말에서 이색적인 단어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침묵하는 유시리안을 보 며 딜린은 씨익 되물었다. “율?” “내 애칭이다, 왜? 부럽냐?” “부러울 것 같습니까?” 정색하고 되묻는 딜린. 역시 만만치 않은 남자다, 유시리안은. “알 수 없지. 내가 네 속을 어찌 알겠어? 그런 뒤틀린 녀석의 맹렬한 광신도의 속을 말이 야.” “아까도 말하려다 말았는데, 마스터에 대해 유시리안 씨가 뭐라고 하는 건 누워서 침 뱉 기에요.” “어째서?” “…….” 조용히 차를 마시는 딜린이었다. “수도로 가신다고요?” “일단은.” “흐음.” 딜린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난로 앞에 앉아 불을 헤집고 있는 무하를 힐끗 보고 소 리를 낮췄다. “저번 의뢰와는 상관없는 겁니까?” “의뢰인이 누굴 도우라고 했어.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가봐야 알아.” “의뢰인이 누군지 물어도 될까요?” “……너를 수도의 누가 불렀지?” “……너무 예리하신 거 아닙니까?” “관록이다.” 한숨을 픽 쉰 딜린은 좀더 상체를 숙여 유시리안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거의 소곤거리다시피 말했다. “저를, 정확히 곤크의 마스터를 부른 건 황실이었습니다. 비밀리에 만난거긴 하지 만……. 가서 그 역겨운 자들을 보고 왔습니다.” 집히는 것이 있었다. 수도에 간 은릴과 그 다음에 만난 훼오트라 아나. 너무 잘 들어맞는 타이밍이 아닌가. 이토록 잘 짜여진 우연은 믿을 수 없다. “녀석을 노린 건가.” “적이 많습니다.” 한숨 섞인 딜린의 답에, 팔짱을 끼며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꺾고는 묻는다. “그래서 병력을 모아두겠다?” “……역시 예리하십니다.” 화르륵! 불꽃이 갑자기 강하게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자 딜린이 흠칫하며 돌아봤다. 기름 을 부었는지 기름병의 뚜껑을 닫고 있는 무하가 보였다. 이쪽에는 별 관심 없어 보이는 눈 치였다. 작게 숨을 내쉬는 딜린에게 무하의 나직한 질문이 닿았다. “딜린 씨. 락아타에 오래 계셨습니까?” “그리 오래는 안 있었습니다. 반역자들이 성을 침입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무렵에 떠났으 니까요.” 게다가 시간이 촉박하여 강행하였다. 간간히 마법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그러니 정말 얼 마 걸리지 않은 셈이다. “그럼 국내 소식은 잘 모르시겠군요?” “부관님과 매일 소식을 주고받았으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뭔가 알고 싶은 거 라도?” “…….” 기름병을 배낭 안에 집어넣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딜린의 눈 을 진중하게 마주보았다. “다음 황제는 정해졌습니까?” 딜린은 어이없다는 미소를 설핏 지었다. 락아타까지 널리 소문이 퍼져 있는 ‘금안의 황 제’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인가? “금안의 ‘지배자’, 테밀시아 경으로 확정 됐다고 들었습니다. 락아타에까지 소문이 파 다하지요.” “확정 된 겁니까?” “그렇게 들었습니다.” 확정되지 않았다 해도, 외국까지 소문이 퍼진 상태에서 다른 이를 황위에 앉히기도 뭣할 것이다. 아무래도 국제적인 이미지가 있으니 말이다. 또 금안의 ‘지배자’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게 현재 민심이었다. 반역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민중은 현재 날이 선 칼날과 같 다. 그것을 암살이나 수작 따위를 부려 자극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무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훼오트라 아나가 약속은 지킨 모양이다. 시체를 태운 자가 누구인지 밝혀졌다면 절대 ‘확정’이 되진 못했을 테니 말이다. 유시리안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굳히는 모습을 보면서 슬쩍 웃었다. “난 간단히 씻고 잘게. 그럼 이야기들 나눠요.” 유시리안을 보고 용건을 말하고, 딜린을 보고 인사를 한 무하는 일층 구석에 있던 욕실 쪽 으로 갔다. “물은?” 유시리안이 뒤에서 묻자 오른손을 쓰윽 들어보였다. 붉은 뫼비우스 팔찌가 약하지만 부드 러운 공명음을 내고 있었다. “많이 안 좋나?” 욕실로 들어가는 무하를 지켜보던 유시리안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못 알아들을 딜린이 아니었다. “좋아지고 계십니다.” “안 좋았었단 말이지.” 어두운 얼굴로 약하게 고개를 끄떡였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스터는 강하십니다.” “나도 알아.” 존재감 없이 테이블 한 쪽을 차지하고 있던 락샤사가 낮게 말했다. “쥐다.” “귀찮군. 없애.” 유시리안의 말이 떨어지자 락샤사는 시선을 돌려 천장 한 귀퉁이를 보았다. 허공에 아롱 맺은 한 방울의 물이 빠른 속도로 그곳에 가 박혔다.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런 잔재도 없었다. 전형적인 천리안이었다. 딜린이 물었다. “언제부터?” “기름을 쏟았을 때부터.” 하며 락샤사가 방금까지 무하가 서 있었던 난로 가를 가리킨다. “알아차렸던 걸까요, 무하 씨는?” “그는 강해.” “마법사?” “겸사, 겸사지.” 딜린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군요.” “포기해.” “그거야 부관님이 알아서 하겠지요.” “…….” 일명, 망할 수전노. 그를 겪은 모든 이들이 혀를 차며 이 단어를 읊는다. 공짜로 일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고 자기 수하 용병들이 놀고 있는 걸 못 참는 독종 중의 독종. 그 울 궈먹기 좋아하는 라이시륜마저도 한수 접고 들어간다는 놀라운 녀석이다. 그런 녀석과 성 실한 실력자, 무하가 만났으니 아주 죽이 짝짝 맞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쉽게 내보내려하 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쳇, 귀찮은 녀석이야.” 그렇게 인상을 찡그리며 툭 내뱉더니만, 묘한 시선으로 딜린의 눈을 마주보았다. “말 돌리는 건 그쯤 해두지?” “……역시 귀신이 군요, 유시리안 씨는.” 그리고는 곤혹스런 미소를 지었다. ============================================================================ 아피엔님의 리플이 없으니... 왠지 올리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강박관념이...ㅡ''ㅡ; 그래도 올립니다^^ 무하의 심적인 갈등이 당분간 보류되는 상황에서 진행이나 분위기가 전보다는 조금 가볍게 흐르는 듯... 앗! 자꾸 패러디 집계를 잊네요; 다음 회에는 꼭...!!! 쿨럭; 카페에 올라온 패러디가 너무 즐겁습니다. 은랑님, 펄슨님. 저보다도 극악하신 속도의 소유자...ㅡ.ㅜ 훌쩍... 순식간에 욕조를 가득 채운 맑은 물 속에 손을 넣어 그 온도를 잰 무하는 만족스런 얼굴 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저편에 있는 선반 쪽으로 걸으며 옷을 벗었다. 선반에 옷을 챙 겨 넣고 두건의 매듭에 두 손을 갖다댔다. 희미한 빛이 어리며 매듭이 풀러 내렸다. 보조 마법을 걸어두었기 때문에, 두건을 벗겨내려면 그것을 풀어야 했다. 번거로운 작업이긴 했 지만 늘 하다보니 습관이 되 버렸다. 말을 탈 때나 격한 전투 중에도 풀러지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긴 두건을 대충 접어서 선반에 올려놓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때……날라 갔었지.” 끔찍한 시체 속에서 아름다운 빛에 감싸여, 바람을 타고 날라 갔었다. 그때는 생각지 못했 는데, 보조마법이 걸려있었던 것이 어떻게 풀려나갔던 것일까?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앗아 간 듯 느껴지기도 한다. “율이 주워주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훼오트라 아나가 볼일을 마치고 가버리고, 무거운 침묵이 흐를 때 잊고 있었다며 건네주었 다. 날라 가는 것을 챙겨두었다고 했다. 그때 무하는 멍하니 그 두건을 보다 웃음을 터뜨 려 버렸다. 당황한 어조로 왜 그러냐며 애써 퉁명하게 묻는 유시리안을 보며 더욱 크게 웃 어버렸다. 지켜봐 주고 있었던 것이다, 유시리안은. 무하와 형님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미처 신 경 쓰지 못한 두건까지 착실히 챙기며 무하가 그동안 맺힌 그리움을 털어 놓기를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애칭을 허락받고 기뻐하는 무하를 지켜보았고, 형님이라 불린 것을 기뻐하 는 테밀시아를 지켜보았다. 조금만 더 무하가 비겁해지길 바랐을 것이다. 형님에게 모든 것을 떠넘긴다는 비겁함이 아니라, 이 사람의 동생은 자신이라 말할 수 있는 비겁함을 원 했을 것이다. 결국 그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지만……. “후회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두건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후회는 남았다. 그만큼 이 시간을 소중히 하자. ‘자신’을 포기하면 테밀시아를 죽이겠다 고 유시리안이 그랬다. 테밀시아를 살리고 싶으면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 말라는 협 박……. 유시리안은 무하에게 ‘테밀시아를 살리기 위해서는 진실을 은폐해야 한다’ 는 명목을 준 것이다. 주변상황에 그리고 과거에 눌려,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할 방법을 택하 려 하는 무하를 막은 것이다. 그에게 유예기간을 준 것이다. -참방. 욕조에 들어가 편히 등을 기대며 천장을 보았다. 나무결의 천장 곳곳에 빼곡한 거미줄, 어 두운 등잔불과 부스럭 움직이는 벌레, 덜컹거리는 창문, 싸늘한 바람소리. 음산하다고 느 껴질 법한 공간 속에서 무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시리안이 자신에게 한 협박. 그것은 어쩌면 ‘페르노크’에게 몸을 돌려줘야 할지도 모 르는 상황에서의 도피이자 그런 자신을 비난하는 또 다른 자신에 대한 변명이 되었다. 유 시리안은 바로 그것을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자.” 좀더 당당해져도 된다. 좀더 비겁해져도 된다. 무지한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속죄할 방법을 스스로 정해보자. 그것이 최선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자. 그리고 비겁하게 믿자. “단지 지금은……조금만…….” 조금만 쉬어보자. 절벽 바로 끄트머리까지 몰렸던 정신은 아직 여유가 없다. 극에 달했던 육신은 아직 기력이 없다. 겨우 생긴 ‘있어야 할 곳’에서 조금만……아주 조금만 쉬어보 자. 스르륵,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속은 너무도 따뜻했다. * * * ‘기도하는 땅’. 대륙의 중심부이자 거대한 호수, 끝 모를 깊이, 그리고 바다의 근원지. 그것을 설명할 단어는 이렇듯 무수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진 것은 바로 신전이었 다. 그것도 위세당당한 창세신의 신전! 거대한 호수 한 가운데, 세워진 신전은 제 1기 마 도 때부터 존재해 왔다고 전해진다. 저 드넓은 호수의 중심부에, 그것도 끝조차 밝혀지지 않은 깊이 위에 어떻게 신전을 세웠 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법사들의 경탄은 더했다. 그들은 실재 그 물 밑으로 들 어가 본 자들. 그들은 증언했다. 신전이 세워진 곳은 ‘물 위’라고. 신전의 밑에는 오로 지 물뿐이었다고. 대리석으로 지어진 거대한 신전은 물 위에 떠있는 것이라고, 세상은 경 악했고, 감탄했다. 다리조차 놓을 수 없는 그 호수 주위로는 작은 조각배가 수 천척 떠있다. 신전을 가기 위 해서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 배의 이름을 ‘순례자 의 걸음’라 한다. ‘기도하는 땅’ 외각에만 자라는 물풀을 엮어 만든 것으로, 만드는 방 법은 ‘사공’이라 칭해지는 장인들에게만 전승되어 왔다. ‘순례자의 걸음’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을 뿐더러 아름답기까지 했다. 신비로운 녹음의 빛을 띠고 검푸른 물결을 가르며 부드럽게 나아가는 배. 바람이 없어도, 어느 방향에서 띄 어도 일정한 속도로 유유히 신전을 향해 가는 모습은 ‘기도하는 땅’만의 명물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타고 신전을 방문했다. 축복을 구하기 위해, 안식을 구하기 위해, 기도를 바치기 위해……. “변함없군요, 이곳은.”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깊디깊은 호수. 이 소름끼치는 칠흑색을 그의 아들은 아름답다고 했 다. “다른 존재라면 몰라도, 당신이 ‘순례자의 걸음’을 타고 변함없다는 말을 입에 담다 니.” 마주 앉아 있던 남자가 장난스레 웃는다. 천진한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고, 내뱉는 목소 리는 장난스럽기만 한 남자. 스물이 훌쩍 넘었음에도 십대의 소년으로만 보인다. 그렇게 동안인 것도 아닌데 그에게서 풍기는 느낌이 그를 그렇게 보이게 했다. 이카미렌은 그런 남자를 마주보았다가 이내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손을 배 밖으 로 내밀어 물 속에 담가보았다. 끝이 없는 깊이 때문에 검게 보인다 해도 그것은 너무도 맑은 물이라 그의 하얀 손이 고스란히 보였다. 물결에 의해 조금 일그러진 형상이었지만 그 맑음은 얼마든지 알아 볼 수 있었다. “이미 이것이 정상이 되어버릴 시간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평이한 어조,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무심한 태도. ……그 어떤 것을 보아도 별다른 의미 없이 한 말로 보였으나 그를 마주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은 묘하게 굳었다. “흘렀지요.” 얼굴 만연에 흐르던 천진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씁쓸함이 가득 찬 주홍빛 눈동자로 칠흑 의 호수를 본다. 그런 그에게서 지독한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카미렌은 그런 그의 모 습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것이 그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렇게 ‘순례자의 걸음’은 신전의 기슭에 다가가고 있었다. “훼오트라 아나를 뵙습니다.” 황급히 나와 엎드려 절하는 무리들 중에, 직분이 높은 이가 대표로 인사말을 여쭈었다. 신 전 안쪽까지 쭉 엎드려 있는 신관, 신도들을 힐끗 보며 이카미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취 미다, 저런 것은. 훼오트라 아나는 창세신의 화신이라 불리고 있긴 하지만 신이 아니다. 단순히 신전 안을 들어서려 한다는 것만으로, 또 그 걸음이 닿을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고 두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허영과 허례를 좋아하는 황제도 바로 자신의 앞에 나오는 자 가 바치는 고두로 만족할 뿐이다. 하물며 신전에서……. 그런 이카미렌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훼오트라 아나는 생글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좀 전의 그 깊은 미소는 환각에 불과했는지 철없이 밝고 명랑하기만 하다. ‘알 수 없는 분.’ 한번은 진짜 모습이 무엇이냐 물은 적이 있다. 저 천진하기만한 모습이 가식에 불과하다 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진실을 보는 눈을 가졌 음에도……. 그 능력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런 것이 있는 것이다. 그 질문에 잠시 보여주었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경멸, 욕망, 권태, 열망, 증오, 연모……그리고 그리움.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얼굴로 그 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녀석과 똑같은 말을 하는 군요.” 그에게는 무어라 답했냐고 물었을 때, 그는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긴 머 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하얀 얼굴을 잠시 덮었을 때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것이 알고 싶다……라고.” 그때 느꼈던 연민이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응어리 맺혀 있다. 예전의 유시리안과 너무도 닮은 얼굴을 했던 그 거대한 존재를 감히 동정했다. 진심으로 그가 가엽다고 느꼈다. “어딜 갔다 왔소?” 어딘지 삐딱한 목소리와 어조. 그 이질적인 음성에 이카미렌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고두를 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만하게 꼿꼿이 서 있는 남자. 연한 하늘색의 기본 신관 복 식 위에 흰 천으로 만든 무릎덮개, 두 어깨를 걸쳐져 점차적으로 길게 등을 덮어 발목까 지 흐르는 흰 망토. 그 속에 정교하게 수놓아진 창세신의 문양. 머리 위에는 고상한 문양 의 관, 관에 달린 청색 깃털이 길게 어깨에 걸쳐진다. 단지 그것만 봐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대신관인 훼오트라 아나의 유일한 윗사람, 교황! 황공해 하는 신도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훼오트라 아나는 여전히 명랑한 미소를 띠며 허리 를 약간 숙여 인사했다.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인사였고, 답하는 목소리도 철없이 밝기만 했다. 누가 보더라도 겉보기에는 그리 보였다. “잠시 산책이요.” “근신을 명한 것으로 기억하오만.” “에이! 답답해서 어떻게 있어요.” 꿈틀, 애써 무표정을 지키고 있던 교황의 얼굴이 아주 조금 무너졌다. “근신으로 성이 안 찼다면 면벽을 명해주지.” “농담도. 잠깐 배를 타고 놀았을 뿐이에요. 여기 이 분이 증인이라고요.” 딱딱한 교황의 말에도 훼오트라 아나는 순진하게 웃으며 이카미렌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제야 이카미렌을 발견한 교황은 약간 이색을 띄고 그를 보다가 고두 하고 있는 신관에게 명했다. “대신관의 손님이시다. 정중히 모시도록.” “예.” 다소 고압적이긴 했지만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과함은 없었다. 또한 명을 받은 신관이 들 떠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는 듯 하다. 이카미렌은 획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교황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안내하는 신관 의 뒤를 따랐다. 물론 그의 옆에서 훼오트라 아나가 동행하고 있었다. 앞서 걷는 신관을 의식하여 목소리를 낮췄다. “적대감이 느껴지는 군요.”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닌 천부적인 것은 질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요. 오히려 그것 을 단순히 존경하고 감탄하는 것은, 자존심이 없어 보여요.” 굳이 낮출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낮추지도 높이지도 않은 훼오트라 아나 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걷고 있는 신관의 귀에 닿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세신의 화 신이라 불리기까지 하는 그의 능력을 뻔히 알면서 우습지도 않은 짓을 해버렸다. 그런 이카미렌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훼오트라 아나는 재미있다는 듯 덧붙였다. “전 교황이 꽤나 마음에 든답니다.” 하며 짓는 웃음이 무하에게 ‘협상’을 운운할 때의 웃음과 꼭 닮아 있었다. 안내된 곳은 ‘기도하는 땅’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방이었다. 한쪽 벽면이 탁 뜨여 있어 기분 좋은 바람이 항시 부는 곳. 훼오트라 아나의 처소 중 한 곳이었다. 넓고 쾌적한 곳임 은 분명했지만 이카미렌은 그곳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삶의 채취가 전혀 담겨있지 않는 곳. 폐허도 이보다는 손때 묻은 따뜻함을 가졌을 것이다. 당장 거실의 역할을 하는 듯한 이 방만 봐도 그렇다. 하얀 대리석 벽과 바닥이 저편에 보 이는 ‘기도하는 땅’보다도 싸늘하게 느껴진다. 썰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구들 과 쓸데기 없는 장식구들과 그림. 생기 없이 깨끗하기만 한 곳. 조금은 어지러워도 아늑 한 이카미렌의 저택과는 대조적이다. 앞서 걸어온 신관이 방을 둘러보고 있는 이카미렌과 그런 그의 옆에서 생글 웃고 있는 훼 오트라 아나에게 그만 물러가겠다고 인사를 했다. 공손히 나가는 그의 모습이 너무 딱딱하 고 정중했다. 그 필요이상의 예는 오히려 반어적으로 느껴졌다. 신관 특유의 부드러움과 자상함은 없고 오직 격식뿐. 그렇다고 좀 전의 교황에게 보였던 존경과 경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미움 받고 있군요.” “말했지 않습니까.” 훼오트라 아나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이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푹신한 쿠션이 가득 있 는 큰 의자는 트인 창쪽으로 향해져 있었다. 몸을 비스듬히 누워 턱을 괴고 한쪽 발을 건 성으로 의자 위에 올렸다. 늘 그래왔는지 취하는 자세가 편안하고 익숙해 보였다. “앉으세요.” “…….” 그리 청하긴 했지만 앉거나 말거나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때문에 이카미렌은 창문 쪽으로 걸어가 그 밖을 보았다. 둘이 침묵하는 동안에 견습신관들이 조용히 나타나 다과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내놓고 사라 졌다. 기척을 보아 방과 방을 연결하는 통로 쪽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대 신 푸른 휘장이 쳐져있어 방안을 살피며 시중들기에는 적당했다. 내온 찻잔을 두 손으로 모아 쥐고 홀짝이던 훼오트라 아나는 창가에 가만히 서있는 이카미 렌을 힐끗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늘쌍 짓던 천진한 웃음도, 가끔 보이던 싸늘한 조소도 아닌 웃음. 그것은 지독한 공허였다. “리안은 이곳을 오게 되겠지요. 페르노크의 손을 붙잡고.” “…….” 여전히 창문 밖을 보며 이카미렌이 말했다. 훼오트라 아나의 얼굴에 서려있던 공허함은 어 느새 바다거품처럼 사라지고 평소의 천진함으로 그 공백이 채워졌다. 그의 얼굴이 완벽한 철부지 청년의 것으로 돌아갔을 때, 이카미렌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특유의 무표정에 가 까운 옅은 미소로 훼오트라 아나를 마주보며 덧붙였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 일 테니.” “방해할 건가요?” 순간 훼오트라 아나의 눈동자에 공허함이 스쳤지만, 서로간의 묵인 하에 못 본 척 넘어갔 다. “그럴 거면 애당초 막았겠죠.” “그렇군요.”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길 바랍니다.” 바람이 불었다. 이카미렌의 백금발을 스치고 훼오트라 아나의 흑발을 지나 다시 창밖으로 빠져나가는 바람 사이로 둘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 아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하얀색 커튼이 부드럽게 펄럭이는 소리가 주위를 메웠다. 이카미렌은 다시 고개를 창밖으 로 돌리며 낮게 덧붙였다. “그러기 위해 왔습니다.” 대답대신 느껴지는 것은 공허한 웃음. 이카미렌은 답답하다, 라고 내심 중얼거리며 쓴 한숨을 쉬었다. ‘갈망하는 안식처’. 레타 마스터가 단골인 식당겸 여관겸 술집인 곳. 요리 솜씨 좋은 마 스터, 키안과 그의 귀여운 딸, 카나가 있는 곳. 언제나 사람이 들끓는 그곳은 분쟁이 없기 로 유명하다. 싸움을 벌인 녀석은 다시는 손님으로 안받는다는 키안의 방침이 있기 때문이 다. 맛좋은 요리를 두 번 다시 먹지 못하느니 부릴 성질을 다른데 해소하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이제는 레타 마스터의 비호마저도 있었다. 덕분에 늘 북새통이고 시끄럽고 소란한 그곳은 레타 내의 몇 안 되는 안락한 휴식처였다. 때문에 종종 연인들이 찾아와 고소한 깨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아아, 깨가 쏟아지고 있다. 깨가.” 테이블에 편하니 널브러져 고개만 빼꼼 든 상태로 록이 중얼댔다. 그 앞에는 정답게 앉아 있는 제그와 카나가 있었다. 피식 웃고 넘기는 제그와는 달리 카나는 약하게 반박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요.” “부러워. 부러워. 부러워. 부러…….” 기다렸다는 듯 웅얼대는 록을 보고 카나는 졌다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런 카나를 응원 하듯 조용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익숙한 그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은연의 힘이 실려 있으면서 편안했고, 또 어딘지 짓궂었다. “딜린이 없어서 쓸쓸한 게로군, 록?” “……아악!” 발작하는 록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음을 터뜨리는 남자. 집중된 시선 속에서 태연자약하 게 재차 농을 던진다. “그렇다고 엉뚱한데 화풀이를 하면 쓰나.” “누가!” 한참 발끈하다 자신의 옆에 앉은 민을 보고 아차, 입을 다물며 깊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마스터가 된 순간부터 이제는 예를 갖춰주어야겠다고 다짐했던 건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 시 습관처럼 발작을 해버렸다. 이것을 노린 걸지도 모른다. 알아서 화림을 갖다 주는 키안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 반갑게 마셨다. 제그가 물었다. “상처는 어떠냐?” “우문.” 하며 과장되게 손을 불끈 쥐었다가 쿡쿡 웃었다. 민이 세웠던 작전을 반대했던 제그는 뚱 하게 비꼬았다. “송장 치우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부흥하지 못해 미안하군.” 여유자작하게 대응하는 자신을 보며 싸늘히 인상을 찡그리는 제그였지만, 그게 다 걱정에 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기에 웃음만 났다. 솔직히 그로서는 오랜 친구의 죽음으로 적지 않 은 상처를 받았을 제그가 걱정이었지만 말이다. 소울러……. 그의 죽음마저 저잣거리의 볼 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후에 그 시신이 불태워지긴 했지만……. 아직은 요양해야 할 몸으로 오기를 부려 레타에 온 것에는 저간의 사정과 돌아가는 사태 를 알기 위함도 있었지만 제그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아무리 과거의 사람으로 치부하였 다 해도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을까. “괜찮아?” 차를 마시며 건성인 듯 낮게 물어온 질문.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그는 무슨 소리냐 며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다친 놈은 너야. 내가 아니라.” “하하. 그랬지.” 어설프게 웃으며 넘어갔지만 제그의 찌푸려진 얼굴은 돌아올 생각을 안했다. 걱정 때문에 저러는 사람한테 뭐라고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되던 안 되던 웃음으로 때우는 수 밖에. “오늘쯤이면 키르가 네 녀석 올 거라고 하더라. 자기한테 잠깐 들려달라고 했어.” “아아, 안 그래도 가보려고 했어. ……키르도 화났어?” “…….” 침묵하는 것이 더 불안하다. 어째 말을 괜히 꺼낸 것 같아 민은 식은땀만 흘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 “그, 그럼! 키르한테 가볼까! 데이트 방해해서 미안해!” 음산한 목소리에 지레 찔끔한 민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벌컥 화를 내려는 제그의 말을 잽싸게 잘랐다. 걱정 끼친 건, 민이니 면목 없는 것도 민이 었다. “그리고 록! 나중에 잠깐 보자.” 그리곤 날다시피 나가버리는 민을 보며 제그를 씩씩대다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런 제그 를 보며 카나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록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 “화 풀릴 때까지.” 록의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하는 제그였다. 그런 제그를 보며 어느 정도 납득했 다. 자신도 소식을 알길 없는 친구를 걱정하는 초조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록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자위할 수 있지만, 제그는 ‘중상’이라는 것만 확실하게 알 고 있는 상태에서 호전상태를 알 수 없어 더욱 초조했을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인가.” 딜린이 레타를 떠난 하기는 벌써 끝나고 추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형님이 벼르고 계시던데요.” “당할 뻔하다 왔지.” 새하얀 아이의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그의 한손에는 과자 따위를 담은 바구니가 들려있었 고, 작은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꿀꺽 삼키고 나서 민을 보았다. “언제로?” “황제 계승식이 끝나면 바로 할까 하는데.” “나쁘지 않군요.” 고개를 끄떡이며 약하게 찬성한다. 오랫동안 그 기간에 대해 고민해왔고, 겨우 정한 민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었다. “테밀시아님을 도운 대가로 받는 것……. 감사히 써먹는 것이 최대의 예의겠지.” “그것을 위해 고통을 감수한 것이니까요.” 물론 형님을 돕겠다는 순수한 호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수한 호의만으로 깊은 중상을 감당하기에는 짊어진 것이 많았다. 테밀시아에게 대가로 받고자 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 은 아니었다. ‘새로운 신분에 대한 윤허’ 랄까. 용병 길드나 마법사 길드처럼 새로운 신 분으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황실과 신전의 허가가 필요하다. 과거 황실과 신앙이 일체되 던 때에는 지배자의 허가만이 필요했지만, 신앙이 또 다른 형태의 신분으로 갈라진 현대 에 와서는 둘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받기 힘든 쪽은 단연 황실이었다. 게다가 두 제국 이상의 허가가 필요하니 그 난이도는 더했다. 일단 욤은 됐으니, 또 다른 제국과 조금은 소홀히 하고 있던 신전 쪽을 생각해야 할 차례였다. 세분화된 신전들 중 그들이 허락받아야 할 신전은 최고위 신전, 바 로 창세신 신전이었다. 그 일을 고민할 무렵,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해결책이 나타났 다. 게다가 키르바나가 또 다른 해결책에 나타났다고 은밀히 전해왔다. “그전까지 일을 해결해야 돼. 전에 말한 그 의뢰, 자세히 이야기 해줘.”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할 몸인데…….” “괜찮아. 건강체니까.” 걱정 어린 얼굴을 지었으나 이내 자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신전 쪽에서 비밀리에 의뢰를 해왔다는 건 말했지요?” “아아.” “이번 몬스터 사태에 대한 의뢰였습니다.” “몬스터 사태라……. 몬스터를 부리는 자가 무언가를 요구해 왔다는 것까지는 알아냈지 만 그게 뭔지는 결국 못 알아냈지. 회유나 거래를 원한다 해도 단연 거절할 신전에게 요구 를 해온 배짱은 대단하지만 실용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키르바나는 과자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몸을 움츠렸다. 중요한 것을 꺼낼 때면 나오 는 버릇 같은 자세였다. “그들이 요구해 온 것은 검이었다고 합니다.” “검?” “신전 측에서는 그쪽 세계의 세력다툼이 섞인 게 아닐까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만 증거는 없습니다.” “검이라…….” 몬스터 사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변방 마을은 거의 사라지고 성벽 있는 마 을만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를 하는 난민들이 제대로 된 일을 구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아니던가. 몬스터 사태로 인해 농 사는 이미 그 맥이 끊겼다. 허드레 일이나마도 없는 난민들 살기위해 강도가 되어 날뛰었 다. 결국은 난민이나 성벽 안 주민이나 맘 편할 날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토 록 어지럽고 번민에 빠진 세상을 보고도, 신관이란 작자들은 자신들의 고고한 자존심을 위 해 그깟 검 하나 못 내주고 버티려 한단 말인가.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군.” 싸늘히 말하는 민에게 키르바나는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슷한 의뢰가 또 들어왔습니다.” “비슷한?” “몬스터 사태에 관련된……. 속내는 감추고 있었습니다만.” 그만의 능력으로 알아냈겠지. 키르바나는 의뢰서와 함께, 의뢰인과의 대화 따위를 비밀리 에 저장해둔 수정구와 아이다운 필체로 자세히 써 놓은 서류를 내밀었다. 꼼꼼히 읽어 내 려가던 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일석이조란 딱 이때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잘만하면……. 내가 가보지.” “네? 하지만!” “레타 마스터로서 갔다 오겠어. 연락을 취해줘.” 만류하려는 키르바나에게 딱 잘라 말한 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걱정스런 얼굴을 하는 아이의 머리를 헝클이고 씨익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허리를 쭉 피며 머리를 몇 번 젓다가 기지개를 피다가……. 찌푸둥한 몸을 가볍게 풀어주 고 숨을 토해냈다. 굳어 있던 몸이 조금은 풀린 느낌이었다. “자, 그럼 이번엔 외기러기를 만나러 가 볼까나.” “외기러기요?” 민은 장난스레 웃을 뿐이었다. 각 대륙의 경계면에는 그 특유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면 얼마 안 있어 뚜렷한 문화차가 나타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문화다. 이곳을 중점으로 언어며 복색이며 주식 등등,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에 맞춰 통역사나 문화 참고서나 여행 지침서 따위가 거래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다른 곳을 가기 위해 잠시 쉬었다 가는 여관과 같은 문화랄까? 게다가 각기 날씨에 맞춰 교통수단이 달라지기도 하기에 그것에 대한 준비도 이곳에서 해결하곤 했다. 북쪽 대륙은 하기와 추기가 짧고 동기가 길다. 서쪽 대륙은 대체적으로 온난하며 하기가 길다. 남쪽 대륙은 습지대가 많고 동기가 없다. 동쪽 대륙은 춘기가 없고 동기에 눈이 많이 와, 그때는 말을 이용할 수 없다. 이에 맞춰 알맞은 이용수단을 그 경계선에서 구해야 한다. “이게 뭐야?” 무하가 가리킨, 시장 구석에서 파는 이 동물은 서쪽 대륙의 주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서쪽대륙은 아직 하기이기 때문에 말보다는 더위에 강한 이 녀석이 더 잘 쓰인다고 한다지만 상당히 묘하게 생긴 녀석이다. 크기는 대충 말만한데, 날렵하다기보다는 가볍고 늘씬하다. 색은 연한 적색인데 검은 줄무늬가 있어 사납게 보이기도 하다. 슬쩍 올라간 눈매와 이마 한가운데 난 길쭉한 뿔 덕분에 한층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퍽 아름답다. 슬쩍 만져보니 털이 매우 부드러웠다. “마음에 드는데?” “산리. 빠르고 지구력도 괜찮아. 서쪽 대륙에서나 볼 수 있는 녀석이야. 춥거나 습진 건 싫어하거든. 서쪽 대륙은 동기에도 그리 춥지 않으니까.” “헤에. 이걸 타는 거야?” 조심스런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을 만지는 무하를 밀치지 않았다. 반쯤 눈을 내리깔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녀석은 상당히 영리해 보였다. “타는 법은 말과 비슷해. 달릴 때 심하게 흔들려서 균형 잡는 건 좀 힘들지만.” “부드럽다.” “청결은 좋아하는 동물이야. 자주 씻겨 주지 않으면 제대로 달리지 않고 주인에게 화를 내. 성질이 좀 사납지.” “더러운 것보다야 낫잖아.” 씨익 웃으며 몇 번이고 그 털을 쓰다듬어보다가 얼른 사자고 독촉했다. 몸에 익은 말을 살 수도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이쪽 동물에 더 호기심이 동했다. 생긴 것도 예쁘고 말이다. 국경에서는 말을 구할 수가 없었다. 락아타와 욤을 지나는 상인이 당분간 뜸했고, 전쟁이 종결된 틈을 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의 소요가 높았기 때문이란다. 덕분에 여태 도보로 여행했다. 심하게 피곤한 건 아니었지만 탈 게 있는 쪽이 편한 건 당연했다. 서쪽 대륙에서는 흔한 동물이기에 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세 마리의 산리의 고삐를 쥐고 가까운 여관으로 향했다. 시장 구석이라 곧장 나온 거리에 여관이 깔려있었다. 곳곳에서 말을 걸어오는 호객꾼을 무시하고 유시리안은 마음에 드는 간판을 골랐다. 세계 이곳저곳을 꽤 오랫동안 돌아다닌 그는 락아타에도 익숙했다. “저기 가자.” 한 음식점을 가리키며, 서쪽 대륙의 요리만을 고집하는 곳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식욕과는 거리가 먼 락샤사는 어디든 상관없었고, 새로운 문화권의 음식이라는 말에 무하는 관심이 쏠렸다. “이쪽 음식은 대체로 매워. 난 매운 걸 좋아하기 때문에 이쪽이랑 잘 맞아.” “나도 좋아해.” “그럴 것 같았어.” “샤는?” “락아타보다는 욤이 낫다.” 그래도 미각은 있는 모양이라며 내심 고개를 끄떡이는 무하에게 유시리안이 덧붙였다. “술은 욤의 야매주가 최상급이니까. 뭐, 락아타도 나쁘지는 않아.” “뭐야, 술 이야기였어?” “샤에게는 음식하면 술이야.” 킥킥 웃으며 대신 답해주는 유시리안이었다. -딸랑. 식당 문을 열자 가볍게 방울소리가 났다. 저편에서 종업원이 인사하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꼭 떡볶이 같아.” 야채와 국수, 그리고 수제비처럼 얇게 떠놓은 쌀 반죽이 고추장 양념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모양새를 보며 무하가 한마디 했다. 유시리안은 계란후라이와 함께 나온 밥을 떠먹다가 웃었다. 꼴깍꼴깍 군침 삼키는 무하의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알맞게 졸여진 요리를 날름날름 먹어대며 매우 흡족해 하는 무하였다. 욤의 음식은 대체로 기름지다. 향유도 많이 사용되는데다가 고기가 주식이다.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질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국 종류는 얼큰한 것이 제법 되서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말이다. 냄비에 들러붙지 않게 주걱으로 뒤적거리다가 물었다. “괜찮은 거야? 그 친구한테 안 가 봐도?” 딜린이라는 남자와는 다음날 아침 헤어졌다. 반갑지 않은 만남이었다고 서로에게 빈정대며 미련 없이 갈라졌다. 씻고 나왔을 때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잠을 청하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이야기를 한 것 같았는데 상당히 깔끔한 이별이었다. 자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친구를 돕고 싶으면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묘하게도 유시리안은 물론이거니와 딜린까지 흠칫하며 싫다고 소리쳤다. 그리곤 다시 서로를 보며 빙글빙글 꼬인 웃음을 지어댔다. 유시리안은 현명한 생각이라고 비아냥 거렸고, 딜린은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비아냥 거렸다. 그러면서도 가볍게 손을 마주치고 헤어지는 모습은 매우 친근해 보였다. 간단히 나온 찬과 더불어 밥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던 유시리안은 뜬금없는 질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래잖아.” “걱정 안돼?” “걱정도 팔자다. 그딴 녀석을 내가 왜…….” 잘 졸아붙은 요리를 집으며 궁시렁 대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작게 웃었다. “믿는 거구나, 율은.” “믿기는 무슨! 눈 감으면 코 베어갈 녀석이야, 그 녀석은.” “하하하.” 발끈하며 답하는 유시리안을 가만히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무하였다. “어떤 사람이냐고?” “궁금해. 율은 상냥하지만 쉽게 마음을 열 타입은 아닌 것 같거든.” 유시리안이란 남자를 일면이나마 알고 있는 자가 옆에 있었다면, 그의 살기에 질려 웃지는 못하더라도 사레정도는 들리지 않았을까 싶은 발언이었다. 락샤사야 그런 일반적인 반응을 보일 차원을 넘어선 존재니 넘어가자. 유시리안은 야채를 하나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조금 음산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앞에서 무하는 태연히 면을 접시에 덜고 있었다. 락샤사는 유시리안과 마찬가지로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락샤사가 유시리안과 만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라이시륜을 만났다. 유시리안도 그때 그를 처음 만난 것이니, 셋의 인연은 거의 같은 시점에서 시작한 것이라 봐도 된다. 락샤사가 봤을 때, 유시리안과 아무렇지 않게 투닥거린 존재는 라이시륜이 처음이었다. 서로를 빈정대고 비꼬고 아픈 데를 찔러대고…… 원수라는 말조차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락샤사가 봤을 때, 그들은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칼부림이 안 났다는 것은 서로간의 무언가가 있었음이라. 락샤사는 그것을 읽었지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갓난아이가 책을 본다 하여 그 안의 것을 읽어 내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였다. 글자는 볼 수 있으나 그 의미는 모르는 것과 같았다. 단지 그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헐뜯고 몰아세웠으면서도 단 한번도 서로를 경멸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한 그 헐뜯음에 마음 상해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거면 된 거라고 이카미렌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나와 얽힌 인연 중 가장 끔찍한 악연이야.” 삐딱한 저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락샤사는 알고 있었다. 유시리안에게 있어서 타인이란 ‘자신의 것이 아닌 자’다. 그는 소유함으로서 애정을 느낀다. 따뜻함을 느낀다. 그 외에 보기 싫은 녀석이라면 안보면 그만이고 귀찮은 녀석이라면 처리하면 그만이다. 또 관심 없는 녀석이라면 애당초 이런 감정 소모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유시리안은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라이시륜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소유당하지 않는 자다. 늘 혼자였던 자. 그렇다고 보기 싫은 녀석인 것도 귀찮은 녀석인 것도 관심 없는 녀석인 것도 아니다. 생소하기만 한 ‘친구’인 자. 유시리안에게 있어서는 가장 골치 아픈 존재. 그것은 서로 간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둘 다 그 두통을 감수하고 있다. 끝없는 감정소모를 해대며 헐뜯고 비아냥거린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깊게 신뢰하고 있다. ‘지기’는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지 않는다. 둘은 너무 닮았기에 닮은꼴인 서로를 의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지기가 아니다. “지기?” “말도 안돼! 누가 그딴 녀석을 의지할까봐!” 무하가 넌지시 물어오는 말에 유시리안을 펄쩍 뛰었다. 하지만 무하는 강적이었다. “그럼 신뢰는 한다는 소리네?” “…….” 좀 전에 했던 질문과 뜻은 같았지만 초점이 달랐다. 앞서 했던 질문이 그에 대한 감정측면을 묻는 거였다면, 지금은 지기에서의 조건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자, 의지하게 할 수 있는 자. 믿을 수 있는 자, 믿게 할 수 있는 자……. 함부로 대답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여태껏 유시리안에게 이것을 노골적으로 물어온 자는 없었다. 이카미렌은 다 안다는 듯이 웃었고 락샤사는 무관심했다. 그 외에는 감히 그에게 질문을 던질만한 존재는 없었다. 그래서 조금 당황한 유시리안은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다시 음식에 관심을 돌렸다.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로 답하면서. “뭐, 배신할 녀석은 아니야.” “후후.” 무하는 다시 웃었다. 꽃과 수풀로 가득 찬 화원. 독한 꽃 내음과 싱그런 수풀 내음이 조화를 이루고 무리를 지 은 나무들이 끊임없이 산소를 뱉어내는 곳. 개인의 손길로는 유지할 수 없는 그곳은 대부 분 마법으로 관리되고 있다. 마법으로 끌어들이는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고 곳곳에 설치한 마법진이 주기적으로 물방울을 뿌린다. 그 안에서 평평한 바위에 느긋하니 자리 잡고 향기에 취해있는 남자가 있었다. 바위 위에 결 좋은 흑발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고 살짝 감은 눈동자는 기분 좋은 곡선을 그려내 고 있다. 깨끗한 갈색 피부와 좋은 대치를 이루는 연한 분홍의 입술은 고집스레 닫혀있지 만, 풍기는 느낌은 일광욕을 하는 고양이와 같이 한가하고 평화롭다. “마스터.” 화원의 벽이 기이하게 갈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와는 다르게 깊은 연륜이 느껴지 는 삼십대 중후반 정도의 남자다.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던 흑발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떠 그를 보았다.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가 드러나자 그 몸을 휘감고 있던 평온함은 온데 없고 싸늘함이 내려앉았다. 중년의 남자는 이 순간적인 변화가 익숙한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딜린이 왔습니다.” “호오.” 그제야 일어나 가볍게 옷을 탁탁 털었다. 싸늘하기만 했던 눈동자에 연하게 반가움이 서렸 다. 화초로 가득 찬 공간을 나가자 또 다른 공간이 나왔다. 전의 공간과 마찬가지로 극소수만 이 아는 비밀공간이었다. 방어 결계는 물론이오, 기척을 감추는 결계까지 고난위도로 설치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행동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지금의 라이시륜에 게는 그 필요성이 더했다. 이러는 중에도 그를 추적하고 있는 이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공간이 갈리며 그가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미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막 샤 워를 하고 온 참인지 약하게 비누냄새가 풍겼다. 락아타에서 돌아오자마자 씻고 이리로 온 것일 테지. 딜린은 자신의 마스터에게 있어서만큼은 고지식했다. “다녀왔습니다.” “아아. 앉아라.” 대충 권하고 거실과 이어져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알고 있는 이가 극소수이니만큼 이곳 에는 비서나 하인 따윈 없었다. 부관이 있긴 하지만 자기 먹을 것 정도는 챙길 수 있었다. “시원한 걸로?” “예.” “인심 쓰는 김에 제 것도요.” 부관이 냉큼 덧붙였다. 과일즙을 세잔 들고 온 라이시륜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자리 에 털썩 앉았다. 물론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감사히 마시라고.” “뼈 속까지 새기며 마시죠.” 능글스런 부관의 대답이었다. 약하게 웃어 보인 딜린은 일단 몇 모금 들이킨 다음에 숨을 돌렸다. 샤워를 한 뒤라 갈증이 났던 참이었다. 그리고 라이시륜을 보며 말했다. “락아타에 있던 인원들은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후계자 가지고는 성이 안 찬다더냐?” “안차는 정도가 아니던데요.” “쿡쿡.” 조소를 짓는 라이시륜을 가만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다음 건을 보고했다. “그들이 있었습니다. 확인하고 싶었던 거겠죠. 소문의 ‘그’를…….” “확인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애송이야. 신경 쓸 필요 없어. 경계해야 할 것은 이미 알 고 있는 녀석들이지.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확실히 알아내면 바로 쳐들어 올 테니.” “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냉혹한 얼굴로 딱 잘라 답하며 은연중에 살기를 뿜는 딜린을 보며 라이시륜은 피식 웃었 다. “다음에 보일 움직임이 기대되는군.” 그리곤 음료를 들이키며 한숨을 쉬었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욤의 술은 추기에 진면목을 보인다. 아직도 저조한 몸 상태 때문에 그것을 멀리해야 하는 처지가 고달팠다. 쇄골 쪽을 엄지로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안에 그들이 박아 넣은 봉인구가 있다. 마나를 강제로 흐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 녀석이다. 여태껏 회복이 되지 않은 것도, 기운 을 제대로 못 모으는 것도 이 빌어먹을 봉인구 덕분이다. 억지로 마나를 끌어 모으려하면 근육이 뒤틀리고 내장이 뒤집힌다. 선을 넘어서면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죽게 된다. 이것 이 라이시륜보다 약한 그들이 택한 방법이었다. 입으로만 고상한 말을 뱉어내는 역겨운 종 속들. “아직 제거하지 못하는 겁니까?” 더욱 조심스럽게 딜린이 물었다. 강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과 체력소모 가 따른다. 2년 동안의 감금과 굶주림, 그리고 봉인구 때문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라이시 륜이다. 고통쯤이야 견딜 수 있지만 체력이 딸려서야 제거되기도 전에 죽기 십상이다. 인 내를 가지고 몸을 회복시킨 뒤, 적당선이 되면 제거해야 한다. 라이시륜은 바로 그때를 기 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이렇듯 구차하게 결계 속에 숨어있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 런 굴욕을 맛보게 해준 그들에게도 보답을 해주어야겠지. “아, 그리고…….” 빠득빠득 이를 갈던 라이시륜이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자 딜린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가 이내 털어놓았다. “오는 길에 유시리안 씨를 보았습니다.” “……망할.” 한층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토해낸 라이시륜은 계속 말해보라며 손짓했다. 부관마저 석 고상마냥 굳어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그게……어느 정도 눈치 챈 듯 했습니다. 마스터의 상태나 제가 이끌고 오는 병력이 나…….” “이걸 제거하기 전까지 얼굴 볼일이 없길 빌고 또 빌어야겠군. 무슨 꼬투리를 잡힐 지…….” 쇄골 쪽을 다시 문지르며 투덜댔다. 그래도 방금까지 살벌하게 뿜어내던 살기 같은 것은 없었다. 이렇듯 참으로 묘한 친우였다, 이 둘은. “그리고 일행이 있었습니다.” “일행? 락샤사 말인가?” “아니오. 다른 남자였습니다. 겉보기에는 인간으로 보였습니다만.” “희한하군. 그 싸가지랑 어울릴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신 관인가? 아니야, 신관도 나가 떨어진지 오래지. 신관도 사람이니까.” 참으로 독살스럽지만 맞는 말이니 욕이라고 하긴 뭣하다. “곤크의 용병이더군요.” “곤크?” 흥미를 보이는 라이시륜과 부관에게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이름을 알려주었다. “무하. 무하 카 곤크라고 했습니다.” 라이시륜과 부관은 각기 뭐라고 표현할 길 없는 얼굴을 해보였다. 놀람이 기본으로 깔려있 는 위로 경악과 반가움과 불신 따위가 뒤섞이고 마지막을 안쓰러움이 장식했다. 그것은 마 음고생을 할 게 뻔한 무하를 향한 동정이었다. 유시리안을 뻔히 알고 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과민한 반응이 아닌가 싶은 딜린이었다. 무엇보다 도 부관은 모를까, 라이시륜은 그와 안면조차 없지 않는가. 타인에게 무관심, 무성의한 것 은 유시리안이나 라이시륜이나 도토리 키 재기였다. “왜 그리 놀라십니까?”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쯧쯧.” 노골적으로 동정을 표하며 혀까지 차는 부관을 보며 식은땀 섞인 웃음을 짓다가 마스터를 돌아보았다. 그의 마스터는 평소 보기 힘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무하라…….” 이름을 읊조리다가 쿡쿡 웃었다. 그것은 조소도 자조도 아니었다. 따뜻한 웃음……. “어때 보이던가?” “그게, 의외로 셋 다 사이가 좋아보였습니다. 락샤사 씨야 워낙 속모를 분이지만 유시리 안 씨는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던걸요.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은 얼굴이긴 했습니다만.” 소름 돋는 얼굴로 몸서리까지 치는 딜린을 보며 라이시륜은 또 쿡쿡 웃었다. 자신과 죽이 잘 맞았던 무하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대범하며 할 때는 하고 쓸데없는 간섭이나 참견은 없었다. 이성적이면서도 따뜻했고,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타인을 배려했다. 당당하고 위선 적이지 않았다. 딴마음을 품지 않고 늘 곧았다. 아마 유시리안과도 잘 맞을 테지. 부관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 고생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락샤사나 이카미렌을 대하는 유시리안 을 보면, 자신이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있어서는 이중적으로 성격이 변하니까. ‘나중에 만나서 그 꼴을 보는 것도 재밌겠군.’ 이번 일로 당할 놀림을 막을 좋은 구실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딜린은 ‘어느 정도’라고 했지만, 거의 다 눈치 챘을 것을 라이시륜도 알고 부관도 알며 딜린도 안다. 녀석 눈치가 어디 보통이던가. 당장 놀리러 날라 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아, 날라 왔다면 무하도 함 께였을까? 역시 마냥 좋을 수만도, 마냥 나쁠 수만도 없는 게 인생사인 모양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못하는 마스터를 보며 딜린은 의아하게 그를 불렀다. “마스터?” “아아.” 오랜만에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는 그에게 부관이 연이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별로.” 테이블에 놓인 과일즙이 눈에 들어왔다. 단거는 죽어도 못 먹던 지기……. 시륜도 단 것 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광적으로 끔찍하게 싫어하지도 않았다. 이모저모로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같이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이게 지기란 거구나 하 고 느끼게 해주었다. 처음으로 ‘구하고 싶다’라는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이것이 ‘의 지’라는 것일까?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하게 할 수 있고……. 악연의 극치인 유시리안과 그 사이에서는 절대로 생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언제고 만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기약 없이 헤어졌다. 이런 식으로 소식이나 마 접하게 되니 그 무더웠던 사막에서의 이별이 새삼 스쳐간다. “무하란 녀석…….” 라이시륜은 유리잔을 가볍게 퉁기며 웃었다. “내 지기거든.” 그 뒤로도 보고와 질문이 상당한 시간동안 오고갔다. 쉬시라는 말과 함께 일어서는 딜린에게 라이시륜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그러냐며 고개를 갸웃하는 딜린에게 부관이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입이 왔다.” “신입이요?” 신입이 온 것과 저 둘이 저런 미소를 짓는 것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의아해 하는 딜린을 앞에 두고 한층 깊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마주보는 라이시륜과 부관이었다. “꽤 유능해서, 오자마자 파 등급이야.” “괜찮군요. ……근데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곤크에서의 계급 관리는 타 용병단과 비교할 수 없이 엄격하지만, 덕분에 알아서 실력자들만 몰렸다. 때문에 그 정도 실력자는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다. 적어도 곤크의 독재자 마스터와 곤크의 노랭이 부관의 관심을 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는 자네가 그 신입과 파트너가 됐으면 하는데 말이야.” 하는 부관의 말은, 말이 권유지 실상은 명령보다도 더한 강제였다. ‘우리’라는 말에는 마스터의 의견도 들어가 있다는 뜻. 유시리안의 말을 빌리자면, 마스터 추종자인 딜린에게 그것은 절대적 명령인 것이다. 어쨌거나 딜린은 별다른 반박은 안했지만 여전히 껄끄러움이 남은 상태로 그 권유를 받아 들였다. 부관은 여전히 그 묘한 미소를 지으며 신참보고 가라고 할 테니 먼저 식당에 가있으라고 했다. 공간을 빠져나가는 딜린을 보다, 라이시륜과 부관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하군.” “못 보는 게 애통할 따름이죠.” “나름대로 오붓하게 할 말도 많을 테니까. 우리가 있으면 방해가 될 거야. 아무래도 입장이 있으니까.” “자상하시군요.” “누구 표현을 빌자면, 보모잖아?” 유시리안이 늘 그렇게 라이시륜을 놀렸다. 뒤로 이어지는 말은 늘 다 늙어서 주책이다, 이었다. 그러면 라이시륜은 여태 아버지 품을 못 나오는 녀석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고 쏘아붙였다. 즉, 보모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은 것이다. 실제로 부모에게 버림받고 죽어가는 다섯 살짜리 꼬마를 데려다 키운 것은 라이시륜이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는 멀쩡한 애 죽일 일 있냐며 만류했고, 오기 부리는 라이시륜을 꺾지 못하자 저 아이가 업이 많은 거라고 동정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딜린을 키우겠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이, 리안 녀석과 일행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과 비슷한 것 같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부관은 입에 담고 있던 음료를 풋 뿜어내며 깔깔댔다. 손수건으로 대충 테이블을 훔쳐내면서도 한손으로는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그 꼴을 뚱하니 보고 있던 라이시륜이 생긋 웃으며 한마디 했다. “평생 웃게 해줄까?” “흠흠.”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온 공간 속에서 간간히 해대는 부관의 헛기침 소리만 울렸다. “왜 기분 나쁘게 웃는데?” “듣고 보니 정말 똑같아서 말입니다.” “똑같긴 뭐가 똑같다는 거야.” 다시 눈살을 찌푸리는 라이시륜에게 부관은 웃음을 삼키며 힘들게 답했다. “역시 두 분이 타인에게 순수한 호의를 품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도 그렇고. 그 호의가 좋게 영향 끼친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다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는 거야. 그 녀석은 몰라도 난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도 두 분 다 똑같고요.” “……쳇.” 음료를 들이키는 마스터를 가만히 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좀 전의 태연히 ‘지기’라고 말했을 때의 당혹감이 아직도 가셔지지 않는다. 그가 아는 무하를 떠올려보자면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마스터란 작자가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남자라서 말이다. ‘그래도 그때 얼굴은 좋아보였다.’ 지기가 생겼다며 자랑스럽게 말했을 때의 얼굴도, 무하가 그 지기라며 웃으며 말했을 때의 얼굴도. 제법 오랜 시간동안 마스터와 함께 있었지만 그런 얼굴은 본 기억이 없다. 아, 딱 한번 있었던 것 같다. 딜린이 카 등급을 땄을 때였던가? 그때는 팔불출이라며 유시리안에게 놀림을 당해 곧 지웠지만……. 이번에는 피차일반이니 유시리안도 뭐라고 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내가 알던 무하는 늘 어두웠다. 솔직히 저렇게 웃는 마스터나 그 싸가지 유시리안과 함께 있는 무하는 안 어울린다. 감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안보였고 웃음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늘 어둡고 슬퍼보였지.’ 뭐,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던 거겠지. 솔직히 부관으로서는 유시리안과 라이시륜이 여태껏 유혈사태 없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신기하니까. 매끄러운 복도 위를 기계적으로 걷던 딜린은 잠시 창문 밖을 보았다. 추기의 풍경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용병들, 속속 들어오는 귀족들의 마차들. 높은 성벽과 단내의 활기찬 상점, 식당, 술집. 저편에는 공원도 있다. 성벽 너머에는 깊은 해자까지 있다. 이 요새와 같은 곤크는 몬스터로부터 안전하다. 그 굳건함은 그들이라고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손을 내밀자 닫혀 진 창문의 촉감이 느껴졌다. 뭐랄까……. 딜린에게 있어서 마스터는 이 닫혀 진 창문과 같은 존재였다. 굳게 닫혀져 있고 차갑다. 안이 다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보고 있던 것이 단순히 그 유리에 그려진 다른 것이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인가 깨닫고 만다. 오늘 그 창문이 잠깐 열렸다. 그 안은 무척 따듯했다. 그 따뜻함은 언젠가 느낀 적이 있는 따뜻함이다. 언제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기인가…….” 손을 떼고 다시 걸음을 놀렸다. 부관이 말한 식당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식당이다. 양도 많고 맛도 좋은 곳. 술집도 겸하는데, 그 술들도 제법 괜찮다. 무엇보다도 딜린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있는 곳이다.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한입 삼키며 중얼거렸다. “키안 오라버니네가 더 맛있어.” 아이스크림 뿐 아니라 녀석을 놀려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언제나 똑같은 매뉴얼인데도 언제나 똑같이 발끈하고 날뛴다. 뻔히 남색에 취미가 없는걸 알면서도 놀림을 당하면 뭐라고 한마디 해야 속이 풀리는 모양이다. 그다지 강하지 않으면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셔대고 데려다 주면 당당하게 해장국까지 요구했다. 완전히 물 빠진 거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 한번 우격다짐으로 직접 끓이게 해봤더니 어찌나 맛이 없던지. 결국 죄다 버리고 다시 끓여야 했다. 끓여주고 나서 역시 마누라 손맛이 좋지? 라고 놀렸더니 발작하다 혓바닥이 다 데어 비명을 질렀다. “아무튼 하나하나가 재미있는 녀석이었어.” 다시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나름대로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 관심 없이 다시 아이스크림을 푸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는 절대 들을 수도, 들려서도 안 되는 목소리였다. “저 딜린이라는 사람과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요.” 숟가락을 입에 문채로 황당하게 뒤를 돌아봤더니, 그쪽도 딜린을 발견했는지 딱딱하게 굳었다. 종업원이 손으로 딜린 쪽을 가리키며 안내를 하고 나서야 석고 상태가 풀렸는지 철컥철컥, 속빈 갑옷이 걷듯이 부자연스럽게 걸어왔다. 그 모습에 상황도 입장도 다 잊고 딜린은 평소처럼 한마디 했다. “바람은 안 폈겠지, 허니?” “크악! 누가 하니야!” 발작하는 걸 보니 잘못 본 건 아니다. 딜린은 다시 평소처럼 흐느끼는 척했다. “흑흑. 그새 딴 남자가 생긴 게 분명해. 정조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흑흑.” “뭐가 정조야! 앗! 그리고 왜 생겨도 그게 남자인 거냐? 엉?” 딜린은 생글 웃으며 마무리했다. “알면서.” “……으, 으윽!” 힘이 빠졌는지 앞자리에 털푸덕 앉아, 테이블에 엎드려 한참을 심호흡하는 남자의 익숙한 검녹색 머리카락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좀 전까지 우울하던 마음이 어느 샌가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 신기했다. 거칠게 들썩거리던 어깨가 잠잠해졌는데도 고개를 들 생각을 안 하는 친구를 보며 딜린은 태연히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어째서 녀석이 여기 있는 건지, 또 자신이 왜 여기 있는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한 친구를 만났고 그것이 반갑고 즐겁다는 것이 중요했다. 넙적한 유리컵에 가득 채워져 있던 아이스크림이 자취를 감췄을 무렵, 친구의 익숙한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죽은 줄 알았다. 망할 녀석.” “쉽게 죽을 몸이냐, 내가?” 어깨가 높게 들려졌다가 낮게 내려앉았다. 한숨을 쉰 것일 테지. “못 보는 줄 알았다고, 변태 자식아.” “뜨거웠던 밤은 이제 다 잊고, 흑흑.” “아악! 뭐가 뜨거워, 뜨겁기는!” 그제야 상체를 번쩍 든다. 다시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먹으며 딜린은 방긋 웃었다. “이제야 얼굴 좀 제대로 보는 구나. 아주 기름이 잘잘 흐르네. 나 없으니 살 것 같았지?” “……잘 아네.” “불어. 누구야?” “뭐가?” “살결 고운 우리 민? 인상 좋은 우리 제그? 관록 넘치는 우리 산 형님? 연륜 풍부한 우리 키안 오빠?” “……산 형님이나 키안은 넘어가고 나머지는 뭐냐? 가면 쓰는 민 녀석의 살결이 고운지 수세미인지 알게 뭐냐? 제그가 인상이 좋으면 세상 망할 징조지. 대체 뭘 묻는 거야?” 뭘 물어보는 지도 모르면서 일일이 꼬투리 잡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딜린은 스푼을 입에 문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바람 핀 상대.”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고, 주인장이 와 시끄럽다고 고함을 지를 때쯤에야 록의 발작은 멈췄다. 딜린은 그 앞에서 깔깔 웃어대고 있었다. 생기고 봐야 한다는 진리처럼, 얄밉게 웃는 딜린을 보는 여인들의 얼굴에 작게 홍조가 돌았다는 건 별 상관없는 이야기다. 다시 기진맥진 상태로 엎드린 록을 보며 딜린은 얼마 남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역시 놀려먹는 재미란 아이스크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딸깍, 스푼을 빈 컵에 꽂으며 웃었다. 방금까지 우울했던 것이 정말 거짓말 같다. ‘조금 질투를 한 것 같다.’ 언제나 차가웠던 마스터였기 때문에. 마스터에게 그런 웃음을 짓게 한 무하라는 남자에게 조금 질투했다. 지기가 생겼다는 말에 순수한 기쁨을 느꼈건만, 막상 현실감을 느끼고 나니 이렇듯 우울해 했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겠다며 생판 타인의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의 기분과 같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마스터에 대한 질투도 조금,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처음으로 생긴 친구를 포기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당당하게 지기가 생겼다며 좋아하는 마스터가 비교되어, 아주 조금 질투를 한 것 같다. 이렇듯 록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딜린은 라이시륜의 양자와 같았다. 적어도 곤크 내에서는 그렇게 취급받으며 자라왔다. 당연한 거지만 친구는 없었다. 일단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한창 나이의 용병들이었다. 피치 못한 경우, 단 내에 그들의 가족이 살기도 했지만 그들은 딜린을 어려워했다. 딜린은 그들로서는 바라볼 수도 없는 마스터의 아이였고, 또 강했다. 그것이 어렵고 낯설고, 무엇보다 자신들과 비교가 되어 싫기도 했다. 그래서 딜린은 친구가 없었다. 라이시륜은 단 내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많았고 부관은 바빴다. 쓸쓸하다거나 외롭다고 느낀 건 아니었다. 그냥 그것이 당연했다. 그러다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곤크 내의 카 등급을 따게 되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고 그의 마스터는……. “아!” “……?” 록이 엎드린 상태로 고개만 들어 딜린을 봤으나, 딜린은 갑자기 생각난 그 일에 정신이 없었다. 그랬다. 그때도 그런 웃음을 지었다. 딱 한번, 그때 굳게 닫힌 창문이 열렸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뭉쳤던 응어리가 풀려갔다. 그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하하하.” 그리고 엎드린 록의 어깨를 팡팡 쳤다. “잘 부탁해, 파트너.” “아아.” 두 손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힘없이 답했지만, 록 역시 웃고 있었다. “헤에, 첩자였구나?” 딜린의 사정을 다 들은 록이 한 말은 이게 전부였다. 뭐, 첩자라고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게 사실이었다. 아이세란의 시대는 이미 가고 민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로 어쩌다 레타에 굴러왔는지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불문율이기도 했지만 피차간에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식으로 탈퇴를 한 상태라면 후에 무슨 일을 해도 상관하지 않는 게 규칙이다. 물론 딜린의 경우엔 배신자라고 봐야 하는 거지만, 록은 그렇게까지 레타에 대한 의리는 없었다. 아니, 레타보다는 딜린이 더 우선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사정을 들은 걸로 족하다. 이번엔 딜린이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민이 시켰어.” “민이?” “아아. 곤크에 가보라고 하더라고. 명목은 첩자였는데 말이야.” “에?” 록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말했다. “첩자 말이야. 뭘 알아내야 하는 거냐고 하니까 그냥 웃으면서 가보면 안다나?” “그, 그런 걸 막 이야기해도 되는 거야?” “뭐, 어때. 넌데.” 아무렇지 않게 한 그 말에 딜린은 할 말을 잃었다. 하긴 아무렴 어떻겠는가. “뭐, 그렇지.” 첩자라……. 예리한 걸까? 아니면 예민한 걸까? 그도 아니면 자신 때문일까……. 아무 생각 없이 록을 이쪽으로 보낼 리는 없다. 할 일 많은 민에게는 믿을 만한 사람 한명이 아쉬운 판이다. 록이라면 신뢰는 물론 능력도 되는 남자. 함부로 다룰 리 없다. 그 민이 인력을 낭비할리 없을 터. ‘냄새를 맡은 걸까.’ 하지만 어떻게? 아직 부관과 자신밖에 모르는 일이다. 정보가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없는 것이다. 단순히 후계자인 자신이 락아타를 갔다가 의뢰인에게 당한 모욕의 대가로 인력을 데리고 온 것으로 그것까지 읽어나갈 관록은 아직 민에게는 없다. 곤크의 마스터는 자존심이 강한 자. 딜린과 같이 단의 대표로 갔다가 귀족의 모욕으로 가벼운 앙갚음을 한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과민반응인가.’ 만약 대세를 읽었다면 민 본인이 왔겠지. 아마도 록이 도착하고 보낸 편지를 보고 생각해낸 이벤트라 보는 편이 맞을 듯싶었다. ‘나를……위해서인가.’ 뭔가 쑥스러움이 밀려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꽤나 배가 고팠는지 정신없이 밥을 먹고 있던 록이 아! 하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왜?” “그러고 보니 민 녀석,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 “이상한 말?” 상의의 안주머니에서 손바닥의 절반만한 종이봉투를 꺼낸 록은 딜린에게 건네며 말했다. “줄 사람 생기면 주라던데. 나야 여기에는 안면이 없잖아? 아무한테나 주라는 말은 아닌 것 같고. 그때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지금 보니 네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 이걸 여태껏 보관하고 있었던 록에게 감탄했다. 자신이라면 벌써 뜯어보고도 남았을 것이다. 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이유를 대면서. 단단히 봉해진 것을 뜯으니 곱게 접힌 종이가 들려나왔다. 펼쳐서 읽은 딜린은 묘한 얼굴을 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가뜩이나 궁금했던 편지라 얼른 뺏어다 읽어본 록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인상을 썼다. 왠지 좋은 어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하하!” 타인의 호의란 이토록 포근한 것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니까?” 웃기만 하는 딜린에게 재차 묻는 록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겉돌고 있었다. -우리의 외롭고 슬픈 외기러기를 보낸다. 예쁘게 사용하길. 욤 제국과 락아타 제국이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욤 제국은 치유와 중재의 신전이 국교로 정해져 있고, 신성제국이라 불릴 정도로 신성마법을 깨우친 신관들이 많다. 또 신전과 국가, 신관과 귀족들 간의 유착되어 있어 그만큼 신관들이 입지가 견고하다. 그에 반해 락아타에서는 신관들은 그다지 대우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법제국이라 불릴 정도로 마법에 치중되어 있다. 욤에서는 수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마법 길드 지점이 락아타에는 각 도시마다 깔려있다. 전 대륙에 퍼져있는 마법 길드의 본점이 바로 이 락아타 수도에 있는 것이다. 욤에서는 신전이 설립한 학원이 주를 이루는 반면, 락아타에서는 마법 길드가 설립한 학원이 주를 이룬다. 이례적으로 욤의 이므르와 락아타의 화이라가 마법을 포함한 전반적인 학문을 전문적으로 분류하여 가르치고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례적인 일일 뿐, 절대 다수의 학원들은 편중된 학문만을 주입시키고 있었다. 결국 그 편협함이, 욤에서는 신관이 락아타에서는 마법사가 흔해빠지게 되는 현상을 자아낸 것이다. 무하는 곳곳에서 마법 길드의 로브를 입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헤에, 감탄 했다. 여태 지나왔던 도시나 마을에도 적지 않은 수의 마법사가 눈에 띄었지만, 역시 수도랄까.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소질만 보이면 바로 길드에 가입시키는 욤과는 달리 락아타는 그 심사가 엄격하다고 한다. 워낙 지망자가 많다보니 입맛에 맞게 고를 수 있는 것이다. 열에 두어 명만 치유마법을 깨닫는 욤과는 달리 락아타에서는 열에 일곱은 깨닫는다고 하니 그 질의 차이가 확연했다. 솔직히 무하야 마법 시전을 치유마법부터 시작한 비정상적인 케이스니 실감은 잘 안 나지만 말이다. “마법 길드, 용병 길드. 그럼 신전 길드도 있어?” “하하하! 신전은 과거 황실에서 갈라져 나왔어. 마법사나 용병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계층으로 인정해주기는 하지만 그 시초는 완전히 다른 거지. 최고위 신인 창세신을 모시는 신전을 필두로 하여 자기들끼리 모임은 있는 것 같지만 길드처럼 공식적인 건 없어. 그럴 필요성이 없다는 게 더 맞겠지만.” 신전은 길드로 묶이지 않아도 각기 얼마든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들은 마법 길드와 용병 길드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 제국과 함께 허락한 권력자다. “욤은 신관들이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눈에 띄지는 않았는데.” “대부분 신관들은 신전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마법 길드는 신전과는 달리 모든 마법사들이 거주하거나 일하거나 하지 않거든. 뭐, 마법 길드 소속이라는 자긍심만은 대단해서 저렇게 문양이 새겨진 로브 따위를 입고 돌아다니긴 하지만서도.” “흐음.” 소속됨으로서 자유는 잃지만 안정을 얻는 그런 건가? 화마라고 이름 지은 산리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거리를 좀더 구경했다. 욤은 석제 건물이 주를 이루고 대부분이 오층 정도 높이인데 반해 락아타는 목제 건물이 주를 이루고 대부분 이층에서 삼층이다. 욤은 장인들이 기술 위주로 튼튼하게 집을 짓지만 달리 락아타에는 남아도는 마법사들을 활용한다. 외형적인 아름다운에 치중하여 나무를 깎고 조각하고 엮은 다음 마법사들이 강화 마법 등을 걸어주는 것이다. 그 마법은 대충 삼년에서 오년동안 유지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마법을 걸어주는 직종이 따로 있었다. 락아타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색 직업이었다. 때문에 거리는 매우 아름다웠다. 외형에 치중할 뿐 아니라 주위의 건물과의 조화도 생각하여 꾸미기 때문이다. 각기 건물이 하나의 예술품처럼 느껴질 정도다. “예쁘다.” “락아타는 하기가 길어. 덕분에 숲도 많고 꽃도 많고 특이한 화초도 많지. 수도 바로 옆이 바다라 해물 요리도 뛰어나고.” 싱긋 웃으며 가리키는 곳에는 잘 깎여진 생선모양의 간판에 락아타 어로 ‘바다내음’이란 글씨가 새겨진 음식점이 있었다. 무하도 마주 웃으며 발을 옮겼다. “아. 의뢰인은 어떻게 만나지? 수도에 가라는 말만 했으니…….” “그쪽에서 알아서 오겠지. 안 오면 그걸로 끝이고.”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내키지 않아하는 사람들에게 협박을 한 건 그쪽이니 심할 것도 없다. 무하가 못 말린다며 가볍게 웃을 때, 뒤쪽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졌다. “뭐, 뭐야?” 돌아보니, 몰려있던 사람들이 다급히 갈라지고 있었다. 저쪽에서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중심 쪽에서 벗어나 있던 무하 일행은 뭔가 하고 여유 있게 방관했다. 급히 피하는 사람들의 층이 얇아졌을 무렵, 거대한 적마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갈색 털에 붉은 빛이 감도는 녀석이었다. 어딘지 눈에 익다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안장이나 고삐는 없고 갈기도 깨끗하다. 길들여진 말과는 달리 생생하게 살아서 살기를 띄우는 눈동자나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을 능숙하게 가르는 몸놀림, 적당하게 뿜어내는 위압감을 보건데 팔팔한 야생마가 아닌가 싶었다. 몬스터나 야수 따위와 뒹구며 자라는 야생마는 그들 못지않게 호전적이기 마련이니까. 야생마가 왜 이런 곳에? 라는 의문이 들기가 무섭게 강한 경고성이 들려왔다. “비키시오!” 말의 뒤를 근소한 차로 한 남자가 따라붙고 있었다. 간소하게 차려입었지만 은빛이 감도는 검은 갑옷위의 새겨진 문양과 정식 망토, 그리고 허리에 매인 보검을 보건데 기사인 듯 했다. 당황한 얼굴이나 움직임은 날렵하고 적당한 절제가 있어 수련의 정도를 대강 알 수 있었다. 또 단순히 달리는 것으로 말을 추적하는 걸 보니 실력도 상당했다. 평범한 말이라면 벌써 잡히고도 남았을 테지만 불행이도 야생마의 속도는 평범한 말의 그것을 훨씬 웃돌았다. 명마는 명마인 모양이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헤집고 앞으로 튀어가는 말을 멍하니 보던 무하가 아, 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유시리안이 왜 그러냐고 물었으나 답할 새가 없었다. 기어이 기사가 검을 뽑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강하게 땅을 박차고 날다시피 달렸다. 순식간에 기사를 따라잡은 무하는 검을 뽑을 새도 없이 팔을 가로로 내리쳐, 기사가 휘두르는 검의 옆면을 때렸다. 궤도가 어긋난 검은 허공을 힘들게 배회하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뭔가!?” 짜증어린 목소리가 꽂혔으나 무하는 묵묵부답으로 더욱 속도를 낼 뿐이었다. 그 경이로운 속도에 기사의 입에 반사적인 탄성이 튀어나왔다. 정신없이 달리는 말의 옆에서 속도를 맞춘 무하는 갈기를 움켜쥐고 순식간에 그 위를 올라탔다. 갑작스런 무게감에 말은 크게 울며 앞발을 올렸다. 건방진 습격자를 떨어뜨리려는 몸짓이었다. 무하는 몸을 한층 낮춰, 말에 달라붙으며 소리쳤다. “마르스! 나다!” 듣지 못했는지 말은 계속해서 거칠게 요동쳤다. 무하는 목을 끌어안으며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마르스!” 여차하면 베기 위해 뒤에서 대기 중인 기사를 본 무하는 다급히 말을 진정시키려 했다. “무하다, 마르스! 무하야.” 목을 심하게 젓던 말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신을 탄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으나, 당연한 거지만 보이지 않았다. 무하는 얼른 내려서 말의 시야에 자신을 집어넣었다. 살기등등했던 말의 눈이 순간 부드러워졌다. 헤어진 친구를 만난 것이다. 어깨를 가볍게 깨물며 반가워하는 마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도하는 무하에게 기사가 다가왔다. “귀하의 말이오?” 그 놀라운 몸놀림을 봤던 터라 기사는 적당히 존칭을 써주었다. 무하는 마르스의 털을 손끝으로 쓸어내며 답했다. “친구입니다. 2년 전에 헤어진.” 집을 떠난 직후에 구한 말이다. 소유 이전을 떠나 둘은 친구였다. 무하는 그를 굴복시키지 않았고 같은 야생의 존재로서 청했다. 마르스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기꺼이 무하를 태워주었다. 그러다 회색 고향을 가기 위해 수도 근처에서 헤어졌다. 사막을 여로로 잡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잠깐 스쳤던 인연이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건만 이 먼 락아타의 땅에서 만나게 되다니. 이래서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친구요?” 묘한 눈으로 무하를 살펴보는 기사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어깨에 얼굴을 가까이 드밀며 속삭였다. “관심 끄시지.” “……!”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기사는 흠칫 놀라며 무심결에 검을 곧추들고 몸을 돌렸다. 장신의 남자는 조소를 흘리며 가볍게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아슬아슬하게 검이 남자의 눈앞을 스쳐갔다. 동시에 그의 손이 부채질을 하는 듯한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 -끼익! 뭐라 설명할 길 없는 금속성을 내며 기사의 검이 휘어졌다. 그 검 끝을 쥐고 있는 건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의 차가운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 본 기사는 순간 검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유, 유시리안!” “아아, 검 좀 좋은 걸 쓰지 그래?” 멀쩡한 검을 망가뜨려놓고 능청스럽기만 하다. 제구실을 못하는 검을 휙 던지고는 무하를 보았다. 저쪽에서 세 마리의 산리를 이끌고 걸어오는 락샤사가 보였다. “뭐야, 그 말은?” “전에 같이 다녔던 녀석이야. 이름은 마르스.” 그깟 녀석 이름 따위 알게 뭔가. 내심 투덜대면서도 마르스를 뜯어보는 유시리안이었다. 확실히 보기 드문 명마이긴 했다. “괜찮은데.” 사나운 마르스의 기색은 아랑곳 안하고 이곳저곳 꼼꼼히 살펴보며 만져보기도 하는 유시리안에게 기사가 주저하며 말을 걸었다. 비록 묻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 절실히 얼굴에 새겨져 있었지만 말이다. “어, 언제 오신 겁니까?” “나 알아?” 크윽, 신음하며 찡그려지는 안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저 인간이야 원래 저모양이 아니던가.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는 쪽이 바보다. “황태……시오니타님을 모시는 나이트 타마샤입니다.” “펠. 이 녀석 몰고 다닐 거야?” 딱딱하나마 꿋꿋하게 자기소개를 하던 타마샤는 이렇듯 무참히 무시당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를 수차례 곱씹으며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는 타마샤의 노력이야 유시리안이 알 바 아니었다. 또 그 속을 알지 못하는 무하는 유시리안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화마도 있고……. 마르스는 야생의 존재이니 야생에서 살아야지.” 그러다 타마샤를 보고 아차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하의 말입니까?” 적당한 대가정도는 지급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제압하지 못해서 마르스가 도주한 것 일 테고, 결국에는 죽이려 들었으니 대가만 받으면 물러나 주지 않겠는가. 타마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귀하께서 처분하십시오.” 타마샤의 어투가 완전히 바꿨다는 것을 무하는 눈치 채지 못했다. 타마샤는 괴물단지에 싸가지까지 골고루 갖춘 유시리안과 친해 보이는 무하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얼마나 착한 사람이기에 저런 인간과 함께 다닐 수 있는 걸까? 그것도 저렇게 무난하고 평화롭게. 공연히 무하에게 호감이 생긴 타마샤는 웃으며 덧붙였다. “훌륭한 녀석이지만 사납고 민폐를 끼쳐서 죽여야 됐는데 잘 됐습니다.” “네 능력이 딸리는 거야.” “…….”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이는 유시리안의 말에 뭐라 반박은 못하고 다시 인내는 어쩌고저쩌고 중얼대는 타마샤였다. 무하는 그런 타마샤를 보진 못했지만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는 생각에 타박을 놓았다. “율. 그렇게 말하는 건 실례야.” “그래도 사실이잖아.” 풀죽은 얼굴로 무하의 어깨에 뒤에서 두 팔을 걸치며 유시리안이 웅얼대자 누그러지며 타이르는 무하였다. “그래도 그러면 실례잖아. 굳이 그런 말 꺼낼 필요도 없고. 그치?” “으응…….” 하며 힘없이 기대오는 유시리안의 팔을 톡톡 치며 웃었다. 그런 그들을 보는 타마샤야 물론 죽을 맛이었다. 무하의 시선을 교묘히 피해 살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면서 가증스럽게 내숭을 떠는 유시리안을 보자니 속이 뒤집혔고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저 인간의 비위를 거스른 인간치고 끝이 좋은 인간을 못 봤다. 게다가 무하는 ‘능력이 딸린다.’라는 의견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하게 긍정했다. 솔직히 이런 무시를 당하는 서글픈 처지에 그냥 모른 척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에게는 임무가 있었다. “시오니타님께서 유시리안 씨를 발견하면 즉시 자신한테 와달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귀찮게 사람 오라가라야. 자기가 올 것이지.” 노골적으로 짜증을 팍팍 뿌려대며 제국의 황태자에게 막말을 하는 유시리안에게 한마디 반박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했다. “시오니타?” “전 의뢰인. 이것저것 요구만 많은 녀석이지.” 무하의 질문에 다정히 답하며 생글 웃는 저 가증스러움이란! 으득 갈리는 이를 애써 참으며 심호흡하는 타마샤였다. 재차 말하지만 그런 그의 사정 따위야 유시리안이 알바 아니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아쉬운 쪽이 오라고 그래.” “그러지 말고 잠깐 갔다 와봐. 혹시 모르잖아. 그가 이번 의뢰인일지도 모르고.” 냉랭하게 거절하려던 유시리안은 무하의 말에 거의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꼬리가 있다면 살랑살랑 칠 법한 얼굴로. “그럴까?” “…….” 타마샤는 정말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럼 잠깐 갔다 올게. 아까 그 식당에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 “같이 갈까?” 뜻밖에도 유시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에는 같이 못 움직여 안달이었던 그가 말이다. “아니야. 그 녀석 눈에 띄면 펠도 귀찮아질 거야. 사람 보는 눈은 짜증나게 좋거든. 간단한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간단한거다, 간단한거.” “알았어.” 강조에 강조를 하는 유시리안이 어린 아이 같아 저도 모르게 머리를 헝클이며 답하는 무하였다. 그러자 유시리안은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아이와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옆에서 못 볼꼴을 봤다는 듯 창백히 질리는 타마샤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말은?” 저편에서 존재감 없이 서있던 락샤사가 대충 행로가 정해지는 것 같자, 다가와 물었다. 그가 넘기는 화마의 고삐를 받으며 무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일단 식당에 데리고 갔다가, 나중에 성문 밖에서 놓아줄까 하는데.” “이거 나 갖고 싶어.” 유시리안이 욕심어린 눈으로 마르스를 보았다. 뜻밖의 말에 당황한 무하는 응? 하고 되물었다가 유시리안과 마르스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주인 할게.” 이정도 말 제압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유시리안은 씨익 웃으며 마르스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야생에서 사납게 자란 말답게 자신의 기운에도 꽤나 호전적으로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가.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것을 그 괄괄한 기세로 억누르고 있는 게 보여서 더 마음에 들었다. “뭐, 그런 건 당사자들끼리 정할 문제니까.” 하며 상관 안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유시리안은 대번 밝아져서 마르스의 목을 가볍게 쳤다. 그리곤 락샤사가 건네는 산리의 고삐를 받고 발을 옮겼다. “그럼 먼저 가 있어. 금방 갈게.” “응.” 유시리안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가 기사의 뒤를 따르자, 락샤사가 당연한 듯 그 뒤를 따랐다. 정신적으로 기진맥진한 타마샤는 유시리안이 황태자궁에 가자마자 뒤로 빠졌다. 터덜터덜 걷는 그의 모습은 기사로서의 품위와 체통은 없었으나 실로 불쌍해 보였다. 그가 유시리안을 데리고 왔다는 것을 본 다른 기사들이나 경비병들은 동정어린 눈으로 돌아가는 그를 지켜봐 주었다. 언제 유시리안에게 걸려서 자기도 저 꼴이 될지 모르는 일이니 남 일 같지 않았다. “타마샤 경!” 힘들게 걷고 있는 타마샤를 누군가가 불렀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니 간편한 드레스를 입고 총총 걸어오는 귀여운 아가씨가 보였다. 20대 초반임에도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이 동안의 아가씨, 디이나는 시오니타의 신뢰를 받는 수하 중 한 사람이었다. 냉철한 판단력과 대범한 활동력을 갖춘데다가 검술 역시 기사 못지않은 다재다능한 인재다. “유시리안 씨가 왔다고요?” 인사치레 없이 본론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아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타마샤는 기력 없는 얼굴로 겨우 겨우 답했다. “예. 변함없는 성품에 언동에……실력이더군요.” 결국 검은 회수하지 못했다. 검 집만 덩그러니 볼쌍스레 허리를 차지했다. 그럴 정신적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휘어진 검을 어떻게 챙겨야 할지 막막했던 것도 있었다. 디이나는 알겠다는 미소와 함께 타마샤의 어깨에 한번 손을 얹었다가 내렸다. 기운 내라는 뜻이었다. 돌아서서 시오니타의 거처로 가려는 디이나를 가만히 보다가 갑자기 생각 난 게 있어 불러 세웠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거 말입니다.” “예?” “엘프 말입니다.” “아…….”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냐는 얼굴을 하다가 불현듯 혹시? 하는 얼굴로 변했다. 타마샤는 텅 빈 검 집을 슬프게 쓰다듬으며, 여전히 기력 없이 답했다. “약에서 깬 야생마가 날뛰어서 잡으려고 쫓았는데……. 전속력으로 달리던 저를 순식간에 추적하더니 달리는 말에 올라탄 남자가 있었습니다. 말이 몸부림을 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달래고……. 아, 그리고 제가 당신 말이냐고 물으니까 친구라고…….” “귀는요?” “귀요?” 힘들게 한마디 한마디를 뱉던 타마샤는 기운 없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에 반해 디이나는 눈을 번뜩이며 거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타마샤는 좀 전의 그 남자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건을 쓰고 있어서…….” 그 답에 오히려 좋아 날뛰는 디이나였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시장에서 봤으니까……. 아, 지금은 바다내음이라는 식당에 있겠군요.” “정보 감사합니다!” 디이나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냉큼 인사하고는 서둘러 뛰어갔다. 예정이 변경됐는지 달려가는 쪽은 황태자궁의 반대쪽이었다. 멀리 사라지는 디이나를 가만히 보다가 타마샤는 다시 검 집을 내려보았다. 깊이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걸었다. “검이나 장만하러 가야지. 그래도 가보는 아니어서 다행이군.” 성의 정원을 지나가다 무심코 다시 중얼거렸다. “아, 그 남자가 유시리안의 일행이라는 이야기를 내가 했던가?” ……타마샤는 불안하게 웃으며 애써 방금 떠오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안했음 뭐 어쩌겠는가. 해코지 할 것도 아닌데. 그저 저 싸가지가 조금 날뛰다 말겠지, 조금……. 이내 그의 머릿속에서 그 생각은 강제소거 되어 훠이훠이 날라 가버렸다. 그것도 다 살아가는 방법이다. 황태자궁은 락아타의 건물이 그러하듯 나무로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다. 마치 동화책 속의 그림과 같은 저 궁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인들이 골머리를 썩었을까. 벽은 넝쿨나무로 덮여있고 기울어져 있는 지붕은 곱게 부순 청보라빛 자기가 깔끔하게 깔려있다. 그러면서도 인공적이지 않고 은은하다. 건물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아득함이 풍겨온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 깨끗한 차향기가 스며 나왔다. 마루바닥에 무릎 꿇고 엎드려 있던 하인이 공손히 인사했다. 문 바로 옆에 있던 이들이 물을 간신히 바닥만 채운 넙적한 사각모양의 대야를 내밀었다. 신발바닥을 씻기 위함이었다. 그 위에 올라서자 얼른 큰 수건을 갖다 앞에 내려놓는다. 물이 묻은 신발을 그 위에 찍어 대충 물기를 없앴다. 그러고 나서야 앞서 무릎을 꿇고 기다리던 하인이 일어나 앞장섰다. 서쪽 대륙에나 찾아볼 수 있는 예법이었다. 식당 같은 곳이나 상점은 상관없지만 일반 집과 같은 경우에는 누군가가 이렇게 챙겨주지는 않더라도 문가에 물을 담은 대야와 수건은 필수적으로 둔다. 밖에서 옮겨왔을 해악한 것을 물에 씻어 보낸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층으로 올라선 하인은 어느 문 옆에 무릎 꿇고 앉아 공손히 청했다. “유시리안님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청하긴 누가 청했다는 거야! 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의미를 따질 것 없는 단순한 예법이기에 가만히 있었다. 가볍게 웃음소리가 나며 들라하라, 라는 시건방진 답이 떨어졌다 . 하인이 천천히 문을 옆으로 밀자 책 냄새가 쏟아졌다. 책 사이에 파묻혀 있는 한 남자가 친근히 웃음을 띠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대조적인 흑발, 빛조차 투영시키지 못할 듯한 흑안. 압도적인 존재감의 남자. 대 락아타 제국의 차기 황제, 락아타 시오니타 라 제노스였다. 메뉴판을 뒤적이던 무하는 결국 포기하고 덮었다. 간단한 것을 먹으려 해도 마땅히 눈에 띄는 간단한 게 없었다. 락아타 어를 어느 정도 알기는 하지만 읽을 수 있으면 뭐하겠는가. 어떤 요리인지를 모르는데. 결국 일행이 오면 시키겠다는 말과 함께 메뉴판을 밀어 넣고 턱을 괸 채 멍하니 있었다. 툭,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발치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배낭이 쓰러진 것이다. “아, 맞다.” 욤의 수도에 도착하면 바꾸려고 했는데 계속 잊고 있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리라. 모처럼 마법제국이라고까지 불리는 락아타에 왔으니 여기서 장만해도 괜찮겠지. 유시리안이 오면 우선 밥부터 먹고 상점을 가보자고 해야겠다. 유시리안도 슬슬 주머니를 채워줄 때가 됐다고 했으니까. 배낭을 제대로 세우고 다시 턱을 괴었다. 멍하니 시간이 뚝딱뚝딱 지나갔다. “주위에서는 요리 냄새가 진동을 하고 배는 고프고 율은 오지 않고 할 일은 없고…….” 웅얼웅얼 대다가 허리에 찬 작은 검을 어루만져보았다. 락샤사는 보완이라고 했지만 무하가 봤을 때는 완전한 재탄생이었던 그 경이로운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는 길에 몬스터 무리와 한번도 접하지 않은지라 하환은 만날 수는 없었지만, 후에 만나도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됐다. 함부로 두건을 벗겼던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이쁜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이런 귀한 검을 줬으니 봐줘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검사로서의 무하를 인정해서 준 검이니 더 마음에 든다. -탁! “어서 오십시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대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유시리안이 아니었다. 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와 두 명의 기사, 두 명의 마법사, 그리고 후드를 뒤집어쓴 한 사람 . 적잖이 실망하여 고개를 돌리는 무하에게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이 손가락질했다. “저 분 입니다.” “……?” 뭔가 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니 막 들어온 사람들이 일제히 무하를 보고 있었다. 여자가 재차 확인했다. “저 두건을 쓴 남자 말입니까?” “예. 분명히 ‘열어 놓은 마음’을 가졌어요.” 후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매우 나긋나긋했다. 그 말에 단박에 환해진 여자가 무하에게 걸어왔다. 그리곤 테이블 너머에 멈춰 서더니 뜬금없이 이리 말하는 것이다. “두건 좀 벗어 보십시오.” “……싫습니다.” “제 이름은 디이나. 페이야 디이나 란 카르민. 수상한 자가 아닙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카르민이라니! 게다가 황태자 파로서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는 페이야 가의 란이 어째서 이런 곳에! “두 번 말하게 하는 군요. 싫습니다.” 디이나는 잠깐 굳었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후드를 쓴 이에게 청했다. “잠깐만 부탁합니다.” “……어쩔 수 없군요.” 하고는 천천히 후드를 벗어 내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집중되어 있던 이목이 순식간에 동요하며 웅성댔다. 청아한 외모나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는 둘째치더라도 그 귀! 끝이 뾰족하여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그 귀는 의심할 것 없는 엘프의 것이었다! 가는 여성미와 독특한 매력.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질적인 아름다움. 무하도 놀라 가만히 엘프를 보다가 곧 실례라는 걸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무하가 자신의 모습을 봤다는 것을 확인한 엘프는 얼른 후드를 다시 썼다. 그것에 다들 안타까움을 느꼈으나 기사와 마법사의 동행으로 있는 그녀에게 접근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디이나가 다시 말했다. “이제 안심하고 벗으십시오.” “전 무언가를 불안해 한 적이 없습니다. 대체 뭘 안심하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거절합니다.” 재차 이어지는 거절에 초조한지 디이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잠깐 인상을 찌푸리다 엘프를 돌아보고 물었다. “분명하지요?” “예.” 단호한 답에 한숨을 푹 쉰 디이나는 기사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다음 순간 한 기사가 빠르게 테이블 위로 뛰어 오르며 손을 내밀었다. 두건을 벗기려는 것이었다. 무하는 의자를 뒤로 젖혀 잽싸게 그것을 피한 뒤, 쓰러지는 의자의 리듬을 맞춰 뒤로 텀블링했다. 안정된 자세로 착지하는 그의 몸놀림에 감탄한 디이나는 헛손질을 한 뒤 다음 명을 기다리는 기사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그러자 테이블 밑으로 빠르게 뛰어내려 무하에게로 달려들었다. 예비동작으로 날린 주먹을 피하자 진짜 목적이었던 손이 날라 와 두건을 채가려 했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그 손을 피했으나 길게 늘어진 두건 끝부분이 잡혔다. 탁 잡아당겼으나 의외로 그것은 벗겨지지 않았다. 저편에서 마법사가 신음성을 냈다. “보조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해제하라.” 한 마법사가 캐스팅을 하는 동안에도 기사는 무하에게 방어 마법을 시전 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공격했다. 어차피 두건은 보조 마법을 해제하지 않는 이상 풀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마법사가 곤혹스런 음성을 냈다. “이런! 키워드 마법입니다!” 키워드가 입력되지 않는 한 해제 되지 않는 마법. 디이나는 잠시 미간을 모으다가 순식간에 결론을 내었다. “잘라내라!”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 검을 뽑아들었다. -싫어! 갑자기 두통과 함께 머리 속으로 미약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신음을 삼키며 한걸음 물러난 무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기사를 주시했다. 진검을 가진 자 앞에서, 전투 중에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러는 동안에 두통은 가라앉았다. 디이나의 명을 받는 기사에게 항의를 해봤자 소용없는 일. 경계 어린 눈으로 기사를 노려보며 디이나를 향해 말했다. “왜 남의 두건을 가지고 참견입니까?” “확인할게 있어서 그럽니다. 협조 해주시면 더 이상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겠습니다.” “벌써 저지를 대로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차갑게 반박하며 허리의 단검을 뽑아들자 엘프가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저, 저건!” 언제나 침착한 엘프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자 놀라 얼른 어깨를 감쌌다. 목소리만이 아니라 그녀의 몸까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디이나가 당황하여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검! 그것도 피를 가득 먹은…….” 후드 속으로 손을 넣어 머리를 감쌌다. 위치를 보아 귀를 막은 모양이다. 디이나는 물론 기사들도 당황해서 주저앉은 엘프와 무하의 검을 번갈아 보았다. 마법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검만을 빤히 보고 있었다. “저, 저 자가 분명해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힘들게 말하다가, 자신이 말하는 것의 무게를 못 이기고 쓰러지는 엘프를 붙잡아 안으며 디이나가 짧게 명했다. “생포해라!” 어느 정도의 부상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명이 떨어지자 가만히 서 있던 기사 역시 검을 뽑았다. 실내였기에 마법사는 가만히 방관했다. 강화 마법이 걸렸다고는 하나 나무로 지어진 집. 자칫하면 통째로 날라 가 버릴 수도 있었다. 무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쓰러진 엘프를 보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 팔아넘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의 상념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기사들이 합공하여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실전에서는 처음 써보는데.’ 유시리안과 가볍게 대련을 하곤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서서히 투기를 일으키자 투명한 날이 우우웅, 울음소리를 내며 형성되었다. 투명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그 날은 흡사 유리와 같았다. 엘프의 말과는 달리 피를 먹은 요사스러움 따윈 없는 깨끗함. 오히려 엘프의 분위기와 닮은 청아함이 흘렀다. “하압!” 의아함을 떨치려는 듯 기사들은 크게 기합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한 기사의 검을 막자 교묘하게 틈을 노려 다른 기사의 검이 비집어 왔다. 강하게 뿌리치며 한번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우우웅, 울음소리가 커지는가 싶더니 바닥이 뜯겨나가며 무형의 기운이 한 기사를 덮쳤다. 팔을 교차하고는 잠시 버티던 기사는 결국 벽에가 박혔다. 나무로 만들어진 벽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강화마법의 효력으로 겨우 버텨냈다. 이는 투기와 검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낸 힘이었다. 때문에 살상을 할 정도의 날카로움은 없었다. 유시리안이 살기로써 이 검을 휘둘렀을 때는 그 상대가 됐던 바위가 깔끔하게 반으로 갈렸지만 무하가 했을 때는 달랐다. 둔탁한 것에 부딪친 듯 조금 부서지기만 했던 것이다. 그 정도면 뼈가 부러지는 정도에서 끝난다고 유시리안이 말했다. 남은 한 기사가 자세를 바로하고 경계했다. 무하는 좀더 고르게 호흡하며 기를 컨트롤했다. 맑은 소리가 검에서 울렸다. 그것이 신호음이라 된 양 둘은 동시에 땅을 박차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캉, 하고 짧은 금속음이 나면서 잘린 검 조각이 허공을 배회했다. 울음소리가 날 때보다 맑은 소리가 날 때 그 예리함이 한층 더해진다는 것을 유시리안과의 대련으로 알고 있었던 무하는 놀라지 않고 뒤를 돌며 한번 더 크게 휘둘렀다. 방어 자세조차 취하지 못한 기사가 저편으로 튕겨졌다. 거의 동시에 높게 떠오르던 검 조각이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무하의 배낭에 박혔다. 혀를 차며 배낭 쪽을 보았으나 아직 디이나들이 남아있는 터라 다가가 살펴보지는 못했다. 안고 있던 엘프를 잠시 옆으로 내려놓고 검을 뽑은 디이나는 짧게 명했다. “마법을.” 이대로는 끝이 없다고 판단한 무하는 전에 벽에 박혔던 기사의 곁으로 달려가 그 목에 검을 대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디이나는 크게 소리쳤다. “그대는 엘프로서의 자긍심도 없는 건가!” “엘프?” 무하는 황당한 듯 되물었지만 디이나는 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미 한 엘프가 확인을 해주었다. 발뺌하려 해봐야 소용없다. “마법사!” 기사라면 부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법.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 여기서 저 엘프를 놓치면 또 얼마의 희생이 일어날지 모른다. 저 엘프는 마검에 홀려 살육에 미쳤다고 했다. 새파란 서슬에 마법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캐스팅했다. 실내에서의 마법은 금지라고 말해봐야 지금 떨어지는 건 호통뿐이다. 책임이야 나중에 카르민인 디이나가 져주겠지. “내가 원하는 것은 공격, 내가 바라는 것은 물의 힘.” “내가 원하는 것은 공격, 내가 바라는 것은 전기의 힘.” 연계마법으로 그 앙상블이 잘 맞는 마법들. 처음 싸움이 났을 때부터 피신한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일부분의 사람들은 문가에서 몰래 구경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도망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주인장도 있었다. 마법사들이 나서자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이는 그를 누군가가 거칠게 밀쳤다. 여지껏 사람들을 가르며 들어온 남자였다. “뭐요!” 가뜩이나 미칠 지경인데 밀쳐지기까지 하자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함을 지르는 주인장의 목에 서늘한 칼날이 붙었다. “닥치고 꺼져.” 검을 거둔 남자는 목이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확인하고 있는 주인장의 널브러진 몸을 아무렇게나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대단한 싸가지였다. 그 순간 마법사들의 시동어가 터져 나왔다. “워*터*볼*” “라*이*팅*볼*” 마법이 작렬하면서 나무 바닥이나 테이블 따위가 박살나고, 타올랐다. 워터볼 때문에 불은 나지 않았으나 연기가 심하여 시야가 가려졌다. 디이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검을 굳게 잡았다. 이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마법사 마법을 준……!”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했음에도 목에 겨누어진 검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싹 긴장하여 멈추니 등 뒤에서 겨누어졌던 검이 목을 회전하며 천천히 앞으로 왔다. 위협자가 그녀의 옆으로 이동한 것이다. 누군가 옆에 선 것을 느끼고 눈을 굴린 디이나는 경악에 헛바람을 삼켰다. 그 바람에 목이 살짝 베여 피가 송글 맺혔지만 느낄 수조차 없었다. 그만큼 위협자의 정체는 그녀를 압박했다. 두려워하는 디이나에게 시선을 한번 주었다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쪽을 본 위협자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디이나를 돌아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잔인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다쳤으면 너는 죽는다. 그가 죽었으면 락아타는 멸망한다.” 위협자, 유시리안은 진심으로 그리 선고하고 있었다. 디이나보다도 더 긴장하여 몸서리를 치는 마법사들과 밟힌 고통과 굴욕에 고함을 지르다 그대로 굳은 주인장과 카르민을 태연히 협박하는 만행에 놀란 사람들 속에서 유시리안은 살기를 한 오라기 한 오라기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유시리안의 뒤에 무심히 서 있던 락샤사가 손을 한번 가로로 젓자 연기가 녹듯이 스멀스멀 사라져 갔다. “자신 입으로 한 말을 믿지 않는군.” 락샤사의 말에 사라지는 연기 속을 가늘게 주시하던 유시리안이 흘낏 시선을 주자 짧게 덧붙였다. “그는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다음 순간, 강한 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날카롭지 않은 거센 바람이었다. 천천히 사라지던 연기가 순식간에 날라 가버리고 드러난 것은 왼팔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무하였다. 그의 왼팔에서 붉은 뫼비우스 팔찌가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고 오른 손에는 이미 날이 사라진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 뒤로는 부상 입은 기사가 신음하고 있었다 . 무하를 중심으로 기사까지 감싸고 있던 둥근 방어막이 연해지더니 결국 사라졌다. 재차 올 거라 생각했던 마법 공격이 안 오자 주위를 보기 위해 바람을 뿜었던 것인데 상황을 보니 알만했던 것이다. 무하는 긴장했던 어깨를 풀며 걸음을 떼었다. 마법이 덮쳐 왔을 때 또다시 비명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그것은 미약하기 그지없었으나 좀 전에 들었던 것보다 한층 높아져 있었다. 두통도 그 강도가 심해졌다. 다행히 금방 가라앉아서 탈은 없었다. 게다가 이제 유시리안도 왔으니 두통으로 움직임이 좀 둔해져도 괜찮았다. “왔어, 율?” “암튼 눈을 못 뗀다니까.” “말해두지만, 원해서 말려든 게 아니라고. 뜬금없이 두건 벗으라고 하더니 거절하니까 달려들잖아.” “흐음. 비싼 얼굴을 공짜로 보려고 했다 이거군.” 농담같이 들리는 말이었지만 디이나는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바싹 긴장했다. 교묘하게 검 날이 목 줄기를 타고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디이나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 자리에서 유시리안의 위협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무하는 검 조각이 박힌 자기 배낭 쪽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락샤사야 디이나가 죽거나 말거나 상관할 존재가 아니니 논외로 치자. 배낭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무하는 깊게 박힌 검 조각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에 있는 무언가가 쇠붙이가 아닌 이상 망가졌을 게 확실했던 것이다. 검의 옆면을 붙잡고 무성의하게 뽑아내는 무하의 귀에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펠! 그러면 안……!” “……?” 유시리안의 경고가 한 박자 늦어 검 조각을 뽑아버린 무하는 그 상태로 유시리안을 멀뚱히 보았다. 유시리안은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가려버렸다. 약하지만 불길한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찌이익. 뭔가 하고 고개를 돌린 무하는 검으로 인해 생긴 구멍이 서서히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 점점 빨리 넓어지던 구멍은 결국 배낭 자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배낭 안에 쑤셔 넣었던 짐들이 급류처럼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무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끝없이 쏟아지는 짐을 망연히 보아야 했다. “이런 아이템 류의 원리는 물건을 압축시켜서 보다 많이 넣는 것에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찢기면 안쪽의 압력에 의해서 순식간에 벌어지고 결국에 배낭자체가 박살나 버리지. 때문에 아까처럼 검이 박혔다면 일단 박힌 상태로 내버려두고, 상점에 가 수선을 맡겨야 해. 능력만 된다면 알아서 보조 마법을 걸어 그 상태를 고정시키고 수선을 하면 되지만…….” 늦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의미하게 설명을 늘여놓는 유시리안이었다. 그리곤 바닥에 잔뜩 늘어져 있는 짐들을 보며 한마디 더했다. “참 많이도 집어넣었다.” “……과찬이야.” 힘없이 테이블에 앉아 있던 무하는 막막함에 한숨만 쉬었다. 저편에서 마법사들에게 기사들을 회복시키라는 명을 내린 디이나는 유시리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옷이나 음식은 그렇다 치고……주방용품은 뭘 이리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거야? 전에 야영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말이야. 텐트를 꺼냈을 때도 황당했지만 공구는 왜 갖고 다녀? 책도 엄청 많네. 이 자루는 뭐야?” 망연히 있는 무하와는 달리 유시리안은 재미있는 모양이다. 어린아이도 무난하게 들어 갈만한 자루를 벌려보고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보석이 빼곡히 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금화나 은화 같은 것은 없고 고가의 보석들로만. 레일리아에게서 받은 보수와 지난 2년간 일하면서 받은 보수였다. 쓸 일이 별로 없어서 구석에 모와 두었는데 벌써 저 정도 양이 되었군, 하며 멍하니 무하는 생각했다. 유시리안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을 하나 들어 펼치고는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없어서 못 구한다는 전문 마법서적이었다. 저편의 상자를 주워 열어보니 힐링 포션과 리커버리 포션이 가득하다. 은장도는 형님에게 드렸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 많이 장만해 두었던 것이다. “어쩌지…….”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끙끙대는 무하였다. 기사들을 치료한 마법사중 한 사람이 자신들의 발치까지 굴러온 주머니를 주워 올렸다. 짤랑, 하는 유리잔이 서로 부딪치는 듯한 맑은 소리가 났다. 약간 벌어진 입구에서 붉은 반지들이 후루룩 쏟아졌다. 당황해서 얼른 줍는데 동료 마법사가 어깨를 탁탁 치는 게 아닌가. 저 악귀와 같은 유시리안이 있으니 소리 내어 묻지는 못하고 왜 그러냐고 입 모양을 만들어내는 그에게 그가 줍고 있던 반지 중 하나를 쓰윽 내밀었다. 받아 채서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니까 다급히 손을 흔든다. 왜? 하고 입 모양을 다시 만드니 반지를 채가서 한쪽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앗!”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던 무하와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던 유시리안, 그런 유시리안의 눈치를 살피던 디이나, 무심히 벽에 기대있던 락샤사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얼른 친구의 입을 틀어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와중에도 분위기 파악을 못했는지, 입을 막든지 말든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지만을 보는 마법사를 멀뚱히 보던 무하가 뭔가를 발견하고 테이블에서 내려왔다. “그거 제 겁니다만.” 발 딛을 틈이 없는 바닥을 요리조리 요령껏 걸으며 마법사에게로 간 무하는 손을 내밀었다. 아직도 반지를 뚫어져라 보는 동료의 머리를 있는 힘껏 내리치고, 그 손에서 반지와 주머니를 낚아채 얼른 건넸다. 인상을 쓰며 항의하려다 자기 앞에 서 있는 무하를 보고 멈칫한 마법사는 잠시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거 어디서 났습니까?” “의뢰 차 나갔다가 샀습니다만.” 반지가 마음에 든 걸까? 어차피 많으니 하나 정도는 줘도 상관없지, 라고 생각하는 무하에게 마법사는 황급히 물었다. “어, 어디서요?” “지명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동료가 옥공예가 유명한 곳이라고 설명해 줬었는데……. 이런 반지는 굳이 거기가 아니어도 많이 팔던데요?” “에?” 마법사는 자신이 직접 만지기까지 한 그 촉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룬어가 적옥가락지 안에 오목하게 새겨져 있었다. 불룩하게 솟아난 게 아닌 오목하게 들어간 룬어! 그것은 부여아이템인 것이다! 한때 마법 길드에서 부활시켰으나 결국 금지되어버린 부여 마법! 때문에 부여 아이템은 고대 유물에서나 희박하게 찾아볼 수 있는 희귀품이 되어버렸다. 그런 부여 아이템을 어디서 많이 판단 말인가? 마법사는 황망함에 되물었다. “부여 아이템을요?” 저 인간이 왜 저러나? 저 싸가지의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건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생각하며 마법사와 유시리안을 불안하게 번갈아 보던 사람들은,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제히 무하를 보았다. 부여 아이템? 저 주머니에 있던 반지들이 그럼 죄다 부여 아이템이란 소린가? 무하는 주머니의 입구를 묶다가 무성의하게 답했다. “아, 그거요? 어차피 일회용인데요, 뭐.” 난동이라 봐야 할 정도로 수선을 피우는 마법사들을 한마디로 잠재운 유시리안은 자신의 작은 주머니를 꺼내서 주둥이를 벌렸다. 그러자 실내 가득히 바람이 불며 짐이 떠올랐다. 빼곡히 쌓여있던 짐들이 하나둘씩 차례로 그 작은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유시리안의 주머니를 생각해 낸 무하는 다행이라고 빙긋 웃었다. 그제야 유시리안이 왜 그토록 여유였는지 안 것이다. 유시리안은 마주 웃으며 계속 바람을 부렸다. 그에게 바람의 정령을 부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수장인 실베스트르를 청하는 것만은 그에 맞는 예의가 필요하기는 했지만 이정도 일에 수장을 부를 필요는 없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디이나가 침울한 신음성을 냈다. 저 괴물이 검술 말고도 여러 능력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정령까지 부릴 줄이야. 도대체 저 더러운 성질머리 외에 뒤떨어지는 게 뭐냔 말이다. 인간적인 질시가 잠시 그녀의 가슴을 어지럽혔지만 이내 자신을 다잡았다. 유시리안은 단지 용병일 뿐이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다 한들 사회적 지위는 결국 용병인 것이다 . 게다가 성격은 잔인하고 질도 나쁘다.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할게 뻔하다. 게다가 디이나 자신도 해택 받은 극소수의 하나였다. 카르민인데다 개방적인 집의 분위기 덕에 화이라도 다녔고, 검술도 연마했다. 황태자 시오니타의 수하로서 활약도 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하는 투정은 배부른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후우…….” 살짝 베여 따끔거리는 목을 잠시 만져보다가 한숨을 쉰 디이나는 유시리안에게 다가갔다. 어쨌거나 무하라는 남자에 대해 확인해야 할 게 많다. 죽기는 싫지만,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다. 디이나는 조심스럽게 다른 화제를 먼저 꺼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녀는 분명 유시리안이 시오니타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왔었다. “시오니타님은 만나보셨습니까?” “아아.” 비장한 디이나의 심정은 아랑곳없는 유시리안은 마지막으로 보석자루를 집어넣으며 건성으로 답했다. 그럼에도 답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해 하는 디이나를 보자면 그의 평소 업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보석자루가 다 들어가자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품에 넣는 유시리안에게 무하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만 신세 질게. 금방 살 테니까.” “신경 쓸 거 없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포근하게 말하는 유시리안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귀여운 여인의 목에 흠집을 내며 아무렇지 않게 협박을 일삼지 않았던가. 나이가 지긋한 주인장의 몸을 무자비하게 밟고 가기까지 했다. 그런 주변 반응을 알리 없는 무하는 그저 고마워하기만 했다. “저…….” 어떻게든 대화의 길을 트여야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인 디이나에게 뜻밖의 돌파구가 생겼다. “시오니타? 아, 만나봤어? 이번 의뢰인이야?”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 같아.” 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유시리안을 보며 디이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유시리안은 괴물 단지에 성질은 더럽고 싸가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다. 적으로 돌리면 그만큼 피곤해지는 존재인 것이다. 아군이라 해도 정신적으로 피곤한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생명의 위협은 없지 않은가.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황제의 눈 밖에 난 것과는 반대로 백성들의 열성과 같은 지지를 받게 된 시오니타는 많은 이들의 눈 안의 가시였다. 지난 2년 잔인했던 피의 숙청으로 반대 세력의 대부분은 처단됐다지만 황제의 방해 덕에 전면으로 나서는 건 불가능하게 됐다. 즉 지금의 시오니타는 황제가 죽을 날만을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다행히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재상과 그의 아들인 세마로스와 딸인 디이나가 시오니타의 오른팔로서 암약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도 미지수인 데다 황제가 된 이후에도 여러모로 지장이 있다. 그것을 해결하고자 일을 도모했지만, 막상 시작할 때쯤에 유시리안이 락아타를 떠났다. 그 외에는 마땅히 믿고 맡길만한 실력자가 없었다. 타로엘 기사단장 세마로스와 근위 기사단장 아클렌이 있었지만, 세마로스는 시오니타의 곁에서 그를 보좌해야 했고 아클렌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근신 중이었다. 그 외에는 신뢰 여하를 떠나 실력자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유시리안은 말 그대로 필요악이었던 것이다. “뭘 해 달래?” “황당해. 그 얌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진심으로 황당하고 짜증난다는 얼굴을 하는 유시리안을 보자 순간 울컥한 디이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반박하고 말았다. “일국의 황태자 전하십니다. 얌체라니요?” 그리고는 스스로 놀라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유시리안은 아주 기어오르는 군, 중얼대며 연하게 웃었다. 디이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유시리안의 얼굴을 보지 못한 무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기세 좋게 소리 칠 때는 언제고 왜 저렇게 새파랗게 질려있는 걸까? 그러다 그녀가 한 말을 떠올리곤 유시리안을 돌아보았다. 극악한 이중성의 소유자, 유시리안은 이미 표정을 고친 상태였다. “황태자?” “시오니타 말이야.” “아아.” 그렇군, 태연히 고개를 끄떡이는 무하를 보며 디이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대 락아타 제국의 황태자를 저렇게 무덤덤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무하야, 훼오트라 아나 정도가 도우라고 한 인물이라면 그 정도는 되겠지 라고 납득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속을 어찌 알겠는가. “실은 같이 왔어.” 너무도 뻔뻔히 말하는 바람에 한 박자 늦게 그 뜻을 알아들은 디이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싸울 분위기가 아니자 사람들이 흩어져 버려서 식당에 남아 있는 건, 유시리안 일행을 제외하고는 디이나와 기절한 엘프를 보살피고 있는 기사들과 좀 전에 봤던 아이템에 대해 열광적인 토론을 나누고 있는 마법사들과 저편에 찌그러져 울먹이고 있는 주인장이 다였다. “여기다, 디이나.” 벽에 기대 있는 락샤사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투명한 물방울 모양의 펜던트를 휙휙 돌리며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웠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의 남자. 본래 그는 잘 웃는 남자가 아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어느 샌가 소름이 돋아 있을 정도로의 냉랭함을 위압적으로 뿜어내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황태자로 자리매김 하고 나서는 웃음이라는 가면 썼다. 저리도 부드럽게 웃으며 그 어떤 전례보다 가장 잔인했다 기록될 피의 숙청을 했다. 락아타에서 악귀라고도 불리고 싸가지라고도 불리는 유시리안을 태연히 대하는 유일한 분.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디이나를 비롯해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무릎을 꿇고 인사하자 저편에서 주인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얼른 바닥에 엎드렸다. 시오니타는 그들에게 일어나라고 허락해 준 뒤, 유시리안을 돌아봤다. “일행이라는 사람이 저 사람?” “아아. 네 녀석이 귀찮게 할까봐 일부러 안 데리고 갔는데. 쳇.” 실로 유감이라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유시리안을 보면서도 시오니타는 별 반응이 없었다. 으레 그러려니 하는 거겠지. “일단 나가자.” “어디로 갈 건데?” “재상네로.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고.” 재상이 시오니타 쪽 사람이라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그런 재상의 집은 비밀스런 일을 논하기는 별로 적당하지 않은 곳이다. “읽혀지는 거 아냐?” “괜찮아. 황제께서는 요즘 이쪽엔 관심이 없으시거든.” 시오니타가 몸을 낮추고 경계하는 것은 황제뿐이다. 욤과는 달리 락아타에서는 최고의 정치인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옥좌다. 물론 황족의 피가 흘러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긴 하지만, 차지하지 못하면 죽는 운명 하에서 치열하게 경쟁한 황족들만큼 정치에 민감한 자는 드물다. 계속해서 바싹 엎드려 있는 주인장에게 보석 하나를 건네고는 앞서 나가는 시오니타의 뒤를 디이나들이 따랐다. 무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유시리안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유시리안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까이 하자, 낮게 물었다. 아까 디이나의 개입으로 제대로 듣지 못한 내용이었다. “뭐가 황당해?” 유시리안의 입매가 묘한 곡선을 그렸다. 그리곤 락샤사에게 가자는 손짓을 하며 짧게 답했다. 아까 디이나가 오해한 부분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얌체는 시오니타가 아니었다. 협박을 하면서 끝까지 협상이라고 우겨대던 맹랑한 창세신의 대신관, 훼오트라 아나였다. “기도하는 땅으로 가 달래.” ‘기도하는 땅’. 창세신의 신전이 있는 곳이다. 길을 가는 동안에 마법사들은 유시리안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무하와 말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 반지가 어디서 났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여태껏 부여 아이템은 금속이나 돌 등으로 만들어진 물건에나 찾아 볼 수 있었다. 옥으로 만들어진 반지. 옥도 어찌 보면 돌이지만, 마법 길드에서 명명한 돌이란 마나 부여가 가능한 특정 강도를 갖춘 것을 말했다. 때문에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옥은 돌이 아니다. 부여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까 무하가 말한 대로 한번 사용하고 나면 깨져버렸다. 그것에 영구적 속성부여가 가능한 부여 마법을 사용할 미친 마법사는 없었다. 한번밖에 사용을 못한다면 차라리 룬 아이템이 낫지 않은가. 룬 아이템은 옥에도 가능하다. 게다가 일정 시간동안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다. 부여 아이템과 룬 아이템이 각기 요구하는 특정 강도가 다른 것이다. 룬의 그것이 좀더 광범위했다. 좀 전에 봤을 때 하나도 아니고 많은 반지가 죄다 부여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각기 종류가 달랐다. 한번에, 한 물건에 다른 속성을 부여할 수는 있어도 각기 다른 속성을 각기 다른 물건에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저것을 만든 마법사는 부여 마법이 가진 최대의 단점, 즉 한번 구사하고 나면 평생 마법을 사용 못할지도 모른다는 문제점을 극복한 마법사일 가능성이 크다. 그도 아니면 한번에 각기 다른 속성을 각기 다른 물건에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한 마법사이거나. 어느 쪽이든 마법사로서는 흥미가 동하는 일이다. “저, 저기…….” 애써 한마디 걸어봤지만 저 싸가지 유시리안의 눈길에 움찔했다. 마법사들은 서로 머리를 모와 이들의 관계를 분석해 보았다. 락샤사라는 저 지독히 무표정한 남자는 일이 어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려 할 사람은 나머지 두 사람뿐. 아까 보건데 유시리안의 싸가지는 이미 널리 알려진 그대로였다. 하지만 저 두건의 남자에게만은 비위 거슬릴 정도로 상냥했다. 또 누군가를 위협함에 있어서 저 두건의 남자가 알지 못하게 교묘히 했다. 저 남자 앞에서는 손속에 여유를 두기도 한다. 평소의 저 싸가지라면 좀 전의 디이나의 말참견을 가만히 넘기지 않을 터. 즉, 먹이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꼭대기에 두건의 남자가 있는 것이다. “토, 통성명이나 하죠! 저, 저는 델니에. 이 친구는 파호. 보시다시피 마법사입니다.” 이론은 만들었으되, 실험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들의 실험은 이론에 어긋남 없이 돌아갔다. “전 무하입니다. 다들 유시리안이나 락샤사와는 구면인 것 같던데…….” 소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무하에게 이구동성으로 구면이라고 답했다. 유시리안이 끼어들면 어떤 수로 대화를 끊을지 알 수 없었다. 함께 길을 걷던 자들도 아닌 듯 하면서 은근히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특히 좀 전에 정신이 들어 디이나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떼고 있던 엘프의 관심은 더했다. 델니에는 준비했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반지를 무하가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준비한 질문이다. 만들지는 않았더라도, 마법사라면 그 반지의 가치를 알고 있을 터. 살 때 그냥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마법사십니까?” “용병입니다.” 중복 가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용병에도 마법사는 있다. 그러나 어지간한 수준의 마법사라면 십에 구는 마법 길드 소속이다. 마법 길드원끼리 서로의 소속을 밝힐 때라면 용병으로서가 아닌 마법사로서의 자신을 알린다. 고로 무하라는 남자는 마법 길드 소속은 아니라는 것. 물론 ‘페르노크’는 준 소속으로 마법 길드원이었지만 무하가 길드원끼리의 그런 소소한 예의 같은 것을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이번에는 파호가 물었다. “어디 쪽의 용병이십니까?” “곧 나올 겁니다.” 용병은 두부류가 있다. 용병길드에 들어온 의뢰를 골라서 움직이는 부류와 단에 들어가 지급되는 의뢰대로 움직이는 부류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냥 취향 따라 고르는 거니까. 단지 용병길드를 중심으로 하는 쪽은 본인의 등급이 그 사람을 알려주는 지침이 되고, 단을 중심으로 하는 쪽은 그 단의 명성이 그를 알려주는 지침이 되는 차이다. 즉 무하는 현재 단에 속해있긴 하나 곧 나올 것이니 자신을 알리는데 소속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완곡한 거절과 같은 답이었기에 둘은 더 깊이 묻지 않았다. 어차피 저 유시리안과 다닐 정도면 웬만한 실력자는 저리가라겠지. 락샤사만 해도 그 능력의 끝을 감 잡을 수가 없지 않던가. “저……그 반지 말입니다.” “예? 아아. 그거요.” “저희도 부여 아이템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옥에 되어 있는 경우는 못 봤거든요.” “그런가요?” 부여 마법은 시전 할 물건이 따로 정해져있는 걸까? 귀에 걸려 있는 세 개의 반지를 한번 쓸어보며 생각에 잠기는 무하의 모습을 어떻게 봤는지 델니에가 눈을 번뜩이며 말을 늘여 놨다. 아까 척박한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반지를 만져댔던 마법사가 바로 그였다. “당연하지요! 완전 병신이 육갑한 거라니까요! 부여 아이템은 영구 속성 부여인데 한번 쓰면 깨질 옥에 누가 미쳤다고 거기다 하겠습니까.” ‘병신이 육갑’이라는 소리에 움찔한 무하는 뭔가 기분이 나쁜 듯 보였다. ‘그냥 반지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데……. 사람이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쳇.’ 이어지는 설명에 그도 그렇군, 이라고 납득했지만 말이다. “근데 그거 누가 만든 건지 아시나요?” ……여기서 자기가 했다고 할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입으로 자기가 병신이라고 자수하는 꼴인데. “모릅니다.” “그럼 누구한테 샀는지는 기억하십니까?” 필사적인 얼굴로 묻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되물었다. 은근히 마음 상했던 터라 삐죽 가시가 돋친 질문이었다. “그런 병신은 알아서 뭐하게요?” “천재 아니면 바보일 테니까요. 제 생각에는 천재일 가능성이 더 크고요.” “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물으니 델니에가 잘 물어봤다며 흥분해서 설명을 늘여놓았다. “만들어진 걸 보니까 그 사람은 부여 마법을 펑펑 써댔어요! 부여 마법은 한번에, 한 물건에 다른 속성들을 한번에 부여 할 수는 있지만 각기 다른 속성을 각기 다른 물건에 부여 할 수는 없거든요. 무하 씨의 반지는 각기 다른 속성이 하나씩 부여되어 있잖아요? 그것도 그렇게 많은 수의 반지에! 그렇다는 것은 그 사람은 그 반지 수만큼의 부여 마법을 시전 했다는 게 되지요. 하지만 부여 마법을 사용하면 몇 년에서 최악에는 평생 동안 마법을 쓸 수 없게 되는 부작용이 있거든요. 그런데도 그런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은 그 부작용을 극복할 방법을 알아낸 천재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아니면 한번에 각기 다른 속성을 각기 다른 물건에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거나!” “……아, 예.” 저런 설명을 마법사가 아닌 사람이 들으면 이해 할 수 있을까? 숨도 안 쉬고 다다닥 말해버리면 알고 있던 사람도 뭔 소린가 할 것이다. 무하는 생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그냥 고개만 멍하니 끄떡였다. 그런 그의 옆에서 유시리안이 킥킥 웃고 있었다. 저 반지를 만든 사람을 알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 멍청이! 그렇게 흥분해서 막 말해 버리면 누가 이해하냐! 아는 나도 헷갈린다, 이 딱따구리야!” “으윽…….” 파호가 타당한 면박을 주자 반박거리를 못 찾고 풀이 죽어버리는 델니에였다. 그때 앞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는 끝났나?” “예? 아!” 어느새 재상의 저택 앞까지 도착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델니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게다가 물어온 사람은 황공하옵게도 황태자 전하였다. 가장 잔인한 피의 숙청을 한 무서운 분이지만 자신의 적이 아닌 사람에게는 자상하기 때문에 델니에는 공포가 아닌 부끄러움에 머쓱해했다. 시오니타는 그런 델니에를 느긋하게 보다가 무하를 돌아보았다. “마법사란 본래 이렇다네. 듣는 사람이 알아듣는지 여부는 상관안하지. 자네가 이해하게.” 피식 웃어버리는 무하였다. 시오니타라는 남자는 어딘지 형님과 닮았다. 무뚝뚝하고 말도 사무적으로 하지만 자상한 형님. 그러면서도 로레라자를 단 칼에 죽여 버린, 적을 대함에 있어서는 인정이 없으신 분. 저 시오니타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지만 형님과 같은 냄새를 풍긴다. 자신의 사람을 아끼는 만큼 적에게 냉혹하나 아군과 적군을 가리는데 있어 편협은 없을 것 같다. 그런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있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라 시오니타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유시리안과의 허울 없는 분위기를 봐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자리에서 움찔 일어나려던 무하는 ‘민’이라는 호명에 슬그머니 앉았다. 민이라 불릴 때의 요크노민은 비밀이 많아, 자신이 아는 척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런 무하의 어색한 모습은, 다행히 민이라는 초대자에게 이목이 집중되어 눈에 띄지 않았다. 유시리안만이 왜 그러냐고 눈으로 물어왔지만 나중에, 라고 입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지나갔다. 유시리안은 2년 전 왜소했던 요크노민만을 알고 있었다. 민은 자신을 모르는 척 하는 지기를 보고 슬쩍 웃었다가 주인인 일르마냐에게 인사를 건넸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해주어 감사하오.” 락아타의 예법을 제법 잘 알고 있는 듯한 청년을 뜯어보며 자리를 권했다. 그가 권한 자리는 락샤사의 옆이었다. 락샤사는 민을 알아봤는지 희미하게 목례했고 민도 슬쩍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워낙 순식간에, 그리고 경미하게 이루어진 인사라 그것을 눈치 챈 자는 없었다. “오늘은 손이 많구려. 그대와는 조용히 면담하길 원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대와의 용무와 관련이 있으니 상관없을 듯싶소.” ‘사람’이라는 말에 아사라느를 한번 본 민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엘프는 용무와 관련이 있는 자가 아니니 말을 함에 있어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엘프가 인간의 권모술수에 관심을 가질 일도 없을뿐더러 퍼트리고 다닐 리도 없으니 적당선만 지키면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클렌. 그대도 앉게.” 아클렌은 아사라느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쪽은 전에 제가 말씀드린 ‘그 곳’의 민. 이쪽은…….” “락아타의 황태자이신 시오니타 전하, 재상이신 일르마냐 공, 그 영애 디이나 씨, 근위기사단장 아클렌 씨, 프리 급 용병 유시리안 씨, 그 동료 락샤사 씨, 그리고 무하.” 민이 부드럽게 말허리를 자르며 읊었다. 시오니타나 일르마냐, 디이나, 아클렌은 그렇다 치고 유시리안 일행을 아는 건 의외였다. 게다가 무하까지. 속을 가늠해보려는 일르마냐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보는 민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일르마냐 쪽에서 먼저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 “민 씨가 한 말은 저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찾는 마검은 어떻게 생겼지요? 무하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생겼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장로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함께 마을로 가달라고 한 겁니다. 그렇다면 두건을 벗지 않아도 일이 해결될 테니까요.” 납득하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민이 저지했다. 그로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프는 마검을 소유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니요. 옳은 지식입니다.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진 자는 마검을 다루지 못합니다.” 디이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요?” “살기를 못 내니까.” 뜻밖의 답은 유시리안에게서 나왔다. 그는 돌아가는 상황이 재미있는지 미소를 진득하니 달고 웃고 있었다. 비록 아사라느를 보는 눈은 적의로 가득했지만 말이다. 민이 이어서 덧붙였다. “자아가 있는 마검은 살기로만 제압할 수 있습니다. 자아가 없는 마검도 있지만, 그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살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사라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모순이 보입니다만?” 아사라느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제가 찾고자 하는 자는 혼혈입니다. 아직 선택하지 않은 혼혈. 때문에 그는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지고도 마검을 다룹니다. 하지만 마검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는 실패하여 살육에 취해버렸습니다.” 디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무하라는 남자는 살육에 미친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형성시킨 마검의 날은 너무도 청아한 기운을 담지 않았던가 . 기사들 역시 죽이지 않았고, 마법으로 공격당했을 때는 감싸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아까 식당에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묻는 건지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사라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창백해져서 눈을 크게 치켜떴다. 흥분으로 그만 실언을 해버렸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말했다. “말 할 수 없습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좌중을 한번 훑어본 민은 낮게 웃었다. 처음과 같이 냉랭함이 서려있는 웃음이었다. “두건을 벗지 않아도 확인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리곤 일어나 무하 쪽으로 걸어가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초목의 엘프는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를, 그림자의 엘프는 금속빛 고양이 눈동자를 가졌습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이냐는 의문을 담는 눈동자들을 마주보며 다시 한번 웃었다. 이들은 너무 두건에 집착하고 있었다. 무하의 눈꺼풀을 아슬아슬하게 덮는 두건을 아주 조금 올려 보인 민은 짓궂게 물었다. 본래라면 그 손을 쳐냈을 무하는 한숨과 함께 묵인했다. 민이 자신이 꺼리는 짓을 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게 분명했다. “어떤 눈동자입니까?” 그늘에서 벗어난 무하의 눈동자는 짙은 녹음을 품고 있었다. 아사라느가 진심으로 사과를 했고, 무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허무하게 끝난 이 결말에 시오니타나 일르마냐나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두건에만 집착하고 다른 것은 생각 못한 자신들이 우습기도 했다. 유시리안은 감 잡은 얼굴로 민을 힐끗 보고 있었다. 무하가 자신의 두건을 건드리는 행위를 묵인했다는 것이 많은 힌트가 되어주었다. 이야기가 무난히 마무리 되고 음식이 들어왔다. 뷔페식인 욤과는 달리 똑같은 메뉴의 음식이 일인분씩 차려졌다.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디이나가 조심스럽게 무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어쨌거나 무하 씨는 열어 놓은 마음을 가졌지 않습니까?” “잘 모르겠지만 일단 다들 그렇게 말하는 군요.” 대체 열어 놓은 마음이란 게 뭘까? 다들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묻지는 못하겠고, 나중에 유시리안이나 민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들은 무하가 무지한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마검을 다루지요?” 디이나뿐 아니라 다들 그것이 궁금했는지 무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하는 말해도 되는 건지 고민을 하다가 유시리안을 돌아보았다. 일부러 사람의 이목을 피해 보완하지 않았던가.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유시리안이 약하게 고개를 끄떡여주자, 이번에는 락샤사를 보았다. 락샤사는 그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마주보다가 짧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 고개를 까딱이고 디이나를 보았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빛을 내는 눈동자가 귀엽게 느껴졌다. 동생을 보는 느낌이랄까. 식당에서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제 검은 투기로도 날을 형성시킵니다. 살기로 형성된 날 쪽이 위력이 더 강합니다만.” “투기로 다뤄지는 마검은 처음 봐요.” “그건 샤가 보완해줘서 그래요. 처음에는 살기로만 날이 형성 되서 단검으로밖에 못 썼었지요.” 마검을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이채를 띤 눈동자들이 락샤사에게 쏠렸다. 그에게 좀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기에 억지로 호기심을 삼켜야 했다. 저 남자의 이름조차도 유시리안과의 주고받는 대화에서 겨우 알아냈다. 유시리안 외의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경우는 드물고, 그나마 유시리안과도 꼭 필요한 사항이 아니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외모에 가끔 보이는 엄청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없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존재감을 일부러 감추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어떤 면에서는 유시리안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운 남자다. 다들 락샤사에게서 관심을 끊자 시오니타가 입을 열었다. “리안도, 민도 왔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인간들의 화제로 넘어가자 아사라느는 자리를 피할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시오니타는 그런 그녀를 잠시 지켜보다가 말을 골랐다. “좀 전에 리안이 용건만 간단히 하라고 했기 때문에 기도하는 땅으로 가달라는 말밖에 못했다. 그런데 리안이 뜬금없이 알았다고 일어나 버려서 말이야.” “그거면 충분해. 우리가 락아타로 온 용건은 따로 있었으니까.” “용건?” “누구를 도우라는 협박을 당해서 말이야.” “누구를 도우라는? 누군지 정확히 안 밝혔단 말인가? 천하의 유시리안을 협박했다고?” 그 짧은 사이에 조목조목 잘도 따졌다. 유시리안은 인상을 찌푸리면 그럴 일이 있었다고 짧게 답했다. 시오니타는 더 묻지 않고 넘어갔다. 자신의 의뢰를 맡겠다는 걸로 충분했다. 유시리안은 신용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한 남자였다. 대충 넘어갈 분위기자 일르마냐가 다시 이어서 말을 꺼냈다.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소수 정예로 나갈 필요가 있지요. 유시리안님이 욤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못 올 경우도 생각해 길드에도 의뢰해 두었습니다. 다소 위험부담은 있지만 길드는 신용이 생명이니까요.” 하며 민을 본다. 아사라느를 의식하여 길드의 이름을 대지 않고 교묘히 말을 이어나가는 걸 보니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일르마냐와 다시 눈이 마주친 민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서 뭘 해주면 되는데?” 뻔히 아사라느 때문에 말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얄밉게 핵심을 찌르는 유시리안을 보며 일르마냐는 능숙하게 핵심을 피하며 답했다. “편지를 가져와 줬으면 합니다.” “편지?” 그때 아사라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려지면 곤란한 이야기라면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오니타가 흔쾌히 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는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엘프는 타인을 떠보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자신을 붙잡아주길 원하면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도 않는다. 단순한 호의라면 고맙게 받아주는 게 도리다. 디이나가 미안한 얼굴을 하며 일어나자 아사라느는 부드럽게 한번 웃어 보이고 돌아섰다. 민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가는 아사라느를 줄곧 주시하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관심 있어?」 토라진 목소리가 머릿속에 직접 울려왔다. 뿐만 아니라 옷 안쪽으로 넣어둔 목걸이가 작게 진동했다. 민은 가만히 옷 위로 그런 목걸이를 쓸었다. ‘조금.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달라서.’ 「제 1기 마도 때는 몰라도 이제는 대단할 것도 없는 녀석들이야.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잔인한 저주에 걸려버렸거든.」 ‘흐음.’ 불칸은 가끔씩 제 1기 마도나 ‘지워진 존재’, ‘지워진 언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호기심에 자세히 캐물으려 하면 딱 잘라 안 된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그러한 단어나 내용들을 들어보면, 어느 압도적인 존재가 제 1기 마도를 강제적으로 멸망시켰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뭐, 마법사나 신관이나 학자도 아니고, 민에게 있어서는 어차피 호기심 충족 이상의 의미가 없는 이야기라 억지로 들을 생각은 없었다. 아사라느의 인기척이 멀어지자 일르마냐는 본격적으로 화제를 꺼냈다. “몬스터 사태로 전 대륙이 피해를 입고 있긴 하지만 유독 락아타에 출현 빈도가 높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몰라.” “락아타로서는 곤란하게 됐지요.” 유시리안과 민이 거의 동시에 답하고는 서로를 한번 보았다. 유시리안은 민의 깊은 남색 눈동자를 빤히 보다가 픽 웃으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 눈치 챘군, 민도 웃으며 일르마냐에게로 눈을 돌렸다. 일르마냐는 의외라는 얼굴로 민을 보고 있었다. 욤에 기점을 둔 길드면서 상당히 정보에 밝지 않은가. 락아타는 농사가 주를 이루는 곳이다. 상업도 발달되어 있고 공예도 발달되어 있지만, 모두 숲과 초원에 딸려 나오는 특산물을 기초에 두고 있다. 그것이 벌써 2년 동안이나 몬스터 사태에 휩쓸려 대부분 정지상태다. 이제 루트가 밝혀지긴 했지만 그 공포 변함없는 몬스터의 습격으로 사람들은 밖을 나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가는 끝없이 치솟았고 빈익빈 부익부는 그 격차가 날로 벌어져 가는 악순환이었다. 배를 불리는 건 귀족이요, 세금을 내는 건 백성인지라 황실에서도 문제를 타파하고자 애는 썼지만,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몬스터 사태라는 괴현상인지라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락아타는 몬스터의 출현 빈도가 타 나라보다도 훨씬 높았다. 쉬쉬하며 숨기고 있지만, 그것은 변함없는 끔찍한 진실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터진 전쟁, 그리고 패전. 이제는 고인이 된 욤 황제가 요구한 과대한 보상금.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면 다행인 와중에 그 망할 보상금으로 인해 세금은 더 높아졌다. 시오니타가 귀족들에게서 징집하자는 주장했지만 묵살 당했고 언제나 그랬듯이 부담은 백성 몫이었다. 욤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조금이나마 백성들의 원한과 분노를 가셔주었다면 락아타는 그것의 패배로 인해 더욱 증오에 묻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계속된 황제와의 대립으로 시오니타는 발이 묶였다. 그나마 민심은 시오니타 쪽에 있지만 그것은 황제가 된 다음에나 발휘될까, 지금으로서는 도움이 안되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그들이 시오니타에게 가지는 기대가 무거운 짐이 되어 두 어깨를 짓누를 뿐. 어떻게든 해결책을 물색 하고자 하는 시오니타에게 음지에서 정보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몬스터 사태를 불러일으킨 원인에 대한 것이었다. “원인?” “그 정보의 루트는 어딥니까? 신뢰할 수 있습니까?” 또 유시리안과 민이었다. 당연한 질문이었기에 일르마냐는 느긋하게 답했다. “먼저 정보의 루트는 밝힐 수 없으나 신뢰는 보장할 수 있다는 건 밝혀두겠소. 몬스터 사태는 자연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괴현상이라 여겨져 왔소. 결국 그것은 정말로 인위적인 사건이었던 거요. 그 몬스터들의 뒤에는 마족이 있다는 군.” “이상한데. 인간들이 보기에는 몬스터나 마족이나 한통속이겠지만 엄연히 다른 생명체들이거든. 단지 마족이라고 해서 몬스터를 지배할 수는 없어. 죽이거나 사로잡아 지배할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많은 수를 일일이 사로잡아 지배할 필요는 없어. 수만 많을 뿐 실용은 없으니까. 차라리 혼자 움직여서 해결하는 편이 마족으로서는 편하거든.” 뚱하게 말하는 유시리안을 보며 곤혹스런 미소를 짓는 일르마냐를 대신해 시오니타가 간단하게 답했다. “너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약속된 지배’를 마족이 가지고 있다면?” “골치 아프군.” “신이 허락한 행위라는 겁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그런 행동을 보이지요? 기도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지요? ……알겠습니다.” 몇 개의 질문을 던졌으나 민은 답을 요구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들을 건 다 들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의자에 푹 기댔다. 단지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린 것으로 보이는 민을 보며 일르마냐는 순간 감탄했다. 이는 깊은 학식과 기민한 두뇌 회전,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실태를 모두 알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유시리안의 그것은 이미 뼈저리도록 잘 알고 있었지만 그와 비슷한 괴물단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학식도 돌아가는 실태로 모르는 무하는 관심 없는 얼굴로 일르마냐와 시오니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설명을 하면 듣는 거고, 안하면 나중에 유시리안이나 민에게 물어보면 되는 거였다. 일르마냐는 확인하는 차원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모든 몬스터를 지배할 수 있다고 알려진 ‘약속된 지배’. 그것은 창세신의 허가를 받은 자만이 쓸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소. 그것을 마족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하는 행동이 창세신의 허락 하에 벌어지는 것이라 봐야하는 것. 그런데도 창세신의 신전 쪽에서는 신성마법을 구사할 줄 아는 신관들과 성기사들을 대거 동원하여 마족을 쫓고 있다오. 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게요. 현재 그들 중에서 창세신의 목소리를 배알했다는 신관은 오직 훼오트라 아나뿐. 신께 무언가를 청하고 그것을 허락받은 일은 아예 없다 봐도 무관하지요. 그들도 못한 것을 마족이 먼저 해냈다는 것을 납득하기 싫었을 거요.” “때문에 마족의 요구를 거절했다? 거절당한 마족은 ‘약속된 지배’의 힘을 빌어 스스로 해결하려 하고 있고?” 유시리안 역시 확인 차원에서 물으며 민처럼 의자에 깊이 기댔다. 식사는 이미 끝나고, 하인들이 소리 없이 치우고 나갔다. 곧 올 후식을 기다리며 따분하게 있는 유시리안의 모습을 가만히 보며 일르마냐가 고개를 끄떡였다. “처음에 그것은 단지 자신의 요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허락의 증표였을 테지만 그들이 뻔히 보이는 진실을 부정하고 반발한 이상, 그 권위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사용해야 했을 거요. 신전에 대한 위협도 될 테고.” “위협?” 일르마냐는 혼잣말처럼 낮게 한마디 하는 무하에게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창세신의 허가를 받은 마족은 정당하오. 그러니 그가 몬스터 사태로 위협을 계속 할수록, 또 그로 인해 피해가 심해질수록 그 죄는 신전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거라오. 진실이 알려졌을 때 신전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되겠지.” 시오니타가 짧게 말을 덧붙였다. “바로 우리는 그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거다.” 이유는 많았다. 제일 먼저 분풀이 거리가 필요했다. 겹쳐진 폐해로 백성들이 황실에 가지게 된 백성들의 깊은 반감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또 몬스터 사태를 한시라도 빨리 해결하고자 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이 더 이상 이어지다가는 락아타는 돌이길 수 없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락아타의 피해는 타국의 정도를 웃돌았다. 더 이상 땅을 방치해 둘 수도 없었다. 재기하는 데는 신전이 지급할 피해보상금으로 충분하리라. 또 시오니타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데도 필요했다. 황제가 아무리 배척한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입지를 굳히는 데는 영웅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전쟁을 반대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피해보상을 귀족이 부담하자고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말뿐인 남자라고 비웃음 살 것이다. 이는 락아타이기에 생각하고 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신성제국인 욤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신전과 합심해 사실을 은폐하려 할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비록 창세신을 국교로 하는 것은 아니나 신성제국이라 불리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다. 락아타는 마법제국이라 불리는 곳. 이 일이 밝혀지면 신관과 사이가 나쁜 마법사들이 발 벗고 도와줄 것이다. 또 시오니타 쪽으로 몰려올 것이다. 마법사들이 많고, 그 세가 넓은 락아타에서, 그들의 지지는 더할 나위 없는 힘이 된다. “편지는 무슨 소리야?” 유시리안이 묻자 시오니타가 간단하게 답했다. “2년 전 마족이 신전에 정식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요구문인가……. 마계의 종이를 인간들이 없앨 수 없지. 뭐, 그것이 가지는 가치를 보아 없애려 하지도 않았겠지만. 신전 쪽에서야 양날검인 셈이군.” “정보원은 그것을 교황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내내 뚱한 얼굴이었던 유시리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훼오트라 아나는 이들을 도우라고 했다. 그것을 그의 직감과 상황이 알려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 걸까? 신전의 자존심보다는 고통당하는 대륙의 불쌍한 생명체들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신전의 자존심 따위는 알 바 아니다……인가.’ 유시리안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클렌이 무하에게 물었다. “오늘 묵을 데는 정했소?” “아직 입니다.” “내 집으로 오지 않겠소? 그리 외지지도 않으면서 조용하다오.” 유시리안의 의향을 묻기 위해 고개를 돌리니 상관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처음 무하의 반응을 보면 헛소리 말라고 비아냥 거렸겠지만 솔직하게 사과도 했겠다, 무하의 얼굴도 많이 편해졌겠다, 묵어줘도 괜찮았다. “호의 감사합니다.” 무하의 인사에 아클렌은 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다 락샤사 옆에 앉아있는 기이한 가면의 남자를 발견했다. “민 씨도 함께 묵지 않겠소? 어차피 일정을 잡으려면 모여야 할 텐데.” “일행이 있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오. 방은 많소.” “호의 감사드립니다.” 거처가 정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인들이 후식을 가지고 왔다. 매운 음식이 많은 락아타는 주로 차가운 후식을 즐긴다. 하인들이 가지고 온 것은 손대기도 꺼려지도록 섬세하게 꾸며진 생과일 아이스크림 케이크이었다.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접시자체에 마법적인 처리를 해놓아 실내에 두어도 녹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대화를 나누며 즐길 수 있다. 이것을 퍽 좋아하는 디이나는 냉큼 작은 스푼을 들었지만 무하는 어딘지 불편한 얼굴로 몸도 의자에 바싹 붙어 최대한 그것으로부터 떨어졌다. 물론 그것은 민도 마찬가지였다. 유시리안은 아이스크림과 무하를 번갈아 보다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는가?” “…….” 손님 대접은 주인의 몫. 일르마냐는 똑같은 모양새로 거부감을 뿜어내고 있는 무하와 민을 보며 물었다. 둘은 묵묵부답으로 황홀한 자태를 뽐내는 아이스크림을 놀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화림은 없습니까?” “……저도.” 젊은 손님에 맞춰 내온 후식이기에 일르마냐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화림은 제피모나, 그것도 노인들이나 즐기는 씁쓰름한 맛의 차였다. 카르민인 일르마냐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후식으로 나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나?” “아주 싫어합니다.” “매우 싫어합니다.” 부사만 틀린 이 두 답은 동시에, 빠르게 튀어나왔다. 뭐라 더 물을 수도 없어 잠시 자신이 아는 한도에서 고민하던 일르마냐는 낮게 물었다. “주스는 괜찮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것 좀 치워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더 이상 보기도 싫었는지 민은 고개를 휘 꺾으며 말했다. 마찬가지 심정이었던 무하도 가만히 그것을 외면했다. 유시리안만이 쿡쿡 웃으며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아무렇게나 잘라먹고 있었다. 2년 전에도 저 둘은 지금과 같이 단 것을 거부했었다. 페이야 가의 정원 안에서도 유난히 수목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연못 근처를 아사라느는 좋아했다. 널찍한 바위에 앉아 연못에 발을 담그고 나무에 기대 앉아 있으면 나뭇잎에 부딪치는 바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이때만큼은 초록 고향에서 받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늘 가슴을 아프게 짓누르는 의무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이럴 때면 울고 싶어진다. 조상이 저지른 무거운 배반의 대가는 천년에 한번씩 이렇게 엘프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 저주를 받은 이후 홀로 당당하게 존재하던 엘프는 사라지고 ‘그랜드’에 의존하여 겨우 살아가는 생명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천년에 한번씩 가장 추악한 생명체가 되어 존재감을 상실하고 의지할 자, ‘그랜드’를 찾는다. 그에게 그 무거운 배반의 대가를 전담시킨다. 그것은 끔찍하게 쫓아오는 인과였다. 그때 그 행위에 가담하고 그의 신뢰를 저버린 대가였다. 그 존재를 찾는 과정을 ‘계승’이라 칭하고 엘프의 왕, ‘그랜드’라 칭했다. 그리고 그 허울뿐인 명예를 강제로 뒤집어 씌어 희생양으로 내몰았다. 대부분은 그 명예라는 껍데기에 홀렸다. 그 홀렸다는 것 자체가 저주의 시작임을 그들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것은 엘프가 할 짓이 아니다. 본래 엘프는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 이율배반 속에서 엘프 족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제 1기 마도 때 그를 배신한 대가로 엘프는 더 이상 엘프가 아니게 됐다. 희생양의 몸부림 아래에서 간신히 숨을 쉬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추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여기 있었군요.” “디나…….” 평소라면 먼저 알아차리고 인사를 건넸을 텐데 이번에는 정신을 딴 데 두고 있어 미처 알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다가오던 디이나는 울적해 보이는 아사라느의 얼굴을 보며 급히 달려왔다. “왜 그래요, 아란?” 둘은 공식적인 입장에서는 존칭에 존댓말을 하지만 사적인 입장에서는 친근한 관계였다. 특히 아사라느는 ‘나이트’ 디이나의 ‘레이디’였다.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디나.” 어차피 익숙해져야 할 고통이다. 아사라느는 몇 년이나 살게 될까? 본래 이천년에서 삼천년 사이였던 엘프의 수명은 제 1기 마도 때 받은 저주로 크게 뒤틀렸다. 벌써 여섯 번째 계승을 겪은 엘프도 있다. 아사라느는 이번이 두 번째다. 자살을 하지 않는 것은 엘프들에게 남은 최후의 자존심. 자살한 엘프는 최악의 비겁자다. 그들의 시신은 초록 고향에 묻히지 못한다. 멀리 바다에 태워 버린다. 봉인된 땅의 머나먼 경계로 가서 부서져 두 번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일곱 번째 계승을 겪은 엘프는 거의 다 자살했다. 첫 번째 계승 때 얼마나 바랐던가. 부디 두 번째를 맞이하기 전에 죽게 해달라고. 지금은 이렇게 빈다. 부디 세 번째를 맞이하기 전에 죽게 해달라고. “전 얼마나 살게 될까요?” 시야를 어지럽히던 눈물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차마 꺼낼 수 없는 금기를 마음속으로나마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얼마나 더 계승을 겪어야 될까요?’ 그런 아사라느의 심정을 알리 없는 디이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엘프는 수명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만…….” 아사라느의 눈물을 뒤늦게 본 디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했던 아사라느였기에 그 눈물은 더욱 애절했다. 그녀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눈동자 속에 맺혀있었다. 디이나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눈물을 닦아냈다. “적어도 제가 살아 있는 동안만큼만은 살아 계셨으면 좋겠어요.” “오십년? 백년?” “잘 모르겠어요. 인간의 수명 역시 평균은 없으니까. 수 백 년을 사는 인간도 있고 하루를 사는 인간도 있으니까.” 수 백 년을 살아도 계승은 겪지 못한다. 아사라느는 벌써 두 번째 계승을 겪고 있다. “디나는 몰라요.” 아사라느의 불이 눈물로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녀는 무의미하게 반복했다. “디나는 몰라요. 몰라요…….” 말하고 싶다. 저 어린 소녀는 나이트로 임명 받았을 때 자신에게 레이디가 되어달라고 청했다. 당신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 강한 눈동자에 끌려 처음으로 인간 나이트를 가진 엘프가 되어버렸다. 명예라니. 죽음을 갈망하는 추한 자신에게 명예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이미 헐고 닳아 걸레조각이 된 자존심만이 있을 뿐이다. “디나는 몰라요.” “알고 싶어요.” 디이나의 짧은 말에 아사라느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디이나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금기였다.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아무리 자신의 나이트이라 할지라도 디이나는 엘프가 아니니까. 침묵하는 아사라느를 보며 디이나는 다른 말을 꺼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싶어요. 뭘 원하죠? 그것도 말할 수 없는 건가요? 그럼 묻지 않을게요.” 다정한 말에 이끌려 아사라느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 누구에게도 꺼내본 적 없는 그녀의 바람. “디이나, 난 말이에요. 우리가 이대로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추해지는 건 싫어. 조금이라도 엘프답게 있을 때 죽고 싶어요. 이성이란 것이 남아 있을 때, 더 이상 존재감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때…….” 더 말 할 수 없었다. 이미 많은 것을 말해버렸다. 어쩌면 금기를 말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디이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완연한 성숙미를 갖춘 아사라느를 완전히 안아주기에는 여자이자 작은 몸인 디이나에게는 무리였지만 그래도 어깨를 안아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힘들게 떨리는 아사라느의 몸은 참으로 가늘었다. “당신이 진심으로 원한다면 내가 당신을 죽여줄게요.” 나이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존재. 디이나는 아사라느를 위해 스스로의 룰을 깨려 하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지키는 것은 생명에 국한 된 게 아니니까. 그녀의 자존심을 지키고 그녀의 바람을 지킨다. 그것 역시 나이트로서 아사라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다. 뜻밖의 달콤한 제의에 아사라느의 고양이 눈동자는 욕망으로 일렁였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디이나라면 죽여줄 것이다. 두 번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고 이 아름다운 정원 한 구석에 묻어줄 것이다. 세 번째 계승을 보지 않아도 된다. 당장 그녀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미쳐가는 자신을 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이트 디이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그건 레이디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입니다.” 디이나는 씨익 웃었다. 자신의 레이디를 죽인 나이트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잠시 떨림이 멈췄던 아사라느의 몸이 흠칫하며 디이나를 바싹 끌어안았다. 갑자기 온 몸에 오한이 돋았다. “나이트 디이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디이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 무하라는 분은 어떻게 됐나요?” “별로.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나이트 아클렌의 저택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어요. 곧 의뢰를 위해 기도하는 땅으로 떠나겠지요. 적어도 한 달 간은 볼 일 없을 거 에요.” 디이나는 아사라느의 무릎을 베고 누워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아사라느에게서는 초목의 향이 난다. 상쾌한 아침의 향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무릎을 베고 누워 아침의 향속에서 잠자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때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품 같아서 좋았었다. 지금은……그냥 좋았다. 이제는 어머니의 품이 그리울 나이는 아니니까. “전 그가 제가 찾아야 할 그 자가 아니길 바랐어요. 너무도 두려웠어요. 이 손으로 그 자를 계승시켜야 한다는 것이.” “계승?” “……실언했군요. 잊어주세요.” 디이나는 조용히 눈을 떠 아사라느의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무엇이 두려운 가요?” “묻지 말아주세요. 답할 수 없습니다.” 아사라느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저렇게 슬픈 눈으로 거짓말보다 더 아픈 거절을 했다. “엘프는 다 당신 같은가요?” “예?” “거짓말 같은 건 못하고…….” “각기 개성이지만 굳이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게 보통이에요.” 웃음 섞인 답변에 디이나는 눈을 감았다. 차마 다음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다 당신처럼 죽고 싶어 하나요?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주길 바라나요?’ “어쨌거나 무하 씨가 그 자가 아니라 다행이에요. 그는 참 이상해요. 인간이면서도 열어 놓은 마음을 가졌어요. 어떻게 미치지 않고 살아온 걸 까요?” “인간이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지면 미치나요?” “인간은 죽여야 사는 종족이니까요. 비단 인간뿐만 아니에요. 대부분의 종족들은 거의 다 그래요. 애당초 엘프 외에는 타고 난 자도 별로 없지만.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지고도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건 최하 파 등급 정도는 되어야 했어요.” 묘하게 익숙한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파 등급? 용병이나 기사처럼 뭔가 자격이나 등급이 있는 건가요?” “……오늘은 자꾸 실수만 하네요.” “그것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 “미안해요.” 과거 많은 종족들이 공생했을 때. 그들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자신의 종족을 맨 뒤에 붙여 소개할 수 있었을 때. 고위 종족과 하위 종족이 염연하게 갈렸을 때. 그들을 나누는 등급이 바로 카, 하, 파, 타, 차였다. 그것이 어찌어찌 구전되어 용병이나 기사들이 실력을 나누는 척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중 인간은 타 등급이었다. 때문에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지면 정신적으로 지탱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열어 놓은 마음은 엘프이나 지니는 것으로 다른 종족들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하 등급인 종족 중 한 명이 그것을 지니고 태어났으면서도 미치지 않은 것을 보아 그런 설이 나온 것뿐. 그런 엘프가 저주를 받아 이렇듯 비틀린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그랜드가 없으면 그들은 인간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아니 차 등급의 종족보다도 못하게 그 등급이 떨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서서히 미쳐갔다. 필사적으로 그랜드를 계승시키면 딱 천년동안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수명이 비틀린 엘프들 중에서 오직 그랜드만이, 몇 살에 계승하든 상관없이 딱 천년을 살았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죽었다. 그리고 다시 서서히 미쳐가면서 필사적으로 그랜드를 찾는다. 그렇게 수 만년을 버텨왔다. 허물어진 정신이 채 치유되기도 전에 다시 반복되는 그랜드의 죽음과 계승……. 천년이란 시간이 고작 2~3년의 상해를 치유시키지 못했다. 때문에 미쳐버린 것은 고칠 수 없다. 그렇게 엘프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하라는 인간은 살아있다. 멀쩡한 정신으로 곧게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엘프는 2~3년의 상해에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그는 수 십 년간을 멀쩡히 살 수 있었던 걸까? “그 기도하는 땅에는 가는 일. 극비에 속하나요?” “알고 싶어요?” “예.” 극비에 속하지 않는다면 따라가고 싶다. 따라가서 그가 여지껏 미치지 않고 살아남은 방법을 엿보고 싶다. 아마도 천성 탓이 클 테지만……. 본인 스스로도 모르는 무언가 일 테지만 곁에서 지켜본다면 뭔가 알게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희망 없이 한걸음, 한걸음 죽음을 향해 걷는 엘프에게 뭔가 실마리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아사라느에게라면 괜찮겠지요. 실은…….” 이야기가 끝나자 아사라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이나가 따라 일어나며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아사라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눈으로 디이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절 죽여 줄 수 있나요, 디나?” “예.” 나이트는 레이디를 지킨다. 나이트 디이나는 레이디 아사라느의 바람을 지킨다. “절 지켜 줄 수 있나요?” 두 번 죽지 않게 시신을 남몰래 묻고 가끔이라도 좋으니 찾아와 줄 수 있나요? 미치기 전에 죽고 싶다. 더 이상 미치기 전에. 하지만……. “예.” “그럼 나이트 디이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사라느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 없이 눈물만을 흘리는 모습은 차라리 오열하는 것만 못했다. 디이나는 결국 전처럼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약하게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편하게 등을 기댔다. 결국 실림이라는 쌉싸름한 맛의 차를 끝으로 점심을 무사히 마쳤다. 화림과는 또 다른 깊은 맛이 있는 차라 퍽 마음에 들었다. 깔끔한 연녹빛도 괜찮았다. “역시 단 건 싫어. 몇 달 죽어라 먹은 게 평생 가는 군.” “고문이었지, 그건.” 민이 푸념 투로 중얼거리자, 무하가 마찬가지 심정으로 그날을 회상하며 한마디 했다. 유시리안이 옆에서 웃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무하가 슬쩍 흘겨보았다. 그러고 보면 좀 전에도 다른 것을 청하는 자신을 보며 저렇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별로.” 시치미 떼며 공연히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는 유시리안을 한동안 흘겨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다시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추궁하는 것을 단념한 무하는 쳇, 하며 시선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런 둘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민이 조용히 말했다. “많이 좋아졌구나.” “그럭저럭.” 무뚝뚝한 대답이었지만 전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았다. 민이 이번에는 유시리안 쪽을 보았다. 저 남자한테는 시간이란 게 비껴가는 걸까? 2년이란 흔적을 느낄 수가 없다. “만났군요.” “만났지.” 느긋하게 웃으며 답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무하가 막 집을 나가고 난 다음에 도착한 유시리안. 떠났다는 말에 흔들리며 어디로 갔냐고 필사적으로 물었었다. 모른다는 답을 듣고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결국 이렇게 찾아내어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무하를 바꾸었다. “들었습니까?” “들었어.” 그때 그는 무하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었다. 민은 무하 본인에게 들으라고 했다. 모든 것을 들은 건가. 그리고 나서 그는 민이 제시하지 못했던 해결책을 내놓은 것일까? 그래서 무하가 저렇게 밝아진 걸까? “다행이군요.” 유시리안에게 있어서나, 무하에게 있어서나 다행이다. 민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금 그들은 아클렌의 저택으로 안내받고 있는 중이었다. 일르마냐가 준비해준 마차 안에는 유시리안과 무하, 락샤사, 민이 탔고 아클렌은 타고 온 말을 옆에서 몰았다. 야생마인 마르스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유시리안이 뭐라고 속삭인 이후로는 얌전히 따라왔다. 산리들은 아클렌의 수행 기사들이 이끌었다. 굳이 마차를 탈 필요는 없었지만 이쪽 동향에 눈과 귀를 밝히는 적들이 많다며 일르마냐가 권했다. 유시리안이란 남자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겠지. 그만큼 위험물이니까. 락아타에도 알려지지 않은 레타 지점이 있기 때문에 이쪽 사정에도 어느 정도 밝은 민은 마차 벽을 툭툭 건드리며 조소했다. 그로서는 유시리안이란 괴짜를 장기간 묶어둘 수 있었던 수완이 놀라울 뿐이었다. 시오니타라 했던가. 테밀시아의 지기인 남자. 루카다는 그를 두고 테밀시아와 ‘동족’이라고 말했다. 민도 직접 보니 알 수 있었다. 각 제국의 황제가 될 두 사람이 지기인 경우가 어디 또 있었을까. “그러고 보니 수도에서 시체를 태운건 너라고?” “그래도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어.” 민은 언제나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또한 테밀시아와 뮤비라를 돕고 있었고, 무하의 지기였다. 그런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당연했기에 무하는 덤덤하게 답했다. 마차 안에는 믿을 수 있는 존재밖에 없었다. “테밀시아님의 소장품이 하나 늘은 거지, 뭐.” “응?” “그 손칼 말이야. 치유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아아, 은장도.” 고개를 끄떡이며 뭐라 말을 이으려던 민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삼켰다. 테밀시아가 로레라자의 유품이기도 한, 카한세올의 그림을 넣은 목걸이를 늘 가지고 다닌 다는 것은 예전에 말해 무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뜻 말할 수 없는 것은 무하가 지난 2년간 지독히 고통스러워했음을 봤기 때문이다. “늘 가지고 다니신다고.”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되다 뿐이겠는가. 6 써클의 마법사가 치유한 것보다도 더 탁월한 효력을 보이는 물건인데. 게다가 리커버리에 힐링에 큐어까지 있다. 전례에 없는 이 아이템을 본, 오르세만 가의 마법사가 완전 눈이 뒤집혀서 어디서 난 거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걸 겨우겨우 얼버무렸을 정도다. “나도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고.” 자신의 검을 톡톡 두들겨 보이는 민이었다. 예전에 무하가 페르노크로서 만들어주었던 마법검이었다. 그가 청염의 마스터라는 칭호를 얻었을 때 이 녀석은 ‘훼크미렌아’라는 칭호를 얻었다. ‘훼크미렌아’는 신성어로서 ‘여덟의 수호자가 감싸는 검’이란 뜻이다.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전례가 없는, 여덟 가지의 마법 부여가 된 엄청난 검을 가진 민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레타의 수하들이 붙여준 칭호라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청염의 마스터’와 함께 레타를 통합시키는데 은근한 힘이 되어주었다. 레타 길드원들이 이런 ‘대단한’ 사람의 부하다, 라는 우월감을 갖게 만들어 준 것이다. 물론 그런 분위기를 형성시키는 데는 산과 키르가 조금 힘을 썼지만 말이다. 무하는 도움 받고 있다는 민의 말에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민은 무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묘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울음을 동반한 미소였다. 비록 가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 그 눈동자와 입매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무하가 왜 그러냐며 걱정스레 묻자 민은 한숨과 같은 말을 토해냈다. “이제는 웃는구나.” “…….” 무하 자신도 스스로가 웃고 있음을 의식했을 때 저리도 묘한 감동 속에서 서툴게, 어색하게 웃었었다. 당사자인 자신과 같은 웃음을 짓는 민을 보며 무하는 다시 한번 웃었다 . 언젠가 유시리안이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믿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많은 거라고. 그리고 작게 답했다. “이제는 웃어.” “그래…….” 마차 안에 부드럽게 퍼지는 공명음을 음미하듯 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럼 전 일행한테 잠시.” “찾아오실 수 있겠소? 아클렌의 물음에 민은 물론이라고 답하고 유시리안이 준 산리를 올라탔다. 유시리안은 이제 마르스가 있으니까 그 녀석은 필요 없다면서 가지라고 했고 민은 흔쾌히 받아먹었다. 갑자기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산리는 유난히 얌전히 굴었다. 본래 산리는 생긴 대로 꽤 사나운 짐승이었는데 말이다. 비록 야생의 존재는 아니라 성질이 누그러졌다 해도 저렇게 얌전하게 구는 것은 보기 드물었다. 민은 만족스러운 듯 부드러운 털을 쓸어주며 유시리안에게 물었다. “이름은 뭡니까?” “난 이름 같은 거 안 지어.” 이름은 예언이다. 유시리안은 그것이 설령 말이라도, 타인의 운명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럼 이제 제거니까 제가 지어도 되겠지요?” “마음대로.” 민은 가볍게 목례를 해보이고는 능숙하게 산리를 몰고 가버렸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아클렌은 감탄하며 말했다. “아주 얌전한 산리로군. 게다가 잘 다루는데. 산리는 흔들림이 많아 균형 잡기가 힘든데 말이야.” “얌전하긴 뭐가 얌전해. 눈치가 빠른 것뿐이야.” 툭 쏘아붙인 유시리안은 이어서 물었다. “안 들어가?” 사람 무안 주는 게 유시리안의 더럽게 많은 장기 중 특출한 하나라는 것을 익히 아는 아클렌은 발끈하지 않고 하인들이 공손히 열은 문 안에 발을 디뎠다. 결국 그도 유시리안이라는 싸가지를 겪을 만큼 겪은 것이다. 일전의 욤과의 전쟁에서 극에 달했던 싸가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한 축이다. 그는 타마샤처럼 그 독설 속에서 허덕이지 않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여유를 보였다. “눈치가 빠르다?” “오셨습니까?” 하인이 무릎을 꿇고 대기하고 있는 그 뒤로 비딱하게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클렌과 생김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어려보이는 남자였다. “근신이 풀리자마자 바쁘십니다.” “인사를 드리고 왔을 뿐이다. 실로크.” 비아냥거리는 어조에도 아클렌은 별 반응 없이 냉랭히 답했다. “황태자 전하께 말이죠?” “우연히 만나 뵙기는 했지만, 페이야 공께 갔었다.” “그러시겠죠.”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짓다가 뒤늦게 아클렌 뒤로 따라 들어오는 손들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그러더니 입을 다물며 몸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가족제인 만큼 가족간의 화목이 중시되는 락아타에서, 가족 싸움을 타인에게 보인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아클렌은 가볍게 한숨을 짓다가 앞의 하인에게 명했다. “귀한 손님들이다. 별채로 안내해라.” 손님은 본디 본채가 아닌 별채에 묵는다. 물론 별채라도 다 같은 별채는 아니다. 주인이 정해주는 등급에 의해 안내되는 곳이 달라진다. ‘귀한’이나 ‘반가운’이나 ‘초청된’ 등의 단어가 들어가면 고급이다. “곧 민이라는 손님이 오실 거다. 같은 별채로 안내해라.” 명을 내리는 아클렌을 계단 쪽에서 누가 부르며 내려왔다. “아클렌!” “아버님.” 엄하게 생긴 초로의 남자, 셀반은 계단 밑으로 내려오며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손들을 발견하고 멈췄다. 정확히는 싸늘한 보라색 눈동자의 남자를 보고서였다. “유시리안. 언제 왔나?” “얼마 전에. 아직 팔팔한데, 영감.” 슬쩍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유시리안을 보며 셀반은 이를 빠드득 갈다가 아클렌을 보았다. “저 자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제 손님입니다.” “네가 미친 게로구나!” 아클렌은 차마 답하지 못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유시리안은 적에게는 악귀라 불리고 아군에게는 싸가지라 불리는 남자였다. 그 누가 유시리안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겠냐 만은 고지식하고 깐깐한 아버지와는 특히나 최악이었다. 때문에 아버지가 발작하기 전에 이 말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 “시오니타님의 의뢰를 받고 온 겁니다.” “전하……의?” 떫다는 얼굴로 유시리안을 노려보던 셀반은 옆의 락샤사와 무하를 보고 간신히 분을 억눌렀다. 유시리안이라면 몰라도 손들 앞에서 큰소리를 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구면인 락샤사만 있었다면 이도저도 없이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쳤겠지만 초면인 무하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저 놈은 또 뭔가 하는 눈으로 무하를 살피는 아버지의 기색을 알아차린 아클렌은 서둘러 소개했다. “이쪽은 무하 씨. 유시리안 씨의 일행이자 용병입니다.” “……일행?” 저 싸가지와? 그놈이 그놈인 걸까? 의심스런 눈으로 다시 탐색하는 셀반에게 무하가 먼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하입니다. 일정 잡힐 때까지만 신세 지겠습니다.” 가만히 인사말을 듣던 셀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좀 된 놈인가.” “예?” “아닐세. 내키는 대로 머물다 가게나. 아클렌은 애비가 할 말이 있으니 따라와라.” 마지막으로 유시리안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다가 획 돌아 올라가 버렸다. 아클렌은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쓴 미소를 지었다. “먼저 실례해야 될 것 같소. 별채는 하인이 안내 할 거요. 저녁은 별채에 따로 내어드리리다.” “거듭 호의 감사드립니다.” 무하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고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거처를 안내 받은 유시리안은 쪽마루처럼 정원 쪽으로 나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한가로운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뒷머리는 대충 묶을 수 있지만 앞머리는 그렇지 못해 귀찮은 감이 있었다. 길러서 없앨 수는 있으나 그럼 이카미렌과 너무 똑같아진다. “펠도 전에는 머리 길었는데. 저쪽에 있었을 때도 길었다며?” “응. 근데 자르고 나니까 이쪽이 훨씬 편해. 가볍고.” “길러보면 어때? 내가 묶어보고 싶어.” 무하는 웃으며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다. 유시리안이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와 정원을 내다보았다. 락샤사는 유시리안의 옆에 편하게 앉았다. 그의 검고 푸른 머리카락은 삐쭉삐쭉 뻗어있었지만 지저분해 보이지 않았다. 만져보면 부드럽지 않을까, 한번 보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기도하는 땅의 어디에 편지가 있는지 알고 가야하는 거 아냐?” “그 녀석들 숨기고 있는 게 있어.” 유시리안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서렸다. 아무리 숨겨 봤자 락샤사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집히는 곳은 있었지만 확인 차원에서 락샤사에게 물었다. “그 얌체 녀석이지? 정보원이라는 작자.” 락샤사는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둘의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벽에 삐딱하니 기대 있던 무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유시리안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생각인 걸까?” “확실한 건 우리를 기도하는 땅으로 불러드리려는 것.”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꾸며가면서? 애당초 처음에 협박을 할 때, 기도하는 땅으로 오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 “일석이조라는 거지. 우리를 그곳으로 불러드리는 김에 시오니타 녀석이 꾸미는 일도 돕고.” 답은 명쾌하게 내렸지만 내용이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무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기도하는 땅에만 가면 편지는 훼오트라 아나가 준다는 건가?”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 시오니타 녀석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렇지 않고서야 신전의 내부 구조도나 문서가 있을 법한 곳이나 비밀 공간 따위의 정보는 일절 없이 그냥 가달라는 말만 할리 없잖아.”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편지를 그 자가 빼돌려 준다는 건데. 스스로가 위험해지지 않을까?” “알 바 아니지.” “상관없다.” 별나게도 락샤사가 덧붙여 답했다. 둘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무심히 앞만을 보며 재차 말했다. “어차피 5년 밖에 안 남았으니까.” “아아. 하긴.” 납득하는 유시리안에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별거 아니라고 서두를 달고 설명해주었다. “아까도 들었지? 이번 일은 신전 쪽의 잘못이라고. 하지만 신관 모두가 이 일의 진상을 알고 있지는 않아. 위에 녀석들이나 알고 쉬쉬하고 있겠지. 모든 신관들이 똑같이 생각하는 건 아닐 뿐더러, 밑으로 내려갈수록 때가 덜 묻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그 얌체가 나서서 진상을 알린다 해도 입장이 곤란해지는 건 없다 이거야. 기껏해야 같은 고위층 쪽에서야 배척당하는 정도겠지만 그 녀석의 수명은 이제 5년밖에 안 남았거든.” 또 굳이 이 일이 없더라도 이미 신전 내에서 배척당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훼오트라 아나는 순수한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맹렬한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능력을 타고난 자의 숙명이다. “하지만…….” 무릎을 세워 팔을 편히 걸친 무하는 낮게 말했다. “5년은 짧지 않아.” 유시리안과 락샤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다시 정원 쪽으로 돌렸다. 5년이란 시간을 가볍게 여길 정도로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리고……. 민이 일행이라며 데리고 온 이는 남자 한명이었다. 보통 키에 왜소한 체격이지만 사나운 기운이 은은히 뿜어져 나와 결코 약해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간편한 여행복에 장검과 단검을 각기 하나씩 허리에 매고 있다. 귀족가의 호사스러운 별채를 조소담긴 얼굴로 훑어보고 있던 그를 민은 이렇게 소개했다. “이쪽은 내 일행, 제그. 내 지기야.” 지기란 소리에 무하는 제그를 새삼 살펴보며 인사했다. 무하는 언제나 남몰래 민만을 만나고 갔다. 오죽하면 민의 양 손인 로딘이나 카산마저도 일전에 우연히 본게 다겠는가. 이야기야 듣곤 했지만 안면은 없었다. 민이나 무하나 그걸 원했다. 용병 무하와 레타 민과의 대치점은 물론 용병 무하와 카르민 민과의 대치점도 없어야 했다. 그들이 대외적으로 보여야 할 가식과 지켜야 할 비밀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하란 남자가 민의 최초의 지기라는 것을 오는 도중에 들었던 제그 역시 관심 있게 그를 보고 있었다. 늘씬하게 빠진 몸은 제법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기운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두건이 눈가를 가려 얼굴 전체는 볼 수 없었지만 매끄러운 턱선 이나 날카로운 콧날 따위를 보건데 생김도 제법 생겼을 법했다. 극도로 단련된 청각에 희미하게 잡히는 멜로디는 민이 말했던 그 공명음일 것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좋은 느낌의 멜로디였다. 민은 순서대로 상대를 소개했다. “함께 일할 유시리안 씨, 락샤사 씨.” 남성적인 매력 속에서 아름다운 유시리안과 무성(無性)적인 매력 속에서 멋진 락샤사는 서로 대조적인 미남들이었다. 하나같이 개성 넘치는 일행들을 보며 제그는 내심 웃었다. 유유상종이란 말은 이럴 때 쓰일 것이다. 대충 인사가 오가고 무하는 민에게 훼오트라 아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시체를 태운 날에 당한 협박과, 그로 인해 오게 된 락아타 수도 화이라, 여기서 만나게 된 시오니타와 그의 의뢰. 가면 속으로 보이는 깊은 남색 눈동자가 생각에 잠긴 듯 멍해져갔다. 여전히 쪽마루처럼 나 있는 바닥에 앉아 있는 유시리안과 락샤사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민이 생각에 잠기자 정원 쪽을 돌아보았다. 제그는 의자에 앉아 편하게 한쪽 발을 올려 팔을 걸친 상태로 민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기도하는 땅이 뭐로 유명한지 알아?” “응? 거대한 호수에 끝을 모르는 깊이, 그리고 창세신의 신전이 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질문을 바꿔서, 기도하는 땅이 왜 기도하는 땅이라 불리는 지 알아?” “……창세신의 신전이 있어서 그런가?” 유시리안이 묘한 눈으로 민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레이아사 아나가 있기 때문이야.” “레이아사 아나?” “신성어로 '기도하는 자' 라는 뜻이지.” 락샤사의 무심한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가장 오래된 검이자 제 1기 마도의 생존자였다. 그리고 진실을 아는 자였다. ‘기도하는 자’. 그는 평화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다. 강제된 희생을 밟고 그들은 환희에 떨었다. 그리고……제 1기 마도는 멸망당했다. “창세신의 신전 중심에 경건히 모셔져 있지. 밝고 어두운, 희고 검은 빛에 감싸여 죽지도 늙지도 않고 두 손을 모아 기도만 하는 자. 제 1기 마도의 생존자이면서 줄곧 존재해 온 자. 훼오트라 아나는 창세신의 화신, 레이아사 아나는 창세신의 전달자라 불려.” 뜬금없는 민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창세신의 신전에서는 ‘레이아사의 날’이라고 해서, 3년에 단 한번 한 달 동안만 레이아사 아나를 만인에게 공개해. 사람들은 죽기 전에 한번은 가서 경배를 드리고 오지.” 그리고는 다시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기도하는 땅의 기후가 어떤지 알아?” “응?” “기도하는 땅은 늘 조하기(早 夏期)야. 약간 더운 편에 속하지. 그런데도 3년의 단 한번, 한 달간만 물이 얼어. 본래 끝을 모르는 깊이의 기도하는 땅은 순례자의 걸음이라는 배로밖에 출입할 수 없어. 하지만 이때만은 특별하지. 걸어서 신전으로 들어갈 수 있거든.” “바로 그때가 레이아사 아나를 공개하는 때인 건가?” “아아.” 민은 다시 이어 말했다. “근데 그 어는 시기는 10년을 턴으로 바뀌거든. 그 바뀌는 시기를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바로 훼오트라 아나야.” “헤에.” “올해가 바로 10년의 턴을 지나 새로운 기간에 돌입되는 해이고, 당연히 현 훼오트라 아나는 새로운 시기를 읽어서 알렸어. 그 기간이 바로…….” “2주일 후.” 유시리안이 이어서 말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꽤나 기간이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여기서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여, 담수 지역에서 내려 다시 도보로 기도하는 땅으로 가면 얼추 보름이 걸린다. 민은 고개를 끄떡였다. “아까 기도하는 땅으로 가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기간이 맞아서 레이아사 아나를 보게 되겠다고 생각했었거든. 우연인가 했는데 훼오트라 아나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상한데. 2년간이나 가만히 있었던 훼오트라 아나가 이제야 나섰다는 것도 이상하고.” “……지도.” “응?” 모두의 시선의 락샤사에게 몰렸다. 언제나 무심한 락샤사의 얼굴에 조각만한 흔들림이 있었다. 이들 중 눈썰미 좋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모두 그것을 발견했지만 원인을 알 수는 없었다. 의아해 하는 이들을 대표로 유시리안이 물었다. “왜 그래?” “말하지 않겠다.” 먼저 입을 여는 경우는 없어도 물으면 꼬박꼬박 답을 하던 락샤사였기에 유시리안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잠시 보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마음대로 해.” 포기하지 않고 의문을 나타내는 일행에게도 한마디 했다. “포기해. 하지 않겠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안 해, 샤는.” 분명 맞는 말이긴 했지만 굳이 틀린 점을 들자면, 마스터인 유시리안이 강요하면 락샤사는 그것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나찰’일 때에 비해 그 강제력이 약해져 있지만 분명 존재하기는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시리안은 굳이 싫다는 락샤사를 강제로 어떻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유시리안은 자신이 마음에 든 존재에 한해서만큼은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남자였다. “그럼 난 좀 씻고 올게.” 자다 끌려온 제그는 새삼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아아, 나도 씻어야지.” 민이 방을 나서는 제그의 뒤를 따랐다. 훼오트라 아나가 노리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현실적인 문제 먼저 해결하기 위해, 테이블에 둥글게 앉아 지도를 꺼내 일정을 짜는 그들에게 아클렌이 찾아왔다. 근 신이 풀리자마자 바깥출입을 한 것에 대해 여태 아버지께 혼나고 온 중이라 얼굴빛은 좋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쁜데 실례하오. 실은 아버지께서 저녁을 함께 하고 싶다 하셔서 말이오. 싫다면 알아서 거절 할 테니 부담은 갖지 말고 결정해주시오.” “그 영감이 갑자기 왜?” 지도에 위에 손을 집고 있던 유시리안이 신기하단 얼굴로 물었다. 아클렌의 아버지는 유시리안은 얼굴만 보면 으르렁대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아클렌이 딱딱하게 답했다. “뭣 같은 성질머리와는 별도로 네 녀석 실력은 아버지도 인정하니, 전하께 동급의 취급을 받은 다른 인재들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신 거지.” 그리고는 다시 예의를 갖춰 민에게 물었다. 무하야 유시리안 일행이니 유시리안이 싫다면 안 갈 것이다. 유시리안이 굳이 자신을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과 식사를 함께 할 리 없지 않은가. 아버지도 민 쪽에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제국의 황태자와 재상의 앞에서도 당당하게 굴던 민에 대해서 말이다. 예의상, 손님인 유시리안에게도 청했지만 셀반도 아클렌도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시겠소?” 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제그를 보았다. “어쩔래?” “소화 안돼.” 삐딱하게 거절하는 제그였다. “하지만 일행이니까 같이 움직여야지. 난 얼굴을 봐두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난 볼 일 없어. 혼자 갔다 와.” 그때 유시리안이 턱을 괴던 손을 빼며 말했다. “같이 가지. 영감의 꽥꽥거리는 소리도 간만이고. 그 영감 술 보는 안목 하나는 좋아.” 심보 고약한 게 훤히 보이는 소리였다. 술이라는 말에 흔들리는 제그를 민이 살살 꾀였다. “욤의 술이 더 알아주기는 하지만 락아타의 특산주도 무시 못해. 락아타의 기후 속에서 먹어야만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술도 많고.” 제그는 조용히 한숨쉬는 것으로 답했다. 일단 정해진 것 같자, 아클렌은 하인을 불렀다. “손님들의 의복을.” “의복이라…….” 뚱한 어조로 유시리안과 제그가 동시에 말했다가 서로를 흘낏 보았다. 그 옆에서 무하와 민이 쿡쿡 웃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인 것 같아. 유시리안이 다른 옷 입는 거.” 의자에 벗은 옷을 걸쳐두고 있던 유시리안은 무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던가? 하긴 더렵혀질 일이 없으니 갈아입을 일도 없었지. 무엇보다 이쪽이 훨씬 편하고.” 품이 넉넉한 락아타의 옷을 입은 유시리안은 어색한지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 있었다. 무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흡사 베처럼 약간 뻣뻣한 재질의 상의는 헐렁하고 큼지막하여 허리쯤에서 묶어 고정했다. 마찬가지 재질이지만 안쪽으로 부드러운 천이 겹 대어 있는 바지는 상의에 비해 그 품이 좁은 편이었다. 그 위로 무릎부근까지 상의의 여분이 내려가 덮었다. 이것이 락아타에서의 평상복이다. 시중을 들던 하녀가 일행이 벗은 옷을 개어 바구니에 담고 유시리안의 옷가지에 손을 댔다. 다른 것들처럼 개어 세탁하기 위해 가져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몸을 움직여 보느라 그것을 미처 못 본 유시리안은 하녀의 비명소리가 들려서야 뒤를 돌아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하녀는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하고 떨고 있었다. 유시리안이 늘 양팔에 걸쳐 가지고 다니던 붉은 천은 허공에서 혼자 율동하며 하녀의 피를 먹어댔다. 주인의 제지가 없을 때 먹을 게 다가와 모처럼 허기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늘 배불리 먹여주었던 주인이 근래 들어 만족하지 못하게 해서 불만이었던 터다. 내버려 두면 하녀가 죽을 때까지 피를 빨아댈 녀석임을 알기에 유시리안은 얼른 잡아챘다. 평소라면 알아서 사냥하는 녀석을 기특하다고 내버려 뒀겠지만 지금은 옆에 무하가 있었다. 역시나 무하는 놀란 얼굴로 붉은 천과 하녀의 손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비단 무하뿐만이 아니었다. 유시리안은 뭔가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업자득이야.” “에?” “이 녀석, 나 의외의 사람이 소유를 목적으로 손대거나 나에게 살기를 품었다거나 하면 난동을 부리거든.” 도둑 아니면 암살자란 뜻이었다. 난데없이 상처 입고 피까지 뺏겨 정신없던 하녀는 유시리안의 말에 반사적으로 엎드려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아, 아닙니다. 저, 전 세탁을 하려고 가져가려 한 것뿐 저, 절대로 도둑질 같은 건.” “됐어. 말이야 누가 못해.” 멀쩡한 사람 나쁜 놈으로 몰아놓고 참으로 뻔뻔했다. “저, 전 정말 결백합니다. 정말입니다.” 부들부들 떨며 울먹이는 하녀를 내려보다가 민이 눈짓하자 다른 하녀가 얼른 다가와 부축해 나갔다. 타안 가의 하녀이니 타안 가가 처분할 일이다. 그들이 나가자 다른 하녀들이 들어와 옷을 챙겨나갔다. 의자에 걸쳐져 있는 유시리안의 옷은 누구도 손댈 생각을 못했다. 도둑이나 암살자가 아니더라도 두려운 건 두려운 것이었다. 하녀가 나가자 유시리안은 들고 있던 붉은 천을 의자에 대충 던져 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얌전히 있어.” 그리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짧게 덧붙였다. “곧 배불리 먹여 줄 테니.”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있지 않는 한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지만 붉은 천은 용케 알아들은 듯 보통 천처럼 얌전히 축 늘어졌다. 허리끈을 조이던 민이 말했다. “보통 천이 아니었군요.” “온도도 조절해주고 적혈뿐이지만 피도 알아서 처리해주고 마법은 물론 물리적 방어도 되며 상황에 따라선 전력으로 쓸 수도 있는 녀석이지.” “생명이 있는 겁니까?” 유시리안은 답 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오래전에 손에 넣은 이 녀석은 서로에게 있어 좋은 파트너가 되어주고 있었다. 본래 식당은 주인이 먼저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 예의. 그 것에 따라 먼저 앉아 있던 셀반과 실로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인이 연 문 저편으로 달갑지 않은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각기 본 사람은 달랐지만. 본래 대가족제인 락아타에서는 다같이 식사를 하기 때문에 다소 산만한 경향이 있었다. 그만큼 화목하다는 뜻도 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손님이 왔을 경우에는 다른 가족들은 다른 별채에서 따로 식사를 한다. 서로 용무가 있는 자들만이 남아 은밀히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 조용한 식당 안에 아클렌이 먼저 들어와 일행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신도 앉았다. 윗사람인 셀반은 그대로 앉아 있고 실로크는 찌푸린 얼굴 그대로 자리에 일어났다. 그러나 형이 앉자마자 바로 앉아버림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만 지켰다. 셀반은 노골적으로 유시리안을 보며 으르렁 거렸다. “왜 왔냐?” “나이 지극한 노친네가 간절히 청해서 응해준 거야.” “노친네라니!”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소리치는 셀반을 놀랜 눈으로 보던 유시리안이 물었다. “그럼 그 나이에 아저씨 소리 듣고 싶어?” “…….” 원한의 눈초리가 자신에게 향해진 것을 본 아클렌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애당초 별채에 식사를 보내겠다는 걸 데리고 오라고 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던가. 치도곤을 맞고 있는 아클렌을 보며 민은 부드럽게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민입니다. 이쪽은 제 일행 제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그가 이어서 짧게 인사하자 셀반은 헛기침과 함께 주의를 돌렸다. “타안 셀반 장 자르카일세. 그래, 전하의 의뢰로 왔다고?” “아니오. 페이야 공의 의뢰입니다.” 페이야가 하는 일은 시오니타가 하는 일. 뻔히 알고 있는 진실이지만 명목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셀반은 진중한 민이 마음에 들었다.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청년이로고. 정신적으로는 매우 고달픈 일정이 될 테니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걸세.” “하하. 명심하겠습니다.” 쾌활하게 웃는 와중에 음식이 들어왔다. “욤의 사람에게는 락아타의 요리가 잘 안 맞는 것 같더군. 요리사에게 욤 식으로 몇 가지 준비하라고 했네.” “배려 감사드립니다.” “아, 내가 영감 술 보는 안목이 높다고 미리 말해뒀어.” 알아서 잘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생글 웃는 유시리안을 보며 쓰디쓴 인내를 감내하는 셀반이었다. 그리고는 일그러진 웃음과 함께 딱딱하게 끊어 답했다. “네 놈 줄 건 없어.” “타국 손님 대접이 소홀한 것은 락아타의 수치지 않을까?” “네 놈을 지극히 대접한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다!” 유시리안은 얄미운 미소를 살살 담아내며 목소리를 은밀히 낮췄다. “영감. 솔직히 말해봐. 내 입맛에 맞출 술이 없는 거지? 또 감봉 됐어?” “……내가 누구한테 돈을 받는다고 감봉이냐!” 영지에서 나오는 돈으로 재정을 운영하는데 누구한테 돈을 받아 감봉이겠는가.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자, 셀반은 유시리안 쪽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민에게 친근하게 물었다. “제그 군은 같은 길드원긴 건가?” “예. 그는 유능한 동료입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거론되거나 말거나 제그는 식사만 묵묵히 했다. 그는 마법 길드에 들어가지 못한 마법사였기에 그의 신분은 변함없이 제피모였다. 레타는 인정받지 못한 음지의 길드. 제그 하 레타라는 이름은 그늘에서나 통하는 이름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했다. 애당초 신분 따위가 두려웠다면 카르민이었던 ‘페르노크’를 괴롭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가.” 셀반은 미심적은 얼굴로 제그를 살펴보다가 이내 시선을 접었다. 그는 함부로 사람을 대하지 않았고 경솔히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살아남아온 방법이었다. 슬쩍 끼어들어 다시 속을 긁으려는 유시리안의 손을 무하가 붙잡더니 고개를 저었다. 듣기로는 친근하게 오가는 농담 같았지만 셀반의 안색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무하는 다정하고 친절한 유시리안이 공연한 오해로 미움 받는 것이 싫었다. 그런 무하의 속마음을 셀반이 알았다면 새파랗게 질려서 무하를 미친놈 취급했을 테지만 말이다 . 타인의 마음을 접할 수 있는 락샤사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셀반의 심정을 뻔히 알기 때문에 무하의 저지가 절묘했다고 내심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 그들을 앞에 두고 실로크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찡그린 채 말없이 음식만 먹어댔다. 솔직한 심정으로야 출신여분도 알 수 없는 녀석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아클렌에 대한 반발 때문에 그것을 억눌렀다. 아무리 잘나봐야 제피모는 제피모, 라는 지극히 귀족적인 사고의 소유자인 그에게는 아버지나 형이 이해되지 않았다. 또 유시리안이나 락샤사의 잘난 낯짝도 마음에 안 들었고 무하의 두건도 마음에 안 들었고 제그의 오만방자함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 무엇보다도 사탕발림만 해대는 민이란 녀석의 수상쩍은 가면이 마음에 안 들었다. “가면은 왜 쓰는 거지?” 난데없이 질문을 던진 실로크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민이 몸을 담고 있는 길드는 음지의 길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가면을 묵인하고 있었던 셀반이나 아클렌은 실로크를 힐난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 속에서 민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연하지 않냐는 말투에 무안함을 느낄 법도 하련만 실로크는 집요했다. “왜 얼굴을 가리려 하는 거지?” “실로크!” 결국 아클렌이 끼어들었지만 민은 괜찮다는 눈길을 보내며 느긋하게 답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길드가 알려져서는 안 되는 길드이기 때문이죠.” “그럼 왜 저 제그라는 자는 얼굴을 안 가리지?” “실로크!” 셀반까지 나서서 제지하고서야 실로크는 불만 어린 얼굴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이미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는 집요한 눈으로 민을 바라보았다. 민은 제그를 살폈다. 제그는 주위가 어찌 돌아가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곁들여 나온 술을 음미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번 일만 끝나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자들이다. 민은 쿡 웃으며 짧게 답했다. “제가 겁쟁이거든요.” 실로크가 꿈틀하며 재차 질문을 하려는 순간 문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대충 듣고 보니 만나봐야 한다, 손님이 계시니 다음에 와라 등등의 대화였다. 손님이 있다는 말에도 억지를 부리는 목소리가 익숙해 셀반이 하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위저드 가나란께서 만남을 청…….” “이보게! 급한 일일세!” 혹여나 거절할까 하인의 말까지 잘라 먹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셀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손님 앞에서 이게 웬 추태인가. “가나란…….” 시종 관심 없는 얼굴이던 제그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았다. 마법사라면 가나란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대륙의 단 둘뿐인 8써클 마스터 마법사가 아니던가. 용병을 하면서 몇 번 들었던 8써클 마법사의 이름이 거론되자 무하도 관심 있는 얼굴로 문 쪽을 보았다. 당시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냥 먼 나라 이야기 같았는데 실재 그 인물이 저 문 건너에 있다니 신기했다. 그나마 저 망할 친구 녀석의 이름이 유명해서 그럭저럭 무마되는 분위기라 조심히 물었다.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제그와 무하의 번뜩이는 눈동자를 번갈아 보고 웃던 민이 답하자 유시리안 쪽은 보지도 않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모셔라.”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쾅 열리며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 중 한명은 눈에 익었다. 딱따구리라 불렸던 비운의 마법사 델니에였다. 그들 너머로 하인이 질린 얼굴로 문을 조심스럽게 닫는 게 보였다. 델니에와 함께 온 쉰이 훌쩍 넘어 보이는 초로의 노인이 흥분해서 대뜸 소리쳤다. “누구냐!?” “이 친구가 갑자기 들어와서 무슨 헛소리야!” 똑같이 버럭 소리치는 셀반은 안중에도 없고 뒤쫓아 온 남자를 돌아보며 다시 소리쳤다. “누구냐니까?” 델니에는 가나란의 서슬 퍼런 기세에 거의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들어 답했다. “저기 두건 쓴 남자요!”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두건이란 말에 무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무렵, 가나란이 순식간에 날라 와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텔레포트 못지 않은 속도였다. “너냐?” “에?” 얼떨떨해 하는 무하의 눈앞에 뭔가를 바싹 내밀며 다시 소리쳤다. “이거 말이다!” 가나란이 물건을 너무 가까이 갖다 대는 바람에 제대로 안보였다. 조금 고개를 뒤로 빼, 확인해보니 델니에에게 주었던 붉은 반지였다. 그걸 델니에에게 준 사람이냐고 묻는 것 같아 고개를 끄떡이며 답했다. “예.” 그 겨를에 은줄에 매달아 귀에 걸어둔 세 개의 반지가 가볍게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가나란은 그 세 개의 반지를 알아보고 눈을 번뜩이며 무하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유시리안이 끼어들어 가나란의 손을 탁 쳐내고 다른 손으로 무하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나란을 불쾌한 낯으로 노려보았다. “뭐야, 영감?” 극도의 흥분으로 미처 주위를 살피지 못한 가나란은 유시리안을 보고 움찔했다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가 판단하기로 위험인물은 유시리안 정도였다. 확실히 대륙의 단 둘밖에 없는 8써클 마스터 마법사다운 두뇌회전이었다. 델니에와 파호가 둘이서 끙끙대며 도출한 결과를 순식간에 해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는 경계 어린 눈으로 유시리안을 노려보다가 무하에게 물었다. 그래도 조금은 침착해진 목소리였다. “내 제자 녀석이 이걸 갖고 왔다. 이게 뭔지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예. 부여 아이템이라고 델니에 씨가 말해주었습니다.” “일회용 부여 아이템이라니! 전례에 없는 일이야! 자네 부여 아이템이 뭔지 아나? 부여 아이템이란 말이야…….” “스승님! 제가 설명했어요. 했다고요.” 말이 늘어질 것 같은 기색이 팍팍 풍겨오자 유시리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것을 눈치 챈 델니에가 얼른 가나란에게 달라붙어 간신히 말리자 가나란은 알았다며 왜 흥분이냐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정신없는 마이페이스인 이 두 마법사를 번갈아 보던 무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사제간이 저리도 똑같을까. 가나란은 불똥이 튈 것만 같은 눈을 바싹 붙여오며 재차 물었다. “어디서 났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대충이라도 기억해봐. 이건 역사에 기록될 대 사건이야!” “죄송합…….” “기억해봐!” 무하가 거절의 말을 하려는 기색이자 제대로 듣지도 않고 딱 잘라냈다. 늙은 생강이 맵다던가. 델니에보다도 더 수준 높은 집착이 느껴졌다. “난 견습 마법사 때부터 부여 마법을 연구해왔다! 한번은 겁 없이 만들었다가 삼년간이나 마법을 쓰지 못한 적도 있을 정도지! 이런 미친 짓을 한 천재를 꼭 알아야겠다!” 저편에 앉아 있던 아클렌이 문득 아, 하고 탄성을 냈다. 욤의 황성에서의 무례를 사죄할 방법에만 몰두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무하란 남자는 그때 전쟁터에서 공격마법을 썼었다. 그때는 참혹한 결과에만 정신을 뺏겨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지만 후에 마법사들이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듣고 알았다. 8써클 공격 마법, 헬파이어. 그것이 단순히 화상으로 끝난 것은 상대가 그 정도로 뛰어난 컨트롤을 가졌다는 뜻임을 마법사들은 덧붙여 설명했다. 가나란은 갑자기 탄성을 내는 아클렌을 수상쩍다는 눈으로 힐끔 보다가 일단 급한 불부터 끌 셈으로 무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얼굴로 반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여기에 부여된 마법이 뭔지 아나?” “모릅니다.” 이것저것 많이 해놓은 데다가 집히는 데로 줬으니 알 턱이 없었다. 가나란은 이런 귀한 것을 너무도 경시여기는 무하가 수상하기만 했다. 아무리 무식하다 해도 부여 아이템이 얼마나 귀한건지는 삼척동자라도 안다. 물론 일회용 밖에 안 되는 부여 아이템은 스크롤 이상의 가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저 반응은 너무 미지근하다. 게다가 이것에 부여된 마법은 7써클의 보조 마법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마법이 아니던가. 거기에다 전해진 주문의 운용공식이 불안정해서 성공률도 지극히 낮은 마법이기도 했다. “타임이라고 일정 공간 내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마법이다.” “아아.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그런 마법도 있었다. ‘페르노크’의 서재에서 발견한 것이 아닌, 의뢰 중에 클랜이 발견해서 남몰래 빼돌린 책에서 알아낸 주문인데 재미삼아 부여해놨었다. 더더욱 미심쩍다는 얼굴을 하는 가나란을 곤혹스럽게 마주보는 무하를 유시리안이 도와주었다. “좋은 거 얻었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어디서 행패야?” “행패가 아니라…….” “게다가 그 불순한 눈은 뭐지?” “불순이라니! 난 단지…….” “성질머리가 그 모양이니 여태 혼자지.” “…….” 뭐라고 욕을 해야 속이 풀릴까 고민하는 가나란에게 델니에가 조심스럽게 원점을 되살려 주었다. “스승님. 일단 그 반지부터 해결하시지요.” “아아.” 가나란은 쉽게 평정을 찾지는 못하겠는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유시리안을 노려보다가 애써 시선을 무하에게 돌렸다. 다시 곤란해진 무하를 보호하듯 더 바싹 끌어안으며 유시리안은 싸늘한 눈초리로 두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특히 입방정을 놀린 주범인 델니에를 보는 눈은 그 싸늘한 강도가 더했다. 델니에는 애써 그 시선을 피하며 한동안 어디에 박혀 있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옆에서 그 꼴들을 보던 민이 쿡쿡 웃으며 끼어들었다. “전 그걸 누가 만들었는지 압니다.” “뭐!?” 무하가 당황하며 돌아보자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저 짓궂은 지기가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걸까? “그걸 만들 때 옆에 있기도 했었는걸요.” 확실히 반지의 대부분은 요크노민 처소에 놀러 갔을 때 만들었었다. 그때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몇 개를 가져가기도 했다. 가나란이 가지고 있는 저 타임도 그 몇 개 중 하나였다. 솔깃한 민의 말에 가나란은 오히려 냉정해졌다. 차라리 무하처럼 미적거리는 편이 더 신뢰가 갔다. 단순히 믿기에는 그 말은 너무 달콤했다. 가나란은 현실이 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작 부리지 마라. 아이템을 만드는 것은 극비에 속하는 것. 함부로 타인에게 보여줄 리 없어!” “이걸 보면 믿을 수 있겠지요.” 매섭게 끊는 가나란의 말에도 민은 여유였다. 넉넉한 품의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끄집어냈다. 가나란의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반지였다. 알려지지 않은 부여 아이템을 혼자 대량으로 가지고 있었던 점과 출처를 묻었을 때의 반응을 보아 무하가 만든 게 아닐까 의심하던 가나란은 제 3자가 꺼낸 반지에 입을 쩍 벌렸다. 민은 획 던졌다가 탁 잡아채며 씨익 웃었다. 승기를 잡은 자의 여유였다. “밖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음지쪽으로는 꽤 유행이랍니다, 이 반지.”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가나란은 단번에 무하에 대한 의심을 지우고 이번에는 민을 향해 눈을 번뜩였다. “누구냐!” “음지쪽 일인데 쉽게 발설 할 수 있나요.” 여전히 승자의 미소를 담은 눈동자는 분명 협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곤란해 하는 지기를 구할 겸 나섰지만 상대는 대륙의 단 둘뿐인 8써클 마스터의 마법사.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 분명하니 훗날을 위해 빚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솔직히 그보다는 지기를 골려줄 속셈이 더 컸지만 말이다. “뭘 원하나?”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민은 쾌활하게 가나란의 어깨를 잡았다. “방금 한 말 절대 잊지 마십시오.” “위저드 가나란의 이름에 맹세코 절대로!” 구렁이 둘이 만나니 죽이 짝짝 맞았다. 뒤에서 델니에가 저러다 무슨 곤장을 맞으려고, 중얼거렸지만 가나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말해보게. 누군가?” 건네는 말도 꽤나 누그러졌다. 다른 이들도 궁금했던 터라 숨소리를 죽이고 집중했다. 그 속에서 무하는 곤혹스럽게 이마를 부여잡았고 유시리안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키득거렸다. 락샤사는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서 무심히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민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페르노크라고 아십니까?” “호오.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애송이 말인가?” 가나란은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했다가 이내 가늘게 떴다. “이름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카르민이라 특혜를 받은 걸 꺼라 생각했는데…….” “페르노크…….” 민의 옆에서 제그가 낮게 그 이름을 되새겼다. 한때 증오 속에서 되씹었던 이름이었다. 가나란의 말대로 그가 카르민이라 특혜를 받은 것은 있었다. 제그역시 속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처음부터 마나를 느꼈던 사람이었으니까. 페르노크라……. 그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역겨운 녹안이 생각나 술을 벌컥 들이켰다. 설마 민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을 줄이야.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에게 이므르에서의 인연은 과거일 뿐이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 자기연민에 젖어 있는 낯짝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한 상관할 것 없다. 만약 그 비굴한 눈동자가 또다시 나타나면 이번에는 몇 대 패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패는 것으로 끝내기에는 제그는 피 맛을 너무 잘 알았다. 그는 지금도 싫었다.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 스스로를 동정하는 녀석 따위는. ‘그러고 보면 소울러도 녀석의 눈동자가 싫다고 했다.’ 못 들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소울러는 스치듯 말했었다. 자기는 그 녀석 눈이 싫을 뿐이라고. 갖은 이유를 다 끌어내 헐뜯어대던 학우들을 비웃듯이 짧게 말했었다. 그때 제그는 못 들은 척 했지만 분명 들었다. 그리고 소울러는 변했다. 평소와 같이 ‘페르노크’를 괴롭히는 학우들을 말렸고 알 듯 모를 듯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어째서? ‘이미 죽어버린 녀석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페르노크’와 벌였던 싸움이 생각났다. 어쩌면……그는 변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제는 끝난 일이다. 카르민인 그와 음지의 사람인 제그가 다시 만날 일 따윈 없으니까. 제그가 상념에서 빠져나왔을 무렵, 가나란도 생각을 끝냈다. “페르노크라……. ‘희대의 천재’란 이름값을 하는 게로군.” 고개를 끄떡이며 나름대로 납득하는 그를 사이에 두고 무하와 민은 무언의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체로 힐난 빛인 무하의 눈빛을 민이 뻔뻔하게 웃어넘기는 대화였다. 유시리안은 여전히 무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힘들게 웃고 있었다. 상황을 조금 살펴보던 아클렌이 머뭇거리며 끼어들었다. “그럼 무하 씨가 일전에 전쟁터에서 시전 했던 마법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일전 전쟁?” 무하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가나란이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 역시 마법사들에게서 전쟁터에 시전 된 8써클 공격마법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길드 내에서만 아는 일이지만 가나란도 헬파이어를 시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시전하고도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그 마법사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지만 자신까지 포함한 네 명의 헬파이어 시전 가능자 중에서 전쟁에 참여한 마법사는 없었다. 그 마법사와 실제 전투를 치렀다는 당시 총사령관 아클렌은 근신중이기에 만날 수 없었고 결국 흐지부지 다음을 기약하며 끝나버렸다. 다시 의심의 눈이 뻗쳐오는 것을 느끼며 무하가 내심 식은땀을 흘릴 때 민이 또다시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그거 역시 이 녀석이죠.” 반지를 들어 보이며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신 답해주는 민이 그렇게 고마워 보일 수가 없었다. 비록 ‘페르노크’로서는 곤란과 곤혹의 늪에 빠뜨리고는 확인 삼아 흙을 덮어주는 도움이라 해도 말이다. “마, 말도 안돼.” 가나란은 이제 부들부들 떨었다. ‘희대의 천재’ 페르노크라면 이름정도야 들었다.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마나를 느낀 소년. 마법의 배움에 있어 막힘이 없고 아직까지도 그 잠재 능력이 파악되지 않은 천재. 하지만……. “이제 겨우 스물이 됐을 꼬마가 아닌가! 8써클이라고? 8써클을 부여한 아이템을 만들었다는 거냐?” “뭘 놀라십니까? 타임은 7써클 마법. 부여 마법의 난점까지 해결한 ‘희대의 천재’가 8써클 마법을 사용하는 게 그리도 믿겨지지 않습니까?” “……!” 비틀거리는 가나란을 델니에가 급히 부축했다. 그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지만 8써클까지 힘들게 올라간 가나란의 것만은 못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이제 겨우 스물이 아닌가! 이제 겨우! “그는 별칭을 바꿔야겠군.”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씁쓸하게 웃으며 가나란이 말했다. 민은 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기에 쓴 미소를 지어보이기만 했다. 솔직히 분위기를 스리슬쩍 맞춰가며 효과를 극대로 끌어올린 자신의 탓도 컸기 때문에 아주 조금 죄책감도 있었다. 그래도 뭐, 거짓말은 안했다. “바꿔야겠어.” 한숨과 같이 또 한번 말하며 델니에의 부축을 뿌리쳤다. “페르노크를 한번 만나봐야겠네. 듣기로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정진중이라던데 자네는 어떻게 만났나?” “음지의 루트로 잠깐 나타난 적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잠적에 들어갔습니다. 그럴 때의 그는 누구도 찾을 수 없지요. 오르세만 가에 공식적으로 만남을 주선해 보는 수밖에 없겠지만 이쪽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하지만 듣기로는 오르세만 가에서도 그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들어오는 청을 거절하고 있다더군요. 아마 그가 직접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를 만날 수 없을 겁니다.” “그런가…….” 용병과 마찬가지로 마법사도 비밀주의다. 용병은 그것이 주로 개인적인 일에 해당되지만, 마법사들은 주로 지식과 수련에 해당된다. 때문에 마법사인 페르노크가 스스로의 정진을 위해 누구와도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 스스로가 그것을 깨기 전까지는 어떤 수도 없다. 그것은 같은 마법사인 가나란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무하라고 했던가.” “예.” 저 노친네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는 건가, 눈을 치켜뜨는 유시리안을 고려할 정신도 없는지 가나란은 힘없이 물었다. “그때 썼던 아이템이 또 있는가?” “아…….” 잠시 생각을 더듬어 봤지만 헬파이어를 부여해 놓은 것은 없었다. 애당초 생각할 것도 없이 무하가 만든 것들은 보조 마법들뿐 공격 마법은 없다. 특별히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다. 공격보다는 다양한 효용이 있는 보조 쪽에 관심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없습니다.” “자네에게는 똑같은 쓰임의 스크롤을 주겠네. 수는 그 두 배를 주겠어. 그 반지를 나에게 주지 않겠는가?” 곤란한 얼굴로 귀걸이로 쓰고 있는 반지 세 개를 쓸어보다가 간절한 가나란의 얼굴에 흔들려 고개를 끄떡였다. “이 세 개는 빼고요.” 당장 걸고 있던 것이 사라지면 허전할 테니까. 산뜻한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난다. 특이한 향내를 지닌 화초들이 곳곳에 있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향기가 우러나온다. 기분 좋은 바람, 기분 좋은 소리, 기분 좋은 냄새. 가만히 눈을 감고 맘껏 그것을 즐기다 문득 웃어버렸다. “요즘은 너무 평화로워.” “엘프로 몰려 두건이 벗겨질 뻔하고, 바로 이어 반지 소동이 났는데도?” “하하!” 여전히 입심 좋은 녀석이다. 무하는 가만히 지기의 짙은 남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원 어딘가에 시선을 던졌다. “평화로워. 맘껏 수다를 떨고 웃을 수 있고 화낼 수 있고…….” 또 이렇게 오랜만에 요크노민과 함께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곤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릴 때면, 늘 안타까운 얼굴로 여전한거냐고 묻던 녀석에게 이제는 웃는다고 말할 수 있다. 꿈만 같은 일이다. “유시리안 씨는 언제 다시 만난 거야?” “좀 됐어. 전쟁이 끝난 직후였으니까. 이카미렌 산맥에서 만났지.” “대단한 인연이네.” 무하는 묘한 얼굴을 하다가 키워드를 말하고, 매듭을 풀어 두건을 벗었다. 페이야 가에서는 벗지 않으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두건이었지만 주위에 요크노민 밖에 없으니 상관없었다. 어차피 정체가 들통 날 것을 우려해 안 벗었던 것이니까. 조금 눌린 머리카락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헤집은 다음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넓어진 시야로 요크노민을 바라보았다. “쭉 찾았었데. 나를…….” “그럴 것 같았어.” “나는 몰랐어. 그가 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단 사실을 전혀 몰랐기에 슬프거나 초조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미안해.” 어떤 메리트가 있었던 것일까? 유시리안은 어째서 단 세 번의 만남으로 2년간이나 그리워하고 찾아 헤맨 것일까? 무하는 멍하니 말했다. “너무 미안해. 그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이 너무 미안해. 아마 앞으로도 계속 미안할 것 같아.” 그리고는 쑥스러운 낯으로 애써 헛기침을 했다. 요크노민의 눈빛에서 짓궂은 장난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저 눈치 빠른 녀석이 벌써 무하의 감정을 읽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구나?” “아마도…….” 무하는 붉어지는 얼굴을 간신히 가다듬다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이런 화제는 너무 낯설었다. “율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줘. 내가 싫어하는 것을 직시해줘. 무척 다정하고 상냥해. 그래서 그저 의지하려고 하는 건지도 몰라. 많이 지쳤으니까.” 요크노민은 어이없는 얼굴로 무하를 쳐다보았다. 다정? 상냥? ‘뭐, 확실히 페르한테만큼은 다정하고 상냥하지.’ 간신히 납득하는 요크노민을 보지 못한 무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 율에게 얘기 했다.” 하늘을 올려보니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빼곡히 차있다. 언제보아도 이질적인 밤하늘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세계에서 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손을 위로 쭉 뻗어 올려보았다. 새하얀 손. 이제는 굳은살이 적당히 박혀있지만 한때는 가늘고 아름답기만 했던 손이다. “이 몸이 원래 누구의 것인지. ……모두 말했다.” “……믿어?” “믿는다고 했어.” 요크노민은 쓰게 웃으며 덩달아 하늘을 보았다. 자신은 어렵게 ‘믿겠다’고 한 사실을 유시리안은 너무도 쉽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도 돌아가고 싶냐고 되물었어.” “대……답은?” 2년 전 자신도 그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때 무하는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때의 무하는 분명 그리 대답했다. 꾹 쥔 주먹 안에 땀이 고여 들자 옷에 쓱 문질러 닦아냈다. 유시리안마저도 무하를 이곳에 묶어둘 수 없다면, 아마 그를 묶어둘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율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자신의 옆이라고 했어.” 당당하다 못해 오만한 유시리안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무엇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가득 짓는 무하를 보자니 안심이 된다. 자신의 꿈을 인정해준 최초의 사람. 자신을 강하게 바꿔준 사람. 소중한 지기. 언젠가 자신은 ‘있어야 할 곳’을 잃었다고 힘들게 중얼거렸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집을 나간 뒤, 요크노민의 처소에 찾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약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녀석이 그리 말했다. 그때 요크노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감사 해야겠구나.” 같은 여관방을 쓰거나 야영을 하니 당연한 것이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유시리안이 있었다. 부드러운 보라색 눈동자에 온기를 담아 아침인사를 건넸다. 마주 인사를 건네며 일어나면 먼저 씻은 락샤사가 이어 인사를 했다. 그는 간혹 먼저 식당으로 내려가 있곤 했지만 유시리안은 늘 무하가 깨는 걸 기다려 주었다. 무하는 그 순간이 무척 좋았다. 잠에서 깨어난 무하는 허전한 느낌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낯선 나무 천장, 약간 딱딱한 침대, 가벼운 이불.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이곳이 어딘지를 깨달았다 . 아클렌이 마련해준 별채의 많은 방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면 여태 율과 독방을 쓴 적이 없구나. 늘 삼인용 방이었지. 샤가 검의 형상일 때는 이인용 방이었고.’ 새삼 깨달으며 일어났다. “잘 잤어, 펠?” 일층으로 내려가자 거실 소파에 느긋이 앉아 있던 유시리안이 환하게 반겼다. 계단을 막 내려선 무하는 묘하게 안심하며 마주 웃었다. “일찍 일어났네?" “나야 늘 그렇지. 펠이야말로 유난히 일찍 일어났네?” 안색을 살피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악몽을 꾼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눈이 떠진 것뿐이야.” 머쓱하게 웃으며 옆에 앉았다. “어제 민과 늦게까지 얘기했잖아. 잠이 부족하지 않아?” “괜찮아. 그보다 율.” “응?” “오늘 이것저것 사려고 하는데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 “아아. 나도 슬슬 보충해야 했으니까.” 쾌히 응하는 유시리안을 잠시 보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율은 인기 많지?” “응?” “내가 있던 곳에서도 잘생기고 강한 사람은 인기가 많거든. 보면 이곳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주위에서 말 걸고 힐끔 쳐다보고 그러지 않아?” “뭐…….” 얼떨떨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다가 수긍했다. “말 거는 것들은 별로 없지만 많이 쳐다는 보더군.” 건드려봐야 좋은 꼴 보기 힘드니 그저 눈요깃감으로 만족한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솔직히 털어놓을 유시리안이 아니었다. “하긴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은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이니까.” 나름대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떡이는 무하의 뒤로 억누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민이었다.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는 있지만 분명 웃고 있었다. 눈동자에도 특유의 짓궂은 장난기가 어른거리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무엇 때문에? 무하가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민은 애써 외면하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무하.” “좋은 아침.” 민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웃음을 띠며 유시리안 쪽을 돌아보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유시리안 씨?” “아아. 좋은 아침.” 두 쌍의 눈이 마주치며 무언의 대화가 오고갔다. 유시리안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가지고 오지. 둘도 마시겠어?” “부탁해.” “부탁합니다.” 하인이 있음에도 직접 끓여오겠다는 것은 자리를 피해주겠다는 뜻이리라.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무하가 아니었기에 민에게 물었다. “뭔가 할 말 있어?” “응. 어제 깜박하고 말을 안했는데.” 운을 떼며 무하의 앞에 앉았다. 주위를 살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하고도 손에 끼고 있던 반지 위를 다른 한손으로 얹으며 중얼거렸다. “사*일*런*스*” 예전에 무하가 만들었던 것들 중 하나인 그 적옥가락지였다. 예전에 클랜에게 주었던 것처럼 효과가 바로 일어나는 것들은 반지를 깨뜨림으로서 부여된 마법이 시전 되지만, 이처럼 일정시간동안 발생하는 마법은 시동어를 읊어야 된다. 그러면 반지가 천천히 금이 가며 결국에는 부서져 버리며 효과가 상실되는 것이다. 민이 쓴 아이템은 후자에 속했다. 금이 가는 정도를 알기 위해 반지를 뽑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무하를 보았다. “계속 떠돌 거냐?” “아직 결정하지 못 했어. 이 몸을 ‘페르노크’에게 돌려줘야 하는지는 물론 형님께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도.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 했어.” 민은 무하가 수도에서 시체를 태웠던 그때, 무슨 생각으로 테밀시아를 만났는지에 어제 들었다. 그런데 왜 새삼 묻는 것일까? 의아해 하는 무하를 보며 짧게 말했다. “테밀시아님은 황제가 된다, 페르.” “…….” 갑작스런 애칭에 무하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의향을 존중하여 늘 무하라고 칭하던 민이 아니었던가. “페르, 아직도 모르겠니? 오르세만 가의 다음 가주 말이야.” “……!” “테밀시아님으로서도 이 이상 네 가출을 묻어둘 수 없게 된 거다. 테밀시아님이 황제가 된다면 자연히 가주 계승권자에 대한 정리가 일어날 것이야. 라인 테밀시아님이 황제가 되고 아인 카한세올님이 돌아가셨다. 이번 계승권자 중에는 란이 없다. 남은 건 페르노크, 너밖에 없는 거야. 아무리 마법 수련으로 잠적중이라 해도 이쯤 되면 불러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적어도 테밀시아님이 황위 계승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정해야해, 페르.” “……그렇구나.”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했다. 관자놀이를 한손으로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그에게 주어진 유예기간은 짧았다. “계승식은 언제지?” “갑작스런 계승식이라 준비할 것도 많고 각 나라에 초청장도 뿌려야 하니까 좀 걸리겠지만, 늦어도 두 달은 안 넘길 거야. 원래라면 여유 있게 세 달 안팎정도 걸리겠지만 지금 욤의 민심이 극히 불안정하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있거든.” “그렇구나.” “기도하는 땅에 갔다가 돌아오면 얼추 시간이 맞아떨어지겠구나. 우리의 속도라면 기도하는 땅으로 가는데 보름, 이곳으로 오는데 보름. 다시 욤으로 가는데 이주에서 삼주.”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한 무하를 보며 민은 한결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달래듯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어차피 지난 2년간이나 줄곧 고민해왔던 일이잖아? 결단을 내릴 시간으로 치면 두 달의 기간은 충분히 길어. 길게 생각한다고 해서 꼭 좋은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반지를 한번 체크했다. 그것은 이미 부서지기 직전까지 빼곡히 금이 가 있었다. 민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넌 좀더 이기적이어도 돼, 페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반지가 부서져 내렸다. 테이블 위에는 이제 적옥의 파편만이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무하는 유시리안과 같이 마구간을 갔다. 마르스와 화마, 그리고 이름을 받 지 못한 두 마리의 산리와 한 마리의 말이 있었다. 말은 제그가 몰고 온 것이다. 화마는 주인을 보자 가늘게 눈을 뜨며 얼굴을 들이 내밀었다. 본래 산리는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동물이지만 화마는 유별났다. 무하만 보면 만져 달라고 보챘다. 무 하 역시 부드러운 화마의 털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화마의 애교가 기분 좋았다. “마르스. 율이 널 가지고 싶데.” 화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마르스에게 말하자 녀석은 도전적인 눈초리로 유시 리안을 노려보았다. 유시리안은 같잖다는 얼굴로 오만하게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네 놈이 노려보면 어쩔 거냐?” 일부러 살기를 뿜지 않아도 마르스는 유시리안의 강함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또 녀석 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유시리안도 알고 있었다. 한참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둘을 옆에 두 고 무하는 화마를 씻겨주었다. 물의 정령에게 부탁해서 몸을 씻기고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 해서 말리는 게 다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 천천히 걸어가고 싶은데. 느긋하게 구경도 하고 싶고.” “그것도 괜찮지.” 답하며 유시리안이 허공에 손짓하자 마찬가지로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이 나타나 마르스 를 씻겨주었다. 그리고 차례로 나머지 녀석들을 씻겨냈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동물답 게 기분 좋은 얼굴로 가볍게 울었다. 정령들이 모든 작업을 마친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 다. “가자.” “응.” 마르스의 목을 한번 쓰다듬고 나가는 유시리안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르스. 율은 다정한 사람이야.” 들릴 새라 작게 속삭이며 마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특한 마르스는 떨떠름한 눈으로 무하를 보았다. 녀석이 보건데 자신의 주인은 강하기는 하지만 다정이라는 것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나마 강한 자가 주인이라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다. 순수한 야생마인 마르스는 약육강식의 법칙 속에서 살아온 녀석이었다. 대립은 격렬하게 하더라도 일단 꺾이면 그것에 순응할 줄 알았다. 그리고 주인이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쓰다 듬고 간 것을 보건데, 자신의 것에는 그나마 너그러워지는 모양이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 은 주인이다. “의뢰인 쪽에서는 이번 의뢰의 리더를 민으로 정한 모양이야. 변동사항이 생겼다며 민을 부르는 것을 보면.”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 이 꺼림칙한 의뢰나 얼른 해치우고 호젓하게 관광이나 하고 돌 아다니고 싶을 뿐이야.” “관광?” “응! 북쪽 대륙 뿐 아니라, 모든 대륙을 다 섭렵하고 싶어. 그리고 경계 너머로도 함께 가보고 싶고.” “여행을 좋아하는 구나?” 유시리안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무하를 돌아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매력적이었 다. 그렇지 않아도 유시리안을 바라보며 넋이 나갔던 아가씨들이 얼굴을 붉히며 자기들끼 리 소리 지르며 소곤거릴 정도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유시리안은 주위에 신경 쓰지 않았 다. 그는 무하 쪽으로 고개를 약간 숙이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펠이랑 그렇게 다니고 싶어.” 정겨운 느낌에 웃음을 터뜨렸다가 유시리안이 여전히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 고 있음을 알고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마치 민에게 옮은 양 그 웃음은 녀석의 것과 꼭 빼닮아 있었다. “만약 내가 ‘페르노크’로서의 삶을 택해서 오르세만 가로 돌아간다면?” “납치해 올까?” “진짜?” 유시리안은 장난스럽게 무하의 목을 바싹 끌어당겼다. 그리고 마구 조르는 척 하며 말했 다. “그래. 진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닌 이상 납치해 올 거다. 백번이고 마음 없 이 돌아 가봐라. 바로 데리고 나와 버릴 테니.” “그건 너무 제멋대로잖아.” “난 원래 제멋대로인 게 매력이라니까?” 진심으로 원한다면……. “율은 언제나 당당하구나.” 이쪽은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는데. 어두운 여운이 남는 무하의 목소리가 걸리는지 유시리 안은 드물게 차분하게, 조금은 냉랭하게 말했다. “참는 게 다가 아니야. 그저 참기만 해서는 가슴에 앙금이 남게 되지. 그 앙금은 다른 말 로 후회야. 후회는 언제해도 늦지.” 그것은 단순히 지식에서 나오는 딱딱한 위로가 아닌, 경험에서 나오는 진솔한 충고였다. 무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언제나 유시리안에게라면 약한 소리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 했다. “난 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조차 모르겠어. 참는 게 아니라 헤매는 거야. 내 마음을 모르니까 뭘 해야 할지도 몰라. 바보 같아. 테밀 형님이 황제가 되면……오르세 만 가의 가주 계승권자는 나밖에 남지 않아. 정확히는 ‘페르노크’밖에. 얼른 정해야 하 는데…….” 이미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유시리안은 뜻밖에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자신에 게 그 이야기를 했다는 것에 조금 놀란 것도 같다. 그는 짧게 물었다. “사라지고 싶어?” “모르겠어.” 모든 걸 포기한 ‘페르노크’에게 그 모든 걸 쥐어주고 싶어? “살고 싶어?” “……모르겠어.” 아니면 비겁하게, 이기적으로 그 모든 걸 움켜쥐고 싶어? 무하의 영혼으로서 ‘페르노크’ 의 운명으로 살고 싶어? 무하의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풀며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바싹 끌어 붙였다. 바로 귓가에서 속삭였다. “자기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바보라고 생각해?” “적어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의 난, 내 마음을 모른 적이 없었어.” “펠 자신이 퇴보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적어도 진보한 건 없어.” 고집스러운 어조에 유시리안은 킥킥 웃었다. 어쩐지 비웃음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하 는 가만히 있었다. 유시리안은 자신을 모욕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 신뢰가 있었다. “난 펠이 진보했다고 생각하는데?” “……?” “자신의 마음을 전부 안다는 것은 오만을 넘어선 자기기만이야. 가장 알기 힘든 것이 자 신의 마음이니까.” 늘 당당하고 오만했던 유시리안의 입에서 나올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무하가 뭐라 묻기 전 에 유시리안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알고, 내가 싫어하는 것만을 알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을 알지. 그 외에 것들은 충분히 고민해. 어떤 것이 후회가 안 남을까, 어떤 것이 나에게 이로울까.” 마지막 말에 무하는 쿡쿡 웃었다. 너무도 유시리안다운 말이었다. 바다.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무한한 흡입력. 직접 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벅차도록 시린 마력. 비록 그 진면목은 저 머나먼 경계 너머에 봉인되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그 특유의 마력은 여전하다. 바다는 락샤사에게 있어서는 특히나 특별했다. 항구 구석에 가만히 서서 출렁이는 파도를 내려보는 락샤사의 주위로 바닷새들이 몰려들었 다. 바다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바다내음이 짙게 배여 있었다. 바닷새들은 그에게서 본능적 인 향수를 느꼈다. 천천히 손을 뻗자 몇몇 녀석은 내려앉아 부리를 문질렀다. 환호성이 절 로 날 법한 모습이었지만 당사자인 락샤사는 너무도 무표정했다. 유시리안과 함께 있을 때도 가려지지 않는 멋을 지닌 락샤사는 거친 선인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그에 바다를 구경 나온 할일 없는 처자들이나, 생선을 사기 위해 온 아주머 니들이 낯을 붉히며 힐끔댔다. 비단 여자뿐만 아니라 그 무성적인 매력은 긴 항해 동안 간 혹 남색을 하는 선인들에게도 상당히 눈길을 끄는 상대였다. 그렇지 않아도 의미심장한 시 선으로 몸을 훑고 있었는데 저와 같은 명장면을 자아내니 절로 군침을 삼키게 된다. 주위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락샤사는 바다를 보았다. 바다가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안 된다.” 파도가 더욱 거세게, 애절하게 항구의 단단한 돌을 부딪쳤다. 육지로 올라오기 전까지 락 샤사는 바다의 보호자였다. 락샤사는 바다에서 태어난 최초의 생명체. 그는 바다의 역사 를 처음부터 줄곧 지켜봐왔다. 그런 그가 검으로서 육지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알 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겐 마스터가 있다.” 자신의 것이 되지 않겠냐고 손을 내밀었다. 아껴주겠다고 웃었다. 그것에 끌린 것은 아니 지만 거부감 또한 들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손을 잡았다. 마스터를 정하는 것은 락샤사의 의지. 락샤사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창조자뿐. 그는 지배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안 된다.” 파도가 높게 일더니 부서지며 락샤사의 몸을 덮었다. 그것은 안타까운 애무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몸에 닿는 바다의 촉감을 느끼는 락샤사에게 누군가가 높은 음성을 내 며 다가왔다. “이봐요, 다 젖었잖아요! 멍청하게 서 있으니까 다 젖지요.” 그냥 말만 들어서는 친절하다고 느낄법하지만 뻗어오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면 의아할 뿐이다. 게다가 입안으로는 의미모를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지 않은가. 손수건을 꺼내 다가오는 아가씨를 무심히 보던 락샤사는 물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바다 속에서 지내왔던 락샤사에게 물은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물이 없다고 죽는 건 아니고 이편이 기분 좋은 것뿐이다. 손수건을 건네는 것이 아닌, 대범하게 직접 닦아내 주는 여자를 향해 질투의 눈길이 집중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용감한 자가 미인을 낚는 것이 세상의 법도가 아닌가. 락샤사 가 가만히 있자 여자는 좀더 접촉도를 높여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런 여자를 무심히 내려보던 락샤사는 부드럽게 몸을 틀어 그녀의 손을 피했다. 그와 동 시에 기분 좋게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물방울들이 떨어져 나왔다. 자신들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래도 아쉬운 듯 락샤사의 주위를 잠시 배회하다가 땅으로 스며졌다. 믿겨지지 않는 그 모습에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여자를 향해 락샤사는 짧게 말했다. “필요 없다.” 손수건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여자는 흠칫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멋진 얼굴도 좋고 장신 에 쭉 빠진 몸도 좋고 뭐라 표현 못할 분위기도 좋았지만 그 무심한 목소리를 들으니 본능 적인 두려움이 솟았다. 차라리 발밑의 돌덩이가 감정이 있으리라. 그래도 미련을 못 접고 고개를 높이 쳐들어 얼굴을 마주했지만 더욱 무심한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보고 있을 뿐이 었다. 지레 질려 물러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어 다시 바다를 보았다. 기도하는 땅은 이 바다 를 통해 가게 될 것이다. 친근한 바다의 노래를 당분간 계속 들을 수 있겠지. “왔어?” 페이야 가로 불려 나갔던 민이 언제 돌아왔는지 한가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막 들어서 던 무하가 웃음으로 답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제그 씨는?” “사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 페이야 가의 저택 앞에서 헤어졌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밤에 경매가 벌려진다고 해서 거기에나 가보려고.” 마법제국이라 불리는 곳답게 생각도 못한 기발한 상품들이 많긴 했지만 딱히 이렇다 할만 한 걸 발견하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재료만 있으면 무하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것들뿐이었다. 그래도 대충 사고 마려는 무하를 유시리안이 말리며 밤에 다시 오자고 했 다. 실은 음지의 거래였지만 유시리안은 그 바닥을 훤히 꿰고 있었다. 눈이 높은 그는 일단 마 음에 들기만 하면 장물이어도, 값이 얼마가 되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런 타입은 그쪽 바닥 에서는 환영받는다. 이번에는 민이 물었다. “락샤사 씨는?” “항구에 갔을 거다.” 앞의 의자에 털썩 앉으며 유시리안이 답했다. “항구에요?” “바다가 보이니까.” 민이 가볍게 실소하며 되물었다. “이제부터 질리도록 보게 될 텐데요? 배를 타고 갈 테니.” “봐도 질리지 않는 게 있으니까. 그나저나 녀석들이 뭐래?” 대충 넘어가는 기색이자 민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이어지는 질문에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동행이 생겼습니다.” “누구?” “…….” 다시 한숨을 쉬며 무하를 보았다가 답했다. “나이트 디이나와 엘프 아사라느” “뭐…….” “덧붙여 말하자면 이쪽에서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당장에 발끈하는 유시리안의 말을 자르고 마무리했다. 유시리안뿐 아니라 무하 역시 얼굴 을 찌푸리며 딱딱하게 물었다.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겠지?” “표면적인 이유는 우리가 기도하는 땅으로 가는 이유가 ‘두 숙녀 분을 호위하기 위해 서’이기 때문.” “이목을 숨기자는 건가? 하지만 전에는 그 말이 없었잖아? 또 우리가 가는 시기가 레이아 사 아나의 날과 겹친다면 굳이 그런 명분이 없어도 상관없지 않아?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판인데.”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무하의 반문이 빨랐다. “표면적인 이유라고 했잖아. 나한테는 그리 둘러대는데 대충 눈치 보니, 그 두 여자가 동 행하고 싶다고 조른 모양이야.” “졸라? 일의 경중쯤은 판단할 수 있는 여자로 봤는데.” 민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어. 이쪽에는 선택권이 없다고. 마찬가지로 거부권도 없어.” “하!” 기가 막힌 지 의자에 몸을 푹 묻으며 불만 어린 탄성을 냈다. 뜻밖에 완강한 거부감을 드 러내는 무하를 보며 민이 물었다. 그는 저런 반응을 보일 사람은 유시리안이고 무하는 어 찌되든 상관안할 것이라 생각했다. “싫은 모양이네?” “당연히.” “두건 때문에?” “그건 사과를 받았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속내를 감추고 뻔히 보이는 변명 을 해대는 사람은 별로야. 이용당하는 기분이 들잖아.” 훼오트라 아나 건이야 입막음료로 이용당해주는 거지만 이쪽은 그런 메리트조차 없다. 그 리고 민과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것은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 타인이 끼어들면 다니는 동안 에 내내 타인인척 해야 한다. 만만치 않게 피곤한 일이다. “이중고야, 이중고.” 적어도 디이나나 아사라느는 고생모르는 어리광쟁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이런 중대한 일에 납득할만한 이유도 대지 않고 끼어든 것을 보면 철은 없 어 보이지만 말이다. “피곤하게 됐네.” 기력 없이 유시리안의 어깨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어쩌겠는가. 이쪽에는 선택권도 거부권 도 없다. 뭔가 평소와 입장이 바뀐 유시리안은 색다른 맛에 웃음만 흘렸다. 원래 날뛰는 쪽은 그고, 그것을 달래는 쪽은 무하였다. ‘여자가 끼어들었다고 좋아하는 것보다야 낫지.’ 그리고 이어 생각했다. ‘그 계집들, 생긴 건 반반하니까.’ 외모에 구애받지 않는 무하의 성격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보면 무하는 본래 여자 니 같은 여자의 외모에 끌리지 않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잘생긴 남자에게 호감을 갖 는 것도 아니니 성격 탓이 크리라. ‘아, 하긴 본래 여자인데 여자가 끼어들었다고 좋아할 턱이 없나?’ 새삼 여자고 남자고 모든 자를 연적으로 봐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재밌겠군.’ ……유시리안은 이런 남자였다. 제그는 해가 떨어진 직후에 돌아왔다. 손에는 세 개의 작은 상자와 열권은 족히 되어 보이는 책들이 들려있었다. 상자의 하나는 동생에게, 하나는 연인에게, 하나는 친구들에게 줄 선물이라고 했다. 그런 선물은 사는 것이 쑥스러웠는지 늘 냉랭하던 얼굴에 연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다. 또 구하기 힘든 마법 서적을 많이 발견했다며 신나하는 모습에서 마법사 특유의 지식욕이 보였다. 마법서적이란 말에 무하도 관심을 보였으나 읽을 시간이 없었다. 슬슬 경매가 열릴 시간이었다. 락샤사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유시리안은 염려하는 무하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 이런 일이 한 두번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급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일도 없으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자고 하는 유시리안이 자상하게 느껴져 무하는 웃었다. “좋은 물건이 많이 들어와 있으면 좋겠는데.” 경매에 가는 것은 오랜만이라며 기대감에 눈을 번뜩였다. 오랜만이고 뭐고 처음 가보는 무하도 적지 않은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들어보기는 많이 들어봤다. 귀족의 호위로 상류층이 득세하는 곳에는 많이 가봤지만, 카 등급의 용병을 고작 경매장에서의 호위로 쓰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뒤가 구린 만큼 믿을만한 기사가 아니면 꺼렸다. 개중에는 가명을 쓰고 얼굴을 가린 채 참여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은밀히 다루는 것에 따라 내 놓는 물건의 품질이 비례한다며 유시리안은 그쪽을 더 좋아했다. “원래라면 초청장이 있어야 되지.” “있어?” “장소도 알고 암호도 알아. 그런 경우에는 초청장이 없어도 가능해.” 초청장은 돈과 소유욕이 있는 귀족들에게만 배포된다. 하지만 유시리안처럼 대가가 확실히 보장된다면 특정 암호에 의해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 게다가 유시리안은 그쪽 단골이었다. “전에 거기서 샀던 귀걸이가 마음에 들었는데 잊어버렸어. 대충 상점에서 샀지만 전에 것만은 못했어.” “사기도 하는구나.” 처음에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새삼 놀렸다. 그때 유시리안은 골드 드래곤의 피를 훔쳤었다. 그러고 보니 그건 어떻게 했을까? “팔면 사지.” “안 팔면?” 집요하게 묻는 무하에게 유시리안은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이미 답을 한거나 다를 바 없었다. 그에 피식 웃고 마는 무하였다. “난 마음에 드는 건 가져야 직성이 풀리거든.” “그때 그건 어떻게 했어?” “이카 줬어.” 그리고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아, 탄성을 냈다. “이참에 말해두겠는데, 그건 원래 이카 거였어. 선물로 초대 자하라 가주에게 주었지만 이제 그 대가 끊겨 주인에게 돌아간 것뿐이야.” “초대 자하라 가주?” “이카는 셀족이라고 했어. 이제 셀족의 대는 끊겼으니 도로 거둬와야겠다고 했지. 이카가 호의를 베푼 건 셀족이지, 자하라 가가 아니니까. 당시 ‘생존자’가 있긴 했지만, 바로 그 녀석이 셀족을 끝내버릴 녀석이니까 가지고 있을 자격이 없다고 했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턱이 없는 무하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유시리안은 그 정도만 알면 된다고 더 말해주지 않았다. 무하는 나름대로 이해하며 말했다. “골드 드래곤의 피니까 골드 드래곤인 이카미렌 씨의 소유였던 거구나?”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자랑스럽게 웃는 그가 보기 좋았다. 뭔가 어긋나는 납득이었지만 애당초 무하에게는 유시리안이 도둑질을 하던 강도질을 하던 상관없었으니 적당히 넘어갔다. 전에는 자기에게만 폐를 끼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라면 얼마든지 폐를 끼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유시리안이 만약 이 생각을 읽었다면 행복에 겨운 얼굴로 연신 웃어댔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의미가 큰 것만큼 행복한건 없다. “아! 저기야.” 그곳은 생각보다 평범한 상점이었다. 물론 귀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고급 옷가게였지만 경매장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평범했다. 유시리안은 저 곳의 지하에 거대한 홀이 있다고 했다. 비밀스러운 냄새가 풍겨 괜히 긴장이 되었다. 유시리안이 앞서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계산대에 앉아 있던 한 아가씨가 인사를 하고, 저편에서 안내하기 위해 다른 아가씨가 다가왔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시냐는 질문에도 답 없이 주위를 한번 둘러본 유시리안은 안쪽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구석에서 걸레질을 하는 아가씨 쪽이었다. 타 종업원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귀에는 그 평범한 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라색 보석 귀걸이가 걸려있었다. 그것은 마력이 담긴 보석으로 연금술사의 손에서나 태어나는 희귀품이었다. “나는 탐욕자. 원하는 것은 손에 넣는다. 방해하는 장벽은 부순다. 그 안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기에.”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는 생긋 웃으며 걸레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며 무하가 낮게 물었다. “암호?” “아아. 락아타 초대 황제, 화이라가 한 말이지.”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교묘하게 설계된 사각지대가 나타났다. 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이는 설계였다. 아가씨가 옷걸이에 잔뜩 걸려있는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자 뭔가를 누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유시리안이나 무하 정도나 되어야 들리지 어지간한 자는 듣기 힘든 작은 소리였다. 옆으로 물러나며 아가씨가 말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직원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뭔 소린가 하는 무하와는 달리 유시리안은 벽 안 쪽으로 발을 넣었다. 놀랍게도 그의 몸이 벽을 통과하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환각마법이었던 것이다. 유시리안이 무하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무하도 당황하지 않고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붉은 비단이 깔려있는 응접실과 같은 방이 나왔다. 문 쪽에 서 있던 한 남자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앞서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앞장서 문을 열고 나갔다. “신기해.” “우리 집에 설치된 환각 마법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우리 집이라 함은 이카미렌의 레어를 말하는 것이다. 무하는 킥킥 웃으며 팔꿈치로 가볍게 유시리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비교할 데를 비교해야지.” 아무렴 인간의 마법이 드래곤의 마법과 동급일 수 있을까. “가자.” 한가하게 앉아서 간만의 휴식을 즐기던 민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경매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마법 서적을 마구 읽어 내려가던 제그는 흥미 없이 뭐냐고 물었다. 책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지만 민은 괴이치 않고 짧게 답했다. “나 예전에 노예상에게 납치된 적이 있었어.” “아, 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뭐?!” 예상했던 반응에 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네 놈 같은 괴물단지를 납치할만한 실력자가 노예상 중에 있었단 말이냐? 아니, 그것보다도 어떻게 생긴 줄 알고 납치해?” “이봐…….” 줄줄이 터지는 질문에 가만히 핏대를 세우다가 허무하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강했던 것도 아니고, 또 맨날 가면을 쓰고 다니지도 않는다고. 뭐, 그때는 가면자체를 안 썼지만.” “흐응. 그래서 얼마에 팔렸는데?” “……팔렸으면 내가 이 자리에 있겠어?” “도망친 거야? 강하지 않았다며?” 이 이야기를 하려면 무하의 이야기를 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민은 상관없겠지 싶어 말을 골라 답했다. “그때 같이 납치당한 녀석이 강했거든.” “강한 녀석이 어쩌다 납치를 당한 거냐? 그럼 넌 빌붙어 탈출한거냐?” 어째 거슬리는 말이지만 제그의 거친 말투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민은 느긋하게 웃었다. “약에 당했거든.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되나?” “그 강하다는 녀석은 혹을 붙이고 탈출했단 말이야? 인간성 좋네?” 제그는 동생이 아닌 이상 자진해서 혹을 붙일 남자가 아니었다. 그와 교류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제그보다 약한 사람은 동생밖에 없는 것도 있지만 말이다. 연인인 카나는 카 등급 암살자, 키안은 그런 카나를 가르친 실력자, 지기인 민은 화염의 수장의 맹약자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제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민은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며 태연히 답했다. “그 녀석이 무하였거든.” “그때 만난 것?” “아니. 그 전에.” “흐음.” 관심을 끊고 다시 책에 몰두하는 제그를 보며 민이 낮게 물었다. 제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요크노민 마 카르민이라는 것과 그 전에 오르세만 가의 하인이었다는 것과 형인 뮤비라가 가주가 되려 한다는 것, 형의 로드 테밀시아가 황제가 되려한다는 것. 그 네 가지만 말했을 뿐이다. 또 다른 지기인 페르노크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다. 그만큼 제그와 민은 서로 간에 아는 것도 적었고 숨기는 것도 많았다. 그럼에도 둘은 지기였다. “궁금하지 않아?” “별로. 말하고 싶을 때 말해. 들어는 주지.” 제그를 못 믿는 것은 아니다. 못 믿었다면 지기라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말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지기의 상처를 입에 담아야 한다. 타인의, 그것도 지기의 상처를 함부로 말할 수야 없지 않은가. ‘페르가 결단을 내리면……. 그때는 전부 말할 수 있을 거다.’ 책장을 넘기는 제그를 가만히 보며 속으로나마 그리 말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제그가 반쯤 읽어 내려가며 한마디 했다. “난 별로 상관없어. 꼭 상대의 전부를 알아야만 한다는 법은 없잖아?” 그리고 마나 배열법 부분이 되자 책을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너 역시 나에 대해서 다 아는 게 아니고, 나 역시 너에게 전부를 말하지는 않았어.”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 비참했던 유년시절, 퇴학당한 이므르.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꼭 전부를 알 필요는 없다. 꼭 전부를 말할 필요도 없다. 민이 느끼는 죄책감은 그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쓸모없는 감정이다. “말하지 않는 것과 속이는 것은 달라.”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책에 집중해 버리는 제그였다. 민은 그 앞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풋! ……쿡쿡.” “너무 웃는 거 아냐?” 불만어린 목소리로 항의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억눌린 웃음소리뿐이다. “남이 노예 상인한테 납치당했었다는 게 그렇게 재밌는 이야기야?” “쿡쿡……. 그래서 그렇게 도망쳐 나왔단 말이야?” “그때 클랜을 만났지. 클랜은 전에 말했지? 곤크에 있었을 때 파트너였던 녀석이라고. 암튼 그 녀석은 의뢰로 가출한 귀족 여자를 찾기 위해 왔던 건데 덤으로 우리도 도와줬어. 그 보답으로 난 마법검을 하나 줬는데 나중에 그 검덕에 녀석을 다시 만나게 됐지. 도둑맞았던 걸 내가 우연찮게 발견했거든.” “가벼운 호의로 대단한 대가를 받아냈는걸, 그 녀석.” 재주껏 도망치는 녀석을 멋대로 도와준 대가치고는 과한 감이 없지 않다. 다시 비집고 올라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저 앞의 무대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노예가 누군가에게 낙찰되는 모습이 보였다. 바싹 마른 몸뚱이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만은 바들바들 떨어대는 폼이 가학성애를 불러일으킨다. 생김도 반반하니 아마도 쓰임은 그쪽이겠지. “저 녀석도 십 중 팔구 납치다.” “그런가?” 무하는 뚱하니 답하며 카탈로그를 뒤적거렸다. 그가 사고 싶은 것은 저런 종류의 노예가 아니라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제국이라 불리는 곳답게 눈길을 끄는 물건이 적지 않게 나왔지만 마땅히 사고 싶은 것은 없었다. 유시리안은 보석류를 사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른 때는 별 관심 없이 카탈로그를 보거나 무하와 떠들었지만 보석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감정을 해댔다. 거리가 멀어서 마법구로 확대해 비쳐주는 화면을 봐야 되건만, 그는 물건 쪽만을 집중해서 봤다. 감정까지 하려면 도구가 필요할 텐데 그는 멀리서도 꼼꼼히 감정하고 있었다. 이건 이미 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난 문제였다. “보수로 받은 보석들이 꽤 있지 않아?” “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니까. 그것들은 돈이고, 내가 사려는 건 수집품.” 노예가 연달아 나와 팔리고 이번에는 그림이 나왔다. 뭐라고 사회자가 열심히 설명해댔지만 그런 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무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카탈로그를 뒤적거렸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좀더 뒤에 나올 예정이다. 곳곳에서 돈을 높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에. 저 그림 이카가 그린 거다.” “응?” “이카가 원래는 책에 미쳐 있지만 가끔 다른 쪽으로도 미치거든. 언제였던가, 그림에도 미쳤었어.” 그 이카미렌이 그린 그림이라……. 새삼 그림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것은 안개에 숨겨져 어렴풋이 보이는 성의 그림이었다. 다가가고 싶은데 다가가지 못하는 듯 그림을 그려낸 시야가 안타깝다. 이쪽으로는 문외한이지만 스며져 있는 감정이 뚜렷이 보였다. 강렬하면서도 애절했다. 그러고 보니 이카미렌이라는 드래곤을 보았을 때의 감정과 비슷하다. 숨을 들이 삼키며 물었다. “어떻게 알아봐?” “사인. 저기 황금빛 사인 보이지? 모조품도 많지만 저것만은 따라하지 못해. 이카는 피로 사인을 했거든. 극히 일부 만족한 것에만. 그리고는 두 점인가만 빼고 다 선물로 줘버리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 버렸지.” “재주가 많으시구나.” “한번 흥미를 갖은 것에는 집착이 심하지. 책 외에는 대부분 금방 시들해 졌지만.” “율의 아버지답다.” 그 집착이나 그 변덕이나. 유시리안은 말없이 다정하게 웃기만 했다. 그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늘 신나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아주 잠깐 이야기를 나눠본 것뿐이지만 이카미렌 역시 유시리안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었다. 둘 사이의 단단한 끈을 무하는 강하게 느꼈다. 그것이 부럽기보다는 왠지 기뻤다. 다행이다…… 라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림이 비싼 값에 팔려가는 것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유시리안은 다음 물건이 장내에 들어오자 눈을 번뜩였다. 그것은 맑은 올리브 그린의 보석이었다. 적당한 굵기의 링의 가운데가 제법 깊게 파여 있고, 그 가운데로 보석이 박혀있다. 파인 안쪽은 버들가지가 섬세하게 깎여져 있었고 가운데가 파이는 바람에 갈라져 돌출된 바깥의 양 선에는 정교하게 축복의 룬이 새겨져 있다. 해석자가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유시리안은 그 보석의 값어치를 알았다. “녹양의 샘. 금화 2000부터 시작하겠습니다.” “3000나왔습니다!” “3500나왔습니다!” 돈 단위에 따라 일정한 손가락 모양으로 돈을 높인다. 그렇게 주위에서 열심히 손을 드는 동안에도 유시리안은 연신 보석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든 듯 눈은 가늘게 뜨다가 사회자가 마지막 확인을 할 때쯤에서야 손을 들었다. 엄지와 소지를 편 모양. 이는 더블로, 현재 액수의 두 배를 부른 것이다. “10000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유시리안이 부른 값을 두고 세 번 확인을 한 사회자는 낙찰가를 부르며 축하한다는 둥의 말을 했다. 유시리안은 턱을 괴고 만족한 듯 웃었다. 생각보다 값이 안 올랐다. 아마 앞서 이카미렌의 그림에 너무 돈을 투자한 탓일 테지. 그것을 알아볼 안목이 없는 자라면 저 보석의 값어치 또한 모를 테니. 그저 그런 자가 애첩에게 쳐바르기에는 아까운 반지다. 유시리안은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사회자를 향해 왼손의 검지를 들어 보였다. 물건을 지금 당장 받고 싶다는 뜻이었다. 본래는 돌아갈 때 받아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장 받아보길 원하는 자도 적지 않기 때문에 이런 사인을 만들어냈다. 사회자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엄지를 들어보였다. 곧 네 남자가 반지를 가지고 왔다. 그 중 셋은 경호원인지 근육질에 검까지 차고 있었다. 올 때는 물건을, 갈 때는 돈을 옮겨야 하는 지라 상당한 실력자들을 고용한다. 유시리안은 주머니에서 감정서 딸린 투박한 유리와 같은 손톱만한 무언가를 건넸다. 보석이나 감정서를 확인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은 놀란 눈으로 감정서를 읽어 내리다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 반지가 담긴 케이스를 만족스럽게 어루만지는 유시리안에게 무하가 물었다. “아까 그거 뭐야?” “락팔어라고 후카 중 하난데, 슬라임에서 나오는 거야.” “슬라임? 그렇게 강한 녀석은 아닌데, 그 몸에서 나온 게 금화 10000닢의 값어치가 있단 말이야?” “원래 후카가 있는, ‘이름을 부여받은 몬스터’는 대부분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강한 놈들뿐이지만 슬라임을 별개야. 그 놈은 후카를 건져내기 가장 어려운 놈이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놈도 이름 없는 몬스터였어. 최초로 놈에게서 후카를 건져낸 몬스터 헌터가 놈의 이름을 지었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얼굴을 하는 무하를 보며 좀더 덧붙였다. “그건 부르는 게 값이야. 매우 유용한데도 희귀하기 때문에 돈 많은 연금술사나 마법사들이 얼마가 됐든 얻어내려고 혈안이거든.” “헤에……. 백지수표 같은 건가.” 몬스터에게서 후카를 건져 낼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 그들을 칭해 몬스터 헌터라고 하는데 전 대륙에 걸쳐 그 수가 50이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마법사 길드나 용병 길드처럼 새로운 신분 계층으로 인정받지는 않았지만, 워낙 그 기술이 희귀하고 고급이기 때문에 웬만한 귀족보다도 대우받는다. 그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일류 헌터들은 연금술사와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황제보다 더 극진히 받들어지고 있다. 뭐, 머나먼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왜 부르는 게 값인 그것을 금화 10000닢짜리에 지불했어?” “어차피 크기가 작아서 그 정도 받을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이건 드워프가 세공한 반지라고.” ‘지워진 존재’는 아니지만 봉인된 대륙 저편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이쪽에서는 볼 수 없는 종족. 날 때부터 금속의 정령, 화염의 정령과 더불어 태어나는 장인들. 특히 금속의 정령은 그들 외의 종족은 맹약을 맺을 수 없다고 한다. 이쪽에서는 아주 가끔 유적에서나 나오는 그들의 작품을 유시리안은 무척 좋아했다. 오랜만에 하나 건졌다며 만족스레 웃었다. “뭐 봐둔 거 있어?” 반지 케이스에 봉인과 보호의 마법을 걸어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모인 보석들은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방에 진열된다. 집에서 이카미렌의 서재 다음으로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유시리안의 수집방이다. 유리덮개가 있는 선반으로 사방이 꽉 차 있는 앞으로 미닫이 선반이 몇 개고 겹쳐져 있어 다 구경하는 것도 일이다. 그 방을 구경한바 있었던 무하는 질린 듯 웃으며 카탈로그의 한 페이지를 짚었다. 그것은 심플한 디자인의 흑색을 띈 금속 귀걸이였다. 그 이름은 거창하게도 몽환의 바람이었다. “기능이 마음에 들어.” “기능?” 카탈로그의 써져 있는 글귀 중 눈에 들었던 것을 작게 읊었다. “제 2기 마도의 유물. 깃들어 있는 꿈의 정령이 보고 싶은 꿈을 꾸게 해줍니다.” “꿈의 정령을 어떻게 안에 담아놨지? 정령은 메리트가 없는 한 절대 구속당하는 짓 같은 것 안하는데.” “내 팔찌의 두 정령처럼 뭔가 만족할만한 조건이 있었겠지. 어쨌든 재밌을 것 같아.” “꾸고 싶은 꿈이라도 있는 거야?” 무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악몽은 안 꾸게 해줄 거 아냐.”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다. 악몽의 정도 꿈의 정령 중 하나다. 설명에 보고 싶은 꿈을 꾸게 해준다고 한 것을 보면 한 속성에 묶여 있는 하위 정령은 아닌 것 같지만. “또 이 귀걸이들도 금방 써버릴 테니, 다른 귀걸이를 사두는 것도 괜찮잖아? 이건 반영구적인거래.” “꿈의 정령이 영원히 하나에 묶여 있을 리 없는데. 장착하고 나면 조건을 말해올지도 모르겠다.” “헤에, 신기한데.” 기대감에 웃음을 흘렸다. 이제 순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카탈로그 보면 참 재밌어.” “뭐가?” “종이 안에서 영상이 계속 움직이며 상품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재밌고, 옛 유물이나 희귀 마법 물품 설명해 놓은 거 보면 꼭 RPG 게임 속 아이템 목록을 보는 것 같아서 재밌어.” “RPG 게임?” “음…….” 설명할 길이 없어 한참 우물대다가 그냥 그런 게 있다고 넘어갔다. “아! 나왔다!” 무하가 점찍어둔 물건이 나오자 사회자가 감질나게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보석과 돈은 꽤 있으니 어떻게든 사고 싶었다. 정령분야에서는 백지상태나 다를 바 없는 무하에게 정령이 깃들어져 있는 물건은 무척 신기한 것이었다. “몽환의 바람. 금화 18000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고대 유물인데다 마법 물품인지라 처음부터 값이 엄청났다. 유시리안이 산 반지도 고대 유물이긴 했지만 다행이도 그것을 알아본 자가 없었기 때문에 헐값에 산 것이다. 시작된 가격을 듣고 유시리안은 운이 좋았다며 재차 웃었다. 무하는 예상 밖에 높은 가격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한번쯤이야 과하게 지출해도 괜찮겠지, 하고 손을 들었다. 그때 그들이 앉은 테이블 옆으로 새로운 손님들이 들 어와 앉았다. 경매가 벌써 중반에 접어든 참인데, 퍽 늦은 참여였다. 급히 왔는지 앞에 놓인 물을 벌컥 마시며 숨을 골랐다. “불구경하다가 놓칠 뻔 했네.” “그러게 그냥 가자고 하지 않았나! 사려고 했던 노예가 벌써 팔렸음 어쩔 건가? 곧장 이리로 오자니까 저 멀리 불난 곳까지 굳이 돌아가다니!” “싸움구경과 불구경을 지나치면 벌 받아. 또 네 놈이 점찍은 건 고급품이라 후반에나 나올 거라고 했으니까 괜찮아.” “이미 팔렸기만 해보게.” 그리고는 서둘러 카탈로그의 뒷부분을 펼쳤다. 고급 노예부분을 훑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책을 펼친 채 테이블 위에 놓 고 한층 여유 있게 와인을 마셨다. 그 앞에서 친구인 듯한 남자가 킥킥 웃으며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위풍당당한 녀석 집에 불이라니. 전에는 근신을 받더니 이번에는 불인가. 꽤 불길하지 않아?” “그래봤자 그는 기사니 사지가 잘려나가지 않는 한 타격 따윈 안 받는다. 또 불난 곳은 별채라고 하지 않나.” “그래도 꼴좋잖아. 황태자가 비호해준다고 기세등등해서 오만방자하게 겉돌더니. 결국 패전에 근신에. 킥킥.” 남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인양 남자는 계속 웃어댔다. 듣고 싶지 않아도 바로 옆에서 떠드는 터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던 무하는 다시 가격을 올리기 위해 손을 들며 한숨을 쉬었다. 듣기만 해도 한심한 작자다. “한심한 소리 그만하고 카탈로그나 보게. 자네도 살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참!” 계속 값이 오르는 동안에 그 남자는 자신이 사고자 했던 것을 발견하고 켁! 소리를 냈다. “지났잖아!” “자업자득이군, 그래.” “젠장! 어떤 놈이야!” 어떻게든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만큼 권세가 있다는 뜻일까? 단순히 귀족이기만 해서는 불가능할 테니. “그깟 반지 때문에 귀족들과 분쟁을 일으킬 생각인가?” “그깟 반지라니!” 반지라는 말에 괜히 신경이 쓰였지만 억지로 끊고 다시 손을 들었다. 아직도 가격은 계속 오릴 기세였다. 다들 고대 물품이라는 것에 눈이 뒤집힌 모양이다. 벌써 금화 37500닢까지 올라갔다. “알고 놀라지 말게. 내가 알아 본 바로는 그건 드워프제야!” “뭐?” 노예를 사려했던 남자가 카탈로그를 다시 들어 앞부분을 뒤적거리더니 김빠진 얼굴을 했다. “뭔가 착각한거 아닌가? 그런 말은 없는데?” “그쪽 감정사를 매수했지. 근데 하필이면!” 머리를 마구 쥐어뜯더니 으르렁 거렸다. “아악! 내 녹양의 샘! 어떤 수를 써서라도 되찾아오고 말테다! 망할 아클렌 자식! 녀석이랑 관련 되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니까! 젠장! 아예 본채에까지 불을 질러놓고 오는 건데!” “말조심하게! 벽에도 귀가 있는 법일세.” 처음에는 귀에 익은 명칭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뜻밖의 이름에 놀랐다. “율!” “들었어.” 감히 자신의 것을 앗아가려 작심하는 작자를 냉랭한 눈으로 보며 답했다. 물론 무하가 불안해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별채라면…….” “진정해. 별채는 우리가 머문 곳 말고도 많아.” 느긋하기만 한 유시리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찡그리는 무하였다. 요크노민과 제그가 그곳에 있지 않은가. 만약 자고 있었다면 꼼짝없이 화를 당했을 수도 있다. 안절부절 못하는 무하의 볼을 툭툭 치며 웃음기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안 사?” “50000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사회자가 재차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꽤 떨어지고 마지막에 크게 부른 귀부인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무하는 한가한 소리를 하는 유시리안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 가보자.” “알았어. 근데 저거 안 사?” “더 없으십니까?” 무하는 짧게 혀를 차고 검지와 중지를 붙여 들었다. “55000 나왔습니다!” 하필이면 타이밍이 낙찰을 선언하기 직전이라, 완전히 마음 놓고 기뻐하던 귀부인이 울컥하며 검지를 들었다. 실은 이미 예산초과였지만 귀족 특유의 쓸데없는 오기란 것이 작동한 것이다. “56000 나왔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던 무하는 다시 검지와 중지를 붙여 들었다. “61000 나왔습니다!” 옆에서 유시리안이 얄밉도록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결국 72000을 치루고 몽환의 바람을 손에 넣은 무하는 물건을 받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느긋한 유시리안의 팔을 잡아끌며 나직이 투덜댔다. “걱정도 안 되는 거야?” “펠이 내 옆에 있는데 웬 걱정? 남의 집 타는 것까지 걱정해줄 의리는 없어.” “민이나 제그 씨가 있잖아. 그쪽 별채가 탄 거면 어떻게 해. 또 샤가 와 있을 지도 모르는데!” 유시리안은 깔깔 웃어댔다. “샤가 있다면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지. 그 녀석은 수해(水海)술사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소리를 치려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멈칫했다. 한 남자가 둘을 바싹 쫓아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좀 전에 옆에서 떠들어 대던 두 남자 중 하나로, 녹양의 샘을 사기 위해 뒷공론까지 했던 자였다. “이봐, 좋은 물건을 샀더군?” 무하가 자신을 발견하자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친숙한척 유시리안의 어깨에 손까지 짚었다. 하필 그쪽 방향의 손을 무하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제때 뿌리치지 못하고 미묘하게 인상을 썼다. 그러면서도 무하에게 잡힌 손을 놓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유시리안다웠다. 그는 대신 짧게 되물었다. “너 나 알아?” “아, 이거 실례. 난 페이야 위프릭 아 카르민. 자네는?” 페이야 가의 사람이었던가. 게다가 앞에 성을 붙이고 ‘아’를 말했다는 것은 가주 계승권자라는 뜻. 굳이 풀 네임을 말했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와 세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그에 유시리안은 같잖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감히 이름 따위로 압박하려 들다니, 천년은 이르다. 게다가 이쪽 이름을 물어보는 것을 보아 유시리안의 얼굴조차 못 본 모양이다. 가주 계승권자여도 제대로 실세를 못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긴 페이야 가에는 라인 세마로스와 란인 디이나가 맹활약중이니까. 아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겠지. “이곳에서 서로를 알려하는 건 금지야, 애송이.” 맞는 말이지만 참으로 듣기 거슬리는 어조에 호칭이었다. 위프릭은 웃던 얼굴 그대로 딱딱하게 굳다가 빠득빠득 이 가는 소리를 냈다. “난 지금 내 이름을 밝혔잖은가!” 그 말에 유시리안은 냉기 도는 조소를 지으며 뻔뻔하게 물었다. “내가 언제 네 이름 물어봤어?” “크……!”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이 안나오는 모양이다. 유시리안의 어깨를 잡은 손을 꾹 쥐며 부들부들 떨기까지 한다. 이에 유시리안은 어깨를 부드럽게 뒤로 빼 손을 뿌리쳤다. “율! 지금 이러고 있을 때야?” 시비가 길어질 것 같자 무하가 혀를 차며 면박 주었다. 유시리안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웅얼댔다. “내 탓이 아니잖아. 저 녀석이 먼저 접근한거라고. 어깨도 아프게 꽉 잡고. 그게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저런 애송이를 상대하겠어?” 그리곤 짐짓 아프다는 얼굴로 잡혔던 어깨를 다른 손으로 쥐었다. 물론 엄살이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성격 탓이다. 무하는 잡고 있던 유시리안의 손을 슬며시 놓으며 퉁명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염려어린 눈으로 어깨를 살피는 눈치였다. “괜히 말을 그렇게 하니까 오해를 사는 거잖아.” 위프릭은 이 남자가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하는 얼굴로 무하를 보았다. 제멋대로 과민반응 보인다고 비꼬는 것인가? 하지만 도대체 오해할게 뭐가 있는가? 유시리안은 생글 웃으며 무하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자자, 가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아, 응!” 두 사람 모두에게 깨끗이 무시당한 위프릭은 빠르게 달려가는 둘을 보며 입만 벙긋벙긋 했다. 대부분 그의 이름만 들으면 알아서 기었기 때문에 저런 안하무인인 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면역이 안 되어 있는 것이다. 문을 열고 나가던 유시리안이 잠시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처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괜한 호감이 들어 처음에 세게 나가지 못하고 친한 척 접근했던 것이다. 비록 그 입이 열리자마자 환상이 깨졌지만. “덕분에 싸게 샀다. 수고했다고는 해두지!” 얄밉게 한마디 덧붙이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여전히 입만 벙긋하는 위프릭에게 그의 친구가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애도를 표했다. “바람맞았구먼.” “저……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문을 가리키며 뭔가 말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을 동정어린 눈으로 보던 그의 친구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저 미인도 드워프제인걸 알았던 모양일세.” “저 새……!” 마침내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친구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자네한테 그런 취향이 있을 줄은 몰랐네. 하긴 저런 미모정도라면 없던 남색기도 동할만하지. 이해하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막 울분을 토하려던 순간에 막혀서 더욱 울화가 치밀었는데 이놈은 뜬금없는 소리만 해댄다. “아, 내가 점찍은 물건 차례군.” 싹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비슷한 세력을 가진 녀석인지라 패버릴 수도 없었다. ‘그 기생오라비 녀석보다 저 녀석이 더 열 받아!’ 속 편히 손을 들며 경매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친구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속으로나마 고함을 질렀다. 원래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얄밉기 마련이다. 그 건물은 비정상적으로 잘 탔다. 누군가 작위적으로 꾸민 것이 아니고서야 락아타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목재를 애용하는 만큼 그로 인해 생길 위험에 철저히 대안을 짜두는 락아타다. 건물에 강화, 방수, 방화 등의 마법을 거는 작오라는 직종까지 따로 있을 정도다. 특히 저 건물은 한창 득세중인 타안 가의 고급 별채. 귀한 손님을 모시는 곳이니 만큼 본채만큼 유독 신경을 쓴 곳이다. 하물며 바로 어제, 손님들이 본채에서 식사 중 일 때 작오를 불러 한 번 더 마법을 걸어두기까지 했다. “노려진 건가.” ‘우연히’로 넘어가기에는 이쪽이 사전에 대비해 둔 게 너무 많다. 게다가 저 별채에 묵던 사람들 중 도처에 적이 깔린 유시리안이 있다. “하지만 그를 노린 것이라면, 저 정도 가지고는 안당할걸 뻔히 알 텐데.” 뭔가 다른 것을 노린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휘하 마법사들이 죽어라 진압하고 있었지만, 불길은 영 사그라질 기미가 없다. 그것 역시 작위적인 수작임을 증명해준다. 타안 가의 마법사라면 최소 4써클 마스터는 된다. 그런 마법사가 셋이나 달려들고 있는데 진압은커녕 수그러들지조차 않는다니. 이걸 자연 발화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바보라고 명명해 줄 용의가 있다. “안에 손님들은 어찌 되셨느냐?” “그, 그게 아직 확인이 안됐습니다.” “흐음.” 타고 있는 별채가 고급이라는 것은 안에 있을 사람들이 귀한 손님이라는 뜻. 질문에 답하는 휘하 마법사는 송구스러운 얼굴로 어쩔 바를 몰라 했다. 만약 깨어 있었다면 불이 났을 때 뛰쳐나오거나, 비명이라도 질렀을 텐데 여태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불이 난지 꽤 됐는데도 소식이 없는 것이 불길한 추측을 하게 한다. 그런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는 마법사과는 대조적으로 아클렌은 여유로웠다. 유시리안과 락샤사, 그리고 무하는 나가서 부재중이라고 하지만, 저 안에 있는 자들은 페이야 공께서 친히 의뢰한 길드에서 온 실력자들이다. 그것도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페이야 공과 타안 공, 즉 아클렌의 아버지가 인정한 실력자. 이 정도에 당할 리 없다. “아클렌 경!”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빠른 속도로 두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날아온 남자들 중 말을 건 남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아, 무하 씨. 가셨던 일은 잘 보셨소?” “아, 예. 그럭저럭…….” 아클렌이 느긋이 질문을 던지자 얼떨결에 답하던 무하는 지글지글 타오르는 집을 보며 놀라 정신을 차렸다. “민은요? 제그 씨는?” “아직 안 나왔소.” “……네?” 너무 태연한 아클렌의 모습에 멍하니 반문했다. 옆에서 유시리안이 삐딱하게 팔짱을 끼며 불타고 있는 별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이 났다는 별채가 여기였군.” “벌써 소문이 퍼진 건가?” “어느 촉새가 떠드는 소리를 들었지.” “그런가.” 무하는 어이없는 얼굴로 둘을 보다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무하?” “들어가겠어.” 막 뛰어 들려는 순간 안쪽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어?” 불을 등지며 나오던 그는 막 뛰어들려는 무하를 보며 얼떨떨한 음성을 냈다. 그 어깨에 강렬한 화염의 여인이 빙긋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무하는 자신의 지기가 어떤 힘을 가진 자였는지 새삼 떠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불에 있어서 그의 지기를 절대 안전하다. 화염의 정령과 맹약을 맺은 자도 화상을 안 입는데, 하물며 화염의 수장의 맹약자가 당하겠는가. 당황해서 미처 생각해내지 못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지만 무의식중에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불의 일렁임이 비쳐 기괴해 보이는 하얀 가면 속에 남색 눈동자가 의문을 띠더니 이내 웃음을 지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상황파악이 빠른 녀석이다. “뭐하냐?” 이어서 나오던 제그가 문 쪽에서 멀뚱히 서 있는 두 남자를 보고 퉁명하게 물었다. 그의 말투는 원래 저렇다. “아아. 일단 피하자.” 제그를 돌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며 답하더니, 딱딱하게 서 있는 무하의 어깨를 툭 치고 스쳐 달렸다. 뒤늦게 무하도 그를 따랐다. “오!” 화제를 진압하는데 급급하던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탄성을 질렀다. 사라지고 있긴 하지만 저 기품 넘치는 화염의 새는 분명 기록에서 전해지는 화염의 정령! 게다가 저 위압감은 틀림없는 수장의 것이다. 탄성 속에서 화염의 새는 우아하게 홰를 치며 사라졌다. “늦었소.” “꾸물대기는.” 감탄하는 마법사 속에서 아클렌과 유시리안이 위와 같은 말을 하며 느긋하게 그들을 맞았다. “미안합니다. 짐 좀 챙기느라고요. 이번에 산 것을 미처 배낭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저 정도 불에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 여유가 있을 줄은 몰랐소.” 민은 농조로 말하는 아클렌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곤 불타는 별채를 잠시 돌아보았다가 아클렌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물었다. “작오는 언제?” “유감스럽게도 어제였소.” “역시.” 고개를 끄떡이더니 한층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에서 자객을 만났습니다.” “……!”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그럽시다.” 아클렌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뜻밖에 거물이 왔었군.” 한밤중의 소동에 이미 깨어있었던 셀반이 꺼낸 첫마디였다. 그 화살의 표적인 민은 특유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무하나 유시리안, 제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아클렌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와 민을 번갈아 보았다. 셀반은 아들을 배려한다기보다는 확인 차 되짚었다. 꽤 흥분한 터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 “설마 레타 마스터가 직접 올 줄은……. 한창 바쁠 때일 텐데.” 바쁘기야 죽도록 바쁘다. 고작 두어 시간 정도의 수면이 눈물겹게 행복할 정도로. 부상으로 부재중이었을 동안 누적된 일거리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암담할 지경이다. 게다가 이번 의뢰는 한달 정도의 시간이 들 예정이니 돌아가서의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갑자기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 하고 싶어지는 것을 꾹 눌러 삼키며 애써 웃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뿐입니다.” “레타 마스터……?” 민이 긍정을 하자 아클렌이 멍하니 되물었다. 민은 눈을 가늘게 하며 미소했다. 셀반이 가볍게 혀를 차며 대신 답했다. “너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거 아니냐. 청염의 마스터 말이다.” “아…….” “이제와 생각해보면 못 알아 본 게 이상했군. 늘 하얀 가면을 쓰고 다니고 남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장신의 남자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러더니 테이블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민의 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럼 그 검은 훼크미렌아인가.” “꽤 소식이 정통하시군요. 과연 타안 가의 저택을 수도에 지은 분답습니다.” 락아타 역시 수도에 저택을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큰 세력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락아타에서, 타안 가는 자르카이면서 수도에 저택을 가졌다. 가주인 셀반은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정치가이며, 그의 아들인 아클렌은 근위기사단의 단장이자 뛰어난 검객이다. 이토록 위풍당당한 타안 가를 여기까지 키운 사람이 바로 지금의 가주, 셀반이다. 그 전까지 타안 가는 중상위권 정도의 가문에 불과했다. 셀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표면적인 가치에 끌려 온 것은 아닐 테지.” “물론입니다.” 민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던지 셀반은 긴장한 근육을 풀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 얘기는 의뢰 완료 후에 하기로 하지. 자객을 만났다고?” “예. 덕분에 불 속에서 좀 날뛰었습니다. 가구들을 많이 훼손했습니다만……어차피 내버려 둬도 탔을 것들이니 그냥 넘어가 주십시오.” 그렇게 적당히 농을 섞어가며 웃다가 제그를 돌아봤다. 그러자 제그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체격은 보통인데 무척 날쌨습니다. 마법전사로 최하 4써클 마스터입니다. 안쪽에서 이것에 불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연금술사가 조제한 가루인데 화약의 종류로 베크야라고 합니다. 화염속성 몬스터 베크라의 후카를 가공해서 만든 거라 작오가 걸어둔 보호 마법 정도는 가볍게 박살낼 수 있지요” 챙겨 놓은 주머니를 꺼내 주둥이를 벌렸다. 붉은 빛의 베크야가 독한 향을 뿜고 있었다. 원재료인 베크라의 후카에는 향이 나지 않지만 특수 가공을 하는 도중에 생겨난다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불쾌한 향이기 때문에 얼른 묶었다. 그리고는 슬쩍 품안에 갈무리했다. 베크야는 없어서 못 구하는 희귀품이었다. "그 자객은?” “거의 잡았었는데 스크롤로 도주했습니다.” “아, 도주 전에 바람의 정령도 부렸었습니다.” 민의 답에 이어 제그가 덧붙였다. 자객을 놓친 게 분했는지 그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민이 짐을 챙기는 동안에 제그가 자객을 발견, 상대한 터라 자객을 놓친 건 순전히 그의 실책이었다. 움직임은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고 마법 실력마저 뛰어났으며, 마지막에는 바람의 정령까지 부렸었지만 상대는 아마추어였다. 그런 자에게 프로인 제그가 당했다는 것은 퍽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무엇을 노린 것이라 생각하나?” “저희 중 누군가를 향한 개인적인 원한, 아니면 저희들 모두에게 보내는 경고. 둘 중 하나겠지요.” “개인적인 원한이라면…….” 셀반은 노골적으로 유시리안을 바라보았다. 무관심하게 앉아 있던 유시리안은 그 시선에 피식 웃었다. “내가 표적이었다면 저렇게 무르게 대처하지는 않을 거다.” “유시리안 씨는 아닙니다. 제 감입니다만, 상대는 이쪽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은 어쨌거나, 이성적으로는 민과 마찬가지 생각을 했던 셀반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의뢰를 맡지 말라는 경고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이번 의뢰 일정 동안 한층 더 주의를 기해야겠군. 느긋하게 있을 틈도 없다. 그들이 이쪽에 대해 파악하지 못할 거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서두르는 편이 좋겠다.” “레이디 디이나, 아사라느는 빠지는 편이 좋겠습니다. 레이아사의 날은 이번이 아니어도 삼년 후에 또 있습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괜찮습니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문가에서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뒤늦게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이나님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모셔라.” 셀반은 불쾌한 낯으로 딱딱하게 허락했다. 문이 열리며 평상복 차림의 디이나와 아사라느가 들어오자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기척도 하지 않고 엿듣다니. 되먹지 못한 행동이다. “좋지 못한 것을 배우셨소.” “죄송합니다. 제 이름이 거론되기래…….” 디이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가볍게 혀를 차는 것으로 넘어갔다. 아클렌도 비슷한 실례를 얼마 전 페이야 가에서 저지른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디이나는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다시 한번 깊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예의에 민감하고 고지식한 셀반인지라, 자식의 실례를 알게 되면 당사자인 페이야 가주가 용서했다 해도 자신이 용서 못할게 뻔했다. 아클렌에게 악감정이 없는 이상에야 굳이 화근이 될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괜찮습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번에 가야할 이유가 있습니까? 레이아사의 날은 삼년 후에도 있습니다.” 디이나와 아사라느가 뭔가 다른 목적으로 동행을 청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민은 그리 말했다. 곤란한 듯 입술을 달싹이던 디이나는 고집스럽게 숨을 삼키며 민을 보았다. “어차피 늘 암살 기도에 시달리는 처지입니다. 이처럼 강한 분들과 함께 갈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지요.” “그렇다면 이쪽은 이중고입니다. 레이디 디이나를 쫓는 암살자와 의뢰 달성을 막으려는 방해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니까.” 제그였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갈색 눈동자가 맹렬한 조소를 품고 있었다. 디이나는 대범하게 받아쳤다. “레타 마스터와 동행중인 귀족을 노릴 암살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지 않는군요.” 레타는 도둑과 암살자들의 길드. 확실히 자신의 마스터와 함께 있는 자를 노리지는 않을 것이다. 미소를 잃지 않던 민의 눈에 냉기가 가라앉았다. 그의 입술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경솔하시군요.” 그리고는 그 입술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어차피 카르민께서 고집을 부리신다면 미천한 저희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뜻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죄송합니다.” 디이나는 가볍게 목례했다. 민은 그에 응하지 않고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쪽의 변동사항이 생겼습니다. 페이야 공께 전해주십시오.” “무엇을……?” “제그는 이번 일정에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요. 페이야 공께 양해를 구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어차피 그쪽의 인원은 그쪽에서 알아서 하실 일. 아버님은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제그는 흘낏 민을 보았다가 이내 무관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쪽에서의 행적이 알려진 이상, 이곳에서 머무는 것을 현명하지 않았다.유시리안과 무하, 그리고 민과 제그는 여관에서 묵기로 했다. 용병용 여관은 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용병용 여관은 그 경호가 확실히 되어 있기 때문에 불을 지른다든가 하는 수작은 부릴 수 없다. 다들 잠만큼은 마음 편히 푹 자고 싶었다. 마침 삼인실 하나, 이인실 하나가 남아 제그와 민이 한방을 쓰기로 했다. 침대 위에 짐을 내리며 민이 말했다. “넌 돌아가서……. 아니, 이쪽 지점에서 알아보는 편이 더 낫겠다. 일단 산형님께 기별을 넣고 그쪽에서도 알아봐 달라고 해. 키르바나에게도 말해두고.” “그 자객에 대해서 말인가?” “아아. 네 말대로라면 분명 그 자객은…….” 민의 목소리가 극히 낮아졌다.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제그는 격투 중 그 자객의 복면을 일부 찢었었다. 그때 그가 본 것은 분명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 “엘프야. 그것도 초목의 엘프.” “이번 의뢰, 즉 마족과 신관 사이의 문제에 엘프도 끼어 있다는 뜻인가?” “그럴 공산이 커. 이번 의뢰는 극비에 진행되고 있었어. 아는 자가 극소수인 만큼, 범위도 좁아지지. 디이나의 입을 통해 아사라느, 그리고 엘프들에게 전해졌을 거야. 좀 전에 아사라느의 안색을 보면 그녀는 이번 화재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보여. 그 여자는 내가 일정 중에 감시해 볼 테니 너는 엘프 쪽을 맡아줘.” “세부적으로, 정확히 뭘 알아보면 되는 거지?” “엘프들의 현재 동태. 그리고…….” 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얼마 전에 아이세란의 서재에서 극비서류를 발견했다. 레타 마스터에게 전해지는 문장을 매개체로 한 마법 공간 속에서 어렵게 발견한 그 안에는 아이세란을 비롯한 역대 레타 마스터들이 모은 진귀한 정보가 담겨있었다. 상인 및 귀족들의 비밀 공간 및 저택의 비밀 통로 따위로 시작해서 넓게는 알려지지 않은 고대 미궁과 유적, 그리고 그 설계 도면까지 있었다. 심지어는 비밀주의인 몬스터 헌터, 연금술사의 길드 본거지까지 상세하게 조사되어 있는 서류들이었다.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을 방대한 서류 속에서 민이 그것을 본 것은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그것에는 대 용병단 곤크의 현 마스터의 정체에 대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산에게 말해 곤크에 간, 록에게 연락을 넣도록 해. 곤크 내에 이상한 기류 따위가 흐르고 있지 않는지. 그쪽 마스터가 2년 만에 돌아왔다고 했지?” “아아. 그게 왜?” “잠적한 시기가 몬스터 사태의 시작과 맞물려. ……우연일 확률이 크지만 알아봐서 손해 볼 건 없겠지.” 민은 의외의 실마리에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본 제그는 음산한 미소라며 퉁명하게 말했다. 재차 말하지만, 그는 원래 말투가 그렇다. 배 특유의 흔들림은 많은 사람들의 속을 뒤집는다. 오랜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심심치 않게 배를 타온 유시리안이나 신체 구조 자체가 다른 락샤사야 멀미와는 거리가 먼 녀석들이었지만, 바다가 바로 옆인 락아타의 수도에 살았으면서도 장기간 배를 타본 적이 없는 디이나는 어제부터 멀미에 굴복했다. 아사라느도 깊고 울창한 숲에서 살아 배를 타본 적이 없지만 락샤사처럼 신체 구조가 달라 멀미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녀는 디이나의 옆에서 꼭 붙어 간호하며 간간이 맑은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럴 때면 멀미 기운도 가라앉는지 디이나의 혈색이 나아지곤 했다. 민과 무하는 배 끄트머리에서 광활한 바다에 푹 빠져 있었다. 둘 다 이렇게 배를 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민은 제그가 만들어준 마법시약을 미리 먹었기 때문인지 멀미를 하지 않았다. 그 둘의 옆에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당기는 빼어난 미남 유시리안이 서 있었다. 바닷바람에 한껏 흩날리는 백금발이 거슬리는지 드물게 땋아버렸다. 대충 땋은 것이라 단정하지 않고 헝클어진 기미가 뚜렷했는데도 멋있어 보이는 것은 미남의 특권이리라. 보라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물론 무하였다. “펠도 시약을 먹었던가? 멀미를 안 하네.” “응? 아아. 나도 뜻밖이야.” 무하가 싱겁게 웃음 지었다. “디이나처럼 자리보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처음 타보는 거니까.” “체질이지, 뭐.” 민이 받아넘기며 몸을 돌렸다. “안에 들어가게?” “응. 모처럼만에 휴식이니까 푹 쉬어두려고.” 그렇게 말하는 민은 처음에도 배에 타자 자신의 선실에 결계를 치고는 그대로 고꾸라져 잠이 들었었다.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자고 일어났으면서도 아직도 피곤한지 연신 눈가를 문질렀다. 이쯤 되면 시약덕분에 멀미를 안 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할 새가 없었던 거라 봐도 된다. “그럼 난 더 잘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알아서 해결하고 부르지 말아줘.” 민이 걸어가며 무성의하게 말하는 것을 보다가 유시리안과 무하는 동시에 쿡 하고 웃었다. 민의 발걸음이 약간 불안정한 것이 보는 사람까지 피곤해질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서 충분히 처리해줄 것이란 믿음을 가져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간 정말 쉴 새가 없었던 모양이야. 늘 바빴는데 근래 들어서는 장난이 아니었데.” 다시 시선을 돌려 바다를 보다가 문득 물었다. “샤는 여전히?” “여전히 보는 쪽이 불안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선수의 마스코트에 서있지. 바다내음이 가장 잘 맡아지는 곳이니까.” 미소 지으며 답하는 모습이 확실히 아름답다. 무하는 새삼 자신의 주위에 아름답고 멋진 남자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시리안이나 락샤사, 이카미렌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형 테밀시아는 절제된 남성미가 멋지고 뮤비라는 예리한 날을 숨긴 가면에 깃든 매력이 아름답다. 요크노민은 경박하지 않은 노련함이 돋보이고 클랜은 자상하며 따뜻한 눈빛이 인상 깊다. 하나같이 각기의 개성적인 멋을 지닌 사람들……. 그러고 보면 시륜도 그 독특한 매력이 짙은 녀석이었다. “아!” “왜 그래?”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불현 중에 생각난 것이라 약간 흥분하여 말하는 무하의 말을 본의 아니게 민이 잘라먹었다. 선실로 내려간다던 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되돌아와 둘을 부른 것이다. “무하! 유시리안 씨!” “응?” “……?” “선장에게 선물 받았어.” 들어 올리는 것을 보니 술병이다. 연한 하늘빛 액체가 투명한 병 속에서 찰랑거렸다. 락아타의 특산품, 산매주였다. 락아타 수도 근처의 해저에서만 나는 검보라색 열매, 산매로 맺은 술로 열매의 색과는 다른 맑은 빛깔이 도는 게 특징이다. ‘욤의 야매주’라 불리기까지 하는 락아타의 최상급 술이지만, 그것은 야매주와는 달리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퍼지래야 퍼질 수 없는 성질머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장인들에게 비밀스레 전승되는 가공법으로 빚은 바닷물로 맺는 산매주는 숙성되는 곳도 바다 안이라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해저에 내려놓은 독을 끌어올려야 한다. 헌데 이 까다로운 녀석은 바다에서 벗어난 것은 이삼일만 지나면 맛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마법진을 이용할 수 있는 극소수의 귀족들이나 간혹 즐길 뿐 그 외의 사람들은 좀처럼 맛볼 수 없다. “샤가 좋아하겠군.” 유시리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산매주도 괜찮지.” 바다의 독특한 내음이 흠뻑 묻어나오는 모습으로 나타난 락샤사는 유시리안이 따라주는 술의 빛을 감상하며 말했다. 유시리안은 민이 비우고 내려놓은 잔에 다시 가득 따라놓고 병을 내려놓았다. 술을 즐기지 않는 무하는 처음 따른 잔을 아직도 비우지 못하고 있었다. 유시리안은 몇 모금 마시고 만족스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카도 좋아할 것 같아.” 한 모금 들이킨 락샤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입안에서 굴러 넘어가는 술맛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목안으로 넘겨가는 부드러운 감촉이 제법이었다. “술은 요정들이 빚은 게 제일이다. 술이 주식이니까.” 꿀꺽꿀꺽 한 잔을 비운 락샤사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북쪽 대륙의 야매주, 서쪽 대륙의 산매주, 남쪽 대륙의 려매주, 동쪽 대륙의 설매주. 다 요정들이 이쪽의 재료를 연구해서 빚고, 전파한 술들이다. 그 중 맛이나 보존, 관리가 쉬운 것이 야매주가 제일로 꼽히지. 나도 그게 제일 괜찮더군.” “요정들이 만들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민이 호기심을 보였다. 무하도 요정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졌다. 이곳에는 그들이 실재한다는 것인가? “이제는 보기 힘들다. 그들은 신뢰와 우정을 제일로 여기는 종족. 자신들이 친구라 믿었던 자들에 대한 실망이 속계, 혹은 물질계라 불리는 이쪽 세계에 대한 실망으로 번져 더 이상 이곳에 발을 딛으려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우정을 안타까워해봐야 엎질러진 물…….” 락샤사는 눈을 내리뜨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에 취한 것일까. 말이 많았다. 불칸과 연인 관계이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누었던 민은 간혹 그녀가 내뱉는 제 1기 마도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말하는 중에 무심코 나온 이야기일 뿐, 그녀는 깊은 내용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멸망 때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때면, 스스로 말해 놓고도 불쾌감에 휩쓸렸었다. 때문에 끝을 흐리는 락샤사에게 뒷이야기를 더 묻지 않았다. “간혹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락샤사는 작게 혼잣말을 하다가 다시 술을 마시는데 집중했다. 그런 락샤사를 덮어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갑자기 생각난 건지는 유시리안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뭔가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 까맣게 잊고 있던 무하가 유시리안의 말에 아, 하며 탄성을 내며 허리를 곧게 폈다. “전에 말했던 내 지기 기억해? 시륜이라고…….” “기억해.” 자신이 아는 녀석과 비슷하게 생겨 먹었으면서도 제대로 된 또 다른 녀석. 시륜 녀석과 비교돼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다. “그 녀석도 눈동자가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였거든? 근데 전에 노……아니, 민이 초목의 엘프는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를 가졌다고 하지 않았어?” “아아…….” 유시리안도 새삼 자신의 친구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상착의가 너무 같다. 게다가 녀석은……. “펠. 곤크에서 그 시륜이라는 지기를 본 적이 없다고 했지?” “응? 아, 응.” “…….” 카 등급의 용병을 마스터가 한번도 안 만나 봤을 리 없다. 당연히 입단시 면접을 봤을 터. 유시리안은 더욱 의아해져서 확인 차 물었다. “곤크에서 그 마스터 녀석 만나봤지?” “아니.” “그래, 아니구……뭐!?” 무심결에 고개를 끄떡이던 유시리안이 급히 반문했다. 무하는 산매주를 한 모금 마시고 답했다. “내가 만난 건 부관뿐이야. 마스터는 내가 입단 했을 때부터 쭉 부재중이었어. 부관도 이렇게 오래 잠적한건 처음이라며 걱정했었는걸.” 유시리안은 멍청히 무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하는 그 라이시륜을 두고 사람을 잘 다룬다고 했다. 확실히 사람들은 뒤에서 뭐라고 불만을 터뜨리든 라이시륜의 앞에서는 그의 말에 복종했다. 본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것이다. 또 차가운 느낌은 드는데 장난기가 많다고 했다. 매사에 비틀리고 차가운 그 녀석을, 늘 누군가를 향해 냉소를 짓는 그 녀석을 그렇게 말했다. 재밌고 멋진 녀석이라고 했다. 뒤틀릴 대로 뒤틀려 상대하는 쪽이 질려버리는 그 녀석을 그렇게 말했다. 의아해 하는 무하나 민을 앞에 두고 한참을 웃어대던 그는 힘들게 물었다. “그 지기라는 녀석 말이야.” “……?” 유시리안은 눈물까지 훔치며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자기 키만한 대검을 다루지 않았어? 전체가 칠흑색이고 손바닥만한 보석이 달렸고, 녀석의 몸으로 사라지는 대검.” “어떻게 알았어?” “역시! 하하하!” 어리둥절해 하는 무하와는 달리 감 잡은 민은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시리안의 그 ‘뒤틀린 친구’에 대해서는 모른다. 하지만 곤크 마스터의 기록을 봤고, 무하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랬건만 둘을 전혀 연상하지 못했던 자신이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꼭 유시리안이나 민의 탓이라 볼 수는 없다. 라이시륜이라는 남자에 대한 무하의 주관적인 평가가, 그를 일컫는 대외적이고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평가와 너무도 다른 것이다. 그러다 민은 불현듯 제그에게 지시한 일을 생각해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곧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쪽이 곤크와 대립한다는 것도 아니고 동태를 살피겠다는 것뿐이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록이 레타 소속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주기까지 했다. 피차간에 적대할 이유는 없다. “아무튼 이상한 데서 인기가 많다니까.” 유시리안의 웃음 섞인 진담에 민 또한 동의했다. 그렇게 자세한 설명 없이 웃기만 하는 유시리안과 이미 그 속을 읽어 다 알고 있는 락샤사, 그리고 감 잡은 민을 번갈아 보며 무하는 의아함에 어깨를 으쓱여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유시리안에게서 그의 ‘친구’의 이름을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민은 혼잣말처럼 나직이 속삭였다.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거야.” “도대체 율은 왜 웃는 거야? 민도 묘한 소리나 하고.” “하하하!”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유시리안을 보며 민은 어쩔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무하는 포기했는지 작게 한숨을 쉬며 술잔을 움켜쥐었다. 이리저리 출렁이는 율동을 느끼며 누워있었다. 널찍한 침대에 대자로 누워 나무 천장을 바라보았다. 대외적으로는 카르민인 디이나의 호위로 가는 길이라 무하가 배정받은 방 또한 일등급이었다. 실용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하기만 한 방안은 검소한 생활에 익숙한 무하에게는 낯설기만 한 것이었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도 이런 이질감을 느꼈었다. 느끼고 싶지 않은 기시감. 농땡 사부는 보기 싫으면 눈을 감으라고 했다. 그래서 무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느껴지는 것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푹신한 침대의 촉감과 귓가에 울리는 바다소리뿐이었다. 평소보다 많은 양을 마셨는데도 이상하게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몸뚱이가 무겁게 느껴질 뿐이었다. 요즘 따라 이렇다. 아니 전부터 그랬었지만 요즘 들어 잦아졌다. 몸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감각이 멀어진다. 외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싸늘하게 식은 심장소리만이 아프게 박혀온다. 울컥 솟아나는 눈물을 애써 손바닥으로 가려보았다. 눈꼬리 밑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 따뜻한 것이 빠른 속도로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자니 재차 눈물이 솟아났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힘껏 문질렀다. 벌떡 일어나 앉으니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슬며시 빠져나왔다. 아무 모양도 없는 단순한 흑 빛 귀걸이였다. 집어 드니 금속 특유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나며 유시리안이 들어왔다. 씻고 왔는지 향긋한 비누 냄새가 풍겼다. 같은 비누를 사용해도 유시리안에게서는 유시리안의 내음이 났다. 그리운 느낌이 들어 공연히 웃게 하는 내음이다. 이 순간이 소중하다. 요즘 들어 자꾸만 이렇다. 이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하다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 귀걸이 해보게?” “여태 잊고 있었어.” 늘 챙기면서도 정작 잘 때는 생각을 못했다. 자고 일어나면 아, 하면서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곤 했다. 요즘 들어 악몽을 안 꾸는 탓이다. “괜히 긴장 된다.” 쿡쿡 웃다가 숨을 삼켰다. “율이 이게 말을 걸지도 모른다고 했지?” “정령이 쓸데없이 한 물건에 서려있는 있는 경우는 없어. 녀석이 뭔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야. 펠의 팔찌에 서려있는 두 정령들만 해도 그렇잖아?” “으윽. 더 긴장돼.” 심호흡하다가 한 귀걸이를 뺐다. 적옥가락지가 은줄에 부딪쳐 마찰음을 냈다. “이거 유시리안이 보관하고 있어줘.” “그러지.” 받아들고는 자신의 귀에 걸었다. 양 귀에 각기 두 곳을 뚫었기 때문에 본래 걸고 있던 귀걸이는 그대로였다. 유시리안의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진보라색 귀걸이였는데, 다행히 적색과 잘 어울렸다. 이쪽 관념으로는 없겠지만, 언젠가 설희가 말했던 커플링이 생각나 괜히 쑥스러웠다. 헛기침을 하다가 귀걸이를 걸기 위해 거울을 찾았다. 능숙한 유시리안과는 달리 무하는 이런 것이 설익었다. 거울을 안보고 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해줄게.” 이상하게 신나 하는 유시리안에게 귀걸이를 넘겼다. 곧 차가운 느낌이 귓불에 닿았다. 그 순간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몸을 지탱하기가 힘들어졌다. 애써 눈을 치켜뜨려는데 유시리안이 부축하여 천천히 뒤로 눕혀주는 게 느껴져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몽롱한 와중에 유시리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 하더니 이내 끊겼다. “눈물 자국이 그대로잖아. 우는 건 상…….” 그 느낌은……. 그래, ‘페르노크’와 꿈속에서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 어두운 속에서 사물이 보이고, 잠든 속에서 의식이 뚜렷하다. 서 있는지 누워있는지 알 수 없고 이곳이 어딘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다가 현실 아닌 현실, 혹은 꿈이 아닌 꿈임을 깨닫고 기다린다. 먼저 다가오기를, 먼저 말하기를. 그러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사이에 다가와 말은 건다. 「당신은 새로운 맹약자가 되길 원하는 자?」 ‘맹약자?’ 「꿈을 원하는 자?」 ‘꿈?’ 무하는 상황도 뭐도 있고 잠시 웃었다. 유시리안이 말한 것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말을 건 존재는 아마도 귀걸이에 깃들어 있다는 꿈의 정령일 테지. 「꿈을 원하는 자?」 상대가 갑자기 웃어버리는데도 정령은 당황스럽지도 않은지 고지식하게 반복하여 묻고 있었다. 무하는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떡였다. 「과거를 보길 원하는 자? 현실을 보길 원하는 자? 미래를 보길 원하는 자? 자신을 보길 원하는 자? 타인을 보길 원하는 자? 눈앞을 보길 원하는 자? 천리 밖을 보길 원하는 자? 행복을 보길 원하는 자? 행운을 보길 원하는 자? 경고를 보길 원하는 자? 위험을 보길 원하는 자? 욕망을 보길 원하는…….」 “고르는 대로 볼 수 있는 거야?” 한참을 더 읊어댈 것 같아 잘라 물었다.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답하는 목소리를 듣건대 정령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품고 있는 자라면.」 “원하는 것이 뭔데?” 다시 웃음이 비집어 올라왔지만. 애써 참았다. 확실히 정령은 자신에게 아무 메리트가 없는 일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것도 유시리안의 말 그대로이다. 「꿈.」 “뭐?” 「내가 원하는 것은 꿈.」 “너는 꿈의 정령이 아닌가? 꿈의 정령이 꿈을 원해?” 「나는 꿈을 탐하는 꿈의 정령. 꿈을 먹음으로써 꿈을 꾸는 꿈의 정령. 나는 먹은 꿈을 간직한다. 새로운 꿈만을 먹는다.」 이해가 갈듯, 안 갈듯 모호했다. 무하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정령의 말은 계속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굶주렸다. 포만감을 주겠다던 첫 맹약자 외에 모든 자들은 허기만을 주었다. 비단을 두르고 금은보화로 치장하는 꿈, 가상의 아름다움을 얻어 타인의 시선을 받음으로써 쾌감을 얻는 꿈, 황제가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꿈, 증오하는 자를 찢어 죽이는 꿈, 정욕을 품은 자를 범하는 꿈 , 자신을 동정하는 꿈, 오만에 가득찬 꿈. 그것들은 이미 먹었던 꿈. 새로운 꿈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가치를 못 느끼고 있다.」 ‘그야 값이 비싸니 귀족들밖에 못 샀겠지. 귀족들이 원하는 것은 일괄된 건가. 물론 표현은 다 달랐겠지만 정리하면 그게 그거니.’ 「그대는 나에게 꿈을 줄 수 있는가?」 무하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나에게 새로운 꿈이 있는지 없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는걸.” 「그렇다면 잠들라.」 정령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둠이 깨어졌다. 손바닥 밑으로 느껴지는 감촉 좋은 푹신함, 볼을 핥아 내리는 까슬함, 귓가에 울리는 독특한 울음소리, 조용한 주위, 가슴 밑으로 느껴지는 호흡의 율동. 무하가 어리광 섞인 음성을 내며 몸을 뒤척이자 다시 그리운 울음소리가 나며 까슬한 촉감이 볼을 덮쳤다. 무하는 자연스럽게 몸을 움츠리며 불평어린 목소리를 냈다. “좀만 더 잘게, 가하. 좀만 더.” 다시 볼을 덮치는 까슬한 촉감. “아이. 좀만 더 잔다니……!” 불현듯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검은 얼룩무늬의 황갈색이 너무도 그리워 차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어나면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저 손바닥 밑으로 만져지는 부드러움을 필사적으로 느꼈다. “가……하?” 답 대신인지 따뜻하게 볼을 핥았다. 무하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가 싶다니 그대로 뚝 떨어졌다.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힘들게 옆을 돌아보았다. 자상한 가하의 눈동자가 박혀와 그 목을 와락 껴안았다. 그 그리운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목이 매여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으흑…….” 그저 그 목을 더 강하게 끌어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과거를 보길 원하는 자. 오랜만의 식사였다.」 무감정적인 정령의 음성이 머리 속에 박혀 들어 왔을 때, 무하는 현실을 깨달았다. 쓰라리게 빈 두 손을 내려보다 소리쳤다. “네가 꿈을 먹으면, 그 꿈은 사라지는 거냐? 다시는 못 보는 거야?” 「나는 먹을 뿐이다. 당신이 존재하는 한 당신 안에서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내가 먹은 꿈은 내 안에서 간직된다.」 무하는 아프게 펼쳐져 있는 두 손을 꾹 쥐며 고개를 떨꿨다. “오랜만에 행복한 꿈이었어. 그만큼 아프지만……그만큼 행복했으니까.” 그리고 하얗게 질린 주먹을 가슴 쪽으로 모으며 힘들게 부탁했다. “……간직해줘, 이 꿈을.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내 꿈을 간직해줘.” 「물론이다.」 눈앞이 크게 비틀리더니 가하의 모습을 한 정령이 무감각한 눈동자로 나타났다. 「나는 서열 제 7위의 유르미르. 꿈을 포식하는 자. 꿈을 보여주는 자. 꿈을 고르는 자. 그대는 나에게 꿈을 주었다. 나는 그대에게 꿈을 보여준다. 맹약은 성립됐다.」 유르미르는 무하와 눈을 마주했다.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꿈을 꿀 것이다. 그대가 바라는 꿈을 꿀 것이다.」 가하의 모습인데도 그 무감각한 눈동자가 슬퍼져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무하를 향해 유르미르는 마지막 말을 했다. 「이제 잠들라.」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무하는 바닷가에 서서 밀려들었다 사라지는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알 수 있었다. 눈앞의 것이 겨울바다라는 것을. 텅 빈 백사장에서 신발이 다 젖는 줄 모르는지 멍하니 바다 저편을 바라보는 옆의 저 아이가……설희라는 것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무하는 설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텅 빈 백사장만큼이나 텅 빈 눈동자로 바다 저편만을 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이것이 또 다른 현실이라는 것을. “실은 알고 있었어.” 늘 순진하게, 수줍은 듯 웃음 띈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바싹 말라 갈라져 있다. 예쁘다 생각했던, 그래서 처음으로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럽다 생각하게 했던 갈색 머리카락은 퍼석하게 갈라져 탈색이라도 한 듯 볼품없었다. “알고 있었어.” 재차 내뱉고는 입술을 깨문다. 앙증맞게 붉고 촉촉했던 그 입술도 잔뜩 텄다. 곳곳에 핏덩이가 맺혀있다. 꾹 입술을 깨물자 미처 아물지 못한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가 스며 나온다. 늘 신경 써 입던 예쁜 옷들은 어디가고 대충 걸치고 나온 티가 나는 코트 밑으로 비쭉 보이는 손가락은 뼈와 가죽만 있다. 힘껏 움켜쥐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만 같다. 그럼에도 그 모습이 안쓰럽다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미 무하의 마음이 그녀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네가 원장에게 저항을 했기 때문에 그가 쩔쩔 맨 거였다는 거 알아. 너에게는 ‘농땡 사부’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양부모 따윈 필요 없었던 거라는 것도 알고, 희미해져 가는 부모님의 기억에 죄책감을 가질 정도로 효녀였다는 것도 알아. 내가 거짓말만 해서……그래서 민재 선배가 나를 믿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네가 창녀가 아니라는 것도, 원장에게 몸을 팔지 않았다는 것도 다 알아.” 설희의 눈에 고집스럽게 맺혀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무하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2년 전 무하였다면 그녀를 보듬어 안고,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속삭였을 텐데. “그래서 널 저주해.” 부들부들 떨며 설희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내가 나를 경멸하게 만드니까. 내가 나를 역겨워하게 만드니까.”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뱉으며 간간이 섞여드는 오열을 억누르던 설희는 갑자기 바다에 달려들었다. “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다가 바다를 앙상한 주먹으로 때렸다. “내놔! 무하를 내놔! 내놔!” 그러다 고개를 높이 들며 울음 섞인 고함을 마구 질러댔다. “아아아-!” 무하는 그 모습을 백사장 저편에 서서 보았다. 설희는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은 그녀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어두운 건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강하게 그녀를 지탱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자신을 증오하게 된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감추려 들기만 한 자신의 탓이라고. 그것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모두 보여줬다면 그녀가 자신을 증오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가망성에 대한 후회. 숨기려 했다. 원장에게 범해질 뻔 했다는 사실도, 그때 당한 상처로 자칫하면 뇌 이상으로 반신불수가 될 뻔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두려워했다는 사실도, ‘농땡 사부’를 어린아이처럼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점점 흐려지는 부모님에 대해 막연한 그리움만 가질 뿐 사랑이나 존경 따위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모두 숨기려 했다. 강하게만 보이고 싶었으니까. 너무도 예쁘고 소중한 설희가 자신에게 의지하고 기대오는 것이 기뻤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알고 있다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하를 증오한 거다. 무하는 그 어린 시절에 사람 하나를 불구로 만들 뻔 했는데, 양부모라는 존재는 생각도 못할 만큼 ‘농땡 사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약한 아이였는데, 죽음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가지지 않는 이기적인 아이일 뿐이었는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은 그녀다. 그녀가 무하에게 한 저주는 스스로의 환상에게 한 저주인 거다. 겨울 바다가 뿜는 한기에 새파랗게 질렸으면서도 설희는 집요하게 바다를 때렸다. 떼를 쓰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철부지처럼. 그런 설희를 멀리서 바라보던 무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발을 떼었다. 하얗다. 바닥도 천장도 기둥도. 모든 것이 새하얗다. 비현실적인 공간을 무하는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곳은 처음 보는 건물 안이었다. 높은 천장을 지탱하는 원기둥에 섬세하게 문양이 새겨져 있다. 쭉 올라가면서도 기이하게 휘어져 거대한 나무처럼 느껴진다. 그 뻗어 나감은 자연스럽지만 새하얗게 탈색된 모습은 석화된 것 마냥 답답하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이라는 동화책이 생각난다. 공주님의 깊은 잠을 함께 나눈 성안이 모든 생명체들.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지 공주가 잠이 들었다는 것만으로 백년간 잠을 자야만 했던 모든 것들. 이곳에도 그런 괴리감이 흐른다. 이 건물 자체가 억지로 멈추고, 강제로 희생당한 생명체처럼 보인다.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지는데도 청량함과 물기가 묻어나는 공기가 한편으로는 편안하다. 그것은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정화가 되는 듯이 맑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거대한 건축물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무하뿐인지 발자국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왜 걷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의아해 하면서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계속 걸었다. 그러다 위를 올려보았다. 바닥의 것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천장. 바로 그것이 이상하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인데도 바로 코앞의 바닥과 같은 색을 띄고 있다. 마치 명암을 넣기 전의 건물 그림 같다. 무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좀더 자세히 뜯어보았다.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온갖 조각들이 새겨져있다. 아마도 정교하게 새겨져 있을 그것은 무척이나 하얘서 생김을 구분할 수가 없다. 무하의 시력으로도 뭔가가 빼곡히 조각되어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퍽 아쉬운 일이다. 왜 있다는 것조차 알기 힘든 저런 곳에다 조각을 했을까? 천장 전체에 조각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러다 발걸음을 멈췄다. 새하얀 속에 유독 눈에 띄는 흑발의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와.” 공허한 눈동자가 그때의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는지 새삼 생각하게 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락샤사처럼 무심하게 울려나왔다. 하지만 락샤사의 무심함과는 달랐다. 그의 무심은 본래는 꽉 차 있었던 것이 텅 비어버린 듯한 아픈 공허다. 그의 아픔이 전염이라도 된 듯 무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런 무하의 심정을 읽었는지 그는 설핏 웃음을 지었다. 무하는 작게 목소리를 냈다. “어째서 일까요? 전 당신이 슬퍼 보입니다. 모든 것을 타고난 당신이.” “내가 나의 영원을 뺏겼기 때문 일거다. 나의 심장이 뜯겨 나갔기 때문 일거다. 모든 것을 다 타고났다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행복을 뺏겼다. 운명이란 이름 아래에, 순리라는 이름 아래에 강탈당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오로지 하나만을 갈망해왔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덩달아 보았다. 직경이 수 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심연의 호수가 뚫려 있었다. 하얀 건물 안에서 칠흑의 그것이 섬뜩하고 아름답다. 그 중심부에 새하얀 빛의 기둥이 일렁인다. 그것은 역행하는 빛의 폭포 같다. 생명이 있는 듯 힘차게 약동하지만 일정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위로 솟는다. 그러다 갈 곳 잃은 빛이 천장을 타고 기둥을 감싸 바닥에 깔린다. 그렇게 건축물을 감싼다. 그래서 이 건축물은 이질적으로 하얗다. 조화롭지 못하다. 분명 경이로운 광경이요, 현상이긴 했지만 그것은 이곳과 어긋나고 있다. 기껏 부수고 매만진 천장의 조각은 존재조차 알 수 없게 가려버리고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 나무의 형상을 한 기둥을 석고상마냥 마비시킨다. 그뿐 아니다. 끊임없이 하늘을 갈망하는 저 빛은 이 건축물에 묶여있다. 서로 별개의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묶여있는 듯 서로에게 맞지 않는다. 호수의 곳곳에 정교한 룬어가 촘촘히 파고들어있는 기둥이 박혀있다. 여태껏 보았던 기둥의 자연스런 곡선의 뻗음과는 다르게 그것은 똑바른 직선의 사각이다. 이 또한 저 빛의 기둥과 마찬가지로 이 건축물의 침입자처럼 느껴진다. 무하가 좀더 다가가려 하자 남자는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리고는 뭐라 입술을 달싹이지만 목소리가 미처 닿지 않았다. 무하는 이상할 정도로 태연히 호수 중심부, 정확히는 빛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어떤 존재가 앉아 있었다. 고아함이, 그리고 장엄함이 물씬 묻어나오는 존재. 그 필사적인 경건함에 저도 모르게 경의를 표하게 하는 존재. 무하가 그 존재를 보고 있음을 안 그는 노래하듯이 속삭였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저 모습을 하는 걸까? 저 장엄함은, 저 경건함은……무엇을 바라건대 저리도 필사적일까? 무엇을 저리도 처절하게 기도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그 존재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검은 호수의 경계선에서 멈췄다. 슬프게 일그러진 얼굴로 한참 빛의 기둥을 보던 그가 천천히 무하를 돌아보았다. “그대를…….” 웃음소리와 음악소리가 섞여든다. 귀족들임이 분명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의 차림은 성적 매력을 돋보이게 치장하는 여느 연회장의 차림과는 좀 달랐다. 그들이 짓는 미소도 연회장에서의 가식적인 웃음과는 달랐다. 환한 미소와 수줍게 붉어져 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드물게 신선해 보였다. 아는 얼굴도 보였다. 귀족이 아니라 용병이다. 저편에 부관도 있었고 그 부근에 안면 튼 곤크의 용병들도 제법 있었다. 일전에 전쟁터에서 신세 진 피일도 있었다. 하나같이 어색한 정장차림들이다. 그들 스스로도 어색한지 연신 목 주위를 문질렀다. 부관도 마찬가지로 편한 심정은 아닌 듯 보였지만 체통을 생각해 자세를 꼿꼿이 하고 있었다. 여느 귀족들과는 다르게 딱 짜여진 몸매에 은근히 풍겨오는 살기와 곧은 자세가 중년에 접어든 부관을 매우 멋지게 포장해 줬다. 곳곳에서 스리슬쩍 시선을 던지며 서로를 경계하는 여성들을 보자니 곧 몇몇이 접근해 올 듯 보였다. 무하는 그 홀의 구석에서 서있었다. 문 옆에 있는 화환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에 저편에서는 이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진한 꽃향기가 맡아져 화환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깨끗한 순백의 꽃들. 좀 전의 보았던 이질적인 하양과는 다른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는 하양이다. 가만히 고개를 숙여 꽃향기를 맡았다. 볼을 스치며 은색 머리카락이 꽃에 살짝 닿았다. “응?” 손을 들어 이마를 만졌다. 어느 샌가 두건이 사라지고 없었다. “오오!” 갑작스런 환호성에 흠칫해서 고개를 드니 화환을 지나 앞으로 걷는 남녀 한 쌍의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들. “클랜…….” 행복하게 활짝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무하가 빙긋 웃었을 때, 마침 신부를 돌아보던 클랜과 눈이 마주쳤다.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가 반가움을 담고 있다. 무하는 다시 웃어 보이며 손을 들었다. 무엇인가를 가득 쥔 손이다. 부드럽게 펼치자 촤르륵 소리가 나며 쥐어져 있던 것들이 흘러내렸다. 바람의 정령이 그것들을 실고 행복한 신랑신부의 위에서 흩뿌렸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루. 정갈한 붉은 빛과 푸른빛, 그리고 초록빛과 투명한 빛을 뿜어내는 그것이 새하얀 신부의 드레스에 내려앉았다. 환상적인 빛의 퍼레이드. 붉은 빛은 육신의 건강을 기원하는 빛, 푸른빛은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빛, 초록빛은 삶의 평온을 기원하는 빛, 투명한 빛은 가정의 화목을 기원하는 빛. 그것은 축복의 가루. 소중한 친구를 위해서 만들었지만 언젠가 헛되기 버리게 됐던 가루. 신부가 자신의 몸에 내려앉은 축복의 가루의 빛에 놀라 탄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며 무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쓰게 됐다. “무하!” 클랜이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 무하는 물러섰다. 곧 결혼식장의 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고요한 숲이다. 흔한 풀벌레의 울음소리조차 없다. 그렇다고 생기가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녹음의 그늘 저편으로 새파란 하늘이 보이는 이곳은, 그저 고요할 뿐이다. 조용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고요하다. 무하는 이끌리듯 어디론가 걸었다.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어깨 위까지 훌쩍 자란 풀들이 꺾여 쓰러졌다. 어느 샌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게 자란 풀밭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걸음은 점차 급해지며 풀을 헤치는 손길이 거칠어졌다. 마음이 급했다. 뱉어내는 숨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크게 울렸다. 손에 검이 쥐어졌다. 하환이 준 마검이다. 투명한 검 날이 방해하는 풀들을 가차 없이 쳐내기 시작했다. 가슴의 두근거림. 그 설레는 고동소리가 무하를 재촉해댔다. 그리고 마침내 풀밭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검을 크게 휘둘자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두근거림이 극에 달했다. 왼손에서 팔찌가 크게 진동했다. 그리고 공간 저편에……. “…….” 목안을 비집고 튀어나왔던 음성이 입술을 벗어나지 못하고 도로 삼켜진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격하게 아파오는 사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공간 저편에 유시리안이 있는데. 아름다운 유시리안. 움직여야 하는데, 너무 아프다. 고통스럽다. 움직일 수가 없다. 입조차 열 수 없다. ‘율!’ 초점 없던 유시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의 눈이 격하게 떨리며 그의 몸이 힘들게 일어난다. 지쳐 보이는데도 강렬한 눈동자. 힘들어 보이는 데도 생기 넘치는 몸놀림. 아파 보이는 데도 환한 미소. 그리고 드디어 그의 입술이 열린다. “……!” 보인 것은 낯선 천장, 느껴지는 것은 푹신한 침대, 들리는 것은 바다소리. 날이 샜는지 어둑한 조명이 아닌 새하얀 빛이 방안에 꽉 차 있다. 방안의 밝기로 봐서는 대낮인 모양이다. 무하는 멍하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독방을 배정 받았지만 어제도 유시리안이 와서 깨어나길 기다려주었기 때문에 혼자 방안에 있는 것이 어색했다. 민이야 자기 방에서 예의 결계를 쳐놓고 자고 있을 테고 락샤사야 바다에 취해 있을 테지만 말이다. 가볍게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바로 방을 나섰다. 원래라면 이런 여유 있는 일정의 아침에는 샤워를 했지만 지금은 왠지 마음이 급했다. 마지막에 꾼 꿈 때문일 것이다. 당장 유시리안의 얼굴을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 선실 문을 열었을 때 무하는 묘한 이질감에 멈칫했다. 평소와 뭔가가 달랐다. ‘너무 조용해.’ 밀려드는 긴장감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무하는 저편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손등을 꼬집어보았다. 현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이런 확인이 필요했다. 솔직히 꿈의 마지막 부근에서 고통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확인은 신뢰성이 없지만 말이다. ‘현실이다.’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두어 번 거칠게 젖고 숨을 깊이 쉬었다. 멈췄던 인기척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거슬려 신경을 바싹 세웠다. 그러자 미약하게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무하는 미간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쿵쾅쿵쾅 가슴이 달음질쳤다. 무하는 잠시 숨을 멈추고 벽에 기댔다. 거슬리는 인기척이 계속 느껴져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부드럽게 발을 떼었다. 공기 속에 동화 된 듯 무하의 기척은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오히려 알아차리기 힘든 은신술. 무하는 그것을 가하에게서 배웠다. 다행이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곳을 확인한 무하는 더 이상 기척을 숨기지 않고 뛰어들었다. 그곳은 디이나의 방이었다. -쾅!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단검을 높게 쳐들고 있는 남자였다. 복면을 한 모습이 척 보기에도 자객이었다. 그는 당황한 듯 잠시 주춤하다가 이내 손을 내리꽂으려 들었다. 그것을 봄과 동시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머리 속을 날카롭게 흔들었다. -싫어! 급격히 밀려든 두통에 순간 얼굴을 팍 찡그린 무하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왼 손을 크게 뻗었다. 검을 뽑을 여유가 없었다. 붉은 바람이 쏜살같이 내달려 자객의 단검을 멀찍이 쳐냈다. 그 겨를에 부자연스럽게 비틀어진 손목을 꾹 쥐고 자객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의뢰의 달성을 앞에 두고 자신의 고통을 신경 쓰다니, 그리 등급 높은 자객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지껏 무하가 겪은 자객들과는 급이 달랐다. 실력은 둘째 치고서라도 어딘지 어설픈 것이다. 원인 모를 두통에 행동이 둔해진 무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일단 몸으로 부딪쳐 자객을 침대에서 멀리 밀쳐낸 무하는 침대 위를 확인했다. 바로 어제 본 것보다도 훨씬 야위고 창백해져 있지만, 정상적으로 고르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보아 단순히 잠이 든 모양이다. 그나저나 상당한 수준의 기사라고 들었는데 이정도로 경계가 허술하다니. 무하는 자객을 경계하며 빠른 어조로 디이나의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검을 뽑아 투기를 뿜자 예의 투명한 날이 생성되었다. 자객은 고통이 잔뜩 배였지만 미성의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것은 자신을 습격한 무하에 대한 욕설 따위가 아니었다. “나의 맹약자여!” 제법 많은 전투를 치러왔던 무하는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상대는 정령법사였다! 또다시 울리는 거부의 음성을 무시하며 막 왼쪽 팔찌의 정령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옆에서 가늘지만 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어*” 방어막이 구현됨과 동시에 강한 충격이 부딪쳐왔다. 냉기를 품어 얼음조각이 된 물의 정령이 방어막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하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잠시 시선을 주었다. 아사라느가 두 손을 내뻗고 버티고 있었다. 천만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쉰 무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신음을 흘렸다. 고요한 호수에 떨어진 돌덩이처럼 그 미약한 음성의 파문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두통이란 형태로서. “방해다!” 자객은 아사라느 쪽을 보며 일그러진 음성을 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아사라느의 참견이 억울하고 부당하며, 심지어는 황당하다는 듯이 들렸다. 무하뿐 아니라 아사라느도 그리 느꼈는지 당황한 얼굴로 무하를 보았다. 혹시 친구들끼리 장난이라도 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어이없는 생각까지 해보았지만 무하의 어이없는 표정을 보건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다시 한번 강하게 부딪쳐 오는 정령의 공격에 비틀거리며 아사라느는 자객을 돌아보았다. 저 자객으로 보이는 자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든, 디이나와 무하를 보호하는 게 먼저였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약해지는 방어막을 느낀 무하는 내심 혀를 찼다. 아사라느가 약한 게 아니다. 저 정령이 강한 것이다. 최소한 서열 급은 되리라. 서열 급 정령의 맹약자가 자객이라니……. 뭔가 이상하다. 암살자가 맞기는 한 걸가? 아사라느도 마찬가지의 것을 느꼈는지 마나 운용에 매달리면서도 자객을 살펴보았다. 살펴 볼 수도 없이 흑색 옷으로 칭칭 감겨있었지만 아사라느를 노려보는 눈동자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아……?” 아사라느의 입에서 멍한 소리가 흘러 나왔을 때, 방어막이 깨졌다. 집중해도 모자를 판에 딴 생각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뾰쪽한 얼음의 칼날들이 디이나와 무하를 향해 쏘아졌다. 자객은 그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급하게 붉은 구슬을 던졌다. 그리고는 옆의 벽을 통과해 빠져나가버렸다. 그 벽 너머에는 바다가 있었다. 서열급 물의 정령의 맹약자가, 그 힘이 최고조에 이르는 바다에서 익사를 할 리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자객이 벽 너머로 사라진 찰나, 그가 던진 붉은 구슬이 바닥에 탁 떨어졌다. 묵직한 소리가 나며 몇 바퀴 회전한 구슬을 본 무하는 아사라느를 디이나의 옆으로 던지다시피 잡아 당겼다. 그 알 수 없는 거부의 음성이 날카롭게 높아져 절규했다. -싫어-! -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배 전체를 덮었다. ========================================================================== 사랑니쪽 잇몸이 부었어요. 부운 상태에서 음식을 씹다가 살을 같이 씹어버렸습니다. .........덕분에 헐어버렸어요;ㅡ; 자고 일어났더니 통증이 귀와 관자놀이까지 번졌습니다. 식도도 부워서 물 삼키는 것도 힘든데 배는 고파요. 흑흑ㅠ.ㅠ 음식을 입에 넣기 위해 벌릴때 조차 지릿하게 아픈데다가 씹을때도 둔탁하게 아파오고... 삼킬때는 식도가 아프고... 흑흑. ㅠ.ㅠ 기도하는 땅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십자 형태의 바다. 기도하는 땅에서 시작하는 그것은 일정 구간동안 담수였다가 해수로 변한다. 배가 지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해수에서뿐 . 담수 지역에서는 절대 배가 들어설 수 없다. 그곳에서는 배가 뜨지 않는 것이다. 무생물을 빨아드리는 곳.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보통의 물에서처럼 헤엄을 칠 수 있지만, 죽은 생물이나 무생물은 모조리 가라앉는다. 그곳의 물은 매우 맑아 식수로 쓰지만 그곳의 공기는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무겁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뜨는 무생물이 바로 ‘순례자의 걸음’다. 하지만 그것은 기도하는 땅에만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수 지역은 해로로, 담수 지역은 육로를 이용한다. 지금 이곳은 해수 지역이 딱 끝나는 지점이다. 대륙과 대륙의 경계선 지역처럼 이곳은 그 특정 문화가 숨쉬고 있다. 가장 발전한 것은 숙박업과 마차 판매업. 항구가 바로 보이는 길목 쪽에서 세 남자가 수두룩하게 널려있는 여관 중 묵을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저 여관은 어떻습니까?” 어딜 보나 수상하기 그지없는 하얀 가면을 쓴 남자가 쓸만한 여관을 발견하고 손가락질하자, 호객 행위를 하고 있던 녀석들의 눈이 번뜩였다. 얼른 다가와 자신의 여관 홍보를 하는 녀석들을 가소롭게 보던 백금발의 미남자가 옆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어떠냐?”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가 돌아 본 곳에 보기 힘든 적 빛이 도는 갈색 말 한 마리가 있는 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일행인 듯 보이는 하얀 가면의 남자나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달려온 호객꾼들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더 기가 막히게도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이 갈색 말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는 것에 있었다. 백금발의 남자는 알았다며, 대련하다는 얼굴로 갈색 말의 목을 두들겨 주고 일행들을 향해 짧게 말했다. 그는 본래 ‘자신의 것’에는 너그러운 성격이었다. 그 성질머리를 두고 사람들은 제멋대로라고 한다. “기각.” “그럼 좀더 안쪽으로 가볼까요?” 황당한 얼굴로 말과 백금발의 남자를 번갈아 보는 호객꾼들과는 달리 하얀 가면의 남자는 태연히 되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벌써 몇 번째 있었던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저 마르스라는 야생마는 좋고 싫음이 뚜렷하다. 싫어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리 힘든 것도 아닌데 좋을 대로 해주는 게 낫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녀석의 어리광을 유시리안이 받아주고 있다면야. 여관 간판을 이리저리 찾아보며 민이 입을 열었다. “무하는 괜찮을까요?” “괜찮아. 잠이 든 것뿐이니까.” “하지만 벌써 일주일째에요.” “몽환의 바람을 이용한다는 건 꿈의 정령과 일종의 맹약을 맺는 것이라 봐야 하니까. 배에 두고 오고 싶지 않았지만 그 상태에서 움직여도 되는지 알 수가 없잖아. 쓸모는 없지만 일단 두 계집을 두고 왔으니, 둘이 방패 노릇은 할 수 있을 테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아, 저 여관은 어때요?” “어떠냐, 마르스?” 무하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던 마르스는 유시리안이 가리키는 여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항구 쪽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마법사들끼리 싸우기라도 하나?” 그렇게 눈살을 찌푸리던 유시리안에게 락샤사가 한마디 했다. “타고 왔던 배 쪽이다.” 유시리안과 민은 잠시 멍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그러다 거의 동시에 달렸다. 유시리안이 진로를 방해하는 들끓는 인파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안 비키면 벤다!” 진심으로 살의를 뿜으며 검을 뽑는 유시리안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 앞으로 인파가 양 갈래로 급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크기의 여객선이 볼품없이 타고 있다. 폭발이 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것은 형체만 간신히 유지하며 무너져 내렸다. 그 폭발이 얼마나 거셌는지를 알려주는 일면이다. 불구경하면 빠질 수 없다는 듯 많은 사람들이 항구 쪽에 몰려들었다. 아직 배 안에 가족이나 친구 등이 남아 있었던 자들은 절규하며 그 안으로 달려들려 했고, 주위에서 그런 그들을 막고 있었다. “아내가 있어요! 아내가!” 품에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가 절규하다 쓰러졌고, 품에 안긴 아이는 뭣도 모르면서 빽빽 울어댔다. 그런 피해자들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동정과 연민으로 눈물을 글썽였지만, 단순한 구경꾼들의 안에 있던 사람들은 흔하지 않는 구경거리에 흥분하기만 했다. 개 중에는 선체가 크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환호성을 질러대는 사람까지 있었다. 불에 타면서 동시에 침수 당하던 여객선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무사할지도 모르는 가족을 생각하며 몸부림을 치는 자들과 술까지 터뜨리며 웃어대는 자들로 나뉜 항구는 말 그대로 아귀규환이었다. 뭐라 표현 못할 광기의 지옥이었다. 그 속에 또 다른 광기가 끼어들었다. “아아악!” 진하게 퍼지는 피비린내와 함께 자지러지듯 비명소리가 울렸다. 제때 앞을 안 비켰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어깨를 찔린 가련한 자의 핏덩이요, 절규였다. 배에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 고통어린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하고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방울의 핏방울이 얼굴에 튄, 수려한 외모의 남자, 유시리안이 싸늘한 얼굴로 검을 비틀어 회수하고 있었다. 덩달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가련한 자의 비명이 높고 끔찍해졌다. 막 인간의 몸 안에서 빠져나온 검은 혈흔이 싸라기만큼도 없이 깨끗했다. 그 검을 쥔 손을 앞으로 곧게 내민 유시리안이 짧게 경고했다. “안 비키면 벤다.” 섬뜩하리만치 냉혹한 목소리에 질린 사람들은 황급히 갈라졌다. 그들이 갈라진 그 사이 끝에 무너져 가는 여객선이 보였다. 차갑게 전방만을 주시하던 유시리안은 크게 흔들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말없이 있던 두 남자가 그 뒤를 급히 따랐다. 유시리안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냈다. 그것은 길게 말 안 해도 알아들을 존재에게 내리는 명령어였다. “샤!” 순식간에 항구 끝에 도달한 그는 여객선 쪽으로 몸을 달렸다. 폭발의 여파로 항구에서 제법 떨어져 버려, 발판은커녕 연결된 밧줄하나 없건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배에서 떨어져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나뭇조각을 사뿐히 밟아가며 이동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그의 뒤를 쫓던 민이 항구 끝에 서서 손을 가슴 위에 얹자, 옆에서 락샤사가 그런 민의 앞쪽으로 느릿하게 손을 뻗어 제지했다. 의아한 눈빛을 하는 민에게 락샤사는 짧게 말했다. “내가 한다.” 그리고는 민을 제지하느라 옆으로 뻗었던 손을 자신의 가슴 앞을 지나 반대편 쪽으로 약간 느리게 움직였다. 팔꿈치는 여전히 쭉 뻗어진 상태였다. 민은 그 모습을 여전히 의아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락샤사의 손끝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폭발과 거대한 여객선의 난파로 크게 일그러져 있었던 바다가 락샤사의 손짓을 따라 천천히 율동하며 높게, 높게 치솟기 시작했다. 민은 안도가 섞인 탄성을 질렀다. 저편에서 유시리안은 배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해, 해……!” 유시리안의 살기에 짓눌려 있던 사람들 중 그나마 회복이 빨랐던 한 사람이 입을 떡 벌리며 바다를 가리켰다. 빳빳하게 굳어 있던 사람들도 그 사람이 손짓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멍청히 입을 쩍 벌렸다. “해일이다-!” 느릿한 듯 보이면서도 빠른 속도로 높게 일어난 파도는 둥글게 배를 감싸며 내려앉았다. 수증기가 사위에 자욱이 깔렸다. 배가 가라앉고 있는 건 여전했지만 일단 가장 위험했던 불은 꺼졌다. 저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아있었다면 불이 꺼졌으니 밖으로의 탈출이 가능할 것이다. 헤엄을 못 치더라도 근처 나무라도 붙잡고 있으면 바로 코앞이 항구이니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남아만 있다면. 그 희박한 가능성에 초조하게 매달리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밖으로 나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배는 가속도가 붙어 빠르게 바다를 파고들고 있었다. “페르…….” 무의식중에 지기의 이름을 읊으며 주먹을 꾹 쥐는 민의 옆에서 락샤사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라앉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하가 있었던 곳은 제일 먼저 침수가 시작된 곳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있었던 곳은 선실 중 제일 밑인데다가 폭파가 터진 곳인 것이다. 그 사연까지는 모르지만 이미 바다에 어느 정도 먹힌 부위가 자신들의 선실이 있었던 바로 그 부근이라는 것은 유시리안은 알아보았다. 가뜩이나 가파른 내리막길이었지만 그는 더욱 속도를 내어 달렸다. “펠!”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는 부근까지 온 유시리안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묵었던 선실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남아 있었다. 이미 잠겨버린 괴기스런 복도 쪽을 내려보던 유시리안은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물론 바람의 정령들에게 명하여 공기막을 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 속에 잠겨있지만 이미 새카맣게 타버린 복도를 보며 유시리안은 몇 가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강한 화재의 흔적이긴 했지만 저편보다는 이쪽이 더 심하다. 아마도 폭파는 이쪽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배 전체를 순식간에 덮친 모양새를 보건데 이는 자연적인 사고에 의한 화재가 아니다. 누군가가 배 전체에 거미줄 모양으로 꼼꼼하게 화약을 설치한 게 분명하다. 이쪽이 강도가 가장 강한 것과 시작점이 이곳인 것을 보니 분명 이쪽을 노린 짓이리라. ‘펠은 자고 있었다. 깨지 못했다면 당했을 수도 있어.’ 초조해진 유시리안은 더욱 속도를 내어 달렸다. 물 속이라 평지만큼의 속도를 내기는 힘들었지만, 그는 오기로 해냈다. 가끔 곁을 둥둥 떠다니는 시체들도 있었지만 신경 쓸 바 아니었다. ‘곁을 떠나는 게 아니었어! 빌어먹을!’ 정신없이 달리는 유시리안의 눈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것은 자연적인 빛이 아니었다. 귀 바로 옆에서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걷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 빛에 무엇을 본 것일까? 멈춰지기는커녕 더욱 빨라졌다. 이제는 달린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펠-!” 급히 다가가던 유시리안은 일순 멈추더니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경악 어린 눈동자를 잔뜩 치켜떴다. “펠……!” 그리고 잠시 멈춘 것이 무색하리만치, 쏜살같이 달렸다. 저편에서 둥근 빛의 막에 감싸여 힘들게 걷고 있던 남자가 그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화상으로 반 정도가 일그러진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감겼다. 태반이 타버려 불안하게 걸쳐져 있는 두건 틈새 사이사이로 은발이 새어나와 있었다. 깊고 진한, 무하 특유의 녹안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볼품없이 타버려 상의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옷자락의 사이로 화상 입은 피부가 보였다. 발밑으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오른 팔은 기이하게 꺾여져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발도 다쳤는지 약간 절고 있으면서 왼팔에는 작은 체구의 디이나를 안고, 등에는 성인 체격의 아사라느를 업고 있었다. 폭발 당시 충격으로 아사라느가 기절해 버렸기 때문이다. 디이나는 아마도 잠에서 기절로 번져간 듯 했다. 그 모습에 분노한 유시리안은 거부감 없이 무하의 막 안에 들어갔다.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유시리안을 덮친 것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멜로디였다. 그것은 희미했지만 막 안에 갇혀 끊임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그 공명음은 무하의 감정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시리안은 더 생각 할 것도 없이 무하를 꼭 끌어안았다. 무하에게 들려져 있던 디이나와 아사라느가 볼품없이 바닥을 뒹굴었지만 무하나 유시리안이나 신경 쓰지 않았다. 무하는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힘들게 왼손을 뻗어 유시리안의 듬직한 몸을 마주 앉았다. “나 많이 다쳤어, 율.” “괜찮아. 금방 고쳐줄게.” 먼저 오른 팔에 힐링을 쓰기 위해 몸을 떼려는 유시리안을 저지하며 더욱 필사적으로 왼팔에 힘을 주었다. “그게 아니야, 율. 그게 아니야.” 무하의 목소리에 울음소리가 섞여들었다. “그게 아니야.” 무하는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배가 완전히 바다에 먹혔을 때까지도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민은 주먹을 폈다 접었다 하며 초조하게 배가 잠긴 지점만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옆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락샤사가 짧게 말했다. “올라온다.” “아!” 락샤사보다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리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그 기운을 느낀 민은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유시리안, 무하, 디이나, 아사라느를 감싼 둥근 구체가 떠오르자 그는 경악으로 크게 눈을 부릅떴다. 지기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만 것이다. “페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달려가려는 민을 말린 것은 역시나 락샤사였다. 민은 분노와 걱정으로 일그러진 눈동자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다가오는 구체안을 좀더 살펴보았다. 역시나 만신창이가 된 지기가 유시리안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서 있었다. 척 보기에도 끔찍한 몰골이었다. “페르!” 무하라는 이름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힘없이 쳐져 있던 고개가 천천히 들려지며 다소 충혈 된 녹안이 민을 마주보았다.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 듯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떠오르자 한 가닥 희망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이내 주저앉고 오열을 터뜨렸다. 저 넷 중에 그들의 가족은 없었다. 급히 마법사들이 대동된 구조단이 파견되었지만 결국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불에 탄 시체들뿐이었다. 그나마 온전한 시체라도 건진 사람은 다행이었다. 폭발이 시작된 지점쯤에 있었던 자들은 부분, 부분 터져나간 살점으로 만족해야 했다. 유일한 생존자라 봐야 하는 무하와 디이나, 아사라느에게 당시 상황을 묻고자 관부에서 왔었다. 하지만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디이나가 카르민이자 당대 세력가인 페이야 가의 란이라는 것을 알고 알아서 조사를 꾸리고 가버렸다. 그녀를 노린 암살기도이라 생각했음이 분명했지만 그들의 서류에는 몬스터용 화약 무기에 불이 난 ‘사고’라 적히는 것으로 끝이었다. 이래서 힘은 있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유시리안의 치유 마법 덕에 완치된 무하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여전히 그가 운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유시리안은 잠든 무하의 곁을 차분하게 지켰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났다. 가만히 무하의 얼굴을 내려보고 있던 유시리안은 그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경련하는 것을 발견했다. 깨어난 것이다. 하지만 무하는 눈을 뜨려 하지 않았다. 단지 바싹 마른 입술을 힘없이 달싹였을 뿐이다. “율……. 있지?” “응.” 손을 뻗어 무하의 손을 끌어 쥐었다. 무하가 얼른 그 손을 맞잡는 것을 느끼며 처음부터 이렇게 잡고 있을 걸 그랬다고 잠시 후회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무하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 “율…….” “응.” “율.” “응.” 감긴 무하의 눈꺼풀에서 실선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도 한참동안이나 무하는 유시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유시리안은 일일이 답해주었다. 그렇게 유시리안의 존재를 느끼려는 듯 한참동안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손을 꾹 움켜쥐고 있던 무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기억날지 모르겠는데 전에 이렇게 물어 본 적이 있었어. 만약 내가 ‘페르노크’로서의 삶을 택해서 오르세만 가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기억해.” “그때 율은 진심으로 원하는 게 아니라면 데리고 나와 버릴 거라고 했어. 기억해?” “기억해.” “…….” 더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는데도 무하는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율.” “응.” “……나를…….” 그러고도 한참동안 침묵하던 무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여전히 유시리안의 손을 꼭 쥔 채로 앉아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무하……라고 불러주겠어?” “싫어.” 그동안 무하가 망설이고 고민하고 주저하던 시간을 생각하면 유시리안의 답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빨랐다. 신속하고 단호한 그의 거부에도 무하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이. “난 무하야. 이무하.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의 육체에 빌붙어 있는 이무하.” “펠은 펠이야. ‘사랑받는 자’, 펠이야.” “아니야.” 한숨과 같은 부정을 하며 무하는 침착한 얼굴로 말을 골랐다. 몽환의 바람 덕에 무하는 이제 꿈속에서 자유로웠다. 무의식 속에서 자유로운 그는 그 속에서 오랜 시간동안 생각하고 고민했다. 처음 ‘그것’을 느꼈을 때의 공포와 절박함, 그리고 한편으로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냉정함이 공존하는 혼란은 이미 대부분 가라앉았다. 유시리안에게 의지하여 맘껏 울어댔기 때문도 있었다. 무하는 유시리안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최대한 냉정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골랐다. 하지만 유시리안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은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를 잡듯이 필사적이었다. “난 펠이 아니야. 페르노크가 아니야. 난 무하야.” 그렇게 말을 골라냈음에도 결국 단순한 반복이 되어버렸다. 그것 외에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했는데도. “펠은 펠이야.” 무하가 한 말이 앞과 같았기 때문인지 받아치는 유시리안의 말도 앞과 같았다. 그에 무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유시리안의 멱살을 잡아, 자신 쪽으로 바싹 당겼다. 똑바로 눈을 마주 보며 낮게 물었다. “날 못 믿는 거야?” “믿어.” “내가 미친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공상하기 좋아하는 망상가라고 생각하는 거야? 멋대로 비참한 과거를 만들어 그에 취해있는 철부지라 생각하는 거야?” “아니.”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답에서 진심을 느낀 무하는 여전히 딱딱하게 물었다. “그럼 왜?” 유시리안은 무하와 맞잡은 쪽이 아닌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문질러 주었다. 마치 눈물이라도 닦아내는 냥 조심스럽게 양 눈가를 훔치더니 생긋 웃었다. “아주 예쁜 눈동자야.” “뭐?” 뚱딴지같은 소리에 멍한 목소리로 반문하자 이번에는 킥킥 웃었다. “예쁜 눈동자.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깊디깊은 호수, ‘기도하는 땅’과 같은 칠흑빛.” “……!” 무하는 뭐라 말을 하고 싶었다. ‘이 몸’은 녹음의 눈동자를 가졌다. ‘페르노크’의 몸은……. 필사적으로 할 말을 짜내려 했지만, 입을 열려 했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자 하는,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미약하게 떨기만 했다. 그것은 기대하지 못했던 행운에 대한, 그리고 행복에 대한 전율이었다. “눈동자 색과 같은 칠흑의 머리카락. ‘지금’과는 달리 길어서 허리까지 오고 있지. 하나로 모아 올려 묶었지만 대충 묶은 티가 물씬 나. 그리고 새하얀 피부.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흉터도 많은데 깨끗하게만 느껴지는 피부야.” “……!” 유시리안은 지금 ‘무하’의 생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무하는 어떻게든, 무엇이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유시리안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멱살을 쥔 무하의 손을 감쌌다. 그러자 힘없이 풀려지는 무하의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한 손이다. 그 기분 좋은 온기를 느끼며 유시리안은 다시 한번 웃었다. “말했지? 믿는다고.” 맞잡은 무하의 두 손을 자신 쪽으로 당기더니 모았다. 마치 기도라도 하는 양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맞잡은 손들 위에 이마를 얹은 유시리안은 낮게 속삭였다. “그러니 내가 믿는다는 것을 펠이 믿어줘.” “…….” 계속해서 미약하게 떨던 무하의 몸이 차츰 진정되었다. 자신을 봐주는 사람을 만났다. 만난 것이다. 무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유시리안과 이마를 맞대었다. “……믿어.”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을 가슴 깊이 삼키며 그렇게 믿는다고 했다. 차마 꺼낼 수가 없어서……. 노크 소리와 함께 오랜만에 맨얼굴의 민이 들어왔다. 그러자 유시리안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자리를 비켜주었다. 민과 이야기가 되어 있는 걸까 했지만 그 역시 의외라는 얼굴로 나가는 유시리안을 바라본 것을 보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가는 유시리안과 스쳐 들어온 민은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짐짓 쾌활한 체 말했다. “이제는 사람 같구나. 괜찮은 거야?” “그렇지 않아도 이 곳에 와서 제일 놀랐던 게 바로 치유마법이었다. 흉터조차 없군.” 무하의 덤덤한 모습에 민은 밝은 체 했던 기색을 지우고 불쑥 말했다. “말해.” “뭐?” “상처를 치료도 못하고 나올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유시리안 씨와 만나기 전에 치료가 된 상태여야 맞는 거잖아? 게다가 유시리안 씨와 만난 이후에도 치료조차 안하고 나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늘 생각했던 건데, 넌 징그럽게 눈치가 빨라.” 민은 씨익 웃으며 받아넘겼다. “칭찬 고맙다. 그래서 치료를 안 하고 있었던 이유는?” “그건…….” 머뭇거리던 무하는 갑자기 다른 말을 했다. “넌 ‘페르노크’를 알지?” “응?” “그는 어떤 사람이었어?” “글쎄…….” 진지하게 생각하던 민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마찬가지로 짧게 답했다. “싫은 녀석.” “응?” 너무 짧은 답에 무하가 떨떠름한 반문을 했다. 민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나직이 말했다. “나와 닮았다.” 말없이 꾹꾹 눌러 담으며 삭히는 것이 닮았다. “그리고 나와 달랐다.” 누구든 의지할 이를 찾는 그와 의지할 이가 있음에도 홀로서기 하려는 민은 분명 달랐다. 솔직히 말하면 민은 그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그가 싫어진 것은 페르노크를 만나고부터다. 언제 그의 ‘지기’, 페르노크를 사라지게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가 싫었다. 하지만……. “그래서 싫은 녀석이다.” 그렇다고 고스란히 말하기는 쑥스럽지 않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민의 말을 가만히 듣던 무하는 깊이 한숨을 쉬며 뒤로 기댔다. 유시리안이 베개를 앉기 쉽게 세워두었기 때문에 수월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녀석은 자살을 했어.” “……?” 민은 강한 눈동자로 무하를 보았다.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했어. 하지만 너는 살기를 원했다. 그는 죽음을 원했고 너는 삶을 원했기 때문에……. 나는 그렇기 때문에 네가 그 몸에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결국 살아달라고, 이기적으로 그의 몸을 빼앗아서 살아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소용없다. 그는 이 몸을 돌려받을 것이다. 이 몸을 다시 찾아갈 것이다. “내가 왜 치료를 안 하고 있었냐고 물었지?” “……?” 답을 기다리는 민을 한번 보고, 머리맡에 놓아져 있는 마검을 집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멋진 검. 무하를 ‘이쁜이’라 부르던 하환이 무하의 ‘실력’을 인정해서 준 검이다. 뽑아내자 빼곡하게 박혀 있는 룬어가 눈에 들어왔다. 무하는 검을 쥔 오른 손을 힘껏 들어올렸다. 그리고 민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것을 내리 꽂았다. 그것이 깔끔하게 관통한 것은 무하의 왼손바닥이었다. 경악한 민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황급히 테이블 위에 두었던 약상자 쪽으로 걸어가려는 민을 무하가 붙잡았다. 민이 벌컥 화를 내며 돌아봤을 때, 무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말했다. “그건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관통되어 있던 단검을 아무렇지 않게 뽑아냈다. 왈칵 피가 솟구치는데도 무하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것은 락샤사의 무감각한 무표정과는 달리 예리하게 서 있는 검과 같은 무표정이었다. 무하는 피가 넘쳐나는 왼손을 가만히 들어, 쥐었다 폈다는 몇 번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터져 나왔는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반복했다. 참지 못하고 민이 뜯어 말렸을 때, 무하는 차분해서 더욱 슬픈 목소리로 고백했다. “예전부터, 처음부터 그랬어. 일정 수준의 고통은 느끼지 못했지. 그러다 일정 수치가 넘어서면 갑자기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느끼질 못해. 마치 누군가가 그것을 대신 느끼고 있는 것처럼.” “언제……부터야?” ‘누군가’라고 칭했지만 민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무하 말 따라 징그럽게 눈치가 빠른 남자니까. 무하의 정체를 알고 있는 단 둘의 인간 중 한명이니까. 무하도 그 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히 집히는 게 없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확실해. 녀석이 깨어난 거야. 그리고 나에게서 되돌려 받으려는 거야. 이 몸을, 아니 자신의 몸을…….” “그러니까 언제 깨어났는데?” “…….” “모르는 거야?” “아니.”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율을 만나고…….” “그리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자신의 옆이라고 그가 말해줬을 때부터…….” 그때는 무하만이 녀석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녀석은 구석에 꽁꽁 숨어 끊임없이 무언가를 거부하고 있었다. 무하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들으려 하지도 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 녀석에게 무하가 물었다. 누구냐고. 녀석은 여전히 들으려하지 않았다. 다시 물었을 때, 이번에는 끊임없이 읊조리던 말을 멈췄다. 섬뜩한 고요. 그것이 녀석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 이번에는 녀석이 물었다. 누구냐고. 왜 ‘거기’에 있는 거냐고. 녀석은 답을 듣기도 전에 완강한 거부의 비명을 질렀다. 이어진 세 번째 만남. 녀석은 이제 무하를 완전히 인식한 듯 보였다. 본능적인 거부감을 지우고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이번에는 서로에게 물었다. ‘무엇을?’ 계속된 네 번째 만남. 이미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의미’에 대해 물었다. 그 답은 듣지 못했지만 분명 들었다. 둘은 서로를 두려워하며 서로를 탐색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만남. 그제야 서로를 인식하게 됐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답을 들었다. 녀석의 이름은 ‘페르노크’. ‘거기’에 있는 이유는 싫기 때문에. 그래서 피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게 된 얼굴은 아직도 낯설기만 한 거울 속의 그것. 그 얼굴로, 울부짖으며 모두를 원망하고 스스로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을 욕하고 있었다. 고작 이런 녀석이었던가, 무하는 생각했다. “그 뒤로 나타나지 않았는데…….” 무하가 녀석을 ‘싫어하게 되었을 때’부터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뒤로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강하게 바랐었다. 그래서 녀석이 나타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랬는데……. 리커버리 포션을 조심히 바르는 지기의 모습을 보다가 씁쓸히 웃었다. 어느 선까지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포션을 바르거나 치유 마법을 시전 했을 때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은……민의 손길마저 흐릿하다. 무언가가 맞닿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지만, 그것에서 풍기는 따뜻함이라든가 세밀할 배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꿈속에서 꿈속의 물건을 만지고 있는 것처럼 몽롱한 촉감이 느껴진다. 그런데도 지독히 현실적이다. “재밌어.” “뭐가?” 무하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민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어투가 제그의 것과 흡사했지만 둘 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이런 순간에도 나는…….” 무하는 차마 뒤를 잇지 못하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차마 말 할 수 없었다. 유시리안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거야? 쳇!” 신경질적으로 반지를 끼며 투덜대는 유시리안을 가만히 보다가 락샤사가 한마디 했다. “가서 물어보던지.” “미쳤냐? 몰래 엿보고는 가서 물어보게?” 뭘 잘했는지 당당한 기색으로 저와 같은 말을 하는 유시리안이었다. “그럼 애당초 옆에서 듣고 있지 그랬어.” “요크노민 녀석은 지기니까.” 유시리안은 침대에 주저앉아 삐뚤어진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 제대로 맞췄다. 이카미렌이 만들어준 투시 반지다. 유시리안은 마법 아이템을 만드는 것에 별 취미가 없었다. 자기 손으로, 그리고 자기 능력으로 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마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 탓이다. 뭐, 특별히 불편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반지를 제대로 낀 손을 눈앞까지 들어올려 이리저리 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난 지기가 아니니까.” “지기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건가?” “아아. 실제로 나에게는 그 ‘페르노크’라는 녀석이 깨어났다는 소리를 안했잖아?” 그리고는 잔뜩 찡그러진 얼굴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고함을 질러댔다. “찝찝해! 찝찝해! 찝찝해! 찝찝하단 말이야!” “뭐가?” 궁금하다기보다는 물어보라는 강한 의도가 엿보여 한마디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쫘르륵 늘여 놓았다. “뭔가를 놓친 기분이야! 뭔가 엉성하게 끝난 기분이라고! 왜 갑자기 무하라고 불러달라는 거지?” “방금 말하지 않았나. ‘페르노크’가 깨어났다고.”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그 녀석이 깨어났다는 것은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몸을 뺏으려 드는 거지? 이미 훨씬 전에 깨어났는데 왜 이제 와서야? 처음에 그 녀석이 깨어났을 때는 나도 긴장했어. 금방이라도 나의 펠을 뺏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다시 구석에 박혀서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밖으로 나오려 드는 거냐고!” 그리고 인상을 찡그리다가 다시 말했다. 혼란이 조금은 가라앉았는지 제법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무엇보다 왜 내가 펠이 있어야 할 곳이 내 옆이라고 말한 순간부터 깨어난 거지?” “페르가 말하는 ‘있어야 할 곳’의 의미는 특별하다.” “말해줘.” 유시리안이 타인의 속을 읽어달라고 말한 적은 꽤 됐었다. 그러나 가까운 자의 속을 알려달라고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모든 걸 알면 재미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랬는데……. ‘어지간히 불안한 모양이군.’ “가장 소중한 것이 있는 곳.” 그토록 간단히 설명될 단어는 아니었다. 무하에게 있어 ‘있어야 할 곳’은 좀더 필사적인 무언가 이었으니까. 하지만 락샤사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과거 무하에게 처음으로 ‘있어야 할 곳’이란 단어를 알려준 민재라는 아이가 말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는 곳’으로 설명을 끝내버렸지만 유시리안에게는 충분했었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 멍한 얼굴로 락샤사의 말을 곱씹더니 헤벌쭉 웃어대고 있다. 좀 전까지의 초조함이나 불안도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청혼을 했었군.” 그렇게 농 같지 않은 농을 하며 한참을 좋아하는 것이다. 실재로 본인에게는 농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에게 락샤사가 나름대로 설명을 덧붙였다. 어찌됐든 유시리안은 락샤사의 마스터. 모처럼의 질문인데 나름대로 성의를 다하는 것이 좋다. “페르는 그 곳을 몇 번이나 잃었다. 설희라는 여자, 농땡 사부라는 남자……. 아니, 잃었다는 표현은 맞지 않아. 그들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고 봐야 맞겠군. 그는 끊임없이 그곳을 갈구했다. 그리고 네가 본의 아니게 그 해답을 내려준 거다.” “…….” 유시리안은 무하의 방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깨어났다고 했어…….” “그랬지.” “…….” 순간 한기가 돌았다. 급히 잡은 여관이라 그리 수준이 높은 곳은 아니었지만 숙박업이 발전된 곳답게 그럭저럭 머물만했다. 음식도 제법 맛깔스럽게 나왔고 방도 깔끔했다. 숙박비도 비싸지 않아 손님이 몰렸다. 그 증거로 점심을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인데도 1층과 2층의 식당이 붐비고 있었다. 이 지역 자체가 원래 지나가는 객들이 득실대는 곳이기도 했다. 2층의 바다가 보이는 창가 옆 자리는 인기석이다. 대부분 연인이 찾는 그곳에 눈에 뛰는 미녀 둘이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수작을 걸어볼 법도 했지만 저 귀여운 외모의 여자가 그 위풍당당한 카르민, 페이야 가의 란이라고 한다. 그것을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목숨이 아깝지 않고서야 수작을 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페이야 가의 란이 왔다는 소리에 몰려들었던 귀족들마저 그녀들이 풍기는 침중한 분위기가 질려 다가서지 못했다. 그것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지금의 디이나에게 말을 걸었다가는 평생 밉보였을 테니. 의미 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디이나가 힘들게 입을 떼었다. 아사라느가 무언가 딴 생각에 빠져 있음을 알기 때문에 여지껏 말없이 기다렸던 것이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침묵하는 동안에도 자책감은 끝없이 커져가고 있었다. “죄송해요. 나이트인 주제에…….” “예? 아아.” 역시나 아사라느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이제야 침울해 하고 있는 디이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옅게 실소했다. “후후. 살아 있으니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충분해요." “바로 그게 죄송하다는 거 에요.” “네?” 뜻밖의 답에 아사라느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에 디이나가 다시 자책어린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듯 낮게 답했다. “제가 깨어있었다면 ‘살해당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을 텐데.” “……디나.” “죄송해요.” 재차 사죄하는 디이나를 보며 아사라느는 가슴이 알싸하게 죄여오는 것을 느꼈다. “내심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에요. 이 자라면 나에게 죽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자객을 본 바로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도 아사라느는 방어막을 펼쳤다. 그리고 버텨냈다. 자신이 염원하는 죽음을 눈앞의 자객이라면 거리낌 없이 베풀어 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후에 이어 저 자객의 표적이 될 자신의 나이트를 생각하며 버텼다. 자객이 폭탄을 던진 그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 방어막을 펼치지만 않는다면 다음 순간에 죽을 수 있다. 그 생각이 미처 끝맺기도 전에 무하가 그녀를 끌어당겼고 보호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게 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죽음이 바로 앞에서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이렇게 살아버렸다. 그러나 생각만큼 지금의 생환이 아쉽지는 않았다. 다치지 조차 않았는데도 아사라느의 귀여운 나이트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따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면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전 저항하는 길을 택했어요. 그러니 괜찮아요. 디이나가 살아 있으니까.” 아사라느는 실소했다. 어머니를 여의고 슬피 울던 꼬마 숙녀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는 적어도 디이나보다는 오래 살 작정이다. 그래봤자 100년이나 넘겠냐 만은. ‘그리고 아직 희망은 있다.’ 그 희망은 무하.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진 인간이면서 여지껏 미치지 않고 살아온 남자. 그에게는 미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사라느는 지금 그것에 매달리고 있다. 미치지만 않는다면 오천년이고 만년이고 살아갈 수 있다. ‘분명 뭔가가 있을 거야. 그 남자에게.’ 뭐, 그것이야 함께 여행하면서 천천히 눈 여겨 보면 될 테고……. 지금 당장의 고민거리는 그것이 아니다. 여지껏 디이나를 앞에 두고 고민해 왔던 문제는 바로 배안에서 보았던 자객의 정체. ‘분명…….’ 막 생각에 잠기려는 아사라느의 주의를 끄는 묘한 탄성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오오!” “까악!” 예리한 청각을 가지고 있는 그녀인지라 듣고 싶지 않아도 곳곳에서 군침 삼키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별다른 호기심 없이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정도로 넘어가려는 아사라느의 주의를 다시 잡아끄는 소리. 그것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디이나의 목소리였다. “유시리안 씨? 옆의 그 분은……?” “네 눈은 장식이냐?” “네?” 등 뒤에서 유시리안의 것이 분명한 감미롭지만 냉랭한 음성 뒤로 키득거리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강렬한 화염의 기운이 풍겨오는 것을 보아 청염의 마스터라 불린다는 민 장 레타가 분명했다. 그는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한발 앞서 판단하여 반응하곤 했다. 디이나가 정체를 물었을 법한 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그에 호기심이 동해 뒤를 돌아보았다. “아!?” 헐렁한 소매 사이로 보이는 붉은 팔찌와 옅게 들려오는 특유의 공명음. 아사라느가 크게 눈을 치켜떴을 때 디이나가 당혹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무하 씨?” 남자는 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창을 통과한 햇살이 그런 남자를 덮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가느다란 은빛 실타래가 한 가닥, 한 가닥 은은하게 빛났다. “은발…….” 아사라느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바로 했다.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디이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아사라느는 절망과 슬픔, 그리고 허무함에 울고 있었다. 그녀가 한때 가졌던 유일한 희망이 그녀를 비웃으며 산산이 부셔져 버렸다. 아사라느는 한손으로 눈가를 덮고 고개를 숙이며 일어났다. “저……잠시…….” “아……!” 디이나가 반사적으로 한손을 들며 주춤 일어났지만 아사라느는 말없이 유시리안과 무하, 민의 옆을 빠르게 지나쳐 달려 가버렸다.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는 것을 보면 방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유시리안은 묘한 얼굴로 그런 아사라느를 보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매우 싸늘해서 우연히 보게 된 민이 순간 몸서리를 쳤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평소로 돌아간 유시리안은 조금 치켜떠진 민의 눈동자를 한번 마주보다가 고개를 앞으로 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디이나가 앉은 쪽으로 다가가는 무하를 향해 디이나는 농조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사라느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랐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보이기 싫다고 해서 저는 엄청난 추남인가 했어요.” “별로 마음에 드는 얼굴이 아니라서…….” 여전히 고소를 짓고 있으며 말끝을 흐리는 무하를 보며 디이나는 재차 농을 건넸다. 필사적으로 건네는 그 농이 아사라느에 대해 무하나 다른 사람들이 묻지 않길 바라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다니.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별로…….” “내가 옆에 있으니까 눈이 높아도 돼.” 여전히 말끝을 흐리는 무하의 옆에 태연히 자리 잡고 앉은 유시리안이 잘라내듯 말했다. 그 옆으로 민이 앉으며 쿡쿡 웃고 있었다. =================================================================== '페르노크'가 무하의 '있어야 할 곳', 즉 유시리안을 차지하려든다... 라고 볼 수도 있...는 걸까요;? 하하... 세상은 넓습니다( '')~ (<-의미불명) 아무리 그래도...'페르노크'는 바보가 아닌데....허허허.... 듣기에 상당히 거슬리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던 디이나였지만 유시리안의 잘난 얼굴을 보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외모만큼은 ‘아름답다’라는 수식어가 그를 위해 있는 것이라 생각될 정도의 미모였으니까. 곁에 있는 것들의 빛을 모조리 가려버리는 태양빛과 같은 강렬한 매력이 그에게는 있다. 그의 옆에 있어 빛이 가려지지 않은 사람은 여지껏 시오니타와 락샤사 정도밖에 못 봤다. 아니다. 이제는 황제가 될 이국의 귀족 남자가 한명 더 있었다. 이름이 분명 테밀시아라 했다. ‘이제는 넷인가.’ 디이나는 유시리안의 발언에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은발의 미남에게 시선을 주며 그리 생각했다. 유시리안이 태양이라면 무하라는 저 남자는 달이다. 어려서 보았던 동화책에 등장하는 태양의 정과 달의 정을 보는 듯 하다. 특히 저 은발이라니. 유시리안의 백금발과 마찬가지의 희귀한 아름다움이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무엇인가가 어렴풋하게 떠오르려고 한다. 은발이라……. “은발…….” “…….” 디이나가 미간을 모으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을 무하가 불안하게 보고 있자 민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제가 참여한 상태에서 자객이 닥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자객의 소속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길드는 아닐 겁니다. 개인적으로 육성 시킨 자객이라 봐야 될 겁니다.” “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자객에 대해 저도 이모저모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히 감잡히는 곳이 없어요. 저를 노릴만한 사람은 많지만, 레타에 의뢰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그런 자객으로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디이나가 다른 쪽으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자 무하는 깊은 감사를 담아 자신의 지기를 보았다. 민은 한쪽 눈을 장난스레 찡긋해 보였다. “재차 습격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되면 디이나 씨가 수도로 돌아가는 것이…….” “안됩니다.” 말을 잘라먹으며 딱 잘라 거부하는 디이나를 유시리안이 차갑게 몰아붙였다. “너를 노리고 계속 자객이 습격해 온다면 처음 말한 대로 확실한 방해다. 실제로도 펠과 저 엘프 계집이 아니었으면 눈 한번 떠보지 못하고 골로 갈 뻔했잖아?” “그, 그건…….” 스스로가 생각해도 뼈아픈 실책이었기 때문에 디이나는 할말을 찾지 못하고 진땀만 흘렸다. 민이 그런 그녀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일단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겠습니까?” 디이나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떡이자 입가에 여전히 웃음을 띠며 말했다. “디이나 씨가 수도로 돌아가는 것이 일정에는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이미 저희들은 디이나 씨의 호위를 의뢰받은 것이란 명분을 대며 여기까지 온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디이나 씨 혼자 수도로 간다는 것은 어폐가 안 맞을뿐더러 저희가 기도하는 땅까지 가는 명분도 서지 않지요. 한마디로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겁니다.” 성질대로 몰아붙이기는 했지만 민이 꺼낸 문제점 정도는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유시리안이 이어받아 말했다. “네가 자객의 습격으로 죽든 살든 이쪽은 상관없지만, 저쪽에서 폭탄처럼 민폐 끼치는 수단으로 오는 이상 조심하는 편이 낫겠지.” “페이야 공께 보고해놨으니 일정이 새어나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루트를 변경해서 최단 거리로 가도록 하지요. 일행의 신원도 숨겨야 합니다. 특히 저희 쪽은 눈에 띄는 미남미녀들이 많으니까 변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난기 어린 눈동자로 유시리안과 무하를 보았다. 술을 산다며 나가버려 지금은 없지만 락샤사도 만만치 않은 미남이다. “민 씨의 가면도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되는 되요?” 자신을 보내지 않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맞춰지자 안심했는지 디이나가 제법 여유 있는 농담을 건넸다. 민은 유독 붉어 보이는 입술에 곡선을 그리며 짧게 답했다. “생각해 뒀습니다." 그리고는 종업원을 부르기 위해 한 손을 들어올렸다. 눈을 뗄 수 없는 미남들이 나타났을 때부터 메뉴판을 들고 있었던 종업원은 텔레포트를 불허케 하는 속도로 날라 왔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속도를 타고 부풀어 올랐을 정도였다. 민은 쿡쿡 웃으며 간단한 식사를 주문했다. 유시리안과 무하가 추가로 주문하자 다가왔던 속도와는 달리 슬라임을 연상케 하는 속도로 흐느적흐느적 멀어져갔다. 얼굴이 새빨개진 것을 보아 그 속이 대충 짐작이 갔다. 무하는 그 모습을 어이 없이 보다가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내려보았다. 역시 어색했다. “두건이나 새로 사야지.” “그대로도 괜찮은데, 왜?” “눈에 띈다며. 그리고 이 얼굴, 난 싫어.” 짧기에 단호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민은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그의 지기가 집으로 돌아오려면 먼 것 같다. 그렇더라도 결단을 내릴 때는 가까워져만 가는데 말이다. 그는 한 가지 제의했다. “두건도 마찬가지야. 지금 모습은 확실히 눈에 띄니 너에게도 그걸 빌려주지.” “그거?” “형님께 빌려온 게 있어.” 민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무하를 보았다. “전에도 유용하게 써먹은 물건이지.” 방으로 올라갔던 아사라느가 다시 식당으로 내려 온 것은 무하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차를 즐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엘프답지 않은 딱딱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 그녀는 마찬가지로 딱딱한 음성으로 디이나를 불렀다. 억지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디이나.” “아! 이제 괜찮……?”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던 디이나는 결국 말끝을 흐려버렸다. 아사라느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봤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두 눈은 울었는지 붉으며 입술을 보랏빛으로 죽어있다. 벗었던 후드를 다시 쓰고 있지만 귀가 기력 없이 쳐진 기색이 역력했고 긴 소매 밑으로 삐쭉 드러난 손은 주먹을 꾹 쥔 채 떨리고 있었다 . 정말로 간신히 서 있는 모습 그 자체였다. 디이나는 안타깝게 그런 아사라느를 살펴보다가 곧 그녀의 등에 배낭이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아사라느 씨?” “저……초록 고향에 가봐야겠어요.” “네!? 하, 하지만……?” 동행하고 싶다고 한 것은 아사라느였잖아요? 라는 뒷말을 꿀꺽 삼키며 다른 할말을 찾으려는 그녀에게 아사라느는 창백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전 가봐야겠어요.” “…….” 무슨 일이 생긴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디이나는 더 이상 묻지도 붙잡지도 않고 일어났다. “배웅할게요.” “괜찮아요.” “그래도…….” “자객들이 노리고 있잖아요? 이분들과 함께 있어야 해요.” “그럼 이 앞까지만이 라도요.” 아사라느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무하 쪽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런 이야기에 의아한 기색인 그를 슬픈 눈으로 보다가 공손히 인사했다. 무하가 당혹스럽게 마주 인사하자 설핏 웃고는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유시리안의 눈동자가 섬뜩한 조소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갑자기 왜 그럴까요?” 민이 나직이 물었다. 그에 유시리안은 무하를 잠시 돌아봤다가 찻잔을 들었다. “글쎄.” 민은 그런 유시리안의 답을 듣고 쿡쿡 웃었다. 유시리안이 왜 그러냐는 시선을 던지자 입가를 문지르며 웃음기를 실린 목소리로 답했다. “무하의 말투와 똑같아서요.” “그래?” 질문은 민에게 했지만 시선은 무하에게 꽂혀있었다. 민의 시선도 따라 무하를 향했다. 그러나 무하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둘의 대화는 물론 시선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찻잔을 이리저리 흔들며 멍한 초점으로 그 안을 내려보고 있었다. 잔속에서 맑은 찻물이 이리저리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부딪치고, 부셔지고, 다시 하나가 되고 있었다. “펠……?” 말을 걸려는 유시리안을 민이 저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 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얌전히 따른 유시리안이었으면 애당초 싸가지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펠!” “에?” 흠칫하는 바람에 손잡이를 놓쳐버렸다. 떨어지는 잔은 유시리안이 부드럽게 잡아다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아주었다. 무하가 머쓱한 얼굴로 고맙다고 하는 것과 유시리안이 뻔뻔한 얼굴로 별게 다 고맙다며 받아치는 것을 본 민은 결국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하하하!” “왜 그래, 민?” “……?” 무하와 유시리안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것을 보며 재차 웃었다. 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면 불안이 가라앉는다. 순수하게 이 상황을 즐거워하게 된다.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이 강요되지 않은 선택이라면……후회 남지 않은 선택이라면…….’ 웃음이 잦아들며, 민은 끝 맛이 써짐을 느꼈다. ================================================================================ 정상인으로의 컴백은 좋습니다만, 생활 리듬이 영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난다니... 이런 생활이 저한테도 가능할 줄은 몰랐습니다. 광란에 휩싸이면 다시 고스란히 뒤바뀌겠지만... 현상태가 마음에 드네요. 역시 사람은 밤에 자고 낮에 활동해야 하는 겁니다! 하하하! 라**** **와 카*** **을 읽으며 새삼 생각한건데, 전 할렘물이 싫습니다. 그것이 남자한테 여자들이 몰리는 거든, 여자한테 남자가 몰리는 거든. 남자한테 남자가 몰리는 거든, 여자한테 여자가 몰리는 거든. 할렘물은 딱 질색입니다. 전 1:1 관계, 동등한 관계가 좋아요. 또 어느 한쪽이 휘둘리면서 그에 맞춰지는 것 역시 싫습니다.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상대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관계가 좋습니다. 뭐, 그렇다는 겁니다. 이번 회는 좀...많이 짧군요; 이야기가 여기서 끊기고 장이 바뀌는 부분이기 때문에... 음냐... 어쩔 수 없었습니다( '')~ 제 1기 마기. 타 계에서의 왕래가 빈번했던 그때. 엘프들의 고향도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도하는 땅’에 인접한 초록 고향과 ‘돌아오지 않는 곳’이라 불리는 봉인 결계에 인접한 들녘 고향. 단 두개만이 남았을 뿐이다. 봉인 결계 너머에 있었던 그 많은 고향들은 어떻게 됐는지 이 안에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결계를 넘어보겠다고 갔던 모든 이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모르는 많은 종족들은 그 결계 근처의 위험지대에 ‘돌아오지 않는 곳’이란 호칭을 붙이고 경외했다. 진짜 두려워할 결계의 존재는 전혀 모른 채. 진실은 그렇게 묻혀만 갔다. 이곳 초록 고향은 락아타 제국에서 기도하는 땅 근처까지 넓게 퍼져 있는 깊고 울창한 수해(樹海)였다. 바로 이곳에 그토록 칭송받는 초목의 엘프가 터를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초록 고향이 엘프들만의 고향인 것은 아니었다. 곳곳에 소수로 무리를 짓고 사는 종족들도 제법 있었고 그 근처에 살며 그곳의 나무와 짐승으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엘프에게 약초학을 배우기 위해 몰려든 약제사들만의 마을도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전통과 규칙으로 이 은혜 받은 수해를 지키며 세월을 보내왔다. 그럼에도 초록 고향하면 떠오르는 것이 초목의 엘프인 것은 그들이 이곳에 뿌리내린 길디 긴 세월과, 지닌 힘, 지식, 그리고 지혜 때문일 것이다. 강한 햇살에도 촉촉한 토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가 빚어내는 깊고 시원한 소리. 은혜 받은 땅, 초록 고향. 평온한 그곳에 어울리는 느긋한 걸음으로 마을을 향하던 한 노인이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편에서 걸어오는 자의 신상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노인은 시력이 썩 좋은 편이 못 됐다. “아사라느님 아니시오!” “리무씨…….” “일 때문에 외지로 나가셨다는 말은 들었소! 지금 돌아오시는 길이신 게요? 일은 잘…….” 앞서 말했듯이 시력이 썩 좋지 못한 리무 노인은 아사라느의 창백한 안색을 뒤늦게 알아보고 허둥대다가 모른 척 얼버무려주었다. 그는 평화로운 초목 고향의 토박이다운 노인이었다. “날씨가 참 좋지요?” “예.” 아사라느는 리무 노인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초록빛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수줍게 드문드문 보이고 있었다. 그 기분 좋은 대조를 아사라느는 줄곧 좋아해 왔다. 물론 그것은 리무 노인은 물론 초록 고향 토박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리무 노인은 자신의 생애 속에 항상 같은 모습으로 있었던 엘프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생김은 이리 달라도 저 엘프는 리무 노인의 수십, 수백 배의 세월을 살아왔을 것이다 . 그녀가 봤을 때 턱없이 어린 자신의 어설픈 위로가 그녀에게 필요할 리 없다. 어차피 그녀의 슬픔과 고뇌를 자신은 공감할 수 없다. 이해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즐거움’을 꺼내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래서 리무노인은 자신의 소중한 비밀을 은밀히 풀었다. “아사라느님. 이 길을 따라 쭉 가다가 천련목의 왼쪽 풀밭으로 깊이 걸어 가다보면 가는 시냇물이 흐르는데 상류 쪽으로 가다보면 금방 큰 바위가 나온다오. 그곳이 시냇물의 시작인데 물이 아주 시원하고 달지요. 내 비밀기지라오.” 초록 고향의 토박이들은 초록 고향 안에 자기만의 비밀기지를 만들어 놓는다. 그곳을 찾는 것은 이곳 어린이들의 주 놀이이자 모험이었다. 그렇게 한번 찾은 비밀기지는 이렇게 머리가 새하얗게 새도록 나이가 먹도록 비밀스럽게 간직한다. 아내나 지기에게나 알려줄까? 절대 발설하지 않는 비밀기지를 아무렇지 않게 알려주며 자상한 미소를 짓는 리무 노인을 보며 아사라느는 디이나와 헤어져 처음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리무노인은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내 친구, 서린을 아시죠? 녀석이 알려준 거라오. 사이좋게 공유중이지. 혹시 서린에게 들키시더라도 내가 말했다고 하시면 아니 되오? 이 리무가 혼난다오.” 서린은 이쪽 구역의 지배자인 손바닥만한 작은 백사다. 그 앙증맞은 모습과는 달리 기운을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목표물만 녹여 죽일 수 있는 독기와 컨트롤을 지닌 무시무시한 지배자다. 다행히 그 힘에 비례하듯 지성 또한 높아 함부로 힘을 남용하는 자는 아니었다. 엘프들과도 그럭저럭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친구인 리무 노인은 이쪽 구역에는 꽤 유명인사였다. 물론 그 말을 리무 노인, 본인 앞에서 하면 어이없다는 웃음만 터뜨리지만 말이다. 그런 성품의 리무노인이 일부러 ‘친구’를 운운하며 저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괴로워 보이는 아사라느를 웃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씀씀이를 알았기에 아사라느는 약하게 웃어보였다. 이상하게도 쥐어짠 웃음이라도, 일단 짓고 나자 한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서린님은 여전하시지요?” “하하. 여전히 잠보에 신경질쟁이라오.” 리무노인의 자상한 눈동자가 개구쟁이처럼 빛났다. 선잠에 든 친구를 은근히 괴롭히는 재미는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생각 깊은 친구지만 억지로 깨워졌을 때는 신경질쟁이로 변한다. 그렇게 서너번 소음을 만들어 깨워버리면 잔뜩 약이 올라 물을 끼얹기도 하고 옷 속으로 들어와 괴롭히는 둥 보복을 강행했다. 리무노인은 어려서부터 간지럼을 심하게 탔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손님이 찾아왔었다오.” “손님이요?” “타지 인간으로 보였는데……. 서린 녀석이 손을 보자마자 늦었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었지요.” “타지 인간……?”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소. 그렇게 아름다운 금발은 처음 봤지.” “…….”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아사라느의 모습은 그래도 좀 전에 비하면 괜찮아진 모습이었다. 생각이란 건 깊게 하는 건 좋지만, 너무 속으로만 싸매면 안 된다. 끝이 없는 미로에 빠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답지 않은 일상생활 이야기 따위를 해가면서 평화에 취해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리무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마을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점심때가 되서 이만.” “예.” 그렇게 가볍게 목례를 주고받고는 헤어졌다. 아사라느는 리무 노인이 알려준 샘을 찾아 걸었다. 초록 고향의 중심부, 엘프의 마을로 가면 갈수록 청량해지는 공기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사라느는 그곳이 싫었다. 리무 노인이 말한 그대로의 작은 시냇물은 초록 고향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시냇물이었다. 하지만 엘프인 아사라느의 눈에는 활기차게 약동하는 물의 정령의 춤사위가 보였다. 이곳은 특별했다. 리무노인은 스스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정령사 자질이 뛰어난 듯 하다. 이 활기참을 즐길 수 있다니. 시냇물을 발견했으니 이제는 상류 쪽으로 가볼 차례다. 아사라느는 정령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갈수록 좁아지던 시냇물이 급격히 축소되더니 눈앞에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나타났다. 비좁게 갈라진 틈으로 시냇물이 힘껏 뛰쳐나오고 있었다. 나뭇잎 틈새로 비쳐 내린 햇살에 은빛으로 물들며 활기차게 밑으로, 밑으로 달려 나갔다. 두 손을 뻗어 가늘지만 힘찬 물줄기에 대자 금세 맑은 물이 넘실거렸다. 고개를 숙여 목을 축였다. 그것은 너무도 시원했고 달았다. 충동적으로 세수까지 한 아사라느는 바위의 그늘 속에 대자로 누웠다. 시원한 바람의 소리, 활기찬 정령들의 노래, 싱그러운 나무의 냄새……. 아사라느가 좋아하지만, 그만큼 싫어하는 초록 고향의 내음. 「초목 족인가.」 “……!” 위쪽에서 들려온 울림에 소스라치게 놀란 아사라느는 벌떡 일어났다. 예상대로 손바닥만한 작은 뱀이 바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하얀 몸체와 대조적인 흑색 눈동자가 투명한 비닐에 덮여 기이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아사라느보다도 훨씬 오래 살아온 저 뱀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만큼 이 ‘시기’의 엘프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달가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하는 듯 보였다. 아사라느는 바싹 긴장했다. “초록 고향의 서쪽 지배자, 서린님을 뵙습니다.” 「혼자 온 것을 보니 결국 못 찾은 모양이군. 하긴 네 수준에게 잡힐 녀석은 아니지. 애당초 잡혔던 것이 의아했으니.」 작은 뱀은 천천히 똬리를 쳤다. 느긋한 모습이었지만 그 눈동자는 상당한 적의로 번뜩이고 있었다. 아사라느는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서린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도망치지 못했을 거라는 장로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 친구의 아들이다. 돕는 게 당연하지. 그대들의 욕심 때문에 희생당하기에는 아까운 녀석이야. 물론 희생당할 녀석도 아니지만.」 “장로님께서는 서린님이시라면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알려주지는 않을 거라는 말도 했겠지?」 아사라느는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뱀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아사라느를 꿰뚫었다. 적의도, 독기도 없는데 아사라느는 잔뜩 굳어 식은땀을 흘렸다. 서린의 통찰력이 죽음을 갈망하는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서린의 눈동자는 처음 그대로였지만 싸늘하게만 느껴져 아사라느는 자꾸만 주눅이 들었다. 보통의 엘프라면 그렇지 않을 테지만, 아사라느는 죽음을 원하는 이단자였다. 때문에 서린에게서 풍기는 위협이 크게 박혀왔다. 그것을 서린이 알아차렸는지는 미지수다. 「초목 족 일은 초목 족이 알아서 해결 할 일.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내 친구가 희생당할 때도 나는 방관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사라느는 이번으로 두 번째 계승식을 맞이한 엘프다. 그만큼 ‘덜’ 미쳐있는 엘프다. 이율배반적인 현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죽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계승식 때쯤이면 아사라느도 저들과 다를 바 없이 미쳐서 날뛸게 뻔하니까. 그 압도적인 현실감은 아사라느를 지쳐가게만 했다. 말끝을 흐리는 아사라느를 서린은 인정 없는 눈동자로 내려보다 똬리를 풀었다. 「아직 선택하지 않은 이상 그 아이는 초목 족이 아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죽은 친구의 하나뿐인 자식이지. ‘왜’가 필요한가?」 서린의 작고 하얀 몸이 바위 너머로 사라졌다. 「리무가 보낸 것 일 테지. 이번은 그냥 보내주겠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마라. 내 잠을 방해하지 마라. 내 안식을 방해하지 마라. 초목 족의 방해는 용납하지 않는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꼿꼿하게 서 있던 아사라느는 서린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무너졌다. 그때 바람의 정령이 아사라느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자연에 녹아있는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도드라져 나와 있는 정령의 모습에 누군가에게 소환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뭔가요?” 「에르니가 불러요.」 에르니. 아사라느에게 이번 명을 내린 장로였다. 아사라느는 지친 얼굴로 땅에 엎드렸다. 불쾌한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곳이 싫었다. 언제나 그립고 사랑스러운 곳이지만, 그만큼 그녀를 옭아매는 곳. “……곧 갈게요.” 그래서 벗어날 수 없는 곳. “어서오너라” “…….” 모두가 인정하건대 엘프는 아름답다. 천성적으로 깨끗한 피부와 부드러운 머리카락, 청아한 목소리를 타고났다. 그리고 종족마다 다르지만 각기 독특한 매력이 있는 고양이 눈동자를 지녔다. 초목의 엘프는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 그림자의 엘프들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광채의 고양이 눈동자를 지녔는데, 인간들은 그들의 눈동자를 보고 금속빛 고양이 눈동자라고 했다. 그 어느 것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사라느의 눈앞에 있는 장로는 초목의 엘프다운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다. 엘프는 대부분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을 하고 있지만 그는 산뜻해 보이는 커트머리였다. 엘프들에게는 보기 힘든 머리스타일이지만 그에게는 잘 어울렸다. 오히려 머리 긴 그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다섯 번째 계승식을 맞는 이로서 그 누구보다도 그랜드를 찾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엘프이기도 했다. ?선택?받기만 하면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 오르는 그랜드와는 달리 장로는 5천살에서 6천살의 나이대의 엘프만이 될 수 있다. 그 아래로는 연륜이 떨어지고, 그 위라면 미친 것이 극에 달해 금방 자살해버리기 때문이다. 에르니는 이제 다섯 번째 계승식을 맞는 엘프로서 평소에는 능청스러운 면이 있지만 생각이 깊고 매사에 확실해, 선대 그랜드를 잘 보필했었다. 그랜드가 없는 지금은 실질적인 지도자이기도 했다. 나뭇가지에 편하게 앉아있던 에르니는 안색이 좋지 않은 아사라느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 온 게 아니냐? 돌아오라는 말을 뿌리치고 그들과 동행했던 네가 말이다.” “자객을 만났습니다.” “안다.” 힘들게 입을 연 아사라느와는 달리 에르니는 담담하기만 했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아사라느를 보며 가지에 열린 열매를 따 와삭 베어먹었다. 엘프들에게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만이 존재했지 격식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아사라느는 딱딱하게 격식을 차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만의 작은 반항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몸부림만이 지금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던 것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에르니였지만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거론되어 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없는 화제였다. “얼굴을, 아니 눈을 보았습니다.” “너답구나.” “예?” 에르니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스쳤다. 일부러 이리저리 뱅뱅 돌려 가는 화법. 그것은 엘프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아사라느만의 화법이었다. 평소라면 그것을 느긋하게 다 들어주었을 에르니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내가 보냈다.” “어째서!” 오랜만에 노골적인 딱딱함을 지우고 소리 지르는 아사라느의 모습이 꽤 귀여웠다. 하지만 일은 일. “몰라서 묻는 거냐?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곳에 가는지 보고한 것은 너다.” “하지만 저는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있다……고.” 무너진 희망을 떠올린 아사라느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일로 인해 네가 다칠 뻔했다는 보고는 들었다. 계속 잠들어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용병 때문에 너까지 휘말렸다 더구나. 그건 미안하다.” “제가 휘말렸던 일 때문에, 제가 다칠 뻔했다는 일 때문에 미안한 거라면 필요 없어요.” “그렇다면 내가 사과할 일은 없는 거구나.” 에르니는 다 먹은 열매의 씨앗을 땅에 뱉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굵지 않은 가지에 있었음에도 그 가지는 휘어짐 없이 곧게 뻗어있었다. 그가 자리를 떠날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아사라느는 고개를 번쩍 들고는 평소의 화법을 잊고 엘프다운 직설적으로 말했다. “당신은 제 나이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제가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도!” “기다려 달라고 했었지. 희망이 있다고 했었지.” 늘 느긋하고 차분했던 에르니의 눈빛이 놀랍도록 차갑게 변했다. 아사라느가 그에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의 앞으로 훌쩍 뛰어내린 그는 이리 물었다. “그 희망이 뭐지?” “그건…….” 이미 무너져 버렸다. 그녀는 진실을 알고 말았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진실을 보고 말았다. 에르니는 손을 뻗어 아사라느의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그 손길과는 달리 내뱉는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곁에 있었던, ‘열어 놓은 마음?을 지니고도 미치지 않고 있는 용병을 말했던 거겠지?” “…….” 아사라느는 괴롭게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아도 흘러내리던 눈물이 에르니의 손가락을 지나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에르니는 그것을 집요하게 쫓아 훔쳐 주었다. 아사라느는 힘들게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도?” “네 보고를 듣고 조사했다.” 생각은 깊게, 판단은 신중하게, 행동은 빠르게 살아왔던 에르니였다. 겨우 두 번째 계승식을 맞는 아사라느와는 그 연륜의 차가 뼈저리게 컸다. “이제야 알게 된 모양이구나.” “어째서 말해주지 않으셨죠?” “네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너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 않느냐?” 그의 말이 옳았다. 부정하고 또 부정했을 것이다. 애써 생긴 희망에, 도피처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에르니는 확실하게 못 박았다. “우연히 '열어 놓은 마음'을 지니고 태어나긴 했지만 그는 미칠 리도, 미칠 수도 없는 존재다. 이제 너도 알게 됐지만…….” “그는 요정 족이었어요. 하 등급의 고위 종족……. 이제는 방문하지 않는 타 차원계의 존재.” 그들은 하 등급의 고위 종족이다.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지고도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건 최하 파 등급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는 그것을 가볍게 뛰어 넘은 하 등급의 종족이다. 그의 은발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아사라느의 희망은 깨졌다. 그는 미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요정……. 그때의 배반에 실망해 더 이상 발을 돌리지 않는 옛 친구들. 술이 주식이었던 눈부신 존재. 강하고 자유로운 존재. 표현은 엘프의 것과 같은 황금빛이지만 그 광채도 그 색채도 엄연히 틀린 금안의 존재. 부정한 것을, 그리고 현혹시키는 것을 꿰뚫어 보는 강렬한 금안과 깊은 마력의 상징인 은발. 반하지 않고는 못 견딜 매혹적인 그들. 정 많고 의리 있던 그들에게 그 추악한 배신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버렸다.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 가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혈이다. 아직 선택하지 않은 혼혈.” 그랬다. 차라리 그의 눈동자가 금안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니면 처음에 그가 두건을 벗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대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오는 동안 절망에 몸부림쳤던 아사라느는 깊은 한숨으로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아직도 뚜렷한 눈물 자국을 에르니는 못 본 본 척 해주었다. “그에 대한 건 이제 됐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제 나이트를 내버려두라는 거예요. 그녀는 그저 저를 위해 동행한 것뿐이에요. 이 목적에 해당되는 일에 그녀의 권한은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내버려두세요.” “제국의 황태자가 움직이고 있는 일이라는 건 나도 안다.“ 에르니는 아사라느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피식 웃었다. 지쳐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사라느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권태를 읽었다. 그는 뒷말을 짧게 이었다. “하지만 당장 책임자가 죽으면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런……!” “아사라느 락 아트리드.” “…….” 갑자기 호명된 풀네임에 아사라느는 말을 멈추었다. 엘프들 사이에서의 풀네임은, 그 본인이나 그랜드의 입에서 나올 때만 위력을 발휘한다. 본인이 내뱉은 풀네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며, 그랜드가 꺼낸 풀네임은 그 이름의 주인을 속박하고 강제한다. 그것이 모든 엘프의 속죄양인 그랜드에게, 엘프들이 준 권한이다. 에르니는 장로일 뿐 그랜드가 아니기에 강제력은 없지만 현재 그랜드의 대리를 하는 자로서, 그 권한이 인정된 상태다. 때문에 그랜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에르니에게서도 거부하지 못할 위압감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 그가 보였던 권태감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 녀석을 찾아오라고 명 내렸다. 멋대로 희망이 생겼다며 명을 어겨 일이 늦어지게 한 것은 너다.” “……!” “난 너를 잘 알아. 일이 어찌됐든 자신의 나이트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 말하기 위해 온 것이겠지. 자기 자신 때문에 그녀가 위험해 졌다는 것쯤은 알아차렸을 테니.” “…….” 마냥 편한 이웃집 아저씨와 갔던 에르니가 늘 짓던 표정 그대로 천년간 그랜드를 보필한 연륜을 뿜어냈다. “어리광은 그쯤 해둬라, 아사라느 락 아트리드.” “어리광……이라고요?” 딱딱하게 되묻는 아사라느에게 에르니는 여전히 느긋한 모습으로 답했다. “지금의 넌, 은릴과 다를 바 없어.” “그런……!” 발끈하는 아사라느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쓸어 넘겨준 에르니는 그대로 홀짝 뛰어,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다. 짧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이마 위에서 흐트러진 아래로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화를 내려는 아사라느가 무안해지리 만치 그는 태연했다. “은릴이 돌아왔다.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래도 네 어머니 아니냐.” 아사라느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에르니는 나뭇가지 위로 가볍게 사라졌다. 건장한 성인 스무명이 팔을 벌려 감싸도 채 감싸지지 않을 거대한 나무. 이곳이 아사라느가 성인이 되어 나온 집이다. 첸이라 불리는 이 나무는 독특하게도 속이 텅 비어 있으면서 껍데기가 얄팍하고 단단하다. 그것은 나뭇가지도 마찬가지라 안쪽에서 보면 수많은 통로가 뚫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첸에 이천년 이상 엘프들이 보금자리를 튼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이 태어나면 신중하게 터를 골라 첸의 묘목을 심는다. 그리고 자신의 표식을 남겨두어 자식이 이천 살이 되어 독립할 때를 준비해준다. 만약 표식이 서려진 첸에 손을 댔다가는 엘프들의 보복을 면치 못한다. 아사라느는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당신들의 자식을 위해 준비했을 나무의 기둥을 어루만졌다. 그녀를 반기듯 숙여오는 가지에게 옅게 웃어보였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사라느는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벌써부터 죽음을 꿈꾸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은릴은 입버릇처럼 일족이 미쳤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일족이 어째서 이 꼴 된 것인지 자세히 알려주면서 신뢰를 배반하지 말라고 했었다. 자상하고 현명한 어머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며 자수를 놓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랬는데……. 다시 한숨을 내쉰 아사라느는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 인기척이 분명 있는데도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들어가자 늘 즐겨 앉으시던 나뭇가지의 안쪽에 힘없이 앉아 있는 은릴이 보였다. 늘 단정했던 흑발이 이리저리 엉켜있고 늘 고고하게 치켜들던 고개는 축 늘어져 있었다. “어머니?” “…….” 섬뜩한 기분이 급히 달려가며 다시 한번 소리쳤지만 은릴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사라느는 떨리는 손으로 은릴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늘 맑았던 어머니의 눈동자가 흐릿했다. “어머니……?” “…….” 여전히 답은 없었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흐트러진 모습에 아사라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꼭 끌어 안아버렸다. 왈칵 눈물이 치밀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왜 그러시는 거 에요?” 끌어안은 상태로 부들부들 떨며 몇 번이고 묻자 조심씩 은릴의 몸이 움직였다. 아사라느가 다급히 떨어져 은릴의 얼굴을 살폈다. “어머니?” “…….” 여전히 힘없는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시야는 잡혔는데 초점이 뚜렷했다. 바싹 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였지만 은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사라느는 그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은릴은 끝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쓴 미소를 지으며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아사라느가 주먹 밑으로 자신의 손을 들이밀자 그것을 폈다. 제법 무게감이 나는 반지 하나가 아사라느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건……?” 은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초록 고향은 현재 두 지배자가 이등분하여 지배하고 있다. 그 중 동쪽 지배자가 그린 드래곤 나린, 서쪽 지배자가 백사 서린이다. 나린은 어머니가 혼자 잉태한 순수 드래곤으로, 그의 나이가 수천에 달했을 때 서린이 태어났다. 혼혈이었던 서린이 선택을 달리하여 종족은 갈렸으나 나린은 나이 차가 많은 동생을 아껴 어머니가 물려준 초록 고향의 절반을 떼어주었다. 생각 깊고 정 많은 서린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여태까지 그곳에서 평온하게 살아왔다.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많은 인연을 맺어왔지만, 서린이 소중히 여기는 존재는 그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 중 한 명은 이미 고인이 된 녀석으로 2대전 그랜드였던 엘프로 순수한 녀석이었다. 또 다른 친구 리무라는 녀석은 자각은 없지만 뛰어난 정령술사의 자질을 가진 다정한 녀석이다. 잘 때마다 자주 방해하는 것이 흠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서린은 똬리를 친 채 달콤한 선잠에 취해 있었다. 공기가 뒤틀리며 녹아져 있던 무언가가 튕겨지듯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똬리를 천천히 풀며 머리를 들었다. 짙푸른 녹색 그늘 저편, 아사라느가 서린을 만났던 그 바위 위에 걸터앉는 에르니가 보였다. 기분 좋은 바람 속에 에르니의 짧은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헝클어지고 초목 엘프 특유의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가 무기질의 것이 되어 무심하게 어디론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 울적해 보이는 친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던 서린은 친구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물었다. 「반지를 돌려받은 게냐?」 “내 것이었으니까.” 서린의 접근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던 듯 에르니의 목소리에는 지극히 평이했다. 서리는 의아해 하며 다시 물었다. 「은릴에게 아주 준 것이 아니었나?」 “이것이 그녀를 망쳤다.” 「그런가.」 서린은 ‘침묵의 대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은릴이 동의 없이 힘을 남용하여 망가졌으리란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서린의 답에 에르니는 피식 웃었다. “여전히 냉정하군. 이 시기의 엘프가 그렇게 싫다면 나도 피해버리지 그래?” 이어 에르니의 어깨로 올라탄 서린은 짧게 답했다. 「넌 안 미쳤잖아. 진실을 안 순간부터.」 “…….” 차라리 몰랐으면 좋으련만. 엘프들이 모든 진실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그 배신극에 참여하지 않아, 망각을 선물 받은 타 종족보다야 많이 알고 있긴 하지만 완벽히는 아니다. 그 진실의 무게. 그것이 엘프의 왕이자 엘프의 희생양인 그랜드의 짐이었다. 에르니는 그랜드도 아니고 그랜드였던 적도 없지만 그는 2대전 그랜드, 란티리네의 지기였다. 또한 란티리네의 ‘표식’을 받은 자였다. 그의 지기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에르니와 맞들었다. 물론 에르니는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진실을 안 순간부터 에르니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지기에게마저도. 천년후면 자신을 버려두고 떠나야 하는 지기에게 죄책감을 씌우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지기가 죽은 후 그는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미쳐 가는 동족들 사이에서 그는 홀로 버텨나가야 했다. 안다는 것만으로 방법이 생긴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에르니는 무려 이천년간이나 해결책을 모색하고, 궁리해 왔다. 하지만 한 오라기의 실마리도 풀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엘프의 운명을 한탄하며 함께 타파할 길을 모색하던 은릴이 결국 일곱 번째 계승식을 맞이하여 완전히 미쳐버렸다. 에르니에게 남은 것은 이제 얼마 없었다. 그는 그 얼마 안 되는 것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은릴도 곧 죽겠지.」 “그러겠지. 금방이라도 자살 할 것 같더군.? 서린은 조심스럽게 에르니를 살폈다. 「괜찮아?」 친구의 걱정에 에르니는 쿡쿡 웃었다. 좀 전까지의 외로움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래도 아직 지킬 것이 남아 있음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서린 역시 그에게는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만 말이다. “물론 괜찮아.” 그랜드로 지목 받은 그 아이가 감금됐던 2년 전, 그녀가 자수를 배우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마을을 떠났을 때 이미 이와 같은 일을 예상했다. 또 오랜만에 은릴을 찾은 에르니가 침묵의 대가를 건네주었을 때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보면서 이미 손쓸 수도 없이 망가졌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를 감시했고, 그러다 그녀가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수작을 부렸음을 알아냈다.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던 그녀를 암살해도 된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그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덤덤히 나와 주었다. 어쩌면 에르니는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냉정한 건지도 모른다. 서린은 좀더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말했다. 「난 네가 그녀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내가?” 에르니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서린은 머쓱하게 에르니의 목덜미 쪽으로 돌아갔다. 간지러움에 다시 웃다가 서린이 다른 쪽 어깨로 이동하자 애써 진정하며 말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은릴은 그냥 친구야.” 「엘프는 자신의 반려를 위해 머리를 기르잖아. 그런데 은릴이 결혼했을 때 머리를 잘랐기에 하는 소리야.」 “그랬던가?” 그때 은릴이 결혼했었던 가? 고개를 갸웃하는 에르니를 보며 서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머리는 왜 자른 거지? 나는 그 때문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쩐지 안 물어 본다 했더니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군.” 미처 가시지 못한 웃음기가 답하는 에르니의 음성에 가득 실려 있었다. 서린은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에르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덤덤했다. “일생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노기가 가득 담긴 서린의 기세에도 에르니는 능청스레 미소만 지었다. “말 그대로.” 「너……!」 에르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듯 담담했다. “난 미치지 않아, 서린.”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런 내가 미쳐 가는 엘프와 함께 할 수 있겠어?” 「꼭 엘프가 아니어도 되잖아.」 에르니는 친구의 작은 몸뚱이를 검지로 톡 치고는 답했다. “물론 엘프가 아니어도 되지만……. 이종족과 결혼을 하면 반려에게도 ‘선택의 의무’가 생겨. 나의 반려에게도 마찬가지로 생기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미쳐 가는 엘프로서의 삶을 줄 수 있겠어? 그렇다고 미쳐 가는 엘프들을 내버려두고 내가 타 종족이 될 수 있겠어?” 「안될 건 또 뭐야.」 서린이 삐쭉거리며 말하는 소리에 에르니는 소리 없이 웃었다. “하긴. 안될 것 또 뭐겠냐.” 그러며 유쾌하게 한마디 했다. “어쨌거나 짧은 게 편하잖아.” 멍하니 앉아 있는 은릴의 앞에 아사라느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황폐한 모습은 언젠가 있을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하니 섬뜩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어머니를 앞에 두고도 자신의 미래만을 걱정하는 스스로가 치 떨리게 혐오스러웠다. “어머니.” 망연하게 중얼거리는 아사라느를 은릴은 흐릿한 눈동자로 마주보았다. “어머니…….” 에르니를 막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이상 디이나의 옆에서 그녀를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르니는 아사라느가 애써 잊으려 했던 어머니의 존재를 강제로 인식시켰다. 이런 모습이 된 어머니를 두고 마을을 떠날 수는 없었다. 어째서 어머니는 그랜드가 되고자 했을까? 그랜드에게 의지하는 엘프들을 그토록 안타까워하셨는데. ……그렇게까지 미치신 걸까. 무릎을 모으고 얼굴을 묻었다. 암담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곧 자살하실 것이다. 그리고 아사라느 자신은 그랜드로 지목 받은 자가 그랜드에 오르기 전까지는 계속 미쳐가겠지. 그를 붙잡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붙잡은 후에도 문제다. 아사라느가 들어 아는 그라면 죽으면 죽었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요당할 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일단 붙잡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는 듯이 움직이는 에르니의 속셈을 알 수 없다. “어머니…….” 언제부터였을까. 은릴이 힘들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사라느가 그것을 눈치 챈 것은 은릴이 그녀 쪽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비틀비틀 아사라느의 앞까지 걸어온 은릴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전히 기운 없지만 초점은 뚜렷한 눈동자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어머니를 껴안았다. 그렇게 힘들고 괴로웠던 응어리를 토해내듯 울고 또 울었다. 해결 된 것도 없고 해결책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포근했다. [연재] 아해의 장-351 기도하는 땅을 둘러싼 지역들을 통칭 ‘대륙의 각’이라 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바다로 갈린 네 개의 대륙이 중심부인 기도하는 땅을 각의 형태로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네 개의 대륙의 각은 각기 속해 있는 대륙에 의해 각각 이등분된다. 대륙의 나뉨이 바다의 갈림과 동일하지 않은 까닭이다. 하여 서쪽 대륙의 두 각이라면, 서상각, 서하각으로 불리며 북쪽 대륙의 두 각이라면 북좌각, 북우각이라 칭해지고 있다. 이 각들은 언제나 기도하는 땅을 찾는 자로 붐빈다. 그에 반해 기도하는 땅은 한적한 편이다. 그것은 기도하는 땅은 순례자의 걸음으로밖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공들은 한번에 한 손님밖에 받지 않는데다가 왕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순례자의 걸음을 차지하지 못한 손님들이 항시 붐벼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제약에서 풀려나는 기간이 다가오고 있다. 기도하는 땅의 죄다 얼어버리는 기적 같은 날. ‘레이아사의 날’! 기도하는 자가 만인에게 공개되는 영광스러운 날! 자연히 인파는 더 붐볐다. 이때쯤이면 안 그래도 성황인 여관은 복에 겨운 비명을 지른다. 이제 레이아사의 날까지 일주일. 곳곳에서 몰려든 객들은 숙소를 잡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래도 이맘때면 일반집도 민박을 하기 때문에 질만 안 따지면 어떻게든 구할 수는 있었다. 귀족들이나 부유한 자들은 까다롭게 수준을 따졌지만 그들에게는 그들만을 받는 고급 여관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은 없었다. 어디 일 이년 이어온 행사던가. 이 지방의 특색으로 굳어버릴 정도로 길디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축제다. 나름대로 그에 맞게 정비되어 있는 것이다. 고급 여관은 비싼 숙박료로 인해 자연히 고객층이 걸러졌기 때문에 굳이 손님을 가릴 필요는 없었다. 대신 그 비싼 숙박료만큼의 서비스를 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하지만 저런 사람들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돈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지만 행색은 초라하고 언행은 거칠다. 일단 손님으로 받아들이면 고객이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해야 하는데 저런 자들일수록 취향은 까다롭기 마련이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어쨌든 경험을 통해 판단하건 데 저들은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인 부류가 분명하다. 비수기 때라면 야 돈만 보고 받아주겠지만 지금은 성수기 중에서도 성수기. 귀족들조차도 골라 받아도 될 정도로 사람이 몰리는 판국에 저런 손님들은 사절이다. 위와 같은 판단을 한 종업원이 공손히 웃으며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되려는 말을 하려했다. 만약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깡마른 여자가 그보다 먼저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훗날 지배인에게 딱 죽지 않을 만큼만 혼났을 것이다. “페이야 디이나 란 카르민이다. 방은 각각 네개로.” 길게 말할 기운도 없는지 짧게 끊어 말하며 여자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먼지가 앉은 소매 밑으로 살결은 귀족 특유의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여자가 보여주려 한 것은 그 살결이 아니었다. 손목에 달려 있는 투박한 팔찌였다. 그것에는 대 세력가인 페이야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종업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 주십시오.” 침착하다 볼 수는 없는 음성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카르민 중에서도 세도가인 페이야 가의 란인 것이다. “바로 안내할 것이지 기다리긴 뭘 기다려.” 종업원이 전과 같은 판단을 하게 한 장본인인 남자가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먼지투성이인 옷차림에도 당당해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의 남자였다. 그래도 천하의 페이야 가 사람이니 내색 못하고 슬쩍 못들은 척 안으로 들어가 지배인을 찾았다. 어떤 일을 당해도 귀족을 대하는 것은 항시 예의바르게, 정중하게.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주의사항이었다. 그들 눈에 잘못 들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남이 기껏 해준 충고는 달게 받는 게 좋다. “쳇. 피곤하게 하는군.” 종업원이 안으로 들어가는 꼴을 보며 보라색 눈동자의 남자가 투덜댔다. 창백한 안색의 디이나는 지친얼굴을 해보일뿐 눈치 없는 종업원을 위해 한마디 거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척 봐도 먼길을 온 것이 분명한데 지배인을 찾는답시고, 식당에조차 안내하지 않고 획 들어가 버린 종업원이 곱게 보이지 않은 탓이다. “곧 오겠지. 율은 피곤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자꾸 신경질을 부리고 그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마찬가지로 먼지투성이인 옷을 걸치고 있는 은발의 남자에게서 나왔다. 길가다 한번쯤은 뒤돌아 볼 법한 보기 드문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얼굴은 아무리 잘 봐줘도 중하위를 면치 못하는 남자였다. 뒤쪽에서 조용히 있던 부드러운 빛의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문가에 마련된 의자를 권했다. “디이나 씨는 여기 앉아 계시지요?” “괜찮습니다.”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는 짧고 간단하게 다시 권했다. “사양은 건강하실 때. 몸 상태도 좋지 못하신데 무리하셨습니다.” 거절할 말을 찾지 못한 디이나는 그의 깊은 배려에 감사하고 앉았다. 일단 어딘가에 앉고 나자 살 것 같았다. 가지고 온 스테미너 포션은 각 산리와 말에게 먹이는 것만으로도 부족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할당되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온 것도 아니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기 때문에 피로가 극에 달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디이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며 일행을 곁눈질했다. 이들은 말 그대로 ‘괴물’이다. 본래라면 일주일에서 열흘 걸릴 거리를 단 삼일만에 돌파해 놓고는 저렇게 씽씽하다. 특히 부족한 싸가지만큼 실력이 높기로 유명한 유시리안은 동네 한바퀴 산책하고 온 듯 말짱하다. 만약 눈에 뛴다는 이유로 옷을 바꿔 입어, 먼지가 묻지만 않았더라도 정말로 그리 믿어버렸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다 뿐이지 무하나 민도 만만치 않다. 락샤사는 짐승을 타고 오래, 그리고 빨리 달려야 한다는 것을 듣고는 검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지는 이미 오래다. ‘시오니타님 외에 저들을 감당할 자가 또 있을까?’ 적어도 락아타 내에는 없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픈 다리를 주물렀다. 그나마 디이나가 나이트로서 상당한 경지에 올랐기에 망정이지 다른 레이디였다면, 아니 보통의 건장한 남자였더라도 이들의 페이스를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고 싶었지만 더러운 손수건이나 옷으로는 닦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길가면 모를까 바로 앞이 여관인데 뭐가 아쉬워서 닦으나마나인 걸레조각에다 얼굴을 문지르겠는가. “지배인이 늦는군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 지배인에 대해 말하며 지친 신음성을 냈다. 그 망할 종업원 녀석. 눈치가 없으면 행동이라도 빨라야지. 무의식중에 살기까지 뿜는 디이나의 눈앞에 작은 병이 불쑥 나타났다. 받아보니 반정도 남은 스테미너 포션이었다. “아, 고맙습…….” 인사하며 올려보니 낯선 얼굴이 있었다. 잠시 놀랐다가 이내 그것이 모습을 변신시킨 무하라는 것을 깨닫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겨우 삼일 만에 익숙해지기에는 무리가 있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처음의 그 잘생긴 얼굴이 인상 깊게 박혀 버렸기 때문에 더했다. 순간 스쳐간 디이나의 반응을 알아차렸는지 무하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보았다. 정확히는 손가락에 껴있는 반지였다. "형님은 이걸 어디에 사용했을까?" 그때 안쪽에서 허겁지겁 사람들이 뛰어왔다. 아까 그 종업원이 뒤를 따르는 것을 보아, 드디어 저 굼뜬 녀석이 지배인을 찾아온 모양이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한 지배인은 먼지 쌓인 디이나들의 차림을 보고 바로 문 옆에 비켜섰다. 역시 지배인은 아무나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디이나는 다시 한숨을 지으며 일어났다.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나자니 더 힘들었다. 비틀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옆에서 누군가가 붙잡아주었다. 단단한 남자의 몸이 느껴지자 디이나는 슬쩍 몸을 뺐다. 그러며 올려보니 뜻밖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민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부축하겠습니다.” 평범하게 변해버린 얼굴에 유독 눈에 박혀오는 고요한 눈동자. 엉켜서 엉망이 된 은발 밑으로 심연과도 같은 그것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순한 욕망이라고는 한 점도 없기에 오히려 거부하기가 힘들었지만……. “괜찮습니다. 무하씨.” 그보다는 옆에서 날카롭게 노려보는 유시리안의 눈초리가 두려웠다. “호의는 감사드립니다.” 옆에서 노골적으로 찡그리고 있는 유시리안이 안 보이는지 무하는 디이나의 양어깨를 감싸듯 부축했다. 디이나가 급하게 거절하려 했지만 무하가 먼저 발을 떼는 바람에 때를 놓쳐버렸다. 은밀한 살기가 온 몸을 휘감는 것이 느껴져, 차라리 라는 심정으로 민을 돌아봤지만 민은 알 듯 모를 듯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하긴 여태껏 봐왔던 민은 기본적인 인정은 그리 인정이 좋은 축에는 끼지 못하는 남자였다. 게다가 어쩌다 수작을 부려오는 여자들을 만나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이 동성애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지간해서는 신체적 접촉을 안 하는 것을 보면 그도 아닌 것 같지만.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비틀거리시면서요?” “그건…….” 또 의외인 것이 무하는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자상하다. 여지껏 디이나가 이들을 쫓아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덕이 컸다. 처음 만남이 그리도 껄끄러웠는데도 말이다. 그 호의가 순수한 것일수록 거절 할 수 없어 유시리안의 불만을 사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 호의가 순수하여 유시리안에게 여지껏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란 걸 디이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끝끝내 거절한다면 그것마저도 유시리안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유시리안이라는 남자는 제멋대로였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확실히 부축은 육신에게는 고마운 것인지라 디이나는 한결 수월하게 걸음을 떼었다. 어쨌거나 이제 기도하는 땅 코앞에 도달했다. =============================================================================== 졸려라...졸려라... 그리도 열망하시던 무하대령이요. .·´″``°³оΟ\(´ ∇`)ノ [연재] 아해의 장-352 “……어?” “아……!” 유시리안과 무하의 입에서 동시에 기괴한 탄성이 튀어나왔다. 출구에 속하는 긴 복도를 지나 나온 홀 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익숙하다 못해 반가운 그의 모습에 유시리안은 반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카!” 유시리안의 호명에 이카미렌의 옅은 미소가 진해졌다. 그가 두 손을 벌리자 유시리안은 달려들어 마주 안았다. 뜻밖의 만남은 더 반가운 법이다. 집에서 볼 때야, 유시리안이 만남을 전제로 찾아가는 경우고 수도에서야, 독서광인 이카미렌이기에 만남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는 정말 뜻밖 그 자체였다. "어쩐 일이야, 이곳엔?" "널 기다리고 있었다." 이카미렌이 유시리안의 등을 부드럽게 쓸며 답했다. 유시리안은 쿡쿡 웃으며 믿어주지, 라고 말했다. 한편, 그와 같은 훈훈한 광경을 경악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디이나. 나름대로 유시리안이라는 남자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 생각했던 여자다. 그런 그녀에게서 저와 같은 따뜻한 장면은 차라리 공포였다. 이리 저런 모습을 본 바 있는 무하야 오랜만에 보는 이카미렌에게 막연한 반가움을 느낄 뿐이었다. 그 옆에서 디이나보다는 아니었지만 적지 않게 놀란 민이 무하의 어깨를 툭 치고 물었다. "누구……?" 디이나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무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하는 덤덤하게 답했다. "율의 아버지." "아!" "네?" 나름대로 납득하는 민과는 달리 디이나는 못들을 것을 들은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무하와 민이 덩달아 놀라 보자 한층 더 당황해서 변명을 늘여놨다. "아니, 그게……. 물론 저 싸가……, 아니 괴물……, 아니 유시리안 씨라 해도 생물은 생물이니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는 건 당연하겠지요. 아니, 당연하지요. 하하……." ……변명이라기보다는 자기 납득에 가까웠으니 나름대로 그 심중은 이해가 가기에 말없이 외면해 주었다. 창피함에 얼굴을 붉힌 디이나는 조심스럽게 이카미렌을 살펴보았다. 외견상으로는 아버지보다는 형 쪽이 더 어울리지만 유시리안을 보는 눈빛이나 지어 보이는 미소가 자상하기 그지없어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 됐다. 게다가 저 미모라니! 단정하게 땋은 긴 백금의 머리카락이나 인자하기 그지 없는 다정한 보라빛 눈동자나. 같은 빛인데 이리도 느낌이 다를 수가 있나! 물론 유시리안 역시 그 뭣 같은 성질머리와는 별개로 아름다운 남자라는 건 인정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모습만 변화시키지 않았어도 둘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과히 볼만했을 것……. "어?" 디이나가 떨떠름한 소리를 내자 민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새삼 깨달은 바를 입 밖으로 꺼냈다. "저 분, 이쪽을 알아보고 있었지요?" "그런데요?" "어떻게 이쪽을 알아본 거죠? 유시리안 씨나 무하 씨나 얼굴을 바꾼 데다 락샤사씨도 없잖아요. 저희는 아예 초면이고……." 이카미렌의 정체와 그의 진정한 강함을 단면으로나마 접해 본 적 있는 무하는 별다른 의구심이 들지 않았다. 그것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음을 본능으로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민이라면 모를까 디이나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민을 슬쩍 보았다. 그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무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안 무하는 민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민에게는 불칸이 있었다. 아마도 이카미렌과 유사한 세월을 살아왔을 그녀가. "자식이잖아요." 민이 고민하는 디이나에게 능청스레 한마디하며 유시리안과 이카미렌 쪽으로 먼저 걸어가자 디이나도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그 뒤를 따랐다. 변함없이 임기응변에 능한 녀석이다, 감탄하며 무하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일행 쪽에 잠시 시선을 준 이카미렌은 유시리안과의 포옹을 풀었다. 다른 자들이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수장의 맹약자가 그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한 맹약자라면 마찬가지로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저 자는 '영원'아 아니던가. 다정한 물의 어머니, 네레이데스를 통해 저 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비단 정령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드래곤 사이에서도 화젯거리인 연인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먼저 구면인 무하와 말없이 목례를 주고받았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민이 짧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민이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풀네임을 말하고 싶었지만 이카미렌의 미모 때문에 주위의 이목이 쏠린 탓에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이어서 디이나가 자신을 소개했다. "디이나입니다." 어차피 종업원에게 정체를 밝힌 마당에 굳이 이름만 말할 필요는 없었지만 만이 자신의 정확한 소개를 피했으니 장단을 맞춘 것이다. 그 씀씀이에 민이 감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의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지배인이 슬그머니 끼어 들었다. "같은 층으로 방을 마련할까요?" "이카는 몇 층?" "잠시 기다리고 있었던 것 뿐 방을 잡지는 않았다." "그럼 따로 잡아 둔 곳은?" 이카미렌은 잠시 디이나를 돌아보았다가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신세를 지고 있는 곳은 있지." 그 답지 않게 말을 돌리는 터라 유시리안은 더 캐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할거야?" "오랜만에 아들과 담소나 나눌까 하는데. 폐가 안 된다면." 덧붙이며 웃음을 짓는다. 예상했듯이 유시리안은 다른 이들의 의견 따위는 구할 생각도 않고 쿡쿡 웃으며 지배인을 돌아봤다. "안내 안 해?" 아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기껏 배려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지배인은 순간 경직됐다가 딱딱하게 미소지었다. 어쩌겠는가. 저 자는 카르민 중에서도 세력이 높은 페이야 가의 란의 일행인 것을. "이쪽으로." 방을 잡자마자 씻기부터 한 그들은 그 다음으로 제일 급한 것을 찾아 다시 모였다. 바로 식사였다. '기도하는 땅'의 경계까지 온 이상 이제는 안전하다 판단은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변신을 풀지 않기로 했다. 이미 디이나가 정체를 밝히긴 했지만 이 정도 여관이면 손님의 신상은 물론 사적 정도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는 법이니 괜찮다. 식사를 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일행 중 특히 긴장한 것은 디이나였다. 차분하면서 진중한 목소리와 세련된 행동거지, 정중한 말투가 유시리안과 꼭 닮은 자에게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어색했던 것이다. 게다가 유시리안만한 아들이 있는 데도 저토록 젊은 얼굴이라니……. 그렇다면 적어도 마스터 급이란 뜻이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집안인 걸까? 호기심은 나지만 차마 물어 볼 용기는 없었다. "피곤이 안 풀리십니까?" 무하가 낮게 물었다. 일정을 서두르느라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는데 통 먹지를 못하니 하는 소리였다. 그 씀씀이가 고마워 웃음으로 답했다. "입이 깔깔하더라도 드십시오. 앞으로 돌아갈 일이 남지 않았습니까. 죽을 시킬까요?" "괜찮아요. 맛있습니다." 그 모습에 아들이 입을 삐쭉거리는 모습을 본 이카미렌은 무하에게 웃음기 섞인 질문을 던졌다. "친절하군. 그 여성에게만 인가?" 특별한 의미로의 친절이냐 돌려 물은 것이다. 귀를 쫑긋하는 유시리안과 바싹 긴장하는 디이나, 그리고 웃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 민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 지 무하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답했다. "환자지 않습니까." "환자?" 뜻밖의 말에 디이나조차 당혹스러워했다. 무하는 태연히 말을 덧붙였다. “아픈 사람한테는 최소한의 친절은 베풀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돌려받는다고요” “…….” 상당히……해석하기에 따라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그래서 돌려달라는 건가, 뭔가. 디이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해 보였다. 주위의 썰렁한 반응이 보이지 않는지 무하는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홀로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제일 먼저 어떤 반응을 보인 것은 이카미렌이었다. 그는 특유의 옅은 웃음을 지우고 크게 웃으며 물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유시리안에게도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누가 그런 가르침을 주던가?” “제 사부님이요.” “독창적인 사람인 모양이군.” “……보편적인 분은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이카미렌의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뭔가 꿍꿍이 있는 얼굴로 궁리 중인 아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런데…….” 뭔가 말하려던 디이나가 머뭇거리며 이카미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카미렌이 말했다. “렌.” “아, 렌 씨군요.” 유시리안이 ‘이카’라고 말했으니 분명 가명이겠지. 적어도 풀 네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디이나는 굳이 캐지 않고 넘어갔다. 솔직히 캐낼 자신도 없었다. “이곳을 어떻게 알고 오신 건가요? 이곳에 숙박조차 잡아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곳에, 그리고 오늘 저희가 도착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지 않나요?” 탐색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질문에도 이카미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답했다. “내가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안내자?” 이번에는 유시리안이었다. 이카미렌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가 말을 돌렸다. “샤는?” “녀석은 긴 시간동안 말이나, 뭐 그런 것을 타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 아, 하긴 이제 도착했으니 상관 없으려나. 근데 이카, 나 괜찮은 말을 갖게 됐어! 이름은 마르스! 야생마야.” 허리춤의 검을 톡톡 치며 평이하게 말하던 유시리안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자랑했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든 것을 소유한 모양이라 생각하며 이카미렌이 물었다. “야생마? 길들인 건 네가 아닌 모양이구나?” “아니야! 나야.” “네가 이름을 지어줬단 말이냐?” 뜻밖이라는 얼굴을 해 보이는 아버지를 향해 유시리안은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이름은 제가 붙였습니다. 예전에 잠시 신세를 졌던 친구지요.” 무하가 옆에서 설명했다. 그제서야 납득한 이카미렌은 처음의 화제로 돌아갔다. “샤와 잠시 대화를 하고 싶구나.” “흐음.” 유시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카미렌을 보았다가 아무 말 없이 ‘나찰’을 풀었다. 그 상태라 해도 주위 상황을 보고 듣는 ‘나찰’은 곧 물로 화해 허공에서 이리저리 비틀리기 시작했다. 락샤사의 모습으로 변하려는 것이다. 갑자기 불어진 물방울들이 허공에서 불규칙적으로 퍼져나가며 한 남자의 형상을 그려냈다. 장신에 늘씬한 몸을 가진 락샤사의 형상이었다. 이어 옷의 실루엣으로 일렁이던 물망울이 색상을 띄기 시작했다 싶은 순간, 어딜 봐도 사람으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그 곳에 서 있었다. 락샤사였다. 마지막 물방울이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끄트머리에서 사라졌다. 무심한 눈동자로 이카미렌을 마주보던 그는 옆의 테이블에서 의자를 당겨와 앉았다. 그 일대에 소란이 났지만 카르민인 디이나의 영향으로 이곳까지 와 수선을 피우는 자는 없었다. 뭐, 소란의 주범들은 대부분 마법사이니 귀족인 그녀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드래곤인 이카미렌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라 봐야 될지도. 어쨌거나 그것은 유시리안 일행을 위해서나 그네들을 위해서나 잘 돌아가는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술.”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주문을 던진 락샤사를 위해 유시리안이 한 손을 들었다. 저편에서 바싹 긴장하여 대기 중이었던 아가씨가 날라 왔다. 그 긴장은 디 이나에게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번개와 같은 저 속도는 필시 이카미렌이나 락샤사를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아직 변신을 풀지 않은 유시리안이나 무하, 그리고 민을 보고 저런 반응을 보일 리 없으니. "술 갖고 와." 유시리안의 짧기 그지없는 주문에 아가씨는 아쉬운 얼굴로 이카미렌을 훔쳐보다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모습에 심술궂은 얼굴로 한마디했다. "아버지도 한잔 할 거야?" "야매주 외에는 별로 끌리지 않는 구나." 비단 그 아가씨뿐만 아니었다. 주위에서 소리 없이 환호하던 아가씨들 뿐 아니라, 낯짝 반반한 녀석이라며 투덜대고 있던 남자들도 다 같이 경악하여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라 칭한 말에 응한 사람은 분명 저 잘생기다 못해 아름다운 남자였다. 충격 먹은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유시리안은 짓궂은 미소로 지켜보았다. 옆에서 무하가 낮게 웃고 있었다. 유치하다 할 수 있지만 어쩌겠는가. 아버지에게 여자가 꼬이는 걸 좋아할 아들은 없는 법이다. 이카미렌이라고 그 속을 모를까. 애칭이 더 좋다며 아버지라는 호칭은 소개할 때 외에는 거의 쓰지 않았던 유시리안이다. 그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으니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뒀고 말이다. 충격 먹은 주위 사람들이야 알게 뭔가. 유시리안이 재미있어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이카미렌은 '팔은 안으로 굽는다'의 표본 그 자체였다. "안내자라고?" 락샤사가 물었다. 그제야 유시리안에게서 눈길을 거둔 이카미렌은 약하게 끄떡였다. 락샤사는 알았다는 듯 마주 끄떡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 .·´″``°³оΟ\(´ ∇`)ノ [연재] 아해의 장-353 어찌 돌아가는 사정인지 궁금하기는 매한가지였으나 민은 굳이 다른 화제로 돌렸다. “일정을 바꾼 데다 모습까지 바꿔서인지 자객의 습격은 받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아직 레이아사의 날이 되기도 전에 도착해 버렸지만……. 어찌 하시겠습니까? 레이아사의 날까지 기다릴까요? 아니면……?” 질문은 명목상 의뢰주인 디이나에게 향해 있었다. 이카미렌의 알 수 없는 언행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디이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레이아사의 날의 혼란을 틈타 일을 진행시킬 생각으로 일정을 짰으니 그대로 하지요. 일단 레이아사의 날이 되면 기도하는 땅 전체가 성역이 되어버려 자객의 방해가 소용없게 되니까 그날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정체가 탄로 났으니 하루 정도 머물다가 기도하는 땅으로 가는 척 하며 다시 뒤로 빠져 다른 여관을 잡도록 하지요. 그 반지는 여러 모습으로 변신이 가능하겠지요?” 민은 자신과 무하의 손에 끼어진 반지를 한번씩 보고는 피식 웃었다. 이것을 빌려줬을 때 지어 보였던 형님의 웃음이 생각 난 것이다. 무척이나 그리운 듯, 그러면서도 즐거운 듯 장난기 서린 웃음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일루젼을 시전하고 있던 유시리안은 불만 어린 얼굴을 해보였다. 힘이 드는 것은 별개로 시전 시 느낌이 별로였던 것이다. 두꺼운 막에 감싸진 느낌이랄까. 마법의 사용을 기피하는 데다 마나의 불균형적인 비틀림에 민감한 유시리안에게는 특히나 불쾌한 감각이었다. 그때 이카미렌이 물었다. “이곳에서 얼마간 있을 생각인 건가?” “예. 그럴까 합니다만…….” 디이나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귀족의 최고봉인 카르민의 란인 그녀가 저토록 저자세인 것은 이카미렌에게 본능적으로 경외심과 위압감을 느끼는 탓일 것이다. 이카미렌은 손을 뻗어 유시리안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것과 똑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애정을 담아 그를 보고 있었다. 언젠가 테밀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의 무하가 그런 것처럼 일루젼 따위로는 가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왜곡을 꿰뚫어 보는 황금의 눈동자, 방대한 마력의 상징인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맹약의 눈동자.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쉬도록 하지. 내일은 나와 함께 가자.” “하지만 저희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디이나가 곤혹스럽게 말했다. 이카미렌에게 압도당한 그녀지만 자신의 의무와 소임을 잊지 않았다. 이번 일에 주군이 얼마나 많은 것을 걸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지 않은가. 이에 정작 당사자인 이카미렌은 반응이 없는데 유시리안이 미간을 찡그리며 면박을 주었다. “이카는 허튼소리를 안 해. 끝까지 들어.” 그리고는 이카미렌을 돌아보고 물었다. “어디를?” 이카미렌은 아버지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말했잖아. 난 안내자라고.” 그러면서 디이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을 마주한 디이나는 무엇을 떠올렸는지 놀라 물었다. “그럼 그 분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서 말이야. 부탁 받았지.” 이카미렌의 말에 유시리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불만 어린 얼굴을 했다. “약점 잡힌 건 아니고?” 이카미렌이 그를 바라볼 때면 어딘지 안타깝고 동정 어린 빛을 띤다. 약점을 잡힌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유시리안도 알고 있다. 하지만 끌려 다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락샤사까지 그와 관련되면 평소와는 미묘하게 달라진다.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 듯 보인다. 그렇다고 완전히 협력하거나 원조하는 것도 아니다. 방관보다 조금 나은 정도? 유시리안은 그런 미지근함이 싫었다. 유시리안에게는 ‘나의 것’과 ‘나의 것이 아닌 것’. 오직 이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유일한 예외가 라이시륜이라는 녀석이지만, 어쨌든 녀석만 빼면 그렇게 두 가지만 있다. 좋고 싫음이 물과 기름처럼 분명한 그에게 있어서 이카미렌과 락샤사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기보다는 답답한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런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지만, 아니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그 둘은 유시리안이 소중히 여기는 극소수의 ‘나의 것’들이었다. 나의 아버지, 나의 검. 그런 둘을, 희미하게 라지만 슬픈 얼굴을 하게 하는 그가 유시리안 눈에 곱게 비칠 리 없었다. 그런 유시리안을 모를 리 없음에도 이카미렌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자신의 행동, 자신의 마음을 납득시키려고도, 변명하려고도 않고 그냥 그렇게 있었다. 그는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유시리안도 가만히 있었다. 서로 그렇게 알면서도 모른 척, 스물스물 넘어갔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애정이었다. 이번에도 이카미렌은 스리슬쩍 넘어갔다. 다른 화제를 꺼낸 것이다. “오늘은 방을 리안과 함께 써야겠구나. 더부살이라고 내쫓지는 않겠지?” “하하. 설마. 하지만 샤와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었어?” 뜻밖의 배려 섞인 답변에 디이나는 저게 미쳤나 하는 눈으로 유시리안을 살폈다. 이카미렌은 락샤사를 한 번 보고 말했다. “나와 샤의 대화를 네가 듣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니.” 부모 앞에서는 평생 아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식 이랬던가. 유시리안은 유쾌하게 웃어 재꼈다. 그 보기 드문 해맑음에 무하가 미소했다. 옆에서 디이나가 못 볼꼴을 봤다며 음산하게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알 바 아니었다. 아마도 락샤사와 이카미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유시리안의 방을 지나 민이 무하를 찾아왔다. 디이나는 지금쯤 완전히 골아 떨어져 있으리라. -똑똑. “나다.” 간단한 말을 덧붙이자 추가로 붙는 질문 없이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검 자루에 손을 얹고 있었던 무하가 손을 늘어뜨리며 느긋한 미소로 지기를 반겼다. “무서운 걸?” “인기척을 일부러 죽이지 않았으면 안 이랬을 거다.” 권하는 의자에 앉고 보니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두꺼운 책과 반쯤 비어진 찻잔이 있었다. “독서 중?” “아아.” 잔을 하나 더 꺼내와 차를 따라 건네고는 앞에 앉았다. 쌉싸름한 향이 민의 구미에 맞았다. 원래 무하에게 맞는 차를 민에게도 맞았다. 취향이 같기 때문이다. 일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민은 책을 한번 훑어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것은 제 1기 마도의 유산인 고대책이었다.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그 책을 무하는 벌써 반 이상 넘기고 있었다. “재밌어?” “별로.” 무하는 쓰게 답하고는 책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내 배낭 깊은 곳에 봉인했었던 건데……. 전에 디이나와의 일로 다시 나와 버렸어. 그렇게 잊으려 애썼던 건데 다시 읽으니 생생하기만 해서 입 안이 써.” 카한 형님을 죽이게 했던 주문을 손가락으로 쭈욱 읽어나갔다. 그때와는 달리 이 주문을 조금은 다스릴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읽는 것만으로는 어떤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내가 명한다. 그대 멸하라.” 무하의 고개가 점차 숙여지더니 결국 책에 이마를 맞대었다. 민은 말없이 무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리석었어.” 손바닥 밑으로 무하의 어깨가 떨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민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페르노크’는 카한 형님만큼은 싫다고 하지 않았어. ‘전부’라고 말은 했지만, 테밀 형님조차도 입에 담았지만 카한 형님만큼은 거론하지 않았어. ‘페르노크’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었을 거야, 카한 형님은.” “난 그를 좋아하지 않아. 아니, 싫어한다.” 카한세올이 불쌍한 처지였다는 건 알고 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머니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리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저 알뿐이다. 결국 카한세올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은 테밀시아도, 페르노크도 아니었던 로레라자였던 것뿐 아닌가. 그래서 테밀시아도, 페르노크도 죽이려 들었다.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민에게는 그로 인해 지기가 받았던 상처만이 중요했다. 만일 카한세올이 죽으면서 웃지만 않았더라도, 민은 거리낌 없이 그를 증오한다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서 무하를 조금이라도 원망했다면, 민은 거리낌 없이 그를 경멸한다 말했을 것이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형인 뮤비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카한세올이 중요하지 않았다. 무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상체를 들었다. 이런 어두운 대화나 하자고 온 게 아닐 텐데 공연한 감상에 빠져서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별로. 느긋하게 수다나 떨까 하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동자가 생생하게 빛나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호기심 어렸을 때의 모습 그 자체였다. “유시리안 씨 말이야.” 역시나일까? 드래곤의 아들이라는 데 태평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드래곤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무하조차도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평정을 잃고 압도됐을 정도다. 하물며 태어나면서부터 드래곤의 존재를 들어 알고 있는, 게다가 욤의 수도에서 현명한 골드 드래곤 이카미렌의 황홀한 칭송을 자장가 삼아 자라온 민은 어쩌겠는가. 여태껏 말없이 있었던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그만큼 자제력이 뛰어나다는 뜻일 것이다. “드래곤의 아들일 줄이야. 거물일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율은 인간이야. 드래곤의 아들일 뿐이지.” “양자?” “아마도.” “대단해! 그 이카미렌 산맥의 주인, 이카미렌의 아들이라니! 양자라도, 아니 양자이기에 더 대단해!” 흥분 어린 목소리로 들떠서 말하는 그를 보며 무하도 웃었다. 자신에게도 가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인지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는데 민의 반응을 보니 이게 정상인가 싶었다. 뭐, 민도 그리 정상인으로 보기는 힘든 괴짜부류이긴 하지만 말이다. “드래곤에 대해서는 알아?” “엄청 강하다는 것 정도? 그건 이카미렌을 보면서 실감했지. 그 외에도 끝을 느낄 수 없는 연륜에 압도됐었어.” 민은 웃었다. 확실히 드래곤은 강하다. 타고날 때부터 타 종족과는 급이 다르게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무하의 입에서 듣는 감상은 그 느낌이 조금 달랐다. 수많은 종족들이 드래곤을 질투한다. 그것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질투가 섞인 선망은 순수하지 못하다. 대부분 타고나지 못한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을 덧붙이고 덧붙인다. 과장되게 드래곤을 찬양하거나,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가면서 험담을 늘여 놓는다. 이토록 순수하게 감탄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그것이 무하의 강함이라고, 민은 생각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응?” “그 엘프들이 말하는 ‘열어 놓은 마음’이라는 건, 나의 것일까? 아니면 ‘페르노크’의 것일까?” 민은 답을 못했다. 당연히 무하의 것이리라 생각했다. ‘열어 놓은 마음’이 있다면 ‘페르노크’가 그런 한심한 세월을 허비했을 리 없다고 단정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무하의 덤덤한 어조로 지적당하니 새삼스레 곰곰이 되짚어 보게 됐다. “난 네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무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난 내가 ‘열어 놓은 마음’을 가졌다고 의식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게 뭔지조차 모르겠어.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페르노크’쪽이어야 맞는 게 아닐까? 그 ‘열어 놓은 마음’인지 뭔지가 육신에 서려 있기는 한데 영혼이 달라 쓸 수는 없는 상태라던가…….” “확실히…….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민이야 ‘열어 놓은 마음’이 그 한심하기 그지없는 ‘페르노크’에게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뭐, 상관없겠지. 어느 쪽이든.” 무하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똑똑. “펠.” 문 너머로 유시리안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무하가 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빼꼼 고개를 들이민 유시리안이 일루젼을 해제한 모습으로 화려하게 웃으며 물었다. “잠시 괜찮아?” 무하는 답하기에 앞서 민을 보았다. 민이 고개를 끄떡이고서야 답하며 일어났다. “응. 무슨 일이야?” 지기가 유시리안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마주본 유시리안은 똑같은 미소로 답하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저토록 강한 존재가 무하를 지켜주고 있다. 아껴주고 있다. 소중히 여겨주고 있다. 민은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옷 밑으로 따뜻한 목걸이의 촉감이 느껴졌다. 가슴까지 훈훈해 지는 안락함. 이와 같은 것이 무하에게도 생긴 것이다. 그가 그리도 갈망하던 ‘있어야 할 곳’이. ……하지만 그런 안도감만큼이나 섬뜩하게 울려오는 불안감이 민을 안타깝게 했다. 그가 아는 무하는, 페르노크는 너무 강직했다. 그로 인해 때때로 스스로를 절벽 끝까지 몰고 가 버린다. 차라리 약하면 피하기라도 할 텐데……. 민은 무심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은 매우 썼다. ============================================================= .·´″``°³оΟ\(´ ∇`)ノ 슬슬 미치기 가동...중... 후후후... 연재] 아해의 장-354 숱한 음유시인들이 이곳을 노래했고, 숱한 작가들이 이곳을 묘사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이곳을 완벽하게, 제대로 느끼게 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백 번 묻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했던가. 민은 지금 그것을 실감하는 중이다. 말로야 골백번도 넘게 들어왔던 ‘기도하는 땅’. 죽기 전에 한번은 봐야 한다는 명소 중의 명소이자 성역 중의 성역. 광활한 흑색 대지에 새파란 새벽빛 안개가 아련하게 깔리는 위로 수십의 푸른 순례자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차분히 깔린 안개가 뽀얗게 감싸진 그곳은 유독 깊고 검었다. 반사되지 못하는 새벽빛은 하염없이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에 따라 보는 이의 벅찬 시선도 빨려 들어 헤어나지 못한다. 태양이 높이 오를수록 빛은 강해지지만 이곳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속절없이 흡수당하고, 거부할 수 없이 매혹 당한다. 바로 이곳이 그토록 찬양 받는 물의 대지! 그 어떤 것이라도 빨려들어야 마땅할 바로 그곳에 디딤대 하나 없이 우뚝 서 있는 기세등등한 신전.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그 어떤 상상도 초월하는 엄숙함과 신비함이 공존하는 곳. 그리하여 세상은 이곳을 칭해 ‘기도하는 땅’이라 부른다. 민은 새삼 조심스럽게 손을 담갔다. 보이는 색과는 달리 투명한 물은 민의 손을 깨끗하게 투영해냈다. 그에 웃음을 터뜨리며 천진한 아이와 같이 손을 모와 물을 앞쪽으로 퍼부었다.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파문이 일었다. 그 감동은 비단 민만의 것이 아니었다. 무하도 디이나도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순례자의 걸음의 감탄 어린 모습에 환호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을 이곳까지 안내한 이카미렌은 어딘지 씁쓸한 얼굴로 신전 쪽을 향하는 순례자의 걸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유시리안이 꼬인 얼굴로 서있었다. ‘지금’의 기도하는 땅도 그럭저럭 볼만하다고 생각하는 그와는 달리 이카미렌은 무심한 듯 과거를 떠올리며 무심결에 비교하곤 했다. 그런 이카미렌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리 멍해 보이고 아련해 보여, 그와 함께 있을 때 보는 기도하는 땅은 싫다. 늘 그랬지만 그는 이토록 제멋대로인 남자였다. 유시리안은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딴청을 피우다가 락샤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이카미렌과 마찬가지로 락샤사도 이곳의 옛모습을 알고 있는 존재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그가 이카미렌처럼 감상에 잠겨 있다거나, 회한이 빠진다거나 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는 그가 유시리안은 마음에 들었다. “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공연히 투덜대며 걸음을 옮겼다. 바다가 고향인 락샤사. 물에서 태어나고, 빗어지고, 연마된 검. 최초의 검이자 가장 오래된 검이며 가장 강한 검.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로만 주인을 선택할 수 있는 검. 그 누구도 그를 꺾어낼 수는 없다. 그것은 유시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바위를 지나자 물풀이 잔뜩 엉킨 호수 저편에 앉아 있는 락샤사가 보였다. 본래 인간이라면, 아니 인간이 아니라 몸이 가벼운 엘프라도 가라앉아야 마땅할 그곳에 그는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흡사 기도하는 땅의 내음을 즐기는 듯, 살포시 감긴 눈꺼풀.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이지만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유시리안은 말없이 돌아서려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욕구이다. 모처럼 드물게 배려해 주려는 유시리안을 락샤사가 저지했다. “신경 쓰지 마라.”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그와 오랫동안 함께 해온 유시리안이기에 태연히 대꾸할 수 있었다. “너야 말로.”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무심한 눈동자로 유시리안을 바라보던 락샤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었다. 그 발 아래로 물 속에서 물풀들이 이리저리 너풀거리고 있었다. 락샤사의 발길이 잠시 닿는 호수 위로 작게 파문이 일어, 동심원을 그렸다. 그랬다. 그가 딛고 있는 것은 물풀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기도하는 땅’ 그 자체! 그 기적과 같은 일은 락샤사가 물에서 태어난 존재이기에 가능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든 이곳에 발을 딛을 수 있다. 박차서 걸을 수 있다. 때문에 이곳이 기도하는 ‘ 땅’이라 불린 것이다. 때문에 그 위에 신전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기한 일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몇 만 년 전이던가. 순례자의 걸음은 귀족의 사치품에 불과했었다. 신전은 늘 북새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발로 그곳을 찾았다. 그것이 이카미렌이 기억하는 진실한 이곳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세월에 묻혀 감춰졌다. 걸을 수 있다는 ‘당연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에는 아무리 걸을 수 있다 하여도 미치광이의 헛소리요, 아무리 증명해 보여도 사기꾼의 괘씸한 소행일 뿐이다. 이미 ‘순례자의 걸음’이라는 것이 사람을 실고 떠다니는 사치가 정석으로 변질되어 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다른 누가 봤다면 마법사나 정령사라 생각할 지도 모르는 모습으로 락샤사는 태연히 걸어왔다. 그 모습을 덤덤히 보던 유시리안은 불현듯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이 ‘땅’을 걸을 수 있는 건, 이곳을 ‘땅’이라 믿는 자 뿐이라고 했지?” “너 다운 생각이군.” 속을 읽어버리니 편하기는 하지만 재미가 없다. 유시리안은 쳇, 하며 돌아섰지만 꿍꿍이가 가득 담긴 눈빛만은 여전했다. 뒤에서 락샤사가 한마디 했다. “점심 무렵에나 순례자의 걸음이 난다고 했던가?” “귀찮긴 하지만 순례자의 걸음은 승차감이 썩 좋단 말이지.” 뭔가 어긋난 답을 하며 유시리안은 경쾌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락샤사가 소리 없이 따랐다. “무하.” “……?” 이카미렌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비슷한 시기에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은 무하의 앞쪽에서 불어, 이카미렌의 머리카락을 잔뜩 흩트려 놓았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얼굴 속에 유독 눈동자만이 깊게 박혀왔다. “왜 부르셨는지……?” “나는 리안의 아버지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무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떡여 답했다. 이카미렌에게는 함부로 토를 달지 못할 엄격함과 위엄이 있었다. “모든 아버지는 자식의 행복을 바란다.” 재차 고개를 끄떡이는 무하를 보며 이카미렌은 덧붙였다. “나 역시 리안의 행복을 바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리안이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삶을 살길 바란다.” 그것은 유시리안이 당시 빙산이었던 이카미렌 산맥을 그 쇠약한 몸뚱이로 기어올라 한 말이었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삶을 살고 싶다고. 그래서 찾아왔다고. 상처도 한도 많은 작은 인간이 오만하게 그리 말했었다. “그로 인해 상처 입어도 그것은 자신이 바란 아픔. 그로 인해 괴로워해도 그것은 자신이 바란 선택.” 이카미렌은 빨려들 듯한 강렬한 보랏빛 눈동자로 무하를 꿰뚫어 보았다. “그 아이는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언가에 휩쓸려가는 것이 싫었던 거다.” “…….” 무하는 묵묵히 이카미렌을 마주보았다. 피하고만 싶었던, 외면하고만 싶었던 현실이 지금 그의 눈앞에 불현듯 떨어져 위협하고 있다. 무언가에 휩쓸려 가는 것……. 이대로 모두의 희망이 그렇다는 이유로 이런 상태로 살고 싶다고 무심결에 품었던 소망이 아프게 가슴 안쪽을 긁어내렸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던, 그것이 네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길 바란다.” 그래야만 유시리안도 납득 할 테니. 이카미렌은 뒷말을 삼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하가 알아들으리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때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시리안이었다. “펠!” 그쪽을 향해 몸을 돌리다가 자신이 무심코 미소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입가를 문지르다가 쿡쿡 웃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웃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웃음을 되찾아준 존재의 소중함 역시. “율…….” 한편 달려오던 유시리안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멈춰서 의아한 얼굴로 무하를 살펴보다 이카미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카미렌은 덤덤한 얼굴로 부드럽게 유시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푸근한 미소를 살짝 보여주었다. 마주 웃어보이다가 무하 쪽으로 다시 걸음을 놀렸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이카미렌을 믿었다. 아마도 세상에서 유시리안을 가장 많이 사랑할 존재일 테니. “펠!” 기괴하게 번뜩이는 눈동자로 입을 연 유시리안은 다음 말을 기다리는 무하에게 해맑은 웃음을 활짝 지어보였다. 뒤에서 흠칫 놀라며 주춤 물러나는 디이나나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무하가 집중하여 말을 기다리는 기색이자 유시리안은 밝게 외쳤다. “걸어보지 않겠어?” “……?” 유시리안의 기대 어린 눈을 가만히 마주보던 무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몇 걸음 걸어보였다. 물론 바위 위였다. “…….”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달은 유시리안은 서둘러 덧붙였다. “여기 말이야.” 그가 가리킨 곳은 드넓은 기도하는 땅의 수면 위였다. 자연히 의아한 얼굴로 기도하는 땅과 자신의 번갈아 보는 무하에게 유시리안은 뻔뻔한 얼굴로 설명했다. “기도하는 땅은 걸을 수 있어. 그래서 땅이라 불리는 거야.” 민과 디이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유시리안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일까? 만약 다른 자에게 저러는 거라면 말 그대로 물 먹이려고 저러나 보다 할 텐데, 애석하게도 상대는 무하다. 아무리 궁극의 싸가지라 불리는 유시리안이라지만 무하에게 해가 될 일을 할리 없다. “와! 별게 다 있구나, 이곳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새삼스런 눈으로 기도하는 땅을 바라보는 무하의 모습에 디이나는 기가 막혀했다. 정말로 저 말을 믿고 있지 않은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민은 한숨과 함께 내심 납득했다. 무하는 이계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도 했다. 그러니 저 허무맹랑한 말도 당연하게 믿어버리고 만 것이다. 하물며 그 말을 한 상대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유시리안인데야. 그로서는 믿어버리는 무하보다 그런 말을 한 유시리안이 알 수 없었다. 내내 씁쓸한 얼굴이었던 이카미렌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유시리안과 무하를 살폈다. 그 옆으로 어느 틈에 나타난 락샤사가 서 있었다. “저 아이의 생각은 늘 알 수 없구려.” “품안의 자식은 부모의 생각일 뿐이니까.” 그러다 잠시 생각을 더듬다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 경우엔 다르군. 녀석이 영원히 당신 품을 벗어날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 “복잡한 심정이오.” 이카미렌이 쿡쿡 웃었다. 둘이 그렇게 소담을 나눌 때, 무하는 기대 찬 얼굴을 하고는 바위 밑으로 뛰어내렸다. 바로 발치에서 잔잔한 검푸른 물결 위에 수초가 잔뜩 엉켜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옆의 바위에 기대 신발을 벗기 시작하는 무하에게 디이나가 다가가려 했으나 유시리안이 은밀히 차단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 물론 그보다는 참견하려 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확실한 직감이 뇌리를 관통한 탓이 컸다. “물 위를 걷는 느낌이 어떨까 기대되는데.” 무하는 눈 가에 닿아 거슬리는 앞머리를 대충 쓸어 올리며, 드물게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본연의 모습으로 그런 모습을 취했다면 무척 볼만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그의 외모는 중하위권을 넘지 못했다. 물론 그에게서 다른 모습을 관통해 보는 유시리안에게는 지금의 겉모습의 여부는 상관없었다. 순수하게 기대에 차오른 모습으로 호수를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이 그를 행복하게 했다. “경공으로 물을 박찬 적은 있어도 차분히 걸어본 적은 없거든.” 그리 말하며 무하는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는 거동으로 수면 위에 발을 내딛었다. 디이나와 민이 동시에 어어, 하며 기이한 음색을 뱉어냈지만 기대에 찬 무하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발 아래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물결에 감동해서였을 것이다. “하하하!” 무하는 호쾌하게 웃으며 몇 걸음 더 옮겼다. 간간히 수면 위를 비집고 올라온 수풀들이 발을 간질였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율동하는 수면에 균형을 잡기 어려워 두 팔을 벌렸다.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로 유쾌한 경험이었다. 끝을 모른다는 기도하는 땅이 발아래에 있다. 아름다운 흑색 호수가 이리도 깨끗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촉촉한 공기와 호수의 내음,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공기. 쾌적한 봄 날씨의 호수 위를 지금 걷고 있다. 자신의 두 발로! 발을 뗄 때마다 파문이 연하게 일었다. 그 모습이 신비하여 몇 번이고 무익한 걸음을 옮기다가 결국 넘어져 버렸다. 애당초 균형을 잡고 있기 힘들었었다. 넘어졌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물 속에 한 움큼 들어갔다가 부드럽게 튕겨져 나왔다. 말로만 들었던 물침대가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무하는 두 손을 물 속에 담갔다가 빼내며 웃었다. 그가 지금 앉고 있는 곳은 틀림없는 물 위였다. 무하는 저편에서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지기에게 손을 흔들었다. “민도 들어와 봐! 이곳은 처음일 것 아냐?” 민은 멍하니 있을 뿐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기도하는 땅을 걷는다니. 그런 것은 처음 들었다. 그때 보다 유연하게 충격에서 벗어난 디이나가 조심스럽게 한걸음 내딛었다. 바로 앞에서 걷고 뛰고, 주저앉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데 못해 볼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발은 부질없이 바닥으로 꺼졌다. 균형을 잃고 비틀대던 그녀는 결국 호수 속으로 풍덩 빠져 버렸다. 기도하는 땅은 가장 얕은 수면, 즉 각 가장자리라 해도 수면이 3m는 족히 되기 때문에 수영을 못하는 자에게는 공포와도 같았다. 다행히 그녀는 자택의 수영장에서 즐겨 수영을 해왔던 터라 별 위험 없이 떠올라 민의 손을 잡고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물을 삼켜버렸는지 가파르게 기침하던 디이나는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날씨는 따뜻한 봄 날씨였건만 물은 얼음장보다도 찼다. 잠깐 물에 잠겼던 것뿐인데도 입술이 파랬다. 그렇지 않아도 동안인 얼굴에 호리호리하고 작은 몸을 가진 터라 뭇 남성들의 보호심리를 자극하는 그녀였는데 창백하게 질려 떨어대는 모습이 가련 하기만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그녀의 주위로는 보호심리를 가져 마땅할 보편적인 남자 따윈 없었다. 그나마 최소한의 인정을 가지고 있는 민이 배낭에서 망토를 꺼내 건네준 게 다였다. 남자의 친절 따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던 디이나였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서운한 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귀족 여자로 보여 싫었다. 냉정히 말하면 여자, 남자 따위를 떠나 누구든 서운해 할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무하는 물 속에 빠져버린 디이나의 모습에 당황하여 주춤 일어났다. 그것을 본 유시리안이 내심 혀를 차며 디이나의 옆을 지나 수면 쪽을 향했다. 그녀의 옆을 스치면서 결코 약하지 않게 꿀밤을 먹인 것은 당사자들만의 비밀로 넘기자. 물론 눈치 챌 놈은 다 눈치 챘지만 말이다. “기분 좋지, 펠?” 태연히 웃으며 무하 쪽으로 걸어갔다. 그 걸음은 바위 위에서나 수면 위에서나 똑같았다. 너무나 평범한 걸음. 그것에 왠지 안심이 된 무하는 다시금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유시리안 뒤쪽으로 다시 한번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디이나와 민은, 유시리안에게 교묘히 가려져 보지 못했다. “흔들려서 잘 못 서겠어.” 장난꾸러기 소년마냥 킥킥 웃으며 유시리안을 반겼다. 유시리안이 손을 내밀자 맞잡아 섰지만 다시 휘청거렸다. 버스에 탔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손잡이는 없었지만 대신 유시리안이 손을 붙잡아주었다. “걸어서 저기까지 걸어가려면 힘들겠어. 그래서 순례자의 걸음이라는 배를 타는 건가?” “글쎄.” 그리 답하고는 유시리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일전에 민이 무하의 말투와 같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하를 닮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왜 웃는지 알 도리가 없는 무하는 관심을 접고 저편에 있는 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직도 들어올 생각을 않고 있는 그에 대한 독촉이었지만 민은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도하는 땅을 걸을 수 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인데다 방금 디이나의 추태를 본지라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 무하는 유시리안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영을 못하는 걸까?”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지만 이색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밑이 끝이 없다는 심연이라는 미지의 공포만 극복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수영을 못하는 자에게는 미지의 공포 정도가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죽음의 영역이겠지. 무하의 생각은 그의 입장에서 보면야 당연한 것이지만 유시리안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웃음이 물 위를 걷는다는 신비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유쾌함이라기보다는 웃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장난기가 가득 묻어나오는 웃음인지라 무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웃는 거 아냐?” “하하하!” ====================================================================== ........가동하다 망가졌습니다.......훗; ( '')~ [연재] 아해의 장-355 숨넘어가게 웃는 유시리안의 모습에 문득 장난기가 돌았다. 무하는 유시리안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몸을 숙여 손을 물에 담갔다. 그리곤 웃느라 정신이 없는 유시리안에게 물을 끼얹어 버렸다. 좀 전에 물에 빠진 디이나가 지금까지도 덜덜 떨고 있듯이, 이곳의 물은 무척 찼다. 그 차가운 물벼락을 난데없이 맞은 유시리안은 웃음을 멈추고 무하의 목을 팔로 꼭 끌어안아 넘어뜨렸다. 아차 하는 순간에 넘어진 무하 덕에 물기둥이 일순 솟았다 가라앉았다. 흑색의 고요한 호수에 하얀 거품들이 잔잔하게 일었다. 물 속에 무릎 정도쯤 잠겼다가 다시 떠오른 무하의 몸 위로 같이 쓰러진 유시리안이 짓궂은 웃음을 가득 터뜨렸다. 그런 유시리안의 몸을 집어던지듯 밀쳐냈으나 허공에서 한바퀴 구르고 유유히 착지할 뿐이었다. 그에 누운 자세로 발을 걸어버리자 결국 유시리안도 뒤로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동시에 풋 웃어버렸다. 한참 웃던 무하는 죄다 젖어버린 옷을 살펴보며 곤혹스런 얼굴을 해보였다. 순례자의 걸음을 타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다. “추운 거야?” 유시리안이 묻자 무하가 내심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유시리안 쪽을 보았다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율이야 말로!” “응?” “……됐으니까 얼른 나가자.” 얼떨떨해하는 유시리안에게 별다른 설명 없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갑자기 왜 그래?” 달리면서 유시리안이 물었지만 무하는 잠시 그를 돌아봤을 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곤 한층 굳은 얼굴로 속도를 더 붙였다. 그 뒤로 유시리안이 씨익 웃고 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본래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덕에 순식간에 바위 위로 올라온 무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유시리안을 돌아보았다. 같이 뒹굴었으니, 당연히 그도 흠뻑 젖어있었다. 그것을 보고 혀를 차며 유시리안의 손을 놓았다. “왜 그래?” “담요. ……아니 새 옷.”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뒤를 돌았다가 아, 하며 다시 유시리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모든 짐은 유시리안의 저 작은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정신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유시리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미묘하게 입술이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은 모른 척 하자. “왜 그래?” “이 바보! 떨고 있잖아!” 핏기 가신 낯빛과 새파란 입술, 약하지만 춥게 떨리고 있는 몸뚱이. 어딜 봐도 아파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마법으로 모습까지 변하게 해 놓아, 전의 강한 인상이 약 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층더 안쓰러워 보였다. “전에 그……붉은 담요? 쇼홀? 암튼 그거 어디 있어?” “응?” “온도를 조절해 준다며! 어서 꺼내봐.” 무하가 왈칵 화를 내며 재촉하고서야 주머니에서 예의 붉은 천을 꺼내는 유시리안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천을 펼치려 하는 것을 보다 못한 무하가 그것을 빼앗듯 건네받아 그의 몸에 둘러주었다. 그것은 실제로는 그렇게 손으로 일일이 할 필요 없이 알아서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여 주인의 몸뚱이를 감싸주는 녀석이었지만, 무하가 알 턱이 없었다. 그 진실을 아는 유시리안은 시치미 떼고 있고 이카미렌은 저 위에서 웃음을 삼키고 있고 락샤사는 침묵하고 있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민과 디이나는 기이한 얼굴로 유시리안을 뜯어보고 있었다. 물론 물 속이 뼈 속까지 에이도록 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다는 말조차 약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특히 디이나는 그것을 몸으로 직접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러니 방금 물에서 뒹굴어댔던 자가 저렇게 추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이성적으로 판단은 되지만 아무래도 영 미심쩍다. 아무리 그래도 저 유시리안이 이 정도에……. 두 남녀의 의심스런 시선 속에서도 유시리안은 꿋꿋이 아파했고, 무하는 한층 당황했다. “따뜻해지지 않는 거야?” “따뜻해. 이제 괜찮아.” 웃으며 답했지만, 그 웃음은 아픔이 잠재된 웃음이었다. 무하는 입술을 깨물며 유시리안의 옆에 서서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바위 위를 올려보고 말했다. “숙소를 잡아두셨다고 하셨지요? 먼저 돌아가 있겠습니다.” 이카미렌을 향해 한 말이었다. 고개를 저편으로 돌리고 있던 이카미렌이 무하의 말에 반응하여 낮게 말했다. “같이 가지.” 조금만 냉정했다면 이카미렌의 목소리가 웃음기로 뭉쳐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테지만 무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몹시 당황한 상태였다. 분노나 슬픔 외에 걱정으로 냉정을 잃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민은 어쩌겠어? 더 구경할 건가?” “아니, 같이 가지.” 유시리안에게서 의심쩍은 시선을 거두며 짧게 답했다. 디이나도 몸의 냉기가 가라앉지 않은 터라 숙소로 돌아가겠노라 답했다. 전원이 돌아가기로 의견을 모으자 이카미렌이 가볍게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락샤사가 비슷하게 뒤를 따르자 허공에 금빛 마법진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텔레포트였다. 순례자의 걸음을 만드는 장인 족들 사공. 그들의 마을은 신전의 비호 하에 있기 때문에 일종의 치외 법권이 형성되어 있다. 다른 말로 그 마을에서는 그들의 질서와 전통이 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정해진 몇 안 되는 법 중 한 가지가 외부자의 출입의 금지. 하지만 순례자의 걸음을 내줄 수 있는 것은 사공들뿐. 외부자가 출입할 수 없는 그곳의 장인들과의 연락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비사’. 사공들의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제 2의 마을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아직 장인이 아닌 견습생 사공들이 배의 신청과 접수를 담당하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한시가 아까운 견습생들이 마땅치 않아 했다. 때문에 사공들의 마을 내에서는 비사에서 최하 삼년간 일하지 않은 사공은 본격적인 수업을 못 받는다는, 또 다른 법을 만들었다. 이 비사를 여관과 식당 따위로 이루어진 촌락이 흡사 성벽처럼 둥글게, 그리고 두텁게 감싸고 있다. 본래 각기 ‘각’에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로 들끓고 있으니 이곳은 조금 달랐다. 이곳은 막연히 순서를 기다리는 자들이 아닌, 이미 ‘배정받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정식 명칭 따위는 없으나 은어로 ‘객’, 그리고 투숙하는 자들을 ‘순례자’라 칭하고 있다. 이카미렌이 만약을 위해 잡아둔 숙소가 바로 이 객 안에 있었다. 그 만약이란 것이 바로 ‘이 순간’을 의미한 것이었다면 선견지명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 저 단순히 자신의 아들을 잘 알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이카미렌은 창틀에 기대어 방안의 광경을 보며 내심 웃고 있었다. 아니, 겉으로도 웃는 것이 보이니 내심이라고 하긴 뭣했다. 노골적이지 않다 정도에 그치는 정도의 웃음이었다. 방안에는 아픈 얼굴로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침대에 누워있는 사랑하는 아들과 걱정 어린 얼굴로 그의 이마에 손을 대고 있는 무하가 있었다. 방안에 들어서면서 마법을 풀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둘은 함께 있음으로서 서로가 돋보였다. 한마디로 보기 좋았다. “열이 있는 것 같아.” “추운데…….” “감기군.” 진단한 무하는 잠시 고민했다. 감기에는 뭘 해야 하지? 다행히 열이 심하지는 않다. 그래도 물수건을 해야 하는 건가? 약은 어디서 구할 수 있지? 아니, 이 정도에 약은 필요 없나? 무하는 도통 해답을 찾지 못했다. 농땡 사부를 만난 이후로 병을 앓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달고 다녔던 건 늘 자잘한 외상들뿐. 농땡 사부 역시 잔병 한번 걸려본 적이 없다. 경험하지 못한 것에 관심을 갖기란 힘들지 않은가. 그러니 이런 자잘한 상식 면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물수건이나 해 주거라. 워낙 튼튼한 아이니 내일이면 괜찮아 질 거다.” 이카미렌이 조언해주자 그제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유시리안의 양해를 구해 주머니를 뒤져 수건을 꺼냈다. 그 다음 침대 옆 작은 테이블 밑에서 대야를 꺼내 올려놓았다. 이어 오른쪽 팔찌의 정령에게 부탁해 수건을 적당히 적신 뒤, 꾹 짰다. 차복차복 개어 유시리안의 이마에 얹고 조심히 물었다. “시원해?” 유시리안은 애써 생기를 짜내 답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리 보였다. “딱 좋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불현듯 고함을 질렀다. “멍청하긴! 물놀이하다가 감기 걸리는 바보가 어디 있냐? 그것도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월 감기를!” “하,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시끄러!” 겨우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유시리안은 우물우물 거렸지만 그 눈빛은 장난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이제야 그것을 발견한 무하는 한층 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죽인다고 죽였지만 확연히 들리는 크기였다. “쿡쿡…….” “웃지마, 이카!”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리는 이카미렌에게 유시리안이 버럭 외쳤다. 그럼에도 뻔뻔한 낯은 변함이 없었다. 한참 웃던 이카미렌은 아직도 들썩이는 어깨를 가다듬고 말했다. “하지만 페르…….” 무심코 페르노크라 말할 뻔 했던 이카미렌은 잠시 침묵했다가 호명을 건너뛰었다. 새삼 ‘무하’라고 바꿔 말해봐야 저 아프게 일그러진 녹안이 평정을 찾을 리 없었다. “어제 환자에게 안정과 휴식이 중요하다고 한 게 누군가 생각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구나.”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문지르는 무하에게 유시리안은 맞아, 맞아 하는 강력한 눈빛을 보냈다. 그것을 본 무하가 그를 향해 공연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건 환자한테 하는 말이고 바보한테는 통용 안돼!” “그런……!” 유시리안의 울음을 가장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수건을 떼어 다시 시원한 물로 헹궈주었다. “아직 시원한데.” 말은 그리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고양이 같다고 중얼거리는 무하의 소리는 흔쾌히 한귀로 흘려주었다. 이카미렌의 옆에서 방안의 돌아가는 모양을 지켜보던 락샤사가 일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분명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노크소리도 없고, 멀어지는 기색도 살기도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문을 벌컥 열자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어 사레들린 기침소리가 들렸다. 디이나였다. 노크하기 전에 심호흡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락샤사는 무성의한 얼굴로 유시리안 쪽을 돌아보았다. 이 여자가 용건이 있는 쪽은 그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그러나 락샤사의 예상과는 달리 디이나는 이카미렌 쪽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순례자의 걸음의 순서가 됐다고 비사가 통보해 왔습니다.” “아들이 아프니 내일로 미루지.” 그리 말하는 이카미렌의 입가에 어쩔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들이 꾀병을 부리게 된 원인인 그녀를 보자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뭐, 저 정도면 귀여운 축에 속하는 질투가 아닌가. “우리는 나가지.” 락샤사가 고개를 끄떡이는 모습을 본 디이나는 유시리안 쪽을 흘낏 보다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녀로서는 저렇게 자리보전한 유시리안의 모습을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똑같이 물에 빠진 자신이 이렇게 멀쩡하기 때문이다. 유시리안이 자기보다 허약하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기에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인정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납득이나 인정 여부는 일행에게 있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 디이나에 이어 락샤사가 나가고, 이카미렌이 유시리안을 향해 다정한 얼굴로 웃어 보이고 나갔다. 진짜 병이었다면 남아서 간호하겠지만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은 개구쟁이의 꾀병이니 그 소원을 풀어주는 게 아버지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일행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무하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아무 것도.” 희미하게 웃으며 답을 회피하는 모습에 미간을 모아 봤지만 무하는 이불 밑으로 시선을 떨꿔 그것을 보지 못했다. “펠…….” “자두도록 해. 강행군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야. 돌아가는 길은 여유롭게 가자.” 유시리안의 말허리를 자르며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그때 보인 얼굴을 유시리안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본래의 얼굴로 돌아가 수려한 그의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안에 투영되어 보이는 단아한 소녀의 얼굴 때문도 아니었다. 진하게 서려 있는 슬픔에 순간 말문이 막힌 것이다. “어째서……?” “응?” 스스로는 의식을 못한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반문하는 그를 보고 유시리안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얌전히 눈을 감고 잠에 빠진 유시리안을 내려다보던 무하는 주저하며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은 언제나 턱없이 짧다. 언제나……. 이 순간이 영원하길.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연히 바라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현실뿐. 유시리안의 창백한 얼굴을 봤을 때, 심장이 멈출 것만 같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가 이리 될 정도로 물 속이 차갑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자신이 얼마나 싫고 미웠던지. 아예 느낄 수 없는 통증과 한 꺼풀 가려진 듯 둔탁하게 느껴지는 촉감……. ‘있어야 할 곳’이 자신의 옆이라고 그가 말해줬던 때 깨어난 ‘페르노크’가 대신 느끼고 있을 그것. ‘무하’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그것에 언제나 섬뜩한 공포를 느꼈었지만 그때처럼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좀더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걸을 수 있으면서도 ‘순례자의 걸음’이란 것에 의존하는 지. 인간의 체력으로는 걷지 못하는 혹한의 땅이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민도 들어오지 않았던 걸까? 자신의 무심함과 무지함이 유시리안을 힘들게 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자책감에 가만히 속삭여 보았다. “미안…….”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이불 위에 이마를 대었다.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가 끊겨져 나갔다. ============================================================================ 그렇습니다!!!!!! ..........ㅜ.ㅜ;; 우습게도....... 개도 안걸린다는 여름감기를!!!!!! ..........걸려버리고 만겁니다; 위의 내용을 올리기 차마 민망합니다;ㅡ; 며칠동안 죽어있다가 겨우 부활했습니다. ㅠ.ㅠ;; [이번 내용을 읽으며 "아! 이거!!!" 하며 탄성을 지르실 분도 조금은 있을 듯..^^ 아르의 장에서 약간 언급이 된 바 있었거든요...] 기억 안나신다면 [ ]안의 말은 그냥 헛소리로 가뿐히 넘겨주세요. 모르셔도 무관합니다. 아해의 장 -356 신전의 수호 하에 있는 ‘사공’들은 늘 공정하게 배를 내주었다. 한마디로 선착순이란 것이다. 때문에 한번 주어진 순번을 포기 하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맨 뒤로 돌아가 기다려야만 했다. 이미 한번 주어진 순번을 미룬 이카미렌이었지만, 그는 신전의 대신관인 훼오트라 아나의 부탁으로 나온 신분이었다. 때문에 그를 위한 순례자의 걸음은 타인에게 양도되지 않고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것을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훼오트라 아나의 손님이라는 수려한 미모의 남자를 시기와 분노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시선들을 눈치 채지 못할 이카미렌이 아니었으나 상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러다말 자들이다. 앞에 나와 말 한마디 못하고 노려보는 것으로 분을 풀어야 하는 작 자들에게 써줄 신경 따위는 없다. “누구는 한달을 기다려 겨우 배정받았는데. 빌어먹을.” “아서라. 쥐뿔도 없이 태어난 죄 아니냐.” 수군거리는 소리가 카르민인 디이나의 비위를 거스르게 했지만 쓸데없이 소동을 피워서는 안 되는 상황을 잊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런 소리야 수도 없이 들었고, 그때의 기분에 따라 성질도 부리고 무시도 했던 유시리안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주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락샤사야 어떤 소리를 듣든 상관하지 않는 무심한 남자였고, 무하는 이런 소리에 연연하지 않은 남자였기에 무난하게 비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순례자의 걸음’이 출항 전에 대기하고 있는 곳을 ‘걸음의 시작’이라 부른다. 인공적인 나무 건축물을 한참 걸어 나오면, 기도하는 땅의 일부분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곳은 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이 겹겹이 자리 잡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투명한 물 속에 거대한 나무기둥들과 더 밑으로 엉키고 꼬인 뿌리들. 마주보니 흑 빛 호수 위에 살짝 닿는 가늘고 긴 초록빛 나뭇잎들. 실로 한 폭의 유화와 같다. 그 거친 톤과 투박한 색채라니! 바로 그 속에 수백 척의 순례자의 걸음이 떠 있었다. 아니, 떠 있다는 표현은 적당치 않다. 그것은 저 거대한 나무의 뿌리와 이어져 있으니. 마치 저 나무의 일부인양. “이건……!?” “뭘 그리 놀라지?” 디이나의 탄성에 이카미렌이 옅게 웃었다. “하지만 뿌리가 이어져 있지 않습니까! 이건 대체……?” “기도하는 땅 역시 담수 지역이다. 생명체만이 떠 있을 수 있는 곳. 무생물을 빨아들이는 곳.” “순례자의 걸음은 살아있는 거군요.” 민이었다. 언제나 한발 빨리 알아차리는 그를 보며 이카미렌은 내심 감탄했다. 비사 한명이 일행을 향해 인사를 꾸뻑 한 뒤 물 속으로 풍덩 들어갔다. 익숙한 듯 뼈에 사무치게 시린 냉기에도 태연히 수영해 순례자의 걸음에 다가갔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곡도로 배와 이어진 나무의 뿌리를 서걱 배어냈다. “저렇게 자른 배는 일정한 기간동안은 ‘생명체’로 인식되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왕복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보다는 그 기간동안만 신전에 머물 수 있는 거지만.” 이카미렌의 설명이 끝날 무렵, 비사가 배를 끌고 이쪽으로 헤엄쳐 왔다. 사람 여덟은 충분히 탈만한 크기이지만 가뿐하게 끌고 있었다. 배의 무게가 그만큼 가볍다는 뜻이리라. 게다가 이곳은 무생물만을 빨아들이는 곳. ‘생명체’인 순례자의 걸음을 빨아들이는 힘이 없으니 더욱 가볍겠지. “이 배는 언제나 신전 쪽으로 향해갑니다. 일단 타기만 하면 알아서 신전으로 가니 특별히 주의하실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비사는 타원형 열매를 꺼내 이카미렌에게 건넸다. “이것을 배의 선두에 두시면 방향이 이쪽으로 고정됩니다.” 물 위로 올라온 비사는 상업용 미소를 지었다. “그럼 좋은 시간되시길.” 앞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한사람, 민이 불현듯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각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기압이군, 무하.” “별로…….” 민은 유시리안 쪽을 잠시 보았다. 무하가 저기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그일 텐데 의외로 아무 말도 않고 있다. 그보다는 뭔가 생각에 휩싸여 눈앞의 것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는 듯 보였다. 무하가 힘들어한다면 그것을 풀어줘야 할 사람은 바로 그건만. 무하가 흔들린다면 그것을 지탱해줘야 할 사람은 바로 그건만……. 애써 불안을 떨쳐보려는 민에게 무하가 물었다. “왜 안 들어 왔어?” “응?” “어제 말이야.” “걸을 수 없었거든.” 민의 단순명료한 답변에 더욱 알 수 없게 된 무하였다. 그에 민이 덧붙였다. “디이나 씨도 걸으려 했지만 걸을 수 없었어. 그냥 빠져 버렸지.” “왜……?” 모르기는 마찬가지라 민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새삼 유시리안을 보며 물었다. “기도하는 땅을 걸을 수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게다가 디이나 씨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지요?”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굳이 건드린 이유는, 지금 당신에게는 딴 생각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토록 어둡고, 힘없는 무하를 봐주길 바라는 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시리안은 건성으로 답할 뿐이었다. “거짓은 아니야. 분명 진실이다. 단지 묻혀진 진실일 뿐.” “그럼 그 진실을 알기만 한다면 걸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러나 디이나 씨는 걷지 못했습니다.” “알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믿어야 하지.” “……그렇군요.” 납득하는 그를 보며 이카미렌은 또 한번 감탄했다. 선입견이라는 것은 대단해서 눈앞에 보이는 것조차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민이란 저 남자도 이곳의 존재로서, 왜곡된 진실만을 보아왔을 터인데 그것이 잘못된 선입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선뜻 인정해 버리다니. 여간내기가 아니다. ‘과연 불칸의 영원이 될만하군. 그녀와 성격이 맞겠어.’ 성격이 맞는 것으로 치면 유시리안과 무하도 뒤지지 않는다. 이카미렌은 간절한 바람을 안으로 깊이 숨긴 채 무하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떤 선택을 하든, 네가 택한 것이면 된다. 하지만 나로서는 부디…….’ 자연히 시선이 유시리안을 향했다. 간절한 바람을 여전히 깊이, 깊이 묻은 채. 훼오트라 아나는 만날 수 없었다. 레이아사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 백목(白木)의 관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레이아사 아나가 있는 백목의 관은 원형으로 지어진 신전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원형 형태로 지어져 있는 건물인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신전과는 겨우 네 개의 다리와 연결되어 있을 뿐 완전 별도의 건물이었다. 지어진 양식조차도 확연히 달랐다. 외형은 거대한 나무들이 엮여 생겨난 듯한 건물이요, 그 색은 백색이라 백목의 관이라 불리는 이곳은 평소에는 교황과 훼오트라 아나만이 출입할 수 있는 금역이다. 오직 레이아사의 날에만 만인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개의 다리로 이곳을 방문하고, 다른 두개의 다리로 이곳을 떠났다. 그 동안 레이아사 아나의 양 옆을 창세신전의 교황과 훼오트라 아나가, 그리고 그 둘의 옆으로 수많은 신전의 교황들이 이어 서있다. 혹여 불순한 호기심을 가진 자들이 접근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 어쨌거나 이카미렌들은 아직 레이아사의 날이 아닌 관계로 백목의 관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견습 신관의 안내를 받아 이카미렌의 거처 쪽으로 방을 배정 받고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일단 이곳에 도착만 하면 신상의 안전은 보장된 것이었다. 신전 쪽에서 이들의 목적을 눈치 챘다면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모르는 듯 보였다. 기분 좋은 촉촉한 바람에 실려 오는 차 향기를 즐기며 디이나가 말했다. 상대는 민이었다. “만날 수도 없는 데 이곳에 미리 데리고 온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 “물론 있겠지요.” 유시리안이나 락샤사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듯 했지만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아까 전부터 침울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지기가 신경 쓰였다. 그들이 묵고 있는 곳은 최상급 손님을 맞는 곳으로, 그 층 전체의 반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거실에 해당되는 이곳 외에도 수 개의 방이 있어 각기 하나씩 쓰기로 했다. 무하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그 중 하나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안했다. 유시리안은 그런 무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잔뜩 굳은 얼굴로 다른 방에 들어 가버렸다. 들어갈 때 이카미렌의 팔목을 잡고는 끌듯이 함께 들어갔다. 그 뒤를 락샤사가 태연히 따랐다. 자연히 남게 된 민과 디이나는 견습 신관이 내어준 차를 마시며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상태였다. ‘불안하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바싹 곤두서고 있다. 만나지도 못하는데 어째서 미리 데리고 온 거지? 저 정도 되는 존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럴 리 없다. 뭔가 나름대로의 꿍꿍이가 있을게 분명하다. 그게 뭘까? 민은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 답답했다. 답답함에 차를 꿀꺽꿀꺽 목 너머로 밀어 넣은 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그가 향한 곳은 무하의 방이었다. “불안해, 이카!” 유시리안은 넓은 테라스를 왔다 갔다 하며 입술을 지끈 깨물어댔다. 아침부터 이상했다. 아니 어제 잠이 들 때부터 이상했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변했다. 무하가 침묵하며 자신의 안에 잠기는 것은 한두번 있었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게다가 이카미렌이 약간 찔러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참이니 더욱 그랬다. 생각 할 것도 많고 고민할 것도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달랐다. “불안해. 불안해.” 희미하게, 아주 가끔씩 밖에 보이지 않던 ‘페르노크’가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은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무하에게 어떤 징조가 일어나고 있는 지도 엿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 변했다. 그래……. “너무 희미해.” 바로 앞에 있는데, 그 향기가 맡아지고 그 온기가 전해지는데……너무 희미하다. 옅어서, 너무 옅어서 금방이라도 지워질 것만 같다. 그 존재감이. “녀석과 만나게 하는 건 미루는 게 좋지 않을까?” “레이아사의 날. 그분은 이날을 기다려 왔다. 이번을 놓치면 다시 삼년을 기다리게 되지.” “알게 뭐야!” 버럭 소리 지르는 기세가 살벌하다. 그러나 이카미렌은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번이 고비라고 생각한다.” “고비?” “그분에게도. 너에게도. 그리고 무하에게도.” 이카미렌의 앞에 털썩 주저앉은 유시리안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불안해, 이카.” “나 역시다.” 어리광 부리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처음부터 불안은 있었다. 무하는 이단아. 그것도 단지 영혼만으로 이 세계에 빌붙어 있는 이단아. 하지만 그는 언령을 쓴다. 지워진 고대마법을 쓴다. 그것을 컨트롤 할 줄도 안다. 그래서 살려둔 것이다. 처단했어야 할 녀석을 시험을 통해 방치해뒀다. 그 어설픈 합격을 묵인했다. 그러하기에 이카미렌은 방해하지 못한다. 본래라면 처단됐어야 할 녀석을 살려준 것만으로 그는 훼오트라 아나에게 빚을 졌다. 단지 그 이단아가 아들의 영원이라는 것만으로 없던 그 빚을 갚아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솔직히 내심으로는 그분 역시 이제 그만 해방되길 바라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강하게 불안을 호소하는 아들을 위로하는데서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오늘 밤. 그가 지고 있던 빚은 사라진다. 이제 순수한 자유의사로서 앞일을 결정해야 한다. ‘나의 아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훼오트라 아나여.’ 무하는 테라스의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있었다. 그 밑으로는 끝을 알 수 없다는 기도하는 땅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턱이 없었다. 그에게는 선입견 따윈 없다. 이미 저 위를 걸어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그의 모습은 너무나 아슬아슬해 보였다. 민은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지 않더라도 지기가 자신의 방문을 눈치 챘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면서. “잠깐 괜찮겠어?” “……요크노민.” 실로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본명에 민은 쓴 얼굴을 해보였다. 확실히 지금의 무하는 뭔가 이상했다. “만약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돌아보는 무하의 얼굴이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이견은 듣지 않겠다는 확고한 얼굴. “그건 내 의지다.” 다시 기도하는 땅 쪽으로 돌려버리는 모습이 냉정하다기 보다는 안쓰러워 민은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 드디어 그 '장면'의 순서... 후후후... 이제 슬슬 외전 준비도 해야 하는데... 이번엔 뭘 해볼까나... [연재] 아해의 장-357 “당신은 누구지?” 남자가 묻는다. “몰라서 묻는 건가?” 불쾌감 어린 목소리로 여자가 되묻는다. “응. 모르겠어.” 뻔뻔하게 느껴지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다. 남자는 담담한 얼굴로 답하고 있었으니까. 검은 호수가 발밑에 있다. 수면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뿌리에 앉아 눈앞까지 늘어진 물풀을 손가락으로 튕기곤 한다. 위를 올려보면 초록색 이파리에 하늘조차 가려져있다. 사방이 온통 늘어뜨려진 이파리와 가지 투성이라 밖에서 보면 그저 녹음덩어리로 느껴지지만 안쪽에는 이렇게 제법 넓은 공간이 있는 것이다. 이곳은 오랜 세월동안 그녀만의 장소였다. 그런 장소에 용케 찾아내, 굳이 들어와서는 겨우 한다는 말이 저거라니.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바보구나?” “그럴지도.” 능청스레 답하며 여자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다 달콤한 키스를 한다. 여자가 키득 웃는다. 차가운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아득한 미소를 짓는다. “당신의 이름은 뭐지?” 얇은 비단이 간신히 들어 갈 듯한 틈을 만들어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 “이름따위……없어.” 물소리에 깼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스르륵 일어났다. 어째서 인지는 모른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계속 걸었다. 그렇게 나가는 무하를 거실 저편에서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매력적인 보라색 눈동자가 이지적으로 빛나는 남자. 이카미렌이었다. “시작되는가.” 무하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겠지만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은 특히나 경계가 삼엄한 곳이었다. 입구는 겨우 네 개인데다 견습 신관이 아닌 정식 신관들이 교대로 항시 지키고 있는 곳. 그런데 무하는 어떤 제지도 없이 그 안에 들어갔다. 그곳은 타인들이 백목의 관이라 칭하는 바로 그곳이었다. 안은 하얬다. 바닥도 천장도 기둥도. 모든 것이 새하얗다. 비현실적인 공간을 묵묵히 걸었다. 무하로서는 처음 보는 건물 안이었다. 아니, 처음 보는 건 아니다. 이 뚜렷한 기시감. 비록 현실이 아닌 곳에서라지만 분명 본 적이 있다. 무하는 혼란스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을 지탱하는 원기둥에 섬세하게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쭉 올라가면서도 기이하게 휘어져 거대한 나무처럼 느껴졌다. 그 뻗어 나감은 자연스럽지만 새하얗게 탈색된 모습은 석화된 것 마냥 답답했다. 분명 본적이 있는 모습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이라는 동화책이 생각난다. 공주님의 깊은 잠을 함께 나눈 성안이 모든 생명체들.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지 공주가 잠이 들었다는 것만으로 백년간 잠을 자야만 했던 모든 것들. 이곳에도 그런 괴리감이 흐른다. 이 건물 자체가 억지로 멈추고, 강제로 희생당한 생명체처럼 보인다.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지는데도 청량함과 물기가 묻어나는 공기가 한편으로는 편안하다. 그것은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정화가 되는 듯이 맑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그렇다. 꿈에서 봤다. 몽환의 바람과 계약을 맺었던 그 첫날. 분명 이와 같은 곳을 걸었었다. 이 뚜렷한 기시감은 그에 비롯된 것이었다. 그때의 꿈과 마찬가지로 이 거대한 건축물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무하뿐인지 발자국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왜 꿈속과 똑같은 곳을 이유 없이 걷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의아해 하면서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계속 걸었다. 그러다 위를 올려보았다. 꿈에서도 그랬다. 바닥의 것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천장. 까마득히 높은 천장인데도 바로 코앞의 바닥과 같은 색을 띄고 있다. 마치 명암을 넣기 전의 건물 그림 같다. 무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좀더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렇게 꿈과 똑같은 행동을 곱씹듯 따라하고 있었다. 역시나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온갖 조각들이 새겨져있다. 아마도 정교하게 새겨져 있을 그것은 무척이나 하얘서 생김을 구분할 수가 없다. 뭐하는 짓인지, 쓰게 웃으면서도 계속 걸었다. 분명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어서와.” 역시나 새하얀 속에 유독 눈에 띄는 흑발의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훼오트라 아나……. 하지만 지금 보이는 저 공허한 눈동자가 그때의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문스럽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락샤사처럼 무심했다. 하지만 락샤사의 무심함과는 달랐다. 그의 무심은 본래는 꽉 차 있었던 것이 텅 비어버린 듯한 아픈 공허다. 그의 아픔이 전염이라도 된 듯 무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런 무하의 심정을 읽었는지 그는 설핏 웃음을 지었다. 무하는 작게 목소리를 냈다.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꺼낸 말은 꿈속에서와 똑같았다. “어째서 일까요? 전 당신이 슬퍼 보입니다. 모든 것을 타고난 당신이.” “내가 나의 영원을 뺏겼기 때문 일거다. 나의 심장이 뜯겨 나갔기 때문 일거다. 모든 것을 다 타고났다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행복을 뺏겼다. 운명이란 이름 아래에, 순리라는 이름 아래에 강탈당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오로지 하나만을 갈망해왔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덩달아 보았다. 직경이 수 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심연의 호수가 뚫려 있었다. 하얀 건물 안에서 칠흑의 그것이 섬뜩하고 아름답다. 그 중심부에 새하얀 빛의 기둥이 일렁인다. 그것은 역행하는 빛의 폭포 같다. 생명이 있는 듯 힘차게 약동하지만 일정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위로 솟는다. 그러다 갈 곳 잃은 빛이 천장을 타고 기둥을 감싸 바닥에 깔린다. 그렇게 건축물을 감싼다. 그래서 이 건축물은 이질적으로 하얗다. 조화롭지 못하다. 분명 경이로운 광경이요, 현상이긴 했지만 그것은 이곳과 어긋나고 있다. 기껏 부수고 매만진 천장의 조각은 존재조차 알 수 없게 가려버리고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 나무의 형상을 한 기둥을 석고상마냥 마비시킨다. 그뿐 아니다. 끊임없이 하늘을 갈망하는 저 빛은 이 건축물에 묶여있다. 서로 별개의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묶여있는 듯 서로에게 맞지 않는다. 호수의 곳곳에 정교한 룬어가 촘촘히 파고들어있는 기둥이 박혀있다. 여태껏 보았던 기둥의 자연스런 곡선의 뻗음과는 다르게 그것은 똑바른 직선의 사각이다. 이 또한 저 빛의 기둥과 마찬가지로 이 건축물의 침입자처럼 느껴진다. 무하가 좀더 다가가려 하자 훼오트라 아나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는 고개를 조금 돌려 빛의 기둥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안식과 죽음의 신의 교황. 죽은 자에게는 안식을, 산 자에게는 죽음을 내리는 사자. 그러니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더 이상 다가왔다가는 안식을 얻게 될 거다. 원치 않더라도 정화될 거다.” 훼오트라 아나의 시선이 다시 무하에게로 향했다. 그의 붉은 입술이 무심히 달싹였다. “넌 죽은 자이니.”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무하는 거짓처럼 놀라지 않았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설희가 바다를 향해 자신을 요구할 때 알아차리고 말았다. 본래의 육신은 이미 불 태워져 바다에 뿌려진 것일 테지. 이상할 정도로 자연히 납득했다. ‘무하’는 죽은 거다. 그랬으면서 자신의 바람만을 위해 구차하게 타인의 육신을 빼앗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죽었으면서……. 무하는 쿡쿡 웃으며 꿈속에서처럼 호수 중심부, 정확히는 빛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 안에는 어떤 존재가 앉아 있었다. 고아함이, 그리고 장엄함이 물씬 묻어나오는 존재. 그 필사적인 경건함에 저도 모르게 경의를 표하게 하는 존재. ‘죽은 자’인 무하에게는 본능적인 평온감과 경외감, 그리고 두려움이 느껴지는 존재. 무하가 그 존재를 보고 있음을 안 훼오트라 아나는 노래하듯이 속삭였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저 모습을 하는 걸까? 저 장엄함은, 저 경건함은……무엇을 바라건대 저리도 필사적일까? 무엇을 저리도 처절하게 기도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그 존재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검은 호수의 경계선에서 멈췄다. 힘을 줘보기도 하지만 부질없이 막혔다. 슬프게 일그러진 얼굴로 한참 빛의 기둥을 보던 그가 천천히 무하를 돌아보았다. “그대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는 나의 소망을 들어주길 청하기 위해서다.” “소망?” “나의 영원을 되돌려 받게 해주길. 나의 뜯겨 나간 심장을 치유해주길.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행복을 되찾게 해주길. 숨조차 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갈망해온 나의 단 하나의 소망을…….” 공허하기만 했던 훼오트라 아나의 어조에 격정이 담겼다. 지친 듯 비어있던 눈동자에 격분과 갈망이 뿜어져 나왔다. 그 압도적인 박력과 짓눌린 아픔에 무하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팠다. 얼마나 기다려 왔을까. 얼마나 소망해 왔을까. 그 절박함이 무하를 아프게 했다. 무하에게는 그 소망을 이루어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전…….” 그 속을 읽은 듯 훼오트라 아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무하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너에게 있다. 오직 너에게만 있다. 나의 영원을 속박한 힘과 똑같은 힘! 이제는 지워진 그 힘이 오직 너에게만 있는 거다! 언령! 의지의 힘! 지워져 이제 이곳에서는 없는 그 힘이 오직 이단자인 너에게만 있는 것이다!” “당신……대체 누구죠?” 더욱 물러나며 무하가 물었다. 훼오트라 아나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무하가 그토록 꺼려하는 그 힘까지도. 무하의 질문에 훼오트라 아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맹렬한 조소를 품었다. “내가 누구냐고?”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무하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훼오트라 아나는 한마디씩 딱딱하게 끊으며 한걸음씩 다가갔다. 이번에는 그의 접근을 피하지 못했다. 몸이 바싹 굳어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영원히 신을 노래하는 자.” 그리하여 영원히 죽음을 허락받지 못한 자. “나는 이름 없는 자.” 그리하여 운명에 대한 예언이 없는 자. “나는 고귀한 꼭두각시.” 그리하여 의지로 인한 선택이 없는 자. 훼오트라 아나의 주홍빛 눈동자가 기이하게 광채를 발했다. 바로 무하의 앞까지 온 그는 무하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작게 속삭였다. “나는 최초의 피조물.” 태초로부터, 그 질리도록 긴 억겁의 시간동안 오로지 신만을 노래한 꼭두각시. 그저 그뿐인 존재.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축복을 그들이 강탈해 갔다. 그토록 베풀어줬건만…….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이끌어줬건만……. 그들이 빼앗아갔다. “나를 구해줘. 나의 영원을 돌려줘.” “다, 당신에게는 이 힘이 없는 건가요? 언어를 알고 의지를 억제할 수 있으면 구현할 수 있는 이 힘이?” 그의 진정한 일면을 잠시나마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압도되어 버렸는데, 고작 이정도의 힘이 없는 걸까? 무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던진 질문에 훼오트라 아나의 얼굴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있었다! 나한테도 있었다!” 그의 분노가 퍼짐에 따라 건물 전체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바람조차 몸을 감추고 겁에 질렸다. 건물 안에 있는 심연의 호수를 이루고 있는 물들도 힘들게 비틀거렸다. 그 중심에서 무하는 크게 부릅뜬 눈으로 훼오트라 아나의 분노의 여파를 지켜보았다. 이는 소리 없는 아우성. 바로 그 자체였다. “그들이 빼앗아갔어! 나를 속이고, 나를 기만하고! 그들이!” 누구보다도 아꼈는데. 누구보다도 믿었는데. 누구보다도……. 그랬는데 그들이 속였다. 입에 담기조차 증오스런 이름, 엘프. 바로 그들이! 더 이상 그들에 대한 말을 하기 싫었던 훼오트라 아나는 무하를 다그쳤다. “나는 너를 처분해야 했다. 이단자주제에 이곳의 주민의 몸을 빼앗은 너를! 하지만 살려두었다. 어수룩한 시험을 했고, 어설픈 결과를 납득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의 네가 있는 거다! 그러니 그 대가를 치러라. 나에게 그를 돌려줘!” 회색 고향에서의 시험. 고작 그 정도로 넘어가 주었다. 그나마도 바람의 수장과 바다의 수장의 도움으로 간신히 합격한 결과인데도. 본래라면 처분했어야 했는데도. 오직 이 날을 위해 살려두었다. 아니! 오히려 죽어버리지 않도록 보살피고 감시하며 계속 살려두었다. 그에 대한 대가치곤 쉽지 않은가. 한번 바라주기만 하면 되는데. “동정이라도 좋다. 나에게 돌려줘. 나의 영원을!” 훼오트라 아나는 무하의 어깨를 움켜쥐고 다급히 말했다.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었다. 지치고 힘들고 초조했다. 이렇게 영원의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간신히 만난 희망이다. 정말 간신히 만났다.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약속하지. 네가 원한다면 그 육신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래서 더한 해택을 제안했다. 그 어떤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싫어─! 그로 인해……. ===================================================================== ( '')~ 과거 키스동이 그립습니다. 글 안 풀릴때면 패러디 란에 박혀서 이것저것 보며 으흐흐흐... 어디 패러디 많은 곳 없나요? 물론 므흐흐~ 패러디+_+ 패러디가 고픕니다...;ㅡ; [연재] 아해의 장-358 창세신의 신전은 안팎 모두 순백색이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신전이 언제 지어졌는지, 누가 지었는지조차도 모르는데 왜 그랬는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또 그것에 의문을 가지는 자 역시 없었다. 그냥 그것이 당연했다. 이 세상에 빛이 있는 것처럼 물이 있는 것처럼, 공기가 있는 것처럼. 현 교황은 이 순백색이 좋았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의 첫사랑인 그녀와 이 순백의 낙원을 거니는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작은 소년이었던 그가 조금만 더 커, 한 남자의 모습으로 당당히 나설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그녀의 수명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벌써 몇 대 전의 훼오트라 아나. 작은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죽어버린 여자. ‘레이아사의 날. 바로 직후였다.’ 교황은 씁쓸하게 와인을 삼켰다. 창세신의 교단은 특별히 결혼이 금지되어있지 않는데도 줄곧 혼자였던 것은 그녀만큼 가슴 떨리는 존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 늘 온화하고 자상했으며, 아름다웠던 그녀……. “청승맞게 혼자 술입니까?”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시중드는 견습 신관들에게 말해놨는데……. 뻔뻔하게 쳐들어와 놓고 저따위 머리 빈 웃음이나 지어대는 녀석이 현 훼오트라 아나라니. 교황의 눈매가 매서워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훼오트라 아나의 평소 모습 그대로 속모를 웃음을 짓기만 했다. “무슨 일이오?” “아! 별건 아니고, 한 가지 미리 말해둘게 있어서요.” 늘 일언반구 없이 멋대로 사라지고, 그러나 갑자기 나타나고 함부로 말하고 경솔히 행동하고……. 정말 말썽이란 말썽은 있는 데로 다 부리던 훼오트라 아나가 아닌가. 새삼 무슨 말을 하고 자시고 인지 제법 흥미가 돌았다. “말해 보시오.” 훼오트라 아나의 얼굴에서 잠시 지독한 공허와 격렬한 분노와 암담한 슬픔을 본 듯 했다. 교황은 애써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넘겼다. 그토록 속 썩이는 철부지에게서 저와 같은 고뇌가 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교황이 어찌 생각하든 훼오트라 아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타인의 시선 따위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지 오래다. 자신이 존재하는 것, 자신이 사고하는 것. 인간은 그것을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훼오트라 아나는 최초의 피조물로서 오직 혼자 존재하는 유일한 종족. 타인과 함께 함으로서 성립하는 절대 다수의 종족과는 엄연히 다른 존재. 그래서 영원을 빼앗겼음에도 그 아득히 긴 세월을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미치지 않고, 변함없는 열망과 깊어가는 그리움 속에서. ‘나의 영원…….’ 훼오트라 아나는 무겁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대로 이 기회를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이번 레이아사의 날에 불참하게 됐어요.” “…….” 생각보다 미지근한 반응에 반사적으로 생긋 웃었을 때서야 고막이 울릴 듯한 고함소리가 터졌다. “뭐요!?” “안타깝게도 그렇게 됐으니 뒤를 부탁해요.” 앙증맞게 윙크까지 던지며 잽싸게 빠져나왔다. 뒤에서 당장 들어오라는 명령은 가뿐히 무시해 주었다. “혼자 있고 싶으시다면 서요?” “그걸 말이라고 하……!” 등 뒤에서 계속 울려대는 고함을 한귀로 흘려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고두하는 자들 사이로 걸었다. 이제 나이 좀 먹었다고 근엄한 척 하려는 교황을 보며 같잖지도 않다. 기도하는 땅에 버려져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주워온 것이 어제 같은데 말이다. ‘그때는 여성이었지.’ 그 다음 번 탈태에도 여성이었고 그 다음에도 여성이었다. 지금의 교황 녀석의 기저귀를 갈아준 적까지 있었다. 그런데 어딜 감히 위엄을 세우려 하는 가. 훼오트라 아나는 훼오트라 아나. 이름 없는 자. 최초의 피조물. 영원히 신을 노래하는 자. 세간에서는 단명하여 새로이 태어난다고 오해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단 한번도 다른 자였던 적이 없다. 단지 오륙년을 턴으로 탈태를 하는 것 뿐이다. 영원히 신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영원히 존재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가장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시기를 영원히 되풀이 하는 것이다. 탈태를 할 때마다 겪는 온 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은 아무리해도 익숙해질 수 없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인격을 연기해가며 다른 존재인척 하는 것은 익숙해졌다. 제 1기 마도 때는 이러지 않았다. 굳이 진실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질시를 받고, 끝내는 배신을 당한 순간부터 이렇게 변한 것이다. 진정한 자아는 숱한 자아들의 난립 속에서 부서지고 마모되고, 가닥가닥 뜯겨나가 이제는 스스로도 공허함 속에 세월을 보낼 뿐이지만……. 그래도 그가 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라는 끈이 훼오트라 아나를 지탱해 주었다. 이제 그는 혼자 존재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의 영원이 레이아사 아나라는 참혹한 모습이나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역시 미치지 않고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 단지 그가 의식하고 의존하는 ‘타인’이 그의 영원뿐이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바닷물을 마신 자의 갈증은 더욱 심해지는 법이다. 오아시스의 신기루를 본 자의 절망은 더욱 심해지는 법이다. 훼오트라 아나는 희망을 봤었다. 이 끝없는 절망의 늪 아래서 실오라기만한 동아줄을 잡았었다. 더 이상 이대로의 악순환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제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이다. “그를 돌려줘. 나를 도와줘.” 문득 하늘을 보았다. 달 없는 하늘에 무수히 박힌 별들이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셀 수조차 없는 무구한 세월을 홀로 노래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찰나의 행복…… 끝을 알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의 연속. 그럼에도 버텨왔다. 이를 악물고 버텨왔다. 하지만……. 온통 적막뿐인 세상이 짓밟고 있다. 짓이기고 있다. 훼오트라 아나는 두 팔를 교차하여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약하게 떨었다. “제발…….” * * *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려 있었다. 이제 말로만 들었던 그 광경이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질 것이다. 이윽고 기대와 흥분에 들뜬 가슴을 부여안는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숱하게 묘사된 바와 그대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신전을 중심으로 기도하는 땅이 크게 동심원을 그려나갔다. 밖으로, 밖으로 퍼져나가던 그것은 마침내 안으로, 안으로 휩쓸려 들어왔다. 그 확연한 물살이 신전을 더 나아가 백목의 관을 덮쳤다. 그것은 내부에 있는 레이아사 아나의 기둥이 있는 호수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빛의 기둥을 타고 호수가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빛을 흡수하듯 호수는 차츰 밝아져 갔다. 그 강도가 급격히 높아져 맨 눈으로는 마주 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이 역류하는 호수에게서 뿜어졌다. 그러자 호수는 맹렬한 속도로 본래의 자리로 파고들었고, 빛은 급격히 퍼져나가 기도하는 땅 전체를 밝혔다. 레이아사의 날을 맞아 기도하는 땅을 둘러싸고 있던 자들은 그 강렬한 밝기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이내 빛이 가라앉아 본래대로 그곳을 바라봤을 때, 그들의 앞에는 꽁꽁 얼어붙은 얼음의 땅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기적의 날, 레이아사의 날이 시작됐다! “기적은 뭐가 기적이야. 결계가 주기적으로 영역을 굳히는 거에 불과하잖아.” 기적의 날이자 축제의 날인, 레이아사의 날을 두고 이토록 빈정대는 남자. 호수 가에 자리한 술집에서 독한 술을 벌써 몇 병이나 비우고 있는 그였지만 주정뱅이처럼 보이지 않는 기품과 냉기가 있었다. 게다가 유독 도드라지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온 몸에서 위험한 매력과 위엄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 술 떨어졌잖아!” 버럭 소리 지르는 모습은 어딜 보나 시정잡배였으나 천성이 그러한 듯 그와 잘 어울렸다. 그런 남자의 앞에서 이도저도 못하고 움찔움찔 떨어대는 또 다른 남자가 불쌍히 여겨질 뿐이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다른 테이블에 있던 여자가 용기를 내어 둘에게 다가왔다. “이제 그만해요! 왜 그를 괴롭히는 거죠?” “닥치고 꺼져.” 이빨을 드러낸 야수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겁이 안 질리래야 안 질릴 수 없었지만 여자는 애써 떨고 있는 남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여기 있을 필요 없어요.” 내심 누군가의 도움을 바랐던 터라 남자는 냉큼 일어났다. 그때 야수가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부서질 듯 거칠게 테이블에 박아 넣었다. “넌 앉아. 넌 꺼져.” 남자와 여자를 차례로 가리키는 야수의 눈빛은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여자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남자는 다시 주춤주춤 야수의 앞에 앉았다. 일단 남자가 앉자, 야수는 그에게 관심을 끊고 술에 몰두했다. 무의미한 순간이 이렇게 수차례 지나갔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죠?” 야수의 살기에 포박되어 있는 남자에게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던 여자가 다른 일행들에게 물었다. 눈앞에서 어떤 광경이 펼쳐지건 상관없이 언제나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 락샤사. 그에게서 대답 듣기를 포기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그 옆에 차분하고 부드러운 얼굴은 하고 있지만 의외로 냉정하고 말 수가 적은 남자, 이카미렌. 그에 대해서 포기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포기했다. 그나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남자, 민. 싸가지가 야수로 진화한 그 순간부터 묘하게 차갑게 되어 말 붙이기가 힘들었다. 주위가 이 모양이라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상황이 왜 이지경이 됐는지 여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도저히 못 버티겠다. “왜 저러는 거냐고요!” 용기를 내어, 그나마 만만한 민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앞의 야수나 남자, 무하와는 달리 여전히 반지로 모습을 변형시킨 민이 지극히 평범한 얼굴로 답했다.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네?” 알 수 없는 답에 반문했지만 민은 그것을 끝으로 차가운 눈동자를 무하에게 고정시킨 채 입을 다물었다. 꼭 집어 정확히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치껏 민과 무하가 구면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던 디이나는 그 시선자체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저 싸가지 야수와 마찬가지로 민도 지금의 무하가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솔직히 디이나도 지금의 무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본래의 잘생긴 모습으로 돌아간 그는……. 그래, 이질적이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차분함과 진중함 , 그리고 곁에 있으면 함께 젖어들고 마는 슬픈 느낌, 그리고 듣고 있노라면 잠들고 말 것 같은 따뜻하고 조용한 멜로디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느껴지는 것은 두려움, 그리고 혼란스러워 듣고 있노라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불안정한 멜로디뿐. 특히 그토록 사이가 좋았던 유시리안에게 대한 두려움은 그 강도가 더했다. 더 이상한 것은 무하의 앞에서는 역할 정도로 달콤했던 유시리안의 태도가 그 누구를 대할 때보다도 난폭하고 표독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디이나는 좀더 파고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기억을 되찾았다니요? 그럼 전에는 기억을 잃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네.” 역시나 짧은 답변. 그래도 해주는 게 어디냐, 디이나는 한숨을 삼키며 연달아 물었다. “그렇다면 다행 아닌가요? 어째서 유시리안 씨가 저렇게 대하는 거지요?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서 저렇게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요?” “철천지원수보다 더한 존재니까요…….” “네?” 민에 입에서 어떤 답이라도 좋으니 뭐든 나와 주길 간절히 바랐던 디이나는 결국 단념했다. 그는 더욱 냉기 도는 얼굴로 무하를 바라보는데, 아니 노려보는데 바빴다. 다시 야수가 술을 내놓으라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짜증 섞인 신음을 내는 디이나와 거의 동시에 이카미렌이 입을 열었다. 딱히 그녀에게 한다기보다는 들을 사람은 들으라는 듯한 어조였다. 다른 표현으로는, 조금 큰 혼잣말이라 할 수 있겠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저는 아직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디이나 때와는 달리 민의 답이 쉽게, 그리고 길게 이어졌다. 그 역시 이카미렌이 말을 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민은 냉기와 독기가 적절히 섞인 눈동자를 이카미렌에게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그 답에 따라 어찌 행동할지 결정하겠습니다.” 여차하면 이카미렌이라도 적으로 돌리겠다는 말로 들렸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카미렌은 옅은 미소가 배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할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했을 분이다. “나 역시 그 답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겠다.” “……그렇습니까.” 좌우사정은 하나도 모르지만, 이카미렌이 간접적으로 현 상황의 발생 원인을 마찬가지로 모른다고 답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디이나가 이들의 대화에 촉각을 바짝 곤두세울 때 락샤사가 한마디 했다. “왔다.” 이를 드러낸 한 마리의 야수 때문에, 말 그대로 개판 오 분 전이었던 술집의 문이 열렸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여행복 차림의 호리호리한 몸을 한 남자였다. 어찌 보면 소년이요, 어찌 보면 청년인 그는 갈색 빛이 도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변질되어 보이는 그 눈동자가 이쪽을 보며 웃음 지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밝다기보다는 철없이 명랑한 목소리로 남자가 인사했다. 그리고 이카미렌 쪽으로 걸어왔다. 걸음은 이쪽으로 뗐으되, 그 시선은 저편의 야수와 겁먹은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안경에 가려져 잘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들을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런. 전 할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만.” 놀랍게도 이카미렌의 입에서 정중한 존댓말이 나왔다. 고압적이지는 않았지만 늘 반말이었던 그에게서 나오는 존대는 예상외로 잘 어울렸다. 게다가 맞받아치는 상대의 그 철없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의외로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옆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천연덕스럽게 하나 끌고 와 앉은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디이나에게 생긋 웃어주었다. “일단 이 아가씨가 상황을 모르는 것 같으니, 예의상 소개하지요.” 정확히 자신을 지목하는 말에 당황한 디이나는 다른 일행, 그러니까 락샤사와 민을 둘러보았다. 락샤사야 뭐 아무 것도 읽을 수 없는 그 무표정 그대로라지만, 민은 확실히 그의 정체를 알아챈 듯한 얼굴로 날카롭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디이나가 주위 정탐을 마치고 다시 자신에게 시선을 돌릴 때까지 기다린 남자는 지나치게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훼오트라 아나입니다.” “……네?!” 너무 간단하고 천연덕스러워 한 박자 늦게 반응한 디이나를 보며 훼오트라 아나는 쿡쿡 웃었다. 디이나에 대한 관심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다시 이카미렌에게 집중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할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훼오트라 아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 제의를 했을 뿐입니다.” 이카미렌, 락샤사, 민, 그리고 사정은 모르지만 디이나.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넷 외에도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는 이가 있었다. 이성을 잃은 모양새로 술독에 빠져 있던 야수, 유시리안이었다. 그 외에도 눈에 팍팍 튀던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숱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훼오트라 아나의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단 네 명에 불과했다. 이카미렌, 락샤사, 민, 그리고 유시리안. 디이나는 훼오트라 아나가 자신을 소개한 말 이후로는 좀 전부터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훼오트라 아나는 태연히 덧붙였다. 그가 그로 인해 느꼈던 절망감과 고통을 눈치 챈 자는 그래서 없었다. “원한다면 그 몸을 주겠다고.” ============================================================================= 메일로 주소를 보내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한회 더 올립니다. 한가지 질문~! 이건 지금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인데요... 외전으로 훼오트라 아나의 이야기 or 유시리안의 이야기....로 어떤걸 보고 싶으십니까? 훼오트라 아나의 이야기는 (가제) 기도의 장, 유시리안의 이야기는 (가제) 맹약의 장에서 (통칭, '장' 시리즈...퍼퍼퍽) 다룰 내용이긴 하지만... 아해의 장의 내용을 위해서도 조금은 나와줘야 하는 이야기라서... 저는 훼오트라 아나의 이야기를 쓸까 했지만... 웬수탱이 소유씨가 유시리안을 부르짖고 있는 관계로... 번뇌에...ㅡ''ㅡ;; 여러분께서는 어떤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투표는 여러분의 자유♡ 선택은 나의 자유♡ (........탕!) [연재] 아해의 장-359 "그게 무슨!?" "리안." 유시리안이 버럭 소리 지르려는 찰나 이카미렌이 저지했다. 유시리안은 살기어린 눈으로 훼오트라 아나를 노려보다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럼에도 훼오트라 아나는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이카미렌이 한층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뜻이십니까?" "그 말 그대로." 그의 시선이 유시리안의 앞자리에서 주눅 들어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무하'라는 가명을 쓰는 '페르노크'라고 해야 할까? "저 자를 없애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훼오트라 아나의 말은 네 명밖에 듣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유시리안이 반색했다. "그게 가능해? 그럼 지금 당장 해줘." 살기도 전보다 누그러졌고 말투도 전보다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훼오트라 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에는 가능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이제는 '페르노크'의 영혼이 표면에 있기 때문이죠." "어차피 없애는 건데 그게 무슨 상관……!" 다시 목소리가 커지려 하자 이카미렌이 저지했다. 이번에는 유시리안이 불만어린 눈으로 이카미렌을 보았다. 이카미렌은 투정부리는 아들을 향해 옅게 웃어 보이고 훼오트라 아나에게 물었다. "그럼 '무하'가 다시 표면에 나오면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는 것은 본래의 육신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상관없다는 겁니까?" 차분한 음색으로 예리하게 물어오는 이카미렌을 보며 훼오트라 아나는 희미하게 스쳐 웃었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짓던 가식적인 미소도, 가끔 내보이는 공허한 미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움, 사무치게 그리운 미소였다. "난 당신에게는 도움을 받았었습니다." "그것은 때늦은 참견이었을 뿐. 도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눈을 감으며 그 날을 회상해 보았다. 조금만 그가 빨리 와주었어도, 라는 미련이 남지 않는 건 아니다. 아쉽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는 그때 훼오트라 아나를 위해 와준 유일한 존재였다. 상냥한 드래곤. 자신이 품었던 감정을 존중해준 드래곤. 영원한 축복을 부여받은 그를 동정해준 드래곤. 고마운 존재. "나는……." 뭔가 말을 하려던 훼오트라 아나는 입을 다물고 눈을 떴다. 축복의 상징, 주홍빛 눈동자. 그것은 유일한 존재의 상징. "누가 육신의 주인이건 상관없습니다." 물론 육신은 '페르노크'의 것이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육신에 대한 지배권이 미약하다. 이미 한번 육신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무하가 주도권을 빼앗긴 건 그가 '페르노크'에게 순응한 탓이다. 이기적인 사람이다. 무하는. 훼오트라 아나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왜냐면 '페르노크'도 죽은 자니까." 두루마기. 세로는 어림잡아 30㎝, 활짝 펼쳤을 때의 가로 길이는 대충 70㎝정도. 지금은 양쪽 끝에서 단정히 말려져, 세련된 은회색의 금속 띠로 고정되어 있다. 그 위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가문을 상징하는 건지 나라를 상징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심플하고 강인하다. 종이를 고정시킨 두 개의 막대는 고풍스러운 청록 빛이다. 금속인지 나무인지조차 알 수 없는데 촉감은 차고 약간 거칠다. 양쪽 끝은 조그만 둥근 축이 박혀있다. 똑같은 청록 빛이다. 그리고 한쪽에 흑색 장신구가 달려있다 . 종이의 재질 역시 뭔지 알 수 없다. 그냥 볼 때는 황토 빛 가죽 같고 만져보면 잘 다듬어진 나무 같으며 냄새는 과일의 것과 같이 달콤하다. 바로 이것이 몬스터 사태의 주범인 마족이 친히 신전에 보낸 서신이자 요구문인 것이다. 흔들리는 싸구려 램프 아래서 디이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훼오트라 아나라 밝힌 뒤 말없이 식사만 하던 그는 그녀 에게 두루마기를 넘기고 그녀가 잡아둔 방에 들어가 버렸다. 곧 이어 이카미렌이 그 방에 무하를 올려 보냈다. 한창 신경질을 부리는 중이던 유시리안은 뜻밖에도 말없이 그 모습을 보려보고만 있을 뿐 저지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카미렌과 별도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지도 모른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니 텔레파시 마법 이라도 쓴 게 아닐까?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답답한 마음에 입 밖으로 의문을 꺼내보지만, 답이 떨어질리 없었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내내 신경질적이던 유시리안도, 내내 차갑던 민도, 그리고 락샤사와 이 카미렌도 평소와 같이 말없이 있었지만 분명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가장 이상했던 바로 무하다. 디이나가 알고 있는 무하는 항상 침착하고, 경우 바르며, 당당하고 강한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의 무하는 항상 겁에 질려 있다. 그것도 가장 가까웠던 유시 리안의 앞에서 유독. 민은 무하가 기억을 되찾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것이 무하의 본래 모습이란 것일까? 사람의 본성이란 것이 기억 하나에 저리도 뒤바뀔 수 있단 말인가? 디이나는 현 상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그들의 일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란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정해져 있다. "이것을 시오니타님께 바친다." 손안에 넣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인 건 아니다. 이것이 시오니타의 손으로 넘어가야만 끝인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한숨을 쉬며 침대 위로 털썩 누웠다. 도와주고 싶다는 뒷말을 쓰게 삼키며. 어차피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어떻게 할건가?" 질문을 던진 것은,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녔지만 더욱 성숙한 느낌의 이카미렌이었다. 그 질문을 받은 것은 그의 앞에 있는 두 남자였고, 먼저 답한 것은 내 내 냉기를 뿜어내던 한 남자였다. "욤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가족의 품에 안겨주려고?" 그 옆에서 내내 신경질적이던 다른 남자가 물었다. 그보다는 비아냥거렸다고 보는 편이 옳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끌고 다니실 겁니까?" 민의 반문에 유시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펠을 뺏어간 저 녀석을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래서는 펠을 만날 방법이 영영 사라져 버리게 된다. 아무리 싫어도, 증오스러워도, 화가 나도 끌고 다녀야만 한다. 펠이 나타날 때까지는. 일단 나타나만 준다면……. "난 펠의 옆에 있을 거야. 욤으로 가든, 그 외 어디로 가든." 그렇게 말한 유시리안은 짜증이 잔뜩 배여 있는 몸짓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카는?" "당분간 함께 갈까 한다." "그래……." 말끝을 흐리던 유시리안이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며 이카미렌을 바라보았다. "전에 펠이 한 말 기억해?" "……?" "내가,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내 옆이라고 했을 때부터 깨어났다고 했어. 그게 무슨 뜻이지?" 그것은 이미 물었던 질문이었다. 유시리안은 이카미렌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여전히 이미 물었던 질문. 그것을 생소하게 되짚었다. "그게 펠에게 무슨 의미를 가진 거지?" "그 보다 당신이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압니까?" 멍하니, 자신의 생각에 잠기려는 유시리안을 민이 불러 세웠다. 슬쩍 올라간 눈꼬리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유시리안은 쿡 웃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민은 확신을 담아 물었다. "엿들었군요?" "엿본 거야."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잖아? 네 녀석이 지기니까." 그리고 난 지기가 아니니까, 덧붙인 유시리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말 나옴 김에 물어보지. 넌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하지?" 민은 딱딱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라고 고민을 안 해 봤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았다. 꺼내면, 그것이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을 읽지 못할 유시리안이 아니었다. "말해. 말해야해, 요크노민."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느긋한 척 침대에 누워있던 유시리안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네가 생각한 것이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해야 한다는 거다!" "……." 고뇌하던 민은 고개를 숙였다. 기계적으로 입술이 열렸다. "저는……." 어려서부터 전설처럼 들어왔던 이카미렌이라는 드래곤의 이끌음을 거부할 수 없었던 무하, 아니 페르노크는 메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혀로 축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문 너머에 그를 '살해'하려 한 존재가 있다. 여태껏 몇 번이고 자신을 죽이려 한 자들이 숱하게 있었다. 오르세만 가의 정적들, 자신을 질시한 마법사들, 그리고 로레라자……. 그들의 의뢰로 무수히 많은 자객들이 그를 찾아왔었다.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이므르만이 그나마 안전했다. 고위 귀족들의 자제가 득실거리는 이므르는 경비체계에 있어서만큼은 철통을 자랑했던 것이다. 비록 암살자의 시달림을 당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곳에서의 생활이 괴로웠다지만……. 그러나 그때처럼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존재가 지워진다는 뚜렷한, 그리고 현실적인 두려움. 그것은 무하의 미움이 두려워 안으로 무한히 파고들고 있었던 그가 뛰쳐나올 정도로 강대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와서 본 것은 공허와 살기가 뒤섞인 눈동자. 그것을 피해 도망 친 곳에서 본 것은 놀람의 빛을 띈 보라색 눈동자. 언제나 다정했던 그것은 금방 일그러지고 증오로 번뜩이며 흉폭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그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숨어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그 순간에 지었던 표정이 바로 저랬으니까. 두려웠다. 무하라는 여자도, 유시리안이라는 저 남자도. 그래서 이 몸을 무하가 대신 살아주고 있는 것도 썩 괜찮다고, 그렇게 억지로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그곳에는 관통한 상처의 흔적이 아직도 끔찍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무심코 입 밖으로 꺼내진 목소리에 움찔하다가 손을 꾹 쥐었다. "……아픈걸." 이대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페르노크는 그럴 용기조차 없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램프조차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저 편 창가에 멍하니 밖을 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박혀왔다. 기묘한 슬픔과 공허와 그리움에 묻혀있는 남자. 말로만 들었던 훼 오트라 아나. "들어와라." 고저 없는 목소리가 방안에서 흘러나왔다. 페르노크는 그 말에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보지 않아도 그것을 느낀 훼오트라 아나는 낮게 웃었다. "쿡쿡." 그 웃음에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의식하고 행한 것이 아니었다. 본능이었다. 뱀의 앞에 선 개구리, 혹은 쥐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움찔거리며 발버둥치는 게 고작이었다. "들어와라." 그래……. 발버둥치는 게 고작인 거다. 그런 생각을 목안으로 밀어 넣으며 무거운 한 발을 떼었다. 창문 밖으로 고정되어 있던 얼굴이 천천히 페르노크를 향했다. 어두운데다, 달빛을 등져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페르노크가 필사적으로 훼오트라 아나를 살필 때, 그 역시 페르노크를 살피고 있었던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같은 얼굴인데 느낌이 너무 다르구나."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에 오히려 흠칫했다. "너도 살고 싶었겠지." 여전히 부드럽고, 어찌 들으면 따뜻하기까지한 목소리지만 페르노크는 떨려오는 몸을 어찌 할 수 없었다. 훼오트라 아나가 서서히 다가옴에 따라 떨림은 강도를 더 해갔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난 내 바람을 위해, 너를 죽이려 했다." 그것을 부정하진 않아,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말했다. "난 널 살해하려 한 거다. 그리고 넌 그것에 저항 한 거고." 페르노크에게로 손을 뻗었다. 보드랍지만 차가운 손으로 식은땀에 젖어 있는 페르노크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것은 정당하다." 그 말에 페르노크는 고개를 저었다. 정당하지 않다. 그것은 비겁한 행동이었다. 한 번 버린 몸을 무하가 여태껏 살려왔다. 그것을 일순간에 뺏아간 것이다 . 이미 버렸던 목숨이 아까워서. 살해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고통이 싫어서. 지금껏 안으로 도망쳤듯이 이번에는 밖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그래서 눈물이 나려했다. 아슬아슬하게 넘치는 물기를 지켜보던 훼오트라 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의 손이 차츰 턱가로 흘러갔다. "숨어라. 도망쳐라. 저항해라." 덥석, 목줄기를 움켜쥐고 낮게 속삭였다. "난 끝까지 찾아가 널 살해할 거다."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훼오트라 아나의 얼굴이 너무나 차갑고 슬퍼 페르노크는 결국 눈물을 떨궜다. 그 눈물이 훼오트라 아나의 손으로 흘러내렸을 때, 탄 식하듯 희미한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오직 나만의 바람을 위해서." 그러니 너는 정당하게 도망쳐라. 손아귀를 풀고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그리 말했다. 기어이 쓰러지며 페르노크는 울었다. 상냥하다. 저 남자는 너무도 상냥하다.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존재가 이제는 슬픔에 울게 만들 었다. 처음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죄책감에 울었다. 타인을 위해 울었다. ====================================================================== 이거 정말....쿨럭; 어제 부로 겨우 외전이 끝났습니다. 아직 수정이 남았지만; 일단 끝낸 것입니다;ㅡ; 이번 외전은 정말 양이 많아요. 총 55장! 이야, 8권의 1/3이네요! 아하하하;;; 어쨌거나, 이번 회까지 해서 8권 분량이 완성됐습니다. 원래의 양보다 조금 많아져서 걱정입니다만... 어떻게든 되겠지요; 원래라면 이번 회와 저번 회 분량을 빼야 하는데...ㅡㅡ;; 그러면 또 끝이 안 맞지 않습니까; 뭐, 그런 겁니다^^ [연재] 아해의 장-360 황성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풍만한 음악소리가 멈춘 지 오래, 홀 가득 메우던 화려한 신사숙녀들의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가득했던 산해진미 의 맛깔스런 향내가 사라진지 오래. 남은 것은 약간의 어수선함뿐. 곳곳에서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 못 견디겠는지 작게 킥킥 웃는 소리. 그것을 타고 확연히 밝은 생기가 곳곳에 퍼져나가고 있다. 조용히 약동하는 그 활기참. 새로운 황제를 기다리는 궁인들의 마음은 욤의 백성들의 마음과 똑같다. 약속된 것은 없다. 약속해 준 것도 없다. 그럼에도 강한 믿음이 그 소리에 실려 있다. 기대가 있다. 이제 뭔가가 달라질 것이다, 살만해 질 것이다, 라는. 근거는 없지만 확신은 있는 믿음, 희망, 그리고 기대. 대관식 준비로 한창 분주한 황성 안은 그렇게, 때 아닌 봄바람에 쌓여있었다. 비단 황성뿐만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궁인들의 마음은 욤의 백성들의 마음. 온 나라가 들뜬 기대감에 소란스러웠다. 그것은 이 술집도 마찬가지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술집. 조악한 실내장식과 닦아내도 끈적끈적한 테이블, 상표도 제대로 붙어있지 않는 재탕, 삼탕한 술병과 재활용된 안주, 시끄럽게 울리는 품위 없는 음악소리. 그래도 흥겨움이 있고 웃음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그 분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지, 암암.” “대관식 날짜가 이제 잡힐 쯤 됐는데. 발표는 아직 인가?” “글쎄. 난 그쪽으로는 통 깜깜이라. 자네는 아나?” “나? 알 리 있나. 몰라도 상관없어. 대관식 볼 때까지는 수도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니까. 킬킬.” “얼씨구? 돈은 있고?” “마누라 몰래 꿍쳐든 비상금, 이때 안 쓰면 언제 쓰나!” “크크. 마을로 돌아가면, 다시 한번 명물을 볼 수 있겠구먼!” “명물?” “속옷 바람으로 쫓겨나 문잡고 애원하는 우리 의터씨! 푸하하하!” “이, 이 놈이!” 지금은 어느 서나 들을 수 있는 무의미한 수다, 영양가 없는 농담. 그러나 불과 몇 달 전 만해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불안감과 뒤틀린 기류 속에서 사방으로 눈을 굴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바로 몇 달 전 일상이 이제는 꿈만 같다. 아주 극소수, 이 들뜬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독설을 뿜는 자도 있었다. 머리만 바뀌면 뭐 하냐, 어차피 그 놈이 그놈이다. 지금은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광장의 저들은 훗날 안타까운 희생이라 칭송 받을 것이다. 그에 비해 금안의 ‘지배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줬는가! 애써 없앤 황제를 받아먹는데 급급하지 않는가! 결국 그도 귀족일 뿐이다. ……내버려두면 꼬박 한나절은 웅변해댈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물론 싸늘한 반박뿐이었다. 네 놈이 살아 있는 것, 우리가 살아있는 것, 그것이 금안의 ‘지배자’가 우리에게 베푼 것이다, 라고. 실제로도 그랬다. 몬스터 사태 때 유일하게 나섰던 귀족 기사단이 바로 테밀시아 경의 휴첼 기사단인 것이다. 본래라면 삼대 기사단이기 이전에, 오르세만 가 휘하의 기사단인 휴첼은 자신의 영지만 지켜도 무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청해서 몬스터 사태 진압에 앞장섰다. 그 과정에서 천하기 그지없는 하츠민까지 보호했다. 뿐만 이던가? 얼마 전 일어났던 전쟁 때에는 전쟁을 반대하여, 카르민이자 휴첼 기사단의 마스터이면서도 변방으로 밀려났었다. 그 변방에서는 또 어떠하랴. 이루 셀 수 없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결국에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그였다.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활약상에도, 배은망덕하게 그를 ‘결국 귀족’이라 칭한다면 최근의 일을 꺼낼 수밖에 없다. 바로 얼마 전, 반역도들의 시체가 불살라졌을 때의 일이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들고 일어나 반역에 동조한 자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됐다. 불탄 시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는 이유만으로 반역자로 끌려갈 뻔한 자을 정도였다. 그 자를 구한 것이 바로 테밀시아 경이다. 또 다른 황위 계승자 사뮤에르의 포기 선언으로 확실하게 다음 황제로 자리매김한 그가, 직접 나서서 반역도의 뒤처리를 시작한 것이다. 무모한 자들을 잡아가둔 자는,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저의로 보겠다는 단 한마디! 그 한마디가 언급조차 무의미한 많은 백성들을 살렸다. 제피모뿐만 아니라 제법 많은 수의 귀족들 역시, 그 한마디에 살아남았다. 정적 제거에 딱 좋은 미끼인지라 많은 귀족들이 수작을 부리려던 직전에 떨어진 그 한마디. 실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이 일까지 꺼냈는데도 ‘결국 귀족’이라 매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이야 말로 반역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관대하면서도 위협적으로 주위를 장악해 나가고 있던 테밀시아가 귀족들의 고집을 받아준 것이 단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반역도의 시체 처리였다. 광장 속에 쌓아두었던 시체는 불타, 이제는 손바닥만한 뼛조각이 자잘하게 깔려 있었다. 그나마도 건드리면 부서져 내렸다. 이제는 본보기는커녕 길가의 먼지보다 조금 나은 취급을 받는 잿빛 가루를 귀족들은 놓아주려하지 않았다. 꿋꿋하게 본보기라 우기며 광장을 차지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귀족들뿐이리라. 저 덩어리들을 보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대관식의 날짜가 잡히면, 외국의 인사들의 방문이 시작된다. 그들에게 이런 수치를 보여줄 수는 없는 일. 당연히 대거 청소에 들어갈 것이다. 길어봐야 한달? 그 때문에 생각 싶은 금안의 ‘지배자’가 귀족들의 고집을 받아준 것이리라. “평화롭군.” “나쁘지는 않습니다.” 느긋한 어조에 답하는 경어는 딱딱하고 어딘가 삐딱한 느낌이 들었다. 중년의 남자는 자신이 신뢰하는 부하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투정부리는 손주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미소라, 자기도 모르게 삐딱하게 답했던 청년은 약하게 낯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요즘 계속 저기압이더군, 로딘?” “별로…….” “흐음?” 다 안다는 뜻을 강하게 내포한 의문성에 로딘은 부담스러운 듯 계속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사갈은 한층 더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요크노민 경의 모습이 통 보이질 않더군? 수도 경비를 하다보면 종종 마주쳤었는데. 워낙 트러블에 잘 휘말리는 남자라.” “그건…….” 답이 궁색한 로딘이 난처해하자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사갈은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뭐든 적당히가 좋다고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 “오르세만 가의 다음 가주는 누가 되는 거지?” 이 사람밖에 없다, 라고 칭송받고 확신 받아왔던 테밀시아가 황제가 된다. 오르세만 가의 가주 계승권자는 테밀시아까지 해서 둘밖에 없으니 누가 어쩌고 할 것도 없이 또 다른 계승권자가 잇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당연히, 라고 치부하기에는 미묘한 거리낌이 남는다. 테밀시아라는 남자의 명성과 능력이 워낙에 두드러졌기에, 그 누구도 또 다른 계승권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 만큼 가문을 휘어잡기 힘들 테고, 테밀시아를 상대로 하던 타 대립 가문들과의 세력싸움에서도 상당수 불리해질 것이다. 게다가 그 다음 가주 계승권자는 다름 아닌, ‘희대의 천재’, 페르노크. 마법사가 가주가 되는 것은 둘째 치고 그의 성품에 부족한 감이 많다고 들었다. “나랑은 상관없는 문제긴 하지만.” 말 돌리는데 써먹을 뿐인지라 사갈은 금세 시들해진 얼굴로 술을 마셨다. 반면에 로딘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주군도 그 점을 상당히 우려했었다. 페르노크를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말했었는데……. “지금의 페르노크라면 가주가 되도 문제없을 겁니다.” 2년 전의 페르노크라면 그도, 오르세만 가의 최후가 멀지 않았다며 비웃거나 한숨을 쉬거나 했겠지만 지금의 그 페르노크라면 얼마든지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확신조의 말에 사갈이 의아해했다. “지금의 페르노크? 자네, 페르노크와 안면이 있는 건가?” “조금 알던 사이였습니다.” “조금이라…….” 사갈을 말끝을 흐리며 로딘을 보았다. 조금 아는 것으로 저 정도의 확신이 설 수 있을까? 물론 테밀시아나 뮤비라,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자하라 가의 선대 가주 정도라면 한눈에도 걸물이라는 걸 알 수 있겠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고, 항간에는 자살까지 시도했다는 말도 있는 자인데. 게다가 현재는 다니던 이므르도 자퇴하고 은거하지 않았나. 가주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성품이다. “아! 페르노크 하니까 생각나는데!” “네?” “요즘 묘한 소문이 떠돌더군.” “소문? 아아. 그거 말입니까?” 사갈은 내심 고개를 끄떡였다. 여태껏 로딘이 자신보다 소식에 느린 적은 없었다. 어디서 알아 오는 건지 놀랍도록 빠르고, 정확하고, 세밀하다. 확실히 요즘 젊은 녀석들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눈빛이 살아있다. 사갈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대마법사라는 호칭은 제 2기 마도 이후로는 없었지?” “대마법사는 8써클 마스터에게 부여되는 호칭이니까요. 옛날에 만들어진 호칭이라 좀 유치한 감이 있지만.” 그렇게 답한 로딘에게 사갈은 별거 아닌 냥 넌지시 물었다. “욤에 사는 나조차 그가 만들었다는 반지 따위 본 적 없는데. 어떻게 알고, 락아타의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들이 몰려드는 거지? 뻔히 은거중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며 막무가내라던데.” “그야, 락아타는 마법사 길드의 본점이 있는 만큼 마법 관련 정보에 빠를 테지요. 실제로 페르노크가 제작하여 팔았다는 반지를 수개 가지고 있는 자도 있고, 길드에서 직접 그 반지를 사들여 연구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호오. 그런가.” 의미심장한 어조에 움찔한 로딘은 자신이 너무 떠들었다는 걸 알고 반성했다. 그걸 뻔히 눈치 챘으면서 사갈은 능청스럽게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러 술을 추가주문 했다. 확실히 늙은 생강이 매운 법이다. 오르세만 테밀시아 라 카르민. 이제 곧 욤 제국의 황제가 될 그가 계승식 전에 잠시 고향을 찾은 것은 가문 내에서의 일의 정리 때문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활기차게 진행되던 가문의 일거리들에 급정지가 걸려버려, 여러모로 차질을 겪고 있는 터라 확실하게 다잡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흐른 삼일이란 시간. 고작 그 시간동안 테밀시아는 가문 내의 일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었다. 유능한 부관, 루카다의 덕이 컸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바로 후계자의 문제였다. “난 너로 생각해왔었다.”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테밀시아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자신의 탓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동생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제대로 말 한번 해준 적 없었다. 고통에 겨워 술에 잠겨도 보고, 횡포를 부리고 욕하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면서 그에게 책임과 의무만을 지우려 했다. 납득할 수 없었겠지. 첩의, 아니 첩조차 아닌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났다는 열등감과 싸늘한 현실감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겠지. 이제 와서 그것을 알면 무엇 하리. 정작 동생이 괴로울 때는 아무것도 못해주었는데. 아니, 안 해주었는데. “나는 진심으로 나의 가족을 사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것만은 알아다오, 가슴 깊이 삼키며 자신의 얕은 투정을 비탄했다. 새하얀 비석을 어루만지다 이마를 대었다. 아무리 다듬었어도 돌은 돌. 매끄러운 듯 하지만 특유의 오돌함이 느껴지는 돌의 감촉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또 손바닥 밑으로 느껴지는 돌의 표면에 새겨진 비문의 존재. 그 문자들은 테밀시아가 직접 새겨 넣은 것들이다. 직접 만든 문장을 스스로 검을 들어, 검기로써 새겨 넣었다. 그 검은, 무덤의 주인이 그토록 사랑했고, 사랑하길 바랐던 그의 어머니의 목을 벤 검이었다. 또한 가주의 증표였다. 문득 비석에서 이마를 뗀 테밀시아는 허리에 얌전히 매여 있는 금빛 검을 집 채 뽑아, 두 손에 들었다. “이 검으로 네 어미를 벴다. 너를 사랑했기에, 그 여자를 죽였다.” 말끝을 흐린 테밀시아는 탄식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그런 나를 원망할 테지? 나에게 검을 들 정도로, 페르노크에게 검을 꽂을 정도로 사랑한 어머니였으니.” 검을 뽑은 테밀시아는 그 날을 잡고, 손잡이를 비석 쪽으로 내밀어 보였다. “이렇게, 너에게 주고 싶었다.” 가주 자리와 함께. “네가 그렇게 괴로워할 줄 알았다면, 아니 로레라자가 너의 어머니였다는 걸 알았다면 미리 말했을 텐데.” 훗날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에 동생을 잃었다. “동생분과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테밀시아님.” “루카인가.” 매끄럽게 손을 놀려, 손잡이를 잡은 뒤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믿음직한 루카다가 특유의 웃음을 한가득 짓고 있었다. 꿍꿍이가 넘실거리는 웃음이었다. 테밀시아는 의아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검 집에 천천히 검을 밀어 넣으며 물었다. “뭐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여기까지?” 수도에서는 귀족간의 만남이 상당히 개방된 편이다. 본가가 아니기 때문에 손님을 받는 것이 비교적 완화되어 있었다. 본가는 가문의 자존심이자 뿌리이기에 그만큼 방문이 경직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여기까지입니다.” 루카다는 못 견디겠다는 듯 그 눈동자에 웃음을 가득 담았다. 궁금하죠? 궁금할걸? 궁금 할거야. ……라고 강렬하게 말하는 눈동자라 테밀시아는 못 견디고 먼저 물었다. “누구인가?” 순간 루카다의 눈에서 검기라도 뿜어지는 줄 알았다. 그만큼 안광(眼光)이 강렬했다. “자신을 ‘얀'이라 칭한, 남루한 차림의 남자분이셨습니다.” “야, 얀!?" “역시 자신의 등장 시기를 잘 아시는 분이시로군요.” 그렇게 말한 루카다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테밀시아의 아버님은.” ========================================================================== 에고고. 평소보다 양은 적습니다만, 이제 22일은 23분밖에 안 남았습니다만, 어쨌거나 22일에 컴백~! 했습니다. 하하하! 9권의 시작부분이니만큼, 약간 시간의 공백을 주었습니다. 어쨌거나 아주 조금 미쳐서 돌아온 벗은 이제 방 청소 좀 해야 겠어요. 그간 공부한답시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방 꼴이.... 딱 누울 자리만 남아 있는......... 흠흠. 그럼^^ [연재] 아해의 장-361 동생에게 인사를 고하고, 잔디밭 건너 건너에 놓인 넓적한 돌덩이를 밟아 일족의 묘지를 나온 테밀시아는 계속해서 걸었다. 비켜서며 고개 숙이는 하인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뒤에서 쫓아오는 루카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났던 것은 결혼식 때가 마지막이다. 그 때도 몇 년 만이었던가. 그러나 그때는 지금처럼 초조하고 급하지 않았다. 올 때가 됐으니 올 거라 생각했고,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역시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전에 결혼식이 끝나고 떠나면서 아버지가 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부산하게 내려앉은 앞머리가 눈가를 간질였다. 들뜬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가슴을 간질이듯이. 언젠가 뮤비라가 물은 적이 있다. 어째서 가주를 잇지 않느냐고. 그때 테밀시아는 적어도 계승식은 부모님이 계시는 자리에서 치르고 싶다, 라고 답했다. 훗날 황위를 찬탈하여 가주자리는 카한세올에게 넘겨주게 될 테지만, 그래도 계승식만큼은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치르고 싶다고. 뮤비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표면상의 어머니는 지방의 별채에서 자신의 정부와 함께 안락한 여생을 보내고 계시니까. 부르는데 굳이 안 올 정도로 나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똑똑. 손을 뻗어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이 곳은 가주의 서재. 실질적인 가주라고는 하나, 진짜 가주가 이 안에 있다. 가주이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와……. “네 서재가 아니냐. 문은 왜 두들기느냐?” 장난기 섞인 인자한 목소리. 아버지의 것이다. 이어서 들리는 약한 웃음소리. ……어머니. 뒤따라 온 루카다는 문 앞에 서 있는 테밀시아의 모습에 빙긋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가족끼리의 만남에 끼어들 자격은 없지만, 흥분한 테밀시아가의 주위가 염려되어 여기까지 따라온 참이었다. ‘이제 페르노크님만 오시면 되는데.’ 뒤쪽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돌아 본 루카다는 내심 한탄하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부디 테밀시아님께서 쌓인 일거리를 잊지 않기를.” 계승식을 맞아 바쁜 것은 오르세만 가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귀족가문이 다 그러하겠지만, 카르민들은 유독 바빴다. 특히 이제 막 가주가 된 뮤비라 경우에는 그 정도가 한층 더 심했다. 가문 내의 세력을 가다듬는 일도 그렇고, 영지의 정리, 대외 세력의 통솔들도 있는데다 황위계승식 때의 선물 선정과, 카르민이 맡는 외국 공신들의 접대 준비도 있었다. 다행히 전 가주 계승권자였던 비레오가가 흔쾌히 가문 내의 일을 도왔기 때문에 가문 내의 일에서는 그럭저럭 수월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한가하게 쉴 틈이 있는 건 아니었다. 비레오가는 선대 가주이자, 아버지 수가 사라진 뒤로는 기세가 꺾였다. 이제 곧 결혼할 예정인 그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 절대 아버지나 뮤비라처럼은 안 살겠다고. 그 말을 들은 뮤비라는 웃으며 그러라고 답했다. 그 뒤로 비레오가는 전처럼 자하라 가내의 무부분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뮤비라의 유능한 보좌 역할을 했다. 뮤비라의 아내이자, 자하라 가의 안주인임에도 석녀인 카시안은 재차 첩을 들이기를 권했지만 뮤비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후계자를 남겨야 할 정도의 혈통도 못 되는데다가, 가주 계승권자가 꼭 가주의 자식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마음에 없는 후처 따위는 들이고 싶지 않는 게 이유였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실제로는 그 아름다운 남자는 자신의 아내인 카시안에게 상당히 잔인한 말을 남겼다. “처음부터 말했지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당신과 결혼한 것은 당신의 애원이나 당신에 대한 동정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러기 위해, 자하라 가를 가지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겁니다. 그런 만큼 당신께는 충직한 남편이 되지요. 다른 여인에게 눈을 팔지도 않을 것이며, 당신의 명예를 훼손시키지도 않을 것이며 당신에게 무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항상 당신을 존중하는 상냥한 남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 그 이상을 바라지도 강요하지도 말아주십시오.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저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카시안, 당신입니다.” 눈물을 참는 모습이 더욱 가련하고 아파보이는 부인에게 그렇게 말하고 매정하게 돌아서 나갔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결코 전해지지 않을 둘만의 이야기다. 그렇게 상처를 받아가면서도 카시안은 뮤비라를 사랑했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를 붙잡은 것은 자신이다.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투정부릴 수는 없었다. 잔인하도록 냉정한 남편은 거리낌 없이 그것을 선택한 것은 당신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것은 카시안과 뮤비라 사이의 무언의 약속. 투정도 소용없다. 울어도 소용없다. 남은 것은 갈기갈기 찢겨나간 자존심과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뿐. 괴로워하는 것이 뻔히 보임에도 뮤비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토록 냉정했다. 그런 그가 드물게 감성적이 되는 자신의 소중하디 소중한 두 사람과 관련됐을 때 만이다. 그의 주인 테밀시아와 그의 동생이자 아들인 요크노민. 넘쳐나는 사무 속에서는 한 치의 어긋남 없던 뮤비라가 지금 초조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요크노민의 일 때문이었다. “쉬운 일이라 장담하고 나갔던 아이가…….” 시작부터 엘프의 습격을 받더니, 이어서는 타고 있던 배가 폭파되고, 결국에는 뮤비라에게조차 연락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행적을 숨겨야만 하는 처지. 그런 동생이 락아타까지 동행하였다 떼어놓고 간 일행은 얼마 전에 욤으로 돌아왔다. 그 소식을 전해온 카산은 지금 그의 앞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매형의 초조한 얼굴을 마음껏 감상하며 그의 하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노민의 행방은 그 쪽에서도 알 수 없는 건가요?” “알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일부러 행방을 감춘 마스터를 추적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문란하지 않아서요.” “제그는 어째서 먼저 돌아 왔다고 했습니까?” “노민이, 아니 마스터가 제그에게 분부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저와 함께 알아보던 중에 락아타 내에서의 일이 묘하게 돌아가 먼저 돌아왔다고 합니다.” 뮤비라는 쉽게 납득했다. “요즘 락아타는 세력이 완전 양분 되서 살벌한 상태니, 외부인인 제그가 계속 머물고 있는 것은 경계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겠지요. 특히 페이야 가와 타안 가를 번갈아 출입한 뒤라 행동의 제약도 클 테고.” 카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정확한 답이었다. “알아볼 것도 다 알아봤으니 돌아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뮤비라는 평이한 어조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노민과 함께 움직이게 됐다던 용병들에 대해서는 알아보셨습니까?” 이미 대략 조사한 것을 올렸는데도 카산의 입으로 다시 듣고 싶은 모양이다. 팔불출 형이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카산은 피식 웃었다. 그는 한층 조심스러워진 뮤비라의 눈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유시리안. 프리급 용병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활동 영역이 꽤 넓은데, 근래에는 락아타에서 황태자 쪽의 의뢰로 움직였다고 합니다. 락아타에서는 괴물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입니다. 또 한 명은 보여주는 실력과는 달리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아 애먹었습니다. 이름은 락샤사. 수계 마법을 쓰는데, 다른 마법을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술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무하 카 곤크. 유일하게 단에 소속된 용병입니다. 곤크 내에서는 현재 휴가 중이라고 하니, 곤크가 락아타의 의뢰를 받아 움직인 건 아닐 겁니다.” 카산은 잠시 망설였다가 덧붙였다. “마스터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지요? 무하라는 남자는.” “무슨 뜻이지요?” 뮤비라의 얼굴은 여전히 평상시와 같았지만, 카산은 본능적으로 매형의 기색이 날카로워졌음을 알아차렸다. “일전에 이곳에 찾아왔었습니다. 로딘이 그러더군요. 주군의 지기라고.” “흐음.” 생각에 잠기는 매형에게 농조로 말했다. “저도 슈에게 많이 들어서 낯설지만은 않았습니다만.” “네?” “무하라는 남자는 슈의 영웅이거든요. 일전에 저에게서 도망쳐버렸을 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도망치는 걸 도와줬다는 뜻입니까?” 뮤비라가 작게 웃자, 카산은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그녀를 찾기 위해 수배해버렸거든요. 대부분 범죄자라 알겠지만 그렇게라도 붙잡고 싶어서……. 그때 귀족을 호위하던 용병들에게 붙잡혔는데 범해질 뻔한 것을 도와줬다고.” “그런가요.” 말끝을 흐리며 뮤비라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페르노크님이 현재 노민과 있다……라.’ 요크노민이라면 분명 그를 데리고 돌아올 테지.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약간 억지를 써서라도. 아니, 그 전에 페르노크가 책임감을 느끼고 돌아올지도. 전의 페르노크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그라면 분명……. ‘테밀시아님은 전부터 자신의 다음 후계자로 카한세올님을 염두에 두고 계셨는데.’ 얼마나 후회스러우실까.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해준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고 계실 테지. 그분이라면 그러고 계실 테지. 뮤비라는 한숨을 쉬었다가 카산을 똑바로 보았다. “카산님은 완전히 마음을 굳힌 겁니까?” “비레오가 형님으로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습니다.” 가주 계승으로는 자신을 들뜨게 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보다 더욱 크고 더욱 힘든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카산은 줄곧 자신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헤맸었다. 그리고 이제야 찾았다. 왜소하기만 했던 그 소년이 당당하게 자신을 이끌어주었다. 이거다! 그때 카산은 그렇게 느꼈다. 이 십 여년을 헤매 겨우 찾아내, 여기까지 일궈냈다. 이제와 가문 내로 돌아오는 건 손해다. 손해도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다. 그리 생각하며 카산은 웃었다. 오만한 듯 즐거운 듯. 그것보다 확실한 거절은 없었다. 뮤비라는 입가에 미소를 띠다가, 문득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동생을 잘 부탁합니다.” “물론입니다.” 진지한 얼굴, 정중한 어조로 카산은 답했다. ======================================================================== 무하가 나와야 쓰는 맛이 나는데...웅얼웅얼 이런 정리 분위기는 나랑 안 맞는다고...웅얼웅얼 아주 조금 미치긴 했는데, 하하하^^ 하필이면 딱 쓰기 시작한 날 (그러니까 23일) 출판사에서 교정본이 도착했지 뭡니까^^; 덕분에 지금 교정본에 매달리고 있는 중; 다음주 월요일쯤에 보낼 거니까, 그 뒤에나 글에 본격적으로 매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__) [연재] 아해의 장-362 수도의 뒷골목이자 밑바닥 인생들의 모임터. 그 곳에 극히 드물게 존재하는 평화지역 중 하나인 갈망하는 안식처는 훌륭한 요리 솜씨로 유명하다. 그 요리에 반한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소동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레타 마스터가 이곳, 갈망하는 안식처의 주인과 절친한 사이라 드물게 일어났던 소동조차 찾기 힘들게 됐다. 언제나 활기차고 북적대는 이곳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한창 손님이 붐빌 저녁 무렵이라 문이 여닫히는 소리 따위는 그대로 묻혀 들리지 않았다. 이 무렵이면 문 위에 달린 방울도 소용없었다. 아쉬운 사람이 알아서 주인장을 불러야 했다. 헌데 이 손님은 조금 달랐다. 붐비는 가게 안을 한번 둘러보고 쿡 웃다가 저편에 있는 주방 쪽으로 걸었다. 출입금지라고 떡 붙어있는 표지를 무시하고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손님은 저편에서 한창 요리중인 주인장을 불렀다. “키안.” “장님이냐! 앞에 글 못…….” 반사적으로 소리를 버럭 지르며 돌아서던 주인장, 키안은 손님이 누군지 알아보고 반갑게 웃었다. “사위 왔나?” “하하. 키르는 위에 있습니까?” 제그가 존댓말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도 귀족의 앞에서 형식적인 존댓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키안 경우는 달랐다. 그는 말 그대로 장인어른인 것이다. “카나와 있어.” “그동안 폐 끼쳤습니다.” 락아타에 가있는 동안 동생을 이공간에 혼자 둘 수는 없었다. 그동안 멀리 나가는 일을 피했었지만 이번일은 사안이 사인인 만큼 피할 수가 없었기에 이제 가족이라면 가족일 수 있는 카나와 키안이 있는 이곳에 맡겼다. 하물며 갈망하는 안식처는 평화지역인데다 레타 마스터의 비호아래에 있는 곳. 이곳만큼 안심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키안은 아쉽다는 얼굴로 물었다. “데리고 가려고?” “예. 이미 신세를 많이 졌는걸요. 키르에게도 원래 있던 곳이 움직이기 편할 테고.” 키안은 요리를 세 개의 접시 위에 같은 양으로, 맛깔스럽게 담으면서 말했다. “이제 가족인데 신세라니. 그럼 섭섭하지.” 목소리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섭섭하다는 빛이 역력했다. 제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게다가 난 키르가 장님이라는 걸 자꾸 잊게 되어 버리던걸.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어.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 잘 보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야.” 키안의 손은 여전히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요리 위에 장식을 겸용한 과일을 얹었다. “어차피 같이 살게 될 텐데, 그냥 이참에 자네도 이집으로 오지 그래?” “데릴사위입니까?” “설마 늙은이 혼자 쓸쓸하게 내버려 두고 자기들끼리 깨 쏟아지게 살 생각은 아니겠지?” 키안의 능청에 웃음을 터뜨린 제그는 위로 올라가 보겠다고 말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주방을 지나서 있었다. 접시를 들고 나가다가 키안이 잠시 돌아보며 말했다. “아! 산이 와 있어. 자네를 기다리던걸.”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의 문을 열자 카나와 키르바나, 그리고 산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은 키르바나의 거처이기도 한 이 방은 하나밖에 없는 손님방이었다. 반색하며 달려든 카나를 한번 안아주고, 저편에 환하게 웃는 키르바나의 머리를 헝클어준 다음에 산을 보았다. “본가에 갔다더니.” “지금 막 돌아왔지.” “보고 하고 온 건가?” “형이잖아.” 이견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제그는 키르바나의 옆에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 돌아가려고 하는데, 따로 챙길 건 있니?” “없어요.” 돌아간다는 말에 반기듯 웃는 키르바나의 모습에 카나가 서운한 어조로 물었다. “역시 집이 좋은 모양이네?” “죄송해요. 그동안 신경 써주신 거 알고 있지만 역시 부담스러워서…….” 약간 고개를 숙인 키르바나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빨개져 있었다. 저 어린 아이는 타인의 관심과 배려가 영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자라온 환경이 워낙 엉망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의지하듯 형의 손을 꾹 잡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보기 좋다. 제그는 다른 손으로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준 뒤, 산을 돌아봤다. “반응은?” “걱정은 되지만 믿는다, 랄까?” “그 이야기도 했어?”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했지만……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만만치 않은 남자니까, 매형은.” 카나가 끼어들었다. “그 이야기라니?” “그러고 보니 전에 제그가 왔을 때 카나는 의뢰 때문에 없었으니 못 들었겠군.” 고개를 한번 끄떡이며 납득한 산이 입을 열었다. “제그가 민과 헤어져 락아타에 남은 이유는 엘프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지. 특히 초목의 엘프. 조사해보니, 그들의 동태는 확실히 수상했다고 해.” 제그가 말을 이었다. “초목의 엘프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수가 초록 고향에서 나왔어. 그리고 모두 이곳, 욤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욤의 수도를.” 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의 대규모 이동이라면 당연히 국경에서부터 소란이 일어났을 텐데? 이번 의뢰 때문에 국경 근처로 갔었는데 별다른 소리는 못 들었어.” “황위 계승식에 각 국에서 사신들이 온다는 건 알고 있지? 초대장을 받지 못한 거상들이나 귀족들도 대규모로 와. 하지만 몬스터 사태 때문에 호위가 문제가 되잖아? 그래서 용병들을 고용하는데, 그 용병에 지원한거야. 엘프들은 몸이 날렵하고 정령마법을 쓰지. 아는 것도 많아. 한사람 호위쯤은 쉽게 할 수 있어. 게다가 두건이라도 쓰면 인간인지 엘프인지 분간하기 힘들고.” “헤에. 그래서 제그가 급히 귀국한거구나?” “일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민 녀석이 언제 올지 알 수 없고, 욤에서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이면 늦잖아.” 그리 말하며 무의식중에 키르바나를 돌아보는 제그였다. 동생이 걱정됐던 거겠지, 카나는 웃었다. 그때 산이 자신이 조사했던 것을 짧게 덧붙였다. “곤크도 심상치 않아. 웬일로 록이 우는 소리를 하던데. 외부로 나갔던 용병들까지 죄다 불러들이고 성벽 방어에 무기 정비에, 이것저것을 준비 중이라는데.” “엘프와 곤크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둘만 놓고 봤을 때는 확실히 뭔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군요.” 카나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맴돌았다. 저편에 열어놓은 창문에서 쌀쌀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몸이 약한 동생을 위해 제그가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키르바나는 그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는 양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어서오세요, 청염의 길을 걷는 자. 어서 오셔야 해요.’ 약간의 마찰음이 나며 창문이 닫혔다. 차가운 바람도 멈췄다. 키르바나는 손을 들어 얼굴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겼다.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 * *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저 멀리 락아타에서부터 온 마법사들로, 오르세만 가의 저택 주위의 숙박업소들은 완전 만원이었다 . 몰려든 마법사들의 하루 일과는 오르세만 가를 쳐들어가 처절하게 매달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숙소로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 끝났다. 은신중이라는 마법사를 찾는 것만도 무례 중에 무례인데, 하물며 그 마법사가 카르민의 가주 계승권자 중 한 사람이다. 본래라면 무력으로 내쳐진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그들에게 오르세만 가는 침묵으로 응했다. 그 때문에 무례한 마법사들의 수가 더 불어난 건지도 모르지만, 일단 오르세만 가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뭐, 오르세만 가가 무력으로 나온다고 해서 순순히 당할 마법사들도 아니고, 무엇보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그들의 눈에 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으니 차라리 저 미지근한 반응이 현명하다 봐야 할지도. 오로지 오르세만 가의 저택에만 매달리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반반한 낯짝에 독특한 차림, 강자의 느낌이 물씬 나는 남자들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 강인한 몸에도 불구하고 왜소하게 느껴지는, 소심한 눈동자를 한 남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저택의 뒷문으로 슬쩍 들어서고 있었음에도 마법사들 중 누구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봤다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라면 한번쯤 돌아봤을 미남들이었지만, 눈앞에 놓인 먹잇감에 비하면 하찮았다. “득실대는군요.” 짐짓 즐겁다는 듯 뒤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하는 남자는, 동그란 갈색 안경을 쓰고 있는 훼오트라 아나였다. 청년으로도 보이고 소년으로도 보이는 그에게 앞서 걷던 한 남자가 짧고 비호의적인 음성을 냈다. 잔뜩 찌푸려져 있는 얼굴조차 아름다운 남자, 유시리안이었다. “시끄러. 닥치고 있어.” “계속 그렇게 찡그리고 계시면 예쁜 얼굴 망가져요. 유시리안씨.” 버릇없는 말투와 뚝뚝 흘러넘치는 살기에도 훼오트라 아나는 느긋하게 웃었다. 이 정도에 나가떨어질 정도였으면 기도하는 땅에서 여기까지 동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시리안은 멋대로 동행을 자처한 그가 마음에 안 들지만, 훗날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기에 묵인해 주었다. 때문에 심각한 대립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둘의 사이는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애당초 유시리안에게서 무하를 빼앗아간 장본인은 훼오트라 아나이지 않는가. 이러한 둘의 사소한 대립이야 늘 있었던 일이기에 민, 아니 요크노민은 복잡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여기를 또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구에게랄 것 없는 혼잣말이었지만 유시리안이 반응을 보였다. “이곳을 싫어했나?” “좋은 추억은 별로 없습니다." 하인들의 노예였던 멍청이. 열등감에 휩싸여 눈앞의 애정도 못 알아보던 바보. 냉엄하고 무정한 아버지에게 복종하던 얼간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자신의 과거 모습이 이곳에 오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고작 2년 전일인 것을.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다고 형과 함께 떠나면서 그리 생각했었다. 레타에서의 일로 생각보다 빨리 되돌아왔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녀석을 만났다는 것, 그리고 불칸과 만났다는 것만은 이곳에 감사한다. ‘그것만은 말이지.’ 저편에서 주춤주춤 따라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려 본다. 저런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이계에서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불안했다. 언제고 떠나버릴 것 같아서. 그런 확실한 예감이 들어서. 쓰게 한숨짓는 요크노민에게 유시리안은 뒤쪽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저 녀석도 이곳을 싫어했나?” 뒤쪽에 있는 그에게 묻지 않고 굳이 자신에게 묻는 심보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요크노민은 차분히 답을 골랐다. “이므르에 가기 전까지는 별다른 점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여전히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지만. 아. 하지만 모친과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 같군요. 로레라자가 그렇게 한탄하던 걸 들은 적이 있어요.” “모친?” “예. 이오리린님이시죠. 편애가 심하신 분이었다고 하더군요.” 유시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기는 모양을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이므르에 가고 몇 년 만에 집에 왔을 때부터 상황이 안 좋아졌죠. 이오리린님은 가주 계승권자인 테밀시아님과 카한세올님을 제외한 자식들과 함께 지방의 별장으로 떠나 없었고, 테밀시아님은 실질적인 가주로서 가문을 이끄느라 바빴고, 무엇보다 자신을 귀여워하던 카한세올님이 변했으니까. 그리고 본인의 성격 역시 많이 변해져서 왔어요. 전에는 내성적이지만 밝았었는데 어둡고 소심하게.” “지금은 이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 “아마도요.” 요크노민과 유시리안은 잠시 뒤에서 따라오는 페르노크를 돌아보았다. 코앞에서 이루어진 둘의 대화에도 그는 불안한 안색으로 걷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 간혹 주위를 둘러보며 초조한 듯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다른 생각에 몰두해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아왔단 말이지. 자기 발로.” 낮게 중얼거린 유시리안은 다소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요크노민은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떼어놓을 생각인거다, 자신들을. 오르세만 가라는 권위의 이름으로. “만만하게 보는 건가.” “그 정도 밖에 생각해 낼 수 없었겠죠. 워낙 멤버가 화려하니까.” 실력으로는 도망치지 못한다. 단련된 육체적 강함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백분 발휘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발휘할 수 있다 하더라도 유시리안이나 이카미렌들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텔레포트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생각해낼 수단이 이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 아이노 쿠사비를 봤습니다. 화질은 노이즈 그 자체, 200%화면으로 전환해도 손바닥만한 크기, 잘 안들리는 음질... 여러모로 악조건이었지요. 하지만 봤습니다. 봐야만 했던 겁니다. 므흐흐... 그러다 저는 웃고 말았습니다. 주인공들이 담배불을 교환하는, 일명 라스트 스모킹. 주인공들 멋지지요, 분위기는 비장하지요, 그림도 멋지지요. 다 좋았습니다. 하지만 전 웃고야 말았습니다. 리키의 나레이션에 웃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딥키스." 뭐가 웃겼냐고요? 저 딥키스....풋 그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그 발음.... 디~프. 키~스. ('~'에서 길게, '.'에서 한번 끊어주고) ...........웃고야 만 것입니다;ㅡ; 아아, 그래도 음악은 정말 멋졌어요. 특히 그 디.......(풋) 디프키스할때의 배경 음악은 환상이었죠. 어떻게든 구해보려도 찾아다녔는데 결국 못찾고 말았습니다...ㅠ.ㅠ 누구 혹시 아이노 쿠사비의 ost 있으신분 없나요? 아니면 있는 곳이라도;ㅡ; [연재] 아해의 장-363 그때였다. 앞쪽에서 부산하게 누군가가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을 때 요크노민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여전히 차갑고 엄격한 눈빛, 딱딱한 얼굴, 달려오는 데도 절제된 격식이 갖춰져 있는 모습. 생각보다도 변함없는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 겨우 2년이었던가. 새삼 실감하고 만다. 폭삭 늙은 아버지를 만나게 될 거라 생각이라도 했던가. 스스로에게 조소 짓고 만다. “오셨습니까? 페르노크님.” 다가온 집사는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본래 그는 페르노크에게 그다지 예의를 차리지 않는 남자였다.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페르노크는 다르다. 지금의 그는 일전에 테밀시아님이 납치되었던 틈을 타 오르세만 가를 날로 먹으려 들었던 가짜 페르노크의 정체를 밝힌 공로자인 것이다. 게다가 홀로 남은 가주 계승권자이기도 했다. “일행분이…….” 페르노크와 동행한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던 집사는 눈에 익은 한 청년의 모습에 잠시 굳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장성했다지만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2년만의 아들과의 재회. 큰 아들은 결혼을 하면서 동생만을 데리고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고 한번도 아버지를 다시 찾지 않았다. 물론 그도 아들을 찾지 않았다. 그토록 시린 관계였다. 그러니 이제와 다시 만났다 해서 변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집사는 작게 숨을 삼키고 페르노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행분이십니까?” “아, 저…….” “페르!” 페르노크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 저편에서 달려오며 그를 불렀다. 테밀시아였다. 순식간에 그 앞에 도달한 그는 놀람과 반가움이 교차되는 눈동자로 페르노크의 위아래를 살펴보다 환하게 웃었다. “정말 너로구나!” 하인의 통보를 받았을 때조차도 믿겨지지 않았다. 이렇게 눈으로 보고나서야 웃을 수 있었다. 이제야 실감한 것이다. 정말로 그의 동생이 돌아왔음을. 딱딱하게 굳어 있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생을 다정하게 안아 다독였다. 얼마 전 수도에서의 만남 때도 동생은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까지 오는데 얼마나 망설였을까. 그래도 이제 됐다. 이제 돌아왔으니까. 테밀시아는 일행들 속에서 눈에 익은 청년을 발견하고 말을 건넸다. “이야기는 들었다, 노민.”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어는 빠져 있었지만 요크노민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형, 뮤비라에게서 들었다는 거겠지. 아버지가 앞에 있어 신경 써 준 것이리라. 조금만 주의해서 관심을 갖고 본다면 이토록 다정하고 배려 깊은 남자건만 페르노크는 그것을 알려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열등감에 사로잡혀 형의 애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몰라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게 아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괴로웠다. 그러나 페르노크는 줄곧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맸으면서, 눈앞에 있는 따뜻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애당초 알려하지도 않았다. 되도록 보지 않으려 했고 필사적으로 피했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저토록 다정한 눈동자를. “이쪽은……?” 하며 일행을 차례대로 돌아보던 테밀시아는 동그란 색안경을 쓴 훼오트라 아나에게 시선을 멈췄다가 내색 없이 거뒀다. 존재감은 죽였지만 기품이 자연히 흘러나오는 이카미렌을 묘한 얼굴로 보다가 마지막으로 유시리안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본 적이 있는 얼굴, 아니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자신에게서 동생을 앗아갔던 장본인인 것이다. 소름끼치는 요염함과 섬뜩한 살기가 뒤섞인 독특한 분위기의 남자. 독점욕과 소유욕, 그리고 경계심과 적개심으로 이글거렸던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구면이군.” “아아.” 유시리안은 쿡 웃었다. 짧고 작은 웃음이었지만 복잡했다. 그의 펠이 그토록 믿고 사랑한 ‘가족’. 그래서 전쟁터에서도 죽이지 않고, 덤비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후에 만난 그의 펠은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그 수단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를 내버리고 죄 값을 치르려 했을 정도로. 그때의 아슬아슬함이 지금도 생생한데……. ‘나의 펠은…….’ 우울한 눈으로 페르노크를 바라보았다. 쌀쌀한 날씨에도 땀으로 젖어 있다. 식은땀이겠지. 초조하게 꽉 깨물고 있는데도 입술이 파랗다. 약하게 떨고 있기까지 한다. 겨우 만난 아군이다 이건가. 어떻게 말을 꺼내야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 중인 거겠지. 저 페르노크에게 있어 테밀시아라는 존재는 그리 믿음직한 아군이 아닐 테니. ‘마음에 안 들어.’ 다시 재회했을 때, 테밀시아가 납치를 당했었다. 그때 그의 펠은 그를 내버려 두고 형의 행방을 좇아 가버렸었다. 그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형이 더 소중했을 뿐. 그의 펠은 그 정도로, 겨우 생긴 ‘가족’에 매달렸었다. 그것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런 펠이었기에 사랑하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음에 안 들어.’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펠과는 다르다. 저 약하고 한심한 녀석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다른 점을 발견할 때마다, 한심한 점을 알아 낼 때마다, 얕은 속내를 간파할 때마다 녀석에 대한 증오는 깊어져 간다.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둡게 싫어하는데도, 분명하게 정도가 더해간다. 그리고 그만큼 그리움이 커져간다. 아무리 쳐다봐도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존재감마저 희미해서 간신히 느낄 정도다. 그 희미함에 아득하게 슬퍼진다. 가슴 한쪽이 꽉 죄여 숨을 쉴 수가 없다.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고통에 온 몸이 잠식당한다. ‘펠…….’ 아무리 둔치라도 일행들 사이에 흐르는 어둡고 어색한 분위기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 동생의 불안한 모습, 유시리안의 우울한 얼굴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테밀시아는 눈치가 빨랐다. 때문에 그는 요크노민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요크노민은 불편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곧이곧대로 모든 걸 알릴 수는 없었다. 특히 테밀시아에게만은. 무하가 돌아왔을 때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자신을 다독인 그는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입을 열었다.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 테밀시아는 놀라 동생을 돌아보았다. 숙이고는 있다지만 새파랗게 질린 안색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무엇이 저리도 두려운 것일까? 전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심약함을 떠올렸다고 해도, 지금의 동생이라면 굳건하게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터. 무엇보다도 자신은 형이지 않는가. 가족이지 않는가.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도 자신이 형이라는 것, 이곳이 집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데. ……아니면 다시 그때처럼 자신을 무서워하게 된 건가? “페르.” 단순한 호명에도 흠칫하며 바싹 얼어버린다. 테밀시아는 그런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잘 돌아왔다.” “테밀 형님…….” 페르노크는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형을 올려보았다가 매달리듯이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음성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요크노민이 이어 다른 말을 했다. “대신 기억을 잃은 동안의 일을 잊었습니다.” 동생의 필사적인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테밀시아는 요크노민의 말에 당황하여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르노크는 다급히 형을 부르려 했지만, 그런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순간 비명이 튀어나올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신음을 흘리며 돌아보니, 유시리안이 매서운 살기를 남아 노려보고 있었다. “시, 싫어!” 반사적으로 탁 뿌리쳤지만, 자신이 뿌리쳤다는 사실에 또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소리에 요크노민에게서 시선을 거둔 테밀시아는 동생과 유시리안 사이에 흐르는 괴리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안으로 안내하기 전에 테밀시아가 유시리안에게 물었다. 그를 받아들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 “그때의 만남 이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생각을 더듬어 봤었다. 곧 생각나더군. 락아타와의 전쟁에서 만났지?” 유시리안은 딱딱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평소라면 비웃듯이 기억력 좋군, 이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의욕도 없었다. 그저 못 견디게 펠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테밀시아는 힘들어 보이는 유시리안의 모습을 다소 냉정하게 관찰한 뒤에 이어 물었다. “락아타의 사령관이 항복하기 전에 나를 공격할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수도에서의 만남을 돌이켜 생각하면 실력에 부족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왜 나를 공격하지 않았지? 용병이라면 의뢰인의 요구대로 움직여야 하지 않았나?” 락아타에서 활동하던 용병이 욤의 세력가인 오르세만 가의 마와 함께 하고 있다는, 우연으로 단정하기에는 너무도 기이한 인연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전쟁터에서는 실력을 알 수 없으니 별 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훗날 들어보니 그는 그 유명한 프리 급 용병, 유시리안이었다. 그때 어째서, 라고 궁금해 했던 것을 이참에 알아보려는 것이다. 저 오만한 눈동자의 남자가 그런 꿍꿍이로 접근할리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으니까. 아니, 그보다는 그때의 동생의 모습이……. “펠의 형이니까.” 테밀시아의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유시리안의 답이 먼저 나왔다. 그 말을 꺼낸 직후, 그는 저편에서 필사적으로 형에게 붙어 있는 페르노크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펠이 당신을 믿고 사랑했으니까.” 울적하게 고개를 숙였다. “펠에게 미움 받기 싫었으니까.”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건가? 카르민인 페르노크와?” “자하라 가에서 돌아오는 중에 만났습니다.” 요크노민이 끼어들었다. 쓰게 웃는 그의 모습에 테밀시아는 동생을 돌아봤다. “기억이 나니?” “모, 몰라요! 저, 전 모르는 사람이에요!” 마구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그 모습에 오히려 유시리안에 대한 동정심이 깊어졌다. “손님으로 맞겠소.” 유시리안들을 쭉 보며 말한 테밀시아는 옆에서 대기 중인 집사에게 말했다. “안내해드리게. 페르의 거처가 좋겠군.” “전 싫어요!” 바들바들 떨면서 거부했지만 테밀시아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납득하기 힘들다는 건 이해하지만 너와 함께해왔던 동료들이다. 무작정 거부만 하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야.” “그, 그렇지 않……!” “떨어져 있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지요.” 페르노크의 말을 자르며 요크노민이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곤 애써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 페르에게 있어 저는 시종에 불과할 테니.” “난 싫어!” 유시리안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난 옆에 있을 거야! 절대!” “하지만 유시리안 씨. 페르 생각도 해줘야지요.” “나에게 있어서도, 지금의 녀석은 타인이야. 나와 처음 만났던 페르는 기억상실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곁에 있을 거야! 떨어지지 않아!” 고집스럽게 말하는 유시리안을 보며 테밀시아는 한층 엄한 얼굴로 동생에게 말했다. “페르. 힘든 건 마찬가지다. 함께 이야기하며 풀어나가야지 무작정 피해서는 안돼.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나중에 기억을 잃었을 당시의 일을 생각해냈을 때, 괴롭고 후회스러울 거다.”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그때, 수도에서 자신에게 무언가 말하려던 동생을 가로막았던 손. 그때 동생의 눈동자는 살기가 일정도로 일그러졌었지만, 귓가를 스쳐 지나는 목소리에 얼핏 안도의 빛을 띠었었다.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할 그 찰나의 반응을 테밀시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계산되지 않은 그 반응은 동생이 저 유시리안이라는 남자를 얼마만큼 믿고 의지하는 지를 알려줬다. 그러니, 후에라도 기억의 공백이 메워지면 분명 후회하고 미안해할 거다. 그런 형의 깊은 배려를 알 턱이 없는 페르노크는 힘없이 고개를 떨 꿨다. 진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유시리안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두려웠다. 그 존재자체의 힘도 힘이지만 그 뒤를 단단히 버티고 있는 이카미렌을 생각하면 온 몸이 굳어버리고 만다. 형이 강하다는 것도 알고 오르세만 가의 세력도 알지만, 그것이 어디 드래곤에 비견될까. 드래곤의 위엄으로 자신을 내놓으라고 명한다면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드래곤의 분노는 혼자 뒤집어 써야 한다. 그건 생각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은 공포다. 그래도 어지간해서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드래곤이기에 희망을 갖고 여기까지 왔지만……. 이 상황을 뒤집을만한 용기조차 없었다. 결국 페르노크는 억지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에 테밀시아가 다정하게 어깨를 두들겨 주었지만 페르노크는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그만 가자. 너에게 전해줄 소식도 있단다.” 즐거운 듯 웃음 띤 목소리에 페르노크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형님도 전의 그가 좋은 거야.” 혼잣말이었지만 마스터인 테밀시아의 귀에는 정확하게 들려왔다. 테밀시아는 곤혹스런 얼굴로 페르노크의 어깨를 감쌌다. “기억을 잃든, 되찾든 넌 내가 사랑하는 동생이다, 페르.” 하지만 페르노크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믿지 않는다며, 강한 거부감을 뿜어낸 채로. 그런 동생을 테밀시아는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ost를 주신 미키님>.< 감사감사! 받아가라고 아이디 가르쳐주신 분들도 감사감사>. 감사 하는 마음으로 벗은 힘차게 미친벗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아직 도달한건 아닙니다!) [연재] 아해의 장-364 페르노크의 거처는 오르세만 가의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아담하다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뚫린 구조인 이곳에 빈방이라곤 요크노민이 쓰던 방 하나뿐이었다. 삼층의 페르노크의 까지 친다 해도 딸랑 둘뿐. 페르노크까지 해서 장성한 남자 다섯이 묵기는 아슬아슬한 감이 있었다. 그런 협소함을 모를 테밀시아가 아니었는데도 이 거처를 함께 쓰라 한 것은, 함께 부딪기며 얘기해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타인의 침범을 배제한 상태에서 서로가 납득할 수 있도록, 깊고 넓은 이야기를 나눠보라는 그런 배려. 그것을 눈치 챈 유시리안은 언젠가 와봤던 페르노크의 거처를 훑어보며 말했다. “실제로는 얘기하고 말 것도 없지만.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데는 함께 있는 편이 편하니까.” 비아냥거리는 듯한 내용이었지만 그 음성은 씁쓸했다. 아쉬운 데로 방을 분배하기 위해 입을 모을 때, 유시리안은 인상을 찡그리며 딱 잘라 말했다. “펠이었다면 모를까, 이 녀석과는 싫어.” 결국 그는 예전 요크노민의 방을 쓰기로 하고 페르노크의 침실에는 훼오트라 아나가 가기로 했다. 그래도 그동안 관리를 잘했는지 건물은 깨끗했다. 따로 치울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그 소소한 것에서 동생에 대한 테밀시아의 애정이 느껴져 요크노민은 웃었다. 방 배정을 한 뒤에는 하녀가 들여온 약탕에서 몸을 풀고 오르세만 가에서 내온 복장을 갖췄다. 곧 있을 저녁 식사를 계산한 것인지 격식 있는 정장이었다. 딱딱한 선과 부담스러운 화려함, 무거운 장식구가 달린 정식 정장이 아닌 움직임이 편한 세미풍의 정장이었다. 정식 정장이라 해도 문제 될 일행은 없었지만 이쪽이 더 낫긴 했다. ‘이것은 아버지가 명해서 준비 된 것일까, 아니면 테밀시아님이 직접 당부한 것일까?’ 끝까지 사무적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요크노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보려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무뚝뚝한 성격일 뿐이라고, 애정표현이 뜸하신 것뿐이라고 애써 자신에게 되새기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자각해 버렸다. 상전의 몸에 해를 가했다는 이유로 어두운 지하에 감금하고, 미칠 때까지도 풀어주지 않았던 아버지. 차라리 남만도 못한 존재. 찌푸려져 있던 미간을 문지르던 요크노민은 문득 유시리안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화제로 신경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유시리안씨도 고단수인걸요?” “저 얕은 속내에 넘어갈 멍청이가 어디 있냐? 너야 말로 즉석에서 잘 맞추던걸.” “뭘요. 그저 페르노크의 입에서 그의 사정이 나와 버리면, 설령 이카미렌님의 정체가 드러나도 굴할 분이 아니시란 걸 잘 안 덕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말머리를 잘라주는 게 상책이었죠. 이정도 포석이면 그 다음 페르노크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어지간해서는 들어 먹히기 힘들 테니까. 또 녀석에게 그 전부를 부인할 용기가 있으리라 생각되지도 않고 말입니다. 자신의 형에 대한 믿음이 얇으니까요.” 유시리안의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진하게 서렸다.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삼층에 틀어박혔다가 형의 호출로 도망치듯 나가버린 페르노크를 떠올리면 이런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요크노민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들뜬 분위기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수도에 들리지 않고 바로 이곳에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제그에게 받은 보고서로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지금으로는 반쪽 정보일 뿐. 산을 만나 곤크 사정까지 듣고 나야 인과 관계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엘프들이 정말로 곤크를 노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수도에 연락을 취해보고 싶지만, 오르세만 가의 영지에는 레타 지점이 없어서 곤란하군.’ 레타 지점이 없는 곳은 거의 없다. 전 대륙에 걸쳐 소규모로 퍼져 있는 것이다. 오르세만 가의 영지에도 몇 십 년 전까지는 있었다. 한 20년 전이었던가? 현 가주의 동생이자 전 가주 계승권자 ‘아’였던 남자가 이곳 영지의 레타 지점을 몰살시켰다. 오기로 몇 번이고 그 사람에게 자객을 보냈었지만 모두 전멸. 그렇게 귀중한 인력인 카 등급의 암살자의 피해가 두 자리를 거뜬히 넘게 되자 레타는 이곳을 포기했다. 그 뒤에 그 남자가 영지를 떠나 잠적한 뒤에 다시 손길을 뻗었지만 유능한 현 가주가 그것을 용납지 않았고, 그 뒤를 이은 테밀시아는 훨씬 가차 없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레타가 들어서질 못했다. 그것이 영지나,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에게나 좋은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잠시 옆의 영지로 가서 소식을 들어보고 싶지만 이쪽도 눈을 뗄만한 상황이 아니라.’ 연락을 두절하기 위해 일부러 연락용 아이템까지 제그에게 넘기로 온 것이 조금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그 연락용 아이템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추적기능까지 있었기 때문에 불가항력이긴 했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 있다면 키르가 어떻게든 연락을 취하려고 할 테지만 레타나 제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테니 조금 불안한데.’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하녀가 들어왔다. 앳된 얼굴의 하녀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밀시아님께서 여러분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페르노크는?” “테밀시아님과 함께 계십니다.” 요크노민이 넌지시 물었다. “저택의 분위기가 들떠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그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던 하녀는 어차피 알게 될 일이고, 요크노민이란 존재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기에 솔직히 답했다. “가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뜻밖의 소식에 눈을 크게 떴다. 현 가주는 테밀시아가 20세가 된 해에, 그에게 모든 걸 맡기고 사라졌었다. 그 뒤로 테밀시아의 결혼식에 딱 한번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아, 황위 계승식 때문에 나타나신 건가.” 그러자 재차 의문이 들었다. ‘그 정도라면 하인이나 저택 분위기가 들뜨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테밀시아님까지 들떠보였던 건…….’ 테밀시아는 자신의 결혼식 때, 즉 십년 만에 아버지를 봤을 때조차 덤덤했었다. 소식은 전해 듣고 사나봅니다, 진심 섞인 농을 건네고 힘껏 포옹 한 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채 몇 달이 되지 않아 만난 아버지를 보고 들떠한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을 다 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테밀시아님만 아는, 혹은 페르노크와만이 공유할 수 있는 다른 뭔가가 생긴 걸까?’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식사에는 누구누구가 초대됐지?” “여러분들뿐입니다.” “가주님도 합석하시는 건가?” “물론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요크노민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 응할 겁니다만.” 어쩌겠냐는 질문이었다. 이카미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훼오트라 아나를 돌아보았다. 유시리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응할게 뻔했다. 이카미렌의 시선에 훼오트라 아나는 생긋 웃었다. “전 이곳에 남을래요. 테밀시아 경은 이미 저에 대해 눈치 챈 모양이니 양해해 줄 테죠. 좀 전에도 못 알아본 척 넘어가줬으니.” 그리곤 하녀 쪽을 돌아보았다. “식사는 필요 없어요. 갈 곳이 있어 자리를 비울 거니까.” “나와 리안은 갈 거다.” 이카미렌이 이어서 덧붙였다. “예.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훼오트라 아나를 제외한 일행이 일어났다. 그들을 눈으로 배웅하던 훼오트라 아나가 문득 요크노민을 불렀다. “요크노민 씨.” 돌아보는 그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예언입니까? 충고입니까? 아니면 경고입니까?” “겸사겸사요.” 속내를 알 수 없는 훼오트라 아나에게서 몸을 돌리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하지요.” 변함없는 장소였다. 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는 먹음직스런 요리들의 군침 도는 향내, 섬세한 조화를 이룬 장식. 시각으로 먹고 후각으로 먹고 미각으로 먹는 그 완벽함. 테이블 옆에 시립한 시종들의 손에는 널찍한 쟁반이 들려있다. 쟁반위에는 빈 접시가 세 개 놓여있다. 한 사람당 한 시종이 붙어 지시에 따라 그 접시를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욤 특유의 뷔페식 식사다. 시종이 딸리는 것이야 귀족이나 거상에게나 가능하지만 말이다. 요크노민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종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식사 시중은 하인들 사이에서는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이었다. 주인을 바로 곁에서 모시기 때문에 그 입김이 상당한 것이다. 또 귀족들이 낯선 하인이 자신의 식사를 챙기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한번 그 자리에 들어가면 어지간해서는 교체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신참에게는 절대 시키지 않는다. 때문에 그에게 다가오는 시종은 낯익은 남자였다. 그쪽에서도 내색 안하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은지 어색한 표정이었다. 짐짓 태연한척 덜 요리를 지시한 뒤 요크노민은 저편에 늘어져 있는 커튼 쪽을 보았다. 여기서 음식을 덜어 저쪽으로 가서 먹는 것이다. 저 너머에 가주 부부내외와 테밀시아와 페르노크가 있을 테지. 그리고 가주의 식사를 돌볼 아버지, 아니 집사도…….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낳는 게 다가 아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 나름대로의 권위와 의무가 있다. 집사에게는 죽은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할 의무도 있었다. 그는 그 어떤 것도 짊어지지 않았다. 오직 강요하고 압박했을 뿐. ‘나의 아버지는 뮤비라 형님이다.’ 형과 함께 이곳을 떠나면서 그렇게 정했다. 아니, 자신과 함께 가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 =========================================================================== 벗은 자정을 사랑해요♡ (퍼퍼퍼퍼퍽!! ->자진납세) 흠흠; 푸른 늑대의 전설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뭘 찾아서 보고 다니는 건지)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 설마~ 하며 하하, 웃다가.... 또다시 갸웃.... 결국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뒤지던 끝에....ㅜ.ㅜ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알고야 말았습니다....(->자기가 찾아본 주제에) 케이키............;ㅡ; 네 어찌하여....ㅜ.ㅜ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돈이 궁했던 게지요' 하며 우스개 소리를 하더군요. 전 입맛이 썼습니다; 바이스 크로이츠의 아야, 십이국기의 케이키! 그 멋진 폼생폼사 다 어디가고 그 어설픈..........!!!!!!! 엉엉...ㅠ.ㅠ 근데 푸른 늑대의 전설은 자막이 없더군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뭐, 대충은 알아 들을 수 있으니까(또 이런 류의 애니나 만화는 그리 어려운 단어도 없고) 별 상관은 없지만.... 대신 볼륨을 크게 해 놔야 하기 때문에(들어야 아니까) ................그, 저기.......거시기.................. 혼자 있을 때나, 아니 적어도 부모님 없을때만 볼 수 있는.........쿨럭;; 그러고 보니 보쿠노 세이하라는...........(고만해!!! 퍼퍼퍼퍽!!!!) ..................뭐, 그런겁니다^^ (뭐가!) [연재] 아해의 장-365 기립해 있던 시종이 줄을 당겨 커튼을 쳤다. 이곳에 익숙한 것은 요크노민이지만 일부러 이카미렌이 앞서 들어갔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라는 의미도 있고 여러모로 불편할 요크노민을 생각해준 것도 있었다. 본래라면, 기나긴 수명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인연 따위 배려해주고 말 것도 없었지만 요크노민은 불칸의 영원. 지겹도록 긴 세월동안 살아오면서 수장의 영원을 본 것은 몇 안 됐으니 그만한 예우를 대해주려는 것이다. 이카미렌 다음에 유시리안이 이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들어선 요크노민은 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사를 의식하고 있는 자신이 싫었지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주의 식사 시중은 집사가 직접 드는 것이 당연했건만 뜻밖에 그는 없었다. 아마도 요크노민을 배려한 것이겠지. 이들 부자간의 냉정한 증오, 혹은 혐오 관계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새삼 모르는 척 해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니까. “셋째가 신세 졌다고 들었습니다.” 무시 못 할 힘이 담겼으면서도 부드러우면서 정중한 음성. 미소 띤 눈동자는 페르노크의 것과 꼭 닮은 녹음 빛으로 풍만한 연륜이 서려있다. 그것에 서린 따뜻함은 알아보기 쉽지만, 그 너머에 냉정하고 날카로운 사고가 은밀히 도사리고 있다. 강렬한 위압감 너머에 따뜻하고 다정한 씀씀이가 깃들어있는 테밀시아와는 반대다. 하지만 지위나 차림새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 그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기품만큼은 똑같다. 이것이 당대 세력가인 오르세만 가의 가주의 모습이다. “오르세만 카스야나 장 카르민입니다. 풀네임을 입에 담는 것도 오랜만입니다만.” 장난기 섞인 웃음을 흘리며 이카미렌을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그가 가장 강하며 거대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제일 처음에 들어왔기에 연장자라 생각해서인지는 그만이 알 일이다. 이카미렌은 의례적으로 짧게 목례를 하고 뒤쪽을 가리켰다. “신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대의 아들과 함께 한 자는 내가 아니다.” 아무리 상대가 예의를 갖추고 나왔어도 카르민의 수장에게 하대이라니!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경악하여 몇 번이고 경을 칠 일이건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이카미렌의 언동에 반발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자연히 납득되어졌다. 아니, 납득할 것도 없이 그냥 당연했다. 이카미렌이 가리킨 쪽을 보니, 이카미렌과 흡사하게 생겼지만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남자가 오만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분명 이름이 유시리안이라 했던가. 카스야나는 잠시 자신의 큰 아들 쪽으로 눈을 돌렸다. 큰아들은 어째서인지 이카미렌 쪽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아버지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자네가 유시리안이군. 테밀에게서 말은 들었네.” 그리고 요크노민. 테밀시아의 결혼식 때 만났으니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특별히 인사할 것도 없어, 간단히 오랜만이라고 웃었다. 그때 유시리안이 삐딱한 어조로 물었다 .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 거냐?” 이카미렌과는 달리 건방지게 들리는 하대였지만 카스야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것에 일일이 발끈할 정도였다면 애당초 떠돌이 생활 따위는 못했다. “이야기는 식사와 함께 할까. 그만 앉지.” 손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은 옆으로 빠졌다. 그리고 옆의 의자를 뒤로 빼, 상대가 앉기 쉽게 했다. “고마워요, 얀.” 나긋나긋한 여성의 목소리. 카스야나는 미소로서 응대했다. 요크노민은 실례되지 않는 선에서 그 여성을 살펴보았다. 어려서 멀찌감치 몇 번 보았던 이오리린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갇혀있다시피 지내고 있는 테밀시아의 부인, 마린나사도 아니었다. 어딘지 신경질적이고 차가운 느낌이었던 이오리린과 다른 느긋하고 여유로운 느낌의 여자. 싸구려 여자의 냄새가 진동하는 마린나사와도 다른 고고한 품성의 여자. 그 가늘고 작은 몸에서 활기가 넘치고 있다. 채 스물이나 됐을까? 그 옅은 존재감은 이카미렌처럼 일부러 감추고 있는 듯 이질적이다. 어째서 한 눈에 보지 못했을까? 온화하면서도 강한 황금빛 눈동자, 허리 밑으로 한참 내려가는 은은한 광채의 은발. 각기 뿜어내는 느낌은 테밀시아는 물론 페르노크의 것과도 달랐지만, 그 색만큼은 똑같다. 그리고 이마의 새겨진 황금빛 독특한 문양. “그 분은……?” “소개가 늦었군.” 카스야나는 즐겁게 웃으며 여자를 보았다. 마주 웃으며 여자는 직접 자신을 소개했다. “리화(梨花)라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서 기뻐요. 특히…….” 그녀는 이카미렌 쪽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오래된 분을 뵈어 기쁩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만남.” “예전과는 달리 요정들의 방문이 뜸해졌으니까.” 다소 들뜬 그녀와는 달리 이카미렌은 차갑다 싶을 정도로 차분했다. 이미 그녀의 정체쯤은 알고 있었는지 동요도 없었다. 이카미렌도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는지 슬쩍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고, 요크노민만이 뜻밖인 듯 눈을 크게 뜨며 반응했다. “금안과 은발을 봤을 때 혹시나 했습니다만, 정말 요정이셨군요. ……그렇다면.” 요크노민의 시선이 닿은 곳은 테밀시아였다. 그는 여자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강렬한 황금빛 눈동자로 이카미렌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이었다. 노골적이다 못해 무례의 경지까지 이르는 그 시선에 카스야나가 내색 없이 지적했다. “테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것이냐?” “…….” 그 시선을 알고는 있었지만 줄곧 무시해 왔던 이카미렌이 그제야 테밀시아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테밀시아는 한번 숨을 깊이 삼켰다. 옅은 미소가 배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이카미렌이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본의 아니게 실례했습니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한 테밀시아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 집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검은 눈에 띄지 않게,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귀공께 이 녀석이 공명을 하기에.” 테밀시아가 극존칭을 써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는 그다지 답을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이카미렌을 바라보았다. “이 검은 개국 공신인 초대 오르세만 가주가 건국 황제께 하사받은 검이지요. 마법검이 아니면서도 이가 나가기는커녕 피조차 묻은 적이 없는 보검입니다. 은은한 황금빛 때문인지 골드 드래곤의 검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테밀시아가 말한 것은 욤의 백성이라면 대부분이 아는 유명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이카미렌은 흥미롭다는 듯 듣고 있었다. 그런 이카미렌의 모습을 곧은 눈으로 바라보던 테밀시아는 검에서 손을 떼고 스푼을 들었다. “와전된 전설에 불과하겠지만 말입니다.” 스프를 몇 번 젓다가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짧게 덧붙인 말에 이카미렌의 눈동자가 고요해졌다. 카스야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아직 듣지 못했군요.” “렌.” 단음으로 답한 이카미렌은 리화를 보고, 아까 요크노민이 말하려다 만 것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저 둘의 어미로군.” 기분 탓일까? 페르노크가 움찔한 것 같다. 우연찮게 그것을 본 요크노민은 의문을 억눌렀다. 저 요정이 테밀시아와 페르노크의 어머니라면, 그렇다면 이오리린은 무엇인가? 이오리린과 가주 사이의 아이들은 무엇이며 카한세올은 무엇인가? 적어도 카한세올은 첩의 아들이란 오명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테밀시아와 페르노크는 달랐다. 둘은 정실 자제로서 떠받들어져 왔다. 들어서는 안 될 일을 들은 기분에 긴장과 흥분이 교차됐다. 애써 스프 쪽으로 시선을 떨 꾸어 표정을 가리는 요크노민의 귀에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대는 왕의 여자가 아닌가?” 이카미렌이었다. 페르노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요정과의 혼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떤 요정의 아이인지는 알 바 아니었지만 그녀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이마의 저 낙인. 그것은 왕의 낙인이다. 절대 군주제인 요정들 사이에서 왕의 낙인은 그의 소유물이란 의미. 절대 손대서는 안 되는 성스러운 것. 이카미렌의 목소리가 엄해졌다. “그대, 인간과 간통한 건가?” “…….” 노골적인 그의 말에 낯을 붉힌 여자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아니, 간통일지도 모르지요. 그때는 이미 낙인이 찍힌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이 낙인은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당하게 찍힌 겁니다. 식을 거부하고 도주 중에 이 사람을 만난 거죠.” 결계가 쳐진 방안에서 십년을 버텼다. 자유로운 기질을 타고난 그녀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왕에게 걸려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얀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고, 외부에 알려져서도 안 되는 몸이라 정식 혼례조차 치루지 못했지만 그녀는 정당한 카스야나의 부인이었다. …… 하지만 결국 들통이 났다. “그렇다면 이오리린님은……?” 못 견디고 의문을 꺼내버리려던 요크노민은 얼른 말을 멈췄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말았다. 테밀시아와 페르노크를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이 이상 캐물어서는 안 된다. 하물며 뮤비라 형님조차 모르는 테밀시아의 사정을 먼저 알고 싶지 않다. 그 심중을 헤아린 건지,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 카스야나도 테밀시아도 모호한 미소를 지을 뿐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카미렌은 리화의 이마를 보며 다시 물었다. “왕의 낙인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왕이 그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어떻게 속계로 나올 수 있었지?” “그는 죽었습니다. 곧 신왕이 등극하고나면 이 낙인도 사라질 겁니다.” “그런가.” 그것으로 이카미렌은 관심을 끊었다. 그는 남의 애정 관계에 끼어들 만큼 오지랖이 넓지도 않았고, 한가하지도 않았다. “테밀시아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친모에 관해서…….” 이것만큼은 알아두고 싶어 요크노민이 물었다. 그래서 그만큼 들떴던 것일까? 테밀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여 긍정했다. “페르도?” “……!” 이번에는 눈에 띄게 움찔했다. 고개를 숙인 채 한번도 들지 않던 페르노크가 천천히 요크노민 쪽을 바라봤을 때, 요크노민은 뜻밖인 듯 눈을 둥글게 떴다. 본래대로 돌아와 페르노크가 지었던 표정이라고는 겁에 잔뜩 질려있는 창백한 얼굴뿐이었다. 그것은 집에 돌아와 아군이라 할 수 있는 테밀시아를 봤을 때도 변함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일그러져 있는 얼굴. 딱딱하게 굳어서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고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그 모습. 어둡게 뻗어 나오는 기운과 충혈 된 눈동자가 담아내는 그것은 분명 분노였다. 과거 오르세만 가에 있었을 때에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뜻밖의 답. 요크노민은 페르노크를 향해 물었다고 해도 그가 답할 거라는 생각은 안했었던 터라 약간 당황했다. “페르…….” 카스야나가 씁쓸하게 아들을 불렀다. 어머니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테밀시아가 동생에게 그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인 자신이 금했기 때문이다. 생모가 돌아올 때까지 이오리린을 어머니로 생각하며 자라는 편이 더 나을 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진실을 들은 페르노크는 빠득 이를 갈며 처음 보는 생모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오리린이 친모가 아니라는 것은 금방 납득했지만, 친모에게 애정을 갖는 일은 별도였다. 애정은커녕 그가 보이는 감정은 증오에 가까웠다. 그 격렬한 반응에 테밀시아도 놀랐으나 페르노크는 어떤 말도 하려하지 않았다. 진실은 들은 뒤 처음으로 입을 연 페르노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노려보다가 날카로운 음성을 뚝뚝 떨어뜨렸다. “난 몰라, 저 여자.” “페, 페르!” 리화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작은 아들을 보았다. “거짓말쟁이! 그렇게 날 보지 마! 마치 날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상처 입은 눈으로 보지 말라고!” ============================================================================= 오늘은 하루 종일 걸었어요. (이라고 해봐야 네다섯시간?) 덕분에 피곤...넉다운... 에고고 삭신아. 원래 걷는 건 좋아하지만... 옷 사러 돌아다니는건 딱 질색이라고요. 책이나 게임이나 그림이나 골동품이나 공예품이나 가구(특히 주방이랑 서재용품)나 인테리어 소품따위를 사거나 구경할때는 지치는 걸 모르지만, 역시 관심없는 분야쪽으로 돌아다니는 건 피곤하군요. 나이도 나이거니와....;ㅡ; 이제 슬슬 문제의 그 8권 외전을 보신 분들이 나타나겠군요. 어떻습니까? 8권의 외전을 보면 여태까지의 의문이 상당수 해결되지 않습니까? 소유씨는 소름돋는다, 라고 말했었지요. 도대체 뭐가! ;ㅇ; [연재] 아해의 장-366 이렇게 차갑게, 그리고 격하게 소리 지르는 페르노크의 모습을 본적이 있던가. 이런 상황에서 묘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마는 테밀시아였다. 이래서 처음부터 말하자고 했었지만 아버지는 끝끝내 함구하기를 명했다. 진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오리린의 차별적인 대우에 상처만 받아가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아버지는 안 된다고만 했다. 그러니 지금의 저 적대감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책임져야할 몫이다. ‘어리광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테밀시아는 눈물이 그렁해진 어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리화는 어머니로서의 위치와 권위와 역할과 의무를 모른다. 방에서 꼼짝도 못한 채 단절된 생활 속에서 테밀시아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정작 기른 것은 이오리린과 유모였다. 그나마도 테밀시아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알’ 하나만 남겨두고 본래의 세계로 끌려가 버렸다. 그 ‘알’을 거의 일년간 보살펴 깨뜨린 사람은 카스야나와 테밀시아다. 리화는 ‘어머니’라는 것을 모른다. ‘자식’이라는 것도 모른다. 본능만으로 그것을 알기는 역부족이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가시를 세우고 달려드는 페르노크를 보듬어 줄 수 있을까? 한숨이 흘러넘친다. “페, 페르.” 리화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페르노크는 거칠게 일어났다. 그 겨를에 의자가 뒤로 넘어졌으나 양탄자 때문에 소리는 그리 나지 않았다. 하지만 리화의 입을 막기는 충분했다. “난 당신을 몰라.” 페르노크의 충혈 된 눈에 서서히 물기가 맴돌았다. “당신도 날 모르잖아! 그런데 왜 사랑한다고 하는 거야!?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알’만 낳았을 뿐이면서, 얼굴도 처음 보는 거면서, 이름도 십수 년 만에 듣고 안 거면서, 자신에 대해 뭘 알아서 사랑한다는 것인가. 단지 자식이라서? 그럼 요크노민의 경우는 뭐지? 집사는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어. 그토록 긴 시간동안 함께 있었으면서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런데 뭘 믿고 사랑한다는 거야? 왜 그렇게 쉽게 말하지?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길가에서 봤어도 모르고 스쳐지나갈 정도의 얄팍한 사이일 뿐인데. “나에게 그 이유모를 사랑을 강요 하지 마! 기르지도 못할 아이를 낳아서, 결국 버리고 간 건 당신이잖아!” 이오리린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페르노크는 단 한번도 못 보았던 ‘진짜’ 어머니의 얼굴로 그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그 원인 모를 괴리감, 그리고 확연한 거리감. 그 속에서 외로워했던 자신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오리린이 자신의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은 납득할 수 있다. 무의식중에 깨닫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서 어머니라며, 자신의 사랑을 강요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착하지는 않다. 그 무엇보다도 페르노크를 화나게 하는 것은……. “난 사랑 같은 거 몰라.” 늘 어딘가 정신이 팔려 있었던 아버지, 아득한 거리감에 손조차 내밀 수 없었던 어머니, 무뚝뚝한 큰형, 그리고……. “카한 형님…….” 멍하니 중얼거린 페르노크는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페르!” 지켜보고만 있던 테밀시아가 기어이 일어나 다가가려는 순간, 페르노크는 비틀비틀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다. “카한 형님뿐이었어.” 상냥하게 지어주던 미소도, 따뜻하게 안아주던 품도……. “카한 형님께 갈래.” 여긴 싫어, 실성한 듯 중얼거리는 페르노크의 손목을 붙잡기 위해 내밀었던 손을 테밀시아는 힘없이 내렸다. 바로 앞에 있는 동생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 마음이 저 멀리 떠나버려 손을 뻗어도 닿을 것 같지 않았다. 전에는…… 눈앞에 없다 해도 마음만은 가깝게 있는 듯 느껴졌는데. “죽었어도…… 카한 형님뿐이야.” 비틀비틀 서너 걸음 더 내딛던 페르노크는 갑자기 힘껏 뛰었다. 요크노민이 놀라 몸을 일으켰을 때, 유시리안은 이미 그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급히 따라가려는 요크노민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테밀시아였다. “요크노민 마 카르민.” 갑자기 불려진 풀네임에 요크노민이 멈춰 돌아봤다. 언제나 다정했던 테밀시아의 눈동자가 엄격하게, 그리고 냉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뿜어지는 기세도 달랐다. 수장의 맹약자이자 레타 마스터인 요크노민을 일순에 압도하는 그 기세. 이것이 ‘지배자’인가. 요크노민은 새삼 생각했다. 그리고 의문을 느꼈다. 갑자기 왜? 결국 울음을 터뜨린 리화를 카스야나가 안고 다독였다. 쉽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맹렬하게 반발할 줄은 몰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아이에게.’ 차라리 증오라 불러 마땅할 그 분노. 순수하게 리화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이것저것이 뒤엉킨 그것은 페르노크의 한이었다. 리화라는 존재는 그것의 기폭제에 불과했다. 난장판이라면 난장판인 그 속에서 유일하게 침착, 냉정한 자가 있었다. 수프 두 술을 뜬 뒤 음식을 조금씩 떼어다 맛보던 그는 우아하게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단정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느긋한 듯 차분하게 일어났다. “페르노크, 그리고 리안에게는 내가 가보지. 그대는 남아서 볼 일을 보도록 해라. 나중에 페르노크의 거처에서 보도록 하지.” 단순한 지시에 불과한 그 말이 조용히 식당 안에 울렸을 때, 식당 안을 메우던 혼란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테밀시아가 진지한 눈으로 이카미렌에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이카미렌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싶었다. 그의 검이 아직까지도 이카미렌과 공명하고 있으니까. 고개를 끄떡이고 나가는 이카미렌의 뒷모습을 보던 테밀시아는 부모님에게로 주위를 돌렸다. “즐거운 식사는 못됐지만 곪은 상처를 터뜨리는 건 의미 있었습니다.” 아직도 울먹이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페르는 어리광을 부리는 겁니다, 어머니.” “페르가 차갑게 대한다고 해서 우는 게 아니란다, 테밀.” 리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서 우는 거란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낳았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단다. 보살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그렇게 내버리고 가야만 했던 것이 미안해서.” “이번에는 버리지 말고 끝까지 지켜봐 주시고, 안아주십시오.” 테밀시아는 든든한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았다. “가족이잖습니까.” 뒤쪽에서 요크노민이 쓰게 웃었다. 타인만 못한 가족은 얼마든지 있다. 자신이 그 대표적인 예지 않는가. 그것을 누구보다도 뻔히 알고 있을 테밀시아인데……. “저는 볼 일이 있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중에 찾아뵙지요.” 안심한 듯 웃는 부모님을 두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요크노민을 마주보았다. 그 순간 좀 전까지의 따뜻하고 든든한 미소는 사라지고 엄격하고 위압적인 기운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날 따라 오너라, 노민.” 페르노크가 달려간 곳은 오르세만 가의 묘지였다. 가주나 그 아내, 그리고 명을 다 하지 못한 가주 계승권자만이 묻히는 곳. 이곳에 카한세올이 있다.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그가 있다. 시야가 흔들린다. 햇빛이 부셔 눈앞에서 새하얗게 일그러지고 아롱지고 사라진다. 그 때문에 비석의 글씨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어디가 어딘지조차 모르는데도 계속 앞으로 걷는다. 누군가 이끌어주듯, 비틀비틀 거리면서도 머뭇거림 없이 어느 방향을 향해 걷는다. 일그러진 시야는 끊임없이 흐려졌다 맑아졌다를 반복한다. 볼을 흐르는 무언가는 잊은 지 오래, 틀어막은 입 안쪽에서 넘치는 오열도 잊은 지 오래. 지금은 그저 보고 싶을 뿐. 그렇게 낮은 언덕을 올라갔던 페르노크가 멈춰선 것은, 저 밑쪽에 서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지금의 형편없는 시계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그 뚜렷한 존재감. “훼오트라 아나……?” 무언가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훼오트라 아나가 그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태연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자신이 바라보던 것을 손가락질했다. 그것이 향하는 끝에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페르노크는 무작정 뛰었다. 훼오트라 아나에 대한 두려움도 지금은 생각나지 않았다. 육신만큼은 혹독하게 단련되어 그 정도 뛰는 것에 숨이 차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일정도 본래의 페르노크였다면 견딜 수 없었을 정도로 빡빡한 것이었다. 무하는 페르노크에게 작은 형을 앗아갔고 숨 막히는 고통을 주었지만 무익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맙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훼오트라 아나의 바로 옆까지 단숨에 달려온 페르노크는 흐릿한 시야를 문질렀다. 그러자 훼오트라 아나가 언제나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를 외면하며 무덤 쪽을 돌아보았다. 깨끗한 잔디가 덮여 있는 모습. 관리가 잘 된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 앞에 놓인 새하얀 비석에 수려한 필체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 예리하게 패인 모양은 조각가의 섬세함과는 달랐지만 힘 있었고 대범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페르노크에게는 없었다.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비문 속에서 어찌 그 이름만이 눈에 박혀오는 것인가. “오르세만 카한세올 아 카르민…….” 온 몸이 덜덜 떨렸다. 무릎이 꺾였다. 바닥을 쥔 손바닥이 땅을 파고들었다. 그 손에 흙과 돌, 잔디가 박히기 시작했다. 풀에 베였는지 약하게 아파온다. 흙 위로 떨어진 점점 물방울들이 하릴없이 스며들어갔다. 페르노크는 쥐어짠 음성으로 물었다. “이……안에는 뭐가 들어있나요?”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사라졌는데. 핏방울 하나 남기지 않고 먹혀버렸는데. 그 존재자체가……. “글쎄요.” 훼오트라 아나는 천진한 듯 잔인하게 말했다. “물어보지 그래요? 살아있는 형에게.” “당신이라면 알 수 있지 않나요?” “아무리 저라도 무덤 안을 엿보는 취미는 없답니다.” 웃음기가 실려 있지만 엄한 음성이었다. 그 뜻을 이해한 페르노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비석을 바라보며 계속 울었다. 그것을 별 말 없이 바라보던 훼오트라 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좀 전에 페르노크가 서 있었던 언덕 위를 올려보았다. 싸늘한 바람 속에서 유시리안이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지는 백금 머리카락 사이로 오만한 보랏빛 눈동자가 돋보였다. 유시리안 뒤로는 그보다 좀더 긴 머리카락과 한층 깊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이카미렌가 있다. 그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이쪽을, 정확히는 훼오트라 아나를 마주보았다. 속을 읽을 수 없는 고요한 눈동자로. 빙긋, 훼오트라 아나는 무의미한 웃음을 지어보이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서 흐느끼고 있는 작은 아이……. 하지만 동정하지 않는다. 아니, 동정한다 해도 자신이 그를 죽일 것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순간은, 이 순간만큼은 함께 있어줄 수 있다. 테밀시아도 카스야나도 리화도 안 된다. 유시리안이나 요크노민은 더더욱 안 된다. 자신밖에 없다. 이 순간에 곁에 있어줄 존재는. 비록 자신의 살의를 페르노크가 잘 알고 있다지만, 정말로 자신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유시리안도 이카미렌도 저 선에서 멈춰있다.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감시하듯 지켜보고만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페르노크는 여전히 물기 젖은 얼굴로 억지로 말을 뱉어냈다. 속삭이듯이 낮은 그 음성에 흐느낌이 섞여있었다. “열어 놓은 마음이라는 거…….” 겨우 서두를 꺼낸 그는 비석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자신의 손이 흙과 피로 더러워진 것을 깨닫고 힘없이 내렸다. “그게 제 것이라는 거, 아시죠?” “예.” 페르노크는 시선을 비석에 고정시킨 채 멍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혀로 몇 번이고 입술을 축이다가 가늘게 물었다. 회한이 밀려드는지 말하는 속도가 서서히 빨라졌다. “엘프도 아니면서 그 쓸데없는 걸 갖고 태어난 바람에 제가 생겨버린 능력이 뭔지도 아세요?” “글쎄요.” “당신이라면 아실 것 같아요.” 비문 속에서 친근한 만큼 애통한 이름만을 멍하니 주시했다.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이 안개 같은 것이 마나인가요?” 그것은 마나였다. 안개처럼 흐리면서도 촉촉하게 세상을 감싸고 있는 그것은 마나였다. 그렇게 최단기간 마나를 느낀 아이가 되어 버렸다. 주위의 감탄, 순조롭게 이루어진 마법 길드의 가입, 환영해주는 마법사들, 그리고 그의 차가운 눈동자. 페르노크는 무섭기만 했다. 그는 페르노크가 좋아한 선생님이었다. 귀여움을 받고 싶었던 선생님이었다. 만약 그의 재능이나 마법 수위가 조금이라도 높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만……. 불행히도 그의 마법적 재능이나 수위는 아무리 좋게 쳐도 삼류를 넘지 못했다. 그러니 까마득히 어린 후배이자 제자인 페르노크를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의 인연은 마법 길드를 감으로써 완전히 끝이 나버렸지만……. 페르노크가 겪어야만 했던 불행의 발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생전 처음으로 명상을 한 꼬마가 순진한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의 천재성을 타인에게 알려버려서가 아니다. 마나를 느껴버렸다는 그 자체. 그 자체가 바로 불행의 발단이었다. -쾅! 철제문이 크게 울리며 닫혔다. 어린 페르노크는 마법사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떼면서도 닫힌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악물려져 있는 문은 너무도 굳건해 보여,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른다.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는 것은 작아지는 저 문뿐. -쾅! 나무문이 크게 울리며 닫혔다. 철제문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닫혔고, 남은 것은 단절된 시간뿐이었다. 그리고 그 철제문을 페르노크가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일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 이제부터 페르노크의 우울한 과거가 시작됩니다. 전 페르노크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의 분신이라 여겨질만큼 저와 닮았으니까요. 나르시즘까지는 아니지만 자학성애에 취향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뭐, 그런 겁니다( '')~ [연재] 아해의 장-367 모든 것이 낯설었다. 신기한 것을 본다는 얼굴로 힐끔되는 아이들, 다소 어렵게 자신을 대하는 선생님들, 자신을 두고 수군대는 소리들. 그 시선, 그 태도, 그 음성……. 모든 것이 숨이 막혔다.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좀더 필사적인, 좀더 현실적인 ‘괴로움’에 숨이 막혔다. 이미 익숙해 졌다고 생각했는데……. 수가 많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과도한 관심집중 때문일지도. 머리가 지독히 아파와 토할 것 같았다. 입을 틀어막으며 헐떡대는데, 안내하던 선생님이 물었다. “괜찮은가, 페르노크군? 안색이 안 좋은데?” “…….” 몇 번 입을 뻐끔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극심한 ‘소음’이 귓가에서 울려와 두통이 났다. 애써 고개를 끄떡였지만 선생님은 안 되겠다며, 교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를 인도했다. 신관에게 가려는 걸까? 페르노크는 다급히 음성을 쥐어짜냈다. “괜찮아요.” 생각보다도 훨씬 작게 나와 들렸을지 여부가 걱정일 정도였지만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멈춰 섰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어서 방으로 들어가고 싶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누구의 소음도 듣지 않고, 정막 속에 묻혀 있고 싶다. “긴장한 모양이구나. 뭐라 해도 일년 만에 돌아온 거니까.” 선생님은 관대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어 따랐다. 고막이 찢겨질 것 같은 소음에 식은땀이 흘러넘쳤다. 호흡이 가퍼지는 것을 애써 틀어막으며 초조하게 걸었다. ‘일년…….’ 자신이 마법을 배울 때마다, 스승들이 시범보인 것을 따라할 때마다 달라지던 눈빛들. 그러던 어느 순간인가, 그는 ‘희대의 천재’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겨우 학교로 돌아왔다. 막 신학기가 시작 되었을 때 마법 길드로 강제 가입, 배속되었기 때문에 일년 만에 돌아왔어도 반겨줄 친구하나 없었다. 외롭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지금은 혼자가 더 편했다. 편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누가 뭐래도 절대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이젠 모든 것이 싫다. 조용히 혼자 죽어지내다가 방학이 됐을 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적어도 집으로 가면 카한형님이 있으니까……. 벌써 일년이나 못 만났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안아주었던 따뜻한 품. 몇 달만 버티면 다시 볼 수 있다고 위로해 주었던 다정한 음성. 지금은 이러지만 곧 친구가 생겨서 방학에도 안돌아 오는 거 아니냐며 장난스럽게 먹였던 꿀밤. 그것으로 일년을 버텼다. 이제 정말 몇 달 안 남았다. 이제 카한 형님을 뵐 수 있다. ……이제 친구는 사귀지 못하게 됐지만. “이 방이네.” 앞서 열어 준 방 안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자 방을 쓰게 될 거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이렇게 쓸데없이 큰 방일 줄은……. 무의미한 공간 활용에 절로 혀를 차게 됐다. 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저 화려함은, 안락하고 정갈한 자신의 거처나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이 갖춰진 마법 길드 내의 방과는 극단적으로 달라 부담스러웠다. 이 방안에서 자신만이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불쾌했다. 그것을 본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마음에 안 드나?” “네? 아, 아니요.” 기껏 챙겨준 건데 이런 건 예의가 아니지, 하며 고개를 젓는 순간이었다. 「이 정도는 눈에도 안찬다 이거지?」 “……!” 흠칫하며 눈을 크게 뜬 채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상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 안돼…….’ 페르노크는 주먹을 꾹 쥐었다. 울음이 치밀어 입술이 떨렸지만 애써 참아냈다. 선생님은 여전히 걱정을 담아 물었다. “계속 속이 안 좋은 거니?” 「가지가지 한다.」 동시에 들리는 음성. 전자는 귀를 통해, 후자는 머리 속으로 직접 들려왔다. 그 치 떨리는 이중성에 페르노크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굳게 쥔 주먹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그럼에도 페르노크는 웃었다. 그래야만 했다.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이 닫히고 그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페르노크는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악, 하악 숨을 뱉어내는 얼굴이 새파랗다. 가슴을 움켜쥔 손을 뻣뻣하게 펴 귀를 막았다. ‘들은 척 해서는 안돼! 내색해서는 안돼!’ 의식하지 못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안돼!’ 마나를 느낀 순간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을 자각하고 본격적인 운용에 들어갔을 때 온 몸의 피가 제멋대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따지면 설명할 수 없지만 확실히 그것을 느꼈다.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은 동안에도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레 확장된 무언가의 영역을 다른 무언가가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과정을. 그것이 엘프가 아니면서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진 자가 가지는 부작용을, 자신이 가진 요정의 피가 억누르는 과정이었음을 아주 훗날에 알게 됐지만, 그때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울 뿐. 몇 번이고 피를 토하고, 또 토했다. 그것은 요정의 피가 자신의 힘을 백분 발휘하기 위해 이질적인 피, 즉 인간의 피를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페르노크는 알지 못했지만 ‘열어 놓은 마음’은 마나와 정령의 기운 등에 감응하는 성질이 있다. 엘프들이 천성적으로 마법을 쉽게 깨우치고 정령을 숨쉬듯 자연스럽게 소환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성질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 둘이었다.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엘프뿐. 그들은 일찍이 속계의 지배자의 총애를 받았던 종족, 등급이 높지도 않으면서 많은 축복과 선물을 받았던 종족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저주와 다를 바 없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열어 놓은 마음’은 엘프만의 전유물이었다. 엘프가 아니면서 그것을 가진 자에게는 여지없이 부작용이 생긴다. 그리고 그 부작용에 의해 그 자는 미쳐버렸다. 세간에는 엘프가 아니면서 그것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미친다로 단축되어 알려져 버렸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에 ‘부작용’이라는 과정이 끼어 있는 것이다. 여태껏 극소수가, 엘프가 아니면서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었다. 그러다 색다른 점을 발견했다. 종족 등급이 파등급 이상이면 미치지 않는다는 것. 먼 훗날에야 알게 됐지만, 그는 요정과 인간의 혼혈이다. 요정은 파 등급 이상의 종족, 인간은 파 등급 이하의 종족. 그는 선택하지 않은 혼혈아. 때문에 미묘한 균형 하에서 ‘열어 놓은 마음’의 부작용은 발동되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요정을 선택한다면 그대로 발동하지 않을 것이요, 인간을 선택한다면 발동되어 미치겠지만……. 그러나 균형이 깨졌다. 페르노크가 마나를 느꼈을 때부터 서서히 흔들렸던 그것은 운용을 하면서 완전히 박살났다. 페르노크의 운용력, 마나에 대한 감응력을 타고 급격히 확장된 ‘열어 놓은 마음’의 기세에 그 부작용까지 덩달아 커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페르노크의 온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살기 위해 발악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었던 시야가 흐릿해졌고, 그 다음에는 새하얘졌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보는 스승님이 보였다. “스, 스승님…….” “깼구나.” 따뜻하고 커다란 손바닥이 이마를 덮었다. 기분 좋은 촉감에 눈을 감는데 머리 속으로 음성이 직접 울려들었다. 「재수 없는 새끼.」 번쩍 눈을 떠 스승님을 봤지만 그는 여전히 걱정스런 눈길로 자상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것이리라 생각하며 안도했다. 하긴 언제나 어린 나이에 고생한다며 다독여 주던 스승님인데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가족의 이야기를 하며 그리워할 때면 일년만 고생하라고 자신이 좋아하는 군것질 거리를 쥐어주기도 했다. 잠시라도 그 런 환청에 속아 스승님을 의심했다는 게 죄송스러워지려는 찰나였다. 「애송이가 한번에 운용을 해내? 천재라 불리는 나조차도 일주일은 걸렸는데.」 화, 환청이다. 이건 절대 환청이다. 페르노크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눈을 치켜뜨는 그에게 스승님은 여전히 자애로운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니?” “아……. 스, 스승님께서는 운용을 일주일 만에 해내셨다고 했지요?” “그래. 최단기록이었지. 이번에 네가 깼지만 말이다. 자랑스럽구나. 나의 제자가 출람(出藍)을 해냈지 않니.” 그 말에 페르노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듯이 일그러져 있던 눈에 물기가 어리더니 결국 떨어져 내렸다. 고막을 통해 들리는 그 음성과, 머리 속으로 직접 울리는 음성의 극명한 괴리감과 극단적인 이중성에 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제 겨우 14살 된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두려운 현실이었다. 「잘난척하고 싶은 거냐? 칭찬 듣고 싶은 거냐? 날 얕보는 거냐? 이 빌어먹을 애송이가!」 “아, 아니에요!” 간신히 입을 열어 부정했지만, 스승은 상냥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겸손해 할 것 없다. 내가 보증하건데, 너는 천재야. 벌써 너의 앞날이 기대되는 구나.” 「머리 좋군. 그쪽에서 겸손 떨면 이쪽에는 다시 칭찬하는 수밖에 없지. 과연 천재님이셔.」 손이 덜덜 떨렸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치아가 딱딱 부딪쳤다.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아악―!” 아무리 어려도 알 수 있었다. 들통 나면 안 된다. 알려지면 안 된다. 사람의 속은 어둡다.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모양의 가면으로 숨기는 것이다. 그 가면 밑은 결코 알아서는 안 되는데 그만 알고 말았다. 들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두운 그것이, 차가운 그것이, 음흉하고 타산적이며 이중적인 그것들이 모두. 욕하고 시기하고 때때로는 저주까지 하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일년을 지냈다. 일부러 잘못된 운용법을 알려주어, 페르노크를 망가뜨리려는 선배들도 많았다. 그것을 ‘들은’ 페르노크가 무사히 함정을 빠져나올 때마다 그들의 적의는 거세졌다. 온통 적뿐이었다. 그도 아니면 철저한 무관심뿐. 그러는 동안 페르노크는 인간이 두려워졌다. 내성적이었지만 밝고 순수했던 소년을 망가뜨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학교로 돌아왔다. 이쪽에서도 상당히 관심집중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마법 길드에 비하면 약한 편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시시껄렁한 호기심으로 볼 뿐이었으니까 한결 나았다. 고깝게 보는 이도 조금 있긴 했지만 마법사들의 적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머리 속에 울리는 소리에도 그 강약이 있었다. 그것이 맹렬한 감정일수록 더 강하게, 고통스럽게 박혀든다. 저들의 약한 관심 따위는 웅웅거리며 흘러들어왔다 흘러나갈 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몇 달 후면 집에 갈 수 있다. 카한 형님도 뵐 수 있고, 로레라자가 만들어 주는 달콤한 군것질거리도 실컷 먹을 수 있다. 조용한 집안에서 바람을 만낏 하며 책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께 졸라보자. 이므르에 있기 싫다고. 페르노크가 뭘 하듯 관심 없었던 어머니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할 게 뻔하다. 이때만큼은 어머니의 무관심이 고맙게 느껴진다. 몇 달 후의 일들을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소리’에 괴로울 때면 주문처럼 읊어본다. 한결 두통이 가라앉는다. 희망이란 것은 이렇듯 큰 힘이 있는 모양이다. “다들 들어 알겠지만, 이번에 복귀한 페르노크군이다. 다들 잘 대해주도록.” 그렇게 소개된 페르노크는 은색의 독특한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외향임에도 상당한 미인임을 알 수 있는 소년. 환하게 웃으면 귀여울 것 같은데, 새파랗게 질려서 식은땀을 흘려대고 있다. 긴장이라도 한 것일까? “페르노크군, 인사해야지?”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키며 페르노크는 한번 허리를 숙였다 폈다. 입을 열었다가는 비명을 질러버릴 것만 같았다. 완벽한 관심집중. 오십 여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떠들어대는 ‘소리’가 머리 속에 울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어지러웠다. 끔찍한 두통 속에서 간절히 소망했다. ‘나를 보지 마!’ 나를 보지 마! 나에게 관심 가지지마! 나를 내버려 둬! 나를……! 동시에 그와 상반된 또 다른 소망이 은밀하지만 확연히 존재했다. 본인은 모를 정도로 은밀하지만, 타인을 알아 볼 정도로 확연한 소망. ‘나를 봐줘’……. ============================================================================ 최악의 환경에서 생긴 최악의 능력. 컨트롤 할 수 없는 능력은 '병'일 뿐이지요. [연재] 아해의 장-368 구석에 자리 잡은 페르노크는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홀로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이 편했다. 누군가의 소리가 괴로웠다. 하지만 외로웠다. ‘몇 달만 있으면 돼. 몇 달만 있으면 돼.’ 그때가 되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조용한 자신의 거처에서 쉴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외로움도 끝이다. 자신이 자처한 배척도 자신이 만들어낸 경계선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몇 달만 있으면……. “페르노크군. 길드에서 편지가 왔네.” 편지는 일방적인 통보장이었다. 그 내용은 첫 번째 벽을 넘기 전까지는 방학 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야 지금 이 시기가 가장 많이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때라는 둥을 늘여 놨지만 페르노크는 집 이야기를 할 때면 환해지던 자신을 보며 그들이 냈던 ‘소리’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 끈적끈적한 증오에 몸서리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보복할 줄은……. 침대에 쓰러져 얼마동안 울었던가. 잔뜩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토록 안심되던 적막이 지금은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혀, 형님…….” 이가 딱딱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꽉 껴안았다. 그 걸로는 따뜻해지지 않았다. “형님…….”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은데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아파왔다. 아무리 자신을 껴안아 달래도 달래지지 않았다. 무서웠다. 이 적막이, 이 고독이, 그 적의가, 그 소리가. 울음이 흘러넘쳤다. 향수는 날이 갈수록 진해져, 그 갈망 속에 목이 마를 지경인데 길이 막혔다. 팔다리에 쇠사슬에 칭칭 감겨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못 견디게 카한형님이 보고 싶었다. 로레라자가 해주는 달콤한 간식이 먹고 싶었다. “나 좀 구해줘요. 도와줘요.” 그 쥐어짠 속삭임은 그 홀로 있는 방안에 크게 울렸다. 허무하게, 부질없이. 복귀한지 제법 많은 시일이 흘렀음에도 페르노크를 향한 관심은 분산되지 않았다. 그런 만큼 페르노크는 고통스러워했고, 언제나 불안해했다. 들켜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민감하게 살피고, 자신의 태도 하나하나에 주위를 기했다. 가끔 악의적인 소리가 들려와 흠칫하기도 했지만 애써 못들은 척 외면하고 또 외면했다. 그렇게 간신히 버텨나가던 페르노크에게 누군가가 거친 음성으로 물어왔다. “네가 페르노크냐?” 그 소년은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뜻밖에도 그는 페르노크를 동정하고 있었다. 카르민 중 하나이자 당대 세력가인 오르세만 가의 가주 계승권자인 페르노크를. 벌써부터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페르노크를. 세간에서 말하는 온갖 부귀영화에다 건장한 신체, 상당한 외모까지 가지고 태어난 페르노크를 말이다. 처음으로 ‘듣는’ 소리에 조금 기대를 걸고 고개를 들었다. 앞의 소년은 그보다 약간 작은 키에 빼빼마른 몸을 가진 아이였다. 게다가 인상도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고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다분히 풍겼다. 그럼에도 페르노크는 자신이 들은 소리에 확신을 가지고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막상 자신을 본 소년은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여태껏 느꼈던 증오 중 가장 현실적인 증오. 날카롭게 피부를 찌르는 살기, 생생하게 전해오는 잔인한 충동. 방금까지 호의적이었던 소리의 급변에 두렵기에 앞서 당황해 할 동안, 소년은 차갑게 웃으며 돌아섰다. 페르노크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적의를 품은 자에게 손을 뻗었다. 비록 그것이 소년에게 닿지 않고 허공에서 허물어졌다고는 하나, 그것은 페르노크가 소리를 듣게 된 후에 처음으로 보인 미련이었다. ‘난 네 동생과 상관없는데……. 너희가 말하는 모든 것이 무엇인데? 이 끔찍한 소리만 없앨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있어. 무슨 권리로 스스로를 동정하냐니? 그래도 넌 동정해줬잖아. 다가와 줬잖아.’ 처음으로 들은 ‘소리’였다. 자신을 향한 동정. 그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따뜻했다. 그만큼 지금의 저 적의가 어느 때보다도 시리고 아팠다. ‘내 자신이 비참하지만 그래도 비굴한 적은 없었어. 난 비굴한 짓 같은 거 하지 않았어.’ 그저 두려웠을 뿐이다. 날카롭게 찌르는 악의들이, 그것을 들을 때마다 몰려오는 지독한 두통이, 무엇보다 그들을 신뢰하고 좋아했던 자신의 마음이 하나씩, 하나씩 확실하게 파괴되어 가는 것이. ‘난 그래도 매달리지 않았어. 변명하지 않았어.’ 매달릴 수 없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지. 뭐라고 매달리는가? 바로 눈앞에서는 호의를 보이며 상냥하게 대해주는 그들에게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매달릴까? 변명은 또 어떻게 하지? 입으로는 다른 말을 뱉어내는 그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할까?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되지? 겉으로는 좋아한다고, 다 안다고 웃어 보이는 그들의 악의를 느끼는 게 다일 테지. ‘난 겁쟁이지만 그래도…….’ -쾅! 교실 문이 닫히며 소년의 모습은 사라졌다. 페르노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자신을 억지로 잡아끄는 손아귀도 없었으니까. 그 소년의 이름은 제그. 그와의 악연은 그때부터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치유, 내가 바라는 것은 복귀의 힘. 리*커*버*리*” 운용을 방해하는 ‘소리’가 없는 곳에서 처음으로 완성한 치유마법. 겨우 완성했음에도 페르노크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았다. 맑은데도 비가 내렸다. 새삼 깨닫고 만다. 자신이 가지는 마법적 재능을. 많은 마법사들이 좌절하는 치유마법의 벽을 페르노크는 고작 2년 만에 깼다. 그에게 있어서는 일각이 여삼추와 같은, 힘겹고 지겨운 나날이었지만, 타인의 눈에는 ‘고작’인 시간. 이제는 주인의 허락 없이 멋대로 흘러버리는 눈물이 빗물과 섞여들었다. “돌아갈 수 있어.” 이제야 겨우…….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 것일까. 제그에게 걷어차였던 가슴이 욱신거려왔다. 페르노크는 아픈 것이 싫었다. 마조히스트가 아닌 이상에야 누가 아픈 것을 좋아하겠냐만은, 페르노크는 유독 싫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생체기가 나면 신관에게 달려갔다. 그럴수록 제그가 가하는 폭력은 거세졌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프면 소리가 더 잘 들리니까……. 더 선명하게, 더 강하게, 더 깊이. 그러니까 어제 방에서 맞은 거라 해도 지금은 상처하나 없이 말짱한데……. 자꾸만 욱신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왜, 왜 이러지? 곧 형님을 뵐 수 있는데…….” 반쯤 뜬 눈에, 멍하니 벌린 입 속에, 무방비하게 놓인 온 몸에 빗물이 치고 들어와도 느껴지는 것 뜨거운 눈물의 온감뿐. 마법 길드에 들어가고 1년, 학교에 복귀하고 2년, 그러나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13살에 수도로 왔으니, 대략 4년만의 귀향. 그런데 왜 기쁘지 않은 거지? “뭐가 불안한거야……?” 겨우 2년이란 시간이 들었다. ‘희대의 천재’라는 별칭은 너무도 멀리 퍼져버려서 이제는 도저히 마법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상황에서 첫번째 벽을 고작 2년 만에 깼다는 게 알려진다면? 이제 돌아간다 해도 마법에서 멀어지는 길은 요원하게 될게 뻔하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 형의 얼굴이 흐릿해지는 것이 숨 막히는 고통이다. 오직 그곳에만 의지하고 있는데, 그것마저 흔들리고 옅어져 간다. 돌아가야 한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괜찮을 거야. 난 카르민이니까. 저들도 함부로 나서지는 못할 거야.” 첩의 자식조차 아닌지라, 가주 계승권자인데도 실세가 없는 카한 형님께 방패막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페르노크 자신도 가주 계승권자 중 하나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애써 자신을 달래며 발을 떼었다. 오늘은 길드에 가는 날이었다. 경과보고를……해야겠지. 겸사겸사 그들의 맹렬한 저주를 들어주기도 해야 하고. ‘내가 마나를 못 느끼게 된다면 좋을 텐데.’ 그럼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다. 마나를 운용한 순간부터 이지경이 되었으니까, 마나를 못 느끼게 된다면……. 그러면 마법 역시 쓸 수 없게 된다. 마법사들의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다. ‘희대의 천재’라는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있어.” 삼박한 얼굴로 선배 마법사가 말했다. 막 자신의 수위를 보고하고 오는 참이었던 페르노크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선배는 누구보다도 어두운 증오를 내뱉고 있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그 악의에 눈을 굳게 닫았다 떴다. “뭔데요?” 순수한 호기심인 것처럼, 약간 멍청이같이, 아주 조금 오만하게. 그렇게 말하면,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흥분해서 지식을 늘여 놨다. ‘희대의 천재’가 모르는 무언가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 우월감에 취해서. 혹은 그 지식으로 인해 페르노크가 잘못되기를 기대하며. 그리고 그것을 뻔히 들으면서 페르노크는 아픈 가슴을 움켜쥐고 바보 같은 웃음을 지어야 했다. 지금 만해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오지 않는가. 「너도 내 꼴이 돼야 해.」 “부여 마법. 그걸 쓰면 몇 년간은 마법을 못 쓰지. 나처럼 말이야.” 「운이 좋으면 몇 년, 재수 없으면 평생이다. 나처럼 말이지. 너도 내 꼴이 돼봐. 잘난 도령.」 이 선배가 부여 마법을 실험하다 마법을 못 쓰게 됐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페르노크가 듣고 싶었던 것은, 이제는 금서가 되어버린 부여 마법서가 어디에 있는 가였다. “그렇게 위험한 마법서라면 이제는 구할 수 없겠네요? 파기 되었을 테니.” “파기라니! 그 마법을 알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데! 언제고 보완해서 완성시켜야지!”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그 마법이 궁금하다면 마법서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 그러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시전 해봐. 그 알량한 천재성을 믿고 시전 해봐. 그리고 나처럼 좌절해. 절망해. 크크크!」 페르노크는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사람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자신을 싫어하냐고……. 그리고 마법을 못 쓰게 되면 좋아해 줄 거냐고. 정말 간신히 갖게 된 귀가의 기회. 제그에게 열쇠를 준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제 마법을 못 쓰게 될 테니까. 들뜬 얼굴로 자신을 데리러 올 마차를 기다렸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지금만큼은 아무렇지 않았다. ‘카한 형님이 오지 않을까? 얼마나 변하셨을까? 키는 더 크셨을까?’ 길드에 들어가서 한번, 학교로 돌아가서 한번. 딱 두 번 편지를 썼었다. 길드에서는 아예 보내는 것 자체를 못했다. 대신 부쳐주겠다던 선배가 길가에서 찢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쓰는 것 자체를 포기했다. 학교에서는 보내기는 보낼 수 있었다. 단지, 답장이 돌아오지 못했다. 기숙사로 온 편지를 방으로 배달하는 임원이 도중에 없애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그만큼 단절된 생활, 공간, 시간 속에서 버텨왔다. 그래도 희망을 잃은 적은 없었다. 희망마저 잃으면 끝장이라는 것을 무심중에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만이구나, 페르.” 갑작스런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불쑥 큰 키, 단단하게 다져진 강인한 몸, 마주보는 자로 하여금 주눅 들게 하는 박력이 있는 남자가 페르노크를 내려보고 있었다. 외향은 많이 변했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테밀형님…….’ 페르노크는 두려웠다. 이렇게 두려운 적은, ‘소리’를 듣고 나서 처음이었다. 그것은 테밀시아라는 남자가 뿜어내는 박력 때문도, 그 강렬한 눈동자 때문도, 강해보이는 큰 몸 때문도 아니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페르노크를 향한 소리가 가장 강하게 들려왔다지만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것을 향한 소리라 해도 약하게 들려왔었다. 아무 소리도 안내는 사람은 여태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테밀시아 형님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예리한 금안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읽혀지고 있는 듯한 오싹한 느낌. ‘어째서?’ 처음 느끼는 ‘정적’에 페르노크가 주춤할 때, 테밀시아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페르노크님.”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페르노크는 또 한번 두려움을 느꼈다. ‘이, 이 사람도 들리지 않아!?’ 웃음 띤 남색 눈동자와 단정한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느껴지는 청년이었다. 그는 테밀시아의 강렬함과는 상반된 의미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따져보면 여자 같은 외모도 아니고, 테밀시아와 비슷한 장신에 날렵한 몸에 적지 않은 남성미가 있음에도 아름답다 느껴졌다. 잠시 그렇게 뜯어보다가 그가 테밀시아 형님의 심복인 뮤비라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이 남자도 몰라보게 변했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호감을 가지기 충분한 미남자들이었으나, 페르노크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처음 겪는 현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자신의 능력이 사라진 걸까? 하지만 이 둘 외에 저기 있는 마부의 소리를 약하기는 하지만 똑똑히 들리고 있다. 왜 이 둘만 읽을 수 없는 거지?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건가? 그렇다 해도 왜 마음을 숨기고 있지? 페르노크의 능력을 알 리 없는데. “타시지요.” 공손한 어조, 태도였으나 페르노크는 혼란했다. 그러다 테밀시아를 올려보았다. 무뚝뚝했고 카한세올처럼 다정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처럼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형이었다.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무서웠던 적은 없는데, 지금은 너무 무섭다.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테밀시아는 동생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잠시 시선을 주다가 짧게 말했다. “타라.” “…….”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야 이므르를 떠날 수 있는데, 이정도 기현상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페르노크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올라탔다. 곧 두 사람이 탔고 마차는 출발했다. 그것이 4년 만에 만나는 가족, 4년만의 탈출, 4년만의 귀가였다. 혼자 있을 때 외에는 느끼지 못했던 고요함 속에서 페르노크는 당혹감과 긴장감에 시달렸다.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만큼 불안했다. “안색이 안 좋구나?” 불쑥 말한 목소리는 무뚝뚝하지만 걱정이 배여 있었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야 길드에서도 다정한 눈으로 부드러운 눈동자로 따뜻한 목소리로 염려하고 칭찬하던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그만큼 이 큰형의 진심이 의심스러웠다. 진짜일까? 지금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욕을 할까? 정말 걱정을 하는 걸까? 왜 소리가 안 들리는 거지?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신가요, 페르노크님?” 편안하게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페르노크는 고개를 저으며 한층 몸을 웅크렸다. 이 남자의 소리도 들리지 않아. 진심이 들리지 않아. 생각할 수록 야속한 현실이다. 소리 때문에 타인을 두려워했고 그것이 들리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만큼 소리가 들리지 않는 타인이 두렵다. 그의 진심을 들을 수 없기에 더욱 긴장하고 멀리하게 된다. 진심이 뭐냐며 머릿속이 난동질치고, 익숙지 않은 ‘공존하는 정적’에 가슴이 비명을 지른다. 페르노크는 힘들게 대화거리를 찾아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정적에 짓눌려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테, 테밀 형님께서는 휴첼 단장이 되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고맙다.” 벌써 삼년 전 일이니 엄청 늦은 축하인사였다. 돌아온 것은 짧고 무뚝뚝한 답변이었지만 페르노크는 그것에 의존하여 물었다. 이므르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자신 역시 줄곧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셨다는 소문도 들었고요. 정말인가요?” “일단은.” 역시 짧고 무뚝뚝한 답. 페르노크는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지쳤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의 대화는 생각보다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들려오는 목소리도 무뚝뚝하기만 했고 말이다. ‘내가 뭘 잘못 물어본 걸까?’ 한참 망설이다가 눈을 올려 테밀시아를 봤을 때, 그는 뮤비라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약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씁쓸하고 아파 보이면서도 어딘가 행복한 듯 그리운 미소였다. 그 강렬하면서도 고요한 눈동자가 그려내는 진한 고통과 기쁨. 이질적인 그것이 완벽하게 녹아든 그것은 차마 마주볼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으며, 또 아름다웠다. 페르노크는 안절부절 못하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강했던 형님이 아닌가.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혹된 수련을 앓는 소리 하나 없이 해내던 형님이 아닌가. 그런 형님이 어째서 저런 얼굴을 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타인의 행동에 신경을 쓰는 건 오랜만이다. 그동안은 행동 따위 볼 것도 없이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다시 조심스럽게 눈을 올려, 이번에는 뮤비라를 보았다. 서류를 뒤척이던 그는 잠시 테밀시아 쪽을 돌아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좀 전에 페르노크에게 지어보였던 부드러운 미소가 아닌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를 담아내고 있는 고요한 듯 깊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어딘가 익숙해 곰곰이 생각을 더듬던 페르노크는 아, 탄성과 함께 숨을 삼켰다. “왜 그러지?” “아, 아니요.” 테밀시아의 눈동자다! 뿜어내는 기운은 확연히 다르지만, 그 고요함이며 깊음은 똑같다. 오랜 세월을 함께 있으면 닮는 법인 걸까? 그런 것이라 치부하기에는 뭔가 다르다. 게다가 페르노크에게는 달리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똑같은 눈동자를 한 저 둘의 마음이 똑같이 들려오지 않는 다는 것. ‘이 능력이 약해진 게 아니야. 이 두 사람이 내 능력을 뛰어넘은 거다!’ 그런 ‘힘’을 그들의 눈동자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는지는 페르노크도 몰랐다. 그저 확실한 느낌이 뇌리에 꽂혔을 뿐이다. 육감이나 직감이라 해도 좋다. 시선을 느낀 뮤비라가 페르노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두려웠다.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이질감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고 말았다는 어렴풋한 자각, 자신의 능력을 무의식중에 차단할 정도로 강한 무언가가 있다는 확실한 느낌.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가슴을 움켜쥐었다. ‘카한 형님.’ 보고 싶다. 이 두 사람은 역시 무섭다. 무서워 견딜 수가 없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질감도 두렵지만, 이 둘이 뿜어내는 은밀하면서 강렬한 기운이 특히 두렵다. 페르노크는 본래 마나에 민감한 소년이었다. 그것은 단 한번의 명상만으로 마나를 느껴버렸을 정도의 특출 난 재능. 그 재능이 본능적으로 알게 해주고 있었다. 이 둘의 막강함과 그에 수반하는 위험을. ‘카한 형님.’ 괜찮다. 조금만 견디면 카한 형님을 뵐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이 몰려들었던 두려움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생각할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 테밀 형님은 마스터다! 마스터라고 읽을 수 없는 거다! ……그럼 뮤비라는?’ 뮤비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별로 없지만 그가 검을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문관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런 뮤비라가 테밀시아와 똑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눈을 감고 천천히 기운을 더듬어 보았다. 믿겨지지 않았지만 느껴졌다. ‘뮤비라 쪽이 조금 강하다!?’ 페르노크는 다시 몸을 움츠렸다. 목안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카한 형님. 카한 형님. 카한 형님…….’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말았다. 그런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무섭다. 눈치채여선 안된다. 자신이 알고 말았다는 것을 눈치채여선 안된다. ‘살해당할 지도 몰라.’ 새파랗게 질려서 헐떡였다. 여태껏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자는 꽤 있었다. 그때면 달갑지 않은, 아니 아예 저주스러운 이 능력이 쓸모가 있었다. 독이 들었으면 안 먹었고, 함정이 쳐져 있으면 다가가지 않았고, 자객이 기다리고 있으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뮤비라의 능력은 자신의 능력을 훨씬 웃돈다. 그래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가 죽이려 들면 피할 재간이 없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는 해도 뮤비라가 죽음으로 입막음하려 할리 없다는 것을. 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뮤비라는 강하다. 그리고 차갑다! 그 냉정함은 테밀시아의 것을 훨씬 웃돈다. 그는 맹목적적이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바로만 가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만 한다. 위험하다, 이 남자는. 페르노크는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 필사적으로 그 그리운 이름에 매달렸다. ‘카한 형님.’ 7년 전부터 테밀시아가 다스리고 있는 오르세만 가의 영지는 매우 활발한 곳이었다. 상인들의 활기와 농민들의 생기와 노인의 여유와 아낙의 수다와 아이의 웃음이 흐르는 곳. 청렴한 정치가이자 인자한 영주라 칭송이 자자한 테밀시아의 영지답게 합리적인 세율, 잘 닦여진 도로, 따뜻한 벽돌집, 안정된 치안, 깔끔하게 운영되는 복지 시설. 그 번성은 테밀시아 혼자서 이룩한 것이 아니었다. 현 가주이자 그의 아버지인 카스야나 역시 현명하며 청렴한 영주였으며, 지금은 은둔중인 숙부는 선대 휴첼 마스터로서 숱한 공을 세운 기사였다. 영지의 윤택함과 정돈된 건물, 도로, 시설들은 현 가주의 손으로 이룩된 것이요, 질 나쁜 세력의 단절, 안정된 치안, 강한 군사력은 선대 휴첼마스터의 손으로 이룩된 것이다. 그리고 테밀시아는 두 가지 모두를 물려받았다. 어찌 어깨가 무겁다하지 않겠냐만은, 그는 당연한 듯이 모든 것을 해내나갔다. 그 강함, 그 유능함, 그 현명함. 페르노크는 쓰게 웃었다. 테밀시아에 대한 칭송은 이므르에서 지겹도록 들었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녀석들조차도 테밀시아를 동경하고 있었다. 동시에 극명하게 비교되는 자신을 보며 다들 비웃었었다.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지러웠다. 큰 형과 뮤비라와 함께한 며칠간의 일정동안 페르노크를 극한 긴장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토해 버릴 듯한 매스꺼움이 동반된 긴장감이었다. 끝없는 미로와 답 없는 수수께끼에 시달리는 듯한 막연함과 불안함 속에서 금방이라도 끊길 것만 같은 의식을 다잡아야 했다. “도착했습니다.”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시야 저편에 뮤비라가 보였다. 그의 어깨 너머로, 마중 나온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테밀시아가 있었다. “페르노크님?”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다 겨우 일어섰다. 숨을 뱉어낼 때마다 뜨거운 기운이 밀려들어왔다. 윈디의 시원한 바람에도 열기는 가셔지지 않았다.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핥으며 마차에 내려왔다. 순식간에 그를 덮치는 소리들에 휘청하며 마차의 문을 집었다. 며칠간의 긴장된 정적에 비하면 덜한 편이지만, 역시 고통스러운 소음들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간신히 몸을 지탱한 페르노크는 뮤비라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분명 카한 형님이 나와 계실 것이다. 지금도 들리고 있지 않은가. 「페르……페르…….」 안타까운 듯이, 그리운 듯이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고 있지 않은가. 기대감으로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 울렸다. 눈물나도록 그리운 그 소리에 의지하여 카한세올을 찾을 무렵, 쌀쌀맞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혀왔다. “애물단지 데리고 왔다며?” 주춤하며 하인들이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 갈라진 틈새로 한 남자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비죽거리며 웃는 그 모습에 페르노크는 할 말을 잃었다. 뮤비라처럼 늘 상냥한 웃음을 짓던 카한 형님의 변모 때문일 수도 있었고, 다정했던 그가 내뱉은 그 차가운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면……. ‘어째서…….’ 그토록 그리던 형님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그 어느 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어째서…….’ 시야가 흔들린다 느꼈던 그 순간, 페르노크의 손목을 움켜쥐는 강한 힘이 있었다. 카한세올이었다. 그는 대뜸 다른 손으로 페르노크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열이 있잖아!” 「안색도 안 좋아. 도대체 이렇게 될 때까지 테밀형님은 뭘 한거야? 곁에 있었으면서 신경을 써줬어야지. 4년만이라 긴장하고 있었을 텐데! 역시 내가 갔어야 했 ……쿡쿡. 내가 가서 뭘 어쩔 수 있었다는 거지? 이렇게 눈앞에 있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주고 있는데. 쿡쿡.」 퉁명한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걱정과 슬픔, 그리고 자괴에 젖은 소리.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려는 페르노크의 어깨를 누군가가 강하게 잡아끌었다. 테밀시아였다. 카한세올과 마찬가지로 이마를 짚어본 그는 집사에게 주치의를 불러오라 했다. 그러면서 페르노크를 다그쳤다. “언제부터 열이 있었던 거냐!” 그 강한 기세에 페르노크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가 겨우 답했다. 가뜩이나 카한세올의 까닭을 알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하고 있던 참이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마차……에서…….” 옆에서 카한세올이 웃는 것이 보였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싸늘한 웃음. “바보는 고칠 수 없다더니 맞는 말이군, 고작해야 윈디 따위에 열이 나다니.” 그리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페르노크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그런 카한세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관심했던 어머니대신,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주었던 카한세올의 홀대와 조소,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자학과 죄책감 어린 소리. 겨우 돌아온 4년 만에 돌아온 집은 타인의 집만 같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다. 힘들게 돌아왔는데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열은 점점 심해졌다. 그토록 고대했던 카한세올과의 재회는 끔찍하게 끝나고, 그 뒤로 아직까지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카한세올은 왔었을 지도 모른다. 고열로 의식이 희미했기에 못 알아 본 것일 수도 있다.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었다. 온 몸이 무겁고 나른하고 뻐근했다. 목까지 말라붙어 신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땀 때문에 달라붙은 옷은 불쾌했다.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모든 기력을 소진해 버렸다. 테밀시아가 몇 번인가 왔다 갔지만, 한가하게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몸이 두 쪽이 나도 감당 못할 정도의 사무가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틈틈이 짬을 내 와서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정리해주고 이마와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잠시 지켜보다가 가곤 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그 다정함이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애타게 그리워했던 카한세올의 이해할 수 없는 이중적인 모습에 힘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역시 카한세올의 부드러운 웃음이 보고 싶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쓰다듬어주는 손바닥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괴롭도록 그리웠던 혈육의 품에서 맘껏 어리광부리고 하소연하고 투정부리고 울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테밀시아가 수도로 간 이 순간이 기회…….” “하지만 아픈 애를…….” “이 어미의 말을 안들을 거…….” “꼭 이래야…….” “카한!” “…….” 귀가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물 속에서 잠겨 있는 듯이 번져서 들렸다. 도려낼 듯한 적의는 비명과 같은 고함을 질렀고 깊은 고뇌와 진한 고통에 절어 있는 음성은 결국 침묵했다. 페르노크는 혼탁한 의식 너머로 그것을 느꼈으나 혼란 속에 묻혀 제대로 깨닫지는 못했다. 그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점점 아파지는 볼의 통증뿐이었다. -찰싹. -찰싹! 힘들게 눈을 뜨자 차가운 얼굴에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둘째형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괴로운 눈을 한 채로……. 「페르…….」 “카한 형?” 카한세올은 답 없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페르노크를 침대에서 끌어내렸다. 가뜩이나 열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던 페르노크는 형편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페르…….」 안타깝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는 다정했던 옛날 그대로인데, 어째서 저렇게 차가운 얼굴을 할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억지로 감싸는 페르노크를 카한세올은 냅다 걷어찼다. “감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네까짓 게 감히 나를 ‘카한’이라 칭하다니! 네까짓 게!” 「아니야. 아니야. 이게 아니야!」 원인을 알 수 없는 구타가 계속 이어졌다. 입가에서 계속 튀어나오는 욕설과는 달리 절규하는 그 ‘소리’는 페르노크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제발! 싫어! 페르…….」 카한세올의, 누구에게인지 모를 그 절규와 거부와 애원. 그 처절함에 얽매여 꼼짝도 못하고 있던 페르노크의 귀에 또 다른 소리가 슬며시 비집고 들어왔다. 그 독한 악의는 길드 마법사들의 그것과 맞먹을 정도로 지독했다. 「더 쳐! 더 쳐! 병신을 만들어 버려! 더 치란 말이야!」 「페르……. 도망쳐. 나한테서 도망쳐. 소리 질러. 사람을 불러. 제발 나를 막아! 페르!」 “으……!” 그 필사적인 애원에, 몸을 웅크리고 맞던 페르노크는 찢겨진 입술을 열고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신음소리조차 잘 나와 주지 않았다. 「더 치란 말이야! 더! 더!」 “으……! 으아아악―!” 마침내 비명이 나와 주자 카한세올은 뭐라 욕을 하며 가버렸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안도하고 또 안도하며, 스스로를 저주하고 있는지 페르노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어째서! 형편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내려가는 카한세올의 모습을 보고 발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어두워져 가는 의식 속에 징그러운 악의가 쑤셔졌다. 「마음 약한 것! 고작 이 정도라니! 병신을 만들었어야지! 마에서 밀려날 정도의 병신으로! 쇼크로 미치게 만들었어야지!」 ‘누……구?’ 억지로, 간신히 의식을 다잡아 힘들게 옆을 보았다. 페르노크를 침대로 다시 이끌고 리커버리 포션을 꼼꼼히 발라 치료해주고 있는 자상한 손길의 주인. “로……?” “흑흑. 어쩜 좋아요. 어쩜 좋아요.” 눈물을 글렁이며 떨리는 손으로 옷을 갈아입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다정하고 상냥하고 아름다웠지만……. 「포션을 바르니 거의 나아버렸잖아! 고작 이 정도라니! 역시 내가 나서야 되겠군!」 정말로 아름다웠지만……. “음식을 가져와야겠어요. 이럴 때일수록 식사를 잘 하셔야지요. 여기 사탕 두고 갈게요, 도련님.” “로레라자……?” “네?” 페르노크는 멍하니 로레라자를 올려다보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버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도련님?” “…….” 멍하니 있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로레라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금방 올게요, 도련님.” 그리고 나가버렸다. 홀로 남은 페르노크는 무의미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카한세올과 로레라자 사이에 뭔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카한세올로 하여금 원치 않더라도 페르노크를 때리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그것은 페르노크에게 편안한 보금자리를 앗아갔다. 더 이상 이 곳은 ‘집’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어쩌면 좋을까? 이므르로 돌아가는 것, 마법 길드에 계속 속해야만 하는 것은 싫다. 그보다 카한세올에게 차가운 조롱을 당하는 것이나 구타를 당하는 것이 더 싫다. 그러나 가장 싫은 것은 카한세올의 절규를 듣는 것이다. 그의 절규는 가슴을 꿰뚫는 통한이다. 안타까워 귀를 틀어막고 그만하라고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그것은 모순적이게도 현재 페르노크에게 있어 유일한 행복이기도 했다. 그 절규가 존재하는 한, 카한세올은 페르노크를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페르노크의 인생이 이토록 틀어져 버렸을까? 페르노크는 문득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길드에서 빼돌린 마법서가 있었다. 그에게서 마법이란 것을 앗아가 줄 고마운 마법이.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있으면…….” 마법서를 품에 안고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실은 알고 있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서, 더 이상 희대의 천재가 아니게 된다 해도 마법사들은 그저 고소해 할뿐이란 것을.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다 해도 자신이 사람들과 가까워 질 수 없다는 것을. ‘소리’가 들리지 않는 테밀시아와 뮤비라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처럼. 아니, 더 두려워하고 멀리했던 것처럼. ……이미 알고 말았으니까 .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의 악의를, 상냥하게 웃어주는 사람들의 조소를. 그 치 떨리게 뚜렷한 이중성을 똑똑히 알고야 말았으니까. “카한 형님…….” 카한세올은 아직도 페르노크의 정신적 지주였다. 비록 욕하고 때렸다 해도 카한세올은 페르노크를 위해 울고 애원하고 절규했다. 그것은 페르노크가 들어온 소리 중에서 가장 아프고 슬프면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소리였다. “마법사들의 호의도,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도 불가능할 테지만 이것 하나는 가능해.” 그래, 카한세올만큼은 되찾을 수 있다. 로레라자와 카한세올의 무언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로레라자는 카한세올이 ‘마’가 되길 원하고 있다. 페르노크에게는 지도력도, 통찰력도 대범함도 없다. 그런 그가 마가 된 것은 ‘희대의 천재’라 불리게 됐기 때문이다. 그가 인정받은 재능은 결국 마법뿐인 것이다. 그러니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면 가주 계승권도 물려지게 될 것이 뻔하다. 그 후에 카한세올이 ‘마’로 승급하게 되면…… 그를 강압하던 로레라자의 소망이 이뤄지게 되는 것이니 더 이상 카한세올이 자신을 멀리 대할 필요도 없어지지 않은가. “그걸로 충분해.”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단절된 생활을 하게 된다 해도, 카한세올만큼은 믿을 수 있다. 마음껏 그를 좋아하고 따르고, 어리광부릴 수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믿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많은 것이니까. 그 후 카한세올은 종종 와서 페르노크를 괴롭혔다. 그러나 페르노크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든 오지 않으려고 이 구실 저 구실을 만들어대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있었다는 것을. 페르노크는 로레라자를 멀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힘들게 부탁한 끝에, 본래 같이 지냈던 있었던 로레라자는 본관으로 옮겨갔고 거처에 혼자 남게 됐다. 그녀가 하루에 한두 번 간식을 가지러 올 때면 지하에 틀어박혀, 관심도 없는 마법서적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외롭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미 혼자 있는 걸 좋아하게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페르노크에게 ‘희대의 천재’라는 별칭이 붙여진 날 만들었다는 지하는, 마법 연구를 하기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기본 이론서나 실용적인 학술서나 실험도구, 실험재료 따위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바닥 전체를 차지하는 거대한 마법진이 최하 7써클까지 커버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길드 내의 연구실에 비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딴건 다 제쳐놓더라도 이 마법진은 그 설비에만도 만만치 않은 돈이 바쳐졌을 것이다. 마법진을 만들 수 있는 건 마법사밖에 없고, 욤은 마법사가 귀한 나라니까. “무슨 일을 하건 상관 안하던 분들이 이번은 빠르네.” 바닥의 마법진을 발로 문질러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마법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 관심이 매우 기뻤을 테지만……. “기쁘긴 해. 분명…….” 저편의 의자까지 걸어갈 기력도 없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그대로 뒤로 누워버렸다. 카한세올 외의 가족에게 이런 호의를 받는 것은 익숙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테밀시아는 얼굴 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는 본인이 가진 재능과 능력만큼 바빴다. 아버지는 테밀시아가 20세가 되던 해, 그러니까 페르노크가 10살이 되던 해에 만사 제쳐놓고 떠나버려 그다지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떠나기 전에 남몰래 페르노크를 찾아와 꼭 안아주며, 반드시 찾아오겠다며 속삭였었지만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어머니는……. “별장으로 가셨다고 했지.” 테밀시아는 동생들을 데리고 요양 차 공기 좋은 별장에 갔다고 말했다. 로레라자는 서운하겠다고 안타깝게 말해주었지만, 속으로는 정부와 놀아나는 암컷이라 욕했다. 그 소리는 페르노크를 치라는 소리보다도 더 어둡고 끈적끈적했다. ‘이대로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는 없는데…….’ 가만히 마법서의 표지를 쓸어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지하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마나 운용력을 연마할 수 있는 데까지 연마했다. 부여 마법의 부작용은 그 마법이 일단 성공해야만 발생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갈고 닦아야만 했다.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필사적이었다. 마법을 배우는데 필사적이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에게서 자유와 평온을 빼앗아간 것이 마법인데, 그것을 되찾기 위해 매달려야 하는 수단이 마법이라니. “성공해야해. 성공해야해.” 몇 번이고 다짐한 그는 곧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개학일이 점차 다가왔다. 4년만에 돌아온 페르노크는 지하에서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거처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명상에 필사적으로 몰두해 있는 그 모습에 테밀시아는 마법에 심취한 모양이다, 멋대로 단정지었다. 2년 전 길드에서 왔던 서신에도, 치유마법을 깨닫기 전에는 방학 중에도 길드 내에서 마법에 매진하고 싶어한다고 적혀 있었다. 진의를 묻는 서신에는 답조차 보내지 않았었다. 혹시 도달하지 않은건 아닌가 싶어 시종을 시켜 직접 답을 들어오라 했을때는 길드 내에 틀어박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막 상위 써클의 마법을 깨달았다며 흥분한 길드장의 서신이 대신 왔을 뿐이었다. 매정한 동생이라며 서운하게 웃었지만 그래도 숱기 없는 그가 몰두할 것이 생긴 것이 기뻤다. “몰두해 있는 건 좋지만, 건강도 생각하며 해야지.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는건 안좋은데 말이야.” “방에 틀어 박혀 있는걸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방이 몸에 좋은 법이에요.” 옆에서 서류를 넘기던 뮤비라가 웃으며 되받아쳤다. “테밀시아님에게는 밖이 몸에 좋은 것처럼 말이죠.” “뮤비라처럼 말이지?” 뮤비라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나다니는 걸 좋아하는건 테밀시아나 뮤비라나 피차일반이었다. 개학일이 바로 코앞이다. 밖으로 나가면 카한세올과 마주칠 수밖에 없기에 거처에 내내 틀어박혀 있었다. 또 거처 안에서도 로레라자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마나 운용을 높이기 위해 지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가주 계승권자의 권위를 살릴 겨를도 없었고, 테밀시아에게 부탁할 틈도 없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할 수 있는건 다 했어.” 두렵다. 마법을 잃는것이 두려운게 아니다. 과연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까, 라는 의문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분명 지금보다는 좋아질 거라는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분명 지금보다는 좋아질거야.” 실재로 더 나빠질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몇 번이고 자신을 독려한 페르노크는 길드 내에서 훔쳐온 얄팍한 마법서를 꺼내들었다. 그 선배가 전적으로 도와준 덕에 길드내에서는 아직도 그 마법서의 도난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악의어린 도움이었지만 어쨌거나 신세를 지긴 했다. 마법서를 매만졌다. 까슬한 종이의 촉감이 손가락 밑에서 문대졌다. 이 마법만 성공시킨다면……. “더이상 나는 ‘희대의 천재’가 아니야.” 입술을 꽉 깨물다가 책을 펼쳤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하게 이해했지만 아직 운용력이 딸리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없었다. 두 손을 모아쥐고 주문을 외웠다. 점점 마나가 통제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한계’. 가파오는 호흡, 넘쳐흐르는 식은땀. 조금만 머뭇거리며 주문이 흐트러질 것만 같은 위기감. 한계에 이른 몸은 서서히 고통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고통에 익숙해져 있는 페르노크에게도 비명을 터뜨리고 싶은 고통이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웠고, 필사적으로 신께 빌었다. ‘제발……!’ 주문이 끝나고 이제 시동어를 말할 순간. 페르노크는 떨리는 음성으로 모아쥐었던 두 손을 양쪽으로 활짝 펼쳤다. ‘제발 날 해방시켜줘!’ 마나를 느끼고, 그것을 운용했던 그 순간. 페르노크는 질식할 것만 같은 악의와 적의 속에서몸부림쳐야했다. 자유롭고 싶었다. 그 소음으로부터, 그 악의와 적의로부터. 막연하게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테밀시아를, 뮤비라를 만나버렸다. 정작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때, 페르노크가 느낀 것은 해방감이 아닌 공포. 그토록 떨쳐내고 싶었던 소음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에 의존하고 있던 자신을 깨닫고 말았다. ‘그래도 카한 형님만 되찾을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두렵게 느껴진다 해도 상관없다. “펼*쳐*지*리*라*” 각오와 희열에 들뜬 음성이 지하실 내에 울렸다. 그리고……그뿐이었다. “실……패?”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욱……!” 검붉은 핏덩이이가 목구멍을 디밀고 쏟아졌다. 페르노크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처음으로 마법 시전을 실패했다는 것을 믿기 싫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자신이 염하던 바람을 이 정적이 단호하게 부정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 믿기 싫다는 것이었다. 「페르!」 자상한 소리. 아아, 카한형님……. “제……발…….” 아니다. 이 정적은 그저 마법 시전을 실패했음에 생기는 정적일 뿐이다. 카한 형님을 되찾을 수 없다고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건 그저 착각이다. 스스로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보라. 카한 형님은 저리도 자상하게, 서글프게 자신을 부르며 오고 있지 않은가. 그래, 착각이다. 착각이어야 한다. 어두워져 가는 의식 끄트머리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페르노크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동안 그토록 타인에게 말하고 싶어했던 단 하나의 소망이었다. “절 미워하지 마세요.” 마법구현에 실패한 페르노크는 곧장 길드로 옮겨졌다. 마나 운용에 실패한 부작용은 마법사만이 고칠 수 있었다. 신관이나 의원으로는 불가능했다. 그것은 정신을 건드리면서도 손상시키지 않고 특정한 곳만 다듬는, 특수하면서도 섬세한 작업이었다. 마법사 중에서도 고위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치유작업이었고, 욤에서 그것이 가능한 마법사는 수도의 길드에만 있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이 길드에 있음을 안 페르노크가 느껴야 했던 절망과 공포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작별인사조차 못하고 헤어져야만 했던 카한세올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과 슬픔에 그는 울지조차 못했다. 길드에서는 무엇을 시전하다 그리 되었냐 캐물었다. 치유마법을 시전 한 지금까지도 한계를 보이지 않은 ‘희대의 천재’가 실패한 마법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끝 모를 저력을 파악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말이다. 페르노크는 자신이 아는 고 써클의 마법을 대충 대고 얼버무렸다. 그 마법서를 훔쳤다는 것이 들통 나면 어떤 곤혹을 치르게 될지 몰랐다. 학원에서의 따돌림도, 줄곧 이어져 왔던 집단구타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도 전만큼 페르노크를 아프게 하지는 못했다. 그보다 더한 고통에 절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절하게 매달릴 목표가 생겼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는 기필코 부여 마법을 성공시키리라! 그래서 ‘희대의 천재’라는 시답지 않은 호칭에서 벗어나리라. 그래서……그래서 카한 형님을 되찾으리라. 그렇게 버텼다. 지금 와 생각하면,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겨울이 왔고 또 방학을 했다. 길드의 방해가 붙을 뻔 했지만, 간신히 벗어나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마중을 온 것은 또다시 큰형이었다. 수도에서 활동하는 그였기에 당연하다고 페르노크는 대충 넘어갔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의 큰형, 테밀시아는 보통사람이라면 몸이 두 쪽 나도 버텨내지 못할 정도의 막대한 사무에 시달리는 몸이었다. 휴첼이라는 당대 최고의 기사단을 이끌어 나가는 단장이었고 오르세만이라는 거대한 가문을 운영하는 실질적인 가주였으며, 욤이라는 제국을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였다. 그런 테밀시아가 고작 동생의 방학 귀가길이나 마중 나오고, 또 데려다 주는 일을 한다니.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만큼 동생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나, 불행히도 그 애정을 그 당사자인 동생만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페르노크는 세상사에 너무나 둔감했고, 테밀시아의 거대함을 실감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많이 쌀쌀해졌기에 야영은 무리였다. 특히 페르노크는 마나 운영에만 몰두해온 덕에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또 테밀시아, 뮤비라와 함께 하는 시간동안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다. 그것을 배려한 테밀시아는 아직 일렀지만 마차를 멈춰 숙소를 잡았다. 본래 다음 마을에서 멈추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게 해야 그 다음날 점심쯤에 오르세만 가의 영지로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서두르고 싶은 건 페르노크가 가장 간절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늦어도 내일 저녁이면 카한세올을 만날 수 있었다. 페르노크는 몸을 웅크렸다. 좀처럼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할까…….’ 낮게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나왔다. 잠이 들 자신이 없었다. 복도로 나오자, 옆방 문 틈새로 불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테밀시아의 방이었다. 잠깐 들어가 볼까 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돌바닥에서 차가운 기운이 밀려들었다. 신발 안도 차가워져서 발이 시려왔지만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서 고함을 지르며 몸부림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페르노크는 아무도 없는 폐쇄된 공간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답답했다. 사방에 쳐진 벽이 자신을 압박하는 듯이. 지난여름 귀가길 에서의 설렘과 그리움은 희미해지고 이제는 초조함과 공포 속에서 우울할 뿐이다. 1층 홀을 지나 문을 열고 나갔다. 기름칠 잘된 문이었지만 사위가 워낙 조용하여 여닫히는 소리가 꽤 울렸다. 온 몸에 쌀쌀한 바람이 부딪쳤다. 하얗게 입김이 서렸다. 얼마동안 멍하니 앞으로 걷다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구름이 잔뜩 껴, 달이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카한형님의 비명과 로레라자의 광소를 들어야 하나…….’ 방학이 되기 전에 또 한번 부여마법을 시전 해보았었다. 그리고 실패했다. 방학동안 운용력을 갈고 닦는다 해도, 과연 그 두어 달의 시간동안 해낼 수 있을까?지난여름에 처음 느꼈던 한계가 이제는 거대한 벽이 되서 앞을 막아섰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다. 가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미치지 않을게 신기할 정도로 두통의 정도는 여전히 극심했다. ‘차라리 미쳤으면 좋았을 텐데.’ 내면에 꽁꽁 숨어서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그렇게 산다면 좋을 텐데. 실실 웃다가 갑자기 시끄럽게 웃고 자신을 피하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그렇게……. 남이 보기에는 불쌍하고, 또 흉하더라도 미친 자들은 즐거워보였다. 하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겪어보지 못해서 현실도피 하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페르노크를 지탱해주는 것이 있었다. 카한세올의 절규…….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슬픈 그것이 카한세올의 애정을 알려주어, 페르노크로 하여금 한 가닥이나마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이번에 마법을 시전 시키지 못하더라도, 테밀 형님께 부탁해서 이므르만큼은 그만 둬야…….’ 전에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지만, 이번만큼은 반드시! 그때였다. 「오르세만 페르노크 마 카르민.」 흠칫! 반사적으로 주위를 돌아보려 했던 페르노크는 간신히 자신을 다독였다. 발이 경직되었으니 심호흡을 몇 번하며 주먹을 꾹 쥐자 움직였다. 지겨우리만치 겪었던 살기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공포. 자객이다! 태연한척 여관 문 쪽으로 발을 딛으려는 페르노크의 머리에 음산한 소리가 맹렬한 기세로 박혀들었다. 「죽인다!」 “시, 실*드*” 반사적으로 내뱉은 시동어가 약한 빛을 뿜어내는 방어막으로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챙, 하며 암기가 튕겨졌다.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곳에는 마스터인 테밀시아가 있었고, 그보다 더 강한 것으로 추정되는 뮤비라가 있었으며, 수호 기사와 수련 기사들이 여럿 있었다. 저 안으로만 가면! 「쳇!」 또다시 살기가 꽂혔다. “실*드*” 급히 마법을 시전 시키자 또다시 암기가 튕겨져 나갔다. 안되겠다 싶은지 자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라면 처음 암기가 실패한 시점에서 도망쳐야 했지만, 아직 여관과의 거리가 있었기에 기회가 있다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오산이기도 했다. “감히 누굴 노리느냐. 건방진 것.” 바로 등 뒤에서 울린 섬뜩한 음성. 자객은 그 음성에 답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관통한 황금빛 검을 무의미하게 손으로 붙잡으며 컥컥거리다 축 늘어졌다. 시체에서 검을 뽑아낸 테밀시아는 피한방울 묻지 않은 검을 버릇처럼 한번 휘둘렀다가 검집에 넣었다. 저편에서 페르노크가 주저앉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다친 곳은?” 긴장이 풀린 페르노크는 고개를 저어 답했다. 그런 그를 일으켜주는 손이 있었다. 누군가 접근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페르노크는 흠칫하며 위를 올려보았다. 차분한 남색 눈동자가 보였다. “뮤비라…….” “괜찮으십니까, 페르노크님?” 이번에는 고개를 끄떡여 답했다. 둘에게로 테밀시아가 다가왔다. 막 살인을 해서 일까? 아니면 실력을 드러내서일까? 평소와는 달리 강한 기운이 숨김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 저것도 어느 정도 숨긴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있는데도 자객이 덮치다니. 이상하군.” “이므르는 황성 다음으로 경비가 살엄한 곳. 마땅한 기회를 잡지 못한 거겠죠. 살기를 느끼고 바로 나오긴 했지만 페르노크님께서 침착하게 대응하지 않으셨다면 늦을 뻔 했습니다.” “……익숙하니까.” 입안에서 웅얼거린 그 말을 용케 알아듣고 테밀시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난 그런 보고를 한번도 받지 못했는데?” 이므르에서 암살 기도가 일어나면, 그 성공여하를 불문하고 본가에 연락을 취한다. 길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태껏 이므르와 길드에서만 오가는 생활을 해왔던 페르노크가 습격을 받았을 곳이야 뻔하다. 그런데 단 한번도 듣지 못했다. 약해진 몸으로도 효율적인 방어와 도주를 한 모습에서, 이런 상황을 익숙해질 정도로 많이 겪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는데도. 일단 깊이 생각하는 것을 미룬 테밀시아는 아직도 창백한 페르노크의 머리를 몇 번 부벼주고 말했다. “들어가자.” 주춤하며 그 뒤를 따르던 페르노크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왜 그 정도 살기정도에 뛰쳐나오신 건가요?” 자객의 살기는 지극히 희미하다.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페르노크의 목쯤이야 벌써 바닥을 굴렀을 것이다. 그런 희미한 살기를 저 여관의 꼭대기 층에서 느꼈다는 것은 대단하지만, 그 정도 살기에 일일이 뛰쳐나올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텐데.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면 뭔가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고. 마차 안에서도 쉴 틈 없이 서류를 보고 있지 않았던가. 힐끗 뒤를 돌아봤던 테밀시아는 별말 없이 다시 고개를 바로 했고, 대신 뮤비라가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답해주었다. “페르노크님께서 좀 전에 나가시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뜻밖의 말에 멍하니 테밀시아의 등을 바라보았다. 뮤비라가 낮게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쭉 밖에 신경을 쓰고 계셨답니다.” 페르노크는 흐트러지지 않는 테밀시아의 등을 보며, 그리고 자신을 부축해 주는 뮤비라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아, 이들의 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 이런 생각 따윈 하고 있지 않을 텐데. 정말일까? 라는 생각 따윈……. 다른 한편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비웃는 또 다른 자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것 봐! 넌 이미 그 힘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넌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됐다고! ‘아니야. 그래도 카한 형님만큼은……!’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페르노크에게 카한세올은 단 하나뿐인 의지처, 단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이때까지는 그랬었다. 다시 돌아온 집. 자신을 반기지 않는 수많은 시선들. 경멸하고 조소하는 소리들. 신경 쓰지 않은지 이미 오래인 그것들은 페르노크에게 아무런 상처거리도 못되었다. 그러나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배신감과 슬픔이라는 정신적 아픔과 고통이라는 육체적 아픔들. 다시 돌아와 처음으로 느낀 것은 바로 그 ‘배신감’이었다. 이미 기대하지 않기로 했는데도, 이미 처참하게 당했는데도 그녀에게 느껴버린 감정. 마음 한편에서는 그녀를 믿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스스로도 진단할 수 없는 마음은 배신감에 찌들어 비틀거렸다. 「흥! 살아 있군! 그 자객을 고용하는데 얼마가 들었는데!」 아아, 로레라자여. 그토록 상냥한 얼굴로, 그토록 다정한 음성으로 어찌 그리 잔인한가?! 절규하는 마음을, 믿었던 네 잘못이다 채찍질하며 힘들게 외면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용케 골병 안 들고 왔군.” 비아냥거리는 음성이 아니더라도, 카한세올의 등장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 중에서도 유독 강한 슬픔의 소리. 그 서글픔에 한숨이 나왔다. 그에 카한세올이 버럭 소리 질렀다. “어디서 한숨질이야?” 하며 올려지는 손을 테밀시아가 잡아챘다. 표독하게 일그러진 카한세올의 얼굴을 테밀시아는 차분한 듯 슬픈 눈으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한세올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그도 손을 놓으며 낮게 말했다. “네가 자신을 숨겨가면서까지 얻으려는 게 뭔지, 나로서는 알 수 없구나.” 움찔하며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동생을 보다가 자신을 기다리는 집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페르를 거처로.” 하인이 짐을 들고 침실로 올라갔을 때, 페르노크는 손님방이 된 예전 로레라자의 방 앞에 섰다. 문을 열지도 않고 그저 그 앞에서 멍하니 있었다. 짐을 놓고 내려온 하인이 인사를 하고 나가고서도 한참동안 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있으면 몇 년 전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다정한 미소를 함빡 지으며 나와, 군것질 왕자님께서 또 무엇이 드시고 싶은 거냐고 물을 것만 같았다. 그럼 잔뜩 어리광 부리며 가장 좋아하는 오렌지 치즈 케이크와 생크림을 잔뜩 얹은 코코아를 말하는 거다. 그 옆에서 카한형님이 눈사람처럼 둥글게 되어 버릴 거라며 꿀밤을 먹이겠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다 로레라자가 가져다준 케이크와 코코아에 철없이 환호성을 지르면 옆에서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릴 거다. 그리운 공상 속에서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머리 속에 ‘소리’가 울렸다. 따뜻하면서도 서글픈 그 소리에 페르노크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그것은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본래 어느 정도 떨어지면 ‘소리’는 잘 들리지 않지만, 페르노크를 향한 감정이 강하게 실려 있으면 간혹 들려오기도 했다. 보통은 무시해버리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카한 형님……?” 카한세올이 어디선가 남몰래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 건물을, 그리고 페르노크를. 잠시 망설이던 페르노크는 심호흡을 깊이 하고 밖으로 뛰었다. 이미 한번 깨졌던 희망을 가지고 버텨나가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덧없는 희망이 아닌 확신이 필요했다. 마법만 못 쓰게 되면, 그래서 ‘희대의 천재’가 아니게 되면, 그래서 가주 계승권자에서 밀려나게 된다면 카한세올이 전처럼 돌아온다는 확신. 그것만 있으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버틸 수 있다. 버티고 버티면서, 운용력을 갈고 닦아 부여마법을 성공시킬 수 있다. 이제는 막연한 희망만으로 버텨나가기가 힘들다. 테밀시아와 뮤비라와 함께 짧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알고 말았다. 소리로 인해 누구도 믿지 않게 됐다지만 그것이 들리지 않는다 해서 다시 믿을 수 있게 되지는 않다는 것을. 이미 자신은 그 소리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페르노크에게는 카한세올밖에 없다. 정말 카한세올밖에는 없는 것이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헉헉대며 뛰던 페르노크는 나무에 기대 있는 카한세올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번 거처로 들어가면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던 페르노크였기에 카한세올이 몸을 숨기는데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주의를 했어도 금방 찾아냈을 테지만 말이다. 두 손으로 괴롭게 얼굴을 감싸고 있었던 카한세올은 인기척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리고 페르노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나직이 말했다. “꼭 이래야 합니까?” “……?” “정말 이런 방법 밖에는 없는 걸까요?” “무……?” “전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페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테밀 형님 역시 사랑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제 가족이라고, 그렇게!” 거칠게 소리를 지르던 카한세올은 얼굴을 감싸던 두 손을 내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지만 전…….” “형님?” 조심스럽게 부른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페르노크를 보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페르노크를 위아래로 본 카한세올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잊어라.” 떠나려는 그를 급히 붙잡았다. 꼭 물어야만 하는 게 있었다. 꼭 들어야만 하는 게 있었다. “형님! 다른 건 다 잊을게요. 무슨 소린지도 모르는 걸요.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할게요. 딱 한가지만요. 저를 사랑하시는 것. 그것만은! 그러니까!” 딱딱하게 굳은 카한세올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소리’가 아닌 음성으로 들은 애정은 너무나 포근했다. 멍청하게도 다른 소리는 몽땅 잊어버리고 그것만 되새기고 또 되새길 정도로 안심되는 것이었다. 카한세올이 뿌리치지 않는다는 것에 더더욱 안심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 비록 카한세올은 아무 말 없이, 관심 없다는 듯이 차가운 척 얼굴을 돌리고 있었지만 온 신경이 자신의 기척에 쏠려 있다는 것을 페르노크는 알고 있었다. “제가 마가 아니게 되면, 카한 형님은 전처럼 돌아와 주는 거지요? 그치요?” “…….”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백지장이 되어버린 듯이. 카한세올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한숨과 함께 페르노크를 뿌리쳤다. 그리고 아무런 답 없이 걸음을 디뎠다. 다음순간 페르노크는 숨을 멈추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느꼈던 두 번째 감정은 슬픔. 심장을 뜯어내는 고통과 같은 슬픔. 「안될 거다, 페르.」 멀어지는 카한세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어머니가 너를, 테밀 형님을, 그리고 오르세만 가를 증오하는 이상.」 점점 흐릿해지는 그를 향해. 「설령 네가 마에서 밀려나, 내가 마가 되더라도. 아니 테밀 형님이 밀려나, 내가 라가 되더라도. 그렇게 해서 가주가 되더라도. 어머니의 증오는 풀리지 않을 거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아, 페르.」 이리저리 일렁거리는 그를 향해. 「내가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원하는 이상은.」 ……그 손은 닿지 않았다. 발밑이 흔들리고 있다. 무너지고 있다. 외부와 차단되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공기조차 흐르지 않는지 숨이 막히고 심장이 요동친다. 춥다. 온 몸이 덜덜 떨린다. 아무리 손을 뻗어 안아도, 자신의 몸. 그 공허한 포옹에 더욱 시려질 뿐이다. 이런 것이 절망인가? 한 치의 희망도 없어, 차라리 눈물도 나오지 않는 이것이 절망인가? 페르노크는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옆에 있기를. 아니, 아무도 없기를. 이런 자신을 그 누구도 보지 말아주기를. 아니, 누군가 봐주기를. 그래서 힘내라고, 위선이라도 좋으니 힘내라고 안아주기를. 아니, 아니, 아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도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그저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어디지? 왜 이곳에 있지? 내가 언제 이곳까지 왔지? 그가 있는 곳은 작은 방이었다. 윤기 도는 나무 바닥과 작지만 답답하지 않은 크기의 창문과 이불 없이 그저 커버만 씌어져 있는 침대뿐인 방. 여기가 어디지? 의문과 함께 답이 떠올랐다. 이곳은 로레라자의 방. 아니, 로레라자의 방이었던 손님방. 빈방. “로레……라자.” 그녀가 카한세올의 어머니란다. 따뜻하게 대해주는 모습조차 본 적 없는 데, 서로 적당한 타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둘의 접점이라곤 페르노크밖에 없었는데, 카한세올을 보는 그녀의 마음에는 온통 자신의 분풀이를 대신하는 자에 대한 응원뿐이고 애정도 다정함도 없었는데, 그런데도 그녀가 카한세올의 어머니란다. 카한세올은 그런 그녀의 사랑만을 바란단다. 그 외의 무엇을 희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녀의 사랑만을 바란단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는 계속 흐느꼈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몸을 웅크리고 공허하게 자신을 껴안았다. 텅 빈 방은 찬 공기만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걸? ‘희대의 천재’씨.” 또 제그다. 같은 반 아이들은 잔인한 장난기가 번질거리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타인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경우는 드문 법. 카르민의 가주 계승권자이자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소년이 자신들과 같은 제피모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므르 생활에서 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특히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을 볼 때면 오싹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일종의 대리만족인 것이다. 뒤를 돌아본 아이들은 일상과는 다른 점을 발견하고 의아해했다. 제그 네가 굳이 시비를 걸지 않더라도, 그네들의 접근만으로도 바들바들 떨며 몸을 움츠리던 페르노크가 이번에는 멍한 얼굴로 창가를 바라볼 뿐 아예 반응을 하지 않았다. 껍데기만 남겨진 듯한 옅은 느낌의 그를 보는 제그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자신이 무시당해 화가 났다기보다는 무언가에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제그?” 다혈질에 무시당하는 것을 못 참는 제그였기에 주위의 친구들도 약간 당황하며 그를 불렀다. 제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몇 번 가로저었다. 그리고 페르노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자신의 머리카락이 무자비하게 뜯기고 있음에도 페르노크는 멍한 눈동자로 제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네 동생과 상관없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공허하고, 허무한 느낌이 묻어나는 모습과 목소리에서 제그는 또 한번 동생을 떠올렸다. 그 다음 순간 이를 빠득 갈며 페르노크를 내팽개쳤다. 의자와 책상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쓰러지고, 그 위로 페르노크가 힘없이 너부러졌다. 고통스러울 텐데도 그는 평소와는 달리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대신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에 다른 아이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설 때, 제그만이 사납게 페르노크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무슨 헛소리냐?”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의 눈동자는 어떻게 네가 내 동생을 아냐는 의문이 실려 있었다. 키득키득 웃던 페르노크는 검지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댔다. “여기에 들린다고. 모든 게. 아니 거의 모든 게. 그래, 우리 위대하신 큰 형님 것은 안 들리니까. 킥킥.” “페르노크?” 완전히 풀린 눈동자는 제그를 보고 있지만, 제그 너머를 보고 있는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멱살을 움켜쥔 손아귀에 따라 맥없이 늘어져 비틀대는 몸뚱이도 이상했다. 말 그대로 미친놈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살핀 제그는 멱살을 풀고 대신 그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도대체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뭔데? 응? 너희가 말하는 모든 것이 무엇인데? 난 가진 게 없어. 아무것도. 킥킥. 처음에는 소리만 없앨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것도 안돼. 내 손아귀에 있는 게 뭐가 있지? 응? 뭐가 그렇게 나에게서 빼앗고 싶은데?” 실실 웃으며 고저 없이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던 제그는 뒤에 서 있는 소울러를 향해 외쳤다. “신관을!” 이번에는 자신들이 때린 것도 아니고, 멋대로 실성한 것이니 신관을 불러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소울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떡이고 얼른 뛰어 나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페르노크는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무슨 권리로 스스로를 동정하냐고? 그래, 난 날 동정해. 나란 놈은 참 불쌍한 놈이야. 더럽게 불쌍한 놈이라고. 자신을 동정하는데 권리가 필요해? 어떤 권린데? 그 권리는 누가 주는 건데? 응?” 어떤 짓을 해도, 어떤 것을 버려도 과거의 평화는 돌아오지 않는다. 마법을 버린다 해도, 소리다 들리지 않는다 해도, 가주 계승권을 버린다 해도. 이제 두 번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카한세올도 로레라자도 전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몸부림 쳐봐야 소용없다. 그런데도 불쌍해하면 안 되는 건가? 아무도 불쌍하다 여겨주지 않는 자신을, 자신만이라도 동정해주면 안 되는 건가? 그래도……. “페르노크군!” 소울러가 먼저 뛰어 들어오고, 그 뒤로 신관이 들어왔다. 여전히 제그의 부축 아닌 부축을 받고 축 늘어져 있는 페르노크의 모습에 신관은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제그에게서 페르노크를 건네받아, 덩치가 제법 큰 검사 지망생에게 업고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비틀비틀 업히면서도 페르노크의 눈은 제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를 업은 아이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페르노크는 울먹이듯이 고함을 질렀다. 덧없는 발악이었다. “그래도 넌 동정해줬잖아!” 뻣뻣하게 굳은 제그의 눈앞에서 페르노크는 기절했고, 실려 갔다. 페르노크가 안정을 되찾고 교실을 다시 찾은 것은 한달이나 지난 후였다. 전보다도 창백하고 비쩍 마른 모습으로 그가 자신의 책상에 앉았을 때,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제그를 보았다. 그의 옆에 앉은 소울러만이 페르노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페르노크가 자신의 방에서 요양을 한 그 한 달 동안, 누구도 페르노크의 실성한 모습을 거론하지 않았다. 거론하려고만 하면 제그의 사나운 눈길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제 2의 페르노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페르노크가 자리에 앉고 다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을 때, 제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다음 수업의 교재를 꺼내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이 시작됐다. 다음 시간은 수학으로, 제그에게는 가장 약한 과목이자 페르노크에게는 두 번째로 강한 과목이었다. 오랜만에 수업에 나온 페르노크에게 선생님이 문제풀이를 시켰을 때,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노크가 가지고 있던 교과서는 제 7학기의 교과서였다. 당연히 문제를 풀지 못한 페르노크는 고개를 숙인 채, 교과서를 제대로 챙겨오지 않은 것에 대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이들은 힐끔힐끔 제그와 소울러 쪽을 보았다. 서로 뭐라 수군대며 키득거리던 둘은 자신을 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비죽 웃어보였다. 아이들은 다시 한번 안도하며 앞을 보았다. 그들의 ‘일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보였던 페르노크의 발악에도 말이다. 괴롭힘은 계속됐지만 반응은 사라졌다. 다른 말로 즐거움이 줄었다. 개학일 때의 발악 후 한번도 입을 열지 않고 멍하니 있던 페르노크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그의 방에서였다. 화려한 방안에서 초라하게 쭈그리고 신음한번 없이 맞던 그는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단 하나뿐인 희망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하겠어?” 그 질문은 저편에 널브러져 멋대로 음료를 마시던 제그를 향한 것이었다. 한달하고도 몇 주 만에 듣는 페르노크의 목소리에 컵을 내려놓고 입가를 훔치며 생각에 잠겼다. 본래라면 페르노크가 무슨 말을 하건 들은 척도 안할 그였으나, 단 둘 뿐인데다 고요한 밤이라 약간 감상적이 된 모양이다. 혹은 근래의 페르노크의 행동이 자꾸만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게 해서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제그에게 있어 페르노크가 물은, 그 단 하나뿐인 희망이란 동생 키르바나였다. “타의로 사라진 거라면 복수를 하겠지.” 어머니나 계부, 형 따위에 의해 살해당한 거라면.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공포이자 분노였다. ‘빌어먹을!’ 불쾌해진 제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슬슬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제그를 향해 페르노크가 다시 물었다. “자의로 사라진 거라면?” “…….” 키르바나가 자살이라도 한다면……. 타의보다도 더 섬뜩한 공포와 분노가 밀려와 버럭 소리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타의라도 도저히 복수할 수 없고, 자의라 더 이상 매달릴 수도 없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어?” 고개를 푹 숙이고 덤덤하게 물었지만, 그의 어깨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그는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런 페르노크를 내려다 보다 툭 내뱉고 나가버렸다. 그것은 그 질문을 듣고, 그 상황을 떠올린 순간 제그의 머리 속을 스쳐간 충동이었다. 그랬기에 그만큼 진실성이 있었다. “죽는 게 낫겠지.” 페르노크는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깜박이지도 않는 눈동자에서 툭툭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볼을 타고 흐린 눈물은 금세 차갑게 식었다. 그 한기로 인해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전…….” 고개를 떨꾸자 흙과 약간의 피로 더럽혀진 손이 보였다. 그것을 뒤집자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이 보였다. 바로 이 손바닥이 무하의 흔적이다. 주먹을 꾹 쥐며 페르노크는 한숨과 같이 속삭였다. “있어야 할 곳이 없었어요.” 무하도 페르노크도 있어야 할 곳을 잃었다. 절망했고 죽음을 선택했다. 그 순간, 살려면 살 수 있었던 그 순간에 무하는 설희의 모습만을 보았고 페르노크는 손목을 끊었다. 너무도 똑같은 상황. 똑같이 느꼈던 절망과 괴로움. 그리고 똑같은 선택. 둘 다 도망친 것이다. 자신을 뒤흔들고 결국은 부숴버린 현실로부터. “그리고 전 지금도…….” 부모님을 뒤로하고 식당을 나선 테밀시아는 곧장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오르세만 가의 본가는 전체가 철통같은 방어막에 둘러싸여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주 서재의 방어막이 가장 두터웠다. 심지어 침실보다도 말이다. 그만큼 서재는 기밀사항이 쌓여있는 곳이자 비밀스럽고 은밀한 곳이었다. 때문에 서재로 타인을 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요크노민은 테밀시아가 자신에게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그 장소를 택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물론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이야기할 장소를 서재로 꼽은 것이기도 할 테지만, 그보다는 이야기가 남에게 흘러가지 않기 위한 포석으로서의 성격이 강해 보였다. 때문에 테밀시아가 알아야만 하는 것을 숨기고 있는 만큼 긴장해야 했다. “들어와라.” 먼저 문을 열고 들어 가버리는 테밀시아의 모습을 잠시 멈춰 보다가, 넘쳐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뭔가 덜미가 잡힐만한 짓을 했던가? 따라오면서도 계속 이것저것 생각해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적어도 요크노민의 시야에서는 있을만한 소동만 있었고, 할만한 말만 한 것으로 보여 졌다. 문을 닫고 서재 안으로 들어오자 책상에 기대 서있는 테밀시아가 있었다. 따라 들어온 요크노민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창가 쪽을 보던 그는 한숨과 함께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창가를 향해 발을 옮겼다. “요크노민.” “예.” “피차 모든 것을 털어놔야만 하는 관계는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 “각기 입장이 있고, 생각이 있고, 사정이 있으니까.” 창가에 선 테밀시아는 양 손을 뻗어 천천히 커튼을 쳤다. 저녁노을의 붉은 빛이 서서히 차단됐다. 커튼이 완전히 쳐지자, 고개를 돌려 요크노민을 보았다. 어두운 서재 안에서 그의 눈동자만이 섬뜩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던 요크노민은 애써 그 자리에서 버텼다. “하지만 이번은 나와 관련된 일이고, 또 나만큼은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인 것 같구나.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떻지?”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 “나를 두고 말장난을 하려하지 마라, 요크노민.” 요크노민이라는 단순한 호명이 자꾸만 그를 옭아매는 듯이 느껴졌다. 그 묘하고도 확실한 감각에 요크노민은 당황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테밀시아라는, 금안의 ‘지배자’라는 남자에게 압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침묵하고 있었을까. 테밀시아는 요크노민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에 요크노민은 뒤로 물러나고 싶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만류해야 했다. 테밀시아가 어느 정도의 선을 눈치 챈 건지 알 수 없었기에 더욱 초조했다. 훼오트라 아나라는 존재가 어째서 이들을 쫓아온 건지를 묻는 걸까? 아니면 이카미렌의 정체에 대해? 아니면 유시리안과 페르노크의 관계를 묻는 것일 수도 있다. …… 그렇게 제 삼자의 눈으로 봤을 때 이상하게 보이기 충분할 일행의 미묘한 점을 열거하면서도, 요크노민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이자 가장 가능성 있는 것. 무하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인가?! 마주치기 싫은, 테밀시아의 꿰뚫어 보는 듯한 황금의 눈동자를 억지로 바라보며 요크노민은 자신을 다독였다. 스리슬쩍 넘어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남자다. 답변을 하기 전에 정확히 테밀시아가 얼마만큼 눈치 챘는지를 알아야 했다. 요크노민은 질문할 말을 골랐다. 테밀시아는 상대의 말실수 하나에서, 그가 숨기고자 하는 것을 능히 알아낼 남자였다. 질문에도 진실성을 띄고 물어야 했다. 앞서 했던 경고처럼, 말장난 할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말장난이 아닙니다. 숨기고 있는 것이 많아, 정확히 무엇을 묻고 계신지 알 수가 없는 것뿐입니다.” “…….” 요크노민을 묵묵히 바라보던 테밀시아는 한걸음 내딛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묻겠다.” 그리고 다시 한걸음 내딛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의 일을 잊었다는 페르가 어떻게 카한세올의 죽음을 알고 있는 거지?” “……!” 다시 한걸음, 두 걸음……. “네가 알려줬다는 둥의 얕은 변명은 하지마라. 페르가 그 사실을 타인의 입으로 들어 알게 됐다면 나를 보는 즉시 확인을 했을 거다. 아니!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묘지로 달려갔겠지!” ……세 걸음, 네 걸음……. 요크노민의 바로 앞에서 멈춰선 테밀시아는 그를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 ‘훼오트라 아나가 말한 조심은 이것을 말한 거였나? 예언이자 충고이자 경고라. 확실히 겸사겸사군. 젠장!’ 필사적으로 생각을 짜내던 요크노민은 포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으로 느낄 수 있었다. “테밀시아님에게는 기억을 잃든, 되찾든…… 페르노크는 동생이겠지요?” “물론이다. 너에게 뮤비라가 기억을 잃든, 되찾든 형인 것과 마찬가지로.” 테밀시아의 말에 요크노민은 눈을 꾹 감고 뮤비라를 떠올렸다. 만약 뮤비라의 육체에 타인의 영혼이 들어왔다면? 기억을 잊은 게 아니라, 육체를 도둑맞은 거라면?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했을까?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자신이 택할 사람은 생각도 할 것 없이 뮤비라였다. 그 타인이 아무리 자신을 위해준다 해도, 자신을 사랑해준다 해도, 또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그렇기에 테밀시아만큼은 알아서는 안 되는 거다. 마른침을 한번 삼킨 요크노민은 눈을 뜨고 테밀시아의 금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다릅니다. 기억을 잃은 페르노크만이 저의 지기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묻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숨기는 것은 제 지기를 위해서라는 것만 아시고, 더 이상 파고들지 말아주십시오.” 테밀시아는 알아야만 하지만, 동시에 테밀시아만큼은 알아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말을 잘 듣고 자신을 좋아하고 또 가족으로서 사랑한다 해도, 자신의 진짜 동생을 내버려두고 타인을 택할 테밀시아가 아니다. 요크노민처럼 말이다. 그런 그가 진실을 알게 될 때, ‘페르노크’라는 이름 하에 용납 되던 면죄부가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과연 어찌 될지 요크노민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자신의 지기가 다시 혼란과 괴로움에 비틀거릴 거라는 것. “네 말을 듣고 있자면, 기억을 잃은 페르와 되찾은 페르는 별개의 인간으로 느껴지는 구나.”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요크노민이 답했다. 그 말까지 듣고 난 테밀시아는 다시 책상 쪽으로 가, 비스듬히 기대섰다. 그리고 눈을 감고 침묵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테밀시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요크노민은 안도감이 치밀어 주저앉고 싶어졌다. 냉혹한 듯 거칠게 일렁이든 안광이 가라앉고 평소의 차분한 빛으로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너도 심정이 복잡할 테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기로서 얼굴을 마주하던 자가 자신을 단순한 시종으로서 기억하고 있으니…….” 몸을 바로 한 테밀시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기억을 잃은, 되찾듯 페르는 페르다. ‘기억을 잃은 페르’만이 네 지기라지만 결국 둘은 같은 존재이니……. 지기를 위해서라는 네 말을 믿고 이번은 넘어가마.” 만에 하나 테밀시아가 진실을 알게 됐을 때, 그가 느낄 배신감을 떠올려보며 요크노민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인 ‘죄송합니다’는 깊이 삼켰다. * * * 미약하게 타고 올라오는 흔들림, 꽉 닫혀있지만 맑은 공기, 따뜻한 온도, 의자를 덮은 푹신한 털 담요의 감촉.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만 같은 안락한 마차 안에서 다섯 남자가 무거운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특히 그 어색한 분위기의 중심이었던 유시리안이 발끝으로 앞의 남자를 툭툭 건드렸다. “너 말이야.” 마차 벽에 기대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던 페르노크가 유시리안 쪽으로 눈을 돌렸다. 카한세올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 덕인지 페르노크는 공포도 두려움도 모두 다 잊은 듯 보였다. 쓰라린 추억에 고통스러워하고, 그러면서도 그때를 그리워하고……. 여전히 막막한 현실을 잊은 듯이. “네 놈 생각 따위 내 알바는 아니지만, 듣고 있자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다.” “……?” 텅 빈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당연한 거겠지만, 유시리안은 물론 훼오트라 아나, 이카미렌, 락샤사, 심지어는 요크노민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두려운 것이다. “네 놈은 결국 죽음을 택한 거잖아? 카한세올이란 놈을 로레라자라는 계집이 뺏어갔지만, 그 계집을 죽일 수도 없고, 그 놈에게 매달릴 수도 없고. 그래서 죽어버린 거잖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페르노크는 고개를 약간 들어 올렸다. 훼오트라 아나도, 요크노민도, 이카미렌도 각자 다른 방향에 시선을 주고 있었지만 신경은 유시리안에게 집중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쩌고 싶은 거냐? 그놈도 죽고 그 계집도 죽었는데, 어쩌고 싶어서 뛰쳐나와 피곤하게 하는 거냐?” “…….” “이제와 세삼 가주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겠지? 카스야나와 테밀시아의 말을 들어보면 가주 계승권자 자리도 팽겨 친 것 같으니 확실히 그건 아니고. 도대체 뭘 어쩌고 싶어서 버티고 있는 거냐?” 페르노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은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너도 나의 펠처럼 시작하고 싶은 거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언젠가 생길 있어야 할 곳을 찾아 해매고 싶은 거냐?” 유시리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점차 격해지는 감정이 똑똑히 전해졌다. “이것만은 알아둬. 나의 펠은 다시 시작했지만, 절대 과거를 버리지 않았어. ‘처음부터’가 아니었어. 지긋지긋할 정도로 과거에 얽매여, 괴롭고 힘들어했다고. 그렇게 ‘시작’했어.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필사적으로 걸어왔어. 바로 내가 있는 곳까지!” 결국 마지막에 소리를 버럭 지른 유시리안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놈은 네 놈이 원하는 대로 꼭꼭 틀어박혀 아무것도 생각안하고 모든 것에서부터 회피했으니 모를 테지. 육체적 고통은 네 놈한테로 갔다고 했지? 나도 그 일에 대해서는 나의 펠에게 들은 게 있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통증이 안 느껴진다고 했어. 그리고는 그 수준을 넘어서면 한번에 몰려든다고 했지. 결국 넌 네 육체가 겪는 고통조차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도망친 거야. 그걸 나의 펠은 여태껏 대신 견뎌왔어.” “……나, 난 도망치지 않았어요! 제가 원해서 겪어야 했던 게 아니에요. 제가 책임져야 했던 고통이 아니라고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로 페르노크가 반박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로서는 매우 대단한 발악이었다. 또 그의 말이 옳기도 했다. 하지만 유시리안은 꿈쩍도 안했다. 그는 더욱 냉혹하게 페르노크를 몰아세웠다. “나의 펠이 견뎌야 했던 것은 고통이 아니야! 네 놈의 어중간함 때문에 이 육신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느껴야 했던 그 이질감이지!” 이 얼마나 이기적인 추궁인가. 객관적인 인과를 무시한 채, 오직 자신의 펠만을 위한 추궁. 이 얼마나 오만하고 유치한가. 억울함에 페르노크가 다시 입을 열려 했지만 유시리안이 단숨에 잘랐다. “결국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냔 말이다! 살기 싫어서 죽은 거 아냐! 그럼 죽으란 말이야, 얌전히!” “…….” 반박을 하기 위해 약간 들려졌던 페르노크의 고개가 다시 푹 꺼졌다. 입 속에서 맴돌던 말을 차마 뱉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기 때문이다. ‘나도 그게 알고 싶어.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싶다고.’ 깍지 낀 양손이 새파래질 정도로 꾹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애당초 왜 내가 깨어났는지조차 모르겠는데…….’ 죽는 게 두려워서 뛰쳐나온 거라고 할 수 있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뛰쳐나와도 벌써 오래전에 뛰쳐나왔을 것이다. 꿈을 꾸듯 몽롱한 상태로 의식을 배회하던 그가 어째서인지 갑자기 모든 것을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억지로 외부와 접촉당하기 시작했고, 은신처는 그를 내몰기 시작했다. 어째서? 의문을 삼킨 채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하면 전처럼 다시 깊이, 깊이 가라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하를 만났다. ‘애당초 왜……?!’ 마차 안에서의 시간도 허투로 보내지 않던 테밀시아가 어쩐 일인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현재 마차는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본래 대관식 바로 전날까지 오르세만 본가에서 지내려 했으나, 바로 어제 수도에서 뮤비라로부터 급히 전갈이 왔다. 락아타에서 축 하사신이 막 국경을 통과했다는 전갈이었다. 당연히 도착해야 할 자가 도착한 것뿐이지만 그 사신으로 온 장본인이 문제였다. 락아타 시오니타 라 제노스. 제국의 황태자! 이는 전례에 없던 일이다. 게다가 시오니타라면 현재 화제에 오르고 있는 인물이었다. 몬스터 사태의 진상규명! 바로 그가 모든 학자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렸으며, 모든 백성들이 처절하게 기다렸던 그것을 해낸 사람인 것이다. 전례에 없는 속도로, 순식간에 퍼진 그 소식은 온 대륙을 경악케 했다. 정식으로 격식을 갖춰 보내온 마족의 요구문. 그들은 ‘검’ 하나만을 원하고 있었다. 겨우 그것뿐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창세신께서 친히 증표를 내려주신 정당한 요구. 그 증거가 바로 몬스터 사태! 이는 신전의 배신이다! 신의 의지를 받든다는 신전이, 신의 허락을 얻어 정식으로 요청해온 마족을 등졌다. 그 증표까지도 외면했다.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그 정당함에서 눈을 돌렸다. 온 대륙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신전에 의탁하러 온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귀족들의 기부를 받아먹으면서 뻔뻔하게도 입을 다물었다. 온 대륙이 기도하는 땅을 향해 비난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신전을 향해 비난한 사람은 바로 신관들이었다. 특히 하위 신관으로서 백성의 곁에서 그들을 돕던 신관들의 반발은 그 누구보다 거셌다. 교황들을 비롯하여 고위 신관들의 독선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했다. 무엇보다 도화선이 된 것은 몬스터의 사태의 침묵이었다. 그렇게 진실이 발각되고 온 대륙이 기도하는 땅을 향해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하자 그를 알았다는 듯이 멈춰버린 것이다. 이는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증거가 되어주었다. 그 침묵에 안도한 만큼 신전을 향한 증오가 솟아났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지금의 침묵과 안도가 그들의 ‘일상’이었을 것이 아닌가! 제일 먼저, 가장 피해가 심했던 대 제국 락아타에서 피해보상을 요청하자 다들 뒤따라 일어났다. 신전은, 아니 교황들을 비롯한 고위 신관들은 궁지에 몰렸다. 피해보상을 해주지 않으면 온 대륙과 전쟁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고위신관보다 압도적인 수를 가진 하위 신관이 등을 돌린 판에야, 하루도 못 버티고 몰살당할게 뻔했다. 결국 신전은 제 1기 마도 때부터 쌓아온 재물을 개봉해야 했다. 바로 이 대소동의 중심인물인 시오니타가 축하사신으로 온 것이다!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다들 당황하며 어수선하게 굴고 있으니 와서 진정 좀 시켜 달라는 뮤비라 특유의 농조가 섞여 있는 전갈에 웃음이 나왔다. 뮤비라 역시 가문 내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본가로 내려갔을 터인데……. 시오니타의 등장으로 수도로 불려간 모양이다. 계승식 전날까지 본가에 있겠다고 말한 금안의 ‘지배자’를 불러들이는 가장 현명한 수단이 바로 뮤비라일테니. 테밀시아는 곧장 집사를 불러 차비를 꾸리게 했다. 물론 카스야나와 리화도 함께였다. 공적으로는 오르세만 가의 가주로서 새로운 주인의 탄생을, 사적으로는 아버지로서 아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페르노크는……. “우아악!” “바보 녀석! 다음 휴식까지 걸어!” “조장, 말위에서 자는 것도 재주라고요!” “굴러 떨어지지나 말고 그런 말을 해!” 마차 밖에의 소란함이 스며들었다. 밖의 소리를 차단시키는 아이템이 있지만 그것을 발동시킨 적은 없었다. 마스터인 테밀시아에게 주위 기운을 살피는 것은 수련에 하나였다. 마차 밖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 뻔했다. 지금은 마차 안에 있다지만 테밀시아는 몬스터 사태 때도, 전쟁 때도 말 위에서 그들을 지휘했었다. 그만큼 그들에 대해 꿰뚫고 있었다. ‘이제 저들을 누가 지휘해야 할까.’ 금안의 ‘지배자’에게 길들여진 최고의 맹수들을 과연 누가 다스릴 수 있을까? 당장은 카스야나가 있지만, 그는 마법사지 기사가 아니다. 한때는 페르노크에게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이라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그 스스로가 그것을 거부했다. 더 이상 생각해볼 여지도 없이 단호하게, 완벽하게 거부했다. 바로 오늘 아침에. “수도에요?” “그래. 계승식 전날까지 있다가 마법진으로 가려 했지만 락아타의 황태자가 축하사신으로 왔다는 구나. 식사 후에 바로 출발할 예정이다.” 친구의 방문 소식은 당장이라도 마법진을 이용해 단숨에 날라 가고 싶게 만들었지만, 입장 상 그럴 수는 없었다. 타국의 황태자의 방문에 곧 황제가 될 이가 허둥지둥 달려오는 꼴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대신 루카다에게 명해 일정을 빡빡하게 짜놓았다. “아버지……도 가시겠군요. 가주로서.” 어머니라는 단어자체를 입에 담기 거부하는 동생의 모습에 테밀시아는 씁쓸해했다. 애써 태연한척 차분하게 말했다. “챙겨야 할 짐이 있다면 말해두어라. 하인이 챙겨서 따라올 거다. 남의 손이 닿기 싫다면 식사 전까지 챙겨두고.” “……저도 가야 되는 거군요.” “당연하지 않니. 내 동생으로서, 하나뿐인 가주 계승권자로서.” 그 말에 페르노크는 미소를 지었다. 슬픔과 허무, 고통과 회한이 뒤섞인 일그러진 미소였다. “계승권자요…….” 깊이 숨을 들이 삼킨 페르노크는 저편에서 걸어오는 부모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딱딱하게 말했다. “저에겐 자격이 없습니다. 허울뿐인 계승권자정도는 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실질적인 의미로의 계승권자로서는 미달입니다. 그건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잘 알고 있을 분이 바로 형님이지 않습니까?” “…….” 물론 테밀시아도 불과 2년 전까지는 페르노크를 가주 계승권자의 재목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너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형님이 말씀하시는 지금의 저는 기억을 잃었을 때의 저겠지요?” “…….” 침묵으로 긍정하는 테밀시아를 페르노크는 상처 입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허망하게 웃었다. “전……그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격이 없어요.” 한숨처럼 죄송하다 속삭이고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아버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형제의 대화를 다 들었음이 틀림없는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 계승권을 박탈해주십시오, 오르세만 공.” 어머니, 나아가 아버지까지 거부하고 있음이 그 음성, 어조, 단어에서 똑똑히 느껴졌다. 리화가 앞으로 나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카스야나가 막았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페르노크에게도 리화에게도. 이제야 자신의 출생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환경의 진실을 알게 된 페르노크도, 이제야 왕의 속박에서 벗어난 리화도 혼란스럽고 감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카스야나가 답을 하기도 전에 페르노크는 테밀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럼 페르노크 마 카르민으로서 동행하겠습니다. 단순한 동생으로서.”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 한 뒤 처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멈춰 물었다. “카한 형님이 살아계셨다면 카한 형님께 가주 자라가 갔을 테지요, 테밀 형님?” “……아아.” 그리움과 고통이 배인 테밀시아의 음성에 페르노크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테밀시아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테밀시아는 카한세올을 아꼈다. 진심으로. 그러니 테밀시아도 알 권리가 있다. “그래도 카한 형님은 기뻐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카한 형님이 바란 것은 단지 어머니의 사랑뿐이었으니까. ……로레라자의 사랑뿐이었으니까.” 그래, 단지 그것뿐. 페르노크를 향한 애정도, 테밀시아를 향한 존경도 버릴 정도로. 희미하게 흔들리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테밀시아는 그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만큼 괴로워했었다는 것도. “페르노크님은 어째서 그렇게 어머니라는 존재를 거부하는 걸까요?” 루카다가 건넨 질문 덕에 회상에서 깨어난 테밀시아는 눈가를 문지르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테밀시아와는 달리, 평소와 같이 서류를 검토하던 루카다는 보던 것까지 내려놓고 재차 물었다. “제 삼자인 제 시선에서 보면, 이상할 정도로 싫어하던걸요? 증오에 가까울 정도로.” “확실히 그 거부는……단순히 무책임하게 내버리고 간 것에 화가 난 걸로 보이지는 않았지.” 테밀시아의 동의에 루카다는 좀 전의 일을 거론했다. “마차를 탈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와 함께 타느니 자신의 일행과 타겠다고 하셨지요. 그 말은 ‘차라리’라는 의미지요. 페르노크님은 예전 일행조차도 꺼리는 기색이셨습니다. 물론 어색한 기분이야 들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두리뭉실한 어색함이 아니라 좀더 현실적인……그래, 공포로 보였습니다. 아무리 기억이 안 난다 해도 가장 가까웠던 지기와 줄곧 붙어 있었던 동료를 두려워한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테밀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거다. 페르가 먼저 말해주기를.” 어제 요크노민의 언동으로 확신을 가졌다. 이들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기억의 유무의 차원이 아니 다른 것이라고. 기억의 유무 따위였다면 요크노민씩이나 되는 자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숨기려 할 리는 없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거다. 기억을 잃은 페르노크와 인연이 있는 자들은 안 된다. 오직 페르노크만이 굴곡 없는 진실을 알려줄 수 있다. 그리고 테밀시아가 보호하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 역시 페르노크뿐이다. 그래서 초조함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거다. “먼저 물을 수는 없는 겁니까?” “지금의 페르는 나를 두려워한다. 지금 이 상황에게 내가 물으면 그건 추궁이 되어 버려. 쫓기는 기분으로 털어 놓은 말에 진심이 얼마만큼 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먼저 말할 용기가 없는 자에게는 훌륭한 응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흐음.”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던 테밀시아에게 루카다의 말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루카다의 말이 틀리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루카다는 씨익 웃으며 마무리 지었다. “테밀시아님을 두려워한다지만 페르노크님은 결국 집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침묵하던 테밀시아는 쿡 웃으며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어 건성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루카다를 보았다. “자네는 보좌관이 되지 않았다면 사기꾼이 됐을 거야. 남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바꿔놓거든.” “칭찬으로 알지요.” 특유의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은 농조로 맞받아치는 루카다를 보며 잠시 웃다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결론을 지었다. “수도에 도착하면 얘기를 해봐야겠다. 녀석의 지금 일행들이 없는 곳에서.” 잠시 미소 짓던 루카다는 다시 서류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쭌다는 걸 깜빡했습니다만, 오르세만 가는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페르노크님은 저리 변하셨고, 계승권마저 포기하셨으니……. 물론 당장이야 현 가주이신 카스야나 공께서 건재하시니 걱정은 없습니다만.” “아버지는 페르노크가 기억을 잃었을 때의 모습을 모르시지. 내가 황위 계승권자의 아내를 맞았을 때부터 다시 전 혈족을 살피셨다더군. 처음에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필요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었지만.” “적임자를 찾으셨답니까?”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물은 거였지만, 예상 밖에 테밀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쭉 찾았지만 적임자는 보이지 않았다는군. 그런데 이번에 어머니께서 요정계에서 돌아오셨을 때 낭보를 가지고 오셨다.” “낭보라면?” “숙부께서 요정계에 계신다고 한다.” “숙부라면……. 전 가주 계승권자 아였던? 선대 휴첼 마스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테밀시아는 뜻밖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확실히 낭보로군요. 카스야나 공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던 분이니까. 하지만 전대 계승권자가 후대 계승권자 자리에 거론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식이 있다고 한다.”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어떤 녀석일지는 봐야 알겠지만 아버지는 기대하고 계시더군. 이제 그 건은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카한세올 의외의 후계자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혹은 기억을 잃었을 때의 페르노크 정도일까? ……이미 끝난 일이니까 더 생각해 봐야 헛일이다. 불과 이틀 만에 황성에 도착한 테밀시아는 루카다와 페르노크, 그리고 유시리안만을 이끌고 성으로 들어섰다. 카스야나는 타인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 리화와 함께 오르세만 가의 저택에 가 있겠다고 하며 뒤로 빠졌다. 훼오트라 아나와 이카미렌, 요크노민도 성안에는 볼일이 없다고 뒤로 빠졌다. 처음에는 유시리안도 그들처럼 뒤로 빠지려 했으나, 테밀시아가 페르노크에게 할 말이 있으니 함께 성으로 가자고 권하자 시오니타에게 인사나 하겠다며 함께 나섰다. 막 외성을 지나, 중문을 지나자 마중 나온 고위 대신들 보였다. 그들 너머에서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바로 뒤편에 뮤비라가 서서 테밀시아를 향해 목례를 해보였다. 직접 이곳까지 안내한 것일 테지. 상대가 황태자 정도 되면 카르민의 일원이 상대해야 구색이 맞으니까. 욤과 맞먹는 대 제국, 락아타의 황태자가 등장하자 자연히 테밀시아와 그 사이의 인파가 갈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를 갖춰야 했던 상대를 지금은 동등한 위치, 아니 보다 높은 위치에서 만나는 순간이다. 때문에 욤의 귀족들은 우월감에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들은 테밀시아를 동등하게 상대할만한 황족 따윈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상대가 아무리 몬스터 사태를 잠식시킨 자라 할지라도. 물론 그것은 욤의 정치적 구조만을 고려한 좁은 편견이었다. 락아타는 단순히 보라색 눈동자를 타고나기만 하면 황태자가 되는 욤과는 달랐다. 저 제국은 가장 뛰어난 황족만이 살아나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피의 숙청이라는 불문의 ‘과정’이 있을 정도로. 검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정장을 입고 서 있던 시오니타는 테밀시아가 자신 쪽으로 걸어오자 그 까만 눈동자에 장난기를 담으며 맞이했다. “굳이 소식을 전할 필요는 없다고 했었는데.” 그리곤 보통의 음성으로도 충분히 닿을만한 거리만큼 테밀시아가 다가오자 능청스런 음성을 냈다. “지금 온 걸 보면 전한 모양이군.” “나의 신하들이 자네 명을 들을 의무는 없으니까.” 듣기에 따라 도발적이기도 한 그 말에 시오니타는 호쾌하게 웃었다. 유치한 우월감 속에서 그가 보일 굴욕을 기대하고 있던 자들은 당황한 기색을 띄었다. 그 한심한 작태에 뮤비라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루카다는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이제 조금 뒤면 휜을 만날 수 있으니 모든 것이 즐거웠다. 주위 반응이 어땠거나, 테밀시아는 마주 웃으며 친구와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오랜만이다.” “2년만인가?” “소식은 잘 듣고 있었다. 멋지게 자리 잡았더군. 이제 물갈이는 다 끝난 건가?” “대충은.” 의미심장하게 웃는 시오니타에게 퉁명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네놈 얼굴을 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리안?” 놀랍다는 얼굴로 유시리안을 보는 시오니타는 참으로 능청스러웠다. 같이 중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뻔히 봤으면서 말이다. “여전히 바쁜 모양이군. 내 의뢰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욤의 예비 황제의 의뢰를…….” “의뢰 따위가 아니야. 이번은.” 제국의 황태자에게 반말 짓거리를 하는 데다 이제는 말허리까지 잘라먹는 유시리안의 행태에 다들 기막혀 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태연한 지라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쿡 웃으면서 유시리안의 뒤를 살핀 시오니타는 의아하게 물었다. “네 파트너는?” “…….” 퉁명하게 말을 했어도 희미하게 웃음기를 띄고 있던 유시리안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 모습에서 쉽게 꺼낼 수 없는 사정이 있음을 눈치 챈 시오니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할 이야기도 많았고, 또 명성만큼은 질리도록 들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화제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쪽은?” “내 동생이다. 페르노크 마 카르민.” “역시 그런가. 명성만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 대마법사 페르노크. 가나란이 만나보려고 몸부림을 쳐대는데 뜻밖에 내가 먼저 만나게 됐군.” 시오니타의 입에서 나온 호칭에 페르노크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희대의 천재’라는 호칭조차 감당하지 못했던 자신이 아니던가. 하물며 대마법사라니……. ‘그건 내가 아니야.’ 일행 사이의 어색한 기운을 감지한 시오니타는 친구의 어깨를 툭 쳤다. “지금 도착한 건 자네지만 손은 나라고. 언제까지 밖에 세워 둘 거지?” “아아. 들어가지.” 친구의 배려에 테밀시아는 웃었다. 그리고 주위 대신들을 돌아보았다. “그대들은 이만 돌아가라.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촉박할 터. 나에 대한 예우는 이걸로 충분하다.” 공손히 인사하는 대신들 사이의 길을 먼저 걸었다. 대신 속에서 뮤비라만이 유일하게 테밀시아의 뒤를 따랐다. 언제나 그랬듯이. 제 2의 중문을 지나자 화초의 달콤한 향내가 밀려들었다. 잠시 멈춰서 그 향내를 즐기는 척 주위의 기운을 탐색한 테밀시아는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2년 동안 성격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다.” “일단 겉보기에는.” 답하는 목소리는 좀 전의 부드럽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으면서 날카로운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에 실려 있는 웃음기는 전보다 진솔하게 느껴졌다. 얼굴 전체에 배여 있던 미소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옅어진지 오래였다. 그 변화에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테밀시아와 루카다, 뮤비라에게는 예상 안의 일이었고, 유시리안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고 페르노크에게는 그의 ‘소리’가 들렸다. 시오니타는 황태자가 된 순간부터, 아니 황제가 되리라 결심한 순간부터 피의 숙청을 철저히 계획해 왔다. 그 결과물이 유례에 없는 잔인한 피의 숙청. 그것은 훼손된 그의 자존심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주는 공포가 필요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아군에게만큼은 안도감을 주어야 했다. 그래서 가면을 썼다. 인간이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쉽게 착각해 버리는 종족이니까. “속은 더 꼬여졌지.” 유시리안의 말에 시오니타는 쿡 조소했다. “부정할 수 없군.” “하하. 일단 걷지.” 하며, 이번에는 시오니타와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그리고 한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뮤비라를 향해 물었다. “뮤비라, 축하 사신은 다 온 건가? 일정이 꽤 빡빡했는데.” “시오니타님을 끝으로 모두 도착했습니다.” “바로 옆이면서 늦장부리긴.” “지각은 아니잖아?” 옅게 웃던 시오니타는 무엇이 생각났는지 테밀시아의 어깨에 팔을 장난스레 걸쳤다. “언젠가 있을 대관식 때 보자고 했었지만 이렇게 금방 이뤄질 줄은 몰랐다.” “여러모로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 준 덕이지. 유능한 부하도 조력자도 많았고. 운이 좋았어.” 같이 어깨동무를 하며 답한 그 말은 겸손이 아니었다. 물론 그 유리하게 돌아간 상황 중 대부분은 철저한 계획하게 의도적으로 맞춰진 것이긴 했다. 하지만 몬스터 사태라는 비자연적인 사건이나 반란분자들의 궐기 등은 확실히 이 ‘시일’을 앞당겨 주었다. 시오니타는 어깨동무를 한 상태에서 하늘을 올려보며 낮게 말했다.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 준 게 아니야. 상황을 유리하게 만든 거지.”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 테밀시아도 시오니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페르노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시오니타는 확실히 대단한 남자다. 하지만 마스터인 테밀시아와 뮤비라, 유시리안처럼 마스터인 것도 아니었고 훼오트라 아나나 이카미렌처럼 고위 종족인 것도 아니었다. 또한 요크노민처럼 수장의 맹약자인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그의 소리는 들렸다. 그 소리는 페르노크를 향한 것이 아니기에 주위를 해야 들릴 정도로 희미했다. 처음에 그것은 무척 차가웠다. 대신들의 유치한 우월감을 오만하게 비웃고 있었다. 그토록 부드럽게 웃고 있으면서도 냉철하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가까이 가기 싫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테밀시아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테밀시아를 향한 그 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호의, 신뢰, 자랑스러움, 반가움, 장난기, 유쾌함……. “저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을 게요. 왠지……피곤해서.” 내성으로 걸어가는 이들을 향해 속삭이듯이 낮게 말했다. 이방인, 동떨어져 있다는 소외감.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낄 바에야 애당초 혼자 있는 편이 낫다.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던 테밀시아는 동생을 붙들려 했으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허락하고 말았다. “가서 푹 쉬렴.” “예. 감사합니다.” 목례하고 돌아선 그를 보던 유시리안이 씩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시온에게 인사도 했겠다, 나도 이만 가보겠어.” 그리곤 페르노크의 뒤를 쫓는 유시리안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시오니타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꼭 나에게 인사하러 온 것처럼 말하는 군.” “그 말대로. 자네에게 인사하러 따라나선 거야.” “흠.” 퍽이나, 라는 말을 삼키며 분명 다른 속셈이 있었던 거라 확신하는 시오니타였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이다. 잠시 동생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테밀시아는 왠지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와 주먹을 꾹 쥐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흐릿한 동생의 등이 안타까웠다. 이런 감각은 예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처음 이므르에 보냈을 때, 마법시전에 실패한 그를 길드에 보냈을 때……. 오래토록 못 만나게 될 것만 같은 느낌. 기약 없이 멀어지는 그 느낌에 당장이라도 달려가 동생을 붙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테밀?” “……아아.” 시오니타가 의아하게 물어오자 퍼뜩 정신을 차린 테밀시아는 후 웃으며 몸을 돌렸다. 괜찮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차갑게 군다지만, 그토록 동생을 위했던 유시리안이 곁에 있으니까 문제없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발을 떼었다. 가득히 널려있는 쓰레기들, 정체모를 걸쭉한 것이 들러붙은 회색 벽, 희미하게 나는 피비린내와 아찔한 악취. 이것이 큰길과 접해있는 뒷골목 시작점의 모습이다. 금이 가고 부서져 자갈보다 조금 나은 정도인 바닥 타일을 딛고 뒷골목을 한참 걸어 들어가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골목 풍경이 나타난다. 대신 간간히 버려진 시체 따위가 보이지만 말이다. 차라리 더러운 것이 나을 정도로의 살풍경 속을 익숙하게 걸어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를 탐색하던 구석구석의 패거리들은 이내 동경어린 눈으로 남자의 모습을 쫓았다. 그는 그들의 마스터였다. 청염의 마스터! 불의 수장의 맹약자인 남자! 전무후무한 마법검의 소유자! 어째서 이 밑바닥중의 밑바닥까지 왔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 그는 그들이 이곳으로 굴러 떨어질 때 잃어버린 희망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그는 약속했다. 반드시 양지로 끌어올려주겠다고. 당당하게 이름 뒤에 붙일 수 있는 ‘호칭’을 만들어주겠다고. 모두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들뜬 심정으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뻔히 알면서도 민은 내색하지 않았다. 오만하게 앞을 보고 걸었을 뿐. 자하라 가의 저택에 가보니 산은 외출중이라고 했다. 이곳에 있을 확률이 크긴 하지만, 이곳에 없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제그와 키르바나가 있으니 말이다. 이미 그들끼리의 정보교환은 되어 있을 테니까. 제그와 키르바나의 은신처로 먼저 가려다 생각을 바꿔 갈망하는 안식처로 향했다. “오랜만이야. 마스터.” “여어.” 아직 한가한 시간이라, 키안은 식당 안 의자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 앞에는 제그가 앉아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가 돌아왔는데도 검 날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치 어제 헤어진 친구를 만난 듯한 여유였다. 키안이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이제야 의뢰가 끝난 거냐? 생각보다 늦었는걸.” “대충은. 중간에 들릴 곳이 있어서 좀 늦어졌어.” 검을 검집에 밀어 넣은 제그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민을 저지하며 일어났다. “일단 은신처로 가자. 할 말이 많아.” 민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키안에게 짧게 인사한 뒤 먼저 나섰다. 길을 걸으며 제그는 건성으로 물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길에서 할 수는 없었다. “그럭저럭 날짜는 맞춰서 왔군. 계승식이 이제 이틀 남았던가?” “아아. 온 거리에 국기가 꽂혀있더군. 꽤 장관이었어.” “일은 잘 된 건가? 신관 쪽은?” “확실하게 해치웠지. 운 좋게도 당사자들이 납셔주셨으니까 훨씬 수월하게 됐어. 그런데 꽤 서두르는 걸?” 스쳐 지나가듯이 질문했지만 여러 가지를 묻고 있었다. 제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급할 수도 있고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너를 기다리는 눈치라.” “키르가……?” 키르바나는 언제나 민에게 많은 돌파구를 제시해주었다. 레타 내 세력문제는 아이세란으로부터 정보를 빼옴으로서 도왔다. 제그와의 대립 때는 미라를 죽임으로서 도왔다. 욤 외의 제국의 허락 때는 페이야 공의 의뢰 내면을 읽어냄으로서 도왔다. 신전의 일도 마찬가지다. 민이 청염의 운명을 타고난 이상 키르바나는 믿을 수 있는 우방이다. ‘그래, 내 운명에 휩쓸리는 게 제그에게 도움이 되는 이상은 말이지.’ 오히려 상호계산관계가 확실해서 더 믿을 수 있다. 제그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이쪽이 배신 당할 일도 없는 것이니까. 민은 배신이라면 지긋지긋한 남자였다. 배신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자신의 최초의 지기가 지금까지도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민에게 있어서도 안식처와 같은, 제그와 키르바나의 은신처는 여전히 아담하고 포근했다. 오래된 나무향기가 배어나오는 것만 같은 곳.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거라 생각하며 지내는 자하라 가에서의 거처와는 다른 느낌이다. 새하얀 소년, 키르바나는 그들이 올 것을 알고라도 있었는지 소파에 앉아 그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태 읽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과 쿠키, 차가 놓여져 있었다. 장님인 키르바나는 책을 귀로 읽었다. 이들의 책은 펼치면 그 내용이 음성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제그는 동생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마법이었다. 당장 마법길드에 보인다면 다들 경악할 혁신적인 마법이었지만 그는 마법의 이름을 ‘키르바나’로 명명하고 오직 동생만을 위한 마법으로 두었다. 그것이 키르바나는 기쁜 듯 했다. “어서오세요.” 환하게 웃으며 둘을 맞은 키르바나는 정확하게 요크노민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늦지 않아 다행이에요.” “듣고 싶은 게 많아.” 가면을 벗으며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제그는 주방으로 갔다. “화림?” “아, 부탁해.” 주전자에 물을 채우며 제그가 말을 꺼냈다. “락아타 지점에 남겨둔 내 보고서는 봤겠지?” “응. 엘프들이 욤의 수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 말이지? 그래, 곤크 쪽은 어떻지?” “산이 알아본 결과, 그쪽도 어수선하데. 록이 우는 소리를 했다는 군. 외부로 나갔던 용병들까지 죄다 불러들이고 성벽 방어에 무기 정비에, 이것저것 준비하는 모양이야.” 컵을 꺼내다 말고 고개를 돌려 민을 보았다. “확실히 둘만 놓고 보면 뭔가 있어 보여. 곤크의 마스터가 행방불명됐던 것이 2년 전이라고 했지? 단순히 그것만으로 곤크에 대해 알아보라고 한건 아닐 테고. 뭐가 있는 거지?” “마족과 신관 사이에 엘프가 있으니까. 그리고 때마침 몬스터 사태가 시작됐을 때 실종된 현 마스터, 라이시륜 장 곤크는…….” 민은 새삼 목소리를 낮췄다. “엘프거든.” “……아사라느라는 엘프를 보고 깨닫긴 했지만…….” 차를 따라가지고 나오면서 제그는 빈정댔다. “엘프라는 종족은 내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 머리가 뻑뻑하게 돌아가던 아사라느도 그렇고 오만방자하기로 유명한 곤크 마스터도 그렇고.” “그거야 개성이지.” 제그가 건네주는 잔을 고맙게 받아들었다. “일단, 곤크와 엘프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치고서라도 시점이 두개로 갈리는군. 하나는 곤크와 엘프가 합심하여 누군가를 막으려 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마족일 확률이 크겠지? 마족의 요구문의 공개를 제지하려 했던 걸 고려했을 때 말이야. 또 하나는 곤크와 엘프가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엘프끼리 어째서? 엘프들은 유대성이 깊은 종족으로 유명하지 않나?” 민의 말을 가만히 듣던 제그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거지? 단순히 록이나 딜린이 그곳에 있는 것 때문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안전장치로 알아두려 한 게 아닌가? 락아타의 ‘허가’를 받은 이상, 몬스터 사태를 헤집을 필요는 없지 않아?” “아아. 안전장치였지.” 따뜻한 찻잔을 손으로 감싸다가 씁쓰름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래, 안전장치일 뿐이다. ‘허가’를 받기 위한. 그리고 허가를 받은 지금은 아마도 호기심 충족이겠지. 새로운 신분으로 독립해 나오기 위해서는 황실과 신전의 허가가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받기 힘든 쪽은 단연 황실이다. 자신의 지배 하에서 이단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녀석을 반길 지배자는 없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세상인데, 하물며 평탄하게 있던 것이 모나려 하는 데야. 게다가 두 제국 이상의 허가가 필요하니 어려움이 더했다. 민은 두 제국을 욤과 락아타로 택했다. 어느 제국보다도 혈통중심주의인 욤에서 허가를 받는 다는 것은 절대불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테밀시아가 있었다. 철저한 혈통중심제인 욤에서 무모하게도 황제가 되려하는 남자. 그럼에도 그가 그렇게 마음먹었다는 것 자체로 ‘무모하다’라는 생각이 안 들게 하고 마는 ‘지배자’. 그래서 그를 도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형님을 위해 도왔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민은 목적을 갖고 도왔고 그 대가로 허가를 요구했다. 테밀시아는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이로서 하나의 허가는 얻어냈다. 그 다음으로 락아타를 택한 것은 그들의 겪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다. 락아타는 농사가 주를 이르는 곳. 때문에 몬스터 사태로 인한 피해가 가장 극심한 곳이었다. 게다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유독 락아타에 출현빈도가 높았으니, 피해는 더욱 그게 달해갔다. 그 와중에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졌다. 황실은 백성의 원성에 흔들리고 있었다. 때문에 락아타를 택했다. 상황 돌파를 위해서라면 새로운 신분의 출현쯤은 용납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풍요롭고 안정된 황실은 안 된다. 아쉬울 게 없는 그들은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때문에 레타 마스터가 되어, 레타의 광범위한 세력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몬스터 사태에 대해 조사해 왔다. 몬스터 사태라는 비자연적인 현상을 파헤쳐 그 진실과 맞바꾸려 한 것이다. 하지만 성과는 적었다. 민은 테밀시아의 황제등극 직후에 신분창안을 하고 싶었다. 최초의 금안의 황제의 탄생과 더불어 역사의 한 획을 긋고 싶었다.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 몬스터 사태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이상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키르바나가 어떤 의뢰를 지목했다. 그것은 락아타의 페이야 공의 의뢰였다. 그 내용은 ‘어떤 물건을 기도하는 땅에서 가져와 줄 것’, 그리고 그 목적은 ‘세력 확립’. 키르바나는 그것이 몬스터 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뢰. 그것은 신전, 아니 훼오트라 아나 개인의 의뢰였다. 그 내용은 ‘어떤 물건을 시오니타 황태자에게 가져다 줄 것’, 그리고 그 목적은 ‘몬스터 사태의 해결’. 이 두 의뢰에서 어떤 연관관계를 읽은 민은 직접 나섰다. 그리고 시오니타를 만났다. ‘테밀시아님의 지기다운 남자였다. 강해.’ “생각보다도 야심 찬 남자였군.” 요구문을 건네기 전에 의뢰의 대가를 요구한 민에게 시오니타가 한 첫마디였다. 물론 대가는 ‘허가’였다. “확실히 그 요구를 황제가 아닌 나에게 한 건 현명한 처사였다.” 그렇게 말하고 시오니타는 냉소를 지었다. “나로서는 손해볼일 없는 거래군. 하지만 그대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 침묵으로 질문을 대신하는 민을 보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로서 허가를 내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황제가 철회하면 그걸로 끝이다. 황제에게 밉보이고 있는 지금이야 분명 그리 되겠지.” “거래 후에는 시오니타님의 손에 요구문이 놓여집니다. 그럼 상황이 달라지겠죠.” “호오? 어떻게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거지?” “제일 먼저 황실을 향했던 원망이 신전으로 돌려집니다. 그것으로 시오니타님을 향한 황제의 미움이 약간은 가셔지겠죠. 그 다음 신전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게 됩니다. 근래 즐거울 게 없었던 락아타로서는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겠지요. 마지막으로.” 흥미롭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시오니타를 바라보며 민은 또박또박 말했다. “마법사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신전과는 앙숙인 마법사들은 신전에게 망신을 줬다는 것 하나만으로 시오니타를 열렬히 지지하게 될 것이다. 본래 집단이란 그런 것이다. 만약 마법사의 영향력이 약하다면 그저 그런 것으로 끝나버릴 테지만, 락아타는 마도제국이다. 마법사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미치는 곳. 락아타에서 마법사의 지지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락아타에서 황제는 가장 영악한 정치인. 현명한 황제는 자신을 압도할 정도로 세를 넓힌 시오니타를 다시 가까이 할 것이다. 거슬려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할 테니. 시오니타는 그 누구보다도 잔인한 피의 숙청을 한 남자. 적에 한해 자비가 없는 자니까. “하하하!” 가식적인 미소도, 차가운 조소도 아닌 호쾌한 웃음을 한참 터뜨린 시오니타는 오만하게 말했다. “자신이 품은 야심을 감당할 남자다. 나와 거래를 할 자격은 있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가 나에게 위협을 느껴, 다시 가까이 할 만큼의 영향력을 과연 이 요구문이 발휘해 줄까?” “……?” “신전에게 주는 타격이 크면 클수록 그럴 가망성은 커지겠지.” “……저에게 그것을 도우라는 뜻입니까?” 시오니타는 입술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신전은 백성의 지지 하에 먹고사는 존재. 백성의 실망이 클수록…….” “타격도 커진다, 이 말씀이시군요.” “레타는 가장 광범위하게 세력이 퍼져 있는 길드라 들었다. 민심을 조작하기 딱이군.” 민은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에 불쾌하다기 보다는 감탄했다. 지금 처음 ‘허가’에 대해 들었으면서, 그 짧은 순간에 여기까지 읽어낸 건가? 과연 테밀시아의 지기! “그 대신 허가는…….” “원하는 시일에, 확실히.” 시오니타의 얼굴에 다시 예의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로서 두개의 허가를 받아냈다. “그보다 세 번째 허가는 어떻게 할 거지?” “응?” 퍼뜩 정신을 차린 민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제그를 발견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아아. 받았어.” “받았다고? 신전 쪽도 해결된 거냐? 하지만 그쪽은 신전이 아니라 훼오트라 아나 개인의 의뢰였다며? 아무리 훼오트라 아나라도 신전에서의 위치는 대신관. 교황이 아니잖아?” “운이 좋았어.” 훼오트라 아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차를 두어 모금 삼켰다. 씁쓰름한 차 맛이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요구문의 공개로 교황의 입지가 약해졌거든. 훼오트라 아나는 진실을 밝힌 자로서 선망에 올랐고. 이 시점에서 훼오트라 아나가 허락 한 것을 교황이 철회하지는 못하지.” 상황을 설명하면서 계속 훼오트라 아나를 떠올렸다.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읽고 있는 걸까? 지금 제그에게 민이 하는 말은 훼오트라 아나가 요구문을 건네주면서 민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어째서 레타에게, 민에게 의뢰를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 천지다.’ “날짜를 맞출 수 있게 됐군. 계승식이 모레였던가?” “아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거상이나 귀족들을 호위하던 엘프들은 수도에 도착했나?” “도착했지. 락아타 황태자가 가장 늦게 도착했으니까. 귀한 몸일수록 엉덩이가 무거운 법이잖아? 떨거지들은 벌써 다 도착했어.” “엘프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수도에 계속 있나? 아니면 밖에서 대기 중인가? 그도 아니면 곤크 쪽으로?” 뮤비라의 후계식과 마찬가지로 대규모의 인구가 집중되는 행사시에는 수도에 동행할 수 있는 군사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 수는 평상시에 저지되는 수보다 훨씬 아래라, 대동하는 호위는 정예 중에서도 정예를 고른다. 그러니 엘프들이 수도로 들어왔을지, 수도 밖에서 정류하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엘프의 실력으로 봤을 때 수도에 들어와야 마땅하긴 했지만 말이다. “산이 쭉 감시를 했는데, 수도 안으로 들어온 엘프는 없었어. 삼일 전까지는 거상들도 아직은 수도 안으로 안 들어왔기 때문에 같이 밖에 있었지. 계약한 의뢰에 따라 자유 시간을 갖는 정도가 달라질 테니 더 지켜봤는데, 이틀 전부터 움직임이 보이더군.” “초대받은 자가 다 들어오기 전까지는 초대받지 못한 자는 들어올 수 없으니까……. 어디로 움직이고 있지?” “남하했어. 그리고 방향을 바꿨지. 이카미렌 산맥을 우회할 생각인모양이야.” 수도에서 이카미렌 산맥 우회하면 무엇이 나오는가. 생각할 것도 없다. 너무나 유명한 곳이니까. “역시 곤크인가.” 미간을 문지르며 다시 차를 마셨다. 우회한다 해도 엘프의 속도로는 3~5일 정도 걸릴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엘프들이 눈에 띄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다르게 계산된다. 한번에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시선을 끌 테니 그것은 피할 테지. 시간차를 두고 집결한 뒤에 움직일 거라 가정한다면 넉넉하게 일주일정도가 걸릴까? 그중에 벌써 이틀이 지났으니, 앞으로 오일. ……자, 이제 어떻게 할까? 곤크에서 외부에 협력을 구할 생각이었다면 가장 먼저 레타에 연락이 왔을 것이다. 타 용병단과는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니까. 이번 전쟁에서의 일로 평판이 꽤 좋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뭐, 사이가 좋다 해도 도움을 청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현 마스터의 자존심이 좀 높아야지. 청하지도 않은 자에게 가서 도움을 베풀 정도로 레타는 오지랖 넓은 곳이 아니다. 받는 당사자가 고마워하지 않을 거란 걸 뻔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야 더욱 그랬다. 더구나 엘프들이 곤크로 가는 이유마저 확실히 모르는데. 곤크와 함께 싸우려는 건지, 아니면 곤크와 싸우려는 건지. 그때 민의 의문을 읽은 듯이 키르바나가 단정 지었다. “그들은 곤크와 싸우려고 하는 거예요.” “……!” 약간 몸을 움츠린 키르바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늦지 않아 다행이에요.” 처음 민이 들어왔을 때도, 키르바나는 저렇게 말했다. 그제야 민은 그 말에 묘한 여운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까도 그런 말을 했었지? 무엇에 늦지 않았다는 거야?” “지기를 되찾을 기회.” “……!” 흠칫 놀라 키르바나를 바라보던 민은 이내 쿡 웃었다. 이 아이의 능력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듯 종종 놀라버리곤 한다. 옆에서 제그는 관심 없는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동생의 신비한 능력이야, 굳이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민을 돕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애당초 그가 얀이라는 남자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마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동생의 그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그분과 곤크의 마스터의 사이를.” “……?”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라이시륜은 강한 자이다. 아무리 엘프들이라도 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능력을 가졌다. 그러니 엘프의 습격 정도는 아무런……. “왜 곤크가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 거지?” 불현듯 생각난 의문에 민이 눈을 번뜩였다. 차를 다 마시고 과자를 집어 들던 제그가 당연하지 않냐며 답했다. “엘프가 습격하려 한다며? 전투 준비를 안 하면?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랴?”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니야! 라이시륜은 역대 곤크 마스터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칭해지는 남자야. 귀족들조차 꼼짝 못할 정도로! 게다가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그가 곤크 내에 틀어박혀서 덤벼오는 자를 상대한다고? 차라리 단신으로 초록고향에 쳐들어가는 편이 그답지 않아?” “확실히…….” 두 남자의 시선이 키르바나에게로 향했다. 키르바나는 예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해답을 주었다. “지금 그는 몸이 좋지 않아요.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죠.” “녀석은…….” 잔뜩 흥분한 민이 쥐어짜듯이 한 말을 키르바나가 조용히 이었다. “그는 친구의, 하물며 지기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할 사람이 아니지요.” “…….” 순간 멍해진 정신을 급히 수습한 민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가면을 쓰면서 입을 바쁘게 놀렸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듣지. 급한 게 있다면 제그가 와줘.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거라면 아레나 테사라에게, 며칠 비운 거라면 로딘에게 전해주고. 산은 지금 엘프들을 추적하고 나?” “응.” “연락은?” “일정 시간에 마법구로 와. 이쪽에서 먼저 하는 건 하지 말라는데.” “어떤 소식이건 바로 전해줘.” “뭐, 그러지.” 제그가 건성으로 답하는 것을 뒤로 하고 은신처를 나왔다. 오르세만 가에 도착한 페르노크는 정원 구석에 멍하니 앉아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페르노크에게 호위를 보이는 기사들이 거북해서 피해있는 것이다. 본래 그들은 페르노크를 경멸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호의를 보이는 자는 페르노크가 아닌 무하였다. 고작 2년. 자신이 18년 동안 해내지 못했던 것을 그녀는 고작 2년 만에 해냈다. 얼마나 느끼고 싶었던가, 저런 호의를. ‘계속 잠들어 있고 싶었어.’ 쌀쌀한 바람이 강하게 부딪쳤다. 과거 페르노크는 이정도 추위에도 맥을 못 추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날렵하고 단단하게 단련된 몸은 자신이 보아도 강하고 멋졌다. ‘난 이제 어쩌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 몇 번이고 묻고 또 묻는다. 그럴 때면 냉혹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왔다. -결국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냔 말이다! 살기 싫어서 죽은 거 아냐! 그럼 죽으란 말이야, 얌전히! 죽음.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벌써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하늘……. 손을 뻗어보았다가 그런 자신이 바보 같아 다시 내렸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하늘은 잡을 수 없다. 그때의 카한형님처럼. 멀고 까마득하다. 차마 증오할 수 없었던 로레라자도, 그토록 사랑받고 싶었던 카한세올도 이제는 없다. 괴롭고 괴로워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격한 감정이, 이제는 공 허하게 비어버렸다. 텅 비어버린 가슴을 모아 쥐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 준 게 아니야. 상황을 유리하게 만든 거지. 듣고 싶지 않은데 들렸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갈 수 없었다. 사랑 받고 싶은데 사랑 받지 못했다. ‘희대의 천재’라는 이름 하에 미움 받았다. ‘오르세만’이라는 이름 하에 괴롭힘 당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까? 시오니타는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테밀시아이나 시오니타라면, 이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할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르노크는 페르노크일 뿐, 그들이 아니다. 때문에 유리하게 할 방법을 생각해내지는 못했다. 하나뿐인 희망을 잃기 싫어 몸부림치는 게 다였다. 그런데도 잃었다. 몸부림 쳐서, 마법을 잃는다 해도 되찾지 못한다고 한다. 몸부림 쳐서, 계승권을 포기한다 해도 되찾지 못한다고 한다. 몸부림치고 몸부림 쳤는데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하릴없이 사라지는 모양을 봐야만 했다. 붉어지는 하늘을 외면하고 어둑한 땅을 내려보았다. 시오니타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됐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게 됐다. 겨우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이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것이 그가 원하는 것.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죽으면 그것이 가능한가? 죽음을 택했던 그 순간에 육신을 침범당해 원치 않은 고통을 지겹도록 강요당해야만 했었는데. ……완전히 죽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죽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분명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그 순간 뛰쳐나온 것일까? 자각은 지금에야 하게 됐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왜 죽임을 당하려는 순간 뛰쳐나온 것일까? 정말로……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걸까? “무하!” 헐떡이는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닿지 않는 음성이었다. 누구보다도 페르노크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음성은 계속해서 무하를 불렀다. “무하! 무하! 무하!” 점차 가까워지면서 결국 어깨를 움켜쥔다. “이무하!” 그렇게 안타까운 눈으로 봐도 ‘페르노크’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데……. “요크노민?” 저편의 나무 옆에 기대 있던 유시리안이 의아한 음성으로 요크노민을 불렀다. 그런 유시리안의 어깨를, 어느새 나타난 훼오트라 아나가 붙잡았다. 그리고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보는 그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그동안 잘 참으셨습니다.” “손 치워. 빌어먹을 녀석.” 하며 손을 탁 쳐냈다. 그때 훼오트라 아나 뒤편에서 이카미렌이 나타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두 사람을 의아하게 보는 데 요크노민이 한층 강하게 무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시륜이 위험해!” “나, 난 그런 사람 몰라.” 페르노크가 짜내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요크노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라이시륜이 위험하다고!” “난 그런 사람 몰라!” “무하! 그가 위험하단 말이야!” 페르노크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다. 요크노민은 그런 그의 어깨를 굳게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아 불가능했다. 키르바나는 ‘늦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것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라는 뜻이었다. 다음 기회가 있었다면, 키르바나는 ‘이번에 할 건가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다음 기회가 있었다면 말이다. “네 지기가 위험하단 말이다, 무하.” “나, 난 지기 같은 거 없어!” 늘 혼자였어. 누군가를 믿는 다는 거,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카한 형님 밖에는! 카한 형님 밖에는! 그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어!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준 게 아니야. 상황을 유리하게 만든 거지. “나, 난…….” 페르노크는 혼란한 눈으로 머리를 짚었다. 모두 다 그를 싫어했다. ‘희대의 천재’인 그를, ‘오르세만 가의 가주계승권자’인 그를. 시기하고 증오했다. -너도 나의 펠처럼 시작하고 싶은 거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언젠가 생길 있어야 할 곳을 찾아 해매고 싶은 거냐? “지기 같은 거…….” 누구도 진짜 페르노크는 봐주려 하지 않았다. 날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원했는데.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이것만은 알아둬. 나의 펠은 다시 시작했지만, 절대 과거를 버리지 않았어. ‘처음부터’가 아니었어. 지긋지긋할 정도로 과거에 얽매여, 괴롭고 힘들어했다고. 그렇게 ‘시작’했어.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필사적으로 걸어왔어. 바로 내가 있는 곳까지! “나는…….” 덜덜 떨어대던 페르노크는 비명을 삼키듯이 몸서리쳤다. ‘나는……원하기만 했다…….’ 어둠이 덮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은신처가 아니었다. 따뜻하고 몽롱하며 안락하고 조용했던 그 은신처가 아니었다. 낯설다. 모든 것이 낯설다. 주춤주춤 물러섰다. 과연 물러선 것인지는 페르노크도 몰랐다. 그저 여기서 떨어지고 싶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마치 페르노크가 은신처에서 튕겨졌을 때처럼, 어둠이 그 무언가를 뱉어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검은 머리카락, 어둠을 밀어내는 새하얀 얼굴, 깊고 따뜻해서 울고 싶어지는 눈동자. 이미 봤던 얼굴. 점점 자신을 밀어내는 은신처에 달라붙어 웅크리고 있었던 그때 만나 버렸던 여자. 하지만 어째서? 「무하……?」 「……미안해.」 천천히 다가와 손을 맞잡았다. 지금의 페르노크 것만큼이나 거칠고 단단한 손바닥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 눈빛만큼이나 따뜻해서 페르노크는 밀려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 삼키다가 결국 토해냈다. 끊임없이 오열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이렇게 봐주길 바랐다. 이렇게 감싸주길 바랐다. 이렇게 다가와주길 바랐다. 하지만……바라기만 했다 . 「네가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면서…….」 무하는 조심스럽게 페르노크의 손을 어루만졌다. 혼란했던 그녀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었던 그녀가, 스스로 검을 꽂아버렸던 그 손이었다. 「알면서…….」 검을 꽂은 것은 무하였지만, 그 고통은 고스란히 페르노크가 받아내야 했다. 「나만 힘들다고 착각해 버렸어. 나만 괴롭다고 착각해 버렸어. 정말 미안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무하는 그 손을 한번 굳게 쥐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페르노크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따뜻했던 온기만큼이나 든든했던 감촉만큼이나, 지금의 텅 빈 손이 춥고 외로웠다. 천천히 시선을 무하에게로 옮겼을 때, 페르노크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무하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마워. 나에게 ‘있어야 할 곳’을 찾을 수 있게 해줘서. 그런 시간을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엎드려 절했다. 「그리고 미안해.」 그 순간, 페르노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들렸다. 무하가 떠올리지 않은 것까지도.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무하의 두려움, 서러움, 슬픔, 고통, 괴로움. 그리고 그만큼의 행복, 즐거움, 기쁨, 다정함, 그리움. 그 중에서도 유독 강한 게 있었다. 페르노크는 괴롭게 물었다. 「괜찮아?」 무하는 고개를 들어 페르노크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알 수 있다는 것을 무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하는 말했다. 「비겁한건 나쁜 게 아니라고, 율이 말해줬어.」 「…….」 그 냉혹하고 이기적인 남자가 이토록 무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하가 사랑 받고자 했기 때문에. 힘들어 비틀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똑같이 도망쳤었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절망과 괴로움을 느끼고, 똑같은 선택을 했다. 하지만 무하는 상황을 바꾸고자 했다. 그래서 바꿨다. 페르노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대로다. 페르노크는 18년 동안이나 못했던 일을 무하는 2년 만에 해냈다. 사랑을 받았고, 신뢰를 받았고, 존경을 받았다. 그것은 무하가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뭘 알아? 너희가 내 괴로움을 알아? 아무도 몰라! ……그렇게 도망쳐왔다. 하지만 무하는? 추궁 당해진 느낌에 초조하게 뒤로 물러나려는 페르노크를 향해 무하가 웃었다. 「이번엔 내가 너에게 말해줄게.」 일어선 그녀는 페르노크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그만큼 페르노크는 뒤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섰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 괴로움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움직였다. 이제 페르노크는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만큼은 알고 있기에. 멈춰선 그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무하는 두 팔을 뻗어 그를 안았다. 카한형님처럼 서툴면서도 다정한 온기에 페르노크는 안심했다. 페르노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하는 부드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말해주었다. 그때 유시리안이 그녀에게 그래주었던 것처럼. 「비겁한 건 나쁜 게 아니야, 페르노크.」 그 따뜻함이 슬퍼서 페르노크는 나직이 물었다. 이제는 알게 됐으니까. 어째서 자신이 깨어났는지, 어째서 안식처가 자신을 밀어냈는지……. 「정말 괜찮아?」 「…….」 무하는 답 대신 페르노크의 등을 몇 번 두들겼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녀는 사라졌다. 허무하게 허공을 안게 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던 페르노크는 천천히 무너졌다. 그리고 울었다. 그것은 그가 타인을 위해 흘리는 두 번째 눈물이었다. * * * 마침내 온 나라가 열망하던 바로 그 날이 왔다! 구름 한점 없이 드높은 하늘, 쌀쌀하지만 깨끗한 바람, 건조하지도 눅눅하지도 않은 공기. 쾌청하기로 치면 최상급인 날이다. 사람들의 기대와 설렘은 그 쾌청함과 더불어 상승세를 이루고 있었다. 유쾌한 축제! 위대한 시작! 역사의 한 획! 과거 이므르의 계승식을 기다렸던 자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이 순간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행운에 건배하며 마냥 들뜬다. 어느 기념일보다 많이 보이는 국기와 곳곳에서 들려오는 국가가 그 심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무리 아둔한 자라도 느끼고 말 그 거대한 기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석이나 금박 없이 욤 전통 문양만이 음각으로 새겨진 마차였다. 빈 틈없이 정교하게 패여 있는데도 심플해 보이는 그것은 화려하다기 보다는 고상해보였다. 사방이 개방되어 주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깨끗한 돌바닥을 굴러갔다. 오만한 얼굴 위로는 거슬리지 않는 거대함과 천박하지 않는 화려함이 응집되어 있는 역삼각의 관이 씌어져 있고, 단단한 몸에는 금실 자수가 놓여진 붉은 옷이 덮여있다. 손에 껴져 있는 것은 대대로 황실에 내려오는 황제의 반지, 들고 있는 것은 욤 제국의 수호 드래곤이라 추앙받는 이카미렌의 위용이 새겨진 황제의 검. 그 어느 것 하나 아 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가장 화려한 것은 역시 그것에 감싸져 있는 장본인. 무표정하게, 흔들림 없이 앞을 바라보며 사위를 압도하는 남자. 충분히 갈무리 되었음에도 강렬하게 쏟아지는 그 기운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금안의 ‘지배자’! 금안의 황제! 그들의 황제의 등장이었다. 귀를 틀어막아도 터질 듯이 울리던 소음이 일순에 사라졌다. 자기들끼리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고 노래하던 이들이 엎드려 절했다. 길가에도 건물에도, 빼곡히 들어박혀 있는 인파의 모양은 설탕에 몰려드는 개미의 그것과 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 그들의 설탕은 하나뿐이라는 것. 엎드려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인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을 보라.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수도에 몰린 적이 얼마나 있을까? 또 이토록 조용한 적이 얼마나 있을까? 바싹 조여진 긴장의 틈새를 유유히 가르는 황금의 광채. 당당한 우리들의 황제여! 위엄과 기품, 그리고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는 황제의 모습을 감히 훔쳐보며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듯한 탄성을 삼키는 자들로 가득한 대로를 지나 이제 막 마차는 이오문에 도달했다. 이오궁! 황위 계승식이 치러지는 곳이며 황위 계승식에만 개방되는 곳인,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은밀한 곳. 그리고 그곳과 일직선으로 연결된 단 하나의 문, 이오문. 이오궁과 마찬가지로 계승식 때만 열리는 그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황제의 곁으로 근위기사단장이 다가갔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황제는 단장의 호위 하에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이오문을 들어서기 전에 열성적으로 자신을 보는 백성들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수도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그 거대한 함성이 새로운 황제를 향한 애정과 기대를 알려줬다. 보일 듯 말 듯 옅게 웃은 황제는 이오문 쪽으로 거침없이 발을 디뎠다. 바로 뒤에서 들리는 함성에도 성안의 분위기는 절제되어 있었다. 차분하고 엄숙했다. 채 숨기지 못한 들뜬 기색이 스며 나오기는 했지만 밖에 비하면 점잖은 편이었다. 이오궁과 이오문 사이의 대로는 붉은 꽃잎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선명한 핏빛의 그것이 황제가 밟고 지나갈 길이었다. 그것은 밟히면 밟힐수록 향을 진하게 뿜어낸다. 때문에 그 잎은 희생이라는 불리며 그 향은 영광이라 이름으로 불린다. 때문에 그 꽃은 ‘황제’라 불린다. 희생을 밟고 영광을 일궈내는 자! 그 황제의 길 좌우로 모든 신하들이 고두하고 있었다. 그를 따르고 받들던 이들을 비롯하여 질시하고, 모함하고, 신경전을 벌이던 자들까지도. 문 바로 옆에는 자하라 가주와 오르세만 가주, 그리고 가야다 가주가 있었다. 문에 가까울수록 고위요, 멀리 있을수록 하위였다. 문 바로 앞에서 멈춰 섰던 황제가 붉은 꽃을 처음 내딛었을 때,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느릿하지만 강한 걸음으로 황제가 앞을 지나자 고두하고 있던 신 하들이 차례로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문에 가까이 있을수록, 황제와의 거리가 가까웠다. 그래서 고위일수록 문에 가깝게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황제의 길을 밟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들까지 밟을 수 있었다면 황제의 길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여 황제의 길을 밟게 된다면 반란자로 몰려도 할 말이 없게 되어 버린다. 그들은 여전히 붉은 길 좌우에서 황제를 따랐다. 처음부터 길에서 약간 떨어져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걸을 공간은 충분했다. 음악이 활짝 열려진 이오문을 빠져나가 사방으로 번지자 성 밖의 환호성도 멈췄다. 대관식의 음악은 대관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파도 타듯 번졌던 그 환호가 똑같이 점차적으로 멈춰지다가 완전히 침묵한 그때, 황제는 이오궁의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 마치 계산된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대관식을 주재하는 자는 욤의 국교인 치유와 중재의 신교의 교황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했다. 훼오트라 아나께서 친히 나서주신 것이다. 궁지에 몰린 창 세신전이 이미지 회복을 위해 나선 게 아닌가 싶지만, 훼오트라 아나라는 존재정도가 대관식을 중재한다는 것은 매우 커다란 영광이었다. 창세신전의 정식복장을 차려입은 훼오트라 아나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처럼도 청년처럼도 보이는 그였지만, 이오궁의 엄중함에 짓눌리지 않은 당당함이 있었다. 고요한 홀에 훼오트라 아나의 철없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렸다. “욤 테밀시아 장 제노스라민.” 황제는 답 대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예를 취했다. 이어 신하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모든 자가 자세를 갖추고 사위가 조용해졌을 때, 훼오트라 아나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제 그대는 욤이라는 거대한 가문의 수장이 됩니다.” 절차와는 다른 말을 꺼낸 훼오트라 아나는 주위의 당황하는 모습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쾌활하게 이었다. “그대는 이 가문을 배불리 먹여야 하고, 따뜻이 재워야 합니다. 모두가 당신의 핏줄이요, 자식인 겁니다. 좀 많긴 합니다만. 후후.” 교황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법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가볍게 느껴지는 어조와 말투와는 달리, 그것이 내포하는 뜻은 깊고 넓었다. “가장으로서 그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습니까?” “예.” “그대의 명예에 맹세하겠습니까?” 이제야 제대로 된 절차로 돌아왔다. 노골적으로 안도하는 주변에는 한줌의 시선도 두지 않고, 훼오트라 아나는 오직 테밀시아만을 바라보았다. “맹세합니다.” “그대의 명이 다할 때까지……는 무리겠지요. 노망이 들기 전에 물러나주는 게 깔끔한 뒷마무리가 될 테니까요.” 곳곳에서 기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속에서 테밀시아만이 진중한 눈으로 훼오트라 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에 한번뿐인 계승식을, 특히 그에게는 수 십 년을 투자하여 이룩한 이 순간을 어이없게 만들어 버리고 있는 자를 보는 눈답지 않았다. 오히려 경의를 표하는 눈동자. 훼오트라 아나는 황제가 아닌, 테밀시아라는 남자를 위한 계승식을 만들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테밀시아는 웃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진지한 음성으로 답했다. “식구를 배불릴 수 있을 때까지만,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빙긋 웃음 훼오트라 아나는 손을 뻗어 검지를 테밀시아의 이마에 갖다댔다. “창세신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영광을.” 그 말이 떨어지자, 테밀시아의 몸에 새하얀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훼오트라 아나의 손을 통해서였다. 이것이 계승식의 마지막 절차였다. 중재하는 신관이 자신의 신성력을 백분 발휘하여 내리는 수호와 영광의 축복. 그것은 평생 동안 지속되는 위대한 마법이기도 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훼오트라 아나의 중재가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신관보다도 강대한 신성력의 소유자였으니까. 빛이 사라지자 훼오트라 아나도 손을 떼었다. 그리고 손등을 테밀시아에게로 내밀었다. 테밀시아는 강렬한 황금의 눈동자로 훼오트라 아나를 마주보다가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는 그대의 이름을, 그대의 운명을 거머쥐었군.” 바로 앞의 테밀시아에게도 간신히 들릴 정도의 속삭임. 손등에 입술을 맞댄 그 상태로 훼오트라 아나를 올려본 테밀시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모든 건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이름 없는 자여.” 이름은 예언이라 했다. 그러나 소망이나 기대 따위라 보는 편이 더 낫다고 테밀시아는 생각했다. 부모님은 예언자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자신들의 아이에게 축복을 바란 것뿐이다. 동시에 자신의 기대를 짊어지게 한 것뿐이다. 카한세올만 해도 그렇다. 로레라자는 자신의 아이에게 ‘갈망하는 자’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서, 자신의 소망과 기대를 짊어지게 했다. 오르세만 가의 당당한 일원의 되고 싶었던 자신의 소망과 기대를. 일어선 테밀시아는 천진한 미소를 짓는 훼오트라 아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철없어 보이는 그 순진한 웃음이 아파만 보였다. 그것은 훼오트라 아나가 짊어져야할 아픔. 자신이 감히 참견할 일이 아님을 알기에 테밀시아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양 갈래로 갈려 절하는 자 사이를 지나 복도로 걸어 나갔다. 이번에는 카르민의 수장만이 따라왔다. 그 복도는 이오문 위에 나있는 높은 발코니로 이어져 있다. 그 앞은 광장이다. 이오궁은 오직 계승식만을 위해 지어진 성이기에, 계승식을 위한 모든 것이 이 안에 있었다. 복도 끄트머리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저 문 너머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것은 황제뿐. 카르민의 수장은 문 바로 앞까지만 이다. 거침없이 다가서자 문 앞에서 자세를 갖추고 있던 기사 둘이 문을 양쪽으로 당겼다. 수십 년만의 개봉임에도 마찰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어두운 복도에 빛이 파고들었다. 눈을 찡그릴 만도 한데, 테밀시아는 묵묵히 그 문에서 내리 쏘이는 빛을 마주보았다. 조용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 문 너머에 얼마 만큼의 인파가 얼마만큼의 기대를 갖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비소(誹笑)하며 눈을 감았다. 느껴진다. 한결같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 잠깐 그것에 집중하자 금세 부드럽고 다정한 기운에 감싸인다. 뮤비라……. 줄곧 발코니를 주시하고 있던 백성들은 문이 열리자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가 모습을 보이자 그 긴장과 흥분은 절정에 이렀다. 마침내 황제가 두 손을 벌려 백성을 향했을 때 체통도, 나이도 모두 잊고 함성을 질렀다. 축포가 터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대 욤 황제 만세!” “금안의 ‘지배자’ 만세!” “금안의 황제 만세!” “대 욤 제국 만세!” 욤 최초의 금안의 황제의 탄생이었다! 온 거리가 축제로 시끌벅적할 때 황성에서는 성대한 무도회가 열렸다. 대 제국의 황제 계승식을 축하하는 무도회니만큼, 때를 탓하며 검소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게다가 막 몬스터 사태의 원인이 밝혀져 대륙이 안도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크게 탓될 것도 없었다. 주인공인 황제는 단상에 앉아 귀족들이 차례로 문안 여쭈는 것을 받아주고 있었다. 일종의 신고식이라 도중에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테밀시아는 빠져나가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접고 느긋이 인사를 받았다. 그래야 마음이라도 편했으니까. 그런 테밀시아를 저편에서 뮤비라와 루카다가 지켜보고 있었다. “폐하만큼이나 카스야나님도 인파에 묻혀 계시는 군요. 10년 만에 일선으로 돌아오셔야 하니 이것저것 바쁘시겠습니다?” “그동안 실컷 농땡이 친 벌이지요.” “후후. ……페르노크님은?" 루카다의 얼굴에 미소가 가셨다. 그리고 그 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에 혼란이 일었다고는 합니다만……. 직접 뵙지를 못했으니 잘 모르겠군요.” “아직도?” “그분 일행들이 워낙 완고해서요. 테밀시아님과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궁에 도착한 날, 오랜만에 온 친구와 담소를 즐기는 테밀시아를 뒤로하고 먼저 돌아갔던 페르노크. 그 뒤로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죽었다든가 사라졌다는 건 아니다. 단지 처소에 틀어박혀 도통 나오지를 않는데다, 오는 방문객은 그의 일행들이 막아섰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는 거다. 리화도 몇 번이가 찾아갔다가 유시리안의 저지에 만나지 못했다. 결국에는 싸우려고까지 했으나 렌의 저지로 지금은 자중 중이었다. 심지어는 테밀시아조차도 그들의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계승식 전에 짬을 내어 찾아온 테밀시아에게, 기억의 혼란이 일어 현재 정리중이라며 다음에 오라는 말만 남겼다. 기억상실이었을 때를 다시 기억해 내기라도 한 것일까? “전 기억상실증 같은 건 걸려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루카다는 약간 인상을 썼다. “기억이란 게 그렇게 쉽게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걸까요?” “쉽게 할 수 없는 거기에 지금 페르노크님께서 혼란해 하시는 거겠지요.” “뭔가 석연치 않군요.” 끝 맛이 쓴 루카다의 말을 뮤비라도 침묵으로 동의했다. 무겁게 침묵하다가 갑자기 빙긋 웃으며 루카다의 어깨를 툭 쳤다. “지금은, 지금의 일에만 집중하기로 하지요.” 그리고 자신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테밀시아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지금의 저희 일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루카다도 빙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말했다. “확실히 그렇군요. 그치요, 휜?” “아아. 달라진 게 없어, 내 주군은.” 뒤에서 쿡쿡 웃음소리를 동반한 답이 들려왔다. 루카다와 마찬가지로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뮤비라는 별 반응 없이 낮게 웃기만 했다. 그러다 테밀시아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자들의 얼굴을 보았다. 애써 태연한척 하지만 굳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마법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테밀시아의 금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이 강렬하니 까. 황제의 권위에도 꺾기지 않던 그 위엄과 기개가, 이제는 황제의 관을 쓰고 까마득히 높은 곳에 올라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테밀시아를 보고, 휜은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그것은 뮤비라도 동감이었다. ‘여전히 가깝고 먼 분.’ 그때였다. 테밀시아가 문득 고개를 돌려 뮤비라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그리워 멍하니 마주보자 무뚝뚝한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다가 돌아선다. 뮤비라는 힘들게 숨을 삼키며 그런 테밀시아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리고……여전히 멀고 가까운 분.’ 이런 작은 것 하나하나가 뮤비라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다. 그리고 하루하루 살아갈 의미를 그 소중함에서 찾아간다. 계승식 전날 밤, 그러니까 어제 밤 테밀시아와 뮤비라는 모처럼 술을 마셨다. 취하지는 않는다지만 내일을 위해 약한 와인으로 건배를 하며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눴다. 이미 시오니타와 함께 꽤 마시고 왔기 때문인지 테밀시아는 입술만 축이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종종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그에게 뮤비라가 슬쩍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내심 페르노크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뮤비라에게 테밀시아는 뜻밖의 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테라스로 걸어간 테밀시아는 한참동안이나 침묵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뮤비라는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명하게 떠오른 달을 올려보는 테밀시아의 모습 을 새기며. 밝지만 은은한 달빛을 머금는 황금빛 머리카락, 생각에 잠겨 반쯤 감긴 황금빛 눈동자, 굳게 닫혀 있는 마른 입술……그 모든 것을. 테밀시아는 계속 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제가 되는 것이 내 꿈인 건 아니다.” 권력이 좋다. 남들 위에 서서 그들을 내려보는 것이 좋다. 누구에게도 굽힘없이 살고 싶은 데로 사는 것이 좋다. 강압당하지 않고 뜻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다인 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가 끌려가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왕의 여자’라는 이유로 끌려갔다. 단지 왕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그 이유의 전부였다. 어려서 어머니에게 안겼던 기억도 적다. 소문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출입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이다. 테밀시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왕에게 어머니의 품을 빼앗겼다. “그래서 왕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거다. 어차피 뺏고 뺏기는 세상이라면, 적어도 뺏기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그리고 지금에 와 생각한다. 뺏기기 싫은 것이 무엇인가. 테밀시아는 웃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손아귀에 넣고 절대 뺏기기 싫은 것. 움켜쥐어 절대 놓고 싶지 않은 것.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은 것. 자신에게 이런 독점욕과 소유욕, 그리고 집착이 있었던가, 새삼 놀라버리고 말았다. “나는 내가 내 나라를, 내 백성을 위할 수 있을 때까지만 왕으로서 살 거다. 내가 내 인생의 일부분을 그들에게 기꺼이 베풀 수 있을 때까지만. 그리고 더 이 상 그들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게 됐을 때, 더 이상 황성에 있어야 할 가치를 못 느끼게 될 때……. 난 떠날 거다.” “……!” 뜻밖의 소리에 뮤비라는 바싹 긴장했다. 언제까지고 눈에 담아두고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용히 뒤에서 그를 바라보며 살겠다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그런 데 사라진단다. 저렇게 단호하게, 매달리지도 못하게 딱 잘라 사라지겠다고 한다. 그때 테밀시아는 달에서 시선을 거둬, 뮤비라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고아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난 더 이상 왕이 아니지만.” 언제나처럼 뮤비라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으로 쫓으며 가슴에 새긴다. 그리고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묻는다. 뺏기기 싫으니까. 놓치기 싫으니까. 어렵게 오른 가주 자리. 제피모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광이자 명예. 그 자리를 이제야 차지한 뮤비라에게 말하고 만다. 이기적인 집착으로 그를 옭아매려 한다. “그렇지만……넌 내 곁에 있겠지? 넌 내 것이니까. 난 네 주인이니까. 그렇지 뮤비라?” “아……!?”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문지르며 뮤비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서웠다. 너무 행복해서…… 차라리 무서웠다. 테밀시아는 그런 뮤비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함께 가자.” 너와 난 마스터다, 라고 덧붙이면서. “수명이 몇 백 년은 될 테지. 언제까지고 황제의 자리에, 가주의 자리에 붙어서 애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살 수는 없잖아?” 특유의 장난기 섞인 미소가 황금빛 눈동자에 어렸다. “우린 아직 못 본 곳이 많아.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함께 가자. 가출도, 여행도 아니다. 유람인 거야. 함께 즐거운 곳을 찾고, 즐기고, 또 찾아 헤매는 도락인거다.” 뮤비라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런 테밀시아를 보다가 웃었다. 함께 가자고 한다. 나의 주인이. 그리고 나의 의미가. 그것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행복이다. 깨어지면 자 괴감에 웃고 말 그런 꿈만 같은……. 언제까지고 사로잡히고 싶은 환상. “젊어서 고생하고 늙어서 도락인 겁니까?” “안락한 노후는 만인의 꿈이야.” 뮤비라는 소리 내어 웃으며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도 괜찮지요.” 함께……. “그런데 가장이라니, 제법 멋진 소리를 하지 않습니까?” 퍼뜩 현실로 돌아온 뮤비라는 루카다의 말을 금세 파악하고 되물었다. “훼오트라 아나 말입니까?” “그를 존경하지는 않지만, 세간의 소문처럼 철부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그의 행동에 의미가 있고 말에 뼈가 있어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렇군요.” 적어도 훼오트라 아나는 테밀시아의 내면을 꿰뚫어보았다. 언젠가 떠나버릴 그를 읽어냈다. 그래서 테밀시아만을 위한 계승식을 치르게 해주었다. 맹약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주었다. 루카다도 알고 있을까? 휜에 한해서는 루카다보다 뮤비라가 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만큼, 테밀시아에 한해서는 뮤비라보다 루카다가 더 잘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니 루카다는 이미 눈치 채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럼 루카다는 어떻게 할까? 테밀시아의 보좌관으로서 맹활약을 떨치는 그가, 테밀시아의 잠적 이후로는 어떤 삶을 살아갈까? “후후. 표정을 보니 이미 들은 모양이군요?” “……!?” 루카다는 씨익 웃으며 뮤비라를 보았다. 그가 물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역시 루카다는 알고 있었던가.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요. 자신의 후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계셨으니까. 마린나사를 거부함으로서 오르세만의 피를 이을 후계자도 만들지 않으시고, 황위를 이을 후계자는 양자로 맡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니까. 아마도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루카다는 홀가분한 어조로 가볍게 말했다. “전 제 선택이 자랑스럽습니다. 저의 주군은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하셨고, 냉정하면서도 배려있으셨죠. 그리고 주군 덕분에 휜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기로 버티고 있었던 계승권자 자리도 일순에 내던질 만큼 맹목적적으로 사랑하게 될 줄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계산적이었던 자신이. “전 휜의 곁에 있을 겁니다. 자하라 가주 자리보다 테밀시아님의 곁에 있는 것을 택한 뮤비라님과 마찬가지로. 전 행복해지고 싶거든요. 그녀의 곁에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어요.” “사람 뒤에 놓고, 없는 양 그런 말 하지 마!” “하하하. 죄송합니다.” 휜이 뒤에서 버럭 소리 질렀지만 루카다는 쾌활하게 웃기만 했다. 그 곁에서 뮤비라도 웃음을 터뜨리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아직 한참 먼 일입니다. 당장 코앞은 고생길로 훤하니 각오하십시오.” “으윽.” “하하하!” 이번엔 루카다가 움찔하고 그 모양에 휜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뚝 끊고는 급한 어조로 물었다. “어? 저 녀석 페르노크 아냐?” “예?” 휜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막 문에 들어서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곳에 있는 것은 요크노민이 아니었다. 모든 지하를 지배하는 레타의 마스터, 민이었다. 문양하나 없이 희기만 한 가면, 머리카락은 중간에서 묶여 앞으로 늘 여져 있다. 장신의 날씬한 몸은 남자다운 강함이 흐르고, 문 앞에 잠시 멈춰서 저 멀리 황제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는 기품이 엿보인다. 옷은 정식 복장, 검붉은 색과 검은 색이 뒤섞여 문양을 이루는 옷에 액세서리는 선명한 붉은 목걸이 하나. 툰은 불새가 새겨진 검은 비단. 다른 건 다 재껴 놓고라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가면을 쓴 남자를 황제의 계승 무도회에 내보낼 수는 없는 일. 입구에서 막아서는 기사를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온 또 다른 남자가 제지했다. 카르민의 전 가주 계승권자이자, 자하라 가의 인정받은 귀족인 카산 마 카르민의 보증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연회장으로 들어온 침입자는 저편의 황제만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생소한 침입자의 모습에 주위의 신경이 쏠렸다. 황제에게 인사하기 위 해 줄 서 있던 자들도 이내 그 수군거림에 휩쓸렸다. 개 중에는 침입자를 알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 기이한 가면, 가슴을 내리누르는 위압감, 피부를 찔러대던 옅은 살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하의 왕, 민 장 레타의 모습을. 그를 알고 있는 자들은 공교롭게도 거의 다 고위 귀족층이었다. 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덩달아 다른 이들도 물러섰다. 하나, 둘, 그리고 무리가 잇따 라 그 움직임에 동참하자, 결국에는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트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있는 모양새가 보이지 않는지, 침입자는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기만 했다. 신하의 인사를 받던 황제가 그 웅성임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이미 황제와 그 사이에 방해물들이 남김없이 갈라져 사라진 상태였다. 황제와 눈이 마주친 침입자는 빙긋 웃으며 오른 손을 심장 위에 갖다대고 정중히 인사했다. 그 목소리에는 주위의 어지러운 소음을 단숨에 눌러버리는 패기가 있었다. “대 욤 제국의 축복, 금안의 황제 만세.” 거대한 홀 안에 침묵에 번졌다. 더불어 팽팽한 긴장감이 퍼져나갔다. 그 중심에 신왕(新王)과 침입자가 있었다. 구석구석의 모든 이들이 침묵하여 그 둘을 볼 때쯤에야, 묵묵히 침입자를 내려다보던 왕이 답했다. “나는 정체를 모르는 자와의 대화를 즐기지 않는다.” 한마디로 정체를 밝히라는 말이었다. 침입자의 드러난 입가에 미소가 실렸다. “실례. 지금의 저는 ‘민’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당장 잡아들여 경을 쳐도 부족함이 없는 무례함이었지만, 왕으로서의 첫걸음을 피로 시작할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무례함을 참는 굴욕으로 시작할 수도 없었다. 신왕은 오만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침입자를 상대했다.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이라면 목적을 달성했다. 돌아가라.” “저의 목적은 합당한 대가 요구입니다. 목적을 달성한다면 합당한 예로서 신왕을 축복하며 물러설 것입니다.” 아연하리만치 무모한 언행을 보이는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귀족들은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도둑길드 레타의 또 다른 얼굴, 암살. 그 최고봉에 선 절대 마스터. 도대체 왕이 저자에게 무엇을 빚졌기에 저토록 당당한 것일까?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음습하고 어두운 밑바닥에서 몸을 낮춰 숨기며 권력에 빌붙어 대신 손을 더럽히는 족속들이 이 경사스러운 황위 계승식의 축하연에 출현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비록 자신의 입으로 ‘레타’를 거론한 것은 아니라고는 하나,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혼란해 하는 귀족들의 정상에서 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낮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다면 목적을 달성하라.” 굳이 속되게 풀이하자면, 볼 일 보고 꺼지라는 말이었다. ‘민’은 왕에게서 잠시 눈을 돌려 왕의 근처에 있는 훼오트라 아나와 시오니타 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저는 세 번째 획을 긋고자 합니다. 그에 대한 허락을 구합니다.” 여기서의 ‘획’은 새로운 신분계층의 창시를 두고 ‘역사에 획을 그었다’라 표현한 역사가의 문구를 인용한 단어로서, 공공연한 은어다. 첫 번째 획은 마법사 길드, 그리고 두 번째 획은 용병 길드다. 공식적으로는 이 둘뿐이다. 신전은 황권과 분리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신분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 하여 ‘획’에서 빠졌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없었다. 수 천년동안이나 없었던 그 ‘세 번째 획’이 바로 지금 거론 된 것이다. 온통 소란이 일었다. 이제 막 권력을 움켜쥐고 한창 고조되어 있을 신왕에게 ‘독립’을 허락받으려 하다니! 어리석은! 다수가 그렇게 격노하며 혀를 찼을 때, 현명한 소수는 감탄으로 혀를 내둘렀다. 온 대륙이 욤 최초의 ‘금안의 황제’에게 집중하고 있는 지금, 온 대륙에 화제가 되고 있는 시오니타가 있는 이 자리에서, 온 대륙의 통렬한 비난 속에서 훼오트라 아나가 신전의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된 이 순간에! 게다가 계승식으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축하 사신을 보내온 자리인 만큼, 각지로 소식이 전달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지 않은가! 주위의 반응을 느긋이 지켜보던 왕이 물었다. “세 번째 획이라. 어떤 획을 그을 생각인가?” “크리터 사잔 아나. 이야기를 훔치는 자. 바로 정보입니다.” “정보라.” 왕은 웃었다. “신관과 마법사가 반목하는 이유는, 신전이 이룩한 독립을 재끼고 첫 번째 독립이라 칭해졌기 때문이다. 용병은 그 틈에 끼어들어 양 세력의 반목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을 맞춰 두 번째 독립을 일궈냈다. 그대들은 무엇으로 기존의 ‘획’의 경계를 뿌리칠 수 있지?” “저희는 실익을 줄 수 있습니다.” 침입자는 당당했다. 명분쯤은 얼마든지 재낄 수 있을 정도의 실익. 바로 정보 그 자체. 얼마든지 줄을 맞출 수도 있고, 얼마든지 반목할 수도 있다. 그만큼의 저력과 무력이 레타에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준비를 충분히 해두었다. 마법 쪽은 가나란의 원조가 약속되어 있다. 용병 쪽은 오히려 반겼다. 몸으로 뛰며, 위험한 일을 해 내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 안정되고 확실한 정보는 사막의 오하시스와 같았다. 그것을 정당한 대가만 지불하면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 었다. 마법과 용병의 지원이 확실한 이상, 기존의 신분계층이나 신전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왕은 동요하지 않았다. “획을 긋겠다고 나섰다가 자멸한 선례는 얼마든지 있다.” “성공한 선례도 있습니다.” “하하하!” 왕이 웃는 모습을 보며 국적 따질 것 없이, 모든 귀족들이 바싹 긴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우리의 권리를 남에게 떼어줄 수는 없다. 우리의 힘을, 우리의 돈을, 우리의 노예를! 한눈에 보이는 귀족들의 긴장을 무시하며 왕은 간단하게 답했다. “욤이 허락한다.” 어디 해봐라, 라고 덧붙이며 다시 웃었다. 안돼! 절규하면서도 귀족들은 나서지는 못했다. 욤의 귀족으로서는 신왕의 눈 밖에 나기 싫었고 타국의 귀족으로서는 레타의 마스터에게 밉보이기 싫었던 것이 다. 레타는 전 대륙적으로 퍼져 있는 대규모 길드이다. 공식적인 얼굴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그 압도적인 규모와 무력은 누구보다도 귀족들이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귀족 중에서도 축하연에 초빙될 정도의 대 귀족들이. 차마 나서지는 못하는 귀족들은 침입자의 다음 말에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락아타 시오니타 라 제노스를 이 자리에서 뵙습니다.” 이로서 침입자의 속셈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됐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치울 셈인 것이다. 두 제국의 허락, 신전의 허락. 그 모든 것을.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서는 것 을 보면 이미 공작은 다 끝난 상태인 거겠지. 완벽한 뒷공론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일인 만큼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사를 아연히, 멍청히 볼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밝히는데 협조한 대가, 지금 받고자 합니다.” 진실! 저 말을 못 알아들을 바보는 없었다. 상대가 몬스터 사태의 진상을 밝힌 장본인으로 화제에 오른 자인데. 게다가 그 진상을 밝히는데 손을 모은 자가 바로 훼오트라 아나다. 지금 이 자리에 와 있고, 신왕의 계승식까지 주재한 훼오트라 아나 말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어 놓은 것인가. 현명한 귀족들은 하나같이 포기의 한숨을 쉬었다. 진작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실책이다. 이제 와서 레타의 양지진출을 막아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숱한 선례처럼 알아서 지리멸렬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오니타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답했다. “락아타가 허락한다.” 황태자인 시오니타보다 윗선인 황제가 있기 때문에 침입자는 지나치지 않게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듯이 훼오트라 아나를 바라보았다. 기둥에 기대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훼오트라 아나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철없는 장난기로 가득한 미소. 몇몇 귀족들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버렸다. 훼오트라 아나는 자신을 향해 뭐라 말하려는 침입자를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리고 아침 인사라도 하는 양 쌈박하게 답했다. “창세신전이 허락합니다.” 황제와는 별도의 신분을 가진 훼오트라 아나였기에 이번에는 심장에 오른 손을 갖다대고 정중히 인사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여러분이 욤과 락아타, 창세신전의 허락을 받은 것의, 크리터 사잔 아나 창시의 증인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왕을 보았다. “크리터는 바로 오늘부로 창시되었습니다. 이용을 부탁드립니다, 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저희를 빼고는 생활할 수 없게 되리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도발적인 말이었지만, 충분히 현실가능한 일이었다. 왕은, 테밀시아는 자신을 꼿꼿하게 올려보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무뚝뚝한 얼굴에 감춰진 미소를 요크노민은 똑똑히 보았다. 마치 아들의, 혹은 동생의 성장을 바라보는 듯한 부드럽고 자상한 미소였다. ‘형님의 마음을 알고서도 불쾌감이 들지 않았던 것도. 불안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그런 테밀시아님이기에…….’ 남몰래 감사의 인사를 던지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가면을 만졌다. “이제부터 저는 ‘민’이 아닙니다.” 망설임 없이 그것을 벗었다.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제부터 저는 요크노민 장 크리터입니다.” 다음에는 무엇을 더 설명하랴. 거대한 놀람 뒤에 이은 경멸어린 시선, 욕설 섞인 고함, 암담한 한숨. 거대한 홀을 가득 채운 그것들을 요크노민은 만족스런 얼굴로 즐기며 인사했다. “그럼 초청받지 못한 자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퍼붓고 사라졌다. 귀족들은 좀 전까지는 마주보는 것도 꺼려한 뮤비라에게 항의했다. “귀공도 알고 있었던 일이오?!” “동생 관리를 어찌 시키는 것이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뮤비라는 답을 할 생각은 않고 동생의 등을 지켜보기만 했다. 놀란 눈이 아닌 부드러운 눈으로. 그것이 답을 대신해 주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가증스러운 자!” “배신자! 이래서 타고난 출신성분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자하라 가의 만행을 절대 잊지 않을 거요!”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 욕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었다. 그냥 귀족도 아닌, 자하라 가의 가주이자 마스터인 그에게 노골적이며 저속적인 욕을 할 만큼 간 큰 자는 없었던 것이다. 같은 위치의 카르민 수장이면 모를까. 그러나 그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들은 그를 적대하며 욕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르세만 가의 가주 카스야나나, 가야다 가의 가주 사뮤에르나 그저 흥미롭다는 얼굴로 돌아가는 꼴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내심 그들이 나서길 바랐던 귀족들은 혀를 찼다. 카스야나는 이미 포기다. 그는 아들이 스물이 되자마자 전권을 물려주고 사라졌던 남자다. 죽기 직전까지 그 권력을 움켜쥐려하는 평범한 귀족들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뮤에르가 나설 것을 기대했으나, 역시 그는 꼬마에 불과한 모양이다. 손에는 주스를 든 채 보좌관과 담소나 나누는 것을 보니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대꾸자체를 안하는 뮤비라를 보며 분통을 참지 못한 한 다혈질 귀족이 장식용 검 자루에 손을 얹으며 으르렁 거렸다. “이 걸레자식!” 뮤비라가 자하라 가주가 된 이후로 절대 나오지 않았던 금어가 거침없이 튀어나오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상대는 제모아다. 최하위 귀족 스타민의 바로 위인 하위 귀족. 그런 그가 감히 대 카르민의 수장을 욕보였다. 이는 앞서 절제된 욕과는 차원이 달랐다. 테밀시아의 보좌관이었을 때도, 자하라 가의 일원으로 활동했을 때도 그 불명예스런 호칭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뮤비라였으나 이제는 아닐 것이다. 아니, 그가 여 전히 상관치 않더라도 자하 라 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그는 당당한 대 카르민인 자하라 가의 가주. 가주에 대한 모욕은 가문에 대한 모욕. 스스로의 명예를 위해 철저히 상대 를 부서 버릴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말해 보겠나?” 흠칫! 자신이 한 말이 아님에도 귀족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비켰다. 등 뒤에서 들린 음성의 주인이 전 가주 계승권자이자, 지금은 보좌관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비레오가였기 때문이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며, 뮤비라에는 못 미치지만 수준 높은 검객이며, 성품이 괄괄한 그가 딱딱한 얼굴로 제모아의 귀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레오가로서도 요크노민의 이탈은 놀랍고, 뮤비라에 대한 배신감과 울화가 치미는 일이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감정이다. 뮤비라는 그 자체가 자하라 가의 얼굴인 존재. 그런 그가 타인에게, 그것도 제모아 따위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자부하는 자하라 가를 업신여김이다. 서슬 퍼런 비레오가의 모습에 제모아의 귀족은 주춤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사교계에서 매장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 사실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뮤, 뮤비라 공의 동생이……!” “내가 말해보라 했던 것은 그게 아닐 텐데?” “그, 그건……!”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그의 모습에 타 귀족들은 더 이상 뮤비라를 향해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뮤비라는 출신성분이 비천한 만큼 흠잡을게 많았다. 그럼에도 오히려 한층 조심해야 했다. 현재 그의 위치가 높은 탓이다. 저 제모아의 귀족이 몸소 보여주었듯이, 조금이라도 과함이 있었다가는 자하라 가를 적으로 돌리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테밀시아는 혼란의 도가니인 연회장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꼴들을 충분히 구경한 그는 말없이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그 작은 행동에 연회장은 일순에 조 용해졌다. 그와 함께 방향을 잃고 헤매던, 뮤비라를 향한 불만의 화살이 황제에게 돌려졌다. 모두가 엄청난 권력 이양을 해버린 황제가 꺼낼 말을 기다렸다. 그는 가장 큰 피해자이긴 했으나, 동시에 수많은 귀족들의 이득을 앗아간 가해자이기도 했다. 의당 납득할 말을 해줘야만 했다. 그 집중된 항의의 시선을 무표정한 황제의 얼굴로 돌아가 덤덤하게 바라보며, 테밀시아는 짧게 말했다. “다음.” 옆에서 서열순대로 정리된 목차를 읽고 있었던 신하가 황급히 다음 차례의 귀족을 호명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태연한 테밀시아의 행동에 덩달아 그리 행동해 버린 것이다. 호명된 귀족은 예조차 갖추지 않은 채 불만 어린 얼굴로 테밀시아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가 내비치는 명백한 의도를 테밀시아는 모른 척 하지 도, 그에 따르지도 않았다. 단지 황제의 얼굴로 오만하게 내려다 볼 뿐이었다. 이는 기백싸움이 아니었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했다. 귀족은 적의와 강압을 띈 기운을 뿜어냈지만 테밀시아가 상대 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얼마나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을까. 귀족은 낮게, 그러나 무겁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뿜어내던 기운이 사그라졌다. 그가 졌다. “신 미기온, 신왕을 뵈옵니다.” 그리고 허리를 꺾었다. “대 욤 제국의 축복, 금안의 황제 만세.” 테밀시아는 그 작은 승리에 웃지는 않았다. 미기온을 마주보았을 때와 똑같은 얼굴로 그 인사에 답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밑에서 목록을 들고 대기 중이던 신하가 다 음 차례의 귀족을 호명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연회장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대단하군.” 멀찍이 인파 속에 뒤섞여 있는 한 남자가 웃음기 섞인 음성을 냈다. 그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지나치게 움찔하며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나서는 안 될 곳에서 소리가 들린 다는 듯한 묘한 반응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남자가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여 흘려버리고 마는 벽의 문양처럼 말이다. 그러다 뜻밖에 의식해 버린 그 남자는 왜 여태 눈길을 끌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존재감 있었다. 직선미를 살린 어깨선, 날씬하게 몸을 감싸는 좁은 품, 하얀 천과 그 위에 새겨진 푸른 기이학적 문양, 팔에 걸친 검푸른 툰, 이중으로 천을 댄 격식용 망토. 완벽한 귀족의 차림을 한 그의 외모 또한 영락없는 귀족의 것. 속을 알 수 없는 짙은 녹색 눈동자, 흔치 않은 은색 머리카락, 깨끗한 흰색 피부, 다소 거친 입술, 날렵한 턱선. 젊다 못해 어 린 축에 속했지만 결코 어려보이지 않는 자. 남자는 주위에서 자신을 보든 말든 단상 위에서 인사를 받고 있는 황제만을 바라보았다. 그 묵묵함에 다른 이들도 감염이라도 된 듯 단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 남자란 존재에 대해 잊어버렸다. 무심코 목소리를 내는 실수를 한번 한 남자는 한층 더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주위의 시선이 가셔지는 것을 느낀 그는 안도의 숨을 삼키며 벽에 기댔다. 그리고 저 멀리 황제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형님.’ 그 남자의 이름은 페르노크. 한때는 ‘희대의 천재’라 불렸으며 현재는 대마법사라 칭송 받는 위대한 마법사이자, 지금은 포기했다지만 오르세만 가의 가주계승권자 중 한사람이었던 최고위 귀족인 남자. 그 화려한 간판 뒤로는 겁쟁이에 비겁자, 소심자 등등 불명예스럽게 헐뜯어지던, 바로 그 페르노크인 것이다. 그 이름은 페르노크이나 그는 ‘무하’라는 존재였다. 유일한 지기에게 배신당해 죽음으로 도망친 겁쟁이. 그럼에도 새로이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죽음을 택한 남의 몸에 깃들여 그에게서 안식을 빼앗아 버린 비겁자. 존경하는 형을 위해 닮은꼴의 형을 죽여 버린 살인자.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형에게서 ‘동생 ’을 빼앗아 버린 탈취자. 그럼에도 결국 자기가 원한 바를 해내고 만 이기주의자. 그럼에도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물론 떳떳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학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을 뿐. 자신을 괴롭혀 봐야 달라질 것은 아무것 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아니까. 그러나 이것만은 부끄러웠다. 그 누구에게도 아닌 자신에게. 페르노크의 안에서 잠들 듯이 움츠려 있었을 때, 그의 괴로움과 고통을 똑똑히 보고, 듣고, 느꼈 다. 때문에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 삼자의 말만 듣고 그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 상상도를 맹신하며 그를 판단하고 경멸했다. 바로 그것이 부끄럽다. 무하는 기척을 주위에 녹였다. 누구의 시선도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형의 모습을 보는 것. 그것만을 원했다. 다행히 2년 전, 이므르를 자퇴하고 나선 뒤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였기에 주위의 귀족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그 자체로 눈에 뛸 법한 미남이었지만 주위와 동화시킨 은신 덕에 원하는 대로 조용히 형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련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쓰게 웃으며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어지러웠다. 벽에 기대있지 않았다면 금방이라도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당장이라도 질식해 죽어버릴 것만 같은 초조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는 각오가 있었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 그 상태로 잠시 숨을 멈췄다가 일시에 토해냈다. 그러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운 형의 모습이 박혀 들어왔다. 언제나 다정했던 그 얼굴에 위엄을 담아, 만인을 내려다보는 형의 모습. 어머니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그 강한 황금빛 눈동자가 인상 깊다. 금안의 ‘지배자’라는 별칭 그대로의 모습에 무하는 왠지 웃고 싶어졌다. 아니, 그보다는 울고 싶어졌다. 아니, 그도 아니었다. 그는 눈을 감 고 자신의 감정을 더듬어 보았다. 어떻게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해 내고 싶었지만 결국 포기해 버렸다. 다시 눈을 떠 형의 모습을 하 나하나 뜯어보았다. 언제고 떠올릴 수 있도록. 그 얼굴, 그 눈동자, 그 웃음, 그 음성, 그 몸짓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웃을 수 있도록. 천천히 심장 위에 오른 손을 얹었다. ‘이상하게도…….’ 무하는 그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또다시 느끼며 입가에는 웃음을, 눈가에는 울음을 담아버렸다. ‘마지막으로 뵙는 모습이 ‘형’의 모습이 아니라 기쁩니다.’ 눈물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힘들지만, 정말 힘들지만…….’ 깊숙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돌아설 수 있으니…….’ 그렇게 일방적인 작별을 고했다. 연회장보다는 비교적 어둡게 느껴지는 복도를 걸어 나갔다. 첫날이라 모든 귀족이 연회장에 몰려 있어 복도는 한산했다. 경비조차 연회장을 중심으로 뻗어 있어 꽤 오 래 걸었음에도 기사 한명 보이지 않았다. 화려하지만 차갑고, 낯선 그곳에 무하의 발소리만이 뚜벅뚜벅 울렸다. 막 코너를 꺾는 데, 벽에 기대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팔짱을 낀 손에는 하얀 가면에 들려 있었다. 객관적으로는 결코 어둡지 않은 복도였기에 그가 눈을 내리깐 채 무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무하는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한창 수하들과 승리의 축배를 들 그가 왜 여기에 있겠는가. 멈춰서 그를 보던 무하는 다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지기의 옆을 지나쳤다. “축하 안 해주냐?” 걸음이 멈춰졌다. 지기의 평이한 음성이 무거운 족쇄가 되어 발을 묶었다. 그것을 애써 뿌리치고자 입을 뗐다. “……축하한다.” “엎드려 절 받기군.” “배 아파 하지 않는 게 어디냐?” “쿡쿡.” 짧은 웃음은 이내 가라앉고 사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요크노민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바닥을 보고 있었고 무하는 멈춰선 채였다. 멀리 연회장의 음악소리가 울려 올 뿐, 온통 정적이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요크노민이었다. “갈 거냐?” “그러기 위해 깨어났어.” “말려도 갈 테지.” “말리지 않을 거잖아?” 다시 둘은 입을 다물었다. 공기가 둘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그 무게에 진 듯 요크노민은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면 내가 네 지기라는 것이 싫다.” “…….” “내가 너를 의지하듯, 너 역시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믿듯, 너 역시 나를 믿기 때문에.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건 네 의지라는 말 때문에……. 나는 너의 자유를 구차하게 속박할 수도 없고, 너의 판단에 치졸한 반박을 할 수도 없고, 너의 행동에 이기적인 저지조차 할 수 없다.” “…….” “괴롭다. 내 생애의 최고의 승리를 거머쥔 오늘, 난 최고의 무력감을 느낀다.” “…….”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요크노민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무하를 잘 안다. 사랑하는 가족인 테밀시아보다도, 처음부터 마음이 맞았던 라이시륜보다도, 늘 이해하려 애써주었던 클랜보다도, 마음을 읽는 락샤사보다도, 손 내밀어 일으켜준 유시리안보다도. 그리고 그만큼 무하도 요크노민을 잘 안다. 형이자 아버지인 뮤 비라보다도, 영원인 불칸보다도, 이끌고 보필해준 산보다도, 절친한 제그보다도, 미래를 읽는 키르바나보다도. “난 안 따라간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난 여기서 내 갈 길만을 갈 거다. 이제 자하라 가에서 나올 생각이다. 레타 내의 거처에서 크리터를 운영할 거다. 나를 만나고 싶으면 크리터 본점으로 와라. 내가 널 만나고 싶어지면 정보길드 수장답게 알아서 찾아갈 거다.” 요크노민은 고집스럽게 말했고 무하는 좀 전에 테밀시아를 보며 느꼈던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2년간 작별인사는 종종 있었다. 그때의 인사보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는 인사였다. 앞으로의 거처에 대해 말하고, 언젠가 있을 재회를 확신하며 깔끔하게 헤어져 서로의 길을 가다가, 다시 만나 정담을 나누는……. 그러나 둘은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만큼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눈가에 웃음을, 입가에 울음을 담아낸 무하는 간신히 울음기를 제거한 목소리를 냈다. 너무나 희미한 속삭임이었지만 요크노민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고맙다.” “……죽도록 고마워해라.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후후. 다시 만날 때까지만…… 죽도록 고마워하마.” 무하는 미련 없이 걸었다. 요크노민은 똑같은 포즈, 똑같은 얼굴로, 똑같이 바닥만을 바라보았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가면을 쥔 손이 떨리고 있는 것 정도. 그런 그의 손을 어느새 나타난 붉은 여인이 감싸 쥐었다. 그녀는 고집스러운 자신의 영원의 뺨을 쓰다듬다가 안아주었다. “바보.” “…….” 그렇게 둘은 작별을 했다. 황성의 문을 나오자 말고삐를 쥔 채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제그였다. 유시리안들은 성벽에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계승식으로 인해 거리가 온통 축 제로 번잡했기 때문이다. 요크노민의 부탁으로 대기하고 있던 제그는 무하를 발견하자 짧게 목례했다. 무하도 마주 인사했다. “민은?” 제그가 물었다. “곧 나올 겁니다.” “큰길을 피해 가십시오. 사람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무하는 말고삐를 넘겨받았다. 말을 올라타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제그에게 요크노민을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약한 모습 보이는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요크노민이 그 참견을 달가워 할 리 없었다. 그토록 따르는 형에게조차 보이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지 않았던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키며 안장을 꾹 잡았다. 그리고 올라탔다. “그럼.” 제그는 답 대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담백함에 무하는 미소했다가 출발했다. 득실대는 인파를 피해 샛길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그는 뒤의 벽에 기댔다. 기다리던 무하는 떠났고, 이제는 또 다른 자를 기다릴 차례였다. 분명 아무렇지 않 은 척 나타날 녀석을 이쪽도 아무렇지 않은 척 만날 준비를 해야 했다. -피잉! 무심코 하늘을 올려보았다. 퍼퍼펑, 불꽃이 동그랗게 퍼져 문양을 그려냈다. 하나의 불꽃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그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불꽃들이 겹치 고 겹쳤다. 환호성과 폭죽소리로 사방이 시끄러웠다. 제그는 감흥 없는 얼굴로 올려보며 친구였던 자를 떠올려보았다. 이미 죽어버리고 없는 자였고 기억 속 한편에 묻어두고 있던 자였지만 스스로도 놀랄 만큼 생생하게 떠올려졌다. 과분할 만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었고, 그만큼 배신감을 느꼈던 녀석. “그렇구나, 소울러.” 혼잣말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변했었구나.” 소울러는 페르노크의 눈이 싫다고 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그 눈이 싫다고.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 페르노크를 감쌌다.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제그가 그 것을 빨리 알아차렸었고, 때문에 그가 없을 때 일을 저질렀다. 제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맨 처음에는 페르노크에게 연민을 느꼈었다. 그것이 그의 눈을 본 순간 경멸과 살의로 바꿨다. 은인의 것과 꼭 닮은 그 눈이 두려 움과 공포로 흔들리는 꼴이 보기 싫었고, 아울러 홀로 힘없이 당하고 있을 동생이 떠올라 싫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실성한 모양으로 녀석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난 네 동생과 상관없어, 이었던가?” 어떻게 네가 동생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 순간에도 묻고 싶었고, 방에 찾아갔을 때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렸던 그 말이 떠올라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무슨 권리로 스스로를 동정하냐고? 그래, 난 날 동정해. 나란 놈은 참 불쌍한 놈이야. 더럽게 불쌍한 놈이라고. 자신을 동정하는데 권리가 필요해? 어떤 권린데? 그 권리는 누가 주는 건데? 응? 누가 주는 것일까? 녀석이 업혀나가는 꼴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녀석이 요양차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도 계속 생각했다. 가주 계승권자씩이나 되는 자가 실성하여 방 에서 요양을 하는데 그 누구도 문병 오지 않는 것을 보며 계속 생각했다. 녀석의 말이 옳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도 넌 축복 받으며 태어났을 거 아냐? 그래도 넌 어머니가 죽이려 들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래도 넌 앞이 보이잖아?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려 들었다. 녀석이 방안에서 한 이상한 질문에 무심코 답하고 나왔을 때, 같은 방을 쓰는 소울러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응?” “안색이 안 좋아.” “……별로.” 애써 강한 척 답했다가 불안하게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그는 소울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었다. “녀석이 기분 나쁜 질문을 해서 그런가봐.” “페르노크가?” 한번도 먼저 뭔가를 말해본 적이 없는 페르노크가 아닌가. 한번 실성하더니 뭔가 변한 걸까? 소울러는 흥미 도는 얼굴을 했다. “뭘 물었는데?” “쳇. 하나뿐인 희망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하겠냐던데?” 당시 느꼈던 섬뜩한 공포가 다시 밀려와 몸서리치는 제그에게 소울러는 한층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답했는데?” “죽는 게 나을 거라고 했어.” 침대로 향하며 고함을 지르듯이 퉁명하게 답했다. 그 말에 소울러는 묘하게 굳었다. 제그는 그런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왜 그래?” “응? ……아니.” 약간 초조한 기색이던 소울러는 잠깐만, 하고 나갔다. 곧 소등시간이라 했지만 금방 돌아오겠다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가 손목을 긋고 죽어가는 페르노크를 발견 한건 잠시 후의 일이었다. -피잉! 얄팍한 불길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새삼 귀에 박혔다. 숱하게 들려왔지만 흠칫 의식하며 회상에서 깨어났다. 퍼퍼펑, 사방으로 퍼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현실로 돌아온 제그는 머리를 버버벅 헝클였다. 그리고 핏 웃으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제와 무슨 상관이냐. 녀석도 나를 모르고, 나도 여태 몰랐는데.” 그러니 앞으로도 모르고 살면 되는 거다. 다시 만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만날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상관없다.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새삼 녀석 에게 미안하다고 할 마음도 없었다. 그냥 지금처럼 서로 엮기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가면 그만이다. 요크노민이라는 다리를 통해야만 성립되는 관계로서 마음 편히 살아가면 되는 거다. 불꽃놀이는 끝날 기미도 없이 여전히 시끄럽게, 화려하게, 밝게 계속되고 있었다. 몇 시간동안의 연금술사들의 불꽃놀이가 끝나면 그 다음에는 마법사들이다. 오늘 하루만큼은 어두울 겨를이 없이 색색의 빛으로 물들일 예정이었다. 역사적인 황제의 등극일이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 늑장 부리기는.” 무하가 떠난 지도 제법 됐건만 그의 친구는 나올 생각을 안했다. 제그는 편하게 팔짱을 낀 채 하늘을 구경했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장관이었다. 키르바나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동생은 앞을 못 본다. 이런 날이면 차라리 밖에 나오지 않는 편이 낫을 것이다. 카나와 함께 봐도 좋을 것이다. 곧 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는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걷고, 유치한 기념품을 사고, 둘 만의 밀담을 속삭이고, 동생에게 줄 간식거리를 사고, 그러다 피잉, 소리가 나면 하늘을 올려보고 그 후에 펼쳐질 광경을 공유하는 것이다. “후후.” 자신의 생각이 낯간지러워 실소하는 제그의 옆에 어떤 남자가 다가와, 털썩 벽에 기대섰다. 그리곤 제그와 똑같은 폼으로 팔짱을 끼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자의 한손에는 기이한 흰색 가면이, 또 다른 한손에는 물방울 모양의 붉은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제그는 그를 무관심하게 힐끗 보고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몇 번이고 솟아올라 퍼지고, 사라지는 불꽃이 하늘과 더불어 사방을 붉게, 노랗게, 푸르게 물들였다. 두 남자의 머리카락도, 얼굴도, 눈동자도 그때마다 빛을 달리했다. 고민을 하는 양, 찌푸려져 있던 미간을 펴며 제그는 인심 썼다는 어조로 말했다. “하는 수 없지. 이번만큼은 네 녀석과 함께 봐주마.” 둘도 없이 소중하고 귀여운 키르바나도,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카나도 아닌 우중충한 사내 녀석과 함께 라니. 투덜대면서도 제그는 계속 곁에 있어 주었다. +++ 엘프들이 이카미렌 산맥을 돌아서 가는 길을 택한 덕에 무하는 유예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지만 테밀시아의 계승식, 요크노민의 창립선언을 보고 갈 수 있는 짧은 여유였다. 곤크는 그 자체로 요새였다. 거대한 성벽이 몇 겹으로 두텁게 세워져 있었고, 유성이 떨어진다 해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견고한 마법진까지 갖춰져 있었다. 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결계가 빈틈없이 짜여져 있어 외부에서 곤크 내로 텔레포트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초대 곤크 마스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지었는 지 모를 정도다. 외부에서 내부로 텔레포트를 못하는 덕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근처 마을로 텔레포트하고 곧장 말을 몰기로 했다. 그래도 엘프들보다 하루 정도는 빠르게 도착할 거라 예상됐다. 일단 번잡한 수도 외곽을 빠져나와 인적이 없는 이카미렌 산맥의 기슭까지 달렸다. 곧장 무하가 곤크 근처 마을을 목표지점으로 삼아 텔레포트를 시전 했다. 그리곤 쉬지 않고 급히 곤크로 말을 몰았다. 락샤사는 훨씬 전부터 말을 타는 것이 귀찮다며 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고, 요크노민은 수도에 남은 데다, 훼오트라 아나는 연회에 참석해야 했기에 남은 일행은 이카미렌과 유시리안이 다였다. 그런데다 유시리안은 화가 난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고, 무하도 굳이 말을 걸지 않고 똑같이 침묵하고 있는 중에, 이카미렌까지 묵묵히 방관하는 눈으로 둘을 지켜볼 뿐이라 상당히 썰렁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불편하다면 불편한 분위기였지만 피차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무하는 정신없이 말을 몰다가 저 앞에 월등한 체력과 속도를 가진 마르스를 타고 있는 유시리안의 등을 바라보았다. 화났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오라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눈을 뜬 무하가 처음으로 본 것은 유시리안의 다정한 눈동자였다. 페르노크에게 향해지던 그 싸늘하고 잔인한 빛이 아닌, 녹아들 듯한 부드러움에 무하는 왠지 울고 싶 어졌다. 무하의 손을 감싸고 있는 그의 두 손의 온기를 느끼며 새삼 확신할 수 있었다. 유시리안에게 있어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무하는 애써 웃었다. “잘 잤어?” “……쭉 보고 있었어.” “할 일도 없다.” 평소라면 웃으며, 이제 알았냐고 맞받아칠 유시리안이었다. 그러나 그는 웃지도, 농담으로 받아치지도 않았다. 대신 놓칠 새라 무하의 손을 꼭 움켜쥐며 진지한 얼굴로 나직이 답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어. 질릴 때까지 지켜보다가, 신물 날 때까지 바라보다가 지겨워지면 자려고 했어.” “매일 보는 얼굴인데 새삼…….”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어.” 아무리 봐도 ‘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눈에 반해버린 그 곧은 눈동자도 가끔 웃을 때면 놀랄 만큼 예뻐지는 입술도 다소 창백한 얼굴도. 아무리 찾아도, 아무 리 봐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 매일, 당연히 옆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공포였다. 자신에게서 펠을 앗아간 녀석에게서 그를 찾아야 한다 는 것에, 무엇보다도 화가 났다. 이제야 잡은 펠을 확실히 움켜쥐기 위해 유시리안은 나직이 말했다. “훼오트라 아나를 불러올게.” “율!” 일어서려는 유시리안의 손목을 다급히 잡아챘다. 그 의미를 모를 유시리안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펠이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끌렸던 것이다. “난 널 놓치지 않아! 이렇게 허무하게 뺏기지 않아!” 상냥함의 가면을 벗어던진 유시리안이 거칠게 고함질렀다. “네가 그걸 원하건 원치 않건 상관하지 않아! 난 여태까지 내가 원하는 것만 하고 살아왔어! 그건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 부드럽지도 상냥하지도, 다정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는 눈빛, 목소리, 분위기. 그럼에도 무하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페르노크의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 이미 보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유시리안을 믿었지만, 그게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안에도 숨기고 싶은 또 다른 자신이 있듯이 유시리안 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새삼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해서 놀라거나 서운해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무하는 덤덤히 답하기만 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율.” “……뭐?” “난 착한 녀석이 아니야. 살신성인이나, 희생정신 따위와는 거리가 먼 녀석이지.” 유시리안을 붙잡기 위해 반사적으로 일으켰던 몸을 제대로 세워 앉았다. 그리고 붙잡고 있던 팔목을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급할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뿌리치지 않고 따 라주었다. “나야말로 원하는 것만을 위해 살아온 녀석이니까.” 그래,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아왔다. 염원을 이루기 위해……. “아니, 달라.” “……?” “달라, 펠. 확실히 달라.” 답답한 듯, 허탈한 듯, 화가 난 듯, 짜증이 난 듯, 유시리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펠은 원하는 것만을 위해 살아온 자기 자신을 비겁하다 생각하고 있어. 아니군. 그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남을 희생시켰다는 것을 비겁하다 생각하는 거겠지. 아니, 아니. 남의 희생을 뻔히 보고 느끼면서,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겠다는 것이 비겁하다 생각하는 걸 거야. 그렇지? 그래서 자학해 온 거잖아? 그 래서 비겁한 것이 나쁘지 않다는 내 말에 일어선 거잖아?” 하지만 난 달라, 유시리안은 오만하게 무하를 내려보았다. “난 원하는 것만 행하며 살아온 내 자신이 비겁하다 생각하지 않아. 그보다는 누군가의 희생 따위, 애당초 염두에 두지 않는 다는 것이 맞겠지. ……펠과 나는 달라.” 한눈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칠흑의 눈은 남의 아픔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이었기에. 그래서 반했다. 자신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눈을 가진 그에게 강한 집착과 소유욕을 느꼈다. 가지고 싶었다. 머리카락 하나하나부터 눈빛, 목소리, 작은 품, 딱딱한 손, 그리고 발끝까지도. 모두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그것은 지금 도 마찬가지다. 그런 유시리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하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 “율과 나는 다르구나.” “응. 달라.” 무하는 두 팔을 뻗어 유시리안을 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등을 움켜쥐었다. 분명 따뜻할 품, 분명 맡아질 살내음, 분명 부드러울 촉감. 그러나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과 이질감. 무하는 눈을 감았다. 그동안 간신히 견뎌냈던 그 고통.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켰다. “그래도 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방식대로 살 거야.” 당연히 유시리안은 화를 냈다. 그러나 무하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훼오트라 아나가 무하의 뜻에 따랐기 때문에 아직도 무하의 몸 안 어딘가에 페르노 크가 존재했다. 꺾기지 않는 무하를 보며 유시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대화가 끊겨버렸다.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달래고 되돌릴 길은 무하가 자신의 결심을 포기하는 것뿐이지만 그것만은 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마냥 냉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한 것 뿐. 무하에게나, 유시 리안에게나. 그토록 화를 냈으면서도 유시리안은 수도 외벽에서 기다려 주었고, 또 지금 같이 달려주고 있다. 지금은 그걸로 됐다. 어슴푸레한 새벽이 다가왔을 때, 숲 너머로 곤크의 거대한 성벽이 나타났다. ‘시륜.’ 설마 두 번째 지기, 라이시륜이 곤크 마스터일 줄이야. 2년이란 시간동안 한번도 마주치지 못한 그 마스터가. 게다가 곤크의 마스터라면 유시리안의 친구라 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들었는데도 주관적인 설명이라 눈치 채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징그럽게 눈치 빠른 요크노민이나 이것저것 캐묻던 유시리안 이나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나중에 무하가 보일 반응을 즐길 생각이었던 걸까? 2년 만의 재회.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즐거웠을 여정이건만……. ‘다시 만날 거라는 예감이 맞긴 맞았군. 녀석이 행방불명만 되지 않았다면 말이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실소했다. 그러고 보니 요크노민이 정보길드를 창설하면 그때 그의 행방을 의뢰 해볼까, 반쯤은 진심으로 고민했었던 적도 있었다. 어느덧 곤크의 성문 코앞에 도착했다. 유시리안이나 무하나 평소와는 다른 곤크의 모습에 인상을 썼다. 벌써 열려 있어야 할 곤크의 성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또 밤낮 따지지 않고 들락거리던 귀족들의 마차가 한대도 보이지 않았고 성벽 위에는 무기들이 빼곡히 설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조용했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말이다. “누구냐?!” 성문 위에서 고압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라이트를 응용한 조명 마법으로, 무하들을 밝혔다. 무하는 주머니에서 패를 꺼내 들어올렸다. 그리고 간 단하게 통성명을 했다. “무하 카 곤크.” “…….” 곤크에서는 두건을 벗은 무하를 모르기에, 곤크가 보일 무렵에 미리 구해 놓은 두건을 뒤집어 쓴 상태였다. 때문에 상대는 무하의 모습을 보기 보다는 패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이쪽으로 던지십시오.” 진짜 무하일 경우를 생각해서인지 말투가 한층 정중해졌다. 정령을 시켜 안전하게 던져 올리자 곧 문을 열라는 외침이 들렸다. 잠시 기다리자 투박하고 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몇몇 낯익은 얼굴이 웃음을 띠며 다가왔다. “절묘한 타이밍에 극적인 등장이십니다, 무하씨.” “무하씨 입장에서야 일복이 터진 거지만 말이죠. 하하하.” 그렇게 반갑게 다가오던 자들의 얼굴이 일순에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연습이라도 한 양 동시에 뒷걸음을 쳤다. 그 꼴이 한편의 희극과 같았다. 본인들 로서는 절박하지만 말이다. “싸, 싸, 싸……!” “왜, 왜, 왜……!?” 웃어야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가 보니 유시리안이 있었다. 무하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다시 예전 동료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뿐만 아니라, 몰려 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뒷걸음치고 있는 게 보였다. 무하는 모르겠지만, 일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들은 최근 2년 내에 들어온 신참이었다. “왜들 그러는 겁니까?” 물론 무하도 나름대로(?) 유시리안이 한 성격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반응들과 유시리안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깊고 자세히는 몰랐다. “저, 저 자는……!?” “아, 일행들입니다. 이쪽은 유시리안, 저기 계시는 분은 렌님.” 마스터의 친구라고 해서 단원들이 전부 알고 있으리란 법은 없지, 혼자 납득하며 소개시켜주는 무하였다. 그들이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는 걸 그가 알 턱 이 없었던 것이다. “마스터에게 용무가 있습니…….” “마스터는 지금 라인에 계십니다.”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어디선가 답이 튀어나왔다. 모두들 무하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말을 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라인이 어딘지 아시죠? 물론 아실거야. 하하. 당연히 아실 테지. 그러니 안내할 필요 없는 거죠? 그치요?” “예. 물론.” 그 음성에 실린 절박함에 무하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라인쯤이야 어디 있는지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순순히 답해주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카미렌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과 그 무리를 한번 번갈아 보았다. 좋고 싫음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아들의 성격은 여태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듯 싶었다. 무하에게만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보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곤크의 중심부, 라인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곳은 흑색투성이었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사방으로 얼마나 뻗어 있는지 감 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온통 흑색천지인 그곳에서, 푸르 스름한 빛을 내는 마법진은 마치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둥근 테두리 밖으로는 룬어가 빽빽하게 둘러져 있고, 안으로는 기이학적인 문양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을 중심으로 밀폐된 공간인지, 개방된 공간인지도 모를 그곳에 거대한 기류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마법사나 검사들은 물론, 마나의 율동 따위에 전혀 관심 없는 범인이라도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벅찰 정도로 강대한 소용돌이였다. 그 속에서 한 남자가 평면의 마법진 위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이리저리 흐트러지는 것이, 마법진이 뿜어내는 희미한 빛에 어렴풋 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빛이 부딪쳐 본래의 색이 다소 창백하게 굴절됐지만 남자는 갈색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긋이 감겨있는 눈 위로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이 쉴 새 없이 굴러 떨어졌다. 굳게 닫혀 있는 입술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확실히 좋아 보이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어둠의 공간의 한쪽이 네모나게 벌어지며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림자를 그려내며 한 남자가 공간에 한걸음 발을 디뎠다. “마스터.”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소용돌이치던 기류가 일순간에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갔다. 떨어져 나갈 듯이 펄럭이던 남자의 머리카락도 바닥에 가지런히 가라앉았다 .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마치 수 백 명이 미친 듯이 부르짖는 듯한 소란이 한순간에 소멸된 듯한 정적이었다. 왠지 고막이 눌리는 듯한 느낌에 방에 들어선 남 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추스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가 마법진으로 걸어올 때까지도 호흡을 고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야성적인 황금빛 고양이 눈동자가 희석된 어둠 속에 드러났다. 자신에게 다 가온 자를 올려보다 일어선 남자는 뚱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직접 만나야 할 녀석인 거냐, 딜린?” 묻긴 했지만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날 필요가 없다면 딜린이 굳이 이곳까지 자신을 찾아올 리 없었던 것이다. 딜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수건을 건넸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손님과, 만나면 반가울 손님들입니다.” 얼굴의 땀을 닦아낸 라이시륜은 떠오르는 바가 있는지 낮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쓸데없이 왜 온 거야, 그 녀석은.” 자신이 걱정되어 온 거라고는 결단코 생각할 수 없었다. 아, 무하라면 그래서 온 걸지도. 무하는 라이시륜이 곤크 마스터라는 걸 몰랐을 테지만, 유시리안과 어쩌다 주고받는 말에 거론 되어 알게 됐을 수도 있다. 딜린과도 만났다니 더더욱이나……. “올 거면 혼자 오지. 왜 애물단지를! 젠장.” 투덜대며 양 손을 합장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몇 번이고 해왔던 것처럼 쇄골에 박혀 있는 이물질을 탐색하다가 서서히 힘을 뻗었다. 이어 자신의 몸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그 추악한 손아귀를 붙잡고 떼어내려 했다. 자극하지 말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하나를 펴나갔다. 딜린은 옆에서 초조하게 그것을 지켜보았다. 벌써 몇 달째인가. 마나를 강제로 흐트러뜨리는 봉인구 때문에 체력을 회복하는 것도 힘들었다. 체력이 일정 수위에 오르면 발동하여 그것을 헤집어서 다시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보할 수 있는 체력이 서서히 확장되어가고 있어 견뎌내고 있었다. 그렇게 체력회복에 전력을 기울이던 터에 엘프들이 욤으로, 정확히는 곤크로 향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 뒤로 라이시륜은 무리임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봉인구를 제거하 는 시도를 했다. 그 결과는 근육이 뒤틀리고 내장이 뒤집히는 처참한 고통뿐이었다. 점차 일그러지는 얼굴을 지켜보니 이번에도 힘들어 보였다. 딜린이 그렇게 판단하기가 무섭게 라이시륜의 상체가 앞으로 크게 숙여졌다. 목구멍을 비집고 검붉은 피가 몇 줌이나 쏟아졌다. “마스터!” 황급히 부축하자 괜찮다며 거절했다. 고통을 인내하며 심호흡을 하다가, 불만 어린 얼굴로 짧게 투덜댔다. “빌어먹을. 이 놈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볼 일 없길 빌었건만.” 당장의 실패보다도, 곧 이을 비웃음이 더 짜증나는 모양이었다. “뭐, 됐어. 녀석과 싸울 것도 아니고. 지가 내 몸을 진찰하지 않는 이상, 말 안하면 알 길이 없을 테지. 부관이 입방정을 떨 리 없고.” 그러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다소 비틀거렸으나 이내 곧게 걸었다. “정확히 누구누구가 온 거야?” “유시리안, 무하, 그리고 렌이라는 남자. 이렇게 셋입니다.” “렌?” 뜻밖의 소리를 들은 양 라이시륜이 반문했다. “예. 유시리안 씨와 매우 닮은 분이셨습니다.” “흐음. 오랜만에 뵙는군.” “누군지 아십니까?” 마스터의 밑에서 커 오는 동안 유시리안이나 락샤사는 종종 봐왔지만 이카미렌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이카미렌은 나와 봐야 서적을 구하러 나오는 게 대부분이라, 곤크에는 거의 오지 않았던 것이다. 라이시륜이 마스터가 되는 날에 한번오고 그 뒤로는 귀한 서적을 구했다는 소식에 몇 번 온 게 다였다. 그나마도 라이시륜이 거의 찾아가서 주기 때문에 늘 곤크에 있는 부관조차도 한번밖에 못 봤었다. 그것도 스치며 만난게 다라, 얼굴만 알뿐 이름도 몰랐다. 라이시륜은 굳이 이카미렌의 정체를 알려 줄 것 없다고 생각해 짧게 답했다. “유시리안의 아버지다.” 그리고는 뭔가 부족한 느낌에 한마디 덧붙였다. “녀석과는 달리 존경할만한 분이지. 부전자전을 부정하는 모범적인 예랄까.” “아, 예.” 딜린은 웃음을 삼켰다. 손님들은 부관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무실에 타인을 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라이시륜도 그것을 뻔히 알았기 때문에 딜린의 안내가 없어도 부관의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 “나다.” 짧게 통성명 하고 문을 열었다. 부관의 사무실은 평소와는 달리 서류더미가 없어 꽤나 썰렁했다. 의뢰접수를 전면적으로 멈춘 덕이다. 일전에 딜린이 이곳이 이렇게 넓은지 몰랐다고 농을 할 정도였다. 그 황량한 사무실을 꽉 채우는 존재감에 라이시륜은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한눈에 들어오는 저 망할 녀석을 반반한 낯짝을 보자면 화를 내야 옳은 것 같고, 전에 헤어졌을 때보다는 밝아진 지기를 보자면 웃어야 옳은 것 같았다. 그런 라이시륜을 도우려는 심사였는지 유시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여! 몰골을 보니 죽다 살아난 꼴이군. 천하의 라이시륜도 한물 간 게지. 하기야,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여! 그쪽은 비루먹은 망아지 꼴이군. 천하의 유시리안이 왜 이리 풀이 죽은 게지? 하기야, 그쪽 나이도 만만치 않았지. 늙으니 마음이 약해지든?” 친구의 배려 덕에 라이시륜은 깔끔하게 고민을 접었다. 그 보답으로 똑같이 환하게 웃으며, 똑같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유시리안이 참으로 오랜만에 입을 연 것이라는 것을 그가 알 리 없었다. “엘프들이 드디어 너를 척살하려 든다면서? 그 멍청한 녀석들도 정신을 차렸군. 네 놈 존재 자체가 해라는 걸 이제야 안 거야.” “그 놈들이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어. 놀랍게도 이 몸을 그랜드로 섬기려고 몰려드는 거니까 말이야.”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아예 미쳤구나.” 유시리안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번만큼은 라이시륜도 호응했다. “미쳤지.” “음. 미쳤어.” “그래, 미쳤다.” 똑같이 고개를 주억거리다 실소했다. 일단 친구와의 재회를 즐긴(?) 라이시륜은 저편에서 웃음을 삼키는지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지기를 돌아보았다. 전에는 듣는 것만으로 울적해지던 멜로디가 이제는 한결 밝아져 있었다. 좀더 컸고, 좀더 단단해 졌지만 그 외에는 그리 달라진 게 없었다. 풍겨오는 분위기도 여전히 곧고 당당했다. “2년만인가?” “2년이 좀 넘었지.” 여전해 보이는 라이시륜의 모습에 왠지 안심이 되었다. “네가 샛길로 안 새고 바로 이곳으로 왔다면 훨씬 일찍 만났을 텐데 말이야. 그때 알아봐야겠다고 한 건 다 알아본 거야?” “뭐, 일단은.” 말을 흐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창가에 서 있는 이카미렌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본래 친구들과의 인사가 더 급한 법이지. 이해하니 신경 쓰지 말거라.” 희미하게 미소로서 답한 이카미렌은 묘한 눈으로 라이시륜의 목, 정확히는 쇄골 쪽을 바라보았다. 라이시륜은 능청스럽게 답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다시 라이시륜의 얼굴로 시선을 올린 이카미렌은 별 말 없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봉인구를 눈치 챘다는 것을 안 라이시륜이, 아무 말 말아달라고 한 것이니 그에 따른 것이다. 자존심 강한 라이시륜은 드래곤인 이카미렌에게도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어쩌다 이카미렌이 자처해서 주는 것도 과하지 않는 선에서만 받아들일 정도였다. 침묵을 지켜주는 이카미렌에게 보일 듯 말 듯 목례한 라이시륜은 소파에 앉았다. 지친 몸뚱이가 축 늘어지려 했지만 억지로 견뎠다. 그리곤 태연한척 무하에게 물었다. “반갑기는 한데, 얼마 전까지 락아타에 있던 녀석이 여기는 웬일이야? 휴가가 끝나려면 아직 먼 거 아닌가? 내년 하기에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엘프들이 너를 노리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 말에 유시리안을 보았다. “네가 말했냐?” “뭐 하러 말하겠냐?” 라이시륜은 두 번 묻지 않고 무하를 봤다. “어디서 들은 거야?” 유시리안의 말을 믿지 못해서 무하에게 화살을 돌린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을 믿기에 누군지 정확히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크리터 사잔 아나, 정보 길드 마스터에게 직접 들었지.” “크리터 사잔 아나?” 생소한 이름에 반문한 라이시륜은 부관을 보았다. 들은 바가 있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부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무하는 자랑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어제 밤에 창시된 길드야. 금안의 황제의 대관식에서, 욤과 락아타, 훼오트라 아나의 허락을 받아 획을 그었지.” “호오, 세 번째 획인가. ……그래서 무엇, 무엇을 들은 거냐?” 라이시륜은 크리터라는 신생 길드가 자신과 엘프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파악하려 했다. 정보 길드를 자체한 곳의 저력이 궁금했던 것이다. 무하는 숨 김없이 답해주었다. “엘프들이 너를 노리고 욤에 왔다는 것. 너 역시 엘프들의 동향을 알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본래의 너라면 곤크 내에서 전투준비를 하기보 다는 엘프들에게 당장 쳐들어갔을 것이라는 것.” “흐음.” 그게 파악한 전부라 해도 놀라운 것이었다. 엘프의 묘한 움직임과 곤크의 움직임 사이의 연관관계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라이시륜의 정체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거창하게 정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서도. ‘크리터라……. 무하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더 있어 보이는 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무하를 보았다. 곧 대규모 전투를 치러야 하는 자신을 걱정하는 기미였다. 모처럼 보는데 반가움보다는 걱정에 잠겨 있는 모습이 탐탁치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의 염려를 받는 건 영 어색했다. 자신의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더 마음에 안 드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여유가 사라져 버려서 일까 . 라이시륜은 뚱한 음성으로 장담했다. “난 그딴 것들한테 안 당해.” “물론 그렇겠지.” 무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그렇지만 걱정되는 건 당연한거잖아. 믿고 안 믿고 여하를 떠나서. 안 그래?” “흠.” 반대 입장이었다면 자신 또한 그럴지 모른다 생각한 라이시륜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감정, 이런 생각. 어느 하나 생소하지 않은 게 없었다. 냉대라면 이골이 났지 만 말이다. “설마, 리안. 네 놈도 그 소리에 온 건 아니겠지?”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라는 눈빛을 하며 물었다. 유시리안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미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야.” “노망 날 나이는 벌써 한참 전에 지나지 않았나?” “난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다.” “아직도 구만리나 남았단 말이야? 통탄할 일이로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점점 스파크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카미렌이나 부관, 딜린은 매번 봐왔던 일이기 때문에 아예 신경을 껐다. 그리고 무하는 웃으며 둘을 보았다. 그것을 본 딜린이 낮게 물었다. 유시리안이나 라이시륜이나, 서로간의 설전에 집중하여 그것을 보지 못했다. “재밌습니까?” “네?” 반사적으로 반문한 무하는 딜린이 유시리안과 라이시륜 쪽을 눈짓하자 아아, 하며 다시 실소했다. “율이 누군가와 저렇게 친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서……. 샤와도 친하긴 했지만, 저렇게 대등한 모습은 아니었어요. 시륜도 처음 들어왔을 때는 어딘가가 불편해 보였는데 지금은 무척 편해 보여요.” “그렇습니까?” 딜린은 스파크의 경지를 넘어 이제는 번개라도 떨어질 것 같은 둘 사이의 분위기를 힐끔 보고 모호하게 웃었다. “또…….” 유시리안이 입을 열게 해주었다. 무하는 오랜만에 듣는 유시리안의 목소리를 새기듯 말끝을 흐리며 눈을 감았다.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던 딜린은 라이시륜 의 호명에 그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록은 아직도 성벽에 있을 테지? 불러들여서 휴식을 취하게 해라. 이 놈 말대로라면 오늘 저녁쯤에나 올 테니 체력을 비축해 둬야지.” “예.” 지시를 받은 딜린은 곧장 일어났다. 그러자 부관도 따라 일어났다. “성벽에 있는 녀석들에게도 적당히 쉬어두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유시리안 씨는 늘 묵던 곳에서 쉬시지요. 준비해 두겠습니다.” 둘이 나가는 것을 지켜본 라이시륜이 문득 생각난 듯 무하에게 물었다. “어차피 거절한다 해도 참전할 테지?” “그러려고 왔어.” “물론 네가 강하다는 걸 알아. 하지만 엘프들도 강하다. 그랜드가 없어 정신적으로 불안하다 해도 그 강함은 카 등급 못지않아.” 욱신거리는 쇄골을 움켜쥐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그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힘들 거다.” 무하가 곤크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부관에게 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그가 사람, 엘프 등의 지성체를 죽이는 것을 매우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과거 무하와 동행했을 당시에는 몬스터나 야수 따위만 상대했기 때문에 미처 몰랐었다.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죽일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단순한 겁쟁이에 불과할 테지만 무하는 달 랐다. 그는 굳이 살인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나아가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니 그가 살인을 즐기든, 기피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어쭙잖은 각오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어지간한 전쟁보다 더 치열할 테니. “그래도 싸울 거야. 네가 싸우는 걸 구경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덧붙여 난 구경하러 왔다.” 유시리안이 얄밉게 빈정댔다. 라이시륜은 딱 잘라 말했다. “부디 그래다오.” 다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옆에서 무하가 쿡쿡 웃었다. 이제야 그것을 본 라이시륜이 짧게 탄성을 냈다. “아! 이제는 웃기도 하는 구나. 나와 여행을 했을 때도 그랬지만, 부관 말로도 여태 웃는 걸 못 봤다던데.” “율이 웃게 해줬어.” 무하는 밝은 듯 서글픈 듯,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본 라이시륜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좀 쉬어 둬. 이런 날만 아니라면 술이라도 진탕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할 테지만. 알다시피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말이야. 나머지 이야기는 엘프들을 격 파한 뒤에 자세히 하자.” 시선은 유시리안에게 가있었다. 유시리안은 쳇, 하며 고개를 획 돌렸다. 새벽에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맞긴 했지만, 곤크는 나름대로 평온하게 굴러갔다. 오늘 저녁이라 확정된 전투의 막바지 준비를 하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성 벽 위에서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무기 점검을 하고 있던 용병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색적인 손님 때문에 몽땅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늘 동경해 왔던 마스터가 나타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마스터의 동행인이었다. 근래 뜸하다 싶더니 결국 또 오고만 저 싸가지! 녀석의 하는 말 하나 하나에 자존심은 박살나고, 자신감은 땅에 꺼졌다. 그야 말로 언어폭력! 말뿐이라면 뭐가 문제일까. 진짜 문제는 그 망할 싸가지만큼이나 실력도 괴물 급이라는 것에 있다.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덤벼봐야 결과는 무참히 깨지는 것뿐. 동료의 일방적인 패배에 분노해 패거리로 덤벼 봐도 소용없다. 깨지고, 깨지고, 또 깨졌다. 뼈다귀는 부서지고, 내장은 터지고, 근육은 비틀렸다. 멀쩡한 사람 반병신 만들어 놓 고, 라이시륜 얼굴 봐서 한 수 봐줬다는 말 한마디로 비수를 꽂았다. 마스터에게 호소해봐야 소용없다. 있지도 않은 죄를 긁어다 누명을 씌우고는 당당해 할 뿐이다. 반병 신으로 만든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도둑으로도 만들고 성추행범으로도 만들었다.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나마 구석지고 눈에 안 띄는 위치였기에 파동은 적었다. 평소에 쌓은 업보덕분에 듣는 귀 걱정 안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유시리안은 뭐가 불만인지 내내 뚱한 표정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라이시륜의 얼굴에는 짓궂은 웃음이 가득했다. “왜 삐져 있는 거냐?” “무슨 상관이야. 신경 꺼.” “딜린 말로는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던데 말이야. 그 꼴 보는 걸 내심 기대했는데 실망이군.” “네 놈 기대에 부흥할 의무 따위 없어.” “물론 나에게도 너에게 그걸 강요할 권리 따위 없지. 있어도 내팽겨 칠거다.” 그러면서 유시리안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툭 쳤다. “네 놈의 이중인격을 봤을 때, 무하와 알콩달콩 판 벌려야 맞잖아? 네 놈은 마음에 드는 존재한테만 절대적으로 관대해지니까. 게다가 그 관대함은 어지간 해서는 사라지지 않잖아. 그런데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주둥이를 내밀고 있는 거냐?” “흥!” 답하기 싫다는 얼굴로 난간에 팔을 걸치고 섰다. 라이시륜은 더 묻지 않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유시리안에게도 한 개비가 삐쭉 튀어나온 담뱃갑을 내밀었다. 그도 답답할 때면 종종 담배를 폈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고 깨물어 뺐다. 그리고 벌써 불을 붙인 라이시륜에게 고개를 기울어 불씨를 옮겨 받았다. 깊이 한 모금 삼키고 내쉰 유시리안은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투덜댔다. “빌어먹을. 되는 일이 없어. 내가 이렇게까지 성질 참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쿡쿡. 그러면서 철이 드는 거지.” “이딴 식으로 들 철 따위 필요 없어.” 그리곤 입을 다물고 담배만 펴댔다. 짜증이 나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손에 넣기 힘든 것은 처음이다. 잡았다 싶으면 어느새 빠져나가서 저 멀리 있다. 또 힘들게 찾아, 잡았다 싶으면 손아귀 사이로 흘러내려 사라졌다. 움켜쥐고, 움켜쥐고, 움켜쥐어도 잡히지 않는 물줄기처럼, 혹은 바람처럼. 허망하게 빈손을 보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한대를 다 피었을 쯤, 유시리안은 한탄하듯 툭 내뱉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방식대로 살겠다더군.” “당연한거 아냐? 그럼 넌 남이 하자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가 낫냐?” 유시리안은 버럭 성질을 냈다. “그래! 당연한 거겠지. 너무나 당연한 거라 말려도 말을 안 들어 문제다!” 젠장, 숨을 몰아쉬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러면서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겠단다. 나를 두고 말이야.” “결국 넌 함께하지 못하는 게 불만인거구나.” 침묵으로 긍정하는 유시리안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너 답지 않다.” “뭐가?” “넌 타인의 생각대로 휘둘려 사는 걸 가장 혐오하고 경멸했잖아? 그런데 지금 네 모습을 봐. 자기 의지대로 걸어가겠다는 녀석을 붙들기 위해 안달이 나 있어. 네 자 신이 가장 싫어하는 짓을 네 스스로가 하고 있다고.” “그래서?” 유시리안은 툭툭 시비조로 반문했다. 라이시륜은 다 피운 담배를 비벼 끄고 난간 밖으로 던져버렸다.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문 뒤, 담뱃갑을 들고 유시리안을 보았다. 한 대 더 피겠냐는 뜻이었다. 유시리안은 거의 다 피운 담배를 똑같이 던져 버리고는 새로 물었다. 새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 라이시륜은 단정 짓듯 물었다. “무하는 너의 친구가 아니었군?” “물론.” “지기도 아니고?” “당연히.” 거기까지 들은 라이시륜은 혀를 찼다. “이런 놈과 얽히다니. 무하 녀석, 인복이 없군.” “그 없는 인복을 대표하는 게 바로 네 놈이다!” “하아. 불쌍한 녀석.” “네 놈을 만나고야만 것보다 더 불행한 게 있을까!” 라이시륜은 들은 척도 안했다. 대신 탄성을 지르며 손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무하가 네 놈에 대해 이야기 한 게 있었지. 워낙 미화 된 설명이라 아닌가 보다 했는데 말이야. 하아. 녀석의 통찰력이 그것밖에 안 됐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짓는 옵션까지 선보였다. 무하를 통해 들은 이야기라면 유시리안도 할 말이 많았지만, 자신에 대해 무하가 어떻게 말했는지 궁금한 관계로 잠시 뒤 로 미뤘다. “뭐라고 했는데?” “너무 끔찍해서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가…….” 슬쩍 외면까지 해 보인다. 유시리안은 흥, 웃으며 자신의 패를 꺼냈다. “나도 네 놈에 대해 들은바가 많다! 확실히 통찰력이 떨어지긴 하더군!” “호오?” 본래 이 둘은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남자들이었지만 대상이 대상이니만큼 궁금해 질 수밖에 없었다. 침묵한 채 서로를 보던 둘은 거의 동시에 난 성벽 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말을 꺼냈던 라이시륜이 자신의 패를 뒤집었다. “예의가 매우 바른 사람이라고 했었지. 내숭을 얼마나 떤 거냐? 그 광경을 상상하니 소름이 돋는다.” “연애에서 내숭은 필수다. 하긴 어디 해봤어야 알지. 너야 말로 혼자 움직이는 타입인데도 사람을 잘 다룬다고 하더군. 또 얼마나 횡포를 부린 거냐? 이 독재자 녀석아.” “나의 리더쉽이야 정평이 나 있는 거다. 횡포라니. 난 목숨 부지하게 해준 것밖에 없다. 또 사교성도 좋고 장난기도 많고 상냥하다고 했던가? 사교성? 장난기? 상냥? 하! 저쪽에 피해있는 녀석들에게 들려주고 싶군.” “저딴 녀석들이야 알게 뭐냐. 그러는 너도 차가운 느낌인데도 장난기가 많다고도 했다. 장난기? 혼자만 즐거운 장난이겠지. 민폐장이야!” 둘은 침묵했다. 그러다 풋 웃으며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이 둘의 대화는 본래부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제 삼자 가 듣기에는 뭔 소린가 싶을 정도로 뜬금없이 진행되곤 했다. “그래서 내내 삐져 있었던 게로군. 네 놈이 입을 여니까 무하 녀석 안색이 갑자기 밝아지더니만.”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다.” “웃기군. 네 놈이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내냐?” 라이시륜은 가소롭다는 듯 시니컬하게 잘랐다. 물론 그 정도에서 꺾길 유시리안이이 아니었다. “그를 펠이라 부르는 자격으로 화를 낸다. 왜!?” “녀석의 인생은 녀석 거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권리, 아니 의무가 있어.” 재를 한번 톡 털고 다시 한번 들이 삼켰다. “녀석이 네가 하자는 대로 질질 끌려 다녔다면, 지금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안 그러냐?” 유시리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라이시륜은 피식 웃었다. “네 놈 마음대로 안 되니까 더 집착하게 되는 거고,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더욱 끌리는 거잖아. 막말로, 녀석이 네 말을 따라서 자신의 방식을 포기했다면 벌써 흥 미 잃고 떨어졌을 거 아냐? 그런 부류를 경멸했으니까.”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만 뻑뻑 피우는 친구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어색하지는 않지만 평온하지도 않은 침묵을 깨고 유시리안이 뜬금없이 말했다. “나랑은 너무 달라. 펠은.” “당연히 다르지. 그러니까 나와 지기씩이나 된 거 아니겠어? 너 같은 인종이 둘이나 있다면 그건 세상이 망할 징조지.” 과거 자신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음을 잊었는지, 라이시륜은 당당하게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왜 자꾸 펠이라고 부르는 거냐?” 그 질문에 유시리안은 기분 좋은 듯, 반쯤 눈감으며 옅게 웃었다. “페르노크의 펠이야.” 만약 그가 무하의 지기, 아니 친구이기라도 했다면 이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기도 친구도 아니었다. 때문에 거리낌 없이 말하며 자랑스럽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사랑 받는 자, 펠이지.” “낯간지러운 이름이군.” 간단히 평한 라이시륜은 좀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희대의 천재’?” “지금은 대마법사야.” “그런 촌스러운 호칭은 접어두자고.” “쿡쿡.” 유시리안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웃기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이시륜은 생각을 정리하는데 바빴다. “무하가 페르노크였나. 이므르를 자퇴한 뒤 내내 은둔한다 싶더니, 실은 가출한 거였군. 자기보다 강하다던 그 형님은 금안의 ‘지배자’고. 하. 재미있군.” 그러다 고개를 갸웃했다. “페르노크의 부모님은 살아 있다고 알고 있는데? 왜 본 적이 없다고 했지?” “본 적이 없으니까 없다고 한 거다.” 유시리안은 참견했다. “얼마나 바빠야 자식이 아비, 어미 얼굴 한번 못 볼 수 있는 거냐?” “하하! 페르노크와 나의 펠은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짧게 설명해 주었다. 무하가 이계의 사람이라는 것, 그쪽에서 살해당해 이쪽으로 건너왔다는 것, 주변에서는 기억상실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 최근에 페르 노크가 깨어났다는 것까지. 천하의 라이시륜도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유시리안도 그 나름대로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에, 둘은 두 번째 담배가 다 타버릴 때까지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라이시륜은 담배꽁초를 획 던져 버리며 쿡 웃었다. 그리고는 한 단어로 모든 것을 요약했다. “빙의(憑依)군.” “어감이 안 좋은데?” “좋고 말고가 어디 있어.” 그리곤 새 담배를 꺼내려다 손을 내렸다. 몸 상태가 염려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조금씩 힘에 부치고 있었다. 그 찰나의 포기를 유 시리안은 놓치지 않았다. “상태가 이상하기로는 너도 만만치 않은데? 아까도 말했지만 죽다 살아난 꼴이다.” “관심 꺼라, 삐돌이. 그래서 언제까지 투정부리고 있을 생각이냐?” 들통 나면 두고두고 놀림을 받을게 분명했기에 라이시륜은 태연한 체 했다. 그러나 호락호락 넘어가줄 유시리안이 아니었다. 말 돌리는 걸 보니 뭔가 건수가 있 는 게 분명해 보였다. 라이시륜은 뻔히 그 기색을 알면서 모른 척 했다. “무하의 성질대로라면 분명 자기가 하려는 대로 하겠지. 그런데 이대로 헤어질 셈이야? 서로 말 없이 냉전 벌이다 헤어지면 더 낫냐?” “난 뺏기지 않아!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다른 화제였다면 유시리안이 이렇게 쉽게 넘어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모습에서 라이시륜은 자기 생각보다 유시리안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서늘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누구한테 뺏긴 다는 거냐? 무하는 누구에게도 가지 않아. 네 놈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너에게도 가지 않는다.” 울컥하는 유시리안의 가슴을 탁탁 치며 비웃었다. “힘으로 녀석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 지도 모르지. 간단하잖아? 허튼 짓 못하게 족쇄를 채우고, 감금해 버리면 끝이니까. 그렇게 되면 혼자 차지할 수 있게 돼. 네 놈 뜻 대로 누구에게도 안 뺏기고, 헤어지지도 않고 네 곁에 묶어 둘 수 있게 되는 거다.” “…….” 유시리안의 침묵에 확신하며 물었다. “네 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 생각해 봤다. 골백번도 더 생각해 봤다. 족쇄는 마나와의 접촉을 끊는 족쇄,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 움직이는 반경을 제약하는 족쇄를 그 목, 팔, 다리에 채 워야지. 감금해 둘 곳은 이공간이 좋겠어. 약속된 언어를 모르면 절대 찾아올 수 없는 그곳에 영원히 가둬두는 거야. 이공간 안은 멋지게 꾸며놔야지. 구질구 질한 곳에 나의 펠을 지내게 할 수는 없어. 그래, 이카의 거처처럼 꾸미는 거야. 펠도 그곳을 마음에 들어 했어. 나만 보고, 나만 듣고, 나만 만질 거야. 내 거 야. 안 뺏겨! ……광기에 차서 생각했다. 라이시륜이 말한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생각의 차원을 넘어서 계획에 가깝게……. “하지만 넌 그렇게 못할 거야.” 라이시륜은 딱 잘라 단정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순간, 네가 사랑하는 펠은 사라지고 네가 그토록 경멸하는 인종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지. 타인에게 휘둘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버러지만이. 네 손으로 네가 사랑했던 사람을 버러지로 전락시켜 버리는 거다. 그러니 넌 그렇게 못할 거야. 겨우 찾아낸 이상형일 테니까. 안 그래?” 그렇다. 자유롭게 활공하는 새를 사랑하여, 소유하고 싶다고 그 날갯죽지를 찢어버리면 새는 죽고 만다. 새장에 가둬도 마찬가지다. 새장에 갇힌 새는 더 이상 자유 롭지 못하다. 그것은 더 이상 그가 소유하고자 한 ‘자유롭게 활공하는 새’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유시리안은 지난 짧은 여유동안 족쇄를 채우는 것도, 감금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미움을 받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되돌릴 자 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찢겨나간 날개를 붙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게 두려웠다. 부서진 조각은 더 이상 가치가 없듯이, 자신의 안에서 그의 존재가 더 이상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아니게 되어 버리는 것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될 바에야, 그 미약한 확률에 도전하겠어.” 언제나 유시리안의 손아귀에서 흘러내리던 그다. 그러니 날개가 꺾이고, 새장에 갇힌다 해도 펠은 펠로서, 여전히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무 리 얄팍한 가능성이라도, 두려움에 질려 아무것도 안하고 눈앞의 펠을 뺏기는 것보다는 낫다. “난 바보도 아니고, 어리석지도 않아.” 집착과 광기로 젖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라이시륜은 문득 코웃음을 쳤다. “네 놈은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넌 바보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여기서 보초나 서. 네 놈 때문에 죄다 내려가 버렸으니까. 밥값은 해야지.” 유시리안 때문에 내려갔다면, 그가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라이시륜은 이 자리에 있으라고 했고, 유시리안은 그 말에 따랐다. 유시리안이나 이카미렌뿐만 아니라 무하도, 곤크 내에 있는 자신의 처소가 아닌 따로 마련된 처소에서 짐을 풀었다. 어차피 잠깐 쉬는 것뿐인데다, 무하가 돌아왔다고 하면 찾아올 손님들이 몇몇 있기에 피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깍지 낀 손을 내려보던 무하는 고개를 들어, 저편에 서 있는 이카미렌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인데도 고아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다가서기 힘든 아득한 느낌 . 그러면서도 그리움이 녹아나는 이율배반……. 깊이 숨을 들이 삼켜다, 조용히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카미렌님.” “……?” 약간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본다. 그 눈을 마주하면 더욱 아득하여, 차라리 암담한 느낌이 들어 버린다. 무하는 애써 그 눈을 마주보았다. “일전에 말씀하셨지요. 제가 무슨 선택을 하든, 그것이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길 바란다고. ……율은 그런 삶을 살아왔고, 그만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 이 휩쓸려가는 것을 싫어한다고도 하셨지요. 그 뒤로 줄곧 이카미렌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하는 다시 깊이 숨을 들이 삼켰다. 그리고 삼킨 것을 내뱉으며, 자신의 생각도 함께 내뱉었다. “이카미렌님은 제가 율이 좋아할 수 있는 존재로 계속되길 바라셨던 거지요? 그래서 말씀해 주신 게 아닙니까?” “제법 영특하구나.” 이카미렌은 유시리안에게나 보였던 부드러운 미소를 잠시 지었다. 그것에 무하는 긴장을 풀고 한결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카미렌님께서 율을 누구보다도 이해하며, 사랑하고 계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일어서 이카미렌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율이 저에게 친구나, 지기였다면 감히 이런 부탁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주제넘게 나섭니다.” 질끈 눈을 감았다. “율의 곁에 있어 주십시오!” 외부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라인에는 층과 층 사이를 잇는 마법진이 있었다. 때문에 라이시륜은 빠른 속도로 체력이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도 꼭대기 층까지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라인의 꼭대기에는 특정한 손님만이 묵을 수 있는 방이 있었다. 간혹 유시리안들이 묵고 가는 방이기도 했다. “하아. 하아.” 벽을 짚고 숨을 고르며 봉인구가 있는 곳을 지그시 눌렀다. 유시리안이나 단원들 앞에서야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지만 이제는 서있는 것도 버거웠다. 마나를 모을 수 없게 하는 봉인구의 위력을 상쇄시키면서 체력을 회복하려면, 특정 공간의 특정 마법진 위에 있어야만 했다. 새벽까지 라이시륜이 있던 바로 그곳이 다. 일단 마법진을 벗어나면 봉인구의 위력이 다시 기어 나와 기껏 비축한 체력을 갈아먹었다. 이어 공간을 벗어나면 완전히 활기를 뻗어 본격적으로 마나를 흐트러뜨렸다. 원래는 엘프가 오기 전까지는 그 공간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무하나 이카미렌만 왔다면 양해를 구하고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시리안이 함께 와버 렸다. 라이시륜은 죽으면 죽었지 그 망할 놈에게 약점 잡히기 싫었다. “빌어먹을.” 이정도로 헐떡이는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엘프 따위에게 잡혀 이 꼴이 되다니! ……하지만 그는……. 귀를 반쯤 가린 머리끈을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어렸을 때의 일은 그다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다. 특히 초록 고향에 오기 전의 일은 희미하고 잡티가 많았다. 아버지가 한 선택 때문에 자신의 차원계로 홀로 돌아가 버린 어머니와의 추억도 그러했다. 그럼에도 참으로 많이 원망했었다. 이종족과 결혼을 하면 반려에게도 ‘선택의 의무’가 생긴다고 알고 있다. 어째서 어머니는 선택을 기피한 것일까? 어째서 우리의 곁에 있어주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홀로 가버린 것일까? 미쳐가는 엘프의 삶이 그렇게 싫었던 것일까? 남편도 자식도 내버리고 가버릴 만큼? 엘프들 사이에서 소외당할 때 더욱 원망했고, 자신을 기피하는 그들의 눈에서 공포를 읽었을 때는 조금 그리웠고, 그 공포 속에서 강렬한 질투를 읽었을 때는 아주 조금 이해가 됐다. 애정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원망의 감정이 너무 강했다. 그것을 안 아버지는 네가 좀더 자라면 모든 걸 알려주겠노라 했다. 어머니를 원망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때가 되면 정말로 원망할 자가 아비임을 알게 될 거라고도 했다 . 라이시륜은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못하고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천년이다. 어찌 보면 지긋지긋하게 긴 시간이다. 그러나 이별을 준비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그보다 몇 배의 세월을 살아가야 하는 시륜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암담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어느 날 잠들 듯 그렇게 가버렸다. 어머니처럼 매정하게 홀로 가버렸다. 혼자가 된 라이시륜의 곁에 다가오는 자는 대부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 즉 라이시륜의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을 부탁 받았다고 했다. 듣겠냐는 그의 물음에 라이시륜은 고개를 저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결국 천년간이나 찾아오지 않았다. 하나뿐인 자식이 금기의 아이로서 배척 받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아니,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공포 너머의 질투를 본 순간부터 엘프들의 배척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서서히, 확실히 죽음으로 걸어 가면서도 그토록 그리워했는데. 원망도 하고 그리워도 했다. 한때는 아주 조금 이해했었고, 언젠가는 완전히 이해하게 될 거다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은 순간 그의 안에서 어머 니는 더 이상 그립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원망, 오직 원망만이 어머니와 그를 이었다. 그런 라이시륜의 심중을 안 대부는 듣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말로 매듭지었다. “쿡.” 누구에게인지 모를 조소를 지으며 허리를 폈다. 그리고 오기를 부리며 또박또박 걸었다. -똑똑. “시륜이다.” 그가 문을 열기 전에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다. 이카미렌이었다. 창가에서 무하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잠시 나갔다 오마.” 라이시륜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무덤덤하게 이카미렌이 말했다. 그리곤 스쳐지나가는 그에게 라이시륜은 낮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시륜의 몸놀림이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이카미렌이 회복 마법을 걸어준 덕이다. 봉인구 덕분에 효과가 오래 가지는 못하겠지만 당장은 살 것 같았다. “왜 멍청히 서 있냐? 앉아.” 창가에 멍청히 서 있는 무하에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피식 웃으며 무하도 자리에 와 앉았다. 그가 앉는 것을 기다린 뒤, 라이시륜은 가차 없는 질문을 던졌다. “페르노크라고 부를까? 무하라고 부를까?” “……무하라고 불러. 그게 진짜 내 이름이니까.” 쭈뼛하게 굳었다가 한숨과 함께 답했다. 그리고 물었다. “율이 말했어?” “달리 누가 있겠어. 왜? 화났어?” “아니.” 망설임 없이 답한 무하는 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제멋대로인 게 매력이라는 남자잖아. 화낼 수도 없어.”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하든? 예나 지금이나 그 놈 낯짝 두꺼운 건 불치병 수준이지.” “하하. 난 그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게 보기 좋은데? 솔직히 겸손한 율의 모습은 상상이 안돼.” “제 눈에 안경이다. 뭐, 싫은데 억지로 붙어 다니는 것보다야 낫지만.” 유시리안의 이중성을 알고 있기에 무하의 반응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라이시륜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무하가 먼저 질문을 던져왔다. “회색 고향에서의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오해가 있었던 거야? 2년간 곤크를 비운 것과 관련이 있는 거야?” “…….” 딱딱하게 인상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오해고 뭐고……. 작당한 거였어.” “작당?” “회색 고향은 태고 나무의 영역권. 그 안에 있으면 마법 탐사에는 물론 천리안에도 걸리지 않아. 거짓 정보를 알려준 그 자는 나를 잠시 눈에 안 뛰는 곳에 두려 한 거랬어.” “그 자가 누군데? 무엇을 위해 그런 건데?” 누구라도 당연히 해 올 질문이었다. 라이시륜도 그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갈리는 분노와 살 떨리는 배신감을 억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무하는 날카롭게 찔러오는 살기에 당황했다. 지난 2년 동안 용병생활을 해오면서 많은 적들을 만났고 싸웠다. 심지어는 전쟁터까지 갔다 왔다. 덕분에 뛰어난 기사의 절제된 살기도, 일류 암살자의 정제된 살기도, 삼류 현상수배범의 악착같은 살기도 겪어봤다. 그러나 이토록 강하고 복잡한 살기는 처음이다. 차가운 것 같으면서도 뜨겁고, 절제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폭주하고 있고, 정제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원색적이며, 악착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허무했다. 무섭지만 슬픈 살기다. 무하가 질문을 취소하려 했을 때, 라이시륜이 나직이 답했다. “내 대부. ……그리고는 진의를 묻기 위해 찾아간 날 감금했지. 뭐를 위한 건지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어.” 따뜻해서 어색했던 손으로 봉인구를 박아 넣고, 자상해서 좋았던 목소리로 감금을 명했다. 묘하게 아프고, 슬프고, 그러면서 단호한 눈을 해가지고 그리 명했다. 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면서 2년 동안 엘프를 선택해서 그랜드가 되라는 강요는 하지 않았다. 다른 엘프들처럼 공포와 질투로 망가진 얼굴로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보기만 했다. 겁쟁이 녀석들이 같잖은 협박이랍시고 음식을 주지 않을 때조차도. “그를 믿었나 보지? 아파 보여.” “글쎄. 다른 녀석이 그런 짓을 했다면 그토록 당하지 않았을 것이란 거 하나는 분명하지.” 라이시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당초 그 전에 대부가 아닌 다른 엘프들이 그 정보를 알려줬다면 그곳까지 가지도 않았을 테고.” “대부가 엘프야?” “거기까지는 듣지 못했나보지?” 쿡쿡 웃으며 머리끈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려왔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 끼어들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어 머니 함께 무척이나 행복하게 지냈었다. 그런 행복을 깨면서까지 아버지가 그랜드가 되어 주었는데도 엘프들은 금기를 깼다는 이유로 좋지 않는 눈을 했다. 그런 엘프들이 더없이 싫었고, 또 그 피가 흐르는 자신도 싫었다. 그래서 늘 끈으로 가리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근래 다른 엘프들도 머리끈이나 두건, 후드 따위로 귀를 가린 채 다니고 있다. 딜린의 말로는 초록 고향의 마을에 진을 설치하여 외 부에서의 탐색을 막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자신을 찾는 자, 그러니까 딜린이나 부관의 이목을 막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귀는 왜 가리고 다니는 걸까? 그 뾰쪽귀에 자부심을 가지는 건 아니지만, 자기 자신을 숨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들이. “뭘 듣지 못했다는 거야?” “……응?”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던 라이시륜은 흠칫 깨어났다. 이어 질문의 요지를 금방 파악하고는 아아, 하며 웃었다. “엘프의 묘한 움직임, 곤크의 전투태세. 이 두개의 인과관계를 크리터에서 어떻게 읽어낸 거라 생각해? 그들은 내 상태에 대해서는 안 좋은 게 아닐까 예상했으면서 나 와 엘프들과의 전투를 확신했어. 시기적으로 맞닿긴 하지만 각자 놓고 보면 모를 일인데도 말이지.” “아……!?” 워낙 신뢰할 수 있는 녀석에게 들은 정보라 의문 없이 받아들였던 무하는 그제야 자신이 놓친 부분을 발견했다. 라이시륜은 그런 지기를 위해 내키지는 않지 만 잠시 머리끈을 풀기로 했다. 그다지 길지 않은 길이에, 넓은 폭을 가진 그것은 키워드 마법이 걸려져 있어 약속된 언어가 아니면 절대 풀 수 없었다. 물론 그 약속 된 언어는 라이시륜만이 알았다. 목욕할 때 외에는 풀린 적이 없었던 끈이 잠시 허물어지고 끝이 가려졌던 귀가 드러났다. 그것은 인간의 귀보다 윗부분이 손가락 한마디 정도 길었고, 끝이 뾰쪽했다. “그건 그들이 내가 엘프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 일거야.” 정확히는 혼혈이지만, 덧붙이면서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한 얼굴을 했다. 다시 묶고, 마법을 거는 모습을 지켜본 무하는 나직이 말했다. “아사라느가 찾던 엘프는 너였나 보군.” “아사라느?” “락아타에서 만난 엘프 여자다. 마검을 소유한 엘프를 찾고 있었지. 네 검, 이계의 것이라 했지?” “확실히 찾는 게 나군. 그쪽에서 내가 곤크 마스터라는 것을 아는 건 대부뿐이야. 그런데 어째서인지 대부는 그걸 다른 엘프들에게 알리지 않고 나를 찾으 라고 명했어. 덕분에 나로서는 전투 준비를 할 여유가 생겼지만…….” 본인도 의아하게 생각되는 점이라 미간을 모으다가 설명을 계속했다. “아사라느라는 이름까지는 모르지만, 락아타에서 수작을 벌인 엘프가 있다는 건 알아. 아마 별도로 정보를 수집하다가 곤크 마스터가 마검을 쓴다 는 걸 들은 모양이야. 혹시나 하고 락아타 황실에 도움을 청해 나를 유인한거지. 뻔한 수작이라 딜린을 대신 보냈어. 후계자쯤 되면 얼마든지 대리가 가능한데다, 그쪽 귀족을 도발해서 일부러 모욕당하고 그 대가로 락아타 내의 병력을 되돌릴 재간이 있는 녀석이니까. 아, 귀환 중에 너와 만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머리 속을 정리하던 무하가 다시 물었다. “아까 들으니 너를 그랜드로 삼으려 한다던데 왜 그들은 너를 감금하고, 또 쳐들어오는 거야?” “내가 그랜드가 되길 거부하기 때문이야. 힘으로라도 밀어붙이려는 거지. 난 혼혈이라 모르겠지만 그랜드가 없으면 꽤나 곤란한 모양이야. 뭐, 평소에는 보여도 안 보이는 척 하던 것들이 제 발로 오는 걸 보면 곤란을 넘어선 지경인가 보지만.” “다른 엘프를 그랜드로 세우면 되잖아? 왜 자신들을 싫어하는 너를 그랜드로 삼으려고 몸부림치는 거야?” “그랜드는 지목 당한 엘프만이 될 수 있는 거야. 인간들의 왕과는 달라.” 무하는 더욱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누가 지목하는데?” “……나도 모르겠어.” 라이시륜은 미간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말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은 알 수 있어. 지목 당한 자가 누군지. 설명하긴 힘들지만.”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핥았다. “엘프들은 저주를 받은 거라고 했어. 배신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 거라고. 내 생각에는 지목하는 자는 저주를 건 자가 아닐까 싶어.” “어쨌건 넌 그랜드가 되기 싫은 거지?” “죽어도 싫어.” “그걸로 됐어. 그럼 나는 네가 원하는 선택을 위해 싸우겠어.” 무하는 미소 지으며 강한 눈으로 라이시륜을 보았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 웃음은 유시리안의 것과 닮아있었다. ‘원하는……이라.’ 점차 거칠어지는 호흡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리곤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무하를 찾은 이유는 자신의 일을 수다 떨기 위해서가 아 니었다. “그보다 문제는 너희야.” “너희?” “그래. 너와 리안. 리안 놈이 말하길, 넌 사라질 생각이라는데. 어떻게 할 셈이지?” “말 그대로야.” 마음에 안 드는 답이었는지 슬쩍 인상을 찌푸린다. “말 그대로라니? 난 너에게 질문을 한 거야. 확인을 한 게 아니라고.” “말 그대로 난 페르노크에게 몸을 돌려줄 거야.” “돌려 준 다음에는? 아니, 차례대로 짚자면.” 진짜 묻고 싶었던 것은 이것인지 좀 전의 미소가 되살아났다. “돌려주기 전까지는 뭘 어쩔 건데?” “……?” “이대로 이렇게 있다가, 나를 도와준 직후에 사라지겠다는 거냐? 날 우습게 보는 건 적당해 해둬. 네 도움은 필요 없어. 네가 유예기간을 갖는데 날 끌어들이지 마.” “…….” 너무나 솔직해서 차라리 잔인하다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날 걱정해서 온 것도 있겠지.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거야. 내 상태가 안 좋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는 다면 그건 지기가 아닐 테지. 하지만 크리터에서 들은 그 예상보다는 나를 믿는 게 강하잖아? 그럼에도 굳이 깨어났고, 굳이 이곳까지 왔어. 그것도 바로 온 게 아니었지. 날짜 계산이 맞아서 그렇게 됐 다는 얕은 말은 하지 마. 엘프 녀석들은 겁쟁이이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야. 너희처럼 텔레포트로 올 가능성도 있었어. 그런데도 넌 네 형의 계승식을 보고 왔어.” 유시리안은 무하가 고집을 부리는 것에 화가 나 냉정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라이시륜은 달랐다. 두 사람 사이의 일에서는 한걸음 뒤로 물러난 관조적인 입장이었고, 또 본래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다소 횡포는 부릴지언정 무의미한 희생은 만들지 않았고, 때문에 그의 독재에 투덜대면서도 다들 따라왔 던 것이다. 단순히 강하기만 해서는 독재자가 될 수 없다. “잘 봤네.” 무하는 미소 지었다. 역시 라이시륜은 2년 전 그대로다. 조금 수척해진 것 빼고는 외양도, 타인에 관해 솔직한 성품도 여전했다. “난 욕심이 많아.” 게다가 이기적이고 비겁하기까지 했다.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그와 거래를 해야 했어.” “훼오트라 아나 말이냐?” 무하는 확고한 눈으로 고개를 끄떡여 답했다. “이미 거래는 끝냈어.” 라이시륜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침묵했을 때, 무하는 그런 그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슬픈 듯이 다정한 미소였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시륜과 율은 지기보다 더 가까운 친구로 보여.” “친구까지도 안가!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것 뿐이라고! 단순한 악연이야, 악연!” “하하하!” 버럭 성질을 내는 라이시륜을 보며 무하는 경쾌하게 웃어 재꼈다. 유시리안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똑같은 얼굴, 똑같은 어조로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아까 둘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 저렇게 서로 간에 악담을 퍼붓는데도 오랜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간에 통하는 게 있는 거라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됐어.” “다행? 이상한 어휘를 쓰는군.” 무하가 한 말이 마음에 안 드는 지 잔뜩 인상 쓰다가 스치듯 반박했다. 그것뿐인데 무하는 묘하게 굳었다. “무하?” “응? 음…….” 잠시 주저하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응. 다행이야. 적어도 나처럼……. 그녀에게 배신당했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나처럼은 되지 않을 테니까. 내가 떠난다 해도 율은 혼자가 아니니까. 누구보다도 율을 사랑하는 이카미렌님이 계시고, 또 지기보다 더 가까운 시륜도 있고, 항상 가까이에 있는 샤도, 율이 마음에 들어 하는 마르스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행이라고…….” “너는 없잖아. 믿기지는 않지만 그 놈이 사랑한다는 너는 없잖아.” 라이시륜이 말허리를 잘랐다. 무하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숨을 깊이 삼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난 돌아올 거야.” 라이시륜은 웃었다. 어떻게? 무슨 수로? 언제쯤에? 가능성은? ……하려면 할 수 있는 구차한 질문대신 그는 말했다. “그럼 어서 안심시켜줘. 그 놈 풀 죽은 꼴 보자니, 답지 않아서 닭살 돋는다.”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언젠가 유시리안이 무하를 찾아 이카미렌 산맥을 달렸을 때처럼, 이번에는 무하가 달렸다. 똑같이 숨 가쁘게,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견 딜 수 없게. 말을 걸려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오직 성벽을 향해서. 유시리안을 향해서. 계단을 오르고, 코너를 돌고, 다시 계단을 오르고, 다시 코너를 돌고……. 꼭대기에 올랐을 때, 활짝 열린 문 너머에 유시리안이 보였을 때, 무하는 울고 싶어졌다.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던가.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과 함께 그도 물들어 갔다. 아름답다. 아름다운 남자다. 언제 어디서든 한눈에 들어오는 특별 한 사람. ‘나의 율’. “율…….” 욕심이 생겨버린 것도,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어진 것도 다 저 남자 때문이다. 곁에 있고 싶어, 같이 이야기 하고 싶어, 그 온기를 느끼고 싶어, 그 내음을 맡고 싶어. 촉감, 목소리, 온기, 냄새. 그 모든 것을 손에 쥐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페르노크가 깨어나 촉감을 잃었을 때. 온기도, 내음도 맡을 수 없게 됐을 때는 음성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자신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하 루하루지만 그 목소리 하나로 버텨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욕심을 부렸다. 비겁한건 나쁜 게 아니야. 암시라도 하듯, 자기 자신에게 몇 번이고 말하면서 매달렸다. 그런데 그런 이기적인 욕심이 유시리안을 아프게 했다. 다행히 그때는 가벼운 감기로 끝났지만 깊은 공포가 가슴에 패였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으리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딛고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 다. 이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한 감각이 돌아올 리 없고,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 한 먼저 챙겨줄 수도 없다. 무력하게,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까지는 좋다. 하 지만 그 대가를 유시리안이 짊어지게 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다. 훼오트라 아나의 제안이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심 ‘페르노크’를 경멸했기에 한층 더 쏠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진실을 알고 말았고 그것을 외면할 수 없다. 그리고…… 욕심이 생겨 버렸다. “율…….” 유시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무하 쪽을 보았다. 무하는 웃었다. *** “곧 도착입니다.” 긴장에 절은 목소리가 보고해왔다. 안내를 위해 이 지역을 탐사한 자다. 그의 긴장은 곤크의 위용을 봤기에 생긴 것일까? 아니면 그랜드가 될지도 모를 자와의 반목 때문일 까? 그도 아니면 곧 있을 전투 때문일까? 서서히 퍼져나가는 저녁노을을 올려보다가 보일 듯 말 듯 인상을 찌푸렸다. 비단 저 남자뿐만 아니라 모든 엘프들이 긴장과 초조함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차분 하며 이성적이었던 그들이 그랜드가 없다는 것 하나 때문에 저리 망가졌다. 나이가 많은 엘프일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정확히는 치룬 계승의 수 만큼이라 해야겠지. 좀더 잔인하게 짚자면, 미친 정도만큼 일 테고. 미치는 것은 괴롭다. 에르니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 그도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미쳐가며 괴로움에 몸부림쳤으니까. 그러나 그 속에서 홀 로 제정신인 것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친한 이들은 하나둘씩 미쳐 죽고, 지켜야 할 것도 사라져 갔다. 「꼭 가야 하나?」 꼭 해야만 하냐는 물음. 작별 인사를 하러 온 에르니에게 서린은 염려를 담아 그리 물었다. “난 장로야. 그랜드가 없는 지금 그들을 이끌 책임이 있어.” 「내 앞에서까지 거짓말 할 필요 없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야.” 에르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아인 네 아이야. 넌 란틸이 그 아이와 함께한 시간의 배나 그 아이를 보살펴 왔어.」 “그렇게 따지면 너도 마찬가지잖아.” 「달라. 난 란틸에게 그 아이를 부탁받지는 않았어.」 에르니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뒤로 털썩 누워버렸다. 짙푸른 녹음 너머로 하늘이 비좁게 보였다. 초록 고향의 더 깊이 들어가서 나무에 기대면, 가느다란 빛의 기둥이 곳곳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것이 보인다. 그만큼 나무가 우거져 있는 것이다. 에르니 는 종종 그곳을 찾아, 나무에 기대 그 가는 빛줄기를 보았다. 그렇게 숨죽여 보고 있자면 벌레가 잎을 갉아먹는 소리, 새가 나무기둥에 집을 짓는 소리, 다람쥐가 도 토리를 땅에 숨기는 소리, 맹수의 우아한 울음소리, 이슬이 나뭇잎에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 멀리서 폭포가 내리꽂히는 소리, 덜 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곳은 에르니의 비밀기지였다. 그는 그 숲의 소리를 사랑했다. 그리고 초록 고향을 사랑했다. 친인들은 하나둘씩 미쳐서 죽어가지만 이곳만큼은 늘 변함없었다.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책임감에 얽매여 괴롭고 초조할 때면 비밀기지에 가서 언제까지고 숲의 소리에 취해 위안을 얻었다. 두 손을 뻗어, 좁은 하늘을 향해 보았다.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것 같아, 손가락을 뻣뻣하게 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쿡 웃었다. 그리고 주먹을 꾹 쥐었다. “난 장로야. 나에겐 책임이 있어.” 지키고 싶은 것은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 위로 받을 곳도 사라져 간다. 혼자가 되어 간다. 그런데도 지워야 할 책임은 늘어간다. 이끌어야 할 자들도 늘어간다. “그들에게는 그랜드가 필요해.” 하지만……. 주먹을 펴고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 손으로 지켜야 할 것이 아직은 남아 있다. 그때 작은 백사가 맹렬한 비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하하! 그랜드라고? 그랜드가 필요하단 말이지? 정말 모두가 그렇게 말한단 말이지?」 “서린…….” 「난 원래 이 시기의 엘프가 싫었어. 그런데 지금은 달라.」 “서린…….” 달래듯, 위로하듯, 말리듯 불렀으나 서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시기와 관련 없이 그들을 경멸해! 」 하늘이 새빨갛다. 에르니는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복잡하게 웃었다. 밤은 그들에게 유리하다. 인간의 시야는 밤이 되면 급격히 좁아지지만 엘프들은 낮이나 밤이 나 별 차이 없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명을 기다리는 엘프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자신만을 보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래 엘프는 개개인이 평등한 종족이었다. 뭔가 중대사를 결정할 일이 있으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상대의 의견을 듣고 충분한 토론을 걸쳐 내렸다. 한 엘프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그때의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모든 엘프들이 저주를 받고 만 것이지만……. 모든 것은 그랜드가 생기고부터 변했다. 그랜드는 미쳐가는 엘프 종족을 살렸지만, 역으로 그들을 죽여 갔다. 그것이 저주다. 배신의 대가다. “여기서 쉰다. 체력을 회복시키고, 새벽에 친다.” 그들이라고 인간과의 전투에서는 밤이 이롭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약간의 의문과 불만을 띠면서도 에르니의 명령에 따랐다. 마치 부당한 명령을 받은 기사가 주군의 명에 거슬릴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행하는 것처럼. 그것을 보며 에르니는 또 한번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애당초 자 신이 마법진을 사용하지 않고 일부러 시간이 걸리는 길을 택했을 때조차 이견 없이 받아들였던 그들이 아닌가. 어째서? 그랜드가 없어 정신이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에? 미쳐가고 있기 때문에? ……에르니도 서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경멸……. ‘나 역시 엘프야. 난 그들을 욕할 자격이 없어. 란티리네가 아니라면 나 역시 저들과 똑같았을 테니까. 똑같이 미쳐가고, 강압하고, 희생시키고, 그러다 자살했을 테니까.’ 미간을 문지르며 나무쪽으로 걸어가 기대앉았다. 저편에서 엘프들은 취향껏 야영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식사가 하고 싶은 엘프들은 장작을 줍는 둥 요리 준비를 했고, 별 생각 없는 엘프들은 건량을 꺼내 먹었다. 말을 씻기는 엘프도, 모포를 펴는 엘프도 있었다. 이렇듯 엘프들은 단체 생활이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폐 끼치지 않는 개인주의가 확실하게 뿌리박혀 있었다. 그 모양을 멍하니 보다가 배낭에서 건량을 꺼내 먹었다. 그러다 서린과 헤어진 뒤 줄곧 걸고 다니던 목걸이를 옷 안에서 끄집어냈다. 검은빛이 도는 투명한 반 지와 ‘표식’이 매달대신 걸려 있었다. 이 반지는 얼마 전까지는 완전히 투명했었는데 서서히 본래의 빛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아이가 준 반지다. 그리 고 ‘표식’. 지금은 죽고 없는, 그가 지키고 싶었던 친구가 그에게 준 것. “도대체 어쩔 생각인거죠?” 놀란 내색 없이 고개를 들어보니, 삭막한 느낌의 눈동자가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반지를 들고 있던 손을 오그려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사람 좋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인지 몰라서 되물어 보는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몰라서 묻는 거다. 뜬금없이 어쩔 생각이냐고 물으면, 뭐에 대한 건지 모르는 건 당연하지 않냐?” 짐작은 갔다. 다른 엘프들이었다면 정말 알 수 없었겠지만 지금 질문을 던진 엘프라면 대충 알 수 있었다. 에르니와 유일하게 마음이 통했던 현명한 은릴의 교육을 받은 아이니까. 과거의 은릴과 너무나 닮은 눈을 한 아이니까. 그녀의 딸이니까. 아마 텔레포트를 하지 않고 일부러 멀리 돌아온 것이나 유리한 조건인 야습을 포기 한 것이나, 둘 중 하나겠지. “당신은 그 자가 곤크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부정도, 긍정도 않고 그렇게 묻기만 했다. 하지만 아사라느는 그 질문 자체가 긍정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에르니의 기나긴 권태 를 읽었던 유일한 엘프였던 것이다. “마검을 쓰는 곤크 마스터! 그 정보를 구한 건 분명 저였죠. 하지만 그가 후계자를 대리로 보냈다는 것, 그것을 트집 잡은 귀족 때문에 락아타 내의 병력을 수습해 돌 아간 것. 단지 이 두개만을 보고 곤크 마스터가 그 자가 아닐까 추측을 한건 에르니에요. 그 후 곤크를 감시, 곤크가 계속해서 외부에 나간 병력을 불러 모은다는 것을 보고 확신한 것도 에르니에요.” 아사라느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에르니는 굳이 수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낮추라는 말을 했다가는 오히려 역시 뭔가 있군요, 소리를 지를게 뻔했 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에르니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보긴 어렵겠지요. 그러니 그 문제를 두고 더 따지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에르니는 계속해 보라는 얼굴을 했다. 느긋한 그 얼굴을 보며 아사라느는 조금 주춤했다가 발끈했다. “그런 얼굴 해도 전 속지 않아요! 어째서 마법진을 사용하지 않은 거지요? 텔레포트로 이동했다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요? 아니, 그건 그렇다 쳐요. 눈에 띄지 않 게 가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으니까요. 그럼 이카미렌 산맥을 관통하지 않고 멀리 돌아간 이유는 뭐지요?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이카미렌 산맥을 관통하는 쪽 이 더 나았을 거 에요. 안 그런가요?” 아사라느처럼 나서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의아했고, 또 불만이었던 엘프들이 이쪽에 신경을 집중하는 게 보였다. 에르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난 별로 널 속일 생각은 없단다. 이카미렌 산맥을 관통하지 않은 이유라. 모두 별 말 없기에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대다수의 엘프들이 무안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아사라느만이 차가운 눈으로 답을 독촉하고 있었다. “이카미렌 산맥의 주인, 이카미렌님은 그 아이와 알고 지내는 사이다. 때문에 이카미렌님은 엘프들을 달가워하지 않아. 평범한 집이라도 주인이 반기지 않으 면 그 애완동물들도 적대감을 보인다. 그럼 장소를 옮겨 보자. 이카미렌님이 반가지 않으면 덩달아 적대감을 보일 애완동물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몬스터다. 자. 어느 길이 더 빠르리라 보느냐?” 말문이 막힌 아사라느는 한숨을 쉬며 납득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우리에게 유리한 야습을 피하는 이유는 뭐지요?” “우리 목적이 곤크와 싸우는 것이냐?” “예?” 에르니는 이런 딱한 것이 있나, 하는 눈으로 아사라느를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얌전히 들어줄 자가 아니니까 무력을 이끌고 가지만 아쉬운 쪽은 이쪽이란 말이다. 야습해서 곤크를 몰살이라도 시킨 다음에 그 자에게 그랜드가 되라고 명령이라도 할 참이냐? 2년이나 감금한 채 협박해도 들어먹질 않았던 그 자에게?” “그건…….” “따지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생각이란 걸 좀 해 보거라.” 에르니는 딱 잘라 말하고 눈을 감았다. 쉬겠다는 뜻이자, 그만 가보라는 뜻이었다. 아사라느는 아프게 한숨쉬며 돌아섰다.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에르니는 내심 조소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과, 진실을 말하지 않는 건 다르지. 결국 말장난이란 거야. 역시 어리구나.’ 아사라느가 에르니를 상대하는 건 몇 천 년은 일렀다. 정상의 은릴이라면 모를까. 은릴의 생각을 하니 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은릴 곁에 있는 편이 낫지 않겠니? 굳이 너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 멀어지던 아사라느는 우뚝 멈춰서 침묵했다. 그러다 희미한 목소리를 냈다. “자살한 어머니 곁에 있어서 뭘 어쩌게요? 전 그를 만날 거 에요. 만나서 당신 이기심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아느냐고 말할 거예요. 그가 바로 그랜 드에 오르기만 했어도 어머니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자살하시지는…….” 말끝을 흐리며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걸어갔다. 에르니는 주먹을 폈다. ‘표식’과 반지. 에르니가 지키고 싶었던 것과 지키고 싶은 것……. 은릴 역시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 중 하나였다.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 하지만 그녀 역시 사라졌다. ‘나에게 지키고 싶은 것은 거의 다 사라졌다. 그러니까…….’ 다시 주먹을 꾹 쥐었다. ‘얼마 남지 않은 그 소중한 것을 반드시 지키고 싶다.’ * * * 곤크에 새벽이 껑충 다가왔다. 밤에 올 것이라는 적은 오지 않았다. 바싹 긴장한 채 성벽 너머를 노려보던 용병들을 부관이 보초병만 남고 다 들어가라고 직접 명을 내려 겨우 진정시켰다. 적당한 제지였다. 만약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밤새 긴장에 시달려 다들 진이 빠졌을 것이다. 라이시륜은 뭐가 바쁜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래도 성벽 위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보초병이 있었는데 유독 한 곳에만 없었다. 여기서 없었다는 것은 보초병이고, 외부인은 있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그 중 한사람 은 단원이었지만, 곧 탈퇴할 거라 하니 외부인으로 치자. 그나마 자리에 앉아있어, 밑에서 보면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보초병은 절대 그 근처 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시선도 주려 하지 않았다. 그것도 다, 아직 싸가지가 내려오지 않았다는 전 보초병으로부터의 조언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꽤 추운 날씨인데 어제 저녁부터 내려오지 않았다니 어지간하면 한번 올라가 볼만도 했지만 누구도 감히 엄두 내지 못했다. 가봐야 좋은 말을 못 듣는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니, 말로만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모두가 기피하는 그 성벽 위에, 붉은 쇼올을 함께 덮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서로에게 기대 앉아 아무 말 없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검은 두건을 한 남자는 두 눈을 감고, 닿아 있는 남자의 호흡을 느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호흡이 너무나 안심되어 잠이라도 들 듯한 나른한 기분으로. 백금발의 미남은 그런 남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반쯤 감긴 눈은 고뇌로 어두워 있었지만 어깨를 감싸주는 손만큼은 굳건했다. 성벽 밑에서 음식을 만드는 지 약간 소란스러웠다. 밝아오는 사위, 기어 올라오는 음식 냄새, 아스라한 안개……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느낄 수 있는지, 검은 두건을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지 않네? 시륜은 분명 밤에 올 거라고 했는데.” “엘프에게는 밤이 유리하니까.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시야가 같아. 뭐, 그것까지 계산에 넣어서 이쪽 진을 빼게 하려는 작전 일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밤을 노리는 편이 더 나을 텐데, 유시리안은 굳이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랜드가 없는 지금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자는 분명 장로인 에르니일 것이다. 그자 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는 걸 포기한지 오래다. 알 수 없는 깊은 눈을 한 엘프. 느긋한 웃음을 짓고 있는 데도 초조해 보이고, 능청스런 얼굴을 하는 데도 차 가워 보였던 남자. 그런데도 라이시륜을 볼 때면 마치 이카미렌이 유시리안을 볼 때처럼 관대하고 자상했다. 때문에 반항할 기분을 사라지게 만들었었다. 유시리안 은 이카미렌에게만큼은 약했으니까. 그런 에르니가 라이시륜을 몰아세운다니. 아무리 일족을 이끌어야 하는 장로로서의 책임이 있다지만 유시리안이 아는 그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늙은이.’ 정말 라이시륜을 그랜드로 세우려는 걸까? 그랜드로서 죽은 자신의 친구에게 분노마저 보이던 그가? “오늘 밤에 올까?” 눈을 감은 채 무하가 물었다. 그러길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좀더 유시리안과 있고 싶으니까.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 전에 이별이 있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 무하는 자신의 생각보다도, 또 유시리안의 예상보다도, 라이시륜의 확신보다도 유시리안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새삼 발견했다. “글쎄…….” 유시리안도 어깨를 풀지 않은 채 답했다. 아니, 더욱 굳게 잡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었다. 조금만 더……. 그때였다. 둘의 바람을 비웃듯 성벽이 흔들릴 듯한 굉음이 울렸다. 둘은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굉음은 계속해서 터졌다. 붉고 푸른 마법 결정체가 무수히 날라 와 박혀댔다. 결정체가 부딪칠 때마다 반투명한 푸른 막이 보였다. 방어 마법진이 가동한 것이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리긴 했지만 유시리안은 어렵지 않게 저 멀리 정립해 있는 군단을 발견했다. 한눈에 수를 파악할 수 없는 대군이었다. “전투가 가능한 놈을 죄다 끌고 왔나?!” 엘프들은 그다지 수가 많지 않았다. ‘결계’내에 들어온 엘프 마을이 겨우 두개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랜드’라는 존재에 연명하는 처지가 된 순간부터 엘 프들은 자식을 한 둘 정도밖에 낳지 않게 됐다. 수 천 년 동안 겨우 말이다. 쳇!” 엘프 중에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런데다 에르니가 전투 가능한 엘프만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여기의 엘프들은 전원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런 그 들이 일제히 파이어볼, 워터볼, 라이팅 따위의 마법을 시전 해됐으니 그 기세가 어지간한 고 써클 마법보다 더 했다. 비록 곤크에 구축된 방어진이 제 역할을 해 굉음 외에는 별 영향이 없다지만 무수히 많은 마법 결정체가 날아오는 모습은 충분히 섬뜩했다. 이대로라면 당하는 쪽의 사기 문제가 크다. 지금은 성벽 위에 있는 자의 수가 얼마 않지만 곧 이 굉음에 다들 뛰쳐나올게 아닌가. ‘저 정도 마법으로는 효과가 없다는 걸 알면서 저러고 있는 이유가 이건가?!’ 유시리안은 혀를 찼다. 그 옆에서 무하가 딱딱하게 굳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 장관 때문에 기가 꺾기기라도 한 것일까? 난간에 얹은 무하의 두 손이 약하게 떨렸다. 그것을 본 유시리안은 물었다. “무서워?” “……응.” 무하는 자신의 공포를 순순히 인정했다. 어색하게 웃다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전에는 공포보다는…… 이질감을 느꼈어. 현실에서 동떨어진 느낌. 혼자 겉도는 느낌. 확신할 수 없었어.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죽어서 꾸는 꿈에 불과한지.” 몬스터 사태 때에도, 락아타와의 전쟁 때에도. 죽음, 부상, 비명, 울음, 고함, 신음, 공포, 고통, 절망……. 모든 것이 격렬하게 아우성치는 그 속에서 무하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질감. 마치 물 위를 떠도는 한 방울의 기름처럼. 과연 이 속에 나는 존재하는 가? 과연 나는 살아 있는가? 그 해답을 얻을 곳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있기만 했다. “죽어서 꾸는 꿈이라고?” 유시리안은 불쾌한 낯으로 반문했다. “그럼 나와 너의 만남도, 이별도, 약속도 깨면 그만인 그런 꿈이냐?” “……!” 흠칫한 무하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단정 지었다. 단정이라기보다는 확신, 혹은 억지에 가까웠지만. “현실이다. 꿈이어도 현실이야. 현실이어야 해.” “후후.” 실소하며 유시리안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 현실이야. 나는 그것을 휴로버 신관과 파크다 선배, 그리고 소울러의 시신을 보며 깨달았지. 내 가까운 사람이 언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죽을지 알 수 없는 현실. 그래서 지금 두려워.” “죽는 게 두려운 거야?” 무하는 복잡한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뭐가 두려운 건지는 잘 모르겠어. 내가 죽는 것인지. 누군가를 죽이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친인들이 죽는 것인지.” “난 안 죽어. 내가 안 죽는 만큼 시륜도 안 죽어. 이카는 더더욱 안 죽어. 요크노민이나 테밀시아는 이곳에 없어.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 전투 때문에 죽지는 않겠지.” 뭘 의미하는지 모를 말을 툭 내던진 유시리안은 소란스러워진 성벽 밑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무하가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따랐다. 성벽 밑에서 세 남자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관록이 넘쳐 보이는 남자와 화사한 금발을 가진 남자, 사람 좋아 보이는 검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 다. 앞의 두 남자는 달려오면서도 주위에 차근차근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보통 화살은 소용없다. 적은 정령의 호위를 받을게 뻔하다. 이쪽도 정령사가 지원하라!” “적은 하위급밖에 못 쓴다. 서열급 정령사는 성벽으로, 하위 정령사는 궁수를 보조하라!” “마법사는 방어 마법진을 수호하라! 절대 망가지게 해서는 안 된다!” “수비전이다! 무리하게 공격은 하지 마라! 방어에 충실해라!” 곤크의 목적, 혹은 역할은 어디까지나 라이시륜이 봉인구를 떼어내는 날까지의 방어전이었다. 라이시륜은 곤크에게 엘프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시간 벌이만으로 족했다. 그 후에 단신으로 끝을 낼 작정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다. 왜 엘프와 이런 다툼을 하게 됐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 들과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끝내겠다는 마스터의 의지를 굳이 반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마스터는 신이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광신도였다. 광신도는 신의 의지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때문에 곤크는 처음부터 방어에 치중했다. 곤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요새이자 영지였다. 본래부터 성벽이 몇 겹으로 튼튼히 서 있었고, 방어 마법진 도 견고했다. 식량과 물 역시 내부에서 얼마든지 조달 가능했다. 무기 생산도 자체 내에서 해결해왔으니, 수비도 문제없었다. 화살이나 투석용 바위도 얼 마든지 있었다. 대 용병단답게 인재 역시 훌륭하게 갖추고 있었다. 마법사, 정령사, 전사, 검사, 궁수 등등. 수비를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장기전으로 끌고 갈 저 력이 있었다. 성벽 위로 올라온 부관과 딜린, 록은 이미 보고받긴 했지만, 자신의 육안으로 적의 수를 가늠해 보고 혀를 찼다. 유시리안과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초목의 엘프는 전부 끌고 왔군. 본래라면 한방에 열댓 명은 즉사할 위력의 마법이 쉴 새 없이 날아와 박히는 그 장관에 딜린은 기가 죽기에 앞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역시나 어지간한 곤크 용병들도 질렸는지 주춤거리고 있었다. “방어진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공을 마법사에게 돌릴 작정이라면 말리지 않을 테니 내려가라.” 그 말에 오기가 생겼는지 하나 둘씩 제 자리를 찾아 섰다. 부관은 흡족한 눈으로 딜린은 보다가 다시 엘프 쪽을 살폈다. “야습은 포기 한 건가. 노리는 게 이쪽의 전멸이 아닌 건 분명하군.” “저들도 마스터의 성격을 잘 알 테죠. 곤크의 희생이 크면 클수록, 마스터는 저들의 뜻에 반박할 겁니다.” 딜린은 엘프를 살피는 대신 성벽 위, 아래의 전열을 살피며 답했다. 그러다 묘하게 사람이 없는 구석진 곳을 발견하고 미간을 모았다. 이어 집중하여 그곳을 보 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저 자가 저기 있다면, 저곳에 사람이 없는 거야 당연하다고 봐야겠지. “유시리안 씨! 구경하러 오셨으면 꼭대기에라도 올라가 계십시오. 방어벽이 비지 않습니까?!” “난 구경하러 왔지만 펠은 아니거든.” 유시리안은 얄밉게 웃었다. “그럼 무하 씨. 그쪽 방어를 맡아 주십시오. 혼자서 무리라면 주위에 지원을 청하시고요.” 딜린은 확실히 라이시륜과 부관의 교육을 받아온 남자다웠다. 무하의 주위라고 해봐야 유시리안밖에 더 있는가. 구경꾼을 자처한 그를 뻔뻔하게 끌어들인 것이다. 무하는 쿡쿡 웃으며 답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구경 오신 유시리안 씨는 원하는 장소에서 실컷 구경하십시오.” 마무리 지은 딜린은 화사하게 한번 웃어주었다. 유시리안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이런 상황에 무하를 혼자 둘 리 없지 않은가. 가서 한대 패줄 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녀석의 보모 라이시륜이 지척에 있는 관계로, 또 무하가 옆에 있는 관계로 빈정거리는 선에서 끝냈다. “시륜이 애 교육을 꼭 저같이 시켰군.” “과찬이십니다. 전 아직 멀었어요.” 딜린이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유시리안은 이해할 수 없는 종자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로서는 죽어다 깨어나도 모를 심보였다. 유시리안과 무하에게 한 구역을 떠넘긴 딜린은 부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부관은 웃느라 바빴다. “마스터께 보고를 드릴까요?” “그래. 그 분도 아셔야지.” 뜻밖의 방문자 덕분에 기껏 모은 체력의 태반을 다 써버린 라이시륜은 저녁부터 밤새 공간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입대지 않던 스테미너 포션까지 한 병 비우고는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그 집중력을 깨뜨리기는 싫으나 알 것은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이곳은 내가 지킬 테니, 네가 가 보거라.” “그러나 저들이 곧장 육박전을 강행한다면…….” 딜린은 아홉밖에 없는 카 등급 전사였다. 그것은 궁수 한 두 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부관은 여유 있는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지휘 할 수 있는 사람이 남는 게 좋아. 또 저들이 곧장 육박전을 할 거라고 보지도 않는다.” “죄송합니다.” 순순히 사과하는 딜린에게 록이 든든하게 자신의 가슴을 쳐보였다. “여긴 부관님과 나에게 맡겨두고 얼른 갔다 오라고. 저들이 하는 꼴을 보니 마법 공격이 좀더 계속될 모양이니까.” “흐음…….” 그 말에 엘프들 쪽 동향을 살피던 딜린은 록이 질색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선 록은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물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거냐?!” “뒤는 내가 맡겠어, 당신이라도 살아! 나 믿지? ……로맨스 소설 같잖아.” 두 손을 모아 쥐고 꿈꾸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딜린에게 록은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그럴 때냐! 이 바보 녀석! 때와 장소를 가리란 말이야!”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에 뵈는 건 없는 법! 뜨거운 사랑에 장애란 무용지물!” 두 뺨을 감싸고 수줍게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 젓기까지 했다. 록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가! 가버려!” “그럼 갔다 올게, 허니. 바람피우지 말고.” 크아악, 비명 지르는 록을 뒤로 하고 딜린은 쾌활하게 웃으며 성벽 난간 위로 홀짝 뛰어 올랐다. 그리고 곧장 밑으로 뛰어 내렸다. 실컷 놀리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계단을 이용할 여유조차 없었다. 고함을 지르다 진이 빠져버린 록은 난간에 기대서 딜린이 라인을 향해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이대로 당하고 살 수만은 없어. 없다고! 크윽!” 그래봐야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옆에서 부관이 배를 움켜쥔 채 대소하고 있었다. 그리곤 눈물까지 훔치며 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포기하게. 마스터와 내 밑에서 큰 애야.” “마스터와 부관님도 변태십니까?” “설마! 하하하!” 록의 진지하고도 원망서린 눈동자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며 록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그저 놀려 먹길 좋아하는 것뿐이야.” “…….” 순간 록은 납득하고야 말았다. 아아, 이 사람 밑에서 크면 인간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구나. 한숨을 쉬는 록에게서 등을 돌린 부관은 다시 저편 난관 쪽으로 걸어가 적을 살폈다. 그라고 수백, 수 천 개의 마법 결정체가 날라 오는 광경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 니었지만 봐야만 했다. 긴장 때문에 무의식중에 검 자루를 쥐긴 했지만 표정만큼은 태연하게 저 광경을 봐야만 했다. 평소라면 질색이었을 굉음이 지금은 반갑기만 했다. 자신들의 수명이 늘어나는 소리였으니까. 엘프들이 마법을 구사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선전포고 한마디 없이, 마구 퍼부어 댈 줄은 몰랐다. 방어막을 보강하는 게 늦었다면 벌써 깨져버렸을 정도로 강공이었다. ‘초대 곤크 마스터에게 감사해야겠군.’ 한편 부관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용병들이 록에게 슬쩍 접근했다. 평소에는 파트너인 딜린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영양가 없는 농담이나 한두 마디 주고받 는 게 전부였지만, 록은 현재 곤크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록은 성격도 호감을 살만한 건실한 타입인데다, 실력도 한번에 파 등급이 될 정도 상당했다. 무하처럼 들어오자마자 카 등급이 된 케이스도 있긴 하 지만 그 경우에는 아예 딴 세상이야기라, 오히려 그 실력이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파 등급 정도라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범주였다. 이처럼 그 자 체도 주목 받을만한 존재인데, 하물며 현 마스터의 후계자인 딜린의 파트너이자 매우 가까운 사이로 보였으니 그 주목도가 껑충 뛰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딜린과는 전부터 알고 지내왔나 봅니다.” “예? 아아. 몇 년 정도 알고 지냈죠. 저 녀석, 여기서 자랐다면서요? 저보다야 원래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더 오래 알고 지냈겠네요? 저 녀석 어려서부터 저랬습니까?” 실제로 묻고 싶은 것은, 자기 말고도 딜린이 놀려 먹는 존재가 있느냐는 거였지만 자존심상 입에 낼 수는 없었다. 질문을 들은 용병은 모호한 웃음을 흘렸다. “뭐……. 그런 편이죠.” “어쩐지 다른 사람들은 익숙해 보인다 했습니다. 다들 속도 좋으십니다.” “저희 쪽에서 보면 록 씨 반응이 신선합니다. 딜린 녀석 농담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 다들 그러려니 하거든요. 개중에는 진담인줄 알고 남색이 동해 달려드는 녀석들도 있지만…….” “박살났겠군요.” 록은 그 꼴이 보이는 양 몸서리를 치기까지 했다. 말을 꺼냈던 용병은 또 다시 모호한 웃음을 흘렸다. “제가 있었던 곳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여자도 아닌 사내 녀석이 그런 말 한두 마디 했다고 달려드는 멍청이들이야 그리 되도 싸지만 말입니다.” “하하…….” 정말 신선하군, 용병을 비롯한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주변 사람들의 뇌리를 스쳐간 생각이었다. 등 뒤에서 벌어진 그 촌극을 간파한 부관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록이 온 뒤로 딜린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많이 완화되어가고 있었다. 딜린의 농담을 천박한 수작이라 치부하던 자들이 단순한 농담으로 반응하는 록은 보 며 신선함과 더불어 자신들의 과민반응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반성까지는 아니고, 그저 인식 수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딜린을 향한 적의는 상당히 수그러들었 다. 라이시륜의 호의를 받은 것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적의이니만큼 딜린에 대해서는 내심 인정하고 있던 상태라 더 그러했다. 또한 라이시륜이나, 부관 앞에서 나 보였던 미소가 록 덕분에 밖에서도 자주 내보인 탓도 있었다. 자신도 그 미소를 받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무의식중에 생겨버린 것이다. 그만큼 가식적인 미소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미소의 차이는 컸다. 딜린이야 주위가 어찌 돌아가든 별 상관 안했지만 부관은 무척 안심되었다. 역마살이 낀 라이시륜이 일년 중 대부분을 길거리에서 허비할 때면 보살펴왔던 녀석이라, 아 들처럼 여겨왔던 것이다. ‘나나 마스터가 언제까지 곁에 있을 수 없으니까…….’ 한때 상념에 젖어 들었던 부관을 비웃기라도 하듯, 엘프부대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부관은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라이시륜이다. 그것도 목숨이 아닌 그 자체를 원하고 있다. 그 이유는 황당하게도 자신들의 그랜드로, 인간의 이념을 적용하자면 왕으로 모시기 위해서란다. 그러니 육박전은 피할 거라 생각했는데……!? “제길! 화살부대에게 신호를!” 곤크 내에 설비되어 있는 방어 마법진은 물리적 공격과 마법 공격을 커버해 주는 고난위도 마법진이다. 하지만 외부의 침입을 막는 성능은 없다. 애당초 그런 마법진 은 제 2기 마도때 소실됐지만 말이다. 엘프들이 방어막 안으로 들어오면 곤란하다. 안으로 들어와 좀 전에 퍼부었던 수의 마법을 쏘아댄다면 아무리 곤크라 해도 금방 쑥대밭이 되어버릴 게 뻔했다. 아니, 그 정도의 수도 필요 없다. 그 반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절대 저지시켜라!” 명을 내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이목을 다 집중시킨 이 마당에 접근을 하는 것 일가? 처음부터 기척을 숨기고 접근했다면 이렇게 대처하지는 못했을 텐데. ‘도대체 저들의 우두머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자신들을 전멸시킬 참인가?’ 부관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중대규모의 부대를 필요로 하는 의뢰를 도맡다시피 맡아서 했었다. 그때마다 언제나 적의 피해는 최대로, 아군의 피해는 최소로 하는 작전을 짰고, 그대로 행했다. 때문에 저들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머리를 굴린 부관은 옆에 서서 검 자루를 잡고 호흡을 고르고 있는 록을 불렀다. “라인으로 가서, 딜린을 기다려. 녀석이 나오면 현 상황을 말해서 마스터에게 보고하게 해라. 라인은 문이 하나고 최단거리로 가면 엇갈릴 일은 없을 거다. 길은 알겠지?” 록은 딜린처럼 난간 위로 뛰어 올라, 그대로 내려가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레타에서 때로는 도둑으로, 때로는 암살자로 활약했던 그에게 내부 지리를 외우는 것 쯤은 일도 아니었다. 또 위급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이럴 때는 망설이는 게 아니다. 답할 필요도 없다. 오직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목을 모은 건가?” 유시리안이 나직이 말했다. 옆에서 의아한 눈으로 무하가 물었다. “어째서? 저쪽 피해가 더 커질 거 아냐?” “저쪽 우두머리 녀석의 생각은 알 수가 없어. 그러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 현상만 가지고 파악하는 편이 낫지. 쓸데없이 마법을 퍼붓고, 이쪽이 모든 대책 이 마련된 뒤에 접근전이라니. 보통은 반대잖아? 그러니 우두머리의 의도도 보통과 반대로 생각해보면 답은 그거야.” “어째서…….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피해가 더 크잖아. 그러지 않아도 곤크는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유시리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어이없어 하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곤크는 처음부터 수비전을 준비했어. 저들도 곤크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지. 둘의 목표가 전투가 아니기 때문에……. 한쪽은 시간 끌기, 한쪽은……. 젠장!” 미간을 문지르며 누구에게인지 모를 욕을 낮게 내뱉다가 고개를 들었다. “내 일에 정신이 팔려서 절호의 기회를 놓쳤군.” “절호의 기회?” “놈의 약점을 잡을 기회! 두고두고 놀려먹을 거리를 놓치고 말았어!” 농담을 하는 건지, 장난을 하는 건지, 무하는 의심스런 눈으로 유시리안을 보았다. 농담으로 보기에는 진심이 깃들여 있고 장난이라 보기에는 한없이 진지했다. 때문 에 더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곤크가 왜 시간 끌려고 하는지를 간과했어. 시륜 녀석, 역시 어디가 안 좋은 거야! 엘프들은 곤크와 정면전을 펼치는 것보다 시륜이 회복되는 쪽이 더 손해라고 판단한거고. 이런 좋은 먹이를 놓치다니. 어지간히 초조했었나 보군, 나도.”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 유시리안을 보며 무하는 더더욱 알 수 없어졌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유시리안이 전혀, 티끌만큼도 라이시륜 을 걱정하지 않는 다는 것. 그만큼 그를 믿는 다는 것. 물론 그것을 말했다가는 아니라며 펄쩍 뛸 테지만. “그런데 이목은 왜 집중시키려고 한거지? 그게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기습하면 곤크의 피해가 절대적으로 커지니까. 또 이렇게 이목을 집중시킨 상태에서, 그러니까 뻔히 불리해진 상태에서 접근을 해오면 아무리 멍청이라 도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나 생각할 거 아냐? 그러니까…….” 유시리안은 밑을 손가락질했다. “저런 일도 가능해지지.” 대부분의 일반적인 화살 거리의 직전에 멈춰 섰다. 그리고 단 둘의 엘프만이 앞서 걸어 나왔다.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정령사를 응용하여 쏠 수 있음에도 불구하 고 다들 숨을 낮추고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다른 엘프들과는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남성 엘프가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성문 앞, 그러나 성벽 위에 있는 자들이 그를 보기 위해 굳이 허리를 꺾지 않아도 되 는 곳까지 걸어왔다. 그 몇 걸음 뒤로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뒤집어 쓴 또 다른 엘프가 따라왔다. 유시리안은 신음처럼 한 단어를 흘렸다. “에르니…….” 마치 그 소리를 들은 양, 에르니는 정확히 유시리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들과는 달리 산뜻한 커트를 한 그 엘프 는 온 몸에서 강인함과 당당함이 뿜어지고 있었다. 전투를 시작했음에도 어딘지 의기소침한 분위기의 엘프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적으로 마주 선 곤크 용병들 처럼 투기나 살기가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 살기가 없는 것은 그가 ‘열어 놓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겠지만 투기조차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능청스러워 보이는 얼 굴에는 마치 친구에게 차라도 얻어 마시러 온 듯한 느긋함이 흐르고 있었다. 전투를 위해 달려 나온 용병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주목하는 것을 확인한 에르니는 손주를 대하듯 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운을 떼었다. “우리는 그대들과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러면서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용병들의 시야에서는 그 양팔 너머의 수많은 엘프들이 보였다. “아까는 거리가 멀어 위력이 반감됐지만, 지금 이 거리에서 똑같이 마법을 쓰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견고한 마법진이라도 4써클의 공격 마법 세례를 근거리에서 받고 유지될 수는 없어. 그대들에게 있는 마법사가 우리의 수보다 많다면 모를까.” 그러며 참으로 에르니답지만, 엘프답지는 않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얄밉고 능글맞은 미소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대들이 우리가 이곳까지 접근하게 내버려두었기에 충분히 가능하게 되었다.” 그 말에 발끈한 한 궁수가 멋대로 활을 쏘았다. 부관이 잠시 기다리라는 명을 내려 여태 참았지만 자신들을 비웃는 건방진 자를 내버려 두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가 너무 높았다. 게다가 바로 옆에서 정령사가 보조를 해주는데 무엇이 무서울까. -피잉! 정확히 에르니의 미간을 노리고 날라 간 화살은, 목표지점에 다다가면서 눈에 띄게 속도가 줄더니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궁수를 보조하던 정령사가 낮게 신음했다. “정령……!” 정령사는 아니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부관도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았다. “어떻게?! 지금 엘프들은 서열 급 정령을 못 부를 텐데!?” 그랜드가 없는 엘프는 힘이 많이 반감된다. 타고난 육체적 힘은 그렇다 쳐도 정신이 치중하는 바가 큰 마법이나 정령 소환, 검기 등은 그랜드가 있을 때의 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원인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방금 저 엘프를 보호한 것은 서열 급 정령이었다. 같은 하위급끼리는 힘이 상충되어 그 가호가 소멸한다. 그러니까 상대가 하위급 정령을 소환하여 자신을 보 호했다면, 방금 던진 화살은 정령의 가호를 잃어 다소 속도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계속 전진해서 목표에 꽂혔어야 했다. 또 상대가 마법으로 방어막을 쳤다면, 화살과 막이 부딪치는 곳에 막의 형상이 드러났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령의 보조는 물론 화살의 위력까지도 저지한 것이다. 이는 서열 급 정령의 작용이 분명하다. 부관은 내심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태연히 말했다. “서열 급 정령을 부릴 줄 안다고 곤크를 얕보는 거요? 내 보기에 서열 급 정령을 부릴 수 있는 건 당신 하나뿐인 것 같군. 그러나 우리에게는 서열 급 정령사가 많소. 당신에게만 공격을 집중하여 처리한 뒤, 다른 엘프들은 천천히 요리 할 수 있다 이거요. 허튼 수작 마시오.” 도발적인 말에 뒤에 서 있던 엘프들이 파르륵 떨었다. 물론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분노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르니는 느긋한 얼굴 그대로 웃기만 했다. “그랜드가 없다 하여 우리를 너무 얕보는군요!” 에르니의 뒤에서 아직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났다. 온 몸을 덮는 긴 로브를 입은 채 에르니의 뒤를 따랐던 그 자에게서 난 소리였다. 에르니는 네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듯, 혹은 민감하게 반응 할 일이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짓하여 말렸다. 그것을 본 부관은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저 로브의 여자나, 뒤에 서 있는 엘프들처럼 제대로 된 반응을 보여주는 쪽이 다루기 쉬웠던 것이다. 그런 부관의 속내를 안다는 듯 에르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보았다. 부관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물었다. “피차 서로를 위한 전투준비를 해왔소. 이제와 무슨 할 말이 있어 질질 끄는 게요?” “피차? 이제와? 그대들은 우리와 싸워야 하는 이유를 알고나 있는가?” 모르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어조였다. 실제로 절대다수의 용병들은 몰랐다. 부관은 용병들이 동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빠르게 답했다. “모르오. 또 알 필요도 없소. 당신들이 마스터의 적이라는 것으로 충분하오.” 마스터가 언급되자 잠시 흔들렸던 용병들의 눈에서 혼란이 사라졌다. 대신 흥분과 투지, 그리고 살기로 들끓었다. 적을 동요시키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는지 에르니는 그런 모습에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흡족해 하는 얼굴이었다. “충직하군. 그럼 내가 할 말을 하지.” 에르니는 처음 말을 시작했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는 얼굴,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대들의 마스터와 단판을 짓길 원한다. 그대들의 마스터, 라이시륜에게 전하라.” “거절하겠소!” 본래 부관에게는 마스터를 청하는 ‘손님’을 구분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마스터에게 전하고 난 뒤에 싸워도 싸우는 것이 법도였다. 그러나 부관은 라이시륜의 현 재 상태를 알고 있으며, 저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다소 예의에 어긋나더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에르니는 미소 지으며 손을 내렸다. “그럼 이쪽에서 불러들여야겠군.” 그 말이 신호인 듯 엘프들이 움직였다. 전방에 있는 엘프들은 정령을 소환하기 시작했고, 후방에 있는 엘프들은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전방은 둘로 나 뉘어 곤크의 궁수의 화살을 감싼 정령의 가호를 상쇄시키는 역할과 가호를 잃은 화살을 막는 역할을 각기 맡았다. 후방도 둘로 나뉘어 성문에 집중된 공격 마법과 적의 마법을 막을 방어 마법을 맡았다. 이것은 엘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아니었다. 그들이 활을 잡는 다면 지금 이 거리보다 훨씬 떨어져서도 얼마든지 유리하게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특수한 사정에 의해 곤크, 즉 적의 피해를 최소로 해야만 했기에 이런 미지근한 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미지근하다는 기준은 엘프의 기준일 뿐, 곤크 입장에서는 상당히 버거웠지만 말이다. 정령 소환도, 마법 시전도 하지 않고 성벽을 올려보던 에르니는 상황에 맞지 않게 자신의 가슴을 내려보았다. 옷 위로 다소 거추장스럽게 흔들거리는 목걸이를 한 번 어루만졌다. 그가 지키고자 했었던,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이 안에 있다. 뒤에서 로브의 엘프가 낮게 물어왔다.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게다가 어떻게 서열급 정령을 소환하신 거죠? 아무리 에르니가 장로라 해도 그건 불가능…….” “얽매이지 마라, 아사라느.” 에르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씁쓸함과 냉기가 뒤섞인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미칠 대로 미쳐 자살해 버렸다지만 한때 초목의 엘프 중에서도 가장 총명하고 현명하다 칭송받던 은릴의 하나뿐인 딸. 오랜 친구의 하나뿐인 자식. 어찌 귀엽지 않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만큼은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자로서 이런 말 밖에 해줄 수 없었다. “현상에 얽매이지 마라. 공포에 얽매이지 마라. 그러면 그 답이 나올 거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토록 총명하던 은릴마저 얽매이고, 결국 굴복했던 공포가 아니던가. 에르니는 재차 포기함으로서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아사라느. 녀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왔다고 했었지? 말릴 생각은 없으니 네 뜻대로 하려무나.” 나직이 말한 에르니는 그대로 날아오르더니 성벽의 난간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오른 손을 왼쪽 손목에 얹었다. 정확히는 손목에 낀 두꺼운 금속 팔찌의 호박색 보석에. 찰나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그는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내 뜻대로 할 테니.” 왼쪽 손목과 그것을 쥐고 있는 오른 손. 그 두 손을 중심으로 검보라색 이물질이 에르니의 몸을 덮었다. 마치 걸쭉한 반죽처럼 일렁이며 온 몸을 감싼 그것은 에르니의 이마에서 타원형으로 벌어졌다. 그 안에 호박색 보석이 솟아나더니, 그것을 중심으로 이물질이 응고되기 시작했다. 그 형태는 갑옷과 흡사했다. 말로 늘여 놓으면 길지만 실제로는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험이 풍부한 곤크 용병들도 미처 대응을 못할 때 저쪽에서 부관이 칼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다른 용병들도 거의 본능적으로 침입자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카앙! 이물질 안에 박힐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금속이 부딪치는 히스테리한 마찰음이 울렸다. 그것을 듣고 빠르게 판단한 부관은 보석 밑, 이물질이 덮이지 않은 에르니의 눈 부분을 찔렀다. 다른 것은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던 에르니가 이번만은 손목을 들어 막고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에도 응고를 계속하던 이물질이 곧 완벽하게 굳었다. 그것은 이제 고상한 은색 광택을 내는 맑은 보랏빛 갑옷이었다. 에르니의 움직임에 따라 마찰음조차 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것은 마치 에르니라는 존재만을 위해 만든 맞춤옷처럼 느껴졌다. “마, 말도 안돼!” 눈으로 에르니를 쫓던 로브의 엘프가 밑에서 경악성을 질렀다. 그녀뿐만 아니라 전투 준비를 하던 모든 엘프들이 술렁이는 기색이었다. “그랜밀라 나이트!” 곤크의 용병들은 그 술렁임까지는 알아차렸지만 그들이 무심코 흘린 단어는 주어 담지 못했다. 만약 그 단어를 알아들었다면 곤크에서도 상당한 술렁임이 번졌을 것이다. 그랜밀라 나이트. 그것은 인간의 세계관에 대입해서 해석하자면 황제 친위기사, 즉 근위 기사를 말함이었다. 그것은 대부분 그림자의 엘프에서 배출 됐고 초목의 엘프 중에는 현재 한명만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대 황제 이므르의 일화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기사지만 아쉽게도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니 만약 용병들이 그 단어를 주어 들었다면 옛날이야기의 등장인물로 알고 있던 그 엘프 기사가 거론되어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엘프들 입장에는 달랐다. 그들은 당연히 에르니가 그랜밀라 나이트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워진 영광, 제 1기 마도 때 위대한 왕에게 하사받은 단 다섯 벌의 갑옷을 소유하는 자.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하며 가장 오래된 자, 에르니는 초목의 엘프의 자랑이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그랜드가 없는 지금, 에르니가 갑옷을 발동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랜드가 없는 엘프는 서열급 정령을 소환하지 못하는 것처럼, 고위 마법을 시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영광의 갑옷 역시 발동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견이 필요 없는 당연한 이치이며, 진실이다. 그런데 지금 에르니가 갑옷을 발동시켰다!? 어떻게!? 밑에서 경악해 하거나 말거나, 성벽 위에서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에르니는 이물질이 완벽하게 굳자 부관을 크게 떨치며 서너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이마에 박힌 보석에 검지를 댔다가 그대로 허공을 크게 내리 그었다. 호박색 호선이 허공을 맴돌다 부풀더니 날이 완만하게 휜 도를 형성했다. 생김은 시미터와 비슷하나 그보다는 폭이 넓었고, 두께는 두꺼웠으며, 가드가 없고 그립은 양손용으로 화려한 호박색 금속이었다. -캉! 짧고 맑게 느껴지는 마찰음이 울렸다. 부관과 에르니의 칼이 부딪친 소리였다. 부관은 에르니에게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지시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자는 내가 상대한다. 제자리를 지켜라! 궁수와 정령사는 활을! 마법사는 방어진을!” 명을 내리면서도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윗줄이라는 것을 알고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상대가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면 사망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한 부상 한 두개는 벌써 입었을 것이다. “그대는 내 적수가 못 된다.” 에르니의 황금색 고양이 눈동자가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냈다. 부관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를 죽이지는 못하지 않소? 반면에 나는 그대를 죽여도 아무 거리낌이 없소. 그 차는 크오.” “실력의 차만큼 크지는 못하다.” “그럴지도 모르지.”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지만 부관은 선뜻 인정했다. 마스터를 대할 때처럼 까마득히 멀게 느껴져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숨이 보장된 이상 나는 당신을 막을 거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거든.” 망할 수전노라는 명예로운 호칭이 달린 사람다운 말이었다. 에르니는 소문 그대로의 모습에 왠지 유쾌해졌다. 부관은 자신이 시간을 버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에르니의 계산대로라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접근했다. 이 의아한 현상을 마스터에게 보고하지 않았을 리 없다. 에르니는 라이시륜의 성격을 그 본인보다도 잘 알았다. 자신과 곤크를 얕봤다고 생각할 테지. 자존심과 오기로 똘똘 뭉친 그가 이 소식에 뛰쳐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직접 봉인구를 박아 넣은 에르니가 온 이상 분명 나올 것이다. 그런 종류의 봉인구는 그 당사자가 죽으면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그 종류의 봉인구를 박은 의미가 없다. ‘몰아 세워주지. 엘프 따위 죽는 것보다 싫다고 여기게 해주겠어.’ 마법 공격?” “예.” 마법진 위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던 라이시륜은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야습을 하지 않은 것부터가 이상하지만 마법이라니? “곤크의 방어진 위력을 뻔히 알면서 왜……?” 보통 성이었다면 이 마법 공격이 충분히 기습적 위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곤크는 욤의 수도만큼이나 방어진이 견고하게 갖춰있는 요새가 아니던가. 굳이 알리지도, 숨기지도 않았지만 모두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닌가. 그것을 에르니가 모를 리 없다. “더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부관께서는 육박전은 없을 것이라 예측하셨습니다. 그러니 마스터께서는 계획대로 회복에 전념하십시오.” 의아함이 앞서긴 했지만 라이시륜은 자신을 억눌렀다. “그래. 부관 옆에서 그를 도와라.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라 꽤나 무뎌졌을 테니.” “그건 마스터 시야에서 그런 거고요. 전 여태까지 한번도 부관을 이겨본 적이 없는 걸요.” 신뢰에서 비롯된 여유를 보이며 딜린은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홀로 남은 라이시륜은 어둠 속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한번 집중이 깨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도 있겠지.’ 무심코 쇄골을 어루만지다 고소했다. 아버지가 죽은 날, 라이시륜이 혼자가 된 날 처음 그들의 첸에 찾아온 이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엘프 여자였다. 아버지의 친구라며 종종 찾아오곤 했던 여자라는 것까진 기억나지만 그것도 후에 생각해낸 거고 당시에는 누가 왔다는 것만 인식하는 수준이었다. 예정된 죽음이었지만 괴로움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하고 왔는지 여자는 침착하게 사자(死者)에 대한 예우를 갖춘 뒤, 라이시륜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본래 라이시륜을 꺼려했던 여자는 더 말을 걸지 않고 나가버렸다. 혼자다. 그가 사랑했고, 그를 사랑해 주었던 아버지가 떠났다. 그가 믿었고, 그를 믿어주었던 아버지가 떠났다. 이제 혼자다. 혼자가 되어 버렸다. 점점 식어가는, 점점 굳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으며 혼자가 되었음을 느꼈다. 두 번째로 찾아온 이는 다수의 엘프들이었다. 그들은 멍하니 앉아 있는 라이시륜을 거들떠도 안보고 사자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그리고 라이시륜에게서 아버지를 떼어냈다. 그들이 여자가 왔던 시간쯤에 왔다면 라이시륜은 아마 검을 뽑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아버지에게서 떨어뜨리려는 것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혼자가 되었음을 절감했기 때문에 순순히 그에 따랐다. 수명을 다하고 죽은 아버지는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바다에 버려지지 않고 정중히 매장될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는 자식인 라이시륜이 치러야 마땅하겠지만, 그는 그럴 힘도 의욕도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고, 그것을 보는데도 머리가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들이 아버지의 손에서 마땅히 라이시륜이 받아야할 반지를 빼내는 데도 그는 멍하니 그것을 보기만 했다. 서서히 제정신을 차려갔을 때 라이시륜이 느낀 것은 분노였다. 아버지는 단란한 행복을 포기하고 그랜드에 올랐다. 그리고 예정된 죽음을 맞았다. 그토록 자신을 희생하면서 지켜준 엘프들이 아버지에게 해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랜드에 대한 순종과 존경? 그래, 그것을 주었다고 믿었다. 아버지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이나마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정말 진심으로 따랐다면 아버지가 죽자마자 다음 그랜드가 누구인가만을 숙덕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 와중에 자신의 처분에 대해 숙덕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순종했던 것은, 그리고 존경했던 것은 아버지가 아닌 ‘그랜드’ 자체였다. 그들에게 그랜드가 아닌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한 한 개인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심지어는 아버지의 친구라 자처하던 자들마저도……. 서서히 돌아오는 이성과 함께 분노도 솟아올랐다. 누구든 죽여 버리고 싶은 광기와 혼자가 되었다는 고독감, 이런 자들을 위해 희생한 아버지에 대한 답답함. 그 중에서도 가장 라이시륜을 화나게 했던 것은 누구하나 아버지만을 위해 울어주지 않았다는 배신감이었다. “……겠어. 죽여 버리겠어. 죽여…….” 구석에 널브러지듯 팽개쳐 있던 몸을 일으켰다. 죽이고 싶었다. 죽여야 했다. 그래야 이 분노가 조금이라도 수그러들 것이다. 그의 분노에 공명이라도 하듯 손바닥에서 검은 보석이 솟아올랐다. 어머니가 물려주었다는 검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어머니가 만들었다는 것만 알았다. 대단한 보검이라는 것은 직접 확인하여 확실히 알았다. 고강한 엘프들마저 검의 살기에 압도될 정도였으니까. 이 검이라면 라이시륜의 분노를 푸는데 기꺼이 응해줄 것이다. 막 완전한 검을 만들어 내려는 찰나. “시륜…….” 작고 가늘어서 속삭임보다 못한 부름이 들렸다. 무시하려면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던, 아니 오히려 주의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희미한 부름이었다. 오히려 그럼에도 라이시륜은 그 음성에 한순간 정신을 놓았고, 집중이 깨지자 검도 사라졌다. 막 첸으로 들어온 엘프는 라이시륜도 익히 알고 있는 엘프였다. 맨 처음 들어왔던 여자 엘프와는 다르게 그 이름까지 알았다. 아버지의 표식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제외하면, 살아있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자이기도 했다. 멀리 볼일이 생겨 나가게 됐다면서, 예정된 죽음에 맞춰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고 미리 작별인사를 했던 아버지의 지기…….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도 항시 덤덤하고 느긋한 얼굴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에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외면하는 것으로 참았다. 그랬기에 단지 그라는 존재 때문에 한계까지 끌어올렸던 살기를 일순 누그러뜨린 것은 아니었다. 그 음성에 녹아있는 진한 슬픔과 울음 때문이었다. 늘 시원시원하고 느긋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래서 보기 싫었던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롭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란틸이…….” 아버지의 애칭을 힘들게 꺼냈다가 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라이시륜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또 깊이 숨을 내쉰 에르니는 비틀비틀 라이시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두 손을 뻗어 라이시륜을 안아주었다. 그의 어깨가 괴롭게 떨리는 것을 맞닿은 어깨로 느끼며, 그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귓가로 숨죽인 울음소리가 박혀들었다. 아아, 누군가 울어주고 있다. 하나뿐인 자식조차 울어주지 않았는데. 맞닿아져 있는 그의 몸이 떨렸기에 라이시륜의 몸도 떨렸다. 기대어 있는 그가 힘없이 무너졌기에 라이시륜도 무너졌다. 늘 웃던 그가 울음을 터뜨렸기에 늘 냉정했던 라이시륜도 울어버렸다. 드디어 울 수 있었다. 드디어 아버지가 없음을 실감했다. 처음 보는 그의 눈물이 그것을 새삼 알려주었다. “넌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늘 청량하던 그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는 충혈 된 눈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그의 뜻은 확고하게 전해졌다. “이곳은 있을 곳이 못 되.” 그것은 라이시륜도 전적으로 동감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떠날 수 없다. 일방적인 원한의 대가를 치르게 할 마음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에게는 받아야 할 것이 있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이것은 네가 가져가라, 라고 말한 것이 있다. 어머니께 결혼할 때 받았다는 반지다. 그것의 주인은 어머니이니 자신이 무덤에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 끈을 남겨두고 싶어 하는 것임을 라이시륜은 알았다. 그렇기에 비록 어머니를 만날 생각은 없다지만 아버지의 바람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상징하는 권위와 실질적인 힘 따위는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그러길 바랐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때문에 원한과 광기는 일단 한풀 꺾였다지만 그들이 계속 정당한 소유권을 부정한다면 기꺼이 도륙해줄 생각이었다. “란틸이 나에게 너를 부탁했다. 네가 어찌 생각하건 나는 네 대부다.” 에르니는 쉬어빠진 음성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라이시륜의 한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 손위에 올려놓았다. 둔탁한 광택의 흑색 반지. 바로 아버지가 라이시륜이 가지고 있길 원했던 어머니의 반지였다. 엘프들이 중간에 가로챈 그 반지말이다. “언젠가 란틸이 이것은 너에게 주겠다고 했었다. 너에게 말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라이시륜은 놀란 눈으로 반지를 보다가 대부를 올려보았다. 그는 누구에게인지 모를 조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엘프들은 이것이 너에게 가는 것을 꺼리는 모양이더구나. 아니면 위대한 그랜드가 없어져 이것이 마땅히 네 것임을 판단할 능력조차 없어진 것일지도 모르지.” 그는 반지가 올려져 있는 라이시륜의 손을 움켜쥐게 하고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그랜드는 바로 서게 됐단다. 바로 초록 고향에 있는 한 엘프가 지목됐기 때문이지. 바로 그랜드가 설 테니 너에게 쏠린 관심도 곧 사라질 거다. 그러니 가거라. 지금이 적기인 것 같구나.” 한 손으로는 여전히 라이시륜의 손을 맞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라이시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버지 외에는 그렇게 해준 사람이 없었기에 불편하고 어색했다. “란틸의 장례는 내가 책임지고 맡으마. 걱정 말거라.”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란틸은 너에게 어머니와 관련된 진실을 알려주기를 부탁했단다. 차마 자기 입으로는 말 할 수 없다면서……. 선택은 네가 하렴. 듣고 싶니?” “필요 없어.” 천년간 한번도 오지 않은 어머니. 반려의 의무가 있는데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매정하게 돌아선 어머니. 아버지가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리워했던 어머니. 한때는 그리웠으나 지금은 원망스러울 뿐인 어머니. 라이시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곧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네 선택을 존중하겠다. 언제든 궁금해지면 물으려무나.” 그리고는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물었다. “엘프들이 원망스럽지? 그랜드에 얽매여, 란티리네라는 남자는 보지 않은 그들이.” “…….” 침묵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감정이 원망 정도로는 납득되지 않아서였다. 그것을 읽었는지 대부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눈을 가까이 맞춰 말했다. 거역할 수 없는 단호함으로. “지금 이 감정을 절대 잊지 말거라.” “마스터!” 퍼뜩 회상에서 깨어난 라이시륜은 입구를 돌아보았다. 딜린이 다소 가쁘게 숨을 내쉬며 그를 보고 있었다. “록이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엘프들이 마법 공격을 한 뒤 바로 접근해왔다고 합니다.” “……접근?!” 뜻밖의 소식에 생각에 잠겼다가 발끈하고 일어났다. “나를 얕보는 건가?” 아니, 급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상대는 에르니다. 에르니……. 도발하는 것이 분명하다. 곤크와 상대해서는 끝이 없으니 봉인구를 빼내기 전에 불러내려는 거다. 그러니 발끈 할 거 없이 하던 거에 집중하면 된다. 그렇게 흥분을 가라앉힌 라이시륜은 재차 생각에 잠겼다. ‘나한테 박혀 있는 봉인구는 시전자가 죽으면 소멸되는 것이다.’ 에르니는 그랜밀라 나이트이자 서열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사이며, 고위 마법사다. 같은 엘프 중에서도 최상위급 엘리트인 것이다. 라이시륜에게 검을 가르친 것은 아버지이나, 아버지에게 검을 가르친 것은 에르니이니 두말 할 것 없다. 하지만 에르니는 엘프다. 그랜드가 없는 엘프는 약하다. 그렇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가보겠다.” 일어서는 라이시륜을 딜린이 급히 말렸다. “도발입니다!” “안다. 그러나 상대는 엘프. 그랜드가 없는 엘프는 적수가 못 되. 질질 끌 거 없이 시전자를 상대하면 봉인구는 깨진다.”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제압하여 위협할 수 있다. 만약 록이 조금 더 지켜보다가 에르니가 그랜밀라 나이트 갑옷을 갖췄다는 이야기를 보고 전했다면, 라이시륜은 절대 이 도발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록은 접근하는 엘프들만을 봤고 그것만을 전했다. 그것이 라이시륜의 계산의 치명적인 오류였다. 부관은 상대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발끈하여 실력차를 잊고 무모하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대 용병단 곤크의 이인자가 그 정도 사리분별도 없겠는가. 상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는 와중에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목숨은 소중한 것이다. 부관은 죽는 것보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라이시륜과는 다른 성격의 남자였다. 때문에 그는 자존심에 목숨을 거는 라이시륜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만큼 존경했다. 그런 부관이 지금 초조해 하는 것은 지금 이 불유쾌한 상황 자체가 아닌 그것이 지닌 의미 때문이었다. 부관은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엘프에 대해 꽤 소상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따르는 마스터가 혼혈인데다, 또 엘프를 끔찍이 싫어했기에 참고삼아 알아두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눈앞의 남자가 입고 있는 갑옷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 남자는 좀 전에 서열 급 정령을 소환하기도 했었다. ‘그랜드가 없는데 어떻게?!’ 다행히도 그와 똑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문을 안에서 풀기보다는 간편하게 답을 아는 자에게 묻는 길을 택했다. “약한 애 괴롭히는 취미는 없지 않았나, 에르니?” “유시리안…….” 갑자기 부관과 자신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검을 막아선 자를 확인하고 에르니는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한 것 같기도 한 미소였다. “여전히 친하구나, 둘은.” “친하긴 누가 친해!” 버럭 소리 지르며 검을 뿌리쳤다. 에르니는 가볍게 물러나면서, 이번에는 확실히 에르니다운 미소를 지었다.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도 여전하구나.” “시끄러! 드디어 노망이 났냐? 아님 그랜드가 없어 너마저 미친 거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유시리안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카미렌과 공유하는 능력, ‘진실을 보는 눈’이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당초 그 능력은 그의 것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발휘할 수도, 활용할 수도 없었다. 그 진실이 왜곡되었는지 어쨌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고 그 상태 그대로를 읽어내는 선에서 그칠 뿐이었다. 지금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에르니가 미치지 않는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당신……?” “…….” 에르니는 별 말 없이 검을 고쳐들었다. 유시리안이 어떤 존재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카미렌의 하나뿐인 아들, 그의 능력을 공유하는 자. 비록 구체적으로 그 능력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나 그 거대함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상태를 눈치 챘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눈치 채지 못하면 오히려 놀랐을지도 모른다. “난 당신이 미쳐서 이러는 거라 생각는데. 그토록 시륜 녀석을 아꼈던 당신이, 결국 미칠 대로 미쳐서 광기를 부리는 거라고.” 에르니는 여전히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빠른 속도로 공격해 들어왔을 뿐이다. -카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귀 아프게 울리고, 에르니와 유시리안은 잠시 가까이 붙게 되었다. “그 정령은 뭐지? 그 갑옷은 뭐냐고!?” “비밀이다.” 에르니는 피식 웃었다. 둘은 서로를 강하게 밀쳐냈고 양쪽으로 멀찍이 떨어졌다. 성벽 난간위에 착지한 에르니는 우아하게 자세를 잡고 다시 기를 가다듬었다. 그 뒤로 엘프들이 던진 마법이 부딪치고 터지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 반투명한 푸른 방어막이 곳곳에 모습을 얼핏 보였다 사라졌다. 붉고 하얀 폭발과 반투명한 푸른 방어막이 끊임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그 속에서 보라색 갑옷의 에르니는 유독 강인해 보였다. 계속되는 굉음에 유시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딴 저급 마법으로는 여기 방어진은 안 깨져. 당신도 알잖아? 왜 시끄럽고 번거롭게 일을 벌이는 거지? 왜 이목을 끌려는 거야?” 이어 결론적인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뭐가 목적이야?” “넌 모를 거다.” 에르니는 눈가에 웃음을 띤 채 답이 아닌 답을 했다. “아무리 네가 총명한 아이라 해도 말이다. 친애하는 렌님이라면 아실까?” 주위에 쏠린 이목을 생각했는지 이카미렌이 종종 써먹는 가명을 사용했다. 유시리안과 이카미렌, 둘을 배려한 것이다. 그것을 읽은 유시리안은 더욱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말이다. 무엇을 느꼈는지 에르니는 무모하게도 코앞에서 공격할 자세를 취하는 유시리안에게서 고개를 돌려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유 없는 행동을 할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유시리안은 공격 대신 그를 따라 밑을 보았다. “쳇. 굼뜨기는.” 한눈에 띄는 그 긴 흑발과 깨끗한 갈색피부의 이국적인 미남. 라이시륜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시리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에르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잠시 생각할 틈에 에르니는 벌써 성벽 밑으로 몸을 날린 상태였다. 게다가 단순히 접근만이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노골적으로 공격할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를 뒤에서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유시리안은 하지 않았다. 라이시륜은 내심 혀를 차며 들고 온 검을 뽑아들었다. 그랜밀라 나이트의 검을 상대할만한 검은 못됐지만 당장은 이것 외에 쓸만한 무기가 없었다. 자세를 잡고 자신을 향해 날라 오는 에르니를 노리고 있는 모습은 당당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 아직 체력이 있어 조금은 상대할 수 있겠지만……. 어째서 에르니가 그랜밀라 나이트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인가!? ‘에르니가 아무리 강해도 엘프일 뿐이다. 어째서?!’ 라이시륜은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검기를 일으켜 공중에 있는 에르니를 공격했을 것이다. 정령의 보호를 받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날지 못하는 이상 공중이라는 것은 치명타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그의 몸 상태로는 검기는커녕 언제 체력고갈로 쓰러지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마나를 끌어 모으려 하면 강제로 분산시키는 데다 몸을 망가뜨리는 봉인구까지 있으니……. 호흡을 가다듬으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봉인구가 박힌 쇄골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욱신거려오는 것과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는 것을 빼면 다른 건 다 좋았다. 허나 마나를 끌어 모르려 하면 근육이 뒤틀리고 내장이 뒤집히겠지. ‘빌어먹을.’ 유시리안 녀석만 안 왔으면 됐을 텐데. 투덜투덜 대며 놀라운 속도로 내려와 검을 내리꽂는 에르니를 피했다. 슬쩍 한걸음 옆으로 옮기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정도는 에르니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바로 몸을 돌려 위로 비스듬히 그었다. 라이시륜은 그것을 맞받아치는 것은 포기하고 뒤로 물러섰다 빠르게 접근해 찌르기를 넣었다. 에르니는 위로 치솟았던 검을 빠르게 내려, 라이시륜의 검을 뿌리쳤다. 에르니의 검이 자신의 검을 타고 오르려 하자 라이시륜은 검을 비틀어 털고 뒤로 물러났다. 능히 따라붙을 수 있음에도 에르니는 같이 뒤로 물러남으로서 거리를 두었다. 설명은 길지만 실로 찰나간의 일이었다. “시원치 않은데, 시륜?” 언제 내려왔는지 유시리안이 성벽 밑에서 둘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하도 그 옆에 있었다. 처음에는 한쪽의 방어를 부탁받아서 망설였지만, 유시리안이 자리를 뜨자 다른 용병들이 왔기에 괜찮다 판단해 내려온 것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움직임도 많이 둔하고…….” “저 녀석이 신경 끄라고 했으면 끄면 되는 거야.” 무하는 화가 난 듯 말했지만 유시리안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낯으로 팔짱을 낄 뿐이었다. 하지만 무하는 검을 뽑아드는 것으로 그 말에 답했다. 그것을 본 유시리안이 물었다. “화낼걸?” “나도 화났어.” “저 놈이 네게 말하지 않아서?” “난 지기야.” 의지할 수 있는 자, 의지하게 할 수 있는 자. 믿을 수 있는 자, 믿게 할 수 있는 자. 그런 지기이다. 그런데 라이시륜은 말하지 않았다. 의지하지 않았다. 무하는 의지하게 할 수 없었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래도 별 수 없지.” 유시리안은 무하가 화내는 이유를 정확히 읽고 웃었다. “고집불통에 오기로 똘똘 뭉쳐서 저만 잘난 줄 아는 독불장군이니까. 애당초 지기란 것이 생긴 게 신기하다니까. 저 놈은 의지한다는 게 뭔지도 모를 거다.” “풋.” 짧게 실소한 무하는 다시 붙는 에르니와 라이시륜을 보았다. 그리고 검을 바로 잡고 서서히 기운을 응집시켰다. 그런 그의 옆에서 유시리안이 라이시륜을 향해 조롱을 보내고 있었다. “그 정도밖에 못 하겠냐, 시륜? 그렇게 비실비실 댈 거면 다시 안에 틀어박히지 그래?” “닥쳐!” “차라리 부관이 낫겠다. 계속 그따위로 할 거면 얌전히 하자는 대로 하지 그러냐? 안 그러면…….” “닥치라고 했다! 싸가지!” 에르니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면서도 라이시륜은 유시리안을 향해서 계속 악 질렀다. 그리고 에르니를 노려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그랜드 따위 될 것 같으냐! 죽인다 해도, 엎드려 빈다 해도 절대 그 따위 것 하지 않아! 누가 하자는 대로 할 것 같아!? 그딴 거 할 바에는…….’ “죽고 만다.” 자기도 모르게 뒷말을 입에 담은 라이시륜은 한층 차갑고 매서운 살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검과 검집을 옆으로 던졌다. 에르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공격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라이시륜은 그런 에르니를 노려보며 오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 잠시 흑 빛이 감돌더니 언젠가 보았던 흑색 보석이 나타났다. 막 그 위에 왼손을 얹으려는 때였다. “라이시륜!” “……?” 성벽 쪽에서 시륜을 향해 누군가 달려들었다. 에르니를 따라왔던 로브를 입은 엘프였다. 위협적으로 검을 치켜들고 있었으나 시륜은 눈길 한번 흘낏 주는 것으로 끝내고 에르니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마나를 모을 수 없고, 체력이 떨어져가는 상황이라지만 저런 애송이는 문젯거리도 안 된다. 게다가 막 끼어드려는 그 엘프를 향해 달려드는 녀석을 봤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의 하나뿐인 지기. 바로 무하였다. -카앙! 맑은 빛을 뿜어내는 검이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을 내며 엘프의 검을 막아냈다. 엘프의 기세가 얼마나 강했던지 두 검의 접점을 중심으로 둥글게 파동이 일었다. 무하의 검은 두건자락이 그에 따라 금방이라도 찢길 듯이 나부꼈고, 엘프의 로브도 뒤로 강하게 퍼졌다. 그 겨를에 후드가 넘겨지고 엘프의 얼굴이 드러났다. 청량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였다. 그를 본 무하는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외모가 아름다워서는 아니었다. 익히 알고 있던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사라느 씨?” 좋지 않은 첫 만남을 가졌던 엘프. 늘 단정하고 차분하게 행동하던 그녀가 악에 박친 눈으로 무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하자체에 대한 원한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막아선 것에 대한 원망인 듯 했다. “비켜서요!” “…….” “난 저 자에게 할 말이 있어요!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요!” 라이시륜의 것과는 확연히 느낌이 다른 그녀의 눈동자에 울음기가 가득 배여 있었다. 그러나 무하는 비켜서지 않았다. 그녀의 이유 모를 슬픔에 동화되기에는 라이시륜이 소중했던 것이다. 평소의 라이시륜이라면 모를까 어딘가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그에게 이처럼 악의를 뿜어내는 여자가 접근하게 둘 수는 없었다. “검으로서 들어야 할 말이라면 막겠습니다.” “당신이 뭔데!? 비켜!” 악에 바친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은 흡사 비명과 같았다. “전 시륜의 지기입니다.” 무하는 침착하게 답했다. 뜻밖의 답에 아사라느는 멍하니 무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라이시륜은 악마 그 자체였다.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수많은 동족을 절망으로 몰고 가는 악마.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독선적인 남자였다. 엘프는 낼 수 없는 살기를 어려서부터 품어왔던 이단아였다. 그런 남자에게 지기라는 존재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전혀 못 해봤다. 그 다음 순간 아사라느는 무하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알아보았다. 본래 옷 안으로 밀어 넣었었지만 새벽에 유시리안과 이야기 할 때 꺼내었기 때문에 지금은 옷 위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표식……?!” 그때였다. 무하의 뒤쪽에서 검은 빛이 일순 퍼졌다 사라졌다. 아사라느는 무하의 어깨 너머로 빛의 근원지를 알아보았다. 라이시륜이었다. 라이시륜은 왼손으로 대도의 손잡이를 잡고, 오른 손은 대도에 박혀 있는 검은 보석에 얹은 채 오만하게 서 있었다. 길 잘들인 야수와 같이 라이시륜의 의지대로 강인하게 살벌하게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는, 라이시륜의 반신이라 칭해도 과함이 없는 도. 이계의 것이라는 것만 아는 그것은 어려서부터 라이시륜의 몸 안에 깃들여 있던 녀석이었다. “아, 안돼!” 아사라느는 당황하여 에르니를 보았다. 늘 짓던 미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 그것에서 아사라느는 확신할 수 있었다. 고의다! 일부러 저 도를 소환하게 내버려 둔 것이다! 아니, 유인한 것이다! “에르니! 어째서!?” 에르니는 더 이상 공격할 의도가 없는지 검을 느슨하게 잡고 아사라느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저, 저 도는!” “안다.” “에르니!” 에르니는 다시 라이시륜을 바라보았다. 마스터의 등장에 잠시 주춤거렸던 용병들은 사정을 모르는 성벽 밖 엘프들이 마법 공격을 재차 해대자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부관의 지시 하에 그것을 막는데 주력했다. 때문에 라이시륜, 에르니, 그리고 새로 나타난 엘프 여자를 주시하는 자는 딜린과 유시리안, 무하뿐이었다. “하아. 하아.” 억지로 도를 소환한 탓인지 라이시륜은 눈에 띄게 헐떡이고 있었다. 그 잘생긴 얼굴도 잔뜩 일그러져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보기 좋았던 분홍빛 입술도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호흡을 정리하려 했으나 도저히 가라앉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파열할 것만 같았다. 온 몸의 근육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뼈는 마디마디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몸을 억지로 바로하며 에르니를 노려보았다.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테지, 에르니?” “물론이다.” 에르니는 덤덤하게 답했다. 그의 차분한 눈동자 속 깊은 곳에 근심과 염려가 섞여 있음을 안 것은 무하와 유시리안으로 악에 박친 라이시륜이나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아사라느는 미처 보지 못했다. “난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해.” “그럴 테지.” “에르니!” 아사라느가 끼어들었다.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저, 저 도는 그들을……!” “이 도가 뭘 어쨌다는 거지?” 라이시륜이 싸늘하게 물었다. 아사라느는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나다가 억지로 버티고 섰다. 그녀는 라이시륜이 두려웠다. 무하를 라이시륜이라 알았을 때는 기절 할 정도로 무서웠다. 미지에 대한 공포가 현실로 드러났을 때의 섬뜩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여전히 두려웠지만, 그보다 강한 분노가 그녀의 안에서 들끓고 있었다. 심호흡하며 라이시륜을 마주 노려보았다. 저것을 어떻게 족칠까 고민하는 라이시륜의 귀에 에르니의 차분한 답변이 들려왔다. “그 도는 그들을 불러들이는 매개체다.” “그?” “에르니!” 아사라느가 다시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에르니는 성격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그렇게 자꾸 불러대지 않아도 내 이름이 에르니라는 건 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왜 저것을 꺼내게 내버려 둔 거죠? 그, 그들이 올 거예요!” “그래. 올 테지.” “그들이라니? 누구 말하는 거야?” 라이시륜은 에르니와 아사라느를 번갈아 보았다. “나를 두고 뭔가 작당이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 뒤에서 수작 좀 부렸다.” 에르니는 여전히 덤덤하게 답했다. 방금 전까지 맹렬하게 일던 투기도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초조함도 사라지고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얼굴이었다. 마치 어려운 숙제를 끝낸 듯한 홀가분한 얼굴. 무하는 아사라느가 파랗게 질려서 에르니만 보자 검을 치우고 라이시륜에게 걸어갔다. 척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지기를 보며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라이시륜은 실소했다. “화났냐?”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 손에 죽었다.” “무섭군.” 그렇게 농조로 답한 라이시륜의 속을 저편에서 박박 긁어오는 이가 있었다. “역시 문제가 있었군.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보이는 걸? 골골대는 꼴 보여주려고 나왔나 보지? 꼴불견인건 알고 나온 거냐?” 빈정대며 맹렬하게 비웃는 그의 이름은 유시리안. 라이시륜의 둘도 없는 악우였다. 가장 들통 나기 싫었던 녀석에게 걸려버린 라이시륜은 벌레 씹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 정도에 주춤할 유시리안이었다면 둘의 관계가 여태 유지되지도 못했을 것 이다. “호오! 무섭네, 그래?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벌써 죽였겠네. 근데 어쩌지? 눈으로는 사람을 못 죽이거든. 죽이고 싶으면 손에 들고 있는 도를 휘둘러야지. 아, 하긴 그거 들고 있기도 힘들지?” “흥! 어제까지만 해도 풀 죽어서 울상이더니 이제 꽤나 팔딱거리는 구나. 무하가 잘 달래줬나 보지? 만년 어리광쟁이야!”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에서 무하는 라이시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연한 푸른색 빛이 라이시륜의 몸 전체에 은은히 흘렀다. 그와 거의 동시에 라이시륜의 안색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눈앞에서 뻔히 치유 마법이 시전 되고 있는데도 에르니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아사라느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뒤에서 자신을 옭아매는 살기에 옴짝달싹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금방 살갗이 찢겨질 듯한 날카로운 살기였다. 오직 아사라느만이 느낄 수 있는 살기. 그 소름끼치도록 정제된 살기에 아사라느는 힘들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라이시륜을 놀려먹고 있는 남자, 유시리안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호흡도 가라앉고 얼굴에 핏기도 돌고, 운신도 가뿐해진 라이시륜은 지기에게 인사대신 질문을 던졌다. “역시 마법도 쓰는 군? 아, 하긴 대마법사 호칭 듣고 살려면 이 정도는 기본일 테지만.” “…….” 화가 났는지 딱딱한 얼굴로 라이시륜을 노려보던 무하는 나직이 말했다. “일 끝나면 한대 맞을 줄 알아.” “하하.” 봉인구가 발동하며 또다시 체력을 갉아먹기 시작했지만 라이시륜은 내색 없이 웃었다. 무하의 마법은 놀라운 것이라, 순식간에 체력이 회복 됐지만 봉인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아까 꼴 되는 건 금방이었다. 그러니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나를 그랜드에 앉히는 것이 목적인가, 에르니?” “그렇다면?” “전부 죽인다. 왕을 원하는 녀석들이 모두 사라지면 왕도 필요 없어질 테지.” “후후후. 그건 곤란한 걸.” 그러면서 에르니는 가볍게 검을 들어 올렸다. “다시 몸 상태가 나빠지기 전에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좀 보자. 아직 시간도 있고 하니.” “시간?” 몸 상태가 나빠지기 전의 여유를 말하는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느껴졌다. 좀 전의 공격을 퍼부었을 때 느껴지던 초조함, 라이시륜이 도를 소환한 이후의 여유. 무엇을 기다리는 가? 에르니는 아무 답 없이 바로 파고들었다. 라이시륜은 훨씬 유연하게 그것을 흘리며 바로 반격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봉인구가 기승을 부리며 고통을 선사했지만 그는 어거지로 눌러 삼키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에르니는 흡사 나비처럼 가볍게 피하고 덮쳤다. 부관 때와는 사뭇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것이 그가 부관을 상대할 때 얼마나 봐주었는지를 알려주었다. 무하는 그런 둘, 정확히는 라이시륜의 상태를 살폈다. 방금 전보다는 꽤 나아지긴 했지만 본래 그의 움직임에 비하면 여전히 둔했다. 공격에 여유도 없었고, 움직임을 최대한 절제하고 있었다. 좀 전에는 어디가 잘못 된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체력을 보충시키는 것만 했다. 묻는다고 해도 말해줄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유시리안 앞에서는 절대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알아서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어깨를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유시리안이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건지 알 수 있겠어?” “잘……. 율은?” 유시리안은 탐색 마법을 시전 시키며 라이시륜을 살폈다. 마법은 이카미렌과 공유하는 힘 중 하나였다. 자신의 힘으로 해내는 것을 좋아하는 유시리안은 집중을 하면서도 투덜댔다. “쳇. 이카는 첫 눈에 알아봤을 텐데. 말도 안 해주고.” “어른이시잖아.” 애들 싸움에 어른은 참견하는 게 아니지. 무하는 웃음을 삼켰다. 어감이 이상해서인지 무하가 삼킨 웃음을 알아챈 건지 유시리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야?” “글쎄.” 더 물으려던 유시리안은 그들을 지나쳐 라이시륜 쪽으로 달려가려는 기척을 느끼고 잡아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손을 돌려 넘어뜨렸다. 후드를 붙잡혔던 아사라느는 공중에서 한바퀴 돌고는 착지했다. 유시리안의 반응이 워낙 빨랐기 때문에, 엘프의 몸놀림으로도 간신히 해낼 수 있었다. “넌 왜 자꾸 끼어들려는 거냐? 날파리마냥.” “전 저 자에게 할 말이 있어요!” “사랑고백이라도 하려는 거냐?” 유시리안이 조롱조로 물었다. 아사라느는 한 귀로 흘리려는지 별 반응 없이 본래 가려는 곳으로 가려 했다. 어느 틈인가 라이시륜과 에르니는 성벽 위까지 올라가 싸우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는 에르니가 그 위로 유인한 듯 보였다. 꽤나 여유 있게 하늘 위나 성벽 너머를 짧게, 짧게 살피면서. 마치 곧 올 누군가를 기다리며, 눈에 잘 띠기 위해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둘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청량하고 맑은 소리가 울려댔다. 그것은 곤크를 감싸는 방어막에 부딪치는 마법구들이 내는 굉음보다는 작았지만 그것을 압도할 만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둘이 나타나서인지 엘프들의 공격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소리가 영롱하게 울렸다. 유시리안은 아사라느의 옷을 다시 잡아챘다. 이번에는 그것을 예상했는지 아사라느는 빠르게 뿌리쳤다. 유시리안도 그녀가 이렇게 반응 할 것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 검 중, 나찰을 뽑아 아사라느의 목에 갖다댔다. “움직여도 난 상관없어. 내가 다치는 게 아니니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사라느는 울컥하며 물었다. 그에 유시리안은 차게 웃었다. “너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할 말이 있으면 저 싸움이 끝나거든 해. 아니면 저 놈 몸을 펠이 치유하고 나서 하라고.” 그러다 아, 하며 탄성을 냈다. “그러고 보니 너라면 알지도 모르겠군.” “……?” “저 놈 쇄골에 박혀 있는 잡것 말이야. 해제시키는 방법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저게 뭔지 정도는 알겠지?” 라이시륜의 상태를 계속 살피던 무하가 처음으로 둘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사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답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저건 봉인구예요. 마나를 흐트러뜨리는 거지요. 에르니가 직접 시전 했어요. 해제 방법은 에르니밖에 몰라요. 억지로 빼려다가는 그 고통에 죽어버릴 걸요.” “저 놈은 그 정도 가지고 안 죽어.” 억지로 빼내는 것쯤은 유시리안도 할 수 있다. 비단 그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마법사라면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무식하게 빼기만 해서는 죽기 십상이다. 일단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마법에 따라 억지로 빼는 즉시 죽게 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라이시륜은 후자의 것이 아닌가 싶어 여태 못 빼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지. 당장 가서 빼면 그만이니까. 녀석이 겪을 고통이야 알바 아니고. 막 실행하려는 찰나,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아사라느가 사족을 달아주었다. “저건 체력도 갈아먹는 거라 시도 즉시 죽고 말 거예요.” “흐음.” 그럼 곤란하지. 유시리안이 주춤거릴 때 무하가 물었다. “빼낼 수 있어?” “그럴 수는 있지만 그 전에 죽는다잖아.” “좀 전처럼 체력을 내가 보충해주면 그 순간에 가능하지 않을까?” “글쎄…….” 그걸 몰라 여태 이러고 있었겠는가. 그때 뒤에서 누가 끼어들었다. “순수하게 비축한 체력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마나로 인해 급히 채워진 체력은 봉인구가 순수 체력보다 훨씬 빨리 갈아먹는데, 빼내는 시간이 그보다 오래 걸린다는 군요. 마스터께서 시전자, 그러니까 저기 에르니라는 엘프에게 직접 들은 거라고 하니까 확실할 겁니다. 몸으로도 한번 확인했고요. 그래서 특정 공간 안, 특정 마법진 위에서 봉인구를 억제시키며 순수 체력을 회복시키고 있었지요.” 딜린이었다. 그는 성벽 위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 라이시륜을 올려보다가 원망스럽게 유시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제 유시리안 씨가 오시는 바람에 공간 안을 나와서 그동안 쌓았던 체력을 다 잃으셨어요.” “괜히 저 놈과 내가 악연인줄 알아?” 자책이라고는 약에 쓸래야 보이지 않고, 뻔뻔하게 웃기만 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틈에 아사라느는 유시리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뒤도 안돌아 보고 급히 성벽 위로 달려갔다. 라이시륜에 대한 공포도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죽었다. 어머니가……. 저 자가 죽인 것이다! 저자가 이렇게 질질 끌지 않고 빨리 그랜드만 됐어도 어머니는 그렇게 죽지 않았다. 자상한 어머니. 현명한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 원수와 다를 바 없는 라이시륜의 모습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 아사라느는 이성을 잃었다. 이제 그녀의 눈에는 자살한 어머니의 모습만이 보였다. 감겨져 있는 눈에도 약간 벌어져 있는 입술에도 온통 검은 피투성이였다. 손에는 작은 병이 들려있었다. 독이었다. “아아악!” 비명과 같은 고함을 지르며 검 날을 앞으로 한 채 달려들었다. 눈에 띄게 헐떡이며 에르니의 공격을 막고 있던 라이시륜은 등 뒤에서 예리하게 다가오는 기척에 급히 도를 뒤로 그었다. 그러나 늦었다. 그것을 직감하고 입술을 깨문 순간이었다. -챙! 예상했던 고통대신 거슬리는 마찰음이 꽂혔다. 거의 동시이긴 했지만, 조금 앞서 그를 끌어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라이시륜은 얼떨떨한 눈으로 자신을 도운 자를 바라보았다. 병 주고 약주고 인가? 라이시륜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아사라느의 검을 튕겨낸 에르니는 딱딱한 얼굴로 아사라느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냐?” 나직하지만 깊은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너는 시륜에게 할 말이 있어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게 무슨 경거만동이냐?” “저 자가 어머니를 죽였어요.” “은릴은 자살했다.” 따라 올라온 무하와 유시리안은 귀에 익은 호칭에 멈춰 섰다. “은릴이라면…….” “엘프라는 건 알았지만, 저 계집의 어머니였나? 모녀가 하는 짓이 똑같군. 보고 배운 게 그거밖에 없는 모양이지?” 유시리안이 비아냥거리자 아사라느는 울음 섞인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아요! 어머니는! 어머니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 아사라느는 힘없이 주저앉아 오열했다. “저 자가 죽인 거예요. 저 자만 아니었으면…….” 흐느낌이 섞여 알아듣기 쉽지는 않았지만 대충 뜻은 파악한 라이시륜은 불쾌한 얼굴을 했다. 에르니가 아직도 잡고 있는 손목을 가볍게 비틀어 빼내고는 도의 끝을 아사라느 쪽으로 향했다. “아까 전부터 시끄럽게 땍땍거리는데,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그 어머니라는 여자를 직접 죽였다 해도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을 테지만, 자살한 것을 죽였다고 하니 더더욱 차갑게 나왔다. 아사라느는 비통하게 라이시륜을 몰아세웠다. “너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너 때문에! 너 하나 때문에 모두가 고통 받고 있어!” 라이시륜이 성벽위에 나타난 이후 공격을 멈춘 엘프들은 완전 방어 태세를 갖추며 그와 에르니의 동태에 관심을 모았다. 때문에 그들은 어렵지 않게 아사라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도중, 도중 끊겼지만 알아듣기 힘들지는 않았다. “네 이기심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알아? 너만 바로 그랜드에 올랐어도 어머니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 다른 어른들도 죽지 않았어! 그렇게 처참하게……!” 솟아오르는 눈물 때문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쳤다. 그 억울함을, 그 슬픔을, 그 통한을 쥐어짜듯이 악을 썼다. “그들은, 어머니는 무덤에 묻히지도 못했단 말이야!” 이제 곤크도 공격을 멈췄다. 애당초 곤크는 수비에 몰두했기 때문에 엘프들이 공격을 멈추자 자연히 소강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와중에 두 집단의 대장격인 두 엘프(한쪽은 혼혈이지만)가 성벽 위에서 싸워댔으니 당연히 주의가 쏠리고, 또 그랬기에 사위가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아는 엘프들의 동정과 공감 속에서, 사정을 모르는 곤크의 의문과 불쾌감 속에서 오열하는 그녀를 냉정하게 바라보던 라이시륜은 매우 짧게 자신의 소견을 전했다. “내가 알 바 아니야.” “……!” 남의 고통은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단란한 가정을 포기한 아버지를 은밀히 배척한 것은, 아버지의 희생이 자신의 희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라이시륜의 몸에 봉인구를 박아 넣은 것은, 그 봉인구로 인한 아픔이 그들의 아픔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라이시륜이 체력을 회복할 것을 염려하여 식사를 제때 주지 않은 것은, 그의 굶주림이 자신의 굶주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라이시륜이 미쳐가는 자신을 보며 몸부림치는 그들에게 냉정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광기가 자신의 광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남의 일이라는 것이다. 라이시륜은 시니컬하게 웃으며 에르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도 당신의 행동을 저렇게 포장할 생각이야? 많은 자가 고통 받고 있다는 이유하나로 소수를 억압하고 강요하고 핍박하는 행동에 당위성을 주입할건가?” 그 서늘한 물음에 오열하던 아사라느는 흠칫했고, 에르니는 웃었다. “물론 아니다. 나는 내가 하는 행동이 옳다고 생각한 적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이다.” “하고 싶은 것이 뭔데?” 에르니는 대답 전에 잠시 눈을 감았다. 많은 이들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행하느냐? 왜 그런 방법을 취했느냐?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뭘 원하는 것이냐? …… 각기 질문은 달랐지만 결국은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묻는 것이었다. 그의 목적을 묻는 것이었다. 곧 눈을 뜬 에르니는 처음으로 그 질문에 답했다. “지키는 거다.” “쿡.” 라이시륜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에르니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켜? 나를 이 꼴로 만들어 가면서 그렇게까지 엘프들을 지키고 싶었단 말이지? 난 몰랐어! 당신이 그렇게 엘프들을 염려하는지 말이야! 정말 몰랐어! 하하하!” 그것은 광소였다.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얇고 팽팽한 실이 끊어져버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포기에 가까운 배신감을 느끼며 웃던 라이시륜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날 이 꼴로 만들어 가면서 말이지!?” “물론 아니다.” “……!?” 에르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동안 고통을 인내해온 자의 어둡고 무거운 미소였으며, 마침내 그것을 초월한 듯 홀가분한 미소이기도 했다. 그는 입을 열어 여태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심중을 또박또박 끄집어냈다. 스스로에게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이.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엘프라는 한 종족이 아니다.” 울던 아사라느가 소스라치게 놀라 에르니를 바라보았다. 에르니의 행동이 석연치 않다고는 생각해왔었다. 마음 속 어딘 가에서는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말로 듣고 나자 마냥 부정하고만 싶었다. 에르니는 고해성사라도 하듯 천천히 말했다. “물론 그 무게에 짓눌린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란 녀석은 란틸도 포기할 정도로 말썽장이라서 말이다.” 항상 엘프의 앞길을 염려했던 상냥하고 순수한 란티리네. 절대적인 멸망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는 종족의 미래를 슬퍼했던 지기. 그런 그였기에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에르니는 달랐다. 란티리네나 은릴이나,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 한탄하면서도 내심 부러워했을 정도로 에르니는 자유분방한 엘프였다. 그런 그였기에 란티리네가 하나뿐인 소중한 자식을 맡긴 것이다. 종족의 틀에 박혀 있는 엘프들은 금기의 아이를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니까. 절대 마음을 열려하지 않으니까. 열어 놓은 마음을 지닌 주제에.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살 거다.” 진실의 무게를 나누고자 한 것도 에르니의 선택, 장로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것도 에르니의 선택, 지키고자 하는 것도 에르니의 선택. 모든 것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그럼 뭘 지키려는…….” 에르니는 자상한 눈빛으로 라이시륜을 바라보았다. “유시리안도, 너도…… 평생 모를 거다.” 그 순간 왠지 무하는 그가 원하는 것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이카미렌이 유시리안을 보듯, 가하가 자신을 보듯…… 자상하고 부드러워 눈물이 날 것만 같은 포근함이 에르니에게 있었다. 그렇게 라이시륜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남자가 무언가에 얽매여 소중한 것을 잃는 어리석음을 범할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에르니! 우릴 버릴 생각인가요? 여기까지 몰고 와 놓고?!” 아사라느가 필사적으로 다가와 에르니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의 엘프들에게는 에르니가 있어야 한다. 그랜드가 죽었다. 은릴도, 다른 많은 엘프들도 죽었다. 미쳐서 자살했다. 그나마 에르니가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다. 라이시륜에게 박혀 있는 봉인구도 에르니의 권속 하에 있는 것이다. 라이시륜에게 저토록 당당하고 차분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에르니뿐이다. 에르니까지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하다. “난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다정하게 아사라느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주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평소에 짓던 성격 좋아 보이는 미소도, 라이시륜에게 보였던 자상한 미소와도 사뭇 다른 미소였다. 어딘지 씁쓸하고, 화를 내는 듯한, 또 한편으로는 포기하는 듯한……. “아무것도 말이다.” “그건 불가능해.” 라이시륜은 도의 끝을 다시 에르니에게 향하며 단정 지었다. “나는 그랜드가 되지 않아. 엘프들은 그랜드를 필요로 하지.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건 불가능해.” “가능하다.” “불가능해! 당신도 알잖아? 아무리 그랜드가 없어 정신이 불안정해진다지만 그 정도는 알잖아?!” 주르륵, 한 줄기의 피가 라이시륜의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내장이 뒤틀린 것이다. 에르니의 공격을 받기 위해 무리하게 체력을 끌어 모으고 마나를 운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아사라느가 눈물과 광기로 얼룩진 눈으로 라이시륜을 돌아보았다. “그래요, 에르니. 모두 버리지 않는 방법이 있어요.” “……?” 아사라느의 기괴한 분위기에 에르니는 의아함과 더불어 긴장하며 아사라느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아사라느가 빨랐다. 그녀는 좀 전처럼 검 끝을 똑바로 라이시륜에게 세우고 돌진했다. “이 자가 죽으면 되는 거야!” “시륜!” 억지로 버티고 있던 라이시륜이 바로 옆에서 돌진해 오는 아사라느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에르니가 그녀를 막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이제 막 그녀의 검이 라이시륜의 가슴에 꽂히려는 찰나였다. -콰콰쾅! “꺄악!” 정확히 아사라느의 손에 쥐어진 검을 향해 직선으로 내리꽂혀진 그것은 새파라면서도 새하얀 번개였다. 번개를 직통으로 맞은 아사라느는 주저앉아 고통에 절은 비명을 내질렀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강한 번개였지만 죽지는 않았다. 대신 검을 쥐고 있던 손이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는 자연적인 마나였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질적인 마나에서 생성된 번개, 즉 마법으로 인한 번개였기에 마법에 내성이 있는 엘프라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다. 시전자가 급하게 시전 한 탓에 위력이 약한 것도 있었지만 보통 인간이었다면 벌써 숯덩이가 되고도 남았다. 에르니는 비명을 지르는 아사라느에게 치유 마법을 시전해 주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왔나…….” “……?” 덩달아 하늘을 올려본 이들은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는 한 인형(人形)을 볼 수 있었다. 이질적이지만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검은 날개가 등 뒤에 활짝 펼쳐져 있는 남자. 검은 머리카락,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 붉은 색임에도 차가운 느낌의 눈동자. 왠지 눈에 익은 번개다 생각하던 무하는 그를 바라보고 짧게 탄성을 질렀다. “하환!” “하환?” 무하는 자신과 동시에 이름을 꺼낸 유시리안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유시리안은 떨떠름하게 위를 보다가 무하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저 녀석 이름을 아는 걸 보니…….” 슬쩍 무하의 검을 내려다보고 말을 이었다. “역시 이 검은 저 녀석이 준 모양이지?” “응. 율은 어떻게 알아?” “뭐…… 좀 옛날에 만난 적이 있긴 하지.” 그러는 동안에 하환은 사뿐히 내려섰다. 쫙 펼쳐져 있었던 검은 날개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곧 사라졌다. 하환은 에르니의 치유로 겨우 숨을 돌린 아사라느를 싸늘하게 보다가 라이시륜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른 손을 심장 위에 얹고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드디어 뵙게 되어 기쁩니다.” 하환은 라이시륜 옆의 에르니를 한번 보고, 성벽 밑에 모여 있는 엘프들을 쭉 본 뒤 실소했다.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엘프가 여기 죄다 모여 있군.” “그대가 못 찾게, 마을을 벗어나는 엘프는 죄다 띠를 두르거나 두건을 썼으니까.” 평이한 듯 농담조로, 듣는 사람 약 오를게 뻔한 말을 하는 에르니였다.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성벽 밑에서는 경악성이 잇달아 터지고 있었다. 엘프들 쪽이었다. 그가 와버렸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그가!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가! “마, 마법을!” “저 자에게 집중해!” “화살!” 에르니가 라이시륜을 몰아넣었을 때 흘렀던 느긋함은 순식간에 박살나고,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여 마나를 최대한 끌어 모았다. 여태까지 곤크의 방어막의 한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퍼부었지만 이제 모든 힘을 다할 작정이었다. 하환은 성벽 쪽에서 뒤틀리고 있는 마나를 느끼고 흥,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이 향하는 쪽 허공에 무언가가 일그러지고 모이고 압축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고 가는 피리였다. 외향은 평범하나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피리. 바로 그것이 창세신전의 질투를 산 ‘약속된 지배’였다. -삐이익─! 엘프들은 바싹 긴장하며 곤크에서 등을 돌려 다른 쪽을 살폈다. 저것이 가지는 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 흐르자 곧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거세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편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거대한 무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곤크를 몇 겹으로 둘러싸고도 남을 만큼의 몬스터 떼거지였다! 하환은 다시 피리를 불었다. 당장이라도 저 엘프들을 몰살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가 모시고 가고자 한 존재도 반은 엘프였으니까. 반발을 사서 좋을 게 없다. ……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라이시륜은 지금 눈앞에서 엘프들이 몰살당한다 해도 별 상관 안했을 테지만 말이다. -삐이익─! 위협적으로 달려들던 몬스터들은 속도를 서서히 줄이더니, 엘프들을 반원 형태로 포위했다. 어지간한 군대보다 더 정연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가지각색의 몬스터가 모인 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흉흉한 기운만큼은 똑같았지만 말이다. 엘프들이 바싹 긴장하고 있을 때, 하환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의 위에서 내려왔다. “참견하지 마라. 너희 따위를 상대하려고 온 게 아니다.” 엘프들을 마른 침을 삼키며 몬스터와 하환을 번갈아 보다가 마지막으로 에르니를 보았다. 에르니가 특유의 미소어린 얼굴로 짧게 고개를 끄떡이고 나서야 엘프들은 마법을 거뒀다. 상당히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본래라면 ‘열어 놓은 마음’ 덕분에 몬스터와 적대하지 않는 엘프들이 몬스터의 위협 속에서 공격하지 못하고 있고, 본래라면 몬스터의 공격의 대상일 인간들이 몬스터의 도움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있다. 곤크 용병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다가 거의 동시에 마스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곳이 이 상황의 중심지였다. 영문 모를 도움을 받은 라이시륜은 썩 유쾌하지 않은 얼굴로 하환을 보고 있었다. “넌 뭐지?” 하환은 그에 답하기에 앞서 라이시륜의 옆에 서 있는 에르니를 노려보았다. “역시 전하지 않은 모양이군.” 살벌한 독기가 쏟아지는 데도 에르니는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짓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사단을 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라이시륜에게 자신의 이름을 댔다. “저의 이름은 하환. 정식 이름은 따로 있습니다만,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것이니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라이시륜을 봤다가 그의 입가에 흐른 피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저 피만이 아니라 척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이때 에르니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팟, 봉인구가 떨어지면서 터졌다. 여태껏 그것을 빼내겠다고 발버둥 친 것에 비해 상당히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 반동으로 크게 기침하며 비틀거리는 라이시륜을 에르니가 부축해 주었다. 하환은 그 모습에 노하며 소리쳤다. 엘프가 여태껏 훼방 놓은 것을 생각하면 몰살 시킨다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손을 놓아라!” 전보다 더 크고 강한 번개가 에르니를 향해 박혀들었다. 제 아무리 엘프라 해도 단숨에 잿더미가 되고 말 정도의 강력한 번개였다. 그러나 에르니가 허공을 향해 건성으로 손을 내젓는 것으로 그 공격을 막았다. 아니, 막았다는 표현보다는 흘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그의 검이 그 움직임에 따라 몇 번 허공에 곡선을 긋자 호박색 호선이 아롱지듯 나타났고, 그 호선을 따라 번개의 궤도가 꺾이며 땅으로 스며든 것이니 말이다. 이에 하환이 미간을 모으며 더 기운을 끌어올리자 에르니는 부드럽게 저지했다. “기다리게. 급한 것은 그게 아니니.” 그러며 라이시륜의 몸에 치유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제 체력을 갉아먹을 봉인구도 없으니 회복 마법의 진정한 위력도 발휘되었다. 내장이 제자리를 찾고 금방이라도 찢겨나갈 듯한 근육도 진정되고 몸에 기운이 돌자 라이시륜은 입가에 피를 훔치며 퉁명하게 물었다. “무슨 수작이야?” “말했지 않니. 지킬 거라고.” 에르니는 온화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놓았다. 그러자 처음 나타났을 때와 같이 호선의 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갑옷도 다시 녹기 시작했다. 이마의 보석이 이물질로 화한 갑옷 안으로 사라지자, 에르니의 몸을 덮고 있던 이물질이 다시 팔목 쪽으로 밀려들어갔다. 금속 팔찌의 모습으로 변한 그 위에 호박색 보석이 솟아나는 것으로 그 변모는 완성되었다. 하환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런 에르니를 보았다. “그랜밀라 나이트 갑주? 지금 엘프에게는 그랜드가 없지 않나? 전에 만났을 때의 느낌도 그렇지만 당신 뭔가 이상해.” “후후. 감이 좋군.” 어차피 묻는다 해도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 없기 때문에 하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에르니가 전투태세를 거뒀기에 일단 사태를 지켜보기로 하고 번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모은 기운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 차가운 홍안에 가득 배여 있는 적의와 분노도 여전했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몬스터 사태의 주범인 하환의 갑작스런 등장, 그리고 라이시륜을 감싸는 듯한 행동, 라이시륜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 에르니를 향한 적의. 유시리안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홀가분한 복장의 에르니를 보다가 무심코 그가 걸고 있는 목걸이를 발견했다. “앗! 그건!?” “……?” 유시리안이 손짓한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린 라이시륜은 그 목걸이를 발견하고 움찔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표식, 그리고……. 라이시륜이 주춤할 때 유시리안은 화난 얼굴로 대뜸 물었다. “당신이었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 반지 말이야! 전에 펠에게 침묵의 배려를 건 게 당신이었던 거야?” 유시리안은 무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따졌다. 언제고 꼭 보복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뒤로 많은 일들이 들이닥쳐 잊고 있었다. 다섯 개뿐인 침묵의 대가의 소유자는 사대 왕과 금기의 아이, 라이시륜. 사대 왕이나 라이시륜이나 그런 일을 할 이유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뺏겼을 수도 있지만 누가 감히 사대 왕에게 그것을 뺏을 수 있겠는가. 라이시륜은 뺏기느니 자기 손으로 부셔버리고 말 녀석이다. 오리무중이었던 그 일이 이제야 조금 납득이 되었다. 에르니라면 라이시륜에게 그것을 빼앗지 않고도 가질 수 있다. 그토록 엘프를 경멸하며 증오하는 라이시륜이 처음으로 상종한 엘프였으니까. 언젠가 라이시륜가 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를 위해 울어 준 유일한 엘프라고……. 그러니 에르니라면 라이시륜에게서 그것을 선물 받았을 수도 있다 . ‘펠?’ 유시리안의 몸짓으로 그가 칭하는 펠이 누군지 안 에르니는 무하를 슬쩍 보았다. 바로 저 남자인가. 아사라느에게 부질없는 희망을 안겨주었던, ‘열어 놓은 마음’을 가지고도 미치지 않는 인간이. 실상은 선택하지 않은 혼혈이었던 것뿐인……. 잠시 위아래로 무하를 살피던 에르니는 그가 걸고 있는 목걸이의 메달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저것은 표식이 아닌가! 게다가 저 첸은……. 에르니는 짧은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이것을 받은 이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만약 근래 누군가 이것을 썼다면…… 그것은 은릴일 거다. 내가 그녀에게 잠시 빌려줬었거든. 아마 우리가 추적했을 때…… 저 아이가 라이시륜에 대해 거론하여 정보가 누설될까 두려웠던 거겠지. 표식을 봤다면 저 아이가 라이시륜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렸을 테니까.” “은릴? 저 계집의 자살한 어미 말이야?” 에르니가 고개를 끄떡여 답하자 유시리안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투덜댔다. “이미 죽은 계집을 또 죽일 수는 없잖아.” 유시리안의 목소리를 쫓아 무심코 뒤를 돌아본 하환은 놀란 눈으로 무하와 유시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또 만났군. 무하라고 했던가?” “아아. 네가 몬스터 사태의 주범이라며?” “뭐, 그런 셈이지.” 피식 웃고는 이번에는 유시리안을 돌아보았다. “몇 달 전에 마주쳤던 것 같은데. 안 그런가? 그때는 피차 인사할 처지가 아니었지.” “기억력이 감퇴하지는 않았구나. 축하한다. 치매는 아직 멀었다.” 시비 거는 듯한 말투에도 하환은 별 반응 없이 실소했다. “성질머리는 여전하군, 이므르.” “유시리안이라고 불러. 날개 죽지 뜯어내기 전에.” 제법 살기를 내며 으르렁거렸지만 그 정도는 농담 따먹기로 들리는지 하환은 능청스러운 웃음만 지었다. “이므르?” 무하가 옆에서 물었다. 그뿐만 아니라 엘프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도 의아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고룡어로 맹약자라는 뜻이다.” 답은 하환이 대신했다. 그리고 잔뜩 얼굴을 찌푸리는 유시리안을 보며 짓궂게 말을 이었다. “이카미렌의 맹약자, 욤 유시리안 이므르 이카미렌. 저 녀석의 풀네임이지. 몰랐나?” “욤?” 무하는 파악이 안 간다는 얼굴로 유시리안과 하환을 번갈아 보았다. 저쪽에서 라이시륜이 몸을 회복시키면서 한마디 보탰다. “이런. 무하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있었나?” “둘 다 닥쳐.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뿐이야.” 유시리안은 불쾌하게 하환과 라이시륜을 노려보다가 무하를 돌아봤다. 둘을 대했을 때의 사나운 기세는 어디로 가고 다소 풀 죽은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뒤에서 라이시륜이 눈을 번뜩이고 있다는 것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말하려 했었어. 정말이야!” “후후. 그래. 다음에 말해줘.” 무하가 개의치 않아하자 유시리안은 기고만장해져서 하환을 돌아보고 버럭 소리 질렀다. “그딴 주둥이 놀리러 왔냐? 볼일이나 보고 꺼져!” 하환은 쿡 웃으며 그의 악담을 흘리고, 몸을 돌려 라이시륜에게 예를 갖췄다. 유시리안의 말대로 지금 한가하게 유시리안의 과거나 폭로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아까운 시간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는 저의 주군께 당신을 모셔가기 위해 왔습니다. 전에도 한번 찾기 위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전에 약속된 기간이 다 되어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때의 실패를 떠올려 이번에는 이곳 주민의 도움을 받고자 창세신의 허가까지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환은 불쾌감어린 눈으로 에르니와 성벽 밑 엘프들을 한차례 노려보았다. “신전에서는 창세신의 허가를 직접 받은 저희를 질시하여, 엘프는 그랜드로 지목당한 자를 소유하기 위해 모두 신의 증표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꽁꽁 숨겨놓아 찾기 힘들었지요.” “그럼 지금은 어떻게 찾아온 거지?” “그대가 약속된 검을 소환하였기 때문입니다. 주군께 부탁드려 이번에는 감히 약속된 검의 기척을 알아내고 왔기 때문에 그것의 기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은 2년 전 처음 약속된 지배를 사용했을 당시에 그대의 기척을 느꼈었습니다만 그때는 신전과 엘프에게 그 증표의 진위를 보여주기 위한 자리였기에 다음으로 미뤘습니다. 진위를 가리는 장소에서 사라지면 도망친 꼴이 되어버려 주군의 명예에 누가 되는데다가, 진위만 알리면 당연히 신전과 엘프 쪽에서 그대에게 안내해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유시리안은 갑자기 나타나 라이시륜을 구하고, 답지 않게 빙빙 돌리지 않고 충실히 답하는 데다, 끝에는 사과의 말까지 덧붙이는 하환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몬스터 사태의 주범인 마족이 원하는 것은 검이라 했다. 그런 마족이 왜 뜬금없이 라이시륜에게 저렇게 군단 말인가? 게다가 신관과 엘프에게 적의까지 보이면서. ……엘프? 실마리를 잡혔다! 검! 라이시륜의 검! 그들이 원하는 검이 바로 라이시륜의 검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유시리안은 금세 의문점을 발견했다. 어째서 엘프들은 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까? 마족이 원하는 검을 라이시륜에게서 빼앗아 건네줄 재주는 없다 해도 라이시륜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마족이 재주껏 가져가게 할 수는 있었을 텐데? 왜 만인의 지탄을 받아가면서까지 라이시륜을 숨겼을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단순히 검만이 아닌 것인가? 여기까지는 라이시륜도 들으며 추리할 수 있었다. 그는 굳이 의문을 안에서 삭힐 필요가 없이 묵묵히 하문을 기다리는 하환에게 물었다. “왜 나를 정중하게 대하는 거지? 내 검이 갖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소용없어. 난 죽어도 건네주지 않을 거니까.” “전 그 검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검. 제가 당신에게 예를 갖추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약속의 검?” “주군께서 자신의 후계자에게 친히 선사한 검이란 뜻입니다. 즉 주군의 자식임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는 검이지요. 속계에서 마족의 요구문에 당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좋지 못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에 검이라고 한 것뿐. 제가 찾고자 하는 것은 주군의 후계자, 즉 주군의 아들분이였습니다.” “…….” 딱딱하게 굳어있던 라이시륜이 고저 없는 어조로 물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를 아들이라 칭할 수 있는 자는 이제 단 한명뿐이었으니까. 어머니……. 이제와 왜?” “어미가 아들을 찾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것은 사무치게 시린 조소였다. “꺼져라.” 광소 끝에 떨어진 짧고 단호한 축객령. 라이시륜은 하환에게서 에르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똑같이 차가운 눈빛이었다. “알고 있었군?” “물론. 2년 전 창세신전에서 연락이 왔었다. 이유는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빨리 오라는 전언이었지. 연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가보니 처음 보는 형태의 서신이 와 있었다.” 그리고 거칠게 내쳐졌음에도 묵묵히 예를 갖추고 있는 하환을 가리켰다. “이 남자에게서 온 서신이었지.” 에르니는 신음을 삼키며 하환과 에르니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아사라느를 바라보았다. “너도 알게다. 신전의 연락이 왔던 때가 언제인지 말이다. 다음 그랜드가 지목 당한 직후였지.” 이번에는 라이시륜을 돌아보고 미소 지었다. 매우 복잡한 미소였다. “시륜, 바로 너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신전이 무슨 생각으로 거절하는 지 뻔히 알면서 그에 동조했다.” “그랜드로 지목받은 엘프가 그랜드를 거부했을 때, 혹은 이 종족이 되었을 때, 혹은 죽었을 때. 다시 언제, 누가 지목받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바로 그 즉시 될지,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그 때문인가?” 유시리안이 물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닌 확인이었다. 아사라느는 부끄러운 듯 낯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성벽 밑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엘프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들은 에르니가 뽑은 마법이 가능한 정예들, 즉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 엘프들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더 미친 상태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와 왜 찾는 겁니까? 선대 그랜드의 부인되시는 분은 그랜드께서 돌아가셨을 때조차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던 그 분이 이제와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그랜드를 빼앗아간다는 겁니까! 무슨 권리로!” “그랜드를 빼앗으려는 게 아니다. 자식을 찾으려는 거다.” 하환은 짜증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엘프들과 이와 똑같은 공방이 얼마나 오갔는지 모른다. 진척이 없다.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뻔히 보이는 진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아니, 정말로 안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하환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머리띠나 두건 따위를 두르고 다니기 시작했다. 하환으로서는 그들을 찾는 게 더더욱 힘들어졌다. 초록 고향을 아무리 뒤져도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수작을 걸어둔 게 분명했다. 초조함에 약속된 지배의 힘을 이용해 그들을 협박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때 유시리안이 어이없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너희는 무슨 권리로 시륜에게 전했어야 할 소식을 전하지 않은 거냐?” “저흰 그랜드를 뺏기기 싫었습니다!” “누가 그랜드라는 거야! 너흰 입 닥쳐!” 버럭 소리 지른 라이시륜은 에르니를 돌아보았다. “계속 말해. 그게 끝이 아니잖아?” “일단 다른 엘프들과 의논하기 위해 신전에서 돌아왔을 때, 네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너에게 허위 정보를 알려주어 이 남자의 시야에 닿지 않는 태고 나무 영역권으로 보냈다. 그리고 태고 나무 영역권에 도달하기 전에 네가 검을 소환하게 될 일이 생길까 싶어 약속된 지배가 진품인지를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 진위를 보이는 동안에는 네 기척을 느껴도 쫓아가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거지.” “치밀하군. 무서울 정도야.” 유시리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옆에서 무하와 딜린은 착잡한 얼굴로 라이시륜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니의 말이 계속 될수록 딱딱하게 굳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내 예상이 맞았고, 정보가 허위임을 안 너는 다른 길로 안 새고 바로 나한테 왔다. 그 뒤는…… 네가 더 잘 알 테지.” “결국 당신도 내가 그랜드가 되길 원했다는 거야?” “설마.” 에르니는 이런 헛소리는 생전 처음 듣는 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절대 그런 일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지. 난 네가 그랜드가 되길 원치 않는다.” “에르니!” 동요하는 엘프들 속에서 에르니만이 홀로 여유자적하게 웃고 있었다. 참으로 얄미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라이시륜은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왜 나를 감금한 거야? 그 망할 봉인구까지 박아 넣고.” “네가 분노하길 바랐다. 네가 절대, 절대로 그랜드가 되지 않겠다고 새삼 결의하길 바랐다. 엘프라는 종족에 완전히 진저리를 치게 만들고 싶었다.” 에르니는 여전히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이시륜은 그것이 서글픔과 고통, 번민을 담은 것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뿐. 횃불이 있어도 한치 앞이나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숲 안에서 한 남자가 묵묵히 앉아있었다.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대고 조용히, 어둠에 동화되고 싶은 양 칙칙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 어쩌죠, 우린 어떻게 해야 해요? -말도 안돼! 왜 그 자가! 왜 하필! -이단아. 이단아! 우리는 이 저주에 언제까지 눌려야 하는 겁니까! -싫어! 싫어! 싫어! 좀 전까지 지겹도록 듣고 왔던 그 절규와 거부, 광기가 아직도 귓가에서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나라고 별 뾰쪽한 수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한탄하듯 그 환청들에게 변명해보던 남자는 자기 하는 꼴이 웃긴지 킥킥댔다. 여전히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댄 채, 허리를 숙이고 킥킥, 쿡쿡, 그리고 하하! …… 그리고 침묵. “……빌어먹을.” 왜 하필이냐고? 그건 누구보다도 남자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우린 어떻게 해요, 에르니? -당신은 장로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알려줘요. -그 자와 친한 엘프는 당신뿐이잖아요. 네? -에르니! 푹 숙인 고개 밑에서 빠득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왜 하필…….” 고개를 들어 빛 조각 없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고 싶은 건, 누구보다도 에르니 자신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시륜…….” 란티리네가 그에게 남기고 간 아이. 아비의 마음으로 지켜봐온 아이. “왜 하필 너인 거냐.” 더 이상 홀로 견디기 힘들어진 에르니는 비틀비틀 일어나, 지금의 그로서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지기를 찾아 걸었다. 유독 정령이 활기를 펼치는 서린의 비밀기지. 재밌지 않은가? 명랑하고 쾌활한 에르니의 비밀기지는 청량하지만 무거운 깊고 깊은 숲인데, 조용하고 과묵한 서린의 비밀기지는 정령들의 춤사위로 시끌벅적한 샘의 근원이니. 힘들게 서린의 비밀기지까지 온 에르니는 늘 앉던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내쉬었다. 그를 짓누르던 무언가에서 이제야 해방된 기분이었다.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잠에 취해 있는 지기의 모습에 까닭모를 안도감마저 들었다. 「엘?」 “후후. 달리 누구겠어?” 지혜롭고 현명한 초록 고향의 지배자, 서린은 자신의 지기에게 다가가며 다소 퉁명하게 말했다. 「억지로 웃지 마라. 보기 안 좋다.」 “…….” 에르니는 이제야 숨이 트인 듯 깊이, 아주 깊이 숨을 삼켰다 내쉬었다. 이 지기 앞에서만큼은 여유 있는 척, 다 아는 척, 강한 척, 하지 않아도 된다. 가면을 쓰지 않아도 좋은 상대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왜 죽을 쌍을 하고 있는 거냐?」 “그랜드가 죽었어.” 「그런데?」 엘프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 서린은 참으로 냉정하게 반문했다. 에르니는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가 본래 이 시기의 엘프는 좋아하지 않았다는 건 알지만 근래는 아예 싫어하는 것 같아. 이 시기가 뿐 아니라, 그랜드가 있을 때조차도 말이야.” 서린은 에르니의 옆에 똬리를 치고 느긋하게 자신의 비밀기지를 즐겼다. 에르니의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 자리에만 오면 늘 그가 하던 행동이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에르니는 독촉하지도, 발끈하지도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저번 그랜드는 바로 섰지? 란틸이 죽고 말이야.」 “초목 엘프인데다, 같은 초목 엘프 부인과 자식을 둔 지극히 평범한 엘프였으니까.” 초목 엘프와 그림자 엘프는 같은 엘프인데도 사이가 좋은 편이 못 됐다. 초목 엘프는 제 1기 마도 당시 엘프들의 우두머리 격인 고등 엘프였다. 당시 초목 엘프의 장로, 태로는 4대왕 중에서 서쪽을 다스리는 백왕의 측근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 ‘배신’도 초목 엘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림자 엘프는 자신들이 받고 있는 저주를 초목 엘프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에 서로 겉도는 관계정도에서 그친 상태였다. 「그래서 넌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난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아왔기 때문 알 수 있었어.」 서린의 음성이 점점 차가워져가고 있었다. 에르니는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 그냥 듣고만 있었다. 잠시나마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서린의 말을 듣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다음 순간 에르니는 여태껏 고민하고 번민했던 것의 몇 배나 큰 우환을 안아버렸다. 「엘프는 더 이상 미치지 않아. 그랜드가 있든, 없든. 그것이 이치야.」 “무, 무슨……!?” 혼백이 나갈 정도로 놀랐던 에르니는 어이없이 웃으며 심호흡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난 방금 전까지도 그들의 광기를 보고 왔어.” 「그래서 내가 그들을 싫어한다는 거야.」 에르니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서린을 내려보았다. 서린은 여전히 자신의 비밀 기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지금 하는 말이 그에게는 새삼스런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 그는 이미 그것을 천년이나 전에 알아버렸고, 또 보아왔던 것이다. 그것에 여전히 분노를 느끼고는 있지만 굳이 심각한 비밀을 털어 놓는 다는 식으로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주는 발동되고 있지 않아, 엘.」 “……!?” 지기가 창백하게,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 버리자 서린은 그제야 그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그가 느낄 충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손바닥만한 백사가 한숨을 쉬는 모습은 상당히 앙증맞았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연륜과 위엄이 그것을 어울리게 했다. 「엘. 그랜드가 뭐지?」 “엘프의 희생양.” 쭉 생각해왔던 것이기에 에르니는 그 와중에도 망설임 없이 답했다. 서린은 고개를 끄떡이고 다시 물었다. 「그 희생이 어떤 거지?」 “진실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는 것.” 「그래. 달리 말하면, 진실을 아는 ‘희생양’만 있다면 엘프는 미치지 않는 거다. 그리고 지금 그들에게는 너라는 희생양이 있지.」 “……!” 어린 아이를 가르치듯 조근조근 집어가며 알려주고는 있지만, 영민한 에르니가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렸음을 서린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미치고 있다.」 “…….” 에르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놀랍다. 슬프다. 안타깝다. 답답하다. 그립다. 고독하다. 아프다. 그리고 허무하다. 감당 못하리만치 격하고 복잡하며 혼란한 감정이 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기의 괴로움을 뻔히 알면서 서린은 계속 말했다. 에르니의 속에서 그것을 이미 알았다 해도 서린은 말해야했다. 에르니가 자신의 속에 묻혀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기 전에, 그가 냉정하게 확실하게 집어줘야만 했다. 그것은 에르니에게 파문을 일으킨 그가 해줘야만 하는 마무리 정돈이었다. 「저주는 발동되지 않고 있는데도. 미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그랜드가 없다는 공포에 얽매여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거다. 그것이 이미 그동안 미쳐온 게 있어서 그런 거라면 납득할 수도 있어. 하지만 란틸이 그랜드에 있을 때 태어나고, 네가 진실을 안 이후에 자라온 어린 엘프들마저 광기에 젖어있다. 그들은 스스로 원해서 미치는 거다. 때문에 나는 그들을 경멸한다.」 오래 살아온 만큼 현명하고, 현명한 만큼 서린은 분노했다. 「그들은 이미 엘프가 아니다. ‘열어 놓은 마음’을 지닌 그 고강하고 축복받은 종족은 이제 없다.」 “……그만. 그만해.” 굳이 에르니가 저지 하지 않았어도 서린은 더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괴롭게 헐떡이는 지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눈물이 복받쳤다. 이 지경까지 와버린 종족이 불쌍하다. 그들을 동정한다. 하지만 그만큼 경멸한다. 진실을 몰랐다면 그런 그들과 똑같았을 자신에게 우월감을 느낀다. 그리고 우월감을 느끼는 자신역시 경멸한다. 모든 게 싫다. 미치지 않았음에도, 아니 미치지 않았기에 더더욱 죽고 싶어진다. 죽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시륜…….” 나직이 지켜야 할 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고 냉정하게 자신을 다독였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해야 할게 있다. 해야만 하는 게 있다. ‘……지켜야 해.’ 얼굴에서 두 손 떼기 전에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그래봐야 잔뜩 젖어 있는 눈가며 뺨은 여전했지만 에르니도 서린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랜드가 죽었어.” 「그런데?」 처음과 똑같은 대화가 오갔다. “시륜이 지목 당했어.” 「…….」 아무리 서린이라 해도 이것만은 당혹스러웠는지 선뜻 답을 못했다. 그러나 절대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에르니 역시 그것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실을 안다. 그분에게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선조가 부끄럽다. 또한 장로로서, 홀로 미치지 않는 자로서, 종족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것은 자신의 아이에 대한 부정(父情)이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지. 네 말은 당연히 사실이겠지.” 에르니는 혼란을 애써 걷어냈다. 그것이 부모 된 자의 강함이었다. 비록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일이 더 쉽게 되겠구나. 적어도 그랜드의 부재로 고생할 이유는 없으니까. 스스로의 광기까지 내가 어떻게 해줄 수는 없어.” 자기 스스로가 미치겠다는 걸 막아설 정도의 오지랖은 없다. 지금의 에르니는 스스로를 지탱하기도 버거웠다. 그 버거움 속에서 아이조차 떠안고 있어 더더욱 힘들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까지 신경써줄 여력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다. “창세신전에서 연락이 와서 갔다 왔어.” 「거기서 왜?」 “마족에게서 서신이 왔어. 검 하나를 찾으니 도움을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창세신의 허가에다 그 징표까지 받았더군. 검이라고는 칭해있었지만 진짜 원하는 건 시륜이었어.” 「마족이라면…… 그녀인가?」 “왜 이제와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어미가 자식을 찾는데 이유가 필요하겠어.” 「시륜은 응하지 않을 거다.」 “알아. 하지만 응하게 해야 해.” 「시륜은 진실을 듣기를 거부했다.」 “듣고 싶게 해야 해. 듣기 싫다 해도 듣게 하겠어. 그 아이는 총명해.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르지. 단지 인정하기 싫은 것뿐인지도 몰라.” 에르니는 그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계획했다. 아니,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을 이라고 하기는 무리가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으니까. 그 아이의 선택, 미래……. 그리고 이번에는 에르니의 심중과 욕심까지도 끼어들어, 그 계획은 본인이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치밀하게 차곡차곡 탑을 쌓아갔다. “이만 가볼게. 오늘은 쉬고 싶어.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까.” 「그래.」 “그리고 부탁 하나가 있어.” 서린은 그를 올려보는 것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독을 좀 주지 않겠어? 죽지는 않고 체력만 빼앗아 가는 것으로.” 에르니의 눈앞에 초록빛이 도는 투명한 수분들이 이리저리 출렁대며 단 한 방울만을 만들어냈다. 물론 서린의 것이었다. 에르니는 나뭇잎 하나를 따, 그 위에 그것을 받았다. 독은 이슬처럼 나뭇잎 위에 내려앉았다. “고마워.” 첸으로 갔을 때, 에르니는 자신의 첸에 누군가 와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익숙하고 반가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 비틀비틀 힘없이 걷던 에르니의 몸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했던 얼굴에 웃음을 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를 반겼다. 부모란 이런 것이다. “시륜. 왔구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왔어, 엘." 마음에 들지 않는 자에게는 애칭을 허락하지도 않으며, 자신 역시 상대 애칭을 부르지 않는 라이시륜이었기에 그의 입에서 나온 애칭이 즐겁기만 했다. 란티리네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듣지 못했던 애칭이다. 란티리네가 죽고, 그를 초록 고향 밖으로 내보낼 때 처음 들었던 귀한 애칭. 에르니가 처음 그를 란티리네의 자식이 아닌 자신의 아이로 본 순간이기도 했다. “이번에…… 그랜드가 죽었지?” 그 역시 혼혈이지만 엘프의 피가 흐르는 몸이다. 미약하게나마 지목 당했음을 느낀 모양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기에 에르니를 찾아온 것일 테지. 에르니는 그 속을 뻔히 알면서 시치미를 뗐다. “명이 다했으니 죽었지. 그랜드 수명은 알지 않느냐. 그보다 시륜. 이번에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뭔데?” 아닌 척 하지만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눈은 초롱거린다. 에르니가 주는 재미있는 정보가 어떤 것인지 아는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에르니가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을 보아 자신의 불길한 느낌이 틀리다 생각한 탓이 더 클 것이다. 에르니는 차곡차곡 자신의 계획을 정리하며 천천히 책장 쪽으로 걸어갔다. “태고 나무는 알 테지?” “회색 고향에 있는 나무 말이야?” “그래. 어디서 봤더라?” 맨 끝부터 걸어가 훑기 시작했다. 생각할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이대로 마족과 라이시륜을 만나게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어머니를 만나려 하지 않을 테고, 엘프를 택하지도 않을 것이며, ‘선택’도 하지 않아 곧 죽음을 택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엘프들의 강제 추대로 그랜드에 올라버릴 지도 모르지. 그 어떤 것도 에르니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여기 있구나.” 보호 마법이 걸려있는지 깨끗한, 그러나 제책 방법이 오래된 서적을 뽑아 펼치고는 어느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자, 이거다. 이 책에 의하면 태고 나무에는 ‘핵’이 있다는 구나.” “핵?” “태고 나무는 거대하다. 보통 식물이 아닌 건 확실하지. 제 1기 마도 때부터 살아온 나무니까. 여기에는 이 태고나무를 다스리고 보호하는 힘의 조절체가 있다고 적혀있다. 때문에 그 긴 세월을 살아올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 핵을 손에 넣으면 태고나무를 지키던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도 해놓았다. 정확히는 이렇게 써 있다. ‘덩치가 비대하는 것만으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 지혜롭고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창세신께서는 그것을 유념하셨고, 당신께서 직접 심으신 태고 나무에 스스로의 덩치를 보호할 ’뇌‘를 부여하셨다’.” 라이시륜은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그걸 무슨 수로 가져. 핵이라면 태고 나무의 의지와 일맥상통 할 텐데.” “여기서 끝이 아니란다. 더 들어 보렴. ‘또한 그 뇌를 지켜줄 ‘두개골’을 배치하셨다. 그것은 나무의 가지이되, 머리의 현명한 힘의 조절로 태고 나무의 정수를 이어받아 그 어떤 금속보다 강하고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 그제야 라이시륜은 다시 흥미를 보였다. 두개골이라면 그 강함만으로 가치가 있지 않은가! 물론 진짜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에르니가 허튼 정보를 알려준 적은 여태껏 없었다. 게다가 저것은 마도의 최절정이라 불리던 제 1기 때의 것이 아닌가. 라이시륜은 에르니와는 달리 고대어는 모르지만, 저 제책 방식이 제 1기 마도 때의 방식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렇다면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에르니는 뻔히 알면서 물었다. “가볼 테냐?” “당연하지! 재밌을 것 같은데!” “그럼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어서 가보려무나. 그랜드가 부재중이라 엘프들이 광기를 띠고 있다. 지금은 머물만한 상황이 못돼.” 에르니는 일부러 독촉해댔다. 당장이라면 납득할 얕은 변명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평소의 그였다면 일찍 가려는 걸 붙잡아서라도 다정하게 차와 음식 따위를 권했을 텐데 말이다. 라이시륜은 약간 당황했지만 금방 납득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이 시기가 아니라 해도 그는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에르니만 아니었다면 두 번 다 시 이곳에 발을 딛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그럼 갔다 와서 봐, 엘.” “그래. 조심해서 다녀 오거라.” 떠나려는 라이시륜의 머리를 언제나처럼 쓰다듬어주자,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떠났다. 새삼스러운 일인데도 영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빠르게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무너질 듯 비틀거렸다. 그러다 꿋꿋하게 바로섰다. 혼란은 여기까지다.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먼저 손에 들린, 고대어로 ‘죽음과 안식의 신교의 독립, 그 정당성에 대한 고찰’이라 써진 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 품에 소중히 넣어둔 나뭇잎을 펼쳤다. 동그랗게 뭉쳐 있는 한 방울의 독은 흡사 젤리처럼 이리저리 출렁되면서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주가 발동되지 않는다면……. 내가 그랜드의 업을 짊어지고 있다면…… 한 가지는 편해졌군.”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나뭇잎을 들고 있던 손을 거두어, 합장했다. 어떻게 했는지 나뭇잎은 그 위치 그대로 고정되어 허공에 떠있었다. 나직이 주문을 외우는 에르니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원이 그려졌다. 에르니의 주문이 계속 될 때마다 원 안에는 빼곡히 직선, 곡선, 세모, 네모, 원, 기이학적인 문양, 룬어 따위가 채워졌다. 에르니는 합장한 손을 풀고, 오른 손으로 나뭇잎을 가리켰다가 이어서 마법진에서 유독 빛을 내는 원형을 가리켰다. 그러자 나뭇잎 위의 독이 그 손짓을 따라 떠올라 원형 안에 스며들었다. 그것으로 시전은 끝났다. 에르니는 양 손을 옆으로 활짝 펴며 외쳤다. “생*성*되*리*라*” 첸 내부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의 강한 빛이 일순 뿜어졌다 사라지고, 첸 안에는 마법진 대신 동그란 초록빛 광구가 남았다. 그것은 에르니가 고안한 매우 골치 아픈 봉인구였다. 우울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본 에르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에르니가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들과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수정구가 놓여있었다. “창세신전 교황에게로. 초록 고향의 장로, 에르니 야 아트리드가.” 엘프는 락, 아, 야, 타, 탄이라는 다섯 단계의 중간 이름을 가진다. 락은 어린아이, 아는 청년층, 야는 장년층, 타는 노년층, 탄은 죽은 자가 가지는 명칭이다. 여기서 락은, 본래는 첸으로 독립하지 못한 엘프에게 붙여졌으나 지금은 계승식을 2번 이상 치루지 못한 엘프에게 붙여지고 있다. 그리고 타라는 호칭은 이미 쓰이지 않은지 오래다. 노년까지 가지 못하고 모두 자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 락아타 초대 황제는, 언젠가 모든 명칭을 사용하길 바란다는 의미로 자신의 국명을 죽은 자를 칭하는 ‘탄’을 뺀 나머지 중간네임을 모아 지으려 했다. 그래서 락아타의 제국명은 처음엔 락아야타가 될 뻔했으나, 신하들이 ‘야’의 엘프들은 자살을 얼마 앞둔 엘프들이라 불길하다고 한결같이 반대하여 그것을 뺀 세 개의 호칭으로 국명이 정해져 지금까지 왔다. ‘어쩌면 내가 저주 이후 최초로 타를 단 엘프가 될지도 모르겠군.’ 의미 없이 쿡쿡 웃는 동안 수정구는 흐려졌다 도로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중간에 걸쳐지는 단계를 무시하고 교황이 바로 나타났다. “어찌 되었소? 다른 엘프들은 무어라 하오?” “기뻐하시게. 다들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고 있으니.” 에르니는 느긋한 얼굴로 부드럽게 답했다. “그럼 이제 어찌 할 생각이오? 그 ‘검’은 어떻게 할 거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마족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빼돌린 참이네.” “어째서? 밖으로 돌리면 돌릴수록 위험부담이 커지는 걸 알지 않소!” “그 마족은 무지하지 않아. 그는 천년 전에 이곳을 찾은 적이 있는 자이기 하고. 초록 고향에 엘프의 마을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지. 그러니 어떤 은신 수단도 없는 이곳에 두는 것이 더 위험해.” 달래듯 말하자 교황은 한층 누그러져 사과했다. 에르니가 생각 없이 움직일 위인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급함에 감정적으로 나와 버린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에르니는 쾌히 사과를 받고, 말을 이었다. “‘검’이 돌아오기 전까지 은닉 마법진을 준비할 거네. 마족의 뛰어난 능력으로도 찾을 수 없는 견고한 마법진을. 그러나 그 전에 그대들이 해야 할 것이 있어. 만약 그 ‘검’이 발동되면 마족은 이쪽을 찾을 필요도 없이 그리로 갈 테고, 또 발동되지 않는다 해도 마법진이 준비되기 전에 와서도 곤란하거든.” “해야 할 것이라니? 무엇이오? 뭐든 말하시오.” 대책 없이 무조건 ‘절대 안돼’만을 부르짖고 있던 차라 무엇이든 달게 해줄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읽은 에르니는 더욱 풍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시간을 벌어주게. ‘검’이 발동되든 안 되든, ‘검’에게도 이쪽에도 오지 않도록 해주게.” “어떻게……?” 교황은 조심스럽게 방법을 물었다. 에르니라는 엘프는 호락호락한 엘프가 아니다. 뭔가 말을 할 때는 의당 그에 대한 준비와 생각을 충분히 해두었을 터. 교황의 예상대로 에르니는 기발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증명해 보이라 해. 그 ‘약속된 지배’가 진짜 고서에 전해지는 그 창세신의 ‘약속된 지배’인지.” “오오!” 그래도 나름대로 오랜 세월을 굴러먹은 교황인지라 단박에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서두르라는 에르니의 말에 교황은 곧 수정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에르니는 모든 힘을 소진 듯 테이블에 엎드려 거칠게 헐떡거렸다. 울컥 눈물이 치밀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 깊은 곳이 아파와 견딜 수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에르니는 킥킥 웃으며 속삭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편해졌어.” 수정구에 비치지 않도록 사각에 내려놓았던 봉인구에 손을 뻗어 가까이 끌어왔다. 그 봉인구의 촉감은, 자석이 같은 극끼리 만났을 때 서로 밀어내는 듯한 막연한 느낌의 촉감이었다. 에르니는 그것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적어도 장로의 책임에 얽매이지는 않을 수 있으니까. ……더 이상 그들을 이끌어야할 책임에 발목 잡히지 않을 테니까.” 스스로를 죽여 가는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어졌다. 그것 하나, 오직 그거 하나만 편해졌다. 모든 것이 에르니의 계획대로 돌아갔다. 마족은 ‘약속된 지배’의 진위를 선보이느라 라이시륜의 기척을 쫓아가지 못했다. 후에 속았다는 것을 안 그가 필사적으로 뒤져, 회색고향 직전까지 추적했으나 신성마법을 쓸 수 있는, 사제급 고위 신관들의 저지로 그 이상 쫓지는 못했다. 그 대가로 당시 저지했던 신관들의 몰살을 안겨주었지만 말이다. 정보의 허위성을 안 라이시륜은 에르니가 쫓아내듯 자신을 내보냈다는 것을 떠올리고 곧장 초록 고향으로 달려왔다. 본래 한번 의심스러우면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법이었다. 만약 라이시륜을 그렇게 보냈던 이가 에르니가 아닌 다른 자였다면 그렇게 무작정 달려오는 대신 상대가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 건지 차분히 시간을 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에르니는 자신의 계획에, 라이시륜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자신에 대한 라이시륜의 무의식중의 신뢰까지도 집어넣었다. 에르니가 자신을 찾아온 라이시륜의 쇄골부근에 초록색 봉인구를 박아 넣었을 때, 라이시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직되어 차라리 비명만 못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이 저 자들에게 이용당하는 거라 생각했어.” “나는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는다, 시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에르니.” 애칭이 아닌 이름. 그 명백한 거절에도 에르니는 묵묵히 끌려가는 라이시륜을 바라만 봤다. ‘증오해라. 그리고 절대 엘프 따위 되지 말거라.’ 단순히 그랜드가 되지 않길 바란 거라면 이런 식의 연극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에르니가 바라는 건 그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절대 나보다 먼저 죽지 말거라, 시륜.’ “엘.” “……은릴이냐.” 에르니의 지시에 따라 머리띠로 귀 끝을 가린 은릴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그것 외에도 에르니는 그녀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나 잠시 마을을 떠날까 해.” “이 시기에?” 정말 말 그대로 ‘이시기’였다. 그랜드는 죽고, 후대 그랜드로 지목당한 자는 엘프를 싫어하는 혼혈인데다 마족이 그를 찾고 있다. 어쩌면 이계에 후대 그랜드를 뺏길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에르니와 같은 장로인 그녀가 마을을 나간다니. 은릴은 우아하게 웃었다. “배우고 싶은 게 있어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조금 멀긴 하지만, 텔레포트로 금방 돌아올 수도 있고.” “배우고 싶은 거라니? 꼭 지금 배워야겠어?” “왠지 심란해서……. 그랜드가 죽으니, 그 전의 그랜드가 죽었을 때 자살해버린 남편 생각도 나고. 당분간 마을을 벗어나고 싶어.” 그러고 나서 미안한 듯 에르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엘이 있으니까 걱정 없이 갔다 올 수 있어. 부담주어 미안해.” “아니, 괜찮아.” 은릴은 에르니의 어깨를 굳게 잡았다 놓고 돌아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르니는 문득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무척이나 조용하고, 낮게 울렸다. “그런데 배우고 싶다는 게 뭐야?” 그 물음에 고개를 돌려 에르니를 본 은릴은 환하게, 정말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자수.” “…….” 에르니는 침묵했다. 평소 성격 좋아 보이는 웃음도 지운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릴……. 오랜 친구. 소중한 친구. 지켜주고 싶은 친구. 현명하여 늘 의지되던 친구. “아란에게 멋진 신부 옷을 만들어주고 싶어. 이번 계승식이 끝나면 그 아이도 ‘아’가 되잖아. 언제 결혼하게 될지 모르니까. 후후. 너무 성급한가?” “……그래. 잘 배우고 와. 틈나면 내 것도 만들어주면 좋고.” 에르니는 일그러진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은릴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떠났다. 그렇게 에르니는 소중하고 소중한 친구를 떠나보냈다. 그 후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라이시륜이 한계까지 다다랐다는 걸 안 에르니는 이제 슬슬 움직일 때라고 판단했다. 마족의 움직임도 극에 달했고, 무엇보다도 레이아사의 날이 가까워지면서 그분의 움직임이 묘해졌다. 에르니는 온전한 진실을 아는 유일한 엘프였다. 때문에 레이아사 아나가 그분에게 어떤 존재인지, 레이아사 아나의 날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도 알고 있었다. 레이아사 아나의 날은 결계가 잠시 약해지는 찰나의 순간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기 보강 성격이 있는 결계가 다시 굳건히 자신을 굳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에르니는 오랜만에 은릴을 찾았다. 그녀는 자수로 유명한 마을에서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말이다. 에르니는 그녀를 떠나보냈을 때의 일을 애써 잊으려하며 희망을 걸었다. 은릴은 현명하다. 엘프 중에서는 그랜드를 제외하고 자신과 대등한 존재였다. 서린조차도 한때 그녀를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니……그녀는 얽매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공포에, 광기에, 굴레에. “어머, 엘! 무슨 일이야?” 환하게 자신을 반기는 그녀를 보며 에르니는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아직도 그 아이는 말을 안 듣니?” “응.” “후우. 그렇다고 언제까지 감금할 수는 없잖아? 뭔가 해결대책이 없을까?” “그러게.” 에르니는 조금씩, 조금씩 기대하려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모습만큼은 평소 그녀와 다른 게 없었다. 사려 깊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배려 깊은 그녀였다. “애당초 그 아이가 지목을 당한 게 문제야.” 한숨을 쉬며 머리띠를 만지작거렸다. “왜 하필 그 아이가…….” 수 십 번도 더 곱씹었던 말을 또다시 꺼내며 은릴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어. 마족은 왜 이제 와서 그 아이를 찾는 걸까? 모정?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흐르지 않았나? 그런 거였다면 란틸이 죽었을 때 바로 찾아왔어야 했잖아?” “뭔가 사정이 있겠지.” 점점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에르니에게 은릴이 은밀히 물었다. “혹시 그 반지 때문이 아닐까?” “반지?” “란틸의 부인이 결혼식 때 그에게 주었던 게 있잖아. ‘침묵의 대가’! 그것이 가진 권위와 힘이 이제와 새삼 아쉬워진 게 아닐까?” “…….”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 그런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닐 것이다. “그건 아니야.” 부정한 에르니는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그랜밀라 나이트의 갑주와 란티리네의 표식을 지나 줄에 엮여 있는 반지를 풀러냈다. “만약 그들이 원한 게 그것이었다면 처음 날 만났을 때 달라고 했을 거야.” 그리고 은릴과 그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 반지를 올려놓았다. 그것은 은릴이 거론했던 ‘침묵의 대가’이자 라이시륜이 그에게 주었던 최초의 선물이었다. -내가 마을을 나온 이후에 다른 엘프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보내왔어. 중요한건 그거 하나였으니까 순순히 준거겠지. 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물려 준 것은 그거 하나뿐이야. 다른 것들은 아버지를 떠올리기 위해 가지고 있지만 언젠가 아버지에게 돌려줘야해. 그래서 나에게 있는 건 그것과 표식뿐이야. 엘은 지기도 아니고 영원도 아니니까 표식은 줄 수 없어. 그래도 뭔가 주고 싶어. 아버지를 위해 울어준 것도, 아버지의 기일에 음식을 장만해 주는 것도, 아버지의 무덤을 보살펴 주는 것도 엘뿐이니까. 엘이 가지고 있는 거라면 아버지도 괜찮아 하실 거라 생각해. 아니라도 별 수 없지만. 하하. 란티리네의 죽고 몇 년인가 지났던 날, 아무도 찾지 않는 그의 무덤에서 생전 그가 좋아했던 음식을 벌려 놓고 술을 마시던 에르니에게 라이시륜은 그리 말했다. 붉어진 눈을 긴 앞머리로 가리고 에르니가 건네주는 술잔을 몇 번이고 연거푸 비우다가 그리 말했다. 어색하게, 성질에 안 맞는 듯 긁적이면서. “이게 왜 네게 있는 거지?” 퍼뜩 회상에서 깨어난 에르니는 오랜 친구의 놀란 얼굴을 보고 웃었다. “난 그 아이가 가지고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 네가 중간에서 빼돌렸던 건 아니겠지?” “설마. 그 아이가 내게 줬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기에 에르니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답을 들은 은릴은 별안간 안색을 달리하여 물어왔다. “그럼 그 아이가 너를 자기 대신 그랜드로 추대했다는 거야?” “……뭐?” 믿겨지지 않는 말이었다. 방금까지도 2년간이나 감금되어 있는 그 아이를 염려하고 있던 그녀가 할 소리가 아니었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저 눈빛은……. 에르니의 반문에 은릴은 얼른 얼굴을 바꿨다. “미안, 흥분했네. 생각이 짧았어. 추대한다고 해서 추대되는 게 아니었지.” 에르니는 암담함에 숨이 멎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어린 탐욕과 열망……. “……그, 그 아이가 유일하게 너를 따른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걸 줄 정도까지인 줄 몰랐어.” 은릴은 에르니의 침묵에 당황했는지 수습하려는 듯 얼버무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주춤거리며 반지에 손을 댔다. 에르니가 별 제지를 안 하자 그것을 눈앞으로 가져가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소 초조한 듯 마른침을 삼키다가 에르니를 돌아보았다. 에르니는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능청스런 웃음도, 느긋한 눈빛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에르니를 마주본 은릴은 흠칫하며 반지를 움켜쥐었다. “이거…… 잠시만 빌려주지 않겠어?” “어디에 쓰게?” “조금 쓸데가 있어서.” “어디에?” 에르니가 집요하게 묻자 은릴은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누굴 만나고 싶은데……. 그냥 가면 안 만나 줄 것 같거든. 이 반지의 권위를 빌리면 어떻게 주선이 될 것도 같아서…….” “그래?” “응.” 에르니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그래.” “고마워! 곱게 쓰고 돌려줄게!” 에르니는 암담하게 두 눈을 감고 속삭였다. “그래……. 그렇게 해…….” 마을을 돌아온 에르니는 어지러운 머리를 움켜쥐고 라이시륜에게로 갔다. 라이시륜은 그가 왔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냥 그렇게 우두커니 있었다. 에르니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비틀비틀 벽에 기댔다.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미치고 싶을 정도로. 아무 것도 모른 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지켜야 할 것이, 지키고 싶은 것이 또 하나 사라졌다. 스스로가 미쳐가는 것을 참견할 수는 없다. 그는 이미 그녀를 저주에서 지켜주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로 미치는 것을 택했다. 이것은 배신이었다. 에르니는 배신당한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멍하니 주저앉아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깍지 끼고 고개를 숙였다. 창백하게 질려, 식은땀에 젖어, 독기를 품은 라이시륜을 마주보기 힘들었다. 에르니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수습했다. ‘어리광 부리지 말자. 어리광 부리지 말자. 어리광 부리지 말자.’ 지켜야 할 것이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에르니의 독선이다. 자신의 독선으로 저 아이는 저렇게 고통 받고 있다. 지금 에르니가 그러한 것처럼, 저 아이 역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에르니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야. 나를 위해서다. 나를 위해서다.’ 에르니는 애써 힘주어 일어났다. 그리고 저편의 라이시륜을 마지막으로 보고 돌아섰다. 지하에서 나오는 그를 몇몇 엘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니. 마족이 이 근처까지 왔다 갔습니다.” “마법진을 좀더 보강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 정도는 알아서 해!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 자가 멀리 떨어졌을 때 보강해라. 지금 했다간 그 마나의 움직임에 이곳을 간파하고 말거다.” “예. 은릴은 아직도 돌아오실 생각이 없답니까?” “그래…….” 에르니는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꾹 삼키고 엘프들을 돌아보았다. “은릴의 동태가 이상했다.” 만나고 싶은 이가 있다고 했다. 그것도 ‘침묵의 대가’의 위엄에 빌붙어야 간신히 만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존재……. “아에서 서너 명을 차출해 감시하게 해라. 만약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보고하고…….” 불길하다. 반지를 보았을 때의 욕망. 헤어질 때 그녀가 했던 말. 모든 것이 불길하다. “만약 그 이상한 움직임이 훼오트라 아나와의 만남 주선이라면…….” 훼오트라 아나만큼은 안된다. 그분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저주를 내린 자에게 빌붙어 무얼 하려는 건가. 은릴은 미쳤다. 미친 은릴은 권력을 탐하고 있다. 명예를 원하고 있다. 평소 그녀가 그렇게 안타까워했던 엘프들의 명예욕에 그녀 자신도 동참하고 말았다. 가장 비참한 형태로 그녀는 미쳤다. “만약 그렇다면 보고 할 것 없이 죽여도 좋다.” 그 말은 에르니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덤덤하게 나왔다. 배신감에 괴로워했던 것이 방금인데도 참으로 덤덤하게, 차분하게, 냉정하게 나왔다. 그것은 은릴을 비롯한 모든 엘프, 스스로 미치길 택한 자들에 대한 에르니의 분노였다. 그리고 포기였다. 이제 더 이상 붙잡지 않을 것이다. 미련을 두지 않을 것이다. 홀로 진실을 안다는 것에 얽매여 스스로 책임을 덮어쓰지도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할 것이다. 이제는 그럴 것이다. *** 에르니는 다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아이를 마주하며 웃었다. 이제는 멋대로 살 거다. 엘프라는 종족을 배신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에르니를 배신했다. 그러니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네가 살길 바란다.” “……뭐?”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얼굴로 라이시륜이 되물었다. 에르니는 또박또박 한마디, 한마디를 소중하게 입에 담았다. “네가 나보다 더 오래 살길 바란다.” 그리고 라이시륜이 그토록 낯설어하는 자상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라이시륜이 그토록 어색해 하는 다정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비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길 바란다.” 아비라는 단어에 라이시륜은 멍하니 에르니를 바라보았다. “때문에 네가 세 번째 선택마저 거부하지 않길 바랐다. 엘프가 되길 원하지 않지만, 네가 세 번째 선택을 하길 원했다. 그래서 엘프를 증오하게 했다. 감정이란 상대적인거지. 엘프를 미워하는 만큼 저 남자에게 상대적인 호의를 느끼길 바랐다. 나마저 너를 저버린 만큼 어머니를 그리워하길 바랐다.” 한마디, 한마디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을 때마다 에르니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이 하나둘씩 끊겨나가는 것을 느꼈다. 홀가분했다. 자유로웠다. 또 조금은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나는 네가 저 남자를 따라 마계를 가고, 또 마족이 되길 바랐다.” 아아악!”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듯 아사라느는 비명을 질렀다. 이건 배신이다! 에르니가 우리를 저버렸다! 여태껏 혼자 생각 깊은 척, 혼자 아는 척, 갖은 가증을 떨어대며 이렇게 뒤로는 기만하고 있었다. 그의 가증스러운 가면과 소름끼치는 이기심이 어머니를 죽였다! 진짜 살해자는 바로 에르니였다! 아사라느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어들고 에르니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번개에 잔뜩 그을려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다는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배신자! 살인자! “이 배신자!” 처음 아사라느가 비명을 지르고, 또 검을 들 때 만해도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그녀를 보던 에르니가 그 단어를 듣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에르니의 분노어린 진짜 얼굴이었다. “커억!” 그 누구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을 때, 에르니는 아사라느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올리고 있었다. 검은 여전히 그 손에 쥐어져 있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듯 아슬아슬했다. “누가 배신자라는 거냐!?” 엘프는 ‘열어 놓은 마음’을 지닌 존재다. ‘열어 놓은 마음’을 지닌 존재는 절대 살기를 낼 수 없다. 그런데도 모든 이들은 지금 에르니가 살기를 뿜어내고 있다고 느꼈다. 그만큼 그가 보이는 분노가 짙고 깊고 어두웠다. “내가 배신했다는 거냐? 내가? 나를 배신 한 건 너희야!”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에르니의 통한과 고통, 그리고 분노. 그것은 슬프고 아프고 무서웠다. 살기를 다스리는 마족, 하환마저 질려버릴 정도로. “그랜드가 없어서 힘들다고? 그랜드가 없어서 미쳐간다고? 그랜드가 없어서 자살한다고?” 아사라느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에르니를 노려보았다. 배신자의 헛소리 따위 들을 필요 없다. 어머니의 원수! 우리를 기만한 자!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용한 자! 배신자!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아사라느는 신음성과 함께 말했다. “배……신……자!” “배신자는 너희다!” 에르니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것은 피눈물이었다. “저주는 발동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너희는 미쳐가며 그랜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사라느의 눈이 크게 치쳐 떠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검마저 놓쳐버렸다. 에르니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아사라느를 거칠게 떨쳐냈다. 바닥을 나뒹굴던 아사라느는 기침을 하면서도 비명처럼 말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성벽 아래서 모든 것을 듣던 엘프들도 하나같이 에르니를 욕하고 있었다. “거, 거짓말이야!” “배신자!” “이 이상 우리를 기만하지 마라!” 그때 유시리안은 조소했다. 그 조소는 하나같이 광기를 부리는 엘프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래서 에르니, 당신은 미치지 않고 있는 거였군.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서열급 정령을 소환하지 않나, 그랜밀라 나이트 갑주를 입지 않나.”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엘프들은 순식간에 침묵했다. 혼란스러웠다. 지금도 미쳐가는 느낌이 생생한데 저주가 발동하지 않다니? 왜? 그랜드가 없는데 왜?! “거, 거짓말. 그랜드가 없는데 저주가 발동하지 않을 리……. 우리는 미쳐가고 있는데? 어머니는 끝내 자살했는데? 저 자가 그랜드로 지목 당했는데? 저 자는 그걸 거부했는데?” 아사라느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에르니는 다시 자신을 수습하며 슬픔도 고통도 분노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무표정한 얼굴로 아사라느와 저편의 엘프들을 한번씩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라이시륜을 보며, 자신을 납득시켜달라는 그의 눈빛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랜드는 엘프의 왕이다. 허울뿐인 왕이지 실제로는 희생양이다. 여기까지는 아사라느, 너도 알고 있을 게다.” 다시 차분해진 그가 아사라느는 무서웠다. 그녀가 무서워하건, 듣지 않건, 믿지 않건 에르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엘프를 납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이시륜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랜드가 왜 희생양이라 불리는지 아느냐, 시륜?” “…….” “그건 진실의 무게를 홀로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란다. 란틸은…… 그래, 녀석은 완전한 희생양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론되자 라이시륜은 움찔했다. “왜냐면 녀석은 홀로 짊어지지 않고, 자신의 지기와 그것을 나눴기 때문이다.” “서, 설마…….” “그래, 바로 나다.” 에르니의 목소리는 절대 크지 않았다. 좀 전에 유시리안의 목소리보다도 작았다. 낮고 고저 없는 그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지경이었는데도 성벽 안팎, 위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은 분명 그것을 들었다. 그만큼 사위가 조용했다. “때문에 저주는 발동하지 않았다. 그랜드는 엘프의 희생양. 그랜드의 희생을 빌어 엘프는 평정을 얻는다. 결국 진실을 아는 희생양만 있다면 엘프는 미치지 않는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 나라는 희생양이 있다.” 에르니는 낮게 웃었다. 그리고 아사라느를 보았다. 그리고 성벽 밑 엘프들을 보았다. “그런데도 이들은 미쳐가는 구나. 그랜드가 필요하다는 구나. 후후.” 그 나직한 웃음은 약하고, 섬뜩하고, 처절했다. 아사라느는 혼백이 빠져나간 듯 창백하게 굳었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머니는……. “은릴은 누구에게도 살해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살했다. 스스로를 광기로 몰아세우고, 그것에 만족하며 자살한거다.” 반박할 기분조차 들지 않는 냉정한 말이었다. 에르니는 깊이, 깊이 심호흡하다가 하환을 보았다. 새삼스레 엘프들의 문제에 시간을 뺏길 생각 따위 없다. 이제 그는 엘프들의 문제에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기로 결정했으니까. “나도 묻고 싶군. 그녀는 왜 이제 와서 시륜을 찾는 거지? 납득할 이유가 없다면 절대 보내지 않겠다.” 비록 에르니의 욕심으로는 마계로 보내고, 마족을 선택하게 만들고 싶지만 그것이 라이시륜을 불행으로 몰고 간다면 자신의 욕심쯤은 접을 수 있었다. 그는 수단을 위해 목적을 잊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환은 그의 단호함을 읽고 한숨을 쉬었다. 포기의 한숨이었다. 어차피 라이시륜을 설득하려면 하긴 해야 하는 말이었다. 그는 라이시륜을 향해 말했다. “주군께서 많이 편찮으십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아들을 뵙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 그녀가? 암염(暗炎)의 지배자, 카이레느가?” 에르니가 당황하며 되묻는 말에 라이시륜은 물론 모든 이들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암염의 지배자 카이레느라면 마계 4대 마왕 중 하나가 아닌가! 주위가 어찌 반응하듯 에르니는 하환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환은 다시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번에도 라이시륜을 향해서였다. “천년 전부터 아무것도 드시질 않고 계십니다. 때문에 육체가 쇠하시어 힘과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지금도…… 서서히 죽어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정색하며 이어 말했다.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지는 모르나, 주군께서 곡기를 끊으신 것은 부군의 죽음 이후입니다. 또 이제 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천년 전 란티리네님의 죽음을 아신 주군께서는 저를 보내시어 라이시륜님을 찾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초록 고향은 룬 황국의 결계 내에서 있었고, 마족인 저로서는 그 결계를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기간이 다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저는 다시 찾으려 나섰습니다만 주군께서 라이시륜님이 란티리네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을 거라며 막으셨습니다.” 그러다 침울하게 덧붙였다. “실은 이번에 나온 것은 저의 독단입니다. 하루하루 죽음으로 가시며 가족분의 이름만 부르시기에…….” 뜻하지 않게 어머니의 사랑을 듣게 된 라이시륜은 믿지 않는 다며 따지듯 물었다. “그토록 사랑했다면 왜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은 거지? 왜 홀로 떠난 거냐고!? 이 모양 이 꼴인 엘프가 되는 게 그렇게 억울하던가? 지배자로서의 위엄과 힘을 잃는 게 그렇게 두렵던가?” “그런……!” 화를 내려는 하환을 말리며 에르니가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란다,” 그리고 부드럽게 물었다. “이제 진실이 듣고 싶은 거니, 시륜?” “…….” 에르니는 재차 물었다. “이제는 네 어머니의 진실을 알고 싶은 거니?” 그것은 독촉이 아니었다. 강요도 아니었고, 압력을 주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배려 깊게, 라이시륜의 의사를 존중하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듣고 싶을 때 알려 주겠다 말을 지키기 위해. 라이시륜은 나직이 답했다. “거창하게 진실이라고 할만한 거라면 해봐.” 그 버르장머리 없는 퉁명함에도 에르니는 웃었다. 라이시륜이 천년 만에 어머니를 향해 한발 내딛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르니가 의도했던 대로, 엘프에 비하면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상대적으로 덜해진 덕이었다. 에르니는 딱 잘라 말했다. “배신자는 네 아비다.” “……!?” “화가 나더라도 내 말을 끝까지 들으렴. 네 어머니는 암염의 지배자 카이레느다. 너는 모르겠지만 반려의 의무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단다. 그것은 일족의 지배자인 경우다. 즉, 정령의 수장과 인간이 반려라면 인간은 정령이 될 수 있으나 정령왕은 인간이 될 수 없다. 또 반대로 서열급 정령과 인간의 왕이 반려라면 정령은 인간이 될 수 있으나 인간은 정령이 될 수 없다. 란틸은 반려의 의식을 할 때는 보통 엘프였고 카이는 이미 왕이었다. 때문에 란틸이 마족으로서의 삶을 택해야 했다.” 라이시륜은 하, 김빠진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 난간에 기댔다. “그, 그렇다면…….” “총명한 시륜. 이미 다 알아차렸을 테지만 계속 말하마. 일단 시작한 이상 나는 모든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라이시륜의 질문을, 혹은 확인을 막으며 에르니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그것은 그가 말한 것처럼 의무 때문은 아니었다. 언젠가 서린이 그에게 그래주었던 것처럼, 라이시륜이 자신의 속에 묻혀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기 전에 냉정하게 확실히 정돈해 주려는 것이었다. “란틸과 카이는 반려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후로 미뤘다. 바로 네가 성년이 되길 기다린 거다. 혼혈은 섞인 종족이 어떤 것이든 20살에 성년이 되지. 그러니 그 둘은 20년만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고, 그것을 쉽게 하기 위해 란틸은 의무를 뒤로 미뤘다. 그러는 동안 그랜드가 죽었고 란틸이 지목 당했다.” 카이레느는 당연히 거부하라고 했다. 자신과 함께 하기로 한 약속을 저버릴 거냐고 화도 내고 애원도 했다. 그랜드는 엘프의 왕이요, 지배자다. 그랜드에게는 반려의 의무가 생기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왕이었다. 마계에서 왕이란 자의로든 타의로든 벗어날 수 없는, 죽을 때까지도 벗어날 수 없는 명예요, 권위였다. 때문에 그녀는 란티리네를 따라 엘프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란티리네는 아직 평범한 엘프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반려의 의무가 적용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랜드가 되는 걸 거부하고 미뤄뒀던 의무만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란틸은 그랜드를 택했다.” 에르니는 딱 잘라 정리했다. “배신당한 것은 너의 어머니다. 가족을 깨뜨린 것은 너의 아버지다.” 그리고 혼란해 하는 라이시륜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때문에 나는 네가 마족이 되길 원한다. 이대로 세 번째 선택도 거부하고 죽는 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란 건 안다. 네가 살아가길 바라는 게 내 이기심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에르니는 말끝을 흐리며 라이시륜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단다. 부디 네가 나보다 오래 살아주길 원한다.” “엘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다고 이러는 거야……. 내가 세 번째로 선택을 강요당하는 때쯤에는 엘이 죽고도 한참이 지났을 거라고,” 본인은 의식 못하는 듯 했지만, 라이시륜은 다시 에르니의 애칭을 입에 담고 있었다. 라이시륜이 불러주는 애칭을 좋아했던 에르니는 깊이 안도했다. 납득한 것이다. 인정한 것이다. 이해한 것이다. “엘프의 수명이 얼마라고 생각하느냐? 6천년? 7천년? 아니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자살을 했으니 진짜 끝은 알 수가 없어. 지금껏 미치지 않는 엘프는 그랜드뿐이었다. 그리고 그랜드의 시간은 천년에 한정되었지. 저주 받기 전, 모두가 미치지 않았던 때를 볼까? 그때는 기껏해야 2천년 정도만 살았다. 시륜. 그럼 나는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니? 그랜드도 아니면서 미치지 않는 나는 얼마나 살 거라 생각하니? 내가 그랜드가 되지 않는 한 기약 없이 살아갈게다.” “엘…….” “나는 무섭다. 혼자 남는 것이 무섭고, 더 이상 지킬 것이 없게 되는 것이 무섭다. 언젠가 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 무섭고, 또 언젠가 란틸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무섭다. 세월에 눌려 결국은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것이 무섭다.” “엘…….” 절절하게 느껴지는 에르니의 슬픔, 두려움, 고독에 라이시륜은 안쓰럽고, 또 안타까웠다. 에르니의 모든 고뇌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에르니가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살길 원한다. 혼혈도, 엘프도 아닌 마족으로서. 자식을 둔다는 건 그런 거란다. 멋대로 사랑하고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희생한다. 모든 게 이기적이야. 사랑하기에 이기적이 되어버리지.” 자식이라는 단어에 낯간지러운 듯 시선을 돌리다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아무 것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저주는 발동되지 않고 있다. 엘프들을 미치게 하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스스로다.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엘프를 포기 하지 않은 것이니까.” 에르니의 분노와 실망을 똑똑히 느낀 엘프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에르니는 그럼에도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엘프들을 확실한 멸망의 길로 몰고 간 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바로 저주라는 공포에 진 자신들이었다. 라이시륜은 에르니의 어깨를 강하게 맞잡아준 뒤, 하환을 보았다. “한 가지만 더 묻겠어.” “하문하십시오.” “왜 부모님께서는 처음부터 마계에서 살지 않은 거지?” 원래 이런 질문은 에르니에게 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라이시륜은 에르니에게 감정을 다듬을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 속을 읽었는지 하환은 퍽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엘프 사이에서는 이계의 혼혈. 즉 금기의 아이라 하여 배척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만 마족 사이에서는 살해를 당합니다. 마계에서 약한 자는 죽습니다. 마계에서 약한 것은 죄입니다.” “나는 약하지 않아.” 불쾌한 듯 반박했지만 하환은 피식 웃었다. “그건 지금 이야기겠지요. 당시에는 약하셨습니다.” “우습군. 그럼 마족들은 유아기가 없는 모양이지?” “저희는 알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순간 알을 깨고 나옵니다. 속계의 의미로의 유아기는 없습니다.” “그런가…….” 완전히 납득한 라이시륜은 얼굴도 제대로 기억 안 나는 어머니를 떠올려보며 미간을 모았다. 그때 끼어들며 속을 긁는 목소리가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유시리안이었다. “부모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어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절절 매는 구나?” “너야 말로 어미, 아비는 제 손으로 죽여 놓고 렌님께 애교부리잖아!” “내 아버지는 렌뿐이야. 그딴 연놈들 따위 알게 뭐냐!”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듯한 분위기 속에서 무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둘은 지기보다 가까운 사이 같아.” “악연이야!” “악연이야!” 둘은 동시에 버럭 소리 지르고 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딜린도 고개를 돌리고 웃어버렸다. “라이시륜님. 벌써 2년이나 지체했습니다. 주군께 남은 시간은 이제 얼마 되지 않습니다. 부디 결단을.” 이러는 동안에도 주군은 죽어가고 있다. 이제 길어야 한두 달 남았다. 좀 일찍 찾아서 아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얼굴이라도 보고 갈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또 내심 아들을 보고 기운을 차리지 않을까 기대가 있기도 했다. 묵묵히 생각에 잠겼던 라이시륜이 곧 쌈박하게 말했다. “마계로 가겠다.” “네 놈의 악마 같은 성격과 딱이다! 가서 그냥 박혀 살아라.” “네 놈에 비할 소냐? 아니지, 네 놈은 그쪽에서도 거부할거다! 그쪽도 상식이란 게 있으니 말이다!” 으르렁거리는 둘을 정리한 건 무하였다. “마족이 될 생각이야?” “글쎄.” 말끝을 흐리며 에르니를 보았다가 무하를 돌아봤다. “어머니를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한 것 뿐 마족까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느낀 다음에 결정할 거야.” 그리고 무하를 향해 했으나, 명백히 에르니를 향한 말을 이어했다. “나는 늘 그랬듯이 내가 원하는 것만 할 거니까.” 그 말에 에르니는 자상한 눈으로 라이시륜을 보았다. 에르니의 이기적인 부탁 때문에 선택 하는 게 아니라는 속뜻을 모를 에르니가 아니었다. 그는 라이시륜이 자기 자신을 향한 애정을 어색해하고, 또 서툴러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조건 죽겠다고 안하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고 생각되는 구나.” 에르니의 말에 이어 유시리안이 비아냥거렸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혼자 잘 살아봐라. 저런 말이 어떻게 저렇게 태연히 나오나 몰라. 낯짝 두꺼운 녀석.” “제멋대로인 게 매력이라는 뻔뻔한 놈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다. 어떻게 크면 너만큼 두꺼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무하가 문득 물었다. “만약 시륜이 마족을 선택한다면, 어머니의 뒤를 이어서 마왕이 되는 거야?” “그건 아니지.” 라이시륜은 피식 웃었다. 전이라면 대마법사씩이나 되는 녀석이 왜 모를까, 했겠지만 이제는 전후사정을 아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설명은 하환이 했다. “우리에게 혈통은 중요하지 않다. 지닌 힘만이 권력과 권위의 수단이 되지.” “그럼 하환은 왜 라이시륜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지? 후계자라고도 했잖아?” “그건 주군의 하나뿐인 자식이니까.” “의외로 성실하네.” 무하의 말에 하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웃음을 흘리던 라이시륜이 말했다. “혈통이 중시되는 곳이었다면 가는 걸 다시 생각했겠지.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고.” “만인이 인정하는 독재자 녀석 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희한하군. 네 놈에겐 아주 딱이겠구만.” “만인이 인정하는 싸가지에게서 그런 과찬의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다시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를 또 무하가 비집고 들어갔다. 내버려뒀다간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카미렌님은 통 보이질 않네? 전에 잠시 돌아다니겠다고 나가시고는…….” “이카미렌님이라면 저기 망루 위에 계신단다.” 에르니가 답해주었다. 유시리안은 알고 있었는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자기 일이라 다른 곳에 정신을 팔 틈이 없었던 라이시륜과는 달리 그는 냉정한 제 3자의 입장이었으니까 당연했다. 에르니는 논외로 치자. 다른 이들과 같은 클래스에 놓고 보기에는 너무나 비상한 남자니 말이다. “정확히는 망루 지붕 위야. 그 망할 놈과 같이 있군.” 그 말에 망루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무하는, 이쪽을 보고 있는 두 존재를 발견하고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에르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배신당한 자, 우리를 저주한 자…… 고귀한 속계의 지배자. “훼오트라 아나…….” 옆에서도 들릴까 말까한 그 속삭임을 들었는지, 훼오트라 아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것은 ‘가면’이다. 에르니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가면임을 아는 무하는 한동안 그에게서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유시리안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 “고대 마법의 비호가 없다면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야.” 유시리안은 피식 웃었다. 무하가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것을 전부 유시리안에게 짊어지게 하는 것 같아 무하는 못내 미안했다. 비록 그것이 유시리안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기 위해서 저지른 일이라 해도 말이다. 만일 유시리안이 무하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게 되면, 무하가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되면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도록……. 무하가 돌아오고자 하는 이유는 유시리안이니, 유시리안이 더 이상 무하를 원치 않는다면 돌아올 이유도 없게 된다. 그러니까 유시리안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난 이제 널 안 찾을 거야. 여태껏 지긋지긋하게 찾아다녔으니까. 더 이상은 안 찾아.” “응.” 무하는 환하게 웃었다. “이번엔 내가 찾을 게. 내가 찾아갈게.” 꼭, 반드시! “한창 좋을 때 미안한데 말이야.” 라이시륜이 거북한 얼굴로 둘을 보며 팔목을 문지르고 있었다. “닭살은 둘이 있을 때 실컷 피우고, 이만 난 가봐야겠다.” “마스터!” “지금 말입니까?” 기겁하는 딜린과는 달리 부관이 꽤나 태평했다. 어차피 이곳에 얽매여 있는 게 신기하다 못해 이상했던 남자다. 여태까지도 곤크에 붙어 있는 적이 얼마 없지 않았나. 잠시 마계를 갖다오는 것으로 동요할 필요는 없다. 마족이 된다면 그건 좀 생각해볼 문제지만 말이다. “죽기 직전에 얼굴이나 보고 오련다.” 라이시륜은 별일 아닌 냥 건성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하환은 반색하며 일어나 성벽 밖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집중하여 캐스팅하려는 순간, 에르니가 슬쩍 끼어들었다. “이제 저 녀석들 좀 물리지 않겠나? 돌아갈 때 거치적거릴 것 같은데.” 라이시륜을 설득하는데 에르니의 도움을 받은 하환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여 약속된, 완전한 해체의 음색을 불었다. -삐이익─! 몬스터들은 밀물처럼 빠르지만 조용히, 그리고 거대하게 사라졌다. 사방으로 퍼지면서 사라지는 것이, 이제는 무리를 이루어 다니지 않을 모양이다. 하긴 이제 그럴 이유가 없었다. 몬스터가 시야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을 때, 하환의 손에 있던 피리도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그 소임을 다했으니 주인의 손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는 몬스터 사태의 종결을 뜻했다. 하환은 아쉬움 없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몬스터야 위협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 녀석들 이용하는 것보다 혼자 나서서 힘을 쓰는 편이 빠르다. 비록 약속된 권위가 크긴 하지만 더 큰 소득이 있었으니까 상관없다. 게다가 본래 하환은 권위나 권력에 욕심이 없는 남자였다. 다시 캐스팅을 시작하는 하환을 보며 에르니는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씁쓸해지는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마족이 되어 마계에 뿌리를 박는다 해도,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살아있길 원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 큰 힘과 의지가 되니까. 그러니까 웃자. 모든 게 바란 대로 됐다. 라이시륜은 어머니가 있는 마계를 가게 됐고 엘프들은 그랜드가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는 에르니에게 있어서는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닌가. 허공에 평면으로 그려진 마법진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검으면서도 붉고, 붉으면서도 파랗고, 파라면서도 하얗다. 게다가 분명 똑바르게 그려져 있는데도 제대로 읽어낼 수는 없는 일렁거림이 있었다. 마치 유시리안의 검 나찰처럼 끊임없이 율동하고 약동하는 이질의 것.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나찰은 유리병 속에 꽉 찬 물의 움직임 같다면, 이것은 정해진 곳에서만 타오르고 있는 불꽃같았다. 하환은 난간에 훌쩍 올라가 마치 기사가 주인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인도 하듯이 허리를 약간 숙였다. 그리고 마법진이 마차의 문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향해 두 손을 구부정하게 뻗었다. “어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떡인 라이시륜은 먼저 딜린과 부관을 보았다. “딜린은 그동안 후계자 공부를 해왔으니 문제없겠지. 부관, 나 없다고 살판났다 애들 쪼지 말고.” “언제는 그런 거 신경 쓴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절대 쪼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는 부관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유시리안은 끼어들지 않으려야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 “장기 출장 가는 남편이 마누라랑 아들한테 당부하는 것 같다.”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무하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뿐만 아니라, 저편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록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스터가 마계를 간다는 것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원래 평범한 곳은 가지도 않던 마스터가 아닌가. 언제나처럼 홀연히 나타나서 밀린 서류 작성해댈게 뻔하다. 그렇듯 광신도인 그들은 절대 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 아해의 장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바람의벗 ( 2004-02-22 00:20:42 , Hit : 5096 ) [연재] 아해의 장-400 라이시륜은 유시리안을 향해 뭐라고 톡 쏘아붙이려다 록을 발견하게 씨익 웃었다. 그것은 록이 질색하는 딜린의 웃음과 꼭 빼닮았다. 주춤 뒤로 물러나려는 그를 향해 라이시륜은 간곡히 당부했다. “우리 아이 잘 부탁하네, 사위.” “으윽! 똑같아……. 똑같아……!” 차마 분위기상 대들지는 못하겠고,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며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컥컥 거렸다. 그것을 보다가 이번에는 딜린을 보았다. “조만간 손주 볼 수 있는 거냐?” “저 이가 요즘 부실해서. 휴. 보양 닭이나 고아 먹여야겠어요.” 딜린이 똑같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뒤에서 록은 부들부들 떨며 당장이라도 딜린의 모가지를 움켜잡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짓궂게 웃어버린 라이시륜은 이번엔 무하를 보았다. “만나자마자 이별이군.” “그러게.” “다음에 만날 때는 그 모습이 아니겠어?” “그럴 테지.” 정작 ‘그 모습’조차 라이시륜은 모른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무하는 두건자락을 매만지며 씁쓸하게 미소했다. 그리고 그것을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보조마법도 걸어두지 않은 그 평범한 두건은 별 저항 없이 무하의 손길을 따라 흘러내렸다. 삐뚤빼뚤하게 잘렸던 머리카락은 페르노크가 표면에 나타났을 때 다듬어져 단정했지만 그 눈빛만큼의 무하의 것 그대로였다. 라이시륜이 생각한 그대로……. 무하라는 존재를 그대로 담아낸 깊은 녹안. 슬픈 듯 서글픈 듯, 강하고 다정한 눈동자.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고독하지 않은 그것에 라이시륜은 웃음 지었다. “잘생겼네?” 라이시륜은 무하의 은색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져보다가, 옆의 유시리안을 돌아봤다. “씩씩대지 마라. 남자의 질투는 추한 거다, 삐돌아.” “시끄러. 손 안 떼?” “안 뗀다.” 와락 무하를 끌어안고 비틀린 장난기를 담아 웃었다. 유시리안이 울컥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만족스럽게 손을 풀고 대신 무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재회가 있다 해도 이별은 이별이지. 그때처럼 내가 먼저 떠나서 좋군. 이편이 담백하니까.” “하하. 좋기도 하겠다.” “그러고 보니, 일 끝나면 한대 팬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맞고 싶어서 묻는 건 아니었다. 무하는 웃으며 라이시륜의 어깨를 똑같이 툭 쳤다. “아직 일이 끝난 게 아니잖아? 일이 완전히 매듭지어지면 기필코 한대 팰 거니까 각오해.” “무섭군. 일이 매듭지어지지 않길 빌어야 하는 건가?” 라이시륜은 괜히 호들갑을 떨었다. 실소하던 무하는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가서 조심해라.” “아아.” 라이시륜은 그 다음으로 망루 위에 있는 이카미렌을 향해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에 이카미렌은 살짝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물론 유시리안과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럼 넌 그동안 뭣 빠지게 용 써봐라. 그 꼴을 처음부터 못 보는 건 아쉽군.” “흥. 마계에 가서 큰 코 다쳐, 철들어 오길 빌어주마.” 서로 정답게 악담을 주고받은 라이시륜과 유시리안은 약속이나 한 듯 주먹을 내밀어 가볍게 부딪쳤다. 그것으로 둘의 인사는 끝이었다. 라이시륜은 깔끔하게 돌아서 하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에르니를 지나쳐 난관 위로 훌쩍 올라섰다. “착지 장소는?” “저쪽에 대응 마법진이 있습니다. 걱정 마시길.” 그래, 하면서 고개를 끄떡이는 라이시륜에게 에르니가 다가갔다. “이거 가지고 가야지.” 그가 내민 것은 ‘침묵의 대가’였다. 그제야 에르니를 돌아본 라이시륜은 반지를 떨떠름하게 내려보다가 결국 외면했다. “그건 이제 엘 거야. 엘이 가지고 있어.” “하지만 어머니에게 보여줘야…….” “됐다니까.” 그리곤 몸을 홱 돌렸다. 마법진을 정면에서 바라보다가 힐끔 뒤를 돌아 에르니를 봤다. “그럼 다녀올게.” “……!” 에르니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뭔가를 기다리듯이 마법진만 보고 서 있는 라이시륜의 뒷모습에 웃어버렸다. “다녀 오거라.” “아아.” 라이시륜은 한쪽 손을 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마법진 속으로 들어갔다. 하환은 자신을 여태 골탕 먹였던 에르니를 복잡한 눈으로 보다가 인사했다. “감사해야 하는 건지, 원망해야 하는 건지……. 어쨌거나 신세졌군. 당신이 아니었으면 라이시륜님은 응하지 않았을 테니.” 모호한 웃음을 짓다가 정색하고는 오른 손을 심장 위에 얹고 정중히 예를 갖췄다. 그리고 무하와 유시리안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검은 잘 쓰고 있나?” “고맙게 쓰고 있어.” “여유가 될 때 한번 붙지.” “바라는 바야.” 다음으로 유시리안을 보았으나 별 말 없이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라이시륜을 따라 마법진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마법진은 검은 불꽃이 되어 허공에서 일순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라이시륜과 엘프의 전쟁은 일단 막을 내렸다. 엘프들은 곤크의 도움을 거절하고 곧장 초록 고향으로 향했다. 에르니는 곤크에 남았다. 그에 엘프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혼란해 했지만 곧 극복하고 자기들끼리 떠났다. 어떤 자는 마법으로, 어떤 자는 말로, 어떤 자는 걸어서. 민폐 끼치지 않는 개인주의가 되살아나면서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랜드가 없어도 저주가 발동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달라지겠지, 에르니는 낙관했다. 솔직하게 집어내자면 달라지든 말든 이제 상관 안하겠다는 무관심이었지만 말이다. 지금 에르니는 저편에 있는 훼오트라 아나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토록 만나기 꺼려지던 존재, 그러나 한편으로는 깊이 동정하고 있던 존재……. 눈치 빠른 부관과 딜린의 지휘 하에 곤크의 용병들도 흩어지고 성벽 근처에 인기척이 사라졌을 때, 훼오트라 아나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곧 무하의 앞에 나타났다. “이제 저와의 거래를 시행할 때가 됐습니다.” “그렇군요.” 라이시륜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무하는 예상했던 일인지 덤덤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어느 샌가 유시리안 뒤에 이카미렌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아들의 어깨에 양 손을 얹고 훼오트라 아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훼오트라 아나에게 빚이 없다. 그러나 훼오트라 아나의 목적이 레이아사 아나…… 륜원의 부활이라면 결코 막을 수 없었다. 륜원. 그는 이카미렌에게 빼앗긴 꿈을 되찾을 용기를 준 인간이다.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인간이다. 그의 부활은 이카미렌도 원하는 바다. “유시리안 씨. 무하 씨에게 이미 말은 들었을 테죠?” “나의 역할 말이냐?” 질문의 형식을 띤 대답이었다. 에르니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저주를 벗겨낼 수 있는 단서가 조금이라도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 에르니를 훼오트라 아나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엘프의 장로이면서 그랜드의 업을 짊어진 자로군요.” “에르니라 합니다, 고귀한 자여.” “동정하는 겁니까? 이 나를?” 에르니는 울적한 눈으로 그를 보며 답했다. “전 6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진실을 안 것은 그 중에서 2천년 정도였습니다.” 저 천진한 소년의 몸을 한 위대한 자가 너무나 가여워 안아주고 싶었다. 토닥토닥, 감싸주며 다정하게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에르니가 할 수 없는, 에르니만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그는 가해자인 자신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유일한 엘프였으니까. “그 세월에도 지긋지긋하게 괴로웠습니다. 그대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홀로 견뎌오셨겠지요. 2천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세월을 말입니다.” 그래서 동정합니다, 라는 뒷말을 삼킨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 훼오트라 아나는 특유의 철없는 듯한 천진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에 섞여 있는 회한을 읽지 못할 존재는 여기 이 자리에 없었다. 에르니는 그 웃음에 짓눌려 무거워진 가슴을 움켜쥐다 목걸이의 촉감을 느꼈다. 란티리네의 표식과 ‘침묵의 대가’. 깊이 숨을 들이쉰 에르니는 힘들게 훼오트라 아나를 마주보았다. “그런데도 저는 감히 저희들이 받고 있는 저주의 해결책을 묻고자 합니다.” “…….” “방도가 없는 것입니까? 그대께서 저희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멸망뿐입니까?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쓸모없는 희망이라도 버릴 수 있도록.” “진실을 아는 자…….” 한숨처럼 에르니를 부른 훼오트라 아나는 공허한 눈에 아련히 그리움을 떠올렸다. “너는 그를 닮았구나. 당돌하고 직설적이며 한편으로는 냉정하고, 그러면서도 책임감 있는 다정한 그를…….” 륜원, 륜원, 너무나 그리워 이름조차 담을 수 없는 사람. 이름을 준다했다. 웃게 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하고는 이렇게 괴롭히기만 한다. 그런데도 미워할 수 없다. 그립다. 그 당당한 눈동자, 그 낮은 목소리, 그 따뜻한 온기, 그 부드러운 감촉…… 모든 것이 그립고 그리워……. “그를 돌려다오.” “……저희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저희는 언령의 능력이 없습니다.” 에르니는 안타깝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훼오트라 아나를 바라보았다. 돌려주고 싶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돌려주고 싶다. 헌데 능력이 없다. 힘이 없다. 방법이 없다. “저에게 있습니다.” “……!” 소스라치게 놀란 에르니는 그 말을 한 자를 돌아보았다. 라이시륜의 지기, 라이시륜의 표식을 받은 자, 무하였다. 이제 두건을 벗어 청아한 은발과 진한 녹안이 드러난 미남자는 다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있어봐야 별 쓸모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대신 거래를 할 정도는 되었죠.” “거래?” “저는 이 육신에 빙의되어 있는 죽은 자입니다. 하여 거래의 대가로 새 육신을 청했습니다. 그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무슨……? 언령으로 걸린 마법은, 언령으로만 풀 수 있다고 들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 분을 풀어주면 될 것 아닌가? 저 분이 약속을 어길 분이 아니야. 먼저 풀어준다 해도 그 대가를 잊을 분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해서 해보았습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유시리안이 화내며 나가버리자마자 훼오트라 아나가 찾아왔다. 그는 페르노크를 지우고 이 몸을 차지하는 게 싫다면 새 몸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본래라면 환생의 굴레를 밟아 본래 차원계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가 힘써 이곳에 태어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무하가 원했던 것이었다. 해서 기도하는 땅을 갔다. 그동안은 이카미렌에게 누가 찾아오거든 막아달라고 부탁해 놓고서 단 둘이 그곳을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하가 깨달은 것은 압도적인 강함이었다. 그 거대함이라니……. “그런데…… 안됐습니다. 저의 힘은 결계를 만들어낸 자들에 비하면 너무나 조악한 것이었습니다. 수준이, 차원이 달랐습니다. 저는 그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결계는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하나는 이 대륙을 감싸고 있는 결계. 그것은 죽은 자의 기운을 억누르며, 즉시 안식을 취하게 해버리는 것으로, 왕의 힘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땅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또 퍼지는 대륙의 기운을 이용하고 있었다. 무하는 그것에 손조차 댈 수 없었다. 또 하나는 바로 대륙을 감싸는 결계의 중심핵, 즉 레이아사 아나를 봉인하고 있는 결계였다. 다른 건 됐으니 그것만 풀어달라는 훼오트라 아나의 말에 갖은 수를 다 써봤으나 하나를 풀어내면 세 개의 방어막이 생겨버렸다. 그리고는 풀어낸 하나가 다시 복구되자 사라졌다. 그 관계가 워낙 긴밀하여 무하 수준의 존재가 최소 셋은 있어야 가능했다. 훼오트라 아나는 그 봉인 결계에 대해 그간 많은 조사를 해왔었다. 본래 그 정보는 극비라 절대 외부유출이 안됐으나 기나긴 세월동안 지워진 영광을 지키던 존재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것에 의하면 봉인 결계는 사대 왕이 직접 시전 한 것으로서, 네 개의 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왕들이 그 핵을 하나씩 맡아 언령으로서 은닉했다고 한다. 그것까지 설명한 무하는 씁쓸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제가 풀 수 있었던 것은 그 핵을 은닉하고 있는 언령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은닉을 풀은 것뿐이고 핵은 건재합니다. 게다가 핵을 부순다고 해도 보조 핵이 존재하기에 결계는 유지됩니다.” 백목의 관 안에 있었던 유독 이질적인 그 직선 비석들. 그것들이 바로 보조 핵이라고 한다. 대륙의 힘을 조금 흘려 넣어 대륙을 감싸는 결계와 호응하게끔 만들어진 핵. 그것은 대륙의 결계를 파괴해야만 없앨 수 있다고 한다. 에르니는 어둡게 물었다. “그럼 희망이 없단 말인가?” “한 가지 있습니다. 저는 미약하게나마 언령의 힘을 펼칠 때, 레이아사 아나님께서 안에서 저항을 하는 기운을 느꼈습니다. 레이아사 아나님이 내부에서, 훼오트라 아나님이 외부에서 동시에 힘을 펼치면 대륙의 기운을 이용한 결계를 아주 잠깐 동안 무산 시킬 수 있습니다.” 에르니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동시에 펼쳐야 한다는 게 관건인 거군. 그분과는 의사소통이 가능했던가?” 무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될 수 있었다면 훼오트라 아나님께서 벌써 하셨겠지요. 문제는 두 가지나 됩니다. 하나는 에르니 씨가 말씀하신 의사소통 문제. 그리고 또 하나는 앞서 말한 봉인 결계의 네 개의 핵.” 일순 무하가 비틀거렸다고 느낀 순간 유시리안이 그를 부축했다. 염려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에게 괜찮다고 속삭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네 개의 핵이 레이아사 아나님이 저항하기 위해 뿜어내는 힘을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레이아사 아나님의 반발이 무산되고 있었던 겁니다.” 훼오트라 아나도 그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무력하게 알고 있기만 했다. 그때의 배신으로 언령의 힘을 봉인 당했기 때문이다. 언령으로 인한 마법은 언령으로만 해제할 수 있다. 때문에 훼오트라 아나는 네 개의 결계핵을 은둔시키고 있는 마법을 해제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막연히 찾아 헤매왔었다. 그러나 무하가 은둔을 풀었다. 이제 그 핵이 어디 있는지 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언령을 봉인당한 그가 레이아사 아나와 동시에 동등한 힘을 쓰려면 상당한 시간 힘을 비축해야만 했다. 타이밍도 문제였다. 게다가 마지막 핵이 부서지는 바로 그 순간에 힘을 써야 했다. 훼오트라 아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무하와 새로운 거래를 했다. “바로 그 네 개의 핵을 내가 부수는 거다. 그게 두개 이상을 부서지면 레이아사 아나와 의식을 교류할 수 있게 된다는 군. 그러면 둘이 순간을 노리며 힘을 비축할 수 있게 되지. 내가 나머지까지 모두 부쉈을 때 핵에 응축된, 그동안 레이아사 아나가 저항한 힘도 일시에 그에게로 돌아가고, 훼오트라 아나의 힘이 가세하면 아주 짧은 순간 대륙의 힘을 넘어서게 된다. 즉 결계가 짧은 순간 풀린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레이아사 아나가 훼오트라 아나에게 언령의 힘을 돌려주면 그걸로 문제는 끝.” 유시리안이 마저 설명하고 픽 웃었다. “그래서 레이아사 아나가 깨어나면, 즉 내가 봉인구를 모두 부수면 무하를 환생 시켜준다. 그게 계약이다.” 에르니는 이해할 수 없다며 훼오트라 아나에게 물었다. “무하는 강한 남자가 아닙니까? 유시리안과 함께 움직이는 게 더 빨리 끝날 텐데요?” 그 질문에는 무하가 답했다. “네 개의 핵을 은둔시키던 언령 마법에는 한 가지 안전장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 무하는 서서히 허물어져갔다. “그것을 풀은 자는 그 정신이 죽어 버리게 됩니다. 육신만 살뿐, 그 영혼은 육신이 죽을 때까지 구천을 떠돌게 되지요. 제가 풀려고 하자 그 언령의 의지가 그것을 알려주더군 요.” “하지만 넌……. 그런가. 이미 죽은 자이기에 버틴 것인가? 두 번 죽일 수는 없으니까.” “예. 그 당시 영혼은 저였습니다. 페르노크는 깊숙이 숨겨져 언령의 의지도 발견하지 못했지요. 하지만 이제 한계가…….” 은닉을 풀은 순간 그동안 느껴지지 않았던 고통이 느껴졌다. 그것은 육신을 통한 고통이 아니었다. 영혼을 옭아매고, 비트는 고통이었다. 그것을 무하는 쭈욱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유시리안에게도 바로 어제까지 차마 말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떠넘기고 가는 이기심이 부끄러웠고, 그가 귀찮다고 하지는 않을지 무서웠고, 그가 지금 무하가 겪고 있는 고통에 안타까워할까 염려됐다. 모든 것을 말한 어제, 그는 꿀밤을 먹이고는 웃어주었다. 그럼 됐다고 말해주었다. 족쇄 건은 물 건너갔군,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이제 저는 율만 믿고 가려고요.” 그렇게 말한 무하는 후후, 웃으며 유시리안을 올려 보았다. 그때 에르니는 어떤 묘한 것을 보았다. 무하라는 남자 위에 창백한 안색의 여자가 겹쳐 보인 것이다. 두개의 그림이 겹쳐있는 듯이 불안하게 흔들흔들 거리면서. 인간의 나이로 19세 정도 됐을까? 여자는 참 아름다웠다. 창백한 얼굴, 고통에 꽉 깨물고 있는 입술, 일그러져 있는 미간이 아니라, 자신을 부축하는 유시리안을 보는 염려의 눈이 아름다웠다. 이미 죽은 자마저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마법의 위력이 오죽할까. 그런데도 정작 겪고 있는 당사자가 자신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다른 자를 걱정한다니. 원래라면 옆에 누가 있건 말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상태일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에르니는 흠칫 놀라 훼오트라 아나를 돌아보았다. 에르니는 이카미렌이나 유시리안과는 달랐다. 또한 죽음과 안식의 신관도 아니었다. 그는 죽은 자를 볼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그에게는 ‘무하’가 보였다! 훼오트라 아나는 에르니의 시선에 미약하게 고개를 끄떡여 답했다. “시간이 됐어.” 그러며 그가 두 손을 뻗자 그 흐릿한 여자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육체에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무하는 유시리안과의 눈높이가 같아지고, 결국은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보며 웃었다. 점점 몸이 가벼워지고 있다. 이 육체를,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사무쳤던 이 육체를 드디어 떠나는 것이다. 실은 가지고 싶었다. 이렇게 떠나기 싫었다. 그러나 생각했다. 페르노크를 강제로 뽑아내고 빈껍데기를 뒤집어쓴다고 해서, 과연 이 몸이 ‘무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유시리안을 보는 이 눈이, 유시리안을 만지는 이 손이, 유시리안의 음성을 듣는 이 귀가, 유시리안을 부르는 이 입술이, 과연 ‘무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가? 평생 이질감만을 맛보며, 육체를 질투하기 위해 페르노크를 희생할 수 있는가? 무하는 욕심쟁이다. 고작 빌붙어 있는 것에 몸부림을 쳤던 주제에, 막상 완전히 차지할 기회가 생기니 새로운 욕심이 생겨버렸다. ‘내 몸’으로 그를 마주하고 싶다는 욕심. 유시리안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는 무하를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하는 알고 있었다. 훨씬 더럽고, 이기적인 자신을 알고 있다. 그때, 페르노크를 다시 안으로 잡아당기고 무하가 나왔을 때, 페르노크에게 깊이 사과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그 둘은 그 찰나의 시간에 대화를 했다. -있지, 무하. -응? -나 말이야, 그때 내가 왜 깨어났는지 알았어. 페르노크는 우물쭈물하면서도 말을 계속 이었다. -그건 말이지, 무하 때문이었어. 혹시나 무하가 화를 낼까 급하게 덧붙였다. -무하는 줄곧 생각했었잖아. ‘있어야 할 곳’을 찾기 전까지는 죽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다고. 무하가 화를 내지 않고 얌전히 듣자 다시 우물쭈물 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그랬던 거야. 그리고 무하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건 말이야, ‘있어야 할 곳’이 생기면 죽어도 된다는 거잖아? -……! -그래서 이 몸이 나를 깨운 거야. 살려달라고. 하지만 페르노크……. 그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어도 말이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거야. 무하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내 눈으로 그 얼굴을 보고, 내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고, 내 귀로……. 유시리안은 오직 무하만을 바라보았다. 각인시키듯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꼿꼿하게 무하만을 바라보았다. 무하가 빠져나가자 페르노크의 육체가 쓰러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그것조차 보지 않았다. ‘펠’이 없는 저 몸뚱이는 더 이상 유시리안의 것이 아니었다. 유시리안은 ‘소유하는 자’.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펠만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나의 펠. 꼭 찾아서 부술 거야. 네 개 다.” 「…….」 “절대 포기 하지 않아. 걱정 마. 전혀 귀찮지 않으니까.” 내 귀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니까 페르노크. 이건 무하의 최소한의 양심인거다. 더 이상 페르노크에게, 무하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선택을 했지만, 다른 대가를 치룬 그에게 이 이상 고통 주기 싫다는 아주 작은 양심……. 무하의 행복은, 무하의 ‘있어야 할 곳’은 페르노크의 희생으로 생겼다. 완벽한 해피 엔딩이란 없다. 누군가의 행복 뒤에 누군가의 불행이 있고, 누군가의 불행 뒤에 누군가의 행복이 있다. 완벽한 해피 엔딩이 있다면, 그건 기적이겠지. 하지만 만들고 싶다. 그 완벽한 해피 엔딩, 기적을! 지금은 이렇게 발전 없는 꼬마지만, 철부지 어린 아이지만. 언젠가는 한층 성숙하게 커서 기적을 만들어내고 싶다. 희생 없는 행복, 불행 없는 행복, 영원한 행복! “그러니까 이번엔 네가 찾아와.” 다정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무하는 행복을 느꼈다. 「율.」 무하는 두 손을 넓게 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유시리안을 안았다. 「나의 율. 내가 ‘있어야 할 곳’.」 반드시 돌아 올 거야. 반드시 기억할 거야. 그러니……. 유시리안이 마주 안기 위해 팔을 뻗고, 모았을 때 이미 무하는 사라지고 없었다. 천천히, 눈이 내려앉듯 고요히 쓰러지던 페르노크의 육신은 그와 동시에 서서히 부스러져 갔다. 무하가 사라지자, 버티고 있던 끈이 끊겨나간 듯이 허물어졌다. 마치 곱게 갈아 놓은 가루처럼, 낱낱이 흐트러졌다.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미처 바닥에 닿기도 전에 페르노크의 육신은 모두 부서져 자유롭게 날라 갔다. 훼오트라 아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모래 한 톨보다도 작은 페르노크의 파편을 받았다. “결국 네 선택은 이거구나, 페르노크.” 죽음을 택했던 페르노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페르노크. 그는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단지 자각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닌, 사랑받고 싶었던 자신을. 그러나 그는 무하라는 무게에 졌다. 무하가 고작 2년 동안 이룩해 놓은 것에 졌다. 그는 무하의 그림자를 지고 살 용기가 없었다. 그것은 비겁한 도피였지만, 무하는 그에게 비겁한 것은 나쁜 게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홀가분하게, 자유롭게 날라 갔다. 페르노크에게 있어 단 하나의 행운은 그가 죽음을 택했을 때 그를 찾아온 소녀였다. 절망에 찌든 비참한 자살을 자유로 바꿔주었으니까. 훼오트라 아나는 파편을 동그란 구에 소중히 넣었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모든 것을 잃은 작은 소년. “넌 나와 같구나.” 저녁노을이 짙게 내리는 성벽 위에서, 아름답게 웃으며 무하가 말했다. -왜 모두들 나를 위해 주는 걸까 생각해봤어. 율도, 노민도, 시륜도, 또 클랜도……. -그래서 결론이 났어? -아마 내 자신이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 거야. 그들 역시 스스로 그것이 좋지 못함을 알아도 결국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나를 위해 주는 걸 거야. 결국 내가 아닌 그런 자신들을 위해주는 것인지도 몰라. 저녁노을이 짙게 내리는 성벽 위에서, 울 듯 유시리안이 말했다. “그래도 펠…….” 두 손을 내려보다가 꾹 쥐며 유시리안은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펠은, ‘사랑받는 자’ 펠이야.” 몬스터 사태 이후 혼란의 도가니였던 욤 제국이 드디어 평화를 찾았다. 먼저 만 백성의 찬양과 열망 속에 금안의 황제가 등극 했다. 강하고, 청렴하며, 현명한 황제가! 게다가 그는 놀랍게도 락아타의 황태자 시오니타와 지기였다. 앙숙 관계였던 두 제국 사이에서는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둘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전쟁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전쟁이 없다는 것은 강제 징집이 없다는 것이다. 강제 징집이 없다는 것은 백성이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성이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은 크게 나아가 나라가 풍족해 진다는 것이다. 황제 역시 타 국과의 대립보다도 내실에 신경 썼기에 욤 제국의 앞날은 밝았다. 그 다음으로 제국을 지탱하고 있던 세 기둥, 카르민들이 모두 안정되었다. 먼저 자하라 가. 라와 란의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곳이 이제 문무 모두 뛰어난 가주를 맞았다. 뜻밖에 라가 그것을 쉽게 납득하고 새 가주의 보좌가 되어 한결 빠른 속도로 내부가 단결되었다. 그리고 오르세만 가. 이미 가주나 다를 바 없던 테밀시아가 황제가 되어 버려 순간 흔들릴 뻔 했으나 때마침 행방불명이었던 가주가 돌아와 주어 혼란이 멈췄다. 후계자 문제가 아직 불안하긴 하나 가주가 워낙 정정하고 금안의 ‘지배자’ 아버지답게 호락치 않은 남자라 가문 일원들이 기회를 틈타 반발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야다 가. 근래 들어 다른 두 카르민에 비해 한풀 꺾였던 그곳이 새 가주를 맞아 서서히 부흥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 가주가 섰을 때의 선대 가주의 노망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던 불신도 가라앉았다. 또한 영지 전체가 생기가 돌았다. 몬스터 사태도 정리되고 막대한 보상금도 들어오고 황제와 세 기둥이 자리를 잡자 제국 전체가 안정된 활기를 띠었다. 물론 여전히 가난, 병마, 기아와 강한 자의 횡포, 약자의 눈물, 그리고 도둑, 강도, 인신매매 등은 존재했다. 또한 고질병인 부자들의 사치도 가난한 자들의 시기, 질투도 여전했다. 그러나 이 연회만큼은 누구도 시기, 질투하지 못할 것이다. 전직 용병과 카르민 영애의 결혼식! 용병 계뿐만 아니라 귀족, 제피모들 사이에서도 음유시인을 통해 널리 퍼진 로맨스! 사랑하는 자와 이루어지고자 전쟁을 나간 남자,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기 위해 기도원에 가려한 여자. 자신의 힘으로 근위 기사가 된 제피모 남자, 제피모를 위해 일생을 홀로 보낼 각오를 한 카르민 여자. 충분히 인기와 호응을 얻어낼 소재였다. 때문에 이들의 결혼식만큼은 누구도 시기, 질투하지 못할 것이다. 대 카르민의 결혼식답게 대규모로 화려하게 치장된 식장 내에는, 평소 귀족 결혼식에는 보지 못한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귀족뿐만 아니라 용병들도 초대된 것이다. 모두 신랑 측 손님들이었다. 가야다 가주 사뮤에르의 용인 하에 벌어진 일인데다 신랑 신부의 사정은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거나 공연한 분란을 일으키는 귀족은 없었다. 만약 있다 해도 친히 참석한 사뮤에르가 내쫓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을 바꾸게 한 은인의 지기인 클랜이 마음에 들었다. 성품도 털털하고 자상한데다 오지랖이 넓은 것도 좋았다. 이 연회는 결혼식답게 정치적인 목적 하에 열리는 것들과는 달리 산뜻했고 화사했다. 남녀 사이의 육체적 접촉과 은밀한 대화를 위한 달짝지근한 음악 대신 경쾌하고 깔끔한 음악이 흘렀다. 가식적이며 과장된 웃음 대신 수줍고 쾌활한 웃음이 터졌다. 그 둘은 서로가 잘 어울려 연회를 한층 풍요롭게 했다. “이거 참. 체질에 안 맞아.” “마스터가 안 계시니 부관께서 오셔야지요. 게다가 클랜을 기사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이시잖습니까.” 영 어색해 보이는 부관과는 달리 딜린이 익숙한지 느긋하게 행동하며 웃었다. 그것은 그의 화려한 외모와 어울려 그를 귀족처럼 보이게 했다. 옆에서 록이 불편한 듯 칼라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윽, 이거에 목이 베일 것 같다. 왜 이렇게 빳빳한 거야.” “원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 부관의 말에 딜린이 옆에서 암암, 하며 호응했다. 록이 무슨 소린가 하고 멀뚱히 둘을 보자 딜린이 씨익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레이디들이 늘씬해 보이기 위해서 코르셋을 졸라매는 것처럼 신사도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목이 잘리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지.” “덕분에 자네도 이렇게 근사해 보이지 않는가.” “어머, 부관님. 우리 그이는 원래 근사하다고요.” “누가 그이야!” 쿡쿡 웃는 부관에게 용병 하나가 슬며시 물어왔다. 클랜과 함께 전쟁에 참여한 피일이었다. “무하 씨는 소식이 없습니까?” “글쎄다…….” 부관은 말끝을 흐렸다. 무하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많지 않았다. 무하의 죽음을 지켜본 이가 워낙 적은데다, 그들이 이리저리 수다를 떨고 다니는 위인이 아닌 덕이다. 부관과 딜린은 유시리안에게 들어 알고 있지만 말이다. “정말 클랜 씨를 기사로 만들어 버린 것은 그 사람인데…….” 누구보다도, 심지어는 그 당사자들보다도 이 결혼식을 바랐던 사람. 살아 있는데, 같은 공간에 숨쉬고 있는데 왜 포기 하냐며 화를 냈던 모습이 아직도 훤하건만……. “소식을 못 들은 걸까요?” “글쎄다…….” 피일의 계속되는 질문에도 부관은 계속 답을 피했다. 딜린이 그를 도왔다. “무하 씨가 오면 유시리안 씨도 오는 거잖아? 그래서 안 오는 게 아닐까?” “으윽!” 피일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서며 신음했다. 그리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렇군요! 과연 무하 씨! 생각이 깊어요!” “…….” 말은 안했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용병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끄떡였다. 부관과 딜린은 서로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나저나, 부관님.” “응?” “시선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시선?” 말을 꺼낸 용병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어느 방향을 눈짓했다. “저 끈끈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입니까?” “…….” 그제야 부관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 시선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저렇게 노골적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옆에서 다른 용병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우리 부관님은 생긴 거 하나는 멀쩡하거든.” 그 말대로다. 실력으로 곤크에 들어와 카 등급으로 활약하다가 그 리더십이 인정되어 부관으로 차출된 그는 전성기 때의 강인한 몸매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전사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몸이었다. 게다가 비록 여자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마음에 안 들어서 생기는 살기지만, 비록 불편한 복장에 의식적으로 꼿꼿하게 편 몸이라지만, 그 은근한 살기와 곧은 자세가 중년에 접어든 그를 매우 매력적으로 포장해 주고 있었다. 딜린처럼 느긋함과 여유는 없었지만, 대신 그에 못지않은 위엄이 있어 귀족의 정장이 어색하지도 않았다. 부관은 부하의 말에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뭔가 이상하게 들리는 군. 생긴 거 하나는?” “그야 그 본질은…….” “망할 수전노잖아요.” “망할 수전노 아닙니까?” “망할 수전노니까.” 이구동성으로 쏟아진 말에 부관이 꿈틀할 때, 용병들에게는 참으로 다행하게도 낭랑한 목소리가 식장에 울렸다. “입(入)─!” 신랑 신부의 입장이었다! 따지려 들었던 부관도 놀려먹으려 했던 딜린도 여세를 몰아 하소연까지 가볼까 했던 용병들도 곳곳에서 수다 떨던 귀족들도 하나같이 하는 것을 멈추고 출입구를 보았다. 깔끔한 색채의 적발을 가진 인상 좋은 클랜과 통통한 몸매의 선해 보이는 브리아가 기쁘게, 들뜨게, 수줍게 미소하며 화환의 아치 가운데 있었다. 순백의 꽃들로 이루어진 그 아치형태의 화환은 신랑신부를 부드럽게 감싸며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감탄한 부관은 공연히 투덜댔다. “쳇. 귀한 카 등급을 근위기사단 따위에게 뺏기다니.” “아깝습니까?” 딜린의 질문에 당연하지 않냐고 펄쩍 뛰었다. 딜린은 후후 웃으며 신랑신부에게 고개를 돌렸다. “반란 때 클랜이 수도에 없어 다행이었죠? 그때 근위기사들이 반도 넘게 죽어다던데.” “그때는 가야다 본가에서 예법을 배우고 있었다고 했던가? 가주 지시였다던데. 그 가주 아직 어리면서 선견지명이 있어.” “단순히 타이밍이 좋았던 거죠.” 딜린의 반박에 부관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느끼는 게 있어서 뒤로 빼돌린 걸 거야. 당사자도 그 때 황제에게 인사만 하고 바로 빠져나왔잖아.” 그리고는 입구에서 인사를 받고 있는 신랑신부를 보며 다시 투덜댔다. “더 부려먹을 수 있는걸 놓아줬으니 행복하지 않으면 다시 끌고 와서 피눈물 흘릴 때까지 쥐어짜 줄 테다.” 딜린과 록은 그 옆에서 웃었다. 부관의 악담 아닌 악담을 받고 있는 신랑신부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실지 선남선녀가 아니라도 행복에 젖으면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이다. 클랜은 그렇다 쳐도 브리아는 예쁘다고는 못할 외모이었는데도, 무척이나 환하고 예뻐 보였다. 평소 브리아를 알던 귀족 여자들도 감탄하며 신부의 자태를 감상했다. 그 반응에 브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클랜을 올려보았다. 그것을 느낀 클랜이 활짝 웃으며 브리아를 돌아보다가, 무엇을 봤는지 브리아 너머에 시선을 주고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는 이내 반가움을 담아 웃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다른 이들도 뭔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곧 새하얀 화환 옆에 서 있는 새하얀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남자의 몸은 하얀 꽃에 반쯤 가려져 있었으나 그것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청아한 자체의 새하얀 꽃, 연하게 빛을 내는 은색 머리카락, 깨끗한 얼굴, 짙지만 맑은 녹색 눈동자,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 날카롭다 싶을 정도로 매끄러운 턱선, 균형 잡힌 장신의 몸. 존재감은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희미하고 옅다. “……!” 딜린이 소스라치게 놀라 한걸음 내딛었을 때, 부관이 어깨를 붙잡아 말렸다. 돌아보자 고개를 저었다. 다시 앞을 보자 그 새하얀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무엇인가를 가득 쥔 손이다. 부드럽게 펼치자 촤르륵 소리가 나며 쥐어져 있던 것들이 흘러내렸다. 바람이 불지 않는 실내인데도 그것은 신랑신부의 위로 신비롭게 흩뿌려졌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루. 정갈한 붉은 빛과 푸른빛, 그리고 초록빛과 투명한 빛을 뿜어내는 그것이 새하얀 신부의 드레스에 내려앉았다. “축복의 가루……!” 그것을 알아본 누군가 낮게 감탄했다. 환상적인 빛의 퍼레이드. 붉은 빛은 육신의 건강을 기원하는 빛, 푸른빛은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빛, 초록빛은 삶의 평온을 기원하는 빛, 투명한 빛은 가정의 화목을 기원하는 빛. 그것은 축복의 가루. 이제 저자가 누구인지, 왜 클랜이 멈춰 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브리아가 자신의 몸에 내려앉은 축복의 가루의 빛에 놀라 탄성을 지르자 남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의 윤곽선이 점점 불안정하게 녹아들며 결국에는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짧은 은발이 긴 흑발로, 새하얀 피부는 상아빛이 도는 창백한 피부로, 짙은 녹안이 훨씬 짙고 고요한 흑안으로……. 그렇게 변해가면서 남자는, 혹은 여자는 뒤로 물러섰다. 클랜은 그 기이한 광경을 보았지만 눈앞의 저 존재가 자신의 은인이자 친구인 그 무하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저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무하!” 다급히 손을 뻗어봤지만 친구는 흐릿하게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힘들 때 옆에서 지켜봐 주었던 친구, 자신을 위해 테밀시아에게 진실을 알린 친구,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졌던 친구, 자신과 똑같이 새로운 사랑을 찾은 친구. 무하는 그 소중한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왔고, 그리고 사라졌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몽환의 바람이 만들어준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현 황제 테밀시아가 아직 귀족이었을 무렵, 그에게는 두 명의 보좌관이 있었다. 처음 보좌관이었던 뮤비라는 제피모주제에 카르민의 보좌관에 올라 상당한 논란을 불어 일으킨 남자였다. 게다가 그 출신 또한 오르세만 가의 집사의 아들에 불과하지 않던가. 그것에 대한 반발이 당사자의 곱상한 얼굴과 맞물려, 그에게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붙게 되었다. 바로 ‘걸레’. 테밀시아에게 엉덩이를 바쳐 그 지위에 올랐다는 둥. 남자에게 교태를 부린다는 둥. 별별 추잡스러운 꼬리가 따라붙었다. 그가 어떤 반응하지 않았기에 소문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던 그가 덜컥 자하라 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그리고 2년이 지나 가주에까지 올랐다. 이제 그는 ‘걸레’라 불렸던, 몸 팔아 지위를 산 남자가 아니었다. 대 욤 제국에 단 셋뿐인 카르민의 하나이자 그 전통이 가장 긴 자하가 가의 수장이었다! 뮤비라가 떠나고 들어온 두 번째 보좌관, 루카다. 그는 고위 귀족자제로서, 전형적인 절차를 거쳐 그 자리에 올랐다. 처음의 파격적인 인선을 했던 테밀시아치고는 평범한 선택이었다. 처음 그가 나타났을 때 다들 어이없어했다. 그는 뮤비라만큼 아름답지 못했고, 뮤비라만큼 똑똑해 보이지도, 뮤비라만큼 강해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뮤비라와 그마나 견줄 수 있는 것은 그 지워지지 않는 미소뿐이었다. 나름대로 화젯거리를 기대했던 귀족들의 열기가 수그러들 무렵, 이미 그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하며 테밀시아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의 가장 대단한 점은 자신이 개입했음을 절대 외부에 드러나게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그 공기와 같은 존재. 그러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 뮤비라와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면 루카다와 같이 있으면 편하다. 테밀시아에게 있어 루카다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 루카다가 처음으로 도마에 오른 것은, 파만 가의 가주 계승권을 포기한 일이었다. 불공정하지만 어쨌거나 확실히 가주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데 그것을 포기했다. 그의 가문이 하급 귀족 가문처럼 돈과 권력은 없고 빚만 있는 가문이라면 말을 안 한다. 자그마치 파만가! 수도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자르카! 그것을 포기하다니!? 외부의 압력이라고 보기에는 그가 가진 배경이 너무 막강했다. 자그마치 금안의 ‘지배자’가 아닌가! 금안의 ‘지배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보좌관이 힘과 재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유리할 텐데 그는 루카다의 이탈을 방관했다. 그의 주인인 테밀시아가 가만히 있으니 자연히 다른 사람들도 나설 수 없었고, 또 나설 이유도 없었다. 다시 사람들 뇌리에서 그 존재가 잊혀질 무렵, 루카다가 세간이 이목을 일거에 주목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그의 주인인 금안의 ‘지배자’의 황제 등극이었다. 황제가 된 주인을 따라 황성에 기거하게 된 이후로 오른팔인 뮤비라와 같이 왼팔로서 테밀시아의 보좌하게 된 그가 택한 직책은 외교였다. 그러니 주목을 받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었다. 루카다는 그 분야에서 당장에 두각을 나타냈다. 여태껏 눈에 안 띄게 활약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그는 빈틈없이 치밀한데다 심계가 깊고 수작에 능했다. 억지를 부려도 어느 틈인가 역전되어 스스로 놓은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끝나 버린다. 그야 말로 천직이었다. 제일 처음에는 창세신전에게서 엄청난 액수의 손해 배상금을 뜯어냈다. 이어서 엘프에게까지 책임을 물었다. 단 그들에게는 배상금 대신 일정량의 약초상납을 요구했다. 그동안 욤 제국은 신전, 신관이 많은 만큼 의사와 약사가 희귀한 반작용이 쭉 문제였다. 의사와 약사의 수가 적으니 약초를 사는 사람도 적고, 사는 사람이 적으니 약초를 재배하는 사람도 적었다. 그러던 중 아직 젊고 패기 넘쳤을 무렵의 선대 황제가 따로 의사와 약사의 교육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따로 학원까지 세워 배울 수 있는 환경도 조성해 주었고 정기적인 수입을 보장했으며 병원 역시 영지 크기에 따라 한두 채는 짓도록 규정했다. 특혜가 많으니 자연히 배우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나 의사가 많아진 것에 비해 약초의 공급은 그대로였다. 그 분야에 무지한 황제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국에서 약초를 감당할 수 없으니 당연히 타국에 의존하게 됐다. 약초의 값은 점점 치솟았다. 타국에서 얼마를 부르건 이쪽에서 거절할 형편이 못 됐던 것이다. 욤에서도 서둘러 약초 재배를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당분간은 꼼짝없이 부당한 값을 치루고 수입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에 루카다가 약초 공급을 무상으로, 그것도 고급 품종인 엘프의 것을 받아낸 것이다. 엘프와의 담판을 위해 락아타로 떠났던 루카다는 그처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늘에야 돌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 벌써 두 번의 활약을 한 루카다가 엘프와의 회담을 마치고 오늘에야 돌아왔다. 모든 정황 보고가 끝나자 테밀시아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잘했다. 이제 휜에게 가볼 건가?” “물론입니다.” 계단을 내려오며 일어나라고 손짓하자 루카다는 공손히 예를 갖추고 일어났다. “중간까지 방향이 같군. 같이 걷지.” “영광입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목소리로 루카다가 답했다. 그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짓궂게 웃고 있었다. 예를 갖추는 신하, 궁인들을 지나쳐 알현장을 나왔다. 본래는 그 뒤를 근위 기사단장 뮤린이 따랐어야 했으나 지금 그는 테밀시아가 내린 지시덕분에 다른 일에 바빴다. “나 역시 마스터다. 나를 지키는 것에 그대를 낭비할 수는 없어. 저번 반란으로 근위 기사가 많이 비었다. 공석을 메우는데 소임을 다하도록 해. 단 전보다 강하게 보강, 단련시키도록.” 테밀시아는 뮤린을 자신의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선대 황제와는 사뭇 달랐다. 때문에 뮤린은 호위는커녕 얼굴조차 몇 번 내비치지 않은 채 기사단에 매진하고 있었다. 욤에서 단 다섯뿐인 마스터인 그는 본래 선대 황제가 죽자 은퇴를 하려 했었다. 원래부터 선대 황제에 대한 충심 따윈 없었던 것을 아버지의 유언으로 어쩔 수 없이 모셨던 것이라 홀가분하게 떠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선대 황제를 진심으로 주군으로 모셨기에 나를 모실 수 없는 거라면 말리지 않겠다며 진지하게 말하는 테밀시아를 뿌릴 치지 못하고 결국 그의 곁에 남아버렸다. 뼈 속까지 기사인지라 내심 진심으로 따를만한 주인을 원해왔었던 탓이다. 테밀시아는 주인으로 모시기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다. 타고난 ‘지배자’! 과묵하고 세속적인 욕심은 없는 검사, 뮤린을 얻은 테밀시아는 꽤나 흡족했다. 아직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서로 겪은 시간이 짧았지만 꽤 믿을만한 남자라고는 생각됐다. 정원으로 들어서자 루카다가 한가롭게 말했다. “락아타에 간 김에 시오니타님을 뵙고 왔습니다.” “여전하던가?” “예. 여전해 보이셨습니다.” 테밀시아는 잠시 지기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는 웃었다. “전에 헤어질 때, 곧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었는데 어찌 되어가는 지 모르겠군.”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루카다는 가슴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봉투를 꺼냈다. 받아든 테밀시아는 곧장 뜯어서 읽었다. 빠른 속도로 읽어 내린 테밀시아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하하! 조만간 보게 되겠군.” 어떤 내용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던 루카다는 굳이 무슨 소리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디를 가십니까?” “만오를 좀 돌아볼 생각이다.” “만오라면 후궁의 처소 아닙니까?” 루카다는 뜻밖이라는 듯 무엄하게도 황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후궁도 안들이실 거면서 거긴 왜……?” “도발하려고.” “아아, 그런 겁니까?” 루카다는 특유의 미소를 짓다가 분기점에 다다르자 곧 인사를 하고 자기 갈 쪽으로 갔다. 씬 가문을 창립한 휜은 여전히 루카다에게서 이것저것 배우느라 바빴다. 모시는 주인이 황제가 됐으니 귀족과 다리를 놓기 위해 돈을 뿌릴 필요가 없었고, 또 그러다보니 재정 채우느라 뭣 빠지게 뛰어다닐 필요도 없었다. 거기다 주인이 마스터니 가주인 휜이 직접 호위한답시고 쫓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씬 가문 일원들이 구역을 나눠 황성을 호위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이 틈에 죽어라 배우는 수밖에. “해 놓으라고 한 건 다 해놨겠지?” 룰루랄라 걷는 것은, 결코 죽을 쌍을 하며 숙제를 했을 연인을 상상해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제법 쫓아온단 말이야. 후후.” 팔불출이란 말이 여기에 쓰이는 거다. 오랜만에 만날 연인을 떠올리며 즐겁게 걷던 루카다는 옆으로 꺾으려다, 앞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저쪽 남자는 이미 루카다를 발견했었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뮤비라님.” “예.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하하, 웃다가 퍼뜩 생각났는지 루카다가 물었다. “테밀시아님께 가시는 길입니까?” “예. 보고드릴 건이 있어서.” 뮤비라는 현재 욤의 국고를 맡고 있었다. 몬스터 사태 이후로 들어오는 돈도 많고 나가는 돈도 많은 지금, 그것을 확실하게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몇 없었다. 거기다 그것을 뒷주머니에 빼돌리지 않을 사람은 더욱 적었다. 때문에 테밀시아는 능력과 신뢰가 확실히 보장되는 뮤비라를 총괄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 전폭적인지지 하에 뮤비라는 외부에 융통되는 물자와 내부에서 소용되는 물자는 물론 황실의 재정까지도 관리했다. 루카다는 뮤비라가 걸어온 방향이 재무 업무를 보는 쪽이 아닌 란오 쪽임을 알고 낮게 물었다. “흐음. 혹시 황후 전하의……?” 뮤비라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짓는 미소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루카다의 눈에는 그것이 조소로 보였다. “벌써 입니까?” “그쪽으로는 빠르더군요.”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루카다는 짧게 말하고 비켜섰다. “테밀시아님은 지금 만오에 계십니다.” “예. 그럼 다음에 뵙죠.”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헤어졌다. 황후의 처소는 란오, 후궁의 처소는 만오, 그 외의 궁녀들의 처소는 안오라고 한다. 란오를 제외하고, 후궁은 그 등급에 따라 궁녀는 그 역할에 따라 다시 세부적으로 갈렸다. 그러나 테밀시아도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제 알아두어야 할 테지만 아직은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걷는 만오가 어떤 등급의 후궁이 거처하는 만오인지 알 지 못했다. 그냥 만오일 뿐이었다. 만오는 자식을 낳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성적 쾌락과 만족을 위한 목적이 컸다. 때문에 우아한 분위기의 란오와는 달리 화사하고 조금은 달짝지근한 분위기였다. 심어져 있는 꽃과 수목도 그러했다. 란오의 정원은 고상한 색과 청량한 향을 가진 꽃과 푸르고 정갈한 나무들이 많았지만 만오는 자극적인 색과 달콤한 향을 가진 꽃과 색색의 화려한 과실나무가 많았다. 사시사철 변함이 없는 백성들에게는 동화에서나 있을 법한 꿈의 정원. 이렇게 힘과 권력, 그리고 재력만 있다면 손에 넣을 수 있다. 테밀시아는 새빨갛게 부풀어 오른 열매를 따 한입 베어 먹었다. 촉촉한 과즙이 물씬 배어있었다. 씹을 것도 없이 부드러워, 그대로 입안에서 굴리다 삼키고는 다시 한입 먹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욤은 춘기가 시작되면 바로 부슬비가 내린다. 하기에는 소나기가 잦다. 그러다 하기를 마무리 짓는 장마가 그치면 바로 추기가 시작된다. 추기 내내 건조하고 바람이 잦다가 동기가 되면 눈이 종종 내린다. 이제 곧 추기가 끝난다. 그래서 그런지 하늘이 흐렸다. “눈이 오려나…….” 열매를 먹는 것도 잊고 하늘을 바라보던 테밀시아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막 정원으로 들어서는 한 남자가 보였다. 테밀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뮤비라.” 테밀시아를 찾던 뮤비라는 그 작은 한마디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넓은 정원, 그것도 갖은 화초와 과실나무 속에 가려져 있는 그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다가온 그를 보며 테밀시아는 다시 열매를 한입 먹었다. 달디 달았다. “여긴 왜……?” “도발하려고.” 그러면서 뮤비라의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었다. “여길 채울 계획을 짜시는 건 아니고요?” “하하. 부셔버릴까 생각은 해봤지.” 테밀시아의 말을 뻔히 알면서 농을 던졌다. 농담인지, 아니면 진짜로 듣고 싶어서 한 말인지는 본인 스스로도 몰랐다. 테밀시아는 다시 한번 만오를 둘러보고 정원 안으로 더 걸어 들어갔다. 뮤비라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루카를 통해 시온에게서 편지가 왔다.” “시오니타님 말입니까?” 고개를 끄떡인 뒤 말을 이었다. “곧 볼 수 있게 됐다고 하더군. 비공식적이지만 황제가 황위 계승식 준비를 지시했다는 거야.” “락아타 황제가 과로로 쓰러졌다고 하더니, 단순한 과로가 아닌 모양이군요. 가져갈 선물 목록이나 준비해야겠네요.” “하하, 그러도록 해.” 그리고는 문득 물었다. “그보다 한창 바쁠 텐데 보고 할 거라도 생긴 건가?” “예. 좀…….” 뮤비라가 말끝을 흐리자 슬쩍 돌아봤다가 곧 고개를 바로하고 걸었다. 다시 한입 먹었다가, 예쁘게 익은 열매를 하나 더 따서 뮤비라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황제 앞에서 음식도 아닌 과일을 먹을 수 있는 담력이 있는 자는 별로 없었으나 뮤비라는 달랐다. 같이 여행을 하면서 야영도 하고 사냥도 하고 음식도 만들었는데 새삼 무슨 문제겠는가. 게다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한입 먹은 뮤비라는 조용히 말했다. “달군요.” “피곤할 때 단걸 먹으면 좋데.” “그렇군요.” 다시 한입 먹으며 후후 웃었다. 그것을 지켜본 테밀시아가 스쳐가듯 물었다. “보고 할 게 뭔데 인상을 찌푸려?” “……황후 전하의 일입니다.” “마린나사로 족해. 황후는 무슨.” 피식 웃으며 마지막 한입을 먹었다. 그리고 남은 씨앗을 아무 데나 던졌다. 사방이 흙이니 강하면 살겠지. “여태 잠잠하더니 또 뭐지?” “란오에 할당되는 예산을 늘려달라는 군요.” 지금까지는 보석 따위의 사치품을 사겠다고 극성을 부리지는 않지만 그것은 전통대로 란오의 주인에게 물려진 역대 황후들의 패물 때문이지 그녀의 허영이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이제 손에 쥔 보화가 자신의 것이라 실감하게 되자 새로운 것에 손을 뻗치려 드는 것이다. 원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귀족 부인들은 그만큼 정부와 보석에 애정을 주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동정할 테밀시아는 아니지만 말이다. “기각해. 들을 가치가 없다. 왜 나한테까지 보고하는 거지? 이미 황실 재정 관리까지 맡겼을 텐데?” “관리일 뿐, 권한이 아니니까요. 마린나사님께서는 대 카르민의 자제로 자라셨습니다. 권리 사항은 저만큼이나 잘 알고 계시는 분이죠.” “그런가?” 그렇게 반문한 테밀시아는 곧 쌈빡하게 말했다. “그럼 권한까지 넘겨주지. 이제 시작일 텐데, 계속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앞으로는 뮤비라 선에서 해결해. 그러기 위한 권한은 줄 테니.” “예.” 깊은 신뢰가 담긴 말에 뮤비라는 웃었다. 또 테밀시아가 마린나사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도 기뻤다. 치졸한 기쁨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황후, 마린나사는 첫날밤 이후로 단 한번도 남편과 합방을 하지 못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남편이 오지 않는데 아이가 생길 리 없었다. 욤 제국의 황실 시스템은 독특하여 자식이 생긴다고 무조건 그 어미의 기세가 높아지는 건 아니다. 보라색 눈동자의 자식을 낳아야만 비로써 그 세력이 넓고 견고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없어도 된다는 건 아니다. 가끔씩 후천적으로 보라색 눈동자로 변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안전하게 자리보전을 하려면 아이가 있어야 했다. 일단 합방만 하면 정부와 관계를 맺어서라도 아이를 낳을 수 있건만 아예 오질 않으니 뾰쪽한 수가 없다. 이럴 때는 외가가 나서줘야 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간곡히 황제에게 청해 합방을 유도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녀는 친정의 도움을 받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버지 수는 가주 자리를 넘겨주자마자 행방불명 됐고 현 가주는 외부인 인데다 테밀시아의 오른팔이며, 한때는 테밀시아의 정부라는 소문까지 돌았던 뮤비라다. 그녀의 오빠, 비레오가는 다른 때는 다 자상하면서 이상하게 합방이야기만 나오면 딱딱한 얼굴로 외면해 버렸다. 마린나사가 간곡히 부탁할 때면 우리 같은 아이는 만들지 말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때문에 기회를 틈탄 신하들이 은밀히 후궁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황족의 피가 흐르는 마린나사라면 모를까, 그들의 딸이 후궁이 된다 해도 보라색 눈동자를 가질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없지만 자신의 권력에 상당한 보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테밀시아와 한번 관계를 맺으면, 다른 황족을 매수하여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 꼬락서니들 때문에 지금 테밀시아가 도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다스려야 할 신하들의 유형을 파악하기 위해서. 후계자 따위는 어찌되든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마린나사는 물론 누구와도 자식을 만든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후궁 역시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오르세만 가야 이미 테밀시아의 손을 떠난 것이고, 황실은 어차피 테밀시아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만 태어나면 황태자가 되는 구조니까. 게다가 이미 테밀시아는 보라색 눈동자의 황족을 확보해 두고 있지 않던가. 때를 봐서 입양해야겠지. 지금해서는 테밀시아에게 반발하려는 무리들이 그 갓난아기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좀더 시간을 두고, 테밀시아가 확실하게 국정을 사로잡은 다음에……. “자요.” “……?”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흠칫 정신을 차려 보니, 뮤비라가 크고 곱게 여문 열매를 내밀고 있었다. 받아 드니 웃으며 말한다. “피곤할 때 단걸 먹으면 좋데요.” “하하. 그런가.” 한입 먹어보니, 좀 전에 먹었던 것보다 훨씬 달고 부드러웠다. “달군.” 다시 한입. 이번에는 혀에서 굴리며 충분히 맛을 느낀 뒤 삼켰다. 마치 술을 음미하듯이. 그렇게 또 한입. 또 한입. 그러다 조용히 물었다. “페르는 소식이 없나?” “……예.” “그래…….” 왜 동생의 소식을 뮤비라에게 묻느냐. 그것은 뮤비라의 동생이 그의 동생의 지기였기 때문이다. 2년 전 가출을 했을 때도 요크노민은 동생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뮤비라에게 묻는 것이다. 2년 전 요크노민이 뮤비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페르 녀석……. 단 것을 좋아했는데…….”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그때의 아릿하게 저려왔던 통증도 잊혀지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흐릿했던 등도 잊혀지지 않는다. 오래토록 못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예감과 같은 느낌도 잊혀지지 않는다. 안타까워서,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때 붙잡았어야 했던 걸까?” “테밀시아님…….” “그랬다면…….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들었다면…… 이렇게 안타깝지는 않았을 텐데.” 열매를 들지 않은 손을 펴, 내려다보다가 꾹 쥐었다. 아무거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페르노크님은 분명 괜찮으실 겁니다.” 뮤비라는 애써 확신을 담아 말했다. 꾹 쥔 테밀시아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유시리안 씨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때도 그렇게 보내신 거고요.” 테밀시아는 후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페르를 보고 있지 않았어. 페르 안에서 다른 걸 찾고 있었지.” “기억을 잃건, 잃지 않건 페르노크님은 페르노크님이십니다.” “그에게는 아니었어. 노민에게도 아니었지.” 그리고 힘들어지면 늘 그랬듯이 뮤비라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이제…… 다시는 내 동생을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약한 소리 마세요. 기억의 혼란이 가라앉으면 분명 다시 돌아오실 겁니다. 기억을 잃었을 당시까지, 테밀시아님을 좋아하던 그때까지 기억해 내시고 돌아오실 지도 모르죠. 지금 이러시다 나중에 페르노크님 보게 되면 뭐라고 하시려고요?” “그런 페르를 보게 되도…… 아니, 보게 된다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들 것 같아.” “네?” 알 수 없는 말에 뮤비라가 되물었지만 테밀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테밀시아님…….” 그때였다. 뮤비라는 이마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위를 올려보았다. “아……!” 테밀시아도 뮤비라의 어깨에서 이마를 떼고 하늘을 보았다. 잔뜩 흐린 하늘에 나풀나풀 새하얀 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순결하고, 그 어떤 것보다도 화려하고, 그 어떤 것보다도 눈부신 꽃잎. 테밀시아는 살짝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한 송이 먹고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웃었다. “눈이다.” 세 번째 획을 그은 정보 길드, 크리터. 금안의 황제의 계승식때 시작된 그곳은, 바로 그 다음날 동시에 각 제국, 나라의 수도, 중요도시에 지점을 열었다. 그 광범위함은 용병길드에 비견될 정도였다. 본래 획을 그으려다 실패하는 이유는 그 토착세력의 반발이 제일 큰 이유였는데 크리터는 레타의 양지 얼굴이었기에 그런 일은 없었다. 왜냐면 토착세력이라는 것이 레타였기 때문이다. 또한 방해거리가 있으면 암살해 버리면 그만이었고 말이다. 그것을 뻔히 알고 있는 귀족들은 감히 크리터를 방해하지 못했다. 덕분에 크리터는 욤과 락아타의 지지 하에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물론 그만큼 욤과 락아타에 재물을 바쳤지만 말이다. 그 계산적인 관계는 그들에게 있어서 의리나 보은이라는 달콤함보다 믿을 수 있는 관계였다. 지금 당장은 의뢰가 들어오면 발 빠르게 구하러 다녀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비축되어 언젠가는 의뢰 즉시 해결이 가능해질 것이다. 정보길드란 그 존속기간이 길면 길수록 유리해 지는 법이다. 게다가 그들은 단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고 내부 세력 다툼 없이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었다. 그것은 각 단끼리의 세력 다툼이 심한 용병 길드나, 파벌로 갈려 싸우는 마법 길드에는 없는 힘이었다. 그 구심점은 두말 할 것 없이 ‘청염의 마스터’였다. 그에 대한 길드원의 충심은 굳이 예를 들자면, 곤크에서 마스터에 대한 충심과 같았다. 신과 광신도의 관계. 크리터의 본점은 레타의 본점이었던 욤의 뒷골목이다. 떵떵거리며 화려하게 지어 놓은 타 지점과는 달리 그곳은 은밀한 곳 그대로 있었다. 그것은 레타라는 길드가 가졌던 힘을 포기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도둑, 암살. 이것은 정보와 유착되기 쉬운 매력적인 힘이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귀족들을 향해, 우리는 아쉬울 게 없다는 유세를 떨기 위함도 있었다. 덕분에 다른 지점과는 달리 본점은 찾는 이가 거의 없었다. 가끔 찾아오는 이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귀족들뿐. 그만큼 본점이 다루는 정보는 고급이었고 찾아올 엄두를 내기 힘든 곳이었다. 바로 그 본점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본점은 마스터가 있는 곳. 자연 경비도 삼엄했다. 손님이라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이 삼엄함이란 외부에 보이기 위함으로, 레타에서 마스터란 가장 강한 자였기에 그다지 필요 없는 인력낭비였다. “요크노민을 만나러 왔다. 안내해.” 오랜만에 찾은 손님은 상당히 예의가 없었다. 오만함이야 귀족들의 특징이라지만 이 자는 특히나 더했다. 감히 마스터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대다니. 대귀족들마저 존칭을 붙여주는 마당에! 생긴 것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겨가지고! 막아서며 물었던 경비는 순간 울컥했으나 성질을 죽였다. 이제 그는 레타 길드원이 아닌 크리터 길드원이다. 성질대로 덤비고 볼 수는 없다. “저희 마스터께서는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약속은 되어 계신 겁니까?” 예약되어 있지 않는 손님은 받지 않는다. 그것이 크리터 마스터다. 자부심을 섞어 물었지만 상대는 감흥 없이 말했다. “많이 컸군, 그 꼬맹이.” “……뭐야!?”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감히 마스터를! 그 이름도 드높은 청염의 마스터를! 우리들의 신을!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경비가 검을 뽑자, 옆에서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힐끔 노려보고 있던 녀석들도 무기를 꺼내 들었다. 네댓 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흉흉한 무기를 든 채 위협적으로 주위를 도는 데도, 골목 곳곳에 열은 족히 넘을 듯한 건달들이 노려보고 있는데도, 그 손님은 짧게 비웃기만 했다. “요크노민에게 전해. 유시리안이 찾는다고.” “씹! 알게 뭐야! 덤벼!” “그 녀석 얼굴 봐서 여태 살려둔 거다. 난 두 번 경고는 안한다. 얌전히 전하기나 해.” “이 싸가……!” 막 경비가 욕을 퍼부으며 덤벼들려는 찰나였다. “무슨 일이야?” 크지 않은 평이한 목소리였지만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목소리였다. 마스터의 지기이자 왼팔인 남자, 제그의 목소리였으니까. 게다가 그의 미래 장인은 뒷골목 터줏대감 키안, 그의 미래 부인은 뒷골목의 아이돌 카나인데다, 그의 하나뿐인 동생은 현재 마스터의 머리로서 활약하고 있는 키르바나이지 않은가. “이 싸가지가 감히 마스터를 함부로 부르잖아!” “노민을?” 그는 다른 길드원처럼 마스터의 광신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 걸어왔다. 그리고 덩치 큰 경비에게 가려져 있던 손님을 보았다. “아…….” “오랜만이군.” “그렇지 않아도 노민이 당신을 기다리더군.” “그래?” 그러며 먼저 앞장서 문으로 들어가자, 그 앞에 서 있던 경비들이 주춤 물러났다. 마스터가 기다리는 손님이라니 기가 꺾인 것이다. “그는…….” “뭐?” “……아니. 아무것도. 여기서부터는 내가 앞서 가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제그는 곧 담백하게 떨쳐내고 앞서 걸어 나갔다. 긴 복도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손잡이는 없고 눈높이쯤에 마름모꼴의 금속판이 붙어있었다. 제그가 그곳에 손을 얹자 소리 없이 열렸다. 그 너머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마법으로 한 짓인지 산뜻하게 밝았고, 바닥은 결 좋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제그는 먼저 걸어갔다. 한 이층 깊이 정도 들어갔을까? 다시 똑같은 문이 보였다. 다시 제그가 손을 얹자 이번에는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그냐?” “기다리던 손님이다.” 그제야 문이 덜컹 열렸다. 제그는 자기 역할을 했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서 올라갔다. 얼마 안가 위쪽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신호가 된 양, 묵묵히 서 있던 유시리안이 어중간히 열려 있는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부드러운 조명과 은은한 책 냄새가 나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둥근 방이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모피가 깔려있고 사방에 책이 쌓여 있으며 한가운데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다였다. “어서 오십시오, 유시리안 씨.” “…….” 책을 뒤지고 있었는지 요크노민은 책 더미 쪽에 서있었다. 유시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무의식중에 그의 뒤를 살폈다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의 지기는 없었다. 그리곤 들고 있던 책을 덮고 옆에 탑을 쌓고 있는 책들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방 중앙, 책상 쪽으로 걸어왔다. “들어오십시오.” “왜 왔는지는 알겠지?” “지기의 부고를 전하러 왔다면 정중히 사양하고 싶군요.” 요크노민은 별 동요 없는 음성으로 답했다. 유시리안은 그 덤덤함이 아닌, 그가 택한 단어에 화를 냈다. “펠은 죽지 않았어!” “……?” 유시리안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잠시 이별을 했을 뿐이야.” “그렇습니까…….” 말끝을 흐린 요크노민은 테이블에 기대 미간을 문질렀다. 피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럼 왜 오신 겁니까?” “듣지 못했나?” “뭘요?” “결계핵.”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요크노민은 뜻밖에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유시리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못 들은 거냐?” 맨 처음의 확신어린 질문, 그리고 잠깐의 이별이라 한 말, 그 다음에 의미심장한 단어, 계속된 질문. 생각을 정리하다가 지기와 헤어졌을 때의 일까지 거슬러 올랐다. 그때 그는 다시 만날 때까지만 미안해한다고 했었다. 거기까지 생각해낸 요크노민은 미심쩍게 물었다. “……혹시 페르가 돌아올 방법이 있는 겁니까?” 유시리안은 그 순간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펠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선택권을 줬군.” “……?” 요크노민은 더 묻지 않고 유시리안이 알아서 말해주길 기다렸다. 유시리안은 시간 끌 거 없다 생각했는지 바로 무하에게 들은 말을 늘여 놓았다. “그 일은 분명 만만치 않을 테지. 그래서 펠은 그 시작점까지 다 나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 거야. 더 이상 나에게 자신이 특별해지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게.” “그래서 시작점은 접니까?” 요크노민의 얼굴에 미소가 슬쩍 떠올랐다. 그것은 그가 지기를 그렇게 보낸 이후 처음 짓는 미소였다. “핵에 대해 알아봐줘. 명색이 정보 길드잖아.” “크리터 최초의 고난위도 의뢰군요. 후후.” 요크노민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맨 밑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서류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뭐냐?” “계약서입니다. 알아보는 데 드는 경비의 배분, 기간, 항목, 대가, 만약 알아보지 못했을 때의 배상금 따위죠. 곁들여 저희가 지켜야 할 의뢰인 정보 보완도 있고, 의뢰인이 지켜야 할 예의도 있습니다.” 그리고 씽긋 웃었다. “저희도 땅 파 장사하는 게 아니라서 말이죠.” “쿡. 필요 없어.” “……?” 유시리안은 작은 주머니에서 건성으로 뭔가를 휙 던졌다. 받아 채서 보니 손바닥보다 큰 락팔어였다. 백지수표와 다를 바 없는 후카! “경비는 내가 다 대겠어. 기간은 핵에 대해 모두 알아낼 때까지. 대가는 그동안 든 경비의 두 배를 지불하지. 단!” 요크노민은 이미 그가 할 말이 뭔지 안다는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알아내지 못했을 때란 없어.” “좋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백지를 꺼내 빠르게 내용을 채웠다. 그가 쓰는 것을 지켜보던 유시리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나한테 보내는 정보는 초록 고향의 장로 에르니한테도 보내.” “그랜드가 아니면서 그랜드의 짐을 지고 있다는 분 말입니까?” 명색이 정보 길드라고 벌써 안 모양이다. 유시리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도 돕는답니까?” “아아.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필사적으로 도울 거다.” 다른 엘프라면 거치적거린다며 거절했겠지만 에르니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는 충분히 도움이 되는 전력이다. “자, 사인하십시오.” 계약서를 밀며 펜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드는 유시리안의 손목에 기이한 형태로 휜 붉은 팔찌가 걸려있었다. “그건 페르의…….” “아아.” 퉁명하게 답한 유시리안은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고 빠르게 서명했다. 그가 서명한 것을 지켜보던 요크노민이 조용히 물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군요.” “이 녀석들이 공명하는 것은 내가 아닌 펠이니까. 나는 잠시 맡아둔 것뿐이야.” “정령과의 맹약은 깨진 겁니까?” “훼오트라 아나 녀석이 무슨 수를 썼는지 깨지지는 않았어. 두 녀석 다 잠든 상태야.” “그렇습니까.” 유시리안은 사인을 한 계약서와 펜을 넘겼다. 계약서에 휘갈겨져있는 유시리안의 사인을 잠시 살핀 요크노민은 싱긋 웃었다. 개구쟁이 같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활기 있는 웃음이었다. 지가가 돌아오는 것을 이 손으로 도울 수 있다. 이제 무력하지 않다! “이용 감사합니다, 고객님.” 1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