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아가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일루니아가 물었다. " 왜 그래? 그 인간 때문에 그래?" 여기서 그 인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루시아는 대답을 하지 않은으로써 긍정을 표시했다. 일루니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시아같이 완벽한 여자가 어째서 그딴 자식을 좋아하는가? 뭐가 아쉬워서? 일루니아는 루시아를 위해서라도 둘이 헤어지기를 바랐따. " 그러니까 그딴 자식은 내버려두고 어서 왕궁으로 돌아가라니까." " 그러는 언니는 왜 여기에 있는 건데?" " 그야……." 재밌으니까 그러지.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어차피 한번뿐인 인생 여기저기 돌아봐야 죽을 때 후회를 안 하지. 루시아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정말로 그의 어디가 좋은 걸까? 외모는 평범의 극치이고, 성격은 종잡을 수가 없다. 게다가 여자관계까지 복잡……. 간단히 말해 최악의 남자였다. 어딜 봐도 반할만한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8클래스 마스터라는 것과 드래곤이 친구라는 것. 그리고 라이의 보호자라는 것 정도? 사실 히로 자신은 인식을 못하고 있지만 그의 최대 장점은 라이의 보호자라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 라이같이 귀여운 소녀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귀여움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대량살상 무기로 분류될 라이가 아니던가? (이렇게 되면 미국이 난리치겠군) 루시아가 이 세상에 온 이유 중 라이의 존재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라이는 히로과 떨어지기 싫었고, 루시아는 라이와 떨어지기 싫었으니……. 뭐, 어쨋든 지금 루시아는 히로를 어느 정도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이 라이 때문이든 뭐든 간에. 루시아가 히로의 과거에 신경을 쓰는 것은 히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의 과거를 신경 쓰겠는가? ' 내가 너무 심했나? 그래도 단 한번의 실수인데. 그것도 나랑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잖아.' 머릿속으로는 이해해보려도 해도 가슴 속으로 이해가 안 된다. 루시아는 아까 히로와 싸운 이후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했고,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먼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화해의 손길을 내민 건데……. 거절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지니 오빠와 갈 데가 있다고? 대체 어딜 가기에 내 요청을 거절한 거지?' 이러한 의문은 루시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루니아 역시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싿.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히로는 공처가였다. 루시아 말 한마디면 꼼작 못하는. 그렇기에 일루니아는 루시아가 저녁을 같이 먹으러 가자는 제안을 했을 때, 히로가 발정난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루시아의 뒤를 졸졸 따라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히로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자신의 동생인 지니가 있었다. ' 뭔가 음모의 냄새가 풍겨.' 왕년에 참모였던 일루니아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일루니아와 히로의 사이는 견원지간이라는 고사성어가 부족할 정도로 안 좋았다. 히로는 과거나 수많은 노처녀들에게 귀롭힘을 받으며 노처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 쌓여 있었고, 일루니아는 천성적으로 히로같이 뺀질뺀질한 인간을 싫어했다. 어쩌면 애초에 둘은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 이해할 수가 없어. 어째서 그 자식이 너의 제안을 거절한 거지? 게다가 지니랑 어디를 간다는 거야? 대체 어디를 가기에 너의 제안까지 거절하며 가야했을까?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 하긴, 좀 이상하긴 해. 어디 갈 데도 없을 텐데." 듣고 보니 의혹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루시아는 라이에게 물었다. " 라이야, 히로 오빠가 어디 갔는지 알아?"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라이는 오빠가 어디에 갔는지 잘 몰라요. 라이도 오빠랑 언니랑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싶었는데……. 루시아는 침울한 표정을 짓는 라이를 꼭 안아 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루시아의 품에서 볼을 부비부비하며 웃음을 지었다. ' 나도 저런 딸 하나만 있었으면……' 일루니아는 그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인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인디님은 그 인간이 어디에 갔는지 아시나요?" " 예, 예!" 요리를 하던 인디는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손가락을 베었다. 인디의 새하얀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놀란 일루니아는 황급히 반창고를 찾아와 그의 손가락에 붙여 주었다. " 괜찮으세요?" " 예, 괜찮아요, 일루니아님." " 그러게 조심하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호 해드릴게요. 호~." " 고, 고마워요." "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신 거예요?" " 아, 아니에요! 저 하나도 안 놀랐어요!" 화들짝 놀라며 극구 안 놀랐다고 주장하는 인디. 그런 인디의 모습은 마치 '저도 그 일과 무슨 연관이 있답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했다. 장님이 아닌 이상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일루니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혹시 뭔가 알고 잇는 게 있으신가요?" " 아, 아니에요! 저, 저는 아무 것도 모, 몰라요. 지, 진짜에요……." 몸을 덜덜덜 떨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은 채 눈에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히로가 시킨 대로 말하는 인디. 인디는 지금 극심한 공포감에 가득 차 있었다. ' 만약 남자끼리 한 약속을 어긴다면 일루니아님이 이혼하자고 할지도 몰라. 그렇다고 일루니아님께 거짓말을 하다니. 흑흑, 이제 난 어쩜 좋아?" 일루니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제까지의 결혼 생활 동안 거짓말은커녕 사소한 것 하나 숨기지 않은 인디였다. 그런 인디가 이렇게까지 극구 부인을 하는 데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인디님은 진실을 알고 있어. 하지만 누군가의 협박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분명해.' 일루니아는 엘리트 여성답게 금방 사건의 진위를 파악해 냈다. 그럼 이젠 인디를 구슬려 정보를 얻어내기만 하면 되는 거다. 일루니아는 잔뜩 겁먹은 인디를 안아서 달래 주었다. 토닥토닥! " 괜찮아요. 겁먹지 마세요." " 이, 일루니아님." " 그런데 정말로 그 인간이랑 지니가 어디에 갔는지 모르시나요?" " 저, 저는……." 차마 뒷말을 잊지 못하는 인디. 인디의 귀에 낮에 히로가 한 협박이 맴돌았다. 당장 일루니가 여사님께 일러바치겠어. 그럼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니가 남자끼리 한 약속도 안 지키는 신의 없는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러면 크게 실망하셔서 니 곁을 떠날 거야. 인디는 일루니아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 일루니아가 떠나버린다면 자신은 슬픔에 치여 죽을지도 말랐다. 그럼 사상 최초로 실연의 아픔으로 사망한 드래곤이 되는 것이다. 인디가 굳게 입을 다물자 일루니아는 조금 화가 았다. 원래 말을 잘 듣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안 들으면 괜히 반항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기분이 상한 일루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몸을 획 돌렸다. " 이, 일루니아님." " 부부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서 한다고 생각해서 전 이제까지 인디님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씀 드렸는데, 인디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신가 보군요." 냉랭한 일루니아의 말에 인디는 그야말로 얼어붙었다. ' 일루니아님께서 저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이시다니! 화가 많이 나셨나봐. 난 어쩜 좋아? 흑흑.' " 인디님께서 이러시는 것은 저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네요. 우리 잠시 동안 떨어져 있어요." " 아, 안 돼요!" 일루니아가 가려고 하자 인디는 필사적으로 일루니아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 흑흑, 잘못했어요, 일루니아님. 저, 저는 다만 일루니아님께서 절 싫어하시게 될까봐…… 절 떠나실까봐…… 흑흑." 싫어 해? 떠나? 인디가 펑펑 울자 일루니아는 더 이상 싸늘한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일루니아는 인디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제가 인디님을 싫어하게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어서 말씀해 보세요." " 흑흑, 정말요" " 예. 절 사랑한다면 전부 말씀해주세요." " 그럼……." 인디는 낮에 창고에서 들었던 얘기와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술술 불기 시작했다.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하니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지니가 히로에게 바람을 피라고 사주한 얘기, 둘이 나이트클럽 가기로 한 얘기, 그리고 칼로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는 것과 남자의 약속 운운하면 비밀을 지킬 것을 강요한 얘기 등등……. ' 뭐야? 그럼 나이트클럽에 가서 여자 꼬시려고 저녁 식사 제안을 거절했단 말이야?" 루시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루니아도 마찬가지였다. ' 감히 내 남편을 칼로 협박하고, 그딴 얼토당토한 얘기로 옭아매려 했단 말이지? 역시 그놈은 인간 쓰레기야!' 일루니아는 분노를 잠시 삭인 다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어서 가자, 루시아." " 응? 어딜?" " 당장 가서 현장을 덮치는 거야." " 응?" " 그 인간 성격 봐서는 분명 끝까지 안 했다고 잡아 뗄 게 뻔해. 그리고 지니는 그 인간 편이니까 분명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겠지. 그러니까 현장을 덮쳐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야." 그렇다. 히로 성격상 끝까지 잡아뗄 께 뻔하다. 라이가 사랑과 정의의 요정이라면, 히로는 구라와 공갈의 요정이 아니겠는가? " 라이도 같이 갈래요!" 여기 있는 사람 중 유일하게 히로를 믿어 주는 사람이 바로 라이였다. 라이는 헬로우 귀티 인형을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 인디 오빠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해. 히로 오빠가 루시아 언니를 버려두고 다른 언니를 만날 리 없어! 그래! 라이는 오빠를 믿어! 왜나하면 오빠는 착한 인간이니까.' 히로가 착한 인간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 강남의 나이트클럽 <쉐이크>라고 하셨죠?" " 예. 분명히 그렇게 들었어요." 요즘은 시대가 워낙 발달 되어서 인터넷 검색 한번만 해보면 연락처와 위치는 물론 약도까지 쫙 나온다. 약도를 프린트한 넷은 만들던 저녁을 내팽개치고 현장을 급습하기 위해 나이트클럽으로 향했다. 아아~ 과연 히로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      *     *     * 내가 나이트클럽에 온 것은 맹세코 생애 처음이다. 지니를 따라 들어선 그곳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인가? 바깥의 모습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난 신선한 문화적 충격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벗었다……라는 표현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여성들의 복장(난 처음에 수영장에 온 줄 알았다). 지니의 말대로 그 여인들은 거의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고, 외모 역시 아름다웠다(고친 게 분명하시만). 시끄러운 음악과 화려한 조명, 그 밑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는 사람들. 나이트클럽의 열기는 한껏 조고되고 있었다. " 어떻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마음에 드시는지요?" 난 고개를 획 돌려 지니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좋은 곳을 그동안 혼자서만 출입했단 말인가? 좋은 것은 나눠먹고 좋은 곳은 같이 가는 것이 진정한 신하의 도리이거늘. " 죄송합니다. 그동안 제가 생각이 짧아 아이언스 공작님을 모시고 오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오늘 부킹은 제가 완벽하게 책임질 테니, 부디 이번 한번만 저의 과오를 용서해 주십시오." " 흠흠, 그렇게까지 말하시니 이번 한번만은 제가 참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넓은 아량으로 용서를 하자 지니는 감사의 의미로 머리를 조아렸다. 우리는 일단 스테이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아까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웨이터 '투명 드래곤'이 맥주와 기본 안주를 내왔다. 아까부터 자꾸 이 웨이터의 명찰이 신경 쓰인다. 화이트 드래곤도 블루 드래곤도 아닌 투명 드래곤은 대체 뭐야? 하얀 집이 화이트 하우스, 파란 집에 블루 하우스, 투명 집이 비닐하우스……인 것과 무슨 관련이 있나? 지니는 품에서 VIP쿠폰을 꺼내 투명 드래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투명 드래곤은 놀라며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지니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 일단 이 집에서 제일 비싼 양주와 최고급 안주를 내오십시오. 그리고 근처에 호텔룸 두 개 잡아주십시오. 부킹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 알겠습니다. 모시게 되서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오실 때도 저 투명 드래곤을 찾아 주십시오." 투명 드래곤이 사라지고나자 난 지니에게 말했다. " 그 쿠폰이 대단한 건가 보죠?" " 저 쿠폰 한 장으로 이곳에 있는 술을 다 마셔도 상관없습니다." " 그런데 호텔룸은 뭐 하러 잡은 건가요?" " 후후, 다 아시면서 뭘 묻고 그러십니까?" " 다 알다니…… 헉! 서, 설마!" " 바로 그 설마입니다." " 그, 그런……." " 제가 부킹에서 호텔룸까지 완벽하게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러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저만 믿고 따라주십시오." " ……." 부킹에서 호텔룸까지! 요람에서 무담까지도 아니고, 부킹에서 호텔룸까지라니! 세상 천지에 이런 충신이 어디 있겠는가! 하, 하지만 호텔까지 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냥 같이 술 마시고 춤추는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 아이언스 공작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호텔룸 하나는 취소하도록 하지요." 지니는 투명 드래곤을 불러 정말로 호텔룸을 취소하려 했다. 깜짝 놀란 나는 지니를 뜯어 말렸다. " 생각해보니 사일런스 백작님의 성의를 거절하는 것도 좀 그렇군요. 특별히 호텔까지 가는것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씨! 이 인간은 세 번 거절은 예의라는 말도 모르나? 호텔 가기 싫다고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쩌자는 거야? 기왕 여기까지 왔으면 호텔까지 올 나이트를 해야 할 것 아냐? 사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루시아와의 사이는 오히려 더 소원해졌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가게 차리느라 바빴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집에서 죽 치고 있는 라이레얼 때문이다. 아아~ 라이레얼과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이 세계로 왔지만 그 과거는 끝까지 나의 발못을 붙잡고 늘어지는구나!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이유라 하면 라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루시아가 라이 기르는 재미에 푹 빠져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거든. 흑~ 라이가 루시아를 뺏어갓어. 라이 미워! 이러한 연유로 난 이 세계로 돌아온 뒤 루시아랑 키스 한번 제대로 못 해봤다. 키스는 둘째 치고 손이라도 제대로 잡아봤으면 좋겠다. 그래. 결론은 지금 난 욕구 불만이라는 거다! 한참 성적 호기심이 왕성할 이 나이에 절세 미녀를 앞에 두고도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야 하는 내 심정. 이건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나같이 잘난 인간이 뭐가 아쉬워서 참고 살아야 하는가? 그래. 이제는 한계다. 나도 즐길 권리가 있다 이거야! 내 오늘 끓어로느는 이 청춘의 열기를 활활 불태우리! 난 혼자서 굳게 각오를 다졌다. 어느새 우리가 앉은 자리에는 양주와 안주가 가득 올려져 있었다. " 한잔 받으시지요." " 예." 난 술을 받기만 하고 마시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힘 뺄 필요는 없겠지. 그나저나 여기 참 정신없는 곳이군. 시끄러워서 말소리도 제대로 안 들리네.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긴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다. 미모의 여성들이 현란한 불빛 아래서 몸을 흔들어 대고 있는 모습은 마뤼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아아~ 세상 천지에 이런 좋은 곳이 있었을 줄이다. 앞으로도 자주 애용해야지. 비록 즐겁긴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찝찝함이 느껴진다. 이유는 루시아와 라이를 속이고 이런 곳에 와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셋이서 저녁 먹는 것이 더 재밌었을지도…… 아니야. 그래서는 발전이 없어. 가끔씩은 나도 좀 즐기고 살아야지. 내가 지금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인디였다. 이놈이 과연 약속을 지킬까? 혹시 ㅂ러써 일루니아 여사님께 술술 분 거 아냐? 남자끼리의 약속을 운운하며 어떻게든 약속을 지킬 것을 종용했지만 이놈이 정말로 지킬지는 의문이다. 이놈 하는 짓을 봐라. 남자가 치마를 입고 다니질 않나, 만날 눈물 질질 짜질 않나……. 인디는 어디까지나 일루니아 여사님의 치마폭에 휩싸여 있는 소심남에 불과핟. 일루니아 여사님 한마디면 간도 쓸개도 다 빼줄 드래곤이다. 다시 말해 약속을 개코로 아는 드래곤이라는 거다. < 참고> 약속을 개코로 아는 인간 - 히로 약속을 개코로 아는 엘프 - 갈리온드 약속을 개코로 아는 하프엘프 - 라이레얼 뭐, 사나이끼리 한 약속인데 설마 어기지는 않겠지. 그래. 그냥 믿고 술이나 마시자. 내가 양주잔을 들고 한잔 쫙 들이키는데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근처로 두 여인이 다가왔다. 두 여인 모두 미니스커트와 배꼽티를 입어 몸매를 한껏 드러내고 있어써다. 얼굴에 짙은 화장을 했고. 이런 말을 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겠다. 내가 이 여인들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술집 여자군. 바로 이거다. 두 여인 모두 아름답긴 하지만 뭐랄까? 너무 노는 분위기가 난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녀들은 평범한 남자인 내가 범접할 수 없는 특이한 오오라(?)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굶주렸다고는(?) 하지만 이렁 여자들한테 넘어갈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나의 이상형은 아름답고 차분하고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발랄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러니까 루시아 같은……. 안 돼! 여기서 왜 또 루시아 얘기가 나오는 거야? 오늘밤은 루시아를 잊고 즐겨보려 하는데! " 오빠. 우리랑 놀자." 그들이 말하는 오빠란 당연 지니를 칭한다. 하긴, 설마 내 얼굴을 보고 우리 테이블로 찾아오지는 않았겠지. 지니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정중하게 거절했다. " 죄송합니다, 아가씨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시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들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지니의 팔에 매달렸지만 지니는 정중한 태도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 마음에 다는 여성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 그런데 제가 마음에 들었다 하더라고 상대가 절 싫어하면 어쩌죠?" " 그럴 리는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여성분들은 아이언스 공작님의 인품에 반해 자발적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간택하시면 그 여인은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성심성의껏 아이언스 공작님을 모실 것입니다." " 아니, 이 여자들이 내가 이곳에 온다는 걸 어떻게 알고 여기에 모여요?" " 꽃의 향기에 취해 나비들이 몰려들듯 출중한 남자에게 여자가 이성적으로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외모와 학식, 무예, 인품 등 모든 면에서 타인이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지니셨으니 어찌 여성들이 그에 반해 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오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주위에 모인 여성들에게 손을 내미시기만 하면 됩니다." " ……."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 라지만 기분은 좋다. 역시 지니가 아부에는 일가견이 있어. 후후~ 그럼 어디 한번 골라 볼까나? 난 부킹 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여기도 미인, 저기도 미인……. 어떻게 된 게 사방팔방에 다 미인들이다. 우리나라에 언제 이렇게 많은 미인들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같이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얘가 걔같고, 걔가 얘같고. 으음, 미인인 것은 좋지만 몰개성한 것은 싫은데. 원래부터 저렇게 비슷비슷하게 생겼을 리는 없다. 여기 있는 여자들이 전부 자매가 아닌 이상. 그렇다면 답는 하나. 그렇다. 뜯어 고친 것이다. 원래 뜯어 고치다보면 다 비슷비슷한 얼굴 되는 거 아니겠나? 뭐, 성형수술에 특별히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끔찍하다. 이러다가 길을 걷다가 똑같은 얼굴끼리 마주치는 거 아냐? 으음, 무슨 도플갱어도 아니고……. 난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170이 넘는 키에 날씬한 몸매. 입고 있는 옷은 분홍색 원피스다. 치마가 좀 짧긴 하지만 이곳에 모인 다른 여성들에 비하면 그리 짧지도 않다. 얼굴은 그야말로 조각 같았다. 계란형의 얼굴에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눈, 코, 입. " 견적이 얼마나 나왔을까요? " 제가 계산해 보기론 최소 1500만원입니다." " 으음, 엄청난 리모델링이군요." " 저 정도면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 수준이죠." " 으음, 재건축이라니……." 참고로 현재 의학계에서는 리모델링과 재건축의 기준에 대한 눈란이 많다고 한다. 어떤 의사는 1천만 원 초과는 재건축, 1천만 원 이하는 리모델링이라 하고, 또 어떤 의사는 골격을 중심으로 하여 뼈를 갈면 재건축, 안 갈면 리모델링이라 하고, 또 어떤 의사는 변신 정도에 중점을 두어 가족도 몰라볼 정도면 재건축, 가족이 알아볼 정도면 리모델링이라 주장한다. 으음, 정말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난 한참을 둘러보앗지만 마음에 드는 여성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들이 아무리 예뻐 봤짜 루시아 발끝에도 못미치니. 아아~ 루시아가 보고 싶다. 백금발 머리카락에 풍기는 샴푸 냄새를 맡고 싶다. 보석과도 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흠뻑 취하고 싶다. " 마음에 드는 여성이 없으신가요?" " 예. 다 거기서 다 거기네요." 미인들과 사니 이게 문제다.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높아져 버린다는 것. 내 주위에 미인은 정말 널리고 널렸다. 일단 여자로는 루시아, 라이레얼, 카르, 루엔 등이 있고, 남자로는 인디, 크로니스 등이 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일루니아 여사님도 꽤나 미인 축에 속한다. 인텔리전트한 미인. 그리고 지니, 카이네이드, 갈리온드는 여자들이 한눈에 혹할 만큼 잘 생겼고, 라이, 루, 루비는 귀엽고 깜찍하다. 이런 인간(인간 아닌 것들이 더 많지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데 눈이 안 높아지고 배기겠나? " 그럼 제가 일단 아이언스 공작님 마음에 들 만한 여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여성상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적극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난 별로 기대 되지는 않았찌만 '밑져야 본전이다'라는 생각으로 말했다. " 일단 예뻐야 하구요…… 몸매도 좋아야 하구요…… 좀 순진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말이 잘 통해야 하고, 성격은 차분하면서도 귀여운…… 아! 기왕이면 연하였으면 좋겠어요. 제가 비록 연상 취향이긴 하지만 가끔은 연하가 땡기기도 하네요. 그리고 단발머리에 염색은 안 했으면 좋겠고, 커다란 인형을 써서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는 풍기는…… 그러면서도 지적으로 보이는…… 복장은 너무 튀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 주문(?)이 끝나자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반드시 아이언스 공작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여성분을 부킹해오겠습니다." " 예, 수고하세요."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한손으로 턱을 괴면서, 다른 손으로 과일 안주를 집어 먹었다. 어디 한번 잘 해봐라. 니가 어딜가서 그런 여자를 찾아오겟냐? 그동안 너무 루시아한테만 매달려서일까? 요즘은 왠지 연하가 끌린다. 으음, 그런데 여기에 연하가 있으려나? 다 누님들뿐인 것 같은데. 내가 과일 안주를 세 개째 집어먹고 있을 때 지니는 세 여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나는 그 여자들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정말로 그들 중에 내가 주문한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단발머리에 알이 큰 무테안경, 동글동글하고 앳되 보이는 얼굴,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 차분하면서도 귀여운 외모다. 입고 있는 옷은 청바지에 한 사이즈 큰 티셔츠로 수수했고, 액세서리라고는 목에 건 은색 목걸이가 전부였다. 외모와 옷차림으로 봐서 대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고등학생? 그녀의 옆에 있는 둘도 그녀의 또래인 것 같았다. 고등학생들이 몰래 엄마 카드라도 훔쳐서 놀러온 건가? 지니는 자신의 양 사이드에 둘을 앉힘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녀를 내 옆에 앉게 했다. 다소곳하게 내 옆에 앉는 단발머리 소녀. 다른 두 여자는 지니의 양팔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난 이번 계획에 치명적인 약점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와 지니가 같이 있을 경우 모든 여성들은 지니에게만 관심을 나타냈다. 그리고 나는 만날 '덤' 혹은 '부록'으로 취급받았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녀를 만났는데 지니에게 빼앗겨야 하다니! 이런 비극적인 일이! " 저, 저기…… 안녕하세요." " 어! 그래. 아, 안녕." 놀랍게도 단발머리 소녀는 지니에게 별 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난 기쁜 마음에 침을 꿀꺽 삼켰다. "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맞지?" " 예. 고등학교 2학년이에요." " 그럼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 친구 따라서 온 거예요. 여기는 주민등록증 검사를 안 한다고 해서……." 말하는 것도 차분하고 또박또박하다. 난 이 소녀를 보고서 왜 남자들이 연하에 끌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이름이 뭐야?" " 은영이에요. 김은영." " 난 박영웅이라고 해." " 예."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하다. 아아~ 오길 잘 했어. 플레이 걸즈(노는 여자들?)가 대부분인 이곳에서 이런 순진하고 귀여운 여고생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뭐? 여고생이면 원조 교제 아니냐고? 어허! 내 나이게 몇인데 원조 교제야? 내가 비록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지 얘랑 2살 정도 박에 차이 안 난다. 후후~ 2살 차이면 딱이군. 앞으로 잘해보자꾸나~. " 술은 좀 마실 줄 아니?" " 아, 아니요. 잘은……" " 일단 한잔 마시려무나." " 예." "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그냥 편한 오빠처럼 생각하렴." " 예." 후후~ 오빠, 오빠 하다가 여보, 자기 되는 거지. 아아~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연하가 끌리는지 모르겠어. 은영이는 내가 따라준 양주를 한번에 꼴깍 삼켰다. 그러나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 자자, 한잔 더 마셔." 난 은영이에게 계속 술을 권했다. 은영이는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지 내가 권하는 대로 받아 마셨다. 지니는 양 사이드에 여고생을 끼고 한창 즐기는 중이었다. 얼굴 잘 생긴데다가 말도 잘하고, 매너도 좋다.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바람둥이라는 거지만 그게 또 여자들에겐 매력으로 느껴지겠지. " 여기 자주 오니?" " 아, 아니요. 오늘이 처음이에요." " 그래? 재미는 있어?" " 예. 오빠는…… 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 아하하! 그야 물론이지." " 오빠는 여기 자주 오시나요?" " 아니야. 나도 저 인간 따라서 처음 와본 거야." " 그렇군요." " 그나저나 고등학생이면 참 힘들겠구나." " 예. 조금……." "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시절이 그립군. 비록 지금은 힘들겠지만 열심히 하렴.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그 시절이 조금도 그립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나보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그 자식에게 빅장 40단 콤보를 먹여 줄 것이다. 학생이 무슨 공부하는 기계인 줄 아나? 하지만 나는 이런 본심을 내보이는 대신 어른스러운 말로 타일렀다. 내 말을 들은 은영이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 고마워요, 오빠. 오빠랑 얘기하니 기운이 나는 것 같아요. 사실 이번에 성적이 많이 떨어져서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이 기분 전환하자면서 끌고 온 거예요. 처음에는 오기 싫었는데 지금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빠같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 그, 그래? 하하, 도움이 되었다니 나도 기쁜 걸. 아하하하!" 그래. 인간 박영웅 아직 죽지 않았다. 나의 남자로서의 매력은 살아 있었던 거야! 그동안 루시아 꽁무니 따라다니느라 허비한 시간이 아깝군. 앞으로는 나도 좀 즐기고 살아야겠어. 은영이는 많이 취했는지 슬쩍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난 그녀의 여린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아 주었다. 순간 찌리릿 하고 전기가 온다. 간만에 여자랑 접촉을 하니 참으로 긴장되는군. " 스테이지에서 이 두 여성분과 함께 춤을 추고 오겠습니다." 지니는 두 여고생의 손을 붙잡고 스테이지로 나갓다.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던 여성들은 지니의 옆에 있는 두 여고생을 잡아먹을듯이 노려보았다. ' 네년이 주제를 모르고 감히 내 이상형에게 붙어 있다니!' ' 당장 떨어지지 못할까!' ' 야, 이년아! 죽고 싶어! 당장 떨어져!' ' 어린년이 집에서 모의고사나 볼 것이지 여기서 왜 지랄이야? 당장 집에 가서 국영수 공부나 해!' ' 그 남자는 내 꺼야!' 하지만 두 여고생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 훗! 노땅들 주제에 어디 감히 지니님을 넘봐!' ' 난 오늘 하루 지니님의 품에 안겨 있을 테야!' 지니를 두고 벌어지는 여인들의 암투. 언제나 잘난 지니를 부러워하긴 하지만 저런 못브을 볼 때면 좀 무섭기도 하다. 뭐, 지니도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겠다…… 이젠 둘이서 오붓하게 즐기는 것만 남았군. " 우리도 춤출까?" " ……"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은영이. 아아~ 정말 너무 귀엽다. 난 은영이를 데리고 스테이지로 나갓따. 마침 신나는 댄스곡이 끝나고 잔잔한 블루스 음악이 깔렸다. 몸을 흔들어 대던 남녀는 어느새 서로의 몸을 꼭 겨안고 음악에 맞춰 몸을 느리게 움직였다. 난 은영이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러자 은영이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몸을 밀착해 왔다. 쿵쾅쿵쾅!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아아~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그동안 이런 행복을 모르고 살았다니. 좋았어! 이대로 호텔까지 직행하는 거야!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응?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인 여자애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그건 뭘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면 알거 다 알고, 할 거 다 할 줄 아는 나이다. 난 고등학교 2학년 때 다른 세계에서 피 터지게 싸웠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은 기본이다. 세계의 운명을 걸고 드래곤과 싸울 뻔하기도 했다. " 저기요……." " 응? 왜 그래?" 내가 묻자 은영이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 저 오늘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 ……!" 헉! 이럴 수가! 집에 들어가기 싫다니?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외박을 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는 것은 나와 함께 밤을 지새고 싶다는 뜻? 처음으로 와본 나이트클럽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여자를 만났는데, 그런 그녀가 집에 들어가기 싫단다. 어쩜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가 있을까? 너무 일이 잘 풀리다 보니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에는 늘 마가 낀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찰 수는 없는 일. 난 기꺼이 그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 그럼 오빠가 오늘밤 은영이 곁에 있어 줄게." 내가 은영이의 귓가에 속삭이자 은영이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 " 고마워요, 오빠." 은영이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앗따. 천천히 감기는 눈. 색색깔의 조명 아래 붉게 빛나는 입술. 은영이는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몸이 밀착되어 있는지라 나는 그녀의 떨림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난 은영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곧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난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입술이 나를 유혹하득 반작거렸다. 마치 첫키스를 하는 것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두근두근! 쿵쾅쿵쾅!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녀의 입술을 느낄 수 있다. 조금만 더……. 그녀와 나의 입술 거리는 1센티미터. 하지만 난 그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은영이와 키스를 하고 싶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본능이 이성의 명령을 거역하고 멈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본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본능은 끊임없이 나에게 경고를 보냈다. 키스를 하지 말라고. 하지만 무엇 때문에? 여자 쪽에서 이렇게까지 바라는데 문제될 게 뭐가 있다고? 그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겉보기에는 이렇게 평범해 보여도 절대 감각을 가지고 있는 뉴타입이 아니겠는가? 난 절대 감각으로 주위의 이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매우 낯익은 기운이었다. 은영이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굳어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 오빠 왜 그래요?" 그녀의 질문에 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루시아, 라이,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난 지금 이 순간이 꿈이기를 바랐따. 하지만 내가 처한 이 상황은 분명한 현실이다. 내가 꿈이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눔을 감았다 떴다. 당연하게도 네 사람은 여전히 그 곳에 서 있었다. " ……." 뭐야? 집에서 저녁 먹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난 순식간에 잔머리를 굴려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아니, 잔머리를 굴릴 것도 없었다.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 소심 드래곤으로도 불리며 현재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남편으로 일처종사하는 애처가.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서 약속을 개코로 아는 불량 드래곤. 내가 노려보자 인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 너 이 자식! 남자끼리 한 약속을 어겨? 니가 그러고도 남자야? 니가 그러고도 드래곤이야?" " 죄, 죄송해요. 저는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드래곤이랍니다. 하지만……." " 하지만?" " …… 사랑이 더 소중하답니다." 자기가 말하고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일루니아 여사님 뒤로 후다닥 숨어버리는 인디. 그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일이 어찌된 건지 알겠군. 냄새를 맡은 일루니아 여사님이 인디를 닦달했고, 사랑에 눈 먼 인디는 남자끼리의 약속을 개코로 여기고 술술 불었겠지. 나쁜 자식! 역시 그때 제거했어야 했는데! " 한순간의 실수가 천추의 한이 되어 돌아오는구나!" 난 하늘(정확히는 나이트클럽 천장)을 바라보며 장탄식했다. 팔짱을 낀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를 마음껏 비웃었다. 순진한 나를 궁지에 몰아 놓고 저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다니! 도대체 노처녀의 사악함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아니, 이젠 노처녀도 아니잖아. 결혼까지 한 주제에 대체 왜 날 괴롭히는 거야? 결혼했으면 이제 히스테리는 그만 부려야 하는 거 아냐? 예로부터 남의 곤경을 보고 돕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저 부부는 절벽 끝에 서 있는 나를 밀지 못해 안달이었다. 내 언젠가는 이 빛을 갚고 말 테다!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두 손을 꼭 쥐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는 라이와 얼음장같이 싸늘한 눈빛을 한 채 나를 보는 루시아. 루시아의 눈빛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빨리 변명의 말을 생각해 내야 돼! 그래! 나의 말발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거야! 하지만 대체 무슨 말로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내 품 안에 은영이가 있는 마당에……. " 아는 사람들이에요, 오빠?" " ……." 그래.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어서 문제지. 난 떨리는 소능로 은영이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어느새 블루스 음악은 신나는 댄스 음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춤을 추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스테이지 위에서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라이의 목소리였다. " 너, 너무해요, 오빠! 라이는 오빠를 믿었는데! 인디 오빠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라이는 오빠를 믿었는데…… 훌쩍~." " 라, 라이야." " 어떻게 루시아 언니를 두고 다른 언니를 만날 수가 있어요? 루시아 언니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잘 알면서…… 훌쩍~." " 오, 오해야, 라이야." " 라이는…… 라이는…… 오빠한테 실망했어요! 오빠 미워요! 우에에엥~!" 말을 마친 라이는 루시아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이럴 수가! 내가 라이를 울리다니!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 나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유일한 충신인 지니마저도……. " ……." 지니? 맞아. 생각해보면 이게 전부 지니 때문이잖아. " 저, 저기…… 루시아. 그, 그러니까 나는 지니를 따라왔을 뿐이야. 지니가 그냥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해서 따라와 봤는데 여기였어. 난 나가려고 했지만 지니가 하도 잡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 전부 제 동생 탓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제 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네요."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내 말을 자르며 비아냥거렸다. 그 말에 난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지니를 찾아보았다. 보통 한번 둘러보면 지니가 어디 있는지 대강 파악되기 마련이다. 왜냐고? 그야 지니의 주위에는 항상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그 어디에서도 지니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 ……." 설마 이 인간 벌써부터 호텔로 직행한 건가? 그것도 미성년자를 둘이나 데리고? " 저, 정말 지니 따라서 온 거라니까. 지, 진짜야." " 호오~ 뭐 그렇까지 말씀하시니 믿어 드리지요. 그럼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 곁에 찰싹 붙어있는 여자에 대해서 한번 설명해 보시지요." 이 아줌마가 날 엿 먹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 그, 그러니까 이 여자는……." 설명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아아~ 이 중요한 순간에 왜 좋은 생각이 나질 않는 거냐? " 이, 이 여자는 그냥 친구야……. 그래. 맞아. 친구야, 친구. 아하하……." " 호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친구와 키스를 하나 보군요. 아주 놀라운 사실이네요." " ……." 그만 좀 비아냥거려, 이 아줌마야!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 오, 오빠 왜 그래요? 저 여자가 누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 ……." 내가 왜 니 오빠니? 우리가 언제 봤다고? 내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루시아는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라이를 안고 걸음을 옮겼다. 난 황급히 달려가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 봐." " 놔." 루시아의 싸늘한 음성. 하지만 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 저, 정말로 난 지니를 따라온 거라니까. 난 오기 싫었는데 자꾸만 지니가 날 꼬드기는 바람에……." 내가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자 루시아가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 짜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나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갓다. " 최저야." 루시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라이를 데리고 떠났다. 난 멀어지는 루시아를 잡을 수가 없었다. " 이게 아닌데……."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기 마련이다. 어쩐지 지니의 말을 들을 때부터 뭔가 불안했다. 그 인간 말을 들으면 언제나 마지막에 피 보는 건 나다. 정작 당사자는 구렁이 담 넘어 가득 쏙 빠져 나가지. " 배도 고픈데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요?" " 좋아요, 일루니아님." " 뭐 먹고 싶어요?" " 전 일루니아님 좋아하는 게 먹고 싶어요. 일루니아님이 좋아하는 게 제가 좋아하는 거니까요." 좌절하고 있는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태연하게 염장질을 하는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 내가 거의 죽고 싶은 심정에 사로 잡혀 있는데 은영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짜악! 다행히 이번엔 반대쪽을 맞았다. 은영이는 왼손잡이인가 보다. " 흑흑~." 은영이는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갔다. 이연타를 얻어맞은 나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한참 후, 제정신을 회복한 나는 재빨리 나이트클럽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루시아의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난 땅바닥에 주저앉아 절규했다. " 으아아아아아! 내 인생은 왜 이모양이야!" 아이리스 2부 1권 Substory 1 라이와 돈, 오빠와 피자 어느 날 라이가 말했다. " 오빠, 우리 피자 시켜 먹어요!" " 응? 피자?" " 예, 라이는 피자가 너무너무 좋아요. 피자 막막 먹고 싶어요." " 그렇게 피자가 좋아?" " 예!" 라이가 처음 피자를 맛본 것은 일주일쯤 전이었다. 그 후로 라이는 피자의 맛에 흠뻑 빠졌다. 피자의 '피' 자만 들어도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내 지갑이다. 혼자서 라지 사이즈를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데 지갑의 돈이 남아날 리 있겠나? " 미안하지만 그냥 집에서 밥 먹으려무나. 경기가 어려워서 다들 허리띠를 졸라 매는데 우리만 사치할 수는 없잖니. 요즘 인형집 매출도 많이 줄었어." "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소비를 통한 경기 부양책을 써야하는 거예요. 피자를 시켜 먹으면 피잣집에 돈을 벌게 되고, 그 돈으로 우리 가게에 인형을 사러 올지 누가 알겠어요? 안 그래요, 오빠?" " ……." 라이는 너무 똑똑해서 탈이다. 언제 그렇게 경제 논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니? 아예 주식 투자 자금이라도 대줄까? " 아무튼 돈이 없어서 피자를 못 사준단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인디에게 밥 해 달라 그러렴." 내가 말하자 라이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 오빠는 라이가 좋아요, 돈이 좋아요?" " ……." 헉! 그런 잔인한 질문을! 라이 치고는 굉장히 신경 써서 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라이가 좋다고 하면 피자를 사줘야 한다. 돈이 좋다고 하면 라이는 펑펑 울 것이다. 이런 어려운 질문을 만났을 대는 질문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 그러는 라이는 오빠가 좋아, 피자가 좋아?" 만약 오빠가 좋다고 하면 피자를 안 사줘도 되고, 피자가 좋다고 하면 내가 펑펑 울면 그만이다. 후후~ 나의 잔머리는 아직 녹슬지 않았군.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 라이는 피자 사주는 오빠가 좋아요!" " ……" 뭐야? 이건 무슨 의미야? 피자가 좋다는 거야, 오빠가 좋다는 거야? 아니면, 피자 안 사주는 오빠는 싫다는 건가? 나도 대답했다. " 이 오빠는 돈 벌어 오는 라이가 좋단다. 그러나 나가서 고구마 장사라도 해서 돈 벌어 오렴." " 우에에엥~ 오빠 미워요오~." 아이리스 2부 1권 Story 2 화해를 위하여 나이트클럽에서 내 인생 최대의 위기라 할만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시간이 되자 태양은 어제처럼 동쪽에서 솟아올랐다. 아마도 시간이 되면 어제처럼 서쪽으로 질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나 하나 어찌 되든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아아~ 사람은 이럴 때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낀다. 난 화려한 일출을 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조용히 타오르는 담배연기 속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집에 기어 들어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두 여자에게 뺨을 맞은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이런 걸 의학적 용어로 '강렬한 정신적 충격에 의한 단기적 기억 상실증' 이라 한다. 그냥 간단하게 '필름 끊김현상' 이라 하자. 아무튼 루시아에게 얻어맞고 은영이에게 얻어맞고, 거기에 대해 일루니아 여사님의 비웃음까지 접하게 되자 너무나도 큰 충격에 한동안 정신적 공황 상태가 될 게 아닌가 싶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일런스 지니 그 인간의 말을 따른 것이 잘못이었다. 세상에! 루시아같이 완벽한 여인을 두고 바람을 피다니! 내가 어쩌자고 그런 미친 짓을……. 난 어디까지나 일편단심을 지향하는 순정남이다. 왜 순정 만화 보면 가끔 나오지 않는가? 연인이 죽으면 평생 그 연인을 가슴에 묻어 두고 사는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남자의 가슴은 조금씩 열리지만, 남자는 죽은 연인을 끝까지 잊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날 꿈속에서 죽은 연인이 나타나 남자의 행복을 빌어주고, 남자는 그녀를 위해 행복해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결국 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앗! 이건 아니군. 아무튼 나는 그런 남자다. 만약 루시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기꺼이 루시아를 따라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루시아가 죽었다고 라이레얼과 딴 살림 차리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진짜다. 좀 믿어라. 니들은 속고만 살았냐? 왜 내가 말하면 안 믿는 거냐? 그렇게 사람 말을 믿지 못할 거면 처음부터 읽지를 말던가! " ……" 흠흠, 잠시 흥분을 했군. 그래도 계속 읽어주시길……. 뭐? 둘 다 죽으면 라이는 어떻게 하냐고? 그야 뭐 어쩔 수 없이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께 맡겨야지. 인디는 예전에 라이를 기른 경험도 있고, 일루니아 여사님도 라이를 싫어하지는 않으시니까. 이런 순정파인 내가 한순간이나마 다른 여자에게로 눈을 돌린 것은 전부 지니 때문이다. 자신이 마치 충신인 양 가장하고 눈물로 읍소하는 지니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 화근이다. 그냥 내쳤어야 하는 건데……. 나를 바라보던 루시아의 싸늘한 눈빛.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게다가 라이마저 울리고 말았다. 루시아의 품에 안겨 펑펑 울어대던 라이의 모습. 아아~ 세상의 어떤 소녀가 그렇게 가련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 으아아! 어떻게 해야 오해를 풀 수 있는 거냐!" 난 화난 루시아와 우는 라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하게 쌓일 때까지 고민한 나는 적당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지쳐 잠이 들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지난 시각이었다. 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집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루시아와 기타 등등은 가게 보러 나갔을 테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 일이 있나 보다. 자다 일어났으면 제일 먼저 생리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 난 졸린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활짝 열었는데……. 쏴아아! 아니, 이게 웬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냐?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앞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샤워기에서는 여전히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커다란 키, 호리호리한 몸매, 물에 젖은 붉은색 머리카락. 들어갈 데는 들어갔고 나올 데는 나왔다. 그야말로 완벽한 몸대라. 게다가 얼굴 또한 아름답다. 이런 미녀가 샤워를 하고 있다니! 이런 행운이! 설마 어제의 재해는 오늘의 행운을 암시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그런게 뭔가 이상하다. 보통 이쯤 되면 여자가 '꺄악! 치한이야!' 하고 비명을 질러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붉은 머리 미녀는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나를 향해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 으아악!" 난 황급히 화장실 문을 닫았따.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그냥 계속 보고 있을 걸.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으윽, 이런 중요한 기회를 그냥 보내 버리다니! 내가 미쳤지! 조금 시간이 지나가 샤워를 끝마친 그녀가 몸에 타월을 두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다름 아닌 루엔이었다. 루와 루비의 할머니이자, 라이레얼의 아버지인 갈리온드와 그렇고 그런 사이에 있는 에릎. 현재 우리 집에 식객으로 있는 내 친구이기도 하다. " 샤워 오래해서 미안해요. 화장실 빨리 쓰세요." " 아, 예." 난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 세수를 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잘 생긴 내 얼굴이 보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이정도 얼굴이면 어디 가서 미남 소리 듣기 충분하다. 그런데 어째서 세상 여자들은 그런 걸 몰라주는 걸까? 아니, 세상 여자들이 다 몰라줘도 상관없다. 루시아 하나만 알아주면 좋을 텐데……. " 하아~." 루시아를 생각하니 또 다시 한숨이 나온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사과를 하고 다시 전처럼 돌아가야 할텐데. 바람 피는 것을 현장에서 걸렸으니 대체 어떻게 사과를 하냔 말이야? 이건 정말 빼고 박도 못 하게 됐잖아! 혹시 이러다가……. 루시아 : 이제 그만 헤어져. 본인 : 그게 무슨 말이야? 루시아 : 나는 바람 피는 남자는 질색이야. 본인 : 그, 그건 한번의 실수일 뿐이야. 루시아 : 그게 바람 피는 남자들의 변명이지. 한번 바람 핀 남자는 언제든 다시 바람 필 수 있어. 본인 : 내가 잘못했어, 루시아. 제발 한번만 용서해줘. 난 너 없으면 못 살아. 제발~. 루시아 : 이미 늦었어. 우리 사이는 이걸로 끝이야. 라이는 내가 데려갈 테니 그런 줄 알아. 본인 : 헉! 라이까지! 루시아 : 라이도 바람 피는 남자는 싫대. 앞으로 만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그럼 이만. 라이 : 빨리 가요, 언니. 라이는 바람 피는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헉! 안 돼! 난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그러자 내 비명 소리에 놀란 루엔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 무슨 일이에요?" 루엔은 어느새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머리는 여전히 촉촉하게 젖어서 상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으음, 역시 엘프는 예뻐. 예전에 잊혀진 엘프의 숲에 놀러 갔을 때가 좋았었는데. 우리 집에 잇는 식객들 중 여자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쫓아내버릴 방법은 없을까? 여자들에게는 기꺼이 우리 집을 제공할 의향이 있지만 남자에게 제공할 의향은 눈곱만큼도 없다. 난 지금 식탁에서 루엔과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루엔은 손수 탄 블랙커피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 조금 진정이 되나요?" " 예." 루엔은 웃으며 붉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루엔이 우리 집에서 나는 이유는 당연 갈리온드 때문이다. 라이레얼이 오면서 갈리온드가 따라 왔고, 갈리온드가 오면서 루엔도 따라왔다. 그리고 루엔이 오면서 루와 루비도 따라왔다. 으음, 이건 뭐 줄줄이 소시지도 아니고……. "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요?" " 하아~." 난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엔은 커피를 마시며 말햇다. " 한번 말씀해 보세요.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친구잖아요." " ……." 그렇다. 루엔과 나는 친구다. 친구랑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이. 게다가 루엔은 여자가 아닌가? 여자의 화를 푸는 데는 여자의 조언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 난 어제 일어났던 일데 대해 조금도 숨김없이 루엔에게 털어 놓았다. 루엔은 나의 얘기를 들으며 같이 슬퍼하고, 같이 고민해 주었다. 전부 털어 놓으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고민이라는게 원래 혼자 끌어안고 있을수록 무거워지는 것 아니겠는가? " 참 난감한 상황이군요." " 그렇죠. 정말 난감한 상황이죠. 여자들은 남자가 바람 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 물론 안 좋게 생각하지요." " 그, 그렇겠죠? 근심이 더욱 깊어져만 간다. " 하지만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한다면 여자 쪽에서 용서해줄수도 있어요." " 저, 정말요?" " 제가 보기엔 루시아가 화를 내는 것은 히로를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좋아하지 않으면 히로가 뭘 하든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까요. 히로가 바람 핀 것에 대해 화를 낸다는 것은 히로를 좋아한다는 증거죠." " 그, 그런가요?" " 물론이에요." 그 말에 나느 적잖이 안심했다. 맞아. 루시아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야. 만약 나를 싫어했다면 아예 신경도 안 썼겠지.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라고 하잖아. 헉! 그럼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를 만날 괴롭히는 이유는 뭐지? 날 싫어한다면 아예 신경도 안 쓰면 될 텐데. 설마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좋아하기 때문? " 어떤 여자가 절 마구 괴롭히고 있는데 그건 그 여자가 절 좋아하기 때문인가요?" " 흐음, 얼마나 괴롭히는데요?" " 거의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났다고 보면 됩니다." " 그 정도로 괴롭힌다면 그건 그 여자가 히로를……." " ……?" " 진짜, 정말, 아주, 매우, 굉장히 싫어한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 ……." 그런 거였나? " 흠흠, 아무튼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제가 루시아와 화해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 여자가 화가 났을 때는 남자의 반응이 중요해요. 만약 여자가 정말 화가 났는데 남자가 '니가 화를 내든 말든 신경 안 써'라는 등의 반응을 취한다면 둘 사이는 그대로 끝나는 거죠." " 그럼……?" " 무조건 매달려서 용서를 빌어아죠." " 용서를 안 해주면요?" " 그래도 계속 용서를 빌어야지요.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고, 그러면 언젠가는 루시아도 히로를 용서해줄 거예요." " 그렇군요. 하긴 옛말에도 '열 번 찔러 안 죽는 인간 없다' 고 했으니……." " 그런 속담도 있나요?" " 어! 아직 모르셨나요? 아주 유명한 일화에서 나온 말인데." 난 아직 한국 문화에 적응하게 못한 루엔을 위해 '열 번 찔러 안 죽는 인간 없다' 라는 속담의 기원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일제 시대 유명한 도둑이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교강욘. 그리고 그때 당시 서울 종로를 주름잡던 조직 폭력배 두먹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개날림. 교강욘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형님이 있었다. 그 형님의 이름은 황해. 하지만 황해 형님은 일본 야쿠자 개남림에 의해 죽고 만다. 그 이후 교강욘은 하던 도둑질도 때려치우고 개날림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불철주야 이를 간다. 날 잡은 교강욘은 근처 등산 용품 판매점에 들어가 '동물의 뼈도 끊는 칼' 을 사서 품에 잘 갈무리하고 개날림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복수는 무리였다. 그래서 개날림의 차를 대리 운전하는 대리 운전사 대리우수(우수한 대리 운전사라는 뜻)와 손을 잡고 개날림을 공격한다. 피 터지는 혈투 끝에 개날림은 궁지에 몰리고 교강욘은 동물의 뼈도 끊는 칼로 대날림의 배를 찔렀다. 하지만 칼은 들어가지 않았다. 개날림은 이런 날이 있을 것을 대비해 항상 몸에 복배를 차고 다녔던 것이다. 개날림 : 후후~ 니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교강욘 : 열 번 찔러 안 죽는 인간은 없는 법! 그리고 이것은 보통 칼이 아닌 동물의 뼈도 끊는 칼이다! 주옥같은 명대사를 날린 교강욘은 계속해서 개날림의 복대를 찔렀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개날림의 복대는 찢어졌고, 동물의 뼈도 끊는 칼은 복대를 뚫고 개날림의 배에 박혔다. 개날림 : 크헉! 나의복대가! 교강욘 : 황해 형님의 복수다, 개날림! 너희들은 칼침을 박으면 빙글 돌린다더군. 계속 돌려주마, 개날림! 너의 그 더러운 생명줄이 끊길 때까지! 교강욘은 인정사정없이 개날림의 배에 박힌 칼을 빙글빙글 돌렸다. 결국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개날림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황해 형님이 복수를 끝낸 교강욘은 일본 순사들에 의해 감옥에 갇혀 사형을 언도 받는다. 하지만 교강욘은 사형 직전에 탈옥하여 업무일선(다시 말해 도둑질)에 복귀한다. 그 후, 교강욘은 그야말로 전설로 남앗다. 심지어는 조선을 강제 점령한 일본인들까지도 그의 남자다움에 신출귀몰함에 반하여 그에게 '욘사마'라는 극존칭을 붙여주었다. 참고로 교강욘이 개날림을 죽일 때 썼던 동물의 뼈도 끊는 칼은 현재 일본 박물관에 '팔지도(사지도 팔지도 말자라는 뜻)' 라는 이름으로 '칠지도' 와 함께 보관되어 있다. " 뭐, 이런 내용입니다. 일본 측에서는 조선인들이 일제 시대 때 받은 억압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낸 얘기하고 주장합니다만, 여거 가지 사학적 자료로 보았을 때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 그렇군요." 루엔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잘 이해가 안 되긴 한다. 그런데 저거 진짜 사실이야? 설마 진짜로 믿는 사람은 없겠지? " 아무튼 상담해줘서 고마워요, 루엔." 내가 말하자 루엔은 웃음을 지었다. " 친구끼리 당연한 거죠. 히로와 루시아가 잘 되길 바랄게요." " 예." 루엔과의 대화에서 용기를 얻은 나는 일단 루시아의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놀랍게도 침애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난 혹시 루시아인가 해서 이불을 들추어 보았다. 침을 질질 흘리며 자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라이였다. 라이는 헬로우 귀티 인형을 꼭 끌어안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 오빠 미워요…… 우엥~." 난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꺼내 라이의 입가에 잔뜩 묻은 침을 닦아 주었다. 라이한테도 제대로 사과해야 하는데. 뭐, 지금은 이렇게 곤히 자고 있으니 나중에 깨어나면 사과 하도록 하자. 난 일단 루시아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가게로 향했다. *      *     *     * 경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한창 성업 중인 나의 가게 <라이의 집>. 라이의 집이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트리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뭐니 뭐니 해도 나도 천재적인 경영 능력…… 은 아니고, 아마도 종업원들의 외모가 아닐까 싶다. 요즘 같은 외모 지상주의 사회에서 우리 가게 종업원들이 각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사실 얼짱이니 몸짱이니 하는 열풍만 봐도 알겠지만 한국 사회는 외모 하나로 먹고 사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오죽하면 '외모는 경쟁력다' 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참고로 중국은 '미녀는 국가의 재산이다' 라고까지 하더라. 뭐? 얼굴 예쁜 것보다는 마음이 예뻐야 하지 않냐고? 물론 그렇다. 그건 내가 겪어 봐서 잘 안다. 흑~ 내가 얼굴 예쁜 여자(라이레얼)한테 걸려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아무튼 완벽한 외모를 지닌…… 소위 말하는 얼짱, 몸짱인 우리 가게 종업원들은 지금 몰려드는 여고생들을 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으음, 그런데 지금 학교 갈 시간 아닌가? 쟤들은 교복을 입었으면 학교나 갈 것이지 여기서 뭐하는 짓이래? 저거 어느 여고야? 난 차마 가게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복했다. 지니와 크로니스의 모습이 보이는군. 루시아는 어디 간 거지? 아! 저쪽에 있군! 난 루시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루시아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화가 나 있을 것이다. 어젯밤의 화가 벌써 가라앉았을 리는 없으니. 어? 쟨 뭐야? 키가 작고 귀엽게 생긴 한 여고생이 루시아에게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내민다. 그것은 분홍색 봉투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새빻갛게 붉힌 채 입을 오물거린다. 쓰읍~ 뭐라고 말하는지 안 들리잖아. 뭐, 이쯤 되면 대충 감이 잡힌다. 보나마나 루시아에게 고백하고 있는 거겠지. " ……." 뭐? 고백? 아니, 여자가 왜 루시아한테 고백을! 난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분노를 삼켰다. 젠장! 이젠 남자도 모자라 여자까지 상대해야 하는 거냐? 네 이년! 당장 떨어지지 못할까! 감히 불손한 생각을 품고 루시아에게 접근을 하다니! 내 당장 네년의 목을 처서 가게법의 지엄함을 알릴 것이다! 참고로 가게법이란 '가게 내에서 고백 금지, 러브레터 전달 금지, 데이트 신청 금지, 기타 작업 종류 전부 금지' 를 말하는 것이다. 자꾸만 손님들이 종업원들에게 작업을 걸어오는 바람에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저런 가게법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주항을 몽땅 어기다니! 이건 당장 단매에 쳐 죽여도 할 말이 없을 범죄였다. 난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저 여고생을 가게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루시아가 여고생에서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고생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여고생을 살짝 안아서 달래주는 루시아. 잠시 후, 여고생은 루시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모습을 보게 되자 분노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으음, 다시 보니 애가 참 귀엽게 생겼군. 이럴 땐 나같이 멋진 남자가 나서서 위로해 줘야 하는데 말이야. 사랑으로 입은 상처는 또 다른 사랑만이 치료할 수 있는 법. 실연의 고통으로 울고 있는 여자에게 대쉬하면 성공확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던데……. " ……." 헉! 내가 무슨 생각을? 루시아한테 용서를 구하러 와서 다른 여자한테 눈을 돌리다니. 내가 미쳤나? 난 미련을 털어 버리고 가게로 들어가기 위해 용기를 내보았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루시아의 반응이 두려운 것이다. 어젯밤의 그 경멸어린 눈빛이 떠오른다. 대체 뭐라고 사과를 하면 좋을까? 무릎 꿇고 빈다고 해서 루시아가 날 용서해 줄까? 혹시 열 받아서 아이리스 왕국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한번의 잘못된 판단이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되는구나! 지니 말을 믿는 내가 바보지. 어찌되었든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보는 거야. 그래도 루시아가 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자해 소동이라도 벌이든지 해야지. 내가 용기를 내기 위해 심호흡을 가다듬는데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따. " 여기는 독수리. 이쪽의 준비는 완벽하다. 갈매기와 부엉이, 올빼미는 어떤가? 라져. 예정대로 정각 오후 두 시에 작전을 개시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실제 상황이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대화를 마친 아저씨는 핸드폰을 끊었다. 그리고는 몸을 순긴 채 인형 가게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뭐야? 경찰인가? " 아저씨는 누구에요?" 신경이 쓰여서 묻자 그 아저씨는 나를 보며 되물었다. " 그러는 학생은 누군가?" " 저 학생 아닌데요. 대학 안 갔어요." 정확히 말하면 못 간 거지만. " 흠흠, 그런가? 미안하네. 나는 저쪽에 있는 대중 여자 상업 고등학교 1학년 3반 담임 김상철이라고 하네." " 김장철이여? 아직 김장 할 때는 안 된 것 같은데……." " 김장철이 아니라 김상철이네. 언젯적 개그를 지금 하는 건가? 담당 과목은 영어일세. 그리고 요즘 누가 김장하냐? 슈퍼에서 사다 먹지." " 아! 선생님이셨군요. 안녕하세요." 난 김상철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악수까지 나눴다. 다행히 경찰은 아니었군. 그럼 아까의 대화는 뭐지? " 그런데 여기서 뭐하시고 계신 건가요? 지금 한창 수업할 때 아닌가요?" 내가 묻자 김상철 선생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 수업할 시간이지. 지금 한창 애들을 가르치고 있어야할 땐에 내가 뭐하는 짓인지……." " 혹시 실직하셨나요?" " 휴우~ 사실은 전부 저 인형 가게 때문이라네." " 예? 인형 가게가 왜요?" 역시 인형 가게와 관련이 있군. 설마 청년 재벌의 신화를 일구어낸 나의 성공을 시기한 나머지 가게에 테러를 하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평범해 보이는 이 아저씨가 너무나도 수상해 보였다. 혹시 이 아저씨 뒤에 알-카에다가 버티고 있는거 아냐? 그게 아니라면 가게를 테러하고, 그 테러를 알-카에다에게 뒤집어 씌워 한국 내에 반 이슬람 감정의 싹을 틔우려는 부시 행정부의 음모? 으음, 과연 이 아저씨의 배후에는 누가 숨어있는 걸까? 빈 라덴이냐, 부시냐? " 저 가게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대중 여상 학생들은 학교에 잘 나오는 성실한 학생들이었네. 하지만 저 가게가 생기고 나서부터 출석률이 저조해지기 시작했지. 우리 반 샅은 경우에도 10명 정도가 매일같이 결석을 하고 있네. 결석도 결석이지만 수업 분위기도 문제야. 애들이 진사모(진짜로 지니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니 크로니스님 팬클럽(말 그래도 크로니스의 팬클럽)이니 만들어서 서로 패싸움을 해대는 통에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네." " ……." 으음, 빈 라덴과 부시는 아무런 관련이 없군. 오해한 것이 미안해진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 진짜 패싸움까지 해요?" " 못 믿겠지만 사실이라네. 지금 학교 내에서 극한 대립을 보이고있어. 하아~ 전 국민이 통합해서 국민 소득 2만 불 시대로 나아가도 모자랄 상황인데도 이런 좁은 학교에서까지 패를 갈라 싸우다니. 이 나라가 어찌 될지 정말 걱정이 되네." " 뭐, 국민 소득 2만 불은 예전에 물 건너 간 얘기지요. 1만 불이라도 제대로 유지하면 다행이겠네요." " 아무튼 더 이상 이 일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우리 교사들은 학교 정상화 대책의 일환으로 먼저 무단결석하고 있는 학생들을 잡아오기로 했네." " 그럼 무단결석하는 여학생들이 전부 저 인형 가게에 있단 말인가요?" " 전부는 아니겠지. 개중에는 이걸 기회 삼아 당구 치러 당구장에 가거나 스타(스타크래프트의 약자)하느라 PC방에 출근 도장 찍는 학생들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상당수가 저 인형 가게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네. 저 교복 보이지?" " 남색 스커트에 청색 블라우스요?" " 그래. 저 교복이 바로 대중 여상의 하복이지." " 으음, 그렇군요. 그런데 어떻게 잡을 생각이신지? 숫자가 저렇게 많아서야 힘들 텐데요." " 일단 선생-학부모 합동 작전이 준비되어 있네. 지금 이곳에는 일선 교사 30여명과 학부모 50명이 잠복해 있지. 심지어는 두 명의 교감 선생님들까지 이번 작전에 투입되었어. 참고로 작전 지휘관은 나지." " 아니, 왜 선생님이 지휘관이에요? 보통 이럴 땐 가장 높은 사람이 지휘관을 맡아야 하는 게 원칙 아닌가요?" " 원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두 교감 선생님 중 한 분은 군 면제를 받으셨고, 다른 한 분은 방위 출신이라네. 나는 해병대 수색대 출신이자 특수 작전에 몇 번 투입된 경력이 있어서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게 되었지." " 그래서 작전 개요는 어떻게 되나요?" " 일단 80여 명의 선생-학부모 합동반은 네 개의 부대로 나누어져 잠복중이네. 참고로 이번 작전의 작전명은 '둘리와 피카츄의 재난' 이지." " 뭡니까, 그 이상야릇한 작전명은?" " 멋지지 않나? 참고로 이 작전명 내가 지은 거네." " ……." 이 아저씨 센스가 개판이군. 둘리랑 피카츄가 어깨동무하고 비웃겠다. " 작전 개요나 설명해 주세요." " 원래는 1급 기밀에 속하는 거지만 특별히 자네에게만 알려주도록 하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그동안 입이 근질거렸음이 분명하다. " 작전 시각이 되면 먼저 갈매기 부대와 부엉이 부대, 올빼미 부대가 정문을 봉쇄하고 길목을 차단한다. 이어서 특수 부대 출신으로만 이루어진 독수리 부대가 가게 안으로 침투, 학생들 검거에 나선다. 검거된 학생들은 철저한 감시 하에 학교로 이송된다. 이것이 '둘리와 피카츄의 재난' 작전의 개요라네." " ……." 겨우 학생들 잡아오는 것을 무슨 테러 진압보다 요란하게 한다냐? 이 학교 뭔가 이상한 거 아냐? 하지만 말을 하는 김상철 선생님의 표정은 진지했다. 난 그 표정에서 학생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진실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참고로 지금 김상철 선생님이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니들 오늘 전부 다 죽었어! 교육을 위해 자신의 한 몸 바쳐 열과 성을 다해 학생들을 조지겠다는 저 마음. 이런 게 참교육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간, 내 머릿속에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드넓은 운동장에 여학생들이 일렬로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를 선생님이 돌아다니며 야구 배트로 학생들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퍼억! 퍼억! 동네 주민 하나가 학교 운동장에서 개 잡는 줄 알고 구경 왔다가 그 잔인한 광경에 놀라 쓰러진다. 여학생들은 피를 토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해보지만 선생님들은 사랑의 매(구타)를 멈추지 않는다. 몇몇 학생들은 이미 숨이 끊겼는지 눈동자가 풀려 있다. 운동장 한쪽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인다. 선생님들은 이미 숨이 끊긴 학생들을 그 구덩이 속에 던져 넣는다.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은 공포에 질려 감히 결석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한다. 으음, 역시 애들은 사랑의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건가?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난 사랑의 매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2학년때 판타지 세계로 소환 당한 바람에 그냥 자퇴했다. 참고로 내 학력은 고졸이다. 고등학교 검정고시 정보는 가뿐하게 패스했거든), 통합 11년 동안 선생님들에게 얼마나 맞았는지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내 꿈이 선생님이었겠는가? 나중에 선생님이 돼서 내가 학생 때 맞은 것만큼, 아니, 이자까지 쳐서 몇 배로 돌려주려 했다. 뭐, 지금은 그런 생각을 다 버렸지만. 아무튼 요즘은 체벌 심하게 하면 학부모들이 고소하기도 한다니까 그렇게 심하게 패지는 않겠지. " 그런데 그거 아세요?" " 응? 뭐 말인가?" " 저 가게 뒷문 있다는 거." " ……." " 모르셨군요." " ……." " ……." " 그, 그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는지 김상철 선생님은 그 자리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 어, 어째서 이런 일이……." " 그럼 비상구도 확인 안 해보고 작전을 세운 겁니까?" 참 어이가 없다. 작전명에다가 부대 편성까지 짜놓고선 정작 비상구 확인조차 안 하다니? 이 아저씨 정말로 해병대 수색대 출신 맞아? 혹시 동사무소 방위 출신 아냐? " 뭐,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특별히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 도와줘? 자네가 어떻게…… 헉! 설마?" " 후후, 바로 그 설마입니다." " 설마 해병대 수색대에서 이번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에이전트란 말인가?" " ……." 이 아저씨 지금 나랑 장난 하나? 해병대 수색대가 뭐 하러 이딴 작전을 도와줘? 이건 피카츄가 100만 볼트를 날리니 둘리가 손가락을 내밀며 '즐! 반사' 라고 외치는 것보다 더 어이없다. " 아무튼 핸드폰이나 좀 빌려주세요." 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참고로 난 핸드폰이 없다. 예전부터 하나 장만하려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귀찮아서 안 삿따. 사실 그동안 없어도 별 불편함이 없었거든. 하지만 지금은 루시아와 커플폰을 장만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그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루시아의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잖아. 난 가게 유리창 너머로 지금 카운터에 있는 사람이 크로니스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크로니스가 받았다. " 저 히로에요.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세요.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후문을 봉쇄해 달라고 부탁하자 크로니스는 별 말 없이 내 말에 따라주었다. 임무를 무사히 끝마친 내가 핸드폰을 돌려주자 김상철 선생님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 자, 자네의 정체는 뭔가? 정체가 뭐기에 그런 고난이도의 미션을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한 건가?" 그 물음에 난 생긋 웃으며 답했다. " 이 인형 가게 사장입니다." 내가 선생-학부모 합동반을 돕는다고 해서 이들과 한패라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난 이들과 적이 될지언정 결코 한 패가 될 수는 없는 존재이다. 그동안 내가 당한 게 얼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들을 돕는 것은 이들과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사실 가게 사장인 내 입장에서 저 여고생 손님들은 반갑지가 않다. 쟤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바람에 가게 안은 소란스럽기 그지 없고, 종업원들에게 매달리는 바람에 종업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쟤들이 인형을 안 사간다는 것이다. 인형도 안 사는 것들이 매일같이 가에 안에서 농성을 벌이다니!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용서가 안 된다.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면 학생들이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어디서 감히 인형 가게에서 땡땡이를 친단 말인가? 이래서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겠어! 난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부터 국가 발전을 실천하는 애국자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내가 '둘리와 피카츄의 재난'작전을 돕기로 한 것이지, 지니와 크로니스의 팬클럽은 있는데 내 팬클럽이 없는 것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난 쪼잔하게 내 팬클럽 없는 거 가지고 삐지는 남자가 절대 아니다. 진짜다. 좀 믿어라(그런게 대체 내 팬클럽은 왜 없는 거야?). " 갈매기, 부엉이, 올빼미 전부 준비 되었는가? 작전은 예정대로 진행한다. '둘리와 피카츄의 재난' 작전의 성공을 위하여!" 비장한 못브으로 전화를 끊은 김상철 선생님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현재 시각은 1시 59분 30초. 이제 30초 후면 작전이 개시된다. 초침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정각 2시! " 와아아아!" 거대한 함성 소리와 함께 세 방향에서 사람들이 튀어 나왔다. 머리가 벗겨진 회사원부터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까지 그 종류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들이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못하게 입구를 봉쇄하자 곧이어 김상철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독수리 부대가 가게 내부로 투입되었다. 그제야 자신들을 잡으러 왔따는 사실을 깨달은 여고생들은 '꺄악!'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지만 비상구가 막혀 있었기에 도망칠 곳은 없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여고생들은 머리끄덩이를 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는데, 학교 땡땡이 친 여고생이 할 말이 없을 리 없다. " 공부 같은 거 다 필요 없어! 나한테는 지니님만 있으면 돼!난 이미 몸과 마음을 전부 지니님께 바쳤단 말이야. 그린까 엄마는 신경 쓰지 마." " 아이고, 이년아! 아이고오~!" 몸과 마음을 전부 지니님께 바쳐? 지니가 받아 주기나 한대? 그렇게 할 일 없으면 차라리 내 팬클럽 창설이나 할 것이지. 인형 가게 앞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골육상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마구 딸애를 때리다가 주저앉아 펑펑 우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울면서 잘못을 비는 학생들. 하지만 잘못을 비는 학생들보다는 끝까지 잘했다고 큰 소리 치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저런 애들은 패야지 말을 듣는다. 자식을 올바르게 교육 시키려면 매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법. 패도 말은 안 들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렇다면 죽기 직전까지 패야지.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죽기 직전까지 패면 말을 듣기 마련이다. 그래도 나는 말을 안 들었지만, 요즘 애들에게 나와 같은 끈기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나는 줄줄이 연행되어 가는 여고생들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그러게 내 팬클럽도 하나 만들어 줬으면 이런 일 없잖아. 선생-학부모 합동반을 지휘하는 김상철 선생님은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 고맙네. 덕분에 무사히 학생들을 검거할 수 있었네. 우리 '대중 여자 상업 고등학교' 교사와 학부모들은 자네가 보여준 용기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걸세." " 아니,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 아무튼 고맙네." " 하하, 천만에요. 그나저나 쟤들 데려가서 교육 시키려면 노고가 많겠습니다. 제가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참교육을 위해서는 매를 아끼지 않는 것이……." 내가 말하자 김상철 선생님은 굳은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 암. 애들은 패야 말을 듣는 법이지. 아픙로 일주일 간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팰 생각이네. 하하, 자네가 참교육이 뭔지 좀 아는구만." 난 마음속으로 성호를 그리며 여고생들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학생들의 연행이 전부 끝나자 가게 앞은 언제 그랫냐는 듯 조용해졌다. 난 이제 정말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렵지만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할 일. 두렵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루시아를 피해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나의 사랑을 고백하는 거야! 만약 그래도 용서 안 해준다면? 그럼 뭐 용서해 줄 때까지 매달려야지. 난 용기를 내서 걸음을 옮겼다. 가게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와 더불어 나의 심장 박동수도 점점 증가한다. 으음, 이러다가 심장 마비로 죽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내 평생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으론 크로니스랑 싸우러 갈 때도 이렇게 떨진 않았다. 어느새 가게에 도착했다. 난 조심스럽게 유리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 쪽에 루시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크로니스가 날 보더니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 또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는 바로 물었다. " 루시아는 어디에 있나요?" "2 층 청소하고 있습니다." 으음, 2층이라? " 지니는요?" " 그는 오늘 안 나왔습니다." " ……." 뭐? 안 나와? 설마 어제 그 여고생 둘과 그렇고 그런 일을 하느라 아직 안 돌아왔단 말인가? 난 지금 이 꼴 났는데 자기는 여자들과 노닥거려? 사일런스 지니. 이 인간은 제거 대상 2위다. 참고로 제가 대상 1순위는 당연 날 배신한 인디다. 일루니아 여사님도 3위쯤에 껴주려고 했지만 무서워서 관뒀다. 이것들에 대한 복수는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루시아와 화해를 하는 것이 우선이니. 2 층으로 올라가자 루시아가 청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긴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완벽한 천사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천사라 하더라고 루시아보다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미의 여신보다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청소를 하던 루시아가 몸을 돌렸다. 그 덕분에 루시아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순간, 나는 숨을 멈추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청소를 계속할 뿐이었다. " 저, 저기……." 결국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하지만 루시아는 못 들은 척했다. 난 한 걸'?한 걸음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아까 한 여고생이 루시아에게 러브레터를 내밀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러브레터가 하나 준비해 올 것 그랬나? 나의 경우는 러브레터가 아닌 반성문이겠지만. 생각해보니 꽃이라도 한 송이 사들고 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아~ 난 왜 이런 쪽으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걸까? " 루시아, 어제 일에 대해서 말인데……." " ……." 휙! 용서를 빌려는 찰나 루시아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 ……." 설마 무시당한 건가? " 자, 잠깐만 루시아!" 난 재빨리 루시아를 쫓아갔다. 내가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용서를 빌 기회 정도는 줘야 하잖아. 하지만 루시아는 냉정했다. 내가 어깨를 붙잡자 루시아는 내 손을 탁 치며 말했다. " 나한테 말 걸지 마." " ……." 내가 충격을 받아 굳어 있는 사이 루시아는 내 앞에서 사라졌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런 냉랭한 태도라니. 마치 시베리아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다(그래봐야 시베리아 한복판에 서 있었던 적은 없지만). 이건 정말이지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나에게는 용서를 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 흑……." 너무 슬퍼서 눈물이 다 흘러나왔다. " 어머, 여기엔 어쩐 일이신가요, 아이언스 공작님? 오늘은 나이트클럽에 안 놀러 가셨나 보죠?" 들려온 목소리에 난 황급히 눈물을 닦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그녀의 꼬봉(부하라고도 한다)이자 남편인 인디가 서 있었다. " 후후, 울고 계셨나 보죠?" 아무리 눈물을 닦았다 해도 한번 흘러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나는 다시 한번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 울긴 누가 울었다 그래요!" " 어머, 화까지 내시니 더욱 수상하네요." " 누가 화를 냈다 그래요!" 소리를 지르던 나는 멈칫했다. 젠장, 이 아줌마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 되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은 아예 내 염장을 지르려고 작정을 한 모습디었다. 인디와 팔짱을 끼고 내가 루시아에게 면박 받은 뒤에 나타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의 고통은 일루니아 여사님의 행복. 일루니아 여사님의 고통은 나의 행복. 우리 둘은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는 사이. 언젠가는 반드시 오늘의 복수를 하고 말리라. " 전 바빠서 이만." 더 이상 말해봐야 나만 손해다…… 라고 생각한 나는 작전상 후퇴를 하기로 했다. 등을 돌려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일루니아 여사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빠드득! 내 오늘의 원한은 결코 잊지 않으리라! 일루니아 여사님이 가게 안에서 버티고 있는 관계로 루시아에게 사죄하는 것은 다음에 하기로 했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어떤 방해 공작을 펼칠 지 모르니. 그리고 당장 사죄한다고 해서 루시아의 화를 누그러뜨리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왜 장수를 치려면 먼저 말을 쓰러트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즉, 라이를 먼저 공략해야 한다. 그래. 라이를 내 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라이와 합동작전을 펴서 루시아의 화를 풀어 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집으로 향했다. *      *     *     * 집에 도착해 슬그머니 방문을 여니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 라이의 모습이 보였다. 가게에 안 나오고 집에서 혼자 놀고 있는 걸보니 라이도 어제 일 때문에 충격이 컸나 보다. 난 최대한 다정하게 웃으며 라이에게 다가갔다. " 라이야~.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라이야~. 우리 라이 뭐하니~?" 라이가 가지고 놀고 있는 인형은 귀엽게 생긴 고양이 인형이다. 정식 명칭 헬로우 키티, 라이가 붙인 명칭 헬로우 귀티. 귀티 나게 생긴 반가운 인형이라 하여 헬로우 귀티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아무리 인형이 귀엽게 생겼다고 해도 우리 라이에 비하면 발톱에 때만도 못하다. 라이의 귀여움을 차마 인간의 언어로는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니까. 난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라이는 고개를 획 돌리며 내 손을 쳐냈다. 그리고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 라이 귀여운거 하루 이틀 일 아니니까 만지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 ……헉!" 순간, 나는 귀를 의심해야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의 라이가 지금 뭐라고 말한 거지? 라이는 동그란 눈으로 있는 힘껏 나를 째려보았다. 으윽, 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말아줘. 눈빛 공격까지 받게 되자 나는 더 이상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따. 라이는 팔짱을 끼며 여전히 적대적인 자세를 취한 채 말했다. " 오빠는 나빠요! 라이는 나쁜 오빠를 안 좋아해요. 이제부터 라이는 오빠랑 안 놀아줄 거예요." " ……." 헉! 이 오빠랑 안 놀아주다니?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 라, 라이야……." 어쩌다가 그 귀엽고 착한 나의 라이가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나이트에 가서 다른 여자를 만난 것을 보고 이 정도로까지 시랑했단 말인가? 신뢰를 쌓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신뢰를 잃는 것은 한순간이다. 난 단 한번의 실수로 그동안 쌓아올린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다. 난 어떻게든 라이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다. 그 여자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나는 다만 지니의 꼬드김에 넘어갔을 뿐이라고 라이를 설득했지만 라이는 여전히 동그란 눈을 치켜뜨고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린아이는 아직 선과 악에 대한 가치관이 제대로 확립되어 ㄱ있지 않은 만큼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지금 라이의 행동은 비수로 내 가슴을 푹푹 찌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절망감에 빠져 고개를 숙인 나에게 라이가 한마디했다. " 할말 다 하셨으면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어요. 라이는 귀티랑 계속 놀아야 하니까요." " ……." 그래. 내가 나쁜 놈이야. 내가 죽일 놈이야. 나 같은 놈은 라이한테 용서를 구할 자격도 없어. " 흑흑~." 라이의 차가운 눈빛과 쌀쌀맞은 말투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는 울면서 뛰쳐나갔다. 집을 나온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거리를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던 나는 지쳐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젠 모든 게 끝이야. 루시아한테도, 라이한테도 버림받은 몸. 더 이상 살아봐야 무슨 소용이야? 그냥 콱 죽어 버릴 테야! 내가 죽음을 결심한 그 순간 어디선가 피자 냄새가 흘러나왔다. 향긋한 피자 냄새를 맞고 있자니 배가 고프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거 피자는 먹고 죽자. 죽으면 먹지도 못할 텐데 죽기 전에 실컷 먹어 둬야지. 옛말에도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았나? " ……." 잠깐! 피자라고? 그러고 보니 라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1위가 피자였지. 언제나 내 옷깃을 붙잡고 피자 사달라고 애원을 했고 말이야. 으음, 피자라……? 한참을 방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용기를 내서 방문을 열었다. 라이는 헬로우 귀티와 노는 것도 질렸는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 라이야~." 내가 다정하게 불렀지만 라이는 날 본체만체 하며 말했다. " 왜 또 오셨어요? 라이는 오빠가 정말 싫어요. 그러니 빨리 나가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말한 라이는 날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렸다. 하지만 라이는 이내 내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향긋한 모짜렐라 치즈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라이의 시선은 내 손에 들린 피자에 머물렀다. 주르륵! 입가에 침 흐른다, 라이야. " 오빠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라이는 한걸음에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볼을 부비부비 비비며 말했다. " 라이가 오빠 좋아하는 거 오빠도 잘 알죠?" 아아~ 이제야 나의 라이로 다시 돌아왔군. 역시 라이는 이런 모습이 어울려. 난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 " 라이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라이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 라이는 세상에서 오빠가 제일 좋아요!" " 이 오빠도 세상에서 라이가 제일 좋단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그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뭐게?" " 피자요!" 침하게 대답하는 라이. 이미 라이의입가에서는 침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손수건을 꺼내 라이의 입가를 닦아주고는 방금 사온 따끈한 피자를 바닥에 벌려 놓았다. "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치즈 크러스트 리치 골드 피자야. 고구마가 두 줄이래. 우리 라이 많이 먹으라고 오빠가 훼밀리 사이즈로 사왔어." " 우와~ 굉장해요, 오빠!" 라이는 경탄을 넘어 감동까지 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피자를 바라보던 라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 우에에엥~." " 헉! 왜 그러니, 라이야? 피자가 마음에 안 들어? 오빠가 다른 걸로 바꿔올까?" 내가 당황해서 묻자 라이는 내 품에 안겨 울먹거리며 말했다. " 흑흑, 오빠가 이렇게 라이를 생각해 주는데…… 라이는 그것도 모르고 오빠한테 그런 심한 말을…… 흑흑, 라이가 잘못했어요, 오빠. 라이는 나쁜 엘프인가 봐요. 우에에엥~." 난 라이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 아니야, 라이야.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야.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착한 엘프만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오빠는 이미 라이를 용서했어. 자, 빨리 피자 먹자. 이러다가 식겠다." 내가 라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자 라이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오빠." 라이는 그 자리에 앉아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피자 조각을 억지로 입에 우겨넣는다. 누가 뺏어갈까 봐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다. " 맛있니?" 라이는 입에 가득 든 피자 때문에 대답은 못하고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라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정말 기쁘다. 하지만 저렇게 먹다가는 체할 텐데. 역시나 내 예상대로 라이는 숨이 막히는지 켁켁거렸다. 난 라이의 등을 두드려주며 콜라를 내밀었다. " 뺏어 먹는 사람 없으니까 천천히 먹으렴. 여기 콜라도 좀 마시고." 라이는 콜라를 꿀꺽꿀꺽 마신 다음 나에게 말했다." " 오빠는 안 먹어요?" " 으응. 이 오빠는 라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단다. 우리 라이 맛있게 먹으렴." 내 말에 다시 피자를 먹는 데 열중하는 라이. 셋이 먹어도 다 먹기 힘든 훼밀리 사이즈 피자를 7분만에 다 먹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라이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난 라이의 입가에 묻은 토마토소스를 닦아 주며 물었다. " 잘 먹었니?" " 예. 너무너무 잘 먹었어요. 라이는 너무너무 행복해요." " 그럼 오빠가 나중에 또 사줄까?" " 정말요?" " 물론이지. 우리 라이를 위해서라면 오빠가 무엇인들 못하겠니?" " 와아! 고마워요, 오빠." 라이는 완전히 예전의 귀여운 라이로 돌아와 있었다.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피자 한판으로 라이의 신뢰를 회복하는 게 성공했군. 역시 라이는 먹을 거만 사주면 뭐든 해결되는 단순한 엘프였단 말인가? 아무튼 라이와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젠 루시아와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만 남았다. 루시아도 피자 한판으로 가능하려나? " ……." 그럴 리가 없지. 아아~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뭐 좋은 수 없나? 나는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 응? 무슨 생각……?"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랏다. 어느새 지니가 내 옆에 있는 게 아닌가? 대체 언제 돌아온 거지? " 이 자식!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지니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게 이 인간 때문이다. 이 인간이 꼬드기지만 않았어도 난 나이트클럽에 가지 않았을 테고, 거기서 여자와 노닥거리는 장면을 루시아와 라이에게 들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를 꼬드겨 위험에 빠트린 주제에 자신을 여고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이거지?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젊은 남녀가 하룻밤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정신박약아가 아닌 이상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여고생들을, 그것도 둘이나 데리고 자다니! 이런 부러운 놈 같으니…… 아니, 나쁜 놈 같으니! 이런 놈은 사회악이야! 우리 사회 발전을 위해서라도 이런 놈은 제거해야 해! 내 눈빛의 의미를 눈치 챘는지 지니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 손만 잡고 잤습니다." " ……."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 절 못 믿으시는 겁니까?" " ……." 내가 뭘 보고 널 믿겠니? 하지만 지니는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본인은 정말로 손만 잡고 잤다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이라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중요한 것은 내 문제다. "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끝장났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임마?" 내가 화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니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 시끄러, 임마! 내가 니 말 들어서 엿 먹은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 변명은 필요없다! 문답무용!" " 저의 불찰로 인해 아이어느 공작님께서 위기에 처하게 되시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미력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 필요 없다니까! 잔말 말고 죽어!" " 잠시만 진정하시고 이걸 봐 주십시오." 지니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호기심이 생긴다. 그래. 죽일 땐 죽이더라도 뭔지는 들어보고 죽이자. 난 지니의 멱살을 놔주고는 손에 들린 종이를 받아 들었다. " 이게 뭐야? 스카이라운지 20만원 식사권?" 지니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 그렇습니다. 이번에 새로 개장한 스카이라운지의 식사권입니다. 양천구에 있는 에이스 빌딩 60층에 위치한 프랑스 요리 전문 음식점입니다. 생음악이 연주되고 밤에는 한강의 야경이 아름답게 펼쳐지지요." " 오오~." 난 감탄했다. 그리고 물었다. " 그래서 어쩌라고?" " 오늘 루시아 공주님을 데리고 이곳으로 가셔서 아이언스 공작님의 진심을 고백하십시오." " 뭐? 고백!" 내가 크게 놀라며 묻자 지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마음속에는 오직 루시아 공주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고백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진심은 어떤 얼음 같은 여자라도 움직일 수 있는 법입니다." " ……." 고백이라고? 이곳에서? 내가 식사권을 멍하게 바라보자 지니는 작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 저의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서늬 고백 성공 확률은 100퍼센트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부드러운 생음악이 흐르고 창밖으로는 한강의 야경이 보입니다. 부드러운 와인과 흔들거리는 촛불.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 그, 그래도……?" " 원래 여자는 분위기에 약한 법입니다. 게다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 정도로 성의를 보이시면 루시아 공주님의 마음도 분명히 풀릴 것입니다." " 그, 그럴까?" " 그리고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오늘밤에는 이슬비가 온다고 합니다." " 그래서?" " 비 내리는 밤에 스카이라운지에서 야경을 바라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 ……." 내 머릿속에서 시물레이션이 세팅 된다. 어두운 조명 아래 촛불이 흔들리고 있다. 감미로운 생음악이 귓가를 간질이고 창밖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다. 스르게 내리는 비 사이로 한강의 야경이 보인다. 불이 켜진 천호대교가 한강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루시아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비 내리는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반쯤 감겨 있었다. " 아름다워." 그럼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 야경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네 아름다움에 비할 바는 아니지." 루시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난 와인잔을 내밀며 말한다. " 너의 아름다움에 건배." " 아……." 두 개의 잔이 부딪힌다. 난 흔들리는 촛불 너머로 루시아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감미롭게 속삭이듯 말한다. " 널 사랑해!" " 어머!" 가볍게 놀라는 루시아. 하지만 이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난 그녀의 손을 꼭 붙잡는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입술을……. " 어떻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들려운 지니의 말에 나의 상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으음, 비록 상상이긴 하지만 너무 좋다. 이렇게만 된가면 얼마나 좋을까? " 그런데 내일 비가 온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니?" 내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하며 묻자 지니는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요즘 교제하는 여성분이 기상 캐스터입니다." " ……." 헉! 기상 캐스터? 그나저나 교제라고? 교제하는 여성이 있으면서 나이트클럽에서 여자 꼬시고 다닌단 말인가? " 이 식사권은 어디서 났니?" " 요즘 교제하는 여성분이 이곳 사장 딸입니다." " ……." 음식점 사장 딸? " 저번에 준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은?" " 요즘 교제하는 여성분이 놀이공원에 근무하고 계십니다." " ……." 놀이공원 알바생? " 어제 나이트클럽 VIP 쿠폰은?" " 요즘 교제하는 여성분이 그 일대 유흥업소를 관리하는 조직의 넘버 3입니다." " ……." 조폭 여자까지? 이인간이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 대체 몇 명인지 정말 궁금해진다. 나도 한때는 이런 것을 꿈꿨다. 전 세계에 별장을 건설하고 그것에 애인들을 놓아둔다. 그리고 전국 일주를 하며 그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것이다. 아예 하램을 건설하는 것도 생각해볼만한 일이지. 아아~ 소설을 보면 대다스의 용사들은 마지막에 삼처사첩을 얻어서 잘 먹고 잘살던데 난 왜 이 모양 이꼴이냐? 난 삼처사첩 같은 것은 바라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루시아. 루시아만 나와 결혼해 준다면 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자신이 있다. 아! 물론 여기에는 라이도 포함된다. 루시아 같은 아내와 결혼해서 라이 같은 딸을 키우는 것. 이것은 모든 남자들의 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루시아에게 용서를 구하고 신뢰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루시아와 그렇고 그런 관계로 진전을……. "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입니다. 최고급품으로 이태리제입니다." " 요즘 교제하시는 여성분이 초콜릿 업체 사장 딸인가 보지?" " 수입 제과업체의 간부입니다." " 아! 그렇군." " 그리고 이것도 받아 주십시오." 이번에 지니가 내민 것은 납작한 갑이었다. 난 그것을 받아서 열어 보았다. " 헉!" 난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납작한 갑 안에 들어있는 것은 휘양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목걸이와 반지였다. 금으로 된 테두리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 이, 이건……?" " 프랑스에서 수입된 최고급 귀금속으로 시가는 1억이지만 현재 없어서 못 판다고 하는 제품입니다. 반지 크기는 루시아 공주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맞추어 놓았습니다." " 그런데 이 비싼 걸 왜 나에게?" " 이걸 루시아 공주님께 선물하시면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 ……." 차마 목이 메어 말을 못하는 나에게 지니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너스 공작님과 루시아 공주님이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는 견마의 노고를 다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 사, 사일런스 백작님! 흑흑~!" 나는 울음을 터트리며 지니의 품 안에 뛰어들었다. 지니가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주는데 난 지니의 멱살을 잡고 욕이나 해댔다니. 흑흑~ 내가 나쁜 놈이야. 그런데 이 1억원이나 하는 귀금속은 어디서 났을까?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 금은방하나? 누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쨌든 나를 생각해주는 지니의 마음에 그저 감동할 뿐이다. 지니는 울고 있는 나를 다정하게 껴안아 주었다. " ……." 헉! 이 인간이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무슨 짓을? 난 황급히 지니를 밀쳐내고 눈물을 닦았다. 남자 품에서 울었다고 생각하니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난 울더라도 루시아 품에서 울고파~. 선물을 챙기며 지니에게 물었다. " 그런데 고백을 한다고 해도 루시아가 받아들여 줄까요?" "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흔들다리 효과라고 알고 계십니까?" " ……." 흔들다리 효과? 그거라면 나도 알고 있다. 흔들거리는 다리에 남녀가 서 있으면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이유는 다리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사랑의 감정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 그것은 높은 곳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곳에서 야경을 보게 되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을 사랑의 두근거림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밤은 감정이 고조되는 시기이고 비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까 비 오는 날 밤에 높은 곳에서 고백을 하게 되면 성공 확률이 지극히 높아집니다." " 오오! 과연 그렇군요." 단지 공짜로 받은 식사권으로 생색내려는 건 줄 알았는데, 여기에 이런 깊은 뜻이 숨어있을 줄이야! 대륙 최고의 참모 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군. " 그런데 차이면 어저죠? 그럼 진짜 죽고 싶어질 것 같은데." " 만약 차이시면 바로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리시면 됩니다. 이게 또 스카이라운지의 장점이지요." " 하하, 그렇군요. 역시 사일런스 백작님은 당대 최고의 참모입니다." "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계신데 어찌 제가 감히 최고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전 다만 두 번재로 만족하도록 하겠습니다." " 하하, 겸손하시기까지." " 감사합니다. 더욱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잠깐. 내가 왜 웃고 잇는 거지? 차이면 뛰어내리라는 건 나보고 죽으란 얘기잖아! 난 지니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 이 자식! 지금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 뭐야?" " 그런 각오로 고백에 임하시면 루시아 공주님께서 반드시 마음을 움직이시리라 생각하여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 ……." 하여간 말은 잘해요. 어찌되었든 지니의 말이 맞다. 루시아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루시아에게 나의 진심을 보이고 말겠어! "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크게 한턱내도록 하겠습니다." " 저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전 다만 할 일을 하였을 뿐이니 개의치 말아주십시오." " ……." 그래. 너로 인해 내가 이렇게 됐지. 잘 아니 다행이구나. " 그런데 루시아를 어떻게 이곳으로 데려가죠? 제 말은 듣지도 않으려고 하는데." " 그 점에 대해서는 심려치 마십시오. 제가 저녁 8시까지 루시아 공주님을 그곳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창가 자리에 미리 예약도 해두었습니다." " 오오! 예약까지. 그것도 창가 자리로!" 이렇게 준비성이 투철할 수가! 좀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니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예, 아이언스 공작님.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 헉! 그렇다면 뭔가 또 있나요?" " 그렇습니다. 루시아 공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지요. 제가 생각한 계획을 말씁드릴 테니 상황에 맞지 않다 싶으시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수정해 주십시오." " 됐으니까 빨리 말이나 해요." "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한 계획은……." " ……." " ……." " 왜 그래요?" " 귀를 좀 가까이." " 아니, 여기우리 둘밖에 없는데 뭐 하러 귓속말로 해요? 물론 라이가 있긴 하지만 자고 있고, 설사 들었다 하더라고 평균 기억력 10초인 라이가 기억할 리 없잖아요." " 원래 이번트라는 게 극비를 요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 흐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내가 귀를 갖다 대자 지니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는 말을 끝날 때쯤엔 입김까지 후~ 부는 것이 아닌가? 헉! 이 인간이 자꾸 무슨 짓을! 그렇게도 내가 탐이 났단 말인가? 난 이번 기회에 지니에게 확실히 말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니가 자꾸 이런 행동을 하면 할수록 우리 둘 다 힘들어질 뿐이다. " 전 이미 루시아의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런 오해의 소지가 있는 행동을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 알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니는 굳게 약조를 하고 방을 나갔다. 난 스카이라운지 20만원식사권을 보며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이번 기회에 확실에 오해를 풀고 나의 마음을 고백하는 거야. 난 할 수 있어! *       *     *     * 현재 시각 7시 50분. 난 정장을 차려 입고 스카이라운지에 도착해 있었다. 지니가 말한 대로 분위기는 환상적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흔들리는 촛불.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클래식 생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지니가 요즘 사귀는 기사 캐스터 여성분의 말대로 창밖 너머에는 이슬비가 구슬프게 내렸다. 내리는 비 사이로 보이는 한강의 야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정말 완벽하다. 더 이상 완벽할 수가 없다. 다시금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떠오른다. 루시아가 이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을 때 나는 지니가 수입 제과업체 간부에게 받은 이태리제 초콜릿을 내민다. 우리는 다정하게 그것을 나눠 먹는다. 초콜릿을 몇 개 먹었을 때쯤 나는 조심스럽게 1억을 호가하는 반지와 목걸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루시아에게 말한다. " 나의 마음을 받아줘." " 어머!" 너무 감동한 나머지 말도 못하는 루시아. 잠시 후, 루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난 목걸이를 루시아의 목에 걸어주고 반지를 루시아의 손가락에 끼워준다. 루시아는 수줍게 웃으며 묻는다. " 어때?" 난 루시아의 백금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루시아의 두 눈을 마주 본다. " 너무 아름다워. 세상 누구도 너처럼 아름답지는 않을 거야." 루시아의 얽둘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와인을 마신다. 시간은 이미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지하철이 끊겼다. 루시아는 나의 품에 안기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 나 오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 ……." 헉! 그런 대담한 말을. 음식점을 나온 우리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근처의 최고급 호텔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아아! 안 돼. 상상은 여기까지. 아무튼 상상대로만 된다면 정말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루시아를 기다렸다. 그렇게 괜히 물잔만 기울이고 있는데 입구에서 루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백금발을 틀어 올려 보석이 박힌 써클렛으로 장식을 했고, 옷은 어깨가 드러나는 새하얀 원피스였다. 캐주얼한 드레스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홀 안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연인과 함께 온 남자들도 루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자들은 그런 연인의 행동에 질투심과 적개심 어린 눈으로 루시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루시아의 미모에 기가 죽어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아! 집에서 보는 평범한 모습도 아름답지만, 이런 곳에서 잘 차려입은 모습을 보게 되니 정말 너무 아름답다. 흑! 저런 여인을 옆에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려 했다니. 내가 눈이 삐었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루시아는 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려는 굳은 얼굴로 잠시 날 노려보더니 이내 몸을 획 돌려서 나가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 이거 놔." 루시아는 냉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말투로 명령했다. 마치 카르와 대화하는 것 같은 무서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 놓는다면 영원히 루시아를 놓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일단 앉아. 우리 앉아서 얘기하자." "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 내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제발……." " 아, 알았으니까 손 좀 놔." 내가 체면 불구하고 매달리자 루시아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나는 메뉴판을 루시아에게 내밀었다. " 뭐 먹을래? 내가 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골라." 그렇게 말하자 루시아는 정말 부담 갖지 않고 제일 비싼 걸 골랐다. 1인분에 10만원이라니!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 문제없다. 나에게는 지니가 준 20만 원짜리 식사권이 있으니까. 그리고 현금도 꽤 많이 준비해왔다. 혹시라도 일이 잘 되어서 호텔까지 직행할지도 모르니……. 난 루시아와 같은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과 은은한 조명. 그리고 비가 내리는 야경까지. 레스토랑 안은 반 정도 차 있었다. 대다수가 연인들이었다. 이런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연인들은 음식과 와인을 즐기며 사랑을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 눈에도 나와 루시아는 연인으로 보일 것이다. 설마 미녀와 야수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코스 요리가 기본이다. 애피타이저, 샐러드, 본 음식, 후식 등등 마치 릴레이 하듯이 차례대로 나온다. 으음, 예전에는 컵라면으로 세 끼를 때웠었는데. 돈을 좀 많이 벌게 되니 먹는 것부터 확 바뀌는군. 후후~ 역시 자분주의 사회에서는 무조건 돈을 많이 벌고 볼 일이야. 사실 돈 없으면 굶어 죽어도 할 말 없는 게 자본주의 사회 아니겠어?(이건 진짜다. 정부는 돈 없는 사람이 굶어죽든 말든 별 신경 안 쓴다. 정부의 극빈층 정책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하는 사이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우아한 동작으로 스프를 떠먹었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니 루시아가 공주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역시에 몸에 밴 기품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왠지 그녀 앞의 내가 초라해 보인다. 그녀는 공주. 나는 돈 없는 서민. 아니, 이제는 돈 있는 서민. 정말로 내가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진정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난 절대로 그녀를 놓아줄 수 없다. 만약 그녀가 날 떠난다면 난 앓아누울지도 모른다. 참고로 내가 앓아누우면 정말 큰일이다. 그게 왜 큰일이냐고? 다음 장면을 보면 알게 된다. 힘없는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나. 그리고 그 옆에 앉아 나를 간호하는 라이. " 라이야, 이 오빠가 죽을 날이 머지않았구나." 내가 입을 열자 라이는 화들짝 놀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 우에에엥~ 안 돼요. 오빠 죽으면 안 돼요. 라이를 남겨두고 죽으면 안 돼요. 흑흑." " 미안하다, 라이야. 루시아가 날 떠나갔는데 더 이상 살아서 뭐 하겠니? 이 오빠는 루시아가 없으면 숨조차 쉴 수 없어. 흑~ 내가 그날 지니를 따라 나이트클럽에만 가지 않았어도 이렇게는 안 되었을 텐데. 헉! 호흡이!" " 아, 안 돼요, 오빠!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라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입을 연다. 할 말을 하고 죽어야할 것 아닌가? " 헉! 사일런스 지니…… 그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야……. 지니만 아니었어도 루시아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 헉! 라이야…… 반드시 이 오빠의 복수를…… 크어어억!" 말을 마친 나는 숨을 거둔다. 라이는 날 깨우기 위해 내 몸을 흔들며 오열한다. " 우에에엥~." 장례식이 끝나고 나자 라이는 인형 가게를 정리하고 여행에 나선다. 라이의 한 손에는 헬로우 귀티가, 다른 한 손에는 요술봉이 들려 있다. 라이가 입고 있는 옷은 상복이다. " 라이는 반드시 오빠의 복수를 하고 말 테야! 오빠의 복수가 끝날 때까지 이 상복을 벅지 않을 거야!" 라이는 나의 원수인 사일런스 지니를 찾아 정처 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이렇게 되는 거다. 흑흑~ 기특한 것 같으니라고. 이 오빠의 복수를 위해 상복조차 벗지 않고 여행을 떠나다니. 역시 내가 딸 하나는 잘 키웠어. " ……." 그런데 정말로 라이가 저렇게 할까? 요즘 라이 행동을 봐서는……. ( 전략) 장례식이 끝나고 나자 라이는 인형 가게를 정리한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피자 가게를 세운다. 그리고 원 없이 피자를 먹는다. 응? 오빠의 복수는 어쩌고? " 응? 오빠가 누구에요? 라이는 그런 거 잘 몰라요." 평균 기억력 10초를 자랑하는 라이는 히로 오바 같은 것은 다 잊고 매일 피자를 먹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으음, 앞의 것보다는 이게 좀더 가능성이 높군. 요즘 라이의 행동을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흑흑~ 매정한 것 같으니라고. 이 오빠보다 피자가 더 소중하다는 거야? 내가 딸자식을 잘못 키웠어. 어찌되었뜬 위의 두 가지 경우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진심으로 루시아에게 용서를 구하고 나의 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메인 요리가 끝이 나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요즘 날씨가 많이 덥다보니 후식이 차가운 걸로 나오는군. 루시아는 딸기 시럽이 뿌려진 아이스크림을 작은 수저로 떠서 먹었다. 난 아이스크림이 녹는 줄도 모르고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난 먹는 거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가장 추잡한 짓이라는 것은 알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이라도 계속 보고 있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루시아 얼굴은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가 않는다(이건 라이도 마찬가지). 이대로 평생 루시아 얼굴만 바라보라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 왜 그렇게 봐?" 억양 없는 루시아의 물음. 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 미, 미안." 아아~ 대체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이런 좋은 기회에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있다니. 점수를 따기는커녕 계속해서 잃고 있다. 이대로 가면 진짜 루시아가 날 떠나버릴 수도 있다. 안 돼! 그렇 수는 없어.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계획대로라면 이제 조금 있으면 이벤트가 시작될 것이다. 사일런스 지니를 믿는 수밖에 없겠군. 그런데 정말로 믿어도 되는 걸까? 그 인간 믿으면 언제나 마지막에 피 보는 건 나인데. 으음, 그냥 크로니스한테 부탁할 걸 그랬나? *           *          *          * 두 여성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웬만한 남자보다 더 키가 큰 여성은 레몬빛 머리카락과 레몬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꽉 끼는 청바지에 어깨가 더 드러나는 탱크탑을 입었기에 그녀의 몸매는 여과 없이 밖으로 드러났다. 웬만한 모델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완벽한 몸매였다. 게다가 얼굴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그런 섹시하고도 터프한 이미지에 지나가던 남자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외모 하나는 완벽한 여성이었다. 그들은 맹세코 이제까지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은 그녀의 가슴이었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걸어가고 있는지라 탱크탑이 몸에 밀착되어 커다랗게 모양 좋은 가슴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게다가 레몬빛 머리카락을 물기를 머금은 채 해초처럼 목에 달라붙어 있어 농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통 이런 경우는 은근슬쩍 훔쳐보는 것이 예의라 할 수 있지만 남자들은 아예 대놓고 침을 질질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예의가 아니긴 하지만 남자의 본능인 것을. 그들 중에는 옆에 애인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여자들은 자신의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며 다른 여성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화를 냈다. 하지만 남자들은 애인의 질타에도 고개를 원상복귀 시킬 줄 몰랐다. 어떤 여성은 참다못해 옆에 있는 남자의 뺨을 후려갈기고 울면서 뛰어갔다. 물론 여성들이 이렇게 화내는 거 다 이해한다.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한테 홀딱 빠져있는데 가만히 있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여자들도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해주어야 한다. 예쁜 여자가 지나갈 때 남자의 시선이 돌아가는 것은, 레몬을 한 입 먹었을 때 입 안의 침이 고이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즉, 본인이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생리적 현상의 일부라는 것이다. 물론 아예 대놓고 침까지 질질 흘리며 바라본다면 그건 좀 문제가 있지만……. 그녀의 옆에는 흰 머리카락의 미녀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니, 달라 붙어있다기보다는 밀착해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녀는 놀랍게도 새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새하얗다는 것은 밝은 피부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피부는 말 그대로 새하얀 색깔이었다. 정상적으로는 결코 이런 피부색이 나올 수가 없다. 그녀는 마치 희귀병을 앓고 있는 병약 미소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레몬빛 머리카락의 미녀를 빠르게 쫓아다니며 활발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녀의 은색 눈동자는 오로지 자신이 매달려있는 여성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사랑이었다. 이 둘이 라이레얼과 카르임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라이레얼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집 안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며 과자를 먹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라이레얼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텔레비전이었다. 오죽하면 히로에게 부탁(강요? 협박?) 하여 베란다에 접시(고가의 아이템. 이게 있으면 여러 위성 채널을 볼 수 있다)까지 달았겠는가? 참고로 라이레얼의 최미는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며 과자를 먹는 것이었다. 물론 발가락으로 리모콘 버튼을 눌러 채널을 요리조리 돌리는 스킬을 필수였다. 서울에 온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라이레얼은 문명의 이기에 물들어 점점 귀차니즘에 빠져들었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귀찮아서 거의 모든 일은 카르에게 시키고 있었다. 과자 가져와라, 음료수 가져와라, 세수하게 물 떠와라 등등. 물론 카르는 라이레얼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카르는 라이레얼이 시키는 것이라면 기름을 둘러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정도로 라이레얼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무튼 극도의 귀차니즘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늘씬한 몸매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정말 타고난 복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게 귀차니즘에 빠지다 못해 이젠 스페셜 귀차니스트가 되어버린 라이레얼이 밖으로 기어 나온 이유는 카르 때문이다. 카르가 하도 영화를 보러 가자고 졸라 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카르가 선택한 영화는 두 여인이 나이 차이와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동성애를 이룩한다는 하이퍼 스펙타클 휴면 판타스틱 레즈 로맨스물이었다. 다들 좋은 영화 많이 놔두고 왜 이 영화를 택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리는 커플석으로 잡았다. 하지만 라이레얼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영화관에서 나올 때가 되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미리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는지라 둘은 비를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 이젠 뭐 할까요, 언니?" " 뭐 하긴? 빨리 집에 돌아가서 시트콤이란 드라마 봐야지." " 그, 그러지 말고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언니." " 밥 먹자고?" " 예. 가끔은 외식도 해야지요." " 흐음, 돈은 있어?" " 이게 있어요." 카르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놀랍게도 스카이라운지 20만원 식사권이었다. " 으음, 귀찮아서 그냥 집에 가고 싶은데." " 가요, 언니~ 제발요오~. 이 티켓 날짜가 얼마나 안 남았단 말이에요. 꼭 오늘 먹어야 해요." 카르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라이레얼에게 애원했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티켓 날짜가 얼마 안 남았다고 하지 않는가 공짜로 밥 먹는 건데 굳이 사양할 이유는 없지. 라이레얼이 허락하자 카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오늘 중요한 것은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는 다만 라이레얼을 밖으로 불러낼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카르의 진짜 목적은 라이레얼을 이곳 스카이라운지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카르는 아까 낮에 지나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이게 뭐야?" " 스카이라운지 20만원 식사권입니다." "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 오늘 저녁에 라이레얼 양과 함께 이곳으로 오십시오." " 왜?" " 오늘 이 곳에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루시아 공주님께 영원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그럼 자동적으로 라이레얼 양과의 관계는 완전히 끝이 나는 거지요. 라이레얼 양이 큰 충격을 받고 상심할 거라 생각되지만 두 분의 새 출발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 응. 알았어. 꼭 갈게." 그동안 카르의 사랑의 가장 큰 방해자는 히로였다. 카르는 라이레얼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전부 히로 때문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 그놈이 라이레얼 언니에게 매일 꼬리를 쳐서 라이레얼 언니가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 그놈을 언니 곁에서 떨어트려 놔야 해!" 하지만 몇 번이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로는 라이레얼에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정확히는 라이레얼이 히로 곁을 떠나지 않은 거지만). 카르는 히로를 제가할 마음까지 품었다. 만약 히로 주위에 드래곤들이 포전하지 않았다면 히로는 진작 카르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침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 그놈이 루시아라는 여자한테 사랑을 고백하면 라이레얼 언니는 조금 슬퍼하겠지? 그럼 그때 내가 나가서 라이레얼 언니를 갖는 거야.' 카르는 생글생글 웃으며 라이레얼을 보았다.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하프엘프 여성. 카르가 그동안 기다려온 이상형 그 자체였다. ' 아아~ 사랑해요, 언니." *           *          *          * " 오늘 가실 거예요?" " 흐음, 글쎄요." 일루니아는 손에 든 종이를 흔들어 보았다. 그것은 스카이라운지 20만원 식사권이었다. 일루니아는 아까 낮에 지니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 오늘 저녁에 이곳으로 인디님과 함께 와주십시오, 누님." " 왜?" " 오늘 이곳에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루시아 공주님께 영원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누님과 인디님께서는 이곳에 오셔서 두 분의 사랑의 맹약의 증인이 되어 진심으로 두 분을 축하해 주십시오." " 뭐?" " 그럼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누님. 전 이벤트 준비 때문에 바빠서 이만." " 영원한 사랑 고백이라…………?" " 너무 낭만적이에요. 아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인디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렇게 말했다. 일루니아는 그런 인디를 보며 웃듬을 지었다. 인디는 진정으로 'LOVE & PEACE' 를 바라는 드래곤이다. 비록 드래곤이긴 하지만 인디는 히로에게 소심 드래곤이라고 불릴 정도로 소심하고 감수성이 예민했다. 어느 정도냐면 연애 소설을 보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드라마를 보다가 펑펑 울 정도다. 인디는 진심으로 히로와 루시아가 잘 되기를 빌었다.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사랑이니까.' 게다가 인디는 히로에게 마음의 빚을 많이 지고 있었다. 뭐 빚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빚은 일루니아와 만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물론 히로 본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만약 둘이 결혼하게 될 줄 알았다면 목숨 걸고서라도 둘의 만남을 막았을 것이다. 일루니아의 불행은 히로의 행복이니). ' 히로님이 없었다면 난 일루니아님을 만날 수도 없었을 거야. 그럼 지금처럼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도 없었겠지. 그러니 히로님도 루시아님과 잘 되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아아~ 정말 훌륭한 드래곤이 아닐 수가 없다. 인디 같은 사람들만 산다면 지구는 한층 아름다워질 텐데. 그런 인디의 반응과는 달리 일루니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 훗~ 주제에 이쁜 건 알아 가지고. 그 얼굴로 감히 누굴 넘보는 거야?" 사실 외모 면에서만 비교해보자면 루시아가 백번 아깝다. 하지만 사람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지 않는가? 으음, 그래도 너무 차이가 나긴 한다. 일루니아는 루시아와 자매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가깝게 지내왔다. 그러니 동생 같은 루시아를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는 히로에게 넘겨주기 싫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어쨋든 공짜 식사권이니 가서 먹어주는 게 예의겠지요?" " 그, 그럼 가는 거예요?" " 예. 오늘 저녁은 안 하셔도 돼요. 나갈 준비 하세요." " 예, 일루니아님." 인디는 기쁜 듯이 방으로 달려갔다. 간만에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볼에 홍조가 때올랐다. 게다가 스카이라운지에서 저녁식사라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야경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          *          * 히로는 루시아에게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넌 떠들어라. 난 다른 거 할게' 라고 말하는 듯했다. 어느새 둘은 식사를 끝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별 진전이 없어 보였다. ' 힘내세요, 오빠. 라이가 응원할게요. 오빠, 파이팅!' 히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가게 한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는 지니과 라이가 앉아 있었다. 워낙 출중한 외모를 지닌 둘인지라 존재감이 없으려고 해도 눈에 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둘은 살짝 변장을 하고 있었다. 지니는 짙은 선글라고를 쓰고 있었고, 라이는 모자를 깊게 눌러 써서 귀여운 얼굴을 조금이나마 가렸다. 라이의 옆에는 벌써 접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지니가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 이 스카이라운지 사장의 딸이 아니었다면 지니의 지갑은 벌써 거덜 났을 것이다. 라이는 푸아그라 요리를 입에 우겨넣고 꿀꺽 삼켰다. 미식가들이 보면 기절한 일이었다. 그게 얼마짜린데……. 아무랟호 낮에 훼밀리 사이즈 피자만으로는 많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 으음, 이 시간까지 진전이 없으시니 정말 걱정되는군요." 지니가 말하자 라이가 고개를 끄덕었다. " 맞아요. 라이는 오빠랑 언니랑 빨리 잘 됐으면 좋겠어요. 오빠랑 언니랑 화해해서 다시 전처럼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군요." " 그런데 다른 오빠랑 언니들은 언제 오는 거예요?" " 흐음, 글쎄요. 지금까지 오시지는 않는 것을 보니 올 생각이 없나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과 루시아 공주님의 영원한 사랑의 맹세의 참관인으로 모시려 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으시다니……. 다 저의 불찰입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지니는 선글라스를 벗고 외눈 안경을 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 스테이지로 나갔다. *           *          *          * 이젠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무슨 말을 해도 루시아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설마 나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건가? 내가 하는 말은 개 짖는 소리(줄여서 개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 건가? 내 품안에는 지니가 건네준 1억짜리 목걸이랑 반지라 들어 있었다. 난 이것을 루시아에게 건넬 타이밍만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란 쉽게 오지 않았다. 지금 건네 봐야 거절당할 게 뻔하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결국은 지니가 나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군. 그나저나 이 인간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이러다가 파토나면 지가 책임질 거야 뭐야? 다행히 그 순간 한 남자가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 스테이지로 걸어 나왔다. 뒷모습만 보였지만 난 한순간에 그가 지니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금발을 늘어뜨린 키 큰 청년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되겠는가?(찾아보면 많을지도) " 어, 지니 오빠가 왜 여기에……?" 사정을 모르는 루시아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지니를 보았다. 지니는 관계자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음악을 연주하던 사람들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지니에게 집중되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금발의 미청년. 지니의 존재는 레스토랑 안의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예상대로 몇몇 여성들은 침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지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 있는 커플 중 몇은 깨질 것이다. 으음, 지니는 커플 파괴의 주범이란 말인가? 왠지 점점 지니가 두려워진다. 지니가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 " 이 자리에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와 계집니다. 그분께서는 한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나 저로 인하여 그녀와 헤어질 위기에 처하셨습니다. 전 이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이 저의 실수 때문임을 밝히며 그분과 그분이 사랑하는 레이디께 용서를 구합니다. 지금 제가 부를 노래는 그분을 대신하여 그녀에게 들려드리는 노래입니다. 곡명은 . 두 분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지니가 말을 마치자 뒤에 있는 연주자들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피아노와 현악기의 소리가 부드럽게 레스토랑 안에 울려 퍼졌다. 손가락을 튕겨 박자를 맞추전 지니는 노래를 부르고 시작했다. [ 원래는 노래 가사가 책에 나와 있으나, 옮긴이(?)의 괴차니즘의 압박으로 안 씁니다-_-]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지니의 노래는 내 마음 속을 파고 들어와 내 온몸을 뒤흔들었다. 스테이지에서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노래를 부르는 지니의 모습을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순간, 나는 지니에게 반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대체 언제 영어 공부랑 노래 공부를 했기에 이렇게 완벽하게 팝송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역시 천재라는 건가? 아무튼 이 정도면 천상의 노래라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아아~ 지니에게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반할 것만 같아. " ……." 헉! 내가 무슨 생각을? 깜짝 놀란 나는 두 손으로 뺨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이 정도이니 여자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레스토랑 안의 모든 여자들은 광신도가 되어 있었다. 어떤 여자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눈물까지 흘렸다. 그들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 저분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 지니 팬클럽 수가 또 늘어나겠군. 노래를 마친 지니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우수에 젖은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본다. 순간, 픽픽 쓰러지는 여자들. " ……." 이젠 지겹지도 않다. 제발 이런 장면은 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독자들이 지겨워하잖아! 대체 이번이 몇 번째야? 언제까지 이 장면으로 페이지를 때울 건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헉! 그런데 설마 루시아도 홀린 건 아니겠지? 난 루시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루시아는 감동 받은 얼굴로 지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고 그것은 순수하게 감동 받은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친한 오빠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수준. 남녀 간의 사랑의 감정은 담겨져 있지 않았다. 역시 루시아는 외모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루시아가 더욱 더 사랑스러워진다. 아아~ 두근거리는 이 마음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노래가 끝났으니 이젠 내가 나설 차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스테이지로 걸어 나갔다. 지니는 날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마이크 옆으로 비켜섰다. 이미 지니가 사람들의 시선을 다 집중시켜 놓은 터라 정말 부담스럽다. 난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마이크 앞에 섰다. 여기서 보니 스카이라운지 안이 더욱 넓어 보인다. 루시아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저절로 침이 넘어간다.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없다. 준비해왔떤 멘트들은 대체 어디로 날아갔딴 말인가? 그렇게 난 한동안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안 돼! 이렇게 있으면 바보처럼 보일 뿐이야!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땀만 삐질삐질 흘리는데 어디선가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힘내요, 오빠! 오빠는 할 수 있어요! 라이가 응원할게요!"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반바지에 반팔이라는 캐주얼한 복장을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소녀가 서 있었다. 그 소녀는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긴 회색 머리가 촤르륵 흘러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깜찍한 소녀. 그 소녀는 바로 라이였다. 라이는 주먹을 꼭 쥐고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가…… 나의 라이가 응원을 해주다니! 난 감동 받아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래. 난 할 수 있어. 라이가 날 응원해주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어? 난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정체 모를 힘이 온몸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모 회사의 시리얼 광고처럼 '호랑이 기운' 이 솟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으음, 그러고 보니 그 회사 소송 걸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광고를 보고 시리얼을 먹은 소비자들이 과장 광고라며 단체 소송을 걸었다는 것이다. 소송 이유가 참 황당했다. 시리얼을 먹었는데도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지 않는다나 뭐래나……. (시리얼 먹고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아무튼 라이의 러브러브 응원 파워를 받은 나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난 마이크를 잡고 루시아를 응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준비해온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제게는 정말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누구보다도 착합니다. 전 그녀를 위해서라면 저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가 저에게 뛰어내리라고 한다면 기꺼이 저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릴 겁니다. 전 그만큼 그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전 제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만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 실수로 인해 그녀는 제 곁을 떠나려 합니다. 하지만 전 그녀를 놓아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그녀가 없으면 살아갈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전 바보 같게도 이제야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달은 겁니다. 그녀를 붙잡는다는 것은 저의 이기심의 발로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녀에 비해 많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저 같은 것은 그녀를 사랑할 자격조차 없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만약 저에게 단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녀를 사랑하겠습니다." 루시아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루시아를 바라보는 내 눈 역시 크게 흔들렸다. 난 품안에 손을 넣어 지니가 준 목걸이랑 반지 세트가 들어있는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루시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은……." " 아! 라이레얼 양이 오셨군요." " ……라이레얼입니다. 전 이자리에서 그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다. 전 죽을 때까지 오직 그녀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녀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녀 외에 다른 어떤 여자도 바라보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말을 마친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손에 든 케이스를 열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와 반지가 오색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이제 루시아가 나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일으켜 주면, 내가 루시아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고 손에 반지를 끼워준다. 그리고 사람들의 축복 속에 키스를 하면 행복하게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루시아의 표정은 더 이상 차가울 수가 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 나의 절대 감각은 나에게 적색경부를 울리고 있었다. " 그랬구나. 난 히로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렇게까지 날 사랑할 줄이야. 이제까지 내가 들어본 고백 중에 최고야. 흑~ 감동이야." 어라? 이 목소리는? 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네 남녀가 서 있었다.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카르, 그리고……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감동받은 표정으로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달려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 나도 사랑해, 히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 자, 잠깐만요. 이게 무슨 짓……." " 쉿! 니 맘 다 알아. 날 위해 이런 이벤트까지 준비하다니. 훌쩍~ 정말 감동에 감동이야. 사랑해, 히로." 난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라이레얼이 입술로 내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 읍읍!" 난 라이레얼과 키스를 하는 와중에도 시선은 루시아를 쫓았다. 루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려 했다. 난 떨어지지 않으려는 라이레얼을 억지로 밀치고 루시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 루, 루시아. 나는……." 짜악! 내 뺨을 때린 루시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날 한번 쳐다보더니 계속해서 갈 길을 갔다. 난 레스토랑을 나서는 그녀를 보면서도 잡을 수가 없었다.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째서 루시아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난 머릿속의 기억을 거꾸로 감아 보았다. 순간, 내 머릿속에 영상 하나가 잡혔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은…….' ' 아! 라이레얼 양이 오셨군요.' ' ……라이레얼입니다. 전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 헉! 어떻게 이런 일이! " 어머, 저 여자 웃긴다. 걱정하지 마. 히로. 히로 곁에는 내가 있잖아. 맞은 데 아프지? 이 누나가 호~ 해줄게." 어느새 달려온 라이레얼은 나를 꼭 껴안고 내 볼에 입김을 불었다. 난 완전히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 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람이 어떻게 미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미쳐버리는 거야. " 너 이 자식! 처음부터 이럴 속셈으로…… 결코 용서하지 않겠어!" 눈을 부릅뜨고 힘을 개방해 날 쳐 죽이려는 카르와 그런 카르를 뜯어 말리는 인디. 나를 보며 비웃음과 행복한 웃음을 동시에 짓고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빨고 있는 라이. 그리고…… 그리고…… 뭐야? 이 인간 어디 갔어?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사일런스 지니는 어느새 모습을 감춘 뒤였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 으아아! 나 뛰어내릴 거야!" 난 유리창을 향해 돌진했으나 라이레얼이 뒤에서 껴안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 어딜 가려는 하는 거야? 사랑해, 히로~." " 너 나의 언니한테서 떨어지지 못해! 죽여 버리겠어!" " 꺄아! 좀 진정해." " 말리지 마, 이 검둥아! 여장이나 하고 다니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 그, 그러는 넌 레즈잖아!" " 호호호~ 아이언스 공작님이 라이레얼 양을 그렇게 사랑하는지는 정말 몰랐네요. 제가 루시아한테 두 분의 관계에 대해 잘 말해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힘내세요, 오빠! 라이가 응원할게요!" " 으아아! 지니 이 자식 죽여버리겠어!" 올해로 고등학생이 된 김한나는 학교가 끝나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가는 중이었다. " 얘들아,우리 뭐 할까?" " 영화나 보러 갈까?요즘 재미있는 영화 많이 개봉했던데." " 그럴까?" " 그 전에 밥이나 먹자. 나 배고파." 역시나 토요일은 일찍 끝나서 좋다. 모두들 오늘을 위해 용돈을 모아 왔다.한나 일행은 일단 밥부터 먹고 나서 영화를 보고, 그 다음에 노래방에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 뭐 먹지?" " 피자 어때?" " 그래. 피자가 좋겠다." 한나 일행은 발걸음을 피자집으로 향했다. 마침 이 근처에 맛있는 피자 체인점이 개업을 했던 것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마스터 피자>. 마스터 피자 체인점을 세운 사람은 10년동안 계룡산에서 남들다 도(道) 닦을 때,혼자서 피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피자의 도(피자에도 그런게 있나?)를 깨우쳤고, 하산하여 마스터 피자를 차렸다. 아무튼 맛있기로 유명한 집이니 모두가 기대감을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한창 자랄 나이인지라 언제나 배가 고픈 여고생들이었다. 그런데 피자집에 다다랐을 때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우에에엥~." 울음소리의 근원지는 피자집 앞이었다. 그곳에는 한 소녀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고 있었다.한나 일행은 그 소녀를 보고 깜짝 놀랬다. 그 소녀는 외국인이었다. 길게 흘러내린 회색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는 한국인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소녀가 너무나도 귀엽게 생겼다는 것이다. ' 헉!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동글동글한 얼굴과 통통한 볼,큰 눈망울과 작은 입. 소녀가 입고 있는 새하얀 원피스는 그런 소녀의 모습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마치 인형과도 같은 귀여움‥‥‥아니, 이 세상의 어떤한 인형도 이 소녀보다 귀엽지는 않을 것이다. 한나는 맹세코 이제까지 이 소녀보다 귀여운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소년가 지금 울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서럽게. 온 힘을 다해서. 눈물까지 펑펑 쏟으며! " 우에에엥~." 소녀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한나는 재빨리 소녀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토닥토닥! " 귀여운 소녀야.여기서 왜 울고 있는 거니?" 그러자 소녀가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 훌쩍~오빠가‥‥‥오빠가‥‥‥." " 응? 오빠가 뭐?" " 오빠가 없어졌어요! 우에에엥~." 다시 크게 울음을 터트리는 소녀. 한나는 깜짝 놀라 소녀의 등을 열심히 두드려 주었다. ' 보호자를 잃어버린 모양이구나. 어린아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한나는 순간 친구들과 놀러가야 한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 가여운 소녀를 도와 소녀의 오빠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 걱정하지 마 .언니가 오빠를 찾아줄게." 다행히 그런 사명감을 가진 것은 한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한나의 친구들 역시 사명감에 불타오르긴 마찬가지였다. " 그래.언니들이 꼭 오빠 찾아 줄게." " 언니들만 믿으렴." 한나와 친구들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소녀는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 정말요?정말 우리 오빠 찾아주실 거예요?" " 응.물론이야." 소녀는 자신의 주위에 선 여고생들을 둘러보더니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 우에에엥~." " 앗! 왜 그러니?" 한나가 깜짝놀라서 묻자 소녀는 더욱 크게 울며 말했다. " 우에에엥~라이는 배가 고파요~너무너무 배가 고파요~." 그 말에 여고생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 보호자를 잃어버린데다가 배까지 고프다니. 어린 것이 얼마나 고통이 심했을까?' 한나는 재빨리 소녀를 달래며 물었다. " 걱정하지 마. 언니들이 맛있는 거 사줄게." " 그래. 우리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뚝 그쳐." " 흑흑,정말요?" " 응. 뭐먹고 싶니? 말만해. 언니들이 다 사줄게." 그러자 소녀는 거짓말처럼 눈물을 뚝 그치며 바로 앞에 있는 피자집을 가리켰다. " 라이는 피자가 너무너무 먹고 싶어요~." " ‥‥‥." " ‥‥‥." 아까까지 서럽게 울다가 너무 한순간에 뚝 그치니 뭔가 이상하다. 소녀는 주위의 반응이 없자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 우에에엥~라이는 피자가 먹고 싶단 말이에요~엉엉~오빠아~피자아~." " 아,알았어.언니들이 사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뚝! " 정말요?" " 응." " 헤헤~." 피자 사준다는 말에 울음을 그친 것도 모자라 방긋방긋 웃는 소녀. 너무 행복해 보인다. 대체 이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한나를 비롯한 여곳애들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소녀를 데리고 피자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걱우걱! 자신의 이름을 라이라고 밝힌 소녀는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 듯 먹어댔다. 마치 며칠은 굶은 듯한 모습이었다. 훼밀리 사이즈 피자가 순식간의 사라져가는 모습은 신기에 가까웠다. " 처,천천히 먹으렴. 체하겠다." " 그,그래. 여기 콜라라도 좀 마시면서 먹어." 한나가 콜라를 내밀자 라이는 그것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양손에 든 피자를 입 안에 우겨 넣었다. '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나.' 한나는 문득 이 소녀의 오빠가 누군지 궁금해졌다.대체 누구기에 애가 이렇게 굶주리도록 놔뒀단 말인가? 어느새 훼밀리 피자 한 판이 사라졌다. 라이는 콜라를 마시며 입가심을 했다. " 피자를 좋아하나 보구나." " 예. 라이는 세상에서 피자가 제일 좋아요." 훼밀리 사이즈 한판을 혼자서 다 먹은 라이였지만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라이는 무언가를 굉장히 요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한나와 한나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초롱초롱! 막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한판 더 먹어도 될까요?' 그 눈빛이 너무나도 강렬했기에 눈치를 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 하,한판 더 먹을래?" " 예! 라이는 한 판 더 먹고 싶어요!" 한나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라이. 여고생들은 없는 살림에 지갑을 탈탈 털어 훼밀리 사이즈 피자 한 판을 더 시켰다. 그러자 라이는 다시금 피자 조각을 양손에 들고 입에 우겨 넣기 시작했다. 꼬르륵~. 여고생들은 배가 고팠지만 차마 피자에 손을대지 못했다.맛있게 먹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피자에 손을 댄다는 것이 빼앗아 먹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금세 두 판째 피자를 다 먹은 라이는 그제야 포만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여고생들은 반쯤비어버린 지갑을 생각하며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제 배도 채웠으니 소녀의 오빠를 찾아 주어야 할 것이다. 한나 일행은 라이를 데리고 피자 가게를 나왔다. " 오빠랑 어디서 헤어졌니? " 우웅~그게‥‥‥앗! 아이스크림집이에요! 라이는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이 막막 먹고 싶어요!" " ‥‥‥." 이에 하는 수없이 한나 일행은 라이를 데리고, 비싸다고 소문이 자자한 아이스크림 가게 <베스킨라빈스 31>으로 들어갔다.무려 31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구비되어 있어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는 이 아이스크림 가게는 한창 성업 중에 있었다. 라이는 그곳에서 망고탱고,초콜릿무스,쿠키&크림,슈팅스타,블루베리 등등 약 2만원 어치의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었다. 여고생들은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지갑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하지만 라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않았다. ' 어쩜 저렇게 복스럽게 잘 먹을까?' 라이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자 한나 일행은 다시 라이의 오빠 찾기에 나섰다.오늘 놀러 가기는 완전히 글렀다. 시간도 늦은데다가 돈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야 또 만들면 그만이고,돈이야 또 벌면 그만 아닌가?당장 중요한 것은 라이의 오빠를 찾는 일이다. 라이는 한나의 손을 잡고 초옹걸음으로 주위를 돌아 다녔다.한나는 문득 이런 여동생 하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말 너무 귀여워. 당장이라도 집에 데려가고 싶어.' 라이를 계속 보고 있자니 납치해가고픈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한나만이 아이었다. 한나의 친구들도 라이를 보며 납치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들은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고,머리를 쓸어주고,등을 토닥여 주는 등 라이의 귀여운 매력에 푹 빠졌다. " 아앗! 저 머리핀 예뻐요! 라이는 저 머리핀이 너무너무 갖고 싶어요!" 라이가 노점상에서 팔고 잇는 머리핀을 가리키자 여고생들은 또 다시 없는 돈 탈탈 털어 머리핀을 사주었다. " 아앗! 저 목거링 예뻐요!저거 루시아 언니한테 너무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라이는 저 목걸이를 루시아 언니한테 선물해 주고싶어요!" 여고생들은 남은 동전과 신발 깔창 밑에 숨겨 놓았던 비상금까지 몽땅 꺼내서 금은방에 진열되어 있는 목걸이를 사주었다. 이제 그들은 소위 말하는 '개털'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마 어쩌겠는가?저렇게 갖고 싶어 하는데 안 사줄 수가 없지 않은가? 라이는 14k 금목걸이를 손에 넣자 되게 귀엽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 감사합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들 헤헤~." " 아,아니. 뭐 이런 걸 가지고‥‥‥." " 어쩜 인사하는 것도 이렇게 귀엽니?" " 아이~귀여워라~." 여고생들은 라이의 부드럽고 통통한 볼살을 살짝 살짝 꼬집으며 라이의 귀여움을 만끽했다. 그 순간, 라이는 저 멀리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는 라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히로 오빠였다. 라이는 손가락으로 히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 앗!오빠다!" 그러자 히로도 라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 앗!라이다!" " 오빠아~." " 라이야~." 히로와 라이는 헤어진 지 정확히 세 시간 만에 다시 만나 포옹을 했다. 히로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 그래.혼자서 잘 놀았어?" " 예.저 언니들이랑 재밌게 놀았어요." 그들의 대화에 여고생들은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놀다니? 얘 지금 미아 된 거 아니었나? " 저,저기요. 혹시 이 아이 잃어버리신 거 아니었나요?" 한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히로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닌데요.루시아 선물 사러 나왔다가 다리 아프다기에 좀 쉬고 있으라고 놔둔 건데요. 우리 라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미아가 되겠어요?하하하!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우리 라이는 천재랍니다. 아이구!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똑똑한 우리 라이~. 우리 라이는 어쩜 이렇게 잘났을까?" " 다 오빠 닮아서 그래요!" " 아하하하! 그야 당연하지. 라이가 오빠를 안 닮으면 누굴 닮았겠니? 이 오빠한테도 오직 라이밖에 없단다." " 라이도 오빠밖에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히로의 품에 안겨 볼을 부비부비 비비는 라이. 그런 라이를 껴안고 토닥여 주는 히로. 그런 둘의 모습에 여고생들은 뭔가 심하게 잘못됬음을 깨달았다. ' 설마 우리 속은 건가?' 그런 여고생들의 심정을 알 리 없는 히로는 라이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우리 라이 밥은 먹었니?" " 예. 저 언니들이 피자 사줬어요. 맛있었어요!" " 저 언니들이?" " 예. 라이가 막막 피자 먹고 싶다고 하니까,사줬어요.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사줬어요.라이가 막막 먹고 싶다고 하니까 사줬어요." " 그래? 정말 착한 언니들이네." " 그리고 저 언니들이 라이 머리핀도 사줬어요. 라이가 막막 갖고 싶다고 하니까,사줬어요." " 정말?" " 예,오빠." 라이는 자신의 귓가에 꼽힌 머리핀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파란색 머리핀은 라이의 회색 머리카락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 그런데 오빠,루시아 언니 선물은 고르셨어요?" " 하아~ 안타깝지만 아직 못 골랐단다. 루시아한테 뭐가 어울리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있어야지‥‥‥.에휴~." " 걱정하지 마세요,오빠. 라이가 이 목걸이 골라써요.어때요?루시아 언니와 잘 어울릴 것 같죠?" 라이는 주머니에 있던 금목걸이를 히로에게 내밀었다. 히로는 그 목걸이를 자세히 보았다. 줄이 가늘고, 중앙에 마름모 형태의 작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는 확실히 루시아와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았다. " 그런데 너 이거 어디서 났니?설마‥‥‥." 히로가 의심의 눈초리로 보자 라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오빠. 라이는 나쁜 짓 안 했어요." " 그럼 이건 어디서 났는데?" " 저 언니들이 사줬어요." " 저 언니들이?" " 예. 라이가 이 목걸이 루시아 언니한테 어울릴 거라고 막막 그러니까 저 언니들이 사줬어요." " 정말?" " 예. 라이는 착한 엘프니까 거짓말 안 해요." 히로는 금목걸이와 라이의 뒤편에 서 있는 여고생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라이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여고생들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기에 귓속말로 하는 건지 정말 궁금했다. 설마 우리 욕하는 건가? 귓속말이 끝나자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하지마 이내 히로 오빠가 시킨 대로 여고생들을 보며 말했다. " 오빠가 그러는데 라이가 80인치 PDP TV가 갖고 싶을 거래요.막막 갖고 싶을 거래요. 너무너무 갖고 싶을 거래요." " ‥‥‥." " ‥‥‥." 여고생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설마 우리보고 사달라는 건가?' 여고생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순진한 라이를 사주한 남자를 노려보았다.그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담뱃불을 붙이는 척하면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을 빨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라이는 라이는 딴청을 부리는 히로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 근데 PDP TV가 뭐예요?" 끝 아이리스 2부 1권 Story 3 라이의 가출 신은 나를 버렸다. 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어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난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을 믿기엔 내 삶이 너무 불행했기 때문이다. 사실 원리주의적으로 따지자면 난 사탄의 종자나 다름없다. 마법은 이단의 힘이 아니던가? 지금이 중세시대였으면 사탄 추종자로 몰려 화형 당해도 할말 없다. 물론 쉽게 죽어줄 내가 아니지만. 난 삶에 집착이 강한 인간이다. 처음부터 신을 믿지 않았기에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땅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이단인 나에게 조금만이라도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면 내가 이 지경이 될 리는 없었을 것이다. " 후후~."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이 나올 뿐이다. " 으아아! 거기서 왜 라이레얼 이름이 나왔냔 말이다!" 난 머리를 붙잡고 절규했다. 이게 전부 누구 탓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사일런스 지니. 이 인간이 거기서 라이레얼 이름만 언급을 안 했어도 나는 지금쯤 루시아와 키스를 나누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키스는 커녕 손잡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아아~ 나의 사랑은 정말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루시아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인 목걸이랑 반지는 라이레얼에게 빼앗겼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어째서 그게 라이레얼의 손가락에 맞냔 말이다! 루시아와 라이레얼의 손가락 두께가 똑같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건 정말 운명의 장난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후후후~ 신이 날 엿 먹이려고 작정을 했군. 난 하룻밤동안 지나간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길지 않은 삶 동안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 ……."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아아~ 나름대로 착하게 산 인생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많을 줄이야. 나도 누구처럼 15년 동안 독방에 갇혀서 회고록이나 한번 써봐야 하는 건 아닐까? 아무튼 내가 비록 인생을 좀 안 좋게 살긴 했지만 그래도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아를 향한 나의 마음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대로 있으면 난 이 불길에 타 죽을지도 모른다. 아아~ 사랑이란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이었단 말인가? 사랑이 고통인 줄 알았다면 사랑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건데……. 하지만 난 이미 사랑의 유혹에 빠져들었고, 그 유혹에 흠뻑 취한 나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의 사랑뿐. " ………." 음음, 그동안 시집을 열심히 읽어둔 보람이 있는지 감성이 많이 발달했다.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아니, 대다수 사람들이 모르겠지만 알고 보면 나도 참 부드러운 남자다. 세상에 나만큼 부드러운 남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저요! 저요! 아이씨! 어떤 놈이 손을 들어? 당장 안 내려? 흠흠, 아무튼 난 이렇게 좋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 으음, 대대적으로 텔레비전 광고라도 한번 해야 하나? 그래도 공중파 한번 타면 나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질지도……. 그런데 공중파 광고 하려면 얼마나 들지? 적어도 억대 아닌가? 좀 처렴하게 하는 방법은 없나?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방문이 열렸다. 아니, 어떤 놈이 노크도 안하고 문을 열어? 이런 예의 없는 놈을 봤나! 내 들어오는 즉시 당장 뒤통수를 후려 갈겨……. " 앗! 라이야!" " 오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딸이자 여동생인 라이였다. 라이는 두 팔을 벌리고 아장아장 걸어와 내 품에 쏘옥 안겼다. 난 라이를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아아~ 이 감촉 너무 좋아. 아무리 날씨가 덥다한들 라이를 안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 부드러운 살결이라니! 난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분명 말하는데 이건 라이를 괴롭히는 게 아니다. 그 증거로 라이도 좋아하지 않는가? " 헤헤." 해맑게 웃는 라이를 보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 라이야, 오빠가 비행기 태워줄까?" " 정말요? 라이는 비행기 타는 거 너무너무 좋아해요. 비행기 막막 타고 싶어요." 라이가 이렇게까지 좋아하다니! 난 라이를 위해 업그레이드(?)된 비행기를 태워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과거에 라이를 비행기 태워줄 때는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고 빙글빙글 돌리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계속 하다보면 약발이 떨어지는 법. 이젠 아무리 빨리 돌려줘도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 이젠 업그레이드 된 비행기를 선보일 때가 된 거야! " 라이야, 이리로 와봐." 난 라이를 안고 두 팔과 다리를 올렸다. 그러자 라이의 몸은 살짝 공중에 떴다. " 그럼 이륙합니다. 목적지는 일본." 난 손과 다리를 앞뒤, 위아래로 움직였다. " 꺄아아~ 꺄르르~." 너무 좋아서 비명과 웃음을 동시에 지르는 라이. 정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라이가 기뻐하니까 나도 기쁘다. 라이의 행복은 나의 행복~. 그런데 너무 힘들군. 이 자세 생각보다 많은 근력을 필요로 하는데. " 라이야, 이제 착륙할 시간이야." " 안 돼요, 오빠. 라이는 착륙 안할 거예요. 꺄하하~." " ……." 니가 착륙 안하면 어쩔 거니? 비행기 조종하는 사람은 난데. 난 라이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뭐, 아빠라는 게 원래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존재 아니던가? 그렇다 하더라도 힘들어서 더는 못 버티겠군. 결국 버티지 못한 비행기는 비상 착륙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난 그대로 뻗었다. 라이는 뻗어있는 나를 흔들며 말했다. " 좀더 태워줘요, 오빠." " 재미있었니, 라이야?" " 예.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라이는 오빠가 비행기 태워줄 때가 제일 행복해요. 그러니까 또 태워주세요! 이번엔 미국까지요!" " ……안타깝지만 요즘 미국은 테러 경보 때문에 입국이 힘들단다." " 그럼 유럽이요!" " ……정말 안타깝지만 요즘 유가가 올라서 거기까지 갈 연료가 없단다. 항의하고 싶으면 OPEC(석유 수출국 기구)에 항의 하려무나." " 그럼 항의하러 가게 사우디아라비아까지 태워주세요!" " ……." 라이는 이 세계에 온 지 1개월도 안 돼 이 세계의 역사, 문화, 국제 정세 등등 거의 모든 지식을 습득했다. 말도 안 된다고? 훗! 그건 우리 라이를 우습게 보는 말이다. 라이가 누군가? 8클래스의 마법사다. 다시 말해 천재 소녀라는 거다. 훗~ 이게 다 날 닮아서 그런 거다. 아아~ 역시 딸은 잘 키우고 볼 일이야. " 비행기 태워주세요오~." 라이에게 있어서 비행기란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한번 맛들기 시작하면 강도를 점점 높여 계속 맛 봐야 하지. 그 때문에 죽어나는 것은 나다. " 라이야, 오빠 다 죽어가는 거 안 보이니?" " 그래도 라이는 비행기 타고 싶단 말이에요!" " ……." 흑~ 오빠야 죽든 말든 비행기를 타고 싶다니. 라이는 어째서 이렇게 이기적인 걸까? 이럴 때는 야단 쳐야 하는데……. 옛날 같았으면 주저 없이 야단을 쳤을 것이다. 물론 나는 말로만 야단치는 그럼 무른 부모는 아니다. 야단이라 함은 당연히 체별이 동반돼야 할 것이다. 손바닥을 때리다든가, 엉덩이를 때리다든가하는……. 하지만 이 어린 것이 어디 때릴 데가 있어서 체벌을 한단 말인가? 아무리 살펴봐도 도무지 때릴만한 곳이 보이지가 않는다.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귀여워서 차마 손을 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아아~ 이래서 애 교육이 제대로 되겠나? 하지만 우리 라이는 워낙 착하기 때문에 야단 같은 것은 안 쳐도 상관없다(대부분의 부모가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 자식은 너무 착해서 싸움 같은 거 안하고 공부만 하는 줄 안다. 그런 애들 중에 일진이니 뭐니 하는 애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결국 라이의 요구에 못 이긴 나는 죽을힘을 다해 라이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날라 주었다. 라이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비행기는 무리한 비행을 강행한 나머지 완전히 고장 나고 말았다. 헉! 팔이 부러진 것 같아! 라이랑 실컷 놀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을 생각해보니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 후우~." 빨리 루시아와 냉전 사태를 끝내야 우리 집에도 평화가 찾아 올텐데. 이대로 가다간 한숨 때문에 방구석만 꺼지겠군. " 고민 있어요, 오빠?" " 아니." " 그러지 말고 말해 보세요, 오빠. 라이가 들어 줄게요." " 오빠는 괜찮단다, 라이야." " 루시아 언니 때문이죠? 라이는 다 알아요." " ……." 헉! 그걸 어떻게! 하긴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모르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라이가 정확히 핵심을 짚어내니 나로서는 놀랄 따름이다. " 라이가 상담해줄게요." " 응? 라이가 상담을 해주겠다고?" " 예. 라이는 인생 경험이 많잖아요." " ……." 그렇다. 라이가 비록 이렇게 어리게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 나이는 700살이 넘었다. 내 몇 십 배나 되는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굳이 따지자면 35배 정도? 아무튼 그렇게 많은 인생을 경험한 라이임으로 어쩌면 나의 고민에 답을 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라이한테 속 시원하게 털어 놓고 상담을 받는 거야. " 우리 피자 먹으며 상담해요! 라이는 피자 먹고 싶어요! 막막 먹고 싶어요! 피자~! 피자~!" " ……." 라이에게 상담하려 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진다. 어쨋든 나는 라이를 위해 피자를 시켜 주었다. 또 다시 고구마 두 줄짜리로. 으음, 고구마 두 줄짜리는 비싼데……. 하지만 라이가 고구마 두 줄짜리를 좋아하니 어쩔 수 없다. 기왕 사주는 거 애가 좋아하는 걸로 사줘야 할 것 아닌가? 피자가 도착하자 우리는 방으로 가져와서 먹었다. 라이 한 입, 나 한 입. " 라이야, 아~ 해봐." " 아~." 쏘옥! " 맛있니?" 우물우물! " 예. 너무너무 맛있어요!" " 그래? 그럼 오빠도 먹여 줄래?" " 예. 오빠도 아~ 하세요." " 아~."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피자 한 판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으음, 배가 부르니 졸립군. 난 그대로 침대에 자빠져 누웠다. 라이도 졸린지 내 팔을 베고 눈을 감았다. 내가 토닥거려주자 라이는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 힘내세요, 오빠. 라이는 언제나 오빠 편이니까요." " 그래." 몇 번 눈을 깜쒼타??라이는 이내 잠이 들었다. 잠든 라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였다. 난 조심스럽게 팔을 빼고 대신 베개를 놓아 주었따. 라이는 깊게 잠들었는지 쌔근쌔근 숨고리만 내뱉었다. 난 라이가 더워할까 봐 선풍기까지 틀어주고 방을 나왔다. 집 안은 조용했다. 모두 다 가게로 간 건가? 라이레얼은 나갔나? 설마 집에 있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라이레얼은 집 안에 없었다. 아무래도 카르가 데리고 나간 것 같았다. 아아~ 라이레얼을 생각하니 어제의 악몽이 같이 떠오른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꼴을 당해야 하는 건지……. 내가 충격 때문에 비틀거리며 벽을 짚는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루시아? 라이레얼? 들어온 사람은 다른 아닌……. " 너 이 자식! 감히 여기에 다시 고개를 들이 밀었다 이거지? 너 오늘 나하테 죽었어! 한동안 봉인되었던 나의 필살 기술 빅장 40단 콤보를 보여주마!" 내가 살기를 뿜어내며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지니는 여자 접대용으로 쓰이는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며 혈관이 팽창했다. 그리고 제 갈길을 찾지 못한 피는 팽창된 혈관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지니의 웃음은 나의 복장을 터트리고 염장을 지를만한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헉! 몸 상태가 이상해! 설마 주화입마에 걸린 건가? 사람이 한계치 이상의 분노를 느끼게 되면 뇌가 타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뇌가 타버리면 어떻게 되냐고? 그야 둘 중 하나지. 죽거나, 미치거나. 지금 난 그 정도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그와 비견될 정도로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저놈이 설마 이걸 노리고……. " 크헉! 내 네놈을 없애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           *          *          * " 으으으~." 눈을 떠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에 무언가를 씌어 놓은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 루시아와 라이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설마 난 죽은 건가? 믿었던 가신이자 친구의 배신으로 죽음을 당하다니, 내가 무슨 카이사르오 아니고……. "괜찮으십니까,아이언스 공작님?" "……." 헉! 이 목소리는? 그제야 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난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누 워있었다. 그리고 내 이마에는 차가운 물수건이 올려져 있엇다. 이렇게까지 극진하게 날 간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 였다. 게다가 자기 무릎까지 빌려주다니. "……." 헉! 내가 남자의 무릎을 베고 눕다니! 이런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놈!" "흥분하지 마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공작님께서는 지금 안정 을 취하셔야 합니다." "닥쳐! 내가 너 Eans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 너 이자식 정체가 뭐야? 불만 있으면 말로 할 것이지 왜 자꾸 훼방을 놓는 거 야?" " 죄송합니다. 전 오직 아이언스 공작님을 향한 충성심으 로……." " 아직도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문답무용(問答無用)! 받아라 빅 장 40단 콤보!" 결국 참지못한 나는 지니에게 빅장을 난사했다. 지니는 열심히 방어했지만 감히 나를 당해낼 수는 없었는지 10단 콤보째에서 쓰 러졌다. 난 나머지 30단 콤보도 쓰려다가 그만 두었다. 쓰러진 자를 공격하는 것은 기사의 도리가 아니지. " 너 앞으로 조심해. 내가 지켜보고 있겠어. 그럼 난 루시아한테 용서나 빌러 가야지~." 차마 지니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던 나는 황급히 집을 나와 가게로 향했다. * * * * 히로가 나가자마자 바닥에 쓰러져있던 지니는 옷을 털며 몸을 일 으켰다. 빅장을 맞은 것 치고는 꽤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는 잘 방어했다기보다는 히로가 주화입마(?)에 걸려 빅장의 위 력이 많이 감소된 덕분이다. 빅장은 제대로 맞으면 뼈와 살이 분리 되는 고통을 겪게 되는 필살기다. 원래 대(對)드래곤용으로 만들어 진 필살기가 아니던가? 지니는 구겨진 옷을 바로하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크 게 탄식했다. " 내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이 한몸 다 바쳐 도와드리려 했으 나, 나의 도움이 오히려 해가 되었구나! 이제 무슨 면목으로 아이언 스 공작님을 뵙는단 말인가!" 면목 없으면 집에 안 들어오면 될 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이 런 말을 왜 하는 건지 정말 모를 일이다. 아무튼 지니는 두번에 걸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크게 상심 했다. 둘의 사이를 붙여 놓는다는 것이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지 않 았던가? " 이번에도 아이언스 공작님을 도와주고 싶으나, 누를 끼치지 않 을까 두렵구나!" 이말을 히로가 들었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그래. 넌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야.' 그래서 지니는 가만히 있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핸드폰 벨소리 가 울려 퍼졌다. 지니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놀랍게도 지니의 핸드폰은 MP3 기능과 디지털 카메라 기능, 네비게이션 기능 등등 이 전부 들어있는 최신형 핸드폰이었다. 가격만도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는……그야말로 럭셔리 핸드폰. 지니는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핸드폰을 산 걸까? 물론 이 핸드폰은 지니가 돈 내서 산 게 아니다. 인형 가게에서 월급도 안 받고 무료 봉사하는데 돈이 어디 있겠는가?당연히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 선물로 준 거다. 지니는 돈 한 푼 없어도 삶을 사는 데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 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니는 얼굴만 가지고도 평생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지니에게 용돈을 주지 못해 안달 난 여인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 다. 그 여인들에게 한 달씩만 얹혀살아도 족히 100년은 지낼 수 있 을 것이다. 지니는 핸드폰을 받았다. 상대는 당연히 여자였다. 통화를 마친 지니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자 잠시 후 초인종이 울 렸다. 문을 열자 한 여인이 들어왔다. 20 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지니는 그녀를 향 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 들어오시지요." " 예." 히로가 여자 문제로 고통 받는 사이 지니는 집에 여자를 끌어들 였다. 만일 이 사실을 히로가 알았다면 다시 한번 주화입마에 걸렸 을 것이다. 아아~ 이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 * * * * 가게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다행히 저번처럼 선생-학부모 합동 작전이 벌어진다거나 하는 일 없이 가게 주변 은 조용했다. 난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 근처 꽃가게에 들려서 꽃을 사기로 했다. " 그래! 여자 마음을 푸는 데는 꽃이 제일 아니겠어?" " 아닌데요. 누가 요즘 꽃 같은거 받는다 그래요?" " 응?넌 누구니?" 나에게 말은 건 사람은 어린 소녀였다. 때 묻은 손으로 코를 후비 고 있는. 으음, 더럽군. 우리 라이는 코 같은거 안 후비는데. 대신 손가락 을 빠는 나쁜 버릇이 있지. 쪽쪽! " 헉쓰!" 난 놀라서 소녀에게서 한걸음 떨어졋다. 방금까지 코를 후비던 손을 입에 넣고 쪽쪽 빨다니. 너무나도 큰 문화적 충격에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 그거 맛있니?" " 네!"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소녀의 모습에 난 내 코딱지라도 파서 입에 넣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뭐, 자기가 맛있어서 먹는다는데 내가 할말이 있을 리 없지. 남한 테 피해주는 일은 아니니까(시각적으로는 좀 그렇군). " 그런데 넌 누구니?" " 전 지나가던 귀여운 소녀에요." " 푸훗~."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코딱지 먹는 소녀는 귀엽게 생 기긴 했다. 하지만 우리 라이에 비한다면 태양 앞에 반딧불이오,38 광땡 앞에 38따라지다. " 그런데 이 오빠한테 말을 건 이유가 뭐니? 헉! 설마 어린 나이에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이 오빠한테 반한 거니? 으음, 이거 곤란한 데. 이 오빠는 여자가 너무 많아 더 이상의 여자는 필요 없단다." " 뭔 헛소리에요?" " 애써 아닌 척해도 소용없단다. 뭐, 나정도 외모라면 반하는 게 당연하지." " 본인의 외모를 지니 오빠랑 착각하는거 아니에요?" " ……." 뭐야? 여기서 지니 얘기가 왜 나와? 지니를 떠올리자 다시금 나의 몸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으윽, 아 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어! 그냥 독하게 마음먹고 제거했어야 했는데. " 아무튼 요즘 여자들은 꽃 같은거 안 좋아해요." " 응?그럼 뭘 좋아하는데?" " 보석이나 귀금속 종류요. 비싸면 비쌀수록 약발이 세요." " 보석? 귀금속?" 하긴, 그런 거 싫어하는 여자는 없지.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잖 아. 지니가 주었던 다이아몬드 반지랑 목걸이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라이레얼이 가져갔으니. " 하지만 보석이나 귀금속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어요." " 응?그게 뭔데?" " 현금이요. 빳빳한 1만 원짜리 지폐를 007가방에 차곡차곡 넣으 면 4천만원 정도 되거든요. 그걸 선물하면 돼요." " ……." " 진짜에요. 그걸로도 약발이 안 먹히면 여행 가방에 담아 보세 요. 차곡차곡 담으면 5억 이상 들어가요." 코딱지 먹는 소녀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5억이란 액수를 아주 가 볍게 말해다. 참고로 내가 저 나이 때는 500원만 있어도 행복했다. 그런데 뭐? 여행 가방에 차곡차곡 담으면 5억이 들어가? 그런 건 어디서 배워 가지고……. "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니?" " 오빠가 아직 뭘 모르시는군요. 현대는 자본주의 사회에요. 돈 이 최고의 선(善)이고, 돈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요. 오빠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도 못 들어보셨어요? 돈이면 뭐든 용서가 되는 세상이에요. 돈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심한 죄를 저질러도 다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돈 없는 사람들은 빵 하나 훔쳐도 감방 가지요." " ……." 헉! 이 어린 나이에 한국 사회를 정확히 궤뚫고 있다니! 난 코딱지 먹는 소녀의 논리정연한 말에 반박할 말을 찾을수가 없었다. 참고로 집행유예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의 형이 선 고된 범죄자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말 한다. 그 기간 동안을 사고 없이 넘기게 되면 형의 선고 효력이 없 어진다. 즉, 다시 말해 집행유예를 선고 받으면 감옥에 안 가게 되는 것 이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무슨죄를 저지른 누가 형 몇년에 집행유예 몇 년을 선고 받았다고 나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그중에 는 가벼운 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있지만,용서가 안 되는 큰 죄를 저지를 사람들도 많다. 그럼 큰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어째서 감옥에 안 가고 집행유예 를 선고 받는 것인가? 그야 간단하다. 돈이 많기 때문이다. 비싼 변호사 쓰고, 피해자에 게 돈 듬뿍 건네 줘서 합의 보고, 여기저기에 뇌물 좀 뿌리면 만사 OK 다. 법이라는데 원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 겠나? " 으음." 이렇게 생각하니 코딱지 먹는 소녀의 말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여행 가방에 5억 담아서 건네주면 어떤 여자가 용서를 안 해주겠어? " 그런데 5억 가지고 될까나?" 내가 중얼거리자 코딱지 먹는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 글쎄요. 좀 힘들 거예요. 사실 요즘 5억은 돈으로 치기나 하나 요? 서울의 평균 분양가가 평당 2천만원 이상이에요. 강남은 그렇 다 치고, 강북만 하더라도 평당 1천2백만 원 정도는 되지요. 그럼 24 평짜리 아파트 하나 장만하는데도 3억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와 요. 뭐, 외곽 지역은 그래도 2억 정도지만요. 그러니 5억이라도 해 봐야 집 하나 장만하고 벤츠나 BMW 한 대 뽑고 나면 끝이에요. 요 즘 세상에 5억은 돈도 아니죠." " 으음." 지금 내가 살고있는 집의 가격만 해도 5억이다. 살때는 3억 주 고 샀는데, 1년 사이에 2억이나 오른 것이다. 참고로 집 명의는 내 명의로 되어 있지만, 내돈 주고 산 것은 아니다. 크로니스 레어에 서 가져온 보석들을 장물로 넘겨서 마련한 돈으로 산거다. 그나저나 1년 사이에 집값이 70퍼센트 정도 뛰다니, 이럴 줄 알 았으면 몇 채 더 사놓을거 그랬나? 아니야. 안 그래도 국가 경제가 개판인데 나까지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 수는 없지. 내 집 마련이 꿈인 서민들을 생각해야 할 것 아 냐? 그리고……. " 요즘 정부의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으로 집값 많이 떨어지지 않 았나?" " 에이~ 떨어지긴 뭘 떨어져요? 오른 거에 비하면 택도 없죠. 게 다가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분양 원가 공개 반대를 천 명하는 나라에요. 정치인들과 주공 관계자들이 건설업체에서 뇌물 받아먹고 각종 편의를 봐주고, 건설 업체들은 분양가를 꼐속 올려 서민들 등골 빼먹으려고 하는데 집값이 떨어질 리 있겠어요?" " 듣고 보니 참 심각하구나. 그래도 꽤 많이 덜어진 것 같은 데……." " 강북 변두리에 있는 24평 아파트가 최소 2억이에요. 이 정도 금 액을 마련하려면 봉급자생활자들이 2,30 년은 벼 빠지게 벌어서 먹을 거 안 먹고,입을 거 안 입고 저축해야 해요. 나이 30에 회사에 입사 해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대출금 갚다보면 어느새 은퇴할 나이가 되지요. 이때 은퇴해서 연금이나 나오면 다행이지만 국민연금 고 갈돼서 못 받게 되면 그냥 굶어죽는 거예요. 그렇게 죽고 나면 평 생에 걸쳐 간신히 마련한 집은 세금으로 국가가 다시 거두어 가는 거죠. 어때요? 재밌죠?" " 별로 재미는 없구나." 난 벌써 내집이 있기 때문에 서민들이 내 집 마련으로 겪는 고통 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 부모님이 집 장만할 때만해도 집값이 지금처럼 개판은 아니었거든. " 그래서 결론이 뭐니?" "5 억 가지고는 택도 없으니까 최소 10억은 줘야 여자가 감동한다 는 거죠." " ……." 뭐냐? 그 어이없는 결론은? 물론 루시아에게는 10억이 아니라 100억을 줘도 아깝지가 않다. 문제는 내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다는 거지. 루시아가 원한다면 집 이랑 가게 명의도 다 넘겨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시아가 기뻐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꽃이나 사러 가자. 내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코딱지 먹는 소녀가 내 옷을 붙잡았다. 그것도 아까까지 열심히 코를 후비던 손으로. " 왜그러니?" " 상담해줬으니 상담비를 주셔야죠." " 응?상담비?" "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법이에요." " ……." 어린 소녀가 어쩌다가 이렇게 돈만 밝히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 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잘못이 아닐까? 짧은 대화였지만 나름대로 얻은 것이 많았기에 난 소녀에게 돈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지갑을 뒤져보니 1천원 짜리가 없다. 그래서 하는수 없이 1만원짜리를 주었다. 그러자 소녀가 말햇다. " 요즘 1만원 가지고 뭘 할 수 있겠어요? 이 책값만 해도 8천원인 데." " ……." 하는 수 없이 1만원 더 줬다. 코딱지 먹는 소녀는 2만원을 받고도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다행히 더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소녀와 헤어지고 꽃집에 들어가서야 난 소녀가 한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뭔 꽃값이 이렇게 비싸? 꽃에 금칠이라도 했냐! 물가가 올라도 너무 많이 올랐군. 그래도 아쉬운 사람은 나였기에 난 거금을 내고 빨간 장미를 샀 다. 그러고 보니 오늘 수요일이다. 왜 이런말도 있지 않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 거기 안개꽃도 좀 넣어주세요." " 네. 5천원 추가입니다." " ……." 비싸다. " 예쁘게 포장해 주세요." " 예. 포장비 7천원 입니다." " ……." 진짜 비싸다. 아무튼 거금 3만2천원을 투자해서 풍성한 장미 꽃다발을 구매할 수 있었다. 킁킁! 냄새좋다.장미 꽃의 향긋한 냄새가 나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는 것만 같다. 이런 꽃다발을 받게 되면 어떤 여자라도 기뻐하겟지? 난 꽃다발을 안ㄱ 가게로 향했다. 지금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인 데 남자가 대낮에 장미꽃 안고 걸어가는 것…… 상당한 용기가 필 요한 일이다. 주위 사람들이 자꾸 나만 쳐다보는것 같다. 그래도 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걸었다. 그리고 어느새 가게에 도착.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게에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설마 여기로 피서 온 건가? 우리 가게는 에어콘을 빵빵하게 틀기 때문에 피서지로도 쓸만하다. 난 조심스럽게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다. " 어서오세요."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며 손님을 맞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인디. 인디는 휜색 원피스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 길게 늘 어뜨린 모습이엇다. 그야말로 청초하고 단아한 모습. 마치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 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이 녀석이 남자라는 거겠지. 대체 남자 자식이 뭐 때문에 치마를 입고 다니는 건지……. " 어, 그래." " 아! 히로님이시군요." 반갑다는 듯이 활짝 웃는 인디. 그러면서 은근슬쩍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하긴 잘못한게 있으니……. 난 활짝웃으며 인디를 보았다. " 왜 도망치니? 너 뭐 켕기는 거 있니?" " 아, 아니요." " 그런데 왜 도망치니? 후후~." " 도, 도망이라뇨? 저, 저는……." 난 이를 갈았다. 생각해보니 애초의 원인은 이놈이었다. 이놈이 내가 나이트클럽에 간 사실을 불지만 않았더라도 일이 이 지경까 지 되지는 않았다. 남자끼리 한 약속을 이따위로 저버리다니! 죄를 지엇으면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하는법! 하지만 이 녀석은 아 직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 려줘야겠지? 지금 내가 여기에 서 있고, 내 앞에 인디가 서 있다는것.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복수를 허락했다고 밖에는 볼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럼으로 나의 복수는 정당하다. " 너 이리로 와 바. 너 나랑 으슥한 곳에 가서 조용히 얘기 좀 하자." " 지,지금 일이 바빠서……." " 됐어. 내가 따라오라면 따라 오는 거야. 뭔 잔말이 그렇게 많 아?" " 하, 하지만……." " 남자끼리 한 약속을 어긴 것은 원래 죽음으로 다스려야 하지 만……." " 헉!" " 내 일루니아 여사님을 봐서 손가락 하나 자르는 정도로 끝내 주 도록 하지." " 헉!" " 뭘 그렇게 놀래? 남자끼리 한 약속을 어겼을 때 이 정도는 각오 하지 않았니?" " 죄. 죄송해요 히로님. 저,저는……흑흑……."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인디. 순간 주위의 시선이 안 좋아진다. 난 일단 인디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달래 주었다. " 야 울지마. 뭘 잘못했다고 울어? 당장 안그쳐? 죽고싶냐?" " 흑흑." " 아, 이자식이 더럽게 말을 안듣네. 너 좀 따라와라." 내가 끌고 가려하자 인디는 끌려가면 죽음이라는 것을 눈치 챘는 지 완강하게 버텼다. " 흑흑. 제발 용서해 주세요." " 누가 널 죽인데? 그냥 난 가볍게 손가락 하나만 만질 뿐이야. 뭘 그렇게 겁내고 그러니? 마치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 으아아앙~." " 무슨 짓이죠? 당장 그 손 놓지 못해요?" 인디가 위험에 처하자 기사처럼 나타나는 일루니아 여사님. 난 하는수 없이 인드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인디는 후다닥 달려가 일 루니아 여사님의 품에 안겼다. " 흑흑……무서웠어요, 일루니아님." " 괜찮아요, 안디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 예. 훌쩍~." 아아~ 깨가 쏟아진다. 나도 루시아 품에 안겨서 울면 얼마나 행 복할까? 어째서 나만 혼자서 베개를 글어안고 울어야 하는 거지? 혹시 나는 책박의 누군가(작가?)에게 굉장히 미움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를 팍 째려보았다. 난 깜짝놀라 고개를 반 대편으로 휙 돌렸다. " 다시 한번 인디님을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 ……." 건드려? 어째 어감이 이상하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은 진심이었다. 그 증거로 눈동자가 활 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으음, 바라보고 있기가 무섭군. 저게 바로 사랑의 힘? 참고로 난 사랑의 힘 같은 것인 믿지 않는 주의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믿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꽃까지 사온 거고. " 흠흠, 루시아는 어디에 있나요?" " 저,저기……루시아님은 2층에……." 인디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난 염장질부부를 놔두고 2층으로 올라갔다. 루시아는 2층 찻집에 앉아 있었다. 가녀린 손을 뻗어 찻잔의 손잡이를 잡는다. 찻잔을 들어올린다. 살짝 기울인다. 차가 붉은 입술로 흘러들어간다. 일련의 동작들이 기품있고 우아했다. 마치 고귀함이라는 단어 는 오직 그녀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찻집 안의 남자는 물론 여자들까지도 그런 루시아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난 루시아를 보며 다시 한번 사랑이란 감정을 느꼈다. 루시아를 볼 때마다 사랑이란 감정은 계속 새로워지는 느 낌이다. 난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무감정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난 루시아의 앞에 서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것은 너를 향한 나의 마음 영원한 사랑의 약속.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찻값을 계산한 후 밖 으로 나갔다……? " 킥킥, 저남자 뭐야?" " 푸훗~ 되게 웃긴다." " 호호~ 완전 개그네." " ……." 주위에서 들려오는 날 비웃는 소리. 난 한순간에 바보가 되어 버 렸다. 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아를 쫓아갔다. " 루시아!" 내가 루시아를 붙잡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누구세요?" " 응?" " 누구신데 절 잡으시는 거예요?" " 무, 무슨 말이야? 나잖아. 히로. 박영웅." " 히로가 누구죠?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이만." 루시아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갈 길을 갔다. 설 마 기억상실증……일 리가 없잖아! 지금 루시아는 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고 해서 물러설 내가 아니다. " 내 말을 들어줘, 루시아. 어제 일은 정말 실수 였어. 그때 지니가 라이레얼의 이름을 꺼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 아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누구신데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 ……." 사랑하는 여자에게 무시를 당해 보았는가? 진짜 미칠 것 같은 기 분이다. " 제발 이러지 마, 루시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라 는 것을 너도 잘 알잖아." " 전 잘 모르겠는 데요. 그런데 저한테 그런말 하셔도 되는 거예요? 전에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봤을 때는 라이레얼이라는 여자한테 영 원한 사랑을 맹세햇잖아요. 그여자한테 반지랑 목걸이 까지 줬고." " 그, 그건 실수라니까! 그게 다 지니 때문에……." " 알았으니까 비켜 주시겠어요? 일 하는데 방해 되거든요."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휙 스쳐 지나갔다. 오해의 골이 너 무 깊어서 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수 없어! " 그럼 제발 이거라도 받아줘. 널 위해 산거란 말이야." " 아아~ 그래요?" 전혀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루시아. 결국 3만2천원이나 주고 산 장미꽃다발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괘, 괜찮으세요?" 문앞에 서 있는 인디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 ……." " 이거 너 가져라." " 이, 이게 뭐예요?" " 보고도 모르냐? 장미 꽃다발이다. 내가 3만2천원주고 산 건데 특별히 너한테 반값에 줄게. 1만6천원은 나중에 니 월급에서 청구 할테니 그렇게 알아라. " 예, 예?" " 날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생각한다면 닥치고 받아." " 아, 예." 난 인디에게 억지로 꽃다발을 넘기고 가게를 나왔다. " 히,힘내세요, 히로님. 저도 응원할게요!" 풀이 죽은 내 모습이 안되 보였는지 인디가 뒤에서 소리쳤다. 인디에게도 동정받는 내 신세라니……. 인디의 응원이 고맙기는 하지만 별로 기운이 나지 않는다. " 하아~." * * * * " 오빠, 잘 됐어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라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렇게 물었 다. 난 고개를 저었다. " 잘 되긴 개뿔이…… 하아~." 라이는 풀 죽어있는 나를 안아서 위로해주었다. 토닥토닥! " 힘내세요, 오빠. 오빠 곁에는 라이가 있잖아요." " ……그래. 이 오바 곁에는 라이가 있지. 이 오빠는 다른 거 다 필요 없단다. 오직 라이만 옆에 있어주면 돼 흑~ 그런데 왜 눈물 이 나는 걸까? 어흐흐흑~ 루시아~ 우에에엥~루시아가 보고파 ~."( 헉! 라이울음소리..-베낌이의 한줄..ㅡㅡ;) " 우, 울지마세요, 오빠. 오빠가 울면…… 흑~ 라이도 슬퍼진단 말이에요. 우에에엥~ 오빠아~" " 우에에엥~ 라이야아~" 나와 라이는 서로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난 내품에 안겨 우는 라이를 보며 다짐했다. 그래, 라이를 결손 가정의 아이로 만들 수는 없어! 난 라이를 반 드시 엄마 아빠 있는 행복한 가정에서 키우고 말테야! 난 내 눈물을 닦고, 라이의 눈물도 닦아 주었다. 하지만 라이의 회색 눈동자에 가득 고인 눈물을 계속해서 흘러 내렸다. " 라이야, 이 오빠를 도와주지 않으련? 라이가 도와준다면 루시아 와 화해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하자 라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오빠와 언니가 화해할 수만 있다면 라이는 뭐든 하겠어요." 굳은 의지로 반짝 빛나는 라이의 눈동자. 난 너무 감동한 나머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 우에에엥~ 라이야아~" " 우에에엥~ 오빠아아~" 기나긴 신파극 끝에 나와 라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내가 루시아 와의 화해를 위해 생각한 것은 서프라이즈 파티였다. 원래 여자들은 이벤트에 약하고 하지 않던가? 내가 루시아를 위해 깜짝 파티를 열어준다면 분명 루시아도 감동해서 날 용서해 줄 것이다. 최소한 라이의 얼굴을 봐서라도 못 이긴척 용서해 주겠 지. 라이를 결손 가정의 아이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은 루시아도 마 찬가지일 테니. " 오빠 이건 어디다 놔요?" " 일단 식탁 위에 올려 놔." " 헤헤~ 라이 케이크 빨리 먹고 싶어요~." " 그래, 그래. 금방 먹게 해줄게." " 피자는 안시켜요?" " 응. 그건 나중에 시켜줄게." " 헤헤~." " …… ." 정말 너무 좋아한다. 누가 보면 라이를 위한 깜작 파티인줄 알 겠군. 케이크랑 과자등은 사서 준비했지만 그 외의 음식들은 직접 만 들어야한다. 내가 만들수 없는 노릇인 관계로 요리사에게 연락 을 했다. " 부르셨나요?" 내가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인디였다. 인디의 취미와 특기는 요 리 아니겠는가?" " 니가 날 좀 도와줘야겠다." " 예. 제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게요." " 그래. 이번 일만 성공적으로 잘 끝난다면 내 너를 특별히 사면 해주도록 하마." " …… 예." 인디가 낌으로써 깜짝 파티 준비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인디 눈 주문하는 요리는 뭐든 척척 만들어 내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남자와 결혼한 일루니아 여사님은 정말로 행 복한 여자다. 그러고 보면 일루니아 여사님은 요리와 가사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커리어 우면이다. 반면 인디는 요리와 가사에 두각을 나타내 는 가정 관리사고. 이 둘이 결혼을 한것은 정말이지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대략 두시간정도 걸친 노력끝에 깜작파티는 완벽하게 준비되 었다. " 하아~ '끝났다." " 그럼 이제 루시아님만 부르면 되겠네요." " 그렇지. 지금은 가게 문 닫기 조금 이른 시간. 하지만 가게가 끝나면 사람 들이 몰려올 테니 그 전에 파티를 해야 한다. 그래서 난 라이에게 부탁했다. 라이는 내 부탁대로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 저 라이에요!" " 어머, 우리 라이가 어쩐일로 전화를 걸었니?" " 헤헤~ 언니가 보고 싶어서요." " 응. 언니도 라이가 많이 보고 싶어." " 정말요? 그럼 오늘 빨리 들어와 주세요. 라이는 언니가 너무너 무 보고 싶어요. 막막 보고 싶어요." " 그래? 알았어. 그럼 언니가 바로 집에 들어갈게. 조금만 기다리 렴, 라이야." " 예, 언니." 통화가 끝나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나한테는 그렇 게 차갑게 대한 것과는 반대로 라이에게는 굉장히 사근사근하다. 귀여워 어쩔줄을 몰라하는 말투다. 라이가 보고 싶다고 하니 재깍 달려온다고 하는 것에서부터 알수 있지 않은가? 이럴 땐 라이가 부러워진다. 이젠 라이한테서가지 질투를 느껴 야 하다니. 나도 참 많이 타락했군. " 불 그고 있다가 루시아가 들어오면 불을 켜며 폭죽을터트리는 거야. 알았지?" " 예, 오빠." " 예, 히로님." 라이와 인디는 머리에 파티용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둘 다 너 무 잘 어울린다. " 라이 케이크 빨리 먹고 싶어요." " 조금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에 제가 잘라 드릴게요. " 인디 오빠도 케이크 좋아해요?" " 물론이에요." 인디는 라이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엘프 마을을 뒤쳐나 온 어린 라이를 돌봐준 게 바로 인디 아니던가? 인디 밑에서 자랐 기에 지금 라이가 8클래서 마법사가 될 수 있었지. 드래곤이 마법 을 가르친 것이니, 지금식으로 따지면 고액과외를 받은 셈이다. 으음, 둘이 너무 잘 어울려 보이니 괜히 열 받는다. 루시아랑 자 꾸 트러블이 생기면 라이의 양육권을 인디한테 빼앗기는거 아냐? 그러고보면 저놈이 요즘 호시탐탐 라이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 데…… . 난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응? 어째서 꽃다발에서 한 송이로 줄었냐고? 그야 파티 준비하느라 자금이 다 떨어졌기 때문 이지. 그리고 잘 생각해보니 꽃다발은 루시아가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냥 한 송이만 주기로 했다. 한송이 정도라면 루 시아도 부담 갖지 않고 받아 주겠지. 띵동! 띵동! 벨소리가 울렸다. 루시아가 온 것이다. " 불꺼. 계획대로 진행하는거 잊지마. 문제가 생길 시에는 목을 매달아 버리겠어!" " 거, 걱정하지마세요 히로님." 라이가 불을 끄자 인디가 문을 열었다. 어둠속에서 한 여인이 걸 어 들어왔다. 설마 들어온 여인이 루시아가 아닌 라이레얼이라던 가 하는 일은 없겠지? " 응? 왜 불이 꺼져 있지?" 다행히 루시아 목소리다. 아직 내 운이 다하지는 않았나 보다. 루시아가 문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는 사이 라이가 불을 켰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폭죽을 터트렸다. 펑!펑!펑! " 어머!" 감짝 놀라는 루시아. 라이는 폭죽 소리 때문에 충격을 받았는지 두 손으로 귀를 꼭 막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다. "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언니의 생일을 축하합 니다~♬ 와아아~!" " …… ." 순간 얼어"刻駭? 여기서 갑자기 왜 생일 축하 노래가 튀어 나오 는 거니? 설마 우리가 지금가지 생일 파티 준비한 걸로 착각한 거 니? " 라이야, 이건 생일 파티가 아닌 그냥 파티란다. 생일날에만 파 티를 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렴." " 뭐하는 거야?" 아직도 어리둥절한 루시아의 물음. 그 물음에는 인디가 대답했다. " 루시아님을 위한 깜짝 파티에요." 라이가 거들었다. " 맞아요. 깜짝 파티에요!" 파티라면 무턱대고 좋아하는 라이. " 이 이벤트는 전부 히로님께서 루시아님을 위해 준비하신 거예 요. 루시아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며…… ." 인디는 날 밀어주기로 작정을 했는지 시키지도 않은 멘트를 열심 히 내뱉었다. 난 그런 인디의 행동에 고마움을 느꼈다. 내가 잘 되면 결코 널 잊지 않으마. " 루, 루시아…… " 루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난 루시아가 살 짝 감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있었다. 하긴, 이런 이벤트까지 준 비했는데 어떤 여자가 감동하지 않겠는가? " 이, 일단 이거 받아." 난 조심스럽게 장미꽃을 내밀었다. 차마 루시아를 마주볼 용기 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안 받으면 어떡하지? 혹시 깜짝 파티고 뭐고 다 싫다고 하면? 그럼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다행히 루시아는 내가 내민 장미꽃을 받았다 별로 탐탁치 않 은 표정이었지만, 난 그녀가 꽃을 받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 했다. " 앉아요, 언니! 우리 케이크에 불붙이고, 빨리 잘라 먹어요!" 라이가 재촉하자 루시아는 못 이긴 척 자리에 앉았다. 라이는 일 이 잘 되게 도와주기 위함인지 루시아 옆에서 계속 재롱을 부렸다. 그러자 굳어있던 루시아의 표정도 서서히 풀렸다. 역시 라이의 귀 여움 앞에서는 어떠한 포케페이스도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라이터를 꺼내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언니의 생일을 축하합 니다~♬" " ……." 생일 파티 아니라니까! 난 손뼉을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라이를 뜯어 말렸다. " 빨리 부세요. 언니." 루시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귀 뒤로 넘기며 입김을 후 불었다. 흔들거리다가 꺼지는 촛불. " 와아! 케이크 잘라 먹어요!"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은 라이. 인디는 재빨리 케이크를 잘라 라이 앞에 덜어 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포크로 열심히 케이크 를 집어 먹었다. 입가에 생크림을 잔뜩 묻히고 복스럽게 먹는 라이 의 모습은 귀염성이 철철 남쳐흘렀다. " 조심해서 먹어야지." 루시아는 티슈를 뽑아 라이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어느새 루시 아는 웃음을 짓고 이었다. 좋았어! 이분위기대로라면 화해는 문제 없어! 예상외로 라이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난 나중에 라이에게 상장 이라도 하나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난 본론을 꺼내기로 마음먹 었다. " 루시아." " 응?" " 미안해." " 뭐가?" " 그냥 이거저거. 전에 너 몰래 나이트클럽 간 것도 그렇고, 스카 이 라운지에서 실수한 것도 그렇고……." " ……." 루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계속 말했다. " 하지만 내 사랑은 오직 너뿐이야. 그것만은 믿어줬으면 좋겠 어." " 그래서 그 여자랑 잤니?" " ……응?" " 그래서 그 여자랑 잔 거냐고?" " ……." 여기서 그 여자란 라이레얼을 칭한다. 그리고 나와 라이레얼 사 이에는 예전에…… 정말 아주 예전에…… 그게 언젯적 일인지 기 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래 전에……살짝 썸씽이 있었다.(1부 2권에서 일어났던 일이니 정말 오래됐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룻밤 의 실수에 불과했다. 그것도 루시아를 만나기 전에 일어난 일. 그런데 지금와서 왜 또 그 얘기를 끄집어 내는 거지? ────────── ────────── ────────── ────────── 출처 : http://cafe.daum.net/fantagyNo1 나?누구? 님께서 올려주신 글인데요 ; 제가 쓴 거와 다른 카페에서 퍼온 거와 섞였네요- - ; 라이의 가출 이 두개면 회원분들이 혼란스러워 하실 것 같아서 ; 글시체는 제가 모두 굴림 으로 수정했습니다 ; 아이리스 2부가 더이상 업데이트(?)가 안 되니 회원분들께서 이렇게 글을 올려주시는군요-_-;; 죄송해요ㅜㅜ; 루시아는 자기가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해야 될 얘기가 있고 하 지 말아야 할 얘기가 있는 법인데, 자신이 한 말은 후자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루시아도 어느 정도 히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좋아하니 같이 사 는거지, 좋아하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곳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 나이트 건이야 전부 히로의 잘못이었다. 자신을 놔두고 감 히 다른여자와 놀아나다니! 그러나 스카이라운지에서 일어난 일은 다만 실수에 불과했다. 라이레얼이라는 이름은 지니 때문에 실수로 튀어나왔을 뿐이고, 원래는 그때 자신의 이름이 나왔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 이레얼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 되 어버렸다. 둘이 완전히 끝난 사이라는것은 잘 알고 있다. 적어도 히로는 그 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예전에 갈 데까지 간 사이가 아니던가? 그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화가 났다. 과거는 바꿀수가 없으니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감싸 안아 주어야한 다. 그 사람의 과거까지도. 루시아는 히로를 사랑하긴 하지만 히로의 모든 것을 감싸 안아 주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그래서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제 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이렇게 화만 내고 있는 것이다. 루시아는 의외로 질투심과 소유욕이 강한 여인이었다. * * * * 갑자기 라이레얼 얘기가 나오자 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생각하기 싫은 과거이자 나의 최대 약점이다. 만약 루시아가 나와 만나기 전에 다른 남자와 썸씽이 있었다면 어땟을까? 물론 화가 날 것이다. 어쩌면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 만 난 그 모든것을 이해하고 루시아를 사랑할 것이다. 그것만은 맹세할수 있다. 과거의 일은 어찌되었든 상관없다. 중 요한 것은 지금 내가 루시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난 그녀의 과거 를 포함해 그녀의 모든것을 사랑한다. " 왜, 왜 또 그얘길 꺼내는 거야?" " ……." 루시아는 대답대신 고개를 돌렸다. " 그, 그건 널 만나기 전의 일이잖아. 그런데 자구만 그걸 끄집어 내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 나도 몰라.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해? 생각할 때마다 화 가난단 말이야!" 루시아는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 그래서 어쩌라고? 과거있는 남자는 사랑도 하지 말라는 거야 뭐야? 날 사랑한다면 내 과거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하잖아!" " 아니. 난 이해 못해. 절대 이해 못해!" " 그럼 어쩌라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과거를 지워버릴까?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까?" "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 내가 잘못한 건 뭔데? 과거가 있다는 게 그렇게 큰 죄야?" " 난 첫키스도 너랑 했는데 넌 아니잖아!" " 첫키스가 자랑이야? 니가 처음이면 나도 처음이어야 하는 거 야?" " 뭐, 뭐?" " 솔직히 이젠 나도 지쳤어.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이젠 너 그럴 때마다 짜증나." " 뭐, 짜증? 너 진짜 웃긴다." " 웃기긴 뭐가 웃겨? 내가 바람이라도 폈어?바람이라도 폈냐고?" " 바람 폈잖아! 나이트클럽 가서 여자랑 껴안고 춤추던 게 누군 데?" " 그,그거야…… 지니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그런거지! 왜 나한 테 난리야! 따지려면 지니한테 따져!" " 하! 기가 막혀서…… 거기까지 간거야 지니 오빠 때문이라고 해도 거기서 여자 꼬신건 너야. 괜히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넘어가 려 하지 마!" " 그, 그건 그냥 친한 여동생 만난 것과 비슷한 거야!" " 하! 넌 친한 여동생한테 키스하나 보지? 그리고 니가 여동생이 어디 있어?" " 그.그건……아무튼 다 지니 때문이라니까! 난 아무 잘못 없 어!" " 됐어. 너랑은 말하고도 싶지 않아." " 너 자꾸 그럴래?" " 너? 누가 너야? 내가 너보다 나이 많다는거 잊었어? 이제부터 날 함부로 부르지 않았음 좋겠어." " 반말 쓰라고 한 건 너잖아!" " 그럼 이제부터 존댓말 써." " 뭐? 너 지금 나랑 장난 하냐?" " 장난은 너 혼자 해. 난 너랑 얘기하기도 싫으니까." 혈압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다시 한번 주 화입마의 증세가 나타나려 한다. 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햇다. 참자. 참자. 참자. 참을 인(忍) 세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않던가? " 저,저기…… 두, 두분 모두 진정하세요.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세요. 그리고 대화로 천천히 오해를 풀어 나가심이……." " 닥쳐 이자식아!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니가 이 상황이면 진정할수 있을 것 같아?" " 흑~ 왜 저한테 그러세요?" " 닥쳐! 너 지금 내가 우습게 보여? 니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 흑흑~ 전 다만 걱정이 되어서…… 흑~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 해요……." " 당연히 방해지! 입 다물고 저쪽에 가서 찌그러져 있어!" " 으아아앙~ 일루니아니임~." 괜히 끼어들었다가 면박만 당한 인디는 울음을 터트렸다. " 흥! 이젠 아무한테나 화풀이 하는구나. 아주 꼴불견이야." " 그만 좀 해둬! 이젠 지긋지긋해!"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폭발하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브레이크 고장 난 트럭이 내리막길을 내려가듯. " 지긋지긋하면 나가. 난 너랑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으니까." " 내가 왜 나가? 여긴 내집이야. 나가려면 니가 나가!" " ……뭐?" " ……." 난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아무 리 화가 나도 사랑싸움에서 절대 해서는 안될 말이 있다. 특히나 ' 헤어지자'와 '나가'라는 말은 금기어 중의 금기어이다. 루시아는 싸늘한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 그래. 좋아. 내가 나갈게." " ……." 아, 안돼…… 나가면 안돼……. 루시아를 붙잡아야 한다. 내가 붙잡지 않으면 루시아는 분명 나 갈거야. 그리고 루시아가 나가면 나와는 끝이다. 만약 루시아와 헤어지게 된다면 나는……나는……슬픔에 미쳐 죽을지도 몰라! " 나,나……." " 뭐야?" " 나, 나……" 나가지마! 제발!……이라고 말해야 해. " 나,나……" " 나 뭐? 할말있으면 빨리해." " 나, 나갈테면 나가! 너 없어도 인생사는데 아무 지장 없으니!" " 그래. 안그래도 나갈 거야. 재촉해줘서 고마워." " ……." 이게 아닌데.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게 아닌데. 루시아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감작 놀라 방은 으로 쫓아 들어갔다. 루시아는 커다 란 슈트케이스를 꺼내 옷가지를 집어넣고 있었다. 이건 전형적인 집 나가는 아내 패턴이다! 지금이라도 루시아를 말리려면 무릎꿇고 빌어야 한다. 자존심 을 버려야 한다. 그래.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자존 심을 버리고 매달려야 해!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무엇인지 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난 초조한 마음으로 루시아가 짐 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체 저 슈트케이스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어떤놈이 사다 놓은 거야? 난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되어 있는 슈트케이스에 화가 났다. 그 리고 손을 몸추지 않는 루시아에게 더욱 화가 났다. 그러는 사이 루시아는 짐을 다 쌌고, 슈트케이스를 질질 끌며 밖 으로 나왔다. " 오빠! 케이크 다 먹었어요. 이제 피자 시켜 먹어요." 아직까지 상황파악 못한 라이는 입가에 생크림을 잔뜩 묻힌 채 나에게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생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루시아가 집을 나가면 라이는 결 손 가정의 아이가 되는 게아닌가 하는……. 루시아는 어느새 현관 앞까지 가 있었다. 잡으려면 지금이 마지 막 기회이다. 하지만 내 입은 본심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 그래! 나가려면 나가!" 그러자 루시아는 진자 나가려고 했다. 현관문이 열렸다. 한쪽 발 이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 발만 나가면 진짜 끝이다. 난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 단 다시는 라이를 볼 생각 하지 마!" 순간, 루시아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돌 아왔다. " 뭐라고?" 난 라이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 집 나가려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 뭐? 니가 뭔데 라이를 보라 마라야." " 라이는 내 딸이니까!" " 내 딸이기도 해!" 루시아는 라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꼭 껴안았다. " 집 나가는 엄마가 딸 운운할 자격이 있기나 해?" " 좋아. 그럼 라이는 내가 데리고 가겠어." " 뭐?" 루시아에 이어 라이마저 날 떠나면 난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의 삶의 의미가 없을 테니. " 누가 맘대로 라이를 데려가? 라이는 내 꺼야?" 난 루시아의 품에있는 라이를 휙 당겨서 내 품으로 끌어오려 했 다. 하지만 루시아는 라이를 놓아 주지 않았다. " 넌 라이를 기를 자격이 없어!" " 내가 자격이 없긴 왜 없어?" " 흥! 나이트 클럽에 가서 여자랑 노닥거리는 모습을 라이한테 보 이고도 아이를 양육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 그. 그건 아니라고 했잖아! 라이를 기를 자격이 없는 건 내가 아 닌 너야! 여자 혼자 애를 키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 그럼 남자 혼자서는 키울수 있을 거라 생각해?" " 지니랑 크로니스가 도와 줄 테니 염려 끄셔." " 이쪽이야말로 일루니아언니가 도와줄 테니 걱정마." " 하! 그 아줌마? 그렇다면 더더욱 안 되겠군. 그 아줌마는 분명 자기 자식 아니라고 라이를 괴롭힐게 뻔하니까. 그럼 라이는견디 지 못해 가출하겠지." " 아, 아니에요. 일루니아 님은 그렇지 않아요. 일루니아님이라면 분명 잘 길러줄 거예요." " 넌 또 왜 끼어들어? 저쪽에서 찌그러져 있으랬잖아!" " 예,흑흑~." 인디는 다시 한족으로 가서 쪼그려 앉아 흐느꼈다. 짜식이 낄 데 안 낄데 구분을 못하고 자꾸 끼어들고 난리야. " 아무튼 라이는 내가 데리고 갈 거야!" " 누구 맘대로! 라이는 내 꺼니까 나갈려면 너 혼자 나가!" 우리는 그렇게 라이를 가운데 놓고 목청을 높이며 싸웟다. 현관 문이 열린 상태였기에 우리가 내지른 소리는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같은 세대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왔다. 아줌마들은 열린 현관문 틈으로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보며 자신 들기리 뭐라고 쑥덕거렸다. " 뭐예요? 구경났어요!" 내가 소리치자 아줌마들은 움찔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다 시금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 어린놈이 참 싸가지가 없네." " 그러게. 쟤네 부모도 참 힘들겟어." " 내 자식은 저렇게 키우지 말아야지." " 그나저나 저 아가씨 참 예쁘네. 며느리 삼았으면 딱 좋겠구만." " 그런데 저 처자는 왜 저쪽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거래? 참 참 하게도 생겼구만……."(인디를 여자로 아는군...동감-베낌이) " 그러니까 저놈이 저 검은 머리 여자랑 바람을 피다가 저 백인 처 자 한테 걸린것 같은데." " 아이고! 그럼 저 백금발 머리를 한 여자가 본처라는 건가?" " 그렇지! 그러니까 저렇게 싸우는 거겠지. 들어보니 애를 데려가 네 마네 싸우는 것 같은데……." " 둘다 어려 보이는데 벌써 저만한 애가 있네. 아이고, 귀엽기도 해라." " 그럼 이제 둘이 별거하는 건가?" " 별거가 아니라 이혼인 것 같은데." " 하긴 바람피다 걸렸으면 이혼해야지. 간통죄면 감옥 들어가도 할말 없는거 아녀." " 저 남자는 별로 생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예쁜 여자를 둘이나(?) 건졌는지 몰라." " 돈이 많나 보지."(그렇게 못생겼나?-베낌이) " 애만 불쌍하게 됐네. 저 귀여운 것이 어쩔 줄 몰라서 손가락만 빨고 있다." " 그나저나 철수네 아빠가 딴 살림 차렸다는게 사실이야?" " 아고! 소문한번 겁나게 빠르네. 철수네 아빠가 그 술집 여잔가 뭐시긴가한테 빠져가지고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잖아. 그 때문 에 철수 엄마 앓아누웠어." " 어머, 어머! 어쩜 좋아. 어쩐지 요즘 철수 엄마 안 보인다 했어." " 그 착하고 순하게 생긴 사람이 딴 살림 차렸을 거라 누가 상상이 나 했겠어. 난 그 사실 알고 깜짝 놀랐다니까." " 그나저나 이 집안은 시끄럽게도 싸우네." " 원래 이상한 사람들이 좀 많이 살잖아. 대부분이 외국인이고." " 저거 누가 말려야 하는거 아냐?" " 말리긴 뭘 말려? 한창 재밌을 때구만." " 하긴 그렇지……." " 그래서……." " 그려……." " 또……." 아줌마들 수다를 꼐속 듣고 있자니 내가 먼저 미칠 지경이다. 저 아줌마들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난 현관문을 쾅 닫고 걸어 잠갔다. 그러자 문밖에서 아줌마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난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도 대한민국 아줌마 들의 행동에 할 말을 읽은것 같았다. 어차피 더이상의 말싸움은 서로 피곤할 뿐이다. " 좋아. 그럼 라이한테 직접 물어보자. 라이가 둘중 누구를 따라 갈지를 선택하게 하면 되겠지?" " 좋아." 루시아는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그덕였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루시아와 라이 양육권 분쟁을 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겟는 가? 하지만 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라이를 포기할수 없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 라이야." " 예, 오빠." " 들었으면 알겟지만 오빠랑 언니중 누굴 택할래?" " 예?" " 오빠랑 언니 둘 중 하나를 따라가야해. 이 오빠는 라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단다." 이건 뻥이다. 만약 라이가 루시아를 택한다면 난 그 자리에서졸 도할지도 모른다. " 그러니 오빠가 물을 테니가 솔직하게 대답해야 되." 난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음 말을 이었다. " 오빠가 좋아, 언니가 좋아?" 아아~ 드디어 나왔다. 어린 아이에게 가장 고난이도의 질문으 로 꼽히는 일명 '엄마가좋아, 아빠가좋아" 질문. 아이 입장에서는 어느 한쪽도 택하기 힘들다 하지만 반드시 택 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것을 딜레마라 부른다. 예상대로라이는 완전히 얼어 붙었다. 나와 루시아는 초조한 마 음으로 라이의 대답을 기다렷다. 라이야, 설마 이 오빠와 함게 한 그 많은 시간과 수많은 모험들을 잊은 건 아니겠지? 제발 이 오빠를 택해줘. 오빠가 좋다고 말해줘. 만약 라이가 오빠를 택하지 않는다면……오빠는 콱 죽어버릴 테야! 라이는 손가락을입에물고 나와 루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계속 번갈아 보았다. 끊임없이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30분동안 꼐속해 서 고개만 좌우로 돌렸다. 그리고는……. " 우에에엥~ 오빠랑 언니 다 미워요오~"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와 루시아는 깜짝 놀라 황급히 라이를 다독 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 라이야 뚝 그치렴." " 그래 라이야. 언니가 맛있는거 사줄게 그만 울어." " 오빠가 피자 시켜 줄게." " 우에에엥~" 라이는 나와 루시아의 손을 밀치더니 내가 아까 시킨 대로 한쪽 에서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인디의 품으로 달려갔다. 인디는 라이 를 꼭 껴안고 다독여 주었다. 라이의 심정 내가 충분히 이해한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질문을 받게 되면 어떤 어린아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난 라이의 이런 행동이 집을 나가려는 루시아의 마음을 조금이나 마 움직이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에서 루시아를 보았다. 하지만 루 시아는 자신의 결정을 철회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떠한 일이 있어도 라이를 빼앗길 수 없다. 만약 라이의 양육권이 루시아에게 넘어갈 시에는 루시아와 재결합(?)하 게 될 조금의 가능성마저 없어지는 셈이다. 라이가 내 옆에 있는 한 루시아는 라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집에 자주 들락날락거릴테고 그러다보면 화해할 기회도 있을테니. 게다가 난 약간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다. 라이와 내가 같이 한 세 월은 루시아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길다. 애초에 라이와 루시아의 만남이 나로 인해 가능하지 않았던가? 물론 세월과 정이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라이와 나는 판타지 세계에서 수많은 모험을 함께 한 사이다. 드래곤을 만나기 위해 눈쌇인 산을 오르기도 했고, 드래곤과 싸우기 위해 여기저기 열심히 돌아다니기도 햇다. 상아탑에서 나와 라이가 만난것은 그 야말로 운명이라고 할수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즉, 나와 라이는 운명의 실로 연결된 공동 운명체인 것이다. 이런 나를 놔두고 라이가 루시아를 선택할 리 없지. 맞아. 라이는 분명 날 선택할 거야. 난 라이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 라이야. 이 오빠는 라이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 이해한단 다. 하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야. 그렇기에 쉽게 대답할수 없 기도 하겠지. 그래서 라이한테 생각할 시간을 줄게. 내일 아침까지 천천히 생각해 보고, 그때 대답을 해주렴." 난 루시아를 보고 말했다. " 이의 없지?" 루시아도 지금 대답을 듣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선선히 고개 를 끄덕였다. " 좋아." 형평성을 기하기 위해 오늘밤에는 인디가 라이를 데리고 자기로 했다. 난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잡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을 감으면 루시아와 라 이가 손을 꼭 잡은채 집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때문에 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 * * * " 꺄아아악!" 꼐속 되는 악몽 때문에 나는 깊게 잠들지 못하고 현실과 꿈속을 오갔다. 그나마도 들려온 비명 소리 때문에 완전히 현실로 돌아 왔다. 난 침대에서 벌덕 일어나 방을 뛰쳐나왔다. 아침부터 누가 소리 를 지르고 난리야? " 무슨 일이야?" 누가 비명을 지른 거지? 비명이 들려온 곳은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의 방이었다. 그리고 비명소리는 분명 인디의 목소리. 루시아 역시 놀라서 잠옷바람으로 방을 뛰쳐나왔다. 약간 큰 하 늘색 파자마 잠옷이 잘 어울린다. 헝클어진 백금발이 귀여워 보인 다. 껴안고 쓰다듬어 주고 싶어~. 아차! 지금은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 무슨 일이야?" 루시아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 나도 몰라. 일단 들어가 보자." 난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잠옷을 입은 인디가 요염 한 자태로 흐느끼고 있었다. " 흑흑~." 마치 '절 덮쳐주세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내가 손수 덮쳐 주었다. 퍽! " 무슨 일이야, 임마?" " 라이님이……." 라이님? 라이한테 님자를 붙이니 뭔가 어감이 이상하다. 인디도 예전에는……즉, 라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는 그냥 라이라고 불렀 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성년이니 꼬박꼬박 님자를 붙인다.(성년 이라고 해봐야 외모나 하는 짓은 어렸을 때와 다를게 없지만). " 라이가 왜? 라이가 어쨋다고?" " 사라졌어요." " 뭐? 사라져?" " 예. 깨어나 보니 라이님이 옆에 없어서……." " 화장실이라도 갔겠지." " 그,그게……저도 그런줄 알았는데 이런 쪽지가……." 그렇게 말하며 인디는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노트를 찢은 종 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빠와 언니에게 라이는 오빠와 언니가 싸우는거 시러요. 다같이 행보카개 살아 쓰면 조캐써요. 어제 오빠와 언니가 라이 땜에 싸운 걷 가타서 라 이는 너무너무 슬퍼요. 그래서 라이는 오빠와 언니 겨틀 떠나기로 해써요. 오빠와 언니가 이써서 구동안 라이는 행보케써요. 그럼 안녕이 개세요 꾸벅~ - 라이 " ……." 이게 뭐야? 맞춤범이나 좀 제대로 쓸 것이지. 뭔 내용인지 알아먹 기가 힘들잖아. 지가 초딩이야, 뭐야? 난 다 읽은 쪽지를 루시아에게 건네주었다. 루시아는 그것을 읽 어보더니……. " 아! 라이야……."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 루시아!"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루시아를 부축했다. 그리고는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주로 일루니아 여사님이 날 바라보는 눈빛)으로 인디를 보았다. " 어떻게 된 거야, 임마?" " 흑~ 저도 잘 모르겠어요. 깨어나 보니 라이님은 없고 이런 쪽 지만……." " 시끄러! 니가 데리고 잤으면 이런 일이 업게 책임지고 잘 관리 햇어야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 흑흑~죄송해요. 제가 죽일 놈이에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으 아아앙~." 놀란 것은 인디도 마찬가지인지 펑펑 울기만 했다. 물론 나도 놀 랐다. 하지만 루시아가 혼절까지 하니 놀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떡하지? 우황청심환이라도 하나 가져와야 하는 것 아닌가? 다향히 잠시후 루시아는 눈을 떴다. 난 걱정스런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괜찮아?" " 라이는?" " ……."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루시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흑~." " 우는 거야?" " 흑흑~." 눈물이 그녀의 가녀린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작은 어깨의 떨림 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가슴이 찢어질듯 아파왔다. 견딜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우 는데 어째서 내가 이렇게 아픈 걸까? " 괘,괜찮아?" " 흑흑……." 루시아는 내 어개를 붙잡고,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난 살며시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달래 주었다. 토닥토닥! " 흑흑, 이게 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라이가 가출한 거야," " 아, 아니야. 루시아는 아무 잘못 없어." " 흑흑, 우리 라이 어쩜 좋아? 라이한테 무슨일이라도 생기 면……." " 그, 그럴리 없어." " 흑흑. 난 이제 어떡해? 라이 없으면 난 어떡해……엉엉~라이 야아~." " ……." 루시아가 이렇게가지 라이를 사랑하고 잇엇을 줄이야. 그런 루 시아에게서 라이를 빼앗으려고 하다니, 내가 진짜 죽일놈이다!나 같은건 살 자격도 없어! (그럼죽어!-베낌이&일루니아 여사님..ㅡㅡ) " 그만 울어. 울어봐야 아무 소용 없잖아. 한시라도 빨리 라이를 찾아야지." " 으응." 난 손으로 루시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촉촉한 그녀의 눈물. 유 리병 안에 넣어서 가보로 삼고 싶다. 루시아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아직 눈곱도 떨어지지 않은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물을 흘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루시아도 어젯밤 나처럼 잠을 못 잔 것이 분명하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언제나 차분하고 청초해 보여서 다가가기가 힘들었는데, 역시 루시아도 여자였던 것이다. " 그럼 일단 조사부터 시작하자." " 조사?" " 설마 빈손으로 가출했을 리는 없잖아. 뭔가 가지고 나갔겠지." 내말에 루시아와 인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다 너무 놀란 나머 지 그런 쪽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이다. " 너도 그만 질질 짜고 도울 생각이나 해." " 흑흑~예." 인디는 열심히 옷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우리 셋은 집 안을 샅샅 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라이가 무엇을 가지고 나갔는지 대 충 알수 있었다. " 일단 없어진 품목을 보자면…… 냉장고 안에 있던 초콜릿 다섯 개, 캔 콜라 두개, 사탕 한 봉지, 마스터 피자쿠폰 일곱장, 돈은 가 지고 간 것 같지 않아. 그리고 라이는 이 모든 것을 우리 가게 최고 의 히트 상품인 둘리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갔어. 아! 한가지 덧붙이 자면 헬로우 귀티 인형도 들고 갔고.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흰색 원 피스야."(한가지가 아니라 두가지잖아 이사람아-베낌이..ㅡㅡ) " 돈이라도 가지고 나갔으면 다행인데……."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괜찮을 거야, 루시아. 너무 걱정하지마. 설마 라이의 귀여움에 반한 변태나 인신매매범들이 납치해 가거나 할 리는 없잖아." " 아! 라이야~." 루시아는 비틀거리더니 옆으로 픽 스러졌다. 난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 어쩜 좋아? 우리 라이 어쩜 좋아?" 루시아는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보다. " 라이는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 아니야. 사람들이 우리 라이같이 귀여운 애를 그냥 놔둘리 없 어.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거야." " ……." 그건 그렇다. 요즘 세상에 어린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변태가 얼마나 많은데. 꼭 유아성도착증 환자가 아니라도 라이의 귀여 움에 홀린다면 누구나 납치범으로 변할수 있다. 길 잃은 새끼 고양이를 보면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것이 사람 심 리 아니겠는가? 그러니 라이는 오죽 하겠나? 게다가 라이도 문제다. 사탕 하나만 주면 지구 끝까지 따라가는 건 정말 문제가 있다. 그야말로 납치 대상 1순위다. " 주위 사람들에게 다 연락해서 라이가 갈만한 곳을 찾아보자. 시 간이 없으니 발리 행동해!" 나와 루시아는 세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옷만 갈아입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나간 라이를 차지기 위해서. * * * * 집안이 발칵 뒤집혀 라이 찾기에 나선 그때, 라이는 그러한 사정 도 모르고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등에 맨 둘리가방, 한손에 든 헬로우 귀티 인형, 그리고 다른 한 손에 든 초콜릿. 라이는 초콜릿을 오물오물 먹으며 아장아장 여심히 걸었다. 집 을 나왔지만 딱히 갈 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계속 걸었다. 집 나온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오빠와 언니가 싸우는 모습을 또 보 게 될까바 두려웠다. 라이는 단지 걷는 것 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 다. 거리 사람들은 라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세상에 이런 귀여운 소녀가 있었다니!' 초콜릿만 먹다 보니 목이 말랐다. 라이는 가방에 손을 넣어 캔 콜 라를 꺼냈다. 꿀꺽꿀꺽! " 아! 배고프다." 역시 초콜릿과 콜라로 배를 채운다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오 래 걸어서인지 다리가 아팠다. 라이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 순간 라이의 눈에 피잣집이 보였다. 그동안 즐겨 먹던 마스터 피자 체인점이었다. 라이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피자쿠폰 일곱장이 나왔다. 열장 이 되어야 레귤러 한판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일곱장은 아무런 소 용이 없다. 라이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자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카운터에 도착한 라이는 아르바이트생을보았다. ' 어머! 너무 귀엽게 생겼다!' " 뭘 줄까?" 여고생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다정하게 물었다. " 저, 저기……이거……." 라이는 쿠폰 일곱장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 ……." " 피자……." " ……?" " ……주세요." " ……." " ……." " ……응?" " 피자요……." " ……." 쿠폰 일곱 장으로는 피자는 커녕 피클도 어림없단다. 집에가서 손 가락이나 빨고 있으렴…… 이라고 말하는 것이 원칙이다. 세상에! 쿠폰 일곱장 들고 와서 피자를 달라고 하는 아이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아르바이트 생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소녀가 회색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라이는 피자가 너무너무 먹고 싶어요.' 아르바이트 생은 그 눈빛 공격을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 무, 무슨피자 줄까?" " 고구마 두줄 있는 걸로요." 아아~마스터 피자 창업 이래 이런 명대사는 처음이다! 고구마가 두 줄 있는 피자는 가격이 일반 피자에 비해 두 배는 더 비싸다. 쿠폰 스무 장을 가져와도 레귤러 한판 줄까 말가다. 그런 데 겨우 일곱장 들고 온 주제에 고구마 두줄 잇는 피자를 원하다 니! 뻔뻔함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라이는 한마디 덧붙였다. " 훼밀리 사이즈로 주세요. 콜라도 큰 컵이로요." " ……." 아르바이트 생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여기서 넘어가게 된다 면 피자값은 자신이 지불해야 한다. 현재 자신의 시급은 2천원(참 고로 시급2천원이면 노동법 위반이다. 하지만 패스트 푸드점들은 그런 것에 신경도 안쓴다).고구마가 두줄인 치즈 크러스트 리치 골드 훼밀 리 사이즈의 피자의 가격은 무려 4만8천원. 자신이 24시간을 잠 안 자고 일해야 만질수 있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치즈 크러스트 리치 골드 훼밀리 사이 즈 피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초롱초롱! 안주면 울어 버리겠다는 저 눈빛. 저 눈빛을 마주보고 마음이 움 직이지 않는 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로보캅이었다. " 그, 그래. 저쪽에서 조금만 기다리렴. 언니가 가져다 줄게." " 예. 감사합니다." 소녀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으로 인해 아르바이트생은 행복했다. 우걱우걱! 피자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 으면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 작고 어린 소녀는 자신의 얼굴보다도 더 큰 피자 조각을 입에 우겨 넣고 있었다. 소녀에 옆에는 일본이 만든 세계적인 고양이 캐릭터 '헬로우 키 티'가 앉아 있었다. 물론 이건 범용적인 명칭일 분이고, 소녀가 붙 인 이름은 헬로우 귀티이다. 귀티가 흐르는 반가운 인형이라는 뜻 이다. 그 헬로우 귀티마저도 소녀의 식성에 기가 질린 모습이었다. 푸 르딩딩한 헬로우 귀티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가끔 추석 때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세계의 미스터리' 에서나 나올 법한 놀라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훼밀리 사이즈 피자를 다 먹은 라이는 남아 있는 콜라 를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는 피자판을 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라이는 카운터에 피자판을 내밀며 한마디 했다. " 피자……." " 응?" " ……리필해주세요." " ……." 아르바이트 생은 기절했다.(기절할만 하다..9만6천원..ㅡㅡ -베낌이) 피자 가게에서 배를 채운 라이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어느새 날 은 저물고 있었다. 붉은 가로등 밑으로 사람들이 정신없이걸어 다 녔다. 몇 걸음 걷던 라이는 힘이 드는지 건물 입구에 주저앉았다. " 라이는 오빠랑 언니가 보고 싶어……." 여름이라 해도 밤이 되면 기온이내려가 추운 법이다. 라이는 헬 로우 귀티를 꼭 끌어안으며 몸을 움츠렸다. 히로, 루시아, 인디등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지나갔다. 라이는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 다. 이렇게 혼자였던 적이 얼마만이던가? 그동안은 꼐속 곁에 누군 가가 있어 주었기에 외로움은 더 햇다. 그때 라이의 머릿속에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주었던……그러나 지금은 곁에없는……. " 흑~ 이코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비였기에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들은 손에 든 것으로 머리를 가리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툭 툭 쏴아아!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더니 금세 폭우로 바뀌었다. " 우에에엥~ 이코야아~ 어디 있는 거야, 이코야? 우엥~ 우엥 ~." 라이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 * * * 그럼 라이가 그토록 애타게 찾은 이코, 즉 라이코스는 지금 어디 서 무었을 하고 있는 걸까? 여기에는 좀 복잡한 사정이 있다. 라이가 히로를 따라 이 세계로 올 때 라이코스도 물론 라이를 따 라 오려고 햇다. 하지만 라이코스는 여자 친구가 있는 몸. 아이리 스 12권을 자세히 읽었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라이코스에게는 드 림위즈라는 참한 여자 친구가 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또다른 청안백우조가 드림위즈를 좋아한 것이다. 그 청안백우 조의 이름은 다음(Daum). 다음은 라이코스의 절친한 친구다. 그렇 다면 이 사건은 간단하게 요약된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그래. 바로 이거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이코스는 불같이 분노했다. 하지만 상대는 친구가 아니던가? 라이코스는 친구를 잃 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처음엔 다음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라이코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다음은 드림위즈를 포기할 수 없다 고 완강하게 버텼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자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만약 상 황이 악화되기 전에 드림위즈가 나서서 자신의 마음을 밝혔다면 유혈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드림위즈는 남 자 둘이 자신을 놓고 싸우는 이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고, 결국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라이코스와 다음은 드림위즈를 놓고 결투를 하게 되었다. 버들랜드(Birdland)에서 가장 높은 산인 버드-마운틴(Bird- Mountain). 이곳은 청안백우조의 결투 장소로 유명한 곳이엇다. 평 화의 상징인 청안백우조들은 싸움을 최대한 자제햇지만, 트러블이 란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트러블을 공식적으로 합법적으 로 풀기 위한 방식이 바로 결투였다. 결투 시간이 다가오자 버드-마운틴에는 수많은 청안백우조들이 모여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라이코스와 다음이 있었다. " 내가 없는 사이 나의 여자 친구를 가로채다니!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라이코스가 소리치자 다음은 피식웃으며 말했다. " 훗! 사랑은 움직이는 법. 이건 전적으로 관리를 못한 네 책임이 다!" " 그동안 너 같은 놈을 친구라고 생각했던 게 쪽팔릴 지경이다! 너 같은 놈은 라이레얼이라는 여자 하프엘프의 보신탕용으로 쓰여 야 마땅해!" " 훗! 라이코스가 다음에 인수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큰 소리 를 치다니! 우습기가 하늘을 찌르는 구나!" " ……." 엄청난 인신공격에 라이코스는 극심한 정신적 데미지를 입었다. 대체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건데? "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가 한계다. 내 오늘 너를 쓰러트리고 경영 권을 되찾아오고 말테다!" " 훗! 카페도 없는 주제에 잘난 척 하기는!" " 너야말로 요즘은 싸이월드에 밀리잖아!" " 미, 밀리긴 누가 밀렸다 그래? 조만간 카페 개편하면 싸이월드 쯤이야 아웃오브 안중(Out of 眼中:안중에도 없다는 의미)이야!" " 개편해 봐야 호박에 줄긋기지!" " 적자나서 경영권까지 팔아먹은 주제에!" " 이 자식이! 서버 해킹 당하고 싶냐?" 둘은 이해할수 없는 말을 떠들어 대며 격렬한 배틀을 벌였다. 보 고 있던 관중들은 가지고 있던 도토리(하나에 100원?)를 걸며 누가 이길지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결투는 사흘밤낮으로 계속 되엇다. 그에 따라 도토리의 개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 한판에 걸린 도토리의 개수만도 자그마치 3억 개 ( 시가로 환산하면 3백억?). 승률은 다음이 조금 유리햇고, 도토리 역 시 다음에게 많이 걸렸다. 실제 둘의 전투력은 비슷한 수준이었지 만 라이코스가 다음에 인수된 것이 장세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뭔 말이야?). " 헥헥! 제법 하는군." " 헉헉! 너야말로." 라이코스와 다음이 동시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 이 한번의 공격에 나의 모든것을 걸겠다. 간다 어깨 너머로 배 운 필살기! 빅장 40단 콤보 흉내 내기!"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스피드로 라이코스가 움직엿다. 순 간, 하늘에 번개가 치는 것만 같았다. 몇초후. 한 청안백우조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누구냐?라이코스냐,다음이냐? 모든 관중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떠오르는 아침 햇 살 속에서 당당하게 공중에 떠 있는 라이코스의 모습이 보였다. 라 이코스가 인수라는 악재를 딛고 다음을 이긴 것이다.(이건 또 뭔 말 이야?) 와아아아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다음은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처박혀 있었 다. 라이코스는 숨을 고르며 땅으로 내려왔다. 비록 이기긴 했지만 라이코스 상태가 그리 좋지는 못했다. 지금가지 정신력으로 버텨왔을 뿐이다. 다음에게 도토리를 걸었던 관중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 은 도토리를 건 일부는 그 자리에서 졸도 했다. 반면 라이코스에게 도토리를 걸었던 관중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 랐다. 가진 도토리 전부를 건 도박가들의 기쁨은 더더욱 컸다. 그 들은 벌써부터 친구들에게 음악 선물을 돌린다, 스킨 선물을 돌린 다 난리였다. 드림위즈는 승리한 라이코스에게 다가갔다. 여자를 두고 결투를 하는 경우 승자승(勝者勝)제도에 의해여 이긴 남자와 맺어지는 것 이 원칙이다. 하지만 라이코스는 드림위즈를 외면해버렸다. " 너에게 정말 실망했어. 난 너 같은 여자는 필요없어." " 미, 미안해.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난 널 진심으로 사랑한다 는걸 깨달았어. 제발 한번만 다시 생각해 줘." " 아니. 다시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너와는 끝이야. 난 내 친구 라이를 찾아 떠날테야. 라이코스는 그렇게 한때 애인이었던 드림위즈를 놔두고 버들랜 드를 떠났다. 라이코스에게 버림 받은 드림위즈는 다음에게 다가 갔지만 다음 역시 드림위즈를 거부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양다리 걸치면 죽도 밥도 안된다. 어쨋든 라이코스는 라이를 찾아 다시금 머나먼 여행을 떠났다. 아아~ 이런게 진정한 우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 * * " 라이 아직도 못 찾았어?" " 예." " 지니 쪽은 어때?" " 지니님도 아직 못 찾았대요. " 알았어. 끊어." " 예. 죄송해요. 저 때문에……흑~ 이 모든게 저의 잘못이에요. 제가 조금만 주의했어도 이런일은……흑흑~." " 아이씨! 짜증나니까 그만 울어. 질질 짠다고 뭐가 해결 돼? 울 시 간 있으면 빨랑 라이나 찾아." " 예.흑흑~" 난 전화를 끊었다. 이 핸드폰은 지니가 어디선가 가지고 온 거다. 내가 장담하는데 요즘 지니와 교제하는 여성이 이동통신 관련 쪽 에 근무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난 루시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루시아는 한손으로 이 마를 붙잡으며 비틀거렸다. " 루시아!" 난 황급히 루시아를 부축했다. 루시아는 지금 체력적으로나 정신 적으로나 한꼐에 다다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를 찾는다고 아침도 먹지 않고 나오지 않았나? 게다가 하루 종일 걸어 다녔고. 가녀린 체격의 루시아가 버틸 리 없지. " 라이한테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루시아는 자신보다 라이를 먼저 챙겼 다. 이런 것이 모성애라는 거겠지. " 분명 괜찮을 거야. 라이가 비록 좀 어리버리해 보이고, 실제로 도 어리버리하지만 그래도 강한 아이이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지금 루시아의 모습은 손가락 하나로면 밀어도 쓰러질 것 같이 초췌했다. 툭 툭 쏴아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난 걸을 힘도 없는 루시아를 안아 들고 가까운 건물로 몸을 피했다. " 큰일이야." " 응? 뭐가?" " 라이 우산도 안 가지고 나갔잖아. 어디서 비라도 맞으면……." " ……." 자나 깨나 라이 걱정. 앉으나 서나 라이 걱정. 루시아의 이런 마 음도 모르고 가출을 하다니. 라이는 정말 나쁜 엘프다. 돌아오면 혼쭐을 내 줘야지. 루시아의 상태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비까지 내리니 이런 몸으로 라이를 찾기는 무리다. 난 루시아를 업고 택시를 잡았다. 내가 행선지로 집을 말하자 루 시아가 말했다. " 라이를 찾아야 돼." " 너 집에 데려다 놓고 내가 다시 찾아 볼게." " 하지만……." " 그런 몸으로는 방해가 될뿐이야. 집에서 좀 쉬어. 그동안 내가 찾아볼 테니." " ……응." 루시아는 눈을 감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난 한손으로는 그 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라이는 루시아가 이렇게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가? 돌아오기만 하면 그냥 콱! 아니야. 라이가 가출을 한 데에는 내 잘못이 커. 내가루시아와 싸우지만 않았어도……. 아아~ 어린 라이가 그 모습을 보고 얼마 나 놀랏을까? 얼마나 놀랐기에 가출까지 결심한 걸까? 생각을 하는 사이 택시가 집에 도착했다. 난 루시아를 업고 내렸 다. 그리고 비 맞지 않도록 재빨리 달려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 갔다.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뭔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귀찮아서 그냥 무시햇다. 그러자 그 이상한 기척이 소리 쳤다. " 야!" 문 앞에는 비둘기 정도 크기의 흰색 매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매는 파란 눈동자를 시퍼렇게 빛내며 나를 보고 있엇다. 난 그 매를 보며 물었다. " 넌 누구냐?" " ……." 알고보니 그 매는 라이코스였다. 아이리스부터 등장해서 그 이후로 별다른 존재감 없이 나와 함께 여행을 했던. 참고로 라이코 스는 라이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둘이 결성한 조직이 그이름 도 유명한 '라이 패밀리'아기 겠는가?(그럼 라이레얼도?-베낌이) " 그런데 넌 어쩐 일이냐?" " 당연히 나의 친구 라이를 찾으러 왔지!" 라이코스는 눈을 반짝 빛내며 그렇게 말했다. 난 한숨을 내쉬 었다. " 어쩌지? 라이는 지금 가출햇는데." " ……." " ……." " 뭐?" " 가출했다고." " 말도 안돼! 나의 친구 라이가 가출이라니!" 믿을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라이코스. 하지만 현실이이 어쩌겠니? " 그나저나 넌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 아주 힘든 여정이엇지." 라이코스는 버들랜드를 더나서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구구 절절하게 읊어댔다. 아이리스 왕궁에 가서 이동마법진(아이리스 왕 궁에는 한국과 연결되는 이동마법진이 있다. 크로니스를 비롯한 드래곤 들이 설치해 둔 거다.)을 타고 이 세계에 도착해 물어물어 우리 집을 찾아왔다는……별 감흥도 없는 얘기 였다. " 아무튼 라이가 가출을 했다니, 내가 라이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 겠군!" " 니가 무슨 수로 라이를 찾아?" " 훗! 청안백우조는 후각이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나 보군. 나의 예민한 후각이라면 라이를 찾는데 아무 문제없어!" " 그래. 만약 라이를 찾으면 오바와 언니 화해했으니 집에 빨리 돌아오라고 해." "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지." 라이코스는 그 말을 끝으로 창문으로 날아올랐다. 저녀석이 라 이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하지만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보는 수 밖에. 난 일단 루시아를 침대에 눕혔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약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감기 몸살인가? 난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가스불을 켜고 죽을 끓 였다. 루시아가 이렇게 된 것은 전부 내 탓이다. 난 혹시 굉장히 나 쁜 놈이 아닐까? 루시아는 날 믿고 이곳까지 따라와 주었는데 난 루시아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아니, 해주기는 커녕 지니 같 은 간신배의 꼬임에 넘어가 다른 여자랑 노닥거리기나 했다. 난 정 말 나쁜 놈이다. 흑~. 눈물이 냄비안으로 덜어졌다. 난 황금히 눈물을 닦아냈다. 죽이 어느정도 끓자 난 그릇에 담아 간장과 함께방으로 가져갔다. " 저,저기…… 죽 가져왓어. 힘들더라도 좀 먹어. 아침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잖아." " 생각 없어." " 그, 그러지 말고 좀 먹어. 먹고 기운 차려야 다시 라이를 찾으러 나가지." 루시아는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루시아 의 등 뒤로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손수 죽을 떠서 루시아의 입에 넣어 주었다. 먹기 힘든 듯했지만 루시아는 억지로 죽을 삼켰다. " 이제 됐어." 죽그릇이 반쯤 비워졌을 때 루시아가 말했다. 난 죽그릇을 치우 고 다시 루시아를 눕혀 주었다. "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라이는 내가 반드시 찾아로 테니." " ……미안해." " 응?" 내가 놀라서 묻자 루시아는 날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미안해." " ……." 미안하다고? 지금 루시아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한 건가? 난 웃음을 지엇다. " 아니야. 넌 미안할 거 하나 없어. 전부 내 잘못인걸. 나야말로 미안해." 난 침대에 걸터 앉았다. " 이제 우리 화해한 건가?" " 응. 루시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이제 라이만 돌아오면 되는 거네." " 그러게." 우리 둘 사이에는 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 고, 그에 따라 호흡이 가빠졌다. 난 루시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엇다. 루시아 역시 내가 무 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난 몸을 숙였다. 루시아는 살짝 눈을 감았다. 이제 조금만 더……. 벌컥! " 아! 두 분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군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거 계속 하십시오." " ……." 아이씨!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열린 방문 앞에서 지니가 활짝 웃고 있었다. 다시금 온몸의 기혈 이 들끓는다. 헉! 참아야 돼. 잘못하면 또 주화입마 걸릴라. 그런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중요한 타이밍에 나타나 초를 치는 걸까? 혹시 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 아냐? 내가 지니에게 빅장이라도 날리려는 찰나 배게가 날아가 지니의 얼굴을 강타했다. 루시아가 던진 것이다. 루시아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몸을 휙 돌렸다. 루시아도 키스가 무산되어 회가 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뭐, 기회가 오늘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 무슨 일이야?" 내가 묻자 지니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햇다. " 워낙 중요한 사안인지라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까 무슨 일인데?" " 저희 누님과 인디님게서 라이미안님을 찾으셨습니다." " 뭐야!" " 정말이에요?" 루시아도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 어디에 있대요?" " 은행 사거리 쪽 분식점에 있습니다." 내가 뛰쳐나가려고 하자 루시아가 내 옷깃을 잡았다. " 나도 같이 가." " 뭐? 넌 좀더 쉬어야 하잖아."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라이를 만나기전에는 못 쉴것 같아." 루시아의 의지는 단호해 보였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알았어. 같이 가자." 난 루시아를 들쳐 업었다." " 저도 같이 갈까요?" 지니의 물음에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 댁은 집이나 지키세요." * * * * 라이는 라이코스가 보고 싶어 펑펑 울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 량해 보이던지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울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 았다. 어느새 소녀에 발밑에는 동전과 지폐가 수북히 쌓였다. 라이는 앵벌이로 나서면 대성할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라이코스는 도심의 허공을 떠돌며 열심히 라이를 찾고 있엇다. 라이의 냄새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대략적인 범위를 잡을 수가 있 었다. 하지만 내리는 비 때문에 자세한 추적이 힘들었다. 그 순간, 라이코스의 귀에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우에에엥~ 우엥~ 우엥~." " 앗! 이 울음 소리는 나의 친구 라이의 울음소리?" 라이코스는 울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 * * * 인디와 일루니아는 팀을 이루어 라이 찾기에 전력을 다하고잇었 다. " 흑~ 모든 게 저 때문이에요. 라이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 는…… 흑흑~." "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일루니아님." " 뚝 그치세요. 뚝!" " 흑~ 뚝!" 일루니아는 인디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인디는 눈물을 닦 으며 일루니아의 품에 안겼다. 이 둘은 라이를 찾는 건지, 데이트를 즐기는 건지……. 어쨋든 둘은 나름대로 열심히 라이를 찾았다. 일루니아는 한때 아이리스의 참모로 있엇던 만큼 머리가 비상했다. 그래서 마구잡 이식으로 찾지 않고, 라이가 있을 만한 곳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 펼쳤다. 라이가 있을 만한 곳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 펼쳤다. 라이가 있을만한 곳이란 너무나도 뻔햇다. 1. 피자가게 2. 패스트 푸드점 3. 기타 음식점 특히나 일루니아는 라이가 마스터 피자 쿠폰 일곱 장을 들고 나 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근처 마스터 피자 체인점을 제일 먼저 조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 라이가 들렸던 마스터 피자 체인점 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일루니아와 인디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쯤 ……라이의 존재는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어린 소녀가 치즈 크러스트 리치 골드 피 자 훼밀리 사이즈를 두 판이나. 그것도 삼십 분 안에 먹어 치웠다. 이것은 마스터 피자 창업 이래 가장 놀라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믿을수 없다는 표정을 지엇다. 하지 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증인들이 수십명이나 있었던 것 이다. " 그 애는 어디로 갔죠?" " 글쎄요. 그거야 저희는 모르죠." 비록 원하던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여기서 포기할 일루니아가 아 니었다. 일루니아는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라이에 대해 물어 보았 다. 다행히 라이의 외모가 워낙 귀엽게 생겼다보니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수사망은 점점 좁혀졌다. 일루니아는 제대로 밥도 먹지 않고 라 이 찾기에 온 힘을 다했다. 히로에 관계된 일이라면 도와주기는커 녕 훼방을 놓는 일루니아가 어째서 이렇게 라이 찾기에 열심인 걸 까? 그 이유는 일루니아 역시 라이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라 이가 루시아의 딸이라면 일루니아에게는 조카가 되는 것 아니겠 나? 일루니아와 루시아가 자매 사이나 다름 없으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거기에다 비까지 내렸다. 거리에 사람들 이 사라지면서 수사는 난항에 부딪혔다. 실망감에 하늘을 바라보던 일루니아는 허공을 날아가는 희색 새 를 발견했다. " 어! 저 새는 설마……." 멀리서 보았지만 일루니아는 그 새의 정체를 당번에 알 수 있었 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새는 아이리스의 상징인 청안백우조였던 것 이다. " 설마 라이코스?" " 아! 맞는것 같아요!" 인디가 반갑게 소리쳤다. " 저 새를 따라가요." " 예 일루니아님." 둘은 새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고인 물이 사방으로 튀 었다. 신발과 바지가 온통 젖었지만 둘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새의 속도를 쫓아갈 수는 없는 법. 청안백우조는 어느새 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인디는 드래곤의 감각으로 청안배우조가 향한 방향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 제 등에 업히세요, 일루니아님." " 괜찮으시겠어요?" " 예. 전 괜찮아요." 일루니아는 인디의 가녀린 등에 업혔다. 인디는 일루니아를 업 고 쏜살같이 달렸다. 아무리 여리게 보여도 드래곤은 드래곤인 것 이다. 빠르게 달리던 인디의 걸음이 멈추었다. 일루니아는 고개를 돌 렸다. 그곳에는 라이가 비를 맞으며 서 있엇다. 품에는 흰색 매를 꼭 껴얀은 채. " 우에에엥~ 이코야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 미안해, 라이야. 그동안 내가 일이 좀 많아서. 흑~ 우리 이제 헤 어지지 말자." " 그래. 이코야. 이제부터 라이 곁을 떠나면 안돼, 알았지?" " 응, 라이야. 이코는 언제나 라이 곁에 있을게." " ……." 라이 패밀리가 재결성 되는 역사적이고 감동적은 순간이었다. * * * * 난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루시아를 업고 뛰었다. 분식점이 라면 어디 분식점을 말하는 거지? 세 개의 분식점을 돌아다닌 끝에야 난 라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는 포장마차같이 생긴 분식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양 옆에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앉아 있었다. 라이는 입가에 잔뜩 양념을 묻힌 채 떡볶이와 순대를 먹는 중이 었다. 그리고 라이의 옆에는 라이의 유일한 친구이자 절친한 친구 인 라이코스가 있었다. "라이야!" 루시아가 소리치자 라이는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오빠랑 언니다!" 라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맑게 웃고 잇었다. 우리가 얼 마나 가슴 졸였는지도 모르고. 루시아는 내 등에서 내려 라이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는 라이를 와락 껴안앗다. 옷에 떡볶이 양념이 묻는 것도 개 의치 않고. "괜찮니, 라이야? 어디 다친 데 없어?" "예 괜찮아요, 언니." "흑흑~." "언니 우는 거예요?" 루시아는 라이를 껴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라이는 영문을 모 르겠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역시 라이를 껴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꾹 참았 다. 라이 때문에 나와 루시아 애간장이 녹은걸 생각하면…… 다시 는 가출 같은거 꿈도 못 꾸도록 이번 기회에 확실히 혼을 내야지! 루시아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난 라이에게 다가갔다. "오빠아~" 라이는 반가운 표정으로 내 품에 안기려 했다. 하지만 난 라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쪽지 한장 남기고 가출하면 어쩌자는 거야? 오빠랑 언니가 얼 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오,오빠……." "라이는 착한 엘프가 되겠다고 했으면서 왜 가출 같은 걸 해? 가 출은 나쁜 엘프나 하는 거야. 라이는 나쁜 엘프가 되고 싶은 거야?" "훌쩍~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에요. 흑흑~라이는 착한 엘프란 말이에요. 우에에엥~." 라이가 펑펑 울어대자 루시아는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만해. 그 정도 말했으면 라이도 알아들었을 거야." 루시아는 라이를 안고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이의 울 음은 금세 잦아들엇다. 난 표정을 좀 풀며 말했다. "잘못 했지?" "훌쩍~." 루시아는 라이를 안고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이의 울 음은 금세 잦아들었다. 난 표정을 좀 풀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그럴 거지?" "훌쩍~." 다시 끄덕끄덕. 난 라이를 겨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앞으로 다시는 가출 같은거 하면 안돼. 가출은 나쁜 엘프나 하 는 거야. 착한 엘프는 오빠랑 언니 말 잘 들어야돼. 알았지?" "예, 오빠. 라이 앞으로 오빠랑 언니 말 잘 들을게요." 난 아직 남아있는 라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오빠가 화를 낸 건 다 라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라이도 오 빠 맘 잘 알지?" "예." "그럼 언니한테도 가서 '잘못 했습니다~' 라고 말하렴." 내가 라이를 내려주자 라이는 쪼르르 루시아 앞으로 가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잘못 했습니다." 루시아는 기특한지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분위 기가 너무 화기애애하다. 역시 이런 게 가족이라는 거겠지. "오빠랑 언니 이제 화해한 거예요?" 라이는 우리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나와 루시아는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응, 언니랑 오빠랑 화해했단다." "그럼 이제 안 헤어지는 거예요?" "물론이지." 아아~정말 감동적이다. 차갑고 쌀쌀 맞아 냉동 인간 처럼 보이는 일루니아 여사님마저도 이 광경에 감동받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있는 인디는 눈물 까지 흘리며 감동했다. "흑~ 완전 감동이에요." "아! 오빠. 라이 친구 이코가 돌아왔어요." "응, 알고 있단다." 라이는 라이코스를 껴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하여 라 이 패밀리 재결성! 어쨌든 라이가 행복해 하니 나도 행복하다. 난 라이를 들쳐 업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이는 하루 종일 돌 아다니느라 많이 힘들었는지 내 둥에 얼굴을 파묻고 쌔근쌔근 잠 들었다. 난 루시아에게 말했다. " 내일은 셋이서 놀이공원이나 놀러 갈까? 지니가 준 공짜표 아직 남아있는데." " 그래." 루시아는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Story 4 히로의 금연일기 한밤중에 나는 눈을 떴다.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일어나기 싫어 몇번 이불 속에서 뒤척이던 나는 타는 듯한 목마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떡 일어났다. " 무울……." 난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주 저없이 들이켰다. 꿀꺽꿀꺽! " 캬아~ 살것 같네!" 역시 목마를 때 물만큼 시원한게 없다. 그런데 이젠 뭘 하지?다 시침대에 누워봐야 잠이 안 올건 뻔한데. 으음, 모두가 잠든 이 밤에 나 혼자 할수 있는 일이 뭐가 있으려 나? 루시아 방에나 살짝 들어가 볼까? 루시아는 어덯게 자려나? 라이 가 헬로우귀티를 꼭 끌어안고 자듯이, 루시아도 라이를 꼭 끌어안 고자려나? 아아~ 정말 보고 싶다. " ……." 헉! 안돼! 그러다가 변태로 몰리면 어쩌라고? 간신히 루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했는데, 그럴 수는 없어! 난 아쉬운 마음을 접고 그냥 어제 빌려다 놓은 비디오나 보기로 했다. 거실로 걸음을 옮기는데 베란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씨! 전기세가 얼마나 비싼데 어떤 놈이 불을 켜놓고 잤어? 기 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이렇게 에너지를 낭비해서 쓰나! 난 불을 끄기 위해 베란다 쪽으로 갔다. 그런데 그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시간에 누구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난 일단 몸을 숨겼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베 란다를 살펴보았다. 베란다 난간 끝에 귀여운 소녀가 걸터앉아 있었다. 통통하고 동 글동글한 얼굴, 허리까지 흘러내린 회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 머리 카락 사이로 삐죽 나와 있는 길고 뾰족한 귀,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와 아기자기한 이목구비, 입고있는 옷은 땡땡이 무늬가 들어가 있 는 분홍색 파자마다. 한 치수 큰 그 파자마는 약간 헐렁헐렁 해서 소녀의 귀여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앗! 저 귀엽고 깜찍한 소녀는 나의 라이가 아니던가? 라이의 옆에는 라이가 라이코스 다음으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 헬로우 귀티 인형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라이는 난간에 내민 발을 흔들며 헬로우 귀티와 함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중이엇다. 약간 쓸쓸해 보이는 회색빛 눈동자. 그리고 우수에 가득 찬 표정. 그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경건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한 폭의 그림이다! 난 그모습에서 정체 모를 감동을 받았다. ' 우리 라이 뭐하니?' ' 그렇게 난간에 걸터앉아 있으면 위험하단다. 어서 오빠 품으로 오렴.' ……등등의 말을 하고 싶은데 차마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나서는 순간 이 환상 같은 장면이 깨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 다. 난 그렇게 숨어서 계속 라이를 바라보았다. 라이는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학호 있는 걸까? 어째서 저런 표정 을 짓고 있는 거지? 고향이 그립나? 상아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가? 그럼 이건 향수병? 아아~ 그동안 라이에게 무심했던 나 자신이 미워진다. 라이를 슬프게 하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나 같은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해! 혼자서 궁상을 떨고 있는데 라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가 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담배였다. 영어로는 시가렛(Cigaret). 헉! 저것은 내 디플(디스플러스)이 아니던가? 라이가 왜 저걸 가지 고 있는 거지? 라이는 담뱃갑을 톡 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아주 자연스 러운 동작으로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내가 애용하는 지포라이터 로 불을 붙였다. 지포라이터를 여는 동작, 왼손으로 바람을 막는 동작 등등이 너 무 자연스럽고 너무 완벽하다. 사진을 찍어 흡연 교과서에 싣고 싶 을 정도다. 담배에 불을 붙인 라이는 지포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오른손 검 지와 중지로 담배를 잡았다. 그리고 한 모금 길게 빨더니 아주 천천 히 내뱉었다. 후우~! 길게 뿜어져 나온 담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라이는 온갖 고뇌와 슬픔, 망상등이 담긴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 다보며 계속 담배를 피웠다. 라이의 옆에 있는 헬로우 귀티는 그런 라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라이의 옆을 지 키고 있었다(그럼 인형이 갑자기 웃기라고 하겠냐?). 난 눈을 비비고, 볼을 꼬집어 보았다. 하지만 라이는 여전히 그 자 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 뭐야? 지금 내가 꿈을 구고 있는게 아니란 말인가? 그럼 라이가 정말로 담배를 피우고 있단 말인가? " ……." 뭐라? 라이가 담배를 펴? 폐암 및 각종 질병의 원인이자, 임산부 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로움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해롭고,특 히나 어린아이에게는 특히 더 해로운 담배를! 19세 미만 청소년에 게는 판매도 하지 않는 담배를 감히 아직 머리에 피도 안마르고, 호적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라이가 감히!(니는 어렸을때 안?냐?-베낌이) 내 이놈의 자슥을 그냥……! 난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생 각해보니 지금은 일단 상황을 좀더 지켜보는게 좋을 것 같았다. 내 가 갑작스럽게 뛰어들면 라이가 너무 놀란 나머지 베란다 난간너 머로 뛰어 내를 수도 있으니, 물론 뭐 마법을 쓰면 베란다에서 떨어 져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라이는 그냥 담배를 피우는 것이 심심한지 도너츠 만들기를 시도 했다. 라이가 입을 뽁~ 하고 벌리자 담배 연기가 도너츠 모양으로 뿜어져 나왔다. 아니! 흡연 경력 최소 한 달 이상만이 시전할수 있다는 도너츠 만들기 스킬을 저렇게 완벽하게 마스터하다니! 나도 저렇게 깨끗 한 도너츠를 만들 자신은 없는데! 우리 라이는 정말 천재란 말인가? 라이의 '담배 연기 쇼'는 도너츠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범 선 모양의 배를 만들었다. 라이가 후~ 불자 범선은 미끄러지듯이 먼저 만들어 놓은 도너츠 안을 통과햇다. " ……." 뭐야? 지가 간달프야 뭐야? 난 하도 어이가 없어서 계속 지켜보았다. 이윽고 담배가 필터 까 지 타오르자 라이는 손가락으로 담배를 튕겨 버렸다. 그리 고 슬리퍼를 신은 한쪽 발로 담배를 꾹 밟고 비벼주었다. 정말 너무 자연스럽다. 대체 몇 번을 했기에 저런 완벽한 동작이 나오는 거지?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래도 다행이었다. 다음에 이어진 라이의 행동은 나를 완전히 충격에 빠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찍! " ……." 이빨 사이로 침 뱉기 스킬이라니! 아아~저 소녀가 정녕 내가 아 끼고 사랑하는 라이가 맞단 말인가? 혹시 라이로 변장한 누군가는 아닐까? 헬로우 귀티 인형을 안아 든 라이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클린 (Clean) 마법을 사용해서 버린 담배꽁초와 방금 뱉은 침을 깨끗하 게 정리했다. 순식간에 베란다에는 어떠한 증거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완전 범죄라는 건가? 다시 주위를 살피며 혹시나 증거가 남지 않았는지 꼼곰이 살핀 라이는 아장아장 걸음을 옮겼다. 베란다 입구에 숨어있던 나는 거실로 돌아오는 라이의 앞을 가로 막았다. " 앗!" 나를 보더니 놀라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라이. 라이의 얼굴에는 경악, 황당, 난감 등이 섞인 복합적인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마치 얼굴로 '라이는 뭔가 나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오빠~' 라고 말하 는 듯하다. 난 아무 것도 못 본 척 산뜻하게 웃으며 라이에게 물었다. " 우리 라이 베란다에서 뭐 했니?" " 그, 그냥 귀티랑 같이 별 봤어요." 라이는 헬로우 귀티를 꼭 끌어안으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손짓 하나 하나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팍팍 티가 난다. " 별을 봐? 서울에서 별 보기는 하늘에 별따기인데. 보이지도 않 는 별을 어떻게 봤니?" " 마음의 눈으로 봤어요." " ……." 오오~ 심안(心眼)이라는 건가? " 아하하하~ 그랬구나. 오빠는 또 라이가 베란다에서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한 줄 알앗지." " 헤헤~ 그럴 리가 있겠어요? 라이는 착한 엘프잖아요,오빠." 어색하게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 라이. 만약 내가 정말로 아무 것 도 보지 못했다면 라이의 애교에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지 금쯤 라이를 껴안고 부비부비하며 예뻐해 주었겠지. 하지만 방금 일련의 행동들을 지켜본 나한테는 그런 라이의 태도 가 가증스럽게 보였다. 감히 오빠 몰래 담배를 피운 것도 모자라 거 짓말 가지 하다니! 우리 라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역시 교육 환경의 문제인가? " 라이야. 오빠가 다시 한번물을게. 구라치지 말고……아니, 거 짓말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하렴. 우리 라이 베란다에서 뭐 했니?" " 벼, 별 봤어요." 라이는 내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헬로 우 귀티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누가 보면 헬로우 귀티에게 헤드 락 거는 줄 알겠군. " 오빠 눈을 보며 다시 대답해 보렴. 우리 라이 베란다에서 뭐 했 니?" 난 억지로 라이와 시선을 맞추며 다시 물었다. 내 얼굴은 웃고 있 었지만 볼에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난 지금이라도 라이가 솔직하 게 말하고 잘못을 뉘우치기를 바랐다. 하지만 라이는 이런 나의 기 대를 가볍게 배신해버렸다. " 헤헤~ 라이는 정말로 별 봤어요, 오빠." " ……." " 진짜예요." " 그럼 별 보는 동안 뭐 했니?그냥 별만 봤어?" " 예." " 별 보는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 예." " ……." 이젠 아주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난 분노와 배신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어떻게 라이가 나한테 이럴수 있어! 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마지막으로 라이에게 물었다. " 정말로 베란다에서 별만 봤니?" " 예. 정말로 라이는 별만 봤어요." " ……." 뭘 잘 했다고 방긋방긋 웃기까지 하는 라이. 나 역시 웃음을 띄 웠다. " 우리 라이 담배는 맛있었니?" " 예. 라이는 담배가 너무너무 맛있……헙!" 단순한 라이는 역시나 너무나도 쉽게 덫에 걸려들었다. 두 손으 로 자신의 입을 막은 라이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 헤헤~." 애교스럽게 웃는 라이. 난 라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 우리 라이 언제부터 담배 피웠니?" " 그. 그게요……." " 괜찮아. 오빠는 다 이해하니까 안심하고 말하렴." " 한 달 정도 전부터요." " ……."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달이나 피워댔단 말인가? 난 당장이라도 라이의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계속 웃음을 지었다. 파르르! 아아~얼굴 떨려. 라이는 내 얼굴에 이는 경련을 보지 못했는지 계속 귀엽게 웃고 있엇다. " 후후~ 어쩐지 담배가 한개비 두개비 씩 사라지더니만 그게 전 부 우리 라이의 짓이었구나." " 예. 이해해 주실거죠, 오빠?" " ……." 내가 미쳤니? 그런걸 이해해 주게?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서 너 같으면 이해가 되겠니? 니가 지금까지 가져다 피운 담배만 해도 한 보루는 족히 될 텐데. " 그런데 라이가 그렇게 골초가 되도록 오빠랑 언니느 왜 몰랐을 까?" " 그건 라이가 마법으로 깨끗하게 뒤처리를 해서 그래요." " 아아~ 그렇구나. 입 냄새도 그렇게 처리한 거ㅑ?" " 예. 냄새 제거 마법으로 입이랑 옷에 배인 담배 냄새를 깨끗하 게 제거했어요." " 아이구, 우리 라이는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내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라이는 이제 완전히 안심을 했는지 배시시 웃으며 깜찍하게 말했다. " 다 오빠 닮아서 그래요!" " ……." 제발 쓸데없는 것은 좀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 오빠한테 할말 더 없니?" " 있어요." " 뭔데?" " 라이 담배 한 까치 더 배우고 싶어요!" " ……." 한 개비도 아니고 한 까치? 이젠 아주 전문 용어까지 쓰시는구만.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슥슥! " 헤헤~." 라이는 두 손을 가슴게로 모으며 귀엽게 웃었다. 난 라이를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 헤헤~." " 지금 웃음이 나와!"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라이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키다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 딸꾹~!" " 뭘 잘했다고 웃어!" " 딸꾹~!" " 뭘 잘 했다고 딸꾹질을 해?" " 딸꾹~!" "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는 못할 망정. 거짓말을 해? 그리고 뭐? 담배 한까치 더 피우고 싶다고? 그게 오빠한테 할 소리야? 라이 오 늘 오빠한테 좀 혼나야 되겠어!" " 딸꾹~! 우에에엥~ 갑자기 왜 그래요, 오빠? 우엥~ 딸꾹~ 우 엥~." 라이는 딸꾹질을 하며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시작했다. 난 그런 라이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때렸다. 찰싹 찰싹! " 우에에엥~ 딸꾹~ 아파요~ 엉엉~ 딸꾹~!" " 이제 보니 라이는 아주 나쁜 엘프구나. 오빠 몰래 담배를 피우 지 않나, 거짓말을 하질 않나. 루시아 언니가 알면 뭐라고 생각해겠 어? 응? 말해봐." " 우엥~ 라이는 나쁜……딸꾹……엘프……우엥……아니에 요. 우에에엥~." * * * 한창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루시아는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 때 문에 잠에서 깼다. " 한밤중에 누가 큰 소리를 내는 거야?"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루시아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옆으 로 손을 뻗었다. 다시 잠이 들기 전에 라이의 부드러우면서도 푹신 한 감촉을 느끼고 싶었다. 이상하게 라이를 끌어안고 자면 그렇게 잠이 잘 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라이의 감촉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더듬더듬. 아무리 열심히 더듬어 보아도 라이가 없다. 루시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때 들려오는 울음소리. " 우에에엥∼." 이렇게 특이한 울음소리를 내는 아이는 세상에서 오직 딱 한 명. 우리 라이뿐이다! 루시아는 허겁지겁 방을 나왔다.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리고 히로가 라이를 마구 혼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라이는 딸꾹질 을 하면서 울고데 히로는 가차없이 라이의 엉덩이를 때 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라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루시아는 깜짝 놀라 히로를 뜯어 말렸다. " 왜 애를 때리고 그래? 너 미쳤어?" 루시아는 울고 있는 라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 * * 갑작스레 등장한 루시아 때문에 나는 잠시 화를 가라앉힐 수 있 었다. " ……." 가라앉히긴 뭘 가라 앉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라이를 달래던 루시아는 매서운 눈길로 나를 모려보았다. " 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 그게 라이가 잘못을 해서……." " 애가 잘못할 수도 있는 거지. 너는 잘못 안 해? 그리고 애가 잘 못해도 말로 타일러야지 이렇게 때리면 어쩌자는 거야? 폭력은 가 정교육의 가장 큰 적인거 몰라?" " 나도 말로 타이르려고 했는데 라이가……." " 변명하지 마! 라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던 간에 폭력은 용납될 수 없어. 난 라이를 사랑으로 기를 거야." " ……." 매를 대지 않고 사랑으로 기른다는 루시아의 의견에는 십분 공감 한다.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애가 담배 피는 걸 보고 내가 지금 안 때리게 생겼어? 아주 그냥 다리몽둥이를 뽀각∼ 분질러도 부족할 판국인데. 루시아가 안아서 토닥거려주자 라이는 금방 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딸꾹질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루시아는 라이의 등을 부드 럽게 쓸어 주었다. 루시아가 입고 있는 잠옷은 땡땡이 무늬가 들어간 파란색 파자 마. 라이와 세트로 구매한 것이다. 으음, 기왕이면 내 것도 한 세트로 구매해주면 좋았을 텐데. 어쩨서 내 건 안 사준 거지?(하긴 내가 세트로 입어봐야 그리 어울릴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약간 헝클어진 백금발 머리카락과 살짝 구겨진 파자마, 그리고 약간 졸린 표정 때문인지 루시아의 모습에서 백치미가 느 껴졌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루시아가 라이를 끌어안고 았는 장면은 정 말 감동적이다. 눈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미녀와 눈 놀아갈 만큼 귀 여운 소녀. 남들 눈에는 엄마와 딸로 보이려나, 언니와 동생으로 보 이려나? 루시아가 열과 성을 다해 달랴준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라이의 딸꾹질도 멈추었다. 라이는 루시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부비 부비했다. " ……." 이 순간 만큼은 내가 라이이고 싶다. 내가 행복한 상상에 젖어있는 그 순간, 루시아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 대체 라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때릴 데 하나 없는 우리 귀여운 라이를 개 패듯이 팬 건지 이유나 좀 들어볼까?" " ……때릴 데가 없다니. 그래도 잘 찾아보면 은근히 많아. 그리 고 내가 언제 개 패듯이 팼다 그래? 겨우 엉덩이 몇 대 때린 걸 가지 고……." " 아무튼!" " ……" 무섭다. 루시아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다니. 여자는 약햐도 어 머니는 강하다는 건가? 아무리 자식 사랑이 중요하다지만 이렇게 오냐오냐하면 애 버릇 나빠지는데. " 그러니까 라이가 뭘 잘못했냐면……." " 우에에엥∼오빠 미워요오∼언니∼우엥∼." 내가 말하려는 순간 울음을 터트리는 라이. 헉! 미리 선수를 치는 건가? 이런 영악한 것 같으니라고! 역시나 라이가 울자 루시아의 관심은 라이에게로 쏠렸다. " 걱정하지 마, 러이야. 언니가 오빠 혼내줄게." 다시금 나를 노려보는 루시아. 난 이때를 놓칠 새라 재빨리 라이 의 잘못을 술술 불었다. " 그러니까 내가 목말라서 밖으로 나왔는데 베란다에 불이 켜져 있지 뭐야. 그래서 베란다로 가봤는데 거기에 라이랑 헬로우 귀티 가 앉아 있더라고 그런데 라이가 갑자기 담배를 꺼내서 피우기 시 작하는 거야. 그것뿐인 줄 알아? 담배로 도너츠도 만들고 범선도 만들었어. 그리고 나중에는 덤배를 발로 짓이긴 다음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뱉는거 있지?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하니까 자기는 죽어 도 안 했다고 딱 잡아 떼는 거야. 담배를 피운 것도 모자라 거짓말 까지 한 거지. 게다가 오늘 하루만 피운 게 아니라 한 달 동안 줄곧 피워 왔대. 너랑 나를 감쪽같이 속이면서 말이지. 그러니 내가 화 안 내게 생겼어?" 말을 마친 나는 숨을 골랐다. 루시아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그, 그게 정말이야?" " 응. 정말이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내가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라이 를 보았다. " 우리 라이 정말이야?" " 헤헤∼." 차마 대답을 하지 못 하고 귀엽게 웃는 라이. 웬만한 일은 이 웃음 으로 그냥 넘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일은 애교로 넘어갈 만큼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 라이, 언니 눈 보고 말해봐. 방금 오빠가 한 말이 정말이야?" 루시아가 진지하게 묻자 라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손가락을 꼼지 락거렸다. " 그, 그게요……." " 정말이야, 아니야?" " 헤헤∼ 정말이에요. 이해해 주실 거죠?" 라이는 애교 어택으로 이 상황을 무마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온갖 귀여움은 다 떨어댔다. 나는 그 순간 루시아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루시아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이해? 그런 말은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봐!' 루시아의 얼굴에서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루시아는 흥분을 가라 앉히려고 노력하며 라이에게 물었다. " 정말 라이가 담배를 피웠니? 정말로?" " ……예." 라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순간 루시아의 손이 라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찰싹! 찰싹! 찰싹! " 뭐? 담배를 피워? 라이 지금 제정신이야? 어떻게 담배를 피울 수 가 있어? 응? 말해봐. 어떻게 언니를 이렇게 실망시킬 수 있어? 다 른 것도 아니고 담배를 피우다니. 게다가 거짓말까지 해? 이제 보 니 라이는 정말 나쁜 엘프구나." " 우에에엥∼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에요∼." 찰싹! 찰싹! 찰싹! " 그럼 담배 피우고 거짓말하느 엘프가 착한 엘프야? 응? 어서 말 해 봐." " 우에에엥∼." 라이는 펑펑 울었지만 루시아는 가차없이 라이의 엉덩이를 때 렸다. 너무 세게 때리는 것 아닌가? 저러다 애 잡겠다. 난 루시아를 말릴 필요성을 느꼈다. " 저, 저기 루시아. 좀 진정해." "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애가 담배를 피웠다는데." " 그, 그래도 말로 타이르면 잘 알아들을 거야." " 매를 아끼면 애를 망친다고 했어. 이런 건 말로 타일러서 될 일 이 아니야. 아주 혼쭐을 내줘야 해." " 우에에엥∼ 아파요, 언니∼." " 뭘 잘 했다고 울어? 당장 뚝 그치지 못해!" " 우엥∼ 우엥∼." 내 평생 이렇게 화난 루시아의 표정을 보기는 처음이다. 루시아 는 마치 얼음 마녀 카르처럼 냉기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라이가 담배를 피웠다는 것이 그렇게 화낼 일인가? 아니, 애가 살 다가 안 좋은 일이 있고 그러면 담베를 피울 수도 있는 거지, 뭘 그 런걸 가지고……. 요즘 조기 교육이라고 해서 뭐든 알찍 시키는 게 유행이라고 하던데…… 담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 주면 안 되나? " ……." 이해가 안 되긴 하는군. 아무튼 이러다가 진짜 야 잡겠다. 난 일단 루시아의 품에서 라이를 빼앗아 온몸으로 보호했다. 라 이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 콧물 다 묻혀대고 있었다. 난 라이를 달래주며 루시아에게 말했다. " 일단 진정해. 냉정을 되찾아. 이런 식의 체벌은 폭력에 지나지 않아." " 라이 너 어서 일루 와. 어린 게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가지고. 당 장 일루 못 와!" " 우에에엥∼ 오빠아∼." " 괜찮아, 라이야. 오빠가 지켜줄게. 제발 진정해, 루시아. 이 어 린 게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난 라이를 달래며 루시아를 말렸다. 그렇게 한참을 씨름한 끝에 야 간신히 루시아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어느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강렬한 햇빛이 모 습을 드러냈다. 날이 밝은 것이다. 방문이 열리며 인디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인디는 곧장 화장실 로 갔다. 잠시 세수하는 소리가 나더니 인디가 화장실 밖으로 나왔 다. 그제야 우리를 발견한 인디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앗! 왜 다들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 너야말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니?" " 아침 준비해야 하잖아요." " ……." 그렇군 부지런한 주부라는 건가? " 그런데 너 아까 시끄러운 소리 못 들었니?" " 못 들었는데요. 자기 전에 방음 마법을 펼치고 잤거든요." " ……." 방음 마법? " 아니, 왜 방음 마법을 펼쳤을까? 무슨 이유로 방음 마법을 펼쳤 을까? 방음 마법을 펼친 것은 밖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 일까, 안의 소리가 밖에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까?" " 그, 그건……." 참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붉히는 인디. 아아∼ 더 이상 말해 무 엇 하겠는가?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이 저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짐작이 간다. 헉!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아! 난 언제쯤 루시아랑 방음 마법 펼치 고 자보려나? " 후후∼ 그래서 조카는 언제쯤 생기는 거야? 응? 응?" " ……." 더욱 더 새빨개지는 인디의 얼굴. 여기서 한 번 더 놀렸다가는 폭 발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지금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우리 라이가 담배에 맛을 들였다는 거다. 원래 담배라는 게 맛들이긴 쉬워도 끊 기는 어려운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라이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담배를……. " ……." 생각해보니 700살이구나. 뭐, 700살이면 미성년자는 아니군. 하 지만 라이의 육체적 연령과 정신 연령을 생각할 때 담배는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요즘 담배값이 얼마나 비싼데! KT&G(한국담배인삼공 사)에 돈 퍼주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하다. " 라이야, 대체 왜 그런 거니? 응? 뭐 떄문에 담배를 피운거야? 언 니 마음 아프게." 루시아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 다. 난 루시아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 너무 그렇게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 담배라는 게 꼭 그렇 게 나쁜 것만은……." 찌릿! " …… 담배는 나쁜 거야. 그런데 그런 나쁜 담배를 피웠단 말이 야? 라이 오빠한테 혼나 볼래?" 활활 타오르는 루시아의 눈빛을 접한 나는 재빨리 말을 바꾸었 다. 그리고 라이한테 호통을 쳤다. 라이는 또 다시 펑펑 울기 시작 했다. " 우에에엥∼." " 아앗! 괜찮으신가요, 라이님?" 인디는 다년간 단련된 솜씨로 라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인디가 라이를 달래는 솜씨는 신기에 가까워 라이는 금방 울음을 그친다. 으음, 좀 보고 배워야겠군. * * * 우리는 거실에서 부엌으로 장소를 옮겼다. 루시아는 갈증이 나 는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함인지 찬물을 꿀꺽꿀꺽 들 이켰다. 라이는 인디가 준 우유를 홀짝홀짝 마셨다. 너무 열심히 울었기 때문인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모습은 모든 이들의 가 슴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했다. " 어서 말해보렴. 어쩨서 담배를 피우게 되었느지 말이야." " 그게요……." 입만 우물우물거릴 뿐 말을 못 하는 라이. 심문의 방법이 잘못되 었군. 이렇게 닦달을 해서 쓰나? 난 라이의 입에 담배를 물려 주었다 " 뭐 하는 짓이야!" 놀란 루시아는 라이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으며 외쳤다.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라이. 난 당황하며 변명했다. " 아니, 왜영화같은 것을 봐도 그렇잖아. 피의자 심문할 때 담배 하나 물려주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 ." " 시끄러!" " ……네." 아아∼ 루시아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나. 결혼도 안 했는데 이렇게 잡혀 살다니. 그래도 루시아와 함께라면 잡혀 살아 도 좋아∼ 이야기는 다시 라이 심문으로 돌아와서…… . 루시아가 몇 번 달래며 질문을 한 끝에야 라이는 입을 열었다. " 라이는 원래 담배 같은 거 정말 싫어했어요. 오빠가 라이 얼굴 에다 대고 담배 연기 불 때는 숨이 막혔구요." 찌릿! " 하하, 그게 언젯적 일인데…… ." " 어느날 밤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밖으로 나왔는데 오빠가 담 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였어요. 베란다 창틀에 기대 피고 있었는데 굉장히 멋있어 보였어요." " 푸하하! 내가 좀 멋있긴 하지." 찌릿! " ……조용히 할게." " 라이가 화장실을 나왔는데 담배랑 지포라이터가 탁 자위에 올려져 있었어요. 그래서 호기심에 그만……." " 호기심에 손을 댄 거야?" " 처음에는 맵고 썼는데 피다 보니 맛있어서……." " 그래서 계속 피게 된 거야?" " 예." 루시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그런데도 라이는 잘못했다고 빌기는커녕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 담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세수 증대에도 효과가 있고. 모든 사람이 담배를 끊으면 국가 재정에 심각한 타격이 와요. 담배에 붙는 세금만 해도 50퍼센트가 넘으니까요. 그리고 담배 재배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농민들을 생각하 면……." " 아∼!" " 루시아!" 난 재빨리 루시아를 부축했다. "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 같으니! 그렇게 안 봤는데 라이는 아주 나쁜엘프 였구나. 어서 언니에게 잘못했다고 빌지 못해!" " 그, 그치만…… 오빠도 담배 피잖아요!" " 헉! 그, 그건……." 여기서 왜 날 걸고 넘어진다냐? " 오빠는 어른이니까 괜찮아!" " 어른이니까 괜찮으면 루시아 언니가 담배 피워도 괜찮아요?" " 뭐라? 루시아가 담배를…… 헉! 그건 절대 안 돼!" " 라이도 이제 자랄 만큼 자랐어요! 라이는 계속 담배 피울 거예 요!" " 뭐라고? 내 이놈의 자슥을 그냥……." " 꺄아! 자, 잠깐만요! 진정하세요, 히로님"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인디는 온몸으로 라이를 감싸 안으며 나를 말렸다. 나도 정말로 때릴 생각은 없었기에 일단 손을 내렸다. 아아∼ 하지만 정말 충격이다. 우리 라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 었단 말인가? 담배나 피고 언니 오빠한테 대드는 불량 엘프가 되다 니. 이것은 내가 애 교육을 잘못 시켰기 때문일까? 평소에 매를 좀 들었어야 했는데. 원래 애들은 패서 가르치는 것 아니겠나? 나 어 렸을 땐 정말 많이 맞고 자랐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 각 될 정도로. " 어서 히로님과 루시아님한테 잘못했다고 비세요." 인디의 말에도 불구하고 라이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획 돌렸다. " 흥! 라이는 잘못한 거 한 개도 없어요!" " 아∼!" 이번엔 내가 쓰러진다. 부축해 줄 사람? 그런 거 없다. 콰당! " 꺄아! 히로님∼!" 소리 좀 지르지 마라. 귀 아프다. * * * " 야, 너 피자 만들 줄 알지?" " 예? 알긴 아는데요. 그런데 갑자기 왜?" " 고구마 두 줄짜리로 한 판 만들어라. 훼밀리 사이즈로." " 예에?" " 뭘 그렇게 놀라?" " 아침부터 피자라니요? 느끼하지 않을까요?" " 괜찮아. 내가 먹을거 아니니까." 인디는 내가 시킨 대로 고구마 두 줄짜리 피자를 만들기 시작했 다. 재료가 약간 부족하긴 했지만 그런 것 정도는 인디의 솜씨로 다 커버가 되었다. 이윽고 오븐에서 피자가 구워져 나오자 난 그것을 라이의 앞에 놓았다. " 라이야. 우리 피자를 먹으며 진솔한 대화를 나눠 보자꾸나." " 오물오물……예, 오빠." 벌써부터 집어 먹다니. 피자를 향한 라이의 무한한 욕망에 다시 한번 감탄하는 바이다. 아침부터 피자와 콜라를 먹다니. 미국인도 아니고……. " 라이야 담배 같은 거 피지 마. 응? 이 언니가 이렇게 부탁할게." 루시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라이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담배 가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담배에는 약 4천 종의 독성 화학물질이 포함되어 있고, 이중에는 발암물질도 포함되어 있으며, 일산화탄소는 혈액의 산소 운반 능 력을 감퇴시키고 만성 저산소증 현상을 일으켜 신진대사에 장애를 주고 조기 노화 현상을 일으킨다. 담배를 많이 피우거나 담배연기 가 가득한 방에 오래 있으면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멍해지는 것이 바로 이 일산화탄소 때문이다. 니코틴은 아편과 같은 수준의 습관 성 중독을 일으키는 물질로 간단히 말하자면 마약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금단증상으로는 불안, 초조, 안절부절, 집중력장애 등이 있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 30∼40분에 한 개비씩 피워야 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니코틴 때문이다. 니코틴 자체에는 별 다른 독성은 없지만 중독을 일으켜 담배를 계속 피우게 하는 것이다. 니 코틴은 뇌의 특정부위 뇌세포에 작용하며 뇌의 모든 신경전도 물 질과 내분비계에 영향을 준다. 담배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으로는 호흡계 질환, 심혈관계 질환, 구강 질환 등등. 폐암의 90퍼센트가 흡연으로 인해 발생되며 폐암 사망률은 비흡연자에 비해 6∼9배 정도 높다. 구강암 걸릴 확률도 무지하게 높아진다. 그리고 입 냄새 나지, 이빨 누렇게 변하지. 아무튼 담배는 무지하게 나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나쁜 담배를 피우는 놈도 나쁜 놈이다. 그런 놈들은 사회악이니 전부 제거해 버 려야 한다. " 저, 저기 루시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사회악이라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아?" 찌릿! " 나, 나도 담배 피우는데……." " 그럼 끊어!" " ……." 담배를 끊느니 차라리 인생을 끊겠다. 담배를 안 피우고 십 년 더 사느 니, 담배를 피우고 일찍 죽으련다. ……이게 바로 나의 인생 모토다. 담배 좀 핀다고 그렇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담배 피는 게 죄인가? 무슨 마약하 는 것도 아니고, 국가에서 공인한 기호품을 내 돈으로 사서 내가 피 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 사실 그동안 금연 열풍이다 뭐다 해서 흡연자들의 권리가 개무시 당해왔다. 물론 비흡연자 입장에서는 간접흡연 등의 문제를 제기 할 수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인정한다. 그래서 금연 장소 많 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담배 못 피게 하는 나 라도 있다. 담배가 정말로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 국가에서 강력하게 규제를 하면 되지 않나? 하지만 국가에서는 생색내기 규제만 할 뿐 제대로 된 규제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텔레비전 광고까지 해댄다.(직접 적인 담배 광고는 금지 되어 있어서 KT&G 브랜드 광고만 한다.). 국가가 하는 규제라고 해봐야 담뱃값 올리기다. 참고로 담뱃값 인상은 원가 상승으로 인한 부담과는 아무런 관련 이 없다. 전부 담배에 붙은 세금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 다 국가는 말한다. 국민 건강을 생각해서 담뱃값을 올린다고. 담뱃 값이 오르면 흡연율이 줄어든다나 뭐래나. 차라리 '국가가 돈이 좀 필요해. 그런데 다른 데서 세금 걷기는 좀 그렇잖아. 만만한 게 흡연자들이니 니들이 돈을 좀 더 내야겠 다. 억울하면 끊던가.'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깔끔하고 좋아? 흡연자들에게 세금 삥 뜯으려는 것이 빤히 보이는 데 뭔 국민 건강을 생각한다고 지랄 이야. 흡연자들을 바보로 아나?(국가 입장에서 흡연자는 '호구' '봉' ' 핫바지'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 좋다. 국민 건강을 생각해서 담뱃값을 올린다는 국가의 취 지에 맞게 전 국민이 담배를 끊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그렇게 되 면 국가 재정이 흔들린다. 이거 농담 아니다. 담배로 걷는 세금만 도 한 해에 대략 4조원 정도 된다. 총조세에 대한 담뱃셋 분담율이 4 퍼센트에 이른다. 즉, 전 국민이 열 받아서 담배를 끊으면 100퍼센 트 걷혀야 할 조세가 96퍼센트밖에 걷히지 않게 되는 거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가가 국민들 담배 끊기를 바라겠는가? 내가 가장 짜증나는 것은 이러한 국가의 이중성이다. 국민 건강 을 위해서 담뱃값을 올리겠다고 말하면서 은근히 국민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기를 바라는 이중성. 정말로 국민 건강을 생각한다면 담배 가격을 500원 1000원 올리지 말고 한번에 1억 정도 올려라. 그럼 알 아서 전 국민이 금연한다. 국가의 허락 하에서 정당하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담배를 피우 는데 죄인 취급하는 거. 이제는 좀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흡연 금지 법안을 국회에 통과시켜서 정말로 흡연자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던가(이건 또 나름대로 끔찍하군. 만약 이런 법안이 통과되 면 난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아∼ 생각을 하다보니 진짜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 화를 삭히려면 담배를 피우는 수밖에 없다. 젠장! 내가 이래서 담 배를 못 끊는 다니까. 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었다. 니코틴과 타르, 기타 독성물질 이 폐 깊숙한 곳까지 공급되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역시 나에게 있어서 담배 없는 인생은 앙코 없는 찐빵, 오광없 는 화투, 조커 없는 트럼프나 다를 바가 없다. " 후우∼ 이게 바로 인생의 행복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인새의 행복은 뭔 인생의 행복? 당장 끄지 못해? 애 보는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이건 루시아의 말. " 맞아요. 어서 끄세요." 이건 인디의 말. 아아∼ 정녕 내 편은 없단 말인가?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온갖 눈 치를 다 받아야 하다니. 내가 탄식하는 순간 내 편이 등장했다. " 옛 성현이 말씀하시길 '식후연초면 불로장생이라(食後煙草不老 長生)'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또 말씀하시길 한 대의 담배 로 인생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니 세상에 그 어떤 묘약보다도 위 대하다 하였습니다." 갑자기 나타나 청산유수로 말을 해대는 이 사람은 바로 사일런스 지니.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와 탄탄하고 호리호리한 몸 매, 수려한 얼굴. 여자들이 한눈에 반할 것 같은 완벽한 외모다. 그뿐인가? 초외모(남들보다 월등하게 잘생겼음을 일컬음)는 기본이다. 여기에 초똑똑(남들보다 월등하게 똑똑함을 일컬음), 초주먹(남들보다 월등하 게 싸움을 잘함을 일컬음), 초매너(남들보다 월등하게 매너가 좋음을 일 컬음) 등등이 옵션으로 달려있다. 그야말로 여자들이 바라는 완벽에 가까운 이상형. 보통여자들은 지니를 보는 순간 신음성을 내뱉으며 픽픽 쓰러지 지만 루시아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니의 외모에 넘어가지 않 는다. " 대체 그런 말 한 사람이 누군데?" 루시아의 질문.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식후연초면 불로장생 이라니! 한 대의 담배로 인생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니 세상에 그 어떤 묘약보다도 위대하다니! 대체 그런 명언을 누가 남겼단 말인가? 지니는 나를 보며 말했다. " 그러한 명언을 남기신 분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대마법 사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후계자이자 현재 아이리스의 명예 공작 으로 계시는 아이언스 히로님이십니다." " ……." 뭐야 내가 한 말이었나? 찌릿! 루시아가 노려보자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 아니야.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난 강력하게 부정을 했다. 그러자 지니가 말했다. " 아니, 아이리스 2권에서 하신 말씀을 벌써 잊으셨단 말씀이십니 까?" " ……." 그런 것 까지 기억하고 있냐? 참 별 걸 다 기억하는군. " 잠깐! 생각해보니 댁은 2권에선 등장도 안 했잖아! 댁이 등장한 건 5권으로 알고 있는데?" " 아이언스 공작님을 흠모한 나머지 1권에서 15 권까지 정독하였습니다." " 아아∼그렇군요∼." " 그렇습니다." " ……." ' 아아∼그렇군요∼'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 이상해도 뭔가 심하게 이상하다. 원래 책 속에선 이런 대사가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냐? 책 밖의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아무튼 내편이 하나 등장하니 정말 다행이다. 사일런스 지니는 자타가 공인하는 애연가 아니겠는가? "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사일런스 백작님?" "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권해주시는 담배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 습니까?" 난 지니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손수 불까지 붙여 주었다. 우리 는 사이좋게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며 담배를 피웠다. " 라이한테도 한 까치 주세요." 아주 당당하게 담배를 요구하는 라이. " ……." 할 말이 없군. 놀란 루시아는 나와 지니한테 버럭 화를 냈다. " 당장 꺼!" " 이것만 다 피고. 장초를 버릴 수 없잖아." 옆에 지니가 있었기 때문일까? 루시아도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하 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촤악! 루시아는 물 컵에 있던 물을 내 얼굴로 쏟았다. 담뱃불은 꺼졌고, 네 얼굴은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 이게 무슨 짓이야!" " 애 교육에 안 좋아. 그렇게 피고 싶으면 나가서 펴." " 아무리 그래도 물을 끼얹다니! 너무하잖아!" " 난 라이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어!" " ……" 아아∼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니는 내가 당한 것을 봤기 때문인지 어느새 담배를 껐다. 약삭 빠른 인간 같으니! 그나저나 지금 중요한 일은 라이의 흡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 냐, 이다. 라이가 계속 담배를 피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으음, 그런데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담배를 피는 라이의 모습…… 정말 귀여웠다. 뭐랄까? 언밸런스함이 오히려 색다른 귀여운으로 다가왔다고나 할까? 담배피는 라이라……? 의외로 괜찮은 컨셉인 걸. 사진 한방 찍 어놨어야 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라이가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 그렇게 나쁘게 만 볼 것도 아니다. 아무리 어린애지만 살다보면 고민이 있을 수도 있는거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다 보 면 담배를 피울수도 있는 거지. 그걸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지 않나? 적어도 애가 탈선의 길로 접어드는 것보단 낫잖아. 저번처럼 가출하면 어쩌려고? 당구장이 나 PC방 전전하는 라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계단에? 쪼그려 앉 아 컵라면을 먹는 라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아아∼ 이 얼마나 비 참한가?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나와 루시아는 UN 인권위에 제 소 당할지도 모른다. 흠흠, 아무튼 라이가 담배를 계속 피우면 다음과 같은 일도 가능 해진다. 나: 라이야∼. 우리 라이 뭐하니이? 라이: 아! 오빠다. 라이는 배가 불러서 소화시키는 중이었어요. 나: 뭐? 소화? 소화하는 데는 담배가 최고지. 자, 어서 한 까치 피렴. 라이; 와아! 나: 그렇게 좋니? 라이; 네! 라이는 담배가 너무 좋아요! 막막 좋아요! 나와 라이는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운다. 나: 라이야. 요즘 고민 같은 거 없니? 라이: 하아∼ 고민이 왜 없겠어요, 오빠. 오빠는 고민 없어요? 나: 물론 있지. 요즘 루시아가 저기압인 것 같아서 큰일이야. 라이: 힘내세요, 오빠. 나: 그래. 너두. 아아∼ 서로 맞담배를 피며 인생의 고민을 나누는 모습이라니! 이런 게 진정한 사랑 아닐까? 아님 말구. " 이리로 오렴." 루시아는 라이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타이르기 시작했다. " 라이가 담배를 피우면 언니 마음이 슬퍼져. 그러니까 담배 같은 거 피지마, 라이야." 루시아의 간절한 말에 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라이가 담배 피는 데 왜 언니가 슬퍼져요?" " 담배는 몸에 안 좋으니까. 라이가 몸에 안 좋은 연기를 들이마 시는데 언니 마음이 편할 리 있겠니?" " 하지만 오빠가 연기 들이마실 때는 아무 말씀 안 했잖아요." " 그건……아무튼 라이는 담배 피면 안 돼." " ……" 뭐야? 난 담배 피다 일찍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정말 그런 거 야, 루시아? " 오빠는 피잖나요." " 오빠는 어른이잖아." " 어른은 피워도 되는 거예요?" " ……" " 그럼 언니랑 인디 오빠랑 일루니아 언니랑 라이레얼 언니랑 다 펴도 되는 거예요?" " 그, 글쎄……." " 라이도 자랄 만큼 자랐어요. 라이 나이가 몇 갠데." " 그,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튼 안돼." " 어째서요?" " 안 되니까 안 돼." " 안 되니까 안 된다는 것은 논리적 부재가 아닌가요?" " ……." 앗! 루시아가 밀린다. 라이가 언제 저렇게 말을 잘하게 되었지? 저것도 다 나의 교육의 결과? " 라이 자꾸 언니한테 말대꾸 할래? 그런 나쁜 버릇 어디서 배웠 어?" 말발에서 밀리니까 화를 내다니. 저건 내가 라이에게 자주 써 먹 었던 수법이 아니던가? 설마 저거 나한테 배운 건가? " 우에에엥∼ 언니는 라이만 미워해∼." " 아, 아니야. 미안해, 라이야. 언니 화 안 낼게. 그러니까 울지마. 언니 진짜로 화 안 낼게." " 훌쩍∼." 라이가 울기 시작하자 루시아는 깜짝 놀라 재빨리 라이를 달랬고 라이는 금방 울음을 그쳤다. 사실 너무 많이 울어 이젠 울 힘도 없을 거다. 그러고 보니 오늘 라이 정말 많이 울었군. 라이의 수난 시대인가? " 대체 어떻게 하면 담배를 끊을 거니? 응? 말해봐, 라이야." " 안 끊을 거예요." " 뭐? 라이 정말 언니한테 혼나 볼래!" " 우에에엥∼ 언니 화 안 낸다고 해놓구선 또 화내∼. 우엥∼ 우 엥∼." " 앗! 미안해, 라이야." 라이의 귀여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루시아. 원래 애가 말을 안 들으면 혼내거나 때려야 하는데 라이가 울 시늉이라 도 하면 깜짝 놀라 달래기 바쁘다. 쯧쯧, 이래서 애 교육 시킬 수 있겠어? 애를 교육 시키려면 때론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측은지심을 모두 벗어버리고 맹수처럼 잔혹 해질 필요가 있다. " ……." 뭐, 그 정도로 잔혹해질 필요까지는 없지만 아무튼 조금 냉정해 질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애한테 너무 오냐오냐하면 버릇 나 빠진다는 것은 이미 치맛바람에 휩싸여 인생을 살아온 수많은 마 마보이들이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아무튼 내가 보기에 루시아의 방법은 크게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 다. 특히나 논리성의 부재 가장 큰 문제다. 라이같이 꼬치꼬치 따 지기 좋아하는 애한테는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래서 내가 나서기로 했다. " 좋아, 라이야, 계속 담배를 핀다고 하자. 그런데 담배는 어떻게 구해서 필 건데?" 나의 물음에 라이는 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 그건…… 오빠 꺼……." " 내 담배를 왜 니가 펴? 이제까지 핀 담뱃값이나 정산하렴. 대충 한 보루라 가정하면 한 1만 5천원에서 2만원 정도 나오는군. 그리고 정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니가 직접 돈 벌어서 사서 펴." " 도, 돈이요?" " 그래. 밖에 나가서 고구마를 팔든 앵벌이를 하든 직접 벌어서 피란 말이야. 알았어? 우리나라같이 정부가 심심하면 담뱃값 가지 고 장난치는 나라에서 담배는 부르주아들의 기호품이야. 돈 없는 서민들이 손 댈 물품이 아니란 말이지. 세상은 오직 자본주의 논리로 돌아간다.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돈을 벌어와!" " ……." 아무말도 못 하는 라이, 훗∼ 나의 승리군. " 하, 하지만 오빠는 피잖아요." " 난 돈을 벌잖아. 저 인형가게가 누구 건데?" " ……." 훗∼ 나의 2연승이군. " 그, 그럼…… 라이는 돈 벌어서 피울 거예요!" " 니가 무슨 수로 돈을 벌어?" " 앵벌이라도 할 거예요!" " 뭐? 앵벌이를 한다고?" 순간, 내 머리속에서 마수 시뮬레이팅 되는 장면 오후 시간의 지하철. 러시아워 시간을 피한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거나, 책 을 읽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때 한 소녀가 들어온다. 소녀는 고양이 귀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에는 검대이가 묻어 저금은 지저분하게 보인다. 하지만 소 녀는 보고 있는 사람의 숨을 멎을 만큼 귀엽고 깜찍하게 생겼다.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얼굴, 고양이 털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회색 머리카락,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회색 눈동자. 소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눈으로 처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 한다. " 훌쩍∼ 라이는 담배가 피고 싶어요∼." 그리고는 고양이귀 모자를 벗어 천천히 걸어간다. 감수성이 여 린 한 여대생이 지갑채로 모자 안에 넣어준다. 그리고는 소녀의 손 을 꼭 붙잡으며 말한다. " 이 돈으로 피고 싶은 담배 마음껏 피렴." " 예. 고마워요, 언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고양이귀 모자에 돈을 짐 어 넣는다. 순식간에 그 지하철 칸에 있던 사람들은 거지가 되었다. 소녀는 다음 역에서 내려 가게로 걸어간다. 그리고 돈을 내밀며 말한다. " 담배 주세요." 그러자 주인이 말한다." " 어머, 아빠 심부름 왔나 보구나. 여기 있다." "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한 소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유유히 걸음을 옮긴다. 으음, 우리 라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실 앵벌이 할 필요 도 없다. 라이가 가게에 가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가게 주인을 보며 ' 담배 한 갑만요∼' 라고 하면, 가게 주인은 한 갑이 아니라 한 보 루라도 아낌없이 줄 것이다. 라이의 애교 어택에 그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라이는 무적이라 할 수 있다. 음음, 이제부터 최강라이라고 불러 줘야 하나? 그럼 난 영웅히로?(다시 말하지만 내 이름 박영웅이다) " 안돼! 앵벌이라니! 앵벌이가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아무튼 라이를 앵벌이로 내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그 꼴 못 보지. " 그냥 오빠가 한 보루 줄게." " 와아∼ 정말요?" " 물론이지. 라이는 누가 세상에서 제일 좋니?" " 오빠요!" " 푸하하∼ 자, 어서 오빠 품에 안기렴." " 오빠아∼." " 지금 뭐하는 거야?" 루시아는 화를 저럭 냈다. 그 때문에 난 다시 태도를 바꿔야 했다. ' 생각해보니 안 되겠구나. 미안하다, 라이야. 하지만 이 오빠의 마음은 언제나 라이를 지지한단다. 이 오빠도 고등학교 때 갖은 모 욕과 치욕을 당하며 담배를 피웠단다. 하지만 이 오빠는 주위의 압 박에도 굴하지 않았고 꿋꿋이 지금까지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단다. 그러니 우리 라이도 힘내서 계속 피다보면 언젠가는 담배갑으로 금자탑을 쌓을 날이 올 거야." " 애 앞에서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퍼억! 루시아는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졌고, 미처 피하지 못한 나는 그 의자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 커억! 뼛속까지 아프다!" " 괜찮으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 ……댁은 이게 괜찮아 보입니까?" " 아니요 별로 괜찮아 보이지 않는군요." " 그럼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요!" " 알겠습니다." " 라이야. 이 오빠는 비록 이렇게 쓰러지지만 우리 라이는 끝까지 투쟁을 해서 흡연권 쟁취를 하길……." 퍼억! * * * 깨어나 보니 새하얀 손이 내 머리위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놓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루시아가 던진 피자판을 맞아 기절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미 안하게 생각한 루시아가 나를 간호해 주고 있다는 것. 헉! 루시아가 날 간호해 주다니! 이런 영광이! 지금 루시아는 나에게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겠지? 좋았어! 이 순 간 루시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그녀의 입술을 노리는 거야! 미안 한 마음이 있는 루시아는 분명 거절 못하고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 올 거야!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 그렇게 생각한 난 물수건을 올려놓는 손을 덥석 붙잡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뜨거운 열정을 담아 말했다. " 사랑해. 내 사랑은 오직 너뿐이야." "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 곤란하군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에게 그런 마음이 있으실 줄은……." " ……!" " ……?" " 으아악!" 난 비명을 지르며 침대의 끝 쪽으로 후다닥 물러났다. " 너, 넌 뭐야? 니가 왜 여기 있어?" " 아이언스 공작님을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간호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였다. 지니 는 한 손으로 금발머리를 멋지게 쓸어 넘겼다. 지니의 손은 마치 여 자 손처럼 손가락이 가늘고, 애기 피부처럼 뽀샤시 했다. 태어나서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듯하다. 저게 정말 남자 손이란 말인가? " 아무튼 이걸로 아이언스 공작님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저를 생각해주시는 그 마음……가슴 깊이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 간직하지 마!" 아아∼ 요즘은 이 인간 얼굴만 봐도 혈압이 오른다. 난 지금 안정 을 취해야 하는데. 생각 같아선 이 인간을 당장 아이리스 왕궁으로 날려 보내고 싶다. 내가 그러지 못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지니가 사라지고 나면 매 편이 아무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사방이 적이 되는 셈이 지. 으음. 비참하군. " 지금 몇 시죠?" " 오후 두 시입니다." " 라이랑 루시아는요?" " 거실에 계십니다." " 인형집은요?" " 크로니스님이 여셨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생각됩니다." " 그렇군요." 크로니스에게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지게 되는군. 나중에 밥 한 끼라도 사던지 해야지. "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누워 계신 동안 루시아 공주님과 저희 누 님께서 라이님의 설득 작업에 나섰습니다." 뭐라? 일루니아 여사님까지? " 그래서?" " 그 결과 라이님께서는 철저한 금연주의자가 되셨습니다." " 뭐라!? 흡연주의자도 아니고 금연주의자? 아니, 어떻게 세뇌를 시켰기에……?" "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 무슨 문제요?" " 그건 직접 들으시는 편이 나으실 겁니다." 지니의 말에 난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 소파에는 루시아와 라이, 그리고 나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 과 여사님의 남편인 인디가 있었다. 약간 치켜 올라간 눈 , 그리고 한 쪽이 말려 올라간 입 꼬리, 팔짱 을 끼고 있는 거만한 자세 등등. 이것이 지금 일루니아 여사님이 취하고 있는자세였다. 뭐야? 저 아줌마 왜 저래? 내가 다가가자 라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품에 포옥∼ 안겼다. " 오빠. 일루니아 언니랑, 루시아 언니랑, 인디 오빠가 담배는 나 쁜 거라고 했어요!" " 그, 그러니?" " 담배를 피우면 나쁜 엘프도 아니고 불량 엘프라고 했어요." " 꼬, 꼭 그렇지만은 않아. 담배 피는 착한 엘프가 얼마나 많은 데." " 아니에요, 오빠. 담배는 무조건 나쁜 거예요." " ……." 방금 전까지 흡연권 쟁취를 위해 투쟁하던 라이가 이렇게 180도 바뀌다니! 대체 애한테 무슨 세뇌 교육을 시켰기에?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 그러니까 오빠도 담배 담배 끊으세요!" " ……." 뭐? 뭐라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 오빠도 담배 끊으세요! 담배는 나쁜 거예요!" " ……헉!" 난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라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가차없이 나를 몰아 붙였다. " 라이도 담배 안 필 테니까 오빠도 피지 마세요!" 내가 아직 잠을 덜 깼나? 어떻게 라이가 오빠한테 그런 잔인한 말을! 라이만 나에게 금연을 강요하는 게 아니었다. 루시아까지 나서 서 거들었다. " 라이 말대로 이베부터 담배끊어." " 루, 루시아……." " 우리 귀여운 라이도 담배 끊으라고 말하잖아. 그럼 끊어야지." " 하, 하지만……." " 그리고 나도 전부터 너 담배 피는 거 맘에 안 들었어. 비싸고 몸에도 안 좋은 담배를 왜 그렇게 많이 피우는 거야?" " 하루에 두 갑이면, 한달이면 60갑이야. 한 갑에 2000원 이라고 가정하면 자그마치 12만원이지." " ……." 주부 다 됬구나. 담뱃값 계산하는 걸 보니. ' 하, 하지만 담배는 나의 삶의 활력소이자 나를 살아가게 하는 삶 의 원동력이야. 그걸 끊으라고 한다는 것은 나보고 죽으라는 것이 나 다를 바가 없어." " 아니야. 담배는 무조건 끊어야 돼." " 그, 그동안은 괜찮았잖아.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 일루니아 언니의 말을 듣고 깨달았어. 담배를 피우는 것을 지켜 본다는 것은 자살 방조죄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부턴 나도 절대 내 앞에서 담배 피는 것을 그냥 보고 넘기지 않기로 했 어. 인형집 안에 있는 흡연구역도 오늘부터 철폐할 생각이야." " 헉! 인형을 사랑하는 흡연자들은 어쩌라고?" " 이제부터 인형을 사랑하는 금연자가 되어야겠지." " ……." 루시아의 의지는 분명하면서도 확고했다. 난 그 어떤 말로도 루 시아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응 강력 한 세뇌 교육의 결과다! 그리고 이런 세뇌 교육을 시킨 사람은……. 난 고개를 돌려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았다. 이제야 일루니아 여사님이 왜 저런 포즈를 취하고,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널 한번에 죽이지는 않겠다. 금연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거다. 금단 증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껏 비웃어 주마. 오호호호∼.' 이, 이 아줌마가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래서 루시아와 라 이르 포섭한 거였어. " 금연할 거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묻는 루시아. 난 루시아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을 느낄 겨를도 없이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야 했다. 루시아의 말이라면 간과 쓸개까지 다 빼줄 준비가 되어 있는 나다. 하지만 금연을 하라는 요구는 도저히……. "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루시아를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지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이라면 분명 들어줄 수 있을 텐데. 루시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루시아에 대한 사랑이 부 족 하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네요." 이때 난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아무리 날 갈궈도 꿋꿋이 버터야 했다. 하지만 나는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 뭐라구요? 제가 루시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구요? 이 세상에 저만큼 루시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루시아에 대한 저의 사랑을 금연으로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헉! 내가 무슨말을! " 어머, 그러시군요. 루시아에 대한 사랑을 금연으로 보여 주신다 니…… 그럼 금연을 하겠다는 말씀이시고, 만약 흡연을 할 시에는 루시아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의미가 되겠군요. 그 말씀 꼭 기억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 와아! 대단해요, 오빠! 라이가 응원할게요!" " 고마워, 히로. 날 위해 금연 하겠다니. 솔직히 감동 되네. 헤헤∼ 아무튼 나도 응원할게." " 저도 응원할게요, 히로님." 헉쓰! 단순엘프 라이도 안 걸릴 법한 도발에 내가 걸려 넘어 가다니. 하지만 상황은 이미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어느새 모두가 박수까지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상황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금연 같은 건 안 하는게 좋을 것 같아' 라고 말했다간 맞아 죽을 것 이 뻔하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나? 지니는 어디갔지? 지니라면 날 이 위 기에서 꺼내주지 않을까? 지니는 바로뒤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인간이 박수를 치고 있는 것ㅇ리 아니가? " 금연 결심을 축하드립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용기 있는 결단 에 감동 하였습니다. 진심으로 좋은 성과를 얻길 바라겠습니다." " ……." 말리지는 못할망정 박수를 치다니! 니가 정녕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냐?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일명 물귀신 작전.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죽더라도 같이 죽자꾸나∼. " 생각해보니 흡연은 누구에게나 나쁜 것 같군요. 그래서 말인데 사일런스 백작님도 이번 기회에 금연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 까? 설마 공작인 제가 한다는 데 사양하진 않으시겠죠?" "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의 건강까지 염려해 주시다니. 진심으로 감복하였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 ……." 뭐야? 왜 이렇게 쉽게 받아 들여? 이 인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냐? 아무튼 이렇게 해서 나와 지니는 금연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참고로 그 자리에서 답배와 지포라이터는 전부 루시아에게 압수당 했다. 우째 이런 일이! 아이리스 2부 2권 Story 4 히로의 금연일기 히로의 일기 첫째 날 금연을 선포한 그 순간부터 담배가 피고 싶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는 더더욱 피고 싶었다. 괜히 베란다에 나가서 서성거렸다. 그동안 식후담배의 중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담배를 필 수 없게 된 지금, 식후담배가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는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아아~ 뱃속에 뭔가가 얹힌 느낌이다.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아. 그때 루시아가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라도 먹어봐” 박하사탕이었다. “힘들더라도 기운 내. 난 니가 반드시 해낼 수 있을거라 믿어.” “루시아.......” 루시아의 격려에 난 힘을 되찾았다. 그래!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어! 사랑하는 루시아를 위해서라도 난 반드시 금연을 하고 말테야! 난 박하사탕을 힘차게 빨아 먹으며 전의를 다졌다. 둘째 날 어젯밤 담배 생각 때문에 한숨도 못 잤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눈이 예쁘게 충혈된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금연한 지 24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이 모양이라니. 그런 나에게 영원히 금연을 하라니. 이건 차라리 고문이다! 내 목을 자를지언정 단 한 까치의 담배도 뺏길 수 없다...... 라는 명언을 남긴 애연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이런 나에 비해 지니는 꽤나 멀쩡해 보였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화사한 모습. 뭐야? 이 인간 혹시 몰래 담배 핀 거 아냐? 난 의심 섞인 눈으로 지니를 보았다. 지니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과 함께 금연을 하게 되다니. 저에게는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아이언스 공작님을 생각하며 견디도록 하겠습니다.” “.......” 그 말을 들으니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아아~ 화가 나니 더욱 담배가 피고 싶다. 화를 삭이는 데는 줄담배가 짱인데. “카악! 퉤!” 난 가래침을 세면대에 뱉었다. 젠장, 가래는 왜 이렇게 많이 끓는거야? 아주 목구멍 막히겠네. 이것 역시 금단현상인가? 담배를 안 피니 손가락과 입이 심심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손가락으로는 볼펜을 돌리며 입으로는 껌을 씹었다. 내가 씹는 껌은 보통 껌이 아니다. 루시아가 선물해 준 금연껌이다. 그런데 무슨 금연껌이 씹으면 씹을수록 담배 생각이 간절해지냐? 지친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양 한마리, 양 두마리, 양 세마리...... 양 백만스물한 마리, 양 백만스물두 마리......" 셋째 날 여전히 잠을 못 잤다. 금단현상이 이렇게 지독한 것이었다니. 담배 끊은 인간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속담이 왜 생겨났는지 알 것 같다. 내 몸은 지금 절실하게 니코틴과 타르를 원하고 있었다. "눈 밑에 다크써클이 생겼어요, 오빠!" "뭐라?" 라이의 말에 놀란 나는 거울을 보았다. 정말로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게다가 눈은 퀭하니 들어간 것이 아닌가? 뭐야? 나의 잘생긴 얼굴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내 여성팬들은 어쩌라고? 이게 다 잠을 못 잤기 때문이다. 숙면을 취해야 하는데 담배 생각이 나서 잠이 안 오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아~담배 고파~. 지니는 여전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난 그 모습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같이 금연을 하는데 나는 이 모양이고, 지니는 저 모양인걸까? 이거 뭔가 문제가 있는거 아냐? 인형 가게에서 일을 하는데 어떤 고딩 무리(남자들)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웠다. 분명 금연이라고 써 붙여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다니!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을 봤나! "야 이 자식들아! 니들 저기 써진 팻말 안 보여?" 내가 소리치자 그 고딩들은 날 쳐다보며 삐식삐식 웃었다. 여전이 담배를 뻑뻑 피며. 담배 연기가 내 콧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아아~ 이렇게 향긋할 수가! 루시아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냄새보다도 향기롭다. "댁이 뭔데 난리야? 남이사 담배를 피든 말은 신경 꺼." 머리를 염색하고 귀에 피어싱을 한 고딩이 나에게 말했다. 대충 보아하니 이놈이 우두머리인것 같다. 그놈은 보란듯이 담배를 맛있게 피웠다. 그것도 모자라 내 얼굴에 연기를 내뱉었다. "휴우~." 밀려오는 향긋한 냄새. 난 분노하고 말았다. 이 자식이 지금 날 놀리나? 누구는 담배를 못 펴서 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감히 내 앞에서 맛나게 담배를 피다니! 난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그놈은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이 새끼가! 얘들아! 저 새끼 까!" "까긴 뭘까? 고삐리 새끼들이 감히 담배를 펴? 그것도 금연구역인 내 가게에서? 내 오늘 니들에게 금연의 고통을 맛보게 해주마!" 다섯 명이나 되는 고딩들은 지들이 독수리 오형제라도 되는지 슈파슈파~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딩들이 내 상대가 될리 없었다. 이런 놈들에게는 빅장을 쓸 가치도 없다! 난 아주 가벼운 기술로 녀석들을 밟아 주었다. 잠시 후, 고딩들은 전부 화장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감히 고등학생이 담배를 핀단 말이야? 미성년자가 담패 피면 안된다는거 몰라? 니들 이 담배 어디서 샀어?" "내가 담배를 어디서 샀든 당신이 뭔 상관인데?" 퍽퍽퍽! "흑흑~ 저 앞 가게에서 샀어요." 저 앞 가게라고? 당장 신고해야겠군. 감히 미성년자에게 담배를 팔다니! 성인인 내가 사고 싶어도 못 사는 담배를! "니들 부모님은 니들 담배 피는거 아니 모르니?" "여기서 왜 부모님 얘기를 꺼내고 그러세요?" 퍽퍽퍽! "흑흑~ 몰라요. 엄마 알면 저 맞아 죽어요." 내가 한창 탈선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있을 때 인디가 들어왔다. 인디는 피가 떨어진 바닥과 얼굴이 팅팅 부은 고딩들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꺄악!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래도 주제에 남자라고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을 쓰는 모양이군. 난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애들 선도하는 중이니깐 나가 있어라." "선도라니요?" "아직 미성년자인 애들이 담배를 피우지 뭐니? 법치 국가인 대란민국에서 이런 일이 있어도 되는거야? 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자라나는 새싹들이 벌써부터 담배에 물들다니. 그래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교육 시켜서 애들 금연하게 만들 생각이야." "굉장해요, 히로님. 히로님께서 그런 훌륭한 일을 하시다니. 제가 뭐 도울 일은 없을까요?" "없으니까 나가 있어라." "인디가 나가고 나자 난 고딩들을 다시 쥐어 팼다." "담배를 핀단 말이야? 미성년자가! 교복을 입고! 그것도 국산 담배가 아닌 양담배를! 이런 인간 말종들 같으니! 담배가 인체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 정년 모른단 말이냐? 담배는 인류의 적이다! 그런 담배를 피웠다는 것은 니들이 전부 악의 축이라는 거야! 알았어? 니들같은 놈들 때문에 부시 행정부가 대 테러 전쟁이다 뭐다 난리를 치는 거야!" 퍽퍽퍽! "끄아악! 살려주세요." "제발 손속에 자비를......크헉!" 난 고딩들을 완전히 떡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얘네들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아, 서라 고등학교 3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이시죠? 아니, 선생님 반 애들 다섯이 담배를 피우지 뭡니까? 그것도 학교 고복을 버젓이 입은 채 말이에요. 대체 학교에서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겁니까? 내일 얘들 학교에 가면 단단히 주의 좀 주세요. 담배 피는 놈들을 그냥 놔둔다는 것은 자살 방조죄나 다름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모님들께도 전화를 걸었다 "아, 철식이 어머님이시죠? 전 인형가게 사장인데요. 아니, 글께 댁의 아드님이 우리 가게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워대지 뭡니까? 주의를 줘도 막무가내에요. 어머님께서는 자식이 담배 핀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예? 모르고 계셨다구요? 아니, 어떻게 그러실수가 있어요? 사랑하는 자식이 백해무익한 담배를 핀다는 사실을 모르시다니. 이제라도 아셨으니 절대 담배 못 피게 하세요. 예? 철식이가 부모 말을 잘 안 듣는다구요? 그럴 때는 죽도록 패보세요. 매 앞에서는 장사 없아고 팔다리 하나 부러짛 때까지 패면 담배를 끊을 겁니다. 그래도 안 끊으면 저한테 데리고 오세요. 제가 반드시 금연하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담배는 이 사회의 적입니다.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면 반드시 금연하게 하십시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내가 이러는 것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담배의 마수에서 벗어나 새 삶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는 거다. 지금은 애들이 나를 원망스럽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면 분명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그때 그분 덕에 담배를 끊었지, 하고. 결코 내가 느끼고 있는 금연의 고통을 이놈들에게 똑같이 맛보여 주고 싶어서 이러는거 아니다. 난 그렇게 쪼잔한 놈 아니다. 잠시 후, 부모들이 가게로 찾아왔다. 난 부모들에게 다시 한번 담배의 해악성을 강조한 뒤 녀석을을 넘겨주었다. 간만에 격렬한 운동을 하니 더욱 담배가 피고 싶어진다. 이젠 앉으나 서나 담배 생각뿐이다. 난 루시아가 준 금연껌을 씹으며 담배에 대한 욕구를 억눌렀다. 넷째 날 고통이 점점 극심해진다. 대체 몸은 왜 이렇게 가려운 거야? 지니의 말에 의하면 그동안 각종 노폐물로 막혀있던 혈관이 제 기능을 하게 되면서 가려움을 느끼는 거라고 한다. 밥맛도 없고, 온몸이 피곤하다. 게다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마치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다. 루시아가 보다 못했는지 나를 데리고 한의원에 갔다. 금연침을 맞으면 좀 나을 거라나? 귀에 침을 잔뜩 맞았다. 침의 효과 때문인지, 플라시보 효과 때문인지 흡연 욕구가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담배가 피고 싶었다. 담배만이 이 고통에서 나를 구출해 주리라. 다섯째 날 난 담배 생각을 하지 않기 위에 일에 집중했다. 그래! 다 잊고 사는거야. 이제 나에게 담배는 필요 없어. 담배와 함께 했던 그 많은 추억을을 이제는 지워버릴 테야! "대단해요, 오빠! 오 일 동안이나 담배를 안 피웠어요!" 라이는 감동 받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후후~ 이 오빠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란다.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러니? 남자에게 이 정도는 기본 아니야? 푸하하~!" 말은 이렇게 하지만 피고 싶어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이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아~ 라이와 맞담배를 피며 인생의 고민을 토로하려했던 나의 원대란 계획은 이대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라이도 이제 단배 안 피니?" "예. 라이는 착한 엘프니까요! 담배는 나쁜 엘프나 피는 거예요." "찾아보면 담배 피는 착한 엘프도 있지 않을까?" "아니에요. 담배 피는 엘프는 모두 나쁜 엘프에요!" "......." 착하고 나쁘고의 기준이 담배를 피냐 안 피냐로 갈라지다니.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애가 이렇게 세뇌 당한 거지? 혹시 약물 주입 한 거 아냐? 건물 뒤편에서 혼자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지니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이게 괜찮아 보입니까?"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도 지니는 나와 같이 금연을 하는 동지이니 조금 따뜻하게 대해주고 싶어도 지금 내 기분이 상대를 배려해줄 만큼 좋지 못하다.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안 힘드시나 보죠?" "어찌 힘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언스 공작님을 생각하며 참고 있습니다." "하아~ 어째서 우리 흡연자들은 이렇게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담배를 물고, 온 동네가 담배 연기로 뒤덮인 그런 아름다운 세상은 없는 걸까요?" 난 잠시 눈을 감고 상상했다. 고등학교 운동장 조회 시간. 머리가 벗겨진 교장 선생님이 단상에 오른다. 교장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문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학주(학생주임)가 불을 붙져준다. 운동장에 늘어선 3천명의 학생들은 전부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운동장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모두들 연기를 깊에 빨아드리며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수업 시간. 40여명의 학생들이 담배를 피며 수업에 열중한다. 책상 한쪽에는 하나같이 재떨이가 놓여져 있다. 담배가 다 떨어진 학생 하나가 옆 친구에게 한 개비 빌려서 피운다. 교실을 가득 메우는 담배 연기. 학생들은 그런 좋은 환경 속에서 열심히 공부한다. 아아~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내 학창 시절이 저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실제 내 학창 시절은 담배 피다가 걸려서 학주한테 맞은게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저런 환경을 만들어서 애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할 텐데. 우리나라 교육부는 뭐하나 몰라. 으윽, 생각을 하다 보니 더욱 담배가 피고 싶어진다. 그때, 지니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내들었다. 헉! 그것은! "금연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보다 못해 제가 비밀리에 구한 것입니다. 제가 망을 보고 있을테니 안심하고 피십시오." 지니가 내민 것은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난 허겁지겁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루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라이의 얼굴도 떠올랐다. 하지만 무었보다 먼저 지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동안 이 인간 말을 믿었다가 피 본 게 몇 번 이던가? 의도적인건지, 단지 운이 안 좋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인간 말을 들으면 항상 끝이 좋지 않다. 안 돼! 참아야 돼. 지금 유혹에 넘어가서는 루시아를 볼 면목이 없어. 라이는 또 얼마나 실망을 할까? 그래, 참자.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루시아와 라이를 실망시킬 수는 없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담배를 내려놓았다. "왜 그러십니까?" 지니의 물음에 난 굳은 경의를 담아 대답햇다. "저는 이미 루시아와 약속했습니다. 금연하겠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담배를 필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결심이 그렇게 대단한지 모르고 담배를 권하다니.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뭐, 용서까지야. 아무튼 원한다면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지니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헉! 나랑 같이 금연하기로 한 인간이 어째서 담배를......? 내가 황당하다는 눈길로 보자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어제부로 금연을 그만 두었습니다. 역시 금연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군요. 그럼 저는 이만." 담배를 피며 유유히 사라지는 지니. 홀로 남은 나는 배신감에 비틀거려야 했다. 뭐야? 이렇게 쉽게 그만둘 거면서 뭐 하러 같이 한다고 했어? 지구 끝까지 나를 따르겠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배신을 때려? 나야 금연으로 죽든 말든 저 혼자 살겠다고 담배를 펴? 처음부터 아예 말을 하지 말던가! 마읆껏 담배를 필 수 있는 지니가 부럽다. 그냥 지니가 내밀었을때 필 걸 그랬나? "......." 안 돼! 이런 나약한 생각으로는 금연을 할 수 없어! 딱 한 개비만 피면 안 될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개비만....... 난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겨우 오 일 이났을 뿐이다. 겨우 오 일 만에 경심을 무너뜨릴 수는 없지.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는 거야! 여섯째 날 나의 몸은 점점 초췌해지고 있었다. 입맛이 없어서 밥도 잘 못먹고, 잠도 잘 못잔다. 눈은 퀭하고 머리는 부스스하다. 피부 역시 푸석푸석. 마치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되는 것만 같다. 그렇다. 지금 나는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의도대로 난 말라 죽어가고 있다. 금연을 한 뒤로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대체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런 복수를 계획 한 걸까? 이것은 복수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복수였다. 한번에 죽인가면 이런 고통은 없을 테니. 정말로 난 이대로 죽는 건가? 지금이라도 일루니아 여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내 드 생각을 지워 버렸다. 남자라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당당해야 한다. 이대로 죽을지언정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무엇보다 내가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자비를 베풀 일루니아 여사님이 안디ㅏ. 난 일하던 중 너무 피곤한 나머지 가게 한 편에 마련되어 있는 휴게실에서 살짝 눈을 붙였다. 잠이 들려는 찰나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입에 닿는 익숙한 감옥, 그리고 찰칵~하는 부싯돌 긁히는 소리. "헉!" 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내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일루니아 여사님의 얼굴이 보렸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묻자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내 지워졌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내 옆자리에 앉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너무 괴로워 보이시는 것 같아서요" "......." 뭐야? 이 아줌마 오늘 왜 이래? 뭔가 이상한데.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은 공작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복수하는 마음으로 이번 일을 계획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요 며칠동안 괴로워하는 공작님의 모습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더요. 저는 금연의 고통이 그렇게 큰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후우~ 그래요. 솔직하게 사과 할게요. 미안해요." "......헉!" 일루니아 여사님꼐서 내게 사과를 하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혹시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난 너무 놀란 아머지 내 볼을 꼬집어 보았다. 따끔한 아픔이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 그럼 정말로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나에게 사과하는 거란 말인가? "이제 금연은 그만해도 좋아요. 루시아에게는 제가 잘 말해둘게요." "어, 어째서......?" "만약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잘못 되기라도 하신다면 루시아가 슬퍼할 테니까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담배에는 이미 불이 붙어 있었다. "자요. 이건 사관의 선물이에요." 상대가 이렇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데 받아주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다. 난 기꺼이 과거의 원한 관계를 잊고 일루니아 여사님이 내민 손을 맞잡으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굉장히 느낌이 안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뭡니까? 그 손에 든 디카는?" "......" 부드럽게 웃고 있던 일루니아 여사님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쳇! 거의 다 성공했는데." "......." 뭐야? 설마 이 모든게 다 작전이었단 말인가? "아니, 이 아줌마가 진짜!" 전부 들켰다고 생각했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은 팔짱을 끼며 예의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훗~ 이제까지 잘 버티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루시아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지켜보도록 하겠어요. 호호호~." "큭!" 난 분노해서 이를 빠드득 갈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한때 아이리스의 참모였던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이런 치졸하신 수법까지 쓸 줄이야. 이렇게까지 해서 대체 얻어지는 것이 뭐가 있다고? "오늘 일...... 절때 잊지 않겠습니다." "훗~ 잊기 않으면 어쩔 건데요?" "큭!" 일루니아 여사님은 정말이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생긍생글 웃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아이와도 같은 웃음. 내 복장을 뒤집어 놓으려고 아주 작정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웃음이다. 헉! 계속 보고 있자니 주화입바 걸릴 것 같아! "아! 오빠 여기서 뭐해요?" "어라? 일루니아님과 히로님 뭐하시는 거예요?" 때마침 등장한 라이와 인디가 아니었다면 난 정말로 주화입마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저 디카는 언제 산 거야? 나도 아직 없는데. 일곱째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책상 위에 담배와 라이터가 곱게 놓여져 있는것이 보였다. 아직 잠이 덜 깬 나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붙잡았다. 순간,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난 재빨리 고개를 휙 돌렸다. 열려진 방문 틈 사이로 무언가가 모였다. 난 방문을 확 열어 젖혔다. 방문 앞에는 디카는 든 일루니아 여사님이 서있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쳇!" "......" 쳇은 뭐가 쳇이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공작이라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그 후로도 일루니아 여사님의 방해공작은 계속되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담배가 눈이 띄었고,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담배를 피워댔다. 빨대를 꽂아 마시던 우유를 놓아두고 잠시 밖에 나갔다. 다시 돌아와서 빨대를 입에 무는데......이게 뭔 일인가? 빨대가 꽂혀 있어야할 자리에는 담배가 쫒혀 있었다. "......."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나의 등 뒤에는 언제나 디카를 든 일루니아 여사님이 서 있다. 누가 보면 스토커인줄 알겠군. 만약 내가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될까? 보나마나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디카로 그 모습을 찍어 가지고 쪼르르 루시아에게 달려가 일러바칠 것이다. 그럼 루시아는 나에게 실망하게 되겠지.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까짓 게 금연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절대 할 수 없어. 분명 너는 다시 담배를 피게 될 거야. 그러니 더 이상 버티지 말고 빨리 펴. 더 이상의 발악은 무의미할 뿐이야.' 이를 악물고 버티리라.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버티리라. 아~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운 걸까? 서 있기조차 힘들어. 난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빙글빙글 돌았다. 아아~ 왜 이러지? 털썩! 한동안 비틀거리던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햇습니다." 여기는 어디지? 눈을 뜨려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명이 뭐죠?" 앗!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듯한 이 목소리는 루시아의 목소리가 아닌가?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과로, 영양실조 등등, 대체 뭘 했기에 환자가 이 지경까지 된 겁니까?" "예? 한 건 별로 없는데요. 그냥 금연한 짓밖에는......" "금연이요?" "예. 요 며칠 금연하느라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얼마나 했는데요?" "일주일이요" "그 일주일 사이 환자가 저렇게 폐인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 그런 것 같은데요." "하아~ 의사 생활 30년에 금연하다가 병원에 실려 온 환자는 처음입니다. 의사로써 이런 말 하면 안되지만 저 환자는 그냥 담배를 피게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이대로 계속 금연을 하다가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질 겁니다. 심지어는 죽을지도......." "오빠 죽는 거예요? 우에에엥~ 오빠 죽으면 안 돼요! 우엥~우엥~ 라이는 오빠 죽으면 싫어요~." "죽을지도 모른다는......김 간호사. 이 꼬마 진정 좀 시켜!" "우에에엥~ 오빠 죽지 마세요오~." 후다닥~ 폴짝~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커억!"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것 같아. 내 배 위에 오른 라이는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나를 마구 패기 시작했다. "우에에엥~ 오빠 눈 좀 떠 보세요~." "진정해, 라이야. 오빠 아직 안 죽었어." 만약 루시아가 라이를 끌어 내리지 않았다면 난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날 생각해 주는 라이의 마음은 고맙지만 이런 식의 애정 표현은 부담스럽다. 아무튼 정신을 차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있는 곳은 병원이었다. 난 1인실 병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내 왼쪽 팔목에는 링거 바늘이 꼽혀 있었다. 병실 안에는 루시아와 라이,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사일런스 지니, 그리고 콧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반백 머리를 한 나이 많은 의사와 그저 그렇게 생긴 간호사 하나가 있었다. "아! 오빠가 깨어났어요. 우에에엥~ 오빠아~." 눈물을 흘리며 내 품으로 와락 뛰어드는 라이. 퍼억! "커억!" 내 품에 뛰어드는 것은 좋은데, 좀 천천히 뛰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무튼 라이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울었다. 그래서 난 다 죽어가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라이를 달래주어야 했다. 토닥토닥. "이 오빠는 라이를 두고 절대 안 죽는단다. 그러니 안심하렴, 라이야." 그래, 내가 이 어린 것을 두고 어찌 죽을 수 있겠는가? 나 없으면 우리 라이는 어쩌라고? 내 목숨은 나 하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에겐 끝까지 살아서 라이를 기를 의무가 있다. "괜찮아?" 루시아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렇게까지 루시아가 날 걱정해주고 있었다니! 아아~정말 감동이다. "으응" 사실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 루시아를 걱정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억지로라도 괜찮은 척하는 수 밖에 없다. "일단 담배부터 피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께 필요한 것은 바로 한 개비의 담배입니다." 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해주는 사일런스 지니의 충성스러운 발언. 지니는 말가 동시에 담배를 내밀었다. 난 당장 그것을 받아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먼저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 허락하지 마, 루시아. 이런 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야. 원래 일주일이 고비인 법이지. 이 고비만 넘기면 완전히 금연을 하게 될 거야."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인지 끝까지 초를 치는 일루니아 여사님. 오죽하면 보고 있던 인디가 말렸다. "그, 그만하세요, 일루니아님. 히로님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흥! 저 인간이 죽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 너무나도 당당하게 본심을 말하는 일루니아 여사님. 정말로 할 말이 없아. 두고 보지. 내 언젠가는 이 복수를....... "피워." "응?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니 어쩌겠어? 그나저나 이때까진 어떻게 참았는지 참 신기하네." "그야 너랑 피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것 때문에 안 핀 거야?" "응." 일루니아 여사님이 디카를 들고 다닌 것도 한몫했지만, 루시아와의 약속이 중요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루시아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웃음을 지었다. "에휴~ 정말이지?" "응?" "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니가 실망할까봐......." 루시아는 내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손끝을 통해서 부드러운 촉감과 체온이 느껴진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스킨십은 언제나 새롭다. 아아~ 어째서 이렇게 손이 떨리는걸까? "어라? 금단현상 중에 수전증도 있었나요?" 아이씨! 인디 저 자식은 왜 끼어들어? 집에 가서 일루니아 여사님과 2세 만들기 작업에나 열중할 것이지. "고마워.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해줘서." "루, 루시아." 난 녹보석 같은 루시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나의 마음이 루시아에게 전해진 건가? 난 루시아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리고 녹보석처럼 빛나는 루시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얽히는 시선. 사랑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에게는 오직 너뿐이야. 나의 몸과 마은은 전부 너의 것이야. 나는 너를 위해 존재하고 있어. 내가 숨을 쉬는 것은 니가 숨을 쉬기 때문이야. 니가 없는 세상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내가 그 모든 생각들을 담아 뜨거운 시선을 보내자 루시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루시아. 난......으아악!"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고백을 하려는 순간, 라이가 다시 폴짝~ 뛰어 내 배 위에 올라왔다. 아까 가격 당한 부위를 또 가격 당하게 되자 정말로 뼈와 살이 분리되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우에에엥~ 오빠 유언같은거 남기지 마세요오~. 오빠 안 죽는다고 약속했잖아요. 우엥~ 우엥~" 유언은 뭔 유언? 난 루시아에게 고백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나저나 빨리 좀 내려오렴. 정말로 오빠를 죽일 생각이니? "커헉!" "꺄아! 히로님이 피를 토했어요." "저 인간이 피를 토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마세요, 인디님." "괜찮으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빠, 빨리 내려와, 라이야." "우에에엥~ 오빠 죽지 마세요오~." "오빠 안 죽으니까 어서 언니한테 와." "우엥~ 우엥~" "환자가 호흡을 멈추었습니다!" "어서, 심폐소생술 준비해. 그리고 이사람들 전부 쫒아내!" ---------------------------------------------------------------------------- 라이의 일기 이렇게 해서 오빠의 금연은 끝이 났어요. 담배를 피기 시작한 후부터 오빠는 건강해져서 삼 일 만에 퇴원했답니다. 퇴원한 오빠는 그 전에 못 핀 것을 보충이라도 하듯 막막 담배를 피워요. 그래서 매일 루시아 언니가 막막 뭐라고 그래요. 그러면 일루니아 언니가 루시아 언니를 도와 막막 오빠를 몰아 붙여요. 오빠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지니 오빠뿐이에요. 인디 오빠도 오빠 편을 들어주고 싶어 하는데 일루니아 언니한테 혼날까봐 그냥 가만히 있어요. 라이도 가끔 담배 생각이 나지만 오빠랑 언니가 절대 못 피게 해요. 오빠랑 언니는 라이에게 참 다정하지만 라이가 담배 얘기를 꺼내면 막막 화를 내요. 담배는 나쁜 엘프나 피는 거라구요. 라이는 이제 담배 절대 안 피워요. 피고 싶어도 꾹 참아요. 라이는 착한 엘프니까요 헤헤~. 오늘 아침에는 오빠가 좋은 생각이 있다며 언니에게 말했어요. "인형 가게 구석에 담배 판매코너를 하나 만드는 거야. 그럼 나랑 지니가 더 이상 담배를 사서 피울 필요가 없잖아. 가게 매상도 더 올라 갈 테고. 그리고 담배 판매코너 개설 기념으로 인형 사는 사람들에게 경품으로 담배를 한 갑씩 나눠주는 행사를 벌이는 거야. 흡연자면서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것이 사실이지. 아무래도 인형은 여자나 아이들을 주 타깃으로 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행사를 통해 금연자인 여자나 아이들을 흡연자로 만드는 거야. 주면 피게 될 테니까. 이 사람들이 흡연자가 되면 우리 가게에 와서 담배를 사갈 테고, 그럼 매출이 더욱 늘지 않을까? 어때? 괜찮은 생각이지? 이게 그 기획안이거든. 나랑 지니가 어제 밤새 생각해서 짜놓은 거야. 한번 읽어...... 앗! 무슨 짓이야? 그걸 왜 찢어? 어떻게 만든건데! 자, 잠깐. 갑자기 빗자루는 왜 집어 드는거야? 지, 진정해, 루시아. 으아아악!" 루시아 언니는 오빠가 내민 기획안을 북북 찢더니 빗자루로 오빠를 막 패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라이가 언니한테 '왜 오빠를 때렸어요?' 하고 묻자 언니는 '맞을만한 짓을 해서 때린거야' 라고 대답 해 주었어요. 그리고 '라이는 절대 오빠 닮으면 안 돼' 라는 말을 덧붙였어요. 우웅~ 아무튼 라이는 오빠랑 언니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이제 졸리네요. 루시아 언니 품은 폭신해서 잠이 잘 와요. 하지만 가끔은 언니가 라이를 막막 세게 끌어안아서 숨이 막힐 때도 있어요. 우엥~ 그럼 라이는 이만 자러 갈래요. 꾸벅~ (작가 주 - 원래 라이가 쓴 일기는 맟춤법이 엉망임. 위의 '라이의 일기'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맞춤법을 수정한 것임) ------------------------------------------------------------------------------ 아이리스 2부 2권 Substory 3 긴급조치 29호 2012년 12월 20일 흡연 전면 금지를 공약으로내세운 노후면(No흡연?)후보가 47.9%의 득점율로 송연초 후보를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3년 2월 25일 노후변 후보의 대통령 취임식. 2013년 5월 13일 노후변 대통령은 긴급조치 29호를 발령했다. 긴급조치 29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다음 각 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담배를 소지하는 행위 나. 담배를 피우는 행위 다. 담배를 재배하는 행위 라. 담배를 제조 하는 행위 마. 담배를 밀수하거나 판매하는 행위 담배를 소지하다가 적발되었을 시에는 최하 징역5년 형, 최고 징역 10년 형에 처한다.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었을 시에는 최하 징역 10년형 최고 20년 형에 처한다. 담배를 판매하는 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었을 시에는 최하 징역 20년형 최고 징역 30년에 처한다. 담배를 재배하는 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엇을 시에는 최하 징역 30년형 최고 징역 40년 형에 처한다. 담배를 제조하는 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었을 시에는 최하 징역 40년 형, 최고 무기징역에 처한다. 담배를 밀수하거나 판매하는 행위를 하였을 시에는 최하 무기징역,최고 사형에 처한다. 이러한 긴급조치 29호는 흡연자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하지만 노후변 정권은 그런 흡연자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담배와의 전면전을 선포 했다. 2013년 5월 14일 이웃의 신고에 의해 최초로 흡연자 2명을 체포 각각 징역 10년 형과 15년 형에 처해짐. 10년 형을 받은 사람은 반 갑을 피웠고, 15년 형을 받은 사람은 한갑을 피웠음. 2013년 5월 31일 담배 재배 농가의 일제 시위. 청와대까지 행진을 벌였으나 도중에 해산됨 2013년 7월7일 인천항에서 담배 밀수를 하던 밀수업자 2명 검거. 이틀 후에 사형에 처해짐. 2013년 9월 18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에서 비밀 집회를 갖던 담사모(담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 23명 일제 검거. 지부장 김궐련은 격렬한 지항 끝에 사살됨.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담배가 피고 싶어' 였다. 경찰은 이를 계기로 담사모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2013년 9월 29일 경찰은 담사모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지부를 습격, 교전 도중 2명 사망 2명 도주 17명 검거. 검거된 피의자 전원은 담배를 소지하고 있었고, 일부는 밀수담배로 보이는 담배를 소지하고 있었다. 사흘 후, 경찰은 대전 지부와 광주 비부를 급습. 50여 명을 검거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2013년 10월 3일 서울에 사는 70대 노인이 아파트 15층에서 투신자살. 주위사람들은 노인이 금단 현상 때문에 계속 괴로워 해왔다고 증언했다. 2013년 10월 4일 점점 흡현 허가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노후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국민 연설을 했다. 노 대통령은 흡연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범죄이며, 앞으로도 계속 흡연과의 전쟁을 해나갈 것을 재천명했다. 2013년 12월 25일 경찰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담배가 거래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대대적인 작전을 벌였다. 작전명"누가 둘리 혓바닥에 담뱃재를 털었나" 인 이 작전에는 경찰 3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그 결과 200여 명에 이르는 범인들을 검거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범인들은 둘리나 피카츄 인형 속에 담배를 숨겨 거래하는 신종수법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법원은 판매자 전원에게 사형을 선고 했다. 2014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흡연자들 집회 흡연자들은 "흡연 선언문" 을 낭독하고 흡연권 보장을 요구하였다. 집회는 금방 시위로 변했고, 흡연자들은 KT&G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흔들며 "흡연권 보장 만세!"를 외쳤다. 이어 청와대로 행진을 하였다. 처음에는 1천여명으로 시작된 이 집회는 청와대로 행진하는 사이 5만 명으로 불어났다. 흡연을 원하는 국민들의 욕구가 폭발한 것이다. 놀란 정부는 군대까지 투입하여 무차별 진압을 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시위자 27명이 사망.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를 주도한 유장초,유공초 형제는 즉석에서 체포, 며칠 후, 사형이 언도 되었다. 2014년 3월 9일 경찰이 부산에 위치한 담사모 본부를 습격, 회장 윤애연 현장에서 사살, 간부급 20명 체포, 이로써 담사모는 사실상 와해 되었다. 2014년 3월 21일 경찰이 부산항의 담배 밀수 현장을 급습, 이 일을 계기로 담사모 와 연계하여 국내 최대 규모로 담배를 밀수하던 끽연파와 왜해되었다. 끽연파의 보스 마보루를 비롯한 간부 전원은 사형을 언도 받았다. "구해 왔나요?" "예. 힘들게 구해 왔습니다." 지니는 품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알루니늄 호일을 벗기자 손가락 하나 정도 길이의 원통형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담배였다. 예전에는 언제나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기호품이었지만, 지금은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중범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잡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아아~ 이 향긋한 냄새. 얼마 만에 맡아보는 담배의 향기냐? 나는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담배를 입에 물자 지니가 불을 붙여 주었다. 난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 들였다. 니코틴과 타르가 폐 속 가득히 흡입되자 혈관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이틀 만에 피는 담배의 맛을 음미했다. 지니 역시 못 참겠는지 남은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우리 둘은 잠시 동안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의 길이가 점점 줄어든다. 나는 그것이 아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줄담배를 피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담배 한 개비 못 구해 허덕이는 시대가 되었다. 이 모든게 전부 그놈 탓이다. 노후변! 이놈이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않았어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긴급조치29호 라니! 이 나라가 흡연자들을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다. 흡연자들은 국민도 아니라 이거냐? 그동안 우리가 조세에 공헌한 게 얼만데! "담배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담뱃값이 역시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구요. 현재 담배 한 개비가 대략 100만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 100만원 이란다. 한 보루도 한 갑도 아닌 한 개비가. 과거 담뱃값이 한 갑에 2000원 이던 시절이 잇었다. 한 갑에 스무 개비가 들어있으니, 한개비에 100원 그러니 지금은 만 배가 뛴 셈이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개비에 30만우너 정도에 거래 됬잖아요. 그새 3배 이상이 뛰었단 말이에요?" "최대 규모의 담배 밀수를 행하던 끽연파가 와해된 것이 큰 타격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밀수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게다가 끽연파 보스 마보루와 간부들 전원이 사형을 언도받은 터라 밀수를 하던 조직들이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돈을 주고도 담배를 못구하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으음" 대화를 하며 담배를 피우는 사이, 필터까지 타오른 담배는 알아서 불이 꺼졌다. 나는 그것을 바닥에 버리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담배 한 개비를 핀다는 것은 100만 원 짜리 수표를 말아서 태우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흡연자들은 담배를 끊지 못해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이젠 누군가가 나서야 했다. 누군가가 나서서 흡연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줘야했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커다란 이상이 아닌 한 개비의 담배였다. "사일런스 백작님" "예 말씀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저는 수많은 흡연자들이 더 이상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 볼수 없습니다. 이 세계에 온 뒤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살려고 했지만 세상이 저를 가만히 놓아두질 않는군요. 저는 더이상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이땅에 사는 흡연자들을 위해 떨치고 일어서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사일런스 지니는 성심성의 껏 아이언스 공작님을 보필하고 , 대의를 위해 함께 싸울 것을 맹세 합니다." 지니는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고, 난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지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사일런스 백작님" "아이언스 공작님!" 그렇게 수락산 깊은 곳에서 우리의 결의가 맺어졌다. 후대의 흡연자들은 이를 두고 "흡연결의"라 하여 두고두고 칭송하였다. 나와 지니가 흡연자들을 위해 처음으로 한 일은 담배 밀수 였다. "이제 까지 담배 밀수 루트는 주로 중국을 통해 완제품을 들여오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이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담뱃잎은 차이나 마피아의 연계하여 중국에서 수입하고, 필터는 유럽에서 수입하는 겁니다." "유럽이라면?" "일단 가까운 러시아가 되겠지요. 그리고 프랑스, 이탈리아,등등 수입처를 다변화해야 합니다. 밀수 조직 역시 점조직으로 운영하여 한 곳이 걸리더라도 전체에 문제가 없게 해야 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것들을 전부 한국에 들여와 비밀 공장에서 담배를 제조 하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담사모 회원들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담사모는 와해되지 않았나요?" "와해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지도부일 뿐입니다. 조직원들은 남아있지요. 그들을 우리가 흡수해야 합니다. 그들을 흡수해서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노후변 정권과 대항해서 싸울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조직을요." "알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일런스 백작님께 모든 것을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한국의 흡연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당당하게 담배를 필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예. 제 목숨을 걸고 모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단기간 안에 엄청난 양의 담배를 밀수했다. 그리고는 담사모 회원들을 모아 담배를 제조했다. "이로써 한 가지 일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기를 탈취해야 합니다. 이미 평화적으로 흡연권을 주장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그럼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지니의 의지는 굳건했다. 하지만 난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반군이 되는 것이 아닌가? 난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나의 결단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흡연자들은 고통받게 된다. 나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고통의 수렁 속에서 건져내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본도 문제입니다. 싸움에 있어서는 돈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몇몇 재벌들과 극비리에 접촉을 해보았는데, 다행이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는 흡연자들 입니다." "그들도 답답하겠군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담배를 피울 수가 없으니" "그렇습니다. 그들은 노후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자본과 무기,인력의 결합 지니는 아이리스 왕국의 참모답게 몇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노후변 정권이 무너지거나 흡연자들이 전부 죽거나 둘 중 하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곳은 서울역 안.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임과 동시에 엄청난 숫자의 노숙자들이 밀집해 있는 장소였다. 얼마 전부터 노숙자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어이, 그 얘기 들었어?" "담사모가 아직 살아있다며?" "강화도를 거정으로 대 정부 투쟁을 벌인다고 하더군." 노숙자들 대부분은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들 이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은 한 개비의 담배였다. 빵 없이는 살아도 담배 없이는 못 사는 노숙자들이 상당수 였다. 그런 그들에게 긴급조치 29호는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그곳에 가면 담배를 무상으로 지급해준다고 하더군." "남녀노소, 신분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흡연자들 이라면 무조건 받아준다고 하던데." "이대로 앉아서 고통받을 수만은 없어. 우리도 그곳으로 가자,." "그래, 그곳으로 가서 우리 흡연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드는 거야!" "노후변 정권을 무너뜨리자!" 엄청난 숫자의 노숙자들이 강화도로 향했다. 그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외에도 전국의 수많은 흡연자들이 강화도로 향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강화도를 점령한 우리들은 그곳의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전부 담사모 사람들로 채웠다. 담사모 회원들 중에는 공무원이나 회사원들도 많았기에 행정 시스템을 돌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무기고를 탈취하여 3천여 명의 사람들을 무장시켰습니다. 그리고 담배 제조도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 사람 앞에 하루 다섯 개비 정도를 지급하지만 한 달 후면 열 개비까지도 지급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어쩌실 생각이죠?" "먼저 분리 독립을 선언하는 겁니다. 강화도를 흡연자들의 영역으로 선포하고 대한민국에서 분리하여 도시국가를 세우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노후변 정권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만약 계속해서 우리를 핍박한다면 청와대를 공격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지니의 말에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조국을 향해 총칼을 겨누어야 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을 따르는 저 수많은 흡연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있어서 아이언스 공작님은 빛과 희망 입니다." "으음."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는 없다는 건가? 조국을 향해 총칼을 겨누어야 하다니!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정말로 옳은 것일까?" 난 내민 담배를 허겁지겁 받아들고 뻑뻑 피워대던 한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논산에서 농사를 짓던 88세의 할아버지는 70년 동안 담배를 피워왔다고 했다. 긴급조치 29호가 발령된 이후에 몇번 이고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난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하던 할아버지의 못소리를 기억했다. "고맙네.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죽기 전에 담배 한 개비를 피웠으면 소원이 없었는데. 자네 덕에 그 소원을 이루는구만.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네." 이 땅에서 고통받는 흡연자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난 도저히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입니다." "자유를 위한 투쟁입니다." "우리가 이러는 것은 헌법이 위배되는 짓 입니다." "한민족이 언제부터 담배를 피워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모르긴 몰라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부터 담배를 피워왔습니다. 수천 년 동안 피워온 담배를 법으로 금지시키는 것이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흡연권 보장은 관습헌법이나 다름없습니다. 애초에 헌법을 어긴 것은 노후변 정권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어쨌든 상황을 계속 지켜보도록 하지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14년 5월 5일 어린이 날을 맞이하여 담사모가 강화도를 거점으로 삼아 분리 독립선언을 하였다. 그들의 숫자는 약 200만 명 정도 였다. 독립 정부의 수장은 아이언스 히로, 국무총리는 사이런스 지니 였다. 그들은 노후변 정부가 긴급조치29호를 철회하고 흡연권을 보장 할때 까지 투쟁할 것을 천명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청와대는 난리가 났다. 과거 흡연 경력이 있던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은 긴급조치 29호를 철회아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후변 대통령은 담사모 의 분리 독립선언에 대한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그들은 아무 곳에서나 담배를 피우고, 아무 곳에나 침을 찍찍 뱉습니다. 그들이 내뿜는 담배로 인해 선량한 시민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 건강보험금은 늘어나고 있으며, 그 늘어난 금액은 선량한 시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들을 위하여 흡연을 하는 인간들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긴급조치 29호는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정부는 이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할 것입니다. 강화도에 계신 선량한 시민들은 어서 강화도를 빠져 나오십시오. 정부는 담사모 회원들에게 경고합니다. 앞으로 10일 동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 사이 항복을 한다면 선처할 것을 약속 합니다. 하지만 항복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처절한 응징이 가해질 것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정부의 서명서를 접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의 양보도 없는 첨예한 대립. 흡연자들은 흡연권을 주장하고 있고, 정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흡연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하긴. 이 상황까지 와서 타협이하는 것이 있을 수 없겠지.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 내보내세요. 얼마 후면 이곳이 전쟁터가 될 수도 있으니." "이미 나갈 사람들은 다 나갔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나요?" "180만 명 정도 입니다." "엄청나군요. 이 작은 섬에 그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네요." "전국에서 몰려왔으니까요. 이들은 금연을 하느니 죽음을 택할 자들입니다."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나요?" "가능은 합니다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째서요?" "국제사회라고 해봐야 미국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손을 벌이게 되면, 그들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 삼키려 들 것입니다. 일본이나 러시아,. 중국등도 가만히 있지 않을것 입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군요." "민족 자결주의라는 거지요. 한 나라의 일은 그 나라 안에서 끝을 내야 합니다. 남에게 손을 벌렸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지요." "그런데 정말로 노후변 정부가 군대를 보낼까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요?"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중대사를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저를 따르는 사람들의 의견은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투표를 붙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투표 결과가 나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97.3%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결국은 전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10일후. 청와대는 강화도에 모인 담사모 회원들의 대한민국 시민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무력 응징을 결정했다. 그리고 바로 2개 보병사단과 1개의 기갑여단을 강화도로 파병했다. "어떻게 하죠?" 나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숫자가 180만 명이라고는 하지만 이들 중 싸울 수 있는 인원을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싸운다 하더라도 장비가 너무 열악했다. 하지만 지니는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요?" "군인들 중에 흡연자가 몇이나 되시는 아십니까?" "글쎄요." "모르긴 몰라도 반 정도는 될 겁니다. 그들을 잘만 회유하면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군 내부에서도 긴급조치 29호 발령으로 인한 불만분자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지금은 단지 불만을 가슴에 품고 있을 뿐이지만, 언제든 기회가 오면 그 불만이 폭발할 것입니다." "이이제이 라는 건가요? 잘만하면 손 안대고 코풀 수도 있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적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만드는 거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 앞으로 밀려올 적들에 대항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지니의 전략은 주효했다 .조금 공작을 한 것뿐인데도 정부군은 흡연자와 비흡연자로 나뉘어 전투를 벌였다. 그 사이 지니가 급조된 군대를 몰아 비흡연자 부대를 공격하니, 정부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우리는 이 전투로 인해 1만 여명의 군인과 기계화 무기들을 손에 넣게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녀석들을 처단하기는 커녕 지리멸렬하다니!" "죄송합니다.각하. 군대 내부에 흡연자들이 그렇게 불만을 품고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일단 군대 내부의 흡연자들을 솎아내! 그리고 오직 비흡연자들만으로 그들을 공격하도록!" "알겠습니다.각하." 실패로 쓴 잔을 마신 노후변 정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비흡연자들로만 파병부대를 조직했다. 2차 파병부대의 규모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20만 명이라는데요. 저번에 대략 2만 5천명 정도였으니, 8배 정도 늘어난 셈이네요. 게다가 이번에는 비흡연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군요,"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총사령관 김연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원인은 담배 때문이죠, 그래서 그는 담배라면 치를 떱니다. 그는 흡연자들을 죽이는 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큰일이군요." "예. 이번에는 정말 큰일입니다." 단지 담배를 핀다는 이유만으로 20만이나 되는 군대와 맛서 싸워야 하다니. 담배의 해악성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누가 그걸 모르나? 하지만 내 몸 내가 상하게 하겠다는데 왜 뭐라 그러는 건가? 이제 까지 심심하면 담뱃값 올리면서 흡연자들 등쳐먹을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우리들을 이렇게 내칟다니. 그것도 긴급조치 29호 라는 말도 안 되는 법령을 발표하면서 말이다. 지금이 유신 시대야? 독재정권 시대야?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래도 되는 거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반드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사일런스 지니는 아이리스의 참모 출신으로 천제 중의 천제다. 위대한 지휘관은 수적 열세를 이겨내고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법. 난 사일런스 지니를 믿었다. 사일런스 지니는 직접 부대를 이끌고 나가 토벌군과 맞서 싸웠다. 지니는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법으로 토벌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몇 배나 되는 병력 차이는 쉽게 극복할 수 잇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좌절에 빠져 있을 때. 내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그린드래곤 카이네이드,.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 그리고 라이레얼과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위기에 처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도우러 왔습니다." "크.크로니스 . 흑 ~ 고마워요." 난 감동한 나머지 울음을 터트렸다. 이번엔 카이네이드가 말했다. "난 네놈을 도우러 온 게 아니다. 다만 노후변 자식을 때려눕히러 왔지. 감히 나에게 금연을 하라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이번엔 에스카네스. "백수의 낙인 담배를 금지시킨 것은 모든 백수족들을 적으로 돌리는 거나 다름 없지. 그자식은 이제 죽었어." 난 감사의 인사를 표시했다. "아무튼 둘 다 고마워요.' 그리고 라이레얼과 칼라이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레얼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도우러 왔어. 히로.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 "난 언니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거야. 혹시라도 내가 널 돕는 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 착각 안 하니 걱정하지 마렴. 아무튼 이렇게 해서 우리는 드래곤 네 마리를 전력으로 보유하게 되었다. 이 드래곤들이 있는 이상 적이 20만이든 100만이든 두렵지 않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뭐라? 20만 군대가 패했다고?" "예."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반군들은 이상한 공격을 했습니다. 불꽃이 날아다니고, 번개가 내리치고...... 아무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반군들의 공격을 맞으면 며칠 동안 기절은 하지만 죽지는 않더군요. 아마도 봐준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후변 대통령은 20만 대군의 패배 소식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최후의 시나리오대로 진행을 하는 수밖에." "헉! 그건 안됩니다. 각하!" 여러 장관들이 결사반대를 했지만 노후변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 했다. "이 땅에서 담배를 몰아 낼수만 있다면 이 나라쯤이야 어찌 되든 상관 없다. 당장 주한미군 사령부에 연락하도록." "각하! 다시 한번 재고 해 주십시오." "재고하고 말 것도 없다. 설사 한국이 미합중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흡연자들을 제거 해야만 해!" 결국 노후변 대통령은 미국에 손을 벌리는 길을 택했다. 이렇게 될 경우 미국은 본격적으로 한국 내정에 간섭할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한국이 미합중국의 51번째 주가 될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후변 대통령은 그런것에 개의치 않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강화도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주한미군이 움직이고 태평양 함대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심지어는 항공모함까지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한 척도 두척도 아닌 세척이나 누가 보면 미국이 북한과 전쟁하려고 하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엄청난 숫자의 미군은 단지 우리를 토벌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노후변이 아주 미쳤군." 나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미국이 뭐 하러 한국의 요청에 이렇게 쉽게 응했겠는가? 설마 미군이 담사모를 박살내고 유유히 한국을 떠날 거라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은 없겠지? 보나마나 이대로 한국을 집어 삼키려할 것이다. "을사오적(조선 후기에 을사조약을 체결에 가담한 다섯 매국노(때국놈)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을 이른다.)에 이은 또 하나의 위대한 매국노의 탄생인가? 이 나라는 왜 이렇게 매국노가 많은 거야?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담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이제는 나라의 존망까지 위협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원정출산을 해서 자식이 미국 국적인 사람들이나, 수십억의 재산을 미국은행에 빼돌린 자산가들 그리고 평소 미국 발바닥을 핥느라 수고가 많았던 정치인들은 성조기를 흔들며 좋아 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죽어날 것이다. 주권을 잃어버리는 것은 일제시대로 충분하다. 일본에 이어 미국한테까지 주권을 빼앗길 수는 없어!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수가 없군요. 주한미군이 움직이는 것이야 그렇다 치고 태평양 함대가 한국에 오면 빼도 박도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 전에 노후변 대통령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일런스 지니가 거들었다. "미국을 끌어들인 이상 그는 더 이상 대통령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팔아 넘긴 매국노에 불과하지요. 그러니 그를 처단하는 것은 반역이 아닌 애국입니다." 모두의 뜻이 하나로 모아졌다. 하지만 매국노 노후변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청와대 주위에는 엄청난 숫자의 경찰과 군인 들이 포진해 있었다. "어차피 다수의 인원으로 가봐야 기동성만 떨어질 뿐 입니다. 그러니 소수정예로 가도록 하지요." 인원은 금방 정해 졌다. 대장-나 참모-사일런스 지니 돌격대원1-크로니스 돌격대원2-카이네이드 돌격대원3-에스카네스 돌격대원4-라이레얼 돌격대원5-칼라이스 무려 드래곤이 넷이나 끼어있는 최강의 파티이다. 이 파티라면 매국노 노후변을 제거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난 가기 싫은데 언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야. 혹시라도 내가 널 돕는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 그래. 착각 안 하니 안심하렴. 청와대는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강와도를 빠져나온 우리는 버스를 훔쳐 타고 청와대로 돌격했다. 으음, 이러니까 마치 영화 찍는 것 같군,. 실미도에 이은 강화도. 내가 매국노 노후변을 처단하기만 한다면 분명 영화로 만들어지겠지? 투자자금이야 흡연자들이 대주겠지. 뭐. "바리케이드가 나타났습니다." 능숙하게 버스를 운전하던 지니가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바리케이드가 도로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내가 처리하지" 카이네이드는 창문밖으로 튀어나갔다. 쿵! 뭐야? 지붕 위로 올라간 건가? 헉! 이 느낌은 설마..... 마법을 쓰려는 건가? 공중에 거대한 불덩이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불덩이는 바리케이드를 향해 날아갔다. 퍼엉! 바리케이드와 군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굉장하군! 관연 드래곤! 헬파이어를 이렇게 간단히 날리다니. "지 혼자 활약하려 하다니. 마음에 안 드는군,. 이번엔 내가 처리하지." 역시나 지붕 위로 올라가는 에스카네스. 그 뒤로도 바리케이드가 계속 나타났지만 카이네이드와 에스카네스의 마법으로 전부 뚫었다. 잠시 후, 청와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문에는 수천명의 군인들이 서 있었다. "쓸어버려요!" 내가 외치자 갑자기 태풍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냥 태풍이 아니었다. 활활 불타는 태풍이었다. "으아악!" "크악!" "살려줘!" 타오르는 태풍은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원래대로라면 버스도 빨려 들어가야 했지만, 크로니스가 마법으로 방어 필드를 쳐서 우리는 유유히 정문을 지날수 있었다. 끼이익! 지니가 버스를 세우자 우리는 재빨리 버스에서 뛰어 내렸다. 잠시 후, 박격포가 날아오더니 버스를 폭파시켰다. 콰앙! 이렇게 스펙터클할 수가! "반군들이 저기 있다! 쏴라!"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이 우리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네이드와 에스카네스가 말했다. "이쪽은 우리가 맡겠다. 넌 빨리 가서 노후변 그놈의 목을 따와." "으하하, 이쪽은 걱정 말라고." "그럼,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우리는 두 드래곤을 남겨 둔 채 청와대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스판 소재의 짝 달라붙는 옷을 입은 다섯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화려한 원색의 옷에 이상하게 생긴 헬멧까지 쓰고 잇는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포즈를 취하며 외쳤다. "우리는 청와대를 경호하는 경호부대, 경호전대 피스톨메이커다!" "리볼버 레드!" "핸드건 옐로우!" "머신건 블루!" "라이플 그림" "지대공미사일 블랙!" "......." 얘들은 또 뭐냐? 다른 놈들은 그래도 이해하겠는데 마지막의 지대공 미사일은 뭐야? 지금 나랑 장난하나? 탕탕탕! "젠장! 피스톨메이커면 총이나 만들 것이지 왜 쏘고 지랄이야?" 우리는 옆 복도로 잠시 몸을 피했다. 녀석들은 각자 자신이 밝힌 무기를 쓰고 있었다. 레드는 리볼버,블루는 머신건,.뭐, 대략 이런 식이었다. 잠깐! 그럼 블랙은? 콰앙! "이런 미친! 실내에서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하다니!" 난 녀석들의 공격에 어이가 없었다. 쟤네들 경호부대 맞아? 초토화부대를 잘못 말한 거 아냐? 권총 전대 피스톨메이커의 대장은 블랙인 듯 했다. 그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으하하하 ! 아이 엠 샘(I am SAM)!" 또 어이없어진다. 여기서 갑자기 아이 엠 샘이 왜 나와? 나의 의문에 사일런스 지니가 답해주었다. "샘이란 사람 이름이 아닌 지대공미사일을 말하는 겁니다. 지대공 미사일은 영어로 서피스 투 에어 미사일(surface to Air Missile)입니다. 약자는 SAM 이지요. 그러니 지금 저자가 말하는 것은 '나는 지대공미사일이다." 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 그래 너 잘났다. 그냥 영어 강사로 나서지 그러니?" 어쨋든 지니의 설명 덕에 난 블랙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놈 미친 거 아니예요? 왜 지가 지대공 미사일 이래요?" "이름이 샘일 수도 있지요." "........" "성이 '지' 고 이름이 '대공미사일' 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 장난하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요. 정말 큰일이군요.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합니다. 노후변이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요. 빨리 그를 찾아 제거 해야 합니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만약 오늘 노후변을 놓친다면 다음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태평양 함대가 한국에 도착했을 테니, 그러니 반드시 지금 처리를 해야만 한다. 내가 걱정하는데, 라이레얼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히로, 이곳은 나와 카르에게 맡기고 히로는 계속 전진해." "라이레얼,,,,," 난 감동받은 눈길로 라이레얼을 보았다. 라이레얼이 나를 위해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려 하디니. 이 고마움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하는걸까? "그런 표정 짓지 마, 히로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난 아직 도 아이리스2권의 일을 잊지 않고 있어." "........" 그건 잊어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부탁해요. 라이레얼" "난 싸우기 싫은데 언니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싸우는거야. 혹시라도 내가 널 돕는다는 착각은......." "알았어. 착각 안 할게. 걱정하지마." 이제 남은 인원은 나와 지니, 크로니스 셋뿐.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그런데 노후변은 어디에 있는거죠?" "대통령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대통령이니까 대통령 집무실에 있겠죠. 대통령이 장관 집무실 같은 곳에 있으면 이상하잖아요." "........" 뭔가 이상하긴 한데,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는 한참을 달린 후에야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했다. 집무실 앞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으나 지니와 크로니스가 순식간에 제압했다. 이제 끝났나, 하는 순간 양쪽 복도에서 수십명의 군인들이 나타났다. "반군들이 저기 있다.!" "이곳은 저와 크로니스님이 처리하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주저하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 노후변을 처단하십시오." "괜찮겠어요?" 지니는 웃음을 지었고 크로니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크로니스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절대 죽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칠 것 같으면 제 걱정은 마시고 도망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크로니스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밝게 웃었다. "저기....... 아이언스 공작님" "왜요?" "저한테도 격려의 말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 이 인간 왜 이래? 내가 죽으라고 전화수를 떠다 놓고 빌어도 상처하나 없을 인간이 뭔 격려의 말이 필요해? "댁의 목숨은 댁이 알아서 챙기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뒤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적들과 맞서 싸우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할일이 있었다. 노후변 한 명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생겼는가? 그 희생자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노후변을 처단해야 했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책상앞에 앉아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바로 모든 흡연자들의 적이자 매국노인 노후변 이었다. 노후변은 마치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난 그 에게 물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지?" 나의 물음에 노후변은 순순히 답했다. "네놈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지." "뭐라?" "크크. 나의 계획은 전부 네놈을 노린 것이었다. 긴급조치 29호를 발력한 것도 네놈이 담배 없이는 못 사는 애연가임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그런 말도 안되는 ! 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계회했다는 말인가? "크크. 그렇다." 노후변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가! 모든 일들이 나를 고통에 빠트리기 위해 계획된 것이 었다니! "대. 대체 네놈은 누구냐? 누구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내가 누구냐고? 아직도 나의 정체를 모르겠나?" "크크. 그럼 이렇게 하면 알아보겠나?" 노후변은 갑자기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가발과 인피면구가 바닥에 떨어지며 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이, 이럴수가! 어, 어떻게 이런일이!" 난 노후변의 진짜 얼굴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가 풀려 주저 앉고 말았다. 노후변의 정체는 바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초롱초롱. 예쁘게 빛나는 여섯개의 눈동자. 난 그 눈동자를 한번 훑어본 다음 말을 이었다. "노후변의 정체는 바로......." 아이들은 기대에 찬 눈길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일루니아 여사님 이었어." "헉!" 예상대로 깜짝놀라는 아이들. 난 지금 이 아이들을 위하여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의 일대기를 구연하는 중이었다. 경청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라이와 루와 루비 이렇게 셋. 세 엘프 모두 귀를 쫑긋 세운 채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됬어요?" "후후, 글쎄. 어떻게 됐을까?" "빨리 말해주세요. 오빠. 라이 궁금하단 말이에요." "루비도 궁금해요."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줘요" "알았어. 말해줄께. 아이언스 히로는 노후변의 정체가 일루니아 여사님이라는 것을 알고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아이언스 히로를 죽이려 했지만, 아이언스 히로가 누구야? "위대한 영웅이요~!" 크게 합창을 하는 아이들. 난 너무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잘 아는 구나. 위대한 영웅인 아이언스 히로가 일루니아 여사님한테 당할 리 없지. 아이언스 히로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삼일 밤낮을 싸운 끝에 결국 일루니아 여사님을 물리쳤어. 그리고 긴급조치 29호를 철회시켰지." "그럼 미국은 어떻게 되었어요?" "아! 물론 매국노 일루니아 여사님이 죽었다고 해서 미국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지. 그래서 아이언스 히로는 드래곤들과 함께 미국과 맞서 싸워,.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을 지켜내지. 그 후에 아이언스 히로는 담뱃값을 대폭 인하하고, 흡연 구역을 많이 만드는 등 죽는 순간까지 흡연자들의 권리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어. 그래서 수많은 흡연자들의 칭송을 받았지. 이걸로 오빠의 이야기는 끝이란다. 자, 다들 박수." 짝짝짝!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의 일대기를 다 들은 아이들은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운 난 아이들의 머리를 한번씩 쓰다음어 주었다. "자, 그럼 오빠가 여기서 문제 하나 낼게.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영웅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아이언스 히로요~!" "그럼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악당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일루니아 여사님이요~!" "아이구. 귀여운 것들. 어쩜 이렇게 다들 똑똑할까?" 그나저나 오랫동안 얘기를 했더니 참으로 피곤하군. 이만 애들 내보내고 쉬어야 겠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방문이 열려있는 것이 보이여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헉!" 난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가 풀려 주저 앉고 말았다. 방문 앞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일루니아 여사님이 었다. "호호. 얘기 잘 들었어요,. 아주 재밌게 잘 말씀하시더군요. 아이언스 공작님께 그런 특기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네요."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웃으며 말했지만 눈빛은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널 반드시 찢어 죽이고 말겠어!" ,,,,,,,,,,,라고 말하는 듯하다. 난 너무 무서워서 일루니아 여사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저. 저기요,. 뭔가 오해하시나 본데, 이건 그냥 얘기일 뿐이거든요." "예, 누가 뭐래요? 그냥 얘기일 뿐이지요, 문제는 그냥 얘기를 가지고 아이들을 세뇌하려 했다는 거지만," "세, 세뇌라니요? 저는 순수한 의도로,,,,,,"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말을 씹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부엌으로 가보렴. 얘들아. 루시아 언니가 피자 시켜놓았어" "정말요?" "와아!" "피자다!" "자, 잠깐만 얘들아 ! 가지 마!"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썰물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아이들이 다 나가고 나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문을 잠갔다. "저,저기 문은 왜 잠그시는지요? 남녀가 유별한데 조금은 열어 놓는 것이......" "그냥 아이언스 공작님과 조용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호호~" "조, 조용히 할 얘기라니요?" 난 너무 두려운 나머지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에 의하면 삼일 밤낮을 싸운 끝에 내가 승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현실에서도 가능하려나? ".........." 가능할 리 없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눈빛만으로 나를 찢어 죽일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흑흑,. 누가 날 좀 구해줘~! ------------------------------------------------------------------------------------ 아이리스 2부 2권 Story 5 히로, 또 나이트클럽 가다 요즘 들어 다른 캐릭터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집에 안 들어오는 캐릭터들도 있고, 집에 있어도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들도 있다. 으음, 아무래도 주인공이 나이다보니 나와 내 주변의 몇몇 인물에 초점이 집중되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캐릭터 들에게는 조금 미안하군. 특히나 등장을 거의 못하는 캐릭터들에게. 난 인형 가게 카운터엣 턱을 기고 앉아서 요즘 등장이 없는 다른 캐릭터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갈리온드와 루엔, 루와 루비, 에스카네스와 카이네이드(제갈량)등등. 으음, 그러고 보니 등장 없는 캐릭터들이 꽤나 많군. 라이레얼과 카르도 요즘에 별로 보이지 않고, 크로니스도 뜸하고. 대체 이 다종족들(엘프, 하프엘프, 드래곤)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지? 설마 어디서 사고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담배 피려면 나가서 펴!" 짜증 섞인 루시아의 목소리.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입에는 담배가 물려있었다. 으음, 금연에 실패한 뒤로 흡연양이 많이 늘었다. 아무래도 금연의 부작용인 것 같다. 이래서 금연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인형 가게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러자 라이가 쪼르르 달려나와 나에게 말했다. "언니가 손님 떨어지니까 다른 곳에 가서 피래요." 난 담배를 들고 가게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지니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워낙 잘생긴 지니다보니 담배 피는 모습도 장난 아니게 멋있다. 저 우수에 가득찬 표정,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아아~ 아무리 봐도 완벽하다. 이 이상 완벽할 수는 없다. 대체 어떤 여자가 저 모습을 보고 반하지 않겠는가? 저쪽에 지나가던 여자1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1,2,3…… 콰당! 으음, 정확히 3초 만에 쓰러지는군. 119에 연락이라도 해줘야 하나? 난 지니의 옆에 앉았다. "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도 이곳으로 오셨군요." "인형 가게 안에도 흡현실을 만들던지 해야겠어요. 저번 기획안만 통과 되었어도 가게 안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을 텐데. 길 건너서까지 담배 사러 갈 필요도 없고."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안타깝습니다. 새로운 기획안을 준비 중이지만 저희 누님과 루시아 공주님의 반대가 너무 심해 통과되기 힘들 듯 합니다." "하아~ 뭐 어쩔 수 없지요." 내가 보기엔 일루니아 여사님이 가장 큰 문제다. 그 아줌마가 철저한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기에 기획안이 통과가 안 되는 것이다. 대체 이번엔 무슨 말로 루시아를 꼬드긴 걸까? 아니면, 루시아가 그렇게까지 반대할 리는 없을 텐데. 그나저나 요즘 루시아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다. 요즘 들어 매사에 신경질적이다. 나한테 소리도 자주 지르고, 라이의 애교에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좋아서 볼을 부비부비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제 생각으로는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이라뇨?" "지금 루시아 공주님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니셨습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제가 어찌 아이언스 공작님의 근심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 아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가끔은 이 인간이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으음, 여자도 아닌 남자한테 속마음을 들킨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신 것 같습니다." "일상에 지쳐요?" "예.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해 신경질적이 되어 가는 겁니다." "정말인가요?"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럼 어찌하는 것이 좋을까요?" "당연히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게끔 도와드려야겠지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떠게 해야 하냐구요."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는……." "으로는?" "저의 짧은 소견에 의하면……." "의하면?" "나이트클럽 가서 흔드는 것이 제일입니다." "……." 나이트클럽? 파이트클럽도 아닌 나이트클럽? 아이리스 2부 1권을 읽었던 독자라면 알겠지만, 난 나이트클럽에 대한 굉장히 안 좋은 추억이 있다. 오죽하면 한때 나이트클럽이란 나이트클럽을 전부 폭파할 계획까지 세웠겠는가? 아아~ 그날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 피가 끓어오른다. 생각해보면 그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이놈이다. 난 사일런스 지니를 노려보았다. 지니는 끓어오르는 나의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나이트클럽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 당연하지. 안 좋게 생각하는 원인이 바로 넌데. "하지만 나이트클럽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젊은 남녀들의 만남의 장도 되고, 음악에 취해 마음껏 춤을 추다보면 스트레스도 해소됩니다. 물론 국내의 나이트클럽 문화가 일정 부분 퇴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사용자에 따라 얼마든지 건전하게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지니가 이렇게 뜸을 들일 때는 뭔가 중요한 말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루시아 공주님과 블루스를 출 수 있다는 겁니다." "뭐라? 블루스!" "그렇습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스테이지 위에서 아이언스 공작님가 루시아 공주님이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천천히 춤을 추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루시아 공주님의 촉감과 향기, 숨소리 등등." "그, 그런!" 나는 스킨십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루시아는 스킨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손 한번 잡는 데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껴안고 춤을 출 수 있다니! 세상에 이보다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그리고 나아가서는……." "더 나아가서는?" "음악이 끝날 때 키스를……." "뭐라? 키스!"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헉! 내가 왜 이러지? 단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흥분되는 걸까? "왜 그러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아, 아님니다. 얘기 계속하세요." "그런 의미에서 영업이 끝나면 다 같이 나이트클럽에 놀러가는 것은 어떨까요? 루시아 공주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기획 의도는 참 좋다. 루시아와 나이트클럽에 놀러 가서 술도 마시고 블루스도 춘다니. 술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람의 마음을 열리게 한다. 루시아가 살짝 취했을 때 그녀의 손을 잡고 스테이지로 나가 블루스를 춘다면…… 우리 사이는 분명 한 단게 진일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 별로 내키질 않는다. 감언이설과도 같은 지니의 말. 하지만 내가 이 말을 들어서 잘 된 적은 한번도 없다. 결국 지니의 말에 솔깃해서 따르다보면 마지막에 피 보는 것은 나다. 이게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매번 결론이 그렇게 나니 이젠 귀가 솔깃한 얘기라도 지니가 말하면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그래! 이제부턴 지니의 말을 따르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밀고 나가는거야! 더이상 지니한테 의존하지 않을테야! "사일런스 백작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은 별로 내키지……." "블루스. 키스." "……굉장히 내키는군요. 전 준비 끝났습니다. 당장이라도 갈까요?" "나이트클럽이란 그 이름대로 밤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공작님의 뜻을 잘 알았으니 제가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지니는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나는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절하려고 했는데 블루스와 키스라는 말에 넘어가다니. 으음, 어째 예감이 좀 안 좋은데. 설마 이번에도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루시아랑 함께 가는 건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나저나 라이도 데려가야 하나? 나이트클럽은 성인만 입장할 수 있을텐데. 라이를 성인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겠지? 아무튼 루시아와 블루스라니. 아아~ 정말 기대된다. 〃              〃               〃 어떻게 말했는지는 몰라도 지니는 루시아의 허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크로니스가 불참 의사를 표명했기에 나이트클럽으로 가는 인원은 나, 루시아, 지니,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이렇게 다섯 명으로 결정이 났다. "라이도 가고 싶어요, 오빠." "응? 어딜가?" "우리 라이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나이트클럽은 성인들만 갈수 있는 곳이란다. 그러니 라이는 집에가서 헬로우 귀티랑 라이코스랑 놀렴." "싫어! 나와 라이도 나이트클럽에 갈 거야." 라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라이 주머니에서 라이코스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말했다. 요즘 어디에 있어서 안 보이나했더니 결국 라이의 주머니 속에 있었군. 훗~ 하긴 지가 날아봐야 라이 주머니 속이지. "새가 나이트클럽에 가서 뭐하게?" "아무튼 라이가 가고 싶어 하니까 나도 갈 거야!" "꺄하~ 고마워, 이코야." 라이코스를 두 손에 들고 볼을 부비부비하는 라이. 순간, 라이코스의 부리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으음, 참으로 신기하군 입도 아니고 부리가 웃다니). "어떡하죠?" "어떡하긴요? 나이트클럽은 아이들 정서교육에 안 좋은 곳입니다." 지니의 말을 들은 루시아는 내가 나서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라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런 곳에 가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니 라이는 먼저 집에 가있으렴. 언니가 오는 길에 피자 사다 줄게." "우웅~." 라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루시아가 볼에 뽀뽀를 해주고 엉덩이를 두드리며 달래주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고구마 두 줄짜리로요." "알았어, 라이야. 우리 라이 정말 착하네. 언니 말도 잘 듣고." "에헤헤~ 라이는 착한 엘프잖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만약 라이가 끝까지 따라오겠다고 땡깡을 부렸다면 참 난감했을 텐데. 나 역시 라이와 짐시도 떨어져있기 싫지만 이번만큼은 라이를 데려 갈 수 없다. 솔직히 아무리 애가 좋다지만 365일 애한테 매달려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가끔은 부부(?)끼리 오붓한 시간을 가질 필요도 있다. "그나저나 우리 어느 나이트로 가는 거죠?" "아! 그때 그곳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많은 곳을 돌아다녀보았지만, 그곳만큼 물이 좋은 곳은 없더군요." "그때 그곳이라면……?" "<쉐이크>입니다. 기억 안 나시나요?" "……." 기억이 난다. 너무 잘 기억이 난다.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들. 아아~ 내가 미쳤지. 내가 뭐 때문에 루시아 같은 완벽한 여인을 놔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걸까? 뭐, 은영이도 괜찮은 애이긴 하지만. "왜 하필 그곳으로 가는 거죠? 다른 곳으로 가면 안돼요?" "그곳으로 가야 모든 코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랑 교제하는 여성분께서 그곳을 관리하는 조직의 넘버3인지라." "흐음, 아직도 교제 중이시군요. 꽤나 오래가네요. 그나저나 그 조직 이름이 뭐예요?" "예전에는 비룡파(飛龍派)였으나, 지금은 녹룡파(綠龍派)로 조직명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조직명이 바뀌어요?" "예. 얼마 전 새로운 자가 나타나 비룡파 보스에게서 조직을 넘겨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새로운 보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기때문에 지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구요. 조직명은 그때 바뀌었다고 합니다." "으음, 조직이라니. 뒷골목 세계도 참 살벌하군요." 그나저나 이 인간 진짜 대단하다. 난 지금 루시아 하나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문어발이라니! 대체 교제 중인 여성이 몇 명이야?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20명이 넘는다. 그리고 이 20명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으음, 인류애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건가? 단 그 인류애가 여자에 국한된다는 게 문제지. 생각해보니 남자에게까지 영역을 확대하면 그건 더 큰 문제로군. 아아~ 난 인류애 같은 걸 필요 없으니 루시아와의 사랑만이라도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저 아줌마도 가는 건가요?" 나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지니에게 물었다. 지니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따라오겠다니 어쩌겠습니까?" "물 흐릴 것 같은데, 그냥 빼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흐음, 하긴 저희 누님께서 나이트 갈 나이를 조금 넘기시긴 했죠. 하지만 요즘은 미시족들도 많이 출입하고 있으니 그리 문제될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수질 관리 차원에서……." "저희 누님 정도라면 청정수역까진 아니더라도 1급수 정도는 됩니다." 하긴, 일단 서구적인 외모인데다가 인텔리전트한 여성이란 점에서 어느 정도 가산점이 주어지긴 한다. "거기서 뭘 그렇게 열심히 궁시렁거리시는 거죠?" 날카로운 일루니아 여사님의 목소리. 으윽, 들렸나 보군. 고개를 돌려보니 나를 찢어죽일 것 같은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이 보였다. 정말 눈빛하는 금메달감이다. 대체 어떻게 하면 눈빛만으로 저런 살기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난 너무 무서운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난 복수를 잊지 않고 있었다. 금연으로 인해 내가 받은 고통. 마치 피를 말리는 듯한 그 고통. 빠드득! 결코 이대로 끝내지는 않으리라. 언젠가는 반드시 피의 복수를 하고 말리라! "왜그래? 몸이 안좋아? 눈에 핏발 섰어." "으응? 하하, 괜찮아. 걱정하지 마." 루시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분노의 마음이 사그라졌다. 루시아는 혹시 천사가 아닐까? 나의 고통까지 치유해주는 천사. 일루니아 여사님이야 당연히 마족이겠지? 그것도 고위 마족. 난 일루니아 여사님의 등 뒤에 검은 날개가 돋아나고, 머리에 굵고 흉측한 뿔이 돋아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잘 어울리는군.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요. 차는 저기 준비해 놓았습니다." 지니가 준비한 차는 소형차도, 중형차도 아닌, 대형차. 그것도 국산차가 아닌 BMW였다. 그것도 거대한 검은색의 7시리즈. 이건 또 어디서 구해왔는지 정말 궁금핟. 요즘 교제한 여성이 외제차 딜러인가? 우리는 차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운전대는 당연히 지니가 잡았다. 자연스럽게 운전하는 지니의 모습을 보니 나도 빨리 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돈도 많이 모았으니 이젠 차 한 대 뽑을 때도 되었다. 스포츠카 한 대 뽑아서 루시아를 옆에 태우고 여기저기 놀러 다닌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아아~ 상상만으로도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 어느새 도착한 강남 유흥가. 화려하게 빛나는 네온사인 사이로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젊은 남녀들이 바쁘게 오간다. 퇴폐적인 느낌 이 팍팍 나는 가운데 호객꾼‥‥ 일명 삐끼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지니가 차를 대놓는 사이 우리는 먼저 내려 거리로 나왔다. "여. 여기 뭔가 이상해요, 일루니아님." "괜찮아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소심한 인디는 몸을 잔뜩 음츠렸고, 일루니아 여사닐은 그런 인디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루시아도 적응이 안 되는지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괜찮아?' 나의 물음에 루시아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호기심에 한번 와봤는데 왠지 못 올 데를 온 것 같네." 하긴,나도 적응이 안 되는데 루시아가 적응할 리 없지. 무엇보다 우리나라 유흥문화가 좀 심하게 막나가는 것이 사실이니. "어이,아가씨. 스타일 죽이는데!우리랑 같이 놀래?' 우리에게 다가온 남자 다섯. 아니 , 정확히는 루시아에게 다가온 다섯 놈. "어라? 염색이 아니네. 피부색도 그렇고. 아가씨 어느 나라 사람이야?" 루시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놈이 루시아의 손목을 잡았다. "아가씨 우리랑 놀자니까." "일행이 있어요." 루시아가 말하자 그 녀석은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 그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생기다 만 녀석이 일행이야? 하하. 읏기지도 않는근군. 아가씨 외모면 적어도 나 정도는 돼야하지 않겠어? 이딴 녀석은 버리고 나한테 오지 " "......" 뭐라? 생기다 만 녀석 ?설마 그게 나를 지칭하는 말? 사일런스 지니와 막상막하의 외모를 지녔다고 평가 받는(본인 생각에만) 나를 보고 감히 생기다 만 녀석이라니! 게다가 나도 몇 번 못 잡아본 루시아의 손목을 만지다니! 난 간만에 살의가 치솟는 것을 느껐다. 난 녀석을 밀치며 루시아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뭐야, 이 자식은?"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패거리를 믿었기 때문일까? 녀석은 비웃음을 지으며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일루니아 여사님의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 을 마주 대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뭣 같은 놈의 눈빛 따위야 우습기 그지없다. 난 녀석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큰 키와 날렵하고 탄탄하게 생긴 몸매, 명품으로 보이는 양복, 무스를 처바른 머리 등등 나이트클립에서 1등급으로 치는 제비다. 시계나 구두. 액세서 리 등이 전부 명품인 것을 보니 집안 잘 만나서 공부 때려 치고 나이트클럽에 여자나 꼬시러 다니는 것 같았다. 아아~ 솔직히 좀 부럽다. 난 이 나이에 등골이 휘어져라 일하는데 나트클럽에서 여자나 꼬시러 다니다니. 녀석의 뒤에 서 있는 네 놈은 친구라기보다는 부하(일명 따까리, 또는 시다바리, 다른말로는 꼬붕)로 보였다. 아마도 이 녀석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핥아먹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항상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부하가 하나 있다. 그 이름 하여 사일런스 지니. 당연한 말이지만 저런 놈들 넷보다는 지니 하나가 백만 배 낫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오늘은 루시아와 놀러온 기분 좋은 날. 이런 기분 좋은 날에 찬물을 끼얹은 녀석들에게 철저한 응징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번만은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녀석은 물러나지 않았다. 하긴, 이 정도에 물러날 녀석이었으면 처음부터 찝쩍거리지토 않았겠지. 그리고 루시아의 미모가 어디 보통인가? 루시아의 얼굴을 봐서라도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쭈~ 그래도 여자 앞이라고 픔 좀 잡아보겠다는 거냐?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그런 넌 내가 누군 즐 아냐?" "허허 , 이놈 봐라. 까대는 게 아주 귀여운데."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내 볼을 특툭 쳤다. 만약 이 상황에서도 내가 참는다면 날 지금쯤 성자, 윽황상제의 강림, 예수의 부활, 부처의 환생 등등의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짝! 난 가볍게 녀석의 뺨을 때렸다. 물론 내 입장에서 가벼운 거다. 녀석은 고개가 돌아가다 믓해 몸까지 돌아갔다. 입 안이 터졌는지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 자식이!" 정신을 차린 녀석은 주먹을 휘두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발로 녀석의 배를 걷어찼다. 퍽! 한방에 5미터 가까이 나가떨어지는 녀석. 내장에까지 피해를 입었는지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헛구역질을 해댄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지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다. 그래도 열심히 건들거리기에 좀 센 놈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부실한 놈일 줄이야. 평소에 운동 좀 하지 그랬니? "너 진짜 약하구나. 앞으론 조심하렴." 난 그렇게 말하고 갈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저 자식 죽여!" 죽여? 누굴? 그놈 뒤에 서 있던 네 놈이 나를 향해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아아~ 역시 일기토 다음은 인해전술이라는 건가? "내 네놈들을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려고 했거늘 이렇게 비열하게 나오다니!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로구나! 너희 같은 것들을 상대하는 데 손속에 사정을 들 필요는 없을 터 ! 내 오늘 살계를 열도록 하겠노라!" 분노한 나는 노기를 담아 무협지에서 주워들은 대사를 외치며 간만에 빅장 40단 콤보를 썼다. 물론 위력을 굉장히 다운 그레이드 시켜서. 제대로 쓰면 정말 뼈와 살이 분리될지도 모르니. 퍽퍽퍽퍽퍽 ! "크아악!" "으아악! "크억! 뺏속까지 아프다!" 더 이상 무슨 묘사가 괼요하겠는가?넷은 완전히 떡이 된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도 내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녀석들은 숨을 쉬고 있었다. 믿었던 부하들이 그 모양이 되자 처음 루시아에게 찝쩍거렸던 놈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난 녀석에게 다가갔다. "어이,제비군. 우리 근처 공사현장으로 가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볼까?" "헉!가.가까이 오지 마!"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그러니? 내가 설마 널 공구리 시키기라도 하겠니?난 다만 우리 사이에 심도 깊은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고, 공구리 !" 녀석은 거의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대체 공구리가 무엇이기에 녀석이 이렇게 무서워하는 걸까? 공구리란 콘크리트의 일본말이다. 그럼 공구리를 시키다는 무슨 뜻일까? 이건 업계 전문 용어(?)로 잘 쓰이지 않는 말로서, 콘크리트 속에 사람을 집어넣고 굳혀 버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을 죽였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시체처리이다. 땅속에 파묻어도 언젠가는 발견되고. 바다에 던지면 언젠가는 떠오른다. 돌같이 무거운 것을 매달아서 던진다 하더라도 잘못하면 그물에 걸려 인양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등장한 방법이 바로 공구리다. 공사 현장 같은 곳에서 시체를 콘크리트 속에 넣고 굳혀버 리면,수십 년 동안은 발견이 되지 않는다. 설사 나중에 재건축을 할 때 발견된다 해도 그땐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있다. 공사 현장에서 공구리해서 시체를 건물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방법 외에 드럼통에 넣고 공구리 시켜 바다에 던져버리는 방법도 있다. 이 릴 경우 진짜 상전벽해가 되지 않는 이상 발견될리 없다. 아무튼 '공구리 시키다' 가 이런 무시무시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녀석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너, 너 우리 아빠가 누군 줄 알아? 우리 아빠가 녹룡파 간부야! 내가 당한 걸 알면 우리 아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 할 말이 없다. 결국 결론은 '나 아빠한테 이를 거야~' 라는 거 아닌가?어린애도 아니고. 이놈 완전 찌질이구만. "너네 아빠가 녹릉파 간부든 뭐든 나랑 뭔 상관이야?' 난 이마로 녀석의 코를 들이받았다. 퍼억! "으악!내 코!" 콧잔등이 주저앉고, 코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불쌍한 것. 마지막에 '아빠한테 이를거야~' 라는 말만 안했어도 이렇게까지 할생각은 없었는데. 말 그대로 이놈은 스스로 매를 벌었다. "제가 없었던 동안 사건이 있었나 보군요. 이는 전부 아이언스 공작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어느 샌가 나타난 지니는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난 지니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괜찮습니다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그나저나 여기엔 어중이떠중이들이 참 많군요. 빨리 들어가지요."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지니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난 인디에게 말했다. "넌 참 좋겠다. " "예?왜요?' "일루니아 여사님한테는 찝쩍거리는 남자들도 없을 테니까. 아아~ 루시아는 너무 예뻐서 찝쩍거리는 놈들이 너무 많아. 정말 귀찮다 죽겠어. 그놈들 일일이 정리하려면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니까." "이, 일루니아님토 인기 많아요." "푸흣~ 너 지금 조크하니?" "무,무슨 말씀이세요? 일루니아님이 얼마나 예쁜데요." "푸하하~ 그래. 그릭다고 해둘게." 난 인디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살기넘치는 목소리. "다 들리네요." 일루니아 여사님이었다. 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리라고 말한 겁니다." 파지직! 허공에서 스파크를 튀기는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 난 내가 금연을 하면서 받았던 고통을 잊지 않았다 아니 , 잊을 수가 없었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것보다도 더 끔찍했던 그 고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언젠가는 반드시 처절한 복수를 하고야 말리라!(이 말만 벌써 몇 번짼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나이트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 만났던 웨이터 투명드래곤이 대기 중이었다. 시끄러운 음악과 화려한 조명 속에서 춤을 추는 젊은 남녀들. 우리는 스테이지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투명드래곤이 곧바로 고급 양주와 비싼 안주를 내오기 시작했다. 이곳에 처음 와보는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는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두리번두리번. 역시나 처음 와보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장소인가 보다. 한번 경험(?)이 있는 나는 루시아를 안심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루시아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어때?" "텔레비전에서 많이 보긴 했는데 , 너무 시끄럽네." "괜찮아. 가끔은 잔잔한 음악도 깔려. 일단 한잔 할래?" 난 잔에 가득 양주를 따라주었다. 루시아가 그것을 마시러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루시아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는 의도가 차암~ 궁금하네요. 남자가 여자에게 술을 먹이는 것은 대부분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라고 하는데." "......" 아니, 이 아줌마가 진짜사사건건 태클을! 꿍꿍이라니! 난 다만 루시아가 목 마를까봐 술을 따라준 것뿐이다. 설마 내가 루시아가 취한 틈을 타 껴안고 블루스를 추려는 그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술을 따라줬겠어?(사실 그런 의도로 따라준 것 맞다) 어쨌든 루시아는 술을 마셨다. 도수가 높은지 루시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러브샷을 하는 등 알아서 잘 놀았다. 지니는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부킹 요청을 물리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역시나 지니의 인기는 대단하군. 훗~ 지가 백날 여자 만나봐야 루시아 같이 완벽한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난 지니를 가볍게 비웃어 주고 어떡게 하면 루시아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많이 힘들지? 그동안 신경 못써줘서 미안해. 오늘은 모든 것을 잊고 실컷 놀자." 내 마음이 통했을까? 루시아는 생긋 웃었다. "고마워." 헉! 정말 너무 아름답다. 그녀가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단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광킁쾅 뛰고 혈압이 급속도로 증가한다. 루시아와 함께 살기 위해선 언제나 심장마비를 조심해야하는 것이다. 이릴 즐 알았으면 우황청심환이라도 먹고 올 걸. "너도 마셔." 루시아는 내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루시아가 따라즌 술이라니! 정말 감동이다. 난 기꺼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빨리 취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루시아가 권하는 술을 안 마실 수는 없었다. 난 루시아가 따라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그러다보니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인디와 노느라 정신이 없어서 인지 더 이상 나에게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난 루시아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 웨이터 하나가 다가와 루시아에게 말했다. "저 손님께서 아가씨와 한잔 하고 싶다고 하는데요." 웨이터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닌 정장을 입은 재수 없게 생긴 놈 하나가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 내가 앉아있는 것을 뻔히 보고도 부킹 신청을 하다니! 그렇게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다는 거냐?아니면,내가 우습게 보인다는 거냐? 난 녀석을 브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요청은 고맙지만 거절한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 웨이터는 아쉬은 듯 발걸음을 돌렸다. 후후~ 루시아가 날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갈 리가 없지. 나에게 오직 루시아뿐이듯, 루시아에게도 오직 나뿐이니까. 내가 다시 루시아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하는데, 그 자식이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 웨이터가 거절당하니 직접 대시하겠다는 건가? "안녕하세요." 녀석이 인사를 건네자 루시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자 녀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를 제 자리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부디 저에게 아가씨를 모실 영광을 주시길." 이 자식이 여가 무슨 카바레인 줄 아나? 어디서 그런 느끼한 방법으로 대시를 해?그런 건 카바레 가서 아줌마들한테나 써먹어! 감히 내가 있는 것을 보고도 루시아에게 찝쩍거리다니.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이런 놈은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걸까?가볍게 빅장으로 묻어버려? 아니면, 배에 칼침을 박은 다음 빙글 돌려? 녀석은 자신이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이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재수 없게 웃고 있었다. 루시아가 대답이 없자 녀석은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저희 아버지가 서울시 시의원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큰 사업을 하고 계시지요. 제 차는 BMW 645Ci 컨버터블입니다. 얼마 전 수입차 딜러를 통해 1억 5천만 원에 구입한 새 차지요. 아름다운 그대를 태우고 시승식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 물론 그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가 마음에 드는 차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 그냥 제가 차를 한 대 뽑아 드리지요. 저와 만나주시기만 한다면 한달에 1천만 원‥‥ 아니, 2천만 원을 용돈으로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어이가 없군. 지금 원조교제 하냐? 차 쁩아주고 용돈으로 2천만원을 줘?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니가 돈 자랑하면 루시아가 너 좋다고 따라가기라도 할 것 같아? 루시아가 그렁게 가벼운 여자로 보여? 내가 흥분해 일어서려는 찰나 루시아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 다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루시아가 내 품에 안기며 내 볼에 입을 맞춘 것이다. 헉!루시아가 이런 대담한 행동을! 나는 순간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토 나는 녀석의 얼굴을 주의해서 보았다. 녀석의 얼굴은 그야말로 똥 씹은 표정이었다. 난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지니에게 말했다. "처리하세요 " "알겠습니다. "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크윽!" 지니가 어깨를 조였는지 녀석은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성을 내뱉었다. 지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녀석 에게 말했다. "잠깐 저 좀 보시지요." 지니는 녀석을 질질 끌고 사라졌다. 웬일로 지니가 도움이 되는군. 때마침 음악이 블루스로 바뀌었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손을 잡은 채 스테이지로 나갔다. 자연스럽게 껴안는 둘. 주위 사람들은 이상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여자 둘이 껴안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분명 인디가 더 키가 큰데 어째서 인디가 일루니아 여사님 품에 안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그나저나 저 자식 아주 좋아서 죽는구만. 인디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인 채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저린면서 밤엔 어 떻게 같이 자는지 몰라. 계속 보고 있자니 부러워 죽을 것 같다. 저런 놈도 여자랑 껴안고 춤추는데 , 난 뭐야? 나도 루시아랑 블루스 추고 싶은데. 루시아는 혼자서 자작을 하는 중이었다. 양주병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럴수가! 그새 양주 한 병을 다 마셨단 말인가? "괜찮아?" "으응 "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취했음이 분명하다. 루시아의 얼굴은 더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만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새하얗고 매끄러운 피부가 붉은 기운을 띠고 있으니 색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붉은 입술은 오늘따라 더욱 붉게 느껴졌다. 게다가 술 때문인지 입술 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아~ 그녀의 입술에 묻은 술을 마시고 실다. 그녀의 뜨거운 입술을 느끼고 싶다. 대체 이 마음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루시아를 단순한 욕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순수한 사랑 그 자체이다. 하지만 나는 신체 건장한 남자. 어찌 육체적 접측을 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술에 취해있을 때 접근하는 것은 좀 치사한 것 같다. 으음,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또 없을 것 같고‥‥‥ 혼자 고민에 빠져있는데 루시아가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우리도 나가자." "응?어디로?" "나도 츰출래." '응?춤이라면..." 지금 나랑 블루스를 추자는 말인가? 루시아의 얼굴, 행동, 말 등등을 조합해 볼 때 루시아는 완전히 취해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거겠지. 이 럴 때는 응해주는 게 남자로서의 도리다. 그래. 어차피 놀러 온 거니까 실컷 놀자.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난 루시아와 함께 스테이지로 나갔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정확히는 루시아에게 집증되었다. 루시아는 아이보리색 면바지에 하얀색 면티를 입고 있었다. 화려하고 도발적으로 차려입은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정말 간소하게 입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간소한 차림으로도 루시아가 내뿜는 매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루시아는 비틀거리며 내 품에 안겨왔다. 난 재빨리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내 등에 파바박~ 박히는 시선들. '네놈이 뭔데 그녀에게 손을 대?' '당장 떨어져!' '그 여자는 내가 찜했어!" '난 그녀를 본 순간 목숨을 바쳐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결투다!' ‥‥‥등등의 말들이 내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으음. 루시아가 너무 아름다운 것도 문제로군. 만약 사후 세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루시아는 절대 천당에 가지 못할 거다. 지은 죄가 많으니까. 응? 무슨 죄냐고?그야 당연 아름다운 죄지. 요즘 세상에서는 너무 아름다운 것도 죄다. 어떤 여자라 해도 아무리 열심히 뜯어 고치고, 옷과 액세서 리에 돈을 처발라 봐야 루시아의 발끝도 따라올 수 없다. 이러니 이 세상 여자들이 얼마나 좌절하겠는가?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나도 취했나? 별 쓸데 없는 생각을 다하는군. 난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지우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루시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루시아는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그녀와 몸을 밀착시키며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언제 부킹을 했는지 지니가 아름답고 늘씬한 여자와 함께 스테이지로 올라왔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의미심장한 읏음을 지어보였다. '축하드립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부디 루시아 공주님과 좋은 시간 보내시길.' '수고하셨습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사일런스 백작님도 이름 모를 그 여성 분과 종은 시간 보내시길.' 우리는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루시아와 함께 춤을 추는 이 순간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가져다주었다. 이 음악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한창 분위기 좋은 순간 예상치 믓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음악과 불이 동시에 꺼졌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한무리의 남자들이 등장했다. "저 자식에요! 저 자식이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아빠?' "누구를 말하는 거냐?" "저 자식이요. 저 재수 없게 생긴 자식!" 지글 나를 가리키며 소리치는 놈은 나도 잘 알고 있는 놈이었다. "앗! 너는 아까 그 찌질이?" "누가 찌질이야!" "응? 여기 너 말고 찌질이가 또 있니?" 녀석은 치료를 받았는지 코에 반창고를 불이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뒤에는 아까 빅장을 맞은 놈들도 같이 있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 녀석들의 모습은 보고 있기가 불쌍할 정도였다. "넌 이제 죽었어 !아빠. 저 새끼 아주 패 죽여요." 녀석이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데다가 깍두기 머리를 하고 있는‥‥‥ 다시 말해 전형적인 조폭 스타일의 남자였다. 그리고 그 남자 뒤에는 부하로 보이는 열 명의 남자들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으음, 자기 아빠가 녹룡파 간부라고 떠들어 대더니 뻥은 아니었나보군. "흐흐.무섭지?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빌어보시지. 그럼 반병신 만들어 능는 정도에서 끝내주지." 녀석의 말에 난 할말을 잃었다. "하아~ 살다살다 찌질이도 이런 찌질이는 처음 보네. 남의 여자한테 찝쩍거리다가 복날 개 잡듯이 두드려 맞았으면 조웅히 꼬리를 말고 물러날 것이지, 아빠한테 이르는 건 또 뭐냐? 게다가 직접 나서지는 못하고 아빠 뒤에 숨어서 떠드는 꼴이라니. 그리고 애가 얻어 터졌다고 해서 쪼르르 쫓아오는 아빠는 또 뭐야? 어이 , 아저씨. 자식 교육 좀 뜩바로 시키세요. 재가 설마 지 혼자 찌질이 됐겠어요? 이게 다 아저씨 닮아서 저 모양 저 꼴 된 거 아니에요? 보아하니 부자가 똑같은 찌질이구만." 내가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주위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찌질이와 찌질이 아빠는 열 받았는지 인상이 일그러지며 얼굴색이 빨갛게 변했다. "적당히 패고 넘어가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군. 넌 오늘 죽었다. 녹룡파의 권칠성이 어떤 인간인지 오늘 똑똑히 보여주마." "형님! 저런 어린놈을 상대로 형님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형님 앞에 무릎 꿇려 대령하겠습니다." "맞습니다. 형님 ! 저희가 처 리하겠습니다." 뒤에 있던 부하 둘이 말하자 직접 나설 것 같던 찌질이 아빠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찌질이는 기가 살았는지 크게 소리쳤다. "여자는 손대지 마! 여자는 내가 찜했으니까, 크크!" 날 처리하고 루시아를 데려가겠다는 건가?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찌질이는 마치 루시아가 자기 손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 죽겠다는 읏음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설사 이 지구가 두 쪽 나는 일이 있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시아 곁에는 내가 있으니까. 무서운 표정을 지은 채 나에게 다가오는 두 명의 깍두기 아저씨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자연스런 발걸음. 하지만 별로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처 리하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직접 처리하지요.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잠시 루시아를 지켜주세요." "알겠습니다. " 난 나서려는 지니를 물리치고 몸소 앞으로 나섰다. 깍두기 아저씨라고 생각했던 조폭들은 아저씨가 아닌 청년이었다. 기껏해야 나보다 두세 살 많은. 머리를 짧게 깎고 검은 정장을 입고 있어서 나이가 들어 보인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한 조폭이 예고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휙! 오른손 훅. 난 왼손으로 날아오는 손목을 잡고 그대로 비틀었다. "으아악!" 손목이 비틀리자 녀석은 온몸을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난 그 상태에서 오른쪽 발로 녀석의 목을 때렸다. 퍼억!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조폭. 으음,생각보다간단하군. 그도 그럴 것이 내 전투력은 드래곤 다음이다. 그러니 인간 중에서 누가 나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한 주먹 하는 사일런스 지니도 내가 빅장 쓰면 막기에 급급한데. "이 자식이!" 한 놈이 나가떨어지자 가만히 서 있던 한 놈이 달려들었다. 난 몸을 살짝 비틀며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녀석이 달려드는 힘을 이용하여 그대로 뒤로 던져 버렸다. 퍼억! "크악!" 스테이지 바닥에 층돌한 녀석은 상당히 아픈지 비명을 질렀다. "그러게 둘이서 한꺼번에 덤빌 것이지." 난 손을 탁탁 털며 그렇게 말했다. 나 하나 상대하는 데 하나면 충분하리라 생각한 건가? 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여기 있는사람들 전부가 덤벼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다. 괜히 8클래스 마스터가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마법 쓴 지도 꽤 됐군. 이 세계에 와서는 마법 쓸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개 인적으로는 주먹도 쓰지 않았으련 좋겠다. 난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어째서 주위에선 날 가만히 두질 않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간만에 루시아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걸 박살내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어! "훗,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건가? 얘들아. 장난은 그만하고 제대로 해라." "알겠습니다. 형님." 찌질이 아빠가 명령을 내리자 부하들이 앞으로 나서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들이 꺼내든 물건은 다름 아닌 칼이었다. 그것도 회 뜰 때나 쓰는 회칼, 전문응어로 사시미칼. "헉!" "흐흐, 이제야 놀라는군. 하지만 이미 늦었다." 녀석들은 내가 칼을 무서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재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난 칼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이제까지 장검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싸워은 나다. 그런 나를 고작 저런 사시미칼로 위 협하려는 건가? 어이가 없어 웃음 밖에 안 나온다. 그럼 내가 왜 '헉!' 하는 소리까지 내며 놀라워했는가? 그건 저 긴 칼이 양복 안 주머니 속에 숨어있었다는 게 놀라워서 그런다. 저 놉들은 양복에 칼집이라도 만들어 놓는 건가? "죽어라!" "놀고 있네." 난 날아오는 칼을 맨손으로 잡았다. 날이 아닌 면을 잡은 것이기에 상처 하나 없이 칼을 멈출 수 있었다. "히익!" 뭘 이 정도 가지고 놀라시나? 이런 건 지니도 쉽게 할 수 있는 건데. "보통 놈이 아니다!다 같이 덤벼!" "으아아!" 겨우 열 명이서 날 상대하겠다니. 가소롭기 그지없군. 나야 이럭게 생각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까아아!"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플. 그러고 보니 여기엔 꽤 많은 여자들이 있다. 그것도 20대 미모의 여자들. 지금이야말로 내 여성팬 숫자를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래! 나도 이번 기회에 팬클럽 한번 창단해 보는 거야! 난 슬쩍 뒤로 물러서며 칼을 피했다. 열 명이 달려들었다고 해도 서로 손과 발을 맞춰 협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구잡이식으로 공격하는 거다. 하긴, 조폭들이 합격진을 배웠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난 넓은 스테이지를 이용해 몸을 이리저리 피하며 한 놈씩 쓰러트렸다. 어느새 열 명이던 숫자는 반으로 줄어들었다. "젠장! 저 여자부터 잡아!" 찌질이 놈이 소리치자 날 공격하던 놈들은 루시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안 되니 여자를 인질로 잡겠다는 건가? 루시아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지니에게 기대고 있었다. 앗! 저 인간이 감히 루시아의 허리에 손을 두르다니 ! 너부터 죽고 싶냐? 녀석들이 루시아를 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별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루시아 옆에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사일런스 지니이기 때문이다. 퍽퍽! 내 예상대로 녀석들은 사일런스 지니의 주먹과 발에 순식간에 나가 떨어졌다. 짝짝짝! "멋있어요, 오빠!" "최고에요!" "오빠 오늘 저희랑 놀아요!" "까아아~ 절 가지세요,오빠아!" "......" 뭐야? 내가 쓰러트릴 때는 가만있더니 . 왜 지니가 쓰러트리니까 이렇게 열광이야?내가 더 많이 쓰러트렸단 말이야! 하지만 날 바라보는 여성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지니를 바라보며 열광하고 있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처리할 걸. 칼까지 들고 설친 부하들이 전부 깨지자 찌질이와 찌질이 아빠는 적잖이 당황했다. 난 여성팬들을 지니에게 빼앗긴 분노를 찌질이 부자에게 풀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서 가만히 기다려라, 찌질아. 너네 아빠 박살내고 그 다음은 니 차례니까." 내 경고에 놀란 찌질이는 재빨리 아빠 뒤로 숨었다. 그 모습에 난 다시 한번 허탈해졌다. 저게 정말 남자란 말인가? 다 큰 성인이 아빠 뒤에 숨다니. 저 녀석은 자존심도 없나? 아무튼 부하들이 다 깨지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찌질이 아빠가 직접 나섰다. 촐랑거리다 개박살 난 부하들과는 다르게 찌질이 아빠는 신중한 모습이었다. 즐거워야 할 루시아와의 나이트클럽 나들이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다니.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렁기에 난 더더욱 녀석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난 녹룡파 넘버7 쌍칼 권칠성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니가 넘버7이든 럭키7이든 권칠성이든 권칠득이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그냥 찌질이 아빠라고 하면 되잖아." 찌질이 아빠 칠득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칠득이는 픔에서 칼 두 개를 꺼내들었다. 하나는 날이 20센티 정도로 길었고.다른 하나는 10센티 정도로 짧았다. 길고 짧은 칼로 번갈아 공격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찔리면 아프겠지? 순간, 칠득이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긴 칼이 내 왼쪽 방위를 차단하며 날아온다. 난 오른쪽으로 피했다. 그러자 이번엔 짧은 칼이 직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난 재빨리 칠득이의 왼손목을 붙잡았다. 칠득이는 오른손에 쥔 긴 칼을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나와 몸을 밀착시키며 긴 칼로 내 등을 찌르려 했다. 괜히 녹룡파 넘버7이라고 떠들어댄 것은 아닌 듯했다. 찌질이 아빠 치곤 제법 싸우는군. 문제는 상대가 나라는 거다. 난 접근해 오는 칠득이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그리고 잡고 있는 왼손목을 비틀며 칠득이 등 뒤로 돌아갔다. "으윽!" 칠득이는 어떻게든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로 날 찌르려고 해봤지만 내가 왼쪽 팔을 꺾은 채 뒤에 서 있으니 칼이 닿을 리 없었다. 난 그 상태에서 무릎으로 칠득이의 얼굴을 올려 찍었다. 퍼억! "크악!" 두 번 정도 때리자 칠득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칼을 떨어뜨렸다. 난 마지막으로 세게 녀석의 얼굴을 올려 찍은 뒤, 녀석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녀석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퍼억! 쿠당탕! 스테이지 밖으로 날아간 칠득이는 테 이블에 놓인 술과 안주들을 뒤집어 쓴 채 완전히 뻗었다. 난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었다. 날이 잘 갈아진 칼은 내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매끄러워 보였다. 이런 위험한 걸 가지고 놀다니. 요즘 조폭들은 참 힘들겠군. 난 그 칼을 들고 찌질이에게 다가갔다. "히익!가,가까이 오지 마!" "내가 아까 분명히 경고 했잖니? 이젠 공구리 당해도 할 말 없겠지?" "아, 안 돼!" "어쭈! 니가 지금 나한테 명령할 입장이냐?" "제,제발 살려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정말 어이없게도 찌질이는 무릎 꿇고 빌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난 할말을 잃었다. 여자한테 찝쩍거리다가 얻어터지고, 그러자 바로 친구들 불러서 떼거지로 공격하고, 그래토 깨지니까 아빠한테 이르고, 아빠가 깨지니까 무릎 꿇고 빌다니. 이놈은 정말 밸도 없단 말인가? "너 같은 놈 낳고 미역국 먹었을 너희 어머니가 불쌍하다." "저 어머니 없는데요." "응? 어머니가 왜 없어?" "저 아버지가 고등학교 때 옆집 누나랑 사고 쳐서 태어난 거거든요." "......" 자랑이냐? 어쩐지 칠득이가 쫌 젊어 보인다 했다. 난 찌질이를 보면서 자식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난 절대 라이를 저럭게 키우지 말아야지. 우리 라이는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귀여은 엘프로 키울 테야. 더 이상 찌질이를 상대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나는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죽어라!" 벌떡 일어나 칼을 들고 돌진하는 찌질이. 그냥 맞아줬으면 좋겠지만, 내 반사 신경은 그리 우스운 게 아니다. 생각도 하기 전에 반응한 내 몸은 옆으로 비켜 있었다. "헉 !" 자신의 회심의 공격이 빗나가자 찌질이는 당황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난 그런 찌질이에게 말했다. "찌질아. 니가 매를 버는구나." "가,가까이 오지 마! 죽여 버릴 거야!" 찌질이는 마구잡이식으로 칼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공포를 이기기 위해 발악을 하시는군. 난 찌질이에게 다가갔다. 나이트클럽 안의 VIP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는 이곳에는 무겁고도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불려온 여자들도 그 분위기에 짓눌렸는지 믐을 움츠린 채 조심스럽게 잔에 술을 따랐다. 오늘은 녹룡파 간부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얼마 전, 강남 일대 유흥가 지역을 관리하는 거대 조직 비룡파의 보스 김용팔은 듣도 보도못한 남자에게 자신의 모든 권력을 넘겨 주고 하와이로 떠났다. 김용팔이 말하길 자신은 암흑계를 떠나 양지에서 남은 인생을 편안히 보내고 싶다고 했지만,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서 하는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어쨌든 더 이상 추한꼴 보이지 않고 짐 싸서 떠난 것은 김용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선택 이었다. 조직의 간부들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새로 보스가 된 남자는 자신의 실력을 보임으로써 그 반발을 일시에 제압했다 그래도 자신에게 토전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응징함으로써 더 이상의 잡음을 없애 버렸다. 지금은 그 누구도 그가 보스에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설사 그런 생각을 가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비룡파의 보스가 된 그 남자가 반발 세력 처리 후에 한 일은 조직 이름을 녹룡파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요즘 부상하고 있는 신흥조직 무스탕파를 공격했다. 그의 진정한 실력은 그 전쟁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그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솜씨로 무스탕파의 전투원들을 쓰러트렸다. 무스탕파와의 전투 이후 더 이상 강남 지역에서 녹룡파에 대항하는 조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녹룡파의 보스가 잔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따라서 잔을 들었다. "녹룡파의 영광을 위하여!" 모두가 술잔을 입에 가져가려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피떡이 된 조직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쌍칼 형님이 당하셨습니다." "뭐?" 20분 전쯤, 아들을 때린 놈을 손봐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난 쌍칼.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을 위해 직접 나섰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을 대비해 부하 열 명이 따라 붙었다. 쌍칼은 이 바닥에서도 알아주는 칼잡이였다. 적어도 아무한테나 당할 실력은 아니었다. 게다가 같이 간 부하들도 제법 실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당하다니? 녹룡파의 넘버3 야화 민수경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대가 몇 명이야?" "그,그게.. 한 명입니다" "뭐?" 쌍칼과 조직원 열 명이 단 한 명한테 당했단 말인가? "그놈 지금 어디 있어?" "아직 클럽 안에 있습니다." "녹룡파의 간부를 건드려 놓고도 도망치지 않다니. 간이 부은 놈이군." 수경은 쌍칼의 복수를 위해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보스가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가지." "보스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니가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죄 , 죄송합니다 " 수경은 재빨리 비켜서며 고개를 숙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보스는 룸을 나와 스테이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수십 명의 간부들과 조직원들이 따랐다. 난 찌질이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걸까? 감히 나를 몰라보고 덤빈 것은 내가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놈은 루시아에게 손을 대려 했다. 이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서할 수 없었다. 빅장을 써서 몇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해즐까? 아니면, 그냥 마법으로 불 태워 버려? 대체 어떤 식으로 응징을 해야 좋은 걸까? 그나저나 이건 대체 무슨 냄새지? 난 찌질이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아~ 이젠 오줌까지 싸다니. 새삼 이곳에 라이를 데려오지 않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가 이런 모습을 보고 뭘 배우겠나? 저벅저벅. 갑자기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구두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한두 사람이 아니군. 찌질이 녀석은 고개를 돌려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순간, 찌질이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찌질이는 벌떡 일어나 방금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 뒤로 숨었다. "저 , 저놈이에요. 저놈이 저랑 아빠를 이럭게 만들었어요." "......" 찌질아 찌질아. 대체 널 어떡게 하면 좋겠니? 퍼억!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주먹을 휘둘렀고, 찌질이는 그 한방에 벽에 처박혔다. 피범벅이 되고 얼굴 한쪽이 함물된 찌질이는 기절했는지 신음성조차 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놀란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입구 쪽으로 물려들었다. 난 찌질이를 때린 놈을 보았다. 검은색 양복, 큰 키, 날카롭게 생긴 얼굴. 하나로 묶은 녹색 머리카락, 귀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님이시군요." "저도 압니다. " 지니의 말대로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난 사람은 바로 카이네이드였다. 인간일 때의 이름은 제갈량. 카이네이드는 날 보더니 피식 읏음을 지었다. "오랜만이군."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니가 왜 여기 있냐?" "내가 녹룽파 보스다. " "뭐?" 녹릉파 보스? 그럼 비룡파 보스에게서 조직을 넘겨받았다는 사람이 바로 카이네이드였단 말인가? 녹룡파란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난 뭔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한동안 안 보이더만, 이런 장난을 하고 있을 즐이야." "장난이 아니다." "장난이 아니면 뭔데? 댁 혼자 힘만으로도 이 바닥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잖아. 그런데 뭐 하러 조직을 만들어?" "원래 독고다이는 오래 믓 가는 법이지." "유희라도 즐기는 건가?" "니가 신결 쓸 일이 아닐 텐데." 오랜만에 대화를 하면서 새삼 느끼는 거지만, 카이네이드는 정말 싸가지가 없다. 아마도 모든 드래곤들 증에서 가장 싸가지가 없지 않을까 싶다. 카이네이드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찌질이 아빠를 쓸쩍 보더니 다시 날 보았다. "지금 중요한 건 니가 내 부하를 건드렸다는 거지." "그래서 어쩌라고?" "대가를 치러야지." "한판 뜨자는 건가?' 상대가 드래곤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두렵지 않았다. 비록 등 떠밀려서 한 일이긴 하지만 난 한때 크로니스와 은명적인 대결을 벌일 뻔했었다. 크코니스도 드래곤, 카이네이드도 드래곤. 두려울 건 아무 것도 없다. 게다가 드래곤이라면 우리 쪽에도 하나 있지 않은가?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 소심 드래곤이라 불릴 만름 소심하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드래곤이니 카이네이드를 상대로 밀리지 않고 잘 싸울 수 있을 거다. "인디,드디어 니 차례다. 일루니아 여사님 앞에서 너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는 거야!" "......" 뭐야?왜 반응이 없어? 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입구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위험한 일에는 끼는 게 아니에요. 어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요?더러워서 피하지." "예. 알았어요, 일루니아님" 뭐야? 날 버리고 지들끼리 도망치는 거야? 일루니아 여사님이야 그렇다 치고 넌 같이 싸워야 할 것 아냐? 드래곤이 도망치면 어떡해? 나 혼자 뭘 어쩌라고? "흔자는 아닙니다. 제가 같이 있지 않습니까?" "‥‥‥‥눈물나게 기쁘군요." 난 지니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루시아는 어디 갔어요?' "저희 누님께서 데려 가셨습니다. " "응?" 고개를 입구 쪽으로 돌려보니 정말로 일루니아 여사님이 루시아를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입구 쪽에 물린 사람이 너무 많아 아까는 못 본듯하다. "언니 ,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괜찮으니 까, 나만 따라와." "히로는 어디 있어?" "그딴 인간 신경 쓰지 마." 아직 술이 안 깨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루시아를 부축해 나이트클럽 밖으로 나가는 일루니아 여사님.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화를 내야 하나? 루시아가 위험한 장소를 벗어나서 다행이긴 한데, 나의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 "누가 먼저 덤빌 거냐?" "훗~ 니가 드래곤이라면, 난 전설의 영웅 아이언스 히로다. 한때 크로니스와 싸우‥‥‥지는 않았지만,싸을 뻔했던 나다. 그런 내가 네놈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솔직히 두럽다. 내가 미쳤다고 나이트클럽을 와 가지고 이게 무슨 꼴이래?그럼 그렇지. 하여튼 이 인간 말을 들어서 잘 되는 꼴을 못 봤어. 난 원망스런 눈길로 지니를 바라본 다음 다시 카이네이드를 보았다. 빅장과 개나리 스텝 등을 잘 활응하면 아주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카이네이드는 마법을 쓰지 않을 것이다. 마법을 쓴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회복 마법이나 강화 마법만 쓰지 공격 마법은 쓰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부하들 눈이 있을 테니까(보스라는 인간 손에서 불꽃이 나가고 전기가 지지직거리면 부하들이 어떻계 생각하겠는가?__. 그렇다면 나한테도 충분한 승산이 있다. 내 주특기는 마법보다는 체술이라 할 수 있으므로. "그럼 저는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겠습니다. "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그래. 걱정 돼지. 니가 다치면 병원에 가야하고, 병윈에 가면 병원비를 내야하고, 그 병원비는 내 든에서 빠져나가니까. 그러니 될 수 있는 한 다치지 말고 끝내려무나. 지니는 내 옆으로 섰다. 그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지 , 지니님." "민수경님 이 시군요." 지니를 바라보며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저 여자. 난 직감적으로 그녀가 지니와 '요즘교제하는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폭력 조직의 넘버3라고 하기에 얼글에 칼자국이 나 있는 우락부락한 여성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굉장히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녀였다. 차가워 보이는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이 매력적인. 아아~ 어떻게 달라불어포 저런 여자들만 달라불는 걸까? 정말 지니가 부러워 견딜 수가 없다. 아무튼 그녀는 지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니님이 어떡게‥‥ 설마 저자와 한 패인가요?" "그렇습니다. 수경님이 제갈량님을 모시듯.저 역시 여기 계신 아이언스 공작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어, 어떡게 그런. 저는 당신과 싸울 수 없어요!" "저 역시 수경님과 싸우기 싫습니다. 그대와 싸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을 정도고요. 하지만 저는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의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대와 싸우는 수밖에 없씁니다. 후에 싸움이 끝나면 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이 죄를 대신하겠습니다." "헉! 안 돼요. 당신은 제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당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해요." "아닙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제게 빛이자 희망이에요. 전 당신을 만난 뒤 처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지옥 끝까지 따르겠어요. 당신과 싸우느니 차라리 ‥‥" 허억!닭살돋아 죽을 것 같아!누가 나에게 대패를 줘~ 이런 생각은 다른 조직원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대체 싸움터에서 뭐하는 짓이래? 아주 둘이서 영화를 찍어라, 영화를 찍어. 주위 사람들 생각이야 어떻든 둘은 더 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특히나 여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난 이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짐작해 보았다. 아니 , 짐작하고 말것도 없다. 사실 이때쯤이면 대다수 독자들도 일이 어떡게 진행될지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조직을 배신하고 당신과 함께 싸우겠어요!" "수경님." "저의 몸과 마음은 이미 당신 거예요. 위험하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저에겐 더욱 큰 고통이에요. 저는 이미 당신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요."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 거다. 아아~생각한그대로 진행이 되니 참 재미없다. 어쨌든 전력이 한 명 늘었으니 그건 다행이다. 난 조직원들 증에서 또 다른 여자는 없나 살펴보았다. 만약 조직원 전원이 여자라면 이 싸움은 할 필요도 없다. 지니가 전부 우리 편으조 끌어들일 테니까. 손자병법 에서 이르길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궁극적인 승리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니는 가장 완벽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니의 전략에는 크나큰 허점이 하나 있었으니‥‥ '난 이제까지 연애 한번 제대로 믓 해 봤는데!' '나의 우상이었던 야화 민수경님을 꼬시다니!' '이 자식 ,죽여 버 리겠어!' ‥‥그건 바로 남자들을 적으로 만든다는 거다. 활활 불타오르는 남자들의 눈빛. 자신을 내던져서라도 지니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나한테까지 전해져 온다. 저들의 심정‥‥‥ 나는 층분히 이해한다. "슬슬 시작하지." 이런 상황에서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뮤감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카이네이드. 난 온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허공에서 얽히는 우리 둘의 눈빛. 이런 긴장감을 느껴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크로니스와의 대결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나는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전부 나보다 약한 존재들이었기에 가볍게 장난으로 상대하면 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상대는 지상 최강의 존재였다.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 그를 이기기 위해서는 빅장과 개나리 스텝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동안 봉인되었던‥‥‥ 아니 ,쓸 필요가 없어서 별로 등장을 안 했던 절대 감각까지 써야한다. 난 긴장을 룰며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의 숨소리까지도 느낄 수가 있었다. 크로니스와 싸움을 할 것처럼 폼이란 폼은 다 잡아놓고, 정작 싸움은 하지 않아 분노한 일부 독자들이 책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나고 제대로 된 싸움씬을 보여주고 실다. 15권에서 무산되었던 역사적인 전투가 지금 이 나이트클럽에서 재연되려는 건가? 훗~ 이번에야말로 그동안 보여주지 믓했던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지. "오늘부로 녹룡파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 "실력도 없는 주제에 말은 많군. 나한테 얻어맞고 울던 게 기억 안 나나 보지?" "내가 언제 그랬어!" "입 닥치고 덤비기나 해. 박살을 내주지."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좀 위험할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상대는 드래곤 아닌가? 인간인 나랑은 체급부터가 안 맞잖아. 그리고 이 자식 하는 짓을 봐라. 살기가 풀풀 풍기는 게 싸움 한 두 번 해본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성질마저 더러우니 자비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으음, 지금 크로니스는 뭐하고 있으려나? 이럴 때 짠~ 하고 나타나서 구해주면 정말 멋있을 텐데. 아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뭔가 억울하다. 난 다만 루시아와 블루스를 추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드래곤을 상대해야 되는 거지? 지니의 꼬드김에 넘어가 이곳에 오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루시아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만약 내가 이 싸움에서 죽거나 크게 다친다고 해봐라 루시아랑 라이가 얼마나 슬퍼하겠나? 물론 일루니아 여사님은 좋아서 잔치라도 벌이겠지. 빠드득! 라이야. 지금 너는 윌 하고 있니 ? 라이코스랑 놀고 있니 , 헬로우 귀티랑 늘고 있니? 아니면, 텔레비전 보겠다고 라이레얼과 싸우고 있니? 지금 이 순간 이 오빠는 우리 라이가 참으로 보고 싶구나. 우리가 대치하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상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사일런스 지니가 비록 외모 하나만 믿고 여자 등쳐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적장을 거쳐 온 백전노장이다. 지옥보다도 더한 전장을 혜쳐온 지니가 저런 조직 폭력배들에게 질 리가 없지. 힐끗 보니 예상대로 지니가 열심히 조폭들을 때려눕히고 있었다. 과연 사일런스 지니! 처음에는 좀 돕나 싶던 넘버3 여성은 지니가 워낙 잘 싸우자 그냥 뒤에서 박수나 치며 지니를 응원하고 있었다. 나도 루시아가 박수를 쳐 주면 굉장히 힘이 날 것 같은데. 이번에 살아 돌아가게 되면 내 팬클럽 창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내 팬클럽이라 봐야 루시아랑 라이밖에는 없지만(잘하면 크로니스까지 넣을 수 있을지도). 카이네이드는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여유롭게 서 있었다.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의 허점을 노려야 한다. 문제는 카이네이드에게 허점이 없다는 거다. 허점이 없으면 허점을 만드는 수밖에 없겠지. "간다! 빅장 40단 콤보!" 선수필승! ...이라고 생각한 나는 기꺼이 선공을 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카이네 이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스윽 물러났다. 하지만 빅장 40단 콤보는 나의 필살기. 괜히 필살기란 명칭이 붙은 게 아닌 만큼 쉽게 피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일, 이 , 삼,사,오.육, 칠,팔 ‥‥ 아싸,좋구나!" 결국 견딜 수 없었는지 카이네이드는 손을 내밀어 나의 공격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난 재빨리 따라붙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20단 콤보까지 썼을 때 카이네이드에게 공격을 허락하고야 말았다. 카이네이드는 내 공격을 쓸쩍 흘리며 오른발로 내 가슴을 걷 어찼고, 공격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그 공격을 막지 못하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퍼억! "크윽! 내가 이대로 당할 성 싶으냐? 빅장 40단 콤보의 특징은 중간에 끊어져도 콤보를 이어나가는 게 가능하다는 거다. 21단부터 시작해 주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중간에 끊어지면 그게 무슨 콤보냐?" "......" 듣고 보니 그렇다. 하긴 오락실에서 격투 게임을 하더라도 중간에 끊어지면 콤보 판정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빅장 40단 콤보는 중간에 끊어져도 계속 콤보로 인정해야 하는 걸까? "......" 너무 킬게 따지지 마라. 원래 그런 걸 어저겠냐? "아무튼 지금부터 나머지 20단을 차려하게 펼쳐 보여 주마!" "좋을 대로." 빅장을 가지고는 승산이 없다. 어떻게든 이 기세를 살려야 할 텐데. 빗발치는 나의 공격 중 카이네이드에게 맞은 것은 얼마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헤이스트와 스트펑스를 걸어 스피드와 근력을 더 높이는 수밖엔 없겠군. 여기에 방어를 위해 스킨 스톤을 걸고,파워 워드 스턴을 이용해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면 되겠지?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드래곤이 아닌가?아마토 내 공격이 끝나는 순간 카이네이드는 반격에 나설 것이다. 그나저나 크로니스는 정말 안 오려나? 내가 이렇게까지 위기 에 처해 있는데. 생각을 하는 사이 40단 롬보가 끝났다. 지친 나는 재빨리 뒤로 물리섰다. 카이네이드는 싸가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싸가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끝난 거냐?"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공평하다. 이 럴 때 기적이라도 일어나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나의 심정이 하늘에 닿았을까? 카이네이드가 공격해 들어오려는 찰나 피투성이가 된 한 남자가 나이트클럽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 그래. 널 보고 있자니 뭔가 큰 일이 나긴 난 것 같구나. 아무 일도 아닌데 니가 그렇게 피투성이가 될 리가 없지. "무슨 일이냐?" "처 , 청룡파가 쳐들어 왔습니다." "......" 청룡파? 녹룡파에 이어 이번엔 청룡파냐?요즘 조직들은 왜 이렇게 용을 좋아해? 이러다가 적룡파, 백릉파, 흑룡파도 나오는 거 아냐? 난 민수경이라는 여자와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지니에게 물었다. "청룡파는 또 뭡니까?" "얼마 전에 생긴 신흥 조직으로 강남을 녹룡파가 장악하고 있다면, 강북은 청룡파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녹룡파 보스와 간부들이 이곳에 모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청룡파가 쳐들어온 것 같습니다. " "조직 간의 암투라는 건가오?' "그렇습니다. 녹룡파를 무너뜨리기만 한다면 청릉파가 서울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요.' "......" 땅따먹기 하냐? 그 순간, 입구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들었다. "저자가 청룡파의 보스인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븐 적도 없으면서." "머리카락이 파란색이잖습니까?" "어! 정말 그렇네." 선두에 선 남자의 머리카락은 파란색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수염까지 파란색이었다. 입고 있는 복장은 낡은 파란색 추리닝에 끈이 떨어질 것 같은 빨간색 슬리퍼. 머리카락은 며칠은 안 감은 듯 부스스하고 수염도 지저분하게 엉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백수 증의 백수, 더 로드 오브 더 백수. 다시 말해 백수의 제왕처럼 보였다(그렇다고 사자처럼 보였다는 것은 아니다). 집구석에서 만화책 보면서 방바닥 긁고 있으면 완벽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남자 어째 낯이 익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지 않아요?"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님이시군요." 그렇다! 그의 정체는 바로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였다. 어쩐지 요즘 안 보인다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놀고 있었던 건가? "으하하!내 이름은 박카스다. 녹릉파의 보스는 나와라!"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에스카네스. 그런데 박카스는 대체 뭐냐?설마 저게 한국 이름이라는 건가? 어떻게 이름을 지어도 PPL(간접광고) 냅새 풀풀 나는 이름을 짓냐? 동아제약한테 돈이라도 받았나? "앗! 너는 카이네이드! 어째서 니가 여기에 있는 거냐?" 카이네이드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에스카네스. 카이네이드는 에스카네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녹룡파 보스 제갈량이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 거냐?" "그랬군. 네놈이 녹룡파 보스였군. 크크, 나는 청룡파의 보스다. 강남을 접수하기 위해 오늘 몸소 이곳까지 행차하셨다. " 두 드래곤의 만남. 난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나저나 저 드래곤들은 뭐하는 짓이래? 나를 따라 한국에 왔으면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봉사할 생각을 해야지,조직 폭력배가 돼? 한국 경제를 말아 먹으려고 작정을 한 건가? 드래곤들이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한국을 돕는다 생각해 봐라.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하고 통일하는 거 금방이다(이러니저러니 해도 사회를 익거 나가는 것은 1%의 지도자들이니). 그런데 이런 고급 인력들이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다니. 이건 정말 국가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뭐,그렇게 따지자면 지니가 인형가게 종업원으로 일하는 것부터가 국가적 손실이긴 하지만. 아무튼 두 드래곤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이전의 의리를 생각해서 기회를 주도륵 하지. 좋은 말로 할 때 강남을 내게 넘겨라 " "지랄. 안그래도 강북에 한번 찾아가려 했었는데 잘됐군. 오늘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자." "정말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냐?" "너 정토야 가볍게 상대해 주지." "크크.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점점 무르익어 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이다. 난 안 싸워도 될 것 같군. 기뻐하렴. 라이야. 오빠 살아 돌아 갈 수 있을 것 같다. 기회가 생긴 지금 도망을 치는 게 좋겠지만. 난 쉽게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두 드래곤이 강남과 강북의 패귄을 놓고 대결을 하려 하는데, 어지 그것을 놓칠 수 있겠는가? 판타지 세계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드래곤들의 격돌. 그 역사적인 전투가 지금 서울 강남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설마 한반도가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 지금이라도 결투 장소를 워싱턴 DC로 바꾸자고 건의해볼까? 카이네이드는 양복 상의를 벗었다. 그러자 에스카네스도 추리닝 상의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노란색 러닝. 대체 얼마나 안 빨았으면 하얀색 러닝 이 저럭게 되었을까? 괜티 색깔은 어떤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린 드래곤 대 블루 드래곤의 대결. 카이네이드 대 에스카네스의 대결. 제갈량 대 박카스의 대결. 양아치 대 백수의 대결. 녹룡파 대 청룡파의 대결. 이 역사적인 대결에 나이트클럽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보시기 엔 누가 이길 것 같나요?" "왜요? 알면 돈이라도 거시게요?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다만 저는 한반도가 무사하길 바랄 따름입니다. 집중해서 봐야하니 자꾸 말 걸지 좀 마세요." "알겠습니다. " 난 잔뜩 기대 섞인 눈으조 두 드래곤을 보았다. 두 드래곤의 대결. 두 드래곤은 한문으로 쌍용. 영어로는 투 드래곤(Two dragon). 참고로 오락실에는 일인용 이인용이 있다. "......" 미안하다. 긴장을 플기 위해 80년대 조크 한번 해봤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플스방에도 일인용과 이인용이 있다는 거다. 멀티탭을 이용하면 삼인용과 사인용도 할 수 있다. 쉬이잉 ~ 내가 말하고도 춥다. 한번만 더 하면 진짜 맞겠군. 생각을 하는 사이 에스카네스가 먼저 움직였다. 에스카네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주먹을 내질렀고,카이네이드는 그것을 가볍게 피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아마 다른 사람들 눈에는 움직임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크하하, 제법이군. 역시 맨손으로는 안 되겠어. 무기를 쓰는 수밖에." 무기?라이트닝 블레이드라도 꺼내 들려는 건가? 난 에스카네스가 허공을 찢고 전기가 흐르는 검을 꺼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에스카네스는 그 누구도 예상치 믓한 의외의 행동을 취챘다. 바로 자신의 슬리퍼 한 짝을 집어든 것이다. 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아니 ! 뭔 놈의 드래곤이 슬리퍼를 들 싸은대? 아예 뽕망치를 들고 싸우시지 !" 이때부터 뭔가 안 좋은 예l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간형으로 폴리모프 했다지만 슬리퍼는 너무한 거 아냐? 에스카네스는 정말로 슬리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공격이 제법 매서웠다. 카이네이드가 이리저리 잘 피하자. 어스카네스는 다른 쪽 슬리퍼까지 집어 들어 양 슬리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당연히 발은 맨발이 되었다). "놀랍군요. 슬리퍼로 저 정토의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보다 슬리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데요." 난 지니의 감탄에 성심성의껏 빈정거려주었다. 밀리던 카이네이드는 안 되겠다 실었는지 손바닥을 편 채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에스카네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카이네이드의 오른슨에서는 녹색 연기가 일직선으로 쁨어져 나찼다. 그 연기를 얼굴에 맞은 에쓰카네스는 늘라 소리쳤다/ "치사한 자식 ! 브레스를 쓰다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카이네이드가 달려들자 에스카네스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에스카네스의 손가락에서는 한줄기 전기가 쁨어져 나왔다. "크하하,블루 드래곤의 전격 브레스다. 맛이 어떠냐?" 그 모습을 븐 나는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아니 !뭔 놈의 브레스가 손에서 나간대?" "환타지 소설이잖습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줘야지요." "아니 , 아무리 환타지 소절이어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잖아요. 저야 그럭다 치고 독자들이 이해하겠어요?" "어차피 작가가 설정이라고 우기면 그만입니다 " "......" 할 말 없군. 난 흥분을 가라앉히고 둘의 대결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카이네이드의 손에서 나가는 녹색 연기 , 에스카네스의 손가락에서 나가는 전기. 둘은 그야말로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뭔 드래곤들이 저렇게 싸우냐? 그릴 거면 차라리 스컹크랑 피카츄로 변신해서 싸우던가. 브레스를 쏘며 거리를 유지하던 둘은 갑자기 거리를 좁히며 육박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육박전이라는 게... 퍽퍽! 콰당! "넌 평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자식아!" "지랄 염병 !" "니가 뭐 잘났다고 양복이야?그게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해?' "추리닝보다 백배는 낫다!" "천년 전에 나한테 쥐어터진 주제에!" "내가 언제 쥐어 터졌어? 너야말코 300년 전에 나한테 얻어맞은 거 생각 안 나냐?" "그래! 생각 안 나! 내가 언제 그랬어?" "기억나게 해줄까? 으악! 치사한 자식. 눈을 찌르다니!" "크악!수염 당기지 마!" "왜 볼을 꼬집고 지랄이야?" "넌 치사하게 할퀴기냐?" "으아악!손가락 깨물지 마!" 툭탁툭탁! 바닥을 구르며 물고, 뜯고, 할퀴고‥‥‥ 그것도 모자라 머리끄덩이까지 쥐고 싸운다. 난 또 다시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아니!뭔 놈의 드래곤들이 저럴게 싸운대?지들이 유치원생이야,초딩이야?지금 나랑 장난해?' "진정하십시오. 아이 언스 공작님 ." "이거 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드래곤 둘이 싸운다기에 내가 얼마나 기대를 했는데 ! 독자들은 또 얼마나 기대를 했겠어? 간만에 제대로 된 싸움씬이 나오는구나, 라고 생각했을 거 아냐? 그런데 뭔 놈의 싸움씬이 이 따위야? 이래서 독자들이 다음 권을 보겠어?" "그건 작가가 걱정할 문제지,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하지요." 난 지니에게 끌려서 나이트클럽을 나서며 고래고래 소리첬다. "어디 다음권이 팔리나 두고 보자!두고 보자고!" 밤늦은 시간. 난 혼자서 집으로 향했다. 응? 지니는 어디 갔냐고? 그야 그건 녹룡파 넘버3 민수경양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그녀랑 같이 갔으니까. (둘이 어디로 갔을지 대풍 짐작이 가지 않는가?) 내가 벨을 누르자 루시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거실에는 라이랑 루,루비가 응기종기 모여 앉아 식은 피자를 먹고 있었다 "아까 들아을 때 사왔는데. 애들이 지금 일어나서 먹는 거야." 루시아는 귀엽다는 듯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귀엽긴 정말 귀엽다. 귀여운 엘프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나 있으니 , 귀여울 수밖에 없지.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귀여운 건 우리 라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확~ 눈에 떤다. 군계일학이라고나 할까? "라이야~ 오빠 왔다." "아! 오빠 오겼어요?" 이제야 나의 존재를 눈치 챈 라이. 입은 여전히 피자를 오물거리고 있다. 다른 엘프들도 라이처럼 열심히 먹고 있다.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한판 더 시켜주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하지만 밤에 많이 먹으면 살도 찌고, 소화에도 안 좋으니 자제하는 게 좋겠지. 어차피 지금 시간에는 피자집이 하지도 않을 테니까. "일루니아 여사님 이랑 인디는?' "방에 들어갔어." 루시아는 술이 완전히 깼는지 멀정한 모습이었다. 아아~ 안타깝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까만큼 좋은 기회가 없었는데. "지니 오빠는 어디 갔어?" "방에 들어갔어." "응? 무슨 방?" "글쎄. 무슨 방일까?" 여관방인지.모텔방인지,아니면 그 여자 방인지 내가 알 리 없지.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난 그때 제정신 아니어서 잘 못 봤는데, 너 그 남자랑 싸운 거야?" "아니. 뭐,꼭 싸웠다기보다는 그게 좀 이상하게 진행이 되서‥‥‥‥" 설명하기조차 난감하다. 두 드래곤이 머리끄덩이 붙잡고 바닥을 구르며 싸운 것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하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두 드래곤이 더 이상 우리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저기 . 루시아." "응? 왜?" "다음에 또 같이 놀러 갈래? 지니랑 기타 등등은 다 빼고 단 둘이서."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지쳤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말을 나는 너무나도 쉽게 하고 말았다. 말을 해놓고 초조한 마음으로 눈치를 살피며 루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시아는 생긋 읏으며 말했다. "좋아." 헉! 지금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니겠지? "지 , 진짜?" "응." 이럴 수가! 드디어 루시아가 나의 진심을 이해하기 시작한 건가?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루시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루시아도 싫지 않은지 손을 빼지 않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 아아~ 가슴이 마구마구 두근거 린다. 난 루시아의 녹보석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렇게 봐?"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세상 그 누구도 너보다 아름답진 않을거야." 이런 느끼한 대사를 마구 내뱉다니.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루시아의 얼글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난 슨을 내밀어 그녀의 볼을 쓰다듣으려 했다. 그런데‥‥‥ "와아! 오빠가 언니한테 이상한 짓 한다." "어 ! 진짜." "루비는 아무 것도 못 봤어요." 그 말을 들은 루시아는 내 손을 탁 쳐냈다. 애들 보는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군. 이럴 땐 그냥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는 게 예의 아니야? 나서서 초를 칠 것까진 없잖아. 난 분노어린 눈길로 세 엘프를 훑어보았다. 너희들에겐 나중에 처절한 응징을 해주마. 날 사소한 일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기억력 좋은(쪼잔한) 남자거든. 다음날 강남의 유명 나이트클럽 <쉐이크>가 폭발했다는 기사가 났다. 경찰은 LPG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로 보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난 그 기사를 보고 한숩을 내쉬었다 "아주 경제 파괴에 앞장 서는구만. 하여튼 이런 인간들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 발전이 안 된다니까." 그나저나 경제가 좀 어럽더라도 독자들이 계속 읽어됐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그래야 다음 권이 나오지. 루시아와 사이가 진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완결된다고 생각을 해봐라. 내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완결이 되더라도 라이 동생 하나는 만들어 주고 완결이 돼야지.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건가? ---------------------------------------------------------------------------- 아이리스 2부 2권 Substory 4 접시 달기 -당장 나가, 이녀석들아 -둘리야,너네집 애완동물은 왜 이렇게 사납니? -응,길동이가 원래 성질이 좀 더러워,그래도 나쁜녀석은 아니야, -예방주사는 맞혔니? 텔레비전 앞에 세 엘프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10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엘프들은 텔레베전 화면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고양이 털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긴 회색 머리카락과 동글동글한 얼굴,품에 꼭 안고 있는 헬로우 귀티 인형. 아아~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소녀는 히로와 루시아의 딸이지 여동생인 라이다. 라이의 옆에 앉아있는 두 엘프는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각각 남성체와 여성체인 두 엘프는 남매라고 해도 좋을 만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었다. 실체로 이들은 사촌남매였다. 이둘의 이름은 루와 루비로 루엔의 손자.손녀였다 "둘리가 불쌍해. 둘리는 어째서 저렇게 구박을 받아야 하는걸까? 응? 어떻게 생각해 루 ? " "그래도 둘리한테는 친구들이 있잖아.도우너와 또치 등등." "앗! 마이클 나온다!" 셋은 엉덩이를 앞으로 움직여 텔레비전화의 거리를 줄였다.아마 히로나 루시아가 이모습을 봤다면 텔레비전 가까이서 보면 눈나빠진다고 혼을 냈을 것이다.하지만 거실에는 지금 그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세 어린 엘프는 얼마 전부터 재방영하는 <아기공룡 둘리>를 보느라 모든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그 순간이었다. 삑! -여기는 잠실 야구장입니다.한국프로야구 플레이오프 3차전 경기가 있겠습니다. 네.허정민 해설의원.오늘 삼승과 도산의 대결 어떻게 보십니까? -네.그러니까 말이죠.아무래도 전적을 살펴보면 삼승이 유리하단 말이죠.하지만 삼승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 이번에 도산 김경분 감독이 단단히 준비를 했단 말이죠.아마 이번 플레이오프의 최대 접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오신 곽객분들 완전히 본전 뽑고 가는 거예요. -하하,그렇군요.그럼 이쯤에서 두 팀의 전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면이 떠오르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장.짧은 스커트를 입은 채 열심히 춤추는 언니들.풍성 방망이 부딪치며 소리치는 사람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깐따삐아별로 향하던 둘리와 그 일행들은 어디가고 갑자기 야구장이 나타난단 말인가? 세 엘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한손으로 턱을 괴고 소파에 누워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흘러내린 레몬빛 머리카락,밝게 빛나는 레몬빛 눈동자,도톰한 붉은 입술은 금방이 라도 터질 것 같은 도발적인 매력을 풍겼따.입고있는 옷은 구겨진 와이셔츠와 핫팬츠가 전부였다.만약 이자리에 히로가 있었다면 단추가 열린 와이셔츠 안쪽과 길게 뻗은 다리 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머리카락은 물론 피부까지 새하얀 아름다운 소녀가 앉아있었다. 소매가 없는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아직 앳돼 보이는 외모 때문인지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보였다. 그 둘은 바로 레이레얼과 카르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세 엘프는 즉각 항의하기 시작했다. "뭐에요?"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어요?" "맞아요!우리 둘리봐야 돼요.!" 라이레얼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 어린 엘프를 쨰려보았다. "나 지금 야구 봐야 하니까 다들 조용히 해." "우리가 먼저 보고 있었잖아요.!" "빨리 채널 바꿔줘요!" 세 엘프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라이레얼의 손에 들린 리모콘을 빼앗기위해 달려들었다. 라이레얼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셋은 깡충깡충 열심히 뛰었지만 손이 닿을 리 없었다. -네.1회 초.삼승 공격으로 시작합니다. "앗! 시작했다." "빨리 리모콘 주세요!" "우리 둘리 볼 거란 말이에요!" "우엥~오빠랑 언니한테 이를 거예요." "시작햇으니까 조용히 좀해!" "으아아앙! 둘리 보고 싶단 말이에요!" "앗!울지 마,루비야." "우엥~ 우엥~ 둘리~ 둘리~." 셋이 울면서 떠들어 대니 정말로 정신없을 지경이었다.라이레얼은 카르에게 말했다. "나 야구봐야하니까 애들 정리해." `앗! 언니가 나에게 명령을 내려주시다니!’ 사소한 일에 크게 감동한 카르는 라이레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예 언니.제가 깨끗이 정리할게요." -도산이 삼승 공격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가운데 잠시 후에 도산 공격이 시작되겠 습니다. 네.어떻게 보십니까,허정민 해설의원? -오늘 도살 선발 투수ㅡ로 나선 박순철 투수.아!아주 컨디션 좋아 보여요. 무엇보다 아까의 그 호쾌한 투구. 그동안의 부진을 말끔히 씻어낸 모습이에요. 오늘 경기가 점점 흥미진진해지네요. -예.그렇군요.아! 지금 도산 벤치에서 김경분 감독이 선수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군요.아마도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예.그런 것 같네요. -삼승 나일론즈 대 도산 베어링즈.삼승은 전통정으로 나일론을 생산해왔고,도산은 베어링을 생산해 왔죠.각각 섬유 분야와 공업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두 기업이 창단한 팀. -하나 재밌는 사실은 지금 도산이 입고 있는 옷에 삼승 나일론이 들어갔고,삼승의 선수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엔 도산 베어링이 들어갔다는 거죠.삼승은 세 명의 승려 가 만들었다고 해서 ‘삼승’인데 도산은 왜 도산인지 모르겠어요.회사 망하려고 작정 을 한건지.저런 이름을 가진 회사가 아직 안 망하고 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에요. -하하하. 역시 오늘도 재밌는 해설을 해주시는군요. 계속해서 좋은 해설 부탁드립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계속해서 야구 중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라이레얼은 소파에 길게 누은 채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시청중이었다. 그리고 아까까지만 해고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둘리를 보던 세 어린 엘프는 한쪽 구석에서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었다.루비는 훌쩍거리고 있었고,루는 겁에 질린 모습이었고,라이는 잔뜩 부어 있었다. 결정적을 중요한 것은 세 엘프의 머리에 하나씩 나 있는 혹이었다. ‘감히 나의 언니가 야구 중계를 보는데 반항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라고 생각한 카르가 저지른 일이었다. 세 어린 엘프가 벌을 서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불쌍하고 처절했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비? 훗~ 그런 단어는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보시지. ‥‥‥라는 것이 라이레얼의 생각이었다.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카르도 마찬가지였다. "니들 손 똑바로 못 들어? 어디서 감히 언니가 텔레비전을 본다는데 채널권을 주장해! 라이레얼 언니의 말을 거역하는 엘프는 내가 용서치 않겠어." 라이가 아무리 7클래스를 마스터했고,8클래스에 진입한 마법사라 하여도 드래곤인 카르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그렇기에 시키는 대로 손이나 열심히 들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카르야." "가서 전자렌지에 팝콘 튀겨오고,냉장고에 있는 콜라도 좀 내와." "네 언니." 그때였다. "헉!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 히로왔네. 어서 와,히로." 집에 들어온 히로는 깜짝놀랐다.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라이와 라이보다는 덜 귀엽지만 그래도 귀여워보이는 엘프가 나란히 무릎꿇고 손을 들고있는 것이 아닌가? 라이는 오빠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달려가서 오빠의 품에 와락~안겼다. "우에에엥~오빠아~." "앗!왜 그래,라이야? 무슨일이야?" "라이레얼 언니가‥‥‥라이레얼 언니가‥‥‥우엥‥‥‥둘리‥‥‥우엥‥‥‥채널 ‥‥‥채널‥‥‥야구‥‥‥엉엉엉!" 라이는 펑펑 울며 손짓발짓을 섞어 오빠에게 설명을 했고,대충 상황을 파악한 히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애들이 둘리를 보고 있는데 채널을 돌려버리다니. 인간으로서‥‥‥아니,하프엘프로서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라이레얼한테 정말 실망이에요!" 히로는 정말로 화가 난 듯 소리쳤다.그 모습에 라이레얼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히로.내가 잘못했어.그러니까 화 내지마." 미안해하는 라이레얼의 표정을 본 히로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게다가 라이레얼 이 몸을 숙이는 바람에 와이셔츠가 벌어지며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아닌가? ‘안 돼! 나한테는 루시아가 있어.이런유혹에 넘어가면 안 돼!’ 히로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이자식!니가뭔데 언니한테 명령이야! 죽여 버리겠어!" "가만히 있어, 카르야. 히로랑 나는 그렇고 그런 사이란 말이야.그러니까 카르는 히로한테 그런태도를 보이면 안 돼.알았어?" "하,하지만 저 인간이 언니한테‥‥‥." "난 히로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용서할 수 있어.아이리스 2권에선 히로가 나한테 더 심한 짓도 했는걸." "‥‥‥." 아아~ 또 나왔다. 2권 애기. 응?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고? 그럼 2권 다시 봐라.알게 될 테니. 히로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훌쩍~ 오빠. 빨리 둘리‥‥‥." 울면서도 끝까지 둘리를 보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하는 라이.라이의 옆에 서 있던 루와 루비는 라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긋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둘리가 뭐기에 애들이 이렇게 집착한단 말인가? 어쨌든 눈물 젖은 라이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히로는 심히 마음이 아팠다. "뭐해요,라이레얼?어서 채널 돌려요." "하,하지만 야구 봐야하는데‥‥‥." "지금 야구가 중요해요? 애들이 둘리 보고 싶다잖아요." -1회 말 도산 공격 시작되었습니다.삼승은 양희수 선수를 선발 투구로 내세웠군요. -예.그렇습니다.양희수 선수.꽤 실력 좋은 선수지요.이번 경기의 활약 정말 기대되네요. -네.말씀드리는 순간 윤철영 선수 타석에 섰습니다. "어! 삼승이랑 도산 경기네요.오늘 시합 있는 줄 몰랐는데." "응" "잠깐만 채널 돌리지 마세요." 히로는 소파에 앉았다. "지금 몇 대 몇이죠?" "아직 0 대 0이야." "하긴 이제 겨우 1회초 끝났으니.원래 삼승이 후반 타격이 강하잖아요." "어! 히로 삼승 팬이야?" "당연하죠. 우리 가문은 족보가 생긴 이래 이제까지 쭈욱 삼승 나일론즈 팬이었어요.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옷도 삼승 나일론에서 나온 나일론으로 만든 제품이에요." "나도 삼승 팬인데!" "어! 정말요?" "응응.한국 프로야구하면 무조건 삼승이지." "아하하!라이레얼 뭘 좀 아시는 군요." 라이레얼은 히로의 옆에 기대 앉았다. 둘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집중되어 있었다. 라이는 쪼르르 다가가서 히로의 팔을 흔들었다. "오빠.둘리~ 둘리~." "나중에 보렴, 라이야. 절로 가 있어." "안 돼요.지금 봐야 돼요. 둘리 봐야 돼요." "맞아요.루비랑 저도 둘리 봐야 돼요." "오빠 둘리 보게 해주세요. 루비가 이렇게 부탁드릴께요." 세 어린 엘프는 히로에게 매달려 징징거렸다. 그 떄문에 화면이 잘 보이질 않자 히로는 버럭 화를 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들을 봤나! 오빠가 야구 본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야 할 거 아냐? 대체 누가 교육 시켰기에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 "오빠요!." "‥‥‥." 라이의 대답에 잠시 얼어붙은 히로.하지만 이내 다시 소리를 쳤다. "시끄러! 어디서 감히 꼬박꼬박 말대꾸야! 어른이 말하는데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나 하고! 그게 착한 엘프가 할 짓이야? 당장 절로 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 "우에에엥~ 오빠 미워요오~." 세 엘프는 아까처럼 한쪽 구석에서 벌을 서야했다. "팝콘 먹으면서 봐." "아! 고마워요." "그나저나 이번 게임 삼승이 이기겠지?" "당연하죠. 삼승이 질리가 없잖아요." "호호,하긴 그래.아! 여기 콜라도 있어." "고마워요. 라이레얼도 같이 먹어요." "응." 라이레얼은 남들이 보면 덮치는 것으로 보일만큼 히로에게 심하게 몸을 밀착시켰다. 게다가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질 않나, 컵 하나에 빨대를 두개 꽂고 먹질 않나. 같은 삼승 팬이라는 동질감 때문일까? 아니면,야구 경기에 집중을 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좋아서일까? 히로는 라이레얼의 적극적인 육탄 공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카르는 새하얀 얼굴이 새빨개질 말큼 분노했다. "너‥‥‥당장 언니한테서 떨어지지 못해!" 그러자 히로에게 열심히 몸을 부비고 있던 라이레얼이 카르를 쏘아보며 말했다. "시끄러! 카르 너도 저쪽에 가서 벌서고 있어." "어,언니‥‥‥." "당장 벌서라니까." "흑~예.언니의 명령이시라면." 카르는 벌서고 있는 세 엘프 옆에 자리를 잡고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아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애들을 감시하는 조교 역활을 하던 카르가 같이 벌을 서게 되다니! 하지만 라이레얼의 명령은 카르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5회 초.스코어는 0 대 0.삼승 두 타자는 삼진아웃을 당한 상태. 도산 투수가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쓰리 아웃! 체인지! "아이씨! 저게 어떻게 스트라이크야? 공이 분명 옆으로 삐져나갔구만. 저심판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거야? " "그러게 말이야 히로. 저 심판 아까 전부터 왜 저러나 몰라. 저 심판 도산 팬인가?" "진짜 짜증나서 경기 못 보겠네!" "진정해, 히로. 히로 옆에는 내가 있잖아.자, 아~ 해봐.내가 팝콘 먹여줄게." "아~. 냠냠." "맛있어, 히로 ?" "예. 맛있어요. 라이레얼도 드세요." "아잉~ 히로가 먹여줘야지." "알았어요. 자, 아~." "아~ 헤헤.히로가 먹여주니 더 맛있다." 소파에서 이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같은 야구팀을 응원한다는 동질감이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스포츠를 통해 하나 되는 사람들.스포츠가 어째서 화합과 평화를 강조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와는 반대로 거실 한쪽에서는 세 엘프와 한소녀가 힘들게 벌을 서고 있었다.찌릿찌릿 저리는 무릎.부들부들 떨리는 팔. 이것은 분명 아동 학대였다! 결국 견디다 못한 루비가 먼저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시끄러. 언니가 야구 보는 데 방해된단 말이야." "너나 조용히 해,카르." "예.언니." 시간은 흘러 어느새 9회 초 삼승 공격.스코어는 3대1로 도산이 앞선 상황. 현재 2아웃인 가운데 2루와 3루에 주자가 나가있다. 이때 등장한 우리의 호프 5번타자 이숭업 -네. 이숭업 선수. 작년 시즌 아시아 최대 홈런을 기록한 선수죠. -네. 맞습니다. 지금 삼승이 제대로 홈런 한방터트려주면 충분히 역전 가능해요. -지금 삼승 팬들의 응원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치어리더의 춤도 더욱 격력해지내요. 아! 저 가운데 치어리더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야말로 치마가 뒤집힐 정도로 춤을 추네요. 일당받았으면 저 정도는 해줘야 하는거 아닙니까 ? -하하.허정민 해설의원 입담도 좋으시네요. 아! 이숭업 선수 타석에 나섰습니다. 단단히 각오를 한 듯 표정이 아주 진지한데요. -그럴 수밖에요. 지금 이숭업 선수는 부담감이 엄청날 거예요. 자기 방망이 하나에 팀의 승리가 달려 있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이숭업 선수가 이제까지 그 부담감을 이기고 싸워오지 않았습니까? 아마 이번에도 그런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네. 박순철 투구. 지금 어떤볼을 던져야 할까 고민 중이에요. 포볼로 내보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위험부담이 좀 크거든요. -예.맞습니다. 이숭업 선수 다음 타자가 마해용 선수란 말이요. 마해용 선수가 홈런 수는 이숭업 선수에 못 미치지만 안타 수에서는 이숭업 선수를 앞지르고 있어요. 만약 이숭업 선수를 포볼로 내 보낸 상황에서 마해용 선수가 안타를 치면 충분히 동점이나 역전이 가능 해요. 그러니 어떻게든 이숭업 선수를 상대로 승부를 지으려 할거예요. -도산 베어링즈 대 삼승 나일론즈. 삼승 나일론즈 대 도산 베어링즈. 과연 승부의 행방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 말씀드리는 순간 1구 던졌습니다. 스트라이크! -이숭업 선수가 변화구 킬러거든요. 그걸 알았는지 박순철 선수.아주 정직한, 그러나 정말 치기 힘든 공을 던졌어요. 과연 박순철 선수답다고 해야 해야할까요? 2구는 볼.3구도 볼.4구는 스트라이크.이제 5구를 던지려는 찰나. -정규방송 관계로 여기서 중계를 끝내겠습니다. 한국 프로야구를 사랑하시는 팬 여러분 다음에 뵙겠습니다. 중꼐는 MFC스포츠 위성 채널에서 계속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시작되는 뉴스. 히로와 라이레얼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뭐야? 왜 갑자기 뉴스가 나오는 거야? 어떻게 된 거야, 히로?" "이런 젠장! 여기서 끝내면 어쩌자는 거야? 아! MFC스포츠 위성 채널이 어디야?" "저희 집 위성 채널 안 나오는데요." "뭐?" 깜짝 놀란 라이레얼은 히로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어쨰서? 왜? 내가 이해할 수 있게 A4용기 한 장 이내로 요약해서 설명해봐!" "맞아! 언니가 이해할 수 있게 빨리 설명해봐!" "이, 일단 진정하시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삼승이 이겼는지 졌는지도 모르는데!" "맞아! 언니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너 혼나 볼래!"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게 된 히로는 두려움에 가득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위성 채널을 보려면 접시를 달아야해요!" "응? 웬 접시?" "그러니까 이따만한 접시가 있거든요. 그 접시를 베란다에 달아야 위성 채널이 나오는 거예요." "요즘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그거? 누구누구도 달았다~ 라는거 맞지 ?" "예. 바로 그거에요." "그런데 이 집은 왜 안 달아?" "예?" "개들도 다 달았다는데 이 집도 달아야할 거 아냐?" 접시가 없어서 경기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놓친 라이레얼의 분노는 굉장했다. 히로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하이라이트 장면을 놓친 것에 대해화가 나기는 히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위의 누군가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고 있으면 화를 내기도 힘들다. "그 접시 꽁짜가 아니거든요. 한 달에 일정 금액을 내야만 달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 경기가 힘들다보니‥‥." "그래서? 그게 내가 삼승과 도산의 경기 하이라이트를 놓친 것에 대한 정당한 변명이라고 생각해?" "맞아! 비겁한 변명하지 마!" 두 여자의 공격에 히로는 어쩔 줄을 몰랐다.결국 히로는‥‥‥. "전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때까지 세 엘프는 여전히 벌을 서고 있었다. 라이레얼은 접시의 정체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다. 과연 접시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기에 돈 까지 내면서 달아야 하는 것인가?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 접시를 달면 각종 위성 채널을 마음껏 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영화,음악,만화,스포츠 등등. 이것은 하루 종일 누워 텔레비전만 보는 라이레얼에게 있어서는 필수품이나 다름 없었다. "접시를 달아야겠어. 인권이도 달고 인순이도 달았는데 우리가 안 단다는 것은 말이 안 돼. 어떻게 생각하니 카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언니." 처음부터 자기 주관이라는 것 없이 오직 라이레얼의 의견만을 따르는 카르에게 반대가 있을 수 없었다. 라이레얼은 바로 히로에게 접근했다. "우리 접시 달자" "예? 갑자기 웬 접시를‥‥접시라면 부엌에 많이 있잖아요." "아잉~ 그 접시 말고. 인권이랑 인순이가 단 접시 말이야." "응.그거.걔들도 달았는데, 우리도 달자." "글쎄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히로. "그냥 공중파 방송 보면 되지,뭐 하러 돈 내면서 그런 걸 달아요? 어차피 텔레비전도 많이 안 보는데." "난 많이 본단 말이야." "그럼 좀 줄이세요. 텔레비전 많이 보면 머리 나빠진대요. 라이레얼도 맨날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만 보지 말고 나가서 운동 좀 하세요. 몸매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뭐야? 그래서 지금 못 달아 주겠다는 거야?" "앗! 저 빨리 가게로 가봐야 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그렇게 말한 히로는 박으로 나갓다. 라이레얼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겻다. 아무래도 히로는 접시를 달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집주인이 히로이니,히로가 반대하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라이레얼은 간만에 머리를 회전시켰다. "으음, 아무래도 애들을 먼저 포섭하는 게 좋겠어." 마침 거실에서 루와 루비, 라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라이레얼은 그들에게 접근했다. "애들아~." 라이레얼이 등장하자마자 세 어린 엘프는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모자라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하긴, 그동안 라이레얼에게 당한 것이 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언니가 피자 시켜줄까?" 그 말 한마디에 다시 후다닥~ 앞으로 이동하는 아이들. 그리고는 마치 합창을 하듯 힘차게 소리쳤다. "네에~!" 냠냠. 옹기종기 모여 맛있게 피자를 먹는 아이들. 라이레얼은 평소 히로의 지갑에서 몇 만원식 빼서 챙겨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맛있니, 애들아?" "네에~!" 피자 한판에 그동안의 악감정은 전부 씻겨 나가고,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라이레얼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접시가 뭔지 아니?" 도리도리. "접시는 여러 방송 채널을 볼 수 있는 아이템이야. 그 접시를 베란다에 달면 이 텔레비전 에서 수십 자기 채널이 나오는 거야." "그래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 라이레얼은 다음 말을 덧붙였다. "만화 채널도 있어. 만화 채널에서는 하루 종일 만화만 나와." "정말요?" 그제야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 라이레얼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둘리나 피카츄는 물론 빨강머리 앤이나 짱구도 볼 수 있어." "와아~!" "접시 달면 좋겠지?" 끄덕끄덕. "그럼 나중에 오빠 만나면 접시 달라고 졸라. 알았지? 언니가 알려줬다는 말은 하지말고." 끄덕끄덕. "말도 잘 듣네. 후후~ 귀여운 것들." 라이레얼의 예상대로 피자를 다 먹은 아이들은 쪼르르 가게로 달려갔다. 대걸레로 가게 청소를 하던 히로는 갑작스레 몰려든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니?" "접시 달아요~!" 가게가 떠나가라 합창을 하는 아이들. 히로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갑자기 웬 접시 타령?" 아이들을 대표해 라이가 나섰다. 라이는 히로의 옷깃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접시달면 재밌는 만화를 막막 볼 수 있대요. 만화만 나오는 채널이 있대요." "그,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접시 달아요. 라이 만화 보고 싶어요!." 회색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히로를 올려다보는 라이. 그 눈빛에 히로는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오빠가 루시아랑 상의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 볼께." "와아! 고마워요, 오빠!" 라이는 마치 당장 접시가 달리기라도 한 듯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며 히로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히로는 즉시 루시아에게 달려갔다. "루시아, 우리 접시 다는 게 어때?" "응? 접시?" "그래. 요즘 접시 안 단 집이 거의 없더라구.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라이가 접시 달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어." "라이가 원해?" 아이가 원한다면 뭐든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 아니겠는가? 루시아는 앞위 잴 것없이 접시를 달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대로 계속 진행되었다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텔레비전은 바보상자야.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것은 아이들 정서 교육에 전혀 도음이 안돼. 생각을 해봐. 접시를 달면 만화 채널이 나오는데 그럼 라이가 하루 종일 만화만 보지 않겠어? 내 생각엔 애 교육 차원에서 접시를 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일루니아는 루시아에게 접시를 다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사실 일루니아가 반대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의 교육 얘기까지 꺼내며 반대를 한 이유는 히로가 찬성했기 떄문이다. 일루니아는 사소한 것에서까지 히로 잘 되는 꼴은 못보는 여인이었다. 일루니아의 말을 들은 루시아는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애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애 교육 에 방해만된다면 들어줄 수 없는 것이 부모 마음아니겠는가? "생각해보니 안 되겠어. 접시는 달면 안 돼." "어째서? 아까는 찬성했잖아." "만화 채널이 나오면 라이는 하루 종일 만화만 볼 텐데. 그럼 애 교육에 안좋아. 그 동안 내가 라이 교육 문제에 대해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으음, 그런가?" 루시아의 말에 히로의 마음도 기울었다. "하긴 이제부터 고액 과외시켜도 모자랄 판인데 텔레비전이나 보게 할 수는없지. 그런의미 에서 영어 학원이랑 한자 학원, 무용학원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 라이는 천재니까 어렸을 때부터 영재 교육을 시켜야 해." 아아~ 과연 부모들의 교육열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어렸을 때 마음것 놀게 해주지는 못할 망정 학원을 다섯 개나 보내려 하다니. 이러니 애들이 탈선의 길로 접어드는 거다. 지나친 교육열은 애들에게 오히려 해야 된다는 사실을 부모들은 어째서 모르는걸까? "‥‥‥이러한 연유로 접시를 못 달게 되었단다." "예? 정말요?" "응. 루시아가 결사반대를 하니 어쩔 수가 없어서. 대신‥‥‥."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라이는 귀를 쫑긋 세웠다. 대신 뭐? 대신 케이블이라도 설치 하겠다는 건가? "‥‥대신 우리 라이 학원 보내줄게. 일단 영어 학원, 피아노 학원, 주산학원, 한자학원 무용 학원 다섯 개 수강 신청하고, 다음달에는 토익 학원이랑 바이올린 학원, 연기 학원 등도 보내줄게. 이미 하루에 18시간 스케줄 짜놨어. 어때? 기쁘지?" 잠시 얼어 붙어있던 라이는 히로의 말뜻을 이해라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히로는 라이를 껴안아 토닥여 주었다. "너무 기뻐서 울기까지 하는구나. 우리 라이 정말 공부하고 싶었나 보네." "으아아앙~!" 펑펑 울며 오빠와 언니에게 애원한 덕분에 라이는 하루 18시간 학원에 다니는 불상사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라이레얼은 자신의 접시 달기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고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제 겨우 플레이오프 3차전이 끝났다. 앞으로 남은 경기가 몇 갠데... 하루라고 빨리 접시를 달아야 한 경기라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카르." "예, 언니." 라이레얼의 말이라면 휘발유를 등에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카르는 바로 부복했다. "난 접시 다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 "저도 포기할 수 없어요, 언니." "그래서 말인데‥‥‥." 라이레얼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나 단식할까 봐." "예? 단식이요?" "응. 텔레비전 보니까 많이 나오더라. 이 나라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일단 밥부터 굶더라구. 그래서 나도 한번 굶어보려구." "아, 안 돼요 언니! 아름다운 언니가 밥을 굶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카르는 라이레얼을 뜯어 말렸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같이 예쁜여자가 굶는다는 것은 좀 그렇지." "맞아요!" "그러니까 카르 니가 대신 굶어." "예에?" "왜? 날 위해 굶는 게 싫어?" "아, 아니에요, 언니. 전 언니를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어요." "호호~ 카르는 참 착하구나." 라이레얼은 카르를 꼭 껴안아 주었다. 라이레얼의 품에 안긴 카르는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아! 언니. 세상이 두 쪽 나도 제 사랑은 오직 언니뿐이에요.’ 라이레얼은 카르를 보며 생각했다 ‘애 하나로 효과가 있을까? 아무래도 애 혼자서 단식 투쟁하면 별로 효과가 없겠지? 저번에 텔레비전 보니까 단체로 단식 투쟁하면데.’ 마침 ‘아기공룡 둘리’ 가 할 시간이어서 아이들이 옹기종기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라이레얼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만화 보는 거니?" 라이레얼이 다가가자 아이들은 리모컨을 등 뒤로 숨겼다. "우, 우리 둘리 볼 거예요!" "그래. 니들 둘리 보렴. 누가 뭐래니?" "‥‥‥." 라이레얼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들은 만화가 시작하자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이레얼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너희들 위성 채널 보고 싶지 않니? 거기서는 만화가 하루 종일 나온다는데." "라이도 보고 싶어요. 하지만 오빠가 접시 달기 싫대요. 루시아 언니도 싫다고 하구요." "그렇다고 그냥 물러서면 안 돼지. 투쟁 없이는 원하는 것을 얻기 힘든 법이야. 하루종이 만화를 볼 수 있는 특권을 얻으려면 처절한 투쟁을 벌어야지." "투쟁이요?" "그래. 예를 들면 단식 투쟁 같은 거." "단식 투쟁이요?" 라이는 ‘단식’ 이라는 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라이 삶의 3대 요소는 먹는 것, 노는 것, 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셋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먹는 것이었다. 그런 라이에게 밥을 굶으 라는 것은 뼈를 깍는 고통을 인내하라는 요구화 다를 바가 없었다. "만화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어요!" "그럼 단식 투쟁을 하렴. 그리 길진 않을 거야. 아마 두,세끼 정도 굶으면 분명 접시를 달아 줄거야." "우웅‥‥." 밥과 만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라이. 손가락을 입에 물고 싶은 생각에 잠겨 있던 라이는 1분 만에 결정을 내렸다. "그냥 둘리나 볼래요. 라이는 밥 굶는 거 싫어요." "‥‥" 작전 실패였다. 라이레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카르에게 말했다. "애들 단식 시켜." 결국 말로 안 되면 실력 행사였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히로는 깜작 놀랐다. 카르와 라이, 루와 루비가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항의 집회를 하는 것이 아닌가? 넷은 머리띠까지 매고 있었다. 히로는 어디가 없어서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재들 뭐 때문에 저러는 거예요?" 과자를 집어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면 라이레얼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접시 안 달아준다고 저러고 있어. 접시를 달아줄 때 까지 밥을 안 먹겠대." "예? 밥을 안 먹어요?" 놀란 히로는 라이에게 물었다. "정말이니, 라이야?" 라이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인 라이코스가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자신이 입을 잘못 놀린다면 라이코스는 온몸의 털이 뽑힌 채 끓는 물 속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라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라이는 오빠가 접시 달아줄 때까지 밥 안 먹을 거예요. 흑‥‥우에에엥~." 잡혀있는 친구를 생각하며 울음을 터트리는 라이. 그때 라이레얼이 말했다. "접시 안 달아주니까 엄청 서운한가 보네. 울기까지 하는 걸 보니." 히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와 루비를 보았다. "그런데 니들은 왜 단식하니? 니들도 접시 안 달아줘서 단식하는 거야?" "저희가 단식을 하든 말든 뭔 상관이에요?"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 앞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루. 히로는 바로 루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퍽! "조그만 게 참 싸가지가 없구나. 자꾸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굴면 루엔한테 이른다." 루엔의 이름이 나오자 루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히로의 사상을 이어받은 루엔의 교육법은 ‘패서 말 안 듣는 아이 없다’ 였다. 엘프 치고는 무식한 교육법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루와 루비가 단식 투쟁에 참가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안 하면 카르가 패 죽일 것 같아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것이다. 물론 하루 종일 만화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 다. 히로는 카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얼음 인형같이 아름답고 차가워 보이는 카르는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새하얀 원피스에 이마의 빨간 머리띠는 별로 안 어울렸다. 카르에게 직접 말을 걸기가 무서운 히로는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카르는 뭐 때문에 단식을 하는 거예요?" "걔는 내 대신하는 거야." "예? 요즘은 단식 투쟁도 대타를 쓰나요?" "응. 그게 그렇게 됐어." 라이레얼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더 이상 토 달지 않는 것이 좋다. 히로는 다시 라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가 단식을 한다고? 다른 엘프도 아닌 라이가?’ 히로는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라이가 한 끼라도 굶는 걸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훼밀리 사이즈 피자를 혼자서도 먹어 치우는 라이가 아니던가? 그런 라이가 단 식이라니! ‘얼마나 가려나?’ 히로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온 가족이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카르와 세 엘프 는 굶어야 했다. "아! 고기 냄새다." 마침 오늘 저녁은 고기 파티라도 하는지 재워놓았던 갈비를 굽고 있었다. 라이는 꼬르륵 소리를 내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라이도 고기 먹고 싶은데‥‥‥.’ 하지만 라이는 지금쯤 어딘가에 갇혀있을 친구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그렇지만 입가에 흐르는 침까지 막을 수 없었다. 루와 루비도 맞기 싫어서 꾹 참았다. "어떡해? 우리 라이 정말 안 먹으려나 봐." 라이의 단식 투쟁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루시아였다. 평소라면 쪼르르 달려와 익지도 않은 고기를 입에 넣었을 라이가 지금은 거실 한쪽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있었다. 젓가락으로 밥알 개수만 세고 있던 루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 되겠어. 그냥 접시 달아주자." "한 끼 정도 굶어도 별 상관없을 텐데. 우리 라이가 설마 한 끼 굶는다고 영양실조 걸리 기야 하겠어?" "넌 애가 밥을 굶고 있는데 걱정도 안 돼? 그러고도 라이의 아빠라고 할 수 있어?" "아, 아니 그렇게 화를 낼 필요까지야‥‥." "시끄러!" 히로는 바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드래곤 다음으로 강하다고 자부하는 히로였지만, 루시아 앞에는 고양이 앞에 쥐가 따로 없었다. ‘흑~ 루시아는 나만 미워해. 라이만 편애하고. 너무해!’ "뭐해? 빨리 라이 데려와. 너 혼자 먹을 거야?" "아, 알았어" 루시아의 다그침에 히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그곳에는 라이가 주린 배를 움켜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라이는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히로를 보았다. ‘갈비가 먹고 싶어요, 오빠 막막 먹고싶어요. 진짜진짜 먹고 싶어요, 오빠’ 그눈 빛에 히로는 부끄러워졌다. ‘갈비 하나에 목숨 거는 라이를 놔두고 나 혼자 맛있게 먹었다니. 이런 미안할 데가!’ "라이야, 오빠가 접시 달아줄게. 그러니 단식 투쟁 그만하고 어서 와서 밥 먹으렴. 라이를 위해 언니가 맛있는 갈비를 구워 놨어." "정말요?" "그래. 넌 속고만 살았니?" 라이와 두 엘프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겨우 한 끼 굶었다고 이 난리를 치다니. 역시 애들은 애들이었다. "카르야 우리도 밥 먹으러 가자." "예, 언니" 라이레얼의 말에 붉은색 머리띠를 풀고 벌떡 일어나는 카르. 이로써 투쟁은 완전 종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히로네 집도 접시를 달게 되었다. 베란다에 접시가 달리는 순간 라이레얼과 어린 세 엘프는 감동 받아 기립 박수를 쳤다. 공중파 4개 채널만 나오던 텔레비전에 수십 개의 위성 채널이 나오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무엇보다 그냥 얻은 것도 아닌 처절한 투쟁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사람이든 엘프는 어렵게 얻은 것에 더욱 애착을 갖는 법이다. 어느날 오후. 텔레비전 앞에서 작은 싸움이 일어났다. 라이레얼과 카르가 한패. 그리고 라이와 루, 루비 가 한 패. 이 두 패는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언니 보스턴 빨간양말이랑 뉴욕 양놈들 경기 봐야 하니까 비키렴" "안 돼요! 라이는 빨강머리 앤 봐야 해요!" "맞아요, 루비도 빨강머리 앤 보고 싶어요. 오늘은 앤이 다이애나와 화해한다고 했단 말 이에요." "저번에는 축구 본다고 뺏어 갔잖아요. 오늘은 절대 안 돼요." "맞아요! 이번에는 절대 양보 못해요!" 쾅! 쾅! 쾅! "어디서 언니가 말하는데 말대꾸야? 니들 학습지는 다 풀었니? 밥 먹고 이빨은 닦았어? 애면 애답게 방으로 들어가서 덧셈 뺄셈이나 하고 있어." "우에에엥~." "엉엉~." "흑흑!." 아이들은 머리에 난 혹을 부여잡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울려면 방으로 들어가서 울어. 시끄러우니까." 애들을 전부 쫓아낸 라이레얼은 소파에 길게 누워 보스턴 빨간양말과 뉴욕 양놈들의 경기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아이들은 ‘여기서 물러나면 영원히 채널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지 이마에 빨간색 띠 (저번에 썼던 강렬한 투쟁의 머리띠)를 묶었다. 그리고는 마치 노조가 파업 집회라도 하듯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불러댔다. "주근꺠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머리 앤~. 외롭고 힘들지만 굳세게 살아 ~. 가슴에 솟아나는 아름다운 꿈~. 하늘엔 뭉게구름 퍼져나가네~.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랄라라라~. 요리보고 저리봐도~ 으음~ 알 수 없는~ 둘리~ 둘리~ 빙하타고 내려와‥‥." 힘차게 빨강머리 앤 주제가를 합창한 아이들은 이어서 아기공룡 둘리의 주제가를 불러댔다. 아아~ 이렇게 강력한 투쟁이라니! 세 엘프가 한 마음 한뜻으로 뭉쳐 시위를 하니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라이레얼은 귀를 틀어막으며 카르에게 말했다. "카르야." "예, 언니" "정리해." "예, 언니." 쾅! 쾅! 쾅! 1차 투쟁 실패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거면 시작도 안 했다. 라이를 비롯한 아이들은 이번엔 어디서 가져왔는지 촛불 하나씩을 들고 나타났다. 라이레얼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니들 지금 뭐하는 거니?" "촛불 시위해요." "‥‥‥."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 가지고. "카르야." "예, 언니." "정리해." "예, 언니." 카르가 입으로 바람을 불자 세 개의 촛불은 금방 꺼졌다. 그리고‥‥. 쾅! 쾅! 쾅! 2차 투쟁 실패였다. 벌써 혹이 세 개나 났다. 이쯤하면 물러설때도 됐지만, 아이들은 얻어 맞은게 억울해서라도 물어날 수가 없었다. "안 되겠어. 이런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채널권을 쟁취할 수 없어." "맞아! 이제부턴 실력 행사로 나서야 해." "그래. 이자리에 쓰러져 피를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투쟁을 멈춰서는 안 돼." 뜻을 하나로 모은 아이들은 바로 소파를 향해 돌격했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라이레얼. 아이들은 라이레얼의 옷깃이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등의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아니 이것들이 감히 언니를." 분노한 카르는 아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라이레얼 역시 반격에 나섰다. 툭탁툭탁! 쿵! 쾅! 빠각! 리모컨이 날라가고 소파가 뜯어지고, 전화기가 박살나고. 거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히로는 깜짝 놀랐다. 집안이 개판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소파가 뒤집혀있질 않나, 베렌다 유리가 박살 나 있질 않나, 진열장이 무너져있질 않나... 아파트 재건축 공사라도 벌이는 건가? 히로는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문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찾아왔나 보네요." 문을 닫고 보니, 층과 호수가 틀림없는 본인 집이었다. 히로는 다시 문을 벌컥 열어 제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단추가 떨어진 옷을 입은 라이레얼이 보였다. 얼굴에는 할퀸 자국 까지 나 있었다. 카르와 라이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아! 히로왔네. 어서와. 헤헤~." 라이레얼은 방금 전까지 아이들을 패던 방석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웃음을 지었다. "이, 이제 대체‥‥." "별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라이레얼이 말했지만, 자기 집 거실이 이 꼴 났는데 신경 쓰지 않을 집주인이 있을 리 없었다. "나, 나와 루시아의 보금자리가‥‥." "아니, 글쎄 애들이 버릇없게 나 야구 보는데 채널을 바꾸려고 하잖아. 그래서 혼 좀 내줬어." "아니에요, 오빠! 우리가 먼저 빨강머리 앤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라이레얼 언니가 뺏은 거예요." "맞아요! 라이 말대로 우리가 먼저 빨강머리 앤 봤어요." "시끄러! 니들 지금 언니 말에 반박하는 거야? 언니가 말하는 게 다 맞아! 그리고 언니한테 대드는 너희들이 나쁜 거야!" "아니에요! 우린 아무 잘못 없어요!" 히로가 왔는데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 라이레얼들과 라이들. 히로의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으아아! 이놈의 TV를 그냥!" 3차 세계대전을 연상케 하는 전투 속에서도 흠집 하나 없이 위풍 당당하게 서 있는 42인치 짜리 프로젝션 TV. 피 같은 돈을 모아 산 그 텔레비전을 히로는 지금 박살내려 하고 있었다. 놀란 라이레얼과 라이는 텔레비전 앞을 가로 막으며 히로를 뜯어 말렸다. "안 돼, 히로!" "안 돼요, 오빠!"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텔레비전이 무사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텔레비전은 양측 모두에게 소중한 것이었기에 암묵적으로 건드리지 말자는 합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놔! 싸움의 원인이 되는 이놈의 TV를 아주 박살을 내버리겠어!" "진정해, 히로 내가 잘못했어. 텔레비전만은 안 돼! 제발!" "라이가 잘못했어요, 오빠 라이를 혼내주세요, 텔레비전은 혼내지 마세요. 우에에엥~." 여기에 루와 루비, 카르도 가세하여 히로를 말렸다. 잠시 흥분했었지만 비싼 돈 주고 산 텔레비전을 박살 낼 생각은 없었던 히로는 들어올렸던 손을 내렸다. "당장 저쪽으로 가서 무릎 꿇고 손들어!" 아이들은 히로가 시킨 대로 구석에서 벌을 섰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멀뚱멀뚱 서 있었다. "뭐하고 있어요?" "응? 나도?" "당연하지요! 누가 거실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당장 라이 옆에서 무릎꿇고 손들어요!" "헤헤~ 나 같이 예쁜 여자가 벌 서는 건 보기 안 좋아‥‥." 찌릿! "흑~ 알았어. 벌설게." 라이레얼은 라이 옆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카르는 분노했다. "너 감히 나의 언니에게‥‥." "카르야. 너도 이리 와서 벌서." 히로는 더 이상 화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 라이레얼이 명령을 내리자 카르는 어쩔 수 없이 따랐다. 나란히 벌을 서고 있는 라이레얼,카르,라이,루,루비. 삼십 분이 지나자 다리가 저리고 팔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초리로 감시를 하는 히로 때문에 팔을 내릴 수도 없었다. 화해와 타협을 모르고 오직 가지주장만 내세울 줄 알았던 다종족 (엘프,하프엘프.드래곤) 들의 최후였다. --------------------------------------------------------------------------- 아이리스 2부 2권 Story6. 히로, 운전면허증 따다. "오빠아~ " "앗! 왜 그러니 ,라이야f' 라이는 요즘 들어 부쩍 친해진 루와 루비와 함께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내가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라이는 초롱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라이 배고파요." "루비도 배고파요." "루도 배고파요." 꽝! "왜 때려요?' "여자는 용서가 되지만, 남자는 용서가 안 돼." 말할 때 자신을 '저' 라지칭하지 않고,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라이의 전매특허이다. 루와 루비는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라이랑 같이 다니더니, 이 런 라이의 화법을 닳아갔다 내가 루비까지는 이해해주겠는데, 루는 절대 이해 못한다. 남자가 자기 이름을 넣어서 말하며 귀여움을 떤다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다. 아무리 귀엽게 생긴 어 린 엘프라도 말이다. "루가 맞아야 할 이유를 대보세요! 루는 폭력이 싫어요1" 쾅!쾅!쾅! "한번만 더 이름 넣어서 말하면 아주 갈아 마셔주마." "오빠. 라이 배고프다니까요." "루비도 배고파요. ' "그래그래. 어렸을 땐 많이 먹어야지. 오빠가 피자 시켜줄까?" "네에~." "아이구, 귀여운 것들. 어쩜 이럭게 귀 엽고 깜찍할까?" 난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동시에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루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똑같이 했는데 왜 저는 때리고. 얘들은 쓰다듬어 줘요? 불공평해요!" "시끄러! 임마! 얘들이랑 너랑 같아?" "뭐가 다른데요?" "넌 남자잖아! 내가 미쳤다고 남자애를 귀여워 해주냐?" "남녀차별 철폐 !' 난 힘껏 외치는 루를 가볍게 무시하고 라이와 루비에게 말했다. "둘이 이렇게 딱 불어서 서 봐." 라이와 루비는 내가 시킨 대로 딱 붙어서 섰다. 라이 키가 아주 조금 크다. 베이지색 바지에 큰 티셔츠를 입고 있는 라이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루비. 아아~ 정말 둘 다 너무 귀엽다. 둘 증 누가 더 귀엽냐고 묻는다면 라이를 택할 수밖에 없겠지만, 루비도 라이 못지않게 귀엽다. 루와 루비의 보호자이자 할머니인 루엔이 갈리온드와 함께 놀러 다니는지라 자연스레 두 아이의 양육을 나와 루시아가 떠맡게 되었다. 어린애들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나이가 50세가 넘은 엘프들이고, 루엔이 교육을 잘 시켜놓아서 그런지 기르는 데 별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루시아도 라이 같이 귀여운 엘프가 둘이나 더 늘었다는 것에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나란히 서 있는 라이와 루비를 보고 있자니 조금도 심심하지가 않다. 둘 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오빠가 사진 진어 줄까?" 난 애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재빨리 디카를 꺼내 들었다. 일루니아 여사님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 라는 생각에 거금을 투자해서 산 500만 화소짜리 디카다. 찰칵! "서로 이마가 닿게 머리를 기을여 봐." 라이와 루비는 시킨 대로 동작을 취했다. 난 그 순간을 놓칠 새라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찰칵! 디카로 찍는 것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왜 요즘 여고생들이 디카나 카메라폰을 들고 다니며 도촬에 열을 올리는지 알 것 같다. "라이는 귀티 인형 들고, 루비는 피카츄 인혈 들어 봐. 그리고 그 상태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서보렴." 다시 찰칵! 난 계속해서 아이를에게 여러 가지 포즈를 요구힌다. 기왕이면 옷도 좀 갈아입혔으면 좋겠는데. 두 아이를 보고 있자니 근처 아동복 매잘의 옷을 싹쓸이 해오고 싶은 충등이 마구마구 든다. 라이는 너구리 모자가 어울리겠지? 루비는 찐빵 모자가 어울리려나? 품이 넉넉한 남방을 입혀 놓으면 얼마나 귀여울까? "일은 안 하고 뭐하는 거야?" 내가 한창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느새 나타난 루시아가 물었다. 난 디카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냥 사진 좀 찍고 있었어. 한번 볼래?" 난 즉석에서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루시아의 표정. "이 사진 너무 귀엽다! 어머, 이 사진도 귀여워!" 연신 '귀여워'를 연발하는 루시아.루시아는 내 손에 들린 디카를 거의 뺏어가다시피 했다. "이거 어떻게 찍는 거야? 나도 한번 찍어 볼래." 난 루시아 뒤에서 그녀게게 자세한 조작법을 알려주었다. 손과 손이 맞닿고 숨결과 숨결이 맞닿는다. 내 코앞에 위치한 그녀의 플래티나 블론드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샴푸향이 느껴진다. 쿵쾅쿵쾅! 또 호흡이 가빠지며 혈압이 상승한다. 그녀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고 갱각을 하니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아~ 정신이 흔미해진다. "왜 그래?" 루시아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계속 가까이 있다간 정말 심장마비로 쓰러질 수도 있으니. 아무튼 조작 방법을 익힌 루시아는 열심히 아이플을 찍기 시작했다. 물론 아까의 나처럼 이러저런 포즈를 요구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를래시. 열심히 포즈를 바꾸는 아이들. 난 심심하다는 듯 구경하고 있는 루 옆에 쪼그려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주위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가게에서 인형을 고르던 사람들은 재빨리 카메라폰을 꺼내 라이와 루비를 찍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터지는 를래시. 눈이 아플 정도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인형집 안에서 전쟁 난 줄 알 것이다 "까아~ 귀여워." "어쩜 저 렇게 귀여울까?" "한번 안아보고 싶어." 여자들은 라이와 루비의 귀여움에 발을 동등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제부터 가게법에 '사진촬영 금지' 조항도 삽입해야겠군. 라이와 루비의 초상권 보호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배고파요, 오빠." "루비도 배고파요." 여러 포즈를 취하던 라이와 루비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나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루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루도 배고파요." 쾅! "넌 하지 말라 그랬지!죽고 싶냐?' 순간, 나에게 엄청난 살기가 쏟아졌다. 우리 주위를 포위한 여성들이 하나같이 날카로운 시선을 퍼부은 것이다.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나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루의 매력이 여자들에게는 강렬하게 어필했나 보다. 난 여자들의 눈짓이 무서워서 하는 수 없이 방금 때린 루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구, 귀여운 것. 이 형 이 너 예뻐하는 거 알지?' 그러자 루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차라리 때리세요." "......" 눈치 빠른 녀석. "아! 저쪽에 지니가 나타났다!" "뭐 ?지니님이?" "나의 지니님이 나타나시다니!" "지니니임 ~ ."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킨 나는 피자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인형집인데요. 치즈 크러스트 리치 골드 피자 체밀리 사이즈 2판 가져다주세요. 물른 콜라는 서비스겠죠? 빨리 가져다주세요. 애들이 배고파서 기다리고 있어요." 피자집은 인형집과 얼마 떨어져있지 않기에 20분도 채 안 되서 배달이 완료되었다. 아이들은 괴자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냠냠~ 아주 맛있게 먹었다. 늦게 배운 토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디카에 맛들인 루시아는 피자 먹는 아이들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무 귀여운 것도 참 피곤한 일이로군. 어쩌겠니? 탓하려면 귀엽게 낳아준 부모님을 탓하렴. "루시아,그만 찍고 피자좀 먹어." "알았어. 이따 먹을게." 결국 루시아는 배터 리가 다 닳고 나서야 디카를 내려놓았다. 배가 잔뜩 부른 아이들은 낯잠 잔다며 집으로 들아갔다. 으음, 참으로 편한 인생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다니. 세상에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아이들이 또 있을까? "그나저나 일루니아 여사님이랑 인디는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 보이네." "언니랑 형부는 데이트한다고 나갔어." "형부?" "응. 언니 남편이니까 나한테는 형부지." "......" 그런 건가?하긴 굳이 따지자면 그럭긴 하다. 그런데 인디가 형부라니. 뭔가 이상하다. 그럼 니가 루시아랑 결혼하면 일루니아 여사님은 처형 이 되고, 인디는 형님(또는 동서)이 되는 건가? 으음.우리나라 가족 명칭은 참 복잡하군. 어쨌든 하루라도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루시아와 결혼할 수만 있다면 일루니아 여사님을 기꺼이 처형 이라 부를 자신이 있다. 인디를 형님이라 부를 자신은 없지만. "지니는 어디 갔어?" "글쎄. 지니 오빠야 워낙 바쁜 사람이니." 여자 만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넘버3랑 아직 안 깨졌으려나? 아마 지니가 '요즘교제하는 여성' 들과 일주일씩민 데이트해도 1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여자가 많으니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군. "크로니스는?' "글쎄. 아마 거래처 사람 만나러 갔을 거야." 거래처 사람? 내가 사장이긴 하지만 인형집 내부의 일은 지니와 크로니스가 거의 도맡아서 처리한다. 인형 떼 오는 것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내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내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돈 세는 것뿐이다. 으음. 직원들 보기 민망하군. 잠깐.그런데 그렇게 다들볼 일이 있어서 갔다면 ‥‥ 헉!설마 지금 나와 루시아 둘만 남아있는 건가? 난 주위에 손님들이 있나 없나 둘러보았다. 다행히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재빨리 루시아에게 접근했다. "루시아." "응? 왜 ?' "저, 저기 말이야· 나의 뜨거운 눈빛을 눈치 챘기 때문일까?루시아는 어색한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우리 일 끝나고 함께 영화나 한편..." "실례합니다. " 아이씨! 이 중요한 순간에 대체 누구야? 보통 이런 중요한 순간에 초를 치는 인간은 사일런스 지니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었다. 정장을 입고 검은색 가방을 든 30대 중반의 아저씨. 그 아저씨가 나에게 물었다. "사장님 계신가요? 난 당당하게 대답했다. "제가 사장인데요." "......" 못 믿겠다는 표정 기분 나쁜 눈길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제가 사장 맞습니다." "그, 그렇군요." 내가 다시 한번 말하자 30대 아저씨는 의문 섞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아! 다름이 아니오라, 오늘 저쪽 길 건너편에 자동차 대리점이 들어섰습니다. 저는 그쪽에서 근무하는 직원 차팔아라고 합니다." "차팔아요?" "예. 성이 차고. 여덟 팔자에 아이 아자를 씁니다. 제가 여덟째로 태어났거든요." "여덟째요?' "예. 위로 누나가 7명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3대 독자신지라. 아! 여기 명함입니다." 난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의 말대로 명함에는 차팔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직업은 세일즈맨,다시 말해 자동차 판매원이었다. 자동차 판매원 이름이 차팔아라? 이런 경우에는 이름 때문에 이런 직업에 종사하게 된 건가? "아! 여기 떡도 있씁니다. 개업 떡입니다." "아, 예." 난 차팔아 세일즈맨이 내미는 백설기를 받아 들었다. "개업 떡 돌리시러 이러게 와주신 건가요?" "하하,그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다른 이유요?" "아! 그러고 보니 성함을 믓 들었군요. 사장님 성참은 어떻게 되십니까?" "제 이름은 박영웅입니다." "아! 박 사장님 이 시군요." "뭐,그렇게 되네요." 박 사장님이라? 아아~ 어감이 참 종다. 그래. 나는 박 사장이었던거야. 김사장도 이사장도 아닌 박사장. 푸하하하! "혹시 박 사장님께서는 차가 있으신가요?" "아니요. 없는데요." 내가 고개를 젓자 차팔아 세일즈맨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런! 아니 . 박 사장님 같으신 분이 차가 없으시다니. 이거 정말 놀라운데요. 이 정도로 큰 사업을 하고 계신 분이 어떡게 차가 없으실 수 있는 거죠?" "......"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어째서 나한테 차가 없는 거지? 내가 뭐가 부족해서? 돈도 충분하고, 신체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주위 분들은 차를 소유하고 계신가요?" "아니요." "저런!" 내가 대답하자 다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차팔아 세일즈맨. "요즘 세상에 차 한 대 없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웬만한 가정에 는 거의 다 한 대씩 있고,두 대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가정도 꽤 됩니다. 그런데 박 사장님 같은 분이 차가 없으시다니요. 차는 더 이상 선택 품목이 아닙니다. 필수품이지요. 급할 때 차가 없어서 고생하신 적은 없으셨나요?차를 운전하고 싶지는 않으신가요?가족들과 함께 놀러 가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무, 물론 그렇긴 하죠." "그럼 이번 기회에 한 대 구입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얘기를 하다보니 당장이라도 한 대 뽑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아주 큰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저 아직 면허가 없는데요." "......" "......" "정말입니까?' "예." "......" 당황하는 차팔아 세일즈맨. 하지만 세일즈맨답게 이내 정신을 회복하고는 가방에서 카탈로그 하나를 꺼내들었다. "저희 회사 카탈로그입니다. 찬찬히 살펴보세요. 면허를 따시고 나서 ,차를 구매할 생각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한테 연락 주십시오. 24시간 상담 가능하고, 최고의 서비스로 모실 것을 약속드립니다. " "예 ." "명함이‥‥‥ 아! 명함은 아까 드렸지요?그럼 잘부탁드리겠습니다. 박 사장님 ." "아, 예. 살펴 가세요." 차팔아 세일즈맨은 들어을 때처럼 왼손에 검은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섰다. 난 그가 남긴 카탈로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손가락으로 백설기를 조금씩 뜯어먹던 루시아가 나에게 다가왔다. "살 생각이야?" "으응. 아무래도 한 대쯤은 필요할 것 같아서. 사실 그동안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지니가 여자들한테 차를 징발(?)해 왔잖아. 그것도 한두 번이지 언제까지 지니한테 의지할 수는 없잖아." "그런가?나는 별로 필요한 걸 못 느끼겠는데." 하기야 루시아는 원래 자동차가 없는 세상에서 살다 왔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토 자동차가 한 대 필요하긴 필요하다. 나처럼 잘 나기는 인간이 자동차가 없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은 적당한 소비이다. 내가 청년재벌이라는 명칭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돈을 잘 버는데 한 푼도 쓰질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죄악이다. 가뜩이나 경기가 어려운 이때에 세금 잔뜩 붙는 비싼 차를 쁩아주는 것이 국가 경제에 공헌하는 길이다. "뭐 , 차야 좀 생각해본다고 해도 일단 면허는 따야할 것 같아. 요즘 같은 세상에 운전면허는 필수지." 당연한 얘기지만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한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시험은 1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차는 학과시험, 2차는 장내 기능시험, 3차는 도로 주행시험이다. 이 세 가지 시험을 기준 점수 이상으로 통과해야지만 국가는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준다. 으음,운전면허시험이라는 게 은근히 어려운 거군. 난 일단 돌아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파는 문제지 하나를 구매했다. 내 옆에서 걷던 루시아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로 면허증 따려구?" "응. 물론이야. 결심을 했으면 바로 밀어 붙어야지." 난 추진력 있는 남자다. 집에 돌아오사마자나는 공부에 매진했다. 정말 간만에 해보는 공부다. 판타지 세계에서 돌아와 검정고시 본 이후로는 처음 하는 공부다. 드르륵 드르륵. 으음, 머리 굴러가는 게 마치 돌 굴러가는 것 같군. 내 머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몰라. 한때는 신동 소리를 듣던 나였는데. 아아~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나의 머리도 퇴화되었단 말인가? "오빠~ 라이랑 같이 놀아요 " "루비도 비행기 타보고 싶어요,오빠 루비도 비행기 태워주세요." 이젠 하나도 모자라 룰씩이나 내 방에 쳐들어온다. 라이가 루비에게 비행기가 얼마나 재밌고 스릴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음이 분명하다. 루비의 저 눈빛을 보라. 초롱초롱. 심하게 반짝이는군 '루비는 비행기가 너무너무 타고 싶어요. 막막 타고 싶어요. 진짜진짜 타고 싶어요. 태워주실 거죠, 오빠?' 얘가 요즘 들어 라이랑 불어 다니더니 라이를 심하게 닳은 것 같다. 으음,라이의 귀여운 면을 닮아서 다행이긴 한데‥‥ 으윽,자꾸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렴. 이 오빠는 눈빛 어택에 약하단다. "그, 그래. 이 오빠가 비햄기 태워줄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나오는 말. 루비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와아! 정말요? 고마워요,오빠." 난 루비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내가 루와 루비를 처음 만난 때는 아이리스 10권 연재할 때쯤이었고(얘들이 그때 처음 출연했으니까) 만난 장소는 엘프의 숲이었다. 엘프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루와 루비는 키스를 하기 위해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루엔에게 떡이 될 때가지 맞았지. 옛날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다. 그 아름답고 맑은 숲. 언젠가는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 그곳에 작은 집을 하나 지어 루시아와 같이 사는 것은 어떨까? 으음. 이 세계에서만 살면 재미없으니 다른 세계로의 이민(?)도 생각해 봐야겠다. 한때. 발랑 까진 엘프‥‥‥ 라고까지 불렸던 루비는 이제 라이에게 감화를 받아 귀엽고 깜찍한 엘프로 재탄생했다. 아이구. 귀여워라. 난 예전에 라이 비행기 태워주었을 때처럼 손과 발을 이웅해 루비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움직였다. "날아갑니다. 쉬이잉. 앗! 미사일이다. 왼쪽으로 회피. 오른쪽으로 회피. 위로 회피. 아래로 회피. 슈우우우." "까르르~." 좋아서 읏음을 터트리는 루비. 대략 라이랑 비슷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 비핼기 놀이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너무 힘들다는 거다. 이 자세가 얼마나 힘든지 안 해본 사람은 절대 로른다. "라이도 태워주세요,오빠." 나를 붙잡고 조르는 라이. 이릴 때는 몸이 두 개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는 루비와 라이를 번갈아 태워주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같이 놀아주자 내 몸은 녹초가 되었다 아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침대에 누워 호흡을 가디듬고 있는데 순간 불길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내 지능지수가 라이를 닳아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사실 내가 라이랑 자주 늘면서 많이 유치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지능지수까지 떨어졌을 줄이아. 어썬지 공부하려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더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부터 사일런스 지니랑 늘아야 하나? "얘들아.오빠 공부해야 하니 나가서 노렴." "싫어요. 같이 놀아요." "맞아요. 루비도 오빠랑 같이 놀고 싶어요." 양쪽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라이와 루비. 내가 싫다 해도 막무가내다. 결국 참지 믓한 나는 호통을 쳤다. "시끄러! 니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오빠 말이 말 같지 않아? 오빠가 공부해야 한다고 했으면 조용히는 믓할망정 같이 놀아달라고 땡깡을 부리다니! 너희들이 그러고도 착한 엘프야?그리고 오빠가 니들 친구야? 허구헌 날 같이 놀아달라고 하게! 대체 그런 버르장 떠리는 어디서 배웠어? 루시아가 그럭게 가르쳤니? 루엔이 그렇게 가르쳤어?" "우에에엥~ ." "으아아앙~." 동시에 을음을 터트리는 라이와 루비. 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내는 건 좀 심했나? 하지만 이 정도까지 하지 않으면 애들이 알아듣지 못한다. 그동안 주위에서 너무 오냐오냐 해준 게 문제야. 루엔처럼 강력한 가정교육을 실시해야 하는데. "우에에에!" "으아아앙!" 점점 커지는 을음소리. 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방 안으로 루시아가 뛰어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별 일 아니야." "별 일 아니라니. 애들이 울고 있잖아." "뭐, 애들이 울 수도 있는 거지. 애들은 원래 울면서 크잖아." 루시아는 재빨리 아이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울지 마. 착하지?언니가 옆에 있잖아. 그러니까 그만 울어." 토닥토닥. 루시아가 두 아이를 달래는 모습은 그야말로 친엄마의 모습 그 자체였다. 비륵 피로 이어져 있지 않지만 끈끈한 정으로 이어져 는 모녀. 역시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라는 건가? "누가 우리 라이랑 루비를 울린 거야?' "우에‥‥ 오빠가‥‥훌쩍‥‥‥막막 화내고..." "훌쩍‥‥ 소리 지르고 ‥‥훌쩍‥‥ 그랬어요." 라이랑 루비가 울먹이며 대답하자 루시아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아니 그게‥‥‥ 내가 공부해야 한다고 했는데토 애들이 놀아달라고 땡깡을 부리잖아. 그래서 좀 화를 냈더니 울음을 터트리더라고. 난 별로 잘못한 거 없어." "잘못한 게 없긴 뭐가 없어? 애들이 놀아달라면 놀아줘야 할 거아냐?" "하,하지만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 "넌 공부가 더 소중해, 애들이 더 소중해?" "그건 너무 이분법적인 논리 아냐?" "됐어. 그럼 넌 하던 공부 계속해." 그렇게 쏘아붙인 루시아는 애들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언니가 같이 놀아줄게. 자, 나쁜 오빠는 흔자 있으라고 하고, 거실에 가서 놀자." 루시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나가기 직전 라이와 루비는 나를 향해 혀를 삐죽 내밀었다. 이름 하여 메롱. 아니, 저것들이 감히! 난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루시아가 옆에서 지키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비행기까지 태워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나쁜 엘프를 같으니. 앞으로 비행기 태워주나 보라. 뭐 , 그래도 나중에 비행기 태워달라고 조르면 태워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워낙 착한 오빠다 보니 애들의 애교에는 약하거튼. 어쨋든 애들도 사라졌고 방해되는 것도 없으니 다시 공부나 해야겠다. 내가 마음먹고 책상에 앉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도 비행기 태워 주세요. 라이랑 루비한테 들었는데 그렇게 재밌다면서요? 저도 타고 싶어요. 막막 타고 싶어요." 쾅! "아이씨 ! 왜 때려요?" 콩! "3초간 니가 왜 맞아야하는지를 생각해 보려무나. 그나저나 조그만 게 참 잘 대드는구나. 아주 매를 벌어라, 벌어." 내가 몇 대 더 때리자 루는 머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다행히 라이랑 루비처럼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남자라는 건가? "자꾸 왜 때려요?" "이유를 말해주랴?" "말해 봐요!" "첫째,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감히 나에게 비행기를 태워 달라고 했다." "루비랑 라이는 태워줬잖아요." "내 비행기는 여성전용이다. 뭐가 이쁘다고 남자애를 태워주겠니?" "......" "둘째,감히 내 앞에서 '막막 타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 "그게 어때서요?" "그건 라이의 전매특허다. 루비가 표절한 것까진 봐주겠는데, 니가 표절하는 것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참고로 그것도 여성전용이다. " "......" "셋째 , 너는 남자애다. " "그건 또 뭐 예요?' "그냥 그렇다는 거야." "뭐예요?결국 세 가지 이유가 전부 제가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그래. 바로 그거야. 알았으면 이만 가보렴." 루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얻어맞은 게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가요." "그럼 ?' "억울해서 비행기 한번 타고가야겠어요." "......" 이것들이 내가 교통수단으로 밖에 안 보이나? 쾅! 쾅! 쾅! 난 루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그리고는 방 밖으로 집어 던졌다. 루는 쫓겨나면서도 처절하게 외첬다. "언젠간 꼭 타고 말 거야~" 아주 CF를 찍 어라. 라이와 루비에 이어 루까지 쫓아낸 나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에 앉아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으음,생각보다 어럽군. 어쨌든 열심히 푼 다음 점수를 맞춰 보았다. "......" 30점이라니. 이럴 수가! 정말로 내 두뇌가 라이 수준으로 떨어졌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돼! 어렸을 때 신동 소리를 듣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이렇게 된 원인은 라이밖에 없다. 라이랑 너무 같이 놀아주다보니 내 머리도 라이 수준으로 퇴화한 거야! "히로는요, 루시아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라이야아~. 히로랑 같이 놀아 주세요오~" "히로의 꿈은 세상에서 제일 착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헤헤헤." "우에에엥~ 지니가 또 히로를 엿 먹였어. 우엥~ 우엥~" 대체 뭐냐, 이 상상은? 히로의 라이 버전이냐? 으윽. 닭살이 파바박 돋으며 머리 뚜껑 이 열리 려고 해. "으아아!" 끔찍함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혼자 발광을 하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첬다. "......" "실례하겠습니다. " "으아악! 당신 누구야?" "접니다. 진정하십시오,아이언스 공작님." 소리 소문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 였다. 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헉헉 . 놀랐잖아! 노크 좀 하고 다녀!" "노크를 했는데 말씀이 없으시더군요.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 "앞으로는 주의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루시아 공주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 "무슨 얘기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운전면허시험 보시는 것을 계획하고 계신다는 얘기를요." "아! 맞아요. 문제지까지 샀어요. 5천원이나 주고." "그래서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지금 학과시험 등록을 하고 오는 길입니다. " "예?" 지니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내 사진과 함께 인지가 붙어있는 종이. "1종 보통이군요. 제가 1종 보통을 따려고 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아시고?" "제가 어찌 아이언스 공작님의 마음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남자라면 매뉴얼이고. 2종 보통을 따느니 1종 보통을 따는 게 나으니까요." "푸하하! 역시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윌 좀 아시는 군요. 남자라면 당연히 매뉴얼이죠." 매뉴얼이란 매뉴얼 트랜스미션을 말한다. 자동차의 기어 변속 시스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된다. 매뉴얼 트랜스미션과 오토매틱 트랜스미션. 간단하게 스틱과 오토로 불리는데, 스틱은 운전자가 기어를 변속해야 하고 오토는 차가 알아서 변속을 한다. 참고로 요즘 출고 되는 자동차의 80~90%는 오토매틱 트랜스미션이다. 그럼 1종 보통은무엇을 말하는가? 운전면허증은 여러 종류로 나된다. 원동기 면허, 2종 소형 면허, 2종 자동 면허, 2종 보통 면허, 1종 보통 면허. 1종 대형 면허 , 특수 면허 등등. 원동기 면허는 125cc 이하의 이륜자동차(오토바이)만 운전할 수 있다. 2종 소형 면허는 125cc 이상의 대배기량 이륜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 2종 보통 면허는 만 18세 이상부터 취득 가능하며, 승용자동차와 승차정원 9인 이하 승합자동차, 적재중량 4톤 이하 화물자등차를 운전할 수 있다. 2종 자동 면허는 보통 면허에서 운전할 수 있는 차량을 똑같이 운전할 수 있으나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그것은 기아 변속 시스템이 오토매틱 트랜스미션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2종 자동 면허 소지자는 매뉴얼 트랜스미션을 조작할 수 없다. 1종 보통 면허는 2종 보통 면허와 비슷하나, 운전 가능한 차량의 범위가 조금 확대된다. 승용차, 승차정원 15인 이하의 승합자동차, 적재중량 12톤 미만의 화물자등차, 승차정원 12인 이하의 긴급자동차, 적재중량 3톤 떠 위헐물 운반차 등을 운전할 수 있다. 1종 대형 면허는 말 그대로 큰 차량을 운전하는 데 필요한 면허이다. 버스나 대형 트럭, 건설 기계, 적재증량 3톤 초과의 위 험물 운반차 등을 운전할 수 있다. 그만큼 자격 요건도 까다로워 만 20세 이상부터 취득할 수 있고, 운전경력이 1년 이상이여야 한다. 뭐. 특수 면허야 말 대로 특수한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이 따는 거다. 이중에서 내가 따려는 면허는 바로 1종 보통이다. 남자라면 당연히 매뉴얼 트랜스미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보통 면허를 따야하고, 기왕 따는 거 2종 보통을 따느니 1종 보통을 따는 게 낫기 때문이다. 참고로 차 가격도 매뉴얼 트랜스미션이 보통 100만 원 이상 싸다. 오토매틱 트랜스미션은 옵션이기 를문이다. 그리고 기어 조작을 운전자가 하기 때문에 연비 면에서도 매뉴얼 트랜스미션이 좋다. 결론은 차 가격도 아끼고, 기름값도 아끼기 위해 반드시 보통 면허를 따야한다는 거다. 유전 하나 없는 대한민국이니 기름 한 방울이라도 아껴야 할 것 아닌가? "국가 경제를 생각하여 기름 한 방울 아끼자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생각에 감복하였습니다." "......" 앗! 이 인간은 또 내 생각을 어떻게 안 거야?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차 뽑지 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 하긴,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치고는 차가 너무 많긴 하지. "지금 태클 거시는 겹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 "아니까 다행 이군요." 자기는 이 석자 저 여자한테 차를 징발해서 다니는 주제에 누구보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래? 지금 나랑 장난하나? 난 지니를 한번 노려봐 준 다음에 등록증을 다시 보았다 "이건 뭔가요?왜 신체검사가 통과로 되어 있어요?' "학과시험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합니다. " "그러니까 어떻게 통과 했냐구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신체가 건강하다 못해 완벽한 것은 만인이 다 아는 바. 제가 그 점을 검사관에게 잘 설명해서 통과시켰습니다" "......" 난 그 검사관이 여자라는 데 내 전 재산을 걸 자신이 있다. 그나저나 이 인간은 불법을 너무나도 태연히 저지르는군. "그런데 시험 일자는 언젠가요?' "내일 오전 9시입니다. " "예?" "내일 오전 9시요." "뭐라? 내일? 모레도 아니고 내일?"' "그렇습니다. 뭐가 잘못되었나요?" "그걸 몰라서 묻냐, 이 인간아?오늘 문제지 샀는데 내일 시험이면 어쩌라는 거야? 나 아직 이 문제지 다 풀지도 믓 했어!" "1종 보통이면 커트라인이 70점입니다. 그 정도는 기본 실력으로만 봐도 합격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방금 풀어봤는데 30점 나오던데요." "......" 할말 없는 듯한 지니. 지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한다는 말이‥‥‥ "전 아이언스 공작님을 믿습니다 " "그래서 어쩌라구?" "괜찮습니다. 떨어져도 다시 보면 그만입니다. 기회는 언제든지 오는 거죠." "한번 시험 보는 데 얼마죠?' "5천원입니다. " "......" 나보고 지금 생돈 5천윈을 날리라는 거니? 니가 여자들한테 빌붙어 살다보니 돈 아까운 줄 모르나 보구나. "하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요. 한때 벼락치기의 귀신이라고 불렸던 제 실력을 보여드리는 수밖에!" "그럼 열심히 하십시오. 전 이만." 지니가 나가고 나자 난 다시 책상 위에 앉았다. 생각해보면 난 벼락치기와 인연이 깊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검정고시까지. 내 인생의 시험이란 시험은 전부 벼락치기였다. 물론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언제나 커트라인에서 간당간당했지. 어차피 70점만 넘으면 되는 거다. 70점을 목표로 오늘 밤을 새면서 공부하는 거야. 그럼 분명 합격할 수 있을 거야! 히로 파이팅! 박영웅 파이팅 ! 잔뜩 기합을 넣은 나는 집중해서 문제를 풀었다. 결과는... "32점이라. 아까보다 2점 올랐군. 후후~." 뭔 문제가 이럭게 어렵다냐? 에잇! 다시 한번 풀어봐야지. 난 문제지를 한 장 넘겨 다시 풀기 시작했다. 편도 2차로 미만 일반도로에서 자동차 등의 최고속도는? 1) 매시 70km 2) 매시 50km 3) 매시 60km 4) 매시 80km 뭐야? 뭐 이 따위 문제가 다 있어? 그냥 적당히 밟으면 되는 거 아냐? 답이 뭐야? 3번? 60km가 최고 속도라고? 신호기의 설치, 관리는 누가 하는가? 1) 건설교통부장관 2) 지방 경찰청장 3) 검찰청장 4) 시,도지사 글쎄요? 누가 할까요? 내가 해야 하는 건가? 어디 답을 봐 볼까나? 답은 2번. 지방 경찰청장이 관리하는군. 후후~ 내가 관리하는게 아니니 다행이군. "......" 아이씨! 뭐가 이렇게 어려워? 지금 고교 검정고시 보냐? 수학능력시험 봐? 안 그래도 국가 공인 시험이라 하면 이가 갈리는데 운전면허시험까지 이렇게 어려워야 되겠어 ? 난 문제지를 찢어버리려다가 아까워서 참았다. 5천 원씩이나 주고 산 건데 아끼고 아껴서 써야지. 똑똑. "누구야?' 난 문에다 대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상대는 맑고 고운 목소리로 답했다. "나야. " 헉 ! 이건 루시아 목소리! 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루시아는 과일 접시를 들고 있었다. "공부는 잘 되가? 이것 좀 먹고 해." 루시아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난 큰 감동을 받았다. 거기에다 날 위해서 과일까지 깎아오다니! 아아~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안 그래도 휴식을 취하려고 했기에 난 침대에 걸터앉아 루시아가 가져은 과일을 집어 먹었다. "애들은?' "자러갔지." "이는 닦았지 ?' "응. 억지로 닦게 했어. 애들이 이 닦는 것을 싫어해서 큰일이야. 충치가 생긴다고 말해줘도 마법으로 치료하면 된다고 하면서 안 닦으려고 해." "뭐 , 버릇 들면 괜찮아지겠지." 밤에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자니 우리가 마치 부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을 재워 놓 야심한 시간에 단 둘이 대화를 하는 부부. 이 다음에는 어떤 상황이 진행돼야 옳은 것일까? "저기, 히로." "응?" "불끌까?" "그래." 스위치가 내려가고 형광등이 꺼진다. 어두운 방 안에 어렴풋이 그녀의 실루엣이 보인다. 살며시 내 품에 안겨오는 루시아. 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사랑해." "나도. " 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는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 위로 쓰러진다. 그 다음에‥‥ "어? 뭐야 이건?' 들려온 루시아의 목소리에 감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으음, 어째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끊기는 걸까? 이 다음부터가 사실상 본론인데. 루시아는 문제지를 들고 있었다 "30점?이거 방금 니가 푼 거지?' "으응." "70점 이상 받아야 한다며?" "뭐, 그렇지." "내일 오전 9시에 시험 본다며?" "응. " "그런데 30점이면 어떡해?" "글쎄. 어쩜 좋을까?" 난 할말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래서 내일 시험을 통과할 수 있으려나? 내가 생각해봐도 회의적이다. "안 되겠어." "응? 안 되다니?" "도움을 받아야겠어." "도움?" 루시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도움이라니? 지니를 데려오려는 건가? 하긴 지니라면 도와줄 수 있겠지. 지니는 못 하는 게 없고, 안 하는 게 없는 인간이니까. "헉! 뭐,뭐야? 어, 어째서 일루니아 여사님을‥‥?' 루시아가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일루니아 여사님이었다. 작은 안경을 쓴 일루니아 여사님은 얼굴에 비웃음을 띄우며 싸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운전면허증을 따신다구요?" "왜요? 뭐 잘못됐습니까?" "운전면허증은 아무나 딸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아이언스 공작님이 백날 발버둥 쳐봐야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호호호~." "......" 이 아줌마 대체 여기 왜 온 거야? 내 염장 지르러 온 건가? 날 화나게 해서 얻어지는 게 뭐가 있다고? 금연 사건 이후 나랑 철천지원수가 된 일루니아 여사님. 그동안은 내가 인디 얼굴 봐서 참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이봐요, 아줌마! 운전면허증 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나 하세요? 이건 국가 공인 자격시험이란 말입니다 내가 백날 발버둥쳐도 못 딴다면.아줌마는 평생 공부해도 못 따! 알기나 알아?" 아아~ 소리 지르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런데 일루니아 여사님은 화를 내기는커녕 생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헉 !그,그건 설마‥‥‥!" "호호, 바로 그 설마랍니다 " "마, 말도 안 돼 !" "말도 안 되긴요?한번 자세히 보시지요." 일루니아 여사님이 꺼내든 것은 바로 운전면허증이었다. 그것도 1종 보통. 이건 가짜가 틀림없어! 내 염장을 지르려고 위조한 걸 거야‥‥‥ 라고 생각한 나는 일루니아 여사님에게서 면허증을 받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위조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토 큰 층격에 난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대 , 대체 어떻게 이걸‥‥‥ ?' "이 세계에서 살려면 운전면허증은 필수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일찌감치 따뒀지요. 제가 평생 공부해도 못 딸 거라구요? 호호,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아이언스 공작님은 등안 무얼 하셨는지 묻고 싶네요. 운전면허증 하나 못 따고 빌빌거리다니. 그러고도 남자라고 할 수 있나요?호호호~" "......" 계속되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공격. 이것은 이미 넉다운 되어 링 위에 쓰러져있는 나를 자근자근 밟는 짓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비매너라니! 하지만 이미 케이오패 당한 나는 한마디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은 보다 못한 루시아가 일루니아 여사님을 뜯어 말렸다. "그만해, 언니." 그래도 루시아가 말리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공격을 중단했다. 하지만 나를 심히 불쾌하게 만드는 비웃음은 여전했다. '네까짓 게 운전면허증을 딸 수 있을 것 같아?주제를 알아야지. 너는 운전을 할 자격이 없어. 국가는 너 같은 놈한테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주지 않아. 그냥 평생 걸어 다녀.' ...라고 말하는 듯한 일루니아 여사님의 표정. 혹시 일루니아 여사님이 이 세계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 아닐까?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보기 위해서. 일루니아 여사님이라면 분명 가능한 일이다. 그나저나 일루니아 여사님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졌지?옛날의 그 퍼석퍼석하던 피부가 지금은 라이 피부처럼 뽀송뽀송하다. 마치 회춘이라도 한 것 같잖아. 헉! 설마 내 덕분인가? 내가 그동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일루니아 여사님이 이렇게 젊어진 건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나의 고통이 자신의 행복이라니! 대체 어 떻게 이 럴 수가 있는 거지 ? 빠드득!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일루니아 여사님이 운전면허를 취득했다는 사실이다. 대체 언제 취득한 거지? 어떻게 합격한 거지? 인디가 대리 시험이라도 치렀나? "언니가 히로 좀 도와줘. 내일 오전에 시험이래. 언니가 가르쳐주면 합격할 수 있을 거야." "뭐?나보고 이 아줌마한테 가르침을 받으라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그럼 어떵게 해?내일이 시험이잖아 30점이면 무조건 탈락이야. 언니는 100점으 합 격했으니까. 언니한테 배우면 분명 합격할 거야. 그리고 언니가 원래 남을 잘 가르치니 걱정하지 마. 나도 어렸을 때 언니한테 배웠는걸." 합격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난 본능적으로 이 아줌마한테 배우기가 싫다. 일루니아 여사님께 배우느니 차라리 고액 과외를 하고 만다. "그러니까 부탁해, 언니. ' 난 일루니아 여사님이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 거절하기를 바랐다. 일루니아 여사님께 배우느니 독학하는 것이 백배는 낫다. "좋아. 루시아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내가 들어 줘야지." 헉! 허락을 하다니 ! 난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저 눈빛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눈빛. 내면 깊은 곳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는 눈빛. 그녀 앞에서 나는 가련한 한 마리의 양에 불과했다. "언니가 가르쳐 준다니 다행이네. 그럼 공부 열심히 해." "자,잠깐. 가지 마, 루시아! 날 내버려두고 가지 마!" 하지만 루시아는 매정하게 방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만이 남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운전면허고 뭐고 다 필요 없이,그냥 걸어 다니고 싶다. 고속도로 주햄 시 적정한 타이어 공기압은? 1) 10~20% 낮게 주입한다 2) 20~30% 높게 주임한다 3) 50% 낮춘다. 4) 정해진 압력으로 "정답이 뭐죠?' "그.글쎄요. 4번 아닌가요?" "훗~ 무식하기는." 틀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웃음을 지으며 빈정거리는 일루니아 여사님. 아아~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아. 난 당장이라도 책상을 엎고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루시아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를‥‥‥ "정답은 2번이에요. 문제는 이 문제지에 적힌 문제와 똑같으니까 원리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답을 외우시지요. 뭐, 그 머리로 외우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요." "......" 빠드득. 참아야 해. 이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면 안 돼. 그 옛날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공헌한 한신은 시장 바닥에서 만난 무뢰배의 가랑이 사이를 태연히 기어갔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남자는 대범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누군가? 나는 아이리스 왕국의 명예 공작 아이언스 히로가 아니던가? 그런 내가 고작 아줌마의 시비 에 장단을 맞춰줄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후후~ ." 래. 이제부터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뭐라고 하든 태연하게 행동하는 거야.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웃기는. 아주 입을 찢어 버리고 싶네." "뭐라구요?지금 말 다했습니까?' "어머! 들렸나요? 혼잣말이 었는데." "혼잣말은 뭔 혼잣말? 혼잣말을 그렇게 크게 합니까? 아주 귀에 쩌렁쩌렁 울리더만!" "뭐, 어쨌든 다음 문제 플어보죠." "......" 전혀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말하는 일루니아 여사님. 난 이를 갈며 자리에 앉아야했다. 다음 보기 중 처분벌점 이 몇 점일 때부터 면허가 정지되는가? 1) 50점 이상 2) 40점 이상 3) 25점 이상 4) 30점 이상 "정답이 뭐죠?' "으음, 1번 아닌가요?' "훗~ 그럼 그렇지. 답은 2번입니다. 이런 기본 상식적인 문제도 틀리다니. 아이언스 공작님의 두뇌 수준을 알만하네요. 이런 쉬운 문제는 라이도 맞추겠네 ." "......" 뭐? 라이도 맞출 쉬운 문제라고?그럼 지금 내 두뇌 수준이 라이보다도 떨어진다는 건가? 빠드득! 아주 문제 하나 풀 때마다 이가 갈린다. 이러다가 이 문제지 다 풀 때쯤이면 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교통사고 시 신고할 내용이 아닌 것은? 1) 사고가 일어난 장소 2) 사상자 수 및 부상 정도 3) 손괴한 물건 및 손괴 정도 4) 부모에게 전화 긴급차가 오려면 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필수다. 사상자수와 부상 정도도 필수이다. 그래야 그에 맞게 구급차가 달려오지. 손괴한 물건과 손괴 정도? 이것도 필요할 것 같다. 어느 정도 파손했는지 알아야 견인차가 오든 도로복구차가 오든 할 테니. 부모에게 전화? 사고가 났을 때 꼭 부모님께 전화할 필요는 없겠지? 아빠 차 몰래 끌고 나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정답은 4번 입니다." "맞았어요." 헉! 드디어 맞았다. 이렇게 기쁠 수가. "푸하하하~" "찍어서 맞춘 주제에 웃기는. 진짜 웃기지도 않아." "......" 이 아줌마가 왜 이럭게 날 못 잡아서 먹어서 안달일까? 부들부들. 분노로 온믐이 떨긴다. 난 쓸쩍 시계를 보았다 지금 시각 새벽2시. 9시에 시험을 보니 적어도 8시에는 출발해야 할 거다. 그렇다면 앞으로 6시간을 일루니아 여사님과 같이 있어야한다는 건데... 차라리 날 죽이라고 말하고 싶다. 똑똑. 앗! 누구지 ? 루시아인가? "실례하겠습니다 " 어은 사람은 예쁘장한 하늘객 파자마를 입고 있는 인디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질끈 묶어서 잘 정리해 놓은 픔이 금방이라고 잠자리에 들 듯한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저 잠옷은 남자용 맞아? 왜 저렇게 레이스가 많이 달려있어 ? "저, 저‥‥‥ 방해된 것은 아니죠?" 당연 방해되었지.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냐? 이런 나와는 달리 일루니아 여사님은 반갑게 인디를 맞아 주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쉬려고 했는걸요." "저, 정말요?' "예." "다. 다행이네요. 저, 저기 일루니아님이 좋아하시는 원두커피를 타왔어요." "어머 , 고마워요." 인디는 조심스런 손길로 들고 있던 잔을 내밀었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내 껀 왜 없어, 임마!' "앗!죄송해요,히로님. 히로님 것까지는 생각을 못해서 준비를 못했어요."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겠지! 네놈이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거냐?" "죄, 죄송해요. 정말 몰랐어요. 지금이라도 준비해 올게요." "아니에요, 인디님. 자기가 알아서 타 먹겠죠, 뭐. 신경 쓰실 것 없어요." "하,하지만‥‥‥" "괜찮아요. 인디님께서 자꾸 그러시니 저 뻔뻔한 인간도 부담스러워 하잖아요." "당장 타 와! 나도 목말라!" 잠시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을 번갈아보며 갈등하는 인디.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획 돌리며 나를 외면한다. "......" 뭐야? 이제 나는 안증에도 없다는 거냐? 그동안 나한테 받은 은혜를 이 런 식으로 갚겠다는 거냐? 니가 누구 덕에 일루니아 여사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넌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토 모르냐? 까치는 맨땅도 아니고 쇳덩어리에 헤딩하여 은혜를 갈았는데. 넌 뭐야? 대를 이어가며 은혜를 갚추는 못할망정 고작 커피 한 잔 타오기 싫어 날 외면하다니! 난 흔자서 분을 삭이며 염장 커플을 바라봐야만 했다. 일루니아 여사님 하나도 힘든데 둘이나 상대해야 하다니. 게다가 둘은 커플인 관계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어이,왜 그렇게 붙어 있는 건데? 좀 떨어지시지. 헉!지금 손이 어디에 있는 거야?그런 짓은 둘만 있을 때 해! 아아~ 정녕 내 편은 없단 말인가? 콰앙! 내가 한탄을 하는데 갑자기 문을 박차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오빠아~" "앗! 우리 라이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자다가 화장실 가고 싶어서 깼어요. 이거 드세요,오빠." 라이가 내민 것은 컵이었다. 난 너무 감동 받아 말했다. "우리 라이 ,오빠가 커피 마시고 싶어 하는 건 어떻게 알았니? 아이구, 귀여운 것." "커피 아니에요. 그냥 찬물이에요,오빠. "......" 그래.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니 ? 난 섭섭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우리 라이, 오빠가 커피보다 찬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는 보란 듯이 찬물을 꿀꺽끌꺽 마셨다. 쓰읍. 머리 아프군. 냉기가 머리까지 올라오는 것 같아. "인디님 ,라이가 왜 저 인간한테 찬물을 가져다 줬는지 아세요?"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분명 냉수 마시고 속 차리란 뜻으로 가져다 준 걸 거예요." "서 , 설마요." "아니에요. 분명해요." 어떻게든 라이의 진심을 매도하려는 일루니아 여사님. 아까 같았으면 화를 냈겠지만. 지금 내게는 라이가 있다. 라이가 있는 이상 난 아무 것도 두럽지 않아~ "라이야, 일로 와." "예 , 오빠." 난 라이를 번쩍 안아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윤기가 좔졸 흐르는 라이의 볼을 만지며 늘았다. 아아~ 부드러워라. 이 감촉. 중독될 것만 같아. "우리 라이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헤헤~ 오빠요." "푸하하하! 다시 말해 보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다고?" "오빠요!" "아이구, 귀여워라. 다시 한번 말해 봐."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막막 좋아요! 진짜진짜 좋아요!" "푸하하하! 이 오빠도 세상에서 라이가 제일 좋단다." 나와 라이가 해괴하게 노는 것을 일루니아 여사님이 그냥 지켜볼리 없었다. "어린애 데리고 뭐하는 짓이래요. 흥! 정말 꼴불견이야." 말은 그럭게 하지만 난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꼭 안아주고 싶어. 나도 저런 딸 하나만 있었으면.' 라이 같은 딸을 가지고 싶어 하는 저 심정.내가 충분히 이해한다. 그건 모든 부모의 바람일 테니. "휴식 끝났으면, 계슥 공부하도록 하지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라이님 이리 오세요." "예. 인디 오빠." 인디는 라이를 데리고 나갔다. 다시 방 안에는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 둘만 남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자.다시 문제를 풀어볼까요?" "......" 아니요, 라고 대답하고 싶다. "어떻게 됐어? 합격했어?" "으응." "와아! 대단해요,오빠!" 짝짝짝!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라이. 읏으며 나를 반겨주는 루시아.. 그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 점수는 70점. 정말 간신히 합격했다. 아아~ 내 평생 이런 어려운 시험은 처음이었어. "......" 그렇게 말하니 정말 굉장히 어려운 시험 같다. 사실 운전면허 학과시험은 합격률이 80~90퍼센트 정도이다. 다시 말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합격을 한다는 얘기다. 만약 내 지능이 라이 수준으로 떨어지기 전이었다면 나도 쉽게 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으음, 그러고 보면 자꾸 라이랑 비교해서 라이한테 미안하군. 하지만 사실 라이는 천재 소녀라 불릴 만큼 머리가 좋고 이해력이 뛰어나다. 그러니 7클래스를 마스터하고 8클래스에 진입했지. 다만 문제는 그 뛰어난 머리를 평소에 활용하지 못한다는 거다. 뭐, 그 편이 훨씬 애다은 맛이 있어서 귀엽긴 하지만. 아무튼 밤새도록 한 일루니아 여사님의 과외가 효과가 있긴 있었다. 분명 일루니아 여사님이 아니었다면 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루니아 여사님께 고마운 마음이 들지는 않지만. "그럼 난 피곤해서 좀 잘게." "응. 수고했어." 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 안으로 걸어가 침대 위에 털썩 쓰러졌다. 깨어나니 오후 6시. 루시아가 밥을 차려 주었다. 으음, 빵과 스튜라니. 이건 너무 판타지틱한 메뉴 아닌가? 가끔은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갈 때가 있다. 그러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새삼 놀란다. 만약 나 흔자 이 세계로 돌아왔다면, 난 모든 일이 꿈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는 루시아가 있고, 라이가 있다. 그리고 크로니스나 지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토 있다. 난 빵을 뜯어먹으며 옛날 생각에 잠겼다. 우연히 주운 금화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이 완전히 바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 그날 금화를 줍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윌 하고 있을까? 삼류대학에 다니고 있으려나? 그런 평범한 삶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난 조금 특별하더라도 지금의 삶이 가장 행복하다. 그러니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내 행복에 찬물을 끼얹는 짓을 조금 자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학과시 험을 통과했으면 다음은 뭐야?" "장내 기능시험." "그건 뭐야?" "운전면허시험장이나 건문학원 안에서 보는 거야. 도로가 아닌 일정 코스를 차타고 도는 거지. 80점 이상이어야 합격이야." "그럼 학원에 가야하는 거야?" "오는 길에 알아봤는데 즘 비싸더라구. 기능시험과 도로주행을 합쳐서 대략 100만윈 가까이 하던데." "진짜 비싸네 ." "뭐, 합격할 때까지 친절하게 가르쳐준다고는 하는데 너무 비싸서. 야매로하면 20만원 정도인데‥‥" "야매?" "무허가를 말하는 거야. 학원이 아니라 개인이 교습을 해주는 거지. 뭐 , 보험이나 이 런 것이 안 되어 있어서 사고 나면 정말 큰일이지만." "좀 비싸더라도 그냥 전문학원 가는 게 낫겠다. " "일단 지니 랑 얘기 해보려구." 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언니랑 형부, 지니 오빠랑 크로니스님은 다 가게에 있어. 라이랑 루비랑 루는 놀다 지쳐서 잠자리에 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놀러 나간 것 같아." "그렇군. 설거지는 내가 할까?" "됐어. 그냥 내가 할게. 넌 좀 더 쉬어." "응 . " 아아~ 이 얼마나 부부틱한 대화란 말인가? 아내를 위하는 남편,남편을 위하는 아내.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는 루시아를 뒤에서 살짝 안아주고 싶다. 한번 시도해 볼까? 계속 보고 있자니 정말로 그렁게 하고 싶은 층동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루시아. 정말로 즐거워 보인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배고파요, 언니!" "밥 주세요!" "많이 주세요!" 우르르 물려오는 아이들.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 언니가 금방 차려즐게." "네에~!" 이놈의 엘프들을 그냥... "아! 오빠다!" "안녕하세요." "합격하신 거 측하드려요." "그래. 고맙다. 얘들아. 밥 맛있게 먹으렴." 난 힘없이 걸어 나와야했다. 애들 때문에 연애 사업을 제대로 진행시키기가 힘들다. 혹시 루시아랑 사이가 진전되지 않는 원인이 저 아이들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애들 몰래 루시아랑 밀월여행을 떠나든지 해야지‥‥‥ 그래! 면허를 따서 차를 뽑으면 루시아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나는거야. 애들은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에게 맡겨두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소파에 누워 차팔아 샐러리맨에게 받은 카탈로그를 들춰 보았다. "으음, 좋은 차들 참 많군." 나저나 무슨 차가 좋으려나? 식구가 많으니 경차나 소형차는 힘들고. 증형차를 뽑아야 하나? 아니면, 대형 세단? 놀러 갈 때를 대비 해 RV차량으로 쁩아? "아니야. 기왕 뽑는 거 나의 이미지와 딱 맞는 스포츠카가 좋지 않을까?" 마침 카탈로그에는 신형 스포츠카가 한 대 나와 있었다. 순간, 떠오르는 상상. 뻥 뚫린 해변 도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이 도로 위를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옆에는 플래티나 블른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기어를 변 속하며‥‥‥ "와아! 지니 오빠랑 루시아 언니다." "아니야!" 난 라이에게 소리첬다. 그러자 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라고 했잖아요."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라이는 과자를 집어 먹으며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은 언제 밥을 다 먹었는지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앉아 만화를 시청하고 있었다. 으음. 저 만화는 그 유명한 '열네살 영심이' 가아니던가? 저쩌 또 재방송하네. 옛날에 정말 재밌게 봤었는데. 난 눈을 감으며 하던 상상을 계속했다. 뺑 뚫린 해변 도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이 도러 위를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 는 아니고, 두 번째로 잘생긴 남자다. 그 남자는 검은색 머리카락이니 금발인 지니랑 착각할 리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 남 자의 옆에는 플래티나 블론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기어를 변속하며‥‥‥ "와아! 인디 오빠랑 루시아 언니다!" "아니라니까!" "하지만 검은 머리카락의 잘생긴 남자라고 했잖아요." "그게 바로 나야!" "능숙한 솜씨로 기어를 변속한다고 했잖아요. 오빠는 운전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상상이지! 상상 속에서는 뭘 못 하겠어? 그리고 앞으로 잘하게 될 거야. 면허도 딸 거구!" "우웅~" "그나저나 왜 멋대로 오빠 상상을 들여다보니? 엉? 열네살 영삼이나 계속 볼 것이지 왜 오빠 상상에 신경을 쓰는 거야?" "영삼이가 아니라 영심인데요." "......" 그래. 나도 안다. 흥분하다보니 말이 잘못 나왔다. "영삼이든 영심이든 그게 그렇게 중요해? 영심이가 커서 대통령이 될지 또 누가 알아? 그럼 영심이가 영삼이가 되는 거야! 어디서 감히 오빠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하고, 그것도 모자라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그리고 왜 오빠 상상을 들여다 봐? 지니가 속마음 읽는 것도 기분 나빠 죽겠는데, 라이까지 왜 그래? 라이는 오빠가 라이 상상을 들여다보면 기분 좋겠어?응?말해봐." "우에에엥 ~ " 내가 화를 내자 역시나 라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난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 상상을 들여다 본 거야 그렇다 치자. 그런데 뭐?지니랑 루시아? 인디랑 루시아?개들이 왜 루시아랑 같이 있는 건데?루시아랑 같이 있는 것은 나란 말이야! 오빠랑 언니를 엮어주려는 노력은 못할망정 다른 남자를 갖다 붙이다니! "앗!오빠가 라이를 울렸다." "루시아 누나! 라이가 울어요." 루와 루비는 라이를 달래며 말했다. 난 루시아가 부엌에서 나오기 전에 재빨리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쳤다. 그나저나 라이는 어떻게 내 상상을 들여다 본 걸까? 루시아는 울고 있는 라이를 달래주었다. 금방 울음을 그친 라이는 다시 열네살 영심이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일루니아와 인디 부부가 집으로 들어왔다. "히로님은 나가셨나요?' "예. 방금 전에 나갔어요." "직접 합격 축하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합격률이 80~90퍼센트나 되는 시험에 합격한 치 뭐 그리 대단하다고 축하인사까지 해요. 그리 그건 다 제가 잘 가르졌기 때문이에요. 안 러면 그 돌대가리로 합격은 어림도 없었죠." 일루니아의 말에 인디는 살포시 읏음을 지었다. 루시아는 일루니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장내 기능시험과 도로 주행시험은 어떻게 해야 돼? 언니는 어 떻게 했어?" "나야 지니가 빌려다준 차로 혼자 연습했지." "그래서?" "둘 다 100점으로 한번에 합격 했어. 쉽던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루니아의 기준일 뿐이었다. 전문학원에 다니지 않는 일반인이 장내 기능시 험과 도로 주행시험을 한번에 합격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루시아는 손빽을 치며 좋아했다. "다행이네. 언니가 히로를 좀 가르쳐 줘. 학과시험도 언니가 가르쳐줘서 합격 했잖아. 그럼 학윈 갈 필요도 없고." "맨입으로?' "알았어. 어차피 학원비 굳는 거니까 그 반인 50만원 언니 줄게. 그걸로 형부랑 재밌게 놀아." 50만원에 인디가 그동안 모아둔 월급을 합치면 둘이 하와이나 괌으로 여행을 떠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액수였다. 하지만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히로를 가르친다는 사실이었다. 어제 히로를 가르치고 나니 오늘 피부가 좋아졌다. 교육이라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것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호호호~ 루시아가 부탁하는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걱정 마. 내가 착실히 교육시켜 줄 테니까." '정신 교육부터 말이야.' "호호호~" "고,고마워, 언니 그,그런데 그 웃음소리는 뭐야?"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 호호호~" 일루니아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이러니 하룻밤 사이에 피부가 졸아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호호호~!" 일루니아의 읏음소리에 인디마저 정체모를 오한을 느껴야했다. 인디는 조웅히 성호를 그으던 히로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루시아도 오한을 느끼는지 몸을 움츠리며 생각했다. '어째서 괜히 부탁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냥 학원 보내는 게 좋았으려나?' "에취!" "왜 그러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글쎄요. 정체 모를 한기가 느껴지네요. 마치 누군가가 저를 말려 죽이려는 계획을 짜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위대하신 아이언스 공작님께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물론 일반인이라면 감히 꿈도 못 꿀 일이겠지요. 하지만 짐작이 가는 사람이 한 명 있네요. 아니.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 가는군요." 누구인지 이름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래도 두뇌 수준이 라이인 독자들을 위해 언급을 하도록 하겠다. 일루니아 여사님. 그래. 이 아줌마가 틀림없다. 이미 나를 한번 말려 죽이려고 시도했었고. 지금도 시도하고 있는 악녀. 아마도 그 시도는 내가 죽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난 한기를 물아내기 위해 할일도 없는데 가게 안을 돌아 다녔다. 그런데 카운터 한쪽에 이상한 상자가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난 그 상자를 열어보았다. 엄청난 숫자의 편지들. 즉히 수백 통은 되어 보인다. 그 옆에 있는 상자도 마찬가지였다. "뭔가요, 이건?' "팬레터 입니다." "팬레터?" "예. 이 가게에 오시는 여성분들이 주신 겁니다. 이쪽이 제 앞으로 온 것이고.그 옆의 것이 크로니스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그렇군요." 역시나 인기가 많은 두 사람.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소유한 두 사람이니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하겠지 (실제로 한 명은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 "제 앞으로 온 것은 어디에 있나요?" "......" "아니 . 왜 대답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 "죄송이라니‥‥ 설마!" 내 앞으로 은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어떻게 이런 일이! "한 통도 없나요? 단 한 통도?' "죄송합니다. " "......" 이 , 이럴 수가! 단 한 통도 없다니. 난 이 끔찍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지니랑 크로니스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이 인간들은 수백 통씩 받는데 왜 난 한 통도 못 받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란 말이야! 그런데 왜 조연인 지니랑 크로니스한테는 팬레터가 쏟아지고. 난 왜 없어? 이거 뭔가 잘못 된 거 아냐? "흥! 팬레터 따윈 필요 없어! 나한테는 루시아가 있으니까!" 난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루시아도 있고, 괜레터도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따르릉! "예. 라이의 집 입니다. " 익숙한 모습으로 전화를 받는 지니 . "아! 누님이시근요. 예?알겠습니다 그거면 되는 건가요?알겠습니다. 한 시간 안에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난 지니에게 물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이신가요?" "예." "무슨 일이래요?' "별 일 아닙니다. 전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가게 문 닫기 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 "예. 잘 다녀오세요.' 지니가 나가고 나자 난 지니를 대신해 카운터에 앉았다. 마침 손님이 별로 없어서 심심했다. 그래서 팬레터 한 통을 집어 들었다. 분홍색 편지봉투에는 '사랑하는 지니 오빠에게' 라고쓰여 있었다 "......" 흥!웃기지도 않아. 난 뭔 내용이 써져있는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편지봉투를 뜯어 보았다. 그러자 나타나는 유치찬란한 색의 편지지. 난 편지지를 펼쳐 보았다. 사랑하는 지니 오빠에게. 오빠 저는 지수라고 해요. 대명 초등학교 5학년 2반 학생이구요, 얼마 전 학교에서 실시한 얼짱 콘테스트에서 1등으로 븝히기도 했어요. 사진을 같이 넝었으니 한번 보세요. 정말로 사진이 같이 들어 있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 놀랍게도 수영복 입은사진까지 있었다. 그것도 비키니로. "......" 이게 무슨 미스코리아 서류 심사인 즐 아나? 어쨌든 예쁘게 생기긴 했군. 초등학교 5학년 치곤 성숙해 보이는데. 난 계속 읽었다 얼마 전 오빠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너무 놀랐어요. 오빠는 제가 그동안 꿈꿔오던 저의 이상형이었으니까요 저는 오빠를 본 순간 저의 모든 것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제 몸과 마음은 오빠 것이나 다름없어요. 오빠만 생각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몸이 뜨거워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어 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 뜨거워진 몸을 식혀즐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빠의 손길뿐이에요. 아래 핸펀번호를 적어 놓았으니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저는 언제라도 가능하답니다. 그럼 꼭 연락 주세요.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빠를 사랑하는 지수가 "......" 잠시 침묵.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난 혹시 잘믓 읽은 게 아닌가 싶어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았다. "이런 발랑 까진 것을 봤나!가능하긴 뭘 가능해?초등학교 5학년 주제에 못하는 말이 없어! 학습지나 열심히 풀 것이지 이딴 편지나 쓰다니!" 난 이런 편지를 보고 그냥 넘어 갈만큼 책임감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대명 초등학교 5학년 2반이라고 했지? 내일 날 밝으면 당장 학교에 전화 걸어 주마. 어린 것이 벌써부터 발랑 까져가지고 말이야. 어린애면 어린애답게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어 디서 감히 이딴 편지를!"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탈선의 길로 접어들지도 모르는 이 지수라는 아이를 바고잡기 위함이지, 결코 나한테 팬레터를 안 보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난 지니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떻게 행등했기에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이딴 편지를 보내는 거야? 니가 평소에 행동을 잘 했으면 애가 이렇게까지 했겠어? 비열한 자식!아무리 생각해봐도 용서가 안 되는군. 하지만 그보다 용서가 안 되는 것은‥‥‥ "왜 내 괜레터는 없냔 말이다! 흑흑." 한 통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을 텐데. "무슨 일이신가요? 왜 을고 있는 거죠?"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포니테일 스타일의 불은색 머리카락과 붉은색 눈동자를 지닌 미청년. 크로니스였다. "어라? 있었네요." "2층에 있었어요. 정리 하느라구요." "그랬군요." 크로니스는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니의 염장 미소와 일루니아 여사님의 비웃음과는 차원이 다른 미소다. 이렇게 간만에 크로니스와 단 둘이 있게 되니 뭔가 어색하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오늘 매상은 괜찮았나요?' "예. 평일 치고는 괜찮았어요." 으음, 이게 아닌데. 뭐,좀더 좋은 말 없을까? 내가 고민을 하는데 크로니스가 웃으며 말맸다 "학과시험 통과했다는 얘기 를었어요. 축하드려요." "아! 고마워요." 몇 마디 더 대화가 오고 갔고,크로니스는 아직 정리할 것이 남았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난 계단을 올라가는 크코니스의 됫모습을 바라보며 옛날 일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산을 내려오면서 크로니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내 판타지 세계 여행기의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크로니스이다. 크로니스가 날 위해 이 세계까지 따라와 주었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신경 좀 써야지. 그나저나 크로니스는 이 세계로 와서 행복한 걸까?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데 지니가 돌아왔다. 그리고 지니 뒤로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루시아가 따라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다들 몰려오시고?" 내가 묻자 일루니아 여사님에서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일단 학과시험 합격한 거 축하드릴게요." "헉!" 축하라니 ? 일루니아 여사님 뭐 잘못 드셨나? "그럼 이제 장내 기능시험과 도로 주행시험이 남았군요." "아. 예. 그래서 학원에 갈 생각이에요." "아니에요. 굳이 학원까지 가실 필요는 없어요." 듣고 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사근사근하게 말씀하시는 일루니아 여사님. 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이젠 무섭기까지 하다. "하지만 학원 말고는 배울 곳이 없잖아요. 야매는 좀 위험한 것 같고." "저는 독학으로 한번에 합격했습니다. 그것도 전부 100점으로요." "그래서요?" 지금 자랑하는 거야, 뭐야? 대체 이 아줌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내가 의심 가득한 눈길로 일루니아 여사님을 바라보는데,루시아 가 다가와 말했다. "언니가 긱접 가르쳐주기로 했어." "뭐 ?' "언니가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줄 거야. 그러니 학원 안 가도 돼." "뭐 ?"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나보고 지금 일루니아 여사님께 배우라는 건가? 내가 어제 무슨 꼴을 당했는데! "하, 하지만 차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 지니 오빠가 방금 빌려왔어." "......" 그것 때문에 나갔다 온 건가? 난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때, 일루니아 여사님이 한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호호~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 "......" 웃고 있는 얼굴.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눈은 섬뜩하리만치 잔혹했다. 그야말로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눈이다. 이 순간이 꿈이기를! "일단 사이드 브레이크를 먼저 내려요. 그리고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 에서 시동을 거세요. 시동이 걸리면 왼발로 클러치를 꾹 밟으며 기어를 2단으로 넣으세요." 난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다. "기어가 안 들어가는데요." "클러치를 끝까지 밟아야 들어가죠! 꾹 밟으라니까요!" 난 시킨 대로 꾹 밟았다. 그러자 기어가 들어갔다. "1단이 아니라 2단을 넣으라니까요!" "예?출발은 원래 1단 아니었어요?' "일반 승응차의 경우는 그렇지만 이 런 소형 트럭은 2단으로 출발하는 거예요. 1단은 오르막길 오를 때나 쓰는 거죠." 난 시킨 대로 2단으로 기어를 넣었다 "그럼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클러치에서 서서히 발을 떼세요." "이 , 이렇게요?' 쿵! "어라?시동이 꺼졌네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라고 했잖아!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클러치에서 발을 떼니 시동이 꺼지지! 그렇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 들어? 대체 이번이 몇 번째야?라이도 이거보단 잘 하겠네." 이마에 핏발까지 세우며 나를 몰아붙이는 일루니아 여사님. 내가 이제까지 참고 참았지만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난 고개를 획 돌려 옆에 앉은 일루니아 여사님을 향해 외쳤다. "뭐?아줌마 지금 말 다 했어?" "다 하긴 뭘 다 해?운전도 못하는 주제에 큰 소리 치기는." "뭐라? 아니 , 이 아줌마가 진짜!" "싸, 싸우지들 마세요." "넌 또 왜 끼 어들어?당장 안 내려? "흑흑, 죄승해요." "지금 인디님께 뭐라는 거야? 당장 사과하지 못해!" "내가 사과를 왜 해? 하려면 아줌마가 먼저 해!" "이 뺀질이가 진짜!" "뭐, 뭐라? 뺀질이 ?' 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이대로 차를 몰아 벽을 들이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출발하는 방법을 익 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가게 앞 넓은 주차장. 나는 아직 연습면허도 나오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고로에서 운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참고로 연습면허는 장내 시험을 통과해야 나은다). 그래서 도로가 아닌 주차장에서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인형가게 영업시간이 끝난지라 주차장은 텅정 비어 있어 내가 연습하기 적합한 환경이었다. 내가 타고 있는 이 소형 트럭은 지니가 어 디선가 구해온 것이다. 보나마나 요즘 교제하는 여성에게서 징발해 온 거겠지만. 내 옆에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탔고,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걱정 된다며 뒤에 탔다. 난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배워야한다는 사실이 죽고 싶을 정도로 싫었지만 루시아 얼굴을 봐서 참았다. 게다가 벌써 10만원을 지급했다고 하지 않나? 아니꼽지만 그 돈이 아까 워서라도 열심히 배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잠시 말싸움이 멈춘 가운데 인디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하아~ 이렇게 멍청 할 술 알았으면 맡지 않는 거였는데. 뭐, 어쨌든 이미 돈을 받았으니 처음부터 다시 해보죠." 그래. 내가 돈이 아까워서 한다 "기어를 빼고 다시 시동을 거세요. 그리고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2단으조 넣고,브레이크를 떼고, 클러치를 천천히 떼세요." 탈탈탈. 놀랍게도 차는 천천히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오오! 정말로 내가 차를 움직였단 말인가? 이렇게 기쁠 수가! 난 잠시 환희에 젖었다.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초를 치셨다. "겨우 그거 해놓고서 좋아하기는." "......" 그냥 이대로 벽으로 돌진해? "기능시험은 운전 능력을 시험 보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공식을 시험 보는 거죠. 즉 증요한 것은 얼마나 운전을 잘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공식을 잘 외우고 대입하느냐에요." "그, 그래요?' "기능시험 통과 커트라인 점수는 80점. 한번 틀릴 때마다 5점에서 10점씩 감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이 기능시험에서 패배의 쓴 잔을 마시지요. 어떤 사람들은 스무 번도 넘게 도전하기도 해요. 차라리 도로주행이 훨씬 쉽다고 할 수 있죠." "그렇군요.' "시험 일자는 모레. 목표는 한번에 합격하는 거예요." "예?" "전 길게 끄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리고 기능시험을 합격하는 대로 도로주햄에 들어갈 거예요. 이링게 하면 일주일 안에 면허를 딸 수가 있죠." "가능한가요?' "이대로라면 불가능하겠죠. 그래서 아이언스 공작님의 교육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 "제 교육법이라면?' "아마 '패면 하게 된다' 였죠?' "......"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서로 불어있으면 짜증만 나는 사이이니 열심히 해서 일주일 안에 끝내지요."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 그 후로 뼈를 깎는 처절한 교육이 이어졌다. 굴절 코스, S자코스, T코스, 평행주차 등등. 난 공식에 맞추어 열심히 핸들을 돌렸다. "훗~ 라이도 그것보단 잘 하겠네 ." 흔잣말을 하는 척 한껏 빈정거리는 일루니아 여사님. "왜 자꾸 라이랑 비교를 하시는 겁니까?' "어머, 미안해요. 라이가 들었으면 기분 나빴겠네. 이따 라이한테 사과해야겠네요." "......" 이 아줌마가 진짜! 난 벽을 들이 받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운전을 계속했다. 50분 교육에 10분 휴식 이었다. "이거 드세요, 일루니아님 " "고마워요." 일루니아 여사님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따라주는 인디. 여전히 내 껀 준비해오지 않는다. 비열한 드래곤 같으니. "한 대 피시지요.아이언스 공작님." "고맙습니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인디랑 화기애해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이 나는 지니와 담배를 피웠다. "잘 돼 가시나요?' "보고도 모릅니까. 하루에도 수백 번 벽을 들이 받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자라 오릅니다. 물도 주지 않았는데 참 잘 자라더군요. 조만간 열매가 열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저희 누님 성격이야 원래 그런 것이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웬만하면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나 도저히 안 되더군요. 아마도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저를 말려 죽이려는 2단계 계획에 착수하신 듯합니다. " 그렇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저번 금연 사건에 이어서 이번에는 운전 교육을 빌미로 나를 말려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내 눈 밑에는 이미 다크써클이 생겼다. 게다가 입슬은 점점 파리해 지는 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병에 걸린 줄 알 것이다. 반면 일루니아 여사님의 피부는 탱탱하고 매끄러워지고 있었다. 입술은촉촉 하게 빛나는 것이 20대 중반이라고 우겨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젊어지셨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든 일주일 안에 합격해서 더 이상 얼굴 볼 일을 없게 하는 수밖에. "다시 시작하죠."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이틀 밤을 새다시피 해서 연습한 나는 가까운 운전면허 시 험장을 찾았다. 출발하기 전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100점이든 80점이든 똑같아요. 하지만 80점과 79점은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그 누구도 아이언스 공작님께 100점을 기대하지는 않으니 80점 통과를 목표로 하세요. 뭐 , 제가 그렇게 완벽하게 가르쳤으니 원숭이가 아닌 이상 합격할 수 있겠죠. 호호~" 탈락하면 원숭이라는 건가?훗! 한번에 찹격해 주마! 나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겠어! "자신 있어?" "뭐 , 그럭저럭. 어떻게든 되겠지." "너무 부닫 갖지 마. 떨어지면 또 보면 되니까 " "응. 고마워,루시아.' 루시아의 격려에 나는 피로마저 잊었다. 난 내가 왜 운전면허증을 따려 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루시아 때문이었다. 루시아를 옆에 태우고 달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나는 운전면허증을 따려 하는 것이다. "그럼 라이는요?라이는 안 태워주실 거예요?" 내 옷깃을 잡으며 묻는 라이.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연히 우리 라이도 태워줘야지. 오빠 면허 따면 오빠랑 언니랑 라이랑 이렇게 셋이 놀러가자꾸나." "와아! 정말요?' "물론이지." "이코도 데려가도 되요?' "응? 이코?' "예. 라이 친구 이코요." 요즘 들어 모습을 보이지 않는 라이코스. 자세히 보니 라이의 주머니가 조금 불룩하다. 저 안에 있나? "뭐, 라이가 원한다면 이코도 데려가야겠지. 귀티도 동승하는 걸 허락해 줄게." "꺄아~ 필마워요,오빠." 쪽! 내 볼에 뽀뽀까지 하는 라이. 난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아이구. 귀 여운 것." 아직 면허도 안 땄는데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는 나와 라이. 이러다가 떨어지면 진짜 쪽 팔릴 것 같다. 시험 시간이 가까워오자 난 기능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아와 라이는 그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곳까지 응원을 와준 저 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합격을 하고 말리라. 시험을 하기에 앞서 교통안전 교윽이 실시되었다. 모인 사림들은 내 또래의 청년들부터 아저씨, 아줌마. 할아버지까지 정말 다양했다. 숫자는 대략 40명 정도였다. 내 옆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아저씨가 앉아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들고 있는 서류에는 인지 가 덕지덕지 불어있었다. 대체 시험을 몇 번이나 본 거야? "이번에 몇 번째 도전이신가요?" 내가 묻자 그 아저씨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열다섯 번째일세. 그놈의 T자 코스와 평행주차 때문에 매번 탈락이지. 이놈의 기능시험만 통과하면 도로주행은 금방일 것 같든데. 하아~ 이번에는 꼭 합격해야 할 텐데." 아저씨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이번에는 잘 되겠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네." 잠시 후. 경찰관 한 명이 들어오더니 기능시헐 코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전부 배운 내용이겠지만 모인 사람들은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교육이 끝나자 븐격적인 시험이 시작되었다. 내 순번은 20번째였다. 오르막길에서 미끄러지는 사람, 연석을 밟은 사람, 시동이 꺼진 사람 등등. 합격률은 채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탈락한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시험장을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이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난 긴장된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일단 시트 위치를 맞게 조정하고 안전띠를 착용한다. 그리고 출발 신호가 나면 왼족 깜빡이를 켜고 클러치에서 발을 떼 차를 출발시킨다. 부르릉. 현재까진 좋다. 그 다음에는 횡단보토 앞에서 일시정지. 앞 범퍼가 정지선을 조금이라토 침범하면 5점 감점이다 1초,2초,3초. 마음속으로 3초를 센 나는 다시 출발했다. 이어지는 코스는 오르막길. 오르막길 앞에서 멈춘 다음 출발해야 한다. 이때는 기어를 1단으로 넣어야 한다. 자동차가 밀리면 10점 감점이다. 커트라인은 80점인데 점수 깎는 것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이어지는 굴절 코스. 바퀴가 노란 선에 닿을 때마다 5점씩 감점이다.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간신히 글절 코스를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차 안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기계음. [경고! 경고! 경고!] 비상 신호로군. 이때는 차를 멈추고 비상깜빡이를 켜야 한다. 안하면 10점 감점이다. 잠시 후, 불이 꺼지고 소리가 멈됐다. 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교차로를 통과했다. 이번에는 S자 코스이다. 말 그대로 S자 형태의 곡선 코스. 열심히 차 핸들을 들리며 빠져나가려는데 들려오는 소리. 삐! 그리고는 바로 5점이 감점되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거 살짝 밟은 거 가지고 감점이라니!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못 해먹겠네! 어쨌든 현재 점수는 95점. 남은 점수는 15점. 이제부턴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군. 교차로 통과 이후에 T자 코스가 나왔다. 일명 방향전환 코스. 난 일루니아 여사님께 배운 공식대로 열심히 핸들을 꺾었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반바귀 넣고 서행 후진기어를 넣고 핸들을 왼쪽으로 완전히 감는다. 그 다음에 후진. 자동차가 평행을 이루면 정지한 뒤 핸들을 돌려 앞바퀴를 뜩바로 되게 한다. 그 다음에 또 후진. 확인선을 밟으면 정지. 확인 신호음이 울린 뒤 2단 기어로 바꾸고 서행. 아아~ 정말 살 떨린다 내 손은 마치 수전증이라포 걸린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런 긴장감이라니 ! 일루니아 여사님은 어떻게 이 어려운 시험을 100점으로 통과한 걸까? 과거 참모였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건가? 일루니아 여사님이 합격한 시험을 내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 어떻게 되긴 어 떻게 돼? 열과 성을 다해 비웃어 주겠지. 호호호~ 라이토 합격할 수 있을 이런 쉬은 시험을 떨어지다니 아이언스 공작님의 두뇌가 의심스럽네요. 아니, 두뇌라는 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네요. 아이언스 공작님은 혹시 무뇌가 아니신가요? 무식한 것도 이 정도면 국보급이네요. 정말 인생을 왜 사 는지 모르겠어요. 저 같으면 당장 기름 붓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을 텐데. 휘발유 한 통 사다드릴까요? 호호! 생각만 해토 끔찍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정달로 기름 붓고 불 속으로 뛰어들지도 모른다 . 일루니아 여사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합격을 해야 한다. 좌회전으로 교차로를 통과하고 나니 철길 건널목이 나왔다. 이 역시 일시정지를 하고 서햄으로 통과해야한다. 쿵! 이럴 수가! 시동이 꺼지다니! 건널목이 약간 경사졌기에 시동이 꺼진 것이다. 난 팡급히 시동을 다시 걸었지만. 점수판은 가차 없이 5점을 감점시켰다. 이제 90점. 남은 점수는 10점. 다음 코스는 기어 변슥 코스이다. 20킬로 이상을 발으며 2단 기어를 ,1단으로 변속해서 통과해야한다. 그리고 커브가 나오기 전에 브레이크를 밟으며 3단 기 어를 2단으로 변속해야 한다. 난 엑셀을 밟으며 재빨리 3단 기어를 넉었다. 속토는 25킬로로 유지했다. 그리고 코스를 빠져나오는 순간 재빨리 속도를 떨어트리며 2단을 넣였다. "휴우~ " 난코스라 생각했던 기어 변속 코스를 감점 없이 통과. 이제 남은것은 평햄 주차뿐. 난 평행 주차 구역에 진입을 하며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구제불능이네요. 이런 쉬운 것도 제대로 못하다니.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뭐, 어쨌든 합격을 해야 하니, 한 가지 팁을 알려드리지요 만약 평행 주차 구간까지 점수가 90점 이상이라면 진입만 하고 바로 나오세요. 그냥 지나치면 실격이지만, 진입을 하고 나오면 10점 감점입니다. 괜히 하지도 못하는 거 한다고 난리 치다가 선 밟으면 5점 감점이에요. 그 다음 주차를 한다면 다행이지만 못하면 큰일이죠. 그러니 90점 이상이면 그냥 진입만 하고 나오세요. 알아들으셨나요? 알아들었다. 나 같은 천재는 원래 한번 말해도 잘 알아듣는다. 난 일단 주차 구역에 됫부분을 살싹 집어넣었다. 그러자 삐 소리가 울리며 내가 코스에 들어섰음을 알려주었다. 난 주차를 하지 않고 2단 기어를 넣고 그냥 빠져나왔다. 그러자 삐 쏘리가 울리며 10점 감점되었다. 이제 점수는 80점.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어차피 이제는 오른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 다음 멈출 때 다시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멈추는 것밖엔 남지 않았다. 내가 멈추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20번차 합격입니다.] "푸하하!라이야.그래서 오빠가 어떡게 했는지 알아?" "핸를을 플고 후진했다 그랬어요." "그래. 바로 그거야. 원래 T자 코스는 그렇게 들어가는 거거든. 우리 라이도 나중에 면허 시험 볼 때를 대비해서 미리 외워두렴. 아아~ 정말 힘든 시험이었어. 하지만 이 오빠는 완벽한 솜씨로 한번에 합격했지. 으하하!" "그만 좀 해. 벌써 세 번패야." 합격 기념으로 루시아와 라이차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았다. 나는 밥을 먹는 내내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해, 그리고 내가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나 더 시켜도 돼요.오빠?' "응. 우리 라이 많이 먹으렴."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마구 시켜주었다. 라이는 사양 않고 마구 먹었다. 우물우물. 볼이 터져라 음식을 밀어 넉고 열심히 먹는 라이. 우리 라이는 어쩜 이렇게 복스럽게 먹는 걸까? 정말 음식 만드는 사람 보람 있게 먹는다. 이미 나와 루시아의 식사는 끝나 있었다. 우리는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난 차팔아 세일즈맨에게서 받은 카탈로그를 펼쳐보았다. 이제 겨우 연습면허 나왔지만, 난 벌써 차 뽑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으음, 뭐가 좋으려나? 역시 대세는 RV차량이니 싼타페가 좋겠지? 라이야. 오빠가 싼타페 뽑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나의 물음에 라이는 화들짝 놀라며 수저를 떨어트렸다. "헉 ! 안 돼요. 오빠! 산타 패면 안돼요. 그럼 크리스마스날 선물 못받아요." "......" 쉬이잉 ~ 아, 춥다. 여기 보일러 안 트나? "그,그럼 신형 소나타는 어떠니?" "안 돼요! 개나 소나 다 타는 차는 싫어요. 라이는 예쁜 차가 좋아요." "......" 쉬이잉~! 마치 시베리아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다. 우리 라이가 언제 이렇게 썰렁한 개그를 배웠을까? 혹시 이건 나를 얼려 죽이려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음모가 아닐까? 라이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을지 두려웠던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카탈로를 덮었다. 식사를 끝마친 우리는 가게로 향했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인형 진열을 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이 인형 진열이라는 게 쉬워보여도 사실은 고난이토의 기술을 요한다. 인형 크기, 가격, 출시 일자. 캐릭터 배치 등등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숙달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헬로우 키티 , 테디베어,들리, 피카츄, 마시마로 등등의 인형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마치 내가 동심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어라?들아오겼네요." 커다란 테디베어 인형을 픔에 안은 인디는 읏으며 말했다. 테디베어와 인디. 정말 너무 잘 어을린다. 190센티나 되는 큰 키의 미녀가 커다랗고 복슬복슬한 곰인형을 들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합격하셨나요?" 인디의 질문에 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물른이지. 내가 합격하지 못하면 누가 합격을 했겠어? 완벽한 솜씨로 아주 가볍게 합격했단다. 너 기능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지? 이게 아무나 통과말 수 있는 게 아니야. 그야말로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만이 합격의 기쁨을 맞볼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누구야?내가 바로..." "뺀질이." "‥‥‥뺀질이야. 아니! 뭐라?' "호호, 이젠 스스로도 인정하시는군요. 뭐 , 뺀질뺀질거리니 뺀질이가 맞긴 하죠." "......" 결정적인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초를 치시는 일루니아 여사님.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나를 보며 말했다. "어쨌든 합격하셨다니 다행이네요." "뭐, 이 정도야 기본이죠 "푸훗~ ." "......" 뭐야. 저 비읏음은?아무리 참으려 해ㅗㄷ 일루니아 여사님의 비웃음을 접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 된다. "이제 도로주행만 남았군요." "그렇지요." "일단 오늘은 쉬세요. 내일부터 시작하죠." 말만 들어서는 나를 생각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표정은‥‥ '내일부터 지옥의 고통을 맛보여 주마. 차라리 안전띠에 목을 매달고 싶게 만들어 주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살기라니!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인가? 루니아 여사님이 몸을 획 돌리자 난 그제야 안도의 한눔을 내쉴 수 있었다. 드래곤 앞에서도 당당한 내가 어째서 일루니아 여사님 앞에서는 이럭게 작아지는 걸까?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건지. 어쨌든 이틀 밤을 새고 났더니 피곤해 죽을 것 같다. 잠을 좀 자야겠군. "배고파요. 피자 사주세요,오빠." "저도 배고파요." 갑자기 나타나 내 옷깃을 붙잡으며 괴자를 시켜달라고 조르는 루와 루비. "니들은 어떻게 된 게 피자밖에 모르니? 가끔은 자장면도 좀 시켜먹고 그래." "싫어요. 피자가 더 좋아요.' "맞아요. 피자가 최고에요." 라이한테 세뇌 교육이라도 받았나?아니면,어린 엘프들의 입맛에 피자가 제일 맞는 걸까? 나를 조르던 루와 루비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째 하나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대체 뭐가 빠진 거지? 그때 멀뚱멀뚱 서 있는 라이가 보였다. 그제야 나는 이 이상한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보퉁 셋이 한꺼번에 조르거나 라이 혼자 조르는데, 루와 루비 둘이서만 조르는 모습이 이상했던 것이다. 아이들토 그것을 깨달았는지 라이에게 물었다 "라이는 왜 안 조르는 거야?피자 먹고 싶지 않아"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방금 오빠랑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먹고 와서 배불러." "뭐?" 라이의 말을 들은 루와 루비는 깜짝 늘랐다. 그리고는 이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뭐,뭐니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그 눈빛은?" 내가 묻자 루와 루비는 합창을 하듯 소리쳤다. "우리고 패밀리 레스토랑 가고 싶어요오~!" "......" 아까 라이가 먹은 것만으로도 한 달 매상 다 날아갔다. 그런데 니들까지 데려가라는 거니?차라리 가게 문 닫으라고 하지? 그러 보니 루와 루비를 비싼 음식점에 데려간 적은 없는 것 같다. 라이는 이리저리 많이 데리고 다녔지만. 헉!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애들을 차별하고 있는 건가? 라이는 우리 딸이니까 잘 대해주고, 루와 루비는 남의 딸이니까 푸대접을 한 건가? 갑자기 죄책감이 물 밀 듯이 밀려들어온다. 그런데 루엔과 갈리온드는 대체 어딜 간 거야? 이 어린 아이들을 둘씩이나 놔두고. 어쨌든 루엔이 사라진 이상 나는 그녀의 친구조서 그녀의 아이들을 키워야할 의무가 있다. 루엔이 돌아와서 아이들이 차별받았다는 것을 알아 봐라. 나한테 얼마나 실망을 하겠는가? "그렇게 패밀리 레스토랑이 가고 싶어?' "네에~!" 아주 가게가 떠나가라 합창을 하는군. 난 인디에게 물었다. "너 밥 안 먹었지?" "예. 이제부터 먹으려구요." "그럼 내가 돈 줄 테니까 일루니아 여사님과 함께 얘들 데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렴. 얘들 많이 배고픈가 본데 맛있는 거 많이 사줘." "정말요?" "그래. 내가 100원 줄 테니까 애들이랑 맛있게 먹고 3만원 거슬러 오렴." "헉!" "농담이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소심하기는." 난 지갑채로 인디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휴식을 위해 휴게실로 걸어갔다. 휴게실의 간이 침대에 누운 나는 바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고갯길에서 일루니아 여사님과 자동차 배틀을 벌였다. 누가 이겼을까? 다음날. 일루니아 여사님과 나는 도로로 나왔다. 물론 도로까지 나가는 데는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운전을 하셨다. 운전석에서 내린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도로주행 연습을 시작하겠습니다. " "예." "도로주행에 앞서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뭔데요?' "도로주행을 위해서는 기능시험을 위해 배웠던 것들은 전부 잊어버리세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까요." "예?그럼 기능시험은 왜 본 거예요7' "그걸 봐야 연습면허가 나오니까 보는 거죠." "......" 그런 거였군. "기능시험에서는 클러치만을 사용하고, 액셀은 기어 변속 구간에서만 썼었죠. 하지만 도로구행에서는 클러치를 기어 변속할 때만 사응해야 돼요. 그리고 클러치를 쓰지 않을 때는 왼발을 옆으로 치워야 돼요. 아셨어요?" "예." "그럼 일단 연습부터 해보지요." 난 인적이 없는 도로에서 연습을 시작헌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브레이크를 밟은 상태 에서 시동을 걸고, 클러치를 밟으며 기어를 2단으로 넣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클러치이서 천천히 발을 떼며 에셀을 천천히 밟는다. "......"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더욱 짜증나는 것은 눈서가 틀리면 바로 시동이 꺼져버린다는 거다. "출발을 해서 20킬로가 넘으면 기어를 3단으로 넣으세요" "기어는 RPM을 보고 넉어야 하나요, 속도계를 보고 넣어야 하나요?" "둘 다 보고 넣는 것이 맞아요. 하지만 운전을 하는 내내 계기판을 쳐다보기는 힘들지요. 그래서 기어는 보통 소리를 듣고 넣는 거예요." "소리요?" "엔진음 말이에요. 낮은 기어에서 속도를 높이다보면 엔진은 무리한 회전을 하게 되요. 고회전을 하기 때먼에 소리와 진동이 커지고 연비도 안 좋아지는 거죠. 자동차 기어의 원리는 자전거와 다를 바가 없어요. 자전거를 타보겼으면 아시겠지만 적은 힘을 들여 패 달을 들리면 바퀴는 적게 돌아가죠. 하지만 많은 힘을 들여 페달을 돌리면 바퀴는 많이 돌아가요. 이해가 가시나요?' "예." 자전거를 타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이해 할 것이다. 그래서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기어를 내린다. 그럼 패달을 별 힘 안 들이고 밟을 수 있다. 대신 이동거리는 적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페달을 굉장히 빨리 돌려야 한다. 처음 출발할 때 기어가 높게 되어 있으면, 패달을 돌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어느 정도 속도가 나면 기어를 높여도 수월하게 패달을 밟을 수 있다. 이걸 차 엔진에 적응을 해보자. 차의 저단 기어는 약한 힘으로 엔젠을 돌리는 대신 많은 거리를 이동하지 못한다. 만약 이 상태에서 계속 속도를 을리게 된다면 엔진은 엄청난 고회전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 속도 이상이 되면 고단 기어로 바꾸어줘야 한다. 엔진이 고회전을 하면 엔전 내구성에도 종지 않을뿐더러 연비에도 좋지 않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강의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 였기에 난 집증괘서 새겨들었다. "그럼 해봐요." "예." 난 일루니아 여사님께 욕먹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몸이 뜻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기어를 잘못 넣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떤 때는 기어가 아예 안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도로 가운데에서 시동이 꺼지는 바람에 뒤차들이 경적을 울려대기도 했고, 깜빡이 켜는 것을 깜빡하여 사고가 날 뻔하기토 했다. 끼이익! "급정거를 하면 어떡해! 그냥 가야지 !" "그.그게 황색 신호여서..."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가야지! 이 런 급정거가 오히려 사고를 만드는 거야!하여튼 무식해 가지고 운전 하나 제대로 못하고." "......"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진입로의 뒤쪽 보행 신호가 켜지면 우회전을 해요." "예." "보행 신호가 켜지면 가라니까!방금 사고 날 뻔했잖아!" "아. 죄승해요." "흥! 죄송하다는 게 벌써 몇 번째야? 나 같으면 벌써 한강물에 뛰어내렸겠네. 머리도 멍청한 주제에 운전도 이 모양이니, 대체 할 줄 하는 게 뭐가 있어?아! 하나 있긴 있네. 뺀질대는 거. 아주 그냥 압착기에 넣어 놓고 스위치를 눌렀으면 좋겠네." "......" 인신공격 수준까지 치닫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악담. 하지만 나는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꾹 참았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의 다음 말은 나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루시아는 왜 이런 뺀질이를 사귀나 몰라? 그냥 다른 남자 소개 시켜줄까?루시아 좋다는 남자는 널리고 널렀으니 괜찮은 남자 골라서 소개시켜 주면 될 텐데." 말을 들은 나는 브레이크를 꾹 밟았다. 끼이익! 몸이 앞으로 쏠릴 정도의 급정거 였다. "갑자기 왜 멈춰요?" 난 시동을 끄고는 고개를 획 돌려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았다. "아줌마 지금 말 다 했어? 뭐?루시아에게 다른 남자를 소개시켜줘? 나 같이 완벽한 남자를 놔두고 어째서?" "완벽하긴 개뿔이. 헛소리도 그 정도면 국보급이네. 사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본인이 루시아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줌마 같은 사람도 인디랑 결혼하는데 뭐가 어때서?" "지금 그건 무슨 의미죠?" "무슨 의미 자시고 말 그대로 해석하시죠. 솔직히 아줌마랑 비교해서 인디가 백배는 아깝지. 그에 비하면 나와 루시아 커플은 천생 연분 아냐?" "이 뺀질이가!" "뺀질이라니 !아줌마 자꾸 이렇게 나을 거야?" 우리는 서로 지칠 때까지 다투었다. 쿠위에 말려줄 사람이 없으니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치킨 레이스나 다름이 없었다. 주먹만 오가지 않았지, 그보다 더 심한 말들이 오간 싸움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겄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니까. 불구대천의 원수가 이보다 더 지독하랴? 일루니아 여사님과 나의 이런 관계는 첫 만남부터 예견이 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참 싸우고 나니 배가 고팠다. 그래서 싸우더라도 일단 밥을 먹고 싸우기로 탰다. 근처 패스트 푸드점에서 햄버거 세트로 간단하게 배를 채운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다시 시작된 연습주행. 일루니아 여사님은 방법을 전환했다. 자신의 주특기를 밀고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주특기가 뭐냐고? 그건 바로‥‥‥ "기어 안 바꾸는 거 봐라. 어디 3단으로 출발할 수 있나 보자." ‥‥‥이거다. 비웃음과 살기를 듬뿍 담은 빈정거리기. 이게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굉장히 타격이 크다. 마치 흔잣말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크게 말하는데,듣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 을라 자신고 모르게 이성을 잃게 된다/ 일루니아 여사님 분초를 아껴가며 열과 성을다해 빈정거렸다. "깜빡이 안 키고 도는 거 봐라. 이러고도 사고 안 나나 보자." 이 정도는 양호하다. "급정거에 급출발에. 아주 차를 작살내려고 작정을 했구만." 이 정도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시동도 꺼트리고. 신호도 무시하고.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운전 면허 따겠다고 난리치기는. 그냥 가게 바닥이나 열심히 닦을 것이지." 이건 못 참는다. "내가 공부 못하는데 아줌마가 뭐 보태줬어?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야!"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수능 점수가 수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군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수입은 성적순이에요. 그리고 수입이 많으면 자연히 행복해지기 마련이죠. 적어도 이 나라에 선 말이에요." "......" 맞는 말이다. 이 나라는 수능에 자신의 인생을 전부 을인하는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뭐 , 나야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졸업했고 대학 진학은 아예 포기했기에 수능을 안 보았지만 다른 많은 수험생들은 지금도 목쑴을 걸고 재수,삼수에 매달리고 있다. 아무튼 공부 얘기가 나오니 과거 노처녀 선생들에게 당했던 암울한 기억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나의 암흑기였던 그때 그 시절.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수많은 노처녀 선생들. 난 그 선생들 밑에서 공부하면서 몇 번이나 정신적인 살해를 당해야만 했다. 그녀들은 칼만 들지 않았지 살인자나 다름없었다 그 노처녀 선생들의 얼굴이 일루니아 여사님의 얼굴에 겹쳐지기 시작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지속되어온 노처녀들과의 악연. 어째서 난 그들에게 억압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 어째서 나에게 봄날은 오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난 보도쪽 차건으로 변경을 하고는 차를 멈추고 시동을 껐다. "아줌마. 당장 내려!" 내가 소리치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한껏 비웃음을 지으며 빈정거렸다. "훗, 제가 내리면 어쩔 건데요? 아이언스 공작님 흔자 운전하시게요?" "......" 그렇다. 이게 문제였다. 연습면허로 도로에서 운전하기 위해서는 옆 좌석 에 같은 종류의 운전면허나 그 이상의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 1년 이상된 사람이 앉아있어야 앴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면허를 땄기에 취득 기간이 1년이 넘 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1년이 넘기는커녕 면허조차 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우리 집에는 차가 없지 않는가? 사일런스 지니의 운전 실력은 레이서도 울고 갈 정도지만(이 인간은 뭐든 했다하면 스페셜리스트다) 정작 운전면허는 없다. 다시 말해 무면허 경력만 화려하다는 거다. "크윽!" 결국 나는 그저 이를 가는수밖에 없었다. 이렬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한시라도 빨리 합격하는 것이다. 열심히 연습해서 내일이라도 당장 시험을 보자 그래서 합격을 하면 더 이상 이렇게 고통받을 일은 없겠지. "어라?저기 좀 봐요." "뭔데 그래요?" 난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일루니아 여사님 이 가리킨 대로 앞을 보았다. 보도와 인접한 3차선에 봉고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봉고차 문 앞에는 단발머리 여고생이 서 있었다. 여고생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봉고차에서 나은 선이 여고생을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황급히 닫히는 봉고차 문. 그리고 봉고차는 유유히 출발했다. "흐음, 흥미로운 광경이군요. 우리는 보통 이 런 것을 전문응어로 납치, 또는 포획이라 부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걸 헌팅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뭐하고 있어요?' "예?뭐하다니요?지금 운전연습 중‥‥" "당장 쫓아가요! 여자애가 납치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셈이에요?" "아니 , 뭐 사정이야 알겠지만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잖아요. 번호판도 봤겠다 112에 신고하면 용감무쌍한 우리의 경찰 아저씨들이 파렇고 하얗게 칠해진 경찰차를 타고 달려와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워즐 텐데, 굳이 우리가 나서서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당장 출발해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고,그에 놀란 나는 어쩔 수 없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다행히 봉고차가 신호에 걸려있었기에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서 112에 신고를‥‥‥ 아! 핸드폰이 없구나 " 이런 젠장! 이런 중요한 순간에 핸드폰이 없다니. 요즘은 유치원생들도 들고 다니는 게 핸드폰인데. 혹시 난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닐까? 어쨌든 나는 봉고차를 쫓아가기 위해 열심히 밟았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저 봉고차를 쫓아 가야하는 걸까? 어째서 내가 이름도 로르는 여고생을 구해 야 하는 거지?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에 의하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남의 어려움을 보핏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한다. 성선설의 기븐 이론은 사단으로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를 말한다. 인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 의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 밖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 지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이 바로 그것이다. 뭐, 간단히 말해 인지상정이라는 거다. 사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보면 동전 하나 던져주고 실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물른 나 역시 그런 마음이 없진 않다. 한때는 정의감에 불타을라 악의 무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남은 게 무엇이 있는가? 난 다만 내 주위 사람들을 지키고 싶을 뿐, 다른 일에까지 간섭하고 싶지 않다. 힘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야한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만약 내가 저 여고생을 구해줬다 치자.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1. 여고생이 나에게 고마워한다. 2. 너무 고마운 나머지 선물을 클고 인형가게로 찾아온다. 3. 그곳에서 지니를 만난다 4. 선물을 집어던지며 지니의 품에 안긴다. 5. 절 선물로 드리겠어요, 라고 지니 에게 말한다. 6. 둘이 손잡고 놀러 간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어떤가? 이래도 내가 저 여고생을 구해줘야 하는가? 죽 쒀서 지니 줄 일 있어? "꼭 그렇게 된다고만은 볼 수 없어요. 혹시 아나요? 저 여고생이 고마워서 아이언스 공작님의 팬이 될지." "뭐라구요?' 내 팬이 된다고?아이언스 히로의 팬이? 내 팬클럽 창단을 앞둔 이 시점에서 현재 확보한 인원은 몇 안 된다. 일단 루시아랑 라이. 그리고 먹을 걸로 꼬신다면 루와 루비도 가능하다. 크코니스까지 친다 하더라도 다섯 명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라. 나의 팬클럽 인원수를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1. 여고생이 나에게 고마워한다 2. 너무 고마운 나머지 선물을 들고 인형가게로 찾아온다 3. 난 선물을 받으며 내 팬클럽 가입서를 내민다 4. 여고생은 가입서에 사인한다 5. 그리고 학교에 가서 내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인지를 친구들에게 설명해주고 가입을 권유한다. 6. 수많은 여고생들이 내 팬클럽에 가입한다. "좋았어 ! 내가 반드시 구해주마!" 난 갑자기 정의감에 황활 불타올랐다. 지니따위에게 지지 않을 거대 괜클럽 창단을 위하여! "뭐해요?놓치겠어요. 어서 밟아요." "라져 !" 난 액셀을 힘껏 발았다. 속토가 올라가자 엔진음과 진동이 점점 커졌다. "빨리 4단으로 변속해요." "라져!" 난 능숙한 솜씨로 변슥을 했다. "어 ! 빨간불인데요." "상관없어요! 밟아요!" 봉고차가 지나가고 나자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하지만 난 일루니아 여사님 이 시킨 대로 힘껏 밟았다. 끼이익 ! 여러 차들이 급정거를 하면서 사거리 교통은 난장판이 되었다 "밟아요. 계속 밟아요!" 너무나도 즐거워 보이시는 일루니아 여사님. 마치 청룡열차를 탄 아이들처럼 즐거워한다. 혹시 일루니아 여사님 피에는 질주 본능이 흐르는 것은 아닐까? 대낮에 길거리에서 여고생을 납치하는 만헝을 저지른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남자 셋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잠시 이들의 프로필을 살펴보자. 1. 김만수(48세) -대기업을 다니다가 명예퇴직당함. 퇴직금은 사기를 당해 모두 날림. 아내에게 이흔 당하고 자녀들 양육권까지 빼앗김. 현재 카드빛 1천만 원. 2. 양이욱(53세) - 중소기업 사장 출신. 잘 나가던 회사였으나 무리한 확장을 하던 중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남. 1억2천만 원의 재무를 지고 있음. 현재 빛쟁이들에게 쫓겨 노숙자 생활을 하는 중. 3. 윤칠영(28세) - 양친이 일찍 사망하여 보육 시설로 들어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할일이 없어 소매치기로 나섬. 잡혀 징 역 8개월 복역. 사회에 나와 새 삶을 살아보려 했으나 범법자는 인간 취급 안 하는 사회 현실에 좌절. 동거 중인 여자는 임신까지 하였으나 살길이 막막함. 인생 역전을 노리고 집안에 굴러다니는 동전까지 긁어모아 수백만 원 어치 로또를 갔으나 전부 꽝. 이들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나 범죄를 공모했다. 어차피 막다른 길에 몰린 이들이었기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이 타깃으로 삼은 대상은 성진여고 여학생이었다. 성진여고 는 가톨릭계 학교로 부유한 여학생들이 많이 다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하교 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 그들은 늦게 귀가하는 여학생을 노렸다. 흔자서 걸어가던 예쁘장한 성진여고 여학생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길을 묻는 척하며 여고생을 강제로 차 안에 태웠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아이 부모 의 연락처를 알아내 돈을 요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뭐야?저 트럭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는데." 운전을 하던 윤철영은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파란 트럭의 모습을 주목했다. 처음에는 단지 방향이 같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추격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뭐 ? 사실이야? 진짜야?" "예."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인원을 모은 사람은 이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양이욱이었다. 양이욱은 여고생을 납치하자마자 핸드존을 부수는 치밀함을 보였다. 요즘 핸드폰에는 GPS(위성항법장치)가 장착되어있어 위치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젠장. 떨어트려!' "예." 윤철영은 엑셀을 힘껏 밟았다. 납치된 여고생은 두 팔과 다리가 묶인 채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쫓아온다는 말에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절 구해주세요. 혹흑.' "어라?저 차가 속도를 엄청 높이는데요." "뭐해요?더 밟아요!" "예? 이 이상 과속하면 딱지가 날아을 텐데." "상관없어요!" 어느새 속도계의 바늘은 100킬로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의 봉고차가 갑자기 좌회전을 했다. 끼이익! 마치 차가 넘어갈 것 같은 격렬한 드리프트. "꺾어요!" "예?하지만‥‥‥‥" "잔말 말고 꺾어요!" 난 시킨 대로 브레이크를 살짝 밟으며 핸들을 꺾었다. 끼이익! 온몸이 바깥쪽으로 쏠렸다. 차 밖으로 튕겨나갈 것만 같았다. 어찌되었든 다행히 사고 내지 않고 돌긴 들았다. "저 , 저기요." "왜요?"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나는데요." "원래 다 그런 거예요. 리어 타이어가 그런 마찰을 했으니 타이어가 타는 건 당연하지요." "그, 그런 건가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니 할 말이 없다. 어찌되었든 나는 계속 봉고차를 따라갔다. 하지만 상대는 숙달된 운전 경력은 지닌 듯 했고,그에 비해 나는 도로주행이 오늘 처음인 초보 중의 초보였다. 생각 같아서는 일루니아 여사님께 운전대를 맡기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리를 바꿀 수도 없었다. "안 되겠어요. 그냥 들이받아요!" "예?" "들이받으라구요!" "알겠습니다. " 난 액셀을 힘껏 밟아 봉고차 뒤를 들이 받았다. 쿵! 쿵! 하지만 봉고차가 달리고 있었기에 별다른 층격을 주지 못했다. "차를 옆으로 붙여요!" "라져." 내가 차를 옆으로 붙이자 일루니아 여사님의 다음 지시가 떨어졌다. "옆으로 들이받아요. 힘껏!" "예." 난 내 팬클럽 창단식을 생각하며 시킨 대로 열심히 했다. 몇 명이나 가입하려나? 적어도 100명은 가입하겠지? 팬레터도 오려나? 아마도 오겠지? 적어도 지니보다 많이 와야 할 텐데. 쿵!쿵!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차 지니가 요즘 교제하는 여성한테서 징발해 온 거잖아. 그런데 이렇게 박살내도 되는 건가? 뭐,문제가 되면 지니가 알아서 몸으로 때우겠지. 한낮에 벌어진 도심 속의 추격전. 그것도 스포츠카나 경찰차가 아닌 봉고와 트럭의 대결. 흰색 그레이스와 파란색 포터의 대결. 길을 걷던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대결에 주목했다. 몇 번이나 격렬하게 몸통 박치기를 하던 포터는 이내 그레이스를 가드레일 쪽으로 밀어 붙였다. 끼기긱 ! 가드레일에 그레이스의 믐체가 긁히며 불꽃이 튀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그레이스 운전자 윤철영은 코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핸들을 오른쪽으로 완전히 꺾으며 엑셀을 밟았다. 하지만 그 순간 포터가 떨어져 나갔다. 그 바람에 그레이스는 튕겨나가듯 오른쪽으로 회전했다. 끼이익! "으아악!" 스핀이 걸린 차량은 몇 바퀴 회전을 하다가 옆으로 전복되어 보도의 공중전화부스를 들이 받고 멈추었다. "훗, 감히 이 몸에게 대항하다니. 그 누구도 내 팬클럽 창단을 방해할 순 없다." "헛소리 그만하고 내려요." 나는 차를 멈췄다. 그리고 내려 전복된 봉고차로 다가갔다. 봉고차는 문이 위로 향하는 형 태로 전복되어 있었다. 잠시 후, 그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기어 나왔다. 중년 남자 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조수석문이 열리며 젓은 남자 하나가 기어나왔다. 더 이상 나올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과 발이 묶인 여고생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절 구해주세요 구해주시기만 하면 팬클럽에 가입해 드릴게요. 친구들한테도 가입하라고 권유할게요.' 마치 이렁게 말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 난 그녀를 악당들의 손에서 구해내기로 마음먹었다. "대낮에 여고생을 납치하다니! 네놈들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보구나!하지만 하늘이 용서해도 나 아이언스 히로가 웅서치 않으리! 내 팬클럽 창단을 위하여 네놈들이 희생양이 되어주어야겠다!" "뭔 헛소리 에요? 저리 비켜요!" 한창 폼을 잡는데 초를 치며 나타난 일루니아 여사님. 일루니아 여사님은 악당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 그 소녀 를 풀어주세요." "흥! 웃기는 소리!" 여고생을 잡고 있는 아저씨는 픔에서 칼을 꺼내들어 여고생의 목에 들이댔다. "움직이지 마! 움직 이면 죽여 버릴 거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저씨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난 앞으로 나섰다. "납치에 이어 살인까지 하려 하다니! 게다가 내 팬클럽 창단까지 방해하다니! 그 소녀는 내 팬클럽 가입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니 당장 놓아주어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대체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러는 거냐?" 앞으로 나선 사람은 인상 험악한 청년이었다. 그는 절규하듯 나에게 소리첬다. "난 28세 윤철영이라고 한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사망하셔서 보육원을 전전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을 하려했으나 배운 기술도 없고 해서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너무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어 소매치기를 몇 번 했다. 그런데 재수 없게 걸려서 형무소에서 8개월을 복역했다. 형무소 안에 있는 동안 죄를 뉘우치고 착하게 살아보려 했지만, 이 사회는 범법자인 날 받아주지 않더군. 남은 돈 다 모아서 로또를 샀는데 전부 꽝이었다. 동거녀는 현재 임신 중인데 분유 갈은커녕 집세 벌 돈조차 없어. 그래서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려고 납치를 했다.그런데 왜 방해하냔 말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인생 역정을 장촹하게 늘어놓는 청년. 그의 이야기를 새겨들은 나는 대답을 해줘야 할 의무를 느꼈다. "내 이름은 박영웅. 또 다른 이름은 아이언스 히로라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금화를 주어 판타지 세계를 돌아다니다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왔다. 한번 잘 살아보려고 인형가게를 차렸는데, 팬레터가 지니랑 크로니스한테만 오더군. 내 팬레터는 단 한 통도 없었어. 팬클럽을 창단하고 싶어도 팬이 4명밖에 없다. 그것도 3명은 꼬맹이야. 지니는 전국에 수천 명의 여학생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난 뭐야?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인데 왜 나한테는 팬이 없는 거야? 이거 너무 불공평하잖아.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난 내 스스로 팬클럽을 창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그 여고생을 구해 내 팬클럽에 가입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왜 방해하냔 말이다!" "뭔 헛소리야, 이 뺀질아!" "아줌마는 또 왜 끼어들어? 지금 중요한 순간이란 말이야!" 어쨌든 말이 안 통하면 결국은 주먹을 쓰는 수밖에 없다. "너 불쌍한 것은 알겠는데.그렇다고 내 팬을 납치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야. 덤벼라. 너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마." "이 자식!" 청년은 소리를 지르며 돌격해 왔다. 난 상대가 내지른 주먹을 한 손으로 붙잡고 오른발을 올려 찼다. 퍼억! 턱을 얻어맞은 청년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일어나려고 잠시 비틀거렀지만, 결국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믓하고 쓰러졌다. 이걸로 한 명 처리. 난 여고생을 불잡고 있는 두 아저씨를 보았다. 이미 나의 화려한 솜씨를 목격한 터라 두 아저씨는 두려움에 떨었다.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면 주, 죽여 버릴 거야! 진짜 죽일 거야!" "읍읍!" 칼이 살짝 파고들어 여고생의 목에는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고생은 너무 놀라 눈물을 흘리며 발버등을 쳤다. 소리도 질러댔지만 재갈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진정해! 너도 진정해 ! 그렇게 자꾸 음직이니 칼이 파고들잖아! 아직 팬클럽 가입서에 싸인도 안 했는데 죽으면 안 돼!" "헛소리 좀 그만하고 어떻게 좀 해봐요." "저보고 윌 어쩌라구요?" 상대가 이렇게 막 나오면 방법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저 아저씨가 조금만 실수를 한다면 내 팬은 죽을지도 모른다(어느새 팬으로 확정 되었음). 난 상대를 설득할 필요를 느꼈다. "이봐요, 아저씨. 원하는 게 뭡니까? 너무 그럭게 극단적으로 나가려 하지 마시고 요구 조건을 말씀해 보세요. 제가 적극 검토하여 수능 성적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수능 성적이 왜 나와, 이 뺀질아!" "아줌마는 빠지라니까! 지금 내가 협상 중인 거 안 보여?" 난 사사건건 태클을 걸고넘어지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밀치고 다시 협상에 나섰다. "아무튼 요구 조건을 말씀해 보세요." "닥쳐 ! 너 때문에 우리 인생은 이제 끝났어 ! 어차피 우린 막다른 길에 몰린 인생이야! 이굉게 된 거 이년이랑 다같이 죽어 버릴 거야!" "읍읍!" "저기, 너무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심정은 이해를 하지만 그래도 살다보면 좋은 일이 있지 않겠어요?" "닥쳐, 이 자식아!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자, 우리 모두 삼삼칠 호홑으로 마음을 진정시킵시다. 3초 동안 숨을 들이 마시고, 3초 동안 숨을 참은 다음,7초 동안 천천히 내뱉으세요." "닥쳐! 세상에 그런 호흡이 어딨어?" "아니, 삼삼칠 박수도 있는데 삼삼칠 호흡이라고 없으란 법은 없잖아요." "닥치라고 했지! 진짜로 죽여 버린다!" 나는 저들이 나의 말에 감화되어 무기를 내려놓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럼 왜 이렇게 하는가? 그야 기회를 노리기 위함이다. 난 말을 하는 내내 조금씩 상대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 조금 있으면 경찰차가 도착할 것이다. 이런 큰 사고가 난데다가 주위에 사람들이 수십 명이다. 경찰이 안 올 리가 없지. 아무튼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나는 저 여고생을 구출해 내야 한다. 내 손으로 직접 구해내야 내 팬클럽 회원이 될 것 아닌가? 우에에엥~ ! 이 소리가 라이의 을음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커다란 오산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라이의 울음소리가 아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다. 젠장! 벌써 오면 어쩌자는 거야? 시간이 없군. 경찰이 나타나기 전에 여고생을 구출해 내는 수밖에. 이 정토 거리라면 움직이기 전에 여고생이 죽을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뺀질이‥‥‥ 가 아닌 아이언스 히로다. 드래곤과 싸울 뻔하기까지 했던 나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그리고 나에게 는 필살의 보법이라 할 수 있는 개나리 스텝이 있다. 난 개나리 스텝으로 여고생을 구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검은색 세미 정장을 입은 남자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연한 금발을 하나로 묶은 그는 한쪽 눈에 살짝 색이 들어간 외눈 안경을 끼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키에 늘씬하고 탄탄한 몸매. 깨끗한 피부와 조각 같은 얼굴. 약간은 중성적이면서도 강인한 남성적 매력이 느껴지는 이 남자의 이름은 사일런스 지니. 모델 뺨치는 그의 외모에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보통사람들이라면 그 시선에 어쩔 줄을 몰라 했겠지만, 사일런스 지니는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날려주었다. "아아~!" 인간의 언어로 감히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사일런스 지니의 미소. 그 미소를 받고도 멀쩡할 여자는 얼마 없었다, 일부 여성플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어떤 여성은 다리가 플려 주저앉았다. 사일런스 지니가 이 시간에 가게에서 일하지 않고 밖으로 나온 이유는 호텔 커피숍에서 '요즘 교제하는 여성' 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를 잡은 사람은 여자 쪽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약속 장소가 호텔 커피숍일까? 그냥 커피습도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호텔 안에 있는 커피숍으로 장소를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사일런스 지니는 약속 장소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운전연습을 잘하고 계신지 모르겠구나. 이번 일을 계기로 두 분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면 좋으련만.' 지니의 바람과는 달리 히로와 일루니아는 서코에게 호감을 갖기는 커녕 더욱 사이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설사 지구가 두 쪽 난다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약속 장소에 거의 다 왔을 때쯤이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 사고가 난 듯 토로에는 차량 잔해가 널려있었다. 지니가 그냥 지나가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아저씨 원하는 게 뭡니까? 너무 그럭게 극단적으로 나가려 하지 마시고 요구 조건을 말씀해 보세요. 제가 적극 검토하여 수능 성적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수능 성적이 왜 나와, 이 뺀질아!" "아줌마는 빠지라니까! 지금 내가 협상 중인 거 안 보여?" 지니는 깜짝 놀랐다. '이것은 아이언스 공작님과 누님의 목소리가 아니던가?' 지니는 인파를 헤치며 사건 현장으로 다가갔다.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고, 두 남자는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 여고생을 붙잡고 있었다. 그들은 칼을 여고생의 목에 들이댄 채 죽인다는 헙박을 하 있었고, 히로는 그것을 말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지니는 감탄을 하며 존경스런 눈길로 히로를 바라보았다. '운전연습 도중에도 여고생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나서시다니! 과연 아이언스 공작님 이시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위대하게 느껴지는구나!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럭게까지 하시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내가 나서서 아이언스 공작님의 수고를 덜어 드려야겠군 ' 개나리 스텝으로 여고생을 구하기로 결심한 이상 망설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난 개나리 스텝을 발동하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믓한 일이 일어났다. 쉬익 ! 퍽! 어디서 튀어나은 건지 모를 한 청년이 여고생의 목에 칼을 대고 있던 남자를 순식간에 제압한 것이다. 어느새 여고생은 청년의 품에 안겨있었다. 청년은 여고생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지요7' "흑흑, 무서 웠어요." 여고생은 자신을 구해준 청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죽어라!" 다른 남자가 땅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고 달려들었다. 여고생을 품에 안은 청년은 여고생을 보호하려는 듯 감싸 안으며 돌려 차기를 했다. 퍼억! 게임은 끝이 났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된 것이다. 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뭐야? 뭐가 어 떻게 된 거야? 저건 내 역할인데. 갑자기 나타나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청년은 울고 있는 여고생을 달래며 나를 보았다.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아이언스 공작님." "너, 너는..." 그는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였다. 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소리첬다. "니 , 니가 왜 여기 있어?"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 "지나가던 길이었으면 계슥 지나갈 것이지 왜 끼어들고 난리야?"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악의 무리를 처단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의 수고를 조금 이나마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그런‥‥‥" 지니가 여고생의 손과 발을 묶은 끈을 풀어주었지만, 여고생은 지니를 꼭 끌어안은 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지니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을고 있는 여고생은 이미 지니에게 흘딱 넘어간 모습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럼 나의 팬클럽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윌 어떻게 돼요? 보고도 모르시나요? 저 여자는 이미 지니의 팬이 된 것 같은데. 호호~ 차암 안 되셨네요." 끝까지 나의 염장을 지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루니아 여사님.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무튼 납치당한 여고생을 구해 팬클럽을 창단하려 했던 나의 원대한 계획은 지니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전국에 수천 명의 여성팬클럽이 있는 놈이 몇 안 되는 나의 팬을 빼앗아 가다니! 있는 놈이 더 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일런스 지니는 예의 염장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자식! 결코 응서하지 않겠다!" 내가 지니를 향해 빅장을 쓰려는 순간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를 덥석 불잡아 질질 끌고 갔다. "헛소리 그만하고 따라와요. 하던 주행연습 계속해야 하니." 난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너 이 자식 , 두고 봐! 이번에는 절대 그냥 넘 어가지 않을 테니까! 니가 그딴 식으로 내 팬클럽 창단을 방해했다 이거지? 내가 너보다 인기가 많아질까 봐 두려운 거냐?그럼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것이지 이런 비열한 수작을 부려? 니가 그러고도 충성스런 내 부하 1호라고 할 수 있어?내가 팬클럽 창단해도 넌 절대 가입 안 시켜 줄 거야! 흥!" "닥치고 운전이나 해요." 난 운전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에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경찰아저씨가 앉아있었다. "그럼 출발하세요." 난 천천히 클러치에서 발을 떼며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차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난 능숙한 솜씨로 기어를 조작하며 핸들을 꺾었다. 나의 운전은 여유로움 그 자체 였다. 경찰은 나의 운전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손에 든 채점표에 체크를 했다. "운전연습 많이 하셨나 봐요. 솜씨가 제법 좋은데요." "하하,많이 하긴 했죠." "학원에서 배우셨나요?" "아니요. 어떤 아줌마한테 배웠어요." 빠드득! "......" "아!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아줌마만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리는지라. 그리고 그 아줌마 동생을 생각하면 복장이 뒤집어지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그 여고생은 지니의 열혈팬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통씩 팬레터를 보낼 정도로. 그리고 지니는 범인 검거에 도움을 준 것이 인정되어 며칠 후에 경찰서에서 표창장을 받기로 했다. 사실 그놈들은 내가 다 잡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니가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내 공을 전부 가로채갔다. 그야말로 죽 쒀서 지니 준 격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일로 인해 지니의 명성은 더욱 올라가고 팬클럽 수도 더윽 증가했지만,나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더라. 지니가 나타남으로 인해 나의 존재감이 완벽하게 지워진 것이다. 그 여고생을 생각하면 정말 열 받는다. 그래. 지니한테 반한 것까지는 내가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지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적어도 팬레터 한 통 정도는 써줬야 하는 거 아냐? 나 아니었으면 지금쯤 차가운 땅 속에 누워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래서 함부로 남을 도와주는 게 아니다. 그 여고생이 팬레터 한 장만 보내됐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억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요즘 경기가 참 어렵더라구요. 경기가 어려우면 생활형 범죄도 늘어날 텐데, 경찰 일도 참 힐드시겠어요." "하아, 말도 마세요. 요큼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아주 죽을 지경이에요" 주행시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내가 이렇게까지 여유롭게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도움이 컸다. 옆에서 얼마나 빈정거려 대던지. 그 빈정거리는 소리 듣기 싫어서 목숨 걸고 연습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런 여유로음 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난 채점하는 경찰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도로 주행시험을 보았다 루시아는 라이를 데리고 시험장까지 나와 있었다. 히로를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라이는 루시아가 사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입가에 잔뜩 묻혀 가며. "천천히 먹어,라이야. 입가에 다 묻잖아." 루시아는 손수건을 꺼내 라이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주었다. "합격할 수 있으려나? 언니 말로는 합격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 "오빠는 분명히 합격할 거 예요. 라이는 오빠를 믿어요." 라이는 힘차게 대답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라이의 눈동자에는 히로에 대한 신뢰가 가득 담겨있었다. 루시아는 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라이가 이렁게 오빠를 믿어주니 오빠는 분명히 합격할 거야." "헤헤~" 라이의 읏는 모습이 너무 커여워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라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 숨 막혀요, 언니." 루시아의 품에서 바둥바등 거리는 라이. 그때였다. "루시아~ 라이야~" 저 멀리서 달려오는 히로.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결과는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오빠아~" 라이는 힘차게 히로의 품을 향해 뛰어갔다. ------------------------------------------------------------------------------- 아이리스 2부 2권 Story7 세레나, 한국에 오다 아이언스 히로와 여러 드래곤들이 참여한 전란이 끝난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멸망한 아이리스 왕국은 재건되었고, 여러 국가들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이자,한때는 세계의 운명을 걸고 드래곤과 싸우려 했던 아이언스 히로는 전란이 끝남과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이리스 왕국의 참모였던 사일런스 지니 백작,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과 용병계의 꽃이었 던 라이레얼 도 모습을 감추었다. 이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지만, 그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전부 외계(?)에 있지 않은가? 그들이 다른 세계에 있다는 사실은 아이리스 왕궁 내에서토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극비였다. 그리고 아이리스 왕궁 지하에 그 세계로 통하는 마법진이 있다는 것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예전 크로니스가 살았던.그리고 지금 크로니스의 본체가 잠들어 있는 붉은 산맥. 이 산맥 왼편에는 엘프의 숲이 있고, 오른편에는 헤리오 왕국이 있다. 이 헤리오 왕국은 히로가 붉은 산맥을 내려와 처음 여행한 곳으로, 라나네 가족들과 레이트 백작 등이 살고 있었다. 이 나라의 왕은 헤리오 반데라스로 한때 히로와 깊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지금도 여자 속읏이나 훔치는 변태 국왕으로 불리는 반데라스는 그동안 소망하던 세레나와의 결혼을 한 후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왕비가 된 세레나고 행복한 걸까? 행복하기야 행복했다. 화려한 왕궁에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와 함께 생활을 하니. 부족한 것은 아무 것토 없었고, 지금의 행복을 위협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가끔씩 옛날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와의 첫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모두가 소증한 추억들이었다. 한때는 그를 사랑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레나는 그를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 지금고 세레나는 그가 보고 싶었다. 지금 그를 향한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친근함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함께한 사람이니까. 그러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세레나는 예전 한번 가보았던 그 세계를 떠올렸다. 먼지가 잔뜩 낀 공기 ,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쇠마차, 높게 솟은 건물 등등. 아무튼 이상한 동네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이리스의 공주와 여러 드래곤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보고 싶었다. 그냥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세리나는 창틀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쑴을 내쉬었다. "후우~ ." 집무를 마치고 세레나의 방을 찾아은 반데라스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수에 젖은 눈빛, 그리음에 가득 찬 얼굴, 생기 없는 한숨 등등. 이 모습은 분명‥‥‥ '그놈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반데라스는 히로를 떠올리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히로를 떠올리는 순간 저절로 피가 끓어오르며 혈압이 급상승했다. '대체 그놈이 뭐기에 아직까지 세라나 양의 마음속에 있는 거지? 그놈이 다른 세계로 갔기에 이제 전부 끝난 줄 알았는데. 어째서 다른 세계에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거지?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반데라스는 일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인기척을 크게 냈음에도 불구하고 세레나는 여전히 자기 세계 속에 빠져있었다. "흠흠,세레나 양." 반데라스가 입을 열고나서야 세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냐니? 남편이 아내 방에 들어오는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 반데라스는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다. 아직도 그놈을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떡게 해야 하는 거지? 세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런 걸음으로 방을 나서려 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구요." 세레나가 방을 나가자 반데라스는 그 뒤를 졸졸 따라 붙었다. 마치 스토커처럼. 세레나가 물었다. "어디 가세요?' "그,그냥 세레나 양이 가는 곳에 갑니다. " 세레나는 눈치도 모르고 따라붙는 반데라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는 때론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걸까? 반데라스는 생각했다. '혼자 있으면 분명 또 그놈 생각을 할 거야. 그러니 옆에 꼭 붙어 있어야지.' 사실 조금 후면 민생 안정 문제로 회의가 있었다. 하지만 반데라스에게 있어서 민생 안정이나 국정 같은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세레나의 마음뿐 왕이라는 자리도 별로 중요치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왕관을 내던지고 세레나와 함께 멀리멀리 토망치고 싶었다. 반데라스는 좋게 말하면 사랑밖에 모르는 순정파,나쁘게 말하면 스토커였다. "일 없으신가요?' "예. 없습니다. "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는 반데라스. 같은 시각,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과 관료들은 나타나지 않는 국왕을 저주하며 국왕과 비슷하게 생긴 인형에 못을 박고 있었다. 세레나는 확실히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혼자 있고 싶어요." 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 없는 남자라도 비켜주는 게 예의다. 하지만 반데라스는 끝까지 꿋꿋이 서 있었다. "저는 같이 있고 싶습니다. " 반데라스는 그녀 옆에 남아 그놈 생각이 안 나도록 잘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원래 끈질긴 남자는 인기가 없는 법이다. "혼자 있고 싶다니까요!" 세레나는 짜증스럽게 외쳤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반데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왜요?그놈 생각하시게요!" "......" 놀란 반데라스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세레나는 반데라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반데라스도 이번 기회에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세레나 양을 사랑합니다. 세레나 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세레나 양이 아이언스 히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제 몸과 마음을 바쳐 세레나 양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세레네양이 저만을 바라봐줄 거라 생각하구요. 그런데 어째서 세레나 양은 그놈을 잊지 못하는 겁니까? 제가 뭐가 부족하기에? 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세레나 양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겁니까?" 반데라스의 마지막 말은 절규에 가까웠다. 말을 들은 세레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째서 얘기가 그렇게 진햄되는 거지? 세레나는 븐명 반데라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면, 왜 결혼을 했겠는가?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자신도 그를 사랑하기에 결혼한 것이다. 예전에는 히로를 정말 사랑했지만. 이제 그는 좋은 친구 이상은 아니었다. '어쩐지 요즘 들어 더욱 끈덕지게 따라다니더니 , 그것 때문이었나?' 세레나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저기요. 뭔가 오해를 하시나 본데 저는 그 남자를‥‥‥" "거짓말 하지 마세요! 그놈을 사랑하고 있는 거잖아요. 대체 왜 저의 진심을 몰라주는 겁니까?" "사랑 안 한다니까요!" "사랑하잖아요! 제가 걸 모를 것 같습니까? 저도 다 알아요! 세레나 양은 분명 놈을 사랑하고 있어요?" "안 한다니까요!" "그놈이랑 여관에서 같이 자기도 했잖아요!" "......" 순간, 둘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해도 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사랑한다면 현재가 중요한 건데,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다니. 그리고 둘이 여관에서 같이 잔 것은 맞지만,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반데라스가 지금 그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것이다. 세레나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금방이라도 볼을 타고 홀러내릴 것만 같았다. 반데라스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세레나 양을 울리다니!' 반데라스는 세레나에게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저 , 저기 세 레나 양‥‥‥" 탁! 세레나는 반데라스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는... 짜악! 반데라스의 뺨을 때렸다. 놀란 반데라스는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그사이 세레나는 저 멀리 뛰어갔다. 반데라스는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첬다. "으아아! 이게 아닌데~!" "일로 와봐, 얘들아." 난 가게에서 놀고 있는 어린 엘프들을 불렀다. 쪼르르 다가오는 아이들. 난 아이들에게 지갑을 열어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아니?" "운전면허증이요." 힘없는 아이들의 대답. 난 읏음을 터트렸다. "푸하하~그래. 이게 바로 운전면허증이라는 거야. 어때?신기하지?" "저기요, 오빠." "응?왜 그러니,라이야? "이거 벌써 20번째 보는 거예요." "아니야,라이야. 21번째야. 루비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이제 그만 좀 보여줘요. 지겹단 말이에요." 으음, 이제 겨우 21번째란 말인가? 100번 채우려면 아직 79번이나 남았군. "이 오빠가 이 운전면허증을 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얘기해줬던가?" "예.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어요." "그래? 그럼 오빠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얘기해 줄 테니 또 들으렴." "......" "뭐니 , 그 표정들은?" 아이들이 지루해하건 말건 나는 얘기를 시작했다. 2시간 후 "‥‥그래서 운전면허증을 따게 되었단다.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슨간, 얼마나 기쁘던지. 하지만 난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는다는 사실보다도 더 이상 일루니아 여사님께 갈굼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 기뻤어. 어떻게 생각하니, 얘들아?" 쿨쿨~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을 자는 아이들. 으음, 내 얘기가 조금 길었나?난 아이들을 깨워 집으로 보냈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나니 심심하다. 아아~ 왜 이렇게 입이 근질 거리는걸까?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서 '나 운전면허증 땄다!' 라고 크게 소리치고 싶다. 아예 가게 앞에 현수막을 걸어놓는 것은 어떨까? 4천만 국민이 내가 운전면허증을 땄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 겠는데.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바닥을 닦던 사일런스 지니가 말했다 난 매서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팬클럽 회원을 뺏어 간 나쁜 자식. 있는 놈이 더 하다고 전국에 수천 명의 여성팬이 있는 자식이 몇 명 되지 않는 내 팬을 뺏어 가?니가 그러도 인간이냐? "뭔 좋은 생각인데요?' 내가 퉁명스럽게 묻자 지니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운전면허증을 80인치 정도로 확대 복사하여 가게 한쪽 벽에 걸어 놓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오오~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요." 확대 복사 된 내 운전면허증을 가게 벽에 걸어놓는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으음. 웬일로 지니가 도음이 되는 말을 다 하는군. 아주 굿 아이디어야. "헛소리 그만하고 둘 다 일해. 오빠는 말리지는 못할망정 바람을 넣으면 어적해?" "아! 루시아." 계단을 내려온 루시아는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지니는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난 루시아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흰색 반팔에 청색 데님 스커트 그리고 가벼워 보이는 끈구두. 루시아는 어떤 옷을 입어도 아름다웠다. 이제 운전면허도 땄으니 빨리 차를 쁩아서 루시아와 놀러가야 하는데. 난 은근슬쩍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루시아고 싫지 않은지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난 재빨리 머리를 글려보았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데이트 하러 나갔고. 지니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애들은 집으로 돌아갔으니‥‥방해할사람은없겠지? 지금이야말로 루시아와 사이를 진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난 루시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루시아." "왜 그래?' "저기‥‥ 있잖아" "응?뭐가 있어?" "그러니까 그게‥‥‥ 꼭 뭐가 있다기보다는..." 왜 이렇게 말이 안 나오는 걸까? 데이트 신청 한번 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난 침을 꿀꺽 삼키고 호흡을 크게 했다. 그리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 문이 열리며 손님 이 들어왔다. "......" 이런 빌어먹을! 왜 꼭 이런 증요한 순간에 손님이 오냔 말이다! 자동문 사이로 들어오는 사람은 한 여인이었다. 길게 기른 녹색 머리카락, 적갈색 눈동자. 또렷한 이목구비와 깨끗하고 하얀 피부. 늘씬하다 믓해 완벽에 가까운 몸매. 놀랍도록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다. 그녀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 있었고, 한 손에는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외국인 손님인가?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이 여인은 설마... "세레나!" 난 너무 놀라 눈을 비벼 보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분명 세레나였다. 레이트 백작가의 외동딸이자 헤리오의 왕비. 결혼식 날 레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확실하게 떠을랐다. "오랜만이에요." 세레나는 나를 보더니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아,아니 어째서 여기에‥‥‥ ?” 헤리오 왕궁에서 왕비 생활을 하고 있어야할 세레나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야? 그리고 저 슈트케이스는 뭐야? 내가 당황하는 사이 세레나는 슈트케이스를 내려늘으며 말했다. “당분간 신세 좀 져도 될까요?” (『아이리스』 3권에서 계속) 세레나, 한국에 오다 갑작스런 세레나의 등장.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대체,어째서, 무었때문에....... 세레나가 이곳에 왔단 말인가? 세레나가 사는곳은 판타지 세계의 자이나레스 대륙의 헤리오 왕국. 이곳은 지구의 유라시아 대륙의 대한민국. 다른 나라도 아닌 다른 세계이다. 거리상으로는 계산 조차 불가능한. 그런데 어째서 세레나가 이곳에 있는 거지? 세레나는 헤리오 왕궁에 있어야 하잖아. 혹시 이거 착시현상이 아닐까? 가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보고 있는 곳을 보이지 않는다고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그럼 세레나는 지금 이곳에 존재 하지 않는데, 난 세레나가 이곳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건가? "으음, 그런 거였군. 모든게 착시 현상이었어." "죄송합니다만, 아이언스 공작님. 그런 식의 현실 도피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니다.' ".........." 그건 그렇군. 난 세레나가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럼 이제 다음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다음 문제는 어째서 세레나가 한국에 왔냐는 것이다. "헉! 설마 나처럼 금화를 주워서!"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 그건 그렇다. 세상에 나처럼 재수없는 사람은 흔치 않은 법이지. "제 생각에는 마법진을 통해 온 것 같습니다." "저도 압니다." 아이리스 왕궁 지하에 있는 차원이동 마법진. 세레나는 아마 그곳을 경유해서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세레나는 전에도 반데라스와 함께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으니 쉽게 찾아 왔겠지. 그런데.......왜 반데라스는 안 보이는 거지?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해 보이시는 군요. 일단은 휴식을 취하시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온 손님을 이대고 세워 주는것은 예의 가 아니지. "일단 휴게실로 가서 좀 쉬어.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여기 있는 사일런스 백작이 안내해 줄거야." 내 말에 지니는 세레나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 엄청 무거워 보이는 슈트케이스를 한손으로 가볍게 들고 안내를 했다. "절 따라 오시지요." 세레나는 지니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난 사라지는 세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 "왜, 왜그래?" 내가 그동안 열심히 눈치를 봐왔기 때문인지, 이젠 상대의 눈비찬 봐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수 있을 정도 가 되었다. 루시아의 눈빛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어째서 저 여자가 여기에 온거야? 저 여자랑 끝난 사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여기에 온 거야? 응? 어서 말해봐.' 이런 추궁이라니!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난 결백하다. 세레나가 왜 여기 왔는지는 내가 더 궁금하다. "저,저기.....루시아." "....," "난 결백해." "..........." "진짜야." "........" "믿어줘." ".,,,,,,,,,,,,," 전혀 반응이 없는 루시아. 그 모습에 난 심하게 좌절하고 말았다. 간신이 사이가 좋아졌는데 어째서 이런 시련이? 으윽, 제발 그런 눈빛으로 날 보지 말아줘. 루시아의 싸늘한 눈빛은 일루니아 여사님의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보다 내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라이나 보러 가야겠네" 루시아는 몸을 획 돌려 가게를 나갔다. 난 재빨리 루시아를 쫒아 갔다. "왜 그래, 루시아? 나한테는 오직 너뿐인 거 잘 알잖아." "그래. 잘 알아." "그럼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 그래?" "아니, 그러니까 꼭 뭘 어쨌다기 보다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나한테 신경 끄고 헤리오의 왕비한테나 신경 쓰시지." ",.,,,,,,,,"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닌 것 같은데. 루시아는 걸음을 재촉하여 나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난 루시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찰랑거리는 플래티나 블론드 머리카락과 가느다란 발목. 뒷모습도 참 아름답군......이 아니잖아! 음음, 이런 상황에서까지 루시아의 미모에 빠져들다니, 너무 아름다운 것도 문제로군. 그나저나 루시아가 이렇게 화를 내다니. 앞으로 난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느새 나타난 지니의 발언. 난 지니를 보며 물었다. "아니, 왜요?" "루시아 공주님께서 저런 행동을 취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게 뭔데요?" "질투 입니다." "질투요?" "그렇습니다. 질투입니다. 세레나 왕비님의 등장으로 아이언스 공장님의 마음을 빼앗길까 두려워 질투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긍정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으음.질투라......." 지니의 말이 맞다. 이게 질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후후~ 질투라니. 그 도도하기만 하던 루시아가 내 마음이 세레나에게 갈까 두려워 질투를 하다니! "후후후~." 왠지 루시아가 귀엽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지금 문제는 역시 세레나겠지? "세레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요?" "짐을 내려놓은 후 차를 마시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내가 올라가봐야겠지? 오랜만에 세레나를 만나려니 참으로 부담스럽다. 그때의 만남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세레나가 또 한국으로 올 줄이야. 설마 다른 인간들(이렇게 말해봐야 실제로 인간은 몇 안 되지만)처럼 이곳에 눌러 앉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 일단 세레나를 만나서 얘기를 해보는 거야.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얘기해서 돌려보내야지. 내가 세레나를 만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그녀의 풀 네임은 레이트 세레나(지금은 헤리오 세레나지만.). 헤리오 왕국의 레이트백작가의 외동딸이다. 커다란 저택에서 아무런 걱정없이 행복하게 살던 그녀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녀의 삼촌이란 인간이 백작 자리를 탐내 힐카인 후작과 공모하여 그녀의 아버지를 반역죄로 몰아붙인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전부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녀는 사창가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사창가에서 그녀를 만나 그녀의 가슴 아픈 얘기를 전해들은 나는 기꺼이 그녀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한밤중에 힐카인 후작의 집에 침입하는 등의 일까지 해서 세레나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까지도 구해냈다. 솔직히 지금이라면 귀찮아서 안 했겠지만, 그땐 나도 나름대로 정의감에 넘치던 시절이어서....... 아무튼 세레나와 그녀의 부모는 내가 계속 그곳에 머물며 세레나와 결혼해 살기를 바랬지만. 나는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놓아둔 채. 나는 그때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레나와 내가 인연이 아님을. 어쨋든 나에게는 할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세레나를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만약 내가 그때 세레나네 저택에 계속 머물렀다면 자이나레스 대륙의 역사는 크게 마뀌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계단을 다 올랐다. 찻집한 구석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세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초록색 머리카락과 적갈색 눈동자가 제일 먼저 눈이 띈다. 유부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뭐, 유부녀라고 해봐야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난 천천히 세레나에게 다가갔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세레나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난 세레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손님들이 별로없다. 원래 이 시간에는 손님이 별로 없는 법이지. 난 세레나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윤기가 흐르고 찰랑거리는 초록색 머리카락. 따뜻하고 촉촉해 보이는 적갈색 눈동자.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모습이다. 세레나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반데라스 놈과 결혼하기에는 세레나가 너무 아깝다. 세레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내 가슴이 쿵쾅 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 세레나와 나는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인데. 그런데 어째서 가슴이 뛰는 걸까? 그러고 보면 옛 현인께서 유명한 명언을 하나 남기셨다. 남자와 여자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다. 사실 남자와 여자가 계속하여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보통 힘든일이 아닐 수 없다.특히나 한쪽이 결혼을 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만약 루시아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둘이 자주 만난다고 가정해 보자. 둘은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둘이 만나는 것을 지켜보는 내 심정은 어떻겠는가? 으음, 하지만 나는 마음이 넓은 남자이기 때문에 루시아가 다른 남자를 만나더라도 그가 단지 친구일 뿐이라면 너그러이 이해를.....절대 못한다. 내가 미쳤냐? 그런 걸 이해하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난 주저 없이 사일런스 지니를 시켜 그놈을 평생 햇빛을 볼 수 없게 만들어 줄 거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의 루시아에게 손을 뻗치다니!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부들부들 아아~ 단지 상상일 뿐인데도 왜 이렇게 열이 뻗치는 걸까?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아니. 난 괜찮아." 난 흥분을 애써 가라앉혔다. 먼 곳에서 온 손님에게 큰 실례를 범했군. 세레나의 모습을 살피던 중 난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세레나의 손가락에 끼워진 두 개의 반지. 하나는 결혼반지고, 다른 하나는 통역 마법이 걸린 반지다. 당연한 예기지만 이 세계로 오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언어 문제다. 일단은 말이 통해야 뭔가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그 문제는 드래곤들이 지식 전달 마법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그래서 루시아와 라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한국말로 대화하고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레나는 예전에 이곳에 한번 여행을 왔을 뿐이다. 그런 세레나가 굳이 지식 전달 마법까지 사용하여 한국말을 완전히 숙지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그때 통역 마법이 걸린 반지를 주었고, 그것을 세레나가 지금 다시 끼고 온 것이다. 참고로 언제 또 누가 한국에 올지 몰라 통역 반지 수십개를 아이리스 왕국에 맡겨 놓았다. 이곳에 올 사람은 끼고 오라고(통역 마법이 걸린 반지는 일대일 통역만 가능하다. 즉, 한국어를 자이나레스 대륙 공용어로 인식하게 해주는 기능만 있지, 영어나 일본어 같이 다른 언어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역시 마법은 편리하다. 만약 이 기술을 상용화해서 판매할 수만 있다면 돈방석에 앉는 것은 시간문제다. 생각해 봐라. 통역마법이 걸린 반지라니! 이 얼마나 획기적인 기술인가? 이 기술만 있으면 더 이상 수천만 원씩 들여가며 영어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다. 단지 반지 하나만 끼고 있으면 미국 사람과 아무런 지장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뭐 하러 영어 공부를 하겠는가? 개당 1억원에 팔아도 불티나게 팔릴 것이다. 게다가 유학이다 뭐다 해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돈이 줄어들 테니, 국가 경제에도 엄청난 도움이 되겠지. 문제는 드래곤들이 도와주느냐,이다. 다른 드래곤이라면 모르겠지만 크로니스라면 분명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걸로 부탁 하고 싶지는 않다. 크로니스는 나의 소중한 친구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거야?" "왜요? 제가 이곳에 오면 안 되나요?" "뭐 오면 안 될 이유는 없지." "사실은....." "사실은?" "인형 사러 왔어요." "........." 지금 나랑 장난하나? 이걸 조크라고 하는 거야? 세레나는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유를 말해주기 싫다는 거군. "얼마 정도 있을 예정이야?"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 한달이 될 수도 있고, 일년이 될 수도 있다는 거군. 오랜만에 세레나를 만나니 반갑긴 하다. 하지만 세레나가 오랜 기간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라이레얼 하나만 가지고도 미치겠는데 세레나까지 와봐라. 루시아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새로운 인연을 만났으면 과거의 인연은 싹 다 정리를 해야 하는데, 난 어째서 아직도 과거의 인연에 억매여 헤어나오질 못하는 걸까? 뭐, 어쨌든 이곳까지 찾아온 세레나를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 그렇게 매정한 인간이 아니니까. "다 마셨으면 일어나." "예? 어디 가게요?"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잖아.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설마 너 하나 재울 공간이 없겠니?" 내말을 들은 세레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아아~ 아름답다. 웃는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이런 여인과 결혼한 반데라스는 그야말로 복 터졌다고 할 수 있다. 그놈을 생각하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 놈도 결혼을 했는데, 내가 아직 미혼이라니! 뭐, 결혼이야 그렇다 치자. 문제는 나와 루시아 사이가 키스 다음단계로 진전이 안 된다는 것에 있다. 키스도 그냥 입술만 부딪히는 애들용(?) 키스다. 요즘 초등학생 들도 그런 키스는 안 한다더라. 적어도 혀까지는 집어 넣어야 할 것 아닌가? 이래서야 완결 때까지 라이 동생을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의문이군. 집으로 돌아온 루시아는 굉장히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이상하게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화가 났다. 쿵쾅쿵쾅. "꺄하하~." "캬르르~." "에헤헤~." 거실을 시끄럽게 뛰어다니며 재밌게 노는 어린 세 엘프 라이,루,루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시아는 애들을 야단치고 싶은 충동을 느겼다. '안돼. 이런 식으로 애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야.' 루시아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화를 가라앉히기는 무리였다. '잠깐.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지?'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화를 낼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루시아는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인은 그녀 밖에 없었다. 헤리오 세레나 레이트 백작의 외동딸이자 헤리오 왕국의 왕비. 그녀를 생각하는 순간 정체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그녀와 히로가 같이 서 있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위험에 빠진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히로라고 들었다. 그리고 과거 둘 사이에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는 것도. 라이레얼의 경우처럼 그렇고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아니,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안돼! 그런 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루시아는 주먹을 꼭 쥐며 이를 갈았다. 그녀는 분명히 결혼을 했고, 그 결혼식에는 자신과 히로 역시 참석해서 축복을 해 주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고, 히로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럼 아까 둘 사이에 흐르던 그 미묘한 공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름답게 웃던 그녀의 모습과 심하게 당황하던 히로의 모습.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는 것 같은 그런 이상야릇한 분위기. 그녀는 지금도 히로를 좋아하고 있을까? 히로는 지금도 그녀를 좋아하고 있을까? 둘은 예전에 어디까지 갔었을까? 정말 그렇고 그런 관계까지 간 것은 아니겠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의문. 루시아는 괜스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뛰어놀던 아이들이 루시아의 옷을 붙잡고 매달렸다. "피자 시켜주세요.언니." "루비 피자 먹고 싶어요." "빨리 사줘요.누나." 초롱초롱 눈동자를 빛내며 부탁하는 아이들. 그 모습은 어떤 구두쇠라도 지갑을 열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귀엽고 깜찍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런 아이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내려보았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조용히 하지 못해! 언니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리고 놀았으면 치워야 할 거 아냐? 이 거실 어질러진 것 좀봐. 어지르는 사람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언니가 언제까지 너희들 뒤치다꺼리해야해? 응? 대답해봐." "..........." 갑작스런 루시아의 행동에 아이들은 놀라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당장 거실 치우지 못해! 이제부터 자기방 청소는 스스로해. 알았어?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놀기만 할 거야? 실컷 놀았으면 공부를 해야지. 학습지는 다 풀었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응? 라이가 말해봐." 루시아의 추궁에 라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엘프요오." 아아~ 이런 훌륭한 대답을 하다니! 그럼 엘프가 커서 엘프가 되지, 설마 드워프가 되겠냐? 안 그래도 화 나있던 루시아는 라이의 대답에 더욱 화가 났다. "안 되겠어. 너희들 오늘 좀 혼나야겠어.전부 손바닥 내!" "우에에엥~" "으아앙~" "어어어어엉~." 손바닥을 내라는 말에 아이들은 바로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이 울면서 방안으로 들어가자 루시아는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들에게 화풀이나 하다니, 부모로서 최저야.' 루시아는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어째서 가슴이 이렇게 답답한 건지,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설마 내가 질투를 하고 있는 건가?' 질투라니! 히로가 세레나를 만나는 것을 질투하고 있단 말인가? 루시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말도 안돼. 내가 뭐 때문에 질투를 해야 하는데? 아니, 그 전에 질투를 할 이유가 없잖아. 히로 따위가 누굴 만나든 나와는 상관없으니까. 그래,맞아. 이건 질투가 아니야. 난 다만 오늘 컨디션이 안좋을 뿐이야. 분명 그런 걸 거야.' 루시아는 그렇게 자신을 납득 시켰다. 하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히로와 세레나가 같이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만히 앉아있던 루시아는 갑자기 벌떨일어나 거실 청소를 시작했다.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로 깨긋히 닦았다. 닦은 곳을 또 닦고, 또 닦았다. 어느새 거실은 먼지 한 톨 없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지만, 루시아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 * * * 내가 세레나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가게를 나서는데 지니가 나를 붙잡았다. "왜 그래요?" "세레나 왕비님은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그동안 가게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 난 의심 가득한 눈길로 지니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인간이 세 레나를 데려다 준다고 나서는 걸까? 헉!설마 세레나에게까지 손을 뻗칠 생각인가? 가게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알는다. 느릿느릿 걸어도 15분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15분이면 지니가 작업을 끝마치기에 풍분한 시간이다. 작업 끝마치고 차 한 잔 마시고도 남을 시간이다. (작업에 걸리는 시간 30초,차 마시는 시간 14분 30초). 지니는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았는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맹세코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 그래, 넌 다른 의도가 없겠지. 넌 원래 의도 없이 여자를 꼬시니. "설마 제가 유부녀에게가지 손을 뻗치겠습니까?" "......" 이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난 지니가 어떤 인간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흠흠, 제가 세레나 왕비님을 모시려는 것은 순수한 의도입니다. 막약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세레나 왕비님을 모시고 집으로 들어가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루시아 공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헉!" 듣고 보니 그렇다. 안 그래도 화가 나있을 텐데, 내가 세레나를 데리고 들어가면 더욱 화를 낼 것이 뻔하다. 오해는 될 수 있는 한 피하는 것이 좋겠지? "그럼 사일런스 백작님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저만 믿어주십시오." "......"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더욱 믿음이 안간다. 믿어 달라는놈 치고,진짜 믿을만한 놈은 별로 없는 법이지. 난 세레나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사일런스 백작이 집까지 안내해 즐 거야. 난 영업 문제 때문에 가게에 좀 남아 있어야할 것 같아. 그림 가서 편히 쉬어.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가도록 할게." "알았어요." 지니는 세레나를 데리고 가게를 나갔다. 난 카운터 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어째서 세레나가 이 세계에 온 건지. 그냥 끝까지 물어볼 걸 그랬나? 그런데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내 좋지 않은 느낌은 반드시 맞아든다는 거다. 참고로 좋은 느낌은 별로 맞아들지 않는다. 으음,혹시 난 재앙을 타고난 인간인가? 세레나가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거실을 청소하던 루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루시아는 손에 든 걸레를 내려놓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세레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 둘은 예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저기‥‥‥" "저기‥‥‥" 동시에 입을 연 둘은 돋시에 입을 다물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아, 아니에요. 공주님께서 먼저 말씀하세요." 이런 어색한 분위기라니 !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쩔 즐 몰라 했다. 헤리오 왕국의 왕비와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의 만남. 그 만남은 어색하고 썰렁했다. 아! 배고프시죠?제가 밥 차려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조금만 기다리 세요. "저 , 저기‥‥‥ 세레나가 뭐라 말하기토 전에 루시아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반나절은 굻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공주가 직접 밥을 차리다니.' 왠지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지니는 세레나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라이레얼 양과 칼라이스 님이 쓰시던 방입니다. 현재 두 분께서는는 이곳에 안 계시니 짐을 푸시고 편히 쉬십시오. 식사가 준비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레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좁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침대는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웠다. 이불 역시 포근했다. '난 어쩌자고 이곳에 온 걸까? 세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반데라스와 결혼을 하고난 후에는 거의 왕궁에서만 지냈다. 그리고 각종 무도회나 행사들을 정신없이 쫓아다녔다. 그런 생활이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에 반데라스까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자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이 세계로 떠나왔다. '주위 사람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겠지? 갑자기 피로가 물려왔다. 침대에 누운 세레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세레나야앙~ 반데라스는 세레나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세레나가 사라진지 하루가 흘렀다. 별 관계없던 사람이라도 없어지고 나면 소중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데 정말 소중한 사람이 없어졌으니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반데라스에게 있어서 세레나는 빛이자 공기였다. 그녀가 없는 세상에선 살아갈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사라지다니!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반데라스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반데라스는 당장 궁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폐하. 결제해야 할 서류들이 방 한가득 쌓여있습니다. " "폐하,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예산 심의가 잠시 후에 있습니다. " "폐하, 그 외에도 할일이 많사옵니다. 그러니 궁 밖으로 나가시는 것은 꿈도 꾸지 마시옵소서. "시끄러!내 앞길을 막으면 반역죄로 전부 처형이다!" 그 말에 대신들은 양옆으로 쫙 비켜섰다. 역시 모두들 목숨은 아까운 것이다. 반데라스는 자신에게 폭군이 될 자질이 농후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빨리 궁을 나와 레이트 백작가로 향했다. 레이트 백작은 헤리오 왕국의 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과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사람이다. 외모부터 산적처럼 생긴데다가 한번 화가 나면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언제나 뚝심 있는 태도를 견지하는 레이트 백작이기에 저택에 국왕이 찾아와도 별다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왜 왔냐' 는 듯한 눈길로 반데라스를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국왕 폐하?' "혹시 세레나 양이 이곳으로 왔나요? 반적으로 가출한 아내는 친정으로 가기 마련이다. 이는 한 나 라의 왕비라 해도다르지 않을 것이다. 레이트 백작은 마음베 안 든다는 눈길로 반데라스를 보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그러자 반데라스는 레이트 백작의 바짓가랑이를 불잡고 늘어졌다. "흑흑,제발 알려주세요. 전 세레나 양 없으면 못 살아요." 사내자식이 질질 짜며 매달리는 꼴이라니.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진 않는다, 라는 명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레이트 백작은 이런 반데라스의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레이트 백작이 반데라스를 뿌리치려는 순간, 레이트 백작가의 안주인인 셀리오네가 등장했다. 당신, 폐하께 무슨 짓이에요? 놀란 셀리오네는 레이트 백작과 반데라스를 떼어놓았다. 그리고는 우는 반데라스를 달랬다. 토닥토닥. 셀리오네의 따뜻한 손길에 반데라스는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 했던가? 반데라스가 울음을 그치자 셀리오네는 과일 접시를 내왔다. 그리고는 직접 포크로 찍어서 먹여주었다 "제,제가 먹겠습니다. " "아니에요. 제가 먹여 드릴게요." 셀리오네에게 있어서 반데라스는 헤리오의 국왕이기 전에 하나 밖에 없는 사위였다. 그러니 예뻐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장모가 사위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주겠는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트 백작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도 아내가 내미는 사과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감히 낼름낼름 받아먹다니 !' 과일을 맛있게 먹던 반데라스는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깨달았다. 반데라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세레나 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알아서 뭐하시려 그러십니까? "당연히 세레나 양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반데라스는 힘차게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 자신의 집착 때문에 그녀가 떠나간 것이다. 그녀를 만나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리라! 그리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리라! 문제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사죄든 재발방지 약속이든 할 게 아닌가? "때가 되면 알아서 왕궁으로 돌아갈 테니 , 폐하에서는 국정 운영에나 신경 쓰십시오." 헉 ! 안 돼요! 전 세레나 양 없이는 하루도 믓 살아요. 흑흑~ 제발 부탁드려요. 장인어른. 이제부터 세레나 양한테 정말 잘할 테니 제발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 누가 보면 이혼하라는 줄 알겠다. 하지만 반데라스가 아무리 울며불며 매달려도 레이트 백작은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말해주면 보나마나 반데라스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세레나를 쫓아갈 것이다. 그럼 국정 운영이 어떻게 되겠는가? 국왕이 정식 휴가도 내지 않고 떠나는데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레이트 백작은 진심으로 헤리오 왕국을 사랑하는 충신이었다. 레이트 백작이 입을굳게 다문 채 '전 절대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라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자 반데라스는 상대를 바꾸어 셀리오네에게 매달렸다. "장모니임~." 반데라스의 그 모습이 얼마나 처절했던지, 셀리오네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레이트 백작과의 약속을 어기고 입을 열었다. "세레나는 지금 아이 리스 왕국으로 갔어요." "헉 ! 아이 리스 왕국이라면‥‥‥‥ 세레나가 무슨 이유로 아이리스 왕국으로 갔을까? 세레나는 아이리스 왕국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니 누군가를 만나러 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무슨 이유로 간 걸까? 반데라스는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세레나의 목적지는 아이리스 왕국이 아니었다. 아이리스 왕국은 단지 경유지일 뿐이다. 진짜 목적지는 바로‥‥‥ 한국! 예전에 휴가까지 내서 찾아간 그곳. 그곳에는 꿈속에서조차 마주치고싶지 않은 '그놈' 이 살고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번싸움의 원인 역시 그놈이었다. '그놈이 세레나 양에게 손을 뻗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세레나 양과 싸울 이유는 없었어. 다른 세계로 돌아갔기에 안심했는데 이런 식으로 날 괴릅히다니. 악마 같은 자식 !' 반데라스는 히로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세레나 양이 그늠을 만나러 갈 줄이야! 안 돼! 그놈이 세레나 양에게 손을 뻗치는 것을 지켜볼 순 없어! 어떻게든 세레나 양이 한국 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해! 지금 쫓아가면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반데라스는 당장 아이리스 왕국으로 떠나려 했다. 그 순간,드레스를 입은 한 소녀가 계단을 내려왔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아니, 처제가 무슨 일로? "언니는 분명 히로 오빠를 만나러 갔을 거예요. 저도 히로 오빠를 만나고 싶어요. 그러니 데려가 주세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아 귀여음과 풋풋함이 물씬 풍기는 소녀의 이름은 라나. 원래는 평민이었으나. 레이트 백작가의 양녀로 들어와 레이트라는 성을 갖게 된 레이트 라나. "안 돼!아직 성인도 되지 않았는데 어행을 떠난다니 !" "라나야, 아버지 말씀대로 그건 안 된다. 안 그래도 세레나가 없어서 적적한데 라나마저 없으면 집안이 얼마나 썰렁해지겠니? 레이트 백작 부부는 열과 성을 다해 라나를 뜯어 말렸다. 하지만 라나는 막무가내였다. 그만큼 히로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결국 레이트 백작 부부는 두손을 들어야 했다. "라나를 잘 부탁드립니다. 폐하 " "폐하만 믿을게요." "아. 예." "그런데 가실 땐 가시더라도 국정 문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장인어른께 전권을 맡기겠습니다." 반데라스는 즉석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개인 도장까지 찍어 레이트 백작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국왕 고유 권한을 제외한 대부분의 권한을 레이트 백작이 갖게 된 것이다. 아아~ 이런 왕들이 있으니 외척이 득세한다는 소리를 듣는 거다. 레이트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전권을 위임 받았다. 기왕 이렇게 된거 제대로 개혁해볼 생각이었다. 일단 밥만 축내는 대신들부터 잘라 버려야지. 이렇게 국정 운영 문제가 해결되자 반데라스는 라나와 함께 아이리스 왕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세레나는 이미 한국으로 떠난 뒤였다. "세상 끝까지라도 그녀를 따라가리라!" 반데라스는 이미 한국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라나는 원래부터 히로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갈 예정이었다. 둘은 기꺼이 마법진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손님들고 다 나갔고,2층의 불도 껐다. 이젠 1층 정리하고 가게 문만 닫으면 끝이다. 그나저나 가게 안에 나밖에 없으니 참 썰렁하군. 난 텅 빈 가게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주로 세레나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레나한테토 여동생이 하나 있다. 이름은 라나. 레이트 백작가에서 양녀로 맞아들인 소녀다. 내가 적색 산맥을 내려와 처음 도착한 곳이 레오즈 마을이다. 그곳에서 난 지크 아저씨네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아저씨네는 딸만 둘인데 장녀가 니나,차녀가 라나다. 당시 그 마을 영주의 아들이었던 다레이아 다즈는 니나에게 반하였고, 협박을 비롯한 갖은 비 열한 방법을 동원하여 니나와 결혼하려 하였다. 오크처럼 생긴 주제에 니나 같은 미인을 아내로 맞으려 하다니 ! 참으로 2세가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의의 사도인 아이언스 히로가 이걸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난 결혼식장에 난입하여 결홀을 무효로 반들고 다즈와 다스 아빠 (영주)를 떡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개과천선하여 나 여행할 때 보태라고 마차와 소정의 금액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난 그 마을을 떠났다. 아아~ 그것이 나의 영웅으로서의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지금쯤 그 마을에는 내 동상이 세워져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지크 아저씨네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니나는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했겠지?라나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러고 보면 나의 첫키스 상대는 다름 아닌 라나였다. 당시 라나 10살짜리 꼬마애. 으음, 10살차리 꼬마애와 첫키스라니. 이건 유아 성희롱으로 잡혀가도 할 말 없을 범죄다. 하지만 분평히 밝혀둘 사실은 내가 라나에게 키스한 것이 아니라 라나가 나한테 키스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나는 당한 것이다. 첫키스도 첫경험도 다 당하다니. 너무 인기가 많은 것도 문제로군. 여자들이 나만 보먼 안달이라니까. 후후~. 그런데 왜 내 팬클럽은 없는 걸까? "......" 정말 난감하군. 지니도 있고 크로니스고 있는데 내가 없다니. 나치림 멋지고 잘생긴 남자가 팬클럽이 없다니! 나를 사모하는 수많은 여인들을 위해시라도 한시라도 빨리 팬클럽을 창단해야 할 텐데. "오빠아~ " 자동문이 열리며 라이가 힘차게 달려 들어왔다. "라이야아~ 난 두 팔을 벌러 라이를 맞이했다. 퍼억! "커 억! 강렬한 바디 어택으로 내 품에 안기는 라이. 난 창자가 마디마디 끊기는 고통 속에시도 라이를 꼭 안아 주겄다. 날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라이의 애정표현. 참으로 부담스럽다. "어쩐 일로 왔어? "오빠랑 같이 돌아가려구요." 깜찍하게 웃으며 말하는 라이. 난 그런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집에서 루와 루비와 재밌게 놀아야 할 라이가 날 위해 가게까지 와주다니. 이런 딸이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세레나는 집에 잘 들어갔니? "예. 지니 오빠랑 같이 들어왔어요. 집안 분위기는 어때? 나의 질문에 라이는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이상하다니?어떤 의미로?' "그냥 어색해요 "어색해 ? "예.' 으음, 어색하다니.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과거의 여인과 현재의 여인과의 만남이다. 내가 정식으로 세레나와 사귄 적은 없지만 말이다. 여기에 더해 헤리오의 왕비와 아이리스의 공주의 만남이다. 어색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아!그리고 아까 루시아 언니가 막막 화를 냈어요." 루시아가 화를? "예. 피자 시켜 달라고 했는데, 언니가 막막 화를 내며 손바닥 때리려고 했어요. 우엥~ 언니 무서웠어요. 흑흑, 그리고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어서‥‥‥ 라이가 엘프가 될 거라 그랬더니‥‥‥ 흑흑‥‥‥ 막막 더 화를 내서‥‥‥ 우에에엥~ 무서웠어요오~." 얘기를 하던 라이는 펑굉 울기 시작했다. 난 라이를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토닥토닥. "울지 마, 라이야. 그만 뚝 그치렴." 우에에엥~ 언니는 이제 라이가 싫어졌나 봐요오~ "그럴 리 없어. 언니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라이를 사랑한단다. 아까 라이한테 화를 낸 것도 언니가 라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걸 거야. 그러니 뚝~ !" "훌쩍~ 뚝!" 난 손수건을 꺼내 라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코도 팽~ 풀어 주었다. 울음을 그친 라이는 날 보며 헤헤 웃었다. 그나저나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었는데, 엘프가 될거라 대답했다니. 정말 라이다운 대답이 아닐 수 없다. 루시아가 화 낼만하군. 라이야. 오빠가 재밌는 얘기해 줄까? 예?무슨 얘기요?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가 판타지에 이어 무림을 정벌하는 얘기야." 와아~ 빨리 해주세요. 라이 막막 듣고 싶어요. 난 라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얘기를 시작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업 끝났는데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나가지 않았다. 이 늦은 시간에 인형을 사러은 손님들을 쫓아내기에는 좀 미안하다. 그래. 까짓 거 오늘 연장영업 하자. 난 고개를 들어 방금 들어온 손님을 보았다. 어딘가 부실해 보이는 은발의 미청년과 깔끔한 갈색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어린 소녀. 피부색과 생김새를 보아하니 한국인이 아니다. 으음, <라이의 집>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이젠 외국인들까지 찾아오나 보군. 뭐,장사가 잘 되면 나야 좋지. 어서 오세요. 뭘 찾으시나요? 내가 친절하게 묻자 은발의 미청년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세레나 양을 어디다 숨겼어? 당장 세레나 양을 놓아주지 못해! 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세레나 양을 납치해 간 거야? 응? "우리 오빠 놔줘요." 무슨 짓이에요?당장 놓지 못해요? 라이와 같이 들어온 소녀는 남자를 뜯어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소리쳤다. 당장 세레나 양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무슨 일이지는 잘 모르겠지만 멱살이 잡혀 있으니 심히 기분이 좋지 못하다. 난 일단 남자를 떼어놓기로 하였다. 퍼억! 내가 가볍게 한 대 치자 바닥에 쓰러지는 남자. 난 구겨진 옷깃을 바로 했다. "흑흑, 세레나 양~."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는 남자. 대체 그가 누구기에 갑자기 나타나 이렇게 세레나를 목놓아 부르는 걸까? 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자 몇 가지 기억이 단편적으로 ㄸ올랐다. 세레나 뒤를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던 남자, 결혼식장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세레나 손을 불잡은 남자,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펑펑 울며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라고 절규하던 남자. 그의 이름은 헤리오 반데라스. 세레나의 남편이자 헤리오 왕국의 국왕. 야, 반갑다. 이게 얼마만이냐? 난 반가운 마음에 친절하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런데 이놈은 네 손을 탁 쳐냈다 "......" 이런 싸가지 없는 자식을 봤나!감히 나의 호의를 거절하다니 ! 이런 놈은 당장 빅장 40단 콤보로 박살을 내줘야 한다. 하지만 울고 있는 모습이 니무 불쌍해서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군. 야, 울지 마. 뚝~! "흑흑, 세 레나 양~"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보렴. 개구리 왕눈이처럼 말이야. "흑흑, 닥쳐 !" 으음, 나의 호의를 이렇게까지 무시하다니. 뭐, 닥치라고 했으니 닥쳐주지.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가 우는 모습은 추하기 그지없었다. 라이가 울면 귀엽기라도 하지. 흥! 난 고개를 돌려 반데라스와 같이 온 소녀를 보았다. 자그마한 키에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 가슴은 약간 봉긋했고, 몸의 선도 조금씩 드러났다. 옅은 갈샌 단발머리와 동그란 눈. 여자라고 하기엔 어리고, 소녀라고 하기 엔 성숙했다. 나이는 대략 13~14세 정도로 보이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원래 여자 나이 파악하는 데는 서툴러서. 소녀(아무래도 여자보다는 소녀에 가깝다는 느낌이다)는 멍하니 서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뭐야?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지? "오빠 ‥‥‥ 오빠? 난 라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라이 아니에요. 라이가 아니라면 저 소녀가 말한 건가? 난 소녀를 자세히 보았다. 서서히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에서 소녀는 점점 어려졌다. 어느새 소녀는 10살 때로 돌아갔다. 귀엽고 깜찍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설마‥‥‥ 라나?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제야 그 소녀가 라나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세레나 결혼식 할 때였는데. 그새 많이 컸구나. 오빠! 라나는 내 품으로 뛰어들겄다. 그리고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렸다. "흑흑." 라나야‥‥‥ 난 웃음을 지으며 라나를 달래주었다. 라나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울음 때문에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괜찮아. 말하지 않아도 돼." 난 가만히 라나를 끌어안았다. 오늘은 우리 가게에서 우는 사람들이 참 많군. 바닥 청소 다시 하는 게 좋겠지? 난 가게 문 앞의 표지판을 로 바꾸이 놓았다. 그리고 2층 불을 켜고 찻집을 열었다. 울음을 그친 반데라스와 라나는 조금 진정 한 모습이 었다. 난 그들을 위해 손수 커피를 타 주었다. 반데라스 찻잔에 일부러 손가락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제부터 안 씻었으니 약간 짭짤한 맛이 나겠군. "자, 마셔." 난 반데라스와 라나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라이의 앞에는 따뜻한 우유를 내려놓았다. 라이는 다른 사람들의 잔을 살피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라이도 커피 마시면 안 돼요? "커피 마시면 밤에 잠 안 온단다. 그리고 카페인은 몸에 안 좋아. 애들은 우유를 많이 마셔야지 커피 같은 거 마시면 안 돼." "우웅~ " 라이는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항의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을 붙잡고 홀짝홀짝 마실 뿐이었다. 반데라스와 라나도 잔을 기울여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라나도 아직 애 아닌가? 으음, 뭐 커피 한잔 정도는 괜찮겠지. 난 반데라스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우리 가게에 찾아 왔니?설마... "그래. 바로 그 설마다 " 그랬었군. 하긴, 그런 일 아니면 니가 우리 가게에 찾아을 리 없지. 왕궁에서 주최하는 어린이날 기념행사로 수만 개의 인형이 필요할 줄이야. 걱정 말고 나만 믿어. 우리 사이의 의리를 봐서 저렴한 가격에 인형을 공급할 것을 약속하지." "......"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었냐? "당연 아니지! "아니면 아니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나저나 안타깝군. 혹시라도 나중에 인형 대량 주문할 일 있으면 꼭 우리 가게를 찾아주길 바래. 여기 전화번호 적혀 있어." 난 가게 홍보용 명함까지 건네주었다. 어느새 나도 장사꾼 다 됐군. "그런데 국가는 어떻게 하고 여기에 은 거냐? 국왕이 이렇게 싸돌아 다녀도 되는 거야? 장인어른께 맡겨놓았으니 상관없어. "......" 이 자식 지금 제정신인가? 뭔 국왕이 이렇게 막 나가냐? 헤리오 왕국의 백성들이 불쌍하다. "당장 세레나 양을 만나게 해줘! 니가 숨기고 있는 거 다 알아." "숨기고 있다니. 그런 식으로 날 모함하지 말아줬으면 해." 난 라나에게로 고개를 돌렀다. "너도 세레나 때문에 온 거아? 라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에요. 전 오빠 만나기 위해서 은 거예요." "그래." 라나의 대답에 난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까지 날 기억해주 있을 줄이야. 후후~ 역시 내 인기가 아직 죽지는 않았군. 지금은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한때는 나에게도 엄청난 숫자의 인원이 가입한 팬클럽이 있었다. 당시 나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맞서 싸울 위대한 영웅이었다. 뭐,크로니스와의 싸움이 파토나면서 팬클럽도 다 해체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 부질 없다. 그래도 그때가 나의 전성기 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평화로운 생활이 믿기지 않는다. 다 내가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복 받은 거겠지. 그나저나 세레나에 이어 반데라스와 라나까지 오다니. 식객들이 점점 늘어나는군. 집안이 버틸 수 있으려나? 반데라스가 저렁게 난리를 치는 걸 보면 세레나가 말도 안 하고 이곳으로 왔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반데라스는 세레나를 ?i아온 것이고,라나는 내가 보고 싶어서 따라온 것이다. 문제는 세레나가 왜 말도 안 하고 왔느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남편한테는 말을 해야 할 텐데.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을까? 아마도 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게 싸웠을 것이다. 화가 난 세레나는 말도 없이 왕궁을 나와 이곳으로 왔을 테고, 반데라스는 놀라 부랴부랴 쫓아왔을 것이다. 대충 답이 나오는군. 그런데 이것들은 부부싸움을 하려면 자기들 집에서 할 것이지 왜 남에 집까지 와서 난리래? 무지하게 짜증이 나는군. 야. 왜? "뭐 때문에 싸운 거야? "응? "세레나와 무슨 이유로 싸운 거냐고. "헉! 그걸 어 떻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인데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난 둘이 왜 싸웠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의 예상에 의하면 반데라스의 스토커 짓이 원인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반데라스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니 세레나가 못 견뎌서 뛰쳐나온 거겠지. "너 세레나 뒤를 졸졸 쫒차다니며 귀찮게 했지? 헉 ! 그건 또 어떻게 !" "......" 이 경우에는 내가 똑똑하다기보다는 이놈이 단순한 거다. "하아~ 그 넓은 세계 자두고 왜 여기까지 와서 부부싸움을 하는건지 ." "아무튼 당장 세레나 양을 만나게 해줘! "그래,그래. 나도 귀찮으니까 빨리 좀 데려가라."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의 문제이니, 둘이 직접 만나 해결하게 해야겠지? 세레나가 이곳어 계속 머물러 있으면 나도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러니 빨리 화해시켜서 내보내야지 일루니아는 남편인 인디와 함께 데이트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여는 루시아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사실 그게 ‥‥‥ 루시아는 이제까지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일루니아에게 말해주었다. 세레나가 한국에 온 것, 그리고 둘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까지.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루시아가 아주 어렸을 때 일루니아는 루시아의 가정교사였다. 루시아는 일루니아가 길러준 것과 다름없으며 둘 사이는 친자매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렇기에 루시아는 스스럼없이 모든 얘기를 한 것이었다. 일루니아 옆에는 인디도 앉아있었다. 루시아의 얘기를 다 들은 것은 물론이었다. 원래 이런 종류의 얘기는 남자한테는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루시아는 어째서 말한 것일까? 그건 인디가 남자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 인디를 보고 남자로 생각하겠는가?외모야 둘째 치고, 성격도 소심하기 그지없어 도저히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루시아는 인디를 형부라 부르긴 하지만 형부가 아니라 언니처럼 느끼는 것이 사실이었다. 여기를 다 들은 일루니아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세레나 왕비가 그 인간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고,둘 사이가 어중간하다는 거지? "어중간하다기보다는 미묘하다니까. 마치 둘 사이에 아직도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아 " "하긴,한 나라의 왕비가 그 인간을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니 세레나 왕비에게는 아직 마음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 인간은 예쁜 여자라면 환장을 하니 마음이 있을 게 분명하고." 일루니아의 말에 루시아외 표정이 굳어졌다. 여, 역시 그런 거겠지?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안가는 게‥‥‥ 어째서 그 인간이 여자한테 그렇게 인기가 있는 거지? 그렇다. 그게 일루니아의 가장큰 의문이었다. 어째서 세레나나 루시아 같은 절세 미녀들이 히로같이 안 샘기고 밥맛없는 뺀질이에게 목을 매는 건가? 길거리 나가면 멋진 남자가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 히로인가? 아니, 길거리까지 나갈 필요도 없이 바로 근처에 지니나 크로니스와 같은 남자들이 있는데,그들을 놔두고 어째서 히로를 택한 건가? 하지만 그렁게 따지자면 히로도 할말은 있었다. 어째서 인디가 수많은 여자들 중 일루니아를 택했는지는 히로 역시 의문이었으니. 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언니.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야?그런 인간쯤이야 그냥 신경 안 쓰면 되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자꾸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가슴이 답답하고, 괜히 화가 나고 ‥‥‥ 말을 하는 루시아의 표정에선 그 고뇌가 그대로 드러났다. 일루니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질투하는 거야? 그 말에 루시아의 얼글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 질투라니 ! 누가 질투를 한다는 거야?' "너 ." 일루니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친절하게 대답해주자 루시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무슨 소리야?내가 질투 같은 걸 할 이유가 없잖아! 난 다만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야! 뭐가 걱정이 되는데? 그, 그건 ‥‥‥ 루시아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일루니아는 그런 루시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얘가 그렇게 눈이 낮은 애가 아닌데, 어쩌다가 그런 인간한테 반해가지고‥‥‥‥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해. 이번 기회에 그 인간과 완전히 끝내고 다른 남자를 찾아보는 거야, 어때? "안 돼!" 일루니아의 말에 루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히로와 헤어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자주 싸우고, 때른 꼴 보기 싫을 때도 있지만 헤어지기는 싫었다. 이런 루시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루니아는 말을 이었다. "한번 바람 핀 남자는 언제든 다시 바람 필 수 있는 거야. 저번에 나이트 사건 기억 안 나? 그때 그 인간이 여생을 꼬셔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 했잖아. 그리고 이번 일도 그래. 과거의 연인, 그것토 유부녀를 이 세계까지 불러들이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어? 히로가 불러들인 게 아니라... "아니. 이건 다 그 인간이 끝맺음을 확실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아니면, 뭐 때문에 세레나 왕비가 이곳까지 찾아왔겠어? 그 인간이 어증간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 아니겠어? 세레나 왕비 에 하프엘프 여자에 여고생까지.현재까지 밝혀진 게 이 정도야. 아마 찾아보면 수십 명은 더 나을 거야. 게다가 그 인간은 그 하프엘프와 그렇고 그런 짓까지 한 사이야. 이렇게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자와 사귀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남자의 과거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어 !" 일루니아는 정말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했다. 루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그치만... 보다 못한 인디가 나서서 일루니아를 말렸다. "그만하세요, 일루니아님. 히로님은 그런 분이 아니 에요. 인디는 손을 내밀어 루시아의 가녀린 손을 꼭 붙잡았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인디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미인이 생긋 읏고 있었다. 인디는 루시아의 손을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루시아님. 히로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니까요. 히로님의 마음슥에는 오직 루시아님뿐이에요. 저는 알 수 있답니다. 루시아님께서 히로님을 믿어주세요. 사랑에는 믿음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인디의 말에 루시아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언‥‥ 아니,형부. 루시아는 하마터면 '언니' 라고말할뻔했다. 자신을위로해주는 인디의 모습이 친한 언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인디는 다시금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루시아는 생각했다. 역시 언니에게는 형부가 아까워. 세레나는 잠에서 깼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던 세레나는 왕궁이 아님을 깨달았다. 맞아. 여기는 그사람 집이었지. 세 레나는 침대에서 내 려왔다. 순간, 머 리 에 현기증이 일며 몸의 중심을 잃었다. 세레나는 탁자를 붙잡아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피로와 배고픔이 원인인 듯했다. 세레나는 방을 나왔다. 거실에는 루시아와 두 여인이 서 있었다. 세레나는 그중 한명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아이리스 왕국의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사일런스 지니 백작의 누나였지? 다른 여인은 키가 크고 검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미녀였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와 가느다란 손가락. 까맣고 아름다운 눈동자와 그에 대비되는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 입술은 붉은색으로 촉측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미녀 였다. '아름다워.'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세레나는 재빨리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루시아는 생긋 읏으며 말했다. "일어나셨어요? 예, 예. 아, 안녕하세요. 세레나는 광금히 고개를 숙였다. 일루니아는 앞으로 나서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전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입니다. 세레나 왕비님. 비록 누추한 장소이긴 하지만 왕비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이럭게 뵙게 되어 저도 기쁘네요." 세레나는 당황하였지만 침착하게 인사를 받았다 이번에는. 인디가 인사할 차례 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루니아님의 남편 되는 인디라고 해요. 나, 남편이요? 예. 뭐가 잘못 되었나요? "아. 아니요." 세레나는 놀라 입을다물지 못했다. 이런 미인이 여자가아니라 남자였다니. 그리고 샤이 사일런스 백작과 결혼까지 했다니.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결혼 얘기는 예전에 전해 들었지만, 상대를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예쁘게 생겼을 줄이야! 배고프시죠? 이쪽으로 와서 식사하세요." 식탁에는 간소한 메뉴가 차려져 있었다. 굉장히 배가 고팠기에 세레나는 사양 않고 자리에 앉았다. 세레나는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왕비의 입장에서 보기에 초라한 식단이었지만 굉장히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인 이유도 있었지만, 거의 모든 음식을 인디가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인디는 요리와 가사가 취미인 가정적인 드래곤이었다. "요즘 헤리오 왕국에서 공공사업을 크게 벌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특히나 도로정비와 치수사업에 막태한 자본을 투자하고 있다면서요? 일루니아는 웃으며 세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리스 왕국은 한국으로 간 일루니아에게 마법진을 통해 꼬박꼬박 정보가 될 만한 서류들을 보내주곤 했다. 그녀만한 인재를 다시 찾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루니아 역시 이 세계에 왔다고 해서 조국인 아이리스에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어떡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조국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서 일루니아는 다른 세계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이나레스 대륙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왕비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이 니었다. 그것토 이렇게 부담 없는 사석에서. 일루니아는 이번 기회에 헤리오 공국과 아이리스 왕국 간의 협력 관계 증진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재정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실업자 문제 해결과 그로 인한 부가가치 창출이 엄청나니 일단은 무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러고 보면 헤리오 왕국이 치수 기술에는 가장 뛰어나지요. 왕비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글쎄요. 저는 잘‥‥ "헤리오 왕국와 아이리스 왕국은 동맹국이니, 언제 만나서 서로의 기술 교류에 대해 논했으면 해요. 분명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에요. 예, 예. 식사 시간에 하는 얘기치고는 굉장히 무거운 얘기 였다. 그 때문에 식사자리가 한순간에 정상회담자리로 돌변했다. 하지만 일루니아는 개의치 않았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 하리!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렴 현관 벨이 울렸다. 띵동! 인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오세요, 히로님 "어,그래." 인디는 내 뒤에 서 있는 반데라스와 라나를보았다.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니가 알아서 뭐하게?' 난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루시아, 세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물었다. 저 아가씨는 누구죠? "아! 이쪽은 라나라고 세레나의 여동생이에요." "레이트 백작가에서 입양했다는 그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그런데 둘이 왜 그렇게 붙어있는 거죠? "예? 일루니아 여사님의 말대로 라나는 내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안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언니는 히로 오빠 만나러 왔다 그랬어요." 상황 파악 못하는 라이의 발언. 그 말을 들은 일루니아 여사님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호오~ 그렇단 말이죠? 이런 어린애한테까지 손을 뻗치다니‥‥‥‥ "손을 뻗치다니요!그냥 옛날에 알던 사이에요." "지금도 어린데 옛날이라면, 대체 몇 살 때 손을 뻗쳤다는 거죠? 아이언스 긍작님의 취향이 심히 의심스럽군요." ...... 이 아줌마가 진짜나랑 해보자는 건가? 난 화를 내기에 앞서 루시아의 표정을 살폈다. 루시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와 라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오빠. "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라나는 더욱 더 내 품에 안겨왔고,난 그런 라나가 굉장히 부담스러워졌다. 루시아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 그에 비례하여 내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루시아, 언제나 하는 말 또 해서 미안한데.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야. 그리고 난 결백해." "흐음, 그렇군요.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아이언스 공작님 마음속에는 오직 루시아뿐인데 어째서 주위에 이렇게 여자가 많은 건지. 아! 혹시 마음속에는 루시아만 담아두고, 마음 밖에는 다른 여자들을 위한 공간을 많이 만들어 놓았나 보죠?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생글생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 때문에 루시아의 눈빛은 더 이상 차가워질 수 없을 만큼 차갑게 식었다. 이 정도면 절대 영도에 가깝다. 흥!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획 돌리는 루시아 "아!루시아 언니 화났다. 오빠 이제 큰일 났네요." 친절하게곤 상황을 확인시켜주는 라이의 말. 난 좌절했다. 라이야. 오빠한테 뭐 섭섭한 거 있니? 아까 커피 못 마시게 했다 이러는 거야? 흑~ 우리 라이가 오빠한테 이럴 줄이야. 너무해! "언니 !" 라나는 나에게서 떨어져 세레나에게 안겼다. 세레나는 가만히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기는 왜 온 거야? 나도 히로 오빠 만나려고." 세레나는 고개를 들어 내 뒤에 서 있는 반데라스를 보았다. 반데라스는 망연자실한 표정 이 었다. 어째서... 예? "어째서 세 레나 양이 이곳에 있는 겁니까?" "무슨 말이에요? 세레나가 묻자 반데라스는 절규하듯 소리쳤다. 세레나 양이 왜 이곳에 있냐구요! 이곳은 저 자식 집이잖아요! 난 어이가 없어서 대꾸했다. "왜 날 가리키니?그럼 이게 내 집이지,니 집이겠니?" "역시 아직도 저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 거죠? 그런 거죠?그래서 절 버 리고 이곳으로 온 거죠?" 무, 무슨 말이 에요! 누가 누굴 사랑한다는 거 예요? 맞잖아요! 그러니까 저 자식 집에 온 거잖아요! 저 없는 사이 둘이 대체 무슨 짓을 했어요?무슨 짓을 했냐구요? ...... 순간, 집안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둘이 무슨 짓을 했냐니? 설마 내가 유부녀에게 손 댔을까봐? 이 자식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라이는 이런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되는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뚝뚝. 세레나의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이 홀러내렸다. 눈물은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홀러 바닥에 떨어졌다. "세,세레나 양." 반데라스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세레나의 이름을 불렀다. 세레나는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너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어! 그 말이 지닌 파장은 엄청났다. 마치 무형의 폭풍이 쉽쓸고 지나간 느낌 이었다. 세레나는 그 자리에 틸썩 주저앉아 흐느꼈다. "흑흑. " "울지 마, 언니." 라나는 세레나를 부둥켜안았다. 반데라스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세 , 세 레나 양‥‥‥‥ 멍청한 자식 같으니 ! 난 반데라스의 됫덜미를 불잡고 질질 끌고 현관문을 나갔다. 나 이 자식이랑 얘기 좀 하고 돌아올게. "안녕히 다녀오세요,오빠." 이 런 상황에서도 꾸벅~ 고개 슥여 인사하는 라이. 누가 교육을 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예절바르다(참고로 내가 시컸다. 후후) "그래. 자기 전에 꼭 이 닦고자렴." 히로가 반데라스를 끌고 나가자 라이는 루시아의 품에 안겼다. 루시아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일루니아에게 말했다. 아까 그 남자가 헤리오의 국왕 맞지, 언니? "응. 확실해." 아까 반데라스의 행동은 여자 입장에서 봐도 어이없음의 극치였다. 마치 아내가 바람이라도 핀 듯 추궁하는 모습이라니! 세레나는 아직까지도 을고 있었다. 루시아는 세레나보다는 라나에게 더 관심이 쏠렸다. 갈색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 아까 라나가 보여준 행동과 표정이 나타내는 것은 분명했다. 루시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라나가 히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정말이지 히로는 왜 이렇게 여자가 많은 거야? 루시아는 속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둘이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어디까지 갔는지가 궁금했다. 설마 정말로 어린아이에게 손을 뻗친 것은 아니겠지? 반데라스를 끌고 아파트 밖으로 나온 나는 녀석을 데리고 근처 놀이터로 갔다. 어두운 밤. 가로등 불빛만이 밝게 빛나는 이때에도 놀이터에는 사람이 있었다. 보통 낮에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이 놀이터를 점거하고 있기 마련이다. 반면 밤에는 고등학생 이상의 사람들이 놀이터를 점거한다. 가끔은 젊은 남녀가 해괴망측한 상창을 연출하기도 한다. 오늘은 여섯 명의 남자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대충 보아하니 다섯 명이 한 명을 핍박하고 있었다. 입에 담배를 문 다섯 명은 안경을 쓴 한 명을 들러싸고 툭툭 건드려댔다. "야. 너 죽고 싶냐?죽고 싶어? 그들이 툭툭 내뱉는 말에 안경 쓴 학생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미, 미안해. 하지만 그게 다야. 정말이야." 퍽! "으악! 닥쳐,이 새까! 하지만은 뭔 하지만이야?너 지금 나한테 개기냐? "미, 미안해." 얻어맞은 학생은 배를 움켜잡으며 사과했다. "미안하면 다야? 미안할 짓을 왜 해? 처음부터 미안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할 거 아냐?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놈은 안경 쓴 학생의 어깨를 툭툭 치며 빈정거렸다. 안경 쓴 학생의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내,내일까지 5만원 정토는 더 마련할 수 있을 거야." "5만원? 너 지금 나랑 장난 까냐? 5만원 가지고 뭘 하라고?내가 거지야?내가 지금 너한테 구걸 하냐? "미, 미안해." "넌 그 말밖에 못 하냐?미안하면 성의를보여줘야 할 거 아냐? 퍽! "흑흑, 잘못했어 ." "좋은 말로 할 때 내일까지 80만원 마련해 와라." "내,내일까지는 무리야." 이 새끼가 진짜! 퍽! "흑흑,조금만 더 시간을 줘.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 "아~ 씨발. 좋아. 그럼 일주일 줄게. 그 정도면 됐지?만약 일주일 후에도 안 가져오면 그땐 진짜 죽는다. 알았어? "흑흑, 알았어." 노란머리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돈을 세 보았다. 그리고는 다른 놈들과 이 돈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 낄낄 웃으며 떠들어댔다. 그등안 안경 쓴 학생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이 일련의 사태를 지켜븐 나는 당혹스러음을 금치 못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재밌게도 노는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일해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삥이나 뜯다니. 참 살다 살다 별 꼴을 다본다. "야! 니들 거기서 뭐하는 거야? 내가 소리치자 녀석들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란머리는 나와 반데라스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이, 형씨들. 쓸데없는 데 관심 갖지 말고 가던 길 계속 가세요. 으음, 어린놈이 참 싸가지가 없군. 재네 부모는 뭐하나 몰라? 자식을 이딴 식으로 가르치다니(일반적으로 애가 잘못하면 부모가 욕먹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 욕먹게 하지 않으려면 평소에 알아서 잘 해야 한다). "그렇게 못 하겠다면? "킥킥, 그림 어쩔 건데?' "글쎄. 어쩜 좋을까? 생각해보니 정작 어쩌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나섰다. 이릴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따끔히 훈계해줘?아니면 똑같이 폭력으로 대응해? 으음, 난감한 문제로군. 난 다만 반데라스와 남자 대 남자로 얘기를 하기 위해 이 장소를 찾은 것뿐인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퉤!좋은 말로 할 때 그냥가세요. 괜히 끼어들지 말고." 침을 뱉으며 건들건들 말하는 고딩들. 잘하면 한 대 칠 기세다. 상황이 이쯤 되면 그냥 물러서는 것도 꼴사납다. 그래. 이번 기회에 청소년 선도나 좀하자. 결심한 나는 손을 치켜들며 말챘다. 자,나가서 싸워라! 응? "뭐야, 그 반응은?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당장 지 녀석들을 때려눕혀,반데라스! "내가 왜? 난 반데라스가 뭐라 하건 말건 그를 앞에 내세웠다. 고딩들은 은발머리 외국인이 나서자 어이없다는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고딩들과 반데라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무려 오대일의 싸움이다. 비륵 반데라스가 약간 부실해 보이긴 하지만 한 나라의 국왕이다. 어렸을 때부터 검술 훈련을 받아왔으니 양아치 다섯 명 쯤은 문제없을 것이다 퍽퍽퍽! "크악! "커억! "으악!" 난 놀이터 벤치에 기대 앉아 반데라스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싸우는 내내 중심을 잃지 않는다. 언제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둔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공격하여 체력 소모를 최소화한다. 타격하는 부위도 정확하고, 힘의 분배도 적절하다 생각보다 기본기가 횔씬 탄탄하게 잡혀 있군. 저 정도 실력이면 어디 가서 얻어맞고 살지는 않겠는 걸. 반데라스는 이번 기회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 속셈인지 열심히 녀석들을 두드려 팼다. 잠시 후, 다섯 명의 고딩들은 차가운 모래 속에 몸을 처박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건들거리는 놈들 치고 제대로 된 놈 없다. 이렇게 약하다니! 으음, 우리가 너무 강한 건가? 하긴 기계화 된 문명 속에서 편하게 살아가는 이런 놈들이 칼과 마법이 난무하는 살벌한 세상 속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상대가 될 리 없지. 난 자리에서 일어나 고통에 신음하는 노란머리에게 다가갔다. 으윽, 이러고도‥‥‥ 퍽! "시끄러, 임마" 난 말을 하려는 노란머리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노란머리의 주머니에서 봉투를 챙겨 들었다. 한 장.두 장.석 장, 넉 장‥‥‥ 헉 ! 20만원! 어린 것들이 참 통이 크군. 20만원이나 삥을 뜯다니. 그것도 모자라 일주일 안에 80만원을 더 마련해 오라고>? 이건 정말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나 다름 없군‥‥‥이 아니라 이놈들 날강도 맞잖아! 나쁜 놈들 같으니 ! 내가 이 나이에 라이 분유값이라도 벌기 위해 인형가게에서 밤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하는데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 이렇게 쉽게 돈을 벌어? 내가 화가 나는 것은 이놈클이 삥을 뜯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노동의 대가가 너무 불합리하게 크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다. 100만원이면 다섯 명이서 나눠도 한 사람 앞에 20만원이다. 요즘 청소년 아르바이트가 많이 받아봐야 시간당 1천원 정도이니 , 대략 70시간은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그런데 이놈들은 그 돈을 날로 먹으려 하는 것이다. 이게 말이 돼? 저놈들이 뭘 했다고 10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벌어야 하는 건데? 이건 노동 생산성이 안 맞잖아! 다들 대가리 박는다 실시! 내가 말했지만 고딩들은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반데라스에게 말했다. "야, 이놈들 덜 맞았나 본데 니가 좀더 패줘라. 내 생각엔 니 주먹이 너무 약했던 것 같아. 어디보자. 이 근처에 각목이‥‥‥‥ "헉 ! 대가리 박겠습니다. " 다섯 놈은 일제히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다. 난 을고 있는 왕따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괜찮니? "흑흑, 예. 괜찮아요." "이 멍청한 자식아. 재들이 돈을 가져오란다고 진짜 가져 오냐? 너 이 20만원 어디서 났어 ? "흑흑, 학원비 예요." "용돈은 어쩌고? 흑흑, 용돈은 이미 ‥‥‥ 이미 뜯겼다는 건가?용든에 이어 학원비까지 상납하다니. 나머지 80만원은 어디서 마련할 생각이었어? "흑흑." 왕따 소년은 대답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더 이상 돈 나을 구멍이 없을 경우에는 결국 훔치는 수밖에 없다. 안방 장롱이라도 뒤지겠지. 사실 어느 학교든 간에 저런 사회 암적인 존재는 꼭 있기 마련이다. 저 애들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나쁜 짓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재들은 고등학생이기 때문이다. 재들은 아직 성인이 아니다. 웬만한 행위로 형법에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형법 에 걸릴 행위(지금처 럼 삥을 뜯는 행위)를 하더라도 학교 측에서 보호해준다. 학교는 가해 학생의 처벌과 피해 학생의 보상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학교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학교의 명예뿐이다. 학교에 퇴학을 당할 만큼 불량한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져 봐라. 소문이 어떻게 나겠는가? 그래서 학교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축소하고 은폐하여 최대한 일을 소리 소문 없이 빠르게 처리한다. 나중에 이런 일이 '그것이 알고 싶다' PD수첩 등의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 선생들이나 교장은 얼굴을 가린 채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애들끼 리 서로 싸울 수도 있지. 뭐, 그런 거 가지고 학교 폭력이니 뭐니 하십니까?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예요.' 자기 아들이 지슥적인 구타를 당하며 돈을 뜯겼다 생각해봐라. 그래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가해 학생은 철저히 보호받는다. 반면 피해 학생은 전학을 떠난다. 가해자는 당당하게 가슴 펴고 살고, 피해자는 포망가는 그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죄를 저질러도 죄책감을 받지 않으니, 피해 학생은 신고를 하지 못하고 가해 학생은자신의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애들의 책임만은 아니다. 부모와 학교의 책임도 크다. 물론 아이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이런 애들이 자라서 뭐가 되겠는가?보나마나 사회에 암적인 존재가 될 게 뻔하다. 지금 이 애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을 잘못이라 가르쳐줄 어른들의 가르침이다. "각자 오른쪽 발을 든다. 실시!" ...... "어쭈! 반항하겠다는 거냐?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군." 퍼억! 으악! 난 녀석들을 한번씩 걷어차 주었다. 그러자 녀석들은 바로 다시 머리를 박으며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폭력 맞에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을 팼단 말인가? 인생을 트러블 없이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문에 약한 독자들을 위해 풀어 설명해 주자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남을 때리는 주제에,자신은 맞기 싫어한다. 이 얼마나 웃기는 얘긴가? 난 판타지 세계에서 수많은 싸움을 겪었고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물론 나 역시 죽을 뻔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자신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래서 일본 속담에 이런 말토 있지 않은가? 남을 저주하려거든 무덤을 두 개 파라고. 참고포 유가 사상의 근븐이 되는 공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포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가 맞기 싫으면 남을 때리지 말고,자기가 죽기 싫으면 남을 죽이지 말아야한다. 자기는 되는 대로 폭력을 휘두르며, 자신이 맞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흑흑. 그만 울어, 임마! 부모님 돌아가겼니?아니면, 여자 친구에게 차였니 ? 내가 소리치자 왕따 소년은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흑흑, 세레나야앙~." 세레나에게 완전히 아웃 오브 안중당한 반데라스 앞에서 여자 친구 얘길 꺼내다니. 타격이 크겠군. 아무튼 빨리 이 불량학생들을 처리하고 반데라스 일을 해결해야겠다. 다들 일어나. 다섯 명의 불량 학생들은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머리에 잔뜩 흙이 묻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하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한밤증에 동급생 불러다가 패고 삥 뜯은 놈들이 기합 조금 받았다고 불쌍하면 세상에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불만 어린 표정이군. 억울하냐? 억울하면 덤벼. 니들은 다섯 명이고 난 한 명인데 뭐가 겁나서 그래? 내 말을 들은 불량 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슬슬 나에게로 다가왔다 반데라스 하나 믓 이긴 놈들이 나에게 덤비려 하다니. 이놈들은 학습능력이 없는 건가?하긴, 그동안 다섯이 몰려다니면서 누구한테 맞아보기나 했겠냐?그러다보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거겠지. 쉬익! 노란머리가 주먹을 휘둘렀다. 맞아 봐야 별로 아프지도 않을 것 같아 맞아주려고 했는데,몸이 알아서 피했다. 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녀석의 배를 걷어찼다. 퍼억! "크억 !" 배를 움켜쥔 채 쓰러지는 노란머리. 그와 동시에 다른 놈들이 공격을 해왔다. 사실 애들 싸움에서 일대오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전문 싸움꾼이 아닌 이상 한번에 다섯 명을 상대해서 이기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놈들은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났다. 내가 누군가?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가 아닌가?드래곤 다음으로 강한 나에게 고등학생 다섯 명쯤이야 식후 디저트도 안 된다. 퍽퍽퍽 ! "크악! "으악!" "커억! 현란한 나의 발길질에 추풍낙엽처림 나가떨어지는 불량 학생들. "또 덤빌 놈 없냐? 난 맞은 부위를 움켜잡고 신음하는 불량 학생들에게 물었다. 내가 한걸음씩 다가가자 녀석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한 놈이 벌떡 일어나 도망을 치는 게 아닌가? 바로 이 불량학생들의 짱인 노란머리였다. 제일 먼저 덤빈 놈이 제일 먼저 도망을 치다니. 정말 얍삽하고 비열한 놈이군. 난 개나리 스텝을 이웅해 눈 깜짝할 사이에 녀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헉 ! 어 , 어 떻게‥‥‥? 겨우 이런 걸로 놀라기는. "야,재들 다 버리고 너 혼자 도망치면 어떡해?넌 의리도 없냐?' 제,젠장! 비켜 ! 노란머리는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렀다. 아까 체력 게이지가 가득 차있을 때도 반데라스 옷깃 하나 못 건드린 주제에,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날 공격하다니. 마지막 발악이라는 건가? 난 녀석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케엑! 컥 , 컥! 숨이 막히는지 고통스러워하는 노란머리. 난 녀석을 질질 끌어다가 다른 놈들이 있는 곳에 던졌다. 방금 봤으면 알겠지만 도망칠 생각 하지 마라. 난 그렇게 참을성이 많지 않으니까." 다행히 불량 학생들은 더 이상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도망칠 힘도 없다는 게 맞는 말일 테지만. 난 왕따 소년에게 물었다. "너 이제까지 얘들한테 얼마나 뜯겼냐? 흑흑,그게‥‥‥‥ "얼마나 되는데?솔직하게 말해 봐" 한 200만원 정도... 뭐라? 200만원 ?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200만원이라니. 그 정도면 4인 가족 한달 생활비로도 풍분한 금액이다. 이런 놈들한테 줄 돈 있으면 차라리 불우이웃돕기에나 쓰란 말이다! 참고로 네 눈앞에 불우이웃이 있으니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단다. 내가 백날 뼈 빠지게 벌어봐야 뭐하나? 애들 분유값 대기도 힘든 데. 라이랑 루와 루비가 좀 먹어대야 말이지. 게다가 얘들 입맛이 좀 고급인가?고구마 두 줄 이하는 피자로 보지도 않는다. 에휴~가장이라는 직책이 이렇게 힘들즐이야. 역시 혼자일 때가 편하다니까. 아아~ 나의 젊은 날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묻히고 말았으니 , 이제 남은 것은 가장의 책임과 의무뿐이라네. 넌 대체 그 돈이 어디서 났니? "흑흑, 엄마 몰래 제 이름으로 된 적금을 깼어요. ...... 애가 적금까지 깨서 갖다 바칠 정도라면, 대체 평소에 얼마나 괴롭힌 거야?우리나라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새삼느끼는 바이다. 난 왕따 소년을 불량 학생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서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들이 그등안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니 ? 흑흑, 그게 ‥‥‥‥ "괜찮아. 울지 말고 이 형한테 다 말해보렴." 사내자식이 자꾸 질질 짜니까 짜증이 샘솟는다. 라이가 울면 귀엽기라도 하지. 흥! 왕따 소년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입을 열었다. 흑흑, 심심하다면서 불러서 패고‥‥‥ 책가방을 창밖으로 집어 던지고‥‥ 매점에서 빵사오라고시키고‥‥ 청소나이런것들도대신 시키고‥‥‥ 시험 때는 쪽지 돌리라고 하고‥‥‥ 돈도 뜯기고..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구구절절한 사연. 정말 처절하다. 이렇게 강도 놀은 괴롭힘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다니. 이단심문관이 이교도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짓까지 당하고도 가만히 있었니 ? "흑흑, 견딜 수 없어서 반항을 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흑흑, 방파 후 교실에서 즉을 만큼 맞았어요. 좇만한 게 어디서 개기냐며‥‥‥ 죽여 버 린다고‥‥‥ 너 하나 죽여 봐야 몇 년 살고 나오면 그만이라고‥‥‥ ...... 진짜 이단심문관이 이교도 고문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왕따나 이지메의 수준은 예전에 뛰어넘었군. 하긴, 미성년자가 폭행치사로 끌려가봐야 2, 3년 살고 나오면 그만이다. 집안에 돈이 많고 부모가 높은 직위에 있을수록 형을 사는 기간은 줄어든다. 결국 죽은 놈만 억울한 것이다. 흑흑,한번은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오오~ 드디어 선생님께 일렀군.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흑흑, 그냥 재들 불러서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주의 주는 걸로 끝났고‥‥‥ 전 다음날 또 죽도록 맞고‥‥ ...... 할말이 없다. 학교 폭력의 경우에는 선생님께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말해봐야 해결이 안 되니까. 그리고 이상하게 학생들 인식이 선생한테 이르면 쪼잔한 놈이라는 식으로 박혀있다. 이건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길을 가다가 깡패한테 얻어맞았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1번. 그 깡패를 때려눕힌다 2번 경찰서에 신고한다 1번은 답이 아니다. 일반 사람이 깡패를 때려눕히기 쉽지 않을뿐더러, 때려 눕혔다 해도 문제가 생긴다. 쓰러진 깡패는 팔다리를 부여잡고 전치 4주네 8주네 소리치며 신고한다 어쩐다 난리를 친다. 결국 져도 문제고, 이기면 수백만 원을 합의금으로 물어주는 문제가 생긴다 1번이 아니니, 답은 당연 2번이다. 깡패한테 얻어맞았을 경우에는 경찰에 신고하고, 진단서 끊어서 합의를 하든, 교도소에 처넣든 하는 것이 정석 이다. 성인인 어른들도 이럴진데,미성년자인 학생들이 어째서 주위에 도움을 청하면 안 되는 건가? 선생한테 이르면 쪼잔한 놈이리는 인식이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생긴 건가?혹시 일진이라고 깐죽거리는 놈플이 자신들의 지배권을강화하기 위해 지어낸 것은 아닐까? 아무튼 미스터 리다. 얘기를 하던 왕따 소년은 그동안 당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사실 나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어지간히 맞고 살았다. 일진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놈들한테 말이다 그놈들은 학교에서 왕처럼 군림하였고, 그들의 득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 선생,부모, 법‥‥ 모든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피해 학생이 자살을 하거나, 정신병윈에 입원을 해도 그때만 이슈가 될 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피해 학생이 할 수 있는 복수라고는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기 전,자신을 괴롭힌 놈들의 이름을 유서 에 적어놓는 정도가 전부이다. 아마 오늘 내가 이 현장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왕따 소년도 자살이 라는 극단적 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불의를 보면 그냥 대충 참고 넘어가는 나이지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기를 잘했다. 난 불량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발길질을 시작했다 퍽퍽퍽 ! 으악! 왜 이러세요? 왜 이러는지 몰라서 묻냐? 난 팔, 다리, 배 할 것 없이 성심성의껏 짓밟아주었다. 피를 홀리고,구역질을 해댔다. 연약한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퍽퍽퍽 ! "아프냐? 아퍼?" 흑흑, 잘못했어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그만. 제발 그만‥‥‥ "엉엉엉." 이런 놈들을 동정하는 것이야말로 싸구려 동정이다. 이놈들이 뭐가 예뻐서 동정을 해야 하는가? 이놈들이 그동안 한 짓을 생각해봐라 "안 아프지?하긴, 안 아프니까 그동안 그러고 살았겠지. 맞으면 아프다는 걸 아는 놈들이 남을 패고 다녔겠니 ?안 그래? "흑흑, 아파요." "아파요! 정말 아파요!" "진짜 아파요. 정말이에요 " 불량 학생들은 하나같이 아프다고 소리쳤다 퍽퍽퍽 ! "니들 아픈데 나보고 어쩌라고?' 폭력에 대한 응징을 폭력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그것 외에 무슨 제재 수단이 있겠는가?좋게 타일러?선생한테 주의 받자마자 방과후에 애를 불러 죽도록 팬 놈들에게 타일러서 무슨 소응이 있을까? 학교나 선생한테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경찰서 ? 저 왕따 소년이 맞아 죽거나 자살하기 전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알겠지. 만약 내가 그냥 간다면, 이놈들은 재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행동을 계속 반복할 것이다. 여전히 여럿이서 힘없는 학생들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겠지. "그,그만해, 임마!" "그만하세요. 그러다 죽겠어요?' 반데라스와 왕따 소년이 동시에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로 사람은죽지 않는다. 다만 죽을만큼 아플 뿐이다. "이제 그만하세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왕따 소년이 나를 껴안고 말렸다. 난 왕따 소년에게 물었다. "애들이 너 팰 때.니가 그만하라고 소리치면 얘들이 그만뒀니? 그, 그건... "지금 얘들이 울면서 빌고 있는 거 안 보이니? 얘들은 그런 족속이야. 약자한테는 강하고,강자한테는 약한. 전형적인 쓰레기지. 타인의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고퉁은 죽을 만큼 아파하지. 뭔가 억울하지 않아? 내가 지금 얘들을 그냥 놓아 면 내일 니가 무사히 학교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놈들이 겨우 이 정도 맞았다고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착하게 살 것 같아? 웃기는 소리. 팔다리 하나쯤은 완전히 으스러뜨려 병신을 만들어놔야, 안심할 수 있어." "헉 ! 살려주세요! 그래도 병신 되기는 싫은지 불량 학생들은 하나같이 무릎 꿇고 울며 빌었다. 으음, 이 정도면 뉘우쳤으려나? "일단 다들 지갑 꺼내 보렴." 내 말에 불량 학생들은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내밀었다. 난 다섯 개의 지갑에서 돈을 빼냈다. 대략 20만원 정도 된다. 고등학생 지갑 치곤 굉장히 풍족하다 하긴,그링게 열심히 삥을 뜯었는데 풍족 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난 불량 학생들에게 물었다. "앞으로는 남 괴롭히지 않고 착하게 살 거냐? 예, 예. 불량 학생들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 였다. 난 홉족한 웃음을 지었다. 당연 그래야지. 아무튼 너희들이 개과천선했다니 나도 기쁘다. 그럼 이제 정산을 좀 해보자. 니들이 그동안 얘한테 200만원 정도 삥 뜯은 거 맞지?그 돈 지금 어디 있니? "그, 그게 ‥‥‥‥ 불량 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우물쭈물거렸다. 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보렴. 빨리." "여자애들이랑 늘고, 술 마시고, 나이트클럽 가고‥‥‥ 그러느라 다 썼는데요." ...... 그릴 줄 알았다. 쉽게 번 돈 쉽게 쓴다고, 삥 뜯어서 번 돈을 저축할 리 없지. 난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뭐, 이미 쓴 돈은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채무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다. 남의 돈 공짜로 먹고 넘어갈 만큼 이 사회가 만만하지 않거든. 원금 200만원에 이자 100만원. 그리고 얘 정신적 육체적 보상비로 100만원해서‥‥‥ 합이 400만원. 한 사람 앞 에 80만원씩 내면 되겠군." 말도 안 돼요! "그럼 몸으로 때우든가. 팔 하나에 80만원으로 쳐줄게." "헉 !아,아니에요. 낼게요. 80만원씩 낼게요." 내가 싸늘한 눈길로 노려보자 불량 학생들은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그들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놈들은 등 돌리는 순간 마음을 바꾸기 마련이다. "야. 펜이랑 종이 있냐? 예. 왕따 소년은 놀이터 한구석 에 처박힌 가방을 들고 와 노트와 펜을 건네주었다. 난 노트를 찢어 즉석에서 채무 계약서를 작성했다 6장의 채무 계약서를 작성한 나는 불량 학생과 왕따 소년에게 일일이 이름을 적게 하고, 지장을 찍게했다(인주가 없었기에 사인펜을 손가락에 칠한 후 찍었다). "한달에 40만원씩 두 달 동안 갚아라. 부모한테 손을 벌리든 막 노동을 하든 알아서 하렴. 열심히 일하면 그 정토는 벌 수 있을 거야. 내가 너희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다들 핸드폰 꺼내보렴." 불량 학생들은 주머니 에서 핸드픈을 꺼냈다. 다섯 명 다 가지고 있다. 으음, 요즘은 정말 다 가지고 다니는군. 나 고등학교 때만해도 핸드폰은 있는 집 자식들의 전유물이었는데. 난 불량 학생들의 핸드폰 번호를 일일이 확인하여 적었다. 그리고 검색까지 해서 집 전화번호까지 적었다. "이제부터는 진짜 착하게 살아야 한다. 알았지?만약 안 좋은 소문 들리는 날에는 니들 집까지 찾아가서 부모님과 면담할 테니까. 그리고 돈은 꼭 갚아라." 난 왕따 소년에게 가게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언제든 전화해라." "예. 고맙습니다 " 왕따 소년은 정말로 감동한 표정이었다. 마치 위대한 영웅을 바라보는 듯 눈까지 반짝거린다. 으음, 완전히 내 팬이 되어버렸군. 팬클럽 가입원서를 내밀면 즉시 사인 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난 남자 팬은 받지 않는 주의다. 내 팬클럽 가입요건 중 첫째가 바로 성별이 여자여야 하니까. "됐으니까 가 봐라." 저 , 저기 ‥‥‥‥ "고마워 할 필요 없으니까 가봐." 그게 아니라‥‥‥ 그 20만원‥‥‥ "응? 뭔 20만원? "아까 재들한테 뜯긴 20만원이요. 봉투에 들어있던 돈이요." ...... 쓸데없는 걸 다 챙기는군. 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봉투를 꺼내 왕따소년에게 주었다. "자, 이제 가봐 저, 저기‥‥ 또 뭐? "2만원이 부족한데요.■ ...... 그걸 그새 꺼내서 세어 보다니. 보통 놈이 아니군. "수수료로 뺀 거야, 임마! 넌 대행 수수료라는 것도 모르냐?뭘 그 렇게 꼬치꼬치 따져! "아, 아니에요." 왕따 소년은 나에게 꾸벅 인사하고 사라졌다. 난 불량 학생들에게 말했다. "니들도 가 봐라." "저, 저기‥‥‥‥ "니들은 또 왜 ?' "아까 저희 지갑에서 빼간 돈‥‥ "응?그 돈이 어쨌다고? 돌,돌려주셔야‥‥‥‥ 뭐? 참고로 그 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들어가 있을까? "그 돈은 내가 불우이웃 돕는 데 잘 쓸 테니 걱정하지 말려무나. 자, 어여 들어가렴. 집에서 걱정하시겠다 앞으로는 꼭 착하게 살아야 돼. 알았지?' 불량 학생들은 약 20만원‥‥‥ 정확히는 21만 3천원에 끝까지 미련을 갖는 듯헌지만, 나의 서슬 퍼런 눈빛에 차룬 더 이상 달란 말을 하지 못하고 서로를 부축하며 걸어갔다. 아아~ 오늘도 착한 일을 하나 했군. 위기에 처한 왕따 소년을 구해주다니 ! 게다가 불량 학생을 한두 명도 아닌 다섯 명이나 갱생 시키다니 ! 난 혹시 천사가 아닐까? 난 잠시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가끔 가다 내가 인간인지 천사인지 헷갈린다니까. "후후후~ "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 무엇보다 기분이 좋은 것은 방금 전에 얻은 수입 23만 3천원이다. 이 돈으로 불우이웃 돕기에 참여해야지. 아까도 말했지만 멀리서 찾을 필요 없다. 불우이웃 돕기는 불우히로 돕기와 동일어나 다름없으니 . 집에 애가 셋인데다가 식객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게다가 식객이 셋이나 더 늘었다. 바로 저놈 때문에! 난 아직까지도 놀이터 한쪽에서 을고 있는 반데라스를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놀이터에 온 것은 반데라스 때문이다. 다른 일에 정신 팔려서 잠간 잊고 있었군. 난 반데라스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이 자식! 감히 세레나를 울리다니 ! 그리고 부부싸움을 하려면 넓은 왕궁에서 할 것이지 왜 남의 좁은 집에서 하고 지랄이야? 나한테 무슨 원한 있냐?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대체 세레나 양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남의 아내에게 찝적대냐고! 나 없는사이에 무슨 짓을 했어? ...... 헉 !설마 이 자식 의처증이란 말인가? 의처증이란 아내의 행실을 지나치게 의심하는 변태적 성격이나 병적 증세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 반데라스의 증상을 정확히 말해주는 병이라 할 수 있다. 맨날 세레나 스토킹하고 다니더니 결국 이런 병으로 발전한 건가? 의처증에는 약도 없다는데 큰일이군. "무슨 짓을 하긴 뭔 무슨 짓을 해?나한테는 오직 루시아뿐이야. 세레나랑은 예전에 끝난 사이‥‥‥ 아니, 시작도 안 한 사이라고.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거짓말 하지 마! 니가 세레나 양을 유혹한 게 틀림없어. 아니 , 협박한 거야. 맞지?세레나 양의 약점을 잡아 협박한 게 틀림없어! 나쁜 자식! 반데라스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인지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반데라스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퍼억! 나에게 덤비려면 아직 10년은 이르다. 그나저나 이놈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질 않으니‥‥‥ 세레나가 왜 짐 싸서 이곳으로 왔는지 알 것 같군. "사랑은 집착이 아닙니다. 지나친 집착으로 그 사람을 구속하려 하는 것은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을 뿐,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를 감싸 안아주고, 그 사람을 믿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제가 보기에 반데라스 폐하께서는 그 점을 잊고 계신 듯하군요. 어디선가 들려온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 그 목소리는 사람을 감화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쓰러져있던 반데라스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잠시 후 한 남자가 놀이터로 걸어 들어왔다. 갑자기 나타나사랑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입을 놀려대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바로 못 하는 게 없고,안 하는 게 없는 인간 사일런스 지니 였다. "아니, 댁이 여기엔 어쩐 일로? 설마 그네 타러 온 것은 아닐 테고.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불량 학생들을 선도하는 아이언스 긍작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해 나서시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모습에 큰 감등을 받았습니다.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만인의 귀감이 되시는 위대한 영웅이십니다. "푸하하~ 뭐,그 정도 가지고." "게다가 겸손하시기까지 하시다니. 제가 이 일을 여성분들께 널리 알려 아이언스 공작님의 팬클럽 창단에 미력한 도움이나마 드리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으하하하~ 뭐 ,좋으실 대로 하세요." 지니가 내 팬클립 창단을 후원해준다면 분명 많은 여성팬들이 몰리겠지?후후~ 좋았어. 이대로 밀고 나가는 거야! 날씨가 쌀쌀하군요. 일단 가게 안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요. 우리는 지니의 의견에 따라 가게로 이동했다. 난 닫힌 셔터를 열고 불을 켰다. 으음, 전기세 많이 나오겠군. 전기세는 누진세 적용인데. 참고로 누진세란 과세 대상의 수량이나 값이 증가함에 따라 점점 늪은 세율을 적용하는 세금을 말한다. 전기세가 누진세인 이유는 에너지 절약 장려 차원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서 기름 한 방울 안 나다보니. 어쨌든 우리는 문을 걸어 잠그고 2층 찻집으로 올라갔다. 지니가 커피를 준비하는 사이 난 반데라스에게 물었다. "그래. 일단 이제까지의 상황을 알기 쉽게 자세히 플어서 설명해 봐. 왜 세레나와 싸우게 되었는지부터 말이야." 반데라스는 내가 시킨 대로 입을 열었다. 결혼한 후에도 세레나가 가끔씩 한숨을 내쉬었다는 것, 세레나가 아직도 내 생각을 하는 것 같다는 것,내 문제로 싸우게 되었다는 것 등등. 난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이 자식은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모른다. 여자란 예전에 지니가 말한 것처림 모래와도 같다. 가만히 손바닥을 펴고 있으면 모래는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꽉 잡으려고 손을 움켜쥐면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간다. 반데라스가 가만히 있었으면,둘은 아름다운 사랑을 가꾸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반데라스가 집착함으로 해서 세레나는 견디지 못하고 떠난 것이다. 그리고 반데라스는 그것을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세레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아마 다른 귀족가 여자였다면 왕비가 된 것에 기뻐하며 왕궁 내의 권력을 잡는 데 혈안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세레나에게 있어서 왕비란 자리는 거추장스러운 짐이고,왕궁이라는 곳은 감옥과도다름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지가 되어줘야 할 반데라스마저 세레나의 숨통을 쥐고 흔들었으니 못 견디고 뛰쳐나오는 것은 당연하지. 그렇게 세레나를 못 믿냐? 아니 ,내가 꼭 세레나 양을못 믿는다기보다는‥‥‥‥ "대체 뭐가 문제야? 내가 세레나를 구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세레나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일포 없었어. 그리고 설사 있었다고 하면 어쩔 건데?세레나랑 이혼할 거냐? "아니야!" "그럼 어쩌자는 거야? 그렇게 세레나를 못 믿겠고, 세레나가 헤프게 보인다면 그냥 헤어지면 되잖아. 뭐 때은에 세레나를 붙잡고 괴롭히는 건데?너 혹시 세레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냐? "내 , 내가 세 레나 양을 괴롭혔다고? "그럼 아니냐? 아까 세레나 우는 거 못 봤어? 니가 울렸잖아." "그, 그런‥‥‥ 난 다만 세레나 양을 사랑할 쁜인데. 흑흑~ 울음을 터트리는 반데라스. 난 놀라며 말했다. "울지 마. 나중에 바닥 청소하기 힘들어." "어흐흐흑!" "이 자식, 지금 반항하는 거냐?울지 말라니까! 이따 나가기 전에 바닥 청소 니가 해. 알았어? 지니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우리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마치 고급 레스토랑 웨이터의 몸동작을 보는 듯하다. 난 커피를 한 모금 마셔 보았다. 꿀꺽 . "헉 !" 난 커피를 마신 순간 너무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지니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아이언스 공작님? "이렇게 향기롭고 달콤할 수가! 입 안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이런 맛이라니 ! 커피 특유의 쓴 맛이 설탕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을 자아내는구나! 이 커피 한잔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는 듯하니 , 이는 커피 역사상 유래가 없던 일이로 다! 역전다방에서 미스 김이 타준 커괴가 이보다 더 맛있겠는가? 스쿠터 타고 출장 나온 다방레지의 보온병에 담긴 커피가 이보다 더 맛있겠는가?내 이제부터 이 커피를 '역전다방 미스김이 타준 커피보다 맛있는 커피 라 명명하겠노라! 나의 말에 지니는 감동을 받은 듯 머리를 조아렸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아닙니다.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커피는 처음입니다. 내 그 공을 높이 사서 사일런스 백작님의 이번 달 월급을 약간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본좌의 성의이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앞으로도 성심성의껏 아이언스 공작님을 모시겠습니다." 내가 오버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지니가 타즌 커피는 그 정도로 맛있었다. 커피 타는 방법은 대체 언제 배운 걸까? 내 장담하건데 지니는 다방 호스트로 나가도 엄청난 성공을 거들 것이다. 하여간 이 인간은 뭐든 했다하면 스페결리스트라니까. 반데라스는 내 말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우는 것을 그치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나와 마찬가지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 홀짝홀짝 열심히 마셨다. "두 분께서 나누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집으로 들아가서 주무시지요. 루시아 공주님과 라이미안님이 많이 걱정할 테니까요. 반데라스 폐하께서는 이곳에서 주무시지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저도 이곳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니의 말에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계슥 하품이 나와 죽을 지경이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일찍 자두는 게 좋겠지.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난 지니와 반데라스를 남겨두고 집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길을 흘로 걸어가니 왠지 쓸쓸했다. 그동안 이 길을 루시아와 라이와 함께 걸었었는데. 새삼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만약 루시아와 라이가 내 곁에 없었다면 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떻게 살았든 간에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만,라이 동생이 생기면 더욱 행복할 것 같다. 아아~ 대체 언제쯤이면 라이의 등생이 등장하려나?남동생보다는 여동생이 좋을 것 같다. 머리카락은 루시아를 닮아 플래티나 블론드, 눈동자도 루시아를 닮아 에메랄드빛, 얼굴도 루시아를 닮아 귀엽고 예쁘게‥‥‥ 잠깐. 이렇게 되면 내 딸인데 날 하나도 안 닮잖아?흑시 외모는 루시아를 닳고 성격은 날 닳게 되면 어쩌지? "헉 ! 그건 안돼!" 난 놀라 소리쳤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냥 외모랑 성격 다 루시아를 닮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생이 생긴다고 하면, 라이가 얼마나 기뻐할까? 그때쯤이면 라이도 좀 의젓해지려나?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난 벨을 눌렀다. 띵동! 인디가 문을 열어 주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인디의 표정도 굉장히 어두웠다. 왜 그래?무슨 일 있어? 그,그게요 ‥‥‥ 입만 우물거리는 인디. 난 답답한 마음에 인디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 거야? 거실에는 싸늘한 표정의 루시아와 한껏 비웃음을 짓고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서 있었다. 그리고 라이는 루시아의 옆에서 봉지에 손을 넣 과자를 집어 먹고 있었다. 뭐야?또 세레나 때문인가? 푸욱! 나의 심장을 후벼 파는 루시아의 싸늘한 눈길.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루시아?무슨 일이야? 그걸 물라서 물어? 응?몰라서 묻냐니? 모르니까 묻지. 내가 뭐 잘믓한 거라도... "흥!"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한껏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정말 모르신단 말씀이신가요? 아이언스 공작님 이 색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에까지 손을 뻗쳤을 즐은 꿈에도 몰랐네요. "아니, 색마라니 ! 이 아줌마가 어디서 되도 않는 소리를! "호오~ 변명하시겠다는 건가요? "대체 제가 어쨌다는 겁니까? "10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손을 뻗친 주제에 말이 많군요. "제가 언제 그랬다는 겁니까? 전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이... 헉!설마!" 이제야 기억이 나셨나 보군요. 호호호 ...... 이 , 이럴 수가! 어떡게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이 일을 알고 있는 거지? 난 아주 오래전 일을 기억해냈다 당시 난 영주의 아들과 억지 결혼할 뻔한 라나의 언니 니나를 구해주었다. 그 후에 나는 그 마을을 떠나려 했다. 그때 라나가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울면서 애원했다. 나 역시 그 평화로운 마을에 늘러 앉아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마을을 떠났다. 내가 떠나기 직전 라나는 내 품으로 뛰어들며 나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내 생애 첫키스를 당시 10살짜리 꼬마애였던 라나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어째서 루시아랑 일루니아 여사님이 알고 있는 거지? 헉 ! 설마 라나한테 들은 건가?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순진무구한 라나를 어르고 달래서 입을 열게 만든 건가? 이 아줌마가 끝까지 내 발목을 불잡는구나! 대체 이번이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제대로 된 반격 한번 못해봤는데 이렇게 계속 당하기만 하다니. 빠드득! 내 언젠간 반드시 복수를 하고 말리라! ‥‥‥라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먼저 수습해야 한다. "진정하고 내 말을 플어줘,루시아. 분명 말하지만 난 결백해." 그러자 루시아는 방 안의 기온을 영하로 떨어트릴 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언제나 그 소리구나. 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렇게 변명하지. 이번에는 또 무슨 변명을 하려고? 10살짜리 여자애를 꼬드겨 키스를 하고도 변명할 말이 있나 보지? 왜? 이번에도 먼저 한 게 아니라 당했다고 말해보시 지." "어떻게 알았어?나 당한 거 맞아 내가 한 거 절대 아니야. 난 가만히 있었는데 라나가 내 입술을 빼앗은 거야." ...... 루시아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지며 집 안의 은도가 또 내려갔다. 점점 절대영도에 가까워지고 있다. 누가 아이스 스톰 마법이라도 썼나? 보일러 하나 들여놓던지 해야지‥‥‥ 아! 우리 집은 아파트지. "호호~ 그 레퍼토리는 이제 좀 지겹네요. 좀더 참신한 변명을 생각해보지 그러셨어요? 아! 아이언스 공작님께선 창의성이라는 것을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깜빡했네요. 죄송해요. 그나저나 전 라이가 제일 걱정이네요. 설마 라이한테까지 손을 뻗치는 것은 아니겠죠? 무,무슨 망발을! 날 뭘로 보고감히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뭘로 보다니요? 색마지요. 그것도 아직 솜털이 보승보송한 어린 아이를 밝히는 로리타 콤플렉스 색마. 라이를 딸로 입양한 것도 키워서 잡아먹을 속셈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네요." ...컥! 너무 혈압에 올라 이젠 말도 제대로 안 나은다. 난 뒷목을 붙잡은 채 비틀거렸다. 키워서 잡아먹다니 ! 라이가 개나 소도 아닌데 어떻게 키워서 잡아먹어? "저, 저기‥‥‥ 일루니아님. 잡아먹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어떻게 히로님이 라이님을 잡아먹는다는 거죠? 인디는 정말로 그 의미를 모르는 듯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 이 대답했다. 따먹는다는 뜻이에요. 따먹다니 ! 라이가 나무에 달린 사과야? 아니면, 캔콜라야? 어떻게 따먹어 ? 난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점점 혈압이 올라 이젠 시야마저 흐릿하다. 난 일단 혈압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을 진정 시켰다. "아!오빠가 많이 아파 보여요. 오빠아~ 그래도 나를 걱정해주는 건 라이밖에 없다.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라이. 난 그런 라이를 맞이하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런데 달려오던 라이를 루시아가 덥석 붙잡았다. "이제부터 오빠랑 놀지 마, 라이야. 오빠 근처에도 가지 말고, 오빠가 라이 만지려고하면 무조건 싫다고 해. 알았어? "왜요? 라이는 오빠가 좋단 말이 에요." "아무튼 안 돼."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라이를 뒤로 숨겼다. 마치 나에게서 보호하겠다는 듯이. 난 정말 결백해,루시아. 날 믿어줘 ! 제발! 난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하지만 루시아는 나의 기대를 외면했다. "됐어. 너랑 더 이상 할 얘기 없어. 너 같은 건 꼴도보기 싫어. 흥! 그렇게 내 가슴에 대믓을 박은 루시아는 라이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우째 이런 일이 !" 쾅! 방문이 큰소리를 내며 닫혔다. 루시아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봉지 안에 있던 과자를 다 먹은 라이는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그리고는 침이 잔뜩 묻은 손가락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왜 그래요, 언니? 언니 아파요? 라이의 물음에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루시아는 아까 라나에게 들은 말을 떠올려 보았다. "저는 10살 때 오빠랑 첫키스를 했어요. 자라서 성년이 되면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저는 이제까지 오빠만 보고 살아왔어요. 진심으로 오빠를 사랑해요. 그러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오빠의 신부가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라나의 눈빛은 당당하고 힘찼다. 아직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당당하게 하다니. 왠지 부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라나에게 히로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루시아는 히로와 라나가 키스를 했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화낼 일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화가 난 이유는 라나가 히로를 사랑하고 있다는사실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행동을 했기에 그런 어린아이가 사랑한다고 목을 매는 거 야? 나쁜 놈! 바람둥이!'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라나 앞에서 한마디도 못 했다는 사실이다. 어째서 그 아이 앞에서 히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걸까? 그 아이는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는데, 난 어째서 아무 말도 못한 거지? 어째서 남들 앞에서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지 믓한 거야? '히로는 정말 날 사랑하는 걸까? 세 레나 왕비와 라나에게는 정말 아무 감정 없는 걸까?아!라이레얼도 있었지. 이게 대체 몇 명이야?내가 아는 것만도 이 정도인데,실제로는 훨씬 많지 않을까?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루시아는 괜한 베개를 쥐어뜯었다. 나쁜 자식 ! 나한테는 너뿐인데, 넌 이 여자 저 여자 다 꼬시고 다녔다 이거지?나이와 종족을 안 가리고 말이야. 나쁜 자식! 이젠 정말 끝이야!' 라이는 침대 위로 올라가 루시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름으로 들어온 라이를꼭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 라이를 안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라이는 루시아의 볼에 뽀뽀를 했다. 쪽~. "걱정 마세요, 언니. 오빠는 언니를 사랑해요. 오빠한테는 언니 뿐이라고 오빠가 항상 그랬어요." "라이야." 자신을 위로해주는 라이의 모습에 루시아는 큰 감동을 받았다. 라이는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오빠는 언니를 막막 사랑해요. 진짜진짜 사랑해요. 라이는 오빠랑 언니 맘 다 알아요. 헤헤~." "라이야아~." 루시아는 라이를 꼭 껴안고 침대 위를 뒹굴뒹굴 굴렀다. "까아~ 숨 막혀요, 언니이~." 라이가 바둥바둥거리자 루시아는 라이를 살짝 풀어주었다. 그리고 라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우리 라이는 어쩜 이렇게 예쁘고 커여울까? 게다가 착하기까지 하구. 언니는 세상이서 라이를 제일 사랑해. 라이도 언니 맘 잘 알지? "헤헤~ 라이도 언니를 제일 사랑해요." 쪽쪽쪽~! 루시아는 라이의 볼에 키스를 퍼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하고 화가 났었는페,라이 덕분에 눈 녹듯이 풀렸다. 라이는 자신이 루시아와 히로의 이혼(?)을 막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귀여운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고래 싸음에 새우등 터졌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좀 잘 되나 싶던 나와 루시아의 관계가 어째서 이 모양이 되었는가? 루시아랑 한창 잘나가고 있었는데 어째서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냔 말이다 아아~ 이 모든 게 세레나와 반데라스 부부 탓이다 얘들은 왜 남의 세계에까지 와서 부부싸움을 해서 날 이렇게 괴롭게 만드는 걸까? 아무튼 현재 나는 집에서 쫓겨난 상태. 실추 된 가장의 권위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는구나.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레나와 반데라스를 화해시키는 일이다. 들을 화해시켜 판타지 세계로 돌려보내야만 한다. 그럼 루시아와 나의 관계도 예전처림 화기애애해질 것이다. 그나저나 색마라니! 내가 이제까지 수많은 욕을 얻어먹었지만 색마는 처음이다. 그것도 로자라 로리타 콤플렉스라니! 아아~ 어찌하여 과거의 일들이 지금까지 네 발목을 붙잡는단 말인가? 루시아는 성적인 측면에서 은근히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남자의 과거에 대해 쉽게 이해를 하지 못한다. 예전에 나와 라이레얼 사이에 있었던 그렇고 그런 일이 알려지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런데 이젠 라나와의 과거까지 까발려지다니. 너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어! 꼴도 보기 싫단다. 이건 세레나가 반데라스에게 했던 대사인데, 어째서 내가 루시아한테 들어야 하는 거지? 정말 루시아는 내가 꼴도 보기 싫어진 걸까? 앞으로 어떻게 루시아의 화를 풀어줄지 정말 걱정이다. 나날이 막막해지는 나의 인생. 언제쯤 내 인생에 서광이 비치려나? 내 집에서 내가 쫓겨나다니. 이것도 운명의 장난이 아닐까? 들어가려고 마음먹으면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들어가 봐야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난 현관문 옆에 털썩 주저앉아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담뱃갑을 꺼냈다. 마침 안 되려는 상황이었는지 담배도 다 떨어졌다. 한 개비도 없군. 에이씨! 난 담뱃갑을 구겨 집어 던졌다. 그러자 들려오는 목소리. "어이, 거기 ! 쓰레기를 함부로 버 리면 어 떡해? 마침 지나가던 경비 아저씨가 소리친 것이다. 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 오늘 일진 왜 이러냐? 누군가 내 머리 위에 살수차로 물을 뿌리고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디서 잔다냐? 가게에 가서 자야 하나? 난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3시.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피로가 밀려온다. 참 정신없는 하루였다. 문제는 내일도 이런 날이 이어질 것 같다는 거다. 빨리 수습을 해서 예전의 행복한 날들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헉! 설마 루시아가 날 용서해주는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라나였다. 라나는 추리닝 바지와 상의에 외투를 껴입은 간편한 옷차림이었다. 짧은 단발머리는 가지런히 뒤로 모아 묶어 깔끔하게 정리했다. 귀여워라~ 10살 때의 모습도 귀여웠지만, 지금의 모습 역시 귀엽다. 라나는 지금 소녀에서 여자로 변해가는 중간 단계에 있었다. 아마 3년 정도 더 지나면 완전한 여자가 될 것이다. 그때는 많은 남자들이 꼬리를 치며 줄을 서겠지. 라나를 보면서 드는 생각인데 여자는 한순간에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다. 2차 성장기라고는 하지만 너무 빠르다. 예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냥 어린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소녀티를 벗고 여자의 모습이 되어 가다니. "추운데 왜 나왔어?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웃으며 물었다. 라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오빠. 제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아니야.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난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슥슥~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난다. 종았던 기억도 많았고, 잊고 싶은 기억도 많았던 나의 판타지 세계 모험. 굳이 잊 싶은 기억을 하나 뽑아보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라이레얼과의 일을 뽑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그와 동시에 참 종았던 기억이기도 하다(흠흠,솔직히 좋긴 좋았다. 나도 남자니까). "잠??? 산책할래요? 응? 산책? 지금이 몇 신데 산책을?게다가 바깥 날씨가 얼마나 쌀쌀한데. 그런데 이 근처에 산책할 데가 있기나 하나? 어쨌든 나는 라나를 데리고 아파트를 나왔다. 단지 한 바퀴 들고 들어가면 되겠지. 기온은 영하였다. 가만히 있어도 얼어 죽을 것 같은데,살짝살짝 바람까지 분다. 휘이이잉 ~. 산들바람 수준이었음에토 불구하고 귀와 볼이 어는 것 같았다. 라나는 몸을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럴 때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야겠지 ? 난 입고 있는 점퍼를 벗어 라나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저, 전 괜찮아요,오빠." "추운 거 다 알아 난 괜찮으니까 어서 입어." 하,하지만‥‥‥‥ "자,빨리 입어." 라나는 할 수 없다는 듯 점퍼를 입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이잉 ~. 이런 빌어먹을! 왜 이럭게 추워?누구 얼어죽일 일 있어? "정말 갤찮아요, 오빠? "하하, 걱정하지 마. 이 오빠는 남자잖아 " 억지로 가슴을 펴며 웃어 봐도 추위가 가실 리 없다. 젠장! 난 이래서 남자가 싫다. 어째서 남자는 꼭 여자에게 읏을 벗어줘야 하는 거지? 여자가 추우면 남자도 춥다. 가끔은 여자가 외투를 벗어 남자의 어깨에 둘러주는 그런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싶다. 그나저나 정말 빌어먹게 춥군. 난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추위를 참았다. "하하,달이 참 밝구나." "그런데 별이 안 보이네요. 이 세계에는 별이 없나요? "있긴 있는데 공해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거야." "공해요? "응. 하늘에 검은 먼지가 가득 차는 거지. 그래서 가끔은 붉은 달이 뜨기도 해. 이러다가 몇년 후에는 달도 볼 수 없을지도." "그렇근요."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길을 나와 라나만이 걷고 있었다 라나는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슬그머니 팔짱을 꼈다. 으음, 이렇게 붙어있으니 좀 따뜻하군. "지금 행복하세요? 갑작스런 라나의 물음. 난 당창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응. 행복해." 어떤 아줌마만 없다면, 더욱 행복할 텐데. "저 그동안 오빠 생각 많이 했어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는 라나. 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그러니? "한순간도 오빠를 잊어본 적 없어요." 라나의 얼굴은 추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두근두근! 팔을 통해 라나의 심장소리가 느껴지는 듯하다. 게다가 팔을 통해 느껴지는 이 푹신한 감촉은‥‥‥ 설마 가슴? 괜히 내 가슴이 두근거린다. 확실히 못 본 사이 라나가 자라긴 많이 자란 것 같다. 으음, 그나저나 참 난감하군. 지금 와서 팔을 뺄수도 없고‥‥‥(슬직히 빼고 싶은마음도 없다). "제가 이 세계에 온 것은 세레나 언니 때문이 아니에요. 다 오빠를 만나기 위해서예요. "그, 그랬구나." 난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실었다. 이런 두근거리는 분위기라니! 라나는 이제까지 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런 라나에게 어찌 거절의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선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솔직히 루시아를 사랑한다고 말할까?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일단 루시아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야! "오빠가 루시아 공주님을 사랑하는 거 잘 알아요." ......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군. "라, 라나야." "하지만 상관없어요. ..... 상관없다니? 어째서? "전 오빠가 누굴 사랑하든, 오빠를 사랑해요." 조용하고 나직한 라나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라나는 한순간의 치기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치기 였다면 지금까지 날 바라보고 있을 리 없겠지. 그럼 나는 이런 라나의 진심에 어떻게 대답해쥐야 하는가? 난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입을 열자마자 라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우리 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어느새 놀이터 바로 앞을 지나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갈래? 예. 라나는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난 두 손으로 라나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얼음장같이 차갑다. 특히나 귀는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난 손으로 라나의 귀를 덮어 주었다. 이젠 좀 따뜻하지? 예. 라나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난 그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고개를 들리며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달이 참 밝다. 그치? 늘이터도 썰렁하고. 하긴, 이 시간에 사람이 있을 리 없지‥‥‥여야 정상인데 있네." 그네 근처에는 정말로 두 아이가 있었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에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추운 날.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 이상하다. 헉 ! 설마 귀신? 그네 타다가 죽은 아이들이 밤만 되면 나타나는건가? 하지만 상대가 귀신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두렵지 않다. 난 귀신 잡는 해병대‥‥‥는 아니지만 드래근을 잡을 뻔했던 아이언스 히로다. 그런 그가 어찌 귀신을 두려워하겠는가? 난 조심스럽게 아이들에게 접근했다. 아이들은 하 있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인지 내가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자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던 아이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붙어있었다. 아니 , 가깝게 붙어있다기보다는 껴안고 키스를 하고 있었다. ...... 뭐라?키스? 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니들 지금 뭐하니?' "헉!" "오, 오빠! "아니 , 너희들은?' 추운 겨울날 새벽 3시에 놀이터 에 나와 키스를 하던 아이들은 다름 아닌 루와 루비 였다.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엘프의 숲에 들어갔을 때 만난 엘프가 루와 루비 였다. 두 아이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키스하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짠~ 하고 등장해‥‥‥ "아무리 이 시대엔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르고,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것들이 부모 물래 으슥한 곳으로 와 키스를 하려하다니. 이런 발랑 까진 것들 같으니라고! ‥‥‥라는 명대사를 날렸다. 그리고 루와 루비를 무릎 꿇고 손들게 한 뒤 교육까지 시켰다. 하지만 나의 이런 노력이도 불구하고 둘은 끝까지 키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시도를 했다 그리고 나중에 할머니인 루엔에게 떡이 될 때까지 얻어맞았다. 이런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신 믓 차리고, 추운 겨을날 새벽 3시에 놀이터 에 나와 키스를 하다니 !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다. 만약 이런 집념을 가지고 공부를 했다면 박사 학위를 땄을 테고,마법을 배웠다면 9클래스를 마스터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발랑 까져가지고 키스 같은 거나 하고. 내가 저 나이 때는‥‥‥ 아! 아직 저 나이 되려면 멀었군. 재들 나이는 50살이 넘었으니까. 난 루와 루비를 들러보며 말했다. "뭐, 할말 있니 ?할말 있으면 해보렴. 그러자 루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전 루비를 사랑해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키스하는 게 뭐가 잘못이에요?제발 우릴 그냥 사랑하게 놔두세요? 마, 맞아요, 오빠." 루비까지 일어나 거들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걸렸으면 죄를 뉘우치고 응서를 빌지는 못할망정 이럭게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다니. 얘들 참 많이 컸군. "이건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군. 일단 루엔이 돌아오면 그 때 다시 얘기하도록 하자." 헉! "아, 안 돼요. 할머니한테는 제발 말하지 마세요! 루엔의 이름이 나오자 두려움에 벌벌 떠는 아이들. 그러더니 이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했다. "엉엉 , 살려주세요." "살려달라니? 누가 널 죽인대? "엉엉,할머니한테 말하면 우리 둘 다 죽는단 말이에요." "으아앙, 제발 할머니한테만은 말하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려요, 오빠." 으음, 루엔의 교육 방법이 역시 효과가 있긴 있나 보군. 하긴, 그렇게 얻어맞았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리 없지. 루엔은 정말 떡이 될 때까지 애들을 패니까. 후후~ 이걸로 약점을 잡은 셈인가? "둘 다 일단 저쪽으로 가서 손들고 서 있으렴. 바닥이 차니까 무릎 꿇을 필요는 없어. 손 내리면 알지? 내가 씨익 읏으며 말하자 루와 루비는 알아서 손을 번쩍 들었다. 얼굴은 아직도 공포에 질려 있었다. 역시 루엔이 애들 교육 하나는 잘 시켰다니까. 그나저나 루엔과 갈리온드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자기 자식들 다 내팽개치고 둘이 여행이라토 떠났나? 벤치에 앉아있던 라나는 루와 루비를 보더니 물었다. "이 아이들은 누구죠? "아! 아직 인사 뭇했나 보지? 남자애는 루고, 여자애는 루비야 마법을 걸어서 둘 다 인간처럼 보이지만,사실은 엘프야." "그,그래요?' "응. 원래 보호자인 할머니랑 같이 이 세계로 왔는데, 그 할머니가 지금 다른 곳에 있어서 내가 맡아 기르고 있어." 라나는 루와 루비가 귀여운지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한테 말했다. "얘들 그만 용서해 주시면 안 쾌요? 많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은데. 루와 루비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최대한 반성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에 속아 넘어갈 내가 아니지만, 라나의 부탁이니 특별히 이번 한번만은 봐주기로 하였다. "손 내리렴." 재빨리 손을 내리는 아이들. "저, 저기요‥‥‥‥ "응?왜 그러니,루비야?" 할머니께는 말 안 할 거죠?그쵸,오빠? "글쎄. 앞으로 니들 하는 거 봐서." ...... "뭐니?그 표정은?' "아, 아니에요." 자, 돌아가자. 난 라나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피곤해 즉을 것 같다. 하아~ 얘들 바라다 주고 가게로 가면 4시 30분. 간이침대에 누워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으려나?오늘 잠은 다 잤군. 현관문 앞에 도착. "들어가렴." "오빠는 안 들어가세요?' "응. 난 가게에 가서 자려구 " 라나는 점퍼를 벗어서 나에게 주었다. 난 점퍼를 받아 얼른 입었다. 괜히 폼 잡다가 얼어 죽을 뻔했다. 다음부터는 내복이라도 입고 다니든지 해야지. "고마워요,오빠. 그리고 미안해요." "아니야. 난 괜찮아. 그러니 라나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난 라나를 살짝 안아 등을 두드려 주었다. 토닥토닥. 이렇게 안고 있으니 라나가 많이 자랐다는 것이 새삼 실감 난다. 옛날에는 정말 어 린아이 였는데. "조심해서 가세요." 응. 걱정하지‥‥‥‥ 내가 입을 연 순간 라나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난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두근두근. 라나와 나의 심장소리 외엔 아무 것포 플리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다. 달콤하고 향긋한 기분. 잠시 후, 라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잘 자요, 오빠. 라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난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헉! 설마 키스를 한 건가?또 당한 거야? 방금 키스 한 거 맞지? "응. 오빠랑 저 언니가 분명히 키스했어." "우리 보고는 하지 말라고 해놓구선." "그러게 말이야." 빨리 들어가서 루시아 언니한테 말해야겠다. 헉! 이것들이 뭔 짓을 하려고? 난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루와 루비의 됫덜미를 붙잡았다. 버둥버둥거리는 아이들. "왜 이러세요? 너희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요? "정말로 루시아한테 말할 생각이야? "물론이죠 ...... 만약 루시아한테 이 일이 알려진다면 난 영원히 집에 못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방금 일어났던 일을 조용히 묻어둬야 했다. 방금 본 것은 다 잊어버리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왜요? 말하지 말라면 말하지 마! 어른이 말하는데 윌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니들 그런 나쁜 버릇 어디서 배웠어? 내가 야단을 쳤지만, 아이들은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루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 형이 아까 놀이터 에 본 것을 다 잊어주신다면, 우리도 잊을수 있을 것 같아요. 루도 거들었다. 맞아요. 오빠가 잊으면 우리도 잊을게요." ...... 헉 ! 이것들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날 협박하는 건가? 내 이노무 자슥들을 당장 패대기‥‥‥ 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얘들이 쪼르르 달려가 루시아한테 다 말하겠지? 하아~ 루엔의 손자, 손녀만 아니었어도 영원히 입을 못 열게 만들어 줬을 텐데. 친구의 자식이니 내가 참아야지. "좋아. 아까 놀이터에서 본 것을 잊겠다고 맹세하지." 내가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흐음,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키스하는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면 좋겠어요 "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다. 내 이노무 자슥들을 그냥! "니가 지금 내 약점을 잡았다 이거냐? 하는 짓이 귀여워서 적당히 넘어가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다니. 니가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후후~ 하긴 비밀유지에 있어서 살인멸구만큼 좋은 방법은 없지 ." 내가 손가락을 뚜두둑거리며 말하자 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새. 생각해보니 그냥 서로 잊는 선에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요, 형. 그,그치 루비야?" "루비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오빠." 저 방금 전에 본 거 다 잊었어요 "루비도 잊었어요." 들어가자, 루비야 "으응. " 루와 루비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게로 걸음을 옳겼다. 가게에 도착하니 반데라스는 자고 있었고,사일런스 지니는 깨어있었다. "이 시간까지 안자고 뭐하세요? "잠시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 독일어요? "예." "아니 ,갑자기 왜 독일어를 공부하시나요?'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나 보군요. 사실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 독일인입니다. " ...... 이젠 아주 세계로 뻗어나가시는구만. 뭐, 차원까지 넘었으니 세계가 대수겠냐? "열심히 하세요. 전 이만 잘랍니다. " "안녕히 주무십시오. 부디 좋은 꿈꾸시길." 예. 너만 꿈에 안 나오면,그게 좋은꿈이지. 난 휴게실로 들어가 간이침대에 털썩 누웠다. 눈을 감자마자 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사일런스 지니와 함께 보신탕을 끓여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결국 개꿈이었다. "일어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내 몸을 흔드는 손. 난 억지로 눈을 떴다. 지니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이 몇 시죠? "8시 40분입니다. 가게는 오픈 준비 중입니다." 8시 40분이라. 대략 4시간 정도 잔 셈이군. "하암~ ." 피곤해 죽겠다. 난 하루에 8시간 이상 자지 않으면 움직이기가 힘든데. 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대충 머리를 감았다. 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피부가 이렇게 푸석푸석해지다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얼글이 반쪽 됐을까? 하루라도 빨리 세레나 일행을 집으로 들려보내야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하면 내 피부도 다시 라이 피부처럼 뽀송뽀송해지겠지? 대충 몸을 씻은 나는 가게로 나갔다. 가게는 오픈을 앞두고 한창 바빴다. 인디는 인형을 진열해 놓고 있었고, 크로니스는 카운터를 체크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라이의 머리를 따주고 있었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 모든 것을 총감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레나와 라나는 대걸레로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아니, 니들이 왜 청소를 하고 있니? "얹혀 지내고 있으니 밥갈이라도 하려구요." 으음, 라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세레나가 청소 같은 걸 해본 적이 있으려나. 괜히 나서서 일만 더 만드는 건 아닌지 물라. 난 그렇게 생각했지만, 애들 사기 꺾일까봐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오빠? 으응." 라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때문에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나만의 착각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라나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라나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윙크에는 '어젯밤의 일은오빠랑 저 둘만의 비밀이에요~' 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난 괜히 찔려 루시아를 슬쩍 보았다. 다행히 루시아는 눈치 채지못한 듯했다. 난 옆에 서 있는 지니에게 물었다. 반데라스는 어디에 있나요? 그러자 지니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휴게실 안에 계십니다. 세레나 왕비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며 나오길 꺼리시더군요." 그래도 지가 잘못한 건 아나 보군. 그러게 있을 때 잘할 것이지. 뭐, 지금 내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이러다가 정말 루시아랑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계속해서 내 몸을 엄습해 온다. "사일런스 백작님,잠깐 저 좀 보시죠." 난 지니를 데리고 창고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위에 사람이 있나 없나 열심히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지금 상항이 급박하다는 것은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저는 지금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제 완벽함을 시기한 신의 장난이라 봐도 좋을 것입니다. "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잘 알겠습니다. " "아직 서론밖에 말하지 않았으니 끝까지 들으세요." 반데라스 폐하와 세레나 왕비님을 화해시켜 원래 세계로 돌려 보내고, 루시아 공주님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실 생각이 아니겼습니까? 헉 !아직 말도 안 했는데 그걸 어떻게‥‥‥ 이 인간 정말로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거 아니야? "아무튼 아이언스 공작님의 의견은 잘 알았습니다. " "흐음,아무튼 알았다니 도와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세레나 왕비님이야 그렇다 치고 레이트 백작가의 차녀인 라나 양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뭐, 세례나가 돌아가면 알아서 따라 들아가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게 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의 소견에 의하면 라나 양은 향후 3년 이내에 엄청난 미녀로 성장할 겁니다." "뭐라? 사일런스 지니의 소견은 곧 진리나 다름없다. 특히나 여자에 관한 평가는 더욱 그러하다. 지니가 라나가 향후 3년 이내에 엄청난 미녀가 된다고 하면, 정말 되는 것이다. 헉 ! 지금도 예쁜 라나가 3년 안에 엄청난 미녀로 성장한다니 ! 그런 라나가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 3년 후면 라나도 성년이 되니 결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안 돼!" 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전부 날려 버 렸다. 라나가 아무리 예쁘게 자란다 한들,내 사랑은 오직 루시아뿐이다. 안 그래도 전에 나이트클럽 사건 때문에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데, 또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난 지니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전 오직 루시아만을 사랑합니다." 그러자 지니는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직 루시아 공주님만을 바라보시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마음을 언젠가는 루시아 공주님도 알아주실 겁니다." 말은 잘 해요. "아무튼 둘 사이를 화해시킬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다힐히 두 분께서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데 작은 오해로 인해 멀어진 것입니다. 이릴 때는 서로 간의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두 분 모두와 가까우시니 그 점을 염두에 두시고,두 분의 화해를 주선하십시오." 과연 사일런스 지니. 지니와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포 모든 일이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난 본격적으로 '세레나와 반데라스 화해 시켜주기 작전 에 돌입 헌다. 그런데 내 연애사업도 제대로 안 되는 마당에 왜 남의 연애사업에 끼어들어야 하는 거지? 어느새 점심시간. 가게가 항상 바쁘기 때문에 느긋하게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다. 그래서 점심은 주로 도시락을 싸오거나, 시켜서 먹는다. 참고로 시켜 먹는 메뉴는 주로 피자다. 아이들은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합창을 하듯 소리쳤다. "오늘은 더블러스트 피자 먹고 싶어요오~! "응? 웬 더블크러스트 피자?그건 뭐니? "두 겹의 얇은 도우 사이에 까망베르 치즈가 있는 거예요. 바삭바삭하게 씹힌대요." "응?그럼 고구마 두 즐짜리는? "고구마 두 줄도 좋지만 오늘은 더블크러스트 피자를 먹고 싶어요. 더블크러스트 스위스퐁듀 피자요! 그게 막막 맛있다고 TV에서 그랬어오. 여기 전단지에도 그렇게 써있어요." "라이 말이 맞아요. 그게 진짜 맛있대요." "루비도 먹고 싶어요! 벌써부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아이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그래서 그 피자가 얼마나 하니? 라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단지를 내밀었다. 난 전단지를 받아들어 살펴보았다. "헉! 훼밀리 사이즈가 4만5천원! 이런 빌어먹을! 뭔 피자가 이렇게 비싸? 피자에 금딱지라도 씌웠나? 이 래서 장사 해먹겠어? "오빠아~!" 내 옷깃을 잡고 애원하는 아이들. 물론 나도 시켜주고 싶다. 하지만 애들 한끼 먹이는 데 4만5천원이라니. 이건 너무하잖아!여기 있는 인원 다 먹이려면 적어도 3판은 시켜야 하니 , 그럼 13만5천원이 깨지는 셈이다 어쩐지 장사는 잘 되는데,돈은 안 모이더라. 식비 지출이 이렇게 많으니 돈이 모일 리 있나? 우리 집에는 엥겔계수(생계비 가운데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율로 저소득 가계일수록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릎고, 고소득 가계일수록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다)도 통하지 않겠군. 만약 우리집을 엥겔계수로 평가한다면 저소득층이 아니라 빈민층이 될 것이다. "그냥 두 판에 15900원인 피자 먹지 그러니? "싫어요!라이는 더블크러스트 피자가 먹고 싶단 말이에요! ...... 얘들 입맛이 어쩌다 이렇게 고급이 된 걸까?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 좋겠는데. 그냥 애들 원하는 대로 시켜. "와아! 고마워요, 언니." 루시아가 말하자 아이들은 그녀에게 매달렸다. 루시아는 애들한테 너무 오냐오냐 한다니까. 그러다가 버룻 나빠지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난 하는 수 없이 전단지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더블크러스트스위스퐁듀 피자 훼밀리 사이즈 3판을 주문했다. "콜라는 당연히 서비스죠? 예?콜라는 따로 주문해야 한다구요?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13만5천원 어치를 주문하는데 콜라를 서비스조 안 준단 말이야? 내가 그냥 딴 데서 시키고 만다. 여기 피자 안 먹어! 내가 전화를 확 끊으려는 찰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저 이 피자가게 사장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전 인형가게 사장입니다. 죄송합니다. 방금 종업원이 큰 실수를 했군요. 13만 5천원어치 피자를 주문하는 데 콜라를 서비스로 안 주겠다는 게 실수라면 실수겠죠. 뭐, 안 준다니 어쩌겠어요? 다른 피자집에서 시키는 수밖에. 아, 아닙니다. 당연히 콜라 서비스로 드려야죠. 한판에 하나씩 해서 3개 드리겠습니다. 물론 1.5리터 페트병으로요. 흐음,. 뭐 또 다른 서비스는 없나요? 사죄의 의미로 스파게티와 콘샐러드를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빨리 가져다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주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문을 마친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나저나 점심 한끼에 13만 5천원이 깨지다니. 만약 모든 식사를 이렇게 한다면, 하루에 40만 5천원, 한달이면 1215만원이 되는군. 여기에 애들 간식값까지 더하면... 으음, 이제부터 하루에 한끼만 먹이던가 해야지, 이러다가 빚더미에 앉는 것은 시간 문제겠군. 조금 기다리자 피자가 도착했다. 난 지갑을 열어 피같은 돈 13만 5천원을 지불했다. 와아! 피자다! "더블크러스트 피자다! 아이들은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얼른 피자 조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 얘들아. 체하겠다." 루시아는 컵을 꺼내 아이들에게 콜라를 따라 주었다. 자신보다 아이를 먼저 챙기는 저 마음! 저런 게 진정한 모성애가 아닐까? "맛있니? "네에~ !" 저렇게 맛있게 먹다니. 이걸 사진으로 찍으면 완벽한 피자CF가 될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드세요, 일루니아님." "인디님 먼저 드세요." "아니에요. 전 일루니아님이 먼저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제가 먹여드릴게요. 아~ 해보세요." "아~ ." "맛있나요? "예. 인디님이 먹여주시니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이번엔 제가 먹여드릴게요. 아~ 해보세요." "아~ " 아니, 저 커플은 애들 보는 앞에서 뭐하는 짓이래? 애들 보는 데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 그랬거늘, 이런 애정행각을 펼치다니 ! 이러니 루와 루비가 추운 겨울날 새벽 3시에 놀이터에 나가 키스를 하고 그러지!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 커플은 대놓고 나의 염장을 질러댔다. 아아~ 저 모습이 나와 루시아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시아는 아이들 신경 쓰느라 내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난 세레나와 라나를 보았다. 둘은 조심조심 피자를 뜯어 먹었다. 맛있니? "먹을 만 한데요." "맛있어요." 다행히 피자가 둘의 입맛에 맞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난 아침도 안 먹었군. 갑자기 배고픔이 밀려은다. 향긋한 치즈의 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난 피자 조각을 집어 들고 입 안에 우겨넣었다. 켁켁! 너무 급하게 먹었기 때문인지 목구멍이 막힌 듯했다. 내가 괴로워하자 루시아가 다가와 내 등을 쳐주었다. 툭툭. 몇 번 등을 얻어맞자 목에 걸려있던 피자가 튀어나왔다. 루시아는 콜라를 내밀었다. "이거 마셔." 난 루시아가 내민 콜라를 받아 꿀꺽꿀꺽 마겼다. "하아~ 살았다. " "미련하게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먹으면 어떡해? "어제 저녁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더니,배가 좀 고파서." "아무 것도 안 먹고 다니면 어떡해? 뭐라도 좀 챙겨 먹지 그랬어? "그릴 정신이 있어야 말이지." 앞으로는 바쁜 일이 있더라도 꼭 챙겨 먹어. "응 알았어." 루시아가 이렇게 날 걱정해주고 있었다니! 역시 루시아도 날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행복감에 젖어있는데 우리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라나였다. 라나는 과자를 먹다 말고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아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라나는 손에 든 피자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라나야?' "입맛이 없어요. 그만 먹을래요." 세레나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하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라나. 난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 었다. 아무래도 라나한테는 확실하게 말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설사 상처를 받더라도 그게 낫겠지. 아이들은 배가 터져라 피자를 먹었고, 결국 빵빵하게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그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엘프들이 원래 이렇게 과식을 했던가? 엘프의 숲에서 본 엘프들은 과일과 빵만 조금씩 먹었는데. 다들 소식을 했지. 그런데 얘들은 왜 이렇게 많이 먹는 거지?혹시 변종 엘프인가? 아니면, 인간 세계에 물들어서 그런가? 난 세레나에게 다가갔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예?왜요?' "시내 구경 시켜줄게. 아직 제대로 구경해본 적 없잖아. "아, 알았어요. 세레나는 시내 구경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하는지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굉장히 빈정거리고 싶어 하시는 모습이었지만, 상대가 왕비인지라 특별히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그럼 준비하고 있어." 난 나가기 전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루시아를 불러냈다. "무슨 일이야? 루시아는 팔짱을 긴 채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난 루시아의 어깨를 꼭 붙잡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루시아. 내가 세레나랑 같이 나가는 것은 세레나와 반데라스를 화해시켜주기 위함이야. 분명 말하지만 난 세레나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은 절대 없어. 그건 세레나도 마찬가지일 거야.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야. 난 오직 너만을 사랑해. 만약 니가 싫다면 그냥 여기서 꼼짝 않고 있을게." "그냥 갔다 와.". " 응?" " 알았으니까 그냥 갔다 오라고." " 미 , 믿어주는 거야?" " 니가 그렇다고 했으니까." " 헉!" 역시 진심은 통한다는 건가? 루시아가 날 믿어준다니. 난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 고, 고마워, 루시아. 사랑해." " 왜 , 왜 이래?" 내가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하자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깜찍했다. 난 슬며시 다가가 루시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 무, 무슨 짓이야?' 루시아는 놀랐는지 나를 밀쳤다. 하지만 그 손에는 힘이 들어있 지 않았다. 뾰로통한 표정의 루시아. 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아무튼 고마워. 그럼 나 간다. " 난 외투를 입고 세레나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세레나는 잔뜩 기 대에 부푼 모습이었다. " 어디부터 갈까?" " 전 잘 모르니 알아서 안내해 주세요." " 그래? 그림 일단 백화점으로 가서 구경하자. 그 다음에 백화점 지하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영화 한편 보고, 다음에 밥 먹고 그 러면 되겠지." " 좋아요." 생각해보니 이거 데이트 아닌가? 뭐, 상관없으려나? 난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았다. 내가 문을 열어주자 세레나는 조 심스럽게 택시에 올라탔다 으음, 이런 때 차가 있었으면 얼마나 멋 있을까? 빨리 차를 한대 뽑아야 하는데‥‥‥ 택시기사는 운전을 하는 내내 거울로 세레나의 모습을 훔쳐보았 다. 하긴, 세레나가 좀 예뻐야 말이지. 백화점과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기에 금방 도착했다. 난 택시 비를 계산하고 내렸다 " 여기가 백화점인가요?" 세레나는 높고 커다란 건물과 우글우글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감 탄을 금치 못했다. " 응. 먹거리부터 옷까지 안 파는 게 없는 곳이지. 들어가자." 난 세레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백화점 안의 시선 이 전부 우리에게로 집중되었다. 정확히는 세레나에게로. 반짝거리는 초록색 머리카락, 손대는 게 무서울 정도로 뽀얀 피 부, 적당한 키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균형 잡힌 몸매. 높지도 낮 지도 않은 코 아래에는 장밋빛의 붉은 입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입 고 있는 옷은 흰색 폴라티와 갈색 데님 멜빵치마. 그리고 체크무늬 코트. 그런데 이 옷들은 어디서 난 거지? 루시아 꺼 빌려 입은 건가? 잠 깐.루시아는 키가 크니 사이즈가 안 맞잖아. 그럼 일루니아 여사님 걸 빌려 입 었나? 누구 옷을 빌려 입었든 간에 매우 잘 어울린다. 보고 있기 부담스 러울 정도로 예쁘다고 해야 하나? 사실 나야 주위에 미녀들이 널리고 널렸다. 루시아, 라이레얼,카 르, 루엔, 일루니아 여사님(객관적으로 보면 인텔리전트한 미인이다), 인디(외모로만 보면 얘도 미녀에 속한다) 등등. 그런 미녀들을 하루 종일보며 살기 때문에 세레나를 봐도 '아! 예쁘구나' 하는정도로 넘어간다. 다시 말해 눈이 엄청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에 세레나의 미모 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리는 것이다 미녀랑 같이 걸으면 남자는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마련 이다. 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걸었다. 주위 남자들의 시기어린 눈초리는 나에게 기쁨은 안겨다 주었다. 후후~ 니들이 평생 가봐야 이런 여자 손목이나 잡아볼 수 있겠 니 ? 그냥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려무나 " 굉장하네요. 이런 곳이 있다니‥‥." 문화적 충격에 휩싸여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는 세레나. 예 전에 세레나와 야시장을 구경한 일이 생각난다. 그때도 세레나는 이렇게 열심히 두리번거렸었지. " 와아~ 이 옷 예쁘네요." " 정말. 한번 입어 볼래? 마음에 들면 사즐게." " 정말요?" " 그 정도 돈은 있으니 걱정하지 마."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던지 해야지. 이러다가 지갑에 빵구 나 겠네 . 하지만 이렇게 해서 세레나 기분이 좋아져 반데라스와 화해해서 판타지 세계로 돌아만 간다면야 내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나저나 여기는 옷값이 얼마나 하나? " 헉쓰쓰!" 참고로 난 놀랐을 때보통 '헉' 이라는 외마디 대사로 나의 심정 을 나타낸다. 뒤에 '쓰' 는나의 심정을 '헉 이라는 외마디 대사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할 경우에만 쓰인다. 다시 말해 '헉 보다는 ' 헉쓰' 가 더 크게 놀랐다는 거다. 물론 '헉쓰' 보다는 '헉쓰쓰' 가 더 크게 놀란 거다. 일반적으로 '헉쓰 의 놀라움은 '헉 의 2배, '헉쓰쓰' 의 놀라움 은 '헉쓰' 의 2배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헉쓰쓰' 의 놀라움은 ' 헉' 의 4배가 된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랬다. 대체 이게 0이 얼마냐? 일, 십, 백 , 천, 만, 십만, 백만‥‥ 난 내가 잘못 봤나싶어 다시 보았다. 하지만 숫자는 조금도 줄어 들지 않았다 상표를 확인해보니 아르마니(Armani)다. 알고 보니 이곳은 명품 매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하필이면 들어온 곳이 명품 매장이라니! " 어때요?" 세레나는 하얀색 여성용 정장을 입은 채 내 앞에 섰다 " 어머,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너무 아름다워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피부도 너무 깨끗하고, 머리카락색도 너무 예뻐요. 모델 하셔도 되겠어요." 점원이 세레나를 보며 열심히 칭찬한다. 물건 팔려고 참 애쓰는 군. 하지만 단지 빈말은 아니었다. 점원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 찬할 정도로 세레나는 아름다웠다. " 마음에 들면 그걸로 사줄게." 제발 마음에 들지 않길. 제발! 제발! 제발! " 마음에 들어요." 이런 젠장! " 아! 손님. 정장에는 이 구두가 어울린답니다. 한번 신어 보시 친어요?" 뭔 소리야? 옷 한 벌 샀으면 됐지, 뭔 구두야? 니가 뭔데 세레나한 테 구두를 권해? 점원이면 그래도 되는 거야? 안 돼! 신지 마! 나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세레나는 이미 구두에 발을 집어 넣고 있었다. 제발 사이즈가 맞지 않기를. 사이즈가 맞아도 마음에 들지 않기 를 제발! 제발! 제발! " 사이즈도 맞고, 마음에 드네요." 이 런 빌어먹을! " 그럼 계산하시겠어요, 손님?" " 카드 되죠?" " 물론입니다. " " 최대한 길게 해주세요." "36 개월 할부로 해드리겠습니다. " 결국 카드로 긁었다. 카드가 긁히는 순간 내 마음도 긁히는 것 같 아 눈물이 찔끔 나왔다. 옷이랑 구두 합해서 120만원. 할인도 안 해 준다. 만약 루시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난 죽은 목숨이다. 하아~ 나 이러다가 신용불량자 되는 거 아냐? 세레나는 옷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그래도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다행 이란 생각이 든다 뭐, 비싼 선물 하나쯤은 해줘도 괜찮겠지. 그 뒤에 세레나와 나는 백화점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세레나 는 어느새 밝게 웃고 있었다. 다행히 세레나는 구경만 했지. 디 이 상 사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구경도 어느 정도하고, 시간도 적당히 지나자 난 세레나를 데리 고 지하에 있는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데려갔다. 요즘은 무슨 영화가 유행하나? 어차피 세레나는 영화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난 대충 멜로 영 화를 골랐다. 마침 10분 후가 상영이었다. 우리는 팝콘과 콜라를 들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 왜 이렇게 어두워요? 여기서 관람하는 건가요?' " 응 오페라나 연극과 비슷한 거야. 이제 저 앞에 영상이 뜰 거야. 그걸 보는 거 지 ." 생각해보면 루시아와 영화 보러 온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일 이 너무 바빠 그동안 루시아에게 무심했던 것은 아닐까? 다음번에 는 꼭 루시아와 함께 와야지. 앉아서 조금 기다리자 영화가 시작되었다. 난 팝콘을 열심히 집 어 먹으며 영화를 보았다. 세레나 역시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난 무심코 팝콘 봉지에 손을 집어넣다가 깜짝 놀랐다. 팝콘은 안 잡 히고 세레나의 손이 잡힌 것이다. 이래서 연인들이 영화를 볼 때 꼭 팝콘을 먹는 거였군. 좋은 거 배웠다. 난 다음에 루시아랑 올 때도 꼭 팝콘을 사야겠다고 다짐하며 손 을 뺐다 영화의 내용은 남녀 주인공이 크리스마스 날 만나기로 약속을 했 는데, 남자가 그곳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다. 여자는 남자가 죽은 줄 알고 딴 남자랑 사귀고, 남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그리 필‥‥‥ 마지막에 둘은 다시 만나 잘 먹 잘 살았다. 응? 중간 얘기는 어디로 갔냐고? 그건 나도 모른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영화 보는 내내 잤으니까. "흑흑. 세레나는 영화가 너무 감동적인지 눈물을 흘렸다. 난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 세레나에게 건네주었다. 세레나는 그 손수건 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재밌었니? "예. 정말 감동적이에요. 훌쩍 ~ 난 세레나와 함께 영화관을 나왔다. 저녁때가 다가오니 슬슬 배 가 고프다 " 뭐 먹고 싶어? " 아무 거나요."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거나 먹으러 가면 따귀 맞기 십상이다. 게다가 세레나는 한 나라의 왕비. 왕궁에서 좋은 것만 먹고 살았음이 분명하다. 이런 세레나에게 어떤 음식을 사줘 야 하는 걸까? 난 근처 퓨전 요리집을 선택했다. 어차피 경양식은 물리도록 먹 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식은 세레나의 입맛에 잘 맞지 않을 것이 다. 그러니 경양식과 한식의 퓨전 요리를 선택한 것이다. 퓨전 요릿집답게 가게 안도 퓨전 형태로 꾸며져 있었다. 사람은 반 정도 차 있었고, 분위기는 한산하고 조용했다. 난 쓰는 김에 팍팍 쓰자는 생각으로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그런 데 세레나와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루시아 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 까? 루시아도 지금 밥 먹고 있을까? 라이랑 애들이 자꾸 귀찮게 하 는 건 아니겠지? " 지금 무슨 생각해요? " 응? 아무 것도 아냐." " 그녀 생각하고 있었나요? "응? " 루시아 공주 말이 에요. " 하하, 어떻게 알았어? " 표정 에 다 나타나는 걸요." " 그, 그런가? 세레나와 있으면서 루시아 생각을 하다니. 어쨌든 예의가 아니다 " 그러는 넌 어때? " 예? 뭐가요? 반데라스 걱정 안 돼? " 흥! 몰라요, 그런 남자." 고개를 획 돌리는 세레나. 하지만 난 세레나의 표정 속에서 반데 라스를 향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반데라스를 사랑하지 ? " 그런 남자 모른다니까요." 이제 그만 돌아가. 그놈도 많이 반성하고 있어." " 필요 없어요." 이래서 여자들은 한번 삐지면 무섭다. 루시아가 화났을 때 그거 풀어주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반데라스 녀석 ,고생 좀 하겠군. 잠시 후,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먼저 나온 것은 양송이 크림수 프. 세레나는 수저를 들어 교양 있게 떠먹었다 나? 나는 그냥 그릇을 들어 후르륵 마셨다. 내가 워낙 인생을 험하게 살아오다 보니 교양과는 좀 거리가 멀다. 이어서 샐러드가 나오고, 본 요리가 나왔다. 본 요리는 칠리치킨 라이스. 그린에 구은 자다리살을 칠리소스와 밥과 함께 먹는 거다. 모락모락 김 이 나는 음식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풀풀 풍겨왔다 난 그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그런데 세레나는 음식을 보더니 갑 자기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구역질을 하기 시 작했다. " 우욱~ !" " 왜 그래?' 난 깜짝 놀라 세레나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 괘, 괜찮아요. 우욱~ !" "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어이, 주인장!" 내가 소리치자 주인이 테이블로 달려왔다. " 무슨 일이십니까,손님 ? " 보고도 모릅니까? 여기 음식 왜 이래요? " 아니 , 뭐 잘못된 거라도‥‥‥ ? " 지금 이 아가씨 토하는 거 안 보이십니까? 아니, 무슨 음식이 구 토제도 아니고 냄새만 맡았는데 토를 한답니까? 장사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 전 괜찮다니까요. 우우욱~! " 이거 봐요. 더욱 상태가 안 좋아지잖아요. 어떻게 책임질 겁니 까? " 죄, 죄송합니다. 손님. 당장 주방장에게 말해 음식을 다시 내오 도록 하겠습니다. " 당연 그래야지요." 주인은 점원들에게 지시해서 음식을 치우게 했다 하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세레나의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정작 내용물이 나오지 않았다 보통 이쯤 되면 바닥에 파이(?), 혹은 빈대떡(?)이라 불리는 게 만들어져야 하는데 어째서 아무 것도 안 나오는 걸까? 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드라마를 보면 보통 이런 경우 다음과 같은 상황으로 진행 된다. " 왜 그러는 거야, 여보? 어디 아파? " 이렇게 되었으니 숨길 수도 없군요. 사실 저……. " 응? " 임신했어요." 뭐?그게 정말이야? " 예. 얼마 전부터 이상해서 병원에 가봤더니 3개월째래요. 며칠 후면 당신 생일이잖아요. 그때 말해주려고 했는데." 뭐, 이런 거다 뻔하디 뻔한 스토리. 어떻게 보면 지겹기까지 한 스토리. 원래 우리나라는 재활용을 잘하는 나라기 때문에 이런 스 토리도 한번 쓰고 끝내지 않고 계속 재활용한다. 드라마를 보다보 면 전 국민이 출생의 비밀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샘각 이 들 정도이니 "저기‥‥‥ 세레나. 그냥 체한 거지? 그냥 체한 거 맞지? 설마 이 상황에서 사실은 저 임신했어요 등등의 대사를 말하지는 않을 거 지? "어떻게 알았어요? " 응? 그럼 정말 임신한 거야? " 예. 3개월째 에요." ……. 임신했단다. 게다가 3개월째란다. 어쩜 이렇게 드라마와 똑같을 까? 난 이런 진부한 상황 전개를 굉장히 싫어하는 남자다. 그런데 왜 이링게 진부한 거지? 혹시 벌써 스토리가 다 떨어졌나? 그나저나 세레나가 임신을 했다니. 정말 충격적이군. 으음, 정말 충격적이야. 뭐라? 세레나가 임신을 해? " 헉쓰쓰쓰!" ' 쓰' 가3개 들어갔으니 그냥 '헉 보다8배 놀랐다는 뜻이다. 아니 ,8배 정도로는 나의 놀라움을 표시할 수 없다. 8제곱이라면 모를까 " 저 , 정말이야? 진짜 임신했어? " 조용히 말해요. 사람들 다 듣잖아요." 세레나의 말대로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었 다. 난 부끄러운 마음에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세레나는 헛구역 질이 멎었는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난 그런 세레나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로 임신했어? "그렇다니까요." ……. 이걸 축하해 줘야 하나? 난 축하해 주기 전에 물었다. "누구 아이야? ……. 잠시 침묵 세레나는 물 잔을 들어 내 얼굴에 끼얹었다. 촤악! "무슨 짓이야!" 세레나는 벌떡 일어나 음식점을 나갔다. 난 황급히 계산을 하고 세레나를 쫓아갔다. 생각해보니 내가 좀 실례되는 질문을 한 것 같군 " 아, 미안해. 그나저나 축하해." 나보다도 어린 세레나가 벌써 임신이라니. 물론 성년이긴 하지 만 그래도 애 낳기엔 너무 이른 나이 아닌가? 잠깐. 생각해보니 세 레나는 왕비잖아. 그럼 이건 헤리오 왕국의 경사인가? 반데라스는 알고 있어? 내 질문에 세레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직 말 안 한 거야? 이번에는 끄덕끄덕 . 난 한숨을 내쉬었다 " 일단 어디 앉아서 얘기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장소가 바뀌어 이곳은 찻집. 난 커피를 시키려다가, 카페인이 임산부에게는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녹차 두 잔을 시켰다. " 왜 반데라스에게 말 안 했어? 말하고 싶지 않아서요." " 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세레나는 '뭘 그렁게 꼬치꼬치 캐물어? 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 았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빨리 반데라스랑 화해해서 헤리오 왕궁으로 돌아가야지. 사랑 하는 사람들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하지만, 때론 말하지 않 으면 모르는 것도 있어. 아마 반데라스도 그것 때문에 답답할 거 야 그러니 나한테라도 고민을 털어놔 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면 뭐든 도와줄 테니까. 세레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 저는 그를 사랑해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 역시 저를 누구보다 사랑하구요." " 그런데 뭐가 문제인거야? " 그는 저를 너무 구속하려 해요." " 구속? 무슨 죄인도 아니고‥‥‥ " 신경 써주는 것은 고맙지만, 너무 심해요. 왕궁 밖으로 못 나가 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침 한번만 해도 어의들을 불러 난리를 치 고, 혼자서 생각 좀 하려고 하면 꼭 나타나서 훼방을 늘고‥‥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으음. 하긴 그놈이 스토커 기질이 좀 심하긴 하지." " 지금도 이런데,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 봐요. 그땐 정말 숨도 못 쉬게 할 게 뻔해요." " 으음,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지." " 이제 얼마 후면 몸이 무거워져서 움직이기 힘들 테고, 애를 낳고 나면 산후 조리다 뭐다 해서 또 움직이지 못할 테고, 그 다음은 아 이에게 신경 쓰느라 또 그럴 테고……. 난 세레나의 얘기를 듣고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정리 를 해보자. 번호를 붙여 정리하면 간단하게 알아 볼 수 있으니 1. 세레나와 반데라스는 서로 사랑한다. 2. 세레나는 인생을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반면, 반데라스는 자꾸 만 세레나를 구속하려 한다. 3. 세레나는 현재 임신 중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구속이 더 심해 질까봐 걱정이다. 결론 - 반데라스는 나쁜 놈이다. 으음, 그렇군. 결론은 역시 반데라스가 나쁜 놈이라는 거였어. 결 국 사건의 원인은 반데라스의 스토커 기질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 은 좋지만, 그것이 심해져 집착이 되면 좋지 못하다. 잘못하면 그로 인해 사랑이 깨질 수도 있으니. 난 내가 나서서 도와줄 필요성을 느꼈다 이건 단지 이번 일만이 은제가 아니다. 만약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둘 사이에 반목은 더욱 심해질 테고, 어쩌면 이혼가지 하게 될지도 모른다. 3 쌍 결혼하면 1쌍 이혼하는 시대에 이혼이 뭔 대수겠냐만은 그래 도 내 주위 사람들이 이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둘이 이혼하면 뱃속의 애는 어쩌란 말인가? " 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겠어. 반데라스에게는 내가 잘 말해볼게." " 저기……. 응? 왜 ? " 임신했다는 사실은 알리지 말아주세요. " 아니 , 왜 ? " 아무튼 알리지 말아주세요. " 으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사자의 의견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반데 라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설마 기절하는 건 아니겠지? * * * *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난 세레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고 바로 가게로 향했다 영업을 끝마친 가게에는 지니와 반데라 스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 늦은 시간까지 수고가 많으시군요. " 아이언스 공작님의 노고에 비한다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 커피나 타오세요." " 알겠습니다. " 난 반데라스와 마주 앉았다. " 오늘 세레나와 함께 시내 구경 했다. 참 좋아하더군 " 그러자 반데라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첬다. " 이 자식 ! 세레나 양한테 본격적으로 마수를 뻗치다니 ! 용서치 않겠다! " 니가 용서치 않으면 어쩔 건데? 일단 앉아." 반데라스는 자리에 앉아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하는 듯했다. 하 지만 나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했다 " 일단 분명히 말하지만, 나와 세레나는 친구 이상은 절대 아니 야. 난 세레나를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고, 세레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리고 세레나는 지금 널 사랑하고 있어." " 그, 그래?' 내 말에 반데라스는 조금 진정한 듯한 모습이었다. 얘기를 하는 사이 지니가 커피를 내왔다. 어제처럼 놀라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맛이 예술이다. 입 안을 맴도는 이 향긋함이라니! '역전다방 미스 김이 타순 커피보다 맛있는 커피' 라는 명칭이 부족할 정도다. "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넌 너무 집착이 심해. 사랑이 아무리 구 속이라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넌 거의 세레나를 감옥에 가둬 놓으려 하고 있어. 문제는 세레나가 구속 받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세레나가 보통 귀족가 여자들하고는 많이 다르잖아." 그, 그건 그렇지 ." " 세레나는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싶어 해. 왕궁 안에 만 있으려니 갑갑해서 못 견디겠대. 그런데 니가 왕궁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했다며?' " 그. 그건 세레나 양한테 위험한 일이 생길까봐." " 위험이란 언제나 따라다니기 마련이지. 물 마시다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야.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 단지 위험할지 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세레나를 가둬 놓는 거야? 그건 사랑이 아 니라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야. 어떻게 생각해?' " 그, 그건……. 우물쭈물 거리며 말을 못하는 반데라스. 하긴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겠지. " 그리고 대체 왜 그렇게 세레나를 못 믿는 거야? 사랑의 기본은 믿음인 거 몰라? 진정으로 세레를 사랑한다면 그녀가 무슨 짓을 하건 간아…… 설사 그녀가 다른 남자와 여관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더라도 그녀와 직접 대화하기 전까지는 그녀를 믿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여자의 과거가 그렇게 중요해? 설사 세레나가 과거가 있는 여자라 하더라도 그 과거까지 감싸 안아즐 생각을 해 야지, 있지도 않은 과거를 조작해내면서까지 세레나를 추궁하면 어쩌자는 거야? ……. " 지금 세레나는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어. 지켜보고 있기 불쌍할 정도로. 세레나는 널 사랑하지만, 너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점점 질 려가고 있어. 내가 보기에 이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너희 사이는 끝 나게 될 거야." " 헉 ! 그건 안 돼! " 안 되면 어쩔 건데? 니가 나쁜 놈이야. 내가 보기엔 니가 세레나 를 괴롭히는 걸로 밖에 안 보여. 넌 물론 그게 사랑이라고 우겨대겠 지.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야. 집착일 뿐이야. 넌 널 위한 사랑을 하고 있어. 지독히 이기적인 사랑이지. 상대를 배려해주지 않아. 니가 조금만 세레나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 을 거야." " 그, 그런……. 반데라스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며 고통스러워했다. 난 그 모습 을 보며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좀 심하긴 해도 누군가가 이렇게 직 접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놈의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그걸 몰라서 묻냐? 세레나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할 거 아냐? 넌 그 동안 니 자신만 알았지, 세레나가 뭘 원하는지 생각이나 해 봤어?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야. 둘이 같이 하는 거지. 대화 를 통해 세레나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 봐. 그리고 니 가 생각하는 것을 세레나에게 말하고.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나 가려고 노력해 봐 그럼 진절 서로를 위한다는 것이 뭔지 알게 될 거야. 아아~ 이 주옥같은 명언들. 이러 있으니 내가 마치 연애 전문 가라도 된 듯한 느낌 이다. 하아~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내 앞가림도 못하는 상황에서 남의 연애사업에 신경 쓰다니. 난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이런 내가 초등학교 6년 다니면서 '선행상' 하나 못 타다니. 우리나라 교육은 이래서 문제다. 반데라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굉장히 반성하는 듯한 모 습. 난 다 마신 커피잔을 내러놓으며 물었다. " 잘못을 인정 하냐? 나의 행동이 세레나 양에게 그렇게 큰 고통이었다니.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반데라스는 정말로 바닥에 헤딩이라도 할 기세였다 난 말리는 차원에서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 괜찮아. 자책하는 것은 좋지만 자기비하로 빠질 필요는 없어 힘내 ." 니가 바닥에 헤딩하면 바닥청소는 누가 하니? 피 묻으면 잘 지워 지지도 않는데. " 세레나 양이 날 용서해줄까? " 글쎄. 그건 앞으로 너 하기에 달렸겠지. 아무튼 내가 한 말 명심 해. 만약 너의 생각 없는 행동으로 인해 또 다시 세레나가 상처 받 는다면, 그땐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 세레나의 친구로서 말이야. 내 말 명심해 둬." 아아~ 원래 이런 건 주먹을 한방 날리며 말하는 게 멋있는데. 하 지만 지금 저놈을 때리면 살인죄로 잡혀갈지도 모른다. 그만큼 지 금 반데라스의 상태는 안 좋았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 했는지 볼은 쏙 들어갔고 눈은 퀭하니 생기가 없었다. 손가락으로만 건드 려도 쓰러질 것 같다. 세레나와 잠깐 헤어져있었다고 이렇게 폐인 이 되다니. 세레나가 죽으면 따라 죽고도 남겠군. " 대체 무슨 낯으로 세레나 양의 얼굴을 보지? 세레나 양이 정말 로 날 용서해줄까? 용서 안 해주면 어떻게 하지? 그럼 난 어떻게 해 야 하는 거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혼자서 중얼거리는 반데라스. 난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해주었다. " 걱정하지 마. 반드시 용서해줄 거야." " 용서 안 해주면? " 용서해준다니까." " 아니야. 세레나 양은 날 용서해주지 않을 거야 " " 용서해줄 거라니까. 날 보고 믿어." 반데라스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더욱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절대 웅서 안 해줄 거야. 분명해." 그 모습이 너무 답답해 보여서 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용서해준다니까, 이 자식아!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용서해 줄 거야! 용서 안 해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 응? 앞으로 태어날 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 헉 !" 실수다.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말해버리다니. 약속과 신의 의 대명사인 내가 어쩌다 이런 실수를! 응? 아이라니?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니가 잘못 들었나 보지. " 아니야. 똑똑히 들었어. 분명 앞으로 태어날 아이라고 말했잖 아. 그게 무슨 말이야? 빨리 말해봐." " 으음,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뭐, 별 의미 없는 말이니 잊어 버리렴." 빨리 말해! 적당히 넘기려 했는데 안 통하는군. " 그래, 그래. 알았어. 말해주면 될 거 아냐, 임마. 일단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 내 말체 반데라스는 자리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세레나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라서 기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반데라스가 조금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 사실 세레나 임신했어. 3개월째래. 당연한 얘기지만 니 아이다. 아까보니 입덧까지 하더라.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는 잘 모 른다 물른 초음파 검사로 하면 금방 나오지만, 우리나라는 태아감 별이 불법이니 정 알고 싶으면 다른 나라 가서 해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남녀 구분 없이 낳아서 잘 기르는 거야. 잘 키운 딸, 열 아들 부럽지 않다는 말도 있잖아 그건 우리 라이를 보면 알 수 있지. 물 론 그쪽 세계는 남아 선호사상이 짙은데다가 넌 국왕이니 아들을 원하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 아이언스 공작님 ." " 왜 끼어드시나요, 사일런스 백작님? 제가 일장연설을 하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반데라스 폐하께서 기절하셨습니다. " " 으음, 결국은 기절했군요. 뭐, 별 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 예. 저도 그 점에 대해서는 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숨 을 쉬지 않는다는 거지요." ……예? 뭐라? 숨을 안 쉬어? 난 깜짝 놀라 반데라스에게 다가갔다. 반데라스는 정말로 숨이 멎은 상태였다 " 헉쓰! 일어나, 임마! 이런 데서 죽으면 어쩌자는 거야? 가게 안에 서 사람 죽었다는 소문 퍼지면 매상 떨어져! 어서 일어나!" 짜악~ 짜악~ 짜악~! 난 있는 힘껏 반데라스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녀석은 요지부동.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이런 상창에서는 인공호흡이 최선입니다. " 인공호흡? 마우스 투 마우스(Mouth To Mouth)? 난 지니를 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 그럼 부탁합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그러자 지니는 말을 바꾸었다. " 그냥 심폐소생술을 하도록 하지요.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그것 은 반데라스 폐하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고 봐야겠지요. " 그런데 심폐소생술은 어떻게 하는 거죠? " 원래는 인공호흡도 포함이 되지만, 그것은 제외하고 심장마사 지부터 실시하지요. 일단 환자를 수평이 되게 눕혀야 합니다. 그리 고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체중을 실어 압박하는 겁니다. " " 으음, 그렇군요." 이 인간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난 지니가 말한 대로 심장 마사지를 실시했다. 하지만 반데라스 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큰일이군요.4분 이내에 깨어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4분이 지난다면 뇌사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뇌사 상태까지 가 지 않는다 하더라도 뇌에 손상은 피할 수 없습니다. " 이런 심각한 얘기를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하는 지니. 하지만 난 지니처 럼 태연하지 못 했다. 이런 젠장! 빨리 손을 써야겠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이런 경우 보통 전기 충격 요법을 쓰기 마 련이다. 난 라이트닝 마법을 손에 걸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는 치지직 ~ 하며 전기가 흘렀다. 난 그 손으로 반데라스의 가슴을 눌렀다 푸드득! 경련을 일으키는 반데라스. 난 다시 한번 힘차게 눌렀다 푸드득! " 쿨럭~ 컥컥! 반데라스는 눈을 번쩍 뜨며 기침을 토해냈다. 휴우~ 다행히 살 아났나 보군.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가게 매상이 떨어지는 일은 없겠지? 반데라스는 깨어나자마자 나에게 달려들었다 " 정말이야? 정말로 세레나 양이 아이를 가진 거야? " 그렇다니까. 그것도 3개월째래." " 흑흑, 정말이란 말이지? 정말이란 말이지? 세레나 양이 내 아이 를…… 어흐흐혹~ !" 반데라스는 그 자리에 쓰러져 오열했다. 난 지니에게 물었다 " 쟤 왜 울어요? " 너무 감동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 " 으음, 그게 그렇게 감동할 일인가요? "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등할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아이 를 가졌다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는 뜻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 그런가요? " 게다가 반데라스 폐하께서는 현재 후사가 없지 않으십니까? 처 음으로 갖게 되는 아이이니 기쁨은 더욱 크겠지요." " 어흐흐흑!" 그런데 너무 슬프게 우는 거 아냐? 저러다가 또 쓰러지지나 않 을까 걱정 된다. 그나저나 아이를 갖게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 쁜 걸까? 내가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안 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난 그 점을 이 해할 수 없었다. 만약 루시아가 내 아이를 갖게 된다면 나도 저렇게 좋아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루시아를 닮은 아이를 보게 된다면 정말 졸 을 것 같다. 아아~ 저 띨띨한 반데라스 놈이 벌써 애까지 가졌는 데,난 대체 뭐하는 거냐? 에휴~. 한참 후에 반데라스는 울음을 그첬다. 아니 , 그쳤다기보다는 더 이상 나을 눈물이 없었다는 표현이 정착할 것이다. 다 울었으면 일단 진정해. 지금부터가 중요하니까. 지금 세레나 는 임신 3개월째야. 이때의 태교가 아이의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 어. 그러니까 만약 니가 지금 잘못 행동을 한다면, 널 닮은 아이가 나을 수도 있는 거야." " 무슨 의미야?' " 널 닮은 띨띨한 아이가 나온다는 거지." " 뭐 ? " 아무튼 닥치고 내 말 잘 들어. 세레나가 임신 사실을 왜 너한테 숨겼겠어? " 그, 글쎄 " " 세레나는 더 이상 구속 받기 싫었던 거야. 넌 이제까지 세레나 를 숨도 못 쉬게 닦달했지. 그런데 여기에 임신 사실까지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어? 보나마나 넌 세레나의 숨통을 더욱 조일 거야. 세 레나는 그게 두려웠던 거지." 반데라스는 반성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난 말을 이 었다. " 그리고 세레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해. 물론 왕비라는 직책에 얽매여있는 이상 어느 정도의 책임과 의무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만이라도 자유롭고 싶어 해. 이제 조금 있으면 배가 불러올 거고 그러면 거동이 힘들어지지. 그러다가 애 낳고, 애 낳으면 산후 조리, 그 다음엔 애 교육‥‥‥ 잘못하면 젊은 날이 송두리째 날아가 는 거야. 그럼 어느 날 고개를 들었을 때 세레나는 초라하게 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겠지. 세레나는 그런 삶을 원하는 게 아 니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자 유로운 삶을 원해 나중에 늙었을 때 돌이켜 보아도 후회 없는 삶 을." 내 말을 들은 반데라스는 눈물을 흘렸다. 흑~ 세레나 양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난 그것도 모르 고‥‥‥‥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말하지 않은 걸까? " 니가 언제 말할 틈이나 줬냐? 사실 왕궁에서 세레나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너뿐인데, 니가 그따위로 행동하니 세레나가 얼마나 답답했겠어? 남편이라는 인간이 의지가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 흑흑~ 세레나 양‥‥‥ . " 그만울어, 임마. 왜 그렇게 질질 짜고 그러니 ?나중에 바닥 청소 하기 힘들게. 아무튼 이제라도 세레나의 마음을 알았으니, 앞으로 는 세레나한테 잘 해줘. 니가 세레나의 의지할 곳이 되어주란 말이 야. 알았어?' " 응. " " 그리고 앞으로는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너네 세계에서 해라. 남 의 세계까지 와서 난리 치지 말고. " 응 . " 반데라스는 내 말을 잘 이해한 듯했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부디 둘이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이다. " 고맙다." 반데라스는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난 담배를 꺼 내 입에 물며 말했다. " 고마우면 빨리 세레나랑 라나 데리고 니네 세계로 돌아가. 그래 야 나도 발 뻗고 자지 ." * * * * 반데라스는 세레나가 있는 방에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일 테지. " 잘 될까? 루시아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 잘 되겠지.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난 루시아의 손을 움켜잡았다. 반데라스가 들어간 지 30분이 흘 렀다. 둘은 대체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설마 얘기 말 고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거실에는 나와 루시아,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사일런스 지니, 라이, 루, 루비가 모여 있었다. 그리고 라나도 있었다. 라나는 초조한 모습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난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라나는 고개를 들며 나에게 물었다 화해할 수 있을까요? " 분명 화해할 거야. 걱정하지 말고, 앉아서 기다려." " 설마 언니랑 형부 헤어지는 것은 아니겠죠?" 그럴 리 없어.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예? " 그게 무슨 말이야, 히로? 헉 ! 또 실수했다. 약속과 신의의 대명사인 내가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실수를 하다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 하하, 그게 말이지‥‥‥ 꼭 세레나가 임신을 했다기보다 는……. " 예? 언니가 임신을 해요?" " 뭐? 그게 정말이야? " 세레나 왕비님이 임신을 하셨다는 게 정말인가요? " 임신이 뭐 예요.오빠? 라이 긍금해요. " 할머니 힌테 들었는데 임신은 뱃속에 아이기 들어있는 거래. 루비도 그렇게 들었어. 우리고 옛날에는 뱃속에 있었대. " 그런덴 뱃속에 아이가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빨리 말해주세요, 오빠아~. " 정말 사실이야? 진짜에요? " 믿을 수가 없군요." 몇 개월째래? " 아이는 건강하대요?" " 남자아이야, 여자아이야? ……. 말하지 않기로 세레나랑 약속했는데. 아아~ 나의 신용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구나. 그나저나 참으로 소란스럽군. " 좋아. 이렇게 된 거 하나씩 설명해 주지. 세레나는 현재 임신 중 이야. 3개월째지. 아이 아빠는 당연히 반데라스고.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는 나와 봐야 알지, 지금 어떻게 알아? 그리고 라이랑 너희들은 쓸데없는 저 궁금해 하지 마! 애들이 그런 거에 관심 가지 떤 못 써! 나중에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반데라스가 나왔다. 반데라스의 손에는 슈트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세레나가 따라 나왔다. 난 둘의 표정을 보고 화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군 일루니아 여사님은 재빨리 앞으로 나서 세레나의 손을 움켜잡 았다. "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세레나 왕비님. 이는 헤리오 왕국의 축복입니다 이로써 후사 걱정을 한 시름 덜게 되셨군요. 아이리스 왕국을 대표하여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 " 아, 예. 고맙습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든 세레나는 강하게 나를 째려보았다 찌릿! " 흠흠. " 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세레나는 우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네요. 폐만 끼치고 돌아가서 죄송해요. " 괜찮습니다. 왕비님. 언제든 또 놀러오세요. 양국의 우호관계로 봐서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요. 호호~ "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 집이 일루니아 여사님 집인 줄 알 것이 다. 누구 맘대로 남의 집에 놀러오라 마라야. 흥! 웃기지도 않아! 다음에 또 놀러오세요. 그때는 아이도 같이요." 루시아는 웃으며 세레나에게 말을 건넸다. 세레나 역시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 예. 고마워요. 루시아 공주님이야말로 나중에 꼭 왕궁으로 놀러 오세요. 그때는 제가 대접해드릴게요." 세레나는 다른 사람들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 그럼 난 루시아와 함께 얘들 바래다주고 올게." 난 루시아와 함께 반데라스와 세레나와 라나를 바래다주기 위해 집을 나갔다. 이들을 다시 아이리스 왕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는 인형가게 앞 주차장에 있는 마법진을 이용해야 한다. 그 마법진 은 크로니스가 설치한 것으로, 평소 때는 마법진이 보이지 않도록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다. 가게에 도착하니 크로니스가 마법진 발동 준비를 끝마치고 우리 를 기다리고 있었다. 3차원 마법진은 화려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주차장은 마법진의 중심부일 뿐이다. 청금색의 거대한 마법진은 건물 속에까지 침투하여 빛의 선을 그리고 있었다(차원이동 마법진 은 빛으로 그리는 마법진이기 때문에 주위에 건물 같은 방해물이 있어도 별 상관없다). 아마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 마법진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세 계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인식 제어 마법을 걸어 놓았으니. 하지만 원래부터 다른 세계 사람들인 루시아, 세레나, 반데라스. 라나에게는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나야 뭐 8클래스 마스터 이니 인 식 제어 마법에 별 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만약 크로니스가 진짜 마음먹고 마법을 걸어놓았으면 영향을 받았겠지만). 세레나와 반데라스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마법진 중심부에 섰다. 하지만 라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 왜 그래? 어서 들어가렴." " 꼭 가야 되는 거예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 저 오빠랑 여기서 함께 살면 안 돼요? ……. 라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난 가만히 라나의 머 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부모님께서 많이 걱정하실 거야. " 하, 하지만‥‥‥ . " 영원히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마법진으로 두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이상, 내가 라나를 찾아갈 수도 있고, 라나가 날 찾아올 수도 있겠지." " 혹흑~ " 결국 라나는 울음을 터트리며 내 품에 안겼다. 난 라나를 살짝 안 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토닥토닥. " 그만 울어. 라나는 웃을 때가 예쁘니까." 난 손으로 라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 저 꼭 다시 올게요. 어른이 되면 꼭 다시 올게요. 그때는 꼭 오빠 의 신부가 될 거예요." " 그래 ." 난 웃으며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나는 희미한 미소 를 지었다. 그리고는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 저 없는 동안 오빠를 잘 부탁드려요." " 으응. " 루시아는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나는 말을 이었다. " 오빠가 공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전 절 대 오빠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나증에 공주님보다 훨씬 예뻐져 서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지금 저 선전포고 하는 거예요." 당돌하게 말하는 라나. 루시아는 그런 라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안아 주었다. " 그래. 그럼 그때까지 일단 내가 히로를 맡아두고 있을게." "헤헤~ " 라나는 마법진 중심부로 들어갔다. 난 반데라스에게 말했다. " 잘 가라. 다시는 세레나 울리지 말고. " 그래. 고맙다. " 난 세레나를 보았다. " 너도 잘 가. 나중에 애 낳으면 보러 가도록 노력해 볼게. 그리고 이건 선물. 애 자라면 가지고 놀라고 해. 난 커다란 곰 인형을 세레나에게 주었다. 세레나는 두 손을 한껏 벌려 곰 인형을 끌어안았다 " 고마워요." " 뭘 이 정도 가지고." 난 라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라나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이 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쪽~.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야 돼. 알았지? " 예, 오빠. 오빠도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난 마법진 중심부에서 한걸음 로 물러났다. 크로니스는 시동 어를 외쳤고, 반데라스와 세레나, 라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사히 이동 마법을 끝마치자 마법진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허공으로 흩어지듯 사라졌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다들 가니 왠지 허전한 느낌이다. 으음, 그나저나 라나가 루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하다니. 솔직히 놀랐다. 이렇게 되면 두 여자가 나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건가? 아아~ 난 너무 인기가 많아서 문제야. 이놈의 인기는 어떻게 된 게 식을 줄 모르네. 아주 미치겠다니까, 아아~ 나는야 죄 많은 남자 다 내가 잘난 게 죄지. 누굴 탓하겠 어? 이러다가 감옥 가는 거 아닌지 물라. 푸하하! 내가 한껏 웃음을 짓는데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고개를 돌려보 니 루시아의 싸늘한 시선이 나를 반겼다. 쉬이잉 ~. 북풍한설보다도 차가운 루시아의 눈빛. " 왜, 왜 그래,루시아?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 대체 어떻게 행동했기에 저 어린아이가 나한테 선전포고까지 하는 거야7' " 응? 그, 글쎄. 왜 그랬을까? " 됐어. 비겁한 변명하지 마. 흥!" 몸을 획 돌려 걸어가는 루시아. 난 황급히 루시아를 쫓아가며 말 했다. "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야? " 누가 질투를 한다 그래? " 그런데 왜 그럭게 화를 내? " 그, 그건‥‥‥ 됐어! 아무튼 너랑 더 이상 할 얘기 없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루시아 그 모습에 난 웃음을 지었다. " 후후~ 질투하는 거 맞구나 그렇지? 라나가 날 빼앗아 갈까봐 그래? 에이~ 걱정하지 마.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니까."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루시아. 나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루 시아는 내 앞에 오더니 손을 휘둘렀다. 짝! 흥! 내 뺨을 때린 루시아는 다시 몸을 획 돌려 걸어갔다. 뭐야? 내가 왜 맞은 거지? " 왜 그러는 거야?" " 됐어! 오늘 집에 들어올 생각 하지 마. " 그럼 난 어디서 자라고? 가게에서 자든 길바닥에서 자든 니 맘대로 해. 아무튼 꼴도 보 기 싫으니까 집에 들어오지 마. " 미안해, 루시아. 내가 잘못했어. 날 용서해 줘. 같이 가 루시아 ~. * * * * 며 칠 후. 가게에서 열심히 걸레질을 하고 있는데 라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 오빠아~." " 응? 왜 그러니, 라이야? " 언니가 오빠를 찾아요. " 응? 루시아가 나를? 무슨 일로? "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언니 화 많이 났어요. 응? 화가 많이 나? 정말?" " 예. 편지를 받아보더니 카드값이 어쩌구 하며 막막 화냈어요. " 카드값이라면‥‥ 헉 !" 난 그제야 세레나에게 120만원 어치 옷과 구두를 사준 것을 기억 해 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럴 수가! 난 재빨리 점퍼를 입으며 말했다 " 언니한테 가서 오빠 죽었다고 말하렴." " 예? 오빠가 죽어요? 왜요? " 아무튼 그렇게 말하렴. 그럼 오빠는 살기 위해 잠시 피신해 있 으마. 우리 라이 그동안 건강하게 지내렴." 난 재빨리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입구를 나서는 순간 가게 안으로 들어오던 루시아와 마주친 것이다. " 헉 !" "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 아, 아니‥‥‥ 그게 꼭 어딜 간다기보다‥‥‥‥ . 루시아는 손에 든 카드대금 청구서를 내 앞에 내밀며 달했다 " 변명할 말 있으면 해봐." ……. 헉쓰! 난 이제 죽었다! 아이리스 2부 3권 Story 8 크리스마스에는 * 139.GIF * "징글벨~ JT 징글벨~ f" 이깨동무를 하고 힘차게 노래를 부르는 어 린 엘프들. 귀 엽고 깜 찍한 어 린 엘프들의 노랫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물른 그깃과는 별개로 굉장히 시끄럽다 '시끄러! 크리스마스까지 아직도 한 달이나 남았는데 뭔 벌써 터 징글벨이야?' 내가 소리쳤음에토 불구하고 아이들은 징글벨 노래를 멈추지 않 았다. "징글벨~ f 징글벨~ f" 난애들노래를듣다가 이상한점을발건했다. 계속 '징글벨 하 나만 반복될 뿐 진도가 나가질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다음 가사가 됐였지? "짐글벨만 반복하지 말고 다음 가사를 불러 보렴." 내 말에 노래를 멈추끄 나를 란근 처다보는 아이들. "설마 모르니 ?' 아이들은 슨가락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라이는 둘째 치고 루와 루비까지 손가락을 물다니 애들이 점점 라이를 닮아가는 상황 같아 큰일이다. 잠시 후. 아이들은 다음 가사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 계속해 서 징글벨을 불렀다. "징글벨~ f 징글벨~ f" 계속 되는 징글벨의 무한 반복. 귀에 딱지가 내려앉을 때까지 아 이들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이 지쳐 제풀에 그만둘 때까지 징글벨을 듣고 나자 하루 종일 귓가에 징글벨 소리가 맴돌았다. 그나저나 벌써 크리스마스 시즌이군 크리스마스는 인형가게의 최대 대목이다. 크리스마스하면 선물 아니겠는가?그리고 선물하면 인형이지. 그래서 '라이의 집 도판측준비로정신이 없다. 가게 안에 커다 란 트리를 세우고, 오색찬란한 전구를 켰다. 곳곳을 크리스마스 J 타일로 장식하고, 캐롤송을 틀었다. 가게 전체가 아주 난리 법석이다. 난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말 싫어한다 흥! 크리스마스는 무슨 리스마스야?크리스마스 가 밥 먹여 줘? 크리스마스란 우리나라 달로 하면 성탄절이다. 그리고 성탄절의 성탄은 성스러은 탄생을 의미한다. 즉, 성탄절이란 아기 예수 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크리스파스가 휴일이다. 기독교가 국교도 아닌데, 어째서 휴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참고로 공평성을 기하기 위해서 부처가 태어난 석가탄신일도 휴일이다. 석가탄신일은 음력 4월8일 이다. 일명 초파일(t7,-4 B )로 불린다 아무튼 난 기득교나 천주교인이 아니다. 나는 어떠한 종교와토 전혀 관련이 없다. 덧붙여서 종교도 날 싫어한다. 왜냐하면 난 마 법사이기 때문이다. 마법은 이단의 힘이 아니던가? 옛날 같았으면 바로 화형감이다 물론 지금도 안심할 수는 없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오직 성 서 에 나와 있는 대로만 행동하려하니 생각해보면 판타지 세계 자체가 이 세계 종교와는 맞지 않는다 인간 외에 지성체가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에 신 과 맞먹을 정도의 강대한 힘을 지닌 드래곤도 있으니. "와아! 트리다. " 아이들은 가게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트리를 보며 박수를 쳤다 참고로 가게 밖에도 트리를 세워 놨다. 비싼 돈 들여서 장식물이랑 전구까지 주렁주렁 매달았다 으음,투자한 만큼 효과가 있으려나? "염려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가게를 크리스마스 컨셉 으코 꾸미느라 든이 만이 들기는 했지만, 그만큼의 매출 증대 효과 를 기대할 쑤 있습너다. 그리고 한번 쓰고 버릴 것도 아니고, 내년 에 또 쓸 수 있으니 중장기적 관점에시 본다면 분명 이득이 될 겁니 다 "으음, 사일린스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그나지나 크리스마스까지는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 렇게 난리칠 필요가 있나요?' "'한달이나 남았다' 가 아니라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입니 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인형가게의 최고 대목입니다. 크리스마스 가 되면 선물을 사기 하기 마련이고, 캐롤송을 들으면 기분이 들떠 져 지갑을 쉽게 열기 마련입니다 " "그렇군요. 아무튼 저는 사일런스 백작님만 믿겠습니다 " "에. 기대에 부흥하도록 하겠습니다. " 당연히 기대에 부흥해야지. 배출이 예상만큼 오르지 않는다면 니 월급에서 다 떼어 갈테니 "오빠아 ~ ." "응? 왜 그러 니 , 라이야~i" 생측생팔 웃으며 내 품에 안겨오는 라이. 난 라이를 품에 안고 머 리를 쓰다늠어 주었다. 고양이털처럼 부드러운 라이의 회색 머리 카락. 아아~ 손가락 끝에서부터 전율이 이는 듯하다 이렇게 부드 럽나니 ! 라이는 대체 머리카락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걸까? 엘라스틴 이라도 하나?으음, 머리카락이 기니 샴푸 값이 좀 많이 들겠군. 그러고 보면 라이는 어린아이 치고는 굉장히 머리가 긴 편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다니. 루비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정도인데. 이 긴 머리를 관리하러면 힘들지 않을까? 게다가 라이는 묶고 다 니지 않으니 , 머리카락끼 리 엉키기도 할 텐데. 이찌되었든 이 긴 회색 머리카락은 라이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자르는 것은 절대 용납 못한다. "오빠는 라이가 원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나요?' "물른이지. 우리 라이가 원한다면 이 오빠가 뭘 못해주겠니 f' "그럼 저기 있는 별 따서 라이한테 주면 안 돼요?' "아앗! 안 돼요, 오빠! 라이야, 그 별은 루비가 아까 찍었어. 그러 니 루비한테 주세요." 트리 꼭대기에 달린 금색별을 떼이달라고 조르는 라이와 루비 이러는 걸 보면 정말 애들 같다 아이구~ 귀여운 것들 하지만 아이들이 떼어 달라고 해서 떼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트리의 포인트는 꼭대기의 별 아니겠는가)꼭대기별이 없는 트리는 앙꼬 없는 찐빵,광 없는 화투,루시아 없는 히로라 할 수 있다. "안 된단다. 얘들아." "왜 안 되요?" "생각해 보렴. 저 별이 없으면 저 트리가 얼마나 썰렁하겠니 그 리고 저 별이 금색으로 보여 진짜 금으로 착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퍼 별은 도금한 거란다. 그러니 돈도 안 되는 저런 별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단다. 순금이라면 또 모를까." "싫어요!라이는 저 별이 갖고 싶단 말이에요!" "루비도 갖고 싶어요!" "오빠는 라이가 원하는 거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준다 그랬잖아 요. 그런데 왜 트리 위에 있는 별도 안 따다주는 거예요?' '빨리 떼 주세요." 매달려 땡깡을 부리는 라이와 루비. 나는 굉장히 난감해졌다. 이 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버럭 소리를 질러볼까?아니 면, 한 대씩 쥐어박아버려? 요즘 들어 느끼는 거지만, 애 키우는 매뉴얼이라도 하나 있었으 면 좋겠다. 애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무자식이 상팔자라 는 속담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지금은 떼어줄 수 없어. 너희들도 알다시피 이 트리의 포인트는 꼭대기의 저 별이거든. 많은 사람들이 저 반짝이는 금색별을 보면서 소원을 빈단다. 그런데 너희들이 저 별을 떼어가 봐. 그럼 사람들 이 얼마나 실망하겠어? 안 그래? 그럼 너희들은 사람들의 꿈과 희 망을 뺏는 나쁜 엘프가 되는 거야. 둘 다 대답해 봐. 나쁜 엘프가되I 고 싶어?' 내 말에 라이와 루비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아니요오." "그래. 그러니까 오빠가 지금은 떼어쿨 수 없어. 하지만 많은 사 람들이 저 트리를 보며 소원을 빈 다음‥‥‥ 으음, 그러니까 크리스 마스가 지나고 나면 떼어즐게. 그러면 돼지?' 라이와 루비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정말요?' "응 물론이지. 이 오빠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 이 없탄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이 오빠가 약속과 신의의 대명사잖 아.' 난 아이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라이와 루비는 다시 자기들끼리 뛰어놀기 시작했다. 난 의자에 틸썩 주저앉았다. 아이 들을 상대하다보면 진이 다 빠진다. 젊은나이에 이게 뭔 고생이래? 난 힐끔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는 트리 장긱에 한창이었다 언 제나 보석처림 밝게 빛나는 루시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리고 백금을 실로 뽑은 듯한 플래티나 블론드 머리카락. 나와 루시아의 사이는 여전히 답보 상태. 언제나 제자리걸음이 다. 조금의 진전도 없다. 아아~ 언제쯤이면 그녀의 손을 스스럼없 이 잡을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아이언스 공작님." "....예 ?' "지급 루시아 공주님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 생각하고 계시지 않 았나요?' 어떵게 알았을까?이 인간요즘 '히로심리 연구하기 라는책이 라토 읽나? "그런데 뭘 걱정하지 말아요?' "이재 얼마 후면 크리스마스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도 아시다 시피 크리스마스는 연인들 시간입니다. 선물을 교환하기도 하 고,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하지요. 캐를송이 울려 퍼지고,오색 전구가 밝게 빛나는 거리를 루시아 공주님과 팔짱을 끼고 걷는다 고 생각해 보십시오." 난 지니가 말한 대로 생각해보았다 "오오! 이렇게 좋을 수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이번 크리스마스를 잘 활웅하셔서 루시아 공주님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십시오. 그럼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 "알겠습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그나저나 사일런스 백작님도 힘 드시겠군요. 그 많은 여자들을 다 만나려면." 내 말에 지니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는 중입니다. ' 그래. 너 잘났다 사실 그동안 나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란 휴일 이상의 의미를 지 니지 못하였다. 그럼 여기서 잠깐과거 나의 크리스마스를 살펴보 토록 하자. 중학교 1학년 때. 오한이 일고,고열이 나고,가슴이 아프고,기침이 계속 나오고, 호흡 곤란 증세까지 있었다 뭔 놈의 독감이 이링게 지독하다 냐‥‥‥ 라고 생각했었는데. 병원에 가보니 폐렴이란다. 크리스마 스이브부터 시작해서 한 달 내내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 147.GIF *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념하며 담배를 피 기 위해 친구랑 옥상에 올라갔다. 우리 둘은 담배를 맛있게 족쪽 빨며 영 윈한 우정을 약속했다 담배를 다 피고 내려가려 하는데, 큰 문제가 생겼다. 옥상 문이 잠긴 것이다. 마침 친구네 가족들은 전부 외출을 한 상태여서 문을 열어줄 사람은 아무토 없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 눈까지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의 연 인들이야 좋았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내리는 눈이니. 하지만 우 리는 동사의 위기에 직면했다. 다행히 윽상에는 널어놓은 담요가 히나 있었다. 난 그것을 몸에 들러 추위를 면하려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내 친구도 마찬가지 였다 '담요는 내가 찍었다 그 손놓으시지." "누가 할 소리. 그리고 여긴 우리짇 옥상이고, 이 담요는 우리집 거야. 그러니 내가 두르는 게 당연해." '넌 손님접대라는 사자성어도 모르냐?' "아무튼 이 담요는 내 꺼야." '지 자식이, 진짜?' 그날 밤 우리는 옥상에서 생명을 건 결투를 벌였다 응'? 영원한 우정의 약속은 어디로 갔냐고?후후~ 원래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다. 아무튼 긴 싸움 끝에 나는 친구를 때려눕혔고, 딤요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아침 8시까지 그 옥상에 갇혀 있어 야 했다. 그 후, 나는 독감으로 입원했고, 그 친구는 폐렴으로 입원했다 그래도 담요 덕분에 2년 연속 크리스마스 폐렴은 면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네 부모님이 제주도 여행을 가신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네집 이 비었다. 어차피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다들 방에서 뒹굴거리며 방바닥 긁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친구네 집에 모이기로 했다 모인 인원은 4명. 마침 인원도 적당했기에 4천만 국민의 레저 스 포츠인 고스톱을즐기기로했다. 당시 '고스톱계의 검은혜성' 이 라 불리던 나는 친구들이 상대라 하여 방심하지 않고, 열과 성을 다 해 첬다. 그 결과 3명은 한 시간도 안 돼 개털이 되었다. 난 내 앞에 가득 쌓인 동전과 지폐를 끌어 모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 놈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건 사기야!저 녀석이 무슨 술수를 쓴 게 틀림없어 !" 그러자 다른 녀석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안아. 어쩐지 저 녀석한테만 패가 딱딱 붙더라." "이 자식 완전 사기꾼 아냐f' 고박을 운으로만 하는 거라고 믿는 놈들은 평생 가도 호구 신세 를 면하기 힘들다. 도박은 운보다는 실력이 승패를 가른다. 실력이 없으면 좋은 기회가 와도 그냥 지나치고, 나쁜 상황이 와도 빠져나 오질 믓한다. 도박을 운만으로 하는 거라면 도박사라는 직업이 왜 생겼겠는가? "내 돈 내놔. 이 자식아!' "그래. 내 돈 내놔t" 도박판에서 이러는 인간들만큼 짜증나는 즉속들이 없다. 졌으면 곱게 물러설 것이지 이게 뭐하는 추태란 말인가? "니들 정말 이따위로 나오겠다 이거' 우리는 피 터지게 싸웠다. 유리창이 깨지고 비명소리가 터져 나 왔다. 놀란 이웃집에서 신고를 했고,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유치장 에서 보내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길거리에 쌍쌍이 걷는 연인들을 보자 정체모를 울분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길거리에 서 있 는 차 백미러에 테 러를 가했다. 화려한 앞차기로 백미러를 개박살 낸 것이다. "아니, 이런 개쌍놈을 봤나 네놈이 지금 국가의 공권력을 물로 보는 거냐1잡아서 유치장에 처넣고 삼일밤낮을 고문해 주마?' "헉 쓰 ...좆 됬다,' 이런 젠장. 하필 건드린 차가 경찰차라니 -_-'! "거기서 , 임마,!' 입장 바꿔서 생각해서 당신 같은 서겠어? 난 빙판길을 쇼트트랙 경주하듯 달렸다. 그런 내 뒤를 경찰이 호 루라기를 불며 좇아왔다 "저놈 잡아라!" 그러자 길거리에 있던 시민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향했다. 난 놀라 앞에 가던 사람을 가리키며 막했다. "저놈 잡아라! 저놈이 범인이다!" 그러자 용감한 시민들이 내 앞에 가던 사람을 향해 달러들이 마 구 두드러 패기 시삭했다. 덕분에 무사히 도망쳐서 2년 연속 유치 장 행은 던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대략 이때쯤 이그리드에게 소환 당해서 판타지 세계에서 개고생 했다. 으음, 비참하다 못해 화가 나려고 한다. 행복해야할 크리스마스 가 어째서 이런 악몽이 되었는가1 나 징말로 신에게 미움 받고 있 는 건가?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다르다 내 곁에는 루시아가 있지 않 은가?더 이상 쌍쌍이 걷는 연인들을 보고 분노에 휩싸여 길거리에 서 있는 차 백미 러에 테 러를 가할 필요는 없다. 그동안 커플부대의 염장질에 큰 타격을 입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한때는 '커플지옥 솔로친국 이라는 문구를 외치고 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옛날 일이다. 나도 이젠 커플부대가 되었으니까 후후후~ 루시아가 내 곁에 있는 이상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루시아와 어떻게 하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까? 눈 내리는 거리 를 루시아와 팔짱을 끼고 걸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뭘 해줘야 하는 지지? 크리스마스 10일 전 '전체 손님은 20퍼센트 정도 증가하였고, 매출은 30퍼센트 정토 증가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며 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한해 저녁 9시까지 연장영업을 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상입니다. " 지니는 보고서를 덮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은 개장 전 잠깐 회 의를 갖는 시간. 간단한 과자와 음료를 마시며 떠드는 것이 보통이 지만, 이렇게 매출 증대에 대한 논의를 하기도 한다. 논의라고 해봐 야 지니가 의견을 내면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 지만. 아무튼 매출이 증가 추세라니.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투자한 만큼 못 건지면 어쩌나.하고 솔직히 걱정했는데. "으음,7시에 문을 닫으니 ,9시까지 연장영업을 하다는 것은 2시 간이나 더 일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럼 저녁은 언제 먹죠f' "교대로 먹어야겠지요." 나의 물음에 지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별 로 내키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물론 좋지만, 저녁 시간에 다같이 둘러 앉아 밥을 먹는 것도 행복이라면 행복이다. 그리고 9 시까지 연장영업을하면 루시아와둘만의 시간이 줄어클 것은 불 을 보듯 뻔하다 "회사가 늦게 끝나 지친 몸을 이끌고 애들 선물을 사러오는 샐러 리맨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한 명의 손님이 줄어들수 록, 그만큼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이언스 백 작님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주십시오." "으음‥‥‥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회사가 늦게 끝나는 샐러리맨들은 아 이들의 선물을 사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아이들과 함 께 인형가게에 와서 같이 선물을 고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니, 루시아,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프 로니스가 앓아 있었다. 사장은 나이기에 결국 모든 결정은 내가 니 려야 한다 난 심사숙고한 끝에 입을 열었다. "모두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지 요. 찬성하시는 분들은 손을 들어 주시고, 반대하시는 분들은 가만 히 계시면 되겠습니다. " 그러자 모두가 손을 들었다. 나만 빼고. 뭐야?반대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 루시아는 날 노려보며 말했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빼앗을 샘이야?' "아,아니‥‥‥ 뭐 꼭 빼앗는다기보다는‥‥‥ 모두들 힘들까봐." 내가 걱정하는 것은 루시아와 단둘이 있을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다. 사실 애들의 꿈과 희망이야 나랑 뭔 상관이 있는가?난 정착히 7 살 때 꿈과 희망에 대한 찬상을 전부 버리 현실을 직시챘었다 그런데 상창이 뭔가 이상하다. 원래 연장근무를 한다고 하면 사 장이 찬성하고, 사원들이 반대해야하는 것 아닌가?그런데 어째서 나만 반대하는 거지 ? "뭐. 다수의 의견이 그렇다면 어쩔 누 없지. 사일런스 백작님, 가 게 앞어 공지를 불여 놓도록 하세요. 오늘부터 크리스마스까지 9 까지 연장 영업한다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아침 회의가 끝났다. 오픈 전임에도 가게 앞에는 사람들 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아이플 손을 잡고 온 엄마. 팔짱을 낀 연 인들, 지니와 크로니스 팬클럽에 가입된 것으로 보이는 여고생들 등둥. 난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나자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여기 바비와왕자님 세트어디 갔나요?' "둘리랑 도우너 다 팔렸어요f' "까아아~ 우리 애가 없어졌어요?' "트리에 매달리지 마?' "여기 화장실이 어디죠?' "깍깍!지니 오빠다!" "까악! 크로니스 오빠도 있어 ?' "엉엉~ 엄마아~? "사랑해요, 지니 오빠!" "사랑해요, 크로니스 오빠?' "여기 바비인형 세트가 부족해요, 히로님." "창고로 가 봐, 임마?' "창고에도 없어요." "어떻게 된 겁니까,사일런스 백작님? ·지금 공급처에 연락을 하는 중입니다 물량 확보에 최선을 다하 도록 하겠습니다 " "우리 아이 좀 빨리 찾아줘요. 영철아~ 영철아~?' "손 놔! 이거 내가 먼저 잡았어!?' "흥!웃기지 마! 이건 내 꺼야?' "너 혼나볼래?몇 살인데 개겨?' "8살이다? '간 9살이다?' "그럼 난 10살이다 "아깐 8살이라며 ?' "그건 만으로 계산해서 그래?' 난 한국에선10살이야' "젠장, 민증 까봐?' "뭔 민증을 까?우리 아직 민증 안 나왔잖아!" "줄 서세요. 문화시민으고서 이게 뭐하는 플레이에요?' "새치기 하지 마, 이년아." "끼어든 건 너잖아. 빨리 뒤로 안 빠져'f' "이년이 진짜?' 가게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나. 사람들이 물러있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적정 수용인원을 몇 배니 초과한 상항인지라 건물 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토였다. 이러다 진짜 건물 무너지는 거 아냐? 어어~! 트리가 쓰러지려고 한다! "트리 잡아, 인디!무너지면 대형 인명 피해가 예상된다?' "아. 알았어요."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재빨리 무너지려는 트리를 붙잡았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맡은 루시아와 크로니스는 밀러드는 사람들 때 문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헉 !카운터가 밀리고 있다 "진정하세요, 여러분! 모두들 냉정을 되찾으세요! 우리는 올림픽 과 월드컵을 치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비록 우리 국민들이 국회의원들에게는 봉이나 핫바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을림괵과 월드컵 때 보여주었던 그 시민의식은 대 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우리는 서로 힌을 합쳐 국민소득 2 만불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경쟁국들과의 싸움에 서 지지 않을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으란 말이다. 이것들아 나의 주옥같은 연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상태로 가다간 매출이고 뭐고 가게 다 박살나겠군. "아이씨 !오늘 영업 끝이야!다 나가 "꺄 저기 지니님이다. " "까아~ 지니 오빠아~. 우르르! "헐 ! 이쪽으로 오지 마?' 나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여고생들은 우르르 몰려와 나를 마구 짓밟고 지나갔다 "으악! 살려줘~ ?'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구조요청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러한 소 동은 지니와 크로니스가 직접 나서서 장내를 정리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난 후에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잘못하면 여기서 생을 마감할 뻔했군. 루시아는 내 등에 파스 를 붙여주었다. "좀 조심하지 그랬어." '나야 조심했지. 이게 다 지니 때문이야. 헉 ! 거기야, 거기. 거기 에 불여줘."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흣~ 뭐 이 정도 가지고 병원을‥‥‥ 끄아악?' 파스를 붙인 루시아는 내 등을 파앙~ 패렸고, 난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신음했다. 이건 전부 사일런스 지니 그 인간 때문이다. 나 증에 지니 월급 나오면 치료비 청구하든지 해야지. 아예 원천징수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여섯 명이서 그 많은 손님들을 다 커버한다는 것은 무리야. 게다가 지니는 출장 나가는 경우가 많잖아. 거래처 사람들 만나랴, 물건 떼어오랴." "그건 그래. 손님이 이렇게 늘어날 줄은 나도 몰랐어. 언니랑 형 부도 힘들어하는 것 같던데. 한시적으로 아르바이트생 고용이라도 해야겠어."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면접이라도 봐야 하나?' 어차피 인형 가게 일이란 것이 인형을 진열해 놓거나 청소를 하 는 등의 일이니 특별한 기슬이 필요치 않다. "두 명 정도 뽑으면 되려나?' "일단 두 명 뽑고,모자라면 더 뽑도록 하자." 난 바로 가게 앞에 긍고문을 붙였다 라이의 집. 아르바이트생 대모집1 현재 일슨이 부즉한 관계로 아르바이트생을 쁩습니다. 하는 일은 주로 인형 진열과 청소입니다. 시간당 임금은 3000원. 50분 일하 면 10분 휴식을보장합니다. 저희 가게는노동법을 준수하는모범 적인 가게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내일 저녁 7시부터 있을 면 접에 참석해 주세요 모집 인원 : 2명 나이 : 고등학생 이상 대학생 이하 자격 조건 : 여자일 것 크리스마스 19일 전 "라이도 가게 일 도울게요,오빠l "루비도 도을게요 "루도‥‥‥‥ 쾅! "넌 하지 말라니까, 임마! 자신을 칭할 때 이름으로 칭하는 것은 여자아이만의 특권이야' 난 가게 일을 돕겠다고 찾아온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라이, 루, 루비. 이 어린 것들이 가게 일을 돕겠다니. 참으로 기특하다. 그런 데 얘들이 과연 도울 수 있을까? 일이나 더 만들지 않으면 다행이겠 는데. 그렇다고 돕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아이들을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로 오빠 도와줄 거 야?' "네 ~ ,7' "좋아. 그럼 저쪽에 앉아서 가만히 있어줄래T' '예?왜요?왜 가만히 있어야 되요?' "너희들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거든." 내 말의 의미를 한참 동안 생각해보는 아이들. 의미를 알아챘는 지 이내 울음을 터트린다 "우에에엥~ "으아아앙~." "엉엉 ~." 애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루시아가 재빨리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우엥~ 우엥~ 오빠가요‥‥‥ 라이가 도와준다 그랬는데‥‥‥ 막막 필요 없다며‥‥‥ 막막 가만히 있으라고‥‥‥ 우에에엥!" "으앙~ 으'앙~ 막막 그래서‥‥ 막막 슬퍼요‥‥‥ 으아아앙!" "엉엉~ 형 혼나줘요,누나." 눈을 치켜뜨며 나를 노려보는 루시아. 난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 했다. "알다시피 얘들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잖아. 루시아도 그 렇게 생각하지?' "애들이 너 생각해서 도와준다고 나섰는데 그런 식으로 밖에 말 못해?홍! 정말 최저야.' 헐 ! 최저라니 !내가 뭘 어쨌다고?난 옳은 소리 한 것밖에 없는데. 루시아는 아이들에게 바닥 청소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정확히 10분 후 가게 안은 물바다가 되었다. 루시아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번에는 트리에 전구 가는 것을 도와 달라 했다 정착히 l0분 후 가게 안은 정전되었다. "그냥 손님맞이나 하게 하자."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나의 의견에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으음, 실망이 큰가 보군. 나처럼 처음부터 기대를 안 하면 실망도 안 할 텐데 난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손님 이 들어오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최대한 귀여은 표정을 지 으며 '라이의 집에 어서 오세요오~' 라고인사를하는거야.그리 고 손님 이 나갈 때는 '이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 요오~ 라고 인사하는 거야. 참고로 손님이 아무 것도 안 사고 나 갈 것 같으면 어깨동무를 해서 스크린을 짜렴. 그리고 문 앞을 가로 막은 채 '물건도 안 산 주제에 어딜 나가려 그러시나? 이렇게 나오 면 재미없지' 라는 눈빛으로 손님을 노려보는 거야. 지금 오빠 눈 빛 보이지1 눈꼬리를 약간 치켜든 채 입 꼬리를 살짝 올리는 거야. 아! 일루니아 여사님이 오빠를 볼 때 짓는 표정 기억나지? 바로 그 표정을 짓는 거야. 알겠니 ?' "애들한테 쓸데없는 것 좀 가르치지 마!" 퍽! '너무해. 그렇다고 때릴 것까지는 없잖아 " '시끄러.' 루시아는 나를 밀치더니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오빠가 뒤에 한 말은 다 잊어 버려. 알았지?' "예 ~ .' 힘차게 대답한 아이들은 시킨 대로 문 쪽에 일렬로 서서 손님들 을 맞았다. "라이의 집에 어서 오세요오~ !" 허리와 머리를 꾸벅 숙이며 힘차게 인사하는 아이들. 그 때문에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좋아 어쩔 줄을 물라 했다. "이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오~ ' 나가는 손님들은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 다. 으음, 그래도 인사 하나는 잘하는군. 누구 딸인진 몰라도 인사 성 참 밝네. 후후~. "오늘 저녁에 면접 있는 거 잊지 않았지?' "응. 물론이야." 난 이때까지만 해포 별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르바이트생 두 명 뽑는 게 뭐 그리 힘드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녁때가 되자 확실하게 나타났다 "뭐,뭐야?오늘 여기서 집회라도 하나' "설마 저 사람들이 다 면접 보러 온 건 아니겠지?' 나와 루시아는 가게 주차장에 모인 수천 명의 여자들을 보고 벌 려진 입을 다물지 믓했다. 대체 이 엄청난 인원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711다가 더 황당한 것은 그 여자들이 지니 팬클럽과 크로니 스 팬클럽으로 징확하게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실수다 지니와 크로니스의 팬클럽을 생각하지 못하다니 ! 내가 자격 조건을 여자일 것으로 한정 지은 것은 남자 아르바이 트생이 들어을 경우 루시아한테 찝적거릴까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생기다니 ! "면접 보려면 날 새야겠근." "그, 그러게 ." 아마 시간당 3000원이 아닌 무임금이라 하더라도 저 여자들은 일 하고 싶어 할 것이다. 아르라이트생으로 뽑히면 지니와 크조니스 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는 셈이니. "왜 기업들이 얼짱 마케팅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군." 난 혹시나 내 팬클럽이 있나 해서 잘 살펴보았다. 당연이 없었다. 난 남물래 눈물을 삼켰다. 흑~ 어째서 내 팬클럽은 없는 거야?하나쯤은 있어도 되잖아. 다 들 미워 ! 하지만 난 아직 내 팬클럽 결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두고 보 자. 언젠간 반드시 지니나 크로니스보다 더 큰 팬클럽을 만들고 말 리라 아무튼 지금 증요한 것은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2명을 쁩는 일 이다. 그린데 어떡게 뽑지?무슨 기준으로 뽑아? 만약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난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밟혀죽을지도 모른다. 그때 예상치 못한 두 여성이 나타났다. "아!오랜만이야, 히로?' 라이 레얼과 그녀의 팔에 코알라처럼 매달려있는 카르였다. 레몬 덴 머리카락을 포니테 일 스타일로 올러서 묶은 라이 레얼은 예전보 다 더욱 아름다워 진 모습이 었다. 사실 미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라이레얼보다 아름다은 여인은 세 상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키와 들어갈 데는 들어가, 나 올 데는 나은 쭉쭉빵빵한 몸매. 작은 얼굴과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피보다도 붉은 입술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도발적으로 빛났 고, 레몬빛 눈동자는 마치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계속 보고 있자니 빠져들 것만 같다. 난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나한테는 루시아가 있어 ! "어 , 어쩐 일이 에요?' "응. 아르바이트생 구한다기에 온 거야." '난 언니가 오기에 따라 온 거야." 카르는 은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그럭게 말했다 카르도 못 본 사이에 더욱 예뻐진 것 같았다. 마치 얼음인형같이 귀엽고 아름다 운 카르. 화려한 드레스나, 모피 코트 같은 옷을 입히면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다. 카르는 마치 나에게 라이레얼을 뺏기지 않겠다는 듯 그녀 옆에 꼭 붙어있었다 설마 이 둘 화장실도 같이 가나? "그런데 그동안 어디 갔었어요?한동안 안 보이던데." "으응. 카르가 하도 겨울바다가 보고 싶다고 졸라대기에 속초에 갔다 왔어." "겨울바다요?' "응. 카르가 화이트 드래곤이어서 그런지 겨을이 좋은가 봐. 간김에 회도 실컷 먹었어. 온천에서 목욕고 하고." "돈이 어디서 나서 여행을 갔어요?' "아! 필요 경비는 히로 지갑에서 빼서 썼으니까 그렇게 알아." 어쩐지 돈이 새나간다 했어.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무임금으로 아르바이트하려구. 카르 하고 싶대." "분명히 말해두지만 난 너 따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아니야. 난 오직 언니를 위해서 하는 거야. 그 점을 명심해주었 면 해." "하하, 아무튼 고마워요." 결국 나는 라이레얼과 카르를 단기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했다 그런데‥‥‥ 저 수천 명의 여자들은 어떻게 돌려보내지? 크리스마스 17일 전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다. 어린 엘프들이 시청 하고있는 프로는 다름 아닌 그 이름도 유명한 '하나둘셋 이었다. 어린이 여러분. 하나 언니에요. 이제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 네요. 하나 언니는 크리스마스가 참 좋아요. 어린이 여러분도 크리 스마스가 좋지요? -네!네~~! 크리스마스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줘요. 하지만 모든 아 이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산타할아버지는 착한아 이들에게만 선물을 준답니다. 그러니 어린이 여러분은 오늘부터라 도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 해요. 알았죠? "라이야. 정말이야? 정말로 착한아이에게는 산타할아버지가 선 물을 주는 거야?' "응. 전에 책을 읽어보니까 그렇다고 했어." "에이~ 말도 안 돼. 산타할아버지 혼자서 그 많은 아이들을 착 한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어떻게 구분해?' 루의 질문에 라이는 슨가락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으음,그건 구분하는 전담반이 있지 않을까?" "전담반?' "응. 특수조직이 아이들의 신상정보를 입수해서 착한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구분하는 거야. 어쩌면 FRI나 CIA에서 정보를 제공 받을지고 몰라." "그럼 하룻밤 동안 어떻게 전 세계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거야?' "일단 나쁜 아이들이 빠지니 반 정도는 줄겠지. 그리고 하룻밤이 라 해도 나라마다 시차라는 게 있잖아. 즉, 산타할아버지는 시간상 으로 제일 먼저 해가 지는 나라부터 시작해서 제일 늦게 해가 지는 나라를 향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거야." "선물은 어디서 나는 거지? 그리고 그 선물을 어디에 넣어 가지 고다녀 ?' "으음, 그잔‥‥ 아! 마법 주머니가 있는 거야. 4차원 마법 주머 니에 선물을 넣어 가즌고 다니는 거지. 선물은‥‥‥ 으음‥‥‥ 어딘 가에 비밀 공장이 있는 게 아닐까?' "비밀 공장?' "응. " "공장을 짓고 물건을 생산해내려면 엄청난 인력과 자본이 필요 할 텐데,그건 어디서 나는 거지?' 적당히 넘어가도 될 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루. 그리고 그냥 대층 넘기면 될 것을 어떻게든 논리적인 답련을 하려는 라이. 루비는 둘 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돈과 인력을 빼돌리는 게 틀림없어. 아! 혹시 남미에 있늘 마약 농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콜롬비아, 볼리비아, 페루 등등. 그곳이라면 인신매매하기도 쉽고, 마약을 팔아 돈을 마련하 기도 쉬우니까." "오~ 그거 말 된다. 그럼 남미 마약 산업의 대부분은 산타할아버지가 장악하고 있겠네." "응 맞아. 그런 거야." '우와! 라이 너 진짜 똑똑하다. " "헤헤~ 뭘 이 정토 가지. 라이가 원래 좀 똑똑해." 어깨를 으쓱거리는 라이.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산타는 어느새 남미의 마약왕으로 둔갑해 있었다. "산타할아버 지가 마약왕이 면 마약을 선물로 주는 거야7' "마약을 하는 착한어린이에게는 마약을 선물로주지 않을까?' "그런데 마약이 뭐야?' "몰라?' '응. 루비는 마약이 뭔지 잘 몰라.' '딸이 먹는 약 아냐?' "아니야. 라이가 전에 티비에서 봤는데 아편,모르핀, 코카인, 헤로 인,코데인, 페티딘. 메타돈, 등을 말하는 거야. 마취 작용을 극'S 며 습관성이 있어 잘못하면 중독된대. 의료에 쓰이기토 하지만 남 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에 의사 처방 없이는 절대 먹으면 안 되는 아주 나쁜 약이래." "으음, 그렇구나. 그런데 산타할아버지는 그럭게 나쁜 마약을 왜 재배하는 걸까?' "그런 게 바로 필요악이라는 거야. 착한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기 위해서라면 마약 재배는 어쩔 쑤 없다는 거지." 루는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타할아버지가 정말 있는 걸까?흑시 누군가가 지어낸 얘기는 아닐까?' "아니야. 산타할아버지는 븐명히 있어. 요즘은 코카콜라 선전에 도나오잖아." "그게 더 수상해. 산타할아버지가 왜 코카롤라를 마시는 건데?' "펩시콜라가 싫은가 보지 ." "오빠한테 물어보자." "그래. 루비 말대로 오빠한테 물어보자." 내 앞에 쪼르르 몰려온 어린 엘프들 "무슨 일들이니 ?' 라이랑 루비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오빠,산타할아버지 알아요?' "응?갑자기 웬 산타?' "산타할아버지 진짜로 있는 거 맞죠?그렇죠?' "뭐 ? 산타할아버 지가 있냐고? 푸하하~ !" 난 대답을 하기에 앞서 웃음을 터트렸다. "우헤헤헤~ 산타래~ !" 간만에 실컷 웃은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산타라는 건 말이지 이 세상에 만‥‥‥ 커 억 !" 갑자기 내 뒤통수에서 엄청난 아픔이 느껴졌다. 난 고개를 번쩍 들어 날 때린 사람을 찾았다. 나의 예쁘고 깜찍하게 생긴 뒤통수를 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일루니아 여사님이었다. "아니 , 이 아줌마가 지금 뭐하는 짓이야?' "시끄러, 이 뺀질아!" "끄아악! 이것 좀 놓고 말해 ?'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 귀를 붙잡더니 질질 끌고 방 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방문을 닫은 후 나한테 따졌다. "지금 제 정신입니까?' "예 ? 제가 윌요?' "아이들의 동심을 짓밟으려 하다니. 정말 인간 이하군요." "뭐라구요?' "산타를 믿는 아이들의 저 눈망울이 안 보이세요?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도 어렸을 때 산타를 믿으셨을 거 아닙니까?' "예?저는 정확히 7살 때 세상의 진실을 깨우쳤는데요." "세상의 진실이라는 게 뭐죠?' "유전무죄 무전유피.대한민국 사회이서 돈이면 안 되는 일 얼다. 무조건 돈이 장땡이다 등등이죠." "뭡 니까, 그 한심하다는 눈빛은?' "저 아이들은 지금 산타를 믿고 있어요. 그러니 아이언스 공작님 께서는 아이들에게 산타가 존재한다고 말해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 주세요.' "저보고 지금 거짓말을 하라는 겁니까?' "아무튼 시키는 대로 해요!" 난 하는 수 없이 일루니아 여사님이 시킨 대로 아이들에게 말했 다 "얘들아 산타는 정말로 존재한단다. " "거 봐. 라이랑 루비 말이 맞잖아. 산타할아버지는 정말로 있었어 "알았어. 미안해." 이어서 아이들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왜 코카콜라 선전에 나오는 거예요?' "으응. 그건 코카콜라가 산타할아버지의 이미지를 만들었기 때 문‥‥‥ 이 아니라 산타찰아버지가 코카콜라를 좋아하기 때문이란 다 생긴 것부터가 콜라 좋아하게 생겼잖니. 아! 참고로 콜라 많이 먹으면 이 썩으니, 먹고 난 후에는 꼭 이를 닦으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의 복장은 빨간색 원단에 하얀색 솜 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옛날에는 산타 복장이 각 나라마다 다양했 다. 코카콜라는 자사 흥보 차원에서 산타 복장을 만들어 냈는데 그 게 바로 지금의 산타복이다. 빨간색과 하얀색은 코카콜라의 로고 색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다보니 코카콜라가 만들어낸 산타 캐릭터가 지금은 전 세계의 보편적인 산타로 둔갑했다. 이런 걸 보고 우리는 마케팅 의 승리라 한다. "산타할아버지가 남미의 마약왕이라는 게 사실이에요?' ‥‥그건 뭔 소리니 ' "그런데 우리 집은 굴뚝이 없는데 산타할아버지가 어떻게 들어 와요?" "굴둑이 없어포 걱정할 것 없단다. 산타는 잠입 침투의 귀재거 든. 솔리드 스네이크토 산타한테는 한 수 접어줄 정도지." "솔리드 스네이크는 누구예요?' "잠입 침투의 귀재로서 메탈기어 솔리드라는 오락에 출연했지. 아무튼 산타한테 있어서 현관문을 따거나 잠긴 창문을 여는 것은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려무나." "산타할아버지는 왜 양말에 선물을 넣어쿠는 거예요?' "그건 산타가 양말 제조업체와 모종의 밀약을 맺었기 때문이지. 지금모방송사가 '물은생명이다' 라는캠페인을하고 있잖아.그 런데 그 방승사 대주주인 모 기업은 하수처리장을 짓고 있다는 소 은이 있더군. 산타도 마찬가지야. 산타가 양말에 선물을 넉어주면, 당연히 양말 판매가 증가하겠지?그럼 어디가 재미를 보겠어?당연 히 양말 제조업체가 재미를 보는 거야. 원래 세상은 다 이렇게 돌아 가는 거란다. " "산타할아버지는 왜 착한아이들한테만 선물을 주는 거예요?' '예산 부족곽 바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서지. 만약에 모른 아 이들에게 선물을 준다고 가정해 봐.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어? 그 리고 선물을 못 받은 아이들은 산타한테 항의를 할 거 아냐? 왜 난 안 주냐고. 그림 산타가 할 말이 없잖아. 그래서 착한아이들한테만 선물을 준다는 조항을 덧불인 거야. 그럼 왜 선물을 안 주냐고 따져 도, 넌 나쁜 아이니까 안 준다고 우기면 그만이지. 우리는 이런 것 을 불공정 거래조항이라 한단다. " "루돌프 코는 왜 빨개요?' 그건 루들프가 산타 몰래 산타가 꼬불쳐 놓은 슬을 퍼마셔서 그 런 거야.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산타는 열 받아서 루돌프의 뿔 을 잘라 달여 먹었지. 피장파장이라고나 할까? 또 뭐 궁금한 거 없 니 ?' "산타할아버지 셀매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 거예요?' "하늘을 나는 순록들이 끌기 때문이지." "순록들은 어떻게 하늘을 나는 거예요?' "개들은 변종 순록이야. 아까 루돌프가 술 퍼마신 것부터가 뭔가 이상하지 않았니? 개들은 정상 순록이 아닌 돌연변이들이지. 참고 로 걔들은 크리스마스이브 밤부터 크리스마스 날 해가 뜨기 전까 지만 날 수 있단다. " "왜요?' "평소 때 날아다니면 이상하니까. 만약 라이가 어느 날 길을 걷 는데 순록이 날아다닌다고 생각해 봐. 뭔가 이상하지 않니 ? 물론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순록이 날아다니는 건 이상하지. 하지만 그 때는 '아!오늘이 크리스마스구나' 하며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잖아. 하지만 평일에는 그게 안 되지." "산타할아버지 건강한가요?' "그 몸매에 건강할 리가 있니?척 보기에도 동맥 경화,고혈압,악 성 종양, 당뇨병 . 백내장, 심근 경색증, 폐기종 등등의 성인병에 시 달리는 것 같지 않니?' "산타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뚱뚱한 거예요?' "콜라 많이 마시고 가까운 거리도 썰매 타고 다녀서 그래 즉. 지 나친 열량 섭취와 운동부족이 문제가 된 거지."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당항하지 않고 침착하고 논리정 연하게 답변해주었다. "우와i 대단해요, 오빠! 오빠는 산타할아버지에 대해 모르는 게 없네요." "푸하하~ 뭐 이 정도야 기본이지. 그나저나 더 궁금한 건 없니 ' 네l. 없어요' "그럼 가서 계속 놀렴." 아직까지도 산타의 존재를 믿는 순수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니 나도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크리스마스 보름 전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캐롤송. 곳곳에 세워진 트리. 쌍쌍이 걷는 연인들. 이 모든 것이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온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난 루시아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대체 어떤 선물 을 줘야 루시아가 기뻐할까? 여자한테 선물을 해본 적이 있어야 말 이지‥‥‥ 난 생각 끝에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기로 하였다. "루시아에게 윌 선물하면 좋을까요,사일런스 백작님 '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물해야겠지요." "여자들이 좋아하는 게 뭔데요?' "선물은 일단 받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어야 합니다. 필요도 없는 선물은 받기 부담스러울뿐더러 귀찮기까지 하지요. 그리고 너무 고가품이어도 안 됩니다. 받는 사람에게 부담을 줄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그래서 무슨 선물이 좋다는 건가요?' "제 생각에는 중저가의 향수가 좋을 듯합니다. 약 10만원 정도의 향수라면 루시아 공주님께서도 그리 부담을갖지 않으실 겁니다. " "네? 10만원이 중저가에요?' "수천만 원짜리 향수도 있습니다. " 한번 뿌릴 때마다 수십만 원씩 날아가겠군... -_-. "으음,향수라‥‥‥ 루시아가 좋아할까요?' "원하신다면 제가 친히 루시아 공주님에 물어보겠습니다. " "그래 주실래요?'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네 .' 루시아는 가게 카운터 에 앉아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지니는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어쩐 일이야,오빠?' 루시아는 어렸을 때부터 지니를 봐왔기 때문인지, 지니의 외모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몇 안 되는 여자 중 하나였다. 만약 루시아가 보 통 여자였다면 지니가 다가왔다는 것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을지 도 모른다. 루시아와 지니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 였다는 것은 히로에게 는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군요." "응?갑자기 뭔 소리야?' "크리스마스 시즌은 연인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시기입니다. " 하긴,요즘 부쩍 커플이 늘어나긴 했다. 거리에 나가보면 전부 쌍 쌍이니. 크리스마스가 언제부터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기보다는 연인들을 위한 이벤트날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물을 주고받 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을 왜 나한테 하는 거야?'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히로를 위한 선물‥‥‥ ?' 루시아는 히조에게 줄 선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 았다 요즘 정신없이 바쁜데다가 아이들 선물 생각하느라 미처 신 경 쓰지 뭇한 것이다. 루시아의 표정을 살핀 지니는 탄식을 하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굉장히 기대하고 계십니다. 만약 루시아 공주님께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으신다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는 크게 실망하실 겁니다. " "그, 그렇겠지 ?' 히로가 실망하는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루시아는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히로의 선물은 조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히로는 무슨 선물을 좋아할까? "어떤 선물이 좋을까,오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지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생각에는?' "일탄 머리카락에 붉은색 리본을 묶으십시오." "리본을 묶어 ?' "그 다음에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그 리본을 플게 하십시오." "그,그리고‥‥‥ ?' 어째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루시아는 일단 지니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리본을 다 푸시면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오늘밤 나를 선물로주겠어' 라고." 루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눈길로 지니를 보았다 지니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오빠?' "물론 진심입니다. 저도 몇 번 받아봣는데 좋더군요. 선물이란 무엇보다도 주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루시아 공주님께서 마음을 담아 그렇게 하시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 며 기꺼이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 퍽! 루시아는 힘껏 지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저리 가! 오빠랑은 얘기하기도 싫어 !흥,7' *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고, 지니는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아! 루시아 공주님께서 어떤 선물을 원하시는지 물어봐도 되겠 습니까?' "오빠랑은 할 얘기 없다니까. 루시아는 손을 휘둘러 지니를 쫓차냈다 지니는 허리를 숙여 인 사하고 다시 히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알아냈나요?' 나의 물음에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저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계십니다. " 으음, 지니의 외모와 말발도 루시아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후후~ 하긴 루시아는 날 좋아하니까, 지니 따위에게 신경 쓸 리 없지. 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루시아에게 무슨 선물을 줘 야할지 정말 걱정이다. 루시아 마음에 쏙 클 만한 선물이 없을까? 난 직접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일까지 남한테 의지할 필 요는 없겠지. 그래. 내 일은 내가 해결하는 거야! "아!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 "뭐라?그게 정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기대하셔도좋을 겁니다. " 루시아가 나를 위해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한다니 ! 대체 무슨 선물일까?아~ 궁금하다. 궁금~ 궁금~ 크리스마스 14일 전 인형가게에 단기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된 라이레얼과 카르. 그 들은 무보수 노등임에포 불구하고 열심히 일했다. 아니 정착히 말 하자면 라이레얼은 앉아서 지시하고카르 혼자 열심히 일했다 둘이서 하기에도 힘든 일을 카르 흔자서 하려니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카르는 자신이 열심히 일할수록 라이레얼이 편해 진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저 , 저기요‥‥‥ 언니 ‥‥‥ 조심스럽게 라이레얼을 부르는 카르. 의자에 길게 누워 여성잠 지를 읽던 라이레얼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응? 왜 ?" "언니 크리쓰마스에 뭐할 거예요?' "일해야지. "일 끝나면요' "집에 가서 특선영화 봐야지.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재밌는 거 많 이 할 테 니 ." 그 말에 카르는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 기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언니랑 꼭 좋은 추억을 만들 거야! 나한테는 오 직 언니뿐이니까. 카르는 다가가 라이레얼의 무릎 위에 앉았다. 라이레얼은 카르 를 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쪽~. 그러자 새하얗던 카르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아~ 언니 ~ ' 기절할 것만 같은 행복감. 라이레얼은 그녀에게 있어서 삶의 이 유 그 자체였다. 버들랜드에서 라이레얼을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 해버 렸다. 그때부터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레몬빛 머리카락과 레몬빛 눈동자를 지닌 여성에게 머물러 있었 다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이런 감정을 느긴 적은 처음이었다 라이레얼은 부고러워하는 카르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카르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까지 조금씩 떨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또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라이레얼은 가늘 긴 손가락으로 카르의 얼굴을 만졌다. 부드러운 살결의 감 촉. 라이레얼은 카르의 흰색 머리카락을 뒤로 슬쩍 넘겨 목덜미가 드러나게 했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목덜미를 할았다. "아!아. 안 돼요, 언니. 이, 이러시면‥‥‥ 말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라이레얼의 픔속으로 더욱 파고드는 카르 키가 크고 터프해 보이는 여인과 인형처럼 귀여운 소녀가 벌이는 충격적인 영상에 인형을 고르던 사람들은 동작을 멈추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난 들어온 물건을 픔목별로 창고에 정해놓는 중이었다. "으음, 이건 이쪽에 능고, 저건 저쪽에 놓으면 되겠군 " 하루 종일 허리토 못 펴고 일했더니 죽겠다 이러다가 허리에 문 제 생기는 거 아냐?으음, 그럼 큰일인데. 허리에 문제가 생기면 라 이 동생 만들어주는 계획은 물 건너가는 거잖아. 남자는 허리가 생 명이지. 이제부터라도 허리를 잘 관리해야겠다. 생각해보면 내 허리가 이렇게 안 좋아진 것은 다 라이와 루비 때 문이다 걔들 비행기 태워주느라 허 리가 남아나질 않지. 아아~ 이제부턴 비행기도 좀 자제해야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열심히 일하는데 라이와 루비가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 오빠아~ ?' "응?왜 그러니?' 라이와 루비의 얼굴을 보자 일단 두려은 생각부터 들었다. 설마 또 비행기 태워달라는 건 아니겠지? "큰일 났어요,오빠 " "응? 무슨 큰일f" '가게 안에서 라이레얼 언니와카르 언니가 막막 이상한 짓해요." "이상한 짓 이라니 ?' "라이레얼 언니가 카르 언니 목덜미를 막막 할고, 막막 서로 껴안도 그래요 "뭐라?그 말을 지금하면 어쩌자는 거야?어디야?빨리 안내해 ?' 난 황급히 아이들을 쫓아갔다. 라이 레얼과 카르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니. 빨리 가서 구경을‥‥‥이 아니라 뜯어 말려야지. 라이와 루비가 도착한 곳은 신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 한가운데에 라이레얼과 카르가 있었다 라 이레얼은 의자에 앉아있었고, 카르는 라이레얼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라이레얼이 카르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자, 카르는 얼글 을 새빨갛게 불히며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사실 행동 자체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좋게 보면 언니가 여 등생 타이르는 것으로도 보일 쑤 있으니.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외 설적으로 보이는 걸까? 일단 라이레얼의 눈빛이 문제였다. 라이레얼의 눈빛은 마치 토 끼를 눈앞에 둔 승냥이의 눈빛과도 같았다. 그리고 카르의 저 표 정. 잔뜩 겁먹고 부끄러워하는 표정이라니 ! 게다가 라이레얼이 귓 가에 속삭일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하며 작은 신음성과 함께 뜨거 운 입김을 토해낸다. 이러니 외설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라이야,카운터에 있는 디카 가져와라 " "예1 디카는 왜요?' '당연 도촬하려고‥‥ 가 아니라. 그냥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 윌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니?응?' 라이는 재빨리 디카를 가지러 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이가 들 아오기 전에 상창이 끝이 났다. "아! 히로다?' 라이레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와락 껴안았다 헉 ! 사람들 많은 긋에서 이런 대담한 짓을 하다니 ! "어쩐 일이야, 히로?' "그, 그러니까 그게요‥‥‥ 두 분의 행위에 대해 별 다른 이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만하면 사람들 없는 곳에서‥‥‥ 그러니 까 둘만의 장소에서 하심이 어떠신지?' "뭐?너 지금 나랑 언니 사이를 질투하는 거야?내가 언니랑 무슨 짓을 하던 니가 뭔 상관인데?' 눈 꼬리를 팍 치켜올리며 대드는 카르. 비륵 외형은 15살 정도의 소녀의 모습이지만 그 실체는 화이트 드래곤. 솔직히 카르가 이렇 게 나오면 굉장히 무섭다. 설마 여기서 본체로 폴리모프하지는 않 겠지? 난 재빨리 라이레얼 뒤로 숨었다. "재 좀 말려줘요,라이레얼." "카르, 너 지금 히로한테 뭐하는 짓이야? 어서 잘못했다고 사과 하지 못 해?' "어, 언니‥‥‥ 흑흑~ 너무해요, 언니. 어째서 저 인간을 그렇게 감싸주시는 거죠' 카르의 은구슬 같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마 치 진주 같은 그 눈물은 햇살에 아름답게 부서져 내렸다. 카르가 우 는데 어째서 내 가슴이 아픈 걸까? 갑자기 카르를 살짝 안아 위로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든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냉정했다 '빨리 히로한테 사과하라니까. 안 그러면 카르 니 얼굴 다시는 안 볼 거야." 라이 레얼의 말에 놀란 카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내 앞에서 고 개를 숙였다. "혹흑~ 미, 미안‥‥‥ 으아아앙~." 억지로 사과를 한 카르는 바닥에 엎어져서 울음을 터트렸다. 사 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향했다. '여자애를 울리다니.' '그렇게까지 해서 사과를 받고 싶었냐? '생긴 것도 별 볼일 없게 생긴 주제에.' 나쁜자식? 뭐야, 이 반응은?나만 나쁜 놈 됐잖아! "뭘 잘했다고 울어?카르 너 뚝 그치지 못해?그리고 사과가 그게 뭐야?좀더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당장 일어나서 다시 해?' "저,저기‥‥ 라이레얼." "응?왜 그래, 히로?카르 좀더 혼내줄까?' "아,아니요. 그게 아니라‥‥‥‥ "알았어. 히로 맘 내가 다 알아. 내가 당장 카르 더 혼내줄게. 카 르 너 똑바로 하지 못해?' "흑혹~ 언니이~." 점점 더 나만 나쁜 놈이 되어 가는 상황. 난 라이레얼을 뜯어 말 렸다 "그만해요,라이레얼. 카르고 많이 반성했을 거예요." "아니야. 얘는 더 혼나야 돼. 다시는 히로한테 대들지 못하도록 혼쭐을 내줘야 해." "헉 !안 되요,라이레얼 "알았어. 히로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만 둘게." 라이레얼은 카르를 잡고 일으켜 주었다 카르는 서운하기도 할 텐데 순순히 라이레얼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라이레얼에게 매달 려 펑펑 눈물을 쏟았다. "으아아앙~ 얼마나 서러울까 카르는 라이레얼이 내 편을 들어진다는 것이 가장 서 러운 듯했다. 괜히 미안해지는군. "그만 울어." 라이레얼의 말에 억지로 울음을 그치는 카르. '훌쩍~ 흐꼭! 흐꼭?' 그 모습이 더욱 불쌍해 보인다. 아아~ 내가 진짜 정말 매우 굉징 히 나쁜 놈처럼 느껴진다. 그나저나 카르가 우는 모습은 정말로 귀 엽다 얼음 인형처럼 생긴 카르는 울면서도 별 다른 표정 변화가 언 다. 그 점이 더욱 귀엽게 느껴진다. 으음, 이런 여동생 하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앞으코는 그러지 마. 알았지?' "흘쩍 ~ 네 , 언니 ." 라이레얼이 카르를 달래는 모습은 내가 라이를 달래는 모습과 별 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 둘 일은 언제하려나? 괜히 고용한 거 아냐? 크리스마스 13일 전 난 아직도 루시아에게 무슨 선물을 줘야하나 고민하는 중이었 다. 으윽, 여자 선물 고르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난 일단 루시아에게 접근해 보았다 루시아는 아이들에게 들러 싸여 있었다 "산타할아버지 얘기해 주세요, 언니." "루돌프 얘기가 듣고 싶어요." "전에 오빠는 루돌프가 산타가 꼬불쳐 놓은 술을 퍼마셔서 코가 빨개졌다고 했는데 , 사실이 에요?' 아이들이 옷을 잡아당기며 조르자 루시아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얘기를 시작했다. "루돌프는 코가 아주 빨갰어. 얼마나 빨갰냐면 반짠반짠 빛이 날 정도로 빨갰어. 전에 히로 오빠가 한 얘기는 다 잊어버리렴. 다 헛 소리니까." 헉 !다 헛소리라니?그래도 몇 개는 맞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루돌프 코가 너무 빨개서 다른 순록들이 놀렸어. 코가 빨갛다고 말이야. 크리스마스이브 해가 저물자 산타할아버지는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선울을 주기 위해 썰매를 타고 가려고 챘어. 그 런데 그날 마침 안개가 짙게 껴서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야. 산 타할아버지는 어떡게 할까 고민하다가 루돌프를 발견했지. 그리고 루돌프에게 부탁했어. 루들프 코가 밝으니 썰매를 끌어 달라고. 루 돌프 덕분에 산타할아버지는 무사히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줄 수 있었어. 그 후로는 모든 순록들이 루돌프의 빨간코를 부 러워하게 되었단다 " 루시아의 얘기가 끝이 났다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족 빨 며 고꺼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손가끌을 러며 물었다. "코가 얼마나 밝기에 안개 속에서도 안전운행을 할 수 있었던 거 예요?안개 짙게 끼면 하이빔 켜도 잘 안보이는데." "매우 밝아. 안개 속에서도 앞이 잘 보일 정도로." "그 정도로 밝으면 루돌프 눈이 잘 안 보이지 않을까요? 하이빔 만 해도 눈이 부신데, 하이빔보다 더 밝다면 엄청 눈이 부실 거 아 니 에요?그렇게 빛나는 게 눈 밑에 있는데 루돌프는 실명 안 해요?' 꼬치꼬치 캐묻는 라이. 그 때문에 루시아는 매우 당황했다 난 흑 시아를 대신해 라이에게 말해주었다. "루돌프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기 때문에 괜찮단다. "예? 선글라스요?' "그래. 아까 루돌프가 왕따였다 그랬지? 사실은 다른 순록들이 루돌프를 왐따 시킨 게 아니라 루돌프 흔자서 다른 순록들을 전 따 시킨 거였어. 루돌프는 캡장이었거든." "그림 루돌프는 싸움 잘 해요?' "물론이지. 루돌프의 눈빛을 제대로 받아낼 순록은 한 마리도 없 어. 그래서 루들프는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거지. 만약 루돌프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았다면 다른 순록들은 감히 쳐다보지고 못했을 걸." "대단해요,오빠!오빠는 모르는 게 없어요.' "푸하하~ 이 오빠가 원래 좀 똑똑하잖니. 뭐 또 궁금한 거 없 "없어요!" '나중에 또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질문하렴. 톡똑한 이 오빠 가 친절하게 답변해 줄 테니. 그럼 다들 저쪽 가서 놀렴." 아이들이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가자 난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루시아는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애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떡해?진짠 줄 알면 어쩌려구?' "그렇게 따지자면 산타와 루돌프가 있다는 것부터가 거짓말이잖 "그,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애들한테는 말하면 안 돼.' "알아. 아이들의 등심을 지켜주고 싶은 거지' "응 . " 이런 아름다운 마음씨라니 ! 얼글만큼이나 마음도 예쁜 루시아. 정말 어떤 아즘마와는 너무 차이난다. 그런데 이건 무슨 향기지? 향긋하면서 달콤한 듯한 향기 이 향기는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줌과 동시에 약간의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대체 이 향기는 어디서 나는 거지? 난 그 향기가 루시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예 전부터 루시아의 몸에서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났다. 그것은 루시아 만이 가지고 있는 향기였다. "저기‥‥‥ 루시아." "응? 왜 ?' "그러니까 이번 크리스마스에 선물· "우에에엥 ?' "큰일 났어요, 언니. 라이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어요!" "뭐 ?' 루시아는 재빨리 구급상자를 꺼내 들고 라이에게로 달려갔다. 흘로 남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재들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군. 그래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그건 바로 루 시아에겐 향수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향수도 루시아의 몸 에서 나는 향기보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지는 않을 테니. 크리스마스 12일 전 "저 , 저기 ‥‥‥ 일루니아님 ." "왜 그러세요, 인디님 ?' "일루니아님께서는 어떤 선물이 갖고 싶으세요?' "네 ?' "이번 크리스마스에 일루니아님께 선물을 해드리고 싶어요. "괜찮아요, 인디님. 선물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예?하지만‥‥‥ "저한테는 오직 인디님만 있으면 돼요. 인디님 자체가 저에게는 선물이나 다름없는 걸요." "이, 일루니아님‥‥‥ 흑~ 저한테도 오직 일루니아님뿐이에요. 사랑해요, 일루니아님." "저도 사랑해요, 인디님." "놀고 있네 난 가게 안에서 염장질에 한창인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 커플은 이젠 아주 주위 시선에 신경도 안 쓴다. 애 들 교육에 안 좋게 저게 뭐하는 짓이 래? 인디야 그렇다 치자. 그런 데 저 아줌마는 대체 뭐야?나이를 생각해야 할 거 아냐,나이를. 저 나이에 연애질이라니 ! 흥!웃기지도 않아! 크리스마스가 점점 다가오면서 모두들 마음이 들뜨는 모양이었 다. 솔로들은 외로워 견딜 수 없겠지만, 커플들은 신이 났다 저기 서 놀고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커플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 가? 후후~ 예전 크리스마스에는 나도 솔로였지. 여자친구 없는 외 로움과 싸늘한 겨울바람에 몸을 떨어야만 했지. 너무 열 받은 나머 지 괜한 차 백미러에 테러를 가하기도 했지.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루시아가 있다. 드디어 나도 커플부대의 일원이 된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렁게 하세요, 히로님?' 나에게 다가와 묻는 인디. "신경 쓰지 마라. 니가 알아봐야 소용없으니."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 마침 입이 심심했기에 난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 그러자 인디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커피잔을 내밀었다. 난 커피 잔을 받아들다가 문득 인디의 슨에 시선이 머물렀다 "잠간만 손 줘봐." "왜, 왜 이 러세요?' "손 좀 줘봐. 잠깐만 보게." "이, 이러지 마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뭐야? 이 자식 왜 이 래? 몸까지 심하게 떠는 인디. 검은색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하 다. 순간,나는 커피를 인디의 얼굴에 화악~ 뿌려버리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누가 너 잡아먹는데?잠깐 손 좀 보자니까 왜 이래?' "흑혹~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전 결혼한 몸이랍니다. 흑혹, 도와 주세요, 일루니아니임~.' 누가 보면 내가 인디를 덮치려는 줄 알 것이다 인디가 아무리 예 쁘게 생겼다 해도 생물학적으로 분명 남자다 그리고 나는 남자에 게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과민반 응 하는 거야? "무슨 일이에요, 인디님?'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일루니아 여사님. "헉 !" 난 일단 몸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참고로 내가 몸을 피하려는 것은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함이지, 결코 일루니아 여사님 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창고로 몸을 피한 나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일루니아 여사님이 쫒아오지 얕나 살펴보았다. 다행히 일루니아 여사님의 모습은 보 이지 않았f. "휴우~ 다행이다. " "무슨 일이시죠?' "앗! 계셨네요." 창고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붉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미 청년. 다름 아닌 크로니스였다. 크로니스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 다. 난 조각 같은 크로니스의 얼굴을자세히 볼 수 있었다 으음, 팬클럽이 생길만 하군. "이곳에서 뭐하고 계셨어요?' "창고 청소 중이 었습니다. " "창고 청소요? 아니 , 왜 그런 힘든 일을 하고 그러세요? 그런 건 지니한테나 맡기시지." 크로니스는 읏음을 지었다. 지니의 염장 미소와는 차원이 다른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미소다. 난 그 미소에 잠간 시선을 빼앗겼다 "저, 저기‥‥‥ 제가 도와드릴게요." "저 혼자서도 팬찮습니다. " "아니에요. 둘이서 하면 더 빨리 끝나잖아요." 나는 크로니스와 함께 창고 청소를 시작했다. 난 청소를 하는 내 내 크로니스를 힐끔힐끔 보았다 "왜 그러시죠?' "아, 아무것도 아니 에요." 크로니스에게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다. 받은 것은 많은데 내가 해즌 것은 정작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 근래 이 러저런 일들이 많아 크로니스에게 더욱 신경을 못 써줬다. "저, 저기 이제 귿 크리스마스인데 뭐 받고 싶은 거 없으세요?' "선물해 주시게요?' "물론이에요. 크로니스가 원한다면 뭐든 선물해 즐게요." 크로니스는 읏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당신을 보며 그를 떠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 니까요." "그, 그래요?' 크로니스는 아직도 이그리드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종족이다. 크로니스는 수명이 끝날 때까 지 이그리드를 잊지 못할 것이다. 오래전에 사랑한 감정이 계속 남아있는 채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해서 그에 관한 기억과 그를 사 랑한 감정을 지니고 살아야한다면. 아마 인간이라면 미쳐버 렸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 통일 수도 있으니 "그리고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햄복해요." "네 ?' '당신이 아니었으면 전 계속 이그리드를 생각하며 고퉁스러워했 겠지요. 하지만 당신 덕분에 이그리드에 대한 기억을 추억으로 간 직할 수 있었어요. 제가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저한테 는 선물이에요." '크,크로니스‥‥‥ 흑~." 난 크로니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크로니스의 말 한마디 한마 디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크로니스는 제게 있어서 정말 소중한 친구에요. 앞으로도 계속 참께 있어줘요." "예 ." 크로니스 같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난 감동하고 또 감동했다. 크로니스에게 어을릴만한 크리스마스 선물도 생각해 봐야겠군. 난 아까 인디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떠을렸다. 그것은 결혼반지였다. 루시아의 가느다랗고 모양 좋은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으면 얼마나 잘 어울릴까? 결혼반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커플링 정도는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래.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커플링을 장만하는 거야 크리스마스 11일 전 "언니 ,방에 있어?' 루시아는 방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앉아 무언가를 하던 인디는 가지고 있던 것들을 재빨리 이불로 덮었다. "무,무슨 일이세요?' 인디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시아는 이상한 느 낌 이 들었다. 어째서 형부가 이렇게 당황하는 걸까?갑자기 방문을 열었을 때 당황할 일이란 것이 대체 무엇일까? '설마 도색잡지라도 보고 있었던 거 아냐?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언니 물래 도색잡 지를 보다니 ! 형부는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니 남자들은 다 똑같아! 루시아는 다가가 이불을 확 들추었다. "아,안 돼요!보지 마세요." "이 , 이게 뭐 예요?' 침대 위에 널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털실 뭉치와 나무로 된 바늘. 그리고 제법 모양이 잡혀가는 스웨터 였다. 인디는 몸으로 그것들을 끌어안아 숨기려 하였지만 소용없는 짓 이었다 "형부가 직접 짜는 거예요?' "네‥‥‥ 인디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담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 얀색 털실로 짜여진 스웨터는 70퍼센트 가까이 완성되어 있었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짜여진 스웨터는 물결무늬 모양이 들어있는 등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언니 주려요?'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렇군요." "저,저기‥‥‥ "예 ?' "일루니아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주세요." "왜요? "그,그냥요. 놀래켜드리고 싶어서요." 루시아는 그제야 인디가 왜 그렇게 숨기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언니한테 깜짝 선물을 해줄 생각이었나 보네. 언니는 좋겠다 ' 새삼 일루니아가 부러워지는 루시아였다. 루시아는 인디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상대가 남자이니만큼 약간 거리를 두어야하지만. 루시아는 도저히 인디가 남자로느껴지지 않았다. 인디도 남자가 가까이 접근하는 것에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여자는 별 로 개의치 않았다. "뜨개 질 잘 하네요." "예. 취미 에요." 드래곤이 취미 한번 고상하다. "뜨개질 하는 거 쉽나요?' 루시아가 눈을 빛내며 몫자 인디는 반색을 했다 "예. 조금만 배우면 금방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정말요?하지만자는 데 오래 걸리지 않나요f' '스웨터 같은 것은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금방 끝낼 수 있는 것 들도 많아요. 뭘 짜고 싶으신데요?' "으음, 스웨터는 힘들다고 하니‥‥‥ 목도리랑 벙어리장갑 어때 요?크리스마스 전까지 짤 수 있을까요T' "열심히 하면 층분히 가능해요. 게다가 루시아님은 손재주가 좋 으니‥‥‥‥ "그럼 가르쳐 주실 거예요, 형부?' "예. 물론이에요. 단‥‥‥ '단?' 루시아는 조건이 붙자 긴장했다 설마 수강료를 달라고 하는 것 은 아니겠지? 아마 히로였다면 당연히 수강료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디는 히로와는 다른 착한 드래곤이었다. "일루니아님께 비밀을 지켜주세요." "아아~ 알았어요,형부." "누구한테 선물하실 거예요?' "크리스마스날 라이에게 주려구요. 아! 라이한테는 밝은 회색이 어울리겠죠?회색 털실 있나요?'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지금 당장 시작하실래요?' "예. 좋아요, 형부." 인디는 뜨개질 재료를 루시아에게 건네주고 방법을 설명했다 전문가의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설명 덕분에 루시아는 빠르게 뜨개 질을 배울 수 있었다. '라이가 회색 목고리를 목에 두르고,회색 벙어리장갑을 끼면 얼 마나 귀여을까? 루시아는 라이의 귀엽고 깜찍한 모습을 떠을리며 열심히 나무바 늘을움직였다 크리스마스9일 전 "어 때요, 오빠?' "루비 예뻐요?' 난 내 앞에 나타난 아이들을 보고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리고 그것은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 등등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와 루비가 입고 있는 옷은 다름 아닌 여자아이용 산타복이었 다 치마 형태로 되어있는 빨갛고 하얀 산타복과 검은색 장화. 그 리고 머리에는 산타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헉 ! 이 렇게 귀여울 수가 애들 귀여운 건 알았지만 이번 건 정말 심하게 귀 엽다. 마치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아. "까아~ 일로 와봐, 얘들아. 루시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라이와 루비를 껴안고 볼을 비볐다 "수,숨 막혀요, 언니." 일루니아 여사님도 참기 힘들었는지 아이들을 한번씩 껴안아 보 았다. 루비도 귀엽지만 역시 내 는에는 라이가 훨씬 더 귀여워 보인 다.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고, 이런 게 다 부모 마음 아니겠 는가? "옷 마음에 드니?' "헤헤~ 마음에 들어요." "루비도 마음에 플어요. 고마워요,오빠." 쪽~ 쪽~. 내 볼에 뽀뽀를 하며 감사의 인사를 표시하는 라이와 루비. 루시 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애들에게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오빠한테만 해주는 게 어딨어?언니한테도 뽀뽀해춰." 족~ 쪽~. 루시아의 볼에도 입을 맞추는 라이와 루비. 겨우 산타복 하나 입 혔을 뿐인데 가게 안이 환해지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막막 나는 것 같다. "왜 제 건 없어요?남녀차별하시는 거예요?' 루는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따졌다. 난 한 대 때려주려다 가 참았다. '남자아이응은 없더라. 그리고 남자애가 산타복 입어 봐야 뭐하 니?안 그래?' "하긴, 저런 읏 입기는 좀 쪽팔리죠. 전 힙합 스타일이 좋아요." 니가 힙합을 알기나 하니? 화려하게 장식된 트리, 천장에 수놓아진 오색전구, 가게 안에 을 려 퍼지는 캐롤송,그리고 라이와 루비가 입은 산타복까지. 크리스마스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살지 걱정이다. 난 아이들에게 작은 카드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이게 뭐 예요f' "여기에 받고 싶은 선물을 적으려무나. 그럼 오빠가 그걸 산타에 게 전해줄 거야. 그림 산타가 그걸 보고 선물을 주는 거지. 아! 참고 로 너무 비싼 선물을 적으면 안 돼. 예를 들어 '저는 페라리가 갖고 싶어요 따위로 적는다면 산타한테 맞아 죽는 수가 있어. 왜냐하면 산타도 예산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양심껏 적으렴." "그림 크리스마스 날 선물이 오는 거예요?' "그렇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산타는 착한아이에게만 선물을 준 나는 거야. 그러니 착한 일 많이 하렴. 만악 크리스마스 날 일어났 는데 양말 속에 선물이 얼으면 산타를 탓하지 전에 너희들의 지난 인생을 돌아보려무나. 그럼 적은 후에 봉투 속에 잘 넣어서 오빠한 테 줘. 알았지?' '네에~ ?' 애들이 무슨 선물을 원할지 정말 긍금하다. 만약 페라리나 람보 르기니 등을 적는다면 바로 루엔에게 일러야지.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이제 크리스마스도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루와 루비는 선물 을 적은카드를 나에게 주었다. "산타할아버지한테 잘 전해주셔야 돼요." "그래. 걱정하지 마." 그런데 라이는 카드를 주지 않았다. 난 라이에게 물었다 '라이는 아직 믓 적었니?' '예,오빠." 빨리 적으렴." "적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으음,그럼 선물이 랜덤으로간단다. 그러니 원하는 게 있으면 빨리 적어야 해. 그래야 오빠가 산타에게 전해주지. 라이는 받고 싶은 선물 없니?' "잘 모르겠어요." "으음,그럼 생각나면 말해주렴." "네 . " 대체 얼마나 거창한 선물을 생각하고 있기에 아직까지 못 정하는 걸까?왠지 두려워진다. 난 애들 몰래 카드를 열어 보았다. 전 mp3플례이어가 갖고 싶너요. 쩨쩨하게 128메가 같은 거 주시 지 마시구 최소 기가 이상 되는 걸로 주세요. 기가 이하면 반품 시킵니다 카드도 참 건방지게 써놨군. 그래도 mP3플레이어 정도면 기꺼이 사줄 용의가 있다. 친구의 자식이니 어쩔 수 없이 내가 희생해야 지 . 이번에는 루비의 카드를 열어보았다 루비는 플레이스테 이션2가 가지고 싶어요. 집에서 그냥 놀려니까 너무 심심해요. 오락기가 한 대쫌 있으면 좋겠어요. 아! 메모리카 드와 추가 컨트롤러도 같이 주세요. 그리고 예산이 조금 남으시면 게임도 몇 개 껴주세요. 꼭이요! 루비 으음, 플레이스테이션2라. 하긴,요즘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플레 이스테이션2가 잘 나간다고 하더라. DYD플레이어 기능까지 있기 때문에 혼수감으로도 인기라던데. 우리 집도 한 대 장만할 필요는 있다. 우리집은 DYD플레이어도 없으니. 돈이 많이 깨지겠지만, 애들을 위해서 좀 무리하자. 난 기뻐할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용산전자상가로 향했다. 인터넷 주문이 늘어서인지 웅산논자상가에는 옛날만큼 많은 사람 들이 있지는 않았다. 난구경도 할 겸 이리저리 들아다녔다. 간만 에 이렇게 나오니 참 좋군. 가끔은 혼자서 이러저런 생각들을 하며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아! 아이 언스 공작님 이시군요." "헉 ' 금발머리를 화려하게 휘날리며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 이름도 유명한 사일런스 지니. 지니는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건 제가 물을 말인데요. 이긋에는 어쩐 일이세요?' "후후~ 글쎄요. 그냥 문득 이곳이 오고 싶어지더군요. 아마도 아이언스 공작님의 향기에 이끌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닭살. 아아~ 한 대 치고 싶다. 하지만 그 렇게 하면 난 여성들에게 맞아 죽을지도모른다. "그런데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용산전자상가까지 어쩐 일이십 니까?' "아! 애들 크리스마스 선물 사주려구요. MP3플레이어랑 플레이 스테 이션2가 갖고 싶대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너무 붙어서 걷지 마세요. 다른사람들의 오해가 두럽습니다. " "알겠습니다. " 난 지니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용산전자상가 안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었 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매출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일 하는 중이었다. 같은 자영업자로서 그들이 얼마나 힘든지 공감하 는 바이다 난 일단 mP3플레이어를 먼저 사기로 했다 "뭐 찾으세요?' "한번 와보세요." "싸게 드릴게요." "일단 보고 가세요." "정말 싸게 드릴게요. 한번 보세요.' 용산은 이게 문제다 호객 행위가 너무 심하다는 것. 뭘 사고 싶 어도 이러면 부담돼서 고르기가 힘들다 지니는 한 가게 않에서 걸 음을 멈추었다. 그 가게는 보기 드물게 20대 여성이 영업을 하고 있 었다. "최신 MP3플레이어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네." 지니의 얼굴에 넋이 빠져있던 여자는 진열장을 뒤적거리더니 손 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MP3플레이어를 꺼내놓았다. "얼마인가요?' "그,그게 그러니까‥‥‥‥ 여자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니는 부드럽게 웃 으며 말했다. "여기 계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아이들 선물용으로 구매하려 하십니다. 싸게 주실 수 있으신지요? "예. 원하신다면 기꺼이." "후후~ 고말습니다. " "아니에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여자는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저 몽롱한 눈빛 과 넋이 나간 표정을 보라. 지니의 미소 한방에 저 여자는 이미 이 성을 상실했다. 난 40만원이 넘는 mp3플레이어를 30만원 정고에 구매할 수 있었 다. 지니가 공짜로 달라고 해도 여자는 기꺼이 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그쪽에서 들여온 가격 이하로는 깎지 않았 다. 이득은 주지 못할망정 손해를 입힐 수는 없으니 지니랑 같이 쇼핑하면 이런 장점이 있군. 그 수법을 똑같이 활응하여 플레이스테이션2도 저 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루비가 원하는 대로 메모리카드와 추가 컨트를 러도 구매했다. 더불어 게임도 몇 개 샀다. 으음,돈 엄청 깨지는군 이걸로 일단 애들 선물은 대층 끝났다. 라이 선물은 나중에 따로 사야지.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일단 밥부터 먹죠. 제가 사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 우리는 근처 음식점으로 들어가 식사를 주문했다. 지니가 물었다. "루시아 공주님께 어떤 선물을 드릴지 생각해 놓으겼는지요?' "으음, 이번 기회에 커플링을 하나 맞춰볼까 생각하는 중이에요. 사일런스 백작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커플링을 선물하신다면 루시아 공주님 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 "그, 그렇겠죠?' "물론입니다. 말 나온 김에 같이 사러 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하지만 아직 루시아 손가락 크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아!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알고 있으니 까요." 그걸 니가 왜 알고 있는 건데? "특별히 알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만,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 "저절로 알게 돼요?' "눈으로 살짝만 봐도 알게 되더군요.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사이즈 오차는 플러스마이너스 1mm 이하입니다. " 슬쩍만 봐도 알게 된다니. 바람둥이 특수 스킬인가? 나는 가게로 들아가기 전 지니와 함께 금은방에 들렀다. 이유는 물론 루시아와 나의 커플링을 사기 위해서다 그런데 곳에서 뜻 밖의 사람과 마주첬다. "아니 , 여사님께서 이곳엔 어쩐 일로‥‥‥ "그러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어쩐 일이세요?' "저야 루시아에게 줄 선물을사러왔지요 " "저도 인디님께 드릴 선물을 사러왔어요. 이런 곳에서 일루니아 여사님을 만나게 될 줄이야. 일루니아 여 사님께서는 벌써 선물을 고른 모양이었다. 아니.고른 게 아니라 주 문한 건가? 일루니아 여사님 이 들고 있는 것은 귀걸이였다. 백금링 아래에 길쭉한 마름모꼴의 흑요석이 달려있는. 으음, 혹요석 이라‥‥‥‥ 블랙 드래곤인 인디에게 잘 어울리는 선 물이겠군. 그런데 생긴 것도 여자처럼 생긴 놈이 귀걸이까지 하고 다니면 진짜 여자처럼 보이지 않을까?아니,어차피 지금도 진짜 여자처럼 보이니 더 여자처럼 보여도 상관없으려나? 석자 종업원은 혹요석을 넣은 케이스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 런데 포장하는 손놀림이 매우 엉성했다. 이유는 지니 때문이었다. "고개 돌리시죠,사일런스 백작님." "알겠습니다. " 지니가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종업원은 정신을 차리고 무사히 포 장을 끝마쳤다. 그것을 받아든 일루니아 백작은 나에게 물었다. * "루시아의 선물로 뭘 해주실 생각이신가요?' "일단 커플링을‥‥ "흣~ 선물한다고 해서 루시아가 낀다는 보장은 없지만 잘 해보 지요." 참자. 참는 자가 이기는 것이니라. 이런 가벼운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 부동심을 길러야 한다. 일루니아 석사님은 가게를 나가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선물을 샀다는 것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여사님이야말로말하지 마시죠." 일루니아 여사님은 가게를 나갔고, 난 찬찬히 커플링을 살펴보 았다. "으음, 어떤 게 좋으려나?' 한참을 살펴보던 나는 백금과 순금이 교차되어 있고, 가운데에 작은 큐빅이 박혀있는 반지를 발견챘다. "잠간 꺼내 보여주시겠어요?' "네. 여기 있습니다. " 난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리고 루시아가 이 반지를 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굉장히 어울릴 것 같다. 그런페 여기 박혀 있는 게 큐빅이 아니라 에메랄드면 더 예쁠 것 같은데. 루시아의 눈 동자가 에메랄드빛이니. "혹시 여기 박혀있는 큐빅을뜩같은모양의 에메랄드로 해주실 수 있나요?' "예. 가능합니다. " 큐빅을 에메랄드로 대체하니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하지 만 난 루시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리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일루 니아 여사님께서도 저렇게 무리하시는데 나라 못 할 것 없지. 내 손가락 크기는 즉석에서 쟀고, 루시아의 손가락 크기는 지니 가 말해주었다. 런데 잠깐.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인디의 선물로 흑요석 귀 걸이를 샀단 말이야. 블랙 드래곤한테는 흑요석 이 잘 어울릴 테니 까. 그림 레드 드래곤한테는? "레드 드래곤한테는 루비가 잘 어울리겠죠." "저도 압니다. 자꾸 제 생각 읽으시며 끼어들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 아무튼 레드 드래곤한테는 루비가 잘 어울리겠지? "저기요. 혹시·. 주문을 끝마친 나는 지니와 함께 가게를 나왔다. 4일 후에 찾으 러 오란다 열흘 이상 걸린다는 것을 지니가 부탁하여 4일로 단축 시켰다.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꿈쩍도 안 하던 여인이 어째서 지니가 부 탁하니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거지?굉장히 억울한느낌이다. 이 세계 여자들은 나의 진가에 대해 너무 모른다니까 인형가게로 돌아온 나는 애들 선물을 잘 숨겨 놓았다 라이와 루 비의 산타복 영향 때문인지 오늘 가게 매출은 사상 최대를 기록하 였다. 그나저나 산타복 입은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색다른 귀여움이 느 껴진다. 설날에는 한복이나 입혀볼까? 메이드복도 괜찮을 듯 하다 크리스마스 6일 전 "돈 내놔." 그것이 카르가 나에게 다가와 처음 꺼낸 말이었다. "응?' "돈 내놓으라니까." 카르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내게서 돈을 요구했다. 언제나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인지 몸 전체에서 냉 기가 폴폴 풍겨 나오는 것 같은 카르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은구 슬 같은 눈동자 역시 무감정하다. 카르가 감정을 드러내는 때는 오직 라이레얼과 같이 있을 때뿐이 다. 그런데 표정 변화가 거의 없기 때문인지 막상 표정을 지으면 눈 을 뗄 수가 없다. 특히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는 정말 귀엽고 깜찍하다. 주로 라이레얼이 목덜미를 할거나 하면 그런 표정이 나 온다 음음, 혹시 라이레얼은 카르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닐까? "돈 내놔." "응? 무슨 돈?' "돈내놔 " 누가들으면 나한테 돈 맡겨놓은 줄 알겠다 "무엇 때문에 돈을 내놓으라는 건데 "넌 알 거 없어." 알 거 없다니? "그럼 못줘." "뭐 ?'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줄 수 없지." "니가 나한테 이따위로 군다 이거지?용서하지 않겠어?' 순간,나를 향해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재빨리 소리쳤다. "라이레얼한테 이른다!" 그러자 순식간에 냉기가 사라졌다. 내가 생각해도 좀 치사한 방 법이긴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카르는 얼음같이 차가운 눈동자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조 심스럽게 카르를 타일렀다. "무슨 일로 돈이 필요한 건지 말해봐. 들어보고 이유가 타당하다 고 생각되면 줄게." '라이레얼 언니‥‥‥‥ "응 ‥‥‥‥선물 살 거야." "선물 "웅. " '라이레얼의 선물을 산다고? "웅. " 그래서 이렇게 당당하게 돈을요구하는 거였군. "얼마나 필요한데?' "30만원." "뭐 ? 30만원씩이나?' "언니한데 좋은 거 사줘야 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줄 수도 없고. 난 지갑을 탈탈 털었다. 먼지만 폴폴 날렸다. 하는 수 없이 몰래 숨겨 놓았던 비상금까지 틸어 카르에게 주었다. 이제 완전히 개틸이 되었군. 돈을 받은 카르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카 르 흔자 나가서 잘 할 수 있으려나? "인간주제에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죽여 버리겠어!?' 잘 못하는군. 난 재빨리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냉기를 뿜어내는 카르와 그 앞에 겁에 질린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마도 저 남자가 카르에게 은근슬쩍 접근했다가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이 자식이 감히 카르에게 손을 대다니 ?' 난 쓰러진 녀석을 그대로 밟아버렸다. 그리고 마구 때려주었다. 난 녀석을 처리한 후에 카르를 보았다. '내가 처리했으니까 진정해. 아무리 화가 나도 길거리에서 마법 이나 브레스를 남발하는 것은 자제하렴." 물끄러미 나를 보던 카르는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난 카르의 뒤를 쫓차갔다. "라이레얼 선물로 뭘 살 생각이야?' "시계 ." "시계?무슨 시계?' "언니한테 잘 어울리는 시계." 라이레얼한테 잘 어울리는 시계라?라이레얼에게는 정장 스타일 의 고급스러운 시계보다는 스포티한 이미지를 지닌 시계가 잘 어 울릴 것이다 "뭐 봐둔 거라도 있어?' "지금부터 고를 거야. "내가 도와줄까?' 내 말에 카르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무감정한 눈동자로 뚫어져라 쳐다본다.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의미가 아님은 분명하다. "넌 시계에 대해 잘 모르잖아. 난 시계에 대해서도 너보다 잘 알 고, 라이 레얼이 뭘 좋아하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거든." "그래서?' "그래서 내가 좀 도와주면 니가 라이 레얼의 마음에 쏙 드는 시계 를 고를 수 있다는 거지. 어때?' 한참을 생각하던 카르는 고개를 약간 끄덕 였다.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 백화점으로 가자 난 카르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내가 굳이 카르와 동행하 려 하는 것은 카르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절대 아니다. 아까와 같은 문제가 또 생길까봐 두려워서이다. 카르는 혼자서 밖에 나간 적이 거의 없다 주로 라이 레얼과 함께 다닌다.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라이레얼이 카르를 제어하였기 때문에 이제까지 큰 사고는 없었다. 하지만 카르 흔자라면 서울시 전체를 얼려버 린다 해도 제어할 수가 없다. 난 목숨을 걸고서라도 카르를 제어할 생각이다 '감히 내 어깨에 부딪히다니 !죽여 버 리겠어 ?' "잠간만,카르. 진정해. 자꾸 그러면 라이 레얼한테 이른다?' 벌써부터 살아 들아 갈 수 있을지가 걱정된다 카르와 나는 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오늘 크리스마스 시즌 특가 세일이라도 하는지 백화점 안은사람들로 바글바글거 렸다. 발 디딜 틈도 없군. 어쨌든 라이 레얼의 선물을 사야하니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카 르가 인파 속에 쉽쓸린 것이다 놀란 나는 황급히 쫓아가 카르의 손목을 붙잡았다 "괜찮아?' '감히 나에게‥‥‥‥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내 얼글을 봐서라도 참아." 카르는 내 얼굴을 보았다. 강력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려 했다. 난 황급히 됫말을 덧붙였다. "라이 레얼을 생각해서 참아. 니가 여기를 다 얼려버리면 선물은 어디서 사니? 선물을 못 사면, 선물을 주지 못할 테고 그럼 라이레 얼은 실망할 거야. 너도 라이레얼이 실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 31 ?' 내 말을 들은 카르는 냉기를 거두었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손 놔." 카르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보고 그렁게 말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손놓으면 아까와 같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단 말이야. 잃어 버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꼭 잡고 있어야 돼." "싫더라도 참아. 라이레얼 선물사야지." 난 카르의 작큰 손을 붙잡았다. 약간 차가웠지만 신경 쓰일 정도 는 아니었다 카르 안고 있으면 여름에 에어컨도 필요 없겠군. 나는 카르를 데리고 백화점 안을 돌아다녔다 "한번 보고 가세요." "아! 여기다. " 내가 찾은 곳은 카시오 매장이었다. 카시오는 일본의 전자기기 전문기업으로 쥐샥(G-SHOCK)이라는 시계를 생산하고 있었다. 틸틸한 성격의 라이레얼한테는 쥐샥 같은 스포티한 시계가 잘 어 울릴 것이다. "어떤 분이 찾으시는 거죠" "얘요." 난 카르를 가리켰다. 여자 점원은 카르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하 얀색 머리카락과 생기 없는 새하얀 피부, 게다가 입고 있는 옷은 새 하얀 원피스. 마치 눈의 정령 같은 모습. 머리카락은 그렇다 치더 라도 피부가 새하얀 인간이 있을 리 없다 아니 , 설사 있다 하더라 도 흔치는 않다 "아! 얘가 병 에 걸려서 이렇게 된 거 예요." "병 이요?' "예. 백혈병이라고 피가 새하얗게 변하는 병이죠. 그래서 이렇게 하얀 거예요." "네?백혈병은 피 속의 백혈구에 문제가 생기는 병 아니었나요?' 뭘 그렇게 따지시나?그렇게 잘 알면 의사를 하던가 아무튼 카르와 나는 시 계를 골라 보았다. "이 시계 어때?' "그것도 괜찮긴 한데, 이게 더 낫지 않을까7' 점원은 나를 보며 말했다. '남자분이 옆의 여자친구분께 선물하실 건가 봐요「' 잠시 침묵 카르는 눈을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감히 그딴 말을!죽여· . 난 황급히 카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카르의 귀에 속삭 였다. "라이레얼한테 이른다 " 그 말을 들은 카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에휴~ 이건 뭐, '선생 님한테 이른다' 도 아니고‥‥‥ 꼭 이렇게 치사한 방법을 써야하는 걸까? "얘랑 나는 아무 사이 아닙니다. 그리고 얘가 자기 애인한테 선 물하려고 사는 거니 괜한 말로 죽음을 재측하지 마세요." "네 , 네.' 점원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우리는 다시 시계를 르는 데 열중 하였다. 결국 마지막으로 선택된 것은 금청색의 스포티한 이미지 가 강조된 시계였다. 방수는 물른 층격흡수,항저온,오토 백라이트 등등의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거다. 가격은 무려 28만원 선물 구매를 끝마친 우리는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카르는 예쁘 게 포장된 시계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잃어버릴까봐 두럽다 는 듯이. "언니가 기뻐해줄까?' "분명 기뻐할 거야. 무엇보다 네 마음이 담겨있으니." 난 무사히 선물을 샀다는 것보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 실이 너무나 기뻤다. 헤어지기 전 카르는 내게 말했다.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해둘게. 하지만 라이레얼 언니한테 접근 하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래. 왜 그 말 안 하나 했다 크리스마스 5일 전 나 먼저 집에 들어가 볼게." "벌써 ?' "응. 할일이 있거든." 루시아는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나갔다. 요즘 들어 루시아가 바 쁜 듯하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애들이 놀차달라고 졸라도 싫다고 하고. 대체 무슨 일이지? 게다가 요즘 들어 인디와의 접촉이 잦다. "으음‥‥‥ 헉 !설마 인디 이놈이 루시아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그러고 보면 둘이 방에 들어가 문 잠그고 한동안 나오지 않기도 한다. 같은 방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이해해주겠는데, 왜 문은 걸어 잠그는 걸까?대체 안에서 무슨 일을 하기에? "이런 빌어먹을 드래곤 같으니 ! 유부남인 주제에 남의 여친을 넘 보다니 ! 게다가 처제나 다름없는 루시아를! 내 결코 네놈을 용서치 않으리!" "진정하시 시오, 아이 언스 공작님 ."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인디 이 자식이 개수작을 부리는 마당에?' "사실 저도 요즘 루시아 공주님과 인디님의 행동이 수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의 방법으로 두 분의 뒤조사 를 해보았습니다. " 뒷조사?이젠 흥신소 일까지 하는 거냐? "그리고 놀라운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뭔데요?' "두 분께서는 현재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 중이신 것 같습니 다" "선물이요?' "그렇습니다. 인디님께서야 당연히 저희 누님께 드릴 선물을 비하시는 것 같고,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루시아야 당연 제 선물을 준비하겠죠." "럴 거라 사료됩니다. 인디님께 직접 물어보시면 더욱 자세히 대답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 "순순히 대답해줄까요?' "물론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 "그렇군요."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불게 하면 그만이다. 난 전 화로 인디를 호출했다. "야, 큰일 났어 ?' "예?큰일이라뇨?' "아무튼 큰일 났으니까 빨리 가게로 와. 일루니아 여사님과 관련 된 일이야. 빨리?' "예, 예? 일루니 ‥‥ 난 인디가 뭐라고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오 겠지? "하아~ 하아~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일루니아님과 관련된 일이 라니요?' 벌써 왔냐?전화한 지 몇 초나 지났다고? "일단 창고로 가자." "예 ? 창고에는 왜요?' "창고에서 말해줄게. 워낙 극비를 요하는 내용인지라." "아, 알았어요." 멍청하게도 순순히 따라오는 인디. 난 지니에게 눈짓을 했다. 지 니는 조용히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먼저 창고에 들어가자 인디도 따라 들어왔다. 그 순간,밖에서 문이 닫혔다. 쾅 "까아!무,무슨 일이에요 "뭘 그리 놀라고 그러니 ' 지니가 밖에서 망을 보고 있을 테니 걸릴 리는 없겠지? "왜. 왜 이 러세요?' 상황이 이쯤 되면 눈치를 채지 않으려야 채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다. 인디는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문 쪽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힘껏 밀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니가 밖에 서 잠갔으니까. "여, 열어주세요!제발요!" 어둠 속에서도 겁에 질린 인디의 검은 눈동자는 똑똑히 보였다 난 인디를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솔직히 불어." "예?뭘요?' "너 요즘 방 안에서 루시아랑 뭐하고 있어T' "그 건‥‥‥‥ '빨리 말하지 못해!" "혹흑~ 안 돼요. 말씀드릴 수 없어요. 결국 겁에 질린 나머지 울음을 터트리는 인디. 으음, 생각처 림 길 게 불지는 알는군. 이럴 때 계속해서 강경하게 나가는 것은 별로 좋 지 않다.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가며 써야 효과가 극대화되기 마련 이다. '난 니가 방 안에서 일루니아 여사님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그걸 어떻게‥‥‥ ?' "어덯게 알았냐고 묻고 싶은 거냐?후후~ 다 방법이 있지. 그리 고 난 그 선물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어. 내 입은 일루니아 여사님께 그 선물이 무엇인지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는 상태지. 니가 그 렇게 계슥 버틴다면 난 지금 당장 일루니아 여사님께 가서 말씀드 릴 거야. 그렇게 되면 너의 크리스마스 깜짝 선물 계획은 물 건너가 는 거지. 아아~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얼마나 실망을 하실지 눈에 보이는 듯하구나." '헉 !안 되요!그것만은 제발‥‥‥ 혹혹." 후후~ 걸려들었군.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불어. 루시아는 지금 방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인디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울먹이며 조용한 목 소리로 말했다. "뜨개질을‥‥‥‥ "응? 뜨개 질?' "아‥‥‥ 흑흑 루시아가 뜨개질을? "뭘 짜고 있는데 ?목도리 ? 스웨터 ?가디건?' "목도리랑 장갑이요.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7' 난 그제야 루시아가 왜 인디랑 함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지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루시아가 인디에게 뜨개질을 배우고 있겠지. 그럼 인디도 일루니아 여사님의 선물로 무언가를 짜고 있 겠군. "그헣군. 그랬었어. 겨울을 춥게 보내는 나를 위해 루시아가 바 쁜 시간 쪼개가며 목도리와 장갑을 짜고 있는 거였어. 혹~ 너무 감 동적이야. 우에에엥~ 루시아아~." 난 너무 감동한 나머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저, 저기요, 히로님‥‥‥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아아, 됐어. 니가 무슨 말 하려는지 다 알아. 일루니아 여사님께 는 아무 말 안 할게." "그,그게 아니라‥‥‥ "알았어, 임마. 루시아한테도 모른 척하면 되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요‥‥‥ "너 지금 날 못 믿냐?사내자식이 뭐 그리 말이 많아?' "사실은‥‥‥‥ 쾅쾅! "문 여세요,사일런스 백작님. 다 끝났습니다. " 그러자 바로 문이 열렸다. "잘 되겼습니까?' "후후~ 물론입니다 " 난 창고 안에 인디를 늘아둔 채 카운터로 돌아왔다. 난 기쁨을 자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번 을라간 입 꼬리는 내려을 즐을 몰 랐다. 후후~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손수 뜬 목도리와 장갑인가? 다 른 사람도 아닌 루시아가 손수 떠 준‥‥‥ "푸하하하.7' 아아~ 자제해야 돼. 크리스마스 날까지는 모른 척해야지. 그리 고 루시아가 선물을 건네주면 깜짝 놀라는 척하는 거야. 루시아 : 선물이야. 나 헉 ! 이게 웬 목고리랑 장갑이야? 루시아 : 내가 직접 짠 거야. 나 헉 ! 정말? 이렇게 놀라울 수가! 이런 선물을 받게 될 줄은 정 말 꿈에도 몰랐어. 진짜야. 너무 늘란 나머지 숨이 멎을 것만 같아 (이때 기절할 것 같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이 포인트다). 난 머릿속에 떠오른 시뮬레이션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크리스마스 날이 마구마구 기다려진다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는 거죠?사람 기분 나쁘게." "후후~ 여사님께서는 모르셔도 됩니다. 남의 일에 신경 끄시지 "실실 웃는 모습이 마치 비루먹은 개 같이 보이네요. 뭐, 실실 웃 지 않을 때도 비루먹은 개처럼 보이는 건 마찬가지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이 조소를 지으며 빈정거렸지만,조금도 화가 나 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행복한데 화내서 무엇 하리!웃으며 살기 에도 팎은 인생이다. 이제부터는 웃으며 살아야지. "푸하하~.7' "이 인간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래. 나 좋아 미칠 지경이다.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태클이야? 집으로 들아간 인디는 바로 루시아를 찾았다 "큰일이 에요." "예? 뭐가요?' 루시아는 라이의 벙어리장갑을 짜는 중이었다. 목도리는 어제 완성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했다. 루시 아는 목도리와 벙어리장갑 세트를 받고 기뻐할 라이를 생각하며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히로님께 저와 루시아님이 뜨개질을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루시아님이 목도리랑 장갑을 짜고 있다는 것도 "그게 뭐가 큰일이라는 거예요?' "히로님은 그게 자기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뭐라구요?' 루시아는 놀라 손을 멈추었다. 인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부연설 명을 붙여주었다. "히로님께서는 루시아님께서 자신의 선물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굉장히 기뻐하고 계세요." "라이 선물이라고 말 안 하겼나요?' "그, 그게 말하려 했는데‥‥‥ 흑~ 죄송해요. 전부 제 잘못이에 "아,아니에요, 형부. 울지 마세요." "혹흑~ 어떡해요? 히로님이 라이님 선물이라는 걸 알면 크게 실 망할 텐데." "그러게요." 지금 사실을 말한다 해도 이미 늦었다 실망하는 히로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고 지금 히로 것을 짜기에는 시간이 없 다. 아직 벙어리장갑 한 짝도 못 짰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동안 라이 선물에 정신이 팔려서 히로 선물을 잊고 있었다 그 런데 이 런 일이 생기다니 ! "이 , 일단 제가 히로님 목도리를 짜도록 할게요. 일루니아님 스 웨터는 다 짜서 시간이 남으니까요. 루시아님이 짠 것과는 다르겠 지만,그래도 드리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고마워요, 형부. 그럼 부탁할게요." "예. 히로님을 위해 열심히 짤게요." 루시아는 벙어리장갑을 짜는 내내 히로에게 줄 선물에 대해 생 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를 떠올려 보았지만 직접 짠 목도리와 장 갑을 대체할만한 것은 없었다. 어떤 선물을 주어도 히로는 실망할 것이다. '정말로 지니 오빠 말대로라도 해야 하나 -ㅁ-;;? * 226.GIF * 크리스마스4밀 전 난 저번에 주문한 루시아의 선물과 크로니스의 선물을 찾기 위해 금은방으로 향했다. "저번에 주문한 상품 도착했나요?' "네. 방금 도착했습니다. " 여자 종업원은 진열장 아래를 뒤적거리더니 꺼내서 보석주었다. 두 선물 모두 내가 주문한 대로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포장해주세요." "예." 종업원이 포장을 끝마치자 난 잔금을 치르고 나가려 하였다. 그 런데 종업원이 나를 붙잡았다 "저기‥‥‥‥ "예?무슨 일이에요?혹시 계산이 잘못 되었나요?' "저번에 같이 오겼던 남자분‥‥‥ 이번에는 같이 안 오겼네요." 저번에 같이 왔던 남자라면 사일런스 지니다. 이 여자도 지니한 테 반했나 보군. "예." "저기‥‥‥ 그분 연락처라도 좀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 굉장히 바쁜 사람입니다. 지금 내년 말까지 스케즐 확 밀려 있어요." "그,그래도 괜찮아요. 그분 연락처 좀 가르쳐주세요. 제발요." 이젠 아주 대놓고 매달리는군. "그 사람 죽었습니다. " 난 매달리는 종업원을 매물차게 떼어내고 가게를 나왔다. 그나 저나 라이 선물은 어떻게 해야 하나? 라이는 왜 카드에 아무 것고 적어내지 않는 거지? 가게로 돌아온 나는 선물을 잘 숨겨두었다. 산타복을 입은 라이 는 트리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라이야." "아!오빠." "뭐하고 있었어?' "그냥 놀고 있었어요." 난 라이를 번쩍 들어 껴안았다. "꺄 아 ~ ." 언제 들어도 정겨운 라이의 웃음소리. 난 라이의 등을 두드려 주 며 물었다. "우리 라이 산타한테 받고 싶은 선물 아직도 못 정했어?' "예. 처음에는 이거저거 막막 갖고 싶었는데, 곰금이 생각해보니 라이가 뭘 갖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그랬구나." 루랑 루비 선물은 다 사는데 라이 선물만 못 사다니. 아침에 일 어났는데 루랑 루비 양말에는 선물이 가득 들어있는데 라이의 양 말에는 아무 것토 없다고 생각해봐라. 라이가 얼마나 실망을 하겠 는가?크리스마스 아침부터 펑펑 울지도 모른다 내가 알아서 선물을 준비해야겠군. 라이의 마음에 들 만한 것 으로 "우리 라이 뭐 먹고 싶은 것 없니?' "아까 스파게티 먹어서 배불러요." "으음, 그렇구나." 나와 라이는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캐롤송을 들으며 트리를 바라 보았다 이 느낌 정말 너무 좋다. "우리 라이 행복하니?' 내가 묻자 라이는 내 굼으로 더욱 파들며 말했다 "예. 라이는 막막 행복해요! 헤헤~ 아이구~ 귀여운 것. 내가 너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지 걱정이다. 혹시 라이는 신이 나와 루시아에게 내린 선물이 아닐까? "둘 다 여기 있었네." "아! 루시아 언니다. ' "아! 루시아다. ' "언니 이 ~." 라이는 내 품에서 빠져나와 루시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루시 아 품에 포옥 안겼다. 요즘 들어 드는 불길한 생각 한 가지. 혹시 라 이는 나보다 루시아를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으음,그러면 안 되는데. 루시아가 비록 내 애인이라 해도 라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 "라이야, 놀자아~." "아!루랑 루비다 언니,라이 루랑 루비랑 놀다 올게요." "그래. 조심해서 놀아." 라이는 루랑 루비에게 달려갔다. 라이가 애들과 다른 곳으조 가 고 나자, 난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나의 시선은 루시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집중되었다. 저 손가락에 반지를 끼면 얼마나 예쁠까?그 리고 저 손가락으로 지금 내 목포리와 장갑을짜고 있다는 거지?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손가락인가! "왜 그래?' "오늘 따라 니가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아서 루시아는 얼글을 살짝 붉혔다. '갑자기 웬 헛소리야?' "아!라이 선물은 뭐로 하는 게 좋을까?라이가 아직도 안 적어 냈 어. 아무래도 우리가 정해야 할 것 같은데." "라이 선물은 걱정 하지 마. 내가준비해 놨으니까 "어 ! 정말?뭘 준비했는데?' "목도리랑‥‥‥ 아.' 목도리라면? 아아~ 내 껄 다 짜고 라이 것도 짰나보군. 그럼 나 랑 라이랑 세트로 하고 다니게 되는 건가? "후후~ 그렁군. 그런 거였어." "저 , 저기 ‥‥‥ 히로‥‥‥‥ "응? 왜 ?' 루시아는 굉장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 목도리 말이야. 그게‥‥‥‥ "아1그거 달이지?하하~ 괜찮아. 난 루시아가 직접 짠 목도리와 장갑을 크리스마스 날 히로에게 선물할 거라는 사실을 절대 모르 니까. 아마 루시아가 히로에게 선물하면 히로는 깜짝 놀랄 걸. 왜 냐하면 히로는 루시아가 무슨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테니까. 푸하하~ !" 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가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타비와고양이 가즉' 세트는다떨어졌나요?' "아! 잠간만요.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루시아. 목도리랑 장갑 기대 하고 있을게. 아, 아니지. 히로는 아직 무슨 선물인지 모르는 거지 하하,무슨 선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하고 있을게. 그럼 진짜 이 만." "자, 잠깐만." 루시아는 가게 안쪽으로 달려가는 히로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 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사실 선물을 즌비 못 했다고 하면 얼마나 실망할까? 어쩌면 너무 실망한 나머지 아파트 옥상에 뛰어 내릴지 토 모른다. 아니면,라이의 목고리와 장갑을 뱄으려 할지도‥‥‥ "정말 어쩜 좋아?' "응?어쩜 좋냐니?' 어느새 다가온 일루니아. 루시아는 일루니아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쩜 좋아, 언니?' "무슨 일인데?' "그게 말이야,사실은 어떻게 된 거냐면· . 루시아는 현재의 난감한 상황을 일루니아에게 설명해주었다 "으음,그러니까 너는 라이 것밖에 만들지 않았는데,그 뺀질이는 당연히 자기가 받을 거라 생각하고 흔자 좋아하고 있다는 거지?' "웅. " "뭐가 문제야?그냥 말하면 되잖아." "저럭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말해? 엄청 실망할 텐데." "흐음, 그렇군." 루시아의 말대로 사실을 알게 되면 히로는 엄청 실망할 것이다.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진실을 알았을 때의 타격은 더욱 크겠지. 일루니아는 실망하는 히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펑펑 우는 모습을. 갑자기 기분이 매우좋아지기 시작했다. 상상만으로 이 정도인 데 직접 보게 되면 얼마나 기쁠까? "걱정하지 마. 뺀질이한테 내가 말할게." "그,그만 , 언니." 일루니아는 당장이라토 달려가 히로에게 말할 것 같았다. 루시 아는 그런 일루니아를 말렸다. "왜 이래?내가 대신 말해준다니까. "언니가 무슨 속셈으로 그러는지 다 보여! 그러니까 가만히 있 "응?속셈 이라니 ?' "히로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잖아. "어 떻게 알았어 ?' "내가바보야?그걸 모르게. 머릿속에 장면까지 다 그려봣ㅈㅣ?' 루시아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팅 되는 장면은 다음과 같았다. 글루니아 : 아이 언스 공작님 , 그 사실 알고 계신가요? 히로 · 예?무슨 사실이요? 일루니아 .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지금 루시아가 직접 짠 목도 리와 장갑을 선물로받을거라 어』 의금치 않고 계시지요? 히로 : 헉 ! 그걸 어 떻게 일루니아 : 하지만 사실 루시아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선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요. 루시아는 라이의 목도리와 장갑만 짰 을 뿐이에요 히로 : 뭐,뭐라구요? 일루니아 · 아직 이해를 못 하셨나본데 다시 말씀드리지요. 루시 아가 짠 목포리와 장갑은 라이의 것이에요. 아이언스 공작님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왜냐구요?그건 루시아가 아이언스 공작님께는 선물을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히로 그 그건‥‥‥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야. 일루니아 : 호호~ 끝까지 현실을 외면하려 하시는군요. 남자답 게 인정하시지요. 아이언스 공작님은 크리스마스 날 루시아가 직 접 짠 목도리나 장갑은커녕 틸실 한 가닥 선물 받지 못할 거예요!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 날 아이언스 공작님 혼자만 절망의 구 렁텅 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거예요! 그것이 아이언스 공작님 의 운명 이죠! 히로 : 아니야. 그릴 리 없어. 루시아가 나에게 그릴 리 없어. 절 대 그릴 리 없어. 일루니아 호호,더욱 괴로워하고, 더욱 절망하세요. 히로 우에에엥~ 루시아아~ 우엥~ 우엥~ 안 봐도 DVD다. 위의 상상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일 루니아라면 저렇게 하고도 남았다. "아무튼 내가 뺀질이한테 잘 말할게. 넌 나만 믿어." "그만두라니까?' 지니든 일루니아든 도음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오빠~ 오빠아~. 인형가게 2층으로 우르르 몰려온 어린 엘프들 "이번엔 무슨 일이니 ?' "창 밖을 봐요, 오빠? "웅? 창 밖은 왜 ?' "눈이 와요?' "뭐라?눈?' 난 애들의 말대로 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정말로 눈이 펑펑 쏟아 지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에 내리는 눈 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기쁨에 젖어있었다. 길거리에서 구 걸하던 노숙자만 빼고. "이런 쒸벌! 왜 눈이 내리고 지랄이여?빌어먹을~ 얼어 죽겠네!" 여기까지 욕이 들리는군. 하긴, 안 그래도 추운데 눈까지 내리니 얼마나 짜증나겠냐? 눈을 막아줄 작은 지붕 하나 없으니 . 아이들은 어느새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눈이 내 린다~ 생긴 것도 귀 엽고, 목소리도 귀여운 것들이 노래를 부르니 금방 이라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춤을 출 것만 같다. 하지만 음정과 박자가 틀리고, 가사의 진초가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앞으로 개선 해야할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게 합창을 하는 건지, 돌림노래를 하는 건지. 겨우 세 마디 가 사를 서로 못 맞추면 어쩌자는 거야? "앗 그러고보니 첫눈이잖아?' 나의 소원 중 하나가 루시아와 함께 첫눈을 맞는 거다. 난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이 옷에 묻는 눈을 툭툭 터는 모습이 보였다. "루시아! 루시아?' 난 재빨리 루시아를 찾았다. "무슨 일이십니까,아이언스 공작님?' 난 카운터에 서 있는 지니를 붙잡고 물었다 "루시아 어디에 있어요?' "루시아 공주님 께서는 현재 '현재 ?' "으음,듣지 않으시는 편이 좋으실 듯합니다. " "아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겁니까?루시아를 어따 숨겼어? 당 장 불지 못해?' 난 지니의 멱살을 쥐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무수 한 시선들이 쏟차졌다. '별로 생기지도 않은 놈이 감히 우리 지니 오빠를!' '앗! 지니님 이 위험해 . '저 자식을 죽여!' '오늘 지니 오빠 빠순이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마!' '지니 오빠에게 손을 댄 이상 네놈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 난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지니의 멱살을 잡은 손을 놓지 않 았다. 루시아와 함께 첫눈을 맞으려는 나의 계획을 방해하다니 ! 혹시 지니가 루시아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세계로 온 건가? 헉! 그럼 그동안 나의 충신이니 어쩌니 떠들어대며 내 곁 에 붙어 있으려 한 것도 전부 루시아 때문에? 최후의 순간에 배신 을 때릴 셈이었나? "분덩히 말씀드리지만 전 루시아 공주님께 아무런 감정이 없습 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아이언스 공작님과 루시아 공주님께 서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 이 인간 또 내 생각을 읽었군. 누구 허락 받고 자꾸 내 생각을 읽 는 거야? 읽지 말라니까! "그럼 루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당장 말해?' "저도 말씀드리고 싶지만,들으시면 분명 충격 받으실 겁니다 "역시 네놈이 숨겨 놓은 거지?그런 거지?루시아와 함께 첫눈을 맞겠다는 나의 계획을 끝까지 방해하겠다는 거냐?내 오늘 이 자리 에서 네놈과사생결단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사길대로 말씀드 수 밖에 없겠군요." "그래. 빨리 사실대로 말해 봐."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께서는?' "사실 · . "사실?' "지금‥‥‥‥ "지금?' "화장실에 계십니다. " "계십니 ‥‥‥ 헉 ! 너 지금 뭐라 그랬어 ?' "루시콕 긍주님께서는 사실 지금 화장실에 계십니다." "헉 쓰!" 너무나도 큰 충격이 내 머리를 갈타했다. 난 비틀거리며 뒤로 물 러났다. "갤찮으십니까f' 쓰러지려는 나를 부축하려는 지니. 난 지니의 픔에서 빠져 나오 려 했지만 층격이 너무 컸는지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루시아가 화장실을 가다니 !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난 이제까지 루시아가 화장실을 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루시아같이 예쁜 여자는 화장실도 가지 않을 거라 생 각했던 것이다. 갱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루시아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인간이 다 인간인 이상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 만 루시아의 이미지는 정말로 그랬다. 왜 TV 속 여자 연예인들도 그렇지 않은가? 이슬만 먹고 살고, 화 장실같은 곳에는가지 않을 것 같은. 아무튼 루시아도 화장실을 간다니. 정말 층격적인 사실이다. 그 래. 루시아도 결국 인간이었던 거야. 나와 같은 인간. 런데 루시아는 무슨 일로 화장실을 간 걸까? 난 잠시 해보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군. 맞아. 루시아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간 거였어. 그럼 그렇지. 천사같이 아름다은 루시아가 손 씻는 게 아니라면 화장실 에 갈 일이 없지. 원래 여자들은 손을 자주 씻잖아. 푸하하~ "그렇게 믿고 싶어 하시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심정은 잘 알겠습 니다만‥‥ "믿고 싶어 하다니요?사실이 그런 겁니다. 루시아는 손을 씻으 러 화장실에 간 거예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가겼 습니다. 그런데 손을 참 오래 씻으시는군요.들어가신 지 10분이 넘었는데." 이 인간 진짜 왜 이래?손 씻으러 갔다면 손 씻으러 간 줄 알 것이 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 그렇게 남성 독자들의 환상을 깨고 싶어?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아!루시아. 아무것도 아니야." 난 갑작스레 나타난 루시아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니는 루시아를 보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아까부터 루시아 공주님을 애타게 찾고 계겼습니다. " 날왜?' "아! 맞아.' 이제야 루시아를 찾은 목적을 산기해낸 나는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고 끌어당겼다. "왜 , 왜 이래?' "잠깐 따라와 봐." "이 손좀 놔. 아프단 말이야." 난 당황하는 루시아를 끌고 재빨리 가게를 나갔다. 드디어 첫눈 을 루시아와 함께 맞는 것이다 아아~ 행복해 ! 뭐야?어째서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거지? 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쨍쨍 내리 쬐는 햇볕과 둥둥 떠다니는 솜 사탕같이 맑은 구름. 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에이~ 눈 그쳤다. " "눈싸움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다음에 하자." "그래, 라이야." 눈이 그친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아 이들. 아이들 말대로는이 그쳤다 "무슨 일로 데리고 나온 거야f' "아,아무 것도 아니야. 하하~ 그냥 너랑 같이 바람 쐬고 싶어서."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령게 말했다. 루시아는 이상하다는 눈길로 나를 보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이걸로 루시아와 함께 첫눈을 맞는다는 계획은 물 건너갔 근. 아니야. 첫눈이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것은 크리스마스 날 같이 눈을 맞는 거다. 이름하여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아~ 내일 모레가 기다려진다. 이브날 밤에 만나 연인들끼리 밤을 지새우며 크리스마스를 맞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아 이들이 있다. 밤에 애들 물래 양말에 선물을 넣어줘야 하니‥‥‥‥ 으음,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애들이 조금 부담된다. 하지만 어쩌겠냐? 이런 게 가장의 의무인 것을. 그나저나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려나? 크리스마스이브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다 이브(eYe)란 전야(딘)를 말한다. 즉, 크리스마스이브란 크리스마스 전날, 또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뜻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하자면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는 거다 드디어 루시아와 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가 하루 앞으로 다가 온 것이다 "와아! 내일이 크리스마스다. 7 "정 말." "라이는 크리스마스 날 뭐할 거야?' "라이는‥‥‥ 우웅~ 아! 맛있는 거 먹을 거야?' "그림 루비도 맛있는 거 먹을래." '나도. " "헤헤 ~." 난 아이들과 함께 가게 문을 열었다. 점심때가 될 때까지도 슨님 은 그리 많지 않았다. 평일보다 더 줄어든 느낌이다 하긴, 지금 와 서 허겁지겁 선물사는 손님은 없을 테니 "헥헥!석,여기 '노래하는바비와친구들' 있나요?딸아이 선물 인데 깜빡 했어요. 물론 그런 손님들이 있긴 있다. 그래서 이브날에도 영업을 하는 거고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침 '노래하는바비와친구들' 이 딱하나남아있었다. 30대 후 반의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것을 집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다른 손이 튀어나와 그것을 붙잡았다. 역시 30대 후반의 샐러리맨 으로 보이는 남자다 "무슨 짓입니까' "그쪽이야말로 무슨 짓입니까?' "분명 제가 먼저 집었습니다만." "무슨 소립니까?제가 먼저 집었습니다 " 들의 눈에서 마치 불꽃이 튀어 오르는 듯했다. 들은 동시에 나를 보았다. 주인인 내가 판단해 달라는 것 같았다. "아실 분들은 아시고, 모르실 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저한테는 절 대감각이라는 특수 스킬이 있습니다 제 지각 능력은 일반인에 비 해 몇 백배 뛰어 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는 일종의 뉴타입이라 는 거죠.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누가 먼저 집은 건지나 말씀하시죠." "흠흠,두분다아저씨들이어서 그러신지 뉴타입이 뭔지 잘 모르 시는군요 아무튼 저의 절대감각이 말하는바에 따르딴‥‥‥‥ 아아~ 긴장 되는 분위기. 과연 누가 먼저 집었을 것인가? "절대감각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따르딴‥‥‥‥ 빨리 좀 말해 "누구 애간장다 태울 일 있어?' 그렇게 쉽게 발표하면 재미없잖아. 이 긴장감을 계속 즐기려했는데 이렇게까지 닦달하니 어쩔 수 없군. "두분이 동시에 집으셨습니다. " "0.0001초. 다시 말해 1만 분의 1초의 차이도 없이 두 분제서 동 시에 집으셨어요. 이는 저의 절대감각으로 판단한 것이니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이의 신청은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대체 어쩌자는 거야?' "그림 어쩌라는 거야?' 줄무의 넥타이를 맨 남자와 땡땡이 무의 넥타이를 맨 남자는 나 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 모습이 너무 험악해서 난 슬쩍 뒤로 물러 섰다 "어쩌긴요?한분은 다른 곳에 가서 사셔야지요." "이 근처를 다 돌아다녔는데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어." '나도 이 근처 다 돌아다니고 마지막으로 이곳으로 온 거야." "그럼 한븐께서 다른 것을 사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안 된!우리 딸애가 그걸 원한단말이야." '내 딸애도 마찬가지야! 난 딸애와 이번 크리스마스 때 꼭 '노래 하는 바비와 친구들' 을 사준다고 약속했어." "흐음,공급은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자는 많은 셈이군요. 지금 븐사에 물건을 주문한다 해도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도착할 테고. 이걸 두 분께서 쪼개 가질 수도 없으니,한분께서 양보하시지요.' '난 절대 양보 못해?' '나도 !" 이 아져씨들은 공익광고도 안 보나? 이릴 때 서로 양보하면 좀 좋 아? "그림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이 가게 사장으로서 긍정한 심사를 통해 두 분 증 한분께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으음 " "흐음. " 둘은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두 아저씨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림 일단두분의 사정을들어보지요.자신이 반드시 이 인형 세트를 사야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들 어보고 사정이 더 절박한 쪽의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그럼 줄무의 넥타이 매신 분 먼저 시작하시지요. 줄무의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은한숨을푹 쉬며 얘기를 시작했다. "제 이름은 김상덕 입니다 30살 때 결혼을 했고, 33살 때 첫아이 를 낳았지요. 아이의 이름은 김은아입니다. 요즘 경제가 좀 어럽습 니까? 게다가 집값은 좀 비쌉니까? 직장 다닌 지 10년이 넘었지만,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꿉니다. 옛날에는 열심히 일해서 내 집 마련 을 하겠다는 꿈에 부플어 있었죠. 하지만 막상 돈을 좀 모았다싶으 니 집갈이 2배로 뛰더군요. 게다가 140 때는 구조조정이다 뭐다 난 리 였지, 지금은 불경기다 뭐다 난리지. 회사에서 안 짤리려고 발버 둥치다보니 밤 12시 전에 집에 들어가 본 적이 드물 정도입니다 그 러니 애가 지 아빠도 물라보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애 깨기 전에 출근해서 애 자고 나면 퇴근하니 아빠 얼굴 볼 시간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고는하지만,그 때문에 가족들에게 못해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만은 가족 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서 야근도 다 취소하였습니다. 딸아이가 그 러더군요.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꼭 '노래하는바비와 친구들' 을 받고 싶다고. 반 친구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자기만 없다고. 그 래서 꼭 사다주기로 약슥했습니다. 어제 퇴근하 나서 발이 부르 트도록 돌아다녔지만, 아무데도 없더군요. 그리고 오늘 날이 밝자 마자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겁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딸아이에게 제대로 된 아빠 노릇을 해보고 싶습 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이와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어요," 그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나는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그 심정 저포 잘 압니다. 제가 어려 보이시겠지만, 벌써 애가 셋 입니다. 게다가 식객들 숫자는 셀 수고 없을 정도입니다. 가장 노 릇이라는 게 쉬운 것은 아니죠. 힘내세요." 이번 엔 땡땡이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 차례 였다. "제 이름은 임희탁입니다. 김 형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저 에 비하면 사정이 훨씬 나은 편입니다. 저는 29살 때 결혼을 했습니 다. 아내와 저 모두 찢어지게 가난했지만.사랑 하나만 믿고 시작했 지요. 그때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갱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해보니 세상은 만말 치가 않더군요. 살림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아내가 애를 낳았습니 다. 아시겠지만 애한테 들어가는 돈이 좀 많습니까?살림은 더욱 어려워졌고, 결국 아내는 흔자 집을 나갔지요. 벌써 3년째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 사이에 돈을 좀 벌어 지금은 밥 굻을 정도는 아닙니다. 내 집 마련 같은 것은 아예 꿈도 못 꾸지 못하지만요. 아 무튼 딸아이가 지금 7살인데 그동안 크리스마스는커녕 생일도 한 번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습니다 딸아이도 어려운 집안 사정을 · 알기에 선물 사달라는 말 한번 한 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어제는 슨 일인지 '노래하는 바띠와 친구들' 세트를 사달라고 조르더군 요.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 친구와 싸웠다고 말하더 군요. 싸우는 중 그 친구가 '노래하는 바비와 친구들' 을 선물로 받 았다고 자랑하자, 딸아이가 지기 싫어 자기도 선물로 받았다고 맞받 아친 겁니다. 그리고 내일 만나 보여주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 반드시 '노래하는바비와 친구들' 을사가야합니다. 딸아이를거 짓말쟁 이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정말 힘든 인생을 살아오셨군요. 이 나라가 노력한다고 해서 다 잘 살 수 있는 나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계속 열심히 하세요 사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그것 외에는 방법 없으니." 줄무의 넥타이와 땡땡이 넥타이의 사정을 다 들은 나는 곰곰』 생각해보았다. 둘다 '노래하는바비와친구들' 을사야할절박』 이유가 있었다.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든 비난을 면키는 어려울 ) 이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저로서는 두 분 중 어느 쪽의 손도 들어줄 수가 없군요. 아무리 해 도 이것으로는 판가름이 나지 않겠군요. 그래도 말인데 100미터 달 리기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 "100미터 달리기요?' "그렇습니다. 이는 두 분이 따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보j 위한 테스트입니다 따님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달리는 것으로 표 현해주시면 됩니다. 빨리 도착한 쪽이 따님을 더욱 사랑하는 게 되 겠죠. 둘은 달리기에 자신이 없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 였다. 난 스톱워치를 찾아 주차장으로 나왔다. "그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달리시면 되겠습니다 결승점은 여기 이 주차금지 표시판입니다. 제가 손을 내리면 출발하십시오. 부정 출발은 실격으로 간주합니다. " 난 결승점에 서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두 샐러리맨은 스타 트 자세를 취했다. 난 스틉워치를 누르며 손을 내렸다. 그러자 둘 은 힘찬 출발을 하였다. 이 추운 날 와이셔츠 한 장 입고 100미터 달리기를 하다니. 가장 이란 이 렇게 힘든 직책 인 것이다 스타트는 줄무의 넥타이가 조금 빨랐다. 하지만 땡땡이 넥타이 는 엄청난 스피드로 줄무의 넥타이를 추월했다. 그러자 줄무의 넥 타이도 질 수 없다는 듯 바로 따라 불었다. 계속되는 격렬한 배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사나이들의 숭부. 남 자는 강하지만 아빠는 더욱 강하다. 딸아이를 위해 불타을라라! 둘은 등시에 결승점에 들어왔다. "헉헉~ " "헥헥 ~. 23.6초. 두 분 다 운동 좀 하셔야겠군요. 운동이 부족하기 때문에 요즘 직장인들이 성인병에 많이 걸리는 거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건강은 미 리미리 챙겨두는 것이 좋다. "누가 이 겼습니까?' "으음,말씀드리면 충격 받으실 텐데." "괜찮으니 빨리 말해 봐요." "임 형 말대로 괜찮으니까말해 봐요." "저의 절대감각에 의하면 두 분 중 먼저 결승점에 들어온 사람 은‥‥‥‥ "사람은·. '빨리 좀 말하라니까요?' "우리 데리고 장난치는 겁나석' 이래야 재밌지 않나? "두분이 동시에 들어오겼습니다. 무승부입니다. 축하드립니다. " "무승부요?' "그렇습니다. 저의 절대감각으로 판단한 것이니 조금의 오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두 분은 완벽하게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 "그럼 이젠 어떡해야 합니까?' '단거리로는 승부가 안 나니 장거리로 해야지요. 마라톤 풀코스... '헉 . "허 걱 ?' ‥‥는 두 분 체력으로 무리일 것 같으니, 궈터 마라톤. 즉,10킬 로미터로하지요. 이 가게와주차장둘레를400미터 정도로 잡고, 25바퀴씩 뛰시면 되겠네요.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면 쿼터 마 라톤 정도야 아무것포 아닐 겁니다. 자신 언으신 분은 지금 기권해 주세요." "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권 못해." "저도 마찬가집니다. " "그럼 시간 없으니 빨리 시작하죠. 이쪽에 서세요. 25바퀴를 먼 저 도는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그림 준비하시고‥‥‥ 출발!" 두 샐러리맨은 달리기 시작했다. 오직 딸을 위한 일념 하나로 힘 들고 고된 길을 택한 것이다. 모두들 기억하라. 저것이 바로 이 시 대 가장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성인이 1시간에 천천히 걷는 거리는 대충1키로터 정도. 그러니 달릴 경우 1시간 몇분 정도면 10킬로미터를 완 주할 수 있을 것이다. ' )바귀,2바퀴,3바귀‥‥‥ )5바귀‥‥‥ 20바퀴‥‥ 두 샐러리맨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포기하겠 다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상황은 땡땡이 넥타이가 약간 앞서 있고, 그 뒤를 줄무의 넥타이가 따르고 있었다 땔땡이 넥타이는 어떻게 든 거리를 벌려 안정적으로 )위 자리를 굳히려 했지만, 줄뚜의 넥 타이는 절대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스퍼트에 모 든 것을 걸려는 모양이었다. "헉 헉 ~ '헥헥 ~ 둘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괴로워했다. 난 진심으로 둘을 응원했다. 대한민국 가장들이여,모두 힘내라! "21바퀴째. 이제 4바퀴 밖에 안 남았습니다. " 나한테는 '4바퀴밖에 지만 저들에게는 '4바퀴씩이나' 일 것이 다. 마라튼을 해본 사람은 저 고통을 알 것이다. 다리는 풀릴 듯이 비틀거리고, 입에는 침이 바짝바짝 마르고, 호홉은 목구멍 근처에 서 헐떡거 린다. 눈앞의 광경이 멀게만 느껴지고,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고통뿐. 그래. 마라톤이란 고득한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 서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다. "24바귀째. 이제 마지막 바귀입니다. 끝까지 힘내세요?' 마지막 바퀴라는 말에 더욱 힘을 내는 두 샐러리맨. 즐무의 넥타 이가 막판 스퍼트를 시작했다. 오옷~ 따라 붙었다. 과연 승패의 행방은 어디로 갈 것인가? 들은 거의 동시에 결승점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크헉~ 크헉~." "크억 ! 즉을 것 같아." 걸린 시간은 1시간 17 분 33초. 쾌나 빨리 뛴 셈이다. 으음, 그나저 나 이번에도 무승부인가?럼 이젠 뭐로 하지? 정말로 플코스 마 라톤이라도 해야 하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니가 다가왔다. "뭐 하시는 겁니까?' "별 거 아닙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이 두 분께서 '노래하는 바비 와 친구들' 의 구매를 희망하시는데 그게 하나밖에 남지 않았거든 요. 그래서 그걸 차지하기 위해 이렁게 시합을 하는 거예요. "이 번에 나은 신제품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요즘 여자애들이 최고 좋아하는 바비인형 세트지요." "카운터 옆에 놓아둔 그것을 말씀하시는 깁니까?' "예. 제가 카운터 옆에 빼놨지요." "그거 방금 팔렸습니다. " "예. 그렇군요‥‥‥ 아니 ,뭐라?팔려?' "예. 방금 전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한 남자분이 찾으시기에 저희 누님께서 판매하겼습니다. " "아니 , 팔지 말라고 카운터 옆에 빼놓은 건덱 그걸 팔면 어쩝니 까?' "제가 판 게 아니고 저희 누님께서 파셨습니다 누님께 직접 항 의해주시 면 감사하겠습니다. " 줄무의 넥타이와 땡땡이 넥타이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두 샐 러리맨의 눈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 '노래하는 바비와 친구들' 이 팔렸다고?' "우리들이 그걸 사기 위해 이 지랄까지 했는데?'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10킬로를 뛰었어." "내 평생 이렇게 고통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다. 군대에서 행군할 때도 이 정도로 고통스립지는 않았어." "하하,다들 진정하시지요. 흥분은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이 추운 겨울날 마라톤까지 했는데!" "임 형 이랑 나랑 뭐 때문에 그 지랄을 했는데 !' 이 아줌마는 왜 그걸 팔아가지고 날 곤란하게 만드시나?혹시 일 부러 판 거 아냐? 내가 당황해서 땀을 뻘뻘 흘리는데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쇼핑 백을 들고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아아~다행이야. '노래하는바비와친구들' 이 딱하나남아있 었다니. 믓 사는 즐 알고 걱정했는데." 1의 중얼거림에 줄무의 넥타이와 땡땡이 넥타이는 동시에 고개 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 남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잠간만!" "거기 서 !" 몇분후. "경기 규칙은 간단합니다. 광박, 피박,득박 있습니다. 폭탄,흔들 기 ,따닥,쪽 등은 피 한 장입니다. 흔들기는 패를 내지 않은 상황에 서만 가능합니다 첫뻑은 기본점수‥‥‥ 즉, 3점으로 계산합니다. 10점을 먼저 내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겁니다. 점수를 다 잃으신 분 은 조응히 퇴장해주시고, 그때부터는 맞고로 진행됩니다. 나머지 규칙이야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럼 '노래하는 바비와 친구들 배(플) 고스톱대항전 을 시작하겠습니라." 세 명의 샐러리맨은 가게 휴게실 한쪽에서 '노래하는 바비와 친 구들' 을 능고 고스틉을 치기 시작했다. 사실 고스톱만큼 공정한 승부가 드물지. 과연 '노래하는 바비와 친구들' 은 누구 차지가 될 것인가? 점심때는 조금이나마 손님이 있었는데,저녁이 되니 거의 없었 다. 가게가 번화가에 위치해 있었다면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잠간 들러서 사가기라도 할 텐데, 여기는 번화가가 아니다보니‥‥‥‥ 나는 저녁 7시에 가게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이미 저녁을 다 먹고 응기종기 앉아 후식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시청하 고 있었다. 루시아는 나를 위해 따로 밥을 차려주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크리스마스네." "그러게. 이제부턴 가게 매상도 다시 떨어지겠군. 뭐,요 며칠 사 이 많이 벌었으니 상관없지만." 저녁을 다 먹은 나는 뉴스를 들엇다. 내일 일기예보가 어떤지 보 기 위해서다. 내일은 제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길‥‥ 뉴스가 끝날 때쯤 기 상캐스터가 등장했다. -내일이면 드디어 크리스마스네요. 많은 분들이 을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저도 내일은 눈이 펑펑 내 렸으면 하네요. 그럼 내일 일기예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과연 내일 눈이 내릴 것인가? -내일 날씨는 오늘보다 더 추워질 것으로 예상되니 따뜻한 옷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많은 븐들이 기대하고 계시는 눈은 내리지 않 습니다. 아니, 뭐라?눈이 안 온다고? 기상캐스터는 생긋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고 '혹시나' 하고 기대하시는 분들이 계시지요. 하지만 기 대하지 않는 것이 졸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눈은‥‥‥ 절대,네 버(never), 젯따이(』 # tㄴ ·) 내리지 않습니다. 설사 내일 세계가 멸망하는 일이 있어도 눈은 내리지 않습니다. 만약 내리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그러니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마세요.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 "이런 빌어먹을! 안 내리면 안 내리는 거지 윌 그렇게 강조해?지 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뭐야?' "아!안 돼요,오빠! 텔레비전은 안 돼요「' '참아요! 텔 레비 전은 참아 주세요?' "진정해요, 형 !" "진정해, 히로!아무리 화가 나도 텔레비전만은 안 돼?' 난 너무 열 받은 나머지 텔레비전을 향해 달려들었고, 어린 엘프 들과 라이레얼은 그런 나를 뜯어 말렸다 난 그들 덕에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뭐 저런 기상캐 스터가 다 있냐?저딴 식으로 하고도 안 짤리나? 지금 시간은 밤 9시. 난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만 들어가서 자렴." "싫어요. 오늘은 안 잘 거예요." "응?왜 안자?' 내가 묻자 아이들은 합창을 하듯 말했다. "산타할아버지 기다릴 거예요오~ !" "응? 왜 ?' "산타할아버지 보고 싶어요오~ ?' 아이들이 이러면 부모들은 상당히 난감해진다 있지도 않은 산 타를 기다린다니. 그렇다고 지금 와서 산타 같은 것은 세상에 없다 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깨어 있으면 산타가 오지 못한단다. " "예?왜요?' "사실은 산타가 얼마 전 강도짓을 저질렀거든." "예?정말이에요?' "응. 애들 선물 살 돈이 부족해서 잠깐 나쁜 마음을 먹었었나봐. 아무튼 그래서 현재 특수강도 혐의로 인터폴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 란다. 그래서 제대로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지도 못한대. 그러니 너희들이 자야만 산타가 집 안으로플어올수 있는 거야. 이해하지?' "우웅~ ." "자,그림 다들 들어가서 자려무나." 난 애들을 한방에서 재웠다. 그래야 선물 주기가 편하니까. 혹시 라도 루가 흑심을 품을까봐 루의 이부자리는 라이와 루비에게서 멀찍이 떨어트려 놓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서 방바닥에 금을 그어 놓았다. "여기를 넘으면 즉음이다 알았지?' "잠결에 실수로 넘으면 어떡해요?' "그럼 그대로 영원히 잠들게 되겠지 "뭐니 ,그 표정은?읏어보렴." 난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자 다시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 숨겨 놓 은 아이플 선물을 꺼내오기 위해서. 선물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자 루시아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애들은 다 자?' "응 깊게 잠들어 있어." 난 방문을 슬쩍 열어 보았다. 루시아의 말대로 아이들은 새근새 근 소리까지 내며 잘 자고 있었다. 루시아는 내게 포장꾸러미를 건 네주었다. "이건 라이 양말에 넣어줘.' "응. 알았어." 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 들 머리맡에는 엄청난 크기의 양말이 능여져 있었다 착한 일은 쥐쁠도 한 것 없으면서 양말만 큰 걸로 걸어 놓다니. 이 양말 크기가 어린 엘프들의 탐윽의 크기를 말해주는 듯하다. 난 루의 머리맡에 있는 양말에는 MP3플레이어를,루비의 머리맡 에 있는 양말에는 플레이스테이션2와 주변 기기들을 넣어 주었다. )리고 라이의 머리맡에 있는 양말에는 루시아가 준 선물꾸러미를 넣어 주었다. 그런데 라이의 양말 안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 이상한 것이 잡혔 다. 난 그것을 꺼내 보았다. 그것은 내가 라이한테 선물 적어내라 고 준 카드였다. 방 안이 어두워서 읽을 수가 없었기에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루 시아가 다가와서 물었다. "그건 뭐야?' "글쎄. 라이 양말 안에 들어있던데." 난 카드를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삐뜰빼뚤한 글씨로 다음과 같 이 쓰여 있었다 라이는 아프로도 께속 오빠랑 언니랑 가치 행보카계 사라쓰면 조 캐써요 구게 라이가 받고시픈 선물이애요. -라이 여전히 맞춤법은 엉망이다. 하지만 내용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 체였다. "혹~ " 결국 루시아는 눈물을 홀렸다. 난 루시아를 살짝 안아 등을 두드 려 주었다. 토닥토닥. "우리 라이는 생긴 것만 귀여운 것이 아니라 마음씨도 착하네." "훌쩍~ 나 라이의 엄마가 되길 잘한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야." 아아~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다니. 역시 우리 라이는 복덩어 리야. 라이는 나와 루시아에게 내려진 하늘의 측복. 우리는 밤새 그 카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 의 밤이 지나갔다. 크리스마스 드디어 대망의 크리스마스 날이 밝았다 오늘도 가게를 열긴 연 다. 굳이 휴일까지 여는 이유는 물건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함이 아니 다. 가게에서 놀기 위해서다. 집에서만 놀면 재미없으니. 그리고 오후 5시에 문을 닫고 준비를 해서 6시정도부터 파티를 할 생각이다. 그 때문에 인디와 크로니스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요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인디야 그렇다 치고 크로니스까지 요리를 하다니. 그저 크로니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참고로 크로니스 요리 솜씨도 인 디 못지않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가게에 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밀려 있겠지요. 괜찮으니 다녀오세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 "예.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지니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 하루 등안 몇 명의 ·요 즘 교제하는 여성 을 만나려나? "잠깐 이리와 봐." "응?무슨 일이야?' "아이들이 깨어났어." "정말f' 난 루시아 옆으로 다가갔다. 열려진 방문 사이로 아이들의 모습 이 보였다. 세 어린 엘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 다음에 한 일은 양말 안을 뒤지는 것이다. "우와! mp3플레이 어다" "아! 플레 이스테 이션2야!" "아!라이 것도 있어." * 260.GIF * "뭐야,라이야?빨리 뜯어봐." 라이는 포장지를 부욱 뜯었다 그러자 나타나는 회색 목도리와 회색 벙어 리장갑. "와아~ 목도리랑 장값이다. " 라이는 곧바로 벙어리장갑을 슨에 끼고 목도리를 목에 들렀다 약간 엉성하지만 꼼꼼하게 짜여진 목도리와 벙어리장갑 루시아의 정성이 대로 묻어있는 듯했다. "아! 따뜻해 ?' "정말?좋겠다. 라이야. "헤헤 ~ 응. 좋아." 라이가 좋아f 모습을 븐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오늘 저녁에는 나도 뜩같은 걸 받겠지? 후후~ 안 쾌. 지금 웃으면 안 돼. 건물 받을 때까지 모르는 척 해야 쾌. 난 웃음을 자제했다. 아이플은 자신의 선물을 품에 끌어안고 거 실로 뛰쳐나왔다. "오빠, 이것 보세요. 산타할아버지가 이걸 줬어요. "루비한테도 줬어요." "저도 받았어요." "그래 그래. 다들 착한 일이라고는 쥐뿔도 안 해놓고 선물만 챙 겼구나. 이런 걸 보고 날로 먹는다고 하지. 아무튼 축하한다. 이제 부터라도 좀 착한 일 많이 해서 내년에는 날로 먹지 않았으면 좋겠 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으음, 나한테토 이런 어린 시절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이들이 기뻐하니 그걸 로 충분하다.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어린시절 로 돌아간 느낌 이다 아이구~ 커여운 것들. "자,그럼 아침 먹어야지 네 ~ .' 휴일이든 언제든 밥은 꼬박꼬박 챔겨먹는 아이들. 살이 찌지 않 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난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앓았다. 아침은 야채수프와 호밀 빵, 그리고 따뜻한 우유가 전부였다. 저녁때 파티를 하니 아침부터 많이 먹어들 필요는 없겠지 "오빠, 이거 더 주세요." 그새 다 먹었니? "이따 저녁때 파티를 해야 하니 조금씩만 먹으렴. 알았지?' '네에~ .' 하여간 대담은 잘 한다. 그러면서 꾸역꾸역 입이 미어져라 먹는 것은 뭐냐?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 가게로 가고 나자, 집안에는 크로니스 와 인디만이 남아 있었다. "아! 거기 소금 좀 집어 주시겠어요?' 인디의 부탁에 크로니스는 소금을 집어 주었다 이번에 만드는 요리는 양도 많고,그 종류도 다양했다. 케이크, 피자, 칠면조, 샐러 드,꼬치구이 등등. 아마 흔자였다면 엄두도 믓 냈을 것이다. 인디는 슬쩍 크로니스 를 보았다. 크로니스는파를 써는 중이었다. "저, 저기‥‥‥ "응? 왜 ?' 인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행복하신가요?' "무슨 뜻이지 ?' '말 그대로에요. 지금 행복하신지 궁금해서요. 칼질을 하던 크로니스의 손이 멈추었다 크로니스는 그동안의 생활들을 떠올려 보았다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들. 그리고 그 속에 서 웃고 떠드는 삶. 평범하긴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즐겁고,다음날은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하게 되었다 즐겁고,기쁘고,새롭다. 그를 따라 이곳에 온 선택은 옳았다 이그리드가 왜 그 소년을 만 나게 해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그리드‥‥‥ 넌 죽으면서도나한테 선물을 남겨주었구나.' 크로니스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친구를 떠올리며 슬픈 미소를 지 었다. "행복해." 크로니스의 대답에 인디는 웃음을 지었다 '다햄이에요. 저도 크로니스님이 행복해지길 바랬거든요. 그리 고 그건‥‥‥‥ 인디는 일부러 됫말을 흐렸다. 크로니스는 인디가 무슨 말을 하 려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그리드 역시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랬겠지. 지금처럼.' "아! 빨리 해야 시간에 맞출 수 있겠네요. 아직도 할 요리가 많이 남아있으니까요." "서두르지." "예 .' 예상대로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었다. 지금 시각은 오후 5시. 이 제 슬슬 가게 문을 닫아야겠군. 난 (OPEN) 팻말을 (CIDSED)로 바꾸었다 그리고 곧 바로 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인디와 크로니스는 요리 담당. 일루니아 여사님과 나는 배경 담 당. 루시아는 애들 담당, 라이레얼과 카르는 구경 담당이다. 집 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이등 마법으로 이곳으로 옮겨진다. 내가 전구를 손보는 사이 일루니아 여사님은 테이블에 초를 가져 다 놓았다 루시아는 애들이 장난치지 않도록 아이들과 같이 놀아 주었으며,라이레얼곽 카르는 그냥 앉아서 구경만 했다. 잠시 후, 음식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것을 꼼꼼하게 탁자 위에 잘 배열했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입 안에 군침이 돈다 게다가 이 향긋한 냄새 라니! 이 러한 생각은 아이들도 마찬가지 인 듯했다. "와아~ 맛있겠다. 7' "라이 먹고 싶어요?' "루비도 먹고 싶어요?' "안 되 얘들아. 이따파티 시작하떤 먹을 거야. 조금만 참아." "우웅~ ." 루시아는 금방이라도음식을 향해 달려들 것 같은 아이들을 말렸 다. 확실히 애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윽고 힘든 파티 준비가 다 끝났다. 크로니스와 인디도 가게로 왔다. "우와 케이크다? "우와! 피자다. "우와! 통닭이다?' "아니야,루비야. 그건 통닭이 아니라 칠면조야." "응? 칠면조?' "응. 칠면조. 이거 칠면조 맞죠,오빠?' "으음,자세히 보니 칠면조 맞군 " "거 봐,라이 말이 맞잖아." "우와!라이 너 진짜 똑똑하다. " "헤혜~ 전에도 말했듯이 라이가 원래 좀 똑똑해." 라이가 똑똑하면 히로는 천재겠군. 그나저나 웬 칠면조지? 칠면 조는 추수감사절에 먹는 거 아닌가? 뭐, 상관없으려나? 칠면조 맛 은 어떨지 긍금하군. 통닭이랑 비슷하려나? "파티 시작에 앞서서 서로의 선물을 교환하도록 하지요." 나는 루시아의 선물을 조금이라도 빨리 받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말했다. 모두들 서로의 선물이 궁금한 듯했다. "저기요, 오빠아~." "응? 왜 그러니 ?' 나는 내 앞에 몰려온 어린 엘프들을 보고 물었다 아이들은 손을 뒤로한 채 웃고 있었다. "이거 선물이에요,오빠!우리가 돈 모아서 산 거예요. 라이가 포장지에 싸여진 선물을 내밀었다. 난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내 선물' "예!오빠 선물이에요.7' 아아~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역시 그동안 잘해준 보람이 있었어. 대체 뭘까?아이~ 궁금해라~. 난 포장지를뜯어보았다. 그러자담배 한보루가모습을드러냈다. 뭐야, 이 선물은? 설마 나보고 담배 많이 피고 일찍 죽으라는 건 가? "선물은 받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걸로 사는 거랬어요. 그래서 담배를 샀어요. 이거 필 때마다 우리 생각하면서 피세요?' "그, 그랬구나." 후후~ 귀여운 것들. 그래도 오빠 생각해서 담배 한 보루까지 사 오다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아! 디플(디스 플러스)이네. 이 오빠가 디플을 즐겨 피는 걸 알고 사온 거구나." "아니에요!그게 싸서 그걸로 사온 거예요!돈이 부족했거든요?' 빈 말로라도 그렇다고 하면 어디 덧나니 ?꼭 진실을 말해서 이 오 빠를 상처 입혀야만 했니? 아이들은 이번에 루시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역시 선물을 건네주었다. 머리핀이었다. 루시아는 그 자리에서 귓가에 그 머리 핀을 껴서 아이들을 기쁘게 하였다 "저 , 저기요, 일루니아님 잠간 저쪽으로 "알았어요." 조웅히 2층으로사라지는 인디와 일루니아 "잠간 저기로 가요, 언니 ." "움직이기 귀찮아." "언니 이 ~ " "알았어. 알았으니까 잡아당기지 좀 마 재촉에 못 이겨 억지로 일어나 휴게실 쪽으로 사라지는 라이레얼 과카르. 그 모습을 지켜본 후 루시아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도 잠간 이동할래?밖으로 나가자." 오오~ 드디어 선물을 건네주려는 건가? "먼저 나가 있을래?난잠깐 크로니스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알았어. 그럼 먼저 나가 있을게." 루시아는 가게 밖으로 나갔다. 난 크로니스에게 다가갔다. 그리 고 준비해온 선물을 건네주었다. "뭔가요?' "선물이에요. 크리스마스 선물." 크로니스는 내가 건넨 선물을 받았다. "한번 뜯어보세요."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는 크로니스. 나타난 것은 백금 귿두리예 가운데 루비가 박혀있는 팔찌였다.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크코니스는 레드 드래곤이니까 루비가 잘 어을릴 것 같아서요. 원래 루비를 좀더 큰 걸로 박으려고 했는데,돈이 모자라끈 작은 걸 코 했어요. 마,마음에 드시나요?' 크로니스는 븟은색 눈동자로 팔찌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하아~ 다행이네요. 마음에 안 들까봐 걱정했는데.' "차 봐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크로니스는 왼쪽 팔목에 팔찌를 찼다. 크로니스의 새하얗고 매 Bl러운 피부와 백금색 팔찌는 굉장히 잘 어을렸다. "어쩌죠?저는 준비한 선물이 없는데." "아니에요. 크로니스가 제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커다란 선물인 걸요. 앞으로도 계속 제 곁에 있어주세요 "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크로니스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나는 가슴이 따 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 전 잠깐 나가볼게요. 루시아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인디는 일루니아에게 선물을 건네주었다. 일루니아는 포장지를 뜯었다 "제, 제가 직접 짠 스웨터 에요. 마, 마음에 드실지는 잘 모르겠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말을 더듬는 인디. 일루니아는 스웨터를 살 펴보았다. 꼼꼼하게 짜석진 스체터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 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디자인도 훌륭했다. 전문가의 솜씨가 곳 곳에서 느껴졌다 "어머!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인디님." '다. 다행이에요. 전 일루니아님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쩌나 했는 데‥‥‥ 혹~." 안도감에 눈물까지 흘리는 인디. 일루니아는 그런 인디에게 선 물을 건네주었다. "열어 보세요." 인디는 케이스를 열었다. 그러자 백금링에 길쭉한 마름모꼴 형 태의 혹요석이 매달려있는 귀걸이 2개가 나타났다. "인디님이 하시면 어을릴 것 같아서 사왔어요. 마음에 드세요「' '혹흑‥‥‥ 으아아앙~." 인디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주저앉았다. 놀란 일루니아는 인디를 껴안으며 말했다. "왜 그래요?마음에 안 드세요?' 그러자 고개를 세차게 젓는 인디 "그럼 왜요)" "흑~ 너무 기뻐서요. 너무 기뻐서‥‥‥ 으아아앙 기뻐거 울음까지 터트리는 드래곤이라니. 일루니아는 그런 인디가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일루니아는 슨으로 인디의 눈물을 닦아주고 살각 키스를 하였다. 인디는 혹요 석 커걸이를 꼭 쥐었다. 그리고는 활짝 읏으며 말했다 '내일 당장 귀 뚫으러 가야겠어요." "같이 가 드릴게요." "흑~ 사랑해요, 일루니아님." "저도 사랑해요, 인디님.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무슨 일이야,카르?귀찮으니까 빨리 말 해." 그릴게 말하는 라이레얼의 표정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카르는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언니." "응?선물?' "예. 언니를 위해 제가 직접 고른 거예요." 라이 레 얼은 건물을 받아 포장지를 뜯어보았다. "아! 시계네." 나타난 것은 금청색의 스포티한 시계였다. "그, 그게 제일 좋은 거래요. 언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 호,혹시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좋은데." 라이 레얼은 시계를 팔목에 찼다 큼직한 시계는 라이레얼의 가 느다란 팔과 아주 잘 어을렸다. 라이레얼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 고마워 ,카르." '아! 언니가 나한테 고맙다고 하다니 ? 감동한 카르는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저, 전 언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 라이레얼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카르의 선물에 대해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귀찮아서 사러가 는 것을 계속 미루다보니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된 것이다. '으음,그럼 몸으로 때우지 뭐.' 라이레얼은 카르를 벽 쪽으로 밀어불였다. 카르는 늘란 눈으로 라이레얼을올려다보았다 그순간 라이레얼의 입술이 카르의 입 슬을 덮었다 "읍?' 라이레얼은 능숙한 솜씨로 혀를 이응해 카르의 입속을 헤집었다. '아아~ 언니 ~ ' 카르는 은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카르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라이 레얼에게 맡겼다. 한참 후,라이레얼은 입술을 떼어냈다 "어땠어 ?' "어 , 언니 ‥‥‥ 카르는 완전히 풀린 눈동자로 라이레얼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웃으며 말했다. "이게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언니 ~ ?' 카르는 라이레얼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카르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사랑해요, 언니 저한테는 오직 언니뿐이에요." "그래 ." 라이레얼은 카르를 살짝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나는 가게 밖으로 나가며 주머니 에 손을 넣어 반지 케이스가 있 는 것을 확인했다. 반지 케이스는 주머니 속에 잘 있었다. 이걸로 완벽해. "많이 기다렸어?'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추운데 왜 굳이 밖에서 보자고 한 걸까? 아! 추운 장소에서 목도 리를 선물해 줘서 날 더욱 기쁘게 할 생각이구나! "이거 받아 " 루시아는 손에 든 선물을 나에게 주었다. 난 뭔지 뻔히 알면서도 한번 물어보았다. "응? 이게 뭐야?' "선물." 이게 루시아가 날 위해 손수 싼 목도리랑 장갑이란 말이지?아아 ~ 1초라도 빨리 보고 싶다. 난 재빨리 포장을 뜯었다 나타난 것은 연한갈색 바탕에 흰색줄 이 물결무의로 들어가 있는 털실 목도리 였다. 그리고 목도리 끝 쪽 에는 나의 이니셜인 I와 H가 새겨져 있었다. 목포리는 마치 기계가 짠 듯 완벽했다. 물결무의도 그렇고, 끝단 처리도 그럭고. 으음, 이니셜 부분은 약간 이상하군. 그래도 전체적 으로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진다. "아까 라이 것은 조금 엉성하던데‥‥‥ 아! 내 건 일부러 신경 써 서 짠 거구나. 라이가 조금 실망하겠는 걸. 난 괜찮으니 라이 걸 쯤 더 신경 써서 짜주지. 하하~ 아무튼 고마워. 이 목도리 정말 마음 에 들어. 아! 나 지금 무지 놀란 거 알지? 난 선물이 직접 짠 목도리 랑 장갑일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 아이~ 놀래라 어라1 그런데 장 갑이 없네. 포장지 속에 숨었나f' "미, 미안해!" 내가 찢어진 포장지를 뒤적거리는데,루시아가 두 손바닥을 붙인 채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응1무슨 말이야? 미안하다니 ?아! 장갑 때문에 그러는 거야?하 하~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난 이 목도리만으로도 층분하니까." "그,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니?'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거 형부가짜준 거야." "형부라면 인디?' "응 "이 목도리를 인디가 짜준 거라고?' 뭐야?뭐가 어 떻게 된 거야? 루시아는 고개를 푹 슥이며 말했다. "미안해. 사실은 라이 꺼 다 짜고 나니 니 꺼 짤 시간이 없었어. 그 목도리는 형부가 짜준 거야. 아! 이니셜은 내가 넣은 거야. 진작 말하려고 했는데, 니가 실망할까봐 말하지 못했어. 정말 미안해." 루시아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뭐야? 그것 때은에 그런 거였어? "괜찮아.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응?화 안 내는 거야?' "내가 왜 화를 내? 니 마음 다 아는데.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그리고 이니결은 니가 넣었다며?그럼 니가 짠 거나 다름없지." "하,하지만 그건 내가짠 게 아니라 형부가‥‥‥‥ "이니결을 니가 넣었으면 니가 짠 거나 다름없어. OEM이라는 것 도 있잖아." ", 그런가?' 참고로 OEM이 란 오리 지날 이 쉽 먼트 매뉴팩츄얼(Orlg)nal Equipment bfanufBEkuer)의 약자로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을 뜻한 다. 즉, 인디가 짰다고 해포 그것은 루시아의 요구에 의한 것이고 마지막에 루시아가 상표(내 이니결?)를 박았으니 , 이 목도리는 틀림 없는 메이드 인 루시아(?)다. "아무튼 미 안해 ."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난 정말 기쁜 걸. 루시아가 나를 위해 이렇 게까지 해줬다는 사실이 말이야." 다행 이네 ." 루시아는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선물이 하나 더 있어." "응?또 있어?' "사실은 이게 진짜야." 루시아의 얼굴이 붉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루시아는 몸을 돌렸다 "머리 묶은 리본 보이지?' "응 . " 루시아의 플래티나 블론드 머리카락에는 빨간 리본이 묶여 있 었다. "그 리본 풀러볼래?' 난 루시아가 시킨 대로 리본에 손을 가져갔다. 한쪽 끝을 잡고 잡 아당기자 리본은 힘없이 풀렸다. 그 순간,루시아는 다시 몸을 돌렸 다. 그리고는 나를 껴안으며 내 입슬을 덮었다. 뭐야?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난 당황해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입술의 감촉, 그리고 내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의 감촉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 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루시아는 천천히 떨어졌다. 난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 었다. '루, 루시아‥‥ 루시아외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슥이며 작은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진짜 선물이야." "으응." 난 멍한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다. 루시아가 이런 대담한 키스를 하다니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다. 난 고개를 숙인 루시아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왜 내 얼굴 이 이렇게 뜨거워지는 걸까? "아!나도 선물이 있어." 난 반지 케이스를 열어 루시아에게 보여주었다. '반지네.' "응. 커플링이야. 가운데 있는 보석은 에메랄드고. 네 눈동자 색 에 맞춰서 했어. 마음에 들어?' "응. 예쁘다. 끼워줄래?' "그,그래." 난 루시아의 가녀린 손을 붙잡았다. "커플링은 왼손에 하는 거 아냐?' "아! 그렇지 ." 너무 당황한 나머지 실수했다 난 다시 루시아의 왼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주려 했다 그런데 내 손이 왜 이릴게 덜덜 떨리는 걸까? 두근두근. 루시아 역시 손을 떨고 있었다. 잡은 슨을 통해 그녀의 떨림이 나 에게로 전해져왔다. 난 크게 심호홉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리고 조심스럽게 루시아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 었다. 휴우~ 간신히 했다. "이건 내가 껴줄게." 루시아는 내 반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난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 자루시아는 내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단지 커플링을 끼는 것뿐인데, 마치 약혼식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갑자기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다. 난 어색한 읏음을 지었다. 루시아도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익숙 하지 않은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몰래 가게를 빠져나온 크로니스는 투명 마법을 몸에 건었다. 그 리자 크로니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크로니스는 믐을 공중으로 띄 웠다. 순식간에 대류권(차,쵸떠,대기권의 최하층으로 구름 비 따위의 일기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다)까지 떠오른 크로니스는 손을 뻗으며 증얼거렸다. "컨트를 웨더(EonDol Weaae#). 아이스 스톰(Ire Stolm)."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조 인해 대기 증의 수증기 가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수증기들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코 떨어졌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리에 차가은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것은 내 머리에 닿 은 순간 녹기 시작한다. 난 고개를 들거 하늘을 보았다. "어!눈이다. " "정 말." 나차 루시아는 하늘을 을려다보았다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뭐야?결국 그 기상캐스터 말이 틀렸네." 조금 늦긴 했지만 눈이 와서 다행이다. 이걸로 올해는 화이트 크 리스마스인가? '하아! 눈이다?' "눈이다. 눈,7' 아이들은 밖으로 뛰어나와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깨동무를하고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f" 역시나 이 가사 뒤로는 진도가 나가지 않고 무한 반복된다 "눈이에요, 일루니아님.' "예. 그러네요." "보세요, 언니. 눈이에요." "내일 눈 치우려면 귀찮겠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치울게요, 언니. 언니를 위해서라면 전 뭐든 할 수 있어요." 모두들 밖으로 나와 눈을 보며 즐거워했다. 라이레얼 말대로 내 일 눈 치우려면 귀찮겠군. 하지만 뭐‥‥‥ 오늘은 이걸로 좋겠지. "이걸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어느새 나타난 크로니스가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웃으며 고개 를 끄덕 였다 "예. 화이트 크리스마스에요." "아!모두들 여기에 모여 계셨군요." 흩날리는 눈발과 사이로 지니가 픔 나게 등장했다. 으음, 이러니 마치 지니가 이 글의 주인공 같다. "어라?오늘 약속이 밀려있지 않으셨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크리스마스의 밤은 아이언스 공작님 곁에 머 물고 싶어서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 너 없어도 난 상관없는데. "그보다 오는 길에 오랜만에 반가운 두 분을 만났승니다. " '반가운 두 분?' 저 쪽에서 걸어오는 남녀. 붉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아름다 운 여인과 그 옆에서 레몬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미청년 "아빠?' "할머니 ?' "어라? 루엔이랑 갈리폰드잖아 " 둘은 루엔이랑 갈리온드였다.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렇게 갑 자기 나타나다니. 갈리온드야 나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루엔 은 나의 친구다. 난 다가가 루엔을 반겼다. 루엔은 날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히로. 그동안 잘 지냈어요?' "예. 루엔은 잘 지내셨어요?그동안 어디서 윌 하고 계셨나요?' "갈리온드와 함께 하와이에 있었어요." "예?하와이요?아니 ,돈이 어디서 나서 하와이까지 가겼어요? 나의 물음에 갈리은드가 답했다. "니 침대 밑에 있는 통장에서 빼서 썼다 "헉 ?' 뭐라?내 통장에서 빼서 써?딸은 지갑에서 돈 빼가고, 아빠는 통 장에서 돈 빼가고‥‥‥ 내 돈은 눈 먼 돈아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말하는 갈리은드의 태도가 너무나도 당당하 다는 것이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누구 맘대로 제 통장에서 돈 을 빼서 써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내가 따지자갈리온드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니가 내 딸에게 한 짓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건데? 루엔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히로. 나증에 꼭 갚을게요." "아,아니에요. 뭐, 어쩔 수 없죠. 하하~. 친구한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오늘은 크리스마 스이니 그냥 넘어가주는 수밖에. "할머니 이 ~ ." 루와 루비는 루엔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루엔은 아이들의 머리 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동안 잘 지냈니 ' '네 ~ " 루엔은 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애들이 말썽 피우진 않았나요? 말썽 피웠으면 교육을 좀 시켜줘야 하는데." "헉 .' 교육이라는 말에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 아이들. 아이들은 서로 를 껴안은 채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만약 내가 사실대로 말한다면 루와 루비는 3개월 이상을 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이다. 병원비 아 끼기 위해서라도좋게 말해줘야겠군 '말썽 같은 건 안 피웠어요. 얼마나 착하게 지냈는데요." '다행이네요. 조금이라도 말썽을 피웠으면 제대로 교육을 시켜 주려고 했는데,착하게 지냈다니 필요 없겠네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이들. 라이레얼과 갈리온드도 해후를 나누었다. 파닥파닥. 앗! 이 소리는? "아! 이코다. ' 눈 내리는 하늘 사이로 라이코스가 날아왔다. 라이는 두 손을 흔 들며 외쳤다 "여기야, 이코야!" 그러자 라이코스는 빠르게 날아차 라이의 품에 안겼다 "헤헤~ 이코도 크리스마스 파티 때문에 온 거야T' "응 좀 얻어먹을 게 있을까 해서." 저놈은 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다가 지금 나타난 걸까? 짝짝. 난 손뼉을 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제 다들 모인 듯하니 파티를 시작하지요." "와아! 파티다!" 우리는 가게 안으코 들어갔다. 나는 전구에 불을 넣었다. 오색겉 구가 화려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라이터로 테이블 주위에 장식 된 초에 불을 붙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케이크에 꽃혀있는 초에 불을 붙였다. 초는 14 개. 그냥 인원수대로 꽃아 넣은 것이다. 물론 나중에 추가 된 사람 과 라이코스 몫까지 합친 거다. 14개 초에 불을 다 붙이고 나자 지니가 가게 형광등을 껐다. 그러 자가게 안은 아늑하고 환상적인 파티장으로 변했다 난 아이들을 케이크 주위에 부른 다음 말했다. "자,그럼 하나 들 셋 하면 동시에 부는 거야 알았지?' "네에 ~!" "하나, 둘, 셋 ?' "후우~ 라이, 루. 루비 세 엘프는 힘껏 바람을 불었다 14개의 촛불이 다 꺼지자,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폭즉을 터트렸다 펑!펑! 난 슬며시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MerH Chnstmas~ ! 아이리스 2부 4권 Story 9 랍스타 크리스마스가 지나고나니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찬바람이 휘 잉~ 하고 불어오면 뼛속까지 시리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응? 왜냐고?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 바로 루시아가 선물로 준 이 목도리 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이상 추위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지. 후후~. 아아~ 너무 따뜻해. 너무 따뜻해서 땀까지 나는 것 같아. "라이야, 그거 따뜻하니?" "응, 막막 따뜻해." "와아! 부럽다. 나도 한번 해보면 안 돼?" "안 돼. 이건 루시아 언니가 라이를 위해 직접 짜준 거란 말이야. 그러니 라이만 할 거야." 회색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회색 벙어리장갑을 낀 라이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루비에게 말했다. 난 잠시 내 목도리와 라이의 목도리를 비교해 보았다. 이건 루시 아가 인디에게 하청을 맡긴 OEM 목도리, 저건 루시아가 직접 짠 목도리. "아이~ 따뜻해." "……," 뭐야? 지금 나 비웃은 거 맞지? "라이 일로 와보렴." "예? 무슨 일이에요, 오빠?" 아장아장 걸어오는 라이. 라이의 목에는 회색 목도리가 감겨있 고, 손에는 벙어리장갑이 껴져있다. 이 두 가지 장비가 있는 이상 라이는 추운 겨울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저 목도리와 벙어리장갑은 루시아가 손수 짠 것. 루시아는 저 목 도리와 벙어리장갑을 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 얼 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을까? 털실 한 올 한 올에서 루시아의 정성 과 향기가 묻어나는 듯하다.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메이드 인 루시아(?)다! "왜, 왜 그래요, 오빠?" "응? 왜 그러냐니?" "오빠 눈빛이 이상해요." "내 눈빛이 어떤데?" 라이는 목도리를 움켜쥐며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라이 의 말 대로 지금 내 눈은 탐욕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라이의 등이 벽에 닿았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라이는 다가오는 나를 보며 벌벌 떨었다. "오빠가 그 목도리 좀 만져보면 안 되겠니?" "아, 안 돼요. 이건 라이 꺼란 말이에요." "그냥 만져보기만 할게. 라이, 오빠 못 믿니?" "시,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라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라이의 그런 태도에 나는 분 노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를 봤나! 선물을 받았으면 오빠한테 알아서 갖다 바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반항을 하다니! 그 목도리 당장 내놓지 못할까! 오빠가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벙어리자갑에 는 손을 대지 않을 테니 빨리 그 목도리 벗어!" "우에에엥~." "좋은 말로 해선 안 되겠군. 이렇게 된 이상……." 퍼억! "아니! 어떤 놈이 감히 본좌의 귀엽고 깜찍한 뒤통수를…… 헉!" 난 고개를 휙 돌리며 외치다가 일루니아 여사님과 눈이 마주쳤 다. 깜짝 놀란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나를 노려보며 묻는 일루니아 여사님. 난 애 써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예? 뭐하다니요? 제가 뭘 했다고 그러세요?" "지금 애 우는 거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요?" "예? 울다니요? 누가……?" "우에에엥~." "아앗! 무슨 일로 우는 거니, 라이야?" "우엥~ 우엥~ 오빠가……." "응? 오빠가 뭐? 오빠가 너무 멋있다고? 오빠가 너무 멋있어서 우 는 거야? 그런 거야?" "뭔 소리야, 이 뺀질아! 니가 목도리를 뺏으려고 해서 라이가 우 는 거 아냐!" "아니, 이 아줌마가 이젠 말을 막하네! 그리고 어디서 있지도 않 은 사실을 조작해서 날 모함……." 난 말을 하다가 멈칫 했다.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 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마 정말로 내가 라이의 목도리를 뺏으려 했었나?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헉! 내가 정말 그랬단 말인가? 정말로 내가 라이의 목도리를 뺏으 려 했단 말인가? 놀란 나는 잠시 비틀거렸다.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가 어린 아이를 윽박질러서 목도리를 삥 뜯으려 했다니. 잠시 반성. 나는 라이를 안아 들었다. "미안해, 라이야. 오빠가 잘못했어. 오빠가 다시는 안 그럴게. 그 러니까 울지마, 라이야." "훌쩍~ 정말요?" "응. 앞으로 그 목도리 뺏으려고 안 할게. 아! 물론 라이가 오빠한 테 그 목도리를 선물로 준다면야 성의를 봐서 굳이 거절하지는 않 겠지만……." "우에에엥~." "아앗! 알았어. 선물로 달라고도 안 할게. 그러니까, 뚝!" "훌쩍~ 뚝!" 난 라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아~ 우리 라이는 왜 이렇게 귀 여운 걸까? 이런 귀여운 라이를 울리다니, 나는야 나쁜 오빠~. 고양이털처럼 부드러운 회색 머리카락, 동글동글한 얼굴, 눈물이 고여 있는 커다란 회색 눈동자, 옷은 하얀색 재킷과 무릎까지 오는 흰색 스커트를 입고 있다. 드러나는 다리는 줄무늬 타이츠를 입어 추위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두툼한 빨간 운동화로 발바닥 역시 추 위에 대비. 마지막으로 회색 목도리와 회색 벙어리장갑으로 추위에 완전히 대비하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더워질 정도로 완벽한 무장이다. 라이가 삳런 곳은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의 영지인 청색산맥에 위치한 상아탑. 상아탑은 마법사 길드의 본산. 라이는 그곳의 주 인…… 다시 말해 길드 마스터. 이런 추운 지역에서 살았던 라이지만, 태어난 곳은 자이나레스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의 영지인 흑색숲이 다. 그런 더운 지역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 문인지 라이는 추위에 굉장히 약했다. 으음, 그런 라이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지는 못할망정 두르고 있는 목도리를 뺏으려 했다니. 죄책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난 미안한 마음에 라이를 비롯한 아이들과 놀아 주었다. 갈리온 드와 루엔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루와 루비의 양육에는 조금도 신 경 쓰지 않았다. "아이들은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잘 크는 법이에요." ……라는 것이 루엔의 지론이었다. 애들이 잡초도 아닌데 가만 히 놔둬도 알아서 잘 클 리 없다.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잘 큰다면 내가 이 고생을 할 필요도 없겠지. 아무튼 애들 양육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루엔이었기에 루 와 루비는 계속해서 나와 루시아가 맡아서 길러야 했다. 아이를 세 명이나 키우는 것은 정말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얘들이 좀 먹어대야 말이지. "맛있는 거 사주세요, 오빠!" "맛있는 거 먹고 싶어요." "빨리 사줘요, 형." 언제나 밥 먹는 것이 최우선 과제인 어린 엘프들. 한창 자랄 때라 고는 하지만 정말 너무 먹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국으로 식도 락 여행 온 줄 알 것이다. "오, 오늘은 뭐가 먹고 싶니?" "랍스타요!" "헉!" 난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랍스타라니? 설마 바다가재를 말하 는 건가? 너무 비싸서 나도 아직 한번도 안 먹어본 랍스타를 지금 나에게 사달라고 하는 건가? "어제 TV에서 봤는데 랍스타가 그렇게 맛있대요!" "루비는 랍스타가 막막 먹고 싶어요." "랍스타가 건강에도 좋대요." 아이들은 기대감이 담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 다. 난 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 랍스타를 먹고 싶어 하는 너희들의 마음은 이 오빠가 잘 이 해한단다. 하지만 오빠가 아는 사람한테 얘기를 들으니 랍스타 별 로 맛이 없대. 그리고 영양가도 별로라고……." "그건 아니에요, 오빠." 당당히 한걸음 나서는 라이. 라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랍스타에는 콜레스테롤 조절기능이 있어서 동맥경화, 심장병 등 순환기 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요. 그리고 살균, 향균 작용 기능이 있어 미생물의 증식 억제해줘요. 그리고 체내에 면역계를 활성화시켜 면역력을 증강시켜 주기도 하고, 중금속 및 방사선물질을 체내에서 배출시켜 주기도 해요. 그리고 필수 아미노산을 다량함유한 단백질이 풍부하여 어린이 들의 성장 촉진에도 좋고, 키토산도 많아 머리를 맑게 해주고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해준대요. 그리고 저지방, 저칼로리, 저콜레스테 롤이어서 건강에도 엄청 좋고, 다이어트에도 엄청 좋아요. 그리고 바다가재 알은 핵산이 풍부해서 노화를 방지해줘요. 그 외에도 철분, 마그네슘, 칼슘, 아연, 비타민 등의 영양소를 포 함하고 있어서 몸에 엄청 좋아요." "……." 그런 건 대체 어디서 알아냈니? 그리고 언제 다 외웠니? "우와! 라이 너 엄청 똑똑하다." "너 진짜진짜 똑똑한 것 같아." "헤헤~ 라이가 원래 좀 똑똑해."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라이. 그 모습에 난 할말 을 잃었다. 제발 쓸데없는 부분에서 똑똑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거 외울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외우란 말이다! "라이는 영양소가 듬뿍 들어있는 맛있는 랍스타가 먹고 싶어요. 성장 촉진에도 좋대요. 라이는 랍스타 먹으면 키가 막막 클 것 같아 요." "……." 그걸 먹는다고 키가 크겠니? 라이는 현재 폴리모프 마법에 걸려있다. 뭐, 이유야 다들 알고 있 겠지만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해 주자면……. 상아탑의 주인 라이미안. 7클래스를 마스터한 대마법사인 그녀 의 나이는 650세 정도. 아름다운 회색 머리카락과 밝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 큰 키와 늘 씬한 몸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와 붉은 입술 등등. 그녀는 미의 종족이라는 엘프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평소에 어린아이 모습으로 폴리모프 하는 것을 좋아 하였고, 실험을 할 때는 특히 그랬다. 그날도 라이미안은 어린아이로 폴리모프를 한 채 실험을 하였 다. 실험 도중 별 생각 없이 정체불명의 시약을 마셨는데…… 이럴 수가! 그 시약이 폴리모프에 금제를 거는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그녀보다 더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만이 그 금제를 풀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7클래스 마스터. 그녀보다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는 드래곤밖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절세미녀 인 라이미안에서 초절정 귀염둥이 라이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상이 라이가 지금의 모습이 된 사연이다. 나는 현재 8클래스 마스터. 라이보다 무려 1클래스나 높다. 뭐, 라이도 나와 같이 다니 면서 8클래스로 진입하기는 했지만 날 따라오려면 아직 100년은 멀었다. 푸하하~. 나는 라이보다 클래스가 높기 때문에 라이에게 걸린 금제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확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금제를 거는 것보 다 푸는 것이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실을 엉클어트리기는 쉬워도 엉클어진 실을 풀기는 어려운 법 아니겠나? 뭐, 내가 못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쪽에는 드래곤이 셋이나 있으 니. 9클래스 마스터인 드래곤들이라면 금제를 푸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하지만 나는 금제를 푸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루시아를 비롯한 모두가 마찬가지다. 만약 금제가 풀려 라이가 한순간에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 봐라. 그럼 루시아는 몸져누울지도 모른다. 그동안 라이 양육하는 재미 로 살아온 루시아이기에 라이 없이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 는다. 물론 그렇게 되면 독자들도 반 이상 떨어져 나갈 것이다. 라 이가 사라지면 무슨 재미로 이 책을 보겠는가? 아무튼 라이는 현재 폴리모프 금제 마법이 걸려있기 때문에 계속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니 랍스타를 아무리 열심히 먹 어도 키가 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랍스타~ ♬ 랍스타~ ♬"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며 농성 모드로 돌입한 어린 엘프 들. 난 얘들이 이럴 때가 제일 무섭다. "랍스타는 뭔 랍스타야! 이것들이 어디서 랍스타 같은 소리를 하 고 있어! 요즘 같이 경제가 어려운 때에 랍스타라니! 우리가 무슨 부르주아인 줄 알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이런 어려운 때일수록 소비를 통한……." "소비를 통한 경기 부양책을 쓰자고? 라이는 저번 카드 대란을 보고도 느낀 거 없니? 그 때문에 신용불량자 숫자가 300만 명이 넘 었어. 그리고 당시 업계 1위이던 LG카드는 파산할 뻔했지." "그래도 건전한 소비……." "건전한 소비는 경기에 도움이 된다고? 랍스타가 건전한 소비야? 그건 엄연한 사치야. 랍스타는 부르주아들만이 먹는 고급 요리야." 난 미리 선수를 쳐서 라이의 반론을 전부 차단했다. 하지만 라이 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라이는 랍스타가 먹고 싶단 말이에요!" 눈을 똑바로 치켜든 채 랍스타를 향한 무한한 욕망을 표출하는 라이. 먹을 것에 대한 집착 하나만큼은 세계 제일이다. "라이 지금 오빠한테 대드는 거니? 응? 그런거니?" "아무튼 랍스타 사 주세요!" "맞아요!" "랍스타요!" "헉!" 아이들의 박력에 놀란 나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무 서운 것들. 이렇게 강력하게 나오다니.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정말로 애들한테 랍스타를 사줘야할지 도 모른다. "그, 그냥 짜장면 시켜 먹으렴. 아! 오빠가 탕수육까지 시켜줄 게." "싫어요오~!" "아니, 이것들이 진짜 해보자는 거야 뭐야? 오빠 말이 말 같지 않 아? 빅장 맞고 싶어? 한동안 봉인 되었던 필살기 빅장 40단 콤보를 보여줄까? 화려하게 펼쳐지는 콤보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 지고 싶어?" "랍스타~ ♬ 랍스타~ ♬" 다시금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며 농성 모드로 돌입한 어 린 엘프들. 예전에는 이쯤하면 물러났었는데 오늘은 좀 강하게 나 온다. 역시 루엔의말이 맞았어. 매를 아끼면 애들을 망치기 마련이야. 애들은 맞아야 말을 듣는 법이니까. 내 오늘 이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 엘프들에게 사랑의 매의 위력 을 보여주리라! "간다! 빅장 40단 콤……." "지금 뭐하는 거야?" "헉! 루시아…… 커억!" 갑작스런 루시아의 등장으로 나는 동작을 멈추었고, 그 때문에 기의 흐름이 엉키며 기혈이 들끓기 시작했다. 설마 또 주화입마가! 난 재빨리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애썼다. "후우~ 하아~." 크게 심호흡을 하여 호흡을 정상으로 되돌린 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으음, 빅장 40단 콤보는 이게 문제다. 잘못하면 주화입 마에 걸린다는 것. 주화입마에 걸리면 재수가 없을 경우 반신불수 가 되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언제나 부동심(不動心)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 야 한다. ……라고는 하지만 어린 엘프들이 이렇게 땡깡을 부리면 나도 모르게 화가 폭발한다. 랍스타라니! 우리 집 경제 사정도 좀 생각을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먹을 거 다 먹고, 입을 거 다 입고 언제 돈을 모아? 나의 꿈은 열심히 돈을 모아서 루시아와 행복하게 살 신혼집을 구하는 거다. 루시아같이 아름답고 완벽한 여성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서는 번듯한 집 한 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내 집이기는 하지만 나는 좀더 큰 집을 원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집값이 좀 비싼가? 정부와 건설업체는 국 민들이 봉으로 보이는 모양인지 집값 안정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뭐, 굳이 1권에서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코딱지 먹는 소녀' 가 한 강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집값이 살인적이라는 데는 다들 공감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열심히 벌어 저축을 해야 번듯한 집을 살 수 있 을 것이다. 그런데 오빠의 이런 사정도 모르고 랍스타를 사달라고 난리를 치다니! "언니~ 언니이~." "루시아 언니이~." "누나아~." "응? 왜 그러니, 얘들아?" "라이는 랍스타가 먹고 싶어요." "루비도요." "이따 저녁 때 랍스타 먹으러 가요." 아이들은 루시아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렸다. 루시아는 조르는 아 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루시아는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랍스타가 먹고 싶어?" "네에~!"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먹으러 갈까?" "정말요?" "응. 정말." "꺄아~ 사랑해요, 언니." "루비도 막막 사랑해요." "최고에요, 누나." 쪽! 쪽!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의 볼에 뽀뽀까지 했다. 루시아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아이들을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볐다. 나는 놀라 루 시아에게 말했다. "진심이야? 정말로 애들과 랍스타 먹으러 가려고?" 그러자 루시아가 대답했다. "애들이 먹고 싶다는데 사줘야지." "그, 그런……." 중요한 사실은 루시아가 사준다고 해도 결국 돈 계산하는 사람은 나라는 것이다. "랍스타가 뭔지는 알아?" "바다가재 아냐?" "그럼 그거 엄청 비싼 것도 알겠네?" "비싸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애들이 먹고 싶다는데." "……." 아아~ 이렇게 오냐오냐하면 안 되는데. 애들 버릇 나빠지는데. 내 지갑에 구멍 뚫리는데. "저기…… 내 생각에는 말이야…… 저녁 때 다 같이 둘러 앉아 짜장면을 시켜먹는 것은 어떨까? 곱빼기에 간짜장으로 시켜주면 애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언니. 그냥 랍스타 먹어요." "짜장면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우리는 랍스타가 먹고 싶어요." "랍스타 곱빼기로 먹어요." 애들은 루시아에게 착 달라붙어서 랍스타를 향한 한결 같은 마음 을 내보였다. 루시아는 나에게 말했다. "애들이 이렇게까지 랍스타 먹고 싶어 하잖아." "그, 그렇지만 짜장면도 맛있잖아? 아! 짬뽕은 어때? 볶음밥도 시 켜줄 수 있는데?" 내가 계속 중국요리 쪽으로 몰고 가자 루시아의 눈빛이 날카로워 졌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렇게 랍스타를 사주기가 싫어?" "그게 꼭 싫다기보다는…… 아! 사실 내가 랍스타 알레르기거든. 랍스타만 먹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팍팍 돋는 체일이야." "그럼 넌 먹지 않으면 되잖아." "……." 너무해.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사실은 랍스타 엄청 맛이 없대. 그게 겉만 번지르르하고 괜히 가격만 비쌌지 짜장면보다도 맛이 없다는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야?" "응?" "지금 돈 아까워서 그러는 거야?" "……." 헉! 딱 걸렸다. "아니, 그게 꼭 돈이 아깝다기보다는…… 정말로 맛이 없을 것 같아서……." "니가 먹어 봤어?" "나야 당연 못 먹어봤지만……." "난 먹어봤어." "뭐? 언제?" "옛날에 왕궁에 있을 때." "……." 잠깐 잊고 있었는데, 루시아는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다. 풀 네임 은 아이리스 루시아. 화려한 왕궁에서 자란 루시아가 랍스타를 못 먹어봤을 리 없다. 게다가 아이리스 왕국은 바다를 끼고 있었으니. "아무튼 저녁 때 애들이랑 같이 갈 거니까 그런 줄 알아." "헤헤~." 아이들은 승리의 웃음을 지었고, 나는 얼굴을 구겼다. 영약한 것 들. 내가 루시아한테 약하다는 것을 알고 루시아를 이용하다니. 이렇게 되면 최후의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그, 그럼 이따 저녁 때 랍스타 먹기로 하고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는 게 어떨까? 아까 말했듯이 곱빼기에 탕수육까지 시켜줄게." 내 계획은 간단했다. 점심을 애들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이는 것이다. 그럼 저녁에 랍스타 먹을 때는 많이 못 먹겠지. 지갑이 받을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후후~ 나의 잔머리는 아직 녹슬지 않았군. 가끔은 이런 나의 천재성이 두렵기까지 하다. 혹시 나는 정말로 천재가 아닐까? 사실 잔머리로만 따지면 지니는 내 발끝에도 못 따 른다. 난 이런 나의 계획에 아이들이 쉽게 넘어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 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진행되었다. "아니에요, 오빠. 우리 점심 안 먹을 거에요." "맞아요. 지금부터 굶을 거에요." "그래서 아까 아침도 일부러 조금 먹었어요." "……." 얘들 오늘따라 왜 이러냐? 루시아도 놀란 듯 아이들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점심을 안 먹겠다니?" "헤헤~ 랍스타 많이 먹으려구요." "……." 한 끼를 굶으면서까지 랍스타를 먹겠다니! 참고로 어린 엘프들이 한 끼를 굶는다고 결심하는 것은 구국의 결단이라 표현해도 부족 하지 않다. 사실상 얘들 인생이 식도락 인생 아니겠는가? "그, 그래도 점심은 먹는 게 좋지 않을까? 배고플 텐데? 오빠가 맛있는 걸로 사줄게." "괜찮아요, 오빠." "우리는 랍스타면 충분해요." "헤헤~." "……." 이것들이 아주 작정을 했구나. 나를 뜯어 먹으려고 작정을 했어! 얼마 전 세레나에게 사준 120만원어치 옷과 구두의 할부금이 아직 35개월이나 남아있다. 지갑을 꼭꼭 닫아도 힘든 판국에 구멍을 뚫 으려 하다니! 만약 이 자리에 루시아가 없었다면 난 아이들에게 적절한 체벌을 가했을 것이다. 엎드려뻗쳐 자세를 하게 한 다음 알루미늄배트(일 명 쇠빠따)로 허벅지를 때린다던가, 한강철교(일렬로 엎드려뻗친 상 태에서 다리를 뒷사람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한 사람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라던가, 오리걸음으로 가게 200바퀴라 던가…… 하는 것들은 좀 잔인한가? 뭐, 빅장 40단 콤보를 맞고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을 겪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인도주의적인 체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현재 루시아의 보호 하에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정말로 점심을 먹지 않았다. 난 보란 듯이 일부러 중국 집에서 짜장면, 짬뽕, 탕수육, 깐풍기, 팔보채, 양장피 등등을 시켜 가게 사람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지만, 아이들은 손도 대지 않았다. 아이들은 우리가 점심을 먹는 내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이 들의 눈동자는 유혹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 어 깨동무를 하며 결의를 다졌다. "저거 먹으면 이따 랍스타 많이 못 먹어." "맞아. 배고프더라도 꾹 참자." "이따 오빠가 랍스타 잔뜩 사줄 테니까." "라이는 배터지게 먹을 거야." "루비도." "나도."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음식엔 손도 대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대체 저런 끈기와 의지는 어디서 나오 는 걸까? 솔직히 심정으로 두렵다. 정말 두렵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가게 문을 닫을 시각이 되었다. 아이 들은 겨우 한 끼 굶었을 뿐인데도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언제 나 통통하던 라이의 볼이 홀쭉하게 들어간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 질 것 같이 아프다. "빨리 가자. 애들 배 많이 고픈 것 같아." "으응." 루시아는 아이들이 안쓰러운지 한시라도 빨리 밥을 먹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게 문을 닫자마자 람스타 전문음식점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배고파 걸을 힘도 없었기에 얼마 안 되는 거리임 에도 불구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가야 했다. 이윽고 도착한 라는 이름의 랍스타 전문음식점.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앉을 자리가 없었다. 경기가 어렵다 어쩐다 해도 돈 쓸 사람은 쓰는 모양이다. 이제 곧 연말이니 망년회 자리가 많아진 것도 한 몫 했겠지. 그 때문에 우리는 서서 기다려야 했다. 으음, 랍스타 가게가 이렇 게 장사가 잘 되다니. 인형가게 때려치우고 외식업으로 진출해 봐? 아이들은 배고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특히나 라이는 금방이라 도 쓰러질 것만 같아서 내가 부축해줘야 했다. "괜찮니, 라이야?" "배고파요, 오빠." "……." 그러게 아까 짜장면 좀 먹지 그랬니? 그나저나 겨우 한 끼 안 먹 었는데 이 정도라니. 두 끼 안 먹으면 정말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 된다. 배고파 죽어가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뭐라도 먹여야겠다는 의 무감이 팍팍 든다. 아아~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다행히 아이들의 표정을 본 사람들이 자리를 양보해주었기에 우리는 바로 앉을 수 있었다. 난 탁자 위에 있는 메뉴판을 들여다 보았다. 바다가재 회 1kg - 75,000원 바다가재 칠리소스구이 - 75,000원 바다가재 버터구이 - 75,000원 킹크랩 - 60,000원 새우요리 - 35,000원 "……." 뭐냐, 이 어이없는 가격표는? 난 혹시 잘못 쓰인 건가 싶어서 가격표를 다시 살펴보았다. 하지 만 이상은 없어 보였다. 헉! 그럼 정말로 이 가격이란 말인가? 뒷장에는 세트 메뉴가 적혀있었다. 2人 A코스 - 90,000원 야채샐러드, 스파게티, 새우꽃게 칠리요리, 연어훈제, 과일, 차 2人 B코스 - 135,000원 야채샐러드, 스파게티, 회 1kg, 캥크랩 1.2kg + 매운탕, 새우꽃게 칠리요리, 연어훈제, 과일, 차 3人 특선코스 - 150,000원 야채샐러드, 죽, 빵, 스파게티, 회 1kg, 구이 1kg, 매운탕, 새우꽃게 칠리요리, 연어훈제, 캘리포니아 날치알 김밥, 참치회, 과일, 차 역시나 살인적인 가격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까? 만약 이 자리에 루시아가 없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 이다. 단란하게 외식하는 것까지는 참 좋은데 역시나 문제는 가격 이다. 제일 싼 메뉴라고 해봐야…… 으음, 여기 알밥이 있군. 난 이 거 먹어야지. "일단 바다가재 버터구이 하나씩 먹어요." "그래? 바다가재 버터구이 먹고 싶어? 그럼 하나씩 시켜줄게." 루시아는 배고파하는 아이들을 위함인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 에 주문을 했다. "일단 바다가재 버터구이 3개 가져다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손님." "빨리 좀 부탁드릴게요. 얘들이 많이 배고파하니까요." "예. 최대한 빨리 내오겠습니다, 손님." 바다가재 버터구이가 하나에 7만5천원. 3개면 22만5천원이군. 후후~ 뭐, 얼마 안 비싸군. 난 대범해지기 위해 애썼다. 그래. 남자가 쓸 때는 대범하게 쓰는 거야. 쪼잔하게 돈 계산하지 말자. 그런데 저 위의 대사 중에 '일단' 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마음에 걸린다. 일단 바다가재 버터구이 3인부이라면, 그 다음에 뭔가를 또 시키겠다는 건데……. "저기…… 너는 안 시켜?" "난 애들 먹는 거 도와주며 같이 먹을게. 너는 뭐 먹을 거야?" "으응. 난 알밥 먹으려구." 알밥 - 6,000원 이런 게 가장의 운명이다. 애들 랍스타 먹을 때, 알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아아~ 왠지 비참해진다. 그나저나 알밥도 더럽게 비싸 군. 6천원이 뭐냐? 이거 완전 폭리 아냐? "알밥 먹게? 다른 건 안 먹어?" "으응.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가 랍스타 알레르기인지라." "그럼 어쩔 수 없네." 나는 알밥을 주문했다. 때를 맞추어 바다가재 버터구이가 나왔다. 바다가재 버터구이는 말 그대로 바다가재를 버터에 구운 거다. 빨갛게 잘 익은 바다가재는 양쪽으로 쪼개져 있었고, 반으로 쪼개 진 몸이 또다시 토막 나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살 위에는 모짜렐라 치즈가 들러붙어있었다. 오오~ 이 고소한 향기! "와아! 랍스타다!" "잘 먹겠습니다아~!" 아이들은 재빨리 손으로 랍스타를 집어 들고 살을 발라먹기 시작 했다. 꾸역꾸역. 일단 무조건 입 안에 밀어 넣고는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킨다. 저 비싼 음식을 저딴 식으로 먹다니! "천천히 먹어 얘들아. 아! 언니가 콜라 시켜줄게. 여기요! 콜라 세 병 주세요!" 콜라 세 병이면 3천원. 내 밥값의 무려 반이다. 아이들은 눈에 불을 켠 채 랍스타를 뜯어 먹었다. "맛있니?" "막막 맛있어요." "진짜진짜 맛있어요." "너무너무 맛있어요." 루시아는 그런 아이들을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뱀 혓바닥처럼 갈라진 쇠꼬치를 이용해 집게 안의 살을 발라주었다. 본인은 입도 대지 않고 아이들을 챙겨주는 모습이라니! 루시아는 정말로 천사가 아닐까? 아니, 천사라 하더라도 루시아 처럼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곱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애들 먹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새 세 마리 바다 가재는 완전히 해체되어 빨간 껍질만 남아 있었다. 헉! 그 커다란 바다가재를 벌써 다 먹어치우다니! 난 아직 알밥 한 숟가락 밖에 안 떠먹었는데. 난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알밥 하나씩 시켜줄까?" 난 애들이 알밥을 먹고 싶어 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아 이들은 너무나도 간단히 나의 진심을 외면했다. "아니에요, 오빠. 이번엔 바다가재 칠리소스구이 먹을 거예요." "……." 무서운 것들 같으니라고. 7만5천 원짜리 바다가재 버터구이를 먹었으면 됐지, 칠리소스구이까지 먹겠다니. 오빠가 알밥 먹는 거 안 보이니? 랍스타를 먹기 위해 점심까지 굶은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이 내 지갑 사정을 생각해 줄 리 없지. 아이들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 눈빛은 목숨을 건 결투에 임하는 기사의 그것보다도 더 강력했다. 마치 이 자리에서 배 터져 서 죽어도 좋다고 말하는 듯하다. "여기요! 바다가재 칠리소스구이 3개 주세요. 그리고 이 접시들 은 치워주세요." 난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아까 먹은 바다가재 버 터구이가 22만5천원. 콜라 세병이 3천원, 내가 먹은 알밥이 6천원, 그리고 지금 시킨 바다가재 칠리소스구이가 22만5천원…… 합이 45만9천원. "헉쓰!"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 갑자기 호흡하기가 힘들어져서." 정말이지 한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생각해보니 얘들이 아까 먹은 바다가재 버터구이와 지금 시킨 바다가재 칠리소스구이 모두 1인분이 아니다. 하나 시켜서 두 명이나 세명이서 나눠 먹어야 하 는 겅시다. 그런데 그것을 한 사람당(한 엘프당?)하나씩 먹은 것도 모자라 하나를 더 시키다니! 설마 여기서 더 시켜 먹지는 않겠지? 루시아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쇠꼬치를 이용해 집게나 다리 속의 살을 발라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조금 먹었다. "와인이나 마실까?" "와인?" "응." 루시아는 왕족이어서 그런지 고급술을 즐긴다. 뭐, 모든 와인이 고급술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소주나 맥주를 즐겨 마시는 일반 사 람들에게는 비싸 보이기 마련이다. 나 역시 와인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편이고. 그래도 루시아가 마시고 싶다고 하니 무조건 시켜줘야지. "부담 갖지 말고 시켜." "으음, 그럼 샤또 그랑 퓌 하크스데(Ch. GRAND PUY LACOSTE) 로 할게." "응? 샤또 뭐?" 난 황급히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와인 메뉴판은 따로 있었다. 거 기에는 여러 종류 와인의 등급과 생산지, 특징 등이 자세히 적혀있 었다. 으음, 샤또 그랑 퓌 하크스데라…… 아! 찾았다. 샤또 그랑 퓌 하크스데(Ch. GRAND PUY LACOSTE) - 180,000원 "……." 오늘 가격표들이 다 왜 이러냐? "여기요! 샤또 그랑 퓌 하크스데 한 병 주세요. 잔은 두 개 가져다 주세요." "……." 점점 호흡하기가 힘들어진다. 마치 누군가가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는 것만 같다. 이걸로 63만9천원. 잠시 후, 남자 종업원이 와인과 잔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와인 에 붙은 라벨을 우리가 잘 볼 수 있도록 보여준 다음 코르크마개 를 땄다. 퐁~. 그리고는 나와 루시아 앞에 놓인 잔에 반 정도 따라주었다. 이게 바로 18만 원짜리 와인이구나. 난 붉은 빛깔의 와인을 보고 목을 매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루시아는 손가락으로 잔을 잡고 내 쪽으로 내밀었다. 건배하자는 건가? 난 잔을 들어 루시아의 잔과 가볍게 부딪혔다. 루시아는 붉은 입 술을 잔에 댄 다음 살짝 기울였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붉은 와인. 이 모습이 왜 이렇게 뇌쇄적으로 보이는 걸까? 아아~ 내가 저 와인이었으면. 난 넋을 잃은 표정으로 루시아의 입술에 주목했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마스날 나는 루시아와 진한 키스를 했다. 일명 딥키스(Deep Kiss). 또는 프렌치 키스(French Kiss). 쿵쾅쿵쾅! 그날의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아아~ 난 심장이 약해서 큰일이야. "왜 그래? 안 마셔?" "아, 아니, 마실게." 난 황급히 와인을 마셨다. 그 때문에 와인이 무슨 맛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라이도 마시고 싶어요, 언니." "루비도요." "저도요." 와인을 마시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이들. 얼마나 열심히 먹었는 지 아이들 입가에는 소스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루시아는 휴지 로 아이들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그렇게 마시고 싶어?" "네에~!" "조금만이다, 알았지?" "네에~!" 루시아는 잔을 몇 개 더 가져오게 한 다음 와인을 아주 조금 따라 주었다. 소주잔 하나 채울 정도? "우리 건배해요, 오빠." 라이의 제안에 모두가 잔을 내밀었다. 난 건배할 기분이 아니었 지만, 하는 수 없이 잔을 내밀었다. 쨍! 잔이 서로 가볍게 부딪히자 아이들은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캬아! 맛있어요, 오빠." 마치 쓴 소주를 마신 듯 얼굴을 찡그리며 감탄사를 내뱉는 라이. "더 줘요, 언니." "더 주세요, 누나." 아이들은 잔을 루시아에게 내밀었다.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술 맛을 알다니. 커서 뭐가 되려는지 정말 걱정이군. "많이 마시면 안 돼." "그럼 조금만 주세요." "정말 조금만이야. 알았지?" "네에~!" 루시아는 아이들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많다. 잔을 반 채울 정도? 아이들은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며 열심히 랍스타를 집어 먹었 다. 고급 와인과 함께 고급 요리를 즐기는 아이들. 내일은 뭐 사달 라고 할지 벌써부터 두렵다. 설마 내일은 제비집을 사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정말로 제비집을 사달라고 땡깡을 부린다면 벌집 으로 만들어줘야지. 오늘 쓴 돈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다. 내일부터는 정말로 우유 에 조리퐁 말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루시아는 와인을 세 잔째 마시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뺨은 빨 갛게 달아올라있었고,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약간 풀려있었다. 루시아는 술기운이 금방 올라오는 타입이다. 그리고 약간 취한 상태로 꽤나 오래 버틴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괜찮아. 이 정도는." 루시아는 힘이 드는지 탁자에 몸을 기댔다. 아아~ 루시아가 내 옆에 앉아있었다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을 텐데. 그럼 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면서 허리에 손을 둘렀겠지. 그리고 그 손으로 그녀 의 몸을 더듬으며……. "음식 다 떨어졌어요, 언니." 라이의 말 때문에 난 상상을 중단했다. 아이들의 접시는 어느새 비어 있었다. 음식 한 점 묻지 않은 채로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하 얀 접시. 바닥까지 다 핥아먹은 거냐? 난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제 배 안 부르니?" "배불러요." "그런데 또 먹으려구?" "아까까지가 메인디쉬(Main Dish)였어요. 이제부터 후식 먹으려 구요." "……." 장난 하냐? "뭐 먹고 싶어? 언니가 시켜줄게." 루시아는 메뉴판을 펼쳤다. 당연한 얘기지만 루시아가 시켜주더 라도 계산은 내가 해야 한다. "라이 생각에는 이 3인 특선코스가 좋을 것 같아요. 매운탕까지 끓여준데요." "알았어." 루시아는 주저 없이 3인 특선코스를 시켰다. 가격은 무려 15만 원. 이걸로 78만9천원. 이 음식점 36개월 할부 가능하려나? 난 끓어오르는 속을 어떻게 할 수 없어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 다. 마시면서 생각해보니 이 와인 다 떨어지면 루시아가 한 병 더 시킬지도 모른다. 난 손을 들며 소리쳤다. "여기 소주 한병이요!" 참고로 소주는 한 병에 3천원이다. 이걸로 81만2천원. 난 소주 뚜껑을 따서 와인잔에 한가득 따랐다. 그리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작은 소주잔으로 나의 이 끓는 속을 달랠 수가 없다. 그래. 실컷 마시는 거야. 취하면 이 모든 것들이 잊혀지겠지. 아이들은 순식간에 샐러드, 죽, 빵, 스파게티를 먹어 치웠다. 잠 시 후 회와 구이가 나왔다. 난 소주를 들이키며 회를 집어 먹었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소주. "여기 소주 한 병 추가요!" 이걸로 81만5천원. 조금 있으니 매운탕이 나왔다. 바다가재를 넣고 끓인 매운탕이 어서 그런지 굉장히 시원하고 맛있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먹고도 아직 먹을 여력이 남았는지 매운탕을 떠서 밥과 함께 비벼 먹었다. 얘들 데리고 뷔페에 가면 쫓겨나지 않을까? 언제 뷔페에 한번 데 려가야겠군. 내가 장담하건데 본전의 최소 3배 이상은 먹어치울 것이다. 게다 가 얘들은 어린애여서 입장료도 적게 받을 테니. 그나저나 이 매운 탕 정말 맛있군. 난 수저로 매운탕을 떠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그래도 술을 마시 는 동안에는 계산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와인이 다 떨어졌네." 루시아는 손을 들었다. "여기요. 샤또 그랑……." 헉! 18만 원짜리 와인을 한 병 더 시키려는 건가? 나는 놀라 루시아를 말렸다. "그만 마셔. 많이 취했어." "아니야. 난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빨갛게 달아오 른 얼굴과 살짝 풀린 눈동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짓 등등. 아이들은 매운탕 냄비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 중이었다. 지독한 것들. 누가 보면 내가 3일 정도 굶긴 줄 알겠군. "꺼억~!" 밥을 다 먹은 아이들은 트림까지 했다. 그리고는 빵빵하게 부풀 어 오른 배를 자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렴." "배불러서 못 일어나겠어요오." "……." 그래. 내가 봐도 니들 못 일어날 것처럼 보인다. 한 사람이서 5인 분 이상을 먹었으니. 나 6천 원짜리 알밥 먹는 동안 니들은 20만원 어치를 먹었지. 인간으로서…… 아니, 엘프로서 어떻게 그럴 수가! 얘들은 정말로 양심도 없단 말인가? 아이들은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한 10분 정도 지나자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난 루 시아를 부축했다. 루시아의 왼손을 내 어깨 위에 두르게 하고, 내 오른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또 다시 심장박동수가 증가 하기 시작한다. 난 계산대 앞에 섰다. "81만5천원입니다." "……." 또 다시 호흡곤란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난 카드를 내밀었다. 세레나 옷과 구두값 120만원 다음으로 많은 금액을 카드로 긁는 것이다. 드르륵! 카드가 긁히는 순간 내 마음에는 커다란 스크래치가 생겼다. 아 마 이 상처를 회복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오죽하면 전 표에 싸인하는 손이 덜덜 떨리겠는가? 루시아는 혼자 서있기가 힘든지 나에게 완전히 몸을 기대고 있 었다. 흠흠, 이건 좋군. 난 루시아를 부축한 채 밖으로 나왔다. 연말이라 그런지 거리에 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날씨가 춥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빠르 게 걸음을 옮겼다. 으음, 좀 춥긴 하군. 루시아는 심하게 비틀거렷다. 하긴, 혼자서 와인을 반 병 이상 마 셨으니.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으응." 루시아는 혼자 걸어보려 애를 쓰다가 넘어질 뻔했다. 나는 황금 히 그녀를 부축했다. 와인 향기와 함께 루시아 특유의 향기가 밀려 들어온다. 그리고 손에 닿는 이 촉감. 만약 계절이 여름이었다면 맨살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겨울이어서 아쉽다. 하지만 두꺼운 옷 위로 느껴지는 촉감만으로도 내 심장은 미칠 듯이 뛰고 있었다.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보통 이런 경우에는 무리해서 집까지 데려가기보다는 근처에 쉴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근처에 쉴 수 있는 곳은 주로 여 관이나 모텔 등이다. 그런 곳을 찾아가 그녀를 침대에 눕혀 놓고 깨기를 기다린다. 그 런데 그녀가 너무 더워한다(만약 더워하지 않는다면 더워할 수 있도록 히터를 세게 트는 방법을 추천한다). 그럼 더워하는 그녀를 위해 옷을 벗겨준다. 그 다음……. 한참 상상하던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번화가인지라 모텔 한두 개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로미오 모텔 오옷! 저기 좋아 보이는군. 줄리엣도 아니고 로미오라니! 난 루시 아를 부축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빨리 집에 가요, 오빠." "걸어가기 힘드니까 택시 타요." "기왕이면 모범택시로요." "……." 애들이 있다는 걸 깜빡했군. 난 아이들을 보았다. 라이, 루, 루비. 어딜 보아도 깜찍하고 귀여운 어린 엘프들. 하지만 내 인생에 조금 도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린 엘프들. 만약 얘들이 없었다면 여기서 루시아와 잘 되는 스토리로 흘러갔 을 텐데. 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택시 타고 가자꾸나." 그러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길가에 일렬로 서서 손을 쭉 내밀었다. 엄지손가락이 들려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택시는 금방 잡혔다. 인원이 5명이기에 잘 껴들어가야 한다. 난 루를 앞자리에 앉게 하고, 루시아와 함께 뒷자리에 앉았다. 라이는 루시아 옆에 앉히고, 루비는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끄응, 얘도 라이만큼이나 무겁군. 하긴, 그렇게 먹어대는데 안 무 거우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난 아까 번뜩거리던 아이들의 눈빛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 것은 영원히 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아아~ 8만1천5백원도 아니고 81만5천원이다. 이제까지 내가 먹어본 식사 중에 가장 비싼 식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래봐야 정작 내거 먹은 건 알밥과 소주 두 병 정도지만. 으음, 그러고 보니 랍스타에는 손도 못 댔군). 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혈 압이 급속도로 치솟는다. 난 분명히 오래 못 살 거야. 그래도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지금 루시아가 내 어깨에 머리 를 기댄 채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으음, 아까의 계획대로 진행했다면 환상적이었을 텐데. 아쉽지 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나? "헤헤~ 라이 말 대로에요." 루비는 내 품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응? 라이 말 대로라니?" "라이가 오빠 무릎 위에 앉으면 막막 편하다 그랬거든요." "……." 혹시 이 아이들이 나를 쿠션, 비행기, 물주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 * * * 다음 날. 난 어제 긁은 카드값을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일했다. 조금이라 도 더 일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리라. 결코 신용불량자 따위는 되지 않으리라. 난 이를 악물었다. 내가 열심히 가게 청소를 하고 있는데 라이, 루, 루비가 쪼르르 달려왔다. 아이들은 굉장히 활기차 보였다. 어제 랍스타를 퍼먹은 게 효과가 있긴 있나 보다. 저 땡땡한 볼에 개기름을 흐르는 것 좀 봐. 온몸에서 귀티가 폴폴 풍긴다. 비싼 밥의 효과일까? 헬로우 귀티가 울고 가겠군. "오빠아~!" "아, 안녕, 얘들아." 난 몰려오는 아이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슬쩍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되어 간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12시는 애들이 밥 사달라고 난리칠 시간이다. 나의 예상대로 아이들은 내 앞에 서더니 합창을 하듯 말했다. "맛있는 거 사주세요오~! 맛있는 거 먹고 싶어요오~!" "오, 오늘은 뭐가 먹고 싶니?" 내가 묻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햇다. "제비집이요오!" "……." 결국은 제비집이 나오고 말았군. 난 일단 주위를 살펴보았다. 1층에 있는 사람은 지니뿐이었다. 난 지니에게 물었다. "루시아는 어디에 있나요?" "아이들 간식 사러 간다고 저희 누님과 함께 잠깐 나가셨습니 다." "그렇군요." 난 혹시 몰라(그동안 지니에게 물 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다시 한번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찾아봐도 루시아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루시아가 가게 안에 없다는 것을 확신한 나는 다시 아이 들 앞에 서서 일갈의 사자후를 터트렸다. "네놈들이 간땡이가 붓다 못해 아주 배 밖으로 튀어 나왔구나! 내 오늘은 결코 용서치 않으리! 뭐? 제비집? 이것들이 어디서 감히 제비집 같은 소리를! 아주 벌집을 만들어 주마! 덤으로 사흘 동안 죽만 먹게 해주마!" "왜, 왜 그랭, 오빠?" "루, 루비 무서워요." "지, 진정해요, 형." 아이들은 나의 변화를 눈치 챘는지 서로를 부둥켜안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후후~ 하지만 용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의 빅장 40단 콤보에 자비심을 기대하지 마라! 뼈와 살이 분 리되는 고통을 느끼게 해주마! 간다! 빅장 40단 콤보!" 아이리스 2부 4권 Story 10 담배 사재기 오늘은 12월 29일. 사흘 후면 새해가 밝는다. 보통 이때쯤이면 한 해를 되돌아보기 마련이다. 나는 올 한 해 동안 과연 무엇을 했는가? 생각해보니 별로 한 게 없다. 으음, 한 건 없는데 나이만 먹는군.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라!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나는 학문같이 어려운 것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오직 루시아의 사랑뿐. 히로이로애난성(Hiro易老愛難成)이라! 히로는 늙기 쉬우나 사랑은 이루기 어렵구나! 한 해 동안 루시아한테 차인 게 몇 번인가? 무릎 꿇고 꽃을 바쳤는데 무시당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이혼(?)할뻔하기도 했었지. 만약 그때 라이가 가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말 갈라섰을지도 모른다. 그럼 난 지금쯤 차가운 한강 물 속에 있겠지. 시체가 되어. 세레나가 한국에 온 것도 위기였다. 세레나와 라나로 인해 나와 루시아의 관계가 위험수위까지 갔었지. 과거에 벌여놓은 일들이 이제 와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슨 부메랑도 아니고. 그나마 딱 하나 다행인 것은 크리스마스 날 루시아와 프렌치 키스를 했다는 것이다. 후후후~ 그냥 키스도 아니고 프렌치 키스다. 혀와 혀가 엉키는(이렇게 말하니 낯 뜨겁군).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좋았던 것 같다.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입술과 혀의 감촉. 그리고 코끝에 느껴지는 루시아의 숨결. 마치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 안 해본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도 생각을 해야 할 텐데. 프렌치 키스의 다음 단계라면 뭐가 있으려나? 나의 목표는 완결 전까지 라이의 동생을 만들어 주는 것. 기왕이면 루시아를 꼭 닮은 귀엽고 깜찍한 여자애로. 아마 라이가 굉장히 기뻐하겠지? 나는 자신보다 더 어린 아이를 안고 기뻐하는 라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해?" "응? 아무 것도 아니야."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루시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마치 보석 같은 루시아의 눈동자. 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다. "아무 일도 아닌데 그렇게 웃어?" "그냥 라이 생각하고 있었어." "우리 라이가 좀 귀엽긴 하지." 라이 얘기가 나오자 얼굴에 웃음을 띠며 어깨를 으쓱하는 루시아. 라이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하는 모습이다. "우리 라이는 너무 착하고, 너무 귀여운 것 같아. 난 아직도 크리스마스 날 받은 감동을 잊지 못한다니까." 크리스마스 날 받은 감동이라면......라이가 쓴 카드를 말하는거군. 오빠랑 언니랑 계속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카드. 우리 라이가 얼마나 착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맞춤법과 글씨가 개판이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마음이니. 루시아는 내 옆에 앉아 라이가 얼마나 착하고 귀여운지에 대해 열심히 말하기 시작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아무리 지나쳐도 부족한 것일까?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자기 자식 예쁘지 않은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만약 라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의 질문에 루시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라이가 없는 세상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라이는 나의 전부니까." "......" 그럼 나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루시아에게 있어서 나란 존재는 라이와 비교해 볼 때 너무 밀린다. 그만큼 루시아가 라이를 사랑한다는거지만, 라이의 반만큼이라도 나를 좀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딸을 질투하는 아빠라니, 나도 참 비참하군. 하지만 그만큼 라이에 대한 루시아의 사랑은 지극했다. 난 라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루시아와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언젠가는 우리 셋이 찍은 가족사진을 거실에 걸어 놓는 거야! "언니이~!" "아! 라이다." 라이가 부르자 바로 일어서서 달려가는 루시아. 남겨진 나는 좌절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군. 이대로라면 정말 라이에게 루시아를 뺏길지도...... 생각해보면 라이는 루시아와 항상 붙어있다. 그리고 목욕도 함께한다. 심지어는 잠자리까지도...... 빠드득! 감히 루시아와 목욕에 잠자리까지 같이 하다니! 네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당장 빅장 40단 콤보로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마! “......” 헉! 내가 무슨 생각을? 엄마랑 딸이 같이 목욕하고, 같이 자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 아아~ 라이를 상대로 이런 분노를 표출하다니. 나는야 나쁜 아빠~. 그나저나 손님이 벌로 없으니 심심하군. 난 카운터에 엎드려 가게 문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저 문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 가게 안에선 몇몇 손님들이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인형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는 엄청 장사가 잘 됐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한산해지니 이상한 느낌이다. 역시 불경기라는 건가? 서민들은 지금이 IMF때보다 더 힘들다고 한다. 비정규직은 점점 늘어나고, 자영업자들은 장사도 잘 안 되고, 청년 실업이 50만에 육박하고, 중장년층 실업도 만만치 않고. 오죽하면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삼팔선(38세면 조기퇴직선), 사오정 (45세면 정년), 오육도(56세까지 회사에 붙어있으면 도둑놈), 육이오(62세 까지 일하면 오적(五賊))등등의 단어가 난무하겠는가? 얼마 전에 보니 외식업자들도 못 살겠다고 난리를 치더라.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밟았다면, 지금쯤 공장에서 용접이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판타지 세계에 간 게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덕분에 드래곤의 원조를 받아 이런 가게까지 차렸으니. 게다가 다른 가게에 비하면 장사도 매우 잘 되는 편이다. 적어도 애들 입에 풀칠할 만큼은 벌고 있으니(정확히는 풀칠이 아니라 금칠이다. 우리 애들 입맛이 워낙 고급인지라). 요즘 뉴스를 보면 안 좋은 소식들뿐이다. 아이가 장롱 속에서 굶어죽질 않나, 연쇄살인이 일어나질 않나, 국회의사당에서 패싸움을 하질 않나...... 그래도 국회의원들의 싸움은 정말 재밌다. K1 같은 이종격투기 경기 저리가라 할 정도다. 다양한 타격기술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무기(마이크, 의자 등등)까지 사용한다. 무제한급이니 재미는 배가 된다. 하지만 국회격투기의 진가는 바로 패싸움이다. 수십 명의 의원들이 서로 멱살을 쥐고 싸우는 모습은 국민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빠트리기에 충분하다. 뉴스를 보던 라이레얼이 흥분해서 ‘레프트! 라이트! 썸머 쏠드킥으로 날려버려!’ 라고 외쳤을 정도니 말 다했지. 이런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을 조금이나마 재밌게 해주려는 국회의원님들의 노력. 그야말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이러니 우리나라 국회의원님들이 존경을 받지 않으려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있을 그분들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그래도 그분들께서 활약하시기엔 한국 땅이 너무 좁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 그분들이 마음먹고 세계무대로 진출하신다면 K1이나 WWE 등등의 격투 경기를 평정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음음,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회의원님들 이종격투기 경기 진출을 강력하게 건의해 볼까? 난 오늘도 고생하실 국회의원님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들을 생각하는데 어째서 한숨이 먼저 나오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4년마다 AS가 되잖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AS를 해봐야 성능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거죠.” 내 앞에 등장한 한 남자. 183센티미터의 큰 키에 탄탄하면서도 날렵한 몸매, 상아빛의 매끄러운 피부와 조각 같은 얼굴, 한 올 한 올 금실을 뽑아 만든 것 같은 금발과 지중해의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왼쪽에 낀 외눈안경. 그 외눈안경에는 금줄이 살짝 내려와 있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외모. 하지만 이러한 외모는 그가 가진 능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 사법고시를 치러도 만점으로 합격할 것 같은 두뇌, 어떠한 여인도 30초 안에 넘어오게 할 수 있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언변, 수백 병도 가볍게 이길 것 같은 싸움실력. 여기에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매너 등등. 아아~ 더 이상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그는 과거 아이리스 왕국의 참모이자 지금은 나의 충성스런 부하1호인 사일런스 지니다. 그의 프로필은 ‘안 하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는 인간’ 정도로 기억하도록 하자. “이렇게 한산한 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 난 나빠, 임마. 당장 매상이 줄어드는데 나쁘지 않을 리 있겠냐? 뭐, 그래도 가끔이라면 괜찮겠지. 사실 그동안 너무 정신없었으니까. 가끔은 이렇게 카운터에 편하게 앉아 나른함을 즐기는 것도 일상의 작은 행복인 듯. “할일도 없는데 장기 한 판 두시겠습니까?” “장기요? 그거 좋죠!” 지니는 판과 말을 가져왔다. 무엇을 하든 스페셜리스트인 지니는 내가 룰을 알려주자마자 순식간에 고수로 진입했다. 하지만 도박과 승부에 관련된 종목이라면 나 역시 고수. 그 때문에 우리의 승률은 비슷하다. 정확하게 따지면 내가 약간 더 높다. 후후~ 나라고 언제나 지니보다 못하라는 법은 없지. 가끔은 내가 지니보다 잘하는 게 있기도 하지(여성팬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카운터에 판을 펼치자 우리는 빠른 손놀림으로 말을 배치했다. 내가 한(漢) 이고 지니가 초(楚)다. 참고로 장기는 한나라와 초나라가 싸우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진시황이 진(秦)나라로 통일했지만, 진시황 사후(死後)에 다시 분열하고 만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이다. 역발산기개세 (力拔山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다)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괴력을 자랑하던 항우였지만, 해하(垓下)에서 유방의 군대를 맞아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때 유방은 궁지에 물린 적들을 공격하는 대신 사방을 포위하고 초나라 출신 군사들에게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다. 밤마다 들려오는 초나라 노랫소리에 항우의 병사들은 마음이 약해져 탈영을 하였고, 항우의 세력은 점점 약해졌다. 이때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사면초가 (四面楚歌)이다. 항우는 최후의 연회를 벌인다.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애첩인 우희(우미인) 와 그의 명마 추뿐이었다. 항우는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읊었다. 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 시불리혜추불서(時不利兮?不逝) 추불서혜가나하(?不逝兮可奈何) 우혜우혜나약하(虞兮虞兮奈若何)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때가 이롭지 못하여, 오추마는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으니, 가히 어찌할 것인가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이 노래가 그 유명한 해하가(垓下哥)다. 우희는 그 노래를 듣고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한병기략지(漢兵己略地) 사면초가성(四面楚歌聲) 대왕의기진(大王義氣盡) 천첩하료생(賤妾何聊生) 한나라 병사가 이미 초나라 땅을 차지했고 사면에 들리는 것은 초나라 노랫소리 대왕의 의기가 다 했으니 천첩이 어찌 살리오 노래를 끝마친 우희는 항우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결하였다. 그리고 항우는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리다가 오강(烏江)에 이르러 자결한다. 이 스토리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패왕별희(覇王別姬)라는 경극(京劇)이 있을 정도다. 뭐, 역사 공부는 이쯤 해두도록 하자. 원래 연장자가 한을 잡아야 하지만, 내가 직위가 높고(난 공작, 지니는 백작이다) 내 실력이 조금 더 뛰어난지라 내가 한을 잡고, 지니가 초를 잡는다. 말을 먼저 움직이는 쪽이 초이기 때문에 초가 약간 유리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후후후~ 승부사의 피가 끓어오르는군. 지니가 먼저 졸(卒)을 움직임으로서 게임이 시작되었다. 만약 상대가 일반인이었다면 적당히 둬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사일런스 지니다. 적당히 둬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다. 사일런스 지니는 하나의 커다란 벽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상대로 ‘적당히’ 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력을 다해 부숴주마! 나는 장기판에 몰입했다. 딱! 딱! 조용한 가게 안에 말 움직이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우리가 카운터에서 장기를 두자 손님들은 흥미가 생겼는지 우리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전부 지니 뒤쪽을 택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내 뒤쪽 공간이 더 넓은데. ‘꼭 이기세요, 지니님.’ ‘저런 안 생긴 놈한테 지시면 안 돼요.’ ‘저희가 지니님을 응원할 게요.’ 지니 뒤쪽에 선 십수 명의 여자들. 난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지니의 팬클럽 소속 회원들이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손님이 언제 이렇게 많아졌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몇 명 없었던 것 같은데. 설마 가게 여기저기에 숨어 지니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나? 으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지니의 뒤에 서 있던 여자들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지금 지니님께서 장기를 두고 계셔. 상대는 만날 지니님 옆에 붙어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난리치는 그놈이야. 응, 맞아. 그 안 생긴 남자. 지니님이 지금 그 남자랑 장기 두는 중이니까 빨리 와서 응원해.” “......” 만날 지니 옆에 붙어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난리치는 놈? 안 생긴 남자? 설마 이 말들이 나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지? 조금 시간이 흐르자 가게 안에 수십 명의 여성들이 우르르 몰려와 지니 뒤에 섰다. 그리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직장 여성부터 초등학생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하나같이 아리따운 여성들. 그야말로 미녀군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지니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기권하시지.’ ‘너 같은 것은 지니님이 상대할 가치도 없어.’ ‘감히 지니님께 덤비다니.’ ‘만약이라도 니가 지니님한테 이긴다면,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하게 해주지.’ 나의 온몸을 후벼 파는 여성들의 눈길. 응원에서부터 내가 밀리기 시작한다. 서포터즈는 또 다른 선수라고 했던가? 나는 마치 수십 명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불타올랐다. 네놈이 그딴 식으로 여성팬들을 동원한다 해서 내가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으냐? 열혈과 근성으로 박살을 내주마! 으음, 그나저나 밀리긴 밀리는군. 저 여자들 눈빛이 너무 무서워. 마치 적지 한가운데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내가 핀치에 몰리고 있을 때 나에게도 지원군이 등장했다. “아! 오빠가 장기를 둔다!” “루비는 오빠를 응원할래.” “뭐, 라이랑 루비가 형을 응원한다면 나도 형 응원해야지.” 쪼르르 달려와 내 등 뒤에 붙은 어린 엘프들. 어린 엘프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응원가를 불렀다. “오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그래. 나에게는 이 아이들이 있어.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의 영원한 서포터즈인 어린 엘프들이. “응원하는 모습도 정말 귀엽네. 언니랑 같이 오빠 응원하자.” 여기에 루시아까지 가세했다. 덕분에 나의 사기는 최고치에 다다랐다. 이들이 나를 응원해주는 이상 난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사일런스 지니 따위야 가볍게 아웃 오브 안중이다! “장군.” “멍군.” “장군.” “멍군.” 오호~ 꽤 하시는군. 계속되는 치열한 접전. 내가 졸을 먹으면 지니도 졸을 먹었고, 내가 마(馬)를 먹으면 지니도 마를 먹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말을 죽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루시아와 아이들이 보고 있다. 그런데 진다면 그게 무슨 개망신인가? 하지만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서로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순간 지니의 진형에 빈틈이 생겼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포(包)를 이동시켜 장군을 쳤다. 지니는 왕을 이동시킴으로써 방어를 했다. 나는 이번에 상(象)을 움직여 장을 쳤다. 지니는 사(士)를 이동시켜 상의 길목을 막았다. 왕은 지킬수 있었지만 한쪽에 있는 지니의 차는 내 상의 먹이가 되었다. 지니가 차(車)를 잃은 순간부터 분위기는 급속히 내 쪽으로 기울었다. 후후~ 넌 이제 끝났어. 난 말들을 이용하여 지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니는 내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다 이겼다고 생각한 그 순간...... “외통수군요.” “헉!” 지니의 말대로 외통수였다. 차 하나가 장을 걸고 있는데 왕이 빠져나가질 못하는 것이다. 한 수면, 앞으로 단 한 수면 이길 수 있는 건데...... 말이 아무리 많으면 뭐하나? 왕이 죽으면 게임이 끝나는데. 난 혹시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지 않을까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히 끝이었다. “한 수 물러드릴까요?” 지니의 말은 달콤한 유혹과도 같았다. 이 수만 무르면 내가 이길 수 있다. 시간을 1분 정도만 되돌려 차를 방비하기만 한다면 내가 이기는 것이다. 내가 물러달라고 하면 지니는 별 말 없이 기꺼이 물러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둔 수를 무른다는 것은 나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않았다. 승부의 세계에서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 이제까지 바둑, 장기, 체스 등을 두면서 단 한번도 수를 무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고스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관련된 옛 성인의 명언도 있다. 낙장불입(落張不入) 한번 떨어진 패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승부냐, 프라이드냐? 난 결국 프라이드를 택했다. 비열한 승자가 되느니 차라리 당당한 패자가 되리. “제가 졌습니다.” 난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꺄아~ 지니님이 이기셨어!” “그럼 그렇지. 지니님이 질 리 없잖아.” “사랑해요, 지니님~!” 마치 자기가 이긴 것처럼 기뻐하는 지니의 팬클럽 회원들. 그리고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는 어린 엘프들. 아아~ 아이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고 싶었지만, 실망만을 안겨주는구나. 미안하다, 얘들아. 부족한 이 오빠를 용서해다오. “좋은 승부였습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승리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승부의 세계에 있어서는 운도 실력에 포함되지요. 그리고 사일런스 백작님의 마지막 수는 결코 운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몇 수 앞을 내다보시는 사일런스 백작님의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내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지니는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제 실력은 아이언스 공작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하찮은 것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반딧불이라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태양이고, 제가 노새라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유니콘이고, 제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미스릴입니다. 저는 이 한판의 승부를 통해 아이언스 공작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수비를 하실 때는 산과 같이 진중하시나, 공격에 임하실 때는 마치 세찬 강물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장기를 두심에 있어서 병법의 진수가 녹아들어있으니, 어찌 저같이 미천한 존재가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시는 그 모습은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저에게 있어서 큰 스승님이십니다. 비록 부족한 저이지만 앞으로도 성심성의껏 아이언스 공작님을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푸하하~ 세상이 넓다하나 저의 진가를 알아주시는 것은 사일런스 백작님뿐이군요.” 난 지니의 말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지니는 아부에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패배로 인해 기분이 별로였는데, 지니의 아부에 그런 기분이 싹 가셨다. 만약 지니가 간신배의 길로 나섰다면 자이나레스 대륙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리스 왕국 백성들에게 두고두고 욕 얻어먹었겠지. ‘사일런스 지니라는 놈이 나라를 말아 먹었어!’ 라는 식으로. 난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루시아도 나에게 실망했으려나? 다행히 루시아는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장기라는 거 되게 재밌어 보인다. 나중에 나한테도 가르쳐줄래?” “응?” “가르쳐주기 싫어?” “아, 아니야. 니가 원한다면 언제는 가르쳐둘게.” 난 은근슬쩍 루시아의 손을 움켜잡았다. 루시아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도 똑같은 형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백금과 순금이 교차된 링. 그리고 그 가운데에 박혀있는 에메랄드. 그렇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가 마련한 커플링이다. 참고로 커플링은 아무나 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커플들만이 낄 수 있는 것이다(너무 당연한 말인가?). 그러니까 이 커플링을 끼고 있다는 것은 나와 루시아가 커플이라는 것이다(이것도 너무 당연한 말인가?). 언젠가는 이 커플링이 약혼반지로 변하고 결혼반지로 변할 것이다. 그것이 정해진 수순이다. “손 좀 놔줄래?” “응? 아! 미안.” 난 아까부터 잡고 있던 루시아의 손을 놓았다. 으음, 나도 모르게 계속 잡고 있었군. 나는 스킨십을 굉장히 좋아한다. 반면 루시아는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과는 자연스런 스킨십을 하는 것을 보면 남자와의 스킨십을 싫어한다고 해야 하나? “웃차!” 난 라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올려 안았다. 라이는 짧은 두 팔을 내 목에 두르며 품에 안겼다. “오빠가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번에는 꼭 이길게. 그러니까 우리 라이 실망하지 마.” “라이는 실망 같은거 안해요. 라이는 오빠를 믿으니까요.” “고마워, 라이야.” “루비도 안아 주세요.” 내가 라이를 번쩍 들어 안는 것을 본 루비는 자신도 안아 달라고 매달렸다. 한번에 두 아이를 안기는 힘들었기에 난 라이를 루시아에게 넘기고 루비를 번쩍 들어 껴안았다. “헤헤~.” 귀엽게 웃으며 내 품에 안기는 루비. 귀여움의 지존인 라이를 따르기는 힘들겠지만 루비도 만만치 않게 귀엽다. 라이에 이어 루비도 입양하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루엔과 갈리온드는 애들 양육에 관심도 없으니. 루비를 입양하려면 루도 같이 입양해야 할 것이다. 루가 비록 단지 남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루 역시 극강의 귀여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아이 셋을 기른다는 것이 가능하려나? 뭐, 지금도 기르고 있긴 한데 정식으로 입양한다면 그땐 또 얘기가 다르지. 그때는 정말로 내 아이처럼 키워야 할 테니까.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아, 예. 뭐, 있긴 있지요. 제가 원래 남는 건 시간 밖에 없는 사람이니까요. 무슨 일이시죠?” “간만에 아이언스 공작님과 술 한 잔 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는지라 그에 대한 사죄의 표시도 할 겸해서요.” “으음, 술 좋지요.” 때로는 남자끼리 의기투합하여 술 퍼마시는 것도 괜찮겠지. 코삐뚤어지도록 마시며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것이 대한민국 남자들 아니겠는가? 우리나라는 뭐든 끝장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술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보다 술 많이 소비하는 나라가 있는지 의문스럽군. 지니와 단 둘이 술을 마시면 또 다른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술을 마시는 내내 부담 없이 담배를 마음껏 필 수 있다는 것. 사실 술과 담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술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야말로 남자의 로망 아니겠는가(단 건강에는 매우 안 좋다). 하지만 루시아와 함께 술을 마시면 그것이 불가능하다. 루시아가 담배 연기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금연히 실패한 후, 루시아는 내가 담배 피는 것을 허락해 주었지만, 어디까지나 ‘마지못해서’ 였다. 게다가 일루니아 여사님이 루시아에게 시도 때도 없이 담배의 해악에 대해 떠들어 대는 바람에 담배를 보는 루시아의 시선이 더욱 더 좋지 않았다. 요즘은 루시아의 눈치 보느라 하루에 반 갑 피우기도 힘들 정도다(참고로 나는 기본이 하루에 한 갑이다). “그럼 일이 끝나면 가도록 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시간은 흘러 폐장 시간. 나는 가게 불을 끄고 셔터를 내렸다. 추운 겨울 날씨 속에 ‘라이의 집’ 식구들은 옹기종기 모여 추위에 떨었다. 으음, 오늘 기온이 쌀쌀하긴 하군. 영하 5도쯤 되려나? 우리 중에서 가장 추위를 많이 타는 라이는 발까지 동동 굴렀다. 오리털 파카까지 입고 너구리 모자까지 썼다. 루시아가 선물로 준 회색 목도리는 라이의 목에 몇 겹으로 둘러져 있었고, 회색 벙어리 장갑은 라이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추워요, 언니.” “언니가 따뜻하게 해줄게.” 라이를 꼬옥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벼주는 루시아. 난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라이가 부럽다. 아아~ 라이가 되고파~. “빨리 집에 가자. 라이 추워하니까.” “나 따로 갈 데가 있는데.” “응? 갈 데라니?” 루시아는 라이를 껴안은 채로 물었다. 난 지니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사일런스 백작님과 술 한 잔 하려고.” “둘이서?” “응.” 갑자기 루시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루시아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보며 물었다. “설마 둘이서 이상한 곳에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응? 이상한 곳이라니?” “난 아직 저번 일을 용서하지 않았어.” “......” 저번 일이라면......내가 지니와 함께 나이트클럽에 간 일을 말하는 건가? 그 얘기가 나오면 상당히 찔린다. 어쨌든 루시아를 두고 바람을 피운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간신배인 지니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지 결코 나의 본의가 아니었다. 내 어찌 루시아같이 완벽한 여인을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겠는가? “오, 오해야. 우리는 그냥 술 마시러 가는 것뿐이라고.” “여자 끼고?” “여, 여자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의심스런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지니가 나서서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과 함께 한 잔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어 주십시오.” “히로보다 오빠가 더 나쁘다는 거 알아? 내가 오빠 말을 어떻게 믿어?” 루시아는 싸늘한 눈길로 지니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니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루시아와 일루니아밖에 없을 것이다. 지니의 페로몬도 이 두 여자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지니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훌륭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지니 말 믿었다가 물 먹은 적이 한두 번이여야 말이지. “정말입니다. 저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지니가......아니, 사일런스 백작님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좀 믿어줘. 정말 그냥 술 마시러 가는 거라니까.” 아아~ 갑자기 나 자신이 굉장히 비참해진다. 대체 그동안 어떻게 행동했기에 루시아한테 이렇게 믿음을 주지 못한단 말인가? “......” 흠흠, 뭐 내가 그동안 믿음 안 가게 행동했던 건 사실이지. “추워요, 언니.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믿어줄게.” 루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믿어서 고개를 끄덕였다기보다는 추워하는 라이를 위해 고개를 끄덕인 것 같다. 아무튼 이제 된 건가? 내가 안심하는 순간 일루니아 여사님이 루시아에게 속삭였다. “믿지 마, 루시아. 저 두 인간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될 놈들이야. 이제까지 한두 번 속았어?” 귀에다 대고 말하는 걸 보니 분명 속삭이는 것 같은데 어째서 나한테까지 다 들리는 걸까? 설마 나 들으라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 “이 아줌마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내가 뭘 어쨌다고 사람을 모함해?” “뭘 어쨌냐구요? 그걸 꼭 말해줘야 아나요?” “말할 테면 해봐!” “그럼 하프엘프 여자와의 그렇고 그런 일부터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아! 그 전에 10살짜리 여자애를 꼬드겨 키스한 것도 있었군요.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을......” “......” 젠장! 잘못 건드렸다. “어서 가시지요, 사일런스 백작님.” 난 일루니아 여사님 입에서 나올 말들이 두려워 지니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길가로 나오자 나는 지니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저만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예? 아니, 어디를 가려고?” “제가 이미 룸싸롱에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예? 룸싸롱이요?” “예. 여자들까지 완벽하게 대기시켜 놓았으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가서 즐기시기만 하면 됩니다.” “여자들? 대기?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간단하게 요약해 드리자면 룸싸롱에 가서 여자 끼고 양주 마시자는 얘기지요.” “아니, 아까 건전하게 술만 마시겠다고 루시아한테 목숨 걸고 맹세하셨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이언스 공작님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저의 목숨이 문제겠습니까? 저는 기꺼이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 됐네, 이 사람아. 결국 우리는 시내에 있는 연탄 고기구이집으로 들어갔다. 룸싸롱에서 여자 끼고 양주 마시는 것도 좋겠지만, 이런 곳에서 삼겹살과 함께 소주를 먹는 것도 운치 있어서 좋다. “아줌마. 여기 삼겹살 2인분하고, 갈매기살 1인분 주세요.”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 어렸을 때는 갈매기살이 진짜 갈매기의 살인 줄 알았다. 응? 그럼 갈매기살이 뭐냐고? 갈매기살이란 돼지의 가로막 부위에 있는 살을 말한다. 갈매기 모양으로 생겨서 갈매기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른 말로는 안창고기라고도 한다. 드럼통 안에 연탄을 넣어 놓고 그 위에 불판을 올린다. 그리고 그 위에 고기가 놓인다. 고기는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갔고, 그 냄새가 나의 식욕을 자극했다. 역시 나에게는 이런 곳이 어울려.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그럼 한 잔 하시지요.” “아! 제가 먼저 따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먼저 따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니는 공손하게 잔을 내밀었고, 나는 잔이 가득 차도록 술을 따라주었다. 지니는 고개를 돌려 원 샷 했다. 그리고는 다시 잔을 나에게 내밀었다. 잔 하나 가기고 돌려 마시는 것에 대해 비위생적이다 뭐다 말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술자리 문화 중 하나다. 사실 상대방의 입이 닿은 술잔으로 마신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가 구강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을 앓고 있을 지 누가 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잔으로 마신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믿는다는 의사표시이다. 그런데......이 인간 정말로 병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난 지니가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혹시 몰라 잔에 입을 안대고 그냥 털어 넣었다. “캬아~!” 차가운 소주가 목구멍을 넘어간 순간부터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난 잔을 내려놓고 깍두기를 하나 집어 먹었다. 가게 안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있었다. 넥타이를 맨 직장인, 염색을 한 대학생, 일용직 노동자로 보이는 점퍼 입은 아저씨,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등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역시나 연말이라는 건가? 연말이라 해도 들뜬 분위기는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불경기를 피부로 실감하는 서민들이다. 올해는 IMF때보다 더 힘들다고 할 정도로 경기가 안 좋았으니 자영업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소년소녀 가장들, 생활보호 대상자들, 장애인들 등등 서민 계층은 지옥 같은 일년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연말이라 해도 마음이 들뜨기 보다는 다가올 내년에 대한 걱정부터 앞서는 것이다. 난 그런 생각들을 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고기가 어느 정도 익자 우리는 술을 마시며 고기를 집어 먹었다. 으음, 맛있군. 간만에 먹어보는 연탄구이 고기, 그리고 담배를 피며 마시는 소주. 아아~ 이런 게 인생의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은 엘프나 드래곤들과 함께 환상적인(여러 가지 의미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소시민이다. 랍스타나 고급 경양식보다는 이런 연탄구이 고깃집을 더 좋아하는. “아줌마! 여기 소주 두 병 주세요!”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닙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하하,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십니까? 기왕 마시는 술, 끝장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술을 퍼마셨다. 슬슬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지니는 아직 멀쩡해 보였다. 이 인간은 주량에 있어서도 스페셜리스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주량이라면 지지 않는다. 그래. 오늘 누가 먼저 죽는지 끝까지 가보는 거야! 쓸데없는 데서 승부욕이 불타오른 나는 계속해서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지니 역시 내가 마시는 속도에 맞추어 술을 마셨다. 제법 잘 따라오는군. 하지만 먼저 쓰러지는 것은 네놈이다! 네놈 역시 인간이 분명할 터. 내 오늘 네놈이 술에 취해 추한 모습을 보이는 꼴을 보고야 말겠노라! “아줌마! 여기 소주 다섯 병 추가요!” “무리하시는 것은 아니시진요?” “어허! 무리라니요! 이 정도는 무리가 아니라 기본이지요. 그보다 잔으로 마시니 입맛만 버리는 군요. 이제부터는 병째 마시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병 주둥이를 물고 그대로 들이켰다. 이를 전문 용어로 ‘나발을 분다’ 라고 한다. 꿀꺽꿀꺽. 질 수 없다. 아까 장기에서도 패했는데 여기서도 패할 수는 없어. 남자의 열혈과 근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마! 하지만 술기운은 너무나도 독했다. 위장으로 들어간 알코올은 혈관을 통해 내 온몸으로 퍼졌다. 아아~ 정신이 아늑해진다. 그 순간,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오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라이, 루, 루비. 목소리는 예쁘지만 음정과 박자가 개판이다. 고작 저 두 마디 가사를 맞추지 못해 합창이 돌림노래가 되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만은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래.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어. 반드시 이겨서 아이들에게 승리를 선물해 줄 테야! 난 열혈과 근성으로 술기운을 이겨냈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절 무시하는 겁니까? 이 정도에 제가 쓰러질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 정도로 우습게 보였단 말입니까?” “심기를 어지럽혀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오직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하는 충심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지니. 표정이나 말하는 걸 보니 아직까지 멀쩡하다. 마치 술을 한 잔도 안 마신 듯한 모습. 그러고 보면 지니가 취한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설마......이 자식은 알코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헉!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해보면 주량이 센 것도 바람둥이의 스킬 중 하나다. 응? 그런 스킬을 어따 쓰냐고? 어느 정도 여자와 친해지면 가벼운 술자리를 갖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이럴 경우 절대 여자보다 먼저 쓰러져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여자가 먼저 쓰러지도록 해야 한다. 여자가 술에 취해 쓰러져야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가능하니. 사상이 좀 불순한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터.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여성 독자 분들께서는 남자와 술 마실 때 조심해야 할지어다. 뭐, 요즘은 남녀평등 시대이니 여자가 남자한테 술을 먹여 모텔로 끌고 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군. 결국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한다는 건가?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지니의 주량이 생각보다 세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승산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군. 그것은 바로......술 마시는 척하며 안 마시기! 이 기술의 유래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언제, 누구에 의해 탄생되었는지도 전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회사원들에 의해 탄생되고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로 주목 받고 있다.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술을 좋아하지 않고, 잘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술자리에 나가야 할 일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는 꼭 억지로 술을 먹이는 놈들이 있다. 그놈들 대부분은 팀장, 과장, 사장 등의 명칭을 가지고 있는 직장 상사들이다. 만만한 놈이 술을 권한다면 거절이라도 하지, 직장 상사가 권하면 거절할 수가 없다. 혹시 아나? 술 한 잔 안 받았다가 다음날 회사에서 잘릴지. 그리고 이런 인간들은 거절해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한 잔 받아. 안 받으면 나 여기서 꼼짝도 안 한다.’ 손을 내민 상태에서 술을 안 받으면 꼼짝도 안 하겠다고 땡깡을 부리는데 힘없는 말단 직원이 어쩌겠나? 그냥 받아야지. 물론 받는다고 그냥 끝나지는 않는다. ‘원 샷! 원 샷!’ 그렇다. 그들은 곡 원 샷을 하길 바란다. 그럼 반드시 원 샷을 해야 한다. ‘까라면 까야지’ 라는 말은 군대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마시고 나면 이번에는 다른 직장 상사가 술을 권한다. ‘팀장 술은 받았는데, 사장 술은 안 받아? 어허! 이거 섭섭한데.’ 그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술을 권한다. 한 사람에 한 번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게 그렇지도 않다. ‘딱 한 잔만 받아. 이 잔만 받으면 더 이상 받으라고 안 할게.’ 더 이상 술 권하지 않는다는 말에 믿고 마셔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술에 취하면 방금 한 약속 같은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기 마련이니. 아무튼 그렇게 퍼마시고 인사불성 상태가 되면 집에 갈 수 있는가? 가긴 어딜 가? 여기까지는 시작에 불과한데. 2차 호프집, 3차 민속주점, 4차 단란주점 등등 스케줄이 꽉 짜여있다. 참고로 중간에 집에 돌아가면 퇴직 권고서가 날아올 확률이 높아지니 끝까지 자리를 사수해야 한다. 그렇게 주는 대로 받아서 퍼마신 말단 직원은 거의 초죽음 상태가 되어 새벽 5시쯤 집에 기어들어간다. 그리고 아침 7시면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한다. 일명 ‘회식’ 이라 불리는 회사 술자리는 이토록 잔혹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회사원들은 살 방도를 모색하게 된다. 일단 상사들이 권하는 대로 술을 받아 마신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짐은 물론, 생명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권하는 술을 거절할 수도 없다. 모두가 ‘Yes’ 할 때 혼자서 소신 찾으며 ‘No’ 하는 사람은 다구리 맞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니까. 그럼 결국 남은 방법은 술을 받아 마시는 척 하되, 마시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술자리에서조차 치열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이다. 그럼 이 자리에서 짧게나마 ‘술 마시는 척하며 안 마시기’ 스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1. 술자리에 도착하면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술을 권하는 사람과 같이 앉는 것을 피하라. -중국 춘추시대의 병법가인 손자(孫子)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모공편 (謀攻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번 싸워 백번 다 이기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병법이라 하면 전쟁에서나 쓰이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응용 가능하다. 그리고 술자리란 또 다른 전쟁터나 다름없으니 병법을 응용한다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술 마시는 척하며 안 마시기보다는 처음부터 술잔을 받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나 자주 술잔을 권하는 사람의 주위에 앉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넘어갔던 자리 선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주옥같은 말이라 할 수 있다. 2. 건배하기에 먼 곳과 직장 상사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를 취하라. -1번과 맥락을 같이하는 얘기다. 1번에서 피해야할 자리에 대해 얘기를 했다면 2번에서는 앉아야할 자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건배하기에 먼 곳에 앉으면 남들 건배하고 원 샷 할 때 은근슬쩍 건배만 하고 뺄 수 있다. 그리고 직장 상사들은 눈만 마주치면 잔을 받으라고 큰 소리를 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한 번이라도 덜 띄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 덜 띄면 한잔을 덜 받게 되는 것이니. 3. 초반 러쉬를 자제하라.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는 정신이 멀쩡한 상태이기 때문에 권하는 대로 다 받아 마신다. 하지만 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굉장히 위험한 행위이다. 밤은 길고 술자리도 길다. 초반부터 체력 안배를 잘 해야, 긴긴밤을 무사히 버틸 수 있다. 4. 원 샷을 자제하고 3등분, 또는 5등분해서 마셔라. -손자병법 계편(計篇)을 응용한 것이다. ‘전쟁이란 속임수다[兵者 詭道也]. 그러므로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故 能而示之不能], 쓰면서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用而示之不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술자리에서 상대가 얼마나 마셨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억지로 원 샷을 권하지 않는 이상은 나눠서 마시는 것이 좋다. 한 잔을 여러 번에 걸쳐서 마시면 직장 상사들은 그대가 많이 마신 것으로 착각할 것이다. 5. 빈 술병을 자신의 앞에 배치하라. -4번과 맥락을 같이하는 얘기다. 빈 술병을 앞에 잔뜩 배치하면 직장 상사들은 그대가 그 술을 혼자 다 마신 것으로 착각할 것이다. 이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진수라 할 수 있다. 6. 주위의 소품들을 활용하라. -주위의 소품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술잔 안의 술을 마시지 않고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재떨이에 휴지를 많이 올려두었다가 담배를 피우는 척하며 재떨이에 술을 따라버리는 것은 재떨이 활용, 넥타이를 술잔에 담가 술을 흡수하게 하는 것은 넥타이 활용, 소매를 술잔에 담가 술을 흡수하게 하는 것은 소매 활용, 안주를 일부러 술잔에 빠뜨려 술을 버리는 것은 안주 활용.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소품 활용법들이 있다. 내공의 고수들은 신체의 일부를 활용하기도 한다. 손가락으로 술을 흡수해 삼매진화로 기화시켜 공기 중에 날려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내공이 1갑자 이상인 무림고수들만 가능하니 일반인들이 쓰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기술이다. 참고로 넥타이나 소매를 이용해 술을 흡수하였을 경우에는 즉시 화장실로 가서 짜내야 계속 써먹을 수 있다. 7. 실수를 가장하라. -얘기를 하는 척하며 팔꿈치로 술잔을 쳐서 잔을 엎어라. 술을 마시면서 반 정도는 입가로 흘려라. 단 너무 자주 했다가는 걸릴 위험이 있으니 적당히 해라. 8. 건배 타임이 다가오면 자리를 피해라. -이는 고도의 눈치와 순발력을 필요로 한다. 술잔이 어느 정도 돌다보면 건배 타임이 찾아온다. 건배란 무언가를 기원하며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건배하기 전에는 으레 일장연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건배를 주도하는 사람은 백이면 백, 술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이나 직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다(일반적으로 가장 직위가 높은 사람이 술자리를 주도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잘 살펴보고 있다가 건배를 시작할 기색이 보이면 핑계를 만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연설이 시작되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연설이 시작되기 직전에 그 기색을 눈치 채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대표적인 핑계로는 화장실, 핸드폰 통화 등이 있다. 만약 타이밍을 놓쳐 연설이 시작되었다면 재빨리 핸드폰을 열어 1분 후로 알람을 설정하라. 그리고 1분 후에 알람이 울리면 전화를 받는 척하며 자리를 빠져나오라. 9. 술을 권하는 사람에게 술을 권해라.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다. 수비만 해서는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공세를 취하는 것도 필요하다. 술로 흥한 자 술로 망하는 법. 그가 술을 권하면 받아라. 그리고 똑같이 권해라. 그렇게 적들을 한 명 한 명씩 쓰러트리고 나면 술자리에는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10. 그냥 사표 써라. -이래도 저래도 안 되면 줄행랑이다. 36계에서도 줄행랑은 상책(上策) 으로 친다. 세가 불리할 때는 빨리 퇴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용병술이다. 실업자가 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건강이 최선 아니겠는가? 계속되는 술자리로 간암, 위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걸리는 것보다야 실업자가 되는 것이 백번 낫다. 이상으로 ‘술 마시는 척하며 안 마시기’ 에 대해 알아보았다. 위의 방법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전부 나열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술 마신 다음 바로 화장실에 가서 토한다니 말 다했지 뭐. 으음, 이런 걸 보면 회사원들도 참 힘들겠군. 아무튼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기술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대작에서 이 방법을 쓰는 것은 굉장히 치사한 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야만 이길 수 있다면 난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양심을 팔리라. 응? 비열한 승자가 되느니 당당한 패자가 되겠다는 프라이드는 어디로 갔냐고?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한번 져보니까 당당한 패자보다는 비열한 승자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 과정 따윈 필요 없어. 우리나라가 언제 과정 따졌나? 우리나라는 철저한 결과 위주의 사회다. 12년 공부를 수능 하나에 올인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평소 공부 잘하면 뭐해? 수능 시험날 몸이 아프면 인생 끝인데. 반면 평소에 공부를 못했다 하더라도 대리시험이든 컨닝이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수능만 잘 보면 인생 피는 거다. 그래서 조직적인 수능 부정행위가 일어나기도 하지. 난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술잔을 기울였다. 이 승리를 나를 응원해주는 어린 엘프들에게 바치리! “아니, 술을 어째서 소매 속에 부으시는지요?” “......” 젠장, 걸렸군. “하하하, 소매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기에 좀 줬어요.” “그러시군요.” “......” 그렇긴 뭘 그래, 임마? 다 알면서 모른 척 하기는. 짜증이 마구마구 치밀어 오른다. 난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담뱃갑 안에는 담배가 하나도 없었다. 아까 피운게 돛대였나? “담배 한 가치 주세요.” “저도 없습니다. 아까 피운게 돛대였습니다.” 담배 한 보루에는 10갑의 담뱃갑이 들어있고, 담뱃갑에는 20개비의 담배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 20개비의 담배중 마지막 남은 한 개비를 전문용어로 ‘돛대’ 라고 한다. ‘돛대는 아버지께도 안 드린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애연가들에게 있어서 돛대의 의미는 남다르다. 왜냐하면 돛대를 피우고 나면 다시 담배를 사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사러 가야하는데 가기가 귀찮네요. 그냥 좀 이따 사러가도록 하지요.” “제 생각으로는 지금 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니, 왜요? 당장 피고 싶어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 왜요?”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담뱃값이 500원씩 오르기 때문입니다. 절약 차원에서 지금 사두는 것이 좋지요.” “......” 뭐라고? 지금 뭐라고 말한 거야?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제가 지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예, 앞으로 몇 시간 후, 즉 12월 30일 00시를 기해 담뱃값이 일제히 500원씩 오릅니다. 2000원짜리 담배는 2500원이 되고, 2500원짜리 담배는 3000원이 되는 거죠.” “......” “......” “뭐라?” “12월 30일 00시를 기해 담뱃값이 일제히 500원씩......” “말도 안 돼!”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때문에 고기를 구워먹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지니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 아니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믿을 수 없어.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담뱃값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올라? 혹시 내가 술에 취해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혹시 지니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아! 마침 여기에도 나와 있군요.” 지니는 근처에 있던 신문을 집어 들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난 재빨리 신문을 훑어보았다. 담뱃값 12월 30일부터 500원 인상 담뱃값이 오는 30일부터 500원 가량 오른다. 제정경제부는 오는 30일부터 담배에 부과되는 건강증진부담금을 현행 150원에서 354원으로 204원 인상하고, 담배소비세는 131원, 지방교육세는 66원, 폐기물부담금은 3원, 연초농가지원연출연금은 5원을 올리는 등 담배 관련 각종 부담금과 조세를 409원 인상한다고 밝혔다. 재경부는 이에 따라 담뱃값은 형행 929원에서 1천338원으로 인상되며 담배가격에 10%의 부가가치세가 부과돼 담배 소비자 가격은 갑당 500원 정도 인상된다고 설명했다. 담배 제품별 구체적인 판매가격과 인상 시기는 제조업자, 수입판매업자 등이 자율적으로 결정, 일간신문 등에 공고하게 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내가 받은 충격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술기운이 싹 가실 정도다. “정말입니까? 담뱃값이 500원씩 오른다는 것이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었는데, 모르셨나 보군요.” “담뱃값이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오른단 말입니까?”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담뱃값을 올리면 흡연율이 줄어든다고 하는군요.“ “아니, 그럼 기왕 올리는 거 한 100만원으로 올려서 전부 끊게 하지 500원씩 올리는 건 뭐래요?” “그것이 바로 정부의 이중성입니다. WTO(World Health Organization: 세계보건기구) 협약 등으로 인해 담배는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세수의 상당 부분을 담배에 의존하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직접 나서서 적극적인 금연 대책을 세우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대신 담배에 붙은 세금만 올려서 국민들 호주머니를 털고 있지요. 사실 담배에 붙은 세금 중 흡연자들을 위해 쓰이는 금액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정부가 정말로 국민 건강을 위한다면 담배로 걷은 세금으로 금연 활동을 지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온 국민이 담배를 끊는다면 세수에는 막대한 타격이 옵니다.” 지니의 말대로다. 2500원짜리 담배의 1500원 정도가 세금이다. 즉, 60퍼센트가 세금이라는 것이다. 하루에 한 갑을 피운다면 1년에 56만원 정도를 세금으로 내게 된다. 1천만 명이 담배를 피운다면 무려 5조6천억 원이 세금으로 걷히고, 2천만 명이 담배를 피운다고 하면 11조 2천억 원이 세금으로 걷힌다. 우리나라 1년 예산이 200조원이 안 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금액이라 할 수 있다. 담배란 국가 입장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그런데 어찌 이 거위를 그냥 잡아먹을 수 있겠는가? 사실 국가 전체로 보면 담배는 해악이라 할 수 있다. 담배를 구매함으로 인해 생기는 기회비용, 그리고 그에 따르는 소비 활동 저하, 담배로 인해 걸리는 각종 질병, 그리고 그로 인해 들어가는 치료비와 의료보험비 등등.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찌 이론대로만 돌아가겠는가? 이 사회는 유기적으로 이루어 져있고 담배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의 바람대로(정말로 그것을 바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국민이 금연을 한다고 하자. 첫째로 담배 재배 농가가 망할 것이다. 그리고 KT&G(한국 담배 인삼 공사)도 문을 닫거나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단행해야할 것이다. 이 외에 담배 유통업자들을 비롯한 각종 소매상들도 줄 도산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청년 실업이 50만에 육박하는 이 때에 엄청난 숫자의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 그들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지니의 말대로 현재는 금연이 대세이다. 시간이 지나면 흡연자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니 어찌할 수가 없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줄기는 바뀌지 않을 터인데. 내가 화가 나는 것은 정부의 태도다. 금연이 대세이면 지금부터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담배로 걷은 세금으로 금연활동을 지원하고, 공공의료 확충이나 암 퇴치 등의 의료 사업에 써야지 그걸로 공공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대체 무슨 생각인가? 결국은 이러저런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서민들에게 정부 재정 부담을 떠넘기기 위한 졸속 행정이라는 말밖에는되지 않는다. 세금에 미쳐 담뱃값 올리는 거 뻔히 보이는데 국민 건강을 위해서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정부.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것이지. 정부가 이렇게 삽질도 모자라 포크레인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흡연자들은 정말 가슴이 아프다. 세금을 못 걷어 환장한 정부와 정부의 봉으로 전락한 우리 흡연자들. “차라리 노후변 정권이 낫겠군.” 노후변 정권은 담배 퇴치라는 확고한 의지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정권은 단지 세금 걷는 데만 혈안이 되었을 뿐이다. 담배를 계속 피우라는 건지, 끊으라는 건지...... 진짜 강화도를 거점으로 해서 분리 독립선언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에휴~ 여기서 내가 백날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없다. 세금에 미친 정부가 흡연자들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리 없지. 아무튼 중요한 것은 12월 30일 00시를 기해 담뱃값이 일제히 500원씩 오른다는 거다. 이런 중요한 정보를 지금에야 입수하다니. 현대 사회는 정보전.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한 시점부터 나의 패배는 정해져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해가 가는 마당에 정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놈의 정부는 일년 내내 나에게 실망만을 안겨주더니 결국은 분노까지 하게 하는군.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죠?” “21시 17분 59초입니다.” 앞으로 2시간 42분 1초 후면 담뱃값이 500원 상승한다. 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저는 이대로 가만히 앉아 정부의 후두부 어택(後頭部 Attack)에 당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어쩌긴요? 가격 오르기 전에 사재기를 해야지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가격이 오르는 시점은 약 2시간 반 후. 우리는 그 전까지 최대한 많은 물량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1분1초라도 서둘러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사재기란 ‘값이 크게 오를 것을 내다보고 필요 이상으로 사 두는 일’을 말한다. ‘사 재끼기’ 라는 말이 줄어서 사재기라는 단어가 탄생한 것 같다. 아무튼 사재기는 공정거래를 방해하는 엄연한 불법 행위이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준법정신이 투철했고, 공공질서 유지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재기를 하려는 것은 정부 정책에 대한 작은 저항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금전적 요인 역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한 갑에 500원이면 그게 어딘가? 열 갑이면 5천원, 백 갑이면 5만원이다. 내가 하루에 한 갑을 핀다고 가정한다면(옛날에는 두 갑 정도였는데 루시아 눈치 보느라 한 갑으로 줄였다) 1년에 18만2천5백원이 더 드는 셈이다. 지니도 나만큼 피니 둘이 합치면 36만5천원이군. 이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최대한 많은 물량을 확보해놔야 한다. 연탄구이 고깃집을 나온 우리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디스플러스 한 보루 주세요.” 내가 말하자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 보루는 판매하지 않습니다.” “그럼 한 갑이라도 주세요.” “죄송하지만, 지금 디스플러스가 다 떨어졌습니다.” “그럼 다른 담배라도 주세요.” “다른 담배도 다 떨어졌습니다.” “......” 모든 담배가 다 떨어졌다고? 그게 말이 돼? 난 여자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눈빛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군. 이것은 거짓말을 한다는 증거. 감히 누구를 속이려고! 한때 전 세계를 상대로 구라를 쳤던 나다(본의가 아니긴 했지만). 세계의 운명을 걸고 크로니스와 싸운다고 했다가 안 싸웠지. 그 때문에 나는 세기의 영웅에서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했다. 으음, 그때를 생각하면 또 가슴이 아파지는군. 아무튼 거짓말에 대해서라면 일가(一家)를 이룬 나에게 웬만한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난 대충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재기란 나 같은 최종 소비자보다는 도매상과 소매상들이 즐겨 하는 것이다. 이제 조금 후면 500원씩 더 받고 팔 수 있는데, 뭐 때문에 지금 팔려 하겠는가? 나의 담배 확보는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아마 다른 곳에 가도 몇 갑 구하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한 박스는 구해야 두고두고 필 텐데. 그때 지니가 앞으로 나섰다. “정말로 담배가 업으신지요? 제 눈을 보고 똑똑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지니를 보았다. “아!” 환희와 기쁨으로 터지는 탄성.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 지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응시했다. “정말 없으신가요?” “아, 아니요.” “그럼 꺼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카운터 밑에 숨겨두었던 담배를 꺼내 놓았다. 그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난 지니에게 물었다. “사일런스 백작님은 뭘 피우시죠?” “아이언스 공작님의 뜻을 쫓아 디플(This Plus)을 즐겨 피우고 있습니다만, 가끔은 에쎄(ESSE)도 피웁니다.“ “에쎄면......원(One)이에요, 필드(Field)에요?” “두 제품 다 피우지만, 주로 필드입니다.” “맨솔(Menthol)은 안 피우세요?” “가끔 타임 맨솔(Time Menthol)을 피웁니다. 처음에는 말보로 맨솔 (Marlboro Menthol)을 피웠지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태어나신 나라의 것을 피우는 것이 도리에 맞다 생각하여 타임 맨솔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할 수가! 아마 국내 담배 재배 농가 사람들이 지니의 말을 들었다면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시했을 것이다. 국가 경제를 생각해서라도 양담배보다는 국산담배를 피우는 것이 좋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쌀도 우리 쌀을 먹어야 하고, 담배도 우리 담배를 피워야 한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이 꺼내 놓은 디플과 에쎄, 그리고 타임 맨솔을 전부 사들였다. 그래봐야 1보루 2갑이었다. 다른 담배도 다 사들일까 했지만, 입맛에 맞이 않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싫었다. “이것밖에 없어요?” “예. 요 며칠간 다른 손님들이 보루째 사 가시는 바람에 남은 게 별로 없네요.“ 어쩔 수 없군. 이거라도 챙겨가는 수밖에. 다른 가게나 좀더 뒤져 봐야지. 나는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무리의 남자들이 편의점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 손 놔!” “뭐라? 네놈이 누구기에 감히 본좌에게 그딴 명령을 하느냐? 헉! 너는......” 파란 머리카락과 파란 수염, 때에 찌든 추리닝과 발가락이 다 드러나는 슬리퍼. 한눈에 보기에 백수처럼 보이고, 자세히 뜯어보면 백수의 왕처럼 보인다. 한겨울에 추리닝과 슬리퍼라니! 이 인간은 춥지도 않은가? 아! 인간이 아니지. 무리를 이끌고 편의점 안에 나타난 사람의 정체는 바로...... “에스카네스!” “박카스다.” “......” 저 이름 대체 누가 지은 거야? 설마 성이 박(朴)이고 이름이 카스(Cass)인가? 아예 이름뒤에 에프(F)도 붙이지 그러시나? “네놈의 손에 든 담배를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나라.” “예?” “이 구역의 담배는 전부 우리 청룡파의 것이다.” “예?” “방급 전에야 알았다. 30일부터 담뱃값이 오른다는 사실을. 그래서 담뱃값이 오르기 전에 싹쓸이하려고 이렇게 몸소 아우들을 이끌고 와KT다. 백수들의 유일한 낙인 담배 가격을 심심하면 올리다니. 성직 같아선 본체로 현신해서 국회의사당을 박살내고 싶군.” “......” 만약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에스카네스는 범국민적인 영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대한민국 국회가 드래곤 한 마리 때문에 무너질 정도로 우습게 보이는가? 천만에 말씀. 서울 한복판에 핵폭탄이 떨어져도 창문 하나 깨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방어망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국회다. 대한민국 국회는 방탄 국회라 불릴 만큼 완벽한 방어력을 자랑해왔다. 국민들이 갖은 욕을 퍼부어도 국회는 ‘즐! 반사!’ 라는 말로 국민들 염장을 질렀다. 그 증거로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줄줄이 부결된 것을 들 수 있다. 하루 종일 패싸움만 하던 여야가 체포동의안만 나왔다하면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를 감싸준다. 이것이 방탄 국회의 원동력이다. 한 학계의 보고서에 따르면 방탄 국회는 마징가Z 초합급의 열 배 이상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런 강력한 국회를 어찌 드래곤 한 마리가 박살 낼 수 있단 말인가? 다섯이 전부 달려들어도 될까 말까인데. “죄송하지만 이 담배는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뭐야? 지금 해보자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제가 겁낼 줄 아십니까?” “진짜 해보자는 거냐?” “예전에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우려 했었고, 얼마 전에는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와도 살짝 싸웠었는데, 블루 드래곤과 못싸우겠습니까? 담배에 대한 저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느끼게 해드리지요!” “이 자식이!”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형님.” 에스카네스 뒤에 서 있는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말했다. 하지만 에스카네스는 손으로 그들을 가로막았다. “너희들 상대가 아니다. 저놈은 내가 직접 상대한다.” 에스카네스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예의 슬리퍼 한 짝을 집어 들었다. “......” 저 슬리퍼로 맞으면 아픈 것은 둘째 치고 굉장히 불쾌할 것 같다. 난 서서히 기운을 끌어 올렸다. 하아~ 난 다만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드래곤들과 부딪히는 건지. 이 드래곤들은 왜 이 세계까지 따라와서 날 피곤하게 만드는 걸까? 그냥 판타지 세계에 조용히 있으면 좋잖아. 어쨌든 기왕 싸우게 되었으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겨서 저 담배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선수필승(先手必勝). 먼저 공격해서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개나리 스텝으로 거리를 좁히며 손을 휘둘렀다. “간다! 빅장 40단......” “백수권(白手拳) 1식 슬리퍼난무(Slipper亂舞)!” 헉! 백수권이라니? 화이트 핸드 피스트(White Hand Fist)라는 건가? 에스카네스의 손에 들린 슬리퍼가 내 몸을 향해 날아왔다. 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슬리퍼는 간발의 차이로 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개나리 스텝이 아니었다면 저 슬리퍼에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백수권은 내가 한 달 동안 방바닥 긁으면서 창안해 낸 권법. 우습게보지 마라!” “......” 어이, 탄생부터가 우스워. 뭔 권법을 방바닥 긁으며 창안해 내? 우스꽝스러운 이름과는 달리 백수권은 제법 무서웠다. 1식 슬리퍼난무라고 했던가? 그 이름 그대로 슬리퍼가 마치 어지러운 춤을 추는 듯했다. 피했다 싶으면 의외의 장소에서 슬리퍼가 튀어나왔다. 윽! 피하기만 해서는 승산이 없어. 나는 재빨리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휘둘렀다. “빅장 40단 콤보!” 에스카네스의 슬리퍼와 나의 손바닥이 부딪혔다. 에스카네스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에스카네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제법이군. 슬리퍼난무만으로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제대로 상대해 주지. 백수권 2식 쌍슬리퍼난무(雙Slipper亂舞)를 보여주마!” 난 에스카네스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슬리퍼 하나만으로도 저 정도 위력을 발휘했는데, 슬리퍼 두 개라니. 과연 내가 막을 수 있을까? 붙어보면 알게 되겠지. 이 자리에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고 절대 저 담배를 포기할 수는 없어. 이제 몇 시간 후면 담뱃값이 오르니 그 건제 최대한 많이 사 둬야 해! “두 분 모두 진정하십시오.” 우리가 다시금 출수를 하려 하는 순간 지니가 끼어들었다. 에스카네스는 지니를 보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담배를 내놓고 꺼지겠다는 거냐? 그럼 지금이라도 보내주지.” “훗! 웃기는 소리! 죽으면 죽었지 담배는 포기 못해!” “그럼 죽여주마!” “잠깐만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시각은 22시 10분 12초입니다. 이제 1시간 49분 48초 후면 담뱃값이 500원씩 상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곳에서 적은 양의 담배를 가지고 서로 실랑이 하는 것은 양측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서로 손을 잡고 다른 가게의 담배를 사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더욱 많은 양의 담배를 확보할 수 있고, 서로 나눠 갖는 양도 증가할 것입니다. 이름 하여 윈윈전략이라는 거지요.” 지니의 말에 우리는 살기를 거두었다. 지니의 말이 맞았다. 지금 서로 싸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은 남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양의 담배를 사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여기서 몇 보루 가지고 다퉈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맞는 말이군.” 에스카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니는 말을 이었다. “각자 구매한 담배를 한곳에 모은 다음 인원수대로 정확히 분배하도록 하지요. 어떠십니까?” “좋다. 그렇게 하지.” “일단 지역이 넓은 만큼 서로 흩어져 구매해야 합니다. 2인 1조로 해서 한 구역씩 맡도록 하지요. 이제부터 저의 지시에 따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으음, 따르도록 하지.” 어느새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일런스 지니. 에스카네스와 수십여명에 이르는 그의 부하들은 지니의 작전 개요를 경청하고 있었다. 과연 사일런스 지니, 라고 해야 하나? 아이리스 왕국 참모 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나보군. “그럼 방금 말씀드린 대로 각자가 맡은 구역을 돌며 담배를 사재기하면 되겠습니다. 저는 아이언스 공작님과 함께 이 지역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한 갑의 담배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작전 개시 시각은 지금, 종료 시작은 00시, 집합 시간은 00시 30분, 집합 장소는 맞은편에 있는 ‘도레미 노래방’ 입니다.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에스카네스와 부하들은 지니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럼 가시지요, 아이언스 공작님.” “예.” 우리도 편의점을 나와 다음 가게를 향해 달렸다. 달리는 도중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이 나라가 흡연자가 살기에는 굉장히 피곤한 나라라는 것은 틀림없다. 젠장, 이민을 가던가 해야지. 담뱃값 인상을 1시간 반 정도 남겨두고 담배를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우리를 제외한 많은 흡연자들도 담배를 사려 하는데다가 소매상들이 팔려고 하질 않기 때문이다.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다녔지만 겨우 5보루 2갑밖에 구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담배는 어느 정도 있는데 디플은 정말 없더라. 아아~ 나의 디플~. 어차피 이따 한 장소에 모여 다시 분배를 하기 때문에 일단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사들이는 중이었다. “헥헥~ 힘든데 좀 쉬면 안 될까요?” “남은 시간이 50분도 채 되지 않습니다.” “헥헥~ 그래도 조금만 쉬어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잠시 공원 벤치에서 휴식을 취했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하아~!” 담배 한 가치의 여유. 마치 공익 광고 문구 같군. 후후~. 애들의 말썽은 점점 늘어가고 식비는 점점 증가한다. 게다가 이것들이 요즘은 나를 완전히 물로 보고 있다. 애 키우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결국 늘어가는 것은 한숨이고 쌓이는 것은 스트레스다. 그래도 이런 지친 내 삶을 위로해주는 것은 담배밖에 없다. 만약 담배가 없었다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조차 하기 두렵다. 내가 이 세계로 돌아온 것도 귀환본능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담배가 피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나는 다 타오른 담배를 바닥에 뱉......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아~ 이 철저한 준법정신. 모두들 본받을지어다. “일어나지요.” 우리는 다음 가게로 향했다. 다음 가게는 대형 할인마트. 이 시간까지 영업하는 곳은 편의점과 몇몇 대형 할인마트가 전부이다. 우리는 그곳 지하 1층 식료품 매장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너, 너는......” “네놈이 여기는 어쩐 일이냐?” 쫙 빼입은 검은 양복과 긴 녹색 머리카락. 감히 나에게 건방지게 말하는 이 남자의 이름은 카이네이드. 한국 이름은 제갈량(적어도 박카스보다는 낫군). 그는 카트를 미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카트 안에는 족히 100보루는 될 것 같은 담배가 쌓여 있었다. “헉! 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설마 너도 사재기하는 거냐?” 카이네이드는 예의 건방진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 마트 안에 더 이상의 담배는 없다.” “......” 한발 늦은 건가? “댁 나와바리는 강남이잖아. 그런데 왜 여기 있어?” “강남 쪽 담배는 예전에 전부 사들였다.” “......” 강남에 이어 강북에서까지 사재기를 하는 건가? 내가 당황하는 사이 카이네이드는 카트를 밀고 유유히 사라졌다. 당했군. 난 멀어지는 카이네이드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비상 연락망을 가동하도록 하세요. 상황 설정은 S로 고정. 프로젝트명은 ‘담배 사재기’.” “알겠습니다.” 결국은 비상 연락망까지 가동했다. 잠시 후 인디가 라이, 루, 루비를 데리고 나타났다. “무슨 일이에요?” “졸려요, 오빠.” “하암~.” 아이들은 자다가 끌려나왔는지 잠옷 차림이었다. 파자마 위에 입은 점퍼가 참으로 잘 어울린다. “조금만 참으렴, 얘들아. 오빠가 일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 아이들은 맛있는 거라는 말에 잠긴 눈을 번쩍 뜨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정말요?” “그럼. 언제 오빠가 거짓말하는 거 봤니?” “......” “머니, 그 눈빛들은? 이 오빠는 참으로 부담스럽구나.” 어깨동무 포메이션을 하고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느 어린 엘프들. 내가 어린 엘프들에게 이렇게 신용을 잃었단 말인가? 난 잠시 그동안의 나의 행동을 반성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이런 어린 것들의 손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다급했다.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께는 알리지 않았지?” “예.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난 인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넌 그동안 나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어. 크로니스 일도 그렇고, 일루니아 여사님 일도 그렇지.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일루니아 여사님과 너의 만남을 주선한 게 나라는 걸 말이야.“ “제, 제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금도 감사하고 있답니다.” “그래.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하해와 같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자 드래곤의 도리. 지금 너에게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마.” “예?” “애들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두나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담배를 사들여. 다른 거 다 필요 없으니 디플만 사. 12월 30일 00시를 기해 담뱃값이 500원씩 오른다. 그러므로 남은 20분 동안에 담배를 사들여야 해. 작전을 끝마친 뒤에는 이곳 정문으로 와라. 거기가 집합 장소다. 그럼 너만 믿는다.” “자, 잠깐만요, 히로님.” “응? 왜?” “라이님을 비롯한 아이들은 왜 같이 나오라고 한 거죠?” “......” 생각해보니 그렇군. 내가 쟤들을 왜 나오라고 했지? 그냥 자게 내버려둘 걸. “그냥 심심해서 불렀다. 아무튼 빨리 시킨 대로 하기나 해.” “저, 저기......” “또 뭐?” “돈을 주셔야......” “......” 적당히 넘어가려 했는데 안 되는군. 난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인디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자, 그럼 빨리 움직여!” “예.” 인디는 어린 엘프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추위에 떠는 아이들은 맛있는 거 사준다는 말에 기운이 나는지 발발 뛰어갔다. “작전을 변경해야겠습니다.” “어떻게요?” “여자 종업원이 있는 곳만 중점적으로 공략하도록 하지요.” “으음,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소매상들은 정말로 담배가 없어서 안 파는 것이 아니다. 오늘 안 팔고 남겨 두었다가 시세 차익을 챙기려는 것이다. 있는데 뱉이 않는다면, 뱉게 하는 수밖에 없겠지. * * * * 인디와 어린 엘프들은 근처의 I마트로 걸음을 옮겼다. I마트를 코앞에 둔 지점에서 어린 엘프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아! 군고구마다!” “라이 군고구마 먹고 싶어요, 오빠.” “루비도요.” 인디의 옷깃을 붙잡으며 군고구마를 사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들. 시간이 없었지만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인디는 하는 수 없이 지갑을 열었다. “군고구마 3천원 어치 주세요.” 하지만 이런 그의 행동은 어린 엘프들을 우습게보고 있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군고구마 3천원 어치를 누구 코에 갖다 붙인단 말인가? 그건 라이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양이었다. “더 사주세요, 오빠.” “배고파요.” “막막 맛있어요.” 군고구마 3천원 어치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어린 엘프들은 다시금 인디에게 떼를 썼다. 인디는 다시 지갑을 열었다. “군고구마 1만원 어치 주세요.” 어린 엘프들은 다시 군고구마를 까먹기 시작했다. 입가에 검댕이를 묻혀가며 잘도 먹는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지켜볼 정도였다. “헤헤! 이거 되게 맛있다.” “응응. 막막 맛있어.” “아앗! 이건 내 꺼야. 너희들은 손에 하나씩 들고 있잖아.” 뜨거운 군고구마를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는 라이, 루, 루비. 시간은 점점 흘러가는데 아이들은 군고구마 노점상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 “드세요, 오빠.” 라이는 직접 깐 군고구마를 인디에게 내밀었다.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라이가 자신의 손에 들린 음식을 다른 사람에 권하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는 라이가 그만큼 인디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성의가 고마워 인디는 군고구마를 한 입 먹어 보았다. ‘아! 맛있다.’ 맛있는 것을 먹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영원한 반려자인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일루니아님과 이 군고구마를 같이 먹고 싶어.’ 그녀를 생각하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는 심장. 그리고 붉게 달아오르는 볼. 이런 게 사랑이겠지. 결혼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인디와 일루니아는 언제나 신혼이었따. “다 먹었어요, 오빠.” “더 사 주세요.” “더 먹고 싶어요.” 아이들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디와 어린 엘프들은 어느새 담배를 사오라는 히로의 부탁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결국 어린 엘프들은 군고구마를 한 상자나 먹은 다음에야 더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인디는 일루니아에게 가져다 줄 고구마를 한 봉지 사서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나의 온기로 따뜻하게 해서 드려야지.’ 또 다시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즐거워하는 인디. 그 순간, 문득 히로의 부탁이 떠올랐다. “아!” 인디는 재빨리 시계를 보았다. 현재 시각은 00시 10분. 어느새 12월 30일이 되었다. “어쩜 좋아?” “왜 그래요, 오빠?” “무슨 일이에요?” “군고구마 더 사줄 거예요?” 아이들은 아까 히로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반대쪽 귀로 흘렸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인디를 보았다. 인디는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해? 한 갑도 못 샀잖아. 히로님께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이런 작은 부탁 하나 못 들어 드리다니. 나는 혹시 나쁜 드래곤이 아닐까? 이대로 가면 히로님께서 크게 실망하시겠지? 아니, 실망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화를 내실지도 몰라. 아니, 분명 화를 내실 거야.’ 히로의 화난 표정이 떠오르자 인디는 더욱 나락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결국 도망칠 생각까지 하는 인디. 하지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집에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녀가 있었기에. 인디가 당황해 발을 동동 구르든 말든 인디의 품에 있는 군고구마에 눈독을 들이는 어린 엘프들. 그새 배가 꺼졌나 보다. 그 순간, 한 남자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를 발견한 인디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 * 12월 30일 00시 작전 종료.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녀 구입하 담배는 고작 12보루 5갑. 지니랑 내가 두 달 버티기도 힘든 양이다. 하아~ 최소한 1년분은 확보했어야 하는데. “고작 12보루 5갑이라니.......” “이 정도 구한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아까 보셨잖습니까? 시계 바라보면서 끝가지 안 팔려고 버티던 가게 주인의 모습을.” 지니의 말대로 가게 주인들은 시간을 재며 끝까지 안 팔려고 버텼다. 그도 그럴 것이 1분만 지나면 가격이 500원이 오르는데 누가 팔고 싶어 하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끈질기게 매달려 3초를 남겨둔 시점에서 구매를 했다. 아아~ 이 빌어먹을 놈의 정부 때문에 이 추운 날 이런 개고생을 하다니! “그나저나 이걸 가지고 지금 ‘도레미 노래방’ 으로 가야 하나요?” 아까 우리는 구매한 암배를 한곳에 모아 인원수대로 분배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굉장히 손해일 것 같다. 그 누가 12보루 5갑이나 구매했겠는가? 이것은 기적ㅈ거인 수치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분배에 들어가면 우리가 손해 보게 될 것이 뻔하다. “약속을 어기고 싶어도 상대가 드래곤이니......” 그렇다. 이게 가장 문제다. 만약 상대가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가볍게 약속을 어겼겠지만, 상대는 드래곤이다. 지금 구매한 담배를 빼돌리고 싶어도 드래곤이니 쉽지 않다. 온갖 마법을 다 사용한다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를 조사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혹시 아나? 지금도 패밀리어를 통해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지. 결국은 이 담배를 들고 약속한 장소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인디와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어보았다. 에스카네스와 약속을 한 것은 우리뿐이다. 인디와 아이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디와 아이들이 구매한 담배는 고스란히 나에게 남어오게 된다. 많이 구매했으려나? 적어도 10보루 이상은 구매했으면 좋겠는데. “아! 저기 오시는군요.” 고개를 들어보니 어린 엘프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인디는 가슴에 봉지 하나를 꼬옥 끌어안고 있었고, 세 아이는 커다란 박사를 같이 들고 있었다. “히로 오빠다!” “오빠아~!” “혀엉~!” 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입가에는 검댕이가 잔뜩 묻어 있었다. 쟤들 뭐하다 왔기에 저래? 설마 위장 잠입이라도 했나? 그럼 저건 검댕이가 아니라 위장크림? “이거 받으세요오~!” 아이들은 박스를 나에게 내밀었다. “응? 이게 뭐야?” 난 박스를 받아 열어보았다. “헉! 이, 이건......” 놀랍게도 박스 안에는 담배가 차곡차곡 들어차 있었다. 전부 디플로. 담배 한 박스면 50보루. 50보루면 500갑. 500갑이면 1만 개비. 이 정도면 나 혼자서 1년, 지니와 함께 6개월을 필 수 있는 양이다. 10보루만 구해와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어디서 이런 많은 양을! 박스에 차곡차곡 들어차 있는 담배의 모습은 그야말로 감격 그 자체였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아아~ 이 사랑스런 담배들. 내가 몽땅 피워주마! 난 인디를 보았다. 그리고는 복 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해 와락 끌어안았다. “꺄아! 무, 무슨 짓이에요?” “잘 했어, 인디! 너도 가끔은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이걸로 내가 베풀어준 은혜의 10퍼센트를 갚은 것으로 쳐주마. 하지만 아직 90퍼센트가 남아있으니 앞으로도 은혜를 갚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돼. 알았지?” “예.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놔주세요, 흑흑~ 저는 오직 일루니아님뿐이랍니다.” “나도 오직 루시아뿐이야, 임마.” 난 인디를 놔주었다. “이 많은 담배를 어디서 산 거야? 누가 박스째로 팔디?” “그, 그레......그냥 어쩌다보니......” 말을 얼버무리는 인디. 뭐, 어디서 어떻게 구했든 내가 알 바 아니지. 중요한 것은 50보루의 담배가 내 손에 들어왔다는 거니까. “그런데 그 품에 꼬옥 안고 있는 그 봉지는 뭐니? 냄새를 맡아보니 군고구마인 것 같은데. 아! 나 주려고 사온 거구나. 그럼 빨리줘. 아까부터 뛰어다녔더니 배고프군. 내 너의 정성을 생각해서 특별히 맛있게 먹어주마.“ 내가 손을 내밀자 인디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몸을 움츠렸다. “아, 안 돼요. 이, 이건 일루니아님 드릴 거란 말이에요.” “......” 어이, 가끔은 나도 좀 챙겨주지? 너무 아내만 챙기는 거 아냐? 일루니아 여사님 입은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냐? 나도 군고구마 좋아해! “치사해서 안 먹어, 임마! 아무튼 이 박스 잘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난 사일런스 백작님과 잠시 들를 곳이 있으니.” “예. 알았어요. 일찍 들어오세요.” “그래, 잘 가라.” 나는 인디와 어린 엘프들을 배웅해주었다. “그럼 우리도 슬슬 가볼까요?” “예.” 에스카네스와 부하들은 이미 도레미 노래방 특실에 모여 있었다. 가운데 있는 탁자에는 족히 100보루는 넘어 보이는 담배가 쌓여 있었고, 그 밑에는 담배가 박스째로 쌓여 있었다. 조직원들을 다 풀어서 완전히 싹쓸이를 해온 것이다. 조폭들이 다그치니 어쩔 수 없이 판매했나 보다. 그나저나 엄청난 양이군. 이 정도면 한 팀 당 10보루 정도는 구해온 것 같은데. 이 정도라면 분배해도 우리가 그리 손해 보지는 않겠군. “얼마나 구해봤냐?” 난 12보루 5갑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에스카네스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지니를 보았다. 지니는 알았다는 듯 살짝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자신이 구매해온 금액보다 많이 가져가는 팀은 돈을 내고, 적게 가져가는 팀은 차익을 챙겨 가시면 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담배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각자 기호가 다릅니다. 담배 종류에 대한 선택권은 많이 사온 팀 순서대로 드리 도록 하겠습니다. 이의가 있으신 분들은 지금 말씀해주십시오. 없으시면 분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팀 앞에 돌아온 몫은 7보루. 우리 입장에서는 5보루 5갑을 손해 본 셈이다. 그래도 우리는 많이 사온 쪽에 속하는지라 무사히 모든 담배를 디플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분배가 끝날 때까지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내가 순순히 이곳으로 온 데에는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잔머리는 지금 빠르게 회전하는 중이었다.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앞으로 한동안은 담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윽고 분배가 끝이 났다. 에스카네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잠깐!” “무슨 일이냐, 애송이?”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재미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뭐?” “한 사람 앞에 돌아온 담배의 양은 고작 3보루 5갑, 다시 말해 35갑입니다. 이 정도면 마음먹고 피면 열흘이면 다 필 양입니다. 겨우 이거 얻으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간단합니다. 내기를 하자는 거죠. 35갑 정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닙니까? 이걸 누구 코에 갖다 붙인단 말입니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 말에 에스카네스의 부하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들도 내 말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내기?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지?” “고스톱, 섰다, 포카, 블랙잭 등등. 종목이야 많고도 다양하지요.” “푸하하! 네놈이 지금 날 우습게 보는 거냐? 백수들이 할 일 없을 때 가장 많이 하는게 뭔지 모르나 보군.“ “......” 백수들이 할 일 없을 때 많이 하는 거? 그게 뭐지? “바로 인터넷 고스톱이다. 옛날 같았으면 방바닥이나 긁오 있을 시간에 이제는 인터넷에 접속하여 고스톱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는 게임포털 사이트 ‘명예의 전장’ 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그런 나에게 고스톱을 하자고 하다니. 가소롭기 그지없구나. 좋다. 상대해주도록 하지.” 에스카네스는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나는 승부욕으로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 역시 한때 도신(賭神)이라 불리었던 몸. 상대가 드래곤이라 해도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럼 제가 대진표를 작성하기로 하겠습니다.” 지니가 나서서 말했다. 고스톱은 한 번에 칠 수 있는 인원이 세 명에 불과하다 (광팔이까지 끼면 4명까지 칠 수 있지만, 실제 경기 인원은 3명이다). 그러므로 대진표 작성은 필수라 하겠다. “점당 담배 한 갑으로 하기로 하지요.” “좋습니다.” 대진표 작성은 순식간에 끝이 났고, 노래방 전체를 세 놓은 우리들은 곳곳에서 판을 벌였다. 에스카네스와 나는 다른 조에 속해 있었다. 별 무리가 없는 한 우리는 결승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지니는 에스카네스 조에 속해 있었다. 난 지니가 에스카네스를 이길 거라 생각지 않았다. 지니가 인간으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다. 드래곤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오직 나, 아이언스 히로뿐이다. 딱! 딱! 화투가 담요 위에서 서로 부딪힌다. 아주 짝짝 붙는다.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하는군. 나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해 갔다. “헉! 어린놈이 장난이 아니야.” “완전 타짜가 따로 없군.”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들. 후후~ 네놈들은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났어. 난 조금도 봐주지 않고 한 명 한 명씩 무찔렀다. 그렇게 정신없이 치다보니 어느새 결승전이 되었다. 참고로 예선전까지는 3명이서 쳐서 판돈(판담배?)을 싹쓸이한 사람이 역시 판돈을 싹쓸이한 사람 둘과 함께 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16강부터는 인원수가 팍 줄어들기 때문에 맞고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결승전도 맞고다. 그리고 결승전 상대는 예상대로 에스카네스였다. “죄송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최선을 다했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상대가 드래곤이니 어쩔 수 없었겠죠. 다 이해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쉬고 계십시오. 뒷일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정말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이죠.” 바닥에 담요가 깔렸다. 그리고 새로운 화투가 준비외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요.” 패가 돌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에스카네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장장 3시간에 걸린 결승전은 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에스카네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에 든 화투를 떨어뜨렸다. “내, 내가 인간에게 패하다니.” “당신은 인간의 저력을 너무 우습게 봤습니다. 인간은 짧은 삶을 살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사는 존재. 확실이 인간은 드래곤보다, 엘프보다 못한 종족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꺾이지 않는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멋지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곧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으윽!” 난 두 손으로 열심히 다리를 주물렀다. 너무 오랫동안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있었더니 다리에 쥐가 난 것이다. 쥐가 어느 정도 풀리자 나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기지개를 크게 했다. 우드득! “으윽!” 허리가 부러질 것 같군. 이래서 장기간 고스톱을 칠 때는 수시로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고스톱은 양반다리를 한 상태에서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치기 때문에 허리에 굉장한 무리가 가는 스포츠다. 루시아를 위해서라도 허리를 최상의 상태로 보존해야지. “이건 말도 안 돼!” 에스카네스는 한 다라은 감지 않은 것 같은 파란색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절규했다. 난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링 당했으니 미칠 것 같은 기분이겠지. 난 안타까운 마음에 개평으로 담배 두 갑을 던져 주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그럼 어서 싣도록 하지요.” 우리는 담배 박스를 들고 날랐다. 노래방 건물 앞에는 지니가 공수해온 소형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담배 박스를 트럭 짐칸에 차곡차곡 실었다. 그 양은 장난이 아니었다. 무려 7박스 분량. 보루로는 350보루, 갑으로 치면 3500갑, 개비로 치면 7만 개비다. 우리랑 청룡파 조직원 100여명이 밤새 돌아다녀 사재기한 것이다. 짐을 다 실은 나는 지니에게 말했다. “출발하지요.” “제가 운전할까요?” “아니요. 제가 운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훗, 면허도 없는 주제에 운전한다고 나서다니. ‘1종 보통 면허’를 가지고 있는 나의 운전 실력을 보여주도록 하지. 나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기어를 넣고 액셀을 밟았다. 어느새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 * * * 우리는 집으로 향하는 대신 곧장 가게로 갔다. 가게는 개점 준비로 한창 바쁜 상태였다. 아이들은 자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크로니스,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루시아만 나와 있었다. “뭐, 뭐야, 이건?” 루시아는 트럭에 가득 실린 박스를 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 거 아니야. 그냥 담배야. 오늘부터 담뱃값이 500원씩 오른다기에 미리 사둔 거야. 이제부터 한동안은 담뱃값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하하~/“ “그, 그럼 이게 다 담배란 말이야?” “응.” “몇 갑이나 돼?” “얼마 안 돼. 한 3500갑 정도.” “......” 루시아는 질렸다는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응? 왜 그래, 루시아?” 내가 묻자 루시아는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짜악! “이거 다 피고 죽어버려!” 루시아는 몸을 휙 돌리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난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맞은 거지?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 거지. 하여튼 저 뺀질이는 맞을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인디님?“ “저, 저기 저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물음에 고개를 푹 숙이며 우물쭈물거리는 인디. 난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 아줌마가 진짜 나랑 해보자는 건가? 난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소리치는 대신 인디에게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임마? 당장 튀어 나와서 이거 창고로 날라.” 우리는 담배를 인형 가게 창고로 날랐다. 담배라는 게 부피에 비해 무게가 무거운 편이 아닌지라 나르는 것은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창고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이는 박스. 아아~ 이것이 전부 담배란 말인가? 감동으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지니 역시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난 인디에게 물었다. “어제 가져간 디플 한 박스는 지금 어디에 있니?” “아! 그건 히로님 방에 가져다 두었어요.” “그래, 잘 했다.” 그것까지 포함하면 담배는 약 400보루. 4천 갑이 왼다. 앞으로 한동안 담배 사러 갈 일은 없겠군.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아주 커다란 문제가. “이걸 언제 다 피지?” 담배에는 유통기한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담배에도 엄연한 유통기한이 있다. 담배는 오래 되면 습기를 먹어 눅눅해지고, 맛도 변한다. 그렇기에 오래 놔두면 좋지 않았다. 결국 빨리 피워서 없애야 하는데 이걸 언제 다 피냐가 문제다. “아이언스 공작님과 제가 하루에 세 갑씩 피워도 2년은 족히 걸립니다. 한 갑씩 피운다면 6년은 걸릴 겁니다.” “......” 양이 많긴 많군. 루시아가 아까 왜 때렸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자! 니 차례다, 인디!” “예? 무슨 말씀이세요?” “이 담배 박스에 보존 마법을 거는 거야.” “아, 알았어요.” 인디는 시킨 대로 담배 박스에 보존 마법을 걸었다. 이젠 안심이군. 역시 마법은 편리하다니까. * * * * 창고를 나온 인디는 일루니아에게로 가는 길에 크로니스와 마주쳤다. 인디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크로니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스쳐지나갔다. 인디는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크로니스님은 히로님이 담배를 사재기할 것을 어떻게 알았던 거지?’ 인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뻑뻑 피우며 신문을 펼쳤다. 마침 재밌는 기사 하나가 있었다. 30일 자정 담뱃값 인상, 소매상 곳곳에서 실랑이 일부 애연가들 발품 팔아 수십 보루 사재기도 갑당 500원 인상을 하루 앞둔 29일 밤 도심은 담배를 둘러싼 숨바꼭질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애연가는 어떻게든 한 갑이라도 더 사려고 했고, 담뱃가게 주인은 일찍 철시를 하거나 아니면 한 갑이라도 덜 팔려고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애연가들은 담뱃값이 오르기 전에 미리 구입해 두려는데 반해 소매인들은 시세차익을 얻으려 판매시기를 최대한 늦추려 하기 때문이다. 담뱃값에 부과 되는 국민건강증진 부담금과 각종 조세 인상으로 오는 30일부터 담배 가격이 1갑당 500원 정도가 오르게 됨에 따라 애연가들의 조기구입 열풍이 거세다. 이들은 편의점과 동네 슈퍼 등을 돌며 보루로 구입하면서 담배 비축에 나서고 있다. 1보루를 미리 사두면 5,000원을 아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담뱃값 인상을 코앞에 두고 있는 만큼 소매상들은 보루 판매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거래는 좀처럼 쉽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일부 소매상들은 담배 진열대에 잔뜩 쌓아두고 판매하던 담배를 종류별로 몇 개씩 한정해 내놓는가 하면 진열대를 검은 천으로 가려 구매자들과 마찰을 피하고 있다. 한 담뱃가게 주인은 “최근 담뱃값 인상 발표가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자 보루 단위 구매자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며 “담배 사재기를 막기 위해 공급 자체가 줄어든 데다 시세차익도 무시할 수 없어 단골에 한해 마지못해 보루로 판매하고 있다” 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흡연율을 줄여보겠다는 담뱃값 인상 취지는 사라지고 그나마 애환을 달래주던 서민들의 친구만 사라졌다는 반응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직장인 김모 씨는 “국고를 불리기 위해 담뱃값 인상을 결정한 정부의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인다“ 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나도 정부의 행동에 분노가 느껴지는데 다른 흡연자들이야 오죽하겠냐? 담사모 회원들과 연계해서 대책을 세우든지 해야지. 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신문을 한 장 넘겼다. 강북과 강남에서 조직적 사재기 의혹 갑당 500원 인상을 앞두고 애연가들이 사재기에 나선 가운데, 조직적인 사재기 의혹이 포착되었다. 여기에 조직폭력배들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경찰이 조사에 나섰다. 경찰 측은 청룡파와 녹룡파가 각각 강북과 강남에서 조직적 사재기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몇몇 담뱃가게 주인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가게 안으로 몰려와 가지고 있는 담배를 전부 팔라고 윽박질렀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강북에 위치한 한 노래방 주인은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담배를 사재기했다” 라고 증언했다. 경찰 측은 혐의가 포착되는 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하긴, 그렇게 크게 일을 벌였으니 꼬리가 밟히니 않을 수 없겠지. 한 해가 가는 마당에 정부에게 뒤통수를 맞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놈의 국가는 일년 내내 해준 것도 없으면서 뜯어가기만 하냐? 흡연자들이 무슨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인 줄 아나? 결국 느는 것은 담배밖에 없다. 난 다시 담뱃값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담뱃갑을 채가는 새하얀 손. “그만 좀 펴!” 찌릿! 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 그 눈빛의 영향으로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왜, 왜 그래, 루시아?” “가게 안에서 담배 피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가게 전체가 금연 구역인 거 몰라?“ “아, 아니......그래도 인형을 좋아하는 흡연자들도 많을 텐데...... 그들을 배척한다는 것은 매상에 막대한 지장이......” “매상 안 올라도 상관없으니까 담배나 끊어!” “......” 언제쯤이면 흡연자들이 어깨 펴고 살 날이 오려나? 아마도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 아이리스 2부 4권 Substory 5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 (남자는 흘러간 로맨스에 사랑을 기억한다) 아이리스 왕국에는 한 명의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 청년의 이름 은 아이언스 히로. 히로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열심히 아르바이 트를 해서 학비를 댈 정도였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히로는 항상 밝은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이리 스 루시아. 놀랍게도 그녀는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였다. 왕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장에 일일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된 히 로는 우연히 공주인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공주와 고학생. 어울리 지 않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들었다. 루시아는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히로의 모습을 좋아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히로를 도오주고 싶어 했지만, 히로는 그 모든 것 을 거절했다. " 난 니가 공주이기 때문에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난 너라는 존 재 그 자체를 사랑해. 니가 어떤 신분이든 상관없어. 난 내 힘으로 대학을 졸업할 꺼야. 그리고 졸업을 하면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서 너한테 청혼할 꺼야." 빨갛게 변하는 루시아의 얼굴. 히로는 살며시 루시아의 뺨을 만 졌다. " 사랑해, 루시아." " 나도 사랑해, 히로." 둘은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히로와 루시아는 자주 만날 시간이 없었다. 히로는 아르바이트 와 공부를 하느라 바빴고, 루시아는 왕궁을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 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변함없이 뜨거웠다. 하지만 신분의 격차를 초월한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루시아 의 시녀 중 한 명인 루비가 루시아의 언니인 일루니아에게 둘이 만 난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일루니아는 루시아를 방으로 불렀다. " 무슨 일이야, 언니?" 루시아는 방에 들어선 순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일 루니아는루시아에게 말했다. "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으로 그런 뺀질이를 만나는 거야?" " 그,그걸 어떻게 알았어?" " 내가 언제까지고 모를 거라 생각했니?" 일루니아는 정말 화난 모습이었다. 처음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던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쳣다. " 난 히로를 사랑해!" 일루니아는 기가 찼다. " 그딴 놈을 사랑한다고? 너 제정신이야? 생각해 봐. 그놈은 돈도 없고, 생긴 것도 별로야. 게다가 더럽게 뺀질거리지." " 아,아니야. 히로는 좋은 사람이야." 일루니아는 루시아의 팔을 붙들었다. " 넌 공주야. 넌 너와 어울리는 사람과 결혼해야 돼. 그런 뺀질이 는 잊어버려." " 언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난 히로와 결혼할 거야!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면 히로가 청혼하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흑흑~" 루시아는 울면서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일루니아는 혀를 찼다. " 너 정말 안 되겠구나." " 흑흑~ 제발 이러지 마, 언니. 우리는 정말 사랑한단 말이야. 제 발 우리를 이대로 놔줘." " 사랑? 웃기지마. 그놈은 니가 공주라는 것을 알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야. 널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버릴 생각이야. 그놈은 니 가 공주가 아니었다면 거들떠도 안 봤을 걸. 왜 그걸 모르는 거 야?" " 흑흑~ 아니야, 언니. 히로는 그런 사람 아니야." " 하아~ 더 이상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을 것 같군. 당분간 별장 에 가서 쉬고 있어." 짝짝! 일루니아가 손뼉을 치자 두명의 시녀가 나타났다. " 별장으로 모셔라." " 아, 안 돼, 언니. 난 여기 있어야 돼. 히로를 만나야 한단 말이 야!" 루시아는 일루니아에게 매달렸지만, 일루니아는 그녀를 매몰차 게 뿌리쳤다. 두 시녀는 루시아를 잡아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일루니아는 창가로 걸어갔다. 시녀들이 루시아를 억지로 마차에 태우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후, 마차가 출발했다. 일루니아는 그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 다 널 위한거야." 아르바이트가 끝난 히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약속 장소인 광장으 로 나갔다. 이제 곧 그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몸은 피곤했지만, 마 음은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 루시아가 좀 늦네." 히로는 시계를 보맜다. 약속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났지만 루시아 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 오늘 무슨 일 있나?"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아 왕궁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 었다. 히로는 계속해서 루시아를 기다렸다. 하지만 해가 뜰 때까지 도 루시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히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루시아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히로 는 며칠 동안 광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 히로에게 한 소녀가 다가왔다. " 누구시죠?" 히로가 묻자 소녀는 후드를 벗었다. 긴 회색 머리카락이 폭포수 처럼 흘러내렸다. 소녀는 히로에게 말했다. " 라이에요. 루시아 공주님의 시녀인." " 아! 라이구나." 루시아가 약속 장소에 몇번 데리고 나왔기 때문에 히로는 라이 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라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이 쪽에는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라이는 히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 루시아 공주님과 오빠가 만난다는 사실을 루비가 일루니아님께 일렀어요. 그 때문에 일루니아님이 루시아 공주님을 다른 곳으로 보냈어요. 루시아 공주님은 지금 왕궁에 없어요." " 뭐? 그럼 어디에 있는데?" " 그건 라이도 잘 모르겠어요. 원래는 방금 한 말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만날 광장에서 루시아 공주님을 기다리는 오빠를 보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지면 라이는혼 날지도 몰라요. 우엥~" " 고마워, 라이야. 라이는 정말 착한 엘프구나." " 헤헤~ 라이가 좀 착해요." 히로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광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공부와 일을 전부 때려치우고 루시아를 찾아 나섰다. 루시아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별장에서 시녀들의 감시를 받으 며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있었고, 오직 하루 에 한 번 신전에 가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루시아는 여느 때처럼 신전으로 갔다. 시녀들은 문 앞에서 기다 렸고, 루시아는 신전의 기도방으로 들어갔다. 오직 이 순간만이 그 녀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루시아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 단 한번이라도 좋아요. 단 한번만이라도 히로를 만나게 해주세 요.' 그 순간이었다. 신상 뒤에서 히로가 걸어 나왔다. " 루시아······." " 히로!" 둘은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 정말 히로야? 이게 꿈은 아니겠지? 흑흑~." 루시아는 눈물을 흘리며 히로의 얼굴을 만졌다. 히로의 얼굴은 많이 초췌해져있었다. 거칠어진 피부와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몰 골도 말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여기저기 찢어진데다가 더럽 기까지 했다. " 한 달 동안이나 널 찾아 헤맸어." " 흑흑~." 루시아는 히로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히로는 그녀의 머 리카락을 쓸어주며 말했다. " 얘기 다 들었어. 우리 같이 도망치자. 이대로 도망쳐서 다른 나 라에 가서 살자. 반드시 널 행복하게 해줄게." 그러자 루시아는 갑자기 히로를 뿌리쳤다. " 아,안 돼." " 왜 그래, 루시아? 너도 날 사랑하잖아." " 흑흑~ 안 돼. 널 사랑하지만 그럴 수 없어." " 어째서! 어째서 안 된다는 거야?" 히로의 다그침에 한참 후 루시아는 입을 열었다. " 나 내일 결혼해." " ······뭐?" "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루시아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에서는 끊임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 다. 그녀가 결혼한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히로는 마치 망 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 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히로는 그 상태로 멍하니 서 있었다. 루시아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 나 이만 가볼게." 루시아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히로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 이대로 가면 다시는 못 만나겠지?" " 아마도······." " 그럼 잠깐만 같이 있어줘." 히로는 간절하게 말했고, 그 부탁까지 거절할 수 없었던 루시아 는 고개를 ㄲ덕였다. 히로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당시의 담배는 종이에 말아 피우는 잎담배였다. 그렇기에 몇모 금 빨면 금세 다 타들었다. 히로는 담배를 피웠고, 루시아는 그 옆을 조용히 지키고 섰다.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가 다 타오르는 것은 순식간 이었다. 담뱃불이 꺼지자 루시아는 히로를 남겨둔 채 기도방을 나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며칠 후, 루시아는 지니라는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성대한 결 혼식이 진행되는 날 히로는 짐을 싸서 아이리스 왕국의 수도를 떠 났다. 수도를 떠난 히로는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돌았다. 그의 머릿속 에 맴도는 것은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 담배가 그렇게 금방 타오르지만 않았어도 그녀와 좀더 같이 있 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순간,히로의 잔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 담배와 입 사이에 무언가를 넣어 한번에 흡입할 수 있는 양을 조 절한다면 담배를 좀더 오랫동안 피울 수 있지 않을까? 히로는 바로 자신이 생각한 담배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 어진 것이 세계 최초의 필터담배였다. 히로는 즉시 특허를 내고 투자자들을 설득해 공장을 세웠다. 히 로가 만든 필터담배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다. 애연가들은 전 부 히로의 칠터 담배를 물고 다녔고, 히로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히로는 그동안 계속해서 루시아의 행방을 찾았다. 루시아는 지 니와 결혼한뒤 아이리스 왕국을 떠나 헤리오 왕국으로 갔다. 지 니가 헤리오 왕국에 있는 아이리스 애사관으로 발령 났기 때문이 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후 돌연히 행방을 감추었다. 정보 길드, 도둑 길드, 마법사 길드 등등. 히로는 온갖 수단을 동 원해 그들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기를 1년여. 히로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 지니 오바는 도박에 미쳐 가산을 탕진했구요, 그러다가 결국 마 피아의 총에 맞아 죽었대요. 그리고 루시아 공주님은 현재 빈민가에 서 힘들게 살고 있어요." " 그, 그런!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충격작인 얘기를 접한 히로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에 앞서 드는 의문이 있었으니······. " 시녀였던 라이가 어저다 마법사 길드 수장이 되었니?" 히로가 묻자 라이는 귀엽게 웃으며 대답했다. " 헤헤~ 1인 2ㅇ역이에요." 그러자 라이 옆에 로브를 입고 서 있던 소녀도 밝게 웃으며 말 했다. " 루비는 현재 마법사 길드 원로에요. 루비도 1인 2역이에요!" " ······." 이는 아까보다 더 충격작인 사실이었다. 1인 2역이라니! 출연료 아끼려고 별 짓을 다하는군. 제작비가 부족했나? 아무튼 히로는 그 길로 루시아를 찾아갔다. 루시아가 사는 곳은 헤리오 왕국 외곽에 위치한 빈민가였다. 남편인 지니는 도막으로 가산을 탕진했다. 마지막에는 빚까지 끌어다 썼고, 그 때문에 마피아 총에 맞아 죽었다. 홀로 남은 루시 아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 아 생활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루시아는 남의 집 허드렛을을 대신해주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먹 고 살았다. 그것은 화려한 공주의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원래 몸이 약했던 루시아는 계속되는 힘든 일에 점점 지쳐갔다. 결국 병이 났지만, 돈이 없어 병원조차 갈 수 없었다. 폐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은 집. 집 안에는 퀴퀴한 냄새가 감돌았다. 루시아는 낡아빠진 침대에 누어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 고,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백금을 가늘게 뽑아 만든 것 같은 머리카락은 그 빛을 잃었고, 밥을 제대로 못 먹었는지 뼈마디가 다 드러났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 루시아는 몸을 떨었다. 난방은 커녕 비라람조차 막지 못하는 집 이었다. 루시아는 모포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얇은 모포는 추위 를 막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순간, 말발굽 소리가 들 려왔다. 다그닥 다그닥. 이곳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타고 다닐 만큼 의 신분이나 재산을 지니 사람이라면 이런 빈민가에 살 이유가 없 었기에. 그 말발굽 소리가 멈춘 곳은 그녀의 집앞이었다. 그리고 이어지 는 문 두드리는 소리. " 누구세요?" 루시아는 아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새하얗게 눈이 쌓인 거 리 위에 덩치 큰 백마 네마리가 끌고 있는 화려한 마차가 서 있었 다. 그리고 마차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10년이 넘는 세 월이 흘렀지만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히, 히로." " 루시아······." 서로를 마주본 둘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 을지 알 수 없었다. 차가운 눈이 어깨위에 쌓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루시아였다. " 드, 들어올래?" " 그래." 히로는 루시아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들어선 히로는 속으 로 탄식했다. ' 루시아가 이런 누추한 곳에서 살고 있다니.' " 일단 거기 않아. 뭐라도 내왔으면 좋겠는데, 딱히 내올만한 게 없네. 보다시피 여긴 아무 것도 없거든." 루시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 다. 빛을 잃은 머리카락과 창백해진 얼굴.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해진 몸과 슬픔가득한 눈동자. 히로는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 나 아직 결혼 안 했어. 널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 했지만 잘 안 되더라.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야. 난 아직도 널 사랑해. 제발 나 와 결혼해 줘 루시아." " 히로······." 갑작스런 히로의 청혼. 루시아는 히로의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 었다. ㅡ는 자신에게 언제나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외면한 것은 바로 나······. 루시아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 생각할 시간을 줄래?" " 알았어. 그럼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올게." 히로는 집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히로는 루시아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녀가 자신 의 청혼을 받아들여주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받아들여주지 않 는다 하더라도 그녀를 이곳에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 그녀는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야. 그녀는 커다란 저택에 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살아야 해.' 히로는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히로는 재빨리 문을 부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루시아였다. " 루시아!" 히로는 루시아를 꺄안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바닥에는 권총이 떨어져 있었고, 탁자 위에는 쪽지가 놓 여있었다. 그 쪽지에 적힌 말은 단 한마디였다. 미안해. " 어흐흐흑! 어째서······ 어째서 죽은 거야, 루시아?" 히로는 루시아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런 히로에게 바 닥에 있는 권총이 보였다. 히로는 그 권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타앙! 히로가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Man Always Rema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 * * * * " 남자는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항상 사랑을 기억한다, 라는 뜻이 죠." 얘기를 끝마친 나는 담배를 입에 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 자는 라이, 루 ,루비, 지니,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 루시아 이렇게 7 명이었다. 내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울음소리가 터져 나 왔다. " 우에에엥~ 라이 감동했어요오." " 으아아앙~ 루비는 너무 슬퍼요오." " 엉엉~" 서로를 껴안으며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 엘프드. 루시아의 눈가 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인디는 아예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 훌쩍~ 너무 감동적인 얘기에요." " 그런데 어째서 제가 악역으로 나온 거죠?" 일루니아 여사님의 항의. 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대꾸했다. "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이 중에서 악역 할 사람이 샤이 사일런 스 백작님 빼고 또 누가 있어요? 그리고 실제로 나와 루시아의 사 랑을 방해하고 있잖아요." "그거야 니가 뺀질거리니까 그렇지, 이 뺀질아!" " 그 뺀질이 소리 좀 그만하지 못해, 이 아줌마야!" " 두 분 모두 진정하십시오." " 그, 그만하세요, 일루니아님." 주위에서 말리자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 뭐, 제가 악역인 것은 그렇다 치죠. 그런데 배경이 아이리스 왕 국인데 왜 총이 나오는 거죠?" " 그건······." " 그리고 지니가 죽었을 때, 어째서 루시아는 다시 아이리스 왕국 으로 돌아가지 않았죠?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가 왜 남의 집 허드렛 일을 해야 했는지 정말 의문이네요." " 그, 그건······." 이야기의 허접을 정확히 짚어내는 일루니아 여사님. 난 반박할 말을 생각해보다가 떠오르는 것이 없자 그냥 소리쳤다. " 뭘 그렇게 따져요? 이런 게 다 작가 설정이라는 겁니다!" " 훗! 할 말 없으니 큰소리 치기는." " ······." 좀 찔리는군. " 아무튼 Man Always Rema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 의 머리글자를 따서 말보로(Marlboro)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말보로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tic One이 줄어서 말보로가 됐 다는 얘기도 있지요. 남자는 로맨틱한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사랑 을 기억한다, 라는 뜻이죠. 제가 해드린 얘기는 두 가지를 적당히 섞은 거예요. 그런데 이 얘기는 말보로가 담배 팔아먹으려고 지어 낸 예기고, 실제와는 별 상관없어요." 난 다 타오른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이번만은 루시아도 내 가 담배를 피운 것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재밌었어?" 루시아에게 묻자 루시아는 ㄱ고개를 끄덕였다. " 응. 그런데 되게 슬프다." 인디는 계속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 훌쩍~ 루시아 공주님은 왜 히로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택한 걸까요?" 그물음에 답한것은 루시아였다. " 아마도 여자는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보이는 것이 견 딜 수 없을 정도로 싫었던 것 같아요. 그냥 그렇게 그에 대한 기억 을 간직한 채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을지도······. 왠지 그 여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말을 하는 루시아의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살 며시 그녀의손을 붙잡았다. 걱정하지 마, 루시아. 너와 나의 사랑은 그들처럼 비극적으로 끝 나지 않을 테니까. 이야기 속의 불행했던 히로와 루시아를 위해서 라도 우리 행복하게 살자. "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아인언스 공작님.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도 은근히 악역이군요." " 뭐, 신경 쓰지 마세요." " 헤헤~ 라이는 두 번이나 출연했다.' 헤헤~ 루비도 두 번 출연했어. 그런데 출연 시간이 라이보다 짧아서 섭섭해." " 난 한번도 출연 못했는데······." 루는 볼을 잔뜩 부풀림으로써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 미안하다. 깜빡했다. 다음에 또 얘기 할 일 생기면 그땐 너도 꼭 넣어줄게." " 약속이에요, 형" " 그래. 이 형을 믿으렴." 일루니아 여사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우리를 불러놓고 이 이야기를 한 이유가 뭐죠? 설마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에 흡연을 눈 감아달라는 의도에 서한것은 아니겠죠?" " 헉! 그러 어떻게······ 가 아니라······ 뭐, 꼭 그런 의도라기 보다 는······." " 그럼 무슨 의도죠?" " 그러니까 제가 이런 쟤기를 한 의도는······ 아! 맞다. 양담배보 다는 국산담배를 애용하자는 게 이 이야기의 주제였습니다." 루시아는 날 보며 말했다. " 양담배든 국산담배든 몸에 해로운 것은 마찬가지야." " 뭐, 그렇긴 하지만······." 내가 이런 감동적인 얘기를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담배에 대한 루 시아의 부정적인 생각은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이러면 좀 곤란 한데······. " 어쨌든 얘기는 재밌었어. 너 얘기 되게 재밌게 하더라." " 그, 그래?" " 응. 다음에 또 재밌는 얘기 있으면 들려줘." " 아, 알았어." "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야겠다."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 우리도 들어갈까요? 인디님?" " 예, 일루니아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에게 말했다. "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재밌는 건 사실이네요." " ······." 뭐야? 지금 일루니아 여사님이 날 칭찬한 거야? 흐음, 생각해 보면 내가 은근히 이런 쪽으로 소질이 좀 있는 듯. 아예 이쪽 길로 나가봐? 뭐, 어쨌든······ " 남자는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항상 사랑을 기억한다지만, 나는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항상 사랑에 발목을 잡히지. 하아~." 아이리스 2부 4권 Story 11 망년해&새해 오늘은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게 문을 닫는 대로 집 으로 가서 망년회를 하기로 했다. 망년회(忘年會)의 망은 잊을 망 자다. 즉, 망년회의 뜻은 한 해 동 안 있었던 일을 전부 잊자는 거다. 사실 별로 좋은 뜻은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한 해를 보낸다는 의미에서 송년회(送年會)를 주로 쓴다고 한다. 하지만 올 해는 다시 망년회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 한 해 동안 있었던 일을 몽땅 잊고 싶을 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올 해는 특히나 경제가 어려워 서민들이 살기 힘들었다. 빚에 쪼 들린 가족들이 동반 자살을 했다는 얘기도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에휴~ 내년에는 경기가 좀 나아져야 할 텐데." "에휴~." 내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옆에 있는 누군가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라이다. 라이는 헬로우 귀티 인형을 끌어안은 채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니, 라이야? 무엇 때문에 한숨을 내쉬는 거야?" "그냥 한 해가 간다고 하니 마음이 심란해서요. 내일이면 한 살을 더 먹는데, 그동안 라이가 뭘 했나 싶기도 하고. 마법 공부를 열 심히 하지 못한 것이 후회돼요. 라이도 오빠처럼 8클래스 마스터가 되고 싶은데." "으음, 우리 라이가 고민이 많구나. 라이를 위해 이 오빠가 조언 을 해주자면 마법 공부는 벼락치기로 해서는 안 된단다. 평소에 조 금씩 조금씩 공부하는 것이 중요해. 라이도 알다시피 8클래스 마스 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니. 후후~ 8클래스 마스터는 인간 중 에 오직 두 명뿐이지.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나. 이렇게 딱 둘뿐. 그 만큼 이 오빠가 대단한 마법사란다. 라이는 잘 알지?" 라이는 회색 눈동자를 반짝거렷다. 그리고 나를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오빠는 대단해요! 막막 훌륭해요! 진짜진짜 멋져요!" "푸하하~ 그야 당연하지. 이 오빠는 8클래스 마스터니까!" 초롱초롱. 으음, 너무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는 마렴. 이 오빠가 부담스럽 잖니. 라이는 역시나 마법사였다. 사실 라이가 지금은 여기 와서 하루 하루를 먹고 자는 것으로 보내고 있지만, 판타지 세계에 있었을 때 는 상아탑의 주인, 다시 말해 마법사 길드의 수장이었다. 현재 마법 레벨도 무려 8클래스 러너. 참고로 8클래스 러너와 8클래스 마스터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은 클래스로 오르게 되면 그만큼 레벨업 하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가 이렇게 존경의 눈길로 나를 보고 있는 거고. "라이도 오빠처럼 되고 싶어요." "후후~ 아무나 오빠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우리 라이가 열심히 노력하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란다. 푸하하!"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인디는 나와 라이가 있는 카운터로 다가왔다. 흑단 같은 검은 생 머리를 등에 길게 늘어뜨린 인디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고 청초 하게 보였다. "……." 뭔 남자가 이렇게 보인다냐? "와아! 9클래스 마스터인 인디 오빠다!" 라이는 그렇게 말하며 인디의 품에 안겼다. 나는 질투심이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질투심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저놈은 9클래스 마스터, 나는 8클래스 마스터. 둘의 격차는 하늘 과 땅 차이 이상. 적어도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라고나 할까? 빠드득! 저런 놈이 9클래스 마스터라니! 인정할 수 없어! 라이는 인디의 품에서 마구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 라보는 나는 복장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이 자식! 마법을 가르쳐준다는 빌미로 우리 순진한 라이를 유혹 하다니! 내 라이의 오빠로서 네놈을 결코 용서치 않으리! 덤벼라!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마!" "왜, 왜 그러세요, 히로님? 제,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놈! 네가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느냐? 여봐라! 이놈을 매우 쳐라!" 그러자 어느새 내 옆에 서 있던 지니가 말했다. "정말로 칠까요?" "……." 그냥 해본 소리였다. 나중에 일루니아 여사님께 무슨 소릴 들으 려고. 나는 인디의 품에 안겨있는 라이를 빼앗아 내 품에 안았다. 라이 는 나아 루시아의 딸. 아무나 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나 남자는 더더욱 그렇다. "아! 사일런스 백작님도 저녁 때 있을 망년회에 오실 거죠?" "물론입니다." "여자와 약속 없나요?" "만나자는 약속은 많았지만 전부 거절했습니다." "흐음, 인기 많아서 좋겠네요." 시간이 흐르는 것은 순식간이다. 어느새 가게 문 닫을 때가 되 었다. 나는 가게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렸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는군. 나는 집에 가는 길에 근처 빵집에 들러 케이크를 샀다. "큰 걸로 사요, 오빠. 라이 많이 먹을 거예요." "그래." 나는 제일 큰 사이즈로 구매했다. 라이가 좋아하는 쵸코 쉬폰 케 이크로. 라이를 비롯한 아이등른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집으로 돌아가자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이 미리 거실에 상을 차 려놓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피자까지 시켜놓았다. 고구마 두 줄짜리랑 치즈 크러스트 스위스 퐁듀 피자로.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와!" 뭘 감탄까지 하고 그러니? 망년회인데 못해도 이 정도는 해야지. "응? 이게 다 뭐야?" 라이레얼은 지금 일어났는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참고 로 라이레얼은 요즘 거의 폐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원인은 내가 루 비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플레이스테이션2였다. 정작 아이들은 별로 게임을 안 했다. 해봐야 간단한 클래식 게임 정도? 반면 라이레얼은 그야말로 목숨 걸고 했다. 어떤 RPG게임의 경우에는 클리어까지 100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럼 라이레 얼은 나흘 동안 잠 한숨 안 자며 게임에 매달렸다. 라이레얼은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구했는지 공략집까지 출력했 다. 카르는 라이레얼 옆에 착 붙어서 라이레얼을 도와주었다. 라이 레얼이 게임을 하고 있으면 카르가 공략집을 보며 알려주는 형식 이었다. "하암~." 라이레얼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그 때문에 입고 있던 남 방이 올라가며 맨살이 드러났다. 헉! 이런 애들 교육에 안 좋은 모습을! "오늘이 12월 31이잖아요" "술도 있어?" "물론이죠. 술 없는 망년회는 망년회가 아니죠." "후후~ 다행이네." 라이레얼은 머리가 가려운지 벅벅 긁었다. 폐인 생활 하느라 제 대로 씻지도 않은 것이다. 라이레얼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곱을 떼어냈다. 상당히 지저 분한 행동이지만 미녀가 하니 뭔가 색달라 보였다. 백치미가 느껴 진다고나 할까? 으음, 예쁘면 모든 게 다 용서된다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해서 반 대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라이레얼 같은 미녀에게 뭐라고 하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기…… 샤워라도 좀 하고 오세요. 많이 가려우신 것 같은데." 나는 라이레얼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어느새 라 이레얼의 뒤에 나타난 카르가 소리쳤다. "인간 주제에 감히 언니에게 그딴 말을 하다니! 나의 언니가 씻 든 말든 니가 뭔 상관이야?" "……." 주저 없이 나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카르. 미녀에게 미움 받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카르가 나를 친 한 오빠처럼 대해줬으면 하는데(원래 오빠 오빠 하다가 여보 당신 되 는 거다.) "카르 너 히로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내가 그러면 혼낸다고 했어, 안 했어?" "흑~ 죄송해요, 언니." 다행히 카르는 라이레얼이 화를 내자 금방 물러났다. 하지만 나 에 대한 적개심은 풀지 않았다. "히로 말대로 샤워나 해야겠다. 같이 할래, 히로?" "헉! 왜, 왜 이러세요?" 라이레얼은 어느새 나의 코앞까지 다가와 매혹적인 표정으로 나 를 유혹했다. 라이레얼은 남방 말고는 속에 아무 것도 안 입은 듯했 다. 게다가 남방 단추는 두 개 정도 풀려있어 조금만 몸을 숙이면 속이 들여다보일 듯했다. 원래 완전히 보이는 것보다 이렇게 보일 듯 말 듯 하는 것이 사람 을 더 흥분시킨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면 보일 것 같아. "나의 언니에게서 떨어지지 못해!" 카르가 나를 확 밀쳤다. 그 때문에 나는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난 카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휴우~ 잘못하면 넘어갈 뻔했군. "저, 저기 라이레얼……." "응? 왜?" "웬만하면 옷 좀 제대로 입고 다니세요. 아이들도 있는데 집 안 에서 그런 옷차림은 좀……." "응? 내 옷차림이 뭐가 어때서?" "……."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상체는 속이 비칠 것 같은 여름용 남방 한 벌, 하체는 짝 달라(오타.책에는 '잘라' 라고)붙 는 핫팬츠…… 이게 지금 라이레얼의 복장이다. 아무리 집 안이라 지만 이런 복장은 너무하다. 물론 보는 나야 즐겁지만 애들 교육 차 원에서 이러면 안 된다. 그나저나 보기에 시원해 보여서 좋긴 하군. 개인적으로 베스트 드레서 상이라도 주고 싶다. "아, 아무튼 좀 제대로 입으세요. 날씨도 추운데 감기 걸리면 큰 일이잖아요." "후후~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히로?" "……." 아아~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안 되는데. 나의 인내심에도 한 계가 있는데. 난 루시아를 생각하며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이럴 때는 내가 커플이라는 게 아쉽다. 싱글이었다면 기꺼이 라이레얼의 유 혹에 넘어갔을 텐데. "빨리 씻기나 하세요." "알았어." "저도 같이 씻어요, 언니." "그러든지." 카르는 라이레얼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라이레얼의 오른 팔에 매달렸다. 라이레얼은 욕실을 향해 걸어가다 나에게 말했다. "아! 내 옷이랑 속옷 좀 욕실 앞에 갖다 줘. 옷도 갈아 입어야하니 까. 하는 김에 카르 것도 같이." 그 말을 끝으로 라이레얼은 카르와 함께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금 라이레얼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헉! 옷과 속옷을 갖다 달라고? 그, 그런! 자꾸만 입에 침이 고인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간단한 부탁 일 뿐인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당황하는 걸까? 나는 내가 직접 라이레얼과 카르의 방에 들어가 옷과 속옷을 가 져오는 대신 인디에게 시켰다. 인디는 별 거리낌 없이 방 안으로 들 어가서 옷과 속옷을 들고 나와 그것을 욕실 문 앞에 놓아두고, 라이 레얼과 카르가 벗어놓은 옷가지를 빨래통에 넣었다. 으음, 인디도 분명히 남잔데 어째서 인디의 행동은 이렇게 자연 스러워 보이는 걸까? 만약 내가 했으면 변태처럼 보였겠지? 약 10분 정도 지나자 라이레얼과 카르가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 다. 라이레얼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었다. "간만에 샤워하니 시원하다." 라이레얼의 레몬빛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어 반짝거렸다. 샤워를 끝마친 라이레얼과 카르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라이레얼이 입고 있는 옷은 가벼운 추리닝, 그리고 카르가 입고 있는 옷은 네글리제 잠옷이었다. "오늘은 어제 산 게임 다 깨야하는데." "또 샀어요?" "걱정하지 마. 나는 중고로 사서 다시 중고로 되파니까. 그럼 저 렴한 가격에 게임 라이프(Game Life)를 즐길 수 있지." "……." 어느새 알뜰하게 게임 라이프를 즐기는 방법까지 터득한 라이레 얼. 애초에 집 안에 플레이스테이션2를 들여놓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래도 그로 인해 귀차니즘에서 벗어났으니 그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귀차니즘에서 벗어나 폐인이 되는 것은 발전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나? "이제 시작해요, 히로님." 모두들 거실에 모여 있었다. 라이, 루, 루비, 루시아, 일루니아 여 사님, 인디, 라이레얼, 카르, 지니, 크로니스까지. 갈리온드와 루엔 은 어디 여행이라도 갔는지 집 안에 없었다. "자, 그럼 망년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가 가장으로서 한 말씀드 리도록 하겠습니다." "훗, 가장 좋아하시네, 뺀질이 주제에." "……." 아이씨! 이 아줌마는 사사건건 태클이야! 난 일루니아 여사님을 한번 째려봐준 다음 상 주위에 앉은 사람 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부족한 저를 따라 이 세계로 와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없었다면 저는 이 세계에서 왕따가 되 었을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귀찮기도 했고, 지금도 이 집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누구라고 이름 은 밝히지 않겠지만 본인이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아무튼 여러분 들 덕분에 저는 올 한 해 정말 즐거웠습니다. '라이의 집' 도 번창하였구요. 저를 끝까지 믿어준 루시아와 라이에게 특히 고맙 네요. 크로니스도 고마워요. 흑~ 모두들 고마워요~." 한 해 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눈물 이 흘러나왔다. "울지 마세요, 오빠. 오빠가 울면 라이도 슬퍼진단 말이에요. 훌 쩍~." "흑~ 오빠 안 울어, 라이야." 나는 라이가 울까봐 황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루시아는 나의 등 을 살짝 두드려주었다. 지니는 라이터를 꺼내 케이크에 꽂힌 초에 불을 붙였다. "그럼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촛불을 불도록 하죠. 얘 들아." 라이와 루와 루비는 촛불을 향해 힘껏 입김을 불었다. 후우~! 촛불이 꺼지자 아이들은 재빨리 케이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언 제나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 난 이런 모습을 볼 때 마다 얘들이 어렸을 때 못 먹고 자랐나, 하는 생각을 한다. 혹시 인디 이 자식 라이를 굶기며 기른 거 아냐? 아이들은 케이크와 피자를 맛있게 먹었고, 라이레얼과 카르는 방 금 일어나서 배가 고픈지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한 잔 받으시지요, 아이언스 공작님." 나는 지니가 따라준 술을 받았다. 상 위에는 소주와 맥주가 반반 의 비율로 올려져 있었다. "맥주로 할래, 소주로 할래?" "맥주 마실게. 소주는 너무 써." 나는 맥주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 루시아에게 건네주었다. "나도 줘, 히로." "맥주요, 소주요?" "난 폭탄주." "……." 과연 라이레얼. 나는 맥주와 소주를 따로 따랐다. 그리고 소주잔을 맥주잔 안에 빠트렸다. 그 다음 수건으로 맥주잔의 입구를 막고 한번 흔들어 주 었다. "여기요. 빈속에 마시면 속 버리니까 안주 많이 먹으면서 마셔 요." "응. 알았어." "크로니스도 한 잔 받으세요." "한 잔 받으세요, 인디님." "아니에요, 일루니아님. 저는 술 잘 못하잖아요." "제가 따라주는 술인데도 안 마실 거예요?" "그럼 조금만……." 망년회라면 역시나 술 파티다. "그럼 건배!" "건배!" 나는 소주를 한번에 들이켰다. 일루니아 여사님과(오타. 원래'와'라고 나옴) 인디는 어느 새 러브샷을 하고 있었다. 라이레얼은 폭탄주를 마셨고, 카르는 그 옆에서 안주를 집어 주었다. 루시아는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루시아는 평소에도 절제해서 술을 마시는 편이다. 그렇기에 만 취한 모습은 거의 보기 힘들었다. 취해봐야 몸을 못 가누는 정도랄 까? 하지만 막상 취하면 그때부턴 굉장히 귀여워진다. "우리도 러브샷 한번 할까?" "응?" "저쪽에서 하는 것처럼." 나는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을 가리켰다. 루시아는 그들을 보 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왕 하는 거 우리 폭탄주로 하자." 나는 재빨리 맥주잔에 소주잔을 빠트리고 흔들었다. 우리는 서 로의 팔을 교차시킨 채 술을 원 샷 했다.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루시 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 라 있었다. 후후~ 계획대로 되어가는군. "이번에는 포옹샷으로 할까?" "응? 포옹샷이 뭐야?" "이렇게 상대방을 껴안아서 손을 뒤로 돌려 마시는 거야." "재밌겠네." 평소의 루시아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루 시아는 술에 취해있는 상태. 나는 다시 폭탄주를 만들어 루시아에 게 건넸다. 그리고 루시아를 껴안고 마셨다. 아아~ 이런 분위기 너무 마음에 든다. "오빠아~ 라이랑도 러브샷 해요오." "응?" 어느새 내 옆에 온 라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라이의 새 하얀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회색 눈동자는 풀려있 었다. 발음도 정사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술에 취한 것이다. "헉! 누가 라이한테 술 먹였어?" "내가 먹였는데.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히로?" 라이레얼이 손을 들며 말했고, 난 라이레얼에게 소리쳤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애한테 술을 먹이면 어떡해요?" "애가 옆에서 굉장히 마시고 싶어 하더라고. 그리고 술은 원래 어렸을 때 배우는 거야. 나도 저 나이 때 마셨는걸." "……." 그건 라이레얼 사정이죠. "오빠아~ 라이랑은 러브샷하기 싫어요오? 훌쩍~ 라이 실망이 에요오~." "아, 아니야, 라이야. 러브샷하자꾸나. 오빠도 아까부터 라이랑 러브샷하고 싶었어." 나는 라이와 팔을 교차시켜 마셨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이런 일 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으음,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군. "헤헤~ 이번에는 포옹샷으로 해요오." "그럴까?" 나는 라이와 포옹샷까지 했다. 라이는 내 품에 안겨 계속 방긋방 긋 웃었다. "오빠 라이 사랑해요오?" "물론이지. 오빠는 라이를 막막 사랑한단다." "정말요오?" "응. 정말." "그럼 루시아 언니와 라이 중에 누가 더 좋아요오?" "……." 헉! 그런 어려운 질문을! "그, 그야 당연히……." 이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질문보다 한 단계 위인 질문이 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질문을 옛날에 한번 들은 것 같은데. "맞아. 라이가 더 좋아, 내가 더 좋아?" 루시아는 나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엇다. 오른쪽에는 루시아, 왼쪽에는 라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고립된 상황. 이런 상황 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오직 하나다. 난 내 앞에 놓인 소주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었다. 꿀꺽꿀꺽. 이걸 마시고 죽는 거야! 루시아와 라이 중 하나를 택하라면 차라 리 죽음을 택하리! 속에서 불이 난 열기가 끓어올랐다. 이래서 깡소주를 마시면 속 버리는 거다. "우웅~ 라이 졸려요오." 내 다리를 베고 잠드는 라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 히 루시아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헉! 뭐하는 거예요, 라이레얼?" "응? 보고도 몰라? 애들한테 술 가르치고 있잖아." 라이레얼은 루와 루비에게 마구 술을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루 와 루비는 그것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도 취한 모습이었다. 크로니스와 지니는 담소를 나누며 조용히 술을 들이켰지만, 이미 술자리는 난장판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으음, 우리나라 망년회 문화에 대해 개선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 그만 마셔, 루시아." "괜찮아. 아직 더 마실 수 있어." 루시아는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마셨다. 정말 많이 취했군. 루시 아의 주량을 생각해보면 배는 마신 셈이다. "헉! 거기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런 건 방에 들어가서 해!"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혀와(오타.'과'로 출판) 혀가 엉키는…… 헉! 애들 보는 앞에서 저런 부(끄)러운 짓을! "루, 루비 너희들 고개 안 돌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너희들 나중에 저거 따라하다가 걸리면 루엔한테 이른다!" "우리도 키스해요, 언니." "그럴까?" "하지 마!" "니가 뭔데 나와 언니한테 하라 마라야! 난 언니랑 키스할 거 야!" "너희들 고개 돌리라니까! 오빠 말 안 들으면 루엔한테 이른다니 까!" 루엔한테 이른다는 말에 루와 루비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눈 은 고개와는 반대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눈도 돌려! 그리고 술 좀 그만 마셔! 니들이 술값 낼래?" "오빠아~ 라이 속 울렁(또 오타. 령이라고 나와잇네요.)거려요오." "헉! 안 돼, 라이야. 토하면 안 돼." 나는 재빨리 라이의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다른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우욱! "토하지 말아요, 라이레얼!" "니가 뭔데 언니핱네 하라 마라야! 빨리 토하세요, 언니. 그럼 속 이 좀 나아질 거예요." "하려면 비닐봉지에다 해요! 뭐하니, 인디야? 어서 비닐봉지 안 가져오고?" 하지만 인디는 인사불성이 된 채 일루니아 여사님 품에 안겨있었 다. 저 자식은 왜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가지고는. "우웨엑!" "안 돼!" 라이레얼은 결국 바닥에 토를 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내가 토하고 싶어진다. 내일 여기 누가 치운다냐? "사랑해요오, 오빠아.' "그래. 나도 사랑해, 라이야. 그러니까 토만 하지 마." "그치만요오…… 속이 안 좋아요오. 욱……." "헉! 비닐봉지! 비닐봉지 어디 있어? 조금만 참아, 라이야. 오빠 가 비닐봉지 줄게." "우웨엑!" "안 돼~!" 내 바지에 뜨거운 무언가가 쏟아졌다. 라이가 토를 한 것이다. 아 까 먹은 케이크와 피자가 보인다. 아직 소화가 다 안됐군. 속을 한번 게워낸 라이는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는 죽고 싶 은 심정이 들었다. 하려면 바닥에다 할 것이지, 어째서 내 바지에 한 걸까? 아무튼 잘 하는 짓이다. 어린애가 술 마시고 토하다니. 이래서 술자리에서는 제정신을 유지하면 안 된다. 차라리 취해 있다면 고통도 덜 하겠지. 나는 술을 마구 퍼마셨다. 제야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까 지 계속 퍼마셨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 나는 눈을 떴다. 내가 누워있는 장소는 내 방 침대였다. 응? 내가 왜 여기 누워있지? 어젯밤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열 받아서 술 퍼마시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됐지? 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루시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네." "응. 방금." "이거 마셔. 형부가 타준 거야." 루시아는 머그컵을 내밀었다. 한 모금 마셔보니 따뜻한 꿀물이 다. 으음, 소깅 좀 풀리는 것 같군. "넌 괜찮아?" "머리가 좀 아픈 것만 빼면 괜찮아." 루시아는 말을 하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 모습에 난 미소를 지었다. "라이 여기서 자고 있지?" "응? 라이?" 난 그제야 이불 위쪽에 회색머리카락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 다. 으음, 라이가 내 방에서 잤나보군. "일어나렴, 라이야." 나는 라이를 깨우기 위해 이불을 들추었다. 그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 침대가 좀 축축하군. 그리고 이 이상야릇한 냄새는 뭐지? "우웅~ 라이 더 자고 싶어요오." 라이는 이불에 매달리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침대를 내려다보 았고, 루시아 역시 시선을 침대로 향했다. "헉! 이게 뭐야?" 침대에는 라이가 그려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루시아는 깜짝 놀라 라이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봐, 라이야." "우웅~ 라이 졸려요오." "빨리 일어나지 못해!" 루시아가 소리치자 라이는 어쩔 수 없이 상체를 일으키고 눈을 비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라이야?" "예? 뭐갸요?" 라이는 이불을 들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라이의 표정. 처음에는 경악, 그 다음은 의심, 이어지는 절망. 라이 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나와 루시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는……. "우에에엥~." 울음을 터트렸다. 루시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해 첫날부터 침대에 오줌을 싸다니! 대체 올 한해를 어떻게 보 내려고? "훌쩍~ 훌쩍~." "그만 울어, 라이야. 살다보면 자다가 오줌 쌀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울고 그러니? 이제 그만 울고 뚝 그치렴. 뚝!" "훌쩍~ 뚝!" 난 라이를 안아주었다. 그 순간, 문득 옛날 일이 떠오르기 시작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라이 옛날에도 치마 입은 채 오줌 싼 적 있었 지. 푸훗~ 이 나이 되도록 아직까지 오줌싸개라니. 푸하하하!" "우에에엥~!" "헉! 웃어서 미안해, 라이야. 오빠가 잘못했어." "훌쩍~." 난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날의 일을 생각하 니 웃음이 저절로 입을 비집고 나왔다. 게다가 오늘 일까지. 참고로 라이의 옷과 침대 커버는 인디가 잘 빨아서 베란다에 널 어놓았다. 그리고 라이는 루시아가 깨끗하게 씻어주고, 잠옷을 입 혀주었다. "우헤헤헤~." "우에에엥~." "라이는 오줌싸개구나. 그렇지?" "우엥~ 라이는 오줌싸개…… 우엥~ 아니에요…… 우에에엥!" "어서 키 쓰고 바가지 들고 옆집으로 가서 소금 얻어오렴. 마침 소 금이 떨어진 것 같은데 잘 됐다. 천일염으로 얻어오렴. 우헤헤헤!" "우에에엥~ 오빠 미워요오~!" 퍼억! 내가 한창 라이를 놀리는데 재미 붙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의 뒤 통수를 때렸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감히 나의 옥체에 이런 식으로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일루니아 여사님뿐이다. "애가 우는데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울리다니! 정말 인간 이하군 요. 이모한테 오렴, 라이야." 일루니아 여사님이 말하자 라이는 내 품에서 빠져나와 일루니아 여사님의 품에 안겼다. 나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쓴 특정 용어에 주 목했다. "이모?" "루시아가 라이 엄마니까, 저는 라이의 이모가 되죠. 뭐 잘못됐 나요?" "아니, 뭐 잘못됐다기보다는……" 잘못된 것은 없는데, 뭔가 좀 이상하군. 난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켰다. 거실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 다. 어제의 광란의 술자리가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디가 다 치운 건가? "하암~ 일찍 일어났네, 히로." 라이레얼과 카르가 거실로 나왔다. "뭐, 일찍 일어난 건 아니죠. 벌써 대낮이니." "아무튼 새해 복 많이 받아." "라이레얼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후후~ 히로가 주는 복이라면 당연 받아야지. 그런데 어떤 복을 줄 거야?" 얼굴을 한껏 들이민 채 속삭이듯 말하는 라이레얼. 난 재빨리 뒤 로 물러섰다. "이, 이러지 마세요, 라이레얼. 카르가 보고 있잖아요." "후후~ 카르가 보고 있으면 어때? 더 흥분되지 않아?" "……." 물론 흥분된다. 맞아 죽을까봐. 카르의 은구슬 같은 눈동자가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행히 라이레얼이 카르를 끌고 화장실로 감으로써 더 이상의 사태는 일 어나지 않았다. 으음, 그나저나 오늘이 설날이란 말이지? 오늘은 설날이어서 가게 문도 닫고 집에서 쉬기로 했다. 난 소파 에 기대어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접시를 단 후로는 채 널이 많아져서 좋다. 하지만 정작 볼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형." 아이들은 내 앞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난 아까 라이를 놀린 것이 미안해서, 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니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렴." "그럼 절 받으세요." 아이들은 재빨리 절을 했다. 저 엉성한 몸동작. 절을 하려거든 제 대로나 할 것이지. 절을 한 아이들은 나에게 달려들며 말햇다. "세뱃돈 주세요오~!" "헉! 그게 목적이었냐?" 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마치 '힘들게 절을 했으니 당연히 돈을 주셔야지요. 우리는 땅 파서 절하나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세뱃돈은 무슨 세뱃돈이야!" "그치만 세배하면 돈을 주는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오." "누가 그런 말을 해?" "라이레얼 언니가요오." "……." 애들한테 쓸데없는 것들만 가르쳐주는 라이레얼. 아아~ 애들 교육을 위해서는 라이레얼을 멀리 떨어트려놔야 하는데. "아! 히로다! 나도 히로한테 세배해야지. 너도 해, 카르. 그래야 세뱃돈을 두 배로 받을 수 있으니까." 라이레얼과 카르는 말릴 새도 없이 절을 했다. "빨리 세뱃돈 줘, 히로." "맞아. 나랑 언니한테 빨리 세뱃돈 줘." "저, 저기…… 저희 집안은 전통적으로 구정으로 설을 쇠는지 라……." "정말? 잘 됐다. 그럼 구정에도 세배할 테니까 그땐 따로 줘. 아 무튼 빨리 세뱃돈 줘." "맞아. 빨리 세뱃돈 줘. 내가 뭐 때문에 너 따위에게 세배를 했는 데!" "……." 안 주면 맞겠군. 난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냈다. "난 어른이니까 최소 10만원은 주겠지?" "맞아. 최소 10만원은 줘야 해!" "……." 난 떨리는 손으로 라이레얼에게는 10만원, 카르에게는 5만원을 주었다. "왜 난 5만원 밖에 안 줘?" "넌 아까 절을 성의 없게 했잖아." "뭐? 내가 언제 그랬어?" "마지못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던데. 그리고 라이레얼이 니 보호 자잖아. 보호자랑 피보호자한테 같은 세뱃돈을 주면 형평성에 어 긋나지." "뭐? 인간 주제에 감히 나한테 그따위로……" "됐어, 카르. 그만해." "하, 하지만 언니……." "괜찮으니까 그만해." 라이레얼이 세게 끌어안으며 말하자 카르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카르의 손에 들린 5만원은 라이레얼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열심히 연습해서 구정 때 더 많이 받으면 돼. 나는 최 소 20만원, 카르 너는 최소 10만원을 목표로 오늘부터 절하는 연습 하자." "네, 언니." "……." 대놓고 구정 때 30만원을 세뱃돈으로 달라고 말하는 라이레얼. 나는 할말을 잃었다. 라이레얼과 카르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이번에는 어린 엘프 들이 달려들었다. "우리도 세뱃돈 주세요오~!" 난 하는 수 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옜다. 먹고 떨어져라." "이게 뭐예요?" "뭐냐니? 세뱃돈이지." 아이들의 손에는 반짝이는 100원짜리 동전 하나씩이 놓여 있었다. "너무 적어요." "맞아요." "100원도 돈이에요?" "……." 요즘 애들이 통이 많이 커졌군. 나 어렸을 때는 100원짜리 하나 에도 벌벌 떨었는데. "세뱃돈을 100원씩이나 줬으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래?" "그치만 라이레얼 언니는 10만원이나 줬잖아요." "라이레얼은 어른이고, 니들은(또 오타. 책에는 '인'이라고 나옴.) 애잖아." "라이는 700살도 넘었단 말이에요." "루비는 60살 넘었어요." "저도 라이레얼 누나보다 나이 많아요." "……나이로 따졌으면 카르한테는 집문서 줬어. 니들의 정신연 령을 생각해 봐. 나이만 많으면 다야? 니들이 그렇게 나이가 많으 면 나한테 말 까던가." "형씨, 좋은 말로 할 때 세뱃돈 제대로 주시지." 쾅! "까란다고 진짜 까냐? 이 자식이 해보자는 거야, 뭐야?" 루는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말했다. "아무튼 좀더 줘요. 너무 적단 말이에요." "에휴~ 한 살이라도 정신연령 높은 내가 양보해야지." 난 500원짜리 동전을 아이들의 손에 하나씩 올려주었다. "이제 됐지?" "되긴 뭐가 돼요?" "이것도 부족하단 말이야? 600원씩이나 줬는데?" "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난 어이 없어하며 물었다. "대체 얼마를 원하는 거야?" "최소 1만원이요." 쾅! "왜 저만 때려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리지. 니가 그런 소리를 하고도 안 맞길 바라는 거니?" "아까 방에 있을 때 라이랑 루비도 최소 1만원은 받고 싶다고 말 했어요. 그러니까 라이랑 루비도 때려주세요." 콰앙! "고자질은 더 나쁜 거다. 그렇게 고자질이 하고 싶으면 간첩신고 나 해라." 아무튼 요즘 애들 무서우리만치 통이 크군. 세뱃돈으로 1만원을 달라고 하다니. 그것도 구정도 아닌 신정에. 돈이 땅 파면 나오는 줄 아나? "흐음, 이 오빠가 너희들의(오타.'이'라고 나와있음) 의견을 적극 반영해서 특별히 1천 원 짜리 지폐 한 장씩을 더 주기로 하마. 이제 됐지?" 루비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1600원 가지고 뭘 하라는 거예요? 떡볶이 한번 먹으면 끝나잖 아요." "으음, 하긴 요즘 물가가 비싸긴 하지." 나 어렸을 때는 500원이면 떡볶이 배 터지게 먹었다. 그런데 이 젠 1500원 내도 쥐꼬리만큼 밖에 안 주더라. "라이가 오빠 사랑하는 거 오빠도 잘 알죠?" "루비도 오빠 막막 사랑해요." 쪽! 쪽! 내 양쪽 볼에 뽀뽀를 하는 라이와 루비. 후후~ 귀여운 것들, 어 쩜 이렇게 애교가 철철 넘칠까? 기분이 좋아진 나는 지갑에서 1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라이와 루비의 손에 올려 주었다. "와아! 고마워요, 오빠." "사랑해요, 오빠." 쪽! 쪽! 다시 내 볼에 뽀뽀를 하는 라이와 루비. 이내 돈을 주머니에 넣고 루시아의 방으로 후다닥 달려간다. "이번에는 루시아 언니한테 세배해야지." "……" 아주 골고루 뜯는군. "저는 입술에 뽀뽀해 드릴 테니까 2만원 주세요." "……죽고 싶냐?" 감히 나의 순결한 입술을 노리다니! 그것도 남자 주에에! 어쨌든 형평성을 고려해야하니 나는 루에게 라이와 루비와 마찬 가지로 1만원을 주었다. "헤헤~ 고마워요, 형." 웃으며 루시아의 방으로 뛰어가는 루. 난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설날이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변질됐는지 모르겠군. 내가 우리나라 설날 문화에 대해 회의적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 루시아가 방에서 걸어 나왔다. 난 루시아에게 물었다. "얼마 뜯겼어?" "한 명 당 2만원씩." "그렇게나 많이?" "애들이 볼에 뽀뽀를 하며 애교를 부리는데 어쩌라는 거야? 나도 안 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으음, 그건 그렇지. 애들 애교가 나날이 강력해져가는 느낌이야." "애들한테 돈을 그렇게 많이 주면 안 되는데." 루시아는 애들한테 돈을 많이 준 것이 걱정되는지 한숨을 내쉬었 다. 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단 준 돈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앞으로가 문제야." "응? 무슨 말이야?" "다음달이면 구정이란 말이지. 우리나라는 음력과 양력으로 설 을 두 번 세잖아." "그럼 구정 때 또 세뱃돈 줘야하는 거야?" "물론이지. 사실 진짜 설은 구정이라 할 수 있지. 우리나라는 전 통적으로 음력을 따랐으니까 양력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며 유입 된 거고. 참고로 음력이 양력보다 훨씬 정확하지. 음력은 달의 변 화를 기준으로 맞춘 역법이고, 양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맞춘 역법이니까. 뭐, 복잡한 얘기를 다 떠나서 결론만 말하자면 다 음달에 있을 구정 때는 더 많은 돈을 뜯길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이제부터 그 작전을 짜야지. 구정 때 둘이서 여행이라도 떠날까?" "뭐?" "농담이야. 좋은 방법이 있는지 같이 생각해 보자." 나와 루시아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나질 않았 다. 루시아는 약간의 짜증을 섞어 말했다. "이 나라는 왜 설을 두 번이나 쇠는 거야?" "……." 나도 그게 궁금하다. 신정 휴일은 없애자고 국가에 건의해볼까? 휴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깝지만 세뱃돈을 절약할 수 있으니. "아! 깜빡 잊고 말을 안 했는데." "응? 뭔데?"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그러자 루시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Happy New Year~! 아이리스 2부 4권 Story 12 히로의 찜질방 답사기 어디서 놀았는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아이들.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잘만 논다. 역시 아이들이라는 건가? 하긴 나도 쟤들 만할 때는 날아다녔지. 그때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업었는데. 난 그 옛날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새 옷 입혀 놨더니 어디서 뭘 하고 논 거야? 완전히 흙투성이가 됐잖아." 루시아는 애들의 모습을 보고 화를 냈다. 어린 엘프들은 최대한 귀엽게 웃어 보였다. "헤헤~." "앞으로는 옷 깨끗하게 입어야 돼. 알았지?" "네에~!" 아이들의 웃음 한방에 무너지는 루시아. 아아~ 저러면 안 되는 데. 부모라면 모름지기 혼낼 때는 과감하게 혼낼 줄도 알아야 하는데 데. 루시아는 아이들에게 너무 오냐오냐 한다니까. 앞으로는 나도 루시아가 화내면 귀엽게 웃어볼까? "……." 으음, 그러다가 뺨 맞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여기 더러워진 것 좀 봐. 머리카락에도 흙이 묻었네. 너희들 목 욕 한번 해야겠다." 목욕이란 말에 아이들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라이는 목욕하는 거 싫어요." "루비도 싫어요." "저는 그냥 세수만 할 게요." "누굴 닮아서 그렇게 목욕하는 걸 싫어하는 거야? 목욕은 매일 해야 하는 거야." 누굴 닮아서 목욕을 싫어하긴. 날 닮아서 싫어하는 거겠지. 그나 저나 목욕은 매일 하는 것이 아니라 명절 때만 하는 거 아니었나? 난 구정이랑 추석 때 아니면 목욕 안 하는데. "언니랑 같이 목욕하자. 언니가 씻겨줄게." "……." 뭐라? 루시아랑 같이 목욕을? 라이랑 루비는 별로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루시아의 손길에 이끌려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루도 라이랑 루비의 뒤를 따랐다. "……." 뭐라? 루도? 난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려는 루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왜 그래요, 형?" "니가 저기 왜 들어가?" "목욕하러 들어가죠." "……." 남자 자식이 루시아와 같이 목욕을 하려 하다니! 비록 아이라 해 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내가 경고하는데, 니가 만약 저 욕실 안으로 들어간다면 기필코 네놈의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마!" "아,알았어요. 안들어가면 되잖아요." 루는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욕실 안에서 물 트는 소리 가 났다. 루시아는 벗어 놓은 아이들의 옷을 들고 나왔다. "이거 빨아주세요, 형부." "예. 맡겨주세요." 아이들의 옷을 인에게 맡긴 루시아는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옷 과 아이들의 잠옷을 꺼내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기 는 욕실 문. 욕실 문 너머로 아이들과 루시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욕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라도 루시아와 함께 목욕하는 것은 즐거운 가 보다. "꺄르르~!" "꺄하하~!" 이런 행복한 웃음소리라니! 대체 저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아아~ 나도 루 시아와 함께 목욕하고파~. 난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하지만 자꾸 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의 눈은 텔레비전을 향 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모든 감각은 욕실 쪽에 집중되었다. 물 튀기는 소리, 씻는 소리, 루시아의 목소리 등등.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는 건 신사 답지 못한데.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신경을 끌 수 없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겠지? * * * * 수건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루시아는 물이 차 있는 욕조 안에 들 어가 앉았다. 루시아의 왼쪽에는 라이가, 오른쪽에는 루비가 들어 가 앉았다. 좁은 욕조였기에 셋이 앉자 꽉찼다. 루시아는 양손으 로 라이와 루비를 살짝 끌어안았다. 뜨거운 물에 들어앉으니 온몸의 피로가 풀리며 노곤한 기분이 들 었다. 루시아는 잠시 눈을 감고 그 기분을 즐겼다. 하지만 아이들 은 그런 루시아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받아라!" "에잇! 에잇!"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노는 라이와 루비. 그 바람에 가운데 있는 루시아의 얼굴은 흠뻑 젖었다. "그만 두지 못해?" 루시아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그렇게 말하자 라이와 루비는 루 시아에게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꺄르르~." "꺄하하~." "너희들 정말!" "꺄아! 무서워요, 언니." "때리지 마세요오." "하아~ 알았으니까 앉아. 몸을 담그고 있어야 씻지." "네에~!" 라이와 루비는 다시 루시아의 양옆에 앉았다. 하지만 아이들 성 격상 가만히 있기가 힘든지 계속해서 몸을 꼼지락거렸다.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이 머리카 락은 허리까지, 루비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온다. 둘 다 어린아이 치 고는 머리가 긴 편이었다. 특히나 라이의 경우는 웬만한 성인보다도 길었다. 이렇게 머리 카락이 길면 목욕할 때 상당히 불편하다. 물에 젖으면 엉키고, 무게 도 무거워지니까. 라이는 머리 수건이 답답한지 계속해서 손을 가져다 댔다. 루시 아는 그런 라이를 말리며 말했다. "머리 수건은 절대 풀면 안 돼. 머리는 언니가 이따 감겨 줄게." "우웅~." 루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목욕을 하는 것 은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 자신이 벌써 엄마가 되어, 딸과 함께 목욕을 하다니.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이 아이들과 함께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약 15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루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러자 라이와 루비도 따라 일어섰다. 라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루시아의 몸은 한 마디로 예술이었다. 175센티미터나 되는 큰 키 에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온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몸 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길게 뻗은 다리와 연 약해 보이는 가는 목, 그리고 수건 사이로 삐져나온 백금발 머리카 락 등등. 그녀는 미의 여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다웠다. 루시아는 라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이상한 기분이 들 었다. "왜 그러니?" 루시아가 묻자 라이는 손가락을 들어 루시아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커요." "……." 라이의 행동에 당황하며 얼굴만 붉히는 루시아. 그때 들려오는 루비의 목소리. "우와! 언니 가슴 되게 크다." 더욱 더 붉어지는 루시아의 얼굴. "아! 언니 얼굴 빨개졌다." "진짜 되게 빨갛다. 홍당무 같아." "두,둘 다 조용히 하지 못해!" 참지 못한 루시아는 버럭 소리를 질렀따. 하지만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의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루비도 크면 언니처럼 될까?" "언니만큼은 무리일 걸." "남자들은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맞아. 오빠도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해." "그래서 오빠가 언니를 좋아하는 거야?" "그럴지도." "……." 뚫어져라 쳐다보는 라이와 루비의 시선에 루시아는 두손으로 가 슴을 가렸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어린애들이 못하는 말이 없어! 너희들 그런 말버릇은 어디서 배 운 거야?" 어디서 배우긴. 뻔하지 않은가? 히로랑 같이 있다보니 자연스레 습듯한 것이다. 물론 라이레얼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로 와서 서."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앞에 세워두고 비누거품을 내서 아이들 몸을 씻겨주었다. "꺄하~ 간지러워요, 언니." "아앙~ 싫어요오." "둘 다 가만히 있어. 깨끗하게 씻어야 한단 말이야." 몸을 다 씻기자, 이번에는 머리를 감겨줄 차례였다. 루비는 쉽게 감겨주었지만, 라이는 머리카락이 길어서 조금 힘들었다. 물에 젖 은 머리카락은 무거워지기 때문에 잘못하면 목에 무리가 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라이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루시아의 손길은 조 심스러웠다. '애들 머리가 길다보니까 샴푸가 금방 떨어지네' 루시아는 커다란 수건으로 라이와 루비의 몸을 닦아주고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 주었따. "헤헤~." "꺄하~." 아이들은 그 느낌이 이상한지 자지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따. 루 시아는 아이들의 몸을 다시 한번 꼼꼼히 닦아 주었다. 루시아는 방금 목욕을 끝마친 아이들의 모습에 탄성을 내뱉었 다. 둘 다 그야말로 극강의 귀여움을 자랑하는 모습이었따. 새하얀 피부 위에 묻어있는 물방울, 물기에 젖어있는 회색 머리카락과 붉 은색 머리카락. "아아!"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라이와 루비를 와락 끌어안았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 너무 귀여워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아.'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의 볼에 마구 비볐다. "그만해요, 언니." "아파요오." 아이들이 바둥거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루시아는 아이들 을 놔주었다. "그럼 이제 언니 씻어야 하니까 나가렴." "아니에요, 언니. 라이는 언니랑 같이 있을래요." "루비도요. 언니랑 같이 나갈래요." 그 말에 루시아는 감동 받았다. '라이와 루비가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참고로 라이와 루비는 단지 물장난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루시 아가 몸을 씻는 동안 아이들은 욕조 안에서 서로에게 물을 튀기며 놀았따. 하지만 그것도 싫증이 났는지 이내 욕탕 안에 쪼그려 앉 았다. 그동안 루시아는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은 다음 몸에 물을 끼얹었다. "언니 등 좀 닦아줄래?" 루시아의 부탁에 라이와 루비는 욕조에서 나와 비누 거품이 묻은 수건으로 루시아의 등을 박박 밀었다. 그리고 다시 욕조 안으로 들 어가는 아이들. 루시아는 몸을 씻는 내내 이상한 시선을 느껴야 했다. 그 시선의 정체는 다름 아닌 라이와 루비였다. 라이와 루비가 욕조 밖으로 고 개만 빠끔히 내민 채 자신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왜 그래?" 루시아가 수건으로 가슴을 가리며 물었다. 그러자 라이가 대답 했다. "커서요." 루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되게 커요. 우리 할머니보다 더 커요." 루비의 할머니라면 루엔이다. 엘프 중에는 원래 글래머가 드물 다. 라이레얼이 글래머인 이유도 반은 인가의 피가 섞여있기 때문 이리라. "너희들 정말!" 화를 내려 해도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화를 내기가 쉽지 않다. 루시아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몸을 마저 씻고 머리를 감았 다. 아이들이 욕조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다시 씻어주고, 다시 몸을 닦아 줘야 했다. 물기가 어느 정도 마르자 루시아는 속옷을 입고 그 위에 두꺼운 겨울용 파자마를 입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입혀 주었 다. 세트로 맞춘 파자마를 입자 셋은 마치 자매처럼 보였다. "나가자." "네에~ !" * * * * 루시아가 라이와 루비를 데리고 들어간 지도 1시간 가까이 되었 다. 나의 가장 큰 의문은 여자들끼리 목욕하러 들어가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는 것이다. 아마 이런 의문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남 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남자가 목욕하러 들어가면 수염까지 깎아도 20분이면 게임 끝이 다. 그런데 여자들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대체 안에서 뭘 하기에 ? 궁금~ 궁금~ . 이런 궁금증은 루시아랑 함께 목욕하러 들어가면 한번에 해소되 겠지? 헉! 루시아와 함께 목욕이라니!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제멋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시 아의 알몸이라던가……. 헉! 내가 무슨 생각을! 사랑하는 여자의 알몸을 상상하다니! 히로 야~ 히로야~ 어찌하여 그런 추잡한 상상을 하느냐? 네 마음속에 있는 욕정을 떨쳐내거라! 난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을 어찌하란 말인가? 아아~ 눈앞이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루시아를 사랑하고 있어! 이런 추잡한 상상은 그녀를 모욕하는 짓이야! 나는 그렇게 자신을 다스렸다. 그래. 나는 오늘 나를 넘어선다. 그 순간, 욕실의 문이 열리며 루시아가 라이와 루비를 데리고 나 왔다. "헉!" 나는 너무 놀라 숨이 멎을 뻔 했다. 촉촉이 젖어있는 백금색 머리 카락, 아기 피부처럼 새하얗고 뽀송뽀송한 피부. 눈동자와 입술은 아직도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루시아는 수건으로 머리를 탁탁 털었다. 그 몸동작이 묘하게 매 혹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나의 영혼이 마치 그녀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를 현실로 되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아~!" 나를 향해 뛰어오는 라이와 루비. 루시아와 마찬가지로 파자마 를 입은 아이들은 방금 목욕을 끝마쳤기 때문인지 뽀송뽀송한 모 습이었다. 그리고 물기에 젖어 반짝이는 머리카락. 헉! 얘들은 왜 이렇게 귀여워? 안 그래도 극강의 귀여움을 자랑하 는 애들이 거기서 더 귀여워지면 어쩌자는 거야? 이러다가 정말로 심장마비로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다. 난 내 앞에 선 아이들을 살짝 안아 주었다. "와아! 뉴스 한다. 우리 뉴스 봐요, 오빠." 시사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라이는 내 무릎 위에 앉아 시선을 텔 레비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루비는 내 옆에 앉았다. 난 라이의 허 리를 끌어안고 보듬어 주었다. 아아~ 이 뽀송뽀송한 피부의 감촉! 목욕을 한 뒤여서 그런지 오늘따라 감촉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건 만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 "하암~." 라이는 하품을 했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졸리면 가서 자렴." "아니에요, 오빠. 라이는 뉴스 다 보고 잘 거예요." 목욕을 한 뒤여서 졸린 걸까? 그러고 보니 얘들은 방금 목욕을 했다. 그것도 루시아와 함께. 그 렇다면 루시아와 같은 욕조에 들어가 있었겠지? 라이와 루비의 몸에서 루시아의 향기가 나는 듯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목욕은 옷을 벗고 하는 거다. 옷을 입고하면 옷 이 젖으니까. 그럼 루시아 역시 옷을 벗었겠지? "……." 헉! 기혈이 들끓는다!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걸릴지도 몰라! 난 재빨리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 박 동이 빨라지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래요, 오빠?" "오빠, 이상해요." "……." 그래. 이 오빠가 루시아 생각만 하면 좀 이상해진단다. 나는 뉴스를 시청 중인 라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라이야……." "예?" "루시아 언니가 우리 라이를 씻어줬잖아. 그치?" "예." "그리고 루시아 언니도 목욕을 했잖아. 그치?" "예." "혹시 목욕을 하는 루시아 언니를 보고 뭐 느낀 점 같은 거 업니?" "예? 느낀 점이요?" "아, 아니…… 그러니까 이 오빠가 특별히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데…… 그냥 좀 궁금해서. 일종의 지적 호기심이라 고나 할까?" "으음, 목욜을 하는 루시아 언니를 보고 느낀 점이라면……." 손가락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기는 라이. 이내 생각이 났는지 손가락을 빼고 입을 열었다. "가슴이 커요." "……." 헉! 뭐라고? "맞아요! 루시아 언니 가슴 되게 커요." 옆에 있던 루비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침을 꿀꺽 삼 키며 물었따. "크, 크다니? 얼마나?" "으음, 아무튼 커요." "우리 할머니보다 더 커요." "……." 루엔보다도? 루엔은 엘프답게 미끈하고 늘씬한 몸매를 지녔다. 가슴은 크지 도 않고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루 시아 가슴이 루엔보다 더 크다고? 그렇다면 루시아는 글래머? 루시아의 키는 175센티미터. 여자중에서는 큰 편이다. 옛날에는 내가 루시아 보다 작았따. 내가 루시아를 만났을 때 내 키는 170센 티미터 정도였으니. 그래도 지금은 많이 자라 내가 루시아보다 조 금 더 크다. 한 2센티미터 정도? 아무튼 루시아는 큰 키에 걸맞은 몸매를 지녔기에, 그렇게 커 보 인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루시아는 꽉 끼는 옷을 입은 적이 거의 없었다. 활동 성을 고려하여 주로 편한 옷을 즐겨 입었지. 그래서 루시아의 몸매 를 상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애들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루시아 가슴이 좀 큰 것 같기도 하다. "루시아 언니 몸 되게 예뻐요. 피부도 깨끗하고, 허리도 날씬하고." "맞아요. 막막 예뻐요. 루비는 크면 루시아 언니처럼 되고 싶어 요. 가슴도 루시아 언니처럼 커졌으면 좋겠어요." "조, 좀 더 자세히 말해주렴." "으음, 그러니까 루시아 언니는 다리가 길어요. 다리가 쭉 뻗어 있는데 되게 예뻐요. 그리고 엉덩이는……." 난 숨을 죽인 채 아이들의 얘기를 경청했다. 피는 점점 끓어올라 이제는 귀에서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래서 막막 예뻤어요. 진짜진짜 예뻤어요." 얘기를 다 들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라이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도 루시아와 같이 목욕 할 수 있었을 텐데. 오늘따라 라이가 막막 부러워 보인다. 아아~ 루시아~ .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는 그대여. 그대는 어째서 나를 이렇게 힘 들게 하시나요? 그때 루시아가 거실로 나왔따. "라이야, 루비야.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야지." 루비는 어느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루시아는 루비를 번쩍 안아 들었다. 라이는 하품을 하며 내 무릎에 서 내려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오빠." "그래. 라이도 잘 자렴."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난 그 뒷모습 을 지켜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루시아와 목욕도 같이하고, 잠도 같이 자다니. 쟤들은 정말 좋겠 다. 다음 세상에서는 라이나 루비로 태어나고파~ . * * * * "제발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이번 한번만 저희 회사 제품을 받 아주십시오." "으음, 그렇게 말씀하셔도." "박 사장님 .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음." 여기서 '박 사장님' 이란 나를 지칭하는 대명사다. 그럼 나를 박 사장님이라 칭하는 이 사람은 누군가? 검은색 양복을 갖춰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이 사람은 세일 즈맨. 인형 제조 업체 마케팅 부서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우리 가게 에 인형을 납품하기 위해 이렇게 나를 붙잡고 사정하는 중이다. 우리 가게가 이 불경기 속에서도 잘 나가다 보니 이런 세일즈맨 들이 자주 찾아온다. 인형 한개라도 더 밀어 넣기 위해서. "죄송합니다만, 현재 가게가 포화 상태인지라 더 이상의 물건을 받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한번만 더 고려해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제가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세일즈 맨은 그렇게 말하며 봉투 하나를 슬며시 건넸다. 난 그 봉 투를 보며 물었다. "이게 뭔가요?" "작은 성의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다? 후후~." "……." 작은 성의? 좋은 게 좋은 거?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명백한 뇌물이다. 겨우 인형 가 게에 인형 납품하는 데도 이런 식으로 금품이 오가다니! 우리나라 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런 짓은 대다수 정치인들과 일부 기업인들 만이 하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세일즈맨까지 이런 짓을 한단 말 인가? 이래서야 선진 한국으로 나아갈 수 있겠어? 난 화를 내려다가 참았다. 그래도 상대는 내 삼촌뻘이다. 내가 비록 사장이긴 하지만 연장자에게 큰소리치는 것은 옳지 못한 일 이다. 으음, 그런데 여기 얼마가 들어있는 거지? 갑자기 마구마구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봉투를 받으면 안을 들 여다보고 싶은 것은 사람 심리 아니겠는가? 난 슬며시 봉투를 들춰보았다. "어라? 이건 뭡니까?" 봉투에는 빳빳한 만 원짜리도, 새하얀 수표도 없었다. 대신 이상 한 종이 쪼가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 이번에 저 길 건너편에 생긴 찜질방 무료이용쿠폰입니다. 아시죠? <25시 찜질타운> 이라고." "25시 찜질타운이요?" "예. 한 일주일 전쯤 개장했습니다. 아직 안 가보셨나요?" "예. 뭐……." "그럼 꼭 한번 가보십시오. 강북 최고의 찜질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목욕탕, 사우나, 찜질방, 헬스장 등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습니다. 너무 일만 하시지 마시고 한번쯤 그곳에 가셔서 쌓인 피 로를 푸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아! 혹시 애인이 있으시다면 데이 트 장소로도 그만입니다." "데이트요?" "예. 요즘 젊은 남녀들은 찜질방에서 미팅을 하기도 한다더군 요." "……." 데이트란 말에 나의 마음이 심하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찜질방 이라……. 그러고 보면 일하느라 바빠 찜질방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텔레비전에서 많이 봐서 어떤 장소인지는 대충 알지만. 뭐, 이름 그대로 찜질을 하는 곳이지.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방 이 많은 걸까? 노래방, PC방, 플스방 , 비디오방, DVD방, 찜질방 등등. 으음, 이것도 의문이군. 아무튼 찜질방이라니. 한번 가보고 싶다. 물론 루시아와 함께. 결국 나는 찜질방 무료이용쿠폰 한 장에 넘어가고 말았다. 다음 달부터 일정량의 제품을 들이기로 약속한 것이다. 뭐, 대금 결제는 후불로 하기로 했으니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찜질방 무료이용쿠폰 한 장에 넘어갔다는 것은 나 자신에 게 참으로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아~ 그래. 나는 그런 인간이었어. 뇌물에 꼼짝 못하는. 나는 벽에 기대어 잠시 반성했다. 1초, 2초, 3초…… 반성 끝. 후후~ 그럼 이제 루시아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것만 남았군. 나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카운터에는 지니가 서 있었다. "루시아 어디에 있나요?" "인디님과 함께 잠깐 장보러 나가셨습니다." 둘이서 장을 보러 나가? 어째서 루시아와 함께 장을 보러 나간 거 지? 일루니아 여사님도 있는데 말이야. 혹시 인디 이 자식 루시아 에게 흑심이 있는 거 아냐? 루시아가 남자와 같이 있다고 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나. 이것도 병이 아닌가 싶다. 설마 나 의처증? 아무튼 나는 카운터에 앉아 루시아를 기다렸다. 무슨 말로 데이트를 신청을 하는 것이 좋을까? 으음, 이런 건 역시 전문가한테 상담하는 것이 좋겠지? 난 내 옆에 서 있는 전문가를 보았다. 참고로 전문가란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다. 이 인간은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지만, 연애 분야에 있어서는 특히 닳고 닳은 전문가라 할 수 있겠다.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25시 찜질타운 무료이용쿠폰이군요. 그곳에서 루시아 공주님과 데이트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 무서운 자식. 말도 꺼내기 전에 다 알아채는군. "여기 아시나요?" "제가 그곳 사장 여동생 되시는 분과 요즘 교제하는 중입니다." "……." 아아~ 또 나왔따. 요즘 교제 중인 여성. 요즘 교제 안 하는 여성 이 누군지 궁금해지는군. "저도 한 번 가봤는데 정말 좋더군요. 마침 내일 가게 쉬는 날 이니 루시아 공주님과 한번 다녀오시지요." "루시아가 좋아할까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같이 가자고 권유하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니 염려 놓으십시오." "으음, 그렇겠죠?" 그때 마침 문이 열리며 루시아와 인디가 들어왔따. 루시아는 커 다란 장바구니를 낑낑대며 옮겼다. "헉!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그런 무거운 짐을! 이리 줘, 루시아." 나는 재빨리 달려 나가 짐을 받았다. 루시아는 힘이 드는지 짐을 나에게 넘겨주고는 허리를 폈다. 나는 짐을 카운터 한쪽에 잘 놓아 두고는 인디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 루시아에게 이런 무거운 짐을 들게 하다니! 니가 그러 고도 남자냐?"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지니가 나서서 나를 말렸지만, 나는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루시아가 아닌 일루니아 여사님이었어도 이렇게 무거운 짐을 들게 했을 거야? 응? 말해봐, 이 자식아!" "흑흑,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는 인디. 루시아는 그런 인디 를 살짝 껴안아 다독여 주었다. "너 형부한테 왜 그래? 형부가 다 든다고 하는 걸 내가 억지로 뺏 어 든 거란 말이야. 형부가 들고 온 짐 안 보여?" 루시아의 말대로 인디의 옆에는 루시아의 배는 될 것 같은 짐이 있었다. 뭔 장을 저렇게 요란하게 본다냐? 진짜 볼 장 다 봤나 보군. 하긴, 식구가 많은데다가 아이들이 워낙 잘 먹다보니 사올 게 많 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시아의 가녀린 손에 무 거운 짐을 들게 한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루시아는 저 자식을 감싸는 거지? 어째서 저 자식 편을 드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심. 대체 둘이 장 보러 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정말로 장을 보러 간 걸까? 장을 보러 간다 는 핑계로 다른 걸 하러 간 것은 아닐까? 그래. 생각해보면 인디 저 자식 뭔가 수상쩍었어. 분명 소심한 행 동도 나의 이목을 가리기 위한 속임수였을 거야. 남자란 전부 늑대. 일루니아 여사님한테 질려서 루시아를 노리 는 건가? 하긴, 일루니아 여사님같이 노땅에 노처녀 히스테리까지 있는 여자한테 어떤 남자가 질리지 않겠어. 그렇다고 처제나 다름없는 루시아를 노리다니. 역시 저 자식은 사악한 블랙 드래곤이었단 말인가? 어째 뭔가 스토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옛날 옛날 아주 옛날에 사악한 블랙 드래곤 한 마리가 살았습니 다. 사악한 블랙 드래곤은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님이 예쁘다는 것 을 알고, 공주를 납치하였습니다. 왕국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전 설의 용사가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사연을 들은 전설의 용사는 공 주님을 구하기 위해 사악한 블랙 드래곤의 렝로 찾아갔습니다. 처절한 전투 끝에 전설의 용사는 사악한 블랙 드래곤을 쓰러트리 고 공주님을 구해냈습니다. 그 후, 전설의 용사와 공주님은 오래오 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사악한 블랙 드래곤 - 인디 공주님 - 루시아 전설의 용사 - 나 그래. 결국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이제 인디 이 자식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루시아를 구하는 것만 남았군. 그럼 루시아와 나는 오 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되겠지? "사악한 블랙 드래곤아!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의 칼을 받아 라!" 퍼억! "내 남편한테 무슨 짓이야, 이 뺀질아!" "……." 한가지 깜빡했군. 사악한 블랙 드래곤 뒤에는 드래곤을 조종하는 무시무시한 마녀 가 있었습니다. 전설의 용사는 결국 무시무시한 마녀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공주님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려는 전설의 용 사의 계획은 물 건너갔답니다. 무시무시한 마녀 - 일루니아 여사님 으음, 일루니아 여사님의 존재를 깜박하다니. 인디가 비록 드래곤이지만 중간 보스에 불과한 존재다. 진자 보 스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이다. 참고로 지금 내가 일루니아 여사님과 싸우기에는 레벨이 조금 부 족하다. 젠장, 레벨 노가다 한번 하던지 해야지. "흑흑~ 무서웠어요, 일루니아님." 눈물을 뿌리며 일루니아 여사님의 품에 안기는 인디. 루시아는 벌떡 일어나 나에게 소리쳤다. "넌 왜 자꾸 형부를 못 살게 굴어!" "아, 아니…… 저놈이 자꾸 너한테 찝쩍거리니깐……." "찍쩝거리긴 누가 찝쩍거렸다 그래? 너나 잘해!" "……." 난 언제나 잘하고 있는데. 그런데 어째서 무슨 일만 생기면 나만 나쁜 놈이 되는 거지?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전설의 용사에게는 수많은 시련이 있는 법입니다. 주위 사람들 의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으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래. 전설의 용사인 내가 이 정도의 시련에 굴할 수는 없지. 나는 계획대로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해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루시아는 싸늘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아! 별 일은 아니고…… 어쩌다보니 쿠폰이 생겼는데…… 같이 갈래?" 난 찜질방 무료이용쿠폰을 내밀었따. 루시아는 그것을 받아들 었다. "아! 찜질방 무료이용쿠폰이네! 나 찜질방에 꼭 한번 가보고 싶 었는데." "정말?" "응. 텔레비전에 찜질방 자주 나오잖아. 그래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 "진짜?" 느낌이 정말 좋다. 찜질방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니! 데이트 신 청은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간만에 루시아와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게 되겠군. 방해되는 것 들(특히 어린엘프들)은 다 떼어놓고 말이야. "5인까지 무료입장이네. 잘 됐다. 우리 둘이 아이들 데리고 가면 인원이 딱 맞네." "……응?" "내일 가게 쉬니깐 내일 가자. 아이들한테는 내가 말할게." "저, 저기…… 그러니까 지그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고? 라이랑 루랑 루비를?"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넌 아이들을 떼놓고 갈 생각이었어?" "아, 아니. 그럴 리가! 아이들 데려가야지. 아이들을 떼놓고 내가 어딜 가겠어? 그래서 일부러 5인까지 무료입장 하는 쿠폰으로 구해 온 거야. 하하." "그렇지? 빨리 아이들한테 말해줘야겠다." 나는 루시아의 뒷모습을 보여 벽을 박박 긁었다.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려던 계획이 어째서 이렇게 변질된 거지? 애 딸려있으면 데이트도 즐기지 말라는 거야, 뭐야? 생각해보면 나와 루시아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은 전부 아이 들 때문이다. 으윽, 내가 어째서 아이들에게 질투심을 느껴야 하 는거냐? 이렇게 된 이상 아이들이 찜질방에 가고 싶어 하지 않기를 바라 는 수밖에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아이들이 조르르 달려왔다. "언니가 내일 찜질방 간대요!" "루비 막막 가고 싶어요." "저도 가고 싶어요, 형." "……." 니들이 싫어하는 것은 대체 뭐니? * * * * 다음날. 나는 루시아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찜질방으로 향했다. 결국 은 이렇게 혹을 줄줄이 달고 가게 되는군. 하아~ 언제쯤에나 루시아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한숨이 푹푹 나오는 나와는 반대ㅔ로 루시아와 아이들은 정말 즐거 워 보였다. "헤헤~." 방긋방긋 웃는 라이와 루비. 오늘따라 저 웃음이 비웃음으로 보 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겠지? 찜질방은 우리 가게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25 시 찜질타운은 백화점 건물 7층과 8층을 뚫어 만든 곳으로 얼마 전 문을 열었다. 25시 찜질 타운이라는 이름답게 24시간 영업을 하고 있다. 찜질방은 목욕탕을 포함하고 있으며, 목욕을 한 뒤에 찜질에 임 하는 것이 순서다. 그리고 찜질을 한 뒤에 다시 몸을 씻는다. 찜질 을 하면 땀으로 범벅이 되니까. 그렇기 때문에 루시아의 손에는 목욕 가방까지 들려있었다. 그 러고 보면 여자들은 목욕하러 갈 때 참 준비할 것이 많다. 수건, 샴 푸, 빗 등등. 반면 남자들은 거의가 빈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대다수 목욕탕의 특징 중 하나는 남탕에는 수건 이 배치되어 있지만, 여탕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여탕의 수건 분실율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여자 손님들이 수건 을 몰래몰래 집으로 가져간다. 한때 이것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왜 남탕에는 수건이 있는 데 여탕에는 업냐고 여자 손님들이 항의를 한 것이다. 이건 명백한 남녀차별이라고. 그래서 실험을 했다. 결과는 남탕 수건 분실율에 비해 여탕 분실 율이 10배 이상 높았다. 목욕타에 CCTV를 설치해 놓을 수도 없으니, 아예 수건을 갖다 놓지 않는 수밖에. 그런데 그 수건을 집으로 가져간 사람은 어따 쓰려고 가져갔을 까? 집에 수건이 부족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찜질방에 도착했다. 나는 무료이용 쿠폰을 내밀었따. 카운터에 있는 여자 종업원은 우리에게 찜질복 을 내주었다. 찜질복은 반팔 상의에 반팔 하의로 되어 있었고, 남자 는 하늘색, 여자는 분홍색이었다. 다행이 이곳에서는 여자 손님에 게는 한 사람당 2개씩 수건을 지급해 주었다. "1시간 후에 만나자." "응. 루 잘 씻겨야 돼." "알았어. 걱정하지 마."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데리고 여탕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가 나에게 말했다. "저도 누나랑 같이 가고 싶은데요." "뭐? 루시아랑? 넌 남자잖아, 임마!" "유치원생이라고 하고 들어가면 안 될까요?" "……." 난 너무 어이가 없어 대답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쾅! "어린 자식이 벌써부터 잔머리 굴리기는. 잔말 말고 따라와." 난 루의 뒷덜미를 잡고 남탕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따. 으음, 여탕 이라……. 남자치고 여탕에 관심 한번 안 가져본 사람은 없을 것이 다. 그곳은 여전히 미지의 장소.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유치원생이라고 하고 여탕으로 가고 싶다. 음음, 내가 유치원생이었다면 루시아와 함께 목욕할 수도 있 었을 텐데. 아니, 내가 여자였다면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루시아 와 목욕할 수 있었을 텐데. 남자로 태어난 게 억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군. * * * *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와 함께 히로가 그렇게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여탕에 들어와 있었다. 루시아는 아이들의 옷을 벗겨 주었다. 추운 겨울인지라 아이들은 몇 겹이나 되는 옷을 껴입었고, 이것을 벗기 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옷을 다 벗기고 나자 이제 자신이 벗을 차례였다. 루시 아는 주위 시선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옷을 벗었다. 자이나레스 대 륙에서도 대중목욕탕 문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따. 그리고 루시아 는 공주였기에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한 적도 있었다. 언 니인 일루니아와는 자주 같이 목욕을 해왔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알몸을 보인다는 것은 왠지 꺼려졌다. 옷을 다 벗은 루시아는 머리를 올려 묶고, 집에서 들고 온 큰 수 건으로 몸을 가렸다. "들어가자, 얘들아." "네에~!" 평일 오전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4개의 온 탕과 2개의 냉탕에서 사람들은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루시아가 라이와 루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순간 탕 안 사 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엄청난 외국 미녀가 입이 쩍 벌어질 정 도로 귀엽고 깜찍한 외국 아이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데리고 등 장했으니,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수건으로 몸을 가리긴 했지만, 몸매마저 다 숨길 수는 없었다. 여 자들은 루시아의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몸매와 새하얀 살결을 부러 움과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루시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라이와 루비는 대 중목욕탕이 신기한 듯 우르르 달려갔다. "조심해, 얘들아.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아이들이 뛰어다니자 루시아는 걱정이 되서 그렇게 말했다. 루 시아는 탕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집어 넣었다. "뜨거워요, 언니." "루비는 찬물에서 놀고 싶어요." "목욕탕에 왔으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야지." "그치만……." "너희들 정말 언니 말 안 들을래?" 루시아가 화를 낼 기색을 보이자 라이와 루비는 어쩔 수 없이 탕 속에 몸을 담갔다. 그녀들이 몸을 담근 탕은 하노끼탕이었다. 일본 산 하노끼목은 특유의 향과 살균력이 있어서 모근의 활성화, 혈액 순환의 촉진 및 피부의 신진대사를 촉진시켜 주는 효과가 있습니 다…… 라고 탕 한쪽에 써져 있었다. 정말로 이런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뜨거운 물 속에 몸 을 담그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현상은 라이와 루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처음에 들어오기 싫어했던 아이들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하아~ 700년 동안 쌓인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 "루비도 60년 동안 쌓인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 마치 세상 다 산 듯한 노인 같은 말투. 실제로 두 아이는 그만큼 살긴 했다. 루시아는 그 말을 듣고는 살짝 웃을 지었다. 그리고 두 팔을 아 이들의 어깨 위에 올리고 살짝 끌어안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목욕 을 즐기는 듯했으나, 주위의 시선이 심히 거슬렸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는 거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몸을 탕 속에 담그고 있고, 탕 속의 물이 뿌 연 우윳빛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대놓고 쳐다보며 수군거리는데 부끄럽지 않을 리 없었다. "저 여자 좀 봐." "진짜 예쁘다." "어머! 백금발이야. 나 백금발은 처음 봐." "눈동자가 마치 에메랄드 같아." "입술도 예뻐. 키스하고 싶을 정도야." "치아도 가지런해." "저 피부 뽀얀 것 좀 봐. 비결이 뭘까?" "몸매는 또 어떻고." "키가 175는 되는 것 같아." "아까 보니까 가슴도 크던데. 모양도 좋고." "모델 같아." "어느 나라 사람일까?" "백인인 것 같은데. 유럽 사람인가?" "한국말도 잘하던데." "그럼 교포?" 루시아는 이대로 물 속으로 잠수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무엇보 다 걱정되는 것은 물 밖으로 어떻게 나가냐는 것이다. 라이와 루비 는 이런 루시아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안한 자세로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됐다 생각되자 루시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조심 스럽게 일어섰다. 그 순간, 파바박! 꽂히는 시선들. 루시아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씻겨 주었다. 루시아가 특별히 시선을 더 끌어서 그렇지, 라이와 루비에게도 엄청난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와 루비는 초절정 귀여움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 귀여운 것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 렇기에 라이와 루비를 보며 납치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정성껏 씻겨 주었다. 머리까지 감겨주 고 나자 아이들은 냉탕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바로 다이빙했다. 첨벙! 냉탕 안에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 아이들. 대중목욕탕에 가본 사 람들은 알겠지만, 애들이 이러고 놀면 상당히 짜증난다. 하지만 여 자들은 그저 귀엽다는 눈길로 라이와 루비를 바라볼 뿐, 별 다른 제 재를 가하지 않았다. 루시아는 아이들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씻기 시작했따. 루시아는 문득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내 가슴이 큰가?' 이제까지 그런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여자에 비한다면야…….' 루시아는 라이레얼을 떠올렸다. 라이레얼은 루시아가 보기에도 부러운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키도 자신보다 크고, 가슴도 자신보 다 크다. 게다가 얼굴도 더 예뻤다. 외모만 보고 따지자면 상대가 되질 않았다. 라이레얼은 이제까지 그녀가 봐온 여자들 중에서 가 장 아름다웠다. 역시 엘프의 피가 섞여있기 때문일까? 루시아는 왠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히로가 그 여자랑 잔 건가?' 하긴, 라이레얼 같은 여자가 유혹해 오는데 세상에 어떤 남자가 마다해겠는가? 그 점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더 이상 그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 다. 이미 지난 일을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그 일은 자신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걸 어쩌란 말이야? 그 여자랑은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나랑은 별 진전이 없는 걸.' 루시아는 자신의 손에 끼워진 커플링을 보았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았다. * * * * 나는 탕 안에 5분 정도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씻 기 시작했다. "등 좀 밀어라." 루는 내 등을 박박 밀었다. "좀 세게 밀어, 임마. 빡빡!" 등을 다 민 루는 나에게 말했다. "저도 밀어줘요, 형" "니가 알아서 해결하렴." "예?" "원래 자기 일은 스스로 해결하는 거란다." "예? 그럼 제가 방금 형 밀어드린 건 뭐예요?" "너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니?" "……." "대충 씻어. 원래 목욕은 대충하는 거야." "누나가 깨끗이 씻으라고 했단 말이에요." 루는 혼자서 열심히 씻기 시작했다. 나는 물을 틀어 바가지에 담 았다. "돌아보렴. 등 밀어 줄 테니." 루는 돌아앉았고, 나는 등을 밀어 주었다. 으음, 등판 한번 작군. 역시 어린애라는 건가? 20분 만에 목욕을 대충 끝마친 우리는 찜질복으로 갈아입고 중앙 공연장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하늘색 찜질복을 입은 남자들과 분 홍색 찜질복을 입은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여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나왔네요." "여자들은 원래 목욕하는 데 오래 걸리는 법이지." 할일이 없어진 우리는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녔다. 덕분에 나는 25시 찜질타운의 구조를 알게 되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천연의 요 새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일단 7층부터 살펴보자. 7층의 양쪽 끝에는 남탕과 여탕이 있다. 그리고 가운데 공연장이 있다. 공연장이라고 해봐야 앞에 무대가 있고, 나무 바닥으로 되어있는 정도다. 공연장 뒤쪽에는 동전을 넣 으면 작동하는 안마기가 있고, 그 뒤에는 잠을 잘 수 있는 토굴이 있다. 그리고 양쪽으로 간단한 음료를 사먹을 수 있는 매점이 2개 있고, 역시 양쪽으로 DVD를 상영해주는 영화관이 2개 있다. 그리 고 자수정방, 황토방, 산림욕방, 참숯방, 동굴방 이렇게 5개의 찜질 방이 있다. 8층은 중앙 공연장 위쪽이 훤히 뚫려있어서 7층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형태이다. 8층에는 헬스장, 분식집, PC방, 피자집, 음식점, 네 일 아트, 여성전용 불한증막, 경락 마사지실, 스포츠 마사지실, 수 면실, DVD상영관 2곳 등이 있다(합하면 4개가 되는군). 그리고 8층 은 옥상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 그곳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덤 으로 옥상에는 야외 호프집까지 있었다. "으음, 죽이는군." 난 감탄을 하고는 잠깐의 짬을 이용하여 담배를 한 개비 폈다. "추워요, 형." 루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추운 날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반팔과 반바지로 되어 있는 찜질복뿐이다. 이런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미친 짓이지. 하지만 옥상에는 나 외에도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덜덜 떨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런게 흡연자들의 비애라면 비애겠지. 나는 그래도 옥상에나마 흡연실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담배 를 피우고 다시 7층으로 돌아온 우리는 계속해서 루시아 일행을 기 다렸다. "우리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먹어요, 형." "아이스크림?" 보니까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1천원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 려 2천원을 꺼내 루에게 주었다. "나는 바닐라와 쵸코 혼합으로 사와라." "네." 루는 쪼르르 달려가, 소프트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다시 쪼르 르 달려왔다. 우리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햝아먹었다. 냠냠~. 맛있군. "형." "왜?" "저 비행기 한번만 태워주시면 안 돼요?" "뭐라?" 루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 냈다. 하지만……. "내 비행기는 여성 전용이라니까." "그래도 한번만 태워주세요. 라이랑 루비한테 들으니 그렇게 재 밌다는데. 예? 딱 한번 만요. 한번만 태워주시면 더 이상 태워달라 고 안 할게요." 간절하게 부탁하는 루. 그 부탁에 나의 마음이 움직이는 듯했다. 하지만 내 비행기가 여성 전용이라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니가 여자가 되거나, 내가 머리에 총 맞는 일이 있지 않는 한 내 가 비행기를 태워주는 일은 없을 거다." "쳇!" 어쭈! 이자식이 건방지게! "훗!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참아야지." "나이는 제가 배 이상 많은데요." "……." 그건 그렇군. "그래서, 임마? 지금 나랑 야자타임이라도 하자는 거냐?" 내가 인상을 팍 쓰며 말하자 루는 고개를 획 돌리며 중얼거렸다. "형은 나만 미워해." 니가 미운 짓을 하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이 여자들은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어째서 여자들은 목 욕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고뇌했따. 그때 저쪽에서 루시아가 라 이와 루비를 데리고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헉!" 난 너무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분홍색 찜질복을 입은 루시아 는 백금발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은 풋풋함 그 자체였다. 복숭아빛 뺨과 빨간 입술. 싱그러움이 물씬 풍긴다. "오빠아~!" 나를 향해 달려오는 두 아이, 라이와 루비는 여자아이용 분홍색 찜질복을 입고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온 라이와 빨간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온 루비는 그대로 내 품으로 뛰 어들었다. "헉! 안 돼!" 난 피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퍼억! 혼신의 힘을 다한 아이들의 바디 어택(Body Attak)에 나는 정신 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겼다. 윽! 오장육부가 다 뒤틀린 것 같아. 잔인한 것들 같으니. 이 오빠 를 죽을 생각이었니? 라이와 루비는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 게 웃으며 나를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볐다. 그 모습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깜찍하다. 나는 루비를 번쩍 안아 들었다. 루비는 내 목에 손을 감으며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쪽~. 아아~ 귀엽다. 루엔은 어째서 이런 귀여운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 일까? 아이들이 잡초도 아닌데 가만히 놔둬도 잘 자랄 리 없잖아. 나는 두 손을 루비의 겨드랑이에 넣고 빙글빙글 돌려주었다. 이 름 하여 빙글빙글 도는 비행기. "꺄르르~." 내가 그렇게 루비를 몇 바퀴 돌려주자 라이가 내 옷을 잡아당기 며 말했다. "라이도 안아줘요, 오빠. 라이도 빙글빙글 도는 비행기 타고 싶 어요." "알았어, 라이야." 나는 루비를 내려놓고 라이를 들어 올렸다. "꺄하하~." 루비만큼이나 좋아하는 라이. 루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부럽다 는 표정으로 라이를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루비에게 물었다. "저 비행기 재밌어?" "응. 진짜진짜 재밌어. 또 타고 싶어." 루비의 말에 루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인기 있 는 오빠가 되기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애 들 비행기 태워주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아~ 벌써부터 팔과 허리에 무리가! 난 적당히 비행기를 태워준 다음 아이들을 내려 주었다. 어느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루시아, 라이, 루, 루비…… 모두가 외국인인데다 아름답고 귀엽 다. 나만 한국인이고 평범하게 생겼으니 좀 이상하게 보이겠군. 혹시 다른 사람들 눈에 내가 일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루시아의 손을 보았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반지 하나 가 끼워져 있었다. 저것은 나와 루시아의 커플링. 루시아와 내가 커플링을 끼고 있는 이상 우리는 하나라 할 수 있다. 루시아는 고무밴드를 꺼내 머리를 묶었다. 그리고 라이와 루비 도 묶어 주었다. 라이는 머리가 길기 때문에 포니테일 스타일로 올 려서 묶어주었다. 여자는 머리스타일이 변화는 것만으로도 이미지가 많이 변 한다. "어때요, 오빠?" 내 앞에 한바퀴 획 돌며 물어보는 라이. 난 라이를 안아주며 말 했다. "예뻐, 라이야." "헤헤~." 그러자 루비도 내 앞에서 한바퀴 획 돌며 물었다. "루비는 어때요?" "루비도 예뻐." "헤헤~." "저도 머리 묶어줘요." "넌 묶을 머리도 없잖아." "쳇!" 루시아가 물었다. "바로 찜질방으로 들어갈 거야?" "으음, 일단 가볍게 애들 뭐라도 먹이자. 원래 목욕하고 나면 배 가 고프잖아." "맞아요." "배고파요." 나의 말에 동조하는 아이들. 나는 아이들을 위해 맥반석 계란을 사왔다. 가격은 무려 3개에 1천원. 난 계란 4천원 어치와 바나나 우 유를 샀다. "먹자, 얘들아." 나와 루시아는 계란을 까서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 은 소금을 찍어 맛있게 먹었다. 오물오물. "우와! 이거 되게 맛있어요, 오빠." "그래. 많이 먹으렴." 나는 깐 계란을 루시아에게 내밀었다. "너도 좀 먹어." "난 괜찮으니깐 애들한테 줘. 애들 잘 먹잖아." 자신보다는 아이들을 먼저 챙겨야하는 것이 부모의 입장이다. 아이들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려는 루시아의 모습에 나는 진 한 모성애를 느꼈다. 다시 한번 반한 것 같아~. 결국 우리는 하나도 못 먹고 아이들만 실컷 먹였다. "더 사줘요." "더 먹고 싶어요." "이따 밥 먹어야 하니깐 많이 먹으면 안 돼." "우웅~ 맥반석 계란 맛있는데." "다음에 오면 오빠가 또 사줄게." 나는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이제 찜질방으로 들어가자." "네에~!" 나는 찜질방에 들어가기 전에 음료수를 한 통 구매했다. 우리가 택한 찜질방은 황토 피라미드방이었다. 난 들어가기에 앞서 문 앞에 세워진 푯말을 읽어보았다. 황토 피라미드방(Loess Pyramid Room) *황토: 색상이 붉은색이며 0.082~0.005mm 크기의 퇴적물로 뢰 스(Loess)라고도 함 *이용범위: 질병치료, 건축 등 *효능(참고문헌: 동의보감): 피부 및 몸속의 노폐물 제거에 좋습니다 원인 없는 신경통 관절염에 효과가 있습니다 여성병, 종기, 부스럼 치료에 도움이 됩니다 폐, 심장의 기능을 좋게 합니다 양기를 북돋아 활력있는 신체리듬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조상은 500년 동안 검증된 황토집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00년도 안 된 콘크리트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길다면 긴 설명 중에서 한 대목이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양기를 북돋는다라…… 으음." 다른 것도 마음에 들지만 이게 가장 마음에 든다. 우리는 찜질방 안으로 들어갔다. 찜질방 내부는 마치 피라미드 처럼 이집트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손가락 한마 디 정도 크기의 암염들이 쫙 깔려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금 속에 몸 을 파묻고 찜질을 하고 있었다. "더워요, 오빠." "뜨거워요." "원래 찜질방이 뜨겁단다. 뜨겁지 않으면 어떻게 찜질이 되겠니? 참고 버티렴." 벽에 걸린 온도계를 보니 섭씨 50도다. 솔직히 좀 덥군. 난 더운 건 질색인데. 그래도 몸에 좋다니까 참아야지. 난 꾹 참고 소금 속에 몸을 파묻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땀이 흐 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정은 내 옆에 있는 루시아도 마찬가지였 다. 난 재빨리 루시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덥다. 그치?" "응." "……." 왜 이렇게 할말이 없을까? 루시아는 땀 흘리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아아~ 그녀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나는 아까부터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 고 있었다. 이런 곳에 왔으면 자연스런 스킨십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갑자기 손을 올리면 루시아가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짜증을 낼지도 모르고, 나를 변태라고 생각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엄청 무안해지겠지? 어쩌면 지금의 좋 은 분위기가 깨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대로 스킨십을 포기하는 것은 싫다. 조금씩 사이를 진전시켜 나가야하는데 이래서는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아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계속해서 손만 꼼지락거렸다. 이대로는 아무런 발전이 없어. 그래. 용기를 내야 해.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하는 법. 설사 거절당한다 하더라도 당당하게 대쉬하는 거야! 결심한 나는 손을 루시아의 어깨로 가져갔다. 조금만 더. 조금 만 더! "아! 오빠가 언니 어깨에 손 올리려 한다!" "어! 정말!" 이것들이 진짜! 나는 재빨리 손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 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루시아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아~ 고개를 돌리기가 두렵다. 혹시 나를 변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이와 루비를 힘껏 째려봐 주었 다. 오빠가 언니에게 스킨십을 시도하면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초를 치다니. 아이들이 있는 이상 루시아와의 관계 진전은 당분간 힘들 것 같다. 정말로 애 딸린 남자는 연애할 권리도 없다는 건가?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루시아가 물었다. "정말 내 어깨에 손 올리려 했어?" "저, 저기 그게…… 꼭 올리려고 했다기보다는……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고나 할가?" 내가 지금 뭔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올리고 싶으면 올려도 돼." "응?" "어깨에 손 올리고 싶으면 올려." "……." 진심인가? 나는 루시아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럼 정말로 올려도 되는 건가? 나는 이게 문제다. 너무 생각이 많다는 것이. 행동하기 전에 신 중하게 생각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 하다. 그래. 일단 행동하고 보는 거야. 난 용기를 내서 루시아의 어개에 손을 올렸다. 내 손이 루시아의 어깨에 닿는 순간 찌릿하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나는 그 상태에서 루시아를 살짝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한다. 갑자기 찜질방의 온도가 10도 이 상 올라간 느낌이다. 그때 찜질방 한쪽에 경고 문구가 보였다. 음주자, 중증의 당뇨병환자, 고혈압 환자 및 빈혈 환자, 임산부 및 심혈관 질환자, 부축이 필요한 거동불편자. 열기욕 엄금. 사고시 당 업소의 책임 없음. 저 중에서 나는 고혈압과 심혈관 질환자에 해당한다. 주화입마 나 심장마비에 자주 걸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니! 이건 기름을 몸에 뿌린 뒤 불 속으로 달려드는 행위나 다름없었 다. 그 증거로 지금 내 심장 박동수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한 해에 찜질방에서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이 몇 명이더라? 땀을 너무 많이 흘렸는지 목이 마르다. 나는 음료수 통을 향해 손 을 뻗었다. 하지만 음료수 통은 텅텅 비어 있었다. "……." 먹을 것이든, 마실 것이든 일단 끝장을 내고 보는 아이들. 이래서 애들을 떼놓고 왔어야 했는데. "너무 더워. 나 나갈래." 다행이 루시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루시아를 따라 일어났다. 그러자 소금이 쏟아졌다. 나는 옷 속에 들어간 소금을 털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아~ 시원해~." 라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라이의 이마에는 땀이 송 글송글 맺혀 있고, 찜질복은 땀에 절어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라이의 땀을 닦아주었다. 손수건 하나가 완전히 적셔지는 것은 금 방이었다. "음료수 하나 더 사주세요." "알았어." 나는 2000원짜리 복숭아 아이스티 한 통을 구매하여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들은 통에 빨대 세 개를 꽂고 쪼옥~ 빨아 먹었 다. 그러자 금방 바닥을 드러내는 음료수 통.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이번엔 여기 들어가봐요, 오빠." 라이가 가리킨 곳은 자수정방이었다. 푯말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자수정방(Amesthyst Room) *자수정: 플루오르화칼슘이 주성분인 형석으로 우리나라 것이 최고의 품질을 지님 *상징적 역할: 성실과 마음의 평화를 상징하는 2월의 탄생석 *구조적 역할: 일정한 온도에서 우리 몸에 좋은 원적외선량이 80% 이상 방출 *도움이 되는 장기: 조장, 식도를 경유한 안구의 주위 조직, 폐를 경위한 겨드랑이, 생식기, 위장, 담 *효능(참고문헌: 동의보감, 본초강목): 심장의 기를 보충하고 정신을 안정시킨다 생식기를 따뜻하게 하고 피부를 곱게 한다(특히 눈 주위) 불임의 치료 폐의 기를 원활하게 하여 폐질환 치료에 좋은 보조 역할을 한다. 뭐, 어쨌든 결론은 몸에 좋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 보니 온도가 무려 섭씨 63.4도나 된다 아까까 50도 정도였는데, 63.4도라니! 혹시 여기 들어가면 쪄죽는 것은 아닐까? "들어가자, 얘들아." 루시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찜질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루시 아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힘든 거 아냐?" "괜찮아. 오랜만에 땀 흘렸더니 기분도 좋은걸." 아까 황토 피라미드방에는 소금이 깔려있었는데, 이곳 자수정방 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위에 누워 찜질을 하 고 있었다. 온도가 더 높기 때문인지 아까보다 훨씬 덥다. 나는 루시아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루시아가 말했다. "좀더 가까이 앉을래?" "응?" "싫어?" "아, 아니." 난 재빨리 루시아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어깨와 어깨가 맞닿고, 팔과 팔이 맞닿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따라 루시아가 조금 이상하다. 묘하게 적극적이라고나 할까? 나는 루시아의 어깨를 감사 안았다. 아이들은 조용히 눕는 대신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이런 더운 곳에서도 저렇게 뛰어다닐 수 있다니. 역시 젊은 것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군. 그나저나 쟤네 부모들은 아이들이 저렇게 민폐 끼치고 있는데 안 말리고 뭐하나 몰라? 하긴, 저 어린 것들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나? 다 애들 저렇게 가르친 부모 잘못이지. 부모가 누군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군. "……." 잠깐. 쟤네 부모라면 나랑 루시아잖아! "너희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해!" 놀란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쟤들이 저러고 놀면 욕먹는 것은 나 와 루시아다. 아이의 잘못은 부모에게 돌아오는 법. 내가 욕먹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루시아가 욕먹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모범 시민이다. 아이들이 공공 장소에서 민폐 끼치는 상황. 모두가 짜증나지만 말 못 하는 가운데 한 청년이 나서서 아이들을 혼낸다. 으음, 참으로 멋진 청년이로군. 나는 사람들이 나를 '용기 있는 젊은이' 또는 '준법정신이 투철 한 젊은이' 라고 칭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니, 아이들이 뛰어 놀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야단 을 쳐?" "맞어. 애들 노는 모습이 보기 좋구만 왜 나서서 난리를 친대? 거 진짜 나쁜 청년이네." "거기 청년은 어렸을 때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가?" "원래 아이들은 뛰어 노는 거여. 뛰어 노니까 애들이지, 가만히 있으면 그게 애들이여?" "그런데 그것 조금 못 참아서 소리를 지르다니. 저 청년 부모가 애를 완전히 잘못 가르쳤구먼." "그려. 맞어. 저놈이 나쁜 놈이여." "……." 뭐야, 이 반응은? 나는 옳은 행동을 했는데, 어째서 우리 부모님까지 욕을 먹어야 하는 거지? 아줌마들은 대놓고 나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예상치 못한 상 황 전개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나 문제는 애들 이 너무 귀여웠다는 거겠지? 귀여운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은 보 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까. 그래도 너무한 거 아냐? 아는 아이들이 민폐 끼치는 것을 막기 위 해 그러는 건데. 흑~ 너무해. 왜 나만 미워하는 거야? 주위 여론이 점점 악화되자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나가자, 얘들아. 이 오빠의 뒤를 따르라!"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땀으로 젖은 찜질복은 몸 에 달라붙어서 거추장스러웠다. 루시아가 입고 있는 찜질복 역시 몸에 달라붙었다. 내 시선은 나도 모르는 사이 루시아의 가슴을 향 하고 있었다. 크, 크다.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가는 침.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저 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 순간 라이가 루시아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루시 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부비부비라니! 어, 어떻게 저런 부 러운 짓을! 라이는 루시아의 품에 안긴 채 나를 돌아보며 해맑은 웃음을 지 었다. "헤헤~." "……." 뭐야? 지금 나 비웃은 거 맞지? "배고파요, 오빠." "밥 먹으러 가요." 루와 루비는 내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으음, 하긴 이제쯤 밥을 먹는 게 좋겠지?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8층 식당으로 향했다. 양식과 한식, 그리 고 분식이 골고루 갖춰져 있었다. 가격은 다른 음식점에 비해 약간 높은 편이었다. 이런 곳에 있는 식당이 다 그렇지, 뭐. "라이는 왕돈까스 먹을래요." "루비는 함박스테이크요." "저는 제육볶음이요." 아이들은 순식간에 메뉴를 선택했다. 루시아도 결정했는지 메뉴 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커플 비빔밥 한번 먹어볼래?" "커플 비빔밥?" 나는 메뉴판을 펼쳐보았다. 커플 비빔밥은 이름 그대로 커플이 먹으라고 만들어 노은 비빔밥이었다. 커다란 양푼에 비빔밥 2인분 을 비벼주는 것으로 연인끼리 혹은 아는 사람들끼리 같이 먹으라 고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아무튼 '커플'이라는 단어가 찬으로 마음에 든다. "그걸로 하자." 나는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잘먹겠습니다아~!" 힘차게 소리친 아이들은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내 장담하건데 이 아이들보다 복스럽게 먹는 아이들은 찾기 힘들 것이다. 나는 양푼 안에 가득 담긴 밥과 나물을 열심히 비볐다. 루시아가 아직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으니 고추장은 일부러 조금만 넣었다. "한번 먹어 봐." "응." 루시아는 수저로 밥을 조금 떠서 입어 넣었다. "맛있어." "정말?" 나는 한 입 먹어보았다.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런데 그 순 간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라이와 루와 루비가 수저를 입에 문 채 양푼 속에 담긴 비빔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 앞에 놓인 그릇은 어느새 깨끗이 비워 져있었다. 밥을 비비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자기들 밥을 다 먹고, 나와 루시 아의 밥을 노리고 있는 건가? 새삼 아이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은 나와 루시아의 커플 비빔밥. 쉽게 넘겨줄 수는 없지. "같이 먹자, 얘들아." "네에~!" "……헉!" 루시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은 양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때문에 나와 루시아는 몇 숟갈 떠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놔야 했다. 아이들은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막막 먹는 모습을 보여줌으 로써 주방 아주머니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더 안 먹어도 괜찮아?" "응. 괜찮아." "그래도 좀더 먹는 게 낫지 않아? 몇 숟갈 못 먹었잖아." "정말 괜찮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했다. 아이들은 배가 부르자 졸 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다행히 이 찜질방에는 수면실도 마련되어 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7층으로 내려가 공연장 뒤쪽에 있는 토굴로 갔다. 반원통형으로 되어있는 토굴은 한 사람이 누울 정도의 크기였 다. 하지만 몸집이 작은 아이들은 둘이 들어가도 문제가 없을 듯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오빠. 안녕히 주무세요, 언니." 라이와 루비는 같은 토굴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루는 그 옆에 있는 토굴에 들어갔다. 내가 토굴에 들어가려는데 루시아가 말했다. "같이 들어갈래?" "뭐?" 참고로 입구에는 한 곳에 한 명씩만 들어가라고 써 있었다. 남녀 가 같이 들어가서 이상한 짓을 하니 그런 푯말을 붙여놓은 거겠 지. 나는 루시아의 요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그, 그래." 나는 루시아와 함께 좁은 토굴로 기어들어가 몸을 눕혔다. 확실 히 성인 두명이 눕기에는 너무 비좁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딱 붙어 있는 형태가 되었다. 루시아는 나의 팔을 베고 누웠다. 그리고 이마를 나의 가슴에 댔 다. 다시 말해 내 품에 안긴 것이다. 이거 어째 좀 위험한데. 나는 심장 박동수를 조절하기 위해 최대한 크고 조용하게 심호흡 을 했다. 루시아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기 때문에 심장 박동수 가 빨라지면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 금방 들킬 것이다. 루시아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부드럽게 감긴 눈, 규칙적으로 내뱉는 숨소리. 나는 놀고 있는 오른속으로 그녀를 살짝 감싸 안 았다. 꿀꺽! 루시아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나는 눈과 손을 어따 둬야 할지를 몰랐다. 생각 같아서는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싶고, 그녀의 몸을 더듬고 싶었다. 이것은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본능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무방비 상태로 품에 안겨있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보인다. 새빨간 입술은 도발적인 향기를 풍 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은 나의 몸에 살짝 맞닿아 있다. 한번 만져보면 어떨까? 살짝만이라도……. 좁은 토굴 안은 어느새 그녀의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의 이성 적 제어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안 돼. 이젠 한계야. 나는 천천히 얼굴을 그녀의 쪽으로 가져갔다. 나의 시선은 루시 아의 붉은 입술을 향해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입술과 입술의 거리는 이제 손가락 한마디 정도에 불과했다. 그 순간, 평온하게 잠들어있는 루시아의 얼굴이 보였다. 잠든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수했다. 나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가 잠든 그녀에게 무슨 짓을하 하려 한거지? 아아~ 내가 이런 파 렴치한 인간이었다니! 나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몸을 원위치(?) 시켰다. 나는 손을 들어 앞으로 흘러내린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겨 주었다. 그 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더 이상 이상한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 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 * * * 루시아는 살짝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잠결에 이상한 기척을 느 꼈기 때문이다. 살짝 실눈을 떠보니 히로가 고민하며 손을 꼼지락 거리는 것이 보였다. 히로는 그야말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꿀꺽! 히로는 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루시아의 귀에 똑똑 히 들렸다. 히로는 뜨거운 눈빛으로 자신의 얼굴과 가슴을 훑어보 았다. '어떡해? 이상한 짓 하려나 봐.' 루시아는 눈을 뜨려 했다. 깨어있는 걸 알면 이상한 짓을 못하겠 지. 하지만 그녀는 타이밍을 놓쳤다. 히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 는 중이었다. '키스하려는 건가?' 루시아는 눈을 떠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눈 을 뜨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한동안 얼굴을 마주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이렇게 도둑 키스를 당하는 것은…….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수밖에는.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히로의 얼굴은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이제 하는 건가?' 루시아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입술에 느껴질 감촉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히로의 숨결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히로의 손길도.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은 아쉽고, 조금은 기 뻤다. '제법 남자답잖아.' 루시아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루시아는 머리를 쓸어주는 히로의 손길을 느끼며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 들 었다. * * * * 나는 눈을 떴다. 으음, 살짝 잠들었었나 보군. 루시아는 여전히 나의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루시아는 어째 서 잠자는 모습도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라 할지라도 루시아에 비하면 보름달 앞에 반딧불이요, 봉황 앞에 까 마귀요, 드래곤 앞에 도마뱀이다. 잠깐. 생각해보니 루시아도 공주잖아. 그럼 루시아는 '잠자는 찜질 방 속의 공주' 인가? 으음, 그럼 내 키스 한 방이면 깨어나려나? 헉! 안 돼! 그런 짓은 치한이나 변태가 하는 거야! 아무리 루시아 가 사랑스러워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해! 이것은 거의 인내심 테스트나 다름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루시아가 몸을 뒤척였다. "으음." 루시아는 살며시 눈을 떴다. 몇번 눈을 깜빡인 루시아는 나를 보 았다. "잘 잤어?" 내가 묻자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토굴은 상체만 일으켜도 머리가 맞닿을 정도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을 기어 나왔다. 루시아는 기지개를 펴며 몸을 풀었다. "얼마나 잔 거야?" 난 시계를 보았다. "한 3시간 정도는 잔 것 같은데." "많이 잤네." 정말로 생각보다 많이 잤다. "애들은?" 나는 아이들이 들어간 토굴을 살펴보았다. 루는 바닥에 엎어진 채 자고 있었고, 라이와 루비는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나는 애들을 깨웠다. "일어나렴, 얘들아. 아침이란다." "우웅~ 졸려요오." "그만 자고 일어나. 여기가 너네집 안방이니?" 아이들은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난 그런 아이들을 일렬로 세 웠다. 그리고 수건을 찬물로 적셔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아~." "……." 뭐야, 이 이상야릇한 신음소리는? 소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바로 옆에 있는 토굴이었다. 그 안에 는 하늘색 찜질복을 입은 남자와 분홍색 찜질복을 입은 여자가 민 망한 자세로 엉켜있었다. "우와! 저 언니 오빠가 이상한 짓 한다." "정말. 막막 키스도 해." "찐한데." 어느새 토굴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들. 난 놀라서 라이의 눈 을 가리며 소리쳤다. "애들 눈 가려!" 내가 말하기도 전에 루시아는 루와 루비의 눈을 손으로 덮고 있 었다. 공공장소라 할 수 있는 찜질방에서 이렇게 낯 뜨거운 행위를 하다니! 그런 짓은 댁들 침실에서나 하란 말이야! 참고로 토굴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알림 저희 25시 찜질타운은 공공장소입니다. 불미스런 행동이나 노골적인 애정행각은 삼가주시기 바라며, 발각시 퇴실조치 됨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토굴에는 반드시 한 사람씩만 들어가 주십시오. 만약 남녀 가 같이 들어갔다면 이유 불문하고 퇴실조치 합니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이유는 토굴을 침실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5시 찜질타운은 온 가족의 휴식 공간이지, 가 족을 만드는 공간이 아닙니다. 으음, 남녀가 같이 들어가면 이유 불문하고 퇴실이었군. 나는 안 걸려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 루시 아와 나는 잠만 같이 잤을 뿐 아무 일도 없었지만. "……." 잠만 같이 자? 이거 왠지 어감이 이상하군. 그나저나 저 문구 누 가 썼는지 정말 명언이다. 특히 '25시 찜질타운은 온 가족의 휴식 공간이지, 가족을 만드는 공간이 아닙니다' 라는 말이 나의 폐부를 찌른다. 그런데 정말로 찜질방에서 가족을 만드는 사람도 있나? "……." 으음, 이 사람들 가만히 놔두면 정말로 가족을 만들 것 같다. 사실 이런 것 엿보는 것만큼 재밌는 일이 또 없다. 어이~ 자네 손이 어디 있는 건가? 여기서 카마수트라라도 찍을 생각인가? 참고로 카마수트라란 고대 인도에서 만들어진 성애(性愛)에 관한 경전이자 교과서다. 4세기경에 바츠야야나가 썼다고 전해지는 이 책은 산스크리스트로 쓰여 있다. 고대 인도 사람들은 인생의 3가지 목적으로서 종교적 의무인 다 르마와 처세의 길인 아르타, 성애의 길인 카마를 들어 이에 고나한 많 은 책을 쓰고 연구했는데, 카마수트라는 성애 관한 책 가운데서 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책이다. 대략 내용은 성애의 기교, 소녀와의 교접, 아내의 의무, 남의 아 내와의 통정, 창녀, 미약(최음제?) 등에 관해 논술하여 일반시민을 성지식의 결여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 였다. 가끔 밤에 케이블TV 영화채널을 틀면 카마수트라 애정클리닉 어쩌구 하며 다양한 설명을 곁들인 다양한 영상을 보여준다. 보면 정말 재밌다. 그래서 가끔 밤에 거실로 나와 루시아 몰래 보기도 다한다. 참고로 이때는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재빨리 만화채널로 전환할 수 있도록 고도의 청력과 번개 같은 순발력이 필요로 한다. 나는 카마수트라를 생중계로 보여주고 있는 이 남녀를 뜯어 말려 야겠다고 생각…… 치 안않았다. 으음, 보기 좋군. 이런 구경을 또 어디서 하겠는가? 볼 수 있을 때 실컷 봐둬야지. "뭐해, 안 말리고?" 하지만 루시아가 소리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리기로 했다. "공공장소에서 지금 뭣들 하시는 겁니까?" 내가 소리치자 남자가 살짝 몸을 일으켰다. "넌 뭐야?" "헉! 당신은!" 내가 놀라는데 여자도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헉! 루엔!" 토굴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하던 남녀는 다름 아닌 라이레얼의 아 빠인 갈리온드와 루와 루비의 할머니인 루엔이었다. 레몬빛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마치 라이레얼과 남매처럼 보이는 꽃미남 갈리온드와 붉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스타일리쉬한 미 녀 루엔. 둘은 토굴에서 기어 나왔다. "반가워요, 히로." 루엔은 오랜만에 만난 것이 반가운지 나를 껴안으면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헉! 이것은 서양식의 인사법! 하와이에 놀러 갔다 오더니 서양 문화에 물든 건가? 참고로 나는 이런 인사 방식 정말 마음에 든다. 물론 남자와 이런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은 사양이지만.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루엔에게 인사하려 했다. 하지만 뒤통 수에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관뒀다. 알았어, 루시아. 안 하면 되잖아. "할머니이~!" 루엔의 품으로 뛰어드는 루와 루비. 루엔은 그런 아이들을 안아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표정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입양해 기르던 아이가 친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심정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루시아는 그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살며 시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루시아. 우리한테는 라이가 있잖아. "애들 데리고 놀러온 거예요?" "아, 예. 뭐 그렇죠. 그런데 루엔은 어쩐 일이에요? 한동안 안 보 였는데 어디 있었던 거예요?" "어디 있었냐니요? 여기에 있었지요." "예?" "개장하는 날부터 계속 이곳에 있었어요." "예?" 내가 계속 되묻자 갈리온드가 대답했다. "이곳에 있으니 나갈 필요가 없더군. 안에 음식점도 있고, 수면 실도 있고, 헬스장도 있으니까. 어차피 나가봐야 할 일도 없으니 그 냥 여기서 살았지." "……." 여기에 살림을 차렸다는 건가? 이곳은 입장만 하면 언제 나가든 그건 손님 마음이다. 갈리온드 의 말대로 찜질방 안에는 모든 부대시설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몇 달 동안 살아도 문제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곳에서 나의 친구인 루엔과 만나게 되니 정말 기쁘 다. 우리는 해후를 기뻐하며 공연장 쪽으로 나왔다. "지금부터 헬스장에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헬스장이요? 뭐, 저야 좋죠." 안 그래도 자고 일어나서 몸이 찌뿌둥한 상태였다. 그리고 적당 한 운동은 건강에도 좋다. 우리는 8층의 헬스장으로 향했다. 헬스장에는 몇 사람이 러닝머 신을 하고 있었다. 으음, 역시 가볍게 러닝머신으로 시작하는 게 좋 겠지? 우리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섰다. 나는 속도를 옆에 있는 갈리온 드와 똑같이 마췄다. 시속 6Km로. 그러자 갈리온드는 피식 웃더니 속도를 7Km로 올렸다. "……." 뭐야? 지금 해보자는 거야? 나는 속도를 한번에 10Km로 올렸다. 배팅은 무조건 세게…… 가 나의 신조다. 그런데 갈리온드는 속도를 15Km로 올리는 것이 아 닌가? 질수 없다! 나는 과감하게 시속 25Km로 배팅했다. 갈리온드도 더 이상은 무 리였는지 똑같이 25Km로 올렸따. 시속 25Km면 100미터를 15초 안 에 주파하는 속도로 계속 달려야 한다. 갈리온드와 나는 그야말로 전력 질주를 했다. "헉헉~ 이제 그만 포기하지." "헥헥~ 댁이야 말로 포기하시죠. 나이도 있으신데." "나도 엘프 중에서 영계야! 이거 왜 이래?" "댁이 영계면 라이와 루비는 달걀이겠다!" 시속 25Km면, 1시간 40분 안에 마라톤 코스를 완주할 수 있다. 가히 미칠 듯한 스피드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이것은 미친 짓이다. 남자들이 헬스장에서 이 짓 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없다. 하지 만 막상하게 되니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남자들의 세계! 남자의 근성을 보여주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비틀거렸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하지만 열혈과 근성으로도 체력적 한계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요즘 들어 운동을 안 한 것이 문제다. 그래도 판타지 세계에서는 이 일, 저 일 벌이고 수습하느라 열심 히 돌아다녔는데,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가게와 집을 오간 것이 거 의 전부다. 현대인들의 운동부족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 가 아닌가 싶다. 적당한 운동은 성인병 예방과 비만 예방에 많은 도 움이 된다. "헥헥~." 아아~ 안 돼.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어. 점점 러닝머신 뒤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대한민국 언니 오빠, 파 이팅!" 그 노랫소리는 지쳐있던 나의 육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 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마지만 남은 힘을 짜냈다. "간다! 개나리 스텝!" 쉬이익! 나의 발이 전국을 칼잡이들이 칼부림 할 때처럼 화려하게 움직였 다. 나는 재빨리 러닝머신 벨트 위를 밟았다. 마치 탭댄스를 추듯 빠르고 화려하게 움직이는 발. 이것이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 의 필살 보법인 개나리 스텝이다. 휙휙휙! 이것은 나의 최후의 기력을 짜낸 것이다. 개나리 스텝을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그때까지 갈리온드가 버틴 다면 나의 패배가 될 것이다. 하, 한계다! 지속 시간이 10초도 남지 않았어. 다행히 3초를 남겨둔 시점에서 갈리온드가 떨어져 나갔다. 그 모 습을 본 나는 재빨리 정지 버튼을 눌렀다. 워낙 속도가 빨랐기 때문 에 멈추는데도 한동안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냥 벨트에 밀려 서 떨어졌다. "헉헉~." "헥헥~." 나는 힘든 와중에서도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와아! 오빠 멋져요!" 짝짝짝! 일렬횡대로 서서 박수를 치는 아이들. 라이, 루, 루비로 구성된 서포터즈가 있는 이상 나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나는 갈리온드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후후~ 생각보다 체력이 약하시군요. 평소에 운동 좀 하시죠." "쳇!" 고개를 획 돌리는 갈리온드. 훗! 졌으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한 것이지, 삐지기는. 우리가 러닝머신 배틀을 벌인 시간은 대략 20분 정도. 그러니까 8Km정도의 거리를 달린 셈이다. 일주일치 운동은 오늘 다 했군. 갈리온드는 루엔의 부축을 받고서야, 나는 루시아의 부축을 받고 서야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다. "그러게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야?" "나도 하기 싫었어." "그럼 왜 한 거야?" "걸어온 배틀을 피하는 것은 남자가 할 짓이 아니지." "하여튼 남자들이란……." 아무튼 이렇게 루시아의 부축을 받게 되니 기분 좋다. 오늘은 참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군. "아! 오빠! 4시부터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한대요." "정말이야, 라이야?" "응. 저쪽에 그렇게 써져있어." "루비 둘리 보고 싶어!" "나도." 라이 말대로 8층에 위치한 DVD상영관 제3관에서는 4시부터 아 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을 상영했다. "보고 싶니?" "네에~!" 내가 묻자 아이들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소리쳤다. 시계를 보니 4시가 거의 다 되었다. "난 별로 보고 싶은 생각 없는데." "그럼 내가 애들 데리고 있을 테니까 넌 그동안 찜질이나 더 하고 있어. 이따 영화 끝날 때 만나자." "알았어." 루엔은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PC방에서 시간 보낼 생각인데, 어때요?" "PC방이요? 거기서 뭐 하시는데요?" 나의 질문에 갈리온드가 답했다. "당연히 스타하지. 참고로 나는 오직 저그다." "저는 테란이에요." "……." 못 본 사이에 한국의 PC방 문화에 완벽하게 적응한 두 엘프. 라 이레얼은 비디오 게임이고 갈리온드는 온라인 게임이군. 부녀가 나란히 게임 중독증인가? "아니에요. 그냥 둘이서 재밌게 하세요." 루엔은 갈리온드와 함께 PC방으로 가려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 왔다. "돈 좀 꿔줄 수 있어요?" "예?" "가져온 돈을 거의 다 써버려서요." 루엔이 말하자 갈리온드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갑에 돈 좀 많이 넣고 다녀라. 저번에 빼보니 30만원 밖에 없 더라." "……." 내 지갑을 자기 지갑처럼 사용하는 갈리온드. 라이레얼 아빠만 아니었어도 한판 붙는 건데. "얼마나 필요한가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루엔은 웃으며 대답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건가? 나는 루엔의 얼굴을 봐서 지갑을 꺼내 10만 원짜리 수표 2장을 건네주었다. 루엔은 나의 친구이자, 루와 루비의 할머니이니. "고마워요." "뭘요. 친구끼리 당연한 거죠." "나중에 꼭 갚을게요." 별로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루엔은 가기 전에 루와 루비를 안고 쓰다듬어 주었다. "여기 있는 언니 오빠 말 잘 들어야 돼." "네, 할머니. 루비는 언니 오빠 말 잘 들어요." "저도요." 루엔은 나를 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애들이 말썽 피우면 언제든 말해줘요. 따로 불러다가 교육을 시킬 테니까요." "헉!" '교육' 이라는 말에 서로를 꼭 끌어안고 벌벌 떠는 루와 루비. 이 게 바로 참교육의 결과다. "루, 루비는 말성 안 피워요. 그, 그쵸, 오빠?" "저, 저도 말썽 같은 거 안 피우고 형이랑 누나가 시키는 대로 다 해요. 그쵸, 누나?" 훗~ 말썽을 안 피워? 랍스타 사달라고 땡깡 부리질 않나, 비행기 태워다라고 떼를 쓰질 않나, 세뱃돈을 뜯어내질 않나……. 그 얘기를 지금 루엔에게 하면 루와 루비는 전치 4주 이상의 부 상을 입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 며 말했다. "루와 루비 모두 말 잘 들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애들이 얼마 나 착한데요. 이게 다 루엔의 교육 덕분이에요." 그러자 루엔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부담 갖지 말고 얘기 해요." "예." "그럼 앞으로도 당분간 루와 루비를 잘 부탁해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 루엔은 갈리온드와 함께 PC방으로 걸어갔고, 루시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DVD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DVD상영관은 10평에서 15평 남짓 했다. 천장에 매달린 프로젝 터로 스크린에 영상을 비추고, 사람들은 평평한 바닥에 앉아서 보 는 형태였다. 어떻게 보면 조금 조잡해보이지만, 그래도 이런 DVD 상영관이 4개나 있다는 것이 어딘가? 게다가 여기서 보면 공짜가 아닌가? "그럼 재밌게 보렴." "네에~!" 나는 루시아와 아이들과 헤어져 혼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 녔다. 그때 내 눈에 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포츠 마사 지실! 나는 문 앞에 써진 가격표를 보았다. 전신 60분(일반) - 40,000원 전신 90분(스페셜) - 60,000원 전신 120분(VIP) - 80,000원 발마사지 60분 - 40,000원 전신 + 발 90분 - 60,000원 전신 + 발 120분 - 80,000원 부분 마사지 30분 - 30,000원 으음, 상당히 부담되는 가격이 아닐 수 없다. 1시간에 4만원이라 니. 그래도 한번 받아보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요새 무리를 많이 해서인지 몸 상태가 안 좋기 때문이다. 스포츠 마사지 한번 받아보면 전신의 피로가 확~ 풀린다는데. 비싼 돈을 투자해서라도 한번 받아보는 게 좋겠지? 나는 결심하고 스포츠 마사지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5평 정도 되는 공간에는 마사지 침대가 세개 있었고, 그중 한 곳에 한 남자 가 누워 있었다(얼굴은 수건으로 덮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찜질복 이 하늘색이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미모의 20대 여성이 그 남자를 마사지하는 중이었다. 헉! 예쁘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그녀는 대략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건강하면서도 세련된 외모. 왠지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왕 마사지 받는 거 우락부락한 남자보다 는 미모의 여성에게 받으면 좋지. 그녀는 나를 보며 물었다. "마사지 받으러 오셨나요?" "아, 예."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영업을 안 합니다." "예? 영업을 안 하다니요? 지금 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무튼 안 합니다. 나가주세요." "지금 그 남자 마사지하고 있잖아요." "이분 마사지 끝나려면 오래 걸리거든요." "얼마나요?" "적어도 오늘 안에는 안 끝납니다." "예?" 여자의 표정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표정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했다. '귀찮으니까 어서 꺼져!' "……." 헉!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잠깐만요." 그때 마사지를 받던 남자가 얼굴의 수건을 치우며 몸을 일으켰다. "어! 댁이 왜 여기 있어요?"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이셨군요." 마사지를 받던 남자는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였다. 지니는 마 사지 침대에서 내려와 벗어놓았던 외눈 안경을 꼈다. 그리고는 허 리를 숙이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이런 곳에서 아이언스 공작님을 뵙게 되니 더욱 큰 기쁨으로 다 가오는군요." "글쎄요. 저는 별로 큰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데. 그나저나 여 기는 어쩐 일이세요?" "피로도 풀 겸해서 요즘 교제하는 여성분과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아! 그럼 이 여자분이 이 찜질방 사장 딸이라는……." "아닙니다. 그 여자분은 따로 있으시고, 이 여자분께서는 이곳 스포츠 마사지실을 운영하고 계시는 또 다른 여자분이십니다. 그 여자분은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소개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지니가 본인의 입으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음에 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홀린 듯한 눈으로 지니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지니에게 완전 히 넘어갔다 할 수 있겠다. 역시 이 자식은 세상 모든 남자들의 적이야. 나는 새삼 증오어린 눈길로 지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이신가요?" "마사지실에 마사지 받으러 왔지, 뭐 하러 왔겠어요?"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지니는 미소를 지으며 옆의 여자에게 말했다. "이분께서는 아이언스 공잡님으로 만인의 귀감이 되실만한 훌륭 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모시는 데 있어서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부 탁드리겠습니다." "지니님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하겠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쌀쌀맞았던 여자의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여기 옆드려 누우시겠어요?" "아, 예." 뭐, 어쨌든 무사히 스포츠 마사지를 받게 되엇으니, 이건 다행이 다. 지니랑 아는 사람이니 돈은 안 내도 되겠지? 여자는 내 어깨와 목 부위를 천천히 주물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르는 부위마다 엄청 나게 아팠다. "아아악!" "아파도 참으세요. 혈을 자극해서 뭉쳐진 근육을 푸는 거니까요. 목과 어깨 쪽에 근육이 많이 뭉쳐있네요. 풀려면 한참 걸리겟는데 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꾹꾹 눌러댔다. 그 고통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아악! 그만해!" 너무 아파서 마사지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나를 붙드는 손 길이 느껴졌다. 지니였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다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한 겁니다." 여자는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고 그때마다 나는 경련을 일으켰다. "끄아악! 그만! 제발 그만!" 나의 비명이 마사지실 가득 울려 퍼졌다. 1시간에 걸친 스포츠 마사지를 끝낸 나는 지니의 부축을 받아 마 사지실을 나섰다. 1시간 중 초반 40분은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20분은 그래도 좀 기분 좋았다. 어쨌든 몸이 풀린 것만은 사실이었다. 좀 심하게 풀려서 힘이 다 빠졌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루시아와 아이들이 영화를 보고 나오려면 아직도 30분이라는 시 간이 남아 있었다. "30분 동안 찜질이나 하면서 땀이나 빼죠." "아이언스 공작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기왕 비싼 돈 내고 들어왔으니 나는 최대한 즐길 생각이었다. 이 번에 선택한 찜질방은 참숯방이었다. 역시나 들어가기 전에 푯말을 읽어보았다. 참숯방(Oak-Charcoal Room) *원뜻: 숯이란 '신비스런 힘을 지닌' 순우리말 *한방이름: 대표적으로 '송인묵' 이라 함 *구조: 다공성, 음이온 덩어리, 미네랑 덩어리, 원적외선 방사 *효능(참고문헌: 동의보감): 폐기능이 좋아집니다 소화기 질환의 치료에 도움이 됩니다 피부병 치료 및 피부를 윤택하게 합니다 음식의 맛과 영양을 높입니다 정수, 정화 기능이 탁월합니다 *이용 방법: 10~15분씩 3회(특히 취침 1~2 시간 전) 구체적인 활용 및 치료 방법을 알고 싶으신 분은 당 찜질방 관리팀 에 문의해주십시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말로 사방이 참숯으로 되어 있었다. 온도 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무려 섭씨 71.5도. 쪄 죽겠군.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니 역시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긴, 이런 곳에서까지 땀을 안 흘리면 그게 인간이냐? 터 미네이터지. 이런 곳에서 지니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이것도 나름대로 속이라면 소득이겠군. 나와 지니가 찜질을 즐기는데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질문은 내가 던졌는데, 여자들은 지니에게 말했다. "저, 저기…… 혹시 시간 좀 있으신가요?" 찜질방에서야 남아도는 게 시간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루시아 만나러 가겠습니다.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계속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알겠습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나는 찜질방을 나와 DVD상영관 제 3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상 은 넓고, 인구의 반은 여자라 하나, 그중에서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 여자는 오직 루시아뿐이다. 흥! 헌팅 당하는 지니 따위는 조금도 부럽지 않아! 나한테는 루시 아만 있으면 돼! 마침 영화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아 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루시아가 보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영화 재밌었니?" "예. 되게 재밌었어요." "막막 재밌었어요. 둘리가 악당이랑 막막 싸워서 막막 이겼거든 요." "흑! 그런데 둘리가 엄마랑 헤어지게 되서 라이는 너무 슬퍼 요." "나도 슬퍼져. 흑~." "우에에엥~." "엉엉~." 서로를 껴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라이, 루, 루비. 감수성이 풍부 한 어린아이들인지라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고, 사소한 것에도 슬 퍼한다. 나와 루시아는 우는 아이들을 달랬다.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다. 나는 루시아와 아이들을 데리고 아 까의 음식점으로 갔다. 거기서 배를 채운 우리는 7층으로 내려와 동굴방에 한번 들어가 보았다. 동굴방은 냉찜질을 하는 곳이었다. 위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있 고, 바닥은 차가운 돌바닥이다. 그리고 한쪽에는 눈사람이 서 있 었다. 추운 겨울날 냉찜질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는지 동굴방에 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잠깐 놀다가 추워서 못 견디겠는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코 스는 산림욕방이었다. 푯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산림욕방(Phytonicide Room) *작용방법: 피톤치드의 향기요법 *최초발견자: 러시아 태생의 미군 세균학자 왁스만(1952년 노벨 의학상 수상) *주성분: 여러 종의 테르펜, 알카로이드 배당체 등 *효능 : 피부의 소독, 소염, 긴장완화 혈압 강하 및 심신안정 스트레스 감소 폐, 대장 기능의 활성화 *이용 방법: 15~20분씩 3,4회 *산림효과를 배가시키는 방법: 심호흡을 하면서(일반인) 단전호흡을 하면서(단전호흡 가능자) 명상을 하면서(누구나) 조용하고 차분한 음악을 들으면서(휴대용 뮤직 플레이어 소지 자) 이곳은 다른 찜질방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 섭씨 23 도의 쾌적한 온도다. 그리고 안에는 벽면TV도 있었다. 온도가 높은 찜질방에서는 전기 계통의 기기를 사용하는 것이 금 지다. 배터리가 터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휴대폰도 갖고 들어갈 수 없다(그래도 갖고 들어갈 사람은 다 갖고 들어간다. 아까 보니 어떤 여자 는 안에서 전화하더만). 이곳에 텔레비전에 있는 것은 적정 온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사방이 나무로 되어 있는 이곳에는 은은한 나무 향기가 감돌았 다. 대략 80평은 될 것 같은 공간에 사람들은 누워 텔레비전을 보거 나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도 바닥 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자 루시아도 내 옆에 누웠다. 그리고는 내 품에 안겨왔다. 그런 루시아의 행동에 나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왜 그래?" "아, 아니." 평소의 루시아라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 면 오늘 루시아의 행이 이상하만치 대담하다. "저, 저기…… 루시아……." "왜?" 아, 아니…… 뭐, 별 다른건 아니고…… 으음, 그러니까 그 게……." 나는 뭐라고 얘기를 꺼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루 시아가 입을 열었다. "내 행동이 이상해?" 바로 이거다. 이게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다. "으응. 조금." "……." 루시아는 몸을 일으켰다. 나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루시아는 앉은 상태에서 날 보며 물었다. "내 행동이 그렇게 이상해?" "아니, 꼭 이상하다기보다는…… 평소와는 좀 다르다고나 할 까? 사실 넌 스킨십 같은 건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잖아." "……." 루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화났어?" "아니. 화 안 났어." 루시아는 한동안 침묵한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 꽤 오래 사귀었잖아." "뭐, 그렇지." "그런데 그동안 너무 진전이 없었던 것 같아서." "……." "언니랑 형부는 사귄 지 일년도 안 되서 결혼해서 잘 살고 있잖 아. 그런데 우리는 계속 제자리걸음만하고 있고. 그래서 일부러 좀 적극적으로 행동해 봤는데, 잘 안 됐나 보네." 루시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감동 을 느꼈다. 루시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나는 나 혼자 그 런 생각을 하는 줄 알고 걱정했었는데. 나는 항상 내가 루시아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더 사랑하고, 그년느 나에게 별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해였다. 그녀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살며시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 시간은 많으니까. 우리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 일부러 그러려고 하지 마. 시간이 지나다보면 자연스 럽게 가까워질 테니까." "그렇겠지?" 루시아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얗고 가지 런한 치아가 드러난다. 단순호치(丹脣皓齒: 붉은 입술과 하얀 이를 일 컫는 말로 미인을 표현할 때 쓰인다)란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나는 루시아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잠깐.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루시아가 적극적으로 나오는 데 내가 그걸 점잖게 사양한 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건 거의 미친 짓이었다. 여자가 적극적으로 대쉬하는데 그것 을 물리치다니! 제 정신 박힌 남자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이라 할 수 있다. 이래서 라이 동생을 언제 만들어준단 말인가? 난 루시아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왜, 왜 그래?"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당황한 루시아.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말 했다. "우리 라이가……." "응?" "동생이 갖고 싶대." "……응?" "그래서 말인데 라이 동생을 만들어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떻까? 응?" "라이 동생이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라이와 아이들. 라이는 회색 눈동자를 초 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나는 라이에게 물었다. "우리 라이 동생 갖고 싶지 않니?" "라이 동생 갖고 싶어요! 동생 생기면 라이는 막막 잘 해줄 거예 요." 나는 라이를 앞에 내세우며 루시아게 말했다. "이거 봐. 라이도 동생을 원하잖아. 막막 잘 해준대. 그러니까 우 리 열심히 노력해서 라이 동생을 만들어……." 짜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돌아간 내 목. 나는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루시아는 싸늘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경멸의 뜻을 담고 있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어, 어째서……." 나는 부풀어 오른 뺨을 만지며 눈물을 글썽였다. 육체적 아픔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다. 내가 대체 왜 맞은 거지? 라이 동생을 만들자고 하면 루시아도 기 뻐할 줄 알았는데. "가자, 얘들아." 루시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림욕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사람들의 동정어린 눈길과 조소를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아까부터 맞을 짓만 골라서 하더만 결국은 맞는군." "맞아야 정신을 차릴 놈이여." "저런 놈은 더 맞아야 해." "……." 뭐야? 주위 여론이 왜 이래? 내가 안 생긴 게 죄지 누굴 탓하겠냐? 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 루시아!" 우리는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찜질방을 나섰다. 나오기 전에 지 니와 루엔 일행을 찾아보았따. 지는 먼저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 았고, 갈리온드와 루엔은 여전히 PC방에서 스타삼매경(Star三昧境) 에 빠져있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아침에 들어가서 밤 에 나오다니. 이 정도면 본전은 뽑은 건가? 뭐, 어차피 공짜 쿠폰이 었지만. "추워요, 오빠." 따뜻한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까 추운지 라이는 몸을 오들오 들 떨었다. 나는 라이를 번적 들어 안아주었다. 그리고 꼭 끌어안 고 몸을 비벼 따뜻하게 해주었다. 라이의 목에 둘러진 목도리와 손 에 끼워진 벙어리장갑이 눈에 들어온다. 보고 있자니 갖고 싶다는 욕망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라이는 그런 나의 눈길을 눈치 챘는지 두 손으로 목도리를 가리 며 말했따. "이건 라이 꺼예요." "……." 누가 뭐랬니? 루시아는 양손으로 루와 루비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라이를 안은 채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루시아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라이게 물었다. "정말로 동생이 갖고 싶니, 라이야?" 그러자 라이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내 귀에 속삭였다. "예. 라이는 동생이 너무너무 갖고 싶어요. 라이는 예쁜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이 오빠가 라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노력할게. 그러니 라이도 오빠 많이 응원해줘야 해. 알았지?" "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라이는 오빠 편이니까요." "아이구, 귀여운 것!" 나는 라이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었다. "거기서 뭐해?" "아!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황급히 루시아를 쫓아갔다. * * * * 며칠 후. 어린 엘프들은 나란히 소금 속에 몸을 파묻고 누워 있었다. "아아~ 좋다. 오늘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다 날아가는 것 같 아." "라이는 피부가 고와지는 느낌이야." "땀 한번 좍 빼고 나서 샤워하면 그것만큼 시원한 게 없지." "맞아. 추운 겨울날에는 뜨끈한 찜질방에서 몸을 지져야 해." 라이와 루비와 루는 노인 같은 말을 하며 찜질을 즐겼다. 난 어이 가 없었다. 어린애들이 뭐 피곤할 일이 있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건가? 누가 들 으면 우리가 애들 부려먹는 줄 알겠군. 저번에 한번 갔다 온 후로 가게 일이 끝나면 이곳에 와서 찜질을 하는 것이 하나의 코스로 굳어지고 있었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들이 찜질방에 맛 들여서 큰일이야." "뭐, 어때? 애들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면 애들 몸 위에 소금을 덮어주었다. 난 한 숨만 푹푹 내쉬었다. 역시 애들 키우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우리 엄마 아빠의 심정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애들 자라는 거 지켜보며 사는 게 부모의 낙이지. 대한민국 엄마 아빠, 파이팅! 아이리스 2부 4권 Substory 6 군고구마 장사 어린 엘프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플레이스테이션2를 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하는 게임은 비행 슈팅게임. 멀티탭을 연결하여 셋이서 재밌게 즐기고 있었다. "에잇! 에잇!" "받아라!" "앗! 라이 폭탄 다 떨어졌어." "그러니까 루비가 폭탄 아껴 쓰라고 했잖아." 소파에 누워 아이들이 게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라이레얼은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었다. '훗! 어린 것들.' 아이들이 하고 있는 비행 슈팅게임은 라이레얼이 이미 예전에 클리어한 것이다. 그것도 노 다이(No Die)로. 최고 기록에는 전부 라이레얼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라이레얼이 이렇게 애들 게임하는 것을 단지 지켜보고만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할 게임이 없으니 심심하네.' 그렇다. 라이레얼은 집에 있는 게임을 다 깨서 더 이상 할 게임이 없었다. 다 깬 게임을 팔고, 새로운 게임을 사와야 했지만 나가기가 귀찮았다. 역시나 귀차니즘이 문제인 걸까? '이대로 계속 집에 누워 있는 것도 심심하고… 에잇! 그냥 나갔다 와야지.' 결심한 라이레얼은 세면을 하고,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디 가실 거에요, 언니?" "게임 사러." "저도 같이 가요." 카르는 재빨리 라이레얼의 오른팔에 매달렸다. 점퍼를 입고 나가려 하는데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의 정체는 어린 엘프들이었다. "밖에 나가고 싶니?" 끄덕끄덕. "같이 나갈래?" 끄덕끄덕. "그럼 따라와." "네에~!" 아이들은 두꺼운 옷을 껴입고 라이레얼을 따라 나섰다. 팔짱을 낀 채 걷는 라이레얼과 카르. 그리고 그 뒤를 쫄래쫄래 따르는 어린 엘프들. 아이들은 집 안에 있기가 갑갑했는지라, 비록 춥긴 하지만 이렇게 밖에 나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라이레얼의 손에 는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다 깬 게임이 들어 있었다. 이걸 이제 새로운 게임으로 교환해야 한다. 라이레얼 일행은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국제전자센터 였다. 라이레얼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붙잡았다. "응? 왜?" "배고파요, 언니." "응? 배고파?" "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라이레얼을 올려다보았다. 그눈빛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맛있는 거 사줏요오 ~!' 라이레얼은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웃음을 지었다. "뭐, 히로한테 세뱃돈도 많이 받았으니 내가 쏠게. 나는 원래 통 큰 하프엘프거든." 라이레얼은 아이들을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데려갔다. "여기 천 원짜리 햄버거 10개랑, 콜라 큰 컵으로 하나 주세요." 아이들은 천 원짜리 햄버거를 마구 집어먹었따. 콜라 하나에는 빨대가 무려 5개나 꽂혀 있었다. "콜라 다 떨어졌어요, 언니." "가서 리필해 와. 일단 니가 먼저 가고, 그 다음은 옆에 너, 그 다음은 너, 그 다음은 카르 니가 갔다 와. 본전 뽑으려면 최소한 열 번은 리필해야 돼." 라이레얼의 말대로 아읻ㄹ은 돌아가며 콜라를 리필해 왔다. "더 먹을래?" "네에~!" "그럼 천 원짜리 햄버거 10개 더 사지, 뭐. 카르 너 이 돈 들고 가서 주문하면서 콜라 좀 리필해 와." "예, 언니." 아이들은 햄버거를 한 사람당 4개 이상 먹었고, 콜라는 무려 20번을 리필하였다. 2만1천2백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아이들을 배부르게 만들어준 라이레얼은 국제전자센터 게임 매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라이레얼은 가지고 온 게임을 전부 팔아치웠다. "깨끗하니까 가격 좀 잘 쳐주세요." 라이레얼이 생긋 웃으며 말하자 매장주인은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무, 물론입니다." 라이레얼은 자신이 산 가격보다 오히려 비싼 값에 게임을 매각했다. 아아~ 이래서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자들이 지니에게 잘해주듯, 남자들은 라이레얼에게 잘 해줄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것만으로 라이레얼은 이미 인생의 반은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임을 매각하니 약 15만원 정도가 나왔다. 라이레얼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게임 매장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 뒤를 카르와 어린 엘프들이 열심히 쫓아다녔다. '이 게임도 하고 싶고, 저 게임도 하고 싶고… 아아~ 다 하고 싶다. 요즘 신작이 많이 출시 됐네. 이걸 언제 다 사가야 할 텐데.' 한국의 게임 가격은 꽤 센 편이었다. 아직 비디오 게임기가 많이 보급이 되지 않아 게임 인구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 작으니 가격이 높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고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는 것이고. 라이레얼은 일단 옛날 게임 중에서 하고 싶었던 게임들을 중고로 구매한 다음 최근 출시작들을 구매 했다. 지출은 순식간이었다. 중고와 신품을 합쳐 10개 정도를 사자 30만원이 좀 안 되는 금액이 주머니를 빠져나갔다. 라이레얼은 사고 싶은 게임들이 아직 많았지만, 조만간 출시될 게임들을 생각해 돈을 절약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아예 텔레비전이랑 게임기를 하나 사서 내 방에 들여놨으면 좋겠는데. 그럼 침대에 누워서 할 수도 있잖아. 하지만 문제는 돈이 부족하다는 거지. 히로한테 부탁해 볼까?' 하지만 히로의 돈을 뜯어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앗! 군고구마다!" "군고구마 사주세요, 언니." "먹고 싶어요, 누나." 군고구마 노점상 앞에 멈춰 서서 옷깃을 붙잡으며 매달리는 아이들. 이직 돈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라이레얼은 군말 없이 군고구마를 사주었다. 아이들은 호호~ 불어가며 군고구마를 맛있게 먹었다. 카르는 재빨리 군고구마 껍질을 벗겨서 라이레얼에게 건네주었다. "드세요, 언니." "응." '아아~ 나의 언니가 내가 껍질을 벗긴 군고구마를 먹다니!' 이렇듯 라이레얼은 군고구마를 먹으며 생각했다. '행복한 게임 라이프를 위해서는 자금 확보가 필수야.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겠는데… 아!' 순간, 라이레얼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그 생각들은 점점 구체화 되어 갔다. 라이레얼의 레몬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라이레얼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맛있지? 많이 먹으렴. 후후~ 귀여운 것들." 이곳은 아이스크림 가게. 이이들은 큰 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퍼먹는 중이었다. 라이레얼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군고구마 실컷 먹고 싶지 않니?" "먹고 싶어요." 아이들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레얼은 웃음을 지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 언니가 군고구마 실컷 먹게 해줄까? 군고구마 말고 다른 것도 실컷 먹을 수 있어." "정말요?" "응. 너희들이 날 조금만 도와주면 돼."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는데요?" "후후~ 그건 말이지…." 히로는 라이레얼이 내민 서류를 살펴보았다. "이게 뭔가요?" "거기 써져 있잖아. 사업 계획서야." "사업 계획서요?" "응. 이젠 나도 일 좀 해보려구. 행복한 게임 라이프를 위해서." "…." 뭔가 이상했지만, 히로는 일단 사업 계획서를 읽어 보았다. "군고구마 장 사업 계획서… 사장 라이레얼, 비서 카르, 종업원 라이, 루, 루비… 엥?" 히로가 놀라 고개를 들자 라이레얼 뒤에 서 있던 어린 엘프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도 군고구마 장사 할거예요오~!" "돈 벌어서 맛있는 것도 많이 사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재밌을 것 같아요." 아이들이 한마디씩 하자 라이레얼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들었지? 얘들도 이렇게 하고 싶어하더라고. 그래서 같이 하기로 했어." "이 어린애들이 어떻게 장사를…." "원래 어렸을 때 세상 경험을 많이 해봐야 하는 법이야. 그리고 얘들도 이제 다 자랐어. 자기 용돈은 자기가 벌어서 쓸 때가 됐지." " 하, 하지만…." "스스로 돈 벌어봐야 돈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는 법이야. 그리고 어렸을 때 경제관념을 심어 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데. 안 그래, 히로?" "뭐, 그건 그렇지만…." 라이레얼의 말에는 히로도 공감했다. '하긴, 직접 용돈을 버는 것도 좋은 일이지. 자립심을 키울 수도 있고. 무엇보다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면 비싼 음식 사달라고 조르는 횟수가 줄어들겠지? 제발 식비가 좀 줄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알았어요, 라이레얼. 그런데 너희들 정말 잘할 자신 있니?" "네에~! 우리 정말 열심히 할 거에요오." 어린 엘프들은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자신감이라기보다는 군고구마를 실컷 먹고 싶을 뿐이겠지만. "그런데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으응. 일단 군고구마 리어카랑 장작, 고구마 등을 구입해야하니까 사업자금 50만원하고, 인형가게 앞에 자리 하나 내주면 돼." "헉! 50만원이나!"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갚을게." "이자는 됐으니깐 원금이라도 갚도록 노력해주세요." 그날 저녁. 라이레얼은 어디서 구했는지 군고구마 리어카를 끌고 나타났다. 아지, 정확히 말하면 카르가 리어카를 끌고 라이레얼은 옆에서 느긋하게 걸어왔다. '언니가 시킨 일이니 조금도 힘들지 않아.' 언제나 지극정성인 카르. 아아~ 라이레얼은 언제쯤에나 그런 카르의 마음을 알아줄 것인지…. 가게 앞에 군고구마 리어카를 설치한 라이레얼은 본격적인 아이들 교육에 나섰다. "여기에 이렇게 고구마를 집어넣고, 밑에 장작을 집어넣어서 굽는 거야. 알았어?" "네에~!" 아이들은 이제 곧 맛있는 군고구마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배웠다. 하지만 군고구마를 만드는 것은 모두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기본적인 것은 대충 알았지만,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어떤 때는 고구마가 탔고, 어떤 떄는 고구마가 설익었다. 결국 요리에 대해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인디가 나서서 도와주었다. "장작은 그냥 불을 붙여서는 불이 잘 안 붙어요. 먼저 신문지 같이 잘 타는 것으로 불을 붙인 다음 옮겨 붙게 해야 돼요. 그리고 고구마를 이렇게 계속 뒤집어 줘야 고구마가 타지 않고 골고루 익어요." 인디는 마치 예전에 군고구마 장사를 해본 듯 능숙한 솜씨였다. 오죽하면 라이레얼이 스카우트에 나섰겠는가? "너도 우리 가게에 취직할래?" "아, 아니에요." "월급 많이 줄게." "저, 저는 이미 히로님 가게에 취직해있답니다." "거기 월급 얼마 주는데? 기왕이면 우리 쪽으로 옮겨." "지금 뭐하는 거에요, 라이레얼?" 가게 밖으로 나온 히로가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인디는 '라이의 집' 에 소중한 직원이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월급 적게 줘도 파업 안 하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우리 가게 직원을 스카우트하려 하다니! 자꾸 그러면 자리 안 내줄 거에요!" "뭐? 너 감히 나의 언니에게 그 따위로…." "됐어, 카르. 그만해. 미안해, 히로. 내가 잠깐 눈이 멀었었나봐. 날 용서해 줘. 훌쩍~." 라이레얼이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히로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에요, 라이레얼. 다 이해해요. 인디 이 자식이 쓸모가 좀 많긴 하죠." "그럼 용서해주는 거야? 혹시 나중에 자릿세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무, 물론이에요." "나 계속 여기서 장사해도 되는 거지?" "무, 물론이에요. 장사 잘 되길 바랄게요." "응. 고마워, 히로." 히로는 인디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히로는 혹시 몰라 인디에게 협박성 멘트를 날렸다. "넌 이미 '라이의 집' 과 계약했어.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힘든 게 우리 가게의 특징이지. 배신자에게는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아, 알았어요, 히로님. 절대 다른 가게로 올겨가지 않을게요." 아이들은 인디의 가르침에 따라 군고구마를 만들었다. 루가 불을 때고, 라이와 루비는 고구마를 뒤집으며 체크했다. 이윽고, 완제품(?)이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군고구마를 꺼내 먹어보았다. "헤헤~ 맛있다." "응. 정말 맛있어." 라이레얼도 한번 먹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장사해도 되겠네. 그럼 이제 종업원 교육을 시켜볼까?" 라이레얼은 아이들에게 종업원 교육까지 시켰다. 그리고는 골판지에 커다랗게 써서 리어카 옆에 붙여 놓았다. 축! 라이의 집2 개점 맛있는 군고구마가 한 봉지에 2천원. 드디어 '라이의 집2'가 개점을 한 거이다. 조직표는 다음과 같았다. 사장-라이레얼 비서-카르 종업원1-라이 종업원2-루 종업원3-루비 정식 사업자 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어쨋든 이것도 사업은 사업이었다. 어린 엘프들은 어깨동무를 한 채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군고구마 사세요오~! 맛있는 군고구마 사에요오~!" "지금 장사하는 거야?" "아! 언니다!" 루시아는 아이들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한 봉지 줄래? 오빠랑 같이 먹게." "네. 잠시만 기달려주세요." 루비는 재빨리 군고구마를 봉지에 담아 건네주었다. 루시아는 아이들이 기특해 견딜 수가 없었다. "기왕 하는 거 열심히 해야 돼. 언니도 응원할게." "네, 언니. 언니 껀 서비스로 하나 더 넣어드렸어요. 헤헤~." "어머, 정말? 고마워 루비야." 루시아는 군고구마 봉지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날씨는 상당히 추웠지만, 장작불은 따뜻했다.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몸을 뜨겁게 하기 위해 리어카에 가까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가장 따뜻한 자리는 이미 라이레얼이 차지하고 있었다. "일은 우리가 다 하는데, 왜 언니는 돈만 챙겨요?" 라이의 당당한 태도에 힘을 얻은 루비와 루도 한마디씩 했다. "맞아요." "불공평해요." 라이레얼은 그런 항의를 한마디로 일축했다. "난 사장이잖아." "사장이면 다에요?" "애초에 이 사업 아이템을 생각한 게 누군데. 그리고 사업 계획서를 작성한 것도 나고, 사업자금을 끌어들인 것도 나야. 이것은 엄연한 내 사업이고 너희들은 고용된 종업원이야. 그러니 내가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당연해." "그, 그건…." 라이레얼의 논리는 지극히 타당한 것처럼 들렸다. 라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원가 공개해요!" "그건 사업상의 비밀이라 말할 수 없어. 아파트도 분양 원가 공개 안 하는 마당에 내가 미쳤다고 그걸 공개하니?" "라이는 이 사업체의 투명성이 의심스러워요!" "흥! 의심스러우면 어쩔 건데?" "사업 경영에는 투명성이 중요해요!" "이만큼 투명하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래?" "나머지 돈은 어디에 쓰인 거죠? 언니가 다 가져간 거죠?" 라이레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돈은 설비 투자와 신제품 개발에 투입되었어." "설비 투자랑 신제품 개발이요?" "응." "…."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군고구마 장사에 뭔 설비 투자와 신제품 개발이 필요한가? 참고로 순이익의 대부분은 이미 라이레얼이 자신의 비밀구좌로 빼돌린 뒤였다.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한 거야. 지금은 분배보다는 성장에 치중할 때야. 이렇게 해서 나중에 더 큰 이익이 남는다면 너희들한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갈 거야." "현재 우리나라 경제를 대표하는 단어는 양극화에요. 부유층은 해외 나가서 돈을 펑펑 쓴느데, 극빈층은 장롱 속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죠. 이게 다 성장 위주 정책의 폐단이에요. 이젠 성장 일변도로 나가기보다는 분배에 대해서도 생각할 시점이에요." 평소 열심히 뉴스를 시청한 라이의 진가가 여기서 드러났다. 라이레얼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버럭 화를 냈다. "쪼그만 게 뭘 안다고 큰소리야? 잔말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싫어요! 급료 올려줘요!" "맞아요! 올려주세요!" "백 퍼센트 인상!" 쾅! 쾅! 쾅! 결국 라이레얼은 폭력을 행사했다. 꿀밤을 맞은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으아아앙~." "엉엉엉엉~." 다음날. 아이들은 저번 접시 사건 떄 쓰였던 '강렬 투쟁' 머리띠를 질끈 묶고 군고구마 리어카 앞에 나타났다. 라이레얼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당황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러자 라이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어젯밤에 파업 찬반투표가 있었어요. 만장일치로 우리 군고구마 노조는 파업을 하기로 했어요. 이에 라이는 노조 대표로서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바에요." "뭐?" 예기치 못한 아이들의 행동. 라이레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파업 이유가 뭐야?" 라이레얼이 묻자 라이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일단 비인간적인 대우…." "너희들은 엘프잖아." "…." 라이레얼의 말에 라이와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맞다. 우리 엘프였지." "응. 맞아, 라이야. 우리 엘프야." "그러니까 비엘프적인 대우라고 하는 것이 맞아." 라이는 다시 앞으로 나섰다. "일단 비엘프적인 대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요." "뭐가 비엘프적인데?" "작업 환경이 너무 열약해요. 밖은 춥단 말이에요. 난로 설치를 요구하는 바에요. 그리고 어제 사업주는 노조원들에게 폭력을 휘둘렀어요. 이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에요. 정식 사과 성명서와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해줬으면 해요. 우리들은 편안한 작업 환경에서 안락하게 일하고 싶어요. 사업주가 종업원을 상냐아게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 이유는 급료가 너무 적어요. 우리는 재료원가 공개와 급료 5백 퍼센트 인상을 요구하는 바에요. 그리고 매출 증가에 따른 성과급도 원해요. 여기에 각종 수당과 산재보험 가입도 원해요. 명절 보너스는 기본이에요. 으음, 그리고 또… 아무튼 이거저거 많이 원해요." "…." 라이레얼이 종업원을 착취하는 악덕 사업주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요구는 너무 지나쳤다. 급료 5백 퍼센트 인상이라니! 그럼 한 사람당 하루에 5만원을 달라는 얘기였다. 셋이니까 15만원. 하루매출이 30만원 안팎인 걸 생각하면 무리한 요구였다. 게다가 각종 수단과 산재보험에 가입해 달라니! 그리고 그 외에도 이거저거 많이 원한다니! 그야말로 귀족 노조의 탄생이었다. 라이레얼은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누구 맘대로 노조를 만들어? 그리고 이건 엄연한 불법 파업이야! 당장 업무에 복귀하지 않으면 강제 진압하겠어!" 아이들은 재빨리 어깨동무 포메이션을 취했다. "동지들아~ 나아가자~" 어디서 배웠는지 민중가요까지 부르는 아이들. 역시나 뉴스의 영향일까? 라이레얼은 뒤에 서 있던 카르에게 말했다. "진압해! 폭력을 사용해도 좋아!" "예, 언니." 아이들은 어깨동무한 손에 힘을 주며 결의를 다졌다. "물러서지 마, 얘들아!" "우리 군고구마 노조의 힘을 보여주는 거야!" "악덕 사업주는 물러나라!" "라이는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을 테야!" "사측은 부당한 압력을 중지하라!" "폭력 진압 웬 말이냐?" "민주화 시대에서 이래도 되는 거냐?" "이런 식으로 노조탄압을 하시면 라이는 검찰에 고발할 거에요."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화가 폭발한 라이레얼은 직접 진압에 나섰다. 아이들은 머리디에 쓰인 그 말 그대로 강렬하게 투쟁했다. 진정한 노동 해방의 그날을 위하여…. 툭탁툭탁! 쿵! 쾅! 빠각! 결국 군고구마 사업장(?)은 폐쇄되었다. 엄청난 매출을 자랑하던 군고구마 사업장이 노사갈들으로 문을 닫은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본 히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업자의 임금 착취, 불투명한 경영, 분식 회계, 노조의 무리한 요구, 불법 파업, 폭력진압… 마치 우리나라 노사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군." 아이리스 2부 5권 Story 13 보물찾기 카운터에 엎드려 하품을 하고 있는데 지니가 나에게 다가왔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무슨 일인데요?” “가게에 관련된 일입니다.” 지니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건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자리를 옮겨 얘기하도록 하지요. 야! 나 대신 카운터 좀 맡아!” “예, 알았어요, 히로님.” 인디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고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하지만 인디는 생물학적으로 엄연히 남자다. 남자가 치마를 입다니! 이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다! “......” 뭐, 지가 좋아 입고 다닌다는데 신경 끄도록 하자. 무엇보다 잘 어울리기도 하고. 난 지니와 함께 직원실로 들어갔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니는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같은 커피라도 지니가 타면 뭔가 다르다. “드시지요.” 난 사양 않고 커피를 마셨다. 지니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럼 얘기를 시작하시지요.” “어제 건물주를 만나 얘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무슨 얘기요?” “건물주가 이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더군요.” “이민이요?” “예. 아들은 이미 미국 시민권자라 하더군요.” “미국 시민권자요?” “원정출산으로 낳았다고 합니다.” “......” 하긴, 미쳤다고 돈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애 낳겠냐? 우리나라는 속인주의를 택하고 있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속지주의를 택하고 있다. 속인주의란 혈연으로 국적을 정하는 것이고, 속지주의란 출생한 지역으로 국적을 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에 가서 애를 낳으면 그 아이는 우리나라 국적과 미국 국적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이중국적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국적자는 만 22세가 되기 전에 한쪽의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이중국적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대다수는 미국 국적을 선택한다. 그래야 원정출산한 보람이 있지 않겠나? 참고로 미국 시민권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미국 시민권을 갖게 되면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가능하니 영어 때문에 속 썩을 일 없고, 남자의 경우에는 병역의무를 피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정출산하는 부부들은 원정출산을 일종의 투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원정출산 비용 정도야 나중에 어학연수 보내는 것에 비하면 껌값이라나? 사실 그 의견에 대해서는 나도 동감한다. 영국이나 미국, 필리핀, 호주 등의 영어권 국가를 가보면 전부 한국인이다. 전부 영어 배우려고 몰려간 것이다. 백날 자동차 팔아봐야 뭐하나? 그 돈이 어학연수 비용으로 다시 해외로 빠져나가는데. 뭐, 원정출산 문제는 교육, 경제, 군대 등등 대한민국 사회 전반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얼마 전 원정출산한 아줌마 인터뷰를 보니 대답이 가관이더라. ‘한국이 살기에 좀 위험한 곳이잖아요. 언제 북한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입시 경쟁도 치열하고, 억지로 군대에 끌려가야 하고. 부모된 입장에서 아이를 좀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가 이 아줌마만큼의 모성애를 지니고 있다면, 대한민국 신생아수는 0명이 될 것이다. 사실 이러저런 이유를 대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나 병역 기피다. 그게 아니라면 원정출산 하기 전에 태아 성감별부터 할 리 없지. 그래, 다 좋다. 애가 미국 시민권자여서 병역 기피한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나? 문제는 이 애들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산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을 가지고 미국에서 살아간다면 병역 기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과 한국 국적을 가지고 한국에서 살아가다가 병역 의무를 질 때가 되면 한국 국적을 포기하니 문제가 되는 거다. 한국에서 살았다는 것은 한국인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혜택을 누렸다는 거다. 그런데 권리와 혜택을 누리고 난 후 책임과 의무는 기피하겠다니! 원정출산 전문여행사 앞에 써진 ‘권리는 두 배로! 책임은 반으로! 당신의 자식도 이중국적자가 될 수 있습니다!’ 라는 문구가 과장 광고는 아닌 셈이다. 내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어째서 원정출산을 법적으로 제재하지 않느냐는 거다. 원정출산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입국하는 것은 미국법상 엄연히 불법이다. 만삭인 상태에서는 아예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러니 만삭의 몸으로 출국하는 것은 사실상 불법인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원정출산에 대한 어떠한 법적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 이중국적자에 대한 제재 역시. 어째서일까? 만삭의 몸으로 장거리 비행기 여행을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고, 미국 역시 시민권 취득을 목적으로 한 원정출산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나라는 원정출산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는 걸까? “......” 뭐, 이유야 뻔하다. 원정출산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상류층이다. 이중에는 국회의원이나 장관, 심지어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사람도 있다(결국 당선은 안 됐지만). 입법을 하는 사람들이 원정출산의 최대 수혜자이니, 그 사람들이 미쳤다고 원정출산을 제재하는 법안을 입법하겠는가? 장려하지 않는 것만 해도 국민들은 고맙게 생각해야할 것이다. 으음, 안 그래도 신생아수는 점점 줄어드는데 원정출산은 점점 늘어가다니. 나라를 구성하는 필수 요건 세 가지는 국민, 영토, 주권이다. 이 셋 중 한 가지라도 없으면 나라는 유지될 수가 없다.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는 국민과 영토는 있었으나 주권을 상실했었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젠 국민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한국 영토 안에 미국 시민권자들만 살고 있다면 그게 한국이냐? 미국의 51번째 주지. “그런데 원정출산으로 낳은 아들이 미국 시민권자여서 건물주가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예? 건물을 내놓는대요?” “예. 저한테 건물 매입 의사가 없냐고 물어보더군요. 건물 전체를 매각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먼저 우리 쪽에 매각 의사를 타전해 온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라이의 집’ 이 입주한 이 건물은 지상 5층에 지하 1층 건물이다. 그중에서 우리가 지하 1층과 지상 1,2층을 임대하고 있다. 지하 1층은 창고로, 1층은 인형 가게로, 2층은 찻집을 비롯한 복합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사실상 우리 가게가 건물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으음, 임대료 부담도 컸으니 이번 기회에 건물을 통째로 매입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사일런스 백작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건물주가 급하게 떠나는 모양이니 시세보다 싸게 매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좁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무지 좁지요. 24평짜리 집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이사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이사요?” “건물을 매입해서 5층 전체를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집과 가게의 이동이 편리해질 뿐더러 평수가 배 이상 넓어지니 삶이 더욱 윤택해질 것입니다.” “그거 괜찮은데요. 그런데 건물 매입 자금은 충분한가요?” “이제까지 모아놓은 돈과 은행에서 매입하는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번 기회에 건물을 매입하여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리모델링이요?” “예. 기간은 한 달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가게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매출 감소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편의성과 훗날 더욱 많은 매출을 생각한다면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 역시 사일런스 지니! 눈앞에 닥친 일에 급급해 하기보다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라니! 나는 건물을 매입할 생각만을 했지, 매입한 건물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하지만 지니는 건물 매입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리모델링할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훌륭한 자가 내 밑에 있다는 것은 나의 홍복(洪福)이로다! “사일런스 백작님께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일을 진행시켜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공작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건물 매입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가격 협상부터 담보 대출까지 지니가 다 알아서 한 덕분에 나는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서류에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세 장 다요?” “예.” “뭐, 그러죠.” 그래도 사인은 열심히 했다. 사인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내 사인이 워낙 유니크해서 말이지. 건물 매입이 끝나자 바로 리모델링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게 설계도입니다.” 지니는 내 앞에 커다란 종이뭉치들을 늘어놓았다. 거기에는 도면과 함께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이건 누가 만든 건가요?” “부족한 솜씨나마 제가 만들어 보았습니다.” “헉! 사일런스 백작님이요?” “예.” “건축할을 배운 적이 있으신가요?” “예. 한때 취미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이쪽 세계의 건축 방식에도 관심이 많아 건너온 후에도 꾸준히 연구를 했구요.” “으음, 그렇군요. 그런데 이 설계도 믿을 만한 건가요?” “요즘 교제하는 여성 중에 건축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그 여성분께 이미 설계도를 검증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분께서 이번 리모델링 작업에 참여해 주시기로 약조되어 있습니다.” “......”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요즘 교제하는 여성’. 이번에는 건축 디자이너란다. 건축 디자이너면 상당한 엘리트. “20대 미모의 여성인가요?” “물론입니다.” “......”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 “그 여자 월수는 얼마나 되나요?” “프리랜서인지라 일정치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인지라 연수입이 최소 3억 정도......” “헉!” 3억이라니! 그것도 최소! 그런 여자랑 결혼하면 평생 무위도식해도 되겠다. 새삼 지니가 다르게 보인다. 난 지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우리 친하게 지내요, 사일런스 백작님." "물론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을 향한 저의 충성심은 조금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두 손을 움켜잡으며 서로의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저기......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그 여성분께서 얼마나 원하시는지? 너무 많은 금액을 원한다면 제가 좀 곤란한지라......"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십시오. 그 여성분께서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인품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감동하여 이번 일에 어떠한 금전적 대가도 원치 않늗나 말씀하셨습니다." "아하하, 그렇군요." 내 인품에 반한 게 아니라 지니의 얼굴을 보고 반한 것이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쨌든 공짜로 해준다는 게 중요한 거다. "그럼 자재비랑 인건비만 필요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최단 기간 내에 공사를 끝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 겠습니다. 그동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휴가라도 다녀오십시오." "하긴, 제가 요즘 너무 열심히 일하긴 했지요." "그렇습니다. 이번 기회에 재충전 시간을 가지실 필요가 있다고 생 각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가게 입구에 공지를 써 붙였다. (라이의 집 내일부터 휴업) 라이의 집이 어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서비스로 다시 찾아뵐 것을 약속드립니다. "왠지 이상한 느낌이야." "응? 뭐가?" 내가 묻자 루시아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갑자기 휴업을 하니 좀 서운한 느낌이 들어서. 넌 어때?" "뭐, 그건 그렇지. 갑자기 실업자가 된 느낌이랄까?" "그동안은 잘 몰랐었는데, 이 가게에 정이 많이 든 것 같아." 루시아는 쓸쓸한 눈빛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난 그런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짝 끌어안았다. 조금만 기회가 생겨도 바로 스킨십을 시도하는 나. 루시아와 조금이 라도 가까워지고 싶은 나의 노력은 이렇듯 처절했다. "괜찮아, 루시아. 한 달 후에는 더 멋진 모습으로 재개장할 테니까." "응." * * * * 드디어 라이의 집이 휴업에 들어갔다.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부를 깨끗이 비워야 했다. 건물을 매입하는 시점에서 다른 가게들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었기에 건물 전체를 비우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1층의 진열대에 놓인 인형들을 박스 안에 넣고 포장했다. 크로니스와 인디는 건물의 장식물과 가구등을 밖으로 옮겼다. "꼭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해야 하나요?" "이번 리모델링은 외부 공사뿐만이 아니라 내부 공사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건물은 일제시대 때 지어졌습니다.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이번 기회에 보강 공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흐음, 보강 공사 중요하죠. 무엇보다도 안전이 우선이니." "그렇습니다. 다행히 이 건물은 튼튼하게 지어졌기에 별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세월의 흐름에 따른 부식을 보강하고, 현재 공법에 맞게 재시공할 생각입니다." "그 점에 대해선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잘 알아서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예. 최선을 다해 아이언스 공작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난 창고에 있는 짐들을 옮기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어린 엘프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자신의 몸보다도 커다란 박스를 두 손으로 들고 걸어가는 라이. 앞이 보이지 않는데다가 박스가 무거운지 심하게 비틀거린다. 비틀비틀~. 저러다가 어디 부딪치지나 않을까 걱정이군. 쿵! "우에에엥~!" "......" 저럴 줄 알았다. 난 재빨리 라이에게 다가갔다. 라이는 날 보더니 더욱 크에 울음을 터뜨렸다. "우에에엥~우엥~우엥~!" 원래 애들은 주위에 누군가가 있으면 더 크게 울기 마련이다. 난 라이을 끌어안고 다독여주었다. 토닥토닥~. "우리 라이 많이 아파?" "흑~ 여기 무릎을 부딪쳤어요오~. 그래서 무릎이 막막 아파요오~." "그래? 그럼 오빠가 호~해줄게. 그럼 안 아플 거야." 난 라이의 무릎에 입을 대고 호호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손으로 열심히 문질러주었다. 그러자 라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다행이군. 내가 안심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앙~!" 앗! 이것은 루비의 울음소리! 바닥에 쓰러진 루비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펑펑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같은 루가 같은 포즈로 쓰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루비랑 이마를 부딪쳤어요." 자세히 보니 루의 이마는 빨갛게 부어 있었다. 세게도 부딪쳤군. "그런데 넌 왜 안 울어?" 내가 묻자 루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제가 울면 형이 달래줄 거예요?" "내가 미쳤니?" "그러니까 안 우는 거예요." "......" 제법이군. 은근히 머리 쓰는데. 그럼 루비가 우는 건 내가 달려주길 바라기 때문일까? 아무튼 귀여운 여자아이가 구슬프게 울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빨리 달려줘야지~. "루비 많이 아프니?" "으앙~ 루랑 이마을 부딪쳤어요오~. 그래서 이마가 막막 아파요오~." "그래? 그럼 오빠가 호~ 해줄게. 그럼 안 아플 거야." 난 루비의 이마에 입을 대고 호호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손으로 열심히 문질러주었다. 아까 라이를 달래던 상황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3분 정도 달래주자 루비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난 손가락으로 남아있는 루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루비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패앵~! "헉쓰!" 얘 지금 뭐한 거야? 내 청남방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묻어있는 끈적거리는 액체. 점성이 장난이 아니군. "......"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를 봤나! 감히 오빠의 옷에 코를 풀다니! 그것도 왕건으로! 난 주먹을 불끈 쥐어 루비의 머리통을 내려치려했다. 하지만 훌쩍거리는 루비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내 옷에 코를 푼 죄는 단매에 쳐 죽여도 부족할 정도지만, 그래도 이 귀여운 아이를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때린다면 펑펑 울 것이 뻔하다. 넓은 마음을 지닌 내가 이해하고 용서해얃지. "울지 말고 웃어, 루비야. 루비는 웃을 때가 제일 예쁘니까." 난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렇게 말했다. "오, 오빠......" 빨갛게 변한 루비의 얼굴. 루비는 붉은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나를 보았다. 난 계속해서 루비의 머리를 슥슥 쓰다음어 주었다. "헤헤~." "그래. 그렇게 웃어야 예쁘지." 난 루비를 껴안아 일으켜 주었다.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나중에는 얼마나 예뻐질까? 어쩌면 루엔보다 훨씬 예뻐질 수도 있겠군. "형." "응? 왜?" "이것 좀 보세요." "응? 이게 뭐니?" 루가 내민 것은 누렇게 변한 종이였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끝은 이미 낡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난 그것을 펼쳐 보았다. "헉! 이게 뭐야?" 누런 종이에는 그림과 함께 글씨가 쓰여 있었다. 글씨는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인지 희미해져 있었지만,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거 어디서 발견했니?" "아까 저쪽 창고에서 발견한 거예요." "저쪽 창고라면......" 루가 가리킨 창고에는 각종 잡동사니가 모여 있었다. 우리 가게 물품이 아니라 건물주의 물품이다. 그 창고에는 별별 물품이 다 쌓여 있었다. 다리가 부러진 책상부터 옛날 재봉틀까지. 건물주 말에 의하면 돈 될 만한 것은 다 빼냈으니, 가지고 싶으면 갖고 버리고 싶으면 버리라고 했다. 내가 저쪽 창고 물품을 굳이 버리지 않은 이유는 아직 창고에 공간이 많이 남아있기에 굳이 저 창고까지 비울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이번에 리모델링을 하며 저쪽 창고에 쌓인 잡동사니들도 다 버릴 생각이었다. "좀 자세히 말해보렴." "그러니까 어떻게 된거냐면요......" 루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는 어린 엘프들에게 지하 창고를 정리해줄 것을 부탁했다. 정리라고 해봐야 쌓여잇는 박스를 옮기는 정도다. 어린 엘프들은 처음에 조금 일을 하는가 싶어니 이내 흥미가 떨어졌다. 그때 라이가 제안을 했다. "우리 숨바꼭질 할래?" "와아! 그거 좋겠다." "빨리 하자!" 순식간에 의견을 일치를 본 아이들은 가위바뷔보로 술래를 뽑았다. "잠깐. 그러니까 창고 정리를 시켜놨더니 숨바꼭질을 했다고?" "네." "......" 이것들이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의 말을 콧구녕으로 들었나? 어디서 감히 숨바꼭질을! "아무튼 계속 얘기해 봐." "네." 술래는 루비였다. 루비가 뒤로 돌아 숫자를 세는 동안 라이와 루는 어디에 숨을지 고민했다. 라이는 상자 뒤에 잇는 작은 공간에 숨었고, 루는 잡동사니가 쌓여잇는 창고를 기억해 내고는 그곳으로 기어 들어갔다. 불도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장소. 루는 탁자 밑에 웅크리고 앉았다. 백까지 숫자를 센 루비는 라이와 루를 찾아 나섰다. 상자 뒤쪽에 삐죽 삐져나온 회색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라이 찾았다!" "아! 걸렸다." 라이는 순순히 항복했다. 이제 루를 찾는 일만 남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루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루비는 잡동사니가 있는 창고에 루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라이와 같이 그 곳에 들어갔다. 루비는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루비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꺄아!" "앗! 왜 그래, 루비야?" "저, 저기......" 문 바로 앞에는 사람 키만 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초상화에는 제복을 입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루비는 그곳을 보고 깜작 놀란 것이다. 아무튼 이 소동 때문에 루는 알아서 기어 나왔다. "무슨 일이야?" "저 초상화가 너무 무서워." "에이~ 저런 초상화가 뭐가 무섭다 그래?" 그 순간 갑자기 초상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쾅! "꺄아!" 루비는 재빨리 라이 뒤로 후다닥 숨었다. 루는 초상화를 다시 벽에 걸어놓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인해 틀은 이미 완전히 깨져있었따. 그리고 그 때문에 뒤판이 열렸다. "그 안에 그게 들어 있었어요." "으음, 누군가가 초상화 뒤에 감춰 놓았다는 거군." 뭔가 냄새가 풍긴다. 그냥 단순히 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는 절대감각의 소유자다. 왠지 이번 일을 끝까지 파헤쳐 보고 싶어지는군. 난 창고로 다가갔다. 창고 안은 불빛이 없어 어두웠지만,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는 빛 덕분에 분간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루의 말대로 바닥에는 사람 키만 한 초상화가 떨어져있었다. 틀이 박살나고 뒤판이 열려진. 난 초상화를 뒤집어 보았다. "헉! 이 사람은." "형 이 사람 알아요?" 루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 사진 속의 사람은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인자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인자해 보이는 얼굴과는 반대로 눈동자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검은 제복. 내가 알기로 이 옷은 일본식 제복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으음,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전 알 것 같습니다." "헉!"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는 사일런스 지니. "소리 좀 내고 다녀!"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정말 이 초상화의 인물이 누군지 아시나요?" "예." 지니는 전신 초상화를 훑어보며 말했다. "이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입니다." "아니, 이토 히로부미요?" "그렇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라면,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맞고 죽은......?" "예. 바로 그 사람입니다." "......" 잠깐, 지니가 이토 히로부미를 어떻게 아는 거지? 나도 몰랐는데. "이토 히로부미인지 어떻게 알았어요?" "제 어찌 아이언스 공작님 조국의 역사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1905년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지요. 후에 추밀원 의원장이 되어 1909년 만주 시찰을 겸하여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차 중국 하얼빈에 갔다가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맞아 죽었지요. 한국 입장에서는 조국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인물인 만큼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일본에서는 지금도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 어째서 우리나라 역사를 나보다 지니가 더 잘 아는 걸까? 이는 내가 무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세계사가 선택 과목인 것만 봐도 우리나라 역사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뭐, 내가 이렇게 불평을 하면 교육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사교육은 자네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있는 걸세. 뭐, 우리나라 교육이 원래 그러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국사나 세계사쯤이야 국영수에 비하면 별 거 아니라는게 교육부의 입장이니.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 초상화가 왜 여기 있는 건가요?" "글쎄요. 아무튼 이건 전(前) 건물주의 물품이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요." "그건 그러네요. 건물주 벌써 외국으로 떠났나요?" "아닙니다. 모레 떠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건물주를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 "제가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 * * * 지니는 전화로 만남을 요청했고, 다행히 건물주는 흔쾌히 승낙했다. "잠시 후에 이곳으로 온다고 하는군요." 난 건물주(지금은 아니지만)가 올 때까지 가게 안을 정리했다. 가게는 어느새 반 이상 비워져 있었다. 내일부터는 이곳에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왠지 섭섭하다. 으음, 내일부턴 나도 백수가 되는 건가? 집에서 뭐하고 놀아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되는군. 이번 기회에 루시아와 단 둘이 여행이나 떠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이들을 남겨두고 여행을 갈 루시아가 아니다. 분명 아이들을 데려가고 싶어 하겠지. 문제는 아이들을 데려갈 경우 데이트가 아니라 MT가 된다는 거다. 무슨 단합대회하려는 것도 아니고. "하아~!" 난 앞으로도 순탄치 않을 루시아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검은색 외제차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난 지니와 함께 가게 앞으로 나갔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70대 정도로 보이는 대머리 할아버지였다. "이분이 전 건물주이신 박일만 씨입니다." 지니의 소개에 나는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이번에 건물을 매입한 사람입니다. 본명은 박영웅 이지만, 주로 아이언스 히로라 불리고 있ㅅ브니다." "반갑네. 나는 박일만이네." 박일만씨는 내 손을 붙잡고 악수를 했다. "일단 들어가시죠." "그러지." 나는 그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지니는 재빨리 커피를 내왔다. 박일만 씨는 다리를 크게 벌리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튀어나온 배와 두 개의 턱이 그가 비만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상당히 깐깐해 보였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부른 건가?" "사실 오늘 창고를 정리하던 중 우연히 이토 히로부미 전신 초상화를 발견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뭐, 그건 아무 상관없지요. 중요한 건 그 초상화 뒤에 이게 숨어있 었다는 겁니다." 난 초상화 뒤에 껴 있던 누런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난 볼 수 있었다. 그가 놀라 헛바람을 들이키는 모습을. "헉! 이, 이건......" "적혀진 글과 그림을 봐서는 지도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이토 히로부미 초상화 뒤에 숨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네요. 혹시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으음." 그는 비대한 몸을 소파에 기대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난 지니가 타준 '역전다방 미스 김이 타준 커피보다 맛있는 커피' 를 마시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이건 보물지도 같네." "예? 보물지도요?" "하아~ 얘기는 우리 아버지 대(代)로 거슬러 올라가네. 우리 아버지 의 이름은 돌쇠였네." "예? 돌쇠요? 무슨 머슴도 아니고......" "맞네." "예?" "머슴 맞네." "......" 내가 놀라든 말든 그는 얘기를 계속했다. 때는 일제시대 초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개화기 때부터 시작된 서양 문물의 유입은 더욱 가속화 되었고, 전통적 가치관과 삶은 많은 변화를 맞았다. 조선시대 말기인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나,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사람의 인식이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시와 먼 시골의 경우에는 아직도 전통적 삶의 모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충북 음성에 위치한 박(朴)씨 가문. 그 가문에 머슴으로 있는 돌쇠. 가진 것은 넘치는 힘밖에 없는 돌쇠는 그날도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다. "엿차! 엿차!" 퍽! 퍽! 그가 기합을 내뱉으며 도끼를 내려칠 때마다 장작은 정확히 두쪽으로 갈라졌다. 어느새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그는 갑자기 웃통을 풀어헤치더니, 상체에 찬물을 촤악 끼얹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살려 다시금 장작을 팼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최예분. 최(崔)씨 가문의 여식으로 박씨 가문에 시집 온 여인이었다. 가문끼리의 정략결혼이었지만, 남편과의 사이는 원만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3년이 지나도 애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를 낳지 못하는 것은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가지 허물인 칠거지악(七去之惡) 중 하나였다. 결국 남편은 얼마 전 첩을 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녀에게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애 낳지 못한 죄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첩이 들어오자 그녀의 남편인 박충제는 첩에게 완전히 빠져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신경을 써 줬으나, 지금은 완전히 첩의 방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한창 때의 나이에 독수공방을 하는 것은 의금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 바늘로 허벅지를 푹푹 찌르며 버텨온 날들이 어언 한 달. 이제는 그것도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마당에서 웃통을 벗은 채 장작을 패는 돌쇠였다. "엿차! 엿차!" 힘차게 장작을 패는 돌쇠의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돌쇠에게 말했다. "이리 와 보거라." 그러자 돌쇠는 도끼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요, 마님?" "오늘도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요, 마님. 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구만유." "호호~ 말하는 모습이 아주 기운차구나." 마침 몸종이 상을 들고 왔다. 그녀는 그것을 마당에 내려놓도록 지시했다. "네가 먹도록 하거라." 그녀의 말에 돌쇠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요,마님. 지가 어찌 마님의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요?" "호호~ 괜찮다. 네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대견해서 내리는 것이니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마, 마님." "어서 먹거라." "그, 그럼 감사하게 먹겠습니다요." 돌쇠는 마당에 앉아 수저를 들고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가 두 번 수저를 놀리자 밥그릇은 어느새 깨끗하게 비워졌다. "호호~ 맛있게 잘 먹는구나. 말순아, 돌쇠에게 쌀밥을 가득 퍼다 줘라." "예, 마님." 몸종인 말순이가 바가지에 한가득 밥을 퍼오자 돌쇠는 다시 맛있게 퍼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못브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요." "왜 그러나?"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스토린데요. 혹시 나중에 돌쇠가 마님을 데리고 도망치지 않나요?" "어떻게 알았나?" "......" 어떻게 알긴. 척보니 딱이구만. "아무튼 그래서......" 돌쇠는 마님이 잘해주는 것에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하늘같은 마님이 자신같이 미천한 머슴을 신경 써 주시다니! 그것은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었다. 돌쇠는 마님을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에 마님의 몸종인 말순이가 돌쇠를 찾아왔다. "마님께서 널 데려오라고 하셔." "아니, 이 시간에 마님께서 뭐 때문에 날 부르신대?" "따라와 보면 알아." 돌쇠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마님의 부름이니 어쩔 수 없이 말순이의 뒤를 따랐다. "발소리를 줄이고, 목소리를 낮춰.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안돼." "어째서?"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아, 알았어." 둘은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이쪽은 마님방으로 가는 길이 아니자녀." "잔말 말고 따라오라니까."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말순이의 재촉에 돌쇠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여기야." "여, 여기는......" 돌쇠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물레방앗간이었던 것이다! 물레방앗간이 어떤 장소던가? 조선시대 밤의 역사 중 상당수는 이곳에서 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였다. 애초에 설립 목적은 낙차하는 물의 힘을 이용해 바퀴를 돌려 곡식을 찧거나 빻기 위함이나, 그 취지가 무색해질 정도로 남녀의 밀회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물레방앗간인 것이다! "물레방앗간은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아니, 뭐가 너무한가?" "너무 진부하잖아요. 무슨 80년대 사극 에로무비도 아니고." "진부함이란 간결한 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실화이니 끝까지 듣게." "......" "안에서 마님이 기다리고 계셔. 어서 들어가 봐." 말순이의 말에 돌쇠는 쭈뼛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물레방앗간은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인영이 보였다. 창문틈으로 들어온 달빛 덕분에 돌쇠는 그 인영이 마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 마님. 지 왔습니다요. 헉! 왜, 왜 이러시남유?" 돌쇠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입을 연 순간 마님이 그의 품에 안겨왔기 때문이다. "돌쇠야." "마, 마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요." "돌쇠야. 날 더 이상 마님이라 부르지 말거라." "아, 아니...... 마님을 마님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릅니까요?" "예분이라 불러다오." "지, 지가 어찌 마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요?" "내가 이 집에 시집온 지도 3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그년이 집안에 들어온 이후 남편이라는 작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참을 만큼 참았지만,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구나." "그, 그래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요, 마님. 주인어른께서 아시면 경을 칠 겁니다요." "모르게 하면 되지 않느냐? 자, 내 가슴이 뛰는 것을 느껴보거라." 그녀는 돌쇠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댔다.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에 돌쇠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비록 양반댁 여식이라 하나, 나 또한 여인이다. 밤이면 밤 마다 사내의 품을 그리워하는 여인이란 말이다."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돌쇠를 바라보았다. 돌쇠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너무나도 고귀하고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여인을 앞에 두고 참아야 하다니! 돌쇠는 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차려진 밥상을 마다하는 것은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손만 뻗으면 마님이 내 것이 된다. 꿈에 그리던 마님을 안을 수 있단 말이다! 하지만 이 일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호통을 치는 주인어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멍석말이 당하는 자신의 모습도. 운이 좋으면 반병신이오,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양반댁 마님을 건드린 죄는 목이 잘려도 할말 없는 중죄였다. "이, 이러면 안 됩니다요, 마님." 돌쇠는 머슴 근성까지 동원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손을 빼고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돌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게냐? 내 이토록 네게 안기고 싶구나. 대체 얼마나 나를 고통스럽게 할 작정이냐?" "마, 마님......" "예분이라 부르라 하지 않았더냐 .대체 뭘 망설이는 게냐? 너 역시 날 원하고 있질 않느냐? 어서 나를 안거라. 어서!" 돌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더 이상 주인어른과 멍석 말이에 대한 생각은 나지 않았다. 지금 그는 단지 본능에 충실한 남자였다. 돌쇠는 바로 마님을 덮쳤다. 그리고 허겁지겁 그녀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마, 마님! 지도 전부터 마님을 좋아하고 있었구만유." "예분이라 부르거라. 난 지금 네 마님이 아닌 예분이란 이름의 여인일 뿐이다." "예, 예분 아씨......" "그래, 돌쇠야. 어서 날 기쁘게 해 보거라." "사랑해유. 사랑해유, 예분 아씨!" "저기요." "왜 그러는가?" "이 부분은 스킵하시고 다음 부분부터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어째서인가?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비디오로 봤었거든요. 제목이 '불타는 마님의 몸'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흐음." "마님과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그 다음엔 어찌 되었나요?" "그럼 거기서부터 말해주도록 하지. 그렇게 아버지가 마님과 하룻밤을 지내고 난 다음......" 물레방앗간에서의 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렬적이었다. 그녀는 그 동안 참아온 세월이 억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욱더 돌쇠에게 빠져들었다. 돌쇠 역시 스녀에게 완전히 빠져잇었기에, 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운우지락 (雲雨之樂)을 나누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였던가? 나름대로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자 집안 내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안 것은 3개월 정도가 지난 후였다. 처음에는 아닐 거라 생각했고, 아니기를 바랐지만 이젠 더 이상 부정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하늘을 원망했다. 3년 동안 갖은 치성을 드려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다. 그래서 석녀(石女)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당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지금 아기가 들어섰단 말인가? 그녀는 네 달 동안이나 남편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를 낳게 되면 혼외정사를 한 사실이 들통 날 것은 뻔할 뻔 자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뱃속으로 들어가 임신되 었다고 생각할 리 없으니. 그녀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따.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몸종 말순이가 그 사실을 주인어른께 일러 바친 것이다. 주인마님이 3개월 동안이나 머슴과 놀아나 임신까지 했는데, 몸종인 자신이 무사할 리 없었다. 어떤 변명을 해도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말순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무튼 사실을 알게 된 박충제는 불같이 분노했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그것도 머슴과 놀아나 임신까지 했다는데 그 누가 열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당장 아내를 끌어내 주리를 틀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가 개망신이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소리 없이 처리해야 했다. 그는 먼저 아내의 친정은 최씨 가문에 연락을 넣었다. 최씨 가문 역시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하는지라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빨리 처리하기를 바랐다. 비록 그 대상이 딸이라 해도 말이다. 박충제는 안채에 불을 질러 아내를 태워 죽일 생각이었다. 그럼 증거가 남지 않을 테고, 화재로 인해 사망했다면 가문의 명예 또한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돌쇠는 아무나 시켜 뒷산에 묻을 생각이었다. 돌쇠가 그런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히였다. 박충제는 자신의 계획을 첩에게 알렸고, 첩은 이제 자신이 정부인이 될 수 있다고 좋아했다. 그런 둘의 대화를 첩의 몸종인 분녀가 엿들었고, 분녀는 자신의 애인인 개똥이에게 그 얘기를 해주었다. 개쫑이는 돌쇠의 둘도 없는 친구였기에, 바로 돌쇠에게 알려주었다. 돌쇠는 재빨리 마님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큰일 났습니다요, 마님." 돌쇠는 마님에게 주인어른의 계획을 알렸다. 가만히 앉아 죽음을 당할 수 없었던 예분과 돌쇠는 함께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박충제의 계획대로 안채에선 불길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미 돌쇠와 예분은 값나가는 패물을 챙겨 도주한 뒤였다. "참 감동적인 스토리네요. 마님과 머승의 사랑이라니. 무슨 변강쇠 스토리도 아니고......" "그렇게 아버지가 마님과 함께 도망쳐 도착한 곳이 경성(京城)...... 즉, 지금의 서울이네. 그곳에서 마님은 애를 낳았지." "예? 결국 낳았어요?" "낳았으니까 내가 여기 있지." "예? 그 말씀은......" "내가 그 아이라는 거네." "......" 그렇군. 이 할아버지가 돌쇠와 마님의 사랑의 결정체였군. 이런 놀라운 일이! 내가 놀라든 말든 그는 얘기를 계속했다. "아버지께서는......" 돌쇠는 예분과 함께 경성에 정착해 살기로 했다. 그는 머슴이었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이름을 새로 지었다. 성은 주인어른의 성이었던 박(朴)씨로, 이름은 돌 석(石)자에 쇠 철(鐵)을 써서 석철로...... 합해서 박석철. 이것이 돌쇠의 새 이름이었다. 그리고 석철은 아들의 이름을 돌 석자에 북두칠성의 두(斗)자를 써서 석두라 지었다. 석철은 배운 거라곤 장작 패고 짐 나르는 것밖에 없는 무식한 머슴 이었기에 마님......아니, 아내의 도움이 컸다. 아내는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집을 사는 등 살림을 꾸렸다. 다행히 패물의 가격이 상당해 한동안은 별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잇었다. 하지만 한강 물도 퍼다 쓰다보면 마르는 법인데, 작은 옹달샘이야 오죽 하곘는가? 돈은 빠르게 사라졌다. 석철은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종로경찰서 청소부 일자리를 얻었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독립군 전담 부서가 있어서 강력범 검거보다는 독립군 검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하의 고문실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당시 종로경찰서 고등계 경부는 미와 경부였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이라 할 만큼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김두한이를 아직도 못 잡았나? 감시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를 거스르다니! 내 대일본제국을 위해서 기필코 그 더러운 조센징 놈을 잡아 죽이리라!"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당시 종로 주먹계를 평정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 상인들을 보호 하기 위해 애썼고, 그 때문에 사사건건 일본인들과 부딪혔다. 장군의 아들인 그는 16세 때 쌍칼에게 영입되어 주먹 세계에 입문 했고, 18세 때 신마적, 구마적 등을 꺾고 종로 우미관 뒷골목의 주먹 황제로 등극했다. "저기요." "또 뭔가?" "그 부분은 영화 '장군의 아들' 과 드라마 '야인시대' 로 봤거든요. 대충 요약하고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네." 어쨌든 종로경찰서에서 일하게 된 석철의 눈에는 일본도를 차고 다니는 순사와 독립군을 잡아 조지는 형사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내면서 일본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국가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위에 잇는 일본인들이 일본을 찬양하는 말만 해대니, 무식한 석철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애초에 애국심이라는 것이 없었던 그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박석철이던 그의 이름은 나까무라 다케시[中村 武]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나까무라 니혼[中村 日本]으로 바꾸었다. 대일본제국의 기상을 이어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핏줄만 달랐지 몸도 마음도 정신도 완전히 일본인이 된 다케시는 최선을 다해 일본을 섬겼다. 그런 그의 충성심은 우연히 종로경찰서 서장에게 알려졌고, 다케시는 결국 순사로 채용되었다. 순사가된 다케시는 열과 성을 다해 독립군들을 잡아넣기 시작했다. 일본의 적은 곧 그의 적이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앞잡이'였던 것이다! 그의 집안 벽에는 커다란 일장기가 걸려있었다. 그것도 그냥일장기가 아닌 욱일기가 일장기는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이 그려져있는 반면, 욱일기는 떠오른 태양의 기가 사방으로 뻗치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이 욱일기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일본이 대회침략활동을 할 떄 군용기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지금도 일본 해군은 이 깃발을 쓰고있다.) 이 점만 봐도 그의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수있을것이다. 그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조선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이토 히루부미였다.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인물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같이 이토히로부미초상화 앞에서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안중근의사의 이름이 적힌 짚인형을 바늘로 찌르며 저주하는 등 의 만행을 일삼았다. "아버님께서 정말 엄청난 매국노셨군요."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버지께서는 이토히로부미다음으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 을사오위인 과 함께 을사오위인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일본제국을 위해 큰 공을 세우신 송병준 백작님을 존경하셨다네 그리고 그분들 중 몇 분 과는 친분으르 쌓기도 하셧지." "예? 그사람들은 을사오위인이 아니라 을사오적 아닌가요?" "일부 무지한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군. 하지만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위인들이시네. 대일본제국을 위한 그분들의 업적을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감히 그분들을 을사오적이라 부를수 있겠는가?" "........" 장난하냐? 하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그지없었다. 아버지가 매국노임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군. 뭐 을사오적의 후손들이 나라 팔아먹고 받은 땅 되찾으려고 소송을 걸고 건 소송마다 족족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매국노임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나라 팔아먹고 얻은 재산을 법적으로 인정해주다니! 상식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이해할수없는일이다. 법관들은사유재산이 중요하다 어쩐다 말을 하는데 그 사유재산을 인정해주는것이 국가다. 그런데 국가를 팔아서 얻은 사유재산을 국가가 인정을 해줘야 한다? 이건 어느모로보나 납득하기가 힘들다. 이는 국가가 매국을 장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 천지에 이런 좋은 나라가 어디있겠는가? 기회가 되면 언제든 매국을 하십시오 여러분! 지금 독립투사들 후손들은 대부분 극빈층을 벗어나지 못하고있습니다. 하지만 매국노들은 어떻습니까? 매국해서 얻은 여러분들의 재산. 그귀중한 재산을 대한민국 법정이 끝까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이런식으로 범국민적 매국 캠페인을 벌이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다. 아무튼 법이 이 모양이니 매국노들이 이렇게 떳떳하게 가슴펴고 사나보다. "아버지께서는 그 후에 고문관으로 잠시 일하셨지. 아버지께서 는 자신의 손으로 독립투사 몇명을 완전히 보내버렸다는 것이 큰 자랑이셨네. 고문하고 돌아온 날이면 날 무릎위에 앉혀놓고 독립투사들을 어떻게 보내버렸는지를 자랑스럽게 얘기해 주셨지. 나역시 그런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러웠네." "......." 왜이렇게 주먹이 근질거리는 걸까? 아아~ 한대 치고싶다. 완전히 보내버리고 싶어라~ "그때 난 정말 행복했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지만 않았어도 난 계속 나까무라 니혼이란 이름으로 살고있었을텐데......" 일본은 아무런 소득이 없는 중국에서의 전쟁에 싫증이 났다. 그래서 유럽식민지로있는 동아시아를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아시아쪽에는 일본이 필요로하는 자원이 매장되어있었기에, 일본은 이 지역이 절실히 필요했다. 일본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고철과 석유의 전면 수출 중단을 결정했기때문이다. 그랬기에 일본은 동아시아를 점령해서 직접 자원을 채굴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그힘을 바탕으로 태평양의 패자가 될 생각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대담하게도 기동 타격대를 이용해서 하와이의 진주만과 필리핀의 미국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봤을때 이러한 일본의 공습은 실패였다.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이 바다에 나가있어서 피해를 입지 않앗고 유류 저장시설도 피해를 면했던 것이다. 이 진주만 공습이 아니였다면 과연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였을까? 이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진주만 공습이 아니었더라도 미국과 일본은 필연적으로 부딪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면전을 피하고 외교적으로 해결했을 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쩃든 일본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다 못해 코피까지 냈고 미국은 엄청나게 열받았다. 열받은 미국은 바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따. 엉클 샘의 조카들이여 진격하라! 이 구호대로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섰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쟁터로 나가 아버지의 조국과 싸웠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목적은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게 쓴맛을 보여주고 나면 여기저기 벌여놓은 일들때문에 바쁜 미국이 알아서 전쟁을 피하려 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쓴맛도 정도껏 보여줘야지. 사자의 코를 쑤셔 쌍코피를 내고도 그냥 넘어갈수있을거라 생각했나? 일본은 애초에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처음에 잘나가나 싶던 일본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일본이 점령한 동아시아 영토는 다시 연합군 측으로 넘어갔고, 1942년 4월에는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옹ㄹ라탄 것처럼 그들에게는 오직 공격만이 있을뿐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더욱더 많은 물자와 인원이 필요해졌다. 나까무라 다케시는 이러한 물자와 인원을 조달하는데 앞장섰다. 젊은이들을 강제 징병해 전쟁터나 광산으로 보냈고 처녀들은 종군 위안부로 보냈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 숟가락 하나까지 징발했음을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패색은 점점 짙어져갔다. 그 결정타가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였다. 1942년 6월 4일 일본군은 반전을 노리고 항공모함과 전함을 긁어모아 미드웨이 섬을 향해 진격했으나 패배했다. 이와중에 중요 항공모함과 우수조종사들을 전부 잃어버렸고 이로인해 전략의 주도군을 상실했다. 일본은 점점 막다른 길에 몰렸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코앞까지 몰려오자 본토에선 300만명이 옥쇄를 결심하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일본 본토를 점령하려면 100만명이상의 미군이 사망할 거라는 예상과 소련이 개입할 것이 두려웠던 미국은 간단하게 끝내기로 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투하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천황은 항복을 선언한다. 말을 하던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대일본제국은 패배하였네." "저,저기 .......그렇다고 우실것까지야......." "자넨 슬프지도 않은가? 만약 일본이 이겼다면 지금쯤 아시아는 하나가 되어있을걸세.대동아공영이 현실로 실현되었을거란 말이네ㅐ. "......"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구? 그는 잠시동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참후 마음이 좀 진정 되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잘나가던 우리 나까무라 가문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네. 조선내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네. 여전히 사회시스템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엉ㅅ고 일본의 패망소식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으니까. "예? 하지만 국사 교과서에는 광복일에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오는 사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사진 자체는 조작이 아니지. 단 그사진이 찍힌 시기가 9월 이후라는 거네. 생각해ㅑ보게 일본이 패망했다 해도 그 소식이 조선으로 바로 전해졌겠는가? 물론 고위층 일본인 관리들에게는 전해졌겠지 하지만 그게 뭐 좋은일이라고 그걸 홍보하겠는가? 숨겨도 모자랄 판에. 그리고 그때 사회 시스템은 일본인들이 전부 장악하고 있었네. 그런상황에서 태극기를 뛰쳐나오는건 미치지 않는 이상 하기 힘든일이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일본이 이길거라 믿고 계셨네. 하지만 어머니생각은 다르셨지. 어머니께서는 일본이 패할것을 대비해 재산을 처분해 일본으로 도망갈것을 주장하셨지." "재산이 얼마나 되었나요?" "아버지께서는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엄청난 재산을 모으셨네 . 특히 을사오위인들과 송병준 백작님등 몇분과 약간 친분이 있으셔서 그분들의 일을 도와주며 받은 돈이 꽤 되었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동산만 족히 백억원은 될걸세." "헉! 배,백억!" "아버지께서는 어미니 말씀을 따라 재산을 운반이 편한 금괴와 보석으로 바꾸셨네. 일본 역시 패망을 예상했었는지 각국에서 긁어모은 귀금속과 유물들을 본국으로 실어날랐지. 아버지께서는 재산을 일본으로 옮기려 했지만 떄가 너무 늦어 해외유출이 힘들었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그 재산을 어딘가에 숨기셨지. 일단 몸만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돌아와 재산을 꺼내실 속셈으로 말이야." "그래서 일본으로 피신하셧나요?" "결국은 못했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께서도 일본이 그렇게 갑자기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모르셨으니. 미국이 원폭을 투하할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시 일본 본토에는 300만명의 군인들이 옥쇄를 하고있었네. 만약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수개월 몇년까지도 길어졌을걸세.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며 전쟁은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끝나버렸지." "그럼 어떻게 되었나요/"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이 패망하자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였던 미와 경부는 집안에 꼭꼭 숨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보였기 떄문일까? 김두한은 지하실에 숨어있던 미와 경부를 끌어냈다. 그리고 남산 약수터로 끌고 가 패 죽인다음 매장했다. 그동안 충실하게 앞잡이 노릇을 했던 나까무라 다케시 역시 무사할리업었다. 종로 주먹패들은 다케시네 집에 쳐들어와 다케시를 끌어냈다. 그 자리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도 있었다. 예분은 무슨말을해도 남편을 살릴수없다는것을 알았기에 제 발 아들만은 살려달라고빌었다. 다케시의 아들과는 직접적으로 ㅅ원수진일이 없었기에 종로 주먹패들은 모자에게는 손을대지않았다. 종로주먹패들은 다케시를 어디론가 끌고 갔고 그후 그의 아내와 아들은 다시는 그를 보지못했다. "광복이 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자 나는 이름을 다시 한국식으로 바꾸엇네." "아! 그럼지금이름이.....?" "맞네. 지금 일므인 박일만 으로 바꾸었지. 성은 예전 아버지성을 따랐고 일만이라는 이름은 일본만세라는 의미로 내가 직접 지은거네." "오오! 이름에 그런 깊은 매국심이 숨어있었다니." "아버지께서 그렇게 돌아가신뒤 나는 어머니와 하마께 다른곳으로 떠나야했지 아버지의 명의로 되어있던 부동산은 전부 몰수당했네 아버지께서는 가진 부동산도 꽤 되셨지. 어머니께서 부동산 투자에 소질이 있으셨는지라. 동산은 전부 귀금속으로 바꾸어 어딘가에 숨겨놓으셨고 부동산은 전부 뺴앗겼으니 우리 모자는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은 수밖에 없었지. "혹시 아버님께서 힌트 같은것도 안 주셨나요?" "그럴 겨를조차 없었네 단한가지 단서조차 없었기에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 "그랬군요." "그이후 한국은 정말 빠르게 변했네. 6.25가 터지고 4.19혁명.5.16군사정변 10.26사건 12.12사태 5.18광주민주항쟁 등등 후에 나는 법정에 재산 반환 청구 소송을 걸었네.아버지께서 열심히 매국하셔서 모은 재산을 국가가 뻇어간다는게 말이나 되는가?" "글쎄요., 제생각엔 말이 되는것 같은데 ........ 아무튼 그래서 이기셨나요?" "물론이네.이건물도 그때 소송으로 되찾은거지." "숨긴 귀금속을 찾을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물론 했네 . 하지만 단서도 없었던 데다가 굳이 그 돈이 아니더라도 남부럽지않게 살수있었네. 소송을 통해 부동산을 돌려받자마자 부동산 값이 폭등하더군. 몇십억에 불과하던 부동산이 백억이 되는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지." "........" 독립투사들은 재산을 전부 독립자금으로 쏟아부어 그 자손들은 현재 극빈층으로 살고있다. 아 ㅠㅠ 귀찮아 _ㅠ ㅎㅎ 우선 여기까지 ㅎ 아이리스 2부 5권 Substory 7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어느 날 아이들이 내 앞에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는 애들 가진 부모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것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오~?" "헉!" 이것은 상당한 고난이도 질문이기에 답변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다수 부모들은 '애들은 그런 거 몰 라도 돼!' 라고 호통을 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예전에는 그랬었고. 하지만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 그래선 안 된다고 나오더라. 성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시켜야 한다나 뭐라나? 어렸을 때 바른 성(性) 정체성을 확립해야 커서도 올바르게 행동한다고 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호통을 친다면, 아이들은 성에 관련된 얘기 를 더욱 더 안으로 숨기고 결국은 잘못된 성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다. 그러므로 지금 잘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기가 어덯게 생기는 거냐면......" "......"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설명을 하자면......" ".....?" "그러니까 그게......" ".....!" "그게......" "빨리 말해주세요오~!" "......" 이럴 땐 대체 어떻게 답변을 해줘야 하는 거지? 난 고민해 보았지만, 적당한 답젼이 떠오르지 않았다. "으음, 어린 것들이 별 걸 다 궁금해 하는구나. 건방지게 말이지. 어린애면 어린애답게 인형이나 가지고 놀 것이지,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건지를 궁금해 하다니. 순진해야할 아이들이 어째서 이렇 게 발랑 까진 걸까? 나의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나? 너희들은 어떻 게 생각하니?" 그러자 라이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답변해주기 싫으시면 안 해주셔도 돼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 면 되니까요." "그,그래줄래?" 이 순간만큼 라이가 예뻐 보인 적이 없었다. 이 오빠가 곤란해 하 는 걸 알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주겠다니! 그런데 누구한테 물어 볼 생각이지? 루시아? 지니?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 "라이레얼 언니한테 물어봐야지." "그래. 라이레얼 언니한테 물어보자." "라이레얼 누나라면 분명 잘 말해 줄 거야." "......헉!" 라이레얼에게 애들 성교육을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 기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전원 스톱! 원위치로!" 내가 소리치자 아이들은 내 앞으로 다시 몰려왔다. "왜 그래요, 오빠?" "그냥 이 오빠가 설명해주도록 하마." 아이들은 자리에 앉았다. 난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고민했다. 잠시 고민 중. 이윽고 고민을 끝마친 나는 고전적인 대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주는 거야." "예? 황새요?" "응." 그러자 라이가 갑자기 팔짱을 끼며 고개를 획 돌렸다. "응? 라이 왜 그러니?" "거짓말쟁이!" "헉!" "오빠는 거짓말을 하는 나쁜 오빠에요!" "무, 무슨 소리니?" "라이가 라이 친구 이코한테 물어보니 황새는 아기 같은 거 안 물 어준다 그랬어요!" "......" 그, 그러니? 하긴 라이코스도 새니 황새 사정을 잘 알려나? "어쩔 수 없군. 그럼 이 오빠가 진실을 말해주는 수밖에. 너희들 이 듣고 충격 받을까봐 그동안 숨겨왔거늘. 이렇게 까지 알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지. 사실 아기는......" 꿀꺽! 누가 침 삼켰니? 한마디라도 놓칠 새라 길고 뽀족한 귀를 쫑긋 세우는 아이들. "다리 밑에서 주어오는 거란다." "헉!" 놀라 숨을 멈추는 아이들. 그때 라이가 나서서 물었다. "그런데 그 다리가 교량(校梁)을 뜻하는 거에요, 사람 다리를 뜻 하는 거에요?"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냥 넘어가도 좋을 것을 꼬치꼬치 캐묻다니. 우리 라이는 참으 로 버르장머리 없고, 눈치없고, 겁 없는 3무(三無) 엘프구나." 이때 쓰이는 다리는 교량과 사람 다리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 고 있다. 어쨋든 제왕절개를 하지 않은 이상 엄마 다리 밑에서 주어 온 건 사실이지 않은가? "라이레얼 언니한테 가자, 얘들아." 바로 뒤로 돌아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들. 난 놀라 소리쳤다. "거기 서! 오빠 말 아직 안 끝났어!" 그러자 다시 내 앞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나도 어쩔 수 없군. 이젠 정말로 진실을 말해주는 수밖에.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위험한 거다. 때로는 잔인한 진실보다 아 름다운 거짓이 필요할 때도 있다. '모르는 게 약' 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다른 몉에서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금이야 말로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켜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것은 부모의 의무라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자라면서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했다. 학교에서 성교육 비디오라고 틀어준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 득했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성교육 비디오의 내용을 떠올려보자면...... 철수라는 고등학생이 있다. 철수네 반 담임 선생님은 예쁜 여자였다. 철수는 어느 날 밤 잠을 자던 중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 예쁜 여 선생이 땡땡이무늬 투피스를 입고 나와 옷을 살랑살랑거리며 춤을 추었다, 철수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불을 들춰보 았다. 장면은 바뀌어 화장실. 철수는 화장실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빨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 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거기서 뭐하니?" "아, 아니에요, 엄마. 속이 좀 안 좋아서요. 들어가서 주무세요." "그래. 너도 빨리 자라." 시간은 흘러 아침이 되었다. 장소는 강변 산책로로 바뀌었다. 철수가 갑자기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한다. "내가 그런 지저분한 상상을 하다니! 나 같은 건 살 자격도 없 어!" 다시 장면이 바뀌며 철수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하지만 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 다.] 학교 친구가 철수에게 잡지를 빌려준다. 그 잡지 표지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여자 사긴이 장식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철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 위에 잡지를 펼쳤 다. 카메라는 갑자기 철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비추기 시작했다. 흐르는 땀과 거칠어지는 숨소리. 다시 장면은 아침의 강변 산책로. 또 다시 뛰기 시작하는 철수. "내가 그런 나쁜 짓을 하다니! 난 더러운 인간이야!" 달리다 지쳐 숨을 몰아쉬는 철수. 그런 철수 앞에 나타난 아버지. 아버지는 철수의 등을 다독여주며 말했다. "나도 너만 한 나이에는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단다." "아, 아버지......"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 성교육 비디오는 여기서 끝이 났다. "......" 이 성교육 비디오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개연성이라는 게 무시되다 못해 아예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대체 꿈에 여선생이 투피스를 입고 나와 살랑살랑 흔들어 댄 것 과 빨래를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자꾸 뛰는 건데? 주제가 '운동을 하자' 야? 난 자다가 그 비디오를 보고 민밫위 훈련 비디오인 줄 알았다. 민 방위 훈련 비디오가 아니라면 저렇게 열심히 달릴 리가 없으니. 하지만 내 옆에 앉아있던 친구의 생각은 달랐다. "야! 저게 왜 민방위 훈련이야? 저거 지진 대피 훈련이야, 임마!" "......" 그렇다. 나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민방위 훈련인지 지진 대피 훈련인지 구분도 안 가는 비디오를 성교육 비디오라 틀어주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학생들에게 피임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성교를 하 라고 장려하는 것이다, 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에. 어른들의 성은 부끄러운 것, 숨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러 한 사회적 인식은 성을 더욱 어둠 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그래도 옛날 같았으면 문제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아 이들은 인터넷을 통한 음란물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막고자 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켜주어 스스로의 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다. 구시대적 성교육의 피해자는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일 수 밖에 없으니. "......" 으음, 난 왜 이렇게 옳은 소리만 하는 걸까? 그래. 나는 정직과 신용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아이언스 히로가 아니던가? 그런 내가 위기를 넘기기 위해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난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기는 남자와 여자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면 태어나는 거야." "예? 그렇고 그런 짓이 뭐예요?" 아이들은 흥미가 생기는지 내 앞에 쪼그려 앉아 귀를 쫑긋 세웠다. 저 호기심 가득한 여섯 개의 눈동자! 지적 호기심을 이런 쓸데없는 곳에 투자하다니! 차라리 영엉 단어를 하나 더 외우란 말이다, 이것들아! "그렇고 그런 짓이란 그렇고 그런 짓을 말하는 거지." "틀렷어요, 오빠" "응? 틀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라이야?" "무언가를 설명할 대는 상대가 해당 동의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 다면 모를까, 그럴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의어로 설명하면 안 되요. '사람은 인간이고, 인간은 사람이다' 라고 설명하면 의미전달이 안되잖아요. 게다가 지금 같은 경우는 동의어인데다가 동음어이 기까지 해요. 이는 사람을 사람이라 정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이에요." "......" 언제나처럼 쓸데없는 부분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하는 라이. 평소에도 이렇게 똑똑하면 얼마나 좋을까? 으음, 그럼 귀여운 맛이 사라지려나? "그래, 알았어. 제대로 설명해주면 되잖아. 그렇고 그런 짓이란 남자랑 여자가...... 아! 이해하기 쉽게 오빠와 루시아 언니로 설명 해 줄게. 그러니까 이 오빠가 루시아에게 뽀뽀를 한 다음 침대로 데 려가서......" 쫑긋! 쫑긋! 쫑긋! 아이들 귀가 10cm는 더 길어진 느낌이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 청자의 반응이 이렇게 좋으면, 화자도 흥이 나기 마련이다. "천천히 루시아의 옷을 벗겨......" "헉!" "뭘 그리 놀라고 그러니? 이건 당연한 수순이란다. 그 다음엔 루 시아의 가슴에 손을......" 퍽! 갑작스레 뒤통수에서 전해져오는 충격. 누굴까? 누가 감히 본좌의 뒤통수에 손을 댄 것일까? "......" 물어보나 마나다. 나의 뒤통수에 손을 댈 사람은 뻔하지 않은가? 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 아줌마가...... 헉! 루시아!" 당연히 일루니아 여사님이 서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놀랍게도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루시아였다. 루시아는 팔짱을 낀 채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가슴에 손을 어쨋다고?" "......!" 헉! 설마 다 들은 건가? "아,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난 열심히 변명했지만 루시아의 눈빛은 점점 차갑게 변했다. 그 와 더불어 점점 낮아지는 체감 온도. 루시아의 저런 눈빛은 일루니아 여사님의 '찢어 죽일 것 같은 눈 빛' 이나 카르의 '얼려 죽일 것 같은 눈빛' 보다 더 무서웠다. "아, 아니야, 루시아!" "뭐가 아니야?" "나, 난 널 두고 이상한 상상을 한 게 아니라......" "침대로 데려가서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진다며?" "아, 아니...... 그게 꼭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진다기보다 는......" "게다가 애들 듣는 앞에서 말이야." "......" 아이들이 관련되었다 하면 무조건 신경이 곤두서는 루시아. 난 이제 죽었다! 안 돼. 천하의 아이언스 히로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변명할 말을 생각해 보자. 변명할 말을. "그, 그게 말이야...... 얘들이 자꾸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거냐고 묻기에 어쩔 수 없이...... 아! 맞아. 전부 얘들이 잘못한 거야. 전부 얘들 탓이야." 내가 아이들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아이들은 벌떡 일어나 항의 했다. "무슨 말이에요, 오빠?" "루비는 잘못한 거 없어요." "우리는 결백해요." "결백은 개뿔이 결백! 니들이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거냐고 묻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니야? 그러니 니들이 나빠. 알았어? 니 들 전부 나쁜 엘프야. 라이는 나쁜 엘프1, 루비는 나쁜 엘프2, 너는 나쁜 엘프3. 알았어, 이 나쁜 엘프들아?" "우에에엥~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에요오~." "으아아앙~ 루비는 착한 엘프란 말이에요오~." "엉엉~ 형 혼내줘요, 누나." "어머! 울지 마, 얘들아." 아이들 물음에 놀란 루시아는 재빨리 아이들을 껴안고 달래주었 다. 그 사이를 틈타 난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 순간 들려오는 루시아의 싸늘한 목소리. "거기 서" 그 목소리에 내 몸은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원위치." 후다닥! 난 재빨리 몸을 원위치 시켰다. "애들을 울리면 어쩌자는 거야? 그리고 뭐? 나쁜 엘프? 얘들만큼 착한 엘프가 세상에 어디있어? 이렇게 착하고 귀여운 엘프 있으면 어디 데려와 봐! 그리고 니 잘못을 왜 애들에게 덮어씌워? 애들이 뭘 잘못햇다고. 잘못은 니가 했잖아. 어떻게 이 귀여운 아이들을 그렇게 윽박지를 수가 있어? 그리고......"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지라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루시아의 잔소리를 새겨들었다. 물론 잔소리를 듣는 중에 가끔 아이들을 노 려봐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니들 루시아 가고나면 다 죽었어! "앗! 오빠가 라이를 노려봐요!" "루비도 노려봤어요!" "누나 가고나면 우릴 때리려는 게 틀림없어요." 아이들은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아이들 의 그런 행동은 루시아의 화를 더 돋웠다. 그 때문에 잔소리 듣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잔소리 하는 걸 보니 아줌마 다 됐구나, 루시아. 하긴 벌써 애가 셋이니 아줌마라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 난 루시아가 아줌마여도 좋아~. 약 30분에 걸친 루시아의 잔소리가 끝나자 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잔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의외로 많은 체력 과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잔소리 한번 듣고 나면 머리가 멍해지고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내가 탈진해 있는 사이 아이들은 루시아에게 물었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오~?" "뭐?" 깜짝 놀라는 루시아. 난 루시아가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했다, 잠 시 당황하던 루시아는 대다수 부모들처럼 행동했다. "어린애들이 못하는 말이 없어! 애들은 그런 거 몰라도 돼! 어디 서 버릇없이......" "잠깐만, 루시아." 난 루시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왜 그래?" "내가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말이야......" 난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조기 성교육의 중요성을 루시아에게 말 해주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듣던 루시아도 점차 나의 말에 공 감하는 듯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줘야지." 난 루시아와 함께 다시 애들 앞에 섰다.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건지 지금도 궁금하니?" "네에~!" "좋아. 그럼 오빠가 알려줄게 아기는...... 아! 이렇게 말로 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낫겠다. 효율적인 시청각 자료 활용이 학습 효 과를 극대화시키니까 말이야. 이 오빠가 침대 밑에 숨겨둔 CD와 잡지들이 있거든. 그걸 보며 우리 배워보자꾸나." "뭔 소릴 하는거야? 그리고 그거 언니가 다 내다버렸어." "뭐? 다 내다버렸다니? CD랑 잡지를 전부 다? 침대밑에 잘 숨겨 놓았던 그것들을?" "그래. 저번에 청소하다가 발견됐기에 언니가 전부 내벼렀어. 넌 어떻게 그런 지저분한 것들을 볼 수 있니? 하여튼 남자들이 란......" 난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침대 밑은 뒤져보았다. 놀랍게도 침대 밑은 텅텅 비어있었다. 단 한 장의 CD도, 단 한 권의 잡지도 남아있 지 않았다. "헉! 나의 컬렉션들이! 내, 내가 그걸 어떻게 모은 건데......" 어떻게 이런일이! "어흐흐흑~." 밤마다 루시아 몰래 보는 것이 나의 취미였는데. 보물찾기하러 갔다 온 사이 다 사라졌을 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작별 인사라도 해두는 건데. 미리 보안 마법을 걸어두지 않은 나의 잘못이 크다. 그나저나 이 아줌마는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의 컬렉션들 을 전부 내다버렸단 말인가? 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애들 앞에 섰다. "미안하다, 얘들아. 시청각 자료가 전부 사라졌구나. 흑~."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워?" 때마침 라이레얼이 길게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왔다. 아이들은 라이레얼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오~?" 그럭자 라이레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냐고? 그건 말이지......" "헉! 안 돼!" 결국 난 아이들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야단을 쳤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감히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에 대해 궁금해 하다니! 네놈들이 간뎅이가 땡땡 붓다 못해 배 밖으 로 튀어나왔구나! 전부 단매에 죽고 싶은 게냐?" "우에에엥~ 라이는 단매에 죽기 싫어요오~." "으아아앙~ 오빠 무서워요오~." "엉엉~ 형 나빠요." "시끄러! 뭘 잘했다고 울어? 응? 오빠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무 릎 꿇고 손들고 있어. 그리고 오늘 저녁은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난 펑펑 우는 아이들을 놓아둔 채 방을 나왔다. 응? 조기 성교육은 어쩌냐고?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성교육은 뭔 성교육. 그냥 교육하기도 바 빠 죽겟는데. 이제부터 애들이 쓸데없는 생각 못하도록 과외나 시키든지 해야 겠다. 정말로 학원을 한 다섯 개씩 보내 버릴까?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애들을 뺑뺑이 돌리면 루시아와 단 둘이 있을 시간이 많이 생길 텐데. 그나저나 오늘밤부터는 뭘 보가 잔다냐? 그 컬렉션들을 다시 모으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텐데. "에휴~ 오늘부터 열심히 인터넷 뒤져 봐야지." story 14 설날 이제 며칠 있으면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구정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달의 변화를 기준으로 한 역법인 음력을 써왔기에 구정이야말로 진정한 설날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사실 민족 최대 명절이 설날이냐 추석이냐 말이 많긴 하다. 물론 어린이들이야 무조건 설날이 민족 최대 명절이라고 바득바득 우길 것이다. 이건 나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당연 세뱃돈때문이다ㅑ. 아이들이 설날이 아니면 언제 그렇게 큰 돈을 만져 보겠는가? 하지만 설날 때 수입은 대부분 어머니 주머니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뿌린만큰 거둔거야' 라는 어머니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어머니께선 내가 친척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었기에 니가 세뱃돈을 받을수 있었다. 라는 주장을 펄치셨고, 그주장은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었다. 세뱃돈은 친척들 사이에서 소득 재분배의 효과를 가지고 오기도 했다. 농사 짓는 큰아버지께서는 5천 원짜리 한장을 세뱃돈 수입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애 많은 집 같은 경우에는 지출보다 수입이 많아진다. 이는 양육비 보전 측면까지 있다, 출산 장려 차원에서라도 세뱃돈의 하한선을 정하는 것은 어떨까? "으음. 정부에 한번 건의해 볼까나?" 하지만 그건 지금 당장 신경 써야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코앞에 닥친 문제는 저쪽에서 눈을 회번뜩거리고 있는 어린 엘프들이다. "삼 일 후면 설날이야" "난 세뱃돈 많이 받으려고 세배하는 연습까지 했어." "라이는 세배하느 거 막막 좋아 세뱃돈 받는 건 막막막 좋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까 보니까 라이레얼 언나랑 카르 언니는 세배하는 연습까지 하고 있었어. 우리도 세배하는 연습하자. 세배를 예쁘게 해야 언니랑 오빠가 세뱃돈을 더 많이 줄테니까." "그래. 우리 방에 들어가서 연습하자." "........." 저것들 말하는 것좀 봐! 아이들은 세배 연습까지 할 정도로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순수한 의도에서가 아닌 오직 금전적 이득을 목적으로 말이다. 새해를 기쁘게 맞이하려는 설날이 어찌하여 세뱃돈 챙기는 날로 변질되었단 말인가! 이것은 급격한 자본주의로 인한 황금만주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올해는 경제 상황도 안좋았고, 따라서 내 지갑 상황도 안좋다,. 하지만 이런 것을 생각해줄 만큼 어린 엘프들은 착하지 않다. 신정 때 뜯어간 것도 모자라 구정 때도 뜯으려 하다니! 뭐, 나 어렸을 땐 신정 때는 외가에, 구정때는 친가에 가서 세뱃돈을 타냈다. ",.,,,,," 헉! 설마 과거의 업보란 말인가? 문제가 어린 엘프들뿐이면 말을 안한다. 어린 엘프들 저러는 거 야 애들이어서 그런다고 이해해 주자. 그런데 라이레얼은 왜 애들보다 더 난리야? 라이레얼은 아주 작정을 했는지 카르한테 세배하는 연습까지 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카르는 거울을 보며 하루에 만 번씩 세배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시키는 라이레얼이나 시킨다고 하는 카르나.. 자기들끼리만 그러면 별 상관 없을 텐데. 문제는 아이들에게 바람을 넣었다는데 있다. 애들 지름 저러는게 다 라이레얼의 영향을 받아서다. 난 가뜩이나 얇은 지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물을 조금 빼돌리는 건데.... 돈이 없다고 하면 세뱃돈을 좀 깎아주려나? "......" 그럴리 없다. 지금 애들 행동을 보건데........ 나 : 이 오빠가 돈이 없단다. 그러니 세뱃돈은 조금만 받으렴. 라이 : 안돼요! 우리는 땅파서 세배 하나요? 루비 : 맞아요! 우리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 뿐이예요! 루 : 세뱃돈은 집을 팔아서라도 줘야하는 거예요 나 :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같으니! 누가 그러라고 가르쳤어? 응? 말해봐 이런엘프들 : 라이레얼 언니(누나)요오~! 이럴게 뻔하다 국가 경제 사정과 내 지갑 사정은 어린 엘프들에게 있어서 조금도 신경 쓸 가치 없는 문제일 테니. 아아~ 정녕 세뱃돈을 절약할 묘안이 없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한탄을 하는데 인디가 무언가를 잔뜩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응? 그게 뭐니?" "아! 설빔이예요." "설빔? 레이저빔도 아니고 설빔이라면......" "설날을 맞이해서 새로 장만하는 옷과 신발, 장신구 등을 말하는 거예요." "나도 알아, 임마!" 인디는 쇼핑백에서 빨간색 비단을 꺼내들었다. "이것 좀 보세요 정말 예쁘지 않아요?" "그걸로 뭐하려고?" "한복 만들 생각이예요." "헉! 한복?" "예." 그렇다! 설날하면 한복이 아니겠는가? "그,그럼 루시아가 한복 입은 모습도 볼수 있는건가?" "물론이예요 루시아님의 한복은 이미 만들어 놓았는걸요. 라이님과 아이들 한복도 다 만들어 놓았어요." "그,그래?" "예, 이걸로는 라이레얼님과 카르거 만들거예요." 한복은 이제 예식복 성격이 강해졌고, 그러다보니 가격이 꽤 비싸다, 특히나 여자 한복 같은 경우에는 적게는 수십만원부터 많게는 백만원이 넘어간다. 원재료부터가 비단인데다가 무늬가 워낙 화려하다보니. 다행히 우리 집에는 인간(드래곤?) 재봉틀 인디가 있음으로 해서 원단값밖에 나가지 않는다. 한복을 맞추는 돈이 반 이하로 절약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그 원단은 무슨 돈으로 샀니?" "아! 저, 저기 그게....." "괜찮으니가 말해보렴." "히, 히로님 카드로 긁었어요." "히,히로님 카드로 긁었어요." "......." 뭐라? 내 카드로 긁어? "이 자식이 진짜......" "루시아님께서 한복 입은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 멈칫 루시아들의 한복 입은 모습이라고? 난 인디의손을 움켜잡았다. "잘 했어, 임마, 그런일있으면 앞으로도 부담 갖지 말고 내 카드로 긁으렴" "예,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히로님. 그럼 전 한복을 만들어야 하니 방으로 들어갈게요." "그레. 살펴 들어가렴." 인디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자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얼렁뚱땅 넘어간 듯한 느낌이...... 뭐, 한복 입은 루시아를 볼 수 있다면 말야. 그나저나 가게가 쉬니 할일이 없어 죽겠다.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도..... "아! 여기 아이템이 떨어져 있네, 그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하나?" 소파에 누워 패드를 붙잡고 오락을 하는 라이레얼과 그옆에 찰싹 달라붙어 공략집을 읽어주는 카르.. "저,저기.....텔레비전 좀 봐도 \될까요?" "안돼." 딱 잘라 말하는 라이레얼 "인간 주제에 감히 언니가 오락을 하는데 텔레비전을 보겠다니!" 얼려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는 카르.. 한마디만 더하면 맞아 죽겠군.. "아,아니예요 하던 오락 계속 하세요." 이사 가면 라이레얼 방에 텔레비전 하나 들여놔 주던지 해야지.. 백수가 된 나는 뭔가 할일이 없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루시아 방을 슬쩍 들여다 보니 루시아는 없고 라이와 루비가 부둥켜 안고 자고 있었다. 둘다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흘리며, 지저분한 것들 같으니라구. 그나저나 지금이 몇신데 아직까지 자고 있는 거니? 난 라이를 흔들어 깨웠다. "우웅~~ 라이 졸려요오~~ "어젯밤에 뭘 했기에 지금까지 자는 거야?" "라이는 어젯밤에 잤어요." "......" 어젯밤에도 자고, 오늘 낮에도 자고, 오늘 밤에도 자고...그야말로 나태한 엘프의 전형을 보여주는군. "루시아는 어디갓니?" "우웅~ 언니는 이모랑 같이 나갔어요,. "이모? 이모가 누구야?" "일루니아 언니요." "......." 이젠 일루니아 여사님을 자연스럽게 이모라구 부르는군,. 혹시 이건 나와 루시아에게서 양육권을 빼앗아 가려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음모가 아닐까? 누구든지 라이를 노린다면 그땐 사생결단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서 라이를 뺏어 가지 못하리! 라이는 다시 엎어져서 잤고, 난 집을 나왔다. 집을 나와 봐야 딱히 갈곳이 없었다. ------------------------------------------------------------------------- 잠시 생략... 난 어슬렁 어슬렁 가게로 찾아갔다.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가게는 공가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지니는 안전178p 마지막 ~180p마지막 --------------------------------------------------------------------------- 앗! 저곳은 10년 동안 계룡산에서 피자를 만들던 도인이 하산해서 차렸다는 '마스터 피자' 가 아니던가 우리 아이들이 저집피자를 굉장히 좋아하지. 난 애들을 위해 피자나 한판 사갈 생각으로 피자집으로 들어갔다. 피자집 안에선 연인들이 다정하게 피자를 먹고 있었다. 루시아랑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어! 저기 뺀질이다." "아! 정말 히로네ㅐ." 익숙한 목소리. 난 고개를 휙 돌려보았다. 창가 쪽에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헉! 루시아" 난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가 루시아 옆에 앉았다. "여기엔 어쩐 일이야?" "언니랑 쇼핑하다가 애들 생각나서 들렀어." "......." 헉! 어떻게 나와 똑같은 생각을! 연인끼리는 마음이 통한다고 하더니, 이것이야말로 이심전심이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이것좀 먹어" "루시아는 자신이 먹던 피자와 콜라를 나에게 내밀었다. "너는?" "난 많이 먹었어." "으응~" 난 빨대를 입에 물고 콜라를 마셧다. "......." 잠깐. 이빨대는 아까까지 루시아가 물고 있던 건데.. 헉! 그,그렇다면 간접 키스? 갑자기 빨대에서 향긋한 향이 나는 것 같다. 난 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콜라를 열심히 마셨다. 일반적으로 이런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는 콜라가 리필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리필을 몇 번 하느냐에 얼마나 본전을 뽑느냐가 달려있다. 무한 리필에 도전해 주마! 그순간 아르바이트생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애기 들었어?" "응? 무슨애기?" "쿠폰 일곱장으로 치즈 크러스트 리치 골드 피자 훼밀리 사이즈 먹은 여자아이말이야." "아! 그애. 쿠폰 일곱장 내밀면서 당당하게 '고구마 두줄 있는 걸로요' 라고 말했다는 애 말하는 거지?" "응. 그작고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혼자서 훼밀리 사이즈 한판을 다 먹어치웠다는 게 믿겨지니?" "정말이야?" "응.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피자판을 카운터에 내밀며 피자를 리필해달라 그랬대." "말도 안돼!" "진짜야 그때 카운데에 있던 내 친구가 기절했잖아." "그래서 리필은 했데?" "그럼 어떡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리필을 해줫더니 그것도 다 먹었대잖아 혼자서 훼밀리 사이즈 두판을먹어치운 거야. 그것도 10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여자아이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나도 몰라. 그 때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귀신에 홀린것 같았대. 한 목격자 얘기를 들어보니 '마치 피자가 스스로 움직여 소녀의 입속으로 다이빙하는 것 같았다' 라고 하더라. "어머머머머!" "........" 저 아르바이트생들이 누구 애기를 하는지 알 것 같군... 어느새 피자집의 전설로 남게된 라이. 앞으로 있을 라이의 식도락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라이에 이어 나도 리필 신화를 한번 이룩해 볼까? 일반적으로 패스트푸드점 콜라 한잔이 약 1천원 정도 한다. 하지만 이런 가격은 상당한 폭리라고 할 수 있다. 콜라는 물과 원액과 탄산을 섞은 것에 불과하다. 1천원짜리 콜라 한컵의 원가는 100원도 하지 낭ㅎ는다. 그런데도 일부 패스트 푸드 업체는 리필을 안해주거나,리필 횟수를 제한한다. 엄청난 폭리를 취하면서도 리필을 안해주려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일까? 한마디로 돈독이 오른 것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애긴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햄버거 값이 턱없이 비싸다. 싸고 맛있어서 패스트푸드를 먹는다는 애기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통하지 않는ㄴ다. 맛있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결코 싸지는 않다. 햄버거 하나 가격이 기본 2천원에서 비싸면 4,5, 천원정도 한다. 세트 메뉴의 경우에는 기본이 5천원선에서 1만원이 넘기도 한다. 이돈이면 닭갈비에 사리 넣고 밥 비며 먹는 액수와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다른 나라도 이러면 말을 안한다. 빅맥 지수역시 우리나라가 턱없이 높다. 몰론 팔리니가 가격을 그렇게 책정했겠지만. 그래도 폭리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뭐, 가격이야 그렇다 치자. 그런데 이렇게 폭리를 취하면서 아르바이트생을 착취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ㄱ가? 내 친구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생으로 한 3개월 정도 클로징 일을 했다. 임금은 법정 최저 임급에서 약간 위, 그런데 중간에 휴식시간도 주지않고 계속해서 일을 시킨다. 그것도 모자라 원래 밤 12시에 끝나야 하는데 새벽 2시까지 부려먹는다 연장 근무에 따른 추가임금? 당연 그런건 없다. 으음,. 패스트 푸드 업체들은 우리나라를 만만하게 보고 있는 건가?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난 햄버거를 거의 먹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햄버거는 정크푸드가 아니던가? 비싼 돈 내고 몸버릴 필요는 없지. "그럼 전 먼저 일어나지요." "응? 언니 가려구?" "집에 인디님이 기다리고 잇으니 빨리 가봐야지." 웬일로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는 일루니아 여사님 덕분에 난 간만에 루시아와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루시아와 뭘 하는게 좋을까? 영화나 보러 갈까? "우리도 집에 가자." "응?" "애들 깨어났을 테니 빨리 들어가 봐야지."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이 잘 보살펴 줄텐데. 천천히 들어가도...." "안돼. 언니랑 형부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들은 나없으면 안된단 말이야." ",,,,,," 나와 루시아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진짜 원흉이 일루니아 여사님 이 아니라 어린 엘프들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자의든 타의든 나와 루시아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것들에겐 지옥의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빅장 40단 콤보에 자비심이란 없으니. 루시아는 아이들을 위해 치즈 크러스트 리치 골드 피자 훼밀리 사이즈를 구매했다,.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쁘네." "그,.그래?" 해맑게 웃는 루시아. 저웃음이 내가 아닌 아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가슴이 아프다. 난 루시아를 대신해 피자를 들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설이야." "응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며?" "뭐, 그렇지 저기 말이야....." "응? 왜?" "혹시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아?" "고향?" "아이리스 왕국 말이야." 루시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난 그녀와 함께 아이리스 왕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오빠가 보고 싶긴 하네." 루시아와 유일한 혈육이라 할수 있는 그녀의 오빠. 이름은 아이리스 키에라. 참고로 현재 아이리스 왕국의 국왕이다. 으음. 나에게는 처남이 되는 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보러가면 되는 거잖아. 이동 마법진이 있으니" "그렇지."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같이 갈래?" "그,그럴까?" "솔직히 거기서 공주로 사는 것보다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아." "그,그래?" 루시아의 말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생활이 재밌다니! 그건 나와 같이 있는 것이 더 좋다는 뜻인가? "이곳에는 라이랑 루랑 루비가 있으니까." "....." 그럼 그렇지 난 전봇대를 끌어안고 좌절했다. 난 신문을 펼쳐보았다. "으음, 요즘 경제가 .....여전히 어렵군.... 요즘 정치는......여전히 개판이군.. 설 연휴에는 무슨 프로를 하려나? 난 TV 프로그램 편성표를 유심히 보았다. "으음, 괜찮은 영화들이 많이 하려나? 투갑스는 또 하네. 쉬리도 또하고 장군의 아들도 또하고.....뭐야? 이거 전부 재탕에 삼탕이잖아. 너무 우려먹는 거 아냐? 난 신문을 접고 일어났다,. 명절이 다가오면서 가장 바빠진 사람은 다름 아닌 인디였다. 인디는 한복을 만드는 와중에 틈틈이 명절 요리를 독학으로 배우고 있었다. "공부 많이 했냐?" "예. 떡국이랑 갈비찜이랑 잡채, 부침개 등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인디의 말에 벌써부터 침을 주르륵 흘리는 아이들. 저 아이들에게 있어서 설날이란 세뱃돈 받고 명절 음식 먹는 날 이상의 의미는 지니 못하리. "아! 지금 장보러 가려는데 히로님도 같이 가시겠어요?" "내가 같이 가서 뭐하겠니? 나보고 짐꾼이나 하라는 거냐?" "아,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랍니다.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함께 장을 보러 나갔다. 아아~ 심심해 죽겠다. 가게 일로 한창 바빳을 때는 하루종일 쉬었다면 좋겟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루 종일 쉬게 되니 심심해 죽을 지경이다. 난 열심히 집안을 굴러다녔다. 그러다가 아이들과 부딪혔다. "앗! 오빠 왜 굴러다니는 거예요?" "심심해서 이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렴." 난 바닥에 엎드린 채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 설날 때는 뭐하고 놀지?" "설날 때는 설날 놀이가 따로 있대." "정말?" "응. 제가차기라던가 널뛰기 같은 거 말이야." "아! 루비도 명절놀이 하나 알아. 윷놀이!" "나도 윷놀이 알아." "윷놀이야 말로 명절을 대표하는 놀이야!" "훗~~" 아이들 대화를 듣던 나는 피식 웃었다. 윷놀이가 명절을 대표하는 놀이라니!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란 말인가? "이 오빠가 명절을 대표하는 놀이를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 줄까?" "정말요?" "루비는 막막 배우고 싶어요." "같이 놀아요 형!" "화투의 시초는 1543년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서양의 카드놀이 카루타로 추정된단다. 그리고 19세기경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래 되었지. 화투의 종주국은 일본이라 할 수 있지만. 화투를 가지고 노는 방법은 조선 중기에 자생적으로 발생되었어. 현재 일본에서는 화투놀이를 거의 하지 않는 반면, 한국에서는 4천만 국만의 스포츠로 불릴 만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지. 그런 만큰 화투는 우리나라 문화라 할 수 있을 거야. 사실 젊은 층들은 화투에 별 관심이 없었지. 하지만 인터넷 포털 게임 사이트들이 앞다투어 고스톱 게임을 서비스함으로써 이제 화투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까지 받아들여지고 있어. 화투놀이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고스톱은 일본에서 전래 되어 온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거야. 운과 기술이 결합된 놀이 방식으로 그 재미와 중독성이 남달라 4천만 국민의 스포츠로 불리고 있지. 예전에는 동네마다 룰이 약간씩 달라 각 지방 사람들이 모여 고스톱을 칠때는 많은 시비가 일었지.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 고스톱 활성화로 대부분 그 룰에 따르는 추세야. 화투는 48장으로 이루어져있어 4장씩 열두달을 상징하지. 1월은 송학 2월은 매조 3월은 벚꽃 4월은 흑싸리 5월은 난초 6월은 모란 7월은 홍싸리 8월은 공산 9월은 국준 10월은 단풍 11월은 오동 12월은 비란다. 여기에 일명 조카로 불리는 쌍피나 쓰리피를 넣어서 게임의 흥미를 돋우기도 하지. 그럼 화투의 역사에 대한 공부는 이즘해두고 고스톱 룰에 대해 알아보도록하자 고스톱 룰이랑 각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다르니, 이오빠는 가장 표준적인 룰에 대해 설명을 해줄께. 고스톱의 최대 참가 인원은 세명이야. 광팔이까지 끼면 네명이지만, 실제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세명이지, 참고로 세명이서 칠때와 두명이서 칠때 의 룰은 조금 다르단다. 세명이서 칠때는 3점을 나는 것으로 치지만 두명이 칠때는 7점으로 나는 것으로 치지. 일단 세명이서 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 줄게. 이렇게 화투를 잘 섞은 다음 바닥에는 6장을 각 플레이어게에는 7장씩 돌리는 거야. 각자 받은 패를 살펴보렴 바닥에 깔린 패와 그림이 맞는 게 있지? 그걸 내서 바닥에 깔린 패를 먹는 거야. 그리고 여기 쌓인 패를 뒤집어서 맞는 그림이 있으면 가져오고, 없으면 그냥 내려놓는 거지 라이가 먼저 해보렴." "네, 오빠" 라이는 당당하게 똥광을 내서 바닥에 깔린 똥쌍피를 먹엇다. 그리고 쌓인 패를 뒤집었다. 나온 패는 다름아닌 똥. "자신이 방금 먹은 패와 뒤집어 나온 패가 똑같은 경우에는 일명 쌌다고 한단다. 이럴 경우에는 어떠한 패도 가져올 수가 없지 특히나 지금같이 똥을 쌌을 경우에는 상당히 난감하단다. 왜냐하면 똥은 피가 무려 4장이고, 광도 한 장 있으니까. 이렇게 싼 패를 먹게 된 경우네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서 피를 한장씩 받아올 수 있는데..." 난 최선을 다해 아이들에게 고스톱의 룰을 설명해 주었다,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내말을 경청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쉽게 나의 설명을 이해했다. 아이들이 똑똑했다기보다는 내가 그만큼 열심히 설명했다는 거다, "자, 그럼 이제 실습을 통해 배워보도록 하자. 라이가 먼저 패를 섞어보렴." 당연한 애기지만 손이 작으면 패를 섞기가 힘들다. 그래도 라이는 어설플 솜씨나마 패를 섞고 나눠주었다. 몇번 쳐보자 아이들은 금세 빠져들었다. "재밌니?" "네에! 되게 재밌써요.~" 난 아이들이 치는 모습을 보며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거나, 점수 계산 방법들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내가 애들 교육에 너무 무십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한국에 왔으면 한국법을 따라야 할 것 아닌가? 내가 그동안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데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알려주게 되니 그저 기쁠 따름이다. 이런 훌륭한 문화를 외국에도 많이 전파시켜야 할 텐데... 으음, 이번 기회에 아이리스 왕국에 고스틉을 전파시켜볼가? 고스톱은 일명 망국병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살인자에 손에 들리면 살인 도구가 되고,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의 손에 들리면 정의와 약자를 수호하는 신물이된다. 즉 도구란 누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도구만을 놓고 선악을 판단할 수는 없다. 고스톱도 잘치면 스트레스 해소, 친목도모 등의 좋은 점이 있다. 고스톱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은ㄱ? "아! 루비 났어, 피가 10장이고 삼광이야. 스톱할래 라이랑 루 모두 피박과 광박이야 그러니까 따따블." "우엥~ 아까 피 한장만 뺏기지 않았어도 피박은 면할 수 있었는 데." 사이좋게 고스톱을 치는 어린 엘프들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한 때 도신이라 불리던 내가 이제는 은퇴하여 이렇게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으니 세월 참 무상하구나.. 난 과거를 떠올렸다. 나 전성기 때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한번 갔다하면 몇달치 용돈을 긁어 모았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는 나에게 있어서 참가비 10만원짜리의 도박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내가 계속 현역으로 활동했다면 세계의 도박 역사는 새로 쓰였을 것이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라스베가스로 진출할까 생각도 해보았다.판타지 세계로 소환되는 바람에 도박의 길과 멀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블랙잭이나 바카라를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이 오바가 못다 이룬 꿈을 너희가 이루거라!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스톱을 치는 아이들과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보시는 그대로 입니다. 아이들에게 대한민국 명절놀이 문화를 알려주고 있지요" "아이들에게 도박을 알려주고 그런말이 나오나요?"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초리가 매서워지기 시작한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도박이라니! 물론 안좋은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겝 ㅗ일 수도 있지만, 고스톱은 엄연한 한국의 명절놀이 문화입니다. 이 고스톱에는 우리 조상들의 숭고한 얼이 담겨져 있습니다. 명절 때 친척들끼리 담요 주위에 모여 앉아 고스톱을 치다보면 잊혀가는 가족애가 절로 살아나니, 그 유익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겟습니다? 또 한 개평이라 하여 패자에게도 아량을 베푸니. 이는 고스톱이 관용을 중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스톱은 4천만 국민의 스포츠라 불릴 만큼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지금 이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치고 있습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조상의 얼이 담긴 이 훌륭한 놀이문화를 세계화시켜나가기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열변을 토해내자 일루니아 여사님도 더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오빠도 같이 해요/" "그럴까?" 난 판에 꼈다. 모든 도박이 그러하듯 고스톱 역시 치열한 확률게임이다. 상대가 무슨 패를 먼저 내느냐에 따라 무슨패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야하고 쌓인 패를 뒤집어 나올 확률 등을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도박이 그러하듯 고스톱 역시 아무리 잘쳐도 운이 없으면 질 수 밖에 없는 게임이다. 운은 어찌 할수 없는 것이지만 실력은 어찌할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억세게 운 좋은 인간이 판에 껴있지 않은 이상 운은 대체로 비슷한 편이다, 운이라는 것도 확률의 일종인, 고스톱을 많이 쳐본 사람은 알겟지만, 처음에 이 확률 계산을 하려면 엄청나게 머리를 굴려야 한다. 상대가 청단을 노리면 저놈이 청단 패를 들고 있을 확률이 높군; 이라 생각해야 하고 동상피와 국쌍피가 바닥에 깔렸는데도 비열끗을 먹으면 저놈이 똥이나 국화 세장씩 들고 있거나, 아니면 한장도 안들고있겠군' 이라 생각 해야 한다. 하지만 고수급 반열에 올라서면 그때부터는 어느정도 자동적으로 계산이 된다. 사실 도박판에서 난 왜이렇게 운이 없을까? 첫끗발이 개끗발이야. 한방만 터지면 전부 만회할 수 있어 등등의 생각을 하는 사름들은 도박에서 손을 때는 것이 좋다. 패배를 외적 요인으로 돌리는 사람은 평생 발전이 없는 법이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호구 신세를 면치 못한다. 아이들과 하는 게임인지라 난 복잡한 생각은 관두고 편한 마음으로 쳤다. 그러고 보면 바닥에 까는 담요로는 군용 모포가 제일 좋은데. 그런데 그냥 치다보니 재미가 없다. 원래 고스톱이라는게 도박의 일종이다. 보니 뭐든 걸어야 게임이 재밋어지기 마련이다. 난 냉장고에서 ABC초콜릿 한봉지를 꺼내왔다. 그리고 그것을 한움큼씩 집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지금 먹으면 안돼. 이건 일종의 칩과 같은 역할이거든 점당 초콜릿 하나야 그리고 광값도 초콜릿으로 지불하는 거고, 알았지?" 그러자 아이들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번뜩이는 라이의 회색 눈동자. 그리고 루와 루비의 붉은 색 눈동자. 어린 엘프들은 초콜릿을 독차지 할 욕심에 아까의 장난 같은 태도를 버리고 성심성의껏 치기 시작했다. 고 할때도 신중하기 그지 없었다. 역시 고스톱은 그냥 칠때와 판돈이 걸렸을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그렇기에 판돈을 걸어야 재미가 있는 거고, 난 초콜릿 욕심도 없고 해서 대충대충 쳣기 때문에 내 초콜릿은 점점 줄어들었다. 루 역시 나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면 라이롸 루비의 앞에는 초콜릿이 수북히 쌓였다. 루가 먼저 오링당하고, 그 다음은 내가 오링당했다. 그에 따라 고스톱은 라이와 루비의 맞고로 전환되었다. 라이와 루비의 피할수 없는 승부! 과연 초콜릿을 독차지할 엘프는 누가 될 것인가? 난 판한쪽에 쪼그려 않아있는 루를 보았다. "넌 왜 거기서 그러고 있니?" "개평 받으려고요." "......." 개평으 사전적 정의는 노름이나 내기 따위에서 남이 가지게 된 몫에서 조금 얻어 가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승자가 패자에게 관용을 베푼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초콜릿 몇개 얻어먹기 위해서 조그려 앉아있는 모습이라니, 참 불쌍해 보인다. 그러는 사이 라이와 루비의 대결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초반에는 루비가 우세였다. 하지만 한판에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는 것이 고슨톱의 특성이다. "으음. 포고~!" 라이의 포고 선언 루비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마지막 발악으로 청단을 노려보았지만, 허사였다, 청단 한장을 라이가 들고 있던 것이었다. 쓰리고면 두배, 포고는 네배, 여기세 피박 광박 멍텅구리 폭탄까지, 64배군 게다가 라이는 오광, 고도리 초단, 홍단까지 완성했다. 이한판으로 게임 끝. 라이 앞에는 초콜릿이 수북하게 쌓였고, 오링 당한 루비는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앙~" 난 루비를 껴안고 달래주었다. "승부의 세계란 이토록 냉정한 거란다. 그러니 루비는 울지말고 이번 패배를 발판 삼아 앞으로 도약할 생각을 하렴." 라이는 딴 초콜릿을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난 라이를 불러 세웠다. "라이 어디 가니?" "방에 가려고요." "방에 가서 뭐하게?" "혼자서 초콜릿 먹으려고요." "......." 아아~ 나눔의 문화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난 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우리 라이가 아직 어려서 나눔의 문화가 뭔지 잘 모르나 보구나. 30년동안 김밥 팔아서 모은 1억원을 대학교 장학금으로 기증한 할머니 애기 들어봤니? 노숙자들이 거리청소하며 받은 일당을 모아 쓰나미 피해 지역에 전달했다는 애기는 들어봤니? "아니요 못들어봤는데요." ".........." 우리사회의 미담이 이렇게 잊혀지다니... "그럼 이 오빠가 뼈빠지게 보물찾기해서 찾은 보물 128억 7천만원 전액을 일제치하 피해자들에게 기부했다는 애기는 들어봤지?" "예, 그건 들어봤어요." "이런 게 바로 나눔의 문화란다. 우리 조상들은 나눔의 문화를 중요시 여겼지, 하지만 급격한 경제개발을 거치면서 이런 나눔의 문화는 점점 퇴색되었단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닌 만큼 나눔의 문화랑 꼭 필요한 거야. 우리 조상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깨닫고 딴 돈을 얼마씩을 오링당한 사람에게 던져주는 개평이라는 문화를 발전시켰단다. 우리 라이는 초콜릿을 많이 땄으니 루와 루비에게 개평을 조금씩 주렴,. 그래야 착한 엘프지." "알았어요 오빠." 라이는 초콜릿 하나씩을 루와 루비에게 던져주었다.그리고는 몸을 돌려 방으로 걸어갔다. "........" 그렇게 많이 따놓고 개평이 고작 초콜릿 하나라니! 이건 고스톱 판에서 오링당한 사람에게 100원을 던져주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루비는 자기앞에 놓인 작은 초콜릿 하나를 보더니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ㅇ" 아마 지금 루비는 땄을 때 그만 둘걸..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오링 당한뒤 이런 생각을 해봐야 뭐하겠는가? 잃은돈 은 어찌할수 없으니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속편하다. 울면서 초콜릿을 먹는 루비, 그리고 처량하게 쪼그려 앉아 초콜릿을 먹는 루. 이 두 엘프를 보니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금길 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오늘은 진정한 의미의 설날 할 수 있는 구정. 태양력과 태음력을 같이 쓰ㅏ다보니 복잡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연말은 태양력을 따라 양력 12월 31일로 친다. 반면 설은 태음력을 따라 음력 1월 1일로 친다. 그럼 양력 12월 31일에서 음력 1월 1일 사이에 생기는 한달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외에도 예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양력 12월 25일인 반면. 부처 탄생일인 석가탄신일은 음력 4월 8일이다. 예수는 서양 사람이니 양력으로 생을 계산하고, 부처는 동양 사람이니 음력으로 생일을 계산하는 건가? 아무튼 특이하다.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에 루가 베개를 끌어안고 자는 모습이 보였다. 방이 모자라다보니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가 데리고 자고, 루는 내가 데리고 잔다. 어린아이라지만 남자와 같이 잠을 자야 한다니! 굉장히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라이나 루비를 데리고 자는 편이 낫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루시아가 루를 데리고 자야 한다, "........"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남자는 전부 늑대~~~~~~ 새끼늑대도 늑대는 늑대이다. 그러므로 절대 루시아와 같이 자게 할 수는 없다. 루시아와 같이 잘수 있는 남자는 오직 나뿐이니까. "그런데 어째서 내옆에 루시아가 아닌 루가 있는 걸까? 내가 이좁은 방에 더블침대를 들여놓은 것은 루시아와 함께 자기 위함이지 애들을 데리고 자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아아~ 언제쯤이나 루시아와 신방을 차릴 수 있으려나?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의 목표는 루시아와의 관계 진전이다. 언제까지 키스에만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 이젠 본능에 충실할 때도 되었다. "야! 일어나!" 난 루를 흔들어 깨웠다. "왜요 형?" "오늘은 새해란다. 새해만이라도 일찍 일어나야 하지 않겠니?" "됐어요. 전 더 잘래요." "......" 감히 본좌의 말을 한귀로 흘리며 이불을 덮다니. 난 이불 속에서 웅크려 자는 루를 질질 끌고 거실로 나왔다. "응? 이 맛있는 냄새의 정체는 뭐지?" "아! 정말 맛있는 냄새다!" 난 루와 함께 부엌으로 갔다. 부엌에선 인디가 열심히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잡채를 만들고, 전을 부치고, 갈비를 찌고... 전자렌지를 전부 활용하며 정신없이 손을 놀렸다. "아! 일어나셔어요, 히로님?" 인디는 날 보며 생긋 웃었다. 오늘이 설날이기 때문인지 인디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니가 여자 한복을 입고 있는 거냐?" "아! 저,저기 그게,.,.,. 일루니아 님이 이쪽이 더어울릴 거라고 하셔서.. 아! 저,저도 이쪽이 더 마음에 들어서요.....그,그게 그러니까....." "야!" "예? 왜,왜그러세요." "거기 전 탄다." "아! 죄,죄송해요." 인디는 재빨리 전을 뒤집었다. 초록색 저고리에 빨간색 치마를 입고 긴 검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분홍색 댕기까지 맨 인디. 거기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요리를 한다. 그야말로 참한 새색시가 따로 없다. 으음, 내며느리로 삼으면 딱 좋겠구만... "........" 며느리는 뭔 며느리???? 아들이 있지도 않은데 벌써며느리를 들일리 없잖아!!!! 그나저나 남자가 여자 한복을 입는다는 것도 문제지만 입어서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도 문제다. 아아~! 계속 보고 있자니 뒤에서 끌어안고 싶어져~~~ 안돼!! 인디가 아무리 예뻐다 여자가 아닌 남자야 남자를 끌어안아서 어디다 써? 그래도 정말 너무 참해 보인다. 순종적이고 가정적이고.....마치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상을 보는 것만 같다. 어째서 남자로 폴리모프 한거냐? 기왕이면 여자로 폴리모프 하면 좋잖아! 지금이라도 인디가 여자로 폴리모프 한다면 나의 이 넓은 가슴으로 안아줄 용의가 있다. "아야~" "왜그래?" "아무 것도 아니예요. 손가락이 살짝 데었을 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인디는 오른손 검지를 살짝 입에 물었다. 헉! 저렇게 선정적인 포즈를 취하다니! "........." 잠깐, 어째서 저게 선정적인 포즈지? 혹시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눈에는 인디가 계속 나를 유혹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아~~ 뒤에서 끌어안고 싶어라~~ 하지만 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 참았다. 만약 내가 여기서 인디를 끌어안는다면 이글은 순식간에 야오이로 변질된다. 안그래도 라이레얼과 카르가 백합묵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마당에 야오이까지 추가되면 이글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야오이를 추가시킬수는 없다, 그렇게 결심한 나는 재빨리 인디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루는 그사이에 동그랑땡을 열심히 집어먹고 있었다. "이따 밥과 같이 먹어, 임마~!" 난 루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이를 닦았다. 위이이잉! "응? 그건 뭐니?" "전동칫솔이예요/" "그거 어디서 났니?" "누나가 우리 이닦으라고 사줫어요" "......" 뭐라? 루시아가 사줘? 난 나의 손에 들린 칫솔과 루의 손에 들린 전동칫솔을 잠시 비교 분석해보았다. 결과는? 당연 저게더 좋아 보인다. 어째서 애들것은 사줬는데 내 것은 사주지 않은 걸까? 어째서 애들은 전동이고 나는 수동인거지? 전동칫솔을 칫솔모가 회전을 해서 이를 구석구석 잘 닦아준다. 수동보다 저게 백배는 더 잘 닦일것 같다. 뭐야? 내 이빨은 썩어 문드려져도 상관 없아든 거야? 정말 그런거야? 루시아? 저번 김밥 햄 사건에 이은 전동칫솔 사건, 나에겐 정말 충격이 아닐수 없다. 애들 햄 들어있는 김밥 먹을때 난 햄 없는 김밥을 먹고 애들 전동칫솔로 이를 박박 닦을때 난 수동칫솔로 부실하게 닦아야 하다니. 루시아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부족함이 없거늘... 하지만 여기서 좌절할 내가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루시아에게 햄 들어있는 김밥을 먹고, 전동칫솔로 이를 닦을수 잇는 존재로 다가서리라~ 화장실을 나온 나는 루와 함께 소파에 앚아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명절 때면 으레하는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귀화 외국인들이 두팀으로 나뉘어 윷놀이 하는 쇼프로,.. 할일 없어서 그걸 보고 있는데 라이와 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난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오빠? 라이 예뻐요?" "루비 잘어울려요? 오빠?" "헉!" 라이와 루비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있었다. 루비는 노란색 저고리에 빨간 치마, 라이는 연분홍색 저고리에 분홍색 치마. 루비의 머리 스타일은 그대로였지만, 라이의 긴 회색머리카락은 하나로 땋아여 끝에 빨간색 댕기가 매달려있었다. 내앞에 한바퀴 돌아보는 라이와 루비, 펄럭이는 치맛자락과 흩날리는 머리카락. 귀,귀엽다! 세상 어떤아이들이 이 아이들보다 귀엽겠는가? 난 두 팔을 쫙 벌렸다. 그러자 내품안으로 달려오는 라이와 루비. 난 두 아이를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볐다, "아이구 귀여운 것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울까? 응응? 말해봐 애들아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다 오빠랑 언니 닮아서 예요~!" "맞아요! 오빠랑 언니 닮아서 귀여워요!" "우헤헤헤헤~" 루시아가 왜 이렇게 애들한테 목을 매는지 알것같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을 어찌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애들 한복 잘어울리지?" "아! 루시아 언니다!`" "루시아 언니이~" 다시 루시아 품에 안기는 아이들 난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의 한복 차림을 기대했지만 루시아는 평상복이었다. "저,저기.....넌 왜 한복안입어?" "난 좀이따 입으려고." "그,그래?" 휴우~~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아의 한복입은 모습을 못보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저도 한복입었어요 형!" 루는 주황색 저고리와 통이 넓은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내앞에 섰다. 개량 한복인가? 루도 한복을 입으니 귀엽긴 귀엽다.하지만 아무리 귀여워도 남자는 남자 "으응. 그래 너도 적당히 귀엽구나." "뭐예요?" "뭐가?" "반응이 너무 시큰둥하잖아요." "귀엽다고 해줬으면 됐지 더이상 뭘 바라니?" "쳇!" 루는 고개를 휙돌리더니 루시아를 보았다. "꺄아! 루도 너무 귀여워~" 루시아는 루를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볐다. "헤헤~~" 행복한 웃음을 짓는 루. 감히 남자 주제에 루시아 품에 안겨있다니! 아아~ 부럽다. 얼마나 행복할까ㅣ?' "아! 이모다." "......." 헉! 일루니아 여사님도 한복을! 하얀색 저고리와 자주색 치마를 입은 일루니아 여사님. 저고리 에는 꽃무늬가 곱게 수놓아져 있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성격은 안좋지만. 몸매가 좋다보니 한복도 잘어울린다. 으음, 한복은 외국인들에게도 잘 어울리는군. 그나저나 한복들이 정말 예쁘다. 역시 메이드 인 인디여서 그러나? 하긴, 드래곤이 손수 제작한 것이니 품질 면에서나 디자인 면에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겠지. "제가 한복 입은 모습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느새 옆에 나타난 사일런스 지니. 난 어이가 없었다. 남자가 한복 입은 모습을 봐서 어쩌라는 건가? "됬습니다. 조금도 보고싶지 않네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실줄 알고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 그래. 니 잘났다./ "하암~` 다들 나와있네." 언제나 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실로 나오는 라이레얼. 그리고 그녀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주위를 감시하는 카르,. 이글의 백합화를 주도하는 레즈커플이다. "어라? 오늘 무슨 날이야? 다들 한복을 입고 있네" 평소 텔레비전을 열심히 보던 라이레얼인 만큰 한복을 못 알아볼리 없다. "오늘 설날이잖아요." "아! 맞다 오늘 설날이었지. 이따 세배할테니까 기대해 히로." 윙크를 하며 말하는 라이레얼. 결론은 세뱃돈이군. "씻으신 다음 이옷으로 갈아입으세요." 인디는 라이레얼에게 한복 두벌을 건네주었다. "으음. 난 그냥 이옷이 편한데." 하긴, 탱크탑에 핫팬츠니 편하기 편하겠지. "아,안돼요 언니. 설날에는 한복을 입어야 하는 거예요,. 전 언니 가 한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요." 카르는 열심히 라이레얼을 설득했다. 라이레얼이 한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저 심정.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간만에 카르와 마음이 맞는군. "알았어. 카르 니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한번 입어보지,뭐!" 라이레얼이 긍정적으로 대답하자 주먹을 불끈 쥐며 '예스!' 를 외치는 카르. 너무 좋아하는거 아냐? "식사하세요."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이 상을 거실로 내왔다. 메뉴는 당연히 떡국. 그리고 반찬으로는 도라지나 고사리, 시금치 등 각종 나물이올려져있었다. "잘먹겠습니다아~" 큰소리로 외친 다음 바로 자리에 앉아 떡국을 떠먹는 아이들.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서 큰일이야.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말이야. 장유유서가 뭔지도 모르나? 생각 같아서는 확~ 버릇을 고쳐주고 싶은데, 루시아 눈치가 보인다. 옛날 같았으면 엉덩이를 마구 때려줬을 텐데. 루시아는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맛있니?" "네. 막막 맛있어요." "떡이 쫄깃쫄깃해요." "고기도 질기지 않고 부드러워요" "국물은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고 딱 좋아요." "....." 이젠 아주 심사평까지 늘어놓는 구만. 하도 열심 먹다보니 음식의 도를 깨우쳤나? 어쨋든 맛있는 것은 사실이다. "처음으로 만들어본 건데 맛이 어때요?" 인디는 앞치마를 두손으로 꼭 쥔채 주위의 평가를 기다렸다. "맛있어요형부." 이건 루시아의 평가 "인디님이 해주신것은 뭐든 맛있어요." 이건 일루니아 여사님의 평가 "이정도면 나쁘지 않군 하지만 식신의 길은 멀고도 험한것 앞으로 더욱 열심히 정진하도록." 이건 나의 평가 인디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디는 일루니아 여사님 옆에 앉아 자신이 만든 떡국을 먹어보았다. "더주세요!" "루비도요!" "저는 곱배기로요." 어느새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채 더달라고 떼쓰는 아이들. "그래. 많이 먹어." 루시아는 다시 떡국을 듬뿍 퍼주었다. 그리고는 복스럽게 먹는 아이들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두그릇째 비운 아이들은 더먹으려 했지만, 점심메뉴가 찜갈비라는 것을 애기해주자 수저를 내려놓았다. "헤헤~ 만날 명절이었으면 좋겠다." "응응" 나도 어릴 때는 재들같이 생각했었지. 만날 명절이면 학교도 안가도 되고 일도 안해도 되니 얼마나 좋아? 그런데 재들은 원래부터 학교도 안가고 일도 안하고 만날 놀기만 하면서 왜 저렇게 명절을 좋아하는 거지? "나 한복으로 갈아입고 올께." "으응" 루시아는 방으로 들어갔다. 난 한복버전 루시아를 상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한복을 입은 루시아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루시아는 워낙 몸매가 좋고 예쁘기 때문에 뭘 입어도 잘 어울린다. 한복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이라 해도 틀린말이 아닐 정도로 아름다운옷 그런 한복을 루시아가 입는다면....... "헉! 설마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되는 건 아니겠지?" 나의 약한 심장과 고혈압을 감안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뇌졸증으로 사망할수도 있다. 아아~ 어찌해서 하늘은 루시아를 내곁에 내려주고 나의 심장을 이렇게 부실하게 만들어 주었단 말인가? 난 루시아를 보기에 앞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와 소림사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금강부동심법을 아냐고? 훗~~ 사실 난 소림사와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지금에서야 밝히는 사실이지만 우리 아버지의 형님의 딸과 결혼한 남자..... 다시말해 사촌매형이 지금 소림사에 몸을 담고 있다. 그럼 중국에서 사냐고? 그렇진 않다. 현재 불광동에서 살고 계신다. 불광동의 소림사라고 하면 다 알아준다고 한다. 혹시라도 불광동에서 짜장면 시킬일 있으시면 반드시 소림사를 기억하시라. 우리 사촌매형이 거기 주방장으로 있으니. 한창 금강부동 심법을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헉쓰!" 금강부동심법의 효가과 말짱 도루묵이 되는 순간이다, 흰색 저고리와 분홍색 치마를 입은 루시아. 저고리에는 매화꽃이 수놓아져있고 치마에는 무늬가 금박으로 박혀있다. 백금발 머리카락은 위로 살짝 틀어올려 분홍색 댕기로 묶었고, 감색 옷고름은 치마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저 옷고름이 풀어 달라고 유혹하는 것만 같다. 어두운 ㅇ방안에 호롱불 하나만을 켜놓고 그녀와 단 둘이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아~ 루시아~ 나는 노예 너의 사랑의 노예 나는 바보 너밖에 모르는 바보 나는 뺀질이 만날 뺀질거리는 뺀질이 :"........" 뭐야? 마지막건 아니잖아! 아아~ 일루니아 여사님께 하도 뺀질이라고 욕을 얻어먹다보니 이젠 내가 히로인지 뺀질이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어때? 괜찮은것 같아?" "응응~ 물론이지 막막예뻐!" 너무 당황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라이 말투가 튀어 나왔다. 그만큼 루시아는 아름다웠다. 난 살며시 다가와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순간...... "세배할래요!" "세뱃돈 받고 싶어요!" 나와 루시아 앞에 쪼르르 달려온 라이와 루와 루비. 어린 것들이 돈 쓸데가 어디 있다고 이렇게 돈을 밝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먼저 세배할거야." "맞아 언니랑 내가 먼저 세배 할거니까 니들은 비켜" 한복을 입고 등장한 라이레얼과 카르 라이레얼이 한복을 입자 우아하면서도 성숙한 미가 물씬 풍겼다. 카르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아아~ 저런 여동생 하나 있었으면 정말 귀여워 해줬을 텐데. 라이레얼과 카르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세배를 했다. 왼쪽 무릎을 꿇고 오른쪽 무릎은 세운다. 그리고 두 손으로 살짝 바닥을 짚고 고개를 숙인다. 마치 교본에 나올 법한 완벽한 동작. 그동안 연습한 성과가 여기서 드러난다, "새해 복 많이 받아 히로." "새해 복 많이 받아." 라이레얼과 카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세뱃돈" "빨리 세뱃돈 줘" 난 어쩔수 없이 지갑을 꺼내들었다. "구정이니까 따블" "나도 따블." "....." 세뱃돈 받아서 집살일 있나? "어,얼마나 원하세요?" "희망 세뱃돈 금액 최소 20만원" "난 최소 10만원." "..." 신정 때의 딱 두배로군 둘이 합쳐 30만원이 최소 목표 금액이라는 건가? "저,저기 .....요즘 가게도 쉬는 중이어서 제가 조금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세뱃돈좀 깎아주시면 안될까요?" "안돼! 세뱃돈은 단 한푼도 깎아줄수 없어!" "맞아! 단 한푼도 깎아줄수 없어!" "........" 누가 보면 내가 빚진줄 알겠다. 난 한숨을 쉬며 지갑에서 10만원 수표 세장을 꺼내 라이레얼과 카르에게 주었다. "아껴서 쓰세요." "응 고마워, 히로" 라이레얼은 돈을 잘 챙겨 넣었다. 이걸로 끝나면 좋으련만 다음 타자로 어린 엘프들이 대기 중이었다. "우리는 오빠 3만원, 언니 2만원을 목표로 하자." "그래, 그이하로 주면 받지 말고 금액을 올려줄 때까지 버티는 거야." "응응" "......" 서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세뱃돈 담합까지 하는 어린 엘프들. 방금전 라이레얼 과 카르를 보고 많은 것을 배웠나 보다. 우리 애들이 원래 좀 쓸데없는 것들을 열심히 배우는 편이다. 아무튼 5만원이라니, 애들이 간뎅이가 부어도 한참 부었나 보다. 5만원이면 라면이 몇개고, 담배가 몇갑이고, 초코파이가 몇박스냐? "히로" "응? 왜?" "새돈좀 있으면 바꿔줄래?" "알았어~" 난 루시아가 내민 헌 지폐를 빳빳한 새 지폐로 교환해 주었다. 아무래도 세뱃돈은 빳빳한 새돈으로 받는게 기분이 좋다. 비록 금액이 같다 할지라도 헌돈보다는 새 돈이 좀더 가치있어 보이니까. 그러고 보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말은 16세기 영국의 재무관 그레셤이 제창한 화폐유통 법칙으로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상품에 있어서 가격은 같으나 품질에서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경쟁에 의해 품질이 우수한 것이 열등한것을 제거하게 된다. 그러나 화폐에 있어서는 그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지금이야 지폐가 통용되지만, 예전에는 금본위제도나 은본위제도등을 사용했다.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화폐 자체가 곧 현물 가치를 지니게 된다. 즉 1만원이 금 1g의 가치를 지녔다면, 1만원짜리 화폐를 1g짜리 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 10만원은 10g의 금으로 만들고 100만원은 100g의 금으로 만든다. 정부에서 필요에 의해 화폐를 더 발행하고 싶어도 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화폐 발행이 불가능 하다. 금은 별로 없지만 많은 화폐를 발행하고 싶다면, 방법은 화폐 가치를 떨어트리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금 1g으로 1만원짜리 화폐를 만들어왔다면, 이젠 금 0.5g으로 1만원짜리 화폐를 만드는 것이다. 당신에게 금 1g으로 만들어진 1만원화폐와 금 0.5g으로 만들어진 1만원짜리 화폐가 있다면 무엇을 먼저 사용하겠는가? ]당연 금 0.5g으로 만들어진 1만원 화폐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금 1g으로 만들어진 1만원화폐는 장롱속에 잘 넣어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장에서 양화는 사라지고 악화만이 유통되게 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뭐, 이건 금본위제나 은본위제를 쓰던 옛날에나 통용되던 말이고, 오늘날 같이 신용화폐가 중심을 이룬 시대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굳이 요즘 사정과 비교하자면 지갑에 빳빳한 1만원 지폐와 너덜너덜한 1만원 지폐가 같이 있을 경우 너덜너덜한 1만원 지폐를 먼저 사용한다는것 정도? 나와 루시아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나란히 서서 세배를 했다. 아이구 귀여운것들! 이렇게 있으니 내가 나이를 굉장히 많이 먹은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새 애들한테 세배받는 나이가 되었다니, 나도 큰집에 가면 아직 세배할 나이인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오~" 이렇게 세배를 받았으면 웃어른으로서 덕담을 한마디씩 해줘야 한다. "그래 라이랑 루비랑 루도 새해복 많이 받아. 올 한해 맛있는거 많이 먹고 건강하게 자라." 덕담을 간단하게 끝낸 루시아. 이젠 내차례군. "새해 복많이 받으렴 이제 한살씩 더 먹었으니까 공부도 좀 열심히 하고, 오빠랑 언니 말 잘들으렴, 그리고 올해는 식비를 좀 줄일 생각이니 앞으로 먹는 것은 좀 자제하고, 또 서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렴, 그리고 오빠가 한번 말하면 알아들으렴, 이 오빠가 니들 때문에 작년 한해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주 속이 터진다,터져 특히 말이야....." 덕담이 10분이 넘어가자 아이들이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20분이 지나자 꾸벅꾸벅 졸지 시작한다. 아이들은 세뱃돈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 때문인지 자지 않으려고 허벅지를 꼬집는 둥 반항을 했지만 밀려오는 졸음에는 어쩔수 없는 듯 보였다. 좋았어 이제 10분만 더 하면 재울수 있겠군. 애들이 자면 세뱃돈을 안줘도 된다. 좀 치사하더라도 나의 얅은 지갑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난 속으로 조금만더 조금만 더 를 주문처럼 외우며 덕담을 계속 했다. 감기는 눈동자와 흔들리는몸. 5초전 4초전 3초전........ "그만해 애들이 지겨워하잖아." "헉!" 2초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들어온 루시아의 태클,. 루시아는 아이들을 깨웠다.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은 재빨리 눈을 말똥말똥 뜨며 손을 내밀었다. " 세뱃돈 주세요오~" "......" 결국은 이렇게 뜯기게 되는군.. "희망 금액은 얼마니?" "오빠 3만원, 언니 2만원이요~" "더주셔도 되요!" "그 이하로는 안받기로 이미 애기 끝냈어요!" "........" 담합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어린 엘프들. 당장이라도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하고 싶다. 이런 것들은 콩밥을 먹어봐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루시아는 오늘이 좋은 날이기 때문인지 별 말 없이 지갑에서 6만원을 꺼내 아이들에게 2만원씩 나눠주었다. "헤헤~`" 일제히 나를 향하는 눈동자 난 당당하게 아이들을 마주 보았다. 짧은 시간안에 우리는 눈빛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미안하지만 이 오빠가 요즘 많이 힘들단다.' '그래도 주세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주니?' '세뱃돈은 집을 팔아서라도 줘야하는거예요' '뭐라?' '설마 새배를 받고 그냥 넘어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이!' '세배도 엄연한 노동활동이에요 우리는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에요.' 대략 이런 대화들이 오고갔다. 역시 3대 1이다보니 내가 조금 밀린다. 흑~~ 어린 엘프들 미워~ 계속되는 아이들의 압박에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던 나는 지갑을 꺼냈다. 한엘프당 3만원 엘프가 셋이니까 9만원. 9만원이 애들 장난이냐? 돈을 꺼내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냥 기분 좋게 줬으면 좋겠는데 액수가 크다보니 그러기가 힘들다. 생각 같아서는 줬다 뺏고 싶다. 필요하다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나중에 강도로 변장해서 돈을 다시 뺏어올까? "........" 잠깐, 줬다 뺏는다고?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뭉클뭉클 떠오른다. 으음. 그래 그 방법이 좋겠어, 떠오른 생각에 나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지갑에서 15만원을 꺼내 5만원씩 나눠주었다. 3만원을 희망하던 아이들이 5만원을 받게 되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막막 사랑해요 오빠" "오빠 최고예요~" 쪽쪽~ 내 품에 안겨 볼에 뽀뽀하는 라이와 루비, 난 라이와 루비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애들한테 너무 많이 주는거 아니야?" 루시아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난 루시아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마 루시아,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무슨 생각?" "으응, 별거 아니야." 난 세뱃돈을 손에 쥐고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지금 마음껏 기뻐해라. 어차피 그돈은 내주머니로 들어오게 될 테니. "이번엔 이모랑 인디오빠한테 세배하자" "일루니아 언니랑 인디오빠도 돈 많이 줄것 같아." "라이레얼 언니한테도 세배할까?" "세배해 봐야 라이레얼 언니는 한푼도 안줄껄?" "맞아. 오히려 세뱃돈 내놓으라고 큰소리 칠거야." "응응 그럴게 분명해." "그래도 한번 해보자. 혹시알아? 세뱃돈 줄지." "그럴까?" "........." 돈독이 오른 어린 엘프들.. 내 오늘 너희들의 그날로 먹으려는 나태한 정신에 일침을 가하리! 어린 엘프들은 일루니아와 인디에게 달려가 세배를 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오~" 귀엽고 깜찍한 어린 엘프들의 세배에 일루니아와 인디는 크게 기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너희들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루니아와 인디는 기꺼이 지갑을 털었다. "이걸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어." "아껴서 쓰세요." 일루니아여사님 1만원 인디 1만원 합해서 2만원. 조금 적은 것 같기도 했지만 어린 아이들에게는 큰 돈이었다,. 그리고 히로와 루시아에게 많이 받았으니 상관 없다. 세뱃돈을 챙긴 어린 엘프들은 이번에 라이레얼을 찾아갔다.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서 배를 긁적거리는 라이레얼에게 세배를 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오~" "오냐" ".........." "왜 그러고 있지? 세배했으면 나가봐" 역시나 가차없는 라이레얼 라이는 아이들 대표로 나서서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저기요....." 응? " 세뱃돈이요.." "응?" "세배했으니까 세뱃돈 주셔야지요." 라이가 대표로 말하자 루와 루비는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이레얼은 잠시 아이들을빤히 쳐다보았다. '어린것들이 감히 나에게 세뱃돈을 달라고 하다니.'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즐거운 설날이 아닌가?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니 아무튼 기분 좋은 날인만큼 라이레얼은 기분 좋게 가기로 했다. " 세뱃돈이야 내년까지 아껴서 써." 라이레얼은 아이들 손에 1천원짜리 지폐 한장씩을 올려놓았다. 그런 라이레얼의 행동에 아이들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루비는 믿기지 않는지 자기 볼을 꼬집어 보기까지 했다. 비록 1천원짜리 한장이지만 라이레얼이 준 세뱃돈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라이레얼이... "왜? 받기 싫어? 그럼 다시 내놔" "아,아니에요 언니 고마워요,. 새배복 많이 받으세요." "네 저희는 이만 나가볼께요." "안녕히 계세요." 어린 엘프들은 후다닥~ 라이레얼의 방을 빠져나왔다. 손에 들린 1천원짜리 지폐가 방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헤헤~ 라이레얼 언니한테 세뱃돈 받았다." "루비는 아직도 안믿겨져." "뭐, 어때? 받았으면 됐지 오늘 수입이 9만 1천원 이네" "만날 설날이었으면 좋겠다." "응응 그럼 매일 세뱃돈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우리 이 돈으로 뭐할까?" "맛있는거 사 먹자!" "놀이공원 놀러가자" "라이는 제비집 사 먹을래!" 저축이나 기부 같은 것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없이 오직 개인의 영달을 위해 세뱃돈을 쓰고 싶어하는 어린 엘프들. 이래서 돈 많이 주면 애 버릇 망친다는 애기가 나오는 것이다. 아이들이 돈을 어디에 쓸지 열심히 회의를 하고 있는데 히로가 등장했다. "뭐하니 애들아?" " 세뱃돈 어디에 쓸지 회의하고 있어요." "으응. 그랬구나" 그야말로 쓸데없는 회의다 잠시 후 그돈은 내 주머니에 있을 테니. "후후~" "왜 웃으세요 오빠?" "응? 아무것도 아니란다/" 난 재빨리 웃음을 멈추었다. 지금은 자제해야할 시점이다. 계획이 들통날수도 있으니. "그보다 오늘이 설날이니 설날맞이 놀이를 해야 하지 않겠니?" "놀이요?" "응 놀이 설날맞이 재밌는 놀이. 원래 설날에는 친척이나 가족들끼리 모여앉아 고스톱을 치는 거란다. 그러니 우리도 고스톱을 치자꾸나." "와아! 라이는 고스톱 좋아해요." "고스톱 막막 재미있어요." "형도 할거예요?" "이 형이 좀 바쁘지만 오늘은 설날이니 같이 놀아줄께." "와아~!:" 좋아하는 아런 엘프 일동. 난 그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훗~ 어리석은 것들 니들이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닐 텐데. 니들이 지금은 이렇게 웃고 있지만 몇시간 후에는 피눈물을 흘리게 될게야. 난 재빨리 바닥에 담요를 깔았다. "아! 그런데 너희들도 저번에 해봤으니 할겟지만, 고슽놉에는 뭔가를 걸어야 재미있고거든." "뭘 걸어요?" "저번에는 초콜릿을 걸었으니까 이번에는 돈을 걸자, 너희들 세뱃돈 받은 것도 있잖아 돈을 너무 많이 걸면 부단스러울테니까 점당 10원으로 하자. 어때?" "으음, 라이는 좋아요." "루비도요." "저도 좋아요." 점당 10원이면 아주 크게 났을 때를 가정해도 1,2만원이다. 기본 점수가 3점이 났을 때는 30원이고 쓰리고까지 한다 하더라도 5천원을 넘기기 힘들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을 테고. 하지만 이것이 다 나의 안배였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처음부터 욕심 낼 필요는 없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 초반에는 길을 닦아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점 10원 판이 돌기 시작했다. 돈이 걸렸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신중하게 쳤다. 난 대충대충 치며 티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돈을 조금씩 조금씩 잃어 주었다. 일부러 애들에게 큰판을 내주기도 했다. 게임 시작 30분만에 나는 1만원 정도를 잃었다. "아아~ 오늘은 잘 안풀리네. 라이는 언제 그렇게 실력이 일취월장했니? 그야말로 괄목상대라 할 만하구나. 아주 판돈을 라이가 다쓰네." "헤헤~ 이상하게 오늘 패가 잘 붙어요." "이야! 오늘 완전 라이의 날인가 보구나 큰판도 벌써 여러번 나오고 점 10원 이어서 다행이다." 이제 슬슬 반응이 나올때가 됐는데. "오빠" "응? 왜그러니 루비야?" "판돈 올리면 안되요?" "판돈을 올리자고?" "네 점당 10원은너무 작아요 판돈이 작으니까 재미없어요." 루비는 현재 1천원 정도를 잃었다. 라이가 제일 많았고 루도 조금은 땄다. 따도 찔끔찔금 잃어도 찔끔찔끔. 딴 사람은 더 많이 따기 위해 잃은 사람은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판돈을 올리는 것을 원한다. 난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랑 루비는 어떻게 생각하니?" "라이는 좋아요." "저도 좋아요" "그럼 점당 50원으로 올리자 됐지?" "네에~" 순식간에 판돈이 5배 올랐다. 그에 따라 판도 5배로 커졌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길을 닦는 중이었다. 여기서 섣부르게 행동하면 달아오른 판에 찬물을 끼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좀더 판을 키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까보다 더 크게 잃어주었다. "와아! 루비 쓰리고 성공했어. 라이는 피박이고 오빠는 광박예요.. 그리고 쓰리고니까 두배인거 아니죠?" "난 광만 팔아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루,. 라이와 나는 꼼짝없이 돈을 물어야 했다. 라이는 이제까지 딴 돈을 전부 잃게 되자 화가 나는지 볼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판돈 더 올려요 오빠." "응? 더올려?" "예 50원도 너무 적어요. 100원으로 올려요." "흐음 니들 생각은 어떠니?" "루비는 좋아요." "저도 상관 없어요." "좋아 그럼 너희들 뜻해도 점당 100원으로 올리도록 하자. 이번 판부터 점당 100원이다 선은 계속 루비고 그럼 패돌리렴 루비야." 게임 시작 1시간 만에 100원으로 올라갔다. 처음 시작이 점당 10원이었으니 10배로 커진것이다. 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채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것들. 너희들은 방금 스스로 무덤을 판 거다. 난 이제까지 대충대충 치던 것에서 벗어나 판에 집중했다. 그러자 패가 보이기 시작했다. 딱!딱! 아주 쫙쫙 붙는구만. 간만에 타오르는 도박사의 혼 점당 100원으로 올라간지 10분만에 쓰리고가 나왔다. 난 돈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 "이번 판은 운이 되고 좋네." "빨리 패나 돌려요,오빠" 아이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나에게 이런 건방진 태도를 취하겠는가? 평소 같았으면 엉덩이를 마구 때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가만히 놓아두었다. 도박은 집중력 승부, 흥분을 하게 되면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게 되고, 실수를 자주하게된다. 그래서 도박판에서는 부동심이 중요한 것이다, 이제 끝난 거나 다름없군. 패는 계속 돌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계속 돈을 잃었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운이 없어서 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판 크게 나면 잃은 돈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은 아이들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고 그 조급함으로 인해 이젠 그림만 보고 치는 수준이 되었다. 완전히 호구가 되어 버린 아이들. 남은 일은 돈을 쓸어 담는 것뿐. 처음으로 오링 당한 루 그리고 이어 루비와 라이가 오링당했다. 게임 시작 정확히 1시간 30분 만의 일이었다. 아이들은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멍하니 있었다. 내앞에는 지폐와 동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난 미리 준비해온 봉지에 그돈들을 쓸어 담았다. 룰루랄라~ 오늘은 즐거운 설날~ "우에에엥~~" "으아앙~" "엉엉~" 라이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자 루비와 루가 따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와서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사실 도박을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기가 힘들다 딸 때는 계속 따기 위해 멈추지 못하고, 잃을 때는 잃은 돈을 되찾기 위해 멈추지 못한다. 결국 오링을 시키거나 오링을 당할 때까지 계속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진검 승부라고나 할까? 오죽하면 그 융명한 도박사 차민수가 '도박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도막을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까지 말했겠는가 도박에서는 따는 사람은 따게 되어 있고 잃는 사람은 잃게 되어 있다 그리고 10명중의 9명은 잃는 사람 쪽에 속한다. 초짜가 처음에는 운이 좋아 딸지 모르지만 계속 하다보면 확률상으로 지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처음에 돈을 땄을때 그만둘수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난 개평으로 아이들에게 1천언짜리 한장씩을 던져 주었다. "그거먹고 떨어지렴." "우에에엥~" "으아앙" "엉엉~" 더욱 커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펑펑우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절대 딴 돈을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애들아 세상은 이런 거란다 눈뜨고 있어도 코 베어가는 게 세상이지 이제 도박의 해악이 무엇인지 알았을 테니, 앞으로는 도박같은거 하지말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무나. 너희들이 잃은 돈 9만원 은 수업료로 생각하렴. 이 오빠가 인생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가르쳐줬으니 말이야. 너희들은 오늘 돈 주고도 못배울 아주 소중한 경험을 했단다. 이경험이 앞으로 너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거야. 지금은 이 오빠가 밉고 원망스럽겠지만 너희들이 커서 세상에 나가게 되면 오빠한테 감사하게 될 거란다. 돈을 다 챙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순간, 내뒤에 서있던 사람과 마주쳣다. "헉! 누,누구? 아! 루시아!" 서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루시아였다. 한복을입은. "한복 잘어울린다. 정말 예뻐" 내가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루시아는 팔짱을 낀채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왜. 왜그래? 무슨일 있어?" "그걸 몰라서 물어?" "무,무슨일인데?" "사기도박으로 애들 코 묻은 돈 빼았으니까 좋아?" "사, 사기도박이라니? 난 어디까지나 정당하게 승부했어. 그리고 돈에 코 같은거 안붇었어. 아직 빳빳해." 아이들은 재빨리 루시아에게 매달렸다. "우엥~우엥~ 오빠가요....... 막막 고스톱 치자고.....우에에엥~" "으앙~~ 으앙~~ 우리가 막막 싫다고 했는데도 ......치자고 해서..... 으앙~" "엉엉~ 형이 우리돈 다 뺏어갔어요." 난 기가 막혀서 소리쳤다. "내가 언제 그랬어? 니들도 좋다고 했잖아. 그리고 뺏어갔다니! 이건 정당한 승부의 대가일 뿐이야!" 내가 항변했지만 루시아의 싸늘한 눈빛은 풀릴 줄을 몰랐다. "당장 애들한테 돈 돌려줘." "응? 그,그게 무슨 말이야 루시아?" "당장 돈 돌려주라고." "아,알았어." 루시아가 서슬 퍼렇게 눈을 뜨며 소리치자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봉지에서 돈을 꺼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흑~ 어떻게 딴 돈인데.. 난 결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가게 경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이 한몸 불사른 것이다. 그런 나의 마을을 몰라주다니. 흑~ 루시아 미워~~ "다 돌려줬어 이젠 됬지?" 난 텅빈 봉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아이들은 눈물을 닦으며 돈을 세기 시작했다. "앗! 1만원이 부족해요." "루비도 1만원이 부족해요." "8만 1천원 밖에 없어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1만원은 개펑으로 뗐어." "우에에엥~" "으아아아앙~" "엉엉~" 루시아의 한복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당장 돌려주지 못해!" "아,알았어." 난 빼돌린 3만원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울음을 그쳤다. 혹시라도 돈이 모자랄까봐 또 세어보는 아이들. 그 모습이 정말 얄밉다. "맞아요 언니." "네 이번에는 맞아요." "9만 1천원이예요." 아이들은 돈을 주머니에 잘 집어넣었다. "언니는 오빠랑 잠깐 할 애기가 있으니까 거실로 나가있어." "네에~!" 위기감이 몸을 엄습해 온다. "자,잠깐 가지마, 애들아." 내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빠르게 방을 빠져 나갔다. 루시아는 방문을 닫았다. 우기 수치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한다.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약속이 있었지, 이런 중요한 약속을 깜빡하다니. 아하하하~ 빨리 나가봐야겠네." "멈춰~" "......" 은근 슬쩍 빠져나가려는 작전 실패 2단계 작전을 실행해야겠군. "헉! 갑자기 배가 아파! 아침에 먹은 떡국이 잘못됐나? 헉! 설마 인디 이자식이 날 독살하려고......" "꾀병 부리지 마" "........." 2단계 작전 실패. 3단계 작전을 실행해야겠군. "........." 잠깐 작전은 2단계까지 밖에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봐 왜 애들에게 고스톱을 가르쳤냐부터 시작해서 사기도박으로 돈을 딴것 까지." "........" 난 이제 죽었다... 3시간에 걸친 루시아의 잔소리를 듣고 나자 완전 탈진 상태가 되었다. 즐거워야할 설날에 내가 이꼴을 당한 것은 전부 어린 엘프들 때문이다. 하지만 잔소리를 들은 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딴 돈을 전부 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애기를 나를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결코 믿지 않았으리라. 그나저나 큰일이군. 고스톱으로 돈을 회수할 거라 생각해 세뱃돈으로 한 엘프당 5만원씩 ,합해서 15만원이나 줬는데. 이럴줄 알았으면 3만원씩만 줄걸. 난 벽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아주 속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난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힐 생각으로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 컵을 보니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 듯 말듯 한다. 으음, 컵이라........ "이 주사위가 어느컵에 들어있는지 찾으면 되는 거야" 난 한개의 컵에 주사위를 넣은 다음 컵을 덮고 세 개의 컵을 빠르게 뒤섞었다. "어디 있게?" "라이는 가운데요" "루비도 가운데요." "저도 가운데 할래요." 가운데 컵을 열자 그곳에서 주사위가 나왔다. 난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아! 너희들 정말 잘하는 구나,. 오빠가 못 당하겠는걸?" "헤헤~" "한번 더 해볼래?" "네에~" "이게 그냥 하는 것보다 돈을 걸고 하면 더욱 재밌단다. 아! 이제 부터 맞추는 엘프에게는 건 돈의 10배를 줄께." "정말요?" "응. 1천원 걸어서 맞추면 1만원 주고, 1만원 걸어서 맞추면 10만원 줄게. 이오빠가 너희들이 예뻐서 이러는 거야. 뭐,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고........" "아,아니에요, 라이는 할거예요." "루비도요." "저도 할래요." "그럼 시작한다." 난 가운데 컵에 주사위를 집어넣고 빠르게 컵을 뒤섞었다. "어디있게?" "왼쪽거요! 왼쪽게 분명해요." "맞아. 루비도 똑똑히 봤어." "헤헤~ 난 가진돈 다 걸어야지." "라이도 맞추면 10배잖아." "루비도 다 걸래." 어린엘프들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세뱃돈을 주섬주섬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어리석은 것들. 역시 애들 학습능력은 제로다. 한번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걸려들다니... 그나저나 빨리 돈 챙겨서 철수해야겠군. 이번에도 루시아한테 걸리면 진짜 죽을지도 모르니.... "그럼 연다.~" 초롱초롱 빛나는 여섯개의 눈동자. 미안하다. 애들아 사실 주사위는 오빠 주머니 속에 있단다. 중간에 빼돌렸거든.. 그러니 니들이 어디에 걸든 돈을 잃게 되어 있단다.. 부디 이 오빠를 이해해 주렴 이오빠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란다. 라이코스의 대모험2 (제비집을 찾아서) 친구인 라이를 쫓아 한국까지 온 라이코스 하지만 1권 이후로는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어째서 이런일이 생긴걸까? "그야 정신없는 작가 때문이겠지." 불만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라이코스 라이코스의 의견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작가를 탓하기전에 존재감 없는 자신을 탓해야 할 것이다. 사실 작가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편집자가 닦달할 때마다 작가는 눈물을 뚝뚝 쏟으며 '마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절규하는 힘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편집자는 작가가 하루만 마감일을 어겨도 시어머니 모드로 변신한다. 그리고는 마치 시어머니가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 들볶듯이 작가를 들볶는다 사람이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런일이 있을수 있고 그러다 보면 약속을 어길수도 있다. 그런데 뭐 그런 걸 가지고 사람을 못 살게 구냔 말이다! 마감 독촉을 받을 때마다 가녀린 작가의 마음속에는 큰 스크래치가 그어진다. 하지만 그 스크래치가 채 낫기도 전에 편집자는 또 다시 작가를 닦달하고 작가의 마음 속에는 또 다시 스크래치가 그어 진다. 그러다 보면 작가는 하루하루를 피를 말리는 고통속에서 살아가다가 결국견디지 못하고 일찍 죽게된다. 차라리 안락사를 시켜주는 편이 훨씬 인도적이고 고통도 덜 할 것이다. "......;" 어쩌다가 이런 애기가 나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1권 후반부에 살짝 등장했다가 잊혀진 캐릭터가 된 라이코스는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무려 세권 동안 한번도 출연 기회를 잡지 못한 라이코스 "흑~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버들랜드에 있는 건데..." 5권에서 드디어 출연기회를 잡은 라이코스 라이코스는 울음을 멈추고 날개를 불끈 쥐었다. "이번에야말로 나의 존재감을 널리 알리는 거야"! 참고로 라이코스가 그동안 출연을 못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이유를 잠시 살펴보자면,,,.. 라이코스는 자신이 앞으로 살아게게 될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아보기위해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서울을 떠난 라이코스는 강원도를 먼저 둘러보았다. 파닥파닥~~ 열심히 날아다니던 라이코스는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해 근처에 있던 나무에 앉았다. 그런데 그런 라이코스를 노리고 구렁이 한마리가 스멀스멀 나무 위로 기어 올라오는것이 아니겠는가ㅓ? 구렁이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만약 라이코스가 아닌 일반 새였다면 꼼짝없이 잡아 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코스가 누구던가? 그 유명한(이세계에서는 아무도 모르지만) 영물 청안백우조다. 살기를 느낀 라이코스는 재빨리 구렁이를 노려보았다. 굵기가 어른 팔뚝만한 구렁이였지만. 영물인 라이코스에게는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오늘 점심은 이놈으로 해야겠군..' 구렁이의 머리가 라이코스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라이코스는 몸을 피하며 구렁이의 목을 물려고했다. 그런데 그순간 누군가가 라이코스의 다리를 막대기로 내리쳤다, "크악! 어떤 놈이야?" "아이고 미안해라 난 구렁이 잡으려고 한건데.." 나무 아래 있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구렁이를 때려잡았다. 꾀죄죄한 누더기를 걸친 그남자의 이름은 흥부. 흥부는 길을 지나가던 차에 나무에 구렁이가 있는 걸 보고 정력에 좋을 거라 생각해 때려잡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실수로 라이코스의 다리를 때려서 부러뜨렸고.. "내다리 물어내 임마!" "알았어 치료해주면 되잖아" 라이코스가 하도 난리를 치자 흥부는 라이코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흥부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정력은 좋아 자식은 12명이나 낳았다. 그것도 모자라 몇명 더 낳을 생각인지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처먹었다. 이런 인간들이 많으면 대한민국이 출산율 저하 때문에 골머리 썩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청안백우조가 정력에 좋다는 것을 알았다면, 흥부는 조저하지 않고 라이코스를 끓는 물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안백우조는 이세계에 없는 종이었고, 흥부도 라이코스를 그저 변종 매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튼 흥부는 라이코스 다리에 붕대 하나만 감아줬을 뿐, 그 이후론 아내와 밤일을 치르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라이코스는 부리를 박박 갈았다. '다리만 나으면 두고보자' 다행히 청안백우조는 영물인지라 회복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다리가 다 낫자 라이코스는 흥부네 집을 떠났다. 흥부는 해준 것도 없는 주제에 떠나는 라이코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말했다. "봄 되면 박씨좀줘~~" 귀찮아서 적당히 넘어가려 했던 라이코스는 그 말을 듣자 열이 깃털 끝까지 뻗쳤다. 그래서 그길로 근처 군청을 찾아가 흥부를 야생동물보호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결찰과 관련 공무원들은 흥부네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이 흥부네 집을 조사해보니 수많은 밀렵도구들과 웅담, 산토끼, 너구리 등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경찰에 끌려가는 흥부는 라이코스에게 소리쳤다.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라이코스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 은혜는 뭔 은혜? 니가 내 다리 부러뜨렸잖아!! 니가 빨간약 한번이라도 발라줬으면 이렇게까진 안했어" "붕대 감아줬으면 됐지 뭘 더 바래?" "감방가서 콩밥이나 쳐드셈" 일을끝마친 라이코스는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리가 다 낫긴 했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재 흥부는 야생동물보호법 위한으로 5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이다. 뭐 이러한 이유로 라이코스가 그동안 출연을 못한 것이지 결코 작가가 까먹어서가 아니다(진짜다 좀 믿어라 -_-...) 그런데 한동안 잊혀졌던 라이코스가 어쪈 이유로 다시 출연한 것일까? 여기에도 다 이유가 있다, 라이코스는 얼마 전 라이가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그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라이 : 라이는 제비집이 먹고 싶어 루비 : 루비도,.. 루 : 나도.. 라이 : 하지만 제비집은 너무 비싸 루비 : 전에 오빠한테 사달라고 졸랐다가 크게 혼났잔아 루 : 누나도 졸라봤는데 소용이 없어.. 루비 : 제비집이 그렇게 맛있다는데.. 라이 : 라이는 제비집을 꼭 한번 먹어보고 싶어, 막막 먹어보고 싶어, 루비 : 제비집은 요리하는 집도 얼마 없고 가격도 너무 비싸 언니도 안된됬잖아.. 라이 : 재료만 구해오면 인디 오빠가 요리해 줄텐데... 루 : 어디서 재료를 구해 그만 포기해.. 라이야. 라이 : 그치만... 끝까지 제비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라이.. 우현히 그 대화를 듣게 된 라이코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나의 친구 라이를 위해 제비집을 구해오겠어!@' 다시 말하지만 라이코스는 청안백우조다, 새들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새들의 왕이 제비집 하나 못 구해온다면 그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결심한 라이코스는 제비집을 구하러 남쪽으로 떠났다. 힘찬 날개짓 소리가 허공 가득 올려 퍼졌다. 파닥파닥~~ 제비집은 말 그래도 제비의 집이다. 그리고 제비집 요리는 제비의 집을 끓여서 만든다. 주로 스프이다. 제비집을 어떻게 먹냐고? 제비집이라 해서 다 같은 제비집이 아니다. 우리나라 제비의 제비집은 풀과 나뭇잎, 진흙 등으로 만들어져 있다. 먹을 수 없는 재료들로 만들어졌기에 당연히 못 먹는다. 풀과 나뭇잎과 진흙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 이상 먹을 수 있을 리 없다. 바다제비의 경우에는 해초와 생선 등을 먹는데, 이것이 침과 섞이면 끈적끈적한 젤리처럼 변한다,. 바다제비는 이것을 뱉어내 제비집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제비집은 마르면 석고처럼 변한다. 원재료가 해초와 생선 등이기에 이 제비집은 먹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바다제비의 둥지는 바닷가의 깊숙한 동굴 절벽 곡대기에 달려 있다. 당연히 따기가 굉장히 힘들다.. 그렇기에 제비집은 매우 귀하고 가격이 비싸다. 이 제비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중국 남부나 동남아시아까지 날아 가야한다. 굉장히 먼 길이었지만 라이코스는 오직 친구인 라이를 위하는 마음에 열심히 날갯짓을 해서 서해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열심히 날아서 라이코스가 도착한 곳은 베트남의 해안 절벽,, 그곳에는 수많은 바다제비들이 날아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비집을 따기 위해 배를 띄우고 있었다. 라이코스는 절벽에 난 동굴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여러 마리의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다. 라이코스는 눈대중으로 그중에 제일 크기가 큰 둥지를 점찍었다. '저게 제일 큰 것 같군," 라이코스는 목표로 삼은 둥지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둥지에 살고 있던 바다제비는 깜짝 놀라 라이코스를 가로막았다. "넌 뭔데 우리집에 접근하는 거냐?" "난 청안백우조라이코스다!!" "청안백우조? 라이코스? 어쨌든 우리 집에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긴. 내친구가 너네집이 먹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몸소 찾아온거지. 그러니까 좋은말로 할때 집내놓으시지." "뭐?" 바다제비는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 집을 내놓으라니, 자기가 무슨 건설업체가 입주자들 몰아내기 위해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이라도 된다 말인다."? "웃기는소리!" "훗~~ 감히 영물인 내 말을 거역하다니! 지옥에 가서 아이리스 소설책이나 실컷 봐라!" "에잇! 죽어라!" 바다제비는 라이코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작 제비 주제에 영물인 라이코스의 상대라 될 리가 없었다. 독수리와 17대 1로 싸워도 밀리지 않는 라이코스였다. 게다가 히로와 같이 다니면서 전투력이 일휘월장 했다. "간다! 빅장 40단 콤보 흉내 내기!" 비록 흉내 내기에 불과하지만 빅장은 빅장이었다,. 한낱 제비가 빅장을 맞고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는가? 바다제비는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을 느꼈다. "크억! 이건 뼛속까지 아프다!" "라이코스대회전킥!" 라이코스는 몸 전체를 회전시키며 다리로 바다제비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피니쉬(finish)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상대로 라이코스의 가뿐한 승리였다. ㄱ라이코스가 제비집을 뜯어가려고 보니 제비집 안에는 암놈 제비와 새끼 제비 세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않아있는 것이 보였다. "아 안된다. 이놈아, 이집은 절대 안된다." 라이코스에게 얻어맞은 바다제비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끝가지 라이코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보다 못한 암놈 제비가 말렸다. "그만해요 여보" "흑~ 어떻게 마련한 내집인데. 이집 넘어가면 당신과 나, 우리 애들 당장 바닷가에 나앉아야돼." "새집을 마련하면 되잖아요" "나라 경제가 이모양 이꼴이어도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힘없는 서민들이 어떻게 새집을 마련해? 재건축 한번 들어가자면 주변 집값 전체가 들썩거리고, 신도시 분양에 참여하려해도 투기꾼들이 청약통장 매매하며 독차지를 하니, 정부가 각종 대책을 내놔봐야 백약이 무효야. 오죽하면 부동산 불패신화라는 말까지 나오겠어? 힘없는 서민들은 차리리 달팽이나 거북이로 태어나게 해주지 그랬냐고 하늘을 원망하는 수밖에." "흑흑~ 여보" ".....;;" 얘기를 듣던 라이코스는 어이가 업었다. 바다제비도 아파트 분양 받나? 그냥 아무데나 둥지 틀어서 사는 것들 입에서 집값이 어쩌네 저쩌네 하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건가? "닥치고 비우기나해" "흑흑~ 제발 부탁드려요 이집만은 안돼요 형님 제가 이렇게 부탁드릴테니 옆집 가져가시면 안 될까요?" "내가 널 언제 봤다고 니 형님이야? 그리고 내가 가져가고 나면 새로 지으면 되잖아" "흑흑~ 그게 말이죠.." 바다제비는 금사연이라 해서 칼샛과의 새다. 이 금사연은 산란기에 침샘에서 끈적끈적한 액채를 분비하여, 해초와 생선 등을 섞어 바위틈에 둥지를 만든다. 이제비집은 연와라고 해서 최고급 요리에 속한다. 바다제비가 처음 지은 집은 흰색을 띄고 관연이라 불린다. 이 관연은 최상품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떼어가고 나면 바다제비는 어쩔수 없이 다시 집을 지어야 한다. 이때는 침이 넉넉하지 못하므로 털도 일부 섞어 짓는다. 이것은 모연이다. 때로는 집을 짓기 위해 억지로 침을 뱉다보면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집이 혈연이다. 색깔은 당연 붉은색을 띄게 된다. 라이코스가 뺏으려던 바다제비의 집은 새빨간색이었다. "흑흑~ 벌써 인간들에게 두번이나 뺏겼어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집은 제가 피를 토하며 지은 거예요, 이젠 침도 잘 안나와요 저 이젠 집 못지어요. 이집 뺏기고 나면 제 인생은 끝이예요 가족들과 전부 바닷가에 나앉아야 한다구요ㅡ 어흐흐흑~ 부탁이예요 형님. 제발 자비를 배풀어 주세요." 바다제비의 흐느낌에 라이코스는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힘없는 바다제비를 몰아내고 집을 빼앗으려 하다니! 이는 편집자가 원고 빨리 넘기라고 작가를 닦달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짓이었다. 라이코스는 깊이 반성했다,. "내가 이렇게 나쁜 새였다니. 나도 제비집 빼앗는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어."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 는 없었다 친구인 라이가 얼마나 제비집을 먹고 싶어 하는지 잘 알기예. 만약 제비집을 구해가지 못한다면 라이는 크게 실망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라이코스는 날개를 불끈 쥐며 외쳤다. "그래! 그까이꺼 내가 직접 만드는 거야!" 라이코스는 자신의 침으로 제비집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제비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바다제비의 침이 필요하지, 매의 침같은 것은 불순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코스가 누구던가? 영물 청안백우조가 아니던가? 영물인 라이코스가 제비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라고 묻는 다면 라이코스의 대답은 하나였다 "영물이니까......" 아아~ 간만에 나온 이대사. 모든 의문을 단지 이 한마디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넘겨버리려는 작가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아무튼 라이코스는 근처의 제비들이 집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따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서툴렀지만, 조금 하고나자 웬만한 건축업자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라이코스의 제비집 "헉!" "저런!" "멋지다!: "대단해요!" "언빌리버블!" 라이코스의 제비집을 본 바다제비들은 쩍 벌어진 부리를 다물 줄 몰랐다. 라이코스의 제비집이 초대형이었기 때문이다. 바다제비들의 제비집이 13평짜리 주택이라면, 라이코스의 제비집은 60평짜리 호화 빌라였다. 크기와 품질 모든 면에서 라이코스의 제비집은 기존의 제비집을 압도했다. "우헤헤헤헤~ 영물인 내가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라이코스는 그 제비집을 들고 서울로 날아갔다. 파닥파닥~~ 열심히 날아 도착한 서울. 그곳에는 라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앗! 그게 머야 이코야?" "응. 이게 제비집이야, 라이야" "정말?" "응 라이 먹으라고 내가 만든 거야" "우엥~ 고마워,이코야" 라이는 라이코스를 꼬옥 안아주었다. 라이 패밀리의 빛나는 우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 라이는 제비집을 들고 인디에게 갔다. "아! 제비집이네요 이 비싼 걸 어디서 구했어요?" "라이 친구 이코가 만든 거래요 이걸로 맜있는 요리 해주세요, 오빠" "알았어요" 간만에 좋은 요리 재료를 손에 넣은 인디는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만들었다. 제비집요리는 제비집의 주원료가 해산물인 만큼 해물요리에 속한다. 제비집은 주로 스프나 탕으로 해서 먹는다. 요리를 끝마친 인드는 제비집스프를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렀다. 라이와 루와 루비는 열심히 수프를 떠먹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웅웅~ 막막 맛있어" "한 그릇 더 주세요" 비싼 요리는 천천히 음미하며 먹어야 본전을 뽑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일단 입에 밀어 넣으면 무조건 꿀꺽 삼켰다. 히로와 ㅎ루시아는 처음으로 먹어보는 제비집요리를 천천히 즐겼다. "그런데 이 비싼게 어디서 났니?" 인디는 라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이님께서 주셨어요" 라이는 라이코스를 가리켰다. "이코가 줬어요" 라이코스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영물인 내가 직접 만들었지" "니가? 아니 매가 어떻게 제비집을 만들어?" "후후~ 내가 영물인 것을 잊은 거냐? 영물에게 불가능은 없어!" 라이레얼은 제비집 수프를 후루룩 마시며 말했다. "이것도 몸에 좋나?" 카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명 좋을 거예요 언니" "으음 몸을 생각한다면 이런 것 보다는....." 라이레얼의 시선이 라이코스에게 향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라이코스는 재빨리 라이의 품으로 후다닥 숨었다. "제비집 수프보다는 청안백우조 수프가 더 맛있을 것 같은데." '"알았어요, 언니 제가 끓여드릴게요" 카르가 나서면 라이코스는 죽은 목숨이었다.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는 버들랜드의 주인이 아니던가? 보고 있기가 불쌍할 정도로 몸을 벌벌 떠는 라이코스. "흑~ 난오래 살고 싶어,라이야" "걱정하지마, 이코야. 라이가 이코를 지켜줄게" "너 당장 이리오지 못해!" 카르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히로가 나서서 말렸다. "그만해요 라이레얼. 너도 그만해, 카르 저렇게 벌벌 떨고 있는게 불쌍하지도 않아요?" "그치만 정력에 좋다잖아" "........." 굉장히 몸 생각하는 라이레얼 "라이코스는 비상식량이예요 나중을 대비해 살려두도록 하지요." "뭐, 히로가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그렇게 할께. 언제든 기회는 많으니까" 라이레얼과 같은 집에 사는 이상 라이코스는 평생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힘없는 라이코스가 뭘 할 수 있겠나? 그저 1분 1초라도 오래 살기를 바라야지 "그나저나 이 제비집은 뭐로 만든거냐?" 히로의 물음에 라이코스는 별 생각 없이 말했다. "각종 해산물을 내 침과 섞어서 만든 거야" "......." "......." "......." 순간, 모두가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물론 어린 엘프들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먹었다, "왜,왜그래?" 주위의 시선에 두려움을 느낀 라이코스는 몸을 잔뜩 움추렸다. "침을 섞었다고?" "응" "니침을?" "응" "이런 빌어먹을 매를 봤나~!" 히로가 라이코스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인디가 말렸다. "그, 그만두세요 히로님 , 원래 제비집은 침을 섞어서 만드는 거예요" "뭐라고?" "제비의 침이 섞여있어야 제비집이예요 . 인공 제비집 같은 경우 에는 제비침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맛이 떨어진다고요" ",,,,,," 그런 거였나?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히로는 슬그머니 자리에 않았다 "나도 알아, 임마" 그리고는 다시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느낀 라이코스는 지친 몸을 쉬게 하기 위해 라이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제비집 수프는 금방 동이 났다 맛이 좋은데다가 아이들이 워낙 잘 먹었기 때문이다. "더 없어요?" "예, 이제 다 떨어졌어요." "우웅~ 라이는 더 먹고 싶은데.." "루비는 세그릇 밖에 못 먹었어" "다섯 그릇은 먹어야 배가 차는데." "응응. 입맛만 버렸어" "간에 기별도 안가" 그순간 히로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제비집은 엄청 비싸단 말이야, 그비싼 것을 가져다 팔면 돈이 되지 않을까?' 아이들 머릿속에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코한테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할까? "웅~~ 그게 좋겠다" "빨리 깨워" 라이코스는 앞에 놓인 재료들을 이용해 제비집을 만들었다. 하도 침을 뱉었더니 이젠 잘 나오지도 않는다. "카악! 퉤!" 목구멍이 찣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뱉은 침에는 피가 섞여 나왔다. "헉! 이젠 피까지.." 이대로 만들면 혈연이 된다. 피를 토하면서까지 제비집을 만들다니,.. 라이코스는 이제 그만 쉬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라이코스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빨리 만들어 이코야 라이 제비집 또 먹고 싶단 말이야" "루비도 빨리 먹고 싶어." "쉬지 말고 열심히 만들어. 알았지?" 어린 엘프들은 제비집 요리를 먹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라이코스를 독촉했다. 이렇게 독촉을 하는 것은 어린 엘프들만이 아니었다. "나의 언니 몸보신해야 하니까 빨리 만들어. 하루에 하나씩은 만들어야 할 거 아냐? 자꾸늦게 만들면 그냥 잡아먹어 버린다." 카르의 협박. "방금 음식점과 납품 계약 체결하고 왔단다. 물량 맞추려면 시간이 많이 부족해. 그래서 이제부터는 24시간 풀 생산체제로 들어갈 테니. 농땡이 피우지 말고 열심히 일하렴." 편집자가 작가를 구박하듯. 라이코스를 마구 구박하는 히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제비집을 낳는 라이코스?)가 되어버린 라이코스 인간과 엘프, 드래곤의 이기주의에 철지히 짓밝힌 라이코스의 권리. 라이코스는 결국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다. 하지만 하루만에 잡혀와 다시 제비집을 만드는 신세가 되었다. "흑흑~~ 이건 노동법 위반이야" 매한테는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흑흑~ 그럼 야생동물 보호법 위반이야" 안됐지만, 청안백우조는 천연기념물도 아니고 보호 받을 수 있는 야생동물도 아니다. "그럼 애완동물 보호법....." 거기에도 넌 없어, 임마! 결국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는 라이코스는 침과 피와 눈물을 섞어가며 열심히 제비집을 만들었다,. 으음 이번 건 좀 짜겠군... 아이리스 2부 5권 Story 15 발렌타인 데이 태양계 밖에는 녹색의 아름다운 별이있다. 그 별의 이름은 발렌 타성(Valenta星). 발렌타성에는 발렌타인(Valenta人)이 살고 있었다. 발렌타인들은 지구보다 월등히 우월한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 다. 그들은 그런 앞선 기술력으로 행성 간을 워프 할 수있는 우주선 을 만들어냈다. 발렌타성의 공주 초콜릿. 그년는 국왕인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우주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우주선은 운석과 총돌을 했다. 당황하던 그녀는 우주선 수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근 처 행성에 불시착했다. 그 행성이 바로 태양계에 속한 지구였다. 그 지구에서도 오지에 위치한 쌀국화 마을 (米??). 발렌타인의 외모는 지구인과 비슷햇고,언어 통역기도 있었기에 그녀는 우주선이 수리될 때까지 그 마을에서 살기로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 남자 의 이름은 조지고 부시기. 조지고 부시기는 지능이 좀 모자라긴 하 지만 정말 순수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 장이 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부정 선거를 통해 41대 촌장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43 대 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42대 촌장 믈리너가 8년 동안 만들어 놓은 마을 재정흑자를 단번에 적자로 바꾸어놓았다. 간단히 말해 완정히 말아먹은 것이다. 그러던 중 옆 마을에 사는 빈곤한 라덴이 쌀국화 마을의 집 한 채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일가족 4명이 타죽 었다. 이에 격분한 조지고 부시기는 마을사람들을 이끄고 옆 마을로 쳐 들어갔다. 하지만 빈곤한 라덴은 이미 다른 마을로 도망친 후였다. 마을사람들은 사정을 설명하며 살려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조지고 부시기는 그들의 애원에 콧방귀를 끼며 마을 전체 에 불을 놓고, 마을사람들을 잡아 죽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녀는 조지고 부시기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마침 우주선도 수리되었기에 그녀는 지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지구를 떠나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조지고부시기를 만났다. 자신이 발렌타성에 사는 발렌타인이라는 것을 밝힌 그녀는 이제 지 구를 떠나야한다고 말하고, 조지고 부시기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발렌타성의 언어로 욕을 퍼부었다. "똥이나 처먹어라!" 그녀가 떠나고 나자 조지고 부시기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갈색 고체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응가(?)였다. 일반인에 비해 지는이 떤어지는 조지고 부시기는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먹어 보았다. "오오!이렇게 달콤하고 맛있을 수가!" 그렇다. 발렌타인의 응가는 지구인들 미각엔 굉장히 달콤하고 앗있었던 것이다. 조지고 부시기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지켜모았다. 그녀가 상자 를 건네주며 한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발렌타성의 언어로 '똥이나 처먹어라'는 쌀국화 마을의 언어 '당신을 사랑해요'와 발음이 똑같았던 것이다. 이 사싱을 알리 없는 조지고 부시기는 감탄을 내뱉었다. "그녀가 나를 이토록 사랑했구나!" 그는 드녀가 선물을 건네주며 고백을 하고 떠난 2원14일을 발렌 타인 데이(Valenta人 Day)로 정했다. "이 날에 여자가 남자에게 고잭을 할 수 있도록 널리 알리도록 하 라!" 하지만 뒷마을 촌장 마담 후레쉐이는 발렌타인 데이를 따르는 것 을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조지고 부시기는 마담 후레쉐이가 전쟁 을 하기 위해 많은 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마을사람들을 선동해서 쳐들어갔다. 이번에는 조지기 부시기가 집에서 기르고 있는 푸들 까지 동원되었다 애포에 쌀국화 마을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마담 후레쉐이의 마을 은 금방 초토화 되었고, 마담 후레쉐이는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 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무기는 커녕 그 흔한 식칼 하나 나오지 않 았다. 이에 조지고 부시기는 마담 후레쉐이의 독재에 신음하는 마을사 란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재빨리 말을 바꿨다. 푸등른 꼬리를 흔들고 왈왈 짖어대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조지고 부시기의 목적은 따로있었으니. . . . . .그것은 바로 마담 후레쉐이의 마을에 잔뜩 있는 카카오나무였다. 카카오나무의 열매 속에는 많은 씨가 들어있는데, 이것을 말려 가루로 만들면 코코아가 된다. 이코코아는 발렌타인의 응가와 비 슷한 맛을 냈다. 저지고 부시기가 마담 후레쉬이의 마을을 공격한 데에는 이런 깊 은 이유가 있었던것이다. 조지고 부시기가 코코아를 고체로 만들었고, 그것을 그녀의 이름 을 따서 초콜릿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에 이 초콜릿 이 전통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걱이 발렌타인데이의 유래다. . . . . . .라는 것은 물론 뻥이다. 설마 저 걸 믿는 사람은 없겠지? 발렌타인 데이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많은 얘기들이 있다. 그 준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얘기가 로마의 성 발렌타인(St. Valentaine)의 얘기다. 당시 로마 황제였던 클라디우스는 젊은 청년들을 군대로 끌어들 이고자 결혼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이에 반대해서 서로 사랑하는 남녀를 결혼시켜 주다가 기원전269년2월14잉에 순교했다. 그는 죽기 직전 간수의 딸에게 'Love From Valentine'이라는 편 지를 남겼고, 이는 발렌타인 데이에 사랑의 메세지를 천하는 풍습 의 기원이 되었다. 그 외의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영국인들은 새가 짝을 짓는 날이 2월 14일이라고 맏었다나 뭐라나. 어쨌든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 랑을 고백하는 날이다. 사실 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발렌타인 데이에 대해 괸장히 부정 적인 입장이었다. 국경일도 법정공휴일도 아닌 날에 왜 그렇게 열 과하는가? 솔로들 염장 지르는 날은 코리스마스 하나로도 추분하다. 스 흔한 100원짜리 초콜릿 하나 받지 못하는 남자들의 심정을 아 눈가?누구는 옃에서 키세스(초콜릿의 한 종류)먹고있는데,누구는 구경만 해야하는 그 심정. 안 겪어본 남자는 이 심정 절대 모른다. 연인들을 위하는 날이라는 그 이면에는 솔로들의 피눈물이 숨어 있다. 지금도 발렌타인 데이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이 사람들은 백이면 백 솔로다). 젊은이들을 뼛속까지 미국 문화에 물들게 한다나 뭐라나. 뭐, 미제국주의자들의 음모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여러 화사들의 상업전략임에는 틀림없다. 발렌타인 데이라 해서 초콜릿 판매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카 드,꽃,케이크 등등 각종 선물류의 판매가 늘어나고,이멘트 업체 의 매상이 증가한다. 발렌타인 데이와 사업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로 재미를 본 각종 회사들은 1년365일이 발렌타인 데이이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것을 잠시 살펴보자면........ 1월 14일 다이어리 데이 ㅡ한 해의 시작인 달인만큼 1년동안 사용할수있는다이어리를 연인에게 선물하난 날이다.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ㅡ여자가 평소 좇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고백을 하는 날이다. 초콜릿 외에 개성있는 선물을 준비하거나,이멘트를 하기 도 한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 ㅡ서양에는 없고 동양에만 있는 날이다. 이 날은 남자가 좋아하 는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하며 고백하는 날이다. 4월 14일 블랙 데이 ㅡ발렌타이 데이와 화이트 데이를 쓸쓸하게 보낸 남녀가 외로움 을달래는 날이다. 검은 정장을 입고 짜장면을 먹어야 한다. 이 날 짜장면을 먹지 않으면 내년에도 공친다는 저주 섞인 속설 이있다. 5월 14일 옐로우 데이&로즈 데이 ㅡ옐로우 데이는 연인이 없는 남녀가 노란 옷을 입고 카레를 먹 는 날이다. 블랙 데이와 마찬가지로 이 날 카레를 먹지 않으면 내년 에도 독신 신세를 못 면한다는 저주 섞인 속설이 있다. 로즈 데이는 연인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날이다. 6월14일 키스 데이 ㅡ연인들이 키스하는 날이다. 7월 14일 실버 데이 ㅡ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연인에게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게 하 면서 자신의 애인을 소개시켜주는 날이다. 8월 14일 그린 데이 ㅡ연인들과 함께 교외(산이나 숲 등등)로 나가 삼림욕을 하는 날이 다. 9월14일 뮤직 데이&포토 데이 ㅡ뮤직 데이는 나이트클럽 등 음악이 있는 잔소에 친구들을 모아 놓고 연인을 소개하는 날이다. 포토 데이는 연인과 사질을 찍는 날이다. 10월14일 와인 데이 ㅡ연인과 와인을 마시는 날이다. 11월14일오렌지 데이&무비 데이 ㅡ오렌지 데이는 연인과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날이다. 무비 데이는 연인과 영화를 보는 날이다. 12월14일허그 데이 ㅡ연인끼리 깍 껴안는 날이다. "........" 이게 뭐하는 것인가? 참고로 여기서 끝이 아니다. 11월11일은 빼빼로 데이고,12월24 일은 크리스마스이브,25일은 크리스마스다. 여기에 투투(사귄지 지 22일 되는 날),100일,200일,300일,1년,2년,3년,서로의 생일,첫키 스 기념일,결혼기념일 드드을 포함하면 정말 1년 365일이 기념일 이라해도 과엉이 아니다. 이런 각종 데이들은 자체적으로 생겨났다기보다는 관련 업 종에 종사라는 사람들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예로 화이트 데이는 서양에는 없도 동양에만 있다. 발렘타인 데이로 재미를 본 제과업체들이 계속 재미를 복 싶었나 보다. 블랙 데이는 중국집과, 로즈 데이는 꽃집, 실버 데이는 귀금속 점, 무비데이는 영화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와인 데이는 또 뭔가? 내가 보졸레누보 판매 개시일(11월 셋째주 목요일)은 들어봤어도 와닌 데이는 처음 돌어본다. 와인 문화가 별로 정착되지 않은 우리나라에 뭔 와인 데이? <죄송합니다만 1쪽정도는 생략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위새주는 마음이지 비싼 선물이 아니다. 100 원짜리 초콜릿이라도 마음이 들어있으면 그게 중요한 거다. "........" 아아~ 난 왜 이렇게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단 말인가? 역시 난 천 재? "라이야,라이야." "예?라이 무르셨어요,오빠?" "우리 라이 일오 와바." 난 라이를 번쩍 들어 무릎 위에 안혔다. "우리 라이 다음주 월요일이 무슨 날인지 아니?" "예?으음.....다음주 월요일이면2월14일이니까......아!발렌 타인 데이에요!" "딩동!우리 라이 잘 아는구나."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음어 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내 가슴에 얼 굴을 묻으며 해맑게 웃었다. "헤헤~원래 라이가 좀 똑똑하잖아요." "그럼 발렌타인 데이가 뭐하는 날인 줄은 아니?" "예.여자가 남자한테 초콜릿 주는 날이에요!" "우리 라이 정말 똑똑하구나." "헤헤~." "그럼 라이도 오빠한테 초콜릿 줄꺼지?" "예?" "........." 뭐야? 여기서 왜 의문형이 튀어나와? 설마 초콜릿을 안줄 생각이었단 말인가? "라이, 오빠한테 초콜릿 안줄 거니?" "아. 아니예요 줄거예요 라이 오빠한테 초콜릿 줄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 생각 안하고 있었군. 내가 라이에게 이것밖에 안되는 존재였다니. 난 잠시 좌절했다. 하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오빠 기대하고 있을게." "예." "아! 오빠가 비행기 태워줄까?" "정말요?" "응 오빠가 우리 라이 비행기 태워줄게." 난 소파에 누워 손과 발로 라이의 몸을 받쳤다. "헤헤~~."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라이. 내가 굳이 나서서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발렌타인 데이에 라이에게 초콜릿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앗!오빠가 라이 비행기 태워준다. 루비도 태워줘요!" 라이와 나를 발견한 루비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는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졸랐다. 난 라이를 내려놓고 루비를 태워주었다. "루비는 발렌타인 데이가 무슨 날인지 아니?" "아니요 루비는 그런거 몰라요." "......;" 먼저 말 안 꺼냈으면 큰일 날 뻔 했군. "발렌타인 데이는 남자에게 여자가 초콜릿을 주는 날이란다." "네? 초콜릿을 왜줘요?" "좋아하니까 주는 거지." "좋아해서요?" "그러니까 알기 쉽게 설명을 하면, 루비가 오빠를 좋아하잖니?" "네, 루비는 오빠가 막막 좋아요." "그래 루비가 오빠를 좋아하니까 오빠한테 초콜릿을 주는 거야 다음주 월요일인 2월 14일에 알았지?" "꼭 줘야 하는거예요?" "응 반드시 줘야하는 거야 이날 안주면 큰일나, 루비는 오빠한테 초콜릿 줄거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루비가 꼭 드릴게요." "우헤헤헤~ 고마워 루비야" 난 성심성의껏 비행기를 태워주었다. 후후~ 이걸로 2개 확보군.. 올해 나의 목표는 최소 5개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푸시아에게 초콜릿을 받는 거다. 난 허리가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초콜릿을 받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고통도 견디리... 발란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못 받는 고통에 비한다면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난 아리와 루비와 한참 놀아준 다음에야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운 나는 수첩을 폈다. 루시아 라이 루비 일루니아 여사님 라이레얼 카르 우리집에 사는 여자들 이름이다. 이 여자들이 나의 타깃 6명이 니까 일루니아여사님을 뺀 모두에게 받는다면 목표치인 5개를 채울수가 있다. 난 라이와 루비의 이름 옆에 메모를 했다. 까먹지만 않는다면 줄 것 같음.. 발렌타인 데이 하루 전에 상기시켜줄 필요있음... 메로를 마친 나는 수첩을 덮었다. 이번 발렌타인 데이는 일생일대의 대사다. 작은 것 하나 결코 소홀하게 넘길수 없다. 그동안 초콜릿과 전혀 인연 없는 인생을 살아온 나지만, 이번 발렌타인 데이를 기점으로 변화하리! "반드시 목표치인 5개를 채워 솔로들의 염장을 지르겠어!!!" 라이와 루비의 공략은 예쌍대로 엄청 쉬웠다. 애들 정신연령이랑지능이 좀 낮다보니 비행기만 태워주면 만사 ok라고 할가? 하지만 다음 공략목표는 만만치가 않다. 다음 공략 목표는 바로 카르.... 화이트 드래곤인 라크는 오직 라이레얼만을 바라보는 일편단심인 레즈 드래곤이다. 나와 카르는 모든 면에서 달라 보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것. 카르는 라이레얼을.. 나는 루시아를.. 그러니 이런점을 최대한 부각시켜 초콜릿을 타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침 카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난 재빨리 카르에게 다가갔다. "혹시 내가 뭐 도와줄 일은 없을까?" "비켜, 나의 언니가 물을 마시고 싶어 하니까 빨리 물 갖다 줘야 해."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불길 속으로 뛰어들 각오까지 되어 있는 카르. 이런게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난 이런 카르의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나역시 루시아를 위해서 라면 얼마든지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 있으니(물론 방역복 입구) "너 혹시 발렌타인데이가 무슨날인줄 알아?" "그게 뭔데?" "발렌타인 데이는 2월 14일이야 여자가 사랑하는 사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주며 고백하는 날이지." "그런 날이 있어?" 깜짝 놀랐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묻는 카르.. 난 고래를 끄덕였다. "응. 참고로 우정 초콜릿이라는 것도 있으니 꼭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줄 필요는 없어 그런의미에서......" "나의 언니한테 초콜릿을 주며 고백할 테야!" "뭐? 아니 니가 라이레얼한테 초콜릿을 왜 줘?" "사랑하는 사람한테 주는 거라며?" "응? 그건 사랑하는 사림이 남자일 때 애기지, 여자가 남자한태 주며 고백을 하는 거지, 여자가 여자한테는 아니야" "상관없어. 난 언니를 사랑하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발렌타인 데이라는 게 사랑하는남녀를 위해 있는 거지 백합이나 야오이와는 별 관계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언니한테 무슨 초콜릿을 주는게 좋을까?" "......" 안듣고 있군.. 그순간, 방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빨리 물가지고와, 카르!" "네,언니!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카르는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 난 수첩을 꺼내 카르의 이름옆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실패. 라이레얼을 통해 공략해야할 것 같음.. 라이레얼은 오늘도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저놈의 플레이스테이션2가 정말로 사람 페인 만드는군. "아이씨! 또 죽었잖아!" 라이레얼은 화가 나는지 패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헉! 던지려는 건가? 다행히 라이레얼은 패드를 다시 내려놓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텔레비전과 플레이스테이션2만은 손상시킬수 없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라이레얼" "아! 히로," "좀 쉬면서 하세요. 게임도 좋지만 건강이 우선이잖아요."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히로?" "물론이죠, 제가 라이레얼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그러자 라이레얼은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고마워,히로. 난히로가 그동안 나한테는 신경도 안 써주기에 내가 싫어진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요! 제가 라이레얼을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난 슬쩍 라이레얼의 옆에 앉았다. "저기....... 그런데 혹시 다음주 월요일 그러니가 2월 14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 아! 발렌타인 데이 말이야?" "예, 바로 그거예요!" "왜? 초콜릿 받고 싶어?" "........" 이렇게 정곡을 찌르시다니.. "아하하하~ 뭐, 꼭 받고 싶다기보다는... 안받는 것보다 받는 게 좀더 좋지 않을까......뭐, 이런 생각이 들어서요/" "걱정하지마 , 내가 히로한테 초콜릿을 안주면 누구한테 주겠어? 나만믿어." "........." 헉! 이렇게 쉽게 되다니..! "고,고마워요 라이레얼. 이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난 너무 감동해서 라이레얼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 "아! 그리고 부탁이 하나더 있는데....." "응? 뭔데??" "그게요...." 난 카르한테도 초콜릿을 받게 도와달라고 말했다. 라이레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카르한테도 잘 말해둘게." "고마워요. 라이레얼." 예상외로 일이 잘 풀린다. 난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라이레얼 - 확정 카르 - 라이레얼이 지원해준다면 가능성 높음. 이제 남은 사람은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 마침 일루니아 여사님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난 용기를 내서 일루니아 여사님께 다가갔다. 사실 일루니아 여사님이 초콜릿을 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만약 초콜릿을 준다면 독을 넣어놓지는 않았나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난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일루니아 여사님께 말해 보기로 했다 혹시 아는가? 불쌍해서라도 하나 줄지.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책 읽는데 방해되니까 절로 가세요~" "....." 가차 없는 축객령. 하지만 이정도에 물러날 내가 아니다. "내일이 발렌타인 데이인거 알고 계신가요." "그런데요.?" "발렌타인 데이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준다는 것도 알고 계신가 해서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책을 덮고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걸 알든 만든 그게 아이언스 공작님과 무슨 상관이 있죠?" "아! 그러니까 꼭 상관이 있다기 보다는...." 당당히 하려 했느나.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을 마주하게 되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이럴 때 또 필요한 것이 금방부동심법이다. 난 소림사에서 열심히 짜장면을 만들고 있을 사촌매형을 생각하며 열심히 금강부동심법으로 마음을 가라앚혔다. "혹시 인디한테 초콜릿을 줄 계획이 있으신가 해서요. 아시다시피 개가 드래곤치고는 좀 소심하다보니. 만약 초콜릿을 못 받게 되면 굉장히 슬퍼할거 같아서요." "그래서요?" "그러니까 인디 초콜릿 포장하다가 혹시 남는 초콜릿있으시면 버리기 아까우실테니....." "왜 그걸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신경 쓰시는 거죠?" "......" 그야 당연히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그러는 거지요.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의 태도를 보아하니 얄짤 없을 것 같다. 역시 안되겠군. "아, 아니예요, 읽던 책 계속 읽으세요." 난 방으로 돌아오며 이를 갈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을 향한 분노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한 분노로. 고작 초콜릿 하나 얻으려고 일루니아 여사님께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다니! 이 얼마나 남자답지 못한 행동인가? 내가 초콜릿 하나에 목맨 인간도 아니고 말이야! "........." 사실 초콜릿 하나에 목맨거 맞다. 이제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 한번 못 받았다. 그 비참함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팬클럽이 있는 지니와 크로니스는 초콜릿을 한 트럭 받을게 뻔하다. 그런데 내가 고작 두세개 받으면 내체면이 뭐가 되겠는거? 적어도 다섯개는 받아야 '나도 초콜릿 받았어!' 라고 큰소리 칠수 있지 않겠나? "......" 그런데 진자 어떤 놈이 이런 날을 만든 거야? 이날 초콜릿을 못 받는 솔로들의 마음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본걸까? 열 받는데 제과업체라도 테러해? 일루니아 여사님- 국물도 없음. 아무튼 이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남았다. 사실 수천개를 받아도 이 사람한테 초콜릿을 못 받는다면 나가 죽어야할 것이다. 그녀는 나의 전부~~. 난 루시아의 방으로 찾아 들어갔다. 루시아는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어주고 있었고, 루시아의 옆에는 라이와 루비가 엎드려있었다. "신데렐라가 사라진 자리엔 유리구두만이 남아 있었어, 왕자님은 신데렐라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유리구두가 발에 맞는 여인과 결혼을 하겠다고 말했어. 왕자님은 병사들과 함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유리구두가 발에 맞는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전부 실패였어,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들른 집이....." 앗! 루시아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는 건가? 쿨쿨~~ "......" 뭘야? 재들 왜 자고 있어? 감히 루시아가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잠을 자다니! 이런 건방진 엘프들을 봤나! "무슨 일이야?" "응? 아니, 그냥 뭐하나 해서.." "아! 오빠다!" 라이와 루비는 잠에서 깨어나 내품에 안겼다. "비행기 태워주세요오~~~" "......." 무게 목적이니? 난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우리 라이랑 루비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 "아니요오~! 내일이 무슨 날인데요오!?" "........" 역시 잊고 있었군, 그럴줄 알았다. "내일은 발렌타인 데이란다. 발렌타인 데이가 뭐하는 날인지는 오빠가 전에 설명해줬지?" "예? 언제요오~?" "응? 기억 안나? 전에 라이는 알았었잔아." "다 까먹었어요." "......." 자랑이다.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야, 바꿔서 말하자면 라이와 루비가 오빠한테 초콜릿을 주는 날이지!" 난 루시아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크게 말했다. "알았니?" "네에~!!" "......." 대답은 우렁차게 하지만 굉장히 불안하다. 애들을 믿어도 되는 걸까? "아무튼 발렌타인 데이에는 여자가 반드시 남에게 초콜릿을 줘야해, 특히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말이야. 만약 남자가 받을 거라 생각한 여자에게 초콜릿을 못 받는다면, 그남자는 굉장히 비참해 질단다. 어쩌면 그 남자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베란다에서 뛰어내릴지도 몰라." 말은 길었지만 요즘은 '루시아가 초콜릿을 안주면 히로는 콱 죽어버릴테야!'다. 난 슬쩍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아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었다. "........" 헉! 뭐야? 설마 내가 방금 한 말 못 들은 건가? "저,저기 ......루시아?" "피곤해서 조금만 잘테니까 , 그동안 애들과 놀아줘." 말을 마친 루시아는 더 이상 얘기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렸다. 아아~ 그녀 옆에 눕고 싶다....... 가 아니라 내 ㅍ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어쩔수 없이 라이와 루비를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텔레비전은 언제나 처럼 라이레얼과 카르가 차지하고 있었다. "저기요. 라이레얼." "응? 왜?" "내일이 무슨날인지 아세요?" "응? 내일이 무슨 날인데.?" "발렌타인 데이라고......" "아아~ 그거, 근데 왜? 그게 뭐 어쨌다고?" "......" 뭐야, 이 시큰둥한 반응은? "아,아니요, 뭐, 그냥 그렇다구요." 난 방으로 돌아와 머릴 쥐어뜯었다. 상황이 점점 안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초콜릿을 한 개도 받지 못할지도,....... 평균 기억력3초인 라이와 루비에게 초콜릿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것 같고, 라이레얼은 큰소리 뻥뻥 치더니 별 관심 없어 보이고, 카르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애초에 물 건너갔고, 루시아는........... 아직 이 세계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루시아. 그런 만큰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이 지니는 의미를 소홀히 여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루시아한테 못 받는다면........ 그런도 모자라 일루니아 여사님이 날 비웃는다면........... 호호~ 루시아한테 초콜릿을 못 받다니.. 이로써 루시아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게 증명 되었군요. 인생을 뭐 하러 사나 몰라? 나 같은면 죽겠네. 헉! 이렇게 비참할 수가...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숨이 막힐 것 같다. 아니야. 루시아는 분명 나한테 초콜릿을 줄거야. 난 그렇게 믿어! 그런데 안주면 어쩌지? "........"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 커플들에게는 기념일이지만, 솔로들에게는 짜증 가득한 날. 심지어는 길 가던 커플들을 돌로 쪼개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날이다. 이런 날에 솔로들은 가만히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좋다. 괜히 밖에 나돌아 다니면 마음만 상하니... 가장 좋은 방법은 2월 14일 해가 드기 전에 잠들어 2월 15일 00시 에 깬늑 성디ㅏ. 그럼 발렌타인 데이가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비행기를 타고 날짜 병경선을 넘나들어 2월 14일 을 피해가는 건데, 돈과 비자 문제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난 오늘 하루 조용히 집에서 숨죽이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딩동딩동!!" "그래 나간다 , 나가!" 난 현관문 앞에 섰다. "누구세요?" "예 택배회사 입니다." "......" 택배회사? 누가 뭐 주문했나? "헉 ! 이게 다 뭐예요?" 두명의 택배회사 직원들은 수십개의 박스를 현관문 앞으로 옮겼다. 택배회사가 아니라 이삿짐센터에서 나왔나? "여기 사일런스 지니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거 맞죠? "예. 맞는데요?" "그럼크로니스라는 사람은요?" "예. 맞아요" "어이 맞데 다 옮겨!" "자, 잠깐만요. 이걸 다 집안으로 옮긴다구요?" "이게다 지니씨와 크로니스씨 앞으로 온 택배입니다." "내용물이 뭐예요?" "당연히 초콜릿이죠." "......" 택배는 속속들이 집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좁아터진 집에 이렇게 많은 짐들이 들어오다니!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KCB택배입니다" "화이튼 캡택배입니다." "로즈택배에서 왔습니다." "한국통운에서 나왔습니다." "전진 택배입니다." 수도 없이 몰려오는 택배회사들. 초콜릿만 해도 수백개다. 난 그래도 혹시 몰라 수백개의 상자를 일일이 살펴보았다. 혹시 아나? 내것도 하나쯤은 있을지... 난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내것을 없었다. 으음, 나의 여성팬들이 많이 쑥스러웠나보군. 직접 보내기가 부끄러워 지나와 크로니스에게 대신 전달해달라고 한 게 아닐까? "......" "어흐흐흑~ 왜 내 초콜릿은 하나도 없는 거냐? 나도 초콜릿 먹을 줄 아닌데...... 나도 초콜릿 좋아하는데...... 아무튼 애들 6개월 치 간식을 공짜로 건져서 다행이다. 난 택배회사 직원들에게 초콜릿을 가게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이사를 가는데다가, 집에 초콜릿이 잔뜩 있으면 애들이 하루만에 먹어치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초콜릿에는 당분과 카페인이 많아 많이 먹으면 이빨 썩고, 잠이 안오는 등 부작용이 있다. "이것 좀 저쪽 건물로 옮겨주세요." "우리는 배달만 했으면 임무 끝이예요 알아서 옮기세요." "......." 서비스 정신이 이따위라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이거 전부 반품시킵니다. 이 많은 걸 발송지로 다시 배달시키려면 상당히 피곤하실텐데.." "어디로 옮겨 드릴까요? 저희 택배회사는 언제나 최상의 서비스로 고객을 모십니다. "흠, 진작에 그러셨어야죠." 난 택배회사 직원들을 도와 가게로 초콜릿을 날랐다. 가게는 여전히 공사중 상태였다. 크로니스가 감독을, 지니가 지휘를 하고 있다. 크로니스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며 공사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으음, 그동안 가게일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테니 이번 기회에 푹 쉬면 좋을텐데.. 지니야 막노동판에서 구르든 말든 별 상관없지만 크로니스는 다르다. 가게에서 일해주는 것만도 고마워 죽겠는데, 공사까지 도와주다니.... 흑~ 이은혜 어떻게 갚아야 할까? "아이언스 공장님이시군요." 안전모를 쓴 지니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뭡니까? 그모자는?"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위해 썼습니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피하면 되지 않나요?" "몰론 그래도 되지만, 안전수칙인지라 어쩔수가 없습니다." "창고 쪽 공사는 다 끝났나요?" "예. 보강 공사와 청소까지 전부 끝마쳤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초콜릿을 좀 보관해야 할것 같아서요, 사일런스 백잡님과 크로니스 앞으로 초콜릿이 수백 상자가 왓네요.."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니.. 그런 지니를 보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대체 평소에 어떻게 행동을 했기에 초콜릿이 집까지 날아오는 겁니까?" 내가 호통을 치자 지니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우연히 집주소가 새어나간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하면 뭐해요? 이미 일이 벌어졌는데! 대체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사람이 생각을 좀 하면서 살아야 할 거 아니예요? 아이리스 왕국의 참모였던 사람이 그렇게 생각이 없어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드릴 말씁이 없으면 답니까? 예? 대답해 보세요! 자꾸 일을 이런식으로 하면 곤란합니다. 제가 사일런스 백잡님이 초콜릿 수백상자 받은게 부러워서 이러는게 결코 아니예요! 제가 이러는 것은 사일런스 백잡님께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지. 결코 사일런스 백잡님은 초콜릿은 수백상자나 받았는데 전 하나도 못 받아서 이러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결코 하나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는게 아니란 ....흑흑.....하나도 못받아....우에에엥~~."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나를 감싸 안느 지니의 손, 난 그손을 뿌리쳤다. "저리가! 흑흑~ 그래! 난 태어나서 여자한테 초콜릿 한번 못 받아봤다! 넌 내맘 몰라 임마! 흑흑~~." "다 압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흑흑~ 초콜릿 수백상자 받은 니가 내맘을 어떻게 알아? 너 지금 속으로 나 비웃고 있는 거지? 그렇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 그보다 아이언스 공작님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지는 뭔가를 내밀었다. "흑흑~이게 뭐예요?" "풀어보십시오" 난 포장을 풀어보았다. 그것은 초콜릿이었다. ".....뭡니가? 이건??" "보시는 대로 초콜릿입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제 마음입니다." "........" 발렌타인 데이에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 받다니! 어 째 못받는 것보다 더 비참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일단 챙겨두자. "크로니스는 어디에 잇어요?" "5층에서 도배하는것을 지휘 중이십니다." "알겠습니다." 난 5층으로 올라갔다. 긴 붉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도배하는 인부들을 지휘하는 크로니스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하자 크로니스도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추운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괜찮아요." "아! 혹시 요즘 제갈량하고 박카스 뭐하는지 아시나요? 그둘은 요즘 통 소식이 없네요." "얼마 전에 한번 만나봤는데 조직끼리의 암투가 심한 것 같더군요." "그렇군요." 드래곤들이 패싸움이라니. 검찰과 경찰은 난리 나겠군. 우리나라 강력반은 뭐하나? 그런 놈들 안 잡아넣고. 둘 다 잡아넣어서 평생 동안 콩밥만 먹여야 한다.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조직 폭력단을 만들었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많이 힘드실 텐데 쉬엄쉬엄 하세요. 몸 상하면 큰일이니."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제가 더 고맙지요." "이거 발렌타인 데이 선물이예요. 깜빡 잊고 안 줄 뻔했네요." 크로니스는 초콜릿 상자를 내밀었다. "헉!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고마워요." "별거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예. 살펴 가세요." 일을 끝마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물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엌에서 달콤한 초콜릿 향기가 흘러나왔다. 난 그 향이게 이끌려 부엌으로 가보았다. 앞치마를 두른 인디가 무언가를 열심히 만드는 것이 보였다. "너 거기서 뭐하니?" "마침 잘 오셨어요. 히로님 이거 맛좀 봐주시겠어요?" 인디가 내민 냄비에는 액체형태의 초콜릿이 담겨져 있었다. 난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맛을 보았다. "오오! 달콤하면서도 너무 달지 않고 쌉싸름하면서도 너무 쓰지 않도다. 혀끝에서부터 시작해 입 안 전체로 퍼지는 이 행복감이라니. 내 이제껏 많은 초콜릿을 먹어왔지만 ,이런맛은 처음이로구나!" "하아~ 다행이예요." 안도의한숨을 내쉬는 인다. 난 고래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너 지금 뭐하는 거니?" "초콜릿 만들어요" "그건 알겠는데 왜 초콜릿을 만드는 거야?" "일루니아님 드릴려구요.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잖아요." "........" 잠깐. 발렌타인 데이가 남자가 여자한테 초콜릿 선물하는 날이었나? "내가 아닌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남자한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인데."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그래도 전 일루니아님께 초콜릿을 선물해드리고 싶어요. 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으니까요." 자기가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잔뜩 붉히는 인디. 아주 쌩쇼를 해라!! 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생각해보면 발렌타인 데이라해서 꼭 여자가 남자한테 줘야한다는 법은 없다. 남자가 여한테 줘도 안될건 없잔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관습과 편견, 고정관념을 탈피해서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인디는 상당히 진보적인 드래곤이라 할 수있다. 그래! 루시아가 주지 않는다면 내가 루시아한테 주는 거야!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도 좀 비참하군." 똑똑! 내가 침대를 뒹굴거리며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니?" "저예요 히로님" 인디 목소리군... "들어오렴" 인디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선물이예요." "응??" 인디가 내민것은 하트모양의 초콜릿이었다. "이걸 왜 날줘?" "일루니아님 초콜릿 만들다가 재료가 좀 남아서 히로님 것도 만들어봤어요. 맛있게 드세요." "으응.. 그래 고맙구나." 맛있을 것 같이 생겼기에 난 일단 초콜릿을 받았다. 인디가 나가고 나자,난 초콜릿을 먹어보았다. 으음,, 맛있군..... 그런데 뭔가 좀 잘못된 느낌이다. 남자한테 받은 초콜릿 - 3개 여자한테 받은 초콜릿 - 0개 난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이게 아닌데...." 초콜릿을 안주면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는 히로의 말 루시아는 똑똑히 들었다,. 루시아가 알기로 히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초콜릿을 선물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히로가 그렇게 주지시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와 루비는 초콜릿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루시아가 말했다. "너희들 오빠한테 초콜릿 안사다 줄거니?" "라이는 돈 없어요.." "루비도요.." 루시아는 지급을 열어 1만원씩 주었다. "이걸로 오빠 줄 초콜릿 사와 알았지?" "밖으로 나가기 귀찮아요," "밖은 추운걸요." "......." 안타깝게도 어린 엘프들에게 잇어서 히로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도 나가서 사와, 안그러면 오빠가 크게 실망할 테니까." 루시아가 계속 등을 떠밀자 라이와 루비는 어쩔수 없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을 내보낸 루시아는 부엌으로 갔다. 그래도 처음으로 주는 발렌타인 데이 선물인데 정성을 담아서 주고 싶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도와줄 사람도 잇으니 "미안해요 형부, 이렇게 매번 부탁해서." "아니예요. 전 요리하는게 좋은 걸요. 이런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예요." 루시아는 인디의 도움을 받아 초콜릿을 만들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라이와 루비는 근처 제과점으로 향했다. "어머, 귀여운 아이들이네. 뭘 줄까?" "초콜릿 주세요." "남자친구한테 선물하려는 모양이구나." "오빠한테 선물할거예요." "얼마짜리로 줄까?" "1만원짜리로 주세요." 제과점 주인은 네모난 초콜릿 상자를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해서 라이와 루비에서 건네주었다. 둘은 그것을 들고 제과점을 나왔다. 이제 다시 집으로 향하는데 문득 상자 안의 초콜릿이 무슨 맛일지 궁금해졌다. 라이는 침을 꼴깍 삼키다가 루비와 눈이 마주쳤다. "하나만 먹어볼가?" "응. 가운데 꺼 하나만 먹으면 오빠도 모를 거야." 완벽하게 의견일치를 본 둘은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었다. 초콜릿 상자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가로 세줄, 세로 세줄해서 모두 아홉개의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라이와 루비는 그중 가운데 것을 빼먹었다. 입안에 넣자 초콜릿이 녹으면서 달콤함이 느껴졌다. "맛있다." "응! 되게 맛있다." "하나만 더 먹어 볼까?" "그러자" 둘은 하나를 더 빼먹었다. 역시 맛있었다. 초콜릿을 맛있게 먹고 나서 상자안을 들여다본 루비는 깜짝 놀랐다. "짝이 안 맞는다." "어! 정말 짝이 안맞네." "어떻하지?" "으흠....." 상자는 마방진 형태였다. 그러니 좌우는 물론 대각선으로도 대칭이 되어야 했다. 잠시 상자안을 들여다보던 라이는 손뼉을 쳤다. "그럼 세개를 먹어서 모서리에 네 개만 남기자, 그럼 오빠도 모를거야." "우와! 라이 너 진자 똑똑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거야?" "헤헤~~ 라이가 원래 좀 똑똑하잖아 빨리 먹자." "응~" 라이와 루비는 초콜릿 세개를 더 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아." "달콤하고 맛있어/" 두 엘프는 초콜릿을 먹은 다음 상자를 다시 포장하려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생겼다. "응? 왜 세개 밖에 없지?" "글쎄," "라이는 분명 세 개를 먹은 것 같은데." "루비도" "어떻게 된 일일까?" "글쎄." 두 엘프는 이해할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루비는 어떻게좀 해보라는 눈길로 라이를 보았다. 라이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아! 초콜릿 한개를 가운데 놓고 나머지 두 개를 우리가 먹는 거야. 그럼 오빠도 모를거야." "우와! 역시 라이야 라이 넌 천재인것 같아." "헤헤~~ 사실 그런말 많이 들었어." 두 엘프는 초콜릿 두개를 더먹었다. 그리고 남은 초콜릿을 상자 가운데에 놓았다. "뭔가 좀 허전해 보인다" "괜찮아 오빤 분명 모를거야." 라이와 루비는 상자를 다시 포장하고는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한테 하나도 받지 못하고, 남자한테만 세개를 받다니.... 이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혹시 난 남자한테 인기 많은 타입? ".........." 으음 끔찍하군....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하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그러자 누군가가 들어왔다. "......." 헉! 이 아줌마가 어쩐 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일루니아 여사님. 이 아줌마가 어쩐 일로 내 방에 온걸까? 보나마나 내가 여자한테 초콜릿을 하나도 받지 못한 것을 알고 비웃으러 온게 분명하다. "호호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인데 초콜릿은 받으셨나요?" "크윽!" 남의 고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일루니아 여사님. 그야말로 마녀가 따로 없다. 안 그래도 비참한 나를 얼마만큰 더 비참하게 만들셈이냐? "아! 인디님한테 하나 받으셨죠, 호호~ 축하드려요. 남자한테 받은 초콜릿도 초콜릿은 초콜릿이죠. 훗~~" "........." 뭐야, 마지막의 저 비웃음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나가지 못해! 내가 초콜릿을 반든 말든 아줌마가 뭔 상관이야?" "자요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예요?" "오다가 주웠어요." 일루니아 여사님이 내민것은 대한민국 군인들의 영원한 간식인 초코파이였다. 그것도 오리온 초코파이.. "버리려다가 불쌍해서 주는 거예요." "아,예.." 난 일단 초코파이를 받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볼일 다 봤다는 듯 방을 나갔다. 난 초코파이를 살펴보았다. 포장이 찢어졌으면 독이 들어있나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다행이 포장은 무사했다. "으음 그럼 유통기한 지난건가?" 유통기한도 아직 많이 남아있는듯 했다/. 어쨌든 초코파이에는 초콜릿이 묻어있으니 초콜릿으로 봐도 무방하겠지? 그리고 일루니아 여사님을 여자로봐도 무방하겠지? 그럼 난 지금 여자한테 초콜릿을 받은건가? "우헤헤헤헤~ 드디어 여자한테 초콜릿을 받았다~!" 난 너무 기쁜 나머지 침대에서 방방 뛰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난 감동을 추스르며 초코파이를 먹었다. "그나저나 주려면 한박스 줄것이지 달랑 한개 주는 건 무슨 심보지?" 초코파이를 맛있게 먹고 거실로 나가니 라이레얼과 카르가 오락을 하고 잇었다. "이거 받아 히로." 라이레얼은 날 보자마자 초콜릿을 내밀었다. 슈퍼에서 흔히 파는 500원짜리 초콜릿이다. "헉! 고마워요 라이레얼 잊어버린줄 알았는데......" "에이~ 히로 부탁인데 내가 잊을리 없잔아." "맛있게 먹을게요." "응. 좀비싼걸 사주고 싶었는데. 히로가 알다시피 내가 돈이 좀 없잔아. 그래서 싼 걸로 사웠으니 이해해. 알았지?" 세뱃돈을 30만원이나 받아가고도 돈이 없다니.. 초콜릿이 얼마짜리든 간에 받게 되니 감지덕지다. "아무튼 고마워요." "그렇게 고마우면 다음 설날에도 잘 부탁해." "예?" "다음 설날에는 올해의 두배를 목표로 카르와 함께 열심히 세배 연습할테니까." "......" 헉! 그게 목정이었나? 그 때 카르가 나에게 다가왔다. 카르는 대단히 시큰둥한 얼굴로 나에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라이레얼과 같은 종류의 500원짜리 초콜릿. "너따위에게 주고 싶은 마은은 없지만 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는 거야. 고맙게 받도록 해." "으응." 그래 눈물나게 고맙다. 그 때 내 눈에 라이레얼 옆애 있는 커다란 바구니가 보였다. 바구니 안에는 온갖 종류의 초콜릿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그건 뭐예요? 라이레얼?" "아~ 이거 카르가 선물해준거야." "........." 결국 선물했군. 그나저나 자기들끼리는 저렇게 돈 잔치하면서 나한테는 달랑 500원짜리 초콜릿 두개 라니... 뭐 어쨌든 어거라도 받았으니 다행이다. 이걸로 여자한테 받은 초콜릿이 세개 남자한테서 받은 것과 동률이다. 이제 두개만 더 받으면 목표치는 채우는군. "오빠아~~" "앗! 라이야 루비야!" 내품으로 뛰어드는 라이와 루비, 난 넓은 가슴으로 두 엘프를 안아주었다. "이거 받으세요 오빠, 라이가 오빠주려고 산 초콜릿이예요." "이건 루비가 오빠 줄려고 산 초콜릿이예요." "헉!" 흑~ 잊지 않고 있었구나. 이 오빠는 너희들이 잊은 줄 알고 걱정을 많이 했단다. 난 크게 감동하며 라이와 루비가 내민 초콜릿 상자를 받았다. 크기로 보니 포장으로 보다 굉장히 비싸보인다. 흑~ 이 비싼 초콜릿을 사기 위해 애들이 먹고 싶은 거 먹지 않고 사고 싶은거 사지 않고 돈을 모았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난 포장을 뜯어보았다. "응? 이게 모니?" 상자 안에는 초콜릿이 달랑 하나 들어있었다. 난 루비가 준 초콜릿의 포장도 뜯어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라이와 루비를 바라보자 아이들은 움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라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헤헤~ 그거 원래 하나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자 루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처음부터 하나 들어있었어요. 아홉개 들어있지 않았아요," "........" 아홉개? "정말이예요. 오빠 아홉개 들어있었다는게 라이가 여덟가 먹고 하나만 오빠 드리는게 결코 아니예요." "루비는 라이랑 같이 초콜릿 빼먹는 짓 같은건 전혀 하지 않았어요." "........." 그러니까 원래 초콜릿이 아홉개 들어있었는데 지들끼리 여덝개씩 먹고 나한테는 하나만 줬다는 거군. 라이와 루비는 조심스럽게 내눈치를 보았다. 저렇게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거짓말을 하면 믿어주고 싶어도 믿어주기 힘들다. 난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초콜릿 한개라도 남겨온게 어디냐? 애들한테는 그것도 굉장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고마워라이야. 고마워 루비야. 아이구 이 귀여운 것들!" 난 아이들을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벼주었다. "이 초콜릿 오빠랑 나눠먹자!" 난 초콜릿 두개를 한입씩 먹은 다음 라이와 루비에서 주었다. 라이와 루비는 기뻐하며 그것을 먹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눈빛으로 속삭였다. '다행히 안걸렸어' '루비는 조마조마했어/' '라이 말대로 하니까 안걸렸지?' '응 라이 넌 정말 대단한것 같아.' '헤헤~ 이런게 바로 완전 범죄라는 거야~.' ",............." 완전범죄는 개뿔이... 속아 넘어가주기도 힘들군. 아무튼 이걸로 초콜릿 5개. 목표치 도달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초콜릿을 받아요 루시아의 초콜릿을 받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저녁 때가 되도 루시아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혹시 안주려는 건가? 아니야! 그럴리 없어. 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밤 9시. 10시. 11시. 11시 30분. 11시 45분. 11시 50분............. 헉!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거지? 난 베란다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이제 10분만 있으면 2월 15일 이다. 발렌타인 데이가 지나가는 것이다. 결국 루시아게 받지 못하고 끝나는 건가? 흑~ 루시아에게 초콜릿도 받지 못하는 나 같은 건 살 가치도 없어. 그냥 여기서 뛰어내릴테야! 난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했다. 그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거기서 뭐해?" "아, 아무것도 ㅇㅏ니야." "추운데 창문은 왜 열었어? "아! 그, 그게 담배냄새 좀 빠져 나가라고." 난 재빨리 담배를 껐다. 루시아가 담배 연기를 싫어하니. 루시아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5분 남았네." "응?" "자, 이거 받아." 루시아가 건네준 것은 동그란 모양의 초콜릿 헉! 루시아가 나에게 초콜릿을! 게다가 설마 이건 수제품? 메이드 인 루시아? "하트 모양으로 만들려고 햇는데, 모양이 잘 안나왔지?" "아,아니야! 내눈엔 하트 모양으로 보여!" "호호~ 됐어. 그렇게 애써 말할 필요 없어, 모양은 이래도 이거 맛은 괜찮아. 형부도 맛있다고 인정해줬는걸. 한번 먹어볼래?" 루시아는 초콜릿 한쪽을 떼어내 내 입에 넣어주었다. "어때? 맛있어?" "응응, 진짜 맛있어.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초콜릿은 처음 먹어봐!"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다나려고 한다. 흑~ 내평생 루시아가 만들어준 초콜릿을 먹게될줄이야.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나도 좀 먹어볼까?" 루시아는 자신의 입에 초콜릿을 넣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으음 , 내가 만든거지만 정말 맛있는 것 같아." 루시아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엣취!" 갑자기 기침을 하는 루시아 아무래도 베란다는 너무 추운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자" "괜찮아. 난 여기 좀더 있고 싶어." "그,그래?" 난 재빨리 남방을 벗었다. 이거 벗고 나면 얇은 반팔뿐이지만 루시아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리. 난 벗은 남방을 루시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안추워?" "하하! 물론이지." 얼어 죽을 것만 같다. "추우면 좀더 가까이 와도 돼." "으응.." 난 루시아 옆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슬며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초콜릿을 나눠 먹었다. 둘이 같이 먹는 초콜릿의 맛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아마도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이겠지? 아이리스 2부 6권 Story 16 히로의 사촌 여동생 가게는 여전히 공사 중. 나는 여전히 백수. 할일이 없어 죽을 지경이다. 루시아와 놀고 싶어도 루시아가 나 와 안 놀아준다. 루시아의 관심사는 오직 아이들뿐이니. 지금 난 라이와 루비를 나란히 앉혀놓고 볼을 만지는 중이다. 손 가락에 닿는 피부 감촉과 잡아당겼을때 주욱~늘어나는 느낌. 이건 안 해본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 아아~중독될 것 같아. "으음, 라이 피부가 감촉이 더 좋은 것 같고……루비 볼이 더 늘 어나는 것 같은데. 으음, 이건 어려운 문제로군." 난 라이의 볼과 루비의 볼 중 어느 쪽이 더 감촉이 좋은가 실험하 는 중이다. "……." 으음, 내가 생각해도 좀 한심해 보이는군. 그래도 할일이 없는 걸 어쩌겠나? 난 한참 동안 라이의 볼과 루비의 볼울 만지작거렸지만, 어느 쪽 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막상막하(莫上莫下), 난형난제(難兄難弟), 용호상박(龍虎 相博)이라 할수 있겠다. 라이와 루비는 기대감 섞인 눈길로 나를 보았다. '누구 볼 감촉이 더 좋아요, 오빠?'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둘 중 하나를 뽑는다면 뽑히지 못한 엘프는 좌절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둘 다 이긴 걸로 하면 안 될까?" "안 돼요, 오빠." "맞아요. 루비 볼이 더 감촉이 좋은지, 라이 볼이 더 감촉이 좋은 지 말씀해 주세요." "라이는 오빠가 라이 볼을 더 좋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 요." "루비도 마찬가지에요." "……." 으음, 이런 사소한 것에도 지기 싫어하다니. 역시 애들이라는 건가? 이래서 애들은 피곤하다니까. 난 공정한 비교를 위해 다시 라이의 볼과 루비의 볼을 만지작거 렸다. 하지만 아무리 만져보아도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난 옆에 있는 루를 보았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러자 루는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저한테 떠넘기지 마세요." "……." 눈치 빠른 것 같으니라고. 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심심해도 그렇지 이런 쓸데없는 비 교를 하다니. 잘못하면 어린 엘프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은 아 닌지 걱정된다. "장도 묵은 장이 맛있고, 포도주도 오래 숙성시킬수록 맛있어지 듯이 역시 700살 넘은 라이의 볼 감촉이 더 좋은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오빠. 루비 볼 감촉도 좋단 말이에요." 루비는 날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헉! 이것은 설마 울음을 터트리겠다는 제스처? "생각해보니 루비 볼이 좀더 탱탱한 것 같은데……으음, 루비가 나이가 어리다보니 피부가 참 깨끗하구나." "헤헤~." 그렇게 말하자 루비는 좋아하며 귀엽게 웃었다. 그런데 이번엔 라이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엥~." "앗! 라이 피부도 탱탱해. 새하얗고 부드러워. 이 오빠는 라이 피 부가 막막 좋단다." "으앙~." "헉! 이 오바가 루비 볼 만지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지?" "우엥~." "앗! 이 오빠는 라이밖에 없단다." "으앙~." "……."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우에에엥~." "으아아앙~." 결국 눈물을 펑펑 쏟는 어린 엘프들. 난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 숨을 내쉬었다. 괜히 쓸데없는 비교를 시작해서 애들을 울리고 말 았군. 혹시 난 아빠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게 아닐까? 으음, 아동 심리학이나 아동 교육학에 대해 공부를 좀 하던지 해 야지. "역시나 애들 키우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구나." 난 아빠의 역할이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도 라이 하 나뿐일 때는 그럭저럭 할 만했다. 하지만 애가 셋으로 늘어나니 정 말 미칠 지경이다. 이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농담이 생긴 건가? 뭐, 이렇게 힘들긴 해도 아이들이 계속 내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와 루시아는 이미 애들 없이는 못 사는 팔불출 부모가 되었으니. 난 라이와 루비를 글어안고 달래주었다. "그만 울어, 얘들아. 아! 오빠가 재밌는 얘기해 줄게." 그러자 라이와 루비는 울음을 그치고 내 앞에 앉았다. 혼자서 놀 던 루도 내 앞으로 쪼르를 달려왔다. 무슨 예기를 해주는 것이 좋을까? 재밌으면서도 교훈이 될 만한 얘기를 해줘야 할 텐데. 아! 그 이야기가 좋겠군.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다섯 아이가 우주 멀리 아주 멀리 사라졌 어. 그리고 그들 모두 용사가 되어 지구로 돌아왔지. 악당들과 맞 서 싸우는 그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지구방위대 후뢰시맨'이라 불렀더. 얘기를 하다보니 난 점점 감정에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적 들을 전부 해치우고도 지구를 떠나야만 했던 후뢰시맨. 그들은 다 시 지구로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긴채 사라졌다. 난 어린 마음에 최종화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리고 그 때 문에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만약 내가 당시 산타클로스라는 존재를 믿었었다면 선물을 달라 는 대신에 '후뢰시맨이 빠리리 지구로 돌아오게 해주세요' 라고 소 원을 빌었을 것이다. 결국 난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다섯 아이가 우주 멀리 아주 멀리 사라졌다네 이젠 모두 용사되어 오 돌아왔네 후뢰시맨 후뢰시맨 지구방위대 후뢰시맨 우리의 평화의 수호자 후뢰시맨 오총사 후!(후뢰시) 후!(후뢰시) 후!(후뢰시) 후!(후뢰시) 우리에겐 적이 없다 후!(후뢰시) 후!(후뢰시) 후!(후뢰시) 후!(후뢰시) 우주의 침략자 후!(후뢰시) 후!(후뢰시) 후!(후뢰시) 후!(후뢰시) 우주정복 꿈 버려라 후!(후뢰시) 후!(후뢰시) 후!(후뢰시) 후!(후뢰시) 나간다 오총사 우리에겐 승리만이 지구 방위대 승리의 후뢰시맨 아아~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감동의 스토리 후뢰시맨. 그 후에 바이오맨, 마스크맨, 벡터맨, 오라전대 피스메이커(?)등 이 등장했지만 후뢰시맨을 능가하는 것은 무리였다. 지금도 후뢰시맨은 독수리 오형ㅈ와 함게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만약 세상에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후뢰시맨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일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이 후뢰시맨을 잊었다면 그 건 바로 내가 죽었다는 뜻이다. 으음, 누군가가 나에게 후뢰시맨이 좋냐, 독수리 오형제가 좋냐 라는 질문을 한다면 대답하기 굉장히 난감할 것이다. 개조실험제국과 싸운 후뢰시맨도 좋지만, 알렉터 군단과 싸운 독 수리 오형제도 좋다. 독수리 오형제의 멤버는 1호 독수리 켄, 2호 콘돌 죠, 3호 백조 쥰, 4호 제비 진페이, 5호 부엉이 류 이렇게 다섯이다. 사실 세간에서는 독수리 오형제의 명칭에 대해 말이 많았다. 독 수리는 1호뿐이고, 여자까지 끼어있는데 어째서 독수리 오형제냐 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조류 오남매', 혹은 '짭새 오남매'로 바 꾸자는 개명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뭐, 이런 의견에 대해서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난 어렸을때 5호 부엉이 류를 처음 보고 '독수리 오형제에 왜 돼 지가 끼어있는 거지?' 하고 생각했었다. 커 가면서 류가 돼지가 아 니라 부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도 부엉이보단 돼지 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덩치에 부엉이면 똥파리도 새겠다……라는 것이 나의 생각 이다. 아무튼 개명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결국 개명되지는 않 았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끝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후뢰시맨만 해도 여자가 둘이 껴있으니 원칙대로 하자면 '맨(Man)' 을 '휴먼 (Human)'으로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후뢰시맨'을 '후뢰시휴 먼'으로 바꾸면 굉장히 이상하다. 으음, 합리적인 해결 방안은 없단 말인가? "과학닌자대 갓챠맨'을 국민적 합의 없이 '독수리 오형제'로 바꾼 것부터가 이러한 논란에 불시를 지폈다 할수 있다.(과학닌자대 갓챠맨이 원래 제목이다. 독수리 오형제라는 제목은 국내에서 공중파 방 송을 하면서 바꾼 거다). 원곡을 안 들어봐서 비교는 못 하겠지만, 한국판 오프닝은 그야 말로 최고였다. 슈파 슈파 슈파 슈파 우렁찬 엔진 소리 독수리 오형제 쳐부수자 알렉터 우주의 악마를 불새가 되어서 싸우는 우리 형제 태양이 빛나는 지구를 지켜라 정의의 특공대 독수리 오형제 초록빛 대지의 지구를 지켜라 하늘을 날으는 독수리 오형제 우주를 누비는 독수리 오형제 내가 주제가까지 불러주자 아이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따라 불 렀다. "슈파~ ♬ 슈파~ 슈파~ 슈파~♬ 우렁찬 엔진 소리~♬" 나는 후뢰시맨과 독수리 오형제 세대다. 그들은 지금도 내 또래 아이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요즘 애들은 포켓 몬스터와 에반게리 온을 본다. 나 어렸을 때의 거대 로봇은 건담(자크, 사자비 등등)과 철인28호 였다. 하지만 요즘에는 에반게리온, 미라쥬 나이트 등등 별게 다 있다. 뭐, 건담은 지금도 인기지만. 아무튼 이렇게 애들을 보고 있으니 정말 격세지감을 느낀다. 아아~ 나도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파~. "……." 뭐, 다시 생각해보면 내 어린 시절이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난 일곱 살때 세상의 진리를 깨우쳤고,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순수를 잃어버렸다. 아아~ 순수했던 나의 시절이여! 하지만 메마른 나의 가슴에 한줄기 비가 내려왔으니, 그 비가 바 로 루시아. 루시아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나의 영혼 은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빛과 소금이라 할수 잇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녀를 사랑하리! 그런데 그녀가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니 그것이 문제다. 옛날 에 비해서는 사이가 많이 진전되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라이 동생을 만들어 줄지……. 라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좀더 노력해야 할 텐데. 하지만 애들 대문에 둘만의 시간을 갖기가 너무 힘들다. 그리고 루시아도 애들 대문에 나한테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한다. 역시나 나와 루시아 사이의 걸림돌은 아이들이다. 라이, 루, 루비. 하나같이 귀엽고 깜찍한 어린 엘프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 복해진다. 계속 보고 있으면 볼도 살짝 꼬집어주고 싶고, 머리도 쓰 다듬어주고 싶고, 곡 겨안아주고 싶고……아무튼 그만큼 귀엽고 깜찍하다. 하지만 아무리 귀엽고 깜찍해도 나와 루시아 사이에 방해가 된다 면 그것은 넘어야할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방해물은 전부 제거해야 돼! 난 눈을 번뜩이며 아이들을 보았다. 순식간에 수만 가지 제거 방 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으앙~." 루비가 눈물을 글썽거리자 옆에 있던 라이가 물었다. "왜그래, 루비야?" 그러자 루비는 눈물을 펑펑 솓으며 말했다. "으아아앙~ 오빠 눈빛이 너무 무서워." 어깨를 가늘게 떨며 애처롭게 우는 루비. 그런 루비의 모습에 나 는 깜짝 놀랐다. 헉! 내가 무슨 생각을! 아무리 루시아와의 사랑이 중요하다지만, 이 어린것들을 제거할 생각을 하다니! 아아~ 난 애들 아빠로서의 자격이 없어. 나같은 놈은 법원에서 애들 반경100미터 이내 접근 금지 판결을 받아도 할 말이 없어. "미안해, 루비야. 오빠가 잘못했어." 난 루비를 꼬옥 안아 달래 주었다. 토닥토닥 "훌쩍~." 내가 달래주자 금방 울음을 그치는 루비. 으음, 애들 달래는 걸로는 스페셜리스트 다 됐군. 장담하건데 애들 달래는 기술은 내가 지니보다 한 수 위일 것이 다. 지니는 애들 키워본 경험도 없으니까. 눈물을 닦아주자 루비는 내 품에서 얼굴을 부비부비 비볐다. 이 렇게 보고 있으니 확실히 루비랑 루기 닮긴 닮았다. 둘은 사촌남매 사이지만, 친남매보다도 더 닮았다. 으음, 이 정도면 거의 쌍둥이라 해도 좋겠군. 굳이 둘의 차이점을 말하라면 루비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오는 반면, 루의 머리카락은 짧고 단정하다. 그리고 루비의 더듬이(?)는 오른쪽으로, 루의 더듬이는 왼쪽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4권 일러스트를 참조하 면 되겠다. 사실 사촌이라는 관계는 멀면 멀고, 가까우면 가깝다고 할 수 있 다. 촌수란 친족 사이의 멀고 가까운 정도를 나타내는 수이다. 촌수 계산이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간단하다. 1촌 은 상대방과 내가 부모와 자삭 관계이다. 즉, 아버지와 나는 1촌 관 계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1촌 관계다. 1더하기 1은 2이므 로 나와 할아버지는 2촌이 된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관계는 1 촌이고, 큰아버지와 큰아버지 아들의 관계 역시 1촌이다. 나-아버지-할아버지-큰아버지-큰아버지아들 나와 큰아버지 자식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아버지와 할아버지 와 큰아버지를 통해 연결이 된다. 한 사람을 거칠 때마다 1촌씩 더 해지기 때문에 나와 큰아버지 아들은 4촌 관계가 된다. 위의 경우는 아버지 쪽 친족이므로 친사촌이고, 어머니 쪽으로 대입을 하면 외사촌이 된다. 우리나라 친족 관걔가 심하게 복잡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 는 유교사상의 영향 때문인지 철저하게 친족 관계를 따진다. 그래서 친척들을 만나다보면 ‘내가 이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하 는 거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친족을 부르는 명칭을 전부 외우고 있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일본은 사촌만 넘어가면 그냥 아저씨, 아줌마라고 부른다던데 우 리나라는 뭘 그렇게 복잡하게 부르는 건지. 일본은 사촌끼리 결혼도 한다고 하더라. 우리나라에서는 택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부 보수적인 어른 들은 일본을 보고 ‘개족보’ 라고 욕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예전에 동성동본 결혼을 금기시했었다 (지금도 가문에 따라서는 금기시한다). 동성동본은 먼 조상까지 거슬 러 올라가면 결국 친족이라는 것이다. 친족이라 해봐야 가뿐하게 10촌이 넘어가지만. 그런데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세상에 친족 아닌 사람도 있나? 특히나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단군 시대부터 족보를 따져보면 어떻게든 친족 관계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3대 끈(혈연, 지연, 학연)중에서 도 혈연을 최고로 친다. 으음, 우리나라만큼 친족 관계가 복잡한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다. 친족간의 결혼이 금기시되는 이유는 기형아를 낳을 확률이 비약 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이다. 혈연관꼐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확률 이 높아진다. 하지만 전에 라이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엘프들은 1촌끼리도 결 혼한다고 한다. 1촌이면 부모 자식 간이다. 남자는 어머니를, 여자는 아버지를 이상형으로 생각한다지만, 실 제로 결혼까지 하다니.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치관이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바뀌는 법이고, 긴세월을 사는 엘프들의 삶을 인간의 가치관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과거 이집트 왕족들은 핏줄을 보유하기위해 남매끼 리 결혼하기도 했었지. 아무튼 엘프들은 부모 자식간, 또는 남매간의 결혼도 이상하지 않은 만큼 루와 루비가 나중에 커서 결혼한다 하더라도 별 문제 없 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와 루비의 신체적 접촉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르고,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어린 것들이 키 스라니! 이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아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린아이들의 불건전한 이성 교제는 결코 용서치 않으 리! 만약 내 힘만으로 안된다면 기꺼이 루엔에게 이를 생각이다. 말 로 안되는 것들은 매로 다스리는 수밖에 없으니. “…….” 내가 맞고 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꾸만 체벌에 의존하게 된 다. 반면 루시아는 매를 대지 않고 사랑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 한다. 루시아의 의견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사랑으로만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얘들이 말을 들어야 말이지. 애들 모두가 오바 말 잘 듣는 착한 엘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이다. 내가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건가? 별로 할일도 없었기에 난 아이들과 계속 놀아주었다. 대다수 아 버지들은 자녀 양육을 어머니에게만 맡기는데,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놀아주고 같이 있어주는 것이 애들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된다 고 하더라. 내가 애들과 한창 놀아주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링~♬ 띠리링~♬ 우리집 전화벨 소리는 캐논 변주곡. 클래식 음악과 인연이 먼 나도 캐논만큼은 즐겨 듣는 편이다. 그 외에도 비발디의 사계나 베토벤의 운명 등도 가끔 듣는다. 알고보면 나도 교양 있고 부드러운 남자다. 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영웅이니?] “…….” 헉! 이 목소리는 설마……? “어머니?” [그래, 애미다.] “…….” 헉! 어머니! 내가 고아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난 판타지 세계 로 가기 전에 부모님과 3살 위의 형과 함께 살았었다. 판타지 세계 에서 돌아온 뒤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독립했고. 그렇기에 지금은 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다.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고 싶은데, 이러저런 일 때문에 시간이 나 질 않아 1년 넘게 찾아뵙지 못하고 있다. 이제까지 아이리스2부를 구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이 세계로 돌 아온 뒤에 내가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알 것이다.(백수라며?-베낌이주) 아무튼 정신없이 사느라 사실상 부모님과 연락을 끓고 살았다. 부모님 역시 내 생활에대해 별 신경 쓰지 않으셨고.(버림받았군-베낌이주)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전화를 거셨을까? “무슨 일이세요?” [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한번 해봤다. 뭘 하고 살기에 그동 안 연락 한번 하지 않은 거니?] “아! 이러저런 일이 많이 있었거든요.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 요.” [됐다. 그보다 영아 기억하지?] “예?누구요?” [영아 말이다, 영아. 전주 큰아버지 셋째 딸. 기억 안나니? 계 어 렸을 때 널 되게 잘 따랐었는데.] “아! 걔요? 그런데 걔가 왜요?” [영아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이요? 아니 걔가 벌써 대학 갈 나이가 됐어요?” [그래.] “…….” 생각해보니 걔랑 나랑 몇 살 차이나지 않는다. 하긴, 지금쯤이면 대학 들어갈 때가 됐겠군. “합격은 했대요?” [그렇다고 하더라. 서울에 있는 대학이래.] “뭐, 서울에 있는 대학이 한두 개에요? 둘러보면 사방이 다 대학 이더만. 아무튼 합격했다니 다행이네요,” [며칠 후면 개강이어서 서울에 올라가봐야 한다고 하더라.] “그런데요?” [원래대로라면 기숙사를 배정 받아야 했는데, 조금 문제가 생겼 나봐. 그래서 말인데 네가 며칠 정도 데리고 있어주면 좋겠다.] “예? 어머니께서 데리고 있으면 되잖아요.” [오늘부터 한 달간 네 아버지랑 필리핀 여행가기로 했다.] “형 있잖아요.” [네 형 3개월 전에 필리핀으로 어학연수 떠났다. 이번 여행은 네 형도 만날까 해서 겸사겸사 가는 거고.] “…….” 형이 어학연수를 간 것도 몰랐다니. 앞으로 집에 관심을 좀 갖던 지 해야지. 이건 완전히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군. [그러니 니가 며칠 정도만 데리고 있어주렴.] “예? 제가요?” [그래. 친척 중에서 서울에 사는 애가 너밖에 없잖니. 오래 걸리 진 않을 테니 며칠만 데리고 있으렴.] “예? 말도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돼? 아무튼 그렇게 하기로 정했으니 그런 줄 알 아라.] “예? 누구 맘대로 그런 걸 정해요? 전 절대 허락 못 합니다. 그냥 여관방 빌려서 살라고 하세요.” [여자애 혼자서 여관에서 지낸다는 것이 말이나 되니?] “안 될 건 도 뭐예요?” [아무튼 이미 결정된 일이니 더 이상 말 말아라. 아! 오늘 2시에 서울역에 도착한다고 하니 마중 나가라. 그럼 몸 건강히 잘 지내 거 라. 비행기 시간 다 돼서 이만 끊는다.] “자, 잠깐만요, 어머니!” [뚜뚜뚜뚜.] “…….” 그냥 끊어버리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에 영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다. 주 거 공간이 포화 상태에 이른 지 옛날이다. 여기서 한 명이 더 늘어 난다면 이 집은 폭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나를 제외하면 전부 외계인이다. 이웃들 눈에는 단지 외국인 정도로 보이겠지만, 영아가 같이 살게 된다면 눈치 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집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거다. 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 생에 최고의 선물~♬ 당신과 만남이었어~♬ 요즘엔 컬러링이라고 해서 통화 대기음 대신에 노래를 집어넣는 다. 이런 걸 보면 세상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다. 계속 반복되는 컬러링. “…….” 받지 않으시는군. 벌써 나가신 건가? 난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큰일이로군.” 잠깐, 오늘 2시에 서울역에 도착한다고? 난 시계를 보았다. 시계바늘이 1시를 가리키고 있다. “헉! 1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난 일단 옷을 챙겨 입었다. “어디 가세요, 오빠?”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오마. 오빠 다녀올 때까지 집 잘 지키고 있어.” “예, 오빠. 라이만 믿으세요.” “…….” 저 말을 들으니 더 불안해지는 것은 왜일까? 혹시 아이들에 대한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 내 믿음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쟤들이 자꾸 믿지 못할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서점에 ‘귀엽고 착한 엘프가 되기 위한 101가지 행 동’이라는 책이 있었다면 당장 구매해서 애들에게 선물해 주었을 것이다. 집을 나온 나는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이동했다. 박영아. 전주 큰아버지의 셋째 딸이다. 어렸을 때는 자구 같이 놀았었다. 오빠~오빠~하며 나를 잘 따 랐다. 외모는 뭐……그럭저럭 평범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 앞이마! 앞이마가 살짝 튀어 나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앞짱 구라고 만날 놀렸다. 그 때문인지 나중엔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 리고 다니더라. 으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안하다. 아무리 어렸다 해도 여자애한테 앞짱구라고 놀리다니. 뭐, 어렸을때의 일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그나저나 코흘리개 앞짱구였던 영아가 벌서 대학 갈 나이라니. 세월 참 많이 흘렀군. 언제나 10대일 것 같았던 나도 이젠 20대다. 이러다가 30대 되고, 40대 되고 그러는 거겠지. 하아~세월은 이리도 빨리 흘러가는데 나는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기껏해야 루시아와 키스한게 다다. 그야말로 진보가 없는 상태. 오죽하면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이 답답해 할 지경이다. 일부 독자 들은 ‘그냥 덮쳐!’ 라고 응원한다고 하더라. 사실 루시아와 같이 있다보면 그냥 덮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신체 왕성하고 혈기왕성한 남자니까. 게다가 영웅은 호색이라 하지 않던가? 나는 국가가 발급한 공인 인증서를 받은 진정한 영웅이다. 주민 등록증(공인 인증서?)에 보면 내 이름이 박영웅이라고 찍혀있다. 그런 만큼 고통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손만 벋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루시아. 하지만 그녀와 나의 마음 의 거리는 차원계를 넘나들 정도다. 이래서는 도저히 발전이 없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 기회가 필요해! 지금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이상 나와 루시아의 사이가 발전하기 는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갑자기 난방이 끊긴다고 생각해 보라. 그럼 루시아와 나는 서로를 껴안고 체온을 나누겠지. 그러다가 서로 입술을 맞대 고 진한 키스를 하고, 그 다음에는……. 으음, 집에 가는대로 난방 장치를 박살내야겠군. 생각을 하는 사이 서울역(지하철)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1시50 분. 1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다행히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니 바로 서울역(기차)이 보였다. 곳곳에 붙은 KTX 홍보 전단이 보인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육군 휴가병들과 코트를 걸친 해병데 휴가 병들, 그리고 경비원 복장 같은 군복을 입은 공군 휴가병들까지 보 인다. 군인들이 이렇게 단체로 휴가를 나오다니. 오늘 무슨 날인가? 아무튼 군인들이 많은 걸 보니 이곳이 서울역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실감난다. 서울역만큼 군인 보기 쉬운 곳도 없지. “이거 못 놔, 이 자식들아?”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다른 손님들께 방해됩니다.” “닥쳐, 이 새끼들아! 니들 내가 누군줄 알아? 내가 바로 영등포 바닥에 개또라이야, 영등포에 가서 개또라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 람이 없어.” “예, 예. 알았으니까 일어나세요.” “내가 니들만한 자식이 있어! 알아, 임마? 어디서 쥐방울만한 것 들이 감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이 손 안놔!” 술에 취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노숙자. 그가 누워있던 벤치 에는 참이슬 소주 한 병과 새우깡이 놓여져 있었다. 두명의 공안 요원은 그를 끌고 나가려 했지만, 술에 취해 반항하는 사람을 끌고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와중에 노숙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어이쿠! 이 자식들이 사람치네! 또 쳐봐! 또 쳐봐!” “제가 언제 쳤다고 이러세요? 자꾸 이러시면 경찰을 부르겠습니 다.” “이 자식이 이젠 협박까지 하네! 경찰 불러! 법대로 해!” 소란이 점점 커지자 주위에 노숙자들이 몰려들었다.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듯 노숙자들은 당연 노숙자 편을 들었다. 그러자 공안 요원들과 철도청 직원들이 달려나왔다. 노숙자들 은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고, 직원들은 그런 그들을 밀쳐 넘어 뜨렸다. 쓰러진 노숙자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쳤다. “아이고, 나 죽네! 이놈들이 사람 친다! 아이고! 집 없는 것도 서 러워 죽겠는데 이젠 맞아 죽게 생겼네!” “이런 씨발 것들이!” “다 죽여 버려!” “쩌빱! 쩌빱! 다 죽여 버리겠다!” “허이짜! 허이짜! 다 죽여 버리겠다!” 노숙자들은 흥분해서 마구 달려들었다. 심지어는 소주병이나 쓰 레기통을 치켜든 노숙자도 있었다. “경찰을 불러! 빨리!” 공안 요원과 철도청 직원들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일단 숫자에서부터 밀리는데다가 노숙자들이 너무 과격하게 나왔기 때 문이다. 흥분한 노숙자들은 눈에 뵈는 게 없는지 주위 기물을 파괴하고 쓰러진 공안 요원과 철도청 직원을 공격했다. 이대로라면 크게 다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가 이런 장면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서울역이 노숙자 천국이라더니, 그 말 이 맞긴 맞나 보군. 대체 어디서 이 많은 노숙자들이 튀어나온 거지? “잠깐만요! 모두들 진정하세요!” 난 앞으로 나서서 차분하게 말했다. “넌 뭐야, 이 자식아?” 처음에 난동을 피운 술에 취한 노숙자가 소주병으로 나를 가리키 며 물었다. 사실 이런 질문을 듣게 되면 좀 난감하다. 내 스스로 내 정체를 밝히기는 좀 부끄럽잖아. 여기서 내 이력을 출생부터 현재까지 읊자면 끝도 없기 때문에 난 겸손하게 내 정체를 밝히기로 했다. “전 지나가던 용기있는 시민입니다.” “용기 있는 시민?” “그렇습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이런 소란이 일어났음 에도 시민들은 뒷짐만 지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일 아니라고 빠르게 도망치고, 어떤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서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앞에 나서서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려는 생 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시민의식의 현 주고입 니다.” 나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찔리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노 숙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인 것 같긴 하군.” “자본주의의 기본 이념이 개인주의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공동체가 없으면 삶을 영위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 니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국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라, 라는 말도 있듯이요. 다행히 우리나라의 시민의식은 선진국 수준입니다.” “어째서? “그건 바로 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보시다시피 모두가 외면하는 가운데 저는 당당하게 나서지 않았습니까? 저 하나로 인해 우리나 라 시민의식 평균이 몇 단계 상승했다고나 할까요?” “…….” 난 어이없어 하는 주위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튼 여러분들께서 이러시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사실 저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저 사람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공무원일 뿐입니다. 저런 사람들을 핍박해서 대체 어 쩌겠다는 겁니까?” “그럼 우리보고 어쩌라고?” “당신들도 잘한 거 하나 없습니다.” “뭐?” “이곳은 서울역입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을 관문처럼 거쳐 갑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곳 의 대합실을 차지하고 앉아 의자에 누워 잠자기, 구걸하기, 술 마 시고 꼬장 부리기 등등 시민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치고 있습니 다.” “이 자식이 진짜!” 술에 취한 노숙자는 나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가 발을 떼기 전에 난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봐 주었다. “헉!” 무수한 전장을 헤쳐 온 나다. 나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몇 안 된다. 그 예로 아까만 해도 루 비가 내 눈빛을 보고 놀라 펑펑 울지 않았던가? 참고로 내 눈빛이 강력하다고 해봐야 일루니아 여사님의 ‘ㅉ;ㅈ어 죽일 것 같은 눈빛’과 카르의 ‘얼려죽일 것 같은 눈빛’, 그리고 루시아의 ‘경멸어린 눈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얘기지만 애초에 당신 잘못이 큽니다. 세상 살기 힘든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공공장소에서 술 마시 고 고장 부리면 되겠습니까? 그건 편집자가 새벽 4시에 작가한테 전화 걸어 마감 독촉하는 것보다 더 나쁜 짓입니다. 이곳을 이용하 는 시민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럴수는 없는 겁니다. “그럼 나보고 순순히 끌려 나가라는 거냐? 밖이 얼마나 추운지 몰라서 그래? 누군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이대로 끌려 나 가면 얼어 죽을 것 같아서 여기에 있는 거야! 나보고 그냥 죽으라는 거냐? 그리고 구걸도 누가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당장 굶어 죽 을 것 같은데,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어절 수 없이 구걸하 는 거야!” “여기서 구걸하는거 불법인 거 모르십니까? 그리고 구걸을 하려 면 한자리에 앉아서 할것이지 지나가는 사람길을 가로막고 구걸 하는 건 뭡니까? 그리고 왜 그 대상이 대부분 젊은 여자들인 겁니 까?(넌 왜 그런거에만 민감한데?-베낌이주) “그, 그거야 걔들이 돈을 잘 주니까…….” “수염 덥수룩하고 술 냄새 풀풀 풍기는 노숙자가 길을 가로막으 며 돈 달라고 하는데, 무서워서라도 주겠지요. 사실 이 정도 되면 구걸이 아니라 뜯는 거 아닙니까?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었다니까!” “그럼 빵 사드시지 술은 왜 사 드셧어요? 담배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담배도 피시나 보군요. 담배는 무슨 돈으로 사서 피신 겁니 까?” “내가 뭘 하든 니가 뭔 상관이야?” “다른 사람한테 피해가 되니까 그렇죠. 이 나라가 빈민층과 노숙 자에 대한 지원이 개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분노를 이 런 식으로 풀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현실은 당장 어찌할 수 없 는 겁니다. 정부가 이제까지 햐온 걸로 봐서 단시간 내에 소외계층 에 대한 지원확대를 기대하는것은 무리입니다. 결국은 스스로 일 어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속담이 괜 히 있겠습니까? 늪에 빠진 사람이 나오려 하지 않는데. 백날 밧줄을 던져 줘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여기까지 떨어졌으면 발버둥쳐봐야 아무 소용없어!” “노력이나 해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죠. 아직 나이도 40대이신 것 같은데, 이대로 주저앉기엔 너무 젊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목숨 걸고 노력한 다음 그래도 안 된다면 주저앉아 세상을 원망해 야지, 그냥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빨며 세상을 원망해서야 되겠습 니까?” 술 취한 노숙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그는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어린 새끼가 뭘 안다고 지껄여? “…….” 우리나라는 이게 문제다. 좀 밀린다 싶으면 나이로 누르려 한다 는 것. 연장자에게 대우를 해주는 것도 졸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 다. 만약 이런 논리를 모든 것에 적용시킨다면 대통령 선거나 토론 은 왜 하겠는가? 대통령은 출마자 중 무조건 가장 나이 많은 사람 시키면 그만이고, 토론은 참석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이긴 걸로 하면 그만인데. 살아온 시간과 지성이 비례하면 참 좋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 가 많으니 가슴 아플 분이다. “아무튼 진정하시고, 서로 대화로 해결하도록 하지요. 여기서 패 싸움을 하는 것은 주위 시민들께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양측 모두 에게 좋지 못합니다. 저는 지성인으로서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타 협안이 도출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 “이 자식 먼저 밟아 버려!” “…….”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술 취한 노숙자는 손에 들고 있던 소주병을 벽에 내리쳤다. 그러 자 밑 부분이 깨지며 소주병은 날카로운 흉기로 돌변했다. 술에 취하니 눈에 뵈는게 없나? 하지만 난 아직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빨리 경찰 불러서 이 쓰레기들 없애라고 해!” 그 말에 노숙자들은 머리뚜껑이 열렸다. “이런 개새끼들이!” “쩌빱! 쩌빱! 다 죽여 버리겠다!” “허이짜! 허이짜! 다 죽여 버리겠다!” 내 덕분에 잠깐 멈추었던 싸움이 다시 재개되었다. 그것도 아까 보다 훨씬 격렬하게. 상황이 이쯤 되면 말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 깝다. 으음, 이런 상황을 막아보고자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군. 난 뒤로 물러나려 했다. 이런 일에 껴서 다치기라도하면 루시아 와 어린 엘프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그리고 약속 시간도 다 됐다. 설마 벌써 도착한 건 아니겠지? “도망가려 하다니!” 처음에 이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술 취한 노숙자가 나에게 달 려들었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깨진 소주병. 저것에 찔리면 굉장히 아플 것 같다. 대체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공격을 하는 거지? 내 설교가 마음에 안 들었나? 난 살짝 옆으로 비키며 그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으아악!” 그는 소주병을 떨어트렸고, 난 그대로 그의 후두부를 가격했다. 퍼억! 쓰러진 그는 기절했는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동료가 당했다!” “죽여라!” “와아아!” 한명이 쓰러지는 걸 본 노숙자들은 광분해서 나에게 달려들었 다. 수십 명의 노숙자가 한번에 달려드니 마치 해일이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만약 내가 나중에 자서전을 쓴다면 이 부분을 ‘그 들의 기세는 평원을 질주하는 백만 대군의 그것과도 같았다’라고 쓸 생각이다. 좀 과장이려나? 원래 사람은 집단적으로 행동하게 되면 겁을 상실한다. 집단 속 에 개인이라는 존재가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판단하 기보다 집단이 움직이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에따른 책임 역시 집단이 나누어 질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평소보 다 더욱 과격해진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 이들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자들이다. 가진 것이 많은 자는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한 다. 하지만 가진 게 없는 자들은 잃을 것도 없기 때문에 뒷일을 생 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거고. 어쩔수 없군. 또 다시 나의 필살기를 써야 하는 건가? 가슴은 아프지만, 여기서 내가 손을 쓰지 않는 다면 더 큰 희생이 나올지도 모른다. “빅장 40단 콤보!” 일반인이 빅장을 제대로 맞으면 죽을수도 있기 때문에 위력을 굉장히 다운 그레이드 시켰다. 퍽! 퍽! 퍽! 하지만 아무리 약하다 해도 빅장은 비장이다. “빅장의 위력 뼛속까지 느껴라!” “크억! 이건 뼛속까지 시리다!” “으악! 뼈와 살이 분리되는 것 같아!”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는 노숙자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 었다. 앞서서 십여명이 쓰러지는 것을 본 노숙자들은 겁에 질린 표 정으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난 쓰러진 사람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폭력을 쓰지 않고 끝내려 했는데 빅장까지 쓰다니! 나의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난 서울역 천장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진정한 승리란 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것이고, 진정한 영웅이란 그렇게 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이래서야 어찌 이 싸움을 이 겼다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어찌 본좌를 영웅이라 말할 수 있겠는 가? 진정한 영웅이 되는 길은 이렇게 힘들고 험난하다. 어쨌든 나의 무위(武威)덕분에 장내는 완전히 정리되었다. 난 주 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밖의 날씨는 춥습니다. 그렇기에 노숙자 여러분들이 이곳에 계 시는 것을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들께 피 해를 끼치지 않도록 자중해질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수고 하시는 공무원 여러분들과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 여러분, 조금 불 편하시겠지만,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노숙자 분들의 사정을 이 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후에 기회가 되면 청와대 홈페 이지에 들어가 사회 소외 계층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촉구해 주십 시오. 이대로 양극화가 계속된다면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 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동반 성장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일치단 결해서 신한국 건설에 앞장섭시다!” 난 주먹을 불끈 쥐며 연설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내 누군 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따라 치기 시작했고, 어느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한 할아버지는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참으로 훌륭한 청년이로군. 자네같은 젊은이가 있는 이상 이 나라의 미래는 밝을 걸세.”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칭찬까지 받게 되니 쑥스럽네요.”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이 나라 젊은이들이 자네와 같다면 내 더 이상 뭘 바라겠나? 내 손녀 딸이 하나 있는데 소개시켜 주고 싶 군.” “예……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순간 ‘예쁘나요?’라고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나에겐 루시아가 있다. 루시아가 있는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다른 여자를 소개 받겠 는가? 나한텐 루시아만 있으면 돼~. 다른건 다 필요 없어~. 노숙자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직원들은 주위를 정리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갈 길을 갔다. 난 시계를 보았다. 시계바늘은 2시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헉! 늦었다.” 내가 급히 개찰구 쪽으로 다려 가려하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니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서 있는 것이 보 였다. “영웅 오빠 맞지?” “누구신데 제 이름을……?” “나야, 영아. 박영아. 기억 안 나?” “헉! 니가 영아?” “응.” 영아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놀란 표정을 감추며 영아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키는 대략 155센티 정도. 몸매는 약간 말랐다. 얼굴은 꽤나 귀여 웠다. 커다란 눈과 반짝이는 눈동자로 인해 그 귀여움이 더욱 돋보 였다. 입고 있는 옷은 청바지와 커다란 니트. 소녀다운 상큼함이 물씬 풍긴다. 쇠사슬 같은 커다란 목걸이를 매고 있고, 귀에는 동그라미를 여 러 개 겹쳐놓은 듯한 귀걸이를 끼고 있다. 머리는 어깨까지 오는 직모인데,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었다. 눈 썹 길이의 앞머리카락은 이마를 살짝 덮고 있었다. 혹시 내가 앞짱구라고 놀린 것 때문에 지금도 이마를 가리고 다 니는 건가? 그나저나 그저 그렇게 생긴 앞짱구가 이렇게 예뻐지다니! ‘어렸을 때 친한 여자애들을 많이 만들어놔라. 그들 중 한 명은 반드시 미인이 될 것이다’라는 명언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헤헤~ 오랜만이야, 오빠.” “으응, 그래. 오랜만이구나.” 처음에는 좀 놀랐지만 난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영아가 아무리 예뻐졌다고 해도 루시아, 라이레얼, 카르, 일루니아 여사님 등에 비 하면 그냥 보통 미인일 뿐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루시아가 있기 때 문에 아무리 예쁜 여자가 앞에 있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난 줄 알았니?” “오빠는 하나도 안 변했잖아. 옛날과 똑같은데 뭐.” “그런가?” “그리고 아까 나서서 연설하는 걸 보고 오빠라고 확신했어. 그런 짓 활 사람이 세상에 오빠 말고 또 누가 있겠어?” “……봤냐?” “응. 오빠 싸움 되게 잘 하더라. 옛날에는 되게 못했는데.” “내가 언제?” “옛날에 우리집에 놀러왔을때 동네 애들한테 얻어맞았잖아. 기 억 안나?” “…….” 남의 아픈 과거를 후벼 파다니. “그러는 너야말로 자다가 오줌싸서 큰 어머니께 주걱으로 얻어 맞던 거 기억 안나니? 난 울면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던 너의 모습 이 지금도 생생한데. 퍽! 영아의 갑작스런 일격에 난 눈을 얻어맞았다. 절대 감각이 그런 것도 감지 못하냐……라고 묻는다면 할말 없다. 내 절대 감각은 여 자의 공격엔 이상하리만치 반응을 안 하니까. “무슨 짓이야!” “여자의 과거를 들춰내다니, 저질이야!”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내가 소리치자 영아는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아아~ 기차 타고 왔더니 배고프다. 점심 사 줘, 오빠.” “…….” 뻔뻔한 것 같으니라고. 서울역 안에는 많은 음식점ㅈ이 있다. 패스트푸드점은 물론이고 일식, 한식, 커피숍 등등 웬만한 건 다 있다. 난 가볍게 배를 채우며 얘기를 할 생각으로 도너츠와 커피 전문 점인 ‘도너츠 도너츠(DONUTS DONUTS)’ 안으로 들어갔다. 이 ‘도너츠 도너츠’라는 가게는 국내 유일의 도너츠&커피 전문점이 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사품도 많다. 우리는 도너츠와 커피를 골라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냐?” “뭐하긴? 열심히 공부했지.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잖 아.” “서울에 있는 대학이 어디 한두 개냐? 둘러보니 사방이 다 대학 이더만. 서울대에 갔다면 모를까, 겨우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한 걸 가지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우기기엔 좀 민망하지 않니?” “그러는 오빠는 대학도 못 갔잖아. “난 못 간게 아니라, 안 간 거야.” “누구나 말은 그렇게 하지. 나도 서울대 갈수 있어는데, 안 간 거 야.” “…….”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난 고2때 판타지 세계로 끌려가 약 1년 정도 그곳에서 고생했다. 1년이라는 긴 시간을 판타지 세계에서 보냈지만, 우주의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왔을때, 이 세계 는 고작 며칠이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모험을 하고 돌아온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다. 무엇보다 딸린 식구가너무 많았는 지라. 그래서 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후에 검정고시를 봤다. 그래서 지 금 내 학력은 고졸)인형 가게를 열었다. 만약 내가 고2 때 금화를 줍 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대학에 다니고 있을 것이다. “…….” 내 성적으로 대학 가는 건 무리였으려나? 아니야.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 정도는 갈 수 있었을지도…… 2년제라도……. “대학 이름이 뭐야?” “으응. 서명대라고……유명한 대학이야.” “뭐? 서명대? 이 나라에 그런 대학도 있었냐?” “뭐야? 설마 모른단 말이야? 서울에 있는 서명대를 몰라?” “…….” 아는게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런 대학 처음 들어보는데. “서울에 있는 서울대는 알아도, 서울에 있는 서명대를 모르겠는 데.” “아니, 지금은 서울대의 인지도가 더 높지만, 조만간 바뀔 거 야.” “왱? “내가 서명대에 들어갔으니까.”(히로나 그 사촌이나 똑같구만-베낌이주) “…….” 니가 서명대에 들어간 것과 학교 인지도가 높아지는 것과 무슨 상관이니? “과는 무슨 과야?” “국어국문과.” “국문과라……많고 많은 과 중에 왜 하필 국문과를 간 거야?” “뭐, 그냥. 적성에 맞는 것 같아서.” “국문과가 적성에 맞는다는 것은 별 다른 특기가 없다는 뜻인 데.” “…….” 난 영아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니가 별 생각없이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에 들어갈 때쯤 되 자 생각을 한 거야. 난 무엇을 잘할까? 내 특기는 무엇일까? 영어를 잘하면 영어과로, 일어를 잘하면 일어과로, 법을 잘알면 법학과로, 컴퓨터를 잘하면 컴퓨터 공학과로, 가계부를 잘쓰면 회 계학과로, 수학을 잘하면 수리통꼐학과로 갔을 텐데, 아무리 머리 를 굴려 봐도 딱히 잘 하는게 없는 거야. 그렇게 며칠동안 고민한 끝에 넌 깨달았지. 아! 내가 다른건 하나는 못해도 한국어 하나는 정말 잘하는구나. 말할 때 유일하게 끊이지 않고 말할수 있는 게 한국어야. 듣기, 말하기, 쓰기 전부 완벽해. 발음은 완전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이야. 한국어 능력 시험을 보면 당장이라도 만점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순간, 넌 생각한 거지. 나의 특기는 한국어구나. 내가갈 곳은 국문과밖에 없구나. 그래서 넌 국문과로 간 거야. 어때? 내 말이 맞지?” 내 말에 영아는 울상을 지었다. “그,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그럼 뭔데?” “난 꿈이 있어서 국문과로 간 거야. 내 꿈을 펼치기 위해서.” “니 꿈이 뭔데?” 순가느 영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헉! 저것은 설마 꿈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수 있다는 ‘드림스 컴 트루(Dreams Come True)눈동자! 영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난 작가가 될 거야!” 순간, 영아의 몸에서 새하얀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아무튼 영아가 소리를 지른 덕분에 가게 안의 사람들은 모조리 영아를 바라보았다. 영아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난 마지막 남은 도너츠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작가?” “응. 작가.” “설마 그 작가라는게 소설가를 뜻한는 건 아니겠지?” “맞아. 난 소설가가 될 거야.” “…….” 잠시 침묵. 난 커피를 마시며 영아의 말을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우헤헤헤~!” 내가 웃자 영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 웃어?” “웃자고 한 얘기 아니었냐?” “…….” “난 고난이도의 개그인 줄 알았는데.” “…….” “설마 진심?” “당연 하지!” “…….” 작가가 되겠다니! 얘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너 작가가 어떤 직업인지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니?” “그, 그냥 글 쓰는 직업이잖아.” “그럼 대다수의 작가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아?” “그, 그야 뭐…….” “너 설마 자신이 스티븐 킹, 존 그라샴, 무라카미 하루키, 다나카 요시키 급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스티픈 킹은 호러 소설의 대가고, 존 그라샴은 법정스릴러의 대 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 는 작가이며, 다나카 요시키는 ‘은하영웅전설’ 이라는 불멸의 역 작을 남겼다. “나, 나라고 그런 대단한 작가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물론 그런법이 입법되지는 않았지. 하지만 글 써서 떼돈 버는 작가든은 전체의 1%도 안돼. 글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들은 전체의 10%도 안 되고 말이야. 물론 모든 작가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작가들이 힘들게 사는 것은 사실이지.” “그, 그건 그렇지만…….” “정확히 무슨 소설을 쓸 건데?” “판타지 소설.” “판타지 소설?” “응. 이미 몇 편 써 놓았고, 지금도 쓰고 있어. 판타지 소설은 무협 소설, 로맨스 소설등과 함께 장르 문학 쪽에 포함돼. 장르 문학은 대중 문학 중에서도…….” “가장 상업성을 중시하지. 그래서 글의 퀄리티 뿐만 아니라 재미 도 중요해. 장르 문학은 완결 까지 집필한 다음 책을 내는 것이 아니 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책이 나오게 돼. 그렇기 때문에 집 필 속도가 빠른 것도 장르 문학 작가의 덕목이라 할 수 있지.” 영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난 커피를 휘저으며 말했다. “나도 옛날에 판타지 소설 많이 읽었으니까.” 옛날에는 정말 많이 읽었다. 하지만 지금은 읽지 않는다. 읽을 시 간도 없을 뿐더러, 인생 자체가 판타지나 다름없는데 뭐 하러 읽겠 는가? “그래서 정말로 판타지 작가가 될 생각이야?” “응.”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아. 아무래도 작가라는 직업에 너 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좀 잔인하지만, 현실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겠군. “작가가 그렇게 쉬운 직업인 줄 알아? 물론 대박을 터트리면 좋 겠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그런 작가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 아. 그리고 장르 문학 작가라면 빠르면 한달에 한 권, 늦어도 두 달 에 한 권은 서야 돼.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마감이 라는 것이 존재하지. 이 마감이 단 하루만 늦으면 편집자는 조지기 에 들어가. 그래도 원고가 안 들어오면 굳히기에 들어가지. 혹시라도 운이 없어서 최모 편집자(아이리스 담당 편집자)같은 편 집자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댄 그야말로 인생 종치는 거야! 최모 편집자가 마음먹고 조지기에 들어가면 사흘에 한 권도 쓰게 할 수 있다 하더군. 계속 되는 마감 독촉에 박카스를 물처럼 마시며 사흘 동안 뜬 눈으로 버틴 한 작가가 ‘정말로 죽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최모 편집자는 ‘원고는 넘기고 죽으세요’ 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고 하지. 이 일화는 지급도 업계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 다고 하더군. 니가 365일 마감에 시달리는 작가의 심정을 알기나 해!” 난 눈에 핏발을 세우며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영아가 물었다. “왜 오빠가 흥분하고 그래?” “…….” 잠깐, 듣고 보니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지? 나랑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잖아. 내가 작가도 아닌데 말이야. 으음, 희한하군. “아무튼 그만큼 작가라는 직업이 만만하지 않다는 거야.” “그래도 난 작가가 될 거야.” 영아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난 고개를 내저었다. 지가 좋아 작 가하겠다는데, 내가 어쩌겠냐? “난 베스트셀러를 써서 유명해질 거야. 내가 노벨문학상이라도 타면 서명대 커트라인이 엄청 높아질걸.” “아아, 그러세요?” 노벨문학상이 동네 마라톤대회 참가상인 줄 아나? 누구나 처음에는 저런 허황된 꿈을 꾸기 마련이다. 동네 구멍가 게를 창업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체인점을 내는 것을 꿈꾸니. “자꾸 무시하지 마!” “내가 언제 무시했니? 아무튼 하루 빨리 니 꿈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마.” “…….” “왜 그런 눈으로 봐?” 영아는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가방을 뒤적거 리며 뭔가를 꺼내들었다. 서류봉투였다. 노란색 서류봉투안에는 A4 용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난 그 두툼한 A4용지 뭉치를 꺼냈다. “이게 뭐니?” “소설이야.” “소설?” “응. 내가 쓴 소설. 한번 읽어 봐.” “…….” 제법 본격적이시군. 난 제목을 보았다. 마껌 “마껌?” “응. 막마의 힘이 담긴 껌에 대한 얘기야,” “…….” 난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군신 케이룬을 섬기는 성기사 루뻐쓰와 테리우스. 테리우스는 독실한 성기사인데 반해, 루뻐쓰는 성기사를 노후 연금이 보장되 는 안전 직종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둘은 힘을 합쳐 데스 나이트가 된 성기사 마커스와 싸웠다. 힘든 전투는 간신히 둘의 승리로 돌아가고 데스 나이트는 소멸했다. 사건의 발단은 루뻐쓰가 별 생각 없이 바닥에 떨어져있던 껌을 씹으며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계의 껌이었던 것이다. 모든 악마들이 자기 전에 꼭 자일리톨 껌을 씹고 잔다는 마계이 니만큼 껌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루뻐쓰가 씹은 껌은 단순한 마 계의 껌이 아니었다. 마계의 지배자라는 루시퍼가 세번째로 씹다 버린 껌이라는 ‘마 껌 서드 자일리톨 휘바’ 였던 것이다. 마계에는 수많은 자일리톨 껌이 시판되지만 ‘휘바’가 붙은 것은 오직 단 하나. 루시퍼가 씹는 자일리톨 껌뿐이었다. 참고로 ‘휘바’는 마계 언어로서 ‘잘했어요’라는 뜻일 지니고 있다. 테리우스가 말했다. “교단으로 가지고 가야 하니 이제그만 마껌을 뱉어라.” “그래, 알았어.” 루뻐쓰는 마껌을 뱉으려 했다. 하지만 ‘마껌 서드 자일리톨 휘 바’는 루뻐쓰의 혀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헉! 이거 왜 이래?” 마껍은 자일리톨 성분이 들어있는 만큼 씹는 사람의 치아를 튼튼 하게 해 주는 효능도 있지만, 씹는 사람을 데스 나이트로 만드는 부 가적 효능도 있었다. 튼튼한 치아를 얻으려면 데스 나이트가 돼야 한다니!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인생의 진리란 말 인가? 어떤 짓을 해도 마껌이 루뻐쓰의 혀에서 떨어지지 않자 테리우스 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 혀를 자르는 수밖에.” “우아아악! 야, 이 미친 자식아!” “음, 걱정 마라, 루뻐쓰. 혀 없이도 사는데 크게 지장 없다. 말을 못 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가 아니더냐? 내가 너의 혀가 되어줄 테니 날 믿고 혀를 내밀어라.” “…….” 장난하냐? 장난해? 테리우스는 다른 성기사의 도움을 받아 루뻐쓰를 제압했다. 그 리고 치과 시술에나 쓰일 법한 도구를 사용해 루뻐쓰의 입을 열고 혀를 끄집어냈다. 루뻐쓰는 절망했다. 구해달라고 발악을 하던 루뻐쓰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고 둔 눈을 질근 감았다. 하늘 높이 쳐들려진 테리 우스의 검이 섬광 같은 속도로 루뻐쓰의 혀를 향해 떨어졌다. 그때였다. [튼튼한 치아를 원하는가?] 깊고도 무거운,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어둠이 느껴지는 목소리. 지 옥 밑바닥으로 부터 올려나오는 듯한 목소리가 루뻐쓰의 뇌리 속으 로 직접 말을 걸어왔다. [충치로부터 스스로의 이빨을 지길 수 잇는 힘을……. 치아 건강 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강대한 치아를 원하는가?] ‘…….’ [원한다면…….] ‘줘.’ [뭐?] ‘야! 달라니까! 구해줄 거면 얼른 구해줄 것이지, 뭔 사설이 그렇 게 길어!’ [아, 아니. 저기…… 내 말을 끝까지 듣고…….] ‘젠장, 혀 잘리고 나서 구해줄 작정이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나 좀 살려줘!’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자일리톨 함량과 효과에 대한 친절한 설 명을 들은 다음 계약을…….] ‘캬아아악! 사설 그만! 내 혀 날아간다!’ [……일단 계약은 성립된 것으로 알겠다.] 순간, 루뻐쓰의 입에서 섬광이 터져나왔다. 갑자기 이빨이 엄청나게 튼튼해진 루뻐쓰는 강철로 만들어진 치 과 기기 같은 도구들을 박살내고 혀를 자르려는 테리우스의 손을 물어뜯었다. 짝다리를 짚은 채 마껌을 짝짝 씹는 루뻐쓰. 그런 루뻐쓰의 모습 은 완벽한 데스나이트의 모습이었다,. 친구와 싸우기 싫었던 루뻐쓰는 몸을 날려 도망쳤다. 테리우스는 그런 루뻐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보다도 절친했던 두친구. 하지만 이젠 서로 싸워야만 한다. 그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그들의 운명이었다. “…….” “일단 거기까지 썼어. 어때? 재밌지? TV에서 자일리톨 껌 선전을 보는데 갑자기 스토리가 마구마구 떠오르더라구. 그 다음은 루뻐 쓰가 마껌을 뱉기 위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껌 제거제를 사 는 내용이야. 왜 바닥에 붙은 껌 땔 때 쓰는 그런 거 있잖아. 그렇게 해서 마껌을 뱉어내서 봉인하는데 성공해. 그런데 그 순간 테리우 스가 들이닥쳐 루뻐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마껌을 십게 되지. 그 다음에 루뻐쓰는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설명을 하는 영아. 그 열의 하나는 인정해 주고 싶다. “그래, 재밌구나.”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영아는 좋아 어쩔줄을 몰라했다. “정말이야? 정말 재밌어, 오빠?” “…….” 그냥 예의상 해본 말인데 이렇게 기뻐 하다니! 난 다음 원고를 집어 들었다. 경비전대 피스톨메이커 “으음, 어째 낯익은 제목이군,” 때는 서기2020년. 언제부턴가 갑자기 열리기 시작한 이차원(異次元)의 문. 그리고 그 통로를 통해 나타나는 이계의 상물 몬스터(Monster). 몬스터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대한민국 시민들. 피해가 잇따르자 정부는 대(代)몬스터 특무기관 ‘오라전대 피스 메이커’를 창설……하려 했으나 예산이 부족했다. 부유세라도 걷어 예산을 충당하려 했으나, 이미 부유층들은 전부 해외로 도망친 뒤였다. 급한 마음에 국민연금이라도 쏟아 부으려 했지만,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대 몬스터 특무기관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창설을 포기하고, 대신 최고의 경비회사라고 일컬어지는 ‘쎄콤 (SSECOM)’에게 대한민국 경비를 의뢰했다. 이에 쎄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경비전대 피스톨메이커’를 창 설헸다. 총 다섯 명인 이들은 쎄콤 직원들 중에서도 엘리트로 손꼽 히는 이들이었다. 리볼버 레드. 핸드건 옐로우. 머신건 블루. 라이플 그린, 지대공미사일 블랙. 손에 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아는 경비전대! 경비전대 대원들이여. 자신만의 무기로 몬스터들을 무찔러라! “…….” “왜 그래, 오빠? 재미없어?”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서……어째 낯이 익은데…….” “전대물이니까 낯이 익겠지. 오빠 옛날에 후뢰시맨 되게 좋아했 잖아. 아무튼 1부는 그렇게 몬스터들과 싸우는 내용이야.” “1부? 2부도 있냐?” “응. 1부에서 몬스터들과의 싸움은 막을 내려. 그리고 대한민국 이 평화로워지자 할일이 없어진 경비전대 피스톨메이커는 청와대 경호원으로 취직하지. 그때는 경호전대 피스톨메이커로 이름을 바 꿔. 만약 책으로 낸다면 1부는 ‘경비전대 피스톨메이커’ 로, 2부는 ‘경호전대 피스톨메이커’라 낼 생각이야. 2부에서는 대통령이 흑 연 금지 법안인 긴급조치 29호를 발령하는데, 그 때문에 흡연자들 과 전쟁이 일어나. 후에 흡연자들은 강화도를 거점으로 삼아 분리 독립 선언을 해. 그리고 나중에는 버스를 훔쳐 타고 청와대로 돌진 하지. 경호전대 피스톨메이커는 그들과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여. 그리고…….” “…….” 잠깐. 이 스토리는 내가 어린 엘프들에게 해준 얘기와 비슷하다 못해 똑같잖아. 사람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 걸까? 내가 해준 얘기는 누구 나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진부한 얘기인 걸까? 난 다음 원고를 집어 들었다. 아이미스 “아이미스? 제목이 왜 이래?” “나의 실수라는 뜻에서 아이미스(I Miss)로 지은거야. 내가 이제 까지 쓴 소설 중에 그게 가장 재밌는 거야. 한번 읽어 봐.” “…….” 솔직히 읽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하지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날 보는 영아를 마주하고 있자니 차마 읽기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내가 희생하는 수밖에. 난 첫장을 넘겼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박영운.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화를 주웠다. 하지만 그 금화는 보통 금화가 아니었다. 다른 세계의 마법사가 생명체를 소환하기 위해 이 세계로 날려보낸 금화였던 것이다. 독서실에서 집으로돌아오던 중 갑자기 바닥에 마법진이 나타나 며 영운은 다른 세계로 소환되었다. 영운을 소환한 마법사는 인간중에는 최초로 9클래스를 마스 터한 아이언 이그니드였다. 그는 영운에게 자신의 마법을 물려주 고 죽음을 맞이했다. 졸지에 마법사가 된 영운은 자신의 이름을 히노로 바꾸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히노는 처음 들른 마을에서 영주 아들이 한 여인과 억지 결혼을 하려는 것을 보았다. 불의를 참지 못한 히노는 병사들과 영주 부자 (父子)를 박살냈다. 그리고 사창가에서 세네라라는 여자를 만나 그 녀를 그곳에서 꺼내주고, 그녀의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은 사람을 찾아 혼내주었다. 후에 히노는 누시아라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아이미스 왕국의 공주였다. 그녀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 히노는 그녀를 따라 아이미스 왕 국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공작이라는 작위와 참모총장이라는 직책을 얻게 된 히노는 능력을 십분 발휘하……려 했으나,다른 사 람이 다 하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사일넌스 지리 백작. 사일넌스 지리 백작은 초외모, 초똑똑, 초 주먹의……그야말로 신의 축복이란 축복은 혼자서 모조리 받은 남자였다. 히노는 사일넌스 지리를 ‘안 하는게 없고, 못 하는게 없는 인 간’ 이라 평가했다. 사일넌스 지리에게는 누나가 하나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일누리 아. 일누리아는 만날 뺀질거리는 히노를 싫어하다 못해 경멸했다. 그래서 언제나 히노를 못 살게 굴었다. 하지만 히노는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누시아에게 치근덕 거렸다. 그때 마법사 길드의 수장인 나이라는 소녀가 등장한다. 초절정 귀염둥이 나이. 나이는 히노를 ‘오빠’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대륙 전쟁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를 뒤 흔들만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레드 드래곤 크노리스가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 것이다. 히노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레드 드래곤 크노리스와 맞 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결전의 날. 히로는 자신의 필살기인 빅창(Big槍, 창술의 일종)39단 콤보와 진 달래 스텝을 선보이며 크노리스를 공격했다. 그리고……. “…….” 잠깐. 이 스토리 어째 엄청 낯이 익은데. “왜 그래, 오빠?” “저기, 혹시 히노와 크노리스의 싸움 굉장히 어이없게 끝나지 않 아?” “어! 어떻게 알았어? 원래 크노리스가 미쳐서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는데, 그때 정신을 차리거든. 그래서 둘의 싸움은 어이없게 끝나. 그 때문에 히노는 엄청 욕을 먹지. “…….” 그래. 엄청 욕먹긴 했지. “어쨌든 히노는 본의 아니게 세계 평화를 지켜내고, 나중에 전쟁 도 끝날 때즘 해서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와. 여기까지가 1부 끝이야. 히노가 이 세계로 돌아올때, 10명정도 되는 사람, 엘프, 하프엘프, 드래곤 등도 히노를 따라 이 세계로 오거든. 2부는 히노 일행이 한 국에서 벌이는 일들을 다루고 있어. 히노가 피규어 가게를 차리는 내용, 누시아 몰래 나이트클럽 가서 바람피우다가 걸리는 내용, 운 전면허 따는 내용 등등 재밌는 얘기가 되게 많아.” “…….” 피규어 가게? 나이트클럽? 운전면허? 어째서 이렇게 스토리가 익숙한 걸까? “한 가지 물어볼게 있는데…….” “응? 뭔데?” “나중에 나이 동생이 등장하지 않아? 그러니까 히노랑 누시아가 사고를 쳤다거나, 둘 사이가 잘 되서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다거 나…….” 난 기대감을 갖고 질문했다. 왠지 영아가 쓴 소설 주인공들이 잘 되면, 나도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아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안 생겨.” “뭐라? 어째서!” 인정할 수 없었다. 히노와 누시아 사이에 아무 일도 안 생기다니! 술에 취해 실수를 한다거나, 히노가 누시아를 덮친다거나 하는 일 이 있을 수도 있잖아! “3부에서 히노가 무협 세계로 건너가거든.” “…….” 3부도 있단 말인가? “어쩌다가 무협 세계로 건너가는데?” “2부 끝부분에서 히노가 사촌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와.” “그래서?” “사촌여동생이 잠간 화장실에 간 사이 어떤 스님이 등장하는데, 그 스님의 정체는 소림사의 고승이야. 마교가…….” 중원 정벌에 나선 마교. 하지만 정마대전은 마교의 패배로 돌아 갔고, 마교는 중원에서 물러갔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 었다. 음지에 숨어 조용히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00년후. 전성기 때를 능가하는 힘을 기른 마교는 다시 중원 정벌에 나섰 다. 개개인의 무림인들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로 뭉쳐 진 무림인들의 힘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100년 전의 정마 대전도 그 때문에 패하지 않았던가? 이에 마교는 무림인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도록 제일 먼저 구심 점을 박살내기로 했다. 그 구심점이란 다름 아닌 정파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였다. 달마저 구름 뒤에 숨은 어느 날. 소림사의 문을 지키던 승려들이 소리 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수 많은 마교 고수들이 담을 넘어 소림사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지만, 마교의 공격 앞에서 는 속수무책이었다. 궁지에 몰리게 된 승려들은 108나한진을 펼쳤 다. 그러자 마교의 고수들도 합격진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108나 한진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깨진 역사가 없는 108나한진이었다. 그 역사는 100년 전 정마대전에서도 이어졌다. 하지만 반각 정도 시간이 흐르 자 진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교는 지난 100년 동안 108나한진을 깨기위해 연구했고, 그래 서 나온 것이 이 합격진이었다. 한번 진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소림사의 절대 고수인 허무대사. 허무대사는 이제 곧 소림사가 불바다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소림사라는 곳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림사의 정 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소림사는 언제든 다시 부활할 것이다. 소림사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허무대사는 한 권의 책을 품속에 넣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밖으로 나가 저 사악한 무리들에게 손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 게는 할일이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책만은 지켜야 한다.’ 허무대사는 전각을 바져나와 담을 넘었다. 적을 피해 도망을 치 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책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뒤 따라오는 적들이 없자 허무대사는 안심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한 사람이 뛰쳐나와 허무대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하하! 감히 누가 본좌에게 명령을 한단 말인가?” 허무대사는 일장을 내리쳤지만,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그 일장 을 가볍게 막아냈다. “네놈은 누구냐?” “본좌는 지옥마제다.” “헉! 지옥마제! 그럼 네가 마교의 교주?” “그렇다! 품 안에 든 책자를 내놓고 꺼지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닥쳐라!” “훗! 본좌가 자비를 베풀어 주려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대해 본좌를 원망하지 마라!” “악의 원흉인 네놈을 죽이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도 허락하실 터! 내 오늘 살계를 열겠노라!” 허무대사와 지옥마제는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원래 고수들의 싸 움일수록 한방 승부가 많은 법. 지옥마제의 일장이 허무대사의 가슴을 쳤다, “커억!” 뒤로 튕겨난 허무대사는 피를 토해냈다. “크하하하! 그 실력을 가지고 감히 본좌에게 덤비다니! 가소롭구 나!” “광오하기 그지없구나, 지옥마제여!” 지옥마제는 천천히 허무대사에게 다가갔다. 허무대사는 일이 글렀음을 깨달았다. 도망친다 해도 이런 몸으 로는 지옥마제에게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순순히 책을 내줄 수도 없었다. ‘결국 그 방법밖엔 없단 말인가?’ 허무대사는 금지된 술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혼다라 간다라 도가비가 훈. 혼다라 긴다라 도가비가 훈.” 허무대사가 주문을 외우자 지옥마제는 깜짝 놀랐다. “감히 본좌 앞에서 얕은 수작을 부리려 하다니!” 지옥마제는 황급히 허무대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허무대사의 몸이 사라진 것이다. 지옥마제는 허무대사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이를 갈았다. “크윽! 일이 어렵게 됐군. 하지만 그것이없다고 해서 그곳을 찾 지 못할거라 생각하지 마라. 이미 포빙투사와 칼콤 형제를 보내 그 곳을 찾게 하였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곳을 찾아 내겠다. 그곳을 찾아내는 순간 본좌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된다! 크 하하하!” 허무대사가 쓴 술법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차원 이동 술법이었 다. 달마대사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이 술법은 대대로 1인 에게만 전승되었다. 이러한 술법이 널리 알려질 경우에 새길 사회 혼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를 세계에 떨어진 허무대사. 허무대사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 그의 발걸 음은 바람처럼 빠르고 깃털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지옥마제의 일 장을 억어맞은 지금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간신히 진기를 모아 버티고 있지만,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 지 않은 만큼 내상이 심각했다. “쿨럭! 쿨럭!” 허무대사는 남은 힘을 모아 품안의 책에 술법을 시전했다. ‘지옥마제를 막아야 한다. 그를 막지 못하면 중원은 끝이다. 이 책을 무림맹주에게 전해야 한다. 반드시!” “그 책에 대체 뭔데?” “사실 지옥마제는 마교의 진정 중 한 가지를 이어받지 못했어. 바로 강시술법이지. 강시가 되면 도검불침의 신체를 지닐 수 있지 만 이지를 상실해. 하지만 마교의 강시술법 중에는 이지를 상실하 지 않은 채 신체를 강시로 만드는 술법이 있어. 지옥마제는 그 술법 을 얻어 자신의 몸을 강시로 바꿀 생각이었지. 그럼 도검불침에 불 로불사의 몸을 지니게 되니까. 그 책에는 마교의 다섯 호법 중 하나이자 강시문의 문주인 송강 시의 무덤 위치가 상세하게 설명되어있어. 그곳에는 지옥마제를 강시로 만들 술법뿐만 아니라 백구의 강시가 잠들어 있지. 만약 지 옥마제가 강시술법을 얻고 그들을 깨운다면 그 누구도 마교에 대 항하지 못해. 그렇기에 지옥마제도 그 책을 찾으려 한 거고,” “그럼 그 책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아?” “그래도 되지. 하지반 포빙투사와 칼콤 형제가 수색에 투입된 이상 무덤이 발견되는 것은 시간문제야. 겨우 몇 년 늦춰질 뿐이 지.” “정파는 그곳에 어딘지 알고 있어?” “응. 대략 어디쯤인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그 지역은 언제나 안 개가 짙게 깔려서 한치 앞으로 내다볼 수가 없어. 정파 수뇌부들은 수색을 그만두고 서로 합의를 했지. 왜냐하면 같은 정파라 해도 특 정 문파가그 힘을 손에 넣게 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아무리 약한 문파라도 그 힘을 얻는 순간 중원을 지배할 힘을 가 지게 된다는 건가?” “응. 그래서 합의하에 당시 무림 최고의 고수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허무대사에게 책을 맡긴 거야.” “으음,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 “허무대사는 발리 무림맹주에게 지옥마제가 송강시의 무덤을 찾 는다는 사실과 함께 그 책을 전해주어야 해. 송강시의 무덤은 분지 에 위치한 깊은 동굴이야. 그곳을 폭탄으로 파괴한다면 비급과 강 시들은 전부 묻혀 버리게 되지.” “허무대사는 지옥마제가 찾기 전에 송강시의 무덤을 파괴할 생 각인가?” “응.” “그리고 그 책을 받게 되는게 히노고 말이야?” “응응.” “…….” 불쌍한 히노. 금화 주워서 판타지 세계로 끌려간 것도 모자라 책 받아서 무림으로까지 끌려가다니 게다가 누시아와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말이야. 대체 히노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흑흑~.” “응? 왜 울어, 오빠?” “그냥. 만날 고생만 하는 히노가 너무 불쌍해서. 어흐흐흑!”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이야기 속의 히노 는 다만 누시와, 나이와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소망일 텐데, 어째서 세상은 히노를 가만두지 않는 걸까? “그 다음은 어껗게 돼? 히노가 무림을 정벌하고 다시 원래 세계 로 돌아와?” “정파를 도와 마교를 몰아내. 그리고 그 후에 원래 세꼐로 돌아 오지. 하지만 그때 누시아는 이미…….” 말끝을 흐리는 영아. 난 영아를 닦달했다. “누시아는 뭐? 누시가가 어떻게 됐는데?” “사일넌스 지리와 결혼한 뒤였어,” “커헉!” 난 열기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 열기로 인해 머리 카락이 다 타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나는 분노했다. “누시아는 히로를 기다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히노가 돌아오 지 않자 점점 지쳐가. 그때 그런 누시아를 위로해주고 지켜준 사람 이 사일넌스 지리야. 그러는 사이 둘 사이에는 서서히 사랑이 싹트 게 되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 아니겠어? 지리는 히노보다 키도 크고, 얼굴도 훨씬 잘 생겼으니까. 게다가 옆에서 지리의 언니인 일 누리아가 ‘나이를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 셈이야?’, ‘어차피 그 뺀 질이는 죽었을게 뻔하니 빨리 마음 정리하고 지리와 결혼해’라는 식으로 계속 부추기니 누시아도 마음이 움직였지. 무엇보다 나이 를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누시아는 지리와 결혼식을 올려. 히노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왔을 때 누시아는 이미 유부녀가 되어 있었지. 그 모습을 본 히로는 눈물을 머금고 발걸음 을 돌려. 그리고 둘의 행복을 빌어주며 다시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아.” “둘의 행복을 빌어주긴 뭘 빌어줘? 사일넌스 지리를 쳐 죽이고 누시아를 되찾아야 할 거 아냐!” 빠드득! 사일넌스 지리, 이 간신배! 내가 네놈을 어여삐 여겨 큰 은혜를 베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날 배신하다니! 내 결코 네놈을 용서치 않으리! “혹시 해피엔딩으로 끝낼 생각은 없니? 히노가 누시아랑 결혼해 서 나이 동생을 낳는 엔딩으로 말이야.” 영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히노와 누시아는 결코 잘될 수 없어. 그리고 누시아 입장 에서도 히노와 결혼하는 것보다 지리와 결혼하는게 훨씬 행복할 거야.” “저, 저기…… 너무 그렇게 단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좀 더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는 편이…….” “이제 그만 일어나자, 오빠.” “그, 그래.” 난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충격 은 말로 표현할수 없을 만큼 컸다. 사일런스 남매. 이 둘은 나를 엿 먹이기 위해 이 세계까지 따라온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둘이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나는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나에게서 루시아를 뺏어 간 것만큼은 절대 용서할수 없다.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마! 어째서 빅장을 맞은 사람들이 뼛속까지 시리다는 말을 하는지 알 게 해주지.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오빠.” “응.” 영아는 화장실로 쪼르르 달려갔다. 난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영 아를 기다렸다. 그때 한 스님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반짝이는 대머리와 길게 기른 흰수염. 마치 신선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 스님은 몸이 안 좋은지 금방 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경로사상이 투철한 내가 이런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난 재빨리 달려가 스님을 부축했다. “괜찮으신가요?” 내가 묻자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고 말했다. 스님의 목소 리를 들은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 “중국어군. 나 중국어 하나도 못 하는데. 하지만 내가 누군가? 8클래스를 마스터한 대마법사 아이언스 히로가 아닌가?” 난 재빨리 언어 통역 마법을 시전했다. “괜찮으세요?” “시, 시주는…….” “저는 박영웅이라고 하는데요.” “영웅……쿨럭쿨럭!” “헉! 괜찮으세요?” “나, 난 괜찮네. 그, 그보다 이것을 무림맹주에게…….” 스님은 품 안에서 낡은 책을 거내 내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그럼 부탁하네.” 스님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저, 저기요……스님?” 내가 말을 건넸지만 스님은 아무런 말고 하지 않았다. 난 손가락 을 스님의 코에 대보았다. 헉! 숨을 쉬지 않는다! 입적하신 건가? 잠깐만. 이거 혹시……. 난 이 놀라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이건 영아가 나에게 말해준 ‘아이미스’의 스토리와 똑 같은 상황이었다. 즉, 이 스님의 정체는 무림에서 건너온 소림사의 허무대사. 그리 고 내 손에 들린 이 책은 송강시의 무덤 위치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책. 그렇다고 한다면 이 책에는 수법이 걸려있겠지? 갖고 있는 사람 을 무림으로 날려 보내는 술법이. 만약 내가 이 책을 계속 갖고 있다면 난 무림으로 가게 될 것이 다. 그리고 그곳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루시아와 지니가 부부가 되어 있겠지.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군복을 입고 커다란 팩을 맨 채 어슬 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난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응? 누구세요?” “혹시 군인이신가요?” “예. 아, 아니요. 군인 아닙니다. 방금 제대했거든요. 푸하하!” “아아~ 그러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 요?” “제 이름은 전유준입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특전대 하사였으 나, 지금은 민간인이지요. 장래에 국악선생이 되는 것이 꿈입니 다.” “국악선생이요?”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했습니다. 아직 졸업을 못했지만요.” “그러시군요. 아! 제가 화장실에 갔다 와야 하는데 이것 좀 잠깐 들고 있어 주시겠어요. 오래된 책이라 물에 젖기라도 하면 큰일이 거든요.” “빨리 집에 가봐야 하는데…….” “잠깐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그러자 그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뭐,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난 책을 그에게 건네주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 어가는 척하다가 기둥 뒤로 몸을 숨겨 그를 지켜보았다. 약 3분 정도가 지났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으음, 내가 너무 과민반응한 걸까? 사실 책에 술법을 걸어 무림으로 날려 보낸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잖아! ……라지만 세상일은 또 모르는 거다. 나만 해도 금화 주운 것 때문에 판타지 세계까지 날아가지 않았 던가? 그러니 책 주워서 무림으로 날아간다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또 5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과민반응한 것 같다. 으음, 조금 부끄러워지는군. 난 기둥에서 나와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 헉! 어떻게 이런 일이? 멀쩡히 서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모두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느라 주위에 신경 쓸 여유 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몇 사람은 남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들 모두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는지 이내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튼 큰일 날 뻔했다. 잘못했으면 판타지 세계에 이어 무림으 로까지 끌려갈 뻔했군. 그럼 이걸로 3부 무림편은 물 건너 간 건가? 미래의 일을 알아내서 운명을 바꾸다니. 마치 SF영화의 한 장면 같다. 만약 내가 무림으로 갔다면 정말로 루시아와 지니가 결혼하는 스 토리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대신 특전대 하사 제대를 한 전유준이라는 사람이 무림으로 갔다. 이 시점에서 영아의 예언(정확히 말하면 예언한 건 아니지만)은 빗 나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루시아와 지니가 결혼하는 일 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나를 대신해서 무림에 간 그 남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 흠흠, 뭐 알아서 잘 적응하겠지. 혹시 아나? 그곳에서 국악선생이 될지. “많이 기다렸어, 오빠?” 영아는 헤헤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난 그런 영아를 보며 말 했다. “화장실에서 10분 넘게 있는 걸 보니 변비인가 보구나. 평소에 운동 좀 하지 그랬니?” “…….” 빨갛게 변하는 영아의 얼굴. 퍼억! 어째서 내 절대감각이 여자의 공격에는 반응하지 않는 건지 정말 의문이다. 난 영아와 함께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사람이 없는 낮 시 간인지라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인형 가게 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장사 잘 돼? 요즘 불경기잖 아.” “뭐, 그럭저럭. 지금은 공사 중이지만.” “무슨 공사?” “리모델링. 얼마 전 가게 건물을 매입했거든.” “건물을 매입해? 그럼 빌딩 전체를 오빠가 다 산거야?” “뭐, 그런 셈이지.” “무슨 돈으로 산거야?” “그냥 그동안 번 돈 좀 보태고, 건물 담보로 은행에 대출 받아서 샀지. 대출금 갚으려면 앞으로 갈 길이 멀어. 그 생각하면 가슴 아 프다.” 가슴이 아픈 이유는 다름아닌 매국노 나까무라 다케시의 보물을 전부 기부한 것 때문이다. 거기서 좀 떼서 대출금 갚았으면 지금쯤 이자 걱정 안 하고 있을 텐데. 비록 만족을 위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아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으음, 지나친 욕심은 재앙을 부르는 법이거늘. “그래도 대단해. 생각해 봐. 오빠 나이에 빌딩 산 사람이 어디 있 겠어?” “그야 그렇지.” 생각해보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긴 하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나 만큼 잘난 사람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루시아는 어째서 그것을 몰라주는 걸까? “오빠 집 어떻게 생겼는지 빨리 보고 싶다.” “…….”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 집으로 가고 있는 거였잖아! 영아가 우리 집에 오면 큰일이다. 안 그래도 좁아 죽겠는 집에 한 명이 더 늘어난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 람들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적당히 외국인이라고 둘러 대겠지만, 같이 지나다보면 외계인(?) 인 것을 눈치 챌지도 모른다. 으윽, 어떻게 해서든 떨궈놨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라고 생각한 나는 조심스럽게 영아 에게 물었다. “기숙사는 어떻게 된 거야?” “조금 복잡한가봐. 원래 신입생들은 기숙사를 우선 배정 받거든. 그런데 학교 측에서 실수를 했는지 남는 자리가 모자라대.” “그래서?” “그래서 자리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래. 한 일주일 정도면 생길 거라고 하니 믿고 기다려야지.” “일주일이 지나도 안 생기면?” “그럼 오빠네 집에서 계속 기다려야지.” “꼐속 기다렸는데도 안 생기면?” “그럼 오빠네 집에 눌러 앉아야지.” “…….” 내가 기가 막혀서 입을 쩍 벌리는데 영아가 웃으며 말했다. “헤헤~ 걱정하지 마, 오빠. 집세는 확실하게 낼 테니까.” “…….” 나는 빌딩주. 다시 말해 건물을 임대해주는 사람이다. 이제부터 임대료 받아 챙길 나에게 집세로 생색으로 내려 하다니. “혹시 여관방 얻어서 혼자 살 생각 없니?” “왜? 내가 오빠 집에 들어가는게 싫어?” “…….” 당연히 싫지. “아하하,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니가 불편할까봐 걱정돼서 말이야..” “난 괜찮아. 난 사람 북적거리는게 좋거든. 그래서 기숙사도 4명 이서 같이 쓰는 방을 신청했어.” “…….” 아아~ 정말로 이 철 없는 애를 우리 집에 들여야 한단 말인가? 계속되는 나의 시련. 정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그래도 무림으로 끌려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까지 고 생한 것도 모자라 무림까지 가서 고생한다면 난 너무 좌절한 나머 지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갔다. 영아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좀 떨어지렴. 참으로 부담스럽구나.” “그거 알아, 오빠?” “그게 뭔지 알아야 알든지 말든지 하지.” “오빠 되게 멋있어졌어.” “응?” “되게 멋있어졌다고.” “응응?” “키도 크고, 몸도 좋잖아. 얼굴도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고.” “그, 그래?” “응.” “우헤헤헤~!” 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멋있다니! 사실 난 키 크고 잘 생긴 핸섬 가이다. 그리고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청년 재벌이기도 하다. 게다가 머리도 좋고(주로 잔머리 굴리는 쪽으로)싸움도 잘 한다. 초외모, 초똑똑, 초주먹, 초재벌……그야말로 난 킹카의 모든 조 건을 두루 겸비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나란 존 재는 잡지 살 때 껴주는 부록 정도로 평가절하 되어 있었다. 이유야 당연 지니 때문이다. 지니가 내 옆에 있음으로 해서 상대적으로 내 가 부족해 보인 것이다. 착시현상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착시현상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나는 참으로 완벽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영아가 제법 남자보는 눈이 있구나. 나중에 시집 잘 가겠 는 걸.” 난 영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짓는 영아. 다시 말하지만 내가 머리 쓰다 듬는 솜씨는 스페셜리스트라 할 수 있겠다. 유치원 선생이 보고 울 고 울고 갈 정도다. 어린 엘프들 머리를 많이 쓰다듬어 주다보니 득도(得 道)했다고나 할까? 난 영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중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너 여전히 앞짱구구나. 푸훗~.” “…….” 퍼억! 생각해 보면 난 남자에게 얻어맞은 횟수보다 여자한테 얻어맞은 횟수가 훨씬 많다. 그리고 남자에게 갈굼당한 횟수보다 여자에게 갈굼당한 횟수 역시 훨씬 많다. 일루니아 여사님, 카르, 라이레얼 등등. 여난(女難)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 관상에 문제가 있나? 아니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나? 그것 도 아니면 조상님 묘를 잘못 썼나? 굿이라도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냐? “으음, 굿이라……. 그거 굿 아이디어군. 작두도 한번 타는게 좋 겠지? 그러고 보면 미아리 애기보살님이 그렇게 용하다고 하던데. 견적이 얼마나 나오려나?” “혼자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으응. 아무 것도 아니야.” 난 멍이든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건 진실 을 말한 것뿐이다. 앞짱구를 앞짱구라고 말한 것이 대체 뭐가 그리 잘못이란 말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언론을 탄압해도 되는 거야? “아직도 멀었어?” “좀만 더 가면 돼.” 영아의 질문에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잘 생긴 내 얼굴에 멍을 만들어 놓다니. 이는 국보급 유물을 훼손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범죄 다. 만약 이 사실이 대외에 알려진다면 나의 여성팬들이 가만히 있 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나의 여성팬들은 다음과 같다. 여성팬1-라이 여성팬2-루비 뭐, 성별로 구분하면 쟤들도 여성에 속하니 여성팬의 범주에 포 함시켜도 되겠지? “미안해, 오빠. 하지만 오빠가 자꾸 앞짱구라고 놀리니까…….” “앞짱구를 앞짱구라고 하지 뭐라 그러니? “자꾸 앞짱구라고 하지마! 안 그래도 콤플렉스란 말이야!” “하긴 앞짱구 정도면 콤플렉스가 될 만하지. 그래도 앞짱구를 앞 짱구라고 말했다고 해서 오빠를 때리는 앞짱구가 어디 있니? 아무 리 앞짱구의 콤플렉스가 앞짱구라고 해도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니 야? 그건 ‘짱구는 못 말려’에 나오는 짱구만큼이나 버릇없는 행동 이야. 그나저나 짱구가 앞집에 살면 앞짱구가 되는 건가? 그럼 뒷 집에 살면 뒤짱구고, 옆집에 살면 옆짱구가 되나? 어떻게 생각하니, 앞짱구야?” “…….” 영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반성중인가? 으음, 그런 것 같지는 않군. “야, 왜 그래?” “……” 툭. 눈물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서,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응? 그렇지? “흑흑~.” “…….” 우는 거 맞군. “왜, 왜 울고 그러니? 헉 혹시 그것 때문에 우는 거야? 아무리 그 래도 그렇지 겨우 그런 걸 가지고 울다니. 미안해. 이 오빠가 너무 멋있는 게 죄지 누구를 탓하겠니? 하지만 내가 아무리 멋있다 해도 우리는 사촌지간이야. 그러니 이 오빠가 아무리 멋있다고 해도 우 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 “흑흑~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응? 내가 멋있어서 우는 거 아니었어?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우아아앙! 오빠가 앞짱구라고 놀려서 우는 거란 말이야!” “…….” 그런 거였나? 난 또 내가 너무 멋있어서 우는 줄 알았잖아. 영아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난 재빨리 영아를 살짝 안아 달래주었다. “알았어. 미안해, 앞으로는 다시는 앞짱구라고 놀리지 않을게. 비 록 내가 놀리지 않는다고 해도 니가 앞짱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 겠지만…….” “우아아앙!” “아, 알았어. 너 앞짱구 아니야.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이 순간 홍길동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홍 길동의 심정. 이제는 나도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짱구를 앞짱구라 말할 수 없다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좀 심한 것 같기도 하다. 여자 외모를 가 지고 놀리다니.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는다고, 별 생 각 없이 한 나의 언행이 영아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다. 여자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일은 여성 인권 존중 차원에서라도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사람 은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난 결코 루시아의 외모만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마 음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 흠흠, 사실 외모에 끌리긴 했다. 루시아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성에게 어떤 남자가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진심으로 루시아 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설사 루시아의 외모가 바뀐다 하더라도 난 변치않는 마음으로 계속 루시아를 사랑할 것이다. 이미 난 루시아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어쩌다 예기가 이쪽으로 흘렀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외모도 하 나의 경쟁력으로 평가받는 이 시대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 은 한 발 먹고 들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여자든 남자든 다 마 찬가지다.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에 찌들어 있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아~ 세상이 어지 돌아가려 그러는지. 내가 달래주자 영아는 금방 울음을 그쳤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애들 달래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내 주특기 첫번째가 애들 울리기, 두번째가 우는 애들 달래기다.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애라도 내 ‘토닥토닥 스킬’에 한번 걸리면 금방 울음을 그친다. 대한민국을……아니, 전 세계를 뒤져봐도 나 보다 우는 애 잘 달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가 되면 그 사람은 성공한 것이다, 라는 말 이 있는데, 이렇게 따지자면 나는 대성공 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두 손으로 영아의 얼굴을 감싸며 아직 남아있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의 부드러운 손길에 영아는 몸을 움질거렸다. “오, 오빠…….” “응? 왜?” 물기어린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영아. 볼은 어느 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영아가 나한테 반했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사촌지간. 여기가 일본이었다면 결혼도 할 수 있 겠지만, 여기는 족보를 중시하는 한국. 그렇기에 우리는 절대 이루 어질 수가 없다. 설사 법이 바뀌어 사촌지간의 결혼이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평생을 바쳐 사랑할 루시 아라는 여인이 있기 때문에. 아아~ 대체 난 왜 이렇게 잘 생겨서 주위 여성들에게 상처만 주 는 걸까? 만약 ‘잘 생긴 죄’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사형을 언도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툭.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그와 함께 나를 쏘아보는 시선이 느껴진 다. 절대감각 스킬이 발동되었는지 뒤통수가 굉장히 근질거린다. 이럴 땐 고개를 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 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고개를 돌리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나는 결심을 하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제발 일루니아 여사님이나 루시아가 아니기를 바라며……이 둘 중 하나만 아니라면 누가 있어도 상관없다. 제발!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다행히 둘 중 하나가 아니었다. 둘 다였다.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손에 든 장바구니를 바닥에 떨어트린 루시아. “…….” 내 인생이 그렇지, 뭐. 예상을 벗어나는 최악의 상황. 비록 지금 오해를 살 만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고는 하나 나는 결백하다. 세상이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해도 내 스스로가 결백하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라고는 하지만 두렵다. 원래 진실이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지고, 그 달라진 해석이 진실을 가려버린다. 이미 순수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어찌 진실이 밝혀지길 기대하겠는가? 그래도 루시아라면 나를 믿어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진실된 눈동자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얼음장같이 싸늘한 표정. 온몸에서 불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 사실 내가 그 동안 신용을 깎아먹을 짓을 많이 하긴 했다. 라이레얼 사건, 나이트클럽 사건, 세레나와 라나 사건 등등. 이 외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 루시아가 나를 불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잘 말해서 오해를 푸는 수밖에 없겠군. "저기 루시아……." "이쪽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짓 계속하세요. 어디까지 가나 참 궁금 하네요." "……." 잘 말해서 오해를 풀려 해도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일루니아 여사님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저 아줌마가 초 치기 시작 하면 수습이 안 된다. "난 결백해. 믿어줘, 루시아." "누가 뭐래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백 어쩌구 하는 걸 보면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이죠?"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일루니아 여사님. 드라마나 순정만화에서 여주인공 을 괴롭히는 악녀의 모습이 연상된다. "아, 아니야, 루시아! 이쪽은 사촌동생이야. 절대 니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관계가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넘어가려 하시다니. 아이언스공작님의 잔머리도 한계에 다다랐나 보군요." "뭔 소리야, 이 아줌마야! 진짜라니까! 야,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내가 다그치자 영아는 얼떨결에 자기소개를 했다. "아,안녕하세요. 저는 영웅 오빠 사촌여동생인 박영아라고 해요." 다행이다. 이제 모든 오해가 풀리겠군. "이젠 제 말을 믿으시겠죠?후후후~." 난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일루니아 여사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루시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물론 내 귀에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이젠 사촌여동생한테 손을 뻗치나 봐. 욕정에 가득 차서 핏줄이고 뭐고 없나 봐. 저건 인간이 아니라 완전 짐승이야." "커헉!" 또 다시 오는 호흡곤란 증세. 이대로라면 뇌졸중으로 쓸질지도 모른다. 난 재빨리 금강부동심법의 구결을 외웠다. 흥분하면 안 돼.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해. "근친상간이라니. 하긴 여자라면 환장을 하는 인간이 그런 걸 따질 리 없지. 길거리에서 대놓고 사촌여동생을 성추행하는 인간은 아마 저 인간 밖에 없을 거야. 아!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었지."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인지 콤보 공격을 날리는 일루니아 여사님. 난 이를 악물고 그 공격을 버텨냈다. 여기서 내가 죽으면 일루니아 여사님 좋은 일 시켜주는 거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일루니아 여사님 좋은 일 시켜줄 수는 없지 (어째 말이 좀 이상하군). "정말 사촌동생이야?" 의심 섞인 루시아의 물음에 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진짜 사촌동생이야. 100% 사촌동생. 유전자 검사를 해봐도 좋아." 내가 그렇게 말하고 영아도 동조하자 루시아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쳇! 끝낼 수 있었는데." "……." 끝내긴 뭘 끝내? 멀쩡한 사람을 모함해서 나와 루시아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다니! 어떻게 이렇게 사악할 수가! 난 루시아에게 다가가 슬며시 손을 붙잡았다. 이렇게 루시아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니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만약 아까 내가 무림으로 넘어갔다면 다시는 이렇게 루시아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겠지? 내가 무림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루시아는 지니의 아내가 되어 있을 테니. 사일런스 남매의 꼬임에 넘어가 지니와 결혼한 루시아. 하지만 난 루시아를 원망할 생각이 업다. 모든 것은 사일런스 남매의 잘못이니. 그래. 사일런스 남매가 나쁜 거야. 루시아는 아무런 잘못 없어. "어느 날 내가 사라져도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지? 그치 루시아?"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빨리 대답해 줘. 내가 사라져도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려 줄 거지? 그렇다고 대답해 줘. 응?" "왜, 왜 그러는데? 무슨 일 있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나는 루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해, 루시아! 사랑해! 그러니까 다른 남자랑 결혼하면 안 돼. 특히 지니 같은 간신배랑은 절대 하면 안 돼. 루시아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면 히로는 콱 죽어버릴 테야! 우에에엥~." "왜, 왜 이래? 이, 이것좀 놔." 루시아는 몸을 뒤틀어 나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더 세게 끌어안았다. 온몸에 느껴지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촉. 이렇게 루시아를 안고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으며 편안해 지는 느낌이다. "무슨 일인데 그래?" "흑~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닌데 이래?" "그냥 널 보니까 너무 반가워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흑흑~." 루시아는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울어. 남자가 왜 울고 그래?" "흑흑~." 루시아의 따뜻한 말과 손길에 감동의 눈물이 쏟아졌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람을 신이 들어줄 리 없고, 일루니아 여사님이 들어줄리는 더더욱 없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손에 든 장바구니를 360도 회전시켜 내 머리를 가격했다. 퍼억! "아악! 무슨 짓이야?" "말을 듣지 않는 짐승한텐 몽둥이가 약이죠." "……." 그동안 여성 인권 보호 차원에서 참아왔는데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봉인되었던(이라고는 하지만 매 권마다 등장했던)필살기 빅장 40단 콤보로 뼈와 살을 분리……시키면 루시아와 인디가 가만히 있지 않으려나? 인디가 비록 소심 드래곤이라고는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순정 드래곤이다. 그런 만큼 내가 일루니아 여사님께 무력 사용을 개시한다면 인디가 드래곤으로 변해 날 잡아 먹을지도 모른다. 으음, 크로니스가 막아주려나? "이 사람들은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오빠?" 영아는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소개를 안 시켜 줬군. "아까도 말했듯이 이쪽은 내 사촌동생인 영아라고 해. 친사촌이니 당연히 성은 박(朴)씨야. 그래서 박영아. 그리고 이쪽은 루시아. 이쪽은 일루니아 여사님." "아, 안녕하세요." 영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루시아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아, 예. 안녕하세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예. 저도요." 영아는 다시 나에게 물었다. "잘 아는 사이인가 봐?" "응. 무지하게 잘 알지." "오빠가 외국인을 어떻게 알게 된 거야?" "……." 당연한 얘기지만 영아의 눈에는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이 외국인으로 보일 것이다. "하하하, 그냥 어쩌다보니 알게 됐다고나 할까? 이러저런 일을 하다보니 외국인 들을 많이 만났거든." "그래?" "으응. 참고로 이쪽은 내 애인이야." 난 루시아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영아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에엑!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돼? 외국인 사귀는게 이상한가?" "그게 아니라 오빠 주제에 어떻게 이런 미녀를……." "……." 오빠 주제에? 지금 평가절하 당한건가?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현재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어." 난 말을 하며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손짓을 했다. 알아서 장단을 맞춰달라는 제스처였다. 다행히 둘은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얘가 이번에 대학을 가게 됐는데, 아직 기숙사를 배정 못 받았대. 그래서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머물게 됐어." "그래?" 루시아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하긴 이런 중요한 일을 상의도 없이 내가 혼자서 결정해 버렸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겠지. "이런 중요한 일이면 미리 좀 말해주지……." "미, 미안해. 갑자기 결정 된 일이라 미처 말하지 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그러 니까 화 풀어." "나 화 안났어." 화는 안 났지만 약간 삐진 것 같긴 하다. "아, 아무튼 미안해." 루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정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거야." "응응.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거야. 이해해줘서 고마워."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루시아. 오늘따라 루시아가 천사가 아닌지 더더욱 의심이 간다. 아름다운 외모와 그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 루시아. 얼굴 예쁜 여자가 마음도 예쁘다, 라는 말은 근거 없는 편견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 저기……." 갑자기 루시아 앞으로 다가온 영아. 영아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웅 오빠 애인이면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으응. 좋을 대로 해."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아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웃으며 말했다. "난 루시아의 언니이니 나도 언니라고 불러도 돼." "……." 언니는 개뿔이……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불러야지, 뭔 언니야? "저, 정말 그래도 돼요? 영아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별 걸 가지고 다 감격스러워 하는군. 우리는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영아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저 언니들 되게 예쁘다." "언니들? 언니가 아니라?" "둘 다 엄청 예쁘잖아. 마주보고 있는데 가슴이 두근거려서 혼났어. 아아~반해버릴 것만 같아." "……." 뭐야? 아까 얼굴 붉힌 게 그런 의미였나? 일루니아 여사님한테 반하든 말든 나랑 상관 없지만, 루시아한테 반해서 사랑 고백을 한다거나 하면 바로 사생결단이다. 남자든 여자든 루시아를 넘보는 것들은 절대 용서치 않으리! "그런데 저 언니들 어느 나라 사람이야?" "응?" "국적 말이야. 서양인 치고는 피부가 굉장히 깨끗하고 얼굴도 오밀조밀 하잖아.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야?" "……."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외국인이라고만 하면 그냥 그런줄 알 것이지, 뭘 국적까지 캐묻고 그러시나? "뭐 그냥 동유럽 쪽이라고 알아 둬. 자세한 건 개인 정보 보호 차원에서 말해줄 수 없단다. 나도 몰랐는데 그쪽에선 상대방에게 국적을 물어보는 것이 큰 실례인 가 봐. 그러니까 스스로 말할 때까진 모른 척하고 있어주는 것이 예의야." "그렇구나. 오빠가 말 안 해줬으면 큰 실례할 뻔 했네." "그, 그렇지." 휴우~다행이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영아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외국인 치고는 한국말을 되게 잘하네. 말만 들어서는 외국인인 줄 모르 겠던 걸." "……." 드디어 집에 도착. 집까지 오는 동안 영아는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과 꽤 친해져 있었다. 영아는 제법 붙임성이 뛰어났다. 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앗! 오빠다!" "오빠아~!" 거실에서 문까지 거리를 최대한 활용해서 도움닫기 하는 라이와 루비.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점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피해야 돼! 나는 절대 감각이 위험을 경고해옴에 따라 재빨리 피하려 했다. 하지만 피하려는 순간 내 뒤에 루시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피하면 루시아가 다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자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 죽더라도 내가 죽는 거야. 루시아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않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라이와 루비가 동시에 내 품으로 뛰어 들었다. 퍼억! "크억!" 그야말로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이 느껴졌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다. 난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이런 타격을 입고도 쓰러지지 않은 것은 오직 루시아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오기 때문이다. 난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빠 없는 동안 집 잘 보고 있었니?" "예. 라이는 집 열심히 잘 봤어요." "루비는 더 열심히 봤어요." "아니에요. 라이가 더 열심히 봤어요." "아니에요. 루비가 더 열심히 봤어요." 쓸데없는 데서 경쟁심을 불태우는 라이와 루비. 역시 어린애들 답다. 난 팔을 벌려 둘을 한꺼번에 안아주었다. "둘 다 잘했어. 아이구, 우리 라이와 루비는 오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이 구나." "헤헤~ 라이가 원래 좀 착하잖아요." "헤헤~ 루비도 원래 착해요." 귀엽게 웃는 어린 엘프들. 이 웃음을 마주하게 되면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아아~ 세상 어떤 아이가 우리 라이와 루비보다 귀엽고 깜찍하겠는가? 내가 라이와 루비를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비는 사이 루는 루시아의 품에 안겨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누나." "……." 헉! 저 자식이 나의 루시아에게 무슨 짓을? 난 재빨리 루시아의 품에 안긴 루를 빼앗아 껴안았다. "이 형이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지?" "모르는데요." "지금부터라도 알아두렴. 그러니 앞으로는 이 형의 품에 안기렴." "싫은데요." "뼈와 살이 분리되고 싶니?" "쳇!" 나의 협박에 입술을 삐죽 내미는 루. 난 루의 버르장미러 없는 행동을 너그러이 용서해……주긴 뭘 용서해 줘? 나중에 루시아 안 보이는 곳에 가면 넌 죽었어! "이 애들은 누구야, 오빠?" 영아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라이와 루와 루비를 보았다. "으응. 친구 아이들인데 사정이 있어서 내가 맡아서 기르는 중이야." 라이는 몰라도 루와 루비는 친구(루엔)자식이 맞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우와! 이 애들 진짜 귀엽게 생겼다. 다들 너무 귀엽고 깜찍해. 한번 쓰다듬어 봐도 돼?" "으응. 뭐……." 난 허락을 구하는 눈길로 루시아를 보았고,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의 허락을 맡은 나는 영아에게 말했다. "쓰다듬어 봐도 돼.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니니." 비록 닳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 엘프들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는 영광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슥슥. 영아는 두 손으로 라이와 루, 루비의 머리를 번갈아 쓰다듬어 보았다. 그리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아~ 너무 기분 좋아." 저 심정 내가 십분 이해한다. 고양이털처럼 부드러운 아이들의 머리카락과 뽀송뽀송한 피부. 그 감촉은 만져보지 못한 사람이면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 엘프들의 감촉은 충분한 상업적 가치를 지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 머리 쓰다듬어 주기! 단돈 1만원에 5분동안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깜찍한 아이들 대기 중. 라이, 루, 루비 셋 중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지명. 골라 쓰다듬는 재미까지!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면 떼돈 버는 것은 시간문제다. 뭐, 아이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가는 루시아한테 맞아 죽는 것도 시간문제겠지만. 15분 경과. "이제 그만 쓰다듬어. 너무 많이 쓰다듬으면 상품 가치 떨어지거든." 영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에게서 손을 뗐다. "이쪽은 오빠 사촌여동생인 영아라고 해. 얘들은 오른쪽부터 해서 라이, 루, 루비. 이 언니가 우리 집에 며칠 머물 예정이란다.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 "네에~!" "그럼 방에 들어가서 노렴." 아이들은 방으로 우르르 뛰어갔다. 아랫집이 좀 시끄럽겠군. 사실 애들이 뛰어노는 바람에 바닥이 엄청 울리긴 한다. 그 때문에 한번은 아랫집 아줌마가 올라와 화를 잔뜩 내며 따졌다. 그때의 일을 잠시 회상해 보자면……. 때는 21세기, 장소는 대한민국 서울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 그날도 어린 엘프들은 좁은 거실을 열심히 뛰어다녔다. 쿵쾅쿵쾅! 결국 참다못한 아랫집 아줌마는 우리 집으로 쫓아왔다. 아랫집 아줌마: 아니,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요? 다 같이 사는 아파트에서 이래도 되는 거에요? 나: 애들이 술래잡기 한다고 뛰어다녔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아랫집 아줌마: 죄송하다면 다예요? 대체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애들이 그 모양이에요? 나: 다 저의 불찰입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교육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난 그 자리에서 어린 엘프들을 불러 야단을 쳤다. 나: 오빠가 조용히 있으라고 했어, 안 했어? 응? 감히 다 같이 사는 아파트 에서 쿵쾅거리며 뛰어놀다니! 그게 세계 10위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 시민의 자세야?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룬 국민이 그래서야 되겠어? 니들 때문에 조국 통일이 안 되는 거야. 다들 엎드려 뻗쳐. 다시는 뛰어놀지 못하도록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겠어! 라이:우에에엥~. 루비:으아아앙~. 루:엉엉~. 어린 엘프들은 펑펑 울음을 쏟았고, 그 모습을 본 아랫집 아줌마는 깜짝 놀랐다. 아랫집 아줌마: 아, 아니, 그래도 애들 다리 몽둥이를 분지르는 것은 좀……. 나: 아닙니다. 저는 제 자식이라고 해서 봐줄 생각 없습니다. 아니, 제 자식이기때문에 오히려 더 엄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식일고 무조건 오냐오냐 가르치다가는 오히려 아이를 망치는 법입니다. 아랫집 아줌마: 그래도 말로 잘 타일러서……. 나:말로 해서 들을 애들이 아닙니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치는 법. 우리나라에서 야구를 즐기는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쇠빳따(알루미늄 배트)가 생산되고 있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쇠빳따는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일가구 일빳따'를 강력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좋은 놈으로 하나 장만해 두었습니다. 난 재빨리 신발장에 놓아둔 쇠빳따를 찾았다. 이런 날이 올 것을 대비해 미리미리 쇠빳따를 장만해두는 정도의 센스. 그야말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을 몸소 실천한다 할 수 있다. 난 신발장 뒤에 있는 쇠빳따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어린 엘프들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랫집 아줌마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랫집 아줌마: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나: 예? 뭐하다니요? 애들 혼내려 그러죠. 아랫집 아줌마: 아니, 애들이 원래 뛰어놀면서 크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혼을 내요? 나: 다른 사람한테 방해가 되니까 그렇죠. 저는 부모로서 제 자식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랫집 아줌마: 해를 끼치긴 뭘 끼쳤다 그래요? 나: 지금 시끄러워서 올라오신 거 아닌가요? 아랫집 아줌마: 시끄럽긴 뭐가 시끄러워요? 이웃끼리 그 정도는 이해하고 살아야지. 부모가 할일은 애들을 패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나: 그럼 여기 왜 올라오셨나요? 아랫집 아줌마: 애들이 마음껏 뛰어놀아도 좋다고 말해주려고 올라왔어요. 나: 아! 그러셨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쇠빳따를 그냥 집어넣기 그러네요. 부모가 한번 쇠빳따를 손에 잡으면 피멍정도는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랫집 아줌마: 누구 맘대로 애들을 패! 너부터 맞아볼래? 그날 나는 아랫집 아줌마한테 맞아 죽을 뻔 했다. 그 후, 애들이 아무리 뛰어놀아도 아랫집 아줌마는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린 엘프들의 귀염성. 이런 장점은 배우고 싶을 정도다. 물론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워 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 다들 오셨네요." 인디가 거실로 나왔다. 인디는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옷 위에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외형으로만 따지면 청순가련에 순종적이고 가정적인 미녀다. 요리를 하던 중이었나? "피곤해서 식탁에 엎드려 깜빡 졸았어요. 그 때문에 들어오셨는지도 몰랐네요. 죄송해요." "뭐 죄송할 것까지야." "아! 이분은 누구신가요?" "이쪽은 내 사촌여동생 영아야." 내가 소개하자 인디는 생긋 웃으며 영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저는 인디라고 해요." 영아는 잔뜩 빨개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인디의 손을 잡았다. "저, 저는 박영아라고 해요. 저, 저기 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후훗~." 영아의 말에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예? 아, 안 되나요?" 영문을 모르는 영아는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그런 영아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쪽이 여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남자야. 그리고 유부남이기도 하지." "에엑! 말도 안 돼!" 영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난 영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니 심정 나도 충분히 동감한다. 이런 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자가 아니 라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지." 난 지금이라도 인디가 여자로 폴리모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여자로 성전환하면 내가 정말 잘해 줄 텐데. 구박도 안 하고, 일도 안 시키고 많이 예뻐해 줄텐데. 전에 인디가 한복 입은 모습을 보고 그대로 넘어갈 뻔 했다. 나의 자제력이 조금만 약했다면 이 소설은 야오이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지, 진짜에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는 영아. 그렇게 몇번을 물어보고 나서야 간신히 납득했다. 인디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욱 더 얼굴을 붉히는 영아.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가 인디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잘못하면 당장이라도 인디의 품으로 뛰어들 것만 같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일루니아 여사님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다. 그렇기에 난 미리 차단에 나섰다. "저래보여도 유부남이다.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 안 보이니?" 영아는 인디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활활 타올랐다. '유부남이어도 상관하지 않겠어!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영아가 아무리 발악을 한다 하더라도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결코 꺾지 않을 것이다. 난 일단 영아를 방으로 데려갔다. 정말 다행인 것은 지금 집에 라이레얼과 카르가 없다는 것이다. 둘은 현재 일본에서 열리는 게임쇼를 보기 위해 출국한 상태였다. 이번에 차세대 기기 발표와 유명 게임들의 신작 발표가 있다나? 아무튼 라이레얼은 잔뜩 기대에 부푼 모습이었다. 생산성 있는 활동을 조금도 하지 않는 라이레얼과 카르는 돈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둘의 해외여행 경비는 당연히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갔다. 남들은 내가 떼돈을 벌고 있는 줄 알겠지만, 정작 나는 개털이다. 이런 식으로 돈이 마구 빠져나가니 조만간 지갑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오빠는 저 많은 외국인들을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냥 사업차 이러저런 일들을 하다보니 알게 됐어. 너무 캐묻지 마라. 며칠 동안 이곳에서 지내렴." "여긴 누구 방이야? 짐이 있는 걸 보니 방주인이 있는 것 같은데." "방주인은 지금 외국 갔으니까 안심하고 써도 돼." "알았어. 고마워, 오빠." 영아는 피곤한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난 방을 나와 루시아방으로 갔다. 루시아는 애들과 함께 놀아주는 중이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사촌 여동생이 여기 왜 온거야?" "그게 말이지……." 난 아까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 온 것부터 시작해 이곳에 오게 된 경위까지. 얘기를 다 들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는 루시아. 난 그런 루시아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난 살며시 손을 뻗어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루시아의 손. 난 그녀의 옆에 밀착해 앉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너에게 항상 고마워하는 거 잘 알지?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야." "갑자기 왜 이래?" "그냥 너무 고마워서. 난 너를 너무 사랑……." '사랑해'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여러 개의 눈길이 느껴진다. 그 눈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어린 엘프들이었다. "오빠가 언니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해." "응. 어깨에 손까지 얹었어." "좀 있으면 키스할 것 같은데?" "재밌겠다." "응응. 막막 재밌을 것 같아." "기대 만빵이야." 나와 루시아를 보며 열심히 속닥거리는 어린 엘프들. 조그만 것들이 참 순진하지 못하고 발랑 까졌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정말로 나의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는건가? "비켜. 애들 보는 앞에서 뭐하는 거야?" 루시아는 애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나를 밀쳐냈다. 순식간에 루시아와 떨어지게 된 나는 아쉬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흑~ 그렇다고 이렇게 매정하게 밀쳐낼 것까지는 없잖아. 역시나 문제는 어린 엘프들이었다. 라이, 루, 루비로 구성된 어린 엘프들은 나와 루시아의 연애에 있어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내가 어떻게든 루시아와 잘해보려는 것은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루시아와 잘돼서 스토리가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되면 어린 엘프들에게도 동생이 생기게 된다. 그러니 이건 나도 좋고, 어린 엘프들에게도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요즘 시대에서도 공익을 위해 힘쓰는 나의 모습. 내가 봐도 멋지다. "우리 신경 스지 마시고 하던 거 계속하세요." "루비는 눈 가리고 있을게요." "헤헤~." 버릇없기가 하늘을 찌르는 어린 엘프들. 이게 다 내가 교육을 잘못시켰기 때문이다. 아랫집 아줌마가 말리든 어쨌든 쇠빳따를 휘둘렀어야 하는데. 난 너무 마음이 여려서 탈이라니까. "언니가 동화책 읽어줄 테니 다들 언니 앞으로 와." 어린 엘프들은 루시아 앞으로 쪼르르 모여 들었다. "오늘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얘기를 해줄게." 루시아는 동화책을 펴고 맑은 목소리로 구연을 시작했다. 내용이야 뭐 뻔하다. 옛날 옛날 한 옛날. 그러니까 다섯 아이(후뢰시맨)가 우주 멀리 아주 멀리 떠나갔을 때쯤. 어느 평화로운 왕국에 금실 좋은 왕과 왕비가 살고 있었다. 참고로 이때는 봉건시대. 이때의 왕국을 지금의 나라 개념으로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에 부딪히게 된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는 영주가 가신에게 영토를 주고, 그 대신 군역과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둘은 주종관계이며 가신은 매년 꼬박꼬박 세금을 바치고, 영주가 원하면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는 대신 가신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 안에서 뭔 짓을 하든 간에 영주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즉, 가신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는 왕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서양의 옛날이야기(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등등)에 나오는 대부분의 왕국은 이러한 도시 국가이고, 왕은 그 도시의 영주 같은 존재이다. 아무튼 얘기는 다시 돌아와서, 평화로운 왕국에 금실 좋은 왕과 왕비가 살 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둘 사이에서는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왕이 씨 없는 수박이었기 때문일까? 왕비의 밭이 황무지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황무지에 씨 없는 수박을 심었기 때문일까? 지금처럼 불임 치료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인지라 원인은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래서 불임 부부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아기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부부의 심정을 정치인들은 아는가? 노인 인구는 계속 늘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해 가고 있는데, 출생률은 점점 줄고 있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 된다면 청년 두 명당 노인 한 명을 부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산 인구가 줄어들고, 비생산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국가 경쟁력 약화를 의미한다. 이는 국가의 위기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상공론만 계속하는 정치인들. 대책은 못 세울 망정……. '뒷일 생각하지 말고 일단 순풍순풍 낳으세요. 뭐, 어떻게든 되겠죠.' ……라는 헛소리나 하며 국민들 염장을 지르고 있다. 일이 터질 때쯤엔 자신들의 임기도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난 이 지면을 빌어 정부가 출산율 증가를 위한 합리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강력 건의하는 바이다. 그 첫번째 대책으로 나와 루시아가 잘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와 루시아가 잘 되면 우리나라 인구가 최소한 한명은 늘게 되지 않겠나 뭐, 상황 봐서 둘이 될 수도 있고, 셋이 될 수도 있겠지. 루시아가 원한다면야 기꺼이 이 한 몸 불살라 출산율 증가에 한 몫 하리라! 얘기가 어쩌다가 이쪽까지 왔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둘 사이에서는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가 임신을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건 분명 하늘의 축복이야.' 하늘의 축복인지, 정부(情夫)의 축복인지, 그것도 아니면 옆집 아저씨의 축복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 시대에는 아직 유전자 감식 기술이 없었는지라.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여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왕과 왕비는 크게 기뻐했고, 나라는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왕과 왕비는 공주가 태어난 기념으로 왕궁에서 큰 파티를 열기로 했다. 그리고 많은 마녀들을 초대했다. 파티에 참석한 마녀들은 마법을 사용해 공주에게 여러가지 축복을 내려주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게 될 거예요." "예쁜 목소리를 갖게 될 거예요." "건강한 몸을 갖게 될 거예요." "공부를 잘하게 될 거예요." "공부를 잘하게 될 거예요." 모두가 축복을 내려주는 가운데, 두 마녀는 똑같은 축복을 내려 주었다. 왕은 어째서 똑같은 축복을 내려준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두 마녀가 대답했다. "저는 수능 담당이에요." "저는 내신 담당이에요." "……." 공주가 일류 대학 가는 건 시간 문제겠군. 파티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빗자루를 탄 마녀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파티장으로 들어왔다. "감히 나를 초대 하지 않고 파티를 열다니!" 나타난 마녀는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마녀였다. 파티를 망칠 것을 염려한 왕과 왕비는 그 마녀를 초대하지 않았다. 자신이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녀는 너무 열 받은 나머지 머리 뚜껑이 열렸다. 어느 정도 김이 빠져나가고 나자 마녀는 머리 뚜껑을 닫고 파티장으로 날아온 것이다. 왕은 마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우체국의 실수였습니다. 당장 우체국장을 자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시고 가벼운 식사나 하며 그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하심이……." "문답무용(問答無用)!" 마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공주는 16살이 되는 날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을 것이다! 오호호호!" 상당히 마녀스런 웃음을 날린 마녀는 다시 빗자루를 타고 돌아갔다. 왕따 당한 자의 분노는 아기에게 저주를 내릴 만큼 무서웠다. 그러니 교육계는 하루라도 빨리 학교에서 일어나는 왕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헉! 공주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리다니!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왕과 왕비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한 마녀가 나섰다. "마녀가 건 저주는 쉽게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약화 시킬 수는 있습니다. 다른 모든 마녀들은 축복의 힘을 써버렸지만 저는 아직 공주님께 아무런 축복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제 축복의 힘으로 마녀의 저주를 약화시키 겠습니다." 마녀는 공주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16살이 되면 물레 바늘에 찔리겠지만, 죽지는 않고 깊이 잠들게 될 것입니다. 그 후 왕자가 나타나 마녀를 물리치고 입맞춤을 해주면 공주님은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파티가 끝이 났다. 마녀의 저주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지만, 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하기로 했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닌 나라 안의 물레를 전부 없애는 것이었다. 나라 안의 모든 물레가 수거되어 광장 안에 차곡차곡 쌓였고, 전부 불태워졌다. 의도는 좋았지만, 상당히 무식한 짓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마녀가 '공주는 16살이 되는 날 화장실 변기에 빠져 똥독이 올라 죽을 것이다.'라고 저주를 내렸으면 나라 안의 화장실을 전부 막아버릴 건가? 어쨋든 나라 안의 물레를 전부 없애버린 왕과 왕비는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마녀들의 축복대로 공주는 아름다운 외모와 예쁜 목소리를 지닌 건강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과외는 커녕 그 흔한 학원 한번 안 갔음에도 불구하고 내신 1등급에, 모의 고사만 봤다하면 만점이었다. 그러는 사이 공주의 16번째 생일이 돌아왔다. 공주의 생일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모두가 분주했다. 혼자 있기 심심했던 공주는 성 안을 돌아다녔다. 달그락 달그락.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공주는 그 소리를 따라 올라갔다. 꼭대기 다락방에서 한 할머니가 무언가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요, 그건?" 공주의 물음에 할머니는 손을 멈추었다. "이건 물레라는 것입니다. 실을 만드는 도구지요. 이렇게 솜을 넣고 돌리면 실이 뽑아져 나옵니다." "신기하네요."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예." 호기심이 생긴 공주는 물레에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물레 바늘에 찔렸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잠이 든 공주를 내려다보는 할머니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할머니는 다름 아닌 저주를 건 마녀였다. 자신의 저주가 실행된 것을 본 마녀는 흡족해하며 성을 떠났다. 결국 예언대로 공주가 잠에 빠져들게 되자, 왕과 왕비는 물론 나라 전체가 큰 슬픔에 빠져 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자가 나타나 마녀를 물리치고 입맞춤을 해주면 공주님을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마녀들은 먼 훗날 깨어나게 될 공주를 위해 왕과 왕비는 물론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을 잠재웠다. 그들은 공주가 깨어나는 순간 같이 깨어나게 될 것이다. 나라 전체가 조용한 잠에 빠져든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활기가 넘쳤던 성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가시나무 넝쿨이 성 전체를 뒤덮었다. 그때 그 근처를 지나가던 왕자가 있었다. "어라? 이 나라는 왜 이 모양일까?" 별걸 다 궁금해 하는 왕자에게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해주었다. "오래전 이곳에는 아름다운 공주님이 있었죠. 그런데 마녀의 마법에 걸려 잠이 들게 되었답니다. 공주님은 마녀를 물리치고 자신을 깨워줄 왕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혹시 해볼 생각은 없나요? 참가비는 단돈 500골드입니다." 그 할머니의 정체는 마녀 협회에서 나온 마녀였다. 요즘 마녀 협회의 재정이 예전과 같지 않은 관계로 이런 식으로 참가비를 받아 적자를 메우고 있었다. 왕자는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참가비를 내고 '잠자는 공주 깨우기 이벤트' 에 참가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녀를 물리친 왕자는 꼭대기 층에 잠들어있는 공주를 찾아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공주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깨어났다. 첫눈에 반한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정말 뻔한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오랫동안 아이가 없던 왕과 왕비가 어떻게 갑자기 아이를 가졌냐는 것이다. 으음, 수상하군. 하지만 이점에 대해서 아무도 지적응 하지 않는다. 몰라서일까? 아니면, 모른 척하고 싶어 하는 걸까? 하긴, 어렸을 때 들었던 동화의 주인공이 알고보니 불륜의 산물이었다……라는 식의 얘기는 대다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어쨋든 루시아의 동화 구연을 듣게 되니 감동이 용솟음치며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아이들을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는 루시아의 모습. 유치원 선생 저리 가라다. 루시아가 유치원 선생을 한다면 난 기꺼이 유치원생이 되리라! 루시아의 동화 구연을 매일 들을 수만 있다면 꽃님 유치원 병아리반에 들어가는 게 대수겠는가? 내가 감동에 눈물을 쏟으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반면, 어린 엘프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이런 빌어먹을 엘프들을 봤나! 감히 루시아가 동화 구연을 하는데 졸다니! 네놈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졸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루시아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얘기가 재미없니?" 라이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니에요. 재밌어요. 그치만……." 라이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빠 얘기가 훨씬 재밌어요! 오빠가 해주는 얘기들은 막막 재밌거든요!" 루비와 루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빠가 해주는 얘기는 진짜진짜 재밌어요." "형이 아까는 후뢰시맨이랑 독수리 오형제 얘기해줬어요. 되게 재밋었어요." "또 얘기해주세요, 오빠!" "재밌는 얘기 듣고 싶어요!" 갑자기 나에게 매달리기 시작하는 어린 엘프들. 후후~ 하긴 내가 얘기를 재밌게 잘하긴 하지. 내가 한번 입을 열었다 하면, 어린 엘프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 며 귀를 쫑긋 세운다. 그만큼 내 얘기에 집중을 한다는 거다. 역시 난 이야기꾼의 재능을 타고 났단 말인가? 이쪽 길로 나섰어도 대성했을 텐데. 이런 훌륭한 재능을 만천하 에 알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짓는데, 날 쏘아보는 시선이 느껴 졌다. 그 시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루시아. 루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나를 강렬하게 쏘 아보았다. 그 시선에는 질투와 분노, 배신감 등등의 마이너스적인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왜, 왜그래, 루시아? 내가 뭘 또 잘못했어?" "......" 기대했던 대답 대신 날아오는 것은 아까보다 더욱 싸늘해진 시선 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나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왜, 왜 화를 내는 건데?" "......"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주면 고치도록 할게." "......" 여전히 대답이 없는 루시아. 나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난 지 나간 과거를 하나하나 들춰 보며 잘못한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인생.... 이라 생각했는데 잘 못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루시아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빨리 재밌는 얘기 해주세요." "전에 해주신다던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의 무림 정벌 얘기 가 듣고 싶어요." "빅장으로 무림 구파일방의 고수 수천 명을 물리쳤다는 얘기 말 이에요." 상황 파악을 못하고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조르는 어린 엘프들. 오빠 이마에서 식은땀 나는 거 안 보이니? 아이들은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 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헉! 설마 애들이 내 얘기를 더 듣고 싶어 해서 화가 난 건가? 설마 그런 걸로 화를 낼 리가.... 있으려나? 애들에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루시아의 성격상 애들이 내 얘기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에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다. 그렇다고 그런 걸 가지고 화까지 내다니. "저, 저기, 루시아.... 혹시 애들이 내 얘기 듣는 걸 더 좋아해서 화가 난 거야? 응? 그런 거야?" 루시아는 고개를 획 돌렸다. "흥! 얘기 잘하는 누구는 좋겠네. 어차피 내가 하는 동화 구연 따 위는 자장가 밖에 되지 않으니까." "......" 역시 이것 때문이었군. 아이들이 내 얘기 듣는 걸 더 좋아하는 것 을 질투할 줄이야. 아이들에 대해서만큼은 한 발자국도 밀리고 싶 어 하지 않는 루시아. 그만큼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 겠는데, 루시아의 삐진 모습.... 너무 귀엽다. 루시아에게도 이런 귀여운 면이 있었을 줄이야... "푸훗~."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 난 황급히 손 으로 입을 가렸지만, 이미 루시아가 들은 후였다. "지금 나 비웃는 거야?" 루시아는 눈을 치켜 뜬 채 나를 노려보았고, 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그런 뭔데?" "그, 그냥 니가 너무 귀여워서." "뭐?" "삐진 니 모 습이 너무 귀여워. 라이보다 더 귀여운 것 같아." "......" 나의 말에 루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도 아주 새빨갛게. "아, 언니 얼굴 빨개졌다." "정말 되게 빨갛다." "손대면 데일 것 같아." 아이들은 루시아를 보며 한마디씩 했고, 루시아는 배게를 집어 던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바보야!" "아, 아니. 난 느낀 점을 말했을 뿐인데....." "당장 나가!" 루시아는 근처에 있던 물건을 마구 집어 던졌고, 기물 파손을 염 려한 나는 재빨리 방을 빠져 나왔다. 방을 빠져나온 나는 한숨 돌리며 생각했다. 어째서 루시아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거지? 여자의 심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거실로 나가니 영아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영아는 어느새 옷을 회색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액세서리도 다 떼고, 밴드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 나던데,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었단다." 난 영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영아의 무릎 위에는 넓적하고 네모난 케이스가 있었다. "그건 뭐니?" "아! 이거 노트북이야." "헉! 노트북?" 영아는 노트북을 열고 전원을 켰다. 그러자 화면이 뜨기 시작했다. "나도 없는 노트북을 어째서 니가...." "엄마 졸라서 사달라고 했어. 노트북은 작가의 필수품이니까." "......" 웃자고 하는 소린가?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신을 '작가' 라고 생각하는 영아. 그래도 노 트북까지 들고 다니는 걸 보면 본격적이긴 하다. "그나저나 그 노트북 꽤 좋아 보인다." "응, 비싼 거야. 이거 무선 인터넷도 돼." "좋겠네." "응, 좋아." "......" 나도 루시아한테 하나 사달라고 졸라 볼까? 부팅이 완료되자 영아는 터치 패드를 이용해 인터넷 창을 띄웠다. "뭐하니?" "일주일 전에 출판사에 투고를 했어. 지금쯤이면 답장이 날아 왔을 거야." "투고?" "응, 만약 채택이 되면 책으로 나오는 거야. 내가 쓴 소설이 책으 로 나온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영아는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새로운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아! 왔다. 영광 출판사에서 온 메일이야." "영광 출판사? 거기 영광 굴비랑 무슨 관련이 있니?" "오빠, 이 출판사 몰라? 장르 소설 전문 출판사로 판타지, 무협지, 로맨스 소설 등등을 출판하는 곳이야. 이 바닥에서는 유명해." 영아는 메일을 열어보려다가 멈칫했다. "합격했을까, 떨어졌을까?" "투고한 글이 뭔데?" "아까 오빠한테 보여준 거 있잖아. 마껌이라고." "......" 떨어졌다에 올인 한다 영아는 노트북 모니터를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제발 합격하게 해주세요." 간절하게 빈다고 해서 정해진 결과가 바뀔 리는 없다. 기도와 바람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이 현실이지. 영아는 조심스럽게 메일을 열었다. 박영아님께 저희 출판사에 귀중한 원고를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 다. 성심껏 쓰셧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쉬운 글을 올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박영아님의 작품은 안타깝게도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할 것 같습 니다.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도 모자란 내용을 겨우 글 몇 줄 로 덮는것 같아 죄송합니다. 박영아님의 글은 소재가 독특해서 이런 글을 보내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였습니다. 앞으로 소재를 이 끌어 나가는 힘에 조금만 더 주력한다면 분명 좋은 작품이 되리라 믿습니다. 훗날 좋은 인연으로 뵙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투고해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시기 바랍니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은 떨어졌다는 얘기다. 난 영아의 표정을 살폈다. 영아는 충격이 컸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멍한 눈동자로 하염없이 모니터를 바라보던 영아는 갑자기 울 음을 터트렸다. "우아아앙!" "야, 왜 울고 그래?" "흑흑~ 합격할 줄 알았는데....." 영아는 떨어진 것이 서럽다는 듯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난 재빨리 영아를 달래주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울고 그래? 기회는 앞으로도 많으니까." "흑흑~ 합격할 줄 알고 이미 작가 서문까지 다 서놨단 말이야." "......"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 부터 마신 격이군. 영아는 소매를 눈물로 닦았다. 그리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하지만 난 여기서 포기하지 않아! 작가의 길은 멀고도 험한 가시 밭길. 이 경험을 발판 삼아 더 좋은 글을 쓸 테야!" "......" 혼자 좌절하고, 혼자 극복하는 영아. 그야말로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잘 논다. 내가 보기에는 영아는 작가라는 직업에 너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주 5일제다 뭐다 난리인데, 작가는 그런거 없다. 휴 일 다음날이 마감이면, 남들 다 쉬는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 중노동 을 해야한다. 게다가 산재보험은 물론이고, 퇴직금이나 연금도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열한 것들은 문제 축에 끼지도 못한다. 작가 라는 지업의 가장 큰 문제는 365일 편집자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것 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최모 편집자(다시 말하지만 아이리스 담당 편집자) 같은 편집자를 만난다면 그날로 마감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딩동! 들려오는 벨소리에 난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사일런스 지니가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일은 잘 되고 있나요?" "예. 생각했던 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으음, 수고가 많으시네요."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니 조금도 힘들지 않습 니다." "......" 조금도 힘들지 않으면 24시간 철야로 일할 것이지 집에는 왜 들 어왔니? "아! 지금 집에 제 사촌여동생이 와 있거든요.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될 것 같은데 괜찮으시죠?" "저야 상관없습니다." "다행이네요." 물론 상관없어야지. 니가 상관있으면 어쩔 건데? 이 집은 내 집. 그러니 주인의 결정이 마음에 안 들면 식객이 떠 나야 한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으신가요?" "알아서 뭐하게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사촌여동생 분께 마땅히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거실 소파에 앉아 잇어요. 안 보이시나요?" "아! 저기 계시군요." 지니는 영아에게 다가갔다. 노트북을 치던 영아는 고개를 들어 지니를 보았다. "아!"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탄성. 영아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살짝 벌 렸다. 놀라움과 환희에 가득 찬 표정. 그 표정은 곧 붉게 물들기 시 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사랑에 빠진 소녀의 표정으로 변했다.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 조각 같은 얼굴과 윤기 흐르는 금발 머 리카락. 창공을 연상케 하는 푸른 눈동자와 잡티 하나 없는 새하 얀 피부. ㅍ지적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외눈 안경과 살짝 미소를 머금 고있는 입술. 신이 빗어낸 완벽한 피조물......이라는 수식어도 부족하다고 느 껴질 만큼 완벽한 외모를 지닌 지니. 이런 지니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여자는 세상에 거의 없으리! 두근두근. 영아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린다. 지니는 멍하니 자 신을 바라보는 영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은혜를 받아 이곳에 머물고 있는 사일 런스 지니라고 합니다. 저에게 눈꽃보다 아름답고, 봄바람보다 따 스한 아가씨의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만약 내가 저 대사를 했다면 느끼하다고 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지니가 하니 그렇게 정중하고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난 지니의 몸 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착각마져 느껴야 했다. 이래서 잘 생긴 놈들은 다 죽어야 돼! 그런데 기다려도 영아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와 피가 이 어진 사촌여동생인 만큼 지니의 마수에 넘어가지 않은 건가? 과연 나의 사촌여동생답다. 훌륭하다, 영아야. 이 오빠는 니가 자 랑스럽구나. 칭찬의 말을 해주려 하는데, 뭔가 이상함이 느껴졌다. 지니는 영 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기절하신 것 같습니다." "......" 역시 사일런스 지니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나쁜 놈이었 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연약한 여자를 기절시키다니. 어떻게 인간으로서 이런 잔인한 짓을! 분노한 나는 지니에게 소리쳤다. "내 이 일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듣기 싫습니다! 후에 엄중하게 책임을 물을 터이니 그때까지 반 성하고 계세요!" 그렇게 지니를 야단 친 나는 영아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옮겨 놓 았다. 그리고 영아의 손을 꼭 움켜 잡은 채 깨어나길 기다렸다. 흑~ 미안하다, 영아야. 사촌 오빠가 돼서 널 지니의 마수에서 지 켜주지 못했구나. 다 이 오빠의 잘못이란다. 만약에 이대로 영아가 개어나지 않는다면 큰어머니꼐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영아가 몸을 뒤척였다. "으음." "정신이 드니? 내 얼굴 보여? 나 누군지 알아보겟어?" "영웅 오빠?" "응, 맞아.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흑~ 난 또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꺠어난 영아는 다행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아! 그 오빠는 어디 갔어?" "응? 누구?" "금발머리 외국인 오빠 말이야." "아! 지니를 말하는 거구나. 걱정하지 마렴. 이 오빠가 혼내주었 단다. 지금 반성하고 있을 거야." "뭐? 오빠가 뭔데 지니 오빠를 혼내? 당장 지니 오빠한테 사과 해!" 영아는 갑자기 내 멱살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켁켁! 이것 좀 놓고 말해!" "지니 오빠 지금 어디 있어?" "거, 거실에 있을 거야." 그러자 영아는 나를 내팽개치고 방을 뛰쳐나갔다. 처참한 모습 으로 방바닥에 쓰러진 나는 어이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미안해요, 오빠. 영웅 오빠가 원래 성격이 좀 더러워요. 동생인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릴게요. 그보다 오빠 여자 친구는 있으세요? 아! 제 이름은 박영아에요. 영웅 오빠 사촌동생이에요." "......" 어느새 지니의 손을 꼭 붙잡고 작업을 걸고 있는 영아. 난 기가 막혔다. 지니한테 '요즘 교제하는 여성' 이 몇 명이 있는 줄 알기나 하고 저러는 건가? 난 재빨리 영아를 뜯어 말렸다. 사촌 오빠로서 영아가 지니의 '요즘 교제하는 여성' 중 한 명이 되게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그리 고 솔직히 영아 레벨로 지니를 넘보는 것은 좀 무리다. 지니와 사귀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20대 미모의 여성. 그것도 하 나같이 전문직 등의 고수익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반면 영아는 평 범 그 자체. 여기에 더해 앞짱구이기까지 하다. 영아 편에 서서 주관적으로 봐도 지니가 많이 아깝긴 하다. "이 손 놔, 오빠! 난 이미 몸도 마음도 지니 오빠에게 바쳤단 말이 야!" "......" 지니가 받아주기나 한대? "죄송합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사촌여동생을 잘못 가르친 제 잘 못이 큽니다." "아닙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그보다 영아님꼐서 저와 교제를 원 하시는 것 같은데, 아이언스님이 공작님꼐서 허락하신다면 정식으 로...." "하지 마! 내가 허락할것 같아!" "안타깝군요." "......" 이자식이 '요즘 교제하는 여성' 이나 잘 관리할 것이지 어디서 감히 영아에게 손을 뻗치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결코 허 락할 수 없다. 딩동! 이번엔 또 누구지? 둘만 놔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난 영아를 질질 끌고 현관문으로 갔다. 문을 여니 크로니스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일찍 돌아오셧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예." 붉은 머리카락의 미청년 크로니스. 그의 팬클럽 회원수는 지니 팬클럽 회원수와 비등하다 할 수 있다. 지니가 바람기 있으면서 부 드러운 남자라면, 크로니스는 고독하고 분위기 있는 남자였다. 크로니스는 때때로 슬픈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럴 때면 나는 가슴이 아팠다. 크로니스가 누굴 떠울리는지 잘 알기 때문 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여성팬들은 그저 꺅꺅 소리만 지 를 뿐이었다. '크로니스님의 우수에 찬 눈빛 좀 봐!' '아아~ 저 눈빛에 녹아들 것만 같아.' '저 고독함을 내가 어루만져 주고 싶어.' .,.....등등 여성팬들의 대사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가끔 손님이 없는 시간이면 나는 두 팬클럽에 대해 조사했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 팬클럽 창설에 조금이라도 도 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둘의 인기 비결을 알아내서 둘의 팬클럽보 다 더 큰(다시 말해 더 많은 회원수를 지닌) 팬클럽을 창설한다는 것 이 나의 목표이니. 그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여자들이 지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지니가 연애 대상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외모적 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부드러운 행동과 정중한 말투, 그리고 언제나 여성을 먼저 배려해주는 깔끔한 매너까지. 여자들은 지니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고, 보호받고 싶어 한다. 그 렇기에 지니의 팬클럽은 주로 어린층들이 많다. 팬클럽 회원의 60%가 초등학생에서 대학생층이다. 반면 크로니스 팬들은 약간 성숙한 여성들이 많다. 팬클럽 회원 의 60% 정도가 대학생에서 30대 초반의 여성이다(참고로 이들의 비 율이 높다는 것이지. 다른 여성팬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어 떤 여고에는 지니 팬클럽 회원과 크로니스 팬클럽 회원이 정확히 50 대 50이라고 한다). 여자들이 크로니스를 좋아하는 이유도 지니와는 다르다. 여자들 은 크로니스에게 사랑받거나 보호받고 싶어 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사랑해 주고, 보호해 주고 싶어 한다. 항상 쓸쓸하고 고독해 보이는 모습이 모성애를 자극한다남 뭐라나. 어쩃든 지니와 크로니스는 타입이 다른 미청년이었고, 그 때문에 여성팬들도 갈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지니의 매력과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크로니스의 매력을 동시에 지닐 수만 있다면 둘의 팬클 럽보다 더 큰 팬클럽을 창설하는 것도 불가능만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여자들에게 살짝살짝 미소를 흘려주며 깔끔한 매너 까지 선보였다. 그와 동시에 가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우수에 찬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등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하기 위 해 노력했다. 그런데 별 다른 효과 없더라. 여전히 여자들은 지니와 크로니스를 쫓아다니기에 바빴고, 내 팬 클럽 회원은 늘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패인은 다름 아닌 외모였다. 외모가 딸리면 뭘 해도 안 된다는 사 실을 깜빡한 것이다. 크로니스가 우수에 찬 표정을 지으면 낭만이지만, 내가 우수에 찬 표정을 지으면 주접이라나 뭐라나? 남자는 얼굴이 아니라 능력이거늘! "......" 생각해보면 능력도 내가 딸리는군. 아무튼 팬클럽 창설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 기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내 이름을 내건 팬클럽을 창설하 고야 말 테야! 내가 다시 한번 결심을 굳게 다지는데 영아가 내 팔을 잡아 당 겼다. "이, 이분은 누구야, 오빠?" "아! 이쪽은 크로니스라고 해. 내 둘도 없는 친구야." 난 크로니스를 영아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리고 영아를 크로니스에게 소개시켜주려는 순간, 영아가 재빨 리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전 박영아라고 해요. 첫 만남에서 이런 말 하는 거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영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저, 저와 사귀어 주세요!" "......" 할말을 잃은 나. 나는 영아의 두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저 잘 생긴 남자만 보면 헬렐레 하는 꼴이라니. 외모 지상주의에 빠진 여 대생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박(朴)씨 가문의 수치로다! 무엇보다 남자 얼굴 따지기 전에 자신의 이마를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영아가 비록 좀 귀엽게 생겼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여 자들을 기준으로 해서다. 신급의 외모를 지닌 크로니스나 지니 앞 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영아는 앞짱구다. 아무리 앞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려도 앞짱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난 영아를 대신해 크로니스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얘가 더위를 먹었나봐요." "이 추운날 더위라니..." "그러니까 이 추운날 더위를 먹을 만큼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거죠." 난 영아를 끌고 방으로 향했다. "왜 이래, 오빠? 이거 놔!" "다 널 위해서다. 크로니스 팬이 몇 명인데 감히 고백을 하다니." 그렇다. 만약 이 사실이 크로니스 팬클럽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영아는 죽은 못숨이나 다름없다. 넘볼 걸 넘봐야지. 영아는 끌고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영아를 앉혀 놓고 심문을 시작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왜 그러는데, 오빠?" "왜 그러는데, 오빠? 죄인은 그것을 몰라서 묻느냐? 네 죄를 정녕 네가 모른단 말이냐? 뻔뻔학가 뻔데기보다 더하구나! 여봐라! 당 장 죄인을 하옥하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 나갈래." "앉아!" 난 일어나려는 영아를 억지로 앉혔다. 그리고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지니랑 크로니스에게 접근하지 마." "뭐? 오빠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난 니 사촌 오빠야! 그리고 이 집 가장이기도 하지. 내 방식이 마 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가. 여관비 정도는 쥐어 줄 테니까." "흑흑~ 너무해. 오랜만에 만난 사촌여동생에게 어떻게 이럴 수 가 있어?" 영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어쨌든 용납할 수 없어. 난 너로 인해 내 친구들이 곤란에 처하 는 것을 원치 않아." "쳇!" 영아는 손을 치우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눈물 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 우는 척만 한 것이다. "알았어, 몰랐어?" "알았어. 오빠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잖아." "다 널 위한거야." "그건 부모님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쓰는 말인데. 그런 말 하는 걸 보니 오빠도 부모 다 됐네. 하긴, 친구 애를 셋이나 기르고 있으니 부모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네." "뭐, 그렇지." "그 아이들 정말 되게 귀여운것 같아. 어쩜 그렇게 귀여울 수 있는거지? 나도 그런 아이 한번 길러봤으면..... "후후~ 그 아이들은 아무나 기를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아이들 얘기만 나오면 저절로 어깨가 펴지고 목에 힘이 들어간 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자기 자식만큼 귀엽고 깜찍한 아 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런게 부모의 심정이겠지? "아! 나한테 하나 주면 안돼? 셋이나 있으니 하나쯤은 줘도 되잖아." "지금 조크하냐? 절대 안돼!" 그럴 생각도 없을뿐더러 만약 그랬다간 난 루시아한테 맞아 죽을 지도 모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맞아 죽을것이다. "그럼 하나만 팔아. 가격 잘 쳐줄게." "인신매매 할 일 있냐?" 영아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사촌여동생이지만 정말 대책 없는 애다. 큰어머니께서 무슨 생각으로 얘를 혼자서 서울로 올려 보냈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그만 나가 보렴." "아!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왜 지니 오빠가 오빠를 아이언스 공작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 리고 히로라는 이름은 뭐야?" "......" 판타지 세계였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곳은 한국이 다. 이상해 보일만도 하겠지. "아이언스 히로는 내 외국 이름이야. 외국 친구들을 만나다보니 까 한국 이름으로는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하나 지었어. 그리고 사 일런스 지니가 사실은 유명한 백작가의 후손이야. 그래서 내가 장난으로 지니를 사일런스 백작님이라고 불렀더니 지니도 장난으로 나를 아이언스 공작님이라고 불렀어. 그게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는 거야.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니 신경 쓰지 마렴." 나는 재빨리 잔머리를 굴려 이야기를 날조해 냈다. 다행히 영아 는 믿는 눈치였다. 판타지 세계에서 판타스틱한 경험을 끝마치고 돌아온 나는 지금 의 삶이 굉장히 평범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평범은 커녕 이보다 더 이상할 수는 없을것이다. 이 집에 사는 사람 중에서 나를 제외하고 나면 평범한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뭐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나도 특이해 보일 것이다). 하나같이 외국인(사실은 외계인)에 평생 한번 볼까 말까한 미남 미녀들(더하기 초절정 귀염둥 이들)이다. 이제까지 뉴스에 나오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다. 그러고 보면 나 도 이제 슬슬 공중파를 탈 때가 됐는데. 그런데 영아는 지니와 크로니스 둘 중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걸까? 그 점이 궁금해진 나는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지니와 크로니스 중에 어느쪽이 더 마음에 들어?" "응?" "지니와 크로니스 중에 한 명을 사귀어야 한다면 누굴 사귈 거야?" "뭐, 뭐?" 엄청나게 당황하는 영아. 영아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니 오빠와 크로니스 오빠중 한 명을 택하라니. 나, 난 어떡해 야 하는 거지? 대체 누구랑 사귀어야 하는 거야?" "......" 아주 쇼를 해라, 쇼를 해. 그정도면 전위예술이다. "안 돼. 난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어. 둘 중 누구도 버릴 수 없으 니까. 흑흑~ 난 욕심많은 여자인가 봐." "......" 이런게 내 친동생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저기......그럼 혹시 내 팬클럽에 들어올 생각은 없니?" "......?" "아, 아니, 둘 중 어느 쪽도 택할 수 없다면 그냥 내 팬클럽에 가입하는 게 어떤가 해서. 생각 없니?" "......!" "없음 말구." * * * * 방안으로 들어간 영아는 나올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녁도 먹는 둥마는둥 하고 다시 방안에 틀어박혀 감감무소식이다. 난 애가 방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굉장히 궁금해졌다. 난 슬쩍 방 안을 들여다 보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이런 일은 에 이전트를 고용하는게 좋궸군. 난 에이전트를 호출했다. "라이야, 오빠가 사탕 줄 테니까 일로 와보렴." 그러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라이는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잠깐 저 방에 들어가서 언니 뭐하는지 보고오렴." "사탕은요?" "갔다오면 줄게." "......" 나를 바라보는 라이의 불신 가득한 눈초리. "뭐니, 그 눈빛은? 라이 지금 오빠 말 못 믿는 거니?" "......" 더욱더 짙어지는 불신의 그늘. 이렇게 서로 불신하고 살아서야 언제 신용 사회로 도약하겠 나? 이 사회에 만연한 불신 풍조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텐데. 난 츄파춥스 파인애플 맛을 꺼내 라이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러 자 라이는 귀엽게 웃으며 사탕을 쪽쪽 빨았다. "맛있니?" "예. 막막 달고 맛있어요.' "그래, 그럼 이제 갔다오렴." 라이는 아장아장 걸어서 원래는 라이레얼과 카르의 방이었으나 지금은 영아가 쓰는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라이. 잠시 후, 다시 나오는 라이. "뭐하고 있디?"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어요."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았어요." "글을 쓰고 있어?" "예. 머리에 끈을 질끈 묶고 막막 열심히 쓰고 있어요. 라이가 들 어갔는데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집중하고 있어요." "그렇단 말이야?" "예." "흐음." 작가는 언제 어느 때라도 글을 쓴다는 건가? 그래도 그 정도로 집중을 할 정도면 뭔가 좋은 생각이 떠울랐다 는 건데. 대체 무슨 소설을 쓰는지 궁금하군. "아! 그런데 루시아 언니 화는 좀 풀렸니?" "아니요. 아직 안 풀렸어요." "으음, 역시 오래 가는군." 루시아는 원래 한번 화가 나거나 삐지면 꽤 오래 가는 편이다. 하여튼 이놈의 입이 방정이라니까. 그때 귀엽다는 말은 왜 해 가지고. 그래도 삐진 루시아의 모습이 귀엽긴 무지 귀여웠다. 아아~ 꼭 끌어안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물론 그랬다간 맞아 죽 겠지만. 난 아쉬운 마음을 라이를 끌어안고 보듬어 주는 것으로 달랬다. 라이의 부드럽고 뽀송뽀송한 살결을 만지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루시아 살결도 깨끗하고 부드러운데. 난 라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슥슥. 고양이털처럼 부드러운 회색 머리카락잎이 내 손을 부드럽게 감 싼다. "헤헤~." 해말게 웃으며 내 품으로 파고드는 라이. 이는 내 머리 쓰다듬는 솜씨가 신의 경지에 다다랐음을 말해준다. "오빠가 쓰다듬어 주니까 좋아?" "예. 막막 좋아요. 오빠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라이는 너무너무 행복해요." "루시아 언니도 자주 쓰다듬어 주잖아." "언니가 쓰다듬어 주는 것도 좋지만, 오빠가 쓰다듬어 주는게 훨 씬 좋아요. 오빠가 100점이라면, 언니는 50점 밖에 안 돼요. 에헤헤~." "......" 내가 쓰다듬어 주는게 두배는 더 좋단 예기군. 이 말을 루시아 가 들으면 한달동안 삐질지도 모른다. "라이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런 말은 절대 루시아 언니에게 말하면 안돼. 알았지?" "예? 왜요?" "라이는 오빠가 라이 볼 감촉보다 루비 볼 감촛이 두배 더 좋다고 말하면 기분 좋겠어?" "예? 루비 볼 감촉이 라이 볼 감촉보다 두 배 더 좋아요? 우에에엥~ 너무해요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라이. 난 깜짝 놀라 해명했다. "아니야, 라이야. 단지 비유일 뿐이야. 결코 루비 볼 감촉이 라이 볼 감촉보다 더 좋다는 게 아니야." "우에에엥~ 오빠 미워요오." 내가 열심히 달랬지만 라이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라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은 루시아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상황까지 일어나고야 말았다. "왜 애를 울리고 그래?" "아, 아니, 저기....그게 아니라....." "넌 잘못했다고 말하는 대신 항상 변명을 하더라. 됐어. 듣고 싶 지 않아." 가차 없이 내 말을 자르는 루시아. 그리고 라이에게 손짓을 했다. "언니 품으로 와, 라이야." 라이는 여전히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내 품을 빠져나와 루시아 품 에 안겻다. "괜찮아, 라이야. 언니가 옆에 있잖아." "우엥~ 우엥~ 오빠가요,.....루비 볼이 더 만지기 좋다고.... 라이볼은 이제 필요 없다고.,...막막 그랬어요. 우에에엥~~!" "야! 내가 언제 그랬어?" 찌릿! "아, 아니 그러니까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에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서......" "흥! 방으로 들어가자, 라이야." 루시아는 라이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난 억울한 마음이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흑~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다니. 난 거실에 앉아 놀고 있는 루와 루비에게 물었다. "얘들아, 너희들도 이 오빠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니?" "아니에요, 오빠. 루비는 오빠 편이에요." 내 편을 들어주는 루비. 난 루를 보았다. "너는?" "전 누나 편인데요.' "......" 이래서 아들 키워봐야 아무런 소용없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러운 법. 난 반드시 루비와 라이를 예쁘게 키워내고 말 테야! "루비 일로 오렴. 오빠가 비행기 태워 줄게." "와아! 정말요?" 내가 루비를 태워주려 하자 루가 말했다. "비행기 태워주면 저도 형 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훗, 비행기는 어떠한 경우에도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단다." "흥! 저도 타고 싶은 생각 없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루비를 비행기 태워주기 시작하자 루 는 부러움 가득한 눈동자로 루비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뭔가를 갈망하는 모습이라니! 인형 가게 유리 진열대 안에 세워진 바비인형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는건 왜일까? 그 바비 인형이 나무나도 갖고 싶은데 아무도 사주지 않는, 그래서 바라만 봐야하는 소녀. 뜨겁게 갈망하지만 가질수 없는 그 무엇. 아직 이해가 안가는가? 그럼 좀더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 보겠다. 난 비오는 날 버스를 기다리던 중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래 서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다행히 담뱃갑에는 닥 한 개비의 담배가 남아있었다. 일명 돛대. 내가 돛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버스가 지니가며 물 을 튀겼다. 그 물은 내 옷과 담배를 적셧다. 옷이야 빨면 그만이지 만 담배는 어쩌란 말인가? 난 물에 젖어 죽어가는 담배에 불을 붙 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난 근처 담배 가게를 찾았다. 다행히 담배 가게는 바로 옆에 있었 다. 그런데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나는 결국 처량한 눈으로 계산대 앞에 놓여진 담배를 바라봐야만 했다. 지금 루의 모습은 그날 담배를 바라보던 나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연민이라는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 실 루의 잘못은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비행기를 탈 수조차 없다니. 루 입장에서는 굉장 히 억울할 것이다. 성별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니. 루의 처량한 눈빛 공세에 견디지 못한 나는 루비를 내려놓고 손짓을 했다. "일로 오렴. 너도 한번 태워줄게." "예? 정말요?" "그래. 이 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 루는 반신반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난 루를 붙 잡고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으음, 남자애라서 그런지 루비보다 약간 무겁다. "재밌니?" "예. 진짜 재밌어요." 루는 감동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조금만 더 감동했으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 감동의 시간을 게속 만끽하게 해주고 싶지만 팔다리가 뻐근하 다. 연속 두명을 비행기 태워주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닌지라. 난 루를 내려주었다. 발을 땅에 디뎠음에도 불구하고 루는 감동 의 바다에서 빠져나올 줄 몰랐다. "헤헤~ 드디어 나도 비행기 탔다." "축하해." "자, 그럼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자. 루비는 루시아 방으로 들어 가고, 루는 날 따라오렴." "네, 안녕히 주무세요, 오빠." "그래, 루비도 잘 자렴." 내가 허리를 숙이자 루비는 까치발을 해서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쪽~. 굿나잇 뽀뽀를 한 루비는 루시아 방으로 들어갔다. "저도 해드릴까요?" "......" 어이없는 루의 발언에 난 대답 대신 주먹을 들어 올랐다. 비행기 한번 태워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군. 내 볼은 라이와 루비 전용이야! 그리고 내 입술은 루시아 전용이다. 루시아가 별로 애용을 안 하는지라 현재는 개접휴업 상태지만. * * * * 웬일로 일찍 잠에서 깼다. 이유는 루 때문이었다. 헉! 이놈이 건방지게 지 혼자 이불을 다 차지하다니! 루는 두꺼운 이불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 보 니 거대한 누에고치 같다. 이제부턴 이불을 따로 쓰던지 해야지. 시간을 보니 새벽 4시. 일어나기엔 빠르고, 다시 자기엔 좀 늦은 시간이다. 난 텔레비전 영화 채널이나 볼 생각으로 거실로 나왔다. 응? 무슨 영화 채널이냐고? 후후~ 그거야 뭐 뻔한 거 아닌가? 당연히 성인 영화 채널이지. 밤에 몰래 성인 영화를 보다가 루시아한테 걸리면 그날로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난 조심스럽게 텔레비전을 틀었다. 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일부러 거실 불도 켜지 않았다. 앗! 이건 '물레방앗간의 신음소리 2'! 안타깝게도 저번에 본 거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았지만, 볼 만한(야한) 게 없었다. 포기를 하고 텔레비전을 끄려는데 홈쇼핑 채널에서 여성 속옷 판매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난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오오! 브라 팬티 15종 세트. 거기에 캐미숄웨어까지!" 여성 쇼핑호스트가 제품의 장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디 자인은 프랑스의 누가 했으며, 원단은 뭘 사용했고, 아래와 옆에서 두번 모아줘서 커 보이네 어쩌네 등등. "10개월 무이자 할부에 사흘 안에 배송이 완료되는군. 제품이 마음에 안들 경우엔 전액 환불도 되네. 그나저나 여자 속옷에 저런 과학적 원리가 숨어있는 줄은 몰랐군." 홈쇼핑 채널 여성 속옷 판매를 시청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중 요한 것은 저런 설명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오옷! 나온다." 패션쇼 무대처럼 꾸며진 촬영 세트에 늘씬한 동유럽계 미녀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판매중인 여 성용 속옷과 액세서리 몇 개가 전부다. 꿀꺽. 난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 울였다. 접시 달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마구 든다. 모델들 다리가 참 늘씬하군. 허리도 잘록하고 말이야. 얼굴도 다들 예쁘네. 뭐, 그래봐야 루시아한테 비하면 봉황 앞에 까마귀지만. 그런데 하나 구매해 루시아한테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으음, 저 속옷들 루시아가 입으면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정말로 하나 구매해서 선물해 볼까? "......" 으음, 맞아 죽거나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겠군. 결정적으로 나는 루시아의 쓰리 사이즈를 모른다. 내가 지니가 아닌지라. 참고로 지니는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쓰리 사이즈를 산출해내는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지녔다. 손가락을 보는 것만으로 둘레가 얼마인지 알아내 반지 호수를 정확히 맞출 정도니. 그런 스킬들은 바람둥이의 특수 스킬로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지니한테 한번 배워보려 했는데 잘 안 되더라. 난 계속해서 모델들의 몸매를 감상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대 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만약 루시아나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걸 린다면 그 순간 인생 종치는 거다. 그렇기에 난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 방에 경계를 집중했다. 리모콘을 쥔 손에는 땀이 묻어났다. 방문이 열리는 기미가 조금이 라도 보인다면 순식간에 만화 채널로 바꾸어야 한다. 그 타이밍이 중요하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 오빠?" "허억!" 난 너무 놀란 나머지 리모콘을 떨어뜨렸다. 재빨리 리모콘을 주 우려 했지만, 너무 어두워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속옷만 입은 모델들의 워킹은 계속되고 있었다. 영아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뭘 보고 있는 거야? 꺄악! 이 저질!" "조용히 해!" 난 재빨리 영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루시아 방과 일루니아 여사 님 방에만 집중을 하느라 영아가 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다니. 게 다가 실수를 해서 리모콘까지 놓치고. 다 나의 불찰이다.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 내 빅장 40단 콤보에 자비란 없다." "읍읍!" "......" 아! 이게 아니었지. "부탁이니 조용히 좀 해." 다행히 영아는 더이상 발버둥치지 않았다. "이제 놔줄 테니 계속 조용히 해야 돼. 알았지?" 끄덕끄덕. 난 믿고 입을 막은 손을 치워주었다. 영아는 한심하다는 눈길로 날 보며 말했다. "밤에 몰래 이런거나 보다니. 하여튼 남자들이란." "아, 아니. 내가 꼭 이런 걸 보려고 했다기 보다 살 게 없나 해서 홈쇼핑 채널을 틀었는데 이런 게 나온 거야. 난 결백해." "그랬는데 그렇게 화면이 뚫어져라 보고 있었어?" "그, 그건......" 할말없다. "오빠 애인은 오빠가 이런거 보는줄 알아?" "......알면 난 죽음이야." 하지만 오죽하면 내가 이러겠냐? 나라고 좋아서 멀쩡한 애인 놔두 고 밤에 몰래 여자 속옷 선전 보는 게 아니다. 루시아가 나에게 눈곱 만큼이라도 신경써주었다면 이런 짓 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루시아는 언제까지 날 독수공방 시킬 생각일까? 흑~ 루시아 미워~. 아무튼 난 재빨리 텔레비전을 끄고 거실 불을 켰다. "그런데 이 시간에 무슨일이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일찍 일너난 게 아니라 안 잤어." "뭐라?" "글을 쓰다보니 어느새 새벽이더라고. 그래서 잠깐 쉴 겸해서 나온 거야." "그럼 밤새서 글을 썼다는 거야?" "응." "......" 밤을 새서 글을 쓰다니! 그건 편집자에게 사랑 받는 작가들이나 하는 짓 아니던가? 참고로 I모 소설을 집필하는 박모 작가는 아무리 마감이어도 하 루 8시간 이상 취침은 꼭 지킨다고 한다. 최모 편집자가 아무리 닦 달을 해도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나 뭐라나. 참고로 그동안 마감 때면 박모 작가가 밤을 새서 글을 쓰는 줄 알 았던 최모 편집자가 이 사실을 알게되면 다음 마감때 박모작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최모 편집자는 '마감 날짜 전에 원고를 안 넘기는 작가는 편집자의 적이다. 적을 무찌르는 데 있어서 어찌 과정을 따지겠는가? 중요한 것은 승리해서 원고를 받아내는 것이다' 라는 극단적인 사상을 지 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인 사상은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된다. 다음은 술자리에서 있었던 최모 편집자와 박모 작가의 대화이다. '전에 어떤 작가가 마감을 한 달이나 어긴 적이 있었지. 계속 닦 달을 해보았지만 계속해서 쓰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어.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원고가 넘어오지 않았고, 참을수 없었 던 나는 직접 조사에 나섰어. 알고보니 그 작가는 글을 한 줄도 안 썼더군. 내가 닦달할 때마다 열심히 쓰고 있다고 말하며 실제로는 열심히 오락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난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원고를 받아내는 일이었어. 결국 나 는 한동안 봉인되었던 필살기를 쓸수밖에 없었지.' '그, 그 필살기란 무엇인가요?' '별 거 아니야. 그냥 사흘 밤낮을 안 재우고 글을 쓰게 하는 것뿐이지.' '헉!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사흘 만에 한권을 뽑아내더군. 그때 난 느꼈지. 작가는 쥐어 짜 내면 글을 토해낸다는 것을.' '그, 그런...' '참고로 그 작가는 원고를 넘긴 직후 쓰러져 두 달 동안 요양을 취해야 했지.' '......헉쓰!' '작가 인권 보호 차원에서 또다시 봉인 해두었으니 박모 작가는 걱정하 지 않아도 돼. 하지만 마감은 인권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나의 신조야. 그러니 박모작가의 태도에 따라 사흘 동안 잠 안 재우고 닦달하기 스킬 의 봉인이 풀릴 수도 있지.' '......헉쓰쓰!' '아하하! 농담이니 그렇게 정색하지 마. 자, 마시자고!' 재미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 다고, 최모 편집자는 그것을 농 담이라고 햇겠지만 받아들이는 박모 작가의 입장에서는 결코 농담 이 아니었다. 태초에 우주가 생성된 이후 계속 대립해온 작가와 편집자. 이제 는 그 반목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텐데. 으음, 그나저나 내가 왜 이 일에 신경을 쓰는 거지? 내가 작가나 편집자도 아닌데 이 사람들이 뭘 하든 상관없잖아. "......" 잠깐. 생각해보면 상관이 있을지도...... "잠 안 잘 거면 이것 좀 읽어 봐줘, 오빠." 영아는 노트북을 내 앞에 내밀었다. "응? 이게 뭔데?" "내가 밤새서 쓴 소설이야. 어제 지니오빠와 크로니스 오빠를 만난 뒤에 갑자기 스토리가 막 떠오르더라. 참고로 이 소설은 판타 지가 아니야. 생각해보니 내가 꼭 판타지라는 하나의 장르에만 얽 매일 필요가 없겠더라고.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뿐이야. 장 르는 중요치 않아." "그래서 장르가 뭔데?" "으응. 그건 읽어 보면 알아." 어차피 할일도 없었기에 난 한번 읽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제목 : 질투 어째 진부한 티 팍팍 나는 제목이다. 제목만 봤을 뿐인데 읽기 싫 어지는 것은 왜일까? 어쨌든 나는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작가 : 샤프걸 "샤프걸? 샤프심도 아니고 샤프걸? 뭐니, 이건?" "으응. 내 필명이야." "필명?" "원래 유명한 작가들은 필명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거래. 그래서 지은 거야. 내가 좀 샤프하게 생겼잖아." "....웃자고 하는 소리니, 맞고 싶어서 하는 소리니?" "이, 이 정도면 충분히 샤프하잖아!" "샤프 같은 소리 하네. 어디 볼펜 같은 소리도 해보렴. 기왕 하는 김에 연필 같은 소리도 해 봐. 응?" "오빠가 뭐라고 해도 그 필명은 내 외모를 정확히 표현해주고 있 다고 생각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응." "......"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아의 모습에 난 할말을 잃었다. 대 체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란 말인가? "내 생각엔 너의 외모를 정확히 표현할 필명은 따로 있는 것 같아." "뭔데?" "앞짱구걸. 어때? 딱 좋지?" 그 순간 가차 없이 날아오는 주먹. 이번에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 문에 손쉽게 피할 수 있었다. 영아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한번만더 앞짱구라고 하면 오빠가 밤에 몰래 여자 속옷 선전 봤 다고 루시아 언니에게 이른,....." "그만. 스톱. 거기까지. 오케이. 알았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루시아가 그 사실을 알게되면 난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쫓겨나기까진 않더라도 접시가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아~ 경멸어린 루시아의 시선을 생각하니 갑자기 오한이 든다. 난 몸을 부르르 떨며 소설을 계속 읽었다. 한 집에 사는 세 남자. 크로니스, 지니, 히로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크로니스와 금발 머리카락 과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지니는 신이 빗어낸 완벽한 피조물이라 는 찬사가 부족할 만큼 아릅답게 생겼다. 하지만 히로는 신이 대충 빗어낸 그저 그런 피조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그저 그렇게 생겼다. 크로니스와 지니 옆에 서 있는 히로는 언제나 초라해보였다. 모 든 사람들이 그런 히로를 우습게 보았다. 하지만 크로니스는 진심으로 히로를 아껴주었다. 히로는 그런 크로니스의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어느날 집에 돌아오던 크로니스는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 는 히로를 발견했다. "집에 안 들어가고 왜 그러고 있어?" 들려온 크로니스의 목소리에 히로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빨갛게 변한 눈동자와 눈물 자국은 숨길 수가 없었 다. 게다가 히로의 얼굴에는 상처까지 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크로니스가 다그치자 히로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헤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까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계단에서 구른 다고 이런 상처가 나 진 않아." "아, 아니야, 정말이야." "사실대로 말 하지 않으면 나 진짜 화낸다." 크로니스의 어조는 싸늘했다. 히로는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 했다. "사, 사실은 오다가 여자애들을 만났어." "여자애들이라면..... 수아 패거리를 말하는 거야?" 수아 패거리란 크로니스를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는 여자들이었다. "으응." "걔들이 널 때린 거야?" "나 같은 게 네 옆에 붙어있는 게 마음에 안 든대. 그래서.... 흑~" 히로의 눈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크로 니스는 화를 참지 못해 주먹으로 벽을 쳤다. 콰앙! "이 썅년들을 그냥!" "아, 아니야. 걔들은 아무 잘못 없어. 다 내 잘못이야." "시끄러! 널 이렇게 만들어 놓은 년들을 내가 용서할 것 같아? 그 년들 다 죽여 버리겠어." "아,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난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널 이렇게 만든 년들을 그냥 두란 말이야?" 히로는 크로니스를 껴안았다. 그리고 크로니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나 때문에 니가 그럴 필요 없어. 난 니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 로도 행복해." "히로......" 크로니스는 조심스럽게 히로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마치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이 히로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히로는 얼굴 을 새빨갛게 붉히며 재빨리 크로니스의 품을 빠져나왔다. "드, 들어가자. 내가 밥 차려줄게." "어, 그, 그래." 히로가 밥을 차리는 동안 크로니스는 식탁 앞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 말이라도 해서 침묵을 꺠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그 침묵은 지니가 돌아옴으로써 자연스럽게 깨졋다. "맛있는 냄새군요. 아! 분위기가 왜 이렇지요? 혹시 저 없는 사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지니의 말에 크로니스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니가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그러자 지니는 웃음을 지었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과민 반응 하시는 걸 보니 좀 수상하네 요. 혹시 정말로 무슨 일 있었나요?" "닥쳐." 거친 크로니스의 태도에 지니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저녁 식사를 끝마치자 히로는 설거지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 던 크로니스는 히로에게 다가갔다. "내가 할게." "아, 아니야. 괜찮아. 나 혼자 할 수 있어." "됐으니까 이리 줘." 크로니스는 억지로 히로의 손에서 수세미를 배앗았다. 졸지에 하던 일을 빼앗기게 된 히로는 안절부절못했다. "내, 내가 해야 하는데......" "됐으니까 앉아 있어." 히로는 어절 수 없이 의자에 앉았다. 크로니스는 서투른 솜씨로 접시를 닦으며 물었다. "넌 왜 그렇게 집안일에 열심히인 거야? 셋이 같이 사는데 너 혼 자 도맡아서 할 필요는 없잖아." 히로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 그치만 난 잘하는 것도 없고 얼굴도 별로고...... 내가 잘하 는 거라고는 집안일이 전부인 걸. 그리고 너와 지니에게 도움이 되 고 싶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자기비하 하지 마. 보기 흉해." "미, 미안해." "아, 아니......" 크로니스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 물었다. 원래 의도는 그게 아닌 데 자꾸만 말이 거칠게 나갔다. 단지 히로가 좀더 자신감을 가졌으 면 좋겠다는 뜻으로 말한 건데...... 그날 밤. 갑자기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며 천둥 번개가 쳤다. 빗방울 떨어 지는 소리와 천둥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크로니스는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담뱃갑에 손을 뻗었 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 렸다. "누구야?" "나. 나야. 히로." 히로가 이 시간에 어쩐 일로? 크로니스는 입에 문 담배를 다시 내려놓았다. 히로가 담배 냄새 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들어와." 조심스럽게 방문이 열리고 히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파자마 를 입은 히로는 손에 커다란 베개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가, 같이 자도 될까?" "응?" "처, 천둥소리 때문에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아. 그, 그래서..." 때마침 찢어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히로는 귀를 막 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크로니스는 기꺼이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었다. "고, 고마워." 크로니스는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옆 자리에 히로가 누워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 다시 천둥이 치자 히 로는 소리를 지르며 크로니스를 껴안았다. "무, 무서워." "뭘 그렇게 무서워 해?" "미, 미안 해." 히로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크로니스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 다. 하지만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크로니스가 히로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은 것이다. "왜, 왜 이래? 읍!" 히로의 말은 이어지지 못 했다. 크로니스의 입술이 히로의 입술 을 덮었기 때문이다. 크로니스는 능숙한 솜씨로 히로의 입술을 농 락했다. 그 황홀한 느낌에 히로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순 간 지니의 얼굴이 떠울랐다. 히로는 황급히 크로니스를 밀쳤다. "이, 이러지 마!" 히로는 소매로 입술을 닦았다. 크로니스는 히로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싫어?" "아, 아니야. 내가 널 싫어 할 리 없잖아." "그럼 뭐가 문제야?" "나,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좋아하는 사람?" 크로니스는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설마 지니?" 히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니스는 망치로 머 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히로가 지니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니를 바라보는 히로의 눈빛과 표정은 사랑을 하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크로니스는 그 사실을 애써 모른 척했다. 하지만 본인의 입으로 그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용서할 수 없어.' 크로니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 눈빛에 히로는 몸을 떨 었다. "왜, 왜 그래?" 두려움을 느낀 히로는 크로니스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을 쳤지만 완력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크로니스는 반항 하는 히로에게 억지로 입을 맞췃다. "하, 하지마! 제발! 부탁이야!" 히로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만,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 지 않았다. 크로니스는 히로의 잠옷을 찢다시피 벗겨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다 너 때문이야." "흑흑~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제발 이러지 마." "이렇게 된 이상 힘으로라도 널 갖겠어." 크로니스의 손과 입술이 히로의 온몸을 지나쳤다. 히로는 이 상 황을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 속 깊은 곳에서 열락이 피 어오르는 것을 느껴...... "으아악!" "왜그래, 오빠?" "누, 눈이 썩을 것 같아!" 난 두손으로 눈을 가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본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장이 뒤틀리고, 기혈이 들끓고, 피가 역류하려 한다. 허억!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이렇게 강력한 정신 공격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한 줄의 글로도 사람을 죽일수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믿지는 않았다. 펜은 칼보 다 강하다, 라는 속담도 그저 속담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옛말 틀린 것 없다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적토마를 탄 여포가 덤벼도 두렵지 않은 나다. 하지만 영아가 쓴 글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저 글을 끝까지 읽으라고 한다면 차라리 할복(일명 배째)를 하겠다. 허억! 아직 심마(心魔)가 사라지지 않았구나! 이대로라면 주화입마에 걸려 폐인이 되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난 재발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금강부동심법을 외웠다. 그러자 나의 내면 깊은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은 왜 태어 났고 어디로 가는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 모든 것이 한낱 꿈에 불과하거늘 어찌 그리 물질에 집착하는가?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으니,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 비가 장자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가 없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현실의 물질적 존재는 모두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서 불변하고 고유의 존재성이 없으며, 만물의 본성인 공이 연속적인 인연에 의해 다양한 만물로 존재할 뿐이다. 나는 만물의 본성이나 하나의 만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란 존재 는 우주보다도 더 크지만, 원자보다도 더 작다. 그럼 나란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 이제 곧 루시아의 남편이 될몸 이자, 세 아이의 아빠. 한 집안의 가장이자 인형 가게 사장. 그외에 기타 등등. 나는 죄 많은 남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이니. 예수천국 불신지옥(Jeses天國 不信地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 받을 테지만, 불신하는 자는 영원히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고통 받으리. 이제 곧 심판의 때가 도래하리니, 모두가 손을 하늘로 뻗고 휴거를 외치리라! 믿어라! 믿는 자만이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라! 천국의 문은 좁아 돈 많은 자가 들어갈 수 없도다! 심판의 때가 오면 돈이란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 돈을 바쳐라! 돈을 바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천국행 티켓을 선물 받을 것이다! 노래하라! 너희들을 구원할 그분이 오심을 노래하라! 기뻐하라! 어리석은 자들을 심판할 그날이 도래함을 기뻐하라! 돈을 바쳐라! 너희들의 믿음을 돈으로 보여라! 바쳐라! 마구 바쳐라! 계속 바쳐라! 최선을 다해 바쳐라! 죽을 때까지 바쳐라! "......" 잠깐, 이건 사이비 종교 집회에서나 나올 법한 것들이잖아. 왜 갑자기 이런 게 떠오르는 거지? 비록 좀 엇나가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명상을 계속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고, 그 생각들은 서로 결합해 다른 생각을 만들어 냈다. 정보와 정보가 결합해 새로운 정보를 창조하는 세계. 그렇다, 그것은 엄연한 하나의 세계였다. 우주고 곧 나고, 내가 곧 우주니라.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내 머리 위에는 어느새 오색찬란한 다섯 개의 고리가 떠올라 있었다. 오기조원의 경지! 이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바라마지 않던 경지였다. 그 경지에 나 아이언스 히로가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내 다섯 개의 고리는 다시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아까보다 몸이 가볍고 온몸에 기운이 넘쳤다. 그리고 눈에 보이 는 세상이 달라졋다. 아니, 세상이 달라진 게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진 것이다. 나는 나를 가로막고 있던 높은 벽을 뛰어 넘어 새로운 경지로 도 약했다. 지금의 나는 방금 전의 내가 아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셧다. 그리고 기를 움직여 보았다. 기의 흐 름이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마치 아우토반을 달리는 스포츠카 같 았다. 이는 생사현관이 타동 되고, 전신 세맥까지 뚫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난 주먹을 내질러 보았다. 기의 흐름에 막힘이 없으니 몸의 움직 임또한 부드러웠다. 지금 상태라면 드래곤을 상대로 싸워도 밀리 지 않을 것 같다. 으음, 안 그래도 '졸라 짱 세다' 고 평가 받는 내가 더 세지다니. 정말로 내 적수는 드래곤밖에 없단 말인가? "뭐하는 거야, 오빠?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명상을 하질 않나, 다시 일어나 난리를 치질 않나." "아아~ 영아구나." 시계를 보니 내가 명상을 한 지 겨우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은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새로운 경지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영아 덕분이다. 영아의 소설을 보던 중 심마에 빠져들 뻔했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무(無)로 돌아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돌아온 나는 예전보다 훨씬 강해져있었다. 생각해보니 이 세계로 돌아온 뒤 나의 무공은 진보가 없었다. 스 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평온한 일상 속에서 살다보니 타성에 젖 은 것이다. 원래 나 같은 고수에게 육체적 수련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정 경지 이상 오른 고수에게는 육체적 수련보다 정신적 수양이 중요하다. 으음, 결과적으로 보면 잘된 일이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 이다. 난 영아를 보며 말했다. "넌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니?" "왜? 재미 없었어?"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서 내용이 뭐 저래? 게다가 내 실명까지 거론되고.... 아아~ 떠올리니 다시 정신적 충격이...." "지니 오빠와 크로니스 오빠를 보는 순간 '아! 이거다' 하는 생각 이 들더라고. 그래서 야오이를 한번 써본거야." "......" 야오이. 일명 Y물로 불리는 장르. 판타지와 무협이 배경으로 장 르가 갈린다면, 야오이는 등장인물로 인해 장르가 갈린다. 배경이 어디든 간에 남자끼리 그렇고 그런 짓을 하면 그건 야오이로 분류 된다. "계속 봐, 오빠. 여기서부터가 절정이란 말이야. 크로니스가 히 로를 덮치는 장면이 열 페이지에 걸쳐서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 어." "헉쓰쓰! 그만! 더 이상 말하지 마!" 내가 소리 쳤지만, 영아는 상관 없다는 듯 말했다. "크로니스는 히로를 좋아하고, 히로는 지니를 좋아해. 그리고 지 니는 크로니스를 좋아하지. 그래서 서로를 질투하는 거야. 나중에 히로는 소원대로 지니와 잠깐 사귀지만, 지니가 데리고 놀다 버려. 충격을 받은 히로가 자살을 하려는 순간 크로니스가 앞에 나타 나지. 크로니스의 진심을 알게된 히로는 크로니스를 사랑하게 되고 둘은 사귀기 시작해. 그것을 견딜수 없었던 지니는 히로를 죽이려 하지만, 그순간 크로니스가 히로의 앞을 가로막아. 크로니스는 히로를 대신해 지니의 칼을 맞고 죽어.크로니스는 죽어 가면서 지니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해. 히로를 행복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지니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지. 지니가 할 수있는 속죄라고는 크로니스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이었어. 그래서 지니는 히로를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쳐. 어쨌 거나 지니는 살인을 저질렀으니까. 그래서 도착한 곳은 카리브해의 어느 아름다운 섬. 그곳에서 지니와 히로는 크로니스를 추억하며 살아가. 어때? 재밌지? 참고로 뒷부분에는 이보다 더 충격적인 씬 들이 많이 나오니까 기대해도 좋아." "......" 재밌긴 개뿔이. 진부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그런데 뭐? 이 보다 더 충격적인 씬들이 많이 나온다고? 순식간에 내 얼굴은 사색으로 변했다. 이번에는 운좋게 살아남 았지만, 다음번에도 그런 천행이 따라 줄지는 의문이다. "아! 소설 한 편 더 썻는데 이것도 볼래?" "싫어! 절대 싫어! 난 오래 살고 싶어!" "무슨 말이야? 그리고 이건 야오이 아냐." "야오이 아니야?" "응." "설마 그렇게 말해놓고 남자끼리 그렇고 그런 짓 하는 건 아니겠지?" "남자끼리 그렇고 그런 짓은 커녕 손도 안 잡으니까 안심해." "정말?" "응." "진짜?" "응." 그래도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나는 의심 섞인 눈동자로 영아를 보았다. "뭐야, 오빠? 그 불신 가득한 눈동자는? 설마 사촌여동생의 말을 못 믿는 거야?" "응." "빨리 읽기나 해." 영아의 강압에 난 어절수 없이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아아~ 이 자리에 앉으니 아까의 악몽이 되살아나려고 한다. 난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의 일을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리라! 제목 : 영아가 바라는 영원 "으음, 제목은 괜찮은 것 같군," "그치?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잘 지었다고 생각해. 마땅한 제목이 없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런 좋은 제목이 떠올라서 정말 다행이야. 사실 제목이라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굉 장히 중요한 거야. 제목은 그 소설 전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거든. 그리고......" 한번 입을 열었다 하면 끝도 없이 말이 쏟아져 나온다. 난 신경 끄기 위해 노력하며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작가는 여전히 샤프걸. "......" 얘 정말로 자기가 샤프하다고 착각하는 거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사촌 오빠로서 동생을 위하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충고를 해주는 수밖에 없다. 영아야. 넌 결코 샤프하지 않아. 앞짱구해. 너무 직설적인가? 어쨌든 중요한 것은 작가 이름이 아니라 소설의 내용이다. 고등학교 3학년인 지니와 크로니스. 둘은 둘도 없는 단짝 친구 사이였다. 그리고 크로니스에게는 어 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인 영아가 있었다. 우연히 영아를 만나게 된 지니는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들었다. 크로니스는 그런 친구를 위해 둘이 잘 되도록 도와주었다. 지니는 영아에게 고백을 했고, 지니의 진심을 알게 된 영아는 사 귀기로 결심했다. 둘은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지니가 교통 사고를 당한 것이다. 영아를 기다리던 중 차에 치인 지니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영아 는 매일같이 지니를 간호하며 지니가 눈을 뜨기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영아는 점점 폐인이 되어 갔다. 그런 영아를 옆에서 지켜준 사람이 크로니스였다. 지니 때문에 망가져 가는 영아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지 니의 누나 일루니아는 영아에게 앞으로 병원에 오지 말 것을 부탁 했다. 집에 돌아온 영아는 정신 나간 사람 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그 모 습을 본 크로니스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나 사실은 전부터 널 사랑하고 있었어. 하지만 널 바라봐야만 했어. 넌 지니의 애인이니까. 친구를 배신할 수 없었으니까." "크, 크로니스,....." 크로니스는 영아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지친 몸을 보듬어 주었다. 그날 밤 이후. 영아는 지니를 잊고 크로니스와 사귀기로 결심했다. 폐인 생활 에서 벗어나 직장도 찾고, 일도 열심히 했다. 둘은 서로를 사랑했고, 그런 둘의 사랑은 변치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지니가 깨어난 것이다. 영아는 깨어난 지니를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3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는 지니는 그런 영아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충격 때문인지 지니는 자신이 3년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사 실을 모르고 있었다 .일루니아는 지니의 쾌유를 위해, 지니가 어느 정도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지니를 만나줄 것을 영아에게 부탁했다. 영아는 그 부탁으 거절할 수 없었다. 영아가 매일같이 지니를 만나러 다니는 사이 크로니스와의 관계 는 점점 소원해졌다. 방황하는 크로니스. 그리고 둘 사이에서 갈등 하는 영아. 사랑이란 이토록 잔인한 것이었으니...... 얘기는 여기까지였다. "이거 나중에 어떻게 되니? 당연 크로니스를 선택하겠지? 지니는 어디까지나 옛날의 연인이었으니까 말이야." "아니." 영아는 고개를 저었다. 난 다시 물었다. "그럼 지니를 택하는 거야?" "아니?" "그럼?" "결국 나중에 영아가 둘 다 데리고 살아." "뭐?" "사실 그렇잖아. 사랑이 꼭 1 대 1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어. 일부 일처제같은 것은 이 사회가 정해놓은 법칙에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만 해도 과거에는 일부다처제였고, 여자가 희귀한 지역에서는 일처다부제를 시행했어. 아랍권 국가들 같은 경우에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았지. 이렇듯 사랑의 방식은 여러 가지야. 그걸 꼭 이 사회가 정해놓은 잣대에 맞추려는 것은 옳지 않아." "그래서 니가 둘 다 데리고 살겠다고?" "응. 크로니스 오빠가 첫번째, 지니 오빠가 두번째 남편이야." "......" 기가 막힌다. 둘 중 하나를 택하기 보다 둘다 데리고 살겠다니. 내 사촌동생이지만 너무......너무......똑똑하다. 어쩜 이렇게 똑똑할 수가! 일반적으로 사람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떤 것을 택해야 할 지 고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선택지가 두 개라고 해서 꼭 둘 중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다. 찾아보면 제 3의 길이라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그 예로 '라이가 좋아, 루시아가 좋아?'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난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대신 술 마시고 죽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앞짱구인 영아가 초절정 미청년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데리고 산다는 게 말이 되나? "......" 으음, 뭐 그건 쓰는 사람 마음이겠지. "그런데 이거 제목을 고쳐야 하는 거 아니야?" "응? 왜? 아까는 제목 좋다고 했잖아." "영아가 바라는 영원 보다는 영아가 바라는 하렘 이 좀더 어울리지 않을까?" "에엑! 그게 뭐야?" "뭐긴 뭐야? 이거 완전 하렘물이구만." "겨우 두명이잖아." "한명만 넘어가도 하렘물이야. 그 두명이 지니와 크로니스라면 더더욱 그렇지." "난 둘중 누구도 택할 수 없으니까. 그런의미에서 오빠가 소개시켜주면 안돼?" "응? 누구를" "누구긴 누구야. 둘 다지." "......" 만약 이 말이 지니 팬클럽이나 크로니스 팬클럽에 흘러 들어간다면 영아는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살해 당할 것이다. 말하는 것은 개인 자유라지만, 말하기 전에 자신의 이마를 한번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짱구 주제에 하나도 아닌 둘이나 노리다니! "소개팅은 몇 시야?" "난 시켜주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뭐? 어떻게 오빠로서 그럴수 있어? 사촌여동생의 연애 사업에 도움 을 줘야 할 거 아냐?" "조크하냐? 안 됐지만, 둘 중 한명도 소개시켜 줄 수 없어. 일단 지니는 요즘 교제하는 여성들이 너무 많고, 크로니스는 여자 사귈 생각이 없어." "뭐? 크로니스 오빠가?" "......" 그런데 지니랑 크로니스가 언제부터 니 오빠였니? "어째서? 왜? 진짜야? 정말 여자사귈 생각이 없대?" "이제까지 크로니스가 사랑한 사람은 딱 한 명이야. 하지만 그 사람은 죽었어. 죽은지 오래됐다면 오래됐는데, 크로니스는 아직 그 사람을 못 잊고 있는 것 같아." 크로니스는 이그리드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그리드는 죽은 연인 인 루미아드를 잊지 못해 크로니스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둘은 친구로 남았다. 하지만 지금 이그리드는 죽고 크로니스 혼자 남았다. 크로니스 는 이그리드가 남겨준 추억을 떠올리며 영원에 가까운 세워을 살 아갈 것이다. 요즘도 가끔 크로니스는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본 다. 말은 안 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때마다 이그리드를 떠올리 고 있다는 것을. 그 모습을 볼 때면 난 가슴이 아프다. 크로니스에게 힘이 되어주 고 싶지만,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니스는 웃으며 말해 주었다. 곁에 있어주 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난 그 말에 감동받아 울 뻔했다. 아무튼 크로니스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크로니 스 외에 다른 드래곤들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소심 드래곤 인디부터 시작해서 레즈 드래곤 카르, 깡패 드래곤 제갈량, 백수 드래곤 박카스(에스카네스)까지. 어떻게 정상인 드래곤이 없을 수 있는 거지? "알았어. 내가 양보할게" "뭘 양보해?" "한 명으로 양보할게. 그러니까 빨리 소개팅 시켜줘. 내가 선택할 수는 없으니, 둘 중 나와 더 잘 어울리는 쪽으로 오빠가 골라줘." "......" 영아를 보니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자의식 과잉. 대체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 건가? 그 근거없는 자신감의 정체가 궁금하다. "영아야. 오빠로서 한마디 충고를 해주자면, 무슨 말을 하기에 앞서서 너의 앞짱구를 생각하렴." "그게 무슨 말이야?" 영아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내가 나이트 한번 떳다 하면....헙!" "잠깐. 방금 나이트라는 단어가 나온 것 같은데?" 내가 묻자 영아는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방금 분명 나이트라는 말을 들었는데, 나이트는 나이트클럽의 준말이겠지?" "아, 아니야, 오빠. 오빠가 잘 못 들은거겠지." "그래? 그나저나 전주 나이트는 물 좋니?" "아니야. 별로 안 좋아... 헙!" "......" 단순 엘프로 이름 높은 라이나 걸릴 법한 수법에 넘어가다니. 영 아의 IQ가 심히 궁금하다. 어떻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는지도 수상해지는군. 얘도 수능 비리에 연류되어 있는 거 아니야? "아직 정식 대학생도 아닌 것이 나이트나 놀러 다니다니. 널 보 니 '안 될 성싶은 나무는 싹수부터 노랗다' 라는 말이 떠오르는 구나." "나, 나만 간 거 아니야. 고등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출입하는데." "그 말은 고등학교 때부터 갔다는 거군." "그, 그걸 어떻게.....헙!" "......" 잘하는 짓이다. "나, 나이트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거기서 춤추며 스트 레스도 풀고 친구들끼리 우정도 다지고 부킹도 하고.,....헙!" "......" 계속 삽질 하는 영아. 이 삽질했으면 들어가 누워도 되겠군. "고등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부킹하러 나이트에나 놀러 다니고. 큰 어머니꼐서 아시면 참 좋아하시겠군. 니가 서울에 있는 대학 간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러고 보면 나이트에 은근히 고등학생들이 많다. 전에 내가 갔 을 때만 해도 은영이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 장면이 루시아한테 들키는 바람에 차일 뻔했었지. 으음, 화를 풀어주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아마 라이가 가출하지 않았으면 정말로 루시아랑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럼 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길 한복판에 쓰러지겠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 루시아는 눈물을 흘릴지도 몰라. 아아~ 한 송이 백합보다도 아름다운 그녀가 나 같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니! 죽어서도 루시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마땅해! 뭐, 이런 스토리로 전개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그나저나 은영이는 뭐하나 몰라? 잘 지내고 있겠지? 내가 나이트 클럽에 간것은 딱 두 번. 한 번은 부킹하러 갔었고, 또 한번은 루시아와 함께 놀러 갔었다. 어느쪽이든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그래도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전주 쪽 나이트 물 좋니?" 내가 묻자 영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로 안 좋아."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물이 안좋은게 아니라, 니가 갔기 때문에 물이 안좋아진게 아니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천을 흐린다는 속담 알지?" "응." "그 미꾸라지가 너일 거란 생각은 안 해봤니?" "......" 잠시 생각하는 영아. 이내 의미를 알았는지 화를 내가 시작했다. "내가 나이트 물을 흐리든 말든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그러는 오빠는 어떤데? 오빠는 뭐 잘생긴 줄 알아?" "나야 당연 잘생겼지. 나 정도면 초절정 미남이야!" "흥! 지니 오빠나 크로니스 오빠에 비하면 숭어 앞에 망둥이면서." "뭐라? 그러는 너야 말로 루시아에 비하면 발톱의 때야. 알기나 알아? 특히 너의 그 앞짱구! 앞머리카락으로 가린다고 튀어나온 이 마가 사라지니? 넌 태어났을 때부터 앞짱구였고, 무덤에 묻힐 때도 앞짱구 일 꺼야. 그야말로 한번 앞짱구는 영원한 앞짱구라는 거지. 앞짱구면 앞짱구 답게 나이트 가서 짱구의 엉덩이춤이나 출 것이지 어디서 감히 오빠한테 대들어!" 화가 났는지 영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억울해서일 까, 분노해서일까?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그 말 당장 취소해!" 사실 여자가 이 정도로 화가 났으면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영아의 독기 품은 눈이 일루니아 여사님의 '찢어죽일 것 같은 눈빛'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그 눈빛에 당해온 나날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물러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루시아가 아닌 다른 여자들에게 고개 숙이지 않으리! 내가 고개 숙일 여자는 루시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싫어, 취소 안 해." "그럼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 "훗~ 니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쓸 거야." "응?" "히로가 지니와 크로니스에게 번갈아가며 덮쳐지는 내용으로 소 설을 쓸 거야. 그래서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 보여줄 거야." ".....뭐?" 영아는 몸을 획 돌리더니 방 안으로 향했다. 영아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헉! 어떻게 그런 엄한 내용을! 게다가 그걸 이 집에 살고있는 사람 들에게 돌리겠다니! 만약 그런 내용을 루시아나 일루니아 여사님이 보면 날 뭐라고 생각 하겠는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루시아와 나를 놀려대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 잠깐만, 영아야. 니가지금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우리 좀 진정하고......" "됐어. 나 글 쓸 거야." "알았어. 취소할게. 취소하면 되잖아. 이 오빠가 전부 잘못했단다. 그러니 제발 선처해주렴." "흥!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동생한테 까지 굴복해야 하는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하다. 아아~ 하지만 펜은 칼보다 강하니 힘없는 내가 어쩌겠는가? "나 피곤해서 이만 잘래." "그래, 잘 자렴." 영아가 방으로 들어가자 나도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꼇다. 짧은 수면시간은 피부 미용의 적. 깨끗하고 맑고 자신있는 피부를 위해서라도 다시 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아까 본 소설의 내용이 영상으로 떠올랐다. 크로니스가 날 덮치는 장면이..... "으아악! 왜 이런게 떠오르는 거냐?" 잊어야 한다.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아까의 일을 기억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하지만 기억이라는게 지우고 싶다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내가 이 고생을 할 리 없지. 결구 난 악몽으로 잠을 설쳐야 했다. * * * * 잠에서 깨어나 보니 바닥이었다.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건가? 옆자리에 루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12시. 점심 먹을 시간이로군. 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거실로 나갔다. 단정한 모습의 루시아는 날 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으응. 어제 자다 깨서 다시 자는 바람에. 영아는 일어났어?" "아니. 아직도 자고 있어." "깨우지 마. 어제 밤새도록 글 써서 많이 피곤할 거야." "응." 난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어린 엘프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어린 엘프들은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헉! 어째서 침을 질질 흘리는 거지? 설마 이것들이 야한 것을 보는 건 아니겠지? 난 재빨리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야한 것을 보고 있으면 같이 볼......생각이 아니라 혼내줄 생각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시간에 야한 게 할 리 없고, 야한 게 한다고 해도 루시아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볼 수 있을 리 없다. 어린 엘프들이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육포 선전이었다. -여기 좀 보세요. 육포가 이렇게 많아요. 소고기 육포 45봉에 추가 구성 5봉입니다. 여기에 방송 중에 주문하시는 고객 분께는 돼지고기 육포 5봉을 추가로 드립니다. 합쳐서 55봉 구성. 가격은 59900원. 지금 상담 전화가 너무나 많습니다. ARS 이용하시면 1000원 할인해 드립니다. 한 봉에 1070원 꼴입니다. 시중 육포 가격과 비교해 보세요. -예, 맞습니다. 시중 가격의 반값이라고 보시면 적당할 거예요. 우리 아버지 술안주나 우리 아이들 공부할 때 주면 정말 좋아합니다. -여기 이 육질 좀 보세요. 씹으면 씹을수록 쫀득쫀득하고 맛있습니다. 제가 이 방송하기 전에 잠깐 맛을 보려고 먹어봤는데, 두 봉이나 먹었어요. 잠깐 먹는다는 게 저도 모르게 계속 먹게 되더라구요. 그만큼 맛있습니다. 오늘 주문하시면 내일보레까지 배송 갑니다. 서울 경기 지역에 사시는 분들은 내일까지도 배송 가능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방송 중에 주문하시면 돼지고기 육포 5봉 추가로 드립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툭. 누군가의 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으음, 애들 턱받이가 필요하겠군. 난 휴지를 뽑아 아이들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하지만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침은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었다. "맛있겠다." "응. 맛있어 보여." "먹고 싶다." "응. 먹고 싶어." "육질이 쫀득쫀득 하대." "응응. 들었어." "방송 중에 주문하면 5봉 추가 구성이래." "응응. 게다가 ARS 이용하면 1000원 할인해 준대." "한 봉에 1070원 꼴이래."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 "......" 쇼핑호스트의 사소한 말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 어린 엘프들. 그렇게 육포가 먹고 싶나? 결국 보다 못한 루시아가 말했다. "알았어. 언니가 사주면 되잖아." "와아! 정말료?" "헤헤~ 사랑해요, 언니." "누나가 최고에요!" 애들에게 주가 상승 중인 루시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급상승한 주가는 순식간에 폭락한다는 것을. 쟤들은 평균 기억력 3초를 자랑하는 단순 엘프들이 아니던가? 루시아는 ARS로 육포를 주문했다. 어린 엘프들은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내일이면 육포가 도착하겠지?" "응응. 분명 내일 도착할 거야." "내일까지 안 도착하면 우리가 직접 받으러 가자." 육포를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오른 어린 엘프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든다. 애들 어렸을 때 굶고 자랐나? 원래 어렸을 때 못 먹고 자란 애들일 수록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이 크다. 그런데 애들을 보면 며칠 굶은 엘프처럼 행동하니 참 이상할 따름이다. "점심 먹자, 얘들아." "네에~!" 아이들은 우르르 식탁으로 뛰어갔다. 나도 배고 고팠기에 식탁으로 갔다. 앞치마를 두른 인디가 밥을 푸고 있었다. "아! 히로님." "배고프니까 빨리 밥이나 줘." "네." 난 밥그릇을 받고 앉을 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앉을 자리가 없었다. 어린 엘프들과 루시아가 앉고 나니 의자가 남지 않는 것이다. 루시아는 날 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바닥에 앉아서 먹어." "응?" "애들보고 일어나라고 할 수는 없잖아. 니가 이해 좀 해줘." "으응." 그래서 난 혼자 부엌 바닥에 앉아서 먹어야 했다. 인디는 날 위해 반찬 몇 가지를 그릇에 덜어 바닥에 내려놔 주었다. 식탁에서 어린 엘프들과 루시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하지만 그 분위기에서 나는 소외되어 있었다. 훌쩍~. 내가 이 집 가장인데......누가 보면 왕따 당하는 줄 알겠다. 아아~ 비참해라. 그렇지만 배가 고팠기에 밥은 열심히 먹었다. 으음, 역시 가정부 드래곤이라 할 수 있는 인디가 만들어서 그런지 참 맛있군. "오늘은 밥이 아주 잘 되었구나. 가족의 건강을 위해 잡곡까지 넣었으니 네 정성을 알만 하도다." 음식을 칭찬하는 나의 말에 인디는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감사합니다, 히로님." "하지만 아직 식신(食神)의 경지에 이르기는 멀었다. 그러니 너는 자만하지 말고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니라." "예. 새겨들을게요." 그나저나 혼자서 밥 먹으려니 좀 그렇구나. 난 루시아와 함께 마주보며 밥을 먹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라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빠 여기 앉으세요." "헉! 라, 라이야......" 난 그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거기 앉으면 우리 라이는 어떡하니? 그냥 라이가 앉으렴. 오빠는 이 바닥에 앉는 걸로 충분하단다." "라이는 오빠 무릎 위에 앉으면 돼요. 그러니까 어서 오빠가 앉 으세요." "헉! 그런 방법이!" 아무튼 나는 라이의 행동에 상당히 감동했다. 오빠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다니. 이건 아무 엘프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예로 저 빨간머리 엘프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들 같으니! 난 의자에 앉고 라이를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수저로 밥을 떠서 나 한 입 먹고, 라이 한 입 먹여주었다. "맛있니?" "예. 오빠가 먹여주니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이 오빠도 라이를 먹여주며 먹으니 더 맛있는 것 같아." "헤헤~ 아! 라이는 이 반찬이 좋아요." "그래? 알았어." "아! 김에 싸주세요." "응응." 난 밥 위에 장조림을 올려 김에 싸서 라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라이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오물오물 씹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밥을 잘 먹고 있던 루비가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루시아는 깜짝 놀라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루비 왜 우는 거야?" "으앙~ 으앙~ 루비도 오빠 무릎 위에 앉아서 먹고 싶어요." "......" 헉! 그럼 부러워서 우는 거란 말인가? 루시아는 계속 루비를 달래주었지만, 루비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으아아앙~ 부러워요오." "그럼 언니 무릎 위에 앉아. 언니가 먹여줄게." "으앙~ 싫어요오. 루비는 오빠 무릎이 더 좋단 말이에요오. 오빠 무릎 위에 앉고 싶어요오." 루비의 말에 루시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다. "언니 무릎은 싫어?" "훌쩍~ 오빠 무릎 위가 더 편해요. 그래서 루비도 막막 앉고 싶어요." "......" 헉! 루시아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겨우 이런 것 가지고 루시아가 삐지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루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분노로 점철된 루시아의 눈동자는 나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왜, 왜 그래, 루시아? 내가 뭘 또 잘못하기라도 했어?" 난 몸을 떨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어떤 식으로 애들을 꼬셨기에 애들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 "응? 꼬시다니? 그게 무슨 말......?" "됐어. 더 이상 너랑 얘기하기 싫어." 탁! 루시아는 식탁이 흔들릴 정도로 세게 수저를 내려놓은 다음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아의 밥공기에는 밥이 아직 반 이상 남아 있었다. 먹다 말고 일어나 나갈 정도라면, 삐져도 단단히 삐졌다고 보는 게 맞겠지? 루시아가 사라지고 난 식탁에는 싸늘한 바람만이 맴돌았다. 휘이이잉~. 솔직히 나는 억울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조금이라도 잘못한 게 있으면 이 정도로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애들한테 인기 많은 게 내 탓이야? 나에게 잘못이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너무 잘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잘난 걸 어쩌란 말인가? 태어날 때부터 잘난 걸 어떡하라고? 으음, 그나저나 루시아가 이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날 질투할 줄이야...... 어쨌든 내가 루시아보다 인기가 많다는 사실이 참 기분 좋다. 후후~ 귀여운 것들. 난 울고 있는 루비를 위해 무릎 위에 앉히려 했다. 내 무릎 위에 앉고 싶어서 울었던 것이니, 소원대로 해주면 울음도 그치겠지. 하지만 현재 무릎을 차지하고 있는 라이는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라이야, 루비를 위해 양보하렴." "싫어요. 라이도 오빠 무릎 위에 앉아있는 게 좋단 말이에요." "그래도 루비가 저렇게 울잖니?" "오빠는 루비가 더 좋을 거예요? 이제 라이가 싫어진 거예요? 흑흑~."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우에에엥~!" "으아아앙~!" "......" 나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라이와 루비. 인기가 많은 것은 좋지만 이런 식의 관심은 부담스럽다. 아아~ 어떻게 된 게 이놈의 인기는 사그라들 줄 몰라. 그나저나 얘들은 어떻게 달래고, 루시아 삐진 건 어떻게 풀어준다냐? 그렇게 복잡한 점심 식사를 끝마치고 나서 나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어머니였다. 전화 내용이야 뭐 영아가 잘 지내는지 어쩌는지 에 대한 얘기다. [네가 오빠니까 영아 좀 잘 보살펴 줘라.] "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필리핀은 어때요? 형은 잘 지내요?" [네 형 잘 지내고 있다.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고.] "다행이네요." [네 아버지는 스킨스쿠버에 재미 들려서 하루 종일 물 속에서 살고 계신다.] "간만에 여행 가신 거니까 재밌게 놀다 오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아무튼 영아 좀 잘 부탁한다.] "저만 믿으세요." 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면 언제 어머니께 며느리 소개 한번 시켜드려야 할 텐데. 물론 그 전에 루시아의 허락을 맡아야겠지? 딩동! "누구세요?" 벨소리에 난 현관문을 열었다. "GJ택배에서 나왔습니다. GJ홈쇼핑에서 육포 구매하셨죠?" "예. 맞습니다." 난 상자를 받았다. 뜯어보니 정말로 55봉의 육포가 들어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엘프들은 재빨리 육포 봉지를 뜯어 입에 물었다. 오물오물. 열심히 씹어 먹는 어린 엘프들. 그 모습이 정말 귀엽다. 뭐, 애들 귀여운 것이 하루 이틀 일이겠냐만은 언제 봐도 색다른 귀여움이 느껴진다. "하암~." 하품을 하며 방 안에서 기어 나오는 영아. 꼴이 아주 가관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부스스한 얼굴. 루시아는 자고 일어난 모습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는데, 얘는 왜 이럴까? 역시 그건 예쁜 여자만의 특권? "아! 오빠,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은 개뿔이......지금 몇 신줄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거니?" "원래 작가는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는 거야." "그런 일종의 편견 아닌가? 그리고 작가가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는 것과 니가 지금 일어난 것과 무슨 상관이니? 설마 스스로를 작가라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난 스스로를 작가라고 주장하지 않아. 인기 작가라고 주장하지." "......" 저 자신감의 원천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궁금하다. 영아는 눈을 비벼 눈곱을 떼며 말했다. "내가 아주 재밌는 꿈을 꿨거든." "무슨 꿈인데?" "으응.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왜냐면 내가 지금 그걸 소설로 쓸 생각이거든." "......" 또 쓴단 말인가? 웬만하면 하나 완결 짓고 새로운 작품에 도전할 것이지. 이것저것 문어발처럼 손을 뻗치다니. "기대하고 있어, 오빠. 쓰는 대로 보여줄 테니까." "......" 어째 내가 실험용 마루타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빠르게 밥을 먹은 영아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 솜씨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의지 하나는 정말 대단하다. 저런 의지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 가는 것도 꿈은 아니었을텐데 말이야. 뭐, 인생에 대학이 전부는 아니지. 나만 해도 대학 안 가고도 잘 살고 있으니까. 모두가 대학에서 공부할 필요는 없다. 사람마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이 있지 않겠는가? 자신의 특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지, 무조건 아무 대학에나 쑤셔 들어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대학 안 나온 사람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아~ 제발 이놈의 학벌주의 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놈의 학벌주의 때문에 별 일이 다 일어난다. 교사가 학생 답안지를 대신 작성해주질 않나, 핸드폰을 이용해 단체로 수능 부정을 저지르질 않나, 사교육비 때문에 부모 허리는 휘고, 시험을 망친 학생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나도 한때는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독서실도 끊어 열심히 다녔다. 뭐, 지금 기억나는 건 친구랑 쪼그려 앉아 담배 핀 것밖엔 없지만. "그래도 대학에 얽매이지 않고 벌써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아 하는 걸 보면 대견하긴 하군." 오물오물. 아직도 육포를 씹고 있는 아이들. 어느새 각자 한 봉지를 다 먹어 치웠다. 아이들이 다시 한 봉지씩 집으려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상자를 치웠다. "아앗! 무슨 짓이에요, 오빠?" "루비 간식을 뺏어 가지 마세요!" "이건 누나가 우리한테 사준 거란 말이에요." 거세게 항의하는 아이들. 난 아이들을 보며 소리쳤다. "시끄러! 하나 먹었으면 좀 참았다가 나중에 먹어야할 거 아냐? 한 번에 다 먹을 생각이야?" "원래 한 번에 다 먹은 거 아니었어요?" "루비도 그런 줄 알았는데." "양이 얼마나 된다고 여러 번 나눠서 먹어요?" "......" 잠시나마 아이들의 식성을 과소평가 했던 것이 미안해진다. 난 아이들의 뭐라고 하건 간에 상자를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어린 엘프들은 어떻게든 육포를 먹고 싶었는지 깡충깡충 뛰며 손을 뻗어보았지만, 짧은 다리와 짧은 팔, 그리고 빈약한 점프력의 압박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만 먹고 오빠랑 같이 놀자." 내가 말하자 어린 엘프들은 내 앞으로 쪼르르 몰려들었다. 스머프 만한 것들이 단체로 몰려다니니 정말로 스머프 같다. 그럼 난 가가멜인가? "재밌는 얘기 해주세요!" "오빠가 해주는 얘기 듣고 싶어요!" "저도요!" "으음, 재밌는 얘기라......" 난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의 무림 정벌기'를 얘기해주려다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는 무림에 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갈 예정이 없기 때문이다. 설마 허무대사 같은 사람이 또 나타나지는 않을 테니. 그나저나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 대신 무림에 간 전유준이란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난 그 남자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특전대 하사로 군 복무를 끝마친 전유준은 군대에서 제대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 그는 집이 서울이었기에 KTX를 타고 서울로 왔지. 서울역에 도착한 그가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한 남자가 나타나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온다며 책 한 권을 맡겼어. 전유준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에 거절하려 했지만, 그 남자가 하도 부탁을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책을 맡아 두기로 했지. 그 책은 굉장히 얇은 데다가 여기저기 헤져있는 아주 낡은 책이었어. 게다가 표지에 한문이 써진 것을 보니 굉장히 오래된 고서인 것 같았지. 아무튼 전유준은 남자가 화장실에서 나오길 기다렸어.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갑자기 주위가 새하얗게 변하는 거야. 그 새하얀 빛 속에서 전유준은 정신을 잃었지. 깨어나 보니 동굴 안이었어. 그때까지도 전유준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 이 일로 인해 국악선생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는 것도. 아무튼 전유준은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난 전유준이 무림에서 겪게 되는 일들을 스펙터클한 스토리로 만들어 말해주었다. 그곳에서 사파 우두머리와 몸이 바뀌고, 아름다운 네 자매와 겪게 되는 일 등등. 어린 엘프들은 나의 얘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게 워낙 대작 스토리인지라 하루 안에 끝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자,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 초롱초롱하던 아이들의 눈동자는 어느새 풀려 있었다. 낮잠 잘 시간이 된 것이다. 애들은 잘 먹고 잘 자야 한다지만, 우리 집 애들은 너무 잘 먹고 잘 자는 것 같다.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 방으로 들어갔고, 루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루시아가 거실로 나왔다. 난 루시아에게 물었다. "애들은 잘 자?" 루시아는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획 돌렸다. "......" 아직도 삐져있군. 아아~ 발렌타인 데이에 먹은 초콜릿의 향긋함이 아직 입 안에 남아있거늘, 루시아는 어찌 나를 외면한단 말인가? 내가 애들에게 인기 많은 것이 그리도 큰 잘못이란 말인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야? 이젠 나도 할말은 하고 살 테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벌떡 일어나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루시아." "왜?" "아,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꼭 용무가 있다기보다 는......" "할말 없으면 저리 가줄래?" "......" 루시아 앞에만 서면 한 없이 작아지는 나. 깡패 드래곤 제갈량 앞에서도 당당하던 내가 루시아 앞에서는 왜 이렇게 약해지는 거냐? 이대로라면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결국 언제나 바라 마지않던 관계 진전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없던 용기가 끓어올랐다. 난 루시아의 손을 잡고 소파로 데려가 번쩍 들어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졸지에 내 무릎 위에 앉게 된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애들이 왜 내 무릎 위에 앉는 걸 좋아하는지 직접 느껴보라고. 사실 나도 애들이 왜 내 무릎 위에 앉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거든." 다행히 루시아는 화를 내며 일어나지 않았나. 난 조심스럽게 루시아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지금은 루시아의 엉덩이가 내 무릎에 닿아있는 상황. 그렇게 생각하니 금방 혈압이 상승한다. 그에 따라 얼굴이 빨강헤 달아오르고, 심장 박동수가 빨라진다. 지금 상황에서 이상한 생각을 하면 안 돼! 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난 오기조원이 경지까지 이룩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기조원의 경지가 아니라 검신합일의 경지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 두근거림은 진정되지 않을 것 같다. "어때? 편해?" "이제 됐어." 루시아는 내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난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루시아가 좀더 있어주었으면 했는데...... "네 다리가 워낙 가늘고 예쁘다보니 애들이 내 다리를 좀더 편하게 느끼는 것뿐이야. 남자 무릎이 여자 무릎보다는 넓잖아. 그러니 그런 거 가지고 화 내지 마." "누, 누가 화를 냈다 그래?" 루시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난 그 모습이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따. 그래소 손으로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뭐 하는 거야?" "아! 미안." 하도 애들한테 많이 하다보니 버릇이 됐군. 루시아는 날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푸훗~." "응? 왜 그래, 루시아?" "니 행동이 너무 웃겨서. 방금 내 볼 꼬집은 거 니가 애들한테 자주 하는 행동이잖아." "......" 들켰군. "우리 애들이 워낙 귀엽잖아." "응. 우리 애들만큼 귀여운 애들은 세상에 또 없을 거야." "너도 귀여워." "뭐?" "라이와 루비와 루도 귀엽지만, 너도 귀여워. 가끔은 라이보다 더 귀여운 것 같기도 해." "뭐라고?" 루시아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강 도가 좀 세다. 아까는 그냥 볼만 빨개진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얼굴 전체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진심을 말한 것뿐이야. 너 이렇게 토라진 모습을 보면 정말 귀여워.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더더욱 빨개지는 루시아의 얼굴.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 난 속으로 '아싸!'를 외쳤다. 루시아가 아이들에게 너무 신경을 쓰느라 엄마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20대 초반의 여자다. 예쁘고 귀엽다는 말을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 니 표정이 어떤지 알아?" "어, 어떤데?" "예쁘고 사랑스러워." 빨강머리 앤 국내판 오프닝 중에 '예쁘지만 않지만 사랑스러워 ~♬'라는 가사가 있다. 하지만 루시아는 예쁘고 사랑스럽다.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페이지 때우실 거예요? 이래서 완결 때까지 라이 동생이 등장하긴 하나요? 솔직히 가끔은 그냥 덮쳐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히로 하는 짓이 너무 답답해요'라는 과천에 사는 배모 독자분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 독자들도 원하고 있잖아. 그냥 덮쳐버리는 거야! 난 루시아에게 얼굴을 가까지 가져갔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루시아의 어깨를 살짝 밀어서 넘어트렸다. "왜, 왜 이래?" 소파에 쓰러진 루시아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눌러 그녀가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루시아는 깜짝 놀란 듯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니가 너무 귀여워서 잠깐 놀아주려고." "비켜." "싫어."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가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까지 약하게 나가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나중에 뺨을 얻어맞는 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본능에 충실하리! 난 루시아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작고 아름다운 얼굴,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 백금을 실로 뽑아낸 듯한 플래티나 블론드, 오뚝한 코와 장밋빛을 머금고 있는 입술, 초승달 같은 눈썹과 커다 랗고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까지...... 그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루시아의 향이가 내 코를 간질였 고, 루시아의 숨결이 내 뺨을 간질였다. 난 이 순간 내 어휘의 한계를 느꼈다.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는 그녀의 아름다움 일부조차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와 애인 사이인데도, 동거까지 하는데도 바 라만 봐야 했던 나의 심정을 독자들은 아는가? "내 심장 뛰는 소리 들리지? 너와 같이 있으면 언제나 이래. 네 앞에선 나도 모르게 바보가 되는 것 같아. 너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난 너에게 완전히 빠져버렸어. 헤어 나오려고 해도 이젠 너무 늦었어. 널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 니가 행복 해지는 일이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너는 내게 있어서 전부니까. 그러니 너무 애들만 보지 말고, 가끔은 나를 바라봐 줘. 사랑해, 루시아." 난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남자의 진심은 무쇠 같은 여자의 마음도 녹일 수 있는 법이다. "뭐, 뭐야? 이상한 말이나 하고......" 루시아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는데 서툰 루시아. 그렇기 때문에 내가 더욱 강하게 나가야 한다. 일단 이쯤에서 진한 키스신이 한번 나와 주는 게 좋겠지? 나는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루시아와의 입술의 거리는 이제 20센티. 거실 소파에 누워있는 루시아와 그 위를 덮치듯이 점령한 나. 자세 좋고, 분위기도 좋다. 그래. 이대로 끝까지 가는 거야! 부스럭! 옷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동시에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렸다. "아, 저, 저기......" 긴 치마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정체는 일루니아 여사님 의 남편 인디. 인디는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두, 두 분이 여기서 이런 짓을 하는 줄 몰랐어요. 죄, 죄송해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두 분 하던 거 계속하세요." 난 인디의 말대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루시아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뭐하고 있어? 빨리 안 비켜?" "아, 아니, 하던 거 계속하라는데......" 루시아는 온 힘을 다해 나를 밀쳤다. 파악! 나는 소파에서 나가 떨어졌다. 거의 다 성공했었는데...... 루시아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형부. 그냥 장난치다가 소파에 쓰러진 거예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두 손을 내저으며 극구 부인하는 루시아. 그 모습에 난 슬퍼졌다. 연인끼리 키스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큰 죄라고......인디&일루니아 여사님 커플은 우리 보는 앞에서도 잘만 키스하는데...... "너 솔직히 말해. 어디서부터 봤어?" 내가 묻자 인디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히로님이 루시아님을 쓰러트릴 때부터요." "......" 많이도 봤군. 루시아한테 너무 집중 하다보니 절대감각이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으음, 절대감각도 은근히 문제가 많군. 상대가 여자면 위력이 떨어 지는데다가, 여자한테 집중하고 있을 때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니. 개선해야할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처음부터 라이브로 시청했다는 인디의 말에 루시아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아, 아니에요, 형부. 우리는 형부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 에요." "잠깐만, 루시아.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란 밀이야?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가......" 난 충격을 너무 심하게 받은 나머지 쓰러질 뻔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중요하지 않다니......우리 사이가 중요하지 않다니......너만 바라보며 살아온 난 어쩌라고......흑흑......우에에엥~!" "앗! 울지 마세요, 히로님." "난 몰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루시아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인디는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달래주었다. 난 인디 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으니...... 이 장면을 누가 보게 된다면 야오이의 한 장면으로 보이지 않을까? 특히나 영아가 본다면 나와 인디를 주인공으로 해서 야오이를 쓰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난 재빨리 인디를 밀치고 벌떡 일어났다. 천금보다도 귀한 나의 눈물을 남자 품에서 흘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울음을 그치고 나자 분노라는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자식만 아니었어도 루시아와 진하게 키스를 하고 있을 텐데. 여기에 조금만 일이 잘 풀렸다면 끝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런 짓을 하는 거니? 아주 부부가 세트로 나를 엿 먹이지 못해서 안달이구만. 헉! 설마 일루니아 여사 님의 사주를 받아서 이런 짓을......?" "아, 아니네요, 히로님. 정말 우연이었어요. 저와 일루니아님은 결백하답니다." "시끌버다! 죄인은 어디서 감히 입을 함부러 놀리느냐? 여봐라! 당장 이놈을 하옥하여라!" ......라고 해봐야 우리 집엔 감옥이 없다. "죄, 죄송해요, 히로님. 정말 죄송해요." "시끄러, 임마! 일루니아 여사님이 니 옷을 벗기는데 내까 짠~ 하고 나타나 초 치면 넌 기분 좋겠어?" "아, 아니요." "아닌 걸 아는 놈이 초를 쳐? 이걸 어떻게 보상할 거야? 설마 몇 마디 말로 대충 넘어갈 생각은 아니었겠지? 정신적 피해 보상에 따른 위자료를 지급해주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원래대로라면 위자료로 4천만 원......" "헉!" "......을 내야 하겠지만, 니가 내 팬클럽에 가입한다면 내가 특별히 위자료는 안 받기로 하지." "저, 저기 그건......" "왜? 내 팬클럽에 가입하기만 해도 4천만 원을 탕감해 준다니까. 싫어?" "이, 일루니아 여사님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 히로님 팬클럽에 가입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 이 아줌마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오긴가? 인디에게 팬클럽 회원 가입 요구가 들어올 것을 알고 전방위 차단을 하다니. 과연 일루니아 여사님. 어쨌든 루시아와의 키스신이 무산되니 굉장이 우울하다. 게다가 팬클럽 회원 유치에도 실패했고. 난 이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창문을 살짝 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베란다 한쪽에서는 라이코스가 열심히 제비집을 만들고 있었다. 다리에는 튼튼한 줄까지 매어져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카르가 묶어 놓은 것이다. '언니의 비상식량이 도망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라는 것이 카르의 주장이었다. 사실 라이코스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굉장히 불분명하다. 처음에 내가 데리고 다녔지만, 라이를 만난 후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라이코스는 버들랜드 출신. 그러니 버들랜드의 지배자인 레즈 드래곤 카르의 지배하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라이코스의 소유권 문제는 나와 라이, 카르......이렇게 세 명이 치열한 법정 다툼을 벌여도 해결이 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또 하나 있으니 라이코스를 애완동물로 볼 것이냐, 하나의 인격체로 볼 것이냐다. 라이코스가 애완동물에 속한다면 당연 우리 셋 중 누군가에게 귀속되어야겠지만, 인격체로 본다면 라이코스의 주인은 라이코스 자신이다. 노예제와 신분제는 모두 폐지되지 않았던가? "흑~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라이코스는 울면서 말했다. 그 모습에 난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아~ 그러게 조용히 집에 있을 것이지 왜 이곳까지 왔니? 인간과 엘프, 하프엘프, 드래곤들의 이기주의에 철저히 짓밞힌 라이코스의 인권(조권?). 몸에 좋다면 무엇이든 먹으려 하는 이 나라의 몸보신 문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몸에 좋다면 천연기념물이든 멸종 위기 동물 이든 가리지 않고 포획해서 먹는다. 심지어는 나무껍질을 몽땅 벗겨가기도 하고, 산 곳곳에 덫이나 올무를 놓기도 한다. 이런 잘못된 보양 문화는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언제나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 나. 가끔은 스스로가 너무 대견 하다. 참고로 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남자. 난 노예 해방을 선포하는 링컨의 마음으로 라이코스의 다리에 묶인 줄을 풀어주었다. "이제 넌 자유야. 너는 노예 신분을 벗어나 정당한 노동자의 신분을 획득했어. 이제부터 하루 8시간 근무에 주 5일제를 적용해 줄게." "흑흑~." 감동해서 눈물만 흘리는 라이코스. 난 라이코스의 깃털을 쓰다 듬어 주었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에 라이코스와 함께 판타지 세계를 주유하던 것이 떠오른다. 그때 참 재밌었느데 말이야. 담배를 한 개비 피운 나는 라이코스를 데리고 거실로 돌아왔다. 그때 방 안에서 나오던 영아랑 마주쳤다. 라이코스가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이네. 얜 누구야?" "앗! 새가 말을 한다!" 영아는 깜짝 놀라 외쳤고, 난 재빨리 라이코스의 부리를 다물렸다. "그 새 뭐야, 오빠?" "그냥 매야." "에엑! 매가 왜 이렇게 작아? 그리고 색깔은 왜 이래? 부리랑 다 리까지 다 흰색이잖아?" "으응. 얘가 체르노빌에 살던 매였거든. 그런데 1986년에 있었던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에서 다량의 방사능을 쬐는 바람에 이렇게 됐어. 일종의 피폭 피해자라고나 할까?" "그런데 방금 말도 했잖아. 매가 어떻게 말을 해?" "으응. 방사능을 너무 많이 쫴서 정신이 이상해졌나 봐." "정신이 이상한 것와 말하는 게 무슨 상관인데?" "자기를 앵무새로 착각하고 있는 거니. 정신이 이상해져서."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다행히 영아는 납득했다. "아아~ 그렇구나." "응. 그런 거란다." 나는 영아가 다른 의문을 품으띾 두려워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라이코스를 던져 버렸다. "놀다 들어오렴." 그리고 창문을 잠그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내가 새로운 소설을 썼으니까 한번 봐봐, 오빠." "또?" "빨리이. 이번 건 되게 재밌단 말이야." "......" 그나저나 얜 무슨 소설을 이렇게 순식간에 써낸다냐? 아주 하루에 한 권씩 뽑아내시는구만. 편집자한테 사랑받겠어. 제목 : 교주님이 보고 계셔 "뭐, 뭐냐, 이 제목은?" "오래 생각해서 지은 제목이야. 어때? 멋지지?" "......" 뭔가 심하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작가는 당연하게도 샤프걸. 내용은...... "평안하십니까?" "평안하십니까?" 교주님의 정원에 모인 소녀들은 오늘도 천사 같은 웃음을 지으며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새하얀 블라우스와 새하얀 치마. 모두가 순백의 천사들 같은 모습이었다. 사립 영원불멸 여자 고등학교. 노대통령 집권 2년(1990년)에 건립된 이 학교는 사이비 종교인 영원불멸교의 교주가 신도들에게 긁어모은 돈으로 세웠다는 전통 있고 명망 있는 사립학교다. 시대가 변하고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뀐 오늘날에도 영원불멸교 신도들을 배출해 내는 아주 귀중한 학교인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이리스 루시아도 그런 평범한 신도들 중 한 명이었다. 월요일. 루시아는 등교를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마침 교주님상 앞이어서 루시아는 순간 교주님께서 날 부르셨나, 하고 생각했다. 루시아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인사를 하려 하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현재 2학년 영생반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님. 참고로 출석번호 는 17번. 통칭 홍장미 이짱. 참고로 영원불멸 여고에는 일진회가 있었다. 일진회의 일짱은 세 명. 홍장미, 황장미, 백장미 이렇게 셋이다. 현재 3학년인 이 일짱들은 밑에 2학년 동생을 두고 있으며, 그들은 이짱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짱들 역시 1학년 동생을 두고 있고, 그들은 삼짱이라 불린다. 이렇게 아홉 명으로 이루어진 일진회는 학생회까지 장악하여 학교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일진회의 권위에 도전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어김없는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싶으면 일진회 언니들의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이짱인 일루니아는 아직 여동생이 없었다. 그리고 백장미의 이짱은 1학년이엏끼에, 현재 일진회는 일곱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옷매무새가 엉망이군." 일루니아는 루시아의 옷깃을 바로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루시아 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앞으로 조심해라." 루시아는 일루니아가 걸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방금 전의 일이 생각났다. '나 이짱 언니한테 찍힌 건가?'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일진회 이짱한테 찍혔다는 것은 보통 큰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벗어날 방법은 자퇴나 전학을 가는 것뿐. 일진회 회원들의 특징은 다들 집안이 잘 산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학교 측에서 '장미 소굴'이라는 아지트까지 내주었겠는가? 그녀 들은 학생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그녀들의 부모님은 학교 재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 학교에서 절대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교주님은 심술쟁이. 원망 섞인 눈으로 올려다본 교주님의 동상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온화한 웃음을 지은 채 서 계실 뿐이었다. "뭐, 뭐냐, 이 내용은? 본격 여학원 조폭물이냐?" "아니야. 그런 내용이 아니니까 계속 읽어봐." 난 계속 읽었다. 일진회의 이짱인 일루니아는 루시아를 여동생으로 삼는다. 순식 간에 삼짱이 된 루시아는 모든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영아의 말대로 글의 내용은 여학교 일진 간의 패싸움이 중심이 아니라, 주인공 루시아와 언니인 일루니아 간의 미묘한 감정 흐름이 중심이었다. 여자들 간의 미묘한 감정 줄다리기. 영아는 그것을 잘 표현해 냈다. 가끔은 져가끼리의 키스신이라 거나 안겨서 우는 장면이라던가 하는 것이 나오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은 일짱들이 졸업하는 것이었다. 학교를 떠나는 일짱들, 그리고 새롭게 일짱이 된 이짱들, 그리고 삼짱에서 이짱이 된 루시아. "거기까지가 1부 끝이야." "2부도 있니?" "응. 당연하지. 그런데 어때? 재밌지?" "그런데 왜 여자들만 나오는 거니?" "으응. 이건 백합물이거든." "백합물?" "백합물이란 여자끼리 나와서 미묘한 감정 줄다리기를 하는 장르를 말하는 거야." "그럼 레즈?" "아니. 레즈물과는 달라. 참고로 남자끼리 나오는 것은 장미물 이라고 하는데, 이는 장미가 게이를 뜻하는 속어이기 때문이지." "으음, 복잡하군." "원래 이쪽이 좀 복잡해." "그나저나 왜 여기는 베드씬이 없니? 아직 안 나온 거니?" 난 혹시 못 보고 지나쳤나 싶어 원고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러자 영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없지! 이건 백합물이라니까." "저번 건 나왔었잖아." "야오이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덮치는 씬이 나오지만, 백합물은 절대 베드씬이 안 나와." "뭐? 그럼 일루니아가 루시아를 덮치는 장면이 없단 말이야?" "당연히 없지." "완결될 때까지도?" "없다니까!" "어, 어떻게 그럴 수가......" 난 좌절했다. 내심 일루니아가 루시아를 덮치는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거늘. 그걸 보면 저번에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 중화될 것 같은데. 이건 불공평해! 어째서 백합물은 베드씬이 없는 거야? 이건 남녀차별이야! 난 인정할 수 없어! "이 오빠 생각에는 일루니아가 루시아를 한번 덮쳐야할 것 같아. 그럼 얘기가 좀더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안 돼!" "너무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하지 말고......아! 오빠가 1만원 줄게." "작가는 돈 몇 푼에 자존심을 팔지 않아!" "그럼 10만원......" "어떻게 넣어줄까? 이쯤에 넣으면 스토리 진행상 별로 문제가 안 될 것 같은데. 그치?" "......" 어이, 돈 몇 푼에 자존심을 팔지 않는다며? 그나저나 어째서 소설들이 전부 실명인 거지? 난 그 점이 궁금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영아가 말하길...... "그냥. 재밌잖아. 걱정하지 마. 나중에 출판하게 되면 다른 이름으로 고칠 거니까." "......" 아직도 출판이 되길 바라니? * * * * 영아가 우리 집에 온 지도 어느새 사흘이 지났다. 개강까지 해서 영아는 정식으로 서명대학교 국거국문학과 1학년이 되었다. 학교 다니랴, 글 쓰랴 바쁜 영아. 그런데 기숙사 배정은 언제 받는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랴." "그 조금만이 대체 며칠이라는 거야?" "오빠는 내가 여기에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응." "......" 미안하지만, 우리 집은 너무 좁단다. 방이 없는 걸 어쩌겠니?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라이레얼과 카르도 돌아올 텐데. "자꾸 그러지 마. 누군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응. 있고 싶어서 있는 것 같은데." 초절정 미청년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있다. 게다가 귀엽고 깜찍한 어린 엘프들까지 있으니 그 어떤 여자가 있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아, 아무튼 나한테 너무 그러지 마, 오빠. 자꾸 그러면 작은 어머니께 이를 거야." "여기서 우리 어머니가 왜 나오니? 그리고 어째서 소설을 쓰면 왜 자꾸 나 보고 읽으라고 하는 거야?" "그, 그야 오빠 밖에 평가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데 오빠 말투가 왜 그래? 내 소설을 읽는 걸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왜 기뻐해?" "나의 글을 첫번째로 읽을 수 있는 영광을 누렸으니까. 나중에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되서 자서전을 쓸 때 '영웅 오빠는 언제나 나의 첫번째 독자였다'라고 써줄 수도 있어." "......사양하마." 노벨문학상을 동네 마라톤 참가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영아. 머리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한번 뜯어보고 싶다. 혹시 얘 뇌에 주름이 없는 거 아냐? "자꾸 나 무시하지 마. 조만간 진짜 작가가 될지도 모르니까." "응? 진짜 작가가 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조만간 출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지금 출판사에 투고를 해 놨거든." "......" 투고한다고 해서 출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예로 저번 투고도 실패하지 않았던가? "마껌 퇴짜 맞은 거 기억 안 나니?" "그건 그 출판사가 실수한 거야. 리무진으로 모셔간다고 해도 그 출판사엔 안 갈 거야. 이 박영아님을 찬 것을 후회하게 해줄 테야!"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영아.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좋은데,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냐? 그 일이 있고난 며칠 후. 나는 아이들과 부루마블을 하는 중이었다. 부루마블은 다들 알다시피 주사위 두 개를 굴려 땅 사고 건물 짓고 하는 보드 게임이다. 어렸을 때 많이 했던 이 게임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난 감동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큰 맘 먹고 '부루마블 디럭스 골드'를 구매했다. 참고로 일반판과 디럭스판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일반 밑판부터가 크고 두껍고 튼튼하다. 그리고 돈이나 증서 등도 크고 재질이 좋아. 여기에 결정적으로 건물이 종이가 아니라 플라스틱이다. 자신의 땅에 우뚝 솟은 빌딩과 호텔을 보고 있으면 감동이 밀려온다. 이 부루마블이 주사위 운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보드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다. 물론 주사위 운도 중요하지만 고도의 전략과 전술 역시 동반되어야 한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전략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도록 하겠다. 첫 번째 전략: 카네기 작전.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세계 제1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여러가지 사업 중에서도 철강업이 크게 각광을 받을 것을 예측하고 철강업에 집중투자 하여 노력한 결과 크게 성공하여 세계 제1의 철강왕이 되었다. 카네기 작전은 전반전을 거치는 동안 여러 사람이 자주 통행하는 곳이 어느 곳인가를 알아 두었다가 후반전에 그 지역에 빌딩이나 호텔을 집중적으로 짓는 것이다. ......라고 부루마블 설명서에 나와 있는데 사실 별로 쓸데없는 작전이다. 통행하는 곳이야 그때그때 주사위 운에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런 것에 작전이란 명칭까지 붙인 저의가 궁금할 뿐이다. 두 번째 전략: 포오드 작전 -미국의 자동차업계를 주름잡는 포오드는 낡은 자동차 모양이 인기를 얻어 판매 액수가 떨어지자 재빨리 멋진 최신형 자동차를 만들어 팔 았다. 그 결과 자동차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포드 작전은 상대방의 말이 자기의 증서에 가까이 오면 재빨리 다른 곳의 건물을 팔아 그 앞쪽에 호텔을 지어 놓는 것이다. ......라고 역시 설명서에 나와 있다. 뭐, 이 작전은 약간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만, 설마 이 정도도 스스로 생각해 내지 못하는 사람은 없겠지? 세 번째 전략: 링컨 작전 -정직하고 근면했던 링컨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노예해방을 호소했 으나 남부 사람들이 반대하여 남북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여러 지역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남부군대를 많은 군인 과 대포를 모아 강하게 만든 북부의 군대를 동원하여 한 군데씩 점령하여 결국은 산만하게 흩어졌던 남군을 격파하고 미국을 평정 헀다. 가지고 있는 증서 중에서 유력한 곳만 골라 집중적으로 빌딩이나 호텔을 지은 후 기다린다. 세계 곳곳에 별장 한 채씩 짓는 방법 보다 몇 지역에 뭉쳐 짓는 것이 효과적이다. ......라고 역시 설명서에 나와 있다. 이건 좀 많이 도움이 된다. 자신의 땅이 띄엄띄엄 있으면 그만큼 상대가 피해갈 확률도 올라 간다. 하지만 한 줄 전체를 전부 사서 호텔을 짓는다면 걸릴 확 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낟. 하지만 문제는 그만큼 지을 수 있는 돈이 있느냐는 거다. 결국 중요한 건 예산이다. 네 번째 전략: 36계 작전 -전반전에는 땅 사고 건물 짓느라 바빴지만, 후반전에는 돌아다 니다 상대 편 땅에 걸려서 임대료 지불하는 것만 남았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것이 이득이다. 우주여행에 도착하게 되면 무인도로 들어가자. 3회 동안 더블이 나오지 않으면 상대방이 주는 통행요금만 받아먹으려 편히 쉴 수 있다. 후반전에 자주 쓰이는 작전 중 하나지만, 무인도 앞의 땅들이 남의 땅일 경우 상당한 피해를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36계'는 '36계 줄행랑'을 뜻한다. 참고로 줄행랑 은 36계 중에서도 상책으로 친다. 다섯 번째 전략: 노르망디 작전 -황금열쇠 안에 있는 우대권을 가졌을 경우 아무 곳에나 사용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적절히 사용하는 것을 뜻 한다. 황금 열쇠의 우대권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무인도 탈출권' 이고 다른 하나는 '임대료 면제권'이다. 전자는 전반전에, 후자는 후반전에 많이 필요로 한다. ......라는 것이 작전의 요점인데 우대권 막 쓰는 사람도 있나? 뭐, 결국 전략이라는 게 당연한 얘기를 당연하게 풀어 놓은 것 뿐이다. 하지만 기본에 충실한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 겠는가? 난 그 기본에 충실하게 게임에 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본에 충실하다 어쩐다 해도 주사위 운은 어찌할 수가 없는 법이다. "제발 3만 나오지 마라. 제발!" 주사위를 두개 둘렸을 때 3이 나올 확률은 상당히 작다. 2와 1, 또는 1과 2 이렇게 두 가지 경우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사위 두 개를 굴렸을 때 조합은 서른여섯 가지. 결국 3이 나올 확률을 겨 우 18분의 1. 다시 말해 5% 정도다. 하지만 5% 확률이라 해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나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주사위는 2와 1이 나왔다. "와아! 오빠 서울에 걸렸다. 200만원 내세요." 라이는 좋아하며 말했다. 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루마블의 깡패라 불릴 만큼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서울. 건물 하나도 없는 주제에 걸렸다 하면 200만원이다. 나에게 그만한 현금이 있을 리 없었다. 난 어쩔 수 없이 뉴욕에 건설된 호텔을 매각했다. 흑~ 어떻게 지은 호텔인데. 이제 슬슬 세가 갈리기 시작했다. 루비는 조만간 파산할 것 같고, 그 뒤를 이어 나도 파산할 것 같다. 예상대로 루비와 나는 파산했다. 아아~ 최선을 다했지만 주사위의 운이 나를 따르지 않는구나. 하지만 패배를 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진정한 도박사의 자세가 아니다. 패배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해 앞으로 있을 승부에 대비를 해야 한다. 난 무릎 위에 루비를 앉혀 놓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남은 승부 를 지켜보았다. 라이와 루의 치열한 접전. 우리가 파산하면서 은행에 넘긴 증서들 을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가 승부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가 상황이 점점 라이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아갔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금열쇠의 반액대매출(가진 증서 중 가장 값이 비싼 것을 반값에 은행에 매각하는 것. 이때 그 증서에 건물이 지어져 있으면 그것 역시 반액에 매각해야 한다)이 나오면서 상황이 뒤집어졌다. 라이는 눈물을 머금고 서울을 팔았고, 그것을 다시 루가 사들였는데, 라이가 그곳에 걸린 것이다. 가지고 있을 때는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한 아군이었지만, 적의 손에 넘어간 순간부터 그것은 날카로운 흉기로 변했다. 부루마블의 깡패 서울의 위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서울을 가진 자가 부루마블을 재패하리! 결국 라이는 파산했고, 루가 이겼다. "헤헤~ 내가 이겼다." "우엥~ 라이가 졌어." 난 재빨리 라이를 안아 주었다. "우리 라이 잘했어. 어때? 재밌지?" "예. 부루마블 막막 재밌어요. 라이 또 하고 싶어요." "또 하고 싶어?" 루비도 또 하고 싶어요." "저도요." "한판 더 해요오~!" 애들이 이렇게 원하니 한판 더 해줘야겠지? 이번에는 기필코 승리를 거머쥐리! 나의 부루마블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주겠어! 한 게임 더 하기 위해 판을 정리하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며 영아가 들어왔다. "오빠!" "무슨 일인데, 그렇게 난리야?" 영아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숨까지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것 좀 봐, 오빠." 영아는 들고 온 노트북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뭔데?" 난 영아가 내민 노트북을 보았다. "으음, 노트북 참 좋군. 나도 이런 노트북 하나 있으면 행복할 것 같은데." "누가 노트북을 보랬어?" "응? 아니었니?" "화면을 보란 말이야!" 난 영아가 시킨 대로 LCD화면을 보았다. 거기에는 메일이 한 통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영아님. 책상자 출판사입니다. 투고하신 소설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아직 신인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밌고 훌륭한 글이었습니다. 아직 타 출판사와 계약을 하지 않으셨다면, 저희 출판사에 기회를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해 좋은 책을 만들겠습니다. 이메일 주소나, 아래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주세요. 그럼 빠른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헉! 이 메일은 설마......" "응. 맞아, 오빠." "아니, 아무리 출판을 하고 싶어도 그렇지......어떻게 이런 자작 극을......" "뭔 소리야? 이거 진짜란 말이야! 진짜로 책상자에서 보내온 거야!" "진짜?" "그래. 진짜. 진짜로 책상자에서 내 글을 출판하겠대! 아아~ 이게 설마 꿈은 아니겠지? 나 볼 한번 꼬집어줘 봐, 오빠." "......" 작가라는 애가 이렇게 진부한 방식으로 꿈인지 생시인지를 가늠 하려 하다니. 어쨌든 내가 또 볼 꼬집는 데는 스페셜리스트 아니겠나? 난 아이들에게 해주던 방식으로 영아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헤헤~ 진짠가 보네."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영아. 난 다시 한번 메일을 읽어 보았다. 다시 보니 가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정말로 영아가 출판을 하는 건가? "그런데 무슨 글을 투고한 거야?" "'질투'와 '교주님이 보고 계셔'" "헉! 야오이와 백합물을 투고했단 말이야?" "응." "......"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투고하다니. "설마 이름은 고치고 투고했겠지?" "......" 놀라는 영아. 그 모습에 나는 더 놀랐다. "뭐야, 그 표정은? 마치 '아! 깜빡했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인 데, 설마 진짜로 그러지는 않았겠지?" "미안해, 오빠. 깜빡했어." "헉쓰! 이런 빌어먹을!" "걱정하지 마. 출판할 때는 바꿔서 내줄 테니까." "......"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남자들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소설을 다른 사람이 봤다니.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주화입마에 걸릴 것 같다. "헤헤~ 빨리 전화해 봐야겠다." 영아는 메일 주소에 적힌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얘기를 하던 영아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장 만나재, 오빠." "응?" "1시간 후에 서울역 '도너츠 도너츠'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래? 그럼 어서 가보렴." 난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영아를 빨리 내보내고 아이들과 부루마블 한 게임을 더 즐겨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 보드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부루마블.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런데 영아가 내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같이 가, 오빠." "응? 내가 왜 같이 가?" "나 계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야. 그리고 모르는 사람 만나는 건데 혼자 가기 좀 무서워." "계약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도장만 찍으면......안 되는군." 계약서에 도장 찍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쉽게 생각하고 도장을 찍었다간 삼대가 후회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계약이란 일정한 법률 효과의 발생을 목적으로 두 사람이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계약서란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작성하는 서류다. 이러한 계약은 그 내용이 법률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강압에 의해 계약을 한 것이 아니라면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신체포기 각서, 협박으로 인한 패무 계약 등은 법적 효력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몇 가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적 효력이 있으므로 계약을 할 때는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계약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기세에 눌리면 안 된다 는 거다. 계약이란 채권자든 채무자든 간에 동등한 관계에서 성 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꿀릴 게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어떠한 상황이든 계약서를 꼼꼼히 읽고 독소조항 이 있는지 없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도장을 찍은 뒤에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것이니. 참고로 나는 이제까지 많은 계약을 했다. 상가 임대차 계약부터 시작해서 건물 매매 계약, 담보 대출 계약 등등. 물론 그 많은 계약들은 지니가 알아서 처리했지만, 도장을 찍은 것은 나다. 아무튼 별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사촌여동생인 영아가 계약을 잘못해 위기에 빠지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 "네가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내 친히 가주도록 하마." 난 주사위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 오빠 없어도 잘 놀고 있어야 돼. 오빠 잠깐 나갔다 올 테니 부루마블 재밌게 하고 있으렴." "네에~!" 난 나가기 전에 멋지게 한마디 남겼다. "서울을 차지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리라!" 어느새 도착한 서울역. 영아는 초조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영아는 지금 일생일대의 기로에 서 있는 셈이었다. 출판 계약이라니! 으음, 드디어 영아가 작가가 되는 건가? "나 어때, 오빠? 머리 모양 삐뚤어지지 않았지? 이 옷은 괜찮아? 좀더 예쁜 옷 입고 올 거 그랬나?" "......선보러 왔냐?" 내가 진정시켜주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아의 흥분은 그 정도를 더해갔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오빠. 내가 작가가 된다니. 마치 꿈만 같아." "그나저나 그 책상자 출판사는 뭐하는 곳이니? 야오이 출판사도 있었어?" "판타지, 무협지, SF, 로맨스, 야오이, 백합물 등등 손 안 대는 분야가 없는 유명한 출판사야." "영광 출판사도 유명하다며?" "흥! 그런 출판사는 출판사 축에도 못 껴. 책상자가 최고야!" "......" 이런 식으로 퇴짜 놓은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다니. "그런데 저쪽에선 누가 나오는 거야? 출판사 사장이라도 나 오나?" "윤승이 팀장이라고 동인계 쪽에서 유명한 사람이야. 이 사람의 눈에 뜨인 작품들은 이제까지 전부 히트했어. 업게에선 통칭 야오랑이라 불리지. 이쪽 업계에서 야오랑 모르면 간첩이야. 야오이계의 대부라 할 수 있지." "......대부? 대모 아니야?" "아니. 대부 맞아." "대부라면 남자라는 건데......" "남자 맞아." "뭐라? 남자가 야오이를 본단 말이야?" "이거 왜 이래? 물론 이쪽 사람들이 대부분 여자이긴 하지만, 남자도 꽤 있어. 남자라고 야오이를 안 본다는 편견을 버려!" "......" 남자도 야오이를 본단 말인가? 신선한 충격이로군. 그렇게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책상자에 투고하신 분 맞으시죠?" "예, 예." 난 얼떨결에 대답했다. 나타난 남자는 키가 크고 몸이 마른 남자였다. 나이는 대략 30대 중반. 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보였다. 다정다감해 보이는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호감 이 갔다. "반갑습니다. 전 책상자 편집팀장으로 있는 윤승이라고 합니다. 보내주신 글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제가 편집자 생활 10년 하면서 그렇게 재밌고 잘 쓴 글은 처음이네요. 진흙 속에서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었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만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윤승이 팀장은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붙었다. "샤프걸님 아니신가요?" "저기......샤프걸은 제가 아니고 이쪽인데요?" "아! 그렇군요. 동인남처럼 생기셔서 착각을 했네요." "......" 잠깐. 뭐라? 내가 동인남처럼 생겨?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나는 레즈물은 용서해도 야오이는 옹서 못하는 정상적인 남자다 (레즈물 좋아하는 게 정상적인지는 의문이지만). "아, 안녕하세요. 제가 샤프걸이에요." 드디어 앞짱구걸 등장. 영아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아~ 이쪽이 샤프걸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 어가시죠." 우리는 도너츠 도너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커피와 도너 츠를 시켰다. 윤승이 팀장은 영아의 글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사실 출판사 일이 바쁘다보니 투고한 글을 일일이 읽고 평가 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가끔 정말 좋은 작품을 못 보고 지나쳐 나중에 후회하기도 하지요. 영아님 작품도 그럴 뻔 했어요. 일단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뽑고 나면, 다른 글을은 다시 안 읽어 보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남 아 거절 답장을 보낼 작품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는데 그때 영 아님 작품이 딱 눈에 띄는 거예요. 사실 그때 중요한 약속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글이 너무 재밌어서 도저치 일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자 상대방한테서 전화가 오더라구요. 지금 이 몇 신데 아직도 오지 않는 거냐고.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지금 난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냈다. 미안한 얘기지만, 지 금 나에게 이 글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그리고 끊 었어요." 영아는 얼굴까지 붉히며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저, 정말이에요?" 당연히 뻥이지. 만우절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으음, 만우절 예행연습이 라도 하는 건가? "특히나 크로니스가 히로를 덮치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 어요." "커헉!" 마침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실수로 커 피를 입에 들이 붓고 말았다. 방금 나온 커피인지라 온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헉쓰! 목구멍까지 데인 것 같아! "베드씬을 쉽게 생각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야오이는 그 장면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사실 베드씬이 열 페이지면 좀 길긴 해요. 하지만 세세한 묘사와 짧고 간결하고 격렬한 문장 덕분에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가 않더라구요. 베드씬을 잘 쓰는 것은 프로 작가들도 어려워하는 일인데, 아직 신인인 영아님이 그렇게 해냈다는 게 정말 놀라워요." "헤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썼을 뿐이에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런 감각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 그런데 크로니스가 히로를 강제로 능욕한 다음에 어떻게 되나요?" "커헉!" 방금 먹은 도너츠가 올라오려고 한다. 강제 능욕이라니! 이 런 건 귀축물에나 쓰일 법한 말이 아니던가? "그 다음에는 지니가 히로를 가지고 노는데......" 둘의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나는 아무 것도 듣지 않기 위 해 노력했다. 괜히 따라와서 이게 무슨 고생이냐? "조금만 더 다듬으면 정말 훌륭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질 투 얘기는 이쯤하고 '교주님이 보고 계셔'도 몇 번이나 읽 어봤거든요. 이 글도 아주 괜찮더라구요. 요즘 대세는 백합 이니 때를 잘 맞춰 출간하면 반응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완결은 몇 권 정도를 생각하시나요?" "질투는 단권이에요. 그리고 교주님이 보고 계셔는...... 으음, 아마도 10권 넘어갈 것 같아요." "그럼 먼저 질투를 출간해서 띄워 샤프걸이란 필명을 널리 알리고, 그 다음에 교주님이 보고 계셔를 출간하는 게 좋 을 것 같네요. 참고로 저희 출판사는 작가를 하나의 브랜드 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독자들이 출판사 보고 책을 보는 게 아니라, 작가를 보고 책을 보는 거거든요." "예." "아! 그리고 판타지와 무협도 손을 대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써놓으신 작품 있으신가요?" "예." "그러면 그것도 나중에 보여주세요. 저희가 출간 여부를 검 토해 볼게요." "아, 예." "그럼 여기에 사인하세요." 윤승이 팀장은 자연스럽게 계약서를 내밀었고, 영아는 자연 스럽게 사인을 하려 했다. 그 일련의 행위들은 의식하지 못 한 상태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헉! 이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계약하나? "잠깐만요! 일단 계약서를 읽어보죠." 난 사인하려는 영아를 말리고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희 출판사만큼 조건 좋고 확실한 출판사가 없습니다. 인세를 제때 넣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작가 대우도 아주 좋습니다." 윤승이 팀장의 말대로 계약서에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계약서가 왜 세 개나 돼요?" "하나는 질투, 하나는 교주님이 보고 계셔, 마지막 하나는 그 다음 작품에 대한 겁니다." "......" 무슨 계약서 3종 세트도 아니고...... 어쨌든 조건은 좋았다. 특히나 영아가 신인임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저희 출판사는 작가를 소모품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출판사들은 작가를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으로 생각해서 독소조항을 집어넣거나, 인세를 제때 안 넣어주거나 하는데 그건 작가에게나 출판사에게나 치명적이지요. 저희는 당장의 이익보다는 작가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 길게 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편이 작가와 출판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 거든요. 아시겠지만, 지금 영아님한테 제시한 조건은 신인한 테는 파격적인 조건입니다. 그리고 한 번에 계약을 세 개나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영아님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아니, 영아님의 가능성을 발견한 제 눈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조건에 계약서 세 장 을 제시한 것이구요." 윤승이 팀장 얘기를 듣다보니 영아가 정말로 대단한 작가처럼 느껴진다. 이런 대단한 작가가 우리 박씨 가문에서 나오다니! "파하하! 팀장님께서 사람 보시는 눈이 있으시군요. 사실 저 는 영아의 재능을 오래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아가 좌절하거나, 힘들어할 때 계속해서 작가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많은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않았지요." 그러자 영아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오빠가 언제 그랬어? 만날 빈정거리기만 했으면서." 난 다정한 눈으로 영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오빠가 너한테 그렇게 심하게 대한 것은 니가 자만할까봐 그런 거였단다. 우리 영아 오빠 맘 모르니?" "응, 몰라." "......" 맞장구 좀 쳐주면 어디 덧나냐? 아무튼 영아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원래 계약서라는 게 양측이 한 부씩 나눠 가져야 하는 것인 만큼 세 개의 계약을 하기 위해선 여섯 개의 계약서에 전부 사인을 해야 했다. "그럼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개강하셔서 바쁘시겠지만 그때까지 열심히 써주세요. 계약금은 내일쯤 들어갈 겁니다." "예. 안녕히 가세요." 윤승이 팀장과는 그렇게 헤어졌다. 참고로 계약금은 선인세 방식으로 지급된다. 계약 하나당 200만원씩, 세 개 했으니 600만원. 땡전 한 푼 없던 영아가 순식간에 600만원을 번 것이다. 600만원이라니! 누구 집 애 이름......이 맞구나. 갑자기 육백만불의 사나이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으음, 그럼 영아는 육백만원의 소녀인가? 아무튼 지금 이 순간 영아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귀여운 것. 재주도 많지. 어쩜 이렇게 돈을 잘 벌어...... 아니, 글을 잘 쓸까? "갑자기 왜 친한 척하고 그래, 오빠?" "으응. 그게 무슨 말이니? 우리만큼 친한 사촌 남매가 또 어디 있다고? 우리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몰라서 그러니? 우리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는 형제 사이야. 그리고 우리는 같은 할아버지를 두고 있어. 이보다 더 가까운 사이는 드물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응.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육백만원의 소녀가 왜 이럴까? "뭐야? 돈 벌었다고 지금 오빠 무시하는 거야? 너 지금 이 오빠가 우습게 보여? 서울 한복판......은 아니지만, 아무튼 서울에 빌딩까지 가지고 있는 오빠가 우습게 보인단 말이야?" "흥! 조만간 나도 빌딩 세울 날 멀지 않았어. 책 써서 대박만 터트리면 돼!" "......" 출판이 무슨 로또인 줄 아나? 다음 날. 윤승이 팀장의 말대로 계약금이 들어왔다. 무려 600만원의 계약금. 영아는 확인해 보고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계약금 들어왔으면 한번 쏴주는 게 예의 아니니?" 난 영아를 압박했다. 나 혼자만으로는 약발이 안 먹히기 때 문에 어린 엘프들까지 동원했다. 어린 엘프들은 육포를 씹 으며 간절한 눈동자로 영아를 보았다. '쏴주세요오~' 어린 엘프들의 단체 눈빛 공세에 영아는 버티지 못하고 무 릎을 꿇었다. "오늘 외식하자. 내가 살게." "와아~!" 기뻐하는 어린 엘프 일동. 영아는 통장을 보며 말했다. "20만원 정도면 충분하겠지?" "......" 훗~ 20만원을 누구 코에 갖다 붙이려고? 라이 혼자 먹어도 그 정도는 나오겠다. 참고로 내가 애들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갔을 때 81만5천원 나왔다. 그리하여 오늘 저녁은 '경축! 영아 출판 계약 기념 외식'을 위해 온 가족이 집을 나섰다. "우리 라이 뭐 먹고 싶니?" "라이는 맛있는 게 먹고 싶어요." "맛있는 게 뭔데?" "으음, 회 먹고 싶어요!" "루비와 루는 뭐가 먹고 싶니?" "루비도 회 먹을래요!" "저도 회 좋아해요." "그럼 회 먹으러 가자." 우리 집 외식 코스는 무조건 아이들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가장이긴 하지만 원래 집안에선 안주인의 힘이 가장 큰 법 이다. 그리고 안주인인 루시아는 애들을 끔찍이도 사랑하니. 우리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횟집으로 갔겠지 만, 오늘은 내가 돈 내는 게 아니지 않는가? 참고로 일식집과 횟집은 회를 주메뉴로 하는 음식점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확실하게 구분된다. 횟집은 말 그대로 회를 판매하는 집으로 일반 음식점처럼 자리에 앉아서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는다. 반면 일식집은 내부 인테리어가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고, 자리도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조용히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라는 뜻에서 그렇게 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종업원이 음식만 날라주는 것 이 아니라, 몇 개의 방을 전담해서 손님들을 세심하게 보살 핀다. 그렇기 때문에 일식집이 횟집보다 가격이 비싸고 서비스가 좋다. 참고로 나오는 음식은 거기서 거기다. 밑반찬(일명 스끼다시)나오고, 회 나오고, 그 다음에 매운탕 나오는 것 까지 똑같다. 마침 지니가 아는 일식집이 있었다.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 거기 주방장으로 있다나 뭐라나. 목동 남부지방법원 건너편이 있는 일식집 '나고야'. 일식집은 이렇게 일본 지명을 따는 경우가 많더라. 샷뽀로, 아사카, 고베 등등. 아무튼 일식집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 루시아, 어린 엘프 셋,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지니, 크로니스까지 온 가족이 전부 모인 식사 자리는 흔치 않다. 라이레얼과 카르는 아직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같이 자리를 하지 못했다. "오늘은 제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영아가 이 말을 후회하게 되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 았다. 원래 회라는 것은 천천히 음미하며 먹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 애들은 그런 거 모른다. 참치, 광어, 우럭, 도미, 송어 등등. 각종 물고기들이 아이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저녀석들 초장도 안 찍고 먹는 것 좀 봐. 쟤들 부모가 밥 굶기나? 영아도 깜짝 놀랐다. 평소 잘 먹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오, 오빠 평소에 애들 굶겼어?" "그럴 리가. 나만큼 잘 먹이는 부모가 어딨다고?" 난 꾸역꾸역 잘 먹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체해도 상관없으니 마음껏 먹으렴. 모자라면 또 시키고." 끄덕끄덕. 아이들은 대답은 못하고(입에 음식물이 가득 찼는지라)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덕분에 서빙하는 여종업원의 손만 바빠졌다. 쉴 새 없이 날라오는 음식들과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빈 접시. 나도 최선을 다해 먹었다. 술도 시켰다. 평소라면 참이슬을 마셨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내가 돈 안 내는 날)이니만큼 백세주로 시켰다. "건배!" 나와 지니와 크로니스는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다. 일루니아 여 사님과 인디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딱 붙은 상 태에서 서로 먹여주기에 바빴다. 그리고 루시아는 쉴 새 없이 먹어대는 애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영아는 울상 을 지었다. 그렇게 잘 먹고 나서 드디어 계산할 때가 돌아왔다. 으음, 너무 많이 마셨는지 좀 어지럽군. 내가 비틀거리자 루시아가 부축해주었다. "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 술과 담배는 몸에 안 좋다는 것도 몰라?" "헉!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누, 누가 걱정했다 그래? 애들이 보고 배울까봐 그러는 거지." 그래도 이렇게 루시아와 함꼐 있으니 참 좋다. 난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잘 먹었니?" "네에~! 잘 먹었어요오~!" 하긴, 그렇게 먹고도 잘 먹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양심이 없는 거지. 계산대 앞에 선 영아. 영아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하 지만 영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어, 얼마에요?" 종업원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탁탁탁. 많이도 두드린다. 그렇게 계산할 게 많단 말인가? "120만원입니다." "......" 영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예상 금액에서 딱 100만원 초과했군. 만약 내가 사는 거였다면 결코 이런 곳에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안그래도 애들 식비 때문에 허리가 휠 지경인데 일식집에서 외식하게 생겼냐? 다음부터는 뷔페를 가던가 해야지. 영아는 눈물을 머금고 돈을 계산했다. 사실 우리가 먹은 건 20 만원 정도 밖에(?)되지 않는다. 100만원 어치는 어린 엘프 셋 이서 먹어 치웠다. 당분간은 회 먹으러 가자는 얘기가 안 나오겠군. * * * * 며칠 후. 다행히 일이 잘 처리되었는지 기숙사에 자리가 났다. 일주일 넘게 우리 집에서 눌러 살던 영아는 드디어 우리 집을 떠나게 되었다. "우아아앙~." "이 기쁜 날 왜 울고 그러니?" "흑흑~ 이곳에 정 많이 들었단 말이야." "그래. 알았으니까 어서 가보렴. 아직 짐도 안 쌌구나. 걱정 마. 이 오빠가 다 싸줄게." 그러자 영아는 눈물을 닦으며 날 노려보았다. "오빠는 내가 그렇게 빨리 나갔으면 좋겠어?" 난 당당하게 대답했다. "응." "너무해!"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언제 이 방 주인이 돌아올지 모른단 말 이야. 그러니까 니가 빨리 방을 비워줘야 돼." 내 말에 영아는 어쩔 수 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짐을 다 싼 영아는 노트북 가방을 옆으로 매고 슈트케이스를 질질 끌 고 나왔다. 우리는 영아를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언니." "회 잘 먹었어요." "다음에 또 사 주세요, 누나."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한 자세로 꾸벅 인사를 하는 어린 엘프들. 영아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너희들도 잘 지내렴." "안녕히 가세요, 영아님. 이건 도시락이에요." 도시락을 건네주는 인디. 영아는 그 도시락을 감사히 받았다. 지하철 타고 40분 정도만 가면 되는데 굳이 도시락을 싸줄 필 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이어서 일루니아와 루시아도 작별 인사를 했다. 이번에는 지니 차례. "다음에 또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지니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상큼한 미소를 날렸다. "흑~ 지니 오빠~." 갑자기 덥석 지니를 끌어안는 영아. 지니의 반사 신경이라면 충분히 피하고도 남았겠지만, 지니는 피하지 않았다. 하긴, 여 자의 포옹을 피하면 지니답지 않지......는 둘째 치고 누가 누굴 껴안아? "이것들이 당장 떨어지지 못해!" 난 재빨리 지니와 영아를 떨어트려 놓았다. 영아의 사촌 오빠로 서 둘의 교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안녕히 가세요." 이건 크로니스의 인사. "흑~ 크로니스 오빠~." 크로니스도 덥석 끌어안으려는 영아. 난 재빨리 크로니스의 앞 을 가로막았다. "차라리 이 오빠를 껴안으렴, 영아야." "쳇! 됐어!" "......" 뭐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싫다는 거야? 흥! 별꼴이야 정말! "그동안 감사했어요. 나중에 꼭 다시 찾아뵐게요." 영아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나는 가만히 서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루시아가 내 등을 떠밀었다.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고 와." "응? 내가 왜?" "빨리!" "아, 알았어." 나는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영아를 바래다주기로 했다. 그런 데 그 순간 낯익은 두 여자가 등장했다. "무슨 일인데 전부 밖에 나와 있는 거야? 아! 설마 나 돌아오는 거 알고 환영해 주러 나온 거야?" "분명 그런 걸 거예요, 언니." 큰 키에 레몬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미녀 라이레얼과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얼음인형 같은 카르. 사상 최강의 레즈 커플이 돌아온 것이다. "아! 라이레얼. 일본 여행은 잘 하셨어요?" "응. 게임쇼도 재밌게 봤고, 고베에 들려서 온천욕도 즐겼어. 그리고 게임도 잔뜩 사왔어." 라이레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만에 보는 라이레얼의 미소는 상큼하고 아름다웠다. 옆에 있는 카르는 보기 불쌍할 정도로 짐을 잔뜩 들고 있었다. 자기는 손수건 한 장 안 들고 카르에게 전부 떠넘기다니. 뭐, 카르가 건드리면 쓰러질 정도로 연약해 보이지만 그 정체는 드래곤이다. 저 정도 짐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겠지. "경비가 모자라 히로 카드로 몽땅 긁었어. 이해해 줄 거지, 히로?" "......"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서 너무한 거 아냐? 흑~ 적금 하나 또 깨야겠군. "이, 이분은......" 영아는 라이레얼을 보더니 멍한 표정이었다. 라이레얼은 영아를 보며 말했다. "얜 누구야?" "아! 얘는 제 사촌여동생인......" "사랑해요, 언니!" 내가 소개를 하는 순간 영아는 갑자기 라이레얼을 끌어안았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언니는 제가 마음속에 그려온 이상형이에요. 저랑 사귀어 주세 요. 아니, 사귀어 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 뭐, 뭐야, 이 상황은? 내가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데 갑자기 주위 온도가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헉! 설마? "너, 너......당장 나의 언니에게서 떨어지지 못해?" 눈에 불을 키며 소리치는 카르. 난 카르가 힘을 쓰기 전에 재빨리 막았다. 만약 에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로 인해 나의 무 공은 한층 발전했고, 덕분에 이렇게 카르의 공격을 미리 차단할 수 있었다. 영아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이레얼 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 사촌여동생이 동성 취향이었을 줄은......잠깐. 쟤는 지니와 크로니스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잖아. 그럼 양성애자? 그런데 라이레얼은 왜 이렇게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거지? 라이레얼은 레몬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영아에게 말했다. "미안한 얘기지만, 난 이미 임자가 있어." "예? 이, 임자라니요?" "난 이미 히로와 그렇고 그런 관계거든." "그, 그런......" "자, 잠깐만요! 그렇고 그런 관계라니요?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심하게 오해할만한 발언을 하실 수가......" 영아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뭐, 뭐니?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니?" "오빠, 미워할 거야! 으아아앙~!" 영아는 울음을 터트리며 슈트케이스를 질질 끌고 떠나갔다. 겨우 일주일 있었을 뿐인데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으음, 그러고 보면 이 집안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군.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날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라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집에 들어가자." * * * * 2주일 후. 책상자 출판사에서 영아의 처녀작 '질투'가 출간되었다. 신인 작가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질투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동인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등장인물의 이름은 수정되어 있었다. 히로는 히노로, 크로니스는 크노리스로, 지니는 지리로.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야오이 소설 하나로 인해 샤프걸이라는 필명은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얼마 후. '질투'의 인기에 힘입어 두 번째 작품으로 '교주님이 보고 계셔'가 출간 되었다. 이 작품이 일으킨 반향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 작품 으로 인해 대한민국 출판계에서는 백합물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각광받았고, 수많은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처님이 보고 계셔' '예수님이 보고 계셔' '알라가 보고 계셔' 등등. 영아는 순식간에 10대들의 스타가 되었다. 윤승이 팀장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던 것이다. 과연 업계의 대부답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아이미스는 출판 안하나? 아직 끝나지 않은 히노의 모험이 보고 싶은데. 아이리스 2부 6권 Story 17 히로, 차 뽑다 운전면허증을 딴 지도 몇 개월이나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차를 뽑지 못한 이유는 바빠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차가 없어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었고. 하지만 이제 슬슬 뽑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애들과 놀러 갈 때도 그렇고, 루시아와 데이트하기 위해서라도 차가 있어야 할 테니. 난 어떤 차를 뽑을까 생각하며 열심히 카탈로그를 뒤적거렸다.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의 물음에 지니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의 의견으로는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있는 차를 뽑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멋진 스포츠카를 원하시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식구들을 생각하신다면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있는 SUV 차량이 적합하다 생각합니다.” 요점을 정확히 집어내는 지니. 과연 아이리스 왕국의 참모답다. SUV는 스포츠 유틸리티 비이클(Sport Utility Vehicle)의 약자로 오프로드 주행이나 스포츠, 레저를 즐기기에 적합한 차량이다. 비포장 도로 주행에 유리하도록 차체가 승용차보다 높고(낮으면 긁히니까), 굉장히 튼튼하다. 국산차 쏘렌토, 싼타페, 무쏘, 렉스턴, 테라칸, 코란도, 겔로퍼, 레토나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RV는 레이크레셔널 비이클(Recreational Vehicle)의 약자로 레저용으로 쓰기에 적합한 차량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SUV의 상위 개념으로, 사실상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하긴,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SUV 차량을 구매해야겠지요. 그러고 보면 국산차 중에 괜찮은 차종이 많던데…….” 그동안 고민을 많이 해왔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내가 돈이 좀 있다. 그리고 루시아 앞에서 폼 좀 잡아보고 싶다. 나라고 페라리나 벤츠, 렉서스 같은 고급차 뽑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 멋진 외제 스포츠카에 대한 욕구.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눈물을 머금고 국산차를 뽑기로 결정했다. 자동차 산업의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이다. 지금도 엄청난 숫자의 차를 해외로 수출하고, 그로 인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력이 필요하다. 철강, 전기, 고무 등등. 하나 하나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자동차는 수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00~400 여개에 달하는 협력업체로부터 부품을 공급받는다. 이것을 하나의 기업이 혼자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자동차 산업 육성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필요로 한다. 자동차를 엔진에서부터 완제품까지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만 해도 옛날에는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 부품을 조립해서 판매하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자체적으로 엔진을 개발하고, 그렇게 개발한 엔진이 해외 언론에서 극찬을 받을 정도이니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다 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소비자들이 구매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가 국내 소비자들이 국산차를 구매할 수 있도록 자동차 산업에 대한 지원과 해외차에 막대한 관세를 매기는 등의 보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지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가장 큰 불만은 국산차 수출용이 내수용에 비해 성능이 더 좋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더 싸다는 것이다. AS기간이나 옵션에서도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러니 우리나라 소비자들 입장에선‘내수 소비자가 봉이냐?’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품질 면에서는 벤츠나 BMW 등을 따를 수 없고, 가격 면에서는 중국의 저가 자동차를 따를 수가 없다. 그리고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일본 자동차와 비교해봐도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 지금 현대차를 비롯한 한국차들이 미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점유율을 올려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일본차 들은 미국 시장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특히나 도요타의 렉서스 같은 경우에는 고급 차종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혀가며 벤츠나 BMW의 자리 를 위협하고 있다. 참고로 도요타(DOYOTA)는 일본 자동차 기업 중에서도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다(우리나라로 치면 현대자동차). 도요타가 처음 미국 시장에 진출했을 때만 해도 도요타는 싸구려차 취급을 받았었다. 렉서스(LEXUS)는 도요타가 싸구려 차량 메이커라는 인식을 깨고 미국 시장에서 고급 차량을 판매하기 위해 별도로 만든 브랜드다. 따라서 렉서스의 차량은 도요타 차량과 샤시나 플랫폼 등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국내 자동차 업체들은 내수 소비자들이 해외 소비자들에 비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자동차 산업을 이만큼 키워준 것은 국내 소비자들 아닌가? 그리고 국내 소비자들은 한국 자동차가 더욱 해외 시장에서 선전할 수 있도록 국산차를 애용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말을 하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라고 반론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는 원하는 제품을 선택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가 미국에서 점유율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삼성이 세계최대 크기의 PDP TV를 출품해 해외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등의 말을 들으면 어째서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현대자동차와 삼성은 하나의 기업에 불과하고, 내가 그 회사에 다니지 않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텐데. 하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이 해외에서 선전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해외여행을 하다가 곳곳에 붙어있는 삼성이나 LG 간판을 보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진다. 어째서일까? 우리나라 기업들이 해외에서 잘 나간다고 해서 나한테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내 생각엔 이런 것이 애국심이 아닐까 싶다. 그 기업들과 나의 공통점은 한국 출생이라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선전을 한다는 것은 한국이 선전을 한다는 것이며, 한국 국민인 내가 선전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좋든 싫든 국가라는 틀에 매여 있다. 이것은 국적을 바꾸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으로 귀화해 LA 한인 타운에 사는 사람이라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발 뻗고 자기는 힘들 것이다(가끔 매국노 박일만(스티븐 J. 부시)처럼 예외인 사람도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시비가 붙는다거나 할 경우에는 그 나라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이 독도(獨島)를 다케시마[竹島]라는 되도 않는 명칭으로 부르며 자기 땅이라고 우겨대면, 일본 상푸멩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난다. 요즘은 자유 무역 체제이기 때문에 일본 제품이라 해서 그게 전부 일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소니 노트북이라고 해도 LCD 패널은 삼성 것을 썼을 수도 있고, 제품 제작은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노트북 부품은 누가 대줬고, 어디서 생산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니(SONY) 노트북이라는 것이고, 소니가 일본 기업이라는 것이다. 브랜드로 인해 얻게 되는 판매 수입은 엄청나다. 똑같은 제품이라도 삼성 브랜드가 붙은 것과 이름 없는 중소기업 브랜드가 붙은 것은 가격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OEM업체들이 기를 쓰고 자체 브랜드를 만들 려고 하는 것이고. 그런데 이 불매운동이라는 것은 상당히 냉정하게 해야 한다. 무조건 ‘일본 제품은 쓰지 말자!’ 라고 하면 그걸 지킬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일본 만화도 보지 말고, 일본 영화도 보지 말고, 일본 제품도 사지 말고, 아무튼 일본에 관계된 건 뭐든 하지 말고……. 이건 말도 안 된다. 내가 생각하는 불매운동이라 대체품이 있는 경우다. 한국 만화와 일본 만화가 있는 경우, 한국 만화의 대체품이 일본 만화가 될 수는 없다. 같은 만화라 해도 두 만화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노트북과 일본 노트북은 어떨까? 이럴 경우 한국 노트북은 일본 노트북의 대체품이 될 수 있다. 두 제품이 성능과 외관이 똑같은데 일본 노트북이 한국 노트북에 비해 1만원이 더 싸다면? 현명한 소비자라면 당연히 1만원이 더 싼 일본 노트북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1만원을 더 냄으로써 일본 기업 제품이 하나 덜 팔리고 우리나라 기업 제품이 하나 더 팔리고, 그로 인해 일본의 수출 흑자를 줄이고 우리나라 내수를 늘려, 일본을 한방 먹이고 우리나라를 좀더 잘 살게 할 수 있다면, 1만원을 더 쓸 가치는 있지 않을까? ‘노트북 한 대 안 팔린다고 일본이 망하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한 대 가지고는 택도 없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 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다른 나라 제품을 구매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 을 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성능과 외관이 똑같은데 일본 노트북은 100만원이고, 한국 노트북 은 200만원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럴 경우엔 나 같아도 일본 노트북 산다. 내가 생각하는 불매운동은 구매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정말로 이 것을 사 야 하는가,를 말이다. 100만원이나 차이가 나면 다시 생각해 봐도 일본 노트북을 선택하는 것 이 현명하다. 100만 원자리 노트북의 대체품이 200만 원짜리 노트북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불매운동은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확실한 대응방법이 다. 무조건적인 불매가 아니라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소비하는 한정적 불매는 누구나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매운동은 천천히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 들의 문제는 냄비 근성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것까 진 좋은데 너무 빨리 식는다. 적어도 한번 불매운동을 시작했으면 일본이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지 극히 당연해 다시 말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실을 자기들 입 으로 말할 때까지는 해야 하지 않겠나? 으음,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나는 국산차를 뽑기로 마음먹었다. 문제 는 국산차 중에서 뭘 뽑느냐는 거다. 골라 뽑는 재미가 있다지만, 이건 종류가 너무 다양하다보니 뭐가 뭔 지 알기가 힘들군. “사일런스 백작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국 나는 지니의 조언을 구했다. 지니라면 언제 어느 때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차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차는?” “뉴 렉서스턴(New Rexuston)입니다. SUV 차량으로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차지요. 탑승인원은 7명이고, 차체도 크고 넓어 안락한 드라이빙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마치 타 본 것처럼 얘기하네요.” “예. 요즘 교제하는 여성분이 마침 그 차를 가지고 계셔서 타볼 수 있었습니다.” “…….” 또 나왔다. 요즘 교제하는 여성. 이제 그만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으음, 저도 뉴 렉서스턴이 끌리는군요.” 난 오래 전에 받아 놓은 명함을 꺼내들었다. 그 명함은 다름 아닌 나에게 운전면허를 딸 계기를 제공했던 차팔아 세일즈맨의 명함. 난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차팔아님이시죠?” [예. 맞습니다. 누구신가요?] “전 박영웅이라고 합니다. 기억나시나요? 인형 가게 주인인데.” [아, 예! 기억납니다.] “제가 운전면허증을 따서 차를 살려고 하는데 말이죠…….”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자동차 세일즈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 아니, 어째서…….” [자랑은 아닙니다만, 한 대도 못 팔아서 잘렸습니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정말로 한 대도 못 팔았나요? 단 한 대도?” [예. 아! 그보다 혹시 정수기 필요 없으신가요? 저희 ‘백호 나이키 정수기’는 세계 최초로…….] “됐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난 전화를 끊었다. 자동차 사려는 사람에게 정수기를 팔려 하다니. 자동차 외판원에서 잘려 이젠 정수기 외판원이 된 건가? “으음, 그럼 어디서 사야 하나?” “제가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소개 시켜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아는 분이 있으세요?” “예.”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 자동차 세일즈우먼인가 보죠?” “예.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의 혜안에는 못 당하겠군요.” “후후~ 뭘요? 이 정도는 기본이죠.” “그분을 통하신다면 최대한 싼 가격에 최고로 좋은 제품을 구매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오오! 그거 좋네요. 당장 만나고 싶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지니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를 끊은 다음 나에게 말했다. “지금 이쪽으로 오시겠답니다.” “아니, 이쪽으로요?” “세일즈맨의 기본은 고객을 최고로 모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한 걸음 더 움직이면 고객이 한 걸음 덜 움직여도 된다는 말을 하더군요.” “으음, 훌륭한 세일즈 마인드(Sales Mind)로군요. 차도 잘 팔겠어요.” “예. 작년에 판매왕에 뽑혔다고 합니다. 연봉이 1억이 넘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헉! 판매왕! 1억!” 사실 남한테 물건 팔아먹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난 판매왕 같은 사람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이렇게 말하는 나도 판매하는 사람이지만). 어쨌든 나는 지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우리가 같이 나가자 루시아가 물었다. “둘이 어디 가?‘ “아! 차 뽑으려고 세일즈 하는 사람 만나러 가. 요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너도 같이 갈래?” “아니, 됐어. 난 애들과 놀아주고 있을게. 그런데 차를 꼭 뽑아야겠어? 이제까지 차 없이도 잘 지냈잖아.” “한 대 있으면 좋지. 애들 데리고 놀러 가기에도 좋고. 나 차 사면 우리 애들 데리고 놀이공원이나 놀러 가자.” 비록 ‘애들’ 이라는 불필요한 단어가 붙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데이트 신청이다. 루시아와 단 둘이서 놀이공원에 놀러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고는 할까? “알았어.” 다행이 루시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기뻐하려는 순간, 루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애들이 놀이공원 가자고 졸랐는데, 잘 됐네.” “…….” 언제나 결론은 애들. 아아~ 슬퍼라~. 아무튼 루시아를 옆에 태우고 운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행복일 것이다. 난 세일즈우먼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근처 커피숍.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투피스 정장을 입고 한 손에 카탈로그를 잔뜩 든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라고 말하면 상투적이려나? 뭐, 그래도 예쁜 건 사실이었다. 큰 눈과 수줍은 미소는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듯했다. 왜 저 여자가 판매왕인지 알 것 같다. 저 얼굴로 ‘제발 차 한 대만 팔아주세요’ 라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남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계약서에 사인을 할 것이다. 나야 루시아 하나 보호해주는 것도 벅차니 그런 수법에 넘어가진 않겠지만, 다른 남자들의 생각은 또 다르겠지. “안녕하세요, 지니님.” “오랜마넹 뵙습니다, 김은주님.” “예. 저야말로.” 여자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지니의 손을 붙잡았다. “일단 앉으시죠.” “예.” “이쪽은 박영웅님으로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번에 뉴 렉서스턴을 구매하실 생각이십니다.” “그러시군요. 일단 차를 한번 보시겠어요?” “예? 차를 보다니요?” “마침 같은 회사 직원 중 한 분이 뉴 렉서스턴을 가지고 계셔서 차를 바꿔 타고 왔습니다. 제가 설명을 드리는 것보단 직접 보시고 시승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해서요.” 김은주 세일즈우먼의 말에 난 생각을 바꿔야 했다. 이 여자 단순히 얼굴로 승부하는 세일즈우먼이 아니었군.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고객에게 다가설 줄이야! 이런 사소한 일에 고객은 감동을 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김은주 세일즈우먼을 따라 나섰다. 주차장에는 방금 전 카탈로그에서 본 뉴 렉서스턴이 서 있었다. 김은주 세일즈우먼은 차 문을 열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엔진 출력, 연비, 연로탱크 용량, 타이어 형식, 실내, 외관 등등. 차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아낌없이 말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차를 타며 느낀 점이라던가 다른 차와 구별되는 특징 같은 것도 다 말해주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뉴 렉서스턴이 마음에 들었다. “한번 시승해 보시겠어요?” “아!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에요.” 난 차 키를 건네받고 운전석에 앉았다. 지니가 옆에, 김은주 세일즈우먼이 뒤에 탔다. 난 시동을 걸고 차를 살짝 움직여 보았다. 부드럽게 굴러가는 자동차. 승차감도 마음에 든다. “아까 오다보니 저쪽에 차가 별로 없던데, 그곳에서 한번 달려보시겠어요? 고속주행일 때의 승차감도 중요하거든요.” 친절하게 제안하는 김은주 세일즈우먼의 말에 난 감동했다. 고객을 감동시키기는 쉬워도 영웅을 감동시키기는 어려운 법이거늘. 시속 60km까지 속력을 내본 나는 시승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더 볼 것도 없겠군요. 이 차로 하겠습니다. 출고될 때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최대한 서두르면 일주일 안에도 가능합니다. 원하시는 옵션은 어떻게 되시나요?” “예? 옵션이요?” 자동차를 구매하는 데는 여러 옵션이 달리기 마련이다. ABS(Anti-Rock Braking System: 일반 자동차는 브레이크를 밟으면 바퀴가 잠기게 (Locking) 된다. 이렇게 되면 자동차는 타이어와 노면의 마찰력만으로 움직이게 되고, 운전자가 차량을 전혀 통제할 수 없게 된다. ABS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초당 수십 회씩 반복적으로 브레이크를 작동 시켜주어 제동을 원활하게 해준다. 간단히 말해 브레이크 밀림방지 장치), TCS(Traction Control System: 미끄러지기 쉬운 노면에서 구동륜의 공전을 방지해 발진하기 쉽게 하고 선회 가속시 적절한 구동력과 조종력을 확보하게 해준다. 간단히 말해 미끄럼방지 장치), ECS(Electronic Control Suspension: 주행상태에 따라 서스펜션의 단단함과 무르기를 조절하는 것), 무선리모콘, AV시스템, 썬루프, 카오디오, 열선시트, 전동시트, 천연가죽시트, 자동접이식 아웃사이드미러(통칭 빽미러), 가죽 스티어링 휠 등등. 하나하나 따지자면 끝도 없다. 응? 내가 왜 이렇게 차에 대해 잘 아냐고? 그 이유는 라이레얼 때문이다. 라이레얼은 레이싱 게임 즐기는 것을 보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차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게 되었다. 으음, 게임이 실생활에 도움이 될 때도 있군. “옵션 문제를 비롯한 모든 계약에 대해서는 사일런스 백작님께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아와 함께 탈 것이니 무조건 최고급으로 해주세요.” “예.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계약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36개월 무이자 할부에 선수금 500만원 지급. 계약을 끝마친 나는 초조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내 차가 생긴다니. 내 집 마련할 때만큼이나 감격스럽다. 난 그런 감격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오빠아~” “앗! 무슨 일이니, 라이야?” “차 뽑는다는 게 사실이에요?” “응. 사실이란다.” “와아! 그럼 우리 집도 차가 생기는 거예요?” “응응. 그런 거란다.” 난 라이를 꼬옥 껴안아 주었다. “기쁘니, 라이야?” “예! 막막 기뻐요!” “우헤헤~ 사실 이 오빠도 엄청 기쁘단다.” “오빠는 차 오면 누굴 제일 먼저 태워주실 거예요?” “응?” “라이를 제일 먼저 태워주실 거죠? 그쵸?” “…….” 아니란다, 라이야. 이 오빠는 루시아를 제일 먼저 태워줄 생각이란다. ……라고 말하면 라이가 울겠지?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으응. 노력해 볼게. 아! 차 오면 다 같이 놀이공원 놀러 가자. 우리 라이 놀이공원 가고 싶어 했지?” “예! 라이 놀이공원 꼭 가보고 싶어요!” “후후~ 그래. 다 같이 놀러가자꾸나.” 난 산책이나 할 겸 라이와 루와 루비를 데리고 가게로 나갔다. 이제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조만간 개장이 가능할 것이다. 가게 건물 5층은 주거 공간으로 꾸미는 중인데, 그에 맞는 인테리어와 가구를 들여놓는 일도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맡았다. 5층으로 올라가보니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보였다. 우리가 온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대화를 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부엌 인테리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인디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제 생각에는 이쪽에 오븐과 가스렌지를 놓고, 이쪽에 식탁을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어머, 제 생각이랑 똑같네요. 역시 우리는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아요.” “이, 일루니아님…….” “인디님…….” 장밋빛 분위기. 그리고 이어지는 부부의 키스. 난 ‘놀고 있네’ 라고 중얼거리며 아이들의 눈을 가렸다. “애들 보는 데서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말하자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황급히 떨어졌다. 인디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좋은 분위기를 방해한 나를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볼…… 려다가 아이들이 같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냥 째려보기만 했다. “너희들 왔니?” “네에~!” 일루니아 여사님은 귀엽다는 듯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애들을 좋아하는 일루니아 여사님. 으음, 2세 계획은 없으신가? “여긴 어쩐 일이시죠?” “그냥 애들 데리고 산책 나왔어요.” “앞으로는 소리 좀 내고 다녔으면 하네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오지 마시고.” “훗~ 저는 크게 소리 냈습니다. 누구랑 누가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느라 열중하지만 않았어도 쉽게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안타까운 일이네요.” 파지직!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뜨거운 눈빛의 격돌. 결국 내가 먼저 눈을 돌렸다. 아아~ 아직 눈싸움으로 일루니아 여사님을 이기기는 무리인가? “볼 일 없으시면 이만 나가 주시죠.” 가차 없는 축객령. 흥! 나도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가자, 얘들아.” 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거 내 집 아닌가? 왜 내가 내 집에서 쫓겨나야 하는 거지? 으음, 그나저나 우리가 나가고 난 뒤 저 둘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심히 궁금하다. 얼마나 낯 뜨거운 장면이 연출되려는지……. 산책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이들과 부루마블을 즐겼다. 그런데 연속 두 번 서울에 걸리니 판을 엎어버리고 싶더라. 띠리리~ ♬ 띠리링~ ♬ “앗! 전화벨 소리가! 미안하다, 얘들아. 이 오빠는 전화를 받기 위해 게임을 지속할 수가 없구나.” “아앗! 200만원은 주고 가세요, 형.” “시끄러!” 난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지니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계약하신 차가 나왔습니다.] “헉! 벌써요?” [예. 김은주님께서 특별히 힘을 쓰신 것 같습니다.] “아무튼 기쁜 소식이네요.” [제가 지금 받아 집 앞으로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빨리 와 주세요.” 아아~ 드디어 내 차가 오는구나. 난 재빨리 옷을 챙겨 입었다. “어디 나가게?” “응. 드디어 차가 출고되었대. 지니가 집 앞으로 끌고 온대.” “정말?” “응. 같이 나가자.” “하지만 애들은 어쩌고?” “라이레얼이랑 카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리고 애들 좀 있으면 낮잠 잘 텐데, 뭐.” “알았어.” 난 루시아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갔다. 조금 기다리자 은색 뉴 렉서스턴 한 대가 미끄러지듯 아파트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차는 내 앞에 멈 추었고, 지니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지니는 나에게 차 키를 건네주었다. “직접 타 보시죠, 아이언스 공작님.” “예.” 아아~ 이게 내 차라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사실 차 한 대 뽑는 데는 돈이 장난 아니게 들어간다. 차 값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각종 세금에 보험료에……. 차 유지비도 장난이 아니다. 기름에 붙는 천문학적인 세금과 주차료, 범칙금, 교통사고 시 합의금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이카(My Car)를 갖는 것을 꿈꾼다. 집보다 차를 먼저 장만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차란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하나의 필수품이자 라이프(Life)인 것이다. “와아! 자동차다!” “막막 멋지다!” “나도 갖고 싶어!” “……헉!” 얘들은 언제 나왔지? 어느새 집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나의 뉴 렉서스턴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 만지작거리고 심지어는 본네트 위에 올라가 앉는 아이들. 난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내 차에서 손떼지 못해? 내 차에 작은 흠집 하나라도 내는 엘프가 있으면 절대 가만 두지 않겠어!” “너무해요, 오빠!”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이게 얼마짜리 찬데 감히 손때를 묻혀? 니들이 세차비 대신 낼래?” “우엥~.” 난 아이들의 항의를 가볍게 묵살했다. 아이들은 내 옷깃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태워줘요, 오빠. 타고 싶어요!” “루비는 오빠 옆자리에 앉을래요!” “그럼 라이는 오빠 무릎 위에 앉을래요!” “전 그냥 뒷자리에 앉을게요.” 기대감 가득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어린 엘프들. 차를 타고 싶어 하는 어린 것들의 심정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나는 루시아와 오붓한 시승식을 즐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애들을 떼놓고 가야한다. “같이 타자, 얘들아.” “헉! 잠깐만, 루시아” 난 루시아를 아이들 안 보이는 곳으로 데려갔다. “왜 그래? 설마 애들 태워주기 싫어서 그래?” “그럴 리가! 하지만 생각을 해봐. 저 차는 방금 공장에서 출고되어 나온 차야. 물론 우리나라 자동차 기술이 세계적 수준이긴 하지만 어떠한 결함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 안정성이 확실하게 입증되기 전에는 아이들을 태울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야. 혹시 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 “그, 그건 그러네.” “응. 그러니까 우리가 부모로서 먼저 시승식을 한 다음, 안정성이 입증되면 그때 애들을 태워주자고. 니 생각은 어때?” 루시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말이 맞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내 차에 사고가 날만큼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확률은 거의 업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루시아와 단 둘이 시승식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오빠는 언니와 함께 가볍게 한 바퀴 돌고 올 테니 너희들은 올라가 있으렴.” “우리도 타고 싶어요오~!” “좀 있다가 태워줄게. 착한 엘프라면 오빠 말 잘 들어야지.” “그래. 오빠 말 들어. 언니가 돌아오는 길에 맛있는 거 사다줄게.”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루시아까지 거들고 나서자 더 이상 떼를 쓰지 못했다. 난 운전석에 올라탔고, 루시아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이 되게 넓다.” “그치? 정원이 7명이야. 아이들 태우고 널러 다니려고 일부러 큰 차로 샀어.” 루시아는 신기한 듯 연신 차 안을 둘러보고 이것저것을 만져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동을 걸었다. 운전면허증을 따고 나서 운전할 기회가 그리 많진 않았지만, 나의 운전 솜씨는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클런치와 브레이크, 액셀을 밟는 순서가 머릿속에 확실하게 기억되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아~ 그런 식으로 받은 교육이 어찌 잊혀지겠는가? “안전벨트는 꼭 매. 내가 안전운전을 하긴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응.” 루시아를 옆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다니. 꿈만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유턴을 하던 중 마주오던 차량과 부딪힌 것이다. “꺄악!” 차가 흔들렸고, 루시아는 소리를 질렀다. 난 재빨리 차를 멈추고 내렸다. 상대차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내렸다. 내 차 조수석 쪽 앞범퍼와 상대차 운전석 쪽 앞범퍼가 부딪혔다. 다행히 그리 큰 접촉 사고는 아니었다. 상대차에도 남자와 여자가 타고 있었다. 둘 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지금 유턴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신호 안 보여?” 신호는 빨간불. 보행 신호나 좌회전 신호시 유턴이니 내가 잘못하긴 했다. 으음, 신호를 잘못 봤군. 그런데 내가 유턴을 할 때는 맞은편에 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즉, 내가 유턴하는 것을 상대차가 보았다면 충분히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고가 났다는 것은…… 일부러 부딪혔다는 건가? “빨리 사진 찍어.”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고, 여자는 핸드폰 카메라로 사고 장면을 카메라로 담았다. 꽤나 능숙한 솜씨로군. 그러는 사이 다른 차들은 사고 난 지역을 피해 달렸다. 이렇게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으면 다른 차들에게 피해가 된다. “다 찍으셨으면 일단 갓길로 차를 빼죠.” 사고 장면이 찍혔는데 도망갈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일단 차를 갓길로 뺐다. “괜찮아? 어쩜 좋아?” 루시아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난 차에서 내려 상대차로 다가갔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자세히 못 봤지만, 남자 생긴 게 완전 깡패같이 생겼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얼굴이 길고 날카롭게 생겼다. 그리고 코와 턱에 수염을 약간 기르고 있고, 머리는 올백으로 넘겼다. 여기에 검은 바지와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사고가 났는데 상대차에서 이렇게 생긴 남자가 걸어 나온다면 기세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아이언스 공작이다. 드래곤과도 싸웠던 내가 상대가 깡패같이 생겼다 해서 두려워한다면 말이 안 되지. 으음, 그나저나 인상 한번 정말 더럽게 생겼군. “당신 지금 불법 유턴한 거 알아?” “예. 압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난 조용히 대꾸해주었다. “저 차 누구 명의로 되어 있어? 보험은 들어 있어?” 내가 나이가 어리다보니, 아버지 차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또한 아버지 차를 몰래 끌고 나온 거라면 보험이 안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긴 것이고(일반적으로 가족 보험이 안 되어있으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차 키를 주지 않는다). 보험에 들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가 났을 경우 짜증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사고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 보험은 필수다. “제 명의로 되어있는 제 차고, 보험 들어있습니다. 그 유명한 헬로우카 보험에 말이죠.”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어쩌긴 뭘 어쩝니까? 뭐 범퍼 좀 긁힌 것 같은데, 보험 처리 할 필요 없이 그냥 현금으로 처리하죠.” 보험 처리를 할 경우에는 보험비가 상승한다. 그래서 작은 사고의 경우에는 그냥 현금으로 처리하는 것이 낫다. 상대 남자는 날 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말하는 것 좀 보게. 이거 경찰 불러야지 안 되겠구만.” 깡패같이 생긴 사람이 경찰 부른다니까 좀 웃긴다. 그런데 경찰 불러서 어쩌겠다는 거야? “불법유턴에 중앙성 침범이야. 범칙금 딱지 두 개 날아와. 알기나 알아?” “그래서요?” 까짓 거 범칙금 딱지 날아오면 돈 내면 그만이다. 내가 뭐 감옥 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경찰 부르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하! 이 자식 진짜 웃기는 자식이네. 너 뭐하는 놈이야, 임마?” “이젠 제 직업까지 궁금해 하시는군요. 으음, 저한테 관심 있으신가 보죠? 굳이 원하신다면 알려드리지요. 제 직업은 인형 가게 사장입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판매한다고나 할까요? 물론 돈 받고.” 내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상대 남자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비웃는 폼을 보니 진짜 깡패 같다. 잘못 걸렸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더니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본 나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불 없으신가요? 붙여 드려요?” “너 지금 나랑 장난 하냐?” 남자가 막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은근히 남자에게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이런 깡패같인 남자와 같이 다니는 여자가 정상일 리 없지. “아니, 누가 떼어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돈을 물어준다는데 뭐가 불만이에요?” 남자는 여자에게 말했다. “본네트 한번 열어봐.” 그러자 여자는 운전석으로 들어가 본네트를 열었다. 남자는 차내부를 자세히 살폈다. “여기도 깨졌구만.” 보니까 라이트의 고리 하나가 깨져있었다. 별로 문제 될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남자에게는 큰 문제인 듯했다. 남자는 내부를 열심히 살펴보고, 본네트가 잘 닫히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점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그러는 동안 나도 가만있기 심심해서 내 차를 살펴보았다. SUV 차량의 차체가 조금 더 높고 튼튼한지라 내 차는 조금 긁힌 걸 빼면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으음, 다행이군. 새 차가 잘못됐으면 정말 가슴 아팠을 텐데. 그나저나 시승식부터 이게 뭔 꼴이냐? 재수가 없으려니 별 일이 다 일어나는군. 루시아 볼 면목이 없다. 루시아는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가 잘못한 거니까 배상해 주고 끝내자.” “알았으니까, 차에 들어가 있어.” 루시아의 말대로 사고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러니 내가 배상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행동이 너무 마음에 안 든다. 깡패같이 생긴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저기 찰싹 달라붙어 있는 화장 짙은 여자도 마음에 안 든다. 생긴 거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말하는 싸가지와 행동은 왜 이 모양인가? 가정교육이 잘못됐나? 부모를 잘못 만났나? 아니면, 부모는 최선을 다해 교육시켰는데, 애가 저 모양이 된 건가?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아! 김 사장? 난데, 지금 사고가 좀 났거든. EF소나타 범퍼랑 라이트가 얼마나 하지? 일단 보이는 데가 그 정도고 속으로 얼마가 작살이 났는지는 수리 들어가 봐야 알아. 어, 그래. 아니. 상대차가 불법 유턴하다가 박은 거야.” 불법 유턴한 건 맞지만, 상대차가 달려들어 내 차를 박은 거다. 사고가 난 지역은 그리 속도를 낼 수 있는 구간이 아니다. 빠르게 달려봐야 시속 40km 정도? 그리고 내가 유턴을 할 때만 하더라도 맞은편에 차량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 차를 보지 못한 것일까, 봤는데 제동을 못한 것일까, 봤고 제동을 할 수 있었는데도 안 한 것일까? 만약 보험사기를 노렸다면, 상대방은 벌써 드러누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접촉사고로 드러눕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양쪽 차 모두 찌그러진 곳도 없고, 세게 긁힌 정도니까. 세게 긁히는 바람에 목과 허리에 충격이 가서 몇 달간 병원 신세를 져야한다고 말해봐야 그걸 믿어줄 보험 회사 직원은 아무도 없다. 상대방이 전화하는데 가만히 있기 심심하다. 난 여자한테 말했다. “핸드폰 있으시면 잠깐 빌려주시겠어요?” 여자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지니가 집에 있었다. “아! 사일런스 백작님. 지금 사고가 나서 상대차 범퍼가 세게 긁히고 프론트 라이트 고리가 깨졌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보험 처리 하는 게 나을까요?” [그 정도라면 그냥 현금으로 처리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아마 상대방은 범퍼 값과 프론트 라이트 값 전부를 물어달라고 하겠죠.] “예. 생긴 거 보니까 그럴 것 같이 생겼습니다.” [상대방 차종은 뭔가요?] “EF소나타입니다.” [그럼 35만원 정도면 해결될 겁니다. 비싸면 40만원 정도겠구요. 그 이상을 부르면 바가지 씌우는 것이 확실하니 보험회사에 연락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내가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남자도 전화를 끊었다. 난 핸드폰을 다시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나저나 지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지?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 카센터라도 운영하나?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굳이 저런 눈빛을 하며 말을 하는 것은 기세를 제압하기 위함일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지만. “이거 다 교체하려면 최소한 80만원은 필요하다는데.” “…….” 80만원? 그 정도 금액이면 루시아와 애들 데리고 랍스타 한번 먹을 금액이다. 그만큼 큰 금액이라는 거다. “저도 방금 연락해 봤는데 범퍼랑 라이트 다 갈아봐야 35만원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 80만원이라는 금액은 대체 뭘 기준으로 산출된 겁니까?” 내가 말하자 남자의 볼이 실룩거렸다. 무언가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 남자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 남자는 보면 볼수록 깡패같이 생겼다. 폭력과 유혈이 난무하는 영화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듯한 싱싱한 깡패. 참고로 깡패같이 생긴 사람은, 조폭같이 생긴 사람과 확실하게 구분된다. 조폭같이 생긴 사람은 어깨가 떡 벌어지고 덩치가 좋다.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고 있고, 언제나 각이 잡혀있다. 이런 사람은 날카로운 위압감보다는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반면 깡패같이 생긴 사람은…… 으음, 더 이상 설명 필요 없이 딱 이 사람같이 생겼다. 평범한 체구, 코와 턱에 난 짧은 수염, 길고 날카로운 얼굴과 찢어진 듯한 눈, 그리고 검은색 가죽 재킷까지. 저 가죽 재킷 안에서 사시미칼 하나만 뽑아들면 100% 순수한, 너무나 완벽해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깡패다. 아아~ 법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생겨도 되는 건가?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꾸 줌거을 쥐었다 폈다 하세요? 잘 하면 한 대 치시겠습니다.” 난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죽고 싶냐?’ 라고 묻는 눈빛. 그 표정과 눈빛을 마주보는 나는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적어도 루시아의 싸늘한 표정(난 이 표정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과 일루니아 여사님의 ‘찢어죽일 것 같은 눈빛’ 정도는 돼야지. 그 정도 표정과 눈빛으로 어디 가서 깡패라고 명함이나 내밀겠어? “좆만한 새끼가…….” “…….” 드디어 욕 나왔다. 깡패같이 생긴 남자가 저런 대사를 내뱉으니 진짜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아, 아 저기…… 노, 농담이었어요. 죄송합니다. 혹시 화 나셨나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 아무튼 죄송합니다.” 내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본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러니까 좋아요?” 다시 굳어지는 남자의 표정. 별로 안 좋아 하는 것 같다. 그가 나를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든 말든 난 즐겁게 웃었다. 아아~ 재밌다. “헛소리 작작 하시고, 그냥 40만원 드릴 테니까 그걸로 끝내죠. 어차피 겨우 이 정도로 범퍼랑 라이트 갈진 않을 것 같은데, 그냥 40만원 받아서 둘이 데이트나 즐기세요. 뭐, 싫으시면 이대로 카센터로 들어가도 좋고요. 수리비는 제가 전액 부담하도록 하지요.” 남자는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여자는 가만히 서있기가 힘든지 차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의 몸 중에서 감정이 가장 쉽게 드러나는 부위는 누가 뭐래도 눈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눈동자가 살의나 적의를 품고 있다면 마주보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이렇게 살벌하게 생긴 사람이 살벌한 눈으로 노려볼 경우 대다수 사람들은 시선을 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여기서 잔뜩 쫄아야 할 것이다. 저 남자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 이 남자는 너무 약하다. 남자는 지금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았을 경우고, 그 기준은 나한테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내가 제대로 한 대만 쳐도 저 남자는 죽는다. 아니, 마법을 쓰면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도 죽일 수 있다. 만약 내가 저 남자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고 노려보면 저 남자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것이다. 남자는 아무리 노려봐도 소용이 없자 가죽 재킷을 한번 고쳐 입으면 말했다. “40만원 내놔.”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진작 그러실 것이지. 아! 명함 하나 주시겠어요. 이것도 인연인데 명함이나 한 장 받아 두죠. 혹시 아나요? 나중에 우연히 만나 술 한 잔 하게 될지.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되면 제가 사도록 하지요.” 남자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 난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내 지갑을 열었다. 다행히 현금과 10만원짜리 수표가 몇 장 있었다. 난 현금 20만원과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어쨌든 이 정도 사고로 끝나서 다행이네요. 사람이 안 다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죠. 가시는 길 안전 운행하세요.” 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내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비록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좋게 끝내는 것이 좋다. 이 남자 생긴 거나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이것도 다 인연 아니겠는가? 그리고 화가 난다 하더라도 잘난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악수를 하는 순간 남자의 왼손이 내 복부를 강타했다. 퍼억!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남자는 구둣발로 내 얼굴을 걷어찼다. 퍼억! 내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본 남자는 가죽 재킷 깃을 세우며 말했다. “그 정도로 병원 가봐야 진단서도 안 나올 테니 경찰에 신고하려면 신고해. 그리고 앞으로 조심해라. 어린놈이 어른한테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구는 거 아니다. 생각 같아서는 팔다리 하나쯤 부러뜨려 병신으로 만들어주고 싶은데, 갈 길이 바빠 이 정도로 끝낸다. 그리고 다음에 나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좋을 거다. 니 얼굴 보면 빡 돌아서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을 마친 남자는 아스팔트 바닥에 침을 퉤 뱉고, 차에 올라탔다. 검은색 EF소나타는 그렇게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괜찮아?” 내가 얻어맞는 것을 본 루시아는 깜짝 놀랐는지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쓰러진 나를 일으켜 주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난 옷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는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 주었다. 아까 그 남자가 구둣발로 걷어찰 때 묻은 흙이다. “정말 괜찮아?”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루시아. 루시아의 그런 모습에 난 기분이 좋아졌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걱정해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루시아는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해! 사실 아까 악수하는 순간 남자가 왼주먹으로 내 복부를 때리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은 것은 맞아봐야 별로 아플 것 같지 않았고, 남자가 그 다음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싶어서 였다. 맞는 순간 복부에 힘을 주었기 때문에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구둣발로 얻어맞은 얼굴 역시 아프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분은 상당히 더러웠다. 좋게 끝내려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긴가? 난 아까 남자가 주고 간 명함을 꺼내보았다. 저축은행대출법인 인풋&아웃풋(Input&Output) 안산점 실장 박일현 “저축은행대출법인 실장이라…….” 뭔가 거창해 보이는 명칭이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사채업자다. 모든 사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법 사채업에 종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아까 그 남자의 경우에는 생긴 거나 하는 짓으로 봐서 불법 사채업에 종사하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뭐, 불법 사채업에 종사하든 안하든 그건 별로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얻어맞았다는 거고, 당한 건 이자까지 쳐서 갚아줘야 한다는 거다. 난 명함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박일현이라……넌 이제 죽었다.” (『아이리스』7권에서 계속) 아이리스 2부 7권 Story17 히로, 차뽑다 경축! 오늘은 역사에 기록된 만한 날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오늘을 공휴일로 제정하자고 정부에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오늘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날이다. 바로 내가 차를 뽑은 날이기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차를 사려고 마음 먹었던 나는 일루니아 여사님께 구박 받아가며 운전면허증을 땃다. 그리고 몇 일 전 자동차 계약을 했고, 오늘 마이카(My Car) 뉴 렉서스턴이 나왔다. 난 기쁜 마음에 루시아와 함께 시승식에 나섰다. 하지만 기쁜 날에는 마가 낀다고 했던가? 유턴을 하던중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나고말았다. 내 잘못이 컸기에 난 넓은 아량으로 피해를 배상해 주려 했다. 하지만 상대차 주인은 깡패같이 생겼고, 직업은 사채업자였다. 어쨌든 난 그가 입은 피해를 현금으로 그것도 즉석에서 배상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깡패 같이 생긴 사채업자는 주먹으로 내 배를 때리고 발로 내 얼굴을 걷어 찼다. 잘 생긴 얼굴에 상처나면 어쩌려고! 내가 쓰러진 사이 사채업자는 차를 몰고 떠났고, 지금 난 루시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루시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 운전을 하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마. 잘 해결 됬잔아.“ “그래도....“ 그런일을 당했는데 신경 안쓸리 없다. 나 역시 아직까지 기분이 더럽다. 내가 좋게 해결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딴식으로 나오다니 무엇보다 오늘 같이 좋은 날 이런 기분 더러운 일이 생겼다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 사실 사고가 났다는 사실과 물어준 돈은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 사고야 액땜 했다 치면 될것이고 물어준 돈이야 애들과 외식 한번한 샘치면 그만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너무 싸가지가 없다는 거다. 누가 돈 안 물어준다는 것도 아닌데, 웃으면서 좋게 좋게 대화하면 어디 덧나나? 깡패같이 생긴거야 날 때부터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는거라 치자. 하지만 상대방이 기세를 제압 하려는 그 싸가지 없는 행동은 대체 뭔가? 여기에 더해 감히 주먹까지 휘둘러? “그냥 재수없다고 생각해.“ “아니.“ 루시아의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루시아의 말대로 재수없다고 생각하며 적당히 넘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절대 그럴 수 없다. 최소한 당한 만큼 갚아주고 더 나아가 눈덩이처럼 불려서 갚아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조용히 살려는 나를 건드렸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 할거 아닌가? 생각을 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나는 차를 주차장에서 세워두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루시아를 보더니 물었다. “잘 다녀왔어?“ 루시아는 대답 대신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무슨일 있었어? 설마 저 인간이 으슥한 곳으로 차를 끌고가 널 덮치려는 한 건 아니겠지?“ “어허! 이 아줌마가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물론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가 아니라, 나의 순수한 사랑을 뭘로 보고!“ “ 빨리 말해 봐,루시아. 무슨 일이야?“ “그게.....“ 루시아는 아까 일어났던 일을 일루니아 여사님께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다 들은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새를 획 돌려 나를 찢어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이제까지 이런 눈빛 한두 번 받아본게 아니지만,오늘은 좀더 무섭다. “뭐,뭡니까? 그,그 부릅뜬 눈은 뭐예요?“ “몰라서 묻나요?“ “.....“ 모른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혼자서 차 몰다가 벽 들이받고 죽든 말든 상관없는데,루시아를 태운 상태에서 사고를 일으켜요?가벼운 접촉사고였기에 망정이지,만약 큰 사고가 나서 루시아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어요? “헉!그,그런......“ “루시아를 태운 상태에서 사고를 일으켰다는 것은 살인미수나 다름없어요. 아이언스 공작님이 루시아를 죽일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겁니까? “헉! 살인미수라니! 내가 루시아를 죽일 뻔했다니......“ 그동안 숱한 갈굼에도 꿋꿋이 버텨왔던 나이지만, 이번에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분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의 말이 맞았다. 만약 큰 사고가 일어났다면 어쩔 뻔했는가?그래서 루시아가 다쳤다면?그냥 다친 것도 아니라 크게 다쳤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나,나 때문에 루시아가 다치다니..... 나 같은 건 살 자격이 없어!“ “그만해!다치긴 누가 다쳤다 그래?“ “말리지마,루시아!너를 다치게 한 나 같은 건 죽어야 돼!“ “안 다쳤다니까!“ 루시아가 용서해도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 루시아를 다치게 한 놈을 결코 살려두지 않으리! 난 루시아를 다치게 한 놈의 목을 졸랐다. 다시 말해 내 목을 내가 졸랐다. 그러자 루시아가 뜯어 말렸다. “이거 놔!나 죽을거야!“ “뭐하고 있어,언니?좀 말려 봐!“ “그 뺀질이 때문에 니가 죽을 뻔했는데 뭐 하러 말려?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런 뺀질이는 빨리 죽는게 나아.“ “그 정도 사고에 죽을 리 없잔아!“ “아니야. 세상일은 모르는 거야. 자동차 사고로 죽은 많은 사람들도 너처럼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걸.“ 무슨 일이십니까?제가 뭐 도울 일이라도......“ 어느새 나타난 지니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그러자 루시아는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히로 좀 말려 봐,오빠. 아까부터 자기 목을 조르고 있어!.“ “으음,그거 큰일이군요.“ 태연하게 말하는 폼이 전혀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말려달라니까!“ “저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심복으로서 아이언스 공작님의 의견에 따를 뿐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의 의지를 거스를 수 있겠습니다?“ “......“ 다시 말해 내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하겠다는 거군. 방금 전까지 죽기를 각오했던 나이지만,지니 하는 짓을 보니 삶의 욕구가 마구 생겨났다. 혹시 이인간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건가? 산소 공급 중단되자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의식의 끈이 점점 멀어지는 가운데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지니와 루시아의 결혼식 장면이었다. 내가 무림에 간 사이에 루시아를 꼬드겨 결혼하는 간신배 지니. 다행히 내가 무림에 가지 않아 그런 일이 생기진 않았지만, 여기서 죽는다면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내가 네놈에게 루시아를 넘겨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재빨리 손을 풀었다. “켁켁!죽을 뻔했다..“ 숨을 돌린 나는 고개를 들어 사일런스 남매를 노려보았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고 있는 지니와 아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 나 죽으면 저 둘이 제일 기뻐할 게 뻔하다. 저것들이 좋아하는 꼴 보기 싫어서라도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아야지. “괜찮아?“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루시아. 난 그런 루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흑~미안해,루시아.널 다치게 한 날 용서해 줘. 아니, 난 너에게 용서해 달란 말조차 할 자격이 없어. 어흐흐흑!“ “나 안 다쳤으니까 오바 좀 그만해.“ 루시아는 다정하게 나를 다독거려주었다. 토닥토닥. 루시아의 위로 덕분에 울음을 그친 나는 이를 갈았다. 아까 있었던 안 좋은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채업자 자식! 이대로 넘어갈 거라 생각지는 마라! 내가 당한 것의배는 갚아줘야겠지? 그런데 배라고해봐야,내가 두 대 맞았으니 기껏해야 네 대 패면 그만이다. 두 대를 네 대로 갚아봐야 왠지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인데. 으음,복수를 하긴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는 것이 깔끔할까? 내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데 지니가 네에게 다가왔다. “방금 누님께 사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난 팔짱을 끼며 지니를 노려보았다. 감히 내가 죽으려 하는데 말리지도 않다니. 이는 내가 죽고 난 뒤 루시아를 가로채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렷다! 네놈의계획은 전부 들통 났다!죄인은 당장 죄를 이싱적고하고죽을 청하라! 지니가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이제부터는 지니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생각이다. “복수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 좋은 생각?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니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기로 결심했지만,이런말을 들으면 자연히 귀가 솔깃해지기 마련이다. 정말로 좋은 생각일 수도 있잖아. “뭐,일단 말이나 해보세요.제가 꼭 그 말을 따르진 않겠지만,참고해서 나쁜 것은 없으니.“ “그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묻도록 하겠습니다. 복수란 대체 무엇입니까?“ “예?복수가 뭐냐니요?복수가 복수 아니에요?당한 것 만큼 갚아주는 게 복수잖아요.“ “그럼 아이언스공작님께서는 어떻게 복수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자가 아이언스공작님께 저지른 죄는 보통 큰 죄가 아니닙니다.비록 아이언스 공작님의 위대함을 모르고 저지른 죄라고는 하나.그러한 이유는 용서 받을 수는 없을 겁니다.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께 주먹과 발을휘두른 죄는 목숨으로 갚아도 부족할 것입니다. “예? 목숨으로요? 아니,겨우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기는 좀.....“ “아닙니다. 원래대로라면 삼족을 멸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 삼족(三族)이라면 부모,형제,처자를 포함한다. 즉, 죄 지은 사람의 부모님과 형제와 아내와 자식까지 전부 죽인다는 거다. 일종의연좌ㅡ부자(父子),형제(兄弟),숙질(叔姪)의 죄로 무고하게 처벌을 당하는 일ㅡ로 반역 등의 중범죄에만 이런 처벌이 가해진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구족을 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구족(九族)이라 하면 고조,증조,조부,부친,자기,아들,손자,증손,현손까지의 동종(同宗)친족을 전부 포함한다.구족을 멸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멸문지화(滅門之禍:한 집안이 다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재앙)시킨다는 거다. ‘십족(十族)을 멸한다’는 말도 있는데, 십족이란 구족에 친구까지 더한것이다.즉,가문 전체를 멸문시킴은 물론,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까지 전부 죽여버린다는 거다. 이런식의 마구잡이식 사형은 한 왕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겨우 두 대 맞았다고 이런 형벌을 내린다는 것은 멸한다는 것좀......“ “그럼 삼족만 멸할까요?“ “.......“ 죽이지 못해 안달 났냐? 내 표정을 살피던 지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군요. “그렇습니다.인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제가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큰 죄를 저지른 자의 생명까지 소중히 여기시다니!용서란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펀으로 옮기기는 어려운 것. 새삼 아이언스 공작님께 감복했습니다.“ “아하하! 제가 원래 좀 넓은 아량을 지니고 있잖아요.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 하지만 사실 저만한 사람이 없긴 하죠.“ “그럼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이대로 없던 일로 하시겠습니까?“ “......“ 그건 아니지. 최소한 당한만큼은 갚아줘야 할 거 아냐? “흐음, 그러시다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복수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건......“ 생각해보니 복수를 해야겠다고 마음만 먹었지., 어떤 방식으로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여기에 적힌 주소로 찾아가서 개 패듯이 패?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복수일까? 내가 그 남자를 죽일 생각이 없는 만큼, 개패듯이 패봐야 몇 달 정도 병원에 입원하면 다 나을 것이다. 그럼 그 남자는 그냥 재수없게 걸렸다고 생각하며 이제까지 살던대로 계속 살아가겠지. 이건 진정한 의미의 복수가 아니다. 무릇 복수라 함은 치밀하고 냉정해야 한다. 그냥 무식하게 달려들어 주먹질 해대는 것은 복수 축에 끼지도 못한다. 상대방의 기반부터 철저히 무너뜨려야 한다. 눈치 채치 못하는 사이 서서히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상대가 눈치를 챘을 땐 흙탕물이 턱까지 차 있다. 그제야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소용없다. 그 모든 것을 계획한 사람은 그때가 돼서야 나서서 정체를 밝히고 절망의 구러텅이에 빠진 상대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결정타를 날린다. 이것이 진정한 복수 아니겠는가? 사실 복수만큼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도 없다. 내가 가장 감명 깊게 본 복수극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ymas,1802-1870)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다. 국내에는 ‘암굴왕’이라는 특이한 제 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때는 나폴레옹 보니파르트가 귀양을 간 뒤, 루이왕이 즉위하는 시점.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 사는 선원 에드몽 탕테스는 아름답고 기품있는 메르세데스라는 여인과 약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에드몽은 자신이 제일 행복한 청년이라 생각하며,기쁨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에드몽의성공을 시기한 당글라르와 메르세데스를 사랑하는 메르세데스의 사촌오빠 페르낭 몬데고는 서로 짜고 그를 고발한다. 에드몽은 검사 빌포르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처음에는 에드몽의 편을 들던 빌포르는 그 일이 자신의 아버지와 연관이 있음을 알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그를 이프 성의 감옥에 처넣는다. 처음에 에드몽은 빌포르가 자신을 구해주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빌포르는 연락이 없다. 그곳에서 그느 미쳐버릴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자살까지 결신한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빌포르는 연락이 없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죄수인 신부를 만나게 된다. 신부는 풍부하고 싶이 있는 지식을 에드몽에게 전수해주었다. 그리고 몬테크리스토 섬에 있는 보물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에드몽은 신부에게서 구원을 얻고, 신부와 같이 이프 성의 감옥을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신부는 죽고, 에드몽 혼자서만 가까스로 탈출한다. 14년만의 탈옥이었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에드몽은 몬테크리스토섬에 찾아가 신부가 말한 보물을 손에 넣는다. 보물을 손에 넣은 에드몽은 몬테크리스토 백작 작위를 받는다. 그리고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복수를 계획한다. 그를 지옥의 문턱까지 밀어넣은 셋은 그들이 지은 죄의 대가를 받기는커녕 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잘 살고 있었다. 당글라르는 남작이 되었고, 빌포르는 부인을 잘 얻어 더욱 출세했다. 그리고 페르낭 몬데고는 모르세르 백작이 되었고, 에드몽의 연인이었던 메르세데스와결혼해서 자식까지 두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불타오르는 복수심을 가슴 속 싶이 숨긴 채 차근차근 계획을 짰다. 그는 자신의 적들을 한번에 죽일 생각이 없었다. 죽기전에 한순간 느끼는 공포. 그리고 단 한번의 죽음. 그가 원하는 복수는 그런 가벼운 복수가 아니었다. 그러한 죽음은 적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적들에게 그런 축복을 베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두운 토굴에서 수백 번도 더 죽음을 경험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곳에서 신부를 만나지 못했다면 미쳐버리거나 자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지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거친 뒤에야 그들 앞에 섰다. 그가 살아서 적들 앞에 섰다는 것 자체가 신이 그에게 복수를 허락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자신의 느낀 그 절망과 고통을 적들에게도 똑같이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그래서 그는 결코 서둘지 않았다. 마치 계단을 밟고 올라서듯,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드몽 당테스)의 복수는 상대를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었다. 그는 오직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고, 그것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모르세르 백작(페르낭 몬데고)의 명예를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그리고 그로 인해 모르세르 백작의 아들과 결투를 하게 되었다. 결투 전날 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정체를 눈치 챈 메르세데스는 그를 찾아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애원에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그녀의 아들이자 원수의 아들을 죽이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녀를 돌려보낸 뒤 탄식하며 절규한다. 복수를 맹세한 그날, 왜 나의 심장을 뽑지 않았던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메르세데스는 아들과 함께 메르세르 백작을 떠난다. 그리고 모르세르 백작은 모든 절망을 맛본 뒤에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에드몽 탕테스였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는 다시 한번 절망을 맛본 다음 자살을 선택한다. 검사 빌포르의 최후는 더 처참했다. 그는 가족을 다 잃고 완전히 미쳐버리고 만다. 그 모습을 본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에 회의를 느낀다. 하지만 자신이 갇혀 있었던 이프 성의 감옥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14년동안 받았던 고통을 되새기자 다시금 미칠 듯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의 적들이 아무리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고 해도, 그가 받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복수를 한다 한들 그가 받았던 고통과 그 고통에 몸부림치며 보냈던 수십 년의 세월은 보상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더욱더 잔인한 방식으로 복수를 해도 될 정당한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두 명의 적을 완전히 파멸시킨 그는 마지막 적인 당글라르에게 자비를 베푼다. 복수를 끝마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자신이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복수는 끝났다는 것은 그의 삶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그를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그녀로 인해 그는 행복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아~ 이 얼마나 감동적인 스토리인가? 몬크리스토 백작은 복수극의 전형을 완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다. 진정한 복수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고나 할까? 확실히 복수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제 생각에는 일단 상대를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己知彼 百戰不殆) 하였습니다. 상대를 파악해야 그에 걸맞은 복수를 할 수 있을것입니다.” “듣고보니 그렇군요. 상대가 사채업자라는 것밖에 모르니, 좀더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긴 하죠. 그런데 상댇를 파악하는 일은 누가하죠?” 나의 물음에 지니는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저에게 맡겨주신다면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흐음,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고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제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거라 믿겠습니다.” “예.” 당당하게 대답하는 지니의 모습은 정말이지 만고의 다시없을 충신같이 보였다. 으음, 이 인간 속마음을 한번 들여다 보고 싶군. * * * * 다음날. 나는 책을 읽는 루시아 옆에 찰싹 달라붙어 열심히 찝쩍거렸다. 괜스레 머리카락도 만지고 손도 만졌다. “내가 손금 봐줄게. 앗! 부모님이 돌아셨네. 그리고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으음, 어렸을때 힘든 일을 많이 겪었군.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남자 복이 장난이 아니니까. 조만간 위대한 영웅과 결혼할 거야. 그리고 애도 많이 낳을 거고, 아! 옆에 하루살이 같이 붙어있는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으음, 둘이 남재 같아. 이 사람들과 친해지면 나쁜 일만 일어날 거야. 그러니까 혹시 주위에 그런 사람 있으면 이제부터라도 친하게 지내지 마. 그나저나 결혼할 남자가 정말 딱이다. 완전 천생연분이야. 이 남자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야. 그러니까 하루 빨리 결혼하는 게 좋아.” 내가 손금을 본다는 명목으로 루시아 손을 만지작거리자, 루시아는 한신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남자가 너고?” “헉! 어떻게 알았어? 난 한마디도 안 했는데. 역시 우리는 마음이 통하는 사이인가 봐. 그런 의미에서 우리 정말로 결혼할까? 내일이라도 날 잡는게 어때? “됐어!” 루시아는 손을 뿌리치더니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왜 그래, 루시아? 손금을 보니 정말 그렇게 나왔다니까. 하루 빨리 결혼하지 않으면 큰 재앙이 닥친대. 진짜야.” 난 황급히 쫓아갔지만, 루시아는 방문을 세게 닫고 문을 잠갔다. 난 성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어었다. “하아~ 역시 연애란 힘들구나.” 몸을 돌리는데 바로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헉!누구야?” “접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왼쪽 눈에 외눈 안경을 끼고 윤기가 흐르는 금발을 하나로 묶은 미청년.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였다. 아침 일찍 나가더니 지금들어왔나 보다. “무슨 일이십니까? “맡은 일에 대한 조사를 끝내고 왔습니다.” “벌써요? 아니, 어떻게 하루만에.... 설마 건성으로 한 건 아니겠죠?” “그쪽에 아는 분이 계셔서 쉽게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절대 건성으로 한 것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 아는 분? 이 인간은 왜 이렇게 발이 넓은지 모르겠다. 대체 ‘모르는 분’ 이 누구야? “제 방으로 가서 듣기로 하지요.” “예.” 방으로 들어가자 지는 조사해온 자료를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박일현. 나이 33세 아직 미혼이고, 동거하고 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여자의 이름은 임인숙. 나이는 31세 박일현과 3년 째 동거중입니다.둘 사이에 아직 자식은 없습니다. “흐음, 계속하세요.” “예. 박일현은 현재 저축은행대출법인 인풋&아웃풋(Input&Output) 안산점 실장으로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제가 받은 명함이 진짜였다는 거군요. 꽤나 자신이 있었나 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원래 이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시민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요.” “으음, 마음에 안 드는 군요, 계속 하세요.” “예. 저축은행대출법인 인풋&아웃풋은 사실상 사채업체입니다. 그것도 무허가 사채업체로 불법 사채업을 일삼고 있지요. 안산점이라고 하니 지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곳이 본점이고 지점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저축은행대출법인 인풋&아웃풋의 안산점 실장. 뭔가 대단히 거창해 보이는 명칭이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뭔가 대단한 일을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그런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저축은행대출법인=무허가 사채업체’, ‘안산점’이라고 적어 놓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모르는 사람이보면 서울 같은 대도시에 본점이 있고 여기저기 지점이 있는 줄 알겠다. “박일현이 근무하는 사채업체는 낡은 빌딩의 1층과 지하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직원은 일곱명으로 사장 한 명과 실장 네 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장 직속 여자 비서 한 명과 전화를 받고 잡일을 처리하는 여자 한명이 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비서는 사실상 사장 정부(情婦)이고, 전화 받는 여자는 단란주점 출신입니다.” “예상보다 적네요. 겨우 일곱 명이라니, 여자 둘 빼면 다섯명 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영업을 하나요?” “지금 말씀드린 건 어디까지나 빌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숫자입니다. 사장은 다섯 개의 심부름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실장들은 그 심부름센터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무허가 사채업체의 하부 조직이라 할 수 있지요.” “영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나요?” “당연한 얘기지만, 사채업이라는 게 사람 사정 다 봐주며 할 수 없는 겁니다.” “물론이죠.” 과주 중세 유럽에서는 교황의 권위가 왕보다 더 높았다. 당시 교회는 교회법으로 사채업(고리대금업)을 금지했다. 하지만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종교가 달라 교회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채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 유대인 국가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민족이었기에 돈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농수산업이나 제조업을 하기도 힘들고, 부동산을 소유하면 이동시 처분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산을 오로지 현금으로만 보유했다. 그런데 사채를 끌어다 쓰는 사람은 나름의 힘든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이런 사정 다 봐주다보면 사채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사채업자인 유대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는 인식이 박혔다. 그 예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이라는 희극을 보면, 샤일록이라는 사채업자가 나오는데, 이 사람도 유대인이다. 당시 중세 유렵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잘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후에 히틀러는 전 유렵에 팽배해 있던 유대인 혐오사상을 정치적으로 악용해서 홀로코스트-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 고유명사로 사용될 때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함-를 일으켰다.) 이렇듯 사채업이란 결코 좋은 사업이 될 수 없으며, 사채업자는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인풋&아웃풋은 무허가 사채업체답게 악질적인 영업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허가 받은 사채업체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듯 영업을 합니다. 하지만 무허가 사채업체의 경우에는 애초에 합법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새벽 4시에 전화를 하거나, 이웃이나 친인척에게 빚진 사실을 알리는 것은 기본입니다. 돈을 갚으라는 피켓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는가 하면, 직장까지 쫓아가서 빚 독촉을 합니다. 협박, 폭행, 감금은 애교에 불과합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선불금을 받고 집창촌에 팔아넘기기도 하고, 신체포기각서를 받은 사람에게는 장기매매도 알선합니다. 채무자가 빚을 안 갚고 도망쳤을 때는 전국을 이 잡듯이 뒤져서 찾아내고, 수색에 소요된 비용까지 빚에 포함시켜 청구합니다. 여의치 않을 때는 가족에게도 해코지를.....” “잠깐! 거기까지 했으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들어봐야 귀만 더러워지겠네요. 아무튼 결론은 박일현이 근무하는 인풋&아웃풋은 악덕 사채업체이고, 박일현은 악덕 사채업자라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가히 사회 암적인 존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긴, 생긴 것부터 그렇게 생기긴 했죠.” 누누이 말하지만 외모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외모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을 나타내는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원래 사기꾼일수록 외모는 수려한 법 아니겠나? 이렇듯 외모와 성품이 완전히 다른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외모와 성품이 정확히 일피하는 사람도 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이 자식이다. 박일현. 생긴 건 깡패같이 생겼고, 하는 짓은 사채업이다. 겨우 범퍼 좀 긁힌 걸 가지고 80만원을 요구한 자식이다. 아마 심부름센터 직원(간단히 양아치, 혹은 깡패)을 데리고 다니면서 채무자들을 엄청 조졌을 것이다. 지니의 말을 들은 나는 복수는 하기로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사실 귀찮은 마음에 그냥 잊어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런 인간인 걸 안 이상 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다. 이런 인간에게는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복수를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삼족을 멸할까요?” “......” 아이씨! 이 인간은 뻑하면 삼족을 멸하재. 지니가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지적으로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문관(참모)출신이다 보니 웬만한 일은 무력을 사용하기보단 말로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지니는 문관임과 동시에 무관이기도 하다. 전투력은 초특급 기사 저리 가라다. 실제로전장에서 언제나 맨 앞에 서서 군대를 이끌었다. 그런 지니인 만큼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과격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만약 지금 내가 ‘삼족을 멸하세요’ 라고 말하면, 지니는 실행에 옮기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살인 못해 환장한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의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지 죽이는 행위는 진정한 복수라 할 수 없다.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것이 끝 아니겠는가? 그럼 재미없지. “좀더 건설적인 복수 방법은 없나요?” “물론 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이미 계획을 짜두었습니다.” 지니는 그 계획이라는 것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10분에 걸친 계획 설명을 다 들은 나는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과연 사일런스 백작님이시군요! 이렇게 치졸하고 비열한....아니, 훌륭한 복수 방법은 생각해 내시다니! 사일런스 백작님의 고견에 감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 비하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이 방법이 아주 마음에 드네요. 역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는 돼야 진정한 복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혼자서 준비가 가능하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마침 이번 일을 하기에 적당한 분이 계시니,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럼 사일런스 백작님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뭐요?” “작전명은 뭐라고 할까요?” “작전명이요?” “예.” “으음.......” 그러고 보니 그걸 생각 안했군. 작전명을 멋지게 지어야 작전이 뽀대나고, 작전 성공 확률이 높아지는데. ‘충격과 공포’ 라든가 ‘사막의 폭풍’ , ‘여우 사냥’ 등등.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마땅한 작전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대충 지었다. “그냥 ‘사채업자 물먹이기’ 로 하죠,” “과연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이번 작전의 개요를 작전명 하나에 담으시다니. 훌륭하십니다. “하하, 뭐 별 거 아니에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믿음에 어긋나지 않게,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사채업자 물먹이기; 작전을 진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난 갖은 폼을 다 잡으며 생각에 잠겼다. 굳이 이렇게 폼을 잡은 이유는 누군가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니의 계획대로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복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전문 인력과 특수 능력이 필요하다. 지니의 인맥이라면 전문 인력 수급이 가능하고, 특수 능력 부분 역시 문제없다. 이 집엔 나를 포함해서 마법사가 넷이나 있으니, 그것도 전부 8클래스 이상. 후후~ 날 건드린 것을 평생 후회하게 해주지. “음하하하!” “앗! 웃음이 악역스러워요, 오빠.” 어느새 내 방에 들어온 라이. 난 웃음을 멈추고 라이를 안아 주었다. “걱정할 것 없단다, 라이야. 오빠는 정의의 편이거든. 푸하하하!” “그럼 오빠는 정의의 사도에요?” “물론이지. 이 오빠가 정의의 사도가 아니면 누가 정의의 사도겠니?” “정말요?” “응. 안 그래도 이 오빠는 악을 물리치기 위해 지금 칼날을 갈고 있단다.” “악이 누군데요?” “으응. 사채업자라고 있단다.” “사채업자는 뭐하는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사채업자를 설명하기 위해선 일단 사채와 사채업의 정의를 알아야하는데.....” 난 라이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사채(私債)란 개인이 사사로이 진 빚을 말한다. 그리고 사채업(私債業)이란 개인이 개인이나 기업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업을 말하고, 사채업자(私債業者)란 그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채는 금융기관보다 이자가 비싸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 등의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업는 개인이 많이 찾는다. 은행은 고객을 등급별로 나누어 판단한다. 10억 이상을 예치한 고객들의 경우에는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최상의 서비스로 모신다. 큰 은행들의 경우에는 이들을 위한 전용룸까지 마련되어 있다. 반면 일반 고객들은 청구에서 상대를 하고, 그마저도 귀찮아서 요즘은 기계(현금지급기나 공과금남부기기 등등)로 상대한다. 어떤 고객에게는 돈을 싸들고 가서 대출해 가라고 애원하고, 또 어떤 고객에게는 아무리 무릎 꿇고 빌어도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은행은 대출을 해줄 때 신중하게 판단한다. 만약 그 사람이 갚을 능력이 없다면 이자를 받기는커녕 원금까지 떼이게 되기 때문이다. 담보가치가 있는 동산, 부동산, 은행의 잔고, 직업, 월급, 이제까지의 은행 거래 내역, 또 다른 채무는 없는지, 연체를 한 적은 없는지 등등...... 하나하나 꼼꼼 하고 세상하게 살핀다. 위의 목록들은 전부 개인의 변제 능력(채무이행 능력)의 정도를 알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변제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은행은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은행의평가 기준에 미치치 못해 탈락한 사람들을 상대해주는 곳은 어둠 속의 금융기관. 즉 , 사채업체다. 사채를 찾는 사람은 이미 변제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그리고 변제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궁지에 몰린 사람이다. 은행에서 빌릴 수 있다면, 미쳤다고 비싼 이자 물며 사채를 끌어다 쓰겠는가? 변제 능력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이자는 올라간다. 사채업자들은 개인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해서 최대한의 이자를 제시한다. 돈을 빌린 지 1년 만에 이자가 원금의 배를 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2002년 10월 28일부터 시행된 대부업법, 대부업법시행령, 대부업법시행규칙에 의거한 법정 최고 이자율은 66%다. 이자율 66%에는 정상이자, 연체이자, 제반수수료 등 각종비용을 포함한 모든 금액이 포함되며 이를 초과한 이자는 받을 수 없다. 다만 이 법의 규제를 받는 자는 대부업법으로 규정된 범위에 포함된 사람만 해당되며 일반적인 개인 대 개인의 돈거래는 해당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무허가 대부업체의 경우에는 이자를 자기 멋대로 산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제멋대로 산정한 이자가 법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허가 대부업을 하면서 어떻게 일일이 법을 다 지키겠는가? 사채업을 하며 법을 지킨다는 것은 고양이가 생선을 안 먹는다는 말보다 더 말이 안 된다. 아까도 말했듯이 사채를 끌어다 쓰는 사람은 은행에서 받아주지 않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은 백이면 백 변제 능력이 떨어진다. 이렇게 변제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내려다 보니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힘들다. 자연히 폭력이나 협박 등 불법적인 방법에 의존하게 된다. 채무자:저기, 돈이 마련되지 않아서 그러는데 면치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으세요? 사채업자:예. 알게습니다. 돈 생기는 대로 천천히 갚으세요. ......이러는 사채업자 봤는가? 만약 봤다면 그 사람이 사채업자가 아니거나, 당신의 시력에 이상이 있는 거다. 빨리 안과 가봐라. 채무자:저기, 돈이 마련되지 않아서 그러는데 며칠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으세요? 사채업자:사람의 신장과 눈이 왜 두 개씩 있는지 아시나요? 채무자:예? 사채업자:지금 같은 때 하나식 빼서 팔라고 있는 겁니다. 돈이 없으시면 장기매매 알선해 드릴 테니 안심하세요. 채무자:....... 뭐, 이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수준이다. 신체포기각서를 쓰는 경우도 있고, 채무자가 젊은 여자일 경우에는 성매매를 알선해 화대를 받아 챙기거나 선불금을 받고 집창촌에 팔아넘긴다. 사채를 끌어다 쓰는 사람의 최후르는 세가지. 쥐어 짜이거나, 빼앗기거나, 죽거나. 사채업자들도 나쁜 놈이지만, 돈을 빌려 안 갚는 사람도 문제다. 사채를 끌어다 쓰는 경우는 대부분 당장 돈이 없어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그때는 이자가 얼마인지, 단지인지 복리인지도 생각 않고 돈을 빌린다. 그러다보니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지금 없는 돈이 얼마 후에 생길 리 있겠는가? 돈이 생겨도 그 사이에 엄청나게 불어난 이자는 어떻게 감당할것인가? 정말 돈이 없어서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냥 죽어야 한다. 사채를 끌어다 쓰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 그리고 정 사체를 끌어다 쓰려면 최소한 장기 몇 개 빼서 팔 각오는 해야한다. 남의 돈 빌려 안 갚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략 이런 거란다. 그런니까 라이는 절대 사채 끌어다 쓰면 안 돼. 알았지? 뭐, 스머프만한 것이 사채를 끌어다 쓸 일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미리 가릋서 나쁠 건 없겠지. “예, 오빠! 라이는 절대 사채 끌어다 쓰지 않을게요!” 라이는 굳은결심을 한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엽고 깜찍할 수가 없다. “우리 라이는 오빠 말 잘 드는 착한 엘프구나.” “헤헤~ 라이가 원래 좀 착하잖아요.” “그래. 우리 라이가 원래 좀 착하지.” 난 라이를 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쪼옥~! “헤헤!.” 눈을 크게 뜨고 귀엽게 웃는 라이. 이런 딸이 있어서 행복하다. 라이는 내 목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라이 차 언제 태워주실 거예요?” “으응. 조만간 태워줄게. 조금만 기다리렴.” 일단 복수가 먼저다. “라이 놀이공원 가고 싶어요!” “그래. 아! 이제 조금 있으면 어린이날이니 오빠가 그때 놀이공원 데리고 가줄게.” “정말요? 정말 어린이날에 놀이공원 놀러 가는 거예요?” “응응. 루시아랑 라이랑 루비랑 루랑 다 같이 가는 거야.” 놀이공원 얘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반짝 초롱롱 빛내는 라이. 그눈을 통해 라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얼마나 가고 싶을까? 사실 라이는 전에 한번 놀이공원에 데려간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날 비가 오는 바람에 제대로 놀지 못했다. 그리고 루와 루비는 놀이공원 구경도 못했고.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미안하다. 이제부터라도 자녀들과 자주자주 놀아주는 착한 아빠가 돼야지. “라이 졸려요, 오빠.” “졸려? 그럼 자야지.” 라이는 내 팔을 베고 자연스럽게 누웠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나를 껴안고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라이는 금방 잠들었다. 쌔근쌔근 라이가 자는 모습은 마치 아기 천사 같았다. 아니, 아무리 아기천사라 해도 우리 라이의 귀여움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라이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주는데 루시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야?” 난 벌떡 일어나 루시아를 맞이하고 싶었지만, 라이가 내 팔을 베고 있는 관계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라이 여기 있나 해서. 벌써 자고 있네.” “응 졸립다고 해서 내가 재웠어.” 루시아는 라이가 깰까봐 걱정되는지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쩜 우리 라이는 이렇게 자는 모습도 귀여울까?” 라이 앞에서는 팔불출 엄마가 되고 마는 루시아. 참고로 난 루시아가 팔불출 엄마든 구불출 엄마든 상관없다. 아아~루시아한테도 이렇게 팔베개를 해주고파~. “루와 루비는?” “내 방에서 자고 있어.” 어쩐지 집안이 조용하다 했다. “아까 방 안에서 지니 오빠랑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중요한 얘기하는 것 같던데.” “으응. 별 얘기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설마 또......?” 루시아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번에도 바람 피면 그땐 정말 끝이야. 다시는 니 얼굴 안 볼 거야.” “헉! 바,바람이라니...... 호환마마보다도 무섭다는 바람이라니..... 나,날 어떻게 보고 그런말을......” 난 재빨리 정색하며 말했따.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야,루시아.” “흐음, 그래?” 전혀 못 믿겠다는 불신 가득한표정. 뭐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지은 죄가 많은지라 할말이 없다. “그럼 아까 지니 오빠랑 무슨 얘기했어?” “으응.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면 말해줘도 되겠네. 빨리 말해봐.” 루시아가 계속 추궁하자 난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사채업자한테 복수하려고 계획을 짰어. 현재 기획 안까지 통과 된 상태야. 실행에 옮기는 것만 남았어.” “뭐?” 루시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꼭 복수를 해야겠어? 그냥 넘어가면 안 돼?” “그냥 넘어가면 너무 억울하잖아. 이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응징이야. 아이들에게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훈으 f주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해야돼.” “그래도......” “걱정하지 마. 폭력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폭력적인 방법보다 훨씬 잔인한 방법이다. 차라리 맞고 끝내는 것을 바랄만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다. 사채업자 박일현에게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 것 아닌가? “알았어, 너 좋을 대로 해.” “응. 고마워, 루시아.” 루시아가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다니! 난 당장이라도 일어나 루시아를 끌어안.....으려 했으나, 라이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으음, 아쉽군. * * * * 사채업자 박일현. 그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해 일하는 프로페셔널이다. 나름대로 직업의식이 투철하다고나 할까? 사채업자가 직업의식이 투청하다는 것은 채무자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다. 사채의 특성상 한번 이자가 밀리기 시작하면 원금을 넘는 것은 순식간이다. 원금에 이자가 붙고, 밀린 이자에 또 이자가 붙는다. 오죽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 복리(複利)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아무튼 이렇게 되면 돈을 갚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자 갚기만도 버거운 사람들이 어떻게 불어난 원금을 상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 그 유명한 명장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라는 말을 남겼다. ‘먹고 죽을래도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조지면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그래도 돈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람은 몸으로 갚는 수밖에 없다. 젊은 여자의 경우에는 성매매 알선이라도 해줄 수 있지만, 나이든 여자나 남자의 경우에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의 몸은 보고(寶庫)나 다름없다. 장기매매알선. 이제까지 박일현이 해체한 인간만 해도 족히 수십 명은 될 것이다. 직업소개소나 집창촌에 팔아넘긴 여자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죽인 사람도 꽤 됐다. 패다가 실수로 죽인 경우도 있고, 작정하고 죽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죽이는 것보다는 해체를 선호하는 편이다. 죽고 나면 쓸모없는 몽뚱이지만, 해체하면 상당한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무허가 사채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한다. 사정 다 봐주면서 어찌 사채업을 하겠는가? 박일현이 날 때부터 이런 인간은 아니었다. 뭐, ‘안 될 설싶은 나무는 싹수부터 노랗다’ 고, 박일현이 어렸을 때부터 싹수가 노랗긴 했다. 박일현의 아버지는 박일현이 태어나기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갔다. 때문에 박일현은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국민학교(이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때부터 싸움에 소질을 보였던 박일현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일진회에 가입했다. 그는 2학년 때 3학년을 누르고 캡짱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열받은 3학년 일진 십여 명이 그를 유인해 집단 구타했다. 전치 8주라는 상처를 입고 입원한 그는 퇴원하자마자 복수에 나섰다. 폭행에 가담했던 선배들은 밤길에 기습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거나, 심하면 병신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폭행을 주도했던 선배를 때리던 중 너무 흥분한 나머지 죽여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일로 박일현은 5년을 복역했다. 감옥(소년원포함)이라는 곳이 원해 죄지은 사람을 교화 시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이 안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워서 나오거나 폭력 조직에 가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정도면 교화 시설이 아니라 범죄자 양성소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의 재범률이 높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아무튼 그곳에서 박일현은 조직폭력배와 깊은 인연을 맺고, 출소하자마자 주먹 세계로 빠져든다. 그는 특유의 비열함과 주먹 실력으로 그 바닥에서 잘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며 조직폭력배 강력 단속이 시작되었고, 그는 3년 형을 선고받고 생애 두 번째로 감옥에 갔다. 감옥 안에서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조직폭력배라는 직업은 미래가 없었다.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 심심하면 감옥에 끌려 들어가고,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위험수당 같은건 당연히 안 나온다. 산재보험도 가입을 안 받아주니, 다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그는 업종 전환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의 적성에 맞고 수익도 괜찮은 직업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때 들은 얘기가 사채업이었다. 사채업은 굉장히 매력적인 직종이었다. 돈 안 갚는 사람에게는 마음껏 주먹을 쓸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수익도 마음에 들었다. 경찰에 잡혀갈 확률도 조폭보다 훨씬 낮았다. 그는 감옥 안에 있는 동안 관련 법률을 공부했다. 중학교 중퇴 이후 처음으로 해보는 공부였다. 출소 즈음해서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가족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이었기에 그의 슬픔은 더욱 컸다. 그는 천국에서 보고 계실 어머니에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훌륭한 사채업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출소 직후 박일현은 감방 동기의 도움을 받아 사채업체에 취직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돈을 받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채업자가 되었다. 박일현은 지금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다. 이유는 며칠 전에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상대가 유턴하는 것을 보았다, 차를 멈추려면 멈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 달렸다. 어차피 상대 잘못이었기에 들이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를 들이받긴 했지만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았다. 돈도 받을만큼 받아냈다. 어차피 범퍼와 라이트를 갈 생각이 없으니, 40만원이면 괜찮게 받은 셈이다.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다. 이유는 그 자식 떄문이었다. 나이도 어린놈이 뉴 렉서스턴을 몰고 다니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서양인으로 보이는 엄청난 미녀를 태우고 다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 뺀질거리는 태도였다. 박일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안 해본 짓이 없었다. 사람도 십수 명 죽여 봤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지금은 사람을 주기오고도 편안히 잠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은 살기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대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이 위축된다. 박일현은 자신의 앞에서 그딴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몇 명 만나보지 못했다. 설사 조직폭력배라 해도 자신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그 어린놈은 자신의 앞에서 태연하게 뺀질거렸다. 몇 번 위협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박일현은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주먹으로 배를 때리고, 발로 얼굴을 걷어차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기분이 풀리진 않았다. 최소한 반병신을 만들어 놓거나, 죽여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다. 아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이다.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정말 박살을 내주리라. 박일현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 * * * 지니와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각종 신문과 잡지, 그리고 인터넷을 뒤지는 일이었다. 박일현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나는 박일현에게 명함을 받았기에 당연히 핸드폰번호도 알고 있다. 하지만 연락처의 출저가 명함이어서는 안 된다. 박일현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찾았습니다. 저축은행대출법은 인풋&아웃풋. 적힌 핸드폰 번호는 박일형 개인의 것입니다.” “역시 예상대로군요.” 무허가 사채업자들이 이런 곳에 관고를 낼 것이라는 예상이 주효했다. 지니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집 전화로 하면 발신자 번호 추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지니의 핸드폰으로 걸었다. “빈대시장 신분 보고 연락드립니다. 대출을 받으려고 하는데요. 담보야 물론 있지요. 예, 그럼 조금 있다 찾아뵙겠습니다.” 지니는 핸드폰 폴더를 덮었다. “만나재요?” “예. 정확히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잘됐군요.” 본격적인 작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 * * * 오후 2시. 안산에 있는 저축은행대출법인 인풋&아웃풋 사무실. 사무실 내부는 깔끔하고 조용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평범한 회사인 줄 알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고객을 맞는 장소였다. 나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온 고객 중 상당수는 나중에 지하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피와 토사물이 가득한 지하실에서 고객은 돈을 제때 갚지 않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조금 기다리자 한 남녀가 들어왔다. 외국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남자는 머리를 올빽으로 넘겨 하나로 묶었고, 실크로 된 꽃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다. 금색 손목시계, 빛이 나는 구두 등등 몸에 걸친 모든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명품이었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잘 생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느끼하면서도 비열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여자 역시 제법 예뻤다. 165cm 정도 되는 키에 늘씬한 몸매. 살짝 웨이브진 검은색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흘러내렸고, 귀에는 크고 예쁜 원형 귀고기가 걸려 있었다. 얼굴 전체에 옅은 화장을 했고, 입술에는 반짝이는 붉은색 립스틱을 칠했다. 눈은 보라색 아이 쉐도우와 반짝이 가루로 장식했고, 눈썹은 옅은 초승달처럼 예쁘게 그렸다. 입고 있는 옷은 하늘하늘한 옅은 연두색 원피스와 하얀색 가디건. 가디건은 그물코가 크게 짜여있어, 어깨와 팔의 새하얀 살결이 사이사이로 드러나 보였다. 신고 있는 것은 반짝이는 옅은 보라색에 힐이 높은 구두였고, 손에는 루이비똥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작고 예쁜 갈색 핸드백을 들고있었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를 했다. 박일현은 한눈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채업을 하다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첫인상만 봐도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런 사람들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설마 겉멋만 든 년놈들인가?’ 명품에 미쳐서 주제도 모르고 마구 카드를 긁는 여자들. 일단 사긴 샀는데 카드대금을 갚을 돈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카그를 개설하고, 그것을 긁어 원래 카드를 막는다. 그리고 그 카드는 또 다른 카드를 개설해 막는다. 이런 식으로 돌려 막기를 하다보면 이자는 순식간에 불어나고 결국 이곳을 찾게 된다. 이곳에서 돈을 빌려 카드값을 막지만, 그건 여우 피해 호랑이굴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그런 여자들의 마지막은 뻔하다. 가지고 있는 명품을 전부 압류당하고, 집창촌에 팔려 가는것. 박일현은 그런 여자들을 숱하게 봐왔다. 하지만 눈앞의 남녀는 그런 여자들과는 좀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남자는 그런 듯 보이지만, 여자는 아니었다. 돈도 없으면서 명품을 걸친 여자들은 어딘지 모르게 천박해 보이고, 언밸런스해 보인다. 바로 이 금발 남자처럼, 하지만 정말 돈이 있어서 명품을 걸치는 여자들은 조금도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명품은 사치품이 아닌 격에 맞는 소비다. “헬로우” 들려온 목소리에 박일현은 남자를 보았다. 금발의 남자는 멋진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박일현 씨 맞지요? 마이 네임 이즈 지니. 시얼런스 지니라고 합니다.” 말하는 도중 영어를 살짝 섞어 말하는 남자. 처음에는 그냥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한국어를 잘하는 걸 보니 혼혈아인 것 같았다. 잘 보니 영화에서 보던 외국인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면서, 왜 영어를 섞어서 쓰는 거지? 영어 잘한다고 자랑하고 싶은 건가? 유식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무십해 보인다. 하지만 옆에 있는 여자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꺄아! 멋있어. 오빠는 어쩜 그렇게 영어를 잘해?” “아임 프롬 잉글랜드. 하하, 영구에서 살다왔으니 영어를 잘하는건 당연하지.” “그런가? 호호~ 하긴 그러네. 이어 러브유~, 베리베리 러브~ 어때, 오빠? 내 영어 실력도 괜찮지?” “그레이트!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아메리카에 있는 마이 프렌드 보다 유(You)가 더 잘해. 누구한테 배웠는데.” “호호~ 누구긴 누구야? 당연 허니지.” 여자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자 남자는 사랑스럽다는 얼굴을 하며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박일현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잘들 논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박일현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예. 제가 박일현입니다. 일단 저쪽에 앉으시죠.” 사무실에 찾아온 남녀중 남자는 당연 지니였다. 그리고 여자는 지니와 ‘요즘 교제하는 여성’ 이었다. 여자의 이름은 이세영. 나이는 22세이고, 현재 서울예대(서울예술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다.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의사로 현재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거주하고 있다. 다시 말해 4천만 국민 중 5퍼센트도 채 안 되는 부르주아 계급에 속해있는 여성이다. 지니가 요즘 교제하는 여성들 중 고르고 골라 이 여성을 선택한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여성이야말로 이번 작전에 딱 맞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사채업자 물먹이기’ 작전을 실행하기 위한 핵심 인물이었다. 비중을 따지자면 지니 다음 정도? 지니가 부탁을 하자 세영은 흔쾌히 응했다. 지니의 부탁이라면 기름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 각오까지 되어있는 그녀였다. 오히려 지니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둘은 박일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화장을 진하게 한 여인이 차를 나왔다. “대출을 받고 싶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지니는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옆에 앉은 세영의 몸을 계속 더듬었다. 세영은 싫어하기는커녕 지니에게 완전히 몸을 내맡겼다. 하는 짓을 보니 당장 방 하난 잡아줘도 될 듯하다. “얼마 정도 필요하십니까?” “일단 급한 대로 10억 정도가 필요합니다. 그 이상이면 더 좋지요.” 박일현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 표정을 수습한 그는 재빨리 계산을 했다. 10억이면 보통 큰 돈이 아니였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대출 받아가는 돈은 적게는 100만원, 만아봐야 1억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10억이라니! “글쎄요. 10억이라...... 액수가 너무 크군요.” 세영이 도끼눈을 떴다. 그리고 박일현을 노려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10억이 크긴 뭐가 커요? 그딴 푼돈 가지고, 흥! 기분 나빠. 나가요, 오빠. 우리 다른데로 가요.” 세영은 정말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깐만 앉아봐, 세영아. 지금 오빠가 얘기하는 중이잖아.” 지니가 타이르자 세영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자리에 앉았다. 박일현은 지니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로 대출 받으려고 하려고 하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게......” “허니의 아버지는 큰 사업을 하고 있어요. 외국 기업인데 아주 유명한 회사에요. 영국에 본사가 있고, 세계 각지에 지사가 있어요. 기업 가치가 수백억, 아니, 수천억은 돼요. 이 나라에는 조만간 지사가 건설될 예정이에요.” 지니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세영이 먼저 말을 쏟아냈다. 지니는 세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박일현에게 말했다. “세영이 말 그대롭니다. 아버지께서 아주 큰 사업을 하고 계시지요. 전 지사를 건설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아아~ 그러셨군요,” 박일현은 짐짓 감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 남자는 사업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생긴 것부터 시작해서 하는 짓이 여자들 등쳐먹고 사는 제비 같았다. 결정적으로 사업한다는 놈이 왜 이런 곳을 찾아왔는가? 개인 기업의 경우에는 사채를 끌어다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합ㅂㅂ적(허가 받은)사채다. 기업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사채업자들은 따로 있다. 그들은 기업의 가치와 앞으로의 수익률을 철저히 계산해서 돈을 빌려준다. 금리는 은행 이자보다 높으나 터무니없는 정도는 아니다. 이때의 사채는 투자에 가깝다. 반면, 큰 기업의 경우에는 자금이 필요할 때 주식이나 채권을 말행한다. 자신 가치가 수천억 되고, 전 세계에 지사를 건설할 정도라면 주식회사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채권을 발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뭐하러 무허가 사채업체를 찾아왔단 말인가? 그것도 겨우 10억 빌리러. “실례지만, 기업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그 정도로 d명한 회사면 들어봤을 것 같은데.” “아직 아시아 쪽엔 들어오지 않았으니, 들어도 모르실 겁니다. 저희는 주로 유럽과 아메리카 쪽을 중심으로 영업을 하는지라. 이번에 한국에 지사를 건설하는 것은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위함이죠” “그래도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저희 회사가 한국에 진출하는 것은 극비사항이거든요. 만약 이 사실이 새어나간다면 경쟁기업들이 가만히 있이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지사 건설이 완료되어 언론에 발표하기 전까지는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그럼 업종은......?”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경쟁기업에 정보가 새어나갈 수도 있기 때문에......” “극비사항이라잖아요! 오빠가 나한테도 말 안 해주는 걸 당신한테 말해줄 것 같아요? 사채업자면 사채업자답게 돈이나 빌려줄 것이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아! 기분 나빠!” 세영은 자꾸 캐묻는 박일현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지니는 표정을 굳히며 세영에게 말했다. “세영이 너 조용히 안해? 오빠가 사업 얘기하고 있는데 왜 자꾸 끼어들어?” “미,미안해,오빠. 나,난 그냥.....” “이제부터 입 다물고 있어.” “알았어, 오빠. 미안해.” 세영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객를 푹 숙였다. 지니는 박일현에게 말했다. “현재 인천에 지사를 건설 중입니다. 정확한 장소는 회사 기밀인지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3개월 후쯤이면 완공될 텐데, 자금 흐름이 잠깐 막혔습니다. 일주일 정도 후면 본사에서 수백억이 들어올 텐데, 지금 당장 자금이 없읜 건설을 지속할 수없습니다. 그래서 급한 대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겁니다.” “........”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없다. 기업 가치가 수천억에 전 세계에 지사까지 있는 거대 기업이 뭐 때문에 자금 흐름이 막힌단 말인가? 뭐, 자금 흐림이 막힐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10억이 없어서 무허가 사채업체를 찾아다는 게 말이나 되냐? “담보는 있으신가요?” “예. 물론입니다.” 흥! 그럼 담보가 없을까 봐요? 이번에 재건축 단지로 지정된 강남지 세 채에요/“ 세영의 말을 지니가 받았다. “맞습니다. 13평짜리 아파트로, 이번에 재건축 단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오기 전 부동산에 들러 알아보니 호가는 7억이 넘고, 급매물도 최소 6억 이상에 거래된다고 하더군요.” 지니가 손짓하자 세영은 핸드백에서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박일현이 살펴보니강남 아파트 세 채의 등 기부등본이었다. 강남 개포동 아파트, 그것도 재건축 단지로 지정된 곳이라면 없어서 못 판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좋은 부동산이다. 이 정도 담보라면 10억은 문제도 아니고 20억까지도 가능했다. “여성분 명의로 되어있으신 것 같은데.....” “맞아요. 세 채 다 제거예요.” “그럼 이걸 담보로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이 한 수십억 되는데 전부 해외에 있는 것인지라, 이 나라에서 담보로 잡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부득이 하게 세영이 부동산을 담보로 잡게 되었습니다.“ “난 괜찮아, 오빠. 어차피 오빠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오빠 돈인데, 뭐.” “그래도 너한테 그런 부탁하기가 미안하잖아.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한국 부동산 좀 사두는 건데.” “어차피 일주일 후면 다 갚을 거잖아.” “물론이지. 지금 잠깐 자금 흐름에 막혀서 그런지, 일주일 후면 백언 정도가 들어올 거야. 그럼 오빠가 세영이한테 차 한 대 사줄게.” “나 차 있는데.” “그건 렉서스잖아. 오빠가 BMW로 하나 뽑아줄게. 그 정도는 타고 다녀야 어디 가서 내 애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정말? 꺄아! 오빠 최고!” 지니는 매달리는 세영을 끌어안으면 박일현에게 말했다. “재건축 단지로 지정된 강남구 개포동 아파트 세 채입니다. 이정도면 담보 가치는 충분할 듯한데요.” “예. 그런 것 같네요.” 이 정도 담보면 은행에 가도 충분히 대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허가 사채업체를 찾아왔다는 것은....... 어찌 된 일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박일현은 웃음을 지었다. “언제까지 필요하신가요?” 지니는 담배를 입에 물며 대답했다. “늦어도 내일까진 필요합니다. 그래야 지사 건설을 재개할 수 있거든요. 하루만 늦어도 손해가 막심한지라.” “대출 기한은.....?” “일주일이면 됩니다. 일주일 후면 본사에서 다시 자금을 보내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10억이 큰 돈이긴 하지만, 담보가 확실하니 대출해 드려도 될 듯하네요.” “아! 전부 현찰로 가능하지요? 당장 여기저기 써야 하는지라, 현찰이 편하거든요.” “예. 물론 가능합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사업 때문에 바쁘긴 하지만, 한번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10시에 이곳에서 다시 뵙기로 하지요. 그때까지 돈을 마련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계약서를 써야하니, 필요한 서류를 전부 갖추고 오셔야 합니다. 아! 담보가 여성분 것이니만큼 계약서는 이쪽 여성분께서 직접 쓰셔야 합니다.” “흥! 누가 그걸 모를까 봐요? 돈이나 제대로 준비해 놓으세요.” 지니는 세영의 엉덩이 부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일까지 현찰 10억을 확실하게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지사 건설 문제가 급박한 관계로.......” “알겠습니다.” 박일현은 손을 내밀었고, 지니는 그 손을 잡았다. 악수를 끝마친 지니는 세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건물 앞 주차장에는 렉서스 한 대가 서 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세영은 조수석에 앉은 지니에게 말했다.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지니는 머리 스타일을 바꾸며 외눈 안경을 꼈다. “완벽했습니다. 연기 실력이 아주 훌륭하시더군요.” “저, 정말요?” ‘지니님이 내 연기를 보고 완벽하다고 칭찬해 주시다니!’ 세영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좋아했다. 무엇보다 지니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저를 믿고 강남 집 세 채를 맡기신 것에 뭐라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번 작전을 실행함에 있어서 믿음이 가장 중요했다. 만약 지니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정말로 시가 20억짜리 집을 꿀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집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닌 걸요. 지니님께서 원하신 다면 가지셔도 좋아요.” “하하, 그럴 리가요.” 지니는 웃어 넘겼지만, 세영은 진심이었다. 지니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가 않았다. 이미 지니에게 몸과 마음을 전부 바쳤기 때문에...... 아아~ 어떻게 된게 만나는 여자들마다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하는 건지...... 누가 받아 주기나 한대?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데이트나 즐길까요?” “예, 지니님.” 세영은 시동을 걸었다. 지니는 핸드폰을 꺼내 히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따르르릉! 아까부터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아! 사일런스 백작님. 갔던 일은 잘되셧나요?” [예. 덕분에 잘 되었습니다. 내일 오전 10시에 사무실에서 다시 만나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넘어왓군요. 하긴, 담보가 확실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겠죠.” [예.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릅니다. 작전을 끝마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철두철미하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언제쯤 집에 들어오시나요?” [지금 이세영님과 데이트를 하는 중입니다. 끝마치는 대로 돌아 가겠습니다.] 으음, 데이트라.........좋겠군. “천천히 놀다 들어오세요.” [예. 그럼 전 이만.] “예. 들어가세요.” 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걸로 1단계는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지니의 말대로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작전은 지금부터가 본격적이니. 이번 작전의 목표는 박일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물 먹이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물을 먹이는가? 사채업자를 물 먹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돈을 빌린 다음 안 갚으면 되는 거다. 하지만 남의 돈 빌려서 안 갚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상대가 사채업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바꿨다. 돈을 빌린 다음 안 갚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린 다음 돈을 빌렸다는 사실 자체를 없애버리기로. 나는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에 앞에 나설 수가 없다. 그래서 대신 지니가 나섰다(내가 얼굴이 안 알려졌다 해도 이번 일의 적임자는 지니 였기에 지니에게 맡겼을 것이다.) 지니는 요즘 교제하는 이세영이라는 여성과 함께 대출 문제로 박일현을 만났다. 이때 둘은 각자 다른 인물을 연기하고 있었다. 조작된 둘의 관계는 다음과 같았다. 부잣집 딸로 태어났으나, 헤프고 가볍고 뇌에 주름이 없는(다시 말해 골이 빈)이세영. 언제나처럼 강남 유명 나이트클럽에서 몸을 흔들어대던 세영은 그곳에서 잘생기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외국인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사일런스 지니. 지니는 자신을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혼혈아하고 소개했다. 아버지가 기업을 경영하고 있고, 그 기업은 영국에 본사가 있고 전 세계에 지사를 두고 있는 아주 큰 기업이라는 것과 자신이 지사 건설 문제로 한국에 잠깐 와있다는 사실까지 말해주었다. 잘생긴 것도 모자라 영어도 잘하고, 게다가 세계적 기업 회장의 아들이라니! 한눈에 반한 세영은 지니에게 대쉬했고, 지니도 세영이 마음에 들었는지 둘은 바로 사귀었다.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카페엣 만난 지니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니의 얼굴 전체에 그늘이 드리워진 것을 본 세영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어, 오빠?’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봐, 오빠.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잖아. 사랑하는 사람에겐 비밀이 없는 거래. 혹시 나한테 말해주면 안되는거야?’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러지 말고 말해봐, 오빠. 혹시 알아? 내가 도움이 될지?’ 세영이 게속 다그치자 지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금 흐름이 막혔는지 일주일쯤 뒤에야 돈을 보내준대. 당장 돈이 없으면 지사 건설이 중단될 판인데, 하루만 중단돼도 손해가 막심해 10억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지금 당장 돈이 없으니. 정말 큰일이야. 며칠 안에 해결이 나지 않으면 아무래도 영국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럼 언제쯤 돌아오는데?’ ‘글쎄. 사실 아버지는 내가 영국에서 당신을 도와주길 바라셔. 하지만 난 아버지 밑에 있고 싶지 않아. 부모 잘 만나서 출세했다는 얘기 듣기 싫거든. 난 내 실력으로 올라가고 싶어. 그래서 이번 한국행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거야. 그런데 이렇게 다시 아버지께 손을 벌리러 가야 한다니. 이번에 가면 다시는 한국에 오지 못할지도 몰라.’ 이 말을 들은 세영은 깜짝 놀랐다. 이대로 지니를 놓칠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10억이라고 했지? 그거 내가 마련해 줄게, 오빠. 아빠가 내 명의로 해준 집이 세 채 있어. 그거 다하면 20억은 될 거야. 그걸 담보로 해서 대출 받으면 되지 않을까?' '그래? 그런데 은행 쪽에서 대출 받는 것은 피해야 돼. 자칫 잘못 하면 우리 회사가 자금력이 부족한 걸로 비춰질 수 있거든. 그래서 사채 쪽으로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오빠 좋을 대로 해. 어차피 일주일쯤 뒤에 돈 들어온다며.’ ‘너한테 이런 도움 받는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사정이 워낙 급하니 사양도 못하겠고...... 아무튼 고맙다.’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난 오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사랑해, 세영아.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야.’ ‘나도 사랑해, 오빠.’ 이것이 대략적인 둘의 관계다. 스토리를 보면 알겠지만, 지니의 정체는 여자 등쳐먹는 제비다. 지니가 세영을 부동산을 담보로 잡아 사채 10억을 빌리는 이유는 사업자금 때문이 아닌, 자신이 먹고 날라버리기 위함이다. 박일현이 이러한 계획을 눈치 챌 수 있도록 지니는 제비 역할을, 세영은 골 빈 부잣집 딸 역할 연기했다. 둘의 외모와 행동을 본 박일현은 어째서 지니가 사채를 빌리려하는지 눈치 채고, 의심하지 않고 대출을 해줄 것이다. 그 다음 대출의 증거가 되는 자룔를 전부 파기한다. 그럼 박일현은 한다미로 물 먹게 된다. 이런 작전이 가능한 것은 마법 덕분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출의 증거가 되는 자료를 파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법을 쓴다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 “음하하하!” “왜 그렇게 웃어?” “헙! 아무 것도 아니야, 루시아. 그냥 한번 웃어 봤어. 그나저나 오늘 날씨도 좋은데 우리 드라이브나 한번 할까? 응?” “됐어. 저번처럼 또 사고 내려고?” “아니야.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날 믿어줘, 루시아.” “어디 갈 건데?” “니가 원하면 어디든지, 아이리스 왕국까지도 갈 수 있어, 루시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루시아는 핀잔을 주었지만, 그리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난 재빨리 루시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엔진 길들일 겸 동네나 한바퀴 돌고 오자.”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놔.” 내가 루시아와 함께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어린 엘프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놀이터에서 놀다왔는지 흙투성이다.너희들 흙 털고 들어와. 그리고 놀고 온 다음에는 손이랑 얼굴 깨끗이 씻는거 알지?“ “예, 언니.” 아이들은 흙을 탈탈 털어냈다. “오빠랑 언니 나가는 거예요?” “응. 오빠랑 언니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집 안에서 조용히 노고 있으렴.” “어디 가시는데요?” “그게.......” 드라이브 한다고 하면 이것들이 따라붙을지도 모른다. 그럼 루시아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아무래도 다른 핑계를 대는 것이 좋겠지? 내가 적당히 꾸며서 말하려는 순간 루시아가 말했다. “언니는 오빠랑 드라이브 하고 올게.” “.......” 헉! 안 돼! 이것들이 따라붙으면 어쩌려고? ‘우리도 드라이브 하고 싶어요오~’ 라고 합창을 한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아이들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응? 왜 그러니?” 나의 물음에 라이가 손가락을 빼며 대답했다. “차 없어요.” “헉! 뭐라? 차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전에 일루니아 이모랑 인디 오빠가 끌고 갔어요.” 라이가 말하자 루비와 루가 옆에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맞아요, 오빠. 일루니아 언니가 운전하고, 인디 오빠가 조수석에 앉았어요.” “데이트 하고 오겠대요.” “......” 차주인에게 말 한 마디 없이 남의 차 끌고 데이트 간 일루니아 여사님 커플. 나도 아직 한 번밖에 못 몰아본 차를 끌고 가다니! 이렇게 경우 없는 일이! 난 폭발하려는 분노를 참으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니들은 뭐 했니?” “예?” “그 아줌마가 차 끌고 갈 동안 보고만 있었니?” “아니에요, 오빠! 라이는 보고만 있지 않았어요!”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당당하게 말하는 라이, 역시 우리 라이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 ‘잇츠 디퍼런트(It' s Different)’ 라고나 할까? 아마도 라이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차를 끌고 가려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잔악무도한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런 라이를 마구 혼내서 울렸을 것이다. 힘없는 라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계속되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라이는 길가에 쓰러져 펑펑 울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런 라이를 비웃으며 유유히 차를 끌고 주차장을 빠져 나갔을 것이다. 아아~ 인간이 어찌 그리 잔혹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했다. 그 순간, 라이가 말했다. “라이는 주차장 밖까지 나가서 이모랑 오빠를 배웅해 줬어요. 헤헤~.” “루비도 배웅해줬어요, 오빠.” “저도 손 흔들었어요, 형.” “......” 일루니아 여사님이 뽑은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나의 뉴 렉서스턴을 끌고 가는 동안 손이나 흔들고 있었다는 건가? “이런 개념 없는 엘프들 같으니! 거기서 배웅을 왜 해? 바퀴 밑에 드러누워서라도 못 가게 막았어야 할 거 아냐?” “왜 우리한테 그러세요, 오빠?” “맞아요. 라이는 잘못한 거 한 개도 없어요.” “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어요.” “......헉!” 어깨동무 대형을 취한 채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어린 엘프들. 그 기세에 잠시 밀릴 뻔했으나, 나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쥐방울만한 것들이 감히 오빠한테 바락바락 대들다니!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여봐라! 어서 쇠빳따를 대령하라!” 내가 신발장 뒤에 있는 쇠빳따를 찾으려 하자 아이들의 표정이 확 변했다. 방금 전까지의 당당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벌벌 떨었다. 아직 쇠빳다로 맞아본 적은 없지만, 쇠빳따의 위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후후후~ 쇠빳따의 위력을 뼛속까지 느끼게 해주마! “뭐하는 짓이야? 왜 애들한테 그래?” 루시아는 아이들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루시아 말이 맞다. 이 어린 것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잘못이 있다면, 내 차를 멋대로 끌고 나간 일루니아 여사님한테 있다. 으음, 그나저나 기름은 채워 오려나? 그래도 양심이 있으면 ‘만땅’ 으로 채워오겠지? * * * * 다음날. 일루니아 여사님은 기름을 안 채워왔다. ‘엔꼬’ 나기 직전까지 굴리고도 기름 한 방울 안 채워 오다니. 양심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이제부터 차 빌려주나 봐라. 쳇! “.......” 뭐, 이건 그리 중요한 문제 아니다.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지금부터 ‘사채업자 물 먹이기’ 2단계 작전에 돌입해야 한다. 1단계 작전이 박일현과의 접촉이 목적이었다면, 이번 2단계 작전은 대출 계약을 하고, 계약의 증거 자료가 될만한 것을 파기하는 것이 못적이다. 이번 작전부터는 크로니스가 도와주기로 했다. “고마워요, 크로니스.” “어차피 할일도 없는데요.” “그래도 절 위해 이렇게 나서주시다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마음 쓰지 말아요.”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크로니스. 아아~ 내가 못나 크로니스에게 신세만 지는구나. “저도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나섰습니다만.....” “그래서 어쩌라구요?” 난 지니를 쏘아봐주었다. 지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아! 이세영님께서 오셨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잘 하세요.” “저만 믿고 걱정 놓으십시오.” “.......” 그런 말을 들으니 더 걱정되는군. 지니는 이세영이라는 여자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크로니스와 내가 있는 곳은 인풋&아웃풋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에 차를 세워둔 우리는 먼저 차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사채업자는 방심해선 안 될 존재예요. 그들은 보다 확실한 계약을 위해 계약서에만 의존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 녹음기와 캠코더까지 동원할 겁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말이죠.” “그래봐야 다 같이 파기하면 그만입니다. 그러한 전자기기들은 파기하기가 더 쉽지요.” 난 옆에 있는 노트북을 켰다. 지니가 말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자 인풋&아웃풋 내부의 모습이 LCD모니터에 나타났다. 난 연결해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제 목소리 들리나요? 들리면 무슨 말이든 해보세요.” 지니는 왼쪽 귀에 소형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기계에 이상이 없다면 내 말이 들릴 것이다. [어제 즐거웠지?] 지니가 말하자 옆에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지니의 가슴쪽에 카메라가 설치 되어있기 때문에 지니의 앞만 보이지 옆은 안 보인다.) 여자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오빠. 매일 오빠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걱정하지 마. 지사만 건설 되면 정식으로 한국에 부임을 거니까.] [정말? 꺄아! 좋아라~.] “......” 이것들 내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지금 염장 지르는 건가? 그 순간, 모니터에 박일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양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박일현. 이렇게 차려 입으니 별로 깡패 같아 보이지 않는다. 박일현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둘을 반갑게 맞았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모니터를 후려갈기고 싶은 충돌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저곳에 뛰어들어 박일현을 떡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복수가 아니기에 꾹 참았다. 잠시만 기다려라.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박일현은 지니와 세영은 데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난 재빨리 성계도면을 폈다. 인풋&아웃풋 사무실의 구조가 전부 나타나는 설계도면이다. 참고로 이러한 장비들은 전부 지니가 준비해온 것이다. ‘안 하는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는인간’ 이라는 건 예전에 알았지만, 이렇게 작업에도 능할 줄이야. 첩보 영화 한편 찍어도 되겠군. 지니가 007 제임스 본드 역을 못할 것도 없다. 그런데 본드걸은 누가 하지? 지니가 본드하면 본드걸 하겠다고 나서는 여자가 한둘이 아닐텐데. 아무튼 난 설계도면을 살펴보고 한 곳을 손으로 짚었다. “이 방인 것 같은데요.” “예. 맞습니다.” “위치는 정확히 아시죠?” “물론입니다. 간단한 일이지요.” 9클래스 마스터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난 노트북 모니터를 보며 박일현과 지니의 대화를 감상했다. * * * * 박일현은 지니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했다. 눈앞의 남자는 사업가가 아닌 사기꾼이었다. 그것도 반반한 얼굴로 여자들 등쳐먹는 저질 사기꾼. 재벌2세인 것처럼 위자해 여자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회사일로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자가 돈을 빌려주면 그 돈을 가지고 도망친다. 뻔하디 뻔한 스토리였다. 강남 지 세 채를 담보로 10억을 빌려주면, 분명 남자는 그 돈을 들고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박일현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물재였다.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남자가 돈을 들고 도망치면, 여자는 돈을 갚지 못하게 된다. 그럼 자연스레 담보는 박일현의 수중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 부동산의 가치는 최소 20억을. 10억을 빌려주고, 20억짜리 부동산을 갖는다면 그야말로 남는 장사였다. 자리에 앉은 박일현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일단 서류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세영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핸드백에서 동기부동등본을 비롯한 부동산 서류들을 꺼냈다. 박일현은 그것은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채업자가 주먹만 쓰는 사람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채업을 하기 위해선 관련 법률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했고, 지금도 관련 판례 등을 살펴보는 등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류는 완벽했다. 조금의 하자도 없었다. “담보 대출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하지요.” “돈은 준비되었나요?” “물론입니다.” 박일현은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근처 은행에 다른 직원이 나가 있었다. 만약 미리 돈을 인출해 놓았는데, 계약을 맺지 못하게 된다면 괜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확인을 하고, 그 다음에 돈을 인출한다.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 지금 계약서 작성해야 하니 빨리 와.” 이 말은 신호였다. 은행에 나가있는 직원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10억을 인출했다. 박일현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은 운송하는 직원이 조금 늦나봅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그 사이 계약서를 작성하지요.” “예.” “대출 기한은 넉넉하게 열흘로 잡고, 이자는 1할로 하지요.” 이 말을 오늘 10억을 빌려줄 테니, 열흘 후에 11억으로 갚으라는 뜻이다. 현재 대부업법시행규칙에 의거한 법정 최고 이자율은 연 66%다. 열흘 이자가 1할이면, 한달 이자는 3할이다. 세 달이면 이자가 원금을 넘어선다. 단리로 계산해도 연 400%에 이르는 말도 안 되는 이자율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니는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그럼 열흘 후에 11억으로 갚으면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박일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세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지니에게 말했다. “열흘 이자가 1억이면 너무 비싼 거 아니야? 그럼 한 달이면 3억이잖아.” 단리로 계산하면 그렇다. 복리로 계산하면 3100만원이 더 붙어 3억 3100만원이 된다. 지니는 세영의 허리와 엉덩이 부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차피 열흘 후에 갚을 텐데 무슨 상관이야. 당장 돈이 엇으면 수십억 손해가 나게 생겼는데, 1억 정도야 푼돈이지.” 10억이 없어서 수십억 손해가 난다니. 이 정도면 헛소리가 아니라 개소리다. “알았어, 오빠. 난 오빠만 믿을께.” “하하,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 모습을 본 박일현은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미리 작성해 놓은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 내용은 채무자에게 철저하게 불리한조건이다. 애초에 20억짜리 담보가 있는데도 열흘 이자를 1할로 하는 것부터가 불리한 조건이긴, 하지만. 열흘 이자가 1할 열흘 후에 갚지 않을 경우에는 같은 이자율로 계속 이자가 붙는다. 물론 복기로, 그리고 두 달 동안 갚지 않을 경우에는 담보로 잡은 부동산에 압류한다고 되어있다. 지니는 계약서를 스윽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조건이면 그리 나쁘진 않군요.” 그 순간, 양복을 입은 직원이 커다한 여행가방을 끌고 들어왔다. 그 가방을 열자 시퍼런 1만원짜리가 빼곡하게 차있는 것이 보였다. “100만원 묶음 1천개입니다. 세어 보시겠습니까?” 정신없이 그 돈 뭉치를 바라보던 지니는 박일현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뭐, 맞겠지요.” 돈을 바라보는 지니의 눈은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박일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바람에 손으로 입가를 가려야했다. ‘여자 등쳐먹고 사는 개새끼! 탐욕에 가득 찬 인간. 박일현은 그런 인간들을 숱하게 봐왔다. 돈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돈을 원했다. 후에 어떠한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채. “그럼 이곳에 주소와 이름 적으시고, 그 밑에 사인을 하시고 지장을 찍으세요. 담보 대출이기 때문에 담보 주인이 직접 서명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 계약은 지니와 박일현이 맺는 것이 아니다. 세영과 박일현이 맺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담보를 압류할 때 편해진다. 지니 입장에서도 그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여기다 하면 되나요?” “예.” 지니는 세영의 손에 펜을 쥐어주었다. “여기다 하면 된대.” “응. 알았어, 오빠.” 세영은 주소를 적고 사인을 하고 지장을 찍었다. 박일현은 다모관련 서류들은 한 부씩 복사해 계약서 뒤에 붙였다. 그리고 계약서를 접어 앞장과 뒷장 사이에도 지장을 찍게했다. 이렇게하면 뒷장을 찢어 내거나 바꿔치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계약이 끝나자 박일현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이제 이 부동산을 자신의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안 갚으면 좋겠지만, 만약 갚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열흘 만에 1억이 생기는 셈이니. 계약은 세영이 맺었지만, 계약서는 지니가 챙겼다.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럼 열흘 후에 뵙겠습니다.” “예. 멀리 나가진 않겠습니다.” 악수를 한 지니는 돈이 가득 찬 여행가방을 끌고 나갔다. 소파에 앉은 박일현은 계약서를 다시 한번 살펴본 뒤 금고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품 안에 있는 녹음기와 책장에 설치도니 캠코더를 살펴보았다. 요즘 기술이 좋아져 바늘만한 구멍만 있어도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했다. 틀어보니 녹음과 녹화 모두 잘 되어 있었다. 돈을 빌린 주제에 갚을 능력이 안 되니, 끝까지 안 빌렸다고 우기거나 자의에 의한 계약이 아니었다고 우기는 놈들이 있다. 강제로 계약서를 쓰게 했다나 뭐라나? 이 녹음기와 캠코더는 그런 놈들을 상대할 때 많은 도움이 된다. 박일현은 녹음기와 캠코더를 서류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둘 다 기록 방식이 디지털이기 때문에 나중에 컴퓨터와 연결해 옮겨야 한다. 박일현은 편한 자세로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 외국인은 10억을 벌고, 자신은 10억으로 20억짜리 부동산을 손에 넣었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였다. 졸지에 20억에짜리 부동산에 날리게 된 여자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 이겠지만 말이다. “사채업에 뛰어든 지 7년 만에 이런 큰 건수는 처음이군.” 이런 일만 끝나면, 당분간은 일 안하고 여행을 다닐 생각이었다. 필리핀이나 마카오가 괜찮겠지? 동남아 쪽에서는 적은 돈으로도 실컷 놀 수 있으니까. 박일현은 눈을 감고 담배를 즐겼다. 방 안에는 아까 전부터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박일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 * * * 나는 모니터를 통해 계약하는 모습을 자세히 지켜보았다. 계약을 끝마친 지니는 요즘 교체하는 여성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지금 가면 되겠네요.” “예.” 크로니스는 인비저빌리티(Invisivility) 마법을 몸에 걸고 워프(Warp) 마법을 실행했다. 렌즈가 지니의 몸에 달려있기에, 지니가 빠져나온 지금 더 이상 방 안을 엿볼 수 없었다. 뭐, 크로니스라면 문제없겠지. 9클래스 마스터가 실수할 리는 없으니. 노트북을 끄고 차 안에서 멍하니 있는데, 렉서스 한 대가 다가왔다. 정확한 차종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비싸 보이는 차다. 흥! 그래봐야 내 뉴 렉서스턴이 훨씬 좋아! 그 차는 내 차 바로 뒤에 주차했다. 조수석에 지니가 내렸다. 그리고 트렁크에서 여행가방을 꺼내더니 내 차로 다가왔다. 수고 하셨습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 그래.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알긴 아는구나. “그런데.......” “예? 뭐 또 할말 있으세요? 분명 말씀드리지만, 전 돈 없습니다.” 난 혹시라도 지니가 수고비를 달라고 할까봐 미리 못을 박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지니의 입세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이 돈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 지니가 가리킨 것은 여행가방이었다. 그리고 그 여행가방 안에는 1만원짜리 100장 묶음이 1천개나 들어 있었다. 다시 말해 1만원 짜리 10만장. 참고로 1만원짜리 10만장을 쌓으면 약 10미터 정도된다. 10억이라니!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벌어도 못 만질 금액이 아닌가? 복수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10억이라는 돈이 생긴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부수입. 복수도 하고 10억도 챙기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다. 난 잠시 지니의 눈을 마주보았다. 설마 지가 챙기려는 것은 아니겠지? “으흠! 이런 중요한 일을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바, 중신들의 중론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이돈은 제가 보관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지니는 예상 외로 순순히 돈을 넘겨주었다. 왜 이렇게 쉽게 넘겨주지? 혹시 중간에 빼돌린 거 아냐? 난 여행가방을 슬쩍 열어 보았다. 1만원짜리 100장 묶음이 가득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이거 나중에 다 세어볼 겁니다. 한 장이라도 부족하면 알아서하세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다 자부합니다.” “..........”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지니를 보니 더욱 못 믿겠다. 진짜로 나중에 세워봐야지. 난 일단 여행가방을 차 안에 집어넣었다. 여기서 꺼내 세어볼 수는 없으니.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d자분이 기다리고 계신지라.” “어서 가보세요.” 지니는 다시 여자의 차에 탔다. 그러자 그 차는 바로 출발했다. 난 그 모습을 부며 부러움을 느꼈다. 나도 루시아와 함께 드라이브 하고파~. 내가 핸들에 기대 궁상을 떨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난 깜짝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헉! 언제 오셨어요?” 어느새 조수석엔 크로니스가 앉아 있었다. “방금요.” “어떻게 되었나요?” 크로니스는 웃음 지었다. “녹음기와 캠코더는 전기 계열 마법으로 확실하게 망가트렸습니다. 그리고 계약서는 백지로 바꿔놓았습니다.” 크로니스는 나에게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살펴보았다. 서명과 지장이 찍힌 계약서. 난 라이터를 꺼내 그 계약서를 태웠다. 순식산에 하줌의재로 변한 계약서. 나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돈을 빌렸다는 증거가 전부 사라졌군요. 이 사실을 알게되면 박일현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요. 후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게 복수의 묘미겠지? 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크로니스를 보며 말했다. “우리도 드라이브나 좀 할까요?” * * * * * * 박일현은 EF소나타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사고로 EF소나타의 범퍼(Bumper)한쪽이 심하게 긁혀있었다. 하지만 운해 범퍼란게 긁으라고 있는 거다. 자동차에 범퍼가 달려있는 목적은 출둘 사고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심하게 긁혔다고 해도 목적을 수행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범퍼가 심하게 긁히고, 라이트 이음 고리 하나가 부서진 걸 가지고 40만원이나 뜯어냈지만, 그 돈으로 부품을 교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도 잘 나가는데 뭐 하러 교체하겠는가? 그리고 어차피 이 차는 탈만큼 탔다. 오늘 계약건으로 10억이나 벌었으니, 차부터 바꿀 생각이었다. “룰루루~.” 기분이 좋다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박일현은 서류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으로 올라갔다. 집에는 동거녀 임인숙이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와?” “일이 없어서.” 박일현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양복 상의를 벗고 넥타이를 거칠게 풀러냈다. 아무리 입어도 양복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가죽재킷 쪽이 백 백는 더 편했다. 인숙은 양복 상의와 넥타이를 받아들었다. “밥은 먹었어? 차려줄까?” “어.” 인숙은 양복 상의와 넥타이를 한쪽 걸어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일현은 고개를 돌렸다. 단란주점 종업원이던 인숙과 동거한지도 어느덧 3년째였다. 그녀는 괜찮은 여자였다. 결혼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없지만, 이대로 계속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슬슬 관계를 정리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고 예쁜 여자들이 주위에 널리고 널렸다. 이제 돈까지 생겼으니 여자들이 달라붙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마음에 들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아줌마 냄새가 풍겼다. ‘이쯤에서 적당히 헤어지고 다른 여자 찾아봐야겠군. 주위에 널리고 널린 게 젊고 예쁜 애들인데, 이렇게 인생을 낭비할 순 없지.’ 박일현은 밥을 먹기 전에 녹음기와 캠코더에 있는 데이터를 컴퓨터에 옮겨놓기로 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USB를 이용해 녹음기를 컴퓨터와 연결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아까까지만 해도 잘 되던 녹음기가 이상을 보였다. 전원은 들어오는데 액정에 아무것도 표시가 되지 않았다. 박일현은 놀라 녹음기를 이리저리 만져보았지만, 어디가 고장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첨단화 된 디지털 장비일수록 망가지기 쉽다. 녹음기 메모리칩에 저정된 데이터는 전기 계열 마법의 영향으로 완전히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캠코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일현은 캠코더를 켜보았다. 캠코더를 켜보았다. 캠코더는 아예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전원에 이상이 있나 해서 건전지를 갈아 끼워보고 코드에 직접 연결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메모리칩만 빼서 컴퓨터에 껴보았지만, 인식이 되지 않았다. 운송 도중 문제가 있었나? 사무실에서 집까지 차로 달려왔다. 사고가 나지도 않았고, 자기(磁氣)에 접촉한 일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게 왜 망가졌단 말인가? 그것도 하나도 아닌 둘 다! 녹음기와 캠코더는 전부 계약 당시의 상황을 담고 있다. 둘 다 망가졌다는 것은 그 당시 상황을 증명할 자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뭔가 이상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계약서가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녹음과 녹화는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한 부수적 장치에 불과하다. 계약서만 있다면 계약 자체를 증명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한 생각이 드는 걸까? 박일현은 재빨리 방을 뛰쳐나갔다. 양복 상의를 입을 새도 없이 구두를 구겨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어디가? 밥 안 먹어?”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인숙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박일현은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현재 꼭대기 층에 머물고 있었다.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젠장!” 박일현은 그냥 계단을 뒤어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그는 시동을 걸고 액셀을 힘껏 밟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사무실을 향해 차를 몰았다. 어느새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계약서는 무사히 있겠지?’ 계약서는 금고 안에 넣어 놓았다. 금고의 열쇠를 갖고 있고,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수백 명의 조폭들이 쳐들어온다면 모를까 금고가 털릴 리는 없을 것이다. 회사 건물에 도착한 박일현은 차를 세우고 재빨리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단란주점 출신 여직원은 박일현을 보더니 말했다. “아까 집에 가시지 않으셨어요?” 박일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혹시 나 나가고 난 뒤 들어온 사람 없어?” “예? 그건 왜......?” “대답이나 해!” 박일현이 소리치자 여직원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예. 없어요.” “내 방에 들어간 사람도 없지?” “예” 박일현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탁자, 소파 모두 그대로였다. 금고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박일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녹음기와 캠코더는 옮기던 중 충격을 받아 고장 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괜히 흥분해서 이곳까지 뛰어오다니. 박일현은 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안심한 그는 확인 차원에서 금고를 한번 열어보기로 했다. 열쇠를 곶고, 번호를 맞춘다. 번호를 맞춘 다음 열쇠를 돌리고,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금고 안에는 아까 자신이 넣어두었던 계약서가 그대로 있었다. 두 번 접은 모습까지도 똑같았다. 박일현은 피식 웃으며 그서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계약서라고 생각했던 것은 백지였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까 지니에게 말한 대로 돈뭉치를 일일이 세어 보았다. 일단 돈다발은 1천 개였다. 하지만 지니가 돈다발에서 한 장씩 빼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열 다발에서 한 장씩만 빼가도 무려 10만원이다. 10만원이면 우리 애들 사흘치 간식 사줄 수 있는 금액이다. 좀 부족한가? 아무튼 지니가 빼갔을 수도 있으니 다발을 풀고 일일이 세어 봐야 한다. 그런데 그게 말이 쉽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10억이면 1만원짜리 10만만장이다. 내가 미쳤다고 10만장을 일일이 세고 있겠는가? “으음, 그냥 이번 한번만 지니를 믿어볼까?” 그나저나 참으로 감동적이다. 침대 위를 덮고도 나아 바닥까지 덮고 있는 1만원짜리 돈다발이라니! 난 그 위에 몸을 던졌다. 빳빳한 지폐의 감촉이 너무나도 좋다. 아아~ 세종대왕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 10억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럭저럭 있다. 하지만 10억의 현금을 직접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금융거래의 대부분이 금융기관을 통해 이뤄지다보니, 수십억이라는 돈이 있어도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기에 은행 등의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한번에 많은 현금을 보는 경우가 흔치 않다. 이렇게 1만원짜리 지폐로 가득 찬 방 안을 보고 있으니, 10억이란 돈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내가 돈다발 위를 구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어린 엘프들이 뛰어 들어왔다. 헉! 문 잠그는 거을 깜빡하다니! “와아! 돈이다!” “돈 되게 많다! 방 안이 다 돈이야” “그것도 전부 1만원짜리야.” 아이들은 바닥에 떨어져있는 돈다발을 집어 들었다. 라이는 어디서 봣는지 손에 침을 퉤퉤 뱉어가며 돈다발을 셌다. 난 깜짝 놀라 아이들이 들고 있는 돈다발을 빼앗았다. “니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당장 내 돈에게서 떨어지지 못해! 한 자이라도 꼬불치는 엘프가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난 아이들을 방에서 쫓아내려 했지만, 아이들은 나가지 않았다. 멀뚱 멀뚱 서서 나를 바라보는 라이, 루, 루비 “응? 니들 왜 그러고 서 있니? 빨리 안 나가?” 그러자 아이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두 손을 앞으로 내 밀었다. “응? 그건 무슨 의미니?” “용돈 주세요오~!” “......." 간만에 합창이 나왔군. “이것들이 어디서 용돈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집에서 밥을 안 먹여줘, 간식을 안 먹여줘? 먹일 거다 먹이고 사줄 거 다 사주는데, 니들이 뭔 용돈이 필요해?” “아니에요, 오빠 라이는 언제나 2프로 부족해요.” “맞아요. 밥과 간식으로는 배가 2프로 안 차요.” “그러니까 용돈 주세요.” “........” 징한 것들. 난 아이들을 본체만체 하며 돈을 다시 여행가방에 담아 넣었다. 아이들은 콩고물이 떨어지기라도 바라는 건지 끝까지 그 자리에 손을 내밀고 서 있었다. 돈을 여행가방에 다 담은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보았다. “응? 너희들 아직 안 갔니?” 그러자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으아아앙~.” “엉엉~.” 울음을 터트리며 방을 나가는 아이들. 난 그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돈을 밝히다니. 커서 뭐가 될지 걱정이군. “무슨 일인데, 얘들아?” “헉! 루시아!” 울면서 나간 아이들은 루시아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엥~ 우엥~ 오빠가 돈 이따만큼..... 훌쩍~ 라이한테는 한 푼도 안 주고...... 훌쩍~ 막막 용돈 받고 싶었는데...... 우에에엥!” “으앙~ 으앙~ 루비가 막막 손 내밀고 서 있었는데....... 훌쩍~ 막막 모른 척하고.......으아아아앙!” “엉엉~ 형 혼내줘요, 누나.” “........” 이것들이 지원군을 끌고 들어올 줄이야! 그냥 1만원짜리 한 장씩 쥐어 보낼 걸 그랬나? 루시아는 일단 우는 애들을 달랬다. “그만 울어, 얘들아. 우니까 예쁜 얼굴이 다 망가지잖아. 어서 뚝!” “훌쩍~.” 열심히 달랬으나 애들은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으음, 내가 달래면 훨씬 잘 달랠 자신 있는데/ 내가 토닥토닥 스킬 한번 발동하면 애들 울음쯤이야 한방에 끝이지. “넌 왜 자꾸 애들을 울리느 거야?” 루시아는 나를 노려보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바가지 긁는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난 몸을 잔뜩 움츠리며 변명했다. “아니, 이번에는 진짜 결백하거든.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는데, 쟤들이 와서 막막 용돈 달라고 그래서 막막 용돈을 안 줬는데 막막 울어서 앞이 막막한데...... 그나저나 지금 내가 뭔 소릴 하고 있는 걸까?” “그 돈은 뭐야?” “응? 무슨 돈?” 루시아의 손은 여행가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열려진 사이로 1만원짜리 돈다발이 보였다. “으응. 별 거 아니야. 그냥 부수입이라고나 할까?” “이게 대체 얼마야?” 내가 가방을 완전히 열자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난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 10억이야. 1만원짜리 10만장.”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났어?” “그게........” 난 루시아를 옆에 앉히고 돈이 생기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얘기 해 주었다. 말하는 도중 은근슬쩍 루시아의 어RO에 손을 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얘기를 다 들은 루시아는 수북이 쌓인 돈을 보며 말했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심하긴 뭐가 심해? 이건 인과응보야! 그놈이 나한테 한 짓은 둘째 치고라도 다른 사람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여자들 집창촌에 팔아넘기고, 장기 해체하고, 반병신 될 때까지 패고, 사람도 죽이고...... 아무튼 그놈의 악행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야.” 사실 내가 당한 것만으로 복수를 하려 했다면, 그냥 찾아가서 몇 대 패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의 정체를 알게 되자 도저히 용서를 할 수가 없었다. 남의 눈에 눈물 날 때, 자기 눈에 피눈물 난다는 사실을 알려 줘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택해 복수하는 것이고. “그럼 이 돈은 어떻게 할 거야? 나중에 돌려 줄거야?” “미쳤어? 이 돈은 그놈이 힘없는 사람 등쳐서 모은 돈이야. 이 돈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과 눈물이 들어 있어. 그러니까 이 돈은....... 널 위해 쓰겠어!” “뭐? 왜 날 위해 써?” “그야 넌 내 보물이니까.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루시아? 갖고 싶은 거 있음 뭐든 말해. 다 사줄게.” “너무해요, 오빠! 라이한테는 용돈도 안 줬잖아. 그런데 언니는 갖고 싶은 거 다 사준다고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맞아요! 불공평해요!” “억울해요! 부당해요!” 난 항의하는 아이들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니들이랑 루시아랑 같니?” “흑끄윽~.” “.........” 앗! 설마 또 울려는 거냐? 놀란 나는 재빨리 1만원짜리 한 장씩을 애들에게 내밀었다. “이것 가지고 가서 맛있는 거 사먹으렴.” “헤헤~ 사랑해요, 오빠.” “루비는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저도 형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돈을 챙긴 아이들은 우르르 방 밖으로 몰려 나갔다. 난 한숨을 내 쉬었다. 저것들이 한번 몰려 들어왔다 몰려 나가면,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 “뭐 갖고 싶은지 생각해 봤어?” “내 생각에는..........” 루시아가 입을 열자 난 메모지와 펜을 들고 귀를 기울였다. 마치 사관이 임금의 말을 받아 적듯 루시아의 옥음(玉音)을 받아 적으리라. “이 돈은 우리가 쓰면 안 될 것 같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돈은 우리가 번 게 아니잖아. 만약 이 돈을 우리가 쓴다면 박일현과 다를 게 뭐가 이겠어? 이 돈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헉!” 루시아의 말을 받아 적던 나는 깜짝 놀라 메모지와 펜을 떨어트렸다. “그, 그 말은...... 또 기부하자는 거야?” “응.” “.......” 힘들게 찾은 매국노 나까무라 다케시의 보물(시가 128억7천만원)도 전부 기부했다. 그런데 사채업자에게 뜯어낸 10억마저 기부하자니! 자랑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살면서 1천원 한 장 기부해본 적이 없는 나다.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것들이 기부는커녕 불법 탈세에 불법 증여, 재산 해외로 빼돌리기 등등의 쇼를 하고 자빠졌는데 나 같은 서민이 기부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저에 보니 어떤 기업이 상속세 2천억원을 제대로 냈다고 뉴스에 나오더라. 내야 할 세금 내는 당연한 일이 뉴스에 나올 만큼 신기할 일이 되어버린 우리나라. 이러니 내가 기부할 마음이 들겠냐? “저기..... 루시아.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이 돈이면 너랑 아이들이랑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난 최선을 다해 루시아를 설득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 돈은 우리 돈이 아니야. 박일현이 나쁜 짓해서 모은 돈이니 만큼 좋은 일에 쓰자.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응? 이렇게 부탁할게.” 내 손을 꼬옥 잡으며 말하는 루시아. 아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얼굴 예쁜 것도 모자라 마음까지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거야? 너무 완벽하잔아! 감동한 나는 루시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그,그래. 알았으니까 좀 놔.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 그래? “보면 어때서 그래?” 손에 닿는 루시아의 피부 감촉과 가까이서 느껴지는 숨결. 루시아의 몸에서는 언제나 향기가 난다.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가. “사랑해, 루시아.” 난 루시아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그러자 루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하는 루시아의 모습은 예쁘고 사랑스럽다. 나이는 나보다 2살 더 많지만, 정말 귀엽다. 루시아는 영원한 나의 애기~. 여기까지 진행됐는데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루시아도 싫지 앖다는 뜻. 이런 때 밀어 붙이는 것이 남자의 역할이겠지? 난 한 손으로 루시아으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에 키스를 하려는 순간...... “.........” 나의 경험에 의하면 이때쯤 방해꾼이 등장한다. 그래서 항상 다 된 밥에 재 빠트리는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이번마저 그럴 수는 없다. 난 키스를 하기 전에 미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방해꾼이 없........지 않군. 어느새 등장한 어린 엘프들. 그새 슈퍼에 갔다 왔는지 손에는 커다란 과자봉지 하나씩을 들고 있다. 부스럭 부스럭. 오물오물. 냠냠. 과자봉지를 만지는 소리와 과자를 먹는소리. 참 시끄럽게도 먹는다. 루시아는 아이들을 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애들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빨리 비켜!” “으응. 비킬게.” 난 아쉬움을 달래며 몸을 일으켰다. 어린 엘프들은 과자를 먹으며 말했다. “라이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거 계속하세요.” “루비는 여기서 조용히 과자만 먹고 있을게요.” “저도 조용히 과자만 먹을게요.” “.........” 이것들을 죽여, 살려? 에휴~ 이 돈을 다 기부할 생각을 하니, 너무 아깝다. 그냥 반만 기부하면 안 되려나? 그나저나 지금쯤 박일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정말 궁금하군. * * * * 박일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라도 잘못 봤나 싶어 종이를 다시 펴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계약서가 아니었다. 계약서여야 할 종이는 단지 백지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말을 다시 하자면, 계약의 증거 자료가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20억 원짜리 부동산을 담보로 10억을 대출해준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꼼짝 없이 10억을 날려야 할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박일현은 금발 외국인의 핸드폰번호를 찾아보았다. 사채업의 꽃은 빚 독촉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상대의 연락처를 확실히 알아두는 것은 필수였다. 지금처럼 대출 금액의 두 배가 넘는 담보를 잡았을 경우에는 빚 독촉을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연락처를 알아둘 필요도 없다. 하지만 담보 없이 대출해 줄 때는 본인 연락처는 물론, 부모, 형제, 친척 연락처까지 다 받아 놓는다. 심지어는 친구나 동료들 연락처까지 받아 놓기도 한다. 계약서에 여자의 주소가 적혀있었지만, 계약서가 백지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박일현은 주소를 외워둘 걸, 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다행히 금발 남자의 핸드폰번호는 자신의 핸드폰 통화 내역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려다가 멈칫했다. ‘전화를 걸어서 뭐라고 말하지?’ 계약서를 잃어버렸다고? 그래서 이리 와서 다시 쓰라고? 미치지 않은 이상 그렇게 할 리 없다. 오히려 계약서가 없어진 사실을 알면, 돈 빌린 적이 없다고 잡아 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던 박일현은 어렸을 때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사채업을 하던 한 남자가 친구네 집을 찾아갔다. 그는 친구를 보자마자 탄식을 하며 말했다. ‘작년에 한 상인에게 금 30냥을 꿔주었네. 그 상인은 올해 12월까지 그 돈을 갚기로 했지. 그런데 오늘 찾아보니 계약서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이 시살을 알게 되면 그 상인이 돈을 갚지 않으려 할텐데. 큰일이야.’ 그 친구는 잔머리가 잘 돌아가기로 유명한 친구였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고는 말했다. ‘그럼 당장 그 상인에게 편지를 쓰게. 빌려준 금 40냥을 올해 6월까지 갚으라고 말이세.’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 난 금 30냥을 올해 12월까지 갚으라고 빌려줬는데.’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쓰라는 걸세. 만약 자네가 계약서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그 상인이 알아보게. 그럼 그 상인은 돈을 빌린 일이 없다고 잡아 뗄 걸세. 하지만 자네가 빌려준 금 40냥을 올해 6월까지 갚기로 계약을 했다고, 뭔가 착오가 생긴 게 아니냐고, 답장을 보낼게 아닌가? 그럼 그 답장이 계약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 자료가 되지 않겠나?’ ‘오오! 듣고 보니 그렇군. 자네의 잔머리의 경의를 표하네. 자네 의 JQ(잔머리지수)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걸세. 자네 말대로 당장 편지를 써야겠구만.’ 사채업자는 친구의 말대로 편지를 썼고, 얼마 후 답장이 날아왔다. 답장에는 예상대로 ‘30냥을 올해 12월까지 빌리기로 계약했습니다. 대인께서 뭔가 착오를 하신 것 같습니다. 계약서를 보관한고 있으니, 못 믿으시겠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 편지를 근거로 사채업자는 상인에게 무사히 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아마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였던 것 같다. 사채업을 전문으로 하던 유대인인 만큼 후손들에게 돈 떼이지 말라는 의미에서 탈무드에 적어 놓은 게 아닌가 싶다. 박일현은 새삼 유대인이 존경스러워졌다. 어쨌든 그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전화를 걸어 상대가 빚진 사실을 인정하게 받들어야했다. 그리고 그 통화 내용을 녹음해 계약의 증거로 삼아야한다. [헬로우.] 그 남자의 목소리다. 박일현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저축은행대출법인 인풋&아웃풋 안산점 실장 박일현입니다.” [예. 무슨 일이시죠?] “다름이 아니라......”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박일현은 녹음기가 잘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오늘 대출해 가신 12억 말인데요....” [예? 무슨 말씀이시죠?] 영문은 모르겠다는 억양이었다. ‘10억을 빌려갔는데 12억으로 빌려갔다고 하니 어이가 없겠지’ 박일현은 태연하게 말했다. “아까 대출해간 12억 말이에요. 기억 안 나시나요? 박일현은 상대의 입에서 ‘제가 대출해간 금액은 10억인데요’ 라는 말이 나오길 바랐다. 그런데 정작 나온 말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대출 문제는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예? 그, 그게 무슨.....” 박일현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상대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출해 간 사실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까 분명 10억 대출해 가지 않으셨습니까?” [방금 전에는 12억이라고 하더니, 이젠 10억이라고 하는군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아니 그게.....” [다른 사람과 착각을 하셨나 보군요. 전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자,잠깐만요! 잠깐...... 야, 이 새꺄! 끊지 마!” 박일현이 핸드폰에 대고 소리쳤지만, 상대는 이미 전화를 끊은 뒤였다. “하하......” 하도 어이가 없어다보니 웃음이 나왔다. 혹시 지금까지 일은 전부 꿈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자신이 착각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따. 녹음기와 캠코더가 망가지고, 계약서가 사라지도, 돈을 챙겨간 놈은 대출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고..... 이 모든 일이 우연일 리는 없을 것이다. “설마......”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20억짜리 부동산을 담보로 잡은 것도, 10억을 현금으로 받아간 것도, 터무니없는 이자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서명을 했던 것도.... “으아아!” 화가 난 박일현은 책상 위의 물건을 마구 집어 던졌다. 진열장 유리가 깨지고, 전화기가 박살났다. “무,무슨 일이에요?” 소리를 듣고 놀랐는지 여직원이 뛰어 들어왔다. 박일현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니까 나가” 잔뜩 흥분한 박일현의 모습을 본 여직원은 두려워하며 뒷걸을질을 쳤다. 박일현은 부릅뜬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정말 누구 하나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이 년놈들이 날 속여 먹였단 말이지. 감히 나 박일현을 말이야.” 1,2억도 아닌 자그마치 10억이다. 10이라면 평범한 사람들은 마져보지도 못할 돈이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사람에는 박일현도 속했다. 맨손으로 이곳가지 온 그다. 사채업에 뛰어든 자가 고작 7년인데 그렇게 큰 금액을 벌었을 리 없다. 사챙버을 하는 사람이 돈을 잘 벌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에 불과하다. 사채업의 특성상 악성 채무자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빌려준 돈을 받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여기에 심부름센터 직원에게 수고비 줘야지, 조폭에게 상납해야지, 높으신 분들께도 떡값 하라고 찔러 드려야지.... 아무튼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엄청난 이자율에 의해 원금의 몇 배를 뜯어내도 어떤 때는 적자를 보기도 한다. 수색하고 추적하고 독촉하는 등 제반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닺은 수단을 다 썼는데도 돈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에는 1천만원을 빌려간 40대 가장이 일가족 세 명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다. 죽기 전 행적을 조사해 보니 가족들과 전국 여행을 다니며 그 돈을 펑펑 다 썼다. 처음부터 죽을 생각을 하고, 죽기 전에 돈이나 실컷 써보자는 생각으로 사채를 끌어다 쓴 것이다. 그리고 해외로 도망친 놈도 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완전히 잠적해 버린 놈도 있다. 이렇게 돼도 어디다 하소연할 수가 없다. 돈은 돈대로 날리고, 마음은 마음대로 상해도 말이다. 그 년놈들에게 빌려준 돈 중 3억은 자신의 돈, 7억은 이 회사 사장에게 빌린 돈이다. 확실한 건이라고 장담을 해서 간신히 사장에게 빌렸다. 이자는 한 달에 2%로, 사채업인 걸 감안한다면 괜찮은 이자율이었다. 하지만 갚지 못한다면 산 채로 시멘트 속에 묻혀도 할말이 없다. 저축은행대출법인 인풋&아웃풋의 정식 직원은 사장 한 명과 실장 네 명이다. 실장들은 손님은 직접 상대해서 대출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각자 진다. 사장은 손님을 상대하지 않고, 실장을 상대한다. 즉, 실장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장은 다섯 개의 심부름센터를 갖고 있고, 실장들은 그곳에 빚 독촉을 맡긴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 역시 사장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간다. 그런 사장이 이번에 7억이라는 거금을 박일현에게 빌려주었다. 담보가 확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당장 다음달부터 사장에게 이자를 내야하고, 원금은 1년 안에 상환해야 한다. 이자가 말이 2%지 7억의 2%면 무려 1400만원이다. 한 달 이자가 1400만원이면, 1년 이자는 1억6800만원. 원금은커녕 이자 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돈을 못 갚는다면? 그럼 사장은 자신이 채무자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일단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전부 압류한다. 그걸로 턱도 없으니 몸속의 장기를 전부 끄집어낸다. 신장 3천만 원, 각막 6천만 원 등등. 살려달라고 빌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자신 역시 살려달라고 비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술대 위에 눕히고 집창촌에 팔아 버렸으니. ‘어떻게든 돈을 되찾아야 돼. 돈을 되찾기 못하면 내 인생은 끝이야.’ 박일현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 지니는 박일현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분명 돈을 돌려받기 위해 자신을 찾을 것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지니는 세영과 함께 남이섬으로 향하는 중이다. 남이섬은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속하는 섬으로 북한강에 위치해 있다. 원래부터 관광지로 개발된곳인데가, 몇 년 전부터 일본을 휩쓴 드라마 ‘겨울연가’ 의 열풍으로 지금은 가장 많은 일보느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이 되었다. 데이트 장소로도 괜찮았다. 하지만 지니가 남이섬으로 가는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박일현을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지니의 핸드폰에는 GPS(위성항법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핸드폰은 위치 추적 서비스를 들었다. 추적을 전문으로 하는 심부름센터에서는 그 서비스를 자주 이용한다. 물론 불법이다. 하지만 돈만 주면 사람까지 죽이는 놈들이 불법 합법 가리겠나? 핸드폰 위치 추적은 이동통신회사 사람만이 가능하지만, 돈 몇 푼만 주면 고객들의 정보를 마구 빼내주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러니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극히 쉬울 것이다. 지니는 그 점을 노렸다. * * * * 내가 수화기를 내려놓자 루시아가 물었다. “누구야?” “으응. 사일런스 지니.” “지니 오빠가? 지금 어디래?” “남이섬이래.” “남이섬? 그 겨울연가 촬열 장소라는 곳 말이야?” “응.” 루시아까지 아는군. 사실 겨울연가 열풍이 불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남이섬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다. “그곳엔 왜 간 거야?” “으응. 다 작전의 일환이지.” “응?” “뭐, 신경 쓰지 마. 여자랑 갔으니까 좀 놀다 오겠지. 루시아는 소파에 안으며 말했다. “지니 오빠는 좋겠다.” “응? 왜?” “나도 남이섬에 가고 싶은데.” “뭐? 남이섬에 가고 싶어?” “응. 거기 되게 아름답잖아. 나도 겨울연가 봤어.” “헉! 겨울연가도 봤어?” “응. 위성 채널에서 하던데.” “.......” 나도 볼 걸 그랬나? 루시아가 본 걸 내가 안 볼 수는 없다. 그래, 당장 겨울연가 DVD를 사서 본 다음 루시아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거야! 그녀의 취미를 파악하고 같이 즐겨라. 이건 여자에게 점수 따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루시아와 친해질 수 있다면 드라마 한 편이 아니라, 백 편도 볼 수 있다. “진짜 재밌었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알 것 같더라.” 사실 겨울연가는 좀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연가가 방영될 때만 해도 시청률은 제법 높은 편이었지만, ‘열광적’ 이라고 할만한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 케이블TV회사가 겨울연가를 수입해 방소한 뒤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위성TV에서 방송을 했는데, 입소문을 타고 점점 시청자들이 늘자 재방송을 하고, 심지어는 NHK공중파에서 또 재방송을 했다. DVD와 관련 제품들은 날개 독친 듯 팔려나가고, 남자 주인공을 맡았던 배용준은 욘사마(よんさま)라 불리며 아시아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심지어는 욘겔지수(욘사마와 엥겔지수가 합쳐서 탄샌한 단어. 소득중 욘사마 관련 물품이 차지하는 비중을 뜻함),욘플루엔자(욘사마와 인플루엔자가 합쳐져 탄생한 단어. 욘사마의 매력에 빠질 때 나타나는 열병과조 같은 증상을 뜻함)같은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드라마 한 편이 이렇게 일본 열도를 폭풍처럼 휩쓸 줄은 아무도 못한 일을, 욘사마가 해냈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아무튼 일본의 겨울연가 열풍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겨울연가가 재탕, 삼탕 방영되었고, 남이섬은 최고의 인기 관광지가 되었다. 난 루시아의 옆자리에 앉아 은근슬쩍 손을 잡았다. “원한다면 내가 남이섬에 대려가 줄게.” “정말?” “응응. 난 니가 원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우리 같이 남이섬에 가서 겨울연가의 한 장면을 재연해 보는 것이 어떨까? 내가 욘사마할게.” 만약 이말을 일본의 아주머니들이 듣는다면, 난 빗자루로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녁 때 춘천 닭갈비 먹자. 너 아직 닭갈비 안 먹어봤지? 닭갈비는 춘천이 원조인데 진짜 맛있어. 아마 너도 좋아할 거야.” “언니랑 형부랑 같이 가서 더블데이트 즐기는 것도 괜찮겠다.” “........” 일루니아 여사님와 인디가 여기서 왜 나오는거지? 뭐가 예쁘다고 그 둘을 데려가......겠냐마는, 루시아가 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그곳에 가서 따로따로 행동하면 되니. “그,그래. 니가 원한다면 같이 가자.” “응? 걔들이야 당연 버리고 가야지.” “뭐? 버리고 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루시아는 벌떡 일어서며 화를 냈다. 난 깜작 놀라 말했다. “아,아니 내 말은 그냥 놓고 가자는 거지.” “우리가 놓고 가면 애들은 누가 돌보는데? 그리고 넌 어떻게 자기밖에 모르니? 애들을 버리고 우리끼리만 놀러가자고? 그게 부모로서 할 소리야? “.......” 요즘 들어 루시아의 잔소리가 나날이 늘어가는 느낌이다. “흥!”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애들까지 데리고 가면, 그게 데이트야? 가족 소풍이지. 루시아는 너무 애들밖에 모른다니까. 때로는 아이들에게 해방되어 여가를 wmf길 줄도 알아야 하거늘. 난 고개를 돌리다 깜짝 놀라TEk. 어느새 소파 뒤에 서 있는 아이들. “헉! 니들 언제부터 서 있었니?” “우에에엥~오빠, 나빠요오~.” “으아아앙~너무해요, 오빠아~.” “엉엉~ 이제부터 형이랑 안 놀래요.” “아,아니 왜 갑자기 울고 그러니?” 헉! 설마 버리고 간다는 말을 들은 건가? 과자봉지를 손에 든 아이들은 세상이 떠나갈 듯 펑펑 울었다. 대체 저 눈물이 어디서 저렇게 쏟아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혹시 호스라도 연결해 놨나? “우엥~ 우엥~ 정말로 라이 버릴 거예요,오빠?” “이 오빠가 라이를 왜 버려? 이 오빠는 영원히 라이랑 함께 있을거란다.” “우엥! 막막 버린다 그랬잖아요.” “아니야, 라이야. 오빠는 라이 안 버려. 그러니까 뚝 그치렴. 뚝! 나는 재빨리 라이를 끌어안고 토닥토닥 스킬을 발동했다. 토닥토닥~ 스킬이 발동되자 라이의 눈에 흐르는 눈물의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따. “훌쩍~ 뚝!” 나는 같은 방법으로 루비도 달래주었다. “으앙~ 루비는 오빠가 막막 좋단 말이에요.” “이 오빠도 루비가 좋단다. 막막 좋아. 그러니까 울지마. 우리 루비는 웃을 때가 제일 예쁘단 말이야. 이런, 눈물 때문에 우리 예쁜 루비 얼굴이 엉망이 됐네.” 난 한 손으로 토닥토닥 스킬을 쓰며, 다른 한 손으로 루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루비는 금방 울음을 그치고, 헤헤 웃었다. 내가 라이와 루비를 달래주는 것을 본 루는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엉엉엉~.” 남자애를 달래주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지만, 이렇게까지 서럽게 울어대니 어쩔 수 없다. 아아~ 토닥토닥 스킬은 여자애들을 상대로만 쓰기로 마음먹었건만. 스킬 발동! 토닥토닥~. “뚝!” “.......” 엄청 간단하군, “부루마블 해요, 오빠.” 내 손을 잡아끄는 라이와 루비. 난 그 손에 끌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는 건가? 지금쯤이면 박일현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텐데. * * * *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어디야?” [남이섬 쪽입니다.] “남이섬?” 박일현은 이를 갈았다. ‘내 돈 떼어먹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마라.’ 만나기만 하면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가져간 돈을 다시 뱉어놓는다면 병신 맏는 선에서 끝내는 아량을 베풀어줄 용의가 있다. 물론 그 반반한 얼굴 가죽은 벗겨내야겠지만. “지금 애들 몇 명이나 있어? 힘 좀 쓰는 애로 20명 정도 데리고 나와. 없으면 불러내! 지금 당장 남이섬으로 간다. 그쪽으로갈 때까지 준비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형님.] 박일현은 사무실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한시라도 빨리 그놈을 잡아야했다. 혹시라도 눈치 채고 도망갈 수도 있으니. 심부름센터 앞에 도착하자 덩치 좋은 남자 20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애들을 모이라고 한 겁니까?” 키가 크고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나서며 물었다. 박일현은 수염을 거칠게 긁으면 대답했다. “조져야 할 놈이 생겼어. 한 몫 떼어줄 테니까 따라오기나 해. 어이, 돼지. 그 자식 위치는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거지?” 박일현의 물음에 스모 선수처럼 살이 뒤룩뒤룩 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멸치가 계속 조회하고 있습니다.” 멸치는 이동통신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돼지의 동생이었다. 형은 키 170센티에 몸무게가 150kg이 넘지만, 동생은 키 180센티에 몸무게가 50kg에도 못 미쳤다. 참고로 형은 체중초과로 동생은 체중미달로 둘 다 군대를 면제 받았다. “그럼 됐어. 넌 내 차에 같이 타서 멸치랑 계속 연락해. 나머지 애들은 내 차 따라오고.” “알겠습니다,형님! 박일현은 차에 타자마자 엑셀을 밟아댔다. 그 뒤를 두 대의 봉고차가 따랐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일현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리라. 차리리 죽여 달라고 빌게 해줄테니.” * * * * 지니는 세영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남이섬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상당수가 40대 일본 아줌마들이었다. “여기가 겨울연가의 촬영지인가 보네요.” 남이섬에 들른 일본 관광객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은 만큼 겨울연가 촬영지를 거쳐 갔다. “우리도 구경이나 할까요?”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가면 억울하겠죠?” 지니는 세영과 함께 촬영지를 거닐며 구경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초절정 미청년 지니의 모습에 일본인 관광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청년 좀 봐.” “서양인이네.” “어쩜 저렇게 잘 생겼을까?” “손 한번만 잡아봤으면 좋겠는데.” 일본인 관광객들인 만큼 일본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지니는 쉽게 알들었다. 세영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아줌마들의 시선만 봐도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세영은 일본 아줌들을 경계하며 지니의 팔에 더욱 몸을 붙였다. 그 순간,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한 대의 승용차와 두 대의 봉고차가 멈춰서고, 그곳에서 수십 명의 사라들이 내렸기 때문이다. “흐음, 벌써 왔나 보군요.” 지니는 웃음을 지었다. 박일현은 금방 지니를 발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니의 외모는 어딜 가나 쉽게 눈이 띄었다. 대한민국 땅에서 금발을 길게 기른 초절정 미청년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너 이 새끼!” 박일현이 소리치자 세영은 깜짝 놀라 지니의 뒤로 숨었다. “지,지니님. 저 남자는.....” 지니는 세영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절 믿으시나요?” “예. 전 항상 지니님을 믿어요.” “그럼 안심하시고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세영님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지니의 말에 세영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 지니님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지니님께서도 조심하셔야해요.” “세영님을 위해서하도 최대한 조심하겠습니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기사가 레이디에게 하는 것처럼, 지니는 세영의 손등에 살짝 키스를 했다. 세영은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만약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호흡 곤란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 세영에게 진정으로 위협이 되는 사람은 수십 명의 험악한 남자들이 아닌, 사일런스 지니 였다. 다행히 지니가 몸을 돌림으로 해서 세영은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지니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박일현님이시군요.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건지?” 박일현 뒤에 서 있는 험악하게 생긴 20명의 남자를 뻔히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니의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박일현은 이를 갈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내 돈 돌려주시지. 돈 돌려주고 무릎 꿇고 싹싹 빌면 팔다리 하나씩만 박살내는 걸로 끝내 줄 테니까.” 지니는 더욱 빝은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흐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돈이라니요? 대체 무슨 돈을 말씀하기는 거죠?” “니가 빌려간 내돈 말이야!” “제가 돈을 빌렸다구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전 당신한테 돈을 빌린 기억이 없는데.....” “니가 오전에 저 여자랑 같이 사무실에 와서 10억 빌려갔잖아!” “여전히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계약서를 볼 수 있을까요? 설마 계약서도 쓰지 않고 10억이란 거금을 대출해줬다고 말씀하시지는 않겠죠?” “계약서는 니가 빼돌렸잖아!” “어이가 없군요. 그럼 아무 증거도 없이 몰아붙이시는 겁니까?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돈 내놓으라는 식이군요.” “이 새끼가.....” 박일현은 눈을 부릅뜨고 지니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니는 피식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불었다. 박일현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상대로 수작 부린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박일현은 뒤에 있는 심부름센터 직원들에게 눈짓을 했다. “일단 둘 다 차에 태워.” 조용한 곳을 끌고 갈 생각인 듯 했다. 심부름센터 직원 두명이 다가왔다. 지니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담배를 피우고 있어고, 세영 역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니가 믿고 기다리라고 했으니, 그저 믿고 기다릴 뿐이다. 아아~ 사랑의 힘이란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한 남자가 지니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 순간 그 남자는 튕겨져나갔다. 퍼억!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초자 알 수 없었다. 다만 튕겨져 나간 남자가 배를 움켜잡고 있고, 지니의 두 마리와 왼쪽 팔이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봐서 오른손으로 배를 쳤을 거라 추측할 따름이었다. 지니는 세영에게 손을 대려는 남자의 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벽이 찍어버렸다. 퍼억! 남자는 회색 벽에 붉은색 핏자국을 남긴 채 쓰러졌다. 예상치 못한 지니의 행동에 박일현과 심부름센터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특히 박일현의 놀라움은 컸다. 박일현은 지니를 단지 여자등쳐먹는 제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싸움을 잘할 줄이야.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건가? 박일현은 이를 갈며 외쳤다. "뭐하고 있어 빨리 차에 태우라니까!“ “예, 형님!” 어쨌든 저쪽은 한 명이고 이쪽은 방금 당한 둘을 배더라도 18명이다. 게다가 평소 악성 채무자들 잡아 조지는 일로 단련된 정에들이다. 그러니 상대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소용없다. 박일현은 자신만만했다. 저놈을 지하실로 끌고 가 사지를 묶어 놓고 개 패듯이 패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니는 한 손으로 돼지의 목(정확히는 살에 파묻혀 목인지 턱인지 구분이 안 가는 곳)을 잡고 들어올렸다. “켁켁!” 돼지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지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r 모습에 모두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몸무게가 150kg가 넘어가는 돼지를 한 손으로 들어올리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뭐,뭐하고 있어? 이 틈에 공격해야 할 거 아냐? 박일현이 소리치자 심부름센터 직원들은 정신을 차리고 지니에게 달려들었다. 지니는 손에 들고 있던 돼지를 달려오던 남자들에게 집어던졌다. “아악! 살려줘!” “커억!허리가......” 돼지의 육중한 몸에 깔린두 남자는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지니는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첫 번째 남자가 주먹을 휘둘렀다. 지니는 몸을 슬쩍 비키며 내민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비틀어 꺾었다. 순식간에 공격자와 방어자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지니는 그 상태에서 발로 다른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리고 그대로 몸음 회전시켜 반대쪽 남자의 옆구리에 옆차기를 넣었다. 퍽퍽! 지니가 그림과도 같은 동작을 선보일 때마다 심부름센터 직원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줌마 관광객들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절로나왔다, “스고이(굉장해)! “스테키다(멋지다)!” “스바라시이(대단하다)!” “간바떼 구다사이(힘내세요)!” “브론도상 화이또(금발씨 파이팅)!” 어느새 지니의 팬이 되어버린 일본 아줌마들. 멋진 남자에게 반하는 데는 국적도 인종도 나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젠장!저 여자 먼저 잡아!” 여자를 잡고 협박하면 어쩔 수 없이 저항을 포기할 것이다. 비열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차피 사채업자라는 직업이 정의와는 거리가 머니 상관없었다. 벌써십여 명이 나가떨어진 터라 심부름센터 직원들은 멍설임 없이 세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지니가 아니었다. 지니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지니는 가장 먼저 달려든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피와 이빨 조각이 허공으로 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당한 선에서 타격을 줬던 지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니는 상대의 뼈를 부러트리고 관절을 망가트렸다. 우드득! 기괴한 소리와 함께 팔이 꺾이며 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왔다. “으아악!”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남자는 눈을 뒤집어 까며 실신했다. 아마 다 시는 오른팔로 수저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지니에게 달려들 만큼 용기 있는 남자는 없었다. 쓰러진 심부름센터 직원들은 기어서라도 지니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박일현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심부름센터 직원을 20명이 나 끌고 왔으니, 일이 순조롭게 풀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이렇게 강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니는 조소를 지으며 박일현에게 다가갔다. 박일현은 도명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뎌룽ㄴ 나머지 몸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이 남자가 뿜어내는 살기는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종유의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런 살기를 내뿜을 수 있는 걸까? 지니는 덜덜 떠는 박일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엔 무사히 보내드리지요. 당신을 상대하실 분은 따로 계시니까요.” 말을 끝마친 지니가 몸을 돌리자 박일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 앉았다. 지니는 세영과 함께 자리를 떴다. 관광객들은 박일현과 바닥에 누워 고통에 신음하는 남자들을 보며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 * * * 당연한 얘기지만 박일현은 절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되찾아야 했고, 그 자식을 죽여야 했다. 살면서 이런 꼴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앞에서 자신은 마치 한 마리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꾹 누르면 죽일 수 있는 벌레. ‘반드시 죽여주마.’ 하지만 힘이 없었다. 심부름센터 직원 20명을 순식간에 박살낸 그를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힘이 없으면 빌리면 그만이지.’ 박일현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형님. 저 박일현입니다. 부탁이 있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 * * * * [박일현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죠. 돈 잃고 맘 좋은 놈은 세상에 없으니.” [조만간 2차 공격을 감행해 올 것이라 생각됩니다.] “2차 공격이라니. 기다리던 바로군요.” [조만간 움직일 거라 생각됩니다. 이따 연락을 드릴 테니, 전에 말씀드린 장소로 나와 주시면 됩니다.] “예. 게속수고하세요.” 지니의 보고에 따르면 남이섬 저누(이제부터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에서 우리 편(그래봐야 지니 하나지만)이 20배의 적고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이렇게 말하니 뭔가 있어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지휘에 힘입은 결과다(라지만 난 아무 것도 안했다). 아무튼 부하들을 잃고 도주한 박일현은 새로운 세력에게 도움을 청하고 군사를 빌려 다시금 전투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 전투는 박열힌의 마지막 전가 될 것이다. * * * * 박일현이 연락한 사람의 이름은 오세웅. 조직원을 100명이나 거느린 투명드래곤파(줄여서 투드파)의 보스였다. 오세웅은 박일현의 감방 선배였고, 지금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친분만으로는 한 조직을 보스를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10억의 10%인 1억을 떼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던 오세웅은 조직원들을 이끌고 나섰다. 다행히 상대는 핸드폰을 켜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쪽이 GPS로 추적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늦으면 늦을수록 돈을 되찾을 확률이 줄어든다. 그렇게 생각한 박일현은 한시 바삐 지니를 쫓았다. 지니가 멈춘 곳은 건설이 중단된 채 방치된 건물 안이었다. 부동산 투기 봄이 볼 때 한몫 챙겨 보겠다고 마구잡이로 시공을 하던 건설사가 망하는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어 있는 건물. 지니는 그곳에 차를 세우고 본네트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건물 안을 음산한 달밫만이 밝혀주었다. 곳곳에 폐자재들이 널려 있었다. 부러진 각목, 녹슨 철근 등등. 세영은 중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차는 하루 동안 빌리기로 했다. 부르릉 부르릉.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EF소나타를 선두로 검은색 그랜저와 봉고차가 몰려왔다. 지니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차들이 멈추며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차의 시동은 껐지만 건물 안이 어두웠기에 헤드라이트는 켜투었다. 지니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환영합니다. 또 뵙게 되니 반갑군요.” 박일현은 그런 지니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런 곳으로 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게다가 마치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라니! “뭐하자는 거지?” “그건 그쪽이 이제부터 결정해야할 문제지요.” “유인당한 건가?” 상황을 볼 때 저놈은 추적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곳으로 온 것이다. 사람 하나 없는 공사 중지된 건물 안. 이런 곳에서라면 사람이 죽어 나가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박일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별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딘가에 사람을 숨겨 놓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일현은 점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저 금발 남자는 자신의 상싯을 벗어나는 존재였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상식 밖에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기 마련이다. 국적과 인종을 알 수 없는 외국인, 웬만한 연예인은 명함도 못 내밀만큼 잘생긴 외모, 순식간에 바뀌는 표정과 말투, 엄청난 싸움 실력까지. 살다 살다 이렇게 이상한 인간은 처음이었다. “저 자식이야?” “그렇습니다, 형님.” 오세웅은 박일현은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외모는 대다수 사람들이 상상하는 조폭의 모습 그대로였다. 큰 키에 우람한 체구, 깍두기 모양의 머리와 흉터 꿰맨 자국이 나있는 살벌한 얼굴, 그리고 목에 무리를 줄 것 같은 두꺼운 금목걸이와 잘 어울리지 않는 금시계까지. 그야말로 조폭의 표번이라 할 수 있겠다. 오세웅은 척 보는 순간 지니가 마음에 안 들었다. 너무 잘생긴 얼굴때문이었다. 게다가 벽안에 금발이라니! “저 양키 새끼가 니 돈 떼어먹고 날랐냐?” “예, 형님.” 박일현은 오세웅이 앞으로 나서자 자신감이 붙었다. 오셍웅이 누군가? 조직원이 100명이나 되는 투드파의보스다. 얼마 전에는 투투명드래곤파(줄여서 투투드파)를 깨부수기도 했다. 그런 오세웅이 투드파 조직원 50명은 데리고 이곳에 왔다. 그러니 저 자식이 어떤한 수작을 부려도 소용없을 것이다. 오세웅은 잘생긴 남자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잘 생긴 남자라면 무조건 싫었다. 이세상에 잘 생긴 것들은 전부 죽어야 했다. 오세웅이 이렇게 삐뚤어진 증오심을 갖게 된 것은 유치원 때 일 때문이었다. 꽃님 유치원 노랑반의 오세웅 어린이. 오세웅 어린이는 초록반의 성은미 어린이를 좋아했다. 초록반의 성은미 어린이는 꽃님 유치원의 여왕이었다. 귀엽고 깜찍하고 아름다운 은미의 모습에 수많은 남자들이 찝쩍거렸다. ‘내 도시락 좀 먹어봐. 오늘은 소시지 반찬이야.’ ‘숙제 내가 대신해줄게.’ ‘엄마한테 용돈 받았는데, 가는 길에 같이 떡볶이 먹으래?’ ‘이거 우리 아빠가 미국에서 보내준 과잔데, 너 다 먹어.’ 세웅도 그런 추종자들 중 한 명이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세웅은 자신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없는 돈에 꽃까지 사서 그녀의 집 앞 골목에서 기다렸다. 발랄하게 뛰어오는 그녀. 세웅은 재빨리 그녀의 앞에 나서 무릎을 꿇고 꽃을 바쳤다. ‘내 마음이야. 제발 받아줘.’ 그녀는 그 꽃을 받았다. 세웅이 기뻐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꽃을 떨어트린 다음 발로 짓밟은 것이다. ‘미안하지만, 난 너같이 못생긴 애한테 관심 없어. 솔직히 말해 너같이 못생긴 애가 날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빠.’ 날카로운 비수 같은 그녀의 말은 세웅의 가슴을 후벼 팠다. ‘나,난 널 좋아해! 이렇게 하면 날 받아줄래?’ ‘너같이 못 생긴 애는 싫다니까 이만 내 앞에서 비켜줄래?’ 세웅은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세웅은 은미가 빨간반의 영철이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철이는 키 크고 얼굴 하얗고 잘 생긴 아이였다. 은미랑 붙어 다니는 영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세웅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졌다. 그 순간, 세웅은 영철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쓰러진 영철 위에 올라타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퍽퍽! 유치원 선생들이 달려와 말렸을 때는 상황이 끝난 뒤였다. 영철이는 눈이 찢어지고, 코가 주저 않고, 광대뼈가 부서졌다. 그리고 세웅은 주먹이 찢어지고 손가락 몇 개가 탈골되었다. 그때의 상처가 지금도 남아있다. 지니를 보니 은미와 같이 있던 영철의모습이 떠올랐다. “어이, 양키! 뭘 그렇게 실실 웃냐?” 두려워 벌벌 떨어도 모자랄 마당에 지니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점이 세웅을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내 앞으로 끌고 와!” “예, 형님! 검은 양복을 입은 조직원들이 달려들었다. 지니는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듯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웠다. 조직원 하나가 지니에게 다가온 순간, 지니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지니의 발은 어느새 조직원의 몸에 닿아있었다. 퍼억!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조직원. 같이 달려든 조직원의 사정ㄷ 그리 낫지는 않았다. 그자는 지니의 무읖에 얼굴을 가격당하고 쓰러졌다. 놀란 세웅이 소리쳤다. “뭐하고 있어? 제대로 싸우란 말이야!” 여기서 제대로 싸우란 말은 인정사정 보지 말라는 뜻이다. 조직원들은 품에서 칼을 빼들거나, 가져온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지니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수년을 살아왔다. 이제까지 지니의 손에 죽은 이름 있는 장수만 해도 백여 명에 이르고, 이름 없는 병졸들은 셀 수조차 없었다. 그런 지니에게 이런 싸움은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지니는 휘두르는 쇠파이프를 산 손으로 잡고 비틀었따. 그리고 상대가 손을 놓자마자 빼앗은 쇠파이프로 무릎을 내리쳤다. 파각!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자 상대는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으아악!” 이제 무기까지 빼앗겼으니 더욱더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조직원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세웅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상대는 한 명이다! 배때기에 칼 한 번만 찌르면 끝이야! 저 새끼도 인간인데 설마 안 박히기야 하겠어?” 세웅의 말에 조직원들은 용기를 얻었다. 쓰러진 사람은 겨우 다섯, 이쪽은 아직 45명이고, 저쪽은 여전히 한 명이다. 상대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인간일 뿐이다. 칼로 찌르면 죽는 것은 당연하고, 인간인 이상 한번에 45명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 인간의 경우였다. 45명이라 해도 한번에 공격할 가할 수는 없다. 이중으로 둘러싸고 공격해 봐야 10이 고작이다. 그리고 지니는 상대가 둘러쌀 때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지니는 마치 검을 쓰듯 쇠파이프를 내리쳤다. 참고로 지니는 검술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지니 앞에서 무기를 쓴다는 것은 복싱 세계챔피언 앞에서 양아치가 주먹질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었다. 퍼억! 빠각! “우아악!” “커억!” 지니의 쇠파이프가 휘둘러질 때마다 어김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조직원들이 속수무책을 쓰러지자 세웅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뭐,뭐냐, 저놈은? 저런 실력이라니!”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되니 물러날 수도 없었다. 조직원 50명이 한 놈한테 깨지고 보스는 도망갔다는 소문이 퍼지면, 투드파는 그 날로 끝장이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저놈은 쓰러트려야 했다. 세웅은 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등산용품점에서 15만원 주고 구매한 ‘동물의 뼈도 끊는 칼’ 이다! 전국구 칼잡이들의 복대마저 뚫을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칼이지. 이 칼로 네놈의 배를 찌른 다음 빙글 돌려주마!” 쓸데없는 설명을 늘어놓은 세웅은 힘차게 돌진했다. 나름대로 전국구 칼잡이를 자부하는 세웅인 만큼 그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하지만 지니는 그런 세웅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으아아!” 세웅은 힘찬 기합과 함께 칼을 내질렀다. 푸욱! 칼이 깊숙이 박혔다. 세웅은 웃음을 지르려다 이상함을 느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배때기를 찔러왔지만, 이런 느낌이 든 적은 처음이다. 찌르는 순간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달랐다. 사람 배를 찔렀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닌 좀더 부드럽고 자연스런느낌이다. “뭐,뭐지 이 느낌은?” 세웅의 말에 지니가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뭐긴 뭐겠습니까? 공중전화번호책 느낌이지요.” “헉!” 지니는 어느새 손에 무려 1천 페이지가 넘는 공중전화번호책을 들고 있었고, 세웅의 칼은 그 책의 한복판에 박혀 있었다. 책이 얼마나 두꺼운지 끝 장은 뚫리지도 않았다. “전국구 칼침도 공중전화번호책은 뚫지 못한다는 말에 궁금해서 한번 가져와 봤는데, 사실이었군요.” “이익!” 세웅은 칼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깊숙이 박힌 칼은 아무리 잡아당겨도 빠지질 않았다. 지니는 그런 세웅을 보고 웃으며 쇠파이프로 어깨를 내리쳤다. 빠각! “아아악!” 빗장뼈는 가늘고 길어 작은 공격에도 쉽게 부러진다. 그래서 검술에서 대각선 베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다. 칼이 빗장뼈를 베고 들어가면 그 밑에는 중요한 장기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일격에 즉사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뼈가 부러질 때의 고통은 엄청났다. 하지만 세웅은 그것을 참으며 반대편 팔로 공격을 시도했다. 그래봐야 무의미한 발악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니는 가차 없이 세웅의 얼굴을 발로 짓밟았다. 세웅이 깨지자 투드파 조직원들은 감히 덤비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도,도망치면 어쩌자는 거야?” 박일현이 외치자, 조직원 중 한 명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럼 니가 싸울래?” “......” 투드파가 깨진 마당에 박일현 혼자서 뭘 어쩌겠는가? 지니는 세웅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컥!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앞으로 밤길 조심해. 조직의 쓴맛을.....” 짜악! 지니는 끝까지 잘났다고 주둥아리를 나불거리는 세웅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녹룡파의 제갈량님과 청룡파의 박카스님을 아십니까?” “헉! 니,니가 그분들을 어떻게......”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그분들과 싶은 친분이 있으십니다. 살고 싶으면 조용히 지내십시오. 다음번에 마주칠 땐 이런 행운은 없을테니까요.” ‘보통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녹룡파 보스와 청룡파 보스를 알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모시는 분이라니. 역시 이놈도 조직의 일원?’ 어쩐지 시렭이 너무 뛰어나다 했다. 자신을 비롯한 조직원 50명이 달려들어도 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의 실력이니. 어쨌든 이쯤에서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다 좋을 듯했다. “아,알았다.” 세웅이 힘겹게 말하지 지니는 잡은 멱살을 놓아주었다. 세웅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차로 걸어갔다. “돌아간다.” “잠,잠깐만요, 형님! 돈을 받아내야 할 것 아닙니까?” “할 수 있으면 니가 해, 이 새꺄!” “으윽.” 세웅은 박일현이 만류를 부리치고 차에 올라탔다. 이렇게 되면 박일현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박일현은 허겁지겁 차에 올라탔다. 문드을 닫으려 하는데, 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지니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헉!” 지니는 그대로 박일현을 밖으로 끌어냈다. “당신이 가면 곤란합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시거든요. “누,누구?” “아! 마침 저기 오시는군요.” 박일현은 지니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 * * * “여, 안녕하세요!” 난 박일현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너,넌 설마.....” “어라? 벌써 절 잊으신 건가요? 이거 섭섭한대요.” “네,네놈이 여길 어떻게.........?” 박일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난 그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지니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지니는 뒤로 물러났다. 박일현은 놀라 입 모양만 뻥긋거렸다. “어어......” “예? 뭐라구요?” “네놈이구나!” 박일현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네놈이 저놈과 짜고 일을 꾸민거지!” “으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일을 꾸미다니? 혹시 피해의식 같은 걸 가지고 계시나요?” “이 새끼가!” 박일현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난 몸을 뒤로 젖혀 그 주먹을 피했다. 그러자 박일현은 주먹질, 발길질을 마구 날렸다. “죽어, 이 새꺄! 죽어!”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더니, 정말 그렇게 행동하시는군요. 으음, 이거 제법 무서운데요.” 난 작은 동작으로 박일현의 공격을 모두 피했다. 절대감각을 지니고 있는 나에게 이런 허접한 공격이 통할 리 없다. “으아아!” 내가 한 대도 맞지 않자 박일현은 거의 발악을 하다시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맞아줄 생각은 없다. “내 돈 내놔, 새꺄! 내 돈 내놔!” 얼마나 분한지 박일현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게 되자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동안 젊은 여자들 집창촌에 팔아넘기고, 장기매매하고, 사람패죽이던 박일현이 이런 꼴이 되다니. 그동안 박일현에게 당한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말할까? 결국 제풀에 지친 박일현은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졌다. “나,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거냐?” “글쎄요. 원한이라면 원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닐 수도 있죠. 그러게 40만원 줬을 때 그냥 조용히 받아갔으면 됐잖아요. 왜 멀쩡한 사람을 때리고 그러세요?” “겨우 그 일 때문에 날 이렇게 만든 거냐?” “겨우 그 일이라니요?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얼마나 기분이 나쁠지 생각해 보셨나요? 뭐, 그런 걸 생각했으면 그런 행동을 했을 리도 없었겠지만요. 그리고 평소에 좀 착하게 살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두 대 맞은거 네 대 때리는 걸로 끝냈을 텐데. 순간, 박일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죽여버리겠어!” 박일현은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다. 난 그 칼을 손가락 끝으로 막아냈다. “이익!” 박일현은 온 힘과 체중을 칼에 실었다. 하지만 내 손가락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으음,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강한 것 같다. 하기야 8클래스 마스터에 오기조원의 경지에까지 올랐으니, 강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난 손가락을 살짝 접었다 튕겼다. 그러자 칼은 저만치 튕겨서 나갔다. “어,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뭐,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죠.” 처음에는 몇 대 패줄 생각이었으나, 지금 모습을 보니 때리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 멋지게 복수를 했지만, 기쁨보다는 허무함이 마구 밀려왔다. 아아~ 복수란 허무한 것. 한번 사는 인생. 사랑하며 살아도 부족한데 어찌 그리고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난 나락으로 떨어진 박일현의 모습을 보는 순간, 큰 깨달음을 얻었다. 으음, 이렇게 빨리 깨달음을 얻다니. 설마 또 강해지는 것은 아니겠지? “내 돈 내놔. 내돈 내놓으란 말이야!” 박일현은은 마치 사탕 사달라고 칭얼대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난 쓴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겠군요. 가죠, 상ㄹ런스 백작님.” “예.” 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난 제빨리 몸을 옆으로 비키며 오른팔을 벌렸다. 간발에 차이로 칼을 든 손이 옆구리와 팔 사이로 튀어나왔다. 난 그 팔을 움켜잡고 관절을 꺾었다. 우드득! “으아악!” 박일현은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칼을 떨어트렸다. 챙그랑! 난 바닥에 떨어진 잭나이프를 발로 밟으며 몸을 돌려 박일현을 노려보았다. 박일현의 얼굴은 공포에 가득 질려있었다. 방금 받일현의 살기는 진짜였다. 그런 살기는 사람을 죽여 본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것이다. 박일현은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박일현은 공포를 이기지 위함인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내 돈 내놔! 그 돈이 없으면 난 사장한테 죽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죽을 거야. 그 새끼가 날 살려둘 리 없어!” “미안한 얘기지만, 댁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네요, 이제까지 스스로 한 짓을 생각해보세요.” 내가 가져간 돈으로 인해 박일현은 정말 죽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자비를 베풀어 그를 살려준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는 박일현으로 인해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내가 박일현을 구해준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기가막히고 억울해 하겠는가? “돈이 없으면 버세요. 그래도 없으면 떼다 파세요. 각막, 안구, 신장, 폐, 간, 심장 등등. 장기매매 업자와도 잘 아는 사이이니 좋은 값에 팔 수 있을 겁니다. 설마 남의 장기는 떼다 팔아 놓고, 자기 장기는 팔기 아깝다는 것은 아니겠죠?” “그,그런......” 채무자들의 피를 쥐어짜던 사채업자 박일현은 이제 사채업자에 쫓기는 채무자 입장이 되었다. 이런 것이 인과응보다. “그,그럼 이렇게 하자. 반이라도 돌려줘, 딱 5억만 돌려줘, 제발!” “.........” “둘려주기 싫으면 빌려줘. 아니, 빌려주세요. 그 돈 없으면 저 죽습니다.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박일현은 울며불며 매달렸다. 대항할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난 함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울며불며 매달린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구원해줬다면, 당신 역시 구원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박일현은 그런 적이 없었고, 나 역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부디 절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은 자신의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간 거니까요. 남의 눈에서 눈물나면, 자신의 눈에서 피눈물 난다는 사실을 진작 깨달으셨으면 좋았을텐데.........안타깝네요.” 난 매달리는 박일현을 뿌리치고 차에 올라탔다. 지니는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돌아와, 이 새꺄! 당장 돌아오지 못해? 가면 죽는다. 진짜 죽일거야!” 박일현은 마지막 힘을 다해 악담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소리는 이내 멀어졌다. 복수를 하면 기쁠 줄 알았는데, 내 기분은 지금 엉망이었다. 박일현의 비참한 모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동안 박일현이 해온 짓 때문이었다. 그는 철저히 사채업자라는 직업에 충실했고, 돈을 받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사용했다. 아버지가 돈을 못 갚았다고 해서 딸을 집창촌에 팔아 버린 것 정도는 악행 축에도 끼지 못했다. 어떤 가족은 가장이 빌린 돈 때문에 4인 가족 모두가 신장을 하나씩 떼야 했다. 신장 네 개라고 해봐야 불어난 이자 갚기에도 부족했다. 결국 부부는 각막 하나씩을 떼어 난 뒤에야 원금을 상환할 수 있었다. 견디다 못한 일가족이 동반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다. 박일현은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펑펑 쓰고 다녔다. 무일푼에서 시작한 그는 집도 장만하고 차도 장만했다. 그에게 있어서 사채업이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난 이번 일로 새삼 깨달았다. 돈이 없어서 죽을 상황에 처하더라도 사채는 끌어다 쓰면 안 된다는 것을 * * * * 어떻게 해도 사장에게 빌린 돈을 갚을 수가 없었다. 사장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둘 중 하나였다. 그 자리에서 죽거나, 평생 쥐어 짜이거나. 박일현은 어느 쪽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사장이 눈치 채기 전에 남은 재산을 처분해 해외로 도망치기로 했다. 그는 비밀리에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다행히 전에 만들어 놓은 여권의 유효기간이 아직 남아있었다. 이제 비자가 없는 나라로 도망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도 없다. 동거녀야 알아서 살 길 찾아 나서겠지. 돈을 싸들고 차에 올라탄 그는 시동을 걸었다. 오른쪽에 팔에 깁스를 하고 있어서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기아변속 방식이 오토매틱 트랜스미션이니 한 손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가 출발을 하려는 순간 차 두 대가 나타나 그의 차 앞뒤를 가로막았다. 차 안에서는 검은양복을 입은 남자드이 내렸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사장님께서 잠시 보자십니다.” “적상어......” 키가 멀대 같이 큰 남자. 그는 사장의 직속 부하인 적상어였다. 박일현은 도망치기 위해 엑셀을 힘껏 밟았다. 하지만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덩치 좋은 남자 넷이 앞범퍼에 달라붙어 차를 들어올린 것이다. 전륜구동인 차의 앞바퀴를 들어올렸으니 차가 움직일리 없다. 바퀴는 허공에서 헛돌 뿐이었다. 적상어는 피식 웃으면 유치창을 톡톡 두드렸다. “그만하고 나오시지요.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오시기 힘드시면 제가 직접 꺼내드릴까요?” 박일현은 모든 것이 끝났을 직감했다. 인풋&아웃풋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지하실. 이곳의 원래 용도는 창고지만, 실제로는 고문실로 쓰리고 있었다. 빌린 돈 안 갚는 놈들을 이곳에서 끌고 와 지옥이 뭔지를 보여준다. 손톱을 뽑기도 하고,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리기도 한다. 가끔은 장도리로 이빨을 뽑기도 한다. 박일현은 그런 고문을 가할 때마다 일종을 쾌감 느꼈다. 하지만 자신이 입장이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이곳에 오게 되니 극도의 공포감이 느껴졌다. 그들은 박일현을 주저 앉혔다. 불을 켜자 지하실 내부가 드러났다. 채 치우지 못한 핏자국과 토사물이 널려 있었다. 뽑힌 손톱과 이빨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시체 썩는 것 같은 쾨쾨한 냄새가 지하실 안을 맴돌았다. 뚜벅 뚜벅.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왔다. 하얀색 양복을 입고 백구두를 신은 노년의 남자. 하얀 턱수염과 하얀 중절모가 그를 인자한 할아버지로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가 바로 인풋&아웃풋의 사장이었다. 사장은 박일현을 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다른 노이라면 몰라도 네놈이 날 배신할 줄은 몰랐다.” 박일현은 재빨리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아닙니다, 사장님. 전 사장님을 배신하려 한 것이 아니라.....” “얘기는 다 들었다. 10억을 날렸다지? 나한테 빌려간 7억을 어떻게 갚을 생각이냐?” “그,그건.....” “집 담보로 해서 대출 받은 돈이 1억 정도 될테니. 6억만 마련하면 되겠군.” “예, 예. 제가 어떻게든 마련하겠습니다. “언제까지 갚을 거냐?” “조,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갚겠습니다. “쯧쯧, 누구나 말은 그렇게 하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갚겠다고. 하지만 그 말을 지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지에 몰려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의 말을 믿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없다는 것은 너도 겪어봐서 잘 알지 않느냐?” “그,그건.......” 사장의 말이 맞았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그들은 항상 지키지 못할 말을 마구 떠벌린다. 그리고 위기를 벗어나게 되면 다시 그 약속을 까맣게 잊는다. 박일현은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그런 자들이 하는 말은 하등 믿을 가치가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일현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장이 자신을 믿엊길 간절히 바랐다. 사장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적상어가 의자를 가지고 왔다. 사장은 그 의자에 앉아 박일현은 내려다 보면 말했다. “일단 얘기를 들어보자꾸나. 네놈처럼 철두철미한 놈이 어떻게 속은건지.” “예, 예. 그러니까.........” 박일현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하게 말했다. 세영과지니, 히로의 이름이 언급되었음은 물론 인상착의와 핸드폰번호 등 아는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심부름센터 직원 20명이 깨졌다는 것과 투드파의 보스 오세웅과 조직원 50명이 당했다는 것까지 전부. 사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놈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냐?” “그렇습닏. 보통 놈이 아니었습니다. 제 평생 그렇게 강한 놈은 처음이었습니다. 투드파 보시인 오세웅 형님이 당한 걸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그 지니란 놈도 그렇지만, 히로라고 불리는 남자도 제법이었습니다. 그런 강한 남자를 부하로 부릴 정도니, 스스로의 실력이 대단하거나 거대한 조직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히로라........... 이상한 이름이구나.” “아무래도 별명인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럴 가능성이 높겠군.” 조직폭력배의 경우를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이름보다는 서로의 별명을 즐겨 부른다. 돼지, 멸치, 도끼, 칼날 등등. 사장은 히로와지니도 그런 맥락일 거라 여겼다. 사장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자 박일현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제 정보를 다 빼냈으니 흥미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박일현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머리를 박으며 말했다.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그 년놈들을 찾아 죽여버리고 돈도 되찾아 오겠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혀를 찼다. “쯧쯧, 니가 무슨 수로 그렇게 할 꺼냐? 네 말대로라면 지니라는 놈 하나 상대하는 데도 100명 정도가 필요한데. 팔병신인 니가 나서서 싸우기라도 할 거냐?” 박일현은 히로에게 최후의 기습을 감행했다가 관절 꺾기를 당했다. 천만다행으로 불구가 되는 것은 면했지만, 앞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싸움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놈의 뺀질거리는 얼굴을 떠올리니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놈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졌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곳에 어떻게 있는 것도 전부 그놈 때문이다. 박일현은 히로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놈을 고통스럽게 죽인 뒤 생살을 씹어 먹고 싶었다. 그는 감옥에서 읽는 몬테크리스토 백작 이야기를 떠올렸다. 만약 이곳은 나가게 되면 반드시 그놈에게 복수하리라. 차라리 죽소 시파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게 짓밟아 주리라. 박일현은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조금도 떠올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당한 것만 생떠올랐다. 자신에게는 복수를 할 충분한 권리가 있었다. 어차피 도피 자금마저 빼앗긴 이상 해외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에게 복수하리. 하지만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너의 마음은 잘 알았다. 하지만 너에겐 더 이상 기회가 없을 듯 하구나. 내가 한번 배신한 사람은 절대 안 믿는다는 사실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박일현은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닙니다! 전 결코 사장님을 배신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쯧쯧, 그럼 이 여권을 뭐고, 이 비행기표는 뭐냐? 너 내 돈을 갚지 않은 채 도망치려 했다.” “그,그건........” 변명을 하고 싶어도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박일현은 머리를 받고 울면서 용서를 구했다. “하,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미안하구나. 하지만 네 몸을 받는 것으로 네 빚은 탕감해 준다고 약속하마.” 사장으 s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짓을 햇다. 그러자 남자 둘이 다가와 박일현을 붙잡았다. “으아악!” 박일현은 온힘을 다해 발광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한 남자가 주사기와 별을 꺼내 주사기에 액체를 채웠다. 박일현은 주사기에 든 액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사를 맞은 사람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도. 왜냐하면 그가 많이 했던 짓이기 때문이다. “으아악! 살려줘! 제발 하지마! 제발!” 박일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주사바늘을 찔러 놓고 액체를 주입했다. 그것은 마취제였다. 마취제를 주입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다. 용량을 잘 못 조절하거나 실수를 할 경우 대상자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취제는 허가 받은 사람 이외에는 다룰 수 없는 약품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이들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다시 깨어나지 않아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박일현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가 잠들면 이들은 그를 차에 실고 병원으로 옮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배를 가르고 필요한 장기를 끄집어낼 것이다. 사장은 눈을 감으며 몸을 늘어뜨리는 박일현은 보고는 몸을 돌렸다. “멍청한 녀석.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 복수는 내가 대신 해줄테니.” 사장은 박일현을 물 먹인 놈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며 계단을 발을 올렸다. 이단은 여자부터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 이세영이라는 여자부터 잡으면, 다른 놈들은 알아서 나타나게 되어있다. 인질로 협박하는 것은 고전적이다 못해 전부하기까지 한 수법이지만, 그만큼 쉽게 먹혀들었다. 사장이 계단을 다 올랐을 때 쯤이었다. 어디선가 날라온 발길질이 그의 가슴을 때렸다. 퍽! “아이쿠!” 무게주심을 잃은 사장은 계단을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하얀 양복은 엉망이 되었다. “누구냐?” 적상어가 재빨리 사정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뚜벅뚜벅. 구두소리가 울려 퍼지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계단을 내려온 사람은 붉은 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미청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크로니스. 사장은 크로니스를 보았다. 키는 크지만 얼굴이 마치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겼다. 게다가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와 비단처럼 부드럽고 긴 붉은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번 볼까 말까 한 미청년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한국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생긴 걸 보니 나이트클럽에서 삐끼를 하거나, 캬바레에서 사모님 쌈짓돈 노리는 제비를 하면 딱이겠군.“ 사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뭐냐, 네놈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사장의 질문에 크로니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죽이러.” 사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것은 적상어를 비롯한 사장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장은 바닥에 떨어진 중절모를 집어 머리에 썼다. 그리고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죽이러 온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 “대답하기 싫은가 보군.” 사장은 손직을 했다. 그러자 부하 한 명이 나섰다. “웬만하면 얼굴에 상처는 내지 마라. 저 정도 얼굴은 흔치 않으니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거다. 부하는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크로니스에게 다가가 멱살을 움켜쥐려 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퍼엉! 살점, 뼛조각, 피, 뇌수 등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까이에 있던 사장과 부하들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사장은 자신의 뺨과 수염에 달라붙은 끈적거리는 물체를 손으로 떼어냈다. 그것은 뇌의 한 조각이었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사장은 황급히 얼굴과 몸에 붙은 살점을 털어냈다. “어,어떻게 한 거냐?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상대를 우습게보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눈앞의 남자는 괴물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사람의 머리를 터트릴 수 있는. 살점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로니스의 몸에는 어떠한 것도 달라붙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에 피냄새를 묻힐 생각이 없었다. 크로니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까한 말을 실행에 옮겼다. 잠시 후. 지하실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체도 없고, 핏자국도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조용했다. 크로니스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모습은 마치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다른 실장 셋이 의문의 실종을 맞이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의 일이었다. * * * * 박일현에게 복수를 끝마친 나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니가 내 복수를 도와주느라 가게 리모델링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바람에, 공사 기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공사 기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가게에 재정 부담이 커진다. 그 재정 부담을 박일현에게서 뜯어낸 10억으로 메우려 했지만, 루시아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루시아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그나저나 루시아는 정말로 돈 욕심이 없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돈이 생기는 족족 기부를 하자고 할 수 있는 거지? 내 입장에서는 좀 불만이긴 하지만, 그래도루시아의 이런 아름다운 마음씨를 아이들도 좀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그런 의미에서 어린 엘들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물어보았다. “만약에 너희들에게 10억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뭐가 하고 싶니?” 어린 엘프들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이들. 과연 얘들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까? 만약 루시아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눈곱만큼이라도 배웠다면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쓸래요.’, ‘오빠를 위해 쓸래요.’ , ‘형을 위해 쓸래요’ 등등의 공익적인(?) 대답이 나올 것이다. 제일 먼저 일을 연 엘프는 라이. “라이는 그 돈을 막막 훌륭한 일에 쓸 거예요!” “정말? 우리 라이는 정말 착하구나. 그런데 그 막막 훌륭한 일이 뭐니?”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 실컷 먹는 거요!” “........ 그게 어떻게 막막 훌륭한 일이니?” “라이는 나중에 자라서 막막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니까요!” “..........” 그거랑 그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이번에는 루비가 입을 열었다. “루비는 막막 커다란 놀이공원을 지을 거예요. 그래서 막막 놀거예요.” “.......” 10억 갖곤 턱도 없을 텐데. 마지막으로 루가 입을 열었다. “저는 커다란 비행기를 사고파요.” “응? 비행기는 왜?” “형이 자꾸 비행기 안 태워주니까, 제가 사서 실컷 탈 거예요.” “......” 그 비행기가 그 비행기 아닌데. 아무튼 이걸로 애들이 자기들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엘프라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10억이 생기면 적어도 이 오빠한테 1억 정도는 떼어줘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이기적인 것들 같으니라고. -------------------------------------------------------------------------------- 아이리스 2부 7권 Substory 9 마음의 벗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인 어린 엘프들. 얘들이 이렇게 모인 이유는 다름 아닌 빨강머리 앤을 보기 위해서다. 빨강머리 앤의 원제는 그린 게이블즈 앤(Anne of Green Gables)으로 캐나다의 여류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 1874-1942)의 작품이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클리프턴에서 태어난 몽고메리는 30살 때인 1904년 봄에 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 10월에 끝을 내고 10개의 출판사에 보냈으나 모두 외면했고, 원고는 다락방에 처박혔다. 3년 뒤 우연히 다락방에 올라간 그녀는 자신의 원고를 발견하고 옛 기억이나 되살려볼 겸해서 읽어보았다. 그런데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읽었다. 자기 작품의 값어치를 새삼 깨달은 그녀는 다시금 용기를 내서 미국 보스턴 페이지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 출판사는 5백 파운드에 그녀의 작품을 샀다. 이렇게 해서 1908년 출판된 앤의 이야기는 선풍적 반응을 일으켰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소녀의 이야기는 전 세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어린아이에게는 꿈과 희망을, 어른들에게는 잃어버린 동심을 되찾아 주었다. 몽고메리는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앤의 이야기는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1979년, 일본의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그린 게이블즈 앤을 원작으로 해서 50편짜리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그 애니메이션이 그 유명한 ‘빨강머리 앤(赤毛???)’[일본어 모르겠네요 ㅠ.ㅠ] 이다. 이 작품은 원작을 그대로 살린 대화 위주의 내용, 아름다운 배경, 클래식풍의 음악 등으로 당시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손꼽혔다. 한국에서는 1986년 KBS에서 최초로 방영했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재방송을 했다. 25년도 더 된 작품이지만, 요즘 애니메이션과 비교를 해봐도 전혀 손색이 없다. 물론 화질과 기법 면에서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재미에 있어서만큼은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이 애니메이션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주인동 앤 셜리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엉뚱한 상상을 하고,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며,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앤 셜리. 노래 가사 그대로 예쁘지 않지만 사랑스럽다. 그녀가 가진 순수한 영혼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난 어렸을 때 빨강머리 앤을 정말 재밌게 보았다. 방영 시간만 되면 득달 같이 달려나와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때문에 채널권을 놓고 형과 대판 싸우기도 했다. 한국판 주제가를 지금도 다 기억한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머리 앤 괴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가슴에 솟아나는 아름다운 꿈 하늘에 뭉게구름 퍼져나가네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후뢰시맨과 독수리 오형제가 나의 우상이었다면, 빨강머리 앤은 나의 친구였다. 아무리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 난 빨강머리 앤을 생각하며 버텨낼 수 있었다. 으음, 그때는 나름대로 순진했었다. 아무튼 얼마 전부터 위성 방송 만화채널에서 빨강머리 앤을 재방영하기 시작했다. 애들이 열심히 보기에 난 어렸을 적 생각도 나고 해서 애들과 함께 시청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렸을 때는 순수하고 밝게만 보이던 앤의 모습이 이제는 달라져 보이는 것이 아닌가? 별 이상한 상상을 하질 않나, 다이아나와 헤어졌다고 이제 죽을테니 무덤에 다이아나 머리카락을 같이 넣어달라고 하질 않나, 툭하면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네 행복하네 하며 오바 해대질 않나……. 어린 시절 나의 친구였던 앤 셜리의 행동은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었다. “으아악! 이건 아니야아~!” 난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하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생각했다. 어째서 나의 친구 앤 셜리가 이렇게 변했는가? 내가 없는 사이 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깨달았다. 변한 것은 앤이 아닌 나라는 것을. 그렇다. 앤 셜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예전 모습 그대로 순수하고 착했다. 하지만 나는 변해 있었다. 험한 인생의 풍랑을 헤쳐 나가느라 세파에 찌든 나에게 순수한 앤의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어렸을 적 순수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아아~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위성 방송으로 보던 아이들은 나에게 빨강머리 앤 DVD를 사달라고 졸라댔고, 마침 DVD가 폭탄 세일 중이었기에 난 기꺼이 사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아이들과 같이 시청하는 중이었다. “와아! 시작한다!” 이번 편의 이야기는 앤과 다이아나가 친구가 되는 내용이었다. 한 가지 참고로 말하자면, 그린게이블즈 앤은 단권이 아닌 앤의 일대기를 담은 연작(連作)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본 빨강머리 앤은 앤의 이야기 중 첫번째에 해당한다. 즉, 고아인 앤이 마릴라네 집에 입양되고, 다이아나와 친구가 되고, 이리저리 사고를 치고, 마지막에 길버트 브라이스와 화해하며 끝나는 스토리까지가 1권이고, 그 다음 권에 앤의 다음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주엥 길버트는 앤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그 고백이 황당의 극치다. ‘니가 석판으로 내 머리를 내려친 순간부터 널 사랑하게 됐어’ 으음, 원래 좀 특이한 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취미가 있었을 줄이야. 사실 길버트와 앤의 만남은 상당히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길버트는 당시 학교 최고의 킹카였다. 마음만 먹으면 여자애의 눈길을 끌 수 있고,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길버트는 앤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했다. 마침 앤이 상상에 빠져있었기 대문이다. 길버트는 최후의 수단으로 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당근’ 이라고 놀려 댔고, 빨강머리가 콤플렉스였던 앤은 머리끝까지 분노해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길버트는 앤을 사랑하게 되었다. 노래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앤은 그다지 예쁜 편은 아니다. 주근깨도 그렇고, 배빼 마른 몸도 그렇다(요즘이야 빼빼 마른 게 미의 기준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풍만한 여인이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그 예로 항상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다이아나는 몸매가 통통한 편이었다). 게다가 빨강머리라는 콤플렉스도 있었다(당시에는 금발과 흑발을 아름다운 머리로 여겼다 그리고 빨강머리는 별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은 킹카인 길버트를 꼬시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전형적인 튕기기 수법이다. 모든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길버트에게 앤은 처음부터 무관심하게 굴었다. 심지어는 그의 머리를 석판으로 때리기까지 했다. 길버트 입장에서는 ‘나에게 이렇게 한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 다. 그러니 상당히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후에 길버트는 앤을 쫓아다니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앤은 ‘얄짤’ 없었다. 만약 앤이 쉽게 용서했다면, 길버트는 금방 흥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앤은 질질 끌다가 1권 마지막에서야 길버트를 용서했고, 길버트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기뻐했다. 사실 길버트가 그렇게 몇 년에 걸쳐 사과할 만큼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고작 머리 잡아당기며 당근이라고 놀렸을 뿐이다. 그런데도 앤은 길버트를 마치 부모 죽인 원수 대하듯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앤 셜리…… 은근히 독한 애다. 아무튼 앤의 튕기기 스킬로 인해 길버튼는 앤에게 완전히 빠져버렸고, 둘은 결혼까지 해서 애 낳고 잘 산다. 만약 앤이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의도적으로 행동한 것이라면, 앤의 내숭 스킬은 마스터 레벨에 도달해 잇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이 50편짜리 애니메이션은 1권 스토리만을 담고 있다. 만약 앤 전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면, 족히 500편은 나왔을 것이다. -다이아나. 나를 좋아해줄 수 있니? 나의 마음의 벗이 될 수 있을 만큼? -응.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네가 초록지붕집에 살게 되서 기뻐. 함께 놀 친구가 있다는 건 유쾌한 일일 테니. 지금까지는 함께 놀 친구가 가까이에는 없었어. 내 동생은 너무 어리고. -내 마음의 벗이 되겠다고 맹세할 수 있니? -응.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먼저 손을 잡아야 해. 원래는 흐르는 물 위에서 서로 손을 잡고 맹세해야 하지만, 여기에는 물이 없으니 이 오솔길을 흐르는 물이라고 상상하자. 내가 먼저 맹세의 말을 할게. 해와 달이 없어지지 않는 한 내 마음의 벗 다이아나 배리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자, 이제 니 차례야. 내 이름을 넣어서 말하면 돼. 앤과 다이아나가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마음의 벗이 되기로 맹세하는 장면이다. 둘은 그 맹세를 충실히 지켰다. 그러나 나중에 앤이 다이아나를 티파티에 초대해서 포도주를 주스인 줄 알고 마시게 하는 실수를 범한다. 다이아나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자 배리 부인(다이아나 어머니)은 분노했고, 앤과 헤어질 것을 딸에게 강요했다. 그리하여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둘. 앤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대와의 추억은 내 고독한 인생의 어쩌구저쩌구’ 등등의 별 이상한 헛소리를 다하며 다이아나의 머리카락 한줌을 받아온다. 그리고 마릴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너무 슬퍼서 이제 곧 죽을 테니, 이 머리카락을 제 무덤에 같이 넣어주세요. 냉정한 배리 아줌마도 내가 죽어서 싸늘하게 누워 잇는 걸 보면 후회하며 다이아나를 제 장례식에 보내주실 거예요.’ 당연한 얘기지만, 앤 셜리 여기서 안 죽는다. 목숨 질기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앤이 여기서 죽을 리 없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앤이 여기서 죽으면 스토리 진행이 안 된다. 어쨌든 그렇게 지내던 도중 캐나다 총리가 연설을 하기 위해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도착했다. 마을 어른들은 모두 총리의 연설을 듣기 위해 샬럿타운으로 향했다. 앤은 난로 앞에서 맷슈와 함께 잡담을 하고 있는데, 다이아나가 들이닥쳤다. 동생인 미니 메이가 후두염으로 몹시 아파한다는 것이다. 앤은 예전에 세 쌍둥이를 돌본 경험이 있었는지라 후두염의 치료법에 대해서 제법 아는 편이었다. 맷슈가 의사를 부르러 간 사이, 다이아나 집으로 가서 미니 메이를 간호하는 앤. 필사적인 앤의 간호 덕분에 미니 메이를 위기를 넘기고 안정을 되찾았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는 모든 치료가 끝난 뒤였다. 이 일로 인해 배리 부인은 앤에게 울면서 사과했고, 앤과 다이아나는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그 장면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런데 지금은 그저 하품만 나올 뿐이다. 마음의 벗? 훗~ 마음의 벗이 밥 먹여 주냐? 로또 복권 한 장에 부부가 갈라서는 세상이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서 걸어가는 가시밭길. 친구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만약 다이아나가 앤에게 빚보증을 부탁한다고 하자. 앤은 마음의 벗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이 서류에 사인을 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그 돈 다 날려 먹은 다이아나는 도망치고, 앤은 길바닥에 나앉게 된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빚보증은 서주면 안 된다. 빚보증 서줬다가 패가망신하는 일 비일비재하다. 무엇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친구 챙겨준다고 빚보증 섰다가 망하면, 그 책임은 자신만이 아닌 가족들까지 지게 된다. 가장이라면 친구보다 가족들을 먼저 챙겨야 한다. 그러므로 차라리 있는 재산 탈탈 털어서 줄지언정, 빚보증은 서주면 안 된다. 우정 챙긴다고 빚보증 서주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위의 경우를 보면 알겠지만, 그 빚보증으로 인해 우정마저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돈 날리고 친구 읽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으음, 이런 건 학교에서 가르쳐줘야 하는데 말이야.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학교에서는 쓸데없는 지식들만 가르친다. 물론 도움이 되는 지식들도 있지만, 대부분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다. ------------------------------------------------------------------------------------- 컴퓨터 겨우 켜서 올렸어요 ㅠ.ㅠ 인터넷이 갑자기 안되는 바람에 좀 밖에 못했네요. 아무튼 조금씩이라도 올릴게요 ^^ 이거 제가 올리는 거예요! (by.ㅡㅡ;묻지마)(제가 올리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 ------------------------------------------------------------------------------------ 사회 교과서에서 본 국회의원의 역할과 행동.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이 말 믿고 피 보는 사람 한둘이 아니다.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반면 돈 없고 백 없는 서민은 빵 하나만 훔쳐도 절도죄로 감옥에 간다. 심지어는 아무 죄도 없는데 감옥에서 형을 살기도 한다. 차라리 교과서에 ‘법 앞에서 평등이란 없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侑錢無罪 無錢侑罪)입니다. 억울한 꼴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목숨 걸고 돈을 버세요’ 라고 나와 있으면, 얼마나 실생활에 도움이 되겠는가? 사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교과서 전체가 왜곡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소한 어느 정도는 현실을 감안해 교과서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국정운영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고, 심심하면 국비로 해외에 놀러 다닙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때부터 계속되어온 당파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때로는 패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국회의원의 어원은 국케이원으로, 국케이원은 국(國) + 케이원(K-1)의 합성어입니다. 일본에 K-1(이종격투기 대회)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국케이원(國K-1)이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일 안 하고 놀고먹으며, 고수익을 올리는 최고의 직종입니다. 그리고 국회의원의 주특기는 헛소리이니, 선거 때하는 각종 공약에 대해서는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당선 되면 다 까먹습니다‘ 라고 사회 교과서에 나와 있으면, 얼마나 현실성 있고 좋은가? 일본의 왜곡된 역사 교과서만 욕할 것이 아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왜곡된 교과서부터 뜯어 고쳐야 한다. 교과서대로라면, 기업인과 정치인이 처벌을 받고, 국회의원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사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왜곡된 교과서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당연 학생들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해 사회에 나가게 되면 어리둥절하게 된다. 자신이 배운 것과 세상이 완전 딴판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계약서 쓰는 법, 돈 관리 하는 법, 사람 대하는 법 등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으음, 얘기하다보니 괜히 흥분하게 되는군. 뭐, 학교라는 것도 하나의 사업이다 보니 인재 육성보다는 돈 벌이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사립학교가 많다보니, 더더욱 그렇다. 고등학교에서는 한 명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오로지 성적에 목숨을 걸게 한다.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많이 들어갈수록 학교 이미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한 푼이라도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학교 측에서 보면 학생들은 걸어 다니는 돈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쟤들이 내는 등록금이 얼만데! 학생들이 내는 대학 등록금이라는 것은 학생들을 위해 써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학교 측 주머니에 들어가면 다시 안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떤 대학교 총장은 무려 10년 동안 300억이라는 등록금을 꿀꺽했다. 그야말로 1년에 한 번씩 로또 복권에 당첨된 셈이다. 물론 참교육을 지향하는 교사와 교수들도 많다. 하지만 시스템이 이 모양인데 뭘 기대하겠는가? 교단에 서는 것은 실력 있는 교사가 아닌 재단 측에 예쁘게 보인 교사다. 교사가 바른말 한답시고 재단을 비난했다가는 바로 잘린다. 이게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다. 소위 사학(사립학교)이라는 것들이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돈 벌이에만 관심이 있으니(모든 사학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사학이 그렇다)…… 아아~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는구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또 한 화가 끝났다. DVD는 한번에 몰아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앤 너무 귀여운 것 같아.” “응응. 앤 막막 귀여워.” “난 둘리가 더 귀여운데…….” “…….” 니들이 더 귀여워, 임마! 누가 누구보고 귀엽다고 하는 거야? 앤 셜리가 아무리 귀엽다 한들 니들만 하겠나? 자기들 귀여운 건 모르고, 남 귀여운 줄만 아는군. “라이는 앤처럼 진정한 마음의 벗이 있었으면 좋겠어.” “루비도 마음의 벗이 있으면 막막 좋을 것 같아.” 말을 하던 라이와 루비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루비의 붉은색 눈동자와 라이의 회색 눈동자. “라이야.” “응. 왜 루비야?” “루비를 좋아해줄 수 있니? 루비의 마음의 벗이 될 수 있을 만큼?” 루비의 물음에 라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루비가 이 집에 같이 살게 되서 기뻐. 함께 놀 친구가 있다는 건 유쾌한 일이니까. 지금까지는 함께 놀 친구가 가까이에는 없었어. 오빠는 너무 철이 없고.” “…….” 뭐라? 내가 철이 없어? 라이 너 말 다했니? “루비의 마음의 벗이 되겠다고 맹세할 수 있니?” “응.” “…….” 눈곱만큼의 개성도 없이, 아까 애니메이션에서 본 대사를 그대로 읊는 라이와 루비. 루비가 앤 역할이고, 라이가 다이아나 역할이다. 으음, 루비가 빨강머리라서 앤 역할을 하는 건가? “아! 잠깐만, 라이야.” 루비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루시아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나왔다. 루비의 빨간색 머리카락은 양 갈래도 따져 있고, 끝에는 리본이 묶여 있었다. 헉! 설마 저건 앤의 머리 스타일? “무슨 일인데 갑자기 머리를 따달라고 한 거야?” 루비를 따라 나온 루시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난 방금 전까지 본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어쨌든 머리마저 앤 스타일로 바꾼 루비는 마치 자신이 앤 셜리라도 되는 양 라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먼저 손을 잡는 거야. 원래는 흐르는 물 위에서 서로 손을 잡고 맹세해야 하지만, 여기에는 물이 없으니, 이 오솔길을 흐르는 물이라고 상상하자.” “아! 라이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이번에는 라이가 루시아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침대 밑에 처박아둔 요술봉을 꺼내온 라이. 라이는 요술봉을 휘두르며 시동어를 외쳤다. “일루전(Illusion)!" 그러자 거실이 한순간에 울창한 숲 속으로 바뀌었다. “뭐, 뭐야?” 루시아는 놀랐는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난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안심시켜주었다. “괜찮아. 환상 마법이니까 안심해.” 환상 마법이란 사람의 감각기관을 자극해 환각을 보여주는 마법이다. 지금처럼 아름다운 숲을 보여줄 수도 있고, 끔찍하고 잔인한 지옥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이 있으면 몸이 늘어지고 괜히 피곤해진다. 반대로 기쁜 일이 있으면 방금 전까지 아픈 몸이 씻은 듯이 낫기도 한다. 심약한 사람을 갑자기 놀래면 심장마비로 죽듯, 환상 마법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환상을 보여주면, 몸은 그대로 있는데 정신이 바닥으로 추락해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 실제로 1950년 대에 냉동고에 갇힌 한 남자가 얼어 죽는 사건이 있었다. 재밌는 사실은 그 냉동고가 작동을 하지 않아 안의 기온이 섭씨 19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는 냉동고가 작동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은 얼어 죽었다. 그를 죽인 것은 추위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그나저나 숲이 참 아름답다. 숲 사이에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새의 울음소리와 숲의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루시아는 내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진짜 같아.” “라이 마법 실력이 뛰어나단 얘기지.” 라이가 만든 환상의 숲은 진짜 숲과 다름없이 똑같았다.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소리도 들리고, 냄새도 맡을 수 있다. 난 손을 뻗어 나무를 만져보았다. 까끌까끌한 나무의 촉감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완벽한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8클래스 마스터인 나도 힘든 일이다. 으음, 겉보기에는 초절정 귀염둥이처럼 보여도 역시 상아탑의 주인이라는 건가? 그런데 이 엄청난 마법을 고작 마음의 벗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거 맹세하는데 사용하다니. 정말 엄청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라이와 루비는 징검다리 위에서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루비가 먼저 맹세의 말을 할게. 해와 달이 없어지지 않는 한 루비의 마음의 벗 라이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자, 이제 라이 차례야. 루비 이름을 넣어서 말하면 돼.” “응. 해와 달이 없어지지 않는 한 라이의 마음의 벗 루비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기억력도 나쁜 것들이 저 대사는 어떻게 다 외웠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리해서 라이와 루비는 마음의 벗이 되었다. 그리고 둘이 마음의 벗이 됨으로 해서 루는 왕따가 되었다. 불쌍한 것. 어느새 환상으로 만들어낸 숲이 사라지고, 원래 우리 집 거실로 돌아왔다. 라이와 루비는 서로 손을 마주잡은 채 헤헤 웃으며 좋아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둘의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우리 라이와 루비 이제부터 더 친하게 지내야 돼. 알았지?” “네에~!” 루는 그 모습을 보며 손가락만 빨았다. 성비 불균형 문제는 어떻게 해소할 수가 없군. 남자애 하나 더 있었으면 루도 마음의 벗을 하나 만들었을 텐데. 은근슬쩍 내 옆으로 다가오는 루. 그리고는 내 옷깃을 잡아당긴다. “응? 왜 그러니?” “저랑 마음의 벗 해요, 형.” “…….” 부러웠던 게냐? “미안타, 아그야. 니 나이에 맞는 아그를 찾아보려무나.” “쳇!” 어쭈! 니가 쳇쳇거리면 어쩔 건데? 건방진 엘프 같으니라고. 아무튼 나는 마음의 벗이 되었다고 좋아하는 라이와 루비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인생은 혼자 걸어가는 가시밭길이다. 이제까지 친구 믿었다가 패가망신한 인간이 한둘인가? 저것들 우정이 언제까지 갈지 지켜봐야겠군. * * * * 금방 깨질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라이와 루비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서로 반찬을 양보하질 않나, 항상 손을 붙잡고 다니질 않나…… 아무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 “루비는 괜찮으니까 앉아, 라이야.” “아니야, 루비야. 라이야말로 괜찮아. 루비 니가 먼저 오빠 무릎 위에 앉아.” “고마워, 라이야. 그럼 잠깐만 앉고 비켜줄게.” “…….” 이렇듯 내 무릎 위에 앉는 것도 서로 양보했다. 그동안 나를 둘러싸고 벌어진 라이와 루비의 다툼이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는 비행기 타는 순서까지 양보할 정도니, 말 다 했지 뭐. 하지만 진정한 우정이란 위기의 상황이 닥쳐봐야 알 수 있는 거다. 그때가 돼도 라이와 루비는 서로를 감싸 줄까, 아니면 혼자 살자고 친구를 배신할까? “으음, 넌 어떻게 생각하니?” “예? 뭘요?” “저것들이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서로를 감싸 줄까, 아니면 혼자 살자고 친구를 배신할까?” 나의 물음에 루는 손가락을 입에 물며 고민했다. “서로 감싸주지 않을까요?” “푸훗~ 역시 아직 어리구나.” 난 루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루는 발끈했다. “나이는 제가 더 많아요!” “그래, 그래. 너 늙어서 좋겠다. 후후~.” 루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 “그럼 형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당연히 서로 배신하지. 그게 인생이란다.” “예? 그럴 리 없어요.” “후후~ 과연 그럴까?” 진정한 우정을 알아 볼 수 있는 ‘위기 상황’ 은 의외로 금방 들이닥쳤다. * * * * 라이와 루비가 마음의 벗이 된 지도 어느덧 사흘이나 흘렀다. 둘은 여전히 우정을 과시하며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루는 왕따 신세를 벗어나질 못했다. 마침 히로가 밖에 나가고 없었기에 아이들은 히로의 방에서 판을 펴고 놀았다. 침대가 마치 텀블링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 뛰는 아이들. ----------------------------------------------------------------------------------- 학원 가따와서 또 할게요 ^^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거 썼다는..; 꼬릿말좀 달아주세요 ㅎㅎ; ----------------------------------------------------------------------------------- 당연 침대 스프링이 남아날 리 없다. 히로가 매일 아침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런 침대에서 장기간 잔다면 허리에도 악영향이 미칠 것이다. “아! 목도리다.” 히로의 책상 위에는 털실 목도리 하나가 곱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목도리는 다름 아닌 루시아가 히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이다. 참고로 현재 히로의 보물 1호로 지정되어 있다. 루비는 목도리를 목에 둘러보았다. “어때, 라이야?” “막막 잘 어울려.” “헤헤~ 진짜?” 루비는 목도리가 마음에 드는지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보았다. 그리고 목도리를 두른 채 계속 놀았다. “한참 놀았더니 목마르다.” “냉장고에 콜라 있어. 우리 콜라 마시자.” “응응.” 라이와 루비는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컵에 따랐다. 컵을 들고 방으로 가던 중 일이 터졌다. 문턱에 발이 걸린 라이가 그만 콜라를 쏟고 만 것이다. 문제는 앞에 있던 루비에게 콜라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아앗! 미안해, 루비야.” “아니야. 루비는 괜찮아.” 루비는 괜찮았지만 목도리는 괜찮지 않았다. 목도리는 콜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라이와 루비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떡하지?” “오빠가 알면 큰일인데.” “맞아. 오빠가 알면 막막 화낼 거야.” 라이와 루비 모두 히로가 이 목도리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히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어떡하지?” “아! 지금 오빠랑 언니가 집에 없으니까, 우리가 빨아서 다시 원래대로 해놓자. 그럼 오빠도 모를 거 아니야?” “응. 그게 좋겠다.” 라이와 루비는 세탁을 하기 위해 세탁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세탁을 어떻게 하는 건지 어린 엘프들이 알 리 없었다. “으음, 일단 세제를 풀자.” 루비는 대야에 물을 담은 다음 세제를 마구 풀었다. 그리고 목도리를 넣은 다음 열심히 비볐다. 하지만 얼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 세탁기에 돌리는 것이 어떨까?” “그게 좋겠다.” 라이는 목도리를 세탁기에 집어넣은 다음 무조건 가장 센 단계를 선택해 버튼을 눌렀다. 아까 마구 비벼대는 바람에 목도리는 이미 올이 풀려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세탁기 안에 넣고 최고 속도로 돌렸으니, 결과는 뻔할뻔자였다. 목도리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세탁기를 열고 목도리를 본 라이와 루비는 깜짝 놀랐다. 콜라가 묻어 세탁만 하면 됐던 목도리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후회를 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 어떡하지, 라이야?” “그, 글쎄.” 두 엘프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숨기자. 그 다음에 오빠가 물으면 무조건 모른다고 하는 거야.” “그게 좋겠지?” 어린 엘프들은 엉망이 된 목도리를 숨기기 위해 세탁실을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집에 돌아온 히로와 마주쳤다. * * * * “헉! 오, 오빠…….” 날 보더니 깜짝 놀라는 라이와 루비. 옷은 물로 흠뻑 젖었고, 얼굴에는 흰거품이 묻어있다. 게다가 라이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후다닥 뒤로 감추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수상함의 극치. “너희들 왜 그러니? 그리고 라이는 뭘 뒤로 감춘 거니?”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오빠.” “마, 맞아요, 오빠. 저희는 결백해요.” “…….” 결백? 아직 아무 것도 안 물었는데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뭔가 잘못했다는 얘긴가? “그런데 라이가 뒤로 감춘 건 대체 뭐니? 이 오빠는 참으로 궁금하구나.” “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 그치, 루비야?” “으응. 물론이야.” “에헤헤~.” 괜히 어색한 웃음을 짓는 라이와 루비. 그 모습이 아주 매우 굉장히 엄청나게…… 수상쩍다. “아무 것도 아니면, 오빠한테 보여줄 수도 있겠네. 그치?” “아, 안돼요!” 황급히 소리를 지르는 라이와 루비. “이, 이건 비밀이란 말이에요.” “마, 맞아요. 여자들만의 비밀이에요.” “…….” 여자의 비밀 같은 소리 하네. “어서 내놓지 못 해!” “시, 싫어요!” 난 강제로 라이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았다. “아, 안돼요, 오빠!” “헉! 이, 이것은…….” 난 라이의 손에 들린 것을 본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목도리였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루시아가 나에게 선물해준 나의 보물 1호. 그런데 그 목도리 더 이상 목도리라 부를 수 없는 그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아아…….” 충격을 받는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말을 하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나의 보물 1호 목도리가 어째서 돌아와서 보니 목도리가 아닌 그 무언가로 변해있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저것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난 두 눈을 부릅뜨고 라이와 루비를 보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나의 눈을 본 라이와 루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난 이를 박박 갈며 말했다. “어떤 엘프야? 어떤 버르장머리 없고 싹퉁머리 없는 엘프가 작년 크리스마스 때 루시아가 나에게 선물해 준 나의 보물 1호인 메이드 인 루시아 목도리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어? 응? 누구 짓이야?” 범인은 라이와 루비 둘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렇게 다그치면 범인이 나오게 되어 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 두 엘프. 잠시 후, 라이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라이 탓이에요, 오빠. 라이가 다 잘못한 거예요.” 루비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라, 라이야…….” “라이 혼자서 잘못한 거니까 라이만 혼내주세요. 라이의 마음의 벗인 루비는 혼내지 마세요.” 당당하게 말하는 라이. 그러자 루비는 라이를 밀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니에요, 오빠. 루비가 잘못했어요. 전부 루비 탓이에요. 그러니 루비의 마음의 벗인 라이를 혼내지 말고, 루비를 혼내주세요.” “아니야, 루비야. 왜 거짓말을 하고 그래? 라이가 잘못한 거잖아. 라이를 혼내주세요, 오빠.” “아니에요, 오빠. 거짓말은 라이가 하고 있어요. 루비를 혼내주세요.” 서로 자신의 잘못이라고 우기며 자신을 혼내달라고 부탁하는 두 엘프. 만약 다른 사람이 봤으면 크게 감동해 둘 다 용서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천하의 아이언스 히로는 이런 신파극에 넘어가지 않는다. “오오! 그러니까 서로 잘못했다 이거지? 잘 됐군.” 난 재빨리 신발장에서 쇠빳따를 들고 왔다. “자, 다시 말해보렴. 누가 잘못했다고? 참고로 걸린 엘프는 오늘 먼지 나게 맞는 거야. 그래도 이 오빠가 자비를 베풀어서 딱 10대만 때려줄게.” 난 쇠빳따의 끝부분을 잡고 휘둘렀다. 붕! 붕! “참고로 말하자면 이 쇠빳따는 손으로만 휘두르는 게 아니란다. 어깨와 허리와 다리까지 사용해 휘두르는 거야. 즉, 이렇게 온몸을 비튼 다음 이렇게 휘두르면, 위력이 배가 돼.” 붕! 붕! 쇠빳따는 바람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내가 또 한때는 야구선수가 꿈이기도 했지. 우리 동네에 독고탁과 오혜성이란 애가 있었거든. 걔들 다 내 후배였어. 알기나 아니?” 붕! 붕! 내가 쇠빳따를 휘두를 때마다 두 엘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걸로 10대 맞으면 죽을지도 몰라.” “으응. 분명 죽을 거야.” 온몸을 벌벌 떠는 라이와 루비. 그 모습이 매우 애처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다. 귀엽다고 오냐오냐 해주다보면 애들 버릇 다 망친다. 애가 잘못했을 때는 확실하게 혼을 내줘야 다음부터는 안 그런다. 내가 이러는 것은 결코 개인적인 복수심이나 화풀이 때문이 아니다. 오직 애들 교육을 위해서다. “자, 빨리 말해. 잘못한 엘프 하나만 혼내고, 다른 엘프는 용서해 주겠어. 어디 아까처럼 서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해보렴. 응?” 붕! 붕! 난 말을 하는 중간에도 계속 쇠빳따를 휘둘렀다. 두 엘프는 몸을 벌벌 떨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빨리 안 나오면 둘 다 맞는다.” 붕! 붕! 그래도 여전히 말이 없는 두 엘프. 난 라이를 붙잡고 물었다. “이 오빠의 목도리를 저 꼴로 만들어 놓은 싹퉁머리 없는 엘프가 누구니? 3초 내로 대답하지 않으면 이 오빠는 라이가 그런 걸로 여기고, 라이를 혼내줄 거란다. 참고로 루비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용서해 줄 테니 안심하렴.” “그, 그런…….” “3초. 2초.” 라이는 벌벌 떨며 회색 눈동자로 나와 루비를 번갈아 보았다. 난 쇠빳따를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1초. 라이 엎드리렴. 오늘 쇠빳따로 먼지 나게 맞아보자꾸나.” 그러자 라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루비가 그랬어요!” “응? 루비가 그랬니?” “예. 루비가 오빠 목도리 막막 두르고 다녔어요. 그리고 막막 세제로 비볐어요. 그래서 저렇게 된 거예요. 라이는 아무 잘못 없어요. 루비가 다 잘못한 거니까, 루비를 혼내주세요!” 라이의 말에 루비는 깜짝 놀랐다. 루비는 붉은색 눈동자로 라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오빠. 라이가 먼저 목도리에 콜라를 쏟았어요. 그러니까 라이가 잘못한 거예요. 그리고 세탁기에 넣고 돌린 것도 라이에요. 루비는 한 개도 잘못한 거 없어요.” “아니에요, 오빠. 루비는 거짓말쟁이에요. 라이 말이 맞아요. 전부 루비가 잘못했어요.” “라이 말 믿지 마세요, 오빠. 라이가 다 잘못했는데 루비한테 덮어씌우는 거예요.” “뭐? 루비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루비 너 같은 건 친구도 아니야!” “라이 너야말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루비는 엄청 실망이야!” “루비가 나빠!” “라이가 더 나빠!” “루비가 더더 나빠!” “라이가 더더더 나빠!” “루비가 더더더에 백만 배 더 나빠!” “라이가 더더더에 백만 수천 배 더 나빠!” “루비가 백만 수천 배에 천만 배 더 나빠!” “라이가 백만 수천 배에 백만천만 배 더 나빠!” “그럼 루비는 하늘땅만큼 더 나빠!” “라이는 하늘땅 우주만큼 더 나빠!” “루비는 하늘땅 우주 은하보다 더 나빠!” “라이는 하늘땅 우주 은하…… 아무튼 루비보다 라이가 훨씬 나빠!” “…….” 유치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싸움. 아아~ 아이들이 이 정도까지 유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서로를 노려보던 두 엘프는 이제 주먹까지 휘두르기 시작했다. 툭탁툭탁! “우에에엥~.” “으아아앙~.” 결국은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 놀란 나는 황급히 둘을 떼어 놓았다. 그러자 두 엘프는 내 양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우엥~ 우엥~ 루비 혼내주요, 오빠.” “으앙~ 으앙~ 라이 혼내줘요, 오빠.” 끝까지 서로 잘했다고 우기는 두 엘프. 마음의 벗이 되기로 한 맹세는 쇠빳따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 내 이럴 줄 알았다. “시끄러, 이 버르장머리 없고 싹퉁머리 없는 엘프들아! 용서를 빌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싸우기까지 해? 니들이 이러고도 착한 엘프야? 내 살다 살다 너희같이 못된 엘프는 처음 봤어. 그래도 솔직히 말하고 용서를 빌면 한 엘프는 살려주려 했건만,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이 오빠가 오늘 너희들의 버르장머리를 확실하게 고쳐주겠어. 둘 다 엎드려뻗쳐!” “우에에엥~.” “으아아앙~.” 공포에 떠는 두 엘프. 누누이 말하지만 이렇게 운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동안 사놓기만 하고 한 번도 실전에는 투입된 적이 없었던 쇠빳따. 오늘에서야 그 위력을 확인하게 되는군. 아아~ 막상 애들을 때리려고 하니 가슴이 찢어진다. 하지만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라면 난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후후후~ 쇠빳따의 위력 뼛속까지 느껴라……가 아니라 맞는 너희들의 아픔은 때리는 이 오빠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내가 아이들을 향해 쇠빳따를 휘두르려하는 순간, 루시아가 장바구니를 손에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왜 라이와 루비가 엎드려 있어? 그리고 니 손에든 그 알루미늄 배트는 뭐야?” “으응, 별 거 아니야. 신경 쓰지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이제 곧 죽을 것처럼 굴었던 두 엘프는 루시아를 보자마 벌떡 일어나 매달렸다. “우에에엥~ 살려주세요, 언니이~.” “으아아앙~ 오빠가 루비를 죽이려 해요오~.” 루시아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난 재빨리 쇠빳따를 뒤로 숨겼다. “아하하~ 애들이 잘못했기에 좀 혼내주려고.” “그런데 그 알루미늄 배트는 뭐야? 설마 그걸로 애들을 패려 한 건 아니겠지?” “아니, 뭐 꼭 패려했다기보다는…… 그냥 시위용으로…….” 내가 한창 변명을 늘어놓는데, 라이와 루비가 루시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니네요, 언니. 오빠가 저걸로 라이 막막 패려고 했어요.” “맞아요. 막막 먼지 나게 팬다고 했어요.” “…….” 저것들이 치사하게 고자질을! “애들 말이 사실이야? 정말로 그걸로 애들을 패려고 했어?”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루시아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지자 나는 점점 위축되었다. 루시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넌 애들을 죽일 생각이야?” “아니, 무슨 그런 엄한 말을…… 그리고 쟤들 저렇게 보여도 은근히 맷집 세. 이 정도 가지고는 절대 안 죽어.”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의 등 뒤에 숨어 나를 쳐다보았다. 두 엘프의 눈동자가 ‘오빠를 혼내주세요오~’ 라고 말하는 듯하다. 난 라이와 루비를 노려보며 이를 박박 갈았다. 하지만 루시아가 보호해주고 있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니가 그러고도 얘들 아빠야? 어떻게 인간으로 그럴 수가 있어? 이제부터 아이들에게 1m 이내로 접근 금지야. 알았어? “헉! 접근 금지라니! 가정법원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심한 처벌을!” 난 너무 억울했다. 어떻게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애들 말만 듣고 이럴 수 있어? 난 망가진 목도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크리스마스 때 니가 나한테 선물해준 목도리야. 내가 이 목도리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지? 그런데 얘들이 이걸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 그러니 내가 화 안 내게 생겼어? 이 목도리가 어떤 목도린데…… 우에에엥~ 내 목도리 물어네에~ 우엥~ 우엥~ 히로 목도리 물어내란 말이야아~.” 생각해보니 너무 억울하다. 루시아의 마음이 담긴 목도리가 이 꼴이 되다니. 루시아와 나와의 연결 고리 하나가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목도리에는 루시아의 숨결과 정성과 사랑이 담겨 있다. 그래서 루시아가 내 곁에 없을 때에는 이 목도리를 보고 만지며 루시아를 느껴왔다. 그런데 이 모양이 되다니! “어흐흐흑~ 라이와 루비 둘 다 미워할 테야! 우엥~ 으앙~ 엉엉~.” 내가 그 자리에 누워 펑펑 울자 루시아의 뒤에 숨어있던 라이와 루비가 뛰어나와 나를 껴안았다. “우에에엥~ 라이가 잘못했어요, 오빠. 라이를 용서해주세요오~.” “으아아앙~ 루비도 잘못했어요. 그 목도리가 그렇게 소중한 건지 몰랐어요. 흑흑~.” 우리 셋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내가 목도리 하나 또 짜주면 될 거 아니야? 이번에는 인디 오빠한테 부탁하지 않고 나 혼자서 짤게. 그럼 됐지?” “훌쩍~ 정말? 정말 또 짜줄 거야?” “그래. 그러니까 울지 좀 마. 다 큰 남자가 왜 울고 그래?” “아, 알았어.” 난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라이와 루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훌쩍거리며 말했다. “잘못했어요오~.” 난 두 엘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 거지?” “네에~.” “이 오빠가 루시아 얼굴을 봐서 한번만 용서해 줄게. 하지만 앞으로 또 이러면 그땐 정말 가차 없이 쇠빳따를 휘두를 거야. 알았어?” “네에~.” 이리하여 루시아가 인디에게 하청을 맡긴 OEM목도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고, 루시아는 직접 새 목도리 제작에 들어갔다. 뜨개질을 하던 루시아는 손을 멈추며 나를 흘겨보았다. “이제 겨울도 다 갔는데 꼭 목도리를 짜야 돼?” “그, 그치만…… 히로는 루시아가 짠 목도리가 필요하단 말이야. 훌쩍~ 설마 짜주기 싫은 거야?” “짜 줄테니까 그만 좀 울어!” 루시아는 다시금 뜨개질을 하는 데 열중했다. 난 루시아 옆에 앉아 거실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라이와 루비는 언제 싸웠냐는 듯 우르르 몰려다니며 친하게 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저것들의 행동을 기억한다. 마음의 벗이라는 것들이 맞기 싫어서 상대방을 팔아넘기려 하다니. 쇠빳따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우정을 어찌 우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저것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진정한 우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모름지기 진정한 우정이라 하면 적어도 나처럼…… 잠깐. 생각해보니 나 왕따잖아. “…….” 이럴 수가! 아니야. 그래도 나한텐 크로니스와 루엔이 있어. 으음, 그런데 그 둘이 날 친구로 생각하려나? “…….” 하겠지? 아마도……. “으음…….” 오늘따라 어린 엘프들 표정이 장난 아니게 밝아 보인다. 라이.루.루비 모두 해맑게 웃고 있 다. 방긋방긋. 생긋생긋. 으쓱으쓱. 한시도 웃음이 얼굴을 떠나지 않는다. 대체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저러는 걸까? 궁금해진 나는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니?" 내가 묻자 아이들은 어깨동무 대형을 취하며 합창을 했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 누가 들으면 언제는 니들 세상이 아니었는 줄 알겠다. "5월은 푸르구나아~♬ 우리들은 자란다.~♬" "......" 별로 안 푸르거든. 그리고 니들 하나도 안 자랐어. 여전히 숏다리야. 라이야 마법에 걸려서 안 자란다. 쳐도, 루와 루비는 그렇게 먹어대는 데도 왜 안 자라는 건 지 모르겠다. 엘프여서 성장이 느린가? "에헤헤~." "......" 그만 웃어라. 정든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니 괜히 부럽고 시기심이 난다. 난 어렸을 때 어린이날 같은 건 제 대로 챙기지도 못했는데. 하기야 난 7살때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몸이다. 그때부터 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지. 아 무튼 애들 말대로 오늘은 5월 5일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 기고, 어린이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1923년 5월 1일,색동회를 중심으 로 소파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기념행사를 치름으로써 어린이날의 역사가 시 작 되었다. 1927부터 5월 첫째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어 계속 행사를 치르다가.1939년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된 뒤 1946년 다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 1957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을 선포 하 고,1970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5037호)' 에 따라 공휴일로 정해진 이 래 오늘에 이른다.요즘 어린이날은 법정 공휴일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나마도 일요일과 겹 치 는 날이면 그야말로 사람 환장하게 만든다.외국의 경우(주로 선진국)에는 공휴일과 일요 일 이 겹치면, 그 다음날을 공휴일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공휴일과 일요일이 겹 쳐도 얄짤 없다.아무튼 간만의 휴일(이라고 해보야 현재 백수인 관계로 매일이 휴일이지 만). 침대에 누워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방으로 걸어가려는데 어린 엘프들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응?왜 그러니? 이 오빠한테 뭐 할말 있니?" 아이들은 대답 대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날 바라보았다. 뭔가 기대감에 가득 찬 눈길.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알았어." 난 지갑을 꺼내 아이들 손에 1만원씩 올려주었다. "이제 됐지?원래는 안 주려고 했는데, 오늘이 어린이날이어서 특별히 주는 거야. 이거 가지 고 가서 과자나 사먹으렴." 기뻐할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아이들은 그저 그런 표정이었다. 난 혀를 찼다. 조그만 것들이 돈 욕심은 많아 가지고. "옜다. 날이 날이날이니만큼 기분 좀 썼다." 난 1만원씩을 더 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표정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 지어 라이는 볼을 부풀리기까지 했다. "......" 뭐야? 대체 얼마를 원하는 거야? 설마 어린이날이라고 집 한 채 사달라는 건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라이가 앞으로 나섰다. "오빠 설마 잊어버리신 거예요.?" "응?잊어버리다니?뭘?" 내가 모르겠다는 듯 묻자 라이는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루와 루비 역시 마 찬가지였다. "우엥~어린이날에 놀이공원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해 놓구선......우엥~우엥~." "으앙~오빠 까먹은 게 틀림없어.으앙~으앙~." "엉엉~ 형 나빠." "......" 헉!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나? 생각해보니 했던 것 같기도...... "우하하하! 오빠가 루시아랑 같이 라이랑 루랑 루비 데리고 놀이공원 간다는 약속을 잊었을 리 없잖아. 이 오빠가 잠깐 장난친 거란다. "정말요?" "물론이지.후후~표정을 보니 모두 속아 넘어갔나 보네." "우엥~ 나빠요 오빠~" "으앙~ 오빠 미워!" "훌쩍~ 형 대따 나빠요!" 아이들은 말과는 반대로 웃으며 나에게 매달렸다. 난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 었다. "그럼 어서 옷 입고 준비하렴." "네에~!" 아이들은 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난 그 사이 부엌으로 향했다. 배가 고파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헉! 이게 다 뭐야?" 루시아는 앞치마를 두른 채 인디와 함께 김밥을 만드는 중이었다. "아! 일어나셨나요,히로님?" "오늘 놀이공원 갈 때 가지고 살 거야. 거기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거 먹고, 빨리 씻어. 바 로 출발할 거니까." "으응." 또 다시 등장한 메이드 인 루시아 김밥. 식탁 위에 있는 것은 김밥 한줄과 꽁다리였다. 참고로 김밥의 생명은 이 꽁다리라 할 수 있 다. 난 꽁다리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오오!이렇게 맛있을 수가!" 무엇보다 루시아의 손길이 닿았다는 점에서 더욱 감동적이다. 이런 게 바로 손맛이겠지? "아!그건 제가 싼 거예요, 히로님." "......" 갑자기 맛이 반으로 뚝 떨어진다. 아무튼 김밥을 다 먹은 나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아이들은 어느새 산뜻한 옷으로 갈 아입은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멜빵바지에 발팔티를 입은 라이,무릎까지 오는 원피스 위에 반팔 남방을 걸친 루비, 칠보바 지와 반팔티를 입은 루. 귀엽고 깜찍하고 산뜻하다. 그야말로 어린이날 컨셉이라고나 할까? "라이 어때요,오빠?" "루비도 봐주세요." 아이들은 내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펄럭이는 치맛자락. 난 웃으며 말했다. "너무너무 귀여워,얘들아." "에헤헤~." "준비 다 끝냈니?" "헉!" 루시아는 종아리까지 오는 하늘색 줄무늬 스커트와 검은색 반팔 남방을 입고 있었다. 그리 고 챙이 있는 검은색 모자를 쓰고. 양 손으로 도시락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검은색 모자와 남방이 루시아의 하얀 살결과 백금발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게다가 희고 매 끄러운 팔과 치마 밑으로 드러난 가늘고 예쁜 종아리라니! "어때? 어울리는 것 같아?" "응응. 막막 어울려. 최고야!세상에서 제일 예뻐!" 내가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와 루비는 눈을 샐쭉하게 뜨며 볼을 부풀렸다. "흥!라이에게는 그냥 귀엽다고만 했으면서." "쳇 오빠는 언니만 좋아하는 것 같아." "......" 어린 것들이 질투하기는. "빨리 가자." 우리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가 있으니 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난 롯데월드로 갈 까,에버랜드로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얼마전에 개장한 '논데월드'로 가기로 했다. 새로 개장한 곳인 만큼 시설이 좋을 것 같다. 결정적으로 논데월드가 우리 집에서 제일 가 깝다. 내가 운전석에 앉자 루시아는 조수석에 앉았다. 그리고 어린 엘프 셋은 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와아!출발한다." "차가 막막 움직인다." "우와!멋지다." 아이들은 좋아 어쩔 줄 몰랐다. 난 거울 너머로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 오빠의 위대함을 알겠느냐? 난 저번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주위를 잘 살피며 안전운전을 했다. 게다가 지 금은 아이들도 타고 있지 않는가? 으음,이럴 줄 알았으면 차 뒤에 '아이들이 타고 있어요' 스티커라도 붙여 놓을 걸 그랬나? 생각해보니 초보운전 스티커도 안 붙었군. 뭐,상관없겠지. 비록 운전 경력은 초보라고 하나 실력은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니. 일루니아 여심님께 구박 받으며 키운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날씨가 덥다보니 난 창문을 열고 에어컨을 살짝 틀었다. 그런데 한 가지 깜박한 것이 있었으 니 ......그것은 바로 오늘이 어린이날이라는 것이다. 어린이날에는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놀러나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길이 더럽게 막힌다. 그야말로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도로. 빵빵!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어떤 놈이 자꾸만 경적을 울려댄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내려서 그놈을 끄집어내 집에 재갈을 물리고 트렁크에 쑤셔 넣고 싶다. "왜 안 가요,오빠?" "놀이공원엔 언제 도착해요?" "빨리 가요." 운전을 해본 사람을 알겠지만, 안 그래도 길이 막혀 짜증나는데 같이 탄 사람이 칭얼거리면 정말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린 엘프들은 이런 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빨리 가지고 칭얼거렸다. '니들이 운전해, 이것들아!'......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그럼 루시아가 화내겠지? 루시아는 끝없이 늘어선 차들의 행렬을 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언제 놀이공원에 도착하지? 애들도 지겨워하는 것 같은데......." "......" 헉! 루시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다니! 이건 있을 수도 없고,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겠군. 내 이 방법은 안 쓰기로 마음먹었건만. 난 재빨리 마법으로 인디를 불러냈다. 나의 위치를 파악한 인디는 위프 마법으로 뒷자리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에요, 히로님?" "이 차를 너에게 맡기마.무사히 집까지 가져다 놓으렴." "예? 히로님은 어쩌시구요?" "난 애들과 함께 마법으로 놀이공원으로 날아가련다.그럼 부탁한다." "하,하지만 전 운전은 못하는데......" "그럼 마법으로 옮기든가,일루니아 여사님을 불러!못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니까 못하 는 거야!넌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말도 못 들어봤니?내가 누누이 지적하지만, 넌 너무 근 성이 없어.남자라면 근성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언제까지 소심드래곤으로 불릴래?응?그리 고 말이야......" "빨리 가자 애들 기다리잖아." 루시아의 재촉에 난 인디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아무튼 너만 믿는다." "예,히로님." "그럼 우리를 논데월드로 이동시켜주렴." 이동마법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마법진이 필수다. 하지만 차 안에 마법진을 그릴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난 투명마법을 걸고, 이동 마법은 인디에게 부탁했다. 드래곤답게 인디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우리는 논데월드로 이동했다. 우리가 도착한 장소 는 논드월드의 허공.우리는 마치 스카이다이빙을 하듯 원형으로 서서 서로의손을 꼭 붙잡았 다. 난 재빨리 레비테이션(Leviation)마법을 걸었다. 우리의 몸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갔 다. 이윽고, 발이 땅에 닿자 우리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 투명마법을 풀었다. "와아! 도착했다아!" 좋아서 방방 뛰는 어린 엘프들.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역시 마법이 편리하긴 편리하네." "뭐,그렇지." 마법의 편리함을 대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계 발전이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었듯 이 마법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기계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한다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안 하고 살수도 있다. 그럼 인간 폐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리고 이 세계는 어디까지나 마법이 없는 평범한 세계다. 나의 경우를 보면 알겠지만(난 좀 독특한 케이스이긴 하지만)이 세계 사람이라 해 서 마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이제까지 마법 없이도 잘 살아왔고, 지금도 잘 살아가고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마법이라는 새로운 능력이 알려진다면,세계는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세계에서는 꼭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마법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 은 나를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이라고 해봐야 드래곤이 대부분이지만)도 마찬가지다. 뭐,오늘같이 길이 막히는 상황에서는 어쩔수 없지만. "으음, 그나저나 본의 아니게 입장료도 안 내고 입장한 셈이군.아앗! 그러고 보니 자유이용 권도 못 끊었잖아!" 어쨌든 다시 매표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는 매표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헉!댁이 왜 여기에......?" 언제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한 번씩 얼굴을 비추어주었던 지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나타났 다. 그것도 아리따운 여성과 함께. 으음,그나저나 여자가 또 바뀌었군. 어떻게 된 게 한 여자랑 다니는 꼴을 못 봐.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곳에 오시리라 예상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그걸 어떻게?" "논데월드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차로 오시다가 길이 막히는 것을 깨닫고,중간 에 이동 마법을 사용할 거라 예상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안 되니. 투명마법을 걸고 이동 마법을 쓰셨겠지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투명마법을 푼 다음 자유이용권을 사러 매표소로 향할 거라 생각했습니 다. 아닙니까?" "헉!" 당장 돗자리 펴고 장사 시작해도 되겠다. 어쨌든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닌 철저한 계산 하에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과연 사일런스 지니라고나 할까? 으음,그나저나 정말 놀랍군. 다음 대선엔 누가 당선될지나 한번 물어볼까? "이것 받으십시오." "이게 뭔가요?" "자유이용권입니다. 대인 둘, 소인 셋입니다. 이걸 이렇게 해서 팔에 차시면 됩니다. 그리 고 놀이기구를 이용할 때 보여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프리미엄 자유이용권으로 이 놀이공원 안의 모든 놀이기구를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일반 자유이용권은 몇 개의 놀이기구 탑승이 제한되어있다. 하지만 프리미엄 자유이용권은 모든 놀이기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물론 그만큼 더 비싸다. "이거 비쌀 텐데요. 분명 말씀드리지만 저 돈 별로 없습니다." 난 지니가 자유이용권 대금을 청구할까봐 미리 선수를 쳤다.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아이언스 공자님. 여기 계신 이 여성분께서 이 놀이공원 오너(Owner) 이십니다." "헉! 뭐라구요? 그게 진짜인가요?" "물론입니다. 이 여성분께서 논데월드의 지분을 무려 10퍼센트나 가지고 계십니다." "10퍼센트씩이나!" 지분 10퍼센트라면 이 놀이공원의 10퍼센트가 저 여자 소유이고,이 놀이공원 주주에게 돌아 가는 배당금 10퍼센트가 저 여자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어떻게 저런 여자들만 골라서 사귀는 걸까? 정말 재주도 좋다. 난 지니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속삭였다. "우리 앞으로 더욱 친하게 지내요." "물론입니다." 나는 팔찌모양으로 생긴 자유이용권을 손목에 찼다. 한번 차면 풀지 못하게 되어있다. 정 풀 고 싶으면 끈을 잘라내야 한다. 굳이 이렇게 만든 이유는 자유이용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일 것이 다. 아이들 역시 자유이용권을 손목에 찼다. "에헤헤~." 알록달록한 팔찌 모양의 자유이용권이 마음에 드는지 아이들은 연신 웃음을 지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니가 말하자 난 점짓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으음,벌써 헤어지려니 아쉽군요." 아쉽긴 개뿔이 아쉽냐? 너 아직 안 갔니? "저 역시 아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이 행동하는 것은 어떠신지?" "......그냥 예의상 해본 말이었습니다. 빨리 가세요. 여자분께서 기다리고 계시잖습니까?" "알겠습니다.그럼 전 이만." 지니는 여자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루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지니 오빠 덕분에 바로 놀이기구 타도 되겠다." "지니 오빠 최고예요!" "루비는 지니 오빠가 막막 좋아요!" "지니 형 멋져요!" "......" 뭐야? 설마 지니만 점수 딴 건가? "흠흠,빨리 놀이기구나 타자꾸나."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하다. 녹음이 짙게 깔린 5월. 새 옷을 입은 아이들이 힘차게 뛰어다닌다. 풍선을 든 아이들도 있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 이들도 있다. 모두가 밝게 웃고 있다.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즐거워한다.어떤 아이는 아빠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탔다. 어떤 아이는 부모를 잃어버렸는지 길 한가운데 서서 펑펑 울고 있다. 놀이공원 직원이 달려 나와 아이를 미아보호소로 데려간다.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후룸라이드가 달릴 때마다.물방울이 튀어 오른다. 아이들은 흠뻑 젖어도 즐거워한다. 청룡열차에 탄 아이들은 비명을 질러댄다. 어떤 아이들은 눈이 빨개질 때까지 울기도 하지 만, 대다수 어린이들은 또 타자고 부모를 조른다. 요즘 애들은 겁대가리를 상실했나보다. 아아~ 이 다정하고 정겨운 풍경. 이것이 어린이날 놀이공원의 풍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 헤어져. 헤어져, 이년아! 네년한테 딴 서방 있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나 잘해, 이 새꺄! 장미바 마담이랑 놀아나는 주제에 누구한테 뭐라 그래? 저번에 그년 한테 반지까지 사줬다며?" "네년이 지랄을 하니까, 남편이 밖에 나가 딴 여자 찾는 거 아냐? 니가 제대로 했어도 내가 그랬을 것 같아?" "하! 기가 막혀서. 아주 바람을 피는 게 자랑이구만." "딴 서방 있는 년이 뭐 그렇게 말이 많아? 이 애새끼도 내 애 아니지? 그 자식 새끼지 어쩐 지 닮은 곳이 한 곳도 없다 했어." "당신 미쳤어? 뭔 말을 그렇게 해!" "으아앙! 아빠 엄마 싸우지 마세요!" "유전자 검사 한번 해볼까? 이 애가 내 앤지 아닌지?" "그래 해! 하지면 누가 겁낼 줄 알아?" "오냐,잘 걸렸다. 만약 이 애가 내 애가 아닌 걸로 판명 나면, 간통죄로 고소할 거야. 어디 감방 가서도 서방질 할 수 있나 보자." "누가 먼저 간통을 했는데? 장미바의 마담년 말고도 딴 여자 또 있잖아. 누가 모를 것 같 아?" "아니 이년이 죽고 싶나?" "그래! 나 죽고 싶은 년이다. 죽고 싶은 년이니까 어디 한 번 죽여봐!" 회전목마 앞에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니 죽네, 나 죽네 하며 싸우는 남녀. 그리고 그 앞에 쓰 러져서 엉엉 우는 아이. 이런 게 진정한 어린이날 풍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잘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기도...... 아무튼 회전목마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데 이렇게 재밌는 구경을 하기 될 줄이야. 심심해하 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공연을 준비 하다니. 그야말로 살신성인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난 감동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사람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거라니까. 선진 한국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드 는군." "뭔 소릴 하는 거야?" 루시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야." "너희들 저런 거 보지 마." 루시아의 말에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왜요. 언니? 재밌단 말이에요." "맞아요.되게 재밌어요." "저도 계속 보고파요~." 그러자 루시아는 점짓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희들 정말 언니 말 안 들을래?" "아니, 애들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냥 계속 보게 하지. 저런 구경이 흔치는 않을 텐데." "넌 자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런 거 보면 애들 정서 교육에 안 좋단 말이야!" "아, 아니, 왜 나한테 신경질을...... 애들도 봤는데......나한테만 뭐라 그래......흑~ 루 시아 미워~ ." 그러는 사이 싸움은 점점 스펙터클하게 발전했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던 것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공격을 주고받는 남녀. 때리고,할퀴고,깨물고...... 웬만한 이종격투기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누가 이길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체력 면에서는 남자가 앞서지만, 여자의 근성이 만만치가 않다. 무엇보다 저 긴 손톱에서 나오는 할퀴기 스킬은 상당한 데미지를 주었다. 아마 이것이 대전격투기게임이었다면 엄청난 데미지 판정이 나왔을 것이다. "누가 이길 것 같아?" "글쎄 내 생각엔 남자가 이길 것 같은데." "아니야. 여자가 이길 거야." "설마 남자가 여자한테 지겠어?" "아니라니까. 남자 얼굴과 팔에서 피나는 거 안 보여? 지금은 사소한 상처일 뿐이지만, 저 런 데미지가 누적되면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마련이야." "그전에 여자가 먼저 쓰러진다니까." "아니라니까. 그럼 우리 내기 할까?" "좋아. 나 남자한테. 걸 테니까. 넌 여자한테 걸어." "그래 좋아." 난 우리 앞에 선 사람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혀를 찼다. 싸우는 사람들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내기를 하다니. 누가 우리나라 사람 아니랄까봐 틈만 나 면 내기를 하는군. 남들 싸움에 내기를 거는 이런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한마디 했다. "여자 쪽에 10만원." 그러자 루시아가 내 옆구리를 꽉 꼬집었다. "아악!왜 그래?" "너 제정신이야? 저 사람들 말려야 할 거 아냐?" "아니,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그리고 저렇게 살벌하게 싸우는 사람들을 어떻 게 말려?" "아무튼 빨리 말려 봐." "괜히 끼어들었다가 다치면 니가 슬퍼할지도 모르잖아." "나 안 슬퍼하니까 안심해." "뭐? 내가 다쳐도 안 슬퍼한다고? 어,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난 니가 손가락 하나만 베 어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흑흑~ 너무해!" "빨리 가라니까!" 루시아에게 등 떠밀린 나는 마지못해 앞으로 나섰다. "두 분 모두 진정하지요. 어린이날 사람 많은 곳에서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울고 있는 애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넌 뭔데 끼어들어?" "......" 초반부터 반말이라니! 뭐 좋은 소리 듣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사람 많은데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어떨까요? 남은 싸움은 집에 가서 하세요. 안락한 가족들의 보금자리. 주위에 던질 물건도 많아 깨부수는 재미도 있답니다. 너무 시끄럽게 굴 경우 아랫집에서 쫓아오니, 이 점 주의해 주세요." 내 말에 부부는 싸움을 멈추고 어이없다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난 씨익 웃어 보였다. "웃자고 한 얘긴데 재미없었나요?으음,이거 뻘줌한데요." "나 참...... 살다 살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 미친놈이라니? 멀쩡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한테 미친놈이라니! "빙빙 도는 회전목마처럼 제 머리도 돌아버릴 것 같지만 참도록 하겠습니다. 절 미친놈이라 도 생각하셔도 좋은데 일단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인 법이고, 부모 죽인 원수처럼 싸웠다가도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 다 는 듯이 서로 부둥켜 안고 살아갑니다. 그게 바로 부부라는 겁니다. 결혼식 날을 떠올려 보십시오. 두 분께서는 식장에 서서 검은머 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고 맹세하셨을 겁니다. 물론 그런 맹세 오래 못 간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건 아닙니다. 이 좋은 날, 이 좋은 곳에 놀러워 뭐 때문에 싸우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제 그만 하십시오. 애가 울고 있지 않습니까? 애가 오늘 일을 잊을 것 같습니까?천만에 말씀입니다. 애라고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오히 려 애이기 때문에 더욱 잘 기억합니다. 이런 기억은 애가 어른이 될 때까지도 머릿속 깊숙 이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애한테 무슨 소리를 들을지 생각해 보셨나요?" 그리고 이 일로 받게 되는 아이들의 상처는 장난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처로 인해 아이에게 도벽이나 실어증 등 정신적 장애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이 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에 집에 가서 이혼 도장을 찍든 말든 상관없는데, 아이 앞에서 더 이상 추한 모습 보이 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부모라 해도 이 이상 아이에게 상처를 줄 자격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몸을 돌려 쓰러져 있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저 그렇게 생긴(다시 말해 평범하게 생긴) 여자아이는 날 보며 게속 눈물을 쏟아냈다. 난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토닥토닥 스킬을 사용했다. 토닥토닥~. "훌쩍~훌쩍~." 순식간에 잦아드는 울음. 으음, 효과가 점점 좋아지는 걸 보니 스킬 레벨이 올라간 듯하다. 하긴 그렇게 많이 사용했으니 지금쯤이면 스킬 레벨이 오를 때도 됐지. 만약 온라인RPC게임이었다면,내 손이 황금색으로 빛나며 옆에'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라 는 표시가 나타났을 것이다. 난 울음을 그친 아이를 번쩍 들어 부부에게 건네주었다. 부부는 아이를 받더니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난리를 쳐댔으니 쪽 팔리기도 하겠지. 어쨌든 예상 외로 일이 쉽게 해결되었다. 뭐 내가 나서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손쉽게 해결되 기 마련이지.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에겐 불가능이란 없다. "와아!멋져요 오빠!" "막막 멋있어요,오빠!" "형 대따 멋있어요!" 짝짝짝~ 열심히 박수를 치는 어린 엘프들, 그러자 주위 사람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고, 어느새 우레 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난 팬 관리 차원에서 한번 손을 흔들어준 다음, 다시 줄로 복귀했다. "잘 했어." 팬들이 박수소리보다 루시아의 이 칭찬 한마디가 더 기쁘다. 난 칭찬 뒤에 이어질 상을 기대 하며 루시아를 보았다. "응?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설마 그 한마디로 끝이야?상으로 한 번 껴안다 준다든가., 키스해 준다든가 하는 건 없어?"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헉 어, 어떻게 그런......" 나름대로 엄청 기대했거늘. 충격을 받은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바닥을 긁으며 궁상을 떨었다. 그러자 라이와 루비 가 내 등을 쓰다듬이며 위로해주었다. "힘내세요,오빠." 그래. 니들 동생 제작(?)을 위해서라도 힘내마. 그러는 사이 드디어 우리가 탈 차례가 되었다.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라이가 오빠랑 같이 탈 거야!" "아니야! 루비가 같이 탈 거야!" 나와 회전목마를 같이 타겠다고 싸우는 라이와 루비. 그리고 루는 슬그머니 루시아의 옷깃 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전 누나랑 같이 탈래요." "......" 아니, 저놈이! 난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원래 이런 건 혼자 타야 재밌는 거란다. 그러니 어서 각자 말에 오르렴." 난 라이와 루비를 번쩍 들어 각각 말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루 역시 말에 올려준 다음, 루시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우리는 여기 타자." 내가 택한 것은 말이 아닌 마차.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출발합니다!" 안내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회전목마는 음악과 함께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과 마차는 기둥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꺄하하." 말에 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루시아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니 행복한 기 분이 든다. 나는 오직 루시아의 얼굴만을 바라봤지만, 루시아는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아이들의 모습만 을 바라보았다. "아앗!그렇게 손 놓으면 떨어질지도 몰라, 루비야!라이와 루도 장난 그만 쳐! 말 뒤에서 장 난치면 안 돼!" "......" 바로 앞에 있는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저 멀리 있는 아이들만 신경쓰는 루시아. 난 울적한 마음에 시 한 수 읊었다. 나의 눈에는 그녀가 있지만 그녀의 눈에는 오직 아이들뿐 나는 언제쯤 그녀의 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이들은 언제쯤 그녀의 눈에서 빠져나올까? 아아~ 야속한 그녀의 이름은 루시아 시를 읊어도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다. 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뭐하는 짓이야?" 루시아는 재빨리 내 잎에 물린 담배를 빼앗았다. "애들 타는 놀이기구에서 담배를 피울 생각이야?" "여기 금연구역 아닌 것 같은데. 봐,스티커도 안 붙어 있잖아" "넌 그게 꼭 붙어있어야만 금연구역인 걸 아니? 이렇게 빙글빙글 도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 면 우리 뒤에 있는 애가 연기를 마시게 되잖아.넌 애 아빠로서 어쩜 그럴 수가 있니?" "......" 또 시작됐다. 루시아의 잔소리. 그래도 잔소리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증거다. 적어도 무관심보다는 낫지 않는가? 난 경건한 자세로 루시아의 잔소리를 경청했다. "그래도 이렇게 애들과 함께 놀려오니까 좋지 않아?" "응, 저렇게 즐거워할 줄 알았으면 진작 데려오는 거였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아니,뭐 꼭 애들을 말한다기보다는......우리가 이런 곳에 같이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해 좀 더 진지하고 고차원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너희들 언니가 장난 그만치라고 했지? 내리면 언니한테 혼날 줄 알아!" "......" 저것들을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던지 해야지. 내가 다시 용기를 내 루시아에게 접근을 하려는 순간, 마차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멈추었 다. ------------------------------------------------------------------------------- 타이핑 하기 힘드네요 그동안 다른 분들 열심히 써서 올리시는데 출석만 하고 활동 안 하는 게 어쩐지.. 걸러서 마침 아이리스 빌린 김에 아무거나. 골라서 타이핑 했다는.. "계속해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며, 출구는 왼쪽입니다." "......" 벌써 끝났냐? 말에서 내린 아이들은 우리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막막 재밌었어요,오빠!" "헤헤~루비는 한 번 더 타고 싶어요." "회전목마 최고에요." "......" 그냥 빙글빙글 도는 게 뭐가 재밌다고 이러는 건지...... 회전목마가 아무리 재밌어봐야 진짜 말 타는 것만 하겠니? "너희들 언니가 장난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어? 그러다가 떨어져서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루시아는 점짓 화난 표정을 지어보이며 아이들을 다그쳤다. 그러자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 며 말했다. "죄송해요오~." 난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왜 그래,루시아?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아이들도 많이 반성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그만 화 풀어." 내가 장담하는데 얘들 반성해 봐야 3초면 다 까먹는다. "앞으로는 그러면 안 돼. 알았지?" "네에~!" 대답은 잘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으음, 이제 뭘 타는 게 좋을까?후룸라이드?청룡열차?자이로드롭?신밧드의 모험?지구촌 탐 험?" 난 놀이공원 지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앗! 아이스크림 사주세요,오빠!" 내 옷을 마구 잡아당기며 조르는 아이들. 오늘은 즐거운 어린이날이니 애들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헉! 무슨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2천 원씩이나!"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원래 이런 곳에서 먹을 거 사면 엄청 비싸다. 게다가 오늘 같은 대목 에는 더욱더 비싸진다. 이런 식으로 폭리를 취해도 소비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사는 수밖에 없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자고 놀이공원을 나갈 수는 없지 않는가? 뭐, 그러니까 이런 폭리를 취하는 거겠지만. 난 투덜거리며 1만 원짜리를 꺼내 내밀었다.아이들 입만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가 아 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나도 먹어야지. 우리는 소프트 아이스림을 하나씩 입에 물었다. 나는 초콜릿,루시아는 비닐라,아이들은 초콜 릿,비날라 혼합. 놀이공원에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풍선을 든 여자 애와 로봇 장난감을 든 남자애.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부모. 수많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만큼 귀여운 애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저 애들 좀 봐.너무 귀엽다." "어느 나라 애일까?" "저 빨강머리 남자애가 너무 귀여워." "옆에 있는 빨강머리 여자애랑 쌍둥이인 모양인데." "나는 저 회색머리 여자애가 제일 귀여운 것 같아.깨물어 주고 싶어." 상상을 초월하는 귀염성으로 주위의 시선을 모으는 아이들.덕분에 나와 루시아 어깨가 으쓱 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가 얘들 부모에요!' 라고 소리치고 싶다. 이런 생각은 루시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뺨에 아이스크림이 묻었잖아, 루비야." 루시아는 루비를 살짝 안아주며,혀를 내밀어 루비의 뺨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 헉! 이렇게 선정적이고 뇌쇄적일 수가! 엄마가 딸의 뺨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모습.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 서 봐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흥분이 되는 걸까? 혹시 내가 이상한 건가? "앗! 오빠 얼굴 빨개졌다." 라이의 지적에 루시아는 날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아니.아무 일도......" 내가 얼버무리자 루시아는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너 방금 야한 생각했지?" "헉! 그걸 어떻게......가 아니라,야한 생각이라니......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하 하하!" 어색하다. 무지하게 어색하다. 난 이마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루시아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배고파요,누나.' "도시락 먹어요!" "김밥 먹고 싶어요!" "그럴까?" "네에~!" 우리는 앉아서 먹을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그리하여 찾은 곳이 푸릇푸릇한 잔디 공원이다. 사람들은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그위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돗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대여해주는 곳도 있다. 가격은 8천원. 대여료 3천원에 보증금 5천원이다. 즉,지금 8천원을 내고 돗자리를 빌려간 다음,나중에 돗자리를 반납하면 5천원을 돌려준다. 돗자리를 훔쳐가지 못하게 하려는 놀이공원 측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그나저나 비싸긴 더럽게 비싸군. 난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하고 돗자리를 받아왔다. 나무밑에 펴면 그늘도 생기고 서늘해서 좋겠지만,그런 명당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차지한 뒤였다. 그래서 적당한 곳에 돗자 리를 펴고 그 위에 앉았다. 루시아는 가지고 온 도시락을 열었다. 5단으로 이루어진 도시락통.1,2,3,4단에는 김밥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마지막 5단에는 입가 심용 과일이 들어있다. "와아! 김밥이다.~." 기뻐하는 어린 엘프들 일동. 아이들은 두 손으로 김밥을 마구 집어 입 안에 우겨넣었다. 꾸역꾸역 "천천히 먹어.체하겠다." 루시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가 켁켁거렸다. 루시아는 루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러게 천천히 먹으라고 했잖아. 물이......아! 물을 안 가져왔네." 난 열심히 김밥을 먹었다. 저것들이 다 먹기 전에 하나라도 더 먹어둬야 한다. 이번엔 햄까 지 들어있다. 아아~ 햄까지 들어있는 메이드 인 루시아 김밥을 먹게 될 줄이야! 감동이 막막 밀려온다. 그런데 루시아가 아까부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응? 왜 그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왜 거기 앉아있어?" "응? 왜 거기 앉아있냐니......헉! 설마?" 자신의 옆에 와 앉으라는 뜻인가? 루시아는 역시 나를 사랑...... "애들이 목 메어하는 모습 안 보여? 당장 가서 음료수를 사와야 할 것 아냐?" ......하지 않는구나. "으음." "뛰어 갔다 와." "으응." 난 루시아가 시킨 대로 매점까지 뛰어가서 음료수를 사왔다. 그러자 아이들은 음료수를 꿀꺽 꿀꺽 마시며 김밥을 계속 먹었다. 난 구석에 쪼그려 앉아 김밥을 집어 먹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소외받는 가장을 심심 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가족들과 같이 앉아있으나 대화에 끼지 못하는 가장들. 피곤에 지친 얼굴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축 늘어진 어깨. 아아~ 이것이 정녕 이 시대의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란 말인가?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구박박고, 집에서는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히고, 아이들에게 외면 받는 다. 게다가 사장은 일하는 기계로, 아내는 돈 벌어다주는 기계로, 아이들은 용돈 주는 기계 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가장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아버지는 그저 기계적으로 집에 월급봉투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일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직장인들 대부분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회사 가기가 싫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재 수 없는 상사의 얼굴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싶다고 한다. 명퇴의 위협과 상사의 쪼임에도,수많은 야근과 산더미처럼 쌓인 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악착같이 회사에 붙어 있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아서 그 억압과 굴욕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리면 우리 가족들이 굶는다. 내가 야근을 하면 야근수당으로 아이들 학원 보내주고, 좋은 옷 입힐 수 있다. 내가 조금만 더 힘들면, 그만큼 우리 가족들이 편해질 수 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참고 또 참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들이 아버지를 외면하면,우리 아버지들이 설 자리는 대체 어디란 말인가? 가족들의 따뜻한 격려 한마디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라.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오늘도 어김없이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 나. 으음,조만간 정계에 진출할 날도 머지않았군. 그나저나 김밥 참 맛있다. 내가 김밥을 집으려고 손을 뻗는데, 라이가 김밥을 내밀었다. "아~ 하세요,오빠.라이가 먹여드릴께요.' "헉! 정말?" 내가 입을 벌리자 라이는 내 입에 김밥을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아아~ 라이가 먹여주니 몇 배는 더 맛있는 것 같다. 라이는 내 무릎 위에 올라앉으며 말했다. "라이가 오빠 좋아하는 거 오빠도 잘 알죠?" "......" 우리 라이가 날 좋아하고 있다니. 난 감동해서 라이를 꽉 끌어안았다. "응응. 물론이지. 이 오빠가 라이 좋아하는 거 라이도 잘 알지?" "헤헤~." "루비도 오빠가 좋아요.' 내 팔에 매달리는 루비.그리고 덤으로 딸려오는 루. "저도 형이 좋아요." "얘, 얘들아......" 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세상에 있었다니. 이 아이들이 한 난 혼자가 아니야! "흑흑~." "갑자기 왜 울고 그래?궁상 그만 떨고 이거나 먹어." 루시아는 김밥을 집어 내 앞에 내밀었다. 헉!설마 루시아가 먹여주려는 건가?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루시아는 김밥을 내 입 안에 넣어주었다. 루시아가 나에게 김밥을 먹여주다니! "어흐흐흑~." "왜 자꾸 울어?" "흑흑~감동해서." 나의 가족 루시아,라이,루,루비, 이 넷이 있는 이상 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이들을 위해 서라면 푸세식 화장실에서 똥 푸는 일이라도 웃으면서 할 수 있다. "......"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좀 그렇다. 발을 헛디뎌 똥통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똥독 올라 죽을지도 모른다. 죽는 것은 하나도 두렵 지 않지만, 온 몸에서 똥냄새 풀풀 풍기며 죽는 것은 좀 그렇잖아. 으음,그나저나 김밥 먹으면서 똥 푸는 생각을 하니 속이 좀 메슥거린다. 사이좋게 김밥을 나눠 먹은 우리는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까지 탄 것 이라고는 회전목마 하나. 자유이용권 본전 뽑으려면 아직도 멀었다.(공짜로 받 은 거긴 하지만). "이제 뭐 타고 싶니?" 나의 물음에 아이들은 합창을 하듯 대답했다. "청룡 열차요오~." 청룡열차,또는 팔팔(88)열차로 불린다. 열차를 높은 곳으로 올린 후 떨어트려 엄청난 가속 과 스릴을 맛보게 하는 놀이기구로 놀이공원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이 청룡열차 없는 놀이공 원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자." 난 아이들을 앞장세웠다. 걸음을 옮기는데 루시아가 내 옆으로 다가와 슬그머니 팔짱을 꼈 다. 헉! 루시아가 이런 대담한 행동을! "루,루시아......" "오늘 하루만이야. 다른 부모들도 이러고 다니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우리 애들 기 죽으면 안 되니까." 이러니저러니 핑계를 대도 루시아는 날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좋아하지 않으면 이런 행동을 할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하니 흐뭇해지며 웃음이 절로 나온다. "후후~." 그러자 루시아는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이상한 웃음 짓지마. 자꾸 그러면 떨어져서 걸을 거야." "아, 알았어. 이제부터 안 웃을게." 그런데 문제가 또 있다. 내 팔에 느껴지는 이 부드럽고 뭉쿨한 감촉. 이 감촉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헉! 서, 설마......루시아의 가슴.......?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니 오히려 멀쩡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문제가 생기기 전에 금강 부동심법 구결 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으음,외우긴 외우는데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든 신경은 팔에 닿는 루시아의 가슴에만 집중되었 다. 그리고 별의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크,크다. 겉으로는 날씬해 보이는 루시아가 이렇게 가슴이 클 줄은...... 라이와 루비는 좋겠다. 만날 루시아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니. 나도 루시아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고파~. "히로!" "으응? 나 불렀어?" 루시아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루시아가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몇 번을 불러도 모르는 거야?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아, 아니라니까. 자꾸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나만큼 건전한 청년이 세상에 자꾸 어디 있다고...... 아! 그런데 왜 부른 거야?" "우리 탈 차례야." "응? 우리 탈 차례라니......?" 난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내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청룡열차 바로 앞이었다. 헉!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시계를 보니 1시간 정도 지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청룡열차 타는 곳에 도착해 줄까지 섰던 것이다. 으음, 어린이날이다 보니 사람들이 많긴 많군. 1시간씩이나 기다리다니. "뭐하고 있어?빨리 타." "으응." 아이들은 어느새 청룡열차에 탑승해 있었다. 난 루시아 손에 이끌려 앞자리에 탔다. 루시아 는 당연히 내옆에 앉았다. 사람들이 전부 탑승하고 나자 체인이 감기며 열차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모터의 힘으로 열차를 높은 곳으로 올리면, 위치에너지가 생겨난다. 그리고 이 위치에너지로 인해 열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 게 되는 것이다. 열차가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내가 청룡열 차를 못 탄다는 것이다. "......" 그런데 왜 내가 여기 앉아있는 걸까? 최고점에 오른 열차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공에 설치된 붉은색 레일. 만약 이 열차 가 튕겨나가기라도 한다면 우리 모두 죽는 거다. 견딜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내리고 싶다. 하지만 이미 출발한 열차를 어쩌란 말이냐? 순식간에 가속도가 붙었다. 난 옆에 있는 루시아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 순간, 몸이 왼쪽 으로 쏠렸다. 뭐,뭐야? 어떤 놈이 난폭운전을 하는 거야? 안전운전을 해야 할 거 아냐! 이번엔 몸이 오른쪽으로 쏠린다. 세찬 바람으로 인해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난 억지로 눈 을 뜨다 깜짝 놀랐다. 앞에 보이는 레일이 뒤집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어떤 놈이 레일을 이 따위로 만들었어? 공사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이게 뭐니,이게?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진다. 난 이를 악 물고, 눈을 꼭 감고 버텼다. 훗~ 전설의 영웅 아이언스 히로에게 이 정도 시련쯤은.......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아까 보았던 논데월드 팜플렛이었다. 논데월드의 청룡열차는 원형 코스 다음에 스프링 코스가 이어집니다. 스프링 코스는 스프링 처럼 빙글빙 글 돌아가는 코스로 최고의 스릴을 만끽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더블 원형 코스가 이어져....... "뜨아아!내려줘어~!" 청룡열차가 원래 위치로 돌아왔을 때, 나는 시체가 되어있었다. "일어나요,오빠." "사람들이 빨리 내리래요,형." 난 나를 흔드는 어린 엘프들의 손길을 느끼며 편안히 눈을 감았다. 하얗게 불 태웠어. "못 타면 못 탄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 할말이 없다. 쪽 팔려서. 아아~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가 고작 청룡열차에게 패배하다니. 나의 팬들이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나의 팬들이야 둘째 치고, 루시아한테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비참해 죽을 지경이다. "청룡열차 너무 재밌는 것 같아." "응응. 막막 재밌어." "한 번 더 타고 싶어." 아이들은 나를 보며 합창하듯 외쳤다. "청룡열차 한 번 더 타요오~!" "......" 이런 겁대가리를 상실한 엘프들 같으니! 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루시아는 날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어?" "하하, 뭐 이 정도 가지고....." 루시아 앞에서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청룡열차 따위가 나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오빠." "응? 왜 그러니, 라이야?" "왜 다리를 떠세요?" "응? 이 오빠가 언제 다리를 떨었다고 그러니?" "지금도 떨고 있는데요." "......." 라이의 말대로 내 다리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푸훗~." 입을 가리며 웃는 어린 엘프들. "......" 뭐야? 저것들 지금 날 비웃는 거야?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를 봤나! "너희들 즐거운 어린이날에 먼지 나도록 맞아 보고 싶니?". "왜 애들한테 신경질이야?" 핀잔을 주는 루시아. 내가 실망하려는 순간 루시아는 내 허리를 살짝 감싸 안았다. "좀 진정되는 것 같아?" "......" 다리 떨림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심장이 말썽이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지도를 가운데 놓고 머리를 맞댄 채 토론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후룸라이드를 타자." "아니야. 바이킹이 먼저야." "난 신밧드의 모험이 좋은데." "논데월드 지구촌 탐험도 재밌대. 여기 추천이라고 쓰여 있잖아." "아니야. 그래도 바이킹을 먼저 타야 돼." "아까 보니 바이킹에는 사람들이 많이 줄 서 있었어. 그러니까 신밧드의 모험을 먼저 탄 다 음 이렇게 이동해서 바이킹을 타자." "듣고 보니 그 편이 효율적일 것 같아." "좋아. 그렇게 하자." 나름대로 토론을 통해 합리적 결론을 도출해 내는 아이들. 하는 짓이 너무 귀여워 깨물어 주 고 싶을 정도다. 어쨌든 우리는 아이들이 바라는 대로 신밧드의 모험을 탔다. 신밧드의 모험은 배를 타고 지 하 수로를 따라 이동하며 이것저것 구경하는 형태의 놀이기구다. 팔이 네 개인 괴물도 있 고, 칼을 든 도적들도 있다. 불을 뿜는 용과 오우거 같이 생긴 것들도 있었다. 그런데 저런 것들이 신밧드의 모험에 나왔던가? 쟤들은 출연 안 했던 것 같은데. 아이들은 주위의 것들을 구경하느라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자꾸만 엉덩이를 들 썩거렸다. 때문에 나와 루시아가 계속 주의를 줘야했다. 신밧드의 모험 다음에는 바이킹이었다. 바이킹은 뭐 다 알다시피 바이킹들이 타던 배 모양 의 놀이기구를 마치 진자처럼 좌우로 흔드는 것이다. "꺄아아~." 바이킹에 탄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배가 내려갈 때마다 라이의 회색 머리카락 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은은한 샴푸향이 나는 라이의 머리카락. 으음,향긋하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루비가 나에게 몸을 기대왔다. "꺄아아~ 무서워요,오빠아~." "......" 전혀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는데. 내 눈에는 아주 좋아 죽는 걸로 보이는데 난 두 손으로 양쪽에 앉은 라이와 루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의 루시아 사이에 라이가 앉아있고, 루시아도 나와 마찬가지로 라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루시아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마침 루시아가 반팔을 입고 있는지라 루시아의 살결 감촉이 그대로 느껴진다. 루시아는 무서운지 눈을 꼭 감은 채 양쪽에 앉은 라이와 루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루시아 옆에 앉는 건데. 괜히 중간에 아이들을 끼워 놨잖아. 바이킹이 멈추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번엔 루시아가 일어나지 못했다. 때문 에 내가 부축해서 일으켜주어야 했다. "괜찮아?" "으응." 청룡열차는 잘 타면서, 바이킹은 무서워하다니. 뭐, 사람마다 무서워하는 놀이기구는 다른 법이니 이상할 건 없겠지. 회전목마라면 이를 가 는 사람도 있으니. "업혀, 루시아." 난 걷기 힘들어하는 루시아를 위해 기꺼이 등을 내밀었다. "됐어." "그러지 말고 업혀." "괜찮다니까." "제발 업혀줘. 아니면, 날 밟고 가!" 난 승부수를 띄웠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루시아의 성격상 밟고 지나가 라고 하면 정말 밟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루시아한테 사랑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밟히는 게 나아!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꼭 이상한 쪽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난 그런 쪽으로는 취미 없다. 루시아는 업힐까, 밟고 지나갈까 고민하는 듯했다. 난 초조한 마음으로 루시아가 결정을 내리길 기다렸다. 루시아는 결국 내 등에 업히는 것을 택했다. 등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귓가에 느껴지는 루시아의 숨결 루시아는 내 목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오늘만이야. 다음에도 이러면 화 낼꺼야." 오늘만이라면, 오늘이 영원히 가지 않기를. 난 루시아를 업고 걸음을 옮겼다. "안 무거워?" 루시아의 물음에 난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거워. 라이의 두 배는 되겠는데. 힘들어 죽겠다." 그러자 루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루시아의 얼굴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됐으니까, 내려워!" 화난 루시아의 목소리, 난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얼마나 가벼운데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 살좀 더 쪄야겠는 걸." "흥! 이제와서 그런 소리 해봐야 소용없어." "진짜야. 사랑하는 사람을 업고 있는데 무서울 리 없잖아." "지니 오빠가 그런 말 하면 되게 멋있는데, 니가 하니까 왜 이렇게 느끼한 걸까?" "......" 느, 느끼라니...... 그런 치명적인 말을! "원래 오빠는 뭘 해도 각이 안나오잖아요!" 라이의 말에 난 고꾸라질 뻔했다. 뭘 하도 각이 안나온다니! 이건 결정타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라이 니가 아ㅗ빠 가슴에 대못을 박는구나. 여기에 더해 빨강머리 엘프들이 확인사살에 나섰다. "확실히 오빠가 뭘 해도 각이 안 나오긴 해." "형이 원래 각 없는 인생이잖아." 푹!푹!푹! 아아~ 나의 심장을 후벼 파는 어린 엘프들의 한마디 한마디. 나 각 안나오는데 니들이 보태준 거라도 있니? 어쨋든 우리는 돌아다니며 몇 가지 놀이기구를 더 탔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린이날 놀이공원에 놀러오는 것은 효율성면에서 그다지 좋지 못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이날 놀이공원에 놀러오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놀이기구 한번 타려면 1시간씩 기다려야 한다. 때문에 몇 개 타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밤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행사가 벌어졌다. 화려한 불빛과 함꼐 등장한 퍼레이드 행렬. 논데월드 마스코드인 날라리와 깻잎이(논데월드라는 명칭에 맞게 노는 애들을 마스코드로 내세운 것 같다)를 선두로, 연주대가 북을 치고 트럼펫을 불며 따라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차에 올라탄 각종 만화 캐릭터들이 폼을 잡으며 사탕이나 과자등의 선물을 나눠주었다. "으음,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은 다 있는데...... 후뢰시맨은 없구만. 독수리 오형제도 없고." 난 아쉬운 마음에 임맛을 다셧다. 퍼레이드 행렬을 실컷 구경한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야외 공연장에서는 마술쇼가 한창이었다. 사라졌던 지팡이가 다시 나타나고, 아무 것도 없던 모자에서 토끼가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놀라워하며 박수를 쳤다. 부모들 역시 즐거워했다. 난 절대감각 덕분에 마술사가 어떤 속임수를 쓰는지 다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술이라는 게 원래 눈속임이고, 관객들은 눈속임인줄 뻔히 알면서도 속고, 그렇게 속으면서 즐거워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대로 어떤 속임수를 쓰는지 다 아니 별로 재미가 없는 게 사실이다. 이럴 때는 모르는 게 약인데. 이무튼 애들이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즐겁다. 어느새 시간은 9시가 되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루시아와 애들도 피곤해 보이고. 이제 그만 놀이공원을 나가려 하는데,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관람차! 놀이공원에 왔으면 관람차는 필수 아니겠는가? 이렇게 가족단위라면 더더욱 그렇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거 타자. 이거 타면 야경도 볼 수 있어" "그럴까?"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야 관람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나와 루시아가 같이 앉고, 맞은편에 어러ㅣㄴ 엘프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관람차다 서서히 공중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루시아는 많이 피곤한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난 슬며시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짝 끌어안았다. "와아! 저기 바이킹이랑 청룡열차다." "응응. 저쪽에 자이로드롭도 보여." "나 저거 타보고 싶었는데." 놀이공원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어둠을 몰아내는 화려한 불빛과 수많은 사람들. 루시아는 슬며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예쁘다." "으응. 그러네." 아아~ 분위기 좋다. 루시아와 함꼐 관람차를 타고 놀이공원의 야갸ㅕㅇ을 보게 될 줄이야! 여기에 어린 엘프들만 없었다면 사이가 진전되는 것은 순식간일텐데.. 관람차가 올라갈수록 나와 루시아의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는 듯 했다. 하지만...... "아! 저것도 예쁘다." 우르르! "아! 저기서 과자 판다." 우르르! "아! 저기서......." "가만히 좀 있어, 이것들아! 너희들이 자꾸 몰려다니니까 관람차가 흔들리잖아! 사고나면 니들이 책임질 거야? 응?" 다른관람차는 멀쩡한데, 우리 관람차만 마치 시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다 저것들이 우르르 몰려다녔기 때문이다. "쳇! 오빠는 괜히 우리한테 신경질이야." "맞아. 오빠 미워." "형 대따 나빠." ".......'" 이것들이 어린이날이라고 말을 막하는군. 이쯤 되면 막가자는거지? 나들 12시 지나면 다 죽었어! 쉬이익! 퍼엉! "헉! 뭐야? 설마 나의 능력을 두려워한 CIA의 암살자가 공격을 시작한건가?" 난 재빨리 루시아를 껴안고 보호했다. 하지만 총알이나 미사일은 날아오지 않았다. "너 지금 어디에 손을 대고 있는 거야?" "응? 어디냐니...... 헉!" 내 한 손은 루시아의 뒤통수를, 그리고 다른 손은 루시아의 엉덩이를 감싸 안고 있었다. 엉덩이라니! 어, 어떻게 이런 행복한 일이...... 아니, 당황스러운 일이 있을 수가! "빨리 안 떼?" 살얼음장 같은 루시아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난 용기를 내서 말했다. "조금만 있다 떼면 안 될까?" "안 돼."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루시아의 목소리. 난 하는 수 없이 조심스럽게 손을 뗏다. "하하, 난 또 무슨 일 생긴 건 줄 알고...... 고의가 아닌 거 알지?" 루시아는 '경멸어린 눈빛' 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서 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 오늘부터 이 오른손은 씻지 않으리! "앗! 불꽃놀이에요, 오빠!" "와아! 폭죽이다!" "멋지다!" 아이들의 외침에 난 밖을 보았다. 쉬이익! 퍼엉! 지상에서 쏘아진 폭죽이 공중에서 터지며, 온갖 색깔, 온갖 모양의 불꽃을 만들어 냈다. 빨간꽃, 파란꽃, 초록꽃, 노란꽃 등등. 어떤 불꽃은 유성우처럼 아래로 쏟아졌고, 어떤 불꽃은 밤하늘에 녹아들 듯 사라진다. 루시아와 아이들은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루시아의 음성.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예쁘네." 그런데 난 어째서 저런 불꽃을 보면 예쁘다는 생각이 들기에 앞서 '저거 쏘는 데 돈을 얼마나 썻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걸까? 내가 이상한건가? 정신없이 불꽃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얼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난 이순간 내가 루시아를 사랑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사랑해." 나도모르게 튀어나온 고백.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루시아는 얼굴을 붉혔고, 어린 엘프들은 지들끼리 속닥거렸다. "오빠가 사랑한대." "언니가 뭐라고 말할까?" "글쎄." 아이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비켜주기 위함인지 반대편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런데 이 좁은 관람차 안에서 자리를 비켜주고 말고 할게 뭐가 있는가? 어차피 다 보이는 건 마찬가진데. "애, 애들 있느넫 무슨 소릴 하는거야......." 루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난 루시아의 진심이 듣고 싶었다. 루시아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단지 애들 때문에 나와 같이 있어주는 걸까? 난 주먹을 꾹 쥐며, 용기를 내 물었다. "넌 날 어떻게 생각해?" "......뭐?" 어느새 관람차는 최고점에 도달했다. 최고점을 지나가 관람차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루시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웅~ 지루해." "언니는 오빠를 싫어하나봐." "형이 점수 잃을 짓을 많이 하긴 했지." "라이 생각에는 관람차에서 내리면 말할 것 같아." "왜?" "오빠 성격상 나쁜 소리 들으면 바로 뛰어내릴 테니까." "아아~ 그래서 누나가 내린 다음 대답하려는 거구나." "그럼 언니는 오빠를 싫어하는 건가?" "꼭 그렇다고 볼수는 없지만, 그쪽이 확률이 높긴 하지." "으음, 그헣구나~." "......." 저것들이 진짜! 야! 다 들리거든! 나 뛰어내리기 전에 니들부터 창밖으로 집어던져 줄까? 그래도 라이 말이 맞긴 맞다. 루시아한테 싫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더이상 살아 무엇 하겠는가? 그냥 뛰어내려 콱 죽어버려야지. 그런데 지금까지 댇바이 없는 걸 보면 라이의 예상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내가 너와 같이 있는 이유는 오직 아이들을 엄마 없는 결손가정 아이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고 싶으나, 내가 뛰어내릴까봐 말하지 못하는건가? 정말 그런건가? 이제 관람차는 거의 다 내려왔다. 몇 분 후면 내려야 할 것이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뛰어내리고 싶다. 루시아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고개 돌려." "예? 왜요?" "빨리. 언니 말 들어야 착한 엘프지." 아이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난 혼란에 빠졌다. 어째서 애들한테 고개를 돌리라고 한 걸까? 설마 뺨이라도 떄리려 하는 걸까? 뺨을 때릴 만큼 내가 싫은 걸까? 정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루시아를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 나의 잘못이다. 난 그동안 루시아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붙잡아두고, 일방적으로 내 사랑을 강요했다. 루시아의 마음에는 싱경도 쓰지 않은채. 어쩌면 루시아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저 나에게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래가 루시아를 사랑한다 해서, 그녀에게 날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날 사랑하지 않는 루시아를 억지로 붙잡아두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 그녀가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그녀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루시아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그리고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미끄덩한 혀의 감촉.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 머릿속이 멍해지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오직 루시아의 훔결과 감촉, 마음뿐...... 내가 어디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세계에 오직 나와 루시아만이 존재했다.. 저 멀리서 어린 엘프들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와아! 오빠랑 언니가 키스한다." "부럽다." "형 좋겠다." "......." 저것들 고개 돌리고 잇으랬더니...... 하여튼 말 덜버게 안 듣는 엘프들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루시아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난 그제야 눈을 떳다. 주위의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필름이 빠르게 감기듯, 일그러져보이던 주위 사물과 아련하게 들려오던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관람차 안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루시아가 서 있고, 한쪽에는 어린 엘프들이 서 있었다. 어린 엘프들은 어께동무를 한 채 우리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에헤헤~." 뭐, 뭐니? 그 웃음의 의미는?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리실 때는 소지품을 확인해 주세요." 어느새 도착했는지, 직원이 걸쇠를 올리고 문을 열었다. 내리라고 하니 내려야겠지? 관람차 안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디디니 방금저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난 손으로 입술을 더듬어 보았다. 아직 루시아의 입술과 혀의 감촉이 남아있는 듯 했다. 루시아는 마치 아무 잇도 없었다는 듯 아이들을 챙겼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린 엘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얼레리 꼴레리~ ♬ 얼레리 꼴레리~ ♬ 언니랑 오빠~ ♬ 키스햇대요~♬ 키스햇대요~♬ 얼레리 꼴레리~ ♬" 나와 루시아가 키스를 해? 방금전의 일이 꿈이 아니었나? 루시아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너희들 조용히 하지 못해!" 루시아가 혼내려 하자 아이들은 어깨동무 대형을 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계속 노래를 불러했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루시아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너희들 정말......" 난 일단 저 버르장머리 없고, 눈치 없고, 겁 없는 3무(三無) 엘프들을 응징하기로 했다. 쾅!쾅!쾅! 머리에 혹을 하나씩 단 아이들은 한쪽 구석으로 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들었다. "어디서 나쁜 것만 골라서 배워가지고, 감히 하늘같은 언니랑 오빠를 놀리다니 간댕이가 부어도 아주 땡땡하게 부었구나. 손 똑바로 올리지 못 해!" 아이들은 볼을 잔뜩 부풀리며 울상을 지었다. 귀엽게 생긴 아이들이 벌을 서는 모습은 좋은 구경거리였는지, 주위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떤 인간들은 핸드폰이나 디카를 꺼내 사진까지 찍었다. 아앗! 누가 맘대로 아이들 사진을! 이건 초상권 침해야! 이런 사건이 인터네셍 나돌게 되면, 나중에 아이들의 연계계 진출할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아이들의 장래를 ㅜ이해서라도 미리 미리 찬단을 해두어야지. 그래도 아이들의 귀여움에 반한 사람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게다가 여론마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저 귀여운 아이들을 벌세우다니."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오늘은 어린이날인데." "부모가 피도 눈물도 없나봐." "혹시 계모와 계부인 건 아닐까?" "그렇겠지. 자기 자식 아니라고 막 다루는 게 틀림없어." "불쌍한 것들. 어쩌다가 저런 부모를 만나가지고......." "......." 뭐야, 이 일방적인 여론은? 여론에 밀린 나는 결국 아이들을 용서해 주었다. "손 내려. 앞으로 다시는 그러면 안 돼." "네에~!" "......" 대답은 잘한다. 나와 루시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논데월드를 나왔다. 하루 종일돌아자녔기 때문인지 많이 피곤하다. 다리고 아프고, 튼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내가 이런데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은 어떻겠는가? 루시아와 아이들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 루시아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람차에서 내린 뒤 우리는 서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얼굴만 마주쳐도 고개를 돌렸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난 슬며시 루시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기......." "저기......." "......" "......" 하필 둘이 동시에 입을 열다니! "니, 니가 먼저 말해." "아, 아니야. 니가 먼저 말해." "......" 드라마에서 흔히 써먹는 진부한 대화. 하지만 누구든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위와 같은 대화가 오고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난 용기를 내서 먼저 말했다. "아까 관람차에서 말이야......" "으응." "니가 나한테 키스했잖아." "그,그 얘긴 왜 하는거야?" 마치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루시아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변했다.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아서. 그 키스의 의미는 날 좋아한다는거야, 아니면 싫어한다는거야? 정말 날 어떻게 생각해? 좋아하는거 맞아?" 갑자기 루시아의 표정이 냉랭하게 변했다. 빨갛던 얼굴은 한순간에 하얘졌다. 기온이 점점 내려가며 눈발이 휘날린다. "......." 응? 오뉴월에 왠 눈발? 누가 아이스 스톰(Ice storm)이라도 썻나? "왜, 왜그래, 루시아? 내가 뭐 또 잘못이라도......?" 짜악! 나의 뺨을 때리는 루시아의 손바닥. 루시아는 '경멸어린 눈빛'으로 날 노려보더니, 몸을 획 돌려 걸어갔다. 난 화끈거리는 왼쪽 뺨을 붙잡으며 루시아를 쫓아간다. "흑~ 뺨을 때렸다는건 내가 싫다는거야?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정말 그런거야?" 루시아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 넌 그런걸 꼭 말로 해야 알아?" 헉! 이건 싫다는 의미인가? "흑흑~ 다시 생각해봐, 루시아 난 널 이렇게 살아하는데......." "됐다니까! 너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어!" "헉! 꼬, 꼴도 보기 싫다니......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우에에엥~ 루시아는 날 싫어하는 게 틀림없어. 우엥~ 우엥~." 어린 엘프들은 나와 루시아를 보며 말했다. "아! 언니가 오빠를 울렸다." "형이 울 짓 했네, 뭐." "그래도 오빠가 불쌍해." "오빠는 여자의 마음을 너무 몰라." "원래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거야. 여자들도 남자의 마음을 모르잖아." "아니야. 오빠는 단순해서 무슨 생각하는지 표정에 다나타나." "응응. 오빠는 엄청 단순해." "......." 단순 엘프들한테 단순하다는 말을 들으니 단순히 넘어가기 힘들군. 어쨌든 루시아의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까 키스한 것을 보면 싫어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노력해서 점수를 따는거야! 루시아가 날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데 방금 뺨을 때린 걸로 봐서는 싫어하는것 같기도......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대중교통은 만원이고, 택시도 안잡힌다. 하긴, 굥휴일인 어린이날이니 어쩔 수 없겠지. "라이 다리 아파요, 오빠." "루비도 다리 아파요." "전 허리가 아파요." "......" 넌 어제 뭘 했기에 허리가 아프니? 루시아도 말은 안했지만, 많이 힘들어 보였다. "괜찮아? 내가 업어줄까?" "괜찮아." "언니 괜찮대요. 라이를 업어주세요, 오빠." "아니에요, 루비가 더 지쳤어요. 루비를 업어주세요." "전 허리가 아파요, 형. 남자한테 허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죠?" 업어달라며 내 옷길을 잡아당기는 어린 엘프 일동.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보는데, 어찌나 불쌍해 보이는지. 하지만 나도 힘들어 죽겠다. 그리고 만약 내가 한 엘프를 업어준다면, 다른 두 엘프가 거세게 항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패쓰~." "예? 아무런 설명 없이 갑자기 웬 패쓰요?" "니들은 다리가 없니, 신발이 없니? 멀쩡한 두 다리도 열심히 걸어야 할 거 아냐?" 그래도 애들 다리가 짧긴하다. 남들 두 걸음 걸을 때 세걸음을 걸어야 하니...... 숏다리의 비애라 할 수 있겠군. "그나저나 택시 더럽게 안 잡히네. 이럴 때 차가 있으면 정말 좋은데." 이럴줄 알았으면 인디에게 논데월드 주차장에 나의 뉴 렉서스턴을 세워놓으라고 부탁할 거 그랬다. "졸려요, 오빠." "나도 졸리다." "피곤해요, 오빠." "나도 피곤하다." "빨리 집에가요, 형." "그래, 빨리 집에 가자꾸나." 대중교통도 만원이고, 택시도 안잡히니 남은 방법은 이동 마법 밖에 없다. 웬만하면 마법은 안스려했지만, 루시아와 아이들이 힘들어하니 어쩔 수 없지. 내가 마법진을 그릴맣낳 곳을 찾는데 차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숴 섰다. 빵빵! 경적을 우리며 창문을 내리는 운전자. "타시지ㅛㅇ, 아이언스 공작님." "헉! 사일런스 백작님! 어떻게 여길......?" 운전자는 다름아니 지니. 차는 다름아닌 논데월드 로고가 찍힌 봉고차였다. "지금 이 시간대에는 택시가 잘 안 잡히는 법이지요. 아이언스 공작님을 모셔다 드리기 위해 잠시 빌렸습니다." 언제나 적절한 때 나타나 나에게 도움을 주는 지니. 과연 나의 충신 1호로 불릴 만 하다.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 10인승 봉고차 였기에 자리는 넓었다. 어린 엘프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와 루시아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야경이 스치듯 지나간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나의 물음에 루시아는 웃으며 대답한다. "어린이날이니까." 난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루시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오늘만이야." "그래, 알았어." 어느 순간부터 루시아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잠이 든 것이다. 애들 데리고 돌아다니느라 많이 힘들고 피곤했나 보다. 난 조심스럽게 루시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잠든 루시아의 모습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난 루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자." 모두가 잠든 차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나에게는 오직 루사아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주위풍경은 계속 지나가는데, 마치 어느곳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순간, 지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대로 호텔로 직행할까요?" "......." 이 인간이 날 뭘로 보고 그런 엄한 말을 하다니!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으음, 과연 나의 충신 1호답게 나의 마음을 정확히 읽는군. "됐으니까 운전이나 똑바로 하게요." 난 루시아와 체온과 촉감을 느끼며 잠들었다. "일어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으음, 어딘가요?" "집 앞입니다." 깨어보니 어느새 집 앞이다. 루시아도 깼는지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너무 피곤했는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지났다. "막히긴 엄청 막혔나 보군요." "어린이날이니 어떻 수 없지요." 이 시간에 애들을 깨우기 미안하다. 게다가 저렇게 푹 자고 있고. 하는 수 없이 우리는 한 명씩 집어들었다. 지니는 루를, 나는 라이를, 루시아는 루비를, 그리고 집으로 올라갔다. "아! 다녀오셧어요? 놀이공원은 어땟나요? 들거우셧어요?" "그래. 즐거웠다." 이 늦은 시간에도 불을 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인디와 일루니아 여시남. 우리는 아이들의 얌라과 겉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으음, 그러고 보니 애들 이도 안 닦았군. 뭐, 하루쯤은 안 닦아도 상관없으려나? "나도 씻고 바로 자야겠다." 루시아는 이를 닦고 발을 씻은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지도 않은채 라이와 루비 옆에 누웠다. 난 방의 불을 끄고 문을 닫아 주었다. 그리고 내 방으로 돌아와 루 옆에 누웠다.. 잠이 마구 밀려온다. 난 역시 집이 편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하기를....... story 19 오늘은 어버이날 난 자고 있는 어린 엘프들을 깨워 거실에 일렬로 집합시켰다. "하암~ 무슨일이에요, 요빠?" 잠옷을 입은 아이들은 아직 잠이 덜 깬 모습이었다. 난 일단 미리 준비해둔 물로 아이들의 얼굴을 씻어주고 눈곱을 떼주었다. "피곤해요오~." 어제 그렇게 놀았으니 당연 피곤할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내가 아이들을 깨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어제가 어린이날이었어. 그래서 너희들은 그야말로 질리도록 놀았지. 그런데 너희들 내일모레가 무슨 날인지는 알고 있니?" 나의 물음에 어린 엘프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내 이럴줄 알았다. 이기적인 것들 같으니! "내일모레는 아주 중요한 날이란다. 5월 5일은 어린이날, 그리고 5월 8일은 어버이날이지. 너희들 어버이날이 무슨 날인지는 아니?" 도리도리 "......." 너무 당당하게 고개를 젓는군. 자신의 무식을 조금은 부끄러워 하는것도 필요한데. "어버이날은 어버이에 대한 은혜를 헤아리는 날이란다. 다시 말해 라이, 루, 루비가 오빠와 언니에게 감사해야 하는 날이라고나 할까? 이해가 가니?" "예. 다 이해했어요." "오오! 니들이 웬일로 한번에 이해를 했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예." 아이들은 일렬로 서서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빠." "사랑해요, 오빠."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형." 인사를 마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는 어린 엘프들. "......." 뭐야 이건? "전원 스톱!" 난 아이들의 뒷덜미를 붙잡고 다시 원위치 시켰다. "니들 방금 뭐한 거니?" "예? 오빠한테 감사했는데요." "루비도요." "이제 누나한테만 감사하면 끝이죠?" "......." 이것들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너희들 감사는 반드시 물질적인 무언가가 뒤따라야 한다는거 모르니?" "예?" "감사라는 건 입이나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닌 물질로 하는 거란다. 예를 들어 선물이나 돈 같은걸로 말이야." 낭늬 말에 어린 엘프들은 눈만 깜빡거렸다. 난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너희가 아직 세상을 덜 살아서 모르나 본데,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란다. 즉, 주는 게 있으면 받는것도 있다는 거지. 너희들 왜 어린이날 3일 뒤가 어버이날인지 아니?" 도리도리. "거기에는 어린이날 얻어먹은 걸 어버이날 뱉어내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단다." "헉!" 놀라는 어린 엘프 일동.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설마 어린이날 받아먹은 게 꽁짜라고 생각했던 거니?" 서로의 얼굴을 처다보는 어린 엘프들. '공짜 아니었어?' '공짜인 줄 알았는데.' '나도.' ......대략 이런 의미를 담은 눈빛이 서로 오간다. "아무튼 내일모레 어버이날을 기대하고 있으마. 참고로 말하자면 뒤끝있다. 만약 허접하게 준비해서 오빠와 언니 마음에 안 들 경우에는 앞으로의 삶이 고달파질 거다. 후후~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기는 마렴." 다시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어린 엘프들. "라이 졸려." "루비도." "나도." "일단 들어가서 자고 나중에 생각하자." "응. 그게 좋겠어. "잘자." 눈을 비비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어린 엘프들. "......." 재들 너무 부담 안 갖는거 아냐? *** 오후 1시 어제 실컷 노느라 너무 피곤했던 어린 엘프들은 그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까 히로가 한 말을 기억해낸 라이는 대책회의를 위해 거실로 엘프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은 파자마를 갈아입지도 않을 채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그런데 어버이날이라는 게 정말로 있나?" "그러게 말이야. 루비는 어린이날만 있는 줄 알았는데." "형이 거짓말한 건 아닐까? 원래 형이 거짓말을 잘하잖아." "아니야. 라이가 전에 뉴스에서 본 것 같기도 해." "근런데 왜 하필 어린이날 3일 뒤지?"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해서 이런저런 날이 몰려있나 봐. 스승의날이라는 것도 있대." "으음, 그래도 난 형을 못 믿겠어." "아! 달력을 보면 되겠다!" "맞아. 그럼 되겠다." "응응." 라이는 탁상 달력을 가지고 와 살펴보았다. "으음...... 아~ 여기있다. 5월 8일 어버이날." "진짜네." "어! 정말로 있네." 어버이날 진위 여부를 확인한 어린 엘프들은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버이날이 뭐하는 날이지?" "글쎄. 어린이날이 부모가 아이랑 놀아주는 날이니까, 어버이날은 아이가 부모랑 놀아주는 날이 아닐까?" "그럼 우리가 형이랑 누나랑 놀아줘야 하는거야?" "그래야 하지 않을까?" "우웅~." 회의는 한참동안 계속되었지만 조금도 잘전이 없었다. 단순 엘프 셋이서 머리를 맞대봐야 단순함을 벗어나기ㅏ는 힘들었다. "일단 어버이날이 뭐하는 날인지부터 알아보자." "응응. 그러는게 좋을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알아보지?" "......." 회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침묵이 계속되는 가운데 라이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인디 오빠한테 물어보자." "맞아. 그러면 되겠다." "인디 형이라면 잘 말해줄 거야." "그럼 라이가 물어보고 올게." "응." 라이는 부억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인디는 일루니아를 위한 세로운 요리 개발을 위해 고심하는 중이었다. 라이는 인디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빠, 오빠." 라이를 본 인디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이렇게 몸을 숙인 이유는 라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이다. "무슨일이에요, 라이님?" "어버이날이 뭐하는 날인지 막막 궁금해서요. 알아요, 오빠?" 인디는 귀엽다는 듯 라이의 머리를 쓰다음어 주었다. "어버이날은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기념하여 정한 날이에요. 이 나라에서는 어버이날 아침에 어머니와 아버지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준다고 해요. 그리고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건네주기도 하구요." "우웅~." "카네이션을 달아주면 히로님과 루시아님이 정말 좋아하실 거에요." "정말요?" "물론이에요. 아! 제가 용돈을 드릴테니, 히로님과 루시아님께 꼭 카네이션과 선물을 드려야 해요. 알았죠?" 인디는 앞치마에서 1만원을 꺼내 라이에게 주었다. "헤헤~ 알았어요, 오빠." 1만원을 받은 라이는 기뻐하며 거실로 돌아왔다. "앗! 그 존은 뭐야, 라이야?" "응. 인디 오빠가 줬어." "좋겠다." "이걸로 오빠랑 언니 줄 카네이션도 사고 선물도 사자." 그리하여 선물을 고르기 위해 밖으로 나온 어린 엘프들. 아이들은 무슨 선물을 살까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했다. 하지만 평소에 선물을 사본 적이 없는 아이들인지라 선물을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가게를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길가에 있는 포장마차를 발견했다. 오뎅(어묵이 표준어이나 포장마차에서는 오뎅이라 부른다), 떡붂이, 순대, 튀김 등을 팔고 있는 포장마차. 한참 걸어자였더니 셋 모두 배가 고픈 상태였다. 배를 쓰다듬던 라이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우리 오뎅 딱 하나씩만 먹을까?" "응응. 그러자." "딱 하나씩만 먹ㅈ나." 아이들은 포장마차로 루르르 몰려갔다. "오뎅 세 개 주세요오~." 오뎅 꼬치를 들고 맛있게 먹는 아이들. 하지만 오뎅 하나 가지고 어디 간에 기별이나 가겠는가? 오뎅을 먹고 나자 오히려 더욱 배가 고파졌다. "우리 쩍붂이 한 접시만 먹을까? "응. 그런데 떡볶이에는 튀김을 넣어 먹어야 맛있는데." "응. 그리고 순대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어." 떡볶이와 튀김과 순대까지 시켜서 먹는 아이들. 내침김에 오뎅도 몇 개 더 시켰다. 그렇게 먹고 나니 1만원이란 돈이 사라지는건 순식간이었다. 아이들은 배부르게 먹고 나서야 돈을 다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털이 된 아이들은 아무 소득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 오늘은 5월 7일. 내일은 드디어 어버이날이다. 후후~ 어린이날에 뜯긴거 몽땅 뱉어내게 해주마! ..... 라고 다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애들 하는 걸 보면 별로 뱉어 낼 것 같지가 않다. 다 알다시피 어버이날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날이 아니다. 1년에 딱 한 번 있는 날이다. 그러니까 이 날 최대한 아이들에게 많이 뜯어 먹어야 한다. 부모라서 해피해요~. 사실 그동안 애 셋 키우기가 너무 힘들었다. 요즘 출산율을 보면 알겠지만, 한명만 낳는 추세이다. 둘 낳는 집도 드물고, 셋 낳는 집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 집 아이는 셋. 애들 셋 키워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다. 애들이 말을 들어야 말이지. 어디서 이런 이기적인 엘프들만 나온건지, 아지 미칠 지경이다. 아아~ 오빠 말 잘 듣는 착한 엘프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내가 그렇데 한탄을 하는데 루시아가 거실로 나왔다. "잠깐만 옆에 앉아봐, 루시아." "무슨 일인데?" "아무튼." 루시아는 치마를 가지런히 하며 내 옆에 앉았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며 루시아의 치마가 조금씩 짧아진다. 그리고 치마 재질도 앏아지고. 나도 모르게 시건이 자꾸 종아리로 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루시아는 다리가 너무 예쁜 것 같다. 아아~ 내가 라이나 루비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도 하고, 같이 목욕도 할 수 있을 텐데. "너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싸늘한 루시아의 목소리와 경멸어린 눈초리. 난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루시아. 난 결코 종아리를 보며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부비부비 한다거나 같이 목욕을 한다거나 하는 상상 같은 건 결코 하지 않았어. 정말이야." "뭐? 정말 그런 상상을 했단 말이야?" 루시아는 불쾌감을 슴김없이 그러냈다. 난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리가!" 이럴 땐 괜한 변명을 늘어 놓는 것보다 화제를 돌리는 것이 ㄴ사다. "아! 그보다 내일이 어버이날이잖아. 알지?" "응. 그렇다고 하더라." 어버이날 얘기가 나오니 루시아는 초록색 눈동자를 빛냈다. "사실 난 아직도 내가 엄마라는게 믿어지지 않아. "으응. 사실은 나도 니가 세 아이 엄마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이렇게 예쁜 엄마 봤는가? "내일이 어버이날인데 아이들한테 뭐 바라는 거 ㅇ벗어?" "으음, 글쎄." "부담 갖기 말고 말해 봐." 루시아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듯했다. 참고로 난 아이들한테 바라는 거 많다. 일단 오빠 말좀 잘 들었으며 ㅈ호겠고, 간식 좀 줄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비행기 태워달라고 조르지 않았으면 좋겠고, 펑펑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정적으로 외식하러 가잔말 좀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애들과 외식 한번 갔다하면 가계 경제가 휘청거린다. 요즘은 수입도 뚝 끊겼는데, 식비는 오히려 늘었다. 이래서야 가계 경제가 버티겠는가? 으음, 그런데 아이들이 나의 이런 바람을 다 들어줄라나? "아!" "생각났어, 루시아?" "응." "뭔데?" 난 루시아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정말 궁금했다.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지금처럼 건강하게 잘 커주는 거야." "......." "왜 그래?" "설마 그게 다야? 뭐 또 바라는 거 없어?" "그것 외에 또 뭐가 있겠어?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커주면 그걸로 된 거지." "글쎄. 내가 보기엔 너무 건강해서 문제인 것 같은데." 그렇다. 우리 애들은 너무 건강해서 문제다. 그 땡땡한 볼이라니! 뭐,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서 만지기는 좋다만. "아무튼 내가 엄마로서 어버이날을 맞게 되다니. 너머 행복해." "나도 아빠로서 어버이날을 맞게 되니, 막막 해피해. 아! 그러고보면 부모님도 한번 찾아봬야 하는데. 으음, 내일 찾아뵙긴 힘들 것 같으니 전화로라도 인사를 드려야겠다." 나의 말에 루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제야 난 말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시아의 부모님은 아이리스 왕국의 왕과 왕비, 두 분은 아이리스가 멸망할 때 돌아가셨다. 루시아가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지금 루시아의 혈육이라고는 현재 아이리스 왕국의 국왕인 오빠 하나뿐. 그런 루시아 앞에서 부모님 얘기를 하다니! 내가 죽일 놈이지! "미, 미안해 루시아! 내가 잘못했어! 날 용서해 줘!" 난 재빨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왜 또 오바하고 그래?" "응? 화내는 거 아니었어?" "내가 왜 화를 내?" 루시아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그냥 잠깐 부모님 생각이 났을 뿐이야." "그, 그래?" 난 재빨리 루시아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효도도 못 해드렸는데......." 루시아의 표정이 더욱 우울해졌다. 난 딱히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땐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거지? "흑~." "서,설마 우는거야?" "흑흑~." 루시아의 눈에서 눈물을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어떠한 말을 해도 루시아에게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 이다. 내가 조심스레 어깨를 감싸 안자, 루시아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난 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루시아가 우는 동안 난 계속해서 그녀의 옆을 지켰다. 미안해. 이런 것밖에 해줄 수 없어서. 한참 후, 울음을 멈춘 루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좀 진정이 돼?" 루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루시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내 얼굴 엉망이지?" 얼마나 울었는지 눈 주위가 빨갛게 부었다. 머리카락도 헝클어져있고, 하지만 그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루시아의 이런 모습을 보는것은 내가 최초가 아닐까? 이제까지 몰랐던 그녀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 느낌이다. 난 백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아니야. 정말 예뻐." "칫! 거짓말." 괜한 투정을 부리는 루시아. 하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다. 난 루시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루시아를 들어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뭐하는 거야?" "뭐하긴? 우리 울보 공주님 달래주려 그러지." "뭐?" 입술을 삐죽 내밀며 화내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난 루시아를 껴안고 토닥토닥 스킬을 발동시켰다. 토닥토닥. 나의 손이 천천히 루시아의 등을 두르렸다. 그러자 루시아의 심장 박동수가 조금씩 느려지며 안정을 찾아갔다. 루시아는 두 손을 내 목에 두르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 감사의 인사는 내가 루시아에게 해야 한다. 난 루시아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이렇게 내 곁에 있어주는 것에 감사한다. 루시아는 지쳤는지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편안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난 루시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들어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난 침대에 걸터앉아 가만히 그녀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리봐도 사랑스럽고, 저리 봐도 사랑스럽다. 루시아는 대체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까?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봉긋한 가슴이 조금씩 움직인다. 그때마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울다 지친 그녀를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러면 안 돼! ......라고 계속 다짐을 해보지만, 남자의 본성이라는 게 원래 좀 그렇고 그렇다. 으음, 역시 난 성인군자가 되기는 틀린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루시아를 보고 있으니 참 좋다. 부모님이 안 계신 루시아. 하지만 루시아 옆에는 나와 라이, 루, 루비가 있다. 그리고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지니도 있다. 루시아에게 있어서 나는 애인, 라이, 루, 루비는 자식, 일루니아 여사님은 언니, 인디는 형부, 지니는 오빠다.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사는 한 가족이다. 내가 루시아 부모님의 빈자리를 대신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내 자리에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할 거다. 항상 이렇게 너의 곁에 있어줄게~. **** "우리 어버이날 기념으로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게 어떨까? 라이의 제안에 루와 루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깜짝 파티가 뭔데?" "돈은 어떻게 마련할 건데?" "......." 그렇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예산 부족이었다. 이런 행사가 있을 줄 알았으면 그동안 받은 용돈을 조금씩 모아 두는 건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물론 이런 생각을 진작 했다 하더라도 별 소용은 없었을 것이다. 돈 생기면 먹을 거 사 먹는 데 족족 쓰는 엘프들이 어찌 돈을 모을수 있겠는가? "돈이 쵀대한 안 드는 방향으로 준비를 하는거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가자는 것이 라이의 생각이었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있기에 루와 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돈이 안 드는 걸까?" "몸으로 때워야지!"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라이는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 돈이 없으면 몸으로 때누는 거랬어." "어떻게 몸으로 때워?" "으음......." 잠시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민하던 라이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일단 오빠랑 언니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는거야." "그 다음엔?" "으음, 그 다음엔 우리가 같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거야." "그 다음엔?" "으음, 그 다음엔......아! 오빠랑 언니 어깨 주물러 드리자." "그럼 형이랑 누나가 좋아하려나?" "응응. 분명 좋아할 거야." 어린 엘프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깜짝 파티라면 케이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편지지도 사야 하잖아." "우웅~." "어제 오빠가 한 말 기억 안나? 감사라는 건 입이나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닌 물질로 하는 거랬어. 선물이나 돈 같은 걸로." "맞아. 그리고 뒤끝 있다고 했어. 마음에 안 들면 앞으로의 삶이 고달파질 거라고도 했어." "우웅~." 그렇다. 아무리 몸으로 때운다고 해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히로가 한 말을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뒤끝이 있다니! 앞으로의 삶이 고달파진다니! 아이들은 다시금 머리를 ㅁ자대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도 라이가 그럴 듯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우리 아르바이트를 하는게 어떨까? "응? 아르바이트?" "응응. 일해서 돈을 버는 거야." "전에 고구마 장사할 때처럼?" "응응. 어른들 도와드린 다음 돈을 받는 거야. 그리고 그 돈으로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거야." "와아! 그거 좋겠다. 라이 넌 어쩜 그렇게 막막 똑똑하니?" "맞아. 라이 너 되게 똑똑해." 루비와 루의 칭찬에 라이는 저절로 어깨가 으쓱했다. 라이는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헤헤~ 라이가 원래 좀 똑똑하잔항. 아무튼 빨리 일하러 가자." "응!" 인디는 갑작스레 우르르 몰려온 어린 엘프들 때문에 곤혹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제 일을 돕고 싶다는 건가요?" 끄덕끄덕.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어린 엘프들. 라이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용돈 조금만 주시면 돼요. 저희는 비정규직이니 많이 안 받아요." 뉴스를 많이 본 라이는 주워들은 것도 많았다. 여기서 비정규직 얘기가 왜 나오는 건지....... 때마침 일루니아가 등장했다. 일루니아는 곤혹스러워 하는 인디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저기, 그게......" 인디가 대답하기 힘들어하자 라이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아르바이트 중이에요." 일루니아는 무릎을 굽혀 라이의 머리를 쓰다음어 주었다. "아르바이트? 무슨 아르바이트?" 이번에는 루비가 나서서 대답했다. "오빠랑 언니 깜짝 파티 준비하려구요!" 그러자 라이는 깜짝 놀라 루비의 입을 막았다. "안 돼, 루비야 그건 비밀이란 말이야." 그제야 사정을 눈치 챈 일루니아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어버이날 깜짝 파티 해주려는 거구나. 그래서 돈이 필요한 거고?" 끄덕끄덕. 일루니아는 아이들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들 하는 짓이 너무 귀여워 쓰다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그럼 뭘 할 수 있는데? "뭐든 시켜만 주세요." 굳은 각오를 다지는 아이들. 그 모습에 일루니아는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인디는 일루니아에게 물엇다. "어떻하죠, 일루니아님?" "어떻가긴요? 이렇게 뭐하니, 일을 시켜야지요." "예? 저, 정말요?" 인디는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ㅇ낳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어린 것들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아이들에게 일을 시킨다는 것은 엄연한 노동법 위반이었다. 하지만 일루니아는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을 시크는 것이 좋을까? "슈퍼에 가서 우유 사올 수 있니? 마침 우유가 다 떨어졌꺼든." "예! 가능해요! 우리만 믿으세요!." "호호~ 그럼 부탁할게." 일루니아가 라이에게 1만원을 쥐어주자 아이들은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잠시 후, 우유 하나를 들고 다시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 "다녀왔어요, 이모." "그래. 잘했어. 수고비로 거스름돈은 줄게. 그럼 됐지?" "네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헤헤 웃음을 지었다. 시작부터 일이 순조로웠기 때문인다. 일루니아는 아이들에게 우유 한 잔씩 따라주었다 "이거 마시고 힘내." 슈퍼까지 갖다오느라 고생한(?) 아이들은 사양 않고 우유를 마셨다. 꿀꺽꿀꺽. 이번에는 인디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방 청소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가 청소기로 밀었으니, 걸레질만 하면 돼요." 사실 인디는 걸레질까지 완벽하게 끝마쳤다. 인디는 가사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가사 드래곤이 아니던가? 하지만 인디는 일부러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걸레질을 부탁했다. "맡겨만 주세요, 오빠. 라이가 완벽하게 닦을게요." "루비도 자신있어요." "저도 잘할 거에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손에 걸레를 든 아이들은 방안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일루니아와 인디는 아이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 나는 침대에 누워 조용히 책을 읽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면 최근 들어 독서를 별로 안 했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인데 말이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께서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정말로 입 안에 가시가 돋쳤다는 뜻이 아니다. 설마 이 말을 그렇게 해석한 사람은 없겠지? 책은 지식의 보고다. 즉,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말은 하루라도 지식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난 그동안 너무 지식 쌓는 것을 게을리했따. 군자라면 언제 어느 때고 책에서 손을 떼지 말아야 하거늘. 으음, 그동안 나의 나태함에 깊이 반성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아이미스가 출간될 줄이야. 요즘 영아 잘 나가나 보근." 처녀작 '질투' 를 완전히 띄운 영아는, 후속작 '교주님이 보고 계셔' 마저 대박을 터트림으로써 완전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 인기에 힘입어 영아는 세 번째 작품으로 아이미스를 출간했다. 영아의 인기 때문인지, 글이 재미있어서 인지 아이미스 역시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서점에 갔는데 한족에 영아 책이 잔뜩 쌓여 있더라. 서점 직원에게 물어보니 판매량이 엄청 많아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라고 한다. 평범한 앞짱구였던 영아가 베스트셀러 작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으음, 역시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거다. 그나저나 영아 잘 지내고 있나 몰라. 기숙사는 지낼 만하려나? 난 영아의 사촌 오빠로서 영아의 책을 사주었다. 차마 질투와 교주님이 보고 계셔를 구입할 수는 없었던 관계로 아이미스를 갔가. 난 아이미스를 읽으며 과거 나의 모험을 떠올렸다. 마침 아이미스는 히노와 초절정 귀염둥이 나이가 만나는 장면이었더. 감히 히노에게 건방진 태도를 취하는 나이. 이에 격분한 히노는 나이가 들고 있던 테디베어 인형을 빼앗아 인형의 목에 칼을 켜누고 협박한다. 펑펑 울며 테디베어를 살려달라고 비는 나이. 700살 먹은 엘프였던 나이는 이 일을 계기로 히노에게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으음, 내가 라이 만났을 때와 비스무레하다 못해 똑같군."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테디베어가 헬로우 귀티라는 것 정도다. 나머지는 다 똑같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라이는 참 건방진 엘프였다. 하지만 나는 라이에게 많은것을 가르쳐 주교, 덕분에 라이는 지금의 예의바른 엘프로 재탄생했다. "그런데 히노가 활약하는 부분이 거의 없네. 얘가 원래 이렇게 활약이 없었나? 으음......" 그렇게 한창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린 엘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응? 니들은 뭐니? 설마 같이 놀아달라고 온 거니?" "아니에요, 오빠. 하던거 계속하세요. 우리는 방 닦으로 온 거예요." "응?" 니들이 방을 왜 닦아?" "헤헤~ 그럴 일이 있어요." "읽던 책 마저 읽어요,형." 어린 엘프들은 손에 든 걸레로 방바닥을 닦기 시작했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만 쟤들 왜 저러는 거지? "야, 거기 의자 밑도 빡빡 닦아. 이쪽도 빡빡 닦고. 정성을 담아서 걸레질을 해. 그래야 찌든 떄가 쏙 빠지지." 으음, 그른데 쟤들 일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가슴이 아프다. 라이와 루비는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머리수건 까지 싸맸다. 어딘지 모르게 불쌍하고 처량해 보인다. 사실 쟤들한테 일 시키는 것은 유아노동력 착취 아니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일은 왜 하는 거니? 드디어 밥값 해야겠다고 마음이 든 거니?" 참고로 얘들이 밥값하려면 이 방이 아니라 상암 월드컵경기장 정도는 청소해야 한다. 얘들의 식비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해야지. "헤헤~ 그럴 이유가 있어요." "응? 그 이유가 뭔데?" "비밀이에요!" "......" 방을 다 닦은 아이들은 다시 우르르 몰려나갔다. 그럴 이유라는 게 대체 뭐지? "헉! 설마 일루니아 여사님이 아이들에게 일하라고 구박한건가? 그래서 아이들이 구박을 견디다 못해 일터로 나선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일루니아 여사님.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 집에서 귀여움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히로와 루시아가 안 볼 때마다 아이들을 때리고 괴롭혔다. 그것도 모자라 밥값을 하라며 억지로 일을 시켰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을 시키질 않나, 옆집 돌아다니며 구걸하라고 시키질 않나....... 착한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시킨 일을 했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런 착한 아이들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았따. 툭 하면 일을 제대로 안 했다고 매질하고 꾸짖었다. 아이들은 그런 일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부모님(히로,루시아)께 알리지 않는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기특한 것들 같으니. 매 맞은 상처 자국을 애써 감추는 아이들. 아이들은 서로의 종아리에 발간약을 발라주고는 울며 잠이 든다. 대략 이런 스토리인가? "으음, 정말 잔혹한 아줌마로군. 어떻게 인간으로서 이런 잔인한 일을! 인디 자식도 가담했겠지? 그 불쌍한 아이들을 일루니아 여사님과 같이 구박했을 게 분명해. 흑~ 이 오빠가 무심해 너희들이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몰랐구나. 너희들이 가정 폭력의 희생자가 될 줄이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렴. 이 오빠가 너희를 구원해 줄 테니까."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일루니아 여사님께 뛰어가려다 멈친 했다. 으음, 생각해보니 좀 피곤하군. "일단 한잠 자고나서 구원해 주도록 할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 생각해보니 이런 게 다 인생 겨험이다. 어렸을 때 이런 구박을 받으며 살아야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거아. 대표적인 예로 내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침대 왜 이렇게 불편하지? 누가 여기서 방방 뛰기라고 했나? **** 드디어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 햇살은 쨍쨍하고 기온은 포근하다. 다행히 루시아의 얼굴도 밝아보인다. 난 먼저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어머님." [영웅이냐?] "네. 잘 지내고 계시죠?" [너야말로 잘 지내고 있는 궁금하구나.] "하하, 저야 뭐 언제나 잘 지내죠." [언제 집에 한번 들려라. 얼굴 좀 보자.] "예. 시간 나는 대로 갈게요."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밥 잘 먹고 잘 지내렴.] "예. 사랑해요 어머니." [그래. 나도 사랑한다.] "아버지 좀 바꿔주시겠어요?" 난 어머니와 아버지꼐 안부인사를 드린다음 전화를 끊었다. 지금까지는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하지만 기븐부터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을 차례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저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후후후~." "아! 오늘따라 즐거워 보여요, 오빠." 어느새 내 앞에 쪼르르 몰려든 어린 엘프들. 난 웃음을 터트리며 노래를 불렀다. "오늘은 어버이날~♬ 부모들 세상~♬ " "......" "......" "......" "응? 뭐니, 그 표정들은?" "아, 아니에요, 오빠." "그보다 잠깐 방에 들어가 계세요." "우리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나오시면 안 돼요." "응? 왜?" "아무튼요!" 어린 엘프들은 나와 루시아를 방 안에 밀어 넣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 떠밀린 나와 루시아는 루시아 방에 갇히게 되었다. 으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루시아 방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역시 여자들 방이어서 그런가? 루시아는 침대에 걸터앉았고, 난 그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이지?" "으음, 글쎄......아! 혹시 이런게 아닐까?" "뭔데?" 난 은근슬쩍 루시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께에 손을 얹었다. "어버이날 기념으로 동생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를 어렇게 같은 방 안에 밀어 넣고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같아. 어때? 그런 것 같지?" 기특한 것들 같으니라고. 어버이날이라고 이런 이벤트를 준비하다니. .그래. 이 오빠가 너희들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동생을 하나 만들어 주마. 최선을 다할게 얘들아! "이 손 안 치워? 그리고 좀 떨어져서 앉아." "응? 하지만 애들이 원하는데......" "빨리." "......" 흑~ 미안하다, 얘들아. 오늘도 동생 만들어주기는 틀린 것 같구나.. 난 루시아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아! 혹시 우리를 이곳에 가두어 놓고, 재산을 챙겨 도망치려는 것은 아닐까? 어린이날에 받을 만큼 받아먹었으니 이제 더 이상 볼일 없다는거지. 헉! 어떻게 지들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지들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배은방덕한 엘프들 같으니. 쇠빳따 어디 있어? 내 당장 이것들의 다리몽둥이를......" "왜 자꾸 헛소리야?" "아, 아니, 애들이 내 재산을 챙겨서 도망칠까봐 걱정돼서 그러지." "헛소리 좀 그만하고 앉아. 나까지 정신 사납잖아." "흑 루시아는 나만 미워해." 난 루시아가 시킨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이렇게 루시아와 함꼐 있으니 참 좋다. 으음, 설마 나와 루시아가 함꼐 있게 해주려는 아이들의 배려인가? "오늘따라 더 예쁜 것 같아, 루시아." 또 다시 은근술쩍 접근을 시도하는 나. 사실 난 근성 빼면 시체다. 난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은은한 삼푸향이 난다. 머릿결이 마치 비단결처럼 곱고 매끄럽다. 모발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무슨 비버이라도 있는 건가? "요즘 서울 하늘에 왜 별이 안보이는지 알아? 어늬 아름다움에 부끄러워 모습을 감춘거야. 요즘 햇살이 왜 이렇게 쨍쨍한지 않아? 너의 아름다움에 지지 않으려고 태양이 발악하는거야. 이 세상 그 무엇도 너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난 마구 칭친을 늘어놓았다. 상대방을 칭찬하는 것이야말로 호감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루시아의 반응은 별로였다. "니가 그런 말하니까 되게 느끼하다. 좀더 떨어져 줄래?" "......" 이렇게 남자의 진심을 몰라주다니! 역시 이런 방식으로는 진전이 없다. 좀더 강한 방법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 아이들이 마련해준 이 기회를 무의미하게 버릴 수는 없어! 눈 꼭 감고 덮치는 거야! 어쩌면 루시아도 내가 덮치길 바라고 있는지도 몰라. 용기를 내자, 박영웅.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야. "루시아!" 난 벌떡 일어나 루시아를 덮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라이가 들어왔다. "나오세요, 언니 오빠." "......" 뭐, 뭐니, 이 타이밍은? 루시아는 날 보며 물었다. "왜 갑자기 내 이름을 외친거야?" "으응. 그, 그냥 그러고 싶어서.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 난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간만에 용기 낸 건데......라이 미워. 어쨌든 우리는 라이를 따라 나갔다. 아이들은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서 있었다. 식탁 위에는 케이크를 중심으로 여러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루시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일루니아 여사님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얘들이 다 준비한 거야. 너희들 놀래켜 준다고. 이거 다 준비하기 위해 어제부터 아르바이트도 앴어." 루시아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니?" "에헤헤~" 대답대신 귀엽게 웃는 아이들. "어쩜......." 루시아는 크게 감동받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일단 여기 앉으세요, 언니 오빠." 우리는 아이들이 시킨 대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루와 루비가 나오더니 우리 가슴에 카네이션 한 송이를 달아 주었다. 부모로서 최초로 카네이션을 다는 감동적인 순간이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뿌듯함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뿌듯뿌득~. 루시아 역시 엄청 감동 받은 모습이다. 난 슬며시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역시 우리가 애들 하난 정말 잘 키웠어. 아이들은 일렬로 서더니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았다. 그리고 몸을 살짝 살짝 좌우로 흔드는 율동과 함꼐 노랠르 부르기 시작했따.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깍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그 유명한 '어머니 마음' 이다. 나와 루시아는 감동의 물결이 이는 것을 느끼며 박수를 쳤다. 짝짝짝! 아이들은 화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더니 다시 자세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은혜 푸른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아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느 ㄴ넓은 게 또하나 있지 사람 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아 이 노래는 '어머님 은혜'. '어머니 마음' 과 마찬가지로 어머니께 감사드리는 노래다. "......" 잠깐. 생각해보니 둘 다 어머니께 감사드리는 노래잖아. 그럼 아버지는? 노래를 끝마친 아이들은 헤헤 웃고 있었따. 폼을 보아아니 노래는 이걸로 끝인가 보다. "노래는 전부 끝난거지? 또 안 불러?" "예. 이걸로 노래는 끝이에요. 다음 순서로 넘어갈 거에요. "뭐라?" 이것들이 어머니께만 감사하고, 아버지께는 감사 안 한다는거야 뭐야? 내가 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럼 분위기 다 망치겠지? 사실 이건 애들 잘못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동요의 잘못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께 감사하는 노래는 많은데, 아버지꼐 감사하는 노래는 별로 없다니! 과거 가부장 시대 때는 자녀 양육을 어머니가 전부 도맞았다. 그러니 자녀들은 어머니를 친근하게 느끼는 반면, 아버지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자녀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 으음,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께 감사하는 동요도 많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건 저희가 언니와 오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쓴 거예요." 라이는 편지 세 통을 내밀었다. 난 그것을 받았다. "읽어 봐도 되니?" "예. 물론이에요." 난 일단 루가 쓴 편지를 뜯어 루시아와 같이 읽어보았다 누나와 형에게. 감사합니다 "......" 뭐야? 이게 끝이야? 그 다음은 루비의 편지 언니와 오빠에게. 루비난 언니랑 오빠가 막막 좋아요.. 사랑해요, 언니 오빠. "......" 세줄이 끝? 그래도 루보다는 한 줄 더 썼군. 마지막으로 우리의 친딸(?)이라 할 수 있는 라이의 편지. 언니와 옵빠에께. 라이는 언니랑 옵빠가 막막 조아여. 사랑해여, 언니 옵빠. "......" 역시 세 줄이 끈? 난 루비의 편지와 라이의 편지를 비교해 보았다. 으음, 심하게 똑같군. 라이가 맞춤법 틀린 것 빼면 완전 똑같다. 난 라이와 루비를 번갈아 보았다. 둘 중 누가 배꼈을까? 아무래도 루비가 좀더 수상한데. 그나저나 감사의 편지라는 게 고작 두 줄, 세 줄이라니. 니들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냐? "흑~ 감동이야." 루시아는 몇 줄 안 되는 아이들의 편지를 계속 되 읽으며 눈물을 훔쳤다. "아이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 난 별로 안 느껴지는데. 무엇보다 누가 배낀 건지 정말 궁금하다. 범인을 잡아 경을 쳐야 할 텐데. "이건 선물이에요, 언니 오빠. 우리가 돈 모아서 산 거예요." 또 다시 라이가 대표로 나서서 선물을 내밀었다. "아니, 뭐 이런걸 다......" 난 재빨리 선물을 받아 챙겼다. 라이는 설명을 덧붙였다. "빨간 포장지가 오빠 선물이고, 은색 포장지가 언니 선물이에요." 루시아는 또 다시 감동 받은 모양이었다. "고마워, 얘들아. 선물 풀어 봐도 되니?" "예. 빨리 풀어 보세요." 나와 루시아는 선물을 풀어 보았다. 으음, 대체 뭘까? 개인적으로 현금이면 좋겠는데. 금괴나 보석도 괜찮고. "헉! 이, 이게 뭐니?" 내 선물은 여성용 팬티스타킹, 루시아 선물은 손수건이었다. 난 어의가 없었다. "선물이 바뀐 거니?" 내가 묻자 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빠. 그게 오빠 선물 맞아요." "응? 이게 내 선물 낮아? 이 팬티스타킹이?" 라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언니가 팬티스타킹 입으면 오빠가 좋아할 테니까, 팬티스타킹이 오빠 선물이구요. 오빠가 손수건 들고 다니면 언니가 필요할때마다 오빠가 언니에게 내밀어 줄 테니까, 손수건이 언니 선물이에요." "......헉!" 라이의 설명을 들은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쩜 이렇게 똑똑할 수가! 루시아가 팬티스타킹 입으면 오빠가 좋아할 줄 어떻게 알고 이런 훌륭한 선물을! "너, 너희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루시아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말했다. 난 루시아 손에 팬티스타킹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루시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대할게." "뭐, 뭘 기대해?" "방금 라이 말 못 들었어? 니가 이거 입으면 내가 좋아할 거라잖아. 그러니까 니가 이거 입는 게 애들이 나한테 주는 선물인 셈이야." 정말 엄청 기대된다. 아아! 내가 애들 하난 정말 잘 키웠다니까. 뿌듯뿌듯! "누, 누가 이런 거 입을 것 같아?" "뭐? 애들이 힘들 게 준비한 선물을 외면하겠다는 거야? 으음, 이건 아이들이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준비한 선물을 '이깐건 필요없어' 라고 외치며 하수구에 던져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인데. 그치, 애들아?" 끄덕끄덕. 아이들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준 선물 정말로 버리실 거예요오~?' ......라고 묻는 듯하다. 그 눈빛 공세에 견디다 못한 루시아는 결국 굴복했다. "어, 알았어. 입으면 돼잖아." "았싸!" "왜 니가 좋아하는 건데?" 루시아는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난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게 내가 받는 선물이니까 그렇지. 대신 내가 이 손수건으로 땀이랑 눈물 다 닦아 줄게. 걱정하지 마." "흥! 됐어!" 샐쭉한 표정을 짓는 루시아. 겉으로 저래도 속으로는 싫지 않을 것이다. 아아~ 그나저나 엄청 기대된다.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와 그 밑으로 보이는 스타킹 상상만 해도 행복해진다. 루시아가 입으면 굉장히 어울리겠지? 그나저나 잘도 이런 저렴한 선물을 골랐군. 그래도 어버이날인데 양복 한 벌 맞춰주면 좀 좋아? 아니면, 담배 한 박스라든가...... 현금이 가득 찬 사과상자라든가...... 으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이제 파티해요." 우리는 식탁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식탁 가운데는 초콜릿 케이크가 놓여있고, 그 주위에느 ㄴ몇 가지 음식들이 있었다. 셀러드와 튀김, 과일 등등. "이 샐러드 라이가 직접 한 거예요,!" 루비는 이 튀김옷 입혔어요. 튀기는 건 인디 오빠가 해줬어요." "저도 계란 풀었어요."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한 일에 대해 늘어놓았다. 한쪽에서 인디와 함께 어버이날 행사(?)를 지켜보던 일루니아 여사님이 입을 열었다. "너랑 저 뺀질이 기쁘게 해준다며 아까부터 열심히 준비한 거야." 인디도 거들어 주었다. "예. 다들 정말 열심히 하셧어요." "헤헤~." 쑥스럽다는 듯 웃는 아이들. 루시아는 다시 한번 감동 받은 얼굴이었다. "너희들 정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루시아. 아까 받은 손수건을 써먹을 순간이 이렇게 빨리올 줄이야! 난 아이들이 선물애 준 손수건으로 루시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만 울어. 이 좋은날 왜 울고 그래?" "훌쩍~ 우리 애들 너무 착한 것 같아." 난 루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토닥토닥 스킬을 발동했다. 토닥토닥. 그러는 사이 인디가 케이크 가운데 꽃힌 촛불에 불을 붙였다. "어서 부세요." 나와 루시아가 입김을 불어 촛불을 끄자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짝짝짝! 으음, 그런데 어버이날에도 이런 거 하는 게 맞나? 뭐, 상관없겠지. 아이들은 케이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누구도 케이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응? 너희들 케이크 안 먹니?" 내가 묻자 아이들은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언니랑 오빠 다 드세요. 이건 언니랑 오빠를 위해 산 거기 때문에 언니랑 오빠가 다 드셔야 해요. 우리는 한 개도 안 먹을 거예요." "......" 입가에 흐르는 침이나 닦으면서 말하렴.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크를 조각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런 건 나눠 먹어야 맛있는 거야. 너희들이 먹어야 언니도 맛있게 먹지." "정말 먹어도 돼요?" "응. 빨리 먹어." 루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접시에 얼굴을 박고 먹는 아이들. 얼굴에 생크림이 묻는 것도 상관 않고 정말 열심히 먹는다. 으음, 웬만하면 내 몫은 남겨주렴. 루시아는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거 알아?" "응? 뭐?" "나 지금 최고로 행복해. 가족이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 나 역시 웃음을 지었다. "나도 마찬가이야. 너와 아디들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나와 루시아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 순간 들려오는 대화. "부럽네요." "네." "저도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인디님을 닮은 예쁜 아이를요. 인디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저도...... 아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둘의 눈빛이 뜨겁다. 마음이 자은 둘은 손을 잡고 방으로 향했다. "......" 뭐야? 왜 방으로 향하는 건데?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난 루시아의 어께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이 갖고 싶지 않아, 루시아?" "뭐?" "날 닮은 멋지고 잘 생긴 아이 말이야." 루시아는 눈을 흘겨 뜨며 말했다. "너 같은 뺀질이는 이 집에 하나로 충분해." "헉! 빼, 뺀질이라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루시아마저 날 뺸질이로 부르다니! 상처 받은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케이크를 먹었다. 흑~ 하루라도 빨리 라이에게 동생을 안겨 주고픈 내 마음도 모르고. 5월이 가정의 달이니만큼, 5월에 열심히 노력해서(?) 가족을 늘려야 할 거 아냐?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처럼. 으음 생각하면 할수록 인디가 너무 부럽다. "......" 잠깐. 5월은 가정의 달이잖아. 5월 5일은 어린이날, 5월 8일은 어버이날, 그리고 5월 15일은 스승의날이지, 으음, 다음주가 스승의 날이군. 난 먹느라 정신이 없느 ㄴ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다음주가 스승의날인 거 알지?" "예? 그게 왜요?" "스승의날에는 스승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선물과 파티를 준비해야 하는 거란다." 난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는 아이들을 둘로보며 말했다." "너희들의 삶의 스승이자 마음에 스승인 날 위해 다시 한번 열심히 준비하렴. 뒤끝 있는 거 다들 알고 있지?" "......헉!" 포크를 떨어트리며 놀라는 어린 엘프 일동. 난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의 삶이 고달파 지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하는게 좋을거야. 우후후~." 아이리스 2부 8권 아이리스 2부 8권 Story 20 히로, 이사하다 드디어 건물 리모델링이 끝났다. 내부 보강 공사는 물론 외장까지 완벽하게 새 단장했다. 더 이상 낡고 허름하게 보이던 건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밝고 화사한 건물이 들어섰다. 난 재탄생한 건물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빚 얻어서 빌딩 사고, 빚 얻어서 리모델링 하고…… 아아~ 그 빚 언제 다 갚을지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그렇다. 건물이 아무리 예뻐졌으면 뭐하나? 난 지금 빚더미에 앉아있는데. 정말 안타까운 사실을 그 빚을 갚을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는 거다. 매국노 나까무라 다케시가 남긴 보물(시가 128억7천만원)과 사채업자 박일현에게 뜯어낸 10억원. 그 돈만 있었으면 빚 갚고도 빌딩 한 채 더 세웠다. 하지만 천사 같은 루시아는 이 돈을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까무라 다케시의 보물은 일제 시대 피해자들에게, 박일현에게 뜯어낸 돈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했다. 솔직히 엄청 아깝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나에게는 루시아와 함께 어린 엘프들을 기르며, 아이들 동생을 만들어 주고픈 꿈이 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돈이 많이 필요하다. 원래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나? 사자성어로 다다익선(多多益善). 으음, 이렇게 된 거 로또 복권이라도 한번 해볼까? 당첨되면 한 방에 인생역전인데. “로또 복권이라…… 그거 굿 아이디어군.” 사실 로또 1등 당첨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일단 아무 번호나 찍은 다음, 춫엄할 때 마법으로 당첨 번호를 조작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마법이니 증거도 안 남는다. 하지만 로또 복권은 돈 없고 빽 없는 시민들의 희망. 실제로 부자들은 로또 복권을 거의 사지 않는다. 대부분 서민들이 구입한다. 재미로 사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걸기도 한다. 로또 복권이 아니면 영원히 인생 역전을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로또 복권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로또 복권은 불티나게 팔린다. 하지만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5천60분의 1. 서울 시민을 일렬로 세워놓고 공을 던졌을 때, 그 공에 자신이 맞을 확률과 비슷한 확률이다. 다시 말해 제로에 가까운 확률이다. 하지만 아무리 제로에 가까운 확률이라 해도 제로는 아니다. 어쨌든 공에 맞는 사람은 존재하고, 그 사람은 다른 서울시민이 낸 돈을 몽땅 쓸어간다. 현대 사회에서의 영웅이란 곧 돈이 많은 사람이다. 일확천금을 한 사람은 주위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며, 사람들은 그처럼 되고 싶어 한다. 로또 복권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오직 참가비 1천 원과 기적에 가까운 운뿐이다. 단돈 1천 원으로 일확천금을 꿈꿀 수 있다는 것도 나름대로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꿈의 끝은 항상 생돈 1천 원을 날리는 현실이다. 실제로 로또 복구너의 최대 수혜자는 정부와 국민은행, 로또 복권 판매처 등이다. 당첨이 돼야만 돈을 받을 수 있는 로또 복권 구매자와는 달리, 이들은 누가 복권에 당첨되는 돈을 번다.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기가 따로 없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길 기대하느니, 차라리 복권 살 돈 차근차근 모아 목돈 만들 생각하는 것이 낫다. 뭐, 이렇게 말해도 사람에게는 일확천금과 인생 역전의 욕망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한 로또 복권은 계속 잘 팔릴 것이다. 아무튼 로또 복권을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고 있는 시민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만약 내가 추첨을 조작한다면 그들의 피땀이 묻은 돈을 강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아무리 돈을 좋아한다지만, 그런 짓까지는 할 수 없지. “으음, 정ㅁ라로 어디 돈 나올 구멍 없나?” “이제부터 열심히 벌면 되잖아.” 웃으며 말하는 루시아.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돈 걱정 따윈 한순간에 날아간다. 루시아와 함께라면 단칸방에 이불 하나만 펴고 살아도 좋아. 루시아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옥탑방도 궁궐일 거야. “와아! 이제부터 우리 여기 사는 거예요, 오빠?” “크다아!” “이사는 언제 해요?” “…….” 생각해보고 단칸방은 좀 무리인 듯하다. 단칸방이라면 저것들과도 한 방에서 살아야 할 텐데, 그럼 동생은 언제 만든단 말인가? 으음, 방 두 칸으로 해서 한 칸에 쟤들 다 몰아넣고, 다른 한 칸에 나와 루시아의 신방을 차리면 되겠군. 그나저나 소리가 새어 나가면 어쩌지? 방음 장치라도 설치해야 하나? “무슨 생각해?” “응? 무슨 생각이라니?”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그, 그럴 리가! 나처럼 순진한 남자가 이상한 생각을 할 리 없잖아.” 루시아는 눈을 샐쭉하게 뜨며 나를 흘겨보았다. “흥! 변태!” “벼, 변태라니…….” 난 그저 루시아와 단칸방에서 이불 덮고 하는(?) 것을 상상했을 뿐인데. 이런 나의 마음도 모르고…… 흑~ 너무해 루시아. 내가 눈물을 훔치는데 지니가 다가와 보고를 했다. “내일 바로 이사할 계획입니다.” “가게 재개장은 언제 해요?” [1] "아직 내부 인테리어가 안 끝났는지라, 시간이 좀더 걸릴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뭐,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다른 층에는 뭐가 들어서나요?" 빌딩은 지하 1층과 지상 5층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중 지하 1층은 창고로, 지상 1차과 2층은 인형 가게 및 찻집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5층과 옥상은 우리가 주거 공간으로 활용한다. 결국 3층과 4층이 남게 된 된다. 이 두 개 층은 임대를 해서 임대료 수입을 얻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두개 층 임대 문제를 지니에 게 일임해 놓았다.(정확히는 가게에 대한 모든 것을 지니에게 일임해 놓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협상을 끝냈습니다. 두 개 층 모두 성공적으로 임대되었습니다." "정말요? 뭐가 들어서는데요?" 다른 두 개 층에 뭐가 들어서느냐에 따라서 건물의 이미지와 매출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1, 2층은 인형 가게인데, 3층은 직업소개소나 안마시술소라 생각해 봐라.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러면 부모들이 애들 데리고 인형 사러 오겠어? 술집도 좀 그렇다. 기왕이면 관련 업종이 입점하는 것이 보기도 좋고, 매출에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동복 가게처럼. "관련 업종입니다." "정말요?" 과연 사일런스 지니! 하긴, 안 하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는 지니가 이런 기본 중의 기본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무슨 가게가 입점하는데요?" "가게가 아닙니다." "예? 가게가 아니라면?" "유치원입니다." "예? 유치원이요?" "그렇습니다. 3,4층에 유치원이 들어서는 것으로 얘기 끝냈습니다" "으음, 유치원이라……." 생각해보니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1, 2층이 인형 가게고 3, 4층이 유치원이면 건물 전체가 아이들 을 위한 공간이 되는 셈이다. 매출 면에서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유치원이면 너무 시끄럽지 않을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각 층은 완벽하게 방음이 됩니다. 그리고 저녁떄에는 유치원도 문을 닫기 때문에 소음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을 놓으셔도 됩니다." "으음, 그렇군요, 뭐, 그렇다면 괜찮겠죠. 그런데 임대료는 어떻게 되는지……?" 그렇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건 돈이다. 빌딩 임대해 주는 데 임대료는 두둑하게 챙겨야 할 것 아 아닌가? ……만은 이 빌딩 입지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많이 받기는 힘들다. "임대료 역시 괜찮게 받기로 했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보증금은 일단 대출금 상환에 썼습니다." "예? 그럼 나중에 나간다고 하면 어떡해요?" "그 전까지 벌어서 마련하면 됩니다. 그래도 부족하면 또 대출받으면 그만이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 빌등의 소유주이시고, 이 나라는 부동산 담보 대출에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 놓으셔도 좋습니다." "으음,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 거겠죠. 그나저나 이사는 언제 해야 하나요?" "내일 바로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게 재개장 날짜는 일주일 후로 잡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준비할 것 이 많으니까요." "그렇군요." 가게를 이리저리 둘러본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살던 집은 당장 팔기보다는 전세를 줄 생각이다. 루시아는 머그컴을 두손으로 감싸며 소파에 앉았다. 머그컵 안에선 코코아가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것을 홀짝홀짝 마셧다. "내일이면 이 집과도 이별이네." "으응, 뭐 그렇지." 짐은 대충 싸놓은 상태다. 내일 날이 밝으면 전부 새 집으로 옮길 것이다. "이 집에 정 되게 많이 들었는데……." 루시아는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난 루시아의 그런 마음 십분 이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이 세계로 건너온 뒤 줄곧 이 집에서 살아왔다. 비록 24평의 좁은 집이지만, 이 안에 담긴 추억은 상상도 못할 만큼 많다. 이곳에서 참 많은일이 있었지. 루시아와 키스도 했고, 아이들과 놀기도 했고, 일루니아 여사님과 싸우기도 했고……. 나이트클럽에서 바람피운 것 때문에 루시아와 싸웠던 일이 생각난다. 만약 그때 라이가 아니었다면, 루시아는 정말로 집을 나갔을지도 모른다. 세뱃돈 안 뜯기려고 어린 엘프들과 실랑이 벌인 일도 기억난다. 크리스마스 때 선물 준 것도, 라이레얼 피해 다닌 일도, 영아 가 이곳에서 잠깐 지냈던 일도…… 나는 전부 기억한다.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한 날들이었다. 만약 내가 판타지세계에 가지 않았고, 그곳에서 이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행복한 삶은 없었 을 것이다. 난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이 집은 들고 갈 수 없지만, 추억은 전부 들고 가자. 그리고 새 집에서 계속해서 추억을 만들어 나가자." 아아~ 내가 생각해도 너무 멋진 말이다. 기름도 칠하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혀가 매끄럽게 잘 돌아간다. "너와 함께라면 어떠한 일도 두렵지 않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극복해낼 자신이 있어. 너는 나에게 있 어서 수호천사 같은 존재니까." 아아~ 이 대사도 감동이다. 이 정도 대사면 루시아도 분명 넘어오…… "느끼해 죽겠으니까 그만 좀 해." ……지않는군. 내 손을 뿌리치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루시아. 난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지니가 하면 잘 되던데. 왜 난 안되는 거지? 어째서 자꾸 저런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는 거야? 책에 보면 여자는 남자가 이런 낭만적인 말을 해주는 걸 좋아한다고 하던데. "으음, 세상일 쉬운 게 하나도 없구만." "헤헤~." 내가 한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내 뒤에 서있는 어린 엘프들. 라이, 루, 루비 모두 날 보며 웃고 있다. 라이는 루비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너와 함꼐라면 어떠한 일도 두렵지 않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극복해낼 자신이 있어. 너는 나에게 있 어서 수호천사 같은 존재니까" "정말?" "응,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나도." "츄우~." "츄우~."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입술을 내미는 라이와 루비. 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이것들이 감히 하늘같은 오빠를 놀리다니! 요즘 안 맞아서 몸이 근질근질하니? 간만에 뼈와 살을 분리 시켜줄까? 당장 손들어!" 울상을 지으며 순을 드는 라이와 루비. 난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루를 보며 말했다. "응? 넌 왜 가만히 있니?" "예? 전 아무 것도 안 했는데요." "넌 연대 책임이라는 말도 모르니? 동료의 죄는 곧 너의 죄. 그러니 어서 손들렴." "그,그러는게 어딨어요?" 발끈하며 대드는 루. 난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그럼 너의 죄를 하나씩 일러주지. 첫째, 라이와 루비가 날 놀릴때 말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것은 용기가 없다 하였다. 진정한 남자라면 불의를 보면 들고 일어서야 하는 법. 그러므로 그 죄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둘째는요?" "둘째는 감히 저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들이 날 놀릴 때 옆에서 웃고 있었다." "안 웃었어요!" "속으로 웃은 거 다 알아."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심안(心眼)으로 보았느니라." "말도 안되요!" "뭐라? 8클래스를 마스터한 마법사이자 오기조원 현상을 경험한 무림의 최강 고수 본좌의 말을 못 믿겠 다는 게냐? 네가 정녕 본좌의 일장을 받아보고 싶은게냐?" "쳇! 그럼 셋째는 뭐에요?" "셋째는 감히 이 형님 말씀하시는데 꼬박꼬박 토를 달았다는 거지" "그게 뭐에요!" "봐. 지금처럼 발끈해서 대들었단 말이지. 너의 죄는 국법으로 다스려도 모자랄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의금부에 잡아가기 전에 어서 손들렴." "쳇!쳇!쳇!" 볼을 떙땡하게 부풀리며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루. 그래봐야 지가 어쩌갯는가? 형님이 손들라면 손들어야지 나란히 벌을 서고 있는 어린 엘프들. 난 소파에 누워 담배르 입에 물었다. 으음, 주머니에 라이터가 없군. "불." 내가 말하자 라이가 후다닥 내 방으로 들어가더니 라이터를 가지고 와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후후~귀여운 것. 눈치가 제법 빨라졋군 "헤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라이는 좋아하며 몸을 비비 꼬았다. 그리고는 이내 내 다리를 주무르며 애교 를 떨었다. 벌 안서려고 별 짓 다하는군. "재떨이." 이번에는 루비가 후다닥 내 방으로 달려가서 재떨이를 들고 와 내 앞에 대령했다. 내다리를 주무르며 애교 떠는 엘프가 둘로 늘었다. "또 필요한 거 없어요, 형?" 혼자 벌을 서게 된 루는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모습이 하도 불쌍해 보여서 한마디 해줬다. "물" 그러자 루는 부엌으로 후다닥 달려가 머그컵에 물을 떠왔다. 난 그 컵을 받아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역시 내가 애들 하나는 잘 키웠다니까." 뻐금뻐금. 으음, 오늘따라 담배 맛이 참 좋군. 하지만 거실에서 담배 피우다가, 그것도 애들 앞에서 피우다가 루시아한테 걸리면 그날로 죽음이다. 그래서 난 적당히 피우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껐다. "전부 원위치 시키렴, 그리고 라이는 베란다 창문 좀 열고." 아이들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난 일을 끝마친 아이들을 내 앞으로 불러 모았다. 귀엽고 깜찍한 어린 엘프 셋. 그야말로 초절정 귀염둥이라는 말이 아깝지가 않다. 하나같이 통통하고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다.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슴이 막막 벅차오른다. 만지고 싶고, 끌어안고 싶고, 뽀뽀해주고 싶다. 나는 손을 뻗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나의 머리 쓰다듬기 스킬은 굉장한 위력을 자랑한다. 그 증거로 지금 어린 엘프들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지 않는가? 머리를 쓰다듬던 나는 아이들의 귀를 만져보았다 .둥그둥글하고 예쁜 귀. 보통사람의 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얘들은 엘프인만큼 원래는 길고 뾰족한 귀다. 지금 이 귀 는 마법으로 바꿔 놓은거다. 엘프라는 종족은 외형적으로 인간과 매우 흡사하다. 귀가 길고 뾰족하고, 외모가 심하게 예쁘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간과 똑같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 중에 예븐 여성 이나 잘생긴 남성을 보면 '엘프처럼 생겼다' 고 하는 것이다(물론 판타지 세계에서만). 참고로 지니나 루시아 정도면 엘프처럼 생겼다는 찬사를 듣는 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흠흠, 뭐 나도 엘프처럼 생겻……다고 말하면 엘프한테 욕이 되려나?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귀를 바꾸거나 가리면 엘프라는 점을 알아차리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엘프들은 인간 세상을 여행할 때 마법으로 귀를 인간의 귀처럼 바꾸거나 헤어밴드를 사용해 감추기도 한다. 원래 인간이란 족속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법이니. 만약 이 애들 정체가 엘프라는 것이 밝혀지고, 엘프의 수명이 인간의 10배 이상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잡아다가 해부하려 들지도 모른다. 인간의 수명을 늘릴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라는 명분 하에 각종 실험을 하겠지. 이런 명분이라면 모든 것이 용납된다. 인간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데, 무슨 일이 용납되지 않겠는가? 전체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쯤은 감수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 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엘프 생체 실험은 동물 생체 실험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으음, 나도 인간이 긴 하지만 가끔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 회의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해 FBI나 CIA가 엘프를 잡아다가 분해하든 말든 나랑 별 상관없다. 하지만 그 엘프가 나와 관 련이 있는 존재라면, 그들은 죽었다고 복창하는게 좋을 거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미국을 갈아엎어서라도 복수 하고 말리라. 난 내 주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특히 루시아와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다. 아무튼 귀 모양을 바꿔서 아이들을 인간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옮긴이 : ErwinRommel) [2]----------------------------------- [1] 뒷부분 난 내 주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특히 루시아와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다. 아무튼 귀 모양을 바꿔서 아이들을 인간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 그런데 이 초절정 귀여움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귀모양을 바꿧다 한들 이 초절정 귀여움 떄문에 어딜 가든 눈에 띈다. 게다가 얘들은 인종으로 구분하면 백인종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단군 ㅣ래 단일민족이고, 국민의 대부분이 몽골계 황인종이다. 이런 나라에 초절정 귀여움을 지닌 백인 아이는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으음, 그나저나 대체 얘들을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주위 사람들이 물어보면 그냥 동유럽계라고 대충 넘긴다. 하지만 동유럽계 사람들이 이렇게 생기지는 않았다. 얘들은 엘프니까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인간(루시아, 일루니아 여사님, 지니)도 구분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그냥 백인종이라고 얼버무릴 뿐, 딱히 어느 계통이라 할 수가 없다. 슬라브, 게르만, 라틴, 앵글로색슨 등........ 어느쪾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이들은 외계인 아니던가?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다른세계에서 온 사람들이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외계인 맞다. 만약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 세계 사람들이 알게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생가만 해도 끔찍하다. 보나마나 군대를 끌고 쳐들어 갈 궁리부터 할 거다. 미국이 앞장서겠지. 이유에 뭐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원채취, 영토 확장 등등 대략 이런 이유 떄문이겠지만, 막상 보면 헛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확산과 독재정권 타도, 그리고 예상되는 적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공격을 선택하였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대량살상무기를 많이 보유하고있습니다. 이번엔 진짭니다. 뒤져서 안나오면 제손에 장을 지지.....는건 좀 그렇겟죠? 이라크떄도 뒤졌는데 안 나왔으니. 그래도 우리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확산시켰습니다. 비록 멀쩡한 병원이나 주택가에 폭탄을 퍼부어 죄 없는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긴 했지만, 뭐 전쟁이란게 희생이 따르는 법이니..... 지들 운 없어서 죽은걸 누굴 탓하겠습니까? 흠흠, 아무튼 판타지 세계에 있는 모든 귀족과 왕족들에게 24시간 내에 판타지 세계를 떠날 것을 경고합니다. 만약 이 경고에 따르지 않는다면,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정말 '어쩔수없이' 선제공격에 나서겠습니다. 이라크도 석유 떄문에 폭격을 맞았으니, 판타지 세계라고 그 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정말 다행인 것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는 거다. 차원계를 이동하는 이동 마법은 오직 9클래스 마스터만이 쓸 수 있으니. 그런데 판타지 세계랑 이쪽세계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일단 군대끼리 맞붙는다면 이족 세계가 이길것이다. 판타지 세계의 군대라고 해봐야 총칼로 무장하고 말타고 싸우는 것이니. 여기에 마법사들이 가세한다 해도 상대가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웬만한 마법사라 하더라도 전차 한대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마법사 숫자가 워낙 적은데다가, 전쟁에 투입되어서 위력을 발휘할수 있을 만한 마법사는 극소수다. 아무리 비교를 해봐도 군대끼리의 대결을 이쪽 세계의 승리이다. 하지만 전쟁이란 군대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군대는 어디까지나 전쟁을 수행하는 존재일 뿐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정치인들이다. 군부는 절대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없다. 설사 다 이겨가는 전투라도 정치인들이 종전 선언을 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니 머리가 있다면 직접적으로 군대를 상대하려 들지말고, 정치인들을 노려야 할것이다. 마법사들이 이동 마법이나 정신마법등을 사용해 정치인 암살, 납치, 협박 등에 나선다면 상황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어느 세계나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쪽세계는 핵이 있단 말이지. 버튼 몇 개만 누르면 판타지 세계 자체를 멸망시켜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는 드래곤들이 있다. 으음, 역시 변수는 드래곤이군. 사실 드래곤이 끼면 게임이 되지 않는다. 핵을 날리면 어쩌냐고? 땅에 떨어지기전에 워프시켜 버리면 그만이다. 아이리스 왕국으로 날아오는 핵미사일을 워싱턴DC상공으로 워프시켜 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쏜 핵미사일에 자기가 얻어맞는 것도 볼만하겠군. "......" 근데 내가 왜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다시말하지만 차원 이동 마법은 오직 9클래스 마스터만이 쓸 수 있고, 9클래스 마스터는 드래곤들뿐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두 세계가 전쟁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아이들을 만지작 거렸다. 라이의 귀를 만지기도 하고, 루비의 볼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뭐 가끔은 루도 좀 만져주었다. 루가 단지 남자라는 이유 떄문에 나의 애정을 못 받고 있기는 하지만, 초절정 귀염두이 엘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크면 초절정 미청년이 될것이다. "........." 설마 나보다 잘 생겨지는 것은 아니겠지? 난 라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허리까지 오는 길고 부드러운 회색 머리카락. 마치 고양이털처럼 뽀송보송하고 폭신폭신하다. 여기에 은은한 샴푸향까지 난다. 우리 라이는 대체 모발 관리를 어떻게 하는걸까? 어떻게 모발관리를 하기에 이렇게 뽀송뽀송하고 폭신폭신할까? 참고로 여자애들 씻겨주는 것은 루시아의 일이기 떄문에, 라이의 모발 관리 역시 루시아가 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거싱다. "내일 이사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라이야?" "그럼 이집은 어떻게 되는거에요?"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살겠지." "우웅~" "왜 그래?" "라이는 이 집이 좋은데......" 라이 역시 서운한 모양이다. 이집에서 꽤 오래 살았으니 그럴만도 하지. "더 크고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갈 거야. 사실 이 집은 너무 좁잖아. 새 집에서도 오빠가 좋은 추억을 잔뜩 만들어 줄게" "헤헤~ 정말요?" "응, 물론이지." 난 라이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었다. "아앗! 라이만 뽀뽀해주고. 나빠요, 오빠. 루비한테도 해주세요." 볼을 부풀리며 나에게 매달리는 루비. 난 라이를 내려놓고, 루비를 무릎 위에 앉혔다. 루비 머리카락도 길고 부드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게다가 약간 짙은 빨간색이 참 잘 어울린다. 하지만 길이 면에서나 감촉 면에서나 라이의 머리카락에는 조금 못 미친다. 으음, 이 얘기를 루비한테 하면 울음을 터트리겠지? 그나저나 루와 루비의 할머니인 루엔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저번에 '25시 찜질타운'에서 라이레얼의 아버지인 갈리온드와 함께 있는 것을 본 게 마지막이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설마 아직도 그 찜질방에 있는 건 아니겠지? 루엔이 없어도 루와 루비는 잘 지내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루시아와 내가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고 있지 않는가? 내가 루비의 볼에 뽀뽀를 해주려고 하는데, 루비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떄문에 내 입술이 루비의 입술에 닿았다. 쪽~! 헉! 방금 무슨 일이! 내가 놀라 정신을 못 차리는 것과는 반대로 루비는 몸을 배배 꼬며 되게 좋아하고 있었다. "헤헤~ 오빠가 입술에 뽀뽀해줬다. 아이~ 부끄러. 부끄부끄~." 잔뜩 빨개진 볼을 두 손으로 붙잡은채 도리도리하는 루비. 아주 좋아 죽는다, 죽어. 흑~순결한(?) 나의 입술을 루비에게 뺴앗기다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얘가 왜 이렇게 앵겨오는 거냐? 루비는 내 품을 파고들며 조금이라도 더 찰싹 달라붙기 위해 노력했다. "......." 얘 왜이래? 라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루비를 잡아당겼다. "그만 떨어져. 오빠가 싫어하잖아." "싫어! 루비는 계속 오빠랑 같이 있을 거야!" 루비는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안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노려 보았다. "오빠는 나빠요! 라이는 볼에 뽀뽀해줬으면서 루비는 입술에 뽀뽀해주고! 그러는게 어딨어요?" "아, 저기 그건........." "오빠는 루비를 더 좋아하니까, 루비 입술에 뽀뽀해준 거야. 그쵸, 오빠?" 루비의 말에 라이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리며 루비를 뗴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썻다. "우에에엥~ 오빠는 라이를 더 좋아해! 라이를 더 좋아한단 말이야!" 라이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루비는 견디지 못하고 나에게서 떨어졌다. "아야! 라이 너 무슨 짓이야?" "오빠는 라이 꺼야! 라이의 오빠한테서 떨어져!" "오빠가 왜 라이꺼야? 오빠는 루비 꺼야! 오빠는 루비를 훨씬 더 좋아해!" 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둘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싸움이 시작됬다. 툭탁툭탁! 고사리같은 손으로 치고받는 라이와 루비. 난 깜짝 놀라 둘을 떨어트려 놓았다. "우에에엥~." "으아아앙~."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우는 두 엘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둘을 야단쳤다. "너희들 뭐하는 짓이야? 어떻게 친구끼리 주먹을 휘두를 수 있니? 게다가 너희들은 마음의 벗이잖아. 난 애니메이션 50화까지 보는 동 안 앤과 다이아나가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못 봤어. 그런데 니들은 뭐야? 아무리 오빠가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싸울수있 어? 응? 말해봐!" 잘못했다고 빌기는 커녕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리는 두 엘프. 나의 토닥토닥 스킬과 머리 쓰다듬기 스킬이면 얘들 울음 그치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난 일부러 그 스킬을 쓰지 않았다. 뭐가 예쁘다고 스킬까지 써주며 달래주겠는가? "둘다 뚝 그치지 못해! 뭘 잘 했다고 울어? 이 오빠가 살다살다 니들처럼 나쁜 엘프들은 처음 봤어. 친구끼리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도 몰라? 니들이 그러고도 친구라고 할 수 있겠어? 응? 울지만 말고 대답해 봐. 빨리!" "우에에엥~!" "우아아앙~!" 내가 달래주지 않자 라이와 루비는 더욱 크게 울어댔다. "빨리 나와 봐요, 누나." "무슨 일이야?" 루의 손에 이끌려 방문을 열고 나오는 루시아. 어쩐지 루가 안 보인다 했더니 루시아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나 보군. 루시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는 라이와 루비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또 니가 울렸어?" 난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아니야, 루시아. 난 결백해.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난 손짓 발짓 다 해가며 루시아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라이와 루비가 싸웟다고? 정말?" 루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루시아가 보기에 라이와 루비는 언니 말 잘 듣는 착한 엘프가 아니겠는가? "애들 이렇게 우는데 빨리 달래줘야 하는거 아니야?" "이번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 해줬더니 애들 버릇만 나빠진 것 같아. 가끔은 따끔하게 혼내줄 필요가 있어." "그래도 애들을 야단치는것은 좀....." 루시아는 너무 애들을 감싸고 돈다. 애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런 식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교육에 악영향을 끼칠수 있다.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의 치마를 붙잡고 매달렸다. "우엥~ 우엥~ 오빠가 루비 입술에만 뽀뽀해주고.... 오빠는 막막 라이껀데......" 루시아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오빠가 좋아?" 끄덕끄덕.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두 엘프. 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굴 탓하겠냐? 다 잘난 내 잘못이지.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어린엘프들의 시기와 질투. 이제는 그 반목의 세워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텐데. 루시아는 ㅜㄹ고 있는 아이들을 그대로 놔둘 수 없었는지 껴안고 달래줬다. 하지만 아이들은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어떻게 좀 해봐." 결국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루시아. 난 어쩔수 없이 머리쓰다듬기 스킬을 사용했다. 머리 쓰다듬기 스킬은 우는 애들을 달랠 때 쓰는 스킬이 아니다. 우는 애들 달래는 데는 뭐니뭐니 해도 토닥토닥 스킬이 직빵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머리 쓰다듬기 스킬이 우는 애들이 달래는데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토닥토닥 스킬에 비해 효과가 떨어질 뿐이다. 시간이 흐르자 스킬발동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조금씩 울음을 그치고 있었다. 라이와 루비가 울음을 멈추가 루시아는 둘을 앉혀놓고 물었다. "오빠 때문에 둘이 싸운 거야?" 끄덕끄덕. 두 엘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아는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노려 보았다. 찌릿! 헉! 저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경멸어린 눈빛' 스킬이 아닌가? "왜, 왜그래 루시아? 혹시 나도 모르게 무언가 잘못한 거라면 사과할게. 그러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루시아가 그런눈으로 히로를 보면, 히로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진답니다." "대체 애들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애들이 너 떄문에 싸운거야?" "그, 그건......" "됐어, 말하지마, 니변명같은 건 듣고싶지 않아. 잘못을 했으면 그냥 인정하면 될 텐데, 왜 자꾸 변명을 늘어놓는거야? 너의 그런태도 정말 마음에 안들어. 흥!" "........" 이번일은 정말 결백하다. 아니, 내가 좋다고 지들끼리 싸운걸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루시아 역시 나의 억울함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나에 대한 질투 떄문 일것이다. 아이들이 아빠를 더 좋아하면, 엄마는 서운한 마음이 드는 법. 게다가 아이들이 나를 좀 좋아해야 말이지. 음음, 루시아의 심점 충분히 이해한다. "훌쩍~ 오빠가 라이는 볼에다만 뽀뽀해줬는데, 루비는 막막 입수에 뽀뽀해주고.....훌쩍~ 라이가 오빠랑 더 오래 있었는데....... 오빠는 막막 라이껀데..... 오빠 나빠요오..... 우엥~ 우엥~." "훌쩍~ 오빠가 루비 웃는 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그래는데.... 훌쩍~ 오빠는 라이만 막막 좋아하고.... 루비는 오빠가 막막 좋은데... 으앙~ 으앙~." 라이와 루비의 말을 들으니 내가 죽일 ㅗㄴ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조금만 덜 잘났어도 아이들 마음에 이런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텐데. 역시 애들 키우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애가 하나일 경우는 그래도 좀 낫다. 외자식이라면, 그 아이에게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애가 둘 이상이면 문제가 커진다. 둘다 골고루 사랑해야하고, 싸우지않게 보살펴 줘야한다. 라이 하나만 키울떄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루엔에게서 루와 루비를 떠맡은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물론 루시아와 나는 세아이를 골고루 사랑한다. 열손까락 물어서 안아픈손가락이 어딨겠는가? 하지만 받아들이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라이는 내가 루비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루비는 내가 라이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 떄문에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심지어는 싸우기까지 한다. 귀엽고 착한 라이와 루비가 싸움이라니! 아아~이래서는 안된다. 난 두엘프를 살포시 껴안아 주었다. "이 오빠는 라이와 루비를 똑같이 좋아한단다. 누구를 더 좋아 하지도, 누구를 더 싫어하지도 않아." "그치만,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확실하게 말해줬으면 해요." "맞아요." "그럼 라이와 루비는 오빠와 루시아 언니중 누가 더 좋아?" "......" "......" 예상대로 대답을 못하는 두 엘프.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상황에서 이 눈치없는것들이 '오빠가 더 좋아요오' 등등의 대사를 날렸다면, 루시아는 완전 삐졋을 것이다. 그럼 난 루시아의 화를 풀어주기위해 별짓을 했겠지. 아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오빠와 언니 둘다 좋지?" 끄덕끄덕 "이 오빠의 마음도 똑같단다. 이 오빠는 너희들 모두를 구별없이 사랑해" "정말요? 그럼 저도 똑같이 사랑해요?" 갑자기 끼어든 루. 난 루를 흘겨보며 말했다. "열 손가락 꺠물다보면 좀 덜 아픈 손가락이 이기 마련이지." "쳇! 저도 어차피 형보다는 누나가 훨씬 좋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루시아에게 찰싹 달라붙는 루. (옮긴이 : ErwinRommel) [3]---------------------------------------------------------------------------------- [2] 뒷부분 그렇게 말하면서 루시아에게 찰싹 달라붙는 루. ------------------------------------------------------------------------------------- "너 이따 따로 시간 내서 형이랑 면담 좀 하자꾸나." 난 협박성 멘트를 날린 다음 다시 라이와 루비를 보았다. "아무튼 이 오빠는 라이와 루비 둘 다 막막 사랑해. 그래서 라이와 루비가 서로 싸우면 이 오빠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단다." "정말요?" "응. 지금도 요기가 요렇게 요렇게 집중적으로 막막 아포∼" "……." "……." "흠흠, 우무튼 그렇단다. 라이와 루비는 오빠가 아파하는게 좋아?" 도리도리. "오빠가 아파하는게 싫지?" 끄덕끄덕. "오빠가 행복했으면 좋겠지?" 끄덕끄덕. "이 오빠는 루이와 루비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행복해. 그러니까 앞으로는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낼거지?" 끄덕끄덕. "그럼 어서 화해해." 라이와 루비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쭈뼛쭈뼛거렸다.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 어색한가 보다. 잠시 후, 라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미,미안해." 그러자 루비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아니야, 라이야. 루비가 미안해. 루비가 잘못했어." "루비야……." "라이야……." 두 엘프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오랜 반목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서로를 이해하는 화해와 용서의 눈물이었다. 아아∼ 이 감동적인 장면을 어찌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있겠는가? 난 재빨리 디카로 그 장면을 찍었다. "그나저나 라이가 미안하면, '라이미안'인가? 그럼 라이가 고마우면, '라이땡쓰'인가?" "……." "……." "……." "……." 휘이이잉∼. 창문도 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와 동시에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이 나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어린 엘프들은 오들오들 떨며 말했다. "집에 보일러 하나 들여놔야겠어." "응응. 오빠 때문에 오뉴월에도 추워." "형이 우리를 얼려 죽이려고 작정했나 봐." "라이는 오빠가 아이스 스톰(Ice Storm)마법을 쓴 줄 알았어." "루비 생각에는 아이스 스톰보다 오빠의 80년대 개그가 더 추운 것 같아." "난 벌써 닭살까지 돋았어." "……." 이것들이 진짜! 루시아도 추운지 맨살을 문지르며 말했다. "썰렁한 농담 좀 그만해! 애들 얼려 죽일 일 있어?" "……." 그 정도로 썰렁했나? "미,미안해. 특히 라이한테 미안해. 줄여서 '라이미안'해."(학습성 뛰어난 히로ㅋ - 테인티네스 생각 ㅋ) "그만 좀 하라니까!" "추워요, 언니" "루비는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요." "전 벌써 동상 걸린 것 같아요." 아이들은 서로를 껴안은 채 추위를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머리카락에는 어느새 서리가 내려앉았다. 음음, 춥긴 추웠나 보군. "오빠만 있으면 더운 여름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응응. 너무 시원해서 얼어 죽을 것 같아." "난 이제 말하기도 힘들어. 아까부터 자꾸 졸려." "안돼. 지금 잠들면 얼어 죽을지도 몰라." "맞아. 힘들어도 참고 견뎌야 돼." "안돼.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 이젠 히말라야 등반 때나 쓰일 법한 대사들까지 나온다. "미안해. 얘들아. 난 단지……." 내가 사과하려고 입을 여는데, 루시아가 가로막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마." "아니, 난 그냥……." "됐어. 한마디도 하지 마." "……."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루시아의 싸늘한 눈빛이 경멸어린 눈빛으로 바뀔까봐 두려워 입을 꼭 다물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얘들아. 너희들은 절대 오빠가 저러는 거 보고 배우면 안 돼. 썰렁한 농담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는 건 나쁜 엘프나 하는 짓이야. 알았지?" "네에∼" 입까지 얼어있기 때문인지 아이들의 목소리는 모기만 했다. 루시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을 걸어 잠가 나의 출입을 원천봉쇄했다. "난 그냥 웃자고 한건데…… 다들 너무해…… 흑∼."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으면 하지 말 걸. 그나저나 거실이 좀 춥긴 하군. 어라? 천장에 고드름까지 생겼네. 홀로 남은 나는 겨울에나 쓸 법한 오리털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런데 내 개그가 그렇게 썰렁했나? 시간은 흘러 어느새 밤이 되었다. 오늘 루는 루시아방에서 잔다. 루시아가 데리고 자고 싶다고 해서 데려간 것이다. 뭐, 루는 바닥에 따로 이불을 깔고 자니 별 문제없겠지?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영원히 재워줄 생각이다. 홀로 침대에 누운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일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 하루라도 빨리 이 좁은 집을 떠나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싶었는데, 막상 떠날 생각을 하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 집에서 참 재밌는 일이 많았지. 난 천장을 바라보며 이 집 곳곳에 스며든 추억들을 떠올렸다. "……." 으음, 내가 왜 이렇게 감상적이 되는 거지? 나답지 않군. 그냥 잠이나 자자. 난 눈을 감고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뒤척뒤척. "헉! 잠이 안온다." 잠 올 때 안 자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잠 안 올 때 자는 것도 힘든 일이다.(공감중 - 테인티네스 생각 ㅋ) 나가서 물이나 한잔 마시고 올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드디어 루시아가 나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 그래서 애들이 다 잠든 이 야심한 시각에 내 방으로 들어오려는 건가? 루를 자기 방에 재우겠다고 한 것도 이 일을 염두해 둔 거였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 긴 뭐가 안 돼? 기회를 놓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게다가 난 루시아를 옆에 두고 몇 년 동안 바라만 봐야 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같이 살면서 참고 참아야만 하는 현실. 이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그래. 이것도 어찌 보면 성고문의 일종이다. 무엇보다 나는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이 아니던가? 한때는 끓어오르는 혈기를 참지 못해 바람을 피기도 했다. 그러다가 루시아한테 걸려서 이혼(?)당할 뻔 했지. 아무튼 난 현재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다. (뭐가? - 테인티네스 생각ㅎ) 만약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내가 계속해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래. 난 지금 욕구불만이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그런데 루시아가 이렇게 몸소 내 침소를 침범하다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음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내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생각들은 그저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루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빠아∼" "혀엉∼" 방 안으로 우르를 몰려들어오는 어린 엘프들. 내가 말릴 겨를도 없이 침대를 향해 점프한다. "헉! 안 돼!" 소리쳐보지만, 이미 늦었다. 퍼억! 불이 꺼진 방 안에 보이는 게 뭐가 있겠는가? 아이들은 나의 허리와 다리를 온몸으로 사정없이 깔아뭉겠다. "크억! 이건 뼛속까지 시리다!" 루시아가 불을 켰을 때, 난 이미 반죽음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산 분배에 관한 유언장이라도 작성해 둘 걸. "괜찮아?" 루시아의 물음 난 죽을 것 같이 아팠지만 루시아를 걱정시킬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목숨은 붙어있는 것 같아." 파자마를 입은 아이들은 방금 자신들이 살인을 저지를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루시아 역시 파자마 차림이었다. 약간 큰 연녹색 파자마가 너무 잘 어울린다. 아아∼ 아름다워. 루시아는 뭘 입어도 너무 아름답다. 파자마 차림의 루시아는 뭔지 모를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약간은 무방비 적이고, 약간은 개방적인 느낌. 여름용 파자마인지라 면소재가 굉장히 얇다. 상의는 반팔, 하의는 칠부바지. 덕분에 새하얀 팔과 가느다란 발목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은 여름. 게다가 요즘 열대야 현상으로 매우매우 덥다. 그래서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이 이렇게 얇은 잠옷을 입고 있는 거고. 그렇다면 잠옷 속에는 속옷만 입고 있겠지? "……." 헉! 내가 무슨 생각을? 사랑하는 그녀를 앞에 두고 이런 이상한 생각이나 하다니! 아아∼ 내 자신이 싫어진다. 내가 스스로를 탓하는 사이 라이와 루비는 내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라이, 루, 루비 모두 루시아와 똑같은 형태의 잠옷을 입고 있다. 이는 루시아가 세트로 구매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나는 잠옷 같은 거 없다. 그냥 반팔에 반바지 입고 잔다. "……." 으음, 나도 세트로 맞출 걸 그랬나? 라이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부비 비볐다 "오빠∼오빠∼" "응? 왜 그러니, 라이야?" "그냥 한번 불러봤어요. 에헤헤∼"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천진난만하다. 난 라이를 꼬옥 껴안아 주었다. 아아∼뽀송뽀송해. 끌어안고 자면 굉장히 잠이 잘 올 것 같다. 라이와 루비는 아까 싸운 일을 잊은 듯 사이좋은 모습이었다.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것 아니겠나? ……라기보다는 싸웠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은 게 아닐까? 라이와 루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얘들은 평균 기억력 3초를 자랑하는 단순한 엘프들이니. "그런데 이 야심한 시각에 내 방에는 어쩐 일이야?" 난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루시아에게 물었다. "애들이 잠이 안 온다고 해서. 나도 잠이 안 오고." "잠이 안 와?" "응, 내일이면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서." "그래?" 난 재빨리 라이를 떼어놓고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럼 우리 커피나 한 잔 할까? 내가 타줄게." "그럴까?" "응응." 난 루시아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런 우리를 놓칠세라 쪼르르 따라붙는 어린 엘프들. "니들은 안 졸리니?" "예. 라이는 아까 막막 자서 한 개도 안 졸려요." "루비도 한 개도 안 졸려요." "낮에 너무 많이 잤나 봐요." "……." 얘들 어떻게 재울 방법 없나? 난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단체로 부엌으로 향한 우리들. 나는 가스불을 켜고 물을 끓였다. 저것들만 없었어도 루시아와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사실 데이트 장소로 집도 나쁘지 않다. 부엌에서 커피를 끓여 마신 다음, 베란다에서 분위기를 잡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물 끓어." "응?" "물 끓는다고." "아, 아!" 루시아의 말대로 물은 펄펄 끓고 있었다. 난 급히 가스불을 껐다. "요즘 왜 그래?" "응? 내가 뭘?" "만날 멍하니 있잫아. 사람이 말해도 못 알아듣고." "그,그게…… 아! 이사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뒤숭숭해서, 신경 쓰지 마." 물론 이사 문제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욕구불만 때문이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아∼ 진짜 미칠 것 같다. 이러다가 나도 모르게 짐승(?)으로 폴리모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난 끓인 물을 잔에 따랐다. 그리고 커피를 탔다. 루시아는 블랙으로, 나는 설탕과 프림을 듬뿍 넣은 다방 커피로. "자, 마셔." "고마워." 루시아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는 순간,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의 정체는 다름 아닌 어린 엘프들. 어린 엘프들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보았다. 뭔가 엄청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눈빛. "응? 니들 왜 그러니? 어째서 그런 눈빛으로 오빠를 바라보고 있는 거니?" 내가 묻자 어린 엘프들은 기다렸다는 대답했다. "우리도 커피 마시고 싶어요오∼." "……."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시겠군. 난 차분한 어조로 아이들을 달랬다. "니들이 무슨 커피니? 나이를 생각하렴." 그러자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자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이는 700살도 넘었어요." "루비는 60살도 넘었어요." "저는 루비보다 5살 어려요." "……." 나이로는 안 되겠군. "커피에는 카페인이라는 성분이 들어있는데, 이 성분은 어린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단다. 그러니까 커피는 어른들만 마시는 거고, 아이들인 너희들은 마시면 안 되는 거야. 그냥 냉장고에서 우유나 꺼내 마시렴." "그렇게 따지자면 콜라를 비롯한 탄산음료에도 카페인이 잔뜩 들어있어요. 우리가 이제까지 섭취한 카페인양은 어마어마해요. 하지만 아무 이상 없잖아요. 그러니까 커피 마셔도 괜찮아요." 나름대로 논리 정연한 주장을 펼치는 라이.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 가지고…… 이제부터 뉴스를 못 보게 하던가 해야지. "한 잔 정도라면 상관없을 거야." "뭐, 니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루시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난 커피잔 세 개를 더 꺼냈다. 다행히 끓인 물이 많이 남았기에 몇 잔 더 타는 데는 문제없었다. 애들한테 블랙은 무리겠지? 난 아이들 입맛에 맞도록 설탕을 조절했다. 약간 단맛이 나도록. "하늘과 같은 오빠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시려무나." "헤헤∼." 아이들은 좋아하며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어른이 된 기분이야." "응응. 그럼 루비는 예쁜 숙녀 할래." "그럼 난 신사." "……."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별 짓 다한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으며 커피를 마셨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마셔야 해. 알았지?" 작은 것 하나까지도 아이들을 챙겨주는 루시아. 루시아의 이런 모습은 마치 유치원 선생님 같다. 아아∼나도 좀 챙겨줬으면……. "우와!이거 되게 맛있다." 감탄하며 홀짝홀짝 마시는 어린 엘프들. 밤에 커피 마시면 잠 못 자는데…… 라지만, 어차피 지금 자기는 글렀으니 상관없으려나? 난 냉장고에 기대어 커피를 마셨다. 그나저나 더운 여름밤에 뜨거운 커피 마시려니 좀 그렇군. 이럴 줄 알았으면 냉커피로 할 걸 그랬나? 아무튼 야밤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니, 뭔가 운치 있어 보인다. "한 잔 더 주세요오∼." "……." 저것들만 빼면 진짜 운치 있을 것 같다. "니들 진짜 안 자니? 웬만하면 좀 들어가서 자지? 응?" 도리도리. 고개를 세차게 젓는 어린 엘프들. 들어가서 잘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듯하다. 난 한숨을 내쉬며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루시아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이 집과도 이별이네." "서운해?" "뭐, 그렇지. 그래도 새 집 둘러보니까 좋긴 하더라. 넓기도 하고." "우리 그 집에서……." 난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루시아는 앉아있고, 나는 그 옆에 서 있다. 루시아가 입고 있는 것은 헐렁한 잠옷. 게다가 맨 위에 단추가 풀려있다. 이 각도에서 보니 속이 살짝 들여다보인다. 새하얀 살결과 가슴. 그리고 그 가슴을 감싸고 있는 하얀색 브래지어……. 꿀꺽. 눈이 어질어질하고, 정신이 몽롱하다. "그 집에서 뭐?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아, 아니. 그 집에서 더 행복하게 살자고." 난 슬쩍 루시아 뒤쪽으로 이동했다. 좀 더 잘 보이는 각도를 찾기 위함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나의 행동은 이성이 아닌 본능에 가까웠다. 크,크다. 쿵쾅쿵쾅!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갑자기 늘어난 혈액 공급을 견디지 못한 혈관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혈관이 터지기라도 하면 뇌졸중에 걸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변태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아아∼ 내 자신이 싫어진다.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헉!누, 누구?" 고개를 돌려보니 일루니아 여사님이 서있었다. "노,놀랐잖아요!" 일루니아 여사님이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말을 거는 바람에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긴, 루시아의 가슴을 훔쳐보고 있다가 걸렸으니 놀랄 만도 하죠." "헉!" 딱 걸렸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말에 루시아는 벌어진 옷깃을 손으로 여미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 정말……." "아,아니야 루시아. 나, 난 결백해. 이, 이건 모함이야. 너, 너도 알잖아. 이, 이 아줌마가 원래 생사람 잡는 게 주특기인 거." "그런데 왜 그렇게 말을 더듬어?" "으,응? 내,내가 언제 말을 더듬었다고…… 아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해 보려 했지만, 루시아의 눈빛은 점점 싸늘해 지기만 했다. 게다가 옆에서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삐식삐식 웃고 있다. 아아∼인간 아이언스 히로…… 또 다시 핀치에 몰렸구나. "히로님도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일루니아 여사님을 따라 등장한 인디. "응? 너도 안 잤냐?" "내일 이사 간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 와서요." "잠도 안 오는데 커피나 한잔 마실래요, 인디님?" "예, 일루니아님." 이닏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를 보았다. "뭐하고 계세요?" "예?" "커피 안 타세요?" 뭐라? 나보고 커피를 타라고? "아니, 이 아줌마가 지금 누구보고 커피를 타라는 거야? 사람이 가만히 있으니까 다방 레지로 보이나? 정 그러면 1시간짜리 티켓이라도 끊고 그런 말을 하던가!" "그럼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루시아 가슴을 훔쳐보던 일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어 볼까요?" (옮긴이 : TeinTineS 네이버 카페명 테인네스) [4]---------------------------------------------------------------------------------- [3] 뒷부분 "그럼 아이언스 공작님꼐서 루시아 가슴을 훔쳐보던 일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눠 볼까요?" ------------------------------------------------------------------------------------- "블랙 맞죠? 인디 너도 블랙이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난 재빨리 주전자에 물을 받아 가스렌지 위에 올렸다. 아아~ 인간 아이언스 히로..... 많이 비굴해졌다.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 역시 세트로 맞춘 여름용 파자마를 입고 있다. 머리를 묶고 무테안경을 쓴 일루니아 여사님은 도저히 30대초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많아봐야 20대 후반정도? 그나저나 잠옷 입은 모습을 보니 또 색다르군. 깐깐해 보이는 이미지야 여전하지만. 인디 녀석이야 뭐..... 굉장히 요염해 보인다. 아아~ 어쨰서 자꾸 인디한테 시선이 빼앗기는 걸까? 이러면 안 되는데........ 맞아. 이러면 안 돼. 영아가 보면 나와 인디를 연결시키는 야오이소설을 쓸지도 몰라. 그리고 그걸 보란 듯이 출판할지도 몰라. 그럼 나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된다. 이제까지 쌓아온 나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러면 안 된다. 게다가 나한테는 루시아가 있지 않은가? 비록 그림의 떡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이러는 것도 욕구불만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안 자고 여기서 뭐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타난 라이레얼. 많이 가렵나 보다. 그러니 평소에 자주 좀 감지. 요즘 너무 폐인생활 하는 것 아닌지 걱정된다. 라이레얼의 등에는 카르가 업혀 있었다. 두 팔은 라이레얼의 목을 감고 있고, 다리는 허리를 감고있다. 매미가 나무에 달라 붙어있는 모습이 연상될 만큼 찰싹 달라 붙어있다. 은구슬 같은 은색 눈동자는 수시로 회전하며 주위를 감시했다. '나의 언니에게 접근하는 것들은 가만두지 않겠어.' ......라는 집착과 살의가 엿보인다. 라이레얼의 복장은 여전히 탱크탑에 핫팬츠. 덕분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쭉 뻗은 긴 다리,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허리, 크고 모양 좋은 가슴 등등... 참 보기 좋다. 예쁜 여자들이 이런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면, 남자들은 고맙기 그지없다. 일단 눈이 즐겁지 않은가? 인간과 엘프의 혼혈로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라이레얼. 용병출신이다 보니 몸에 근육이 많은 편이다. 오랜 폐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라이레얼의 몸매는 여전히 탄탄하다. 아무튼 너무 예쁘다. 멋져요, 누님! .........이라고 외치며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할 경우 카르의 '얼려죽일 것 같은 눈빛'과 일루니아 여사님의 '찢어죽일 것 같는 눈빛'. 루시아의 '경멸어린 눈빛'을 동시에 받게 될 것이다. 그동안 각종 눈빛 스킬에 꿋꿋이 버텨왔던 나이지만, 그 세 눈빛을 동시에 받게 된다면 버티기 힘들 것 이다. 카르는 흰색 네글리제(원피스처럼 만든 여성용 잠옷)를 입고 있었다. 흰색 살결과 흰색 네글리제가 잘 어울린다. 네글리제는 나시처럼 되어 있어, 어꺠를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에 천이 얇고 길이가 짧다. 새야한 허벅지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 안그래도 욕구불만인 나를 너무 자극하는군. 난 짐승으로 폴리모프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만약 여기서 짐승으로 변신한다면 그게 무슨 개망신이겠는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욕정을 떨쳐내야 한다. 난 속으로 금강부동심법을 외웠다. 만물은 음과 양으로 이러져있으니, 그게 곧 태극이다. 태극의 오묘하고도 무한한 진리는...어쩌구저쩌구... 아무튼 좋은 말이니 전부 새겨들을지어다. "지금 커피 끓이는 거야?" "예. 뭐......" "나도 한 잔 줘." "언니가 마시면 나도 마실거야." "난 설탕 많이" "난 언니랑 똑같이." "예,예." 난 주전자에 물을 좀더 부었다. 야밤에 온 가족을 위해 커피를 타는 가장.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가장이 아니라 다방 레지로 보일 것이다. 음음, 커피는 지니가 타주는 게 맛있는데. 오죽하면 내가 '역전다방에서 미스 김이 타준 커피보다 맛있는 커피'라고 명명했겠는가? "그런데 라이레얼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안 주무셨어요?" "나의 언니가 자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니가 뭔데 나의 언니의 일에 관심을 갖는거야?" 엄청 과민반응을 보이는 카르. 참고로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다. "카르 너 히로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내가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그치만 저 인간이 주제도 모르고 언니한테 무례하게 굴었단 말이에요." "......." 내가언제? "히로는 나한테 무례하게 굴어도 돼. 카르 너 자꾸 이러면 내 방에서 쫓아낸다." "아, 안 돼요, 언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 흑~" 쫓아낸다는 라이레얼의 한마디에 울상을 지으며 싹싹 비는 카르. 카르에게 있어서 라이레얼의 말은 신탁이나 다름없다. 아아~ 요즘 드래곤들 왜 이러냐? 아무튼 이걸로 온 가족이 다 모인 셈이다. 지니와 크로니스는 마무리 작업을 한다고 가게에 가 있으니. 난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라이레얼과 카르가 마실 커피를 손수 타주었다. 생각해보니 밤에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 커피를 마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름대로 분위기 있다고 해야하나? 우리는 그렇게 이집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 * * * * * * * * * * 날이 밝자 우리는 이사할 준비를 했다. 웬만한 짐은 어제 다 싸놓았으니, 준비할 게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식구가 많으니 일손도 많다. "아! 왔어요, 오빠!" 아이들의 외침에 베란다로 나가보니 이삿짐센터에서나 쓰일 법한 커다란 트럭이 보였다. 트럭에서 내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 저 인간은 운전면허증도 없으면서 별 차를 다 운전한다. 아무튼 운전면허증도 없는 지니가 이렇게 이사용 트럭을 끌고 온 데는 깊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이사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지." 안 그래도 빚더미에 앉아있는데, 미쳤다고 이런 데 돈 쓰겠는가? 아낄수 있는건 최대한 아껴야 한다. "자자, 힘들 냅시다. 빨리 끝내고 편히 쉬지요." 난 사람들을 독려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펑펑노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으로 라이레얼이 그렇다. 라이레얼은 현재 소파에 누워 취침 중. '카르가 내 몫까지 열심히 할 거야.' ........라는 것이 라이레얼의 주장이었다. 뭐, 라이레얼의 존명(?)을 받는 카르가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상관없겠지. 우리는 짐을 아래로 내렸다. 어린 엘프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힘을 합해 집을 날랐다. 개인적으로 쟤들은 좀 가만히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철퍼덕! 와장창! 바닥에 넘어진 어린 엘프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상자. 소리를 들어보니 안에 유리제품이 들어있는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유리 제품이 아닌 유리 조각이겠지만. "헉쓰! 내 집안 살림!" "넌 애들 넘어진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애들 먼저 챙겨야 할 거 아니야!" 루시아는 그렇게 소리치며 아이들을 일으켜주었다. 또 점수를 잃은 건가? "다친 거야 나으면 그만이지만, 꺠진 집안 살림은 ㅇ떻게 할 수 없잖아." "뭐? 그래서 넌 지금 아이들보다 저 상자가 소중하단 말이야?" "아,아니, 뭐 꼭 소중하다기보다는...... 그냥 그렇다는 거지." 다행히 아이들은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루비의 무릎이 조금 까졋을 뿐이다. 그러게 조심좀 하지. "으아아앙~ 아파요오." 루비는 무릎에 난 피를 보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난 상처 난 부위에 침을 발라주었다. "뭐하는거야?" "일종의 민간요법이지." 참고로 민간요법이란 민간에서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치료법을 뜻한다. 빨간약 하나로 모든 찰과상을 치료할수 있다고 믿는것도, 밴드 하나면 모든 자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민간요법의 하나라 할수있다. "아야!" 침을 바르니 아픈지 소리를 지른다. 난 상처 부위를 호호 불어주었다. "이제 안 아플거야, 루비야. 그러니까 뚝!" "뚝! 헤헤~ 오빠가 치료해주니 하나도 안 아파요." "그래 그래. 위험하니 이제부터 저쪽에서 쉬고 있으렴. 루비가 다치면 이 오빠 가슴이 아프단다." "정말요?" "응응. 정말 아파." 꺠진 집안 살림을 생각하면 아주 가슴이 찢어질것만 같다. 이리하여 어린 엘프들은 빠지고, 우리는 다시 짐을 날랐다. 식탁과 소파, 텔레비전은 남겨 두기로 했다. 새 집에 맞는 제품을 새로 샀기 떄문에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다. 트럭에 짐을 다 싣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먼지 묻은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이제 옮겨야 겠군요." "예." 이걸 새집에 옮긴 다음, 그곳에서 다시 풀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아아~ 이사가 이렇게 귀찮은 일일 줄이야! "힘내서 빨리 끝내지요." "예." 우리가 출발하려 하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로 아줌마들로 구성된 단지주민들이었다. 그들은 피켓까지 들고 있었다. 한 아줌마가 앞으로 나섰다. 이마에는 빨간 띠를 둘렀고,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있다. "저 아줌마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부녀회장님꼐서 무슨 일로 이러시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지니가 입을 여는 순간, 부녀회장이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3동 612호 주민은 즉각 이사를 중단하라!!!" (옮긴이 ErwinRommel) [5]--------------------------------------- [4] 뒷부분 "3동 612호 주민은 즉각 이사를 중단하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의 주민들이 손을 하늘로 뻗으며 소리쳤다. ------------------------------------------------------------------------------------ "중단하라!중단하라!" 난 루시아의 얼굴을 보았다. 루시아 역시 내 얼굴을 보았다. "3동 612호면........" "우리 집이잖아!" 우리가 어이없어 하는 사이 주민들의 시위는 계속되어다. "주민 동의 없는 이사 즉각 철회하라!" "철회하라!철회하라!" "와아아!" 이젠 파도타기까지 한다. 피켓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쓰여 있었다. No Moving 이사금지 3동 612호 이사에 주민들 가슴 피멍 든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 왔어도 주민 동의 없이는 한발자국도 못 나간다 니들이 이사 가면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등등. "뭐, 뭡니까? 이 시츄에이션은?" 어떻게 이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내 집 나와서 내가 이사 간다는데, 저 아줌마들이 뭔 상관이야? 뭔 상관이 있기에 피켓까지 들고 난리야? "상관이 있습니다." "예? 상관이 있다니요? 제가 무슨 관리비를 안 낸 거도 아니고......" "2년 사이 이 단지 집값이 크게 상승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 그래요?" "그렇습니다. 평균 5천만워 정도 뛰었습니다." "헉! 5천만원씩이나!" 내가 입주할 떄만 해고 24평이 1억5천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그 사이 5천만원이나 뛰엇단 말인가? "정말요? 이 지역 집값이 오를 이유가 없잖아요. 위치가 좋은 것도 아니고, 부대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근처에 재개발 되는 곳도 없고......결정적으로 주차장이 부족하잖아요." 이 단지의 가장 큰 문제는 주차장 부족이다. 아파트가 지어진 시기는 대략 18년전. 그떄만 해도 자동차는 소위 '있는 사람들' 만 타고 다니는 고가품이었다. 때문에 늘어날 차 수요를 계산하지 못하고 주차장을 조금만 만들었다. 두가구에 차 한대로 계산해서.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개나 소나 차를 끌고 다닌다. 차 한 대 없는 집은 찾기가 힘들 정도며, 한 가구에 두 대 있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차는 몇배나 늘었는데 주차장은 그대로다. 떄문에 퇴근 시간만 되면 주차 전쟁이 벌어진다. 조금만 시간이 늦으면 주차할 곳이 없어 단지 주위를 뻉뺑 돌아야 한다. 좁은 구역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주차하는 모습을 보다보면 테트리스가 연상될 정도다. 그러고 아침에는 차를 빼기 위한 전쟁이 벌어진다. 심지어는 차 한 대 때문에 수십 대 차량이 못 빠져 나가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이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한 50년 후에 재건축 단지로 지정된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런 악조건을 디고 집값이 5천만원이나 상승하다니! 여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터. "집값 상승 요인은 전부 아이언스 공작님께 있습니다." "예? 저한테 있다니요?" "정확히는 이 집에 사시는 모든 분들에게 있지요. 모두들 아름답고 완벽한 외모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죠." 내가 사랑하는 루시아, 3대 초반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우신 일루니아 여사님, 미모로는 세계 제일인 라이레얼, 얼음인형 같은 카르, 고독하고 분위기 있는 미청년 크로니스, 지적인 외모가 돋보이는 지니, 여자같이 예쁘게 생긴 인디..... 그리고 초절정 귀염둥이 라이, 루, 루비! 나만 빼고 전부 완벽에 가까운 외모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백인이니(다른사람이 보기에) 신비감까지 더해진다. "우리때문에 집값이 오른 거란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3동의 경우에는 더욱 올랐고, 612호와 같은 층의 집들은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었습니다." "헉!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의외로 빠른 법이지요." "........." 하긴, 지니의 말이 맞다. 만약 옆집에 엄청난 미남 미녀들과 귀엽고 깜찍한 아이들이 산다면, 누구라도 그 집에 이사하고 싶을 것이다. 난 그제야 주민들이 시위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이사 가면 집값 떨어지니까 시위하는거죠?" "그렇습니다." "........." 지역 이기주의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극단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지역 이기주의가 심각하다. 대표적으로 님비(NIMBY)와 핌피(PIMFY)현상을 들 수 있다. 님비는 낫 인 마이 백야드(Not In My BackYard)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공공의 이익에는 부합하지만 자신이 속한 지역에는 이롭지 않은 일을 반대하는 지역 이기주의를 뜻한다. 핌피는 플리즈 인 마이 프론트 야드(Please In My Front Yard)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지역 발전에 유리한 편의 시설을 인근에 끌어들이려는 지역 이기주의를 뜻한다. 이중, 심각한 것이 님비 현상이다. 쓰레기 소각장, 원전 수거물 관리 센터, 치매 노인 보호시설, 장애인 학교, 납골당 등의 시설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시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자기 지역에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 님비현상이다. 문제는 이 시설이 어딘가에는 반드시 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지역에 안 된다는 말은 자기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이라면 어디든 괜찮다는 거다. 뭐, 쓰레기 소각장이나 원전 수거물 관리센터의 경우에는 지역을 오염시키고 주민들 건강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주장하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치매 노인 보호시설이나 장애인 학교 등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이들이 무슨 전염병 환자나 범죄자들도 아니고........ 애들 정서 교육에 안좋네, 같이 살면 위험하네, 집값이 떨어지네...... 별 이유를 다 댄다. 그런데 모든 지역에서 이 시설들을 반대하면, 치매 노인이나 장애인들은 나가 죽으라는 뜻인가? 이렇게 물으면 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왜 하필 우리 지역이에요? 다른 지역도 있잖아요. 그런 시설이 들어서면 집값 떨어진단 말이에요.' 안 그래도 좁은 땅에서 뭐 그렇게 열심히 니구역, 내구역 따지는 건지..... 물론 정말로 혐오 시설이 들어설 때는 주민 동의를 얻고, 주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치매 노인 보호시설, 장애인 학교, 고아원, 납골당 등을 자기들 멋대로 혐오 시설로 지정하고 '우리집 뒷마당에는 절대로 안 돼' 라고 외쳐대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자기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고, 자기 자식이 장애인이어도 그럴까? 아무튼 이놈의 지역 이기주의 좀 제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나저나 집값 떨어진다고 이사 못 가게 하는 경우는 살다살다 처음보는군. 루시아는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어떡해? 저렇게 입구를 막고 있으면 못 나가잖아." 한국의 안좋은 모습만 골라 보여주는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다. 난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한번 말해볼게." 난 확성기에 대고 외치며 주민을 선동하는 부녀회장에게 다가갔다. "3동 612호 주민은 이사를 즉각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주민 동의 없는 이사 즉각 철회하라!" "철회하라! 철회하라!" "3동 612호 이사에 주민 가슴 피멍 든다!" "피멍든다! 피멍든다!" "주민 동의 없는 이사 웬 말이냐!" "웬말이냐! 웬 말이냐!" "........." 막상 가까이서 보니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다. 우리 이사 여부에 따라 5천만원이 왔다 갔다 하니 목숨 걸고 시위할 만하려나? "안녕하세요. 3동 612호 집주인인 박영웅이라고 합니다." 내가 말을 걸자 부녀회장은 확성기를 내려놓고 나를 보았다. "주민 동의 없는 이사에 대해 우리 부녀회 측은 만장일치로 불가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장 이사를 중단할 것을 통보합니다." "........." 어이없다. 더 어이없는 것은 뒤의 주민들이 전부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아~ 이렇게 극단적인 핌피 현상이라니! 집값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건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 "아니, 제 집 나와서 제가 이사 가는 것도 주민 동의가 필요합니까?" "이사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될 주민들에게 대해서는 어떻게 보상해 주실 겁니까?" 부녀회장은 '뭐 이런 이기적인 놈이 다 있어?' 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때문에 나는 더욱 황당해졌다. 보상? 지금 나랑 장난하나? "집값 오른 게 전부 우리 덕분이라면서요? 우리가 이사를 가면 오른 집값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뿐인데, 뭔 보상이에요?" "어린놈이 어디서 눈 똑바로 치켜들고 어른한테 대들어? 넌 부모도 없니? 내가 집에 가면 너만한 아들이 둘이나 있어! 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건지......쯧쯧." "........."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나이로 미는 거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이 얘기가 왜 나오는 건가? 이 일과 나이가 뭔 상관이라고 가정교육까지 거론하나? "저도 집에 가면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게다가 아줌마만한 부모님도 계십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경우라는 것을 아시는데, 아줌마는 참 경우가 없으시네요. 혹시 가정교육을 못 받으셧나 보죠? 아줌마를 보니 아줌마 부모와 자식들이 어떤지 알만하네요. 쯧쯧쯧!" 당한만큼 갚아 준다. 우리 부모님까지 욕한다면, 난 부모님과 자식들까지 싸잡아 욕하리라. "아,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너 부녀회장이 우습게 보여? 나한테 잘못 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작은 자리에만 앉아도 대단한 권력을 가진 양 착각하고 유세를 떠는 인간. 대체로 좀 모자란 사람들이 그런 경향을 보인다. "부녀회장이 뭐 별겁니까? 그리고 저희 이사 간다니까요. 이사가는 마당에 부녀회장에게 잘못 보이든 말든 뭔 상관이 있어요? 부녀회장 권력이 닿는 곳은 기껏해야 단지 안입니다. 그리고 떄가되면 부녀회장도 바뀌기 마련이죠." 부녀회장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부녀회장인 본녀에게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라고 말하는 듯 하다. 부녀회장은 이를 박박 갈며 말했다. "지, 지금 막판이라고 막나가지는 모양인데... 니들이 내 허락없이 이사를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왜 우리가 이사를 가는데 부녀회장 허락을 받아야 하냐구요?" "니들이 이사 가면 주민들이 피해를 본다니까!" "그 피해가 뭔데요?" "집값이 떨어져!" "그럼 우리 덕분에 집값이 올랐을 때 뭘 해줫는데요?" "........." "아무 것도 해준게 없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집값 떨어지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게 말이나 돼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아무튼 못 가! 내가 죽으면 죽었지, 집값 떨어지는 꼴은 못 봐!" 그렇게 말하며 그 자리에 드러눕는 부녀회장 아줌마. 그 뒤를 이어 시위하던 주민들도 바닥에 누웠다. 그들은 누운 상태에서 구호를 외쳐댔다. "3동 612호 주민은 이사를 즉각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주민 동의 없는 이사 즉각 철회하라!" "철회하라! 철회하라!" "3동 612호 이사에 주민 가슴 피멍 든다!" "피멍든다! 피멍든다!" "주민 동의 없는 이사 웬 말이냐!" "웬말이냐! 웬 말이냐!" "......." 아아~ 이놈의 지역 이기주의 좀 누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집값에 목숨 건 아줌마들. 이러니 부동산 불패신화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대체 집값 올려서 어쩌겠다는 건지...... 아무튼 아줌마들이 이렇게 길가에 누워 있으니,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빠져나갈 수가 없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밤에 몰래 가는건데... "......." 으음, 생각해보니 웃기는군. 무슨 야반도주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러자 지니가 입을 열었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오오! 어서 그 좋은 생각을 말해보도록 하시오." "예. 제 생각에는 그냥 밀고 지나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럼 깔린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죽겠지요." "그렇겠죠?" "그렇습니다." "기각!" 지니는 가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옛날 상아탑에서 있었던까르린느 사건 때도 그렇고, 저번 박일현사건 떄도 그렇다. 사일런스 지니. 정말 이해 불가능한 인간이다. "나의 언니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은 전부 죽여버리겠어!" 카르는 눈을 부릅뜨며 그렇게 외쳤다. 순간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카르의 주위에 몰아친다. 만약 저바람에 닿는다면 순식간에 온몸이 얼어버릴 것이다. "진정하렴." 당연한 얘기지만, 내말은 듣지도 않는다. 난 라이레얼에게 말했다. "얘 좀 말려줘요, 라이레얼." "그만해, 카르." 라이레얼이 한마디 하자 카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라이레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라이레얼이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 하는 카르. 이는 카르가라이레얼에게 홀딱 반했기 때문이다. 음음, 라이레얼의 매력은 드래곤에게도 통할 정도란 말인가? 어쩃든 저 아줌마들이나 빨리 치워야겠군. 결국 나는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난 지니의 핸드폰을 빌려 112번을 눌렀다.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예. 지금 이사를 가야하는데 주민들이 집값 떨어진다고 이사 못 가게 막고 있 거든요. 예? 장난전화하지 말라고요? 이거 장난 전화 아니거든요. 예? 장난전화하면 벌금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구요? 이봐요! 이거 장난 전화 아니라니까요! 아, 진짜 사람 못 믿으시네. 저는 장난전화나 하 는 몰지각한 사람이 아닙니다. 경찰의 동둠을 필요로 하는 선량한 시민입니다. 예? 자꾸 장난전화하면 유치장에 가두겠다구요? 아니, 이 아저씨가 속고만 살았나? 그러고도 경찰이 민 중의 지팡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이 선량한 시민의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장난 전화로 매도하다니! 자꾸 이러시면 경찰서 홈페이지에 항의글 올립니다. 예? 여기가 어디냐구요? 그건 알아서 뭐하시게요? 예? 당장 잡아서 유치장에 처넣겠다구요? 뭐, 좋으실대로 하세요.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되냐면......" 난 주소를 쫙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한 10분 정도 기다리자 경찰차가 달려왔다. 하지만 길바닥에 드러누운 아줌마들에 막혀 단지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경찰차가 멈추더니 안에서 경찰관 두 명이 내렸다. 그 경찰관은 우리에게 달려왔다. "신고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난 손을 들었다. "접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난 현재 상황과 그 원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엇다. "이사 가면 집값 떨어진다고 이사를 못 가게 한다고요?" "믿기 힘드실 거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부 진실입니다." "이것 참....." 두 경찰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분들을 일으켜 차가 지나갈 길을 만들면 되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두 경찰들은 단지 입구를 막고 아줌마들에게 다가갔다. 처음에는 말을 걸었다. 말을해서 들을 사람들이 아닌데. 역시나 아줌마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두 경찰은 아줌마들을 억지로 이으켰다. 일으키려는 경찰과 일어나지 않으려는 아줌마들 사이에 실랑이가 오고갔다. 결국 아줌마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경찰을 밟았다. 두 경찰은 차마 아줌마들에게 무력을 행사할 수 없었는지 그냥 밟히고 있었다. 난 무지하게 얻어맞은 두 경찰을 보며 다시 112에 전화를 걸었다. "저기요, 지금 경찰 두 명이 아줌마들에게 무지하게 얻어맞고 있거든요. 전치 8주는 나올것 같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지원병력을 보내주십시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증원을 요청합니다. 예? 아까 장난 전화한 그놈이냐구요? 아! 장난 전화 아니라니까요! 아저씨 속고만 살았어요? 진짜로 경찰들 다 죽어가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전화를 하는 사이 한 경찰이 비틀거리며 경찰차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경찰차 안의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내 아줌마들 손에 끌려나와 다시; 밟혔다. "으음, 우리나라 경찰들도 참 힘들군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뭐, 그건 그렇죠." 한 경찰의 사력을 다한 지원요청 덕분일까? 조금있자 전경 수송 버스가 왔다. 버스 안에서 방패와 봉으로 완전 무장을 한 전경들이 뛰어내렸다. 전경들은 떡이 된 경찰들을 구출하고 부녀회 아줌마들과 대치했다. 부녀회장을 선두로 한 부녀회 아줌마들은 모든 것을 각오한 모습이었다. "밀리면 안 됩니다. 어떻게 오른 집값인데, 떨어지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집값 사수! 집값 사수!" 아줌마들의 박력에 전경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방패를 앞세워 밀집대형을 짠 전경들이 부녀회 아줌마들에게 밀리다니!! 이건 중장갑보병이 농병(農兵)에게 밀리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만큼 굉장한 일이었다. 하지만 폭팔적인 기세도 잠시일 뿐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전경들은 아줌마들을 포위한 채 압박하기 시작했다. "흥미진진하군요. 사일런스 백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확실히 전력은 전경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부녀회 측에게는 집값 사수라는 확실한 동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훈련을 받고 좋은 무기로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저들은 강제로 징집되어 어쩔 수 없이 싸우는 병사에 불과합니다. 그에 비하면 부녀회 측은 사활의 투쟁이라 할수있지요. 이번 싸움의 승패는 거기에 달려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부녀회장은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밀리면 집값 5천만원이 날아갑니다! 무려 5천만원입니다! 목숨을 걸고 집값을 지킵시다! 부녀회의 힘을 보여주는 겁니다!!" "와아아!" 부녀회는 전경들을 마구 밀기 시작했다. 5천만원이라는 말에 눈을 뒤집어 까고 달려드는 아줌마들. 그리고 그 기세에 눌려 물러서는 전경들.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하는데요." "큰일이군요.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법이지요." 지니의 말대로 전경은 마구 밟히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전경들은 방패를 휘두르며 반격에 나섰다. "반격 시점이 너무 늦었군요. 전경 측 사령관이 누군지는 몰라도 크게 실수했네요."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반면 부녀회 측 사량관인 부녀회장의 용맹은 눈여겨 볼 만 하군요. 사령관이 저렇게 앞장서서 싸우며 병사들을 독려하면 부대 전체에 사기가 오르기 마련이죠." 난 앞장 서서 전경들을 떄려눕히는 부녀회장을 보며 크게 감탄했다. "그야말로 무인지경이로다! 조운이 아두를 품에 안고 조조의 백만 대군속을 달리는 모습을 보는 듯하구나! 그 용맹이 적토마를 탄 여푸와 추를 탄 항우에 비해 부족하지 않으니 과연 부녀회의 수장답도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녀회 측의 승리가 확실시되었다. 그런데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전경 수송버스가 등장했다. "오오! 전경 측에 증원군이 투입되었군요." "흐음, 원군이 도착한 이상 부녀회측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숫자에서도 밀릴뿐더러 저들은 이미 모든 기력을 소진한 상태입니다." "그럼 전경측이 이긴다는 말씀이신가요?" "부녀회 측 원군이 도착하지 않는 ㅣ상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곳은 단지 안입니다. 부녀회 측의 홈그라운드라 할수 있지요. 홈그라운드의 전투는 보급과 증원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홈그라운드에서 패한다면 부녀회장의 권이가 크게 실추될 것입니다. 부녀회장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증원을 요청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와아아!" 지니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 뛰어왔다. 1동,2동,3동,4동........ 아무튼 온 동의 아줌마가 다 뛰어 나온 것 같다. 덕분에 거의 쓰러져 가던 부녀회 측은 기사회생했다. 전경 측은 다급했졌다. 전경들은 다시금 방어진을 구축하고, 황급히 무전기로 증원 요청을 했다. 하지만 물 밀 듯이 밀고 들어오는 부녀회의 공세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으음, 지역 이기주의라는게 사람을 완전히 돌게 만들어버리는군요." "원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죄의식이 희박해지기 마련이지요." "가슴 아픈 현실이군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전경 수송 버스가 두 대나 더 도착했고, 심지어는 방송국 차량까지 왔다. 늘어난 숫자에 힘입은 전경들은 탈진 상태에 이른 부녀회를 손쉽게 진압했다. 부녀회장을 비롯한 부녀회 아줌마들은 줄줄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전경들 피해도 만만치는 않았다. 삐뽀삐뽀~ 소리를 내며 도착한 구급차가 부상당한 전경들과 아줌마들을 실어 날랐다. 이사 첫날부터 이게 뭔 꼴이다냐? 마치 앞으로 있을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하는 것만 같아 두렵다. 어쨋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우리는 단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니는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몰았고, 나는 마이카 뉴 렉서스턴을 몰았다. 내 뒤에 옹기종기 앉은 어린 엘프들은 눈을 반짝반짝 초롱초롱 빛내며 새 집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옮긴이 : ErwinRommel) [6]------------------------- [5] 뒷부분 내 뒤에 옹기종기 앉은 어린 엘프들은 눈을 반짝반짝 초롱초롱 빛내며 새 집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 "좋니?" "네에~!" "후후~ 이 오빠도 좋단다. 새 집은 엄청 넓으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야." "에헤헤~." 엄청 좋아하는 어린 엘프들.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니 나도 기쁘다. 간만에 기분 내서 차를 몰았지만, 가게에 도착하는 데는 3분밖에 안 걸렸다. 나는 차를 주차하고 이삿짐을 내렸다. 이제 이 짐들을 5층까지 올려야 한다. 가게 건물은 일제시대 때 지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하지만 크기가 작은데다가 안전성 문제도 있어써 그동안 사용을 안 해왔다. 그것을 이번에 리모델링을 하면서 개보수했다. 크기도 늘리고, 설비도 최신식으로 교체했다. "엘리베이터에 대해 잠시 설명을 드리지만, 2층과 4층은 서지 않습니다, 1,2층과 3,4층을 하나의 블록으로 나눴기 때문입니다." 1,2층은 인형 가게고, 3,4층은 유치원이다. 어차피 내부 계단이 있으니 상관없겠지. "그리고 5층은 비밀번호를 눌러야만 올라갈 수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0015를 누르고 여기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대시면 됩니다. 이건 최첨단 지문인식기로, 이집에 사시는 모든 분들의 지문정보가 입력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이 이곳에 올라오기 위해서는 집 안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허락은 인터폰으로 내릴 수 있습니다." "오오! 그야말로 최첨단 장비로군요. 그런데 비밀번호가 왜 0015인가요? 뭔가 의미가 있는 건가요?" "별 의미 없습니다. 아이리스 1부가 15권에서 완결되었기 떄문에 그냥 0015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아이리스 1부가 15권에서 완결이 되긴 했죠. 그러고 보니 이게 2부 8권이니, 합하면 23권이나 되는군. 그런데 아직까지 루시아와 아무 일도 없다니...... 으음, 이건 작가의 농간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루시아의 목소리에 난 정신을 차렸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튼 먼저 올라가 보도록 하지요." 난 0015를 누른 다음 숫자밑에 있는 지문인식기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댔다. 그러자 문이 닫히며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현관문이 나타나다. "열쇠입니다." 난 지니가 내민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집 내부가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운동장처럼 넓은 거실이다. 24평 집거실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하다. "와아! 넓다!" 바로 거실로 뛰어가는 어린 엘프들. "헉스! 감히 신발도 안 벗고 거실로 뛰어가다니! 당장 내 집에서 떨어지지 못해? 내 집을 더럽히는 엘프들은 가만두지 않겠어!" 내가 소리치자 어린 엘프들은 투덜투덜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 투덜투덜? 이것들이 하늘같은 오빠의 말씀에 투덜거렸단 말이야? 요즘 들어 점점 버릇없어지는 어린 엘프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쇠빳따로 교육을 시켜줘야겠군. "오셧네요." "아! 크로니스." 집 안에는 크로니스가 있었다. 아마도 집을 정리하느라 어제부터 계속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덕분에 집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바닥을 원목으로 깔았고, 벽지는 흰색에 가까운 밝은 초록색이다. 마치 숲속에 들어온듯한 느낌이 든다. 거실 중앙에는 커다란 소파가 위치해 있고, 그 앞에는 무려 63인치짜리 PDP TV가 있다. "우와! PDP TV다!" 라이레얼은 감동 받은 표정으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왜, 왜 그래요, 라이레얼?" "내가 PDP TV 갖고 싶어 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나 저런 큰 화면을 보면서 게임하는 게 꿈이였어. 사실 42인치 프로젝션 TV는 좀 별로더라고" "아, 아니, 꼭 저 TV를 라이레얼 오락하라고 사 놓은 건 아닌데......" "훌쩍~ 나 지금 엄청 감동 받았어, 히로." 그렇게 말하며 나를 와락 끌어안는 라이레얼. 가만에 라이레얼의 품에 안기니 흥분돼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크, 크다. 몸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하지만 나는 라이레얼 뒤에 카르가 있다는 사실과 내 뒤에 루시아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히 라이레얼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 그렇게 고마워하시면 제가 부담스럽지요. 아하하~."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카르의 얼음같은 눈동자와 루시아의 활활 불타는 눈동자는 사그라질 줄 몰랐다. '나중에 언니 없을 때 두고 봐!" .....라 말하는 듯한 카르의 눈빛. '나중에 애들 없을 때 두고 봐!" .....라 말하는 듯한 루시아의 눈빛. 두고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안 무섭다, 라는 속담에도 불구하고 너무 무섭다. 아무튼 위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을 설계한 지니는 앞장서서 집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집은 한 층 전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몇 평 정도인가요?" "약 100평 정도입니다." "헉쓰! 100평이나!" 그동안 24평짜리 집에서 살았으니, 4배 이상 커진 셈이다. "방은 모두 7개고, 이족에 옥탑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옥상에 올라갈 수도 있고, 옥탑방을 톡해 옥상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옥상에는 안락한 흡연을 위해 의자와 재떨이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오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긴 뭐가 훌륭해? 오빠는 왜 쓸데없는 걸 만들고 난리야? 좋아하는 나와는 반대로 매우 싫어하는 루시아. 아무튼 흡연 장소가 생겼다니 정말 기쁘다. "이쪽 방은 아이언스 공작님의 방입니다." 작은 방 안에는 침대와 책상이 놓여져 있었다. 침대는 1인용보다 약간 크다. 루를 데리고 자야하기 떄문에 일부로 좀 큰 사이즈로 맞췄나 보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놓여져 있었다. "저 컴퓨터는 뭔가요?" "협찬받은 겁니다." "협찬이요?" "예, 아이언스 공작님의 이사 소식을 들은 여성분께서 협찬해주셧습니다." "......." 또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냐? "그런데 어떤 여성분이시기에 컴퓨터 협찬을?" "외국계 기업인 파인애플 컴퓨터 회사에 다니고 계십니다." "파인애플 컴퓨터요?" "예, 회사 로고가 파인애플입니다." "으음, 그렇군요. 그 회사 유명하죠. 아! 그럼 저 PDP TV도 협찬 받은 건가요?" "아닙니다. PDP TV는 아이언스 공작님 카드로 긁엇습니다. 36개워 할부이니 천천이 납부하면 됩니다." "......." 이 인간이 날 파산시키려고 작정을 했나? 42인치짜리 프로젝션 TV만으로도 충분한데, 카드까지 긁어가며 63인치짜리 PDP TV를 샀단 말인가? 아주 미치겠다. 그렇다고 컴퓨터까지 협찬 받아온 지니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이쪽 방은 루시아 공주님 방입니다." "헉! 저, 저건 더플침대?" 루시아 방은 내 방에 비해 훨씬 컸다. 게다가 침대가 더블 침대다. "설마 이건 야밤에 몰래 루시아 방에 침입해 운우지락을 나누라는 따뜻한 배려?" '뭔 소리야?" 루시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아, 아니, 그냥 해본 소리야." .......라지만 결코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니다. 루시아만 원한다면 그깟 야밤 침입이 대수겠는가? "물론 그런 의도도 있습니다만, 일단은 따님 두 분과 편히 주무실수 있도록 놓았다고 해두겠습니다." "오빠!" 루시아는 지니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오빠가 자꾸 그러니까 히로가 이러는 거잖아." 지니는 루시아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붙박이 옷장으로 안에 루시아 공주님과 따님 두 분의 옷을 수납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참고로 이 서랍장 안에는 속옷을 넣어 두도록 되어 있으니, 아이언스 공작님게서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헉! 이 서럽장 안에 속옷을!" 난 지니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하며 서랍장을 눈여겨보았다. 응? 눈여겨봐서 뭐하냐고? "......." 이번 기회에 분명히 밝혀두지만, 난 여자 속옷에 관심을 갖는 그런 이상한 인간이 아니....지만, 그래도 루시아 속옷이라면 관심이 좀....이 아니라 매우 많이 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루시아는 어떤 속옷을 입었으려나? 으음....... "끄아악!" 갑작스레 밀려오는 고통에 나는 생각을 중단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루시아가 내 옆구리살을 꼬집은 상태에서 비튼 것이다. "왜, 왜그래, 루시아?" "저질" "헉, 저, 저질이라니? 내가 뭘 했다고?" 그렇다. 난 아직 ㅏ무 것도 안 했다. 뭐라도 해보고 이런 말을 들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는데.......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에게 말했다. "오빠는 저질에 변태니까 조심해야 돼. 이제부터 오빠가 라이랑 루비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싫다고 뿌리쳐. 알았지?" "......." 나, 난 쟤들한테 관심도 없는데..... 내가 관심 있는 건 오직 루시아 너 뿐인데..... 아아~ 이사 첫날부터 뭔가 안 좋다. 아까 부녀회 아줌마들 난리칠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 "다음 방은 인디님과 누님의 방입니다. 부ㅜ 침실로 꾸몃습니다." 더블침대에 옷장, 책상..... 아무튼 부부방 같이 꾸며 노았다. 자신들의 방을 보며 서로의 손을 꼭 붙잡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두 사람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반짝거린다. 부러워라. 나는 언제쯤 루시아와 신방을 차릴 수 있으려나? "다음 방은 라이레얼님과 카르님의 방입니다." "여기가 내 방이야?" "예, 여기가 언니랑 제 방이래요." 라이레얼과 카르의 방 역시 더블침대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32인치 초박형 TV와 여러 오락기도 있었다 여기에 협찬 받은 파인애플 컴퓨터까지 있었다. "행복한 게임 라이프를 ㅟ해 특별히 설계한 방입니다. 침대에 누워 편안히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인체 공학적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만 하면 질릴 수도 있으니, 가끔은 온라인 게임도 즐기시라고 컴퓨터도 설치해 놓았습니다." 지니의 설명을 들은 라이레얼은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라이레얼이 좋아하니 카르도 따라서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저것들도 다 제 카드로 긁은 거겟죠?" "물론입니다. 협찬에 어려움이 따랐던 관계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그저 가슴 아플 뿐이다. 게다가 라이레얼이 밤새 게임을 하면 전기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 뻔한데..... 아아~ 라이레얼의 행복한 게임 라이프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구나. "다음은 제 방이다. 제 방을 제가 공개하련 ㅣ조금 부끄럽군요." "......." 퍽이나 부끄럽겠다. 지니의 방은 별로 볼 게 없었다. 침대 옆에 책상이 있고, 책상 옆에 책장이 늘어서 있다. 책상 한쪽에는 역시 협찬 받은 파인애플 컴퓨터가 놓여져 있었다. 업무용 책상인지 제법 크기가 컸다. 책장에는 각종 외국 원서들과 소설들이 꽂혀 있었다. "아! 저건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 이네요. 저도 저 책 ㅣㄺ었는데." "저자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밀접한 관계를 규명해서 강대국들이 겪는 흥망성쇠의 원인을 찾으려 했습니다. 강대국들은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힘에 부치는 군사력을 유지하려 시도 했고, 그 떄문에 국력이 쇠퇴하였다는 주장이지요. 논거가 부족하고 말이 안 되는 부분도 있으나,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국제관계를 해석한다는 것이 신선하더군요." "저 역시 비슷한 견해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저자가 쓴 '21세기 준비'라는 책도 꽤 흥미로웠지요." "그렇습니다. 그책에 대해 얘기하자면......" 이제는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 되려는 찰나, 루시아가 나와 지니를 잡아끌었다. "그런 얘기는 나중에 둘이 옥상에서 담배 피면서 해." "응? 그럼 드디어 내가 담배 피는 걸 허락해주는거야?" "내가 언제 허락했어? 그냥 그떄 얘기하라는 거지. 아직 집을 다 둘러보지도 않았잖아." 루시아의 재촉에 우리는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이 방은 크로니스님의 방입니다." 크로니스의 방은 지니의 방과 구조가 거의 똑같았다. 책이 많은 것 역시 똑같다. "방 소개는 이걸로 끝인가요?" "아닙니다. 이쪽 방은 놀이방이자 공부바응로 한번 꾸며 보았습니다." 커다란 방은 유치찬란하게 꾸며저 있었다. 난 그 유치찬란함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아이들은 좋아라고 뛰어놀았다. "참고로 방음 시설이 매우 잘 되어 있으니 아무리 뛰어 놀아도 아래에서 쫓아올 염려는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화장실은 세 개 입니다. 저흐 ㅣ누님방에 하나, 루시아 공주님의 방에는 하나, 그리고 거실에 하나 있습니다.ㄱ저희 누님 방의 화장실에는 욕조가 설치되어 있으나, 루시아 공주님 방의 화장실에는 욕조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실 화장실에는 안락한 목욕 문화를 위해 큰 욕조를 설치했습니다." 거실 화장실의 욕조는 다섯 명이 함꼐 목욕해도 충분할 정도의 크기였다. 목욕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정도 크기면 우리가 같이 들어가도 되겠다. 그치?" 난 은근슬쩍 나의 진심을 밝혔다. 그러자 루시아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기분 나쁘니까 좀 떨어져 줄래?" "......." 괜히 말 꺼냈다가 점수만 잃었다. "다음으로 옥탑방이 있습니다. 옥탑방이지만, 이 집과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거실 화장실 쪽에 사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뭐, 사다리라고 해봐야 2미터 정도에 불과하지만. "와아! 여기 멋지다." 루시아는 옥탑방이 마음에 드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나 역시 마음에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옥탑방은 대략 15평 정도로 원룸 형태였다. 한쪽에 부엌이 있고, 한쪽에 화장실이 있다. 그리고 문이 따로 있어서 옥상으로 나갈 수도 있다. 사다리 위에는 덮개가 있어서 막아 놓을수 도있도, 잠가 놓을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5층과 한 집이라 할 수 있고, 다르게 보면 두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으로 나가면 옥상입니다. 참고로 건물 옆에 있는 비상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멋지군요." 정말 마음에 든다. 이런 곳에 루시아와의 신혼방을 차리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아이들 방해도 안 받고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텐데. "그런데 여기에는 누가 사나요?" "글쎼요, 누군가는 살지 않을까요?" "......." "임대하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 하긴, 이 정도 집이면 괜찮은 값에 임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임대하기는 좀 아깝다. 무엇보다 모르는 사람이 우리 삶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집 구경을 끝마친 우리는 이삿짐을 집으로 날랐다. 나와 지니, 크로니스가 짐을 위로 올렸고, 루시아,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가 그 짐을 풀어 정리했다. 아이들은 어젯밤 잠을 못 잤기 때문인지 침대에 엎어져서 잠들었고, 라이레얼과 카르는 침대에 누워 오락삼매경에 빠졋다. 이삿짐을 다 정리하고 나자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모두들 지체 저녁을 차릴 기운도 없었기에 중국집에서 시켜 먹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인지 입맛도 별로 없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서 자도록 하지요." "예."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난 침대중앙에 자고있는 루를 치우고 침대에 누웠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다. 이사라는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그래도 무사히 마쳤으니 정말 다행이다. 이제 잠이나 자자. "......." 잠이 안온다. 으음, 몸은 피곤한데 왜 잠이 안 올까? 자기 위해 열심히 뒹굴거려 보았지만, 역시나 잡이 안 온다. 난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예전에는 방 나서면 코앞이 부엌이었는데, 이젠 제법 걸어야 한다. "어라? 부엌에 불이 켜저있네." 부엌에 잠옷을 입은 루시아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루시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으응. 잠이 안 와서. 너야말로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나도 잠이 안 와서." "......." 헉! 이런 우연히 있을 수가! 역시 루시아와 나는 운명? "커, 커피 마실래?" "응." 이리하여 나는 또 야밤에 커피를 끓였다. 어제와 다른 점은 방해꾼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기회? 나는 블랙커피를 루시아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루시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집 마음에 들어?" "응, 아이들도 좋아하는 것 같아." 커피를 마시는 루시아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좀 더운가? 난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루시아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고마워." "고맙긴......"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수 있어. "아! 우리 옥상에 올라가 볼래?" "옥상?" "응. 날씨도 더운데 옥상에서 바람이나 쐬자." "음......." "가자." 난 루시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현관문으로 나가 계단으로 올라가도 되지만, 일부러 옥탑방을 통해 나가는 것을 택했다.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옥탑방의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갔다. 루시아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렸다. 백금색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흩날린다. 밤하늘의 달과 별이 모두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름답다. 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아다. 이렇게 다시 한번 루시아에게 반하는구나. "왜 그래?" "아, 아무 것도 아니야." 루시아가 말을 걸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난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왜,왜?" "얼굴이 빨갛잖아. 무슨 일 있어?" 루시아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런 식의 신체적 접촉은 위험한데....... "감기라도 걸린 거야?" "아,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면 뭔데?" "그,그냥...... 니가 너무 예뻐서." ".......뭐?" "이번엔 루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 진짜야." "입에 발린 소리는 됐어." "진짜라니까. 세상에서 제일 예뻐." 그러자 루시아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려다. "나보다 예쁜 여자도 얼마든지 있잖아. 그 여자도 그렇고....카르도 나보다 예쁘고....형부도....." 난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냐, 루시아. 세상에서 니가 제일 예뻐. 정말이야." "그, 그치만 그 여자가 나보다 가슴도 크고...키도 더 크고...얼굴도 더 예쁘고......" "......." 그 여자라면 라이레얼을 뜻한다. 루시아는 라이레얼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건가? "확실히 라이레얼이 너보다 가슴도 크고,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긴 하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루시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좋으면 가서 그 여자랑 놀아! 자꾸 나한테 찝쩍거리자 말고!" 루시아는 화를 내며 나를 밀쳤다. 난 황급히 난 루시아의 손목을 잡고 끌어안았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루시아가 발버둥을 칠수록 난 더욱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나한테는 니가 더 예뻐. 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나한테 너보다 더 예쁜여자는 없어. 이건 진심이야." "......." 루시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난 그녀의 가녀린 등과 허리를 어루만졌다. 사랑해, 루시아 나한테는 오직 너뿐이야. "흑......." "서, 설마 우는 거야?" "울긴 누가 운다 그래?" 난 루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루시아의 맑은 에메랄드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흐러내리고 있었다. "우는거 맞는데?" "니가 이상한 소리하니까 그런 거잖아!" 괜히 화를 내는 루시아. 화내는 모습이 그렇게 귀엽고 예쁠 수 없다. 난 아이들이 어버이날 선물해준 손수건으로 루시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안해. 하지만 내가 너 사랑하는 건 알지?" "그런거 몰라." "헉, 모,모른다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루시아는 고개를 돌리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느기는 거지만, 루시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예쁘다. 루시아는 살짝 몸을 떨었다. 얇은 잠옷 한 벌만 입고 있어서 추운가 보다. 난 루시아의 어꺠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이만 들어갈까?"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그만 더 있을래." 난 옥상 한쪽에 있는 의자로 루시아를 데려갔다. 그곳은 지니가 만들어 놓은 흡연실로 긴의자와 쓰레기통을 겸한 재떨이가 있었다. 여기에 비를 막기 위한 투명 플라스틱 천장까지 설치되어 있어, 마치 버스 정류장 같은 모습이다. 우리는 그곳에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있으니까 참 좋다. 그치?" "응." 루시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향그한 샴푸향이 코를 간질인다. 그 순간이었다. 별똥별 하나가 밤하늘에 긴 꼬리를 남기며 떨어져 내렸다. 누가 메테오 스웜(meteor Swarm)이라도 쓴 건가? 옛말에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했다. 난 재빨리 수원을 빌었다. 루시아와 하게 해주세요. 루시아와 하게 해주세요. 루시아와 하게 해주세요. 별똥별이 사라지기 직전까지 무려 세번이나 빌었다. 응? 뭘 하게 해달라는 거냐고? "......." 그야 뭐... 그냥 이거저거...... 이거저거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난감해진다. 으음, 난 구체적으로 루시아와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물론 궁극적 목표야 당연 그렇고 그런 짓(?)을 해서 라이에게 동생을 만들어주는 거다. 그런데 그렇고 그런 짓이 뭐냐고 묻는다면 또 난감해진다. "뭘 하게 해달라는 거야?" "응?" "나랑 하게 해달라며?" "......." 속으로 빌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나도 모르게 말한건가? "아,아니, 그냥 너랑 행복하게 해달라는 의미야. 결코 이상한 뜻은 아니야."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이상한 뜻을 담고 있었으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려 그랬는데." "헉! 저, 정말? 사실은 너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어." "......." 싸늘해지는 루시아의 눈빛. "왜, 왜 그래?" "......." "내, 내가 뭐 실수라도......" "......." 실수한 게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순 엘프들도 안 걸릴 법한 이런 유도심문에 걸려 들다니! 아아~ 한떄 잔머리으 ㅣ황제라 불렸던 나의 지능 지수가 점점 하락하는구나. "불결해." "헉! 부, 불결하다니......." "남자들은 항상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뭐, 항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 난 루시아의 어꺠를 붙잡으며 말했다. "널 사랑하기 떄문에 그래." "뭐?" "널 사랑하기 떄문에 너랑 같이 있고 싶고, 너랑 키스하고 싶고, 너랑 그렇고 그런....아, 아무튼 그런 거야. 다른 건 몰라도 널 사랑한다는 것만큼 알아주길 바래. 널 사랑하는 마음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어."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 좀 하지마. 부끄럽단 말이야."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아아~ 수줍어하는 모습도 너무 예쁘다. "하게 해줄게." "뭐?" "하게 해준다고." "저, 정말?" "단 키스까지만이야." "......." 개인적으로 좀더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뭐, 급하게 욕심낼 필요는 없겠지. 기회는 언제든 있으니까. 난 루시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오늘은 여기까지로 만족하지만 다음번에는 반드시... * * * * * * (옮긴이 : ErwinRommel) ------------------------------------------------------------------------------------- 아침이 밝았다. 새 집에서 처음으로 맞는 아침이다. .......라지만 어제 이사하느라 피곤했기 떄문인지 12시가 훌쩍 넘었다. 난 기지개를 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루는 먼저 일어났는지 옆에 없었다. 난 눈을 비비며 방을 나섰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난 부엌으로 향했다. "아! 일어나셧어요, 히로님?" "잘 잤어?" 인디가 루시아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게 아침이야, 점심이야?" "아침. 다들 이사 떄문에 피곤했는지 늦게 일어났어. 나도 얼마 전에 일어났고." "그래?" 앞치마를 걸친 루시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조금만 기다려.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으응." 앞치마가 매우 잘 어울리는 루시아. 마치 집안일 하는 아내 같은 모습이다. 그 아내가 루시아면 진짜 좋겠다. 난 식탁에 앉아 루시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오빠아~." "혀엉~." 그새 나타나는 방해꾼들. 니들 왜 안 나타나나 했다. 난 제일 먼저 달려온 라이를 안아 들었다. "잘 잤니?" "예. 침대가 막막 푹신푹신해서 막막 잘 잤어요." "루비도 잘 잤어요. 침대가 넓어서 막막 좋아요." "저도 잘 잤어요." 아이들 표정이 장난 아니게 밝아 보인다. 방긋방긋 생긋생긋 으쓱으쓱 이 정도 표정이면 어린이날과 맞먹을 정도군. 어지간히 새 집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동안 그 좁은 집에서 살앗으니 새집이 좋긴 하겠지. "아침 먹자, 얘들아." "네에~!" 루시아의 말에 자리에 착석하는 아이들. 조금 있자 일루니아 여사님과 지니, 크로니스도 나왔다. "라이레얼과 카르는?" "두 분은 지금 주무시는 중이에요. 나중에 깨시면 따로 차려드릴테니 먼저 드세요." "그래, 너도 어서 앉으려무나." "네." 이젠 식탁이 커서 무려 11명이나 같이 앉을 수 있다. 즉, 나 , 루시아, 라이,루비,일루니아 여산미, 인디, 지니, 크로니스,라이레얼,카르가 한번에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거다. 아아~ 그동안 의자가 모자라 방바닥에 앉아 밥을 먹어야 했던 오욕과 굴욕의 세월이여 이젠 안녕~ "먹자". 원래 식탁에서는 가장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다른 식구들이 먹을 수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었기에 이정도 예의는 당연한 거다. 그런데 어째서 저것들은 감히 가장인 내가 수저를 들기도 전에 젓가락질을 하는 걸까?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 엘프들. 오늘은 즐거운 이사 첫날이니 참고 넘어가 주지만 내일부터는 따끔하게 혼내리라. 밥을 다 먹은 아이들은 당당하게 밥그릇을 내미었다. "한 그릇 더 주세요오~!" "........" 집안 살림 거덜나는 거 순식간이다. 밥값도 안 하는 것들이 먹긴 엄청 먹는군. "그래, 많이 먹어, 애들아." 루시아는 많이 먹는 애들이 기특한지 밥을 한가득 퍼주었다. 다시금 밥 먹는 데 열중하는 아이들. 쟤들 먹는 건 다 어디로 가는 걸까? 피와 살이 되는 것같지는 않은데. "오빠,오빠. 이것 좀 드세요. 막막 맛있어요." 내 밥 위에 계란말이 하나를 올려놓는 루비. "........" 으음, 그래도 이렇게 예쁜 짓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자기들 밥 먹는 것도 바쁠텐데 나까지 챙겨주다니! "우리 루비는 정말 귀엽고 착한 엘프구니." "헤헤~ 오빠한테 칭찬 들었다." 그렇게 말하며 나한테 비비적거리는 루비 그러자 이번에는 라이가 밥을 김에 싸서 내밀었다. "아~ 하세요, 오빠. 라이가 먹여드릴게요." "응, 그래. 아~." 오물오물. "맛있어요?" "응, 라이가 먹여주니까 막막 맛있어." "헤헤~ 라이는 오빠가 원하면 언제든 먹여드릴 수 있어요." 갑자기 식탁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해진다. 하지만 루시아는 질투의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좋겠어. 애들한테 예쁨이나 받고." "조, 좋기는......난 애들한테 받는 것보다......" '너한테 예쁨받고싶어'라고 말하려는데, 루시아의 눈빛이 더욱 안 좋아졌다. 마치 루시아 주위에만 폭풍이 휘몰아치는 느낌이다. "이거 드세요, 누나." "으응." 다행히 루가 나서면서 루시아의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루는 루시아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제가 누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나도 잘 알죠?" "응, 누나도 루가 좋아." "헤헤~." "........" 감히 남자인 주제에 루시아에게 접근하다니! 루 저 녀석혹시 루시아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거 아니야? 루시아는 엘프 이상의 미모를 지녔으니, 엘프인 루가 반할수도 있을것이다. 루시아를 넘보는 것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난 이를 박박갈며 루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라이와 루비에게 속삭였다. "니들도 어서 루시아 언니한테도 애정 표현을 하렴. 그래서 루를 언니 옆에 떨어뜨려놔. 알았지?" "예." 나의 특명을 받은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에게 마구 애교를 떨어댔고, 싸늘하던 루시아의 표정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조용히 식사를 끝마쳤다. 가사 드래곤 이닏는 설거지를 했고, 루시아는 인디를 도와주겠다며 옆에 남았다. 일루니아 여ㅑ사님과 크로니스는 책을 읽으러 방에 들어갔고, 어린 엘프들은 놀이방으로 갔다. 난 지니에게 물었다. "자이나레스 대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아이리스 왕국의 공작이자 8클래스를 마스터한 마법사 아이언스 히로가 남긴 말을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제 어찌 그분이 남긴 말씀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한번 읊어 보시지요." "식후연초면 불로장생이라 하셧습니다." "뜻도 알고 계시겠지요?" "밥 먹고 나서 피는 담배는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지름길이란 뜻입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진정한 앎이란 실천이 동반돼야 하는 것입니다. 큰 깨달읆을 얻었다 한들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럼 실천하러 가볼까요?" "아이언스 공작님을 따르겠습니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루시아가 한마디 했다. "그냥 담배피러 가자고 말하면 될 걸 뭘 그렇게 복잡하게 말해?" "........" 이 편이 더 폼 나지 않나? "많이 피지 마." "헉! 설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누, 누가 걱정한다 그래! 그, 그냥 적당히 피라는.....너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괜히 화를 내는 루시아 하지만 나는 그녀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널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필게." "흥! 됐어!" 난 지니와 함께 옥상으로 향했다. 이ㅣ번에는 현관문을 나가 계단을 통해 오라갔다. "그러고 보면 계단으로 올라올 수도 있군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오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즉, 우리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올 수 없다. 하지만 계딴으로 올라오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계단문에도 전자식 잠금장치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만약 타인의 5층 출입을 막고 싶으시다면, 계단문을 잠그시면 됩니다. 비밀번호는 엘리베이터와 마찬가지로 0015입니다."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군요. 거의 타워팰리스 보안과 맞먹네요." "이 집을 설계할 때 가장 염두해 둔 것이 보안과 사생활 보호 입니다. 바로 아래층이 유치원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사생활이 크게 위협받을수도 있습니다." "흐음, 그건 그렇군요." 스머프만한 건들이 집까지 들어와 설친다고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옥상으로 올라간 우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맛 죽이는군. 열심히 담배를 피며 담소를 나누는데 누군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질질 끌며 오는 여자. 머리는 포니테일 스타일, 앞머리카락은 이마를 살짝 덮고 있다. 헉! 저 애는 나의 사촌여동생 영아가 아닌가? 필며은 앞ㅈ짱구걸.....이 아닌 샤프걸. 현재 책상자 출판사에서 야오이, 백합물, 판타지 등등을 집필하고 있는 인기 작가. "박영아님이시군요." "맞는 것 같네요. 그런데 쟤가 여기엔 어쩐 일로 왔을까요?" 난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다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순식간에 1층으로 내려간 나는 건물 앞까지 온 영아를 맞이했다. "어쩐 일로 또 등장했니? 너 6권 단발 출연 아니었어?" "영웅 오빠......." 영아는 날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왜, 왜 그러니?" "우아아앙!" 영아는 내 품에 뛰어들며 울음을 터트렸다. 난 당혹스러웠지만, 일단 애부터 달래고 봐야한다는 생각으로 토닥여주었다. 토닥토닥.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만 울렴. 니가 울면 이 오빠 가슴이 아프....지는 않지만, 귀가 아프단다." 영아를 계속해서 건물 밖에 세워 놓을 수는 없었기에, 일단 집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리하여 이곳은 집 안. 루시아는 영아의 재등장에 놀랐지만, 별 다른 말없이 주스를 내어 왔다. ------------------- 너무 쓰다보니 오타가 계속생겨요 놀랐지만---->노랄지랐ㅁㅏ ----------------------- "무슨 일이야?" 루시아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리. 옥상에서 담배 피고 있는데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마중 나갔는데, 갑자기 날 보더니 펑펑 우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일단 데리고 올라왔지." "니가 울린거 아니야?" "아, 아니야. 내가 여자애나 울리는 그런 남자로 보여?" "응, 니 주특기가 라이와 루비 울리는 거잖아." "........" 그것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 "혹시 이상한 짓 한 거 아냐?" "헉! 이, 이상한 짓이라니.....영아는 내 사촌동생이야!" "그래?"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반문하는 루시아. 나를 짐승으로 보고 있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루시아? 나, 난 짐승이 아니야! ....라고 소리쳐봐야 루시아는 믿지 않겠지? 영아는 훌쩍거리며 주스를 마셧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니?" "오빠 집에 찾아갔는데 이사 갔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가게로 오면 오빠가 있을 줄 알았지. 그런데 그 아파트 분위기 되게 흉흉하더라. 오빠 이사하기 전에 무슨 사고라도 쳤어?" "........" 사고라면 사고겠지. 우리 집 떄문에 집값이 5천만원이나 떨어졌으니...... 영아는 부엌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 집 되게 좋다. 거실도 넓고, 부엌도 넓고, 방도 많고......" "그치? 내가 이집 마련하느라 얼마나 고생햇는지 알기나 하니? 은행에 진 빚을 생각하면... 아아~ 언제 다 갚을 수있을지......" 빚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나저나 여기에는 어쩐 일이니? 게다가 그 가방은 뭐고?" 영아는 컵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나 학교 그만뒀어." "뭐라? 학교를 그만 둬?" "응. 자퇴서 제출하고 오는 길이야." "자퇴서?" "응." "그럼 대학을 때려치웠단 말이야?" "응."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아. 난 할말을 잃었다. "어쨰서?" "내가 생각하던 곳이랑은 완전히 다르더라고. 그래서 떄려치웠어." "어떻게 다른데?" "난 국어국문과라고 하면 국어와 국문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줄 알았거든. 그래서 열심히 배웠어." "국어국문과가 국어과 구문을 가르쳐주는 곳 아니야?" "가르쳐 주긴 가르쳐 주지 .그런데 제일 먼저 가르쳐주는것이 영어와 컴퓨터야. 그거 못하면 졸업 못한다나 뭐라나 하며. 그리고 국어와 국문에 대해 가르치는 것도 다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더라고. 고등학교에서 배우던 판에 박힌 수업과 다른 점을 못 찾겠어. 차라리 혼자 공부하는게 낫겠더라고." "........" 이런말 하기는 뭐 하지만 우리나라 대학 수준이 원래 이렇다. 창조적인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대한은 진짜 몇 안 된다. 상당수 대학들이 등록금 장사에만 열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내놓으라 하는 명문대인 서울대가 세계 10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한다. 이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정확히 말해주는 거라 생각한다. 이 좁은 나라 안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로 대표되는 1류 대학을 가기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12년 동안 코피 터지게 공부한다. 학교 끝나면 보충수업, 보충수업 끝나면 학원, 학원 끝나면 과외 끝나면 다시 학교.....하루 4시간씩 자며 사교육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다 대학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단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없다.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남들보다 뒤처지게 된다. 남들만큼 공부해서는 결코 앞지를 수 없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밟고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에 입학했다 치자. 하지만 서울대는 우리나라에서만 최고일 뿐, 정작 세계 100개 대학에는 끼지도 못한다. 대체 뭘 위한 교육인지 이해가 되자 않는다. 연간 10조원이 넘는 사교육비를 퍼부에서 배운게 뭔가? 국어? 객관식에서 답 맞추는 것만 배웠다. 수능은 만점이라도 글쓰기실력은 형편없다. 영어? 국제화 시대에 사교육까지 받아서 영어 배우는것 좋다. 읽도 답 맞추는건 완벽한데, 외국인 만나면 말은 한마디도 못한다. 영어교육이아닌, '수능용'영어 교육이다. 수학? 수학 좋다. 그런데 문과생이 수학 만점 받아서 뭐할 건데? 10조원이 넘는 사교육비는 학생의 능력을 키우는 데 쓰인 것이아니라, 내신 등급 올리고 수능 점수 올리는 데 쓰였다. 삽질도 이만한 삽질이 없다. 게다가 대학에 입학해서도 문제다. 고등학교 때까지 목숨 걸고 공부하느라 지친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 탈진한다. 그때부터 공부는 때려치우고 놀기 시작한다. 부모들도 '자식 대학까지 보내놨으니 할일 다 했다'라고 생각하는지 손 털고 일어선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려고 해도 문제다. 우리나라 대학교육은 형편없는 수준이고, 학생들 역시 수능 점수만 잘 받았지 정작 기초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모두가 대학에 가려도 발버둥을 치는 걸 보면 이 나라도 참 이상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 떄문에 학교를 그만 둔 거야? 배울 게 없어서?" "게다가 교수가 내 글을 마구 씹잖아." "뭐?" (옮긴이 : ErwinRommel) [8]------------------------------------------------------------------------------------- "순문학이 어쩌고 저꺼고 하며, 니글은 문학성이 떨어지니 어쩌니 하더라." "진짜?" "응, 할일이 없어서 야오이나 판타지 같은 걸 쓰고 있냐고 욕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러는 교수님은 그런 글이라도 쓸 수 있나요' 라고.? "그러니까 뭐래?" "자기는 그딴 글 안 쓴대. 진정한 문학이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거라면서, 그딴 쓰레기 같은 글을 쓸 바에는 목매달고 죽겠대." "그래서?" "그래서 내가 '그럼 목매달고 죽으세요'라고 했지." "......." 대략 상상이 간다. 영아의 인기가 현재 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서명대 국어국문과 학생들은 영아가 작가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을것이다. 영아가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교수는 영아의 글을 찾아 읽어 보았을 테고, 평생을 순문학 외길에 바쳐온 교수는 대중의 인기를 끌기 위한 영아의 글이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좀 설명해줄래?" "그러니까 수업 시간이었는데......." 오전 9시. 서명대학교 국어국문과 1학년 문학의 이론과 실제 수업 시간. 담당 교수는 유온덕. 유온덕 교수는 진정한 문학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에 대해 얘기하던 중 영아를 일으켜 세웠다. '학생이 쓴 책은 잘 읽어보았네.' '아! 그러셧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학생은 자신이 쓴 글을 문학이라 생각하나?' 좀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자 교수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문학은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을 말하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모든 글은 문학인가?"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애매한 대답이군." "하나의 글이 문학이냐 아니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글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의 기준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 니다. 그렇다고 평론가들 말이 전부 맞는 것도 아니니까요. 결국 글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릭는 사람이 아닐까요?" "아까 문학은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라 말했는 데, 그럼 학생은 자신의 글을 예술이라 생각하나" "그 역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그럼 학생의 글과 이상의 글 중 어느 쪽이 더 예술에 가까울까?" 교수는 영아를 점점 궁지로 몰아갔다. 하지만 영아는 조금도 밀 리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예술에 순위를 매기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교수는 인상이 써지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나는 예술이란 혼을 담아야하는 거라고 생각하네. 핵상의 글에 는 학생의 혼이 담겨 있나?" "물론이에요. 제가 쓴 글에 제 혼이 담겨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시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교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진정한 문학이란 작가의 혼이 담긴 거을 뜻하지. 그런데 내가 읽어본 바로는 학생의 글에는 혼이 담겨져 있지 않았어. 그 글에 개 성이 어디 있고, 예술이 어디 있나? 그건 그저 대중의 인기에 부합 하기 위한 저속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네." 영아는 교수가 그런 말을 할 거라 예상했기에 별로 놀라지도 않 았다. "저는 순문한가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에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읽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에요. 제 글이 문학이 아 니고 예술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저는 소설을 통해 지식과 교양 만이 아닌, 즐거움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학생의 글은 어릿광대의 서커스나 다름없네." "정말요? 다행이네요. 전 그런 목적으로 글을 쓴 거거든요. 제 글 을 읽는 독자들이 그 글을 보며 즐거워하고, 감도을 받을 수 있도록 이요.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제 의도가 잘 통한 것 같아 기쁘네요." 교실 분위기는 점점 냉각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웃지도 못 하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교수와 영아읭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야오이나 판타지는 문학이라 할 수 없네." "그럼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어슐러 K르귄의 어스시의 마법사 등도 문학이 아닌 가요?" "서구 판타지와 한국 판타지는 그 근본부터가 다르네. 서구 판타 지가 문학이라면, 한국 판타지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지." "교수님께서는 문화적 사대주의에 빠져 계시네요. 수준 이하의 작품들도 많이 출판되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것만 가지고 한국 판 타지 전체를 쓰레기로 몰아붙이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판타지라고 해봐야 고등학생이 판타지세계로 넘어가 깽판 치 는게 전부 아닌가?" "퓨전 판타지 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죠. 퓨전이라는 하나 의 코드로만 고착화 되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퓨전 판타지 소설 자 체를 나쁘게 볼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극심한 입시경쟁으 로 인한 청소년들의 탈출 심리에 의해 탄생했다고 봐요. 즉, 우리나 라의 특성에 맞는 나름대로 한국식 판타지라는 거죠. 무엇보다 한국 판타지라는 게 생긴 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어 요. 이제 걸음마 하고 있는 아이한테 걷고 뛰는 걸 천천히 가르쳐야 지, 넌 왜이 렇게 못뛰냐 라고 욕해서야 되겠어요?" "대중의 인기에 부합해 돈이나 벌어 보려고 쓰는 글은 글이 아닌 쓰레기에 불과하네." "문학성 있는 글만 글이고 상업적 글은 글이 아니라면, 예술 영화 만 영화고 액션 영화나 패러디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는 뜻인가요?" "글과 영화는 엄연히 다르네." "뭐가 다르죠? 둘 다 예술 아닌가요?" "......." 교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영아는 제차 물었다. "어째서 웃고 즐기자고 쓰는 글이 쓰레기에요? 웃고 즐기자고 쓴 글을 가지고 문학성 어쩌구 하면서 따지는 게 더 우스운 거 아닌가 요? 저는 문학이나 예술 같은 거 하나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요. 전 제 입으로 문학이나 예술한다고 떠벌린 적도 없고, 그런 대 접 받는 거 원하지도 않아요. 그저 제가 즐거워서 글을 쓰고, 그런 제 글을 일고, 웃고 감동받는 독자들이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게 뭐가 잘못된 거죠?" 영아는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망ㅅ긴을 주려고 영아를 일으켜 세웠던 교수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났다. 더 욱 화가 나는 것은 교실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영아의 말에 공감하 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소리쳤다. "할일이 없어서 야오이나 판타지 같은 쓰레기를 쓰는 주제에 지 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분노를 잃었는지 막나가는 교수. 영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교수님은 그런 글이라도 쓸 수 있나요?" "그 딴 글은 안써! 그딴 쓰레기를 쓸 바에는 목매달고 죽어버리고 만다!" "그럼 목매달고 죽으세요." "........뭐?" "모든 문화는 다양성이 보장돼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고인 물은 썩는다고 다양성이 없는 문화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겠어요? 교수 님의 말씀대로라면 문학성 있는 글만이 가치가 있다는 건데, 그럼 모든 대중 소설은 폐기돼야 하나요? 그렇게 해서 문학성 ㅣㅆ는 글 만 시장에 남으면 사람들이 계속 책을 읽을 것 같아요? 그리고 상 업적 소설을 우습게 보시는데, 교수님께서 그 정도 팔리는 글을 쓰실 수나 있을 것 같아요? 제 반만이라도 팔아보고 그런 헛소릴 늘어놓 으시죠. 그럼 저도 한번쯤 고려해 볼게요." "이..이........." "교수님도 옛날에 책을 스셧죠?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한번 찾아 읽어봤어요. 읽어보니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겟던데요. 제 가 보기엔 그냥 자기 잘난 맛에 헛소리만 늘어놓은 것 같더라고요. 책 찾는 것ㅅ도 정말 힘들었어요. 서점 직원이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 던 걸 간신히 찾아서 주던데요. 물어보니까 더럽게 안 팔렸다고 하 더라고요." "으으......." 교수의 얼굴은 이제 빨가낵을 넘어 파란색으로 변해가는 중이었 다. 그야말로 폭발 일보직전. 영아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이유가 뭔지 궁금했는데, 오늘 교수님을 만나보니 알 것 같네 요.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남에 게 이해시킬 수 있겠어요? 자신의 생각만을 진리라 믿고 상대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어요? 진짜 스레기는 교수님이고, 진짜 더러운 것은 교수님의 그 입이에요. 그 런글 써놓은 주제에 자신이 잘난 걸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독 자들이나 욕했겠죠. 이제 확실히 알았어요. 교수님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정말로 문학을 하는 사람은 다양성을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알아요. 교수님은 독선과 아집에 빠져서 자신만의 세계 에 살아가는 더럽고 비열한 인간이에요." 실제로 유온덕 교수는 몇 번 책을 출간했지만, 더럽게 안 팔렸 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세상이 자신의 천재성을 몰라봐 준다며, 진정한 문학은 죽었다며,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독자들을 욕하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는 자신을 정당화 시키고 싶었다. 영아는 그런 그의 아픈 부분을 마구 건드렸다. 결국 견디지 못한 교수는 폭발했다. "이, 이년이......커헉!" 뒷골을 잡으며 쓰러지는 교수. 깝짝 놀라 교수에게 뛰어가는 학 생들. 영아는 그 길로 짐을 싸서 교실을 나왔다 .그리고 기숙사에 가서 짐을 챙기고 자퇴서를 제출했다. "교수 하나를 완전히 넉다운 시켰단 거군" "응." 짝짝짝 난 크게 감동 받은 나머지 박수를 쳤다. "브라보! 과연 내 사촌여동생답구나. 아주 잘했다." 난 영아의 머리를 스다듬어 주었다. 그것도 그냥 쓰다듬어 준 것 이 아닌 '머리 쓰다듬기' 스킬로 쓰다듬어 주었다. 이 스킬은 대상자로 하여금 칭찬 받는다는 느낌을 들게 하며 무 한한 행복에 빠트린다. "헤헤~." 엄청 좋아하는 영아. "능력도 없는 주제 큰 소리만 치는 그런 인간만큼 한심한 인간이 또 없지. 그나저나 그 교수 어떻게 됐니?"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어." "그렇구나.": 아아~ 세 치 혀로도 사람을 죽일수 있다는 말을 누가 거짓이라 했는가? 그 교수는 퇴원해서도 학생들에게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쪽 팔려서.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수가 됬을까?" "그냥 교수도 아니고 주임 교수야. 재단 자상의 친척이라더라." "역시......." 우리나라 사학이 다 그렇지, 뭐. 사실상 사학을 견제할 만한 수단이 없다보니, 실력이 있는 교수보다는 재단에 충성하고 뒷던 찔러 넣는 교수가 교단에 선다. 물론 모든 교수가 실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교수 임명권이 재단에 있다보니 그런비리가 자주 발생하고, 그런 비리가 발생을 해도 막을 수 없다는게 문제다. 참교육을 실천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등록금을 올려 뒷돈 챙기려는 사학들을 볼 때마다 한심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나라 교육이 이 모양이지. "아주 잘했어, 영아야. 그런 교수는 완전히 보내버리는 게 우리나라 대학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거야." "응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빠." 영아의 앞짱구도 계속 보니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만지기도 좋고. 으음, 이거 은근히 쓰다듬는 맛이 이쑥ㄴ. "그래서 우리집으로 온거야?" "응." "큰아버지랑 큰어머니께는 말씀 드렸어?" "......." 대답이 없는 영아.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말씀 안드렸나 보네." "으응, 사실 자퇴서 낼 때까지만 해도 잊고 있었는데, 아까 오빠 얼굴보니까 엄마 아빠 생각이 났어." "그래서 운거야?" "응." "그래서 운 거래, 루시아. 이제 나의 결백을 믿어 주는 거지?" "그러니까 평소에 믿게 행동을 하란 말이야." (옮긴이 : ErwinRommel 카페 : 플러스 판타지) "......" 너무해. 나만큼 평초 착하게 사는 ㅏㅅ람이 어디 있다고.... "그럼 이제 어쩔 새각이야?" "몰라." "학교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자퇴서 취소도 가능하지 않나?" "절대 없어. 대학이 내 꿈을 펼치기 위해 도움이 될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방해만 될 뿐이야. 난 혼자서 내 갈 길을 갈 테야! ------------ 카페 청소로써 인하여 내용(14p분량)이 빠졋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빠진부분은 별 내용 없습니다. ------------ 꼬르륵. "뭐니, 이 추한 소리는?" "추, 추하다니! 생리적 현상을 나보고 어쩌라고?" 영아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부끄럽긴 부끄러웠나 보다. "배고프니?" ".......응."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영아. 나와 루시아는 영아를 데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부엌으로 갔다. 루시아가 밥을 차려주자 영아는 허겁지겁 먹었다. "물 좀 마시면서 먹어라. 체하겠다." 얘 먹는 모습이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냐? 누가 며칠 굶겼나? 얼굴에 밥풀까지 묻혀가며 맛있게 먹는 영아. 먹기 시작한 지 5 분도 안 되서 나에게 빈 밥그릇을 내밀었다. "뭐니, 이 빈 밥그릇의 의미는? 설마 한 그릇 더 먹어서 이 집 살 림을 거덜 내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겨우 밥 한 그릇 가지고 졔졔하게 굴 거야? 밥값도 따로 낸다니 까!" "그래, 장부에 달아두마." 난 궁시렁거리며 밥을 한가득 퍼주었다. 다시 먹기 시작하는 영아. 난 식탁에 팔을 괴고 앉아 영아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먹 기는 꽤 많이 먹는 듯 한데 몸매는 약간 말랐다. 빈약하다고 해야 하나? "지금 보니 가슴도 좀 빈약하군." "뭐?" 영아는 수저를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난 대답 대신 루시아를 가리켰다. 그러자 영아는 루시아의 가슴과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보더니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빈약한 게 아니라 언니가 너무 큰 거야!" 그러자 루시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아~ 귀여워라. 부끄러워하는 루시아의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 "그래 그래. 그런 식으로라도 정당화 시키지 않으면 인생 살아가 기 힘들지. 어서 밥이나 먹으렴. 혹시 아니? 지금 섭취하는 영양분 이 가슴으로 가게 될지." "오빠!" 어쨋든 영아는 밥을 다 먹었다. 난 슈트케이스를 옥탑방으로 날 라주었다. 옵탑방은 마치 영아가 들어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모 든 설비가 다 갖추어져 있었다. 책상, 책장, 침대, 소형냉장고, 식기, 에어컨 등등. 당장 들어와 살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혹시 지니는 영아가 들어올 ㅓㄳ을 예상한 게 아닐까?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해 놨지? 새삼 지니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영아는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노트북과 옷가지, 책이 전 부다. 그사이 나는 집주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물은 잘 나 오나, 화장실은 어떤가 점검해 보았다. "온수와 냉수 모두 잘 나오는군. 화장실도 깨끗하게 잘 되어 있 고. 욕조가 없다는 건 좀 아쉽군. 혹시라도 목욕하고 싶으면 거실 화장실을 사용하렴." "응, 고마워, 오빠." 영아는 피곤한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난 영아의 옆에 앉아 물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께는 말씀 안 드릴 거야? 언젠가는 알게 되 실 테니, 빨리 말하는 게 좋을 텐데." "당분간은 비밀로 할 생각이야. 기숙사 나와서 오빠 집으로 옮겼 다는 것까지만 말씀드릴래. 그러니까 오빠도 말 좀 맞춰줘." "뭐? 지금 나보고 거짓말을 하라는 거야? 난 이제까지 태어나서 거짓말 한 번 안 하고 착실하게 살아온 진실한 청년이야. 사람들은 그런 나를 가리켜 박진실이라고까지 불렀지. 그런 나에게 거짓말 을 할 것을 강요하다니!" ".......섦 ㅏ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오빠?" "가벼운 조크였다." 사실은 박진실이 아니라 박구라라고 불렸었지. "아무튼 오빠가 잘 좀 말해줘. 응?부탁이야."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매달리는 영아. 사촌 여동생의 간절한 부 탁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큰아버지 큰어머니께는 내가 잘 말해둘게." "정말? 오빠, 최고!" 쪽~. 영아는 나를 껴안으며 볼에 입을 맞추었다 "........." 헉! 얘가 무슨 짓을? 설마 나를 노리고 있는 건가? 우리는 사촌지간인데.....그리고 난 루시아 건데....... 나이는 20살이나 먹은 것이 하는 짓은 어린 엘프들과 똑같은 수 준이다. 에휴~ 뭐, 딸 하나 더 생겼다고 치자. "아! 나 책사러 가야하는데. 같이 가자, 오빠." "책?" "응, 글을 쓰다보니 자료서적이 많이 필요하더라고. 기숙사는 다 같이 사는 곳인데다가 좁아서 책을 못 샀는데, 이제 내 집이 생겼으 니 사야지. 여기 빈 책장도 많잖아." 영아의 말대로 빈 책장이 많다. 왜 이렇게 책장을 많이 놓았을까? 지니는 정말로 영아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 "혼자 갔다 와. 난 파곤해서 한잠 더 자야겠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오빠.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훗~ 먹을 거라 날 꼬시려하다니. 나를 어린 엘프들.....이 아니 라 어린아이들만의 특권이다." "오빠 ㄱ아까부터 왜 자구 엘프 엘프 하는거야?" "응? 내, 내가 언제?" "아까부터 계속 어린 엘프들이라고 했잖아." "니가 잘못 들은 거겠지." 영아 앞에서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입에 완전 히 붙어버렸는지 자꾸만 나도 모르게 판타지 세계 용어들이 튀어 나온다. "아니야. 분명히 그렇게 들었어." "아니라면 아닌줄알아. 어디서 오바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야?" 영아가 눈치 챌 것이 두려웠던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 러자 영아는 몸을 움츠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화를 내고 그래?" "내가 언제 화를 냈다 그래? 니가 자꾸 그렇게 싸가지 없이 구니 까 그런 거 아니야?" "누가 그렇게.....아! 설마!" 뭔가가 생각 난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때리는 영아. 헉! 설마 알아 챈 건가? "그 아이들이 엘프!" "헉....." 알아챘구나! 영아가 이렇게 눈치가 빠를 줄야...... 정체를 들켰으니 어쩔 수 없다. 이대로 살인 멸구를.....해선 안 되려나? 사실 살인멸구만큼 간단한 방법이 없다. 하지만 영아는 나의 사 촌여동생이다. 비록 빅장 40단 콤보에 자비심이란 없다고 하나, 내 어찌 핏줄을 죽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영아가 FBI나 CIA, 국가 정보원 등에 이 사실을 알린다면 큰일이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전 세계 사람들과 맞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제일 좋은 것은 영아가 이대로 입을 다물어 주는 것이지만, 사람 인 이상 영원히 비밀을 지킬 거라 기대할 수는 없다. 모든 소설책과 역사책을 살펴봐도 비밀을 아는 사람을 살려둬서 일이 잘 되는 꼴을 한번도 못 봤다. 우리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영아를 죽여야겠지만, 나를 믿고 여기까지 찾아온 순진한 영아를 어떻게....... 아아~ 난 어떡하면 좋지? 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그래. 차라리 모든 진실을 털어 놓자. 일단 모든 것을 설명하고 영아를 이해시키는 거야. 그 다음일은 다음에 생각하자. "맞아, 사실 그 아이들은 진짜 엘프....." "응, 진짜 엘프처럼 예쁘고 귀엽게 생겼어." "응? 그게 무슨 소리?" "그 아이들이 엘프처럼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게 생겨서 걔들을 '어린 엘프들' 이라고 부르는 거 아니었어? 사실 그렇잖아. 걔들이 귀만 길면 정말 엘프 같을 텐데. 꺄아! 생각만 해도 귀여워. 오빠가 왜 걔들을 '어린 엘프들' 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아." "........." 뭐? 그런 거였냐? 괜히 혼자서 페이지 때워 가며 쓸데없는 고민을 했군. "서점이나 가자." "정말?" 이렇게 해서 우리는 집 밖을 나갔다. 일부러 옥탑방 현관문을 통해 나갔다. 옥상의 오른편에는 비상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 역시 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이번에 리모델리응ㄹ 하며 건 물 옆에 새로 설치한 것이다. 소방법에 따라 비상계단이 있어야 한다나? 난 옥탑방 열쇠를 영아에게 건네주었다. "열쇠 간수 잘해. 덜렁거리다 잊어 먹지 말고." "쳇! 나 어린애 아니야, 오빠." "그런데 어디로 책 사러 가는 거야? 교보문고? 영풍문고?" "총판." "총판?" "응, 동대문에 가면 도서 총판장이 있어 .일종의 서적 도매점이 지. 그곳에 가면 책을 20에서 30퍼센트 정도 싸게 살 수 있어." "호오~ 그런 곳이 있단 말인가?" "응, 그러니까 빨리 가자." "그런데 거기가 어디니?" "동대문역." "그럼 차타고 갈까?" "그쪽 도로 사정이 엄청 복잡한데다가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아. 그러니까 그냥 지하철 타고 가자." "흐음, 어쩔 수 없군." 이리해서 우리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한산한 오후 시간대였 기에 자리가 많이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앉은 지 얼마 되 지않아 영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난 잠든 영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영아는 꿈속에서 내 손 길을 느끼는지 웃음을 지었다. 에휴~ 이 어린 것이 그동안 마음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 이 아프다. 내가 영아의 사촌오빠로서 지금부터라도 잘 돌봐줘야지. 왠지 모를 사명감이 불끈 치솟는다. 사실 내가 애 보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오빠........." 잠결에도 나를 찾는 영아. 이는 영아가 나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지니 오빠, 크로니스 오빠...... 헤헤~." ........없다. 대체 무슨 꿈을 꾸기에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좋아하는 거냐? 설마 지니와 크로니스를 덮치는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 영아라면 그러고도 남을 듯. "동대문 다 왔다. 일어나렴." 난 영아를 흔들어 꺠웟다. "응? 벌서 다 왔어?" 상황 파악이 안되는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영아. 난 전철문이 닫히기 전에 영아를 데리고 빠져나왓다. 영아는 크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에이~ 좋은 꿈꾸고 이었는데 오빠 때문에 다 날아갔잖아." "무슨 꿈인데?" "헤헤~ 비밀이야. 아! 이쪽이야 오빠." 난 영아를 따라 총판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동대문은 사람이 많 아서 싫다. 게다가 노점상들도 많아 필연적으로 인도에서 사람끼 리 부딪힌다. 그거도 모자라 인도로 오토바이가 다닌다. 난 그래도 오빠라고 영아가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돟록 보호해 줘야 했다. 아아~ 오빠 역할하기 되게 힘들구나. 다행히 총판은 지하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만화책과 판타지 ,무협, 로맨스 소설 등이 산더미처 럼 쌓여있다. 문 밖에도 책, 책장에도 책, 바닥에도 책...... 그야 말로 사방이 다 책이다. "여기는 주로 대여점주를 상대로 영업을 하는 곳이야. 그래서 대 여점에서 주로 들여놓는 만화와 장르 소설들이 많아." "아! 저기 니 소설도 있다." 한쪽에 영아의 책도 쌓여 있었다. '질투', '교주님이 보고 계셔, '아이미스'까지. 난 총판 아주머니에게 물어봤다. "저 소설들 잘 나가나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디. "예. 잘ㄹ나가요. 저게 요즘 최고의 인기작이에요. 대여점마다 한 권도 아니고 두 권씩 들여놔요." 아주머니의 말에 영아는 입술을 내밀며 귀엽게 웃었다. 자기 책 잘 나간다니 기쁜가 보다. 영아는 돌아다니며 만화책과 소설책을 마구 뽑았다. "그거 다 살 거야?" "응. 이제 할일도 없는데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 몽땅 읽어야지." 처음에는 좀 많이 뽑나 싶엇는데, 시간이 지나자 뽑은 책들이 내 키를 넘어선다. "이거 진짜 다 살 거야?" "응." 쌓여가는 책이 늘어갈수록 주인아주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영아에게 말했다. "돈은 있니?" "응, 나 돈 많아." "........." 지금 내 앞에서 자랑하는 거냐? 그렇게 돈 많으면 불쌍한 오빠한테 적선이라도 좀 하든가. "돈이야 그렇다 치고 이 책을 다 어떻게 들고 갈 건데?" "그건......" 갑자기 얼어붙는 영아. "오빠가 다 들고 갈 수...... 없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무게는 둘째 치고, 부피는 어쩔 건데?" "하, 하긴 그러네. 하아~ 어쩔 수 없네. 몇 궈만 사가고 나머지는 다시 꽂아놓는 수밖에." 영아의 말에 주인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말했다. "괜찮아요, 배달해 드릴게요." "배달도 가능해요?" "원래는 안 해주는게 원칙이지만, 이정도 구매하는데 해드려야지요." "아!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 오타신공 아주머니---->앚뭐니 --------- 영아는 고개를 꾸벽 숙였다. 그리고 마음 놓고 다시 마구 책을 뽑 기 시작했다. "........." 아예 대여점을 차리지 그러니? 영아가 책을 다 뽑고 나자 아주머니가 계산을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30퍼센트 할인이 된다는 것이다. "156만 7천 800원이네요." "........." 20~30퍼센트를 할인하고도 이 정도라니! 난 엄청난 금액에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영아는 마치 당연하다 는 듯 지갑을 뒤적거렸다. "아! 돈이 모자라네. 아까 보니까 여기 옆에 현금인출기 있던데. 돈 좀 뽑아와 줘, 오빠. 비밀번호는 1508이야." "얼마나?" "넉넉하게 3백만워 정도." --------- 비번 1508은 1부 15권과 2부 8권이 분명해...ㅋㅋ --------- "........." 돈이 아주 썩어 나나 보구나. 난 카드를 받아들고 현금인출기로 갔다. 현금 인출기 앞에선 나 는 카드를 집어넣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헉! 이게 다 얼마야?" 난 화면에 나타난 잔액에 혇를 내둘렀다. 영아가 3백만원이라는 돈을 왜 그렇게 쉽게 말했는지 알 것 같군. 순간, '이 돈을 몽땅 인출해서 도망치면 어떨까' 하는 나쁜 생각 이 든다. 사실 현금이 많이 든 카드 같은 것은 남에게 수비게 맡기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돈 몽땅 인출해서 도망치면 그땐 어떡할 건가? "역시 영아는 아직 어려." 영아는 너무 순진하다. 아직 세상을 모르고, 현실을 모른다. 역시나 아직은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건가? 난 영아가 말한 대로 돈을 뽑았다 .전부 현금으로 뽑으면 부피가 크니, 1백만원은 현금으로 2백만원은 수표로. 영아는 그 돈으로 주인아주머니께 돈을 지불했다. 난 배달될 주 소를 적었다. 총판을 나온 영아는 또 어디론가 향했다. "이쪽으로 와, 오빠." "집에 안가?" "아직 몇군데 더 들러야해." "뭐? 책을 그만큼 샀으면 됐지, 또 사려고?" "이번에는 일반 소설이나 교양서 같은 서점용 책이 많은 총판이 야. 작가가 되려면 다양한 책을 읽어야한단 말이야." 영아는 들어서자마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책을 마구 뽑기 시작 했다. 이젠 말릴 생각도 안 든다. 난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영아가 고른 책들 사이에 은근슬 쩍 끼워 넣었다 .참고로 내가 고른 책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101가지 방법', '유명 데이트 코스 50선', '그녀를 공략해서 함락 시키는 A에서 Z까지의 비법' 등등이다. 내가 이런 책들을 고른 것은 교양을 쌓기 위함이지, 결코 다른 생 각이 있어서가 아니다. 책도 편식하면 안 된다. 다양한 책을 읽어 다방면에 고양을 쌓 을 필요가 있다. 난 그런 의미해서 '행복한 동거를 위한 가이드'와 '여자를 빨리 취하게 하는 99가지 술'등을 추가했다. 이번에도 백만원 넘게 나왔다. 하지만 영아는 조금도 놀라지 않 고 결제를 했다. 들고 가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이 책들 역시 배달 시켰다. "이제 끝났냐?" "응, 일단 이정도만 사면 될 것 같아." "그럼 집에 돌아가자. 피곤해 죽겠다." "응, 오빠. 오늘 너무 고마워. 난 오빠같은 사촌오빠가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후후~ 알긴 아는구나. 앞으로도 계속 그려럼."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영아와 나는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사람이 많아 서 서서 가야했다. 그렇게 서서 집까지 돌아오니 녹초가 되었다. "아아~ 피곤해. 빨리 들어가서 목욕하고 싶어." 나와 영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비밀번호 0015인 거 알지?" "응, 전에 말해줬잖아." "지금쯤이면 지니가 니 지문 정보도 입력해 놓았을 거야. 한번 해봐." 여앙는 0015를 누른 다음, 오른속 엄지손가락을 지문인식기에 댔 다. 그러자 엘리베이터는 자동으로 5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잘 되는군." 난 우리 집 현관문 열쇠도 영아에게 주었다. "우리집을 통해 다녀도 되지만, 특별한 일이 아니면 옥상을 통해 나가렴. 그리고 웬만하면 사다리 위의 덮개는 잠그지 마." "왜?" "감시하게, 이 오빠는 너의 보호자로서 너를 관리 감독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단다." "뭐? 관리 감독? 나도 이젠 다 컸단 말이야." "뭐? 이게 다 큰 거야? 난 좀더 클 줄 알아는데, 키는 그렇다 치고, 이쪽이 다 큰 거라면 좀 그렇군." 내가 시선을 가슴 쪽으로 내리자, 영아는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 로 가슴을 가렸다.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리고 이쪽은 좀더 클 거야." "글쎄, 그건 너의 희망사항이 아닐까?" "아, 아니라니까! 분명 큰다니까!" "그래 그래. 나도 정화수 떠놓고 기도해 주마. 우리 영아 가슴 좀 커지게 해달라고 말이야." "오빠!" "아무튼 넌 아직 성인이 아니야. 그러니까 보호자의 보호를 받는 건 당연해. 정 그렇게 보호 받기 싫으면 다른 집 찾아보든가?" "씨잉~." "너 혼자 살면 니가 뭘 ㅏㅎ고 살든 아무 말 안 하겠는데, 넌 지금 내 집에 들어왔어 .그러니 좋든 싫든 오빠 말을 따라줬으면 좋겠 다. 알았지?" "쳇! 알았어. 오빠가 내 보호자야. 이제 됏지?" 결국은 승복하는 영아. 진작 그럴 것이지. 우리는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맜있는 냄새가 풍 겨온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거실에는 커다란 상들이 나란히 있 고, 그 위에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다. "아! 오셧어요, 히로님?" "왓어?" 음식을 나르던 인디와 루시아는 날 보더니 인사를 건넸다. "으응, 그런데 지금 뭐하는거야?" "짐들이 하려구요." "집들이?" "예, 새 집에 이사왓으니 한번 해야지요." "으음, 좋은 생각이긴 하군." 일루니아 여사님과 지니, 크로니스도 집들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 지니 오빠! 크로니스 오빠!" 영아는 지니와 크로니스를 보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한달음 에 뛰어갔다. 지니는 영아를 보더니 예의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옥탑방에 사신다는 얘기 전해 드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뵙게 되 겠네요." "예, 자주 자주 만나요, 오빠." 영아는 고개를 돌려 크로니스를 보았다. "오, 오랜만이에요, 크로니스 오빠." "예." "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영아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크로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야말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크로니스의 매력 중 하나다. 영아는 눈 을 반짝반짝 초롱초롱 빛내며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주 좋아 죽는구만, 죽어. 난 반쯤 사체가 된 영아를 부엌에서 끌어냈다. "하암~ 잘 잤다." 크게 기지개를 피더니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곱을 뗴는 라이레 얼. 그리고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카르. "지금 일어나신 거에요?" "응, 지금 몇 시야?" "글쎄요. 7시 좀 넘었을 걸요?" "뭐? 그럼 넘 ㅜ일찍 일어났네 .다시 자러 가야겠다." 라이레얼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난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침이 아니라 저녁 7시에요." "그래? 진작 그렇게 말하지. 잘 자어? 히로? 좋은 아침." ".......저녁이라니까요." 라이레얼은 언제나처럼 핫팬츠에 탱크톱 차림이었다. 보고 이쓴ㄴ 사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라이레얼의 패션. 아아~ 나야 고마울 따름이다. 난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선이 자꾸만 가슴과 다 리 쪽을 향한다. 안타깝지만 이건 이성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남자의 본능이다. 남자에게 그러지 말 것을 강요하느 ㄴ것은, 레몬을 깨물고도 침을 분 비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다. 남자도 인간인데 어찌 생리적 현상을 역행할 수 있겠는가? 눈곱을 다 떼어낸 라이레얼은 영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 얘는 누구야? 어디서 본 애 같은데." 마치 홀린 듯이 라이레얼을 바라보던 영아는 재빨리 머리와 옷매 무새를 가다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언니. 저는 영웅오빠의사촌여동생인 박영아 라고 해요. 잘 부탁 드려요." 라이레얼은 날 보며 말했다. "얘가 히로 사촌여동생이야?" "예, 전에 말씀 드려쌎ㄶ아요. 오늘부터 옥탑방에서 살기로 했어요." "흐음, 그래?" 영아는 라이레얼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일을 열었다. "저, 저기요,언니.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돈 들어가지 않는거면 다 들어줄게." "하, 한번만 안아주시겠어요?" "뭐?" 난 어이가 없어 물었고, 그 순간 카르가 소리쳤다. "안 돼! 절대 안 돼! 감히 인간 주제에 나의 언니를 넘보다니! 가 만두지 않겠어!" 영아를 향해 살기를 마구 뿜어대는 카르. 금당이라도 영아를 얼 려 죽일 것 같은 모습이다. 내가 깜짝 놀라 카르를 진정시키려는데, 라이레얼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만둬, 카르." "그,그치만, 언니.....얘가 언니한테...." "그만 두라면 그만 둬. 지금 내 말을 거역하는 거야?" "흑~ 아니에요, 언니." "뭘 잘했다고 울어?" "흑흑~ 죄송해요." 라이레얼의 싸늘한 태도에 카르는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지 더욱 눈물을 쏟아냈다. "울지 마." "네, 언니. 흑흑....." 라이레얼의 명령에 카르는 억지로 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 울 음이라는 게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춰지는 것이 아니다. 칼느느 뭐 가 그렇게 서러운지 아까보다 더욱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면 서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흐끅, 흐끅~." 보고 있기 불쌍할 정도로 슬프게 우는 카르. 얼음 인형 같은 카르 가 우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내 마음이 아프다. 난 조심스럽게 카르의 어꺠에 손을 얹었다. 라이레얼은 두 팔을 벌려 영아를 꼭 안아주엇다. 영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언니....." 기절할 듯 행복해하는 영아. 카르는 그 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는지 눈물을 흩뿌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지금 카르가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을 거ㅏㅅ 같은 느낌이 들 엇다. 사랑하는 언니가 다른 여자를 ㅏㅇㄴ고 있으니, 카르의 마음이 얼마 나 아플까? 라이레얼은 이런 카르의 마음도 몰라주고...... "이제 됏지?" 라이레얼은 손을 ㅜㅍㄹ자 영아는 다리가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 았다. 난 재빨리 영아를 부축해주었다. "그런데 이 상은 뭐야?" "지금부터 집들이 할 거래요. 그러니까 라이레얼도 씻고 나오세요." "안 그래도 가려워 죽겠어. 한번 씻어야 할 것 같아. 히로가 씻겨줄래?" "/......헉!" "뭘 ㅡㄱ래 놀래?" "워, 원하신다면 얼마든지......가 아니라 그냥 카르와 둘이서 씻 으세요." 난 카르가 눈물 맺힌 눈동자로 나를 얼려죽일 듯 노려보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을 바ㅜ것다. 라이레얼은 화장실로 향했고, 카르는 놓 칠세라 재빨리 라이레얼에게 매달려싿. "어, 언니......" 라이레얼의 뒷모습을 눈을 초롱초롱 반짝반짝 빛내며 바라보는 영아. 완전히 라이레얼에게 반한 것 같다. "........." 이젠 백합물을 글이 아닌 몸으로 쓰나? 난 영아를 소파에 앉혀놓고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 "뭘?'" "지니가 좋아 ,크로니스가 좋아, 라이레얼이 좋아?" "그, 그건......" "중요한 질문이니까 진지하게 생각해서 대답해." 눈을 감고 고민하는 영아. 한참 생각하더니 눈을 뜬다. "누가 좋아?" "모,몰라. 난 셋다 똑같이 좋은걸.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다. 아아~ 그냥 셋을 다 가지면 좋을 텐데." "........." 조크하냐? 그나저나 남자고 좋고, 여자도 좋다니. 과연 백합물의 대가답군(그런데 이거 관련이 있는 건가?) 그러는 사이 집들이 준비가 끝이 났다. 온 가족이 상 주위에 옹기 종기 모여 앉았다. 옛날에는 거실이 좁아 상을 놓으면 공간이 거의 남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을 놔도 공간이 많이 남는다. 사방이 탁 트인 이 느낌. 정말 너무 좋다. 라이레얼과 카르도 씻고 나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영아는 재빨 리 라이레얼의 왼편을 차지했다.(오른편에는 카르가 앉아 있었다). 카 르는 저리 가라는 손짓을 하며 얼려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았 지만, 영아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게다가 영아의 오른편은 크 로니스고, 맞은편은 지니다. 그야말로 최상의 자리다. "그럼 집들이를 시작하기 전에 이 집 주인이시자 가장이시고, 그 명성이 하늘을 찌르시는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신 아이언스 공작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와아!" 짝짝짝. 지니의 말에 일제히 박수를 치는 어린 엘프 일동. 내가 '박수 소 리가 작다'라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어린 엘프들은 더욱 세게 박 수를 쳤다. 짝짝짝! 이정도는 돼야지. 난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았다. "일단 이 자리에 모여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라이랑 루비 지금 뭐하니? 설마 이 오빠가 말씀하시는 데 돼지고기를 먹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나의 날카로운 시선에 라이와 루비는 뻗었던 손을 회수했다. "그리고 루 너는 쟤들보다 앞서 머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앗니? 지금 돼지고기 입속에 있는거 다 안다. 이따 끝나고 보자꾸나." 루는 투덜거리며 입안의 음식물을 삼켰다. 난 아이들을 한번 쨰려봐주고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신 분들꼐 다시 한번 감사의 말 씀드립니다. 참고로 오늘부로 식구가 한 명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 다. 영아야 일어나서 인사하렴." 내가 손짓하자 영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 모이는 시 선이 부담스러운지 영아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인사했다. "저는 박영아라고 합니다. 영웅 오빠의 사촌여동생이구 요...... 으음, 직업은 작가에요. 꿈은 독자들이 ㄱ제글을 읽으며 즐 거워하고 감동받을수 있도록 좋은 글을 쓰는거에요. 아, 아무튼 잘부탁드립니다." 나름대로 진솔한 자기 소개. 영아가 다시 고개를 숙이자 온 가족이 박수를 쳤다. 그런데 이 박 수를 틈타 고기 하나씩을 입에 넣는 라이와 루비는 대체 어떻게 된 애들일까? 재빨리 고기를 손으로 집어 입에 넣고 박수 치는 척하고 있으면 누가 모를거라 생각했니? "그럼 건배를 할까요? 모두 앞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우셧어요?" 이 술은 오늘을 위해 크로니스의 레어에 가져온 과일주다. 뭔 과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과일주에서는 독특한 향기가 났다. 판타지 세계에만 있는 과일인가? "라이의 동생을 위하여!: "........." 뭐야 이 침묵은? 원래대로라면 '위하여!'가 터져 나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짙은 침묵이 깔리는거지?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꺠문채 나를 경멸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 엄청 욕을 퍼부어 대고 있겟지? "하하, 농담들에 정색 하시기는. 새 집에 이사를 왔으니, '새로운 행복을 위하여'는 어떨까요?" "하긴, 그머리에 나올수 있는 말이라는게 뻔하긴 뻔하죠. 더 이상 생각 해봐야 나올것도 없을테니, 그냥 그걸로 가지요" "........." 아줌마도 집들이 끝나고 저랑 따로 보시지요. 난이를 박박갈며 말했다. "새로운 행복을 위하여!" "위하여!" 우리는 ㅣㄹ제히 잔을 부디졌다. 난 그대로 술을 원샷했다. 달짝 지근하면서도 황홀한 맛. 오옷! 이거 죽이는데 "캬아! 맛 좋다!" "응응, 달짝지근해서 계속 입에 다라붙어." "내가 이맛에 산다니까." "........." 참고로 어린 엘프들이 마시는 음료는 과일주가 아닌 과일주스다. 과일주스 마시고도 폼을 잡는 아이들.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런 걸까? 과일주를 맛본 사람들은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맛있다 .목 넘김이 되게 부드러워" "그래? 많이 있으니까 많이 마셔." 크로니스가 오크통으로 두 개나 가져왔다. 오늘 ㅏㅎ루는 마음껏 마셔도 좋을 것이다. 난 루시아의 빈 잔을 채워 주엇다. "오빠 건 라이가 따라드릴게요." "응? 라이가?" "예, 원래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라잖아요." "........." 대체 쟤 교육 누가 시켰는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싶다. 어린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라이는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내가 술을 마시자, 루비가 재빨리 안주를 집어 주었다. 손으로. 너희들 앞에 놓인 젓가락은 장식품으로 놓아둔 것이 아니야. 그래도 성의가 기특하여 먹어주마. 난 입을 벌려 루비가 집어준 고기안주를 받아먹었다. 아이들은 과 일주스를 꿀꺽꿀꺽 마시며 허겁지겁 차려진 음식들을 집어 먹었다. 인디는 그런 아이들에게 말했다.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영아는 크로니스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라이레얼은 주량을 과시라도 하듯 엄청나게 마셔댔고, 카르는 술 을 마시면서도 영아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잉꼬부부답게 러브샷과 포옹샷을 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 저기만 곷밭이로군. "저, 저기, 루시아.... 우리도 러브샷 한번 할까?" "싫어." "시, 싫으면 말고."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하다니! 가슴에 큰 상처ㄴ를 받은 나느 자작을 했다. "라이랑 러브샷 해요, 오빠." "그 다음은 루비랑 포옹샷 해요." "그래도 이 오빠를 챙겨주는 건 니들밖에 업구나." 내가 라이와 러브샷을 하는 동안 루비는 뒤에서 기다렸다. 다음 은 루비와 포옹샷을 할 차례. 루비와 포옹샷을 하는데, 루시아가 루 와 러브샷을 하는 것이 보였다. "뭐야? 나한테는 싫다고 하구선, 루한테는 해주는 게 어딨어? 불공평해!" "루는 애잖아. 너는 어른이고." "그럼 나도 애 할래! 그러니까 히로랑도 러브샷 해." "알았어, 해줄 테니까 그만 좀 징징거려." "정말?" 난 기쁜 마음으로 루시아와 러브샷을 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로 행복하다. "우리 포옹샷도 할까?" "싫어, 혼자 마셔." "........." 술에 취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튕기는 루시아의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다. 나의 심장은 너의 것~. 그나저나 이 과일주 참 달고 맛있다. 이런 술의 특징 중 하나가 멋모르고 계속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게 되지. 으음..... 어느새 루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많이 마셔, 루시아." 난 계속해서 루시아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루시아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날 보았다. "왜그래?" "응? 왜 그러냐니?" "니 표정이 이상해." "이, 이상하다니, 난 여자를 술에 취하게 해서 어찌해보려는 새악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남자가 아니.......지 않지 않아."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물었다. "내가 술에 취해으면 어떡할 건데?" "........." 이런걸 보니 확실히 취하긴 취했나 보다. 본인은 잘 모르는 모양 이지만. "나한테 이상한 짓이라도 할 거야?" "루, 루시아......" 루시아는 나에게 몸을 밀착했다. 그리고는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날 보았다. "마, 많이 취한 것 같네." "아니야. 나 하나도 안 취햇어. 이렇게 멀정한 걸. "........." 별로 멀쩡해 보이지 않는다. 루시아는 눈을 감으며 나에게 스르르 안겼다. "루시아?" "........." 대답이 없다. 잠 든 건가? 툭툭건드려도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잠든 것 같다. "여기서 자면 어떡해? 들어가서 자야지." 깨우려고 시도를 해보았지만, 반응이 없다. 하는수 없이 난 루시아를 업었다. 그리고 루시아의 방으로 갔다. 방까지의 거리가 제법 멀다. 확실히 집이 넓어지긴 넓어졌다 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나느 루시아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난 방을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양말 정도는 벗겨주는 게 좋겠지? 난 침대에 걸터앉아 루시아의 양말에 손을 뻗었다. 두근두근 쭉 뻗은 다리가 보인다. 새하얗고 길고 예쁘다. 지금 루시아가 입고 있는 옷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데님치마. 루시아는 평소에도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즐겨 입는다. 활동이 편하고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나는 조심스럽게 양말을 벗겼다. 가녀린 발목, 둥글게 나온 복사뼈. 꿀꺽 난 단지 루시아의 양말을 벗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흥분이 되는 걸까?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술에 취해있기 때문일까? 난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른쪽 양말도 벗겨냈다. 무사히 양말을 다 벗긴 나는 이만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루시아가 몸을 뒤척였다. 살짝 위로 올라가는 치마. 도저히 일어설수가 없었다. 난 나도 모르게 루시아의 다리로 손을 뻗었다. ------------------------------------------------------------------------------------- (옮긴이 : ErwinRommel) 루시아는 지금 술에 취해 자고 있다. 그러니 치마를 살짝 들친다 고 해도 모를 것이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어쩌면 이번에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성추행이다. 경찰서에 잡혀가도 할말 없는 범죄. 이런 식의 성추행은 성욕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나 하는 짓이다. 일종의 충동조절장애라고나 할까? 인간이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이성으로 감성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성으로 감성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나 다름없다. 난 짐승이 아니야. 난 짐승이 아니야. 난 짐승이 아니야....... "으음......" 루시아가 몸을 또 뒤척였다. 그러자 무릎까지 올라가는 치마. 그걸 보는 순간 머리의 퓨즈가 나갔다. 그냥 나 짐승 할래. 짐승이 되기로 결심한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결국 루시 아의 다리를 만졌다. 찌리릿!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 평소에 나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짓. 하지만 지금 나는 술기운으 로 제정신이 아니다. 그동안 차곡차곡 샇인 욕구불만이 무방비 상태인 루시아를 보는 순간 폭발했다. 술의 영향으로 인해 약하된 이성은 그 폭발을 막지 못했다. 보름달을 보면 변하는 웨어울프처럼, 나는 무방비 상태의 루시아 를 보고 짐승으로 폴리모프 했다. 이제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난 천천히 손을 위로 올렸다. 그 순간, 결코 들려서는 안 될 목소 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 다름 아닌 루시아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짐승에서 인간 으로 되돌아왔다. "........" 헉! 방금 전까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루시아는 나의 얼굴과 자신의 다리에 올려진 나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니 손이 왜 내 다리를 만지고 있어?" "헉!" 난 황급히 손을 똇다. 내, 내가 무슨 짓을? 난 놀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잠자고 있는 루시아를 추 행하다니!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이런 추잡한 인간이었을 줄이야....... "미, 미안해, 루시아.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난 용서해달라는 말 을 할 자격도 없는 인간이야. 니가 무슨 벌을 내리든 달게 받을게. 원한다면 기분이 풀릴 때까지 날 밟아. " "내 다리 만지고 싶어?" "응?"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돼." "뭐? 지, 진심이야?" "응." 루시아는 전혀 화난 모습이 아니었다. 빈정거리는 것 같지도 않 았다. 그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보며 바보 같은 미소를 짓고 있 을 뿐이다. 묘한 백치미에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홀린 듯이 루시아를 바라보던 나는 재빨리 머리를 힌들었다. "취, 취한 거야?" "아니. 나 하나도 안 취했어." 취한 사람이 안 취했다고 말하는 것만큼 신빙성 없는 말도 없다. "나, 나 이만 가볼게." 이대로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또 다시 짐승으로 폴리모프할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이성이 남아있을 떄 자리를 떠야 한다. 내가 일어나려는데, 루시아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대 로 나를 침대에 쓰러트렸다. 루시아는 내 목에 손을 두르며 내 귓가 에 속삭이듯 말했다. "내 옆에 있어줘." "루, 루시아....."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에서 녹보석 같은 그녀의 눈동자만이 밝 게 빛났다. "너 많이 취했어." "하나도 안 취했어." "안 취했는데 이런 행동을 해?" "후후~ 왜? 이상해?" "다, 당연하잖아." "내 가슴 만지고 싶지?" "뭐, 뭐?" "뭘 그렇게 놀래? 만지고 싶지 않아?" "그, 그건......."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되. 가슴이든 다리든." "진심이야?" "오늘밤만은 니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 루시아는 촉촉이 젖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수 많은 말을 하는 듯했다. 나는 루시아를 사랑한다. 그녀도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나 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난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겹 쳤다. 달콤한 술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키스. 난 한 손을 그녀의 다리 위에 얹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을 탐하던 중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 다. 순간, 나는 멈칫 했다. "왜 그래?" "........" 루시아는 지금 술에 잔뜩 취한 상태. 즉,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 한 상태이다. 지금 루시아가 보이는 행동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자에게 술을 잔뜩 먹여놓고 덮치면 강간이 아닌 화간이라는 이상한 판결이 난 적이 있지만, 이것은 엄연한 강간이다. 여성이 능동적으로 동의를 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 행위는 강간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여성의 '동의' 는 당연히 온전한 판단력을 가진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 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비록 루시아가 허락을 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술에 취한 상 태에서 내린 결정이다. 때문에 나는 루시아의 동의를 얻지 못한 상 태이고, 현재의 상황은 합의하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다. 즉, 현재의 상황은 내가 술 취한 루시아를 덮치는 것에 지나지 않 는다. 난 그녀의 다리를 더듬던 손을 치우고 용서를 빌었다. "미, 미안해." 루시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싫어?" "널 사랑해. 지금 당장이라도 안고 싶을 만큼." "그럼 뭐가 문제야?" "니가 술에 취해있으니까." "그래서?" "널 사랑하기 떄문에 이런 식으로는 안 될 것 같아. 뭐랄까? 잘 설명하기 힘들지만, 지금 너를 안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 느낌 이 들어." 나의 말을 들은 루시아는 생긋 웃었다. "지금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 라이 동생 만들어주고 싶다 고 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대로 루시아를 안는 게 좋을 지, 안지 않는 게 좋을지 아직도 판단이 안 선다. 그리고 나의 본능 은 계속해서 루시아를 안을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녀가 허락했잖아.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야. 그녀도 원하고 있어. 더 이상 참을 필요 없어. 그냥 덮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그녀의 숨 결에 섞인 달콤한 술 냄새와 살짝 풀린 눈동자도 생각을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루시아를 덮칠지도 모르겠군. 난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녀는 잡은 내 손을 놓치 않았다. 루시아는 내 가슴에 이마를 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그 한 마디에 나는 안도했다. 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줄래?" 그녀의 속삭임. 나는 그 요구에 응했다. "사랑해."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난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 역시 더욱 세게 나를 껴 안았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내 품 안에 잠들어 있다. 지금 나는 최고로 행복하다. * * * * * * "꺄아아!"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난 잠에서 깻다. "무, 무슨 일이야?" 내 옆에는 이불로 몸을 가린 루시아가 있었다. "........" 뭐, 뭐야? 루시아가 왜 내 옆에 있어? 난 잠시 생각한 다음에야 어젯밤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난 웃으며 루시아에게 말을 건넸다. "잘 잤어?" "흑흑~." 루시아는 대답 대신 울음을 터트렸디. "왜, 왜 그래, 루시아? 무슨 일 있어?" 내가 손을 뻗자 루시아는 거친 동작으로 내 손을 쳐냈다. "저리 가! 내 몸에 손대지 마!" "루시아......" 내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방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 다.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지니, 크로니스, 영아, 그리고 어린 엘 프들까지!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와 루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나 를 찢어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이 짐승!" "지, 짐승이라니.......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헉!" 문득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루시아는 술에 잔뜩 취해있 던 상태. 어쩌면 필름이 끊긴 상태였을 수도 있다. 루시아는 어젯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느 ㄴ걸까? 만약 그렇다면 루시아 입장에서는 '술을 마시다가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남자 품 안이었다.' 라는 황당한 인과관계가 성립하게 된 다. 그리고 인과관계를 맞추기 위해 중간에 빠진 내용을 본인의 ㅏㅇ 상으로 채웠을 것이다. 사실 이 경우 상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결론은 다음 하나로 압축이 되니까. 히로가 술 취한 루시아를 덮쳤다! 으음, 사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게 정상이긴 하다. 물론 이 결론은 사실이 아니다만, 누가 믿어주겠나? "........" 나라도 안 믿겠다. "라이는 오빠를 믿었는데....." "루비도 오빠를 믿었는데....." 눈물을 글썽 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라이와 루비. "아, 아니야, 얘들아. 이 오빠는 결백하단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맞아요! 오빠는 거짓말하는 나쁜 오빠에요." "아, 아니라니까. 너희들 오빠 못 믿니?" "라이는 오빠한테 막막 실망했어요. 라이는.......라이는......우에 에엥~ 라이는 오빠가 미워요오~." "으아아앙~ 루비는 이제부터 오빠랑 안 놀테야아~." 울음을 터트리며 뛰어가는 라이와 루비. 그러자 이번엔 루가 소 리쳤다. "저도 이제부터 형이랑 안 놀아줄 거에요!" ".....넌 원래부터 나랑 안 친했어, 임마. "엉엉~." 역시 울면서 뛰어가는 루. 루시아는 일루니아 여사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일루니아 여 사님은 루시아를 달래주며 나에게 소리쳤다. "이 색마!" "새, 색마라니요?" "술 취한 루시아를 강제로 이곳까지 끌고 와 겁탈한 인간이 색마 가 아니면 뭐란 말이죠?" "가, 강제로 끌고 오다니요? 그, 그리고 겁탈이라니! 부, 분명 말 씀드리지만, 전 결백합니다." "하!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군요. 이미 모든 정황이 확실하게 드러났는데 발뺌을 하시는 건가요? 용서를 빌지는 못할 망정, 잘했 다고 큰소리를 치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정말 인간 이하 군요." "흑흑~ 이제 나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언니?" "괜찮아, 루시아.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절대 다른 생각 품지 마. 내가 곁에 계속 있어줄 테니까. 이런 떄일수록 마음 단단히 먹어야돼." 루시아는 계속해서 울었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런 루시아를 껴안고 달래주었다. 난 미칠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녕 나의 결백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단 말인가? "........" 아니다. 한 명 있다. "사일런스 백작님!" 지니라면 분명 나의 결백을 믿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지니는 최 고의 두뇌를 지니고 있는 천재. 아마도 지니는 이 방을 한번 본 것 만으로 모든 ㅏㅇ황을 파악해을 것이다. "저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믿습니다.:" "사, 사ㅓ일런스 백작님...... 흑~." 모두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나를 믿어주 는 지니. 난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니는 전혀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훌륭하십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예? 훌륭하다니요?" "루시아 공주님으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하여 취하게 하였으니 이는 지(智)를 행한 것이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시아 공주 님을 침대로 끌고 가셧으니 이는 용(勇)을 행하신 것입니다. 동 생이 없어 외로워하는 자제분들을 안타깝게 여기셧으니 이는 인 (仁)이고, 자제분들께 동생을 만들어준다는 약속을 지키셧으니 이 는 신(信)입니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루시아 공주님에 대한 한 결 같은 마음을 잃지 않으셧으니 이는 의(모르겠음)이고, 일을 끝마치 신 다음 마치 아무 ㅣㄹ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시니 이는 예(禮)입니다.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육도(六道)를 완벽하게 지키시니, 제 어찌 아이언스 공작님께 감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뭐야? 결론은 내가 루시아를 덮쳤다는 거 아니야? 이 인간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난 영아를 보았다. "영아야, 너는 이 오빠의 결백을...." "오빠가 이런 인간일 줄은 몰랐어. 아니 오빠는 인간도 아니야. 짐승이야. 어떻게 강제로 언니를.... 우아아아!"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면서 뛰어가는 영아. 난인디를 보았다. "너도 날 안 믿니?" "저는 히로님의 마음을 이해해요." "정말? 정말 나의 결백을 이해해주는 거야?" "하지만 방식이 잘못되었어요. 이 일이 루시아님께 얼마나 큰 상 처가 될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셧나요? 히로님의 마음은 이해하지 만, 이럴 수는 없는 거에요! 전 히로님게 실망했어요! 흑~." 역시 눈물을 흘리며 뛰어가는 인디. 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담아 크로니스를 보았다. "크, 크로니스는 제 말을 믿어줄 거죠? 그렇죠?" 크로니스는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슬쩍 고개를 돌렸다. "........" 크, 크, 크로니스마저! 나의 결백을 믿어주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구나. 마치 사하라 사 막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다. "어디 또 변명해 보시죠." 경멸과 조소 섞인 눈빛으로 나를 보며 다그치는 일루니아 여사 님. 비록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이 대로 물러서면 그야말로 파명이다. "아줌마가 아무리 뭐라 그래도 진실은 결코 빛을 잃지 않습니다. 저의 결백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 루시아는 왜 모를까요?" "그건......."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루시아가 저렇게 울고 있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아무튼 전 결백하다니까요! 아무 일 없었다는 증거로 옷도 다 입고 있잖아요." "루시아는 지금 속옷 차림입니다." "예?" 이불로 가리고 있어 루시아의 몸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정말로 루 시아의 옷은 침대 옆에 떨어져 있었다. 헉!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난 잠시 상황을 유추해 보았다. 어젯밤은 유난히 더웠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내 품에 안겨 이 불을 덮고 잔 루시아. 당연 더웠을 것이다. 안 그래도 열대야 현상 때문에 더운데, 술기운까지 올라와 몸을 덥혔다. 결국 너무 더운 나머지 루시아는 잠결에 스스로 옷을 벗었고...... 뭐, 대략 이런 스토리가 아닐까? "아마도 루시아가......" "설마 잠결에 루시아가 스스로 옷을 벗었다고 변명하지 않으시 겠죠? 그런 웃기지도 않으면서도 진부한 변명은 하지 말아주셨으 면 하는 바람이네요." "........" 잠결에 스스로 벗은 거 맞는데. "흑흑~." "울지마, 루시아. 잘못은 저 인간이 했는데, 니가 왜 울어? 저런 짐승 같은 인간은 궁형(宮刑)에 처해야 돼." "궁형이면.....?"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을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형보다 도 잔인한 형벌이지요." "헉!"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국 전한 시대의 사마천은 궁형을 당 한 후에 중국 최고의 역사소설인 사기를 집필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보고 궁형을 당하라는 겁니까?" "꼭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전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지니는 방을 나갔다. 크로니스도 아까 돌아갔기에 이제 남은 사 람은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뿐. 난 흐느끼고 있는 루시아에게 다가가 손을 꼭 움켜잡았다. "정말 기억 안 나, 루시아? 잘 생각해봐. 우리 사이에는 정말 아 무 일도....." 그 순간, 이불이 흘러내리며 뤼아의 몸이 드러났다. 루시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것이라고는 새하얀 속옷이 전부였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시선은 루시아의 몸을 훑고 있었다. "아, 저기......" 루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저질!"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 "자,잠깐만, 루시아. 내 말을 좀 들어봐." 루시아는 울면서 손에 잡히는 모든 걸 집어 던졋다. 심지어는 왼 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커플링까지 뺴서 던졌다. "이딴 거 필요 없어! 이제 너랑 끝이야!" "헉! 그건 안 돼!" 이 커플링은 루시아와 나의 사랑을 이어주는 하나의 증표와도 같 은 것이다. 그렇기에 루시아가 커플링을 뺴서 던졌다는 것은 상당 히 큰 의미를 지닌다. 물론 부정적인 쪽으로. 난 날아오는 커플링을 낚아챘다. "흑흑~ 꺼져! 꺼지란 말이야!" "난 정말로 결백...." 퍼억! "......한데." 이사한 지 3일째. 나는 집에서 쫓겨났다. * * * * 난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물이 끓자 수프를 넣고 라면을 넣었다. "이게 대체 며칠째냐? 이젠 라면 냄새만 맡아도 아주 신물이 나는군."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오빠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 "안 했다니까! 그렇게 말했으면 좀 믿어라!" "말이 돼야 믿지. 루시아 언니같은 영자가 옆에서 자는데, 안 덮 친다는 게 말이 돼? 게다가 루시아를 언니가 허락했다며?" "난 루시아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 나 자신이 결백하다면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난 다 끓인 라면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나 무젓가락을 둘로 쪼갰다. 또 라면을 먹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 하다. 하지만 라면 말고 딱히 먹을 게 없다. 지금은 불평할 때가 아니다. 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살기 위해서라면 우유에 조리퐁 말아 먹는 것을 마다하겠는 가?" 난 결연한 각오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영아는 그런 나를 불쌍 하다는 눈으로 보며 말햇다. "오빠도 참 불쌍하다. 그러게 왜 언니를 겁탈했어?" "세 사람의 말이면 무쇠도 녹인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본 질이 바뀌지는 않는법. 손으로 진실을 가린다 한들, 어찌 진실이 사라지리오!" "정확히 어디까지 했어? 루시아 언니 정말로 임신하는 거 아니야?" "내가 진실 됨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이다. 스스로에게 떳떳 하니 타인의 중상모력에 흔들릴 필요가 없고, 스스로에게 당당하 니......."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그놈의 헛소리 좀 그만해. 누가 보면 오 빠가 독립투사인 줄 알겠다." "진실을 위한 투쟁은......" "알았으니까 불기 전에 라면이나 먹어."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니가 자꾸 말 시키니까 그렇잖아." 난 젓가락으로 라면을 떠먹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 하다. 나의 결백을 알아주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하고 쫓겨났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렇다. 이게 제일 억울하다. 정말로 일을 저질렀다면 죄의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 지만, 아무 짓도 못하고 쫓겨났으니 누명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 그냥 그때 할 걸...... '지금 안하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 ........라는 루시아의 말이 맞았다. 차려진 밥상, 그것도 만한전석(청나라황제가 먹던 중국 황실요리) 를 마다하다니! 내가 미쳤지. "아래층 여론은 어떠냐?" "당연 안 좋지. 특히 일루니아 언니는 오빠가 집안에 발을 한 발 자국이라도 들여놓는다면 찢어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어." "......." 그 아줌마 눈빛이 눈에 선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옥탑방. 이곳에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몸을 기거할 생각이다. 영아는 왜 하필 자기 방이냐며 툴툴거렸지만, 내가 불쌍해보였는지 더 이 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낮에는 이렇게 같이 지내지만 밤에는 따로 잔다. 나는 여기서, 영 아는 아래층에서. 아무리 사촌지간이라 해도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같은 방에서 잘 수 있겠는가? ......라지만, 사실 별로 상관없다. 내가 영아를 덮칠 것도 아니고. 하지만 영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날 보는 시선에서 짙은 경계심이 느껴진다. 게다가 내가 건드리기만 해도 깜짝 놀라 며 방어 자세를 취한다. 멀쩡한 사람 범죄자 되는 거 한순간이구나! "오빠, 왜 날 그런 시선으로 봐? 서, 설마.....안 돼, 오빠. 난 오 빠의 사촌여동생이야. 그리고 나에게는 지니 오빠랑 크로니스 오 빠랑 라이레얼 언니가 있어. 오빠가 이러는 건 천륜을 거스르는 짓 이야." "......아주 쇼를 해라. 미안하지만, 이 오빠는 널 덮칠 만큼 한가 하지 않단다. 무엇보다 이 오바가 널 덮칠 것을 걱정하기에 앞서 너 의 그 앞짱구를 생각하렴. 튀어나온 이마에 부딪힐까봐 키스나 제 대로 하겠니?" "뭐? 내 이마가 어때서? 다른 사람들은 다 귀엽다고 한단 말이 야!" "니 이마만큼 가슴도 튀어나오면 참 좋을 텐데. 그치?" "내 가슴이 어떄서! 무, 물론 좀 작긴 하지만....아, 앞으로 클 거란 말이야!" "알았으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쓰던 글이나 열심히 쓰렴." 영ㅇ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다시 노트북을 두드려다. "그런데 지금 뭐 쓰고 있는거니?" "새로운 소설." "새로운 소설?" "응, 한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술을 잔뜩 먹인 다음 침대로 끌고 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내용이야. 이 사건으로 남자는 집에 서 쫓겨나 사촌여동생이 살고 있는 옥탑방에 머물게 되는데, 반성 을 하기는 커녕 사촌여동생한테까지 손을 뻗쳐. 위기의 순간에 금 발머리 미청년과 빨강머리 미청년이 나타나 그 사촌여동생을 구해 주고 천륜을 저버린 남자를 응징하지." "뭐라? 너 그거 당장 못 지워!" "왜?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노트북을 둘로 쪼개주랴?" "농담이야. 출판한 글 쓰기도 바빠 그런 글 쓸 시간도 없어. 하지 만 언젠가는 꼭 한번 써보고 싶어." "......." 이젠 영아까지 날 놀려 먹는군. 인간 박영웅,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맞은 최대의 위기 상 황이다. 그동안 착실하게 쌓아온 나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한순 간에 무너질 줄이야. 나 왕년엔 아이리스 왕국의 잘 나가던 공작이였다. 커다란 인형 가게도 한 채 가지고 있었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넓은 집도 한 채 있었다.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도 있었는데.... 이 젠 옥탑방에서 혼자 라면 끓여먹는 신세라니..... "어흐흐흑!" 흘러내린 눈물이 냄비 속으로 떨어졌다. 눈물 젖은 라면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도 없다. 사람 팔자 한 치 앞을 못 내다본다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구나. 그래도 이 모진 목숨을 이어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은 '진실은 반 드시 승리한다'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예로 드레퓌스 사건이 있다.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 태어난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인류에게 자유, 평등, 우애의 정신을 가져다준 민주주의의 본고 장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전체를 두 진영으 로 분열시킬 정도로 사회적 갈등을 몰고 왔다. 그리고 전 세계가 지 켜보는 가운데 진실과 양심이 거짓과 음모를 굴복시키며,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전 인류에게 확인시켜 주 었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역사책에 나올 정도로 큰 사건이 된 이 사건 역시 사소한 일에서 시작 되었다. 1894년 9월. 프랑스의 참모본부 정보국은 중요한 군가 기밀이 독일 대사관을 통해 빠져 나가고 있음을 탐지했다. 참모본부는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 무관 슈바르츠코펜이었고, 발신 인은 익명,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명세서였다. 1894년 12월.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독일 대 사관에서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 서 종신형을 판결 받았다. 명세서에 적힌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유사하다는 이유만으 로 그를 스파이로 지목한 것이다. 그 외에 별 다른 증거가 없었으 나, 그가 유대인이었기에 무작정 혐의를 덮어씌웠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제일 먼저 유태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했지만, 반유대주의자들은 사회 각층에 뿌리 깊게 존재했고, 군부나 의회 같은 보수집단에는 그야말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드레퓌스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반유대주의 성향의 신문들은 연일 드레퓌스의 스 파이 행위를 비난하며 있지도 않은 사실들을 과장해서 보도했고, 자 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빠른 사 태 수습을 위해 여러 가지 문서를 날조하여 증거로 제출했다. 또한 문서를 공개하라는 요구에는 '드레퓌스의 스파이 행위를 증명하는 문서가 엄청나게 많이 있거든. 그런데 이걸 공개하면 독 일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 독일과 전쟁 일어나면 니가 책임질 래? 그러니까 이 문서를 공개하면 안돼. 미안하다. 국가안보를 위 해서 그러는 것이니 니들이 좀 이해해라' 라는 삽질성 발언으로 일 관했다. 그리고는 드레퓌스가 그것에 대해 변론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재 판을 끝내버렸다. ------------------------------------------- '삽질'의 의미를 알면 읽는게 재밌습니다 ㅎㅎ ------------------------------------------- 1895년 2월 21일 밤 아무도 모르게 드레퓌스는 아프리카 기아나 적도 해안에 있는 '악마섬' 이라는 외딴섬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조그만 돌감방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은 이렇게 잊혀지는 듯했다. 1896년 3월. 참모본부 정보국 조르쥬 피카르 중령은 스파이 사건을 조사하던 중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과, 문제의 명세서 필적이 보병 대대장 에스따라지 소령의 필적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피카르는 이 사실을 즉시 상부에 알리며,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 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상관들은 참모본부의 체 면을 지키기 위해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두길 원했다. 이때 재심을 열어 드레퓌스가 풀려났다면 이 일은 그저 그런 사 건으로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명예와 체면을 중시한 참모본부 는 한번 시작한 삽질을 멈출 생각이 없었고, 이 때문에 사건은 걷잡 을 수 없이 커졌다. 피카르와 드레퓌스의 형인 마띠외는 필사적으로 드레퓌스의 무 죄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금 드레퓌스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논란이 재연됐다. 그러던 중 한 신문이 명세서 사본을 입수해 신문에 게재했고, 그 명세서를 쓴 진짜 범인인 에스떼라지는 초조해졌다. 참모본부는 진상을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에스떼라지 를 보호하기에 바빳다. 마띠외는 명세서의 필적이 에스따라지의 것이라 고발했으나 군 당국은 시간만 질질 끌며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신문에서는 불꽃 튀는 논쟁이 오고갔다. 갖가지 추 측, 과장, 허위보도가 판을 쳤고, 지식인들과 양심인들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갔다. 에스떼라지는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만장일치로 무죄 판결을 받 고 풀려났다. 오히려 진실을 밝힌 피카르 중령이 군사기밀 누설죄 로 체포되었다. 전 세계신문은 이러한 프랑스의 행위를 비난했다. 프랑스 국민 들은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측과 옹호하는 측 둘러 나뉘어 싸움을 벌였다. 왕정복고주의자, 군부, 반유대주의자, 보수 정치인 등이 재심 반 대를 외치며 군중을 선동했다. 소수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진보적 정치인들의 힘은 아직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1897년 1월 13일. 세계적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 로 시작되는 논설을 신문에 실었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의 이 글은 드레퓌 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톰 소여의 모험' 등의 소설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지식인들은 에밀 졸라를 지지하고, 드레퓌스 의 무죄를 주장했다. 프랑스 전체가 또 다시 논쟁에 휩싸였다. 전 세계가 프랑스를 비난했지만 프랑스 당국은 끝가지 손에 든 삽을 놓지 않았다. 드레퓌스의 재심은 커녕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 장한 에밀 졸라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는 삽질을 한 것이다. 1898년 8월 30일.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떼라지와 짜고 문서를 위조했 던 참모본부의 앙리 중령이 자살을 했다. 이 일로 참모본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재심을 요구하는 목 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위기를 느낀 에스떼라지는 영국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사실 스파이는 나야. 그 명세서도 내가 작성한 거야' 라는 내용이 담긴 책을 출판했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참모본부를 지지하던 신문들까지 참모본부 를 비난하고 나섰다. 1899년 6월 3일. 프랑스 고등법원은 1894년 12워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재 심을 선언했다. 그동안 계속해서 열심히 삽질을 해댔던 군 당국은 재심에서까지 화려한 삽질쇼를 선보였다. 참모본부 상관은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군사 법정의 재판관들은 정상참작을 해준답시고 종신형을 금고 10년형으로 깎아주었다. 지들 딴에는 많이 에누리 해줬다고 생각했나 보다. 에밀 졸라는 또 다시 펜을 들어 프랑스 군 당국을 강력하게 비난 했다. 전 세계 프랑스 대사관 앞에는 항의군중이 몰려들었고, 프랑 스는 모든 나라에게 왕따당했다. 프랑스 대통령은 '그냥 다 깎아줄 걸 그랬나'라고 후회하며,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를 특별사면 시켜주었다. 이리하여 4년 이상을 형무소에서 보낸 드레퓌스는 무사히 가족 의 품으로 돌아왔다. 1904년 3월. 드레퓌스는 재심을 청구했고, 1906년 7월 12일에 최고재파노로 부터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 후에 드레퓌스는 한 계급 승진한 소령으로 군에 복귀하고, 1차 세 계대전에 참가해서 중령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1935년에 사망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사람의 누명이 벗겨지고 결백이 밝혀진 그 런 간단한 사건이 아니다. 당시에는 유럽 전체가 전체주의화, 군국 주의화 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이런 과도기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공화정 성향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이야 아 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군국주의자들을 패퇴시켰다는 점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갖는 의의는 상당하다. 프랑스 군 당국의 작은 삽질로 싲가된 이 사건은 언론이 가세하 고, 전 프랑스 국민이 가세하고, 더 나아가 전 세계가 가세하는 세 계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끝내는 진실이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프랑스 군 당국이 처음에 한 실수는 아주 작은 삽질에 지나 지 않았다. 모종삽으로 주먹만큼의 흙을 퍼낸 정도? 진실을 알았을 때 바로 퍼낸 흙으로 구덩이를 메웠다면 조용히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삽질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더욱 삽질을 해야 했으 며, 처음에 모종삽으로 시작한 삽질은 포크레인질로까지 발전했다. 일설에 의하면 삽질에 가담했던 프랑스 참모본부 상관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것은 저에게 있어서 작은 삽질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선 크나 큰 도약일 것입니다.' 정말로 이런 말을 남겼는지 아직 확인된 바는 없지만, 아무튼 드 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성숙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전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전 세계에 일깨워 주었다(물론 아직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전체주의니 군국주의니 떠들 어대는 나라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 밑에 있는 섬나라를 들 수 있다). 옆나라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나치즘과 파시즘에 물들었을 때도 프랑스는 전체주의 노선을 걷지 않았다.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위 해 그들과 싸움을 벌였다, 드레퓌스 진실이 승리하는 데 무려 12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 렸다. 참고로 난 오늘로 집에서 쫓겨난지 사흘째. "으음, 한 달 안에 들어갈수 있으면 좋을 텐데..... 1년 안에라도....." "나 밥 먹으러 갔다 올게, 오빠." 영아는 아래층에서 내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아마도 나의 빈자리에 영아가 대신 앉을 것이다.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밥을 먹는 식탁. 옛날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지금의 초라한 현실과 대비되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난 면발을 다 먹고 국물만 남은 냄비를 보며 한숨을 내수었다. 사 실 라면 국물만큼 버리기 아까운 것도 없다. 여기에 밥 말아 먹으면 정말 좋을 텐데. "영아야." 난 사다리로 내려가는 영아를 불렀다. 그러자 영아는 내려가다 말고 머리만 도로 내밀며 물었다. "왜?" "식사 끝마치고 올라올 때, 밥 좀 얻어오렴. 라면 국물에 말아먹 게." "알았어. 인디 오빠한테 밥 남은 거 있으면 달라고 할게." "아! 그리고 김치도 좀 얻어오렴. 라면만 먹으려니까 좀 그렇다." "알았어." 영아가 머리를 집어넣으며 덮개를 닫았다. 방바닥에 누워있으니 아래층에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그 눈물을 닦으며 결연한 목 소리로 말했다.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진다. 그리고 그때가 진실이 승리하 는 날이 될 것이다. 드레퓌스의 진실이 승리하였듯이, 히로의 진실 역시 승리하리라. 나는 고발한다. 나는 아이언스 히로에 대한 재심의를 청구하는 바이다. 아이언 스 히로가 루시아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증거는 정황에 근거한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을 비롯한 몇몇 반 아이언스 히로 세력들 은 히로가 루시아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증거는 정황에 근거한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을 비롯한 몇몇 반 아이언스 히로 세력들 은 아이언스 히로에게 변론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집에서 쫓아 냈다. 그들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정의와 진실의 외침을 억누 르고 있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는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외친다. 진실은 행군하고 있으며, 누구도 그 길을 막 을수 없음을!"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 진실이라는 게 과연 통할지 의문이다. 정치인들은 입만 번지르르하게 헛소리를 늘어놓고, 기업인들은 겉으로는 사회 공헌하는 척하면서 뒷돈 빼돌리기 바쁘다. 일부 교 사라는 것들을 학부모에게 돈 받아 챙기며 학생 답안지 대신 체크 해 주고, 사학 재단들은 학생들 등록금으로 돈놀이하기에 바쁘다. 드레퓌스가 재심의를 받게 된 데에는 세계적 대문호 에밀 졸라의 도움이 컸다. 이렇게 된 거 영아에게 '나는 고발합니다'로 시작되는 글 한 편 부탁해 볼까? 영아도 나름대로 야오이계의 대문호이니.... "으음, 영아가 써주려나? 게다가 영아도 내가 루시아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고 믿고 있으니......" 나는 고발합니다. 나는 영웅 오빠가 루시아 언니에게 그렇고 그 런짓을 한 것을 고발합니다. 영웅 오빠는 집들이를 빙자해 루시아 언니에게 술을 잔뜩 먹인 다음, 루시아 언니가 술에 취해 쓰러지자 남들 시선을 피해 침대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저항할 의지가 없 는 루시아 언니의 옷을 벗긴 다음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천인공 노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영웅 오빠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 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다며 발뺌을 했 습니다. 이에 나는 영웅 오빠를 고발합니다. ......이런 식을 쓰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에휴~ 뭐,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겠지.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그래도 이번 일로 한 가지 좋은 건 있었다. 그건 바로 루시아의 속옷 차림을 봤따는 것.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모습이 아른거린다. 라이와 루비에게 들 었지만, 루시아의 몸매가 그렇게 아름다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냥 눈 딱 감고 할 걸 그랬나? "으음......" 아이리스 2부 8권 Story 21 히로, 집에 돌아오다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평소에 웃고 떠들며 집안을 우르르 몰려다니던 어린 엘프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7 나왔다. 서울에 걸렸네.” “응. 그러네.” “200만원 줘.”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주사위를 굴리는 손길 역시 힘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재밌던 부루마블 게임이 어째서 이렇게 재미없는 걸까? “재미없어.” “응.” “그만하자.” 아이들은 결국 하던 게임을 옆으로 치웠다. “하아~!” 뭐가 그리 고민이 많은지 동시에 한숨을 내쉬는 어린 엘프들. “오빠가 없으니까 한 개도 재미없어.” “오빠가 있어야 재밌는데.” “맞아.” “하아~!” 다시금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한숨을 내쉬는 어린 엘프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빠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루비는 오빠가 보고 싶어.” “나도.” “어젯밤에 오빠가 라이 비행기 태워주는 꿈 꿨다.” “루비는 오빠가 우는 루비 달래주는 꿈 꿨어. 오빠가 루비를 안고 막막 토닥토닥 해줬어.” “난 오빠가 머리 쓰다듬어주는 꿈 꿨는데.” [책에서 잘못 편집했나봐요.루가 말하는 건데 오빠라니..]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슬퍼졌다. “우에에엥~ 라이는 오빠가 보고 싶어~.” “으아아앙~ 오빠아~.” “엉엉~ 혀엉~.”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 엘프들. 아이들은 목을 놓아 울었다. 하지만 토닥토닥 스킬로 아이들을 달래줄 히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루시아는 급히 놀이방으로 달려왔다. 펑펑 우는 아이들의 모습에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얘들아?” “우에에엥~ 오빠가…… 오빠가…….” “으아아앙~ 오빠가 보고 싶어요오.” “엉엉~ 형이 머리 쓰다듬어 줬으면 좋겠어요.” “우엥~ 우엥~ 라이는 오빠가 태워주는 비행기에 타고 싶어요오.” “으앙~ 으앙~ 오빠가 라이 껴안고 토닥토닥 해줬으면 좋겠어요오.” [또 잘못 편집했군요.(출판사에서)… 으앙은 루비 목소리인데 라이가 왜 나오는건지.. ] “엉엉~ 형 보고 싶어요오.” 루시아는 할말을 잃었다. 히로가 집에서 쫓겨난 뒤부터 아이들은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예전처럼 많이 먹지도 않았고, 잘 놀지도 않았다. “울지 마, 얘들아. 뚝!” 루시아는 아이들을 달래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더 크게 울어댔다.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히로가 있었다면 쉽게 달래주었을 텐데.’ 히로의 얼굴이 떠오르자 루시아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아이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결국 아이들은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오빠아…….” “혀엉…….” 잠결에도 히로를 찾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보는 루시아의 마음은 착잡했다. 히로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을 줄이야! 히로가 집에서 쫓겨난 지도 어느새 일 주일째. 루시아는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깨어보니 히로의 품 안이었다. 그것도 속옷차림으로. 상황이 이러하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히로가 자신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 것. 그래서 무작정 소리를 지르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술 취해 잠든 자신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억울하고, 분하고, 수치스러웠다. 히로를 사랑하긴 하지만, 술 취한 자신을 덮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욱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런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발뺌하는 태도였다.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자는 처음 하면 많이 아프다는데, 별로 아픈 것 같지도 않고…… 특별히 몸에 손을 댄 것 같지도 않고…….’ 이런 점들을 볼 때 아무래도 그렇고 그런 짓은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루시아는 안도했다. 하지만 히로에 대한 의심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렇고 그런 짓만 안 했을 뿐, 이렇고 이런 짓이나 저렇고 저런 짓 등은 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히로의 평소 행동을 생각해볼 때 거의 확실했다. 루시아는 평소 히로의 행동을 떠올렸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고, 만날 야한 생각만 하는……. 아무튼 믿으려야 도무지 믿을 구석이 없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려 했지만, 한번 끊어진 필름을 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간간히 몇 장면 떠오르긴 했다. ‘대체 어디까지 내 몸에 손을 댄 거야? 바보, 변태, 저질, 치한, 나쁜놈…….’ 루시아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히로를 미워하는 건지, 사랑하는 건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밥은 잘 먹고 있는 걸까? 설마 굶고 있는 건…… 잠깐. 내가 왜 히로 걱정을 하는 거야? 히로가 뭘 하든 나랑 상관없잖아.’ 루시아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집 나간 지(정확히는 쫓겨난 지) 벌써 일 주일이나 됐으니,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루시아는 비어있는 자신의 왼손을 보았다. 반지를 낀 지 얼마나 됐다고, 없어지니 허전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루시아는 그 반지를 정말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걸 빼서 던지다니……. ‘아무리 화가 났어도 반지를 빼서 던진 건 너무했나? 히로 화났으면 어쩌지? 아, 아니야. 히로가 화났든 말든 나랑 상관없어. 이제 히로랑은 끝이니까. 히로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어.’ 그래도 조금은 보고 싶었다. 영아가 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직접 보지 않았으니 걱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도 없으니 만나보는 게 좋겠지? 안 그러면 애들이 계속 울 테니까.’ “맞아. 난 꼴도 보기 싫은데 애들이 걱정돼서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거야. 안 그러면 누가 그런 저질을 만날 것 같아? 하지만 애들 엄마로서 의무를 저버릴 순 없으니 정말 하는 수 없이 만나는 거야.” 루시아는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을 나와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걸음을 옮겼다. * * * * --------------------------------------------------------------------- 제가 다 올리기에는 굉장히 긴 분량입니다. 물론 앞에 히로, 이사하다 여기가 더 길긴 깁니다. 200페이지 분량이니.. 그래도 여기껏도 꽤 길어서. 별로 못 썻네요. 손이 굳었나.. 아무튼 내일은 좀 더 많이 올릴게요. by.ㅡㅡ;묻지마 ---------------------------------------------------------------------- 집에서 쫓겨난 지 일 주일째. 스토리가 20에서 21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에 들어가는 것도 꿈도 못 꾸고 있다. 이러다가 이번 권 끝날 때까지 집에 못 들어가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설마 완결 때까지도 집에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그럼 완결 전까지 라이 동생을 만들어 준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앗! 물이 끓는군.” 난 라면 봉지를 뜯었다. 아아~ 오늘 점심도 라면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침에도 라면을 먹었고 저녁도 라면을 먹을 예정이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영아가 피자를 시켜서 한 조각 얻어먹을 수 있었다. 아아~ 돈 없이 쫓겨나니까 이렇게 비참하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지갑은 들고 나올 걸. 난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보았다. 그것은 커플링이었다. 나와 루시아의 사랑의 상징인 커플링. 루시아는 그것을 빼서 나에게 던졌다. 그 일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루시아가 커플링을 빼냄으로써 내 왼손에 끼워진 커플링은 더 이상 커플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것은 이제 그저 그런 반지에 불과했다.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 진실이 밝혀져 루시아의 손에 다시 커플링을 끼워줄 희망을. 그때가 되면 내 손에 끼워진 반지도 커플링으로서의 의미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와 루시아의 사랑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별로 모두의 가슴 속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희망은 점점 사그라졌다. “하아~ 벌써 일 주일이나 지났건만 진실은 밝혀지지 않는구나.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진실을 가려져 영원히 땅속에 묻히겠지. 그렇게 되면 영원히 루시아의 오해를 받으며 살아가야 할 테고, 그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나는 결국 죽음을 택하겠지. 죽음으로써 진실을 호소한다면 루시아가 알아주려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나의 죽음이 루시아에게 또 다른 고통이 되는 것이 두렵구나.” “뭘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려?” “그냥 심심해서…… 헉!” 난 깜짝 놀라 커플링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고개를 돌렸다. 구멍으로 루시아가 머리만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루, 루시아…….” “들어가도 돼?” “으응.” 루시아는 사다리를 타고 옥탑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열려진 덮개를 닫았다. 일 주일 만에 보는 루시아의 얼굴. 얼굴 살이 약간 바진 것 같은 느낌이다. “지저분하네. 청소도 안 해?” 루시아의 말대로 옥탑방은 지저분했다. 특별히 먼지가 쌓여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사방에 책이 널려 있었다. 전부 영아가 보다가 던져놓은 것들이다. 얼마나 많은 책이 굴러다니는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여, 여기 앉아.” 난 재빨리 방바닥을 치우고 방석을 깔았다. “이, 이 누추한 곳까지는 어쩐 일로?” “왜? 내가 오면 안 돼?” “아, 안 되긴! 내 집이 니 집이고, 니 집이 니 집인데…… 아! 커피 마실래?” “응.” 난 라면을 끓이기 위해 올려놓은 물을 머그컵에 따랐다. 그리고 커피믹스를 탔다. 영아가 사놓은 게 있어서 다행이다. 난 앉은뱅이책상을 루시아 앞에 놓고 머그컵을 건네주었다. “마셔.” “고마워.” 루시아는 두 손으로 머그컵을 붙잡고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난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루시아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머릿속에서 갖가지 생각들이 맴돌았다. 루시아가 왜 여기 왔을까? 설마 여기서도 쫓아내려고? 그럼 난 어디로 가야하는 거지? 그냥 콱 죽어버려야 하나? 정말로 죽음으로써 나의 결백을 증명하는 방법밖에는 없단 말인가? 난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루시아…….” “왜?” “지금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줘.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너는 나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야. 그, 그리고 그날 일 말인데…… 무조건 내가 잘못했어. 니 기분이 풀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게. 죽으라고 하면 지금 당장 옥상에서 뛰어내릴게. 물론 그걸로 니가 받은 상처가 치료되진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릴 것 같다면 얼마든지 뛰어내릴게.” 사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루시아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이다. 루시아는 자신이 술에 취해 자는 사이 내가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루시아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난 무조건 용서를 빌기로 마음먹었다. 루시아를 위해서라면 지옥의 불길 속에 몸을 던지는 것도 두렵지 않다. 루시아는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날 일 말이야…… 너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 “응?” “사실 그날 아침에는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더라.” “응? 이상하다니?” “그, 그런 거 있잖아. 여자는 처음하면 아프다는…….” 말을 하는 루시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리고 특별히 내 몸에 손 댄 것 같지도 않고…… 오, 옷은 벗겼지만…… 속옷에는…… 아, 아무튼…….” 더욱 빨개지는 루시아의 얼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그날 일 정말 기억 안 나?” “그, 그게…… 조금씩 기억이 나긴 하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 그, 그러니까…… 니가 나한테…… 했는지 안 했는지…….” “그러니까 그날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 난 그날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루시아는 과일주를 많이 마셔 술에 취해 쓰러졌고, 난 그런 루시아를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가 양말을 벗기고 가려는데, 루시아의 가녀린 다리가 보였고 난 나도 모르게 그만 다리를 만지며 손을 위로……. “뭐야? 결국 덮쳤다는 거 아니야?”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는 루시아. 난 그런 그녀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아, 아니야, 루시아. 진정하고 끝까지 들어봐.” 그 얘기는 뺄 걸 그랬나? 하지만 나는 진실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다. 만약 내가 말해준 부분이 루시아가 기억하고 있는 부분과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루시아는 내 말을 안 믿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진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진실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하는데, 니가 깨어나서 뭐하는 거냐고 물었어. 놀란 나는 황급히 손을 떼고 용서를 빌었어. 그러자 니가 다리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좋다고…….” “뭐?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루시아의 표정.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야. 나는 니가 너무 많이 취했다고 생각해서 방을 나가려고 했는데, 니가 날 붙잡았어.” “내가 붙잡았다고?” “응응.” “그 다음엔 어떻게 했는데?” “가슴 만져도 좋다고…….” “말도 안 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루시아.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모습이 화를 내는 건지 부끄러워하는 건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루시아는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계속 해봐.” “으응. 그리고는 오늘밤만은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며…….” “뭐?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너 지금 지어내서 말하는 거지?” “아, 아니야. 진짜야. 한 치의 과장이나 거짓도 없어. 널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루시아는 싸늘한 눈으로 내 눈을 보았다. 난 그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경우 루시아의 의심을 받게 될까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있어야 했다. “계, 계속 말할까?” “해.” “아무튼 그래서 난 니가 시킨 대로 하는데…….” “뭐? 했단 말이야? 결국 나를 덮쳤다는 거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 아니, 끝까지 들어봐.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니, 뭐 다리를 좀 더듬긴 했지만…….” “것 봐! 했잖아!” “그렇게 많이 더듬지도 않았어. 종아리부터 시작해서 허벅지까지밖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 바보, 변태, 저질, 치한, 나쁜놈!” “제발 진정해, 루시아. 얘기를 끝까지 들어줘.” 루시아는 어느새 근처에 있던 책까지 집어 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집어 던질 것 같은 위험천만한 상황. 참고로 루시아가 책을 던지면 그냥 맞아야 했다. 피하면 화낼 테니까. 다행히 루시아는 책을 내려놓았다. 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루시아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 짓도 안 했어. 정말이야.” “정말이야? 항상 나한테 야한 짓 하고 싶어 했잖아. 그런데 내가 비록 술에 취해 있었지만 허락까지 했는데, 아무 짓도 안 했단 말이야?” “너의 본심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너는 그때 술에 잔뜩 취해 있었으니까. 다시 말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솔직히 말하면 그대 나도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었어. 하지만 하지 않았어. 아니, 할 수가 없었어.” “왜?” “널 사랑하니까. 조금의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이건 거짓말이다. 사실 그날 그런 결정을 내린 거 엄청 후히ㅚ한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거늘……. 아아~ 미안하다, 라이야. 이 오빠가 멍청해서 우리 라이 동생의 등장이 또 늦어지겠구나. 그날 잘 했으면 열 달 후쯤 라이의 동생이 등장할 수도 있었는데……. “지, 지금 한 말 진짜야?” “응. 진짜야. 잘 알잖아. 난 니 앞에서 거짓말 못한다는 거.” “바, 바보…….” 루시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수줍어하는 듯한 모습. 난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그녀의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은근슬쩍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런 접촉에 루시아는 몸을 잠시 움찔했지만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제 오해가 다 풀린 거지?” “으응…… 아! 내 옷을 벗긴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루시아는 내 손을 뿌리치고는 경계의 자세를 취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그건 나도 몰라. 내가 껴안고 잘 때까지만 해도 다 입고 있었단 말이야. 진짜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럼 내 옷을 벗긴 건 누구란 말이야?” “그, 그야…… 그날 더웠으니까…… 게다가 술에 취해 있기도 했고…… 술기운 때문에 몸이 뜨거운 상태였으니…… 니가 잠결에…… 스스로 벗지 않았을까?” “…….” “어때? 나의 추리가? 나름대로 말이 되는 것 같지 않아?” “이 저질!” 루시아는 그렇게 외치며 손에 집힌 책을 집어 던졌고, 나는 차마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얻어맞았다. 그것도 무려 책 모서리로 이마를 얻어맞았다. 퍼억! “제발 날 믿어 줘, 루시아. 난 정말 결백해.” “니가 벗긴 거 맞잖아! 이 저질! 변태! 치한! 이제 어쩔 거야? 흑흑~ 난 몰라.”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트리는 루시아. 옷 벗긴 것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나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의혹을 해소하냐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데 어쩌라고!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난 벌떡 일어나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울고 있는 루시아를 와락 껴안았다. “알았어. 내가 책임질게. 우리 내일이라도 식 올리고 같이 살자. 아! 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 식만 올리면 되려나?” “저리 가! 꼴도 보기 싫어.” 루시아는 온 힘을 다해 나를 밀쳤다. 그리고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 책임진대도 싫다고 하다니. 대체 나보도 어쩌란 말이야? 한참 난감한 상황이 계속 되고 있는데 똑똑거리는 소리가 방바닥에서 들려왔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사다리에 매달려 덮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노크인 셈이다. “들어오세요.” 내가 말하자 덮개가 열리며 지니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지니는 날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자세가 자세인지라 예를 갖추지 못하는 점을 용서해 주시길.” “사일런스 백작님이시군요. 그런데 이 누추한 곳까지 무슨 일로?” 방으로 올라온 지니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지문 감식 결과각 나왔습니다.” “예? 지문 감식 결과요?” “사실 그날 루시아 공주님께서 벗어놓으셨던 옷에 대해 지문 감식을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그 옷은 루시아 공주님께서 직접 벗으신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예? 정말요?” 잠깐.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 그 옷에는 내 지문도 묻어있을 텐데. “당연한 얘기지만 그 옷에서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의 지문도 검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의를 벗기기 위해서는 아래쪽을, 치마를 벗기 위해서는 위쪽을 잡아야 합니다. 그 부분에서는 루시아 공주님의 지문만이 검출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치마 지퍼에서 루시아 공주님의 지문만이 검출되었으니, 옷은 루시아 공주님이 직접 벗은 것이 확실합니다.” 헉! 역시 그랬군. 지니의 말을 들은 루시아는 울음을 멈추었다. 루시아는 눈물을 닦으며 지니에게 물었다. “정말이야, 오빠? 혹시 히로와 짜고 그런 말을 하는건…….” “그럴 리가! 그렇게 날 못 믿는 거야, 루시아?” “맹세코 진실만을 말씀드리는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루시아 공주님.” 지니는 루시아에게 그렇게 말한 다음 날 보며 말했다. “전 처음부터 아이언스 공작님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 누가 들으면 진짜 믿어 의심치 않은 줄 알겠다. 그나저나 지문 감식까지 하다니. 어지간히 할일 없었나 보다. 그래도 그 덕분에 나의 결백이 증명되었으니, 고마워해야겠지? “수고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한 포상은 추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더 일찍 조사를 하지 못한 저의 잘못이 큽니다.” “알긴 아는군요. 좀 일찍 했으면 제가 일 주일씩이나 이곳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죠. 내려가서 반성하세요.” “예. 그럼 전 이만.” 지니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난 루시아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이제 내 결백을 믿어 주는 거지? 응?” 루시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몰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응? 나 때문이라니?” “니가 평소에 이상한 행동만 해서 그런 거야. 아무튼 니가 나빠. 흥!”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은지 괜히 나에게 뭐라고 하는 루시아. 그 모습도 너무 예쁘다. “맞아. 내가 다 나빠. 미안해.” 난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루시아도 뿌리치거나 밀치지 않았다. “흥! 알면 됐어.” 루시아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난 빨개진 볼에 입을 맞추었다. “뭐하는 거야?” “니가 너무 예버서.” “치! 만날 그 소리.” “그치만 아무리 봐도 예쁜 걸.” “느끼해.” “느끼해도 좋아. 진심이니까.” 난 루시아의 왼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루시아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다시 루시아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거렸다. 마치 있어야할 자리를 찾았다는 듯한 모습이다. 두 개의 반지는 다시 커플링으로서의 의미를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나와 루시아의 사랑 역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왠지 좋은 느낌. 이 옥탑방 안에 루시아와 나 둘뿐. 게다가 바로 옆에는 침대까지 있다. 잘 하면 그날 못한 일을 오늘 할 수 있을지도……. “미안해.” 루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고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런 말 하지 마. 넌 아무 것도 잘못한 거 없으니까. 그저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만 알아주면 돼.”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멋진 말만 골라서 하는 것 같다. 루시아도 분명 감동했겠지? 난 루시아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랑해, 루시아.” “바, 바보…….” 루시아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난 천천히 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 따뜻한 느낌. 서로의 혀가 엉켰다. 이번에는 루시아도 적극적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덜컹! “밥 얻어 왔어, 오빠. 라면에 말아 먹…….”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들이닥친 앞짱구걸. 열리진 구멍으로 고개만 내민 영아는 키스를 하고 있는 우리를 보고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아래층에다 대고 소리쳤다. “꺄아악! 도와주세요! 영웅 오빠가 또 루시아 언니를 겁탈하려고 해요!” “……헉!” 잠시 후, 일루니아 여사님이 제일 먼저 방으로 올라왔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재빨리 루시아를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며 나에게 소리쳤다. “이 색마! 한 번 겁탈한 것도 모자라 옥탑방으로까지 끌고 와 또 겁탈을 하다니!” “그, 그게 아니구요…… 우리는 이미 모든 오해를 풀고 화해를…….” “말도 안 되는 변명하지 마, 이 뺀질아!” “아니, 이 아줌마가 진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히로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루시아님께 몹쓸 짓을 하시다니. 루시아님이 불쌍해요. 흑~.” 어느새 방에 올라온 인디는 눈물을 훔쳤다. 난 인디를 보며 소리쳤다. “넌 또 왜 끼어들어? 당장 내려가지 못해!” “뭘 잘 했다고 내 남편한테 큰소리야, 이 색마야!” “저 자식이 자꾸 성질을 긁잖아! 그리고 난 색마가 아니라니까!” “색마가 아니면 뭔데?” “색마가 아니라 뺀질이…… 아이씨! 아무튼 색마 아니야!” “이미 모든 증거가 확실한데 또 발뺌하시겠다?” “대체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그러자 이번엔 영아가 끼어들었다. “오빠가 루시아 언니 겁탈하려 하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어. 그런데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 있겠어?” “…….”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완전히 초를 친 영아. 이젠 영아까지 내 연애사업에 훼방을 놓는구나. 아아~ 이래서 언제 루시아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될 것이며, 언제 라이 동생을 만들어주는 대업을 성취하겠는가? 그저 앞길이 막막할 따름이다. “으아악!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거냐?” * * * * 이사 3일 만에 집에서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 그리고 일 주일 동안 옥탑방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드디어 기나긴 유배 생활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난 보무도 당당하게 현관물을 열었다. 사다리를 통해 내려와도 되지만, 나의 복귀를 좀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택했다. 이 순간, 악마섬에서 4년 동안 홀로 갇혀 있었던 드레퓌스가 생각난다. 진실의 승리와 더불어 영원히 기억될 그 이름. 그래. 그 무엇으로도 진실을 가릴 수 없어. 비록 고난과 고통이 가득한 가시밭길이라도 그 끝에서 승리하는 것은 결국 진실이야. 나는 진실이 가지는 힘을 믿는다. 그리고 결국은 승리해서 이렇게 돌아왔다. 현관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자 제일 먼저 나를 맞아준 것은 어린 엘프들이었다. “오빠아~.” “혀엉~.” 동시에 내 품응로 달려드는 어린 엘프들.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우엥~ 라이가 얼마나 오빠를 보고 싶어 했는데…… 오빠는 그것도 모르고 라이 마음만 아프게 하고…… 우엥~ 우엥~.” “오빠가 모르긴 왜 몰라? 우리 라이가 오빠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이 오빠는 잘 알고 있단다. 왜냐하면 이 오빠도 우리 라이가 보고 싶었거든.” “훌쩍~ 정말요? 얼마나요?” “막막 많이 보고 싶었어. 이따 만큼. 그러니까 오빠 용서해 줘, 라이야.” “헤헤~ 이렇게 돌아왔으니 용서해 드릴게요, 오빠.” 라이는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난 라이를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으앙~ 루비 버려두고 어디 갔었어요, 오빠? 루비도 오빠 막막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루비가 막막 울었는데, 달래주러 오지도 않고…… 으앙~ 으앙~ 오빠 미워요오.” “미안해, 루비야. 그래도 이렇게 돌아왔잖니? 어서 오빠 푸멩 안기렴. 오빠가 토닥토닥 해줄게.” “훌쩍~.” 난 내 품에 안긴 루비를 꼬옥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루비는 금방 밝게 웃으며 내 볼에 뽀뽀를 했다. “엉엉~ 저도 형 보고 싶었어요.” “그래 그래. 비록 너랑 별로 안 친하긴 하지만, 간만에 만나니 반갑긴 하구나.” 난 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린 엘프들은 일렬로 서서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빠(형)의 출소를 축하합니다아~!” “…….” 응? 출소? “이거 드세요, 오빠.” 라이는 미리 준비해 놓은 것 같은 두부를 내밀었다. “이거 먹으면 다시는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대요.” “그러니까 어서 먹어요, 형.” “…….”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용법이 틀리단다, 얘들아. 그래도 이렇게 준비를 한 아이들의 정성이 기특하다. 난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두부 한 모를 먹어치웠다. 짝짝짝. 박수를 치는 아이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방금 교도소에서 나온 줄 알겠군. “부엌에 있던 두부 못 보셨어요? 김치찌개 하려고 준비해둔 건데…….” 앞치마를 두른 채 나오는 인디. 난 마지막 남은 두부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다 먹었다.” “아! 오셨어요, 히로님?” “그래. 왔다.” 인디는 내 얼굴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 죄송해요, 히로님. 히로님의 결백을 의심하다니. 다 제 잘못이에요. 용서해 주세요.” 인디는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에 편승해 나를 이 집에서 축출하는 데 크나큰 공을 세우 인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누명을 벗고 복권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집에 돌아왔으니 나를 축출하는데 가담했던 자들에게 피의 보복을 시작하는 것만 남았다. 나에게는 복수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 법. 난 넓은 마음으로 인디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이놈! 너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짜고 나를 모함하였다. 그리고 나를 이 집에서 축출하는 데 앞장섰느니라.. 네가 백번 죽는다 한들 어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 “흑~ 죄송해요, 히로님.” “너 같은 무지한 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죄가 있다면 너 같은 자들을 선동한 일루니아 여사님께 있겠지. 내 특별히 이 일에 대해서 너를 문책하지 않겠노라. 하지만 나를 모셔 죄를 씻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감사합니다, 히로님.” 인디는 내 앞에서 물러났다. 이번에는 지니가 거실로 나왔다. 지니는 나를 보더니 허리를 숙였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본좌가 누명을 벗는 데 사일런스 백작님의 도움이 컸습닏. 무언가 우너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아이언스 공작님의 안녕뿐입니다.” “이제 본좌가 돌아왔으니 정권이 새로 재편될 것이빈다. 먼저 나를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역적 무리들을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세찬 피바람이 불 것입니다.” “설사 시체의 산을 넘고 피의 강을 건넌다 하더라도 끝까지 아이언스 공작님을 따르겠습니다.” “그 마음 변치 마시길 바랍니다. 이만 들어가 보십시오.” “예.” 지니는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난 넓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바로 내 집. 내가 빚 얻어서 사고 리모델링한 집. 이사한 지 3일 만에 쫓겨나, 일 주일 동안 옥탑방 생활을 하다가, 오늘에서야 돌아왔다. 오늘은 진실이 승리한 역사적인 날이다. 아이언스 히로의 복귀. 더 리턴 오브 더 히로(The Return Of The Hiro). "음하하하!“ “재수 없게 웃기는.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오는 건지.” 한창 기분 좋을 때 나타나 초를 치는 일루니아 여사님. 안경 사이로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난다. ----------------------------------------------------------------------------- 내일 더 올릴게요. 오늘 10장이나 썻음. - -; 열심히 보세요. by.ㅡㅡ;묻지마 ----------------------------------------------------------------------------- “내 집에 내가 들어온다는데, 기어 들어오든 걸어 들어오든 아줌마가 뭔 상관이야?” 나를 이 집에서 몰아내기 위해 앞장서서 사람들을 선동한 일루니아 여사님. 진정하려 했지만 이 아줌마 얼굴을 보니 확 올라온다. “완전히 보내버릴 수 있었는데, 안타깝군요.” “…….” 보내긴 뭘 보내? 어디로 보내? “아주 기어들어오지도 못하고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걸 그랬나?” “이봐요, 아줌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여자의 혼잣말을 엿들으시다니. 예의가 없으시군요.” “혼잣말은 뭔 혼잣말? 나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얘기했잖아.” “알면 다행이군요.” “……헉!” 이 아줌마가 날 복장 터져 죽게 하려고 작정했구나. “진정해, 히로. 언니도 그만 좀 해.” 팽팽한 긴장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루시아가 나타나 우리를 말렸다. “흥!” 일루니아 여사님은 코웃음을 치며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이를 박박 갈았다. 언젠간 반드시 피의 복수를……. “라이랑 놀아요, 오빠.” “루비랑 부루마블 해요.” “재밌는 얘기해주세요.” 내 옷을 잡아당기며 재촉하는 아이들. “지금은 이 오빠가 조금 피곤하니까 좀 이따 놀자꾸나.” “안 돼요. 라이는 일 주일 동안이나 오빠랑 못 놀았단 말이에요.” “맞아요. 일 주일 동안 못 논 거 메우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놀아야 돼요.” “오늘 하루 밤 새서 놀아요!” “…….”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했더니 몸이 말이 아니다. 여기저기 쑤시고, 피곤해 죽을 지경이다. 바로 자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매달리는 이 아이들을 내칠 수 없다. 일 주일 동안이나 나랑 못 논 아이들은 크게 뜬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간절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만약 내가 ‘싫어’ 라고 대답하면, 펑펑 울 것이 뻔하다. 집에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준 어린 엘프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다. 그래. 이 한 몸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거야! 나는 옥쇄(玉碎: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의미로,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는 것을 이른다)를 결심했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내리리라. “그래. 우리 재밌게 놀자, 얘들아.” “와아!” 기뻐하는 어린 엘프 일동. 이리하여 피곤해 죽을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지도 못하고 아이들과 놀아주어야 했다. 재밌는 이야기도 해주었고, 부루마블도 같이 해주었고, 비행기도 태워주었고…… 아무튼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놀아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만족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놀아주기를 원했다. 아이들의 욕구는 끝이 없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었다. 아아~ 집에 돌아왔으면 루시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할 터인데…….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린 나는 결국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내 방 침대에 누워서 요양을 취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아이들이 간호를 하겠답시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헉! 뭐, 뭐니, 그 복장은?” 의사 가운을 걸치고 목게 청진기를 두른 루. 그리고 널스캡을 머리에 얹고 간호사 복장을 한 라이와 루비. “전 의사에요.” “라이는 간호사에요.” “루비도 간호사에요.” “…….” 대체 저 복장은 어디서 난 거야? 코스프레(복장을 뜻하는 코스튬Costume과 놀이를 뜻하는 플레이Play의 합성어인 코스튬 플레이의 약자. 대중스타나 만화 주인공 등과 똑같이 분장하여 그들의 행동거지를 흉내 내는 놀이)라도 하는 거냐? “그 복장은 어디서 주워 입었니?” “인디 오빠가 만들어줬어요.” “이거 외에도 예쁜 옷 되게 많아요.” “헤헤~.” 라이와 루비는 내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어때요?” “어울려요, 오빠?” “……헉!” 이렇게 귀엽고 깜찍할 수가! 새하얀 널스캡과 새하얀 간호사복. 치마가 좀 짧아 허벅지까지 밖에 안 온다. 대신 무릎까지 올라오는 흰 양말을 신어 드러난 다리를 가렸다. 안 그래도 귀엽고 깜찍한 아이들이 이렇게 깜찍 발랄한 옷을 입다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만약 로리콘(로리타 콤플렉스lolita Complex의 약자. 미성숙한 소녀에 대해 정서적 동경이나 성적 집착을 가지는 인간들을 뜻함)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당장 눈을 뒤집어 까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옷을…….” “라이가 오빠 간호해 주려구요. 라이는 오빠의 퍼스트 널스에요.” “루비도 오빠 간호해 줄 거예요. 루비 막막 잘할 자신 있어요.” “아니야. 오빠는 라이가 간호할 거야.” “싫어. 루비가 간호할 거야. 오빠는 루비 간호를 더 좋아해. 그쵸, 오빠?” “아니야. 오빠는 라이가 간호하는 걸 더 좋아해.” 서로 나를 간호하겠다고 신경전을 벌이는 라이와 루비. 난 두 엘프를 뜯어 말렸다. “둘이 가위바위보 하렴.” “예?” “왜요?” 궁금해 하면서도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가위바위보를 하는 두 엘프. 라이가 이겼다. “라이가 이겼으니까, 라이가 퍼스트 널스(First Nurse)하고, 루비가 세컨드 널스(Second Nurse)하렴. 라이와 루비가 같이 협동해서 간호하면 이 오빠가 더 빨리 나을 테니.” “예, 오빠. 라이 열심히 할게요.” “루비도 열심히 할게요.”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불끈 쥐며 다짐하는 두 엘프. 얘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병이 다 낫는 느낌이다. 그런데 루시아는 어째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까? 루시아가 간호사 복장을 하면 어떨까? “…….” 루시아가 간호사 복장을 하고 간호를 해준다면, 평생 병이 낫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평생 침대에 누워 루시아의 간호를 받고 싶을 테니까. “그런데 뭘 하면 되는 거지?” “우웅~.” “으음…….” 뭘 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는 어린 엘프들. 얘들이 수료 과정을 밟은 것도 아니고 시험을 통과한 것도 아니니, 간호사가 뭘 해야 하는지 알 리 엇다. 그야말로 무늬만 간호사라고 할까? “그나저나 왜 너만 의사 복장이니?” “전 의사니까요.” “면허증은 있어?” “예? 면허증이요?” “…….” 면허증도 업는 주제에 의사를 칭하다니. 우리는 저런 의사를 보고 흔히들 ‘야매’ 라고 부른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싸게 하려면 야매에게. ……라는 구호가 있긴 하지만 야매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야매는 무허가 의사, 또는 무허가 의사가 한 시술 행위를 뜻한다. 무허가인 만큼 허가에 비해 싸긴 하지만, 그만큼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가장 흔한 예가 쌍꺼풀 수술을 했는데 눈이 안 감기는 경우다. 으음, 이건 좀 치명적이군. 한참을 생각하던 어린 엘프들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대로 하기 시작했다. “앗! 환자의 체온이 떨어지고 있어.” “안 되겠어. 이렇게 된 이상 루비의 체온으로 오빠를 덥혀 줄 테야.”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베고 눕는 루비. 라이도 질세라 반대편 팔을 베고 누웠다. “…….” 이 찌는 듯한 무더위에 이게 뭐하는 짓들이니? “오빠 다 나았단다, 얘들아.” 난 아이들의 정성을 생각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라이와 루비는 나를 억지로 다시 눕혔다. “아니에요, 오빠.” “오빠는 좀더 요양을 취해야 해요.” “…….” 그래. 잘 아는구나. 그걸 잘 아는 엘프들이 왜 이렇게 오빠를 가만두지 않는 걸까? “앗! 널스캡이 바닥에 떨어졌어.” “핀으로 잘 고정시키기 그랬어?” “우웅~.” 루비는 떨어진 널스캡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때문에 안 그래도 짧은 치마가 올라가며 팬티가 보였다. 땡땡이 무늬 분홍색 팬티. “꺄아! 어딜 보는 거예요, 오빠?” 루비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치마를 내렸다. 하지만 이미 보일 거 다 보인 뒤였다. 그리고 사실 볼 것도 없었다. 어린애 치마 속 봐서 뭐하겠는가? 루시아 치마 속이라면 모를까……. 흠흠. 뭐, 사람에 따라서는 라이와 루비 치마 속을 더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로리콘들은 꼭 있기 마련이니. 루비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루비 팬티 봤죠, 오빠?”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비는 얼굴을 붉히며 두 손바닥을 뺨에 얹고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오빠한테 팬티를 보이다니…… 아이~ 부끄러. 부끄부끄~.” “…….” 어째 부끄럽다기보다는 좋아하는 걸로 보인다. “루비 이제 어쩜 좋아요오?” “응? 뭘 어째?” “오빠가 루비 팬티 봤으니, 책임지세요오.” “뭘 책임져?” “아잉~ 몰라요오.” 폴짝 뛰어 내 품에 안기는 륍. 그리고는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 얘 왜 이러냐? 이 오빠가 아무리 끝내주게 멋있게 생겼다지만, 이런 식으로 대시를 하다니. “너무해요, 오빠! 루비만 예뻐하고!” “아, 아니야, 라이야. 이 오빠는 라이도 예뻐한단다.” 그러자 라이도 내 품에 안겼다. “헤헤~ 오빠 품 따뜻해서 좋아요.” 루비에게 질세라 열심히 부비부비 하는 라이. 이렇게 난리를 치는 통에 치마가 말려 올라갔다. 흰색에 파란 줄무늬 팬티. 별로 볼 거 업군. 아아~ 그날 봤던 루시아의 속옷 차림이 최고였는데. 난 라이를 붙잡고 치마를 내려주었다. “짧은 치말르 입었으면 조심해서 행동해야지. 자꾸 팬티 보이잖아.” “헤헤~.” “루비도 조심하고. 알았어?” “예, 오빠.” 난 라이와 루비를 껴안고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루시아가 들어왔다. 루시아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나와 내 품에 안겨있는 라이와 루비를 보았다. “너 지금 애들한테 무슨 짓하는 거야?” “응? 무슨 짓이라니…….” “애들한테 간호복은 왜 입혔어? 너 설마…….” 의심 가득한 루시아의 눈초리. 난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루시아. 이건 얘들이 알아서 입고 온 거야. 결코 내가 입힌 게 아니야. 난 그런 취미 없어.” “오빠가 루비 치마 속 들여다봤어요.” “라이 팬티도 봤어요.” “……헉!” 오해성 짙은 라이와 루비의 발언. 루시아의 얼굴이 분노로 빨갛게 변했다. “이젠 아이들한테까지 그런 짓을…….” “아, 아니야! 오해야! 난 정상적인 남자라고! 애들에겐 취미 없어!” “예? 라이한테 취미 없어요?” “루비한테는 취미 있죠? 그쵸 오빠?” “내가 설마 니들같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들에게 취미가 있겠니?” “우에에엥~ 오빠 미워요오.” “으아아앙~ 루비는 오빠 싫어할래요오.” 나의 말에 라이와 루비는 울음을 터트리며 루시아에게 갔다. 루시아는 아이들을 안아 달래주었다. “울지 마, 얘들아.” “우엥~ 우엥~ 오빠가…… 라이한테 막막 취미 없다고…….” “으앙~ 으앙~ 오빠가 루비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예요오.” “그래 그래. 알았어, 얘들아. 나중에 언니가 오빠 혼내줄게.” 루시아는 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라이와 루비 간호복 입으니까 너무 귀엽다.” 그러자 이때까지 멀뚱멀뚱 서 있던 루는 재빨리 루시아에게 물었다. “저는요, 누나?” 루시아는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루를 보더니 역시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도 귀여워.” “헤헤~.” 루시아와 아이들이 같이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루시아는 나에게 말했다. “빨리 일어나.” “응? 일어나라니?” “외식하러 가자.” “외식?” “응. 아이들이 외식하고 싶대. 한동안 외식도 못 했으니, 오늘 하려고.” “와아아!” 기뻐하는 어린 엘프 일동. 하지만 난 기뻐할 수가 없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도 부족할 판국에 외식이라니! 진 빚이 얼만데! 하지만 아이들과 루시아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 힘없는 내가 뭘 어쩌겠냐? 그래도 오늘은 좀 쉬고 싶다. 일 주일 동안 유배 생활을 하고 왔으니, 좀 쉬게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저, 저기…… 그냥 내일 가면 안 될까? 나 피곤한데…….” “안 돼.” “…….” 그렇게 딱 잘라 말하다니. 난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루시아와 아이들과 함께 외식을 하러 나갔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자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마구 먹기 시작했다. 쟤들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의문이 든다. 대체 먹은 음식을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저거 질량보존법칙에 위배되는 거 아니야? “…….” 따지지 말자. 사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끝도 없는 게 이 소설의 특징이다. 때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행인 것은 이 패밀리 레스토랑은 샐러드가 무한 리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쯤이면 그 제도가 바뀌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샐러드를 전부 어린 엘프들이 쓸어갔으니까. 패밀리 레스토랑 직원들과 손님들은 싹 비워진 샐러드 코너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샐러드를 순식간에 해치우는 우리 애들을 보고 눈을 까뒤집었다. 으음, 앉은 자리에서 패밀리 사이즈 피자 두 판 해치우는 걸 우습게 생각하는 아이들이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피자 리필 사건’ 에서 그 점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아이들이 아까 그 복장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는 것이다. 의사 가운을 걸친 루와 간호복을 입은 라이와 루비. 안 그래도 귀엽고 깜찍해서 만인의 시선을 받는 어린 엘프들이 이런 복장을 입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부 남자들은 라이와 루비의 다리 쪽을 열심히 훑어보는 걸까? 얘들이 볼 게 뭐가 있다고? 난 냅킨을 라이와 루비 무릎 위에 올려놔 드러난 다리를 가려주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와 분노의 눈길이 쏟아져 나왔다. “…….” 대체 뭐야, 저 인간들은? “널스캡은 좀 떼고 오지 그랬니?” “무슨 소리야? 이 쪽이 훨씬 더 귀엽잖아.” “…….” 그래서 문제지. 루시아는 복스럽게 먹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운지 볼에 입을 맞춰 주었다. 나도 루시아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도 복스럽게 먹어볼까? “…….” 피곤하니 입맛도 없다. 이렇게 식사를 끝마친 우리들은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라이와 루비 사이에서 또 다시 작은 다툼이 일어났다. “루비가 먼저 찜했어.” “오빠 등은 원래 라이 전용이야.” “아니야. 오빠는 루비 업어주는 걸 더 좋아한단 말이야.” “오빠는 라이 업어주는 걸 백만 배 더 좋아해.” 서로 내 등에 업히겠다고 싸우는 두 엘프. 보다 못한 루시아가 중재안을 제시했다. “반반씩 업혀. 오빠가 먼저 라이를 반 업어준 다음에, 루비를 반 업어주는 거야. 그러면 되지?” “예. 좋아요.” “네. 루비는 그렇게 할게요.” “…….” 내 의사는 완전히 배제하고 자기들까지 합의하다니! 업어주는 사람은 나인데. 어쨌든 나에게 거부권이란 없으니 합의된 내용대로 이행해야만 한다. 내가 등을 내어주자, 라이는 폴짝 뛰어 내 등에 업혔다. 얼마나 먹었는지 무게가 두 배는 늘어난 듯한 느낌이다. 라이는 두 팔을 내 목에 둘렀고, 난 손으로 라이의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으음, 치마가 짧긴 짧군. 루시아도 이런 짧은 치마를 입으면 좋을 텐데……. 물론 내 앞에서만. 다른 놈들이 루시아 다리보고 침 질질 흘리는 꼴은 절대 못 본다. 우리는 집을 향해 걸어갔다. 이렇게 가족들과 같이 있으니 정말로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난다. 아아~ 행복해. 나는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피곤한 남자~. 빨리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다. “자, 이제 교대하자.” “우웅~.” 난 아쉬워하는 라이를 내려놓고 루비를 업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대체 루와 루비의 할머니인 루엔과 라이레얼의 아버지인 갈리온드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따로 살림이라도 차렸나? 돈도 다 떨어졌을 텐데…… 걱정이로군.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루와 루비 얼굴 보러 집에 들러줬으면 좋겠다. 루시아는 라이와 루의 손을 잡고 걸었다.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루시아와 팔짱을 끼고 걸어야할 텐데……. 아아~ 난 언제쯤이나 아이들 업어주는 신세를 벗어나게 되려나? 이젠 나도 루시아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다. 그나저나 루비 얘 너무 무겁군. 자꾸만 다리가 풀릴 것 같다. 이제 집이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힘내자! 난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어찌어찌하여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아는 목욕한다며 라이와 루비를 데리고 거실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리도 목욕해요, 형.” 내 옷깃을 잡아당기는 루. 난 손을 내저었다. “피곤해 죽겠으니 혼자 알아서 하렴.” “쳇!” 루는 목욕을 위해 일루니아 여사님방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난 양말을 벗어 던지고, 침대 위에 엎어졌다. 막 잠이 들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여리며 라이와 루비가 뛰어 들어왔다. “오빠아~!” “헉! 니들이 왜 또 여기에?” 귀여운 잠옷을 입은 라이와 루비는 내 침대로 뛰어올랐다. “오빠랑 같이 자려구요.” “헤헤~ 언니한테도 허락 맡았어요.” “뭐? 진짜?” “응. 진짜야.” 루시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루시아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누르고 있었다. 방금 목욕을 끝마친 모습이 상큼하기 그지없다. “루는 내가 데리고 잘 테니까, 오늘은 니가 라이와 루비 데리고 자.” “헉! 루랑 같이 자겠다고?” 루는 남자. 남자는 아무리 어려도 전부 늑대. 당연 무지하게 걱정된다. “라이랑 루비한테 이상한 짓하면 알아서 해. 나중에 애들한테 다 물어볼 거니까.” “헉!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내가 이상한 짓하고 싶은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그럼 잘 자.” 루시아는 불을 끄고 방문을 닫아주었다. 라이와 루비는 재빨리 나의 품을 파고들었다. “라이가 오빠 막막 좋아하는 거, 오빠도 잘 알죠?” “루비도 오빠가 막막 좋아요. 아까 루비 팬티 봤으니까, 오빠가 루비 책임지세요. 헤헤~.” “라이 팬티도 봤으니까, 라이도 책임지세요.” “아니야. 오빠는 루비를 먼저 책임져야 해.” “아니야. 오빠는 라이를 먼저 책임져 줄 거야. 그쵸 오빠?” “…….” 이젠 진짜 좀 쉬고 싶다. 아이리스 2부 8권 Story 22 등장, 최모 편집자 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덮개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보던 영아는 날 보더니 말했다. "노크 좀 하고 올라와,오빠." "사다리에 매달려 두드리기 힘들다." "그래도 개인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잖아." "너나 내 발 들어올 때 노크 잘 하렴." 영아가 이 집에 들어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침대에 누워 만화책 보기와 내려와서 어린 엘프들과 놀아주기, 그리고 밥 먹는 것이 전부이다. "너 마감이라면서 글 안 써도 괜찮은 거야?" "상관없어. 편집자한테 좀 늦춰달라고 하면 돼." "늦춰달라면 늦춰주니?" "안 늦춰주면 어쩔 건데? 그리고 어차피 지금 써봐야 마감 맞추기는 글렀어. 그냥 마음이라도 편하게 있어야지." "......" 이젠 아주 막나가는구나. 과거 성실했던 작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한때 밤새서 글을 쓰던 영아는 이제 마감 때도 놀고먹는 작가로 변신했다. "너 옛날에는 열심히 쓰지 않았니? 막막 밤새서 쓰고 그랬잖아." "그때는 열정이 넘치던 시기였으니까." "지금은?" "몰라. 지금은 좀 피곤해." "아무리 피곤해도 마감은 맞춰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프로의 자세잖아." "그건 그렇지만...... 으음, 뭐 마감 지키는 작가가 몇이나 된다고? 마감 일 주일 어기는 건 애교야." "그건 자가가 생각이고, 편집자 생각은 다르지 않을까?" "아무튼 요즘은 글이 잘 안 써져. 이럴 땐 억지로 쓰기보다 재충전을 하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며 뒹굴거리는 영아. 내가 보기엔 너무 재충전 하는 것 같다. "대체 얼마를 더 써야하는 거야?" "한 권." "한 권?" "응." "한 권이라면..... 설마 한 줄도 안 썼다는 뜻이니?" "응." "........" 아주 당당하게 대답하는군. "전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왜 작가들은 평소에 조금씩 써놓지 않고, 마감 때면 부랴부랴 쓰는 걸까? 평소에 조금씩 써놓으면 마감 때 밤새서 쓸 필요가 없잔아." "그럼 오빠는 평소에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 봤어? 시험 날짜 뻔히 알면서도 펑펑 놀다가 시험 때 되면 밤새서 공부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야." "......." 너무 완벽한 비유여서 한 방에 이해된다. "마감 때면 기분이 어때? 초조하지 않아?" "물론 초조하지. 그 기분이 어떠냐하면..... 으음, 왜 그런 거 있잖아.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는 하나도 안 해놨을 때의 기분.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해도 어차피 늦었는데, 그래도 급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금 니 기분은?" "아예 시험을 때려치운 기분이야. 점수에 연연하지 않으면, 초조해야할 필요도 없으니까. 나름대로 편해." "빰빠라♬ 빰빰빠♬ 그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영아는 귀찮다는 듯 만화책을 덮고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예? 편집자님이세요? 오랜만이에요. 열심히 쓰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전 이만." 영아는 자신 할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누구야?" "으응. 내 담당 편집자." "담당 편집자?" "응. 최모 편집자님이라고 있어." "최모 편집자? 어째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은데....." "이 바닥에서 유명한 분이야. I모 소설을 집필하는 박모 작가나 KTF를 집필하는 김모 작가도 최모 편집자님이 담당하시는 걸." "그,그래? 그런데 이름이 참 특이하네. 최모라니." 작가는 본명을 제대로 썼는데, 편집 과정에서 이런 식으로 바뀐거 아니야? 어차피 이 소설은 최모 편집자의 손을 거쳐서 나오니. 빰빠라♬빰빰빠♬ 또 다시 울리는 휴대폰. "아이씨! 열심히 쓰고 있다는데 왜 또 전화야?" 영아는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받았다. "열심히 쓰고 있다니까요. 왜 그렇게 작가를 못 믿으세요?" 역시나 자기 할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영아. 심지어는 핸드폰 배터리를 빼서 던져버렸다. "이 오빠가 보기에는 우리 영아가 별로 열심히 쓰는 것 같지 않구나. 침대에 누워 뒹글거리며 만화책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구나." "원래 말은 다 그렇게 하는 거야. 엄마가 공부 열심히 하냐고 물어보면, 펑펑 놀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라고 대답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지." "으음, 그렇구나." 생각해보면 나 고등학교 때 그랬다. 방문을 잠가놓고 있으면, 어머니께서 뭐하냐고 물어보신다. 그럼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참고로 당시 나는 컴퓨터로 야동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노모를. "......." 흠흠, 뭐 소싯적에 그런 거 한번 안 본 사람은 없겠지? 참고로 어젯밤 내내 컴퓨터 돌려 내 방 컴퓨터에도 한 가득 받아놨다. 나중에 루시아 없을 떄 봐야지~. 그런 거 보다 걸리면 그 날로 쫓겨날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이따 시간 되면 내려오려무나, 오늘 점심 메뉴는 냉면이란다. 물냉면, 비빔냉면, 회냉면, 열무냉면 등 메뉴도 다양해. 날씨가 더워서 내가 특별히 인디에게 만들라고 시켰어." "알았어, 오빠. 이따 내려갈게." 난 뒹글거리는 영아를 놓아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째 저러고 있어도 정말 괜찮을까? 혹시 최모 편집자 우리 집까지 쫓아오는 거 아냐? * * * * 경기도 모처에 위치한 책상자 출판사 소설팀 편집자 사무실. 좁은 사무실 안에서 다섯 명의 남자가 열심히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다음 아닌 원고 편집이었다. 작가가 원고를 넘긴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책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편집자의 손을 거쳐 교정과 편집이 완료돼야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오타를 찾아내고, 잘못된 문장을 바로 잡으며, 때로는 내용상의 오류를 잡아내 고치기도 한다. 또한 책이 예쁘게 나올 수 있도록 문단이나 줄 배열을 새로이 한다. 북 디자인(Book Design: 표지뿐만 아니라 책 전반에 형식미를 주는 작업)과 레이아웃(문자 원고와 도판 원고, 사진 원고 등을 효과적으로 배열하는 공간적 편집 기술) 역시 편집자의 몫이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하는 책상자 출판사 소설팀 편집자들. 뜨겁게 달아오른 컴퓨터는 계속해서 열을 내뿜고 있었다. 무려 네 대의 컴퓨터가 동시에 열을 뿜어대니, 그것만 으로도 실내 온도가 몇 도는 올라간 느낌이다. 편집자들은 얼음물을 벌컷벌컷 마셔가며, 부채로 얼굴을 부쳐가며 모니터에 나타난 원고를 편집했다. "아이씨! 이런 날 에어콘이 고장 나면 어쩌자는 거야?" "수리 기사 언제 온대?" "뿔렀으니 언젠간 오겠지." "이도견 작가 원고 넘어왔어?" "그 작가 원고 벌써 몇 달째 안 들어오고 있다." "소집 해제 했으니까 열심히 쓴다며?" "말로는 뭘 못해?" "편집자가 작가 말을 믿느니, 정치인 마을 믿고 말지." 그래도 편집자 생활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작가를 믿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믿은 철저히 배신당한다. 1.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2. 내일까지는 반드시 원고를 넘기겠습니다. 3. 다음 마감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작가들이 이렇게 말하면, 편집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1. 열심히 쓰는 척하면서 결코 쓰지 않고 있다. 2. 지금 막 쓰기 시작했으니 원고 받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 3. 다음 마감 때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한두 번 속았어야 믿든지 말든지 하지. "이간섭 작가 소드 킹(Sword King) 원고는 넘어왔어?" "그 작가야 칼이지. 간섭 안 해도 날짜 되면 칼같이 원고 넘어오잖아." "참으로 훌륭한 작가님이야. 그런 훌륭한 작가가 더욱 많아져야 우리 편집자들 삶이 윤택해질 텐데." 물론 그런 작가는 극히 드물다. "어이, 최편. 박모 작가 원고는 받았어?" "다 썼는데,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 컴퓨터가 망가져 원고가 날아갔대. 그래서 마감 좀 늦춰 달래." "뭐? 아니, 그 작가 컴퓨터는 왜 만날 망가진대?" "저번에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저번에는 아마 위암 말기였지?" "친구 부모님만 한 수십 명 돌아가셨지? 난 하루 걸러 한 번씩 초상치르는 작가는 처음 봤다니까. 아니, 무슨 전염병이라도 돌았대?" "그 작가가 걸린 병만도 수십 가지지. 난 무슨 종합병원인 줄 알았다니까." 참고로 I모 소설을 집필하는 박모 작가의 마감 변명 3단 콤보는 다음과 같다. 1. 몸이 아픕니다. 2. 컴퓨터가 망가져 원고 파일이 날아갔습니다. 3,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박모 작가는 마감 때만 되면 감기, 몸살, 두통, 결핵, 폐렴, 위암, 간암, 심장병, 루게릭병, 이따이이따이병, 알프하이머병 등에 걸리는 희한한 체질이다. 게다가 맹장 제거 수술만 벌써 세 번째 받았고, 남자인 주제에 생리통까지 있다. 그리고 평소 멀쩡하던 컴퓨터는 이상하게 마지막 마침표 찍을 때 망가지고, 친구 부모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가신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박모 작가 친구들은 전부 고아일 것이다. '아무래도 사흘 동안 잠 안 재우고 닦달하기 스킬의 봉인을 또 풀어야겠군.' 최모 편집자는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당시 박모 작가는 마감을 한 달이나 어긴 상태. 계속 재촉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열심히 쓰고 있는 중입니다' 라는 답변만 돌아올 분이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최모 편집자는 박모 작가의 집에 직접 찾아갔다.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오락기를 뭍들고 있는 박모 작가였다. 원고는 한 줄도 안 쓴 주제에 오락기나 붙들고 있다니! 그것도 열심히 쓰고 있다고 편집자를 속이며! 예전에 이와 똑같은 상황이 있었었다. 그래서 자신을 자극하지 말라는 의미로 술자리에서 그 얘기를 박모 작가에게 해주었다. 하지만 박모 작가는 그 얘기를 듣고 조심하기는켜녕 그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최모 편집자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작가 인권 보로 차원에서 봉인해 두었던 사흘 동안 잠 안 재우고 닦달하기 스킨의 봉인을 풀었다. 그 길로 컴퓨터 앞에 앉은 박모 작가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글을 써야 했다. 조금의 휴식도, 조금의 잠도 허용되지 않았다. 박모 작가는 박카스를 물처럼 마시며 사흘 동안 글만 썼다. 더욱 독한 것은 최모 편집자였다. 최모 편집자는 화장실 한 번 안 가고 사흘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박모 작가의 뒤를 지켰다. 사흘 만에 한 권을 뽑아낸 박모 작가는 그 긱로 병원에 실려 갔다. 그리고 원고를 받아든 최모 편집자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박모 작가의 집을 나섰다. 그 순간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며 최모 편집자의 앞길을 비추었다.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니, 다시 한번 편집자의 쓴맛을 보여줘야겠군.' 책상자 출판사 소설팀 편집자 최모. 올해로 편집자 경력 7년째인 그는 '마감 날짜 전에 원고를 안 넘겨주는 작가는 편집자의 적이다. 적을 무찌르는 데 있어서 어찌 과정을 따지겠는가? 중요한 것은 승리해서 원고를 받아내는 것이다' 라는 극단 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편집과 레이아웃 족에도 베테랑이지만, 그의 진짜 주특기는 불량작가(수시로 마감을 어기는 작가를 이르는 말)에게 원고 받아내기였다. 그는 그것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은신술, 미핼술, 추적술, 잡입기술, 고문기술 등을 익혀왔다. FBI 요원이나 CIA 요원은 최모 편집자 발꿈치도 못 따라간다. 잠입 침투의 귀재라는 솔리드 스네이크도 최모 편집자에게는 한 수 접어줄 정도다. 그런 그의 이름은 최모. 성이 '최' 고, 이름이 '모' 다. 어째서 이런 이상한 이름인 걸까? 사실 박모 작가가 원고를 넘길 떄만 해도 제대로 된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원고가 최모 편집자 손을 거치면서, 이름이 '최모' 로 수정된 것이다. 아아~ 이런 부당한 검열이라니. 우리나라 문화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이런 부당한 검열을 철폐돼야 할 텐데. 아무튼 최모 편집자는 박모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모 작가님?" [아! 안녕하세요, 최모 편집자님. 쿨럭쿨럭~ 한국에 사스가 재발했다는 소문 들으셨죠?] "못 들었는데요." [쿨럭쿨럭~ 오늘 뉴스에 나갈 겁니다. 제가 첫번째 재발자인 것 같으니까요. 쿨럭쿨럭~.] "컴퓨터가 망가지더니, 이젠 사스까지 걸리셨군요. 이따 저녁 때 장례식은 없나요?" [쿨럭쿨럭~ 어떻게 아셨어요? 안 그래도 친구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쿨럭쿨럭~ 워낙 친한 친구라 아픈 몸 이끌고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 그러시군요, 그럼 뭐 어쩔 수 없지요." [쿨럭쿨럭~ 이해해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최모 편집자님.] "후후후~ 이해? 지금 이해라고 하셨습니까?" [쿨럭쿨럭~ 예?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지금 나랑 장난해! 마감 변명 3단 콤보 쓰면 누가 넘어갈까봐? 변명은 필요없어! 사흘 안에 무조건 원고 넘겨!" [예?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사흘 동안 잠 안 재우고 닦달하기 스킨 봉인 풀까? 응?" [헉! 그,그것만은 제발..... 흑~ 쓸게요. 쓰면 되잖아요.] "정확히 사흘입니다. 박모 작가님. 그때 까지 원고가 넘어오지 않으면 도망치셔도, 숨으셔도 소용없습니다. 제 능력은 박모 작가님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무,물론입니다. 이 한 목숨 다 바쳐 반드시 마감전선에서 승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을 최모 편집자님께 바치겠습니다.] "마감최전선에 선 그대에게 편집자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만." 최모 편집자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걸로 박모 작가 일은 일단 해결.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교주님이 보고 계셔 다음 권 원고는 어떻게 됐어? 이거 일정대로 출간 못하면 큰일인데." "안 그래도 다음 권 출간이 너무 늦다는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어. 어이~ 최편. 그쪽 작가랑 연락은 돼?" 최모 편집자는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부터 안 되고 있어. 아무래도 잠적한 것 같아." 박영아 작가의 담당 편집자는 다음 아닌 최모 편집자였다. 얼마전까지 원고를 잘 넘기던 박영아 작가는 갑자기 잠수를 탔다. 그리고 마감일이 다 된 지금가지도 소식이 없었다. 최모 편집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보세요.] 웬일로 연결이 되었다. 최모 편집자는 안도하며 말했다. "여보세요. 저 담당 편집자인 최모입니다." [예? 편집님이세요? 오랜만이에요.] "예. 교주님이 보고 계셔 원고 만씀인데......" [열심히 쓰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전 이만.] "자,잠깐만요!." [뚜뚜뚜뚜] 박영아 작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귾었다. 최모 편집자는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여보세....." [열심히 쓰고 있다니까요. 왜 그렇게 작가를 못 믿으세요?] "아니....." [뚜뚜뚜뚜] 또 다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박영아 작가. 최모 편집자는 참을성을 가지고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이런 빌어먹을!" 수화기를 쥔 최모 편집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다가 전화를 끄는 수법. 잠적하는 작가들이 흔히 쓰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후후~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건가? 감히 나 최모 편집자를 우습게 보다니!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우너고를 받아 내리라!" 다짐을 한 최모 편집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짐을 챙겼다. 사무실을 나가는 최모 편집자는 다른 편집자들이 격려해주었다. "잘 가." "원고 꼭 받아내." "올 떄 맛있는 거 사와." "가기 전에 에어컨 좀 고쳐놓고 가." "......." 아무튼 이러게 다른 편집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등에 업은 최모 편집자는 영아를 찾아 나섰다. * * * * * 후루룩~ 후루룩~ 넓은 식탁에 앉아 열심히 냉면을 먹는 가족들. 식탁이 넓다보니 가족 전체가 앉아도 문제없다.(영아를 위해 의자도 하나 더 놓았다). 아아~ 이 가족적인 분위기. 너무 마음에 든다. "맛있니?" 끄덕끄덕. 입에 면발을 가득 문 채 고개를 끄덕이는 어린 엘프들. 그 모습이 귀여워 난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더운 여름에는 냉면이 제격이지. 많이 먹으렴. 얼마든지 있으니까." 난 시원한 물냉면 육수를 들이켰다. 우리에게는 이게 점심이지만, 라이레얼과 카르에게는 아침이다. 언제나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는 라이레얼과 카르. 괜히 방에 텔레비전과 오락기를 설치해준 것 같다. "요즘 몸이 찌뿌둥하네. 근육도 좀 준 것 같고." 라이레얼은 목을 풀며 그렇게 말했다. "운동 좀 하는 게 어때요?" "운동?" "예. 이 세계로 온 뒤에 운동 거의 안 했잖아요." "으음, 그건 그렇지." 사실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나부터 운동을 좀 해야 하는데. 냉면을 먹는 도중에도 라이와 루비는 호시탐탐 내 무릎을 노렸다. 어떻게든 내 무릎 위에 앉고 싶어 하는 두 엘프. 인기남은 피곤해~. 영아는 냉면을 먹으면서도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뭐가 그러헥 재밌는지 킥킥 웃다가 결국 면발을 코로 뱉어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입 안의 면발을 전부 맽어낼 뻔했다. "야! 너 지금 식탁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만화책 못 치워? 이게 어디서 코로 면발을 붐어내고 있어? 그게 세입자가 집주인 앞에서 할 짓이야!" 그렇다 영아는 세입자고, 나는 집주인. "쳇! 집 한 채 있다고 유세 떨기는." "뭐라? 너 지금 집주인한테 말 다 했어? 집주인의 특수 스킨인 세입자 내쫓기 스킬을 발동할까? 응?" "한 달에 1백만 원이나 내며 됐지. 더 이상 뭘 바래?" "......" 그건 그렇다. 영아가 내는 집세는 한 달에 무려 1백만 원. 우리 집 가게 경제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으음, 사정이 이러하니 쫓아내지도 못하겠군. 식사를 끝마친 사람들은 가가자 일어났다. 라이레얼과 카르는 다시 오락하러 갔고, 어린 엘프들은 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고 놀러 갔다. 지니와 크로니스는 가게 재개장 문제 때문에 밖으로 낙갔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할일이 있다며 바으로 들어갔다. 영아는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갔고, 인디와 루시아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남았다. "설거지 그냐 ㅇ인디한테 다 시키면 안 돼? 니 손에 물 묻는 거 보면 내 가슴이 아파." "설거지는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그,그래? 그럼 나도 도와줄게." 난 재빨리 루시아의 옆으로 다가갔다.그리고 인디에게 누짓을 했다. 인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난 다시 눈짓을 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히로님?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여전히 눈치를 못 채는 인디. 난 화가 나서 소리쳤다. "나가라고, 임마! 넌 눈치도 없냐? 이렇게 눈치를 줬으면 알아서 자리를 비켜줘야 할 거 아니야?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헉! 설마 나와 루시아가 단 둘이 있지 못하게 하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특명을 받은 거냐?" "아,아니에요, 히로님.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답니다. 흑~ 눈치 업서엇, 죄송해요." 눈물을 흘리며 뛰어가는 인디. "이걸로 훼방꾼은 사라졌다. 아악! 무슨 짓이야, 루시아?" 루시아는 내 옆구리를 세게 꼬집으며 말했다. "넌 왜 형부를 울리고 그래?" "아,아니, 저놈이 자꾸 눈치 없이 구니까....." "앞으로 형부 좀 그만 울려. 그러니까 언니가 널 더 미워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야, 루시아. 그 아줌마는 더 이상 미워할 수 없을 만큼 나를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미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그 정도로 미워하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더 미워할 수 있겠는가? "너나 언니나 정말 왜들 그러는 건지....." "아무튼 이렇게 둘이서 설거지 하니까 참 좋다. 그치?" "말 좀 그만하고 빨리 설거지나 해." "응응." 난 루시아 옆에 서서 냉면 그릇을 씻었다. 세제를 풀고 수세미로 열심히 문댔다. "이렇게 둘이서 설거지하니까 마치 부부 같다. 넌 어떻게 생각해?" "별로." "아!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됐어." "......" 아아~ 이번 기회를 통해 어떻게 한번 잘해보려는 나의 게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설거지 끝내고 뭐할 거야? 쇼핑이라도 할까? 내가 예쁜 옷 사줄게." "이거 끝나고 빨래 다려야 돼." "......." 주부 다 됐구나 "아! 애들 이빨 닦아줘야겟다. 애들이 이빨 닦는 걸 싫어해서 큰일이야. 남은 설거지 부탁할게." "으응." 말을 끝마치고 아이들 챙기러 가는 루시아. 나는 남은 설거지를 몽땅 해야 했다. 식구가 많다보니 설거지 양도 장난이 아니다. 이 많은 설거지를 매일 같이하는 인디가 존경스러워진다. 인디 없으면 이 집안 살림은 누가 다 하려나? 설거지를 끝마친 나는 담배라도 필 겸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온갖 폼을 다 잡으며 피우고 있는데, 한 남자가 비상게단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옥상으로 올라온 그 남자는 날 보더니 다가왔다. 난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며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여기에 박영아 님이 살고 계신 것 맞습니까?" "예. 맞는데요." "아아~ 사촌오빠분이셨군요. 윤팀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윤팀이요?" "윤승이 팀장이라고..... 전에 만나지 않으셨나요?" "아아~ 그분이요?" 책상자 출판사 편집팀장이자 야오이계의 대부, 통칭 야오랑인 그분을 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누구신지?" "아! 제 소개를 안 해드렸군요. 전 책상자 출판사 편집자인 최모라고 합니다. 박영아님 담당 편집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정말로 '최모'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말로만 듣던 최모 편집자님을 실제로 만나 뵙게 되다니! 왠지모르게 영관스럽다. 이렇게 명함을 받았는데, 건네줄 명함이 없으니 좀 그렇다. 이거 나도 명함 하나 파든지 해야지. 아까 영아가 전화를 마구 끊은 게 기억난다. 그것도 모자라 핸드폰 배터리까지 빼놨지. 그래서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오신 건가? 난 최모 편집자를 보았다. 나이는 대략 30대 중반. 키는 보통 정도고, 몸은 약간 말랐다. 단정하게 깍은 머리와 두꺼워 보이는 안경. 얼굴은 평범했다. 잘 생기지도 못 생기지도 않은....... 하지만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만한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편집자란 소개를 듣고 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편집자 같은 느낌이다. 으음, 정말 편집자스럽게(?) 생겼군. 입고 있는 옷은 베이지색 면바지에 파란색 반팔티. 신발은 운동화다. 그것도조깅화. "옷이 참 편해 보이네요." "편집자 보고 도망치는작가를 쫓아가려면 이런 복장이 편하거든요." "......예?" 그러고 보니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힘들어하는 것 같지 않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시나 봐요?" "불량작가들 소탕하려면 강력한 체력은 필수지요. 그래서 요즘은 헬스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예?" 불량배도 안기ㅗ 불량식품도 아니고 불량작가? "지금 박영아님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예. 지금 집 안에 있어요. 밥 먹고 쉬고 있을 거예요." "예....... 아!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서명대를 찾아갔었습니다만, 자퇴를 하셨더군요. 우연히 룸메이트라는 분을 만나 물어물어 찾아왔습니다." "그,그렇군요." 그 짧은 시간 안에 옥탑방 현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띵동~♬ "영웅 오빠야?" 영아는 나인 줄 알았는지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선 사람은 내가 아닌 최모 편집자였다. "안녕하세요, 박영아 작가님." 최모 편집자님의 등장에 영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햇다. "아, 예. 오랜만이에요, 최모 편집자님." "전화를 안 받으셔서 이렇게 직접 찾아 왔습니다. 원고는 어떻게 되었는지요?" "에, 그게...." 영아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심히 쓴다고 말해놓고 열심히 놀지 않았던가? 쾅! 갑자기 현관문을 걸어 잠그는 영아. 그 행동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놀란 최모 편집자는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문 여세요. 이러셔도 소용없습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라는 속담과는 달리 한번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자 최모 편집자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켰다. 하지만 기름이 다 됐는지 라이터는 불꽃만 튀길 뿐 불이 켜지지 않았다. 난 지포라이터를 켜서 최모 편집자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뭘요. 요즘같이 담뱃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힘든 세상에 흡연자들끼리 돕고 살아야죠." 이렇게 된 거 나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같이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마감 안 지키는 작가들이 많나요?" "대다수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중에서 악질적인 작가들을 일명 불량작가군으로 분류합니다." "아아~ 그렇군요." "I모 소설을 집필하는 박모 작가, KTF 소설을 집필하는 김모 작가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그렇군요." 최모 편집자는 내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왜,왜 그러시는지요?" "아닙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작가분과 굉장히 닮아서요." "그래요? 누구랑요?" "박모 작가라고 있습니다. 항상 뺸질거리는 작가지요." "헉! 그,그런.... 그래도 그 작가 잘 생기지 않았나요?" "하하하~ 잘 생기긴요? 얼마나 뺀질뺀질하게 생겨 먹었는데요. 오죽하면 별명이 뺀질이겠습니까?" "헉! 빼,뺀질이....." "이런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제가 그 작가 만나고 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편집자 생활 7년에 그렇게 뺀질거리는 작가는 처음입니다." "저, 저기.... 저도 이런 말씀드리긴 죄송하지만, 그 작가는 편집자님 만나고 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 걸 보고 흔히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란 사자성어를 쓰지요. 또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라는 속담을 쓰기도 합니다." "....." 우리는 다시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 난 꽁초만 남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실 건가요?" "이 앞에서 계속 기다려야지요." "예? 계속 기다려요?" "예. 문 열어줄 때까지 여기 판 펴고 누울 겁니다." "그래도 안 열면요?" "며칠이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열게 되어 있습니다. 인내심은 편집자의 덕목 중 하나죠." "그래도 안 열면요?" 그렇게 말하는 최모 편집자는 눈을 번뜩였다. 난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이사람..... 정말로 판 펴고 누울 생각이야! "저,저기요..... 지금 와서 이런 말씀드리기 정말 뭐한데 말이요." "뭔가요?" "정말 말씀드리기 좀 그런데...." "뭐지요?" "저 옥탑방 다른 출구도 있거든요." ".....예?" "옥탑방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바로 아해츨으로 내려갈 수도 있어도 그래서 그곳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가 있지요." "......" "......" "정말인가요?" "뭐, 그렇습니다." "....." "....."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동시에 옥상 난간 쪽으로 달려갔다. 건물을 빠져나온 영아가 열심히 달리는 모습이 보 였다. 그 모습을 본 최모 편집자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황급히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최모 편집자. 난 일단 최모 편집자의 뒤로 따라갔다. 하지만 눈치 채는 것이 너무 늦었다. 어 느새 큰 길로 나간 영아는 택시를 잡아탔다. "안 돼! 멈춰!" 택시는 최모 편집자의 비명을 뒤로하고 급출발을 했다. 눈앞에서 작가를 놓친 허탈감에 최모 편집자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럴 수가!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일단 돌아가지요." 난 최모 편집자를 데리고 다시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집주인이기 때문에 당연 예비열쇠도 가지고 있다. 난 그것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 책을 봤으면 좀 꽂아놓을 것이지. 어째서 주위에 던져 놓는 건지..... "잠깐 노트북 좀 살펴보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최모 편집자는 영아의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원고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끄아!"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최모 편집자. "왜 그러세요?" "어어...." 최모 편집자는 말을 못하고 모니터만 가리켰다. 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교주님께서 보고 계셔 4권 딱 제목 한 줄 쓰여 있다. "으음, 한 줄도 안 썼다더니 그래도 제목은 써놨군요." "역시 작가들이란...." 최모 편집자는 분노에 가득 차 이를 박박 갈며 몸을 부들부들 떨 었다. 마치 영아가 앞에 있으면 씹어 먹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다. 최모 편집자는 분노를 삭일 길이 없는지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저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술이나 한 잔 하러가지요. 어차피 갈 데도 없는 애니 저녁때이면 돌아올 겁니다. 그때까지 근처 호프집에서 술이나 마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최모 편집자와 함께 근처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난 자리에 앉아 생맥주 3000cc와 안주 3종 세트를 시켰다. 참고로 안주 3종 세트란 마른안주, 부침안주, 튀김안주 를 하나씩 시키는 걸 뜻한다. 내가 시킨 건 오징어 땅콩과 게란부침과 감자튀김. 술이 나오자마자 최모 편집자는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원샷으로 잔을 비운 최모 편집자는 오징어 다리 하나 를 하나를 찢어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술 마시는 모습을 보니 쌓인 게 많은 것 같다. "편집자 일이 많이 힘든가 보죠?"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편집 일도 힘들고, 작가들 닦달하는 것도 힘들지요." "편집 일이 그렇게 힘든가요? 그냥 오타 수정하고 교정만 좀 보면 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말하자 최모 편집자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편집자는 곧 작가의 동반자입니다. 작가가 스토리 안 풀릴 때 상담해줘야 하고, 새벽 3시에 나가 술 마시는 작가 말동무도 해줘야 합니다. 트랜트를 읽고 분석 해서 작가에게 알려주고, 마감 안 하고 도망친 작가를 잡으러 돌아 다녀야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책이 안 팔리면, 위에서는 왜 안 팔리는 원고를 컨택했냐고 쪼고, 작가는 왜 마케팅을 제대로 안 했냐고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는 작품 같은 경우에 다음 권이 빨리 안 나오면, 독자들은 '책 내고 베짱이냐' 고 윽박을 지릅니다. 원고가 차례대로 넘어오면 좋은데 한번에 뭉텅이로 넘어올 경우에는 며칠 밤을 새며 편집을 합니다. 남들 황금연휴 다 뭐다 해서 놀러 가는데, 우리는 좁은 사무실에 특어박혀 일만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여기에....." 쌓은게 많았는지 최모 편집자는 한참 동안 편집자의 애환에 대해 늘어놓았다. 다시 술을 벌컷벌컷 들이키는 최모 편집자. 난 술로 목을 축이며 물었다. "그런데 주로 어떤 작가들이 불량작가군에 포함되나요?" 최모 편집자는 술기운이 오르는지 한결 풀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싫어하는 작가 유형이 셋 있거든요." "그래요? 어떤 유형인가요?" "첫째는 마감 어기는 작가입니다. 아니, 어떻게 작가가 마감을 어길 수 있는 겁니까? 이게 말이나 돼요?" "아니, 뭐..... 사람이 살다보면 약속을 어길 수도 있고...... 글이라는 게 쓰고 싶다고 해서 써지는 것이 아니잖 아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심이....." 쾅! 최모 편집자는 맥주잔을 테이블에 세게 내리쳤다. "아니요, 절대 이해 못합니다. 사람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라는 말을 남겼지요. 하고자 하면 하루에 한 권도 쓸 수 있는 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널널한 마감일을 못 지킨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이런 작가들은 그냥 잡아다가 독방에 가둬놓고 글 쓰게 해야 한다니까요. 그래서 쓴 페이지수만큼 음식을 집어 넣어주는 겁니다!" "헉! 그, 그런 비인도주의적인 방법을....... 만약 그래도 안 쓰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굶어죽기 싫으면 알아서 열심히 쓰겠죠." "....." 그야말로 라이트 올 다이(Write or Die)다. 쓰거나 죽거나. "그, 그럼 두 번째는 뭔가요?" "두 번쨰는 편집자보다 일찍 결혼하는 작가입니다." "예? 편집자보다 일찍 결혼하는 작가요?" 난 최모 편집자를 훑어보았다. "저, 저기... 아직 미혼이신가 보지요?" 순간, 최모 편집자는 흠칫하더니,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난 결혼 안 한 거야! 못 한 게 아니라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아니, 왜 소리를 지르시고 그러세요? 제가 결혼 못하게 막은 것도 아닌데...." 최모 편집자는 다시 술을 원샷 했다. 난 재발리 잔을 채워주었다. 어느새 3000cc도 바닥이 났고, 난 3000cc를 추가 주문했다. 생각보다 술값 많이 나가겠군. "얼마 전에 한 여자 작가가 결혼을 했어요. 아주 당당하게 편집자에게 청첩장을 보내더군요. 후후~ 뭐? 와서 자리를 빛내달라고? 그게 미혼인 편집자에게 할 소리야! 대체 나보고 언제까지 자리를 빛내달라는 거야? 내가 남의 결혼식에 쫓아다닐 만큼 한가해 보여?" "......" 사실 좀 한가해 보이긴 한다. 그나저나 완전히 취하셨군. "그래서 결혼식에는 참석하셨나요?" "하기야 했지요.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작가가 결혼한다는데, 담당 편집자가 가봐야지. 그때 박모 작가도 왔었는데....." 결혼식 전 날이 마감일이었던 박모 작가. 마감을 밥 먹듯이 어기는 박모 작가는 당연히 마감을 어겼소, 최모 편집자는 그런 박모 작가에게 무리한 주문을 했다. '마감 어기고 결혼식에 참석할 거면 애 하나 업고 와.' '예? 웬 애요?' '그리고 결혼식 도중 뛰쳐나가서, 이 결혼은 무효야! 라고 소리쳐. 알았어?' '......예?' 참고로 당시 결혼식장에는 여자 작가의 친우인 검도 사범들도 상당수 참석해 있었다.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간 즉석에서 산 채로 회떠져도 할말 없을 것이다. '애를 어디서 구해요?' '그럼 라이라도 업고와!' '......예?" 그리고 결혼식 당일. 결혼식장에 먼저 도착한 박모 작가는 최모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오시나요?' '지금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소품은 준비되었나요?' '예? 소품이요?' '애 말이에요, 애.' '예?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농담은 뭔 농담! 당신도 솔로부대라면 최선을 다해 커플부대를 섬멸해야 할 거 아냐? 당신이 그러고도 솔로부대 대원이라 할 수 있겠어?' '....... 솔로 생활 길어지면 편집자님처럼 될까봐 두렵네요.' '이렇게 된 이상 이 차로 결혼식장을 들이 받아서라도......' '헉! 진정하세요. 무슨 자살폭탄 테러 할 일 있습니까?'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박모 작가님. 다음 생에는 좋은 편집자 만나시길.......' '안 돼에에에에!' "이거 실화인가요?" "실화입니다." "그런데 아직 살아 계시네요?" "결혼식 장소가 강남 센트럴시티 웨딩홀이었습니다. 차로 들이받아봐야 기둥에 상처 하나 못남기겠더군요. 그래서 계획을 번경했습니다. 살아남아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그래서 후일을 도모하셨나요?" "일단 식장에 눌러앉아 열심히 먹었습니다. 남들 1인분 먹을 때 무려 5인분을, 축의금은 뽑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신혼여행에 따라가 원고 달라고 닦달했습니다. 그리고 호텔 바라 위층에 머물며 밤마다 탭댄스를 췄습니다." "헉! 그,그런 잔인한 짓을!" "잔인은 뭔 잔인! 잔인하기로 따지면 편집자보다 먼저 결혼하는 작가가 더 잔인해! 나 편집자 최모, 작가 잘 되는 꼴은 봐도 커플 잘 되는 꼴은 절대 못 봐!" "....." 이런 심보라니! 노총각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작가들이 불쌍해지기 시작한다. 빨리 최모 편집자가 결혼을 해야 작가들의 삶이 좀 편해질 텐데(그런 의미에서 아직 미혼인 여성분들은 편집부로 연락 주시라). "그럼 싫어하는 작가 유형 세 번째는 뭔가요?" 최모 편집자는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난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안주 좀 드시면서 마시세요. 속 버리겠습니다." 최모 편집자는 계란부침을 찢어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적 거렸다. 담배를 찾고 있는 것이다. "아! 그냥 제 거 피세요." 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려주고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나도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오랜만에 담배를 많이 피는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참 좋다(담배값이 올라서 그런지 요즘 골초 만나기 상당히 힘들다). 최모 편집자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세번째는 자기 책에 대놓고 편집자 등장시켜 욕하는 작가입니다." "예? 그런 작가가 있어요?" 쾅! 최모 편집자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했다. "있어! I모 소설을 쓰는 박모 작가라고! 세상에 이게 말이 돼? 아니, 어떻게 작가가 자기 책에 대놓고 편집자 욕을 쓸 수 있어? 내가 편집자 생활 7년하면서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야!" "아,아니.... 그냥 재밌자고 쓴 것 같은데....." "자기는 재밌겠지! 그걸 편집해야 하는 편집자는 어떤 기분인 줄 알아? 아주 그냥 칼질을 하고 싶어!" "그,그런...." 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우리나라 문화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그런 식의 부당한 검열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최모 편집자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너 누구 편이야? 너도 그 작가랑 한통속이지!" "그,글쎄요. 뭐, 꼭 한통속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말이야.... 개념이 없어, 개념이! 내가 살다살다 그렇게 개념 없는 작가는 처음이야! 내가 그 작가 만나고 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다른 출판사들은 뭐한 몰라? 그런 작가 안 데려가고." "이런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그 작가는 다른 출판사가 최모 편집자는 데려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요? 왠지 그럴 것 같은데....." "문제는 그 작가가 다음 작도 책상자와 게약되어 있다는 거야!" "헉! 그,그런.... 그럼 다음번에도 최모 편집자님이 담당하시나요?" "그렇겠지." "그냥 다른 편집자로 바꿔주면 안 돼요? 그 출판사에 편집자가 최모 편집자님만 있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나라고 왜 그러고 싶지 않겠어? 그런데....." "그런데?" "다른 편집자들이 죽어도 싫다고 하더군. 그런 불량작가를 맡느니 사표를 쓰겠다나, 뭐라나?" "......" 결국 박모 작가랑 최모 편집자는 게속 함께 가야 한다는 건가? 왠지 모르게 둘 다 불쌍해진다. 혹시 두 사람은 만나서는 안 될 사이가 아니었을까? 운명의 실수로 만나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두 사람. 아아~ 비극적이어라. "마담 안 지키는 작가들은 전부 없애버리겠어! 우워어어어!" 테이블 위에 올라가 포효하는 최모 편집자. 엄청난 박력이 느껴진다. 난 일단 최모 편집자를 아래로 끄집어 내렸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이만 가시지요." "박모 작가도 그렇고 박영아 작가도 그렇고.... 다들 왜 그렇게 편집자를 못 살게 구는거야? 응? 나도 착한 편집자이고 싶다고. 누군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어? 니들이 날 이렇게 만드는 거야! 우워어어어! "......" 소리를 치는 그의 모습에서 편집자의 고뇌가 느껴진다. 난 술에 잔뜩 취한 최모 편집자를 부축해서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눕혀 주었다. "원고 내 놔....... 원고....." 자면서도 끝까지 원고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최모 편집자. 그 끈기와 집념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나저나 영아 이 녀석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난 아래층으로 내려가 영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옥탑방에는 전화기가 없다). [여보세요.] "나다." [오빠야?] "그래. 오빠다." [최모 편집자님은 갔어?] "아니. 옥탑방에 판 펴고 누우셨다. 원고 받아내기 전까지는 안 갈 것 같은데." [저,정말?] "그러게 미리미리 좀 써두지 그랬니?" [정말로 집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지. 사흘 동안 안 재우고 글 쓰게 했다는 얘기 들었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단말이야.] "나도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그러고도 남을 사람으로 보이더라. 너 이제 어쩔래?" [안 그래도 지금 PC방이야. PC방에서 열심히 쓰고 있어.] "최선을 다해 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알았어, 오빠. 나 이따 저녁 때 오빠 집으로 들어갈 거니까, 나 아래츨에 있다는 얘기는 절대 하지 마. 절대 아래층에 못 내려오시게 옥탑방에 붙잡아 놓고 있어. 알았지?] "그래. 알았어." [그럼 부탁해, 오빠.] 영아는 급한 목소리로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글 쓰느라 정신이 없나 보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책 한 권을 언제 다 쓰니? 그러게 진작 좀 써놓을 것이지. 불쌍한 앞짱구걸.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쓰려무나. 저녁. 영아는 살금살금 집에 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로 열나게 글을 썼다. 그리고 최모 편집자는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디죠?" "옥탑방입니다." "제가 많이 마셨나 보죠?" "예. 엄청 마셨죠." "죄송합니다. 불량작가들을 상대하다보니 쌓인 게 좀 많아서....." "변변치 않지만, 이것 좀 드시죠." 난 최모 편집자를 위해 손수 끊인 라면을 내밀었다. 이건 보통 라면이 아니다. 콩나물을 넣고 고춧가루까지 팍팍 뿌린 해장 라면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 않고." 최모 편집자는 해장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샤프걸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나요?" "예. 뭐....." 사실 앞짱구걸은 아래층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 당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영아를 닦달하겠지? 아아~ 사촌여동생을 위해 거짓말까지 해야 하다니! 난 최모 편집자를 속이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말했다. "지금 PC방에서 열심히 쓰고 있다고 합니다. 뭐, 때가 되면 돌아올 거라 생각합니다." "으음, 그렇군요." 순간, 눈을 번뜩이는 최모 편집자. 난 그 눈빛에서 마감 어기는 작가들에 대한 분노를 엿볼 수 있었다. "흠흠, 불겠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라면을 다 먹은 우리는 밥까지 말아 먹었다. 식사를 끝마친 최모 편집자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나 최모야. 지금 여기 박영아 작가 집이거든. 아니, 도주했어. 일단 PC방에서 쓰고 있는 것 같아. 응. 원고 받아내기 전까지는 못 들어갈 것 같아. 응.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받아낼 테니 걱정 하지마. 그럼 이만." 최모편집자는 날 보며 말했다. "여기서 박영아 작가님을 기다리겠습니다. 괜찮지요?" "아, 예. 뭐...." 비록 엄청 지저분하긴 하지만 여기는 여자 혼자 사는 방이다. 사실 이런 곳에 외간남자가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거다. 하지만 이사람.... 나가라고 한다고 해서 나갈 것 같지가 않다. 최모 편집자는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앉은뱅이 책상에 그것을 올려놓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뭐하시는 건가요?" "다른 소설 편집하고 있습니다. 원고 넘겨줄 때까지 이곳에서 편집 일하며 버틸 생각입니다." "......" 이, 이사람.... 정상이 아니야. 난 아래층으로 내려가 영아를 만났다. "야, 얼마나 썼어?" "반 정도. 오늘 밤 새면 다 쓸 수 있을 것 같아." "뭐? 벌써 반이나? 너 할 줄도 안 써놨잖아!" "아까 PC방에서 많이 썼어. 여기 와서도 많이 썼고." 영아는 말을 하는 중에도 손가락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솓도로 두드렸다. "......." 얘도 정상이 아니야. 하루에 한 권을 뽑아낸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작가가 무슨 면 뽑는 기계도 아니고..... 똑똑. "누구니?" "저예요, 히로님." 인디가 문을 열며 들어왔다. 인디는 접시를 컴퓨터 옆에 내려놓았다.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인디가 열며 들어왔다. 인디는 접시를 컴퓨터 옆에 내려놓았다.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인디가 가지고 온 것은 샌드위치와 우유.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는 영아를 위해 만들어 온 건가 보다. 가사 드래곤의 정성이 느껴진다. "고마워요, 인디 오빠." 영아는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다시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난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인디를 데리고 방을 나왔다. "샌드위치 하나 더 만들어줄 수 있니?" "예. 재료는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럼 하나 더 만들어 줘. 위칭에 좀 갖다 주게."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인디는 재빨리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부드러운 빵 위에 상추와 야채, 얍게 썬 토마토를 얹고, 그 위에 얇은 햄을 두 겹으로 깔았다. 금새 완성된 햄 샌드위치. 난 그것을 들고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최모 편집자는 모니터로 작업을 하며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다. "사스는 다 나으셨나요, 박모 작가님? 오늘 저녁에 있는 장례식에는 참석 안 하실 거죠? 예. 잘 생각하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해서 또 마감을 어기는 날에는, 제가 박모 작가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될 테니까. 하하하~ 물론 농담입니다. 하지만 떄로는 농담이 현실이 되기도 하지요(이 부분에서 눈이 번뜩). 아하하~ 그렇게 정색하 실 필요 없습니다. 박모 작가님께서 마감만 제대로 지켜주신다면야 생명의 위협 같은 걸 느끼실 필요가 없지요. 모든 건 박모 작가님 하기에 달려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모레 원고가 넘어오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이만 끊겠습니다." "........." 박모 작가 닦달하는 중이었나? "이것 좀 드시지요." "아, 감사합니다." "박모 작가가 아직 원고를 안 넘겼나 보죠?" "예. 편집자 무서운 줄 모르는 작가지요. 게다가 뺀질거리기는 얼마나 뺀질거리는지.... 생각 같아서는 그냥 땅에 묻어버리고 싶습니다." "헉! 그, 그래도 묻으면 다음 권 원고를 못 받을 텐데......" "그것 때문에 참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마감을 어긴다면 어쩔 수 없지요. 편집자의 인내심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더욱 박모 작가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은?" "자기 책에 편집자를 등장시켜 욕을 바가지로 해놓고는 출연료도 안 줬다는 겁니다." "예? 출연료요? 그걸 받으시려구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안 그래도 이번 달 인세에서 원친징수할 생각입니다." "......" 우정 출연은 출연료도 안 받는다던데..... "그,그럼 계속 열심히 하세요." 난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영아는 열심히 키보드를 두르리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붉게 충혈된눈, 쏙 들어간 볼. 마감 폐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는듯 하다. "그러게 진작 좀 써놓지." "말 시키지마." "그래그래. 말 안 시킬테니 게속 열심히 쓰렴." 아까 술을 좀 마셔서 그런지 피곤하고 졸리다. 침대에 누워 영아가 글 쓰는 걸 지켜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다. 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음, 벌써 아침이군." 영아는 컴퓨터 책상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난 휴지로 뽑아 침을 닦아주었다. 컴퓨터는 아직 켜져 있었다. "......." 밤새 컴퓨터를 켜놓다니. 이번 달 전기세 많이 나오겠군. 난 컴퓨터를 보았다 한글 프로그램이 띄워져있었다. 난 그크롤을 맨 아래로 내려 보았다. 4권 끝. "......." 헉! 정말로 하루 만에 다 쓰다니! 박모 작가가 목숨 걸고 써도 사흘에 한 권이었는데, 어떻게 하루에 한권을! 영아가 정말 인간이란 말인가? 난 교주님이 보고 계서 4권 원고를 USB메모리에 옮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영아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리고 양말을 벗겨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고생했다. 잘 자렴, 영아야." 원고를 끝마쳤다는 기쁨 때문일까? 잠든 영아의 표정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난 방문을 닫고 나와 사다리를 타고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최모 편집자는 노트북 앞에서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기요....." 난 최모 편집자의 팔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최모 편집자는 자세가 무너지며 노트북에 머리를 박았다. "으아악! 무,무슨 일입니까? "......." 참 요란하게도 깨시는군. "여기 교주님이 보고 계셔 4권 원고입니다." "정말인가요?" "예." 내가 USB메모리를 내밀자 최모 편집자는 그것을 자신의 노트북에 끼웠다. 그리고 빠르게 원고를 훑어보았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이 정도 분량이면 되겠네요." 최모 편집자는 원고를 자신의 노트북에 복사했다. 그리고 짐을 챙겨 일어섰다. "하루 만에 받아 낼 줄은 몰랐네요. 한 사흘 머물 각오 하고 있었는데." "예......"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폐 많이 끼쳤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 그리고 박영아 작가님께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예? 무슨 말씀이요?" "다음 마감 때도 잘 부탁드린다고요." 번뜩! 마감 얘기할 때마다 번뜩이는 최모 편집자의 눈동자. 내가 작가도 아닌데 볼 때마다 오한이 든다. "이제 박모 작가한테 원고 받아내는 일만 남았군요." 신발을 신으며 비장하게 중얼거리는 최모 편집자. 난 비상계단까지 최모 편집자를 배웅했다. 멀어지는 최모 편집자의 모습. 난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박모 작가는 이제 어쩐다냐? -------------------------------------------------------------------------- 아이리스 2부 8권 Substory 10 박모 작가의 최후 마감을 지킵시다. -책상자 출판사 공익 캠페인 경기도 모처에 위치한 책상자 소설팀 편집자 사무실. 안경을 쓴 30대 남자가 네명의 편집자를 둘러보았다. 그의 이름은 윤승이. 책상자 출판사 소설팀 편집 팀장이자 야오이계의 대부, 통칭 아오량이었다. 윤승이 팀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요즘 마감을 어기는 작가, 소위 말하는 불량작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감이 무엇입 니까? 국가 간에 맺은 조약보다도 더 큰 효력을 발취하는 것이 마감입니다. 마감은 작가와 편집자가 맺은 신성한 약속입니다. 이 신성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기는 작가는 더 이상 편집자의 동반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무찔러야 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붙잡아 마감이라는 신성한 약속을 어긴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려줘야 합니다. 그리고 즉시 원고를 받아내고, 다시는 마감을 어기지 못하도록 철저히 정신 교육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윤승이 팀장의 말이 끝나자 최모 편집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트를 펼쳤다. 윤승이 팀장은 말을 이었다, "한 제보자의 도움으로 오늘 저녁 불량작가들이 시촌의 한 술집에서 모인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다른 편집자들은 윤승이 팀장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마감도 안 지킨 것들이 감히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심다는건가?" "세상에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있나!" "편집자를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하나같이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윤승이 팀장은 그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우리의 작전 목표는 그곳을 급습해 불량작가들을 연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최모 편집자, 윤모 편집자는 현장을 덮쳐 불량작가들은 검거하겠습니다. 그들의 격렬한 반항이 예상되니 단단히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그리고...." 윤승이 팀장의 게획은 치밀하기 그지없었다. 네 명의 편집자는 눈동자를 번뜩이며 윤승이 팀장의 말을 경철했다. * * * * 저녁 7시. 시촌에 우치한 한 술집에 작가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 마감 아니야?" "아, 형님. 제가 언제는 마감 지켰나요? 원래 마감이란 어기라고 있는 거예요." "맞아요. 세상에 마감 지키는 작가가 몇이나 된다고 그러십니까?" "자, 그럼 한번 짠 하지요." "좋아 좋아. 짠 하자고." 박모 작가는 맥주잔을 치켜들며 외쳤다. "마감 없는 세상을 위하여!" "위하여!" 여기 모인 다섯 작가 중 넷은 이른바 불량작가군에 포함되는 작가들이었다. 이중 유일하게 마감을 지키는 작가는 현제 소드킹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이간섭 한 명뿐이었다. 이간섭 작가는 박모 작가에게 말했다. "최모 편집자가 최후통첩 보내지 않았어?" 박모 작가는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보내기야 보냈죠. 사흘 안에 안 쓰면 잡아 조진다던데요?" "그런데 이렇게 술 마셔도 괜찮은 거야?" 걱정 가득한 이간섭 작가의 눈빛에 박모 작가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뭘 그렇게 걱정을 하세요, 형님? 괜찮다니까요. 하하하~." "맞아요. 저도 핸드폰 끄고 지내잖아요. 지금쯤 이모 편집자 저 찾으려고 난리 났을 걸요." 전대물을 쓰고 있는 반모 작가가 박모 작가를 거들었다. 이도션 작가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난 계약만 하고 글 안 쓴 지 몇 달 째야. 윤모 편집자가 이젠 아주 포기했다니까. 푸하하!" "소집 해제하면 열심히 쓴다면서요?" "그어야 그냥 예의상 해본 소리지." KTF라는 소설을 쓰는 김모 작가도 한마디 했다. "나도 세 달째 원고 안 넘기니까 최모 편집자가 포기한 것 같던데." 박모 작가는 비어 있는 다른 작가들의 잔에 맥주를 채워주었다. "자자, 우리가 언제는 마감에 신경 쓰고 살았나요. 마감 그까이꺼 그냥 뭐 대충 하면 되죠. 아니, 최후통첩 보냈으면 자기들이 어쩔 건데요?" 그 순간, 다른 작가들의 표정이 변했다. 박모 작가는 그것을 눈치 채치 못하고 계속 떠들어댔다. "막말로 여기 찾아올 겁니까, 뭡니까? 안 그래요? 아마 최모 편집자는 지금 제가 집에 틀어박혀 열나게 글 쓰고 있는 줄 알 걸요. 아하하!" "어버버....." 다른 작가들은 차마 말을 못 하고 입을 썩 벌린 채 손가락으로 박모 작가의 뒤로 가리켰다. "예? 왜 그래요? 다들 편집자라도 본 듯한 표정들이시네. 뒤에 뭐 있어요?" 박모 작가는 다른 작가들이 장난치는 거라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박모 작가는 얼어 붙었다. "아주팔자가 좋으시군요, 박모 작가님." "최,최모 편집자님....." 박모 작가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윤승이 팀장과 최모 편집자, 윤모 편집자였다. "어,어떻게 여길....."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요, 박모 작가님. 중요한 건 마감도 안 지킨 박모 작가님이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거지요." "헉! 그,그런...." 박모 작가의 잔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박모 작가는 씨익 웃었다. 최모 편집자도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박모 작가가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튀어!" 다른 작가들도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헉! 이쪽 계단은 이모 편집자가 막고 있어! 비상계단으로 뛰어!" 해동이 늦은 반모 작가와 김모 작가는 어느새 편집자들에게 제압을 당했다. 위기의 순간 이도견 작가가 박모 작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가라. 이곳은 내가 맡으마." "뭐? 그럼 형은?" "난 괜찮아. 윤모 편집자는 그렇게 나쁜 사라밍 아니야. 하지만 넌 최모 편집자에게 걸리면 죽음이잖아." "혀,형....." "내 몫까지 실컷 놀아다오." "하,하지만....." "가, 임마! 가란 말이야!" 박모 작가는 눈물을 감추며 뛰었다. 이도견 작가는 그런 박모 작가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작 가라, 박모. 어떻게든 니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마. 후후~ 이제 끌려가서 글 쓰는 것만 남은건가? 하지만 쉽게 끌려갈 수는 없지. 보여주마! 불량작가의 근성을!" 혈혈단신의 몸으로 편집자들을 향해 달려드는 이도견 작가의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희생을 뒤로 하고 박모 작가는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비상계단을 막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이모 편집자였다. '이대로 잡힐 수는 없어.' 박모 작가는 창문으로 뛰어내릴 각오까지 했다. 하지만 어느새 최모 편집자가 바로 뒤에 다가왔다. "순순히 투항하시지요." 점점 포위말을 좁혀 들어오는 최모 편집자와 이모 편집자. "누가 잡힐 것 같아?" 박모 작가가 뛰쳐나가는 순간 최모 편집자와 이모 편집자가 박모 작가의 팔을잡고 비틀어 뒤로 돌렸다. "으아아!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작가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마감으 렁긴 작가에게 더 이상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모 편집자는 박모 작가의 손을 밧줄로 묶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글만써야 합니다. 당신이 말한것은 출판사에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글을 쓰게 하기 전에 당신이 원하는 변호사오 ㅏ상의할 권리가 없고, 우리가 글을 쓰라고 닦달하는 동안에도 변호사를 배석시킬 권리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글을 쓸 컴퓨터가 없다면, 출판사 측에서 마감을 할 때까지 컴퓨터를 대여해 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마감을 끝낼때까지 글을 쓰는 것을 중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최모 편집자는 불량작가를 연행할 때 반드시 말해줘야 하는 '출판사 원칙' 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읊어주었다. 최모 편집자와 이모 편집자는 박모 작가를 원해 자리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박모 작가는 윤승이 팀장 과 이간섭 작가가 악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간섭 작가님. 이간섭 작가님의 제보 덕분에 불량작가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습니다. 약속대로 이번 마감을 일 주일 늦춰드리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윤승이 팀장님." 박모 작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간섭 작가를 보았다. "혀,형님! 서,설마 형님이 배신하신 겁니까? 어,어째서....." 이간섭 작가는 차마 박모 작가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없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아우야. 너는 내가 마감을 꼬박꼬박 잘 지키는 성실한 작가로 보이겠지. 하지만 마감을 지키는 데는 매번 피를 말리는 고통이 뒤따랐다. 나는 마치 백조와도 같았다. 겉으로는 우와해 보이지만 , 물 속에서는 열심히 발을 놀리는 백조. 그래서 마감을 일주일 늦춰주겠다는 윤승이 팀장의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아아~ 미안하다, 아우야. 마감을 늦춰준다는 유혹에 넘어간 이 못난 형을 용서해 다오. 어흐흐흑!" 윤승이 팀장은 사로잡힌 네 명의 작가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책상자 출판사가 자랑하는 독방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는 노트북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음식은 철저히 여러분들이 쓰는 페이지 수에 따라 지급될 것입니다. 즉, 쓰지 않으 면 굶어 죽습니다. 일명 라이트 올 데드(Write or Dead)지요. 마감을 끝낸 작가는 독방에서 풀려나 정신교육을 받은 뒤 귀가 조치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빨리 풀려나느냐는 여러분들의 노력에 달렸습 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헉! 아,안 돼!" "나 작가 안 할래! 오늘부터 작가 안 할 거야!"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 이제 다시는 마감 안 어길게요. 흑흑, 제발 독방만은....." "으아아! 이거 놔! 이대로 독방에 끌려갈 순 없어!" 애원과 협박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윤승이 팀장과 편집자들은 불량작가 네 명을 차례대로 연행했다. 이것이 마감을 어긴 박모 작가의 최후였다. (『아이리스 』 9권에서 계속) Story 23. 루엔과 갈리온드, 돌아오다. 24평 좁은 집에서 11명이 부대껴 살던 암흑의 세월이 끝이 났다. 사실 11명이서 24평에 산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래서 이사를 했다. 100평이나 되는 넓은 평수. 7개나 되는 방. 3개나 되는 화장실. 더하기 옥탑방. 여기에 완벽한 보안시설까지! 결코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사한 새집 얘기다! 그야말로 일반 서민들을 꿈도 꿀 수 없는 호화저택. 그러므로 이젠 나도 당당히 부르주아 대열에 합류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빚더미에 앉아있다는 거지.” 그렇다. 이게 문제다. 현재 나는 엄청난 채무를 지고 있다. 만약 이 채무를 제대로 상환하지 못한다면 리모델링을 한 이 건물은 통째로 은행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집과 가게도 건물에 속하기 때문에 같이 넘어간다. 그럼 우리 가족은 한순간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 아아- 나에게는 무려 10명이나 되는 가족들의 생계가 걸려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가족에서 여아는 제외된다. 영아는 지금 책 팔아서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나 망해도 자기가 알아서 살길 찾을 것이다. “으음, 그렇게 되면 영아한테 신세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그나저나 나 망하면 판타지 세계로 돌아가야 하나? 판타지 세계에서는 지낼 곳이 꽤 많다. 크로니스 레어나 인디의 레어, 카르의 레어에서 지대로 될 테고, 친정이라 할 수 있는 아이리스 왕궁에서 지내도 된다. 반데라스와 세레나가 살고 있는 헤리오 왕궁에 신세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뭐, 그렇게 되면 반데라스가 무지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지가 싫어해봐야 어쩔건가? 한때 세상을 지키기 위해 드래곤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싸울 뻔했던 나를 쫓아낼 거야 뭐야? “으음, 엘프의 숲에서 루시아와 함꼐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것도 괜찮을 듯한데..” “아까부터 자꾸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오빠?” “응?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나는 영아와 함께 거실 쇼파에 앉아있다. 새롭게 우리 가족이 된 영아. 직업은 작가이고, 필명은 앞짱구걸...이 아니라, 샤프걸이다. 저번 마감 때 하루에 한 권을 써내는 기염을 토해 내고는 다시 펑펑 노는중이다. 그 이후에 글 한 줄 쓰는 걸 못 봤다. “다음 마감때 어쩔려고 이렇게 펑펑 노는 거니?” “상관없어. 뭐, 어떻게든 되겠지.” “......” 이떻게든 안 될 것 같은데. 한번 마감 지옥을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이러니 작가들은 학습 능력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다. “꺄아! 루 너무 귀여워.” 영아는 지금 루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볼을 부비부비 비비는 중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꼬옥 껴안질 않나, 볼에 뽀뽀를 하질 않나...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별로 사랑받지 못했던 루는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영아에게 엄청 사랑받고 있었다. “다 크면 누나랑 결혼하자. 응?” “......” 루가 다 클 때면 넌 늙어 죽어 땅 속에 묻혀있을 거란다. 루는 마구 들러붙는 영아가 부담스러운듯했다. 하지만 그다지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누나가 키스해줄게.” 루의 양 볼을 붙잡고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는 영아. 헉! 쟤 지금 뭐하는 거야? 난 급히 일어나 영아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빠악! “꺄악! 무슨 짓이야, 오빠?” 뒤통수를 얻어맞은 영아는 벌떡 일어서며 나한테 따졌다. 난 영아의 앞짱구를 손으로 밀며 말했다. “너야말로 무슨 짓이니? 어떻게 저항하지 못하는 애를 상대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할 수 있니? 이건 엄연한 성추행이란다.” “조금 귀여워해준 것 뿐이야.” “조금 귀여워해줘서 입술에 키스를 하려고 했단 말이야? 많이 귀여워해줬으면 침대로 데려갔겠다. 그치?” “그러는 오빠는?” “내가 뭐?” “오빠도 라이랑 루비한테 뽀뽀해주고 그렇잖아.” “너랑 나랑 같니?” “다른 건 뭔데?” “난 아이들 아빠로서 순수한 마음에 그러는 거고 넌 불순한 의도로 그러는 거잖아.” “부, 불순한 의도라니! 나, 난 순수해!” 딱 걸렸는지 영아는 심하게 당황했다. 난 그런 영아를 한심하다는 눈길로 보며 말했다.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전혀 순수한 것 같지 않구나. 하여튼 잘생긴 남자들만 보면 눈이 휘둥그레져가지고..쯧쯧!” “어차피 루랑은 열 살 정도밖에 차이 안 나. 혹시 알아? 루가 크면 나랑 결혼하자고 할지?” “......” 루랑 너의 차이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30살 이상이란다. 그것도 루가 더 많아. “요즘은 연하 키우는 게 유행이래, 오빠.” “그래서?” “아! 생각해보니까 루시아 언니랑 오빠도 연하 커플이잖아.” “뭐, 그야 그렇지.” 실제로는 루시아가 나보다 2살 많다. 하지만 가끔씩 삐지는 모습을 보일 때면 꼭 애기 같다. 그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꼬옥 끌어안고 뽀뽀해주고 싶을 정도다. 아아- 귀여운 나의 루시아-. “그래서?” “그래서 나도 연하 한 번 키워보려고.” “......” 다시 말하지만 루가 연상이다. “키워서 뭐하게? 잡아먹게?” “누, 누가 잡아먹는대! 오빠는 내가 그렇게밖에 안 보여?” “응.” 사촌여동생한테 이런 말하긴 미안하지만, 정말 그렇게밖에 안 보인다. 아니, 그러고도 남을 걸로 보인다. “우앙- 너무해, 오빠!” “니가 더 너무해.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치는 거냐?” 영아가 쇼타콘(쇼타로 콤플렉스의 일본식 약자. 남성다운 남성보다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년에게 정서적 동경이나 성적 집착을 가지는 것을 뜻함) 성향까지 잇을 줄이야. “으음, 우리 영아는 정말로 막 나가는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구나. 남자에게 손을 뻗치기에 앞서 먼저 너의 앞짱구를 생각하는 게 어떠니?” “누가 앞짱구야!” “......” 누구긴 누구겠니? 너지. 튀어나온 이마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영아. 때문에 앞머리를 길게 길러 이마를 가리고 있다. 내가 만날 앞짱구라고 놀리기는 하지만 사실 그렇게 많이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귀엽게 보일 정도로 약간 튀어나왔다. 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쨌든 앞짱구는 앞?구다. “흥! 이제부터 오빠랑 안 놀아줄 테야.” “넌 원래부터 나랑 안 친했어.” “......” 영아는 입술을 꼭 꺠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훗- 그동안 각종 눈빛 스킬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텨온 나에게 보통의 노려보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나 보군. 한참 동안 나를 매섭게 노려보단 영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흥!” 그리고는 루를 안아드며 말했다. “누나 방으로 가서 놀자.” “......” 루를 방으로 데려가겠다고?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혹시라도 저 누나가 이상한 짓하려고 하면 명확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렴. 그래도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크게 소리를 질러. 알았지?” “오빠!” 어쨌든 영아는 루를 데리고 자신의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난 소파에 누워 에어컨을 틀었다. 요즘은 가만히 있도 땀이 줄줄 흐를 만큼 덥다. 에어컨을 안 틀고 버텨보려 했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덥다. 사실 나 더운 건 괜찮다. 하지만 나의 루시아가 더워하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납할 수 없다. “그나저나 집이 100평이니 전기세 무지하게 나오겠군. 역시 에어컨 사용은 자제하는 게 좋으려나?” 버는 돈은 없는데 나가는 돈은 점점 늘어만 간다. 이러다가 진짜로 길거리에 나앉는 거 아니야? 내가 걱정을 하며 한숨을 내쉬는데어디선가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아-!” 앗! 이 목소리는 우리 귀엽고 깜찍한 라이와 루비의 목소리가 아닌가? 난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헉! 뭐, 뭐니, 그 복장은?” “에헤헤-” 검은색 옷에 하얀 프릴이 잔뜩 달려있다. 치마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반팔 소매다. 여기에 흰색 스타킹과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다. 라이와 루비가 입고 있는 옷은 다른 아닌 메이드복! “어때요 오빠?” “잘 어울려요?” 내 앞에서 한 바퀴 돌아 보이는 라이와 루비. 라이는 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올려 검은색 리본으로 묶었고, 루비는 ?강머리 앤처럼 양갈래로 따서 역시 검은색 리본으로 묶었다. 이, 이렇게 귀엽고 깜찍할 수가! “자,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데 그 옷은 어디서 났니?” “인디 오빠가 만들어줬어요.” “사이즈도 딱 맞아요.” “......” 인디 이 자식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이 자식 이상한 취미있는거 아니야? 애들한테 이런 옷을 만들어 입히다니! “......” 흠흠. 뭐 잘 어울리니까 봐주자. 라이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라이는 오빠의 메이드이고 싶어요.” 루비도 질세라 반대편에 찰싹 달라붙었다. “루비도 오빠의 메이드 할래요.” “......헉!” 메이드라니! 그건 지구상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 아니던가? 메이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녀가 된다. 하지만 메이드와 하녀는 엄연히 다르다. 하녀는 고용되어 부엌일이나 허드렛일을 맡아서 하는 여자하인을 지칭한다. 그러나 메이드는 주인에게 종속되어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그런 여자하인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주인님이 메이드에게 이렇게 이런 짓이나 저렇고 저런 짓을 한다고 해도 반항을 하면 안 된다. 심지어는 그렇고 그런 짓을 한다고 해도..... “니, 니들 메이드가 무하는 조냊인지 알기나 하니?” 내가 묻자 라이와 루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존재에요.” “저번에 애니메이션을 보니까 그렇게 나왔어요.” “......” 일본 애니메이션이 애들 다 버려놓는군. “헤헤- 오빠는 라이의 주인님이에요. 라이는 오빠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뭐 시키실 거에요, 오빠... 아니 주인님?” “...헉!” 이렇게 좋을 수가...가 아니라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대체 어떻게 교육시켰기에 애들이 이러는 거야? ...라지만 애들 교육시킨 건 나다. 으음, 정말로 나의 교육 방법이 잘못된 거란 말인가? 초롱초롱한 눈망을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보는 라이와 루비.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저번에 입은 간호사복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메이드복을 입고 등장하다니. 이 오빠가 심장마비로 죽으면 어쩌려고? “라이는 주인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루비는 주인님밖에 없어요.” “...헉쓰! 주인님이라니! 너무 감동받아 눈물이 다 나올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라이와 루비가 메이드복을 입고 날 주인님이라 부르다니! 아아-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이 오빠도 우리 라이와 루비밖에 없단다. 아이구- 귀여운 것들.” 난 라이와 루비를 껴안고 마구 보듬에 주었다. “에헤헤-” 엄청 좋아하는 라이와 루비. 이런 귀여운 소녀들을 메이드로 두는 것은 남자들의 소망 중의 소망이다, 하지만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그건 바로 애들이 집안일을 전혀 못한다는 것이다. 설거지시키면 그릇 깨먹고, 청소시키면 물바다로 만든다. 이래서는 진정한 메이드라 할 수 없다. 모름지기 메이드라 함은 주인님이 시키는 것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책임지고 완수해내야 한다. 으음, 역시 얘들은 무늬만 메이드? “오빠가 목이 마르구나. 물 좀 떠오렴.” “예, 주인님!”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라이와 루비는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난 소파에 누워 느긋하게 물 떠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물 떠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중인가? 뭐, 마법을 이용하면 못 만들 것도 없다만 널리고 널린 물을 놔두고 직접 만든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부엌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에에엥-” “으아아앙-” 헉! 이건 라이와 루비의 울음소리? 난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갔다. 부엌은 난리도 아니었다. 바닥에 물이 흥건했고, 라이와 루비는 울며 손을 휘두르고 싸우고 있었다. 툭탁툭탁!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두 엘프를 뜯어 말렸다. 라이와 루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난 일딴 바닥의 물을 닦았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컵인지라 다행이 머그컵은 깨지지 않고 무사했다. “이번엔 또 왜 싸운 거야?” 내가 묻자 두 엘프는 내 양쪽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우엥- 우엥- 라이가 먼저 물 떴는데.. 루비가 막막 자기가 가져다준다고..” “으앙- 으앙- 오빠는 루비한테 물 떠오라도 했는데.. 라이가 막막 자기가 하겠다고..” “......” 또 나 때문에 싸운 건가? 이젠 아주 지겹다. 아무리 이오빠가 좋아도 그렇게 친구끼리 싸우다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잘났기 때문에 생긴 일. 그러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아아- 이젠 제발 좀 나 때문에 싸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야? 애들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애들이 울었다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루시아. 부엌에 온 루시아는 메이드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에 한번 노라고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처음 표정은 ‘너무 귀여워’, 그 다음 표정은 ‘왜 우는 거야’ 다. 그리고는 바로 나를 노려보았다. “설명해 봐.” “응? 뭘 설명해?” “애들에게 이런 옷을 입힌 저의가 뭐야? 그리고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애들이 우는 거야?” “아, 아니야, 루시아. 이 옷 내가 입힌 거 아니야. 인디 자식이 입힌 거야. 그리고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거짓말 하지 마. 니가 입힌 거 맞잖아. 넌 어떻게 애들한테 이런 옷을 입힐 수 있니?” “그래도 귀엽지 않아?” “그, 그야... 그렇지만...” 루시아는 메이드복을 입은 라이와 루비의 모습을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애들은 왜 울렸어?” “내가 안 울렸다니까. 지들끼리 싸우다가 운 거야.” “거짓말 하지 마. 라이와 루비같이 착한 애들이 서로 싸울리 없어.” “......” 진짠데. 아이들을 철석과도 같이 믿고 있는 루시아. 나도 좀 믿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뭐하고 있어? 빨리 애들 안 달래고?” “으응. 알았어.” 라이와 루비가 메이드라면, 루시아는 여왕님 같은 존재다. 그리고 나는 루시아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하인. 그래도 상관없다. 루시아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기쁨이니. 나는야 루시아 여왕님의 사랑의 노예- 루시아의 명령을 받는 나는 재빨리 토닥토닥 스킬로 아이들을 달려주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눈물까지 닦아주었다. 난 아이들을 의자에 앉히고 우유를 따라주었다. “훌쩍- 라이는 초코맛 우유가 좋아요.” “훌쩍- 루비는 딸기맛 우유요.” “......” 주문도 많군. 난 흰 우유에 시럽을 타서 초코맛 우유와 딸기만 우유로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두 손을 컵을 잡고 홀짝홀짝 마셨다. 아이들과 마주 앉은 루시아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우리 라이와 루비 메이드복은 왜 입은 거야?” “오빠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메이드복 입으면 남자들이 좋아한대요.” 그러자 루시아는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난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 괜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흠흠, 천장에 먼지가 꼈네. 인디 이 자식은 부엌 청소를 하는거야 마는 거야?” 루시아는 다시 아이들으 보며 물었다. “오빠 떄문에 입은 거야?” “예. 라이는 오빠의 메이드이고 싶어요.” “오빠는 루비의 주인님이에요.” “...뭐? 주인님?” “예” 아이들은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또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너 정말...” 난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루시아. 내가 그렇게 부르라고 시킨 게 절대 아니야. 그냥 지들이 그렇게 부른거야.” “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했기에 아이들이 널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 그러니까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어떻게 이 어린아이들에게 손을 뻗칠 수가 있어?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난 정상적인 인간이다. 결코 이런 여자애들을 상대로 이렇고 이런 짓이나 저렇고 저런 짓을 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내가 이렇고 이런 짓이나 저렇고 저런 짓을 하고 싶은 대상은 오직 루시아뿐. 루시아는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 옆으로 자리를 이동해 끌어안고 뽀뽀를 해 주었다. “우리 라이와 루비 정말 너무 예뻐. 메이드복도 너무 잘 어울리고.” “라이는 언니 시녀 할래요.” “루비도 시녀 할게요. 언니는 공주님이잖아요.” “저, 정말? 정말 언니 시녀 해줄 거야?” “예. 라이는 언니가 좋으니까요.” “루비도 언니가 막막 좋아요.” “언니도 라이와 루비가 너무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얘들아.” 아이들의 매력에 흠뻑 빠진 루시아. 그야말로 팔불출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으음, 그나저나 루시아도 메이드복을 입으면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 헉! 루시아가 메이드복이라니! 그, 그럼 루시아가 날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뮬레이션. 늦은 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어와’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들옹ㄴ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메이드복을 입은 루시아. 그녀는... 헉! 여기까지 상상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아! 그런데 어째서 배경이 늦은 밤인 걸까? 그리고 어째서 루시아가 내 방에 들어온 걸까? 이 다음에는 어떤 일이 전개되는 걸까? “......” 흠흠, 뭐 이다음에는 저번 권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얘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바로 그렇고 그런... 헉! 안 돼! 위험한 상상은 이제 그만하자. 루시아는 아이들을 껴안고 보듬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양손으로 라이와 루비를 꼭 끌어안고 마구 뽀뽀를 해주는 루시아. 이런 모습을 볼 대마다 나는 라이와 루비가 부러워 죽겠다. 아아- 라이와 루비이고 싶어라- 루시아가 진정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루시아의 품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 애들 정말 너무 예쁜 것 같아. 메이드복이 너무 잘 어울려.” “뭐, 애들 에쁜 게 하루이틀 일인가?” 루시아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루는 어디 있어?” “으응. 영아가 데리고 논다며 옥탑방으로 데려갔어.” 데리고 놀아? 잘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군. “그래?” “응” “난 방에 가서 라이랑 루비랑 놀아줄게.”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데리고 놀이방으로 향했다. 얼굴에 미소를 띤 루시아의 얼굴을 보니 루시아가 아이들과 놀아주는 건지, 아이들이 루시아와 놀아주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히로랑도 좀 놀아주지. 히로도 루시아랑 놀고 싶은데... 난 영아가 루랑 뭐하고 노나 보려고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덮개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루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앞에 쪼그려 앉은 영아는 잠든 루의 얼굴을 보며 볼을 쿡쿡 찌르는 등 괜히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한참동안 루의 얼굴을 바라보던 영아는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입술을 내밀며 루에게 얼굴을 가져다 댔다. 헉! 쟤 지금 뭐하는 거야? 깜짝 놀라는 나는 재빨리 방으로 올라가 영아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빠악! “꺄악!”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기습 공격을 받은 영아는 ???짝 놀라며 침대에 머리르 박았다,. 영아는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날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오빠!”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잠자고 있는 아이를 성추행하려 하다니!” “서, 성추행이라니! 나, 난 그냥 애들 고모로서 좀 예뻐해 주려고 한 것뿐이야!” “...고모?” “얘들 다 오빠의 자식 같은 조내라며? 그러니까 난 얘들 고모가 되지” “......” 맞는 말이긴 하다. 만약 영아가 내 친동생이었다면 그냥 고모가 되겠지만, 사촌여동생이니 정확히는 종고모가 된다. 친근하게 부를 때는 당고모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대로 영아가 루를 부를 떄는 종질이 된다. 마찬가지로 당질이라고도 한다. 또는 5촌 조카라고도 한다. 아아-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친족 호칭의 세계여! 그냥 4촌 넘어가면 아저씨, 아줌마로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체 뭐가 이리 복잡하단 말인가? 참고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 원칙이긴 하지만, 부르는 사람도 귀찮고 불리는 사람도 귀찮기 떄문에, 그냥 고모와 조카로 불러도 상관은 없다. 어쨌든 의미는 통하지 않는가? “정확히는 종고모란다. 그리고 루, 루비, 라이는 너한테 종질이 되지. 알기나 아니?” “뭐? 정말이야? 그럼 나랑 루랑 몇 촌이야?” “니가 나랑 4촌이고, 아버지와 자식은 1촌이니, 더하면 5촌이란다.” 그, 그래?“ 영아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을 하다 결국 포기했다.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 “...알고 하는 소리니, 아는 척 하며 하는 소리니?“ “아, 알아. 누, 누가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를까봐!” “그럼 아주 간단한 문제를 하나 내보마. 너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남동생의 아들이 박부라고 부르는 사람의 손자의 ?은 너와 몇 촌 관계이며 너는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자, 잠깐만. 다시 말해줘.” “그러니까 너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내가 다시 불러주자 영아는 열심히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을 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는지 종이에 도표까지 그려가며 답ㅇ르 생각했다. 난 종이와 펜을 붙잡고 끙끙거리는 영아에게 말해싿. “제한 시간 3분 지났다.” “제한 시간도 있어?” “이것도 일종의 시험이니 당연히 있지. 그래서 답은 나왓니?” “너무 어려워!” “그래? 가장 쉬운 걸로 낸 건다.” “그래서 답이 뭐야?” “촌수는 없고, 부를 때는 나라고 부르면 돼.” “응?” “너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남동생의 아들이 백부라고 부르는 사람의 손자의 딸이 바로 너니까. 그러니까 니가 그 사람을 부를 때는 나라고 부르면 된단다.” “뭐야? 그런 어이없는 답이 어딨어?” “웃- 이런 기초적인 문제도 풀지 못하다니, 너의 지능지수를 알만하구나. 이 머리로 어떻게 글을 쓰나 몰라?” 난 영아의 앞짱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영아는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답을 말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항의는 하지 않았다. “......”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어쨰 요점이 빗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런데 요점이 뭐였더라? “아! 당고모가 잠든 당질을 덮치려하다니! 아무리 굶주렸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짐슴같은 짓을!” “그, 그냥 귀여워해준 것뿐이라니까! 그리고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아직 아주 밋도 안 했다는 말은 앞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퐇마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틀린 게 아니겠지?” “그, 그건... 아, 아무튼 날 결백해.” “......” 결백 같은 소리하네. 요즘 영아 하느 짓을 보면 너무 막나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루에게 손을 뻗치려 하다니! “그러니까 넌 성추행을 안 했다는 말이지?” “난 당고모로서 당... 뭐였지?” “그냥 고모와 조카라고 하려므나. 친족 호칭의 세게는 복잡하고도 미묘하니까>” “난 고모로서 조카를 예뻐해 준 것 뿐이야. 이건 절대 성추행 같은 게 아냐!” 끝까지 잡아떼는 영아. 뻔뻔하기가 뻔데기보다 더 하다. “좋아. 그럼 이 자리에서 우리 선을 좀 그어보도록 하자. 어디까지가 에뻐하는 거고 어디까지가 성추행인지 말이야.” “뭐?” “이 오빠 생각에는 말이다, 볼에 뽀뽀해주는 것까지는 예뻐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입술에 뽀보해주는 것은 좀 아니거든. 영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글쎄... 아! 의ㅁ도만 순수하면 괜찮지 않을까?” “......” 그 의도가 불순하니까 문제지. 영아의 계획은 뻔하다. 루를 잘 길러서 나중에 자신이 잡아먹겠다느 것. 누나동생 하다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겠다는 계획인데...이 계획에는 아주 커다란 맹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루가 엘프라느 것. 루가 결혼할 나이게 될 때쭘에는 영아는 륵어 죽어 땅 속에 묻혀있을 것이다. 영아는 10년 정도 잡고 계획을 세운 모양이지만, 실제로 실행까지느 100년도 더 걸린다. 나중에 영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 실망할 것이다. 으음, 그렇다고 루가 엘프라는 것을 말해줄 수도 없고. 루는 한 차례 소란에도 불구하고 잘 자고 있었다. 잠든 루의 모습을 보니 귀엽긴 귀엽다. 피부도 하얗고 부드러워서 만지기가 좋다. 하지만 아무리 귀여워도 르는 남자. 루한테는 안 된 얘기지만 남자아니는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나느 라이와 루비만 예버할 테야!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나느 현재 라이 동생 제작을 목표로 힘을 쏟는 중이다. 참고로 여기서 ‘라이 동생’ 이란 남동생이 아닌 여동생을 뜻한다. 남자애 낳아봐야 어디다 쓰겠는가? 루시아를 닮은 예쁜 딸아이를 낳고파- 하지만 딸을 낳을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언젠가는 시집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 헉! 안 돼!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놈팽이에게 나의 딸을 빼앗길 수는 없어! 라이와 루비도 문제다. 얘들도 다 크면 언젠가는 시집을 가지 않겠는가? 루비는 루랑 결혼하려나? 뭐, 나의 딸이나 다름없는 루비를 루에게 주기는 좀 아깝지만 그래도 둘이 결혼하는 것에는 찬성이다. 그럼 라이는? “헉, 안 돼! 절대 안 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돼!” 난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왜 그래, 오빠? 미친거야?” “아니. 순간 안 좋은 상상이 떠올랐을 뿐이야.” 만약 라이가 시집을 간다면 난 정말로 미칠지도 모른다. 아아- 언제나 나의 품에 있을 것만 같은 라이가 시집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형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나의 외심 떄문인지 루는 잠에서 깨어났다. 영아는 재빨리 루의 머리르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벌써 일어났어? 더 안 잘 거야?” “......” 더 자면 무슨 짓을 하려고? “글이나 써. 최모 편집자님 또 좇아오시기 전에.” 난 루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로 가니 루시아가 라이와 루비를 함께 소파에 앉아있었다. 여전히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두 엘프. “아! 오빠다.” “오빠아!” 난 라이와 루비를 안아주었다. 라이를 보니 아까의 안 좋은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난 라이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말했다. “우리 라이가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나중에 커서 예쁜 숙녀가 되면 오빠 품을 떠나게 되겠지. 다른 남자의 손을 붙잡고 말이야.” “우웅-” 손가락을 입에 물고 갸웃갸웃하느 리아. 난 그런 라이를 왉 껴안으며 말했다. “결혼 같은 거 하지 마, 라이야. 우리 라이 결혼하면 오빠는 어쩌라고? 오빠는 라이 없으면 단 하루도 못 살아. 그러니까 결혼 같은 거 하지마. 라이 결혼하며 히로는 콱 울어버릴 거야. 우엥- 우엥-” 라이가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마고 쏟아져나왔다. 언제나 내 품안에 있을 것 같은 라이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난 라이를 끌어안은 채 통곡을 했다. “앗! 울지 마세요. 오빠.” 라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라이는 평생 시집 안 가고 오빠랑 같이 살 거에요.” “훌쩍- 정말? 정말로 시집 안 가고 오빠랑 같이 살 거야?” “예” 라이는 두 손을 꼭 쥐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나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우에에엥- 고마워, 라이야.” 아아- 평생 시집 안 가고 오빠랑 같이 살겠다니.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왜냐면요... 라이는요오...” 라이는 말하기 쑥쓰러운지 몸을 비비 꼬며 말했다. “오빠랑 결혼할 거니까요오.” “...헉!” 오빠랑 결혼하겠다니! 이건 딸 가진 부모만이 들을 수 있다는 그 대사가 아니던가? 아아- 가슴이 마구 벅차오른다. 뿌듯뿌듯- 잘 키운 딸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말을 새삼 실감한다. 그래. 아들 같은 건 필요없어. 나한테는 착하고 예쁜 딸 라이가 있으니까. 난 라이를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쪽- “헤헤-” 라이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방긋방긋 웃었다. “루비도 오빠랑 결혼할래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하는 루비. 그러자 라이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루비를 노려보았다. “안 돼. 오빠는 이미 라이의 청혼을 받아들였어. 오빠는 라이랑 결혼할 거야.” “싫어! 루비는 오빠한테 시집 갈 거란 말이야!” “오빠는 라이 전용이야!” “오빠는 루비가 먼저 찜했어!” 눈을 부릅뜬 채 서로를 노려보는 라이와 루비. 얘들 또 시작했군. “너희들 그만두지 못해. 친구끼리 싸우면 안 되잖아. 자꾸 그러면 오빠 라이랑도 루비라도 결혼 안 해줄 거야.” 내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자 라이와 루비는 깜짝 놀라며 서로 노려보는 것을 그만도었다. 난 두 엘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오빠라 라이랑도 결혼해주고, 루비랑도 결혼해 줄게. 그럼 됏지?” “예-” 힘차게 대답하는 라이와 루비. “푸하하하-!” 아아- 이렇게 딸 가진 아버지의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딸들은 어릴 대 ‘결혼 안 하고 아빠랑 평생 같이 살 거에요’, ‘아빠랑 결혼할 거에요.’등등의 대사를 남발한다. 하지만 이 말이 지켜질 확률은 정치인 선거철 공약 지켜질 화률과 비슷한다. 다시 말해 아예 없다고 보는 게 좋다. 처녀가 시집 안 가겠다는 것은 3대 거짓말 중 하나가 아니던가? 통계적으로 살펴볼 때 이런 말 하는 애들이 더 빨리 시집가더라. 그래도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아빠로서는 가슴이 벅차로오를 수밖에 없다. 뿌듯뿌듯- 확성기 들고 돌아다니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좋은 순간 매섭게 날 노려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그 시선의 정체는 다른 아닌 루시아. “......” 앗! 생각해보니 난 라이랑도 결혼해 주고 루비랑도 결혼해 주기에 앞서, 루시아와 먼저 결혼해줘야 한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깜빡하다니! 난 재빨리 정색을 하며 말했다. “걱정하지만, 루시아. 너랑 제일 먼저 결혼해줄게.” “누가 너랑 결혼한대?” “헉! 그, 그럼 나랑 결혼 안 해 줄 거야?” “흥!”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루시아가 갑자기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야 당연 라이와 뤼박 나랑 결혼하겠다 ???라헀기 떄문이다. 루시아는 지금 라이와 루비를 질투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투하고 있다. 루시아는 아이들이 아빠를 더 좋아하면 삐지는 팔불출 엄마- 그 순간, 루가 루시아의 치마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는 크면 누나랑 결혼할래요~!‘ “......” 헉! 저 자식이 무슨 말을! “정말이야?” “예, 누나. 전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누나도 루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루시아는 루를 껴안고 볼을 비볐다. 심지어는 볼에 뽀뽀까지 해 주었다. “헤헤-” “......” 헉! 저 자식이 웃었어! 이 형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감히 루시아에게 청혼을 하다니. 너 이따 형이랑 굴다리 밑에서 좀 보자. 교육 좀 받아야겠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남자아이는 어머니를, 여자아이는 아버지를 이상형으로 여긴다고 한다.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에게서 성적 애착을 갖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출처는 그리스 신화로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라이오스는 태어날 아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할 거라는 신ㅌ착을 받았다. 그래서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내다버렸다. 여기?지 이야기가 나왔으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다를 짐작할 거다. 그런 신탁을 받은 아기가 태어낫으면 바로 죽일 것이지 내다버리긴 왜 내다버린단 말인가? 아기를 죽이는 게 너무 불쌍해서? 그렇게 불쌍하면 내다버리지 말고 그냥 기르든가! 죽이지 않고 내다버리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아기가 들편에서 굶어 죽거나, 짐승들에게 뜯어 먹히면 어쩌려고? 차라리 안락사를 시켜주는 게 훨씬 인도주의적이지 않나? 뭐, 내다버려야지만 스토리가 진행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계속 스토리를 진행시켜 보자면... 아기는 어찌어찌 해서 코린토스 왕 폴리보스와 왕비 메로페에게 넘어갔고, 아들이 없던 왕과 왕비는 그 아기를 양자로 삼고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른이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에 관한 신탁을 듣게 된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할 거라는 신탁을. 그 신탁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깜짝 놀랐다. 폴리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를 자신의 친부모르 올고 있었던 오이디푸스는 신탁이 현실이 될까 두려와 코린토스를 떠났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시기 전까지는 절대 코린토스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떠돌던 오이딥푸스는 어느 교차로에서 마차와 마주쳤다. 서로 길을 비키라고 다투다가 싸움이 일어났고, 화가 난 오이디푸스는 마부와 마차에 탄 남자를 죽여버렸다. 아아- 뻔해. 너무 뻔해. 여기까지 읽었으면 대붑ㄴ의 사람들이 ‘여기서 죽은 사람이 오이디푸스의 아버지가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라고 장담을 하게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똑같은 반응을르 보였다. 진짜 너무 뻔한 스토리다. 뭐, 신화라는 게 원래 좀 뻔한 내용이긴 하다. 그 후에도 계속 여행을 한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도착했다. 마침 테베에서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설치고 있었다. 테베의 왕은 그 괴물에 대한 신탁을 듣기 위해 델포이로 향하던 중 살해당했고, 그 때문에 나라는 슬픔에 빠져 있었다. 왕비는 스핑크스를 없애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공표했다. 할일이 없었던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처치하기 위해 갔다. 여자의 얼굴, 사자의 몸,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괴물 스핑크스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풀지 못하면 잡아먹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았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엔느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데, 네 발로 걸을 때가 가장 약한 것은 무엇인가?’ 이 글을 읽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사람들에게는 난이도가 너무 높았는지, 그 누구도 맞추지 못했다. 아무리 문제 내는 게 출제자 마음이라고는 하지만 너무한게 아닌가 싶다. 이건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학부몰들 항의 들어오면 어쩔려고 그러는지. 참고로 저 수수께끼의 정답은 ‘인간’ 이다. 사람은 어렸을 땐 네 발로 기어 다니지만, 커서는 두발로 걸어다니고,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렇ㄴ데 이게 말이 되나? 뭔 인간이 하루만에 (정확히는 반나절이다) 늙어서 지팡이까지 짚고 다닌다냐? 그야말로 어이없음의 극치다. 수능이 이런 문제 냈다간 출제자는 십중팔구 잘린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답을 맞히자, 스핑크스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 뭐야? 스핑크스는 대체 왜 등장한 거야? 아무튼 스핑크스를 처치한 오이디푸스는 여왕과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되었다.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선정을 베풀며 왕비와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엇따. 그런데 언제부턴가 잡자기 나라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오이디푸스는 상황이 악화되자 델포이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아보았다. 신탁은 테베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한 부정한 자가 존재하기 떄문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다고 했다. 이에 오이디피수는 그 부정한 자를 찾기 위해 와국 전체를 수색했다. 그러던 중 자신이 라이오스 왕의 아들며, 현재 자신의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신탁대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한 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실에 여왕은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미쳐서 자신의 눈을 뽑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 때 오이디푸스를 ?라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다. 대략 이런 스토리다. 남자아이느 어머니를 이상형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연히 어머니의 연인인 아버지를 적대시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가 커가면서 정상적인 성애로 발전하게 된다. 만약 애가 어렸을 때 교육을 잘못 받거나,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 상태가 이상해졌다면 비정상적인 형태의 성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참고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부친의 권위가 강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잘 나타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반대로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있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여자아이가 머니를 증오하고 아버지에게 성적 애착을 갖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의 출처 역시 그리스 신화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 트로이 전쟁에 그리스 연합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아가멤논은 전생에 승리해서 고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내는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다. 엘렉트라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동생 오레스테스가 성장하가 그와 함꼐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대략 이런 스토리다. 결국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 모두 콩가루 집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참고로 요즘 들어 뉴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친족살해는 이와 별 관계까 없다. ‘돈 안 준다고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 ‘보험금을 노리고부모가 잠든 사이 방회’ 등등의 뉴스는 아무리 봐도 콤플렉스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머니 콤플렉스라면 또 모르겠군. 으음, 역시 자식을 똑똑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가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훌륭한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지식 정도는 기본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이렇게 루와 루비를 보고 있자니, 루엔이 떠오른다. 아아- 루엔은 대체 이 귀여운 아이들을 버려두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외식해요, 오빠.” “나가서 먹어요, 형” “루비 피자 먹고 싶어요.”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조르는 아이들. 난 매몰차게 거절하려 했지만 메이드복을 입은 라이와 루비를 보니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다. 이건 뭐 엔간히 귀여워야 말이지. “그, 그럴까?” “네에-!” “......” 아아- 아이들의 귀염성에 또 넘어가다니.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지는데.. 난 루비를 안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건물을 나서는 데 갑자기 빨간색 스포츠가 한 대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앗! 저 차 뚜껑이 열려 있어요, 오빠!” 루비의 말대로 차는 뚜껑이 열려 있었다. 소프트 컨버터블도 아닌, 하드 컨버터블이다. 운전을 하는 사람은 레몬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미청년.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빨간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은 스타일리쉬한 미녀. “......” 앗! 저 둘은 설마 갈리온드와 루엔? 빨간 스포츠카는 격렬한 파워 드리프트를 하며 내 앞에 멈춰섰다. 문을 열고 내리는 남자. 그리고 가볍게 뛰어 내리는 여자. “할머니이-!” 루비는 내 품에서 빠져노아 루엔에게 달려갔다. 루 역시 힘차게 루엔에게 달려갔다. 루엔은 허리를 숙여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잘들 있었어?” “네에-!” 루엔은 간만에 보는 아이들이 반가운지 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웃으며 좋아하는 루와 루비. 난 루시아의 눈빛에서 착잡한 심정을 엿볼 수 있었따. 루시아의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난 슬며시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루시아. 우리에겐 라이가 있잖아.” “으응” 루와 루비는 우리가 잠시 맡아서 기르고 있는 친구의 아이다. 친권자는 어디까지나 루엔이다. 그러니 루시아의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겠지. 내 마음 역시 루시아와 같다. 그동안 루와 루비를 내 친자식처럼 키웠었는데, 친부모...는 아니고 친할머니가 나타나다니. 루엔은 날 보며 물었다. “그동안 이 애들이 말썽은 안 부렸나요?” “헉!” “헉!” 루엔의 말에 깜짝 놀라는 루와 루비. 그러더니 서로를 끌어안고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살려주세요, 오빠.’ ‘전 맞아 죽기 싫어요.’ ...라고 말하는 듯한 루와 루비의 붉은색 눈동자. 난 그 모습에서 루엔이 그동안 얼마나 애들 교육에 힘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한두대 패서는 애들이 이렇게 안 된다. 잘못을 했을 때마다 꾸준해 패줘야 이렇게 ‘말썽’ 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벌벌 떨게 되는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루엔의 교육 방식에 적극 찬성한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 쇠빳따까지 구매했다. 이제 이 쇠빳따로 구타..가 아닌 체벌을 ㅎ나??? 것만 남았다. 하지만 루시아의 반대가 워낙 심해서 아직?지 한 번도 상횽하지 못하고 있다. 루시아는 아이들을 너무 오냐오냐 한다니까. 가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쇠빳따의 위력을 뼛속까지 느끼게 해줘야 할 텐데. “하하, 말썽이라니요? 루와 루비가 얼마나 말 잘 듣는 착한 에릎들인데요.” 아아- 아무리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이런 거짓말을 해야 하다니! 진실과 신용의 대명사인 아이언스 히로의 명성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루엔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말썽을 부렸다면 크게 훈내주려고 했는데.” “헉!” “헉!” 어느새 하얗게 질린 루와 루비의 얼굴. 혼낸다는 말 한마디에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지다니. 내가 혼낸다고 했을 땐 실실 웃은 것들이 말이야. 역시 나의 교육 방법이 잘못된 걸까? “나의 딸 라이레얼은 어디 있지?” 갈리온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랄이러얼을 찾았다. 난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지금쯤 자고 있을 겁니다. 어제도 밤새서 오락했거든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겨울이고, 지금은 여름이다. 당연 입고 있는 옷도 바뀌어 있었다. 갈리온드가 ㅇㅂ고 있는 것은 야자수가 그려진 하늘색 반팔 남방과 아이보리색 반바지, 그리고 신발은 편해 보이는 샌들. 루엔은 꽃무늬 붉은색 남방에 베이지색 반바지. 역시 신발은 샌들이다. 둘 다 이마에 지은 색 선글라스를 걸고 있었다. “......” 피서 왔나? 그야말로 하와이 패션. 지금 당장 비행기 타고 하와이나 괌으로 떠나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차는 어디서 났어요?” 난 ?간색 스포츠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척 보기에도 엄청 비싸보이는 차다. 미국식의 머슬카적인 분위기와 유럽식의 늘씬한 동체 곡선을 자랑하는 스포츠카. 남자라면 한 번쯤 몰아보고 싶은 그런 차다. 그런데 무지하게 비싸 보인다. 척 보기에도 1억 원은 가볍게 넘을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 차는 대체 어디서 난 걸까? 갈리온드와 루엔은 현재 백수. 둘 다 나한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만 보면 돈 달라고 손 벌리기 바쁘다. 가끔은 내 카드를 가지고 나가 마구 긁기도 한다. 그런 갈리온드와 루엔이 무슨 돈이 있어서 이 차르 샀단 말인가? 혹시 훔친 건가?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구리는데, 갈리온드가 입을 열었다. “니 카드로 긁었다.” “헉쓰쓰!”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갈리온든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만약 가리온드가 다음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농담이다. 짜씩, 놀라기는.” “......” 어째 농담처럼 안 들리는데. “그런 무슨 돈으로 산 거에요?” “후후- 후후후-” 갈리온두는 대답을 하는 대신 팔짱을 끼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따. “......” 무야? 이 엘프 왜 이래? 내가 루엔을 바라보자 루엔은 생긋 웃으며말했다. “로또에 당첨됐어요.” “...예?” 순간,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로또에? 로또 복권에? “저번 주에 1등 당첨되었어요. 참 운이 좋았지요.” “......” 로또 1등에 당첨? “왜 그러시죠? 어디 안 좋은 곳이라고 있으신가요?” 루엔은 놀라 아무 말도 못하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얼굴을 바짝 붙였다. 루엔의 얼굴이 코앞에 있고, 그녀가 내뱉는 숨이 내 코를 간질인다. 한걸음만 앞으로 가면 입술이 맞닿을 상황. 헉! 이, 이거 왠지 위험한데.. 두근두근.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까? 루엔과 나느 친구인데.. 그리고 나느 루시아밖에 없는데.. 사랑하는 여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쁜 여자만 보면 두근거리는 내 가슴 이런 게 남자라는 족속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아아- 때로는 이런 내가 싫어진다. “얼굴이 빨개졌네요.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아, 아니, 뭐...” 순간, 느껴지는 뜨가운 시선. 루시아는 팔짱을 끼고 눈 꼬리를 찬뜩 치켜 올린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내 가슴이 얼어붙는다. “아, 아무렇지도 않아요!” 난 재?리 루엔에게서 떨어졌다. 아아- 루시아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설마 또 삐진 건 아니겠지? “......” 척보니 삐진 것 같군. “그, 그런데 정말이에요?” “뭐가요?” “로또 1등에 당첨되는다는 거 말이에요.” “네. 지난주에 당첨되었어요. 1등 당첨자는 모두 9명으로 세금을 제하고 14억 5천원 원 정도 수령했어요.” “헉! 14억 5천만원!” 옛날에 비해 당첨금이 많이 줄었다. 예전에는 당첨금이 몇 번 이월돼서 수백억까지고 나왔었었는데. 그래도 세금 떼고 14억 5천만 원이면 어디냐? 일반인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금액이다. 연봉이 3천만 원이라 가정한다면,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대략 48년 정도가 거린다. 그야말로 평범한 직장인은 죽을 때까지 일해도 벌기 힘든 금액. 그런데 그 돈을 한방에 벌다니! “대체 어떻게 당첨이 된 거에요?” “호호- 그건 말이죠...” 갈리온드와 루엔. 두 엘프는 찜질방와 PC방을 전전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대한민국에는 잠 잘 곳이 널리고 널렸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돈이 떨어지면 PC방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게임 아이템을 팔거나, 히로의 카드를 긁는 등의 방법으로돈을 마련했다. “잠깐만요” “예? 왜 그러시죠?” “돈이 떨어지면 제 카드로 긁었다구요?” “예. 뭐가 잘못되었나요?” “......” 이렇게 당당하게 물어보니 대답하기가 난감핟. “아, 아니요. 뭐, 꼭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럼 얘기 계속하게요.” 그렇게 폐인 생활을 하던 갈리온드와 루엔은 돈도 떨어지고 모도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그들에게 남아있던 돈은 단돈 천 원. 그 돈으로 컵라면을 사서 둘이 나눠먹기로 했다. 그래서 컵라면을 사려고 편의점에 가는데, 편의점 옆 복권방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은 마침 로또 복권 추첨이 있는 토요일이었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은 로또 복권을 사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열풍이 아니라 광풍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 국민을 달ㄹ아오르게 한 로또복권 열기. 그 열기에 이끌린 갈리온드와 루엔은 하끼 굶을 각오를 하고 로또 복권을 샀다. 찍은 숫자는 1,2,9,15,24,30. “찍은 숫자의 의미는 뭔가요?” “호호- 글세요. 그건 직접 생각해보세요.” “으음... 난 나름대로 숫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이리스가 1부와 2부가 나왔으니, 1,2. 그리고 2부가 현재 9권이니, 9. 1부가 15권에서 완결되었으니, 15. 1부와 2부를 합하면 현재 권수가 24권이니, 24. 나름대로 말이 되는 것같다. 그럼 30은 뭐지? 찍을 숫자가 없어 그냥 찍은 건가? 숫자의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1등에 당첨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복권이 1등에 당첨되었단 말인가요?” “예. 정확히 1시간 후에 추첨을 시작했는데, 보니까 1등에 당첨되었어요. 그래서 다음날 바로 국민은해에 가서 당첨금을 찾아왔지요.” “지, 진짜로 줘요?” “물론이지요. 확인 절차를 거치더니 바로 당첨금을 지급해주던데요. 물론 세금 떼고요.” “......” 한방에 인생 역전이란 말인가? 한순간에 빈털터리에서 10원의 자산가로 변신하다니! 왜 전 국민이 로또에 목숨 거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나라는 소득 불평등이 선진국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다. 이나라에서 백날 열심히 벌어봐야 일반 서민들은 집 한 래 사기가 힘들다.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은 1만 불 정도. 그런데 집값은 국민 소득 3만불 이상인 일본이나 영국보다도 비싸다.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웃기는 것은 지금도 계속 오르고 있다느 것이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집을 사는 것은 꿈도 못 꾼다. 1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1억을 벌면, 집값은 2억은 올라있다. 또 1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1억을 더 모으면, 집값은 3억으로 올라있다. 남은 방법은 자신이 살 집을 담보로 잡고 은행에 대출을 받아 사는 것이다. 그리고 빘나 이자 물어가며 열심히 일해 대출금을 갚는다. 대략 정년퇴임할 때쯤 대출금을 갚게 된다. 참고로 대출금을 못 값으면, 은행이 그 집을 고스란히 가져간다. 한사람이 평생도안 일한 가치가 집 한 채만도 못한 셈이다. 게다가 사회 안전망도 개판이다. 혹시라도 가족 중에 한 명이 큰 병에라도 거린다면, 그때부터 밑도 끝도 없는 추락이 시작된다. 중간에 잡아줄 어떤 장치도 없다.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나날이 늘어나고, 고용 불안은 계속된다. 고용 불안은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창업에 뛰어들고 늘어난 자영업자 수로 인해 가게들의 매출은 급감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결혼을 해도 애 낳는 건 꿈도 못 꾼다. 정부가 출산하라고 난리를 쳐대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업삳. 직장에서는 언제 짤릴지 모르고, 집도 없어 여기저기 떠도는데 누가 미쳤다고 애를 낳겠는가? 애를 낳는다고 해도 어떻게 키울 건가? 공영 탁아소는 극소수, 공교육은 초토화, 사교육비는 천문학적. 여기에 돈 맛을 본 대학들은 학기마다 등록금을 미친 듯이 올려댄다. 상황이 이러하니 정부의 출산 장려는 ‘다음 일은 생각 말고 일다 싸질러’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브래드 피트와 모건 프리먼이 주연의 영화 세븐에서는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느 것은 죄악이다’ 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걸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바꾸면 ‘이런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죄악이다’ 가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나라에 사는 서민들은 미래가 없다. 부동산값이 백날 뛰어도 돈 버는 것은 부동산을 소유한 부유층이나 건설자, 투기꾼들이고, 서민들은 돈을 벌기는커녕 내집 만려하느라 죽어난다. 정부가 백날 집값 잡는다고 난리쳐 봐야 뭐하나? 정책 세우는 사람들 대부분이 강남에 사는 땅부자들인데. 이 사람들이 미쳤다고 자기 재산 갂아먹는 정책을 입한하겠는가? 부동산 값을 올리는 정책을 입안하지 않느 것만으로도 서민들은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기 유리한 쪽으로 변화된다고 한다. 그러니 몇 천 년이 지나면, 대한민국 서민들으느 달팽이 인간이나 거북이 인간으로 진화할지도 모른다. 그럼 집값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참 좋을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이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도 대한민국에 사는 서민들은 차라리 다ㄹ팽이나 거북이록 태어나게 해주지 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서 이 고통을 받게 하냐며 하늘을 원망하고 있다. 혹시 대한민국은 진화론의 실험장이 아닐까? 그래서 일부러 부동산 가격을 미친 듯이 올리고 있는 건가? 왠지 가능성 있어 보인다. 어쨌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한민국은 부잗르에게는 천국이고 서민들에게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대한민국에서 돈 벌 수 있느 방법은 부동산 투기 아니면 복권밖에 없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하지만 부동산 투기는 돈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 결국 서민들이 돈을 벌 수 있느 방법은 복권밖에 남지 않는다. 복권은 정부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복권 한 장은 반 이상이 세금이라 할 수 있따. 복권 자체가 세금 덩어리일 뿐만 이니라 당첨금에서도 세금을 거둬가니. 세금이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역할도 한다는 것을 중학교 이상 다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많이 버는 사람이 많은 세금을 낸 것. 이건 세금의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복권은 그 반대이다. 즉, 부자들에게는 한 푼도 걷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걷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부자들은 복권을 거의 사지 않느다. 그들은 814만분의 1의 확률엑 기대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민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복권을 산다. 복권이 아니고서는 인생 역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떄문이다. 통계적으로 볼 때 가난하고 부의 불균형이 심각한 나라일수록 복권이 잘 팔린다. 이런 나라들은 미래가 불투명하고, 미래가 불투명할 수록 기댈 것은 일확천금의 행운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발 교과서에 나와 있는 말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대로 부동산 값이 계속해서 폭등할 경우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장기불황 역시 전국을 휩쓴 부동산 투기 열풍 땜누이었다. 1970-1980년대 말까지 일본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무역에서 엄청난 흑자를 냈다. 넘쳐나는 돈을 주체못한 기업들은 이 돈을 설비투자에 쓰는 대신 부동산과 주식에 몰아넣었다. 부동산과 주식은 계속 올랐고 황금시대를 누린 일본인들은 그 누구도 가격이 떨어질 거라 생각지 않았따. 당시 일본은 전국 어느 곳에 땅을 사놔도 가격이 오른다는 말이 있을 저도로 전국이 부동산투가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실제로 자고 일어나면 땅값이 뛰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돈 있는 사람들은 물론 돈 없은 사람들까지도 부동산 투기에 나섰다. 값이 뛸 대로 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그 돈을 땅을 사서 그 따응ㄹ 담보로 또 다시 대출을 받아 또 땅을 샀다. 기업들도 생산에 투자하깁다 수익이 생기면 무조건적으로 부동산에 밀어 넣었고, 은행들도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무조건적으로 돈을 대출해주 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동산 역시 하나의 상품이고, 상품은 공급과 수요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때 일본의 부동산은 수요는 없이 가격만 몇 배로 올랐다. 물론 수요가 있긴 있었다. 문제는 그 수요가 실수요가 아닌 투기수요였다는 것이다. 이때가 일본 경제의 최대 호황기였다. 하지만 그 호황은 거품에 의해 만들어진 일명 버블경제였다. 실물경제에서는 큰 변동이 없음에도 주식과 부동산이 큰 폭으로 상승하며 경제 전반에 거품이 낀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거품이 빠졌다. 그것은 정말 한순간에 일이었다. 마치 부풀대로 부푼 풍선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말이다. 그 계기로는 일단 엔화 절상과 일본 중앙은행의 재할인율 상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계기가 무엇이었던 잔뜩 부풀어온 풍선은 언젠가 터지게 되어 있고, 거품은 언젠가 빠지게 되어 있다. 땅값은 급격히 하락하고, 자금 유통이 경색되면서 주식 역시 폭락했다. 부동산을 담보로 내놓고 돈을 대출받아 부동산을 산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전 재산을 날리고 파산했다. 은행은 대출 자금을 회수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돈이 아닌 담보로 잡은 부동산이었다. 하지만 폭락할 대로 폭락한 부동산의 가치는 대출금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한 은행은 도산 위기에 이르렀다. 은행의 도산을 막기 위해 일본 대장성(재무부) 은 막대한 공적자금(다시 말해 국민의 세금)을 은행에 퍼부어야 했다. 쪽박을 찬 것은 그동안 부동산과 주식으로 재미를 본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땅값과 주식은 하루아침에 폭락했고, 그로 인해 기업들 역시 경영 위기에 처하거나 도산했다. 기업이 도산하니 기업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은행역시 타격을 받고, 그로 인해 또 다시 공적자금이 퍼부어지고..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넘쳐흐르던 돈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시중에는 더 이상 돈이 돌지 않았다. 1988년과 1989년은 거품경제의 말기이자 전성기였다. 넘쳐흐르는 돈을 주체 못하던 풍요의 시대. 자고 일어나면 땅값이건 주가건 폭등하던 황금의 시대. 그리고 정부, 기업, 은행. 기인 할 것없이 모두가 투기에 미쳐있던 광기의 시대. 하지만 버블경제 대붕괴 이후 남은 것은 장기불황의 늪이었다. 이본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불안한 소비 심리로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고 모든 돈을 은행에 저금했다. 구매 수요가 없자 기업은 생산을 줄였고, 그로 인해 고용 감축이 이어지고, 고용 불안은 또 다시 소비 심리 위축으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어떻게든 국민들의 소비 심리를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금리를 0% 까지 내렸고, 심지어는 상품권까지 배포했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은 이 상품권마저도 현금화시켜 저축했다. 그야말로 늪이었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일본 전체가 끝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 속을 걸어가는 것 같았다. 일본이 장기불황의 늪을 빠져나온 것은 겨우 얼마 전의 일이다. 일본은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며, 그 10년을 만화하기 위해 또 다른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한다.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는 일본과 매우 흡사하다. 애초에 우리나라 경제가 일본을 흐멜로 성장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특징 중 첫째는 무슨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전혀 대비를 안 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그래서 같은 일이 또 다시 터진다는 것이다. 1990년 초에는 IMF 사태, 21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후에는 신용카드 대란, 이젠 일본처럼 버블경제 붕괴로 장기불황의 늪에 빠지는 것만 남았다. 사실 신용카드 사태도 조금만 일찍 대비를 햇으면 어느정도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끎아서 터지기 전까지는 정부가 손을 안 댄다는 것이 우리나라의 시장원리이다. 그래서 아주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정부는 팔짱만 끼고 있었다. 그 결과 수백만명의 신용불량자들이 생겨났고, 부도 위기에 몰린 LG카드를 살리기 위해 막대한 공적자금(다시 말하지만 국민의 세금. 서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이 쏟아부어졌다. 바로 옆에 있는 나라가 버블경제 붕괴로 10년 동안 장기불황의 늪에 빠지는 것을 봤으면 거품을 미리밀 걷어내는 노력을 해야할 것 안닌가? 그런데 거품을 걷어내기는커녕 비누방울 놀이나 하고 있으니 서민들을 환장할 지경이다. 현재 정부 정책은 거품을 걷어내기보다는 거품을 터뜨리지 않는 것이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진짜로 거품을 한 번 터져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IMF와 카드대란을 얻어맞고도 저신을 못 차린 대한민국. 서민들은 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로또 복권인 열심히 사는 것이 현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으음, 그런 의미에서 나도 이제부터 로또 복권인 열심히 사 볼까? 한번 크게 당첨되면 빚 갚은 건 일도 아닐덴데..” 내가 혼자 중얼거리자 루엔은 이상하다는 눈길로 날 보았다. 그 시선에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 당첨금으로 이 차를 사신 건가요?” “예. 빨간 스포츠가는 여자의 로망 아니겠어요?” “......” 남자의 로망인데.. 뭐, 요즘은 양성평등 시대이니 상관없으려나? 아무튼 과연 루엔이다. 스타일리쉬한 미녀답게 스포츠카에도 관심이 많군. 확실히 루엔은 레이싱걸을 하는 것보다는 카레이서를 하는 것이 어울릴 듯하다. 라이레얼도 그렇고. “지금 어디 가는 길이에요?” 아! 외식하려구요. 아이들이 피자 먹고 싶다고 졸라서..“ “흐음. 그래요? 설마 루와 루비가 사달라고 졸랐나요?” “예. 뭐..” “얹혀사는 아이들이 주제도 모르고 사달라고 졸랐으면 그건 매우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죠.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한데 피자를 사달라고 조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만약 그랬다면 제가 따끔하게 혼을 내줄게요.” 루와 루비는 다시 서로를 끌어안고 오들오들 떨었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과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리 것 같은 붉은색 눈망울. 텔레비젼에서 사람이 기어나와도 이 정도로 무서워할 것 같지는 않다. 이는 루엔의 공포 고육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루와 루비는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목숨을 구걸하는 사슴의 눈을 연상시켰다(라지만, 실제로 목숨을 구걸하는 사슴의 눈을 본 적은 없다). “그, 그럴 리가요! 루와 루비는 주는 대로 잘 먹는 아이들이에요. 절대로 뭐 사달라고 조르거나 하지 않아요. 그, 그치, 루시아?” 루시아는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이에요. 피자는 라이사 가 사달라고 졸랐어요. 루와 루비는 집에서 밥 먹겠다는 걸 저희가 억지로 끌고 나온 거에요.” 우리의 거짓말에 루엔은 생긋 웃음을 지으며 루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호호- 둘 다 할머니 없는 동안 착하게 잘 지냈난 보네.” “네, 할머니루비는 막막 착하게 지냈어요.” “저, 저도 엄청 착했어요.” “물론 그래야지. 얹혀사는 주제에 말???부리거나 그러면 할머니가 미안해지잖아.” 루엔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을 움찍거리는 루와 루비. 그 손일에서 가장의 권위가 느껴진다. 루엔의 반만이라도 가자으이 권위를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로 우리 집 애들은 라르 가장으로 안 보니다. 비행기, 쿠션, 이동수단, 장난감, 물주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않느다. 만날 비행기 태워달라고 조르고, 내 무릎 웽 앉으려고 하고, 등에 업히려 하고, 시도 떄도 없이 같이 놀아달라고 하고, 식사 때만 되면 뭐 사달라고 하고.. “으음, 가장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쇠빳따를 사용하는 게 좋으려나?” 내가 중얼거리자 루시아는 바로 내 옆구를 쿡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해본 소리야.” 의미심장한 눕치으로 루와 루비를 바라보던 루엔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같이 가요. 오늘 점심은 제가 살게요.” “아, 아니에요. 오랜만에 오셨는데 당연히 제가 사야지요.” “호호- 괜찮아요. 그동안 루와 루비를 맡아주었으니 보답하는 의미로 제가 살게요.” “예. 뭐 그러시다면야...” 이리하여 우리는 갈리온드와 루엔과 함께 마스터 피자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나는 갈리온드와 루엔이 어떻게 지냈는지 들을 수 있었다. 둘은 ‘뮤니지로크’라는 온라인 게임에 빠져 있었따. 둘이 파티를 이뤄 하루 20시간 이상 게임을 했다고 한다. 화장실 가는 시간과 잠깐 눈 붙이는 시간만 빼고 전부 게임에 투자했다. 그렇게 레벨업을 하던 중 우연히 누군가가 떨어뜨린 성검 샤이닝 블레이드를 주웠다. “샤이닝 블레이드는 초 레어 아이템으로 거래가만 5천만원을 호가하는 물건이에요.” “헉! 5, 5천만원! 설마 현금으로 5천만원?” “물론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나중에 원주인으로 보이는 사라밍 돌려달라고 하더군요. 실수로 떨어뜨린 거라고.” “그래서 돌려주셨어요?” “아니요. 한번 주으면 끝이죠. 미쳤다고 그걸 돌려주겠어요?” “그, 그건 그렇죠.” “거절하니까 동료들을 이끌과 와서 PK를 하려 했어요.” “PK라면..?” “플레이어 킬러의 약자에요. 다시 말해 게임상의 캐릭터를 죽인다는 뜻이죠.” “아아- 그렇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물론 그대로 죽어줄 순 없었죠. 우리 역시 린한 길드가 있었기에 그쪽에 도움을 청했어요” “그래서요?” “순식간에 싸움은 길드전이 되었지요.” “다시 말햇 패싸움이 되었따는 건가요?” “예. 결국 싸움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고, 그쪽 길드는 전멸했찌요. 구리고 우리는 많은 아이템들을 챙길 수 있었어요. 그때 우리가 챙긴 아이템 가격만 해도 몇 천만원은 됐을 거에요.” “헉! 몇천만원!” “이렇게 해서 이 일이 끝날 줄 알았어요,” “그럼 또 무슨일이 있었나요?”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가 있는 PC방으로 찾아왔더군요. 그것도 조폭을 열 명이나 데리고요.” “조폭이요?” “그자는 20살 정도로 보였어요. 그 자의 형이 록스나라는 도시의 군주이고, 그 조폭들은 부하라고 하더군요. 군주님의 동생을 PK한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뭐다 하며 갑자기 공격을 시작했어요.” 루엔의 말대로 PK는 캐릭터를 죽이는 것을 말한다. 가끔은 게임상의 분쟁이 현실의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것을 ‘현실 PK’라고 하고 줄여서 ‘현피’라고 한다. “조폭까지 동원해서 현피를 뜨다니.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죠.” “......” 1부를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루엔이 피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대화로 해결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피를 보지 않고 떡으로 만들어놓겠다는 뜻이다. 루엔은 긴 세월동안 권법을 연마한 엘프다. 그 실력은 일류 권법가들에 비해서 결고 뒤지지 않는다. 전광석화 같은 손놀림과 근육의 힘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타격. 그녀의 권법은 아마 빅장과도 맞먹는 위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을 떡으로 만들면서도 피 한 방을 안 나오게 하는 것은 인체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미세한 힘 조절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피 안 보고 끝냈나요?” “예. 피를 안 보고 끝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 그놈들에게 있어선 결코 다행이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로 얻어맞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피가 안 나는 것보다 피가 나는 것이 훨씬 낫다. 외출혈일 경우 상처는 금방 낫는다. 하지만 내출혈일 경우에는 피가 몸속에 고이면서 골병이 들게 된다. 최악의 경우에는 고인 피가 썩어 상처 부위를 도려내야하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보면 잔혹하기 그지 없는 권법. 무지막지하게 얻어맞았을 조폭들을 생각하니 측은지심이 인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던 중 주만한 피자가 나왔다. 라이는 재빨리 가장 큰 조각을 손으로 집어 들고 먹기 시작했다. “......” 저거 엄청 뜨거울 텐데. “천천히 먹어, 라이야. 혀 데면 어쩔려고 그래?” 라이는 뜨거운 피자를 손으로 잡고 호호 불어가며 열심히 먹었다. “......” 응? 뭔가 이상한데. 루시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이상함을 느낀 듯했다. 우리는 잠시 생각한 끝에 무엇이 이상한지 알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루와 루비가 가만히 앉아있다는 것이다. “......” 헉! 피자를 앞에 두고 루와 루비가 가만히 앉아있다니! 그것도 그냥 피자가 아닌 고구마 두 줄짜리인데! 난 나의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가 떠보았다. 하지만 루와 루비는 여전히 가만히 앉아있었다. 루시아는 크게 당황하며 피자조각을 루와 루비 접시에 덜어주었다. “너희도 빨리 먹어.” 난 루와 루비가 피자를 손으로 잡고 열심히 뜯어먹을 가러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손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잡더니 피자를 잘라먹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조금씩 잘라서 깨작깨작 먹는데. “......” 말도 안 돼! 혹시 지금 내가 꿈을 꾸도 있는 건가? 루시아 역시 놀랐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루와 루비를 보았ㄷ, “왜 그래? 입맛이 없니?” “아, 아니에요. 언니.” 저는 원래 소식을 해요.“ “......” 니들이 소식을 해? 소식. 해석하자면 조금만 먹는다는 뜻. 이게 말이 돼! 앉은 자리에서 훼밀리 사이즈 피자 한 판을 가볍게 해치우는 게 소식이냐? 루엔은 깨작깨작 먹는 루와 루비를 보며 말했다. “남의 집에 얹혀살면 밥이라도 조금 먹어야지. 설마 루와 루비는 얹혀사는 주제에 남의 집 집안 살림 거덜내는 그럼 염치없는 엘프는 아니겠지?” “......” 염치없는 엘프 맞는데. “아, 아니에요, 할머니.” “저는 하루 두끼밖에 안 먹어요.” “마, 맞아요. 언니랑 오빠한테 최대한 부담 안 되게 조금씩만 먹어요.” “......” 하루 두 끼? 부담 안 되게 조금씩만 먹어? 하루에 다섯 끼도 더 먹는 것들이 말은 잘 한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루와 루비. 우리는 저런 엘프들을 가리켜 ‘나쁜 엘프’ 라고 부른다. 아무튼 왜 저렇게 깨작깨작 먹나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루엔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거였군. 가끔은 내 눈치도 좀 보지 그러니? 루엔의 눈치는 보면서 내눈치는 눈곱만큼도 안 보다니. 공포교육의 필요성을 새삼 느낀다. 그래도 저것들이 깨작깨작 먹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밥맛이 떨어진다. 역시 쟤들은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어울린다. 우리 라이처럼 말이야. 루와 루비는 입 안 가득 피자를 밀어넣고 복스럽게 먹는 라이를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도 라이처럼 먹고 싶어요오.’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아! 그러고 보니 니들 아까 아침도 안 먹었지? 배 무지 고프겠다. 입맛 없더라도 많이 먹으렴.” 난 그렇게 말하며 피자 몇 조각을 아이들 접시에 덜어주었다. 루시아도 거들었다. “음식을 남기는 건 나쁜 엘프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러니 먹기 싫어도 다 먹어. 조금이라도 남기면 언니 화 낼 거야.” 그러자 루와 루비는 루엔의 누치를 살피며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눈치 보며 먹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인다. 루와 루비는 깨작깨작 먹는 척하면서 열심히 먹었다. 피자 세 조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내 평생 깨작깨작 먹으면서 이렇게 빨리 먹는 엘프는 처음 본다. 역시 우리 루와 루비는 달라도 뭔가다르다.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피자를 몇 판 더 시켜주었다. 갈리온드는 빨대로 콜라를 마시며 나에게 물었다,. “나의 딸 라이레얼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 그렇게 강조 안 해도 그쪽 딸인 거 다 알거든요. “당연히 잘 지내고 있죠. 여전히 카르랑 같은 방 쓰고 있어요. 참고로 방에 게임기랑 텔레비전까지 들여놔서 안락한 게임라이프를 즐기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다행이군. 아아- 아빠가 되어서 변변한 게임기 하나 사주지 못하다니. 난아빠로서의 자격이 없어! 흑흑- 미안하다, 나의 딸 라이레얼아.” “......” 또다시 시작된 갈리온드의 궁상. 누가 궁상 엘프 아니랄깡봐 무지하게 궁상떤다. “무지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안심하세요. 그리고 울지 좀 마세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안그래도 가게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끝내주는 미청년 갈리온드, 빨강 머리카라이 눈에 띄는 스타일리쉬한 미녀 루엔,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청순가련형 미녀 루시아, 그리고 극강의 귀염성과 깜찍성이 무기인 라이, 루, 루비. 같이 있으면 시선이 집중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갈리온드가 큰 소리로 흐느껴 우니 사람들이 무슨 일이가 싶어 먹는 것마저 중단하고 쳐다본다. 남 먹는 거 쳐다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짓인 거 무르냐? 루엔은 우는 갈리온드를 달래주엇따, 그러자 루엔의 눈치를 살피던 로와 루비는 기회를 놓칠세라 재발리 피자를 입에 밀어넣기 싲가했따. 순식간에 피자 두조각을 입에 밀어넣는 모습이 신기에 가깝다. 저러다가 체할 텐데. “켁켁!” “......” 그럴 줄 알았다. 나와 루시아는 재빨리 루와 루비에게 콜라를 먹여주었다. “후아-”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루와 루비. 그렇게 먹고도 2프로 부족하다는 표정이었다. “......”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아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걸?? 잘량보존의 법칙마저 무시하는 어린 엘프들의 식욕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만 일어나죠.” “예, 계산은 제가 할게요,” 루엔은 계싼서를 가지고 카운터로 향했다. 라이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배를 쓰다듬었고, 루와 루비는 루엔의 눈치를 보느라 얼마 못 먹었는지 배고푸다느 표정을 지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루시아는 그런 루와 루비를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참고로 쟤들이 아무리 눈치를 보느라 조금 먹었어도 그 양은 일반 성인 식사량으 두 배 이상이다. 루엔은 지갑을 열어 수표를 꺼났다. 난 부풀어오른 그녀의 지갑에 깜짝 놀랐다. 헉! 수표가 대체 몇장이야? 역시 로또가 좋긴 좋구나. 밖으로 나오자 난 루엔에게 물었다. “이제 어쩌실 건가요?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실 건가요, 아니면 집에 들어오실 거에요?“ “남는 방은 있나요?” “예. 뭐.. 일단 이사를 했으니?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100평도 넘어요. 아으들 놀이방이 있으니 그곳에서 주무시면 될거에ㅛ,” 루엔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히로한테 너무 폐가 되잖아요.” “아, 아니에요. 폐는 무슨 폐에요? 루엔은 제 친구인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그??? 방 하나가 대수겠어요?” “호호- 말이라도 고마워요. 엘프인 저에게는 히로라는 인간 친구가 있따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몰라요.” “저, 저야말로 루엔이라는 엘프 친구가 있어서 기뻐요. 무, 무엇보다는 루엔은 ... 예, 예브잖아요.” 아아- 왠지 얼굴이 빨개지는 대사다. “정말요? 정말 제가 예쁘다고 생각하세요?” “물론이죠. 루엔은 엄청 예뻐요.” “호호- 고마워요. 히로도 잘 생겼어요” “저, 정말요?” “예. 인가의 관점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엘프의 저의 관점으로 볼때 히로는 정말 멋있어요.,” “아하하- 이거 쑥스럽네요.,” 쑥스럽긴 하지만 엄청 좋다. 엘프의 관점으로 보기에 멋지다고? 역시 나는 엘프한테 먹히는 외모? “그렇군. 역시 그런 거였어. 하기야 무지한 인간들이 뭘 알겠어? 미의 종족이라는 엘프 정도는 돼야 나의 진가르 알아볼 수 있지. 후후후.. 아악!” 어느새 다가온 루시아는 내 옆귀를 세게 꼬집고 비틀었다. “흥! 아주 좋으시겠어. 엘프한테 잘 생겼다는 말도 듣고,. 그것도 여자 엘프한테 말야.” “...헉!” 그러고 보니 루시아가 바로 옆에 있따는 사실을 깜빡했다. 루시아 앞에서 다른 여자와 희희낙락거리다니! 은근히 소유욕이 강하고 질투가 심한 루시아. 표정을 보하하니 엄청 화난 것 같다. 난 재빨리 변명했다. “아, 아니야, 루시아. 루엔으 내 친구야. 난 루엔을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아. 루엔은 절대 친구 이상 이하도 아니야.” “흐음. 그러셔? 언니가 말하기론 남자와 여자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던데.” “......” 아이씨! 이 아줌마는 또 쓸데없는 소리를! “우리는 그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어. 세상사람들을 감동시킨 남녀의 우정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우정은 보통 사랑은 발전하지 않았나?” “그, 그건..” 확실히 그렇다. 통계적으로 살펴봐도 남녀의 진한 우정은 사람으로 발전한 경우가 굉장이 많다. 아니,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아니라고 밀어붙여야 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남녀간의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흐음, 그래? 그럼 나도 남자친구 만들어도 되겠네.” “......” 뭐라? 루시아가 남자 친구를 만들어? “절대 안 돼! 남자와 여자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어! 여자한테 친구하자고 접근하는 것들은 전부 흑심을 품고 있는 늑대들이야!”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는 루시아. 갑자기 이마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는 남자와 여자도 친구가 될 수 있다며?” “그, 그건..” 이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머리르 굴려봐도 마땅한 방법이 없다. 난 정색을 하고 루시아에게 말했다. “내 사랑은 오직 너뿐이야.” “그래서?” “아, 아니, 그냥 그렇다고. 아, 아무튼 난 니가 남자 친구를 만드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만약 루시아 옆에 친구랍시고 찝쩍거리는 남자기 있다면, 내가 친절하게 교육을 시켜줄 생각이다. 물론 쇠빳따로. 웃으며 나와 루시아의 사랑싸움 (내 생각에만)을 지켜보던 루엔은 입을 열었다. “히로의 마음은 고맙지만, 집에 들어가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할 것 같아요. 무엇보다 당분가능 갈리온드와 둘이서만 지내고 싶거든요.” “뭐, 그러시다면야 저도 더 이상 권해드를 수는 없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집 한 채 알아봐주실 수는 없을까요? 매매도 좋고, 전세도 좋아요. 돈이라면 있으니까요.” 하긴, 로또 당첨금이 있으니 집 사는 건 일도 아니다. “흐음, 뭐 제가 부동산 중개업자는 아니지만 루엔이 원한다면야 얼마든지.. 아!” “왜 그러세요?” 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루엔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보았다. 난 손뻑을 치며 말했다. “전에 살던 집 아직 안 팔고 가지고 있거든요. 거기서 둘이 사는 건 어때요?” “정말요? 그럼 저야 좋지요.” “나의 딸 라이레얼이 살았던 집이니, 나도 좋아.” 이렇게 해서 내가 전에 살던 집은 루엔과 갈리온드이 신혼집으로 쓰기로 결정이 났다.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지금 지고 있는 빚을 생각하면 그 집을 팔아야 했다. 하지만 난 그집을 팔 수 없었다. 그 집은 내가 처음으로 산 집이고, 이 세계에 왔을 때부터 모두와 같이 살았던 집이다. 24평 좁은 집에는 모두의 수많은 추들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없었다. 왠지 그 집을 팔면 추억들마저 같이 팔아버리는 듯한 늒미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세를 놓는 것 역시 마찬지다. 그 집에 우리와 관계없는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사는 것이 싫었다. 그집이 계속해서 ‘우리의 집’으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나만의 욕심이려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 집은 누가 뭐래도 나와 루시아의 추억이 담긴 집이니. 그곳에 루엔과 가리온드가 들어가 살겠다니! 나야 당연히 대찬성이다. 루엔과 갈리온드는 한때 그 집에서 같이 살았던 만큼 우리와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루엔과 갈리온드라면 그 집에서 살 자격이 충분하다. “전세로 할까요, 매매로 할까요?“ “아, 아니에요. 친구끼리 무슨 그런 걸 따져요? 그냥 들어가서 사시면 돼요.” “호호- 말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오히려 친구끼리니까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해요. 전세로 하기로 하지요. 전세금은 2억이 어때요?” “헉! 2억!” “왜요? 너무 적은가요?”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집은 1억 5천밖에 안 되거든요. 그리고 전세금은 7,8천만원 정도에요.” 24평 집을 두고 1억5천이면 ‘밖에’ 가 아니라 ‘씩이나’ 가 돼야 옳다. 1억 5천밖에 안 된다고 말해야하는 현실이 가슴아플 뿐이다. 하여튼 부동산 가격하나는 더럽게 비싼 나라다. “그럼 2억을 드릴게요. 그동한 히로한테 빚진 것도 많고 하니까요.” “그, 그래도..” “친구의 성의를 무시할 새악인가요? 만약 계속 거절하신다면, 저를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 생각하겠어요.” “그. 그런..” “그럼 2억에 전세로 들어가는 걸로 알겠어요. 돈은 내일까지 드릴게요.” “예.” 루엔이 이렇게 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사실 내가 거절할 만한 입장도 아니다. 루엔 역시 나의 사정을 잘 알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고마워요, 루엔.” “호호- 인사는 제가 해야지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히로.” “루엔...” 난 벅차오르는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루엔의 손을 꼭 잡았다. 인생을 살면서 진정한 친구를 단 한 명이라도 사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루엔 같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이제 그만 놓는 게 어때? 여자 손을 그렇게 오래 잡고 있는 건 실례야.” 루시아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깜짝 놀라 황급히 루엔의 손을 놓았다. 루시아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획 돌렸다. “흥!” “......” 다시 말하지만 루시아는 은근히 소유욕이 강?고 질투가 심하다. 난 다만 순수한 우정의 의미로 루엔의 손을 잡은 건데, 루시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보다. 그녀의 이런 질투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기쁘다. 질투를 한다는 것은 어쨋은 날 사랑한다는 것이 아닌가? “왜 그렇게 실실 웃어? 그분 나쁘게.,” “아, 아무 것도 아니야.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난 루엔과 갈리온드에게 새 집 구경도 시켜줄 겸 집으로 향했다. “가게 건물에 집을 만든 건가요?” “예. 건물 5층을 통쨰로 집으로 개조했어요. 아! 옥상에 옥탑방도 하나 만들었어요. 사다리를 통해 5층과 연결되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지요.” 난 설명을 하며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마침 라이레얼이 거실에 나와 있었다. 라이레얼은 방금 일어났는지 하품을 하면 탱크탑 속에 손을 넣어 배를 긁고 있었다. 그러다가 집 안에 들어선 날 보고는 말했다. “배고파, 히로. 빨리 밥 차려줘.” “......” 저 가정보 아니거든요. 그런 건 웬만하면 가정부 드래곤 인디에게 문의하시지. 라이레얼은 내 뒤에 서 있는 갈리온드를 발견했는지 크게 소리쳤다. “아! 아빠다!” “그, 그래, 라이레얼. 너의 아빠린다. 너의 아빠 가리온다른다.” 갈라온드는 라이레얼을 보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아빠아-!“ 라이레얼은 마치 라이가 내 품에 안기는 것처럼 달려가 갈리온드를 껴안았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나, 나야 잘 지냈지. 우리 예쁜 딸 라이레언은 어떻게 지냈니?” “나도 잘 지냈어. 우리 히루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저, 저놈이 잘해줘?” “그야 당연하지. 왜나하면 히로와 나는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라이레얼. 아직 잠이 덜 깬 얼굴, 약간 감긴 눈 땜눙니지 묘한 백치미가 느껴진다. 순간 이대로 끌어안고 보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헉! 루시아를 앞에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난 라이레얼을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우해 머리르 세차게 흔들었다. 루시아는 ‘그렇고 그런 사이’ 라는 말과 방금 전 내 표정이 마음에 안 드는지 어느새 팔짱을 긴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또 다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너 이 자식! 내가 없는 사이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요. 카르가 만날 코알라처럼 매달려 있는데.어떻게 ‘무슨짓’을 할수 있겠어요? 지금도 카르가 이렇게 불어‥‥‥ 있지 않네." 언제나 라이레얼의 팔에 코알라처럼 매달려 있는 카르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라이레얼 가는 곳엔 언제 나 있던 카르가 없다니! 카르가 라이레얼에게 찰싹 붙어 다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라이레얼을 사랑해서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들째는 라이레얼에게 접근하는 것들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카르는 어디 있어요?" "지금 자고 있어. 아무래도 내가 너무 일찍 일어난 것 같아 " 지금 우리 점심 먹고 오는 길이거든요. "인디한테 밥 차려 놓으라고 할게요. 씻고 나서 드세요." "응. 고마워, 히로. 이건 감사의 표시." 쪽~ . 라이레얼은 내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헉!고마워라! “너 이 자식!내 딸한테 무슨 짓이야?” "그,그게 말이죠‥‥‥ 이럴 펀 제가 무슨 짓을 했다기보다는 제가 무슨 짓을 당했다고하는 편이 정확하지 않을까요?” "웃기는 소리하지 마! 니가 내 딸을 꼬셨잖아?” 이 엘프, 의녀증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아! 루시아! 난 깜짝 놀라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는 괜히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흥! 여자한테 뽀뽀 받았다고 헤벌쭉 해가지고는‥‥‥ 오빠는 저질에 변태니까 절대 가까이 접근하면 안 돼. 알았지?” "그치만 라이는 오빠가 좋은데요오." "루비도요오." "아무튼 안 돼." "우웅~ " 루시아 또 삐졌다. 아아~ 아주 미치겠다. 어쨌든 나는 집주인으로서 루엔과 갈리은드에게 집 구경을 시켜주었다. "집 참 좋네요.” "돈 좀 벌었나 본데." “......” 전부 빚내서 산 겁니다. 루시아는 루엔이 루와 루비의 친권을 주장할까봐 두려웠는지 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애들 양육권을 빼앗기기 싫다는 마음이 엿보인다. 루시아는 너무 애플한테 집착한다니까. 나한테도 좀 집착해됐으면... 집 구경을 마친 우리는 부엌으로 갔다 라이레얼은 식사를 끝마쳤는지 다시 자러 들어갔다. 우리는 식탁에 풀러앉았다. 난 손수 커피를 끓였다 으음,요즘 들어 커피 끓이는 시간이 많아지는군. 이러다가 정말 다방 레지로 진출하는 거 아냐? 참고로 난 루시아가 티켓을 끊기만 하면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간만에 찾아온 손님인 만큼 난 찬장에 꼭꼭 숨겨져 있던 고급 찻잔까지 내서 대접했다. "자, 드세요." 식탄 한쪽에 앉은 어린 엘프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보았다. "우리도 커피 마시고 싶어요오."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조그만 것들이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다니! 커피는 어른들만의 전유물이란 걸 모른단 말이냐? 그래도 저럭게 불쌍한 눈빛을 보면 내가 또 마음이 약해진다. 난 아이들을 위해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를 타주었다. 내가 라이 앞에 잔을 놓아 주고,루비한테토 주려하는데 루엔이 손을 저었다. "루와 루비 한테는 쿠지 마세요." "예?왜요?" "커피는 어른들만 마시는 거잖아요. 루와 루비는 아직 어린애에요. 아마 루와 루비도 마시기 싫어할 거예요.” 루엔이 슬쩍 눈치를 주자 루와 루비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마. 맞아요,오빠 루비는 커피 마시는 게 막막 싫어요.” "저. 저도 커피 엄청 싫어해요. 그렇게 쓴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어요." “......” 불쌍한 것들. 루엔 눈치 보느라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마시고 싶은 것도 못 마시다니. "뭐, 니들의 뜻이 정 그렇다면야...” "아, 맛있다! 한 잔 더 주세요,오빠." 어느새 커피를 다 마시고 빈 잔을 내미는 라이. 루와 루비는 그런 라이를 부러움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난 멀뚱멀뚱 앉아있는 루와 루비가 불쌍해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었다. 루와 루비는 그것을 흘짝흘짝 마시면서토 계속 라이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중에 루엔 안 볼 때 커피 실컷 마시게 해줄게. 그러니 그런 불쌍한 표정 좀 그만 지으렴. 니들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오빠와 언니 가슴은 찢어진단다. 루시아는 자신 앞에 놓인 커피라도 주고 싶은 심정인 듯했다. 하지만 루시아가 마시는 커피는 블랙커피. 맛에 커피 마시는 것클이 블랙커피를 마실 수 있을 리 없다. 루엔은 우아한 모습으로 커피를 마셨다. 갈리온드는 재빨리 커피를 마시고 라이레얼 방으로 들어갔다. 난 옆에 앉은 루시아에게 몇번 말을 걸어보았지만,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선이었다. 아까 삐진 게 아직도 안 풀렸군. 라이는 내 무릎 위에 앉아 애교를 떨었다. "라이가 오빠 좋아하는 거 오빠도 잘 알죠?” "응. 물론 알지." "헤헤~ 라이는 언니랑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라이는 마치 루비 보란 듯이 찰싹 달라붙어 내 볼에 뽀뽀도 하고 부비부비고 했다. 루비는 눈을 치켜뜨고 라이를 노려보았다. 라이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애교를 떨고 싶은 듯했으나 루엔 때문에 그저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루엔은 찾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루와 루비 말인데요." 헉! 드디어 루와 루비에 대해 말하려는 건가? 나와 루시아는 잔뜩 긴장했다. "그동안 맡아줘서 고마됐어요." "그 말씀은‥‥‥?" "오늘 루와 루비를 데리고 갈게요." 나와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루와 루비를 데리고 가다니! 비록 루와 루비가 루엔의 손자 손녀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도 자식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루엔이 친할머니 인 만큼 친귄은 엄연히 루엔이 가지고 있다. 그러니 루엔이 루와 루비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반대할 권리가 없다. "저,정말 데려가시게요?" "예. 그동안 너무 많은 신세를 진 것 같아서요. 더 이상 부탁하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시, 신세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그,그래요. 이 애들이 얼마나 착한데요” 만약 루와 루비가 떠나간다면 루시아는 몸져누울지도 모른다. 루시아가 아이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잘 알기에 난 필사적으로 루엔을 설득했다. “괜찮으시다면 루와 루비는 저희가 계속 맡아 기를게요. 아이들이 있으면 갈리은드와 행복한 폐인 생활‥‥‥ 아니 , 신혼 생활을 즐기시는 데 방해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아이들 양육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루엔은 삶에 투자하세요." “그래도 너무 미안해서‥‥‥‥” 루시아는 재빨리 소리쳤다. "저희는 괜찮아요!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라이가 적적해 하지 않아 좋은 걸요. 그동안 라이가 혼자여서 얼마나 외로워했는데요. 루와 루비가 이 세계로 와서 라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물라요." "예,맞아요. 그러니까 루와 루비는 저희가 계속 기를게요." “그럼 저야 고맙지만‥‥‥” "전혀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루엔은 제 친구잖아요. 친구끼리 돕고 사는 건 당연한 거예요." 루엔은 날 보며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마워요. 인간은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종족이라고 하는데, 히로를 보고 있으면 그 말이 거짓처 럼 느껴져요." "아하하~ 제가 좀 착하긴 하죠." "이 일은 저 혼자 결정하기가 힘든 것 같아요. 일단 아이들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루엔은 루와 루비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하고 싶니?” 나와 루시아는 루와 루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저것들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루, 루비는요오‥‥‥ 오, 오빠랑 언니랑 같이 있고 싶어요오. 라이랑도 펄어져있기 싫어요요." "저. 저도 형 이랑 누나랑 같이 있을래요. 라이랑도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루와 루비의 말이 끝나자 내 품 안에 있는 라이가 소리쳤다 “라이도 루와 루비랑 계속 같이 놀고 싶어요!” 난 재빨리 루엔에게 말했다. "하하~ 역시 애들이네요. 계속 같이 놀고 싶다니." 루엔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초조한 심정으로 루엔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리 아이들이 같이 있고 싶다고 해도 친권자인 루엔이 데려가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 이 없다. 잠시 후,루엔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루와 루비를 좀더 맡아주시겠어요?" "예 ! 물른입니다!" "루와 루비는 저희가 친자식처 럼 기를 테니 안심하세요 " “오빠아-” “누나아-” 루와 루비는 달려와 우리의 품에 안겼다. 난 루비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아~ 왠지 눈물이 나려고 한다. 잘못했으면 이렇게 루비를 껴아는ㄴ 것이 오늘이 마지막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내 자식과도 다름없는 루와 루비. 내 이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어찌 살 수 있겠는가? 아마 루시아도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래서 기를 쓰고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려 한 거고. 다행히 우리는 계속 루와 루비를 데리고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친권자를 상대로 양육권을 방어해낸 것이다! 루시아는 눈물까지 글썽거 렸다. 난 그런 루시아를 살며시 껴안았다. 이럴 때 껴안지 않으면 언제 겨안겠는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법. 저번 권을 통해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루시아가 허락했는데도 그냥 자다니. 아아~ 그땐 나도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만약 그런 기회가 또 온다면 그땐 반드시 행동으로 옳기 리라! 조금만 기다려, 얘들아. 이 오빠가 반드시 너희들 등생을 만들어 줄 테니까. 이렇게 해서 양육권 분쟁(?)을 끝마친 우리는 전에 살던 집으로 향했다. 24평 집은 먼지가 조금 쌓인 것을 빼면 예전과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텔레비전, 냉장고, 식탁, 침대 등도 그대로 놔두고 이사했기때문에 당장 들어와서 살아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괄리비도 꼬박꼬박 배고 있기에 물과 전기도 잘 나왔다. 뭐, 청소는 한번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집이라는 게 하루라도 청소를 안 하면 먼지가 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매일 매일 청소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사 드래곤 인디의 존재는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인디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겠다. "둘이 살기에는 넓네요 " "예. 뭐 ,그렇죠." 둘이 살기에는 확실히 넓다. 하지만 11 이 살기에는 엄청 좁다. 이 좁은 집에서 어떻게 11명이 같이 살았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하다. "컴퓨터를 들여놔야 할 것 같은데요." "컴퓨터요?" “예. 뮤니지로크를 계슥해야 하니까요. 저와 갈리온드 것 해서 두 대가 필요해요. 알아봐 주시겠어요?” “예. 어차피 할일도 없으니 알아봐드릴게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예." “될 수 있으면 내일까지 설치해주세요. 돈 걱정은 하지 마시구요.” "예. 친구를 위한 일인데 힘들게 뭐 있겠어요? 내일까지는 반드시 설치해 드릴 테니 안심하세요." 루엔은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요?” “이, 이건 너무 많은데요.” "호호~ 남는 건 히로가 가지세요." “예? 그래도‥‥‥” "그렇게 하세요. 안 그래도 히로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진 것 같아 이런 식으로라도 보답하고 싶어요." “뭐 , 그러시다면야‥‥‥” 난 루엔이 마음이 바뀔까 싶어 재빨리 수표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그나저나 로또 1등 한번 당첨되니 씀씀이부터가 달라지는군. 자꾸만나도 로또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아~ 안 돼. 나까지 정부의 농간에 놀아날 수는 없어. “좀 피곤하네요.” “예.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루엔은 갈리온드와 함께 예전에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쓰I던방으로 들어갔다 “......” 뭐? 함께 들어가? 이러다가 루엔과 갈리온드가 먼저 루와 루비의 동생을 만들주는 거 아냐? 아! 라이레얼의 동생도 되겠군. 옛날 집을 실컷 둘러본 나와 루시아는 밖으로 나왔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루시아의 표정이 냉랭해 보인다. “왜, 왜 그래?” "흥! 루엔한테 엄청 잘해주네." “그, 그야 루엔은 내 친구니까.” “흐음, 그러셔?” “그,그리고 루와 루비의 할머니이기도 하고.” “호오~ 그러세요?” 빈정거림이 물씬 풍기는 루시아의 말투. 차라리 화를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난 루엔이 여자여서 잘 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그럴 리가?” “게다가 엘프에다가 미녀이기까지 하지. 니가 딱 좋아하는 타입 아니야?” 물론 좋아하는 타입 이다. 사실 루엔같이 스타일리쉬한 미녀를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이럴 때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다. 사랑을 위해서는 때른 거짓말도 필요한 법! “절대 아니야. 난 루엔 같은 타입은 별로야. 루엔은 정말 친구일 뿐이라니까. 내 타입은 예쁘고 청순하고 착한‥‥” “라이레얼?” “‥‥‥‥라이레얼‥‥‥ 헉?” "흥-" “아. 아니야, 루시아! 내 타입은 루시아야. 난 루시아 같은 타입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내가 소리쳤지만 루시아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루시아. "같이 가,루시아!" 난 재빨리 루시아를 쫓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를 어린 엘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루비는 내 품에 와락 안기며 말했다. "으앙~ 오빠 미워요!" “헉!오빠가 왜 미워?” "라이만 예뻐하고." "이 오빠가 언제 라이만 예뻐했니?" “으앙~ 아까 식탁에서 그랬잖아요. 루비도 막막 오빠 무릎 위에 앉아 오빠랑 놀고 싶었는데‥‥‥ 커피도 마시고 싶었는데‥‥‥” “미안해 루비야. 오빠가 잘못했어. 이제부터 루비도 막막 예뻐해 줄게.” 쪽- 내가 볼에 뽀뽀를 해주자 루비는 금방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헤헤~ 이쪽 볼에도 해주세요." "그래 그래." 난 반대쪽 볼에도 뽀뽀를 해주었다. 루시아는 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할머니한테 가는 것보다 누나랑 형이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아?” “예. 할머니는 루랑 잘 안 놀아주세요.” "그리고 조금만 잘못하면 때려요." "마, 맞아요. 할머니는‥‥ 할머니는‥‥‥ 으아아앙~ 아파요오. 루비는 아프단 말이에요오." "엉엉~ 할머니 무서워요." 루와 루비는 안 좋은 기억들이 떠을랐는지 갑자기 을음을 터트렸다. 때문에 나와 루시아는 깜짝 놀라 아이들을 달래주어야 했다. “괜찮아, 얘들아. 뚝 그쳐. 너희들 곁에는 오빠와 언니가 있잖니?” "그래. 언니랑 오빠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해." 토닥토닥~ “훌쩍~ 정말이죠?정말 오빠랑 언니 계속 루비 곁에 있어주실거죠?” "응응. 물론이야,루비야. 이 오빠가 최선을 다할게. 루비는 오빠의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니까." "헤헤~ 루비도 오빠의 딸이고 싶어요오." “라이도 오빠 딸 할래요!” "그래 그래. 루비도 오빠 딸이고, 라이도 오빠 딸이야. 아이구, 귀여운 내 딸들!" 라이와 루비를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벼주었다. 루시아는 루를 껴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귀엽고 깜찍한 딸 둘에 잘생긴 아들 하나. 여기에 아름답고 착한 아내(?)까지! 아아~ 세상 그 누가 나보다 행복하겠는가? “......” 으음, 생각해보니 로또 1등에 당첨된 루엔과 갈리온드는 나보다 행복할지도 모르겠군. 뭐, 행복이 꼭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지.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하나? 억만금이 있어토 행복하지 않다면‥‥ 잠깐. 생각해보니 억만금이 있으면 행복도 살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든으로 살수 없는 것이 뭐가 있을까? 으음, 아무튼 지금도 행복하긴 하지만 로또 1등에 당첨되련 더욱 행복할 것 같다. "같이 놀아요,오빠 " "루비 비행기 태워주세요." "재밌는 얘기 해주세요." 난 내 옷깃을 잡고 매달리는 아이들을 떼어내며 말했다. "오빠 잠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러니 그동안 언니랑 놀고 있으렴." "우웅~ ." “미안해. 돌아오는 길에 맛있는 거 사올게.” “네에-” 루시아는 나에게 물었다. “어디 가려고?” “용산에 다녀을게. 아까 루엔이 컴퓨터 사다 달라고 부탁했잖아.” “일찍 들어와.” 헉 ! 일찍 들어오라니! 이건 아내가 출근하는 남편에게 하는 대사가 아니던가! "응응. 일찍 들어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뭘 그렇게 좋아해?" "아,아무 것도 아니야. 우헤헤~." 루시아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날 보더니 이내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집을 나서려 하는데 라이레얼이 거실로 나왔다. 이번에는 카르가 팔에 매달려 있다. "어디가, 히로?" "용산에 갔다 오려구요." "용산?" "예. 컴퓨터를 사야 해서요." “그래? 그럼 같이 가.” “예? 라이레얼도 가시게요?” “응. 왜? 내가 같이 가는 게 싫어?” "그럴 리가요! 저야 영광이죠." "잠깐만 기다려." 라이레얼은 방으로 들어가 읏을 갈아입고 나왔다. “헉쓰!”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지며 침이 질질 흐른다.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청반바지. 상의는 흰색 탱크탑. 그리고 그 위에 검은색 긴소매 남방을 걸쳤다. 레몬빛 긴 머리카락은 위로 틀어 올려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었다. 목이 시원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리고 왼손에는 금청색의 두툼한 스포츠 시계를 찼다 앗! 저 시계는 저번 크리스마스에 카르가 선물한 것이 아닌가(참고로 선물은 카르가 맸지만, 계산은 내가 했다)? 목에는 칼 모양의 장식이 검은색 끈으로 연결린 목걸이를 찼고, 귀는 커다란 동그라미 형태의 은색 귀걸이로 장식했다. 청순한 매력,요염한 매력,스포티한 매력이 등시에 느껴진다. 마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이 세상에 현신한 느낌이다. “후후~ 뭘 그렇게 놀래, 히로?” “아, 아니에요!” 난 재빨리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았다. 하지만 시선은 계속해서 라이레얼에게 머물러 있었다. 차마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이것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남자의 본능이다. 아아- 이럴 땐 내가 남자인 게 정말 싫어진다. “남자 주제에 감히 나의 언니의 몸을 훑어보다니! 당장 그 더러운 시선을 치우지 못해!” 라이레얼에게 찰싹 달라붙어있는 카르는 눈 꼬리를 치켜뜨며 나에게 소리쳤다. 라이레얼에게 시선을 집중하느라 물랐는데 카르도 옷을 갈아입었다. 소매가 없는 새하얀 원피스.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머리카락, 은색 눈동자가 새하얀 원피스와 어우러지면서 마치 얼음 인형처림 보인다. 카르는 팔다리가 가늘고 몸매도 전체적으로 가늘다. 그리고 피부와 머리카락이 새하얗기 때문에 묘한 신비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볼 때마다 마치 바비 인형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처럼 눈을 치켜뜨며 날 노려보아도 귀엽게만 느껴진다. 아아~ 저런 여동생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내가 많이 귀여워해 즐 텐데(순수한 의미로). “그나저나 왜 너까지 옷을 갈아입었니? 너도 같이 가게?” “물론이야. 난 언니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 갈 거야.” "거긴 사람들이 많아서 니가 싫어할 텐데." "너와 언니 단 둘이 보내는 것보단 나아." “응? 그 말의 의미는 뭐니? 설마 너 나 못 믿니?” “그걸 말이라고 해? 감히 인간 주제에 나의 언니에게 만날 찝쩍거리잖아. 너한테 위해를가하지 말라는 언니의 명령만 아니었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어.” “......” 내가 꼭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하나? “됐어. 카르. 그만해.” “어, 언니‥‥‥‥” "용산에는 나랑 히로랑 둘만갈 거니까,넌 집에 남아 있어." “시, 싫어요, 언니. 저도 같이 갈 거예요. 제발 절 버리고 가지 마세요” 카르는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아프다. 내가 또 미녀의 눈물에는 약하지 않은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데리고 가요." "혹흑~ 저 멍청한 인간도 저렇게 말하잖아요, 언니. 제발 데려가 주세요." 뭐? 멍청한 인간? 왠지 부탁한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느낌 이다 아니, 벌써 바보가 됐나? "오늘은 히로랑 들이서 데이트를 즐기고 싶어. 그러니까 카르 너는 집에 있어." “데, 데이트요? 혹혹~ 너무해요, 언니. 언니를 사랑하는 절 두고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저한테는 언니뿐인데‥‥ 흑흑흑” 카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자 라이레어른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거리는 라이레얼. 아아~ 고민하는 듯한 표정도 너무 예쁘다. 멋져요,누님 ! 카르는 로리 계열,라이레얼은 누님 계열.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사람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뭐,나야 당연 누님 계열 쪽이다. 아무래도 로리보다는 누님 이 좀더 매력이 있지 않나? 참고로 말하자면 나의 사랑 루시아도 나보다 2살 연상이다. 뭐, 비록 내가 누님 지지파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로리 계열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로리 계 열보다는 누님 계열이 더 좋을 뿐이다. 카르 같은 타입도 나쁘지는 않지. 후후~ 그런데 라이와 루비가 이상형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아니,아무리 로리 계열이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라이와 루비를! 뭐, 우리 라이와 루비가 좀 심하게 귀엽고 깜찍하고 예쁘고 상큼하고 발랄하긴 하다. 그 매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여자에게 무덤덤한(진짜?) 이 오빠도 한순간에 반하게 할 정도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라이와 루비가 이상형이라고 하는 사람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라이와 루비는 아직 가슴도 밋밋한 어린 여자아이. 그렇기에 라이나 루비가 이상형이라고 하면 주위사람들에게 변태나 로리콘 소리 듣기 딱 좋다(못 믿겠으면 한 번 해봐라) 라이와 루비가 로리 계열의 극이라면, 누님 계열의 극은 일루니아 여사님이다. 서른도 넘으신데다가 결혼까지 하신 일루니아 여사님. 하지만 그 미모는 여전하시다. 겉으로 보기에는 20대 후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깐깐해 보이는 얼굴과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빛나는 하늘색 눈동자. 치켜 올라간 눈 꼬리와 약간 웨이브 진금발. 성난 고양이같이 표독스럽고,사감 선생같이 깐깐해 보이는 일루니아 누님‥‥이 아니라 여사님. 날 못 잡아 드셔서 안달이지만,그 점이 또 매력 포인트다.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루니아 여사님의 구듯발에 짓밟히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 뭐,그런 인간들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지. 으음, 그나저나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찢어죽일 듯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는 모습이 은근히 매력 있단 말이야. 치켜 올라간 눈 꼬리가 마치 성난 고양이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일루니아 여사님은 초절정 꽃미남 지니의 누나인 만큼 원판이 굉장히 아름답다. 하지만 일이 바쁘신 관계로 잘 꾸미질 않으신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으시고,그 흔한 장신구 하나 매달지 않으신다. “나 히로랑 나갔다 올 테니까, 아까 내가하 던 게임 레벨 노가다나 하고 있어. 알았지?” "예, 언니. 전 언니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후후~ 레벨 노가다 열심히 하면,상으로 또 키스해줄게." “라이레얼 언니 ‥‥ ” 카르의 표정으로 봐서는 라이레얼이 불 속으로 뛰어들라고 해도 따를 듯하다 재 드래곤 맞아? 드래곤 쿵에는 왜 이렇게 순정파가 많은지 모르겠다. 인디도 그렇고, 카르도 그렇고‥‥‥ 뭐 ,크로니스도‥‥ "그럼 나 간다. 집 잘 지키고 있어." "예, 언니 걱정하지 마시고,다녀오세요."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태도가 바러나? 카르는 어느새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난 라이레얼과 함께 건물을 나섰다. 라이레얼은 발가락이 다 드러나는 검은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키가 큰 만큼 발도 크다. 크고 모양 좋고 예쁜 발이다. 으음, 이렇게 나란히 서서 걸으면 내가 좀 작아 보이려나? 우리 집 여자들은 왜 이렇게 다들 키가 큰지 모르겠다. 루시아도 175센티 정도고,라이레얼은 180센티 이상이다. 내 키는 178센티 정도. 라이레얼이 나보다 조금 크다. 참고로 나는 여자보다 키가 작다는 것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그런 못난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여자보다 작으니 무너가 좀 이상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키 높이 은동화라도 신고나올 걸 그랬나? 아무튼 오늘 라이레얼은 완벽 그 자체였다. 특히나 쭉 뻗은 긴 다리와 남방사이로 보이는 큰 가슴이 자꾸만 시선을 집중시킨다. 게다가 피부는 새하얗고, 살결은 부드럽고 뽀송뽀승하다. 머리카락은 보기 드문 레몬빛으로 상큼함이 물씬 풍긴다. 아름다워도 정도가 있지‥‥‥ 이건, 정말 너무 아름답다. 엘프의 미와 인간의 미 증 장점만을 골라 물려받은 하프엘프 라이레얼. 그러니 드래곤인 카르도 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뭘 그렇게 생각해, 히로?” "아, 아니 에요." "나 오늘 어때? 예뻐?" “무, 물론이에요! 평소 때도 예쁘지만,오늘은 특히 더 예뻐요!” “정말? 고마워 , 히로.” 라이레얼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으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랜 폐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라이레얼의 미모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다. 이대로라면 계속 라이레얼만 바라보고 있게 될 것 같아 난 억지로 고개를 들렸다. “빠, 빨리 가죠.” “응.” 라이레얼은 내 옆으로 오더니 갑자기 팔짱을 꼈다. “헉 !무,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긴?팔짱 끼는 짓이지." "그,그러니까 왜 팔짱을?" "왜?히로는 내가 팔짱끼는 게 싫어?" “아,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빨리 가자." 라이레얼은 나를 잡고 이끌었고, 난 별 다른 말 한마디 못하고 라이레얼에게 끌려가야 했다. 우리는 용산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라이레얼에게 쏠렸다. 남자들은 어린애, 할아버지 할 것 없이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여자들은 부러움과 질투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미모로 따지면 루시아 역시 만만치 않다. 하지만 루시아는 짧은 치마나 짧은 바지는 절대로 입지 않는다. 그리고 꽉 끼는 옷도 입지 않아 몸매가 드러나는 것을 최소화 한다. 그래서 시선이 집중되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핫팬츠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짧은 반바지에 끼는 탱크탑을 입고 있다. 상체를 조금만 뒤로 젖히면 배꼽이 보일 정도다. 그 위에 긴소매 남방을 걸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드러난 부분이 너무 많다. 이러니 시선이 집중되고, 한번 집중된 시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다. 같은 집에 살아 어느 정도 적응되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저기 앉아 있는 저 남자들처림 발정난 개처럼 헥헥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들만이 아니었다. 여자들의 시선 역시 장난이 아니다. 질투와 시기심이 어려 있던 여자들의 눈빛이 어느새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변했다. 여중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반즘 년이 나간 표정이었다. ‘멋져요, 언니. 저는 언니의 노예이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상하게 라이레얼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망다. 특히 나이 어린 여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히 라이레얼에게서는 약간 중성적인 매력이 느껴진다. 큰 키와 용병생활로 잘 단련된 몸매. 그리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큰 몸동작. 여자들이 보기엔 멋있어 보이려나? 으음, 여자들의 생각은 도저히 모르겠다니까. 저쪽에서 라이레얼을 보며 쑥덕거리는 여중생 3인방. 좌우의 여중생이 쿡쿡 찌르며 뭐라고 하자 가운데 앉은 여중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쭈뺏거리며 다가왔다. 작은 키에 마른 몸. 머리는 단발에 안경을 썼다. 여동생 같은 느낌의 귀여운 여자아이. 그런데 갑자기 왜 이쪽으로 오는 걸까? “......” 헉! 설마 한눈에 나에게 반해서! ‥‥라고 생각하면 꼴값이겠지? 나한테 다가오는 거 아닌 거 다 안다. 이제까지 한두 번 당했어야 말이지. 아아~ 나같이 멋진 남자가 인생을 살며 헌팅 한 번 당하지 않다니! 이건 이 세상 여자들 눈이 잘못됐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비를 털어서 안과 하나 차리든지 해야지‥‥‥ 내가 지니나 크로니스에 비해 대체 뭐가 부족한데? 외모로만 봐도 내가 훨씬 낫지! “......” 흠흠,날씨가 하도 더워 헛소리 한번 해봤다. 만약 내가 이 말을 지니 팬클럽 카페나 크로니스 팬클럽 카페에 올린다면,그 날로 팬클럽 회원들에게 맞아 죽을 것이다. 아니, 그래도 운이 좋으면 반신불수로 끝날지도‥‥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여중생은 라이레얼 앞에 서 있었다. 몸은 쭈뼛쭈뺏, 입은 우물우물. 뭔가 말은 하고 싶은데, 떨려서 못하는 듯한 모습. 토끼같이 생긴 여자아이가 잔뜩 겁에 질려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니 귀여워 죽겠다. “뭐야?” “아! 저, 저기 그게...” 라이레얼이 묻자 여층생은 화들짝 놀라며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이내 결심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두 손으로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제,제 핸드폰번호에요!" 헉! 사람 많은 지하철 안에서 이렇게 대담하게 대쉬하다니! 소심해 보이고 겁 많이 보이는 아이가 이링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ㄱ;가 필요했을까? 역시 사랑의 힘이라는 건가? 라이레얼은 레은빛 눈동자로 여중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쩌라구?” “......” 헉! 기껏 용기내서 말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난 재빨리 라이레얼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이 여중생이 라이레얼한테 반한 것 같네요. 그래서 사귀고 싶다는 의미에서 핸드폰번호를 적어서 내민 것 같아요." “그래?” 여중생은 고개를 푹숙인 채 라이레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하고 두근두근한 심정. 아마 저 여중생에게는 이 짧은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질 것이다. 라이레얼은 일단 핸드폰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아들었다. 여중생은 기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라이레얼은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어쩌지? 난 이미 여기 있는 히로랑 그렇고 그런 사이거든." "헉! 무,무슨 말이에요,라이레얼?" “아잉~ 왜 그래, 히로?설마 벌써 내가 싫어진 거야?” “아,아니‥‥‥ 싫어진 건 아닌데‥‥‥” 여중생은 나와 라이레얼을 보더니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원망 가득한 눈길로 날 노려보았다. 왜 하필 날 노려보니? “흑흑.. 우아아앙!”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는 여중생. 실연의 상처를 감당하기엔 아직 너무 어린가 보다. “......” 그나저나 이런 상황에선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여중생은 계속 울어댔다. 친구로 보이는 여중생들이 달래주었지만,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 "제 친구가 더위를 먹었나 봐요." 지하철이 역에 멈추자 여중생들은 을고 있는 여중생을 끌고 가다시피 해서 내렸다. 그 여중생은 끌려가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날 노려보았다. 헉! 저런 독기 어린 눈빛이라니! “흑흑~ 넌 나의 언니에게 어울리지 않아! 당장 나의 언니에게서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 라이레얼이 언제부터 니 언니가 되었니 ? 그리고 왜 자꾸 나한테 그래!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만만해 보여? 여중생이 끌려 나가고 나자 지하철은 문을 닫고 출발했다. 라이레얼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재밌다. 그치?” 이레얼이야 재밌겠죠. 저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랍니다 아아~ 나도 헌팅 한번 당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쪽 세계 여자들은 남자보는 눈이 너무 없다니까. 어찌되었든,우여곡절 끝에 용산에 도착했다. 나와 라이레얼은 팔짱을 끼고 찰싹 달라붙은 채 걸음을 옮겼다. “나,날씨도 더운데 조금 떨어지심이‥‥‥?” “싫어.” "시,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안심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긴 라이레얼 같은 미녀가 팔짱을 끼는데 거절하는 것도 남자가 할 짓이 아니긴 하다. 그나저나 자꾸만 팔을 누르는 이 부드러운 감촉은 대체 무엇일까? 아이~ 궁금해라~ 라이레얼과 팔짱을 끼고 걸어가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간 사람들은 뒤돌아서 쳐다보니 귀찮은 것을 넘어 피곤하기까지 하다. 확실히 어딜 가도 시선이 집중된다는 것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다. 연예인들이 왜 외국에서 휴식을 취하는지 알 것 같군. “그런데 라이레얼은 응산에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그냥. 히로랑 같이 있고 싶어서.” “에? 그, 그게 무슨...?” "호호~ 농담이야. 뭐 살 만한 게임 없나 해서 와 봤어." "그, 그렇군요." 살짝 서운한 느낌이 든다. 나와 라이레얼은 여러 가게를 돌아다니며 컴퓨터 부품을 구입했다. 난 완성픔 형태의 컴퓨터(일명 업체 컴퓨터)를 사는 것보다 부품을 사서 조립하는 것을 좋아한다. 부품을 사서 조립하는 것은 완성품을 사는 것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자신이 원하는 컴퓨터를 맞출 수 있다. 문서 전용인지, 인터넷 전용인지, 게임 전용인지에 따라 컴퓨터 사양은 얼마든지 달라지기 마련이다. 조립식 컴퓨터는 사용 목적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맞추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후에 부품 교환이나 업그레이드가 편하다. 업체에서 판매하는 완성형 컴퓨터의 경우에는 분해가 힘들다. 메인보드와 그래픽 카드가 붙어있거나, 케이스가 업체의 부품에만 맞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부품을 바꾸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통째로 들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당연 부픔 교환이나 업그레이드가 힘들다. 반면 조립식 컴퓨터는 부품 교환이나 업그레이드가 쉽고 간편하다. 셋째,가격이 싸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업체 컴퓨터의 경우에는 쓸데없는 프로그램 등을 같이 끼워 팔기도 하고, 눈에 띄지 않는 부품의 사양을 낮추기도 한다. 그런 만큼 부품을 따로따로 사서 조립하면 가격이 싸진다 넷째,조립하는 재미가 있다. 이건 사람마다 좀 다르다. 하지만 컴퓨터를 레고라고 생각하면 조립하는 것고 꽤나 재밌다. 어쨌든 맞는 장소에 끼우면 된다는 것은 레고나 컴퓨터나 다를 바가 없다. 뭐, 이게 조립식 컴퓨터의 대략적인 장점이다. 하지만 꼭 조립식 컴퓨터가 업체 컴퓨터에 비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조립식 컴퓨터는 AS를 받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고장 나도 어디다 하소연할 곳이 없다. 그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발품도 팔아야 한다(뭐,요즘은 인터넷으로 앉은 자리에서 주문하기도 한다). 내가 맞추려는 컴퓨터는 온라인 게임 전용이다. 루엔과 갈리은드는 온라인 게임 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컴퓨터는 일주일을 틀어놓아도 멀쩡할 만큼 튼튼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픽이 끊기지 않도록 사양도 좋아야 한다. 그래서 난 최고급 부픔들만 골라서 구매했다. 특히 CPU, 그래픽카드, 램에 신경을 썼다. 부품 사양이 올라가니 메인보드 사앙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 즐거운 게임 라이프를 위해서는 사운드도 좋아야 한다. 그래서 사운드카드와 스피커도 최고급으로 맞췄다. 혹시라고 게임 동영상을 저장할지도 모르니 하드도 용량 빵빵한 것으로 구매했고, DVD 라이터기도 구매했다. 아무리 부품이 좋아도 정작 그 모든 것이 구현되는 것은 모니터다. 모니터는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맞닿는 부분인 만큼 좋은 것을 쓸 필요가 있다. 온라인 게임 폐인들은 하루에 24시간씩 오락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좋은 모니터를 써서 시력 저하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화면은 아무래도 넓은 게 좋겠지? 난 21인치 와이드 화면에 해상도가 높은 LED모니터를 구매했다. 오락을 함에 있어서 손가락 테크닉은 두 말 할 것 없이 중요하다. 그러니 그 손가락 테크닉을 컴퓨터에 전달하는 입력기인 마우스와 키보드 역시 중요하다. 마우스와 키보드도 좋은 걸로 구매. 여기에 케이스도 최신식 디자인으로 구매. 뭐, 결론은 전부 좋은 걸로 구매했다는 거다. 그래도 돈이 꽤 많이 남았다. 루엔이 준 돈이 워낙 많았는지라. 만약 내가 저가 부품들만 구매했다면 더욱 많이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의 믿음을 배신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루엔이 날 믿고 부탁한 만큼, 그 믿음에 부흥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 아니 겠는가? 그나저나 짐이 너무 많아 도저히 안 되겠다 라이레얼의 손까지 빌렸지만, 역부족이다. "이거 계속 들고 돌아다닐 거야, 히로?나 힘들어."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라이레얼. "헉! 미 ,미안해요, 라이레얼." 라이레얼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다. 결국 우리는 근처 택배회사에 들러 예전에 살던 집(지금은 루엔과 갈리온드의 집)으로 배송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하니 홀가분하다. "이제 게임 사러 가자, 히로." 라이레얼은 팔짱을 끼며 재촉했다. “예. 갈 테니까 이것 좀‥‥‥” 용산전자상가의 특징 중 하나는 구경할 게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곳곳에 들어선 노점상과 행사장들. 좌판 위에 무언가를 가득 늘어놓고 팔기에 뭔가 궁금해서 들여다봤더니 성인용 DVD다. 헉! 저것은 "팬트네 집" 과 "노는아이들" 이 아니던가? 나 저런 거 되게 좋아하는데. 하지만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인터넷에 접슥만 하면 CD 3만 장 구울 분량의 야동(야한 동영상)을 다운 받을 수 있는 시대다 아니 , CD가 뭐냐? DVD 3만장 구을 만큼도 나오겠다. 그런 만큼 불법 성인용 DVD장사는 그리 신통치 않은 듯했다 어느새 저것도 사양 사업이 되었구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저런 거 한 장 구하려고 별 난리를 다 첬었는데. 누가 하나 구했다 하면 그날 전교생이 개네 집으로 몰러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광경이 보기 힘들어졌다. 그만큼 세월이 홀렀다는 거다. 으음. 좌판 위에 놓인 성인용 DVD를 보면서 옛날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니. 나도 어지간히 특이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뭘 그렇게 봐, 히로?내가 하나 사줄까?” “헉! 아,아니에요! 전 저런 거에 관심 없어요.” “응큼해, 히로. 나 같은 미녀가 옆에 있는데도 저런 것에 관심을 갖다니.” 원래 남자라는 족속들이 다 그렇답니다. “저, 저기요, 라이레얼‥‥‥‥” “응. 왜 그래, 히로?” “남방 단추를 좀 잠그는 것이 어떨까요?” “응? 왜 ?” “그게 말이죠...” 왜냐하면 지나가는 모든 남자들이 라이레얼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어떤 남자는 고개를 돌린 채 걸어가다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쳤고, 어떤 남자는 옆에 애인이 있음에도 고개를 들리다가 여자한테 뒤지게 얻어맞았다. "너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어떻게 날 옆에 두고 다른 여자 가슴을 쳐다볼 수 있어?" "아,아니야,은정아. 오해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바람둥이!죽어버려?" 퍽퍽퍽 ! “끄아아악-!” “......” 저 여자 꽤 과격하게 패는군. 저러다가 남자 잡겠다. "제 생각에는 라이레얼이 남방 단추를 잠그면 더 예뻐 보일 것 같아요." “정말? 알았어. 히루에 뜻에 따를게.” 라이레얼은 남방 단추를 잠갔다. “어때? 더 예뻐 보여?” “‥‥‥‥헉!" 정말로 더 예뻐 보인다. 위에는 검은색 긴팔 남방, 아래는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청바지. 여기에 남방사이즈가좀 커서 청바지를 거의 다 가리고 있다. 원래 위아래를 전부 노출이 심한 옷으로 입으면 시선이 분산된다. 아까 라이레얼의 경우에는 가슴과 다리로 시선이 분산되었다. 하지만 한쪽만 노출이 심한 옷으로 입으면 자연스레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된다 남방 단추를 잠그자 시선이 아래족으조 향한다. 쭉 뻗은 긴 다리로. 이, 이건 어째 아까보다 더 섹시한 것 같은데. 왠지 코피가 쏟아질 것만 같다. 아아~ 안 돼. 여기서 피를 쏟으면 나중에 루시아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왜 그래, 히로?안 예뻐?" "아,아니에외 예뻐요! 너무 예뻐요!" "헤헤~ 히로한테 그런 말 들으니 기쁜 걸. 가자, 히로!" 라이레얼은 팔짱을 끼며 나를 잡아당겼다. 난 그런 라이레얼의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용산은 우리나라 게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한때 수많흔 게이머들을 잠 못 이루게 했던, 4,5만원짜리 패키지 게임들은 이제 단 돈 몇 천원에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과거에는 패키지 게임이 몇 십만 장씩 팔리던 시대도 있었다 지금은 패키지 게임 시장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고 보면 나도 예전엔 기다리던 패키지 게임 발매 전날에는 잠을 못 이루곤 했었는데. 그리고 다음날 학교가 끝나면 득달같이 게임샵으로 달려갔지. 그럼 아저씨가 예약해 놓은 게임을 꺼내서 건네주었고. 조심조심 포장을 열어서 게임CD를 컴퓨터 안에 집어넣었을 때의 두근거림. 그리고 인스틀을 한 뒤 처음 실행시켰을 때의 놀라움. 밤새 오락하다가 엄마한테 뒤지게 맞았을 때의 슬픔. 이젠 다 아련한 추억이다. 지금은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엑스박스 같은 콘솔의 보급으로 콘솔 게임 이 컴퓨터 패키지 게 임을 대체했다. 하지만 나는 콘솔 게임보다는 패키지 게임이 좋다. 구세대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패키지 게임을 보면 예전의 추억들이 많이 떠오른다. 그래서 국내 패키지 게임의 몰락이 정말 안타깝다 패키지 게임 몰락의 결정적 요인은 불법 복사와 와레즈 등을 통한 불법 다운로드다. 문화산업이란,말 그대로 ‘산업’ 이다. 산업이란 인간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재화나 서비스를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산업은 곧 돈이다. 문화산업이란 문화의 공급자가 문화의 수요자에게 돈을 받고 파는 것이다. 하지만 패키지 시장 말기에 게이머들은 돈을 주고 게임을 사기보다 불법 복사를 하거나 불법 다운로드를 받았다. 처음에는 좋았다. 몇 만 원씩 하는 게임을 공짜로 하게 되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수요자가 실질적인 구매를 하지 않으니, 공급자는 투자자금을 회수하지 못했다. 결국 수많은 게임 회사들이 부도가 나거나 게임 개발을 포기했다. 당시 끓어오르는 열점만으로 게임 개발에 뛰어든 개발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음은 어떤 게임 회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게임 제작의 특성상 하루에 몇 시간씩 정해놓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될 때까지 하다보면 밤을 새기 일쑤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나가는 사람이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회사는 1년 내내 불을 끈 사람도,문을 잠근 사람도 없었다. 1년 365일 동안 누군가 한 명은 회사에 남아서 계속 일을 했다는 것이다. 밤새서 일했다고 누가 칭찬해주는 것도 아니고,야근수당을 주는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가 좋아서, 오직 재밌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일념으로 사서 고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만들면 뭐하나? 소비자들이 사질 않는데. 재미가 없어서 안 샀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럼 다음변에 문제점을 고쳐 재밌게 만들면 그만이다. 하지만 게임은 재밌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데, 돈을 주고 사질 않으니 문제다 돈이 되지 않는 산업은 더 이상 산업이 아니다. 결국 개발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하나둘씩 떠나갔고, 패키지 게임 시장은 완전히 몰락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두 남자가 벽에 대자보를 붙여놓고 장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빽업 있어요. 빽업~ 빽업~. 빽업 있어요. 빽업~ 빽업~” 그래. 바로 저런 사람들 때문에 패키지 시장이 망한 것이다. 빽업은 빽업CD로,다시 말해 불법 복사CD이다. 자보에는 각종 게임과 소프트웨어의 목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주문을 하니,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CD가 들러 있었다 장사를 하다가 경찰이 나타나면 대자보만 걷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니 단속에 걸릴 리 없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수많은 개발사들과 프로그래머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모를까? 하지만 요즘은 빽업CD 장사도 그리 신통치 않은 듯하다. 인터넷의 발달로 전부 다운로드를 받으니 빽업CD를 살 이유도 없어졌지. 라이레얼은 패키지 게임 하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앗! 여왕의 기사단이다!나 이거 하고 싶은데‥‥‥” 괜히 말끝을 흐리며 날 바라보는 라이레얼. 나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나도 이러는 내가 싫다. 아주 미치겠다. 이러다가 용산 한복판에서 짐승으로 폴리모프하는 거 아냐? "하고 싶으면 사세요." "흑~ 너무 매정해, 히로." 라이레얼은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으로 살짝 눈물을 훔쳤다. 그러자 주위 모든 남자들의 분노어린 시선이 나에게 쏟차졌다. ‘저런 죽일 자식을 봤나’ ‘빌어먹을 놈이 저런 미녀를 울리다니!‘ ‘저런 개만도 못한 자식은 찢어 죽여야 해!’ “......” 니들이 왜 흥분하고 난리니? 라이레얼은 뒤에서 날 껴안으며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저거 사주면 히로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그때처럼 심한 짓을 해도 괜찮아." “‥‥‥‥헉!” 참고로 난 신체 건강한 남자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유혹에는 굉장히 약하다. 라이레얼 같은 미녀가 유혹하는데 넘어가지 않으면 그건 남자가 아니... 안돼! 나한테는 루시아가 있어! “이번에도 바람 피면 그땐 정말 끝이야. 다시는 니 얼굴 안 볼 거야.” 루시아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하다. 참고로 루시아는 한번 한다고 마음먹으면 진짜로 한다. 예전에 나이트클럽에서 바람 피웠다가 이혼(?) 당할 뻔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사,사줄게요. 사줄 테니까 조금만 떨어져 주세요.” “정말? 사랑해, 히로!” 쪽~ ! 라이레얼은 내 볼에 뽀뽀를 했다. 덕분에 난 또 다시 남자들의 죽일 듯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훗~ 지들이 노려보면 어쩔 거야? 난 라이레얼을 위해 게임을 사주었다. 게임을 받아든 라이레얼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 모습에 나는 또 넋을 잃었다. 관능적인 섹시함과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라이레얼. 이러니 어떠한 남자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같이 살면서 많이 적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볼 때마다 새로운 매력이 느껴진다. 라이레얼은 계속해서 날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아! 저기 오락실 있다. 가보자, 히로.” “예...” 오락을 좋아하는 라이레얼인 만큼 오락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나 보다. 하지만 딱히 하고 싶은 오락은 얼는지 그냥 들러보기만 했다. "아! 이거 해보자, 히로." 라이레얼은 오락실 앞에 있는 펀칭머신을 가리켰다. 펀칭머신은 주먹으로 기계를 때려 그 충격을 점수로 환산하는 게임기다. 으음, 왠지 재밌을 것 같다. 참고로 나와 라이레얼 둘 다 주먹 쓰는 거라면 자신 있다 나는 드래곤과 싸울 뻔했던 용사이고, 라이레얼은 특급 용병이다. 용병세계는 그 특성상 배경이나 외모보다는 실력이 우선시 된다. 예쁘면 뭐하나? 아무리 예뻐도 전쟁터에서는 칼이 피해가 주진 않는다. 라이레얼은 그런 전쟁터 에서 수년을 살아남았다. 그러니 실력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기계에 넉었다. 그러자 동그란 타깃이 앞으로 올라왔다. "먼저 하실래요?" "아니야. 히로가 먼저 해." "그럼 사양 않고." 난 가볍게 주먹을 뻗었다. 참고로 여기서 ‘가볍게’는 어디까지나 나를 기준으로 해서다. 퍼억! 타깃은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마구 올라가는 점수. 800점. "흐음, 너무 가볍게 쳤나?" "이번엔 내가 해볼게." 라이레얼은 남방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자세를 잡은 다음 주먹을 휘둘렀다 다리, 허리, 어깨, 팔의 근육이 동시에 움직인다. 펄럭이는 남방. 흩날리는 레몬빛 머리카락 아아~ 너무 멋져요,누님! 빠르게 날아간 주먹은 타격점을 정확히 가격했다. 퍼억!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마구 올라가는 점수. 999점. 안타깝게도 이 기계는 세 자리까지 밖에 점수를 표시하지 못한다. 그 점을 생각해본다면 실제 점수는 1000점이 넘었을 것이다. “으음, 근육이 좀 줄었나? 몸이 예전만 못하네. 운동을 안해서 그런가?” 하긴,나도 요즘은 몸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 확실히 운동을 좀 해야 하는데. 펀칭머신의 타깃이 또 올라왔다. 난 이번엔 좀 힘을 주어서 세게 때렸다. 퍼억! 와장창! “......” 뭐야,퍼억~ 소리 뒤에 붙은 수상쩍은 소리의 정체는? "헉쓰!" 너무 힘을 줬나? 펀칭머신은 완전히 박살이 나있었다. 애초에 나 같은 초인이 범인들이 사용하는 기계에 너무 힘을 준 것이 잘믓이다. "무슨 일이야?" 놀라 뛰어 나오는 오락실 주. 난 라이레얼을 보며 외쳤다. “튀어요!” 우리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뒤에서 오락실 주인이 뭐라고 소리치며 쫓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떨어져 나갔다. "내 기계 물어내 이놈들아~ !" 오락실 주인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내가 망가진 기계값을 물어줄 이유는 없다. 펀칭머신. 말 대로 주먹으로 때리는 기계이다. 난 주먹으로 때리는 기계를 주먹으로 때렸을 뿐이다. 발로 찬 것도 아니고, 다른 도구를 이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망가졌다면, 이건 내 탓이 아니라 기계가 약한 탓이다. 처음 만들 때부터 나 같은 초인이 칠 것도 계산해서 튼튼하게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면 저렇게 쉽게 박살이 나겠어? 하여튼 뭐든 대충 대층‥‥‥ 이럭게 장인 정신이 부족해서야 되겠어? "나 배고파, 히로." "저도 배가 고프네요. 뭐 먹고 싶으세요?" "히로가 사주는 거야?" "무, 물론이죠." 지금 깨달은 사실인데, 내가 사든 라이레얼이 사든 결국은 똑같다. 어차피 라이레얼 주머니 에서 나오는 돈이 내 돈이기 때문이다 으음,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로군. "아무거나 먹자. 난 히코랑 함께라면 어떤 음식이든 괜찮아." "그, 그래요?" 참고로 나도 라이레얼 같은 미녀와 함께라면 어떤 음식이든 괜찮다. 우리는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엄청 시원하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았나 보군. 라이레얼은 남방 목 부분을 잡고 흔들며 땀을 식혔다. 새하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라이레얼은 남방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 히로 땀도 닦아줄게." 내 앞으로 다가와 소매로 내 이마의 땀을 닦아주는 라이레얼. 갑작스런 행동에 난 숨이 멎을 뻔했다. 제발 갑자기 이 러지 말아주세요. 전 심장이 약하답니다. 그나저나 오해하기 딱 좋은 장면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연인으로 보일 것이다 아마 이 장면을 카르가 봤다면 나를 얼려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루시아가 봤다면 당장 이혼서류(?)를 내밀지도 모른다. "저, 전 괜찮아요. 그,그보다 빨리 주문이나 하죠." 난 햄버거 세트 두 개를 시켰다. 패스트푸드점은 이름 그대로 음식이 빨리 나와서 좋다. 라이레얼은 목이 말랐는지 빨대도 꽃지 않고 그대코 콜라를 들이켰다. 꿀꺽꿀꺽. 입에 얼음을 한가득 물고 씹어 먹는 라이레얼. 이런 털털한 모습이 라이레얼의 진짜 매력이다 이러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지. 안 그래도 가게 안의 여자들이 동경 가득한 눈빛으로 라이레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들의 분노어린 눈빛이 나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물론 여자들의 질투어린 시선도 같이 쏟아진다. ‘저 언니 너무 예뻐.’ ‘레몬빛 머리카락이 너무 매력적이에요, 언니. 가슴도 크고, 다리도 늘씬하고. 아아- 전 언니 거에요.’ ‘그런데 저 남자는 대체 뭐지?’ ‘별로 생기지도 않은 게 어째서 언니 옆에 앉아있는 거야?’ ‘돈으로 언니를 꼬신 건가?나쁜 자식!’ ‘저런 안 생긴 남자는 차버려요. 언니가 너무 아까워요.’ ‘저 남자 쓰레기통에 버리고, 저랑 사귀어요, 언니!’ “......” 뭐야, 이 눈빛들은? 왜 눈빛들이 말을 하고 난리야? 그리고 내가 어디가 뭐 어때서? 나만한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 역시 이 세계 여자들은 남자보는 눈이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이 세계 여자들의 시력이 나쁜 건가. 아니면, 판타지 세계 여자들의 시력이 좋은 건가? 뭐, 그건 둘째 치고‥‥‥ 어째서 내가 여자들한테까지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거지? 역시 라이레얼과 사귀려면 엄청난 응기가 필요한 것 같다. 최소한 주위의 각종 눈빛 스킬 정토는 가볍게 이겨낼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주위의 뜨거운(?) 시선을 받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위축되기 마련이다 식사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군. 라이레얼은 햄버거를 먹다말고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 그래요,라이레얼?" "부탁이 있어, 히로." "예? 부, 부탁이요?" 이젠 라이레얼이 부탁이라는 말만 꺼내도 두렵다. "무, 무슨 부탁인데요?" "후후~ 뭘 그렇게 긴장해?" "아,아니요. 뭐,꼭 긴장한다기보다는· "쉬운 부탁이니까 안심해, 히로." “예, 예. 뭐‥‥‥” 더 안심이 안 된다. 아아~ 방금 목구멍으로 넘어간 햄버거가 얹힌 것 같다. 라이레얼은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난 일단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라이레얼은 내 귓가에 입을 댔다 두근두근. 아아~ 떨린다. 미인에게는 너무 약한 내 심장. 이거 심장 수술을 한번 받든지 해야지. "이거‥‥‥ 해줘." “예” “이거 말이야. 이거.” "예? 이 , 이게 뭔데요?" 라이레얼은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난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있는 것은 빈 컵. "이거 리필 좀 해줘 , 히로." “......” 리필 좀 해달라고? "그, 그게 다예요?" "응. 왜 힘들어?내가 직접 해?" "아,아니요. 제가 할게요." 난 라이레얼을 위해 기꺼이 빈 컵을 카운터로 들고 가 리필을 해 주었다. “콜라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몸에 안 좋대요. 칼로리도 많고.” “나 걱정해주는 거야, 히로? 고마워~” :아,아니요. 고맙긴요...“ 사실 이런 말은 라이레얼이 아니라 어린 엘프플에게 해줘야 한다. 개들이 하루에 마시는 콜라만코 몇 리터는 족히 된다. 그런데 사실 몸에 안 좋기로 따지면 햄버거도 만만치 않다. 햄버거는 대표적인 정크 푸드Junk Food: 쓰레기 음식) 아니겠는가? 우리 몸에 필요한 비타민이나 미네랄 대신에 각종 인공첨가물과 화학물질과 염분을 마구 첨가했다. 그리고 패스트푸드점 감자튀김에는 발암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기름기 음식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삼겹살의 지방 함량이 25퍼센트인데,햄버거는 40퍼센트에 육박하니 말 다 했지 뭐. 콜라에는 당분과 색소, 카페인 등의 유해물질로 가득 차 있으니, 햄버거 세트 메뉴를 시키면 이 모든 유해물질을 세트로 섭취하게 되는 것이다 으음,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입맛이 떨어진다. 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도가의 선인들처럼 생식을 하거나 벽곡단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 건강에 나쁜 거 뻔히 알면서도 맛있으니까 먹는 것 아니겠는가. 뭐, 먹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니니‥‥‥ 식사를 끝마친 우리는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그런지 굉장히 피곤하다. "전 루엔과 갈리온드네 집으로 갈 거예요." "왜 ?" "컴퓨터 조립해서 설치해 줘야 하니까요. 라이레얼은 어쩌실 거예요?" "나도 같이 갈게. 어차피 거기엔 아빠도 있으니까." 아무래도 엘프들은 가족의 개념이 인간과는 좀 다른 것 같다. 루의 부모님과 루비의 부모님 모두 재혼을 하시는 바람에, 두 엘프는 할머니인 루엔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루엔은 그 아이들을 어떻게 보면 남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에게 떠맡기고 자유롭게 살고있다. 인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부모가 재혼한다고 자식을 할머니에게 떠맡기고,어느 할머니가 손자들을 남에게 떠맡기겠는가? 그것도 다른 종족에게. 그것도 여러 종족 중에서 가장 상태가 안 좋은(여러 가지 의미로) 인간에게.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완전 콩가루 집안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건 루엔네 가족만이 아니다 갈리온드 역시 그렇다. 라이레얼이 보고 싶네 어쩌네 하더니, 정작 양육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가끔씩 얼굴을 내비치는 게 전부다. 엘프들의 양육은 자유방임주의인가? 확실히 엘프들은 개인주의 사상이 너무 팽배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일샘 동안 몇 번이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한다. 엘프는 인간의 10배의 수명을 지녔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레얼이야 다 자랐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루와 루비는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다. ...라지만,나이는 루와 루비가 훨씬 많군. “......” 부모보다 자식이 더 나이가 많은 가족이라‥‥‥ 생각해보면 이것도 무지하게 특이하다 아무튼 미성년자인 루와 루비를 이렇게 방치하다니. 아동방치도 일종의 아동학대로 볼 수 있다는데. 역에서 내린 우리는 집까지 걸어갔다. 여전히 찰싹 붙어서 걷는 라이레얼. 이젠 적응이 되서 아무렇지도 않‥‥‥으면 얼마나 좋겠냐? "조,조금만 떨어져 주시면 안 될까요?" "싫어. 나 춥단 말이야." 난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데. 현관문 앞에 선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누구세요?" 루엔의 목소리다. "저예요. 히로." 잠시 기다리자 루엔이 문을 열어주었다 으음,내 집 문을 루엔이 열어주다니. 이제야 내가 이 집을 떠났다는 것이 실감난다. "택배 왔죠?" 당일 택배로 보냈으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거다. "예. 아까 전부 도착했어요. 아! 찬 것 좀 드릴게요. 밖의 날씨가 더웠을 테니까요." 루엔은 복숭아맛 아이스티를 내왔다. "아!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아이스티를 마겼다. 이렇게 루엔과 라이레얼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보니 둘이 마치 자매처럼 보인다. “......” 잠깐. 생각해보니 루엔이 갈리온드와 그렇고 그런 사이니, 루엔은 라이레얼의 새엄마잖아! 으음,그렇군. 루엔이 라이레얼의 새엄마였군. 헉! 그럼 라이레얼은 루비와 루의 고모가 되는 건가? 그리고 루와 루비는 라이레얼의 조카가 되고? 이건 뭔가 신선한데. 그런데 그럼 라이레얼은 조카보다 어린 고모가 되는 건가? “......” 라이레얼이 루와 루비의 고모라니‥‥ 이건 좀 심하게 신선하다(라지만, 그렇게 따지면 영아도 마찬가지다. 그리 이런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할아버지가 노익장을 과시해 늦등이를 만들었다거나 할 경우 얼마든지 가능하다). 엘프들이 왜 친족관계를 따지지 않는지 알 것 같다. 복잡해도 좀 복잡해야 말이지 “앗! 나의 사랑하는 딸 라이레얼 아니니?” “켁켁!” 갑작스레 등장해 소리치는 갈리온드 때문에 사레들릴 뻔했다. 내가 그리 많은 엘프를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의녀증 걸린 엘프는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아!아빠." "응. 오늘은 뭐하고 지냈니, 나의 딸 라이레얼아?" “히로랑 같이 놀았어. 히로가 내 팔짱 끼고 여기저기 데리고 돌아다녔어. 그리고..” "뭐? 저놈이 팔짱을 끼고 들아다녀? 그, 그리고 또 무슨 짓을 했는데?" 갈리은드가 깜짝 놀라 묻자 라이레얼은 두 손을 뺨에 가져다대며 배시시 웃었다. "아잉~ 그걸 어떻게 아빠한테까지 말하겠어?그냥 나와 히로의 비밀로 간직할래~ " "헉! 너, 너 이 자식! 내 딸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장 말해! 말하란 말이야!" “......” 의녀증도 정신병의 일종일 텐데 치로 안 하고 가만히 놔둬도 괜찮으려나? 아이스티를 다 마신 나는 컴퓨터를 조립했다. 케이스에 메인보드를 끼우고, 메인보드에 CPU, 그래픽카드, 사운드카드 등을 알맞은 장소에 끼운다. 그리고 파워랑 하드, DVD라이터기 등도 연결을 하고‥‥‥ 뭐,하드웨어 조립은 레고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소프트웨어 까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난 조립을 끝마친 컴퓨터와 모니터를 책상에 설치하고 손을 탁탁 털었다. 어차피 OS를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 CD가 집에 있으니 내일 가져와서 설치를 끝마쳐야 할 것이다. 인터넷 회사를 불러서 랜선도 깔아야 하고.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잘 있어,아빠." 루엔과 갈리온드는 단지 앞까지 우리를 바래다주었다 "내 딸 잘 데려다 줘. 무슨 일 생기면 죽을 줄 알아." “예, 예. 제가 책임지고 보호할 테니 안심하세요.” "너 때문에 안심이 안 돼!" “......” 나보고 뭘 어쩌라고? 루엔은 갈리온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히로." "예. 걱정 마세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루엔은 나를 살짝 껴안더니 양쪽 볼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헉 ! 이런 대담한 인사법 이라니! 참고로 난 이런 식의 인사법‥‥‥ 굉장히 선호한다. 아주 많이 매우 엄청 선호한다. "내 딸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너 이 자식! 당장 내 딸에게서 떨어지지 못해! 빨리 떨어져!" “저 , 저기요‥‥‥‥” "괜찮아, 아빠. 히로가 으슥한 곳으조 끌고 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더라도 난 괜찮은 걸. 난 이미 모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그,그러니까 제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헉! 이, 이 자식이! 안 되겠어. 내가 직접 바래다주겠어. 내 딸은 내가 지킨다!” 루엔은 한숨을 내쉬며 난리를 치는 갈리온드를 붙잡았고, 그 틈을 타 나는 라이레얼을 데리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단지를 거의 다 빠져나오는데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쳤다. “너, 너는!” “아즘마는 그때‥‥” “아!이 아줌마 우리 이사 갈 때 난리쳤던 아줌마네. 왜 집값 사수 외치며 발광했던 그 아줌마 말이야." "예. 그 아줌마 맞아요,라이레얼." 우리가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아파트 단지 부녀회장이었다. 저번 권에서 집갚 떨어진다고 우리 이사 못 가게 막은 열혈 아줌마. 난 그때 한 사람을 통해 님비 현상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 집값이 왜 이렇게 개판인지, 대한민국 부동산 문화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부녀회장은 날 보더니 멱살을 잡을 듯 달려들었다. "너 잘 만났다. 너 때문에 이 동네 집값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기나 해? 옛날에는 절대 2억 이하에는 팔지 않기로 부녀회에서 담합을 했는데, 이젠 그것도 힘들어졌어. 우리가 입은 피해 어떻게 책임질 거야?응?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아니, 뭐 담합까지 하고 그러십니까? 솔직히 이 동네, 입지 조건도 별로 안 좋잖아요. 주차장도 없고. 요즘 새로 분양되는 아파트에 비해 시설도 좀 안 좋고.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부동산 가격이라는 게 원래 담합을 해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겁니다. 수요가 많아야 가격이 올라갈 거 아니에요? 수요는 없는데 공급자들끼리 가격 담합해서 뭘 하자는 겁니까?” "어린놈이 뭘 안다고 내 앞에서 아는 척이야?부동산 가격은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담합으로 결정하는 거야! 강남 아줌마들 다 하는 짓인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 있어? 정부의 규제 정책 따위를 강력한 집값 담합으로 극복해 내는 것이 우리 부녀회의 목표야!" “......”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아주 생쇼를 하신다. 치맛바람이 무섭긴 무섭구나. 교사촌지부터 시작해서 집값 담합까지. 이 아줌마랑 계슥 말해봐야 더 이상 소웅이 없을 듯하다. "앞으로도 집값 담합 잘하셔서 집값 왕창 올리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정부 정책에 굴하지 마시고 앞으로 그 뜻을 끝까지 관철하세요. 최선을 다해서 강남 집갈만큼 올리세요. 아숨마,파이팅! 그럼 저희는 이만." 난 재빨리 라이레얼의 손을 붙잡고 도망치듯 단지를 빠져나왔다. 저런 아줌마를 상대하느니 광신도 백 명을 상대하는 게 편할 것 같다. 가게 건물로 향하는데 갑자기 라이레얼이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았다. “나 다리 아파, 히로.” "예? 다리가 아파요?" "응. 오늘 너무 많이 돌아다녔는지 힘들어." “5분 정도만 더 걸으시면 집인데‥‥” “싫어. 이제 한 발자국도 못 걸어. 힘들어 죽겠단 말이야!” 괜한 투정을 부리는 라이레얼.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늦은 밤이라 차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다. "태, 택시라도 잡을까요?" "3분 거린데 택시 타고 가면 아깝잖아." "그, 그렇긴 하죠 ‥‥‥‥ 이런 길에서 택시 잡는 것도 힘들 것 같고. "그,그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업어줘." “예?” "업어달라고." "예예? 그 말씀은‥‥‥ 그, 그러니까 마치 라이가 폴짝 뛰어 제 등에 업히듯‥‥ 라이레얼이 제 등에 업히시겠다는‥‥‥ 뭐, 그런 뜻인가요?" "응. 그런 뜻이야." “......” 업어달라니! 어린 엘프들도 아닌 라이레얼이! “진짜 업어줘요?” "응. 진짜 업어줘." “그,그치만 제 등은 어린 엘프들 전용인지라‥‥‥” 라이레얼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보았다. 그녀의 레몬빛 는동자에는 온갖 슬픔이 다 들어있었다. 세상에 이런 가련한 여인이 있다니! “어, 어린 엘프들 전용이지만, 하프엘프토 언제든 탑승 가능이에요.” 난 나도 모르게 등을 내밀었다 "후후~ 고마워, 히로." 라이레얼은 내 등에 업혔다. 여자라고 해도 키가 크고 근육이 잘 단련되어 있는 라이레얼인지라 무게가 상당하다. "무거워?" "아, 아니 에요." "힘들어?" "전혀 안 힘들어요." 평범한 남자라면 땀을 뻘뻘 즐렸을 테고, 약한 남자라면 중간에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난 드래곤과 싸울 뻔 했던 몸(실제로 싸운 것도 아닌데 자꾸 말하니 민망하다). 라이레얼 하나 업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게다가 나는 어린 엘프들을 수 없이 어부바한 경력이 있지 않은가?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손으로 잡고 있는 허벅지 안쪽의 감촉과 등에 닿는 물컹한 감촉이다. 그리 내 얼굴을 간질이는 레몬빛 머리카락도. "히로 등 편해." "하하,제 등이 좀 편하긴 하죠." 내 등의 안락감은 이미 어린 엘프들을 통해 완벽하게 입증되었다. 오죽하면 내 등에 업히기 위해 서로 싸우기까지 하겠는가? 그나저나 이 상태에서 루시아나 카르와 마주친다면 난 죽은 목숨이겠군. 뭐. 늦은 시간이니 전부 집에 있겠지.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까지 안 들어오는 거야?’ 루시아는 계속해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초조하고 답답해서 어떠한 일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까 라이레얼이 히로와 같이 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랬다. ‘왜 하필 그 여자야? 설마 둘이 데이트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생각해보니 남녀가 같이 나간 것부터 데이트잖아.’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잠깐. 내가 왜 이러는 거야? 히로가 어떤 여자랑 나가든 나랑 상관없잖아. 내,내가 히로랑사귀는 것도 아니니까.’ 히로랑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해 보는 루시아. 하지만 둘이 별 짓을 다 해놓고 사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릴게 안 들어오는 거야? 혹시 둘 사이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루시아는 평소 히로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술에 취한 자신에게 어떠한 짓도 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준 히로. 루시아는 그때 진심으로 깨달았다. 히로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을 하지만‥‥‥ 여자 손만 잡아고 헤벌쭉 하고, 예쁜 여자한테는 조금이라도 잘 해 주려 하고, 어떻게든 이상한 짓을 하기 위해 기회만 엿보고, 저번에는 별똥별을 보고 하고 싶다고 빌질 않나‥‥‥ 대체 윌 하고 싶다는 건지 ‥‥‥ 도무지 믿으려야 믿을 구석 이 없었다. 이젠 별 상상이 다 들기 시작했다. 히로가 라이레얼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키스하는 것부터 , 들이 손잡고 모텔로 들어가는 것까지... ‘용서할 수 없어!’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 언니 입술에서 피 나요!" “앗!” 라이와 루비의 말에 루시아는 자신의 입술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에 피가 묻어나왔다. 아무래도 너무 꽉 깨물었나 보다. 루시아는 혀로 피를 할았다. 짭짤한 피 맛에 기분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오빠 언제 들어와요, 언니?" “루비는 빨리 오빠가 보고 싶어요” 라이와 루비는 쉴 새 없이 과자봉지에 손을 집어넣었다 뺐다. 과자를 먹으며 히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루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너희들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오빠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쁜 자식! 아이들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여? 기다리는 거 알면 빨리 들어와야 할 거 아냐? 애들 아빠로서 자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늦으면 연락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루시아 자신은 몰랐지만, 현재 눈 꼬리가 잔뜩 위로 치켜 올라간 상태 였다. 그리고 냉기가 풀풀 흩날리는 것이 접근이 힘들 정도였다.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의 그런 모습에 잔뜩 몸을 움츠리며 서로의 귓가에 속삭였다. "언니 화났나봐." "응. 언니 눈빛 무서워." 따르룽!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루시아는 팔짱을 낀 채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라이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루시아에게 내밀었다. “어 , 언니 ‥‥” "뭐야?" 루시아는 날카롭게 물으며 고개를 획 돌렸다. 때문에 라이는 깜짝 놀라 수화기를 떨어트렸다.다 “우엥~ 우엥~ 언니 막막 라이한테 화내고‥‥‥‥” "앗! 미안해, 라이야. 언니 화 안 냈어. 잠간 실수한 거야. 라이가 이해해 줘." 루시아는 라이를 안고 등을 두드려주며 바닥에 떨어진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누가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고 난리야? 흥! 예의도 없어.’ 루시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아! 루시아군요. 저 루엔이에요.] “......” 루엔? 루엔이면 루와 루비의 할머니다. 루시아는 재빨리 말투를 공손하게 바꾸었다. "예. 무,무슨 일이세요?" [방금 히로랑 라이레얼 나갔어요. 몇 분 후면 도착할 거예요.] "둘이 그 집에 들렀었어요?" [네. 컴퓨터 조립하느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네요. 미안해요. 제가 히로를 너무 오래 붙잡아둔 것 같아서.] "아,아니에요. 그,그럼 방금 전까지 그곳에 있었던 거예요?" [예. 물론이지요.] "그, 그렇죠?호호~." [예.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언제든 자주 전화 주세요. 아! 언제 한번 애들 데리고 찾아뵐게요.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으니 자주 얼굴 봬요.” [예. 루와 루비를 잘 부탁드릴게요.] "예. 잘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내가 왜 안도하는 거야? 나 정말 왜 이 러지? 이러니까 마치 의부증 환자 같잖아.’ "오빠 온대요?" "언제 온대요?" "응. 몇 분만 있으면 올 거야." “헤헤~ 그럼 라이는 오빠 마중 나갈래요.” "루비도 마증 나갈 거예요." "안 졸려?우리 라이와 루비 잘 시간이잖아." "괜찮아요, 언니. 라이 한 개도 안 졸려요." “루비도 안 졸려요. 오빠 오면 같이 잘 거예요. 헤헤-” “그래. 그림 언니랑 같이‥‥‥‥” ‘오빠 마중 나가자’ 라고 말하려던 루시아는 말끝을 흐렸다. 다른 여자랑 실컷 놀다온 리로를 뭐가 예쁘다고 마중까지 나가겠는가? ‘그리고 마중 나가면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할지도 몰라.’ 지금은 이렇게 어린 엘프들을 기르며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루시아의 진짜 신분은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이다. 철이 들 무렵에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공주로서의 권위 의식 같은 것은 많이 사라졌지만,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은 도도함은 아직 남아있었다. 사실 루시아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서툴렀다. 아이들이나 언니인 일루니아에게는 쉽게 표현을 하지만, 히로에게는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하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히로가 적극이어서 둘 사이가 이 정도로 진전된 것이지, 만약 히로마저 소심했다면 둘 사이는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애들만 내보내기는 그런데...’ 지금은 늦은 밤. 비록 건물 앞까지만 나간다고는 하지만,아이들만 보내기는 위험하다. 게다가 얘들이 귀엽기는 좀 귀엽나? "오빠 온대요, 언니?" 어느새 거실로 나온 영아. 루시아는 영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오는 중이래.” “그럼 제가 라이랑 루비 데리고 마중 나갈게요.” "괜찮겠어?" "예. 어차피 지금 편의점에 야식 사러 가려던 참이거든요." "그럼 부탁 좀 할게." "예. 걱정 마세요, 언니." 영아는 라이와 루비에게 손짓을 했다. "언니랑 오빠 마증 나가자, 얘들아." “네에-!” 영아는 아이들을 인솔(해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과자봉지에 손을 넣고 끊임없이 과자를 입으로 옮기는 라이와 루비. 두 엘프의 복장은 여전히 메이드복이었다 이런 어린 메이드라니! 얼마나 귀엽고 깜찍한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것 같다. “까아! 너무 귀여워!” 영아는 아이들을 껴안고 마구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너희들 고모야. 알지? 고모라고 한번 불러봐” "고모요?" “응.” 눈을 동그랑게 뜨고 서로를 마주보던 라이와 루비는 입 안에 든 과자를 삼킨 다음 말했다. "고모." "고모." “꺄아! 행복해!” 다시 아이들을 껴안고 부비부비 하는 영아. 집세가 좀 비싸긴 하지만 이 집에 오길 잘한 것 같다. 영아는 루와 루비와 함께 건물 앞에서 히로를 기다렸다. ‘언니가 너무 늦네. 설마 오빠랑 언니랑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편의점에 야식 사러 간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영아는 라이레얼을 마중하기 위해 나은 것이다. ‘헤헤~ 늦은 밤에 이렇게 마중 나와 있으면 언니가 감동하겠지?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하며 키스할지도 몰라. 그, 그럼 어떻게 하지? 아니, 난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언니가 원한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아아~ 사랑해요,라이레얼 언니. 전 언니 거예요.’ 만약 영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카르가 알게 된다면,그날로 집안에 난리가 날 것이다. 참고로 카르는 현재 라이레얼이 시킨 대로 열심히 레벨 노가다를 하는 중이었다. 레벨 1이라도 더 올려 라이레얼이 더욱 수월하게 게임 진행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카르의 행복이었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자 히로와 라이레얼이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히로가 라이레얼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아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히로가 라이레얼을 땅에 내려놓았다. 영아는 어린 엘프들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잠시 기다렀다. 둘은 그 자리에서 서서 얘기를 나누었다. 영아는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지? 궁금해진 영아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 순간,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말도 안 돼!’ 영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라이와 루비는 그 장면을 보고 손에 든 과자봉지를 떨어트렸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어린 엘프들이 먹을 것을 떨어트리다니! 이는 라이와 루비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수 있었다 영아와 두 엘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대로였다. “다 왔네.” "예." "이제 내려줘, 히로." "예 ." 난 조심스럽게 라이레얼을 내려놓았다. 이제 집에 다 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오늘 하루 역시 정신없이 피곤한 날이었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토 난 하루하루를 너무 충실하게 사는 것 같다. 사실 요즘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어린 엘프들과 놀아줘야지, 루시아랑 사랑해야지, 가게 재개장 준비해야지, 일루니아 여사님 상대해야지,은행에 빛 갚아야지‥‥‥ "오늘 즐거웠어요?" "예. 간만에 라이레얼과 돌아다니니 즐거웠어요." "나도 간만에 단 둘이 데이트하니 되게 좋았어." "하하~ 그,그래요?" "오늘 데이트 고마워 ." "고, 고맙긴요." "그리고 업어준 것도 고마워. 나 되게 감동 받았다." "그, 그래요?" 밤하늘의 별보다도 아름다운 라이레얼. 이렇게 가만히 마주보고 있으니 꼭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어, 어서 들어가죠." "잠깐만, 히로." 라이레얼은 갑자기 내 팔을 붙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 그와 동시에 내 입술을 덮쳤다.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라이레얼의 혀가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다음에야 난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라이레얼과 내가 키스를 하고 있다는 것을. “......” 뭐? 키스? 안 돼요, 라이레얼! 이러시면 안 쾌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이미 내 입술은 라이레얼의 입술에 의해 막혀 있는 상태. 라이레얼은 능숙한 솜씨로 나를 리드했다 온몸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다. 라이레얼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플어가지 않았다. 난 그대로 라이에얼에게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라이레얼이 입술을 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난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카르가 아까 왜 주저앉았는지 알 것 같다. “라, 라이레얼...” "후후~ 이건 보답이야,히로. 데이트하고 업어준 것에 대한 보답." 라이레얼에게는 이런 스킨십이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다. 흑~ 나의 순결한(?) 입술을 라이레얼에게 강제로 빼앗기다니. 라이레얼은 혀로 입술을 할으며 말했다 "으음, 맛있다." “......” 흑흑~ 난 더럽혀졌어. 이제 어쩜 좋아? 일단은 언론을 통제해야 한다. 철저히 은폐해서 루시아와 카르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래. 어차피 목격자도 없잖아. "뭐야,오빠?오빠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 ‥‥‥‥헉?” 이건 영아의 목소리? 설마 영아가 방금 전 장면을 봤단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살인멸구를 하는 수밖에. 미안하다. 영아야. 원망하려거든 너의 그 호기심을 원망하려무나. 난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영아만이 아니라 라이와 루비도 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와 루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해요, 오빠!" "어떻게 루비 입술을 뺏어가 놓고 라이레얼 언니와 키스를 할 수 있어요?" "저, 저기, 얘들아‥‥‥ 진정하렴. 모든 것은 오해란다." 난 일단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영아가 나서며 소리쳤다. "오해는 무슨 오해? 내가 이 두 눈으로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한테 강제로 키스하는 걸 다 봤는데?" “‥‥‥‥너 시력이 대체 몇이니?” "몰라 몰라! 어떻게 나의 언니한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우아아앙~ 미워할 거야,오빠!" 영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오빠는 나쁜 오빠에요!" "맞아요! 오빠는 막막 나빠요!" 메이드복을 입고 화를 내니 화내는 모습조차 귀여워 보인다. “우엥~ 우엥~ 라이는 오빠를 믿었는데‥‥” “으앙~ 으앙~ 루비는 이렇게 오빠를 좋아하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거리는 라이와 루비. 놀란 나는 달래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탁! 라이와 루비는 내 손을 쳐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 다 필요 없어요오." “으아아앙~ 오빠는 루비 마음도 모르고‥‥‥” 헉! 라이와 루비가 오빠의 손길을 거부하다니! 이제 어쩜 좋단 말인가? 난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라이레얼을 바라보았다. 라이레얼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평하게 너희들한테도 해즐게. 그럼 됐지?" "예? 해줘요? 뭘 해줘요?" 라이레얼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울고 있는 영아의 얼굴을 잡고 그대로 키스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방금 전 나에게 줬던 것과 똑같은 딥키스를. 이레얼과 내 사촌여등생인 영아가 키스를 하고 있다니! 이걸 말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계속하라고 장려해줘야 하는 걸까? 라이레얼은 입술을 떼며 영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공평하지?" “어, 언니‥‥‥‥” 황홀한 표정,반짝거리는 눈빛,빨갛게 상기된 볼. 아주 좋아 죽는다. 죽어. 라이레얼은 이번에 라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라이는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뭐해? 너도 빨리 대." “......” 대? 대긴 윌 대? "아,안 돼요. 라이 입술은 오빠 주려고 아껴둔 거란 말이에요." “......” 날 주려고 아껴둬? "괜찮아. 내가 먼저 시식하고, 그 다음에 히로 보고 먹으라고 하면 돼." “......” 시식? 먹어? 점점 위험수위를 달리는 라이레얼의 발언. 조금만 더 나가면 책표지에 19금 딱지를 불여야 할지도 모른다. “우에에엥~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우엥~ 우엥.” "흐음,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라이레얼은 고개를 돌려 루비를 보았다. 그러자 루비토 재빨리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도 싫어?" 끄덕끄덕. “싫음 말구. 들어가자, 히로.” "저, 저기 영아랑 먼저 플어가세요. 전 얘들과 잠깐 놀다 들어갈게요." "응. 그렇게 해." 라이레얼은 영아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레얼이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안도의 한승을 내쉬었다. 하아~ 미치겠다. 난 라이와 루비에게 다가갔다. "안심해, 얘들아. 라이레얼 갔어." 아이들은 그제야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라이레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 나에게 달려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를 마구 때렸다. 툭탁툭탁. “우엥~ 우엥~ 오빠 미워요.” “으앙~ 으앙~ 루비 눈앞에서 다른 여자‥‥‥ 키스‥‥‥ 있어요? 으아아앙!" “아, 아니야, 얘들아. 너희들고 봐서 알겠지만, 이 오빠는 피해자란다.” "우에에엥~ 거짓말 하지 마세요오." "으아아앙~ 오빠는 라이레얼 언니를 더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이젠 때리는 것도 지쳤는지 그저 눈물만 펑펑 쏟을 뿐이었다. 토닥토닥 스킬로 달래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내 손을 쳐냈다. 이 렇게 된 이상 마지막 방법 이다! 난 두 팔로 라이와 루비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 오빠는 라이와 루비가 세상에서 제일 좋단다." "훌쩍 ~ 저, 정말요?" "홀쩍~ 거짓말 아니죠?" "응응. 이 오빠는 라이와 루비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라이레얼 언니보다 백배 천배 더 좋아." 난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루시아 언니보다도요?" “......” 이건 대답하기 좀 난감한 질문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이들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 "으아아앙~ " 난 재빨리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무,물른이야. 루시아 언니보다 우리 라이와 루비가 더 좋아. 왜냐하면 우리 라이와 루비는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깜찍하고 예쁜 엘프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 얘들아. 울면 예쁜 얼굴 다 망가지잖아. 우리 라이와 루비는 활짝 웃을 때가 제일 예뻐." 그러자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며 헤헤 웃었다 난 손수건을 꺼내 아이들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눈물도 닦아주고, 콧물도 닦아주고‥‥‥ “헤헤~ 라이도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이건 비밀인데요...” 라이는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니보다 오빠가 더 좋아요." “......” 뭐라? 루시아보다 내가 더 좋다고? 비밀을 고백(?)한 라이는 몸을 비비 꼬며 말했다. "어, 언니한테는 비밀이에요오." "응. 알았어. 오빠가 비밀 꼭 지켜줄게." 루시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삼일밤낮은 삐질지도 모른다. "루비도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할머니보다도 훨씬 훨씬 좋아요." “......” 친권자인 루엔보다도 양육자인 내가 더 좋단 말인가? “그래,루비야. 오빠도 루비가 정말 정말 좋아.” 쪽~. 쪽~. 난 라이와 루비의 뺨에 뽀뽀를 해주었다 두 엘프는 볼을 붉히며 몸을 비비 꼬았다. “그래서 말인데 얘들아...” "예?왜요,오빠?" “말씀하세요.” "흠흠, 그러니까 말이야‥‥‥ 방금 있었던 일은 오빠와 라이와 루비만의 비밀이란다. 알았지?" "방금 있었던 일이요?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한테 키스한 거요?" "아, 아니. 정확히는 라이레얼이 나한테 키스를 한 거지. 결코 내가 라이레얼한테 키스를 한 건 아니란다." "똑같은 말 아니 에요?" "맞아요. 어쨌든 둘이 키스한 거잖아요." "무, 물론 의미상으로는 그렇게 되지. 하지만 왜곡된 정보는 자칫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단다. 왜 한국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라는 말이 있잖니?" “그래서요?” “아무튼 방금 있었던 일은 비밀이야. 알았지?” "왜 비밀이 에요?" “그.그건‥‥‥” 루시아가 알게 되면 이혼(?)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오빠는 셋만의 비밀이 있었으면 해. 오빠랑 라이랑 루비랑 이렇게 셋이서만 아는 비밀 말이아. 일루니아 여사님도 모르고 루시아도 모르는 비밀." "셋만의 비밀이요?" "응응. 아무도 모르는 셋만의 비밀." 라이와 루비는 잠시 동안 서로를 마주보더니 다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니?" "아니에요. 라이는 찬성이에요." "루비도 찬성이에요. 헤헤~ 루비도 전부터 오빠랑 비밀을 만들고 싶었어요." 비밀이라고 하니 확실히 뭔가 있어 보인다. 라이와 루비는 셋만의 비밀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 엄청 기뻐하고 있었다. 단순한 것들. 난 새끼 손가락을 내 밀 었다. "그럼 오빠랑 약속하자. 어떠한 일이 있었도 비밀을 지킨다는 약속.“ “예.” “네.” 나와 라이와 루비는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이제 약속했으니까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약속을어기는 건 나쁜 엘프들이나 하는 짓이야. 라이랑 루비는 착한 엘프지?" 끄덕끄덕. "착한 엘프가 되기 위해서는 약속을 잘 지켜야 해. 이 오빠가 나쁜 엘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 끄덕끄덕. "이 오빠는 착한 옐프만 좋아한단다. 라이랑 루비는 약속 잘 지키는 착한 엘프지?" 끄덕끄덕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라이와 루비. "아이구, 귀여운 것들!" 난 아이들을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볐다. "그럼 들어가자, 얘들아. 아! 니들 뭐 먹고 싶은 건 없니?배 안 고파? 오빠가 야식 사줄까?" "라이는 삼각김밥이 먹고 싶어요." "루비는 샌드위치요." “......” 그냥 예의상 해본 소리였는데. 난 아이들을 데리고 편의점으로 갔다. 카운터 에 있는 여대생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은 우리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늦은 밤에 한 남자가 백인 소녀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으니 이상할만도 하겠지. 여기에 소녀들이 메이드복을 입 있다면 더욱 이상해보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소녀들 눈이 방금 전까지 운 듯 빨갛게 부어있다면 매우 많이 이상해 보일 것이다. "먹고 싶은 것 실컷 고르렴." “네, 오빠!” 라이와 루비는 우르르 달려가 정말로 실칫 골랐다. 삼각김밥을 종류별로 하나씩 고르고 샌드위치도 잔뜩 샀다. 그리고 콜라와 사이다도 페트병으로 골랐다. “......” 이 정도면 야식이 아니라 주식이다. "다 먹을 수 있겠니?" "예. 걱정 마세요,오빠." "이 정도는 기본이에요." “......” 그래. 내가 니들의 식성을 너무 우습게 본 것 같아 미안하구나. 아이들은 카운터에 음식을 잔뜩 을려놓았다. 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바코드를 찍으면서도 이상하다는 눈길로 나를 노려보는 여자 아르바이트생. 그 눈빛은‥‥‥‥ ‘이 귀여운 소녀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걸?? 이 근처에 사나? 그런데 왜 눈이 부어있지? 그리고 왜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거지? 설마 저 남자가 강제로 입힌 건가? 그럼 아이들 눈이 부은 것도 이 남자가 울린 건가? 그런데 왜 소녀들을게 강제로 메이드복뜰 입힌 거지? 헉! 서, 설마 이 소녀들은 저 남자의 노예? 그렇다면 저 남자는 그 말로만 듣던‥‥‥ 변태! 그것도 어린아이들만 밝힌다는 로리 변태! 그래, 분명해. 저 남자는 이 소녀들을 납치한 다음 메이드복을 입히고 그렇 그런 짓을 했을 거야. 아익거 두 손을 묶은 다음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렸겠지. 아이들은 아파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펑펑 쏟았을 테고.’ ‥‥‥대략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가 어린 여자아이에게 강제로 메이드복을 입힌 다음 손목을 묶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려 울리는 그런 남자로 밖에 안 보이나? “......” 하긴,좀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하다. 확실히 메이드복은 너무 매니악한 코스튬인가?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바코드를 찍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들 오빠인가 봐요?" “예. 제가 이 아이들 오빠‥‥‥” "아니에요. 오빠는 라이의 주인님이에요." "루비의 주인님이기도 괘요." "헤헤~ 라이는 주인님의 영원한 메이드에요." “루비는 주인님이 시키는 거라면 뭐든 다 할 거에요.” 이런 메이드로서의 각오가 물씬 풍기는 발언‥‥‥이 아니라 오해성 짙은 발언을 하다니. "주, 주인님 ?" "아,아니에요. 그낭 얘들이 장난치는 거예요. 아하하!" “무슨 말이에요? 방금 주인님이라고 말하는 거 확실히 들었는데! 다, 당신 설마 이 아이들을 노예로 삼아 밤마다 그렇고 그런 짓을..” "헉쓰! 노, 노예라니! 그 무슨 남이 들으면 큰일 나고, 루시아가 들으면 맞아죽을 발언을?" "그게 아니라면 뭐죠? 왜 이 아이들이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거죠? 당신이 억지로 입힌 거 아니에요?" “그건‥‥‥” “그리고 당신이 이 아이들 오빠라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아니, 그게 왜 말이 안‥‥‥되려나?" 라이와 루비는 백인. 나는 동양인. 친오빠는 말이 안 되고, 사촌 오빠라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냥 아는 오빠라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역시 노예!" "아니라니까! 그리고 당신이 뭔 상관이야? 계산이나 빨리 해!" 난 화를 버럭 낸 다음 돈을 지불하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삼각김밥을 하나씬 꺼내 비닐을 벗기고 먹고 있었다. 그나저나 니들 메이드복은 언제 벗을 생각이니? 이러다가 이 오빠가 정말 로리 변태로 몰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는구나. 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루시아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날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아,아니, 이거저거 하느라." 난 슬쩍 고개를 들리며 말했다. 아까 라이레얼과의 일 때문인지 괜히 루시아의 얼굴을 마 보기가 두럽다. "헤헤~ 오빠가 먹을 것 잔뜩 사줬어요, 언니." "언니도 드세요."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에게 다가가 손에 든 봉지를 내밀었다. 루시아는 그것을 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니가 사준 거야?" “응.” "왜 이 렇게 많이 사줬어 ?" "그,그냥. 늦은 밤에 마중 나와 준 게 기특해서." 정확히는 ‘이거 먹고 입 다물어주렴’ 이라는 의미로 사준거지만. "아!설마 나 기다리느라 안 자고 있었던 거야?" "누, 누가 그렇대?그, 그냥 잠이 안 와서 안 자고 있었던 것뿐이야!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흥!" “......”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는 걸까? 난 아이들과 루시아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루시아는 날 보며 물었다. "왜 그 여자랑 같이 나갔어?" "그, 그게 라이레얼도 용산에 볼일이 있었거든. 그래서 가는 김에 그냥 같이 간 거야." "흥! 좋았겠어. 그 여자랑 데이트도 실컷 하고." “데, 데이트라니. 우리는 그냥 친구로서 같이 돌아다닌 것뿐이야,” "정말이야?" "응. 라이레얼과 나는 이제 친구일 뿐이야." "둘이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그,그야‥‥‥ 물론‥‥‥이지." 정확히는 아주 사소해서 말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 하나 있지만. "흐음, 그래 ?"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루시아. 난 뛰는 심장을 진정키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어느새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아~ 안 돼. 루시아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무리야. 심장은 쿵쾅쿵쾅, 땀은 삐 질삐 질 , 몸은 부들부들. 루시아는 뭔가 눈치 챈 듯 입을 열었다. “너...” “이거 드세요, 언니 ! 참치마요네즈 삼각김밥이에요. 되게 맛있어요.” 순간, 라이가 비닐을 벗긴 삼각김밥을 내밀었다. 루시아는 시선을 라이에게로 돌렸고 나는 안토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라이야. 언니 맛있게 먹을게." "오빠는 이거 드세오. 맛있는 햄샌드위치에요." "응, 루비야." 우리가 그릴게 화기애어하게 야식을 먹는데,파자마를 입은 루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뭐하세요?" "응? 넌 왜 자다 말고 나오니?" "화장실 가려구요." "그럼 갔다 와서 이것 좀 먹으렴." "앗! 삼각김밥이랑 샌드위치다! 빨리 갔다 올 테니까 남겨 놓으세요." "알았어, 임마." 루는 재빨리 화장실에 갔다 와서 야식을 먹었다. 늦은 밤에 온 가족이 들러앉아 야식을 먹는 모습 아아~ 너무 화목하다.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가족 해체 현상 같은 건 우리 가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은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으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이레얼이 거실로 나왔다. "아!들어왔네 , 히로." "예. 야식 좀 드실래요?" "괜찮아. 목말라서 나온 거니까." 라이레얼은 부엌으로 가 물을 마시고 다시 방으로 향했다. 라이레얼은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아까는 정말 좋았어, 히로. 후후~."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라이레얼.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얼어불었다. 삼각김밥을 먹던 루시아는 눈꼬리를 잔뜩 치켜 올리며 날 노려보았다. "저 말 무슨 뜻이야?" "응?무슨 뜻이냐니?" "저 여자가 아까 정말 좋았다고 말했잖아! 대체 뭐가 좋았다는 거야?" “그, 글쎄. 대체 뭐가 좋았다는 걸까? 갑자기 나도 궁금해지네. 하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빨리 말하지 못해!" "아,아무 일도 없었어. 저, 정말이야." "그런데 왜 말을 더듬어?" "누, 누가 말을 더듬었다 그래?" 루시아는 독기 어린 눈길로 날 노려보았다. "진짜 무슨 일 있었지? 어쩐지 너무 늦게 들어온다 했어. 갔다는 것도, 루엔의 집에 들렀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지? 둘이서 이상한 데서 이상한 짓 하다 온 거지? 빨리 말하라니까!" "아니야! 난 결백해! 제발 믿어줘,루시아!" "믿긴 뭘 믿어? 빨리 말하지 못해?" "진짜 난 결백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어." 난 흥분한 루시아를 달래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아야 했다. 나의 사랑 루시아한테 거짓말을 해야 하다니!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족 해체는 막아야 할 것 아닌가? "둘이서 무슨 짓을 했는지 빨리 말하지 못해?" "한 일이 있어야 말하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아무 일도 안 했는데 저 여자가 그런 말을 해? 무슨 일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했을 거 아냐?" "그냥 같이 돌아다닌 게 좋았다는 뜻으로 말한 거야. 정말이라니까. 사랑하는 너를 놔두고 내가 무슨 짓을 하겠어?" "입에 발린 소리는 필요 없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루시아는 필살 공격까지 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루시아의 필살 공격이란 손에 잡히는 걸 마구 집어던지는 것을 뜻한다. 피하면 루시아가 화를 내기 때문에 난 루시아가 던진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를 그대로 얻어맞아야 했다. "앗! 먹을 걸로 장난치면 안 돼요, 누나!" “우에에엥- 라이의 삼각김밥.” "으아아앙~ 루비의 샌드위치." "그, 그만 던져 , 루시아."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로 얻어맞으니 색다른 느낌이다. 책으로 얻어맞을 때보다는 덜 아프지만,더 비참하다. 야밤에 이게 뭔 일이다냐? 어떻게든 가족 해체만은 막아야 할 텐데. "이래도 말 안 한다 이거지?" 루시아는 안 되겠는지 옆에 있는 콜라 페트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뚜껑을 열고 손으로 입구를 막은 다음 마구 흔들었다. 헉! 저 동작은 설마‥‥‥ ? "아,안 돼,루시아. 제발 그것만은 안 돼!" 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루시아는 입구를 막은 손을 치웠다. 푸아아아! 거품을 잔뜩 머금은 콜라 줄기가 나에게 쏟아진다. 난 콜라를 뒤집어쓰면서도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가족 해체를 막기 위한 가장의 노력은 이토록 처절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다행히 걸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오빠가 음식으로 얻어맞은 걸 보고도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라이는 대체 어떻게 된 아이일까? 그리고 오빠 얼굴에 몫어있는 콜라를 핥아먹는 루비는 대체 어떻게 된 아이일까? 뭐, 바닥에 빨대를 대고 빨마억는 루보다는 나으려나? 그나저나 거실 청소는 누가 한다냐? “......” 설마 나? 중일 여자 상업 고등학교,중일 남자 공업 고등학교, 대명 남녀공학 인문계 고등학교. 이 세 고등학교는 한 구역에 몰려 있었다. 때문에 아침만 되면 곳으로 향하는 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그날 아침 역시 그랬다. 버스 정류장에는 교복을 입은 고둥학생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었다. 버스 한 대가 도착할 때마다 밀고 밀리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앞사람은 어떻게든 공간을 확보하려 하고, 됫사람은 어떻게든 버스를 타기 위해 몸으로 마구 밀었다. 숨쉴 공간도 없을 만큼 시루떡이 된 버스는 힘들게 출발했다. 버스를 타지 못한 학생들은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발을 굴렀다. "아이씨!차가 왜 이렇게 안 와?" “이번에 또 지각하면 담탱이 완전 지랄할 텐데.” "학주한테 맞아 죽는 것보단 낫잖아." 모두가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는 만큼 새치기가 극성을 부렸다. "야,오늘 너 머리 예쁘다. " "샴푸 하나 바찐을 뿐인데‥‥‥ 티 나니?" "응. 무슨 샴푸 쓰는데?" 늦게 도착한 학생들은 끝도 보이지 않는 줄의 맨 뒤에 서기보다 이미 줄을 서고 있는 친구를 찾았다. 그리고 그 친구한테 말을 거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줄 서고 있는 학생이 친구를 앞에 세워주고, 그 친구가 또 친구를 앞에 세워주었다. 제대로 줄 서는 사람은 바보였다. 그러니 누구도 제대로 줄을 서려 하지 않고 새치기를 했고, 줄은 한없이 두껍고 길어졌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줄의 가장 앞에는 대명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서 있었다. 머피의 법칙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인지 이상하게 버스가 오지 않았다. 어째서 평소에는 자주 오던 버스가 급할 때는 오지 않는 걸까? 모두가 초조한 마음으조 기다리는데, 다행히 한 대의 버스가 도착했다.이 버스를 탄다 해도 시간 내에 교문을 통과하려면 내리자마자 전력질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연 이 버스를 놓치면 무조건 지각이다. 버스 문이 열리자 가장 앞줄에 서 있던 대명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버스에 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중일 여상 여학생 한 무리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자신들이 먼저 올라타려는 것이 아닌가! 줄을 서고 있던 학생들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대명고 남학생들은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한 대명고 남학생이 소리쳤다. "야! 니들 뭐야?늦게 왔으면 뒤에 서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중일 여상 여학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저 새끼들도 만날 새치기 해." "지들도 새치기하는 주제에 누구보고 뭐라 그래?" “야, 야. 신경 쓰지 마.” "우리가 새치기를 하든 말든 지들이 뭔 상관이야?" "괜찮아. 억울해 봤자 저 새끼들이 어쨀 거야?" "호호~ 맞아. 지들이 덤빌 것도 아니고 말이야." 중일 여상 석학생들은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버스에 올라탔다. 한 여학생이 버스 발판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대명고 학생 하나가 나서더니 그 여학생 머리카락을 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꺄악! 뭐야?” 그 남학생은 발판 위에 올라서 버스 앞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늦게 온 여자분들은 뒤로 가서 서주시고, 줄 서고 계신 분들 먼저 타시지요. 새치기는 경범죄입니다." 중일 여상 여학생들은 눈을 치켜뜨고 그 남학생을 노려보았다. "넌 뭐야, 새까?" 그러자 남학생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말했다. "누구?" "누구긴 누구야? 여기 너 말고 또 누구 있어, 새까?" "응1많은데. 나 말고도 열라 많아. 그런데 웬만하면 말끝마다 새끼 새끼 하지 마라. 듣는 새끼 기분나쁘다. 이 쌍년아." "뭐,뭐‥‥‥?" 나서서 따지던 여학생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글쎄. 방금 전까지는 안 궁금했는데, 니가 그렇게 말하니깐 궁금해지는 걸. 일단 교복을 보니 중일 여상이고, 배지 색 보니 3학년이고, 말끝마다 새끼 새끼 하는 걸보니 싸가지는 어 화투 치다 화투값 대신 지불한 것 같고, 개념은 밥 말아 먹은 것 같고‥‥‥ 그런데 너 대체 누구냐?" 여학생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난 송윤미다. " 남학생은 귀를 파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송윤미? 중일 여상 일짱 송윤미?” “그래. 내가 중일 여상 일짱이야. 알기나 알아?” 남학생은 자신을 송윤미라 밝힌 여학생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키는 170센티 정도로 여자 치고는 큰 편이다. 피부는 하얀 편이고 얼굴은 예쁜 편이다. 교복을 잔뜩 줄여 쫄티와 미니스커트로 만들어 놓은 걸 보니 몸매에도 제법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은 고데기로 지졌는지 제법 꼬불꼬불했다. 잘 보니 갈색 브릿지도 몇 개 보이는 듯했다. 어디 가서 예쁘다는 소리 좀 들었을 것 같고, 좀 야한 옷 입으면 ‘어이,아가씨 죽이는데’ 소리를 듣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치켜 을라간 눈 꼬리와 앙다문 입술을 보니 성깔이 제법 있어 보였다. 중일 여자 상업 고등학교. 학생 대부분이 어디서 좀 늘아본 애들이고, 그중 상당수가 주먹 좀 쓴다고 알려진 학교였다. 그래서인지 중일 여상 교복 입은 여자 애들이 세 명만 같이 다니면 남학생들이 피해 다닌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송윤미. 1학년 때부터 일진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2학년 때 3학년 선배들을 박살내고 일짱이 되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된 지금은 그녀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져 감히 도전해오는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송윤미의 남자친구는 중일 공업 고등학교 3학년 한인주다. 중일 여상과 중일 공고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같은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다. 그런 만큼 학교끼리의 교류도 많고 학생들끼리의 교류도 많았다. 그리고 덤으로 일진회끼리의 교류도 활발했다. 일진회 단합대회나 여러 행사를 같이 하고, 조직의 서 열을 서로 인정해주었다. 즉.증일 여상의 일짱과 중일 공고의 일짱은 같은 급이고, 중일 여상의 이짱과 증일 공고의 이짱도 같은 급이다. 같은 의미로 증일 여상의 일짱은 중일 공고 이짱보다 서 열이 한 단계 높다. 이러니 사실상 증일 여상 일진회와 중일 공고 일진회는 같은 조직이라고 보는 것이 좋았다. 중일 여상의 짱을 건드린다는 것은 증일 공고의 짱을 건드리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왜냐하면 승윤미의 남자친구인 한인주가 중일 공고의 짱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중 이 사실을 모르는 학생은 없다고 해도 좋았다. 그렇기에 감히 승윤미에게 대드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송윤미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잡아당긴 것도 모자라 쌍년이라는 욕?지 하다니! 이제 저 남학생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남학생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아~ 니가 송윤미 였구나. 소문이 아주 자자하던데.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이거 전학 온 지 사흘 만에 이런 유명인을 만나게 되니 기분 좋은 걸." 이 지역 고등학생 치고 송윤미와 한인주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쩐지 너무 설쳐댄다 했더니 전학생인가 보다. 하지만 지금 알았다고 해도 너무 늦었다. 당장이라도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든가, 그게 아니라면 죽었다고 복창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당장 무릎 꿇고 머리를 땅에 처박고 용서를 빈다 하더라도 복날에 개 잡듯이 얻어맞는 것은 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뭐?" "니가 중일 여상 일짱 송윤미인 건 잘 알았어. 그래서 어쩌라구?" "너 제정신이야7" "글쎄. 새치기 하다 걸려서 쪽 당하고도 당당한 어떤 쌍년보다는 제정신이지." “......” 어차피 학교를 가기 엔 이미 늦었다. 저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다음 버스를 타거나 뛰어간다 해도 지각인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줄을 선 학생들은 그럴 생각도 없었다.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대명고 남학생이 감히 중일 여상 일짱 송윤미에게 대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부터 흥미진진하고 스펙터클한 장면이 펼쳐질 것이 뻔한데, 어떻게 자리를 뜰 수 있겠는가? 버스기사는 학생들이 두려운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에 이 버스 정류장에서 패싸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서서 말리던 버스기사는 전치 8주가 나와 아직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다리뼈가 붙으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버스기사는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도록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송윤미는 남학생을 노려보았다. 잘 그을려진 갈색 피부, 제법 반듯한 생김새, 키도 크고 몸도 균형 이 잘 잡혀 있다. 대명고는 인문계인데다가 남녀 공학이다. 대학 진학률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나름대로 학구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대명고에는 이렇다 할 일진회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일진회가 있긴 있다. 하지만 일진회라는 곳이 중일 공고나 중일 여상의 일진회에 비하면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라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중일 공고 일진회 1학년들만으로 대명고 일진회를 박살낸 적도 있었다. 그러니 대명고 학생들은 항상 중일 여상과 증일 공고 학생들에게 주눅 들어 살았다. 등하교 길에 삥 뜯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고, 주먹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대명고에 다니는 주제에 감히 중일 여상 일짱의 앞을 가로막다니. 송윤미는 이제까지 수 없이 많이 싸워봤고, 스스로포 주먹 좀 쓴다고 자부했다. 웬만큼 주먹 좀 쓴다는 남자와 싸워서 이긴 적도 많았다. 여자라고 무시하는 남자들을 밟아준 적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너 죽고 싶은가 보구나?" “왜? 니가 죽여주게?” 그러자 한 여학생이 송윤미 앞으로 나섰다. "됐어,윤미야. 저런 새끼는 니가 상대할 가치도 없어. 내가 처리할게." 그 여학생은 송윤미의 절친한 친구이자중일 여상의 이짱인 최윤지였다. 최윤지는 비웃음을 지으며 남학생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권주혁. 사흘 전에 전주고에서 대명고 3학년 3반으로 전학 왔지. 이 정도면 자기소개는 충분하려나?" "전에 있던 학교에서 싸움 좀 했냐?" "그건 한번 붙어보면 알게 되겠지. 참고로 난 여자라고 안 봐주는데 어쩌지?" "그래? 그거 잘 줬네. 나도 남자라고 안봐주는데." 최윤지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권주혁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권주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 앞문 바로 뒤에 있는 손잡이를 붙잡고 공중 돌기를 했다. 퍼억! 권주혁의 발은 최윤지의 관자놀이를 때렸고, 몸 전체의 무게가 실린 발에 얻어맞은 최윤지는 한참을 나가 떨어졌다. "윤지야?" 깜짝 놀란 송윤미는 재빨리 달려가 최윤지의 상태를 살폈다. 놀랍게도 최윤지는 기절한 상태였다. 발차기 한 방에 기절까지 하다니. 보통 솜씨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권주혁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여자라고 안 봐준다 그랬잖아." 태연한 그의 모습에 송윤미는 이를 갈며 소리첬다. "뭐해? 저 새끼 죽여!" 중일 여상 일진회 여학생들은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권주혁은 정말로 봐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지 주먹으로 달려드는 여학생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코대가 주저앉든 말든 조금도 사정 봐주지 않았다. "넌 뭐야, 이 새까?" "그러는 니들은 뭐냐, 이 씹새까?" 여기에 줄을 서고 있던 중일 공고 일진회 남학생들까지 가세했다. 몇 명을 땅바닥에 눕히던 권주혁은 안 되겠는지 재빨리 버스에 을라탔다. 그리고 버스 앞문을 막은 채 달려드는 놈들에게 발길질을 퍼부었다. "뭐해요, 아저씨? 빨리 출발해요!" 안 그래도 조만간 일진회 학생들이 버스 안으로 밀려들어을 판이라, 무서워 벌벌 떨던 버스기사는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조작해 버스를 출발시켰다. "이런 씨발!가지 마!가지 말라니까!" 버스가 출발하자 방금 전까지 권주혁을 상대로 싸우던 증일 여상 일진회 학생들과 중일 공고 일진회 학생들은 버스를 쫓차갔다. 하지만 뒷문은 닫혀 있고, 열리진 앞문은 권주혁이 가로막고 있다. 몇몇이 앞문에 매달려 보았지만 권주혁은 친절하게 발길질로 답해주었다. "잘 있어, 얘들아. 다음에 또 보자." 권주혁은 몸을 반쯤 밖으로 내밀고 쫓가오는 학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쫓아가던 학생들은 그런 권주혁을 보며 윽을 퍼부어 댔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송윤미는 떠나는 버스를 보며 이를 갈았다. ‘대명고 3학년 3반 권주혁 이라고 했지? 어디 두고 보자.’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점심시간 종이 쳤을 때는 권주혁이 등교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중일 여상의 일짱을 완전히 물 먹이다니! 이제 정상적인 학교생활은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학생들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로 신경 안쓰는 듯했다. 수업 시간에는 태연하게 잠을 잤고, 점심시간에는 매점에서 빵을 사다가 먹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태도. 그런 그를 바라보는 학생들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다름 아닌 수학 수업 이 었다. 점심시간 뒤에 이어지는 수학 수업은 졸음을 유발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학생들은 어떻게는 잠을 쫓아보려고 별 짓을 다 했지만, 포만감으로 인해 밀려드는 졸음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잠들게 되면 수학 선생에게 뒤지게 맞을 것이 분명했다. 잠들면 곧 죽음. 하지만 수마의 유혹은 즉음보다도 강렬하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교실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고, 덕분에 꾸벅꾸벅 졸던 학생들은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쾅! "니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수학 선생은 당당하게 앞문을 열고 들어은 학생들을 보고 고함을 쳤다. 중일 공고 교복을 입은 학생 스무 명. 하나같이 덩치가 좋고 인상이 흉악했다. 그리고 분위기 또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어이, 거기 선생은 좀 빠지시죠. 괜히 나서다가 교사 생활 끝나면 억울하잖아요. 요즘 같은 불경기에 새로운 직업 찾기도 쉽지 않고, 병신은 어딜 가도 받아수질 않습니다. 무사히 정년퇴 임하고 싶으시면 닥치고 교탁 뒤에 찌그러져 계세요." 수학 교사는 학생부에 몸담고 있는 선생으로 학생들 사이데 피바다라 불릴 만큼 악명이 높았다. 작은 트집이라도 잡히면 그날이 곧 제삿날이었다. 한 번은 얻어맞은 학생이 전치 4주의 진단서가 나와 경찰서에 고소까지 했지만, 학교 측에서 학부모와 학생을 협박하고 회유해서 고소를 취하시켰다. 그 결과 고소한 학생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고, 피바다는 지금까지 계속 교사 짓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명사인 피바다는 한마디 항의 없이 중일 공고 학생이 시킨 대로 교탁 뒤에 찌그러져 앉았다. 그의 주특기는 반항하지 못하는 학생을 개 패듯이 패는 것일 뿐이다. 선생과 학생은 착실한 지배 피지배 계급 체제를 지니고 있다. 선생이 패면 학생은 맞아야 했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반항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반항도 못하는 학생을 개 패듯이 패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어차피 문제가 생기면 지금처럼 학교 측에서 잘 해결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재단 이사장 친척이기 때문이다. 그는 반항하지 믓하는 학생들을 상대로는 더할 나위 없이 강하지만, 한 대라도 맞으면 바로 주먹을 날릴 것 같은 학생들을 상대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약했다. 그래서 학생들을 지키기는커녕 자기 한 믐 안위를 챙기고자 교탁뒤에 숨어 벌벌 떨었다. 3학년 3반에 펴들어은 중일 공고 학생들은 그런 피바다의 모습에 비웃음을 지었다. 맨 앞에 선 남학생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이 반에 권주혁이란 새끼 있지?" “......” 살기어린 그의 목소리에 여학생들은 몸을 벌벌 떨었다. 몸을 떨진 않았지만 무서운 것은 남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남학생들은 그래도 여자들 앞이라고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그 모습에 한 증일 공고 남학생이 중얼거렸다. “남녀공학에 남녀합반에‥‥‥ 씨발, 좆같은 학교 다니는 우리는 여자 구경도 못 하고 있는데‥‥‥ 이 학교 새끼들은 아주 팔자가 늘어지네.” 아까 소리친 남학생은 대답이 없자 맨 앞줄의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콰당! 앞줄에 앉아있는 학생들은 괜히 앞줄에 앉았다고 생각하며, ‘뒤에 앉을 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어떤 새끼가 권주혁이야!"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뭐하는 놈인데 남의 학교까지 찾아와서 수업 중에 교실로 쳐들어와서 개처럼 짖어대냐? 혹시 지나가던 똥강아지냐?" 들려온 목소리에 남학생은 고개를 획 돌렸다. "니가 권주혁이냐?"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 권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스무 명이나 되는 중일 공고 남학생들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권주혁은 태 연하기 그지없었다. 맨 앞에 서있는 남학생을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난 중일 공고 일짱 한인주다.” 그러자 권주혁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똥강아지 이름 같은 거 들어서 어따 쓰겠냐? 그냥 닥치고 똥이나 쳐드시지." "니가 아침에 내 여자친구 건드렸다며?" "여자친구? 아아~ 그 새치기 하다가 개쪽 당한 계집애. 개가 니 여친이었냐?" 권주혁은 한인주를 보았다. 키는 크고 몸은 말랐다. 피부는 까뚜잡잡했고 얼굴은 광대뼈가 드러나 있껐다. 전체적으로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잘 생긴 편이었다. 그가 바로 중일 남자 공업 고등학교의 일짱 한인주였다. 한인주가 그 소식을 접한 것은 일이 터진 바로 다음이었다. 송윤미가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굳이 송윤미의 연락이 없었어도 소식을 듣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버스정류장에는 중일 공고 학생들도 상당수 있었고, 그들이 퍼트린 소문이 이미 학교 전체에 퍼졌기 때문이다. 한인주는 성격이 더럽고 성질이 급하긴 했지만, 그래도 해서 될 일과 안 되는 일을 가리지 못할 만큼 지능이 없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업 중간에 쳐들어오는 무뇌아적인 행동을 한 이유는 송윤미 때문이었다. 계속 전화를 걸어 당장 응질을 하라고 재촉하는데 도저히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한인주는 방과 후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학교만 끝나면 개박살을 내주겠다고 송윤미를 달랬다. 하지만 송윤미는 지금 당장 권주혁을 박살낼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식은 것으로 알고 헤어지겠다는 엄포까지 놓았다. "계집애 뒤치다꺼리하는 거 안 쪽 팔리냐?" "밖으로 나와라." "지금은 수업 중인데." "나와, 이 새까!" "싫어, 이 씹새까." 능글맞은 읏음을 지으며 도발하는 권주혁의 모습에 한인주는 더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예고포 없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권주혁은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몸을 뒤로 젖혀 피했다. 그리고는 교탁 위에 있는 사랑의 매를 집어 들어 한인주를 내리쳤다. 빠악! 말이 좋아 사랑의 매지 실제로는 구타봉이었다. 사랑의 매의 정체는 선생들이 각목과 함께 자주 애용하는 반으로 자른 큐대였다. 이걸로 학생들을 개 패듯이 패며 ‘맞는 너희들보다 때리는 선생님 의 마음이 더 아프단다’ 등의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피바다의 주특기였다. "헤이,불량학생! 사랑의 매 맛 좀 볼래?" 막대기라는 물건은 잘 쓰면 좋은 무기가 되지만, 잘 쓰지 못한다면 그냥 주먹으로 싸우느니만 못하다. 다햄히 권주혁은 예전에 검도장을 다닌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랑의 매를 팔의 연장선처럼 자연스럽게 다루었다. 빠악!빠악! 진주혁이 사랑의 매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니, 한인주는 막는 것에 급급했다. 권주혁은 능글맞게 읏으며 말했다. "맞는 너의 아픔은 때리는 나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 너 사람 되라고 이러는 거니까 고맙게 여겨." 한인주는 너무 열 받은 나머지 복장이 뒤집더질 것만 같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라테를 익혀왔다. 이제까지 수 없이 많은 싸움을 해보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급소에 맞지 않으려고 날아오는 사랑의 매를 손과 발로 막아 보았지만,손곽 발 역시 몸의 일부이니 맞으면 당연히 아프다. 이런 흉기를 사랑의 매라고 들고 다니다니. 이 나라 교사들 머릿속에는 ‘조센징들은 패야 말을 듣는다’ 라는 일제시대 식민사관이 뿌리 깊게 박혀있음이 분명했다. "이 개새끼가!" 한인주는 근처에 있던 책상 다리를 불잡고 집어 던졌다. “꺄아!” 그 책상 주인인 여학생은 날아가는 교과서와 공책, 펜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권주혁은 그 책상을 몸으로 맞아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챙그랑! 권주혁이 몸을 피하자 책상을 유리창을 깨부수며 아래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사랑의 매가 부족했나? 어쩔 수 없군. 좀더 사랑해주는 수밖에." 권주혁은 다시 사랑의 매를 휘둘렀다. 한인주는 손에 잡히는 것들을 전부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주혁은 그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피하거나 쳐냈다. "뭐해? 죽여!" 중일 공고 일짱의 명예가 있으니 웬만하면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괜히 깨져서 쪽 당하느니 다구리 놓는 것이 백배는 나았다. 일짱의 명령이 떨어지자 한인주 뒤에 포진하 있던 중일 공고 일진들은 일제히 권주혁에게 달려들었다. 권주혁은 책상 위로 올라가 달려드는 놈들을 발로 걷어찼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많았다. 조금 밀린다는 생각이 들자 권주혁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까아악!" 권주혁은 여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든 말든 책상을 밟고 날아올라 뒷문으로 도망쳤다. "빨리 쫓아가!" 한인주와 중일 공고 일진들은 권주혁을 쫓아 달렸다. 뒷문으로 나가던 일진들이 사랑의 매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권주혁이 도망치는 척하면서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권주혁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사랑의 매로 마구 팼다. 그는 다구리 놓는 놈들을 상대로 인정사정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이 담긴 매질에 일진들은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쓰러 졌다. 빠악!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한 놈이 머리에 괴를 흘리며 쓰러졌고, 사랑의 매는 두 동강이 났다. 사랑의 매가 부러졌으니 피바다는 새로운 사랑의 매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좀더 강하고 튼튼한 쇠파이프나 하키 스틱을 추천해주고 싶었다. 권주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부러진 큐대를 다른 놈에게 집어 던지고 몸을 돌려 도망쳤다. 복도에서 난데없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젠장! 너 거기 안 서?" “니들 같으면 서겠냐?” 일진 스무 명을 끌고 학교까지 쳐들어왔는데 한 놈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중일 공고 일짱의 명예는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건 자존심 싸움이었다. 한인주는 중일 공고 일짱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저 자식을 반드시 밟아줘야 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다른 학교 일짱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추격전의 특성상 발이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이 나뉘게 되고, 자연스레 즐이 길어지게 된다. 권주혁은 그런 특성을 활용해 도망치다 말고 뒤돌아서 맨 앞에 달려오는 놈을 공격했다. 예를 들어 계단을 달려 올라가다말고 등을 돌려 따라오던 놈의 가슴팍에 발길질은 선물하는 식이었다. 이러면 적어도 싸우는 순간만큼은 일대 일이 되니 다수의 인원을 상대할 때는 확실히 효율적인 전법이었다. 학교 복도는 길고 여기저기 계단도 많았다 이런 식의 전법을 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씨발, 저 새끼는 지치지도 않나?" 한참을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권주혁은 조금도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기진맥진한 사람은 한인주와 중일 공고 일진들이었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는 일정 거리를 두고 잠깐 멈춰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권주혁은 교복 맨 윗단추를 플며 말했다. "야! 쪽 팔리게 패거리 끌고 와서 난리 치지 말고, 일짱이면 일짱답게 일대일로 붙는 게 어때? 뭐, 자신 없으면 계속 발정난 개 암캐 쫓듯이 쫓아와 보든지."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피하는 건 일짱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하지만 괜히 나섰다가 깨지는 것은 더욱 도리가 아니다. 한인주는 잠시 승를을 계산해 보았다. 막대기 들고 설쳐대던 모습과 도망치는 모습. 하나같이 치사하고 비열한 싸움 방법이다, 사실 치사하고 비열한 걸로 치자면 스무 명이나 되는 패거리를 끌고 와 다구리 놓는 것이 백배는 더 치사하고 비열했다. 하지만 한인주는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고로 무기 들고설치는 놈 치고 주먹 잘 쓰는 놈은 드물다. 그리고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가라테로 단련된 몸이다. 요좀은 담배를 많이 피워 대서 그런지 폐활량이 예전만 못하지만 어차피 승주는 단시간에 결판이 난다. 한인주는 주먹을 뚜두둑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덤벼." "니가 먼저 덤벼야 하는 쪽 아니야? 싸우고 싶은 건 너잖아. 난 당장이라도 교실로 들어가 공부하고 싶거든." "이런 씨발 새끼가!" 한인주는 주먹을 휘들렀다. 오른손 훅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첫 공격은 오른손 훅이다. 동작이 크기 때문에 꽤나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눈으로 보기만 한다면 쉽게 막을 수 있는 공격이다. 동작이 크다는 것은 곧 공격이 느리다는 뜻이다. 주먹이 날아오는 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쫓으며 왼손 가드를 올린다. 그럼 공격은 막히고 허점이 생기게 된다. 한인주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른손 훅은 싸움을 해본 놈들에게나 먹히는 공격이지, 싸움 좀 했다는 놈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른손 훅은 페인트였다. 한인주는 공격이 막히는 순간 왼손을 내질렀다 공격을 막은 권주혁이 반격을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주혁은 그런 한인주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공격을 막는 순간 뒤로 물러섰다. 때문에 한인주는 허공에 주먹질을 한 꼴이 되었다. 한인주는 이를 갈며 말했다. "어디서 싸움 좀 했나 본데? 권주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남들만큼은 했지." 한인주는 권쿠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을 내질렀다. 권주혁은 그 발을 손으로 막고 역시 돌려차기를 했다. 한인주는 옆구리로 들어오는 오른발을 왼손으로 막아냈다 퍼억! ‘대체 얼마나 세게 찬 거야?’ 손이 저릴 정토였다. 아마 제대로 맞았으면 숨도 쉬지 못했을 것이다. 한인주는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껐다. 하지만 권주혁은 여전히 능글맞은 읏음을 짓고 있었다. ‘젠장. 이러다가 지는 거 아니야?’ 권주혁은 그런 한인주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승부가 나기도 전에 패배를 생각하면 그때부턴 승리에 집착하기보다는지지 않는 것에만 집착하게 된다. 그럼 자연스럽게 몸이 위측되고, 승리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 이번에는 권주혁이 선공을 했다. 오른발이 사타구니를 노리고 들어왔다. 한인주는 손으로 발을 불잡으려 했다. 하지만 권주혁은 갑자기 발을 틀어 정강이를 걷어찼다. 퍼억! 순간, 한인주의 몸이 휘청거렸다. 권주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어댔다. 주먹과 발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한인주는 두 손으로 가드를 올리고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런다 해서 모든 급소를 다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격 하나 하나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이대로는 확실히 진다. "절대 질 수는 없어!" 한인주는 한순간에 가드를 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이 얼글을 때렸다. 한인주는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권주혁에게 달려들었다. 주혁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빼려했지만 한인주가 좀더 빨랐다. 한인주는 두 팔로 권주혁을 껴안았다. "뭐, 뭐야?" “뭣들 해? 빨리 이 새끼 죽여!” 한인주가 소리치자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일진들이 한번에 달려들었다. "치사한 새끼!" 퍽! 퍽! 권주혁은 팔꿈치로 한인주의 등을 내리찍었다. 한인주는 척추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깍지 긴 손을 플지 않았다. "이봐. 난 남자랑 껴안는 취미 같은 건 없어." 권주혁은 일진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뭐 그렇게 내가 좋다면 어쩔 수 없지. 너의 사랑을 받아들이마. 하지만 이런 사랑은 항상 비극적인 결말인 거 알지? 왜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우리 그냥사랑하게 해주세요’ 라고 외치며 같이 뛰어내리고 그러잖아." 권주혁은 빠르게 말을 쏟아내며 한인주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챙그랑! "자, 잠깐!" 한인주는 권주혁의 품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몸은 이미 낙하를 하는 중이었다. 한순간,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략 정신이 멍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몸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왔다. 퍼억! 다행히 교실은 3층이었다. 그리고 뒤뜰에 있는 나무와 풀이 충격을 많이 완화시켜 주었다. "인주야! 괜찮아?" "야, 이 미친 새까.7" 일진들은 뛰어내린 둘을 보며 소리쳤다. 한인주를 쿠션 삼아 뛰어내린 권주혁은 멀정하게 일어섰다. 하지만 쿠션이 된 한인주는 눈을 뒤집어 깐 채 왼팔을 붙잡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으아아악!" 아무래도 팔이 부러진 모앙이었다, 그래도 이 높이에서 뛰어내려 팔 하나 부러진 거면 남는 장사였다. 권주혁은 몸에 묻은 흙을 탁탁 털며 말했다. "거 봐. 이런식의 사랑은 항상 베드 엔딩이라니까. 이 사회는 아직 동성연애를 인정해주지 않거든. 그러니 너 좋다는 여자랑 잘 해봐.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는 별로거든." 그리고는 위에 있는 일진들을 올려보며 말했다. "앨 잘 업고 가라." 권주혁은 믐을 돌리려다 생각이 바러었는지 한인주에게 다가가 발로 왼팔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으아아악!" 툭 친 것뿐인데도 한인주는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짜식, 엄살 부리기는. 나 이만 수업 받으러 간다. 잘 들어가라.” 권주혁은 교실로 향했고, 홀로 남은 한인주는 팔을 붙잡은 채 고통에 몸부림 쳤다. 마침 5교시 수업이 끝났기에 대명고 학생들은 중일 공고 일짱이 뒤뜰에 누워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중일 공고 일짱이 깨졌다! 스무 명이나 되는 일진까지 끌고 학교에 쳐들어갔는데, 단 한 명에게 깨졌다! 소문은 날개라도 달린 듯 빠르게 퍼졌다. 권주혁은 전학 사흘 만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벌써부터 그에게 ‘바람의 전학생’ 이라는 별명까지 불었다. 하지만 권주혁 본인은 그런 소문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태연하게 학교를 다녔다. 대명고 학생들은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다행히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인주가 그 쪽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인주는 팔에 깁스를 한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그의 애인이자 중일 여상 일짱인 승윤미가 앉아있었다. "밟아주고 오랬지, 누가 밟히고 오랬어?" "조응히 안 해!" "깨진 주제에 큰 소리 치기는." 한인주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자식 보통 놈이 아니야." “그래. 보통 놈이 아니지. 중일 공 일짱을 밟아버렸으니.” "누가 밟혔다 그래?그 자식이 치사하게 싸우지만 않았어도 이렇겐 안 됐어!" "한 놈 상대하는데 일진 스무 명 끌고 간 건 안 치사하고?" 만화책이나 영화에선 일짱들의 일대일 대결 어쩌구 말이 많지만, 요즘 그렇게 싸우는 놈은 드물었다. 밟아버리고 싶은 놈이 있으면 패거리 끌고 몰려가서 밟으면 그만이다. 뭐 하러 일대일 대결 같은 피곤한 짓을 하겠는가? 어차피 싸움은 이기기만 하면 장땡이다. 일대일 대결의 낭만 같은 것은 한참 옛날 일이었다. 일대일 대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면 굉장히 쪽 팔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구리라는 쉽고 간편한 방법을 택하는 거고. 괜히 조직이 좋은 것이 아니다. "그 새끼 반드시 죽여 버 리겠어!"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한 남학생이 들어왔다. "깨졌다는 소리 듣고 와 봤는데, 꽤나 멀정해 보이네." "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이긴. 중일 공고 일짱이 일진들 끌고 대명고 한 놈 다구리 놓으려고 갔다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문 듣고 찾아왔지." "빌어먹을 새끼 !" 찾아온 남학생은 청기 공업 고등화교 일짱 김승오로, 한인수와 송은미와는 제법 친한 사이 였다. "너 개쪽 당한 거 소문 다 퍼졌다. 이제 어쩔 거냐? 너 때문에 일진 연합회 전체가 지금 쪽 팔려서 고개를 믓 들고 다니고 있어." "당연히 그 새끼 밟아야지." "넌 쉬고 있어, 임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됐어. 어차피 퇴원할 참이야. 적어도 그 새끼 조지는 건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한인주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김승오는 웃으며 말했다. "뭐, 좋을 대로 해. 명진고 일짱 최상철이랑 대천고 일짱 박기욱도 같이 움직일 생각이야." “그 새끼 하나 치는데 세 학교 일진회를 움직일 생각이야?” "일진 연합회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여서 말이야. 어떤 새끼든 일진 연합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끼는 응납할 수 없지. 그런 새끼 그냥 놔두면 다른 새끼들도 일진 연합회를 우습게 볼 수 있거든. 확실하게 밟아줘야 나중에 이런 일이 안 생기지. 그리고 그 자식 보통이 아니야.전주에서 좀 놀았다는데?" "그 자식 알아?" "아는 놈이 꽤 있더군. 중학교 때 꽤 날렸나 봐. 박영진이라는 놈과 콤비를 이뤘다는데, 그 지역 애들이면 모르는 놈이 없다고 하더군. 그런데 서울로 전학 왔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군." 확실히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 한 지 역을 휘어잡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전주에서 좀 놀았단 말이지?” 학교 폭력은 예전부터 문제가 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인간이란 원래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간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폭력이 있어왔다. 하지만 학교는 그 특성상 특히 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장소다. 일단 학교는 폐쇄적인 장소이다. 등교 때부터 하교 때까지 누구도 학교를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나간다 하더라도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학교로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졸업을 할 때까지 계속된다(자퇴나 전학은 예외적인 경우다). 학교의 구성원인 학생들은 아직 인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해 움직이고, 선과 악의 개념이 무엇인지 모른다. 실제로 같은 반 학생이 왕따를 견디지 믓하고 죽어도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믓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즉, 무지로 인해 악을 행하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인 학생들은 어떨게든 집단에 동화되고 싶어 한다. 그 집단에서 벗어난 존재가 왕따이고, 학생들은 그 왕따를 따돌림으로써 자신이 집단에 소속되어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토 폭력을 유발시키는 한 요인이다 학생들은 치열한 입시경쟁으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대학이 인생의 전부라고 가르치고, 대학을 못 가는 사람은 낙오자로 물아붙인다. 일반적인 사회인들은 하루에 8시간을 일한다(점심시간과 쉬는 시간 포함). 하지만 수험생들은 잠자는 시간과 생리적, 필수적 시간을 제한 모든 시간 동안 공부를 해야 한다. 심할 때는 하루 16시간 이상 공부를 하기토 한다. 이러한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를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분출하는 것이다. 성인의 경우에는 폭력 등의 범죄를 저지르면 법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폭력 쓸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폭력 쓸 일이 생기더라도 말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학생은 미성년자이고,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소속되어 있다. 웬만한 폭력은 청소년 보호법이 보호해주고,강력 범죄 급의 폭력을 저지르더라도 학교가 덮어준다. 심지어는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어도 사회봉사 72시간 정도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대다수 학교들은 교내에서 일어나는 폭력 행위를 발견하더라도 쉬쉬하며 덮기에 바쁘다. 외부에 알려지면 학교 이미지가 안 좋아진다는 이유에서다. 예전에 40여명의 학생들이 한 여학생을 집단 윤간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학생들이 훈방되었고, 처벌을 받더라도 극히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물론 강력한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다 범죄 예방 교육이나 인성 교육 등도 중요하다. 하지만 범죄를 저질러도 그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은 범죄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왕따,폭행,강간,집단 윤간 등. 수많은 청소년 범죄가 지금도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피해자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슥에서 괴로워하고 심지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해자는 아무런 처벌토 받지 않고 풀려나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한다. 학생들은 너무도 쉽게 어른들을 모방한다. 싸움 좀 하는 학생들이 뭉쳐서 일진회를 만든다. 그리고 싸움을 통해 서열을 정한다. 일짱은 보스가 되고, 나머지는 간부가 된다. 후배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똘마니가 된다. 그들 중에서 행동대장을 뽑고 서열을 정한다. 가입은 쉽지만 탈퇴 는 불가능하다. 조직을 배신하면 오로지 죽음뿐이다. 부하들은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다. 그저 위에서 시키면 따라야한다. 밟으라는 놈은 밟고, 삥 뜯으라고 하면 삥 뜯는다. 그렇게 해서 뜯어낸 돈은 위에 상남되고, 그 돈은 일진회의 회식비나 유흥비로 쓰인다. 말이 좋아 일진회지,사실상 폭력 조직이나 다름없다. 단 폭력 조직과 다른 점은 곡력 조직은 단지 조직을 결성했다는 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되지만, 이들은 어떠한 폭력을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 청소년 보호법과 학교가 우리를 보호해준다! 이러한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학생들은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조금의 죄의식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이 있으면 그에 반발하는 세력도 있는 법이다. 폭력 조직이 있으면 폭력 조직 연합이 있듯이 일진회도 더 크게 뭉쳐야 한다. 그리하여 감히 일진회에 도전할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일진 연합회다. 서로 적대적이지 않은 일진회들은 서로 뭉쳤다. 그리고 연합회 내에서 또 다시 조직의 서 열을 정하고, 매년마다 회식과 단합대회를 했다. 조직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면 그만큼 얻는 것도 많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상납금이 들어오고, 일진 연합획에 소속된 여자 일진들을 골라 성관계를 가질 수도 있었다. 일진회는 학교나 경찰이 어쩌지 믓하는 일종의 초법적인 기관이라 할 수 있었다. 웬만한 범죄를 저질러도 그냥 넘어가고, 심지어는 살인을 해도 소년원에서 몇 년 살고 나오면 그만이다. 시간이 흐르자 일진회는 더욱 발전했다. 아예 폭력 조직과 연계를 맺고 조직원들을 대주는 일진회도 있었다. 폭력 조직은 싸움 잘하는 애들을 눈여겨보고, 다른 조직이 채가기 전에 스카우트를 했다. 좋은 재능을 썩히는 것이 아까웠는지 심지어는 인재 양성(?)이라는 명목으로 일진회 회원들을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다. 어떻게 패야 가장 아픈가? 얼마만큼 밟아야 다시는 기어오를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사람을 죽이지 않고 골고루 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가르침을 사사받은 일진회 회원들은 다시 후배들을 가르쳤다. 그로인해 수많은 학생들이 자살을 하거나 학교를 그만 두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이 터지면 피해자는 도망치듯 학교를 떠나고, 가해자들은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학교를 계속 다니는 풍경은 이제 너무나도 당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오히려 가해자가 처벌을 받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재수가 없었으면 사람 좀 반병신 만들고, 예쁘장한 여학생 좀 강간했다고 소년원에 끌려가는가? 정부가 학교 폭력을 근절하겠다고 나섰지만, 정부가 하는 짓 중 대부분이 그렇듯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학교 측은 여전히 가해 학생 보호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피해자는 여전히 도망치듯 학교를 떠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정치인들은 탁자 앞에 앉아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단 한 명한테 중일 여상 일짱 송윤미가 개쪽 당하고, 중일 공고 일짱 한인주가 개박살 났다. 이 둘 모두 일진 연합회 소속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일진 연합회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만약 놈을 그대로 놔둔다면 일진 연합회를 우습게 보는 놈들이 생겨날지도 몰랐다. 싹수가 보이는 놈은 더 자라나기 전에 짓밟아야 한다.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많은 놈들을 짓발았다. 그래서 이제는 일진 연합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놈들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 뭐, 상관없다. 이번에 제대로 밟아 본보기를 보여주면 한동안 또 조용해지겠지. 안 그래도 한동안 일이 없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알았다 한 손이 열 손 당해내지 못하는 법이다. 무리 강한 놈이라도 단체로 몰려가서 짓밟는데 견뎌낼 수 있을리 없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자 권주혁은 가방을 매고 학교를 나왔다. 이제 얼마 후면 기말고사기에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학생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권주혁은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그는 아직 친구 한 명 없었다. 이젠 친구 한명쯤은 생길 때도 되었지만, 전학 사흘 만에 중일 공고 일짱을 묵사발로 만클어 놓는 것을 본 학생들은 그에게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무섭기도 했지만, 앞으로 있을 일진 연합회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뭐, 친구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었다 권주혁은 많은 친구를 가볍게 사귀기보다는 몇몇 친구를 깊게 사귀는 편이었다. 실제로 전주에 있을 때도 친구는 몇 안 되었지만, 그 친구들은 모두 목숨을 걸 만큼 친한 사이었다. 권주혁은 전주에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모르는 남학생 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니가 권주혁이냐?" "그렇다면?" “맞게 찾아은 것 같군” "일 없으면 좀 비켜줄래? 빨리 집에 가서 ‘꼬꼬마 텔레토비’ 봐야 하거든." 그 말에 두 남학생은 얼어불었다 꼬꼬마 텔 레토비? 그 왜 배에 텔레비전 달고 다니는 인형들을 말하는 건가? 그건 유아 교육용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는데. "이 자식 미친 거 아냐?" 권주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흣~ 우리 나나가 얼마나 귀여운지 알면 그런 말이 안 나오지." “......” 진짜 미친 거 아냐? 어찌되었든 두 남학생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좀 따라와라. 너 만나고 싶어 하는사람이 좀 있거든." "그래? 으음, 전학 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부터 날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니. 역시 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군." “......” "그런데 날 만나고 싶으면 직접 올 것이지 왜 나보고 오라 마라 하는 거냐?" "후후~ 그건 가보면 알 거다." "그래? 그럼 안 가면 모르겠군. 별로 안 궁금하니까 난 이만 가볼란다." 권주혁은 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깜짝 늘란 한 남학생은 권주혁의 어깨를 불잡았다 “이 새끼가 좋은 말로 하니까‥‥‥‥” 퍼억! 권주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믐을 들리며 주먹을 날렸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는 남학생. 권주혁은 구겨진 옷자락을 펴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하니까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다른 남학생은 무서웠는지 슬쩍 됫걸음질을 쳤다. “너 ,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그럼 어쩔 건데?아무튼 나 간다." "저쪽 공터에 대명고 애들 수십 명 잡아 놓고 있어!" 그 말에 권주혁은 멈칫했다. 그 모습을 븐 남학생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니가 안 오면 개들은 어떻게 될까?응?" "어떻게 되는데?" "뭐?" 권주혁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 이 학교에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 "그리고 이 학교에 친구 한 명 없거든." "그,그래서?" "내가 왜 거기로 가야하는지 다시 설명해 줄래?" “그,그건‥‥‥ 니, 니가 안 오면 개들 다 죽여 버릴 테니까...” 말을 하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권주혁이 이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이 학교 학생들을 잡아놓긴 했는데,그게 권주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 간다. 잘 있어라.” 권주혁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당황한 남학생이 소리쳤다. "야! 너 안 오면 개들 다 즉여 버린다니까?" 하지만 권주혁은 귀찮다는 듯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 계속 걸어갈뿐이었다 대명고 근처 공터에는수십 명의 남학생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 일진 연합회 소속 회원들이었다. 청기 공고 일짱 김승오, 명진고 일짱 최상철, 대천고 일짱 박기욱. 여기에 여상 일짱 송윤미와 중일 공고 일짱 한인주도 끼어있었다. 각 학교 일짱만 무려 다섯 명이나 모였다. 그리고 그들이 끌고 온 일진들만 무려 40명이 었다. 이 정토면 웬만한 폭력 조직과 싸워도 될 정도였다. 공터 중앙에는 대명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 20여명 정도가 몸을 움츠린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일진들이 포위하다시피 둘러싸고 있었다. "이 새끼 왜 안 와?" 그들이 기다리는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권주혁. 한인주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김승오가 손가락 뼈마디를 풀며 말했다. "깁스한 놈이 여기까지 뭐 하러 나왔어?" 한인주가 왼팔에 깁스를 한 몸을 끌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 새끼 밟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릴 것 같아." 당한만큼 반드시 갚아준다. 아니 ,수백 배로 돌려서 갚아준다. "하지만 그 새끼 확실히 주먹 좀 썼어. 그 정도로 싸우는 놈들은 요즘 드문데 말이야." 송윤미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핸드폰으로 고스톱을 치고 있던 명진고 일짱 최상철이 말했다. "그래봤자야. 다시는 기어오를 생각하지 못하게 제대로 밟아주면 그만이야." 대천고 일짱 박기욱이 그 말을 받았다. "어차피 잘 됐어. 한번 본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 " 그들의 대화를 들은 대명고 학생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집으로 가던 중에 이곳으로 끌려왔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이들의 대화를 들으니 대층 알 것 같았다 ‘권주혁이 오지 않으면 우린 어떡게 되는 거지?’ 주위를 둘러싼 놈들은 하나같이 살벌해보였다. 몇몇 놈들은 교복을 입은 채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어른들은 무서워서 아무 말토 못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그때 저쪽에서 두 남학생이 뛰어왔다. 권주혁을 데려오라고 보낸 놈들이었다. 한인주는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뭐야? 권주혁은 어딨어?" "그,그게‥‥‥ 그냥 가던데." "뭐? 이놈들 잡아두고 있다는 얘기는 했어?" "응. 그래도 그냥 가던데. 자기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면서." 일짱들 다섯 명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래도 이렇게 하면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은 내밀 줄 알았던 것이다. 가장 화가 난 사람은 당연 직접적인 피해자인 한인주였다. "그럼 끌고라도 왔어야 할 거 아냐!" “그, 그게 ‥‥‥” 한 남학생은 말을 흐리며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그의 얼굴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젠장!" "이제 어떡하지?" 김승오의 물음에 박기욱이 대답했다. "일단 저 새끼들부터 밟아야지." 최상철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야! 일단 여자애들은 보내."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폭력에 대한 충격을 더 받는다. 남자들은 어느 정도 맞더라도 그냥 참고 넘어가지만 여자들은 달랐다. 그래서 여자애들에게 손을 대면 잡음이 많이 생겼다. 어차피 본보기로 패는 거니, 여학생들은 건드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뭐 해? 빨리 안 꺼져!" 최상철이 소리치자 여학생들은 재빨리 가방을 들고 고망갔다. 남학생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요즘은 남녀평등이다 뭐다 난리인데, 왜 여자들만 보내? 이것도 남녀차별 아냐? 맞을 거면 공평하게 같이 맞아야지.’ 박기욱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적당히 밟아줘.얼굴은 건들지 말고.” 김승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대명고 남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꼰지르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지? 니들 얼굴 다 기억해 놨으니까 어떤 놈이든 주둥이 놀리기만 하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병신으로 만들어 버 린다. 팔다리 하나 병신 만들다 걸려도 소년원에서 일 년 정도 살고 나오면 그만이야. 평생 불구로 살고 싶지 않으면 입단속 잘해라." 한인주는 이를 박박 갈며 말했다. "원망하려면 권주혁 그 새끼를 원망해라. 그 새끼가 안 와서 니들이 대신 맞는 거니까." 40명의 일진들은 일제히 대명고 남학생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저항인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구타였다. 하지만 때리는 놈들의 얼굴에서 죄책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걸려서 경찰서에 끌려간다 하더라도 훈방 조치된다는 것을. 청소년 보호법과 학교가 보호해 줄 텐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다음 날. 한번 물 먹은 일진 연합회는 계획을 바꾸었다. 하교 시간에 맞춰 교문 주위에 매복해 있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주위의 눈이 있으니 교문 앞에서 싸움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쫓아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덮칠 생각이었다. 기습의 포인트는 들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원은 일짱 다섯 명을 제외하고 열 명의 일진이 전부였다. 다들 한 싸움 하니 한 놈 처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나온다." "저 새끼 맞지?" "응." 권주혁이 교문을 나오자 진을 치고 있던 일진 연합회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걸음을 옮기던 권주혁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등 뒤를 쏘아보고 있는 느낌. 권주혁은 쉽사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자연스레 주위를 살폈다. 자신을 노리는 이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단체로 물려왔구만.’ 주혁은 그런 놈클이 제일 싫었다. 일대일로 싸울 배짱도 없는 주제에 단체로 몰려다니며 힘을 과시하는 놈들. 그리고 그 힘으로 약한 자들을 짓밟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놈들. 전형적인 쓰레기였다. 하지만 쓰레기는 어디를 가든 널려있기 마련이다. 권주혁은 자신이 그 쓰례기가 될 생각도, 그 쓰레기를 주울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몸에 달라불는 쓰레기는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권주혁은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저 새끼 눈치 챘어!" "빨리 쫓아!" 어차피 들켰으니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가 없었다. 일진들은 그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권주혁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상대와의 거리를 최대한 벌려야 했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안 그래도 좁은 길에 노점상까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좁은 길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어깨가 부딪히고 몸이 부딪혔다. 도망치기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영화에서 보면 도망치는 주인공은 사람들 사이를 잘 피해서 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사이에 길이 제대로 나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에서처 럼 잘 비켜주지도 않는다. 권주혁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차도로 뛰어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일진들이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아는 놈도 한 놈 있었다. ‘팔에 깁스까지 하고도 잘 달리는군.’ 다친 건 팔이지 다리가 아니라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다리도 하나 부러뜨리는 건데. 이번에는 아주 작정을 한 듯했다. 끼이익 ! "야, 이 미친놈들아?" 빵빵! "제정신이야, 이 새끼들아? 지금 빨간불인 거 안 보여?" 순식간에 좁은 도로는 엉망이 되었다. 뒤따라오던 놈 중 한 놈은 재수가 없었는지 차에 치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진들은 계속 쫓아왔다. 권주혁은 숨이 차는 것을 느꼈다. 달리기라면 자신이 있었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감기라도 걸렸는지 몸이 무거웠다. "야! 거기서, 새까!" "도망쳐도 소용없어!" "당장 안 멈춰!" ‘빌어먹을. 쾌나 끈질기게 달라붙는군.’ 숨이 차오르자 자연스레 발이 느려졌다. 그런 상태에서 빨리 달리려다보니 스텝이 엉켰다. 주혁은 재빨리 일어났지만 왼쪽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삔 것 같았다. 주위를 들러보니 어떤 건물 앞 주차장이었다. 주차장 안은 SUV 차량 한 대가 있을 뿐 텅 비어있었다.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좀 있자 네 명의 남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일 공고 일짱 한인주와 청기 공고 일짱 김승오, 명진고 일짱 최상철, 그리고 대천고 일짱 박기욱 이렇게 넷이었다. 그중에서 권주혁 이 아는 사람은 한인주뿐이었다. "헥헥~ 새끼 도망치는 건 열라 빠르군." "어디 더 도망쳐봐, 새까!" 권주혁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가 이 모양이니 도망갈 수도 없었다. 권주혁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몰랐는데 난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타입인가 봐. 어제는 어떤 빠돌이 같은 놈들이 날 기다리더니, 오늘은 광팬들이 달려드는군,” 한인주는 이죽거리는 권주혁을 보며 소리쳤다. "씹새끼 주둥아리만 살아가지고. 넌 오늘 죽었어,새까!" “그래? 어떻게 죽여줄 건데? 저번처럼 찐하게 포옹이라도 하려고?” “이런 씨...” “야야, 됐어. 다친 놈은 가만히 있어. 저 새끼는 내가 처리할 테니.” 김승오가 한인주 앞으로 나섰다. "너 싸움 좀 한다며?" "남만큼은 하지." "새끼‥‥‥ 그럼 죽어!" 김승오는 예고도 없이 발차기를 날렸다. 권주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손으로 막아 충격을줄인 다음 옆구리에 끼웠다. 그 다음 비틀었다. 김승오는 자세가 무너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너무 자만하고 처음부터 발차기를 해댄 것이 잘믓이었다. 발차기는 강한 지닌대신 허점이 너무 컸다. 오죽하면 발차기 열 번 중 아홉 번은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겠는가? 이것이 일대일 승부였다면 권주혁이 이긴 걸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일짱이란 놈들은 일대일 승부보다는 다구리를 선호했다. 그들이 일대일 승부를 선호하는 경우는 자신의 승리가 확실시 되었을 때뿐이다. 권주혁이 김승오를 바닥에 눕힌 순간 박기욱과 최상철이 달려들었다. 퍽! 권주혁은 그 상창에서토 손으로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최상철의 공격밖에는 막지 못했다. 박기욱의 주먹은 권주혁의 머리를 때렸다. 몸이 비틀거리는 순간 이격이 들어왔다. 다음 공격은 턱이었다. 퍼억! 턱에 어퍼컷을 얻어맞은 권주혁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재빨리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먹의 충격이 그대로 뇌까지 전해져 평형감각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권주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에서 무수한 발길질이 쏟아졌다 “오빠아-!” "혀엉~?" 내 앞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어린 엘프들. 이것들 우르르 몰려오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심장이 벌렁벌렁 한다. 불안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내 앞에 몰려왔을까? 난 억지로 읏음을 지으며 물었다. "무,무슨 일이니,얘들아?" “오빠, 오빠, 저기에요‥‥‥” “저기? 저기가 어딘데?” "저기 사거리 말이에요." “응. 사거리가 왜? 거기서 교통사고라도 났니?" “아니요. 사거리 상가에요‥‥‥‥” "상가에 불이라도 났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오빠." "그게 아니면 뭐니?" “상가에 새롭게‥‥‥” "새롭게 단장했다고?" "그게 아니에요,형." “그러니까 그게 아니면 뭐냐고?”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동무를하며 합창했다 “치킨집이 생겼어요오-!” “......” 치킨집이 생겨? "그래서 어쩌라구?" “에헤헤~!” "뭐, 뭐니, 그 웃음들은?" "가격 파괴 치킨집이래요?" "안아요! 한 마리에 5천 원밖에 안 해요!" "후라이드 5천 원, 양념 6천 원이에요!" “......” 머리도 나쁜 것들이 그런 건 어떻게 다 외웠을까? "후라이드가 5천 원이고 양념이 6천 원인데, 나보고 어쩌라구?" 그러자 아이들은 다시 어깨등무를 하며 합창했다. "치킨 먹고 싶어요오~!" 얘들 합창하는 모습을 보니 일심동체, 초록은 동색, 가재는 게 편, 치킨으로 대동단결 등등의 말들이 떠오른다. 라이,루,루비 이 세 엘프는 먹을 것에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다 무서운 것들. "치, 치킨이 먹고 싶니?" "네에-!" “집에 밥 많이 남아있는데‥‥” "그래도 치킨이 먹고 싶어요오~!" "튀긴 음식은 몸에 안 좋다는 얘기도 못 들어봤니? 밥이 최고의 건강식품이래. 왜 옛말에 제 때 먹는 세 끼 밥이 보약이라는 말도 있잖아."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아직 집안에 루시아가 있다. 내가 그렇게 소리치면 얘들이 울 테고, 얘들이 울면 루시아가 득달같이 달려 나와 나를 마구 구박한다. "너무해요, 오빠! 어떻게 라이가 후라이드 치킨 먹고 싶어 하는거 뻔히 알면서 이러실 수가 있어요!" “맞아요. 루비가 양념 치킨 종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너무해요!”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보는 라이와 루비. 참고로 얘들 복장은 여전히 메이드복. “......” 이거 언제 벗을 건지 궁금해진다. 설마 이번 권 끝날 때까지 계속 이 복장이려나? "너희들 그 메이드복은 언제 벗을 거니?" "예? 벗어요?" 그러자 라이와 루비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비비 꼬았다. “헤헤~ 라이는 오빠가 원한다면 언제든 벗을 수 있어요오.” "루비는 오빠가 직접 벗겨주세요!" 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이상야릇한 대사를 내뱉는 라이와 루비. 그 모습이 너무 유혹적이어서 고저히 눈을 뗄 수 없‥‥‥긴 뭐가 없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르고 가슴도 평평한 것클이 지금 뭐하는 거니? 물론 이 세상에는 다앙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얘들이 이러는 걸 보고 흥분해서 코피를 쏟는놈들이 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난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쭉쭉 빵빵한 몸매의 여자를 좋아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다. 으음, 정말 너무 정상적이군. 그래도 이것들이 치마를 들어 올리며 이 오빠를 유혹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귀엽다. 어라? 그런데 니들 어디까지 올리는 거니? “......” 헉쓰! 괜티 보일 때까지 을리면 어쩌자는 거야? 라이와 루비 모두 귀여운 토끼가 그려진 횐색 팬티를 입고 있다. 역시 메이드복에는 횐색 팬티가 어을리려나? ...가 아니잖아!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라이와 루비의 치마를 내려주었다. "뭐하는 거야?팬티 다 보이잖아." "헤헤~ 괜찮아요. 오빠는 라이 팬티 봐도 돼요." "언니한테도 보여줬으니까, 공평하게 오빠한테토 보여줄래요." “......” 대체 얘들 누가 교육시켰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런데 루는 뭘 그럭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거니?설마 라이라 루비 치마 속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거니?" 내가 묻자 루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소리쳤다. "아,아니에요! 누가 재들 치마 속에 관심을 가질까봐요.7"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이라‥‥‥ 강력하게 아니라고 외치는 너의 모습이 수상하기 그지없구나." “아, 아니라니까요!” "하긴 니 나이면 여자에게 관심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 후후~ 조숙한 것 같으니라고." 난 루의 머리를 살다듬어주며 말했다 "루시아 치마 속에만 관심 갖지 않으면 된단다. " 흠칫! “......” 잠깐. 방금 얘가 흠칫 한 것 같은데? "뭐, 뭐야, 너 그 반응은?서,설마 오빠의 여자를 넘보는 거냐?" "아,아니에요.형." "헉! 설마 너도 오이디푸스처럼 이 형을 죽이고 루시아를 가로챌 생각? 이럴 수가! 내가 이제까지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라니까요! 제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뭐라? 형을 좋아해? 헉! 니, 니가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었을 줄은‥‥‥ 미안하다. 이 형은 남자인 너보다 여자인 라이와 루비가 훨씬 좋단다. 너왹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형을 용서해다오." "그게 아니잖아요! 됐어요! 이제 형이랑 얘기 안 할래요!" 루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획 돌렸다. 짜식이 삐지기는. “치킨 사 주세요, 오빠~.” "치킨 먹고 싶어요오." 내 옷깃을 붙잡으며 라이와 루비. 백날 애원해도 소용없어! 이 오빠가 한 번 안 된다고 했으면 안 되는 거야! 당장 방으로 들어가! ...라고 소리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아- 얘들이 좀만 덜 귀여웠으면 그렇게 소리치는 게 가능했을 텐데. "이 오빠가 요즘 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다음에 사주면 안 될까요?" "안 돼요! 오늘 개장한 거여서, 오늘 사면 서비스로 콜라도 준단 말이에요!" "맞아요. 지금 예쁜 언니들 와서 막막 옷 벗고 춤추고 있어요." "응?뭐라고? 예쁜 언니들이 읏 벗고 춤추고 있어?" "예." “......” 개장 행사로 내레이터 모델을 불렀나 보군. 내레이터 모델까지 불렀는데 내가 또 안 가볼 수 없다. 정말 가기 싫지만 내레이터 모델까지 불러 개장 행사를 하는데 안 가본다는 것은 동네 주민으로서 예의가 아니다. "그런데 그 언니들 진짜 예쁘니?" "우웅~ 뭐,그럭저럭이요." "루비보다는 덜 예뻐요." “......” 사실 얘들이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크면 절세 미녀가 될 게 분명하다. 문제는 얘들 다 클 때쯤이면 난 늙어죽는다는 거다. "빨리 사주세요오." "루비 배고프단 말이에요." 라이와 루비가 자꾸 매달리니 어쩔 수 없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알았어. 오빠가 사줄게. 저기 사거리라고 했지?" "네에~!" 난 일단 지갑을 착인해 보았다. 다행히 전에 루엔의 컴퓨터 맞춰주고 남은 돈이 조금 있었다. 한 마리에 5천 원이라고 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잘 다녀오세요, 오빠." "빨리 돌아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차 조심해요, 형." 아이들은 현관문 앞까지 와 나를 배웅해주었다. “그래,고맙구나. 그런데‥‥‥” 난 아이들을보며 물었다. "그 브이는 뭐니 ?" 아이들은 하나같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이건 브이가 아니에요, 오빠." "그럼 뭐니?" "두 마리 먹고 싶다는 뜻이에요." “......” 브이가 아니고 2였나? 참고로 여기서 두 마리란 셋이서 두 마리를 먹겠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물론 일반 가정집 애들이라면 셋이서 두 마리 먹으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다르다. 겨우 닭 두 마리를 누구 코에 갖다 붙인단 말인가? 돼지 두 마리라면 모를까. 한 엘프당 닭 두 마리씩을 원하고 있다. 얘들 식성에 그 정도는 기본이다. 얘들은 질량보존의 법칙마저 무시하는 엘프들이 아니던가? 돈이 모자랄까 걱정된다. "그,그래. 그럼 오빠 다녀올게." "안녕히 가세요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사거리에 있는 상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어제 신문에서 담뱃값이 또 오른다는 기사를 봤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담뱃값. 흡연자들이 설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정녕 이 것이 대세란 말인가?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난 저번에 사재기한 담배가 많이 남아있기에 몇 년 동안은 걱정 없다. 하지만 다른 흡연자들은 천정부지로 오른 담뱃값 때문에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피우는 담배 양을 줄이거나 심지어는 끊는 사람들까지 속출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젠 흡연자들도 뭉쳐야 한다. 흡연자들에 의한, 흡연자들을 위한, 흡연자들의 홉연을 해야 한다(뭔 소리냐?).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대로 있으면 흡연자들은 멸종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먼 역사책에 "과거에 흡연자들이 전세계적으로 분포했었다" 라고 서술될지도 모른다. 홉연자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그 특단의 대책이란 다름 아닌,내가 다음번 대선에 출마하는 것. 흡연으로 대동단결! ‥‥‥이라는 구호로 흡연자들에게 표를 호소하는 것이다. 으음, 정말로 한번 도전해 봐? 생각을 하는 사이 사거리에 도착했다. 개점한 치킨집을 찾는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개점 햄사를 하느라 주위가 시끌벅적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서 춤추는 내레이터 모델들. 짧은 미니스커트에 꽉 끼는 배꼽티를 입 정신없이 믐을 흔들어대고 있다. 굉장히 시원해 보이는 복장. 근처를 지나가는 남자들이나 치킨을 사느라 줄 서 있는 남자들은 정신없이 내레이터 모델들의 몸을 훌어보았다 대놓고 음흉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안 보는 척하며 은근슬쩍 보는 남자도 있다. 그 앞에서는 다른 내레이터 모델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는 풍선을 나눠주었다. 춤추는 내레이터 모델들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큰 가슴(어째 뽕이 클어간 것 같지만), 날씬한 허리 , 쭉 뻗은 다리‥‥‥ 확실히 객관적으로 보기에 예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냥 그랬다. 주위 여자들이 좀 미녀여야 말이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것 같은 라이레얼, 천사 같은 마음과 천사 같은 미모를 지닌 루시아,가만히 있으면 얼음 인형 같은 카르, 좀 간간하긴 하지만 그게 또 매력인 일루니아 여사님,그리고 극강의 귀염성과 깜찍성을 지닌 라이와 루비! 으음, 절세 미녀들과 같이 살다보니 괜히 눈만 높아졌다. 그래도 미녀들이 저렇게 시원한 복장을 하고 열심히 몸을 흔들어 대고 있으니 ,참 보기 좋다. 뭐, 남자들이야 고맙지. 그러고 보면 내레이터 모델도 참 훌릉한 직업인 것 같다.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만들어주는 직업은 그리 흔치 않으니. 예를 들어 정치인 같은 직업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만들어주기는커녕 복장 터지게 만들어주지 않는가? 한 내레이터 모델은 마이크를 붙잡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격 파괴 치킨 체인점, ‘오! 마이 닭대가리’ 가 지금 개점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치킨을 구매하신 고객님께는 500밀리리터 콜라를 서비스로 같이 드립니다. 이 좋은 기회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가격 파괴 치킨 체인점 ‘오! 마이 닭대가리’ 에서는 후라이드치킨을 5천 원에, 양념 치킨을 6천 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개점 기념으로 치킨을 구매하신 고객님께 500밀리리터 를라를 같이 드리고 있습니다. 이 좋은 기회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가격 파괴 치킨 체인점 ‘오! 마이 닭대가리’ 에서는 100퍼센트 순수 국산 닭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00퍼센트 순수 국산 닭만을 사용하니 고객님들께서는 안심하고 구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홍보 덕분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가게 주인과 점원들은 밀려드는 주문에 쉴 새 없이 닭을 튀기고 포장했다. 일반 치킨점의 치킨 가격이 1만 원 정도인 걸 생각하면, 확실히 싸긴 싸다. 이렇게 팔아서 남는 게 있나? ‥‥‥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원래 장사라는 게 남는 게 있으니까 하는 거다. 일단 이 치킨점은 배달을 하지 않고 손님들이 직접 사간다. 당연 배달 비용이 절약된다. 그리고 쿠폰이나 콜라 같은 서비스를 없애서 단가를 낮추었다(오늘은 개점 행사기 때문에 특별히 콜라를 껴주는 거다). 여기에 콜라나 찍어 먹는 소스를 따로 판매해서 부가 수익을 내고, 싼 가격을 무기로 박리다매하는 걸 감안해 본다면 남는 게 꽤 될 것이다. 난 기다리는 등안 내레이터 모델이 춤추는 걸 구경했다. 실컷 구경해 지루해 질 때쯤 내 차례가 돌아왔다. "후라이드 치킨 세 마리와 양념 치킨 세 마리 주세요." "후라이드 치킨 세 마리에 양념 치킨 세 마리, 합해서 여섯 마리 맞나요?" "예." "서비스로 500밀리리터 롤라 여섯 개를 드려야 하는데, 1.5리터짜리 두 개로 드려도 괜찮을까요?" "예. 그렇게 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후라이드 치킨 세 마리와 양념 치킨 세 마리딴‥‥ 헉 ! 3만3천원!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애클 간식비가 만만치 않구나. 가격 파괴 치킨점에서 사도 이 정도라니! 아아~ 간식비 대느라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 남들은 긴축재정이다 허리띠를 졸라맨다 난리를 치는데,우리 집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난 지갑에 남아있는 돈을 탈탈 털어 계산을 했다. 텅 빈 지갑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그래도 치킨을 먹으며 기뻐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다. 난 양손에 치킨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사일런스 지니를 만났다. "사일런스 백작님 !" "아!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어디서 돌아오시는 길인가요?" "예. 유치원 관계자들과 잠시 만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3,4층에 들어설 유치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설립인가도 받았고, 내부 인테 리어도 이제 마무리 단계라고 하더군요. 개원 날짜가 착정되어서 현재 아이들까지 모집하고 있습니다." "으음, 언제 들어서나 했는데 결국은 들어서는군요. 아! 그런데 가게 재개장은 대체 언제 하나요?" "준비 중입니다." "계속 준비 중이군요." "죄송합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 “......” 알긴 아는구나. 요즘 지니는 가게 재개장 문제와 유치원 개원 문제 등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집 안에서 펑펑 노는 내가 지니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하, 뭘요?사일런스 백작님 훌릉하신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렇게 겸손해하실 것 없습니다." "아닙니다. 저 같은 건 아이언스 공작님에게 비하면 한낱 티끌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 "잘 아니 다행이군요‥‥‥가 아니라, 티끌이라니요?그건 좀 너무했고, 그냥 태양 앞에 반딧불 같은 존재 정도가 적당하겠네요."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며 같이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퍽퍽! "권주혁 이 개새끼야?" "감히 날 자빠트렸다 이거지? 이런 씨발 새끼가!" "죽어, 이 새까!죽어?" "니 팔도 박살내 주마?" “......” 뭐야, 이 소리는?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역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을 마구 짓밟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모의 원수를 짓이기는 듯한 발길질. 여러 명이서 인정사정없이 한 사람을 짓밟 있다. 때리는 놈들은 전부 이성을 상실한 듯한 모습이었다. 잔뜩 흥분해서 발길질을 하는 모습이 마치 버서커(Berserker)같다. 저놈들은 폭력이 주는 광기와 쾌감에 취해있었다. 저런 식으로 때리다가는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리는 놈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하긴, 폭행치사라고 해봐야 초범의 경우 4년 정도 형을 살고 나오면 그만이다. 게다가 재들은 미성년자에 학생이니 1,2년 정도 소년원 생활하는 걸로 끝낼 수도 있다. 뭐,합의만 잘한다면 형을 사는 기간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사람을 죽여 봐야 고작 1, 2년 소년원 생활하면 그만이라니. 확실히 미성년자라는 타이틀과 청소년 보호법은 이래저래 쓸모가 많은 것 같다. 그나저나 저렇게 미친 듯이 패는 모습을 보니 요즘 고등학생들 살벌하긴 살벌하다. 저번에 뉴스 보니까 일진회다 뭐다 난리도 아니더라. 일진회 회원들은서 열대로 여자 일진들을 골라잡아 동침할 권리까지 가진다고 하니 말 다 했지. 뭐, 요즘 고등학생들이 일진회를 결성하든. 싸우다가 패 죽이든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내 가게 건물 앞 주차장에서 싸우고 있는 걸까?" 저놈들이 지금 집단 폭행을 하고 있는 장소는 법적으로 내 소유의 구역이다. 내 허락 없이는 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할 수 없고, 허락 없이는 들어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곳은 개인 소유 토지고, 그 소유자가 나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제 생각에는 말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지금 상황을 봤을 때 누군가가 말리지 않으면 폭행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치사로 이어질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만약 이곳에 사람이 죽는다면 가게에 대한 소문이 안좋아질 것입니다. " 그렇다. 지니의 말이 백번 옳다. 만약 인형 가게와 유치원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봐라. 어떤 부모가 그 인형 가게와 유치원에 애들을 데려 오겠는가? “......” 뭐,그런 문제를 떠나서 인포주의적 차원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대로 놔두면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않은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다’ 하였다. 그러니 천하의 아이언스 공작이 어찌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8권에서 써먹은 대사를 또 써먹은 나는 집단구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고등학생들에게 소리쳤다. "야! 지금 니들 뭐하는 거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7" 그러자 그늠들은 발길질을 멈추고 날 보았다. "젠장, 저 꼰대는 뭐야7" "저 새끼는 뭔데 끼어들어?그냥 갈 길 갈 것이지." “......” 꼰대? 새끼? 지금 나보고 그런 거 맞지? "야, 야, 됐어. 이제 그만해. 이 정도로 팼으면 이 새끼도 정신 차렸겠지. 괜히 누가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이만 가자." "씨, 씨발. 이 새끼 피를 좀 많이 흘리는데?" "조,좀 위험한 거 아냐?" "서, 설마 이 정도로 죽기야 하겠어?" 그제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는지 놈들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였따는 두려움은 일반인이 견디기 힘든 것이다. "씨,씨발. 빨리 튀어." “그런데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거야? 이러다 이 새끼 죽기라도 하면‥‥” "씨발, 이 정도로는 안 즉어. 빨리 튀기나 해." 놈들은 정말로 죽을까봐 두려웠는지 재빨리 도망쳤다. 눈앞에서 맞은 놈이 죽는다면,그건 자신들이 즉인 게 된다. 하지만 자리를 피한 상태에서 죽는다면, 그땐 ‘우리가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는 분명히 살아있었다. 그 자식이 재수가 없어서 죽은 거다. 결코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킬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해봐야 자신들이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게 원래 거짓말을 잘하는 종족이 아닌가? 남에게든, 자신에게든. 난 도망치는 녀석들을 뒤쫓는 대신 쓰러진 남학생에게 다가갔다. (물론 도망친 놈들의 얼굴은 전부 기억해 능았다). 남학생은 피 떡이 되어있었고, 바닥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으음,아스팔트에 스며든 피 닦아내려면 힘들겠군. 그렇다고 애들 왔다 갔다 하는 곳에 핏자국을 남겨둘 수도 없고. 쓰러진 남학생은 신음소리조차 내고 있지 않았다. 지니는 재빨리 남학생의 상태를 살폈다. “기절은 했지만 다행히 숨은 쉬고 있습니다. 왼쪽 팔과 갈비뼈가 부러졌군요. 폐에 이상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네요. 만약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찢었으면 큰일이었을 텐데 말이죠. 몸을 잘 응크린 덕에 그 외의 부위는 타박상과 찰과상 정도입니다. 두피가 찢어지고 머리가 깨져 출혈량이 많습니다. 이것도 어찌 보면 다행입니다.” “그렇죠. 내출혈이면 큰일이었을 테니.” 대체로 모든 부위가 그렇지만, 머리는 특히 외출혈보다 내출혈이 위험하다. 지금처럼 피가 홀러내리는 것이 낫지, 잘못해서 피가 안에 고일 경우에는 두개골을 열고 고인 피를 제거해야 한다. "회복 마법이라도 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출혈량이 좀 많긴 하지만, 치사량까지는 아니니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즉을 염려는 없습니다. 일단 119에 연락해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지니는 더 이상의 출혈이 생기지 않도록 상처부위를 막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119에 연락했다. 난 피투성이가 된 남학생을 보며 혀를 찼다. 요즘 고등학생들 막 나가도 너무 막 나가는 것 같다. 나 고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아!나 고등학교 중퇴했지. 생각해보면 처음 살인을 한 것도 고등학교 때다. 그때 정말 여럿 죽였지. 판타지 세계에서의 살벌한 삶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지금 삶은 너무 평화롭다. 이 세계에선 항상 칼을 차고 다닐 필요도 없으니. "뒤처리는 전부 백작님께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맡겨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를‥‥‥ 정확히는 제 손에 들린 치킨을 애타게 기다리는 엘프들이 셋이나 있는지라.” 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어서오세요오~!" 현관문을 열자 일렬로 서서 나를 맞는 어린 엘프들. 그들의 시선은 전부 내 손에 들린 치킨을 향해 있었다. 그 눈빛만 봐도 어린 엘프들의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부엌으로 걸어가자 어린 엘프들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난 식탁 위에 치킨을 을려놓았다. "잠깐!" 난 손을 뻗으려는 어린 엘프들을 제지맸다. "먹기 전 하늘같은 오빠의 은혜에 감사하려무나." "감사해요,오빠." "루비도 감사해요." "제가 형 종아하는 거 알죠?" 별 성의 없이 한마디 던지고 치킨에게 달려드는 어린 엘프들. 내가 얘들에게 윌 기대하겠냐? "천천히 먹어. 뼈는 삼키지 말고." 난 라이를 번쩍 들어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라이는 소금을 찍을 새도 없이 열심히 닭다리를 뜯었다. 아이구. 이 토실토실한 것. 난 라이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나저나 옷의 감촉이 참 곱다. 대체 무슨 원단으로 만든 걸까? 이 메이드복은 메이드 인 인디기 때문에 치수토 딱 맞고 바느질도 꼼꼼하다. 웬만한 해외 명굼 브랜드보다 백배는 낫다. 으음, 역시 가사 드래곤의 존재는 이래저래 쓸모가 많군. 루비와 루는 양념을 볼에 묻혀가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우리 귀여운 루가 어디 있나 했는데, 여기 있었네!" 갑자기 튀어나온 영아는 쪼르르 달려오더니 루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는 것이 아닌가? “......” 정말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인가? “치킨 먹고 있었네. 많이 먹어. 많이 먹고 빨리 커야지. 헤헤 ~” “......”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많이 먹고 빨리 크라고? 크면 어쩌 게 ? 아마 저 말 뒤에는 “그래서 누나한테 장가오렴”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루가 크면 절세 미남이 될 걸 알고 미리 작업을 거는 영아. 대체 누굴 닳아서 이렇게 영악한지 모르겠다. "영아야. 니 눈에 이 오빠는 안 보이니?" "아! 언제 왔어,오빠?" “‥‥‥아까부터 앉아있었다.” "까아! 우리 루 정말 너무 귀여운 것 같아. 누나는 루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내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루에게만 신경 쓰는 영아. 시커먼 속마음이 확실히 들여다보인다. "그림 지니랑 크로니스랑 라이레얼은 어쩌고?" “그, 그건‥‥‥‥” 영아는 입을 우물거릴 뿐 대답을 하지 믓했다. 하지만 여기서 밀리면 그건 앞짱구걸이 아니다. "공동 1등이야! 넷이서 공동 1등." “‥‥‥아주 쇼를 해라.” "내가 뭘! 그러는 오빠도 라이랑 루비 중에 누가 더 좋은지 말 못하잖아." “‥‥‥헉!" 니가 지금 반격을 하겠다는 거냐? 다행히 라이와 루비는 먹느라 정신이 없어 그 말을 믓 들은 듯했다. 만약 들었다면 누굴 더 좋아하냐고 날 마구 추궁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대답을 못하면 펑펑 울어댈 게 뻔하다. "누나가 먹여줄게." 영아는 루를 꼭 끌어안은 채 치킨을 먹여주었다. 목 막혀 하면 콜라도 먹여주었다. "헤헤~ 루는 누나가 정말 좋아요." "저, 정말? 아이, 좋아라~" “......” 재 상태가 왜 저 래? 어렸을 때도 상태가 안 좋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안 좋진 않았었는데. 설마 그새 유퉁기한이 지난 건가? 으음, 자세히 보니 좀 부패한 것 같기도 하다. “여기 다들 모여 있네.” "아! 루시아." "루시아 언니." 루시아는 치킨 먹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니가 사준 거야?" "응. 여기 앉아,루시아." 내가 옆 자리를 가리키자 루시아는 치마를 정리하며 앉았다. 여름 더위가 극성을 부리고 있지만 루시아의 치마는 그다지 짧아지지 않았다. 루시아는 여전히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소매가 있는 옷만 입었다. 적어도 민소매 원피스라도 입고 다니면 좋으련만. 루시아가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면 주위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될 게 분명하다. 얼마 전에 라이레얼의 경우를 봤기 때문에 확신할 쑤 있다. “......” 아니 , 어떤 놈팽이가 감히 나의 루시아를 훑어봐! 난 죽으면 죽었지 다른 남자들이 나의 루시아를 음흥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노출이 심한 읏을 입고 나한테만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응? 뭐라고?" “아, 아니야. 너도 좀 먹어,루시아. 날도 더운데 몸보신 해야지.” "난 됐어. 애들 많이 먹어야지." 어느새 다정하게 애들을 챙겨주는 루시아. 아이들을 다루는 손길이 아주 능숙하다. 정말로 아이들 엄마 같은 느낌이다. “저, 저기,루시아‥‥‥” "왜?" "요즘 날씨가 많이 덥지 않아?" "그래서?" "날씨가 더울 땐 얇은 옷 입고 다니는 게 좋대. 예를 들면 민소매같은 거 말이야. 아! 탱크탑도 괜찮아. 라이레얼 입고 다니는 거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시원해 보이잖아. 그리고 치마는 좀 짧게... 응?왜 그런 눈으로 봐,루시아?" 루시아는 살짝 인상을 쓰며 나를 흘겨보았다. "저질! 넌 항상 그런 생각밖에 안 하니?" "아, 아니 , 뭐 항상까진 아니고‥‥‥ 하루에 24시간 증 23시간 정도만‥‥‥ 그, 그리고 테가 뭐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날씨도 더운데 좀 시원하게 입고 다녀." "누구 좋으라고?" “그야 당연 나 좋으라고‥‥‥가 아니라 너 좋으라고 그러는 거지.” "나도 좀 시원하게 입고 다니고 싫어." "정말?" "그런데 내가 그런 옷 입고 다니면 이 집 안에 사는 어떤 남자가 날 음흥한 눈으로 쳐다볼 것 같아서 싫어." “뭐? 아니, 어떤 놈이 감히 나의 루시아를 융흉한 눈으로 쳐다봐? 대체 누구야? 지니? 인디?설마 크로니스? 헉! 서 ,설마‥‥” 난 시선을 슬쩍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닭날개를 뜯어막는 루에게 소리쳤다. "너 이 자식! 어쩐지 전부터 수상하다 했어! 너 오이디푸스와 무슨 관계야? 걔 니 친구지?걔가 그러라고 시키디? 빤리 불지 못해!" 그러자 루시아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 말이야, 너! 이 집에서 날 음흥한 눈으로 쳐다볼 남자가 너밖에 더 있어?" "응?나?내,내가 뭘?" "지금 물라서 물어?" "헉! 서 ,설마 날 짐승으로 생각하는 거야?" “응.” "헉쓰! 서,설마 날 못 믿는 거야?그런 거야,루시아?" "당연하지. 내가 그 날 그런 꼴을 당했는데, 널 어떻게 띤어:i" “......” 그 날이라면, 집들이하던 날을 말하는 거겠지? 그날 루시아는 술에 취해 골어 떨어졌고, 난 그런 루시아를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그때 난 분명히 그냥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양말을 신고 자는 루시아를 보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양말을 신고 자면 깼을 때 루시아가 얼마나 찝찝하겠는가? 그래서 인도주의적 정신(?)을 발휘해 양말을 벗겨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루시아가 몸을 뒤척였고, 치마가 살짝 을라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짐승으로 폴리모프했다. 그것도 보통 짐승이 아닌 웨어울프로.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 상황에서 늑대로 변하지 않을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도 난 초인적인 자제심으로 루시아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허벅지를 좀 만지긴 했지만‥‥‥ 뭐, 그 정도야 용서가‥‥‥ 안 되려나? 아무튼 난 결백하다(뭐가?). "그래. 나 짐승 맞아. 인정할게. 나는야 루시아의 귀여운 애완동물-." "좀 떨어져 줄래?" “......” 나름대로 용기내서 애교 부렸는데, 반응이 영 별로다. "헤헤~ 괜찮아요,오빠. 오빠한테는 오빠의 메이드 라이가 있잖아요." “그래, 라이야. 고마워-.” 난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어주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라이 볼의 감촉은 참으로 오묘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면서도 통통하고 보들보들하다. 아아~ 이 감촉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살짝 꼬집은 다음 잡아당기는 것도 재밌다. 볼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히잉- 아파요,오빠.” "앗! 미안해 , 라이야." "아! 그런데 아까 보니까 구급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던데, 대체 무슨 일이야?" 영아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날 보며 물었다. “아아~ 그거?그냥 좀 그릴 일이 생겼어.” 그러자 루시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인데?" "아까 치킨 사들고 돌아오는데 고등학생들이 한 놈을 다구리 놓더라구." "다구리?다구리가 무슨 말이야?" "으응. 집단 구타한다는 뜻이야. 아무튼 그놈들 쫓가내고 보니 쓰러진 남학생은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러져서 피투성이가 되어있더라구. 그래서 지니가 응급처치하고 구급차를 불렀어." "그런 일이 있었어?" "응. 뭐, 별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괜찮을까?" “괜찮을 테니 안심해.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러게 쉽게는 안 죽어." 그건 그렇다. 묶어놓고 몽등이로 패고 별 짓을 다 해도 쉽게 안죽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반대로 너무나 쉽게 죽는 것도 사람이다. 길 가다가 넘어져서도 죽고, 바늘 하나만 잘못 찔려도 죽는다.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괠 경우 정말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다. 그 고등학생들이 그걸 알고 팼는지 모르고 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이 죽고 나면 그땐 이미 늦는 거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자식 자물쇠로 바꾸니 열쇠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고 일일이 안에서 문을 열어줄 필요가 없어서 좋다. 들어온 사람은 지니 였다. "어떻게 되었나요?" "일단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식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주머니를 뒤져보니 핸드폰이 있어서 집에도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렇게 밟았는데 핸드폰이 멀쩡해요?" "액정이 깨졌더군요." "예?그림 번호를 어떻게 알아서 연락을 했어요?" “일반적으로 1번이나 2번에 집 전화번호를 저장해놓기 마련이지요.” "으음, 그렇군요." 핸드픈도 없는 내가 그런 걸 알 리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와 루시아가 커플 폰을 산다면 1번은 무조건 루시아 번호로 저장할 거라는 거다. "수고하셨습니다 " "별 말씀을요." 지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난 루시아를 보며 말했다. "멀쩡하대." "나도 들었어 ." 어느새 아이들은 치킨 여섯 마리를 해치우고 입가심으로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루시아는 아이들이 초토화 시킨 식탁을 정리하며 말했다. "콜라 마신 다음에는 꼭 이 닦아야 해. 알았지?" “네에-!” “언니가 나중에 닦았나 안 닦았나 검사할 거야. 바로 가서 이 닦아.” "제가 지켜볼게요, 언니." 영아는 아이들을 인솔해서 화장실로 향했다. 루시아는 아이들이 발라먹은 닭뼈들을 손으로 집어 비닐봉지 속에 넣었다. 아앗!나의 루시아가 이런 힘든 일을 하다니! "내가 할게. 루시아." "됐어." "아니야. 내가 할게." "그럼 이 컵들 씻고, 를라 페트병 좀 문 앞에 놔. 나중에 분리수거해야 하니까." "응. 알았어." 루시아가 시킨 대로 컵을 씻고 궤트병을 문 앞에 놓았다. 그리고 행주로 식탁도 깨끗하게 닦았다. 나는야 집안일을 돕는 다정한 남자~ "오늘따라 더 예쁜 것 같아,루시아." "그래서?" "나날이 예뻐지는 너의 모습에 저 하늘의 별도 빛을 잃고 있어." “지금 낮인데.” “......” 태양도 빛을 잃는다고 할 걸 그랬나? “난 너만 보면 참‥‥‥” "오늘도 루시아한테 열심히 져쩍대는 모습이 참 꼴사납군요." “‥‥‥꼴사나워.” "뭐!" 루시아는 인상을 쓰며 날 노려보았고,난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아니야,루시아. 이건 나를 음해하려는 누군가의 모함이야!"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봐요, 아즘마?"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인디는 다소곳해 보이는 티셔츠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쟨 뭘 입어도 여성스러워 보이는군. "무슨 일이야, 언니?" “그냥. 커피나 한 잔 마시려고.” 난 일루니아 여사님을 노려보며 말했다. "훗~ 날도 더운데 커피라니. 찜질방 불가마가 웃겠군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 눈빛을 태연하게 받으며 대꾸했다. "확실히 요즘 날이 덥긴 덥지요. 루시아 주위에 날파리가 꼬이는걸 보니 확실히 알겠네요." "뭐,뭐라?그 말은 내가 날파리라는 뜻?" "아니까 다행 이군요." "그러는 아줌마야말로 인디 옆에 진드기처럼 붙어 있잖아!" “루시아를 겁탈한 주제에 말이 많군요.” "언니!" 루시아는 얼굴을 새빨각게 불혔다. 난 이를 갈며 소리쳤다. "겁탈 안 했어!" "아! 말을 잘못했군요. 겁탈하려 했죠." "겁탈하려고도 안 했어!" "그럼 옷은 왜 벗겼죠?" "내가 안 벗겼다니까! 루시아가 스스로 벗은 거야! 그건 아줌마동생이 지문 감식까지 해서 증명했어!" "지니를 돈으로 매수한 거 누가 모를까 봐요?" "매수 안 했어! 난 결백해 !" "술 취한 루시아를 방으로 데려간 건 사실이죠?" “그,그야‥‥‥” "그리고 침대에 눕혔죠?" “그,그건 편하게 자게 해주려고...” "그리고 벗겼죠?" “안 벗겼어!” “이전의 진술과 상반되는 주장이군요. 그때 분명 양말을 벗겨주었다고 본인의 입으로 진술을 했었는데.” "양말만 벗겼어!" "왜 벗겼죠?" “아, 양말 정포는 벗겨주는 게 예의...” "그 다음엔 무슨 짓을 했죠?" “그, 그 다음엔...” 이런 식의 취조라니 ! "저의 결백은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그 건은 이미 그걸로 끝난 건데 왜 또 들춰내시는 거죠?" “권력이라는 게 좋긴 좋군요. 그런 큰 사건을 은폐하다니. 제대로 판결을 받았다면 사형감이었을 텐데 말이죠.” "아,아니, 이 아줌마가 또 망발을!"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생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지? 혹시 모르니까 임신 검사 한번 해봐. 약국에 가면 자가 임신 진단 시약 팔거든. 99퍼센트 이상 정확하대." "언니!" 루시아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런 루시아가 귀엽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여자들끼리의 저런 자연스런 스킨십. 사실 굉장히 부럽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나도 루시아 머리 쓸어 넘겨줄자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이 날보며 말했다. "뭐해요?" "예?뭘 하냐니요?" "커피 안 끓여요?" “예?커피라니‥‥‥ 아니, 이 아줌마가!” 누굴 다방 레지로 보나! 내가 버럭 화를 내려는데,루시아가 말했다. "나도 마시고 싶어." "그래? 진작 말하지 그랬어 ? 당장 끓일게." 난 재빨리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았다. "끓이는 김에 저와 인디님 것도 같이 끓이세요." “아니 , 뭐라‥‥‥‥” "그렇게 해." "알았어 , 루시아." 일루니아 여사님께 커피를 끓여 주기는 정말 싫지만 루시아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다. "저, 저도 도울게요, 히로님." 난 인디를 흘겨보았다.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예?" "커피 끓이는데 돕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내가 커피 넣고, 니가 설탕 넣을 거냐?" "죄, 죄송해요, 히로님." "됐어, 임마! 앉아 있어 " 인디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일루니아 여사님 옆에 앉았다. 사실 인디가 잘못한 건 없다. 별 도움은 안 줬지만,날 돕겠다고 나선 것이 기특하기도 하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께 당한 걸 생각하니 왠지 면박을 주고 싶어진다.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와 루시아도 일심동체라 할 수 있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난 준비해 놓은 잔에 따랐다. 그리고 커피를 탔다. 커피를 쾌 많이 타보았기에 각자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 지니만큼은 아니지만 내 커피 타는 솜씨도 제법이다. 가 커피잔을 앞에 내려놓자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고, 고맙긴. 니가 원한다면 맛있는 커피를 언제든 타줄 수 있어.” 인디 앞에 내려놓자 인디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히로님.” "그래. 히로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셔라." 난 마지막으로 일루니아 여사님 앞에 잔을 을려놓았다. 탁! "드시지요." "수고했어요. 이건 팁이에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렇게 말하며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 손에 올려놓았다. “이, 이건 뭡니까? 100원짜리도 아닌 10원짜리라니‥‥‥‥” "아이언스 공작님의 가치가 100원씩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10원도 많이 쳐준 거예요." 빠드득!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건가?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당장 피의 보복을‥‥ "과자 좀 내다줘. 커피만 마시려니 좀 허전하다." "아, 알았어." 난 접시에 크래커를 담아 내왔다. 루시아는 크래커를 하나 집어 반으로 잘랐다. 그리고 그중 한 쪽은 댁고, 나머지 한 쪽은 나에게 내밀었다. "먹어." “......” 헉! 루시아가 날 챙겨주다니 ! "머, 먹여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난 진심을 밝히며 슬쩍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노려보았다. "그,그냥 내가 알아서 먹을게." "됐어. 먹여줄게." "저,정말?" "단 이번 한 번만이야. "응응. " 난 입을 벌렸다. 그러자 루시아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크래커를 내 입 안에 넣어주었다. 난 오물오물 크래커를 씹었다. 아아~ 맛있다. 내 평생 이렁게 맛있는 크래커는 처음 먹어븐다. 같은 크래커여도 루시아가 먹여주니 이렇게 맛있구나. 라이가 이 말 들으면 펑펑 울 게 뻔하지만, 라이가 먹여준 것보다 백배는 더 맛있는 것 같다 미안해, 라이야. 그렇다고 우리 라이가 먹여주는 게 맛이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란다. 후후~봤느나? 루시아가 직접 크래커를 나에게 먹여주는 모습을. 난 씨익 웃으며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를 보았다. “......” 헉쓰! 저 둘 지금 뭐하는 거야?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서로의 입에 크래커를 넣어주는 것도 모자라 크래커 양쪽 끝을 각자 입으로 물었다. 아니, 이게 무슨 빼빼로도 아니고‥‥‥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커플. 그리고 그 애정행각을 주도하는 것은 일루니아 여사님이다. 사감 선생님같이 깐깐하게 생기신 일루니아 여사님. 겉보기에는 남녀의 애정행위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일 것 같은 느낌 이다. 왜 손 잡고 걷는 남녀만 봐도 혀를 차며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등등의 대사를 남발하는 아줌마들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전혀 예상 외로 일루니아 여사님은 애정행위에 적극적이시다. 어디를 가든 항상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남들 앞에서 키스나 스킨십도 스스럼없이 하신다. 훗~ 나이도 먹을 만큼 먹으신 분이 주책이군. ...이라고 비웃고 싶지만, 다정하게 애정햄각을 벌이는 둘을 보면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아주 작정을 하고 염장을 지르는 것 같다. 깐깐하고 신경질적인 노처녀 일루니아 여사님과 외모와 성격 모두 여자 같은 소심 드래곤 인디.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두 사람(한 사람과 한 드래곤?)이지만 의외로 너무 잘 어울린다. 저 둘을 보고 있으면 천생연분이라는 게 정말로 있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난 일루니아 여사님이 영원히 결흔 못하실 줄 알았다. 미모는 제법이지만 성격이 너무 깐간하고 신경질적이다. 그리고 굉장한 엘리트이자 페미니스트다. 그런 만큼 웬만한 남자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드래곤 만나서 잘 살게 될 즐 누가 알았겠는가? 으음,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속담이 맞긴 맞나 보다. "사랑해요, 인디님." "저도 사랑해요, 일루니아님." “그 말은 언제 들어도 지겹지 않아요. 하루에 수백 번을 들어도요.” "저도 그래요. 저는 일루니아님을 만나기 위해 그 긴 시간을 홀로 살아은 것 같아요. 일루니아님이 없는 삶은 더 이상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에요." “일루니아님‥‥‥‥” “인디님...” “......”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아주 잘하는 짓이다. 아니, 애정행각을 벌일 팬 벌이더라도 주위 이목을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솔로들 앞에서 이런 식의 염장질은 범죄나 다름없다. 일루니아 여사님 적극적인 거야 둘째 치고, 인디 저놈은 왜 저래? 평소에는 소심해서 말도 제대로 믓하는 놈이 일루니아 여사님한테는 저 런 낯 뜨거운 대사를 마구 남발하다니! 설마 이것도 사랑의 힘? 나저나 염장질의 공격력이 만만치 않다.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느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나도 루시아랑 저런 짓 좀 해봤으면‥‥‥ 루시아가 일루니아 여사님 반만이라도 적극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끓는 속을 삭히기 위해 커피를 원샷으로 들이켰다. “...헉쓰쓰!” 이렇게 뜨거울 수가! 알아차렸을 때 커피는 이미 식도를 타고 넘어간 뒤였다. “괜찮아?” “......” 전혀 괜찮지 않다. 입천장이 다 까지고 목구멍까지 데인 것 같다 “물,물‥‥‥” "아, 알았어." 루시아는 재빨리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냈다. 난 그것을 뺏다시피 해서 받아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켁켁!” 너무 급하게 마셨기 때문인지 사레가 들려 먹은 물을 다시 토해냈다. 루시아는 재빨리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제 좀 낫군. "하아~ 죽는 줄 알았다." “아주 생쇼를 하시는군요. 아이큐가 몇인지 심히 궁금해지네요.” “......” 아니, 이 아줌마가!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소리칠 힘도 없다. "커피 잘 마겼어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나갔다. 루시아는 한심하다는 눈길로 날 보며 말했다. "왜 갑자기 뜨거운 커피를 원샷하고 그래? "그,그러게. 왜 그랬을까?" "니가 그래놓고누구한테 물어?" "그러게." "하여튼 한심하다니까." “......” 아아~ 루시아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저번 권에서는 침대까지 갔었다. 뭐, 결국에는 그게 다였지만. 그때 잘했으면 그렇고 그런 관계까지 진전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권에서 나는 대체 뭘 했는가? 침대까지 가기는커녕 키스 한 번 못 했다 저번 권에서는 키스신도 쾌 많았는데 말이야. 빠른 아이들 동생 제작을 위해서라도 내가 분발해야 한다. 난 루시아 손을 꼭 붙잡았다. “왜 그래?” 어리둥절 하는 루시아. 난 그녀를 냉장고 쪽으로 밀쳤다. "왜, 왜 그러는데?" "사랑해 , 루시아." "또 그 소리야?"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반응이 별로다. 난 그윽한 눈길로 루시아를 보며 물었다. "키스해도 돼?" 그러자 루시아는 바로 대답했다 "안 돼." “......” 너무 바로 대답한다. 한 번 정도는 생각해봐도 좋은데. "아니, 왜? "너 입 안다 데였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그, 그러니까 니가 소독해주는 의미에서...” "균들어가면 오히려 안좋아." “......” 그,그런! “그리고 그런 눈길로 좀 보지 마. 느끼해 죽겠어!” 루시아는 내 손을 탁 치고는 부엌을 빠져 나갔다. 아아~ 무안하다. 너무 무안해서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난 루시아가 간 것을 확인한 다음 소리쳤다. "인간적으로 정말 너무 튕기는 거 아니야?남자가 이렇게까지 하면 못 이기는 척 넘어와 주는 게 예의 아니야?내가 너 아니면 여자가 없을까봐?나 좋다는 여자 줄을 섰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정말 나 졸다는 여자 줄을 섰다. 비록 라이와 루비 들만 서 있긴 하지만 어쨌든 줄은 줄이다. 으음,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내가 불쌍하게 느껴지는군. 며칠 후. 현재 나의 위치는 윽탑방. 난 그곳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만화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푸헤헤헤~” 순식간에 한 권을 다 읽은 나는 책을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3권." "오빠가 직접 뽑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던 영아가 나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난 그런 영아를 보며 말했다. "아이미스?" “응. 히노의 일대기를 그린 판타지 소설 말이야. 저번에 교주님이 보고 계셔 원고 넘겼으니, 이젠 아이미스 넘길 차례야.” "그런데 왜 그렇게 돌아다녀?" "생각이 안 나서. 스토리가 막혔어." "어디서 막혔는데?" "그러니까 히노가 옛날에 세네라랑 헤어졌잖아." "뭐, 그랬지." “나중에 히노가 아이미스 왕국의 긍작이 된 다음에 헤니오 왕국으로 찾아가거든. 사일넌스 지리랑 마법사 길드의 수장이자 초절정 귀염등이인 나이랑 같이 말이야. 이곳 무도회장에서 히노가 세네라를 다시 만나는 장면을 쓰려고 해. 이 장면을 대체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어.” “......” 난 알겠다. 그러니까 그때가 아마‥‥‥ 내 기억에는 8권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헤리오 왕궁에 볼일이 있었다. 그 볼일이란 다름 아닌 아이리스 왕국과 헤리오 왕국의 동맹 체결이다. 그런데 감히 병사들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와 지니와 라이와 칼리(라이의 비서)는 근위병들을 때려눕히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길로 무도회장을 향해 내달렸다. 그곳에서 세레나와 라나와 재회를 했지. 덤으로 라이레얼과도 재회를‥‥‥ 아아~ 또 다시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때 내 주가는 최고치였다. 수많은 여자들이 나를 차지하려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지. 후후후~. 역시 판타지 세계 여자들은 남자 보는 눈이 있다니까. “이 오빠 생각에는 말이다‥‥‥” "응?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영아는 기대감 섞 인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난 피식 읏으며 말했다. “뭐,좋은 생각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아무튼 이 오빠 생각에는 히로가..” "히로가 아니라 히노." "아! 그렇지. 그러니까 히노가 혜니오 왕국으로 들어갈 때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들어가기보다는 바로 무포회장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히노와 지리의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하잖아. 여기에 라이‥‥‥ 가 아니라 나이까지 있으니까. 나이가 정신연령은 좀 낮아도 마법은 잘 쓰잖니 ?그링게 바로 무도회장으로 쳐들어가서 좀 싸우다가 정체를 밝히는 거야. 그리고 싸음이 끝나는 순간 세네라와 재회를 하는 거지. 어때?" 난 영아의 는치를 살폈다. 영아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바로 그거야, 오빠! 확실히 히노 스타일에 정상적인 방법은 좀 안 어울리지. 으음. 무도회장 침입이라. 그게 훨씬 나은 것 같아. 오빠 말대로 쓰는 게 좋겠다. 고마워, 오빠." "별 말씀을." "그런데 오빠는 그런 스토리를 대체 어떡게 생각해낸 거야? 작가인 나도 생각 믓했는데." "뭐, 그냥 떠오른 대로 말했을 뿐이야." ‥‥‥라기보다는,내가 실제로 겪은 일을 말한 것뿐이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오빠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네." "뭐라? 굼벵이? 하늘같은 오빠를 굼벵이로 비유한 거냐? 니가 정녕 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은 게냐?" "쳇! 무슨 말만 하면 쫓아낸대." "훗~ 세입자 쫓가내기는 집주인의 필살스킬이지." 영아는 궁시렁거리면서도 계속해서 글을 썼다. 막힌 스토리가 플리니 잘 써지나 보다. "그런데 니가 웬일이냐? 만날 펑펑 놀던 애가 열심히 글을 쓰고." “으응. 이젠 조금씩이라도 미리미리 써두려고. 하루에 한 권 쓰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더라고.” “......” 하루에 한 권 쓰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닌 게 아니라, 인간이 하기엔 불가능한 짓 아닌가? "아무튼 잘 생각했다. 저번처럼 최모 편집자가 집까지 쫓아오면 이래저래 곤란하지.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좀 열심히 써놓으렴." “알았어.” 조금 쓰나 싶던 영아는 다시 머리를 벅벅 긁더니 방바닥에 엎드렸다. "야!글 안 써?" "이상하게 글이 안 써져." "안 써져도 써야지. 누구는 공부하고 싶어서 공부하고, 일하고 싶어서 일하냐?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법이야." "몰라 몰라. 안 써지는 걸 어떡해? 생각해보니 아직 마감까지는 시간이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만 놀고 내일부터 열심히 써야겠다." “......” 대체적으로 저런 말 하는 작가치고 마감 지키는 작가를 못 봤다. 영아는 정말로 더 이상 글 쓸 생각이 없는지 노트북을 닫았다. "읽던 책이나 마저 다 읽어야겠다. " 영아는 ‘말단영업 성직자’ 라는 판타지 소설을 뽑아들더니 침대에 털썩 누웠다. "이 오빠가 누워있는 거 안 보이니 , 영아야?" "보여." "보이는데 감히 옆에 누운 거란 말이야?" "오빠가 좀 옆으로 비키면 되잖아 " "뭐라? 침대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피고 누워서 만화책 읽는 것을 유일한 휴식이라 생각하는 이 오빠에게 옆으로 비키라고?" "어차피 이거 내 침대잖아!" "응?무슨 소리니 ? 이 침대 내 돈 주고 산 건데." "어쨌든 지금은 내가 이 집에서 살고 있잖아. 이 집 임대할 때 가구도 같이 임대한 거야." "물론 가구도 같이 임대했지. 하지만 침대는 아니야." "왜? 침대도 가구잖아." "흣~ 침대는 가구가 아니야. 과학이지." “......” 순식간에 얼어붙은 영아. 정신을 차린 영아는 심하게 추운지 이불을 뒤집어쓰며 물었다. "그거 대체 언젯적 개그야?" “그 ,글쎄‥‥‥” "오빠가 말하고도 미안하지 ?" “......” 좀 미안하긴 하다. "아무튼 남녀가 유별하니 어찌 같은 침대를 쓸 수 있겠니? 그러니 늦게 온 네가 내려가렴." "싫어. 오빠가 내려가. 요즘은 여성 상위시대래." “......” 그거랑 이거랑 무슨 관련이 있니? 결국 우리는 같이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그러나 조금 읽나 싶던 영아는 이내 책을 덮으며 드러누웠다. "아아~ 우리 루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크로니스 오빠랑 지니 오빠는?라이레얼 언니는?" “......” 앞짱구걸 좋겠네. 챙길 사람도 많고. 그러고 보면 영아는 라이레얼과 키스까지 했다. 정확히는 라이레얼이 강제로 한 거지만. 대체 여자끼리 키스할 때 기분은 어떨까? 남녀가 키스할 때와 똑같을까? "라이레얼과 키스할 때 어땠니?" "응?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 "그,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어?" 영아는 얼굴을 붉히며 두 손을 뺨에 얹었다. "아아~ 생각만 해도 황홀해. 키스가 그런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마치 몸이 다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어." "설마‥‥‥ 그게 첫키스?" "응." “......” 첫키스를 여자랑 했단 말인가? 뭐, 열 살짜리 꼬마애랑 첫키스한 나보다는 나으려나? 지금으로부터 한참된 일이지만,나의 첫키스는 라나가 뺏어 갔다. 그때부터 나는 로리콘으로 찍혔지. 으음,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추억이‥‥‥ 아니려나? "아아~ 나의 첫키스를 언니에게 바치다니. 난 이제 언니의 것이나 다름없어." “......” 너까지 이 글의 백합화를 주도하기냐? 옛날에는 영아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지금 보니 판타지 세계에 던져놔도 매우 잘 살 것 같다. 나 대신 니가 금화를 주웠으면, 이 글이 더 재밌어졌을지도 모르겠구나. "이제 지니 오빠랑 크로니스 오빠랑 루와 키스하는 것만 남았네. 이번엔 루를 공략해봐야겠다." 주먹을 불끈 쥐며 공략의 의지를 보이는 영아. 정말로 루를 잡아먹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아! 그러고 보니‥‥‥” 영아는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뭐야?왜 그래?" "오빠도 라이레얼 언니랑 키스했잖아?" “그, 그건‥‥‥” 헉! 기억하고 있었던 거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응?” "동생의 여자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 동생의 여자? 누가? "어떻게 동생의 여자한테까지 손을 뻗칠 수 있는 거야? 오빠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 "내가 넓은 마음으로 이번 한 번만 모른 척 넘어가 주겠어. 하지만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러면 그땐 정말 용서 안 할 거야." “......”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아니,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어디서 감히 사촌오빠한테 망발을! "니가 용서 안 하면 어쩔 건데?" “그,그건‥‥‥” 대답을 믓하는 영아.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나 보다. 난 기회를 놓칠세라 소리쳤다. "감히 사촌오빠인 나에게 웅서를 운운하다니 ! 튀어나은 앞짱구만큼이나 간댕이도 튀어나왔구나!" "루시아 언니한테 이를 거야!" "뭐 , 뭐 ?"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랑 키스한 거 루시아 언니한테 다 이를 거라고. " “......” 헉 !그렇게 치사한 방법을! 다행히 그 일은 루시아가 모르고 넘어갔지만, 알면 당장 이혼(?)감이다. 루시아 성격상 뒤도 안 돌아보고 갈 게 뻔하다. 내가 다른 여자와 손만 잡아도 화내는 루시아. 라이레얼과 키스한 사실이 알려지면 그날로 난 죽음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영아는 앞으로도 계속 나의 약점을 쥐고 흔들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를 테면 일러라 누가 겁먹을 줄 알고.” "그래? 알았어 ." 영아는 바로 큰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영웅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한테 키스했어요! 그것도 아주 찐하게 했어요!" “......” 헉! 하란다고 진짜 하냐? 난 재빨리 영아를 붙잡고 입을 틀어막았다. "읍읍! 왜 이래? 이르라며? 당장 내려가서 루시아 언니한테 다 말 할 거야." "시끄러! 나의 빅장 40단 콤보에 자비심이란 없다." "영웅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한테 키스‥‥‥ 읍읍" 난 더욱 세게 영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정보가 새는 것을 방지하려면 살인멸구가 최고다. 죽은 자는 말을 못하는 법이니. 아아~ 한순간의 자비가 일을 그르치는구나! 내 핏줄이라 살려주려 했거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끄아악! 이 앞짱구가 감히 오빠의 손을 물다니!" "살려주세요! 영웅 오빠가 절 죽이려고 해요!" 영아는 내 손을 깨물고 재빨리 소리쳤다. 난 다시 영아의 입을 틀어막고 침대 위에 쓰러트렸다. 영아는 내 굼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가만히 있지 못해!" "싫어! 당장 내려가서 루시아 언니한테 이를 거야!" "아니,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 "까아악! 살려‥‥‥ 읍읍!" 난 다시 영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방음 처리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층까지 들릴 염려는 없지만,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 난 영아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좋아. 우리 헙상을 하도록 하자 조용히 한다고 약속하면 손을 치워주지. 오케이?" "읍읍!" "뭐야? 예스라는 거야,노라는 거야?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읍읍@" “......” 아! 내가 입을 막고 있어서 말을 못하는군. "예스라고 알고,손을 치워도 되겠지?" "읍읍!"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영아. 난 조심스럽게 입을 막은 손을 치웠다. 그러자 영아는 숨을 몰아쉬었다. "루시아한테 말하면 너 이 집에서 쫓아낸다." "흥! 내가 쫓겨나기 전에 오빠가 먼저 쫓겨날 걸." “......” 그건 그렇다. "그래서 말하겠다는 거야,뭐야?" "응. 말하겠다는 거야." “아니,뭐라? 너 정말 이러기야?” "먼저 오빠가 잘뭇했잖아." "내가 윌 잘못했는데?" "그림 동생의 여자를 건드린 게 잘한 짓이야?" “‥‥‥‥그렇게 말하니 어째 내가 무지하게 나쁜 놈처럼 느껴지는구나” "응. 굉장히 나빠." "그러니까 라이레얼이 언제부터 니 여자가 됐는데?" "내가 언니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 그러니 ? 이 오빠는 미처 몰랐구나 "조크하냐?" "진짜야." "그러니까 그건 니 생각이고. 라이레얼 생각은 다르지 않을까?" "아니야. 언니가 나한테 키스를 해준 순간,나는느꼈어. 아! 언니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 하고." “......”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난 벌써 라이레얼이랑 결흔해 쿼터 엘프 낳고 잘 살고 있겠다. 내가 라이레얼과 키스한 것만도 수십 번인데.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그런 착각을 하기에 앞서 너의 앞짱구를 생각해보는 게 어떠니?" "뭐? 오빠 말 다 했어 ?" 영아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목청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영웅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한테 키스‥‥‥ 읍읍?" 난 재빨리 영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독한 것 같으니라고. 니가 정녕 이 오빠 이혼 당하는꼴을 보겠다는 거냐? "읍읍!" 내 손에서 풀려나기 위해 발광을 해대는 영아. 난 한 손으로는 영아의 입을 틀어막필 다른 한 손으로는 영아를 껴안았다. 두 팔을 움직이지 믓하도록. 여기 박스 테이프나 재갈 없나? 입을 좀 막아야 할 것 같은데. “읍읍! 살려주‥‥‥” 그 순간,바닥 뚜껑이 열리며 루시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내려와서 밥 먹어...” 루시아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아하하. 오랜만이야,루시아." 순식간에 루시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리고 눈 꼬리가 치켜 을라가며 눈빛에 경멸이 어렸다. "왜 , 왜 그래‥‥‥?" 그제야 난 지금 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영아는 침대에 누워있고, 그 위에 내가 올라타 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떠 입을 틀어막고 있고,다른 한 손으로는 영아를 껴안고 있다. 침대보는 잔뜩 헝클어져 있고.주위의 책은 와르르 무너져 있다. 영아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고, 옷도 말려 올라가 있다. 그리고 우리 둘다 땀에 흠뻑 젖어있다 뭔가 이상야릇한 오해를 하기 에 층분한 상황. 나 같아도 이런 장면을 보면 지금 루시아가 하고 있는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이, 이...” “아 , 아니야,루시아! 이건 절대 니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야!넌 지금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어!” “변태!저질! 색마!” 루시아는 손에 잡히는 것들을 마구 던졌다. 안타깝게도 영아의 방바닥에는 책이 가득 널려 있었다. 다시 말해 탄환은 무한대에 가깝다는 것이다. 퍽!퍽! "지, 진정해,루시아?" "진정하긴 윌 진정해?" "전부 오해야!" "오해는 무슨 오해?니가 영아를 덮치는 걸 봤는데,7" "아, 아니야! 영아는 내 사촌여동생이야! 설마 사촌오빠인 내가 사촌여동생을 덮치기야 하겠어?" "그럼 내가 븐 건 뭐야,7" “정말 아니야!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줘! 내가 아무리 굻주렸어도 그렇지 어떡게 앞짱구를‥‥‥” "뭐?오빠 말 다 했어?자꾸 그림 나 언니한테 다 말할‥‥‥ 읍읍!" "조용히 해, 이 앞짱구야!" 루시아는 정말 화가 났는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책을 던졌다. 퍽!퍽! 매우 아팠지만 난 피할 수도 없었다. 피하면 루시아가 더 화내기 때문이다. 이럴 땐 그냥 얻어맞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게 최선이다. 퍼억! "까악! 그만해요, 언니!" 영아는 바로 내 옆에 있었기에 나와 같이 책을 얻어맞앗다. 영아가 앞짱구에 정통으로 책을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자 루시아는 손을 멈추었다. "괜찮아?" "히잉~ 아파요, 언니." "미안해, 영아야." 루시아는 침대로 다가와 영아의 알짱구를 만져주고 호호~ 입김을 불어주었다 "저, 저기,루시아 나도 여기 아픈데." 찌릿! "아,아니. 그렇다고. 특별히 호~ 해달라는 건 아니야." 루시아는 영아를 살짝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영아는 루시아 품에 안겨 날 돌아보며 혀를 비죽 내밀었다. 메룽~ 훗~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도발할 수 있다 생각하나? ‥‥‥라지만 왠지 모르게 열 받는군. 뿌드득! 루시아는 흥분이 많이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루시아가 날 노려보며 말했다. "설명해 봐." "그, 그게 그러니까 장난 좀 친 것뿐이야 사촌오빠와 사촌여동생으로서 말이지. 결코 내가 영아를 덮치려고 한 게 아니야. 그, 그치 , 영아야?" 영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날 보았다 난 간절한 눈빛으로 영아를 보았다. 만약 영아가 여기서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면 그대로 이혼서류에 도장이 찍히게 된다. 이 오빠가 모두 잘못했어. 한 번만 웅서해저, 영아야. 다시는 안그릴게. 이 오빠 살려주는 셈 치고 한 번만 도와줘. 제발! “맞아요, 언니. 서로 만화책 먼저 보겠다고 싸우다가 그런 것 뿐이에요. 호호~ 아무리 영응 오빠가 색마라지만, 설마 사촌여동생인 저한테까지 손을 뺀치기야 하겠어요? 라이레얼 언니라면 또 모를까‥‥‥‥”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리는 영아. 떄문에 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루시아는 의심 섞인 눈길로 날보았다. “정말이지?” "응웅. 정말이야. 믿어줘,루시아." "흥!내가 뭘 보고 널 믿어?" “......” 그래도 표정을보니 오해가풀린 것 같다. 아아~ 다행이다. 빰빠라- 빰빰빠- 이 시끄러운 소리는 영아의 핸드폰 벨소리다. "아! 전화 왔다. " 영아는 챈드폰을 가지러 갔다. 난 그 사이 재빨리 루시아 옆으로 다가가 손을 꼭 붙잡았다. "내가 침대에 쓰러트리고 싶은 여자는 너뿐이야." “뭐!” 루시아는 눈을 치켜뜨며 날 노려보았다. 헉! 내가 무슨 대사를! "아,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야!" "이 저질!" "아, 아니야, 루시아! 나도 알고 보면 순진한 남자라고." "순진? 대체 어디가 순진한데?" “......” 글쎄? 어디가 순진할까? 괜히 나도 궁금해지는군. 이럴 땐 무조건 말 돌리는 게 최고다. "손이 참 가늘 예쁘다. 루시아. 이 반지도 너무 예쁘다 어라? 내 손에 끼워진 반지랑 똑같네.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역시 우리는 천생 연분인가 봐." 루시아는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친다보았다. “저리 좀 가줄래?귀찮아 죽겠거든.” “......” 웃자고 한 소린데.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내가 아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찝쩍거리다보면, 언젠간 루시아도 내게 마음의 문을 열겠지. 흠흠, 뭐 몸의 문도 열어주면 더 좋고. “예? 그게 정말이에요, 엄마?” 영아는 핸드폰을 붙잡은 채 소리치고 있었다. 엄마? 영아의 엄마라면 큰어머닌데...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지? "아직 방학도 안 했잖아요. 예? 그럼 어떡해요? 핸드픈에 연락은 해봤어요? 알았어요, 엄마. 만약 저한테 연락 오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예. 전 걱정 마세요. 영웅 오빠도 잘 있어요. 예. 오빠한테 고맙다고 얘기 전해드릴게요. 예.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알았어요. 예. 들어가세요." 통화를 끝마친 영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영아의 표정이 자뭇 심각해보였다. "무슨 일이야?" 영아는 내 말을 못 클었는지 팔짱을 낀 채 방 안을 빙빙 들았다. 재 저러는 모습을 보니까 나까지 초조해진다. 그렇게 빙빙 돌던 영아는 쌓아놓은 책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콰당! 영아는 쓰러진 상태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아프냐?" "히잉~ 엄청 아파 " 영아는 울상을 지으며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래저래 튀어나온 앞짱구는 수난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방금 큰어머니 전화 맞지?" "응. 영진이가 가출했대." "뭐 ? 누가 가출해 ?" "영진이." "영진이? 갠 뭐하는 앤데?" "오빠 영진이 몰라?박영진." "박영진?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니 남자친구냐?" "뭔 소리야!내 동생이잖아. 오빠한테는 사촌남동생?" "아아~ 내 사촌남동생 영진이‥‥‥라는 애가 있었냐?" “......” 영아는 날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정말 기억 안 나?" "응." "나보다 한 살 어린 애 있잖아." "너 외동딸 아니었어?" "아니야?" "으음, 이건 또 신선한 충격이로군. 나도 모르는 영아의 남동생이라니." "오빠 진짜 진짜 기억 안 나?" "응. " "어렸을 때 몇 번 같이 놀았었잖아." "그랬니?" "응. " "그런데 난 왜 기억이 안 날까? 뭐,남자 같은 건 기억에서 지워져도 상관없긴 하지만." 사실은 친형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으음, 역시 내 뇌는 여성 전용? “좋아. 너한테 박영진이라는 남동생이 있다 치자.” "있다 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있다니까." "아무튼!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영진이가 가출했다니까!아까 뭐 들었어?” “아! 그랬었냐?그런데 왜 가출했대?" "나도 몰라 아침에 보니까 없어졌대." "핸드폰은?" "연락 안 된대. 아무래도 일부러 안 받는 것 같대." “흐음‥‥‥‥” "아이씨! 고 3인 애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어!" 영아는 속상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화를 냈다. "고 3?" "응. 나보다 한 살 어리니까 고등학교 3학년이지." "생각해보니 그럭군. 그런데 지금 고등학교 방학했나?" "아직 안 했어. 기말고사 보기 전이야 그래서 지금 엄마 기절하시기 일보 직전이야." "으음,뭐 걱정할 거 없어. 검정고시라는 게 있으니까." 영아는 갑자기 는 꼬리를 치켜떴다. "오빠 지금 장난해? 남은 지금 걱정돼서 죽겠는데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아, 아니. 왜 니가 흥분하고 그러니?너 지금 검정고시를 우습게 보는 거야? "검정고시는 학교 못 나온 사람들이나 보는 거잖아." "뭐라? 너 지금 그래서 검정고시를 무시하는 거야?" "내가 검정고시를 무시하든 말든 오빠가 왜 흥분하고 그래?" "그걸 몰라서 묻냐? 나도 고등학교 때려치우고 검정고시 봐서 고졸됐어! 검정고시를 무시한다는 것은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획득한 날 무시하는 짓이나 다름없어!"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영아는 깜짝 놀랐다. "오,오빠 고둥학교 때려치웠었어?" “그래. 난 고등학교 중퇴고, 넌 대학교 중퇴지. 누구는 좋겠어. 가방끈 길어서. 쳇! 쳇!” “오빠, 삐졌어?” “누가 삐졌다 그래! 흥! 흥!” “삐진 거 맞는데?” “안 삐졌다니까!” "미안해,오빠. 난 오빠가 검정고시 본줄 몰랐어." "어머,그러세요?"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게 미안하다는사람 태도야?" "그럼 내가 어털게 해야 하는데?" “......” “......” 나와 영아는 서로를 노려본 채 씩씩거렸다. 루시아는 그런 우리를 뜯어말렸다. "둘 다 그만해 ." “언니 , 오빠가요 먼저 ‥‥” “아니야,루시아. 재가 먼저‥‥‥” "둘 다 그만하라니까?" 루시아가 소리를 지르자 우리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런데 어쩌다 검정고시 얘기가 나온 거지? "아! 니 남등생 가출한 거 얘기하는 중이었지. 그런데 왜 가출했대?" "엄마도 모르겠대. 아침에 깨보니까 사라졌대." "으음,뭐 특별히 이상한 징후는 없었고?" "응. 처음에는 학교에 간 줄 알았는데 학교에 전화해보니 없다는 거야. 아! 그리고 영진이 친구 증 몇 명도 같이 사라졌대." "친구들이 같이 사라져?" "응. " "으음,뭔가 감히 잡히기 시작하는군." 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이와 비슷한 일이 과거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을 중심으로 추측해보자면... "헉!" "왜 그래,오빠? 뭔가 알아냈어?" 영아의 재촉에 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과거에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지. 그리고 아마 나의 예상이 맞다면, 영진이와 친구들은‥‥” “...?” "개구리를 잡으러 갔어?" "뭐? 개구리?" "그래!개구리! 이건 나의 추리니까 확실해!" "오빠 지금 나랑 장난해!" 영아는 화를 버럭 내며 나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난 그 공격을 가볍게 피했고, 영아는 침대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장난이라니? 이 오빠의 추리는 완벽하단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영진이와 친구들. 그들은 근처 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나간 게 틀림없어. 설마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플었던 개구리 소년 사건을 잊은 건 아니겠지?" 영아는 고개를 들며 외쳤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잘 생각해보면 상관이 있을 것 같지 않니? 원래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라잖아 " "말이 되는 소릴 좀 해!" "오빠의 완벽한 추리를 무시하다니. 그러다 벌 받는다. 너." 한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개구리 소년 사건. 아마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1년 3월 26일. 대구시 달서구 이극동 성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다섯 명의 소년. 우철원(당시 13살, 성소초등 6년), 조호연(12살, 5년), 김영규(11살, 4년), 박찬인(10살, 3년), 김종식(9살, 3년). 이 다섯 명의 소년들은 와죵산에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전국은 난리가 났다. 부모들은 하던 일까지 내팽개치고 자식을 되찾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다. 납치되었다. 살해되었다. 섬으로 팔려 갔다 등등 수많은 소문이 떠돌았다. 개구리 소년에게 상금이 걸리고,수많은 전단지가 배포되었다. 전국에서 개구리 소년을 봤다는 목격자가 속출했다. 부모들은 목격 전화가 걸려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하지만 전부 허사였다. 부모들의 피 나는 노력과 범국민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11년 후인 2002년 9월 26일,개구리 소년들은 대구시 달서구 응산동 성산고교 신축공사장 뒤편 500미터 떨어진 와룡산 중턱 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들이 실종되었을 당시 나는 그들과 비슷한 또래였다. 지금도 1리터 우유팩에 인쇄되어 있던 그들의 사진이 기억난다. “으음, 그럼 조만간 우유팩에 인쇄된 영진이의 사진을 볼 수 있겠군.” "그만하라니까! 개가 뭐 하러 개구리를 잡으러 가?" "혹시 아니? 개구리 잡아오면 생물 점수 만점 준다고 생물 선생이 꼬겼을지."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 "촌지 받아 챙기는 선생들이 수두룩한데, 개구리 받아 챙기는 선생 한둘쯤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그, 그런가?" "학교도 많고 양심 없는 선생들도 많은 게 대한민국 교육계의 현실이지. 뭐, 고 3이면 다 큰 거나 다름없으니 안심하렴. 밥이나 먹으러 내려가자." "동생이 없어졌는데 밥이 넘어갈 것 같아?" 그 순간, 영아의 뱃속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 “......” 잠시 침묵. 난 불쌍하다는 눈으로 영아를 보며 말했다. "매우 많이 부끄럽겠다. 그치?" “...응." 우리는 일단 아래로 내려가 밥을 먹었다. 동생이 없어져서 밥이 안 넘어간다던 영아는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아아~ 영진이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왜 아직까지 연락이 없지?” 끊임없이 걱정을 하며 끊임없이 수저를 놀리는 영아. 걱정 때문에 밥을 못 먹겠다는 주제에 저렇게 많이 먹다니. 걱정 안 할 때는 얼마나 먹을지 두럽다. 집세 올려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밥을 먹은 영아는 어린 엘프들과 놀아주었다. 영아는 심심해하는 어린 엘프들을 위해 고무줄놀이를 가르쳐주었다. 고무줄놀이. 국민 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유명한 놀이이다. 원칙상 여자들만 플레이하게 되어 있지만,가끔 소심한 남자애들이 같이 플레이하기도 한다. 누나의 강압에 못 이겨 플레이하는 경우도 있다. 게임 룰은 간단하다. 두 사람이 양쪽에서 고무줄을 잡아 준다. 그러면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다리에 고무줄을 걸고 노래에 맞추어 앞과 옆, 뒤로 팔짝팔짝 뛴다. 최소 플레이어는 3명이고(줄 잡아 주는 사람 두 명, 안에서 뛰는 사람 한 명), 그 이상이면 여러 명이서 짝을 지어 할 수 있다. 만약 플레이어가 모자를 경우에는 기둥에 고무줄을 묶고 하기도 한다. 놀이 방법은 고무줄에 발이 닿지 않게 넘기, 고무줄에 얼마나 높이 다리를 걸 수 있는가를 겨루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응? 고무줄놀이에 대해 어떡게 그렇게 잘 아냐고? 흠흠,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긴 뭐하지만 사실 나 고무즐놀이 마니아다. 어렸을 때 나름대로 이름을 날렸다. ‘고무줄놀이의 제왕 박영웅’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여자애들에게 인기 폭발이었다. 나랑 편먹으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기에. 뭐, 대신 남자애들에겐 왕따 당했지만 산골짜기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 파알딱 팔딱 팔딱 날도 정말 좋구나 라이와 루비가 고무줄을 잡아주자, 영아는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을 넘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얘들아." "푸하하~ 가소롭도다! 어찌 그 정도 가지고 고무줄놀이의 오묘한 진리를 깨우쳤다 할 수 있겠느냐?" 내가 크게 비읏자 영아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뭐?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나 해?오빠는 나만큼이라도 할 수 있어?" "후후~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난 영아를 밀쳤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잘 봐라!한때 고무줄놀이의 제왕이라 불렸던 본좌의 모습을!"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멀리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난 깜찍 발랄하게 노래를 부르며 엄청난 스피드로 고무줄을 넘었다. "후후~ 잘 보았느냐?" 나의 실력에 영아와 어린 엘프들은 깜짝 놀랐다. "우와! 굉장해요, 오빠!" "오빠 최고로 멋져요?" "형 대단해요,7" “어, 어???게 오빠가 고무줄놀이를...” 난 놀라는 영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훗~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이런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 아냐?그럼 이제 좀 난이도를 높여볼까?" 고무줄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린다. 처음에 바닥에 있던 고무줄은 발목, 무릎, 엉덩이, 허리, 어깨, 머리, 머리 약간 위, 머리, 머리 약간 위, 머리 엄청 위로 올라간다. 당연 그때마다 난이도는 점점 어려워진다. 최고 난이도까지 올라가면 발로는 할 수가 없어 손으로 고무줄을 내리며 해야 한다. 난 단 한번의 걸림 없이 그 모든 단계를 클리어 했다. 으음, 예전에 비해 실력이 많이 줄었군. 한때는 타임 어택에 도전해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말이야. 참고로 퐁당퐁당 노래 모든 난이도 전 세계 최단 기록 보유자가 나다. 당시 옆 동네 여자애가 최단 기록을가지고 있었는데,내가 그것을 무려 3.5초나 앞당겼다 기네스북에 등재하려고 협회에 연락까지 했는데, 아쉽게도 실패했다. 고무줄놀이 기륵은 안 받아준다더라. 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흠치며 말했다. "보았느냐?나의 이 깜찍 발랄한 모습을. 음하하하!" "대, 대단해 , 오빠." 이게 모르는사람이 보면,그냥 ‘잘하네’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무줄놀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본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영아는 눈이 휘둥그레져있었다. "내 평생 오빠처림 고무줄놀이 잘하는 사람은 처음 봐. 우리 동네 언니들도 오빠만큼은 못해. 아니 ,오빠 발꿈치도 못 따라가." "음하하하! 이제야 이 오빠의 위대함을 알았느냐?" 난 두 손을 허리에 얹고 호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엘프들은 내 옷깃을 잡고 매달리며 말했다. "라이도 해볼래요!" "루비도 하고 싶어요?" "저도요!" "그래,그래. 오빠한 거 봤지?그대로따라하면 돼." 나와 영아는 양쪽에서 고무줄을 잡아 주었다. 아이들은 산토끼 노래를 부르며 깜찍 발랄하게 고무줄을 넘었다. 얘들이 기억력이 좀 많이 딸리긴 하지만, 그래도 학습 능력은 좋은 편이다. 특히 놀이에 관련된 학습 능력은 발군이다 그렁기에 짧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하고 있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가느냐 깡충깡충 뛰어서 어디를 가느냐 설거지를 끝마친 루시아가 놀이방으로 왔다. 루시아는 깜찍 발랄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내게 물었다. "뭐하는 거야?" "고무줄놀이라는 거야. 아!너도 해볼래?되게 쉬워." "그럴까?" 아이들 뛰노는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루시아도 고무줄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몇 번 고무줄에 발이 걸리던 루시아는 이내 방법을 터득했다. 두 손으로 살짝 치마를 걷어 올린 채 고무줄늘이를 하는 루시아. 아아~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마침 인원도 딱 여섯 명이었기에, 우리는 세 명씩 편을 먹고 팀배틀을 하기로 했다. 나와 라이와 루비가 편을 먹고,루시아와 영아와 루가 편을 먹었다 만약 태그 배틀로 한다면,우리 팀이 무조건 이긴다. 왜냐하면 고무줄놀이 좀 한다는 사람 수백 명이 달려들어포 나한테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팀원 증 한 명이라도 발이 걸리면 그 팀이 지는 게임 방식을 택했다. 첫판은 우리 팀이 이기고,둘째 판은 루시아 팀이 이겼다. 그리고 셋째 판을 하려는 순간 영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빰빠라- 빰빰빠- 핸드폰을 받아든 영아는 깜짝 놀랐다. "영진이니? 너 지금 어디야? 너 때은에 집안이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알기나 알아?" 드디어 영진이가 연락을 했나보군. “뭐?서울이라고? 서울엔 왜 올라왔어? 알았어. 일단 여기로 와. 엄마한테 안 이를 테니까 일단 와! 여기가 어디냐면...” 주소를 불러준 영아는다시 한번 다짐을 받은 뒤에 전화를 끊었다. "영진이야?" "응. 지금 서울이래." "걔가 서울엔 무슨 일이래?" "나도 몰라 일단 이쪽으로 은다니까 얘기를 들어봐야지." "이곳으로 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우리 집 엔 못 들어오게 해. 옥탑방까지 들어오는 건 괜찮아도 이 집에 들어오는 건 절대 안돼." "왜?" "난 이 집에 다른 사람 들어오는 거 싫어." "사촌남동생 이잖아." "그래도 싫어. 너까지는 용납해도 그 이상은 안 돼. 사실 널 이 집에 들이는 것도 엄청 큰 결정이었어." "왜 싫은데?" "우리 사는 거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싫어. 너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가 좀 특이하게 살잖니? 남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싫고, 이렇게 사는 거 이해시키기 위해 떠들어대는 것도 싫어." 이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그건 다른 사람들과 상관없는 문제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들이 워낙 특이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계속 관심을 갖는다. 난 그들이 이해해주길 바라지토 않고, 그들을 이해시킬 생각도 없다. 영아는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알았어. 그럭게 할게. 대신 오빠도 같이 영진이 만나줘. 나 혼자서 집에 돌아가라고 설득하긴 힘들 것 같으니까." “좋아. 어차피 걔가 여기 붙어있으면 나도 곤란하니 협조해 주마.” 난 옥상에서 영아와 함께 영진을 기다렸다. 영진이 나타난 것은 전화온 지 약 1시간 후쯤이었다. 옥상으로 을라온 교복 입은 남자 셋. 난 영아에게 물었다. "재들 중 누가 영진이냐?" "가운데 있는 애." "진짜?너랑 전혀 안 닮았는데?" "영진이는 원래 나랑 안 닮았어." "생긴 거 안 닳은 건 둘째 치고 키가 너무 차이 나잖아. 넌 숏다린데 잰 왜 저렇게 키가 커?" "누가 숏다리야?" 가운데 있는 남학생은 키가 족히 180센티는 넘어보였다. 얼굴도 꽤 잘 생긴 편이고, 체격도 좋다 으음,그런데 쯤 시건방진 표정을 하고 있군. 그 왼쪽에 있는 남학생은 키가 좀 작고 얼굴이 새까맸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남학생은 중간 정도 키에 희멀건한 얼굴이었다. "누나." 영진은 영아를 보더니 한 걸음 다가왔다. 영아는 그런 영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미쳤어? 학교는 어쩌고 여기에 온 거야? 그리고 조금 있으면 기말고사잖아!”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됐으니까 빨리 내려가! 엄마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기나 알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보다 나 돈 좀 줘,누나." "뭐?" "돈 좀 달라고. 급하게 을라오느라 얼마못 갖고 와서 그래."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그건 누나가 알 필요 없는 일이야." "싫어. 난 못 줘." 영아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획 돌리자 영진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 달라니까! 누나 돈 많잖아!" "까악!" 깜짝 놀란 영아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나는 영아의 앞으로나섰다. "야,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영아가 깜짝 놀랐잖아." 그러자 영진은 눈을부라리며 날 노려보았다. "뭐야,넌?" “‥‥‥‥응?" 얘가 방금 뭐라 그랬지? 너라 그랬나? “누나 설마 이새끼랑 동거하는 거야?” “......” 이 새끼 ? "누나 제정신이야? 어떻게 남자랑 동거를 할 수가 있어?" 영진은 영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영아는 그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뭔 소리야! 영웅 오빠잖아! 서울 작은아버지 작은 아들. 너 기억안 나?" "그,그래?" 영진은 의심 섞인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난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꽤 오랜만에 보네. 너 마지막으로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많이 컸다.” “...예.” 영진은 내 손을 붙잡았다. 영아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 그냥 아는 척 하는 거지,뭐 그런 걸로 태클을 걸고 그러니? "뒤에 있는 애들은 친구냐?" "예." 영아는 영진을 잡아끌었다. "일단 들어와.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리하여 이곳은 옥탑방 안. 영진과 두 남학생은 바닥에 앉았다 영아는 그들에게 차가운 주스를 내주었다. "돈 줄 거야, 말 거야?" 영진이의 관심사는 오직 돈인 듯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주지." "그럼 말하면 줄 거야?" "일단 들어보고." 영진은 앞에 놓인 주스를 한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나 주혁이 알지?" "주혁이? 권주혁? 당연 알지. 개 너랑 단짝 친구잖아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붙어 다녔잖아. 그런데 주혁이가 왜?" "주혁이가 얼마 전에 서울로 전학을 갔어." "어머, 진짜? 무슨 일로?"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 받았다나 뭐라나. 아무튼 대명 고등학교라는 곳으로 전학을 갔어." "너 되게 서운했겠다. 그래서 개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올라온거야?" “......” “......” 한순간 침묵. 영아도 은근히 맹한 구석이 있다. 설마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남자가 남자보고 싶어서 학교까지 때려치우고 전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왔겠냐? 영진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걔 지금 서울 병원에 입원해 있어. 혼수상태야.” 그 말에 영아는 깜짝 놀랐다. "뭐?그게 정말이야?" "응.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 안다는데,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대." "지, 진짜?" “......” 영진은 대답 대신 이를 악 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줬는데?교통사고라도 당한 거야?" 영진은 고개를 저 었다. "아니. 다구리 당했어." "다. 다구리 ?" "전학 온 학교에서 일진들과 시비가 좀 붙었나 봐. 어떻게 잘 넘긴 모양인데, 나중에 하굣길에 다구리를 당했어. 얼마나 심하게 당했는지 머리가 다 깨졌대. 아마 지나가는 사람이 신고하지 않았다면 과다 출혈로 즉었을 거야." “그, 그런‥‥‥‥” 말을 하던 영진은 화가 나는지 주먹으로 맨바닥을 찍었다. 쾅!쾅! “......” 아래층 울린다. 그만 해라. 화가 난 건 영진의 뒤에 있는 두 남학생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들은 그 남학생과 꽤 친한 사이 였는지 하나같이 이를 갈았다. "그래서 문병하러 온 거야?걱정돼서?" 영진은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 "그럼 무슨 일로 은 거야?" "복수하러." "응?" "자꾸 같은 말 두 번하게 만들지 마. 복수하러 왔다니까. 주혁이 그렇게 만든 새끼들 다 죽여 버릴 거야." "뭐,뭐? 범인이 누군지 어떻게 알고?" "누군지 대충 짐작은 가. 이 지역 일진 연합회 놈들 짓이야. 알만한 놈들은 다 알더군. 그 새끼들 족치다 보면 주혁이 그렇게 만든 새끼가 누군지 나을 거야." 영아의 얼굴이 하약게 질렸다. "너,너 제정신이야?" "물론 제정신이야. 아무튼 당분간 서울에서 지내야 할 것 같으니까 돈이나 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 일은 경찰에 신고해야지 니가 뭘 어쩌겠다는 거야?" "경찰에 신고해 봐야 소용없어! 증거도 없는데 짭새들이 어쩌겠어? 그리고 설사 그렇게 해서 잡혀간다고 해도 기껏해야 1, 2년 정도 살고 나오면 그만이야!" "그래서 니가 어쩔 건데?" "복수한다니까! 주혁이 그렇게 만든 놈들한테 똑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할 거라고!" 소리치는 영진의 눈은 실핏줄이 터질 듯블게 달아올랐다. 어지간히 열 받은 모양이다. 영아는 그런 영진이 두려운지 믐을 떨었다. “미, 미쳤어...” 영아가 벌벌 떨자 영진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를 백뻑 피며 흥분을 삭히는 영진. 그 모습에 두 남학생도 거리낌 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좁은 옥탈방은 금세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콜륵콜록." 담배를 안 피는 영아는 금방 기침을 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영진은 꽁초를 컵 안에 버리고 그 안에 가래침을 뱉었다. "빨리 돈이나 줘. 나 가게." 영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줘. 아니 ,못 줘.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래, 나 제정신 아니야. 주혁이가 그 꼴 당했는데 내가 제정신일 리 있겠어?주혁이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는 누나도 잘 알잖아! 주혁인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친구야! 그런 친구가 그 꼴을 당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 “......” 목숨을 건 친구 좋아하시네. 무슨 영웅본색 찍냐? 영아는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러지 마, 영진아. 일단 전주로 다시 내려가. 니가 지금 이러는 건 옳은 행동이 아니야." "제기랄!누나 정말 이러기야!" "부탁이야, 영진아. 누나 말 들어.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기나 해?니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이건 아니야." "누나가 뭘 알아! 됐으니까 돈이나 내 놔!" "싫다니까! 너한테 줄 돈 없어! 빨리 나가!" "안 주면 내가 가져간다." "그, 그만둬!" 영진이 지갑을 뺏으려 하자 영아는 지갑을 꼭 껴안은 채 몸을 웅크렸다. 영진은 영아에게 달려들어 억지로지갑을 빼앗았다. 영아는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젊은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안 돼!" 영진은 결국 지갑을 빼앗았다 그 순간,나는 벌떡 일어나 영진의 손에 들린 지갑을 낚아챘다. "뭐야?" 날 노려보며 소리치는 영진.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야, 진정해라. 누가 보면 강도인 줄 알겠다. 니 사정이 급한 건 알겠는데,그래도 누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니가 이러면 누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니?” 그러자 영진이 소리쳤다. "당신이 뭔 상관인데?" “......” 다. 당신? 난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야. 나 니 사촌형이거든." "그래서 어쩌라고?" "아니,그래서 어쩌라고가 아니라 나 니 사촌형이라니까." "당신이 사촌형인 거 알겠으니까,빨리 지갑이나 내 놔." “......” 이 자식 싸가지 봐라. 안 주면 뺏어 갈 기세다. 난 영진이 못 알아듣는 것 같아 쉽게 알 수 있도록 침착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촌지간이야. 우리는 같은 할아버지를 두고 있고,너희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형제 사이지. 그리고 난 너보다 일찍 태어났어. 즉, 형이지. 그런데 우리가 사촌이니 내가 너의 사촌형 이 되는 거야. 이제 이해가 되니?" "헛소리 그만 하고 지갑이나 내 놔." “......” 헛소리? 나의 친절한 설명이 헛소리? 이젠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힌다. 아아~ 안 돼. 흥분하면 안 돼. 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니가 윤리시간에 졸았나 본데, 사촌동생인 니가 사촌형인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란다. 알겠니?" "하아~ 진짜 미치겠네." 영진은 갑자기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쾅!광! “......” 왜 남의 집에 화풀이니? 난 영진의 주먹을 보며 물었다. "주먹 안 아프니 ?" 영진은 손를 몇 번 털었다. 아마 무지하게 아플 것이다. 영진은 애써 안 아픈 척 하며 말했다. "나 지금 무지하게 화 나 있거든. 생각 같아선 사촌형이고 뭐가 패버리고 싶은데,누나 앞이어서 참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지갑 내 놔라." “......” 이젠 협박에 명령까지! 난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시 말했다. “니가 아직 이해를 못 했나 본데,난 니 사촌형...” “이 씨발!” 영진은 욕을 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만해! 너 영웅 오빠한테 무슨 짓이야?" 깜짝 늘란 영아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영진의 주먹은 내 눈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의 사랑스러운 사촌남동생 영진을 보며 말했다. “잠깐 밖으로 나와라.” (아이리스 10권에서 계속) 전주 큰아버지는 결혼을 늦게 하셨다. 때문에 전주 큰아버지의 자식들은 다 나 보다 나이가 어리다. 전주 큰아버지는 슬하에 일남일녀를 두었다. 박영아. 박영진. 영아는 키가 작고 귀엽게 생긴 여자애다. 앞이마가 약간 튀어나와 있어 내가 어 렸을 때부터 앞짱구라고 놀려댔고, 그 때문인지 앞머리를 길게 길러 항상 이마 를 가리고 다닌다. 꿈은 작가이고, 얼마 전 그 꿈을 이루었다. 처녀작 '질투' 가 대박 터져서 돈방석에 앉았고, 현재 책상자 출판사에서 '교주 님이 보고 계셔' , '아이미스' 를 출간 중이다. 힘들게 합격한 대학은 교수와 대판 싸운 끝에 때려치웠다.참고로 영아의 부모님 은 이 사실을 아직 모르신다.아직도 딸이 대학에 잘 다니고 있는 줄 알고 계신 다. 만약 아시게 된다면 기절하실지도 모른다. 얼마 전부터 우리 집에 들어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영진은......으음, 사실 얘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원래 남자 얼굴은 잘 기 억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랑 형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영아와 영진은 연년생의 남매다. 즉, 영진이 한 살 어리다. 영진은 현재 고등학교 3학년.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피 터지게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영진이 갑자기 서울에 올라왔다. 이유는 일진회 학생들에게 얻어맞아 혼 수상태에 빠진 친구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지가 무슨 영웅본색의 주윤발도 아니고, 뭔 친구의 복수를 하겠다고 전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영진은 서울에 머무르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아에게 돈 을 달라고 했다. 책이 엄청 잘 팔린 만큼 영아는 돈이 쌔고 쌨다. 하지만 학업 때려치우고 친구 복수를 하겠다고 난리치는 동생에게 뭐가 예쁘다 고 돈을 주겠는가? 영아는 거절했지만 영진은 마구잡이로 돈을 뜯어가려 했다. 사촌오빠이자 사촌형으로서 내가 어찌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난 당당하게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영진이 영아에게서 빼앗은 지갑을 도 로 빼앗았다. 그러자 영진은 화를 냈다. 난 사촌형으로서 사촌남동생인 영진을 좋은 말로 타일렀다. 그런데 이 자식이 욕을 하더니 주먹까지 휘두르는 게 아닌가? 이렇게 천인공노할 일이 있을 수가!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잠깐 밖으로 나와라" 그 말을 들은 영진은 나와 마찬가지로 피식 웃었다. "나오라면 누가 못 나갈 줄 알고?" 영진은 먼저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갔다. 영진과 같이 온 두 남학생도 따라 나 갔다. 내가 나가려 하자 영아가 날 붙잡았다. "어쩔 생각이야, 오빠?" "어쩔 생각이긴. 잠깐 사촌동생 교육 좀 시켜주려는 거지." "영진이 싸움 되게 잘한단 말이야." "응? 싸움 되게 잘해? 얼마나 잘하는데?" "작년에 이종격투기 대회 청소년부에 출전해서 전국 2등 했어." "......" 이종격투기 대회 청소년부 2등? 확실히 그 정도면 어디 가서 싸움 좀 한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하지 만 그것 뿐이다. 설마 이종격투기 대회에 드래곤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범인들을 상대로 해서 따낸 승리이 같은 것이 나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한 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오빠 사촌남동생한테 얻어맞고 싶어?" "물론 그러고 싶진 않지." "그럼 지금이라도 영진이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 "사과하라고?" "응. 그게 얻어맞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야. 난 오빠가 영진이한테 뒤지게 얻어 맞고 쪼그려 앉아 질질 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너무 추할 테니까." "......" 이게 말이면 다인 줄 아나? "나 싸움 잘해." "오빠가 무슨 싸움을 잘해? 어렸을 때 동네 꼬마를한테도 얻어맞고 다녔잖아. 그때 펑펑 울던 오빠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 남의 아픈 과거를 찌르다니. "서울역에서 내가 노숙자들과 싸우던 거 기억 안 나?" "노숙자들 상대로 누가 못 싸워? 영진이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야." "......" 영아는 아직 나의 신위를 보지 못했다. 백만 대군 앞에서 청룡돌르 뽑아들며 호 령하던 나의 모습을 봤다면 절대 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라지만 백 만 대군 앞에서 청룡도를 뽑아들며 호령한 적은 없다.) 흠흠, 아무튼 나의 신위를 눈곱만큼이라도 보았다면 영아는 지금 나를 걱정하는 대신 영진을 걱정했을 것이다. "괜찮아, 영아야. 오빠 믿어." "내가 오빠를 뭘 보고 믿어?" "......" 이렇게 불신풍조가 만연해서야! "아무튼 이 오빠는 사촌동생 교육 좀 시키고 올 테니, 넌 이안에서 기다리고 있 으렴. 내가 꼭 영진이 사람 만들어 놓을게." "오, 오빠......" 영아는 눈물을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맞다가 아프면 무조건 무릎 꿇고 빌어. 영진이는 무저항인 상대는 때리지 않으 니까. 그게 한 대라도 덜 맞을 수 있는 방법이야." "......" 어이, 조금은 니 동생 걱정도 좀 하지? 어쨋든 영아는 지금 무지하게 나를 걱정하고 있다.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로. 사 촌오빠를 매우 걱정하는 사촌여동생 영아. 후후~ 귀여운 앞짱구 같으니. 난 영아의 앞짱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마가 살짝 튀어나와있으니 참 만지기 좋다. "그래, 알았어. 널 생각해서라도 최대한 안 다칠게." "응, 오빠 다치면 내 주머니에서 치료비 나가니까 최대한 다치지마." "......" 그런거였냐? "다쳐도 너한테 치료비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걱정마!" "정말이야, 오빠? 정말로 다쳐도 나한테 치료비 청구 안 하는 거지?" 앞짱구 얼굴에 화색이 돈다. 돈도 많은 주제에 치료비 몇 푼에 벌벌 떨다니!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그럼 기다리고 있어라. 니 동생 교육 좀 시켜주고 오마." 난 멋지게 옥탑방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갔다. 넓은 옥상은 싸움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난간 밖으로 집어던져도 되고...... "......" 흠흠, 뭐 그렇다고 진짜 집어 던질 생각은 없다. 내가 무슨 살인마도 아니고. 난 영진이 보는 앞에서 영아의 지갑을 열어보았다. "......" 뭐야? 1천 원짜리 한 장밖에 없잖아! 겨우 이 돈 주기 싫어서 그렇게 난리를 친 건가? 난 또 수표가 가득 들어있는 줄 알았잖아! 하지만 난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갑을 닫았다. 그리고 영진을 보았다. "돈이 제법 많이 들어있는 걸. 하긴, 영아가 돈을 좀 많이 벌었니? 후후~ 이거 갖고 싶지? 그치?" 난 해맑게 웃으며 영진에게 지갑을 흔들어 보였다. 영진은 바닥에 침을 밷으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넘겨." "헉! 어, 어떻게 사촌형인 나한테 반말을......" 난 심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손으로 심장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본 영진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이런 쌍!" "헉! 요, 욕까지!" 아아~ 전주에 계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잘못시키셨구나! 솔마 늦게 얻은 아들이라고 오냐오냐 키우신 건가? "너 싸움 좀 한다며?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직접 뺏어봐." 내가 지갑을 들고 흔들자 영진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괜히 얻어맞고 나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을 텐데." "글쎄. 누가 얻어맞을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영진이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걷는 못브에서 제법 여유와 위압갑이 느껴진다 . 뭐, 나에게야 우습게 보일 뿐이지만. 난 무서운 듯 짐짓 뒷걸음질을 쳤다. "야야, 서, 설마 진짜 때릴 건 아니겠지? 나 니 사촌형이야." 그러자 영진은 피식 웃으면 말했다. "지갑만 내놔 그럼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릴게." "응? 지갑? 저, 정말이지? 정말로 지갑만 주면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릴 거지?" "그래."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지갑 주면 팰 거 아니야?" "안 팬다니까." "진짜 안 팰 거야?" "진짜 안 패." "진짜 안 팰 거야?" "정말 안 패." "진짜 정말 안 팰......" "이 씨발!" 영진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난 화들짝 놀라는 척하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알았어. 그럼 하늘과 땅에 안 팬다고 맹세해 봐. 그럼 줄게." "하아~ 진짜 미치겠네." "빠, 빨리." "하늘과 땅에 맹세. 됐지?" "아! 생각해보니까 여긴 옥상이잖아. 엄밀히 말해서 땅이 아니지. 그런 의미에 서 우리 아래로 내려가서 다시 맹세를......" "개쌍!"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영진은 욕을 내밷으며 나에게 달려 들었다. 첫 공격은 오른손 스트레이트. 난 재빨리 왼손 팔꿈치를 들어올렸다. 빠악! 영진의 주먹과 내 팔꿈치가 충돌했다. 팔꿈치는 끝이 뾰족하고 단단해서 인체의 흉기라 할 수 있는 부분읻. 그렇기에 권투를 비록한 여러 격투기에서 팔꿈치 공 격을 금지 시킨다. "아아악! 나 죽는다!" 난 팔꿈치를 부여잡고 방방 뛰었다. 그러면서 영진을 살폈다. 영진은 애써 태연 한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간이 잔뜩 찡그려지는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듯했 다. 아마 무지하게 아플 것이다. 그래도 주먹을 제대로 쥐고 휘둘렀기에 망정이지, 만약 잘못 쥐고 휘둘렀다면 손가락 뼈마디가 부서젺을 것이다. "흑흑~ 너무 아파." 난 열심히 아픈 척 연기를 했다. 영진은 오른손이 얼얼한지 제대로 주먹조차 쥐 지 못했다. 내 챂이 아니었다면 손을 세차게 흔들며 열심히 주물렀을 것이다. "영진아, 제발 이러지 마. 넌 사촌동생이고, 난 사촌형이야. 이가 나한테 이러 면 안 돼." 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영진은 인상을 쓰며 소리 쳤다.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넘기라고!" "나,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그냥 넘기면 니가 날 패 죽일 것 같아서 말이야 . 너무 두려워서 넘길 수가 없어." "안 팬다니까!" "흑흑~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소리 지르는 모습이 너무 무섭단 말이야!" 영진은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엇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발을 날렸다. 헉! 이놈이 이젠 하늘같은 사촌형에게 발길질까지! 난 겁에 질린표정으로 재빨리 뒤로 불러았다. 발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보란 듯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다음 재빨리 일어나 난간 쪽으로 도망쳤 다. 진짜로 열 받았는지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박영진. 난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외쳤다. "오, 오지마! 오면 뛰어내릴 거야. 나 진짜 뛰어내린다." 영진은 코웃을을 치며 계속 다가왔다. 난 주저 없이 난간 위에 올라섰다. 그러 자 영진은 깜짝 놀랐다. "뭐, 뭐하는거야?" "나 뒤어내릴 거야! 뛰어내릴거라고!" "자, 잠깐! 미쳤어?" "그래, 나 미쳤어. 사촌동생한테 얻어맞고....... 흑흑~ 이렇게는 못 살아!" 옥상 난간은 쇠기둥으로 만들어져있다. 옛날에는 콘크리트로 담을 쌓은 형식이 었는데, 리모델링하면서 깔끔하게 쇠기둥으로 교체했다. 이 편이 훨씬 보기가 좋다나 뭐라나? ......라지만, 왜 이런 쓸데없는 것까지 리모델링을 했는지 모르겠다. 혹시 공사비를 부풀려 착복하려는 사일런스 지니의 계략이 아니었을까? 으음, 수상하다. 집에 들어가는 대로 공사내역서를 확인해 봐야지. "당장 안 내려와?" "으아악! 오, 오지마!" 난 몸을 살짝 뒤로 기울이고 손을 풍차처럼 마구 휘저었다. 사실 이런 난간 위 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자체는 그자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뒤로 넘어지면 몇 십 미터를 추락하게 되는 난간 위에서 제대로 몸의 균 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뒤로 떨어지면 무조건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앞으로 무게가 쏠리게 된다. 넘어져도 앞으로 넘어지면 괜찮기 때문이다. 내가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듯 난리를 쳐대자 영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그래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기는 싫은가보다 난 간신히 균형을 잡은 척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 살았다." "빨리 내려와!" "싫엉. 내려가면 때릴 거잖아." 삐드득! 영진은 이를 박박 갈앗다. 하지만 난간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손을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영진이 여기서 손을 쓰게 되면 살인죄, 또는 과실치사죄가 된 다. 아무리 재판부가 미성년자임을 감안해 판결을 한다고 해도 몇 년 정도 형을 사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증거만 남지 않는다면 별 상관없다.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우기면 그만이기 때문 이다.그런데도 내가 떨어딜까 봐 걱정하는 걸로 봐선 사람 죽이는 것에 두려움 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 사실 그게 정상이다. 으음, 요즘은 인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서 큰일이라니까. 난 그렇게 한동안 난간 위에서 영진과 씨름을 벌였다. 사실 나의 절대적인 균형 감각이라면 절대 실수로 넘어갈 리 없다. 그리고 설사 뒤로 넘어간다고 해도 살 아남는 것은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8클래스를 마스터한 위대한 대마법사 아이언스 히로가 아닌가? 으음, 계속 이 짓하기도 지겹군. 난 다시 뒤로 넘어가는 척하다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는 것처럼 해서 난 간에서 내려왔다. 영진은 기회를 놓치지 안겠다는 듯 내가 떨어지는 순간 바로 달려들었다. 난 손 을 들어올려 날아오는 주먹을 막았다. 퍼억! 주먹이 제법 세다. 내가 몇 번 공격을 막자 영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제법인데." "아, 아니, 뭐...... 제법까지야......" 영진은 두 팔로 가드 자세를 취한 다음 나에게 달려들었다. 쉬 새 없이 날아오 는 주먹, 그리고 그런 주먹을 보조하듯이 날아오는 발. 이종격투기 대회 청소년부 전국 2등이라는 타이틀이 거짓은 아닌 것 같다. 주먹질을 할 때는 물론이고, 발길질을 할 때도 허점이 거의 생기지 않았다. 설 사 생긴다 하더라도 반격을 먹이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풋워크라던가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훗~ 어디서 싸움 좀 했나본데. 뭐, 그래봐야 내 상대는 아니다. 드래곤볼에서 항상 천하제일무술대회 1등을 차지하는 미스터 사탄이 초사이어인 의 상대가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 개념이다. 두 팔로 공격을 막으며 피하던 나는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오오! 영진이 꽤 하는데. 엉아가 칭찬해주는 의미에서 이제부터 오른쪽 팔은 안 쓰고 왼쪽 팔만으로 막아볼게. 어때? 우리 영진이 좋아?" "죽어!" "......" 별로 안 좋은 모양이다. 난 내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왼쪽팔만으로 방어를 했다. "어이쿠! 우리 영진이 잘하네. 하지만 주먹을 휘두를 때 어깨의 움직임이 부드 럽지 못해. 그럼 타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쉽게 지쳐. 나중에 어깨통에 시달릴 걸. 우리 영진이 어깨통 아야~ 하지? 그치?" 난 피식 피식 웃으며 영진에게 말했다. 영진은 도발에 넘어ㅏ지 않기 위해 노력 했지만 이미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원래 도발이라는게 알면서도 걸려드는 것 아니겠는가? 한 10분 정도 데리고 놀아주자 영진은 금방 지쳤다. 싸움은 엄청난 심력과 체력 을 소모한다. 권투 경기에서 한 라운드가 괜히 3분이 아니다. 나는 멀쩡한데 비해 영지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젠장......" 공격이 통하지 않으니 무지하게 답답할 것이다. 아마도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기분이겠지. "엉아가 그냥 한 대 맞아줄까?" "닥쳐!" "......" 아직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사촌형님께 쌍소리라니. 뭐, 사촌동생이 하는 쌍소리 정도야 웃으며 넘겨주...... 긴 뭘 넘겨줘? 이런 쌍놈의 새끼를 봤나! 나도 이젠 참을 만큼 참았다. 내가 아무리 생불이라 불릴 정도로 마음이 넓고 자비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라 하나.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군자는 모욕을 참지 않는 법! "내 오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대신해 네놈을 교육시켜주겠노라! 자, 와라!" "지랄하네." "......" 이게 아주 매를 버는 구나. 난 영진이 내지른 주먹을 붙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었다. "윽!" 나의 악력은...... 제대로 안 재봐서 모르겠지만 호두 정도는 가볍게 가루로 만 들 수 있다. 만약 내가 이대로 계속 힘을 줄 경우 영진의 주먹 뼈는 으스러질수도 있다. 그 리고 그렇게 으스러진 뼈는 붙지도 않는다. 으음, 잘못하면 평생 왼손으로 밥 먹어야겠군. 난 적당히 주물러준 다음 놔주었다. "이제 그만하자." "웃기지 마!" 영진은 나의 마지막 제안을 스스로 걷어찼다. 아아~ 이제 정말 어쩔 수 없구나. 난 달려드는 영진의 주먹을 걷어내고 손을 휘둘렀다. 짜악! 나의 귀싸대기 한 방에 영진은 바닥에 쓰러졌다. 난 천천히 영진에게 다가갔다. "너 오늘 교육 좀 받아야겠다." "닥쳐!" "너나 닥쳐, 임마." 짜악! 난 다시 영지의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또다시 쓰러지는 영진. "씨발, 닥쳐, 젠장, 썅, 새끼...... 그게 사촌형한테 할 소리냐? 내가 왠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넌 말하는 싹수가 글러 먹었어." 짜악! "내가 나이로 미는 거 엄청 싫어하거든. 어른답지 못하게 행동하는 어른한테는 어른 대접을 해줄 필요가 없어. 형답지 못하게 행동하는 형한테도 형 대접을 해 줄 필요가 없고, 늙으려면 곱게 늙어야지, 나이 많다고 무조건 대접 받길 바라 서야 쓰겠냐? 안 그래?" 짜악! "그런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니가 형 대접 안 해주는거냐? 응? 한번 말해봐." 짜악! 난 영진의 공격을 막거나 흘리며 계속해서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어느새 영진의 얼굴은 퉁퉁 부었다. 퉤! 거리를 벌린 영진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침에는 피가 가득 섞여있었다. 입 안 이 완전 피범벅이었따. 내가 만약 마음먹고 쳤다면 어금니도 몇 개 나갔을 것이 다. 영진은 심하게 비틀거렸다. 얼굴을 얻어맞았으니 충격이 뇌까지 전달되었다. 게다가 평형감각을 유지시키는 세반고리관도 이상이 생겼을 테니 제대로 서 있 기도 힘들 것이다. 비틀거리던 영진은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영진과 같이 온 두 남학생이 재빨리 뛰어나와 영진을 부축했다. "야! 괜찮아, 영진아? 영진아!" "이런 씨발 새끼가!" 영지이 쓰러지는 걸 본 두 남학생은 흥분해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니들도 잘한 거 하나 없어!" 영진만큼은 아니지만 두 놈도 제법 싸움을 잘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이런 것들 백 명이 몰려와도 나한테는 안 된다. 난 주저 없이 손을 휘둘렀다. 짜악!짜악! 내 귀싸대기 때리기는 일반적 개념을 벗어난 공격이다. 예를 들어 여자가 헤어 질 때 남자의 뺨을 때린다던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거다. 난 손바닥에 무게를 실고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때문에 한 대 얻어맞으면 그래 도 나가 떨어진다. 귀싸대기 공격은 단지 외상을 남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 니다. 가격 부위에 급소가 몰려있는지라 두개골과 뇌를 통째로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한 대 맞으면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들다. 난 영진과 친구들이 쓰러져있는 동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영진과 친구들이 일어났다. 난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귀찮으니까 셋이 한꺼번에 덤벼라." "뭐, 뭐?" "왜? 그래도 다구리는 싫다 이거냐?" 그래도 한 명을 상대로 세 명이 달려드는 것은 싫은지 주춤거린다. "니들 같은 놈들 백 명이 한꺼번에 덤벼봐야 애들 장난에 불과해. 귀찮으니까 빨리 덤벼." 내가 그렇게 도발하자 결국 세 놈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제대오 협공을 익힌 것도 아니기에 공격은 제각각이다. 난 적당히 공격을 막아주었다. 그리고는 바로 귀싸대기를 날렸다. 짜악!짜악!짜악!또 다시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셋은 바닥에 쓰러졌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쭉 빨아들였다. 식도를 타고 들어와 폐를 가득 채우는 담배연기. 아아~ 이런게 삶의 행복이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 겨우 귀싸대기 한 대에 쓰러져서야 쓰겠냐? 빨리 빨리 일어나서 열심히 덤벼야지. 혹시 아니? 내 옷깃이라도 스칠 수 있을 지." "으아아!" 영진과 친구즐은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인 정사정없는 손찌검뿐이었다. 짜악!짜악!짜악! "뭐하니? 빨리 안 일어나니? 니들은 좀더 맞아야 한단다." 또 다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드는 영진과 친구들. 난 또 다시 귀싸대기를 휘갈겼다. 그렇게 십여 대를 대리니 이젠 거의 오기로 달려들었다. 한 대라도 때리고 말겠다는 오기. 하지만 난 맞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얼굴은 퉁퉁 붓고 입 안은 다 찢어서 피를 질질 흘린다. 이는 나의 타격 조절이 아직 미약하다는 뜻이다. 루엔은 피 한 방울 안나게 잘만 때리던데, 왜 난 안되는 거지? 으음, 피를 안 보기 위해서 좀더 수련이 필요하다는 건가?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영진의 가슴에 발길질을 퍼부었다. 퍽!퍽! 얼굴만 너무 패는 것도 미안해서 이젠 골고루 패기로 했다. 팔, 다리, 가슴, 배 할 것 없이 골고루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난 패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장마 전인지라 날싸가 매우 화창하다. 햇볕도 쨍쨍하고, 하늘에 구름 한점 없다. 난 바닥에 버린 담배를 발로 짓이기며 말햇다. "오늘같이 좋은 날에 먼지 나도록 맞아보자꾸나." 휴~ 겨우 30쪽까지 쓰는데 2시간이나 걸리네요ㅡㅡㅋ 뒷부분은 다른분이 좀 이 어서 해주세요.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오빠?" 옥상으로 나온 영아는 깜짝 놀라 물었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는 그대로란다." "어, 어떻게......" 난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그리고 영진과 두 친구는 피떡이 된 채 옥상 바닥에 쓰러져 있었따. 흘린 피는 셔츠를 새빨갛게 물들일 정도였고, 여기저기 해놓은 토는 뜨거운 태양열로 인해 벌써 늘어붙었다. 셋 모두 맞은 부위를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뭐, 그래봤자 내가 워낙 골고루 패나서 전신이 아프겠지만. "오빠가 이렇게 팬 거야?" "패다니? 그냥 가볍게 교육 좀 시켜줬을 뿐이야." "오빠 미쳤어?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 영아는 재빨리 영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영진아? 정신 좀 차려봐." "야야, 그냥 나둬. 원래 남자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거야." "오빠는 그걸 말이라고 해? 영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영아는 다시 영진을 잡고 흔들었다. "영진아! 누나 말 들려, 영진아? 영진아! "으으......" 영아가 계속 흔들어대자 영진은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었다.안그래도 아파 죽겠 는데 누군가가 심하게 흔들어 대니 죽을 것 같이 아플 것이다. 멍든 곳을 손가 락으로 누르면 아픈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짝!짝! "영진아! 정신 좀 차려봐, 영진아! 죽으면 안돼!" "......" 이젠 뺨까지 때려대는 영아. 영진은 죽을 것 같은 신음을 흘려댔다. "으으으......" "정신이 들어, 영진아? 안 되겠어!" 짜악!짜악!짜악! 영아는 이를 악물고 세차게 영진의 뺨을 후려갈겼다. "......" 너무 잔인하군. 애들이 가장 많이 얻어맞은 부위가 얼굴이다. 특히나 영진은 귀싸대기를 수십 대 얻어맞았다. 건드리기만 해도 아플 텐데, 저렇게 잔인하게 때리다니! 때린데 또 떄리는 것만큼 잔인한 짓도 없다는데. "저,저기.....그만하렴,영아야. 그러다가 애 잡겠다." "시끄러,오빠! 오빠가 뭘 잘했다고 그런 말을 해?" 영아는 두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그 모습이 제법 박력 있다. "어자피 좀 있으면 다 일어나게 되어 있어. 니가 그렇게 억지로 깨우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안 좋아. 일단 집에 들어가자." "됐어! 이거 놔, 오빠! 난 누나로서 영진이를 보살펴야 한단 말이야!" 그러면서 영아는 끝까지 영진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짜악!짜악! "눈 좀 떠봐, 영진아! 영진아!" "......" 보살필 생각이니, 죽일 생각이니?" 난 반항하는 영아를 억지로 끌고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옥상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세 남학생을 놓아둔 채. 옥탑방 안에 들어서자 영아는 눈물이 살짝 글썽이는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오빠는 어떻게 사촌남동생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팰 수 있어? 오빠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난 인간이 아니야. 난 루시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인간이기를 포기했어." "......뭐?" "나는야 루시아의 수호천사~." "......" "......" 이 심각한 상황을 웃음으로 타개해 보려 했거늘. 설마 실패인가? 영아는 더욱 강하게 날 노려보았다. "미친 거야?" "응. 난 루시아에게 미쳤어." "......" "......" 또 실패? 영아의 눈빛에 경멸이 어리기 시작했다. 헉! 너까지 나에게 경멸어린 눈빛 스킬 쓰기냐? 경멸어린 눈빛 스킬은 루시아가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잠깐 앉아봐. 일단 진정하고 우리 애기를 해보자꾸나." "진정하긴 뭘 진정해! 내 동생이 저렇게 떡이 되어 누워있는데!" "너한테 동생이면 나한테는 사촌동생이야." "흥! 어자피 기억도 못 하면서." "......" 그건 그렇다. 하지만 내 뇌 구조가 여성 전용으로 되어 있는 걸 어쩌겠니?" "너도 아까 쟤가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 봤잖아. 뭐, 나야 사촌형이니 그렇다 치 자. 그런데 누나인 너한테는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군 거야?" "그, 그건...... 영진이는 원래 착한 애란 말이야!" "......" 저게 착해? 저게 착할 정도면, 안 착한 영진이는 대체 어느 정도일지 정말 궁금하다. 한발 더 나아가, 나쁜 영진이는 어떤 모습일까? "무, 물론 행동이 좀 거칠긴 하지만, 근본은 착해." "너 지금 맹자의 성선설 주장하니?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세상에 안 착한 사람 이 어디 있겠니?" 날이면 날마다 술 처먹고 들어와 아내와 자식을 개 패듯이 패는 남편도 근본은 착하다. 보험금 타내려고, 부모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자식도 근본은 착하 다. 세상에 근본이 착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 아니야, 영진이는 정말 착해." "착하다는 놈이 사촌형한테 주먹을 휘둘러?" "영진이가 싸움을 많이 하긴 하지만, 결코 사람을 패지는 않아." "......" 이건 또 뭔 말이다냐? 얼마 전 한 연애인이 만취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그대로 도주 한 일이 있었다. 그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가 조서까지 작성했다. 나중에 그 연애인이 기자들 불러놓고 변명이랍시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술 마시고 운전은 했지만, 결코 음주운전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음주운전의 사전적 정의가 술 마시고 하는 운전이다. 그런데 술 마시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니! "그 대사는 마치 '영아는 이마가 튀어나왔지만, 결코 앞짱구는 아닙니다.' 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는구나. 또는 '영아는 다리가 짧긴 하지만, 결코 숏다리는 아닙니다.' 라든가, '최모 편집자님은 만날 원고 내놓으라고 작가를 닦달하지만 , 결코 마감 독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는 말과도 비슷하구나." "그, 그러니까 영진이는......" "영진이는 뭐? 싸움만 하면 뒤지게 맞고 집에 들어왔니? 그래서 싸움을 많이 하 긴 하지만, 한 대도 안 때린 거야?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면 좀 말이 된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영진이는 먼저 시비를 걸지도 않고, 싸움 못 하는 사 람은 때리지도 않아. 싸움은 많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싸움이야. 절대 누군 가를 일방적으로 구타한적은 없어." "먼저 시비를 걸지않는다고? 그런 방금 전엔 뭐야? 걔가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 너도 봤잖아?" "그, 그러니까...... 오늘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거지. 평소의 영진이라면 저러지 않았거든." "역시 그 다쳤다는 친구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런것 같아. 주혁이는 영진이의 둘도 없는 친구였거든. 집에도 자주 데리고 왔었어." "가장 친한 친구가 이지역 일진회 놈들에게 얻어맞아 혼수상태에 빠져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오빠도 얘기 들었잖아. 복수하겠다는." "으음, 듣기야 들었지." 복수는 뭔 복수? 고3이면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이거나 받아." 난 영아의 지갑을 돌려주었다. "어떻게 지갑 안에 딸랑 천 원짜리 한 장밖에 없을 수 있니? 대체 뭐하려 그렇 게 목숨 걸고 지킨거야? 동생한테 천 원 주기가 그렇게 아까웠냐." "그, 그래? 어느새 돈을 다 썼나보네. 은행에서 돈 뽑는다는 것을 깜빡 했어." "아주 잘하는 짓이다." "헤헤~" 영아는 혀를 살짝 내밀며 귀여운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런데 오빠 싸움 되게 잘하나 보네. 영진이도 싸움 되게 잘하는데. 대체 어떻게 영진이를 이긴거야?" "후후~ 넌 내가 서울역 노숙자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니?" "그래도 영진이를 이길 줄은 몰랐지. 영진이가 싸움을 얼마나 잘 하는데. 이종 격투기 대회 청소년부 전국 2등이야." "훗~ 그래봤자 내 상대는 안 돼." 나의 무력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참고로 내 직업은 마법사다. 당연 히 무력보다는 마력이 뛰어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무력을 당해낼 자가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아~ 정녕 이제 내 상대는 드래곤밖엔 없단 말인가? "오빠는 어디서 싸움 배웠어? 영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도장을 다녔었는 데." "여러 도장을 다녀?" "응. 태권도도 배우고, 가라테도 배우고, 합기도도 배우고, 유도도 배우고, 권 투도 배우고, 검도도 배우고...... 웬만한 도장은 다 한 번쯤 갔어." "말 그대로 이종격투기로군." 사실 무술이라는 게 원류는 제각각 달라도 종착점에 도달하게 되면 대체로 비슷 해지기 마련이다. 발기술이 화려한 태권도라고 해서 손기술을 안 쓰는 것은 아니고, 주먹만 쓰는 권투라고 해서 발기술을 아예 안 쓰는 것은 아니다(권투 경기 규칙상으로는 못 쓰게 되어있지만). 그렇기에 이종격투기라는 게 성립 할 수 있는 거고. 옛말에 '한 우물만 파라' 라는 말이 있듯이, 무술도 하나를 정해 깊게 파고 들 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재능만 있다면 여러 무술을 배워도 상관은 없다. 비록 원류가 다르다 할지라도 무술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니. 영진의 무술은 딱히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저기서 배운 것을 자신에게 맞게 짜집기한 것 같았다. 발차기는 태권도의 돌려차기였고, 잡기는 유도의 기술이였다. 그리고 주먹으로 때릴 때는 오른손을 휘두르며 왼손 잽으로 견제하는 전형적인 권투의 공격 방식 을 보였다. 그 정도 실력이면 왠만한 싸움꾼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상대가 안 좋아 떡이 될 때까지 맞았지만 말이다. "이 오빠는 모든 것을 독학으로 익혔단다." "뭐? 말도 안돼!" "훗~ 하기야 너 같은 범인들은 믿기 힘들 수도 있겠지." 세상에 그 누가 천하의 아이언스 히로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난 모든 것을 혼자의 힘으로 배우고 익혔다. 나의 필사기라 할 수있는 빅장 40단 콤보를 익히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그때를 잠시 회상하자면...... 술에 만취한 두 남자가 홀 중앙에서 소위 말하는 맞짱을 뜨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말리기는 커녕 소리치며 응원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정겨운 우리네 삶인가? 두 남자는 정말 처절하게 싸웠다. 입에 맥주 거품을 물고 이단 옆차기를 하는 옆집 아저씨를 보았는가? 눈 감고도 피할 그 공격에 나가떨어지는 뒷집 아저씨를 보았는가? "에라 씨발,빅장(Big掌)이다!" 옆집 아저씨는 그렇게 외치며 손바닥을 마구 휘둘렀다.그러자 뒷집 아저씨는 뒤로 심하게 밀 리며 외쳤다. "허억!이건 뼛속까지 시리다!"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마!" 밀리던 뒷집 아저씨는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 일단 여기까지. 오타 죄송.. 나중에 더 쓰죠. 오늘 빌린 관계로 금요일까지 갖다줘야 하니 까, "너의 공격 패턴을 알아냈다.그것은 바로 강약약 강강약약 강중약이다." 그러자 옆집 아저씨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그걸 어떻게......?" "하하하~ 이제 나의 필살기 40단 콤보를 보여주지. 일,이,삼,사,오,육,칠,팔......아싸! 좋 구나!" "으악! 이건 아까의 타격과는 다르다." "이제부턴 나의 공격을 막는 데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다." "으허헉! 이대로 당할 순 없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회전 스크류!" 일렬종대(一列縱隊)!" "우린 아직 순수해!" 난 차마 더 이상은 보지 못하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 잠재의식이라는 것이 이렇게 유치 한 것이었나? 어찌되었든 옆집 아저씨와 뒷집 아저씨는 온갖 유치하면서 알아듣지 못할 대사를 내뱉으며 서로를 공격했다. 잘하는 짓이다~. 난 그들의 싸움에 신경을 끄고 바에 앉았다. 그리고 목청이 터질 것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뒷집 아저씨를 응원하는 주인장을 불러다 세워 술을 주문했다. 그러는 사이 싸움이 끝났다. 승리의 영광은 빅장이라는 특이한 기술을 쓰는 옆집 아저씨에게 돌아갔다. "크하하! 나의 빅장은 무적이다!" "크흑!분하다. 나의 40단 콤보가 무너지다니." 이것은 나의 잠재의식 술집에서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 보면 어느 술집에서나 일어날 수 있 는 사소하디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난 옆집 아저씨와 앞집 아저씨의 싸움을 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 이 옆집 아저씨의 필살기 빅장과 앞집 아저씨 필살기 40단 콤보를 합체시킨 '빅장 40단 콤 보'라는 아이언스 히로만의 필살 기술이다. 아이언스 히로의 필살 보법이라 할 수 있는 개나리 스텝도 마찬가지다. 난 자고 일어나 바람에 흔들리는 개나리를 본 순간 그 안에 담긴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다. 어차피 모든 것은 하나다. 위와 아래를 구분하지 말고, 너의 나를 구분하지 말지어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 물은 모든 것을 정화시켜주고 낮은 곳에 있기를 좋아한다. 물이야말로 모든 만물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아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현실의 물질적 존재는 모두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서 불변하는 고유의 존재성이 없다. 본성인 공(空)이 바로 색(色), 즉 만물(萬物)이니라. 만물의 본성인 공이 연속적인 인연에 의하여 임시로 다양한 만물로서 존재하니 이것이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말이다. 원래 나 같은 고수에게는 육체적 수련보다 명상으로 인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아 무튼 자고 일어나 우주의 진리와 만물의 도(道)를 깨달은 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초사 이어인의 반열에 들었다. 으음, 이렇게 졸라 짱 세질 줄은 나도 몰랐다. 아아~ 평범했던 때의 삶이 그리워지는구나. "그런데 영진이 저렇게 놔둬도 되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맷집이 장난 아니던데, 뭐. 그리고 그렇게 심하게 때리지도 않았어. 가볍 게 쓰다듬어준 정도?" "저게 가볍게 쓰다듬어준 거야? 애가 완전 피떡이 됐던데." "후후~ 빅장 40단 콤보에 얻어맞았으면 저 정도로 안 끝났어." 그렇다. 아이언스 히로의 필살기인 빅장 40단 콤보에 제대로 얻어맞았으면 뼈와 살이 분리되 고 온몸의 뒤틀린다. 왜냐하면 빅장 40단 콤보에 자비심이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응? 오빠가 어떻게 하게?" "내가 알아서 잘 설득해서 돌려보낼게." "안 가려고 할 텐데." "그럼 쥐어 패서라도 돌려보내야지." "또 패게?" "그럼 니가 할래?" "차라리 내가 할게! 오빠한데는 더 이상 못 맡겨두겠어." "아까 쟤 하는 거 못 봤냐? 니가 말한다고 해서 들을 것 같진 않던데." "그,그건 .......그렇지만." 영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난 영아의 앞짱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냥 쓰다듬어준 것이 아니 라. 무려 머리 쓰다듬기 스킬까지 사용해서! "헤헤~.' 영아는 금방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피시전자로 하여금 무안한 행복을 느끼게 하는 머리 쓰다듬기 스킬. 참고로 이 스킬은 어린 엘프들 전용이다. 아무한테나 쉽게 써주는 스킬이 아니니 지금 실컷 즐기려무나. "헤헤~ 참 이상해.' "뭐가?" "오빠가 머리 쓰다듬어주거나 토닥여주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후후~ 그게 바로 스킬의 위력이라는 거지. 이미 이 오빠의 머리 쓰다듬기 스킬과 토닥토닥 스킬은 마스터 레벨에 도달했단다."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튼 이 오빠가 알아서 할 테데, 넌 이 오빠만 믿고 가만히 있으면 돼." "알았어. 그럼난 오빠만 믿을게." 난 잠깐 옥상으로 나가보았다. 영진과 두 친구는 아직도 옥상에 엎어져 고통에 신음하고 있 었다. 여기에다 쨍쨍한 햇볕 속에 오래 있어서인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러다가 일사병 걸리는 거 아냐? 걱정이 된 나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했다. 그리고 최대의 수압으로 물을 틀었다. 쏴아아! 난 차가운 물줄기를 영진과 두 친구에게 뿌렸다. "어푸!어푸! 뭐, 뭐야?" "쿨럭!누, 누구야?" "어떤 새끼가......" "새끼?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난 호스를 가까이 가져다댔다. "그,그만해!" "그만해? 아니, 이것들이 끝까지 반말을!" 빠악!빠악!빠악! 난 물을 뿌리면서 뒤통수를 한 대씩 후려 갈겨 주었다. "니들 일사병 걸릴까봐 걱정돼서 이렇게 시원한 물까지 뿌려주는 엉아의 마음도 몰라주다 니. 아무래도 교육이 덜 된 것 같군. 다시 뒤지게 한번 맞아볼까?응?" 난 영진과 두 친구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뒬 때까지 물을 뿌려댔다. 그들이 머리부터 발끝 까지 쫄딱 젖은 꼴을 본 나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시원하냐? 정신이 확 들지?" "이런 씨......" "응?이런 씨 뭐라고?싸앗?씨감자?씨받이?설마......씨발?" 난 인사을 쓰며 영진과 두 친구를 훑어보았다. "뭐, 아무래도 좋지. 어쨌든 정신을 차렸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보자꾸나." "시,시작?" "뭘 시작해?" "뭘 시작하긴? 또 다시 뒤지게 맞아보자는 거지.' 난 주먹을 뚜둑거리며 다가갔다. 툭탁툭탁! 쿵! 쾅! 빠각! 또 한 차례 교육(?)을 끝마친 나는 다시 호스로 물을 뿌렸다. "야아, 엄살 피우지 말고 빨리 일어나. 또 맞아야지." "헉!" "응? 뭘 그렇게 놀라? 니들 맞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난 니들 뒤지게 맞고 싶어서 그 러는 줄 알고 열심히 팼는데." "......" 두 차례 교육을 받은 영진과 두 친구는 이제 일어날 힘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반항적인 눈 빛만은 여전했다. 이는 교육이 부족하다는 증거! 난 호스를 내던지고 주먹을 꾹 쥐었다. 툭탁툭닥! 쿵! 꽝! 빠각! 난 호스로 물을 뿌린 다음 말했다. "무릎 꿇고 손들어라." "......" "왜 그러고 있니? 무릎 꿇고 손 들라는 엉아 말 안 들리니? 또 교육 받고 싶어?" 내가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영진의 두 친구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무릎 꿇고 손을 들 었다. 하지만 영진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아직 반항을 하다니! 제법 근성이 있군. "후후~ 육체는 소멸해도 근성은 영원하다는 건가? 아주 좋은 자세로군.그 근성이 영원한지 어떤지 한번 시험해보도록 하지!" 난 영진만 마구 팼다. 원래 매 앞에서 장사 없는 법이다. 그렇게 수십 대를 때리고 나니 영 진은 결국 굴복했다. "그,그만.제발 그만......" "그만? 이 자식이 아직도 사촌형에게 반말을!" 퍽퍽퍽! "그,그만하세요. 제발요......" "으음, 이제야 제대로 말이 나오는구만. 더 맞기 싫으면 쟤들처럼 무릎 꿇고 손들렴." 영진은 굉장히 싫은 듯했지만 더 이상 맞기는 싫은지 시킨대로 무릎 꿇고 손을 들었다. 훗~ 이 정도에 굴복하다니. 근성 부족이군. 뭐,그래도 이 정도면 엄청 버틴 거다. 사실 이 정도로 버틸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손 똑바로 들어,임마. 어디서 슬금슬금 손을 내리고 있어?" 영진과 두 친구는 지친 몸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시 속에 계속 벌을 서야 했다. 옥상으로 나온 영아는 물에 쫄딱 젖어 벌을 서는 그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젠 애들을 벌까지 세워?" "다 교육 차원에서 이러는 거니까 넌 가만히 있어." 그, 그래도......" "니가 그렇게 오냐오냐 하니까 영진이 버릇이 나빠진 거야. 남자애는 좀 강하게 교육시킬 필 요가 있어.왜 사자는 자기 새끼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린다고 하잖아." "그,그런가?" "응. 그런 의미에서 얘들 한번 밖으로 집어던져 볼까? 후후~세명 던지면 몇 명이나 살아남을 까?" "헉!" "오빠!" 깜짝 놀라는 영진과 두 친구.그리고 소리를 지르는 영아. "농담이야,농담.그래도 겨우 5층밖에 안 되니까 떨어져도 별 지장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자신 있으면 오빠가 한 번 떨어져 봐!" "......" 얼마든지 상관없다. 이 정도 높이라면 가볍게 뛰어내려 나비처럼 착지할 자신이 있다. 중력 약화 마법이나 레비테이션 마법을 쓰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내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5층에서 뛰어내려 상처 하나 입지 않으면 그게 인간이냐? 뙤약볕 아래 옷이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확실히 날씨가 덥긴 무지하게 덥다. 아마 내가 호스로 물을 뿌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일사병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부들부들. 후들후들. 찌릿찌릿. 떨리는 팔과 저려오는 다리. 그리고 이마에 비처럼 흐르는 땀. 이미 체력이 다한 지 오래였 다. 지금은 그저 근성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왜냐? 손 내리면 뒤지게 맞으니까.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근성 수치를 매우 올려준다는 건가?" "무슨 소리야, 오빠? 그보다 이제 벌 좀 그만 서게 해. 쟤들 너무 힘들어하잖아." 흐음, 그런가?" "빨리! 이러다가 애들 잡겠어. 영아는 영진이 걱정되는지 나를 붙잡고 애원했다. 어느새 눈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만 소녀의 동생을 용서해 주시어요.' '안 된다. 네 동생은 너무도 큰 죄를 지었느니라.' '흑흑~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니.'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쩔 수 없군요. 동생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소녀의 몸을 가지시고 소녀의 동생을 용서해주시어요.' '뭐라?' '아직 남자의 손길이 한번도 닿지 않는 순결한 몸입니다.' '......대신 여자의 손길이 닿았겠지.' '오라버니!' '너의 마음은 잘 알았다, 영아야.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주어야겠구나.' "이 오빠는 앞짱구가 싫단다." "뭐?" "그러니까 이 오빠를 유혹할 생각이랑 아예 하질 말아. 알았지?" "왜 자꾸 헛소리야?" "아무튼 너의 정성이 갸륵하니 이만 저것들을 용서해주도록 하마. 야! 다들 손 내려!" 내가 소리치자 영진과 두 친구는 살았다는 듯 재빨리 손을 내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 다. 난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야 박영진. 내가 너의 뭐지?" "......예?" "내가 너의 뭐냐고?" "사,사촌형......이요." 빠악! "뒤에 조사 빨리 안 붙여! 그렇게 늘어뜨리니까 꼭 반말하는 것 같잖아!" "......예." 빠악! "대답도 빨리 해!" "예,예." "너 나 처음 봤을 때 뭐라 그랬어?너? 새끼? 임마, 그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할 소리야?" 빠악! "저, 저기......그땐 누나랑 동거하는 사람인 줄 알고......" "동거 맞아, 임마. 영아가 내 집에 들어와 살고 있으니, 그게 동거가 아님 뭐겠니?' "아,아니요 그게 아니라......" 영진은 어휘력이 딸리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다 안다. 간단히 말해 내가 영아 애인인 줄 알았다는 거다. 잠도 같이 자고 생활도 같이 하는 애인. 동거(同居)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한집이나 한방에서 같이 사는 것이다. 그리 고 둘째는 법적으로 부부가 아닌 남녀가 부부 관계를 가지며 한집에서 사는 것이다. 영진이 말한 동거는 두 번째 의미였고, 현재 영아와 나는 첫번째 의미의 동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니가 말한 동거는 법적으로 부부가 아닌 남녀가 한 집에서 살면서 부부 관계를 가 지는 것을 말한 거지?' "예." "그리고 난 동거남이라는 거고?" "예. 뭐......" 퍼버버버벅! "그게 더 기분나빠, 임마! 이 자식이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나?' 난 영진에게 마구 발길질을 퍼부었다. 그러자 영아는 날 말리며 소리쳤다. "뭘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그럼 내가 화 안 나게 생겼어?야, 너 말해 봐! 내가 정말 애랑 동거하게 생겼어? 너 내가 그렇게 밖에 안 보여? 내가 아무리 여자가 없어도 설마 앞짱구와 동거를 하겠냐? 대체 날 얼 마나 우습게 봤기에 그런 생각을 해!" "뭐?오빠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어디가 뭐 어때서?" 난 소리치는 영아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내 눈빛이 닿자 영아는 이마를 가리고 가슴을 가 렸다. "그래도 이마 튀어나온 것과 가슴 빈약한 것은 아는가 보구나." "그러는 오빠는 어떤데! 솔직히 오빠랑 나랑 비교하면 내가 훨씬 더 아깝지.' "푸하하~ 우리 영아 개그 많이 늘었네. 이렇게 오빠를 웃길 줄도 알고 말이야." "씨잉!" 영아는 화가 났는지 눈을 잔뜩 치켜뜨며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퍼억! "끄악 너 뭐하는 짓이야? 이게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할 짓이야?" "흥!!" "......" 이걸 때릴 수도 없고. 난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 영진을 보았다. "미안하다. 앞짱구의 동거남처럼 보인다는 말에 이 엉아가 좀 흥분했구나. 하지만 한 번 더 그런 망발을 지껄일 경우 가차 없이 밖으로 집어 던질 테니 그리 알아라. 참고로 지금 니가 있는 곳은 5층 건물 옥상이란다." "맞아! 영진이 너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누나한테 혼날 줄 알아! 내가 미쳤다고 영웅 오 빠 같은 뺀질이랑 사귀겠어? 만약 내가 집주인이었다면 당장 쫓아냈을 거야.' "뭐,뭐? 뺀질이! 아니, 이 앞짱구가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나?" "왜?오빠 별명이 뺀질이 맞잖아." "누가 그래?" "일루니아 언니가." "......" 또 그 아줌마냐? 잊을 만하면 내 인생에 태클을 거는 일루니아 여사님 이쯤 되면 이 글의 제목을 '히로의 수 난기'로 바꿔도 좋을 듯하다. 그 아줌마는 판타지 세계로 안 돌아가나? 대체 이 세계에는 왜 남아있는 거야? 헉! 설마 날 엿 먹이기 위해서? "......" 으음,왠지 엄청 설득력 있게 들리는군. 난 영아와 입씨름을 벌이는 대신 다시 영진과 두 친구를 보았다. "그리고 말이야......" 난 일단 녀석들에게 발길질을 퍼부었다. 퍽퍽퍽! "왜 이러세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하지 마세요!" "왜 이러세요? 뭘 잘못했나고? 하지 마? 니들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이거지? 그럼 계속 맞아,임마!" 퍽퍽퍽! 난 억울해하는 영진과 두 친구를 기분이 풀릴 때까지 밟았다. "......" 뭐야? 왜 안 말려? 이 정도로 패면 영아가 놀라서 말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패도 영아는 말릴 생각을 하 지 않았다. 동생이 맞아죽어도 상관없다는 거냐? 난 언제까지 안 말리나 보려고 더욱 열심히 팼다. 퍼버버버벅! "끄아악!" "......" "커억!" 죽을 것 같은 비명을 지르는 영진과 두 친구. 한 놈은 너무 맞았는지 아무 말도 없다. 잘 보 니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다. 더 잘 보니 걔가 영진이다. 동생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는데도 안 말린다는 거냐? 좀더 팼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에 난 그만 패고 영아를 돌아보았다. 난간 앞에 선 영아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헤벌쭉 웃고 있었다. "......" 뭐야? 동생이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는데 왜 웃고 난리야? 난 뭔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주차장으로 크로니스가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바 람도 불지 않는데 붉은색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에는 우수가 깃들어있다. 고독한 카리스마를 지닌 미청년 크로니스. "헤헤~ 크로니스 오빠......" "......" 뭐야? 보고 반하는 건 좋은데 침은 왜 흘려? 헉! 설마 크로니스도 먹잇감(?)으로 보이는 거냐? "......" 무서운 것 같으니. 내 사촌여동생이지만 정말 무섭다. 대체 어디서 이런 게 등장했는지 모르겠군. 다음 권부터 얘 나오는 장면 편집해 달라고 최모 편집자님께 부탁드리던지 해야지. 동생이야 게거품을 물고 기절하든 맞아 죽든 오로지 크로니스만 신경 쓰는 앞짱구. 이런 누 나를 둔 영진이 불쌍하다. 난 다시 호스의 물을 틀어 기절한 영진을 깨웠다. 열심히 팬 보람(?)이 있는지 영진은 깨어 나자마자 재빨리 친구들 옆에 무릎을 꿇었다. "니들 아까 방에서 무슨 짓 했어?" "예?" "잘 생각해 봐. 니들이 방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영진과 두 친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우리가 뭘 잘못했지?' '빨리 생각해!맞아 죽을 일 있어?' '괜히 트집 잡는 거 아냐' ......라는 눈빛이 서로 오고간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다시 발길질을 날렸다. 퍽퍽퍽! "아까 방 안에서 담배 피웠잖아, 이것들아! 이런 씨발 것들이 어디서 감히 담배를 펴! 니들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치디? 니들 선생이 그렇게 가르치디? 미성년자는 담배 피면 안 된다는 것도 몰라?' 퍼버버버벅! "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한번만 살려주세요.' "시끄러! 담배는 몸에 안 좋다는 것도 몰라? 담배는 인류의 적이야!" "혀,형도 피잖아요."" "그래서, 임마? 내가 피면 니들도 펴도 된다는 거야 뭐야? 니들이랑 나랑 같아? 이것들이 아 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만!" 퍼버버버벅! "끄아악! "커억!" "사, 살려....." "닥쳐! 담배를 피우는 것들에게 자비심이란 필요 없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면 피웠지, 왜 꽁 초를 컵 안에다 버리고 지랄이야? 그리고 가래침은 왜 뱉어? 니들 평소에도 바닥에 꽁초 버 리고 가래침 뱉고 그러지? 니들 같은 놈들 때문에 전체 흡연자가 욕을 먹는 거야! '꽁초는 재떨이에 가래침은 목구멍 속에' 라는 구호도 몰라?" "혀, 형도 바닥에 꽁초 버렸잖아요!" "......" 그랬었나? 난 다른 놈들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그놈들은 영진의 말이 맞는다는 듯이 열심히 고개를 끄 덕였다. "여긴 내 땅이야, 임마! 내 땅에 내가 꽁초 버린다는 데 니들이 뭔 상관이야? 니들도 억울하 면 빌딩 한 채 세우든가!" 퍼버버버벅! 아아~ 힘들다. 패면서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몸이 예전 같진 않다. 예전 체력이었으면 삼일밤낮을 패도 끄 덕없을 텐데. "헥헥, 내 분명히 말하지만.......맞는 니들의 아픔은.......패는 이 엉아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다." 난 누구나 한 번쯤 학교 선생에게 들어봤을 것 같읕 대사를 내뱉으며 계속 팼다. 어이~ 거기 있는 앞짱구. 동생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고개 좀 돌려보지? "아아~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난 라이레얼 언니도 좋고,지니 오빠도, 좋고, 크로 니스 오빠도 좋고, 루도 좋은데. 그냥 다 데리고 살면 안 되는 걸까? 어째서 이 나라는 일부일처제인 거지? 내가 누구를 선택하든 셋은 울게 될 텐데. 흑흑~ 난 죄 많은 여인인가 봐." "......" 앞짱구 신났네. 날이 갈수록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악화되는 영아. 정말 언제 한번 병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냐? 장소가 바뀌어 이곳은 옥탑방 안. 정말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영진과 두 친구는 방 한구석에 조용히 쪼그려 앉아있었다. 난 그들을 노려보았다. 움찔! 내가 눈을 풀자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난 다시 눈을 부릅떴다. 움찔! "푸하하!" 짧은 시간의 교육이었지만,효과가 크다. 단기간에 이 정도 효과를 거두다니! 역시 난 선생 체질? "약이라도 발라야 하는 거 아냐, 오빠?' "괜찮아. 약에 의존하는 건 별로 안 좋아. 놔두면 몸이 알아서 치료하게 되어있어." "그래도......" "특히나 이 나이 때 남자애들은 몸의 치유력이 절정에 다다라 있어. 그러니 약보다는 몸의 자연치유력에 기대는 게 좋아.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약에 기대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아. 그러니까 오빠 말 들어." 결정적으로 약의 의존하면 약값이 나가게 되지. 요즘 약값이 얼마나 비싼데! 난 영진과 두 친구를 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너희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영아는 내 입에 물린 담배를 확 빼앗았다. "내 방은 금연이야." "뭐라? 아까 쟤들 필 때는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땐 그때고. 아무튼 지금부터 내 방은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었어."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여긴 내 방이야!" "원 주인은 난데." "지금은 내가 주인야! 임대차계약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 "웃기는 소리! 집주인은 언제 어디서든 담배를 피울 권리와 의무가 있어!" "말도 안되는 소리 좀 하지마! 그리고 여긴 숙녀의 방이야. 숙녀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 런 몰상식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숙녀의 방......""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 가득 쌓인 책들. 그리고 곳곳에 널린 과자봉지와 쓰레기들. 앉은 자리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 "이게 숙녀의 방이냐? 웬만하면 청소 좀 하고 살지?" "이,아무튼......" 본인도 말해놓고 미안한가 보다. 어라? 저기 벗어놓은 브라도 있네. 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으음, 가슴이 작다보니 브라도 무지 작군. A겁이나 되려나? 나 같으면 미안해서 뽕이라도 좀 집어넣겠네." 난 말을 하며 영아의 얼굴을 보았다. 영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변태!" 짜악! 난 부어오른 빰을 어루만졌다. 영아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린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빠의 뺨을 때리다니. 우리 영아는 참으로 못된 엘프.......가 아닌 앞짱구 구나." "시끄러!그 정도로 끝내준 걸 다행으로 생각해." "그래 그래. 오빠가 잘못했다.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됐어!" "......" 앞짱구 진짜 화났나 보네. 앞짱구를 앞짱구라 말하면 안 되듯이, 평평한 가슴을 보고 평평하다 말해서는 안 되나 보 다. 사실 영아 가슴이 그리 작은 것은 아니다. 평균보다 약간 작은 정도? 하지만 라이레일이나 루시아와 비교해보면 좀 많이 작아 보인다. 난 미안한 마음에 영아의 앞짱구를 쓰다듬어주었다. 슥슥. "미안하다니까.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러도록 노력할께." "흥!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는 거야. 앞으로 또 그러면 절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 니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알았어." 영아의 화가 풀린 듯하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치우고 영진과 두 친구를 보았다. "어이, 거기 영진이 옆에 앉아 있는 두 남학생. 자기소개 좀 한번 해보지?' 키가 좀 작고 얼굴이 새까만 남학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임정환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중간 정도 키에 얼굴이 희멀건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전진빈입니다." 난 두 남학생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기억해놓았다. "셋이 친구냐?' "예." "그 혼수상태라는.......누구더라?" "권주혁이요." "그래 맞아. 권주혁. 그러니까 내가 니들 말을 한번 정리해볼께 권주혁이라는 애와 니들 셋은 아주 매우 많이 베리베리(Vely Vely)친한 친구였어. 맞지?" "예." "니들 다 같은 학교냐?" "예. 모두 전주고에 다닙니다." "그래. 그러니까 니들 넷은 전주고에 다니는 아주 친한 친구였어 그런데 얼마 전 권주혁이 모종의 이유로 서울에 전하을 가게 되었지. 너희들은 가 슴이 아팠지만 친구를 보낼 수밖에 없었어. 그치?" "예." "그런데 얼마 후 일이 터진 거야.너희들의 절친한 친구 주혁이가 일진회에게 밉보여서 뒤지 게 맞은 거지. 얼마나 맞았는지 현재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 중이야.너희들이 주혁이의 절 친한 친구인 만큼 누군가가 너희들에게 연락을 해주었겠지. 뭐, 부모나 형 같은 사람이. 그 얘기를 들은 너희들은 매우 분노했지. 그래서 복수를 하기 위해 학교도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왔어. 그런데 서울에서 지내려면 돈이 있어야지. 복수를 하루 만에 끝낼 수는 없는 노릇 이니까. 그래서 돈을 얻기 위해 영아를 찾아온 거야. 영아는 책 팔아서 돈 좀 만졌으니까. 그치?" "예." 나의 일목요연한 정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난 정리하는 데 재능이 있는 건가?' 이 재능을 공부에 쏟았으면 서울(에 있는)대학 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그럼 이제 정리가 끝났으니 결론을 내려주마." 난 영진과 두 친구를 둘러보며 말했다. "당장 하산해라." "예?" "전주로 내려가라고. 한국말 못 알아듣냐?" "그,그런!" "또 맞고 싶니?" 난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그러자 영진과 두 친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복수는 뭔 복수? 니들 홍콩 느와르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지금 영웅본색 찍냐? 니들이 복수를 왜 해? 그건 경찰이 알아서 할 일이야." "하지만 경찰에 신고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증거나 증인도 없을 뿐더러, 설사 있다고 해 도 가벼운 처벌로 끝난다구요." "증거나 증인이 없어? 지나가는 사람이 신고했다며?" "예. 듣기로는 금발 외국인 남자가 신고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신원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 에 어디 사는 사람인지 알 수도 없고...... 어쩌면 지금쯤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수도 있으 니......" "잠깐." "예?" "금발 외국인 남자가 신고했다고?" "예." "그리고 그 혼수상태에 빠진 애 이름이 권주혁이고." "예." "......" 어째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다. 난 잠시 회상 모드로 들어갔다. 퍽퍽! "권주혁 이 개새끼야!" "감히 날 자빠트렸다 이거지? 이런 씨발 새끼가!" "죽어, 이 새까! 죽어!" "니 팔도 박살내 주마!" "야! 지금 니들 뭐하는 거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젠장 저 꼰대는 뭐야?" "저 새끼는 뭔데 끼어들어? 그냥 갈 길 갈 것이지." "야, 야, 됐어.이제 그만해. 이 정도로 팼으면 이 새끼도 정신 차렸겠지. 괜히 누가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이만 가자." "씨, 씨발. 이 새끼 피를 좀 많이 흘리는데?" "조, 좀 위험한 거 아냐?" "서, 설마 이 정도로 죽기야 하겠어?" 회상 모드 끝. "맞아 그놈이었어!" 난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예?무슨......" "그러니까 권주혁이라는 애가 일진들에게 얻어맞은 장소가 바로 이 건물 앞 주차장이고, 그 걸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나라는 거지.' "예." "정말이야,오빠?" "넌 금발 외국인 남자하면 생각나는 사람 없니?" "금발 외국인 남자......아! 지니 오빠!" "맞아 그걸 목격하고 신고한 사람은 지니지.' "그게 정말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어?" "너 진짜 기억 안 나? 그때 치킨 먹을 때 말이야.' "응? 치킨 먹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 "......" 니 두뇌 수준도 알만하구나. 그 머리로 어떻게 글을 쓰나 몰라. 다시 회상 모드. "아! 그런데 아까 보니까 구급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던데,대체 무슨 일이야?" 영아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날 보며 물었다. "아아~ 그거? 그냥 좀 그럴 일이 생겼어." 그러자 루시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인데?" "아까 치킨 사들고 돌아오는데 고등학생들이 한 놈을 다구리 놓더라구." "다구리? 다구리가 무슨 말이야?" "으응. 집단 구타한다는 뜻이야. 아무튼 그놈들 쫓아내고 보니 쓰러진 남학생은 머리가 깨지 고 뼈가 부러져서 피투성이가 되어있더라구. 그래서 지니가 응급처치하고 구급차를 불렀 어." "그런 일이 있었어?' "응. 뭐,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괜찮을까?" "괜찮을 테니 안심해.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는 안 죽어." 회상 모드 끝. "이게 우리가 치킨 먹을 때 있었던 일이란다." "아! 그랬었지! 그럼 그때 얻어맞은 애가 주혁이었던 거야?' "얘들이 그렇다잖아." 난 다시 영진이와 두 친구를 보았다. "그러니까 니들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지?" "그럴 수는 없어요.' "맞아요.' "주혁이 복수를 해야 돼요." "내가 귀찮은 걸 싫어하지만, 정 원하다면 경찰에 신고해 줄게. 그리고 증언까지 해줄게." 어차피 신고한 건 지니다. 귀찮아도 지니가 귀찮을 테니, 어차피 상관없겠지. "......"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 지니는 현재 가게 재개장 문제 때문에 무지하게 바쁘잖아. 만약 이런 문제에 얽혀들게 되면 가게 재개장이 늦쳐지겠지? 그리고 가게 재개장이 늦어지면 개털 상태가 계속 지속되겠지? 그러다가 은행에서 대출금 상환 독촉장이 오겠지. 하지만 나는 그 돈을 갚을 능력이 없겠 지. 그럼 은행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껏 장만한 내 건물을 대출금 대신 가져가겠지. 그럼 나와 우리 가족들은 전부 길바닥에 나앉아...... "헉 안 돼!" "왜 그래, 오빠? 미친 거야?" "......" 내가 그렇게 제 정신이 아닌 것 처럼 보이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니는 바빠서 안 되겠다. 으음, 좀 귀찮지만 까짓 거 내가 신고하고 증언하고 다 하지 뭐.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경찰에 신고해봤자. 이래저래 다 빠져나간다구요 그리고 처벌을 받는 다고 해봐야 1,2년 형 살면 끝이예요." "뭐 그건 그렇지.' 우리나라 법은 항상 그렇다. 누가 그랬던가? 하늘의 그물망은 넓어도 악인은 한 명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법의 그물망은 좁아도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은 다 빠져 나간다. 대신 돈 없고 빽 없는 피라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걸려든다. 심지어는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까지 걸려들기도 한다. 저번에 언론에 크게 터진 여중생 집단 강간 사건 때도 가해 학생 대부분이 아무런 처벌도 받 지 않고 풀려났다. 강간 피해자는 있는데 강간 가해자는 없는 이상한 상황. 그리고 가해자는 멀쩡히 학교 잘 다니는데. 피해자는 도망치듯이 학교를 떠나야 하는 이상 한 상황.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사실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이 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건 선진 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국가들도 그러하니 별로 태클 걸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 그래도 선진국은 법에 정의라는 것이 있다. 비록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정의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눈 가리고 아웅조차 안 한다.이젠 국민들 대부분이 법에 정의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말을 모두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가 되었다.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어떤 놈이 이딴 되도 않는 소리를 교과서에 집어넣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놈 찾아가 얼굴 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 법이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만인 앞에 평등' 해야 한다. 법은 모두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기면 처벌을 받게 된다.하지만 법을 어겨도 누 구는 처벌을 받고, 누구는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칼로 찔러 죽였는데 누구는 훈방 되고,누구는 사형당한다면 법이 무 슨 소용이 있겠는가? 법은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남의 생명을 존중해 주고, 자신의 재산이 소중하기 때문에 나의 재산을 존중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은 일부 사람들에게 엄청 관대하다. 정치인이나 기업인은 어떠한 짓을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고, 친일파 재산을 보호해주기 위 해 법원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렇게 되면 법은 만인을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일부 계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된 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더 이상 법을 믿지 않고,법을 지킬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스스 로를 방어할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 대표적 방법이 인터넷을 통한 마녀 사냥이다. 죄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사진과 인적사항을 인터넷에 올려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것이다. 일종의 인벌(人罰)이다. 법이 처벌하지 않으니 직접 나서서 처벌을 하겠다는 것이다. 법은 가진 자를 위해 존재한다. 대한민국 법의 정의는 죽은지 오래다. 법을 지키는 사람은 바보다.어기는 게 이득이다. 언제쯤이면 이런 말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국민들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최소한 법이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주길 바라고 있 을 뿐이다.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무죄나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정치인과 기업인. 나라 팔아먹고 동족 피고름을 짜내 만든 재산을 토해내기는커녕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어 줄 줄이 승소하는 매국노 후손들. 여학생을 집단 강간하고도 훈방돼서 멀쩡히 학교 잘 다니는 가해학생들. 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고, 누구를 위한 판결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말로만 선진국을 외치고 있다. 국민소득 2만 불? 뭐, 좋다.하지만 국민소득이 올라간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 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 은 경우는 세계 1위의 산유국으로 석유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나다. 돈이라면 썩어날 만큼 많다. 그러나 세계 어느나라도 사우디아라비아를 선진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돈만 많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이 가지는 사회자체의 합리성이야말로 선진 국의 저력이다. 정치,교육,법,인권 등등. 우리나라는 모든 면에서 후진국 수준이다. 선진국 대열에 들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에 걸쳐 합리성을 재고해야 한다. 그게 10년 후가 될지 20년 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평생 이대로 개발도상국으로 살 다가 주저앉을 수도 있고, 더욱 후퇴해서 당당하게 후진국 반열에 들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잘해야 할 것이다. "으음, 확실히 법의 정의에 기댄다는 것은 미친 짓이지. 이 나라엔 법의 정의라는 게 죽은 지 오래니까 말이야."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영진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부탁이에요, 형. 저 좀 도와주세요." "응? 뭘 도와줘?전주로 내려가게 도와달라고? 차비 없냐?"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면 뭔데?설마 아직도 복수하겠다는 거냐?" "주혁이는 제 가장 친한 친구에요. 가장 친한 친구가 얻어맞아서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생각 해 보세요. 형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응? 나 친구 없는데. 난 왕따...... 아! 잘 생각해보니 몇 명 있구나." 루엔,크로니스,라이레얼. 그래도 이 셋은 나의 친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셋이 얻어맞아 혼수상태에 빠지는 상상은 잘 되지 않는다.크로니스야 일단 드래곤이니 제외. 루엔은 조폭 수십 명 정도는 피 한 방울 안 보고 떡으로 만들 수 있 는 권법가이고, 라이레얼은 용병 출신으로 역시 조폭 수십 명 해치우는 것은 일도 아니다 게다가 화이트 드래곤 카르까지 옆에 붙어 있다. 대체 누가 이들을 혼수상태로 빠트릴 수 있겠는가? 있으면 한번 데려와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글쎄 가만히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예?" "아무튼 그래서 지금 집에 안 돌아가겠다는 거야?" "주혁이 복수를 해야 한다니까요!" "좋은 말로 할 때 내려가, 임마! 고등학생이 공부를 해야 할 거 아냐?" "그러는 형도 고등학교 그만 뒀잖아요." "응?니가 그걸 어떻게 아니?" "아무튼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형." "내가 뭘 도와줘?" "제가 복수하게 도와주세요." "뭐? 복수를 도와달라고?" "예. 형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해요." "내 실력이야 뭐 대단하긴 하지." 이종격투기 대회 청소년부 전국 2등을 가지고 놀았으니 말이야. 영진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하고 있었다. 남자가 다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아까 벌 받을 때도 무릎을 꿇긴 했지만,그때 꿇은 무릎이랑 지금 꿇은 무릎은 그 의미가 천지 차이다. 영진은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고 나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꽉 다문 입과 꾹 쥔 주먹. 난 영진의 의지가 얼마 나 굳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영진의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지,고삐리들과 싸울 수는 없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얘도 빨리 전주로 돌려보내야 한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얼마나 걱정을 하시겠나? "너는 집에서 걱정하고 계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느냐? 난 걱정하고 계실 백부님과 백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근과도 같이 무겁구나. 그러니 너는 어서 본가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도록 하여라"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 오빠? 미친 거야?“ “......“ 얜 뻑하면 미첬데. 이거 진짜 누구 미치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라? 대체 왜?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알아듣고" 예, 형님. 제가 잘못 생각한것 같습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겠습니다." 라고 대 답해야 할 거 아냐?“ “싫어요!“ “걱정하고 계실 부모님을 생각해 봐!하나밖에 없는 딸이 이 모양인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그러면 부모님 심정은 어떻겠어?“ 그러자 영아가 날 보며 소리쳤다. “잠깐만, 오빠. 하나밖에 없는 딸이 이 모양이라니?그거 무슨 뜻이야?“ 난 당당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럼 넌 지금 니가 정상이라 생각하니?“ “내가 뭐 어때서? 나만한 효녀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엣날 같았으면 나라에서 효녀비를 세워주고도 남았어!“ “그거 웃기려고 한 소리 맞지?푸하하~.“ 난 크게 웃어 보인 다음 영진과 두 친구를 둘러보았다. “응? 니들은 왜 안 웃어? 개그 아니야? 이것들 아주 저질이구만.“ 그제야 영진을 제외한 두 놈은 억지로 웃었다. 영진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영아는 그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웃지 마! 왜 웃어?“ “......“ 다시 침묵하는 녀석들. “오빠는 대체 왜 그래? 오빠가 아무리 나의 효심을 애써 폄하하려 해도 소용없어. 누가 뭐래도 난 진정한 효녀니까." “큭큭큭......“ 더 이상 참기 힘들었던지 웃음소리가 영진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영진은 그렇게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영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넌왜 웃어!“ 영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진의 머리를 걷어찼다. 웃고 있던 영진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이게 무슨 짓이야, 누나?“ “시끄러!누나한테 버릇없이 구는 동생은 응징 받아야 마땅해!“ 영아는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는 듯했다. “야야, 그만하고 앉아.“ 난 영아를 달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앞짱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우리 영아의 개그 실력이 날날이 늘고 있는 것 같아 오빠는 참 기쁘구나. 조금만 더 열심히 하 면 오빠의 뒤를 이어 2대 뺀질이로 등극하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그러자 영아는 내 손을 탁 쳐내며 화를 냈다. “나 효녀 맞다니까! 아니라는 증거가 있으면 하나라도 대 봐!“ “어쭈! 대라면 못 될 줄 아냐? 부모님이 공부 좀 하라고 서울로 올려 보냈더니, 대학 자퇴 한 게 효녀냐? 그리고 너 지금 혼날까봐 무서워 말씀도 못 드리고 있잖아. 그것도 모자라 대학 잘 다니고 있다고 거짓말까지 했지. 더 나아가 정 직과 신용의 대명사인 이 오빠한테까지 거짓말 시켰고. 그게 효녀가 할 짓이냐? 응? 한번 말해보시지.“ “그,그건......“ 자기도 양심이 있다면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영아가 항변을 못하고 입을 우물거리자 영진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누나? 누나 정말 대학 자퇴했어?“ "아,아니야 영진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 "누,누나는 결백해. 지,진짜야. 너 누나 못 믿니?' "......" 이 대사 어째 무지하게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형,진짜로 누나 자퇴했어요?"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그런 대답은 원숭이도 할 수 있는 거구요." "......" 뭐라? 원숭이? 하늘같은 사촌형님을 원숭이에 비유해? 빠직! "에라, 이 자식아! 원숭이가 그런 말을 어떻게 해? 세상에 말하는 원숭이도 있냐? 있으 면 한번 데려와 봐!단,못 데려오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퍼버버버벅! "자, 잘못했어요, 형!" 내가 마구 밟자 영진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빌었다. "어쩔 거야, 오빠? 내가 비밀로 해달라 그랬잖아! 그걸 그렇게 쉽게 말해버리는 게 어딨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거란다. 어차피 언젠가는 걸릴 거 좀 일찍 알려진다고 해 서 무슨 상관이 있겠니? 기왕 이렇게 된 거 부모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용서를 비렴." 내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영아는 제법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훗~ 니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백날 노려봐 봐라. 니 눈만 아프지. "좋아. 세사엥 영원한 비밀이란 없으니까,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랑 키스한 것도 언젠가 는 알려지겠네.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질 거 내가 지금 당장 루시아 언니한테 알려줘도 상관없겠지." "자,잠깐!" "왜?오빠도 루시아 언니한테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빌면 되잖아." 영아는 정말 당장이라도 루시아한테 말하러 갈듯 바닥의 덮개를 열려 했다. 난 재빨리 영아를 붙잡았다. "미안하다.이 오빠가 다 잘못했다." "흥!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 오빠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아,아니야, 영아야. 너 효녀 맞아. 이 오빠가 태어나서 너 같은 효녀는 처음봤어.나 중에 오빠가 돈 많이 꼭 니네 동네 아파트에 효녀비 세워줄게. 그 리고 영진은 입막음은 내가 잘 시켜둘게 원하다면 서명대 졸업장도 위조해줄게 지니한테 부탁하면 안되는 게 없거든." 영아는 날 흘겨보며 말했다. "오빠 앞으로 나한테 잘해.' "응응. 이 오빠가 앞으로 잘할게. 아이구, 우리 예쁜 영야. 어쩜 이렇게 착하고 귀여 울까? 오빠는 영아같이 착하고 귀엽고 예쁜 사촌여동생이 있어서 막막 행복해." "아니까 다행이네." 영아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난 이를 갈며 영아의 옆에 앉았다. 이걸 살인멸구할 수도 없고...... 빠드득! "응?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ㅔ." "아,아니야, 영아야. 니가 잘못 들은 거겠지.호호~요즘 신경이 예민해졌나 보구나.그러게 좀 쉬 지 그랬어? 너무 글만 쓰면 몸에 안 좋아. 아! 그럼 마감은 어떡하냐고? 걱정하지 마. 앞으로 최모 편집자님 찾아오시면 내가 다 막아줄게. 어머! 우리영아 옷에 먼지가 묻었네." 난 영아의 어깨를 톡톡 털어주었다. "나 피곤해,오빠." "응?" "나 피곤하다고. 말귀 못 알아들어?" "아,알았어." 난 재빨리 영아의 뒤로 자리를 옮겨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그것밖에 못해,오빠? 아침 안 먹었어? 밥 먹었으면 힘 좀 써야할 거 아냐?" "......" 이런 빌어먹을 앞짱구 같으니! "아야! 아프잖아. 오빠 정말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정성을 다 해야 할 거 아냐, 정성을!" "미,미안해, 영아야." 난 조심스럽게 영아의 어깨를 꽉꽉 주물렀다. "아아~ 시원하다. 그런 식으로 하란 말이야. 난 어깨가 시원할수록 입이 무거워지는 사람인 거 알지?" "응응. 이 오빠가 왜 모르겠니?' 약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설쳐대다니! 두고 보자 앞짱구. 언젠가 반드시 피의 복수를...... 난 앞짱구의 어깨를 주무르며 영진과 두 친구를 보았다. "방금 들은 건 전부 잊어라.만약 함부러 입을 놀릴 시에는 전주까지 내려가 뒤지게 밟아주마. 살 아 있다는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예, 예." 영진과 두 친구는 서로 숙덕거리더니 내 앞에 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셋 다. "응? 니들 왜 그러니?" 내가 묻자 셋은 머리를 땅에 대며 소리쳤다. "도와주십시오,형님!" "......" 뭐야? 무슨 조폭이냐? 난 계속해서 영아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니들 아직도 그 소리냐? 전주로 내려가라니까, 임마!" 셋을 대표해 영진이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니까요.' "뭐가 그럴 수 없어? 하나밖에 없는 딸이 대학교 자퇴한 상황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고등학교 자퇴할 일 있냐? 너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가야 될 거 아냐?'넌 대학은 인생의 전부'.'대한민국 국민은 오직 대학을 가기 위해 태어났다', '대 학 가면 승리자, 못가면 낙오자' 라는 학교 선생의 말도 못 들었니?" "전 대학보다 친구가 더 소중해요!" "그것도 다 한때야. 친구가 밥 먹여 주냐? 친구가 월급 줘?친구 챙겨봐야 나중에 돌아오는 건 빚보증으로 인한 빨간 딱지밖에 없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형이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그 친구는 저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소중한 친구에요." "뭐?목숨보다 더 소중한 친구?" "전 그 친구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어요!" "......" 목숨도 걸 수 있어? 잠깐. 이쯤 되면 영웅본색이 아니라 야오이 아냐? 야오이. 일명Y물 여자들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으나 가끔 취향이 특이한 남자들도 좋아하는 금단의 장르. 남자가 남자와 키스하고, 남자가 남자를 덮치고, 남자가 남자를......마치'질투'에서 크로니스가 히로에게 그랬듯이...... "헉쓰스!그건 안 돼." "왜 그래, 오빠?미......" "나 안 미쳤어!" 난 영아에게 소리친 다음 영진을 보았다. "너 솔직히 말해. 그 주혁이라는애와 무슨 관계야,누가 공(攻)이고 누가 수(守)야?' "예? 그게 무슨......" 영진은 못 알아들었지만, 영아는 야오이 작가답게 금방 알아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영진이가 주혁이랑 그럴 리 업잖아!" "아니야. 이거 뭔가 수상해 방금 쟤가 말한 거 못 들었어?목숨도 걸 수 있다잖아. 그냥 친구 한테 목숨도 건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않아?" "그,그건 그렇지만......"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어때? 쟤 공이야,수야?" "그,글쎄.아무래도 영진이면 강공(强攻)인 것 같은데." "역시 그렇지?" "응, 뭐......" 그렇게 영아와 나는 업계 전문용어(?)를 주고받았다. 영진과 두 친구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영아는 갑자기 영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안 돼, 영진아! 넌 절대 그런 길로 빠지면 안 돼. 그건 옳지 못한 일이야." "......" 웃기고 있네. 옳지 못한 일인 걸 아는 애가 야오이를 써서 대박 터트렸냐? "넌 우리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해.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 금단의 사랑에 빠지면 안 돼." "무,무슨 말이야,누나?' "잔말 말고 누나 말 들어. 사랑은 남녀끼리만 하는 거야. 그것은 우주가 정한 법칙이야. 절대 그것을 벗어나서는 안 돼." "......이 글의 백합화를 주도하는 니가 그런 말을 하니까 무지하게 설득력이 떨어진다." 영아는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계속 영진을 다그쳤다. "빨리 누나랑 약속해. 앞으로는 절대 다시는 남자랑 하지 않겠다고." "그만해, 영아야. 영진이도 그쯤하면 알아들었을 거야." "너 남자랑 하다 걸리면 누나한테 죽을 줄 알아! 엄마랑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그러니까 남자랑 뭘 하냐고?"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영진은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있었다. 난 영아를 억지로 떼어놓은 다음 영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죽어도 복수를 해야겠다는 거냐?" "예." "진짜?진짜로 죽어도?다시는 살아나지 못해도?" "예." "아주 지랄 쌈 싸먹고 자빠졌네." "......예?" "지랄 염병 꼴값을 떤다고." 친구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친구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말은 잘한다. 이런 말 누가 못 하겠냐? 하라고 시키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문제는 정말로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느냐다. 내가 보기엔 영진은 지금 객기로 이러는 거다. 친구가 크게 다쳤다는 말에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위기에 처하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다가 정말로 죽을 위기에 처하면 어떻할 것인가?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아무런 소용없다. 한순간의 객기로 인생을 망칠 셈인가? "좋아. 니 뜻이 정 그렇다면 한번 나와 보렴." 난 영진을 밖으로 불러냈다. 영진은 영문도 모른 체 따라나섰고, 영아와 영진의 친구들도 밖으로 나왔다. 난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한 판 붙어봐서 알겠지만, 나 싸움 무지 잘한다." "예." "그러니까 복수를 하더라도 너보다는 내가 낫겠지. 즉, 니가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나는 이길 수 있 고,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너도 이길 수 없어. 그렇지?" "예." "그 친구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지?" "에.' "그럼 죽어." "예?" "죽을 수도 있다며?그럼 한번 죽어봐." 난 난간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뛰어내려봐. 그럼 니가 죽든 살든 내가 대신 복수해줄게. 나 그놈들 얼굴 다 기억하고 있거든 . 한 놈도 빠짐없이 박살을 내줄게. 주혁이라는 애 병실 옆에 단체로 입원하게 해주지. 어때?" "오빠 미쳤어?그게 말이 돼!" "......" 당연 말 안 된다. 나도 말 안 되는 거 알면서 이런 말 하는 거다. "친구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며? 그럼 한번 죽어봐." 내 말에 영진은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이죠? 정말로 대신 복수해주는 거죠?' "그렇다니까." "좋아요 까짓 거 뛰어내리지요." 영진이 말하자 영아는 깜짝 놀랐다. "영진아, 너 미쳤어? 왜 이래?" "누나는 저리 비켜." 영진은 영아를 밀치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 도움닫기를 한 다음 난간을 뛰어넘을 생각인 것 같다. 문제는 이게 장애물 달리기 허들만 뛰어넘으면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 난간을 뛰어넘는 순간 수십 미터 아래로 추락하게 된다. 십중팔고 즉사고, 운이 좋아도 반신불구다. 영진은 달리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가 붙는다. 훗~ 객기 부리기는. 그래봐야 난간 앞에서 멈출 게 틀림없다. 미치지 않는 이상 난간을 뛰어넘을 리 없지. "그만 둬, 영진아!" "야,미쳤어?" 두 친구는 달리는 영진을 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영진은 더욱 빠르게 달렸다. 어느새 난간 앞에 도착. 영진은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뛰어넘었다. 난 영진의 왼손이 난간을 꽉 잡고 있음을 알았 다. 왼손으로 떨어지려는 몸을 지탱하려는 것이다. 그 순간, 난간을 잡고 있는 왼손이 어이없이 미끄러졌다. "아!" 영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영진은 아래로 추락했다. "안 돼!" 영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난 그런 영아를 보며 말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오,오빠......" 난 매달려있는 영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괜찮냐?' "예,예?" 어이가 없다는 영진의 표정. 영진의 왼손목은 내 오른손에 잡혀 있었다. 영진이 난간을 놓 쳐 추락하는 순간 내가 재빨리 붙잡아준 것이다. "죽는 줄 알았지?" "예.' "고맙지?" "......예.' "별로 고마워하는 표정이 아닌데." 난 그렇게 말하며 슬쩍 손을 놓았다. "으아아!" 몸이 살짝 아래로 내려가자 영진은 죽을 것 같은(정말로) 비명을 질렀다. 난 재빨리 다시 손 을 잡았다. "고맙지?" "예. 고마워요. 엄청 고마워요." "후후~ 진작 글러 것이지." 난 영진을 끌어올려 주었다. 다시 옥상을 밟은 영진은 반쯤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다리가 풀려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 왼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다시 기어 올라온다는 생각이었는데, 실수로 난간을 놓쳤다. 그 바 람에 정말로 죽을 뻔했다. 내가 붙잡아주지 않았으면 90퍼센트 확률로 시체가 되었다.(나머 지10퍼센트는 반신불구) 영아는 간신히 살아난 영진을 마구 짓밟았다. 퍽퍽퍽! "너 미쳤어? 뛰어내리란다고 진짜 뛰어내리는 놈이 어딨어? 정말 죽을 생각이었어?" "아,아니야, 누나. 난간을 잡고 다시 올라올 생각이었단 말이야." "시끄러! 영웅 오빠가 안 잡아줬으면 어쩔 뻔했어? 너 정말 생각이 있는 애야,없는 애야?" "그,그만해,누나!" 영아의 무자비한 발길질을 영진은 그대로 얻어맞아야 했다. 한창 영진을 떡으로 만들던 영아 는 갑자기 날 노려보았다. "오빠!" "응? 왜 또 나한테 그러니?" "오빠 미쳤어? 어떻게 사촌동생에게 뛰어내리라고 할 수가 있어?" "뛰어내리란다고 뛰어내릴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뛰어내리라고 했겠니?" "아무튼! 오빠 한번만 더 그래 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 앞짱구 화났네. 제법 많이 화난 것 같으니 건드리지 않는 게 최선이다. 하긴, 동생이 죽을 뻔했으니 화가 나 기도 하겠지. "그래,이 오빠가 잘못했다. 미안하구나. 앞으로 조심하마." "......어째 사과에 성의가 별로 없어 보여." "미안하다고 하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라니?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이 오빠는 영진이의 생 명의 은인이란다." "병 주고 약 줘 놓구선 뭔 생명의 은인?" "병 주고 약 안 준 것보단 낫잖아." "흥!" 영진은 떡이 된 몸을 추스리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쨌든 형 말대로 했으니까 도와주시는 거죠?" "내 말대로 하긴 뭘 내 말대로 해? 너 아직 안 뛰어내렸잖아." "전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형이 잡은 거잖아요." "니가 언제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난간 잡고 다시 올라올 생각이었잖아." "아무튼 난간은 넘었잖아요." "......" 그건 그렇다. 사실 거기까지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이놈은 정말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해봐야 씨도 안 먹힐 것이다. "그래 너 좋을 대로 해라." "예? 그럼 도와주시는 거예요?" "아니.난 바빠서 못 도와주고, 대신 방해는 안 할게. 그럼 됐지?" "예? 그러는 게 어딨어요? 약속대로 친구 복수를 도와주서야죠." "어쨌든 안 뛰어내린 건 사실이잖아. 그리고 니친구지 내 친구냐? 원래 친구 복수라는 건 자 기 손으로 직접 해야 의미가 있는 거야.남의 도움 같은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되지. 진정한 근 성가이(根性Cuy)라면 아무리 힘든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열혈과 근성으로 극복해 내야 하는 법."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형! 제발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영진과 두 친구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제법 비장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와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난 무지 바쁜 사람이다. 어린 엘프들과 놀아줘야 하고, 틈만 나면 루시아한테 찝쩍거려야하고,지니한테 아부도 받아 야 하고, 일루니아 여사님과 눈싸움도 해야 하고,인디 구박도 해야 하고...... 아아~할일이 많아도 너무 많다. "오,오빠,그러지 말고,좀 도와주는 게 어떨까? 오빠가 도와주면 더 빨리 끝날 거 아니야?" "응? 그게 무슨 소리니,영아야? 넌 동생 돌려보낼 생각은 안하고 뭔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백날 설득해봐야 돌아갈 것 같지 않잖아. 뛰어내리라니까 딘짜로 뛰어내리는 애가 내 말을 듣겠어?" "그건 그렇군." "그러니까 오빠가 좀 도와줘. 복수든 뭐든 빨리 끝나면 빨리 끝날수록 영진이가 빨리 집으 로 돌아갈 거 아냐?" "그야 그렇겠지." "그럼 도와줄 거지?" "아니."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영아는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왜?" "귀찮아. 그리고 내 이 나이에 고삐리들과 싸우게 생겼냐? 조폭이라면 또 모르겠다. 원래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은 쓰지 않는 법이야.하물며 소 잡는 칼도 아닌 드래곤 잡는 칼에 비 유될만한 내가 고삐리 몇놈 조지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리고 원래 자기 일은 스 스로 해결해야 하는 법이야.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하는 버릇을 들여놔야 커서도 스스로 잘 하기 마련이지." "그래도......" "내가 이러는 건 다 영진이를 강하기 키우기 위해서야. 사자는 자기 새끼를 절벽에......" "알아 알아. 그건 아는데 영진이가 다치면 어쩔 거야?" "글쎄." 확실히 요즘 고삐리들 싸운 거 보면 장난 아니다. 전에 뉴스에서 봤는데 쇠파이프에 체인까 지감고 싸우더라. 웬만한 조폭보다 낫더라. 주혁이란 애 구타한 고삐리들만 해도 그렇다. 만약 그때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주혁이란 애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놈들을 강대로 복수하겠다고 설쳐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어쩌면 크게 다치거 나,주혁이와 같은 병실을 쓰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영아도 걱정돼서 이러는 거겠지. "으음,그래도 귀찮군. 뭐, 스스로 잘 알아서 하겠지. 그럼 난 이만 간다." 내가 걸어가자 영아가 붙잡았다. "어디가?" "어기가긴? 어린 엘프......가 아닌 어린아이들과 놀아줘야지. 우리 라이와 루와 루비가 오 빠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야." "영진이는 어쩌고?"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고? 그렇게 걱정되면 니가 도와주든가." "씨잉!" 영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오빠?" "응." "좋아. 오빠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며 나한테도 생각이 있어." "무슨 생각?" "이를 거야." "응?"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랑 키스한 거 루시아 언니한테 이를 거라고." "뭐,뭐라?' 영아는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난 재빨리 영아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너,너 지금 오빠를 협박하는 거니?" "응.'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아. 그 모습이 묘하게 사람 염장을 지른다. "이 앞짱구가!" "그러니까 영진이 도와줘. 안 그러면 루시아 언니한테 이를 테니까." "헉! 감히 하늘같은 사촌오빠를 협박하다니......" 난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영아는 정말로 당장이라도 루시아에게 이를 태세였기에. Story25. 히로, 일진회와 맞짱뜨다. 청기 공고 후문 유흥가에 위치한 술집 루카스. 이곳에는 대략 70여 명 정도의 고등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남자 40여 명에 여자 30여 명이었다. 남자는 거의 전부가 청기 공고 일진 들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일진들의 여자친구, 또는 그냥 친분이 있 어 놀러온 여학생들이었다. 시끄러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들은 자연스레 술을 마시 고 담배를 폈다. 일부 학생들은 홀에서 춤을 추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배꼽티를 입은 한 여학생은 음악에 맞추어 열 심히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한 남학생이 그녀의 뒤에 다가가 허리를 붙잡고 몸을 비벼댔다. "오예!" "좀더 화끈하게 놀아봐!" 학생들은 술을 마시며 소리쳤다. 남녀 할 것 없이 전부 손가락 사 이에 담배를 끼우고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은 청기 공고 일진회 회식이 있는 날이다. 회식 날에는 이렇 게 술집을 통째로 빌려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술집 주인은 돈만 제대로 준다면야 상대가 학생이든 어른이든 상 관없었기에 기꺼이 학생들에게 술집을 내주었다. 미성년자 주류 판매 금지는 먼 나라 얘기였다. 사실 이 지역에서 고등학생 없으면 장사가 불가능했다. 매출의 30퍼센트 이상을 고등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경찰 단속 같은 것은 상관없었다. 뒷돈 좀 찔러주면 그만이었다. 매달 정기적으로 돈을 상납하면 경찰들이 단속 일정까지 알려준다. 그러니 걸릴 리 없고, 걸려도 문제 될 게 없다. 청기 공고 일짱 김승오는 파인애플 맛럼을 마시며 춤추는 학생 들을 보았다. 남녀가 찰싹 붙어 춤추는 꼴을 보니 당장이라도 방 하 나 잡아줘도 될 것 같았다. 그때 한 남학생이 김승오 옆으로 다가왔다. 청기 공고 이짱 윤태 길이었다. "왜 혼자서 술을 마셔, 임마? 자작하면 3년 동안 재수 없다는 거 몰라?" 김승오는 피식 웃었다. "난 어차피 재수 없는 인생이야."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 맛이지. 호낮서 자작하지 말고 좀 즐 겨. 여기 여자애들 많잖아. 혹시 맘에 드는 애 없어? 내가 붙여줄 게." "글쎄. 그다지 마음에 드는 애는 없는데." "쟤 어때?" 김승오는 윤태길이 가리킨 여자애를 보았다. "아아~ 김예원. 쟨 안 돼." "왜?" "기욱이랑 잤어." "기욱이? 대천고 일짱 박기욱? 그럼 둘이 사귄 거야?"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그냥 지명해서 잔 건지, 아님 사귄 건지" "어차피 상관없잖아. 기욱이 지금 다른 여자 사귀지 않나?" "왜 상관이 없어? 난 친구 여자는 안 건드리는 주의다. 잘못하면 개족보 되거든." "킥킥,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돈은 얼마나 남았냐?" 윤태길은 김승오의 절친한 친구이자 김승오가 가장 믿는 사람이 었다. 그래서 일진회 자금은 전부 윤태길이 관리하고 있었다. 사실 상 총무인 셈이다. "남긴 개뿔이. 오늘 술값 내면 완전 쫑일 걸. 외상 달아놔야 할지 도 몰라." "젠장, 상납금이 줄었나?" "뭐 그렇지. 요즘 불경기 아니냐? 솔직히 삥 뜯는 것도 예전만 못 해. 옛날에는 그래도 만 원짜리 몇 장씩 들고 다니던 놈들이 이젠 담합이라도 했는지 전부 천 원짜리만 들고 다니더라. 오죽하면 돈 대신 식권까지 삥 뜯겠냐?" "날 잡아서 수금 한번 해야겠지?" "그래야지. 기말고사 끝나고 방학하면 크게 한번 놀아야 하니까, 한 사람 앞에 5천 원씩 걷을까?" "만 원은 어때?" "좀 힘들 걸. 그리고 한 사람 앞에 만 원이면…… 잠깐. 한 반에 오십 명씩 한 학년에 열두 개 반이니까……." "대략 2천만 원 정도 걷히겠군." "그냥 5천원으로 하자. 그래도 1천만 원이니, 그 정도면 방학 때 몇 번 놀만큼은 되잖아. 우리 피서도 좀 갔다 오고. 정 모자란다 싶 으면 2학기 시작하면 좀더 걷지 뭐." "니 맘대로 해. 돈 걷는 건 니 소관이니까." "킥킥, 그래. 여기까지 와서 뭔 돈 걱정이야? 길가에 널린 게 돈 인데. 아무 생각 말고 실컷 놀아. 한 명 건져서 하룻밤 자고 가야 지." "알았어, 임마." 윤태길은 여학생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승오는 피식 웃으며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였다. 콰앙! 누군가가 가게 문을 박살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문에 술집 안에는 한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술을 마시던 남학생, 춤을 추던 여 학생 모두 동작을 멈추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시끄러운 음악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윤태길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니들은 뭐야?" 그러자 맨 앞에 선 남자가 목을 풀며 말했다. "김승오가 누구냐?" * * * * 〃gouon〃 역시 지니의 정보는 완벽했다. 지니의 정보대로 6시에 이 술집에 서 청기 공고 일진회 회식이 있었다. 내가 9시까지 기다렸다가 급습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일단 6시에 회식을 시작한다고 해도 꼭 늦게 오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5시에 시작한다고 하면, 대체적으로는 7시는 돼야 필요 인원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파티가 절정에 이르는 것은 9시쯤이다. 그 이후에는 집에 가는 사람도 생길 테니. 그래서 난 9시를 택했다. 난 당당하게 가게 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잘못 찾 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집 안은 담배연기로 꽉 차 있었다. 수십 명의 남녀가 술을 마시 며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일부 남녀는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홀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도 여자 뒤에 남자가 달라붙어 몸 을 비벼대는 선정적인 춤을. 형형색색으로 염색을 한 놈이 있질 않나, 배꼽티에 팬티가 보일 것 같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있질 않나, 화장은 왜 저렇 게 떡칠을 했는지……. 이것들이 정말 고삐리들이란 말인가? 그나저나 하나같이 굳어 나만 바라보고 있으니 좀 쑥스럽군.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한 놈이 일어서며 외쳤다. "니들은 뭐야?" 아아~ 바로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체를 물어보면 대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난 대답해주기에 앞서서 질문을 던졌다. "김승오가 누구냐?" 나의 질문에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사이 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영진이 가까이 다가왔다. 난 배꼽티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요즘 고삐리들은 윤락녀 불러서 노냐?" "제가 보기에 쟤들도 고등학생 같은데요." "그래? 난 또 나가요걸인 줄 알았지." 내 말에 여학생들은 인상을 구기고, 남학생들은 문노했다. 각자 의 목소리가 높아지려 할 때쯤 한 남학생이 일어났다. "내가 김승오인데, 무슨 일이지?" 난 그 남학생을 보았다. "니가 김승오냐?" "그래." 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며칠 지났지만 확실하게 기억난다. 주 차장에서 권주혁을 집단 구타한 놈 중 한 명. 나를 '꼰대' 라고 칭 했던 놈이다. "그럼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청기 공고 일진회 회원들이겠군." "그래서?" "……." 이 자식이 꼬박꼬박 반말이네. "야, 내가 너보다 나이 더 많거든." 그러자 김승오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서 새꺄?" "새끼? 너 지금 나한테 새끼라고 그랬니?" "그럼 씹새끼라고 해줄까? 좆만한 새끼가 나이 처먹었으면 곱게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여긴 뭐 하러 왔어? 좆나게 밟히고 싶어서 왔냐?" "킥킥킥" 김승오의 말에 주위 남학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김승오는 담 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좆나게 밟히고 싶지? 그치?" "글쎄. 난 별로 밟히고 싶은 생각 없는데." 어느새 입구는 두 남학생이 막고 있었다. 이곳은 지하이기 때문 에 입구가 하나밖에 없다. 그곳을 막았다는 것은 정말로 '좆나게 밟겠다' 는 뜻인 것 같았다. 남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싸울 준비를 했다. 술에 취한 놈들 이 비웃음을 실실 흘리는 모습을 보니 괜히 짜증난다. "어떻게 할까, 히로?" 라이레얼이 나에게 물었다. 라이레얼은 아까 복장 그대로였다. 얼굴을 반쯤 가린 고글 형태의 선글라스 덕분인지 다행히 라이레 얼의 미모가 조금은 가려진다. 하지만 아무리 가려도 예쁜 건 예쁜 거다. 만약 이 곳 조명이 어둡 지 않았다면, 이 안의 남자들은 전부 라이레얼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을 것이다. "형." 영진도 나를 재촉했다. 아마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할 거 다. 친구의 원수가 눈앞에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난 인상을 쓰며 김승오를 보았다. "내가 제안 하나 해도 될까?" "뭔데?" "욕한 거 사과하고 조용히 따라와라." "뭐?" "내가 욕먹고 이런 제안하는 거 흔치 않거든. 진짜 너 생각해서 이런다. 이런 내 맘 좀 알아줘라." "싫다면 어쩔 건데?" "니들 다 개박살 나는 거지." 내 말에 김승오는 피식 웃었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저 새끼 돈 거 아냐?" "야, 이 씹새끼야! 죽고 싶어?" 남학생들이 소리치자 김승오는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그리 고는 날 보며 말했다. "싫은데 어쩌지?"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럼 거절한 걸로 봐도 되겠지?" "죽고 싶어 환장했나보군." "그건 내가 할 소린데." 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빈, 정환. 니들은 입구를 막아. 한 놈도 못 빠져나가게 해." "예." "걱정 마세요." 난 몸의 근육을 풀며 말했다. "으음, 나의 마지막 제안을 거절하다니. 역시 평화적인 해결 방 법은 무리였나? 뭐,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나와야 재밌지. 안 그래, 히로?" "그렇죠." 영진은 말없이 몸을 풀었다. 그의 눈은 김승오를 향해 있었다. 난 영진의 어꺠를 툭 치며 말했다. "쟨 건드리지 마라. 이따 기회 줄게." "예, 형." 우리의 대화를 듣던 김승오는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죽여!" 그러자 술집 안의 남학생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수십 명이 한 번에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제법 멋지다. 그래봐야 고삐리지만. "죽이긴 뭘 죽여? 살인에 맛 들였냐? 하긴 한번 사람을 죽일 뻔했 으니 눈에 뵈는 게 없겠지." 난 달려드는 남학생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 찍었다. 퍼억! "으악!" 코뼈가 주저앉은 남학생은 코피를 철철 쏟으며 쓰러졌다. 어쩌 면 평생 빗물 들어오는 코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뭐, 요즘은 성형의학이 많이 발달했으니 괜찮겠지. 난 단체로 달려드는 놈들을 살살 다뤄줄 만큼 상냥하지 않다. 그 리고 그건 라이레얼도 마찬가지다. 퍽! 퍽! 라이레얼은 멋진 모습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녀의 몸동작은 거 의 예술에 가까웠다. 라이레얼은 급소를 피해 때렸다. 상대를 배려해서? 물론 아니다. 급소를 제대로 때리면 한 방에 기절한다. 그러면 당 연 싸움이 재미가 없다. 그렇기에 라이레얼은 일부러 급소를 피해 때렸다. "이 씨발년이!" 라이레얼에게 얻어맞아 이빨이 깨진 한 남학생은 엄청 열 받았는 지 근처 테이블 위에 있던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끝부분을 테이블에 내리쳤다. 그러자 맥주병은 끝이 삐죽한 흉기로 탈바꿈 했다(굳이 깨트리지 않아도 흉기인 건 마찬가지다). "죽어, 썅년아!" 그래 죽어라. 넌 이제 죽었다. 난 조용히 그 남학생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라이레얼은 아주 가볍게 맥주병을 피한 다음 팔을 붙잡았다. 그 리고 그 팔을 비틀어 뒤로 돌렸다. "으아악! 이거 놔!" "싫어." 라이레얼은 그 상태에서 남학생의 머리를 붙잡고 테이블에 찍 었다. 퍽! 퍽! 퍽! "으아악! 그, 그만해! 그만!" 테이블 위에는 그 남학생이 깨트린 맥주병 파편이 남아 있었다. 그 런데도 라이레얼은 가차 없이 머리를 찍었다. 파편이 얼굴에 박히자 남학생은 죽을 것 같이 비명을 질러댔다.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이걸 인과응보라고 해야 하나? 난 놀라 소리쳤다. "죽이지만 마세요!" "응. 죽이지만 않을게." 한참을 내리찍은 라이레얼은 남학생을 놓아주었다. 남학생의 얼 굴은 그야말로 피범벅이었다. "꺄아악!" 놀란 여자들은 재빨리 뒤로 도망쳤다. 입구는 정환과 진빈에 의 해 막혀 있는 상태였으니 누구도 도망갈 수 없었다. 라이레얼은 남학생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뭐해? 빨리 안 덤비고?" 아무리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다지만, 당한 놈들을 보자 덤빌 엄 두가 안 나나 보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선공에 나섰다. 난 라이레얼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덤벼드는 놈들을 대충대충 상 대했다. 싸움에 긴박감이 없으니 별로 할 맛이 안 난다. 강자의 고독함이라는 건가? 영진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서 주먹을 휘둘렀다. 이종격투기 대회 청소년부 전국 2등이라는 타이틀이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닌지 맥주병을 들고 설치는 놈들을 그냥 보내버렷다. 한 남학생이 맥주병을 휘두르자 뒤로 살짝 피하며 돌려차기로 맥 주병을 박살내는 모습은 묘기에 가까웠다. "뭐해? 겨우 이놈들도 정리 못해?" 전투 인원이 40명이라고 해봐야 전투력은 별 볼일 없다. 게다가 술을 마셨기 때문에 그 알량한 전투력마저 하락된 상태였다. 이렇게 재미없을 줄 알았으면 술자리 시작되기 전에 쳐들어 올 걸. 난 무지하게 후회했다. 짜악! 짜악! 짜악! 고삐리들을 상대로 차마 주먹을 쓰기 미안했던 나는 대신 손바닥 으로 귀싸대기를 후려쳐주었다. 하지만 좀 때리다보니 이것도 미 안해졌다. 고막이 터졌는지 귀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쓰러지는 일 진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약해진다. 라이레얼은 간만의 싸움이 신나는지 열심히 몸을 놀렸다. 이렇 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박일현 상대할 때도 데리고 갈 걸 그랬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서 있는 남학생은 채 열 명이 안 됐다. 숫자 를 세어보니 정확히 아홉 명이다. 나머지 삼십여 명은 바닥에 쓰러 져 신음하고 있었다. 특히나 라이레얼에게 얻어맞은 놈들은 완전 떡이 되어 있었다. 불쌍한 것들. 차라리 나나 영진한테 덤볐으면 그 정도로 얻어맞진 않았을 텐데. 난 김승오를 보았다. "어때? 아까 내 제안 받아들이지 않은 거 후회되지?" 김승오는 두려운 표정으로 날 보았다. "너, 너 뭐야? 정체가 뭐야, 새꺄?" "이놈이 끝까지 반말에 욕이군. 넌 제일 마지막에 손봐주지." "머, 뭐?" "라이레얼." "응. 알았어, 히로" 몇 놈 안 남았으니 내가 나설 필요도 없다. 난 기꺼이 라이레얼에 게 남은 놈들을 넘겨주었다. "저놈은 건들지 마세요." "응.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씨, 씨발! 가까이 오면 죽을 줄 알아!" 남아있는 놈들은 주위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집어 들었다. 맥 주병이나 접시, 마대자루 등등. 라이레얼은 주저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이 든 무기라는 것 은 전혀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라이레얼은 맥주병으로 공격하는 놈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후려쳤다. 퍼억! 난 당연히 맥주병이 깨질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맥주병은 멀 쩡했다. 하긴 영화나 드라마와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거기서 쓰는 소품 맥주병은 설탕으로 되어 있는 가짜다. 그래서 손으로 세게 쥐 는 것만으로도 쉽게 부서진다. 그래서 그걸로 머리를 내려치면 완 벽하게 박살이 나는 것이다. 으음, 그런데 진짜 맥주병은 사람 머리에 내려쳐도 쉽게 안 깨지 는구나. "어라? 안 꺠지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잘 깨지던데." 라이레얼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렷다. 맥주병은 안 깨 진 대신 사람 머리는 깨졌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꼭 깨트려보고 싶 었는지 피가 철철 흐르는 머리에 다시 맥주병을 내리쳤다. 와장창! 이번에는 제대로 부서졌다. 상처에 유리 파편 들어가면 많이 아플 텐데. 뭐, 죽지만 않으면 상관없겠지. 라이레얼은 무기를 들고 설치는 놈들에겐 더 잔인한 공격을 퍼부 어댔다. 이건 용병 세계의 일종의 법칙과도 같았다. 무기를 든 놈과 안 든 놈을 똑같이 대우한다면, 누가 무기를 안 들려하겠는가? 라이레얼의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일진들. 같이 온 나 와 영진과 두 친구는 라이레얼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결국 라이레얼의 화려한 발차기에 또 한 놈이 테이블을 박살내며 쓰러졌고, 이제 남은 건 김승오뿐이었다. 난 한쪽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여학생(인지 나가요걸인지 헷갈 리는)들을 보고는 다시 김승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떨지 마. 누가 너 잡아먹니?" "너, 너 이 새끼…… 뭐, 뭐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김승오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믿었던 쪽수가 40에서 1로 줄 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뭐, 그건 니가 알 거 없고, 일단 한판 붙어보자. 청기 공고 일짱 싸움 실력 좀 구경해 봐야지. 니들 주특기인 다구리로 승부하고 싶 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니 일대일 대결로 하지. 너의 대결 상 대는……." 내가 슬쩍 라이레얼을 보자 김승오는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짜식 놀라기는. 박영진. 니가 처리해라." "예." 영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왔다. 방금 전 싸움으로 인해 영진은 조금 다친 상태였다. 아무리 싸움을 잘 한다고 해도 다수를 상대로 싸우면서 한 대도 안 맞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나와 라이레얼은 예외)? 아무튼 그 때문에(라기보다는 나한테 얻어맞은 게 아직 다 안 나았다) 몸이 좀 무거운 상태였다. 그래도 저런 놈 하나 상대하는 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영진은 김승오를 보며 눈을 빛냈다. 나와 라이레얼은 그나마 멀 쩡한 테이블에 앉아 싸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나와 라이레얼은 빈 잔에 얼음을 넣고 과일 럼을 가득 따라 마 셨다. "건배!" 챙! 이 소리를 시작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원샷으로 술을 들이켰다. "여기 안주도 많아, 히로." "예. 실컷 드세요. 어차피 공짜니까요." 술조 안주도 엄청 시켜놓았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돈이 썩어 나 나 보다. 영진은 김승오의 공격을 가볍게 막고 주먹을 휘둘렀다. 퍽! 얼굴을 얻어맞은 김승오는 잠시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발차 기를 날렸다.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린 발차기다. 역시 일진이니 일 짱이니 하며 싸움 좀 한다고 난리쳐봐야 거기서 거기다. 저놈은 체계적으로 무술을 배운 놈이 아니다. 그냥 어렸을 때부 터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다. 본인은 스트리트 파이터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삼 류 싸움꾼에 불과하다(실제로 스트리트 파이터가 삼류 싸움꾼을 지칭 한다). 체계적으로 무술을 배운 영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가소로워 보 일 것이다. 김승오의 공격 패턴은 굉장히 단순했다. 반격이 들어올 건 생각 도 하지 않고 동작이 큰 공격을 주로 내질렀다. 발차기는 저렇게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데. 난 술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너의 공격 패턴을 알아냈다. 그것은 강강강 강강강강 강강강이다." 마치 대전 격투기 게임을 할 때 딜레이가 크고 허점이 많은 강 공 격만 주로 하는 놈을 보는 것 같다. 맞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것도 모르나? 예상대로 김승오의 공격은 전부 헛손질과 헛발질이었다. 그가 공격에 지쳐 헉헉거릴 때쯤 영진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주먹, 주먹, 주먹, 발, 발, 주먹, 주먹으로 이어지는 연속 공격. 김승오는 사실상 서 있는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다. 영진은 조금 의 인정도 봐주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친구의 원수라는 건가? 저러다가 잘못하면 애 잡겠군. 난 일단 영진을 말렸다. "거기까지." 바닥에 쓰러진 김승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웅크리 고 있었다. "그만 때려. 제발 그만." 지가 때릴 때는 신나서 때리던 놈이 맞는 입장이 되니까 싫은거보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김승오에게 다가갔다. "니가 왜 맞았는지 모르겠냐?" "몰라. 대체 너 누구야?" "……." 너?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끝까지 반말을!" 퍼버버버벅! 난 바닥에 엎어져있는 김승오를 마구잡이로 밟았다. "한번만 더 반말하면 그땐 진짜 죽는다!" "예, 예. 잘못했어요. 반말 안 할게요!" "그 비굴한 면이 마음에 안 들어! 남자라면 근성이 있어야 할 거 아냐? 한번 말을 했으면 뒤지게 맞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반 말을 하는 정도의 근성! 니가 그러고도 한 학교 일짱이라 할 수 있겠 어?" "아, 알았어요! 반말 할게요! 제발 때리지만 마세요." "뭐? 반말을 해?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진짜 죽을 때까 지 한번 맞아볼래? 너 같은 거 하나 죽여도 감방에서 몇 년 살고 나 오면 그만이야. 알아?" 그 말에 김승오는 화들짝 놀랐다. 그동안 있으나 마나한 법을 비 웃으며 폭행을 행사하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일 것이다. "자,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얼굴이 퉁퉁 붓고 입 안이 터져 피를 질질 쏟으면서도 녀석은 열 심히 빌어댔다. 난 발길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녀석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 얼굴 잘 봐. 진짜 기억 안 나냐?" "예……?" "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 안 나? 우리가 왜 여기까지 쳐들어 와 너를 개 패듯이 패야 했는지, 니가 왜 뒤지게 맞아야 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요 며칠 간의 기억을 잘 뒤져봐. 이 꼴을 당할 정 도로 잘못한 게 뭔지 빨리 생각해 내. 정확히 3분 주지. 그동안 생 각해내지 못하면 죽는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동 안 한 짓이 너무 많아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듯했다. "호, 혹시 영숙이 돌림빵한 것 때문인가요?" "……." 돌림빵. 다시 말해 윤간이다. 한 여자를 여러 남자가 돌려가며 강 간하는 개만도 못한 짓. 뭐, 이 나라는 돌림빵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으니 상관없으려나? 얼마 전 있었던 여중생 집단 강간 사건의 가해 학생 20여 명 중 상당수는 훈방 조치되었다. 그리고 주모자로 뽑힌 가해 학생 몇 명 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집행유예. 정상을 참작해 일정 기간 동안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이다. 집 행유예 기간 동안 별 다른 사고가 없으면 효력이 사라진다. 다시 말해 형을 살지 않는다(대신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저 범죄자 로 분류되긴 한다). 결국 집단 강간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도 형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벌이 뒤따르지 않는 법을 누가 지키겠는가? 이쯤 되면 국가가 집단 강간을 허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장려한 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놓은 대가를 고작 몇 년 감옥살이로 지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안 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마 더 이상 국가나 법에 의존하지 말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 서 해결하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즉, 법의 판결 따위는 아무 소용 없으니 가해자들을 벌하고 싶으면 피해 여학생 스스로 칼을 들고 일어나 가해 학생들을 찔러 죽이든지 하라는 것이다. 어린 여학생을 보호해주기는커녕 절벽으로 떠미는 대한민국 사법부. 이게 다 국민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아닌가 싶다. "영숙이는 지금 어떻게 됐니?" "그, 글쎄요. 학교에 걸레라는 소문이 돌아 다른 지역으로 전학 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런데 넌 멀쩡히 계속 학교 다니고 있고?" "예. 학교예서 다 은폐해줬어요. 어차피 얼마 후면 졸업이니까 그때까지만 조용히 지내라고……." "교장이 직접 말하디?" "예. 교장이랑 교감이랑 학주랑 와 가지고는…… 아! 영숙이 학 교 선생도 찾아왔어요. 그래서 소문 돌지 않게 애들 관리 좀 잘하라 면서……." "……." 그런 씨발 새끼들이 선생이랍시고 학교에 앉아있으니 이 나라 교 육이 이 모양이지. "그것 외에 또 생각나는 것은 없니?" "그저께 아리랑치기 한 것 말인가요?" "……." 아리랑치기. 취객을 부축해 주는 척하며 지갑을 빼내는 수법을 말한다(부축빼기라고도 한다). "그, 그리고 애들한테 수금한 거랑…… 1학년 애 이빨 부러뜨린 거랑……." "너 무슨 범죄 종합 선물 세트냐?" 이런 놈도 청소년이라고 보호해줘야 하는 걸까? 아직 성인이 안 됐으니 어떤 범죄라도 마음껏 저지를 수 있다는 건가? 내가 인상을 쓰자 녀석은 더욱 열심히 자기 죄를 쏟아냈다. "학원비 뜯어간 거랑…… 다른 학교 일짱들과 함께 한 놈 밟아준 거랑……." "잠깐." "예?" "다른 학교 일짱들과 함께 한 놈 밟아준 거 말이야. 그때 밟은 놈 이 누군지 기억하냐?" "예, 예. 권주혁이고 전주에서 전학 온 놈이에요. 인주가 당했기 에……." "이 개새끼가!" 영진은 참지 못하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난 재빨리 영진 을 뜯어말렸다. "가만히 있어봐, 임마! 지금 내가 말 하는 거 안 보여?" 영진은 간신히 화를 삭였다. 친구의 원수가 눈앞에 있다고 해서 눈을 뒤집어 까고 달려들다니. 이는 아직 수행이 부족하다는 증거. 난 영진을 뒤로 물리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 권주혁이라는 놈은 너를 포함한 놈들한테 피떡이 되도록 얻 어맞아 현재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 중이지. 영원히 깨어나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더군 생명유지장치를 치운다면 당장이라도 숨을 거둘 거다. 사실상 뇌사 상태인 셈이지." 난 권주혁의 상태를 마구 뻥튀기해 말했다. "다시 말해 니들이 권주혁을 죽였다는 얘기다." "그, 그런……." "무슨 말인지 알겠냐? 넌 살인자야. 사람을 죽였어.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말이지." "아, 아니야! 내,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뭘 그렇게 두려워 해? 집단 강간에 상습 폭행까지 한 놈이 겨우 폭행치사 가지고 놀랄 필요는 없잖아." "내, 내가 안 죽였어!" "그놈들이 죽인 거야. 전부 그놈들이……." "니가 제일 열심히 패던데." "아니야!" "뭐 폭행치사라고 해봐야 넌 미성년자이니 길어야 3년 정도만 살고 나오면 그만이야. 사람을 살해한 대가라고 해봐야 얼마 안 돼. 이럴 땐 미성년자라는 게 고마워지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 어. 널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 난 이 나라 법에 기대 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난 김승오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대한민국 법의 그물망은 좁아도 악인들은 전부 빠져나간다. 대 신 돈 없고 힘 없고, 심지어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걸려든 다. 법이 벌하지 않는다면 내가 대신 벌해주지. 니가 한 만큼 돌려 받는 것일 테니 다른 사람 원망할 필요는 없을 거다." 난 주먹으로 녀석의 입을 내리찍었다. 퍼억! "으아악!" 쓰러진 녀석은 입을 부여잡았다. 줄줄 흐르는 피 속에 부러진 이 빨들이 섞여 있었다. "뭘 엄살을 부려? 남의 이빨 부러뜨렸으면, 니 이빨도 부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냐?" 난 다시 녀석을 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이번에는 어금니가 부러져 나갔다. "그래도 오른쪽으로는 씹을 수 있겠군." 난 공평하게 반대쪽도 때려주었다. 퍼억! 역시 부러져 나가는 어금니. "잠깐, 입 벌려봐." 난 쓰러진 녀석을 잡고 입을 벌려 보았다. 28개의 이 가운데 20개 정도가 부러져 나갔다. "앞으로는 죽만 먹겠군. 잘못했지?" 내가 묻자 녀석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모 애써여." "응? 뭐라고?" "아모 애써요. 요어애 우애여." "잘못했다고?" "애애." "이렇게 맞으니까 잘못했다는 생각이 좀 드냐? 니가 팰 때는 왜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까? 응?" "으으……." 녀석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용서를 빌었다. 그 모습이 처참하다 싶을 정도였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면 내가 무지 나쁜 놈으로 보이겠고, 사정을 아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 해 도 내가 좋은 놈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죄의 경중을 판단할 때는 그것을 되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 요한 기준 중 하나이다. 빼앗긴 돈이야 돌려주면 그만이고, 상처야 치 료해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여학생을 강간한 건 어떻게 할 건가?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할 그 여학생에게 어떻게 피해를 보상 할 건가? 억만금을 준다 해서 그 여학생을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 을까? 미친 개한테 물렸다고, 재수 없게 걸렸다고 생각하라고 잊어버리 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와서 니가 피해 자들에게 빈다고 해서 니 죄가 씻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널 병신 으로 만든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피해를 보상 받는 것도 아니지. 폭 력을 폭력으로 복수하고 정당화시키는 게 얼마나 더러운 일인지는 나도 잘 알거든. 내가 이러는 거 위선인 거 아는데, 그래도 할 건 해 야겠다. 최소한 니가 피해를 입힌 만큼, 너도 피해를 받아야 할 테 니까." "아모 애써여. 아머아 아여우세요." "한번만 살려달라고? 걱정 마. 안 죽여. 대신 앞으로 약간의 장애 를 안고 살아가야겠지." 난 발로 녀석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퍼억! "으아아!" 그 다음 사정없이 짓밟았다. 퍽퍽퍽! 콰직! 녀석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피가 바지를 적시고 흘러 내렸다. 태어나서 남자가 하혈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라지만 당연히 여자가 하혈하는 모습도 본 적 없다. 그런 걸 봤을 리 없잖아!).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확실히 강간범 심판하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지." 엄청 공평하다고나 할까? 피해자는 평생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가해자는 평생 육 체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거다. 이 정도는 돼야 복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날 원망하기 전에 사건을 은폐한 학교와 쓰레기 같은 선생들을 원망해라. 니가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아서 내가 대신 심판해준 거니까." 녀석은 이미 기절한 상태여서 내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내가 김승오의 그곳(?)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본 남학생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중에서도 몇 명은 죽을 것 같이 몸을 떨 어댔다. 난 그놈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옷 벗어라."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기분 나빠지려 하니까. 정확히 30초 주 지. 그 사이에 팬티까지 다 벗어. 제일 늦게 벗는 놈은 본보기로 이 놈처럼 만들어 주지." 내가 하혈한 채 기절한 김승오를 가리키며 말하자 남학생들은 재 빨리 옷을 벗었다. 여학생들이 보든 라이레얼이 보든 상관없다는 듯 훌렁훌렁 벗어젖혔다. 이윽고 알몸이 된 40여 명의 남학생들. 난 그들을 일렬로 세운 다 음 뒷짐을 지게 했다. 그들을 훑어본 라이레얼은 뒤에서 나를 껴안 으며 속삭였다. "요즘 애들 너무 부실한 것 같아. 역시 우리 히로가 최고야." "저, 저기요…… 지금 그런 말씀하실 때가 아니거든요." "응. 알았어." 라이레얼은 준비해온 디카를 꺼냈다. 그리고 알몸으로 서 있는 남학생들의 사진을 찍었다. 플래쉬가 터질 때마다 녀석들은 움찔 움찔했지만, 감히 항의나 반항은 하지 못했다. 어떠한 치욕을 당하 더라도 평생 고자로 살고 싶지는 않겠지. 난 아까부터 몸을 심하게 떠는 한 남학생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뭐냐?" "유,윤태길입니다." "너도 그 영숙이라는 애 강간 했냐?" "예?" "거짓말 하면 죽는다." "저, 전 승오가 시켜서 한 거에요. 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어요. 흑흑, 어쩔 수 없이 한 거란 말이에요." 난 우는 녀석의 어꺠를 다정하게 두드려주었다. "그래 그래. 니 맘 다 알아. 일짱이라는 놈이 명령했으면 하기 싫 어도 어쩔 수 없이 했겠지. 너도 어떻게 보면 피해자 아니겠냐? 그 래서 말인데 너 말고 참여한 놈은 또 누구냐?" "예, 예?" "니가 수사에 협조를 해준다면 내 기분이 좋아져 너는 용서해 줄 지도 모르잖니? 그리고 내가 널 용서 안 해준다 해도 너만 당하면 억울하잖아. 똑같이 했는데 누구는 고자 되고, 누구는 멀쩡하고 그 러면 억울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같이 한 놈 불러봐." 그러자 녀석은 서 있는 남학생 중에 세 놈을 더 골라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두 놈이 더 있는데, 그놈들도 같이 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심지어는 신상명세서까지 줄줄 읊어주었다. 고자 되기는 무지하게 싫은가 보다. 불려나온 놈들은 자기만 당하는 게 억울해쓴ㄴ지 다른 놈들이 뭘 했는지 좔좔 읊어댔다. 폭행, 강도, 갈취, 협박, 강간 등등. 살인만 빼고 왠만한 범죄는 다 있다. 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건 왠만한 폭력 조직보다 한참 높은 수위였다. 내가 강간범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데, 라이레얼이 나에 게 말했다. "저놈들은 내가 처리할게, 히로." "으음, 그렇게 하세요. 여자의 적은 여자가 처리하는 게 좋겠죠." 내 말이 끝나자 라이레얼은 바로 윤태길의 사타구니를 걷어찼 다. 알몸인 녀석은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며 살려달라고 빌었 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가차 없이 짓밟았다. 잠시 후 하혈(?)이 시작되었다. 사실 저 녀석들은 강간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큰 범죄인지 몰랐을 것이다. 남이 하니까 따라서 했을 수도 있고, 그냥 별 생각 없이 했 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행위가 한 여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 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몰랐다는 말로는 변명이 되지 않는데. 녀석들은 비명을 지르며 한번만 용세해달라고 외쳐댔다. 난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때 그 여학생도 저렇게 소리 지르지 않았을까? "끝냈어, 히로." "잘해셨어요." 난 알몸인 남학생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부로 청기 공고 일진회는 해체한다. 삥 뜯은 돈은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돌려주고, 피해자에게는 사과해라.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 그동안의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읊어라. 그리고 처벌해 달라 고 애원해라. 만약 경찰이 처벌하지 않으면 내가 처벌해 줄 테니까." 난 말하면서 힐끔 하혈하고 있는 놈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서 있는 놈들은 흠칫했다. "물론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비밀이다. 혹시라도 내 말을 안 듣거나, 우리의 존재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린다면, 인터넷에서 '청기 공고 일진 집단 동성애' 같은 제목이 달린 사진을 보게 될 거 다. 그리고 입을 놀린 놈은 특별히 하혈하게 만들어주지. 한번 피 쏟고 나면 다시는 거기가 안 설 걸." 내 말에 녀석들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렸다. 난 피 식 웃으며 옆에 있는 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법을 이용해 터트렸다. 퍼엉! 나무탁자는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니들 몇 놈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까짓 거 몇 년 감옥살이 할 각오하고 다 죽여 버리는 수도 있어." 치사한 방법에는 더 치사한 방법으로 대응하고, 협박에는 더 살 벌한 협박으로 대응한다. 이게 바로 아이언스 히로의 스타일이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여학생들을 보았다. "거기 아가씨들도 잘 알아들었지? 명대로 살고 싶으면 입단속 잘 해." 끄덕끄덕. 죽기는 싫은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여학생들. 난 다시 남학 생들을 보았다. "보고 있기 심히 흉하니, 다시 옷 입어라." 남학생들은 주섬주섬 옷을 집어 입었다. "주머니 속에 든 담배랑 라이터 다 꺼내봐." 그러자 거의 모든 남학생들이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나는 걸어 다니며 일렬로 서 있 는 남학생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빠악! 빠악! 빠악! 빠악! "담배는 몸에 안 좋다는 것도 몰라? 특히 미성년자와 임산부에게 는 치명적이야! 그런 담배를 왜 펴! 이 나라는 미성년자 흡연을 허 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몰라? 좋은 말로 할 때 끊어!" 빠악! "저, 저기요……." "뭐야?" 얻어맞은 한 남학생이 손을 들며 항의했다. "저는 안 폈는데요." "……." 그럼 진작 말할 것이지. "간접흡연도 흡연이야! 담배 피는 친구들을 왜 사귀어? 담배연기 가 얼마나 안 좋은 건지 몰라서 그래? 앞으로는 담배 피는 인간 근 처에도 가지도 마!" "예." 생각 같아서는 전부 깔아놓고 밟아버리고 싶다. 미성년자가 담배를 피다니! 세상에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나는 보건복지부가 정한 금연 홍보대사……는 아니지만, 아무 튼 미성년자의 금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내가 경고하는 데 지금 이 순간을 기해 담배 끊어라. 만약 한 놈이라도 피우다가 걸리면, 인터넷에 청기 공고 일진 집단 동성애 사진 올라간다. 그리 고 여기 있는 담배는 다 압수다." 난 재빨리 근처에 있는 가방 하나를 집어 담배를 쓸어 담았다. 족 히 30갑은 되는 것 같다. 부수입이 제법 짭짤하군. 해로운 담배를 보고 가만히 있으면 아이언스 히로가 아니다. 국민 건강 증진 차원에서라도 내가 다 피워서 없애주마! "내일 학교 가자마자 일진회 해산한다고 공표하고 피해자들에게 일일이 배상해라. 돈 없으면 장기 팔아서라도 배상해. 신장 하나 없어도 인생 사는 데 지장 없다. 남의 돈 공짜로 먹기가 그렇게 쉬 운 줄 알았냐?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는 학교 선생들이 어떻게 했는 지도 자세하게 읊어라." "그쯤 했으면 알아들었을 거야. 가자, 히로." "예." 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정환과 진빈에게 손짓했다. "너희들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기마." "뭔데요?" "저기 테이블 위에 있는 안주들 좀 봉지에 담아 와라. 튀김류를 중점적으로. 알았지?" "예, 예?" "시키는 대로 해." "예." 그리고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영진은 나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해도 괜찮을까요?" "그럼 이렇게까지 안 하면 어떻게까지 하는데?" "그, 그래도 거기를 다시는 안 서게 만드는 것은 좀……." "……." 하긴 좀 잔인하긴 하다. 차라리 팔다리 하나 잘릴지언정 그곳만은 무사히 지키고 싶은 것 이 남자의 마음 아니겠는가? "그럼 그 여학생은 어쩔 건데? 난 지금 훈화하러 온 게 아니야. 복수하러 온 거지. 아예 시작을 안 했다면 모를까, 시작한 이상 철 저하게 짓밟아 준다." "맞아, 히로. 다시는 기어오를 생각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짓밟아야지." 판타지 세계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들과 이 세계 사람들의 생 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리라. "아무튼 이걸로 청기 공고 일진회는 끝장이군. 다음 타킷은 누구 로 해야 하나?" * * * * 〃gouon〃 "얘들아, 오빠 왔다~." 집 안에 들어왔지만 아무도 나를 맞아주지 않는다. 어린 엘프들 은 내가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니, 이것들이! 난 재빨리 봉지를 흔들어 냄새를 풍겼다. 그러자 어린 엘프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다녀오셨어요오~!" "……." 이 인사를 나한테하는 것인지, 봉지한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 다녀왔다. 그보다 너희들 배고프지 않니?" "배고파요오~!" "그럴 줄 알고 오빠가 튀김을 좀 싸왔어. 먹어보지 않으련?" "먹고 싶어요오~!" "……." 뭐야, 이 일심동체 시추에이션은? 난 소파 앞 탁자에 그릇을 놓고 봉지에 있는 튀김을 담았다. 그리 고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어 아이들에게 따라주었다. 열심히 맛있게 먹는 아이들. 아아~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언제 왔어?" "방금." 루시아는 아이들이 튀김 먹는 것을 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니가 사온 거야?" "으응. 뭐, 사온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보니……." "갔던 일은 어떻게 됬어?" "으응. 뭐 잘 해결됬어." "그럼 이제다 끝난 거야?"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지." 그 말에 루시아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천사 같은 마음을 지 닌 루시아는 원래 복수다 뭐다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걱정할 필요 없어. 루시아. 나 믿지?" "흥! 내가 널 어떻게 믿어?" "헉! 그, 그럼 나 못 믿는 거야? 너무해!" 난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살폈다. 거실에는 나와 루시아와 아이 들밖에 없다. 그리고 아이들은 현재 튀김을 먹느라 정신이 팔려있 는 상황. 원래 쟤들은 한번 집중해서 먹기 시작하면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모른다. 결국 아모도 보고 있지 않다는 얘기.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사랑해, 루시아!" 내가 그렇게 외치며 루시아를 껴안으려 하는데 루시아가 몸을 휙 돌렸다. 그 때문에 난 괜히 혼자 삽질한 셈이 되었다. "아! 지니 오빠네." "……." 지니? 고개를 돌려보니 지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도 요즘 자주 늦네." "예. 처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요." 지니는 날 보았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저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잘 되었군요."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난 방문을 닫고 먼저 입을 열었다. "알려주신 정보대로 청기 공고 일진회 회식 장소에 쳐들어갔습 니다. 그리고 청기 공고 일진회를 완전히 와해시켰습니다. 주모 자인 일짱 김승오와 몇몇 학생들에게는 적절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적절한 형벌이라면?" "궁형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보다 또 다른 정보는 없나요?" "사실 그것 때문에 아이언스 공작님을 보자고 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 일진 연합회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래서요?" "일진 연합회는 이 지역 학교들이 상당수 가입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폭력 조직 연합이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연합이라 해도 조직은 조직입니다." "그 말씀은……?" "조직의 우두머리는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 우두머리가 따로 있어요?" "그렇습니다. 각 학교 일짱들은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조직의 특성상 서열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그 리고 애초에 일진 연합회를 만들고,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은 따로 있더군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일진 연합회를 만들었다는 건가요?" "예.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일진회는 하나의 폭력 조직입니다. 일진회의 일짱은 그 학교 내에서 왕과 같은 존재지요. 다시 말해 막 대한 권력과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런 일진회가 연 합한 거대 조직 일진 연합회는 그러한 권력 체계를 더욱 확고히 하 기 위한 하나의 조치입니다. 만약 문제가 생겨 하나의 일진회가 위 험해지더라도 다른 학교 일진회가 나서서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해관계가 각자 다른 일진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그 일을 해낸 사람이 바로 서문 외고 3학년 채범식입니다." "외고요? 아니, 외고에도 일진회가 있어요?" "외고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많이 가고, 대다수의 학생들 이 공부에 주력하다보니 일진회 같은 조직이 생겨나기 힘듭니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 공고나 상고같이 대학 진학률이 낮은 학교들 일수록 일진회가 강세를 보입니다. 그리고 같은 인문계라 하더라 도 학구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곳은 일진회가 없거나 있더 라도 별 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인간이 모여 있 는 곳에서는 폭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학교라는 곳은 그 특성과 이 나라의 교육 시스템, 관련법의 유명무실화 등의 이유로 인해 폭 력이 더욱 쉽게 발생합니다. 이는 외고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럼 그 채범식이라는 애가 서문 외고 일짱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서문 외고에는 일진회라 할 만한 것이 없습 니다. 채범식은 서문 외고 학생회장으로 공부도 잘하고 평소 행실 이 바른 우등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도 높 고 평판도 좋습니다." "예? 아니, 그런 놈이 일진 연합회 짱이란 말이에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저도 그 점에 의문이 생겨 그 의 주변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몇 가지 중 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 면……." 지니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채범식. 학자인 아버지와 변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부 터 비범했다. 그 비범한 출생이란 뭔고 하니…… 바로 원정출산이 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의 한 병원에서 태 어난 그는 날 때부터 미국 시민권과 한국 시민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 전에는 이중국적자로 살다가 군대갈 나이가 되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재외동포로서 한국에 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2005년 5월 24일부터 국적법 개정안이 시행되었고, 이에 따르면 직계존속이 외국에 영주할 목적 없이 체류한 상태에서 출 생한 자는 병역의무를 마쳐야만 국적을 포기할 수 있었다. 때문에 국적법 개정안이 시행되기 전에 이중국적자들의 한국 국 적 포기 행렬이 줄을 이었다. 국적포기자 중 95% 이상이 병역의무 를 이행아지 않은 남성이었다. 어차피 한국에서 재외동포로 살아도 별 다른 불편함이 없는 만큼 채범식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고, 부모 역시 이에 동 의했다. 그리하여 채범식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현재 미국인으로서 한 국에 거주 중이었다. 채씨 가문은 일제시대 때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친일 가문이었 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전형적인 매국노로 조선총독부에 근무하 며 조국 수탈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 지는 친일사관을 그대로 물려받은 학자였다. 그들 부자가 주로 주장한 것은 한일합방이 조선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만약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 은 발전은 이룰 수 없엇다는 친일 학설이었다. 사실 그것은 별 다른 근거가 없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 서 그에 대한 반론 논문 같은 것은 아예 발표도 되지 못하게 막아버 렸다.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은 학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학계에 이어저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가 친일사관 학자라면, 어머니는 친일파 옹호 변호사였다. 그녀는 친일파 후손 토지 반환소송 등의 변론을 맡아 수십 번 승소 를 했다. 이완용 후손, 송병준 후손 등이 전부 그녀의 고객이었다. 이런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채범식. 그는 어렸을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들어왔고, 서문 외고에 있는 지 금에는 서울대 합격도 따 놓은 당상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똑 똑했다. 미국인인 그는 외국계 대학에 입학해도 되지만, 한국 대학에 진 학할 생각이었다. 외국계 대학으로 진학을 해봐야 거기서는 별 볼 일 없는 한국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대학에 진학한다면 그 안에선 최고가 될 수 있다. 그 리고 한국에는 부모님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인맥들이 있었다. 그 인맥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남아있는 편이 나았다. 채범식은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데다가 원래부터 머 리가 뛰어났다. 그렇기에 암기식 교육 위주의 학교 교육을 따라가 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싸움을 좀 하던 그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폭력서클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다. 그는 겉으로는 폭력서클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인 양 행동했 고, 심지어는 다른 학생들을 자신이 만든 폭력서클에게서 보호해 주기도 했다. 선생과 학생들이 보기에 그는 착하고 우수한 학생이 었다. 그는 이런 이중생활에 재미를 들렸다. 그런 그를 도와준 것은 그 의 삼촌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남동생인 곽세윤은 제법 규모가 큰 용역업체의 사 장이다. 물론 말이 좋아 용역업체이지 사실상 폭력 조직이다. 그는 이 합법을 가장한 폭력 조직으로 누나와 매형의 일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채범식은 그동한 주먹구구식 행태에서 벗어 나 좀더 체계적인 폭력서클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1학년 때, 친한 친구인 김인하, 이정원과 함께 일진 연합회를 만들었다. 거대 폭력 조직을 등에 업고 있는 그에게 거역할 만한 일진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레 일진 연합회의 짱이 되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일진 연합회 내애서도 극소수였다. 그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우등생 역할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 가면 아래서 그는 각종 범죄에 개입했다. 패싸움, 폭행, 협박, 갈취, 강간 등등. 지니의 설명을 다 들은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진짜 나쁜 놈이네요." "원래 진짜 악인일수록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요." "증거를 잡아서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까요?" "그래봐야 별 소용없을 겁니다. 그의 부모는 학계와 법조계에 막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채범식 역시 주도면밀 한 놈입니다. 아마 신고한다 하더라도 김인하와 이정원만 잡혀가 고, 그는 풀려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두 놈은 채범식과 무슨 관계인가요?" "각각 오른팔 왼팔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업에 바쁜 채범식을 위해 일진 연합회의 일을 대신 처리해주고, 뒷수습을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채범식을 따르는 대신 많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무슨 혜택이요?" "그들 역시 서문 외고에 다니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 성적으로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외고에 들어갔대요?" "채범식의 힘이지요. 채범식은 부모님께 부탁해 그들을 외고로 진학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다른 학교로 갈 경우 수족처럼 부리기 가 힘들어지니까요." "으음, 그렇군요. 결국 채범식을 제거해야 일진 연합회를 와해 시킬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렇게 하죠.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일 때문에 바쁘실 테니 정보 수집과 계획 수립에만 도움을 주세요. 직접 실행 에 옮기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직접 손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예. 라이레얼도 같이 움직일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비록 직접 아이언스 공작님을 따라 전장에 나서지 는 못하지만, 후방 지원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 * * 〃gouon〃 청 공업 고등학교 일진회가 해체되었다. 술집에서 파티를 벌 이던 그들은 갑작스레 습격한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당했고, 일진회 일짱인 김승오와 몇 명은 병원에 실려 갔다. 그리고 일진회 회원들은 그동안 학교에서 수금하거나 삥 뜯은 돈 을 전부 돌려주고, 경찰서에 자수를 했다. 그들을 일일이 조사하고 조서를 쓰게 하느라 근처 경찰서는 업무 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제발 자신을 처벌해 달라 고 애원했다. 처벌을 받지 않으면 고자가 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며. 경찰은 가해 학생들을 조사하고 죄질이 심한 일부 학생들은 형사 입건 조치했다. 이 조사 과정에서 경찰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 었다. 그것은 바로 일진회의 존재와 그들의 범죄 사실을 학교 측이 알 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적절한 조치 를 취하는 대신 은폐하기에 급급했따는 것도. 이에 피해 학생 학부모들과 관련 단체들은 이 학교 교장과 교감, 학생 지도 선생 등을 고소했다. 그로 인해 관련 교사 십여 명이 직위해제 되었다(하지만 두 달 후 사건이 잊혀질 때쯤에는 슬그머니 다시 복직되었다. 이것이 이 나라 교육 계의 현실이다). 경찰들은 술집을 습격한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보 았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생들이 전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 〃gouon〃 "오늘은 대천고 일짱 박기욱과 명진고 일짱 최상철을 제거하십 시오." "저번처럼 일진회 전체를 몰살시킬까요?" "아닙니다. 이번에는 타깃만 제거하십시오." "어째서요?" "청기 공고 일진회를 몰살시킨 것은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의미 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일짱들만 희생양으로 삼아 전체를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청기 공고의 본보기가 있으니 그들은 예상 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일 공고 일짱 한인주는 언제 제거하나요? 이놈이 권주 혁 집단 구타 사건의 주범이잖아요." "그렇습니다. 그와 그의 애인인 송윤미가 주범이지요. 그렇기에 이들을 놔두는 겁니다." "어째서요?" "충분한 공포를 느끼게 해주어야지요." "오오! 하긴 그렇군요. 숨통을 조여 오는 공포를 느끼게 한 다음 제거하자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악인을 단번에 제거하는 것은 고통을 덜어주는 행 위에 불과합니다.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수 아 니겠습니까?" "이렇듯 사일런스 백작님과 저의 마음이 잘 통하니, 마치……." "천생연분." "……천생연분 같군요……가 아니잖아, 이 인간아! 무슨 야오이 쓸 일 있어?"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비록 농담이라 해도 매우 불쾌합니다. 앞으로 이런 류의 농담은 자제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그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희생양으로 삼 아야 할지." "예. 그건……." 여기까지가 나와 지니가 아침에 나눈 대화였다. 과거 아이리스 왕국의 참모였던 사일런스 지니의 계획은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난 지니가 일러준 정보와 계획에 따라 오늘 밤 대천고 일짱 박기 욱과 명진고 일짱 최상철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한참 동안 통화를 한 영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날 보았다. 난 영아에게 물었다. "큰어머니?" "응." "뭐라고 하셔?" "쫓아오시겠다고 하시는 걸 간신히 말렸어. 내가 영진이 잘 타일 러서 며칠 안에 내려 보낸다고." "그래?" "응. 기말고사 전까지는 죽어도 돌려보내겠다고 했어. 그리고 그 동안 내가 공부도 봐주겠다고 했고." "뭐? 니가 공부를 봐줘? 푸하하하!" 나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은 영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왜 웃어?" "이 오빠가 왜 웃는지 정말 모르겠니? 그런 개그를 해놓고 관중 이 안 웃길 바라는 건 너무한 거 아냐?" "나, 나 고등학교 때 공부 잘 했어!" "공부를 잘해? 앞짱구가?" "진짜 잘했어!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학도 갔단 말이야!" "넌 '세상은 넓고 대학은 많다' 라는 속담도 모르니? 참고로 서 울도 넓고 대학도 무지 많지. 그 대학이라는 곳 대부분이 등록금 장 사 하느라 바빠 정작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 그러는 오빠는 얼마나 공부를 잘 하기에 날 비웃는 거야? 오 빠는 고등학교 중퇴잖아!" "고졸이라니까! 니가 지금 검정고시를 우습게 보는 거냐? 그리고 고등학교 중퇴나 대학교 중퇴나 거기서 거기지!" "아니야! 대학물을 먹고 안 먹고는 그 레벨이 달라!" "아니, 감히 대학물 좀 먹었다고 유세를 떨다니! 세상에 이런 천 인공노할 앞짱구가 있나!" 난 이 나라에 만연한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앞짱구를 선도할 필요성을 느꼈다. 앞짱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오빠도 학력 콤플렉스 있나 보지?" "학력 콤플렉스? 뭐야? 너도 설마 이화여대 나온 그 야당 대변인 이라는 아줌마 생각에 동의하는 거냐?" "응? 그 아줌마가 누군데?" "몰라? 왜 그 '대학 안 간 사람은 전부 학력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라는 식으로 말한 아줌마 있잖아. 심지어는 사법고시 패스해 서 변호사 생활까지 한 대통령한테 대학을 안 나왔기 때문에 학력 콤플렉스가 있다고 몰아붙인." "그게 정말이야? 사법고시 패스하고 변호사까지 한 사람한테 학 력 콤플렉스가 있다고 했단 말이야?" "응. 대학을 안 나오면 무조건 학력 콤플렉스가 있다는데." "그 아줌마 미친 거 아니야? 아니, 돈만 있으면 개나 소나 다 들어 가는 게 대학이잖아. 그리고 사법고시는 수억을 투자해서 공부해 도 합격할까 말까한 시험이고." "그렇지. 개나 소나 사법고시 합격하면, 개나 소나 검사, 판사, 변 호사 할 테니까." "응.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 대학 안 나왔느니 학력 콤플렉스가 있다고 하는 게 말이 돼? 그 아줌마 농약 같은 거 마셔서 정신이 좀 이상해진 거 아니야?" "글쎄. 저번에 텔레비전에 나와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니까 농약 마신 것 같진 않던데. 뭐, 곱게 미쳤으면 겉보기엔 정상으로 보일 수도 있지." "그런데 진짜 웃긴다. 어떻게 대학 안 나왔느니 학력 콤플렉스가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 그것도 국민을 대표한다는 정치인이 말 이야. 이러다가 투포권도 대학 나온 사람한테만 주자고 헌법을 뜯 어 고치는 거 아냐?" "글쎄. 그 아줌마가 정권 잡으면 그러자고 할지도 모르지. 어쨌 든 그 아줌마는 대학을 나왔으니까." "대학 안 나왔다고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응? 니가 용서 안 하면 어쩔 건데?" "나중에 아이미스 2부 쓸 때 그 아줌마 헛소리에 대해 날카롭게 비평할 거야. 아이미스 2부는 현실 세계가 배경이니까." "그, 그러니?" 작가는 글로써 말한다는 건가? 아무튼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난 아래층으로 내려가 밤이 될 때까지 어린 엘프들과 놀아주었다. * * * * 〃gouon〃 늦은 밤. 최상철은 일진들 몇 명과 함께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운이 좋은지 여자애들을 만나 합석을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 년으로 말과 행동을 보아하니 제법 많이 놀아본 애들 같았다. '한 명 정도는 건질 수 있겠군.' 여관비도 충분했다. 최상철은 내심 오른쪽 끝에 앉은 여자애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여자 숫자가 한 명 더 많았기에 그는 친한 친 구인 대천고 일짱 박기욱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박기욱은 거절했다. 이유는 어제 있었던 사건 때문이었다. 청기 공고 일진회 회식 도중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전부 두드려 맞았고, 일짱 김승오와 몇 명은 고자가 되어 병원에 실려 간 사건.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일진들은 오늘 학교에 가자마자 일진회 해 체를 선언하고 그동한 수금하거나 삥 뜯은 돈을 전부 돌려주겠다 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 길로 경찰서로 가서 단체로 자수했다. 박기욱은 그 사건으로 인해 신경이 잔뜩 곤두선 모양이었다. 하 지만 최상철은 그 사건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진회라고 깝죽거리다가 어디 폭력 조직이라도 잘못 건드린 모양이지.' 실제로 폭력 조직을 잘못 건드려 일진회가 개박살 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학교에서 힘없는 놈들 상대로 주먹질 하던 일진들은 자 신들이 건달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진짜 건달을 만나 뒤지게 얻어터지고 나서야 자신들은 건달이 아닌 양 아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술집에서 우연히 조폭 몇 명과 시비가 붙었을 것이다. 일진회 회식 중이었으니 수십 명의 일진들이 모여 있었을 테고, 그들은 멋도 모르고 조폭들을 밟았을 것이다. 그 다음은 안 봐도 뻔했다. 열 받은 조폭들이 패거리를 잔뜩 끌고 와 무자비하게 밟았겠지. 그리고 돈 돌려주고 경찰에 자수하라고 시켰을 것이다. 따르지 않 을 경우엔 배때기에 사시미를 박아주겠다는 협박과 함께. '병신 같은 새끼들.' 같은 일진 연합회 소속이지만, 최상철은 김승오와 그리 친한 사 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고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별로 불쌍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게 학교 안에서만 설칠 것이지 왜 밖에 나와서까지 설친단 말인가? 최상철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학교 내에서는 왕과 같 은 대접을 받지만, 사회에서는 그저 싸움 좀 잘하는 고등학생일 뿐 이다. 아마 이런 생활도 몇 개월만 지나면 끝날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 업하면 더 이상 학교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할 테니. 그리고 성년 이 되면 그때부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처럼 집단 구타를 하고도 훈방으로 풀려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유급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처럼 신나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상철은 여학생들과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마셨다. 그렇게 몇 잔 마시고나자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최상철은 자리에서 일 어났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 "물 빼러 간다, 임마." 술집 화장실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일을 보고 있었다. 큰 것을 보 는 모양인지 두드려도 나오지 않았다. 사정이 급했던 최상철은 하 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술집 뒤편 으슥한 곳으로 걸어간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 인하고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담벼락을 향해 시원하게 오줌을 갈 겼다. 그 순간 뒤에서 낮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원하냐?" "뭐? 누구……?" 콰앙! * * * * 〃gouon〃 난 최상철의 머리통을 붙잡고 그대로 담벼락에 찍었다. "너, 넌 누구야?" "너?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난 최상철의 몸이 담벼락에 밀착되게 밀어 붙였다. 그리고 다시 머리통을 잡고 벽에 찍었다. 쾅! 쾅! 쾅! 이마가 깨졌는지 담벼락에 피가 묻어났다. 그런 와중에도 오줌 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세가 안 좋았는지라 오줌이 바지를 흠뻑 적셨다. 담벼락에 피가 잔뜩 묻은 것을 본 나는 준비해온 칼을 최상철의 목에 댔다. 목에 닿는 칼날의 감촉을 느꼈는지 최상철은 숨을 들이 켰다. "히익! 누, 누구세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에요?" "내가 누군지는 알 것 없고, 왜 이러는지는 잠시 후에 말해주지. 그보다 내가 경고하는데 고개 돌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살고 싶으 면 지금처럼 계속 벽을 보고 있어.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목을 그어 버릴 테니까." "예, 예. 안 볼게요. 절대 안 볼게요." 녀석은 실수로라도 내 얼굴을 볼까 두려웠는지 눈을 꼭 감았다. 난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녀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목을 그으면 왜 사람이 죽는 줄 알아?" 녀석은 온몸을 덜덜 떨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간단해. 사람 목에는 경동맥이라는 것이 있어. 대동맥에서 갈려 나온 경동맥은 목을 지나 머리로 피를 올려 보내지. 목을 제대로 그 으면 이 경동맥이 잘려. 그럼 그곳을 통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 가고, 그로 인해 출혈과다나 쇼크로 죽는 거지. 어때? 한번 시험해 볼까?" "아, 아니요. 제발 하지 마세요. 제발요. 흑흑." 녀석은 정말로 내가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운지 눈물까지 흘려댔다. 사실 굳이 이렇게 칼까지 들이댈 필요는 없었다. 내 악력이면 목을 쥐어 부러뜨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칼까지 준비해 온 것은 상대방이 최대한의 공포와 스릴을 만끽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나의 따뜻한 배려(?)였다. "어이 어이. 조심해. 자꾸 떨면 실수로 경동맥이 끊어질 수도 있어." 그 말에 녀석은 몸을 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난 목에 댄 칼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했다. "그리고 난 남자가 우는 걸 보면 죽여 버리고 싶어져. 그러니까 그만 뚝 그칠래?" "흑흑, 아, 안 울게요. 제발 죽이지만 마세요." 녀석은 이를 악 물었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눈물은 어찌할 수 없 는 듯했다. 녀석의 울음이 좀 진정된 듯하자 난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게임을 하나 시작할 거야. 룰은 간단해. 내가 너한테 질문을 하고, 너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거지. 대답을 하지 않거 나 거짓으로 대답을 한다면 니가 진 것으로 간주. 벌칙으로 목을 긋 는다. 알아들었어?" "예, 예." "대답은 한 번만 해. 그럼 게임을 시작해도 될까?" "예." "권주혁이라고 알지?" "예." "니가 집단 구타한 놈 맞지?" "그, 그건 한인주의 부탁으로……." "맞아, 안 맞아?" "마, 맞아요." "그놈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아, 아니요." "죽었어." "예? 어, 어째서……?" "훗~ 자기가 직접 죽여 놓고 그걸 묻다니." "무, 무슨 말이에요? 제가 죽이다니요?" "니가 패 죽였잖아. 기억 안 나?" "마, 말도 안 돼요!" "쓰러진 권주혁을 목격한 사람이 바로 119에 신고했지. 하지만 구급차가 달려왔을 땐 이미 늦었지. 역류한 피가 기도를 막아 5분 동안이나 숨을 못 쉬었어. 그 때문에 뇌사상태에 빠졌지. 현자 서 울 병원에 입원해 있어. 심장은 뛰고 있지만 살아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지. 몸은 살아있지만 뇌는 죽었어. 생명유지장치만 치우 면 바로 숨을 거두지." "주, 죽었을 리 없어요. 부, 분명 멀쩡하게 살아 있었단 말이에요." "아니, 권주혁은 죽었어. 니가 죽였지. 넌 사람을 죽였어. 니 손 으로 잔인하게 살해했지. 넌 살인자야." "아, 아니에요. 제가 안 죽였어요. 흑흑……." 녀석은 몸을 덜덜 떨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제가 안 죽였어요' 라는 말을 반복했다. 마치 스스로를 세뇌시키 려는 듯.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흑흑." 녀석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주혁이 형이야. 동생을 죽인 놈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복수하 고 있지." "히익!" "첫 타깃은 청기 공고의 김승오란 놈이었지."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김승오 역시 그렇게 빌더군. 난 너희들처럼 사람을 쉽게 죽이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하게 놓아줄 수는 없지. 김승오가 어떻 게 되었는지 얘기 들었을 거다. 목숨은 건진 대신 다시는 거기가 안 서게 됐지." "살려주세요. 제발요. 흑흑." "누가 죽인대? 그냥 김승오와 똑같이 만들어줄 뿐이야." "히익! 용서해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래? 그럼 일단 바닥에 엎드려." 녀석은 시킨 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난 그에게 종이뭉치와 펜을 던져주었다. "고등학교 입학한 순간부터 현재까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 전부 적어라. 만약 제대로 적지 않았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귀 부터 잘라 내주지." 말로만 협박해서는 약발이 떨어지는 법이다. 난 시범적으로 귓 볼 쪽을 그었다. 조금 깊게 긋자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녀석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적기 시작했다. 머리까지 쥐어 짜내 끙끙거리며 쓰고 또 썼다. 폭행, 협박, 강도, 갈취 등등. 역시나 다른 놈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일진회에 거역한 놈을 각 목으로 때려 이를 박살낸 적도 있고, 왕타를 시켜 자퇴를 하게 한 적 도 있고, 몇 달 동안에 걸쳐 학원비 수백만 원을 뜯어 낸 적도 있다. 하나같이 강력 범죄에 속하는 것들이다. 만약 성인이었다면 족 히 20년 이상은 언도 받았을 것이다. "더 없냐?" "예, 예. 다, 다 적은 것 같아요." "왼쪽 귀부터 잘라줄까?" "흑흑, 정말이에요.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 그럼 생각나게 해줄게." 난 칼을 왼쪽 귀에 갖다댔다. 그러자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펜을 잡았다. "아, 아니에요. 생각났어요." 그러면서 몇 개 더 적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 한 두 개 정도 더 적었다. "흑흑, 이젠 정말 없어요."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만약 여기 써진 죄들을 따로따로 판결 받 는다면,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 종신형이다. 대체 몇 살이나 먹었다고 평생 지을 죄를 고등학교 때 다 지었단 말인가? "당한 애들 심정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예?" "너한테 당한 애들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 "잘 모르겠지? 간단해." 난 칼을 다시 목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니 기분이야. 죽을 것 같이 고통스로운 기분. 이제 알겠어?" "히익! 자,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난 또 다른 종이뭉치를 던져주었다. "명진고 일진회에 대해 아는 대로 다 적어. 일진회가 어떤 조직 인지, 그동안 어떤 짓을 해왔는지, 일진회는 몇 명이며 정확히 누가 가입해 있는지. 세세하게 적을수록 니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녀석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쥐어 짜내가며 써내려갔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을 때 학교 선생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적어라." "예." 잠시 후, A4 용지 십여 장 분량의 일진회 관련 문건이 만들어졌 다. 거기에는 일진회 회원 명단과 그들이 한 짓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을 때 일을 수숩하고 은폐한 교사들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난 녀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으아악! 안 봤어요! 얼굴 안 봤어요! 살려주세요!" 녀석은 얼굴을 보면 죽일 거라 생각했는지 눈을 질끈 감은 채 발 광하듯 소리쳣다. 난 녀석을 벽에 밀어붙인 다음 턱을 잡고 고개를 치켜들게 했다. "눈 떠." "싫어요! 안 볼 거에요! 보면 죽일 거잖아요!" "안 뜨면 죽는다." 난 녀석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그러자 녀석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난 눈을 부릅뜬 채 살기를 쏘아 보냈다. "으아아……." 녀석은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다리 사이에서 또 다시 오줌이 질질 흘러내렸다.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똑바로 들어. 정신을 차리면 무조건 경 찰서로 가라. 그리고 방금 종이에 쓴 것을 전부 말해라. 제대로 안 할 경우 넌 죽는다." 내가 뿜어대는 살기에 녀석은 숨이 맛히는 듯 파랗게 질린 얼굴 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살고 싶으면 그 각오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하지만 말이 야……."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동생을 죽인 대가는 치러야겠지?" 난 피떡이 된 최상철을 끌고 나왔다. 영진은 날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잘됐지. 이빨 스무 개 박살내고 피떡이 될 때까지 밟아줬지. 그 래도 범죄 목록에 강간은 없어서 거기는 무사히 남겨뒀어." "그, 그래요?" 영진은 내가 일을 진행하는 동안 망을 보고 사람이 접근하지 못 하게 막았다. 난 영진으로 하여금 최상철을 업게 했다. 그리고 근 처에 세워둔 차로 걸음을 옮겼다. 이 차는 내 차가 아니다. 지니가 어디선가 구해온 차다. 영진은 뒷좌석에 최상철을 실고 조수석에 탔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왜, 너무 잔인하냐?" "아무래도 그렇죠. 한 사람 인생을 완전 망치는 셈인데." "그럼 이놈들에게 인생을 망친 놈들은 어쩔 건데? 걔들은 안 불 쌍하고 얜 불쌍하냐?" "그, 그건……." 난 차를 출발시켰다. "현재의 법체계는 보복보다는 교하의 의미가 강하지. 하지만 우 리나라의 현실은 그 교화의 기능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 지. 일벌백계라는 말 들어봤지?" "예. 한 명을 벌함으로써 백 명에게 경고한다는 뜻이잖아요." "맞아. 그건 현재의 법체계도 마찬가지야. 죄를 저지르면 감옥에 가서 형을 살아야지. 그리고 큰 죄일수록 형을 사는 기간은 길어 져. 배고파서 빵을 훔친 사람은 배를 채워주면 빵을 훔치지 않아. 이 사람은 식욕이라는 본능에 의해 도둑질을 한 것이므로 재범을 막으려면 그 욕구를 채워주면 그만이야. 하지만 감옥에 가두지. 배 고파서 훔쳤든 장난으로 훔쳤든 어쨌든 도둑질을 했으니까. 다시 말해 전혀 교화의 필요성이 없는 사람까지도 감옥에 가두는 거야. 그럼 사람들은 그걸 보며 생각하지. '아! 도둑질을 하면 저렇게 되 는구나. 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지' 라고. 감 옥이라는 처벌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줘 후에 발생할지도 모 르는 범죄를 억제시키는 거야." "배고파서 훔친 거면 정상참작이 되지 않나요?" "너 레미레라블 봤지?" "장발장이요?" "그래. 그거. 거기서 장발장이 빵 하나 훔친 죄로 몇 년을 언도 받 았는지 알아?" "어렸을 때 읽은 거라 잘 모르겠는데요." "5년이야. 고작 빵 하나 훔쳤다고 5년 형을 언도 받았지. 넌 이 얘 기 듣고 뭐 느끼는 거 없냐?" "그, 글쎄요." "이 이야기의 교훈은 간단해.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여덟 글자 는 대한민국 법의 진리라 할 수 있지. 정상참작도 돈 있는 사람들이 나 받는 거야. 한국에서 살려면 이 점을 꼭 명심해 둬라. "……예." "아무튼 일벌백계라는 것이 중요하지. 하지만 이 나라 법이 좀 개판이고 사법부가 심하게 썩었는지라 그러한 기능을 제대로 수행 하지 못하고 있어. 한 여학생을 수십 명이서 집단으로 강간했는데, 가해 학생 대부분이 훈방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났지. 실제로 형을 산 놈은 거의 없어. 그러면 그걸 본 학생들은 '아! 집단 강간이 그렇 게 큰 죄가 아니구나. 합의만 잘하면 그냥 풀려나는 거구나. 설사 고소를 당해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구나. 나도 나중에 좀 꼴린다 싶으면 지나가는 여학생 붙잡아다가 친구들과 돌려 먹어야겠다. 이 나라는 미성년자에게 집단 강간을 허용하는 좋은 나라구나. 이 런 나라에서 태어나서 참 행복해' 라고 생각하겠지." "그야 뭐 아무래도 그렇죠. 실제로 애들끼리 그런 얘기 많이 해 요. 강간해봐야 처벌도 받지 않는다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그래. 이 나라가 그렇게 좋은 나라야. 그렇다고 이 나라 욕할 필 요는 없어. 이게 다 국민을 강하게 키우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니. 법이 제대로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들로 하여금 법에 의 지하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뜻이야. 난 그 뜻을 받들어 이렇 게 직접 일벌백계에 나서는 거고." 말을 하는 사이 명진 고등학교 정문이 보였다. 아마 라이레얼도 지금쯤 박기욱이라는 놈을 끌고 대천 고등학교로 갔을 것이다. 우리는 일을 빨리 끝내기 위해 팀을 둘로 나누었다. 나와 영진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이고, 라이레얼과 정환, 진빈이 한 팀이 되어 움 직이기로. 우리 팀은 명진고 일짱 최상철을 맡았고, 라이레얼 팀은 대천고 일짱 박기욱을 맡았다. 이 역시 지니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아마 라이레얼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이레얼 팀을 만났다. "아! 히로." "아! 라이레얼. 일은 잘 처리했어요?" "응. 깔끔하게 처리했어. 걱정하지 마, 히로." "설마 또 하혈시킨 건……?" "강간은 안 했던데. 그래서 그냥 이빨 몇 개랑 뼈 몇 개만 부러뜨 렸어. 그리고 그 다음엔 히로가 시킨 대로 했어." "잘 하셨어요. 내일이면 난리가 나겠군요." "응. 아마도 그럴 걸." * * * * 〃gouon〃 청기 공고 일짱 김승오, 명진고 일짱 최상철, 대천고 일짱 박기욱 이 당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중일 공고 일짱 한인주와 중일 여상 일짱 송 윤미는 공포에 질렸다. 당한 세 학생의 공통점은 일짱이라는 것과 일진 연합회 소속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런 꼴을 당했을 리는 없다. 송윤미는 손톱을 깨물며 말했다. "여, 역시 그 일 때문인가?" "뭐?" "그렇잖아. 그 일이 아니라면 뭐 때문에 그 셋이 당했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겨우 한 놈 팬 것 때문에……." "어떻게 됬는지 모르잖아.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만 있고 아직 까지 학교를 안 나오고 있는데. 만약 죽기라도 했다면……." "안 죽었어!" 한인주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 일이 내심 찔리던 중이었 다. 그저 기어 오른 놈을 밟아주었을 뿐인데.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송윤미는 한인주를 설득했다. "우리 이러지 말고 경찰에 자수하자. 안 그러면 우리 역시 표적 이 될 거야." "미쳤어? 자수하려면 너나 자수해." "인주야." "닥쳐! 이게 다 너 떄문에 일어난 일 아니야? 니가 복수해 달라고 설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됐을 것 같아? 자수하자고? 넌 직접 폭 행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쉽게 말할 수 있겠지. 만약 권주혁 그 새끼 가 정말로 죽었다면 살인죄야. 난 살인자가 되는 거라고! 그럼 어떻 게 되는데? 나보고 몇 년을 감옥에서 썩으라는 거야?"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소리를 친 한인주는 먼저 고 개를 돌렸다. "젠장!" 지금 기분 같아서는 여자친구인 송윤미마저도 패버리고 싶었다. 모든 것이 그녀 탓이었다. 그녀가 버스정류장에서 그 난리만 치지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인주는 살인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정체 모를 사람이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그렇다고 경찰에 자 수할 수는 없었다. 만약 권주혁이 정말로 죽었다면, 최소한 몇 년은 감옥에서 살아야 할 테니. 한창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썩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 곳에서야 왕 대접을 받으며 지내고 있지만, 감옥에서는 시다바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권주혁을 팬 것이 미치도록 후회되었다. 대체 무슨 원한을 졌다고 사람을 그 지경까지 팼단 말인가?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해오던 일이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한인주의 모습을 본 송윤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넌 너 좋을 대로 해. 어쨌든 나는 경찰에 자수할 테니까. 니 이름 은 말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송윤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중일 공고를 빠져나갔다. 한인주 는 그런 그녀를 말릴 수도 쫓아갈 수도 없었따. "젠장! 애들 창고로 집합시켜!" 한인주는 일진회 학생들을 창고로 집합시켰다. 그리고 1, 2학년 을 엎드려뻗쳐 시킨 다음 각목으로 내리쳤다. 퍽! 퍽! 퍽! 왼손에 깁스를 한 한인주는 오른손만으로 각목을 휘둘렀다. 일 진회 학생들은 자신들이 왜 맞는지도 모른 채 맞았다. 반항은 용납 되지 않았다. 한번은 이렇게 일렬로 엎드려뻗쳐하고 맞는 것을 본 한 학생이 깜짝 놀라 교무실로 달려가 선생들에게 말했다. 선생들은 맞는 학 생들을 구해주기는커녕 웃으려 오래전부터 내려온 '학교 전통' 이 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선생이 학생을 패는 일이 정당하듯 선배가 후배를 패는 것도 정 당하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교육부 홈페이지에 이 사실에 대해 올렸으나 그 글은 10분 만에 삭제되었다. 그리고 그 학생은 교장과 교사들의 압력에 의해 자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선배들이 후배를 패거나 단체기합을 주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다. 지금 광경도 창고를 드나드는 많은 학생들이 보 았으나 누구도 선생한테 알리지 않았다. 그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 고 걸어갈 뿐이었다. 어쨌든 학교 전통 아닌가? "어떤 새끼가 그랬는지 알아내! 어떤 새끼가 청기 공고, 명진고, 대천고 일진회를 건드렸는지, 그 새끼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 한인주는 미친 듯이 각목을 휘둘렀다. 그렇게 한 십여 분 때리고 나자 제풀에 지쳤는지 각목을 집어던졌다. "뭣들하고 있어? 당장 잡아오라니까!" 그의 외침에 일진회 학생들은 재빨리 창고를 뛰어나갔다. 어디 서 어떻게 찾아와야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명령에 따르는 척하는 것이 좋았다. 한인주는 탈진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대로 눈 뜨고 당 할 수는 없었다. 누군지 모를 놈에게 당하고 싶지도 않았고, 감옥에 끌려가고 싶지도 않았다. 한인주는 지금이야말로 일진 연합회의 도움을 빌릴 때라고 생각했다. * * * *〃gouon〃 굳이 한인주의 전화가 아니더라도 소식을 접한 것은 채범식 역 시 마찬가지였다. 외고에 다니는 그는 키 183센티에 무테안경을 쓴 잘 생긴 청년이었다. 특별히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쓰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경을 쓰는 쪽이 좀더 단정해보여서 쓰고 다닐 뿐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지?" 지금은 점심시간이었다. 채범식은 늘 그렇듯 김인하와 이정원과 함께 밥을 먹었다. 김인하와 이정원은 전형적인 양아치였지만 채 범식의 체면을 생각해 학교 내에서만큼은 모범생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부는 잘 못하지만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는 나름 대로 좋은 이미지를 얻고 있었다. "누구 말하는 거야?" 김인하의 물음에 채범식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청기 공고 일짱 김승오를 고자로 만들고, 명진고 일짱 최상철과 대천고 일짱 박기욱을 발가벗겨 철봉에 매달아 놓은 놈 말이야." "아아~ 그놈." "한인주가 도움을 청해왔어." "중일 공고 일짱?" "그래. 얼마 전 대명고로 전학 온 권주혁이라는 놈이 설쳐대서 밟아준 모양이야." "얼마나 밟았는데?"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대. 이미 당한 셋과 한인주가 같이 밟았 나봐. 그러니까 다음은 한인주 차례가 될 가능성이 높지." "한인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 "글쎄. 어차피 그놈들이야 소모품이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하 지만 어쨌든 일진 연합회 소속이니 그놈들이 당하면 일진 연합회 의 힘이 깎여나가는 것도 사실이야. 그리고……." 채범식은 웃음을 지었다. "난 나한테 도전하는 놈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아." 그 웃음에 김인하와 이정원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밟아 달라고 발악을 해대니 원하는 대로 밟아줘야지. 너희들은 일단 그놈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알아내봐. 아막 ㅝㄴ주 혁의 가족이나 친척일 거야." "알았어." "한번 해볼게." * * * *〃gouon〃 일단 세 명은 끝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중일 공고 일짱 한인주와 중일 여상 일짱 송윤미 둘이다. 하지만 송윤미는 신변의 두려움을 느꼈는지 경찰에 자수했다. 죄를 뉘우친 건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몸을 피한 건지는 모르 겠지만, 어쨌든 경찰에 자수까지 했으니 건드리기가 좀 미안하다. 그래서 이제 남은 사람은 한인주 하나다. 하지만 나의 목적은 일 진 연합회를 해체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두목이라 할 수 있는 채범식을 박살내야 한다. 겉으로는 모범생인 것처럼 행동하고, 뒤로는 거대 폭력 조직이나 다름없는 일진 연합회를 움직이다니. 뒤로 호박씨를 까도 정도가 있지! 난 이런 종류의 인간들 무지 싫어한다.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니에요, 형?" 영진은 내 일처리 방식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사실 한인주만 처리하면 권주혁에 대한 복수는 끝나는 셈이다. 만약 내가 한인주까지만 처리한다면, 그건 머리는 놔두고 팔다리 만 제거하는 셈이다. 죄로 따지자면 팔다리보다는 머리가 더 죄질 이 나쁘다. 그리고 머리를 남겨 둔다면 팔다리는 얼마든지 재생된 다. 그렇기에 반드시 머리를 제거해야 한다. "나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놈이 누군데 그런 말을 하니? 아무튼 넌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알았어요. 어차피 저도 혼자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것들이 일진회다 뭐다 뭉쳐서 설쳐대는 꼴을 보면 마음에 안 드니까요." "그래. 잘 아는구나. 너 무협 소설 보냐?" "예. 자주보지는 않지만 가끔 봐요." "거기 보면 왜 정파니 협객이니 하고 나오는 애들 있잖아." "예." "걔들은 뻑하면 살인을 하지. 심지어는 겨우 욕 한번 얻어먹었다 고 상대를 죽이는 경우도 많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걔들을 협객 이라 부르는 줄 알아?" "글쎄요." "간단해. 걔들은 일반인은 건드리지 않거든. 검을 겨누는 것도 죽이는 것도 무림인에 한해서야. 사무라이 역시 비슷한 개념이지. 먼저 칼을 겨누지 않는 한 일반인은 죽이지 않아. 이것은 하나의 원 칙과도 같아. 사실 난 일진회끼리 패싸움을 하든 뭘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싸우고 싶은 놈들끼리 싸운다는데 신경 쓸 필요 없잖 아. 하지만 싸우기 싫은 놈들까지 건드리니까 문제지. 단체로 몰려 다니며 힘없는 학생들을 짓밟고 돈을 갈취하는 놈들은 그야말로 쓰레기지."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너도 잘해, 임마. 누구랑 싸우든 상관 안 하겠는데, 싸 움 못하는 애들에 대해서는 먼저 시비 걸지 않는 한 건드리지 마. 싸움과 일방적인 구타는 엄연히 다른 거니까." "그건 저도 알아요. 이제까지 싸움은 많이 했지만, 구타한 적은 없어요." 나의 충고에 영진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난 녀석을 노려보 며 말했다. "너 처음 만났을 때 나 치려고 했잖아!" "그,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주혁이가 혼수상태라는 얘기 듯고 너무 화가 나서……." "화나면 사촌형을 쳐도 되는 거냐? 응? 많이 화났으면 아예 사촌 형을 혼수상태로 만들었겠다. 그치?" 나의 추궁에 영진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가 뭘 잘했다고 입을 열게쓴ㄴ가? 보다 못한 영아가 말렸다. "그만해, 오빠. 영진이도 많이 반성하고 있을 거야." 그래도 누나라고 동생 편을 들어주다니. 그런데 이렇게 영아와 영진이 같이 서 있으면 아무리 봐도 영아 가 누나로 안 보인다. 영진이 2살정도 많은 오빠로 보인다. 영진이 삭았다는 뜻이 아니다. 영아가 너무 어려 보인다는 뜻이다. 난 영아를 훑어보다가 시선을 가슴에서 멈추었다. "으음, 역시 유아적 체형이 문제인 건가?" "무, 무슨 말이야! 이 저질!" 영아는 그렇게 외치며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이런 모습을 보 게 되면 또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두 손으로 가리니까 다 가려진다는 사실이 더욱 비극적이군. 루 시아는 아무리 가려도 안 가려지는데. 라이레얼은 말할 것도 없고. 뭐, 일루니아 여사님만 해도……." 점점 빨개지는 영아의 얼굴. 조금만 있으면 폭발할 것 같다. "오빠!" 폭발했다. 그 순간 영아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영아는 씩씩거리며 핸드폰 을 받았다. 당연 목소리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누구세요? 예? 누구라구요? 아! 지니 오빠. 안녕하세요. 예? 무 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구요? 호호~ 아니에요, 오빠. 저는 오 빠 생각만 하면 항상 즐거워요." 처음에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하던 영아는 전화를 건 상대가 지니 라는것을 알고는 순식간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바꾸었다. "그런데 오빠가 저한테 어쩐 일로 전화하신 거에요? 서, 설마 평 소에 절 마음에 두고…… 예? 영웅 오빠 바꿔달라구요?" "내 놓으렴." 영아는 울상을 지으며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지니가 아무리 심심해도 설마 널 마음에 두었겠니? 꿈도 크셔라. 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예. 전화 바꿨습니다." [채범식과 주변 인물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계획 역시 수립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제가 생각한 계획은 이렇습니다.] 지니의 계획은 채범식을 치기 전에 먼저 김인하와 이정원을 제거 하자는 것이다. 먼저 팔다리를 자른 다음 겁에 질린 머리를 치는 계획.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세우신 계획이니 어련하겠습니까? 그대 로 따를 테니 세부 계획이나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먼저…….] * * * *〃gouon〃 늦은 밤. 김인하는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채범식이 시킨 대로 세 학교 일 진회를 습격한 놈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다. 서울 강북의 일진 연합회는 여러 지역의 일진회들과 친분을 맺 어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네트워크를 잘만 활 용하면 단기간 내에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전주고 일진회 역시 일진 연합회와 관계가 있었기에 권주혁에 대 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쉬웠다. 집은 어느 정도 사는지, 부모는 무슨 일을 하는지, 친구 관계는 어떻게 되며 약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권주혁은 일단 외아들이었다. 친구는 그리 많지 않았찌만 단짝 이라 해도 좋을 만큼 친하게 지낸 친구가 몇 명 있었다. 박영진, 임정환, 전진빈. 이중 박영진과는 중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고등학 교에 올라와서 박영진은 임정환과 전진빈을 사귀었고, 때문에 권 주혁도 그 둘과 가깝게 지냈다. 박영진은 이종격투기 대회에 나가 청소년부 전국 2등을 할 정도 로 싸움 실력이 탁월했다. 그 지역 고등학교에서 일대일로 그를 이 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박영진만큼은 아니었지만 권주 혁은 물론 임정환과 전진빈도 싸움 실력이 제법이었다. 그래서 전주고 일진회는 몇 번이나 그들을 회유하러 했지만 그들 은 단체로 몰려다니는 것이 싫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사사건건 일 진회의 행동에 태클을 걸었다. 그 네 명 때문에 전주고 일진회는 수 금도 제대로 못 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권주혁은 일짱 네 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고, 며칠 후에 다른 세 명이 동시에 실종되었다. 부모들은 학교 에 유행성독감을 명목으로 병결을 신청했다. 정말로 유행성독감에 걸려 집 안에 누워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예상이 맞다면 그들은 지금 서울에 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사라진 다음날 김승오가 깨졌고, 그 다음날 최상철과 박 기욱이 깨졌다. 이걸 우연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범인은 그 셋이었다. 김인하와 이정원은 확신했지만 채범식은 그 추리에 한 가지 의문 을 제기했다. 최상철과 박기욱은 밤길에 기습을 당했으니 예외로 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셋이서 청기 공고 일진 40명을 쓸어버릴 수 있 었을까? 아무리 그 셋이 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셋이서 40명을 쓸어버린다 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술에 취해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을 거라는 결론을 냈 지만, 채범식은 여전히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채범식은 그 셋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 았다. 셋이서 일진 40명을 쓸어버린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정보를 알아내 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제까지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채범식의 말은 항상 옳았다. 그 렇기에 김인하와 이정원은 그의 말을 믿었다. 어쨌든 그 셋이 범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셋을 찾아 낸다면 배후를 알아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애들을 풀어야겠지? 범식이 말대로 녀석들은 반드시 한인 주 주변에 나타날 테니.'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골목길을 도는데 갑자기 가로등 전구가 깨지며 불빛이 꺼졌다. 챙그랑! "뭐, 뭐야?" 챙그랑! 챙그랑! 챙그랑! 이어서 주변 가로등 역시 마찬가지로 깨졌다. 누군가가 작은 돌 을 던진 모양이었다. 좁은 골목길이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 누구야? 빨리 나와!"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벽에 내 리찍었다. 쿵! 얼마나 세게 찍었는지 머리 전체가 다 흔들리는 것 같았따. 김인 하는 시야가 흐려지고 귀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그의 귓가 에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서문 외국어 고등학교 3학년 7반 김인하 맞지?" "너, 너 누구야?" 그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담벼락을 눌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손가락이 천천히 벽돌을 파고들었다. 마치 진흙더미를 누르는 듯 한 행동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김인하는 지금 자신이 제정신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손가락이 두 마디쯤 벽을 파고들자 그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벽돌이 모래처럼 부서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살고 싶나?" "예, 예." 김인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등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마음 만 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움직이지 마.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죽는다." 몸을 누르고 있던 손길이 사라졌다. 하지만 김인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바로 자신을 죽일 것 같았기 때 문이다. 그는 김인하의 주머니에서 핸드폰과 지갑을 빼냈다. 그리고 핸 드폰은 손으로 쥐어 박살을 내고, 지갑에는 지폐 수십 장을 넣어주 었다. 그는 지갑을 바닥에 던졌다. 툭. "여동생이 하나 있더군. 성혜 중학교 2학년 1반이었던가? 아! 1반 이 아니라 11반이군. 이름이 아마 김인영이었지?" "무, 무슨……." 김인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억지로 배에 힘 을 주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오줌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교문 앞까지 찾아갔지. 꽤나 예쁘게 생겼더군." "아, 안 돼." "그런데 너무 예쁘게 생겨서 나 혼자 보기는 아깝던데. 그래서 친구들이랑 돌려가면서 감상할 생각인데, 오빠인 너의 생각은 어 때?" "제, 제발 그러지 마. 나한테는 뭘 해도 상관없지만 인영이는 안 돼. 제발 부탁이야." 김인하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그는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꼈 다. 자신이야 어떻게 돼도 좋았다. 하지만 여동생은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었다.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한테 풀어. 지금 여기서 날 죽 여도 좋으니까 인영이는 건들지 마." 김인하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인영이를 건드린다면 죽여 버린다. 무슨 수를 써써라도 죽 인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죽인다." 그 말들을 들은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킥킥, 니가 무슨 수로?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 가족을 전부 죽이 는 건 일도 아니야. 물론 그중에는 니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여동생 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는 말을 하며 다시 손가락을 담벼락에 찔러 넣었다. 그 얘기를 들은 김인하는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 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몸이 보 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속박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묘한 목소리, 담벼락을 파고드는 손가락, 자신을 속박한 이상 한 기운. 등 뒤의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라면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키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으리라. "그렇게 떨 거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모두가 무사할 테 니." "뭐, 뭔데?" "지갑을 들고 도망쳐. 집은 물론이고 친구나 선생에게 어떠한 연 락도 하지 마. 니가 서울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네 가족이 살 확 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에 경찰서에 자수해. 니가 채범식 밑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경찰서에 전부 털어놔." "아, 안 돼. 그럼 채범식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등 뒤의 남자도 두려웠지만 채범식도 두려웠다. 채범식이 가진 힘은 자신의 집을 파멸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중학교 때부터 채범식을 지켜봐왔기에 김인하는 그가 어떤 종류 의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친한 친구라지만, 자신이 배신한다면 그는 가차 없이 자신을 눌러 죽일 것이다. 마치 벌레를 짓이기듯이.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 일주일 후면 채범식에겐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만약 일주일 후에도 채범식이 건재하다면 경찰서 건은 없었던 걸로 하지. 어때?" "조, 좋아." "킥킥, 마음에 드는군. 지금부터 열심히 뛰는 게 좋을 거야. 여동 생과 가족들을 살리고 싶다면 말이지. 킥킥킥." 갈라진 듯한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 웃음소리가 완 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김인하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한순간 긴장이 풀리며 김인하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바지가 축축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린 것 같았다. 김인하는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집어 들었다. 지갑에는 현금이 30만 원 정도 들어있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로등이 꺼 진 어두운 골목길에는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갑에 들어있는 돈과 움푹 파인 담벼락이 꿈이 아니었음 을 말해주었다. '도망쳐야 해. 최대한 서울에서 멀어져야 돼.'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가 시킨 대로 해야 했다. 최대한 서울에서 멀어지는 것이 좋을 거라는 그의 경고가 떠올랐다. 김인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열심히 뛰었다. * * * *〃gouon〃 난 지갑을 손에 쥐고 열심히 달리는 김인하를 보며 담배를 입에 물 었다. 일주일 동안은 누구도 김인하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건 이정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이레얼이 잘 처리했을 테니. 채범식의 입장에서 보면 하루아침에 믿었던 두 부하가 증발을 하 게 된 셈이다. 그들은 납치되었을 수도 있고,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 "팔다리를 자르고 숨통을 조인다는 건가?" 이런 계획 정말 마음에 든다. 하지만……. "흑흑, 아까운 내 돈." 도피자금으로 쓰라고 무려 30만 원이나 넣어주었다. 라이레얼이 이정원한테 주었을 30만 원 역시 내 돈이니, 도합 60만 원이 나간 셈이다. 60만 원이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아까워 죽겠다. 그 돈이면 우리 애들 외식 두 번 시켜주고도 남는다. "……." 아니, 남진 않으려나? 조금 모자라려나? 아무튼 그렇다. 그 돈이면 우리 애들 외식도 시켜주고, 나의 사랑 스런 루시아에게 선물도 사줄 수 있다. 그런 돈을 그냥 줘버리다니! 난 채범식이라는 놈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개겂을 물게 해주마! * * * *〃gouon〃 채범식은 학교에 와서야 김인하와 이정원이 실종되었다는 사실 을 알았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 떠한 연락이나 증거도 남기지 않은 채. 놀란 부모들이 신고하자 경찰들은 가출로 보고 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채범식의 생각은 달랐다. 가출일 리가 없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가출을 한단 말인가? 짚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일에는 그 세 놈이 관련되 어 있는 것 같았다. 세 학교 일진회를 무너뜨린 전주고 삼인방. '죽인 건가?' 이제까지 녀석들이 한 행동으로 봐서 가능성이 높았다. 보통 사 람들은 생각도 못할 만큼 잔인한 놈들이다. 오죽하면 그들의 얼굴을 봤을 거라 짐작되는 수십 명의 학생들이 입을 꾹 다물고 있겠는가? 상황이 이쯤 되자 채범식도 위협을 느꼈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 가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 김인하와 이정원을 살해한 것을 볼 때, 적은 자신의 정체를 파악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타깃은 자신이 될 가능성이 높 았다. '대체 적은 누구지? 박영진인가? 아니면, 배후에 있는 다른 사람 인가?' 채범식이 생각하기에 이건 박영진의 소행이 아니었다. 실행은 박영진이 했을지 몰라도 뒤에서 정보를 주고 조종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박영진이 단순한 복수광이었다면 한인주만 처리하고 끝냈을 것 이다. 그런데 왜 한인주는 놔두고 자신의 부하들을 살해한 걸까? '복수를 노리는 박영진과 일진 연합회를 노리는 누군가가 손을 잡았다는 건가?' 채범식은 수많은 가정을 세워보았다. 그리고 적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제까지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왔지만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피해자마저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야?'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그것도 살인도 마다하지 않 는 자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태연할 수 없었다. 더욱 미치겠는 것은 그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책상에 턱을 괴고 한창 생각에 빠져있는데 한 여학생이 그의 어 깨를 건드렸다. "으아악!" 채범식은 기습을 받은 줄 알고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때문 에 그를 건드린 여학생은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채범식은 자신을 건드린 사람이 여학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채범식은 친절하게 여학생을 일으켜주었다. 놀란 것을 생각하 면 따귀라도 때린 다음 기분이 풀릴 때까지 짓밟고 싶었다. 하지 만 주위의 눈을 생각해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모범생 이었으니. 여학생은 서문 외고 학생부회장 민세희였다. 민세희는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왜 그렇게 놀래? 나까지 깜짝 놀랐잖아." "미안. 뭔가 좀 생각하던 중이어서." "친구들 때문에 그래?" "뭐, 그렇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기분이라도 풀려고 오늘 하루 땡땡이 친 걸 거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해." 민세희는 채범식을 위로해주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채 범식은 당장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다가 창문밖으로 집어던지고 싶었다. '니가 뭘 안다고 지껄여?' 민세희는 안경을 쓰고 머리를 길게 기른 제법 예쁘장한 여학생이 었다. 때문에 학교에서 인기도 많아 여러 남학생이 그녀에게 고백 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학업을 핑계로 교제 신청을 전부 거절했 다. 그리고 그 남학생 중에는 채범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범식이 이제까지 그녀를 가만히 놓아둔 것 은 학교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졸 업할 때쯤 손봐줄 생각이었다. 저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에서 눈물을 쏟으며 살려달라고 빌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흥분됐다. 똑똑한 여자든 건방진 여자든 벗겨놓으면 다 같은 존재다. 아마 그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년이 인기 좀 많다고 도도하게 굴어봤자 어차피 남자 밑에 깔 리면 똑같은 계집일 뿐이야. 아주 걸레로 만들어 주지.' 채범식은 자신의 표정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안경을 올려 썼다. 민세희는 채범식이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이따 수업 끝나고 학생회 회의 있는 거 알지?" "응." "늦지 말고 와. 잊었을까봐 말해주러 온 거야." "그래. 고마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친구들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용무를 마친 민세희는 교실을 나갔다. 채범식은 슬쩍 그녀의 뒷 모습을 훌터보았다. 하지만 그녀와 즐기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자 신을 노리는 누군가를 잡는 것이 먼저였다. 그자는 생각보다 쉽게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회 회의는 생각보다 늦게 끝났다. 기말고사 뒤의 축제에 관 한 회의였다. 가수는 누구를 초청해야 할지, 무대 설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 행사 스케줄은 어떻게 할 것인지. 이런저런 회의를 끝마치고 나니 어느새 밤 9시였다. 그나마도 학 원에 가야한다는 회의 참석자들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회의를 중단 한 것이다. 아마 며칠은 이렇게 계속 회의를 해야 하리라. 서문 외고는 학생회의 힘이 꽤 센 편이었고, 교내 여러 행사에 주 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렇기에 학생회 간부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고. 채범식은 민세희와 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학교를 나섰다. 그는 대열의 중간에 서서 끊임없이 주위를 살폈다. "왜 그래? 누구 찾아?" "아, 아니.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 교문 앞 골목길은 기습을 당하기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학생들과 같이 있으니 적도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이 골목길만 빠져나가면 그 다음은 대로였다. 그곳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까지 가면 안전했다. 그렇기에 이 골목길이 최대 위험 지역이었다. 골목을 거의 빠져나올 때쯤이었다. 그들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 다.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검은색 양복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키는 제법 큰 편이고 얼굴은 평범하지만 전체적으로 잘생긴 인상이었다. 그는 웃으며 손을 들었다. "여어! 오랜만이다, 범식아." 민세희가 채범식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 아니." 그러자 그는 채범식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야 나. 기억 안 나?" "실례지만, 누구……?" 채범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뭇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하! 이 자식 진짜 기억 안 나나 보네. 나야, 임마. 영진이 형. 박 영진. 기억 안 나? 너 자주 우리 집에 놀러오고 그랬잖아." "박영진…… 서, 설마……." 그 순간 그는 반가운 듯 채범식을 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는 체 하는 게 좋을 텐데. 할 얘기가 좀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채범식의 등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임마! 그 설마야! 이야, 반갑다." 채범식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설마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데 공격하진 않겠지. "예, 형.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임마. 너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 나 재수 학원 들어 간 뒤로 한번도 못 봤잖아. 아! 기뻐해라. 나 드디어 대학에 합격했 다. 강원도 산골에 있는 대학이지만 제법 괜찮은 대학이야. 지금은 방학 맞아서 잠깐 서울에 올라 온 거야. 대학은 방학이 길어서 좋더 라. 원래 오늘 내려가려고 했는데, 니 생각나서 보러 온 거야. 이야, 그런데 진짜 반갑다. 키도 제법 큰 것 같은데. 잠깐. 지금 보니 나보 다 더 크잖아? 짜식, 좋은 거 많이 먹었나 보네."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는 통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채범식은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상대는 정말로 반갑다 는 듯 웃고 있었다. 도저히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말고 우리 자리 좀 옮기자. 저쪽에 보니까 괜찮은 카페 있던데. 이렇게 서 있으니까 다리 아프네." '유인하겠다는 건가?' 채범식은 적으로 생각되는 자를 믿고 따라갈 만큼 멍청하지 않 았다. "아, 아니요. 지금 빨리 집에 가봐야 하거든요. 다음에 제가 연락 드릴게요." "얘기할 게 좀 있는데." "여기서 하세요." 그러자 그는 채범식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연에 대한 얘기를 여기서 하면 좀 곤란하지 않나?" "……." 그 말에 채범식은 흠칫 했다. 눈앞에 남자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 다는 듯 실실 웃어댔다. "그러지 말고 가자. 나 강원도로 내려가면 다시 만나기 힘들어." 채범식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죠. 이 근처는 제가 잘 아니까 안내해 드릴게요." 따라가긴 따라가되 장소는 자신이 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조용한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채범식은 민세희에게 말했다. "세희야, 저번에 수학여행 회의할 때 만났던 카페가 어디였지? 왜 천장에 태양계 그려져 있던 카페 말이야." "아아, '해달별' 말하는 거야? 골목길 나간 다음 오른쪽으로 가 면 있어."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니가 안내 좀 해줄래? 내가 밤길이 좀 어두워서." "그래. 어차피 바로니까." 민세희와 채범식이 앞장서고 남자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 갔다. 마치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채범 식도 도망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저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 했다. 그가 얼마나 싸움을 잘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대일로 붙어도 지 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정말로 박영진의 형인가? 대체 무슨 의도로 이렇게 모습을 드러 낸 거지?' 기습을 할 생각이었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갑자기 나타나 친한 척 하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김지연에 대한 것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은 적을 모르고 있지만, 적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여기야." "먼저 들어가요, 형."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 등을 보이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그래. 잘 가." "내일보자." 민세희는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채범식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 그를 만날지, 아니면 이대로 도망칠지. '원한다면 한판 붙어주지.' 채범식은 계단을 올라갔다. * * * *〃gouon〃 자리에 앉은 나는 채범식이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채범식 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여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자 난 그 것을 보며 말했다. "뭐 먹을래, 범식아?" 채범식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야, 범식아. 영진이 친구 범식아. 영진이 엉아가 하는 말 안 들리 니?" "너 누구야?" "응?" "니가 김인하와 이정원을 죽였냐?" "……." 죽여? 하긴 연락도 없이 실종되었으니 살해당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이다. 난 굳이 그의 오해를 풀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뭐, 그렇다고 해두지. 예쁘게 썰어서 수락산 양지바른 곳에 묻 어줬으니, 나중에 한번 찾아가서 제사나 올려줘라. 아! 난 레모네이 드로 하지." 난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레모네이드 주세요. 야, 넌 뭐 먹을래?" "……." 대답이 없군. "레모네이드 두 개 주세요." 아아~ 뭘 마셔야할지 모르는 범식이를 위해 대신 주문까지 해주 는 이 친절함. 난 너무 착한 것 같다. 채범식은 안경을 벗고 날 노려보았다. 안경을 벗으니 썼을 때에 비해 굉장히 건방져 보인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지?" "별로 몰라. 일진 연합회 짱이라는 것과 집안 사정, 그동안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 정도?"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거지?" "글쎄. 그건 내가 말해줄 게 아니라 니가 알아내야할 것 같은 데." "김지연하고는 무슨 관계야?" "내가 김지연하고 무슨 관계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니가 김지연하고 무슨 관계인지가 중요하지." 그러자 녀석은 몸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 "난 김지연과 아무 관계없어." "후후~ 과연 그럴까?" 레모네이드 두 잔이 나왔다. 난 빨대로 레모네이드를 휘저으며 말했다. "1년 전의 일이었지. 김지연은 서문 외고 신입생이었어. 김지연 은 선배들의 권유로 학생회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지금은 학생회 장이지만 당시에는 2학년 대표였던 너 채범식을 만나게 되었지. 그 녀는 너한테 반했고, 교제를 신청했어. 넌 그 교제 신청을 받아들이 며 부모님이 이성교제를 반대하고 있으니 사귀는 것은 비밀로 하 자는 조건을 내걸었지. 김지연은 별 생각 없이 그 말에 따랐어. 교 제 얼마 후 너희는 성관계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햇지. 김지연은 책 임지겠다는 너의 말만 믿고 기꺼이 몸을 내맡겼어. 하지만 관계가 지속되자 너는 그 애에게 질렸지. 그도 그럴 것이 니 주위에 여자란 넘쳐났으니까. 일진회 짱만 되도 아무 여자 일진이나 골라서 잘 수 있는 권리가 이쓴ㄴ데, 일진 연합회 짱인 너는 오죽하겠어? 어차피 질리도록 먹었겠다, 더 이상 볼일 없어진 넌 김지연에게 헤어질 것 을 요구했어. 하지만 책임진다는 말만 믿고 몸까지 바친 김지연은 그럴 수 없었지. 김지연은 헤어질 것을 요구하는 너에게 교제 사실 을 학교에 알리겠다고 말했어." 난 말을 멈추고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채범식은 얘기를 들으면서도 별 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얘기가 아닌 남의 얘기를 듣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음료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계 속 몸을 의자에 기댄 채 내 얘기를 들었다. "사실이 학교에 알려질 경우 일이 귀찮아지지. 너는 어디까지나 공부 잘하고 착한 모범생으로 남아있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1학년 여자애왜 성관계까지 가진 다음 차버리려 했다는 소문이 돌 경우 어떻게 될까? 너의 그 모범생 이미지는 한번에 무너져 내리는 거 지. 그래서 너는 김지연을 처분하기로 했어. 밤에 김지연을 불러내 일진들에게 돌려먹게 했지. 그리고 김지연이 수십 명의 남자들에 게 윤간 당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협박했어. 입 조심 하지 않으 면 사진을 학교와 인터넷에 뿌리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혹시라도 김지연이 입을 열까 두려워 은밀히 학교에 소문을 퍼트렸지." 난 다시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김지연은 걸레다. 이제까지 거쳐 간 남자만 수십 명이다. 별명 은 공중변소다. 버스카드 같은 년이다. 원하면 누구한테나 대준다. 중학교 때 같은 반 남자애들이 전부 구멍동서였다. 그런 식으로 소문을 퍼트려두면 설사 김지연이 너한테 당한 일을 실토한다 하더라도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소문은 순식간 에 학교 전체에 퍼졌어. 누구도 진위여부를 확인하려 들지 않았고, 확인할 필요도 없었지. 결국 김지연은 전학을 갔어.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얘기가 끝나자 채범식은 피식 웃었다. "재밌는 얘기군. 지어낸 얘기 치고는 제법 설득력이 있는데?" "그 말은 지금 내가 한 얘기가 거짓이라는 건가?" "그 얘기 중 사실은 나한테 교제 신청을 했다는 것과 그런 소문이 퍼졌다는 것뿐이야. 물론 난 그 교제 신청을 거절했지. 공부와 학 생회 일을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으니까." "흐음, 발뺌하는 건가?" "발뺌이 아니라 사실이야. 김지연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 만, 없는 얘기까지 지어내서 하는 이유는 뭐지?" 거짓말 좀 하는군. 표정 변화 없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것도 재수 없게 입가에 살짝 미소까지 머금은 채. 뭐, 발뺌할 것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증거가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겠 지?" "애초에 있지도 않은 일이었으니 증거가 없는 건 당연한 거 아닌 가?" "끌쎄. 과연 그럴까? 니가 김지연을 집단 강간했다는 증거는 없 어. 하지만 말이야……."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니가 김지연과 잤다는 증거는 있지." "뭐?" 난 대답 대신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그것은 채범식과 김지연 이 모텔촌에서 걸어 나오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본 채범식은 순 식간에 얼굴빛이 바뀌었다. "어때? 둘이서 모텔촌을 걸어 나오는 사진 정도면 충분한 증거가 될 것 같지 않아?" "이, 이걸 어떻게……." "이 사진을 학교에 뿌리면 어떻게 될까? 이미 김지연이 걸레라는 소문이 퍼진 상태이니 '학생회장도 김지연에게 따먹혔다' 라는 소 문이 돌 것 같지 않아? 모범생인 학생회장이 학교에서 소문난 걸레 와 잤을 줄이야. 으음, 이거 꽤나 충격적인 스캔들인 걸." 채범식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날 노려보았다. 침착하려고 노력 하는 듯했지만, 잘 되지 않는 듯했다. "뭘 원하지?" "니가 김지연이 걸레라는 소문을 퍼트린 것처럼 니가 걸레라는 소문이 퍼지는 거야. 채범식은 걸레와 잤다. 그러므로 채범식도 걸레다. 이제까지 수 십 명의 여자들에게 돌려 먹혔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애들에게 전부 따먹혔다. 소문이란 별 다른 증거가 없어도 쉽게 퍼지기 마련이지. 하물며 이런 증거까지 있다면, 날개를 다는 것은 순식간이야." "뭘 원하냐고 했잖아!" 채범식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 빨대로 레모네이드를 빨아 먹었다. "그렇게 흥분할 필요 없어. 좀 진정해." 흥분할 수밖에 없을 거다. 이제껏 잘숨겨왔던 가면이 벗겨지게 생겼으니. 채범식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증거는 없다. 김지연을 집단강간 했다는 증거도 없고, 소문을 퍼트렸다는 증거도 없다. 둘이 같이 모 텔촌을 나오는 사진 가지고는 채범식의 범죄를 입증할 수 없다. 그리고 채범식은 미국인이다. 설사 죄가 입증된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 경찰이 건드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소문이라면 어떨까? 소문이라면 이 사진 한 장만 가지고도 채범식을 매장시켜 버릴 수 있다. 먼저 학교에 소문을 퍼트리고, 거기에 살을 붙여(김지연 자 살 사건과 엮어서) 인터넷에 퍼트리면 대한민국에서 발붙이고 살기 힘들 것이다. 그가 쓴 방식 그대로 똑같이 되돌려주는 것이다. 자신이 날린 화살에 자신이 맞아 죽으면 어떤 심정일까? "내가 뭘 원하냐고? 글쎄……." 난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꺼내 귀퉁이에 불을 붙 여 재떨이에 던졌다. 사진은 작은 조각만을 남기고 재로 변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내일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난 마지막 한 방울의 레모네이드까지 빨아 먹었다. 그리고 웃으 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연락할 테니까 핸드폰 켜놓고 있어. 번호는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난 정보 수집에 능하거든." 채범식은 내가 기껏 주문해준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 은 상태였다. 난 그것이 아까워 재빨리 집어 들고 마셨다. 꿀꺽꿀꺽. 으음, 레모네이드는 달짝지근하면서도 시큼한 게 맛있다니까. 난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 어! 어!" 괜히 당황하는 척한 나는 채범식을 보며 말했다. "아아~ 이거 어쩌지? 지갑을 두고 온 모양이네. 미안한데 오늘 계산은 니가 해라.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난 손을 흔들며 카페를 나왔다. 채범식은 그 자리에 앉아 나가는 날 노려볼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녹음기를 꺼내들었다. "멍청한 자식." 사실 아까 채범식에게 보여준 사진은 합성이었다. 둘이 모텔촌에서 나오는 모습 같은 걸 누가 찍었겠는가? 사진을 합성한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 안 하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는 지니인만큼 합성 실력도 스페셜 리스트다. 김지연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 지니는 김지연의 부모를 찾아갔 다. 부모는 딸이 왜 자살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김지연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사실과 수많은 남자들에 게 집단강간 당한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릴 용기가 없었다. 그래 서 한마디 말이나 유서도 없이 자살했다. 지니는 부모에게 김지연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려주고, 복수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딸의 복수를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김지연은 매일 비밀 일기를 적고 있었다. 김지연이 자살한 후에 발견된 그 일기에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특 히 채범식에 관한 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전부 적었다(그 일기에는 채범식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는 적혀져 있지 않 았다). 처음 사귀기 시작한 순간부터, 언제 처음으로 잤는지, 어느 모텔 에서 잤는지, 그때 무슨 옷을 입고있었는지까지. 그 일기를 토대로 지니는 사진을 합성했다. 김지연과 채범식이 갔던 모텔촌에 가서 배경 사진을 찍고, 거기에 김지연의 사진과 채 범식의 사진을 잘라 붙였다. 비밀로 사귀었기 때문인지 김지연과 채범식이 같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김지연의 사진은 죽기 전 찍은 사진을 이용했고, 채범식의 사진은 학교에 있는 누군가(지니가 요즘 교제하는 여교사나 여학생으로 추정)에게 부탁해 몰래 찍게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진이 방금 전 채범식에게 보여준 사진이 다. 그리고 예상대로 채범식은 쉽게 속아 넘어갔다. 비열한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더 비열해질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는 절대 선(善)이 악(惡)을 이길 수 없다.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더 큰 악뿐이지." * * * *〃gouon〃 4교시 일본어 수업 시간. 채범식은 일본어 선생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어젯 밤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적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전히 자 신은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반면 적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김지연의 일까지. 김지연의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은 다른 일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어떻게 된 놈인지는 몰라도 상대는 살인까지도 우습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사진이 있을 줄이야.' 그 사진이 뿌려지면 자신은 끝이다.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분명 오늘 연락을 준다고 했지?' 계속해서 핸드폰에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그쪽이었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기회를 잡아 그를 제거할 생 각이었다. 법으로든 힘으로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알아야 했다. 상대를 파악하고 약 점을 잡아야 했다. 그때가 되면 확실하게 짓밟아 주리라. 띵동뎅동! 4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도시락을 꺼내거나 식당을 향해 달렸다. 채범식은 교실 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지금 기분 같아선 밥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 았기 때문이다. 스피커가 잠시 찌지직거렸다. 점심 방송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교내 방송실에서 틀어주는 점심 방송은 학생들이 보낸 사연을 읽 어주고 신청 음악을 틀어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윽고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일 년 전의 일이었지. 김지연은 서문 외고 신입생이었어. 김지 연은 선배들의 권유로 학생회에 가입했고, 그곳에서 지금은 학생 회장이지만 당시에는 2학년 대표였던 너 채범식을 만나게 되었지. 그녀는 너한테 반했고, 교제를 신청했어. 넌 그 교제 신청을 받아들 이며, 부모님이 이성교제를 반대하고 있으니 사귀는 것은 비밀로 하자는 조건을 내걸었지. 김지연은 별 생각 없이 그 말에 따랐어. 교제 얼마 후 너희는 성관계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했지. 김지연은 책임지겠다는 너의 말만 믿고 기꺼이 몸을 내맡겼어. 하지만 관계 가 지속되자 너는 그 애에게 질렸지. 그도 그럴 것이 니 주위에 여 자란 넘쳐났으니까. 일진회 짱만 되도 아무 여자 일진이나 골라서 잘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일진 연합회 짱인 너는 오죽하겠어? 어 차피 질리도록 먹었겠다, 더 이상 볼일 없어진 넌 김지연에게 헤어 질 것을 요구했어. 하지만 책임진다는 말만 믿고 몸까지 바친 김지 연은 그럴 수 없었지. 김지연은 헤어질 것을 요구하는 너에게 교제 사실을 학교에 알리겠다고 말했어. 사실이 학교에 알려질 경우 일이 귀찮아지지. 너는 어디까지나 공부 잘하고 착한 모범생으로 남아있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1학년 여자애와 성관계까지 가진 다음 차버리려 했다는 소문이 돌 경우 어떻게 될까? 너의 그 모범생 이미지는 한번에 무너져 내리는 거 지. 그래서 너는 김지연을 처분하기로 했어. 밤에 김지연을 불러내 일진들에게 돌려먹게 했지. 그리고 김지연이 수십 명의 남자들에 게 윤간 당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협박했어. 입 조심 하지 않으 면 사진을 학교와 인터넷에 뿌리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혹시라도 김지연이 입을 열까 두려워 은밀히 학교에 소문을 퍼트렸지. 김지연은 걸레다. 이제까지 거쳐 간 남자만 수십 명이다. 별명은 공중변소다. 버스카드 같은 년이다. 원하면 누구한테나 대준다. 중 학교 떄 같은 반 남자애들이 전부 구멍동서였다. 그런 식으로 소문을 퍼트려두면 설사 김지연이 너한테 당한 일을 실토한다 하더라도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소문은 순식간 에 학교 전체에 퍼졌어. 누구도 진위여부를 확인하려 들지 않았고, 확인할 필요도 없었지. 결국 김지연은 전학을 갔어.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 재밌는 얘기군. 지어낸 얘기 치고는 제법 설득력이 있는데? - 그 말은 지금 내가 한 얘기가 거짓이라는 건가? - 그 얘기 중 사실은 나한테 교제 신청을 했다는 것과 그런 소문 이 퍼졌다는 것뿐이야. 물론 난 그 교제 신청을 거절했지. 공부와 학생회 일을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으니까. '뭐, 뭐야 이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 남자와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어젯밤 그와 자신이 나눈 대화였다. 그 자가 대화를 녹음해 학교에서 튼 것이다! 전교생이 숨을 죽이고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도시락을 먹던 학생도, 배식을 받으려고 줄 서있던 학생도 전부 동작을 멈추었다. 김지연 자살 사건은 당시 학교에 없었던 1학년들까지 알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진실이 지금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 고 있는 것이다. 방송은 교무실에도 울려 퍼졌다. 선생들은 깜짝 놀라 외쳤다. "대체 이건 뭐야?" "방송은 안 나오고 이게 무슨 소리야?" "일단 방송 중단시켜!" "빨리 방송실로 가!" 선생들은 방송실을 향해 달렸다. 채범식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방송실을 향해 달렸다. '미친 새끼! 그 새끼는 완전 돌았어!' 그러는 사이에도 방송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 흐음, 발뺌하는 건가? - 발뻄이 아니라 사실이야. 김지연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 만, 없는 얘기까지 지어내서 하는 이유는 뭐지? -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증거가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겠 지? - 애초에 있지도 않은 일이었으니 증거가 없는 건 당연한 거 아 닌가? -글쎄. 과연 그럴까? 니가 김지연을 집단강간 했다는 증거는 없 어. 하지만 말이야…… 니가 김지연과 잤다는 증거는 있지. - 뭐? - 어때? 둘이서 모텔촌을 걸어 나오는 사진 정도면 충분한 증거 가 될 것 같지 않아? - 이, 이걸 어떻게……. - 이 사진을 학교에 뿌리면 어떻게 될까? 이미 김지연이 걸레라 는 소문이 퍼진 상태이니 '학생회장도 김지연에게 따먹혔다' 라는 소문이 돌 것 같지 않아? 모범생인 학생회장이 학교에서 소문난 걸 레와 잤을 줄이야. 으음, 이거 꽤나 충격적인 스캔들인 걸. - 뭘 원하지? - 니가 김지연이 걸레라는 소문을 퍼트린 것처럼 니가 걸레라는 소문이 퍼지는 거야. 채범식은 걸레와 잤다. 그러므로 채범식도 걸레다. 이제까지 수 십 명의 여자들에게 돌려 먹혔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애들에게 전부 따먹혔다. 소문이란 별 다른 증거가 없어도 쉽게 퍼지기 마련이지. 하물며 이런 증거까지 있다면, 날개를 다는 것은 순식간이야. - 뭘 원하냐고 했잖아! 이젠 끝이다. 뭘 원하냐는 말을 했다는 것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김지연과 잤다는 사실까지만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김지연을 집 단강간 한 것까지 인정한 것인지는 대화 내용만 가지고 판단하기 에 좀 애매했다. 하지만 어디까지 인정했던 간에 이제까지 쌓아놓은 이미지는 완전히 무너졌다. 아마 다시는 고개를 들고 학교를 다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방송을 들은 학생들은 후자 쪽에 무게를 둘 것이다. 어 쨌든 김지연과 잤다는 것은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한 부분이 사실 이면, 전체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니,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소문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김지연 사건 때도 그렇지 않았던가? 누구도 진실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저 소문을 주고받으 며 부풀리고, 그 부풀려진 소문을 진실이라 믿는다. 이번 경우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방송실 앞에 도착한 채범식은 문을 박살내듯 열고 들어갔다. 안 에는 여학생 두 명과 남학생 한 명이 있었다. 아마도 방송부 학생들 일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안으로 뛰쳐 들어온 채범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채범식은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어떤 새끼가 틀었어?" 채범식은 평소의 학교 일에 열심이고 후배들을 잘 보살피던 모범 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살인을 할 것만 같은 살기 넘치 는 모습이었다. 여학생들은 살기등등한 채범식의 눈빛에 놀라 몸을 움츠렸고, 남 학생은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저, 저희가 튼 게 아니에요. 전원을 켜니 갑자기 방송이 흘러나 와서……." "그럼 당장 꺼!" "그, 그게 저희도 끄려고 해봤는게 안 꺼져요. 배선이 완전 엉망 이 되어서……." "이런 씨발!" 채범식은 일단 전선을 세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전선이 워낙 많 은데다 잘 뽑히지도 않았다. "아, 안 돼요! 그렇게 뽑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닥쳐, 이 썅년아!" 퍼억! 한 여학생이 말리자 채범식은 그녀를 때렸다. 그녀가 피를 흘리 며 쓰러지든 말든 채범식은 계속해서 전선을 뽑았다. 하지만 여전 히 방송은 흘러나왔다. "개썅! 왜 안 꺼져?" 채범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학생들이 앉아있던 철제의 자를 집어 들어 방송기기를 내려쳤다. 콰앙! 콰앙! 수백만 원이나 하는 값비싼 방송기기가 순식간에 부서져 나갔 다. 그렇게 한참을 부수자 찌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송이 꺼졌 다. 하지만 이미 중요한 내용은 전부 방송된 뒤였다. 지친 채범식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순간 방송기기 안에 불빛 을 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보였다. 채범식은 손ㅇ을 집어넣어 그것 을 빼들었다. 그것은 전파를 수신 받아 방송하는 기기였다. 그 기기에서 나온 선은 방송기기 뒤의 배선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까의 방송은 이 기 기에서 흘러나온 것이리라. "개씨발!" 채범식은 욕을 하며 그 기기를 집어던졌다. 광기에 찬 그의 모습 에 방송부 부원 세 명은 구석에서 벌벌 떨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방송기기를 부수며 발광하는 모습을 지켜본 선생과 학생들은 할 말을 잃었다. 워낙 큰 사안이었기에 채범식은 교장실에까지 불려갔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저한테 원한이 있는 누군가가 절 모함하 기 위해 한 짓입니다. 그 증거로 범인은 테이프를 남겨두지 않았어 요. 육성 검사를 하면 제 목소리가 아닌 게 판별될 께 뻔하니까요. 누군가가 제 목소리를 흉내 내서 녹음한 거라구요." 채범식은 흥분해 말을 쏟아냈다. 교장은 그런 채범식을 진정시 켰다. "알지. 범식 학생이 그런 짓을 안 했다는 것을 누가 모르나? 자자, 일단 진정해. 범식 학생 말대로 범식 학생한테 원한이 있는 사람이 한 짓이 틀림없어.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나?" 짐작 정도가 아니다. 채범식은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지 만 그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범식 학생이 누군가에게 원한 살 만한 행동을 할 리 없을 테니까.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지. 누군가가 범식 학생을 시기해서 저지른 일 같아. 이렇게 범식 학생을 부른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교장은 조금도 채범식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로 그럴 것이 채범 식은 더할 나위 없는 모범생이었다. 그런 그가 걸레라고 소문 난 여 학생과 그렇고 그런 관계일 리 없었다. 서문 외고 교장은 채범식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채범식의 아버지는 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학자이다. 그리고 학계 와 교육계는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였다. 만약 채범식의 아 버지에게 잘못 보인다면 무사히 정년퇴임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 다. 그래서인지 채범식을 대하는 교장의 태도는 조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혹시라도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게. 나는 물론 이고 선생들도 범인을 색출하는 데 최선을 다할 테니.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누군가의 장난질이었다고 전교생에게 알리 도록 하지. 그보다 경찰에 신고해야하지 않을까?" 교장의 말에 채범식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경찰에 알려질 경우 학교 이미지가 안 좋아질 수도 있 습니다. 그리고 김지연의 부모님들은 이 일로 또 다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전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그런가? 흐음, 하긴 그렇군. 부모들이 또 다른 고통을 겪게 할 수는 없지." 교장은 김지연의 부모가 고통 받든 말든 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학교 이미지가 안 좋아지는 것에는 매우 깊이 상관있었다. 혹시라도 언론에까지 알려진다면 학교 이미지가 실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입지는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명예로운 정 년퇴임을 위해서라도 그런 사태는 막아야 했다. 채범식이 경찰의 개입을 막은 이유는 김지연 자살 사건이 재조사 될까봐 두려워서였다. 물론 재조사 된다 하더라도 별 다른 혐의점 을 찾아내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뒤지기 시작 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러다가 언론이 냄새라도 맡고 달려들면 일 은 더욱 복잡해진다. 얘기를 끝마친 채범식은 교장실을 걸어 나왔다. 주위 학생들은 복도를 걷는 그를 보며 수군거렸다. 채범식은 이를 악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여 버린다. 그 새끼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5교시 수업은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대신 전교생은 대강당 에 모여야 했다. 그곳에서 교장은 마이크를 잡고 점심시간에 있었 던 방송은 학생회장 채범식을 시기한 누군가의 장난질이었다고 말 했다. 그 증거로 테이프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확실히 테이프가 없다는 점은 이상했다. 테이프가 없으니 육성 검사를 할 수가 없다. 정말로 누군가가 채범식의 목소리를 흉내 내 장난을 친 것일까? 하지만 대화 내용이 설득력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었다. 비록 그것이 누군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더라 도 말이다. 교장의 말이 끝나자 채범식은 직접 나서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 했다. 김지연은 그저 좋은 후배일 뿐이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 었다. 그때 떠돌았던 김지연에 대한 나쁜 소문은 전부 거짓이었다. 김지연은 그런 애가 아니었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안타 까웠다. 누가 이런 심한 장난을 쳤는지 모르겠다. 나를 욕하는 것 은 상관없지만 김지연까지 끌어들인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김지연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겠다. 범인 색출도 하지 않겠다. 범인은 스스로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반성하길 바란다. 채범식의 말이 끝나자 학생주임 선생이 나서서 이 일이 누군가의 장난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다음 더 이상 언급하지 말 것을 주문 했다. 만약 쓸데없는 소문으로 학업 분위기를 망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협박도 곁들였다. 하지만 그러한 것으로 소문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강 당에 나서는 그 순간부터 그 일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것은 수업 중 과 쉬는 시간에도 이어졌다. "정말로 채범식이 그런 짓을 한 걸까?" "말도 안 돼. 채범식이 얼마나 범생이인데. 그 범생이가 일진 연 합회 짱이라는 게 말이 돼?" "아니야. 그럼 김지연이 왜 자살을 했겠어?" "맞아. 그 소문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퍼졌어. 내 생각 엔 누가 일부러 소문을 퍼트린 것 같아." "그게 채범식이라는 증거가 없잖아." "채범식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아." "에이, 그건 너무 억지다." "아니야. 학생부에 내 친구가 하나 있는데, 걔가 말하길 김지연 과 채범식의 관계가 좀 이상하다고 했어." "김지연이 채범식을 좋아한 거겠지. 채범식이 좀 멋있게 생기긴 했잖아. 공부도 잘하고." "아니야. 정말 둘이 사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데." "그러고 보니 내 친구 중에 김지연과 친한 애가 있거든. 걔도 그 런 비슷한 얘기를 하긴 했어." "정말?" "그럼 정말로 채범식이 김지연을 따먹은 다음 질리니까 버린 거 야? 그것도 모자라서 입막음 하려고 다른 남자들에게 집단강간시 키고?" "채범식이 정말 그랬을까? 그 범생이가 그랬다니까 믿기지 않는 데?" "아까 채범식 하는 짓 못 봤어? 완전 반 쯤 미쳐가지고 의자 들고 방송기기 다 때려 부쉈잖아." "맞아. 여자애 한 명은 입에 피가 날 정도로 얻어맞앗던데." "그게 거짓이라면 그렇게 흥분할 필요가 없지.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냐?" "그럼 그 새끼 이중인격자란 건가? 학교에서는 범생인 척하고 뒤 로 호박씨 까는." "맞아. 아까 방송실에서 난리 치는 모습이 평소와는 완전 달랐 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니까." "그 목소리도 열라 똑같았어. 톤이 약간 낮은 게 완전 채범식 그 새끼 목소리였어." "테이프가 없다는 것도 뻥 아닐까?" "맞아. 그 새끼가 제일 먼저 달려와 방송기기 때려 부쉈잖아. 그 냥 전원만 꺼도 되는 걸 뭐 하러 그랬겠어? 지가 먼저 테이프를 찾 아 숨기려고 그랬겠지." "그거 말 된다. 왜 추리소설 읽어보면 범인이 제일 먼저 현장에 들이닥치고 그러잖아."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그 새끼가 방송기기를 박살내고 그 안에 있던 테이프를 꺼내 감춘 거야. 그리고 원래부터 테이프가 없었다 고 구라를 깐 거지." "결국 그 새끼가 정말로 김지연 돌려먹고 협박했다는 거 아냐?" "뻔하지." "그 새끼 진짜 나쁜 새끼네. 완전 씨발새끼잖아." "아주 좆 같은 새끼지." 선생들과 채범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안 좋은 쪽으로 흘 러갔다. 한번 소문이 퍼지자 학생들은 채범식의 작은 잘못이나 수상한 점 을 전부 들추어냈다. 심지어는 채범식이 하지 않은 일까지도 누 군가에게 들은 것처럼 말해 소문에 살을 붙였다. 그 대화 내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것인 만큼 그것만으로 채 범식을 죄인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화 내용은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 어 느 정도의 설득력으로 인해 대중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라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아니 땐 굴 뚝에서도 얼마든지 연기가 날 수 있다. 하물며 불까지 때줬으니 연 기가 나지 않을 리 없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잘생겼다. 공부를 잘한다. 운동도 잘한 다. 교우 관계도 좋다. 게다가 학생회장이기까지 하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채범식은 선택 받은 존재였다. 이러한 완벽함은 타인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만약 채범식이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다른 학생들의 입에 오 르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채범식은 서문 외고 학생이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이 다. 그리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완벽한 존재다. 높은 곳에 서 있던 만큼 추락은 순식간이다. 대다수가 그렇다고 하니 아니라고 생각했던 소수도 돌아섰다. 누구도 진실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채범식을 깎아 내렸다. 채범식은 자신이 한 짓에 대해서는 물론 하지도 않은 짓에 대해서까지 욕을 먹었다. 학생들은 사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악의적인 소문을 퍼 뜨리기에 바빴다. 나쁜 놈을 욕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욕하니 나도 따라서 욕한다. 대중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 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악의적인 소문일수록 그 확산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채범식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휘 감았다. 그놈이 눈앞에 있다면 장장 찢어 죽일 듯한 분노였다.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여학생들은 이제 눈만 마주쳐도 고개를 돌렸다. 생각 같아서는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분노를 삭이려고 노 력해보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채범식이 그렇게 이를 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칠판에 필기를 하던 선생은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채범식은 수업 중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리고는 선생의 대답도 듣지 않고 교실을 나갔다. 채범식은 핸 드폰을 받았다. [여어, 수업 중인 것 같은데 미안해. 내 깜짝쇼 어땠어? 재밌었 지?] 어제 만난 그 남자의 목소리다. 채범식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학생회실로 들 어갔다. 수업 중인지라 학생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채범식은 문 을 걸어 잠갔다. "너 이 새끼 무슨 생각이야?" [연설 잘 들었어. 제법 마음에 와 닿던데. 김지연은 저에게 정말 좋은 후배였습니다. 김지연에 대한 악의 적인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거짓입니다. 제 가 아는 김지연은 결코 그런 후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의 모든 것 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짜 감동 받았어. 나도 그 자리에서 듣고 싶었을 정도였다니까. 하지만 어떡하냐? 그 감동적인 연설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방송 내용을 더 믿는 것 같던데.]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잖아, 새꺄!" [뭘 그리 흥분해? 장난 좀 친 것뿐인데 너무 한거 아니야? 그럼 내가 또 기분이 나빠져 사진을 뿌리고 싶어지지. 방송 뒤에 사진 유 포라…… 마치 쐐기를 박는 것 같지 않아? 그리고 그 사실을 인터 넷에 올리는 거야. 네티즌들의 욕이 빗발치면 경찰도 재조사에 나 서겠지. 냄새를 맡은 언론은 대대적으로 보도를 할 테고. 그럼 난 사진과 녹음 내용을 경찰과 언론사에 보내는 거지. 니가 구속되고 안 되고는 상관없는 문제야. 죄가 입증된다 하더라도 넌 미국인이 고, 우리나라 사법권은 미국인에게 굉장히 관대하거든. 하지만 적 어도 더 이상 한국에서 발붙이고 살긴 힘들어지겠지. 아! 어차피 미 국인이니 상관없으려나? 니 나라로 가서 살면 될 테니까. 그러고 보니까 웃기는군. 군대 가기 싫어 한국 국적까지 포기한 놈이 어째 서 한국에 들러붙어 사는 거지?] "이 씨발새꺄! 너 지금 어디야?" [니네 부모 대단한 사람이던데. 아버지는 '한일합방은 조선에게 축복이었다' 라는 논문을 수십 편 발표한 친일사관 학자고, 어머니ㅣ 는 친일파 토지 반환 소송 전문 변호사고. 혹시 박일만이라고 아 냐? 일본식 이름은 나까무라 니흔이고, 미국식 이름은 스티븐 J. 부 시인데. 어째 니네 가족과 무지하게 관련 있을 것 같다.] "어디냐고 물었잖아!" [니네 부모 힘이면 경찰과 언론까지는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인 터넷으로 퍼지는 여론을 막을 수 있을까? 그것을 막으려면 전국의 랜선을 전부 끊는 수밖에 없을 걸. 네티즌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니네 부모에 대한 정보도 인터넷에 뿌리는 거야. 아버지는 친일 사관을 가진 쓰레기 학자다. 어머니는 친일파 토지 반환에 앞장서 고 있는 매국노다. 이딴 부모 밑에서 자라 자식이 씨발놈이 됐다. 자식은 씨발놈이고, 부모는 씨발년놈이다. 범식이네 가족은 씨발 가족이다. 사진과 함께 크게 터트리는 거지. 그럼 니네 부모도 한 국에서 발붙이고 살기 힘들 걸. 결국 가족이 다같이 사이좋게 비행 기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는 거지. 혹시 그곳에서 스티븐 J. 부시를 만나면 내 안부 좀 전해줄래?] "너 대채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 러는 거야!" [재밌지 않아? 지극히 사소한 실수 하나 때문에 너와 니 부모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거야. 전부 인터넷이 있기에 가능 한 일이지. 법은 널 심판하지도 않고, 심판할 수도 없어. 하지만 국 민들은 널 심판할 수 있지. 국가가 사법권을 행사하지 않으니, 국민 들이 직접 나서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왜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 국가가 곧 국민은 아니지만, 국민 은 곧 국가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에 적혀있는 말이지. 국민들은 권력을 국가 에 잠시 맡겼을 뿐이야. 하지만 국가는 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았어. 돈과 권력이 있는 놈들은 살인을 해도 풀려나고,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아주 작은 죄를 지어도 감옥에서 몇 년을 썩지. 심 지어는 죄를 짓지 않아도 돈 없고 힘없으면 처벌을 받아. 고삐리는 미성년자라는 것만 믿고 별 짓을 다 저지르고 있지. 폭행, 협박, 강도, 갈취, 왕따, 강간 등등. 대다수 범죄들이 개걸레 같은 학교 선생들에 의해 은폐되고, 경찰에 알려진다 해도 처벌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심지어는 여학생 한 명을 잡아다가 수 십 명이서 돌려먹어도 전부 풀려나는 게 현실이야. 피해자는 있는 데 가해자는 없어. 피해자는 도망치듯 전학가거나 자살하고 가해 자는 당당하게 어깨 쫙 펴고 계속 학교를 다니지. 누구의 경우처 럼 말이야. 국가가 나서지 않으니 국민이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 "너 김지연과 무슨 관계야?" [그냥 좀 아는 사이라고나 할까? 어느 날 김지연의 원혼이 날 찾 아와 부탁했지. 복수를 해달라고 말이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믿기지 않아? 지금도 내 귓가에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김재승,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선우식,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강민희, 몇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서희정. 너한테 당한 인간들의 원성이 귀가 따갑게 울려 퍼지 고 있어. 난 그들을 위해 나선 거야. 하늘도 널 벌하지 않고, 법도 널 벌하지 않으니, 내가 직접 벌하기로 마음먹은 거지.] "다, 닥쳐! 그게 어쨌다는 거야?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돈을 원해? 얼마나 원해는데? 말을 해봐, 새꺄!" [돈 같은건 별로 중요하지 않……지 않군. 내가 빚이 좀 많아서 말이야. 하지만 너한테 돈을 받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 난 몇 푼 안 되는 돈에 양심을 팔 만큼 썩진 않았거든.] "그럼 뭘 원하는데!" [한 판 붙자.] "뭐?" [좋은 주먹 놔두고 말로 할 필요 없지. 깔끔하게 한 판 붙자. 일진 연합회 짱의 실력을 보여줘. 끌고 올 수 있는 일진들 다 끌고 나와 봐. 니가 이기면 조용히 물러나주지. 하지만 내가 이기면 넌 죽는 거야. 김인하와 이정원 옆에 묻어주지.] "진심이냐?"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의 법이 정당성을 잃은 순간부터 대한민국 은 무법천지가 되었어.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법이지. 너한테 거 절할 권한은 없어. 거절한다면 아까 말한 방법으로 널 매장시킬 테 니까. 설마 내가 김지연 자살 사건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겠 지? 널 평생 감옥에 썩게 할 만한 사건 정도는 줄줄이 알고 있어. 법 이 너를 용서한다 하더라도 내가 용서하지 않아. 넌 평생을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 거다. 언제 김인하와 이정원처럼 밤길에 살해 당해 암매장 될지 모르지. 외국으로 도망쳐도 소용없어. 나에겐 인 간이 그어놓은 국경 따윈 무의미하거든. 그런 두려움 속에서 살아 가느니 차라리 남자답게 목숨 걸고 깔끔하게 한 판 붙는 게 좋을 거 라 생각하는데, 니 생각은 어때?] 채범식은 머리를 굴렸다. 선택의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상대 는 자신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 사실 부터 시작해 부모에 대해서까지. 그리고 김인하와 이정원을 살해했다. 아무도 모르게 학교 방송 실에 전파수신기를 설치해 놓았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의 뒤통수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사진! 그 사진과 녹음한 대화 내용을 인터넷에 올릴 경우 정말 그런 사 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채범식은 인터넷 여론 재판의 위력에 대 해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의 말대로라면 부모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것이다. 그러면 그야말로 끝이다. 김지연 사건 하나만 가지고도 이 정도인데, 다른 사건들까지 공 표할 경우 파장이 더욱 확산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게 원한다면 한 판 붙어주지. 단 시간과 장소는 내가 정한 다." [좋아. 단 시간은 사흘 안으로 정해. 내가 좀 바쁜 사람이니까. 장 소는 어디든 상관없어. 될 수 있는 한 경찰이 개입하기 힘든 지역으 로 정해라. 경찰이 개입하면 너도 좋을 거 없을 테니까.] "물론이다." [그럼 내일 다시 연락주지. 핸드폰 켜놓고 있어.] 통화가 끊겼다. 채범식은 안경을 벗었따. 그리고 그것을 발로 짓 밟았다. 콰직!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채범식은 이를 갈며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문식이냐? 진대고 일진 애들 다 끌어 모아. 죽여야 할 놈이 하나 생겼어. 다른 일진회에도 연락해. 그래. 일진 연합회 전부 모을 거 야.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채범식은 여러 학교 일짱들에게 전부 연락을 넣었다. 일진 연합 회 소속 일진들을 전부 끌어 모을 생각이었다. '날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주지.' * * * *〃gouon〃 범식이 무지 열 받았나 보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으면 죄를 뉘우치고 경찰서에 자수는 하지 못할망정 오히려 길길이 날뛰다니. 스스로 정신 못 차리니 어쩔 수 없다. 내가 직접 나서서 정신 차리게 해주는 수밖에. 시간과 장소는 생각보다 빠르게 정해졌다. 이틀 후인 토요일 밤 10시. 장소는 의정부시에 위치한 한 폐고등학교. 이 폐고등학교는 의정부시 교육청의 뻘짓이 탄생시킨 하나의 작 품이었다. 국민의 혈세 30억 원을 들여 지은 고등학교. 하지만 애 초에 입학 가능 학생 수를 잘못 계산했다. 때문에 학생 수는 50명이 채 되지 않았고, 결국 개교 2년 만에 폐교되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지어진 이 고등학교는 운동장이 넓어 패싸움하 기 좋았다. 그리고 큰소리가 나도 주민이나 경찰이 쫓아올 확률이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패싸움하기에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겠다. 혹시 의정부시 교육청은 우리가 패싸움 할 것을 예상하고 30억 원 을 투자해 이 고등학교를 지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형?" "맞아. 대체 무슨 생각이야, 오빠?" 쌍으로 나를 추궁하는 남매.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세트로 논다. "나에게 다 생각이 있다." 그러자 영진이 물었다. "무슨 생각인데요?" "그건 비밀이다." "……." "뭐야, 그 표정은?" "형 정말 생각이 있는 거예요?" "있다니까." "그 생각이 뭔데요? 좀 말씀해주세요." "흐음, 그렇게 원하니 말해주도록 하지. 그건 너랑 나랑 라이레 얼이랑 니 친구 둘이랑 이렇게 다섯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싸우 는 거야." "……." "어때? 죽이지?" "그게 다에요?" "응. 그럼 또 뭐가 필요한데?" 그러자 영진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게 말이 돼요! 일진 연합회 일진들 다 끌어 모으라고 했따면 서요?" "응. 그래야 일망타진 할 수 있으니까." "열 개 학교 일진들만 끌어 모아도 4,5백 명이에요! 일진 연합회 일진들 다 끌어 모으면 몇 명이 될지 모른다구요! 그런데 겨우 다섯 명으로 맞선다구요?" "우리는 소수정예다." "이건 소수정예라는 말로 어떻게 될 게 아니잖아요!" "뭘 그렇게 겁내? 상대가 5백 명이면, 내가 3백 명 맡고, 라이레얼 이 197명 맡고, 니들이 한 명씩 맡으면 돼." "어째서 계산이 그렇게 돼요?" "그걸 몰라서 묻냐? 나는 보스, 라이레얼은 중간보스, 니들은 쫄 다구니까. 아무튼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말려면 마. 싫다는 놈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으니까." 영진은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따. 난 영 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내가 승산 없는 싸움에 뛰어들 것 같냐?" "아, 아니요." "후후후~ 나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주지." "정말 자신 있는 거야, 오빠?" "걱정 말라니까." "영진이 다치면 오빠 나한테 죽을 줄 알아." "뭐? 영진이가 다치는데 내가 왜 죽어?" "그러니까 영진이 다치지 않게 잘 보살펴 주란 말이야." "……." 그래도 누나라고 동생 챙겨주는 걸 보니 기특하다.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집에서 글이나 써." 난 영아의 앞짱구를 쓰다듬어주었다. 으음,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마가 튀어나와있으니 쓰다듬기 참 좋다. * * * *〃gouon〃 토요일 밤. 채범식은 일진 연합회 소속 일진들 500명을 폐고등학교에 집합 시켰다. 이 500명은 특별히 싸움 잘하고 패싸움에 능한 일진들만을 고른 것이다. 다시 말해 정예부대라 할 수 있다. 일진 연합회는 각 학교 일진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일 진회는 그 학교 내애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학생들을 패싸 움에 강제로 동원하는 이른바 '징집령' 또한 일진회의 권한 중 하 나였다. 만약 강제 동원까지 했다면 수천 명을 끌어 모으는 것은 일도 아 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머릿수를 채울 필요는 없 었다. 그러지 않아도 싸울 인원은 넘치고 넘쳤다. 일진들만 모아도 500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 로 모였다. 그들 모두 싸움에 굶주려 있었다. 단체로 몰려가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를 짓밟는 쾌감. 그 쾌감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었다. 이 정도 규모의 패싸움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일진들 사이에는 폭력 의식이 팽배해있었다. 힘을 가진 자가 곧 법이고, 우상이다. 여기서 좀더 잘 싸우고, 좀더 많은 적을 쓰러트 리는 자가 더 많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한인주는 시계를 보았다. 같은 반 학생에게 삥 뜯은 고급 외제 시 계가 그의 손에서 번쩍거리며 빛났다. 분침은 11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왜 안 와?" 한인주의 물음에 채범식이 대답했다. "기다려 봐." 한인주는 아직 왼손의 깁스를 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역시 중일 공고 일진회를 이끌고 이 자리에 왔다. 한인주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세 명이 당했고, 송윤미는 경찰서에 자수했다. 다음은 분명 자신의 차례다. 그러니 스스로 나 서서 범인을 제거해야 했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다음 피해자는 자신이 될 것이다. 한인주는 이를 갈았다. '죽여주마.' 한인주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기어오르는 놈 밟아준 것이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한인주는 송윤미처럼 경찰서에 갈 생각도 없었고, 당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을 노리는 놈들을 제거하고 졸업할 때까지 계속 왕 대 접 받으며 살고 싶었다. "온다."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교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 였다. "하나, 둘, 셋, 넨, 다섯…… 뭐야? 저게 다야?" "진짜 그런 것 같은데." 놀랍게도 걸어 들어온 사람은 겨우 다섯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도 그 중에 한 명은 여자였다. '이 자식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채범식은 이를 갈며 맨 앞에 선 남자를 보았다. * * * *〃gouon〃 난 당당하게 교문을 걸어 들어갔다. 운동장에는 수백 명의 학생 들이 모여 있었다. 한 5백 명 정도 되는 것 같다. 라이레얼은 태연하게 가죽 장갑을 매만졌다. "애들 꽤 많다." "예. 많으니까 더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응응. 이 정도는 돼야 싸울 맛이 나지. 그치, 히로?" "그렇죠. 싸움의 묘미란 역시 패싸움 아니겠어요?" "이런 기회를 만등러줘서 고마워, 히로." "하하~ 뭘요. 아무튼 이런 기회 흔치 않으니 실컷 즐기세요." 우리의 대화를 들은 영진과 두 친구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자세 히 보면 다리까지 떨고 있었다. 하긴, 다섯 명이서 5백 명을 상대하러 가는 것이니 두렵기도 하 겠지. 사실 얘들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안 한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 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끌고 온 이유는 한인주에게 직접 복수하게 해주기 위함이다. 이번 일의 원흉은 한인주 아니겠나? 다른 놈에 대한 복수는 나와 라이레얼이 거의 다 처리했다. 한인주 정도는 직접 처리해야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도 가벼울 것이다. 수백 명의 적들 앞에 채범식이 서있다. 난 손을 흔들었다. "여어! 범식이 방가방가~! 우리 범식이 그동안 잘 지냈어?"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응? 무슨 생각이냐니? 말했잖아. 한 판 붙자고." "다 온 거냐?" "응. 나 포함해서 다섯 명. 너무 많이 왔나?" "겨우 다섯 명이서 우리를 상대하겠다는 건가?" "코흘리개 초딩 삥 뜯을 때도 2인 1조로 움직이는 놈들 상대로 다섯 명이면 많은 거지. 단체로 모여 꼴값 떠는 놈들의 특징은 단체 로 모여 있어도 별 볼일 없다는 거야." "죽여 버린다." "그런 각오로 싸움에 임하는 게 좋아. 지면 니가 죽을 테니까." 난 싸움이 시작되기 전 영진에게 말했다. "저기 팔에 깁스하고 있는 놈이 한인주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밟아. 그리고 니들 셋은 같이 움직여. 괜히 개인플레이 하다 다구 리 맞지 말고." "알았어요, 형." 영진은 약자로 취급 받는 것이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수백 명이나 되는 적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적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쇠파이프, 못 박힌 각목은 기본 아 이템이다. 칼이나 짱돌을 들고 있는 놈도 있고, 심지어는 손에 체인 을 감고 있는 놈도 있다. "……" 저것들 정말 고삐리 맞아? 내가 어이가 없어서 웃는데, 채범식이 소리쳤다. "죽여!" 난 질세라 소리쳤다. "우리도 진격!" 수백 명의 고삐리들이 우리르 향해 달려온다. 나와 라이레얼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이놈들은 조직 폭력배가 아니다. 그저 싸움 좀 하는 고삐리일 뿐 이다. 이놈들에게 패싸움이란 일종의 재밌는 놀이이다. 그래서 이 렇게 겁 없이 달려들 수 있는 거다. 난 녀석들에게 확실히 일깨워줄 생각이었다. 이것은 놀이가 아닌 목숨을 걸고 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죽이지만 말아요. 라이레얼!" "응. 걱정 마, 히로!" 난 가장 먼저 달려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놈의 팔을 붙잡고 한 바퀴 비틀었다. 우드드득! "으아아악!" 미안한 얘기지만 다시는 오른손으로 수저를 들지 못할 것이다. 너무 잔인하다고?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으면 죽는다. 살인 미수가 팔 하나 로 끝났으면 싼 것이다. 난 재빨리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달려오는 놈의 얼굴 을 내리찍었다. 퍼억! 인중을 가격하자 코와 이빨이 동시에 부러져 나갔다. 녀석은 얼 굴에서 분수같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적이 이쪽보다 많을 때는 인정사정 봐줄 필요가 없다. 쓰러진 놈 이 다시 일어서면 골치 아파지기 떄문이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확실히 끝장을 내야 한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단순이 멍이 들거나 이빨이 부러지는 정도의 상처를 입히는 것 은 적의 사기를 올려주는 행위이다. 멍이 들거나 이빨이 부러지는 정도의 상처쯤이야 얼마든지 입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하지만 덤벼든 적을 불구나 병신으로 만든다면 어떨까? 누구도 다시는 팔다리를 못 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일진회에 가입해 다른 학생들 위에 군림했으면 목숨 정도는 걸 어야지!" 난 주저 없이 쇠파이프로 달려드는 고삐리의 무릎 관절부위를 내 리쳤다. 빠악! "으아악! 내 다리!" 관절이 박살났으니 앞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거나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할 것이다. "뭘 두려워 해? 싸움이 이런 거라는 걸 몰랐냐? 사람을 죽일 만한 흉기를 손에 들고 싸움에 임했으면 자신이 죽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난 한 놈이 알루미늄 야구배트를 휘두르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놈을 들어서 막았다. 빠악! "크아악! 내 팔!" 난 바로 야구배트를 휘두른 놈의 사타구니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콰직! 확실히 감각이 왔다. 녀석은 입에 게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팔이 부러진 놈이 더 불쌍할까, 거기가 박살난 놈이 더 불쌍할까? 내 주위에는 순식간에 십여 명의 학생들이 병신이 되어 바닥에 널 브러졌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라이레얼 주위도 마찬가지였다. 라이레얼은 나보다 더 잔인할 정도로 적들을 상대했다. 심지어 단검을 들고 덤벼드는 놈을 상대로 단검을 빼앗아 양다리의 오금 을 베어낼 정도다. 보나마나 힘줄이 끊어져 다시는 걷지 못할 것 이다. 영진과 두 친구도 잘 싸우고 있었다. 핱은 학교 일진들이 당하는 꼴을 본 한인주는 재빨리 뒤로 도망쳤다. 셋은 무기를 든 놈들한테도 밀리지 않고 잘 싸웠다. 상대적으로 적들이 앞에 있는 나와 라이레얼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30명, 라이레얼이 20명 정도 쓰러트리고 나자 적들은 더 이 상 덤벼들지 않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 로 접어들었다. "뭐야? 왜 안 덤벼?" "미, 미친 새끼!" 채범식은 질린 표정으로 날 보았다.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야? 한 판 붙자고 해서 한 판 붙는 거잖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사람을 이렇게 만들고도 니가 무사할 것 같아?" "아아~ 이놈들 말이야?" 운동장 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나와 라이레얼의 얼굴에도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쓰러진 학생들은 고통에 신음했다. 다리의 힘줄이 잘린 학생은 기어서라도 어떻게든 우리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발악했다. 머리 를 얻어맞은 놈들은 피를 철철 흘린 채 바닥에 쓰러져 아무런 움직 임도 보이지 않았다. 기절한 것뿐이지만, 저놈들 눈에는 죽은 것으 로 보일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말한 한 판 붙자는 의미는 목 숨을 걸자는 뜻이었어. 죽이지 않으면 죽는 거지. 난 니들도 그렇 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헛소리 하지 마!" "그럼 목숨을 걸 생각도 없는 놈들이 그런 무기를 들고 있단 말이 야? 아주 칼까지 들고 설쳐대던데. 설마 사람을 칼로 찌르면 죽는 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난 바닥에 있는 칼을 발로 차서 올렸다. 그리고 튀어 오르는 칼을 손으로 잡았다. "니들은 우리를 죽여도 되고, 우리는 니들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 은 너무 이기적인 생각 아니야?" 난 단검을 던졌다. 쉬익! 퍽! "으아악!" 단검은 채범식 옆에 있는 놈의 허벅지에 꽃혔다. 그놈은 다리를 붙잡으며 바닥에 뒹굴었다. 난 채범식을 보며 말했다. "겨우 10분의 1이 죽었을 뿐이야. 너희는 아직도 9할의 병력을 가지고 있어. 이건 장난이 아니야. 목숨 걸고 싸워. 일진회면 일진 회답게 기개를 보여 봐. 이제까지 일진회라고 설쳐댔으니 대가를 치러야 할 거 아냐? 세상이 날로 먹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남의 돈 공짜로 처먹고, 다른 사람 괴롭히고도 니들은 평 생 멀쩡하리라고 생각했냐?" 채범식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지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건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협상을 하려는 건가?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먼저 한인주를 넘겨." 내 말에 한인주는 사색이 되었다. 채범식은 한인주를 한번 보더 니 말했다. "좋아."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범식아! 서, 설마 날 팔아넘길 생각이 야?" 채범식이 손짓하자 두 명의 남학생이 한인주를 붙잡았다. 그리 고 우리 쪽으로 끌고 왔다. "으아악! 이거 놔! 채범식!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놔! 놓으란 말이야! 난 죽기 싫어!" 한인주가 발광을 했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았따. 심지어는 중일 공고 교복을 입은 놈들까지도 가만히 있었다. 한인주만 넘기면 자 신들은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인주를 우리 앞에 놓은 두 남학생은 재빨리 자기 진영으로 도 망쳤다. 한인주는 도망치려 했지만 영진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 "권주혁 기억하지?" "그, 그건……." "기억해? 못해?" "자,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살려줘. 제발 살려줘. 다시는 안 그럴게." 한인주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으며 애원했다. 영진은 그 런 한인주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난 영진에게 말했다. "니 친구를 죽이려 했던 놈이야. 송윤미는 자수했지만 저놈은 그 러지 않았어. 자신이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는 싫었다는 거 지. 그리고 이제 위험해지니 머리를 땅에 처박고 빌고 있어. 참 재 밌지 않아? 송윤미는 형을 사는 것으로 자신의 죗값을 치르겠지만, 저놈은 겨우 말 몇 마디로 죗값을 치르려 하고 있어.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저런 놈은 용서해줘 봐야 소용없어. 오히려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더욱 날뛰어대지. 쓸데없는 자비는 베풀지 않는 게 좋아." 난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라이레얼 생각은 어때요?" "그건 히로 말이 맞아. 실수라면 용서해줄 수 있지만, 고의는 절 대 용서해줘서는 안 돼. 저런 놈들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이상 끝까지 자신이 잘했다고 착각하거든. 내 생각에 저놈을 그냥 풀어 주면, 오히려 복수하겠다고 설쳐댈 걸.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확실 히 밟아줘야 돼.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다년간의 용병 생활에서 나온 살아있는 지식이다. 아아~ 멋져요, 누님! 잠시 갈등하던 영진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일어나." "요, 용서해주는 거야?" "니가 주혁이만큼 맞는다면." "뭐, 뭐?" 퍼억! 영진은 주저 없이 한인주를 걷어찼다. 그리고 발로 짓밟았따. 난 영진의 뒤에 서 있는 정환과 진빈을 보며 말했다. "야, 니들은 뭐해?" "예?" "권주혁이 네 명한테 밟힌 거 몰라? 그러니까 니들 둘도 같이 밟 아. 그래봐야 세 명이지만 대충 구색은 맞춰지는 셈이니까." 정환과 진빈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한인주를 밟는 데 동참했다. 그러게 기회를 줬을 때 진작 자수할 것이지. 채범식은 셋이 한인주를 짓밟는 것을 보고 나에게 말했다. "이제 됐지?" "돼긴 뭘 돼, 임마? 한 명만 더 넘겨." "누구 말이냐?" "누구긴 누구야? 일진 연합회 일짱이지. 어차피 쫄다구들에겐 별 관심 없어. 일진 연합회 일짱 채범식이라는 놈만 죽이면 그만이 야." "이, 이 자식……." 채범식은 날 보며 이를 갈았따. 난 그를 향해 산뜻하게 웃어주었 다. "넌 어차피 죽어. 니가 여기서 살아나갈 방법은 날 죽이는 것뿐 이야." 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살고 싶으면 덤벼. 남자답게 한번 목숨을 걸어봐. 니가 여기서 물러서면 그동안 너한테 당한 사람들이 울지 않겠어?" "자신만만하군. 그렇게 싸움 실력에 자신이 있나?" "적어도 어디 가서 얻어맞을 실력은 아니어서." "킥킥, 과연 그럴까?" 채범식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떤 두려 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순간 교문 쪽에서 환한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자동차 헤드라 이트 불빛이었다. 십여 대의 자동차와 봉고차가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차 로 인해 운동장이 대낮처러 ㅁ환해졌다. 차가 멈추자, 그 안에서 백여 명의 남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검은 양복, 검은 바지, 검은 구두, 그리고 손에 든 쇠파이프. 척 보기에도 조폭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조폭인 것 같다. 그중 보 스로 보이는 남자가 채범식의 옆으로 다가갔다. 채범식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삼촌." 그러는 사이 백여 명의 조폭들은 우리 주위를 빼곡히 둘러쌌다. 조폭 백 명은 고삐리 5백 명과 비교가 안 된다. 조폭 한 명이면 고 삐리 열 명은 상대할 수 있다. 그것은 실력의 차이가 아니다. 마음가짐의 차이다. 조폭은 싸우 는 게 직업이고 실제로 죽을 위기도 많이 넘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적을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기만 할 뿐 공격하지는 않았다. 보스의 명 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보스는 키가 크 고 뚱뚱했다. 접히는 턱살과 늘어진 뱃살을 보니 각종 성인병에 시 달리고 있을 것 같다. "킥킥, 어디 계속 떠들어대 보시지." 채범식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채 날 보았다. 난 그런 채범식 을 보며 이를 갈았다. "조폭을 싸움에 끌어들이다니! 치사한 자식!" "뭐가 치사하다는 거지? 어떻게 해서든 이기기만 하면 장땡이 야!" "난 일진 연합회만 끌고 오라고 했지, 조폭을 끌고 오라고는 안 했어!" "조폭을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얘기도 없었지. 큭큭." 난 분노한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조폭까지 끌어들이고, 부끄럽지도 않냐?" 그러자 채범식은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하는 거지?" 그 말에 난 화난 표정을 풀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래? 그럼 나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겠군." "뭐?" "신대방동파의 곽세윤이 니가 비밀 언덕이었냐? 겨우 그 정도가 니 히든카드겠지. 그럼 이번엔 내 히든카드를 보여주지." "무, 무슨 헛소리냐?" 굳이 내가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채범식의 말이 끝나는 순간 수 십 대의 차량이 운동장으로 들어왔으니. 채범식은 놀라 옆에 있는 삼촌에게 물었다. "삼촌이 부른 거예요?" 그의 삼촌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 나도 모르는 일이야." 수십 대의 차량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수백 명이 뛰어내렸 다. 하나같이 덩치가 좋고 눈에 살기가 어린 조폭들이었다. 그들의 숫자만도 5백 명이 넘었다. 그들 중 반은 우리 주위를 포위한 조폭들을 포위했고, 나머지 반 은 일진 연합회 주위를 둘러쌌다. 그리고 잠시 후 보스가 모습을 드 러냈다. 구겨지고 지저분해진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 헝클어진 파란 색 머리카락과 이라도 살 것 같은 지저분한 파란색 수염. 그는 다름 아닌 강북을 지배하는 거대 폭력 조직 청룡파의 보스 박카스(본명 에스카네스)였다. 상당히 백수스럽게 생긴 그의 진정한 정체는 블루 드래곤. 방바닥 긁는 것이 지겨워 조폭으로 전향한 정 말 '할 일 없는' 남자다. "오랜만이네요." "그래. 오랜만이군." "이렇게 와주셔서 고마워요." "어차피 겸사겸사이니 상관없어." 박카스는 길게 하품을 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모든 것이 귀찮 다는 듯한 태도였다. 과연 백수의 제왕(사자를 뜻하는 게 결코 아님) 답다. 채범식의 삼촌은 조폭답게 한눈에 박카스를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파란 머리카락에 파란 수염을 가진 백수같이 생 긴 사람이 박카스 빼고 또 있겠는가? 아마 전 세계를 뒤져봐도 박카스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너, 넌 설마…… 청룡파의 박카스!" "그래, 내가 박카스다. 그러는 넌 신대방동파 보스 곽세윤이겠 지. 우리 애들이 신대방동에 수금하러 갔을 때 니네 애들이 우리 애 들 건드린 거 기억해?" "신대방동은 내 구역이다." "언제부터 니 구역이었는데? 그 땅이 만들어질 때부터 니 구역이 었냐? 어차피 너두 누군가한테 뺏은 걸 거 아냐? 그걸 이제 내가 빼 앗겠다는데 불만 있어?" "그, 그런……." "좋은 주먹 놔두고 입 아프게 떠들어 댈 필요 없지. 강북에서 청 룡파에게 잘못 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마." 박카스는 말을 하며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우드득! 그 모습에 곽세윤은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쳤다. 그가 이곳에 끌고 온 조직원이라고 해봐야 백 명이다. 하지만 박카스는 무려 5 백 명의 조직원을 끌고 왔다. 조직원의 전투력에서도 엄청난 차이 가 있다. 청룡파의 조직원이 정규병이라면, 신대방동파의 조직원 은 농병에 불과하다.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결판 난 거나 다름없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넌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고." "이 치사한 새끼!" 채범식은 열 받아 소리쳤고, 난 뉘 집 개가 짖냐는 듯 귀를 후볐다. "뭔 말이야? 조폭을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말도 없었잖아. 니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나한테는 안 돼. 넌 혹시라도 질 것을 대비 해 삼촌인 곽세윤을 끌어들였지. 난 니네 부모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어. 그런 내가 니 삼촌이 신대방동파 보스 곽세윤이란 걸 몰랐겠 냐? 니가 곽세윤을 끌어들일 것 정도는 예전에 알고 있었어. 그래 서 나도 준비를 좀 했지." "이, 이……." "악은 더 큰 악으로 물리친다. 비열한 놈에게는 더 비열한 방법 으로 상대하고, 치사한 놈에게는 더 치사한 방법으로 상대하는 것 이 아이언스 히로의 승리 방정식이지." 내 말이 끝나자 박카스는 주저 없이 소리쳤다. "밟아!" 그러자 청룡파의 조직원들은 신대방동과 조직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조폭들끼리의 싸움이었지만 신대방동파는 어이가 없을 정도 로 쉽게 무너졌다. 조폭이 이런데 하물며 일반 학생들이야 어떻겠는가? 수백 명의 일진들은 청룡파 조직원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속절 없이 쓰러졌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살려달라고 비는 놈들이 부 지기수였다. "그럼 난 곽세윤이나 상대해야겠군." "죽이실 거예요?" "어차피 세력 확장을 하다보면 부딪힐 상대였어. 웬만한 놈이면 부하로 삼겠는데, 난 저런 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신대방동파는 인신매매와 마약에까지 손을 댔다. 저놈들 손에 잡혀서 사창가로 팔려간 여자들만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 고 외국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약장사까지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마약중독자로 만들었다. 아무리 조폭이어도 해도 될 일과 안 될 일이 있다. 인신매매와 마 약은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속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호인이 강호인만을 상대하듯, 조폭 역시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만 상대해야 한다. 그래봐야 조폭인 건 변하지 않지만. 멀쩡한 사람들한테까지 손을 뻗치는 것은 조폭이 아닌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곽세윤은 그 쓰레기에 속했다. 오늘이 저놈 제삿날이겠군. 곽세윤은 부하들이야 죽든 말든 자신만 살기 위해 도망을 쳤다. 차를 향해 달려가는 그를 박카스가 가로 막았다. 그 다음은 굳이 볼 필요가 없었다. "건드리지 마!" 라이레얼은 적이 줄어들자 깜짝 놀라 한 놈이라도 더 패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영진과 두 친구는 갑작스레 나타난 조폭들에 의 해 정신이 없는 상태여서 한 발 떨어져 싸우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 보기만 했다. 난 이 아수라장 속에서 채범식을 찾았다. 채범식은 어느새 검은 색 그랜저에 올라타 있었다. 남들 열심히 싸우는데 치사하게 혼자서 도망치려 하다니. 난 보닛 위에 올라갔다. 채범식은 날 보고는 깜짝 놀라 재빨리 시 동을 걸었다. 챙그랑! 난 주먹으로 앞유리창을 깨고 운전석에 앉은 채범식을 끌어냈다. "어딜 도망치려고 그러시나?" "히익! 사, 살려줘!" 난 채범식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내가 말했지. 법이 심판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심판하겠다고. 넌 사형이야." "다, 닥쳐!" 채범식은 그렇게 소리치며 손에 쥔 모래를 뿌렸다. 난 그것을 가 볍게 피했다. "좋은 태도야. 니가 살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날 죽이는 것뿐이 니 좀더 치사한 방법을 사용해도 좋아." 채범식은 벌떡 일어나 싸울 자세를 취했다. 난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채범식은 공격하기가 힘든지 내 주 위만 맴돌았다. "빨리 끝내는 게 좋을 텐데. 곽세윤은 이미 죽은 것 같고, 싸움도 거의 끝나가니까. 저들이 이쪽으로 몰려오면 너만 곤란해져." "으아아!" 채범식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난 기다렸다는 듯 그 주먹을 손으로 잡았따. 그리고 세게 쥐었다. 우두둑! "으아아악!" 악력을 견디지 못한 손가락 관절이 부서져 나갔다. 난 그 상태에 서 오른팔 관절을 박살냈다. 빠악! "으아악!" "참아. 고통은 한순간이야. 김지연이 자살할 때까지 겪었던 고통 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왼쪽팔의 관절도 박살내주었다. "이번에는 무릎." 난 쓰러진 채범식의 다리를 붙잡고 바깥쪽으로 꺾었다. 우드드득! 다리가 결코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이며 무릎 관절이 박살났 다. 난 맞은편 다리 역시 똑같이 만들어 주었다. 채범식이 고통을 견 디지 못해 기절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까지 해주었다. 난 사지가 박살난 채범식을 끌고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니 싸움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신대방동파 조직원들과 일진들은 피떡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청룡파 조직원 몇 명은 시체가 된 곽세윤을 차에 집어넣고 있었다. "사, 살려줘 아, 아니, 살려주세요. 제, 제발 살려주세요." 채범식은 눈물을 쏟으며 나에게 애원했다. 난 그를 보며 물었다. "살고 싶어?" "예, 예.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할게요. 원하는 건 뭐든 해드릴게 요." "미안하지만 난 김지연의 부모와 약속을 했어. 딸의 복수를 해주 겠다고. 사지를 박살낸 정도 가지고 복수가 될 것 같아? 니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김지연이 겪은 고통과 비교가 된다고 생각해?" "흑흑,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뭐든 할게요." "잘못을 빌기에는 너무 늦었어. 너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 어." 난 부러진 녀석의 팔을 붙잡고 난간 밖으로 내밀었다. "으아악! 하지 마! 나한테 이러고도 니가 무사할 것 같아? 난 미국 인이야! 미국인이라고! 내가 죽으면 미국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우리 부모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잘 가라." "안 돼.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난 손을 놓았다. 그러자 채범식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 로 추락했다. 퍼억! 벽돌이 깔린 보도가 새빨갛게 물들었따. 난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머리가 깨져 피가 철철 쏟아지고 있었지만 채범식은 아 직 살아있었다. 채범식은 입술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따. 살려달라는 애원 같기도 했고, 빨리 죽여 달라는 부탁 같기도 했다. "천천히 고통 속에서 죽어가라. 그게 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 죄일 테니."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복수의 끝은 찝찝하다. 그래도 복수를 하 고 찝찝함을 느끼는 것이 복수를 안 하고 상쾌함을 느끼는 것보다 낫나는 것이 내 생각이다. * * * *〃gouon〃 이렇게 해서 이번 사건은 끝이 났다. 일진 연합회는 해체되었으며, 일진 연합회에 가입해 있던 수많은 일진회도 해체되었다. 경찰들이 사건 현장을 발견한 것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폐고등학교 운동장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과 조폭들이 쓰러져 있 었다. 그중 상당수가 뼈가 부러지거나 불구가 되었다. 심지어는 죽 은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중에 한 학생은 사지가 박살난 채 옥상에서 떨어져서 숨졌다. 피해자들의 진술은 엇갈렸다. 몇 명은 완전히 정신이 나가 헛소 리를 늘어놓았다. 경찰은 각 학교 일진회의 싸움에 채범식이 조폭까지 끌여들여 패 싸움을 벌였다는 발표와 함께 관련자들을 형사 입건함으로써 사건 을 일단락지었다. 그리고 며칠 후 김인하와 이정원이 경찰에 자수해 채범식과 일진 연합회의 범죄 사실에 대해 낱낱이 진술했다. 이렇게 마무리 될 수 있었던 것은 청룡파 조직원들이 일진들을 협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학교 일진회가 한 곳에 모여 패싸움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채범식이 자신의 삼촌이 보스로 있는 폭력 조질을 끌어들 였다' 라는 진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채범식의 부모라는 작자들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굳이 그들까지 건드리지는 않았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고통일 테니. 권주혁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고, 영진과 정환, 진빈은 깨어난 주혁을 문병한 뒤 바로 전주로 내려갔다. 물론 영진은 집에 돌아가 자마자 큰어머니께 뒤지게 맞았다. 그리고 우리는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영아는 최모 편집자님이 쫓아올까 두려워 열심히 글을 쓰고 있 고, 지니는 가게 재개장 문제 때문에 여전히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 고, 라이레얼은 밤새서 오락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라이가 먼저 오빠 무릎 위에 앉을 거야!" "싫어. 루비가 먼저 오빠 무릎 위에 앉을 거야!" "오빠는 라이 전용이란 말이야!" "아니야! 오빠는 루비를 더 좋아해!" ……이렇게 평소처럼 어린 엘프들과 놀아주고 있다. 나름대로 해피엔딩이라고나 할까? Story 26 선물 "우에에엥~." "으아아앙~." 앗! 이 소리는 설마 나의 라이와 루비의 울음소리?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나는 들려온 울음소리에 재빨리 거실로 나갔다. 루시아와 아이들은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루시아를 사이에 두고 라이와 루비가 펑펑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라이와 루비가 싸웠어." "뭐?싸워?" "응." "......." 그런데 라이와 루비가 싸웠다는데 루시아의 표정이 이상하게 밝았다. 루시아는 뭐가 그렇게 기쁜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무슨 일로 싸운 거야?" 그러자 루시아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한 모습. 루시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그리고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라이와 루비가 서로 먼저 내 무릎 위에 앉겠다고 싸웠어." "......" 그랬단 말인가? 아이들이 자신을 두고 싸워 이렇게 기쁜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뿌듯뿌듯. 루시아가 뿌듯해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그런 소리도 있나?). 루시아의 눈빛은...... '애들이 너만 두고 싸운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봐서 알겠지만,애들은 서로 먼저 내 무릎 위에 앉겠다고 싸웠어. 나도 너만큼 애들한테 인기 많아. 흥!"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매우 많이 기쁜가 보다. 루시아 이러는걸 보면 꼭 애 같다. 라이와 루비보다도 더 귀엽다. 아아~ 루시아는 나의 귀여운 애기~. 난 일부러 부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겠다,루시아." 그러자 루시아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긴 뭘,애들이 나 좋아한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서로 친하게 지내야할 아이들이 나 때문에 사이 나빠질까봐 걱정이야." "......."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어쨋든 루시아가 이렇게 기뻐하니 나도 기쁘다.루시아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래주었다. "라이와 루비 싸우면 못 써. 아무리 언니가 좋아도 서로 친하게 지내야지. 언니가 라이도 앉혀주고 루비도 앉혀 줄 테니 서로 화해해.화해 안 하면 언니 이제부터 라이랑 루비랑 안 놀아줄 거야." "........" 라이도 앉혀주고 루비도 앉혀준다고? 기왕 앉혀주는 거 히로도 앉혀주면 안 되나? 히로도 루시아 무릎 위에 앉고 싶은데....... 루시아가 계속해서 달래자 라이와 루비는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았다. 루비가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루비가 잘못했어.미안해,라이야." 그러자 라이는 그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아니야,루비야.라이가 미안해." ".........." 뭐 라이가 미안해? 난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입을 열었다. "라이가 미안하면........" 그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 마!" 화난 듯한 루시아의 목소리. 루시아는 눈을 치켜뜨고 나를 노려 보았다. 눈을 치켜 뜬 채 나를 노려보는 사람은 루시아만이 아니었다. 어린 엘프들도 일제히 날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울던 라이와 루비는 물론이고 이제까지 말없이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루까지. "왜,왜 그래?" "너 또 그거 하려고 했지?" "그,그거라니?" "라이가 미안하면 라이미안이라는 말 하려 했잖아!" "......." 어떻게 알았지? 내가 당황하자 루시아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가 썰렁한 개그로 민폐 끼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저번에 애들 얼어 죽을 뻔한 거 몰라?어쩜 넌 그렇게 다른 사람 생각은 하나도 안 하니? "아,아니,난 그냥 웃자고......." "됐어,더 이상 니 말 듣기 싫어." "언니 말이 맞아요.라이는 오빠의 80년대 개그가 막막 싫어요." "루비도 싫어요.너무 춥단 말이에요." "전 그때 걸린 동상이 아직도 안 나았어요." "........" 이렇게 악의적인 여론이라니! 정말로 내 개그가 그렇게 썰렁한가? 그래도 나의 썰렁한 개그를 사랑해주는 독자들이 많이 있는데.....(거의 없다). 무안해진 나는 조심스럽게 소파 구석에 앉았다. 그리고 루시아와 아이들과 함꼐 텔레비전을 보았다. 마침 애완동물 관련 프로가 방송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에 집중했다(결국 루시아 무릎 위에는 루비가 먼저 앉았다). "아!강아지다." "강아지 막막 귀여워." "난 저 강아지가 제일 귀여운 것 같아." "루비도 애완동물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애완동물 있으면 많이 귀여워 해줄 텐데." ".........." 애완동물이라...... 어째 귀에 익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에도 애완동물이 하나 있지 않았나? "............." 그런 것 같기도 하고,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 상관없으려나? "와아!시베리안허스키다." "시베리안허스키 막막 귀여워." "............................." 뭐? 시베리안허스키? 난 지금이야말로 아까의 무안함을 만회할 기회라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개그를 날려서 모두를 기쁘게 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시베리안허스키는 목소리도....." "그만 좀 해!" 화난 듯한 루시아의 목소리. 난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왜,왜 그래,루시아? "내가 썰렁한 개그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아니,들어보지도 않고 썰렁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이번에는 정말 재밌을 수도 있잖아." "니 개그는 안 들어도 뻔해!" "뻐,뻔하다니......." 시베리안허스키는 목소리도 허스키 하다고 말하려 했잖아!" "..........." 어떻게 알았지? 이제 보니 루시아도 제법 개그에 소질이 있는 것 같군. 루시아는 경멸어린 눈빛으로 나늘 노려보았고,어린 엘프들도 동그란 눈을 최대한 크게 뜬 채 날 노려보았다. "오빠 정말로 이럴 거예요?" "내,내가 뭘........." 라이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시베리안허스키 목소리가 허스키한 거 누가 몰라요? 시베리안허스키는 키 50에서 60센티,체중은 16에서 27킬로의 중형견으로 애틱허스키,또는 허스키라고 불려요. 에스키모개로 북방 스피치계통 품종이에요. 주로 썰매견,수색견,구조견으로 사용돼요. 짖을때 컹컹거리는 거친 소리로 짖기 때문에 허스키라는 이름이 붙은거예요." "그,그러니?" 언제나 쓸데없는 부분에서 똑똑한 면모를 보이는 라이.시베리안허스키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짖어서 시베리안허스키라고 불리는 줄은 처음 알았다. "흥!라이는 개그 같지도 않은 개그를 하는 오빠가 막막 싫어요!" "......" 헉!우리 라이가 오빠한테 그런 심한 말을! "루비도 썰렁한 오빠 개그가 막막 싫어요!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 헉!루비까지 그렇게 심한 말을! "저도......." "넌 됐어." "쳇!쳇!쳇!" "......." 화내는 건 이해하지만,이 형은 남자한테 미움 받는 정도로 충격 받을 만큼 소심하진 않단다. 대신 영아한테 그만큼 사랑받으니,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렴. 아무튼 썰렁한 개그로 민폐 끼친 나는 소파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어야 했다 .루시아와 아이들은 그런 나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떠들었다. 나와 루시아의 거리는 고작 50센티.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몇 만광년이다. 아아~ 언제쯤에나 이 거리를 좁힐 수 있으려나? 좁히기는커녕 멀어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괜히 썰렁한 개그 했다가(정확히는 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점수마저 몽땅 잃었다. 이대로는 안 돼.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나와 루시아의 사이를 획기적으로 좁힐 수 있는 그런 대책이. "라이 언니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고 싶어요." "루비도 하고 싶어요." "......" 뭐?언니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기? 그건 또 무슨 스킬이다냐? "알았어,얘들아." 루시아는 먼저 라이를 껴안아주었다.그러자 라이도 두 손으로 루시아를 껴안으며 루시 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헤헤~언니 가슴 폭신해서 좋아요." "......" 뭐?폭신해? 라이는 행복하게 웃으며 루시아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부비 비볐다. "......." 뭐,뭐야?쟤 지금 나의 루시아한테 뭐하는 짓이야? 심지어 라이는 손으로 루시아의 가슴을 만졌다.루시아는 라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말했다. "우리 라이 왜 이렇게 어리광이야?" "헤헤~라이는 언니가 좋은 걸요,언니 가슴 막막 따뜻해요." 토닥토닥. 루시아는 라이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언니도 라이가 좋아.우리 라이 너무 귀여워~." 행복한 어머니와 딸의 모습.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하지만 그에 앞서....나도 루시아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고 싶어! 아아~ 부럽다. 너무 부럽다. 라이가 부러워 미칠 지경이다. 루시아가 볼에 뽀보해주는 것도 부럽고,루시아랑 같이 자는 것도 부럽고,루시아랑 같이 목욕하는 것도 부럽고,루시아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는 것도 부럽다. 하늘은 어찌하여 나를 라이로 태어나지 않게 하고 히로로 태어나게 해서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 걸까? "비켜,라이야.루비 차례란 말이야." 루비의 재촉에 루시아는 라이를 놓아주고 루비를 안아주었다.난 재빨리 라이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리고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루시아를 보며 말했다. "다음은 내 차례." ".......뭐?" "히로도 루시아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할래!" "........." "........." "........." "........." "........." ".........?" 뭐야,이 긴 침묵은? 루시아와 어린 엘프 셋은 동시에 입을 꾹 다물며 나를 노려보았다.넷의 일심동체 경멸어린 눈빛 스킬에 나는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왜들 그래?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걸 몰라서 물어?" 루시아의 싸늘한 목소리.그 목소리가 내 가슴을 후벼 판다.이어서 라이가 루비가 소리쳤다. "라이는 오빠한테 엄청 실망이에요!" "흥!루비는 이제부터 오빠랑 안 놀 테야!"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가만히 있기 뭐 했는지,루도 입을 열었다. "형은.........." "됐어,임마!" "저 아직 말 다 안 했는데요." "됐어!듣기 싫어!정말 너무들 하는 거 아니야?어떻게 다들 나한테 이럴 수 있어?난 그래도 진심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는데....." 그러자 루시아가 말했다. "넌 너무 진심인 게 문제야." "........." 그건 그렇다. 하지만 진심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야말로 나의 장점! 난 속마음을 숨긴 채 가식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아무튼 모두들 정말 너무해!만날 나만 미워하고......흑흑,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그래도 가장이라고,어떻게든 우리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는데....흑흑,히로한테 이럴 수는 없는거야! 우에에엥~모두 미워할 거야!" 난 울면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리고 방문을 닫고 침대에 엎어져 펑펑 울....진 않고 우는 척했다.난 귀를 쫑긋 세운 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누군가가 달래러 오겠지?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 뭐야?가장인 내가 펑펑 울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는데,아무도 달래러 안 온단 말이야? "어흐흐흑!어떻게 이럴 수 있어?가장이 우는데 아내(?)도 자식(?)도 한 번을 들여다보질 않다니!내가 이제껏 헛살았어. 헛살았던게야.우에에엥~ 루시아랑 어린 엘프들 미워,우엥~우엥~이제부터 같이 안 놀아줄 거야.으앙~으앙~히로 혼자 놀 거야. 엉엉엉~." . . . . 히로가 울면서 방 안으로 들어간 지 한참 되었다. 루시아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장난으로 한 말 같은데......아니야.그 뺀질이는 그 정도는 말해야 알아들어.그런데 정말로 화났으면 어쩌지? 아까 소리치는거 보니까 제법 화난 것 같기도 한데. 지금 방 안에서 뭐하고 있을까?베개에 얼굴 파묻고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가능성 높았다. 히로의 성격이라면 지금쯤 베개에 얼굴 파묻고 펑펑 울고 있을 것이다. 루시아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언제나 실실 웃던 히로가 울 정도라면,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한번 들어가 봐야지.' 그렇게 생각한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라이와 루비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너무해요,언니!오빠가 울면서 방으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한마디 위로도 안 해주실 수 있어요?" "맞아요!오빠가 불쌍해요!루비는 언니한테 엄청 실망이에요!" "얘,얘들아.나,난....." "가자,루비야,우리가 가서 오빠 달래주자." "응,라이야." 두 엘프는 아장아장 히로의 방으로 들어갔다.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히로가 걱정되었으면 바로 일어나서 쫓아갈 것이지,어째서 한참 지난 지금에야 이러는 걸까?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간단했다. 아이들이 먹던 과자봉지가 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과자 다 먹고 나니 그제야 히로 생각이 났나 보다. 아니면,생각은 계속 하고 있었는데 과자 다 먹을 때까지는 일어나기 힘들었던지....... 어느 쪽이든 히로는 어린 엘프들에게 있어서 과자 다음의 존재였다. 똑똑! 앗! 드디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그럼그렇지. 내가 이렇게 우는데 루시아가 가만히 있을리 없지. 난 문밖까지 들리도록 더욱 서럽게 울어댔다. "어흐흐흑! 우엥~으앙~엉엉!" 잠시후 문이 열리며 루시아가 들어왔...나 했는데, 라이와 루비가 들어왔다. "....." 뭐야? 루시아는 어디가고 니들만 왔니? 빨리 니들 엄마 모셔오렴. 내가 눈물 젖은 눈으로 보자 라이와 루비는 폴짝뛰어 침대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눈물을 닦아주며 나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울지마세요 오빠" "라이가 잘못했어요" "루비도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달래주는 라이와 루비의 모습에 난 큰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애들은 이렇게 날 걱정해주는데, 루시아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흑흑..." "오빠 또 우시는 거예요?" "흑흑...아니야,라이야. 울긴..이렇게 라이와 루비가 옆에 있는데 오빠가 왜 울겠어? 외로워도 슬퍼도 오빠는 안울어. 참고참고 또 참지 울긴 왜울어? 웃으면서... 어흐흐흑..루시아~~~" 난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울었다. "울지 마세요, 오빠. 오빠가 자꾸 울면 라이도 슬퍼진다 말이에요... 우엥~ 우에에엥~!" "으아아앙~ 루비도 막막 슬퍼요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두 엘프. 그 모습에 난 크게 감동 받았다. 그래서 라이와 루비를 와락 껴안으며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어흐흐흑.. 그래. 이 오빠한테는 너희들밖에 없단다. 엄마 없어도 우리들끼리 꿋꿋하게 살아가자꾸나. 엄마 없이도..... 우에에엥~ 세상에서 루시아가 제일 미워!" 그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누가 제일 밉다고?" "....." 헉쓰! 이목소리는 루시아? 난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원망섞인 눈으로 루시아를 보았다. 내가 우는데도 달래주지 않다니. 루시아는 날 사랑하지 않는것이 틀림없어. "너 지금 애들 껴안고 뭐하는 짓이야? 누가보면 너희 셋이서 길거리에 나앉은 줄 알겠다." "너무해! 어떻게 히로가 우는데 한번도 와보지도 않을 수 있어? 루시아는 정말 히로를 사랑하긴 하는거야?" "그..그건..." 당황하는 루시아. 대답을 못한다는 것은.......역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 "어흐흐흑~우엥~으앙~엉엉~" "앗! 언니는 왜 오빠를 울리는 거예요?" "맞아요! 언니 나빠요!" 나를 위해 지원사격에 나서주는 라이와 루비. 내말에는 별로 표정을 바꾸지 않던 루시아. 하지만 라이와 루비가 말하니 금방 표정을 바꾸어 어쩔줄 몰라한다. "얘..얘들아.." "이제부터 언니랑 놀지 마세요 오빠" "맞아요. 언니대신 루비가 놀아드릴께요." 라이는 두팔을 벌리며 말했다. "라이 가슴에 얼굴묻고 부비부비 해드릴께요." "........" 너 지금 오빠 놀리니? 대체 어디다 부비부비 하라는 거니? 좁은 어깨. 밋밋한 가슴. 아무리 찾아보돠 부비부비 할 만한 곳이 없어 보인다. "아니야! 루비가 먼저 오빠 부비부비 해줄거야. 루비 품에 안기세요 오빠." "라이가 먼저 말했어" "아니야. 오빠는 라이 품을 백배 천배 더 좋아해" 또다시 시작된 라이와 루비의 신경전. 그 모습을 본 루시아는 어이가 없다는듯 웃었다. 나역시 진이 쫙빠지는 느낌이다. 그래, 이것들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역시 세상은 혼자서 걸어가는 가시밭길. 이제부터 히로 혼자 놀테야! "그만해, 라이야 루비야. 언니가 잘못했어. 그러니깐 너희들도 그만해." 싸움이 벌어질까 두려웠는지 루시아는 재빨리 아이들을 말렸다. 그라자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를 보며 말했다. "그럼 언닌가 오빠한테 부비부비 해줄 거예요?" "응? 그게 무슨 말이니?" "오빠가 언니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언니가 잘못했다고 했으니 오빠랑 놀아줘야죠." "그...그런.." 뭐, 뭐야? 우리 라이와 루비가 날 위해 나서 주다니! 지금 와서 이런 말해봐야 설득력이 떨어지겠지만, 사실 나 얘들한테 매우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라이와 루비는 계속해서 루시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부비부비 해주실거죠?" "안 해주시지 않을 거죠?" 아이들이 계속해서 묻자 루시아는 당황해 어쩔줄을 몰랐다. "그,그래도 그건 좀....." 아이들은 팔장을 끼면 고개를 휙 돌렸다. "흥! 언니는 나빠요!" "루비는 나쁜 언니랑 안 놀아줄테야!" 결국 루시아는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 알았어. 부비부비 해줄께." "헤헤~ 정말이죠?" "잘됐다." 라이와 루비는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걸 기뻐하면 서로 손바닥을 부딧쳤다. 귀여운것들 같으니.. "........." 잠깐. 그럼 결국 부비부비를 해준다는 건가? 즉, 히로가 루시아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를.... "헉 쓰쓰!" 정말이지? 이게 꿈은 아니겠지?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럼 언니가 오빠 부비부비 해주며 놀아줄테니까, 너희들은 나가있어." "......." 헉! 안돼! 루시아 생각이야 뻔하다. 라이와 루비를 내보내고 부비부비 안해주려는 생각이다. 난 간절한 눈빛으로 라이와 루비를 보았다. 안돼, 얘들아 가지마. 니들 가면 루시아가 부비부비 안 해줄거란 말이야. 히로도 부비부비 하고파~.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라이가 입을 열었다. "언니가 오빠 부비부비 해주는거 보고 나갈래요." "뭐?" "앗싸!" 루시아는 깜짝 놀라 물었고, 난 골을 넣은 축구선수처럼 좋아했다. 그러자 루시아는 나를 경멸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고, 난 그 눈빛에 입을 다물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라이와 루비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나가있어. 우리 라이와 루비가 보고있으면 언니 부끄럽단 말야." "괜찮아요 언니." "루비는 이렇게 손으로 눈 가리고 있을께요 헤헤~" 난 뒤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응원했다. 그래. 잘한다, 얘들아! 계속 그렇게 해! 루시아는 곤란한지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언니가 어제 아이스크림 사다놨거든. 너희들 덥고 배고프지? 빨리가서 아이스크림 꺼내 먹어." 헉! 먹을 것으로 유인하다니! 아이스크림 미끼를 물지 않으면 그건 라이와 루비가 아니낟. 라이와 루비를 가정한 평범한(?)어린앨프다. "아이스크림이요?" "정말요? 무슨 아이스크림이에요?" "응, 우리 라이와 루비 실컷 먹으라고 언니가 3색 아이스크림으로 사다놨어 바닐라,초코,딸기맛이야. 골라먹는 재미도 있어." "헤헤~ 라이는 초코맛 아이스크림이 제일 좋아요." "루비는 딸기만 아이스크림이 막막 맛있어요." "아이스크림 녹겠다. 어서 가서 먹으렴." "네에~!" "......." 뭐냐? 여기서 긍정의 대답이 나오면 어쩌자는거야?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녹긴 왜 녹아? 안돼, 얘들아! 지금 가면 안돼! 오빠 부비부비 하는건 보고가야지! 하지만 아이스크림 녹는다는 말에 마음이 다급한지 아이들은 재빨리 방을 나가려 했다. 난 재빨리 루시아 어깨너머로 아이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니들 이대로 나가면 나중에 죽어(힘줄이 솟은 주먹을 들어올림)! 쇠빳다로 뒤지게 맞을줄 알아(무언가를 휘두르는 제스처와 함께 손가락으로 목을 그음)! 오빠가 이따가 이따만한 고구마 두줄짜리 피자 사줄테니(두손으로 원을 그리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림.),나가지마(이건그냥 입모양으로)! 다행히 라이와 루비는 내 메시지를 잘 전달 받았는지 발을 멈칫했다. 채찍(쇠빳다)와 당근(...피자)의 효과는 확실했다. "라,라이는 그냥 부비부비 하는거 보고 갈래요." "루, 루비도요." "아, 안돼, 얘들아. 지금 안 먹으면 아이스크림 다 녹는단 말이야." "헤헤~ 아이스크림 녹으면 다시 얼려서 먹으면 돼요. 그리고 라이는 아이스크림보다 피자가 더 좋아요." "맞아요. 아이스크림 먹고 쇠빳다에 맞아 죽는거보다,그냥 피자 먹을래요." 어찌 되었든 라이와 루비는 자리를 지켰고, 루시아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난 기대감 섞인 눈길로 루시아를 보았다. 아아~ 루시아 가슴에 얼굴묻고 부비부비라니! 하기만 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것 같다. 난 루시아 가슴에 시선을 집중했다. 꿀꺽! 아무리 봐도 크다. 라이말대로 굉장히 푹신할 것 같다. 확실히 저번에 팔짱 꼈을때 굉장히 푹신푹신 했었다. 하지만 팔로 느끼는 감촉에는 한계가 있는법. 그걸 이제 얼굴로 느끼게 된다니! "어딜 보는 거야? 이 변태야!" "아, 아니야, 루시아. 나 아무것도 안봤어." 루시아는 팔로 가슴을 기리며 소리쳤고, 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는 다시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라이와 루비에게 말했다. "어,언니가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나중에 하면 안될까?" 아무리 라이와 루비가 단순 앨프라고 해도 이런 말에 속아 넘어 갈만큼 단순하진 않다. 라이와 루비느 어깨동물 대형을 취하며 루시아를 노려보았다. "언니 지금 라이한테 거짓말하는 거죠?" "그런거죠?" "아, 아니야 얘들아." "그럼 어서 오빠한테 부비부비 해주세요." "빨리요!" 이젠 완전히 막다른 길이다. 루시아 역시 더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듯 했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루시아는 체념한듯 소리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난 재빨리 루시아 옆으로 움직였다. "지,진짜 부비부비 해도 돼?" "너 정말.....해, 해도 돼." 루시아는 쇨를 치려다가 라이와 루비의 눈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천천히 허리를 숙여 얼굴을 루시아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루시아는 지금 싫어하고 있다. 싫지만 아이들의 압력에 의해 어쩔수 없이 하는거다. 그런데도 내가 부비부비 하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그녀를 정말로 위한다면 멈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정말 이대로 해도 좋은걸까? "......." 해도 좋다. 난 재빨리 결론을 내렸다. 군자의 도리? 신사도? 그딴거 다 필요없다. 난 그날의 사건을 겪고 나후 기회가 왔을 땐 족므도 주저하지 말고 잡아야한다는 진리를 깨우쳤다. 그날 루시아를 덮치지 않아서 독자들한테 무지하게 욕 얻어먹었따. 그것도 모자라 루시아를 겁탈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집에서 쫒겨났다. 하고 쫒겨났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만약 내가 그날 루시아를 덮쳤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다. 나와 루시아는 결혼해서 좋고, 어린 앨프들은 동생생겨서 좋고, 다른 사람들은 국수 얻어먹어서 좋고, 독자들은 베드씬(?)을 봐서 좋고..... 그래,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다 내가 희생(?)하는 거야. 아아~ 이런게 상신성인의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루시아는 두려운지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두려운건 나역시 마찬가지다. 부비부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을 까봐 두렵고, 하고 나서 루시아한테 맞아 죽을까봐 두렵고, 초주검(추주검 맞죠?) 생태가 되어 집에서 쫒겨날까봐 두렵다. 그래도 하고 쫒겨난다면 억울하지는 않으리! 난 모든것을 각오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친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라는건 옛 성인의 말처럼 아침에 루시아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할수만 있다면 저녁에 쫒겨나도 좋다. 이제 루시아 가슴과의 거리는 고작 1cm.... 조금만더....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고, 라이와 루비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리고 나는 심장마비에 걸리지 않기 위해 금강부동심법 구결을 외쳤다. 그런데 그 순간 누고도 예상치 못한일이 일어났다. "일루니아 누나가 피자 사왔어. 빨리 나와서 먹으래." "정말?" "응. 고구마 두 줄짜리야. 크기도 이따만해~! 두판이나있어!" "라이 빨리 먹을래!" "루비가 제일 먼저 먹어야지!" "안돼! 가지마, 얘들아! 제발!" 루의 말에 라이와 루비는 우르르 방을 빠져 나갔다. 깜짝 놀란 내가 소리 쳤지만, 아이들은 이미 저멀리 사라진 후였다. "........" 우째 이런일이. 역시 나는 불행의 별을 타고난 인간? 난 배시시 웃으며 루시아를 보았다. "계,계속해도 될까?" 루시아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잠궜다. "왜,왜그래 루시아?" 루시아가 방문을 잠금으로써 방은 우리 둘만의 공간이 되었지만, 어째서 인지 전혀 기쁘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싸늘한 루시아의 표정 때문이겠지? 하지만 난 끝까지 부비부비의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니, 버릴수가 없었다. "저,저기 부비부비는?" 루시아는 대답 대신 이불을 손으로 집었다. "헉! 왜 갑자기 이불을?" "소리가 새어나가면 안되잖아." "......." 뭐? 소리가 새어나가면 안돼? "헉쓰! 그,그말은 설마 이불을 덮고 사랑을 나누자는 뜻?" 그래서 방문을 잠근건가?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루시아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줄이야..! 그동안 부끄러워서 표현을 못했을뿐, 루시아도 날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해! 내가 기뻐하는데 루시가가 이불을 다에게 덮었다. 그리고 지신도 이불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나를 마구 때렸다. 퍽!퍽! "헉! 왜그래,루시아?" "시끄러 이 변태야! 뭐? 내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그게 여자한테 할 소리야?" 퍽!퍽!퍽! "지,진정해 루시아. 내가 잘못했어. 한번만 용서해줘. 다신 안그럴께." 난 재빨리 무릎 꿇고 빌었따. 하지만 루시아는 다시 이불을 덮어 씌웠다. "잘못한 걸 알면서 그랬단 말이야? 넌 좀 맞아야해!" 퍼버버벅! "끄아악~ 살려줘~!" 그리하여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나. 난 코피를 막기위해 휴지를 한쪽 콧구멍에 밀어 넣으며 훌쩍거렸다. "훌쩍..훌쩍..." 맞아서 아픈것 보다도 루시아한테 맞았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다. 이렇게 비참할수가! 너무 서러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흑흑..." "그만울어!" "훌쩍...뚝!" 루시아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맞은 나보다 때린 루시아가 더 힘들어 보인다. 아아~ 사랑하는 그녀를 힘들게 하다니! 이럴줄 알았으면 스스로팰걸. 루시아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땀에 젖은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향긋한 땀 냄새와 촉촉히 젖어 있는 피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가 시작한다. "...." 잠깐, 어쩌면 이건 기회가 아닐까? 방문은 잠겨있고 아이들은 피자먹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루시아는 지친상태고. 난 눈물을 닦고 벌떡 일어나 루시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루시아." "왜?" 난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 주었다. "내가 할께" "가만 있어봐. 내가 닦아줄께." 루시아는 내가 순수한 의도로 그러는 거라 생각했는지,별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루시아의 땀 냄새가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어째서 땀 냄새가 이렇게 향긋하고 매혹적인 걸까? 루시아의 몸에서 나기 때문인가? 곤충이나 동물은 ........(죄송..생략..ㅜ,.ㅡ)1년내 발정기라고도 할수 있다. 이성의 몸에서 나는 땀 냄새는 일종의 페로몬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루시아는 지금 페로몬을 발산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 혼자 그냥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는 걸까? "땀 흐리는 모습도 너무 예뻐 루시아." "휴지로 코피 막고도 그런 말이 나와?" "........" 평생 얻어맞으며 살더라도 루시아와 결혼하고 싶다. 난 콧구멍을 막은 휴지를 빼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루시아와의 거리를 좀더 좁혔다. "좀 옆으로가." "아야!" 루시아는 내 어깨를 밀쳤고 난 아파하며 어깨를 붙잡았다. "왜그래? 어디 다쳤어?" "......" 팬 사람이 이런 질문하면 대답하기 난감하다. 루시아도 자신이 때렸다는 사실이 기억났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아파?" 사실 그렇게 많이 아프진 않다. 비록 루시아가 화가 나 발길질을 퍼부어 댔지만 몸을 잘 웅크린 덕분에 충격이 많이 완화되었다. 코를 잘못맞아 코피를 좀 쏟기는 했지만, 이젠 코피도 멎었다. 그리고 이런식으로라도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아예 관심을 안가져주는 것보다는 기쁘다. 앞으로 루시아가 날 때린다면 얼마든지 맞아주리. "......" 이러다가 이상한 취미에 눈 뜨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군. 뭐, 루시아가 여왕님 열할을 하고 싶다면야 난 기꺼이 노예역할을... 어차피 난 루시아의 사랑의 노예니까~. "잠깐 봐봐." 루시아의 요구에 난 단추를 풀고 어깨를 내보였다. 아아~ 어째 매우 부끄럽다. "멍들었네." 루시아는 멍든 부위를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았다. "으아악!" "아,아파?" "아악! 너무아파! 죽을것같이 아파!" 그렇게 많이 아프진 않지만, 난 일부러 굉장히 아픈척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루시아는 매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그렇게 아파?" "흑흑...막막 아포~" 난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루시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미,미안해." "헉! 아까 맞은 자리가!" 난 비틀거리는 척하며 루시아와 함께 침대에 엎어졌다. "괘,괜찮아?" "엄청 아프지만 네가 키스해주면 괜찮아질거 같아." "뭐?너...." 루시아는 눈 꼬리를 치켜뜨며 화를 내려 했다. 난 매우 많이 아프다느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 표정을 본 루시아는 화를 내려다 멈칫했다. 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루시아를 살짝 껴안았다. "지금 되게 아픈데, 니가 키스해주면 나아질것 같아. 정말이야." "시,싫어." 루시아는 나를 살짝 밀쳤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집요하게 거리를 좁혔다. "왜 싫은데?" "나,나 아까 과자먹고 이도 안닦았단 말이야." "괜찮아.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서로 입으로 먹여주기도 하잖아." "그,그건 그렇지만....."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커플은 가족들 앞에서 별 짓 다한다. 밥을 서로 떠먹여 주는 것은 기본이고, 서로 입으로 먹여주기고 한다. 저번에는 사탕하나를 입에 넣고 둘어서 번갈아가며 먹더라. 아니,염장을 지르더라도 정도가 있지! 누구 복장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나? 그렇게 그런 짓을 하고싶으면 둘만 있을때 하던가! 왜 사람들 다보는데서 하는건데? 이건 나의 추축이지만, 일루니아 여사님계선 내 염장을 지르려고 일부러 그러는게 아닌가 싶다. 나의 불행은 곧 일루니아 여사님의 행복 아니겠는가? 이걸 반대로 해석화면 내의 행복은 곧 일루니아 여사님의 불행이다. 그래. 난 일루니아 여사님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행복해져야해. 루시아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테야! "해도 돼지?" "안돼." "그,그런! 대체 왜 안된다는 거야?" "그냥 지금은 좀 그래." ",......." 대체 왜 싫다는 거지? 혹시 루시아는 내가 싫은 걸까? 그래서 키스를 거부하는 건가? 아아~ 모르겠다. 여자의 마음은 도저히 알수가 없어. 이런 나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쉬고있어. 난 애들 잘먹나 보러갈께." "자,잘먹고 있겠지." "애들만 놔두면 걱정된단 말야." "일루니아 여사님이 사왔다며, 그럼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보살피고 있지 않을까?" "그,그건 그렇지만......아무튼 나 이만 나가볼께." 루시아는 문을열고 거실로 나갔다. 홀로남은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애들한테만 신경 쓰지말고 히로한테도 좀 관심을 가져주지. 히로도 루시아의 보살핌이 필요한데.. 옛날에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특히 더 나한테 무관심한거 같다. 사랑한다는 말도 안해주고, 키스도 안해주고, 관심도 안가져주고....... 정말로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걸까? 야심차게 준비해왔던 '라이 동생 만들어주기 프로젝트'에 점점 차질이 생기고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때쯤 뭔가 좋은 소식이 있어야한다. 예들들어 둘이 같은 방을 쓴다든가. 주위에 청첩장을 돌린다든가, 이불속에서 사랑한다고 속삭인다든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으아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탁자 위에는 빈 콜라 패트병과 빈 피자 상자가 놓여있었다. 훼밀리 사이즈 두판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것이다. 오빠를 위해 한조각 정도는 남겨줄 것이지. 탐욕스러운 것들 같으니. 아이들은 소파에 기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렇게나 좋을까? "헤헤~ 피자 막막 맛있어." "응응. 루비는 피자가 세상에서 젤 좋아." "맨날 피자만 먹었으면 좋겠다." ",........." 집안 살림 거덜 낼 일 있냐? 이럴줄 알았으면 업종을 인형가게에서 파자 가게로 바꿀걸 그랬나? 그럼 애들 원하는대로 맨날 피자를 먹여줄수 있을텐데.. 하지만 맨날 피자만 먹으면 몸에 안 좋을수 있다. 원래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하는것 아니겠는가? "얘들아, 오빠왔다!" "앗! 오빠다." "어서 오세요 오빠." 라이와 루비는 재빨리 자지를 비켜주었다. 자신들의 옆에 앉으라는 거다. 난 라이와 루비 사이에 앉았다. "이거 드세요,오빠. 라이가 오빠 주려고 일부러 안먹고 남겨둔 거예요." 라이가 내민것은 파자....가 아닌 피클. "........." 뭐야, 이건? "라이 지금 오빠 놀리는 거니?" "예? 라이가 왜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는 라이. 그 모습이 매우 가증스럽다. 지들끼리 피자 몽땅 먹어놓고 나한테는 먹다 남은 피클을 내밀다니! 그리고 그걸로 생색을 내려 하다니! 이게 착한 앨프가 할 짓이란 말인가? 빠드득! "우리 라이는 참으로 건방진 앨프구나. 후후~ 뭘 믿고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걸까?" 난 라이의 볼을 잡고 쭈욱 잡아 당겼다. "히잉~아파요.오빠." "우리 라이 귀여워서 이러는 거야." 난 그렇게 말하며 더 세게 잡아 당겼다. 땡땡하고 탄력좋은 라이의 볼은 잡아당기는 대로 늘어났다. 라이는 정말로 아픈지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아프단 말예요오~!" "........" 헉! 내가 너무 세게 잡아 당겼나? 펑펑 눈물을 쏟는 라이. 그리고 그모습을 본 루시아는 눈을 치켜떴다. "넌 왜 또 애를 울리고 그래?" "아,아니야,루시아. 어디까지나 실수였어. 결코 고의가 아니야." 놀란 난 재빨리 라이를 토닥여주었다. 토닥토닥. "우엥~우엥~" 제발 빨리좀 그쳐라. 뒤에서 루시아가 노려보고있다. 난 초조한 마음에 더욱 열심히 토닥거렸다. 서서히 잦아드는 라이의 울음소리. 그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쉴수 있었다. "훌쩍~ 오빠 미워요." "미안,라이야. 많이 아팠지? 오빠가 호~ 해줄께." 난 빨갛게 부은 라이의 불에 입김을 불어주었다. "호~호~" "뽀뽀해 주세요." "응?" "오빠가 뽀뽀해주면 한개도 안 아플것 같아요." "그,그래?" 어째 어디서 비슷한 말을 들어본것 같은데. 난 라이가 원하는 대로 부어오른 부위에 뽀뽀를 해주었다. 쪽~. "헤헤~ 이쪽에도 해주세요." "그래 그래" 뭐, 뽀뽀한다고 돈 나가는 건 아니니. 난 반대편 볼에도 뽀뽀를 해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금방 함박웃음을 지었다. "에헤헤~" 웃으며 내 품에 안겨오는 라이. 난 그런 라이를 꼬옥 껴안아 주었다. 사실 라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어쩌면 정마로 오빠를 생각해서 피클을 남겼을 수도 있잖아. "그래. 그래도 나 챙겨주는 건 우리 라이밖에 없어. 흥! 다른것들은 다 필요없어! 우리 라이가 최고야!" 난 모두 들으라는 의미에서 일부로 크게 말했다. "오빠는 우리라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정말요? 정말 라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응. 라이가 세상에서 제일 제일 좋아." "라이도 오빠가 막막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난 슬쩍 루시아의 반응을 살폈다. 만약 루시아가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쯤에서 질투심을 드러낼 것이다. 라이가 세상에서 제일좋아? 그럼 난 뭐야? 난 라이 다음이라는거야? 날 사랑한다고 말할땐 언제고 지금 와서 이럴수있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내 예상대로 루시아는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질투심 가득한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난 그모습을 보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루시아는 날 사랑하는게 틀림없어! "그런 식으로 아이들한테 점수 따려 하다니 넘 치사한거 아니야?" "....응?" 루시아의 눈은 질투심으로 활활 타오르로 있었다. 라이에 대한 질투심이 아닌 나에대한 질투심으로. 설마 지금 상황을 히로를 사이에두고 루시아와 라이가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라이를 사이에두고 히로와 루시아가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인가? "..." 그,그런! 어째서 나를 질투하는거야,루시아? 라이를 질투해야할 거 아니야! 내가 라이를 이렇게 꼬옥 안고 있는데, 라이한테 나를 빼앗길까봐 두렵지도 않아? 내가 라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말했는데 아무 감정도 안들어? "으앙~으앙~" 갑자기 울먹거리는 루비. 루시아는 깜짝 놀라 루비를 무릎위에 앉혔다. "왜 그래, 루비야?" "오빠가 라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루비는........루비는.. 으아앙~ 오빠미워요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루비의 눈물. "......." 헉! 루비를 깜빡했다! "으앙~으앙~오빠가 루비한테........으앙~ 이럴수는 없는거예요오~" 루시아는 루비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괜찮아. 루비야. 오빠 같은건 이제 신경쓰지마. 언니가 곁에 있어줄테니까." "으아아앙~ 오빠는 라이만 예뻐하고.....이젠 루비가 싫어진게 틀림없어요오~" "아,아니야! 루비야! 오빠는 너희들 모두를 사랑해!" "으아아앙~!" 아무리 달래도 루비의 울음소리는 커져가기만 했다. 루비의 등을 토닥여주던 루시아는 경멸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너 정말....." "헉! 미,미안해 루시아. 내가 잘못했어." "아이들을 편애하면 대체 어쩌자는 거야? 아이들은 부모의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는다는거 몰라? 어떻게 루비랑 루가 듣는 앞에서 라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말을 할 수 있어? 니가 그러고도 애들 부모라 할수 있겠어? 대체 넌 부모로서의 자각이 있는거야,없는거야?" "........" 지은 죄가 너무 커 할말이 없다. 내가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하다니! 우리 루비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난 루비에게 매우 많이 미안했다. 덤으로 루에게도 아주 조금 미안했다. 이런 편애성 대사는 애들 앞에서 하는것이 아니거늘. 흑흑~ 생각없는 말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다니, 난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어! 난 재빨리 루비를 달랬다. "오빠는 라이와 루비를 똑같이 제일 좋아해." "저는요?" 기대감을 가지고 나에게 물어보는 루. 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너도 똑같이 좋아해." "정말요? 그럼 저도 이제부터 비행기 태워주는 거예요?" "......"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이득만 챙기려 하다니. 영악한 것 같으니라고. "울지마 루비야. 자꾸울면 루비 얼굴 미워지잖아. 오빠가 루비는 언제 제일 예쁘다 그랬지?" "훌쩍~ 웃을 때요." "맞아. 그러니까 울지말고 웃어. 루비는 웃을 때가 제일 예쁘단다." "훌쩍~ 정말요?" "으응. 세상에서 제일.....그러니까 라이랑 공동1등으로 예뻐." "훌쩍~헤헤~" 눈물을 닦으며 웃는 루비. 난 글너 루비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껴안고 부비부비 해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애들 달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것 같다. 역시 하늘은 공평하다고나 할까? 지니가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난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대신 애들을 달랠수잇는 수많은 스킬을 가지고 태어났다. 나와 지니를 비교했을때 거의 모든 면에서 내가 밀리지만 애들 달래는 것만큼은 밀리지 않을 자신이있다. 그런데 왜 하필 수많은 스킬들 중에서 애들 달래는 스킬만 가지고 태어난걸까? ".........." 으음,이건 정말 의문이군. 혹시 나의 천적은 보보? 즉,유아 교육사? "..." 헉쓰! 전설의 영웅 아이언스 희로의 천직이 보보라니! 이 무슨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 안돼. 이대로 보모가 될수는 없어. 이제부터라도 옛날의 카리스마를 되찾아야해. .....라고 다짐을 해보지만 옛날에도 카리스마는 별로 없었다. 어쨌든 루비를 달래준 나는 잠시 집 밖으로 나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뜨가운 햇볕이 가득 내리죄는 옥상. 난 흡연 전용으로 만들어 놓은 의자에 앉았다. 조용한 이곳이 마음에 든다. 여기에서 햇볕을 쬐며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우화등선할 것 같은 기분이든다. 아아~ 속세의 은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난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런데 라이터가 없다. 담배는 있는데 라이터는 없는 경우. 이런 경우 애연가들은 상당히 난감해진다. 옆에 또 다른 애연가가 있으면 불이라도 빌리겠는데 이곳엔 나 혼자뿐. "하는수 없지." 난 손가락을 튕겼다. 탁! 그라자 순식간에 담배에 불이 붙었다. 난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앗! 방금 어떻게 한거야 오빠?" "헉! 니가 어떻게 여길....." "어떻게라니? 내가 뭐 못 올 데라도 왔어? 여기 우리집 바로 앞이잖아." "......." 그건 그렇다. 영아는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거 어떻게 한거야?" "응? 그거라니?" "손가락 튕겨서 불붙인거 말이야." "하하, 그,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거야." 방금 한 건 화염계 마법이다. 이 세계로 온 뒤 가급적 마법은 안 쓰기로 마음 먹었지만, 지금처럼 담배는 피고 싶은데 라이터가 없는 경우에는 어쩔수없이 쓴다. 담배는 피워야 할 것이아닌가? "오빠 마술도 할줄 알아?" "으으. 뭐, 그냥 조금.....어깨너머로 배운정도?" 이건 마술이 아니라 마법이다. 단순한 눈속임인 마술과 마나를 재배열해 사용하는 마버븐 그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계 사람들이 결코 알아서는 안되는 비밀. 영이가 마술로 착각하고 있다면 계속 착각하게 놔둬야한다. "그나저나 너는 왜 나왔냐?" "집안에만 있게 답답해서." "그래. 내가 생각해도 무지 답답할 것 같다." 사방이 책 더미에 청소도 제대로 안 해 먼지가 둥둥 떠다니니 답답하지 않을리없지. 언제 한번 인디한테 청소 좀 해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오빠는 왜 여기 있어?" "보면 모르냐? 담배 피우고 있잖아." "그거 맛있어?" "피워 볼래?" "아,아니야. 난 담배 싫어해." 두 손을 내젖는 영아. 그러고 보면 영아의 동생인 영진은 담배를 피웠지. 버리장머리 없는 자식 같으니. 감히 고등학생 주제에 담배를 피다니. 사촌동생의 흡연을 그냥 두고 볼수 없었던 나는 영진이 금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만약 그 꼴 당하고도 또 담배를 핀다고 설쳐댄다면 그땐 진짜 죽음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려줄 생각이다. 나는야 청소년 금연 홍보 대사~ 열심히 담배를 피는데 영아가 계속 날 보고있다. "응? 왜그러니?" 내가 묻자 영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지니 오빠가 담배 피면 되게 멋있어 보이는데, 오빠가 피니까 그저 그렇다." "......" 뭐라? 그저 그래? 이게 은근히 사람 성질을 긁는다. "후후~ 우리 영아가 아직 어리다보니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어느면으로 보나 내가 지니보단 백배 더 낫지." 영아는 배를 잡으며 웃었다. "우헤헤헤헤..." "........." 묘하게 기분 나쁜 웃음이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까지 흘리고있다. "왜 웃니?" 내가 묻자 영아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거 알아? 오빠?" "응? 뭘?" "방금 그 말 이제까지 오빠가 한 개그중 가장 웃겼어. 내 평생 그렇게 재밌는 개그는 처음 들어봐." "......" 이 앞짱구가 이젠 오빠를 아주 가지고 노는구나! 분노한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오갈 데 없는 것을 거두어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었더니 이젠 아주 기어오르는구나!" "오빠가 언제 날 거둬줬어?" "뭐라?" "날 거둬준 건 루시아 언니야. 오빠는 내가 이집에 들어오는 걸 반대했잖아. 그리고 내가 한 달에 내는 집세게 얼만데! 그정도면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도 충분히 남잖아!" "......"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사실 영아가 내는 집세가 없었다면 우리가족 먹고 사릭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린 앨프들 외식은 한동안 중단했을지도 모른다. 뭐, 어찌되었든가 영아가 지금 이렇게 내게 대드는 것은 용납할수 없다. "아니,이런 배은망덕한 앞짱구를 봤나!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 했거늘! 아아~ 옛말 틀린것 하나도 없구나." "응? 머리 검은 짐승? 그게 무슨 말이야?" 여아는 많이 궁금한지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이렇게 궁금해 하면 설명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난 자리에 앉아 설명을 시작했다. "니 머리카락이 무슨색이니?" "검은색" "그럼 머리검은 짐승은 뭐겠니?" "그야...아!설마 사람을 말하는 거야?" "응.'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 기르는게 아니다.'라는 말은 원래 '머리 검은 짐승은 남의 공도 모른다.'라는 말에서 나온거야.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게 남의 은공을 모른다는거지. 예를 들어 한 부부가 상처입은 남자를 집으로 데려와 치료해주었어. 하지ㅏㄴ 이 남자는 자신을 치료해주던 부인에게 반해, 남편을 죽이고 여지를 취했지.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라고나 할까?" "으음.." "사나운 맹수라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의 은혜는 잊지 않는 법이지. 하지만 인간은 달라.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까지 건져다랄는 것은 기본이도, 심지어는 살려놨으니 책임을 져야한다며 구해준 사람을 협박하기도하지." "그,그래도 은혜를 갚는 사람도 많지 않아?" "뭐, 그렇긴 하지. 개인차이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어 핏줄을 굉장히 중요시 여긴다. 믿을것은 자신의 핏줄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칠거지악이라해서 애를 못 낳는 여자를 죄인 취급 했겠는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 기르는 것이 아니다.' 라는 속담은 입양의 위험성을 강조하는데 쓰이기도한다. 자기 핏질이 아닌 애는 길러봐야 나중에 부모 뒤통수를 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입양율을 매우 낮은 수준이다. 오죽하면 고아 수출 대국이라 불리겠는가? 대한민국 주력 수출 품목이 자동차,반도체,고아라고 할 정도니 말 다했지 뭐. 하여간 그놈의 유교사상이 나라 말아먹는데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 모든 사상이 그렇듯 사상의 근본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사상이 우리나라에서 이상한 시긍로 변질 되었으니 문제다. 웃어른을 공경하자.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하지만 이걸 '어른이 말하면 무조건 따라야지! 어디서 어린놈이 말대꾸야?' 라는 식으로 해석되니 문제다. 잘잘못을 따질 필요없이 무조건 나이로 미는거다. 주장이 얼마나 논리정연한지는 중요치않다. 중요한것은 누가 생일이 하루라도 빠르냐는 것이다. 이 외에도 유교사상의 문제점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남아선호,직업에 귀천 따지기,성 역할 정하기 등등.. 대체 누가 연예인을 딴따라라 했으며, 기없인을 천한 장사치라고 했는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좋게 보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폄하를 하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러니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시대가 변화하면 사상역시 변화해야한다. 그 근본은 변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좋은 것은 계승하고, 나쁜것은 없애고, 시대에 맞지않는 것은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전통계승이다. 무작정 '옛날에도 이랬으니 지금도 이래야해" 라고 주장하는 것은 수구 꼴통들이나 하는 짓이다. 난 꽁초만 남은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담배 한개비를 또다시 입에 물었다. "영아야." "응? 왜 오빠?" "여자의 마음이란 대체 무엇일까?" "뭐?" 영아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나와 거리를 벌렸다. "무,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오빠? 아,안돼! 우리는 사촌남매야. 오빠가 그런 마음을 가지는건 사회적으로 용납될수 없어.그리고 나에게는.." "라이레얼,지니,크로니스,루가 있다고?" "라이레얼언니와..응? 어떻게 알았어?" "니 헛소리야 뻔하지." 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영아는 다시 거리를 좁히며 물었다. "왜 갑자기 분위기 잡고 난리야? 오빠 무슨 걱정있어?" "걱정이라.......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겠지. 만물이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차 있으니 나라고 어찌 걱정이 없겠는가?" "뭔 말이야?" "한낱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 "그말은 내가 참새라는 뜻이야?" "덜익은 풋사과라고 해줄까?" "그건 또 뭔말이야? 오빠 미친거야?" "......" 얜 심심하면 날 미친사람으로 몰아가더라. "하아~" 난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자 영아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왜 그러는데,오빠? 진짜 무슨 걱정 있는거야?" "아니야." "그러지 말고 한번 말해봐. 오빠. 혹시알아?내가 도움이 될지.." "니가?" 난 영아를 보았다. 나의 사촌여동생 박영아. 현재 출판해서 돈좀 만지고 있는 샤프걸. 그리고 막 나가는 앞짱구. 어느 면으로 보나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난 고개를 돌리고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아~" 영아를 봤기 때문인지 근심히 더해져 아까보다 긴 한숨이 나온다. "씨잉! 대체 왜그러는거야, 오빠? 나한테 말해 보라니까." "됐어." "그러지 말고 말해봐." "니가 알아서 뭐하게?" "오빠가 자꾸 그러니깐 괜히 궁금하잖아. 난 원래 궁금한건 못참는단 말야." "그건 니 사정이지." "오빠!" "그래그래 알았어 말해줄께." 여아가 이렇게 까지 궁금해하니 난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비밀이라 할만한 것도 아니니. 그리고 혹시 아는가? 영아가 도움이 될지. "사실은 말이야....루시아 떄문인데." "루시아 언니가왜?" "요즘 들어 나한테 관심이 별로 없는것 같아서." "원래부터 관심 없지 않았어?" "....." 사실이긴 하지만,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니?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서 더 관심이 없어진것 같아서. 이젠 키스도 안해주고...... 마지막으로 키스한게 언젠지 모르겠어 난 그저 라이 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은 아주 소박한 꿈이 있을 뿐인데." "라이 동생을 만들어 주는게 소박한 꿈이야?" "이 이상 소박한 꿈이 세상에 어디있냐?" "글쎄,내가 보기엔 오빠가 너무 큰 꿈을 꾸고 있는것 같은데.." "........" 그런가? "키스도 안해주고 스킨십도 거부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안해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대체 루시아의 마음은 무엇일까? 정말로 날 사랑하긴 하는걸까? 혹시 이젠 내가 싫어진게 아닐까? 같은 여자로서넌 어떻게 생각하니?" "으음, 내 생각에는 말이야......." 영아는 잠시 턱을 붙잡고 고민했다. 잠시 고민하던 영아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오빠가 싫어진것 같아." "뭐라?" "그렇잖아. 키스도 안해주고,스킷십도 고부하고,사랑한다는 말도 안해준다는게 뭘 의미하겠어? 오빠가 싫어졌다는걸 의미하는거지. 사실 루시아 언니 같은 미인이 오빠같이 그저 그렇게 생긴 남자를 사귄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돼. 루시아 언니의 미모라면 적어도 크로니스 오빠나 지니 오빠정도는 돼야하지 않겠어?" "맞는 말이긴 한데,그렇게 따지자면 넌 뭐니? 라이레얼의 미모라면 적어도 카르 정도는 사귀어야 하지 않겠어?" "뭐? 오빠 말 다 했어? 내가 카르에 비해 부족한게 대체 뭔데? 나 정도면 라이레얼 언니한테 딱이지!" "........" 여러가지 부족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부족한것은 개념이 아닌가싶다. "아무튼 루시아 언니도 이제 깨달은거야." "뭘 깨달아?" "오빠가 별볼일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헉!" "마침 크로니스 오빠랑 지니 오빠까지 옆에 있으니 무지하게 비교 됐겠지. 그래서 오빠한테 오만정이 다 떨어진거야. 당장이라도 헤어지자고 말하고 집을 나가고 싶은데 아이들 때문에 참고 있는 거지." "그,그런!" "누굴 원망하겠어? 이게 다 오빠가 별 볼일 없는 탓이니."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잔인한 말을 날리는 영아. 그때마다 내가슴은 심하게 찢겨나갔다. "그,그게 정말이야?" "응. 여자 입장에서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을 거야." "헉.....쓰쓰쓰!" 정말 내가 싫어졌단 말인가? 더이상 루시아는 날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너무나도 큰 충격에 난 할말을 잃었다. 어,어떻게 이런일이! "아니야! 그럴리 없어! 루시아는 날 사랑한단말이야! 우에에엥~!" "오,오빠!"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울면서 뛰어갔다. 뒤어세 날 부르는 영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난 무작정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루시아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니! 루시아가 날.... "안돼!안돼!안돼!" 퍽!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실수로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아이언스 공작님?" "사,사일런스 백작님...." 나와 부딪힌 사람은 다름아닌 사일런스 지니. "어서 일어나십시오." 지니는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손을 보는 순간 왠지모르게 서러움이 밀려왔다. "흑흑~ 사일런스 백작님~." 난 울음을 터트리며 지니의 품에 안겼다. 지니는 그런 나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제품에서 실컷 우십시오.아이언스 공작님." "...." 헉! 이인간이 무슨말을! 길거리에 흘릴 눈물은 많아도 남자품에 흘릴 눈물은 단 한방울도없다. 난 재빨리 니니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지니는 나에게 물었다. "외람되지 않는다면 무슨일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외람되거든. 그래도 내가 믿을 사람이라고는 오직 지니뿐. 지니에게 상담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상담하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말하기는 좀그렇다. 주차장 한복판에서 말하기는 부끄럽지 않은가? 지니는 이런 내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먼저 말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요?" "훌쩍~ 예~" 이곳은 집 근처의 카페. 지니가 발을 들여놓는 순간 카페안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집중되었다. "......" 아아~ 이래서 난 이 인간과 같이 다니는게 싫다. 이른 시간이어서 카파에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지니는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종업원 하나가 얼굴을 잔뜩 붉힌채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메뉴판을내밀었다. 지니는 그것을 나에게 주며 물었다. "뭐로 하시겠습니까?" "레모네이드....로 하기전에 한가지 말씀 드리자면 저 돈 없습니다."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사는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래요? 그럼 레모네이드는 잠시후에 시키도록하고.......아! 여기 식사도 되네요. 일단 돈까스 정식부터 먹도록 하지요." "전 아이스 커피로 하지요." 지니는 메뉴판을 다시 여종업원에게 건네주었다. 잠시후, 음료와 식사가 나왔다. 난 재빨리 돈까스 정식을 먹었다. 아까 울었기 때문인지 배가 많이 고팠다. 지니는 천천히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내가 밥을 다먹길 기다렸다. 순식간에 식사를 끝마친 나는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여종업원이 레모네이드를 가져다주자 난 빨대로 한모금 마셨다. 시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레모네이드 맛에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난 아까 영아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니에게 루시아에 대한 일을 털어놓았다. 지니는 진지한 자세로 내말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루시아 공주님께서 요즘 드어 아이언스 공작님께 별 관심을 갖지않는다는 것이 요점이군요." "예,키스도 안해주고,사랑한다는 말도 안해줘요. 스킨십을 하려해도 거부하는것 같구요. "상당힌 난감한 문제로군요. 사실 남녀 간의 문제만큼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국가간의 역학관계도 남녀 관계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정말로 루시아는 제가 싫어진 걸까요? 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거죠?" "제 생각에는 루시아 공주님께서 아이언스 공작님을 싫어하지는 얺는것 같습니다. 이건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그렇죠?" 지니의 말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니가 확신했다면 믿어도 좋을것이다. 언제 지니말이 틀린적 있었던가? "그럼 루시아는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요?" "글쎄요. 그 점에 대해서는 몇가지 가정을 세워볼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을 뽑아 보자면...." "뽑아보자면?" "루시아 공주님은 두려워하고있습니다." "예? 루시아가 두려워해요? 뭘요?" "자신의 마음을요." "자신의 마음을 두려워한다구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겪어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서툽니다. 그나마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속마음을 내보일뿐 타인을 대함에 있어선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지요." "그,그건 그렇죠. 루시아가 좀 심하게 낮을 가리긴하죠."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까지 말이죠." "자신의 마음을 자기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건가요?" "그렇습니다. 아마도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자신이 아이언스 공작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많이 당황하셨을 겁니다." "왜요?" "왜냐하면 루시아 공주님께 있어서 아이언스 공작님은 첫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헉! 첫사랑!" 이 얼마나 낭만적인 단어인가? 내가 루시아의 첫사랑이라니! "루시아 공주님은 연애경험이 없으신 만큼 어떻게 햐야 좋을지 갈피를 못잡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아이언스 공작님을 멀리 하려는것 같습니다." "그,그렇군요" 사랑하기에 멀리한다는건가? 역시 루시아는 날 사랑하고 있었어! "그럼 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뭔데요? 차근차근 말씀해 주세요." "첫째는 이제까지 하시던대로 계속 강하게 밀어붙이는 겁니다. 루시아 공주님이 수동적이신 만큼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적극적으로 나가시는 겁니다. 그럼 루시아 공주님께서도 결국 아이언스 공작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실 겁니다." "두번째는요?" "두번째는....." 지니는 잠시 말을 멈추로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빨대를 이용하지안혹 직접 잔에 입을 대고 마신 지니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루시아 공주님께서 완전히 마음을 정리하실 때까지 가만히 놓아두는 겁니다. 그동한 적적하실 테니 저와 함께 나이트에 가시는것은 어떠신지요?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물좋은 나이트를 몇 곳 몰색해 놓았습니다." "........" 이 인간이 진짜! 그래도 물이 좋다는 말을 들으니 좀 끌리긴 한다. 하지만 한번만 더 바람피다 걸리면 그날로 끝장임을 잘알기에 난 꾹참았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루시아 뿐입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때론 간식을 먹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넌 간식만 먹잖아! 어쨌든 나름대로 적절한 비유다. 하지만 어떠한 논리를 갖다 붙인다 한들 나의 일편단심 민들레같은 마음을 꺾을 수는 없다. "저는 밥을 먹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간식에 손을 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냄새만 맡으셨을 뿐 아직 한 숟갈도 못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럴땐 간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 헉! 이인간이 이런 강력한 유혹을! 내가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지니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식욕은 이찌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니 간식으로 먼저 배를 채우신 다음 밥에 도전하는 것은 어떠신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간식에 손을 대신다는 사실은 저와 아이언스 공작님만의 비밀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과 제가 입을 다물기만한다면 그 누구도 모를겁니다." 지니는 계속해서 나를 꼬드겼다. 여려가지 논리와 비유를 갖다 붙이고, 이런저런 예까지 들었다. 듣다보니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다. 하지만 지니의 유혹에 거의 넘어가려는 찰나 루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리스 루시아. 청조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 언제나 아이들을 챙겨주는 자상한그녀. 화도 잘 내고 삐지기도 잘 하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녀. 그녀야말로 나의 전부이고,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다. 그래,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녀를 배신할순 없어! 무엇보다 난 이미 현장을 들킨 전력이 있기에 한번만 더 걸리면 바로 끝장이다. 루시아 성격으로 봤을때 당장 이혼 서류를 내밀게 분명하다.(라지만 결혼서류에 도장 찍은적도없다. 결혼을 했어야 이혼도 할거 아닌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에게는 오직 루시아뿐입니다.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한여자만을 바라보며 사는 망부석 같은 남자입니다." "누가 들으면 진짜인줄 알겠습니다." "........" 이봐, 지금 그말 무슨 의미야? "진짜입니다. 정 못 믿으시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망부석으로 폴리모프 해보이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실언을 한 것 같은데 용서해주십시오." "아닙니다. 저에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난 레모네이드를 빨아먹었다. 빨려 올라오는 대로 꼴깍꼴깍 삼키다 보니 잔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난 남아있는 얼음을 입에 털어서 깨먹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첫번째 방법을 택하실 생각이십니까?" "예, 루시아가 저에대한 마음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아제까지 찝쩍거린 것보다 더 열심히 찝쩍거릴 생각입니다. 그럼 루시아도 언젠가는 제 마음을 알아주겠지요." 난 최선을 다해 루시아에게 찝쩍거리겠다는 각오를 숨기지 않았다. 지니는 감탄을 하며 말했다. "과연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다르다니요?" "방법을 달리해서 접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법을 달리한다면...구체적으로 뭘 말씀하시는 거죠?" "강렬한 임팩트가 필요하다는 거지요." "강렬한 임팩트?" "그렇습니다. 여자는 때로 남자가 강하게 리드해주길 바라기도 합니다." "그,그런가요?" "루시아 공주님께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때야말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럼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그 모습에 반해 평생 아이언스 공작님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헉! 평생 믿고 따르다니! 그,그말씀은..." "그렇습니다. 결혼을 의미하지요." "겨,결혼! 루시아와 내가!"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바라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무,물론 바라고 있지요. 루시아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것을." "결혼이란 서로의 믿음과 신뢰를 담보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만큼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셔야합니다." "그러니까 그 강력한 의지를 어떻게 보여야하냐는 거지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진심을 솔직하게 표현하십시오." "예? 전 이제까지 솔직하게 표현해 왔는데요." "그 표현을 좀더 강하고 직접적으로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그야 당연 라이 동생을 만들어주는것....." "그걸 직접적으로 표현해보십시오." "지,직접적으로요?" "동생을 만들어주고싶다는 것은 아이언스 공작님이 어떠한 행동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그,그건 그렇죠.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말도 있으니." "정확히 어떠한 행동을 하고 싶은지 루시아 공주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시오." "헉! 그,그걸 말하라구요?" "그렇습니다. 때로는 돌려서 말하는 것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효과가 큰법입니다. 어쩌면 루시아 공주님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그말을 해주시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지만...." "용기를 내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용기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 법입니다." "그,그렇겠죠?" "역대 수많은 공주와 용사의 사랑이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용사들은 숱한 난관을 뛰어넘어 공주의 사랑을 쟁취해냈습니다. 전 이역시 비슷한 상황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그런데 직접적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간단하게 샅이 자고싶다고 말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일명 동침이지요." "헉쓰! 그,그런 대사를 어떻게 직접적으로........루시아가 화내지 않을까요? 루시아 성격에 그런말 들으면 화낼것 같은데." "아닙니다. 어쩌면 루시아 공주님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그런 말을 해주시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별로 그럴 것 같진 않던데요." "그건 해보지 않고는 알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했다가 뺨이라도 맞으면..."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 법입니다. 지금 용기를 내지 않는 다면 평생 라이미안님의 동생을 만들어주는 것은 힘들 지도 모릅니다." "헉! 평생 라이의 동생을 만들수 없다니!" 확실히 지니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리고 지니는 아이리스 왕국의 참모가 아니던가? 게다가 연애에 대해서도 굉장히 박식하다. 이인간이 여지를 좀 많이 사귀어 봤어야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니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내가 그동안 이인간 말 들어서 싼게 한두번이 아니다. 저번 나이트클럽 사건도 이인간이 날 꼬드기는 바람에 그렇게 된것 아닌가? 으음,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따르자고 하니 찝찝하고, 안 따르자니 더 찝찝하다. 난 잠시 고민을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안 따르기로. 그래. 어차피 이건 루시아와 나 사이의 만제야. 나만큼 루시아를 잘아는 사람은 없어. 지니가 루시아에 대해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어? "참고로 전 루시아 공주님이 걸음마 하실 때부터 지켜봐 왔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루시아 공주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 이런 말을 들으니 또 마음이 끌리는군. "그런데 그거 정말 효과가 있는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효과만 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몸소 시범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어떻게요?" 지니는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근처에서 서있는 여종업원에게 다가갔다. 방학을 맞아 학비 벌이 알바를 하는것 으로 보이는 여종업원. 앳된 얼굴을 보아하니 올해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 같다. 갈색으로 물들인 단발머리와 갸름한얼굴, 작고 단일한 체구,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제법 귀엽게 보인다. "무,무슨일이세요?" 여종업원 앞에선 지니는 다짜고자 말도없이 그녈 벽쪽으로 밀치며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같이자자." "........" 헉쓰! 저인간이 무슨짓을! 난 두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소리없는 절규를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처음보는 여자한테 어떻게 저럴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나이트클럽어세 부킹해서 만난 여자도 아닌, 평범한 카페에서 서빙을하는 순진한 여자에게! 설마 미친거냐,사일런스 지니? 너도 나처럼 욕구불만? 아무리 욕구불만이라도 이건 아니다. 비록 욕구가 극에 다다랐다 할지라도 해서 될 일과 안 될 일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지니가 한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1.당장 튀어나가 지니를 말린다. 2.일행이 아닌척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나 아이리스 왕국의 공작 아이언스 히로. 이제까지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동료를 버린적이 없다. 하지만 언제든 위기 상황이 닥치면 동료를 버려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난 당장 튀어나가 지니를 말...리는 대신에 슬그머니 일어나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전혀 지니와 상관이 없는 사람인 척 행동했다. 흠흠, 나 이이리스 왕국의 공작 아이언스 히로.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원래 이런인간이다. 난 다른 곳을 보는 척 하며 슬쩍 지니를 보았다. 난 여종업원이 당장 얼굴을 붉히며 지니의 뺨을 때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여종업원은 엉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좋았어! 이제 뺨을 때리는 거야! "....." 사실 지니가 여자한테 뺨 맞는 모습 전부터 꼭 한번 보고싶었다. 나만 얻어맞는것은 불공평하잖아. 빨리때려! 세게! 나의 응원에도 불구히고 여종업원은 지니를 때리지 않았다. 대신 살포시 지니의 품에 안겼다. 그러면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 뭐야,이 어이없는 진행은? 아무리 설정상 지니가 완벽남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한거 아냐? 말도 안돼! 난 다시 두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소리없는 절규를 했다. 여종업원과 몇마디 나눈 지니는 나에게 다가왔다. "루시아 공주님 께서도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럼 전 저 여성분과 약속이 있어서 먼 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계산은 제가 하고 갈테니 안심하십시오." 지니는 여종업원과 함께 다정하게 카페를 나갔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부러운자식! "여기 냉수 한컵이요!" 난 냉수가 나오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잔을 세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탁! 그래.좋았어. 나도 한번 해보는 거야! 지니가 했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 있어? 사실 강렬한 카리스마하면 아이언스 히로 아닌가? 내가 박력있게 밀고 나가면 루시아도 넘어올 게 분명하다. "그래! 내가 얼마나 박력있는 남지인지 루시아에게 보여주는거야! 난 할 수있어!" 난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나 소려쳤다. 그러자 카페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집중되었다. "......" 모두 나만 보니 좀 부끄럽군. 어쨋든 나는 당당하게 가게를 나섰다. 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는 어린 앨프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어떻게 니들은 볼때마다 뭘 먹고 있니? 역시나 우리 애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 달느 앨프들 한끼 먹을때 우리애들은 세끼먹고, 다른 앨프들 1시간 잘때 우리애들은 3시간 잔다. 이렇게 먹고 자기만 하는데도 살이 안찌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그나저나 루시아는 어디에 있는거지? 방에있나? 방에 들어가 볼까 생각하는 루시아가 거실로 나왔다. 루시아는 바구니를 들고 있는데 그안에는 옷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빨래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루시아의 모습을 본 나느 바로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정말로 해야하는 건가? 혹시 거절당하면 어쩌지? 실패에 댛나 두려움이 계속해서 내 발목을 붙잡았다. 안돼! 실패를 두려워하면 앞으로 나갈수 없어! 용기를 내자. 나의 진심을 루시아에게 보이는거야! 난 결심을 하고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루시아는 날 보더니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 난 대답을 하는 대신 루시아를 벽으로 밀어 붙였다. 루시아는 깜짝놀라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왜,왜이래?" 루시아는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크게 당황한듯 했다. 난 벽을 손으로 짚으며 루시아를 보았다. 마치 보석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 새하얀 피부위로 흘려내린 백금발 머리카락. 은하수를 찍어 붓으로 그린듯한 눈썹, 오똑한 콧날, 그리고 그밑에 있는 도톰하고 붉은 입술. 숨이 멋을 것만 같은 아름다움이다. 가슴이 두근거려 터질것만 같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해야한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기 없을지도 몰라. 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너랑 자고 싶어." 드디어 말했다! 루시아의 눈동자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루시아는 당황해 어쩔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난 초조하게 루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시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무,무슨말을 하는거야?" 난 루시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널 사랑해. 이게 나의 진심이야." 루시아는 나의 시선을 피하려는듯 고개를 돌렸다. "가,갑자기 그런말을 해도......." "갑자기가 아니야! 난 예전부터 널 사랑해왔고,앞으로도 평생 너만 사랑할거야. 난 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없어. 넌 나의 전부야. 사랑해 루시아." "바,바보.." 난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내 입술로 루시아의 입술을 덮었다. 순식간에 서로의 혀가 얽혔다. 짧고 강결한 키스였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듯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미친듯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아이들이 보고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지금 이순간 만큼은 누구도 우릴 방해할수 없었다. 난 천천히 입술을 땠다. 루시아는 다리가 풀린듯 비틀거렸다. 난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뜨거운 눈길로 날 바라보던 루시아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아." "허,허락하는거야?" "응. 어쩌면 난 이런날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동안 많이 망설였는데 이젠 확신할수 있어. 날 사랑한다는것을." "루,루시아...." 난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라자 루시아는 나를 살짝 밀어 냈다. "애들이 보고 있잖아. 방으로 들어가서 계속하자." "응." 난 루시아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 잠근뒤 루시아와 함께 침대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런식으로 진행 되면 정말 좋겠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아아~ 이게 상상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로 나와 루시아가 사랑을 나눌수 있다면.... 그래서 그 사랑이 결실을 맺어 라이의 동생이 태어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일 것이다. 그래. 애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용기를 내야해! 난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우리라이,루,루비에게 동생을 만들어 줄수만 있다면 이 한 목숨 아깝지않다. 살신성인의 자세로 임하리.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진 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설 소파에는 어린 앨프들이 옹기종기 모여 간식을 먹고 있었다. "......" 어떻게 니들은 상상속에서나 현실속에서나 계속 먹고 있니? 대체 밥을 안주는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간식을 먹는건지.... 정마로 땡땡한 볼살 유지하는데 칼로리가 많이 소모되나? 그래서 항상 무언가를 먹는건가? 그나저나 루시아는 어디에 있는거지? 상상대로라면 방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구니에 빨랫감을 담아 거실로 나올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루시아가 거실로 나왔다. 그서도 손에 빨래바구니를 든채! "....." 헉! 상상과 똑같다. 설마 이대로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있다. 사실 그동안 너무 끌어왔다. 이쯤에서 베드씬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 뻔하다. 즉, 이글의 전개로 했을때 이쯤에서 반드시 베드씬이 등장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전체적으로 글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판매량도 따라서 증가하게 되는것이다. 후후~ 오늘은 역사적인 날로 기억되겠군. 난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루시아는 날 보더니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 ".........." 대사까지 똑같다. 좋았어 이제 이대로 밀고 나가기만하면 되는거야! 난 루시아르 벽으로 밀어붙였다. 루시아는 깜짝놀라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왜,왜이래?" "......." 왜이러긴 루시아는 갑작스러 나의 행동에 크게 당황한듯 했다. 난 벽을 손으로 짚으며 루시아를 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카리스마 있어 보이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너랑 자고싶어." 아아~멋지다! 너무 멋지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반하지 않겠는가? 모든것이 너무 완벽하다. 이제 이대로 방으로 직행하면 드디어 라이 동생 제작1단계가 완료되는 것이다. 루시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루시아는 당황해 어쩔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난 루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서 너의 진심을 말해,루시아. 날 사랑하는 마음을 더이상 숨길 필요없어. 루시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고 손을 세게 휘둘러 나의 뺨을 때렸다. 짜악! "........" 뭐야? 데체 무슨일이야? 난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간 다음에야 내가 맞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루시아의 행동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어,어떻게 이런일이........이,이건 예정에 없던 일인데.." "이 저질! 뭐? 나랑 자고싶다고? 너 그걸 말이라고해?" 루시아는 정말 화가 난듯 눈꼬리를 치켜뜬 채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 눈빛과 목소리에는 경멸이 듬뿍 담겨있었다. 여,역효과다!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아니야, 루시아. 자,장난이었어. 요즘 니가 침울해 하는것 같기에 웃겨주려고...... 아하하~ 화는거 보니 별로 재미 없었나보네." "장난?" 루시아는 더 화가 났는지 반대쪽 뺨도 후려쳤다. 짜악! "이 바보,변태,치한,저질,색마!" "잘못했어 루시아. 내가 잠시 미쳤었나봐. 한번만 용서해줘." 난 재빨리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렸다. "너 같은건 꼴도 보기싫어! 나가 죽어버려!" 쾅! 그러게 소리친 루시아는 방으로 들아가 문을 세차게 닫았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문을 잠갔다. 놀란 나는 방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용서해줘, 루시아 내가 다 잘못했어.그건 나의 본심이 아니었어. 아니,본심은 맞는데..... 아니 그러니까...." 난 열심히 방문을 두드리며 용서를 빌었지만 굳게 닫힌 방문은 열릴줄 몰랐다. "흑~ 이게 아닌데.."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역시 애초에 지니의 말을 들은 것두터 잘못이었다. 간신배 사일런스 지니의 말을 믿다디 내가 잠시 어떻게 되었었나 보다. 사일런스 지니......니가 이런식으로 뒤통수를 칠줄이야....... 잘 될거라면서? 루시아도 기다리고 있을 거라면서? 그런게 결과가 이게 뭐야? 잘 되기는 커녕 오히려 점수만 잃었잖아! 이제 루시아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이제 난 끝이야. 완전히 끝장났어! 한순간의 실수가 돌이킬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난 파멸의 구렁터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곳에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루시아의 얼울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아니, 그전에 집에서 쫒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난 이제 어쩜 좋지? 아까의 상상이 현실이고, 지금의 현실이 상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한번 엎지른 물은 주워담을수 없듯이,한번 저지른 일은 돌이킬수 없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문제는 또있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라이와 루비가 벌떡 일어나 나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라이와 루비는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소리쳤다. "너무해요 오빠!" "루비는 오빠한테 막막 실망했어요!" "그,그게 무슨 말이니? 이 오빠는 너희들 동생 만들어주기위해 그런건데." "어떻게 오빠를 좋아하느 라이를 놔두고 언니랑 같이 자고 싶다는 말을 할수 있어요?" "루비도 오빠랑 같이 자고 싶단 말이에요." "......" 헉!그,그런! 난 놀라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라이외 루비가 날 좋아하는 것을 알았지만, 설만 나에게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같이 자자니! "아,안돼. 너희들은 아직 어려." "라이는 다 컸어요. 700살도 넘었는걸요." "루비도 다 컷어요. 루비는 60살도 넘었어요." "그,그래도...아,아무튼 안돼. 그리고 나에겐 루시아가 있어!" 내가 루시아 얘기를 꺼내자 라이와 루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엥~ 우엥~ 오빠는 루시아 언니만 좋아하고...." "으앙~ 으앙~ 루비가 싫어진것이 틀림없어." "아,아니야 얘들아 너희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아니야." "우에에엥~ 라이는 오빠랑 자고 싶어요오." "으아아앙~ 루비는 오빠랑 같이 잘래요오." 펑펑 눈물을 쏟는 라이와 루비. 게다가 이곳은 루시아 방 앞이다. 안그래도 루시아한테 찍혔는데 애들까지 울렸다고 해봐라. 어쩌면 점수가 마이너르로 내려갈지도 모른다. "지,진정해 얘들아. 아! 일단 오빠 방으로 들어가자." 난 우는 라이와 루비를 양 옆구리에 끼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아는 침대에 엎드려 배개에 얼굴을 묻었다. 밖에서 히로가 용서를 비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했어. 한번만 용서해줘. 다시는 안그럴께. 기분이 풀릴때까지 나를 패. 대략 이런 말들이었다. 루시아는 듣기 싫다는듯 베개로 귀를 막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자 루시아는 베개를 내려 놓았다. 너랑 자고싶어. 히로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물론 히로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우외적으로 표현하기도 했고,정말로 일이 생길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루시아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바보! 바보! 바보!' 그 말을 듣고 너무 당황해 자신도 모르게 뺨을 때리고 말았다. 그리고 장난이라는 말에 정말 화가 났다. '뭐? 장난이라고? 그런말을 해놓고 장난이라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루시아는 자신의 마음을 알수가 없었다. 히로를 좋아하긴 하지만 아직은 두려웠다. 그래서 좀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한걸음씩 나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그런말을 할 줄이야.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어떻해? 게다가 애들 보는 앞에서!' 방금전의 일이 게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을 벽에 밀치며 말하던 히로의 모습. 순간적으로 놀랐자면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화를 냈다. 시간이 지나 흥분이 많이 가라않은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루시아는 어째서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이해할수 없었다. 히로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그저 놀랬기 때문일까? '아아~몰라.' 루시아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생각하지말자. 그래,아까 히로의 말은 못들은걸로 치는거야 더이상 거기에 신경쓰지 않을거야.' 하지만 신경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고해서 신경이 쓰이지 않을리 없었다. 루시아는 방을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히로의 얼굴을 보는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나랑 자고 싶은 걸까? 생각해보면 그여자랑은 이미 잤잖아.' 루이아는 라이레얼을 떠올렸다. 레몬빛 머리카락과 레몬빛 눈동자를 지는 하프앨프 여성. 그녀는 루시아가 보기에도 너무 아름다웠다. 미의 종족이라는 앨프나 폴리모프한 드래곤보다도 아름다울 정도였다. 오죽하면 드래고까지 반해서 쫒아다니겠는가? 그러니 히로가 한때 반해서 사귀었닥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것이다. '나쁜자식. 어떻게 날 두고 다른 여잘알 잘 수있어? 혹시 지금도 좋아하는거 아니야? 아,아니겠지? 그여자가 좋았으면 진작 다시 사귀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여잘 좋아하면 나한테 같이 자자느 말을 할리 없잖아. 그렇다는건 히로 말대로 둘사이는 완전 끝난게 맞겠지?' 라이레얼을 생각하면 뭔가 불안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인데 남자인 히로가 보기에는 어떻겠는가? '뭐,뭐야?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거야? 히로랑 그여자랑 무슨 짓을 하던 나랑 상관없어. 그런 저질이 무슨짓을 하든 내가 알바 아니야.' 루시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베개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같이 자자는게.....이,이런뜻이었니?" 난 침대에 누워있고, 라이와 루비는 내 양쪽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두 앨프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 오빠와 같이 낮잠을 자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헤헤~ 루비는 오빠 팔베고 자는게 막막 좋아요." "라이는 오빠팔이 너무 편해요." "오빠도 좋죠?" "으응 무,물론이지. 이 오빠도 라이랑 루비랑 같이 낮잠을 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쁘구나." "헤헤~ 안녕히 주무세요 오빠." "잘자요 오빠." "으응, 라이랑 루비도 잘자." 같이 자자는게 이런 뜻이었을 줄이야... 으음, 난 또 뭐라고. 그럼 그렇지. 애들이 그속에 담긴 오묘한 뜻을 알리가 없지. 괜히 혼자서 난리쳤다. "........" 잠깐, 어린애들이 같이 자자는 말을 이상한 쪽으로 해석한 것부터가 뭔가 이상하잖아. 혹시 나는 나쁜인간? 헉! 순수함과 동심의 대명사인 아이언스 히로가 어쩌다 이렇게 타락했단 말인가? 미안해,얘들아. 오빠 앞으로는 안그럴게. 난 라이의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라이와 루비는 잠이 안오는지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자니? 잠이 안와?" "라이는 오빠가 뽀뽀해 주면 잠이 잘 올것 같아요." "루비도요." "그래, 알았어." 쪽! 쪽! 난 라이와 루비의 볼에 뽀뽀을 해주었다. "이제 됐지?" "헤헤~ 자장가도 불러주세요." "손으로 등도 토닥여주세요." "........" 뭔 요구조건이 이렇게 많아? 그래도 잘못한게 있기에 난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자장가도 불러주었다. "잘자라 우리앨프~........." 그렇게 한5분이 지나자 라이와 루비는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 아이들을 잠든것을 확인한 나는 조심스럽게 팔을 빼고 베개를 받쳐주었다. 쌔근쌔근. 자는 모습이 아기천사 같다. 아아~ 아무리 봐도 너무 예쁘다. 귀염성과 깜찍성이 극에 달한 아이들. 우리 애들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객관적 입장에서 봐도 우리애들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깜찍하다. 이렇게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며 행복감이 밀려온다. 평생 아이들 자는 모습만 지켜봐도 지겹지 않을 것 같다. 난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쓸어주고, 볼을 만져주고,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바른 자세로 잘 수 있도록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왔다. 아까까지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루가 사라지고 없다. 어디로 갔지? "......." 헉! 설마? 문득 드는 불길한 예감에 난 재빨리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루는 옥탑방에 있었다. 영아 팔을 베고 누워있는 루. 영아는 루의 등을 토닥여주며 재우는 중이었다. "누나가 옆에 계속 있어줄 테니까 어서자." "......" 자면 뭐하려고? 영아의 눈은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지까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잠이 안와요 누나." "괜찮아. 우리 루 누나 믿지? 누나가 이렇게 손만 잡고 잘게." "....." 정말 손만 잡고 잘까? 루를 바라보던 영아는 귀여워 죽겠는지 괜히 루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꺄아! 우리 루 너무 귀여워!" 갑자기 루를 와락 껴안고 얼굴을 부비부비 비볐다. 루는 영아의 품속에서 바둥바둥 거렸다. "수,숨막혀요 누나." "어머,미안해. 우리 루가 너무 귀여워서 누나가 잠시 이성을 잃었나봐." "....." 이성을 잃어? 짐승으로 폴리모프가 가능한 건 나만이 아니라는 건가? 난 잠시 숨을 죽인 채 영아의 행동을 감시했다. 약3분 후 루가 잠이 들었다. 하긴 지금이 애들 낮잠 잘 시간이긴하다. 라이와 루비도 꿈나라에 가있지. 루가 잠들 것을 확인한 영아는 조심스럽게 루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볼에 뽀뽀를 한다. 꿈나라에 있는 루는 당연히 반응이 없었다. 영아는 그런 루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마,루. 누나가 다 책임질게." "책임지긴 뭘 책임져?" "그야당연.....헉! 오,오빠."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영아는 당황해 어쩔줄을 몰랐다. 잠시 허둥지둥 하던 영아는 기왕 걸린거 막나가자고 마음먹었는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남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고 그래? 여기는 숙녀의 방이라고. 오빠 너무 예의없는거 아냐?" "........" 어렇게 뻔뻔할 수가! "그래, 미안하다. 그런데 지금 해명해야하는건 내가 아니라 너인것 같구나." "내,내가 뭘 해명해?" "루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200자 이내로 해명해봐." "나,난 그냥 루가 졸린것 같아서 재워주려 한 것뿐이야." 영아는 얼굴을 붉히며 발뺌했다. 거짓말 하는 티가 팍팍 난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거짓말도 평소 많이 해본 놈이 잘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니가 루를 왜 재우는데? 그것도 옥탑방까지 끌고 올라와서." "나, 난 애들 고모로서.....그,그리고 내방이 시원하니까.....에어컨도 빵빵하게 틀었어 오빠." "그래서?" "그,그래서...아,아무튼 그렇다는 거야. 난 결백해." "응? 결백? 아무말도 안했는데 먼저 결백하다고 말하는걸 보니 뭔가 캥기는 게 있는 모양이지?" "그,그건......아무튼 난 결백하다니까!" 영아는 더이상 할말이 없는지 무조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나라는 바법부가 개판이다 보니 누구도 법의 정의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온게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 라는 논리다. "그리고 애초에 오빠가 나빠." "응? 내가왜?" "오빠가 라이랑 루비만 재워줬다며? 그러니까 혼자 남은 루가 얼마나 쓸쓸했겠어?" "그거야 내 팔이 두 개 밖에 없으니 어쩌겠니?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 준다고나 할까?" 몰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내팔은 '여성전용' 이라는 것이다. 루가 내 팔을 베고 자고 싶어하는거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어쩌겠니? 원망하려거든 남자로 태어난 걸 원망하려무나. "그래서 니가 대신 팔베게 해주고 있는거야?" "응, 팔베개하고 자고 싶어하는 루를 위해 난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도와준거야." "......" 살신성인의 자세? 이째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 사실 내가 많이 쓰는 말이긴 하지만, 이말의 원조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할때마다 항상 국민을 끄집어낸다. 국민의 뜻이었습니다. 이말 한마디로 모든 행동을 정당화 시킨다. 법안 날치기 통과시키고도, 지들 맘에 안든다고 대통령을 탄핵시키고도, 돈받아 처먹고도....전부 국민의 뜻이라고 박박 우긴다. 심지어는 차떼기로 돈 받아먹은 것도, 비리 정치인 특별 사면하는 것도, 손자들 미국 국적으로 바꾸는 것도, 자기 아들 군대에 빼는것도....전부 국민의 뜻이란다. 자신들은 정말 하기 싫었는데 국민들이 원해서 어쩔수 없이 했다고 주장한다. 혹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국민' 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게 아닐까? 설마 '국민' 이라는 단어를 '봉' '핫바지' '무뇌아' 등으로 알고 있는건 아니겠지?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입법부만 개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부는 멀쩡한데 입법부만 개판이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겠는가? 그래서 우리나라는 입법부,사법부,행정부 삼부 모두 개판이다. 삼권 분립? 국가의 권력을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으로 분리해여 서로 견제 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막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게 하겠다고? 대체 어떤 놈이 이딴 헛소리를 교과서에 써놨는지 모르겠다. 다음법 교과서 개정할때 삼권 유착으로 바꿀 것을 강력하게 건의한다. 입법부에서는 국회의원들이 개판치느라 바쁘고, 사법부에서는 비리 정치인들 석방해 주기 바쁘다. 그리고 행정부에선 국회의원 선거 낙선자들에게 감투 씌워주기 바쁘다. 이렇게 삼부가 손발을 딱딱 맞춰가며 삽질하는 걸 보면 국민들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뭐 어쩌겠는가? 이 모두가 국민의 뜻이라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영아는 루의 머리에 베개를 받쳐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째 불만 가득한 표정이다. "왜 그렇게 퉁퉁 부어있어?" "됐어. 오빠랑 더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 나의 방해로 못하게 되서 화가 난건가? 그런데 영아는 대체 뭘 하려 했던거지? "......" 헉! 설마 루의 순결이 위협 받던 상황은 아니었겠지? 아니야. 영아가 비록 막나가는 앞짱구라고는 하지만 그정도까지 막나.....갈 수도 있으려나? "영아야. 만약에 말이야. 아주 만약에...." "뭔데?" 내가 뜸을 들이자 영아는 흥미가 생기는지 귀를 기울였다. "라이레얼이 너를 벽에 밀친다음 '너랑 자고 싶어'라고 말하면 어떨 것 같아?" "뭐,뭐? 나의 언니가 그런말을...." "아,아니, 그러니까 만약에 말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란다. 괜히 넘겨짚지 말렴." "나, 나의 언니한테 그런 말을 들으면 난 어떻해야 하는 거지? 아아~ 모,몰라,아잉~!" 영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에 두손을 얹었다. 그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아주 좋아 죽는구나, 죽어. 그렇게 좋아 죽어가던 영아는 죽기는 싫었는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라이레얼 언니가 나를 원한다면, 난 기꺼이 나의 몸을 언니에게 바치겠어!" 말을 하는 영아의 눈동자가 굳은 의지로 빛났다. 난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바치지 마!" 영아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내가 내 몸 바치겠다는데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서,설마 오빠도 내몸을 노리고 있는건....." "......." 앞짱구 정신 상태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남자였으면 당장에 묻어버렸을 텐데.... "미안하지만, 니 몸은 거저 준다고 해도 별로 받고 싶은 마음이 없구나. 한 1억주고 가져가라고 하면 한번쯤 생각해보마." 내말에 영아는 눈을 치켜떴다. "뭐? 오빠 말 다했어?" "응, 다했어." "내가 뭐 어때서그래? 남들은 다 예쁘다고 한단 말야." "푸훗~ 우리 영아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들었니?" "허,헛소리 아니야!" "좋아. 그럼 오빠가 간단한 질문을 하나 내지. 니 생각에는 니가 루시아보다 예쁘다고 생각하니?" "그,그건.......루,루시아 언니가 나보다 조금 더 예쁘긴하지." "......" 조금더?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인정할건 인정한다. 사실 자기가 더 예쁘다고 우겼으면 그건 범죄나 다름없다. "그럼 라이레얼과 비교해서는?" "라이레얼 언니가...." "카르는?" "카르가..."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일루니아 언니가........" "라이는?" "그,그건......라,라이." "루비는?" "루,루비......" 이제야 자신의 주제를 파악한 영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수는 없었는지 고개를 버쩍 들며 말했다. "비교대상이 잘못됐어! 오빠네 집에 사는 여자들 빼고 해!" "좋아. 니가 그렇게 원해니 우리 집에 사는 여자들은 빼기로 하자. 그럼 인디와 비교해서는 어때?" "이,인디 오빠도 오빠네 살잖아!" "인디는 우리 집에 사는 여자가 아니야. 남자지.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하니? 니 생각엔 니가 인디보다 예쁘다고 생각해? 응?" "그,그건........인디 오빠가....." 영아는 결국 굴복했다. 아무리 뻔뻔한 영아라고 해도 인디보다 예쁘다고 우기기는 힘들었나 보다. 사실 이질문은 좀 억지긴 하다. 이세상에 인디보다 예쁜 여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인디의 미모는 경국지색이라 할수 있으니... 영아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는 오빠는 어떤데? 오빠는 뭐 잘생긴줄 알아?" "나 정도면 초절정 미남이지." "오빠가 지니 오빠보다 잘생겼어? 크로니스 오빠보다 잘생겼어? 루보다 잘생겼어?" "응응응, 내가 백배는 더 잘생겼어." "뭐? 오빠 되게 뻔뻔하다. 지나가는 여자잡고 물어봐. 백이면 백 다 오빠가 못생겼다고 할걸." "훗~ 그건 이세계 여자들의 미의식이 잘못된거야." "뭐 착각은 자유지.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줬으면 좋겠어. 오빠보다 그 셋이 훨씬 잘생겼고, 라이레얼 언니도 오빠보다 훨씬 훨씬 잘생겼다는 걸." "뭐,뭐라?" 라이레얼한테까지 비교 당하니 자존심이 팍 상한다. 이상하게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라이레얼. 정말로 여자들 눈에는 라이레얼이 나보다 잘 생겨 보이려나? 우리는 서로를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나와 영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스파크가 튀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당장 루시아에게 달려가 무릎꿇고 싹싹 빌지는 못할망정 여기서 사촌 여동생과 눈싸움이나 하고 있다니. 왠지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난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마찬가지로 시선을 거둔 영아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뭘 물어?" "아까 라이레얼 언니가 같이 자자고 하면 어쩔 거냐고 물었잖아." "아! 그건말이지....." "설마 오빠 루시아 언니한테 그렇게 말하려는건 아니겠지?" ".....헉!" "뭐,뭐야,오빠? 그 엄청난 반응은......" 영아의 물음에 난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고, 그런 내모습에 영아도 깜짝 놀랐다. "오빠 미쳤어? 당장 그만 둬!" "그,그게........" "설마 벌써 한건 아니겠지?" "........" "왜 대답이 없어 오빠? 정말 벌써 말한거야?" "........으응." "말도 안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아는 벌떡 일어나 나를 붙잡고 흔들었다. "오빠 설마 미친거야?" "......."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말해봐 오빠. 진짜 미친거야? 완전히 돌은 거야?" "........" 내가 아니라 니가 미친것 같은데. 영아는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한참동안 나를 붙잡고 흔들어대던 영아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루시아 언니가 뭐래?" "그,그게 말이지....." "됐어,오빠. 오빠 뺨에 난 손자국을 보니 결과가 어땠는지 알만해." "........." 그럼 왜 물었니? 영아는 두손으로 엑스를 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응? 뭐가 안돼?" "우리집은 절대 안돼. 여기는 대피소가 아니야. 그리고 나 요즘 무지 바빠. 오빠랑 놀아줄 시간 없어. 그러니까 다른 곳을 알아봐 줬으면 좋겠어." "뭔 말이야!" "오빠는 대체 왜 집에서 쫒겨나면 항상 여기로 오는건데? 여기가 오빠 대피하라 있는 곳인줄 알아? 다른곳으로 가줬으면 좋겠어." "뭐,뭐라?" "나도 내 사생활이 있어! 그리고 아무리 사촌지간이라고는 하지만, 난 여자고 오빠는 남자야. 내 집에 함부로 외간남자를 들이고 싶지 않아." "루는 저기 있잖아." "그,그건...아무튼 안돼!" "......." 내가 벌써 쫒겨났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영아. 그렇게 믿었으면 나를 다정하게 위로해줄것이지, 오히려 내치기에 급급하다. 아아~ 아이언스 히로의 인망이 이것밖에 안 됐단 말인가? "나 아직 안 쫒겨났거든." "응? 정말? 루시아 언니가 아직 안 쫒아 냈어?" ".......어째 말투가 내가 쫒겨나길 바라는 것 같다." "그,그럴리가! 아무튼 안 쫒겨났다니 다행이다. 오빠. 나중에 쫒겨나더라도 절대 여기로 오면 안돼. 알았지?" "........" 쫒겨나면 여기로 온다. 반드시! 난 그렇게 다짐을 했다. 루시아를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자괴감이 든다. 간신배 사일런스 지니의 꼬임에 넘어가 일을 그르치다니! 아아~ 앞으로 루시아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루시아 지금도 화 많이 나 있겠지? "오빠 괜찮아?" "으응." "왜 그렇게 대답에 힘이없어? 그러니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잖아." "흑~ 사실은 너무 무서워. 루시아가 날 경멸어린 눈빛으로 쳐다볼걸 생각하면 그냥 콱..." 영아는 깜짝 놀라 나를 붙잡았다. "아,안돼 오빠! 자살은 안돼!" 난 어이가 없다는 눈길로 영아를 보았다. "응? 뭔 자살? 그냥 콱 숨어버리고 싶다고 말하려 했는데.." "그,그래? 암튼 나쁜마음 품지마. 오빠. 살아 있으며 언젠가는 잘되겠지." "이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고싶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선 내 얼굴도 보려하지 않을 거야. 난 이제 어쩜좋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건 오빠가 알아서 할일이지 나랑은 아무 상관없어." "........" 도움을 청하는 오빠에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다니. 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수 없지. 루시아랑 완전히 끝나면 라이레얼이랑 다시 사귀어야지~" "자,잠깐만 오빠!" 내가 라이레얼 얘기를 꺼내자 영아는 화들짝 놀랐다. 난 짐짓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응? 왜그러니, 영아야? 너랑 아무 상관없다며?" "아,아니야, 오빠. 다시 생각해보니 상관이 있을것 같아. 사촌 오빠 일인데 사촌동생인 나랑 상관 없을리 없잖아. 호호~" "......" 가증스러운 것. "오빠 절대 루시아 언니랑 헤어지면 안돼. 루시아 언니가 끝내자고 하면 치맛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는 거야. 그리고 무조건 싹싹빌어." "싹싹 빌어?" "응, 오빠가 최선을 다해 싹싹 빌면 루시아 언니도 용서해 줄지도 몰라." "그,그런가?" "어쨌든 지금 오빠는 방법이 없잖아. 화를 내는 이유가 뭐겠어? 그건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알리기 위해서야. 그리고 그로인한 생대의 변화를 기대하는거지." "변화?" "여자가 화가 나면 남자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하잖아. 여자는 가끔 그반응을 보고싶을 때가 있어. 그래서 별로 화나지 않아도 일부로 화난척 하기도해. 남자가 여자를 달래기 위해 온갖 행동을 하면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는걸로 받아들여. 반대로 여자가 굉장히 화가 나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면 여자는 무지 실망하지. 그러다가 실제로 끝나는 경우도 많아. 그러니까 오빠는 루시아 언니의 화를 풀어주기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 오빠가 언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루시아 언니다. 분명 화를 풀거야." "그,그래?" 영아의 말을 들으니 한줄기 희망이 생기는 느낌이다. 지옥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내려온 가는 동아줄이라고나 할까? 그래, 아직 나에겐 기회가 있어! 이대로 루시아와 끝낼수는 없어! 반드시 루시아와 화해해서 라이 동생을 만들어 주고 말리라! "그런데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글쎄. 그건 나한테 묻기보다 오빠가 알아서 해야지. 원래 그런 방법은 스슷로 찾는게 중요한거야." "으음, 그렇군." 하긴 계속해서 앞짱구에게 의지할수는 없는 노릇, 스스로의 힘으로 루시아의 화를 풀 방법을 찾아야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이번 위기를 넘긴다면 루시아와 나의 사이에는 한단계 진일보할지도 모른다. 그래, 어번기회에 나의 진심을 루시아에게 말하는 거야! .....라고 다짐해 보지만, 이미 진심을 말했군. 같이 자고 싶다는 말까지 했으니 이이상 어떻게 진심을 밝힐수 있겠는가? "나 저녁때까지 여기 있으마." "왜?" "아무래도 당장 루시아 얼굴을 마주치면 어색할 것 같아서. 루시아도 마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싫어! 싫단 말이야! 난 루와 단둘이 있을 테야!" "....니 말을 듣고 나니 더욱 여기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나 내려가면 루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난 루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옥탑방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영아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불을 땡땡하게 부풀렸지만 감히 집주인을 쫒아낼수는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영아. 난 영아를 대신해 잠든 루를 살폈다. 후후~ 뉘집 자식인지는 몰라도 엄청 잘생겼군. 마치 내 어린시절을 보는것만 같다. "........" 뭐야, 이 허공에서 느껴지는 가소롭다는 시선들은? 흠흠, 내 입으로 이런말 하긴 뭣하지만 나 정도면 엄청 잘생긴편이라 할수있다. 초절정 꽃미남.......까진 아니더라도 절정 미남 정도는 된다. 나정도면 앨프처럼 생겼지! 분명히 말하지만 나 어렸을적엔 루보다 훨씬 잘생겼다. 루의 귀여움 따위야 나의 귀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형을 닮아 제법 잘생긴 루. 크면 여자 꽤나 울릴것 같다. "...." 뭐? 여자를 울려? 설마 루비도 울리는건.......? "헉! 나의 딸 루비를 울리다니! 용서할수 없어!" "왜그래,오빠? 미친거야?" "아,아니 아직 안 미쳤어." 난 곤히 잠든 루를 노려보며 속으로 경고했다. 루비 눈에서 눈물나면 니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해주마! 어쨌든 나중에 루비가 다커서 오빠 품을 떠나 루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우울하다. 하지만 딸자식을 언제나 품에 안고 있을수만은 없는 노릇. 가슴은 찢어지지만 딸의 행복을 우해 보내주는 수밖에. 나의 살기에 놀랐는지 몇번 몸을 뒤척이던 루는 눈을 떴다. "형이 여긴 어쩐일이세요?" "그러는 너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니?" "전 누나가 낮잠 재워준다고 해서 따라왔어요." "........" 역시. 이정도면 거의 '사탕줄게 따라오렴' 수준의 유괴다. 낮잠을 미끼로 순진한 우리 루를 낚다니. 영아도 은근히 지능적이군. 특별히 할일이 없었던 나는 루와 잠시 놀아주었다. "나 배고파 영아야." 내가 말하자 영아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쩌라구?" 이번에는 루가 말했다. "저 배고파요 누나." 그러자 영아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루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 루 배고파? 뭐 먹고 싶어? 먹고싶은거 있으면 누나가 다사줄께. 누나 돈 많아." "...." 뭐야, 이 극과 극을 달리는 반응은? 영아는 루를 무릎위에 얹혀놓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나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 "나도 배고프다니까." "어쩌라구? 먹고싶은거 있으면 알아서 시켜먹어." "나 돈없어" "그럼 이따 우리 루가 먹다 남기면 그거먹어." ".......헉!" 가장인 나에게 어떻게 그런 심한말을! 루다 먹다 남기면 먹으라니! 내가 무슨 시골집 앞마당에서 기르는 똥개야? 이런 모욕은 태어나서 처음........받아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충격이 크다. 아아~ 돈 없이 집 나오니 이런 설움을 겪는구나. 난 루 옆으로 다가가 괜히 친한 척하며 말했다. "많이 남겨줄거지? 그치?" "........" "........" "응? 뭘 그런 눈으로 보고 그러니?" 나 원래 이런 인간인 거 몰랐니? 루가 스파게티 먹고 싶다고 하자 영아는 스파게티 전문점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안 돼 보였는지 내것도 같이 시켜주었다. 잠시 기다리자 따뜻한 스파게티가 배달되었다. 으음, 요즘은 별게다 배달되는군. 항상 느끼는 거지만 시대 참 좋아졌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짜장면 이외에는 배달되는 음식이 얼마 없었는데. "많이 먹어. 모자라면 누나거 덜어줄게." 난 루를 챙기는 영아에게 물었다. "영아야,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어째서 루는 곱빼기고 내거는 보통이야?" "으응, 그건 돈 안냈으면 주는대로 먹으라는 뜻이야. 먹기 싫으면 내려놓던가." "아,아니야 영아야, 맛있게 먹을게, 하하...." 아아~ 비참하다. 너무 비참하다. 잘나가는 공작이었던 아이언스 히로가 이 지경까지 타락하다니 한때 드래곤과 맍서 싸워 세상을 구할 용사라 불리며 모두에게 칭송받던 아이언스 히로가 스파게티 하나 얻어먹으며 구박을 받을 거라고는 그세계사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이렇게 살고있는거 그 세계사람들은 알고 있으려냐? 자세히 보니 루의 스파게티에는 모짜렐라 치즈까지 얹혀져 있다. 내 스파게티에는 그런거 없는데. 루가 먹는 스파게티가 내가 먹는 스파게티보다 백배는 더 맛있어 보인다. 당장이라도 루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뺏어먹고 싶을 만큼. "맛잇니?" "예,막막 맛있어요, 누나." 루한테는 물어보며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는다. 역시 핏줄따위는 믿을게 못돼. 한번 돌아서면 남남만도 못한게 핏줄이라더니. 어쨌든 나느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었다. 혹시라도 라이와 루비가 이곳으로 올라올까 두려워 무지 빨리 먹었다. 이 스파게티까지 빼앗기면 난 정말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이 라이와 루비는 아직 자는 모양인지 옥탑방으로 올라온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스파게티를 다먹을 루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난 옥탑방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읽었다. "오빠 안내려가?" "지금 몇신데?" "밤 11시." "벌써 그렇게 됐어?" "응, 그러니까 빨리 내려가. 나 잘거란 말야." "이 시간에?" 영아는 생활 패턴이 굉장히 불규칙한 편이다. 밤새서 글을 쓰기도 하고, 어떨때는 초저녁에 자기도 한다. 중간에 자다 깨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경우도 었다. "하암~ 나 피곤하단 말이야." 영아는 하품을 하며 피곤함을 호소했다. 내려가기 두려운나는 어떻게는 이곳에 남아있고 싶었다. "오빠 옆에서 자렴." "뭐? 그걸 말이라고 해,오빠? 잠든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글쎄.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니가 루에게 하려던 짓보단 건전할것 같은데." "아무튼 빨리 내려가." "그래 그래." 영아가 자꾸 등을 떠미니 난 어쩔수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조심조심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거실을 살폈다. 불이 꺼진 거실을 조용했다. 루시아와 아이들은 모두 잠든 모양이었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루시아의 얼굴을 보는것이 두렵다. 몰론 이렇게 영원히 피해 다닐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난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었다. 무협채널에선 무현 드라마를 하는 중이었고, 뉴스 채널에선 뉴스를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홈쇼핑 채널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상품을 파는 중이었다. 바로 브라 팬티 15종 세트! 난 재빨리 음량을 줄이고 주위를 감시했다. 그리고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긴 다리에 늘씬한 몸매를 지는 동유럽 미녀들이 워킹을 선보인다. 그녀들이 입고있는 것은 지금 팔고 있는 속옷과 몇가지 장신구뿐. 계절이 여름이어서 그런지 대담하고 예쁜 속옷을 팔고 있다. "으음, 역시 모아주고 올려줘서 가슴이 좀더 거보이게 해주는 몰드 브라가좋지. 어깨끈 탈부착 기능에 누드 어깨끈도 주네. 브라 5종에 팬티 5종,그리고 햄팬티 다섯장이 더가는군. 가격도 저번 방송 할때보다 3천원 더 싸졌네. 게다가 ARS 5천원 할인혜택까지 주니, 지금이 구매 적기이려나? 평소 즐겨보던(?) 프로였기에 난 쇼핑 호스티스가 말하는 전문 용어들을 다 알아들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보고있는데 문득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든다. 사랑하는 루시아를 놔두고 이게 뭐하는 짓인건지. "하아~ 나도 이러는 내가 싫다." 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밌는 것을 보고 계시는군요. 구매하실 생각이십니까?" "허억! 뭐,뭐야,넌?" 어느새 내 옆에 앉아있는 지니.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집안에 들어왔나 보다. 그러는 사이에도 속옷만 입은 모델들의 워킹은 계속되고 있었다. "일은 잘되셨습니까?" 지니는 웃으며 물었고, 그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너 이자식 잘만났다! 너 때문에 내인생은 끝났어!" "잘 안 되셨나 보군요." "보고도 모르냐?" 지니는 화내는 나의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재빨리 지니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일부러 그랬지? 어쩐지 전부터 수상하다 했어. 너 루시아한테 관심있는거지? 그런거지? 그래서 나로 하여금 큰 실수를 하게 만들어 루시아와 떼어놓은 다음 접근할 생각이었지? 헉! 서,설마...." 나는 지니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수 있었다. 나로 하여금 그런 말을 하게 해서 루시아와 헤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틈을 타 루시아에게 접근해 마음을 얻는다. 그렇게 해서 루시아와 결혼한다. 그리고 둘이 같이 아이리스 왕국으로 돌아간다. 현재 아이리스 왕국의 왕은 루시아의 오빠인 키레아. 자식이나 친척이 없는 만큼 키레아가 죽으면 왕위 계승권은 자연히 루시아에게 넘어오게된다. 루시아가 여왕이 되면 국정운영은 지니가 맡게 될것이다. 그리고 루시아가 죽기라도 한다면.... "이,이럴수가! 그래. 그래서 이세계까지 날 따라온 거였군. 모든것이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이었어. 루시아와 결혼한 다음 루시아의 오빠와 루시아를 암살해 아이리스의 왕이 될 생각이었나? 아이리스 왕가의 핏줄을 사일런스가의 핏줄로 바꾸기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거란 말인가? 헉! 그렇다면 일루니아 여사님도 한패? 일루니아 여사님이 한패라면 인디도 한패? 그래. 어쩐지 전부터 수상하다 했어. 그것도 모르고 이제까지 속아왔다니...으윽!" 갑자기 흥분하니 심장에 무리가 온다. 지니는 재빨리 나를 부축해주었다.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분명 말씀 드리지만 전 결백합니다." "결백 좋아하시네! 너 때문에 루시아가 얼마나 화났는지 알기나해? 솔직히 말해봐. 너 일부러 그런거지? 그치? "일단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그에 맞춰서 새로운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웃기지마! 누가 니말을 들을것 같아?" "절 믿어주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루시아 공주님과 결혼해 행복하게 사시는 것 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부서져 가루가 된다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지니는 무릎을 꿇으며 나를 보았다. 지니의 눈동자는 굳은 의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만고에 다시없을 충신의 눈빛이었다. 아아~ 부끄럽도다. 잠시 흥분했기로서니 나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지니를 의심하다니! "사일런스 백작님의 충성심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잠시 흥분 했던것 같군요. 일어나십시오." "예" 우리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듯 웃고 있는 지니를 보니 또 다시 의심이 든다. 정말로 이 인간을 믿어도 좋은 걸까? 그래도 딱히 상담할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난 지니에게 아까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지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음, 아무래도 너무 성급했던것 같습니다." "니가 하라며!" "다시 생각해보니 안 하는게 좋을 뻔 했군요." "...."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니? "일단 루시아 공주님의 화를 풀어드리는게 좋을 듯 합니다." "어떻게?" "선물을 하는 겁니다." "선물?" "마음을 담은 선물을 여자의 화를 봄날 눈 녹듯 풀리게 하지요." "그,그런가요? 그러데 선물이라고 해도 뭘 하면 좋을지...." "저겁니다." "예? 저거라니....헉!" 난 지니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지니가 기리킨것은 다름아닌 텔레지번 화면. 그리고 텔레비전화면에 나오고 있는것은 다름아닌 여자 속옷. "서,설마 속옷을 선물하라는 것은......?" "맞습니다." "헉쓰!" 난 놀라 지니에게 말했다. "너,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런 치졸한 방법으로 나와 루시아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다니!" 속옷 선물이라니! 루시아에게 속옷을 선물했을 경우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눈에 선하다. 보나마나 변태,저질,색마 소리를 들으며 집에서 쫒겨나겠지. 그리고 루시아는 속옷을 쓰레기통에 버릴테고.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서 그래? 루시아가 속옷 선물을 좋아할리 없잖아!" "과연 그럴까요?" 태연하게 묻는 지니의 태도에 난 당황했다. "응? 그게 무슨..?" "어떻게 루시아 공주님께서 속옷 선물을 싫어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그야 당연....." 막상 이유를 말하려고하니 말문이 막힌다. "여,여자들은 보통 그런 선물 싫어하지 않나요?" "과연 그럴까요? 지금 보시는 이 홈쇼핑, 너무 선정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그건좀 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보는거지. 모델들 안나오면 남자들이 뭐하러 보겠냐? "굳이 이렇게 선정적인 방송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자들이 보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모델들이 속옷만 입고 워킹을 하면 남잗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마련이지요. 홈쇼핑의 목적은 제품을 파는 것입니다. 제품을 팔기 위해서는 일단 시청률을 올려야지요. 보는사람이 많아야 사는 사람도 많아 질 테니까요. 하지만 시청률을 올리는 것은 목표가아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구매 계층이 아닌 소비자들까지 굳이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야 그렇지요. 수익성이 아무리 좋다 해도 오늘 내일 하는 노인이 30년 만기 적금을 붓지 않는 것처럼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홈쇼핑에서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뭘 의미 하겠습니까?" "뭐, 남자들도 구매계층이라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실제로 홈쇼핑 속옷 판매 매출 중 상당 비율을 남성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설마 자신이 입으려고 여성 속옷을 구매했겠습니까?" "그런 사람도 있지 않나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특수한 취향을 가진 남성을 제외한 대다수의 정상적인 남성들은 선물용으로 구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은 대부분 아내나 애인이지요." "그,그렇군요.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에게 속옷을 선물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물론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옷 선물을 한다는 것은 자충수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긴 시간을 사귀어 서로를 잘아는 가까운 사이라면 충분히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하지만 루시아는....." "언제까지 그렇게 미적거리실 생각이십니까? 발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그래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속옷을 선물한다면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리고 루시아 공주님께서 그 속옷을 입으신다면 두 분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지게 되죠." "헉! 내가 선물한 속옷을 루시아가 입는다니..."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어째서 이렇게 흥분되는 걸까? 루시아와 나는 연인사이.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속옷을 선물하는 것은 사회적 통념으로 봐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루시아도 그렇게 생각할까? 남녀관계에 있어서 은근히 보수적인 루시아. 어쩌면 정말로 나를 저질,변태,색마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아이언스 공자님." "글쎄요........" 니 말 믿었다가 싼 적이 한두 먼이어야 말이지. "위기는 기회라고 했습니다. 속옷을 선물해 루시아 공주님의 화를 풀고 마음을 얻으신다면 두분 사이는 전보도 더욱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이번 기회를 활용하시지 못한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더 악화될 것입니다." "어차피 더 이상 악화될수 없을만큼 악화된 것 같은데요."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한번만 더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지니의 모습은 확신에 차있었다. 그 모습만 봐선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칠수 없었다. "이번엔 정말 확실한 거죠?" "확실합니다." "장담할 수 있는 거죠?" "예, 믿어주십시오." "......" 믿어달라니까 더 불안해진다. 아무튼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난 지니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루시아에게 속옷 선물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속옷 선물을 하려면 사이즈를 정확히 알아야 할텐데....." 겉옷은 사이즈가 한 치수 정도 틀려도 상관없지만 속옷은 정확히 맞아야한다. 결국 선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루시아의 쓰리 사이즈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십시오 제가 알고 있습니다." "뭐라? 그걸 니가 왜 알고있어!" 난 깜짝 놀라 지니의 멱살을 잡았다. 그라자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척 보면 딱이지요." "......." 단지 보는 것만으로 알수 있단 말인가? "제가 청진기 대면 진단 나옵니다." "......." 내가 잊고 있었군.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다름아닌 사일런스 지니라는것을. 각종 바람둥이 스킬을 마스터 레벨까지 끌어올린 지니. 실제로 지니는 단지 여자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수많으 정보를 알아낼수 있었다. 키,몸무게,쓰리 사이즈,즐겨쓰는 화장품과 향수, 직업, 나이 등등. 이런 스킬은 나도 꼭 배우고 싶다. "...." 그로고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지니는 연애에 필요한 이런 각종 스킬들을 섭렵하고 있는 반면, 내가 지는 스킬이라고는 고작 애들 달래주거나 같이 놀아주는 것 뿐이니. 토닥토닥 스킬, 머리 쓰다듬기 스킬, 고무줄놀이 스킬 등등. 나도 좀 제대로 된 스킬을 배우고 싶다. 난 슬그머니 멱살 잡은 손을 내렸다. "흠흠,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전해 개의치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럼 지금 당장 전화할까요? 아! 방송 종료 시간이 1분밖에 안남았네요. 시간내로 주문해야 캐미솔 상,하의를 공짜로 주는데." 내가 전화기를 잡으려고 하자 지니가 말했다. "제 생각에는 직접가서 사시는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 그냥 주문하면 간단하잖아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문을 할경우 빨라야 모레쯤에야 배송되어 옵니다. 그리고 처음 선물하는 속옷이니만큼 좀더 고급스럽고 루시아 공주님께 어울릴만한 것을 고를 필요가 있습니다." "....." 저기서 파는것도 충분히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아무튼 기왕 지니의 말에 따르기로 한 거 시키는 대로 하는것이 좋을듯 하다. "그,그렇다면 그렇게하죠." "내일 저녁때 시간 있으십니까?" "물론 있지요. 저야 백수 아니겠습니까?" "그럼 내일 저녁때 같이 사러 가기로 하지요.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전 이만."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속옷 판매가 끝나고 나니 별로 볼것도 없다. 난 텔레비전을 끄고 방으로 향했다. 침대는 비어있었다. 루가 없는 걸로 봐서 루시아가 데리고 자나보다. 난 침대에 털썩 누웠다.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는 인디와 루시아가 아침준비에 한창이었다. "아! 일어나셨어요.히로님?" 날 발견한 인디가 먼저 인사했다. 그러자 루시아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당황한 듯한 루시아의 표정. 그리고 더 당황한 나.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 서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아~ 이 어색한 분위기. 정말 너무 어색하다.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긴한데, 어째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거지? 인디는 그런 우리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결국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잘잤어?" "으응." "아하하~ 오늘 날씨 좋다. 그치?" "지금 비 많이 내리고 있어요, 히로님. 이따 저녁때나 돼야 그친대요." "......." 아이씨! 아자식은 쓸데없이 끼어들어 초 치고 있어! 난 인디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루시아를 향해 웃어보였다. "하!하!하!" 이 어색한 웃음소리 비록 입은 웃고있지만 얼굴은 경련이 일어나려한다. "오,오늘 아침 메뉴는 뭐야?" "베이컨 수프와 야채빵, 그리고 으깬 감자 샐러드에요." "......." 너한테 물은거 아니거든. 거기 가사 드래곤은 조용히 좀 하지? 루시아는 두 손으로 앞치마를 붙잡으며 말했다. "나, 나 지금 바쁘거든." "아! 그,그래? 미,미안. 그,그럼 난 이만 가볼게." 난 재빨리 몸을 돌려 부엌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은 나는 다리가 풀려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루시아를 마주보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줄이야. 일진이라는 것들 수백명을 상대하는 것이 차라리 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아까 부엌에서 나올때 어렴풋이 '바보'라는 말이 들린것 같았는데. "......." 설마 인디 이자식이 뒤에서 욕을? 아침식사는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어린 앨프들은 언제나처럼 말없이 꾸역꾸역 잘먹었다. 수프를 후루룩 마시고, 빵을 입에 밀어넣고, 우유를 꿀꺽꿀꺽 마신다. 우리 수스 세숟가락 정도 떠먹었을때 어린 앨프들 앞에 놓인 음식은 이미 동이 났다. 아이들은 입가에 묻은 수프와 빵 부스러기를 닦지도 않은 채 빈접시를 두손으로 내밀며 합창했다. "더 주세요오~!" 이제까지 한두면 있었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디는 기다렸다는듯이 아이들 접시에 음식을 퍼주었다. 이런 때를 위해 일부러 음식도 넉넉하게 만들어 놓았다. 난 빵을 찢어 수프에 적셔 먹으며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아는 머리가 앞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아서 잡고 다른 손으로 수프를 떠먹었다. 아아~ 역시 루시아는 예뻐. 순간, 고개를 돌린 루시아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난 루시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옷에 다흘리면 어떡해? 언니가 밥 먹을 때 조심하라고 했어 안했어? 너희들 정말 왜 이렇게 말을 안듣니?" 루시아는 냅킨으로 아이들의 옷과 입가를 닦아주었다. 마치 나를 피하는 듯한 그녀의 행동에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이 났다. 방안으로 들어간 루시아는 나오지 않았고, 나 역시 방 안에 틀어박혔다. 오후가 되었지만 지니는 연락이 없었다. 어색해서 환장할 것만 같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다른 가족들도 우리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챈 듯했다. 그래서 인지 집안 분위기 전체가 어색했다. 저녁때가 되자 지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 앞 사거리에 있는 백화점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난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백화점 정문에 지니가 서있었다. "들어가지요." "네." 난 백화점 여성 속옷 코너로 들어간 다음에야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남자가 올 곳이 아니라는 것을. 사방에 형형색색의 여성 속옷들이 즐비하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속옷도 있고, 망사로된 속옷도 있고, 끈으로 된 속옷도 있다. 어디다 시선을 둬야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매장 안에 있는 점원과 여자 손님들이 나를 보며 수근거렸다. "저 남자 여자 속옷 사러왔나봐." "생긴 것도 변태처럼 생겼는데, 진짜로 변태인가봐." "대체 여자 속옷은 사서 뭐하려는 거지?" "머리에 뒤집어쓰고 냄새 맡으려는게 틀림없어." "맞아, 분명 이상한짓 하려가 사는 걸 거야." "......." 뭐,뭐야 이반응은? 내가 미쳤다고 머리에 뒤집어쓰고 냄새 맡으려는 용도로 여자 속옷을 사겠냐? 나 변태 아니야!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러면 진짜 변태로 몰릴 것 같다. 아아~ 쪽팔린다. 남자가 여속 속옷 매장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심을 동반하는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나를 보며 수근거린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나,난 그저 사랑하는 여자에게 선물을 하기위해 이곳에 왔을 뿐인데.... 우리나라의 통념상 남자가 여성속원 매장에 들어오는게 이상해 보일수도 있다. 그건 나도 이해한다. 그런데.... "어머, 저 남자 좀 봐." "너무 멋지게 생겼다." "여기에는 왜 온걸까?" "애인한테 선물할 속옷을 고르기 위해 온 것 같은데?" "누군지는 몰라도 너무 부럽다." "받는 여자는 얼마나 기쁠까?" "저란 남자에게 속옷 선물을 받는다면 죽어도 좋아." "그럼 난 맨날 그 속옷만 입고 다닐래, 평생 벗지 않을 태야." "여기 들어오기까지 많이 망설였을 텐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그만큼 애인을 사랑하나봐." "사랑하는 여자에게 속옷을 선물하다니! 너무 낭만적이야!" "응응, 옆에있는 변태와는 차원이 달라." "...." 어째서 지니의 대한 반응은 이런거지? 아니, 같이 들어왔느데 왜 이렇게 반응이 차이가 나? 지니가 여자 속옷 사면 낭만이고, 내가 여자 속옷 사면 머리에 뒤집어쓰고 냄새맡기 위함인가? 대체 뭐야, 이 편파적 여론은! 이러한 여론 때문인지 나는 고개를 푹 숙인 반면 지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행동했다. 이곳 여성 속옷 매장은 20대 중만 정도의 예쁘장한 여직원 두 명이 맡고 있었다. 손님들이 주로 2,30대 여성들이다 보니, 그들의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젊은 여직원을 배치했나 보다. 실제로 한 여직원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여자 손님의 속옷을 골라주고 있었다. 지니는 카운터에 서있는 여직원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지니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여직원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입을 열었다. "무,무슨 일이신가요?" "속옷을 사러왔습니다." 쪽 팔린다면 꽤나 쪽팔린 대사지만 지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말하는 모습이 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어,어떤 걸 찾으시나요?" 여직원의 물음에 지니는 한 걸음 더 다가서더니 여직원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대가 골라주었으면 합니다." "......." 그새를 못참고 작업에 들어가는 거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여직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 여직원은 맡고있떤 손님을 나팽개치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혜정이 너 창고 정리 다했어?" "예? 그,그건 퇴근 시간 전까지만 하면 된다고....." "무슨 말이야? 지금 당장해." "하,하지만 언니...." "이 손님은 내가 맡을 테니까 걱정하지마. 넌 빨리가서 창고나 정리해." 결국 그 여직원은 창고로 쫒겨나고 다른 여직원이 안내를 맡았다. 이렇게 강제로 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면 이쪽이 먼저 입사했나보다. 아아~ 아름다운 인공서열의 세계. 여직원은 지니의 옆에 바짝 접근 하면 물었다. "뭘 찾으세요?" "요즘 유행하는 여성 속옷은 어떤게 있나요?" "아! 이쪽으로 오시곘어요?" 얼굴에 한껏 미소를 모금고 다정하게 쇼핑을 도와주는 여직원.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한장의 속옷이라도 더 팔아보려는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지니에게 무지막지한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애인에게 선물할 건가 봐요?" 은근히 지니를 떠보는 여직원. 질문하는 그녀는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 만약 지니가 긍정하면 그건 애인이 잇다는 뜻이 된다. 그것도 속옷까지 선물할 정도로 사랑하는 애인이. 지니는 고개를 저으며 나를 가리켰다. "아닙니다. 제가 선물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분께서 선물할 것입니다." "그,그래요?" 여직원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돈다. "......." 이봐, 아가씨. 지니한테 반한건 알겠는데 이젠 본업에도 좀 충실하지? "이건 어떠신가요? 요즘 젊은 여성분들이 많이 찾는 건데." 여직원이 보여준 것은 레이스가 달린 흰색 속옷이었다. 화려하면서도 야한 느낌이 난다. "어떻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글쎄요, 아무래도 루시아느 이런 화려한 속옷은 별로 안좋아할 것 같은데." "저 역시 같은 생각 입니다. 루시아 공주님이라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을 더 선호하실 거라 생각됩니다." 여직원은 잠시 매장안을 둘러보더니 다른 제품을 선보였다. "이건 어떠신가요?" ".......헉!" 파스텔 오렌지색의 망사 팬티와 브라. 저걸 입으면 속이 다 비쳐보일 것이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야! ....라지만 저걸 루시아한테 선물했다가가는 정말 맞아죽을지도 모른다. 너무 야하잖아! "이,이건 너무 야한 것 같은데....." 내가 말하자 여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손님. 요즘 이 정도는 기본이에요. 애인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망사나 레이스로 된 속옷을 찾으시는 여성분들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저,정말요?" 그때 내 귀에 들려오는 수군대는 소리. "어머, 너 남자 망사 팬티 사려고해." "미친거 아니야?" "역시 변태였어." "분명 저걸사서 얼굴에 비비며 냄새를 맡겠지?" "생각만해도 불결해." "........" 점점 악화되어가는 여론. 얼굴이 후끈거리고 다리가 부들거린다. 난 지니의 옷을 잡아 당겼다. "저,전 나가있을테니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대신 골라주시면 안될까요?" 그러자 지니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안됩니다." "왜 안되는데요?" "이곳에 반드시 아이언스 공작님이 계셔야 합니다." "......" 뭐야? 왜 내가 이런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건데? 난 지니의 옆구리를 찌르며 작게 말했다. 원래는 멱살을 잡고 소리쳐야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주위 여성들에게 맞아 죽을수도 있다. "너 지금 나 쪽 당하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그렇습니다." "뭐라?" 결국 난 지니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지니는 멱살이 잡힌 상태에서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제가 이곳으로 아이언스 공작님을 모시고 온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헉! 이,이럴수가....." 믿었던 지니가 배신을 하다니! 역시 지니는 간신배였단 말인가? 내가 놀라든 말든 지니는 태연하게 물었다. "여자가 어째서 속옷 선물을 기뻐하는지 아십니까?" "그,글쎄요?" "그것은 남자가 여자 속옷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견디고 계신것 처럼 말입니다. 즉, 남자가 여자 속옷을 사기 위해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고, 여자는 선물 자체 보다도 자신을 위해 남자가 그런 용기를 내주었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무여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이곳까지 모시고 온 것입니다. 후에 루시아 공주님께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속옷을 사기위해 수많은 난관과 역경을 극복하셨다는 사실을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그럼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아이언스 공작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헉쓰! 그렇게 깊은 뜻이!" 그렇다. 구하기 쉬운 선물이라면 누가 못하겠는가? 쉽게 구하기 힘든 것일수록 선물로서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수십억을 가진 사람이 선물한 다이아문도 반지와 가난한 고시생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산 큐빅 반지중 받는 사람 입장에선 어느쪽이 더 가치게 있겠는가? 선물에 담긴 가치가 높을수록 받는 사람은 더 크게 기뻐하기 마련이다.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속옷을 산 것을 알면 루시아는 분명 크게 감동 받을 것이다. "흠흠,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괜히 오해하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난 슬며시 잡은 손을 내렸다. 지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옷의 주름을 폈다. "감히 저분의 멱살을 잡다니!" "저런 찢어죽일 놈을 봤나!" "생기지도 않은 주제에!" "여자 속옷에나 관심 갖는 변태가!" "......." 주위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 지니의 멱살을 한 번 잡았더니 주위 여자들이 전부 날 찢어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본다. 만약 지나가 옆에서 친한 척 하지 않았다면 당장 달려들어 날 밟았을 것이다. 여기 계속 이기가 점점 힘들어 지는군. 빨리 구매하고 나가고 싶은데 문제는 여직원 까지도 나를 찢어죽일것 같은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 뭐야, 점원이 이래도 되는거야? 물건 안팔아? "다른 제품을 더 보여주시겠습니까?" 지니가 말하자 그제야 여직원은 다른 속옷을 골라주었다. "이건 어떠신가요?" "헉쓰!" 여직원이 골라준 것은 티(T)자형 팬티. 줄여서 티팬티. 바이올렛 색상의 티팬티라니! 이걸 루시아에게 선물하면 루시아는 크게 기뻐하면 당장 입어보...기는 커녕 바로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겠지? 그리고 난 집에서 쫒겨나겠지? "너무 야한 것 같은데 좀 평범한 건 없나요? 망사나 레이스 티팬티나 끈팬티 같으거 말고.... 그냥 좀 일반 적인 걸로....." 아아~ 내가 이런 말까지 해야하는 걸까? 쪽팔려 죽겠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직원은 우리를 다른 쪽으로 안내했다. 이번에 보여준 속옷은 제법 정상적(?)인 것이었다. "주로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많이 찾는 스타일이에요. 모던한 몰드스탈일로 보시다시피 수수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이에요. 브라는 안정감있게 가슴을 모아주어 옷을 입었을때 좀더 볼륨감 있어 보이게 해요. 팬티의 안쪽은 순면 원단을 사용해 착용감이 좋고 땀을 잘 흡수해 주지요. 얇은 소재로 되어있어서 통풍에도 좋구요. 이번 여름 시즌에 맞춰서 출시된 제품입니다." 설명을 들은 지니는 나에게 물었다. "어떠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난 여직원이 손에 든 피치핑크색 브라 팬티 세트를 보며 말했다. "으음, 괜찮긴 하군요. 하지만 색깔이 너무 튀는데요. 얇은 옷을 입었을 때는 살짝 비쳐 보일것 같기도 하고." 평소 홈쇼핑 여성 속옷 판매 프로를 즐겨본 나는 여성 속옷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전문가 뺨치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 흠흠, 내가 생각해도 좀 한심해 보이는군. "밝고 시원해 보이면서도 튀지 않는 색은 없나요?" "여자분 살결이 하야신가요?" "예, 백옥처럼 하얗고 깨끗해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 은은한 파스텔 톤의 느낌도 들어가 있어서 새하얀 피부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젊은 여성분이 입으시면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느낌이 잘 살아나는 그런 디자인이에요." 여직원이 내민 것은 민트블루 색상의 브라 팬티 세트였다. 브라의 컵 윗부분에 금색실로 자수가 놓여져 이고, 팬티 였기 브라와 마찬가지로 윗부분에 자수가놓여져 있어 고급스러운 느낌이 연출 되었다. 색상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루시아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사실 루시아 몸매가 워낙 완벽하다보니 어떤 속옷을 입든 다 잘 어울린다. 난 잠시 루시아가 이 속옷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백옥가이 새하얀 피부를 지는 루시아가 민트블루 색상의 브라와 팬티를 입고 내 앞에 서있다. 가느다란 목덜미와 좁은 어깨. 그 아래 위치한 크고 모양 좋은 가슴, 군살이 하나도 붙지 않은 허리와 탄력있고 아름다운 엉덩이. 그리고 길고 늘씬한 다리... 루시아는 천천히 나에게 걸어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고마워 히로.' '아니야 나야말로 입어줘서 고마워' 루시아는 내 앞에서 한 바퀴 돌아본다. 그리고 귀엽게 웃으며 묻는다. '나 어때?' '예뻐, 세상에서 제일 예뻐. 이세상 어떤 여자도 너보다 예쁘진 않을거야.' 루시아는 내 품에 안긴다. 그리고 내손을 잡아 등 뒤로 이끈다. 난 손에 닿는 후크의 감촉에 깜짝 놀란다. 루시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내 귓가에 속삭인다. '히로가 사준 속옷이니 히로가 집적 벗겨줘.' "헉쓰!" 안돼! 갑작스레 피가 끓어오르며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혈관이 팽창하고 심장이 터질듯이 펌프질을 한다. 안그래도 심장이 안 좋은 내가 이런 위험한 상상을 하다니. 난 재빨리 호흡을 가다듬으며 금강부동심법 구결을 외웠다. 소옷 하나 사는데도 목숨을 걸야야 할 줄은 몰랐다. 난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그렇게 한 열번 정도 반복하자 좀 진정이 되는것 같았다. 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지니에게 물었다. "어때요 사일런스 백작님 생각에 이 브라 팬티 세트가 루시아에게 잘 어울릴 것 같나요?" 나의 물음에 지니는 잠시 눈을 감고 상상에 잠겼다. "......." 뭐? 상상? 난 깜작 놀라 소리쳤다. "상상하지마!" 지니는 눈을 뜨며 말했다. "너 상상했지? 그치?" "....."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는 지니. 그런 지니의 모습에 난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왜 대답이 없어? 서,설마...?" 지니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이언스 공작님." "헉! 버,벌써 했단말인가?" 지니는 쓰러지는 나를 재빨리 부축해주었다. 난 지니의 손을 탁 쳐내며 내 발로 일어섰다. 그리고 지니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 한번만 용서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이런 불경한 행동을 할 경우에는 루시아 공주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선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아아~ 이런 넓은 아량이라니. 이것으로 내가 대인의 아량을 갖추고 있음이 다시한번 입증되었다. "이거 어깨끈 탈부착 가능하죠?" "물론입니다. 브라 팬티 세트를 구매하시는 고객 분께는 누드끈도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누드끈까지! 난 다시한번 심사숙고한다음 결정을 내렸다. "이걸로 주세요." "사이즈는 어떻게 되나요?" "예, 사이즈는....." 난 지니에게 들은 루시아의 사이즈를 불러주었다. 여직원은 견본품을 집어넣고 맞는 사이즈를 찾기 시작했다. 허리 사이즈는 말해줄 필요가 없어 안 말해 주었지만, 들었으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루시아 몸매야 완벽 그자체 아니겠는가? 어떻게 관리를 하는지는 몰라도 우리집(옥탑방 제외) 여자들은 전부 완벽한 몸매를 지니고있다. 루시아와 라이레얼을 말할 것도 없고, 일루나아 여사님과 카르까지. 루시아야 타고난 완벽 몸매이고, 라이레얼은 인간과 앨프의 장점만 골라 몰려받은 하프앨프이고, 카르는 드래곤이 폴리모프한거다. 그런데 일루니아 여사님은 대체 몸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걸까? 3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녀같은 몸매를 유지하고 계시다니. 게다가 일루니아 여사님은 항상 일에 바쁜 커리어우먼이시다. 몸매 관리할 시간도 없을텐데. 혹시 몸매 관리는 남편인 인디가 대신 해주나? 아무튼 그 비법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다. 몸매 관리 비법이 담긴 비디오라도 찍어서 팔면 돈 좀 만질수 있을 것 같은데. "......." 잠깐, 생각해보니 라이와 루비두 우리집 여자에 속하는군. 뭐, 라이와 루비도 완벽한 몸매를 지니고있다. 아린애 치고 그 정도면 완벽한 편이지. 걔들이야 완벽한 유아 체형 아니겠는가? 음음, 이젠 좀 컸으면 하는 바램이다. 생각을 하는 사이 여직원은 맞는 사이즈의 속옷을 찾아 꺼냈다. "포장해 드릴까요?" "예." "선물용이라면 안에 카드를 집어넣을 수도 있는데....." "카드요?" "쓰시겠어요?" "예, 쓸게요." 선물에는 카드게 필수 아니겠는가? 난 먼저 계산을 했다. 기껏해야 속옷 한 세트인데 비싸봐야 얼마나 비싸냐? .....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비싸다. 하지만 루시아를 위해서라면야! 계산을 끝마친 나는 여직원이 내민 카드와 펜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막상 쓰러고 보니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다. 진심이 담긴 솔직한 문장을 쓰고 싶은데.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지니가 말했다. "'이거입고 같이 자자' 어떻습니까?" ".....그렇게 제가 집에서 쫒겨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까?" 그렇게 쓰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너무 진심이 담긴것 같아 피하는게 좋을 듯 하다. 내가 무슨 글을 쓸지 망설이는 사이 여직원은 계속해서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직원은 나 때문에 포장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그냥 생각나는대로 쓰기로 했다. 나는 다 쓴 카드를 접어 봉투에 집어 넣은 다음 여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여직원은 그것을 상자위에 놓고 포장을 했다. 포장을 하는 손이 제법 능숙했다. "포장을 해달라는 고객이 많나요?" "예 선물용으로 사가시는 분이 많으시니까요." "저,저기 그럼 혹시 남자들도 사가고 그러나요?" "....." "글세요, 아! 두 달 전에 한 분 계셨네요." "......" 두 달 전? 하긴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여성 속옷 매장에 들어올 만큼 얼굴 두꺼운 남자는 그리 많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지나가던 두 여성이 날 보더니 피식 웃으며 수근거렸다. "저 남자 여자 속옷 사나봐." "설마 자기가 입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돼,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여성 속옷 매장에 들어간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닌것 같은데." "......." 수군거리려면 좀 작게 수근거리던가! 왜 다 들리게 수근거리는 건데? 아아~ 쪽 팔려 죽겠다. 난 루시아를 생각하며 이 쪽팔림을 꾹 참았다. 루시아가 이 선물 받고 기뻐한다면 이보다 더한 쪽팔림도 얼마든지 감수할 자신이 있다. "....." 그런데 이보다 더 쪽팔린 일이 세상에 있을까? "다 됐습니다." 난 포장된 상자를 받아들었다. "가죠, 사일런스 백작....님?" 지니는 매장안의 여자 손님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제 생각에는 이 속옷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어머! 정말요?" "물론입니다." "에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그러지 말고 제가 한번 입어 볼테니 봐주시겠어요?" "원하신다면." "......." 지금 뭐하는 거니? 지니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속옷을 골라주었다. 골라준 속옷이 하나같이 망사 팬티나 근팬티 같은 야한 속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좋아하며 까르르 웃었다. 장담하건대 만약 내가 저 짓 했으며 당장 뺨 맞고 쫒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지니가 하니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안 하는게 없고 못 한느게 없는 지니인 만큼 여자 속옷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 지니는 체형과 스타일, 나이 등을 고려해 가장 어울릴만한 속옷을 골라주었다. 누가 보면 이 매장 직원인줄 알겠군. 하긴 여자만 여성 속옷 매장 직원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능력만 된다면 남자도 충분히 할수 있지. 만약 지니가 여성 속옷 매장에 취직한다면 그 매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빌 것이다. 여자들이 너도 나도 지니 보려고 달려들었겠지. 하지만 지니는 이미 '라이의 집'의 정식 직원. 유능한 직원을 다른 매장에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한시가 급한 이때에 뭐해고 계신 겁니까? 어서 가지요!" "알겠습니다." 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지니를 억지로 끌고 나왔다. 그러자 뒤에서 여자들의 원망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나의 지니님을 돌려줘!" "제 속옷도 골라주세요, 지니님!" "뭐야,저 안 생긴 남자는?" "지가 뭔데 감히 지니님을 데리고 가는거야?" "용서할 수 없어!" "......." 역시 나는 여자들의 공공의 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건가? 난 지니와 재빨리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예, 사일런스 백작님은요?" "저는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오늘 고마웠어요." "별말씀을. 그럼 일이 잘 되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그래야지요." 당연 진심으로 기원해야지. 만약 이번에도 안되면 그땐 진짜 사생결단 이니까. 난 지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루시아는 어디있지? 아이들은 놀이방에서 놀고있고, 루시아 방은 비어있다. 난 부엌으로 향했다. 루시아는 인디와함께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방금 저녁식사를 끝마쳤나 보군. 이번에도 나를 먼저 발견한건 인디였다. 설거지를 하던 인디는 날 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 오셨어요, 히로님." "그래 왔다." 행주로 식탁을 닦던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저녁은 먹었어?" "으응, 뭐 대충." 사실 안먹었다. 먹어보야 목구멍에 넘어갈 것 같지 않다. 설사 목구멍에 넘어가도 소화가 될것 같지 않다. 루시아는 평소와 별로 다를바 없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치 저번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 나는 손에 든 물건을 건네줘야한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그순간 루시아가 내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손에 든건 뭐야?" "헉! 이,이거?" "응." "그,그게 말이지...." 문득 드는 생각 정말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속옷을 선물해주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난 아까 여성 속옷 매장에서 당한 쪽팔림을 떠올렸다. 그런 쪽팔림을 견디고 산 속옷을 선물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때은 쪽팔림을 생각해서라도 용기를 내자! 난 두손으로 포장된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이,이거 선물이야!" 놀랐는지 루시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선물? 나한테 주는거야?" "바,받아!" "아,알았어." 난 루시아 가슴에 안겨주다시피 선물을 떠넘겼다. 그리고 재빨리 방으로 도망쳤다. 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으로 절규했다. 아악! 이게 아니야! 원래 계획대로라면 좀더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선물을 전달해 줘야했다. 그러데 이렇게 어이없게 진행되다니!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제 중요한건 과연 그 선물이 루시아 마음에 드느냐 안드느냐다. 마음에 들면 입을테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쓰레기통에 버릴것이다. 정말로 잘될까?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예쁜 원피스나 선물할걸. 이건 정말 너무 큰 모험이다. 일종의 도박이라고나 할까? 성공하면 더 가까워지겠지만, 실패하면 더 악화되는거다. 그야말로 '모아니면 도' 인 상황. 제발 잘 되기를........ 갑작스레 선물을 떠넘기고 후다닥 도망치는 히로의 행동에 루시아는 의아해 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어쨌든 선물이라니 기쁘다. 커플링을 받은 이후에는 별달리 선물이라 할 만한 것들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은근히 이런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랑한느 남자가 주는 선물을 받고 싶은 것은 모든 여자들의 공통된 심리 아니겠는가? "이런 갑작스런 이벤트라니, 너무 낭만적이에요!" 인디는 누가 순정드래곤 아니랄까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모습에 루시아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형부?" 인디는 더욱 눈을 빛내며 루시아를 재촉했다. "어서 풀어보세요.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아,알았어요 형부." '나보다 형부가 더 궁굼해 하는것 같네.' 루시아는 의자에 앉아 선물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인디는 의자를 끌어다가 루시아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루시아는 포장지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었다. 포장이 벗겨지고 내용물이 드러나자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이,이건...."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루시아를 대신해 인디가 말했다. "여성용 속옷이네요." "........" 루시아는 기가 막혔다.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도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다른것도 아닌 속옷을 선물하다니!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괜히 화가 났다. '어떻게 이런걸 선물할수 있어? 대체 날 어떻게 봤기에......' 하지만 인디 생각은 다른듯 했다. 인디는 속옷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어머, 너무 예쁜 속옷이네요." "무슨 말이에요, 형부?" "기쁘지 않아요?" "예? 기뻐요?" 루시아는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저질 변태 색마! 어떻게 이런걸 선물이라고 줄수 있어?" 루시아가 화를 내자 인디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럼 제가 화 안내게 생겼어요? 대체 절 어떻게 봤기에 속옷을....이 저질!" 루시아는 자신이 왜 화를 내야하는지 알수 없었다. 그저 화를 내야 할것 같아서 화를 낸 것 뿐이다. 하지만 정말로 화가 난걸까? 어쩌면 기뻐하는 것이 아닐까? 인디는 웃으며 루시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속옷을 선물 한다는 것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거예요" "아니에요. 히로는 저질,변태,색마여서 이런걸 선물한 거예요. 히로 머릿속에는 그렇고 그런 생각밖엔 없으니까요." "정말 그럴까요?" "그럼 아니에요?" "저도 일루니아님께 속옷 선물 많이 하는 걸요. 그럼 저도 저질 이예요?" "혀,형부는 경우가 다르잖아요!" "뭐가 다르죠?" "그,그야 형부는 언니랑 이미 결혼도 했고......" "전 결혼 전에도 선물했는 걸요." "......." '그래서 언니가 형부를 사귄 뒤로는 예쁜 속옷만 입는건가? 난 형부한테 잘보이려고 그런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전부 형부가 선물해준 건가 보네.' 인디는 속옷을 루시아 앞에 내밀었다. "예쁘지 않아요? 루시아님이 입으시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예,예쁘긴 하네요." 어떻게 골랐는지 몰라도 속옷은 확실히 예뻤다. 한번 입어보고 싶을만큼. '아,아니지. 내가 미쳤어? 히로가 선물한 속옷을 입게.' "형부랑 히로는 다르잖아요. 형부는 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속옷을 선물한거고, 히로는.....부,분명 저질스런 생각으로 선물 했을게 뻔해요!" 인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히로님은 진심으로 루시아 공주님을 사랑해요. 저는 알 수 있어요." "어, 어떻게 알아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예쁜 속옷을 선물할 수 있었겠어요? 남자가 여자에게 속옷을 선물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답니다." "그,그렇지만...." 루시아가 계속 우물우물거리자 인디는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사실은 좋은거죠?" "아,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하나도 안 좋아요!"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두 손을 내젖는 등 인디의 말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는가? 인디는 입을 가리며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인디의 행동에 루시아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고 좋게 생각해 보세요. 히로님께서 이속옷을 고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지, 이 속옷을 사느라 얼마나 부끄러웠을지, 그리고 이 속옷을 루시아님께 선물하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를 냈을지. 아아~ 너무 낭만적이에요." 인디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도취되었는지 얼굴을 붉히며 좋아 어쩔줄 몰라했다. 루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선물을 떠넘기듯 주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던 히로. 아마 선물을 주기까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순간에도 노심초사 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자신 때문에 안절부절하고 있다니. 왠지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건가? 어째서 기쁜 마음이 드는거지? 히로가 나 때문에 안절부절 못해서? 속옷을 선물해 줘서?' "한번 입어보세요. 루시아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저,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형부?" "예, 물론이요. 루시아님은 몸매가 좋아서 어떤 속옷이든 완벽하게 소화해 내지만, 이 속옷을 입으면 귀엽고 여성스러운 면이 많이 강조될 거예요." 만약 다른 남자가 이런 말을 했으면 변태로 오인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디가 말하니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루시아도 마치 여자끼리 수다 떠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 여기 카드가 있네요." 인디는 식탁위에 있는 카드를 집어 루시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뭐라고 써져있어요?" "잠깐만요 형부." 루시아는 카드를 열어보았다. 루시아에게. 선물을 받고 놀랐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장난이나 이상한 뜻으로 이런 선물을 하는 건 절대 아니야. 저번에는 미안했어. 내가 너무 경솔했던 것 같아. 이 선물 받고 화 풀어 줬으면 좋겠어. 사랑해, 루시아. -너를 사랑하는 히로. 한글자 한글자에 히로의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루시아는 몇번이고 반복해 카드를 읽었다. 옆에서 같이 읽던 인디는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훌쩍~ 너무 감동적이에요. 히로님께서 루시아님을 이렇게까지 사랑하고 있을 줄이야. 저도 히로님의 사랑에 지지 않도록 앞으로 더 일루니아 님을 사랑할래요." 묘한 데서 경쟁심을 불태우는 인디였다. 옆에 있던 인디가 이정도로 감동 받았을 정도이니 당사자인 루시아가 받은 감동은 더욱 컸다. "바,바보......." 루시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한두 방을씩 무릎위로 떨어져 내렸다. 인디는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루시아는 카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히로는 정말 바보에요. 그렇죠, 형부?" "사랑하면 누구나 다 바보가 되는 거예요. 루시아님은 좀더 바보가 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인디는 루시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기뻐서 우는 거예요?" "아,아니에요. 누,누가 그런 바보가 준 선물 받고 기뻐할까봐요." '저 무지 기뻐요.'라고 얼굴에 써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짓말을 하는 루시아. 확실히 이편이 훨씬 루시아다웠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제생각에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것 보다는 누군가를 사랑하는것이 더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후후~" 행복이라... 누군가가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루시아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리스 왕국에서 공주의 신분으로 살며 만인에게 떠받들어지는 것보다 지금처럼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애들 기르며 사는것이 훨씬 행복했다. 그 행복은 전부 히로 덕분이었다. 히로가 아니었다면 라이와 루비를 만나지도 못했을 테고, 이 세계로 건너와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히로는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항상 열심히 노력했다. 루시아는 히로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난 항상 히로에게 투저만 부렸으니......' 히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루시아의 표정을 본 인디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방에 들어가 볼께요." "예, 형부." 인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나갔다. 루시아는 한동안 자리에 앉아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히로가 선물해준 속옷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온 루시아는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아 선물 받은 속옷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이걸 입으면 히로가 좋아하겠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루시아는 히로가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헤벌쭉 웃으며 침을 흘리는 히로.. 그리고 음흉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정말 입은 거야?' '혹시 안입은거 아니야?'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치마 한번 들어올려봐.'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벗겨줄게.' ......이런 대사를 하겠지. "...." 그런 생각을 하니 입기가 꺼려진다. '저질! 어쩌면 지금도 속옷 입은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잠깐 나한테 어울릴만한 것을 골랐다는 것은 이미 상상했다는 거잖아!' 루시아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데체 어디까지 상상한 거야? 내 허락도 안받고 그런 상상을 하다니! 흥! 역시 저질이야~!' 세상에 상상을 허락받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아무튼 루시아는 괜히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로 화를 냈다. '정말 입어야 하나?' 이 질문만 벌써 수십 번째다. 특별히 야하거나 이상한 속옷이 아닌만큼 입는데 거부감은 없었다. 단지 히로가 사준 속옷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내가 안 입으면 히로가 엄청 실망하겠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히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왜 이런걸 선물해서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거야?' 계속해서 망설이던 루시아는 결국 입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 딱 한번만 입어보는거야. 돈주고 산 걸텐데 안입으면 아깝잖아. 그,그리고 마침 땀이 차서 속옷을 갈아입고 싶으니. 무,물론 서랍장 안에 있는 속옷을 꺼내 입어도 되지만 겨우 속옷 한벌 꺼내려고 서럽장 여는건 너무 귀찮잖아. 마,맞아! 그렇기 때문에 난 어쩔수 없이 이 속옷을 입는 거야. 결코 히로 때문에 입는게 아니야.' 속옷 한벌 입으면서 뭘 그렇게 생각이 많은건지..... 루시아는 입고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 세계 옷의 장점은 입고 벗기가 참 편하다는 것이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많이 입어 본 루시아는 입고 벗기 편한 옷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공식석상에 나갈 때면 옷 입고, 화장하고, 장신구 다는데만 두세시간씩 소요될 정도였다. 게다가 무겁기는 또 얼마나 무거운지..... 온몸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단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고통이었다. 편의성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채 오로지 미적 아름다움에만 치중한 드레스와 장신구. 그때마다 '이런 짓은 인형한테나 해!' 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이런 입기 편하고 활동하기 좋은 옷들이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겉옷과 속옷을 다벗고 알몸이 된 루시아. 그녀는 조심스럽게 히로가 선물해준 속옷을 입어 보았다. 사이즈가 몸에 맞춘듯 딱 맞았다.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지? 서,설마 다른 속옷들을 꺼내본 건가?' 루시아는 이사할때 있었던 일을 기억해 냈다. "이쪽은 붙박이 옷장으로 인해 루시아 공주님과 따님 두분의 옷을 수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참고르 이 서랍장 안에는 속옷을 넣어 두도록 되어있으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헉! 이 서랍장 안에 속옷을!" 그때 히로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 저질! 대체 내 방에 와서 무슨짓을 한거야?' 어쨌든 사이즈가 맞으니 다행이었다. 만약 사이즈가 안 맞았다면 산곳까지 가서 교환해야 했을테니. 루시아는 속옷만 입은 상태에서 일단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추아 보았다. 새하얀 살결을 감싸고 있는 민트블로 색상의 브라와 팬티. 인디의 평가대로 귀여우면서도 여성스러운 느낌이 났다. 밝을 색상이어서 그런지 시원한 느낌도 들었다. '조금 야한가?' 브라는 가슴을 반 정도 가리고 있었다. 밑에서 받쳐주는 형식으로 가슴을 모아주고 올려주어 안그래도 큰 가슴이 더 커 보였다. 팬티는 약간 하이레그 형식이었다. 사실 그렇게 야한 속옷은 아니었다. 다만 루시아가 조금 보수적이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었다. 이번 여름에 맞추어 출시된 속옷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노출을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나시티나 핫팬츠를 입었을 때도 속옷이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더운 날씨에 맞게 통풍이 잘 되라는 의미도 있었다. '뭐, 이정도는 괜찮으려나? 저번에 보니까 언니는 더 야한 속옷도 많이 갖고 있던데. 전부 형부가 선물해 준걸까?' 루시아는 한쪽 다리를 내밀고 손을 허리이 얹는 등 거울 앞에서 여러가지 포즈를 취해보았다. 살결이 워낙 곱고 몸매가 워낙 좋다보니 더욱 잘 어울려 보였다. 히로가 즐겨보는 프로(?)에 나오는 동유럽 모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니, 그녀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루시아의 미모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루시아는 속옷이 마음에 드는지 계속해서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추어 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예쁜 것 같아. 내 몸매가 워낙 좋아야 말이지. 하긴, 나정도 몸매가 어디 흔하겠어?' 다른 여자가 이런 말을 했다면 공주병으로 오인받아도 할 말 없을 것이다.(그리고 실제로도 공주다.) 하지만 루시아가 하니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175센티나 된느 큰 키와 새하얗고 고운 살결, 크고 모양 좋은 가슴과 군살 하나 없는 늘씬한 허리, 탄력있는 엉덩이와 그아래 쭉 뻗은 긴 다리까지. 어느곳 하나 완벽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여자에 비한다면야........' 한참 동안 거울에 몸을 비추어보던 루시아는 라이레얼을 떠올렸다.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만큼 완벽하다고 자신하는 몸매지만 라이레얼만은 예외었다. 잠시 우울해 하던 루시아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래도 히로는 내가 훨씬 예쁘다고 했으니까.' 루시아는 히로를 생각하며 점짓 도발적인 포즈를 취해보았다. 속옷은 타인에게 보여주는 경우가 적은만큼 아무래도 자기만족적인 성향이 컸다. 즉, 속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기뻐 하는 것이다. 발군의 몸매를 가진 루시아인 만큼 만족감은 더욱 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 루시아는 마치 공주병 환자처럼 보였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루시아는 실제로 공주다.) 루시아가 한창 자신의 몸을 보며 즐거워하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쾅! "꺄...." 놀란 루시아느 두손으로 몸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칫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이 다름아닌 라이와 루비였던 것이다.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일어나 방문을 닫고 잠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애초에 방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만약 들어온 사람이 히로였으면 어쩔 뻔 했는가? '들어온 사람이 히로였다면?' 그런 생각을 하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몸이 뜨거워졌다. '내,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루시아는 생각을 떨쳐낼 겸 침대에 앉아 라이와 루비에게 야단을 쳤다. "너희들 노크도 없이 그렇게 문을 벌컥 여고 들어오면 어떡해? 언나가 노크하라고 했어, 안했어?" "했어요오." "그런데 왜 안했어?" "죄송해요오." 라이와 루비는 고개를 푹숙이며 잘못을 빌었다. 아이들이 시무룩해하는 표정을 보니 루시아는 금방 화가 풀렸다. 사실 너무 당황했을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는 그러면 안돼. 알았지?" "네에~!" 대답은 자신있게 했지만, 앞으로 그럴지 안 그럴지는 두고봐아 알 일이었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방긋방긋 웃는 라이와 루비. 두 앨프는 루시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루시아는 민트블로 색상의 브라와 팬티만 입은 반라의 몸이 아닌가? "너무 예뻐요 언니!" "언니 막막 예뻐요!" 라이와 루비는 동그랗게 뜬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루시아를 보았다. 그 시선에 루시아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짐나 그다지 싫지 않았다. "언니 정말 예뻐?" "예!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루비도 크면 언니처럼 되고 싶어요!" "언니도 예쁘지만 속옷도 예뻐요!" "언니가 입으니까 더 예쁜것 같아요!" "정말? 언니가 입으니까 잘 어울리는것 같아?" "예, 최고로 잘 어울려요!" "루비도 그런 속옷 입고 싶어요!" 속옷이 예쁘고 잘 어울린다는 말에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라이와 루비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루시아의 품에 안겨들었다. 루시아는 두 팔을 벌려 두 앨프를 안아주었다. "라이 언니 가슴에 얼굴묻고 부비부비 할래요!" "루비가 먼저 할래요!" "아니야,루비야. 라이가 먼저 말했어." "루비가 먼저 말했어." "라이는 못들었어!" "루비는 눈빛으로 말했어! 언니는 들었을 거야. 그쵸 언니?" "못 들었죠,언니? 라이 먼저 해주실 거죠?" "루비 먼저 할거야! 라이는 저리가." 말다툼을 하던 라이와 루비는 두 손을 허리에 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또다시 시작된 라이와 루비의 신경전. 말리느 사람이 없을경우 잠시후에 주먹다짐으로 이어진다. 주먹다짐이라고 해봐야 고사리같은 손으로 툭탁거리는게 전부지만. 아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화를 내야 정상이겠지만, 루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에 품에 먼저 안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동안 루시아는 아이들이 히로를 두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많이 부러워했다. 그래서 처음 아이들이 자신때문에 싸웠을때 기뻐 어쩔줄 몰랐다. "그만해 얘들아. 언니가 공평하게 해줄테니까." 그래도 싸우는 모습까지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루시아는 두 앨프를 뜯어말렸다. "잠깐만 기다려 얘들아. 언니 먼저 옷입고." "싫어요! 라이는 지금 부비부비 할래요!" "앗! 라이 치사해!" 라이는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 가슴에 얼굴을 묻었따. 기회를 놓친 루비는 어쩔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라이는 두손을 루시아의 허리에 두르고 얼굴을 마구 부비부비 비볐다. "헤헤~ 언니 가슴 푹신푹신해서 막막 기분 좋아요." "자,잠깐만 라이야 그렇게 심하게 하면...." 라이가 마구 얼굴을 비비는 바람에 루시아는 중심을 잃고 침대에 쓰러졌다. 라이는 루시아의 팔을 베고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손으로 루시아의 가슴을 만지작 거렸다. "헤헤~ 언니가슴 말랑말랑해." "꺄아! 그러지마, 라이야. 언니 간지럽단 말이야." 루시아는 라이를 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침대로 뛰어 올라온 루비는 뒤에서 루시아를 껴안았다. "루비한테도 해주세요." "알았어." 루시아는 이번에 루비를 껴안고 입을 맞춰 주었다. "에헤헤~!" 엄청 좋아하는 라이와 루비. 히로가 일진 연합회 처리한다고 밖에서 나돌아 다니는 사이 어린 앨프들은 루시아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루시아의 피나는 노력도 한 몫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인기도에 바로바로 반영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애들에게 잘해줘야 했다. '역시 아이들은 히로보다 날 더 좋아해'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사실 그동안 아이들이 히로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소외감을 느낀 적도 많았다.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를 껴안고 몸을 비볐다. "언니 몸 부드러워." "응응. 루비는 계속 언니 껴안고 있을래." 맨살에 아이들의 손길에 닿으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만해, 얘들아." "싫어요. 라이는 계속 언니 가슴 만질래요." "언니 품 막막 부드럽고 따뜻하단 말이에요." "우리 라이 루비 왜 이렇게 어리광이야? 다들 착하지? 언니가 이따 또 안아줄게."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떼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랍장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얇은 반팔티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였다. 루시아가 옷을 입자 라이와 루비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는 루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언니는 속옷 차림이 더 예쁜데." "루비 생각에는 아무것도 안입었을 때가 가장 예쁜 것 같아." "응. 라이도 그렇게 생각해." "루비는 크면 꼭 언니처럼 예뻐질 테야." "응, 라이도." 두 앨프는 주먹을 꼭 쥐며 각오를 다졌다. '언니처럼 예뻐지면 오빠가 라이를 더 좋아해줄 테니까.' '언니처럼 예뻐지면 오빠가 루비를 더 좋아하줄 테니까.' 이것이 두 앨프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옷을 다 입은 루시아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러자 루비가 먼저 루시아의 무릎위에 올라앉았다. 루시아는 루비가 떨어지지 않도록 두손으로 살짝 안아주었다. "언니가 입은 속옷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예쁜것 같아?" 루시아는 아이들에게 재차 물어보았다. 히로가 선물해준 속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예, 언니랑 되가 잘 어울려요." "언니가 입으니까 막막 예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에~!" 아이들 칭찬에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너희들 뭐 먹고 싶은거 없니? 언니가 다 사줄게." "피자요~!" "통닭이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라이와 루비. 한번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루시아가 물었다. "왜그래, 라이야?" "이상해요." "뭐가?" "언니가 입고 있는 속옷 전에는 없던 거잖아요." "앗! 그러고 보니 루비도 언니가 그 속옷 입은건 한번도 못봤어요!" 아이들의 날카로운 지적. 방을 같으 쓰는데다 목욕을 끝마친 다음 같이 옷을 갈아입다보니 라이와 루비는 서랍장안에 어떤 속옷이 있고 루시아가 어떤 속옷을 입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라이는 서랍장안에 민트블루 색상의 속옷이 없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고, 루비 역시 루시아가 민트블로 색상의 속옷을 입은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는 수 없어진 루시아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오빠가 선물해 준거야." 어쩔 수 없이 말하는 것치고는 왠지 기쁜듯한 목소리였다.(사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루시아의 말에 라이와 루비는 깜짝 놀랐다. "정말 오빠가 선물해 준 거예요?" "너무해요!" 예상치 못한 반으에 루시아는 크게 떴다. "왜그래?" "......." "......." 라이와 루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쌜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얘들아!" 루시아가 불렀지만 라이와 루비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어디론가'가 여기였단 말인가? 갑작스레 내 방으로 뛰어 들어온 라이와 루비. 무슨일 때문에 왔는지는 몰라도 난 라이와 루비가 도움닫기를 해서 내 품으로 폴짝 뛰어 들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난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잘못하면 뼈가 나갈수도 있기에. 그런데 놀랍게도 라이와 루비느 내 품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대신 내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매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뭐, 스머프 만한 것들이 노려본다고 해봐야 얼마나 무섭겠냐마는.... "무슨 일이니,얘들아?" 내가 묻자 라이와 루비는 동시에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흥!" "흥!" "...." 뭐야? 이것들 왜이래? "얘,얘들아....?" 이번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흥!" "......" 무슨 퍼포먼스 하니? 어째서 인지는 몰라도 불만에 가득차 있는 모습이다. 동그렇게 뜬 눈, 잔뜩 부풀어 오른 볼, 팔짱을 낀 팔, 한쪽으로 돌아가 있는 고개 등등. 그야말로 온몸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지?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는데? 오빠한테 화난거라도 있니?" "흥흥!" "흥흥!" "...." 코옷음이 두배로 늘었다. 난 요 근래 라이와 루비에게 잘못한게 있나 생각해보았다. 같이 안 놀아줬나? 먹고 싶다는걸 안사줬나? 자고 싶다는데 안재워줬나?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요 근래에는 라이레얼과의 말썽도 없었고. 그럼 애들이 왜 이러는 걸까? 혹시 용돈 달라고 시위하는 건가?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두지만 오빠 돈 없다." 난 아이들이 용돈 달라고 손 내밀까봐 미리 선수를 쳤다. 그러자 라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라이한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맞아요, 어떻게 루비한테 그러실수가 있어요?" "응? 데체 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맞아요. 정말 몰라서 묻는거예요?" "그,글쎄. 이 오빠는 잘 모르겠구나." "뻔뻔해요!" "맞아요. 뻔뻔해요!" "....." 한 앨프도 아니고 두 앨프에게 추궁을 당하다니 왠지 밀리는 느낌이다. "이,일단 앉아서 얘기하자,얘들아." "됐어요!" "루비도 됐어요!" "그러니까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유를 말해줘야 오빠가 알지. 천천히 말해보렴." 내가 타이르듯 말하자 라이는 동그란 눈으로 날 세게 노려보며 말했다. "루시아 언니한테 선물줬죠?" "응? 그,그걸 라이가 어떻게....?" "줬어요,안 줬어요? 예,아니로,로만 대답해주세요." "......." 뭐야, 이 갑작스런 취조실 분위기는? "그,그렇게 묻는다면야 '예'라고 대답해야겠지. 선물 줬어." 난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러자 라이와 루비의 표정이 제법 표독스럽게 변했다. 얘들 이 정도로까지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런대 화내는 모습이 참 귀엽군. 마치 아기악마 같은 느낌이다. 머리에 뿔, 엉덩이게 화살표 모양 검은색 꼬리, 등에 박쥐 모양 날개가 달려있으면 딱 일것 같다. 라이 악바와 루비 악마가 오빠를 유혹하면 오빠는 타락할래~ 난 잔뜩 부풀린 볼을 살짝 꼬집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아~ 어떻게 된게 화내는 모습까지도 이렇게 귀여운 걸까? 뉘 집 자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귀엽다. 참고로 우리집 자식들이다. "푸하하하하~" "지금 웃음이 나와요?" "맞아요, 지금 웃음이 나와요?" "........." 흠흠, 무지 무안해지는군. 그런대 애들이 왜 화를 내는거지? 그리고 선물에 대해서는 왜 묻는 건데? 화내는 이유가 선물과 관련이 있는건가? "헉! 서,설마...."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뮬레이션. 선물을 받은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와 함게 방으로 들어가 풀어본다. 상자안에 든것은 다름 아닌 여성용 속옷. 그럿을 본 셋을 깜짝 놀란다. 루시아는 너무 불쾌한 나머지 화를 낸다. '대체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런걸 선물할 수 있는거야? 이 저질!변태!색마!' 라이와 루비역시 화를 낸다. '라이는 오빠가 이렇게 저질인지 몰랐어요!' '루비는 오빠한테 엄청 실망했어요!' '라이는 이제부터 저질인 오빠랑 안놀아 줄거예요!' '루비는 저질스런 오빠가 싫어요!' 루시아는 내가 정성껏 고른 속옷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카드는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던진다. 그 모습을 본 라이와 루비는 즉시 항의 하러 내방에 뛰어 온다. 뭐, 대략 이런 스토리가 아닐까? "너무해요 오빠!" "맞아요! 너무해요!" "......." 속옷을 선물한게 그렇게 너무한 일이었단 말인가? "미,미안해 얘들아. 이게 다 간신배 사일런스 지니의 계략이야. 원래 오빠는 안그러려 그랬는데...." "어떻게 언니한테만 속옷을 선물해줄 수 있어요?" "맞아요. 어떻게 언니한테만 속옷을 선물해줄 수 있어요?" ".....응?" "라이가 오빠 좋아하는거 뻔히 알면서......우엥~" "루비가 오빠 좋아하는거 뻔히 알면서......으앙~" 화를 내던 라이와 루비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우엥~ 우엥~ 루시아 언니보다 라이가 더 좋다고 해놓구선..어떻게 언니한테만 선물을...... 라이도 오빠한테 선물 받고 싶었는데 우에에엥~!" "으앙~ 으앙~ 루시아 언니보다 루비가 더 좋다고 해놓구선..어떻게 언니한테만 선물을...... 루비도 오빠한테 선물 받고 싶었는데 으아아앙~!" "....." 그런거였냐? "우에에엥~ 언니한테만 선물주고....라이한테는 아무것도 안주고....." "으아아앙~ 오빠는 루비보다 루시아 언니가 더 좋아진게 틀림없어." 내가 루시아한테만 선물을 줘서 많이 서운한가 보다. 이렇게 화를 내며 펑펑 울줄이야. 아아~ 내 생각이 짧았다. 루시아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어린 앨프들에게는 신경을 써주지 못하다니. 루시아만 선물 받을 걸 보고 라이와 루비가 얼마나 실망을 했겠는가? "우에에엥~!" "으아아앙~!" "미안해, 얘들아. 오빠가 잘못했어." "우엥~ 우엥~ 됐어요. 어차피 오빠는 라이보다 루시아 언니를 더 좋아하잖아요." "으앙~ 으앙~ 이젠 루비가 싫어진거죠? 그런거죠?" "아니야. 우리 라이와 루비가 이렇게 귀여운데 오빠가 왜 루시아 언니를 더 좋아하겠어? 오빠는 라이와 루비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던 라이와 루비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훌쩍~ 거짓말인거 다 알아요." "훌쩍~ 사실은 루시아 언니가 더 좋으면서." "루시아 언니도 좋아하지만, 라이와 루비가 더 좋아. 왜냐하면 라이와 루비는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깜찍하고 예쁘고 착한 앨프니까." 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 팽~!" "패앵~!" 그리고 코까지 풀게 해주었다. 으음, 손수건은 빨아야겠군. 난 라이와 루비를 번쩍 안아들어 침대로 데려갔다. 그리고 라이는 내 무릎위에 앉히고, 루비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게 한다음 어깨에 손을 둘러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뾰로퉁한 표정이었다. "오빠가 잘못했어. 어떻게 하면 오빠를 용서해줄래? 라이와 루비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해줄게." "라이도 선물 주세요." "맞아요. 언니도 선물 줬으니까 루비도 선물주세요. 그래야 공평해요." "그래. 오빠가 선물줄게. 라이와 루비 뭐 받고 싶니?" 애들이라면 왠지 먹을 걸 받고싶다고 할것같다. 케이크냐, 피자냐..... 설마 외식 무료쿠폰을 선물로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속옷이요." "루비도 속옷이요." "헉! 뭐,뭐라?" "언니한테도 속옷 선물해줬으니까 라이한테도 소옷 선물해주세요." "맞아요. 언니도 속옷 선물 받았으니까 루비도 속옷 선물 받을래요. 그래야 공평해요." "......." 뭘 그렇게 자꾸 공평을 따지니? 그렇게 공평한게 좋으면 공산국가로 가든가. "저,저기 다른거 뭐 받고 싶은건 없니? 속옷은 루시아 언니가 많이 사줬잖아. 그리고 혹시 필요한 속옷 있으면 루시아한테 사달라고하면 되잖아." "그래도 라이는 오빠한테 선물 받고 싶어요." "오빠가 직접 선물하 준게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그,그러니?" 사실 얘들한테 속옷을 선물해주는 것 자체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속옷을 선물해주기 위해서는 또 다시 속옷 매장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즉, 그 쪽팔림을 또 다시 감수해야하는 것이다. 아아~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 혹시 다른거 필요한건 없니? 예를들어 먹을거라던가....." "라이한테 속옷 선물해주기 싫은 거예요?" "훌쩍~ 정말로 루비가 싫어진거죠? 그쵸?" 어느새 눈물을 글썽거리는 두 앨프. 울먹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헉! 아,아니야. 얘들아. 오빠가 속옷 선물해 줄게. 사실 예전부터 라이랑 루비에게 속옷을 선물해 주고 싶었어." "정말요?" "응, 물론이지." "그럼 약속해요." 나는 라이, 루비와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을 했다.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찍었다. "헤헤~" "헤헤~" 언제 울었냐는 듯 해맑게 웃는 두 앨프. 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씩 아이들을 상대하다보면 진땀 빠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다. 루시아가 속옷 선물 받은 걸 보고 자기들도 속옷선물 사달라고 하다니. 애들 앞에선 찬물도 못마신다는 말이 맞긴 맞다. "루시아 언니한테 준 것만큼 예쁜걸로 사주셔야 돼요." "루비도 예쁜 속옷이 좋아요." "저,저기 그럼 돈 줄테니까 니들이 직접사......." 아직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라이와 루비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재빨리 말을 바꿔야 했다. ".....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오빠가 사서 선물해 주는 편이 좋겠지?" "네에~!" 끄덕끄덕. 크게 대답을 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두 앨프. 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미치겠다. 요구사항이 충족된 것에 만족을 하는지 라이와 루비는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다. "언니가 입은 속옷 막막 예뻤어." "속옷도 예쁘지만 언니가 입어서 더 예쁜 것 같아." "민트블루 색상이 언니 몸에 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 뭐? 민트블루? 아이들의 말을 엿듣던 나는 깜짝 놀랐다. 난 재빨리 라이에게 물었다. "호,혹시 루시아언니가 오빠가 선물해준 속옷 입었니?" 그러자 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언니가 오빠가 선물해준 속옷이라 그랬어요." "저,정말? 진짜야?" "예, 루비도 같이 있었는걸요." "맞아요, 언니가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헉!" 루시아가 내가 선물해준 속옷을 입었단 말인가? 그렇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는 뜻? "루시아 언니 어때 보였어? 좋아하는것 같았어,싫어하는것 같았어?" "좋아하는것 같았어요. 라이랑 루비가 방안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거울에 몸을 비춰보며 즐거워하고 있던걸요." "거울에 몸을 비춰? 서,설마 속옷만 입고?" "예, 루비도 같이 봤어요." "노크도 안하고 문열고 들어가서 언니가 막막 화냈어요." "......헉!" 이럴줄 알았으면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데! 어째서 내게는 그런 행운이 일어나지 않는거지? 또 다시 라이와 루비가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의 속옷 차림도 볼 수있고 루시아와 같이 목욕도 할 수있고, 루시아의 가슴에 얼굴묻고 부비부비도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루시아의 몸도 마음껏 만질 수 있다. 아아~ 다음 생에는 나도 라이나 루비로 태어나고 싶다. "지,지금은 옷 입었겠지?" "예, 입었어요." "......." 나도 내가 선물한 속옷을 입은 루시아를 보고 싶었는데... 아무튼 마음에 들어 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어쩌나 노심초사 했는데. "라이와 루비 여기서 놀고 있어. 오빠 잠깐 루시아 언니랑 얘기좀 하고 올께." "예, 다녀오세요 오빠." "안녕히 가세요." 두 앨프는 거실로 나가는 나를 방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 고마워서 눈물이 다나려고 하는군. 난 루시아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 선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들어가도 돼?" "......." 대답이 없다. 난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생각. 분명 내 방이랑 루시아 방이랑 다를 건 없다. 인디가 매일 청소해 준다는 것도 똑같다. 그런데 어째서 내방에서는 안 나는 향기가 루시아 방에서는 나는 걸까? 그리고 실제로 향기가 나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느낄 뿐인걸까? 아아~ 나도 루시아 방에서 살고싶다(다시말해 루시아와 같이 살고 싶다.) 루시아는 반팔 티셔츠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간편하면서도 수수한 옷차림. 만약 다른 여자가 이런 옷을 입었다면 너무 평범해서 별 다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가 입으니 평범한 옷도 특별해 보인다. 루시아의 미모가 워낙 출중해야 말이지. 루시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 으음, 침대라..... 난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기위해 노력하며 루시아를 보았다. "오,오늘따라 더 예뻐 보인다." 그러자 루시아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칫 그럼 언제는 안 예뻐 보였어?" "......." 귀,귀엽다! 루시아가 이런 애교스런 표정이라니! 난 재빨리 루시아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저번에는 미안했어." "응? 뭐?" "그 왜 있잖아. 너,너랑 자고 싶다고 말한거." 루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난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그게말이지... 사,사실은 내가 안그러려 그랬는데 지니가 막막 꼬셔가지고... 그,그러니까 지니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그렇게 된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지니가 나쁜놈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거야." "전부 지니 오빠가 시켜서 한 거란 말이야?" "응응, 바로 그거야." "넌 전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그,그건......." 물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많이. 이글의 제목이 '이이리스 2부'긴 하지만 사실 원래 제목은 '라이 동생 만들기' 였다. 뭐, 스토리 진행으로 봐선 '히로의 수난기' 가 가장 어울리긴 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경우1:그렇다고 말하 경우> 나: 물론 있었어.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야. 너랑 자고 싶어. 루시아: 저질! 변태! 색마! 효과음: 짜악! <경우2:그렇지 않다고 말할 경우> 나: 그런 생각 절대 없었어.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 난 그저 간신배 지니의 꼬드김에 넘어간 피해자일 뿐이야. 루시아: 그래? 나랑 자고 싶은 생각이 없단 말이지? 난 드디어 허락할 마음이 들었는데. 뭐, 싫다면 어쩔수 없지. 나: 헉! 아니야, 루시아! 사실은 너랑 자고 싶어! 루시아: 난 이랬다 저랬다 하는 남자가 제일싫어. 저리좀 가줄래? "....." 뭐야? 결국 뭘 선택하든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거잖아. "왜 대답이 없어?" 루시아는 계속해서 나를 몰아붙였다. 난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그게 말이지. 라이가 동생을 원하는 것 같아서. 아! 루와 루비도 동생 갖고 싶대." "넌 어떤데?" "나,나? 나야 뭐... 애들 동생 생기면 좋지." "셋 기르는 것만으로도 힘들지 않아?" "죽을 맛이지.....가 아니라 그래도 하나 더 있어도 괜찮지." "그래?" 다행히 루시아는 더이상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갑자기 말이 없어지니 어색한 느낌이 든다. "저,저기......" "저,저기......" "......" "......" 어색한 분위기를 한층 더 어색하게 만들어주는 일명 동시에 말 꺼내기. 이겨우 다음과 같은 대사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니,니가 먼저 말해." "아,아니야. 니가 먼저 말해." 그리고 이런 대사들은 분위기를 더욱 어색하게 만든다. 우리는 한참동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어색한 자세로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다정하고 뜨거운 분위기가 연출되지는 못할망정 어색한 분위기라니! 난 이런 어색한 분위기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래! 내가 먼저 나서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위기로 바꾸는거야! 일단 선물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선물은 마음에 들어? .....라고 물어보면 되겠지? 난 그렇게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선물은....." "선물 고마워."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루시아가 먼저말했다. 난 눈을 크게 뜨며 루시아를 보았다. "응? 고,고맙다고? 마,마음에들어?" "응, 마음에 들어." 루시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아아~ 다행이다. 쪽팔림을 감수하며 산 보람이 있구나. 마치 그동안의 모든 고통이 보상 받는 듯한 느낌이다. 루시아의 웃는 얼굴을 볼수만 있다면 여성 속옷 매장 한가운데서 텐트 펴고 사는 것도 두렵지 않다. "호,혹시 지금 입고 있는 거야?" 내 물음에 루시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무,무슨말을 하는거야? 바보......." "....."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난 슬며시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을 어깨에 돌렸다. 루시아는 싫지 않은지 가만히 앉아있었다. 루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고있어." "응? 저,정말?" 루시아는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너 이상한 생각 하지마!" "이,이상한 생각이라니! 나,날 어떻게 보고 그런말을......." "너 생각했지? 그렇지?" "아,아니라니까. 내가 정말 그렇게밖에 안보여?" 내가 묻자 루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그렇게 딱 잘라서 말하면 좀 곤란한데...." "넌 하루 24시간중 23시간을 이상한 생각을 하며 보내잖아." "아,아니야!" 이건 진짜 아니다. 난 결코 하루 24시간중 23시간을 이상한 생각을 하며 보내지 않는다. 하루 24시간중 24시간을 이상한 생각을 하며 보낸다. 흠흠, 특별히 내가 이상한 놈이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다 그렇다고나 할까? 뭐, 나야 일반인에 비해 신체가 더욱 건강하다보니 좀더 그런 측면이 있긴 하지만..... "푸훗~" 루시아는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런 루사아의 행동에 난 어리둥절했다. "왜그래?" "아니, 그냥." "그냥이라니? 왜 웃었는지 말해줘." "정말 궁금해?" "응." 루시아는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날 보았다. 에매랄드빛 눈동자에서 색기가 느껴진다. 루시아는 새하얀 팔로 내 목에 둘렀다. 그리고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이동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몸이 뜨거워지며 얼굴이 화끈거린다. 평소의 루시아 같지가 않다. "루시아........" 난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루시아는 껴안듯 내 품에 안겨들었다. "자,잠깐만!" 무게중심이 흐트러진 나는 침대 위에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루시아의 얼굴과 천장이 보인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고 루시아는 내위에 올라 타있다. "가만히 있어봐." 루시아는 두손으로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난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루시아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직도 나랑 자고 싶어?" "그,그건......" "솔직히 말해봐." "......." 솔직히? 당연 자고 싶다. 예전부터 꿈꿔왔고, 지금도 바라고 있다. 루시아를 안고싶고, 루시아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 한때의 기분이나 욕망으로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난 루시아를 책임질 준비기 되어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루시아를 책임질 자신이 있다.(빚이 좀 많긴 하지만.)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다. 루시아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아무리 봐도 평소의 루시아가 아니었다. 평소의 루시아라면 결코 이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지금 루시아는 색기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평소의 루시아라면 이런 표정을 지을 리도, 이런 행동을 할 리도 없다. 뭔가 이상해. "......." 하지만 뭐 어때? 이상하면 이상한거지. 비록 좀 이상하긴 하지만 루시아는 루시아다. 그거면 충분하다. 난 저번일(집들이 다음 날 쫒겨난 일) 이후 깨달았다. 그 날 잘만 했으면 지금쯤 같은 방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여자가 먼저 유혹하는데 빼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하겠어? 그래, 이번에는 기회를 잡는거야! 오빠 잘할게, 열심히 해서 이번에는 반드시 너희들 동생을 만들어 줄게. 오빠를 응원해줘 얘들아! "힘내세요, 오빠! 라이동생 만들어 주세요~!" "오빠 힘내세요~ 루비가 있잖아요~" "저는 예쁜 여동생이 좋아요 형!" 아이들의 응원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100% 환청이다.) 그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정말 재대로 할 테야! 결심한 나는 루시아를 보며 말했다. "너랑 자고 싶어." 루시아는 생긋 웃었다. "너의 그 솔직함이 마음에 들어." "응?" 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루시아가 갑자기 내 입술을 덮친 것이다. "...." 헉! 루시아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다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난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루시아의 혀가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자 더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내 몸 위에 쓰러졌다. 풍만한 가슴이 내 몸을 누른다. 난 두팔로 루시아를 껴안았다. 루시아 역시 나를 껴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미친듯이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몸이 녹아내리고 정신이 구름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열정적인 키스였다. 입술을 뗀 루시아는 내 귓바퀴를 살짝 깨물며 물었다. "어때? 기분 좋았어?" "으응." "더 기분 좋게 해줄까?" "뭐?" 루시아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혀로 내 목덜미를 핥으며 손으로 남방의 단추를 풀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난 지금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목을 핥는 혀의 감촉, 내몸을 쓰다듬는 손의 감촉, 내몸을 누루고 있는 풍만한 가슴 감촉등이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서,설마.....하는 건가? 루시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바래왔다. 그동안 역경도 많았고 좌절도 많았다. 어쩌면 이 글이 완결 날 때까지도 나와 루시아 사이에 아무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드디어 하게 되다니! 아아~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하지만 아직도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루시아가 어째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냐는 것. 설마 속옷을 선물해준 것 때문에 그런가? 내가 선물해준 속옷이 계기가 되어 나에게 안길 결심을 하게 된 건가? 이럴줄 알았으면 좀더 일찍 선물해줄걸. 일이 이렇게 진행 된것은 모두 내가 잘난 덕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니가 아주 약간 도움이 되었다. 개미 눈곱 정도? 어쨌든 도움이 되긴 되었으니, 일이 끝나는 대로 포상을 해줄 생각이다. 상과 벌을 확실히 하는 것이야말로 군주의 덕목 아니겠는가? 루시아와 어린 앨프들과 같이 가려고 아껴두었던 외식 무료쿠폰 다섯 장을 지니에게 하사하리! 루시아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아까보다 더 열정적인 키스였다. 난 루시아 역시 흥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랑해 루시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내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서로의 입술이 닿고, 혀가 얽히고, 이가 부딪혔다. 한창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는데, 갑자기 루시아가 입술을 뗐다. 루시아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에매랄드빛 눈동자는 많은 말을 하고있었다. 나 마음의 준비 다 끝났어 루시아. 난 결심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시아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응?" 오늘은 여기까지? 그게 대체 무슨 뜻......? 그다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으니. 루시아는 침대에서 내려가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머리를 정리 했다. 난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뭐야? 잘나가다가 왜 이렇게 진행되는거야? "빨리 일어나." "응? 빨리 일어나라니? 이대로 하는거 아니었어?" "하긴 뭘 해? 저질!" "....." 저질? 루시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 재빨리 일어나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왜,왜 그래, 루시아? 혹시 내가 뭐 잘못한거라도....." "그런거 아니야. 처음부터 여기까지만 할 생각이었는걸." "뭐?" "........" 처음부터 여기까지만 할 생각이었다고? "그,그런게 어딨어!" 난 두손으로 머리를 붙잡으며 절규했다. 이번 스토리에서는 정말로 하는줄 알았는데..... 그래서 다음권 쯤에 라이 동생이 등장 할 줄 알았는데.......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내가 따지자 루시아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냥 오늘은 하기 싫어." "오늘은 하기 싫어.......헉! 그렇다면 설마 그날?" 루시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매섭게 변했다. "이 저질! 넌 그런 생각밖에 못하니?" 퍽!퍽!퍽! 루시아는 베개를 두손으로 붙잡고 나를 마구 팼다. 난 두손으로 베개를 막으며 소리쳤다. "자,잠깐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 넌 좀 맞아야 해!" 퍽!퍽!퍽! 베개로 맞아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마는 좀 아프긴 하다. 한참을 때린 루시아는 지쳤는지 베개를 내려놓으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일단 루시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대체 왜 하기 싫다는 건데?" "그러는 넌 왜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건데?" "그,그야....." 세상에 하기 싫어하는 남자도 있나? "원래 사랑이라는게 정신적 영역과 육체적 영역을 다 포함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걸 플라토닉 러브와 에로스 러브로 볼수 있는데 즈, 사랑한다는 마음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걸 육체적 쾌락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꼭 나쁘게 볼 수 없지. 물론 육체적 쾌락만을 탐닉하는 것은 그다지 좋지 못한 일이지만, 그래도 육체적 사랑이 정신적 사랑 만큼이나 중요한 만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보는 차원에서....." "결론이 대체 뭐야?" "그,그러니까 그냥 하고 싶다는 거야." "나도 하고 싶어." "그래. 넌도 하고 싶.....뭐?" 난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지금 루시아가 뭐라고 말한거지? 루시아는 다정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너랑 껴안고 키스하고 그러는거 싫지않아." "그,그런데 왜.....?" "좀 두려운 생각이 들어." "어째서?"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직도 마음에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난 루시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니야 루시아. 마음의 준비 같은 거 없어도 돼. 그냥하자. 응?"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노려보았다. "저질." "헉!" "그리고 이대로 하면 앞으로 재미없을 것 같아. 그래서 좀더 시간을 가지고 싶어." "앞으로 재미없다니! 그게 얼마나 재밌는 건데! 앞으로 여러가지로 체위를 바꿔나가면서 하면 무지 재밌을 것 같은데. 무,물론 우리가 지금하면 앞으로 글의 진행에 있어서 조금 재미가 없어질 수 도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 안 하면 오리혀 더 재미 없어질수도 있으니... 일단 하고나서 더욱 재밌는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어떨까?"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거냐?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아,아니, 그러니까 결론은 지금 하자는 거지." "싫어." "......." 그렇게 단호하게 잘라 말하다니. 난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루시아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내 두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우리 이제까지 잘해왔잖아. 지금처럼 천천히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자 응?" "더이상 어떻게 천천히 나가라고? 이제까지 걸어온 속도로 따지면 지금이 딱 해야 할 시점이라니까." "그건 니가 너무 빨리 걸어서 그래. 나랑 보조를 맞춰." "내가 빠르긴 뭘 빨라?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만난지 며칠만에 할짓 못할짓 다하는거 못봤어?" "그,그건 그렇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루시아도 할 말 없는지 말끝을 흐렸다. 하긴 그둘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누구는 100미터 달리기하고, 누구는 마라톤 완주하고. 어째서 나만 이렇게 결승점이 먼거야? 불공평해!" "그래서 오늘 특별히 서비스 해줬잖아. 아까 너도 기분 좋다고 했잖아." ".....하다가 멈추는 것은 아니 하니만 못하다, 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 사람 잔뜩 흥분시켜놓고, 엄청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멈추는게 어딨어!" 그렇다. 차라리 처음부터 안 했으면 모를까 하다가 멈추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너 정말 자꾸 이럴 거야." "나도 이러는 내가 싫어. 하지만 이러는걸 어쩌라고?" "아무튼 오늘은 더이상 안돼." "그,그렇게 잘라 말하지 말고 다시한번 생각을......" "난 분명 안 된다고 말했어." 루시아의 태도는 단호했다. 루시아 성격상 싫다고 하면 싫은거고, 안 된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다. 더이상 말로 설명해봐야 소용없을게 뻔하다. 그렇다면.......? "꺄아! 왜 이래?" 난 루시아를 껴안고 침대에 쓰러트렸다. 루시아는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여자인 루시아가 내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난 아까 루시아가 나에게 한것 처럼 위에 올라타 두손으로 어깨를 눌렀다. 루시아는 날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 비켜. 안 비키면 소리 지를 거야." "지를테면 질러봐. 이집은 방음이 잘 되어 있으니까." 이 순간 나는 리모델링 할 때 방음 시설을 완벽하게 설치해준 지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난 욕망 가득한 시선으로 루시아를 보았다. "날 이렇게 만든건 너야."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책임 떠넘기기란 말인가? 그렇다. 이 모듯 것이 루시아가 나를 흥분시켰기 때문이다. 히로는 한 개도 잘못한 거 없어~ "대,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겁먹은 표정을 보니 더욱 흥분된다. "후후~ 나쁜짓은 하지 않을께." "너 이러는 것만 해도 충분히 나쁘거든." "......" 맞는 말이다. 이러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다. 나도 잘안다. 이러면 안된다는 것도, 당장 비켜줘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현재 나는 수인화가 반이상 진행된 상태. 즉, 다시 말해 짐승으로 포리모프 중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늑대 인간(원래부터 늑대이긴 했지만) 웨어울프로. 인간이 인간으로 있을수 있는 이유는 이성이 감성을 억누를 수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승은 이성보다 감성을 우선시한다. 지금 나의 이성은 그만두라고 말하고 있지만, 감성은 계속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성 VS 감성 승자는? 당연 감성이다. "날 믿고 걱정하지마 루시아." "널 어떻게 믿고 걱정을 안해?" "......" 그건 그렇군. 덮치는 입장에서 말하니 설득력이 떨어지잖아! 뭐, 상관없다. 조금만 기다려 얘들아. 오빠가 오늘은 꼭 동생 만들어 줄게. "사랑해, 루시아!" 내가 키스를 하려하자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내 입술을 피했다. "저리가, 이변태야!" 루시아는 온 힘을 대해 나를 밀쳤다. 때문에 난 뒤로 넘어졌고, 루시아는 그틈을 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헉! 안돼! 난 늑대 특유(폴리모프 100%완료)의 순발력으로 순식간에 뛰어올라 방문을 가로막았다. 출구라고는 방문 하나뿐이니 방문만 막으면 루시아는 이방을 나갈 수 없다. 난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천천히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루시아. 루시아는 어느새 침대 구석까지 몰렸다. "후후~ 이제 그만 포기 하시지." 내가 악역스런 대사를 날려며 덮치려고 하는데, 루시아가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자,잠깐만! 우리 협상해!" "응? 협상?" 갑자기 나온 뜬금없는 소리. 난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행동을 멈추자 루시아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도도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지금 이러는 게 나쁜 짓이라는 거 알지?" "뭐,그야......." "그러니까 당장 그만 둬. 대신......" "대신?" "대신 니가 선물해준 속옷 입은거 보여줄게." "뭐라?" 내가 선물해준 속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루시아의 속옷 차림이라니! 몇년동안 같이 살았지만 내가 루시아의 속옷차림을 본적은 딱 한번 뿐이다. 바로 그날의 사건 때. 술취하 나와 같이 잠든 루시아는 깨어난후에 내가 자신에게 그렇고 그런짓을 한걸로 착각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몸을 가리고있던 이불이 흘러내렸고, 하얀색 속옷을 입은 루시아의 몸이 드러났다.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난 루시아의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시켜두었다. 영원히 잊지 않도록. "으음......" 이거 참 고민된다. 이대로 루시아를 덮칠 것인가, 아니면, 속옷 차림을 보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고민이다.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완느 비교도 안될 정도다. 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제한시간이 지나 폴리모프가 해제되는 중) 최선의 선택은 당연 이대로 루시아를 덮치는 거다. 하지만 이에따른 여라가지 변수를 계산해야 한다. 내가 덮치면 루시아는 소리를 지르며 반항할 것이다. 이 집 방음시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리 없다. 그 외에도 어린 앨프들이 갑자기 들이 닥칠수도 이고, 라이레얼이 밥 달라고 방문을 두드릴 수도 있다. 얻는게 많은 대신 그만큼 위험도 크다고나 할까? 반면 루시아의 협상안대로 속옷 차림을 보는 것은 덮치는 것에 비해 얻는것은 적지만 매우 안전하다. 수익성은 높지만 위험한 큰 곳에 투자할 것이냐, 수익성은 낮지만 위험이 없는 곳에 투자할 것이냐? 이러니 마치 재테크하는 것 같군. 가장 좋은 방법은 분산 투자지만, 현재로는 양자택일을 해야하니...... 난 나의 행운도와 우리집 식구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보았다. 그러자 바로 결론이 나왔다. 그냥 속옷 차림 보는 걸로 만족하자. 이제까지 패턴으로 볼 때 내가 루시아를 덮친다 하더라도 잘 될리가 없다. 그리고 우리집 식구들은 남에일에 초치는데 일가견이 있어서 말이지. "좋아 그렇게 하자." "그럼 좀 비켜봐. 침대에서 내려오게." "그,그래." 난 비켜주었다. 그러자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난 루시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약속 지키는 거지? 이대로 도망치지 않을거지?"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거야? 난 한번 약속한 건 지키는 사람이야 그렇게 날 못 믿어?" "아,아니. 물론 나야 너 믿지." 루시아는 구겨진 옷을 펴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정말....너 때문에 머리카락 또 헝클어졌잖아." "미,미안. 아! 내가 빗질해줄까?" "됐어." 루시아의 머리카락은 반짝이는 플래티나 블론드. 마치 백금을 실로 뽑아 낸 것처럼 아름답다. 게다가 길이도 제법 많이 길어져 이젠 등까지 내려온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단발머리였는데. 참고로 대부분의 남자가 그렇듯 나도 긴 생머리를 선호한다. 남자가 긴 생머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로 긴 생머리는 청순가련의 대명사다. 봄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긴 생머리. 생각만하도 가슴 두근거리지 않는가? 둘째로 긴 생머리는 어떤 모양으로든 변형이 가능하다. 단발머리는 묶을 수도 없고, 길어지려면 몇 달,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긴 생머리는 자르면 단발이되고, 묶으면 포니테일이 되고, 지지면 웨이브가 된다. 이러니 어찌 남자들이 긴 생머리를 선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아~ 루시아의 머리카락 향기를 맡으며 잠에서 깨고파. 생각을 하는 사이 루시아의 머리카락 손질이 끝났다. 난 침대에 앉아 재촉했다. "빨리 보여줘." "알았어." 루시아는 내 앞에섰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부끄러워하는 몸동작. 너무 귀여워 살짝 깨물어 주고 싶다. 그와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요염했다. 난 루시아의 동작 하나하나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사랑스런 나의 요정 루시아. 루시아는 손으로 티셔츠 목 부분을 잡았다. 티셔츠는 한 사이즈 정도 큰지 조금 헐렁했다. 루시아가 목 부분을 잡아당기자 한쪽 어깨가 살짝 드러났다. 새하얀 살결과 민트블루 색상의 브라끈이 보인다. 꿀꺽! 바로 벗는 것보다 이런 전희가 잇는 편이 훨씬 자극적이다. 루시아도 뭘 좀 아는군. "이제 됐지?" "응? 뭐가 돼?" "보여줬잖아." "응? 뭘보여줘?" "못봤어? 그럼 특별히 한번만 더 보여줄게. 마지막 기회니까 잘봐."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티셔츠를 잡아 당겨 어깨와 브라 끈이 드러나게 했다. "이번엔 잘 봤지?" "보긴 뭐.....헉! 설마 그게 다야?" 내가 입을 쩍 벌리며 묻자 루시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뭘 기대 했는데?" "자,잠깐!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 "무슨 소리야? 난 니가 선물해준 속옷 입은거 보여주겠다고 했고 방금 보여줬잖아. 그것도 두번이나." "....." 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 속았다! 이어서 드는 생각 그냥 덮칠 걸! 루시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놀렸다. "원한다면 한번 더 보여줄 수 있는데." "이건 말도 안돼!" "너 자꾸 왜그래?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 하기야?" "어쨌든 난 용납할 수 없아." 루시아는 팔짱을 끼고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용납 안 하면 어쩔건데?" "어쩔거냐고?"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루시아는 뒤로 물러섰다. "무,무슨짓을 하려는거야?" "억울해서 팬티라도 한번 봐야겠어." "뭐? 너 미쳤어?" "응. 나 미쳤어." 루시아는 도망치려 했지만 뒤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난 한 손을 벽에 얹고 루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루시아의 눈동자는 두려움 때문인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장난치지마." "장난 아니야." 난 치마에 손을 얹었다.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두손으로 치마를 붙잡았다. "너 정말 이럴 거야?" "잠깐만 보고 내려줄게. 본다고 닳는것도 아니잖아." "뭐? 너 그걸 말이라고 해?" 난 치마를 위로 잡아당겼다. 루시아는 필사적으로 나를 막았다. "꺄아! 이 저질! 변태! 치한! 색마! 짐승!" "가만히 좀 있어봐." "꺄아아! 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 "앙탈 부려봐야 소용없어." 루시아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치마는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이제 조금만 더하면..... 그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맛잇는거 먹고 싶어요오~!" ....라는 대사와 함께 등장한 어린 앨프들. 나도 얼어붙고, 루시아도 얼어붙고, 라이,루,루비도 얼어붙었다. "........." 그래. 니들 왜 등장 안하나 했다. 하긴, 이때쯤이면 니들이 등장 할 때가 되긴 했지.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어린 앨프들. 얘들이 뭐하는 중이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거지? '오빠가 루시아 언니를 덮치는 중이었단다.' 라고 대답할 수는 없잖아. "얘,얘들아. 이건말이지....." 내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해명을 하려는데, 어린 앨프들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언니 오빠 싸우지 말아요." "으아아앙~ 언니 때리지 마세요 오빠." "엉엉~ 누나대신 절 때리세요." 어린 앨프들은 펑펑 울며 나를 잡아당겼다. 내가 루시아와 떨어지다 루는 두팔을 벌리고 루시아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루시아를 보호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나와 루시아가 싸우는 중이었다고 착각한 건가? "우엥~ 우엥~ 라이는 언니 오빠 싸우는거 싫어요." "으앙~ 으앙~ 오빠가 언니 때리면 루비는 막막 오빠 미워하 거에요." "엉엉~ 형 미워요! 나나가 뭘 잘못했다고 때리는 거예요?" 루시아는 치마를 내린다음 우는 아이들을 달래주었다. "언니랑 오빠 싸운거 아니야, 얘들아." "우엥~ 거짓말 하지 마세요." "으앙~ 맞아요. 싸우고 있었잖아요." "훌쩍~ 형이 누나 때리는거 다봤어요." "언니랑 오빠 장난 치고있었던 거야. 절대 싸운거 아니니까 그만울어 정말이야." 루시아는 '뭐하고있어? 빨리 애들 달래!' 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고, 난 즉시 루시아를 도와 아이들을 달래주었다. "오빠랑 언니가 왜 싸우겠어? 언니가 오빠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찌릿! 흠흠, 뭐 노려볼 것까지야. "오빠랑 언니 안싸웠어. 그냥 장난치고 있었던 거야." "훌쩍~ 그치만 언니 막막 소리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장난이지. 왜 크게 소리치며 장난치면 더 재밌잖아." "훌쩍~ 정말요?" "응응. 오빠가 너희들에게 왜 거짓말을 하겠어? 오빠는 진실과 신용의 대명사잖아." "진실과." "신용의." "대명사요?" 라이, 루, 루비는 어깨동무를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름하여 일심동체 불신 가득한 눈빛 스킬이다. "흠흠, 너희들 눈빛을 보니 이 오빠가 참 신용을 많이 잃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무튼 오빠와 언니는 절대 싸운게 아니란다." "오빠 말이 맞아. 언니랑 오빠가 싸우면 우리 라이랑 루랑 루비가 슬퍼할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싸우겠어?" "맞아. 너희들이 오해한거야. 오빠랑 언니가 얼마나 친한데." 난 뒤에서 루시아를 껴안았다. "너 뭐하는거야? 당장 놓...." 화를 내려던 루시아는 아이들이 보고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걸 노렸지. "봐. 오빠가 이렇게 꽉 껴안아주니까 언니가 좋아하잖아. 이제 오빠랑 언니가 싸우지 않았다는거 믿어줄거지?" 화기애애(?)한 우리의 모습에 어린 앨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좀 놔."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돼. 그럼 애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좀더 친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쪽! 난 기습적으로 루시아의 볼에 뽀뽀를 했다. "앗! 오빠가 언니 볼에 뽀뽀했다!" "헤헤~ 언니 얼굴 빨개졌어." "누나가 형 좋아하나봐." 아이들의 응윈(?)에 힘입은 나는 반대쪽 볼에도 뽀뽀를 했다. 쪽~ 루시아는 아이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작은 목소리로 항의할 뿐이었다. "애들 보는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애들 보는 앞이니까 이러는거지." "너 정말 자꾸 이럴래?" "응." 아이들은 우리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맛있는거 사주세요오~!" "맛있는거 먹기엔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나?" "지금쯤이면 음식점도 문을 다 닫았을 텐데." "인디 깨워서 뭐라도 좀 만들어 달라 그럴까?" "안돼. 형부는 지금 한창 언니랑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거란 말이야." "......" 좋은 시간? 누구는 좋은 시간 보내고, 누구는 그저 그런시간 보내다니. 인디자식 부러워 죽겠다. "그럼 편의점 가서 간식거리라도 사올까? 어때, 얘들아?" "라이는 오빠랑 언니랑 같이 갈래요." "루비도요." "저도 나가고 싶어요." "그래 다같이 나가자." 우리는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앞에서 걷고 나와 루시아가 뒤에서 걸었다. 가벼운 산책을 함녀 잠도 더 잘온다는데. 열대야 현상으로 밤에도 엄청 더웠다.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땀이 줄줄 흐를 정도다. 루시아 역시 더위는 어쩔수 없는 모양인지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빨리오세요 언니 오빠." "루비 배고파요." "저는 삼각김밥 먹을 거예요." "......." 뭐, 쟤들이야 날씨에 상관없이 팔팔하지. "많이 덥지?" "괜찮아." 난 손수건으로 루시아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루시아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천만에." 편의점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먼저 우르르 몰려 들어갔고, 그 뒤를 나와 루시아가 따라 들어갔다. 그러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자 아르바이트 생은 날 보며 소리쳤다. "앗! 당신은 그때 그 로리 변태!" "뭔 소리야!" 9권 스토리24에 등장했던 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아직까지 일하고 있을 줄이야. 루시아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로리 변태라니? 대체 무슨 말이야? 설마 너 또 이상한 짓 한거야?" "아,아니야,루시아! 저여자가 혼자 착각하고 생쇼하는 거야."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이 루시아에게 소리쳤다. "저 남자 뭔가 이상해요. 어린 소녀드에게 메이드복 입힌 다음 이상한 짓 했어요. 제가 다봤어요." "보긴 뭘봐!" 말로 해봐야 소용없을 듯 하다. 난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전원 집합!" 그러자 여기저기 흩어져잇던 아이들이 내 앞에 우르르 몰려왔다. 언제 골랐는지 모두들 품에 간식거리를 한아름 안고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이 고르다니! 이런거 보면 정말 신기하다. 난 아이들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지?" "오빠요." "오빠요." "형이요." 문제가 쉽다보니 전부 맞춘다. 난 루시아를 가리키며 또 물었다. "그럼 이쪽은?" "언니요." "언니요." "언니요." 역시 전부 정답.....이긴한데, 마지막에 왜 언니인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루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얘들이 언니라고 하기에 따라해 봤어요." "......" 그래 잘하는 짓이다. 아예 너도 오빠라고 부르렴. 난 아르바이트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들었지? 여기있는 루시아와 내가 얘들 보호자야. 그때 입고 온 메이드복은 애들이 좋아서 입은거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모함해도 되는거야? 응?" 아르바이트생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그랬나요? 하,하지만 그땐 분명 주인님이라고......." "그거야 코스프레 중 이었으니까 그렇지." 코스프레는 단지 옷만 맞춰 입는게 아니다. 입은 옷에 맞춰 동작과 말투를 바꿔 행동하는 것이다. 즉, 간호사복을 입었으면 간호사처럼 행동하고, 메이드복을 입었으면 메이드처럼 행동하는게 진정한 코스프레다. 아르바이트생은 나와 루시아와 어린 앨프들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죄송해요." "죄송한걸 알면서 그랬단 말야? 뭐? 로리변태? 그 말이 연약한 내 가슴에 얼마나 큰 상처로 남을지 생각이나 해봤어?" "죄,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사람 죽여 놓고도 죄송하다 그럴래? 로리 변태라고 한 건 날 정신적으로 죽인거나 다름없어! 일종의 뇌사와 비슷한 개념이지 어떻게 책임질거야 응?" 난 계속해서 아르바이트생을 몰아 붙였다. 그러자 루시아가 말했다. "그만해, 히로." "아무리 니 부탁이라도 그만둘 수 없어. 내가 왜 로리변태야? 대체 날 어떻게 봤기에 저런 소리가 나와? 내가 로리 변태처럼 생겼어? 나 대신 지니였어도 저렇게 말했을 것 같아? 이건 엄연한 외모적 차별이야! 난 이런 부당한 사회적 차별에 맞서 싸우겠어!" "너 변태 맞잖아." "헉! 그,그게 무슨...." "아까 나한테 하려던 짓이 변태 짓이 아니고 뭐야?" "......." 그것에 대해선느 할 말 없다. 전설의 영웅 아이언스 히로가 강제로 여자 치마를 들추려했다니/ 나도 무지하게 타락했다는 생각이 든다. 난 정신없이 간식거리를 고르는 어린 앨프들을 노려보았다. 저것들만 아니었어도 볼 수 있었는데...... 아아~ 억울하다. 팬티라도 봤으면 이 정도까지 억울하진 않을 텐데.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간식거리를 한가득 골랐다. 삼각김밥과 샌드위치,과자,음료수 등등. 대략 다섯명 정도가 배터지게 먹고도 남을 양이다. 이런 엄청난 양을 '간식' 으로 먹는 우리 아이들. 아무리 봐도 뭔가 특별해 보인다. 으음, 간식값 대느라 집안 경제가 휘청거리는 군. 다른건 다줄여도 애들 먹는 것만은 줄일 수 없다, 라는 것이 루시아의 생각인 만큼 난 지갑을 톡톡 털어 계산을 했다. "헤헤~ 빨리 먹고 싶어." "응응. 빨리 집에 가자." "참치 마요네즈 삼각김밥은 내거야." 계산을 끝마친 우리는 편의점을 나왔다. 아이들은 그새를 못참고 삼각김밥 하나씩을 입에 물고 있다. "......" 집에서 밥 안주니? 다른 앨프들은 과일만 먹고도 잘만 살텐데, 우리집 앨프들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인간 세상에서 키워서 그런가? 설마 부작용? 집으로 돌아오자 아이들은 열심히 간식을 먹었다. 루시아는 음료수를 따라주며 아이들이 체하지 않게 보살펴 주었다. 저 많은걸 언제 다 먹나? .......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금방 다 먹는다. 그 많던 음식들이 전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봉지와 껍질뿐. 어린 앨프들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붙잡으며 말했다. "졸려요오~" "........" 그래. 실컷 먹었으니 이젠 잘 때도 됐지. 이대로 놔두면 여기서 쓰러져서 잘 것 같다. "잠깐만 얘들아. 이는 닦고 자야지."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눈을 감은 상태. 나와 루시아는 어쩔수 없이 애들을 번쩍 들어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한 사람이 붙잡아 입을 벌리고, 한사람이 진동칫솔로 이를 닦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어린 앨프들 팔자가 상팔자다. 어쨌든 그렇게 힘든 작업끝에 아이들 이를 깨끗이 닦았고, 우리는 또다시 아이들을 번쩍들어 침대로 옮겨주었다.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방에, 루는 내방에. 그다음 어질러진 거실을 치웠다. 과자봉지,비닐,흘린음식,빈 패트병 등등 치울것도 많다. 다 치우고 나니 몸이 녹초가 되었다. 루시아 역시 피곤한지 기지개를 크게 켰다. "이만 들어가서 자야겠다." "응, 잘자." 난 방문 앞까지 루시아를 바래다 주었다. 루시아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쪽~ "너도 잘자." "......." 헉! 루시아가 굿나잇 키스를! 루시아는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 애들 안 들어왔으면 좋았을걸. 후후~" "......응?" 루시아는 생긋 웃음을 지어보인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난 닫힌 문 앞에 멍하니 서있었다. 자,잠깐만 루시아! 애들 안들어왔으면 좋았을 거라니? 그거 대체 무슨 의미야? 서,설마 내가 치마 들어올리길 바라고 있었던 거야? 그럼 왜 그렇게 소리 지르며 반항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루시아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정말로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영원히 알 수 없는 건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절규했다. "으아악! 대체 뭐냔 말이야!" "어머, 저 남자좀 봐." "젊은 남자가 여긴 왠일이래?" "좀 이상한 사람인가봐." "설마 변태는 아니겠지?" "변태인 것 같은데." "맞아. 생긴 것부터가 변태처럼 생겼어." "....."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가렸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여성 속옷 매장. 아아~ 쪽팔려라. "이거 어때요, 오빠? 라이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루비가 이 팬티 입으면 예쁠 것 같죠?" 어느새 팬티를 한 장씩 고른 라이와 루비는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나 혼자만 오면 쪽 팔릴 것 같아서 일부러 애들과 같이 왔는데, 얘들 때문에 더 쪽팔린다. 골랐으면 그냥 살것이지, 어째서 나한테 와서 물어보는 거냐? "응응. 무지 잘 어울릴 것 같아. 그걸로 사줄까?" 뭐든 좋으니 빨리사고 이 자리를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난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이와 루비의 표장이 뾰로퉁하게 변했다. "쳇! 마음에 안 드는거죠?" "싫어하는게 틀림없어." "그,그럴리가!" "대답에 성의가 없어요." "맞아요, 제대로 보지도 않으셨잖아요." "......." 눈치는 빨라 가지고. "다시 고르자, 루비야." "응 라이야." "안돼! 그냥 그걸로 사!" 결국 라이와 루비는 나의 바람을 무시하고 다시 한참을 골랐다. "라이는 제일 예쁜 팬티 고를거야." "아니야. 루비가 더 예쁜 팬티 고를거야." "......." 어차피 속에 입는건데 뭔 상관이니? 그리고 니들이 속옷에 신경 쓸 나이니? 어린애면 어린애답게 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루시아한테 속옷 선물해줬으니 자신들한테도 속옷 선물해달라며 나를 이곳까지 끌고온 라이와 루비. "이 팬티는 어때요, 오빠?" "루비 것도 봐줘요." 얘들이 한번 이럴때마다 주위 시선이 점점 이상해진다. "로리 변태가 분명해." "어린애들 데리고 이런곳 온 걸 보면 뻔하지." "밤마다 저 애들에게 이상한짓 하겠지?" "애들이 불쌍해." "......" 내가 더 불쌍하다. 변명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잘안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라이가 고른것은 하늘색 바탕에 흰색 땡땡이 무늬가 그려져있는 팬티. 밝고 시원해 보이는 색이 마음에 든다. 루비가 고른것은 흰색 바탕에 여러가지 색상의 땡땡이 무늬가 그려져 있는 팬티. 굉장히 귀여운 느낌이다. "예,예쁘구나.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아." "정말요?" "진짜죠?" "그럼, 물론이지." "헤헤~ 이거 입으면 오빠한테 제일먼저 보여드릴게요!" "루비도요, 언니보다 오빠한테 먼저 보여줄래요!" "......" 안보여줘도 되거든. 이 발언으로 인해 주위 여론이 더욱 악화되었다. 난 사방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내일쯤 이 매장 입구에 '변태 출입금지' 라는 스티커가 붙여지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아이들이 고른 속옷을 들고 카운터에 들어갔다. "저,저기..... 이거 계산 좀....." 그러자 카운터에 있던 여직원은 날 노려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자가 왕이거늘 내 돈 내고 물건 사면서 매장 여직원한테까지 이렇게 눈총을 받아야 하다니. 아아~ 소비자의 권리가 이렇게까지 무시돼도 되는 건가? "저,지기......포장도 좀......" "카드도 넣어주세요!" "맞아요. 언니한테도 카드 써줬으니까, 루비한테도 써주세요." "......." 뭔 요구사항이 그렇게 많니? 안 써주면 울 것 같았기 떄문에 난 어쩔수 없이 팬을 들었다. 애들이 여기서 울면 누군가가 경찰서에 신고해 유치장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그래, 카드 써주자. 어린 라이와 루비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루시아에게 지기 싫어하는 시기 어린마음 이라고나 할까? 그런 만큼 난 부모로서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토닥거려줘야한다. 옵빠가 젤루 조아하는 라이에게. 라이에게 선물을 주개데서 기뻐. 옵빠는 라이가 막막 조아. 라이가 옵빠 조아하는 걷보다 더 조아해. 사랑해, 라이야~ -라이를 루비와 공동 1등으로 조아하는 히로 옵빠 라이가 읽기 편하도록 일부로 맞춤법까지 틀리게 써주는 정도의 센스.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다정한 오빠인 것 같다.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루비에게. 루비에게 선물을 주게 되서 기뻐. 오빠는 루비가 막막 좋아. 루비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해. 사랑해 루비야~ -루비를 라이와 공동 1등으로 좋아하는 히로 오빠 두아이들 똑같이 사랑하는 만큼 카드도 똑같은 내용으로 적었다.(사실은 지난 어버이날의 복수라고나할까?) 여직원은 카드를 안에 넣고 같이 포장했다. 계산을 끝마친 나는 포장된 선물 두 개를 들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재빨리 매장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혹시라도 나를 본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앞으로 이 근처는 오지도 말아야자. "자, 이건 라이선물, 그리고 이건 루비선물." 난 선물을 라이와 루비에게 주었다. "헤헤~ 고마워요,오빠." "훌쩍~ 루비는 막막 감동했어요." 쪽~ 쪽~ 라이와 루비는 동시에 내 양쪽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애들 기분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구, 사랑스런 내 딸들~ 난 라이와 루비를 꼬옥 안아주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선 루시아가 루와 놀아주는 중이었다. 라이와 루비는 선물을 흔들며 말했다. "헤헤~ 이것봐라. 오빠가 사줬다." "오빠는 루비를 너무 좋아하는게 틀림없어." 라이와 루비의 자랑에 루는 깜짝 놀랐다. "앗! 제 꺼는요?" "니 꺼? 없는데?" "에엑! 그러는 게 이딨어요?" "너랑 얘들이랑 같니?" "다른 건 뭔데요?" "얘들은 여자고 넌 남자잖아." "불공평해요! 불평등해요! 불합리해요! 저도 여자할래요!" "....." 어쩌겠니? 원망하려면 남자로 태어난 널 원망하렴. 화를 내던 루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라이와 루비는 그런 루를 놀리기라도 하듯 계속 선물을 흔들며 자랑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빠는 라이를 너무 좋아하는것 같아." "오빠는 루비를 너무 좋아해서 선물을 사준게 틀림없어." "......." 니들이 사달라며? "훌쩍~ 형은 라이랑 루비만 예뻐하고.....저도 형 되게 좋아하는데....엉엉~!" 결국 루는 울음을 터트렸다. 사내자식을 선물 하나 못 받았다고 울다니. 그런건 열혈과 근성으로 극복해야하는 것 이거늘.... "울지마, 루, 우리루 착하지?" "엉엉~ 형 미워요, 누나." 루시아는 루를 껴안고 달래주었다. 루는 루시아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 뭐? 루시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이런 빌어먹을 앨프를 봤나! 감히 남자 주제에 나의 루시아의 가슴에 손을 대다니! 나도 아직 몇 전 못 만져봤는데! 루시아는 루를 패대기쳐 창문밖으로 던져버리기는커녕 오히려 꼭 안아주었다. 헉! 부러워 미칠것 같다. 루시아는 루를 달래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 정말 왜그래?" "내가 뭘....." "라이와 루비만 선물주면 루가 서운해 할거 몰랐어? 왜 자꾸 애들을 편애하는 거야? 루가 뭘 잘못했는데? 그런 편애가 아이들 정서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 알기나 해? 넌 부모로서의 자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물론 있지." "있으면서 그렇게 행동했단 말이야?" 난 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뒤에 숨겨놓았던 선물을 내밀었다. "짠!" "훌쩍~ 이건 뭐예요?" "보고도 모르니? 선물이다." "훌쩍~ 저 주시는 거예요?" "보고도 모르겠니?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고 뚝 그쳐." 난 루의 품에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러자 루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날 보았다. "엉엉~! 혀엉~!"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내 품에 달려드는 루. 난 그런 루를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토닥토닥~ "이 형이 설마 라이와 루비 선물 사주면서, 루 선물은 빠트렸겠니? 형이 잠깐 장난친 거란다." "엉엉~ 형 미워요. 세상에서 제일 미워요!" "......" 그렇게 미우면 선물 다시 뱉어내든가. 난 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루는 금방 울음을 그쳤다. "훌쩍~ 고마워요 형." "그래. 당연 고마워해야지. 앞으로도 계속 고마워하려무나." "그런데 이거 뭐예요?" "사각 팬티다. 통풍 잘되서 시원할거다." "정말요? 잘 입을게요!" 난 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루시아는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선물 사왔으면 사왔다고 말하지 왜 애를 울려?" "미안,미안. 그냥 장난 좀 쳐봤어." 루시아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휙 돌렸다. "흥! 하여간 마음에 안든다니까." "미안해, 화풀어." "됐어." 그래도 웃고 있는 걸 보니 화난것 같지는 않다. 삐진 척하는 것뿐. 루는 기뻐하며 포장을 풀었다. 라이와 루비도 선물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포장을 풀었다. 라이와 루비도 선물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포장을 풀었다. 상자위에는 예쁜 카드가 올려져 있었다. "앗! 카드다!" "오빠가 루비에게 카드를 써줬어!" "라이한테도!" "........" 니들(루 제외)이 써달라며? 뭘 그렇게 깜짝 놀라는 척하니? 아이들은 서로의 카드를 돌려보았다. 라이와 루비는 매우 좋아하는 반면 루의 표정은 약간 불만이 섞여있는듯하다. 루는 볼을 살짝 부풀리며 말했다. "제 카드만 왜이래요?" "응? 뭐가?" 루에게. 라이와 루비는 사줬는데, 너만 안 사주면 울 것같아서 써준다. 나름대로 좋은거 샀으니 깨끗하게 입어라. -너를 적당히 좋아하는 형 "완벽하잖아." "뭐가 완벽해요? 라이와 루비한테는 제일 좋아한다고 해놓구선, 왜 저만 적당히 좋아한다고 해놨어요? 전 결코 용납 할 수 없어요!" "그렇게 불만이면 다시 돌려주든가." 그 말에 루는 잠시동안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냥 입을게요." "......." 진작 그럴 것이지. "우와! 곰이 그려져 있다!" "와아! 예쁜 팬티다!" "아니야 라이야 루비 게 더 예뻐!" "......" 니들(루 제외)이 골라 놓구서 뭘 그렇게 좋아하는 척 하니? 라이는 하늘색 바탁에 흰색 땡땡이 무늬가 그려진 팬티. 루비는 흰색바탁에 여러가지 색상의 땡땡이 무늬가 그려진 팬티. 루는 회색 바탕에 한쪽 곰이 그려진 사각 팬티. 모두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라지만 라이와 루비는 직접 골랐으니 마음에 안 들리 없다.) "지금 입고 보여드릴께요 오빠." "루비도 보여드릴께요. 조금 부끄럽지만 오빠를 위해서 참을래요." "저도 입고 보여드릴께요 형." "......" 진짜 안 보여줘도 되거든. 특히 루는 제발 참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루시아는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빠 선물 마음에 들어?" "네에~~!" 아이들은 후다닥 각자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사라지고나자 루시아가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속옷 선물이야?" "으응. 어제 너한테 속옷 선물한거 보고 라이와 루비가 자기들도 사달라고 난리를 쳤거든. 그래서 사준거야." "그,그래?" 루시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났나 보다. 난 재빨리 거리를 좁혔다. "지금도 입고 있어?" "뭘?" "내가 사준 속옷 말이야. 입고있지? 그치?" 루시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이 저질!" "그치만 궁금하단 말이야." 내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쳐다보자 루시아는 어쩔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 입었어." "헉! 어째서? 서,설마 마음에 안드는 거야?" "어제 입은 속옷을 오늘도 입을리 없잖아! 아침에 샤워할떄 갈아입었어!" "그, 그래?" 그런거였군 다행이다. 난 다시 루시아에게 접근하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무슨 속옷 입었어?" 루시아는 눈을 치켜뜨며 날 노려보았다. "넌 어떻게 그런 생각밖에 안 하니? 그리고 좀 떨어져. 답답하단 말이야." "아,아니, 그냥 좀 궁금해서. 특별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야." 사실 특별한 다른 의도 있었다. 아아~ 루시아가 무슨 속옷을 입고있는지 궁금하다. 궁금해서 죽을 것만 같다. 이럴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 혼자서 끙끙 앓지말고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저기....... 루시아.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한번만 보여주만 안될까?" "뭐?" 루시아의 표정과 눈빛이 확 변했다. 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딱 한번만 보여줘. 응?" 내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면 루시아도 보여줄 마음이 들..... 짜악! ....지 않는군. "흥! 저질!"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라이와 루비가 거실로 나와 내 앞에 섰다. 두 앨프 모두 무릎까지오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다. "다 입었어요. 오빠. 오빠가 사준거니까 오빠한테만 보여줄게요. 헤헤~" "루비 부끄러워요. 아이~ 부끄러. 부끄부끄~" 라이와 루비는 스커트를 살짝 들어올리며 나를 유혹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니들 이러는거 부모님은 알고 계시니? 나 이이언스 히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한번 보겠다고 마음 먹었으면 봐야한다. 이런걸 일컬어 보통 열혈과 근성(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한다. 그래, 최선을 다해 보는거야! "왜 불렀어요 오빠?" "무슨 일이에요?" 내 앞에 선 라이와 루비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난 말 꺼내기가 좀 쑥스러워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호,혹시 오늘 루시아 언니가 무슨 속옷 입었는지 아니?" 루시아는 방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자주하니 같은방을 쓰는 라이와 루비가 모를리 없다. "예쁜 속옷 입었어요." "아,아니, 그런 추상적인 개념 말고 좀 자세하게.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언니 민트블루 색 속옷 입었어요!" "미,민트블루라면.......헉! 설마 내가 선물해준 속옷?" "예,오빠. 오빠가 선물해준 속옷 맞아요." "....." 서랍장 안에 있는 그 많은 속옷 중에서 내가 선물해준 속옷은 선택해 입어주다니. 왠지 엄청 감동적이다. "라이도 오빠가 선물해준 속옷 입었어요. 헤헤~" "루비도 오빠한테 선물 받은 속옷 입었어요." "....." 안물어 봤거든. "그보다 오빠가 너희들에게 부탁할 게 있거든." "뭔데요, 오빠?" "아주 간단한거야. 그러니까....." 막상 말하려니 좀 부끄럽군. "빨리 말해주세요 오빠." "흠흠, 그러니까 이따 루시아 언니 거실로 나오면 라이와 루비가 아이스께끼를 하는거야." 아이스께끼. 일명 치마 들추기다. 치마를 세차게 들어올리며 '아이스께끼~!' 라고 소리치는것이 포인트다. 하지만 내가 아이스께끼를 했다가는 집에서 쫒겨날 게 뻔하니 어쩔 수 없다. "아이스께끼를 왜 해요?" "응? 그,그게 말이지....." 뭐라고 말하지? 애들한테 '루시아 언니 팬티를 보고 싶어서' 라고 말할수는 없지 않은가? "아! 장난치는거야, 장난!" "장난이요?" "응. 장난치면 재밌잖아." 라이와 루비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다시 날 보았다. "........" 뭐야? 안 먹힌 건가? "재밌을 거 같아요!" "언니 아이스께끼 할래요!" 누가 단순 앨프 아니랄까봐 쉽게 속아 넘어가는 라이와 루비.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우리 루시아 언니를 깜짝 놀래켜주거나, 성공하면 오빠가 맛있는거 사줄게." "정말요?" "루비는 랍스타 먹고 싶어요!" "......." 랍스타? 얘들 눈빛을 보니 아주 작정을 한 것 같다. 이 기회에 한 밑천 챙기자는 건가? "그,그래. 성공만 하면 뭘 못 사주겠니? 아무튼 이따 언니 나오면 라이랑 루비가 다가가서 치마를 확 들쳐 올리며 '아이스께끼~' 라고 외치는 거야. 알았지?" "네에~!" "잘할 수 있지?" "네에~!" "......" 대답을 잘하는 걸 보니 어째 엄청 불안해진다. 얘들 주특기가 '대답만 크게 하기' 아니겠는가? "헤헤~ 라이는 랍스타 막막 좋아." "응응. 루비 이번에 가면 저번보다 훨씬 더 많이 먹을거야." "....."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은 두 앨프. 그리고 뭐? 저번보다 훨씬 더 많이 먹을 거라고? 스토리9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날 밥값으로 81만5천 원 나갔다. 그런데 훨씬 더 많이 먹겠다니! 참고로 얘들은 한다면 하는 앨프들이다. 이것들 침 질질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번에 랍스타 먹으러 가면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루시아의 치마 속을 볼 수 있다면야 전 재산을 날린다고 해도 두렵지 않으리. 난 라이와 루비와 함께 거실로 나갔다.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루시아가 나타났다. 난 루시아를 보며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미안해, 루시아.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히로는 루시아가 그 속옷 입은 모습을 꼭 보고 싶단 말이야. 부디 날 용서해줘.~ Substory11. 히로의 마법 학원-첫번째 수업 "꺄하하~." "에헤헤~." "헤헤~." 방긋방긋. 생긋생긋. 으쓱으쓱. 해맑게 웃으며 깜찍 발랄하게 뛰어노는 어린 엘프들. 오늘 놀이 종목은 텀블링. 루시아가 아이들을 위해 놀이방에 텀블링 기구를 들여놓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신나서 하루 종일 그 위를 뛰었다. 텀블링(Tumbling). 말 그대로 뛰는 거다. 텀블링하면 옛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옛날에 우리 집 앞에 텀블링 아저씨가 있었다. 당시 시세가 100원에 5분이었다. 100원짜리 하나를 내밀고 텀블링 기구 위에서 실컷 뛰어놀 때의 행복감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시간이 다 되어서 내려갈 때의 슬픔 역시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텀블링 기구 안에서 참 별 짓 다 했다. 공중제비는 기본이고, 공중에서 한 바퀴 구르기, 공중에서 540도 몸 틀기 등등. 그야말로 스프링이 끊어져라 별 기술을 다 선보였다. 당시 난 수 많은 애들이 보는 앞에서 신기에 가까은 묘기를 성공시켰다. 나의 묘기에 모든 아이들이 열광하고 존경을 표했다. 그들은 존경의 의미를 담아 나를 '텀블링계의 하얀 혜성' 이라 불렀다. 아아~ '고무줄놀이의 제왕' 에 이어 '텀블링계의 하얀 혜성' 이라니!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그 말 그대로 난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다재다능했다. 하지만 어 렸을 때 영재 소리 들은 아이 치고 커서 훌륭한 사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예외다. 그건 지금의 나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훌륭하고 위대한 아이언스 히로 공작! 난 슬쩍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루시아는 내 옆에 앉아 아이들을 살피고 있었다. 우리 집에 들여놓은 텀블링 기구는 가정용 이기 때문에 업소용(?)처럼 주위에 망이 둘러처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하면 텀블링을 하다가 바닥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완충재를 깔아놓았다. 하지만 그래도 루시아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내가 어깨에 손을 얹은 것도 모를 정도다. "흠흠, 루시아." "왜?" "넌 참 좋겠어." "응? 무슨 말이야?" "나랑 사귀고 있으니까.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 하지만 어디서 나 같은 남자 만나기 쉽지 않지." "……뭐?" 루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넌 밖에 나갈 일도 없니?" "난 항상 너랑 같이 있고 싶어. 항상 너의 곁에서 널 지켜줄게~." "됐으니까 좀 나가줄래? 난 니가 안 지켜주는 편이 더 좋거든." "헉! 어,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마치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루시아의 싸늘한 말. 하지만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물러날 내가 아니다. 이 지구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루시아 옆에서 열심히 찝쩍거리리라! 난 어깨에 얹은 손을 슬쩍 내려 루시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완연하게 굴곡이 살아있는 루시아의 허리선. 날씬해도 너무 날씬하다. 가슴과 엉덩이는 큰데, 어째서 이렇게 허리는 날씬한 걸까? 역시 루시아는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데는 나온 쭉쭉 빵빵한 몸매? 옷 위로 드러난 것만 봐도 루시아는 정말 완벽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왕이면 옷 안을 좀 보고 싶다. 사실 이렇게 남녀가 같은 집에서 살다보면 별 사고가 다 일어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옷 갈아입는데 실수로 방문을 연다든지, 샤워하고 있는데 실수로 화장실 문을 연다든지……. "……." 그런데 어째서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 뭐, 한번 루엔이 샤워할 때 실수로 화장실 문을 연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난 기왕이면 루시아 샤워할 때 열고 싶다. 원래 그런 예기치 못한 사건을 통해 둘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루시아 방과 화장실의 잠금장치를 망가뜨리는 것도 한번 생각해봄직하다. "……." 그런데 허리에 손을 얹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아가 아무 말 없다. 헉! 이건 설마 무언(無言)의 허락? 혹시 루시아도 내가 만져주는 것을 은근히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긴, 루시아도 다 큰 처녀다. 물 오를 대로 오른 20대의 여인. 남자의 손길이 그립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그래. 그런 거였어. 루시아도 날 원하고 있었던 거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루시아가 날 원하는데 뭘 망설이겠는가? 난 손을 좀더 아래로 내렸다. 허리 곡선을 타고 내려간 손은 엉덩이에 닿았다. 두근두근. 아아~ 미안해, 루시아. 니가 이렇게 나의 손길을 원하고 있는지 몰랐어. 하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널 마음껏 만져……. "이 손 안 치워? 죽는다." ……주면 죽을 지도 모르겠군. "으응. 미, 미안. 난 또 니가 좋아하는 줄 알고. 하하……."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루시아의 엉덩이를 만지던 손을 치웠다. 훗~ 부끄러워 하기는. "더우니까 좀 떨어져 앉아." "그, 그래." 난 1밀리 정도 떨어져 앉았다. "더." "더? 어, 얼마나?" "1미터 이상." "헉! 그렇게 멀리?" "빨리 안 떨어져?" "아, 알았어." 난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옆으로 옮겼다. 그래도 루시아와 최대한 가까이 있고 싶었기에 70센티 정도만 떨어져 앉았다. 루시아는 대충 1미터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더 떨어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꺄하하~." "꺄르르~." "헤헤~." 계속해서 텀블링을 하며 노는 아이들. 저것들은 지치지도 않나보다. 저러다가 스프링 망가지는 거 아니야? 라이는 점프를 한 다음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엉덩이로 착지를 했다. 그리고 튀어 오르는 힘을 이용해 다시 벌떡 일어섰다. 루는 공중제비를 돌았고, 루비는 마치 발레를 하듯 허공에서 몸을 회전 시켰다. "……." 저것들 하는 걸 보니 무지 재밌어 보인다. 나도 하고파~ 하지만 이 텀블링 기구는 아이들 전용. 내가 올라갔다간 스프링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휴우~ 힘들다." 나이가 가장 많은 라이가 제일 먼저 지쳤는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텀블링 기구에서 내려왔다. "라이 뛰는 모습 어땠어요, 오빠?" "응. 최고로 멋졌어." 난 라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머리에서 나는 땀 냄새가 왠지 모르게 향긋하다. 헉! 설마 이 어린 것이 벌써부터 페로몬을 풍기고 있는 건가? "헤헤~ 기뻐요, 오빠." "언니한테 와, 라이야." 루시아는 라이가 내 품에서 애교를 부리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재빨리 라이를 빼앗아 자신의 품에 안았다. 질투의 여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질투심 강한 루시아. 질투하는 모습도 너무 귀엽다. 생각 같아서는 루시아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토닥토닥 해주고싶다. 루와 루비도 질렸는지 텀블링 기구에서 내려왔따. 어린 엘프들은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다. "이젠 뭐하고 놀까?" "루비는 고무줄놀이하고 싶어." "난 부루마블." "……." 이것들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놀고 먹고 자는 것뿐이다. 거의 생각을 안 하고 산다. 하는 고민이라고는 뭐하고 놀까, 뭘 먹을까 정도다. 그야말로 천하태평이다. 내 평생 이렇게 인생 날로 먹으려 드는 엘프들은 처음 본다. 다른 아이들은 영어 학원이다, 피아노 학원이다, 주산 학원이 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 만날 노는 게 지겹지도 않나? "……." 뭐, 쟤들 기억력으로 미루어볼 때 하루하루가 신선하려나? 금붕어가 좁은 어항 속에서 잘 살 수 있는 것은 무지하게 딸리는 기억력 때문이라고 한다. 어항 속에 딱 하나 있는 해초를 본 금붕어가 '음, 여기 해초가 있군' 하고 생각하고 돌아선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그 해초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앗! 여기에 해초가 있었다니!' 라고. 이 패턴이 계속 반복된다. 내가 보기에 어린 엘프들 역시 금붕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정도 놀았으면 지겨울 만도 한데, 그래도 항상 재밌게 논다. 어제 피자를 질리도록 먹었어도 오늘도 먹고 싶어 하고, 하루 종일 잤어도 또 자고 싶어 한다. "애들 학원이라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그건 안 돼." 루시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한다는 것에는 루시아도 동의한다. 하지만 루시아는 아이들이 자신의 눈밖에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학원에 보내면 적어도 몇 시간은 아이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루시아는 그 시간을 참을 수 없는 듯했다. 이 문제는 둘째 치고라도 정말 심각한 문제는 아이들이 귀여워도 너무 귀엽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쓰다듬어 주고 싶어지고, 볼도 만지고 싶어지고, 머리도 쓸어주고 싶어지고, 뽀뽀도 해주고 싶어진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원래 인간도 아니지만) 극강의 귀여움을 지닌 아이들. 이 아이들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그건 인간이 아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여자 선생이라면 가르치다 말고 우리 아이들을 와락 껴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나나 루시아는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을 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영아까지는 우리 가족으로 쳐준다). 여자 선생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남자 선생이면 어쩔 건가? 남자 선생은 선생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나의 사랑스런 라이와 루비에게 이상한 짓을 하려 들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시험 보는 중에 치마 밑에 컨닝페이퍼를 숨겼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치마를 들춰보는……. 헉쓰! 어떤 개자식이 감히 나의 사랑스런 라이와 루비에게 그딴 짓을! "……." 흠흠, 아무튼 그런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도저히 학원에 보낼 수 없다. 게다가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눈 뜨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다. 전에 뉴스를 보니 가관이더라. 남자와 동거를 하던 한 여성. 그녀는 애인의 변심이 두려워 임신을 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들통 날 것이 당연지사. 그래서 그녀는 심부름센터에 아기를 구해다 달라는 부탁을 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는 구호를 내세운 심부름센터 직원들은 하나같이 직업 정신이 투철했다. 하지만 아기가 길가에 널린 돌멩이도 아니고, 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안 되면 되게 하라! 심부름센터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이들은 도저히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채없자와 맞먹을 정도로 악명 자자한 직업이긴 하지만, 이들은 장인정신을 가지고 일하고 있었다(사채업자 박일현도 그렇고, 왜 이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장인정신이 뛰어난지 모르겠다). 그들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아기를 안고 걸어가는 여인에게서 아기를 빼앗았다. 하지만 어떤 엄마가 자식을 빼앗아가는 걸 보고만 있겠는가? 당연히 반항을 했고, 그들은 그녀를 죽인 다음 암매장했다. 그리고 아기를 의뢰인에게 가져다주었다. 이런 일까지 일어나는 세상에서 어찌 아이들을 그냥 내보낼 수 있겠는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경우다. 하지만 아이 없는 여자가 귀여운 아이를 훔쳐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자기 자식인 것처럼 키운다나 뭐라나? 라이, 루, 루비. 셋 모두 납치 순위 1위다. 나만 해도 납치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 아이들 아빠인 내가 아이들을 납치하고 싶어 하다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그만큼 우리 아이들이 귀엽고 깜찍하다는 거다. 뭐, 셋이나 있으니 하나쯤은 주면 안 되냐는 박모 양(영아라고 차마 말은 못 하겠다)의 얘기도 있었지만, 당연 하나도 줄 수 없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는가? ……라지만 전에 말했듯이 조금 덜 아픈 손가락은 있다. 아무튼 라이, 루, 루비 모두 하나같이 소중한 아이들이다. "……." 그런데 어쩌다 얘기가 여기까지 온 거지? 흠흠, 아무튼 나와 루시아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은 귀엽고 깜찍해서 함부로 학원 같은 곳에 보낼 수 없다. 그렇다고 계속 놀게 하는 것도 좀 그런데. 뭐 좋은 방법 없으려나? "니가 직접 가르쳐 보는 건 어때?" "응? 내가?" 루시아의 말에 난 깜짝 놀랐다. 나보고 아이들을 가르치라니! "뭘 가르쳐? 인생 교육이라도 시켜줄까?" 하긴, 이 험난한 세상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생 교육은 필수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법보단 주먹이 가깝다, 국민은 봉이고 국회의원은 지존이다, 군제 면제 받은 인간은 신의 아들이고 군대 가는 인간은 어둠의 자식이다, 이 나라에선 평생 열심히 일해도 내 집 장만은 불가능하다, 로또 복권이나 부동산 투기로 한 몫 잡는 것만이 대한민국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다 등등. 그동안 살면서 알게 된 삶의 지혜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이야말로 부모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괜찮고. 아! 요리나 청소 같은 걸 가르쳐보는 게 어떨까?" "요리나 청소? 푸하하! 농담이 지나치잖아, 루시아." 애들에게 요리나 청소를 가르치다니. 내가 장담하는데 애들은 계란후라이 하라고 계란을 주면 젓가락으로 구멍을 뚫어서 쪽 빨아먹을 것이다. 그리고 먼지 좀 털라고 먼지떨이를 주면 그걸로 칼싸움하고 놀 게 뻔하다. 하겠다고 나서도 문제다. 요리하면 태워먹을 테고, 청소하면 집안을 먼지투성이로 만들 것이다. 집안 살림 말아먹을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여, 역시 무리려나?" "응. 꿈 깨, 루시아." "아! 그럼 이건 어때?" "응? 뭐?" "마법을 가르치는 거야." "마법?" "응." "마법이라……." 나는 8클래스를 마스터한 대마법사. 이 정도면 마법사 길드이자 마법사 양성 학교인 상아탑에 가서 원로 교수를 해도 무리가 없다. 아니, 무리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나에게 제발 강의를 맡아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이상할 게 없다. 왜냐하면 난 인간 중에서…… 아니,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종족 중에서 가장 높은 클래스에 위치한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제까지 드래곤을 제외하고 8클래스를 마스터한 사람은 나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나뿐이다(참고로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후에 9클래스까지 마스터했다). 사실 인간의 몸으로 8클래스 마스터에 도달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700년을 살아오며 마법을 익혀온 상아탑의 주인 라이미안도 현재 8클래스 러너에 불과하다.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1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였기에 8 클래스를 마스터하는 것이 가능했다. 난 참고로 1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운 좋은(또는 재수 없는) 인간이었기에 8클래스를 마스터할 수 있었다. 뭐, 좀더 직접적으로 펴한하자면 날로 먹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게 날로 먹긴 했다). 아무튼 상아탑의 주인인 라이는 현재 8클래스 러너. 그리고 루와 루비는 아직 마법이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엘프. 하지만 엘프인 만큼 마법을 배울 수는 있을 것이다. 마나는 자연 전체에 분포한 자연의 기(氣)라 할 수 있다. 이 기를 느끼고 못 느끼고는 전적으로 운에 달렸다. 태어날 때부터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몇 년을 수련해야 느끼는 사람도 있고, 평생 수련해도 못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상아탑의 마법 학교는 마나를 느낀 사람들만 선별해서 받고 있다. 일단 마나를 느껴야 마법을 가르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뭐, 마법과 관련은 있으나 마법을 쓰지 않아도 되는 분야에서는 마나를 느끼지 못한 사람도 받는다. 예를 들어 언어학이라든가, 마법 이론학, 실용학 같은 분야는 마나를 느끼지 못한 사람도 입학 가능하다. 이렇듯 인간은 마나를 느끼는 사람이 드물고, 그런 만큼 마법사들의 존재는 일반인의 눈에 신기하게 비춰진다. 이는 인간이 자연과 동화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나란 결국 자연의 힘이기 때문에, 자연과의 친화력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그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엘프는 자연에 동화되어 사는 자연 친화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즉, 대다수 엘프들이 마법을 쓸 기본 조건이 갖춰져 있다는 거다. 으음, 애들에게 마법을 가르친다라……? 난 내 앞에 나란히 앉아있는 어린 엘프들을 보았다. 라이, 루, 루비. 하나같이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인도는커녕 유라시아 대륙을 통째로 준다고 해도 우리 라이, 루, 루비와는 바꾸지 않으리! "……." 아니, 유라시아 대륙을 통째로 준다면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땅값이 얼만데! "안 되겠다. 니가 가라." "예? 무슨 말이에요, 형?" "아, 아니다." 난 루를 보내려다가 루시아가 옆에 있는 것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만약 유라시아 대륙과 루를 바꿨다간 루시아한테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 "생각해봤어?" "응? 뭘?" "애들한테 마법 가르치는 거 말이야." "으음, 내가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어차피 이제까지 아이들은 니가 다 가르쳤잖아.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그, 그래? 머, 니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루시아는 내 손을 붙잡았다. "난 널 믿어." "……." 헉! 루시아가 날 믿는다니! "응응. 난 믿어도 괜찮은 남자야. 손만 잡고 잘게." "뭐?" "……." 이게 아니었나? "알았어. 내가 한번 가르쳐볼게." "혹시라도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도와줄게. 그럼 부탁해." "응. 나만 믿어." 경축! 히로의 마법 학원 개원! 난 놀이방에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지니가 이 방을 만들 때만 해도 아이들 놀이방이자 공부방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공부방으로 사용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따. 이것들이 만날 펑펑 놀기만 했지, 언제 공부를 했어야 말이지. 후후~ 언제까지 좋은 시절이 계속 될 줄 알았더냐? 이제부터 이 방을 공부방으로 사용하리! "뭐하는 거예요, 오빠?" "루비랑 놀아요." "우리 부루마블해요!" "……."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놀 궁리만 하는 어린 엘프들. "오늘부터 니들은 공부를 해야 한단다." "예?" "공부요?" "무슨 공부요?" "이 현수막 안 보이니? 한글 못 읽어?" 아이들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멀뚱멀뚱 현수막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보군. 그때 인디가 놀이방 안으로 들어왔다. 인디는 꽃다발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개원 축하드려요, 히로님." "뭘 이런 걸 다……라고 말하며 좋아할 줄 알았냐? 8클래스를 마스터한 위대한 대마법사 아이언스 히로가 후학 양성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학원을 차렸는데, 겨우 꽃다발이라니! 최소한 집채만한 화환 정도는 기대했거늘……." "죄, 죄송해요, 히로님. 당장 가서 사올게요." "그래야지." 인디는 부끄러워하며 내 앞에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무슨 돈으로 집채만한 화환을 사니?" "괜찮아요. 히로님 카드로 긁으면 돼요." "……." 히로님 카드로 긁어? "그럼 빨리 가서 사올게요." "야야, 됐어. 그냥 꽃다발로 만족하마. 이 꽃다발도 잘 보니 예쁘 구나. 포장도 예쁘고." "아! 포장은 제가 한 거예요. 꽃값 아끼려고 제가 직접 포장했어요." "……그래. 잘 했다." 돈을 아끼려고 직접 포장까지 하다니! 누가 가사 드래곤 아니랄까봐 살림살이가 제법 알뜰하다. "아! 루시아!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어?" 루시아가 옥체를 이끌고 이 먼 곳까지 행차를 하다니! 생각해 보라. 루시아가 거실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아아~ 그렇게 생각하니 내 가슴이 또 찢어지려고 한다. "잘할 자신 있어?" "물론이야.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사실 이제야 밝히지만, 나 어렸을 적 꿈이 선생이었어." "정말?" "응. 나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잖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담임한테 뒤지게 얻어맞으면서 선생이 되기로 다짐을 했거든." "그, 그래?" "응. 당한 만큼 갚아주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가, 갚아주다니?" "일단 내가 맞은 걸 백배로 불려서 학생들을 뒤지개 팰 생각이었어." "그, 그리고?" "그리고 날 개 패듯이 팬 담임과 맞짱 떠야지. 내가 선생 되면 담임도 선생이고 나도 선생이니 그땐 맞짱 떠도 상관없잖아." "……." 학창시절 때 선생에게 뒤지게 맞아본 경험. 대부분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물론 잘못을 해서 맞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패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똑같이 숙제를 안 해도 어떤 선생은 손바닥 열 대를 때리고, 어떤 선생은 엎드려뻗쳐 시킨 다음 뒤지게 팬다. 같은 선생이라도 그날 컨디션에 따라 안 패거나, 조금 패거나, 뒤지게 팬다. 이건 좀 특이한 경우인데……. 나 중학교 때 기상청이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이 있었다. 이 선생은 그날 날씨에 따라 기분이 바뀐다. 정확히 반대로. 즉, 날씨가 매우 화창한 날이면 기상청 선생은 저기압 상태가 된다. 특히 햇볕은 쨍쨍하고, 바람은 선선하고, 기온과 습도도 적당한 봄 날씨에는 완전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된다. 이 날 잘못 걸리면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맞는 거다. 반대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기상청 선생은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장맛비가 퍼붓고 천둥과 번개가 치고 나무가 뽑혀나갈 정도의 강풍이 몰아칠 때는 꽃밭을 뛰어놀던 동심으로 돌아간다. 이날은 아주 큰 잘못을 해도 웬만하면 웃으면서 넘어간다. 때리더라도 가볍게 손바닥 한 대 정도 때릴 뿐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 선생의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항상 날씨를 체크해야 했다.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다. 기상청 선생이 숙제 검사를 했는데 우리 반 50명 학생 중 무려 30 명이 숙제를 안 해왔다. 마침 그 날은 화창한 봄. 잔디는 푸릇푸릇 하고, 산새들은 노래하는 그런 날씨였다. 당연 기상청 선생은 완전히 폭발했다. 학생들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사랑의 매(하키 스틱)로 뒤지게 팼다. 맞은 아이들은 눈을 뒤집어 까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러다가 진짜 병원에 실려 가는 것 은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뒤에 선 학생들은 비가 내리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도 비가 내린다면 강도가 좀 약해질 테니.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소낙비가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본 기상청 선생은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악귀 같던 얼굴은 어느새 부처의 얼굴로 변했다. 그의 얼굴에는 자비와 자애가 깃들어 있었다. 그 얼굴은 마치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의 얼굴과도 같았다. '모두들 들어가라.' 기상청 선생은 맞느라 대기 중인 아이들을 드러가게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맞은 학생은 2명. 훈방(?)된 학생은 28명. 맞은 학생들은 억울해 이를 갈았고, 안 맞은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희희낙락거렸다. 이때 난 맞은 학생에 속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라는 속담대로 제일 먼저 줄을 섰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소낙비는 내리는 것도 순식간이지만, 그치는 것도 순식간이다. 구름 사이로 찬란한 태양빛이 쏟아졌다. 물기를 머금은 대지는 휘양 찬란하게 빛났다. 찬란한 태양, 선선한 바람, 물기를 머금고 봄의 새싹을 틔우는 식물들. 주위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그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내린 큰 축복이었다. 물론 일부 인간들에게는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아까보다 더욱 화창해진 날씨를 본 기상청 선생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기상청 선생은 분필을 집어 던지고 사랑의 매를 집어 들었다. '아까 안 맞은 놈들 다시 나와!' 아까 안 맞은 28명의 학생들은 다시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하키스틱으로 뒤지게 얻어맞았다. 나를 포함한 둘은 10대 맞고 끝났지만, 후에 맞은 28명은 20대씩 맞았다. 몇 놈은 눈을 뒤집어 까고 기절까지 했다. 난 그때 깨달았다. 역시 옛말 틀린 것 없다는 것을. 뭐, 이건 좀 극단적인 경우긴 하지만, 이 실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선생은 학생에게 있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이 패면 학생은 맞아야 한다. 어떠한 반항이나 저항도 용납되지 않는다. 패는 데 있어서 일정한 기준은 없다. 속된 말로 '선생 꼴리는 대로'패는 것이다. 누가 교사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라 했는가? 교사는 스트레스를 받는 족족 그걸 학생에서 풀 수 있다. 인간 샌드백이 널리고 널렸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그래도 요즘은 학생 인권운동이다 뭐다 해서 좀 나아진 편이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생은 선생이 패면 맞아야 하는 개,돼지만도 못한 존재였다. "저, 정말로 잘 카르칠 수 있겠어?" "응. 걱정하지 마, 루시아. 날 믿는다고 했잖아." "그, 그렇지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믿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꽨찮다니까. 아!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 시간이야." "그, 그래. 그럼 난 나가있을게." 루시아는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난 앞에 서서 어린 엘프들을 둘러보았다. 작은 앉은뱅이책상이 세 개 놓여있고, 그 앞에 어린 엘프들이 앉아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노트와 필기도구가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오빠?" "새로운 놀이하는 거예요?" "재밌을 것 같아요!" "……." 끝까지 놀이에 미련을 못 버리는 어린 엘프들. 난 미리 준비해놓은 사랑의 매(길이 50센티, 직경 1센티)로 화이트보드를 두드렸다. 탁!탁! "너희들은 오늘부터 이 오빠…… 아니, 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 게 된다. 다시 말해 공부를 하게 된다는 뜻이지." "예? 공부요?" "공부가 뭐예요, 오빠?" "새로운 놀이에요?" "……." 모르는 거니, 모르는 척하는 거니? "공부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뜻한단다. 이 오 빠…… 아니, 이 선생님이 잘 가르쳐줄 테니, 너희들은 이 오 빠…… 아니, 이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거 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예, 오빠." "잘 알았어요." "무슨 말인지 다 알아요." "……." 정말로 아는 거니, 아는 척하는 거니? "그럼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마법을 배워보도록 하자꾸나." "마법이요? 라이 빨리 배울래요!" 라이는 마법을 배운다는 말에 굉장히 좋아했다. 사실 라이가 겉으로는 놀고 먹고 자기만 하는 빈둥빈둥 엘프로 보이고, 실제로도 빈둥빈둥 엘프이긴 하지만, 그래도 과거에는 상아탑의 주인, 다시말해 마법사 길드의 길드 마스터였다. 마법 실력은 현재 8클래스러너로 드래곤과 나 다음으로 높다. 그럼 여기서 잠깐 마법사 순위를 살펴보도록 하자. 1위. 9클래스 마스터(5명 공동 일등) -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 -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 -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 6위. 8클래스 마스터 - 아이언스 히로 7위. 8클래스 러너 - 라이미안 신뢰도 99.8퍼센트의 순위표다. 보다시피 1위는 당연 드래곤 다섯이 공동으로 차지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가 더 세지 않느냐?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9클래스 마스터는 일종의 무한대 개념이다. 이 경지에까지 오르면 서로의 힘을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비교한다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 만약 9클래스 마스터끼리 싸운다면 그것은 우주 전체의 공멸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이들 중 누가 더 세냐는 질문은 무한대 짝수와 무한대 홀수 중 어느 쪽이 더 크냐는 질문과 다를 바가 없는 질문이다. 드래곤들은 세계의 균형자인 만큼 거대한 마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마나가 쌓이고, 스펠을 외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각인된다. 처음에는 1클래스부터 시작하지만, 해츨링, 웜급을 거치며 마력이 커지고 클래스가 올라간다. 그리고 때가 되면 9클래스 마스터가 된다(9클래스를 마스터한 드래곤을 일컬어 에이션트 드래곤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9클래스가 드래곤만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드래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종족들은 8클래스까지가 한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런 고정관념은 아이언스 이그리드에 의해 깨졌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아까도 말했듯이 나를 판타지 세계로 부른 마법사이자, 나에게 마법을 물려준 스승이다. 그리고 인간 중에서…… 아니, 드래곤을 제외한 모든 종족 중에서 유일하게 9클래스 경지에 오른 마법사다 (지금은 죽은 관계로 순위에서 제했다). 아무튼 드래곤 다섯이 공동 1위인 관계로 그 다음은 2위가 아닌 6위로 이어진다. 6위는 다름 아닌 아이리스 왕국의 공작이자, 상아탑의 주인 라이미안의 보호자이자, 루엔의 손자 손녀인 루와 루비를 떠맡아 기르고 있는 양육자이자, 사일런스 지니 백작의 마음의 스승이자, 루시아의 남편(은 아니지만, 앞으로 반드시 될) 아이언스 히로다. "……." 흠흠, 간만에 자기 PR좀 할 겸 수식어를 좀 길게 넣었다. 나는야 8클래스 마스터~. 어렸을 때부터 마법에 소질을 보여 호그와트 마법 학교에 입학해 해리포터와 함께 영재교육을 받아서 8클래스 마스터가 된…… 것 은 아니고, 아까도 말했듯이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준 걸 날로 받아먹었다. 나의 뒤를 이어 7위에 이름을 올린 엘프는 다름 아닌 나의 귀엽고 깜찍한 딸 라이. 비록 빈둥빈둥 엘프로 보이는 라이지만, 마법 실력은 무려……. "라이는 텀블링 할 거야." "루비는 고무줄놀이 할 거야." "난 부루마블!" "라이가 먼저 텀블링 하자고 말했어. 그러니까 다 같이 텀블링해야 돼." "그러는 게 어딨어, 라이야? 라이는 나빠!" "루비 말이 맞아. 라이는 나쁜 엘프야." "뭐어?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야! 착한 엘프야!" "아니야! 라이는 나쁜 엘프 맞아! 루비가 착한 엘프야!" "내가 더 착한 엘프야!" "영아 누나가 내가 제일 착하다 그랬어!" 툭탁툭탁! "그만 두지 못해, 이것들아! 다들 저쪽에서 손들고 있어!" 이리하여 어린 엘프들은 첫 수업부터 벌을 받는 신세가 되엇다. 난 사랑의 매로 어깨를 툭툭 치며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특히 라이 를 중점적으로 노려보았다. 팔을 슬금슬금 내리던 라이는 나와 눈 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 쟤 정말 8클래스 러너가 맞을까? 혹시 그동안 내가 속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8클래스 러너는커녕 마법사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저게 어딜 봐서 8클래스 러너야? 아무리 봐도 빈둥빈둥 엘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난 라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우리 라이 몇 클래스지?" "으음, 그러니까요……." 라이는 손가락으로 세기 시작했다. "……." 뭐야? 자기가 몇 클래스인지 기억도 못하는 거야? "라이는 8클래스에요!" "그래. 다행히 맞췄구나. 틀리게 말하면 어쩌나 무지 걱정했단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앗! 오빠 라이만 칭찬하고." "너무해요!" "알았어. 다들 손 내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그러자 루와 루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난 다시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마법을 배우기에 앞서……." "놀아요오~!" "……." 놀긴 뭘 놀아? 책상 앞에 앉아서도 어떻게든 놀 궁리만 하는 어린 엘프들. 내가 애들을 데리고 수업을 잘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난 아이들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말을 이었다. "마법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혹시 마법의 개념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엘프?" "저요!" 역시나 마법사인 라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난 사랑의 매로 라이를 지목했다. "라이 학생 일어나서 말해보세요." 라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말했다. "마법은 마법입니다." "……응?" 뭐야? 지금 내가 잘못들은 건가? 짝짝짝! "와아! 라이 너 대단하다." "역시 라이는 똑똑한 것 같아." "헤헤~ 라이가 원래 좀 똑똑해." 감탄하며 박수까지 치는 두 엘프. 라이는 기분 좋은지 양 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으쓱거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뭐가 대단하다고 감탄을 하고 박수를 쳐! 니들 정말 자꾸 이럴래?" 그러자 라이는 날 보며 물었다. "그럼 마법이 뭐예요, 오빠?" "잘 들어둬. 마법이란 말이지……." 잠깐. 그런데 마법이 뭐지? 막상 설명하라고 하니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제대로 마법을 배운 사람이라면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 지만 난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 속성…… 즉, 야매로 배웠다. 하루아침에 마법을 쓰게 된 내가 마법의 개념 같은 걸 알 리 없다. 야매의 부작용이 여기서 나타나는군. "흠흠, 사실 마법의 개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들면 철학적이고 수학적이고 원론적이고…… 아무튼 무지 복잡해지기 때문에 그냥 '마나를 사용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마법이다' 정도로 알아두면 될 듯하구나." 그러자 라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아니에요, 오빠. 마법이란……." "시끄러!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 알았어?" 난 라이가 태클을 걸기 전에 미리 막았다. 감히 나의 수업에 태클을 걸려 하다니. 그래도 8클래스라는 건가?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마나를 느껴야 해. 마나는 자연 전체에 분포한 기(氣)이자 우주의 근원이라 할 수 있지. 이 우주는 마나로 구성되어 있고, 마나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있어. 마나는 마법을 쓰기 위한 원료지만, 마나가 곧 마법은 아니야. 마나는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어. 인간의 입장에서는 카오스(Chaos)적이라 할 수 있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코스모스(Cosmos)적이라 할 수 있지.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생기는 법이고, 질서는 무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법이니까. 이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라면 엔트로피(Entropy) 개념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데, 이건 니들이 이해하기 좀 힘들 것 같으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라이는 듣고 싶어요!" "루비는 엔트로피가 뭔지 막막 궁금해요." "설명해주세요!" "……." 이것들 왜 이래? 엔트로피 개념을 설명하려면 닫힌 계, 열린 계 등의 개념과 열과 에너지의 흐름 등을 전부 설명해줘야 한다. 사실 나도 대략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설명할 자신은 없다. 그런데 나에게 설명을 강요하다니! 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엔트로피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쇠빳따로 열 대씩 맞아야 한단다. 뒤 지게 맞아야만 이해가 되는 개념이거든. 그래도 설명 듣고 싶니?" "아, 아니요. 라이는 그냥 넘어가고 싶어요." "루, 루비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저, 저는 엔트로피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어린 엘프들은 쇠빳따라는 말에 사색이 되서 손을 내저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럼 아까의 설명으로 돌아가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채내에 마나를 쌓아야 돼. 채내에 마나가 있어야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그러자 라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뭐야? 또 태클인가? 혹시 내가 뭐 틀리게 설명한 거라도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전부 맞는 것 같다. 내가 방금 설명한 것은 마법의 기초 중의 기초. 아무리 야매로 배운 나지만 이 정도는 알고 있다. "라이 학생 무슨 질문 있나요?" "예, 오빠. 방금 전 체내애 마나가 있어야만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했는데, 9클래스는 다르지 않나요?" "그, 그렇지. 우리 라이는 참으로 똑똑하구나."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클인 줄 알고 긴장했는데, 다행히 아니다. "지금 라이가 말한 것은 조금 있다가 설명해 줄게.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은 자연에 분포되어 있는 마법을 인위적으로 체내에 쌓아 몸속에 써클(Circle: 원)을 만들지. 처음 생기는 써클을 1써클이라 하고, 1써클은 곧 1클래스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나를 뜻하지. 1써클에 있는 마나의 양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2클래스에 속한 마법을 쓸 수는 없어. 1써클 바깥에 생긴 또 다른 써클은 2써클이라고 하지. 이런 식으로 계속 써클을 늘려나가야만 높은 클래스의 마법을 쓸 수가 있어." 루비가 손을 들며 질문을 했다. "그럼 3써클은 세 개의 써클이 겹쳐있는 모양인가요?" "응. 중앙에 작은 써클이 있고, 그 바깥에 조금 큰 써클이 있고, 그 바깥에 조금 더 큰 써클이 있고…… 이런 식으로 세 개의 써클이 겹쳐져 있지." 난 매직으로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했다. "보면 알겠지만, 3써클은 2써클을 포함하고 있고, 2써클은 1써클을 포함하고 있어. 이걸 다시 말하자면 3써클은 1,2써클을 포함하고 있는 셈이지. 3클래스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3써클의 마나가 필요해. 하지만 마법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3클래스 마법이라고 해서 3써클 마나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야. 3써클 마나와 함께 1, 2써클 마나도 같이 필요로 하기도 하지. 그런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동시에 세 개의 써클에서 마나를 움직여야 해. 여러 개의 써클에서 나오는 마나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려면 아주 복잡하고도 미세한 조정이 필요해. 반면 1클래스 마법은 오로지 1써클 마나만을 필요로 하니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지. 그렇기 때문에 높은 클래스의 마법일수록 쓰기 힘들어지는 거야. 그래서 마법의 위력과는 상관없이 클래스가 나뉘는 거지. 사실 파괴력만으로 따지자면, 3클래스에 속한 마법보다 강력한 1클래스 마법도 얼마든지 있거든." 이번에는 루가 손을 들며 질문을 했다. "그럼 각 써클의 마나는 따로 모아야만 하나요?" "꼭 그런 건 아니야. 일단은 써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1써클을 만들어야만 2써클을 만들 수 있고, 2써클을 만들어야만 3써클을 만들 수 있으니까. 한번 써클을 만들어 놓으면 써클 사이로 마나를 자연스럽게 이동시킬 수 있어. 예를 들어 1써클의 마나가 10이 있고 2써클의 마나가 10이 있는데, 1클래스 마법을 마니 써서 1써클의 마나가 전부 고갈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1써클 마나는 0이고, 2써클 마나는 그대로 10이 남아있겠지? 이럴 경우 2 써클 마나의 반을 1써클로 보내면, 1써클 마나 5, 2써클 마나 5가 되는 거지." 난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또 다시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렸다. "마나가 우유라고 가정을 한다면, 써클은 컵이야. 이렇게 두 개의 컵에 우류를 나눠 담았어. 그런데 한 컵에 있는 우유를 누군가가 다 마셔버렸어. 그럼 이쪽 컵에 있는 우유를 빈 컵에 따라 이렇게 반반씩 나눌 수도 있고, 빈 컵을 꽉 채워 이 컵을 비게 할 수도 있는거야. 컵의 크기를 똑같이 그려놓긴 했지만 써클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 달라. 같은 1써클이라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양의 마나를 채울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재능과 노력에 달린 거지. 일반적으로 높은 써클은 하위 써클에 비해 마나의 양이 많아. 높은 클래스의 마법일수록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하니까. 하지만 오랫동안 1써클에 머물러 있다가 2써클로 진입한 사람이라면, 1써클의 마나량이 더 높겠지. 그러다가 계속 수련하면 2써클의 마나량이 더 높아질 테고. 오빠 말 이해하니?" "네에~!" 어린 엘프들은 크게 대답하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해 못했다는 뜻인가? 어쨌든 나는 설명을 계속했다. "방금 설명한 것이 일반적인 마나의 원리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8써클까지야. 9써클이 되면…… 아니, 9써클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보는 게 좋겠군." "어째서요?" "8써클까지는 써클이 하나씩 늘어났어. 그래서 8써클은 여덟 개의 써클로 이루어져 있지. 그럼 9써클은 몇 개의 써클로 되어 있을까?" "아홉 개요오~!" 라이를 제외한 두 엘프가 힘차게 대답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겠지.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아탑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틀려. 9써클에 도달하면 써클의 개념 자체가 없어져. 8써클 바깥에 또 다른 써클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써클이 붕괴되어 하나로 합쳐지지. 이렇게 되면 마법을 쓸 때도 동시에 여러 써클을 움직일 필요가 없어. 즉, 이말을 다시 하면 높은 클래스 마법도 손쉽게 쓸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주문과 영창이 필요 없어진다고나 할까? 아! 주문과 영창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해 줄게. 아무튼 그래서 9클래스는 의지만으로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돼. 상상한 것이 곧 현실로 이루어지는 거야." 난 말을 멈추고 잠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내 얘기를 경청하고 있다. 학생들이 이렇게 집중해 수업을 들으면 선생은 신이 나기 마련이다. 난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 "써클이 사라지고 몸속의 마나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은 마법의 개념 자체가 바뀌는 것과 다름없어. 아까도 말했듯이 마법사가 채내에 마나를 저장할 때는 써클의 모양으로 저장을 해. 즉, 자연적인 마나를 인위적으로 가공을 해서 몸에 저장한다는 거지. 하지만 써클이 없으면 몸에 마나를 저장할 필요도 없고, 마나를 가공할 필요도 없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연에 분포되어있는 마나를 무한정 가져다 쓸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래서 9클래스는 무한대의 영역이라 불리는 거야. 아! 예를 들어 설명해 줄게." 난 또 다시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렸다. "8써클의 마나를 충전지라 하면, 9써클의 마나는 콘센트에 연결 되어있는 셈이야. 충전지를 계속 쓰기 위해서는 쓸 때마다 전기를 충전해야지. 또 다 쓰면 다시 충전해야 하고. 하지만 콘센트에 연결이 되어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어. 그냥 무한정으로 전기를 끌어다 쓰면 되니까. 충전을 할 필요도 없고, 전기를 가공해 저항할 필요도 없지." 잠깐. 그런데 내가 이걸 왜 설명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얘들이 9클래스가 될 일은 없다. 루와 루비는 아직 마나도 느끼지 못하는 초보고, 이 학원에서 제일 우등생이라 할 수 있는 라이 역시 8클래스 러너다. 이건 마치 덧셈 뺄셈도 못하는 애들에게 미적분을 설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흠흠, 그럼 9클래스에 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 아무튼 9클래스는 졸라 짱 쎄다는 것만 기억해두면 돼. 다른 건 알 필요없어." "질문 있어요!" 갑자기 손을 번쩍 드는 라이.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 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9클래스가 졸라 짱 쎄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9클래스보다 쎈 건 없는 거예요?" "응. 9클래스는 무한대의 개념이니 무한대보다 큰 건 없어." "그럼 인디 오빠랑 오빠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헉!" "아앗! 루비도 궁금해요." "인디 형이 9클래스니 인디 형이 이기지 않을까?" "그치만 저번에 오빠가 인디 오빠를 울렸는걸." "하지만 9클래스가 졸라 짱 쎄다잖아." "그래도 오빠가 더 쎄!" "아니야. 방금 형이 9클래스보다 더 쎈 건 없댔어. 그리고 인디형은 9클래스고, 형은 8클래스야." "그렇지 않아! 9클래스가 졸라 짱 쎄면, 오빠는 졸라 짱 짱 쎄! 그쵸, 오빠?" "빨리 말해주세요, 오빠. 라이는 궁금하단 말이에요." "저도 엄청 궁금해요." "그, 그건 말이지……." 세상에 이런 난감한 질문을! 히로의 마법 학원 개원 이래 최대의 위기다(라지만 개원한 지 아직 1시간도 안 됐다). 만약 인디가 더 세다고 하면 이것들이 나를 우습게 볼 테고, 내가 더 세다고 하면 아까 한 설명을 부정하게 되는 셈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되면 냉정한 판단력을 상실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가 누군가? 잔머리의 대가 아이언스 히로 아닌가? 그래, 나의 잔머리로 이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가는 거야! "그, 그러니까 인디와 오빠가 싸우면 말이지…… 다, 당연 이 오빠가 이기지." "예? 방금 전에는 9클래스보다 강한 건 없다고 하셨잖아요." "무, 물론 그렇지. 하지만 이 오빠에게는 빅장 40단 콤보가 있지 않니? 뼈와 살을 분리하는 빅장을 맞는다면 9클래스라도 무사할 수는 없지. 40단 콤보 중하나만 직격돼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되니까. 그리고 오빠한테는 개나리 스텝도 있고 쇠빳따도 있고…… 아, 아무튼 이리저리 비교해보면 대략 7대 3 정도로 오빠가 이길 확률이 높단다." "그럼 빅장 40단 콤보가 9클래스보다 더 센 거예요?" "뭐, 꼭 세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누가 쓰냐에 따라 달라지 는 거지. 9클래스가 무한대라면, 빅장 40단 콤보도 무한대라고나할까?" "그럼 무한대 대 무한대의 대결이니 비기는 거 아니에요?" "……." 뭘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니? 라이 오빠한테 한나고 싶어서 그러니? 빅장의 위력을 뼛속까지 느끼게 해줄까? "양쪽의 전력이 비슷한 경우 응원전에서 승부가 갈리기 마련이지. 왜 운동회 같은 거 보면 응원 점수라는 게 있잖아. 루시아 언니가 오빠를 응원해주는 이상 오빠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아!" 난 주먹을 불끈 쥐며 그렇게 외쳤다. 그렇다! 루시아가 응원해주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드래곤 다섯 마리와 싸우는 것도, 여성 속옷 매장에서 한 시간 동안 서 있는 것도! "그치만 인디 오빠한테는 일루니아 이모가 있잖아요." "맞아. 일루니아 언니가 인디 오빠 응원할 게 틀림없어." "그럼 응원 점수도 동점 아닌가?" "……." 순간 맥이 탁 풀린다. "그, 그야 그렇지. 하지만 오빠에게는 우리 라이, 루, 루비가 있잖니? 라이, 루, 루비가 오바를 응원해주면 이쪽 치어리더(?)가 세 명 더 많아지잖아. 그럼 오빠가 이기게 되는 거지." 이젠 제발 좀 납득해라. "헤헤~ 라이는 오빠 응원할래요!" "루비도요!" "라이와 루비가 한다면야 저도……." "그, 그래. 고맙구나." 다행이다. 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무튼 어째서 오빠가 인디 오빠보다 더 센지 이젠 이해했지?" "네에~!" "그래. 그럼 계속 수업을 하자꾸나." 아까 어디까지 진행했더라? 앞으로는 수업과 상관없는 질문은 안 받든지 해야지. 난 화이트보드를 지우며 말했다. "어쨌든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마나를 느껴야 해. 마나를 느끼는 것은 모두가 달라. 태어날 때부터 마나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조금만 수련해도 마나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수십 년 수련해야 마나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평생 수련해도 못 느끼는 사람도 있어.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엘프는 자연 친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대다수의 엘프가 조금만 수련을 하면 마나를 느낄 수 있어." 난 라이를 보며 물었다. "우리 라이는 언제 마나를 느꼈지?" "라이는 태어날 때부터 마나를 느꼈어요. 처음에는 그게 마나라는 것도 잘 몰랐는데, 나중에 인디 오빠가 알려줘서 마나인 줄 알았어요." "……." 라이 너 지금 오빠 앞에서 잘난 체 하는 거니? 흥! 재수 없어! "후후~ 태어날 때부터 마나를 느꼈다니. 우리 라이는 천재 엘프 인가 보구나?" 내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라이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디 오빠가 라이는 천재라고 했어요. 라이처럼 마법에 소질 있는 엘프는 처음 본대요." "……."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우리 라이 정말 대단하구나. 천재여서 좋겠어~." 라이는 내가 빈정거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 라이가 원래 좀 천재잖아요." "……." 아아~ 재수 없어. 당장이라도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을 정도다. 새하얀 엉덩이가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때려주고 싶다. 루비도 라이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지 팔짱을 끼며 볼을 부풀렸다. "흥! 라이 너 지금 잘난 체 하는 거니?" "아니야. 라이 잘난 체 하는 거 아니야. 라이는 천재여서 천재라고 말한 것뿐이야." 그러자 루비는 나를 보며 말했다. "너무해요, 오빠! 라이만 칭찬해주고!" "아, 아니, 별로 칭찬한 건 아닌데……." "루비도 칭찬 받고 싶단 말이에요!" "오빠는 라이게 천재여서 칭찬해준 거야. 루비는 천재가 아니니 까 오빠가 칭찬 안 해줄 거야. 그쵸, 오빠?" "칭찬해준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지금 수업 중이니까 떠들지마! 또 벌서고 싶어?" 내가 소리치자 아이들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난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아무튼 그래서…… 아이씨! 니들 떠들어대는 것 때문에 까먹었잖아!"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이들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우엥~ 우엥~ 오빠 라이한테 막막 소리 지르고……." "으앙~ 으앙~ 루비한테는 칭찬도 안 해주고……." "엉엉~ 형 나빠요." "아니, 이것들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는 못할망정 울다니! 다 들 혼나고 싶어서 그래?" "우에에엥~." "으아아앙~." "엉엉~." "어쭈! 그래도 안 그친다 이거지? 니들 지금 교권에 대해 도전하 는 거지?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난 미리 화이트보드 뒤에 숨겨 놓았던 쇠빳따를 꺼내들었다. "후후후~ 드디어 쇠빳따의 성능을 시험할 때가 왔군. 다들 엎드 려뻗쳐!" "우에에엥~!" "으아아앙~!" "엉엉~!" 어린 엘프들은 엎드려뻗치기는커녕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훗~ 울어봐야 소용없다. 선생이 한번 개 패듯이 패기로 마음먹었으면 학생은 따라야 한다. 설사 선생이 일본도를 들고 와 목을 내놓으라고 하면 학생은 선생이 목을 자르기 쉽도록 길게 목을 빼야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이다.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삼는 군대마저도 구타가 없어지고, 인권의 사각지대로 알려진 교도소마저도 법적으로 구타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학교만은 예외다. 학교에서 선생은 학생에게 체벌을 빙자해 구타를 할 수 있다. 법적으로 인정된 폭력인 것이다. 이는 헌법에도 어긋난 것이다. 누구 맘대로 개인의 인권과 신체의 자유를 억압한단 말인가? 법적으로 인정된 폭력이란 게 말이나 되는가?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대상자가 '인간' 이 아닌 '학생' 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학생은 특수한 존재로 분류가 된다. 그리고 학생에게 인권 같은 것은 조금도 필요 없다. 왜냐? 학생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人權)은 인간의 권리이다. 학생은 인간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 이 나라의 생각이다. 자기 머리 자기가 기르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냐? 그런데 학생들은 뭐라 그런다. 학생은 자기 머리를 기를 권리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들은 바리깡(이발 기기)을 들고 다니며 머리 긴 학생을 발견하는 즉시 강제로 밀어버린다. 만약 이 짓을 길거리에서 했다고 생각해 봐라. 바로 경찰서로 끌려간다. 하지만 선생이 학생에게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 학생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집 개를 붙잡고 털을 밀면 경찰서에 끌려가지만, 학생의 머리를 밀면 아무 상관없는 이상한나라. 학생은 개만도 못한 존재라는 뜻인가? 머리를 기르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학생이 머리가 길면 학생답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흥업소에 출입하거나 담배를 사는 등 아무튼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이다. "……." 이건 뭔 개소리냐? 머리가 짧으면 학생이가, 머리가 길면 성인이라는 건가? 한 마디로 머리가 짧은 편이 통제하기 편하다는 것이다. 아예 학생들의 이마에 '학생' 이라는 문신을 새기고, 몸에 마이크로칩을 내장하라고 교육부와 학교에 건의하고 싶다. 아니면,학교를 교도소처럼 개조해서 가둬놓고 교육시키던지. 두발 규제 문제는 체벌에 비하면 극히 사소한 문제이다. 남의 집 개를 패도 경찰서에 끌려가는 마당에 선생이 학생을 합법적으로 팰 수 있다니! 개가 학생보다는 좀더 인간답게 살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건가? 즉, 인권으로 따지자면……. 인간 > 개 > 학생 대략 이런 순위다. 고등학교 선생이 한 명 있다. 이 선생이 지나가던 사람을 가볍게 한 대 때렸다. 폭행죄로 경찰서에 끌려가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이번에는 지나가던 남의 집 개를 가볍게 한 대 때렸다. 애완동물 보호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이번에는 학교에서 학생을 개 패듯이 팼다. 전치 4주가 나왔다. 아무 죄도 아니므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나는 개 패듯이 맞으며 이 사실을 깨달았다. 중학교 때 반 친구가 선생한테 맞던 중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이 일어났다. 친구 부모님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뼈를 부러뜨린 선생을 경찰에 신고했다. 그럼 이 선생이 처벌을 받았을까? 물론 안 받았다. 경찰은 아예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선생이 학생을 패다보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고, 병신이 될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걸 뭐 하러 신고까지 하냐는 것이다. 선생이 학생을 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학생이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을 테니 그런 일 가지고 일일이 조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찰마저 두 손을 놓자 친구 부모님은 민형사 소송을 걸었다. 이번에는 처벌을 받았냐고? 물론 안 받았다. 고소를 한 그 순간부터 학교 측에서 각종 협박이 들어왔다. 앞으로 어떠한 학교에도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결국 친구 부모님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고소를 취하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계속 학교를 다녔다. 그 다음부터 고소당한 선생은 물론이고 다른 선생들까지 그 친구를 인간 취급 안 했다. 여기서 인간 취급 안 했다는 것은 때렸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 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단체로 기합을 받을 때도 그 친구만 제외되었고, 주번이나 청소는 물론 학교 행사에도 전부 제외시켰다. 간단히 말해 선생들이 학생을 왕따 시킨 것이다. 결국 견디지 못한 그 친구는 자퇴를 했고, 그 다음부터는 선생이 아무리 개 패듯이 패도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고소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선생이 개돼지 취급을 하면 개돼지처럼 굴어야했다. 왜냐하면 상대는 선생이고, 이쪽은 학생이기 때문이다. 매 없이 어떻게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나요? 이것이 이 나라 선생들의 주장이다. 학생은 말로 해서는 못 알아 듣기 때문에 짐승처럼 패야지만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 나라 선생들의 머릿속에는 '조센징은 패야 말을 듣는다' 라는 식민지 시대 사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교도소와 군대가 폭력 근절을 외칠 때도 학교는 끝까지 매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학생을 패고 있다. 아아~ 어쩌겠냐? 학생은 인간이 아니어서 기초적인 인권을 주장할 수도 없거늘. 억울하면 자퇴하거나 졸업하는 수밖에. 난 지금 선생이고, 어린 엘프들은 학생. 그러므로 내가 패면 쟤들은 맞아야 한다.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소송을 걸 수도 없다. "음하하~." 무소불위의 권력이란 이래서 좋다. 내가 쇠빳따를 들어올리자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벌벌 떨었다. '살려주세요오~!'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하지만 학생이 살려달라고 빈다 해서 용서해주는 것은 선생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후후~ 뭘 그렇게 떨고 그러니? 이건 어디까지나 사랑의 매일 뿐이란다. 어떤 엘프가 먼저 이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을래?" 그 순간 문이 벌떡 열리며 루시아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루시아는 서로 껴안고 벌벌 떠는 어린 엘프들과 쇠빳따를 들고 있는 나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하하~ 오랜만이야, 루시아. 이 먼 곳까지는 어쩐 일이야?" "애들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단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야? 너 설마 그걸로 애들을 때리려는 것은 아니었겠지?" "우에에엥~ 살려주세요, 언니." "으아아앙~ 루비는 죽기 싫어요." "엉엉~ 형이 우리를 죽이려고……." 아이들은 재빨리 루시아의 치마를 붙잡고 매달렸다. 루시아는 아이들을 토닥거려주며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난 슬며시 고개를 돌려 루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눈으로 보면 부담스러워, 루시아. "너 정말 그걸로 애들을 때리려고 했어?" "흠흠, 학부모가 수업 중인 교실에 쳐들어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야. 그리고 체벌은 교사의 정당한 권리야. 선생이 학생을 패는것은 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그래서 애들을 때리겠다는 거야?" "니 맘 이해해, 루시아. 하지만 때리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다는 것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정말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지만 참교육을 위해서 살신성인의 자세로 체벌을 하려는 거야." "누구 맘대로 애들을 때려!" "너 지금 나의 수업 방식에 불만을 가지는 거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건 교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야!"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 "말이 왜 안 돼? 우리나라 교육계는 원래 이래!" 루시아는 정말 화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난 그 눈빛에 지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평소라면 당장 꼬리를 말고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선생. 학교 안에서만큼은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다. 학부모의 항의쯤이야 가볍게 아웃 오브 안중이다. 억울하면 교육부에 고발하든가. "그래, 좋아." 날 노려보던 루시아는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반색했다. "내 교육 방식을 이해해주는 거야, 루시아?"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부터 애들 니 학원에 안 보낼 거야." "헉! 그, 그렇다는 것은……." 학원생 고작 세 명. 세 명 모두 학원에 안 나옴. 수업 폐강. 학원 망함. 헉쓰! 개원 하루 만에 폐업이라니! 애들이 단체로 나가면 우리 학원 망한다. 안 돼. 어떻게 세운 학원인데 하루 만에 망하게 할 수는 없어. "자, 잠깐만요, 라이 어머님. 일단 진정하시고 여기 앉으시죠." 난 재빨리 의자를 내왔다. 루시아는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세우며 의자에 앉았다. 난 뒤에서 루시아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애들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어깨에 근육이 너무 많이 뭉쳤네요. 좀 쉬엄쉬엄 하세요." "애들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에 힘들어." "……." 나, 나 때문에? 난 더욱 열심히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흠흠, 아무튼 애들 계속 학원에 보낼 거지?" "먼저 애들 안 때린다고 약속해." "하, 하지만 체벌은 선생 고유의 권한……." "얘들아, 가자." "아, 알았어! 안 때릴게." "정말이지? 만약 애들 한 대라도 때리면 다시는 여기 안 보낼 거야." "으응. 무, 물론이지."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 귀여운 애들이 때릴 데가 어디 있어? 안 그래?" "……." 찾아보면 은근히 많은데. "그리고 우리 애들은 착해서 말로 해도 다 알아들어." "……." 말로 하면 못 알아듣던데. "말썽 좀 피우더라도 잘 타이르면 될 거야." "……." 안 되던데. "그럼 애들 좀 잘 부탁할게." "응. 나만 믿어." "수업 방해해서 미안해. 난 이만 나갈게." "버, 벌써 가게?" 루시아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루시아는 방문을 나가기 직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애들 때리면 그땐 정말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으응." 웃는 얼굴에서 살기가 풍긴다. 애들 한 대라도 때렸다간 루시아한테 맞아 죽을 것만 같다. 루시아가 나가고 나자 나는 다시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뭘 그리는 거야, 라이야?" "강아지 그리는 거야?" "우와! 라이 너 그림 되게 잘 그린다." "헤헤~ 라이가 원래 좀 잘 그려." "……." 언제 울었냐는 듯 웃고 떠드는 어린 엘프들. 과연 평균 기억력 3초를 자랑하는 단순 엘프들답다. 혹시 저것들에게 뭔가를 가르쳐보라는 내가 바보짓 하는 게 아닐까? "……." 아직은 시작에 불과해. 좀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자, 그럼 수업을 재개하도록 하자." "배고파요오~!" "……." 한 게 뭐가 있다고 배가 고프니? "너희들은 '공부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라는 속담도 못 들어봤니?" "이제까지 열심히 했잖아요." "맞아요. 루비가 60년 넘게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열심히 공부한 적은 처음이에요." "저도 머리털 나고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 "……." 아아~ 때리고 싶다. "하긴 뭘 해!" 내가 소리치자 라이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두 나무꾼이 있었는데 한 나무꾼은 쉬지 않고 일했고, 다른 나무꾼은 50분 일하고 10분간 쉬었어요. 그런데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갈 때 보니 10분씩 쉰 나무꾼의 짐이 더 많았어요. 쉬지 않고 일한 나무꾼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봤어요. 그러자 쉬면서 일한 나무꾼이 자신은 휴식을 취해 체력을 보충했고, 그 시간에 도끼날도 갈아서 더 많은 나무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어요." "……." 기억력도 안 좋은 게 이런 얘긴 어떻게 외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라구?" "이 이야기는 휴식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쉬지 않고 공부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해요. 틈틈이 쉬어 머리도 식히고 배도 채워야 더욱 집중력 있게 공부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저도 라이 말에 동의해요." 난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그 말이 맞긴 맞거든. 그런데 그 나무꾼은 일을 하고 쉬었잖니? 니들은 뭘 했다고 쉬자는 거니? 그리고 수업 시작한 지 아직 30분 밖에 안 지났거든. 쉬는 시간까지는 앞으로 20분 남았어. 20분 더 공부하고 쉬자." "안 돼요. 라이 배고프단 말이에요." "루비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나요." "저는 배가 등에 달라붙은 것 같아요." "……." 아아~ 때리고 싶다. 너무 때리고 싶다. 난 사랑의 매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라이는 아이들을 대표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배가 고파 집중이 안 됩니다. 그러니 잠시 쉬면서 간식을 먹는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집중력 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이 말이 끝나자마자 루비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라이 말에 동의합니다." 루도 따라서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라이 말에 동의합니다." 나도 질 수 없어서 손을 번쩍 들었다. "동의 같은 소리 합니다. 아주 쇼를 합니다. 전부 맞고 싶은가 봅니다." 그러자 라이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허리에 얹고 나를 쏘아 보았다.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오빠?" "뭐니, 그 건방진 태도는?" "공부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잖아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데, 일단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굶어가면서 공부를 할 수 있어요?" "……한 끼라도 굶고 나서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있겠는데, 하루 세 끼 꼬박 챙겨먹고 틈만 나면 간식 집어 먹고, 수업하기 직 전에도 빵으로 배 채우고 나서 그런 말을 하니 무지하게 설득력이 떨어지는구나. 그리고 헝그리 정신 모르니? 원래 약간 공복감이 느껴져야 집중이 잘 되는 법이란다." "라이는 달라요. 라이는 배가 빵빵해야 집중이 잘 된단 말이에요." "루비도 배가 부르면 부를수록 집중이 잘 돼요." "전 배 고프면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어린 엘프들은 일심동체 식탐어린 눈빛 스킬을 썼다. "……." 뭐야? 그런 스킬도 있었나? 이 소설에는 뭔 스킬들이 이렇게 많이 등장해? 어쨌든 먹을 것을 원하는 어린 엘프들의 눈빛은 강력하기 그지없 었다. 난 지지 않기 위해 맞섰지만, 조금씩 밀리는 것을 느꼈다. 게 다가 이런 짓을 하는 사이 10분이나 흘렀다. 결국 나는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먹고 하자." "와아~!" 기뻐하는 어린 엘프 일동. 지금은 쉬는 시간. 난 배고파하는 어린 엘프들을 위해 외부 업체에 간식을 주문했다. 외부 업체란 다름 아닌 인디. 인디는 금방 간식을 만들어 배달까지 해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간식이라고 해봐야 삶은 계란이 전부다. 하지만 어린 엘프들은 좋아라고 달려들었다. 저것들 소금도 안 찍고 먹는 것 좀 봐. "헉쓰! 껍질은 벗기고 먹어!" 인디는 아이들을 위해 정신없이 껍질을 까주어야 했다. 꾸역꾸역. 양손에 삶은 계란을 들고 입에 밀어 넣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저것들은 목도 안 메이나? "켁! 켁!" "……." 그럴 줄 알았다. 인디는 껍질 까주랴, 물 따라주랴, 체한 엘프 등 두드려주랴……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히로님도 좀 드세요." "그래." 어린 엘프들이 저렇게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니 왠지 굉장히 맛 있어 보인다. 난 껍질을 까고 소금을 찍어 먹었다. 반숙인 게 상당히 맛있다. 난 하나를 더 먹었다. "좀더 드세요." "됐어." 일반적으로 삶은 계란 두 개 먹으면 배가 부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더 없어요?" "루비는 좀더 먹고 싶은데." "전 라이보다 두 개나 적게 먹었어요." ……우리 집 엘프들은 한 판을 먹고도 부족한가 보다. 뭐, 얘들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배도 채웠고 쉴 만큼 쉬었다. 난 인디를 내보내고 2교시를 시작했다. "1교시에 이어 마법을 공부해보도록 하자. 마나를 느끼기 위해 서는 몇 가지 방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 이……응?" 꾸벅꾸벅. 뭐야, 이 의태어는? 책상 앞에 앉은 어린 엘프 전원이 졸고 있다. 그리고……. 쿵! ……일제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이어지는 의성어는 쌔근쌔근. 나는 어린 엘프들이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폭발했다. 그래서 루시아의 경고도 잊고 사랑의 매를 휘둘렀다. 딱! 딱! 딱! "다들 일어나지 못 해!" 내가 사랑의 매로 머리를 한 대씩 때리자 어린 엘프들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리고는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히잉~ 아파요, 오빠." "아프라고 때린 거다." 난 세 엘프를 노려보았다. "아까 이 오빠는 분명 배도 채우고 휴식도 취하면 집중력 있게 공 부하겠다고 들은 것 같은데, 지금 이게 뭐하는 시추에이션이니?" "라이도 집중력 있게 공부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치만 졸립단 말이에요오." "맞아요, 오빠. 배가 부르니까 졸려요오." "생각해보니 지금 낮잠 잘 시간이에요, 형." "……." 생각해보니 놀고 먹고 자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꽉 자여져 있는 빈둥빈둥 엘프들에게 공부란 처음부터 무리가 아니었을까? 아아~ 정녕 나 혼자 삽질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아니야. 쟤들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은 애들이야. ……라지만, 이렇게 따지면 머리 안 좋은 애도 있나? 나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지만 나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국민학교였다) 성적표에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져 있었다. 머리는 좋으나 주위가 산만함. 아마 이 말 한번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머리가 좋다' 의 의미는 똑똑하다는 것이 아니라 멍청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95퍼센트 이상이 머리가 좋은 쪽에 속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아이들은 이미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 기대를 하지 말자. 2교시는 낮잠으로 때우고 3교시가 시작되었다. "비록 이곳이 마법 학원이긴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는 실생활에 관련된 실용 학문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오빠의 수업을 완벽하게 수료하면 너희들은 앞으로 살아가며 맞닥뜨리게 될 수만 가지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시간은 법률 시간이다. 법이란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 규범을 뜻한다. 도덕과 예절은 어기더라도 강제력이 없지만, 법은 어길 경우 처벌을 받게 되지." 난 화이트보드에 문제를 썼다. 다음 중 교도소에 수감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1. 차떼기로 뇌물 받은 국회의원 2. 불법으로 병역을 기피한 정치인 아들 3. 음주운전을 하던 중 사람을 치어 죽이고 뺑소니를 친 재벌 2세 4. 학생을 개 패듯이 패서 병원에 입원시킨 고등학교 선생 5.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빵을 훔친 노숙자 "다 풀었니? 누가 정답을 얘기해볼래?" 그러자 라이거 손을 번쩍 들었다. 별로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 손만 열심히 드는 라이. 선생 입장에서 이런 학생은 조금 부담된다. "라이 생각에는 3번인 것 같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잖아요. 죄로 따지면 3번이 가장 큰 것 같아요." "라이 말이 맞아. 음주 뺑소니는 중죄지. 게다가 사람까지 치어 죽였다면 말이야. 하 지만 라이는 한 가지 잊은 게 있구나. 차를 운 전한 사람이 누구지?" "재벌 2세요." "그래. 그래서 교도소에 수감되지 않는단다. 이 나라 사법부는 재벌들에게 매우 관대하거든." "그럼 틀린 거예요?" "응.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렴." 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았고, 이번에는 루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루비 생각에는 1번인 것 같아요." "틀렸어. 왜냐하면 수천억을 받아도 집행유예로 다 풀려나거든. 루비는 아직 방탄 국회에 대해 잘 모르나 보구나. 그건 다음 시간에 설명해 줄게. 루는 몇 번이라고 생각하니?" "전 2번이라고 생각해요." "틀렸어. 원래 정치인 아들은 군대를 안 가는 게 정상이야. 병역의무는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거거든." 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엘프들이 대한민국 법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 만하다. 이래서야 앞으로 이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겠니? "정답은 5번이다." "에엑~! 말도 안 돼요오~!" "우리나라 법의 기본 원리는 '무전유죄 유전무죄' 다. 앞의 세 명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고, 선생이 학생을 패는 것은 법에 접촉되지 않아. 반면 노숙자는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이지. 이런사람이 교도소에 안 가면 누가 교도소에 가겠니?" 아이들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엘프들은 좀 이해하기 힘드려나? 난 두 번째 문제를 적었다. 부동산 투기가 극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1. 집 없는 서민들 엿 먹으라고 2. 건설사들이 정치인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기 때문에 3. 대다수의 정치인들이 부동산 투기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답은 1, 2, 3번 전부다. 이 문제 역시 우리나라 입법부의 특성을 이해해야만 맞출 수 있다. 난 계속해서 화이트보드에 문제를 적었다. 어린 엘프들은 그때마다 번번히 틀렸다. 다섯 번째 문제까지 풀었지만 맞춘 엘프가 하나도 없다. "너무 상식적으로 생각을 하려고 하면 안 돼. 이 나라 법은 너무 아스트랄하기 때문에 비상식적으로 생각해야만 맞출 수 있어." "그치만 너무 이상해요." "맞아요. 오빠 지금 루비 놀리는 거죠?" "전부 거짓말 같아요." 난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오빠도 같은 생각이란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어깨동무하고 일심동체 서민 엿 먹이기 스킬을 쓸 때마다 이 나라가 안 망하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 하지만 어쩌겠니? 억울하면 이민 가야지." 가끔은 엘프의 숲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막막 들곤 한다. 조용한 엘프의 숲에서 통나무집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루시아와 함께 라이, 루, 루비를 기르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으음, 루시아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혹시 질문 없니?" 그러자 라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 그래. 니가 제일 먼저 손 들 줄 알았다. "언제 놀아요, 오빠?" "루비는 고무줄놀이 하고 싶어요." "저는 부루마블이요." "……." 먹고 잤으니 이젠 놀 시간이라는 건가? "꺄르르~." "꺄하하~." "헤헤~." 내가 대답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노는 어린 엘프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학원을 연 것은 내 인생 최대의 모험인 것같다. 기대를 안 했으면 실망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수강생이 셋밖에 없으니 참으로 적적하군. 호그와트에 다니는 학생들을 우리 학원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걔들한테 등록금 받아 챙기면 떼돈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예 이번 기회에 사학 재단을 하나 차려? 그래서 등록금 장사나 한번 해볼까? 으음……. (『아이리스』12권에서 계속) 아이리스 2부 12권 Story 27 라이동생? 지금은 즐거운 아침 식사 시간. 아침은 우리 몸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아침은 밤새 공복 상태였던 배를 채워주고,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아침을 먹는 학생이 공부를 더 잘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아침을 먹는 학생이 더 공부를 잘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아침을 먹지 않으면 배는 계속 공복 상태로 있게 되고 따라서 점심과 저녁을 폭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만 예방을 위해서라도 아침은 꼭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체질적으로 아침잠이 많고 아침에 입맛이 없다. 그래서 가끔은 아침을 먹기 싫을 때도 있다. 건강을 위해서? 뭐 그것도 있다 대부분의 전설의 용사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건강은 필수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따라 더 예쁜 것 같아 루시아." ......루시아가 아침밥을 먹기 때문이다. 내자리는 식탁 한가운데. 그리고 루시아의 자리는 내 바로 옆이다.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혼자서 먹는 진수성찬 보다는 루시아와 같이 먹는 콩한쪽이 더 배부르고 맛있게 느껴질것 같다. 물론 루시아가 옆에 앉아있는 식사 시간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것 만은 아니다. "라이가 먼저 집었어!" "루비가 아까 찜해놨어!" "그건 내가 눈도장찍어 놓은거야!" 빵 하나 가지고 유혈 사태 일으킬것만 같은 어린 엘프들. "아침부터 루시아한테 찝쩍거리는 모습이 꼴사납기 그지 없군요. 콱 수프를 머리에 부어 버렸으면 좋겠네." 아침부터 나를 갈구는 일루니아 여사님. "루가 먼저 눈도장찍은거 언니가 확실히 봤어 그러니 라이와 루비는 그빵 루한테 넘겨. 아! 지니오빠 오늘 어디 나가세요? 간밤에 잘 주무 셨어요, 크로니스 오빠? 많이드세요, 라이레얼 언니." 넷이나 되는 연인(본인 생각에만) 관리하느라 바쁜 영아. 다른 사람들 다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루니아 여사님과 사랑의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인디, 라이레얼 옆에서 찰싹 달라붙어 나에게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카르 등도 나의 아침밥 소화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 으흠, 어쨌든 왁자지껄하니, 밥먹을 맛이 난다. 밥은 여럿이서 모여 먹어야 제맛이지. 난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이 연출하는 사랑의 파노라마를 보고 재빨리 빵을 찢어 루시아에게 건네주었다. "이 빵좀 먹어봐, 루시아. 오늘 빵은 특히 더 맛있는것 같아." 니가 옆에 있어서 더욱 맛있게 느껴져~." "됐으니까 아이들이나 줘." "......" 나의 성의를 무시하다니 이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 반대편 커플은 금방이라도 2세가 튀어나올것처럼 화기 애애한데, 어째서 이쪽커플은 냉기가 풀풀 날리는 걸까? 가장 먼저 숟가락을 놓은 사람은 일루니아 여사님이었다. 일루 니아 여사님 앞에는 음식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프만 몇 숟 가락 떠 먹었을 뿐이다. 인디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일루니아님? 맛이 없나요?" 이 음식을 만든것은 인디, 만약 일루니아 여사님이 '네, 맛이 없네 요, 어떻게 이딴 걸 음식이라고 내왔는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한다면, 인디는 창문을 깨고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흑~ 일루니아님께서 맛이 없다고 하셨어. 나 같은 드래곤은 죽어야 돼!" ......라는 대사를 내뱉으며 말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음식이 아무리 맛이 없다 해도 인디가 만든 것이라면 일루니아 여사님은 맛있게 먹어주리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나 역시 루시아가 만든 음식이라면 뭐든 맛있게 먹을 자 신이 있다(라지만 오이는 못 먹는다). 그리고 그런 걱정을 할 필요 없이 실제로 음식은 매우 훌륭했다. 웬만한 일류 레스토랑에서도 이정도 음식은 맛보기 힘드리라. 인디의 요리 솜씨야 세계적인 명사 아이언스 히로가 인정 했을 정 도로 뛰어 나지 않는가? 평소 인디가 만들어준 음식이라면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던 일루 니아 여사님이 고작 몇 숟갈만 먹고 수저를 내려 놓다니. 여기에는 먼가 깊은 이유가 있지 않은까? "아니에요, 인디님.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그런 것뿐이에요." 역시! 나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 이유 없이 그만 먹을 리 없지. 그렇다고 해도 '속이 좀 안좋다' 는 깊은 이유가 숨겨져 있을줄이야. 만약 셜록 홈즈를 능가하는 나의 관찰력과 추리력이 없었다면 결코 알아내지 못햇을것이다. 으음, 역시 나는 대단해. 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해보았다. 나의 예상에 따르면 일루 니아 여사님이 남긴 저 음식에 한 무리의 엘프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만 먹을 거예요, 이모?" "헤헤~많이 남았네요." "저 아직 배고픈데." "......" 내 이럴줄 알았다. 어린 엘프들은 일루니아 여사님이 남긴 음식에 지대한 관심을 가 지도 있었다. 그것은 식탐이라 불리는 인간......아니, 엘프의 근원 적 욕망이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웃으며 접시를 어린 엘프들 앞으로 밀엇다. "괜찮으니까 너희들 다 먹어." "와아~!" 기뻐하며 달려드는 어린 엘프 일동. 그 모습에 난 큰 감동을 받았 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계를 하지 아니 할수 없었다. 먹다 남긴 밥으로 어린 엘프들의 인기를 얻다니! 이건 라이, 루, 루비의 양육권 빼앗아 가려는 일루니아 여사님 의음모? 그렇다면 방금전 일은 훗날을 위한 포석?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루시아도 걱정스런 눈길로 일루니아 여사 님을 보았다. "왜 그래, 언니 입맛 없어?" "으응, 며칠 전부터 좀 그러네." "어떤데?" "입맛도 없고, 속도 좀 메슥거리고, 몸도 나른하고......"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안 좋다는 뜻. 이쯤 되면 뭔가 감이 잡히기 마련이다. "헉! 그, 그렇다면 설마......" 내가 아는 척하자 루시아가 재빨리 물엇다. "왜 그래, 히로? 뭐 짚이는 거라도 있어?" "물론, 나의 완벽한 추리에 의하면 저 아줌마는 더위......" "설마 더위 먹었다고 얘기하려는 건 아니겠지?" "......" 맞는데. 루시아의 추리력이 제법 많이 늘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햇는지 정확히 알아 맞추다니. 난 루시아의 경멸 어린 눈빛과 일루니아 여사님의 찢어죽일듯한 눈빛을 동시에 받고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는 저 인간 옆에 앉지 마, 루시아. 바보도 옮는다더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언니. 어차피 나 히로랑 별로 안 친하 니까." "헉! 아,안 친하다니! 우,우리가 어떤 사인데......" "어떤 사인데?" "그,그야 그렇고 그런 짓까지 한 사이......는 아니지만 이렇고 이런 짓이나 저렇고 저런 짓은 많이 한.....뭐, 그런 사이라고나 할 까?" "그건 니 생각이고, 저리좀 가줄래?" "흑~너무해,루시아." 난 어린 엘프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라이를 번쩍 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우리 라이는 오빠 마음 이해하지?" 그러자 라이는 양손으로 빵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예? 라이는 그런 거 몰라요. 먹는 데 방해되니 말 시키지 마세 요" "......" 그래 미안하구나. 우리 라이 먹는데 말을 걸다니. 이 오빠가 아 주 죽을죄를 지었구나. 난 우리 귀여운 라이를 만지작 거리며 일루니아 여사님과 루시아 의 대화를 경청했다. "그럼 병원에라도 한번 가봐야 하는거 아니야?" "그냥 몸이 좀 피곤할뿐이야, 병원은 무슨......" 그렇다. 병원은 무슨 병원인가? 병원은 죽기 직전까지는 찾지 않는 것이 예의다. 자잘한 병으로 자꾸 병원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별로 보기 안 좋다. 적어도 팔다리 하나는 잘려서 피를 철철 흘리며 가야 주위사람 들도 '아! 이놈이 심하게 다쳐서 병원 가는구나'라고 생각할 테고, 의사도 '아!이 놈은 치료할 맛이 좀 나겠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하지만 루시아는 물론 인디도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동의하면 정상이 아니다). "아니에요, 일루니아님. 병원에 한번 가보시는 게 좋을 듯해요." "일루니아님이 아프시면 제 마음은 더 아프답니다." "제가 인디님 마음을 왜 모르겠어요.저 역시 같은 생각인 걸요." "일루니아님......" "인디님......" 또 다시 연출되는 사랑의 파노라마. 아아~ 염장도 이런 염장이 없다. 사랑하는 여인을 바로 옆에 두고도 독수공방해야 하는 내 신세를 뻔히 알면서 이럴수는 없는거다. 루시아가 일루니아 여사님의 반만이라도 나한테 잘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인디 자식이 부러워서 죽을 지경이다. 루시아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 하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마음에 안드는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언니랑 형부 잉꼬부부인거 아니까 그만 좀 해." "어머! 죄송해요." 인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런 인디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뭐 어때서 그래? 억울하면 너도 결혼하던가." "......" 뭐? 결혼? 난 재빨리 루시아를 보았다. 그래, 나랑 결혼하는 거야, 루시아. 그래서 우리도 보란 듯이 일 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앞에서 사랑의 파노라마를 연출하자. 이 글을 보는 모든 솔로들의 가슴에 염장을 지르는 거야! "결혼은 뭐 나 혼자 하나." 난 재빨리 손가락을 나를 가리켰다. 여기 있잖아, 여기! 내가 너랑 결혼해 줄께, 루시아! 온갖난리를 치면서 나를 PR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아는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루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어디 멋진 남자 없나?" 여기 있다니까! 제발 날 봐줘, 루시아! 일루니아 여사님은 생긋 웃으며 말햇다. " 왜? 괜찮은 남자 하나 소개시켜줄까?" 괜찮은 남자 여기요! 절 소개시켜 주세요! 난 간절한 눈빛으로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았다. 절 루시아에게 소개시켜주시면 앞으로 정말 잘할게요.이제까지 원한도 전부 잊고 착하게 살게요. 나 아이언스 히로, 사랑을 위해서라면 철천지원수에게라도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각오가 되어 있다. 오로지 사랑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나는야 낭만 히로~. "응, 언니 소개시켜 줘." 난 재빨리 옷을 바로 하고 머리를 정리 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라 이를 끌어안았다. 이는 나를 선택하면 덤으로 라이가 따라가게 된 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잡지사면 껴주는 부록이라고나 할까(라지만 부록을 얻기 위해 잡 지를 사는 경우도 엄청 많다)? 일루니아 여사님도 양심이 있으면 날 소개시켜 주겠지? 일루니아 여사님은 슬쩍 나를 한번 보았다. 난 잘보이기 위해 웃 음을 지었다.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웃으며 말했다. "이런 뺀질이 말고 내가 제대로 된 남자로 소개시켜 줄게." "......헉!" 난 깜짝 놀라 자리에서 뻘떡 일어나 외쳤다. "아니, 이 아줌마가 진짜! 세상에 나만한 남자가 어디 있다고 다 른 남자를 소개시켜줘?" "오빠 미친 거 아냐? 솔직히 오빠한테는 루시아 언니가 아깝지." 괜히 끼어들어 내 복장을 뒤집어놓는 영아. "넌 또 왜 끼어들어?" 루를 무릎 위에 안혀놓고 만지작 거리던 영아는 코 웃음을 치며 말 했다. "흥! 나도 끼어들기 싫었는데, 오빠의 헛소리를 듣다 못해 끼어든 거야." "......" 내가 적을 집안으로 들였구나! 난 루시아를 보며 말했다. "안 돼! 다른 건 다 용납해도 바람 피는 것만은 용납 할수 없어! 애들을 생각해봐, 루시아. 엄마가 외도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슬퍼 하겠어? 나야 괜찮지만......아니, 내가 제일 안 괜찮지만, 아무튼 라이, 루, 루비를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돼! 너도 뭐라고 말좀 해 봐, 라이야." 그러자 입에 가득 빵을 문 라이가 입을 열었다. "에? 어여?" "......" 됐다. 그냥 먹던 거 계속 먹어라. 파편 튀는 거 보니 부담스럽구나. "아무튼 절대 안돼! 그렇게 소개팅하고 싶으면 나랑해!" 루시아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애들 생각해서 나이트 가서 바람 폈어?" "그, 그건......"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했거늘, 2부 1권에서 있 었던 일을 아직까지 물고 늘어지는 루시아, 은근히 집착이 강한 루 시아의 성격으로 보건데 평생동안 그 일을 가지고 트집 잡을 것이 뻔하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 나를 꼬드긴 지니의 잘못 이다. 전부 지니의 잘못 인데, 나한테만 뭐라 그러다니. 루시아 미워! "아, 아무튼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돼, 루시아. 설마 이 애들을 결손 가정 아이들로 만들 생각은 아니겠지? 너도 라이, 루, 루비를 예쁘게 키워고 싶다고 말했잖아. 이 불쌍한 것들이 결손 가 정에서 자랄 것을 생각하면......흑~ 너무 불쌍해. 얘들아 엄마 없 어도 우리끼리 굳세게 살아가자꾸나. 이제부터 오빠가 밥해주고 빨 래해 주고 그럴게. 엄마 없어도 이 오빠는 너희들을 예쁘게 키울거 란다. 하지만 다른 애들이 엄마 없는 아이라고 놀릴 걸 생각하면 ......어흐흐흑!" 내가 아이들을 껴안고 울음을 터트리자 루시아는 인상을 쓰며 소 리쳤다. "그만 좀 해! 누가 소개팅 한대?" "흑~ 아까 한다 그랬잖아." "안 해!" "훌쩍~ 정말?" "그래! 안 할 테니까 그만 좀 울어!" 그말에 난 기뻐하며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와락 껴안았다. "다행이다, 얘들아 엄마가 바람 안핀데." "바람은 니가 폈잖아!" "지금처럼 오빠랑 언니랑 행복하게 살아가자. 그리고 혹시라도 결손 사정이라고 놀리는 애가 있으면 단체로 밞아줘.싸울때는 뭐 니뭐니 해도 다구리가 최고지." 루시아는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난 가족 해체를 막기위해서 라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저런 뺀질이랑 사귀지 말라니까." "......" 가족 해체를 시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있는 일루니 아 여사님. 우리 가족 해체 되면 다 이 아줌마 탓이다. "특별히 사귀는 건 아니야." "......헉!" 특별히 사귀는 게 아니라니? 그럼 이제까지 우리가 해온 건 뭐야? 루시아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 몸도 주고 마음 주고 속옷 선물까지 줬는데...... "나 피곤해서 이만 일어나 볼게." "그래. 들어가서 잠 좀 더 자, 언니." "응." "저, 저기......" 일루니아 여사님이 일어서자 인디는 잠시 머뭇거렸다. 루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같이 들어가세요, 형부. 설거지는 저 혼자서도 충분하니." 뭐? 루시아가 혼자서 설거지를? 말도 안 돼! 그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루시아 혼자 할 수 있단 말인가? "죄, 죄송해요, 루시아님.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건데......" 안 돼, 이 자식아! 가사 드래곤의 임무를 잊은 거냐? 가사 드래곤이면 가사 드래곤답게 집안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거 아냐? 그 힘든 일을 루시아에게만 맡겨두겠다는 거냐? "걱정 마시고 들어가 보세요, 형부." 내가 걱정돼! "예. 그럼 저도 일어날게요." 일어나지 마! 인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루니아 여사님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 다. 어린 엘프들과 다른 식구들은 이미 식사를 끝마치고 다들 부엌 을 나갔다. 남아있는 사람은 나와 루시아 둘뿐. 식탁은 언제나처럼 초토화 된 상태였다. "......" 좀 깨끗하게 먹을 수는 없는 거냐? 이게 다 어린 엘프들 때문이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식사 예절을 가르치던지 해야지.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루시아는 개의치 않고 일어나 행주를 가지고 식탁을 치웠다. "내가 할게, 루시아. 이리 줘." 난 재빨리 루시아의 손에 들린 행주를 빼앗았다. 그러자 루시아 는 접시를 치우며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난 설거지나 해야겠다." "헉! 안 돼! 설거지도 내가 할게! 넌 그냥 여기 앉아 쉬고 있어." "내가 설거지하겠다는데 왜 니가 그렇게 흥부나는 거야?" "그, 그야 니 손에 물이 묻으면 내 마음이 아프니까 그러지." "됐으니까 식탁이나 열심히 치워." "흑! 루시아는 내 맘도 몰라주고." 어쨌든 난 루시아를 위해 열심히 식탁을 치웠다. 여기저기 튄 파 편과 빵 부스러기들을 보면 당장 어린 엘프들에게 뛰어가 '무릎 꿇 고 손들어!' 라고 소리치고 싶다. 식탁을 다 치운 나는 설거지를 하는 루시아 옆으로 다가갔다. "내가 도와줄게." "됐어." "그러지 말고 나에게도 기회를 줘. 널 돕는다는 것은 내 인생 최 고의 기쁨이야." 아아~ 내가 말하고도 너무 멋지다. 나는야 가정적인 남자~. 집안일 이거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유교적 가 부장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인지 남자들이 집안일에 거 의 손을 대지 않는다. 남자가 밖에서 일해서 돈을 벌고, 여자가 집 안에서 일을 할 경우 굳이 남자가 집안일을 도와줄 필요는 없다. 둘의 노동 강도가 비슷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이고, 요즘은 부부 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도 밖에서 일해 돈 벌고 여자도 밖에서 일해 돈 버는데, 여자 만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 경우 두 사람 모두 밖에 서 일을 하는 만큼 집안일 역시 공펴하게 분담해서 해야 한다. 언제까지 남자라고 손을 놓고 있을 건가?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는 만큼 우리의 인식 역시 빠르게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하는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젠 남자도 집안일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그래 서 피로에 지친 아내의 심신을 달래주어야 한다. 루시아가 나와 결혼만 해준아면, 난 정말 루시아를 공주처럼 모 시면서 살 자신이 있다. ......라지만 생각해보니 루시아는 원래 공주군. "됐으니까 나 설거지할 동안 커피나 끓여줘." "커피 마시고 싶어?" "응."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천천히 해. 어차피 설거지 끝나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난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사랑하는 루시아를 위해 커피를 끓여줄 수 있다니. 혹시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가 아닐까? 내가 커피를 다 끓였을 때쯤 루시아도 설거지를 끝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하게 치운 식탁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 잠깐. 서로를 마주보며? 지금 이 상황은 서로를 마주보면 안 되는 상황인데. 루시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루시아의 시선이 잠깐 다른 곳 을 향한 사이 나는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루시아가 눈치를 챘을 때 이미 나는 그녀 옆에 찰싹 붙어있었다. "하하~ 이렇게 둘이서 커피 마시니까 참 좋다. 너도 그렇게 생 각하지?" "대체 언제 내 옆으로 온 거야?" "내가 니 옆으로 간 게 아니라, 니가 날 끌어당긴 거야. 마치 자석 의 N극이 S극을 끌어당기듯이 말이야. 니가 N극, 내가 S극. 이런 걸 보고 운명이라고 하지." "흐음, 그래? 그럼 나도 S극 할래." "......헉!" 루시아가 S극을 하겠다는 것은 나를 밀어내겠다는 뜻? 하지만 민다고 떨어져 나갈 내가 아니다. "그럼 난 N극 할래. 헤헤~." "좀 떨어져줄래?" "......" 나의 애교 작전이 안 통하다니. 루시아의 이런 말 진심이 아닌거 다 안다.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부끄러워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어쩌면 오늘도 내가 선물한 속옷을 입지 않았을까? "......" 으음,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든다. 저 치마만 들어올릴 수 있다면...... 앗! 내가 루시아 옆에서 무슨 생각을! 루시아는 눈치가 빨라 내가 조금만 야한 생각을 하면 금방 눈치 챈다. 그렇기에 난 재빨리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우고 루시아 를 보았다. 오늘따라 루시아의 얼굴에 그늘이 져 보인다. 수심 가득한 표정. 무슨 일이지? "얼굴이 좀 어두워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별 일 아니야." 루시아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사실 언니가 좀 걱정돼." "일루니아 여사님?" 루시아는 날보며 물었다. "요즘 들어 부쩍 수척해진 것 샅지 않아?" 난 일루니아 여사님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글쎄, 날 갈구실 때는 펄펄 나시던데."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확실히 수척해진 것 샅아. 평소보다 더 피곤해하는 것 같고, 아까만 해도 그렇잖아. 밥도 얼마 먹지 않고 도로 들어가 자다니. 이상하지 않아?" "뭐가?" "언니는 원래 아침잠이 별로 없단 말이야." 확실히 일루니아 여사님은 아침잠이 별로 없으시다. 그래서 인 디와 꼭같이 새벽 5시쯤 일어나신다. 인디가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일루니아 여사님은 세 종류의 신문을 읽으신다. 우파적 논조의 신문, 좌파적 논조의 신문, 경제 신문. 이렇게 세 종류. 굳이 신문을 세 개씩이나 시켜보는 이유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지니 때문이다. 한 종류 신문만 봐서는 기자의 주관적 시각에 이끌려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힘들다나 뭐라나? 사실 우리 집에서 일루니아 여사님과 지니를 빼면 제대로 신문을 보는 사람은 없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가끔 할 일 없을 때나 신문을 보지, 꼬박꼬박 열심히 보는 편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간 신문도 잘 안 읽으시더군." "맞아. 평소 같으면 오자마자 가져다가 읽었을 텐데 말이야."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난 모든 상황을 종합해 추리를 시도했다. 어째서 일루니아 여사님은 아침잠이 많아지셨을까? 어째서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렇게 피곤해 하시는 걸까? 잠시 생각 끝에 나는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낼 수가 있었다. "으음, 그렇군. 역시 그런거였어." "응? 뭔가 알아낸 거야?" "물론이지. 나의 완벽한 추리에 의하면 일루니아 여사님은...... 밤에 뭔가 하는 게 틀림 없어!" "응? 밤에 뭔가를 한다니......아!" 루시아도 뭔가 눈치 챈 듯 탄성을 내질렀다. 확실히 그렇다고 한 다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루시아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그런가?" "응, 나의 완벽한 추리에 의한 것이니 확실해." "언니도 참......" 루시아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루시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함인지 손은 뺨에 가져다 댔다. 아마 일루니아 여사님은 밤마다 인디와 뭔가를 할 것이다. 그 뭔가가 뭐냐고? 그 뭔가는 다름 아닌 부부가 자기 전에 하는 일이다. 부부가 자기 전에 하는 일이 뭐냐고? 간단히 말해 그렇고 그런 짓이다. 그렇고 그런 짓이 뭐냐고? "......" 그냥 성교육 비디오 한번 보고 와라. 자꾸 나한테 묻지 말고. 아무튼 밤마다 둘이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느라 늦게 잤을 테고, 그 래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밤새 시달린(?) 데다가 수 면까지 부족한 일루니아 여사님은 피로를 느겼을테고. 과연 잉꼬부부! 드래곤과 인간이 결혼해 이렇게 행복하게 살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실 난 얼마 못 가 이혼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혼은커녕 깨가 쏟아져라 잘 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그 깨를 사방에 뿌려 주위 사람들의 염장을 지르고 있다. 아아~부럽다. 그나저나 인디 이 자식은 대체 어떻게 했기에 일루니아 여사님이 이렇게까지 피곤해 하는 거지? 나쁜 드래곤 같으니. 해도 적당히 해야 할 것 아닌가? "앗! 그러고 보니 아까 둘이 같이 방에 들어갔잖아. 설마......? "아, 아닐 거야. 피곤해서 들어갔는데, 그럴리가......"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루시아도 말하면서 자신이 없나 보다. 그 동안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보여준 행태라면 충분히 그러 고도 남는다. 그나저나 루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어쩧줄 몰라 하는 모습이 굉 장히 귀엽다. 이럴 땐 라이보다 더 귀엽다니까~. 누가 그녀를 나보다 연상으로 보겠는가(내가 삭았다는 뜻이 아니다. 루시아가 어려 보인다는 뜻이다)? 귀엽고 깜찍한 나의 사랑 루시아. 난 틈을 놓치지 않고 루시아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군살 하나 없 는 늘씬한 허리는 언제 만져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좋은 말로 할때 손떼." "......" 뭐, 가끔은 이런 반응이 나오지만 말이다. "앗! 내손이 언제 여길!" 난 전혀 몰랐다는 듯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아깝다. 좀더 만지고 싶었는데. "저기 루시아......" "왜?' "나도 밤에 시달리고 싶은데......" 난 갈절한 눈빛으로 루시아를 보았다. 날 가져, 루시아. 날 니 마음대로 해도 좋아. 날 밤새 재우지 말아 줘~.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밤에 시달리고 싶으면 오늘부터 라이, 루, 루비 니가 다 데리고 자." "......헉!" 걔들 다 데리고 잤다간 깔려 죽기 십상이다. "아, 아니야, 루시아. 다시 생각해보니 밤에 별로 시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난 루시아한테 시달리고 싶었는데...... "앗! 언니 오빠 커피 마신다!" "나빠요, 언니 오빠! 루비만 빼고 커피 마시고." "저도 커피 마시고 싶어요." 어느새 등장한 어린 엘프들은 우리가 커피 마시는 것을 보고 소 리쳤다. 이래서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커피에 완전히 맛들인 어린 엘프들. 어린 것들이 커피라니! 커피는 어른들만의 전유물인 것을 모른단 말인가? ......라지만 나도 어렸을 때 커피 무진장 마셨다. 어쨌든 가라고 해서 조용히 물러날 애들이 아니니 만큼 난 군말 없이 커피를 타 주었다. 설탕과 프림을 듬뿍 넣은 '히로표 어린 엘프들이 좋아하는 달짝 지근한 커피' 완성! 한 모금 마셔보니 너무 달다. 아마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이런 커 피를 타주면, 내 얼굴에 집어던지고도 남을 것이다. "옜다. 마시고 떨어져라." "와아~!" 기뻐하며 마시는 어린 엘프 일동. "어때?" 내가 묻자 어린 엘프들은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최고에요, 오빠!" "루비는 오빠가 타준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저는 만날 형이 타준 커피만 먹었으면 좋겠어요!" "푸하하~! 니들이 뭘 좀 아는구나." 어린 엘프들이 좋아하는 커피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설탕과 프림을 들입다 집어넣으면 끝이다. 그럼 건강에 안 좋다고? 뭐, 저것들이 언제는 건강 챙겼나? 그리고 쟤들은 너무 건강해서 문제다. 어떻게 된 애들이 감기 한번 안 걸리냐? 아픈 아이를 간호하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로망인데. "다 마셨어요, 오빠!" "더 주세요, 오빠!" "또 마시고 싶어요, 형!" "그래 그래. 마음껏 마시려무나." 난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마구 타주었다. 이런 커피를 달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먹는 걸 보면 애들 혀 구조는 어떻게 되어있는 건지 정말 궁금하다. 루시아는 아이들이 커피를 홀짝 홀짝 마시는 걸 보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얘들아. 커피는 몸에 안 좋아."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항의했다. "그러는 언니도 커피 마시잖아요." "맞아요. 몸에 안 좋으면 언니는 왜 마셔요?" "우리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누나랑 형만 맛있는 커피 마실 생각 인 거죠?" 루시아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얘들아. 언니는 어른이니까 마시는 거야." "언니랑 오빠만 맛있는 거 먹을 생각인 거죠?" "맞아요. 그런 거죠?" "우리한테 주는 게 아까운 거죠?" 계속되는 아이들의 추궁에 루시아의 표정이 점점 당혹스러움으 로 변해갔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 쳤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들을 봤나! 감히 저 하늘의 태양보다 도 위대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루시아 공주님께 대들다니! 니들 그 런 나쁜 버릇 어디서 배웠어? 누가 그렇게 가르치디? 니네 엄마 아 빠가 그러라고 가르치디? 응?" "넌 왜 애들한테 소리치고 그래! 그리고 애들 엄마면 나야! 너 지 금 나한테까지 뭐라고 하는 거야?" "아, 아니, 난 그냥 널 도우려고......" "니 도움 따윈 필요 없어!" "헉!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훌쩍~." 난 동정 받기 위해 일부러 훌쩍거렸다. 하지만 루시아는 나에게 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가졌다. "우리 라이, 루, 루비 괜찮아? 오빠가 소리치는 바람에 놀랐지? 미안해, 얘들아. 언니가 대신 사과할게." 난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흑흑~ 루시아, 미워. 히로한테는 관심도 안 가져주고......우엥 ~ 우엥~." 난 루시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크게 울었다. 하지만 루시 아는 나를 본체만체 했다. 대신 라이와 루비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울지 마세요, 오빠." "오빠가 울면 루비 마음이 아프단 말이에요." 토닥토닥~. 나를 껴안고 토닥여주는 두 엘프. 이런 걸 보면 역시 내가 자식 농사 하나는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라는 속담이 문득 떠오른다. 그래. 나는 우리 라이와 루비만 있으면 돼. 사랑해, 얘들아~. 지금은 즐거운 오후. 나는 소파에 누워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 보는 중이었다. 거 실에는나 혼자뿐이다. 루시아는 어린 엘프들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고, 인디는 장 보러 나갔고, 라이레얼과 카르는 데이트 하러 나 갔고, 영아는 라이레얼과 카르 쫓아 나갔고, 지니와 크로니스는 업무차 아침 일찍 나갔고......그래서 현재 집에 있는 사람은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뿐. 일루니아 여사님은 방 안에 주무시는 중이고, 나는 이렇게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다. 조용~ 방금 의성어에서도 알수 있듯이 집안이 매우 조용하다.이렇게 조용한 오후는 정말 간만이다. 당장이라도 어린 엘프들이 튀어나 와 이 방 저 방 우르르 몰려다닐 것만 같다. 왠지 좀 썰헝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조용한 것도 나쁘 진 않다. 간만에 즐기는 혼자만의 여유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너무 조용하니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상황이 갑자기 바뀌어서 적응이 안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이 거실로 나왔다. 안경을 비뚤어지게 쓴 일루니아 여사님은 꽤나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자 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째 더 수척해 보이는 일루니아 여 사님. 정말 병이라도 걸리신 건가? 일루니아 여사님은 눈을 비비며 물었다. "다들 어디 갔죠?" "일이 있어서 나갔어요. 루시아는 애들 데리고 산책 나갔고, 인 디는 장보러 나갔고." 아마 지금쯤 인디는 시장에서 웰빙 식품만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요즘 일루니아 여사님 몸이 안 좋아 보여 건강식을 만들어준다나 뭐라나? 아아~ 일루니아 여사님은 좋겠다. 인디와 결혼한 것은 일루니아 여사님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 이라 할 수 있다. 난 결혼하면 인디보다 더 아내에게 잘해줘야지~. 그나저나 일루니아 여사님꼐서 이렇게 무방비적인 모습을 보이시 다니. 평소의 앙칼지고 깐깐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미인은 미인이다. 루시아나 라이레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미인. 일루니아 여사님은 한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머리가 아프신가? 일루니아 여사님은 머리를 한번 세차게 흔들었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안닙니다." "......" 그래도 걱정이 되서 물었거늘!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나에 게 다 들릴장도의 큰 목소리로. "지 앞가림이나 잘할 것이지 누굴 걱정해?" "아니, 이 아줌마가 진짜!" 군자는 모욕을 참지 않는 법!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집 안에 단 둘뿐이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루시아를 덮친 것처럼 저도 덮칠 생각이신가요?" "덮치긴 누가 덮쳤다 그래! 그리고 내가 아줌마를 왜 덮쳐? 내가 미쳤어?" "제대로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쳤는지조차 모른다고 하더군요." "헉! 그,그건 내가 미쳤다는 뜻?" 분노가 막막 끓어오른다. 집 안에는 현재 일루니아 여사님과 나 둘뿐. 나를 지원사격해줄 루시아도 어린 엘프들도 없다(라지만 있을 때도 지원사격해준 적은 없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랫다. "뺀질이랑 꼐속 얘기하려니 피곤하군요." "누가 뺀질이야!" 내가 소리치는데 갑자기 일루니아 여사님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헉! 괘,괜찮아요?" 난 재빨리 다가가 일루니아 여사님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생 각한 것 보다 몸이 너무 가볍다.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부축하다 보니 자연스레 특정 부위에 손이 닿았다. 물컹! 서,설마 이 감촉은......가슴? "헉쓰!" 난 깜짝 놀라 일루니아 여사님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일루니 아 여사님은 안경 너머로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난 침을 끌꺽 삼 켰다. 손이라도 날아오려나? 일루니아 여사님 성격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뺨을 후려칠 것이 다. 어쨌든 가슴을 만진 것은 내 실수이니 뺨 한 대 맞을 각오 정도 는 되어있다. 유부녀이니 두 대까지도 생각하고 있다. 잠시 기다렸는데도 일루니아 여사님은 손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일루니아 여사님 을 마주보고 있자니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아아~ 두렵다. 내가 미쳤지. 뭐가 예쁘다고 일루니아 여사님을 부축까지 했단 말인가? 그냥 쓰러져 죽든 말든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데. 난 여자한테 너무 친절해서 탈이라니까. 그런데 왜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거지? 난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하며 슬쩍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은 게속해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은은한 하늘색 눈동자. 눈동자의 색이나 생김새는 지니의 그것 과 똑같았다. 자세히 보니 눈의 모양도 많이 닮았다. 일루니아 여 사님 쪽이 눈 꼬리가 좀더 치켜 올라가 있긴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생각인 거지? 다행히 일루니아 여사님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난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하아~." 그 순간 일루니아 여사님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아 오면 일러야지~." "헉쓰! 아줌마 잠깐!" 난 재빨리 일루니아 여사님 앞을 가로 막았다. "지, 지금 뭐라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왜 그러시죠?" "아, 아니, 그러니까 뭘 루시아한테 이른다는 겁니까?" "뭐라니요? 전 그냥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려는 것뿐이에요." "방금 있었던 일이라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쓰러져있는 제게 다가와 가슴을 마음껏 주물럭 거리며 능욕한 일을 말하려는 거지요." "헉쓰쓰! 그,그게 무슨! 내가 언제 아줌마 가슴을 마음껏 주물럭 거리며 능욕했어? 난 그저 부축해주려고......" "그럼 정정하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쓰러진 저를 부축하는 척하며 가슴을 마음껏 주물럭거리며 능룍했디,로요. 이제 됬지요?" "되긴 뭐가 돼! 살짝 닿은 걸 가지고 뭐가 주물럭이고, 뭐가 능욕 이야? 순진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죄를 덮어씌워도 되는 거야?" "뭘 그렇게 흥분하시죠? 그렇게 결백하시면 루시아에게 결백을 주장하면 되잖아요. 루시아가 어느 쪽 말을 믿을지는 아이언스 공 작님의 평소 행동에 따라 결정되겠지만요." "그, 그건......" 난 잠시 루시아가 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시뮬레이팅 해 보았다. 일루니아 여사님: 흑~ 나 어쩌면 좋아, 루시아? 니가 없는 사이 저 뺀질이가 쓰러진 나를 부축하는 척하며 가슴을 마음껏 주물럭 거리며 능욕했어. 흑흑~ 외간남자의 손에 더럽혀지다니. 나 이제 인디님 얼굴을 어떻게 봐? 나: 아니야, 루시아! 난 결백해. 부축하는 중에 실수로 손이 가슴 에 살짝 닿았을 뿐이야. 주물럭거렸다거나 능욕했다는 말은 당치 도 않아! 이는 나를 시기한 일루니아 여사님의 모함일 뿐이야. 날 믿어줘, 루시아! 루시아: 됐어! 니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이 저질, 변태, 색마! 결혼 한 언니한테까지 손을 뻗치다니. 넌 인간도 아니야! 나가 죽어버려! 효과음: 짜악! 해설: 그리하여 희대의 색마 아이언스 히로는 집에서 영원히 쫓 겨났다. "......"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될 게 분명해. 그런데 저 마지막의 해설은 뭐냐? 어쨌든 만약 정말로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루시아에게 이른다면 해설처럼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아니, 높은 정도가 아니라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아야 해! "......" 잠깐 생각해보니 뭔가 수상하다. 헉! 서,설마 이 모든 것이 일루니아 여사님의 음모였단 말인가? 내 앞에서 쓰러진 것도, 그래서 부축을 유도해 가슴을 만지게 한 것도......전부 이집에서 나를 축출해 내기 위해 짜여진 게획에 불 과 했단 말인가? 너무나 큰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평소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치졸한 수법까지 쓸 줄이야...... 빠드득! 아무런 의심 없이 일루니아 여사님의 계략에 넘어간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아아~ 집 안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제 온 몸을 더듬고, 제 가슴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다는 사실을 루시아가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정말 궁금하네요." "으윽......" "저는 온 힘을 다해 반항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원래부터 아 이언스 공작님의 힘을 당해낼 수없었던 데다가 지금은 몸이 안 좋 기까지 하니. 결국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를 강제로 범했어도, 저 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지요." "......" 아주 소설을 써라. "명망 높으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미 결혼까지 한 저를 강제로 능욕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내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겠다는 뜻이 담긴 잔인하고 사악한 미소였다. 어찌 인간이 이리 잔혹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 점점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일루니아 여사님께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러면 그럴 수록 나만 손해다. 그래. 지금은 냉정하게 대처해야 돼. 흥분으로 일을 그르치면 안 돼. "저, 저기......배고프실 텐데 식사라도 차려드릴까요?" 나 아이언스 히로. 대의를 위해서라면 철천지원수에게라도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각오가 되어있다. 적어도 집에서 영원히 쫓겨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갑자기 친하게 구니 이상하네요. 혹시 저한테 뭐 바라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하하~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이러는 거예요. 결코 다른 뜻은 없답니다." 루시아한테 말하지마! 입은 웃고 있지만 얼굴은 경련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식사는 됐으니까 커피나 끓이세요." "......" 이젠 명령까지! "어라? 표정이 왜 그러시죠? 어째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뭐 싫 으시다면 안 하셔도 돼요. 그나저나 루시아는 언제 오려나?" "헉! 부,불만이라니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을 위해 커피를 끓이게 되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호호~ 잘 아시는군요.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하하~ 무,물론이죠." 부들부들! 아아~ 얼굴 근육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불을 덮고 자서 그런지 몸이 땀에 젖었네요. 가볍게 샤워를 할 생각이니 그동안 커피 끓이세요. 제가 샤워를 끝마치고 나와 서 커피를 즐길 수 있게요. 아시겠어요?" "예, 예" "그리고 대답은 한번만 해주세요. 약간 기분이 나빠지려고하네 요. 루시아는 언제 오나?" "헉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한 번만 대답할게요." "주의하세요. 제가 기분이 나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지요? "무,물론입니다." 이 아줌마 아이리스 왕국으로 안 돌아가나? 왜 이 세계에 남아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이 세계에 남아있는 이유가 없는 일루니아 여사님.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 세계에 남아있는 것은 나를 엿 먹이기 위함이 분명하다. 만약 내가 이곳에 없었다면 일루니아 여사님은 진작 인디와 함께 판타지 세계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처음에 이 세계로 건너올 때 나는 루시아와 함께 라이를 기르며 행복하게 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후에 일루니아 여 사님과 인디를 비롯한 판타지 세계 사람들이 대거 우리 집으로 몰 려오는 바람에 나의 행복은 저 멀리 날아갔다. 행복만 날아갔으면 말도 안 한다. 행복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다름 아닌 불행. 그리고 그 불 행의 근원에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서 있었다. 제발 판타지 세계로 돌아가 줘~. 물론 내가 이런다고 해서 순순히 돌아갈 일루니아 여사님이 아니 다. 오히려 내가 이러는 것을 알기에 더욱 이 집을 떠나지 않을 것 이다. 나의 고통은 일루니아 여사님의 행복이니. 그 증거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운이 없으셨던 일루니아 여사님 의 얼굴에 지금은 생기고 돌고 있다. 역시 나를 갈궜기 때문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입술이 메마른 걸 보니 확실히 수척해 보이신 다. 생각해보면 오늘 아침도 제대로 안 드셨지. 배 많이 고프실 텐 데...... "......헉!" 내가 미쳤다고 일루니아 여사님 걱정을! 그래도 좀 걱정이 되긴 한다. 아무리 미워도 일루니아 여사님은 루시아의 언니 아니겠는가? 일루니아 여사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루시아가 슬퍼할 게 분명 하다. 그래, 맞아. 난 일루니아 여사님을 걱정한 게 아니라, 루시아가 슬퍼할까봐 걱정한 거였어. 아아~ 다행이다. 난 또 일루니아 여사님을 걱정한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이 다시 비틀거리 셨다. "괘,괜찮으세요?" 난 일루니아 여사님 앞에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히 부축했다가는 누명을 뒤집어씌 울게 뻔하니. "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이 내 쪽으로 쓰러지셨 다.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일루니아 여사님을 붙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일루니아 여사님......이 아니라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일루니아 여사님은 눈을 감은 채 내 품에서 가는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몇 번 심호흡을 하던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병원에라도 한번 가보셔야하는 거 아니에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품을 빠져나오며 중얼거렸다. "이젠 껴안기까지......이것도 루시아한테 일러야지~." "헉!" 이거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쓰러지려는 사람 부축해 준 것도 죄에요!" "유부녀의 몸에 손을 대고도 그런 말씀하시다니, 뻔뻔하기그지 없군요." "내 쪽으로 쓰러진 건 아줌마잖아!" 내가 소리치듯 항변했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은 못 들은 척 고개 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외간남자에게 강제로 추행 당하다니. 아아~ 난 순결을 잃었어. 이제 인디님 얼굴을 어떻게 본담?" "뭔 순결을 잃어! 아줌마 정말 이러기야?" 이대로라면 꼼작없이 '유부녀 강간범' 으로 몰리게 될덧이다. 유부녀 강간범이라니! 이제까지 순결을 지켜오......지는 않았지만, 어쨌근 마음만은 순 결한 내가 유부녀 강간범이라니! 만약 내 이름 앞에 그런 타이틀이 붙게 된다면......즉, 내가 '유 부녀 강간범 아이언스 히로' 라 불리게 된다면, 내 인생은 파멸이 나 다름 없다. 루시아와의 결혼이 무산됨은 물론 '어린 엘프들 100미터 이내 접근 금지' 따위의 법원 명령이 내려올 테고......아무튼 내 인생은 끝장 나게 된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서 있기 힘드신지 잠시 소파에 앉았다. 파리 한 얼굴빛을 보니 정말 병이라도 걸린 것 같다. "정말 식사 안하셔도 괜찮으세요? 아침도 안 드셨잔아요." "입맛이 업센요. 찝찝해서 샤워나 하고 싶어요." "정말 샤워하시게요?" "왜요? 엿볼 생각하시니 벌써 흥분되시나요?" "헉! 그 무슨 망발을! 엿보다니! 내가 미쳤어? 아줌마 샤워하는걸 엿보게? 일루니아 여사님은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입에 살짝 미소를 머금 었다. "그래요? 루시아만큼은 아니지만 제 몸매도 제법 괜찮다고 자부 하는데." "......" 그건 그렇다. 비록 라이레얼이나 루시아만큼은 아니지만, 일루니아 여사 님의 몸매도 어디 가서 빠질 정도는 아니다. 성격이야 어떻든 간에 지니와 같은 피를 물려받지 않았던가? 그 증거로 지금 일루니아 여사님은 30대 초반의 나이지만 소녀 같은 몸 매를 유지하고 있다. 혹시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괜히 지니가 부러워진다. 나도 이런 누나 있었으면…. "……." 헉! 내가 또 무슨 생각을! 일루니아 여사님 같은 누나는 필요 없다. 난 라이레얼 같은 누나가 좋아~. "그런데 정말 샤워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가뜩이나 몸도 안 좋으신데." "땀에 젖은 찝찝한 상태로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잔말 말고 커피나 끓이세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갈아입을 속옷과 겉옷을 들고 나왔다. "거실 화장실을 이용할 거니 행여나 엿볼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요." "헉! 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내가 소리치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다들 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어떻게 보긴……유부녀 강간범으로 보지." "……." 아직 거기가진 안 했거든요. 하고 나서 그런 소리 들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어쨌든 일루니아 여사님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고, 난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끓였다. 빨리 가게 재개점 하던지 해야지…… 이건 뭐 다방 레지나 다름없는 신세로군. 원래 이런 건 인디가 해야 하는건데 말이야. 물이끓기 시작했다. 난 커피를 타려다 멈칫했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언제 샤워를 끝마치고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타면 식겠지? 난 불의 세기를 줄이고, 주전자에 물을 좀더 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루시아가 사온 케이크가 좀 남아있던 것 같은데. 난 냉장고를 뒤졌다. 다행히 초콜릿 쉬폰 케이크가 한 조각 남아 있었다. 난 그것을 꺼내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아침도 제대로 안 드셨으니 커피와 함께 케이크를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일루니아 여사님을 신경 써 주는 거지? 뭐가 예쁘다고? "내가 잘 안 하면 루시아한테 이를 테니까. 맞아. 난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일루니아 여사님의 계락의 빠져 마지못해 하는 것일 뿐이야." 그나저나 왜 이러헤 안 나오시지? 들어가신지 15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세수하고, 몸 씻고, 머리 감는데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나? 뭐, 일루니아 여사님도 여자니까.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씻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 마련이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기다리는데, 20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당장이라도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젖은 머리를 털며 이곳에 나타나실 것 같은데. 설마 때라도 미시는 건가? "…." 그럴 린 없겠지? 어쨌든 지금까지 안 나오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 잠깐. 무슨 일? 난 아까 내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진 일루니아 여사님의 모습을 떠올렸 다. 확실히 오늘 일루니아 여사님의 몸 상태는 굉장히 안 좋다. 서 있기도 힘들어하실 정도로. "헉! 그렇다면……." 샤워 하시던 도중 쓰러지셨단 말인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화장실 문 앞에 도 착하기 직전 발이 멈칫했다. 잠깐. 혹시 이건 일루니아 여사님의 계락이 아닐까? 나로 하여금 화장실 문을 열게 하려는 계락. 그럼 나는 '가슴 만진 죄' 와 '껴안은 죄' 에 더해 '샤워하는 모습을 엿 본 죄' 까지 뒤집어쓰게 된다. 그래, 맞아. 이건 나를 파멸시키려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계락이 틀림없 어! 훗~ 누가 이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줄 알고? 나 아이언스 히로, 비록 무늬만이었지만, 한때 아이리스 왕국의 참모총 장이었다. 지략……이 아니라 잔머리라면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잔머리 의 지존이었지. 그런 나인만큼 이런 얕은 수작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난 발걸음을 돌려 부엌으로 돌아왔다, 주전자는 여전히 뜨거운 수증기를 펄펄 내뿜고 있었다. 잠깐. 그런데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어쩌지? 지금 일루니아 여사님 몸 상태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나오시지 않을 리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건 보통 큰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집에는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 둘뿐. 다른 사람이 없는 만큼 내가 냉정 하게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샤워하는 모습을 엿보게 해 나를 파멸시키려는 일루 니아 여사님의 계락이라면? 아아~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설마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일을 계획하신 건가? 함정인 줄 알면서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든 거란 말인가? 과연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여자의 몸으로 아이리스 왕국 참모의 자리까지 오른 것은 우연이나 요행 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걱정이 커졌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쓰러진 일루 니아 여사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슬퍼하는 루시아의 얼굴도 함께. "언니를 구해줘, 히로." "일루니아님을 구해주세요, 히로님." "누님을 구해주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앗! 이젠 환청까지! 난 거실 화장실로 뛰어갔다. 문에 귀를 대보니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난 일단 문을 두드려보았다. 똑똑! "안에 계신가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난 물소리 때문에 못 들었나 싶어 좀더 세게 두드렸다. 쾅! 쾅! "안에 있어요? 있으면 대답 좀 해보세요!" 쾅! 쾅 쾅! "어이, 아줌마! 커피 다 끓여놨어!" 여전히 들려오지 않는 대답. 이 정도로 크게 소리쳤는데도 못 들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 다면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들었는데도 일부러 대답을 안 하는 경우.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로 하여금 화장실 문을 열게 하여 나에게 '유부녀 샤워 장면을 엿본 치한' 이라는 누명을 씌울 아주 비열하고도 치졸한 계 략을 세웠을 경우다. 참고로 일루니아 여사님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둘째, 샤워를 하던 도중 쓰러졌을 경우. -오늘따라 몸 상태가 안 좋은 만큼 샤워를 하다가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 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까 두 번이나 쓰러졌던 만큼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과연 어느 쪽일까? 아이씨! 그러게 왜 샤워 같은 걸 해서 날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난 더욱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이봐요, 아줌마! 살아있으면 대답 좀 해봐요! 안 하면 문 열고 들어가 서 덮칩니다!" 그 다음 바로 귀를 문에 댔다. 여전히 샤워기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만 들릴 뿐 일루니아 여사님의 목소리나 기타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장난이라고 보기엔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나의 절대감각 역시 상황이 안 좋다는 경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난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철컥! 철컥! 문은 잠겨 있었다. 문까지 잠가 놓고 엿보니 어쩌니 소리를 하다니. 화장실 문은 딱히 열쇠라 할 만한 게 없다. 동전 하나만 있어도 쉽게 열 수 있다.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동전이 없다. "젠장!" 어째서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없는 건지 모르겠다. 난 부엌으로 뛰어가 숟가락을 하나 들고 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잠긴 문 을 풀었다. 딸깍! "됐다!" 난 재빨리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타일 바닥 위에 알 몸의 여성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샤워기는 한쪽 바닥에서 세차게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샤워하던 도중 쓰러지신 건가? "이봐요! 아줌마!" 난 바닥에 쓰러진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다가갔다. 어, 어떻게 하지? 일루니아 여사님은 현재 알몸. 가녀린 등과 둥그런 엉덩이가 보인다. 가 늘고 모양 좋은 다리도.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나중에 뺨을 맞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일루니아 여사님을 옮겨야 한다. 난 일루니아 여사님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물에 젖은 맨살이 손에 닿 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 지만 호흡이 불안정했다. 아아~ 이런 식으로 일루니아 여사님의 알몸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난 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몸은 30대 유부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늘씬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일루니아 여사님 특유의 이지적인 매력과 더해져 더욱 빛을 발했다. 그것은 일루니아 여사님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라이레얼이 가진 아름다움과 루시아가 가진 아름다움과는 전혀 달랐다. 그 아름다움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잠깐 실례할게요." 난 왼손으로 등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무릎을 받쳐 일루니아 여사님을 안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바닥에 묻어있는 피를 볼 수 있었다. 피? 일루니아 여사님 다리 사이에서 대량의 혈액이 묻어 나왔다. 하혈한 것 이다. 혼절한 데다 하혈까지 하다니. 왜 하필 내가 혼자 있을때 이런 일이 생기는 거냐! 난 일단 급한대로 일루니아 여사님을 안아들고 나와 쇼파위에 눕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혼절한 것도 걱정되지만 하혈한것이 뭔가 심상치 않다. 생리인가? 하지만 혼절한 순간에 맟추어 생리가 시작됐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다. 난 한참을 생각한 끝에야 내가 이렇게 생각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아는 의학적 지식이라고 해봐야 민간요법뿐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민간요법이라고 해봐야 까진곳에 빨간약 바르고 그래 도 안되면 반창고 붙이는것 정도다. 역시나 이런것은 전문가와 상담하는것이...... "맞아! 병원!" 내가 백번 고민하는 것보다 의사에게 한번 보이는 것이 나을것이다.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겠군. 난 소파에 누워있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알몸 인데다가 몸이 물에 흠뻑 젖은 상태. 의학적 지식이 일천한 나이지만 물 에 젖으면 체온이 떨어진다는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일단 물기를 닦고 옷을 입혀야 겠군. 난 빠르게 행동했다. 먼저 수건을 몇장 가지고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의 몸을 닦았다.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도록 최대한 고개를 돌린 채 다른생각을 떠올렸다. 나: 애들아 오빠가 피자 사왔다! 어린 엘프 일동: 앗! 피자다! 효과음: 우르르!! 어린 엘프 일동: 잘먹겠습니다아~! 나: 그래 맛있게 먹으렴. 라이: 앗! 라이가 더 큰 거 먹을거야! 루비: 이건 루비가 먼저 집었어! 라이: 그러는게 어딨어? 이건 오빠가 라이를 위해 사온 피자란 말이야. 루비: 아니야. 루비를 위해 사온 피자가 틀림없어! 나: 양은 많으니까 그만 싸워. 니들이 싸우는 사이 루가 다 먹잖아. 라이&루비: 아앗! 치사해 루!! 어린엘프들의 도움(?) 덕분에 나는 사심없이 일루니아 여사님의 몸에 물 기를 닦아 낼 수 있었다. 옷은 어떡하지? 난 일루니아 여사님이 샤워하러 들어갈 때 옷가지를 가지고 들어 갔던것 을 기억했다. 그래서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런데 옷자기를 가지고 나오려는 순간 발이 멈칫했다. 이걸 어떻게 다 입히지? 속옷부터 겉옷까지 일일이 입히는 것도 힘들 뿐더러 시간도 오래걸린다. 두리번 거리던 나는 가운을 찾을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감색 가운. 이거면 되겠지? 난 가운을 챙겨들고 다시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갔다 그 리고 혼절한 일루니아 여사님을 일으켜 가운을 입혔다. 팔만 넣으면 되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다음 나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안아들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몸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난 현관문을 열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일 루니아 여사님을 차 뒷좌석에 태우고 나는 운전석에 올라 탔다. 이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병원이 어디지? "......" 잠깐. 그런데 어떤 병원으로 가야하는거지? 종합병원으로 가면 알아서 해주겠지만 종합병원은 좀 먼 곳에 있다. 결국 맞는 병원에 찾아가야 한다는건데...... 치과? 소아과? 피부과? 비뇨기과? 정형외과? 성형외과? 이비인후과? "아!산부인과!" 혼절한 것과 하혈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여성의 하혈이라면 산부인과로 가면 될 것이다. 다행이 산부인과는 두블록만 가면 있다. 난 재빨리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 시켰다. 그리고 거울너머 뒷좌석에 누워있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병원으로 데려갈 테니." 이 지역이 길이 막히는 지역도 아니고 지금이 길이 막힐 만한 시간도 아 니기에 출발한지 3분만에 산부인과 건물 앞에 도착했다. 난 정문에 차를 세우고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을 안아든 다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정미정 산부인과' 라고 쓰인 유리문을 몸으로 밀며 안으로 들어 갔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간호사는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난 그녀에게 소리쳤 다. "급한 환자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내가 소리치자 간호사는 나를 병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사이 다른 간 호사가 의사를 모시고 왔다. 의사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무슨일이죠?" "그, 그게 그러니까...... 갑자기 쓰러져서......" 내가 당황해 두서없이 말을 늘어 놓자 여의사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몸을 살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황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말씀해보세요." "아, 예." 괜히 의사 자격증 딴 것은 아닌지 당황하는 나와는 반대로 여의사는 침 착한 모습이었다. "오늘 아침부터......아니, 요 며칠 전부터 몸이 좀 안좋았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비틀거리며 쓰러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샤워하러 들 어갔는데 한참이 지나도 나오질 않기에 들어가 봤더니 하혈을 한 채 쓰 러져 있었어요." "피의 양은 얼마나 됬죠?" "그, 그건......아,아무튼 많았어요." "알겠습니다. 진료를 해야하니 나가 주시겠어요?" "예." 난 밖으로 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런데 괜찮은 건가요?" "진료를 해봐야 알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듯 하니 안심하고 기다려 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생명에 지장은 없다는 말에 난 일단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료 결 과가 나와봐야 자세한 것을 알수있을 테니 불안감은 여전 했다. 왜 하필 나 혼자있을때 이런일이 벌어져 가지고...... 난 간호사가 내민 접수록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쓰고 병실 밖을 서성 거 렸다. 병실 밖에는 열명 정도 되는 임부들이 앉아서 잡담을 떨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이 산부인과가 제일 크다보니 임부들도 많다. 임부들은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금발의 미녀를 안고 산부인과로 뛰어 들어온 남자. 결혼했다고 보기엔 너무 젊어 보이는 20대 초반의 청년. 흠흠. 남자는 나밖에 없나? 난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역시 남자는 나뿐이다. 괜히 몸이 위축되기 시작한다. "젊은 남자가 여긴 어쩐 일일까?" "뻔하지." "사고 친 게 분명해." "요즘 애들은 피임을 제대로 할 줄도 모른다니까." "아까 안고 들어온 여자가 애인인가?" "그 여자 되게 예쁘던데." "게다가 외국인이야." "설마 강간한 건 아니겠지?" " 설마......" "......"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임신한 아줌마들 이봐요,아줌마들! 저는 둘째치고 배속의 애들이 들어요! 뭐, 이런식으로 오해받아도 할 말 없다. 그래도 강간은 너무 하잖아! 이렇게 아줌마들 시선을 한몸에 받으니 부담스런기 그지없다. 게다가 여론은 이미 강간쪽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 누가 여론조작이라도 하나? 난 간호사에게 부탁해 지갑의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 공중전화기 앞에 섰 다. 집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직 아무도 안 돌아온 건가? 하긴 집나온지 이제 겨우 5분 지났을 뿐이니 이런때를 대비해 핸드폰 이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 집 사람들은 핸드폰을 쓰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예산 부족 때문이다. 그 많은 식구가 전부 핸드폰을 산다고 생각해 봐라. 단말기값이 얼만데! 단말기값이야 한번 내면 끝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매달 나가는 사용료는 어쩔 건가? 안 그래도 빚더미에 앉아있는 나에게 핸드폰 사용료는 치명적이다. "아! 생각해보니 핸드폰을 가진 사람이 한명 있군." 지니는 '요즘 사귀는 여성' 이 사준 핸드폰이 있다 (매달 통화료도 요즘 사귀는 여성이 내준단다). "으음, 번호가......" 난 번호를 떠올려 통화를 시도했다.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이신가요?] "예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헉! 난지 어떻게 알았어?" 이 전화는 집전화도 아니고 공중전화. 발신자 번호가 뜬다해도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전화를 받는데 문득 아이언스 공작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헉!" 이인간이 이젠 예지력까지?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아! 댁의 누님이 쓰러졌어요." [제 누님 말씀이십니까?] "예.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님 말이에요." [저희 누님께서 쓰러지셨다는 말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덮치셨다는 뜻 인가요?] "예? 아니, 이인간이 무슨 망발을! 덮치긴 누가 덮쳤다 그래! 내가 유부 녀를 덮칠만큼 굶주......린건 맞지만 그래도 실제로 덮치진 않았어!" [아쉽군요.] "아쉽긴 뭐가 아쉬워!"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냉정을 되찾으셔야 합니다.] "너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수화기를 붙들고 소리치던 나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 를 돌렸다. 일제히 나를 노려보고있는 임부들 그 아줌마들의 눈빛은 '태교에 방해되 니까 조용히 하지 못해!'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매서운 시선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아~ 사일런스 남매 왜이러냐? 이 남매 아이리스 왕국으로 언제 돌아가려나? [지금 어디십니까?] "여기 집앞 산부인과에요. 아시죠? 정미정 산부인과라고 이 지역에선 제일 큰 산부인과에요." [예. 알고있습니다. 저희 누님께 정확히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 애기 하려고 했습니다." 안하는게 없고 못하는게 없는 지니. 지니라면 일루니아 여사님이 왜 쓰러지셨는지 그 이유를 알지도 모른다. 난 일루니아 여사님이 깨어난 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 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내앞에서 두번이나 쓰러진것, 샤워를 하던중 쓰 러져서 하혈을 하기에 병원으로 데리고 온 것 등등. 내말을 들은 지니는 잠시후 말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희 누님의 가슴을 만지시고 껴안고 그것도 모자라 알몸으로 쓰러진 누님의 몸에 손까지 대셨다는 거군요.] 지니의 말에 나는 분노해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그게 왜 결론이야!"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 않으셨습니까?] "그건 불가항력이었어! 그리고 그건 과정이지 결론은 아니잖아!" [그렇군요. 하지만 때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결과만을 중요시 한다면 이세상이 어찌 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때로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법도 있으니." 예를들어 나와 루시아가 하기를 바라는 독자들은 '했다'라는 결과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과정을 원하고 있다(즉 베드씬을 보고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결론을 한단어로 요약하자면 능욕......] "능욕 안했다니까!" [그럼 강간......] "강간도 안했어!" [그럼 겁탈......] "그게 그말이잖아!" [겁간,겁욕,겁측......] "다 같은 말이잖아!" [간음,여합,통정,사통......] "너 정말 자꾸 이럴래? 나 전화 끊는다!" [농담이었습니다.] "......" 이자식이 진짜...... [저희 누님께서도 아이언스 공작님께 아주 마음이 없지는 않으셨으니 일단 화간이라고 해두겠습니다.] "......니 좋을대로 하세요." 화내는것도 이젠 지쳤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이 돈이 마꾸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난 500원 짜리 동전을 하나 더 집어 넣었다. 하여간 우리나라 핸드폰 통화료는 너무 비싸다니까. "댁의 누님 일인데 걱정도 안 돼요?" [물론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누님 옆에 계시다는 것을 안 이상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보다 중요한것은 ......] "왜요?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어요?" [아이언스 공작님꼐서 저희 누님을 덮친 일이 루시아 공주님 귀에 들어 가기라도 한다면......] "안 덮쳤다니까 이자식아! 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뭐야? 헉! 설마 애초에 남매끼리 짜고 이런 계획을 세운 건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나를 모함하고 있는 거였나? 나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가기 위해? [그럴 리가요. 전 아이언스 공작님의 심복으로서 영원히 아이언스 공작 님을......] "됐으니까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댁의 누님이 지금 진료 받고 있는 중 이니. 지금 어디에요?" "가까운곳에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빨리......" 잠깐. 왜 위에 지니 대사에 따옴표가 붙어있는 거지? 순간 온몸에 오싹 전율이 일었다. 누군가가 내 뒤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니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헉쓰!" 난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 어떻게 여길......?" 내가 묻자 지니는 왠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더이상 숨길 수 없겠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 어째 지니의 입에서 엄청난 비밀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사실 그동안 지니의 행동이 매우 수상했다.이상하리 만치 여자에게 인기 가 많은것도 그렇고 인간이라 보기에 너무 똑똑한 것도 그렇다 그리고 대단한 능력을 지닌 주제에 날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이순간 지니가 '전 드래곤입니다' 라고 말해도 그리 놀라진 않을것 같다. 하지만 지니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했고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1층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헉쓰쓰!" "아이언스 공작님의 차가 정문에 멈춘 것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희 누님을 안고 뛰어올라가는 것도 전부 목격했습니다." "......" 이런 엄청난 비밀이라니! 1층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니! 이런 전개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가 일루니아 여사님을 안고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지니가 보고 있었다 니! 놀라 정신을 차릴수 없는 가운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봤으면 바로 올라올 것이지 왜 지금에야 올라온 거에요?" "사실은......" "......" 헉! 또 다시 엄청난 비밀이? "다 먹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헉! 그, 그런!" 다먹고 올라오느라 지금 온 거란 말인가? "그리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정문에 세워놓으신 차를 제대로 주차했습 니다. 키도 안뽑으셨더군요." 지니는 그렇게 말하며 차 키를 건네주었다. 정신없이 일루니아 여사님을 안고 올라오느라 차 키조차 뽑지 못했다. 잘못했으면 비싼 돈 주고 산 차를 도난당했을수도 있었다. 난 안도하며 차 키를 받아들었다. "저희 누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 뭘 걱정하는 척하고 그러니? 내가 자기 누나 안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들어가는걸 보고도 먹던 음식 계속 먹은 지니. 그리고 친절하게 차까지 주차하고 올라온 지니. 너네 누나가 알면 참 좋아하겠다. 그치? "진료실에서 진찰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잠시 앉아서 기다리지요." 역시나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모습니다. 지니는 태연하게 대기용 의자에 앉았고 난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지니가 나타나니 갑자기 병원안이 환해진 느낌이다. 임부들은 물론 간호사들까지 지니를 보며 수군거렸다. 물론 나를 보며 수군거릴때와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저남자 너무 잘생겼다." "저런 남자랑 결혼 했어야 하는 건데." "내 아들도 저렇게 멋지게 커야 할 텐데." "딸낳으면 사위로 들이고 싶어." "......" 여기서 지니 팬클럽 미팅이라도 하나? 왜이렇게 여론이 호의적이야? 이렇게 산부인과에 앉아있으니 별 애기가 다 들려온다. "어제 시어머님이 백화점 가서 육아용품 전부 사왔어요."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잖아." "그렇죠 하지만 시어머님은 아들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계세요 아마 딸 낳으면 기절하실 걸요." "하긴 철수엄마는 이번이 세 번째지?" "예 원래는 둘째까지만 낳을 생각이었는데, 시어머님이 하도 아들아들 노래를 부르셔서." "이번에도 딸이면 어떡해?" "모르겠어요 그럼 아마 시어머님이 넷째 낳으라고 난리 칠걸요? 고추달린 손자 안아 보기전에는 눈도 못 감는다는 분이시니 하아~." "......"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 남아 선호사상이 남아있단 말인가? 남아선호사상(男兒選好思想). 말 그대로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이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운 유학에 따르면 가문의 대는 오로지 남자만이 이을 수 있고 제사 역시 남자만이 지낼 수있다. 즉 자식으로 여자를 한 트럭 낳았다 하더라도 남자가 없으면 대가 끊기는 것이다. 이러한 악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남아 선호 사상이 가장 기승을 부린 때가 70~80년대였다. 남자 아이를 얻고 싶어 하는 시부모와 남편의 닦달에 임신한 여성들은 태아 감별을 해서 여자아이로 판명나면 낙태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성비 불균형이 심각해졌고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즉 고부 갈등이다. 이제까지 드라마에서 수십 수백번 우려먹은 패턴 그 패턴은 대략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있고 아들이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키 운다. 아들은 어머니의 말에 따라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직장을 얻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맞는 신붓감을 찾아 선을 볼 것을 권 한다. 하지만 아들은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며, 그 여자와 결혼하 겠다고 한다. 어머니는 무조건 뜯어말린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여 자와 선을 보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 쓰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한다. 이상하게 부부는 분가를 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산다. 시 어머니는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온 날부터 쥐 잡듯이 잡기 시작한 다. 인격모독, 인신공격 등의 각종 언어폭력은 물론 심지어는 폭력 까지 휘두른다. 아들은 아내가 불쌍해 아내의 편을 든다. 그럼 시 어머니는 분노해 더욱 최선을 다해 며느리를 조진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내 아들 인생 네년이 망쳐놨어! 한번 반항 을 하지 않던 그 애가 네년 때문에 나한테 반항을 했어! 대체 어 떻게 내 아들을 홀린 거냐, 이 여우같은 년아! 네년이 꼬리쳐서 착 한 내 아들을 홀렸지? 어디 두고 보자, 이년아!' 이러한 고부갈등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 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국 화해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이 난다. 여기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은 '시어머니는 왜 그렇게 며느리를 미워 하는 건가' 이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다지 미워할 이유가 없다. 며느리는 자기 아들의 아내다. 부부는 일심동체. 며느리의 행복이 곧 아들의 행복이다. 그런데 아들을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째서 며느리를 못잡아 먹어 서 안달인 걸까?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결국 그 근본적 원인은 남아선호 사상과 가부장 제도 때문이다. 가부장제 하에서는 남성이 무조건적으로 가장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다. 이때 남의 집에 시집온 여성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아들이다. 즉 여성의 입장에서는 아들에게 모든건을 의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 역시어머니를 누구보다도 믿고 따른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 애기가 달라진다. 아들은 어머니 보다 더 사랑 하는 사람이 생겼고 이제까지 아들만 바라보고 살던 어머니는 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며느리가 자신의 정한 며느리가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어머니는 이제까지 아들만 보고 살아왔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은 다시말해 아들을 자신에게 종속된 소유물로 보고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유물이 자신의 명을 거역하고 자신이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 한다? 사실 이것은 잘못이라고 볼 수가 없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잘못이라 하더라도 가장 큰 잘못은 그런 선택을 한 아들에게 있다. 하지만 옥이야 금이야 키워온 아들을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 때문에 증오의 방향은 자연히 며느리를 향하게 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를 의금부에서 대역죄인 고문하는 것처럼 조지에 되는 것이다. 고부 갈등에는 권력구조 역할구조 애정구조 세대차이 이해관계차이 등의 여러 원인이 있지만 결국 그 근본은 남아 선호사상에 서 비롯됐다 할 수 있다. 자기 집 아들은 귀하고 남의집 딸은 천하다는 이런 생각이 무조건적인 미움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만약 남아선호사상이 사라진다면 고부갈등 역시 상당부분사라질 것이다. 방금전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도 가문의 대를 이을 남자아이를 원하는 시부모님들이 상당히 많다. 이젠 호주제도 폐지되고 어머니쪽 성을 따르는것도 가능해져 여자가 가 문을 이어나갈 수도 있는데 뭐 그리 남자아이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뭐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사람의 생각이 하루 이틀만에 쉽게 바뀌는건 아니다. 난 개인적으로 고부갈등이 없어지는 것보다 그 뻔한 패턴 가지고 수백 번 우려먹는 드라마들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시어머니가 눈을 까뒤집고 며느리 조지는 걸 보고 있자면 정말 잔인하 다 싶을 정도다. 그 정도면 정신적 살해라고 봐도 무리는 없을것이다. 그렇게 며느리가 싫으면 식칼들고 실력 행사에 나서든가...... 천천히 정신적으로 말려 죽이는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며느리는 왜 항상 당하고만 있는 건데? 옳으면 옳다, 틀리면 틀리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말을 해야 알거아냐? 드라마 라고 하면 일정 부분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인데 어째서 21세기로 넘어왔는데도 20세기 패턴을 그대로 쓰는 건지 정말 모를일이다. 설마 22세기에도 똑같은 패턴으로 우려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안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다. "일루니아 여사님 아무일 없겠죠?" 내가 묻자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설마 무슨일이 있기야 하겠습니다?" "......" 어이,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누나가 아니라 당신 누나거든. 너무 천하태평 아니야? 나같으면 걱정하는 척이라도 좀 해보겠네. 그순간 간호사 한명이 큰소리로 말했다. "아이언스......히로? 아이언스 히로라는분 계신가요?" "......" 아차! 접수록에 실수로 아이언스 히로라고 썼나보군. 박영웅이라고 썼 어야 했는데. "예. 제가 아이언스 히로 입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간호사가 말했다. "따라 들어오세요." "예." 난 간호사를 따라가다가 멈칫 했다. "왜 안따라 오세요?" 지니는 태연하게 여성잡지를 훑어보며 말했다. "저까지 오라는 얘기는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난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그래도 니가 와야지! 니 누나 일이라니까! 남들이 보면 내 누난줄 알 겠다!" 그렇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지니의 누나지 내 누나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난 안절부절 못하고 저 인간 태연한 건가? 원래는 반대가 돼야 하는데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지니가 일어서자 내표정이 환해......진 것보다 간호사의 표정이 환해 졌다. "......" 어이, 간호사 아가씨. 아가씨가 왜 좋아하는 건데? 우리는 간호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까봤던 여의사가 앉아 있었다. 안경을 올려쓰던 여의사는 지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니는 놀라는 그녀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일런스 지니라고 합니다." "......" 차마 대답을 못하고 멍하니 지니만 바라보는 여의사. 난 그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밖에서 임부들과 수다나 떨라고 할 걸 그랬나?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여의사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서른 두세살은 되어 보이시는 분이 뭔 얼굴까지 붉히는지 모르겠다. "저, 저는 정미나라고 해요." 투두둑!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닭살이 튀어 오른다. 아아~ 나이먹고 저래도 되는거야? "저기요, 저도 있거든요. 환자 데리고 온 건 접니다. 웬만하면 저도좀 보시죠." 내 말에 여의사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괜히 안경과 머리를 매만졌다. 지니와 나는 자리에 앉아 여의사의 말을 들을 준비를 했다. 여의사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여의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생각해 보았다. 나릐 경험에 의하 면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올것 같다. 환자가 이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하셨습니까? 이소설의 뻔한 패턴으로 볼 때 이때쯤 이런 대사가 나와 줘야 한다. "환자가 이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하셨습니까?" 역시! 난 다음 대사도 예상해 보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아~ 뻔해 너무 뻔해. 각종 드라마, 영화 소설등을 보면 의사들은 항상 이 두대사를 빠트리지 않고 하기 마련이다 . 여의사는 이런 나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기 위함인지 글자하나 안틀리고 말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무슨 콤보 공격도 아니고......어째서 앞의 대사가 나오면 뒤의 대사가 반드시 이어져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환자가 이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하셨습니까?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어쨌든 이 대사가 나왔다는것은 환자의 상태가 위중하긴 하지만 급한 고 비는 넘겼다는 뜻이다. 난 안도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일루니아 여사님 상태가 심각했나? 초췌한 얼굴과 비틀거리며 쓰러지던 모습. "헉! 서,설마......" 여의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설마입니다." 청천 벽력과도 같은 소리.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 그렇다면 일루니아 여사님이 암이란 말씀이십니까?" 암이라니! 뭔 암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암이라니! 암이라면 신파극의 단골 메뉴 아니던가? 이 소설의 뻔한 진행으로 볼때 이때쯤 일루니아 여사님이 암에 걸려주 셔야 한다. 그럼 앞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그런 그녀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인디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건가? "......" 잠깐. 이글의 주인공은 나와 루시아인데.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아닌데. 그럼 서브 스토리로 진행? 누구보다도 행복한 부부였던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이 암게 걸림으로 인해 둘의 사이에는 짙은 어둠 이 드리워졌다. 말기암의 고통으로 점점 초췌해져 가는 일루니아 여사님. 그런 일루니아 여사님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는 인디. 하지만 인디의 정성스런 간호에도 불구하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점점 죽 음에 한 발자국씩 다가서고 있었다. '이젠 더이상 버틸수 없을것 같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 일루니아님. 꼭 나으실 거예요.'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몸은 제가 잘 알아요.' 결국 참지 못한 인디는 눈물을 쏟아냈다. '흑흑~제가 반드시 낫게 해드리겠어요. 그러니 제발 그런 말씀 하지마 세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요. 다만 홀로 남겨질 인디님이 걱정될 뿐이에요.' '흑흑~.일루니아님...... '저 없어도 행복하게 사셔야 해요.' '안돼요! 전 일루니아님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어요! 제발 절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미안해요 인디님.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아요.' 깜짝 놀란 인디는 소리쳤다. '안 돼요! 가면 안 돼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마지막 생기를 쥐어짜 입을 열었다. '사랑......요.' 털썩!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했다. '일루니아님!' 그리고 인디는 평생 일루니아 여사님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일루니아님과 함께 한 시간은 저의 긴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었어요. 앞으로 남은 수천 년의 세월을 그 추억을 떠올리며 살아갈게요. 제 마음속에는 일루니아님이 계세요. 제가 일루니아님을 잊지 않은 이상 일루니아님도 제 곁을 떠난 게 아니겠지요? 영원히 일루니아님을 잊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요 일루니아님.' 아아~ 슬프다. 여기저기서 다 써먹은 뻔하디 뻔한 스토리를 이 소설에서까지 써 먹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래도 이 소설은 나름대로 권선징악(勸善懲惡)적 구도를 지니고 있다. 착한 자는 상을 받고 나쁜 자는 벌을 받는 법. 일루니아 여사님이 암에 걸린 것은 다 평소 나쁜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 다. 즉 착한 주인공인 나를 너무 많이 괴롭혀 하늘의 벌을 받게 된 것 이다. 하늘의 그물망은 넓어도 악인은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이 맞긴 맞나 보다. 내가 피의 복수를 하기도 전에 하늘이 먼저 벌을 내리다니. 그런 의미에서 서브스토리 제목을 '악녀 일루니아 여사님의 최후'로 지 을것을 강력하게 건의하는 바다. 그나저나 일루니아 여사님이 곧 죽게 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잘해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야 더이상 잘해줄 수 없을 만큼 잘해줬지만. 평소 틈만나면 나를 갈구신 일루니아 여사님 하지만 나는 그런 일루니아 여사님을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주었다. 일루니마 여사님이 나를 싫어 하는 이유가 내가 너무 잘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원래 잘난 사람은 주위의 시기를 받는 법 아니겠나?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를 시기하고 모함했다. 그동안 내가 받은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나는 그 모든것을 이해하고 용서했다. 그런데 이렇게 천벌을 받게 되실 줄이야...... 그러게 평소에 좀 착하게 사시지. "말기 암인가요? 말기 암 맞죠? 이미 몸속 전체에 암세포가 퍼져 치료해 봐야 소용 없죠? 그런데 무슨 암이에요? 위암? 간암? 췌장암? 고환암?" "죄송합니다만 여성은 고환암에 걸리지 않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 듣고보니 그렇다. 고환이 있어야 고환암에 걸릴 것 아닌가? "그럼 유방암?" 여의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긴 산부인과입니다!" "예? 그럼 암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 아닙니다." "......" 에이~좋다 말았네. ......가 아니라 다행이다. 흠흠, 설마 들은 사람은 없겠지? "그럼 뭔가요?" 내가묻자 여의사는 나를 보며 물었다. "데리고 오신 여성분 남편 되시나요?" "헉! 그게 무슨......" 내가 놀라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지니가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이분이 남편이십니다." "뭔 소리야!" 난 지니를 보며 소리쳤다. "너 자꾸 왜그래? 나한테 불만 있으면 말로해!" 지니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 그저 저희 누님과 아이언스 공작님이 잘 됐으면 하는 충심에서......" "댁의 누난 유부녀잖아!" "그렇군요." "......" 말을 말자. 생각 해보면 이렇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일런스 남매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에는 화를 나게 해 고혈압을 유도하고 노화를 촉진시킨다는 고도의 계략이 숨어있다. 이런 치졸한 계략에 넘어가서는 결코 안된다. 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너 때문에 이러는거 아냐 임마!"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지니가 이러는 걸 보면 저절로 화가 치밀어 오른 다. "조용히 하지 못 해요! 여긴 병원입니다!" 여의사는 나에게 소리쳤다. 난 고개를 숙이면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의사 말대로 이곳은 병원이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정숙해야 한다. 뭐 병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모든 병원에서는 정숙을 요구 한다. 게다가 이곳은 소아과도 아니고 산부인과다. 그리고 임부들은 절대안정 을 취해야 한다. 소리 지르는 바람에 임부들이 놀라기라도 한다면 뱃속의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혹시 아나? 잘못해서 애 떨어질지. 난 지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때문에 나만 욕먹었잖아." "죄송합니다." 내가 지니에게 뭐라고 하자 날 보는 여의사와 간호사의 시선이 매우 날 카로워졌다. 자기들이 언제부터 지니 팬이었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저는 그 아줌마와 아무런 관련이 없......진 않고 굳이 관계를 따지자 면 제부쯤 되겠네요. 제 이름은 아이언스 히로......라고 해도 되지만 한국식 이름은 박영웅 입니다. 제가 데리고 온 아줌마의 이름은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그리고 이쪽에 계신 분은 일루니아 여사님의 친동생 입니다. 아까 직접 소개 했듯이 이름은 사일런스 지니구요." 난 대충 소개를 끝마친 다음 여의사를 보녀 물었다. "그래서 일루니아 여사님은 대체 무슨 병에 걸리신 건가요?" 내가 묻자 여의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모르고 계신가요?" "예? 모르다니요? 뭘 모른단 말인가요?"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얼마나 큰 병이기에 의사가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난 여의사를 빤히 쳐다보았고 여의사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임신입니다." "아, 임신이었군요. 그런데 임신인 건 둘째 치고 무슨 병인지......가 아니라 임신?" 임신. 아이를 배는 것을 뜻한다. 이말은 즉 뱃속에 아기가 있다는...... "뭐라구요? 일루니아 여사님이 임신을!" 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고 지니도 놀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에게 허리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축하 드립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예 축하할일......이긴 한데 왜 나한테 축하를해!" 지니는 내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여의사에게 물었다. "정말로 임신입니까?" "예." 산부인과 의사가 저렇게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정말로 임신이 맞나 보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임신이라니! 난 놀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암이었다면 이렇게 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일루니아 여사님의 뱃속에서 아기가 자라고 있단 말인가?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의 사랑의 결정체가? 그럼 일루니아 여사님이 엄마가 되는 건가? 인디는 아빠가 되고? 아아~ 혼란스럽다. 지금 이상황이 믿기지가 않는다. 그만큼 일루니아 여사님의 임신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어떻게 일루니아 여사님이 임신을! "......" 잠깐. 어째서 난 일루니아 여사님이 임신한걸 이렇게 놀랍게 받아들이는 거지?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결혼한 지 꽤 됐다. 그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침을 했으니 지금쯤 아이가 들어서도 이상할 건 전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믿기지 않는 걸까? 경국 지색의 미모와 현모양처 같은 성격을 지닌 인디가 일루니아 여사님 을 임신 시켰다는 것도 믿기지 않고 인텔리전트한 미모를 갖추셨고 실 제로도 고위 전문직 여성이신 일루니아 여사님이 인디의 아이를 가졌다 는것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둘이 아빠 엄마가 된다는건 더욱 믿기지 않는다. 암인줄 알았는데 임신이라니. 이때쯤 일루니아 여사님이 임신을 해줘야 스토리가 진행되나? 그런데 임신 몇개월 째지? 일반적으로 이경우 임신 3개월째일 확률이 가장 높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등을 봐도 언제나 3개월째에 임신 사실을 알아챈다. "몇 개월 째인가요?" 지니가 묻자 여의사는 홍조를 띄우며 대답했다. "3개월 조금 넘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자 지니는 날 보았다. "저희 누님의 임신 사실을 눈치 채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그냥 왠지 3개월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대략 3개월째 임신 사실을 알아채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첫째로 생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생리 불순인 여성들은 한 달에 두번 하기도 하고 두달에 한번 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세 달동안 생리가 없었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하게 생 각하지 않는다. 만약 네달 때도 생리가 없다면 그때는 슬슬 임신을 의심 하게 된다. 둘째로 3개월 때까지는 태아가 자리를 잡고 자라나는 시기. 이다. 이때는 배가 별로 불러오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임신 사실 을 알아채기 힘들다. 셋째로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입덧이 없거나 있더라도 미약한 수준이 면 속이 좀 메슥거리고 구토가 나오더라도 그냥 속이 안좋아서 그러는 걸 거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 마련이다. 이러한 연유들로 인해 세달 이 지나도록 임신 사실을 모르는 임부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임신 3개월이라니! 일반적으로 10개월째에 아기를 낳으니 7개월 남은 셈이다. "별 다른 증상은 없었는데......" "임신 초기에는 입덧을 전혀 안하는 임부들도 많습니다." "그래요?" "혹시 근래 속이 안 좋다거나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갑자기 몸에 힘이 빠져 쓰러진다거나 이상하게 피곤하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나요?" "아! 듣고 보니 있네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요 근래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셨다. 그리고 아까 손으로 머리를 짚으시며 고통스러워 하셨고 비틀거리다 쓰러지기 도 하셨다. 피곤해서인지 잠도 예전보다 많이 주무시고. 그 모든것이 임신 증상이었단 말인가? 난 감기 몸살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앗! 그 그럼 아까 하혈은......" 난 일루니아 여사님이 하혈한 걸 떠올리고 입을 쩍 벌렸다. "서, 설마 아이에게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죠?" 여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이라고 말했던 겁니다. 다행히 아무 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했기에 임부가 하혈까지 하고 쓰러진 겁 니까? 임부에겐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도 모르시나요?" "죄, 죄송합니다." 사실 내가 죄송할 일은 아니다.몸을 막 굴린 것은 일루니아 여사님 자신 이니. 임신 사실을 몰랐던 일루니아 여사님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업부에 매진 했을 테고 몸이 피로를 호소해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가 피로가 쌓여 하혈까지 하게 된 것 같다. 어쨌든 아이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다. "......" 그런데 내가왜 이렇게 안도하는 거지? "본인에게는 알렸나요?" "잠들어 있어서 알리지 못했습니다. 임부 상태가 나쁘진 않으나 피로가 많이 누적된 것 같으니 하루 정도는 입원 해서 휴식을 취하고 자세한 검진을 받아보는게 좋으실 겁니다." "예 그래야지요." 일루니아 여사님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되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설마 애 떼자고 하진 않으시겠지? 일루니아 여사님: 아기는 여자인생의 무덤이에요 임신과 출산,육아는 여자에게 내려진 굴레나 다름없어요 전 아기 따위는 필요 없어요. 인디: 안돼요 일루니아님 키우는건 제가 다 할 테니까 제발 낳아요 우리 사랑의 결실이잖아요. 일루니아 여사님: 저보고 임신 기간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신 가요? 그리고 출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 건지 남자가 알기나 해요? 당장 뗴 버리겠어요. 인디: 흑흑 제발 그러지 마세요 우리 아기잖아요 일루니아님과 저의. 일루니아 여사님: 뭐라 해도 소용없어요. 전 이미 마음을 굳혔어요. 인디: 흑흑 안돼요 아기가 무슨 죄가 있어요? 제발 한번만 더 생각해주 세요.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님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인디님도 다 른 남자들과 다를게 없군요. 정 아기 낳을 것을 강요한다면 이혼 하겠 어요. 인디: 흑흑...... 뭐 이럴리는 없을 것이다. 일루니아 여사님 역시 아이를 원하고 있는 것 같으니. 어떻게 아냐고? 난 평소 라이, 루, 루비를 바라보던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을 기억했다. 하나같이 귀엽고 깜찍한 어린 엘프들을 바라보던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 은 나에게 저런 예쁜 아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2부 7권 스토리 19에서 어린엘프들이 나와 루시아에게 어버이날 을 챙겨주는 것을 본 일루니아 여사님은 인디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했다. "부럽네요." "네" "저도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인디님을 닮은 예쁜 아이를요 인디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저도......아이가 있으면 좋을것 같아요." 그리고 둘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방 안으로 향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일루니아 여사님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정말로 아이를 갖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정말로 애를 잘 키울 수 있으려나? 가사 드래곤 인디에게 애 하나 키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라이를 키운 경험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디의 성향이 '아빠' 보다는 '엄마' 에 가깝다는 것이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업무에 바쁘시다보니 애에게 신경 쓸 시간이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설마 양육은 전부 인디에게 맡기고 본인은 인생에 투자하는 건 아니겠지? "말씀 드릴게 한가지 더 있습니다." "예?" "이걸 잠깐 봐주십시오." 여의사는 한장의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었다. 난 그것을 보았지만 본다고 해서 뭔지 알 수 있을리 없었다. "이게 뭔가요?" "자궁 사진 입니다. 여기에 지금 아기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요?"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잘 모르겠다. 사진이 흑백인데다(그럼 칼라겠냐?) 좀 뿌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니는 한번 들여다보고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예? 뭐가 그래요? 지금 알고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괜히 아는척하는 거 예요?" 내가 문자 지니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쪽에 아기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 봐도 모르겠는데. "그리고 이쪽에도 아기가 자리를 잡고 있지요." ".....예?" 이쪽에 아기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쪽에도 아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건......? 난지니에게 물었다. "원래 아기가 따로 자라다가 합체돼서 자궁을 빠져 나오는 건가요? "물론 아닙니다." "......" 나도 아닐거라 생각했다. 아기가 무슨 변신 합체 로봇도 아니고. "그럼 모든 임부들의 자궁 속에도 이렇게 아기가 따로 자라고 있나요?" "쌍둥이를 임신한 임부들의 자궁속에만 이렇게 아기가 따로 자라고 있 습니다." "......" 쌍둥이? 쌍둥이라면 애가 둘이라는 뜻? 즉 일루니아 여사님 뱃속에 지금 애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다는...... "헉쓰쓰쓰!" 임신한 것도 놀라운데 쌍둥이라니! 난 여의사를 보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정말 쌍둥이에요?" 여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행히 두아이 모두 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임부가 계속 무리를 할 경우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임신 3개월째인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힘든 일은 피하고 스트레스를 줄여......" 여의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오 찍 '쌍둥이' 라는 단어뿐. 이어 루와 루비가 같이 서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루와 루비는 매우 닮 아서 이란성 쌍둥이라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니. 지니는 나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왜 또 나한테 축하를 해!" "죄송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만." "......" 기뻐? 쌍둥이를 임신한 걸 기뻐해야 하나? 이건 좀 생각해볼 문제다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공교육은 개판이고 사법부는 가진 자들만 옹호해주는 이런 나라에서 애를 낳는다 는 것은 보통 큰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구국의 결단이 필요하다 할 수 있겠다. 오죽하면 대한민국 출산율이 세게 최저 수준이겠나? 그런데 쌍둥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나라에서 애를 둘이나 낳아 기른다는 것은 미친 짓 이다. 이민이라도 가야 하는 건가? 정 이나라에서 기르기 힘들면 판타지 세계로 돌아가면 되니 상관없다. 인디의 레어가 있는 흑색 숲에 가서 사는 것도 괜찮겠지. 아니면 아이리스 왕국에서 기르든가. 뭐 그건 일루니아 여사님이 결정하실 문제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려나?" 쌍둥이 임신하신 걸 알면 기뻐하실까, 기절하실까? "말씀 다 끝나셨으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내말에 여의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요. 자, 잠깐......" "예? 뭐 또 하실 말씀이라도?" "그, 그게 그러니까 환자의 상태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심도 있는 대 화를......" "예. 그럼 하세요." "아, 아니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여의사의 모습이 뭔가 수상하다. "역시 암!" 내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치자 여의사는 눈을 치켜뜨며 짜증을 냈다. "아니라니까요!" "......" 아니면 아니지 뭐 짜증까지 내고 그러시나? 내가 왜 이렇게 암에 집착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왠지 이때쯤 암이 등장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생각해보니 일루니아 여사님이 설사 말기 암에 걸리셨다 해도 신파극 스토리로 진행될 일은 없다. 마법으로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남편인데 뭐가 문제겠는가? "......" 잠깐. 마법으로 치료해? 아까 일루니아 여사님이 쓰러졌을 때 회복마법 정도는 걸어줄 걸. 가끔은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깜빡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법으로 치료했다 할지라도 어쨌든 병원에는 데려와야 했을 것 이다. 치료 마법과 회복 마법은 비슷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치료 마법은 말 그대로 마법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칼에 베인 상처를 치료할 때는 베인 부분의 세포를 활성화시 켜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복 마법은 역시 말 그대로 마법으로 회복을 시켜주는 것이다. 이상이 생긴 몸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회복이다. 몸이 원래 상태로 회복되면 상처가 빨리 아무니 회복 마법은 치료를 촉 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치료를 촉진시킬 뿐이지 직접적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아니다. 회복 마법은 몸이 지쳤을 때 걸어주는 것이고 치료 마법은 몸이 다쳤을 때 걸어주는 것이다. 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임신 사실을 모르고 과로해서 피로가 누적돼 쓰러졌 다. 이럴 경우 마법은 피로를 풀어주는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리고 치료 마법을 쓴다 하더라도 무작정 마법을 쓰는 것은 효용이 떨 어진다. 어디가 다쳤고 어디를 치료할지 정확히 알고 마법을 써야 효용 이 극대화 된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마법은 결코 만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마법으로 가능하다면 인간의 노력에 무슨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에 따른 성취감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랬다고 이 세계에 적응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법을 최대한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드래곤들이 마법을 거의 쓰지 않는 거고. "그런데 하실 말씀이 대체 뭐예요?" "그, 그게......" 계속 뜸을 들이는 여의사. 의사가 환자 보호자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 어떻게 해석하긴 뭘 어떻게 해석해? 난 여의사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알기 싫어도 알 수 밖에 없었다. 여의사가 지니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에...... "......" 다른 환자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장사 안 하나? "그럼 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혹시라도 하실 말씀 있으시면 이분께 하세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잡는 시늉조차 안한다. 오로지 지니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태도.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의사는 약간 마른몸에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 로 차분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알이 큰 은테안경을 쓰고 있는 덕분인지 꽤나 지적으로 보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일루니아 여사님과 비슷한 느낌의 미인이었다. 인텔리전트한미인. 뭐, 산부인과 의사정도면 충분히 인텔리전트 하다. 아무나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니. 지니가 '요즘 사귀는 여성'중 상당수는 고위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다. 여기에 이젠 산부인과 의사까지 추가되는 건가? 아니 어쩌면 벌써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난 그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공중전화기 앞에 섰다. 집에 전화를 거니 다행히 누군가가 받았다. [여보세요.] 앗! 이 목소리는 루시아의 목소리? 난 최대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게?" 그순간 전화가 끊겼다. [뚜뚜뚜뚜.] "......" 뭐야? 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역시 루시아가 받았다. [여보세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루시아? 왜 전화를 끊은 거야? 내 애교 섞인 목 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까 전화 건 게 너였어? 난 몰랐지.] "......" 몰랐다니! "너무해! 어떻게 내 목소리를 듣고도 그럴 수 있어? 널 사랑하는 나의 목소리조차 모르는거야?" [알았어. 앞으로 목소리만 들어도 알도록 노력할게. 그보다 너 지금 어 디야? 거실 화장실을 엉망으로 해놓고 어딜 나간거야? 최소한 샤워기는 끄고 나가야 할 거 아냐? 수도세가 아깝지도 않아? 보니까 차도 사라졌 던데 니가 끌고 나간 거야? 그리고 언니는 언제 나갔어? 아! 그리고 가 스 불을 켜놓고 나가면 어떡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한가지 씩만 물어봐줘 루시아. 널 사랑하긴 하지만 한번에 그 많 은 질문에 대답한다는 것은 무리야." 루시아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모르는 듯 했다. 샤워기를 끄지 않고 나왔기 때문에 화장실에 있는 핏자국은 지워진 듯 했고. 정신없이 나오느라 현관문 잠글 생각도 못했는데 자동 잠금 장치 덕분 에 자동으로 잠긴 듯 했다. 하지만 너무 정신이 없어 가스불 끈 생각과 샤워기 끌 생각은 못했다. 정말 화재라도 일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군. "지금 집에 누구 있어?" [나랑 애들 뿐이야.] "인디는?" [형부는 아직 없어. 그런데 언니 언제 나갔는지 알아? 몸도 안좋은것 같 아 오늘은 집에서 쉴 줄 알았는데.] "그 아줌마 지금 나랑 같이 있어." [뭐? 진짜? 니가 언니랑 무슨 일로 나간거야?] 루시아는 놀란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루니아 여사님과 나는 불구 대천의 원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서로 사이가 좋지않다. 당연 같이 집밖으로 나갈 일은 없다. "일이 좀 있었어." [아! 형부 들어왔다.] "그래? 그럼 지금 인디와 함께 정미정 산부인과로 좀 와." [산부인과?] "자세한 건 이따 얘기해 줄테니까 일단 와 아! 올때 옷도 좀 챙겨와 특 히 속옷은 두세벌 정도 챙겨." [옷을 챙겨오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설마 언니한테 이상한 짓 한 건 아니겠지?] "이, 이상한 짓이라니! 날 어떻게 보고!" [색마.] "헉! 난 너한테만 색마야. 다른 여자한테는 목석인 거 너도 잘 알잖아." [모르는데.] "......" 모르면 말구. "아무튼 옷 챙겨서 빨리 와 정미정 산부인과가 어디 있냐면 말이야......" 난 현재 위치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최대한 빨리 와 알았지?" [응. 알았어.] 난 다시 한번 빨리 오라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일루니아 여사님이 계신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있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보였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손목에 링거를 꽂은 채 잠들어 있었다. 간호사들이 입혀줬는지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감색 가운은 한쪽에 걸려 있었다. 속옷은? "......" 흠흠, 쓸데없는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서술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일일이 걸고 넘어지다 보면 끝이 없다. 게다가 일루니아 여사님은 유부녀가 아닌가? 난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얼굴을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임신한 것도 모르고 과로를 하다니. 만약 유산이라도 했다면 정말 큰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기에게 이상 이 없다니 천만 다행이다. 잠든 일루니아 여사님은 편안한 모습이었다. 링거는 아마도 영양제인 것 같다. 그나저나 이렇게 일루니아 여사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지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미인이라는 얘기다. 뭐, 그래봐야 루시아한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루니아 여사님 때문에 놀랐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벌렁 벌렁 하다. 내가 집에 없었거나 조치가 늦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좀더 일찍 발견하지 못한걸 생각하면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건 전부 일루니아 여사님의 탓이지 결코 내잘못이 아니다. 그동안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당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ㅈ기 때문에 이번 역시 일루니아 여사님의 계략인줄 알았다 그래서 일이 생긴것을 눈치채 고도 화장실 문을 열기 꺼렸던 거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의 미약한 숨을 내뱉었다. "으음......" 깨어 나려는 건가? 일루니아 여사님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깜빡거렸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난 재빨리 일루니아 여사님을 말렸다. "그냥 누워 계세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몸을 일으키는게 힘이 드는지 내 말에 따랐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날 보았다. 안경이 없기 때문인지 초점을 맞추기가 힘든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죠?" "병원이에요. 화장실에 쓰러져 계신 걸 제가 모시고 온 거예요." "그래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자신의 몸을 확인해보았다.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속을 살짝 들여다 보았다. "이 옷은 누가 입힌 거죠?" "그야 간호사가 입혔겠죠." "제가 쓰러진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예 그러니까요......" 난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샤워한다고 들어갔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나와 걱정했다. 문을 두드렸는데도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정말 어쩔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기에 여사님이 쓰러져 계셨다. 급한 마음에 물기를 닦아내고 가운만 입힌 다음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 려왔다. 얘기를 다 들은 일루니아 여사님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제가 샤워하는 곳에 침입해 알몸 으로 쓰러져있는 저에게 손을 댔다는 거군요." "그게 왜 결론이야! 아줌마 정말 이럴......"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다가 멈칫했다. 잠깐 내가 지금 이러면 안돼지. 임부에게 소리치면 아기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을을 가라 앉혔다. 그래. 조용조용히 얘기하는 거야 뱃속의 아기가 안심할 수 있도록 말이 야. "물론 안 좋은 쪽으로만 보면 그게 결론이라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잖아요. 만약 제가 그때 화장실 문을 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제 알몸을 봤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군요." "그러니까 어쩔수 없었다니까요. 그리고 얼마 보지도 않았어요. 혼절한 여자를......" "능욕." "......능욕하다보니......가 아니잖아!" "능욕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으시는군요." "능욕 안했어!"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제몸에 손을 댄 거죠?" "아니라니까!" "혼절한 여자를 상대로 자신의 욕정을 마음껏 풀다니 정말 인간 이하군 요." "아줌마 정말 이러기야! 생명의 은인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이거야말로 구해주고도 욕먹는 것 아니겠는가? 아아~ 어떻게 이런 경우 없는 일이 있을 수가! 일루니아 여사님은 알몸을 보였다는 사실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아마 루시아였다면 어떤 상황이었든 간에 '저질! 변태! 색마!'라고 소 리치며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집어던졌을 것이다. 성(性) 적인 면에서는 루시아에 비해 일루니아 여사님이 훨씬 개방적인 것 같다. "제 알몸봐서 좋았겠군요." "좋기야 좋았......지가 아니라 아줌마 지금 뭔소리야! 누가 아줌마 알 몸보고 좋아했을 것 같아?" 솔직히 말해 좋았다. 루시아나 라이레얼에 비해선 조금 부족한 감이 없 지 않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의 몸매가 워낙 발군이다 보니...... "......" 헉! 내가 무슨 생각을! 난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냈다.일루니아 여사님은 나 들으라 는 듯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외간남자에게 알몸을 보이다니 그것도 모자라 능욕까지 당하다니." "능욕 안했다니까!" "어쨌든 제몸에 손을 댄 건 사실 아닌가요?" "그거야 물기와 피를 닦아내느라 그랬던 거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놀란 듯 내게 물었다. "피요?" "......" 아차! 하혈한 사실은 걱정할까봐 일부러 빼놓고 말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말 해줘야 할 것 같다. 어차피 비밀이라 할 만한 것도 아니었으니. "샤워하다 쓰러지셨을때 하혈을 하셨어요. 그 때문에 제가 얼마나 놀랐 는지 아세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다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치 당연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졌을 때 생리가 시작됐나 보네요. 요 몇달간 안 했으니 지금쯤 할 때가 됐죠." "......" 생리가 아닌데.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 생리를 몇 달간 안 하고 그러시나요?" 여자에게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해 주었다. "저는 원래 좀 들쭉날쭉한 편이에요.한달에 두번 할 때도 있고 세달에 두번 할 때도 있고 두달에 한번 할 때도 있지요." "그, 그렇군요." 그러니 임신 사실도 모르셨겠지. "참고로 루시아는 생리 주기가 정확한 편이에요. 그러니 피임도 그에 맞 춰서 하시면 될 거예요." "헉! 그 무슨......좋은 정보를......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정보를 얻어서 기쁘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임신 사실을 말씀 드려야 하는데...... 왠지 말 꺼내기가 쉽지 않다. 난 아까 의사에게 들은 질문을 그대로 일루니아 여사님께 했다. "혹시 근래 속이 안 좋다거나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갑자기 몸에 힘이 빠져 쓰러진다거나 이상하게 피곤하다던가 하지 않으셨나요?" "맞아요 과로해서 그런 것 같은데 좀 쉬면 괜찮아 지겠죠." "그럼 속이 메슥거려 구토한 적은 있으신지?" "며칠 전 그런 적이 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위가 좀 안 좋아진 것 같 은데 약먹으면 괜찮아 지겠죠." "......" 약? 임신 중에 약을 잘못 먹으면 태아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잘 못하면 유산을 할지도...... "안돼! 먹지마!" 내가 소리치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상하다는 눈길로 날 보았다. "제가 약을 먹든 말든 아이언스 공작님이 뭔 상관이죠?" "아, 아니요. 그, 그냥......아! 지금처럼 몸이 안 좋을땐 아무 약이나 먹어서는 안 된대요. 아까 의사가 그러더라구요. 꼭 의사가허락한 약만 먹으라고." "흐음......" 날 훑어보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시선 난 애써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재수없게 웃기는." "......" 참자 애낳을 때까지만 참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아직도 자신의 몸 상태를 과로로 인한 몸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뭐든 다 알 것 같은 일루니아 여사님이라도 자신의 임신 사실은 모르나 보다. 이건 뭐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짐작조차 못하고 계시니 말꺼내기가 쉽지 않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죠?" "의사 말로는 하루 정도는 있으라고 하더군요.. 일단 다른 가족들도 불 렀어요. 사일런스 백작님은 지금 여의사와 얘기중......" "얘기중이 아니라 꼬시는 중이겠죠." "......" 누가 누나 아니랄까봐 동생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루시아와 인디는 어린 엘프들 데리고 이곳으로 오는 중이에요." "그렇군요.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예. 금방 올 거예요" 역시 몸이 아프면 가족들이 그리워지나 보다 혼자서도 꿋꿋이 버티실 것만 같은 일루니아 여사님이 가족을 찾으시다니.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루시아 오면 다 일러야지~." "......헉!" 다 이르다니! "자, 잠깐만 아줌마. 이러는게 어딨어!" "뭐가요?" "다 이른다며!" "전 그저 있었던 일을 루시아 에게 말할 뿐인데 뭐가 잘못됐나요?" "있었던 일이라면......?" "당연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제 알몸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만지기 까지 하고 만지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안기까지......" "내가 언제 아줌마를 안았어?" "저를 안고 뛰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안는다는 의미가 그 의미가 아니잖아!" "뭐가 다르죠?" "그, 그건......" 이건 사전적 의미와 그 안에 내포된 의미의 차이라 할 수있다. 라이가 '안아줘요,오빠' 라고 말하는 것과 루시아가 밤에 야한 잠옷을 입고 내방에 들어와 '날 안아줘 히로' 라고 말하는것, 둘다 안아달라고 말한 것은 똑같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천지차이다. 만약 그 의미를 바꿔 해석하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엄청난 일이 뭐냐고? "......" 그걸 몰라서 묻나? 루시아야 그렇다 치더라도 라이는 어쩔 건데? 로리 변태로 몰려도 할말 없으리. "아무튼 아줌마가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내가 아줌마 살리느라 발에 불 나도록 뛰기까지 했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 말을 못 들은척 천장을 쳐다보며 수심 가득한 얼 굴로 말했다. "아아~ 나는 순결을 잃었어. 이제 인디님 얼굴을 어떻게 본담? 인디님이 이혼하자고 하면 어쩌지?" "......" 흥분하지 말자. 절대 화내지 말자. 상대는 한 아이도 아닌 두아이의 생 명을 책임지고 있는 임부니까. "루시아는 언제 오려나?" "......" 왜 자꾸 루시아를 찾는 거지? 정말 이를 생각인가? 루시아와 인디는 분명 일루니아 여사님 말을 믿을 것이다. 내가 변명을 해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일루니아 여사님 신용등급이 AA라면 내 신용등급은 FF다. 그러니 내 말을 믿을 리 없다. "......" 그럼 결국 집에서 쫒겨나게 되는 건가? 좋은 일 하고도 욕을 먹다니! 이 무슨 '은혜를 원수로 갚는'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난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정말로 이를 생각은 아니시죠? 그냥 저 놀리려고 그러시는 거죠?" "무슨 말씀이신가요? 전 다만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말할 뿐이에요." "......" 있었던 사실만 말해도 문제가 생길 텐데. 내가 일루니아 여사님 알몸을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이유야 어쨌 든 간에 루시아는 나를 두드려 패서 집 밖으로 쫓아낼 것이다. 그럼 어린 엘프들은 펑펑 울며 ' 오빠(형) 쫓아내지 마세요오~!" 라고 말하겠지. 루시아는 그 즉시 애들에게 피자 한 조각씩을 입에 물려 줄 테고 아이들은 피자를 먹으며 침묵하겠지. 심지어는 '안녕히 가세요 오~!' 라고 손을 흔드는 엘프도 있겠지. 결국 쫓겨난 나는 거친 황야를 헤매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겠지.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미소짓는 루시아 얼굴. 그리고 속옷차림 의 루시아...... 흠흠 어쨌든 꽤나 비극적인 결말이다. 반드시 막아야 해! "아줌마가......아니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저는 생명의 은인이라니까요." "굳이 병원에 데려오지 않았어도 생명에 지장은 없었을 것 같은데요." "......" 아줌마 생명이야 그렇지. 하지만 뱃속에 있는 아기의 생명은 어쩔 건데? "제가 안 데려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니까요." "몸살은 하루 정도 푹 쉬면 낫는 거예요." "......" 몸살이 아니라니까! 임신 사실을 말해줘야 하는데 어째 말 꺼내니가 힘들다. 지니 이 인간은 뭘 하고 있기에 안 오는 거야? 아무래도 내가 말해주는 것보단 친동생이 말해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기 혹시......아이들 좋아하시나요?" "무슨 말이죠?" "그러니까 라이, 루, 루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거죠? 어린 엘프들 말이에요." "귀엽고 깜찍하고 예쁜 아이들이죠." 일루니아 여사님은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어린 엘프들을 생각하니 기분 이 좋아지나 보다. 그렇다면 일루니아 여사님도 아이를 좋아한다는 뜻? "아이들을 좋아하시나 보죠?" "예. 좋아해요." 난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을 피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애 떼자고 하지는 않겠군.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상하다는 눈길로 날 보았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 거죠?" "아! 그 그냥 심심해서요." "혹시......" "......" 헉! 눈치 채신 건가? "하나 분양이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예? 분양이요?" 분양이라니! 이 무슨 루시아가 들으면 분노할 소리를! "아니 어린 엘프들이 무슨 애완견도 아니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대단히 기대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분양하실 생각이면 하나 정도는 받아줄 용의가 있어요. 둘도 상관없구 요 정 원하신다면 셋 까지도 가능해요." "......" 분양 안한다니까요. 정 어린 엘프들 분양 받고 싶으시면 루시아와 상의 하세요. 그리고 뱃속에 둘이나 있으신 분이 뭘 그리 욕심을 내시나? 일루니아 여사님은 어린 엘프들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난 그 심정 십분 이해 한다. 라이, 루, 루비 같은 귀엽고 깜찍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은 모든 부모들 의 꿈이 아니곘는가? 그런 의미에서 '어린 엘프들 양육 시뮬레이션' 게임을 제작해 보는것은 어떨까? 플레이어가 부모가 되어 어린 엘프들을 기르는 것이다. 항상 인기도에 신경을 써야한다. 어린엘프들과 같이 놀아주고 맛있는거 사주고 재워주고 하면 인기도가 급상승한다. 하지만 잘 안놀아주고 사달라는 거 안 사주고 알아서 자게 내버려두면 인기도가 급하강한다. 특히나 한끼라도 안먹였을 경우에는 인기도가 마이너스가 되며 게임 오 버된다. 그렇게 열심히 기르다 보면 어느새 엔딩이다. 플레이어가 어떻게 했느 냐에 따라 어린엘프들은 착한 엘프가 되기도 하고 나쁜 엘프가 되기도 한다. 물론 착한 엘프가 되는것이 해피엔딩이고 나쁜 엘프가 되는 것이 베드엔 딩이다. 플레이 타임은 대략 100년정도. 좀 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린 엘프들이 다 자라려면 그 정도 시간은 걸린다. "......" 으음 게임하다 늙어 죽겠군. 그래도 어린엘프들 기르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모습...... 같은건 없지만 나날이 늘어나는 식사량을 볼 때 마다 감동(경악)스럽다. 가끔 피자 가게 차릴 걸 괜히 인형 가게 차렸다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마스터 피자'가게는 진짜 우리 집 때문에 장사한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우리 집이 거래하는 피자가게를 바꾸면 그 가게 매출은 반으로 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단골 할인 같은 거 안해주나? 아차! 지금은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니지. 난 말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았다. "저기......헉!" 난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침대에 누워 계시 다. 그것도 완전히 누워계신 것이 아니라 배개를 등에 받쳐 상체를 약간 일 으킨 상태다 그리고 나는 그 바로 옆에 앉아있다. 때문에 벌려진 옷깃 사이로 새하얀 가슴이 보였다. 일루니아 여사님 가슴이야 샤워하는 도중 쓰러지신 바람에 완전히 드러 났다. 체형에 비해 약간 큰 것 같은 느낌의 새하얗고 모양 좋은 예쁜 가슴. 하지만 이렇게 벌려진 옷깃 사이로 살짝 살짝 보이는 것은 또 다른 느 낌이다. 사실 아까는 너무 당황한데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보니 어디다 시선을 둬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보기야 봤지만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얼핏얼핏 보일랑 말랑 하니 자연스레 시선이 집중된다. 게다가 일루니아 여사님은 현재 노브라 (No Bra)가 아닌가? 원래 다 보이는 것보다는 살짝 가리고 있는 것이 더 자극적인 법이다. 가려진 부분에 대해 상상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 잠깐. 살짝 가리고 있는 것이 더 자극적이라고? 그렇다면 루시아가 그렇게 철저하게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은 설마 나를 자극하기 위해서? 그런데 루시아 정도면 살짝 가린 것이 아니라 완전히 가린 것 아닌가? 이건 뭐상상이고 뭐고 개입할 여지가 조금도 없잖아!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보인다냐? 난 위치를 조금 옆으로 옮기고 고래를 기울였다. 조금만더...... 조금만더...... "지금 뭐하시는 거죠." "......헉!" 고개를 기울이던 도중 일루니아 여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한다. 굉장히 당혹스러운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고 말해야 좋은 걸까? "아, 아니요 그냥......" "그냥 유부녀 가슴을 훔쳐보고 있었던 중이라고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예. 바로 그거......가 아니라......" "그럼 대놓고 보고 있었나요?" "아니요 굳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훔쳐보는 쪽이었는데...... 아, 아니 자지금 무슨 말씀을! 지금 절 모함하시는 겁니까? 이런 모욕은 태 어나서 처음입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라 난 괜히 화를 냈다.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화 안 낼게요." "......" 헉! 일루니아 여사님이 웬일로 자비를...... "이따 루시아 오면 다 이르면 되는 걸 뭐 하러 화를 내겠어요?" ......베풀지 않는군. 한순간이나마 기대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진다. "흠흠, 그나저나 지니는 왜 이렇게 안 온담? 누나 일인데 걱정도 안 되 나?" 난 괜히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피곤한지 이불을 덮 으며 눈을 감았다. "다시 주무시게요?" "왜요? 제가 자면 이상한 짓 하게요?" "헉! 저 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제가 이래뵈도 명망높은......" "유부녀 강간범." "......유부녀 강간범......이 아니라 아이언스 공작입니다. 유부녀 강 간범 절대 아니에요. 자꾸 그쪽으로 몰아붙이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습니다." 난 자꾸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조곤조곤 말했다. 그래 애 나올 때 까지만 내가 참는 거야. "루시아까지 겁탈한 주제에 아닌 척하기는." "......" 난 참을 수 있어! 그나저나 일루니아 여사님 말을 너무 막 하신다. 그럼 태교에 도움이 안 될 텐데. 원래 애를 가졌을 때는 예쁘고 아름다 운 것만 보고 말도 가려서 해야 한다. 뱃속에 아기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역시 임신 사실을 말해줘야겠지? "혹시 몸이 좀 무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예를 들어 뱃속에 돌덩이 가 들어있는 느낌이 든다던가......" "왜 자꾸 그런 걸 묻는 거죠?" 일루니아 여사님은 눈을 치켜뜨며 나를 보았다. 안 그래도 올라가 있는 눈 꼬리가 오늘따라 더 많이 올라간 것 같아 보인다. "아 아니 뭐 특별한 건 아니고......" "저한테 뭔가 숨기고 계신 것 같은데 대체 뭐죠?" "그 그게 그러니까......" 말해주면 충격 받지나 않을까 걱정 된다. 갑작스런 충격은 태아에게도 안 좋겠지? "사실 그다지 중요한 얘기는 아닌데요." 사실 무지 중요한 얘기다 "아까 어린 엘프들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 어린 엘프들이......" "빙빙 돌리지 말고 요점만 말씀해주시겠어요?' "......"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아줌마 충격 받을까봐 이러는 거잖아! "사실 이게 굉장히 충격적인 얘기거든요." "그래서요?" "가뜩이나 몸도 안 좋으신데 듣고 나면 충격을 받이실까 봐요." "전 괜찮아요." "진짜요?" "예" "정말요?" "예" "진짜 정말......" "루시아한테 이르길 바라시나요?" "......아니요." 그래 말하자 일루니아 여사님도 임신 사실을 알면 기뻐 자비를 베풀지도 몰라(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런데 이 얘길 왜 내가 해야 하는 거지? 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나타나 나 대신 말해주 길 바랐다. 하지만 루시아와 인디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일 테고 지니야 뭐...... 지니 같은 인간을 친동생이라고 데리고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위대해 보일 따름이다. 이복 동생도 아니고 친 동생이면 와서 얼굴이라도 내밀어야 하는 거 아 냐? 여의사와 노닥거릴 시간은 있고 친 누나 문병 올 시간은 없다는거냐? 아무래도 내가 직접 말해야 할 운명인 것 같다. 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지금부터 말하는 건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니 믿기 힘들더라도 조금의 의심없이 믿으셔야 합니다." "쓸데없는 설명은 됐으니 빨리 말하세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몸에 관련된 겁니다." 내가 말하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아닐 거라 생각했었는데." "......" 헉! 설마 알고 계셨단 말인가? "아, 알고 계셨어요?" "그냥 그럴 거라 짐작이 들었어요." "그, 그랬군요" "예. 아이언스 공작님이 전부터 제 몸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었으니까요." "......예?" "뭘 놀라는 척 하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를 덮치셨다는 얘기를 하 려고 했던 것 아닌가요?" "......" 뭐라? 덮쳐? 난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뭔소리야! 내가 아줌마를 왜 덮쳐!" "그 동안 아이언스 공작님의 행동으로 볼 때 그럴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잖아! 여기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어야 할 거 아니야? 몇 달동 안 생리를 안 했다며? 속이 메슥거려 구토도하고 머리도 어지럽고 갑자 기 몸에 힘에 빠져 쓰러지기도 하고 이유없이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도 모르겠어요?" 일루니아 여사님의 얼굴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서, 설마......" "맞아요. 바로 그 설마에요." "그렇다면 제가 암에 걸렸단 말인가요?" "......예?" 여기서 암이 또 왜나와? "암이 아니면 다른 큰 병인가요? "아, 아니......"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전이미 모든 것을 각오했으니까요." 일루니아 여사님의 얼굴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몸은 가늘게 떨 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병은 아니구요......" "더이상 숨기실 필요 없어요. 의사가 충격 받을 까봐 말하지 말라고 했 나요? 전 괜찮으니까 어서 말씀하세요 제 목숨은 얼마나 남은 거죠?" "...... 무지 많이 남았거든요 원래 악녀는 오래 사는 법이라고 하잖아 요." "지금 장난 칠 기분 아니에요."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거 아닙니다." 일루니아 여사님도 이때쯤 암이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일루니아 여사님은 손자 볼 때까진 충분히 살 것 같다. 결국 그때까지 시달림 받을 나만 불쌍하다고나 할까? "사실은요......" "......?" 일루니아 여사님은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난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임신 하셨거든요." 일루니아 여사님의 푸른색 눈동자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에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임신을 하셨다구요. 즉, 현재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뱃속에 아기가......" "아!" 일루니아 여사님은 외마이 탄성과 함께 풀썩 쓰러졌다. 기절 하신 것이다. "자, 잠깐만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일루니아 여사님! 아줌 마!" 난 기절하신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며 중얼거렸다. "쌍둥이라는 얘기는 아직 하지도 못 했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눈 을 뜨자마자 날 보았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정말이에요?" "예?" "정말이냐구요?" "무, 물론이죠. 제가 거짓말 해서 뭐 하겠어요?" "그, 그럼 정말로......" 난 일루니아 여사님이 또 기절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럽 게 말했다. "예. 정말로 임신하셨어요." "......" 일루니아 여사님은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문득 지금 일루니아 여사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게 된 것은 어떤 기분일까?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남자는 결코 알지 못할 감정. 일루니아 여사님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임신을......인디님의 아이를......" "괘, 괜찮으세요?" "흑......" "헉! 서, 설마 우시는 거예요?" "흑흑......"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나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눈물이라니! 일루니아 여사님이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이제까지 일루니아 여사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오죽하면 내가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물샘이 고장 난 줄 알았겠 는가? 악녀에게도 눈물은 있다는 건가? "......" 아차! 이게 아니지. "흑흑~." "기뻐서 우시는 거예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웃음을 지 었다. 역시 기뻐하시는구나. "진정하세요. 몸도 안 좋으신데 마음을 편히 가지셔야죠." 눈물을 흘리던 일루니아 여사님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나 를 보았다. "그럼 하혈은......?" "아! 그거 생리 아니에요. 임신 초기에 너무 무리를 하셔서......" "내 아기는? 내 아기는 어떻게 됐어?" 일루니아 여사님은 눈을 부릅뜨며 내 멱살을 붙잡았다. 방금 전 까지 아까 누워있던 사람의 힘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센 힘이 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멱살을 잡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기는 어떻게 됐어? 설마 이상이 생긴 건 아니곘지? 빨리 말 해!" "켁켁!" 이걸 놔야 말하지! 이렇게 흥분하시는 모습은 처음 본다. 오늘 일루니아 여사님의 여러 모습을 보게 되는군. "켁켁! 조금의 이상도 없대요. 컥! 이것 좀 놔줘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 멱살을 놔주었따. 난 잠시 숨을 골랐다. "정말이에요?" "예. 정말이에요." 난 확신을 주기 위해 굳은 의지가 담긴 얼굴 표정을 지어보았다.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의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 속고만 사셨나? "여기는 산부인과고, 이상 없다는 말은 제가 지어낸 게 아니라 샤 이 사일런스 백작님을 검진한 의사가 말한 거예요. 아기는 자궁 속 에서 자리를 잘 잡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대요. 다시 말하지만, 이건 산부인과 의사가 한 말입니다." 그제야 일루니아 여사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기운이 다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입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손으로 자신의 배를 만져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이제까지 본 일루니아 여사님의 모습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 같다. "이 속에 저와 인디님의 아기가 자라고 있단 말이지요?" "예. 뭐, 그렇죠."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씩이나. 행복해 하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표정을 보니 왠지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의 행복은 내 불행이어야 하는데. 뭐, 오늘은 상관없으려나? "축하드립니다." 난 예의상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설마 빈정거리지는 않겠지? 일루니아 여사님은 날 보았다. 그리고는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았다. "고마워요." "......" 헉!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다니! 그것도 소녀와도 같은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아아~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예. 정말로 임신하셨어요. 아! 3개월째래요. 그러니까 앞으로 7 개월 정도만 있으면 애가 나온다는 거죠." 일루니아 여사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3개월이요?" "예. 세 달." 난 손가락 세 개를 펴보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잠시 멍하니 나 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왜, 왜 그러세요?" "나, 난 그것도 모르고 술도 마시고 커피도 마셨는데. 그, 그리고 감기약도......" 일루니아 여사님은 커피를 꽤 많이 마시는 편이다. 밤새서 업무 를 처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시겠지.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행동을 너무 많이 하셨으니. "안심하세요. 아기는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자라고 있대요. 의사 가 한 말이니 믿어도 좋을 거예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또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까지 따라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언제나 냉정한 모습을 잃지 않던 일루니아 여사님이 오늘은 감정에 치우친 모습을 많이 보이신다.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기쁜가? "흑흑......내 아기......나와 인디님의 아기......" 또 다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것은 기쁨과 환희의 눈 물이었다. "울지 마세요. 이 좋은 날 왜 울고 그러세요? 그러니까...... 흑......괜히 저도 슬퍼지잖아요." 일루니아 여사님의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난 재빨리 일루니아 여사님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몸에 힘이 없는 상태에 서 너무 무리하신 것 같다. "흑흑......"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계속 눈물을 흘렸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이런 모습을 보이실 줄이야! 아아~ 당혹스럽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일단 달래주는 게 좋겠지? 안 그래도 피곤하신데 이대로 울면 지쳐 쓰러지실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군. 난 봉인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궁극의 스킬인 토닥토닥 스킬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궁극의 스킬이라고 하니, 어째서 봉인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드는 걸까?). 내 손이 일루니아 여사님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토닥토닥~. 아아~ 어린 엘프들 전용 스킬인 '토닥토닥 스킬' 을 일루니아 여사님께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와 함께 빨라 졌던 심장 박동도 서서히 안정되었다. 애, 어른, 인간, 엘프 할 것 없이 울음을 뚝 그치게 만드는 토닥토 닥 스킬의 위력. 이 스킬은 오로지 나만이 가지고 있는 나만의 전매 특허라 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일루니아 여사님의 등을 토닥거리는데 갑자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벌컥! 앞에 '벌컥 열렸다' 라고 묘사가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하 게 효과음까지 넣어주다니! 이는 설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예고하는 하나 의 장치? 난 고개를 돌렸다. 병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사일런스 지 니......가 아니라 루시아와 인디, 그리고 어린 엘프들. 지니는 여전 히 코빼기도 안 보인다. 자기 누나가 임신했다는 데도 들어와 축하의 인사를 건네기는커 녕 그림자도 안 비치는 지니. 이젠 둘이 친남매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뭐, 지니 따위야 없어도 상관없다. 난 루시아만 있으면 돼~. "아! 여긴 어쩐 일이야, 루시아?" 어쩐 일이긴. 내가 불렀으니 왔겠지.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루시아와 인디는 물론 어린 엘프들까지 얼어붙어 있다. 루시아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응? 뭘 하다니? 내가 하긴 뭘......허억!" 지금 나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안고 토닥거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일루니아 여사님은 내 품에 안겨있는 상황. 그리고 일루니아 여사 님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해석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그리고 루시아의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이, 이젠 결혼한 언니한테까지 손을 대!" ......바로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된다. "아, 아니야, 루시아. 난 결백해." 난 평소처럼 무조건 결백을 주장했다. 그리고 루시아는 평소처 럼 무조건 내 말을 안 믿었다. "이 저질!" 그리고 내 말을 안 믿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디 는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히로님?" "내, 내가 뭘?" "일루니아님은 제 아내란 말이에요! 저와 이미 결혼하셨단 말이 에요! 그런데 어떻게 손을 대실 수 있어요?" "아, 아니라니까. 내가 유부녀한테 손을 댈 그런 사람으로 보여?" "흑흑, 예." "......" 난 이런 단호한 대답을 들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온다. 적어도 한번은 생각하고 대답하란 말이야! 눈물을 흘리던 인디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흑흑, 어떻게 일루니아님께 이러실 수 있어요? 제가 비록 힘은 없지만, 일루니아님만은 반드시 지키겠어요! 전 히로님을 용서할 수 없어요!" "......" 힘이 없긴 개뿔이. 드래곤이 힘이 없으면 인간들은 전부 목매달 고 죽어야겠다. 이번에는 어린 엘프들이 앞으로 나섰다. "너무해요, 오빠! 어떻게 오빠를 좋아하는 라이를 놔두고 일루니 아 이모한테 토닥토닥 해줄 수 있어요?" "맞아요! 토닥토닥은 우리들한테만 해주는 거잖아요!" "토닥토닥 스킬은 어린 엘프들 전용이라고 했잖아요!" "헉! 그, 그건......" "우엥~ 우엥~ 일루니아 이모한테만 토닥토닥 해주고......" "으앙~ 으앙~ 오빠는 루비보다 일루니아 언니를 더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엉엉~ 나한테는 토닥토닥도 몇 번 안 해줘놓구선......" 아이들이 울 준비를 하자 난 깜짝 놀라 다급하게 달랬다. "얘, 얘들아. 여기는 병실이란다. 이런 데서 우는 건 나쁜 엘프들 이나 하는 짓이야. 그러니 다들 뚝!" "우에에엥~." "으아아앙~." "엉엉~."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 엘프들. 인디는 제법 표독스러운 눈 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루니아 여사님 만은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래도 자기 여자는 자기가 지킨다는 건가? 아주 조금......그러니까 개미 눈곱만큼 남자다워 보인다. 사실 인디나 어린 엘프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 은 나를 경멸어린 눈빛으로 보고 있는 루시아. 얼굴이 붉어진데다 가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다. 이는 루시아가 굉장히 분노했다는 증거. "지, 진정해, 루시아. 잠깐만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줘. 물론 니가 보기에 내가 일루니아 여사님께 강제로 뭔가를 한 것처럼 보이곘 지만......" "그럼 언니가 왜 우는데?" "그, 그러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거 나도 인정해.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깊은 이유가......" "니 변명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그,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구." 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루시아에게 말했다. "자비를 베풀어줘, 루시아." "너한테 베풀 자비 같은 건 없어!" "그, 그럼 최대한 살살 때려줘. 엄마가 무지막지하게 아빠를 패 는 모습은 애들 정서교육에 안 좋대." 루시아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덮고 있는 이불을 집어 들어 나에게 덮어씌웠다. 시야가 가려진 가운데 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주먹질 과 발길질을 느껴야 했다. 퍼버버버벅! "끄아악! 살려줘~!" "지, 진짜야, 언니?" "저, 정말이에요, 일루니아님?" 루시아와 인디의 물음에 일루니아 여사님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 를 살짝 끄덕였다. 루시아와 인디의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 그리 고 그 놀라움은 이내 기쁨으로 바뀌었다. "축하해, 언니. 정말 잘됐다." 루시아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루시아의 손을 붙잡으며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그런데 인디가 이상하게 조용하다. 루시아와 껴안고 기쁨을 나 누던 일루니아 여사님은 인디를 보았다. "인디님?" 그 순간 인디는 풀썩 쓰러졌다. 기절한 것이다. "......" "......" "......" 으음, 충격이 좀 컸나 보군. "인디님!" "형부! 일어나요, 형부!" 루시아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대신해 쓰러진 인디를 깨웠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훌쩍거렸다. "흑~ 히로한테도 관심 좀 가져주지." 이번에도 실수로 코를 맞아 코피가 터졌다. 난 휴지로 코를 틀어 막고 계속 훌쩍거렸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라이와 루비가 동시에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라이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세요, 오빠." "루비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세요, 오빠." "......" 그러니까 대체 어디에 부비부비를 하라는 거니? 그래도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서 오빠를 달래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다. "흑흑~ 그래. 엄마 없어도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꾸나." 난 두팔을 벌려 라이와 루비를 껴안아싿. 그러는 사이 인디가 정신을 차렸다.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물었다. "저, 정말이에요? 정말로 임신하신 거예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예. 인디님. 저 임신했어요. 인디님과 저의 아기에요." 인디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얼마든지 말씀드릴게요. 저 임신했어요, 인디님." "이, 일루니아님......" 인디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인디는 뭐라 말을 하려 했 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저 입 모양과 함께 눈 물만 펑펑 쏟을 뿐이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런 인디를 다정하게 껴안았다. "무슨 말씀 하고 싶은지 다 알아요, 인디님. 저도 사랑해요." "흑흑......"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난 재빨리 루시아 옆으로 다가 갔다. "그러니까 이런 사정이 있었던 거야, 루시아. 저 아줌마가 막막 울어서 히로는 어쩔 수 없이 달래준 거야. 이제 히로 말 믿어줄 거 지?" 그러자 루시아는 날 보며 말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누가 들으면 니가 말할 기회를 줬는데, 내가 말 안 한 줄 알 겠다." 변명 같은 것은 듣기 싫다고 내 말을 일축한 사람이 누군데...... "훌쩍~ 언니랑 형부 잘됐다. 그동안 애가 생기지 않아 나도 걱 정이 많았었는데. 이젠 언니랑 형부는 더 행복해지겠지?" 역시나 루시아는 감수성이 풍부하다. 난 조심스럽게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루시아는 내 품에 안겨 훌쩍거렸다. 내가 일루니아 여사님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루시아. 나만 믿어. 어린 엘프들 역시 감동을 받았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엥~ 막막 감동이야." "으앙~ 루비도 막막 감동 받았어." "훌쩍~ 괜히 나도 슬퍼져." "......" 니들 뭔지나 알고 훌쩍거리는 거니? 인디가 울음을 그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인디는 엉망이 된 얼굴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 얼굴 엉망이죠?" 일루니아 여사님은 손으로 인디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니에요, 인디님.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워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인 걸요." "......" 아아~ 느끼하다. 느끼함이 온몸을 휘감는다. 하지만 느끼해 하는 나와는 반대로 루시아는 감동 받은 듯했다. "훌쩍~ 너무 감동적이야." "......" 뭐라? 감동적?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난 루시아의 눈가에 맺혀있는 이슬을 닦아주며 말했다. "니 얼굴 엉망 아니야, 루시아.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워. 왜냐 하면 히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인 걸." 말을 하던 나는 뒤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 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라이와 루비. 라이와 루비는 동그란 눈을 최 대한 크게 뜬 채 날 노려보고 있었다. 저것들이 왜 저러는지 알 것 같다. "무, 물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엘프는 우리 라이와 루비지. 덤으로 루도 제일 사랑하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루시 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엘프는 우리 라이, 루, 루비~." 그제야 라이와 루비는 시선을 풀었다. 아아~ 저것들 때문에 연애 사업도 제대로 못하겠다. 조그만 것들이 질투심은 강해가지고. 뭐, 이게 다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이 오빠가 다 이해해줘야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어느새 키스까 지 하고 있었다. 그것도 혀와 혀가 엉키는 딥키스를...... "니들 고개 돌려!" 내가 소리치자 어린 엘프들은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부부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은 좋은데 적어도 애들 앞에서는 좀 자제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만해요, 형부. 언니도 그만 좀 해. 애들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 도 않아?" 결국 보다 못한 루시아가 둘을 말렸다. 인디는 부끄러운 듯 얼굴 을 붉혔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은 오히려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 었다. "부부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알았어. 그보다 히로가 언니를 병원에 데리고 온 거야?" "아! 그게 말이야......" 일루니아 여사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난 뼛 속까지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은 어떻게 된 거냐면......" "헉! 안 돼!" 내가 소리치자 루시아는 이상하다는 눈길로 날 보았다. "왜 그래?"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닌데......" "아무 것도 아닌데?" "그, 그냥 아무 것도 아니라고. 굳이 들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라 고나 할까?" 내가 횡설수설하자 루시아의 눈빛이 의심 섞인 눈빛으로 변했 다. 루시아는 일루니아 여사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히로 신경 쓰지 말고 말해봐, 언니." "응. 알았어." 일루니아 여사님은 즐거운 듯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일어났을 때부터 얘기해 줄게. 잠에서 깨어나 거실로 나왔 는데......" "......" 안 돼! 제발 말하지 마! 난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일루니아 여사 님은 그것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침소봉대(針小棒大)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기라 도 하듯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엄청 뻥튀기 시키셨다. "내가 비틀거리자 저 뺀질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부축하는 척하며 내 가슴을 손으로......" "가슴을? 정말이야?" "흑~ 정말이야, 루시아. 저 뺀질이가 부축하는 척하며 내 가슴 을 떡 주무르듯 주물럭거렸어. 얼마나 세게 주물렀는지 아직도 가 슴이 아플 정도야." 일루니아 여사님은 억지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성폭력 피해 여성으로 보일 것이다. 루시아와 인디는 나를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난 재 빨리 손을 내저었다. "이, 이건 모함이야! 별 다른 증거도 없잖아!" 그러자 일루니아 여사님이 말했다. "원래 성폭력의 특성상 증거가 남지 않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그 것을 알기에 성폭력 가해자는 거리낌 없이 성폭력을 저지르지요. 특히나 가정 내 성폭력은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장기 간에 걸쳐 빈번하게......" "뭔 성폭력!" "그럼 한 가지 묻겠어요. 제 가슴을 만진 적이 있나요, 없나요?" "그,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로......" "성폭력 가해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이로군요. 엉덩이와 가슴을 만지고도 실수라고 말하고, 옷을 벗기고도 여자가 먼저 원해서 그 런 거라고 말하지요." 일루니아 여사님의 대사가 너무 논리정연하다. 안 돼. 여기서 밀리면 꼼짝 없이 성폭력 가해자로 몰리게 돼. "흑흑~ 죄송해요, 일루니아님. 제가 일루니아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어요." 인디는 울며 일루니아 여사님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루시아는 경멸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 정말......" 어느 새 올라간 루시아의 손. 난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만, 루시아. 애들이 보고 있어." "상관없어!" "......" 상관없다니! 가정 폭력에 상습적으로 노출된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해하 는 것은 이미 수차례 입증된 바 있다. "폭력적인 장면을 임부가 보게 되면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 칠 수도 있대. 폭력적인 장면을 보게 되면 아드레날린이 증가하여 교감 신경을 흥분시키고, 혈당량의 증가와 함께 심장 기능 강화에 의해 혈압이 상승되어 태아에게 심히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 이 매우 높아. 미국의 하버드대 연구팀이 며칠 전 발표한 '폭력이 임부와 태아에게 끼치는 악영향' 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아무튼 무 지무지 안 좋은 영향을 끼친대." 하버드대 연구팀이 그런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 난 잘 모른다. 어쨌든 폭력적 장면이 임부와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누구나가 다 아는 기본 상식이라고나 할까? 루시아는 높이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너 이따 집에 가서 봐." "으응." 어쨌든 당장 안 맞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얘기를 계속했다. "......강제로 나를 껴안은 다음 내가 뿌리치려고 하자 '좋으면서 뭘 그래?' 라고 말하며......" "아줌마가 내 쪽으로 쓰러졌잖아!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너무해요, 히로님! 어떻게 저와 결혼하신 일루니아 여사님께 그 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실 수 있어요?" "조용히 좀 해! 지금 얘기 듣고 있는 중이잖아!" "......어, 어째서 다들 내 말은 믿어주지 않는 거야? 어째서 저 아 줌마 말만......흑흑~ 이건 모함인데......난 결백한데......흑흑~ 다들 너무해!" "앗! 울지 마세요, 오빠." "오빠 곁에는 루비가 있잖아요." "왜 울고 그래요, 형?" 그래도 나를 믿어주는 건 어린 엘프들뿐. "흑흑~ 그래. 엄마 없이도 우리끼리 꿋꿋하게 살아가자." 난 구석에서 아이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일 루니아 여사님의 얘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그 절정은 바로 화장실 의 문을 열고 들어가 일루니아 여사님의 알몸을 본 것. 일루니아 여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난 샤워 도중 쓰러진 유부녀에 게 차마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짓을 수차례에 걸쳐서 한 그야말로 짐승만도 못한 존재였다. 오죽하면 내가 내 얘기를 듣고 분노했겠는가? 얘기를 끝마친 일루니아 여사님은 인디의 품에 안기며 울었다. 입으로만. "흑흑~ 죄송해요, 인디님. 너무 수치스러워서 목숨을 끊으려고 했 으나, 뱃속에 아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답니다. 저 하나 죽는 것 은 두렵지 않지만, 뱃속의 아기까지 잘못되면 안 되잖아요." "......" 눈물은 한 방울도 안 나오는데, 입으로는 정말 서럽게 흐느끼고 있다. 간단히 말해 지금 저거 쇼하는 거다. "아니에요, 일루니아님. 나쁜 건 히로님이지 일루니아님이 아니 에요." "정말 괜찮아요, 인디님." "......" 뭐? 내가 나빠? 인디 이 자식도 이젠 완전히 일루니아 여사님 편에 섰다. 다시 말 해 나와 완전히 등을 돌렸다. 둘이 잘 되게 다리를 놔준 게 누군뎨! 게다가 나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생명의 은인이다. 자칫 잘못하면 태아는 물론이고, 일루니아 여사님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던 상황. 하지만 나의 빠른 조치 덕분에 둘......아니, 셋 모 두 무사할 수 있었다. 루시아는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언니 이야기의 결론은 히로가 언니의 가슴을 만지시 고, 껴안고, 그것도 모자라 알몸으로 쓰러진 언니의 몸에 손까지 댔 다는 거네." "......" 어째서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전부 저런 결론을 내리는 걸 까? 이건 정말 미스터리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역시 입으로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흑, 응. 그게 바로 이 이야기의 요점이야."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날 경멸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난 재 빨리 손발을 휘저으며 변명했다. "아, 아니야, 루시아. 이야기의 요점은 그게 아니라, 쓰러진 일루 니아 여사님을 내가 신속하고 재빠르게 병원으로 옮겼다는 게 요 점이야. 그런데 칭찬은 못해줄망정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루시아는 한 걸음 나에게 다가왔다. 평소라면 기뻐하며 루시아 와 거리를 좁혔겠지만, 루시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난 나 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루시아는 또 한 걸음 다 가왔고, 난 또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게 몇 걸음 이동하다 보니 뒤는 어느새 벽. 루시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눈을 차갑게 빛내며 나를 노려 보았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마치 얼음장 같았다. 루시아 주위에 는 냉기가 폴폴 날리고 있었다. 이 병원은 난방도 안 하나? 임부가 누워있는 병실이 이렇게 추워도 되는 거야? 난 심장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움에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 었다. 이 정도 냉기면 화이트 드래곤 카르도 한 수 접어줄 정도다. 아이 들은 추운지 일루니아 여사님 옆에 다닥다닥 붙어 열심이 손을 비 볐다. 루시아는 냉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으응." "언니 몸 정확히 어디까지 봤어?" "그, 그건......아, 아주 조금밖에 안 봤어." "정확히 어디까지?" "그, 그러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밖에......" 루시아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그것은 용암의 뜨거움을 속 에 품고 있는 차가움이었다. 치켜 올라간 눈 꼬리와 붉게 달아오르 는 얼굴색. 루시아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언니 몸은 얼마나 만졌는데?" "어, 얼마 안 만졌어." "정확하게 말해." "그, 그러니까 수건으로 물기 닦아줄 때만. 그, 그러고 나서 바로 가운 입히고 여기로 데려왔어. 정말이야. 나, 나 믿지?" "......" "아, 안 믿어?" "내가 널 어떻게 믿어?" "......" 루시아는 전혀 날 안 믿는 눈치였다. "너 전에 나한테 한 행동 기억 안 나?" "무, 무슨......헉!" 설마 그 일을 말하는 건가? 짐승으로 폴리모프 해 루시아를 덮칠 뻔한 일. 그리고 '억울해서 팬티라도 한번 봐야겠어' 라고 말하여 루시아의 치마를 억지로 들 춘 일. "그, 그땐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럼 언니 몸 보고 만질 때도 제정신이 아니었겠네?" "아, 아니야. 난 결코 아무 여자나 보고 웨어울프로 폴리모프 하 지 않아. 오직 니 앞에서만 하는 거야." "언니 몸 보고 만지면서 무슨 생각했어?" "무, 무슨 생각이라니. 내, 내가 유부녀 몸 보고 이상한 생각했을 리 없잖아." "언니 가슴 크지?" "응. 체형에 비해 약간 크......" 헉! 단순 엘프들도 안 걸릴 법한 유도 심문에 걸려들었다! 간만에 찾아온 아이언스 히로의 위기 상황.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잔머리에 달렸다. "루, 루시아......헉!" 얼음장같이 차갑던 루시아의 눈동자는 어느새 활활 타오르고 있 었다. 냉기가 폴폴 날리던 아까와는 달리 이젠 열기가 휘날린다. 이 병원은 냉방도 안 하나? 임부가 누워있는 병실이 이렇게 더워도 되는 거야? "대체 언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바보야!" "아,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저, 정말이야." "언니 알몸을 왜 봤어? 왜 본 거야?" "그, 그러니까 그런 의료 행위의 일종으로 불가항력......" 루시아는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몰라. 그런 거 듣고 싶지 않아. 너 언니 몸 보고 만지면서 흥분헀 지? 그렇지?" "흐, 흥분이라니! 그럴 리가! 내가 저 아줌마 몸을 보며 왜 흥분 해? 그리고 그때는 상황이 워낙 다급해서 그럴 겨를도 없었어. 피 흘리며 쓰러진 환자를 보고 흥분하는 의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넌 의사가 아니잖아." "......" 그건 그렇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의사 면허라도 하나 따놓을 걸 그랬나? 퍽! 퍽! 퍽! "이 저질! 변태! 치한! 색마! 짐승!" 루시아는 소리치며 두 손으로 내 가슴을 마구 때렸다. 난 루시아 의 손을 붙잡았다. "지, 진정해, 루시아." 생각해보니 좀 화가 난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쓰러진 사람 도와준 게 죄야? 그럼 혼절한 일루니아 여사님을 그대로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거 야? 알몸을 본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일루니아 여사님 몸에 손 을 댄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해 행동에 옮겼 을 뿐이다. 만약 내 행동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 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하는 거지? "그만 좀......" 난 화를 내려다 멈칫했다. 굳어버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루시아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아의 큰 눈망울에 잔뜩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루시아는 날 보며 울먹거렸다. "흑흑......" "루시아......" 왜 우는 거지? 루시아가 어째서 우는 거지? 당황하던 나는 루시아의 어깨와 허리에 손을 둘렀다. 루시아는 별 다른 저항 없이 내 품에 안겨왔다. "흑흑, 왜 언니 알몸을 봤어? 왜 봤어, 이 나쁜 놈아?"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 난 루시아를 껴안은 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루시아 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흑흑~." 난 말 없이 루시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토닥토닥~. 무슨 이유에서 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울지 마, 루시아. 니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울지 마. 내 손이 루시아의 가녀린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루시아의 울 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난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 었다. 그리고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쪽~. 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물었다. "괜찮아?" 루시아는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 나에게만 들릴 듯 작게 속삭 였다. "고마워." "응?" 루시아가 지금 나한테 고맙다고 한 건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언니랑 언니 아기를 구해줘서 고마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루시아......"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루시아. 악녀인 누구와는 정말 다르게 마 음씨가 비단결 같이 곱고 아름답다. 역시 루시아는 천사? 금방이라도 머리 위에 금색 링이 떠오르고 등에 날개가 돋아날 것만 같다. 루시아는야 나만의 천사~. 그런데 아까는 왜 화를 낸 거지? "......" 모르겠다. 여자 마음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니까. 특히 루시아의 마음은 말 이야. 난 루시아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다른 손으로 루시아의 등을 어 루만졌다. 부드럽고 따뜻하다. "......" 잠깐. 이건 혹시 기회가 아닐까? 울며 내 품에 안겨온 루시아. 그녀의 두 손은 내 허리를 안고 있 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 난 등을 어루만지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 를...... "죽는다." ......만지려다 그만두었다. "하하......" 아아~ 이 어색한 웃음소리. 루시아는 내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여간 틈만 나면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다니까." "틈만 나면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다니!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 을......" 난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히로는 틈 안 나도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해~." 그러자 루시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큰 자랑 아니거든." "......" 흠흠, 그냥 웃자고 해본 건데. 어쨌든 분위기가 좀 화기애애해진 것 같았기에 난 슬쩍 루시아 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루시아는 내 손을 철썩 때리며 말 했다. "언니와 언니 아기를 구해줘서 고맙긴 한데, 그래도 언니 알몸 보 고 만진 건 용서가 안 돼." "헉!" "어떻게 날 사랑한다면서 다른 여자한테 그럴 수가 있어?" "그, 그건......" 이미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 하지만 루시아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해.' ......라고 말하는 듯한 루시아의 눈동자. 아아~ 그녀의 질투심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질투의 여신 헤라와 견주어도 부족하기 않을 듯하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말하려 했어?" "응?" "아까 '그만 좀' 이라고 말하다가 말았잔항. 설마 화내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 그런 것까지 기억하다니! "그, 그럴 리가!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겠어?" "정말이야?" "무, 물론이지." 루시아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가 내 전신을 훑는다. 그 눈초리에 난 바짝 긴장해야했다. "하, 하, 하......"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믿어줄게." "하아~." 루시아는 고개를 돌렸고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상체만 일으킨 채 인디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와 눈 이 마주치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중얼거렸다. "쳇! 완전히 보낼 수 있었는데." "......" 뭘 보내? 어디로 보내? 병상에 누우셔서까지 나를 쫓아낼 음모를 획책하시는 일루니아 여사님. "이봐, 아줌마! 생명의 은인한테 이래도 되느 거예요?" 내가 묻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태연한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 마치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과 태도. 웬만한 번데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뻔뻔하시다. "나 아니었으면 둘 다......아니, 셋 다 큰일 났어. 그런데 고마워 하지는 못할망정......" "잠깐만요, 셋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아, 아니, 그게......"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그리고 루시아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향 했다. 난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사실을 밝힐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듣고 놀라지 마세요. 사실 뱃속에 애가 혼자 들어있는 것이 아 니라 쌍으로 들어있대요. 하나가 아니라 둘." 난 손으로 브이를 그려보았다. "즉, 쌍둥이를 임신하셨다고나 할까요?" 여섯 개의 눈동자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싸, 쌍둥이? 그게 정말이야, 히로?" "응. 의사가 말해준 거고, 아까 초음파 사진까지 봤으니 확실해." "그, 그럼 정말로 언니가......" 루시아는 크게 기뻐하며 일루니아 여사님의 손을 붙잡았다. "축하해, 언니. 쌍둥이래." "으응." 일루니아 여사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표정은 인디도 마찬가지였다. "싸, 쌍둥이래요, 일루니아님. 쌍둥이......" "예. 저도 들었어요, 인디님." 일루니아 여사님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인디는 또 다시 눈 물을 흘려댔다. "일루니아님!" "인디님!" 두 손을 꼭 잡고 기뻐하는 부부.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임신 소식에 쌍둥이라는 소식까지 덧붙 여졌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 하겠는가? 애가 둘이니 기쁨도 두 배려나? 루시아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 중요한 얘기를 왜 지금에서야 하는 거야?" "미, 미안. 진작 하려고 했는데, 임신 소식을 들은 일루니아 여사 님이 기절하시는 바람에......" 루시아는 내 변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 디와 기쁨을 나누었다. "이 속에 아기가 둘이나 들어있단 말이야? 왠지 거짓말인 것 같 은데." "나도 믿기지 않아. 내 뱃속에 아기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들 어있다니." "그래도 믿으셔야 해요." "호호! 물론이예요, 인디님." 루시아와 인디는 조심스럽게 일루니아 여사님의 배를 만져보았 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엘프들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일루니아 이모 임신한 거예요?" "임신이 뭐예요?" "뱃속에 아기가 있는 거예요?" 궁금하다는 눈길로 나를 보는 어린 엘프들. 난 라이, 루,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임신은 아기를 갖는 것을 뜻하는 거야. 지금 일루니아 여사님 뱃속에는 아기가 들어가 있단다.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의 아기 가. 그러니까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중에 아기를 낳게 되면 인디가 아빠가 되고, 일루니아 여사님이 엄마가 되는 거야." "와아! 그럼 라이 동생 생기는 거예요?" "......뭐?" 라이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느낌이 들었다. 라이 동생이라니! 일루니아 여사님이 아기를 낳든 루시아가 아기를 낳든 어쨌든 걔 들은 전부 라이 동생이다. "그, 그런......" 라이 동생을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먼저 만들어주게 되다니! "서, 선수를 빼앗겼다." 허탈감과 함께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난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 잠깐. 생각해보니 나와 루시아의 아기가 태어나면 일루니아 여사님 아 기를 '언니, 오빠' 또는 '누나, 형' 등으로 불러야 한다. 일루니아 여사님 아기는 분명 나와 루시아의 아기를 마구마구 괴 롭히겠지? 아아~ 불쌍한 내 딸(어느새 딸로 결정). 일루니아 여사님 아이에게 구박 받으며 살아야 하다니. 나 당하는 것은 상관없지만(사실은 무지하게 상관있지만), 내 딸만 큼은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다. 지금부터 노력해도 3개월은 늦은 셈이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적어도 같은 해에 출산을 하는 것은 사 능하겠지? 그래.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적어도 동갑내기로 만들어주는 거야! 난 굳게 다짐하고 벌떡 일어섰다. "동생 생긴대, 얘들아." "응응. 루비 동생 막막 좋아." "난 예쁜 여동생이면 좋겠어." "라이는 동생 생기면 막막 잘해줄 거야." "루비는 막막 뽀뽀해줘야지." "난 머리 쓰다듬어줄 거야." 동생이 생긴다는 말에 벌써부터 기뻐하는 어린 엘프들. 후후~ 기다려라. 일루니아 여사님이 만든 동생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예쁜 메이드 인 히로&루시아 동생을 만들어줄 테니. 오빠 열심히 할게, 얘들아. "그런데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루비도 전부터 그게 궁금했어." "형한테 물어봐도 안 가르쳐주고......"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는 어린 엘프들. 여섯 개의 눈동자가 호 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니, 니들 갑자기 왜 그러니?" 난 그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싿.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아니기를. 하지만 어린 엘프들은 나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하고 어깨동무 포 메이션을 취하며 합창을 했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오~?" "헉!" 2부 5권 서브스토리7에서 했었던 고난이도의 질문을 또 다시 하 다니! "그, 글쎄. 어떻게 생기는 건지 이 오빠도 궁금하구나. 저쪽에 가 서 물어보렴." 난 일루니아 여사님을 가리켰다. 그러자 어린 엘프들은 일루니 아 여사님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이모?" "루비는 궁금해요." "알고 싶어요." 아이들의 행동에 일루니아 여사님은 물론 인디와 루시아도 매우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 듣고 당황하지 않을 부모 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결국 난 모두를 대신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쾅! 쾅! 쾅! "이런 발랑 까진 엘프들을 봤나! 니들이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건지 왜 궁금해 해? 그런 너희들이 몰라도 되는 거야! 당장 저리 가 서 손들고 있어!" 어린 엘프들은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볼을 땡땡하게 부풀렸다. 하지만 지들이 볼을 부풀리면 어쩔 건가? 오빠가 벌서라면 벌서야지. 한쪽 구석에서 두 손을 들고 벌을 서는 어린 엘프들. 아이들은 사 랑으로 가르쳐야 돼, 라는 사상을 지니고 있어 평소 때리거나 벌주 는 것을 싫어하는 루시아도 이번만은 별 말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의사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지니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니는 일루 니아 여사님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쌍둥이를 임신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 다, 누님." "......" 누가 들으면 방금 전해들은 줄 알겠다. 대체 뭐하다가 지금 왔니? 일루니아 여사님은 애초에 아무런 기대도 안 헀는지 선선히 고개 를 끄덕였다. "고마워." 지니는 이번에 인디를 향해 허리를 숙여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축하드립니다, 인디카즈네님." 인디는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지니님." 지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가 잠시 진맥을 잡아 봐도 되겠습니까, 누님?" 진맥? 진맥은 병을 진찰하기 위해 한의사들이 손목의 맥을 짚어보는 것 을 뜻한다. 한의사의 전문 분야인 만큼 한방의학을 이해해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지니가 어떻게 한방의학까지 아는 거지? "아니, 진맥을 잡을 줄 알아요?" "요즘 사귀는 여성분이 한의사인 관계로 어깨 너머로 배웠습니 다." "......" 말을 말자. "한번 해봐." 일루니아 여사님은 팔을 지니에게 내밀었다. 지니는 조심스레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진짜로 짚는 건가, 짚는 척 하는 건가? 잠시 후 지니는 눈을 뜨며 말했다. "쌍둥이를 임신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누님." "......" 누가 쌍둥이인 거 모르니? 일루니아 여사님은 애초에 기대를 안 했는지 별로 실망하는 모습 도 보이지 않았다. 지니는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얼마 후면 공주님 두 분이 태어나시겠군요." "......" 공주님 두 분? 그, 그 말은......? 나는 물론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루시아까지 전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지니를 붙잡고 물었다. "아니, 진맥으로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진맥으로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지니는 일루니아 여사님 손맥에서 손을 떼며 대답했다. "물론 진맥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예?" "하지만 이 병원 의사나 간호사와 친해지면 알 수 있지요." "......" 그럼 그렇지. 우리나라는 태아성감별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태아의 성감 별을 목적으로 임부를 진찰 또는 검사해서도 안 되고, 알게 된 태아 의 성별을 임부 본인 및 가족, 기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해서 는 안 된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의료인 면허까지 취소할 수도 있다. 미국이나 선진 유럽 국가들은 태아성감별에 대한 제재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유독 태아성감별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이유 는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남아선호사상' 때문이다. 요즘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으로 인해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 인 집착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자가 아들을 못 낳으면 남편이 바람을 펴도 할 말이 없고, 심지 어는 첩을 들이거나 씨받이를 들여도 할 말 없는 것이 전통사회에 서의 여자들의 삶이었다. 시댁의 압박과 딸은 시집가면 남의 집 식구라는 생각, 생활 형편 의 어려움 등이 합쳐져 여자아이면 무조건적으로 낙태를 했다. 딸은 낳아 길러봐야 남의 집 시집보내면 그걸로 끝이다, 출가 한 딸은 남남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자에게 결혼이라는 것 은 친정과의 유대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 해 부모 입장에서 딸을 기르는 것은 남의 집 자식 주어도 기르는 것 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낳아 기르면 훗날 봉양을 받을 수도 있고, 제삿밥도 얻어먹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자신의 비참한 삶을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 들의 속마음도 있었다. 딸을 낳아봐야 자신처럼 비참하게 살아갈 테니, 차라리 세상에 아노지 말고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더욱이 서구문며으이 도입으로 발달된 의료기구와 장비로 인해 태 아 성감별과 낙태는 쉽고 편해졌다. 이러한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낙태는 60년대 중부주도의 산아 제한 정책인 가족계획이 시작되면서부터 성행하여 70~80년대에 극에 다다랐다. 결국 성비불균형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사회문 제로까지 확산되자 정부는 1987년에 부랴부랴 태아성감별 금지법 을 만들어싿. 한동안 유명무실한 법으로 있던 태아성감별 금지법 은, 1990년대 후반에야 처벌 조항을 강화하였고, 덕분에 지금은 사 정이 좀 나아졌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연간 150~200만 건의 낙태시술이 향해 졌다. 한해 60만~80만 명에 신생아가 태어나니, 태아 4명 중 3명 정도가 낙태로 죽어간 셈이다. 낙태의 원인은 남아선호사상뿐만이 아니다. 서구문명의 도입으 로 젊은 세대의 성개방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반면, 사회 전반에 깔린 보수적 분위기 때문에 올바른 성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아직도 보수적인 사람들은 '피임법을 가르치는 것은 프리섹스를 장려하는 것이다' 라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으니 말 다했지 뭐. 법적으로 낙태시술은 임부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 하거나 태아에게 심각한 장애가 있을 때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 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한 해에 수십만 건의 낙태가 행해지고 있다.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은 세계 1위의 '낙태 왕국' 자리를 계속 지켜나가게 될 것이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낳아서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라는 구호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뭐, 말로만 외치지 말 고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가야겠지만. 아무튼 태아성감별이 금지인 관계로 의사와 간호사는 임부와 가 족들에게 태아의 성별에 대해 알려줄 수가 없다. 하지만 남자아이 인지 여자아이인지 모르면 출산 준비에 많은 차질이 생기기 마련 이다. 성별을 알아야 옷이나 장난감을 사줄 것 아닌가? 그래서 출산 시기가 가까워오면 은근슬쩍 암시를 주기도 한다. '아기가 참 예쁘네요.' '아기가 엄마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튼튼한 게 꼭 장군감이에요.' '아빠를 닮아 훤칠하네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지니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 정보를 알아내느라 지금까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 정말? 여의사와 간호사와 노닥거리느라 그런 게 아니구? 일루니아 여사님은 지니를 보며 말했다. "정말이야? 정말 딸이래?" "그렇습니다, 누님. 3개월이 넘으면 태아의 성별을 확인하는 것 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초음파 사진을 다각도로 분석해본 결과 여아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이르나, 제 생각에는 확실하다고 여겨집니다." 지니가 확실하다고 말했으면 그런 거다. 그럼 정말로 일루니아 여사님 뱃속에 있는 것이 쌍둥이 딸이란 말인가? 인디와 루시아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붙잡으며 기뻐했다. "축하해, 언니. 딸이래." "축하해요, 일루니아님. 저 일루니아님을 닮은 딸을 가지고 싶었 어요." "전 인디님 닮은 아들을 원했는데......"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일루니아 여사님도 그다지 싫은 표정은 아 니었다. 하지만 내 사정은 좀 달랐다. 일루니아 여사님 닮은 딸이라...... 으음...... "......" 뭐라? 일루니아 여사님을 닮은 딸? 그럼 일루니아 여사님을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헉쓰! 안 돼! 딸은 안 돼! 차라리 아들로 낳아!" 내가 머리를 붙잡으며 소리치자 병실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날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히로?" "어째서 딸은 안 된다는 거예요, 히로님?" "제가 뭘 낳든 아이언스 공작님이 무슨 상관이시죠?" "그, 그게......" 일루니아 여사님이 두 딸과 함께 일심동체 찢어죽일 것 같은 눈 빛 스킬을 쓸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렵다. 절대로 일루니아 여사님 닮은 딸이 나오면 안 되는데......인디 를 닮은 딸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부터라도 정화수 떠놓고 빌던히 해야겠다. 제발 앞으로 태어날 아기가 일루니아 여사님 성격을 닮지 않기 를. "흑흑~." "왜 우시는 거예요, 인디님?" "흑흑~ 너무 기뻐서요. 저와 일루니아님의 딸이라니. 지금도 믿 기지 않아요." "믿기지 않으셔도 믿어야 돼요, 우리 사랑의 결실인 걸요." "예. 흑흑~......" 너무 기쁜 나머지 또 다시 눈물을 쏟아내는 인디와 그런 인디를 달래주는 일루니아 여사님.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다.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는 내 옷을 잡 아당기며 말했다. "나가자." "응? 왜?" "부부끼리 얘기를 나눌 시간을 줘야지." "알았어." 난 어린 엘프들을 데리고 루시아와 지니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 품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짜식. 그렇게나 좋을까? 밖으로 나오니 역시나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집중된다. 임 부들은 특히 나와 루시아가 데리고 있는 어린 엘프들을 주목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깜찍한 라이, 루, 루비. 임부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귀엽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 눈빛 속에는 '나도 저런 아이를 낳고 싶어' 라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후후~ 이런 귀여운 아이는 아무나 낳는 것이 아니지. 모두가 우리 아이들을 부러워하니 부모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괜히 목에 힘이 들어간다. 루시아는 목과 허리를 꼿 꼿이 세우고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꼭 팔불출 엄마 같다. "이리와, 얘들아." 어린 엘프들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루시아. 그 모습에 임 부들은 더욱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최대한 가족처럼 보이기 위해 루시아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루 시아와 어린 엘프들과 바짝 붙어 서 있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일행 인지 모른다. 그냥 '지나가다 구경하는 사람1' 정도로 착각한다. "아! 저기 자리 났아." 마침 비어있는 세 자리. 나와 루시아와 한 엘프가 자리에 앉고, 우리 둘 무릎 위에 두 엘 프가 앉으면 된다. 루시아 무릎 위에는 루가 앉았고, 잠시 신경전이 오간 끝에 라이가 먼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그리고 루비는 내 옆 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루시아는 루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루의 등에 루시아의 가 슴이 닿아있는 것이 보였다. "......" 루는 좋겠다. 루시아의 무릎은 히로 전용이거늘. 루시아가 날 보며 말했다. "다행이다." "응? 뭐가?" "결혼한 지 꽤 됐는데도 아기가 안 생겨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데." "그, 그렇지." "그런데 이제 아기가 생겼으니 셋이......아니, 넷이 더욱 행복하 게 사는 것만 남았네." "그, 그러려나?" "언니와 형부가 얼마나 아기를 원했는데, 언니가 우리 애들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르지?" "그랬어?" "응. 되게 부러워했어. 그래서 더욱 아기를 갖고 싶어 했는지도 몰라." "둘이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그렇다. 둘은 정말 매우 열심히 노력했다. 만약 그 노력을 일일이 서술한다면 이 소설이 18금 되는 건 일도 아니다. "역시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건가?" 노력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하늘을 봐야 할 텐데. 아아~ 하늘 보고 싶다. "게다가 쌍둥이라니. 언니가 부러워." "헉! 부러워?" 난 재빨리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니가 원한다면 난 세 쌍둥이도 자신 있어." 루시아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됐거든." "......" 진짜 자신 있는데. 난 루시아를 설득했다. "생각해 봐, 루시아. 우리 아이가 일루니아 여사님 아이에게 지 고 살아서야 되겠어? 생일은 좀 늦더라고, 동갑은 되게 만들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래야 서로 야자 트고 지내지. 우리 아이가 한 살이 라도 적으면 일루니아 여사님 아이가 우리 아이를 막막 때리고 구 박할 거란 말이야. 일루니아 여사님 아이라면 분명 그럴 거야. 왜 냐하면 일루니아 여사님을 닮아 성질이 더러울 테니까. 당하고 사 는 건 나 하나만으로 족해. 내 아이에게까지 고통과 절망의 세월을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어.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최선을 다 해......"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데?" "그, 그건......" 그걸 말로 설명하면 이 글을 보는 미성년자 독자들이 큰 충격을 받을 텐데(라지만 요즘 애들 알 건 다 안다). "아! 말로 설명하기는 좀 힘드니 그냥 행동으로 보여주면 안 될 까? 아까 보니까 저쪽 병실 비어있던데." 루시아는 경멸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너 정말 자꾸 이럴래?"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란 말이야." 그렇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고, 절박한 사안이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쌍둥이 딸이 태어나면 셋이서 어깨동무하고 나를 갈굴 것이 분명하다. 그때를 대비해 나도 방어군(?)을 양성(?) 할 필요가 있다. 만약 나와 루시아가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 라이 동생을 대량 제 작(?)한다면, 샤이 사일런스 모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해낼 수 있을 것이다. "부탁이야, 루시아. 나 혼자서는 일심동체 찢어죽일 듯한 눈빛 스킬을 막아낼 자신이 없단 말이야. 저쪽이 둘이나 증원하는데, 이 쪽도 최소한 하나는 증원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튼 이건 생존권의 문제야. 결코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내 말을 들은 라이는 내 품에서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헤헤~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오빠 곁에는 라이가 있잖아요." 루비도 내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루비는 항상 오빠 편이에요. 알죠?" "......" 그래. 니들이 있어서 참 기쁘구나. 하지만 어린 엘프들은 전력으로 사용하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 다. 그것은 바로 식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것. 어린 엘프들 셋을 전장에 투입하려면 엄청난 식비와 인원, 그리 고 긴 보금선이 필요하다. 즉, 어린 엘프들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전력이다. 게다가 보급선이 끊기기라고 하면(예를 들어 치자를 배 달시켰는데, 일루니아 여사님이 현관문을 안 열어준다던가), 얘들은 바 로 적진에 투항할 게 뻔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 엘프들을 전력으로 사용하는 것은 무 리다. 역시 새로운 군대를 양성해야 돼. "루시아 너도 아이 좋아하잖아. 응? 참고로 난 딸이 좋은데." "잘 됐네. 그럼 언니가 딸 낳으면 니가 다 키워." "......헉!" 아무리 아이언스 히로의 천직이 보모라지만, 일루니아 여사님 아 기까지 키워줄 생각은 없다. "......" 아니지. 원래 애들 성격은 자라면서 결정되기 마련이다. 날 때부터 나쁜 애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은 교육과 환경이 결정하는 거다.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도 있지 않은가? 남방에 있던 귤나무를 북방에 옮겨 심으면 귤 대신 탱자가 열리 는 법(이라지만, 실제로 귤 대신 탱자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북방에 있던 탱자나무를 남방에 옮겨 심는다고 해서 귤이 열리진 않는 다). 즉, 일루니아 여사님이 기르면 탱자가 되고, 내가 기르면 귤이 된 다는 거다. 비록 일루니아 여사님의 딸이지만, 내가 사랑과 정성으 로 기르면 착하고 예쁜 아이로 성장할 것이다. 그럼 일루니아 여사님과 합세해 나를 갈구는 일도 없겠지? 어쩌면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를 갈굴 때 앞으로 나서서 '착한 히 로 오빠 괴롭히지 마세요, 엄마'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 생각해보면 징집(?)만이 최선은 아니야. 적을 아군으로 만들 필요가 있어. 그래서 적의 힘은 줄이고, 이쪽의 힘은 키우는 거야. 일루니아 여사님의 딸로 일루니아 여사님을 막는다. 이것이야말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극치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아~ 위대한 나의 잔머리여! "후후~ 바로 그거야." 난 해맑게 웃으며 루시아를 보았다. "걱정하지 마, 루시아. 내가 책임지고 일루니아 여사님의 두 딸 을 착하고 예쁜 애들로 키울게." 루시아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니가 그러니까 괜히 무서워진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니. 적을 아군으로 만드는 고도의 전략......이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와 이러는 거야. 난 결백해." "됐으니까 언니 딸을에게 접근하지 말아줄래?" "......헉!" 전략이 새어 나간 건가? 하직 작전 개시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차질이 빚어지다니. "아니야. 내가 일루니아 여사님 딸들을 세상에서 제일......은 아 니지만, 어린 엘프들 다음으로 귀엽고 깜찍한 아이들로 키울게. 나 자신 있어. 토닥토닥 스킬, 머리 쓰다듬기 스킬, 어부바 스킬 등이 있는데 뭐가 문제겠어?" 내 말이 끝나니가 무섭게 라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앗! 라이 어부바 해주세요, 오빠." "아니야, 라이보다 루비를 먼저 어부바해주세요." "라이가 먼저 말했어." "아니야. 루비가 훨씬 훨씬 먼저 말했어." "라이는 못 들었어." "라이만 못 들은 거야. 오빠는 들었어." 또 다시 시작된 라이와 루비의 신경전. 루시아가 두 엘프를 중재 해주었다. "오빠 무릎에는 라이가 먼저 앉았으니까, 어부바는 루비가 먼저 해. 그러면 됐지?" "예에." 라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루비는 헤헤 웃었다. 그런데 어째서 매번 내 의사는 배제되는 거지? 난 루시아를 어부바해주고 싶은데. 에휴~ 어쩌겠냐? 어린 엘프들이 어부바 해달라면 어부바 해줘야지. 난 루비 앞에 쪼그려 앉아 등을 내밀었다. "우리 루비 업히렴. 최대한 살살." "헤헤~." 내가 최대한 살살 업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루비는 폴짝 뛰어 내 등에 업렸다. 폴짝! 우드득! "......" 뭐야, 폴짝 다음에 들린 소리는? 어린 엘프들 때문에 히로 허리가 남아나질 않는다. 젊었을 때 이 렇게 무리하면 나이 들어 고생한다는데. 벌써부터 10년 후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헤헤~ 오빠가 루비 어부바해줬다." 루비는 라이와 루를 놀리기라도 하듯 말했다. 난 루비를 업은 채 대기실 안을 돌아다녔다. "루비는 오빠 등이 막막 좋아요." "그래? 오빠도 루비가 막막 좋단다." "헤헤~ 정말요?" "물론이지." 탑승시간(?) 5분이 끝나고 교대할 시간이 되었다. 루비는 아쉬워 하며 내 등에서 내렸고, 이번에는 라이가 폴짝 뛰어올라 내 등에 업 혔다. "저도 어부바 하고 싶어요, 누나." "그래? 그럼 루는 라이 내리고 나면 오빠 등에 업혀. 알았지?" "예." "......" 아미 놀이기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한 번에 한 사람밖에 이용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플 뿐이다. 시간이 지나자 루시아가 말했다. "5분 됐어, 라이야." "라이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요?" "루비도 5분만 했잖아. 그러니까 라이 그만 내려와." "우웅~." 라이는 루비와 마찬가지로 아쉬워하며 내 등에서 나렸고, 이번에 는 루가 업혔다. "헤헤~." "......" 웃지 마라. 정 든다.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라이 또 어부바하고 싶어요." "루비도요."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루 내려오고 나면, 루비부터 차례대로 오빠 등에 업 혀. 알았지?" "네에~!" "......헉!" 그걸 멋대로 정하면 어떡해, 루시아? 어우바 스킬은 아직 스킬 레벨이 부족해 세 번까지 한계란 말이야. 루를 업은 지 2분 정도 지났을 때쯤 지니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누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래요?" 부부끼리의 대화가 끝났나 보지? 난 루를 업은 채 지니를 따라 들어갔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는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난 구겨진 시트에 시선을 주목했다. 설마 그새 둘이 이상한 짓 한 건 아니겠지?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저와 제 아이들을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예?" 나도 놀랐고, 루시아도 놀랐다. "어, 언니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아, 아줌마 제정신이에요?" 일루니아 여사님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한테 고맙다는 말 을! 혹시 내가 미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잘못 들었다거나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거나......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예의상 해본 말인데 좋아하기는. 재수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와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일루니아 여사님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지. 인디는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남자 손이라고는 믿 기지 않을 만큼 가늘고 예쁜 손이다. 참고로 난 남자 손 잡는 취미 같은 건 없다. 인디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날 보았다. "고마워요, 히로님. 히로님이 아니었으면 일루니아님과 아기들 이 어떻게 됐을지......흑~ 그런데 전 그런 것도 모르고 히로님께 심한 말을......흑흑~ 제가 잘못했어요." 소녀를 벌해주시와요, 라고 말하는 듯한 인디의 눈빛. 괜히 가슴 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붉어진다. 예뻐도 너무 예쁘고, 참해도 너무 참하다. "조, 좀 떨어져줄래? 무지 부담스럽거든." "흑흑~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히로님의 은혜는 평생 안 잊을게 요." "그래. 영원토록 뼛속 깊이 간직해라. 당연히 그래야지." 어쨌든 살아생전 일루니아 여사님께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 야.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건가? 좀더 정밀한 검사도 해야 하고, 휴식도 취해야 했기에 일루니아 여사님은 오늘 하루 이곳 '정미정 산부인과' 에 입원하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병원은 정미나와 정윤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의사가 공동출자로 세운 것이다. 그래서 병원 이름이 '정미정 산부인 과' 다). 그리고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 간호를 위해 병원에 남기 로 했다. 루시아와 나는 어린 엘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지니는 여 의사와 볼 일이 있는지 병원에 남았다). * * * * 일루니아 여사님의 임신 소식을 전해들은 식구들의 반응은 제각 각이었다. 크로니스는 웃으며......, "잘 됐네요." ......라고 말했고, 영아는 놀라며......, "와아! 그럼 인디 오빠와 일루니아 언니의 아기가 태어나는 거 야? 인디 오빠랑 일루니아 언니 닮았으면 그 아기 진짜 예쁘겠다." ......라고 말했고, 라이레얼은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그 아줌마가 아기를? 난 불임인 줄 알았는데." ......라고 말했고, 카르는......, "검둥이한테 딸이 생긴단 말이야?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우 리도 애 낳아요, 언니. 전 언니 닮은 딸이 좋아요." ......라고 말했다. 참고로 여자끼리는 아이가 안 생긴다. 이건 매우 기초적인 상식 이다. 뭐, 라이레얼과 카르의 딸이면 매우 예쁠 것 같다. 둘 중 한 명의 미모만 물려받아도 천하의 절색일 텐데, 둘 모두의 미모를 물려받 는다면...... 으음, 월궁의항아가 따로 없겠군. 그나저라 라이 동생을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먼저 만들 줄이 야......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난 당연 나와 루시아가 먼저 만들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이제까지 줄기차게 라이 동생 등장을 요구하긴 했지만, 그 건 어디까지나 메이드 인 히로&루시아......즉, 정품(?)이자 진품(?) 이자 명품(?)에 한한 것이다. 결코 메이드인 인디&일루니아 여사 님이라는 짝퉁(?)을 원한 게 아니다. 짝퉁이 판을 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라이 동생이라도 정품(?)으 로 만들어 줘야 할 것 아닌가? 아아~ 이 세상이 어찌되려고 그러는지...... 이대로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커플에 질 수 없다. 하지만 저쪽 은 벌써 둘이나 제작에 나섰고, 이쪽은 아직 제작 준비 단계조차 진 행하지 못하고 있다. 역시 강제로 덮치는 방법밖엔 없단 말인가? 으음, 혹시 루시아도 내가 그러길 원하고 있지 않을까(이런 생각 은 백이면 백 착각이다)? 내가 침대에 누워 언제 어디서 덮칠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데 라이와 루비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파자마를 입은 두 엘프는손 에 커다란 베개를 들고 있었다. "응? 니들이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니?" 헉! 설마 오빠를 덮치려고? 이런 내 예상은 정확했다. 라이와 루비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라 나를 덮쳤다. "커억!" "헤헤~ 라이는 오늘 오빠랑 잘래요." "루비도요." "......" 다 좋은데 침대에 올라올 때는 살살 좀 올라오렴. 오빠 허리랑 침 대 스프링 다 나가겠다. "루는?" "루는 언니가 데리고 갔어요." "언니가 데리고 잔대요." "으음......" 불안하다. 수상하다. 요즘 들어 루의 얼굴와 오이디푸스의 얼굴이(라고 해봐야 오이디 푸스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다)겹쳐 보인다. 아이든 뭐든 간에 루시아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전부 수상하다. 그러고 보면 전에 루시아한테 청혼까지 했었지. 나의 사랑 루시아를 넘보는 것들은 누구라도 용서치 않으리. 라이와 루비는 커다란 베개를 베고 자......는 대신 내 양쪽 팔을 벴다. "......" 그 베개는 왜 들고 왔니? "라이는 오빠 팔을 베고 자는 게 막막 좋아요." "루비도요. 오빠 팔을 베고 자면 잠이 막막 잘 와요." "그래? 오빠도 우리 라이와 루비를 안고 자면 잠이 잘 와." "헤헤~ 정말요?" "......" 물론 뻥이지. 아침이 되면 팔이 저리다 못해 쥐까지 난다. 그래도 이렇게 귀여운 딸들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비록 식비 가 좀 많이 드는데다, 놀고 먹고 자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빈둥빈둥 엘프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이 곁에 있어서 행복하다. 라이 동생은 역시 딸이 좋겠지? "우리 라이와 루비는 여동생 생기면 잘해줄 자신 있어?" "예. 라이는 막막 잘해줄 거예요." "루비는 같이 놀아줄 거에요. 뽀뽀도 해주고 부비부비도 해줄래 요." "후후~ 우리 라이와 루비는 착하구나." 그래. 너희들을 위해서라도 이 오빠가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일 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가 제작한 동생보다 백배 천배 더 예쁜 동생 을 만들어줄게. 난 내 품에 잠든 두 엘프를 보며 굳게 다짐했다. 그나저나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의 아이라니. 솔직히 기대된다. 둘을 닮았으면 굉장히 예쁜 아이가 나올텐데. 특히 인디 쪽을 많 이 닮으면 그야말로 천하의 절색이 둘이나 태어나게 된다. 난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의 두 딸을 상상하며 잠들었다. 때문인지 꿈에 일루니아 여사님과 두 딸이 등장했다. 내가 두 아이를 쓰다듬어주려고 하자 갑자기 일루니아 여사님 이 등장했다. 두 아이는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매달렸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두 딸을과 함께 찢어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 았다. '일심동체 찢어죽일 듯한 눈빛 스킬'에 직격당한 나는 온몸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고통을 당해야했다. 도망쳐도 소용없었다. 이를 악물도 달려보았지만, 샤이 사일런스 모녀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악의였다. 절대적이라 해도 좋 을 만큼 순수한 악의. 해일처럼 밀려드는 악의에 저항은 아무런 효과가 없엇다. 마치 작은 고깃배가 파도에 부서져 나가듯 나의 저항은 잔해조차 남기 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거대한 악의는 나를 집어 삼켰다. "헉!"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대한 악의가 내 목을 조르는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으윽, 정말로 무언가가 내 목을 조르고 있어! 아직도 꿈속인가? 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라이가 내 목을 꼭 끌어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웅~ 루비만 좋아하는 오빠는 미워요오." "......" 아무리 오빠가 미워도 오빠를 살해하려 하다니! 난 내 목을 조르고 있는 라이의 팔을 풀었다. 낑낑거리며 라이를 떼놓고 나자, 루비가 내 몸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이 보였다. 날도 더운데 좀 떨어져서 자면 어디 덧나니? 난 루비도 떼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난 불 을 켜고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벌컥벌컥.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일루니아 여사님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둘이나 더 생긴다니! 차라리 날 죽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냥 이대로 짐 싸고 도망칠까? 안 돼. 루시아를 두고 갈 수는 없어. 그럼 루시아를 보쌈해서? 하지만 어리 엘프들을 두고 갈 수는 없잖아. 그럼 루시아를 보쌈한 다음 어린 엘프들과 함께 도망가? 그런데 그렇게 되면 도망이 아니라 이사 아닌가? 일루니아 여사님이 아기를 낳으려면 아직 7개월 정도 남았다. 그래. 아직은 시간이 있어. 그리고 상황이 아주 절망적이지는 않아. 딸이라고 해서 꼭 일루니아 여사님을 닮는다는 보장은 없잖아. 혹시 아는가? 둘 다 인디를 닮을지. 인디를 닮아 귀엽고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 나오면 정말 좋겠다. 하지만 아까의 악몽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줄줄 흐르며 짐 싸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그 꿈은 설마 예지몽? 아이리스 2부 12권 Substory 12 복날 날씨가 더우니 땀도 많이 나고 몸에 힘이 없다. 덤으로 입맛도 별로다. 우리 집은 국가 경제나 지구온난화 문제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트는 편이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전기세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에어컨 냉방은 몸에 그다지 좋지 않다. 그래서 냉방을 하더라도 한 시간에 한 번씩은 가동을 멈추고 창문을 활 짝 열어 환기를 시킨다. 게다가 이제는 임부까지 있어 함부러 냉방을 할 수도 없다. 그런 관계로 요즘 나는 더위에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이런 사정은 다른 식구들도 마 찬가지인 듯했다. 어린 엘프들 역시 더운지 노는 시간을 줄이고 잠자는 시간을 늘렸다. 아마 엘프의 모습이었다면 길고 뾰족한 귀를 축 늘어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라이레얼의 옷은 점점 짧아졌다. 가끔은 브라도 하지 않은 채 탱크탑을 걸치고 돌아다녔다. 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난방을 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난 더위에 무지 약해 여름을 굉장히 싫어한다. 더위도 싫고, 장마도 싫 고, 홍수도 싫고, 가뭄도 싫고,......아무튼 다 싫지만, 그래도 딱 하나 좋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노출! 그렇다 여름은 노출의 계절이다. 마음껏 벗고, 시원하게 드러내는. 짧아지는 옷과 얇아지는 옷감을 볼 때마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여자들의 옷이 시원해질수록 남자들이 고마움을 느끼는 건 당연지사 아 니겠는가? 사실 미니스커트에 배꼽티를 입은 여자가 지나가면, 남자들의 고개가 돌 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에 몇 번 언급을 했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반사작용으로 손으로 무릎 을 때리면 다리가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렇게 노출 심한 옷을 입고 다니는 여성 중 에 남자가 힐끔힐끔 쳐다보면 굉장히 불쾌해하는 여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쳐다보는 것을 기뻐하는 것도 아니다. 대체 노출 심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며 남자들 보고 보지 말라고 하면 어 쩌라는 건가? 그럴 거면 집에서만 입든가! 물론 대놓고 음흉한 눈길로 쳐다보는 남자들은 문제가 있다. 침까지 질 질 흘리는 놈은 더 문제가 있고. 그렇다 하더라도 나처럼 순수하게(?) 안 보는 척하며 힐끔힐끔 열심히 보는 건전한(?)남자들 까지 욕해서는 안 된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는 것은 일종의 자기 과시적 욕망이다. 특히 공을 들여 몸매를 가꾼 여성일수록 그런 욕망은 크다. 그래서 노출이 심한 옷 을 입어 자신을 과감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다. 여자에게는 본능적으로 과시욕과 노출심리가 있고, 그러한 본능은 유혹 을 밑바탕에 두고 있다. 이성에게, 또는 동성에게까지 자신을 과시하고, 더불어 스스로가 유혹을 당하고 싶어 하는 본능. 그래서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여자는 미모에 신경을 쓴다. 젊고 아름다 워지고 싶어서 옷차림과 액세서리에 신경을 쓰고, 자금이 받쳐주고 뼈 를 깎을 각오까지 되어 있으면 성형외과 문을 두드리기도한다. 즉, 노출 패션을 입고 번화가를 활보하는 여성의 심리는 타인이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라고, 그 시선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쳐다보면 굉장히 불쾌해하고, 지니가 쳐다보면 좋아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 "......" 뭐야? 이렇게 사람 차별해도 되는 거야? 그럴 거면 지니앞에서만 입든가! 아아~아무튼 여자들 심리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차라리 라이레얼처럼 당당하게 노출하는 여성이 훨씬 보기 좋다. 라이레얼은 너무 당당하게 노출해서 좀 문제지만. 그래서 내 입장에서야......흠흠,매우 고맙지. "헤헤~ 라이는 오늘 짧은 치마를 입었어요." "루비는 핫팬츠에요!" "......" 니들은 별로 안 고맙거든. 라이는 나시티에 무릎이 드러나 보이는 짧은 스커트를 입었고, 루비는 탱크탑에 핫팬츠를 입었다. 팔과 다리, 어깨가 다 드러나 보인다. "......" 그래서 어쩌라구? 노출된 부분이 많아 시원해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얘들이 이런 옷을 입어 봤자...... 그래도 얘들 데리고 밖에 나가면 수많은 남자들이 추파를 던질지도 모른 다. 세상은 넓고 로리콘은 많으니 사실 내가 정상적인 남자여서 그렇지, 만약 로리콘이었다면 라이와 루비 의 노출 패션에 한눈에 반해 짐승으로 폴리모프 했을지도 모른다. 오빠의 귀염둥이 라이와 루비~. 난 라이와 루비를 안고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그 순간 루시아가 거실 로 나왔다. 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루시아 복장에는 변화가 없다. 반팔 티셔츠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스커트 저 반팔이 나시티로 바뀌고, 저 스커트가 미니스커트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째서 그렇게 답답한 복장을 고수하는 거야 루시아? "언니이~!" 라이와 루비는 내 품을 빠져나와 루시아의 품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먼 저 도착한 엘프는 라이. 루시아가 허리를 숙여 안아주자 라이는 재빨리 루시아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부비부비~. "헤헤~." 한 발 늦은 루비는 볼을 부풀리며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루시아의 '부비부비 스킬' 의 레벨이 점점 높아지는 느낌이다. 아직 나의 토닥토 닥 스킬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스킬 생성 시기를 생각해본다면 레벨 업이 굉장히 빠른 펴이다. 무엇보다...... "나도 부비부비 하고 싶은데......" 루시아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기. 이미 해본 라이와 루비의 설명에 의하면 폭신폭신해서 기분이 좋다고 한 다. 언젠가는 반드시 부비부비 하고 말리라. 설마 완결 때까지 부비부비 한번 못하고 끝나는 건 아니겠지? 루시아는 라이를 떼놓고 루비를 안아들었다. 라이는 아쉬운 듯 다시 내 품에 안겼다. 난 라이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부비부비 하니까 어때? 좋아?" "예. 막막 좋아요. 언니 가슴은 크고 부드럽고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 하거든요." "......헉!" 크고 폭신폭신한데가 말랑말랑하기까지! 말만 들어서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역시 직접 부비부비 해보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요즘 들어 루시아의 인기가 급상승하는 데는 저 부비부비 스킬의 영향이 컸다. 부비부비 스킬은 나의 토닥토닥 스킬에 대항해 루시아가 만들어낸 최강의 스킬. 부비부비 스킬이 있는 이상 루시아의 인기도는 당분간 상 승곡선을 그릴 것이 분명하다. 어느새 루비의 부비부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은 히로 차례! ......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저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겠지? 이 소설의 배경이 강호(江湖)가 아닌 것이 아쉽다. 이 소설이 무협 소설 이었다면 최음제나 미약 같은 것이 있었을 텐데. 냄새만 맡아도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간절히 이성을 원하게 된다는 최음제! 나는 명망높은 아이리스 왕국의 공작으로 최음제를 사용해 여자를 어떻 게 해보려는 그런 파렴치한이 결코 아니......지만, 효과만 확실하다면 야 기꺼이 사용을......하면 안 되겠지? 으음, 이젠 최음제까지 의존하려 하다니. 나의 욕구불만 수치가 한계에 다다른 걸까? 저번 권에 있었던 사건 이후로 욕구불만이 더욱 증폭된 느낌이다. 적어도 팬티는 봤어야 했는데. 아아~억울해. 하지만 억울하다고 해서 최음제에 의존하는 것은 남자가 할 짓이 아니다. 최음제를 사용해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는 남자는 인간이 아닌 쓰레기다. 그래. 내가 아무리 타락했다고 해도 최음제를 사용할 수는 없어 대신 수 면제를...... "......" 흠흠, 최음제는 안 돼도 수면제는 괜찮겠지? 루시아가 수면제를 먹고 잠든 사이 살짝 치마만 들춰보는 거야. 그래. 팬티가 무슨 색인지만 확인하는 거야.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 간만에 생긴 기회인데 팬티만 보고 끝내는 건 좀 억울 하다. 그런 의미에서 부비부비도 한번.....그리고 여기저기 좀 만져도 보고 쓰다듬어도 보고...... "무슨 생각해?" "헉......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루시아의 얼굴에 난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루비를 품에 안은 루시아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왜 그래...... 설마 너 또......?" "아, 아니야, 루시아 난 결코 수면제 쓰다듬고 만지고 부비부비 한 적 없어. 난 결백해."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그런가? 루시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흘겨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나 는 식은땀을 흘렸다. "왜, 왜 그래?" "흥!"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획 돌렸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알 수 있 었다. 아아~또 점수가 깎였구나. 상상으로 일관하다 점수만 깎이는 신세라니. 어째 매우 비참하다. 난 슬쩍 루시아를 보았다. 청초하고도 순수한 한 떨기 백합과도 같은 그 녀. 그 청순가련함 속에 숨어 있는 강한 모성애. 아아~ 난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란 말인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상대로 욕정어린 상상을 하다니! 새삼 남자라는 족속이 싫어진다. ......라지만, 언제까지나 플라토닉 러브만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진정한 도(道)를 깨우쳤다고 할 수 있 지 않겠는가? 플라토닉 러브의 반만이라도 에로스 러브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아~ 끓어오르는 욕망을 달랠 길이 없구나. 이러다가 정상적은 사랑의 방식을 벗어나 로리콘의 길로 접어들어 라이 와 루비에게 손을 뻗치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안 더워,루시아?" "더워." "그래?그럼......" 옷을 좀 가볍게 입는 건 어때? 집 안에선 수영복만 입어도 괜찮아. 될 수 있는 한 비키니로. 그것도 최 대한 하이레그로. "그런 의미에서 좀 떨어져 줄래? 붙어있으니까 더 더운 것 같아." "......으응." 루비는 꼭 껴안고 있으면서..... 루시아의 양쪽 뺨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뇌쇄적이다. 혹시 루시아는 지금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당연 아니다)? 얇은 반팔 티가 땀으로 인해 몸에 달라붙으며 몸매의 굴곡이 살짝 드러 나 보인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웬만한 여자 연예인은 물론이고, 레이싱걸이나 특급 모델들도 상대가 안 될 것 같은 루시아의 몸매. 그야말로 신이 내린 완벽한 몸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저나 날씨가 덥긴 덥다. 왜 이렇게 더운 거지?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해서 더 덥게 느껴지는 건가? "더워요,오빠.' "에어컨 틀어요." 나를 조르는 라이와 루비. 난 고개를 저었다. "일루니아 여사님 때문에 안 돼. 에어컨 바람은 일반인에게도 안 좋지만 임부에게는 특히 안 좋대." 지나친 더위도 임부에게 안 좋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은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루니아 여사님 방은 방문은 물론이고 창문까지 활짝 열어 놓았다. 그 리고 그 옆에서 인디가 거대한 부채를 흔들고 있다. 그래도 덥다 싶으면 간간히 분무기로 몸에 물도 뿌려준다. 게다가 손만 뻗으면 차가운 과일이나 주스가 얼마든지 있다. 그야말로 지상낙원. 왕후장상이 따로 없다고나 할까? 생각같아서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 을 정도다. 뭐, 루시아가 원한다면 난 기꺼이 부채질을 해줄 자신이 있다. 강,중,약 세기 조절은 물론이고 풍향 조절까지 가능하다. 인디의 부채질 따위는 가볍게 아웃 오브 안중 시켜주마! 임신한 아내에게 잘해주지 않는 남편이 어디 있겠냐만은(찾아보면 의외 로 많을지도)인디는 좀 극성인 편에 속한다. 그 커다란 부채로 몇 시간 동안 천연 바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 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한두 시간 하면 땀범벅이 되어 나가떨어질 게 분 명하다. 역시 드래곤이라는 건가? "그치만 덥단 말이예요,오빠." "맞아요. 막막 더워요.여름이 루비를 괴롭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렇게 더우면 옥탑방으로 올라가렴. 아까 보니까 영아가 에어컨 빵빵 하게 틀어놨더라 루도 지금 거기서 놀고 있어." 어쩌면 순결을 위협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요?" "루비는 갈래요." 내 말을 들은 라이와 루비는 반색을 하며 옥탑방으로 달려갔다. 루시아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사다리 조심해서 올라가!" 아이들이 가고 나자 소파에는 나와 루시아 둘만 남았다. 날씨가 덥다보 니 불쾌지수도 상승한다. 이런 날씨에 찝쩍거렸다간 따귀 맞기 십상이다. 오늘은 자제하는 게 좋으려나? 아니야. 이런 날에는 둘이 같이 찬물에 샤워하는 게 최고야. 한번 말이나 해볼까?" 어쩌면 루시아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루시아의 짜증만 증폭시킬 수도 있는데...... 내가 찝쩍거릴까 말까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데 지니가 집에 돌아왔다. "날씨가 많이 덥군요." "예.밖은 어때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줄줄 흐르고, 몸매에 자신이 있는 여 성들은 과감히 자신을 드러내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도 있는 법이지요. 빗나간 자신감으로 인 해 사방에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으음, 다 여름이니까 가능한 일이지요." 여름에 노출하지 않으면 언제 노출을 하겠는가? 뭐,라이레얼처럼 사시사철 노출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잠시 조사를 해보니 지금이 삼복더위더군요." "삼복더위도?" "예.삼복(三伏)이란 초복(初伏),중복(中伏),말복(末伏)을 뜻합니다. 초 복에서 말복까지의 기간을 일년 중 가장 더운 때로 이 때의 더위를 삼복 더위라 부르지요." "으음, 그렇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괜히 아는 체 하지마세요." "알고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지니는 허리 숙여 사죄했고 나는 그런 지니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루시아 앞에서 잘난 척하는 것들은 결코 용서치 않으리. "그럼 오늘이 말복인 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오늘이 말복이에요?" "그렇습니다." "......" 난 몰랐지. 요즘 워낙 바쁘다 보니. "그런 의미에서......" "그런 의미에서?" "몸보신을 하러 가시는 것은 어떻겠습까?" "몸보신이요?" "그렇습니다. 복날의 더위를 막고, 더위에 지친 몸을 보신하기 위해서는 영양가가 높은 음식을 먹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양가가 높은 음식이라면?" "당연 보신탕(補身湯)이지요." "헉! 보신탕!" 루시아는 날 보며 물었다. "보신탕이라니?보신탕이 뭐야?" "개장국이라고도 하고, 구탕(拘湯)이라고도 하지." "그러니까 그게 뭔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멍멍이탕이라고나 할까?" "멍멍이탕이면......" "강아지탕이라고도 하고, 바둑이탕이라고도 하고......또 색깔에 따라 흰동이탕, 검둥이탕, 누렁이탕이라고도......" "그, 그럼......" 루시아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었다. "개를 먹는다는 거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바로 그거야." 루시아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너도 먹어?" "뭐, 못 먹지는 않지." 갑자기 루시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루시아는 싸늘한 시선으로 날 노려보며 말했다. "야만인!" "헉!" 야만인은 미개하여 문화 수준이 낮은 사람, 또는 교양이 없고 무례한 사 람을 뜻하는 단어다. 고작 개 먹었다고 야만인이라니! "흥!"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마치 야만인은 상대하기도 싫다 는 듯이. 난 지니에게 물었다. "아이리스 왕국은 개를 안 먹나 보죠?" "물론 먹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판타지 세계......그러니까 자이나레스 대륙은 현대에 비해 농사법이 그리 발달하지 못했다. 콤바인이나 트랙터,경운기 같은 기계도 없고, 저수지나 배수로 같은 농업 기반도 취약한 편이다. 이 세계만 해도 지금이야 먹을 게 넘쳐나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한 해 농사를 망치면 쫄쫄 굶어야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아무튼 농사법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는 늘 먹을 것이 부족했고, 그래 서 집에서 기르는 개를 많이 잡아먹었다. 한국을 개고기 먹는 야만인들이 사는 나라라고 강력 비난한 프랑스만 해도 1870년 보불전쟁때 개고기를 먹느라 파리 시내에 개가 한 마리도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개고기 정육점은 물론 쥐고기 정육점까지 있 었다. 먹을 것이 없을 땐 뭐라도 먹어야할 것 아닌가? 중국에서는 흉작이 계속되자 이웃끼리 자식을 바꿔서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차마 자기 자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나? "아이리스 왕국에서 개고기 요리는 서민들을 중심으로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요리는 적은 양의 고기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기 하기 위해 탕이나 스프, 스튜 등을 중심으로 발전했지요. 때문에 궁중 요리에는 개고기 요리가 없습니다. 높으신 분들은 개고기를 천한 서민들의 음식이라고 하여 먹기를 꺼렸지요." "으음, 그 사람들이 뭘 모르는군요." "그렇습니다. 먹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그 맛을 모르는 법이지요." 지니는 루시아를 잠시 쳐다본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루시아 공주님께서 어렸을 때 강아지를 기르신 적이 있습니다." "정말이야?" 내가 묻자 루시아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니 오빠가 생일 선물로 나한테 준 거야. 이름은 미니(Mini)였어." "미니?" "응.작고 귀여운 강아지였거든." 루시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강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주인을 지키다가 죽었다거나,병들어 죽었다거나......그렇다 면 루시아가 왜 개고기를 싫어하는 이해가 간다. "그 개한테 무슨 일이 생겼죠? 그렇죠?" 지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통찰력에는 감히 따를 수가 없군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빨리 말해 봐요." 내가 재촉하자 지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개는 수캐였습니다." "예? 수캐인 게 뭔 상관인데요?" "처음에는 루시아 공주님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부터 안 보이는 날이 점점 늘어나더군요." "그래서요?" 어째 대단한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X파일'처럼 말 이다. 혹시 그 강아지는 외계인이 아니었을까? "전 루시아 공주님의 명을 받들어 그 개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 다. 그 결과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요한 사실이 뭔가요?" "그 개가 주변 암캐란 암캐는 전부 건드리고 다녔다는 것을." "......헉!" 그런 일이! "그것도 모잘라......" "예? 또 무슨 일이 있어요?" "어느 날 암캐 수십 마리를 데리고 도주했습니다." "......헉쓰!" 지니는 침통한 듯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동안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미니를 찾아내라며 울며불며 난리를 치셨 습니다. 때문에 루시아 공주님을 달래느라 저희 누님께서 많은 고생을 하셨지요. 그리고 그 후로 루시아 공주은 다시는 개를 기르지 않으셨습 니다." 루시아의 표정이 더욱 슬퍼졌다. 눈물을 억지로 참는 것 같은 모습이었 다. 난 감탄하듯 말했다. "조그맣고 귀여운 개라더니 실체는 발랑 까진 발정난 개였군요." "그렇습니다." "그, 개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선물해주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 "......" 누가 지니가 선물해준 개 아니랄까봐 심하게 발랑 까졌다. 어느날 갑자기 지니가 사리지고 수백명의 여자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와 지니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칠까봐 걱정된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놓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런데 그 얘기와 루시아가 개고기를 싫어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나 요?" "별 관련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으음, 그렇군요." 그럼 그 얘긴 왜 한 건데? 지니는 이런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듣고 싶어하실 것 같아 했습니다. 그리고 꽤 재미 있는 얘기 아니었나요?" "후반부의 반전이 좀 놀랍긴 하네요. 주변 암캐란 암캐는 전부 건들고 다녔다니......으음, 루시아가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 이해합니다." 지니는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가실 겁니까?"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쏘신다면야......" 난 루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루시아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먹고 와. 내가 안 먹을 뿐이지,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은 상관없어." "아까는 야만인이라고 했잖아." "그건 농담이었고. 개 먹는다고 야만인이라는 게 말이 돼?" "알았어. 그럼 나가서 먹고 올게." 뭔가를 먹으러 가는데 어린 엘프들을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나 혼자만 먹으러 간다면 나중에 어린 엘프들이 단체로 항의할 게 뻔하니. 으음, 그런데 어린 엘프들이 개고기를 먹으려나? 난 어린 엘프들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덮개를 열고 고개를 내미는 순간 찬 공기가 느껴 졌다. 아래층의 온도와 한 10도는 차이 나는 것 같다. 대체 에어컨을 얼마나 빵빵하게 튼 거야? 영아와 어린 엘프들은 좁은 침대에 다 같이 누워 있었다. 몸이 부딪히고 팔다리가 엉키고......난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 모두 쿨쿨 잘 자고 있었다. 으음,낮잠 타임인가? 이대로 잤다간 감기에 걸리거나 냉방병에 걸릴 것이다. 난 리모콘을 찾아 에어컨의 온도를 27도까지 높였다. 이 정도만 되도 충 분히 시원하다. 난 어린 엘프들을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깨 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밖은 찌는 듯이 더울 테니 이곳에서 낮잠 자는 게 나을 것이다. 음식이야 뭐 올 때 사오면 되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영아와 아이들을 바르게 눕혀주고 아래층으로 내려 와 지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우리는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밖이 더운 데다가 음식점이 좀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끝내주는 집을 알고 있습니다." "오오! 끝내주는 집이요? 기대가 큽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믿으셔도 좋습니다." "하하하, 물론 믿습니다." 어차피 니가 사는 거니까. 마이카 뉴 렉서스턴으로 시내를 벗어나 좀더 달리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 있는 음식점을 찾을 수 있었다. 가게 이름은 '왕할머니 보신탕' "말복이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무지 많네요." "그런 것도 있지만, 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는 듯하군요." 난 지니가 가르킨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동물보호협회에서 나온 것 같다. 그중에 나이가 지긋하신 한 아주머니는 확성기에 대고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난 재빨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지니와 함께 내렸다. 동물보호협회에서 나온 사람들은 빼더라도 사람들이 무지 많다. 이 음식점이 유명해서 그 런 건지, 말복이여서 그런 건지는 모를일이다. 내 생각에는 둘 다인 것 같지만. 줄은 음식점 밖에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난 지니와 함께 그 줄의 끝 에 섰다. 확성기를든 아주머니는 음식점을 향해(동시에 줄을 선 사람들 을 향해)소리쳤다. 줄은 음식점 밖에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난 지니와 함께 그 줄 의 끝에 섰다. 확성기를 든 아주머니는 음식점을 향해(동시에 줄을 선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보십시오, 여러분. 이 많은 사람들이 개를 먹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개는 인간의 친구이자 동반자입니다. 개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야만인들이나 하 는 짓입니다! 개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길 포기한다는 걸을 의미 합니다. 개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친구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 런데 그런 개를 어떻게 먹을 수 있습니까? 죽어 가는 개가 불쌍하 지도 않습니까? 개의 애처로운 눈망울을 한번이라고 봤다면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당장 개를 먹는 것을 중단하십시오! 개는 인간의 먹이가 아닙니다! 인간의 친구입니다! 여러분의 자식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분들이 인간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인간이 고 싶다면 당장 개를 먹는 것을 중단하십시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피켓을 들어올리며 소리 쳤다. "중단하라! 중단하라!" "개고기를 요리해서 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인육을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당장 가게를 폐업하고 수 많은 개들 앞에 사죄하십시오!" "폐업하라! 폐업하라!" 그들의 집단행동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우리에 갇혀 있는 개의 사진,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개의 사진, 두 남자가 개를 개 패듯이 패는 사진, 가죽이 벗겨진 징그러운 개의 사 진 등이 붙어 있었다. 특히 개를 도살하는 장면이 찍힌 사진은 일반인이 보기에 구토가 나올 만큼 역겨운 사진이었다. 그래봐야 전쟁터에서 사람 죽어나가는 것보다는 훨씬 양호하다. 나와 지니는 멀쩡했지만, 줄 서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은 속이 메 슥거리는지 집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주걱을 든 한 할머니가 밖으로 나왔다. 머리가 새하얗 고, 얼굴이 쭈글쭈글하고, 등이 굽은 할머니. 이 보신탕집 주인인 '왕할머니' 인 것 같다. 할머니는 동물보호협회에서 나온 사람들에가 다가갔다. 그리고 호통을 쳤다. "내 집 앞에서 지금 뭐하는 짓들이야?" 그러자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던 아주머니는 할머니를 보며 말 했다. "개고기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중입니다." "그걸 왜 내 집 앞에서 하는데?" "할머니가 보신탕을 팔고 계시니까요." "내 집에서 내가 보신탕을 하는데 니들이 뭔 상관이야?" "개는 인간에게 충성하고, 인간을 믿고 따르고, 인간에게 의지하 고, 인간에게 애정을 주고, 인간을 가장 반기는 인간의 친구입니다. 개를 먹는다는 것은 진화가 덜 된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 러나 할머니께서도 당장 보신탕집을 폐업하고 앞으로 다시는 개고 기를 먹지 마세요." 아주머니의 말에 할머니는 화를 냈다. "지금 나보고 야만인이라는 거야?" "그럼 인간의 친구인 개를 잡아다 죽인 다음 먹는게 인간이 할 짓인가요?" "아니, 뭐야?" 할머니는 화를 참기 힘들었는지, 주걱을 휘두르며 아주머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할머니를 밀쳤다. "어이쿠!" 80세도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무슨 힘이 있겠나? 그다지 세게 밀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바닥에 쓰러 졌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조금의 미안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당장 가게를 폐업하세요." "내 가게에서 내가 장사하는데 니들이 뭔 상관이냐? 썩 꺼지지 못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개고기 판매를 중단할 때까지 시위 를 계속할 겁니다." "썩 꺼져, 이놈들아!" 할머니는 일어나 다시 아주머니에게 달려들었다. 동물보호협회 아주머니는 할머니를 또 다시 밀쳤고, 할머니는 힘없이 쓰러졌다. 그렇게 몇 번 몸싸움을 벌이던 할머니는 바닥에 주저않아 통곡을 했다. "아이고, 이놈들아! 남의 장사 망치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동물보호협회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울든 말든 확성기에 대고 계 속 개고기 반대를 소리쳤다. 동물 보호를 위해서라면 노인보호는 뒷전으로 미뤄도 된다는 건가? 하긴, 남의 가게 앞에 와서 이런 짓 하는 것 부터가 상식 이하다. 이 할머니가 무슨 범법 행위를 저지를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행위를 한것도 아니다. 아니, 저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행위겠군. 결국 내가 나서야 하는 건가? 천하의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 이런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난 앞으로 나서서 울고 있는 할머니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일어나세요, 할머니." 지니는 할머니를 부축해 안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난 동물보호 협회의 행동대장격인 아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연세 지긋하신 분께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남의 가게 앞에서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그러자 행동대장 아줌마(이제부터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는 날 노 려보며 말했다. "아줌마 개고기 싫어하는건 잘 알겠거든요. 제 주위에도 개고기 싫어하는 사람 많아요. 그런데 싫어하면 자기만 안 먹으면 됐지 왜 남한테까지 강요하고 그래요?" "개고기를 먹는 건 역겨운 행위……." "역겨우면 안 보면 되잖아요. 누가 아줌마 앞에서 개고기 먹었 어요? 왜 굳이 여기까지 왜서 개고기 먹는 걸 보고 역겨워 하는 거 죠?" 행동대장 아줌마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이 사진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요? 당신같이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 때문에 사랑스런 개들이 이렇게 잔인하게 죽어 가고 있습니다." 행동대장 아줌마가 가리킨 사진은 가죽이 벗겨져 시뻘건 근 육과 지방이 드러나 있는 개의 사진이었다. 대가리의 가죽마 저 다 벗져진 개의 사진은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역겨웠다. 하지만...... "아줌다 도살장 안 가보셨죠? 거기 가면 가죽 벗겨진 돼지나 소를 많이 볼 수 있거든요. 개들도 가죽 벗기면 이렇게 시뻘 건 모습이에요. 그래서 도살장 한번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일주일 정도는 고기를 입에 대지도 못한다고 하더군요. 어떤 사람들은 아예 채식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세상에 가죽 벗겨 놓고 이 꼴 안 나오는 짐승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도살장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도살장에서 소와 돼지를 잡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백정들은 자기 자식에 게도 직업을 말하는 것을 꺼릴 정도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끔찍한 일인지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정은 예로부터 천한 일로 여겨져 천민들만 그 일에 종사했다(하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고, 그들로 인해 고기를 먹는 모두가 혜택을 받고 있다. 백정을 천한 직업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채식주의자뿐이다). "개를 이렇게 잔인하게 패서 죽이는 게 인간이 할 짓이라 생 각하나요?" 이번에 가리킨 사진은 두 남자가 몽둥이를 들고 개를 개 패듯 이 패는 사진이다. 개는 피를 줄줄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난 기가 막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인간이 할 짓이 아니죠. 어디서 이런 사진을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를 패 죽이는 것과 개고기를 먹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럼 소나 돼지를 때려죽이는 건 안 잔인합니까? 먹기 위해 죽인다고는 하지만 동물도 하나 의 생명인 만큼 최대한 고통을 느끼지 않게 죽이는 게 인간의 도리죠. 개를 패 죽이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일이고, 그런 행 위는 지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고양이를 패 죽이는 것 도 잔인하고, 돼지를 패 죽이는 것도 잔인하고, 소를 패 죽이 는 것도 잔인하죠. 세상에 짐승 패 죽여서 잔인하지 않은 경 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도살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개를 패 죽이는 것도 다 옛날 일이에요. 그 사진 배경 보니까 한참은 된 것 같은데. 80년대 사진인가요? 제가 알기로 요즘에는 개를 도살할 때 고압전류를 흘려 순식간에 고통 없이 죽인다고 하더군요." "이런 행위는 지금도 버젓이......" "그건 그 사람들이 잘못이죠. 누군가가 돼지를 잔인하게 패 죽 였다고 해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자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문제 삼아야 할 건 개를 잔인하게 패 죽이는 사람들이지,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구요? 그럼 돼지 패 죽이는 건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들 때문입니까?" 줄 서 있는 사람들은 공감하는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들은 보신탕을 먹으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인 만큼 당연히 개 고기 찬성파다. 하지만 동물보호협회에서 나온 사람들은 나를 향해 분노를 드러냈다. 당연 저들은 개고기 반대파다. 행동대장 아줌마는 뒤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말했 다. "개는 다른 동물들과 다릅니다." "뭐가 다르죠?" "다른 동물은 가축이지만, 개는 가족입니다. 개는 인간과 친하게 지내며, 인간에게 충성합니다. 인간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간 개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개를 다른 동물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럼 고양이는요? 고양이도 가족 아닌가요?" "그래서 고양이 고기는 먹지 않는 겁니다." "먹는 나라도 있던데요." "앞으로 먹지 말아야 합니다." "어째서요?" "고양이도 인간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개와 고양이만 인간의 친구인가요?" 이 아줌마 말을 듣다보니 옛날에 텔레비전에서 본 프로가 생각 난다. 진행자가 유명 연예인들을 불러 같이 요리를 만들며 대화 를 나누는 프로였는데, 그 프로에 마침 한국인 여자와 결혼해 한국인으로 귀화한 미국인 할리씨와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 한국 인으로 귀화한 프랑스인 이다도시씨가 출연했다. 진행자가 음식을 만들며 그들과 대화하던 중 우연히 보신탕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진행자: (할리에게) 보신탕 드셔 보셨어요? 할리: 당연히 무그봤지예. 억쑤로 맛있었쓰예. 이다도시: (경멸어린 눈으로 할리를 보며) 오! 그걸 어떻게 먹 어요? 할리: 맛있기만 하든데예, 머. 진행자: 몇 번 먹어 보셨나요? 할리: 마이 무그봤으예. 우리 장모님이 여름 되면 마이 해주지예. 이다도시: (째려보며) 개를 어떻게 먹을 수 있죠? 오 마이 갓! 할리: 즈그들은 달팽이도 먹으면서 개 묵는 거 가꼬 난리고. 이다도시: 개는 우리의 친구에요. 그걸 어떻게 먹어요? 그러자 할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할리: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라예. 이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결국 인간의 친구니 어쩌니 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문제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돼지를 애완용으로 키우거든요. 품종 개량한 돼지로 크기가 강아지 정도밖에 안 해요. 요즘은 이런 애완용 돼지가 많이 보급됐더라구요. 그 사람은 그 돼지를 가 족처럼 아끼고 있어요. 그럼 돼지도 인간의 친구 아닌가요?" "물론 그 돼지는 인간의 친구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겠네요? 이 사람은 돼지를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으니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무지하 게 야만적인 행위겠네요. 맞나요?" 행동대장 아줌마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냉정을 회복하 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적어도 가족처럼 아끼는 돼지를 먹지는 않겠지요." "아아~ 그렇군요." 훗~ 걸려들었군. 난 재빨리 반격에 들어갔다. "그럼 개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애완용 개는 먹지 않고, 식 용 개만 먹으면 문제없는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개를 애완용과 식용으로 분류해 길러왔지요. 애완, 사냥, 경비, 관상 등으로 쓰이는 개는 견(犬)이라 하여 잡아먹는 것을 꺼렸 고, 그 외에 일명 똥개로 분류되는 개들은 구(狗)라고 해서 식 용을 목적으로 길러 때가 되면 잡아먹었죠." 나의 물 흐르는 듯한 말에 행동대장 아줌마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개는 개일 뿐입니다. 어째서 인간의 시선으로 개를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으로 구분하는 겁니까? 마당에 풀어 기르는 똥개라도 인간과 친분을 쌓아 얼 마든지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개를 먹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요?" "아까와는 말이 다르잖아요. 애완용으로 품종을 개량한 돼지는 먹어서는 안 되고, 식용을 목적으로 기르는 돼지는 먹어도 된 다면서요? 그리고 똥개 얘기를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맞아요. 비 록 잡종이라 해도 인간의 친구가 되었다면 그 개를 먹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건 개만 그런 건 아니거든요. 저희 시골집에 누렁이란 소가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그 소를 애지중지 하셨죠. 그 소는 할아버지의 친구라 할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을 함께 해왔거든요. 결국 시간이 지나 그 소는 병들어 죽었고, 할아버지는 그 소를 잡아먹는 대신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었어요.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친구가 되면 잡아먹지 말아 야 하는 건 개가 아니라 돼지나 소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소 한 마리나 돼지 한 마리가 인간의 친구라고 해서, 모든 소와 돼 지가 인간의 친구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개는 다른 동물과 다릅니다." 난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동물은 동물일 뿐입니다. 어째서 인간의 시선으로 개와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겁니까?" "푸하하~!" 내 말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행동대장 아줌마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줬기 때문이다. 반대로 행동대장 아줌마와 동물보호협회 사람들은 분노했다.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정말로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개를 잡아먹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특이한 거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가 죽었다고 해서 그것을 먹 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기르던 금붕어, 앵무새, 뱀 등이 죽었다고 해서 그것을 먹는 사람은 없지요. 차라리 동물을 죽이는 것은 너무 잔인하니, 모든 동물을 먹지 말고 채식만 하 자고 주장을 하세요. 유독 다른 동물은 놔두고 개만 반대하는 이뉴는 뭡니까?" "개는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입니다!" "아줌마는 친할지 몰라도 저는 개랑 별로 안 친하거든요. 대신 저는 소랑 무지하게 친해요. 아까 말한 그 누렁이를 제가 얼마 나 좋아했는지 아세요? 그러니까 아줌마나 소고기 먹지 마세요!" "푸하하~!" 다시 터져 나온 웃음. 행동대장 아줌마는 폭발 일보 직전 상태가 되었다. 잘하면 한 대 칠 것 같다. 난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별 다른 이유 없이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지탄 받아야 마땅합 니다. 하지만 먹기 위해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동물보호협회라 할지라도 소, 돼지, 닭 등을 도살하는 것에 대해선 별 문제 삼지 않지요. 심지어는 거위에게 억지로 사료를 먹이고 스트레스를 주어서 간을 땡땡하게 부풀리는 행 위에 대해서도 그다지 심하게 항의하지 않지요. 그런데 개를 사랑한다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행위는 어떻습니까? 뭉툭한 꼬리가 좀더 예쁘다며 멀쩡한 꼬리 끝을 자르질 않나, 귀 끝을 자르가 대가리에 꿰매질 않나, 멀쩡한 털 몽땅 밀어버 리고 옷을 입히질 않나, 심지어는 성대까지 잘라 다시는 짖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지요. 동물을 자신에게 맞추려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저지르는 이러한 행위에 비한다면, 먹기 위해 죽이는 것은 차라리 숭고하기까지 하지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한 행위가 잘못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개를 먹는 행위 는 그러한 행위보다 더욱 비인간적인 행위입니다. 미국과 유럽 여러나라들의 많은 국민들이 개를 친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국제 사회는 한국인은 개를 먹는 야만인이라며 비난하고 있습 니다.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의 말에 따르면......" "아아, 그 아줌마 말은 안 들어도 잘 알거든요. 지들이나 잘하 라고 하세요. 프랑스에서 한 해에 안락사시키는 개가 몇 마리인 지나 아십니까? 개를 사랑한다 어쩐다 해놓고선 휴가 갈 때 버 리고 가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아세요? 버림 받은 개들은 보호소로 끌고 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안락사 시키지요. 그런 주제에 누구 보고 뭐라 그러는지...... 우리는 그래도 먹기 위해 죽인다지만, 걔들은 뭡니까? 개는 인간 의 친구라며 사랑할 땐 언제고 휴가 갈 땐 방해된다고 버리고. 제 생각에는 그거야말로 개를 사랑한다는 인간의 이기심의 극치 를 보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푸와그라 먹겠답시고 거위를 조지는 건 뭡니까? 깔때기 입에 물리고 억지로 사료 부어놓고, 밤낮 가리지 않고 스트레스 받게 해서 간을 열 배까지 부풀리는 행위에 대해 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차라리 고압 전류를 흘려서 깔끔하게 죽이는게 백배는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런 말을 들으면 그 사람들은 개과 거위는 다르다고 말하겠지요. 푸와그라를 먹기 위해 거위를 잡아 고문하는 것은 되지만, 보신탕 을 머긱 위해 개를 죽이는 것은 안 된다고. 그것은 문화적 제국주의에 불과합니다. 자기들이 개를 먹지 않으 니, 다른 나라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요. 반대로 자신들은 예전부터 푸와그라를 먹어왔으니 거위를 조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프랑스는 개 안 먹었는지 아세요? 1870년 보불전쟁 때만 해도 개고기를 먹느라 파리 시내에 개가 남아나질 않았어요. 아 예 개고기 정육점까지 차려 영업을 했었구요. 즉,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그들의 조상 역시 야만인이고, 그들은 야만인의 후손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브리지트 바르도 그 아줌마 는 동물애호가라기보다는 인종차별주의자에 가까워요. 개 죽어 가는 것에는 신경 쓸지언정 다른 나라 사람 죽어가는 것에 대해 서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지요. 그렇게 인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 싶으면 '노 워(No War)' 피켓 들고 백악관 앞에서 일인 시위라도 하라고 하세요." 문득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던 프로가 생각난다. 거기서 한 진 행자가 프랑스 여배우이자 동물애호가......라기보다는 그냥 개 애호가인 브리지트 바르도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진행자: 프랑스민영 방송에서 한국 한생이 개고기를 간식으로 싸가는 장면이 방송된 바 있습니다.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왜곡한 데에 대해 프랑스가 사과해야 된다고 보지 않으십니까? 브리지트 바르도: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개고기 를 계속해서 먹는다면,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한국인들을 희화화 하고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전 이미 여러 차례 경고했습 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우리나라 TV에서 프랑스 사람들을 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집불통으로 희화화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브리지트 바르도: 마음대로 하십시오. 프랑스에 대해서건, 프랑스 사람에 대해서건, 나에 대해서건 마음대로 말하십시오. 다만 개 고기를 먹지 마십시오. 진행자: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브리지트 바르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단 한 사람이 개고기를 먹는다고 해도 그건 불필요한 일입니다. 진행자: 그럼 새로운 사실을 말씀드리죠. 제가 아는 프랑스인은 한국에 와서 개고기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한국에 온 미국인, 독일인 몇 명도 개고기를 먹은 적이 있다고 경험담을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지금도 개 고기를 먹고 있ㅅ브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프랑스 사람, 독일 사람, 미국 사람들의 대다수가 개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즉, 이렇게 과장해서 얘기해도 되냐는 겁니다. 브리지트 바르도: (매우 화난 목소리로)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들은 절대로 개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 다. 그것이 개고기인 줄 몰랐다면 가능한 일이겠죠. 하지만 그것 이 개고기인 줄 알았다면 결코 그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들이 그것을 돼지고기, 소고기라고 얘기했겠지요. 나는 여러분들 과 더 이상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 는 사람과는 얘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앞 으로 어떠한 일이 닥칠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뭔 개소리인가? 한국인이면 몰라도, 프랑스인, 미국인은 결코 개고기를 먹지 않고, 먹을 수 없다니? 아까 할리씨의 경우를 봐서 알겠지만, 미국인(그것도 백인)도 개 고기를 먹는다. 브리지트 바르도가 하도 살쳐대니 프랑스 유학생 들이 직접 한국에 여행을 와서 '문화적 상대성을 이해해야한다'고 말하며 단체로 개고기를 먹고 가기도 했다. 브리지트 바르도가 자신의 논리를 반박 당하자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듯이 행동대장 아줌마 역시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린놈이 뭘 안 다고 꼬박꼬박 말대꾸야? 넌 애미도 없냐?" "......" 아아~ 또 나왔다. 일명 나이로 밀기. 생일이 하루라도 빠른 걸 무기로 삼아 논리와 관계없이 상대를 누르려는 행위. 난 귀를 후비며 말했다. "애미 없는 건 제가 아니라 아줌마인 것 같던데요. 힘없는 할머니 를 바닥에 주저앉힌게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아까 보니까 동물 보호......아니, 동물 보호도 아니고 개 보호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태도던데...... 동물 보호도 좋지만 그 전에 노인 공경부터 하는 게 어떤가요? 애견은 끔찍이도 위하면서, 늙은 부모 고려장 시킬 일 있습니까? 그리고 남의 가게 앞에서 이렇게 설쳐대는 것도 그만하시구요. 제가 아줌마네 집 앞에 찾아가 개고기 먹으면 기분 좋겠습니까? 인간이면 인간답게 타인을 배려할 줄 알아 야지요." "이이......" 행동대장 아줌마는 이를 갈았지만, 내 말을 반박하지는 못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개를 식용으로 길러왔습니다. 여름이 되면 먹을 것이 떨어지고, 더위로 인해 체력이 저하되었지요. 개고기는 이열치열의 원리로 허약해진 몸을 보신하는 데 적격......" "옛날에는 먹을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개고기를 먹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사방에 먹을 게 넘쳐나는 데 왜 개고기를 먹는 건 데?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으면 되잖아!"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도 알고 보면 무지하게 웃기는 논리다. "그렇게 따지자면 고기는 왜 먹습니까? 고기 대신 채소를 먹으면 되 는거 아니에요? 고기는 왜 그렇게 여러 종류를 먹는데요?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등등. 그냥 돼지고기 하나로 통일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푸와그라는 왜 먹는데요? 정 간이 먹고 싶다면 돼지 간 먹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한국 사람이 개고기 먹으면 다른 고기 먹으라고 하고, 프랑스인이 푸와그라 먹는 것은 프랑스 전통 문화여서 절대 양보하지 못한다고 한다. 프랑스가 그렇게 동물을 사랑하는 국가라면 먼저 솔선수범해서 거위 고문하는 걸 그만둬야할 것 아닌가? 그렇게 동물 간이 먹고 싶으면 돼지 간 먹으면 되지, 뭐 때문에 거위 간을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고기 많은데 왜 개고기를 먹냐구요? 그거야 맛과 영양이 다르 기 때문 아닙니까? 오리나 거위같이 비슷하게 생긴 것들도 고기 맛 이 다르고, 심지어는 같은 소라도 해도 품종에 따라 맛이 다른데, 아예 종이 다른 개야 오죽하겠습니까?" 짝짝짝! 나의 물 흐르는 듯한 언변에 감동했는지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일 제히 박수를 쳤다. 아아~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이 느낌. 정말 너무 좋다. 그동안 사람들이 지니만 주목해 내가 이 글의 주인공 인지 엑스트라인지 정체성의 혼란까지 느꼈었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이 글의 주인공은 나! 그리고 이 글의 목적은 누가 뭐라 해도 라이 동생 만들기! "후후후~." 행동대장 아줌마는 나를 거의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것은 동물보호 협회에서 나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개를 먹어선 안 돼!" "그러니까 왜 안 되냐니까요? 동물보호협회에서 나왔으면 이렇게 억지 써도 되는 겁니까? 고양이 잡아먹는 나라도 있고, 원숭이 골 파먹는 나라도 있고, 심지어는 거위 고문해서 간 꺼내 먹는 나라도 있는데, 왜 우리가 개고기 먹는 것 가지고만 뭐라고 합니까? 그게 다 문화 사대주의에요. 선진 서양 국가들이 개고기를 먹지 않으니, 먹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그들이 먹지 말라고 하니, 그 말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 걔들이 하면 로맨스고, 우리가 하면 불륜입니까?" 개고기를 먹고 안 먹고는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 는 예로부터 개를 주로 식용으로 길러왔고, 애완견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하다. 하지만 서양 여러 나라들은 과거게 개를 먹기는 했지만, 애완견 역사가 꽤 긴 편이다. 사실 이러저런 논리를 가져다 붙여 봐야 핵심 논리는 결국 '개는 인간 의 친구다' 라는 것이다. 내가 행동대장 아줌마 말에 조목조목 반박했듯 그들이 말하는 다른 논리는 억지로 갖다 붙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1. 개를 개 패듯이 죽이는 것은 잔인하다. -개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는 편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그럼 편하게 죽이면 될 것 아닌가? 과거에는 육질을 좋게 한다며 장정 몇 명이 몽둥이로 패서 죽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은 도살장 에서 고압전류를 흘려 단번에 죽인다. 만약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일부러 고통스럽게 죽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 2.개를 잡아먹으면 개가 불쌍하다. -세상에 잡아먹어서 안 불쌍한 동물이 있나? 소 정수시를 해머로 때려죽이는 것도 불쌍하고, 닭의 목을 비틀어 죽이는 것도 불쌍하다. 이런 주장은 모든 동물에게 해당하는 만큼 개고기 반대 논리로는 무척 부적절하다(육식 반대 논리로는 매우 적절하다). 3. 개고기 말고 다른 고기를 먹어라. -차라리 식용 고기를 돼지고기 하나로 통일하자 그래라. 4. 개는 지능이 높아 다른 동물과는 다르다. -개보다 지능이 높은 동물들은 얼마든지 있다. 돼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살을 할 만큼 인간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지능으로 먹을 동물, 먹지 말아야 할 동물을 구분하자는 건가? 그렇다면 아이큐 몇을 기준으로 구분할 건가? 그기고 아이큐 미달로 먹어야 할 동물로 포함된 종 중에 이상하게 아이큐 높은 개체가 하나 포함되어 있으면, 얘는 어떻게 할 건가? 5. 다른 나라들이 반대한다. -다른 나라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해야 하나? 대한민국이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냐? 결국 핵심 논리로 남은 것은 '개는 인간의 친구다' 하나뿐. 애완동물로 가장 많이 애용되는 것이 개다. 부유한 선진 서양 국가 들의 경우 상당수 가정이 개를 기르고 있을 정도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는 짐승이 아닌 가족이다. 일종의 의인화(擬人化)의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개고기를 먹는 것은 인육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는 여러 만화나 영와 등에서 의인화가 많이 되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개를 더욱 인간처럼 여기게 된다. 과거게 '꼬마 돼지 베이브' 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베이브라는 돼지가 주인공으로, 영화 내에서 그 돼지는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말했다. 이 영화를 본 일부 어린아이들은 한동안 돼지고기를 먹지 못했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동물(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지만)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든 돼지든 처음부터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지 말아야 할 동물 은 없다. 다만 인간이 동물을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지 말아야 할 동 물로 나눈 것뿐이다. 이러한 구분은 당연 문화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힌두교도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고,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는 그 동물들이 원래 먹지 말아야 할 동물이기 때문이 아니 다. 오랜 세월에 걸친 그들의 문화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대부분 힌두교를 믿고 있으며, 힌두교는 소를 숭상한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차도에서 소가 드러누워 있어도 소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를 몰고, 소가 사람이 다니는 거리를 다녀도 사람이 소를 비껴간다. 그리고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렇게 소를 잡아먹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인도의 문화적,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인도는 한발과 장마가 번갈아 나타나는 지역이다. 농사를 망치면 먹을 것이 없어 소를 잡아 먹다보니, 나중에 밭갈이를 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나무가 없는 들판에서는 연료를 구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소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가 있으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밭을 갈 수 있고, 소똥은 연료로 사용할 수 있고, 젖을 짜서 먹을 수도 있다. 소는 우유와 연료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인도의 토양과 기후에 맞는 가장 싸게 먹히고 효율 좋은 동물이다. 그래서 소를 잡아먹지 않도록 종교적으로 소를 신성시 했다. 하지만 기계 문명이 발달한 지금은 굳이 소에 기댈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소를 잡아먹지 않고 신성시 하는 이유는 그러한 사상 이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도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도 이와 유사하다. 코란 (Koran: 이슬람교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죽은 고기과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살되지 아니한 고기도 먹지 말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라 했거늘 하나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를 충만하심이라. 이 역시 단순한 종교적 이유가 아닌 문화적, 지리적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슬람교도들이 주로 분포해 있는 중동지방은 덥고 건조한 지역이다. 사람이 살아가기도 힘든 척박한 이 지역에서 돼지는 사육하기에 사치스러운 동물이다. 돼지는 인간이 먹는 곡식을 주 먹이로 하기 때문에 곡물이 부족한 사막 지형에서 인간과 경쟁 관계에 있다. 그리고 돼지는 체질적으로 체온 조절을 위해 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마실 물도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 돼지한테까지 물을 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돼지는 낙타, 말, 소 등과는 다르게 노동력도 얻을 수 없다. 다른 동물들은 고기 외에 부가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돼지는 고기 외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리고 단지 고기를 얻기 위해 그러 한 희생을 감내한다는 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종교적으로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했다(그 증거 로 이슬람교와 사이가 안 좋은 유대교도 돼지고기를 금했다. 어쨌거나 같은 중동지방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가 흘러 사정이 나아진 지금도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힌두교도들이 소고기를 먹지 말라고 강요한다면, 그런 옳은 일일까? 이슬람교도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문화 사람들에게 도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강요한다면, 그건 옳은 일일까? 아까도 말했듯이 요즘엔 애완용 돼지도 많이 보급되어 있다. 이 애완용 돼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집집마다 한 마리씩 기르게 되면 어떨까? 그래서 모든 한국인들이 돼지를 친구나 가족처럼 여기게 된다면? 그럼 우리나라는 전 세계를 상대로 돼지고기를 먹지 말 것을 주장해 야 하나? 돼지고기를 먹는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을 야만인이라고 욕해야 하나? 개도 인간의 친구고, 돼지도 인간의 친구고, 심지어는 달팽이도 인간 의 친구다. 왜 그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사실 난 개고기에 대해 별 생각 없는 사람이다. 개고기를 특별히 좋 아하는 것도 아니고, 몸보신에 환장하지도 않았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고, 아까 행동대장 아줌마의 헛소리대로 다른 고기를 먹어도 별 상관없다. 개고기를 역겨워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의 입장 역시 이해해 줘야 한다. 개고기는 담배와도 같다. 자신이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에게 피우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자신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해서 담배를 피 우는 사람에게 끊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꺼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흡연실에 쳐들어가서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끄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개고기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개고기를 싫어하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서 개고기를 먹는다면, 다른 곳으로 가서 먹어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보신탕집에 쳐들어가서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자신의 가치관을 정당한 논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이런 인간들을 보면 심하게 짜증이 난다.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옳다, 라는 논리가 말이 되냐? "여기서 말도 안 되는 땡깡 부리지 마시고 프랑스에 가서 브리지트 바르도랑 쎄쎄쎄나 하세요. 사탕 안 준다고 우는 꼬마애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더불어 사는 사회 몰라요?" "푸하하~!"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이제 아예 대놓고 낄낄 웃었다. 할 말을 끝마 친 나는 행동대장 아줌마와 시위하던 사람들을 보았다. 행동대장 아줌마는 자신의 논리가 철저히 반박 당하자 목청껏 소리 를 질렀다. "어쨌든 개고기는 안 돼!" "......" 나이로 미는 게 안 되니까, 목소리로 미는 건가? 목소리 크면 이기는 줄 아나? 어차피 난 할 말 다 했다. 그리고 이렇게 '무조건 안 된다'라고 억 지를 쓰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난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뭐 좋을 대로 하세요. 굳이 흡연실까지 와서 담배연기를 맡고 싶 다는데 제가 어쩌겠어요?" 난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이분들은 이 삼복더위에 땡볕 아래서 시위를 하고 계십 니다. 이분들이 힘내서 계속 시위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격려의 박수 한번 쳐줍시다!" 내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일제히 박수를 쳤다. "푸하하~!" 짝짝짝! 순식간에 조롱거리가 된 시위대는 폭발할 듯이 분노했다. 난 그들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땡볕에 시위해봤자 지들만 손해지." 후후~ 이게 바로 일루니아 여사님께 배운 '다 들리도록 중얼거 리기 스킬' 이다. 듣는 사람 복장 뒤집어 놓는 효과가 있다. 난 줄의 끝에 섰다. 그러나 내 앞에 있던 아저씨가 말했다. "말 잘 들었네. 든는 내가 다 속이 시원해지더군. 그러지 말고 내 앞에 서게."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내 뒤로 가서 섰다. 그것도 모자 라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크레 소리쳤다. "여러분! 이 청년에게 순서를 양보합시다!" 그러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켜주었다. "먼저 드세요." "먼저 들게나, 젊은이." 난 모두의 격려와 환호를 받으며 당당하게 가게 안으로 입성(?) 했다. 가게 안 역시 더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보신탕을 먹고 있었다. 개고기는 따뜻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몸에 열이 나게 한다. 복날에 개고기를 먹는 이유는 더위로 열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이열치열이라고나 할까? 때문에 개고기 먹고 땀을 쭉 배라는 의미에서 일부러 냉방을 하 지 않은 것 같았다. 과연 정통이 있는 집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나저나 지니는 어디 있지? 아까 할머니 모시고 들어간 다음부터 보이지 않는다. 난 주위를 둘어보았다. 지니를 찾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니는 어디서 뭘 하고 있든 간에 눈에 띄기 마련이니. "개고기가 정말 미용에도 좋아요?" "물론입니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에 의하면 개고기는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가볍게 하며,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합니다. 속 이 편해지면 몸의 혈액 순환이 좋아지고, 혈액 순환이 좋아지면 노 폐물이 빠져나가 피부가 고와지지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그저 조금 흥미가 있을 뿐이지요." "오빠 너무 멋있어요." "혹시 시간 있으세요?" "이거 다 먹고 같이 놀러 갈래요?" "......" 저 인간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땡볕 아래 행동대장 아줌마와 설전을 벌이는 동안 이곳에 편하게 앉아 여대생들과 노닥거리고 있었단 말인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사일런스 백작님?" "아! 오셨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내가 호통을 치자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잠시 이분드로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 그래, 잘 하는 짓이다. 마침 자리가 났기에 나와 지니는 그곳에 앉았다. 저쪽 테이블의 여대생들이 자꾸만 지니를 향해 추파를 던진다. '우리 합석해요.'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흥! 누구 좋으라고 내가 합석을 해? 보신탕집에 왔으면 보신탕이나 먹을 것이지, 남자를 꼬시려 하 다니! 보신탕만 먹고 조용히 나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뭘 드실 건가요?" "보신탕 집에 왔으니 보신탕을 먹어야죠. 보신탕 두 그릇에 수육 한 접시 시키죠." "예." 지니는 주문을 했고, 잠시 후 왕할머니가 직접 음식을 날라 왔다. "이리 주세요." 난 재빨리 쟁반을 받아들었다. 이 무거운 것을 직접 들고 오시다니!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구. 청년들이 아니었으면, 큰 일 날 뻔했어."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아~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잘난 것 같다(자화자찬 중). "고기 듬뿍 넣었으니, 필요하면 또 말해. 얼마든지 줄 테니께." "예, 감사합니다, 할머님." 정말로 보신탕 안에는 고기가 듬뿍 들어 있었다. 그리고 수육 역 시 살코기를 중심으로 가득 담겨 있었다. 난 수저로 보신탕 국물을 떠먹었다. 국물이 구수하고 얼큰하기 그지없다. "어떠신가요?" "맛있네요. 개고기의 비린 맛이 전혀 없는데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탕이 너무 뜨거웠기에 우리는 먼저 수육을 먹었다. 뜨거운 수육 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여름에 먹는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지만, 개고니는 탈 날 일이 거의 없다. 개고기는 고단백질 식품인데다가, 삶으면 풀어지는 성질이 있 다. 풀어진 고기는 목구멍에 부들버게 넘어가고 소화가 잘 된다. 또한 기름기도 적고, 콜레스테롤도 적어 여름철 보양식으로는 최 고라 할 수 있다. 난 수육을 들깨를 섞은 초고추장에 찍어 살짝 데친 부추와 함께 먹었다. 이렇게 먹으니 술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차를 가져왔으니 술 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수육을 다 먹은 우리는 보신탕에 밥을 말아 먹었다. 몇 번 수저를 놀리자 금세 땀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한다. 난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후루룩 마셨다. 이렇게 맛있는 걸 혼 자서만 먹으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지니랑 같이 먹긴 했지만). 맛있는 걸 먹으면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 오른다. 하지만 루시아는 개고기를 안 먹으니...... "으음, 어린 엘프들 것만 사가면 되려나? 여기 포장도 되나요?" "물론 포장됩니다. 저도 수육을 좀 사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왜요? 집에 가서 또 드시게요?" "저희 누님께 가져다 드릴 생각입니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요?" "예. 저희 누님께서는 지금 임신 중이시니 더위에 지친 몸을 보 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루니아 여사님도 개고기 드세요?" "물론입니다. 저의 누님께서도 저와 입맛이 비슷하신지라." "......" 그 아줌마가 개고기를?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이 개고기를 먹는다 니 좀 이상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개고기를 혐오하는 역할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럼 어린 엘프들도 먹고 일루니아 여사님도 먹게 넉넉하게 사 가죠." 우리는 수육이랑 보신탕 싸들고 밖으로 나왔다. 시위대의 모 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런 꼴을 당하고도 계속 남아있을 리 없지. "가지요." 나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루시아가 나를 반겼다. "잘 먹고 왔어?" "응, 일루니아 여사님과 애들 주려고 잔뜩 싸왔어." 난 손에 든 봉지를 내보였다. 루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잘했어." 난 봉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일루니아 여사님 방으로 향했다. 부채를 부치던 인디는 날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히로님?" 일루니아 여사님도 날 보았기에, 난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말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동생이신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과 뱃속에 계신 두 따님을 위해 보신탕이랑 개고 기 수육을 좀 사왔습니다. 드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배가 고팠는데 잘 됐네요. 탕은 나중에 먹고, 수육부터 먹 기로 하지요. 수육은 뜨거울 때 먹어야 제 맛이니." "......" 뭘 좀 아신다. 식은 수육을 뭔 맛으로 먹겠나. 수육은 뜨거울 때 먹어야 제 맛이다. 개고기처럼 뜨거운 성질을 지닌 경우엔 특히 그러하다. "제가 담아올 테니, 계속 누워 계세요." "예. 그럼 부탁할게요, 인디님." 일루니아 여사님은 계속 누워있고, 대신 인디가 내 뒤를 졸졸 따 라와싿. 내가 봉지를 가리키자 인디는 탕은 커다란 냄비에 붓고, 수육은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작은 접시 하나를 꺼내 수육을 덜 었다. "야! 살코기만 다 집어가면 어떡해? 일루니아 여사님 입만 입이 냐?" 인디는 정말 치사하게도 가장 맛있는 부위만 골라 집어가는 만 행을 저질렀다. 내가 소리치조 인디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일루니아님은 임신 중이시잖아요." "......" 뭐야? 왜 이렇게 당당해? 흑~ 죄송해요, 히로님. 다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시와요. ......라고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어쨌든 인디는 계속해서 가장 맛있는 부위만 골라 담았다. 그리 고 그것을 일루니아 여사님께로 들고 갔다. 임신한 아내 챙기는 정성이 애틋하다. 과연 순정 드래곤이라고나 할까? "오빠 언제 왔어?" "방금 왔다." 나의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촌여동생인 영아가 나 타났다. "애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 나타나니?" "방금 일어나서 다들 씻고 있어." "그래?" 영아는 식탁 위에 놓은 음식들을 보며 소리쳤다. "앗! 그거 뭐야, 오빠?" "으응. 보신탕이랑 수육이야." "정말? 마침 배고팠는데 잘 됐다." 영아는 재빨리 식탁으로 다가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영아도 개고기 무지 잘 먹는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개 잡았을 때 같이 먹곤 했었지. "그런데 갑자기 웬 보신탕?" "오늘 말복이잖니?" "오늘이 말복이야? 헤에~ 그럼 나도 몸보신 좀 해야겠다. 안 그 래도 요즘 더워서 기력이 없었거든. 그래서 글도 잘 안 써지는 것 같아." "......누가 들으면 기력이 넘쳐날 땐 열심히 썼는지 알겠다. 그 치?" 영아는 수육을 데친 부추와 함께 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맛있냐?" 영아는 고기를 씹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막막 맛있어." "......" 막막? 라이의 전매특허를 영아까지 쓰다니! 뭐, 나도 가끔씩 쓰니 뭐라 할 입장은 아니군. "탕도 먹을 거냐?" "당연하지. 오빤 내가 보신탕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서 물어? 보신탕에 밥 말아 먹고 땀을 쭉 빼야 제대로 몸보신했다고 할 수 있지" 난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끓였다. 그 순간, 어린 엘프 들이 등장했다.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응. 막막 맛있는 냄새야." "뭘까?"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부엌으로 왔나 보다. "앗! 고기다!" "앗! 맛있는 거다!" "앗! 먹을 거다!" 어린 엘프들은 수육이 담긴 접시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난 재빨 리 어린 엘프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동작 그만!" 음식을 향해 달려들언 어린 엘프들의 한순간에 멈췄다. "손은 깨끗이 씻었어?" "네에~!" "한번 내봐." 어린 엘프들은 일제히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난 일일이 그 손 바닥을 검사했다. 방금 씻어서 그런지 깨끗하다. 게다가 은은한 비누 향까지 난다. 누가 교육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청결한 아이들이 아닐 수 없다. 후후~ 참고로 내가 교육시켰다. "오빠가 먹다가 니들 생각나서 사온 거야. 보신탕이랑 개고기 수 육이야. 맛있게 먹으렴." 젓가락을 집어 들던 아이들은 일제히 멈칫했다. 라이, 루, 루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개......" "고......" "기......?" "응. 뭐가 잘못 됐니?" 아이들은 일제히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새하얀 아이들의 얼굴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영아도 놀랐 는지 젓가락직을 멈추었다. "우에에엥~!" "으아아앙~!" "엉엉~!"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 엘프들. 난 당황해 물었다. "왜, 왜들 그러니?" 아이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나에게 매달렸다. "우엥~ 우엥~ 어떻게 귀여운 강아지를 먹을 수 있어요?" "으앙~ 으앙~ 오빠는 인간도 아니에요." "엉엉~ 형 나빠요." "......" 나의 실수다! 애들이 개고기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깜빡하다니.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어린 엘프들이 못 먹는 음식이 있다는 사실은 나도 지금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애들이 개고기를 싫어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미안해, 얘들아." "우엥~ 우엥~ 강아지가 불쌍해요오." "으앙~ 으앙~ 강아지 먹지 마세요오." "엉엉~ 강아지는 먹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 그래. 오빠가 다 잘못했어." 난 아이들을 일단 거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히고 달래 주었다. "오빠가 앞으로 다시는 개고기 먹으로 안 할게. 그러니까 울지 마, 얘들아." 아이들이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치자 난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영아는 날 보며 물었다. "안 먹겠대?" "응."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겠대?" "나도 모르지." "좀 아깝다. 같이 먹으면 좋은데." "어쩌겠니? 먹기 싫다는 애들에게 억지로 먹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너나 많이 먹어." "응." "일단 수육 먹고 있어. 보신탕은 덜어 놓을 테니." "응. 고마워, 오빠." "......" 고마우면 집세 좀 가불해주면 안 되겠니? 요즘 이 오빠의 사정이 별로 안 좋아서...... 그라저나 라이, 루, 루비가 개고기를 못 먹을 줄이야. 못 먹는 거 빼고는 다 먹는 어린 엘프들. 애들이 못 먹는게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의외의 반전이라고나 할까? * * * * 라이, 루, 루비는 소파에 앉아 훌쩍거렸다. "훌쩍~ 어떻게 귀여운 강아지를 먹을 수 있어?" "훌쩍~ 맞아. 강아지는 먹는 게 아니란 말이야." "훌쩍~ 형은 나빠." "라이는 이제부터 강아지를 먹는 나쁜 오빠랑 안 놀 거야." "루비는 귀여운 강아지를 먹는 오빠가 싫어졌어. 루비도 오빠랑 안 놀아줄 거야." "이제부터 형과 놀지 말고 누나랑만 놀자." "응. 오빠랑 절대 안 놀 거야." "루비도." 어린 엘프들은 눈물을 닦으며 히로와 안 놀아주겠다는 결의를 다 졌다. 그런데 자꾸만 코를 간질거리는 냄새가 신경 쓰였다. 부엌에 서 풍겨오는 보신탕 끓이는 냄새였다. 구수하면서도 군침 도는 냄새에 어린 엘프들은 자신도 모르게 침 을 삼켰다. 꿀꺽! 누구 침 삼키는 소리가 이렇게 큰 걸까? 어린 엘프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하나같이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라이 아니야. 라이는 멍멍이탕 같은 거 싫어해." "루, 루비도 아니야. 루비는 멍멍이탕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나, 난 멍멍이탕 먹느니 굶을래." 꼬르륵! 이번엔 누구 뱃속에서 난 소리일까? 루와 루비는 동시에 라이를 노려보았다. 라이는 두 손으로 배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라이 너 강아지 고기랑 멍멍이탕 먹고 싶은 거야?" "아까 먹기 싫다 그랬잖아?" 라이는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얘들아. 라이는 강아지 고기랑 멍멍이탕 막막 싫어. 이건 그냥 배가 소파서 난 소리일 뿐이야. 라이는 저래 강아지 고기 랑 멍멍이탕 안 먹을 거야." "정말이지?" "진짜지?" "응. 라이는 착한 엘프니까 거짓말 안 해." "우리 강아지 고기랑 멍멍이탕 먹지 말자고 약속하자." "형이 먹으라고 강요해도 절대 먹지 말자." 어린 엘프들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멍멍 이탕의 냄새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셋의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셋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 이 침을 삼켰다. 꿀꺽! 그 순간, 라이레얼과 카르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라이레 얼은 더운지 연신 탱크탑의 목 부분을 잡고 흔들었다. 카르는 라이 레얼이 더워하는 것을 알기에 평소처럼 매달리지는 않았다. 하지 만 찰싹 달라 붙어있는 것은 여전했다. "응? 이게 웬 맛있는 냄새지?" "부엌 쪽에서 나는 것 같아요, 언니." "마침 배고팠는데 잘됐다." "예. 빨리 가서 먹어요, 언니." 라이레얼과 카르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어린 엘프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라이레얼 언니랑 카르 언니도 강아지 고기랑 멍멍이탕 먹으려 나봐." "응. 루비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 "라이레얼 누나랑 카르 누나도 나빠." 라이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라이는 귀여운 강아지를 먹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루비도 따라서 일어섰다. "루비도!" 둘이 일어서자 루도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나도!" "우리 모두 부엌으로 가서 귀여운 강아지를 먹는 것에 대해 항의 하자." "응. 루비는 라이 생각에 따를래." "나도 같이 갈래." 마음을 하나로 모은 어린 엘프들은 항의 방문을 위해 다 같이 부 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 난 국자로 보신탕을 떠서 그릇에 담아주었다. 영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수육은 그만 먹게?" "많이 먹었어." "다 먹어."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어?" "......" 그건 그렇다. 어디까지나 어린 엘프들 주려고 사온 거기 때문에 양이 좀 많다. 아니, 좀 많은 게 아니라 무지 많다. 개 한 마리 정도? 그런데 어린 엘프들이 안 먹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사올 걸. 이 많은 걸 누가 다 먹는다냐? 영아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헤헤~ 맛있다." "정말 맛있어?" "응. 개고기의 비린 맛도 전혀 안 나고, 국물이 구수하면서도 얼 큰해. 여기에 밥 말아 먹으면 딱이겠다." 영아는 계속 호호 불어가며 국물을 떠먹었다. 그리고는 이내 밥 까지 말아 먹기 시작했다. 영아의 앞짱구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긴 이 무더위에 글 쓰느라 지쳤을 테니, 이번 기회에 몸보신 좀 해야지. "......" 생각해보니 영아 방은 엄동설한 아니었나? 돈이 썩어나는지 아예 에어컨을 풀 가동하더만. 나도 전기세 걱정 없이 에어컨 좀 빵빵하게 틀어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여기 있었네, 히로. 나 누구게?" "......" 이 요염한 목소리의 정체는? 난 내 몸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 며 입을 열었다. "라이레얼이잖아요." "후후~ 맞았어." 라이레얼은 팔을 풀었고, 나는 라이레얼의 품을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시원한 복장을 한 라이레얼과 카르가 서 있는 것이 보였 다. 카르는 예의 얼려죽일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언니를 끌어안다니! 죽여 버리겠어!' ......라고 말하는 듯한 카르의 눈빛. 카르의 얼려죽일 듯한 눈빛 덕분에 더운 여름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영아는 라이레얼을 발견한 순간 수저를 내려놓고 라이레얼에게 달려들었다. "라이레얼 언니이~!" 마치 라이가 '오빠아~!' 라고 소리치며 내 품으로 달려드는 모 습과 흡사하다. 영아가 라이레얼의 품에 안기려는 순간, 카르가 재빨리 영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의 언니에게 접근하지 마." 카르가 싸늘하게 노려보며 소리치자 영아는 지지 않고 맞섰다. "라이레얼 언니과 왜 니 언니야? 너 정말 웃긴다." 카르의 눈빛과 영아의 눈빛이 충돌했다. 순간, 허공에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다. 여자끼리의 눈싸움이라니! 보기 드문 광경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난 누굴 응원해야 하는 거지? 카르가 좀더......아니, 훨씬 예쁜 카르를 응원해주고 싶다. 하지 만 영아는 나의 사촌여동생. 아아~ 미모냐, 핏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잠깐. 누굴 응원해야 할 게 아니라, 말려야 하잖아! 내가 말려봐야 씨도 안 먹힐 게 뻔하다. 난 라이레얼에게 말했다. "이러다가 일 나겠어요. 라이레얼이 좀 말려보세요." "알았어, 히로." 라이레얼은 둘 사이로 나섰다. "둘 다 그만둬." "하지만 언니, 쟤가 감히 언니를......" "아니에요, 언니. 저는 언니를......" 카르와 영아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이레얼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만두면 나중에 키스해줄게." "예, 언니." "당장 그만둘게요." 카르와 영아는 언제 싸웠냐는 듯 웃으며 라이레얼의 양쪽 팔에 매달렸다. 카르와 영아를 달래는 라이레얼의 실력이 대단하다. 이 정도면 라이와 루비를 달래는 나의 실력과 비견될 만하다 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뭐야, 히로?" "보신탕이랑 개고기 수육이에요. 좀 드셔보시겠어요?" 내 말에 라이레얼은 깜짝 놀랐다. "개고기?" "예. 뭐가 잘못 됐나요?" 설마 라이레얼도 개고기를 싫어하는 건......?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라이레얼의 눈치를 살피는데, 라이레얼이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꺄아! 우리 히로 최고! 내가 개고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안 그래도 요즘 개고기가 먹고 싶었는데, 나 먹으라고 일부러 사온 거야?" "아니, 꼭 그렇지는 않지만서도......" "훌쩍~ 감동이야, 히로. 요즘 내가 몸이 허해진 걸 알고 몸보신 하라고 개고기까지 사오다니. 신경 안 쓰는 척하며 이렇게까지 날 신경 쓰고 있었구나." "아니, 그게......" "됐어. 더 이상 말하지 마. 말하지 않아도 히로 맘 다 아니까. 고 마워, 히로. 나 히로를 위해서라도 맛있게 먹을게." "......예." 라이레얼이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카르와 영아는 재빨리 라이 레얼의 양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먼저 수육부터 드세요. 탕은 좀 나중에 드시구요." "응. 알았어, 히로." 라이레얼은 수육을 집어 들었다. 난 카르를 보며 말했다. "너도 좀 먹어." "니가 말 안 해도 먹을 거야." 카르도 수육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장을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카르는 개고기를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잘만 먹는다. 뭐, 몬스터도 잡아먹는데, 개고기가 대수겠냐? 라이레얼은 천천히 고기를 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난 조심스럽 게 물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라이레얼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응. 맛있어, 히로. 최고야! 개고기는 뭐니 뭐니 해도 이렇게 삶아 먹는 게 제일이지. 특히 별 다른 양념을 첨가하지 않고 비린맛만 제 거하는 게 중요해. 괜히 이러저런 양념을 하면 개고기의 참 맛이 변 질될 수도 있으니까." 난 라이레얼의 말에 동감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라이레얼이 뭘 좀 아시는군요. 맞아요. 개고기는 그 본연 의 맛을 즐기는 게 중요하죠. 아! 소금 드릴까요? 데친 부추와 함께 장을 찍어 먹는 것도 좋지만, 소금만 살짝 찍어 먹으면 진정한 개고 기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죠." "응. 소금 꺼내줘, 히로. 아! 혹시 소주 없어? 이거 먹으니까 소주 생각난다." "물론 있지요! 개고기에 소주가 빠져서야 되겠어요?" 난 종지에 소금을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다. 그리고 찬장에 있는 소주잔도 꺼냈다. "따라줘, 히로." "예." 난 기꺼이 라이레얼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나도, 오빠." "나도." 난 영아와 카르의 잔에도 소주를 따라주었다. "히로 건 내가 따라줄게." 라이레얼은 소주병을 건네받고 내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주었다. "그럼 건배!" "건배!" 챙! 우리는 잔을 살짝 부딪친 다음 단숨에 소주를 들이켰다. "캬아! 죽인다!" 라이레얼은 수저로 보신탕 국물을 떠먹은 다음 수육을 집어먹었 다. 술이 들어가니 자연히 안주가 땡긴다. 마침 배도 어느 정도 꺼 졌기에 나도 개고기를 집어먹었다. 그 순간, 어린 엘프들이 부엌으로 쳐들어왔다. "귀여운 강아지를 먹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에요!" "맞아요. 옳지 못해요!" "당장 그만두세요!" 스크럼까지 짠 채 강력하게 항의하는 어린 엘프들. 라이레얼은 젓가락으로 어린 엘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들은 뭐야?" "신경 쓰지 마세요, 라이레얼." "응. 나도 신경 안 써." 우리는 어린 엘프들이 뭐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개고기를 먹었다. 그것도 그냥 먹은 것이 아니라 보란 듯이 더욱 맛있게 먹 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어린 엘프들의 항의가 멈췄다. 어린 엘프 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 뭐야? 침을 왜 흘려? 귀여운 강아지를 먹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동물보호협회 스런(?) 멘트를 날린 어린 엘프들이 우리가 개고기 먹는 모습을 보 며 침을 질질 흘리다니. "왜들 그러니? 설마 먹고 싶은 거니?" 내 말에 어린 엘프들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입 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낸 다음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오빠. 라이는 강아지 고기 같은 건 먹고 싶지 않아 요. 정말이에요." "루비도 멍멍이탕 같은 거 싫어해요.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요." "저, 저는......" 루는 잠시 라이와 루비의 눈치를 살폈다. 심하게 갈등하는 모습. 의리를 택할 것이냐, 개고기를 택할 것이냐? 잠시 후, 루는 마음의 결정을 한 듯 눈을 번쩍 뜨며 입을 열었다. "전 강아지 고기랑 멍멍이탕 별로 안 싫어해요." 루의 말에 라이와 루비는 깜짝 놀랐다. 라이와 루비는 눈을 치켜 뜨며 루를 추궁했다. "아까는 강아지 고기랑 멍멍이탕 막막 싫다고 했잖아?" "어떻게 강아지 고기랑 멍멍이탕을 별로 안 싫어한다는 말을 할 수 있어?" "아까 약속까지 했잖아." "우리를 배신하는 거니?"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 따지고 드는 모습이 꽤나 무섭다. 라이와 루비가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자 루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그치만 저거 되게 맛있어 보인단 말이야. 그, 그리고 강아지 라고 해서 꼭 먹지 말아야한다는 법은 없잖아." "푸하하~!" 루의 말을 들은 나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루를 데려 다가 내 옆에 앉혔다. "우리 루는 참 용기 있는 엘프구나. 이 형은 그동안 루가 이 렇게 용기 있는 엘프인 줄 몰랐단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싶다고 말 하는 것은 용기 있는 엘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리고 용기 있 는 엘프는 맛있는 걸 먹을 자격이 있지. 자, 어서 먹으렴." 난 루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었다. 잠시, 라이와 루비의 눈치를 살피던 루는 수육을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어때?" 루는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맛있어요! 쫄깃쫄깃하면서도 살살 녹아요!" "후후~ 그게 바로 강아지 고기의 특징이지. 많이 먹으렴. 아! 여 기 멍멍이탕도 한번 먹어봐." 루는 수육을 집어먹으며, 보신탕 국물을 떠먹었다. 한번 개고기 맛을 본 루는 정신없이 손과 입을 놀렸다. 라이와 루비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약속을 어기고 강아지 고기와 멍멍이탕을 먹은 루는 나쁜 엘프 야!" "맞아! 루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엘프야!" "우리는 절대 먹지 말자, 루비야." "응, 라이야. 루비는 절대로 먹지 않을 테야."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는 라이와 루비. 제법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하지만 과연 그 결의가 지켜질 수 있을까? 루는 누가 뺏어먹을 새라 열심히 고기를 입에 우겨넣었다. 그러 다가 목이 막히면 탕을 후루룩 마셨다. 우리는 소주를 마시며 수육 과 보신탕을 즐겼다. 점점 줄어들고 있는 수육. 라이와 루비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강렬한 항의를 담고 있던 아까의 눈빛과는 180도 바뀐 눈빛. '우리도 개고기 먹고 싶어요오~!'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 안 먹는다며? 풀려있는 눈, 주르륵 흘러내리는 침. 꼬르륵! 게다가 배고픔을 알리는 효과음까지! 그러게 처음부터 먹을 것이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니? 난 라이와 루비 보란 듯이 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소리로 물 었다. "우리 루 맛있어?" 루는 입에 잔뜩 밀어 넣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예, 형. 대따 맛있어요." "얼마나 맛있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 먹어 봐 요." "돼지고기랑 소고기랑은 전혀 다른 맛이지?" "예. 완전 달라요." 루의 힘찬 대답에 라이와 루비의 입가에 흐르는 침의 양이 두 배 로 증가했다.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 정도다. 먹고 싶으면, 그냥 먹고 싶다고 할 것이지...... 라이와 루비의 모습은 마치 며칠 동안 쫄쫄 굶은 불쌍하고도 처 량한 엘프 같았다. 조금 있으면 눈물까지 쏟을 것 같다. "같이 먹자, 라이야 루비야. 응?" 내 말에 라이와 루비는 정신을 차리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먹을까?' '먹자. 루비는 막막 먹고 싶단 말이야.' '라이도 막막 먹고 싶어.' '이대로 있으면 루가 다 먹을지도 몰라.' ......대략 이런 의미를 담은 눈빛들이 오고 간다. 하지만 입에서 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가, 강아지는 먹는 게 아니야. 그, 그치, 루비야?" "으응. 무, 물론이야, 라이야." "가, 강아지 먹는 건 나쁜 일이야. 그, 그치, 루비야? "으응. 막막 나쁜 일이야. 강아지 먹는 오빠랑 루는 막막 나빠." "우, 우리는 절대 강아지 먹지 말자." "으응, 저, 절대 먹지 말자." "......" 아주 쇼를 해라. 먹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대화를 나누다니. 가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두 엘프. 쟤들에게도 저런 면이 있을 줄이야...... 장난을 좀 쳐볼까? 난 화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루비를 향해 소리 쳤다. "뭐? 강아지 먹는 오빠가 막막 나쁘다고? 루비 너 그게 오빠한테 할 소리야? 오빠가 강아지를 먹든 말든 루비가 뭔 상관인데? 안 되 겠어. 루비 오늘 좀 혼나야겠어." 난 루비를 한 손으로 번쩍 안아 들고 식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루비를 내 무릎 위에 앉힌 다음 젓가락으로 수육을 집어 들었다. "루비는 강아지 먹는 게 막막 싫다고 했지? 그러니까 벌로 강아 지를 먹게 할 거야. 알았어?" 순간 루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침이 꿀꺽 넘어갔다. 루비는 잠 시 고개를 돌려 라이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안 돼요, 오빠. 루비는 강아지 고기 먹기 싫어요오." '빨리 먹어주세요오' 라는 표정을 지은 채 무의미한 저항을 시도 하는 루비. 난 억지로 루비의 입을 벌렸다(라기보다는 루비가 알아서 벌렸다). "이건 오빠가 내리는 벌이야. 싫다고 해도 소용없어." 난 고기를 루비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벌이니까 그냥 삼키지 말고 꼭꼭 씹어. 꼭꼭 씹지 않으면 오빠 가 더 혼내줄 거야." 굳이 이런 말이 없어도 루비는 꼭꼭 씹었다. 입을 오물거리는 루 비의 눈동자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막막 맛있어요!' 라는 눈빛. 난 씨익 웃음을 지었다. "루비 어떻게 할래? 좀더 벌 받을래, 아니면, 반성하고 다시는 안 그럴래?" 루비는 고기를 꿀꺽 삼킨 다음 말했다. "루비가 잘못했어요, 오빠. 루비는 막막 나쁜 엘프에요. 루비를 좀더 혼내주세요." "그래? 그럼 오빠가 계속 혼내줄게." 난 개고기를 계속 루비의 입에 밀어 넣었다. 탕도 먹여주었다. 정 신없이 수육과 보신탕을 먹는 루비. "루비를 계속 혼내주세요, 오빠." "응. 오빠가 계속 혼내줄게, 루비야."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수육. 루와 루비가 본격적으로 먹 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수육이 줄어들수록 라이의 표정이 점점 초조하게 변했다. 이제 아예 울상까지 짓고 있다. 이제 슬슬 한계인 것 같은데...... "우에에엥~!" 역시! 난 정말로 왜 우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이에게 물었다. "응? 우리 라이 왜 우니?" 라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말했다. "우엥~ 우엥~ 라이도 강아지 먹는 오빠 나쁘다고 말했는 데......오빠는 루비는 벌주고......라이도 오빠 무릎 위에 앉아서 억지로 강아지 먹는 벌을 받고 싶단 말이에요......우에에엥~." 난 루비를 옆 의자에 앉히고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에게 다가갔다. "그랬구나. 우리 라이도 벌 받고 싶었구나." "우엥~ 우엥~ 라이도 나쁜 엘프란 말이에요. 라이가 루비보다 더 나쁜데......루비만 혼내는 게 어딨어요? 우에에엥~ 라이도 혼 내주세요오." 난 라이를 번쩍 안아들고 달래주었다. "그래 그래. 오빠가 잘못했어. 루비만 벌줘서 우리 라이가 서운 했나 보구나?" 라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라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 라이도 벌 받자. 알았지?" "훌쩍~ 예. 라이도 벌 받을래요." 난 라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맛있니?" "네에~!"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긴 보신탕. 어린 엘프들은 탕에 밥을 가득 말아 먹는 중이었다. 수육은 어느새 전부 먹어치웠다. 지금 부엌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와 어린 엘프들뿐. 라이레얼과 카르, 영아는 2차를 갔다. 다시 말해 냉장고에 있는 캔 맥주를 전부 꺼내서 영아의 방으로 올라갔따. 아마 지금쯤 술파 티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1차는 소주, 2차는 맥주인가? 그럼 3차는 폭탄주? "더 주세요오~!" 일제히 빈 그릇을 내미는 어린 엘프들. "......" 멍멍이탕이 싫다고 할 땐 언제고...... 난 그릇에 보신탕을 가득 담아주었다. 그리고 밥도 가득 말아주 었다. 어린 엘프들은 다시 얼굴을 박고 먹기 시작했다. 난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많이 먹으렴. 탕은 많이 있으니까." "헤헤~ 멍멍이탕 막막 맛있어요." "맞아요, 멍멍이탕 최고에요!" "강아지 고기도 맛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먹는 어린 엘프들. 역시 애들이 못 먹는 것은 없단 말인가? "......" 뭐, 당연한 건가? 그나저나 애들 너무 잘 먹는다. 나중에 또 사달라고 하면 어쩌지? 개고기는 다른 고기에 비해 가격이 꽤 비싼데...... 아이리스 2부 12권 Story 28 재개점 준비 "오빠아~!" "혀엉~!" 힘차게 외치며 내 앞으로 우르르 몰려드는 라이, 루, 루비.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나는 어린 엘프들을 힐끔 보며 물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니?" 뭔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지만, 막상 얘 기를 들어보면 전혀 큰일이 아니다. "오빠, 오빠, 여기에요......" "여기? 여기가 어딘데?" "이 건물 말이에요." "응? 이 건물이 왜? 건물에 헬기장이라도 들어선대?" "아니요. 아래층에서요......" "아래층에서 석유라도 터졌대?" "그게 아니에요, 형." "그게 아니면 대체 뭔데?" 어린 엘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동무를 하며 합창했따. "우리 유치원이 생겼어요오~!" "......응?" 우리 유치원? "그게 뭔 말이니? 니들 유치원이라니? 유치원 원장이 명의를 니 들 앞으로 옮겨주겠대?" "아니에요, 오빠." "그럼 뭔데?" "나와 보시면 알아요." 난 어린 엘프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제야 아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건물 3, 4층에는 어느새 유치원 간판이 걸려있었다. 유치원의 이 름은...... 엘프 유치원 "......" 뭐야, 이건? 인간 유치원도 아니고, 드워프 유치원도 아니고, 드래곤 유치원 도 아닌, 엘프 유치원이라니! 이 세계에 엘프가 어디 있다고 엘프 유치원이야? 물론 우리 가족 중에는 순종 엘프가 다섯 명이나 있고, 하프엘프 도 한 명이나 있다. 하지만 루엔과 갈리온드, 라이레얼은 어른이고, 라이, 루, 루비도 유치원 다닐 나이는 지났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엘프 유치원이라고 이름을 지은 거지? 설마 우리 집에 엘프가 산다는 것이 들통 났나? 아니면, 라이, 루, 루비의 정신 연령이 유치원생 수준이라는 게 들통 났나? 그래서 일부러 엘프 유치원이라고 이름을 지은 건가? 내가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데 지니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시는지요?" "저 유치원 이름 때문에요. 혹시 알고 계셨나요?" 내 물음에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몇 가지 이름을 후보로 올리더니 결국 엘프 유치원으로 정 한 듯합니다." "무슨 뜻으로 그렇게 정했대요? 설마 엘프만 원생으로 받겠다는 것은 아닐 테고." "물론 아닙니다. 엘프(Elf)는 요정족을 뜻하기도 하지만, 꼬마 요 정이나 장난이 심한 어린아이를 뜻하기도 하지요. 후자의 뜻으로 지은 것 같습니다." "결론은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엘프 유치원에도 엘프가 없다 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으음, 라이의 집에는 라이가 있는데, 엘프 유치원에는 엘프가 없 다니. 차라리 인간 유치원으로 이름 지을 것이지." 어쨌든 지들이 좋아 엘프 유치원으로 한다는데, 내가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이 유치원 언제부터 장사한대요?" "이미 원생 모집이 끝났습니다. 다음주부터 영업을 개시한다고 합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그럼 2학기부터 시작하는 셈인데, 원생을 어 떻게 모집했대요?" 일반적으로 유치원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1~2년 전에 다니기 마 련이다. 예전에는 보통 1년을 다녔으나, 요즘에는 조기 교육 열풍 으로 2년을 다니는 경우가 많다(2년 이상 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 근처에도 분명 유치원이 있고, 많은 부모들이 그곳으로 아이 들을 보내고 있다. 유치원은 학교와 마찬가지로 학기별로 구분이 되어 있고, 교육 프로그램도 그에 따라 운영된다. 그래서 특별한 일 이 없는 한 학부모들은 유치원을 바꾸지 않는다. "이 근처의 가장 큰 유치원은 '고구려 유치원' 입니다." "예. 저도 알아요. 저쪽 사거리에 있는 유치원이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얼마 전에 터진 사건도 알고 계십니 까?" "무슨 사건이 터졌는데요?" "유치원 원장이 먹다 남은 음식을 섞어서 만든 일명 '쓰레기죽' 을 원생들에게 먹였습니다. 한 학기 내내 오전마다 점심으로 나왔 던 남은 반찬과 현장학습 때 학부모가 싸준 도시락으로 죽을 만들 어 아이들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지니의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예?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원장이 영양죽이라고 속여 먹인 그 쓰레기죽으로 인해 그 동안 60여 명이 한 번 이상 병원에 입원을 했고, 100여 명의 아이들이 장염, 만성 장증후군, 식중독, 피부병 등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그중 심한 아이의 경우는 장염이 뇌수막염으로까지 진전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애들 가진 부모로서 화가 난다. 만약 라이, 루, 루비에게 그런 쓰 레기죽을 먹였다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고 그 원장을 쥐어 패 줬을 것이다. "......"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폭력은 일을 해결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그냥 골방에 가둬놓고 하루 세 끼 쓰레기죽만 먹이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학기 내내 쓰레기죽만 먹이면 정신 좀 차리려나? "그래서 그 원장은 어떻게 됐어요?" "과태료 100만원 처분을 받고 끝났습니다. 오히려 사실을 폭로 한 교사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죄로 고소한 상태입니 다." "예? 아니, 뭐 그런 인간이 다 있대요? 그 인간 제정신이래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을 지고, 진상을 규 명해야 할 구청은 한술 더 떠사 원장 편을 들며 학부모들을 윽박 질렀습니다. 심지어는 학부모들이 모인 대책위원회의 해산을 요 구하며, 민원과 주민 감사를 취소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학부모들 이 수차례 구청에게 항의했지만,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 요." "대한민국 국민으러소 보육과 교육에 대해 정부에 요구할 수 있 는 권리가 이렇게 일선 지자체에 의해 쉽게 무시되다니. 이런 상황 에서 여성가족부가 출산율 증가를 위해 캠페인을 벌인다는 것이 웃이네요. 무슨 양두구육도 아니고......" 양두구육(羊頭狗肉).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상대 를 기만하는 행위를 뜻한다. 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나라는 애 가진 부모가 죄인 이다. 애를 낳은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애를 낳지 말자고 캠페인을 벌이던가, 왜 뒷일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낳고 보라는 캠페인을 벌이는지 모르겠다. "그 일로 인해 고구려 유치원은 폐쇄되었고, 갈 곳이 없어진 원생 들이 엘프 유치원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어떻게 시기가 딱 맞아 들었 네요. 이런 경우가 흔치는 않은데......" "어떻게는 2학기에 유치원을 개원하려는 작가의 고육지책이 아 닌가 싶습니다." "사일런스 백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제 생각 역시 그러 합니다. 뭐, 이런 식으로라도 개연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가상하 네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저 나 그 고구려 유치원 원장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어떻게 쓰레기죽을 영양죽이라고 속여 애들에게 먹였을까? 애들 피부병 걸리고, 구토하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설마 자기 자식에게도 쓰레기죽 먹이나? 그 원장 나한테 걸렸으면 아주 제대로 손봐줬을 텐데. 부엌 쓰레기통 뒤져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로 맛있는 죽을 끓여줬 을 텐데. * * * * "예?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지니의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내 옆에 있는 루 시아도 마찬가지다. "정말이야, 오빠?" "물론입니다, 루시아 공주님."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도 놀랐다. "그럼 다음주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난 이제 아예 폐업한 줄 알았는데." 우리가 왜 이렇게 놀라는가? 그것은 지니가 한 말 때문이다. 그럼 지니는 무슨 말을 했는가? 그건 바로...... "다음주 유치원 개원 날짜와 맞춰 라이의 집을 재개점할 것입니 다." ......이거다. 라이의 집 재개점이라니! 2부 5권 초반에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때문에 인형가게가 잠시 휴업에 들어갔다. 2부 8권 초반에 리모델링이 끝나 집까지 이사했 다. 난 이때 바로 인형가게를 재개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러저 런 이유로 지체되었다. 그 인형가게가 드디어 재개점한다는 것이다! 아아~ 매우 감동적이다. "겨울에 휴업해서 여름에 문을 열다니. 그동안 참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그렇다.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심지어는 '라이의 집 망한 거 아니냐' 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이 소문은 라이의 집 개점 후 매출이 급감한 이 지역 인형가게들의 음해공작으로 판명나기도 했었다. 일부 독자들은 '히로 장사 안 하냐?', '돈 벌 만큼 벌었다는 거 냐?', '대출금은 드래곤 레어에어 털어온 보석으로 갚을 생각이 냐?' 등등의 항의 서한을 보내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기도 했다. 난 잠시 눈을 감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그 기간 동안 매출을 올리지 못해 빚이 늘어난 것은 슬프지 않 다. 다만 루시아와 하지 못했다는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뿐이구 나. 아아~ 라이의 동생은 언제나 등장하려나......아악!" 루시아는 내 옆구리를 꼬집고 비틀었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 통에 비견될 만큼 아프다. 난 옆구리를 부여잡고 문질렀고, 그런 나를 흘겨보던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흥!" "......" 도도한 루시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일이 순탄치 않을 것 같다. 라이 동생을 만드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인디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히로님. 라이님의 동생은 이미 일루니아님의 뱃속 에 있으니까요." 인디는 보란 듯이 일루니아 여사님의 배를 살짝 어루만졌다. 평 평하고 날씬하던 일루니아 여사님의 배는 어느새 살짝 부풀어 올 라 있었다. 헐렁한 옷을 입으면 별로 티가 나지 않지만, 이렇게 보 니 임신했다는 것이 확실히 티가 난다. 저 뱃속에 애가 둘이나 들어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잘 접혀져 있나? 나중에 애 낳으면 다리미로 펴야하는 거 아냐? 그나저나...... "너 지금 염장질 하는 거니? 너와 이 아줌마가 만든 라이의 동생 은 인정할 수 없어! 그것은 모조품에 불과해! 정품 라이의 동생은 오직 메이드 인 히로&루시아뿐이야! 그 외의 것들은 인정할 수 없 어!" 내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치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피식 웃으 며 말했다. "어머, 꿈도 크셔라." 그 말에 순간 분노가 폭발했다. "뭐라? 아줌마 말 다 했어?" "어머, 무서워요, 인디님." 일루니아 여사님은 짐짓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며 인디의 품에 안 겼다.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꼬옥 껴안으며 날 노려보았다. "......" 뭐야? 날 노려봐? 인디가? "그만하세요, 히로님. 절 괴롭히는 것은 괜찮지만, 일루니아님을 괴롭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요." 힐루니아 여사님이 임신하니 인디도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니가 용서 한 하면 어쩔 건데?" "그, 그건......" 어쩔 건지까지는 생각 못했나 보다. "응? 어쩔 건데? 응응? 빨리 말해봐." "흑......" 내가 계속 추궁하자 인디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모습을 본 일 루니아 여사님은 찢어죽일 듯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내 남편한테 무슨 짓이야, 뺀질아!" "뭐? 뺀질이? 초절정 꽃미남에 근로의욕이 투철한 아이언스 공작 에게 뺀질이라고 하는 게 말이 돼?" 일루니아 여사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흥! 뺀질거리는 얼굴만 봐도 재수 없어. 잘난 내가 참아야지 어 쩌겠어?" "뭐라? 아니, 이 아줌마가 진짜......" 내가 본격적으로 화를 내려는데, 루시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 다. 루시아는 눈 꼬리를 잔뜩 치켜 올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너 지금 임신한 언니한테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소리치면 뱃 속의 아기에게 안 좋다는 거 몰라? 너 정말 생각이 있는 거야, 없 는 거야? 뱃속의 아이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언니는 지금 임신 중 이니까 화나는 일이 있어도 니가 참아야 할 거 아냐? 뱃속의 아이 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니가 책임질 거야? 니가 책임질 거냐 고!" 루시아는 정말 목청껏 소리쳤다.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그녀 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저, 저기, 루시아......" 내가 말을 걸자 루시아는 째지는 소리로 반문했다. "왜?" 난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니 목소리가 제일 크거든." "......" "그냥 그렇다구." 루시아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챘는지 부끄러워하며 자리 에 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쏘아보며 한마디 했다. "아무튼 니가 나빠." "......응." 루시아와 결혼하면 앞으로 무지하게 고생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참고로 지금도 충분히 고생하고 있다). 뭐, 공주님과 결혼하는 건데 그 정도 고생쯤이야. "미안해, 언니. 뱃속의 애가 놀라지는 않았대?" "괜찮아. 우리 애들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우리 애들은 뺀질 거리는 누구 빼고는 다 좋아해." "......" 저 아줌마가 끝까지...... 애 낳으면 두고 보자. 그땐 정말로 피의 복수를...... 그런데 무슨 얘기하다 말았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니가 말해주었다. "가게 재개점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랬었죠. 그래서 다음주에 정말로 재개점을 한다는 건가 요?" "그렇습니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쳐 놓은 상태입니다. 서두른 다면 주말에도 재개점을 할 수 있겠으나, 일부러 유치원 개원 시기 와 맞췄습니다." "으음, 시너지 효과인가요?" "그렇습니다. 유치원의 특성상 부모가 직접 애들을 데리고 찾아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원이니만큼 많은 학부모들이 유치원생을 데리고 이곳을 찾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들을 노려 매출을 올리자는 건가요? 인형은 애들이 좋아하지 만, 돈은 부모가 지불하니?" "그럿습니다. 하나를 말씀드리면 열을 예측하시니, 감히 아이언 스 공작님께 말씀을 올린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입니다." "아하하~ 뭐, 송구스러울 것까지야. 저 잘난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었나요? 그러니 앞으로는 송구스러워할 필요 없답니다." 누가 사일런스 지니 아니랄까봐 기가 막히게 머리가 잘 돌아간 다. 가게 재개점 날짜를 유치원 개원 날짜와 맞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 "확실히 부모와 애들이 같이 있으면 인형 팔기에 좋지요. 게다가 아이들이 새로운 유치원에 입학하는 날인만큼 부모는 애들에게 무 언가를 선물해주고 싶어 할 테니. 잘하면 최대 매출을 올릴 수도 있 겠군요." 나는 지금 돈독이 올라있는 상태다.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면 영혼까지도 팔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열심 히 일할 각오는 되어 있다. "재개점 당일 유치원과 연계해 이벤트를 벌이는 것은 어떠신가 요?" "예? 이벤트요?" "그렇습니다. 유치원에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인형을 선물해주며 가게를 홍보하는 것입니다." "인형을 선물해주자구요? 그 말은 공짜로 인형을 나눠주자는 건 가요?" "그렇습니다. 조금 아까울 수도 있으나, 그로 인한 마케팅 효과 는 엄청 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大)를 위해 소(小)의 희생 이라고 생각하시길." "으음......" 나의 피 같은 인형을 공짜로 나눠주란 말인가? 하지만 이 역시 마케팅의 일환. 더 많은 손님을 끌어 모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못하겠는가? "오늘 부로 사일런스 백작님을 라이의 집 마케팅 담당 부서 부장 으로 임명하겠습니다. 따라서 마케팅에 관한 것은 전부 사일런스 백작님께 일임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유치원 측과는 얘기가 된 건가요?" "예. 제가 엘프 유치원 원장을 만나 여러 차례 얘기를 나눠본 결 과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라이의 집이 유명해지는 만큼 엘프 유치원도 많은 혜택을 볼 테니까요." "그렇지요." 요즘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많이 생겼다. 보통 멀티플렉스 영 화관은 백화점이나 쇼핑몰 등의 큰 건물 최상층에 위치해 있고, 그 아래층에는 음식점들이 몰려 있다. 이 음식점을 찾는 사람은 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다. 영화를 본 다음이나, 영화 시작까지 시간 이 남아있는 경우 밥을 사 먹는 것이다. 영화관이 잘 되면 잘 될수 록 근처에 있는 음식점들의 매출도 증가한다. 라이의 집과 엘프 유치원도 이와 비슷한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라이와 집과 엘프 유치원은 경쟁 상대가 아니다. 한쪽이 잘 될수록, 다른 한쪽도 잘 되는 공생 관계이다. 만약 엘프 유치원에 원생이 늘어난다면 라이의 집 매출도 증가할 것이고, 반대로 엘프 유치원에서 쓰레기죽을 먹이는 사건이 터지 면 라이의 집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공동 마케팅을 하는 것도 괜찮겠지. 윈윈(Win Win)전략이라고나 할까?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나요?" "재개점을 알리기 위해 지금부터 홍보에 나서야 합니다." "홍보요?" "예. 내일 새로운 간판을 달 예정입니다. 그에 맞춰서 홍보를 시 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단 말인가? 그동안 펑펑 놀았었는데. 정말 원 없이 놀았다. 매국노 나까무라 다케시가 남긴 보물을 찾 아 어린 엘프들과 함께 보물 탐험대를 조직해 모험을 떠나기도 했 고, 차도 뽑았고, 사채업자 박일현에게 복수하기도 했고, 어린이날 에는 어린 엘프들과 논데월드에 놀러가서 재밌게 놀기도 했고, 어 버이날에는 어린 엘프들에게 선물을 받기도 했고, 이사도 했고, 이 사한 지 삼 일 만에 '술 취한 루시아 겁탈 죄' 라는 누명을 쓰고 쫓 겨나기도 했고, 최모 편집자님 만나기도 했고, 일진회와 맞짱뜨기 도 했고, 루시아를 덮치려고도 했고...... 아아~ 가게 휴업하고 나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하지만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업무 일선에 복귀를 해야 한다. 열 심히 개미처럼 일해서 대출금을 갚아 나가야 한다. 루시아는 재개점을 기뻐하는 듯했다. "그동안 집에만 있어서 심심했는데, 잘 됐다." "일하는 게 힘들지 않아?" "힘들 게 뭐 있어?" "그래도 가게 보려면 힘들잖아."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딨어?" "......" 하긴 그렇다. 힘들다, 안 힘들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다. 하루 종일 택시를 몰아야 하는 택시기사도 힘들고, 공사판에서 막노동하는 일용직 인부도 힘들고, 스포트라이트 받으며 노래 부 르는 가수도 힘들고, 유명 유럽 구단에서 공차는 축구선수도 힘들 고, 심지어는 대한민국 국회의원도 힘들다. 책 써서 떼 돈 버는 영아만 해도 내가 보기에는 하루 종일 펑펑 노는 것 같은데, 본인은 힘들어 죽겠다고 난리다. '글 쓰는 게 너무 힘들어.' '마감 지키는 것도 힘들고, 편집자한테 독촉 받는 것도 힘들 어.' '작가는 왜 유급 휴가가 없을까?' '최모 편집자님은 이번에 휴가 받아서 해운대에 놀러갔다 왔다 던데.' 대체 뭔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뭐,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남들이 보기에 굉장히 편해 보이는 직업이라도 본인이 느끼기에는 힘들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 A모 항공 조종사 노조가 파업을 했다. 1년에 1천 시간 비행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너무 너무 힘들어서 비행기 조종하는 것에 지장이 생길 정도라고 한다. 그래 서 승객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파업을 했다고 한다. 직장인들이 주 5일제에 하루 8시간을 일한다고 하면, 1년에 휴가 빼고 약 2천 시간 정도를 일하게 된다(참고로 이건 어디까지나 대기업 을 비롯한 근무 조건이 좋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기준이다. 대다수 직장인들은 이보다 훨씬 많이 일한다). 그런데 그 반 정도 일하면서 임금은 두세 배 이상 받아가는 조종 사들이 정말 너무 너무 힘들어서 비행기 사고가 날 것 같다고 한다. 오죽하면 7월 최대 성수기에 파업까지 했겠는가? 오로지 승객의 안전을 위해 1년에 딱 한 번 있는 휴가를 해외로 떠나려는 수천 명의 승객들의 발을 묶고, 하루라도 빨리 외국으로 보내야하는 수출 화물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그럼 그동안 A모 항공사의 비행기를 탄 승객들은 안전하지 않았 다는 건가? A모 항공사는 승객의 안전이 위협 받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운항 스케줄을 짰고, 조종사들은 승객의 안전이 위협 받는 것을 뻔히 알 면서도 비행기를 몰았고, 승무원들은 승객의 안전이 위협 받는 것 을 뻔히 알면서도 기내에서 일을 해왔단 말인가? 대체 얼마나 승객의 안전이 위협 받았기에 조종사들이 최대 성수 기에 국민과 국가경제를 볼모로 삼고 파업까지 했단 말인가? 파업 조종사들의 얘기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내가 비행이 오래 몰면 피곤하거든. 내가 피곤해서 실수하면 나만 아니라 승객 수백 명도 같이 죽어. 이 승객들 안 죽게 하려 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그러니까 나 피곤하지 않게 잘 좀 하란 말이야. 비행시간 좀 줄이고, 정년 좀 늘리고, 가는 곳마다 골프채 좀 비치해놓고, 인사권도 좀 넘기고. 이게 다 승객 안전을 위한 거야. 설마 승객들 죽게 하고 싶지는 않겠지? 알았어, 몰랐 어?' 난 처음에 뉴스 보고 조종사 노조가 승객들을 인질로 잡고 A모 항공사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는 줄 알았다. 이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세상에 안 힘든 일이란 없다. 업무 시간은 남들 반이고 임금은 남들 두세 배인 비행기 조종사 들도 힘들어 죽겠다고 난리니 다른 직업이야 오죽 하겠는가?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번 기회에 온 국민이 파업하는 것은 어떨 까? 승객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비행기 조종사뿐만이 아니다. 숫자 의 차이일 뿐이지 택시기사, 버스기사, 지하철 기관사, 기차 기관사 등도 승객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이들의 업무 강도도 비행기 조종사 못지않다. 하지만 업무 시간 은 두 배 이상인데 반해, 임금은 반도 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업 안 하는 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조종사 노조가 승객 안전을 위해 파업을 했으니, 택시기사, 버스 기사, 지하철 기관사, 기차 기관사 등오 일제히 승객 안전을 위해 파업을 하는 것이다. 그럼 승객들이 더욱 안전해지겠지? 더불어 건설업계 종사자들은 더 나은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파 업하고, 제조업 관계자들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파업하고, 서비스업종 종사자들은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파업을 하고, 공무원들은 더 좋은 민원과 행정처리를 위해 파업을 하는 것 이다. 승객의 안전을 위해 최대 성수기에 파업까지 감행한 A모 항공사 의 조종사 노조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A모 항공사는 둘째 치고라도 여행업계와 수출 기업들이 조종사 노조의 파업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국가 경제가 휘청거리든 말든 수천억의 손실이 나든 말든 오로지 승객 안전을 위해 파업을 한 A 모 항공사의 조종사 노조. 모든 국민들은 이러한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 다. 더 나아가서 벤치마킹(Bench-Marking)을 해야 한다. 아아~ 나도 자영업만 아니면 파업하는 건데. 난 루시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 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내 가슴이 아프니까." 루시아는 손을 치우며 말했다. "됐으니까, 너나 잘해." "......" 난 항상 잘하고 있는데. 난 지니에게 말했다. "마케팅 부서 부장이신 사일런스 백작님만 믿도록 하곘습니 다." "예. 그럼 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 이만." 지니는 인사를 하고 내 앞에서 물러났다. 난 어린 엘프들을 만나 기 위해 놀이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얼굴에 물이 뿌려졌다. "헉! 뭐야? 나의 능력을 두려워한 FBI가 독물을 뿌린 건가?" ......라고 소리쳤지만, 혀를 내밀어 먹어보니 그냥 물이다. 내가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을 닦아내려고 하는데 또 다시 물이 뿌려졌다. 난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려 물을 피했다. "앗! 적이 피했다!" "빨리 쏴!" "집중 사격!" 날 날아오는 물을 피하며 어린 엘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주 먹을 휘둘렀다. 쾅! 쾅! 쾅! "감히 하늘같은 오빠에게 물을 뿌리다니! 전부 무릎 꿇고 손들 어!" 어린 엘프들은 울상을 지으며 시킨 대로 벌을 섰다. "응? 그런데 니들 복장이 그게 뭐니?" 라이와 루비는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정장을, 루는 검은색 양복 을 입었다. 그리고 셋 모두 선글라스를 끼고 귀에 이어폰 같은 것을 끼고 있다. 손에 든 것은 소형 권총. 자세히 보니 글록(Glock)26 모형 물총이 다. 방아쇠를 당기니 물줄기가 나간다. "헤헤~ 라이는 경호원이에요." "루비도 경호원이에요." "제가 대장이에요." "......" 경호원? 중요한 사람들 신변의 안전을 책임지는 그 경호원을 말하는 건 가? "방금 전까지 뭐하고 놀았니?" 내가 묻자 어린 엘프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합창했다. "경호원 놀이하고 놀았어요오~!" "......" 경호원 놀이? "다들 일어나."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린 엘프들은 벌떡 일어나 나에게 매달렸다. "총 돌려주세요, 오빠." "경호원한테는 총이 필수란 말이에요." "빨리요." "오빠한테 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돌려줄게." "라이 약속할게요." "루비도 약속할 거에요." "저도요." 난 어린 엘프들에게 물총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어린 엘프들은 기뻐하며 물총을 왼쪽에 잇는 홀스터(Holster, 권총집)에 잘 집어넣 었다. 홀스터까지 있을 줄이야. 참 별 짓 다 한다. "그런데 갑자기 웬 경호원이니?" "헤헤~ 오빠를 경호해주려구요. 오빠는 아이리스 왕국의 공작 이잖아요." "맞아요. 그러니까 오빠는 정부 요인인 셈이에요. 요인은 경호원 이 항상 지켜줘야 해요." "저는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님을 경호할 거예요." "......"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님?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님은 한 명뿐이다. 바로 아이리스 루시아 공주님. 그렇다면 루는 루시아를 경호하겠다는 건가?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이제부턴 경호원 라이만 믿으세요." "이제부턴 루비가 오빠를 완벽하게 경호해줄 거예요." "......" 물총으로 경호하겠다는 건가? 어쨌든 라이와 루비가 이렇게 오빠를 경호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 니 그저 기쁠 따름이다. "정말 오빠 경호해줄 거야?" "예. 라이가 항상 오빠 곁에서 오빠를 경호해줄 거예요." "라이가 오른쪽을 경호하고, 루비가 왼쪽을 경호할 거예요." "아이구, 귀여운 것들!" 난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에헤헤~." "......"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 신변 보호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 다. 오히려 이 귀여운 경호원들이 납치당하지 않도록 내가 신경 써 줘야 할 것 같다. 내가 놀이방을 나가려 하자 라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오빠. 혹시 적이 숨어있을지도 몰라요." 라이는 품에서 물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등을 벽에 바짝 붙인 다음 방문을 열었다. 잠시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살피는 라이. 위험이 없음을 확인한 라이는 손짓을 했다.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오빠.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어요. 언제 적 들의 총아링 날아와 우리의 심장을 관통할지 모르거든요." "맞아요. 절대 마음을 놓으면 안 돼요. 그래서 루비는 항상 긴장 하고 있어요." "......" 별 짓 다 한다. "저는 거실로 갈 때까지만 경호해드릴게요. 거실에서 루시아 공 주님 만나면, 그때부터 공주님을 경호할 거예요." "......" 그래, 눈물나게 고맙구나. 애들 이러는 걸 보고 잇자니, 경호원 놀이도 무지하게 재밌어 보 인다. 히로는 요인 역할보다는 경호원 역할을 하고 싶은데. 생각해보면 우리 집에 요인이 좀 많다. 루시아는 공주님이고, 지니는 백작이고, 일루니아 여사님도 백작 이다. 그리고 라이는 상아탑의 주인이다. 상아탑의 주인이면 한 나라 왕과도 맞먹는 위치다. 실제로 상아 탑의 주인은 모든 마법사들의 마스터인 만큼 국왕에게 예를 표하 지 않아도 된다. 즉, 지위적으로 볼 때 라이가 나보다 높다. "......" 그럼 내가 라이를 경호해야 하는 거 아닌가? "루비가 가서 거실에 위험 요소가 없는지 살펴보고 올게." "응. 사람들도 잘 살쳐봐. 자살 폭탄 테러를 할 수도 있으니." "그땐 내가 몸으로 막을 거야!" 참으로 해피하게 노는 어린 엘프들. 애들 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 면 나까지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빈둥빈둥 세월도 이젠 끝이다. 내일부터 오빠를 도와 일을 해야 할 테니. 오늘까지만 실컷 놀고 내일부터는 일하자꾸나. 적어도 밥값은 해야지. "......" 그건 좀 무리려나? 애들 밥값이 한두 푼이어야 말이지. * * * * 지니의 말대로 간판이 새로 달렸다.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예 쁜 집(뾰족한 지붕에 굴뚝이 있고 창문이 있는 집)이 그려진 간판이다. 간판에는...... 라이의 집 ....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멀리서도 잘 보이고, 한번 보면 쉽게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이 간판을 보니 재개점한다는 것이 정말로 실감 난다. "후후~ 이제 돈을 갈퀴로 긁어 담는 것만 남았군." 남의 지갑 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인형은 필수 구매품이 아닌 만큼 경기를 심하게 탄다. 먹고 살기도 힘든 요즘 같은 불경기에 누가 인형을 사겠는가?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든 때일수록 마음을 편하게 갖는 것이 중요 하다. 인형을 가지고 놀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결론은 인형을 사라는 것이다. "와아! 라이의 집이 새로 생겼어요오!" "그래, 라이야. 라이의 집이 새로 생겼어." 기뻐하는 라이와는 반대로 루와 루비는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불 만스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니들 왜 그러니?" "흥!" "흥!"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는 루와 루비. 우리 루와 루비가 왜 이러는 걸까? "뭐가 불만인지 말을 해봐, 얘들아."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하자, 그제야 루와 루비는 입을 열 었다. "어째서 라이의 집이에요?" "왜 우리 이름은 없는 거예요, 오빠?" "......헉!" 우리 이름은 왜 없냐니! 간판에 라이 이름은 있지만, 루와 루비의 이름은 업삳. 그러니 루 와 루비가 불만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런데 옛날에는 아무 말 없다가 왜 지금 와서 이러는 걸까? 라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헤헤~ 오빠는 라이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라이 이름만 넣은 거 야. 그쵸, 오빠?"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라이 이름만 넣은 것은 가게를 개업할 때만 해도 라이밖에 없었 기 때문이다. 루와 루비가 온 것은 그 다음 일이다. 만약 개업할 때 루와 루비가 있었다면 '어린 엘프들의 집' 으로 이름을 지었을지 도 모른다. "라이는 오빠가 라이를 막막 좋아한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왜 냐하면 라이도 오빠가 막막 좋은 걸요. 헤헤~ 헤헤~." 찰싹 달라붙어 몸을 비비적거리는 라이. 귀엽긴 하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그 모습을 본 루와 루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훌쩍~ 너무해요, 형!" "으앙~ 오빠는 루비보다 라이가 더 좋아진 게 틀림없어." "아, 아니야, 얘들아. 이 오빠는......" "오빠는 라이를 선택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오빠를 포기 해!" 내가 변명을 하려는데, 라이가 루와 루비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오빠를 포기하라니! 그거 무슨 뜻이니, 라이야? "엉엉~!" "으아아앙~!"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루와 루비. 라이는 의기양양한 승리 의 미소를 지었다. 가게 이름 때문에 이런 불화가 일어날 줄이야......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나타난 루시아는 우는 루, 루비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 리고는 이내 눈 꼬리를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넌 또 왜 애들을 울리고 그래?" "아, 아니야, 루시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됐어. 니 번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아." "......" 변명 아닌데. 루시아는 루와 루비에게 다가가 껴안고 달래주었다. "엉엉~ 혀잉 우리 이름은 빼고......라이 이름만 넣고......" "으앙~ 으앙~ 라이만 좋아하고......이젠 루비가 싫어졌다 고......" "야! 내가 언제 그랬어?" 내가 소리치자 루시아는 나를 경멸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난 조용히 입을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우리끼리 놀자, 라이야." "예, 오빠." 루와 루비가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치자 루시아가 날 보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 "응.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난 방금 있었던 일을 손짓 발짓 다 해가며 루시아에게 설명해주 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루시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애들이 운 거란 말이야?" "응. 그래서 애들이 운 거야." "가게 이름 때문에 그랬다니......" 루시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대로 놔두자니 루와 루비가 서운 해 할 테고, 그렇다고 간판까지 달았는데 가게 이름을 바꿀 수는 없 는 노릇이다. "그때는 루와 루비가 없었으니까......" "응. 내 말이 그 말이야." "어쩌면 좋지? 루와 루비의 서운한 마음은 이해하는데, 별 방법 이 없잖아." "그러게." 우리는 잠시 머리를 맞대고 생각에 잠겼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난 재빨리 잔머리를 굴렸다. 지금이야말로 아이언스 히로의 잔머리가 빛을 발할 때다. "아! 이건 어떨까?"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난 내가 생각한 방법을 루시아에게 말해주었다. "가게 안에 여자아이용 장난감과 남자아이용 장난감 코너가 나 눠져 있잖아." "응." 당연한 얘기지만, 인형가게라고 해서 정말로 인형만 파는 것은 아니다. 인형을 비롯한 수많은 장난감들을 팔고 있다. "여자아이용 장난감 코너를 '루비의 장난감' 이라고 이름 붙이 고, 남자아이용 장난감 코너를 '루의 장난감' 이라고 이름 붙이는 거야. 어때?" 루시아는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게 좋겠다. 그렇게 하자." 루시아는 재빨리 루와 루비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러자 루와 루 비는 기뻐하며 루시아에게 매달렸다. "......" 뭐야? 생각은 내가 했는데, 점수는 루시아가 땄잖아. "너무해, 루시아." 내가 서운한 감정을 표현하자 루시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말하든 상관없잖아." "......" 어린 엘프들에게 점수 따서 뭐 하려고? 루시아 이러는 걸 보면 아주 귀여워 죽겠다. 막막 깨물어 주고 싶어~. 간판도 달렸겠다, 나는 어린 엘프들과 라이의 집 재개점 홍 보에 나섰다. 홍보란 다름 아닌 사탕과 함께 전단지 나눠주기. 이렇게 사탕과 함께 전단지를 나눠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탕 은 먹고 전단지는 버리기 마련이다. 단물만 쪽 빨아먹는 나쁜 인간들 같으니...... 그래서 동원한 것이 바로 어린 엘프들이다. 어린 엘프들이 일일 이 나줘주면 미안해서라도 한번은 읽어볼 것이다. 이 귀여운 아이들이 나눠준 전단지를 읽지도 않고 버리면 그건 정말 인간도 아니다. "라이의 집이 다음주 월요일에 재개점을 해요!" "꼭 와주세요, 언니 오빠들!" "이거 받아가세요, 누나. 맛있는 사탕이에요!" 어린 엘프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탕과 전단지를 나눠주자 거리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어머, 너무 귀여워!"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너희 둘 쌍둥이니?" 어린 엘프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홍보에 나섰다. "라이의 집에 꼭 오세요!" "예쁜 인형들이 잔뜩 있어요!" "다음주 월요일이에요!" 사탕보다도 더 달콤한 어린 엘프들의 유혹. 가장 열광적인 반응 을 보인 것은 여학생들(여중생, 여고생, 여대생)이었다. 가장 인기가 있는 엘프는 루였다. 귀엽고 깜찍한 루의 모습에 여 자들은 꺅꺅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이, 거기 끌어안지 마세요!" 난 여자들에게 안겨 숨도 못 쉬는 루를 구해주었다. 아마 영아가 봤으면 '우리 루 건드리지마!' 라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우리 루는 아무나 함부러 만질 수 있는 엘프가 아니다. 장래에 나 의 수양딸 루비와 결혼할 루를 그렇게 쉽게 만지게 할 수는 없지. 돈 내고 만진다면 모를까. "......" 흠흠. 아무튼 마케팅은 어린 엘프들 덕분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전단 지와 사탕은 금방 동이 났다. 원래 이렇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나면 길바닥은 버린 전단지 투성 이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길거리는 깨끗했다. 간혹 가다 버린 전단지가 한두 장 정도 있을 뿐이었다. 후후~ 역시 내 생각대로군. 마케팅에는 어린 엘프들이 적격이다. 애들 자체가 하나의 마스코트 아닌가? 애들 이미지가 곧 가게의 이미지나 다름없다. 이렇게 위엽고 깜찍한 아이들이 있는 가게에 누가 오고 싶어 하 지 않겠는가? 그리고 왔으면 인형 하나쯤은 사가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후후~ 돈 많이 벌면 뭐할까? 일단 빚 갚고, 그 다음엔...... "열심히 일했더니 배고파요, 오빠." "루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요, 오빠." "저도 대따 배고파요!" ......애들 먹을 거 사줘야 하나? 고작 그거 조금 일했다고 배고프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얘들은 연비가 너무 안 좋다. 일반인은 세 끼 먹 으면 하루 동안 일할 수 있지만, 얘들은 세 끼 먹고 한 시간 일하면 열심히 한 거다. 연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맛있는 거 사주세요오~!" 합창까지 나왔으면 말릴 수도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애들을 데 리고 피자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 단골이라 할 수 있는 마스터 피자집! "무슨 피자 먹을래?" "고구마 두 줄짜리요오~!" "......" 고구가 두 줄짜리? 그 말을 들으니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난다. 어린 엘프들은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있었다. 라이: 오빠는 라이를 더 좋아해! 루비: 아니야. 오빠는 루비를 더 좋아해! 루: 누나는 나를 가장 좋아해! 라이: 오빠는 라이한테 이따만한 고구가 두 줄짜리 피자를 사줬 어! 루비: 루비한테도 이따만한 고구가 두 줄 짜리 피자를 사줬어! 루: 누나는 나한테 그것보다 더 큰 고구마 두 줄짜리 피자를 사 줬어! 잠시 서로를 노려보는 어린 엘프들. 라이: 라이는 오빠한테 고구마 세 줄짜리 피자 사 달라 그럴 거야! 루비: 루비는 오빠한테 고구마 네 줄짜리 피자 사 달라 그럴 거야! 루: 난 누나한테 고구마 다섯 줄짜리 피자 사 달라 그럴 거야! 라이: 그럼 라이는 고구마 여섯 줄짜리 피자...... 루비: 루비는 고구마 일곱 줄짜리 피자...... 루: 고구마 여덟 줄짜리 피자...... 그 모습을 모다 못한 내가 한 마디 했다. 나: 그냥 고구마를 사 달라 그래라. 어쨌든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고구마 두 줄짜리 훼밀리 사 이즈 피자를 시켜주었다. 그것도 무려 두 판이나! "......"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무려' 가 아니다. '겨우' 다. 제발 두 판만 먹고 끝내줬으면 좋겠는데. 피자가 나오자 어린 엘프들은 일제히 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한 판이 아이들 입 속으로 사라졌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내레이터 모델들을 고용하던가 해야지, 어린 엘프들은 연비 안 좋아서 도저히 못 써먹겠다. 그저 장사가 잘 되길 바라는 수밖에. 피자 먹는 아이들이 체하지 않도록 보살피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고 피자집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피자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 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집중됐다. 이 정도로 주목 받을 인물이라면? 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 그런데 지니가 여긴 어쩐 일이지? 피자 먹고 싶어서 왔나? 어쨌든 잘 됐다. 기왕 여기서 지니를 만났으니 나 대신 계산하게 만들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재빨리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에요, 사일런스 백작님."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아이언스 공작님." 나를 발견한 지니는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앉으세요." 지니는 별 의심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음흉 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넌 걸려들었어, 임마. 난 속마음을 숨긴 채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사일런스 백작님?" "아이언스 공작님을 뵈러왔습니다." "저를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집에 가서 얘기해도 되잖아요." "사안이 사인인지라......" 지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지니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난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지니는 외눈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이리스 왕국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리스』13권에서 계속) 작가 블로그: http://psungho.egloos.com Story28 재개점 준비 지니의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튀어나온 눈이 안 들어가고, 쩍 벌어진 입이 안 다물어 질 정도다. 난 두 손으로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다문다음 지니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잘못들은 것 같은데 ,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러자지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다시 말했다. "아이리스 왕국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아까 한말과 똑같으니 잘못들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말씀하신 아이리스 왕국은……. 그러니까 뭐랄까……." "자이나레스 대륙 남동부에 있는 왕국이냐고 묻고 싶으신 겁니까?" "예. 바로그거에요" "맞습니다." "예?" "자이나레스 대륙 남동부에 있는 왕국이 맞습니다." "…….헉!" 지니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들은 나는 태연하지 못했다. 난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 그 자이나레스 대륙이라는 것은……." "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위치해 있습니다. 과거 아이언스 공작님이 여행하셨던 곳이고, 저를 비롯한 다른 분들의 고향이 있는 곳이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그 세계를 '판타지세계' 라 명명하셨습니다." "헉…….쓰쓰!" 이렇게 놀라울 수가! 난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이리스 왕국이라니! 자이나레스 대륙이라니! 판타지 세계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때문에 가게 안에서 피자를 먹던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이 느낌. 아아~ 너무 좋…….긴 개뿔이 좋아? 뭘 봐? 사람소리지르는거 처음 봐?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나는 예의와 염치를 아는 군자이기 때문에 아무 일 없다는 듯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오빠가 놀라든 말든 피자먹는데 여념이 없는 어린 엘프들. 오빠가 이렇게 소리치면 한 번은 쳐다봐 주는 게 예의 아니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린 엘프들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비어있는 피자 판을 내밀며 합창했다. " 다 먹었어요오~!" "……." 어쩌라고? "한판 더 시켜주세요오~!" "……." 니들이 계산할래? 애초에 훼밀리 사이즈 두 판밖에 안 시켜준 내가 잘못이다. 한 엘프 앞에 한판씩은 시켜줘야 했거늘……. 난 손을 들어 피자를 한판 더 주문했다. 믿을 거라고는 내 앞에 있는 지니뿐이다. 그래. 반드시 이 인간에게 계산서를 물려야해. 절대 내가 계산할 수는 없어! 나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지니에게 계산서 물리기 계획> 1. 어린엘프들을 먼저 나가게 한다. 2. 지니와 함께 자연스레 계산대 앞으로 간다. 3. 계산을 하는 척하다가 아! 갑자기 배가! 라고 소리치며 계산서를 지니의 손에 쥐어주고 화장실을 가는 척하다가 밖으로 나온다. 4. 어린 엘프들과 합류해 뛰어! 라고 소리치고 최선을 다해 도망친다. 5. 나중에 집에 돌아와 지니가 뭐라고 항의하면 모른척한다. 6. 그래도 계속 항의하면 모함이라고 되받아친다. 7.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끝까지 항의하면 공작 모독죄로 밖으로 쫓아낸다. 으음,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비열하고 치사한 방법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이게 아니다. 아이리스 왕국에 가봐야 할 것 같다니? 어째서? 무슨 일로? 설마 다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 나의 루시아도? 아직 난 루시아와 아무것도 못했다. 라이동생도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냔 말이야!?" 내가 소리치자 지는 나를 보며 말했다. "진정 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임마? 왜 아이리스 왕국으로 가려하는데? 내가 그동안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게냐?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인 게냐?" "그렇지 않습니다,아이언스 공작님" "그렇지 않긴 뭐가 그렇지 않아! 너 분명 평생 나를 다른다 그랬잖아! 그런데 니가 날 버리고 아이리스 왕국으로 갈수가 있어? 니가 그러고도 충신이야? 허억! 역시 넌 간신배?" "저는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아이언스 공작님을 다를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웃기지마! 방금 아이리스 왕국으로 돌아간다 그랬잖아!"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지니가 간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사실 지니가 사라져봐야 인생 사는데 별 지장없……진 않겠지만 아무튼 지니가 떠나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니가 아이리스 왕구으로 돌아가면 지니의 누나인 일루니아 여사님이 다라 돌아갈게 뻔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돌아가면 일루니아 여사님을 친언니처럼 다르는 루시아도……... 헉! 나의 사랑 루시아가 날 떠나다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떠날 때 어린 엘프들까지 몽땅 데리고 갈 것이 뻔하다. 루시아는 어린 엘프들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팔불출 엄마이니……... 그럼 나는 아내와 자식들을 먼 이국(그것도 다른 세계에 있는)으로 떠나보낸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이다. 기러기아빠라니?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그렇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이 없는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라고 소리치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리겠지. "안돼! 차라리 나도 루시아를 다라 판타지 세계로 가겠어!" 루시아가 있는 곳이 곧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난 루시아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루시아는 나에게 있어서 공기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바로 그겁니다." "응? 바로 그거라니?" "아이리스 왕국에 가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은 저만을 뜻한 게 아닙니다. 루시아 공주님은 물론 아이언스 공작님도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이게 뭔 말이다냐? 난 지니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리스 왕국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 보다 직접 읽어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이리스 왕국에서 날아온 서신입니다." 지니는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봉투에는 '루시아에게' 라고 쓰여 있었다. 인장을 찍어 봉해놓은 편지는 이미 뜯어져 있었다. "이게 왜 뜯어져 있어요?" "혹시라도 독극물이 묻어있을까 싶어 제가 먼저 검사해보았습니다." "……" 말은 잘 한다 난 봉투를 열고 안에 든 편지를 꺼내보았다. 아이리스 왕구의 국왕 아이리스 키레아…… 즉, 루시아의 오빠가 보낸 편지였다. 편지 내용은 매우 간략했다. 그 간략한 내용을 더 요약해보자면…… "키레아 왕이 결혼을 한다구요?" "그렇습니다. 키레아 폐하께서는 그동안 아이리스 왕국을 재건하시느라 나이가 차셨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미뤄오셨습니다. 하지만 이젠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국혼을 할 때가 됐다고생각하신 듯합니다." "……" 하긴, 늦긴 좀 늦었다. 키레아 왕은 아직 서른살도 안 된 젊은 국왕이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 사람들은 일번적으로 17세에서 25세 사이에 결혼을 한다. 게다가 왕족이나 귀족들의 결혼 나이는 더욱 빠르다. 판타지 세계에서는 남자는 17세 여자는 15세를 성인으로 친다. 왕족이나 귀족들의 경우에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결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웬만하면 성인이 되기까지 기다려 결혼을 시키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왕족이나 귀족은 정략적 목적의 결혼이 많은 만큼 가문이나국가 간의 결속을 위해 한시 바삐 결혼을 시키는 것이다. 왕족이나 귀족이 이러한데 국왕은 오죽 하겠는가? 전제군주제도에서는 군주가 주권을 가지고 통치권을 독점한다. 많은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어 있는 만큼 정치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왕의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현재 아이리스 왕국의 왕족은 직계로는 키레아 왕과 루시아 둘뿐이다. 방계까지 친다 하더라도 왕이 될 만큼 혈통적으로 가까운 친족은 거의 없다. 만약 키레아 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국왕 자리는 루시아가 물려 받아야한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는 여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이다. 정치 기반이 튼튼한 나라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현재 아이리스 왕국은 재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치 기반이 약한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국왕이 된다면 정치적 분열은 피할수 없을 것이다. ……라지만, 초절정 꽃미남 마검사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 있으면 괜찮다.(니가 꽃미남이면 지니는 뭐냐? 팬클럽도 없는게 - 옮긴이) 나의 마법은 루시아 여왕(어느새 즉위했다)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이고, 나의 칼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루시아 여왕에게 대항하는 놈 들의 배떄기를 찌르는 사시미가 될 것이다. 칼침을 박은 다음 빙글 돌려주마! "……" 흠흠, 내가 잠시 흥분했군. 감히 루시아에게 대항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루시아가 아이리스의 국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루시아 역시 자신에게 그런 막중한 의무가 지워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아닐수도? -옮긴이) 루시아가 바라는 것은 히로랑 결혼해서(?) 어린 엘프들을 기르며 행복하게 사는것.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평범하게. 그렇기 때문에 키레아 왕은 오래오래 살아서 국왕도 오래오래 해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에 자식을 낳아 왕위를 고스란히 물려줘 야 한다. 그래야 나와 루시아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과연 그럴까? -옮긴이) "그런데 누구랑 결혼한데요?" "거기 써 있습니다." 난 편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헤리오 ……애미? 뭔 애미?" 애비도 아니고 애미? (춥다 그만해라..-옮긴이) "애미가 아니라 에이미(Amy)입니다." "……" 애미가 아니라 에이미였나? "흠흠, 저도 압니다. 웃겨보려고 일부러 그런 겁니다."(개뿔 -옮긴이)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진 없고, 앞으로 주의하세요."(건방지구나 하하 -옮긴이) 사실 공용어를 하도 오랜만에 읽다보니 좀 헷갈린다. "으음, 헤리오 에이미라는 여자와 결혼하는군요. 헤리오 에이미라……. 이름 예쁘네요.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어디서 들었더라?" "혹시 헤리오 반데라스 폐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바로 그거에요! 헤리오 반데라스!" 잠깐. 헤리오 반데라스? 헤이로 에이미? 어째 두 사람 성이 같다. "제가 알기로 헤리오 라는 성은 헤리오 왕족만이 쓸 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헤리오의 전 국왕 헤리오 이야센트는 한 명의 왕비와 두명의 후궁을 두었습니다. 왕비는 현 헤리오의 국왕인 반데라스를 낳았고, 두 후궁은 각각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를 낳았습니다." "에이미 공주가 장녀인가요?" "그렇습니다. 반데라스 왕이 제일 먼저 태어났고, 그 후에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가 태어났습니다. 왕자가 단 한 명뿐인데다가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였기에, 별 다른 충돌 없이 왕위 계승이 이루어 졌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어쩐지 반데라스 자식이 너무 쉽게 왕이 됐다 했어. "에이미 공주는 올해로 17세가 돼었습니다. 아이리스 왕국과 헤리오 왕국의 동맹을 더욱 견고히 하는 차원에서 키레아 폐하와 에이미 공주의 국혼이 추진되었습니다." "으음, 정략결혼 이라는 거군요. 하긴 국가 간의 동맹은 결혼으로 맺어지는 게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확실한 방법이지요." 왕족은 결혼조차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다. 정치적 이유에 다라 가문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해진 상대와 결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왕족의 숙명이다. 왕족으로 태어나 모든 권리를 누리고 산 것에 다른 대가라고나할까? 그래도 남자인 경우에는 그나마 낫다. 여자는 정말로 가문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팔려가듯이 결혼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게 애정 없이 결혼해 살다보면 남자는 바람을 피거나 첩을 들이고, 여자는 정부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귀족중에는 콩가루 집안이 유난히 많다. 뭐, 매우 드문일이지만 정략결혼으로 결혼해 잘사는 귀족들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매우 드문일'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반데라스의 세레나는 아주 행복한 경우라 할수 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있으니. 그리고 루시아도 아주 행복한 경우다.(히로 자뻑이 좀...-rakani-) 귀족집 여다들이 가문의 이익을 위한 정략적 도구로 이용되는 마당에 공주야 오죽하겠는가? 실제로 과거 중국의 여러 황제들은 공주를 변방의 오랑캐에게 시집을 보내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기고 했다. 오죽하면 공주와 충신은 많을수록 좋다,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하지만 루시아는 나와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동거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엘프인 라이, 루, 루비를 기르며 살고있으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나와 결혼해 라이 동생까지 만들면 더 행복해질텐데······."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루시아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 잠깐 내가 이 얘기를 어린엘프들에게 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나: 이 오빠가 사는 이유는 오직 루시아 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란다. 다른건 다필요 없어. 어린엘프 일동:우리는 요오~? 나: 응 뭔소리니? 라이: 우에에엥~! 루비: 으아아앙~! 루: 엉엉~! 나: 헉! 니들 왜우니? 라이: 우엥~ 우엥~ 오빠는 루시아 언니만 좋아하고······. 루비: 으앙~ 으앙~ 루비보다 루시아언니가 더 좋아진게 틀림 없어. 루: 엉엉~ 누나한테 이를꺼에요 "·······." 뭐, 대략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난감하군. 정정하겠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 루시아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어린 엘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내가 그렇게 굳게 다집하는데, 지니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예?" "저도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 이 인간이 또 내 생각을 읽었군. 그렇게 읽지 말라고 경고 했거늘! 아이리스 왕국의 명예 공작이자 전 참모 총장인 아이언스 히로 공작의 경고가 우습게 들렸단 말인가? "행복해지고 싶은데 저보고 어쩌라구요?" 설마 나보고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거냐?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 그냥 그럴 걸 왜 말했니? "으음, 아무튼 헤리오 왕국의 국왕 헤리오 반데라스놈·····이 아니라 헤리오 반데라스 폐하의 첫번째 여동생 헤리오 애미······가 아닌 헤리오 에이미 공주와 아이리스 왕국의 국왕 아이리스 키레아 폐하의 국혼이 성사되다니, 신하된 입장으로서 기쁨을 금할수가 없군요." "저 역시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아이리스 왕국의 국왕 아이리스 키레하 폐하의 유일무이한 여동생 루시아 공주와 아이리스 왕국의 두 말 할 필요 없는 충신이자, 명예 공작이자, 전 참모총장이자, 아무튼 잘나고 위대한 (개뿔) 아이언스 히로 공작의 국혼이 성사되었으면 더욱 기뻣을텐데, 조금 아쉽군요." 솔직히 많이 아쉽다. "키레아 폐하께서 결혼을 하시니, 조만간 좋은소식이 있을거라 생각 합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장유유서이고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니, 일반적으로 결혼은 뱃속에서 나온 순서대로 하기 마련이다. 키레아 왕이 결혼을 하면, 그 다음은 당연 루시아 차례다. "·······." 잠깐. 혹시 루시아는 그 동안 오빠인 키레아 왕이 마음에 걸려 결혼을 미룬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나와 '하는' 것을 거부한건가?(히로 이 색마자식) 오빠를 배신하고 자신이 먼저 결홀할 수 없어서? 루시아의 보수적인 성격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성있는 일이다. "······." 헉! 그렇다면 키레아 왕이 결혼한 다음에는 전부 OK라는건가? "전부 OK라니!" 이렇고 이런짓이나, 저렇고 저런 짓이나, 심지어는······ 그렇고 그런 짓까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뮬레이션. 어린 엘프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루시아는 내방에 들어와 방문을 잠근다. 그리고 천천히 옷을 벗는다. 사라락~사라락~ 어느새속옷차림이 된 루시아.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반라가된 그녀의 몸을 비춘다. 루시아는 내 품에 안기며 속삭이듯 말한다. '이제 오빠가 결혼했으니 괜찮아.' 나는 당황하며 묻는다. '괘, 괜찮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루시아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위에 올려 놓는다. '그동안 널 피했던 것은 오빠보다 내가 먼저 결홀할수 없었기 때문이야. 이제 오빠가 결혼했으니 거리 낄게 없어.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아, 히로' '헉! 그, 그게 정말이야?' '응. 심한 짓을 해도 괜찮아. 나에게 어떠한짓을 해도······.' "그래! 그런 거였어! 루시아는 오빠보다 먼저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나를 피했던거야!" 이 말을 다시 하자면, 키레아 왕만 결혼하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라는거다. 키레아 왕의 결혼식이 끝나는 즉시 라이 동생 제작에 들어가 주마! 이대로 인디&일루니아 여사님 커플에 지고 있을 수 만은 없다. 히로& 루시아 커플도 빨리 반격에 나서야한다! "그런데 결혼식은 언제 한대요?" "두 달 후 입니다." "예? 두 달후요? 아니, 뭘 그렇게 늦게 한대요? 기왕 할 거 빨리좀 하면 좀 좋아요?" "국왕의 결혼식은 국가의 큰 행사인지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으음, 그건 그렇죠. 그래도 좀 일찍 했으면 좋았을텐데. 약간은 아쉽네요" 키레아 왕이 일찍 결혼할수록 라이 동생 제작에 빨리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다니! 뭐, 어쩔 수 없지. 이제 까지 몇 년을 기다렸는데 그깟 두 달쯤 못기다리겠는가? ……라지만 난 못기다린다. 안그래도 요즘 들어 웨어울프로 폴리모프 하는 주기가 짧아 지고 있다. 이는 욕구 불만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거다. 만약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치명적인 문제(예를 들어 루시아를 덮치다 걸려 또 다시집에서 쫓겨난다던가하는)를 야기 할지도 모른다. 뭐, 내 사정이 급하다고 해서 키레아왕의 결혼식을 앞당길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리스 왕국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아이리스 왕국에 가봐야 한다. 루시아의 오빠의 결혼식이니 당연히 가봐야 하고, 나는 루시아의 남편(헛소리)이니 당연히 가봐야 한다. "……." 흠흠, 뭐 엄밀히 다지자면 아직 남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만간 남편이 될테니……. 처남의 결혼식에 매부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아직 매부도 아니지만)? 그리고 나는 아이리스 왕국의 만고에 다시없을 충신인 아이언스 공작이다. 굳이 루시아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옛정을 봐서 참석해야 할 것이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지니……가 아니라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과 사일런스 백작도 마찬가지다. 인디는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남편이니 당연 다라간다고 할 테고, 루시아는 어린 엘프들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으니 어린 엘프들을 데려가려 할테고……. 으음, 어째 엄청난 인원이 참가하는 대이동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루시아한테는 얘기 했나요?" "아직 말씀 안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듯해서……." "푸하하~!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뭘 좀 아시는군요. 이런 기쁜소식은 아무래도 제가 직접 전해주는 것이 좀더 보기 좋지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 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이 소식을 전해주면 루시아가 얼마나 기뻐 할까? 루시아가 기뻐할 생각을 하니 내가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루시아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히로의 행복~ "아차! 그럼 가게는 어쩌죠?" 그렇다. 가게는 어쩌냐? 재개점 홍보까지 했는데……. 전단지 나눠주고 사탕도 나눠줬는데……. 전단지와 사탕은 땅 파면 나오는게 아니다. 다 돈 주고 산 거다. 게다가 재개점 홍보를 해놓고 정작 약속한 날짜에 가게 문을 열지 않는다면, 우리 가게의 신용이 크게 하락할 것이다. 게다가 장사는 신용이 생명 아닌가? 나는 임상옥처럼 상도를 중시한다. 검에도 도가있듯이, 장사도 엄연히 도가 존재한다. 그 도를 지키는 자는 진정한 상인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장사치에 불과하다. 장사란 무엇인가? 상행위란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를 쫓는 것을 옳지 못하다. 공자는 '군자는 의에서 깨닫고, 소인은 이에서 깨닫는다'라 했고, 맹자도 이보다 의를 다르라 했다. 맹자가 양 혜왕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아아~ 또 쓸때없는 잡생각이다... 쓰기 귀찮게 시리) - 혜왕: 노인께서는 천리를 멀다 여기시지 않으시고 찾아와 주셨으니,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일이 생기겠지요? - 맹자: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를 말씀하십니까? 다만 인자와 정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라고 말씀하시면, 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내 가문을 이롭게 할까'라고 말할 것이고, 선비나 서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이롭게 할까' 라고 말하며,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취하게 되니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시해 하는 것은 반드시 천승의 가문이고, 천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백승의 가문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천승을 취하고, 천승의 나라에서 백승을 취하는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녕 정의를 뒤로 미루어 놓고 이익을 앞세운다면,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해 하지 않습니다. 여태껏 인자하면서 자기 어버이를 버린사람은 없었고, 정의에 다라 살면서 자기의 임금을 뒤로 미루어 버린 사람은 없었으니, 왕께서는 인자함과 정의를 말씀하시는데 그치실 것이지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나 역시 이런 공자와 맹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군자라면 이보다는 의를 중시해야 하는 법 나 아이언스 히로는 돈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고 싶다(라지만, 사람과 돈을 같이 남기면 더욱 좋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객과 한 약속을 쉽게 저버릴 수 없다. 다음주 월요일날 재개점 한다고 했으면 재개점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는 재개점 달일 매출이 탐나서 그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로지 고객과의 약속을 지켜 상도를 걷겠다는 일념때문에 이러는거다. "……." 흠흠, 진짜다. 좀 믿어라. "결혼식 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일주일 정도는 영업 할 수 있을겁니다. 출발 날짜는 루시아 공주님과 저희 누님의 의견을 수렴해 결정하도록 하지요." "으음, 그게 좋겠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살펴가세요." "안녕히 가세요오~!" 어린엘프들은 나가는 지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입을 연 걸 보니 피자를 다 먹었나보다. 피자판 위에는 단 한조각의 피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누가 바닥까지 핧아 먹은것처럼 깨끗했다. 접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같이 핧아먹었나? "맛있게들 먹었니?" "네에~!" 힘차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만족스럽게 먹었나 보다. 한 엘프당 훼밀리 사이즈 한 판씩 먹었으니 만족할만도 하지. 난 손도 못 댔는데……. 뭐, 상관없다. 어차피 계산서는 지니에게 물려……야 하는데, 지니가 어디 갔지? "얘들아, 지니 오빠 못봤니?" "아까 나갔어요오~!" "……헉!" 그랬나? 벌써 나갔단 말인가? 기왕이면 계산좀 하고 나갈 것이지. 이런 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엘프들은 빨대로 남아있는 콜라를 쪼옥 빨아 먹었다. 컵에있는 콜라가 순식간에 줄어드는 모습이 신기에 가깝다. 저것들은 목도 안 다갑나? 난 어린 엘프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운터 앞으로 갔다. 지갑을 탈탈 털어보았지만, 피자값 내기엔 턱도 없다. 아아~ 신용카드는 웬만하면 안 쓰려 했거늘. 난 눈물을 머금고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가 긁히는 순간 예리한 단도가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얘들 식비만 아꼈어도 지금쯤 여의도 한복판에 빌딩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뭐, 루시아가 집을 파는 한이 있어도 아이들 굶기는 것만은 안 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에휴~." 난 어린 엘프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어린엘프들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헤헤~ 피자 막막 맛있어." "맞아. 고구마가 두 줄이나 있었어." "만날 피자만 먹었으면 좋겠다." "……." 그냥 피자집 하나 개업할까? 난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어린 엘프들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열심히 일했더니 졸려요오." "루비는 낮잠 자고 싶어요오." "영아 누나한테 재워달라고 할래요오." "……." 니들이 뭘 했다고 졸리니? 하긴, 실컷 먹었으니 이젠 잘 때다. 얘들은 놀고 먹고 자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빈둥빈둥 엘프들이 아니던가? "그래. 다들 옥탑방에 올라가 영아 언니에게 재워달라고 하렴." "네에~!" 어린 엘프들은 우르르 옥탑방으로 몰려갔다. 난 천천히 거실로 걸어갔다. 루시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건가? 난 루시아의 방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려는데 갑자기 든 생각에 멈칫했다. 혹시 루시아는 지금 옷을 갈아입는 중이 아닐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내가 노크를 하면 루시아는 옷을 다갈아 입은 다음 들어오라는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면?(이사람이...) 이벤트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좋았어! 한번 시도해 보는 거야! 결심한 나는 재빨리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철컥! 철컥! "……." 뭐야? 잠겨 있잖아?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방문이 열리고 루시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루시아는 살짝 화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 그냥 할 얘기가 좀 있어서……." "그럼 노크를 하고 들어와야 할 거 아니야? 넌 대체 왜 그렇게 예의가 없어? 여자 방에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오는것은 예의 이전에 매너문제 아니야?" "들어가진 않았는데……." 내가 고개 숙이며 변명하자 루시아는 더욱 화난 표정을 지었다. 난 재빨리 사과 했다. "미, 미안해, 루시아. 내가 잠시 미쳤었나봐. 한번만 용서해 줘." 내가 싹싹 빌자 루시아는 표정을 조금 풀었다. "애들은?" "졸립다고 옥탑방으로 올라갔어. 지금쯤 영아가 다 재웠을 거야." "밥은 먹였어?" "응, 피자 잔뜩 먹였어." 아이들 얘기가 나오자 루시아의 표정이 완전히 풀렸다. 루시아는 들어와도 좋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루시아의 방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그런데 왜 문을 잠갔어?" "옷 갈아 입는 중이었어." "……." 옷갈아입는 데 문까지 잠그다니! 역시 기대했던 이벤트 같은 것은 무리란 말인가? 문고리를 박살내든지 해야지……. 루시아는 반팔 티셔츠와 발목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치마길이는 절대 무릎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긴긴 여름동안 긴 스커트만 고집한 루시아. 다리가 못 생겨서 그런 거면 말을 안 한다. 루시아의 다리는 조각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답다. 만약 루시아가 짧은 스커트를 입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루시아의 다리에서 눈을 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여름도 다 갔으니 짧은 치마 입은 루시아를 보기 위해서는 내년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뭐, 내년 여름이 돼도 짧은 치마를 입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침대 위에는 루시아가 벗어놓은 옷이 널려 있었다. 반팔 티셔츠, 데님 스커트, 그리고 하얀색 브라와 팬티……. "헉!" 벗어놓은 속옷이라니! 이거야 말로 남자의 로망(?) 아니겠는가? "너 지금 뭐하는거야?" 내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눈치챈 루시아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속옷을 숨겼다. 난 아쉬운 마음에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침대에 걸터앉은 루시아는 다리를 꼬고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우며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로 온거야? 용건 없으면 나가줬으면 좋겠어." "으응, 물론 용건 있지." 아아~ 이 공주님스런……아니, 여왕님스런 분위기. 정말 너무 마음에 든다. 난 재빨리 루시아 옆에 앉았다. 그것도 찰싹 달라 붙어서.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으면 루시아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좀 떨어져줄래?" 물론 그런다고 떨어질 내가 아니다. 난 짐짓 못들은 척하며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키레아 폐하가 보내신거야." "오빠가?" 루시아는 재빨리 내 손에 있는 편지를 빼앗았다. 잠시 봉투를 살펴본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흘겨 보았다. "봉투가 왜 뜯어져있어?" "헉! 그, 그건……." 난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루시아. 그건 결코 내가 뜯은게 아니야. 간신배 사일런스 지니가 뜯은 거야. 난 결백해." "그래서 넌 편지를 봤어, 안 봤어?" "그, 그건……." 보기야 봤지. "흥!"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아아~ 또 점수 잃었다. 하지만 루시아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난 조용히 일어나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하면 루시아가 날 보게 되는거지. 후후~ 역시 나의 잔머리는 아직 녹슬지 않았군.(어린애도 할 수있는 잔머리로 자랑하긴) "어서 읽어봐." "알았어." 루시아는 두근거리는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내 들어 읽었다. 편지를 읽는 루시아의 표정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기대감 가득한 표정에서 기뻐하는 표정으로, 기뻐하는 표정에서 놀란 표정으로. "오빠가 결혼을 한다고?" "응,헤리오 애미....가아니라 헤리오 에이미랑 결혼한대.반데라스 여동생이야. 내생각에는 아이리스 왕국과 헤리오 왕국간의 동맹을 더욱 견고히 하는 의미에서 이번 국혼이 성사된것같아." 나는 지니에게 들은 말을 마치 내가 직접 생각해낸것처럼 루시아에게 말해주었다. 루시아는 조금 놀란듯했지만 기쁜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잘됐다." "응.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언니 될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글쎄" 헤리오에이미. 반데라스 여동생.현재나이17세 루시아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키레아 왕과 결혼하면 어쩃든 루시아의 언니가된다. "좋은사람이어야 할텐데." "뭐 반데라스 여동생이니 착하겠지." "왕궁에는 언제 가는게 좋을까?" "결혼식 날짜만 적혀있을뿐 언제까지 오라는 얘기는 없잖아. 그리고 결혼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으니……...뭐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그쪽과 연락해서 정하면 될것같아." "응" 루시아는 행복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루시아가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매우 기쁘다. "그렇게 좋아?" " 응 사실 그동안 오빠가 결혼을 안해서 나도 걱정이 많았었거든. 오빠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해야지. 그래서 애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우리처럼?" 그러자 루시아는 나를 흘겨보았다. "그거 무슨뜻이야?" "아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어린엘프들 기르며 사는 것처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거지." 루시아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세웠다. "분명 말해두지만. 난 아직 너랑 결혼할 마음없어. 알았어?" "……으응.." 아직 없다는건 , 조만간 생긴다는 뜻인가? 중요한건 키레아 왕이 빨리 결혼하는거다 키레아왕만 결혼하면 루시아도 나랑 결혼하기로 결심하겠지? "언니한테도 말해줘야겠다." 루시아는 바로 일루니아 여사님 방으로 달려갔다. 난 재빨리 루시아의 뒤를 다라갔다. "같이가, 루시아~!" "오빠가 결혼한대 언니" 루시아의 말을 들은일루니아 여사님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엇다.마치 '너네 오빠가 결혼하든 이혼하든 나랑 뭔 상관이니'라는 듯한 모습니다. "오빠가 결혼한다니까.우리오빠말이야.키레아 오빠. 아이리스 국왕." "알아." "그런데 표정이 왜그래?" "내 표정이 뭐?"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잖아." 루시아의 말에 일루니아 여사님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순간, 아름답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재빨리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냈다. 내가 미쳤지. 저아줌마가 예쁘긴 뭐가 예뻐? 루시아랑 어린엘프들이 백배는 더예뻐! 하지만 임신한 일루니아 여사님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생명을 잉태한 여성만이 지닐수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으음 저 아줌마에게 저런 면이 숨어있을줄이야……... 일루니아 여사님이 임신할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뭐 그렇게 다지자면 난 일루니아 여사님이 평생 결혼 안하고 혼자 살줄 알았다. 참 여러가지로 나를 놀라게 만드는 일루니아 여사님이다. "알고있었어." "그게 무슨말이야언니? 알고있었다니?" "그 결혼 내가 추진했어" "뭐?" "예?정말이에요?" 일루니아 여사님이 추진했다니! 난꿈에도 몰랐다. 루시아도 역시 몰랐는지 깜짝 놀랐다. "언니가 추진했다고?" "응 ,. 이제 아이리스도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으니 왕비가 잇어야지.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키레아 폐하께서는 현재 후사가 없는상태야. 왕권 안정을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셔서 후사를 보셔야해." 과연 일루니아 여사님. 이세계에 와서 인디와 함께 행복한 부부생활을 즐기는 것 같은 일루니아 여사님이지만. 실제로는 아이리스 왕구을 위해 수많은 현안들을 처리해 왔다. 임신한 뒤에는 일이 많이 줄였지만, 예전에는 정말 산더미 같은 서류를 처리하는 모습도 많이 볼수 있었다. 있는 세계가 다르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이리스 왕궁과 이 건물 주차장 사이에는 영구 마법진이 설치되어있으니. 일종의 재택근무 개념으로 보면 되겠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는줄은 알았지만, 키레아 왕의 국혼까지 진행하고 있었을줄이야……. "그래서 여러 혼처를 물색해 보았어. 일반적으로 왕국내의 유력가문 여식과 결혼하는게 보통이지." 그건 그렇다. 실제로도 반데라스는 세레나와 결혼하지 않았던가? 자국내의 유력가문 여식과 결혼을 하는 것은 국왕의 정치적 기반을 더욱 튼튼하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정략결혼은 가끔 외척 득세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역사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외척이 득세한 나라치고 잘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라지만,찾아보면 하나쯤은 나오지않을까?) "하지만 키레아 폐하의 경우는 조금다르지. 일단 아이리스 왕국을 재건하는데 있어서 특정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것도 그렇다. 아이리스 왕국을 재건하는데가장 큰 도움을 준 가문이라고 하면, 당연 아이언스 공작가를 들수있을것이다. "…….." 흠흠 농담한번 해봤다. 아이언스 공작가보다는 사일런스 백작가가 좀더 도움을 주긴 했다. 일단 사일런스 지니 백작과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이렇게 둘씩이나 있었으니, 뭐 여러가문의 도움이 있었지만,이렇다 할 만큼 크게 도움을 준 가문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공신이라 할 만한 사람들은 그다지 정치권력에 욕심이 없고. 재건국 1등 공신 세명(나,지니,일루니아 여사님)이 다른세계로 떠났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만약 키레아 왕이 아이리스를 재건하는데 유력가문이 도움을 받았다면, 좋든싫든 그 가문의 여식을 왕비, 또는 후궁으로 받아들여야 했을것이다(물론 그 집에 딸이있을경우에만!). 그리고 그 가문이 계속해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막을수없었을것이다. 다행히 아이리스 왕궁의 재건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한것이아니라 키레아 왕이 스스로 한것이다. 다시 말해 재건에 있어서 가장 큰 도움을 준사람은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이다. 그렇다 보니 현재 아이리스 왕국에는 특별히 입김센 가문이 없다. 덕분에 과거사 청산도 꽤나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자바스와 아토리아에 협력해 국가와 민족을 팔아넘긴 귀족들은 전부 처벌 받았다. 죄질이 무거운 귀족들은 아예 가문을 몰살시켰고, 그나마 죄질이 가벼운 귀족들은 영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국외로 내쫓았다. 으음 , 이거하나는 정말 잘한것같다. 매국노 재산을 몰수 하기는 커녕 매국노 후손들에게 땅 돌려주기 바쁜나라도 있는데. 참 비교되는군. 아무튼 현재 아이리스 왕국의 권력은 귀족들이 나닌 키레아왕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있다. 젤대 왕권제에서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국왕에게 권력이 집중되어있어야한다.(그예로 조선은 후기에 외척들이 득세하고 귀족들과 지방 토호들이 설쳐대면서 그야말로 개판이되었다.) "그래서 국제 관계도 생각해서 왕족끼리의 결혼을 생각해본 거야.헤리오 왕국은 아이리스 왕국의 최대 우방국인데다가 마침 결혼하지 않은 공주도 둘이나 있지. 게다가 제1왕녀인 에이미 공주는 혼기가 차기도 했고, 다행히 반데라스 폐하도 긍정적인 답변을 했어.,,그래서 이런저런 얘기가 오간끝에 결국 결혼이 성사된거야." 일루니아 여사님의 얘기가 끝나자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잠시 생각하던 루시아는 갑자기 생각난듯 물었다. "헤리오의공주고 나이가 17살인건 알겠는데 대체 어떤여자야?혹시알아?" "직접보진 못했지만, 예쁜것같아.은발을 길게 기른 미녀라고 헤리오 왕국내에서 소문이 자자하니까." 난 재빨리 끼어들었다. "어느나라나 공주는 대체적으로 예쁜편이지요.그래봐야 우리 루시아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우리 루시아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공주에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우리'라는 단어가 참으로 거슬리네요." "그럼 '나의'로 바꿀까요?" '우리루시아'와 '나의루시아' 어느쪽이 더 어감이 좋으려나? 루시아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무슨말을 하느거야, 바보야?" 그래도 꼬집지는 않는걸 보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라는 칭찬이 싫지는 않은가 보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저 뺸질이 좀 쫓아내, 루시아." "……헉!" 또 뺸질이? 내가 그 뺀질이라는 소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날 뺸질이라고 했단 말이야? 난 '당장 그 말 취소해. 이 아줌마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상대는 임부아닌가? 뱃속에 있는 두아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참아야지. 일루니아 여사님은 말을 이었다. "성격은 좀 말괄량이인가봐. 그래서 헤리오 국민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높아. 덕분에 말도 많았지." "무슨말?" "왕가의 이미지가 실추된다는말. 왜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들은 왕족과 귀족은 타고나는 존재라고 믿기도 하잖아.그래서 일반 백성 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안되고 신성시 되는 존재로 남아있어야한다는." "그래서 결론은 괜찮은 여자라는 거야?" "응 아무리 정략적 목적이 있다 해도 한 나라의 안주인을 뽑는 일인데 안 괜찮은 여자로 할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 여자가 낳은 자식이 장래에 아이리스 왕국을 이끌어가게 될테니, 외모보다는 품성과 행실이 중요하지." 왕이라고 무조건 예쁜여자와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아니, 무조건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하긴한다. 왕비가 아닌 후궁으로 말이다. 왕비는 한 나라의 안주인이자, 장래 국왕이 될 아이의 어머니다. 그런 중요한 위치인 만큼 왕비는 가문,외모,품성,행실 등 여러가지면을 고려해 뽑는다. 가문이 좋고 예쁘더라도 성질이 더러우면 다 소용없다. 그런 어머니가 기른 자식이 왕이 되면, 그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기 떄문에 왕비는 품성이 착하고 행실이 올발라야 한다. 안이 튼튼해야 바깥도 튼튼하지 않겠나? "뭐 반데라스 여동생이니 착하겠지 너무 걱정하지마 루시아." "으응." 고개를 끄덕였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걱정이 많은듯했다. 하긴, 하나뿐인 오빠가 결혼하는데 어찌 걱정이 안되겠는가? 난루시아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 어깨를 살짝 감싸안았다. 루시아는 내가 어꺠에 손을 얹은 것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루시아는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말했다. "그럼 언제 아이리스 왕국으로 가는거야?" "아직 일정은 정하지 않았어, 내가 좀더 그쪽과 얘기를 해본 다음 알려줄게." "응 , 정해지는 대로 꼭 알려줘야해." "알았어." 얘기가 끝나자 난 루시아와 함께 일루니아 여사님 방을 나왔다. 루시아는 부엌으로 햐애고 난 그 뒤를 졸졸 다랐다. 부엌에 도착한 루시아는 찬물을 마셨다. 목이 많이 말랐었나 보다. 루시아는 식탁 앞에 앉았고, 난 그 옆에 앉았다. 루시아는 컵을 내려놓고 나에게 물었다. "너도 갈거야?" "응?가다니?" "결혼식 말이야" "당연하지, 처남의 결혼식에 매부가 빠질수는 없잖아." 순간 루시아의 표정이 변했다.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보았다. "처남? 매부? 너 그거 무슨뜻이야?" "아 아니 뭐……." 변명을 하려던 나는 오히려 뻔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한테 키레아 왕은 처남이고, 키레아 왕한테 나는 매부지." "그러니까 왜 처남이고 왜 매부냐고?" "그 그야 난 라이 루 루비의 아빠고 넌 라이 루 루비의 엄마니까. 즉 우리는 부부라는거지 . 헤헤~" 난최대한 귀엽게 웃어보였다. 루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상대를 말아야지." "……" 어린 엘프들이 하면 잘 되던데 왜 난 안되는거지?" 나도 자세히 보면 걔들만큼 귀여운데. "아무튼 나도 결혼식 갈거야.부부동반으로 참석하는 쪽이 좀더 보기 좋잖아.안그래?" "응, 안그래." "……." 제발 그렇게 잘라 말하지 말아줘 너무 잔안하단 말이야. "라이 루 루비도 데려가야겠지?" 역시나 어린 엘프들을 챙기는 루시아. 만약 어린 엘프들을 이곳에 놓고 가려면, 루시아는 차라리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택할것이다. "당연데려가야지. 걔들한텐 외삼촌 결혼식인 셈인데." 내가 주저 없이 찬성하자 루시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맞아. 애들은 꼭 데려가야대." "응." 애들은 '꼭'이고 난 '덤'인가? "그럼 가게는 어떻게 하지?" "나도 그 문제가지고 지니랑 상의를 해봤어." "지니 오빠는 뭐래?" "언제 출발할지 모르니 일단은 가게를 재개점 하는게 좋을것 같대, 장사좀 하다가 다시 문닫고 출발하자는거지." "그럼 문 열자마자 닫는게 되잖아." "그래도 어쩔수 없지. 이미 유치원과 연계해 이벤트 벌이기로 한데다가 홍보까지 다 해놨으니까 하루라도 일해서 돈 벌어야지 언제까지 쉬고있을수만은 없잖아." "응, 듣고보니 그게 좋겠다. 난 무릎위에 가지런히 놓은 루시아의 손 위에 내손을 겹쳤다. 돈많이 벌어서 널 꼭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내가 그렇게 굳게 다짐하는데 루시아가 말했다. "돈 많이 벌어서 우리 라이 루 루비 행복하게 만들어줄거야." "……...." 그럼히로는? 히로도 행복해지고 싶은데... 아이리스 Story29 재개점 새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서는 물론 세계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라이의집' 재개점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덤으로 '엘프유치원' 개원 날이기도 하다. 나는 개점을 하기 전에 먼저 가게를 점검했다. 내가 조명을 켜자 어린 엘프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예뻐요, 오빠!" "가게가 막막 예뻐졌어요!" "너무 좋아요!" "후후후~당연하지.들인돈이 얼만데." 넓고 환한 매장안에는 각종 인형들이 가득했다. 푸근하고 아늑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느낌의 매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 지면서 동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어때?" 난 내 옆에 있는 루시아 에게 물었다. 루시아는 매장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무 마음에 들어." "정말?" "응. 이렇게 아름다운 가게가 우리 가게라니 믿어지지 않아." 루시아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난 루시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여기가 바로 우리 가게야. 건물도 우리 거니까 임대료 낼 필요도 없어." "응. 나 열심히 일할거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힘들면 언제든 쉬어. 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슴이 아프니까." "응.고마워." "……" 헉! 고맙다니! 루시아가 나에게 고맙다니! 웬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에헤헤~!" 얼인엘프들은 우리를 보며 단체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오빠랑 언니랑 손잡고 있어." "응응. 좀있으면 뽀뽀도 할것같아." "맞아. 내생각에도 뽀뽀할것 같아." "……." 이것들이 진짜! 스머프만한 것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다. 발랑 까진 엘프들 같으니. "2층으로 올라가 보자." "응." 난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장난감과 함께 학용품을 판다. 이건 지니가 생각해 낸 것이다. 학생들이 많이 오니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될것이다. 그리고 같이 온 부모들이 낮아서 쉴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있다. 한쪽에 커피,차,음료 등과 함께 쿠키 등의 간식거리를 판다. 참고로 인형가게 안의 찻집을 책임지는 사람은인디. 찻집에서 나오는 매출은 가게 매출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인형가게에 와서 인형은 안 사가고 차만 마시고 가는 사람도 있으니. 인형이 가득한 아늑한 공간에서 아이들과 함께 편히 즐길 수 있는……... 뭐, 그런게 우리 가게의 컨셉이다. "너무 예쁘다!" 루시아는 2층 인테리어도 마음에 드는지 눈을 크게 뜨며 기뻐했다. 난 기회를 놓칠세라 루시아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 다 너를 위한거야." 아아~ 이 얼마나 낭만적인 대사란 말인가? 루시아도 이정도면 충분히 감동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뒤쪽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니 어린 엘프들이 어꺠동무를 한채 나를 노려보고있다. 우리는요오~? ……..라고 말하는것 같은 눈빛. 난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물론 우리 라이 루 루비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하하하~." 애들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어떻습니까? 인테리어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어느새 2층에 나타난 지니와 크로니스. 난 지니를 무시하고 크로니스에게 달려갔다. 크로니스는 나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드나요?"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마음에 들어요." 난 건물 리모델링과 가게 인테리어를 위해 크로니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있다. 일이 너무 많아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도 많았으니.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애써준 크로니스. 이런게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고마워요,크로니스.그리고 미안해요." 내가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하자 크로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할 필요도, 미안해 할 필요도 없어요.제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요." 이렇게 감동적일수가! 크로니스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 그저 기쁠 다름이다. 난 너무 감동 받은 나머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흑~정말고마워요.크로니스가 제곁에 있어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저도 항상 아이언스 공작님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 댁은 됐거든. "가게가 너무 예뻐요.일루니아님." "예.정말 예쁘네요.인디님." 어느새 등장한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은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때문에 임신한 것이 그다지 티나지 않았다. 배를 조이는 옷을 입으면 태아에게 안 좋기 때문에 헐렁한 옷을 입은건가? 일루니아 여사님 옆에 서 있는 인디는 주위를 둘러보며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예전 가게도 좋았지만, 지금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전 이런 가게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어요." "……." 이거 니 가게 아니거든. 인디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가게 재개점 축하드려요,히로님." "아니,뭐 축하까지야……아! 오늘부터 일해야 하는거 알지?" "예.물론이에요. 2층매장은 저와 일루니아님이 맡을테니 걱정마세요." "일루니아 여사님까지?" 난 일루니아 여사님을 돌아보았다. "괜찮으시겠어요?" "뭐가요?" "일하시는거요. 임신했으니 집에서 쉬시는게 좋지 않겠어요?" "몸이 무거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괜찮아요." 일루니아 여사님 말이 끝나자 인디가 덧붙여 말했다. "임신했다고 집에서만 쉬는 것은 안 좋답니다. 어느정도 운동을 하는것이 태아 건강에도 도움이 된대요.물론 무리하면 안되지만요. 일루니아님은 제가 잘 보살필 테니 안심하세요,히로님." "아니 , 뭐 특별히 걱정한 건 아닌데……." 일루니아 여사님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쥐 주제에 고양이 생각해주기는." "……..." 헉!뭐라? 지금나보고 쥐라고 한건가? 톰과제리를 보면 쥐인 제리가 고양이인 톰을 항상 약올리고 괴롭힌다. 그렇다면 나는 제리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톰……....이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현실은 만화와 다르다. 어떤쥐가 미쳤다고 고양이를 약 올리고, 어떤 고양이가 미쳤다고 쥐와 놀아주겠는가? 현실에서 제리는 톰에게 잡아먹히는 한 마리 가련한 생쥐에 불과하다. 결국 나는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잡아먹혀야 할 운명? 아아~ 뱃속의 애들이 일루니아 여사님의 성격을 닮을까봐 정말 걱정된다. 뭐, 그건 나중 일이니 그때가서 걱정하자. 난 가게 사장으로서 종업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 오늘은 매우 많은 손님들이 우리가게를 방문할 것으로 생각되니 만반의 준비를 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예. 오빠 라이 열심히 할거에요!" "루비도 열심히 할래요!" "저만 믿으세요,형." "……." 니들한테 말한거 아니거든.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고마운데 어린 엘프들은 연비가 너무 안좋다. 애들 한시간 일 시키려면 피자 한판이 필요하다. 즉, 애들이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적자가 나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고마워,얘들아." 이런나의마음을 모르는 루시아는 웃으며 어린 엘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9시가 가까워지자 부모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하나둘씩 나타났다. 엄마손을 잡고 웃으며 걸어오는 아이가 있는 반면, 시끄럽게 울며 질질 끌려오는 아이도 있었다. 어떤아이는 아예 바닥에 엎드려 땡깡을 부리기도 했다. "우와아아앙! 유치원 가기 싫어! 담비유치원 가기 싫단 말이야!" 울며불며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 떄문에 아이 엄마는 어쩔줄몰라했다. 주위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더니 억지로 아이를 안아드는 아이엄마. 난 그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훗~ 첫 보아하니 초보엄마군. 우는 아이 하나 못 달래다니. 저래서 앞으로 애를 어떻게 키울지 걱정이다. 내 토닥토닥 스킬이면 우는 아이쯤이야 한방에 끝이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애 셋을 키우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린 엘프 셋을 별 무리없이 키우는 중이다. 이모든것이 내가 직접 개발해낸 각종 스킬 덕분이다. 토닥토닥 스킬, 머리쓰다듬기 스킬, 어부바 스킬,등등 이런 스킬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면 아이들 키우는 것이 굉장히 수월해진다. 뭐, 부모의 스킬 레벨이 올라가도 아이의 땡깡 스킬 레벨이 같이 올라간다면 소용 없겠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3층(유치원은 3,4층)으로 올라갔다. 나와 루시아도 유치원을 향했다. 3층 '엘프의숲(대강당)'에서 입원식이 있었다. 이번에 유치원에 입원하는 아이들은 대략 70명 정도였다. 여섯 일곱 살정도 되어보이는 (그리고 실제로도 여섯 일곱살인)아이들은 울거나 장난치기에빳다. 앞에 서있는 여자 원장의 말을 듣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유치원 관련일은 지니가 전부 처리해 왔기에 원장을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장은 30대 중반 정도 보이는 여성이었다. 키가 크로 약간 마른 몸매, 갸름한 얼굴에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헤어스타일은 어꺠까지 내려오는 반 곱슬이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지적인 느낌의 미인이다. 아이들을 잘 가르칠것같은. 적어도 아이들에게 쓰레기죽을 영양죽이라고 속여서 먹일 사람 같지는 않다. 뭐, 그런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냐마는. 여기가 국가 공인 교육기관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설 교육기관인 만큼 입원식은 간단하게 치러졌다. (사실 학교 입학식도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만 빼면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아직 엄마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린애들 데리고 형식과 절차를 다져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원장도 잘 알고 있나보다. 먼저 원장을 비롯한 선생들이 아이들에게 인사를하고, 그다음에는 반은 나누었다. 빨강,노랑,파랑,초록반 이렇게 네개반이다. 선생들은 반 이름과 똑같은 색깔의 모자와 엘프 유치원이라고 써진 가방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좀 고급스러운 유치원은 유치원생들에게 교복까지 입힌다던데. 여긴 그정도까진 아닌가 보다. "우와아아앙! 담비한테 안줘! 담비한테는 모자랑 가방 안줘!" 한여자아이는 모자와 가방을 늦게 나눠준다고 바닥에 누워 울며불며 난리를 치기도했다. 애엄마는 재빨리 달려 나와 애를 끌어안고 달래며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아이는 울음을 그치기는 커녕 더욱 크게 울어댔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앙아아앙!" 아아~ 시끄럽다. 웬만하면 참아보고 싶은데, 귀가 다가울 지경이다. 저런애 키우는 엄마는 참으로 힘들겠군. 그에비하면 나와 루시아는 축복받은 셈이다. 라이 루 루비는 오빠와 언니말을 잘 듣는 귀엽고 착한 아이들이니. 게다가 우는것도 시끄럽기 보다는 귀엽다. 워낙 귀여운 아이들이다 보니 우는 모습 또한 귀엽기 그지없다.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거릴 떄면 얼마나 귀엽고 깜찍한지……..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다. 루시아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 라이 루 루비 만큼 예쁜아이들은 없네." 난 재빨리 맞장구 쳤다. " 그야 당연하지. 우리아이들만큼 예쁜 아이들이 이세상에 있을리없잖아." "맞아.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제일 예뻐." 자랑스럽게 말하는 루시아. 이럴때보면 정말 팔불출 엄마가 다로없다. 입원식이 끝나자 우리는 앞으로 나섰다. 그제야 우리들을 발견한 아이들과 부모들은 깜짝 놀랐다. 당연 루시아의 미모 때문이다. 단일 민족인 이나라에서 백금발의 백인 미녀를 만나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라기보다는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그 미녀가 경국지색의 미모를 갖추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심지어는 울던 아이까지 울음을 그치고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루시아는 당황해 어쩔줄 몰랐다. 오죽 당황했으면 루시아가 먼저 내손을 붙잡았겠는가? 난 루시아의 어꺠에 손을 얹어 안심시켜주었다. "쑥스러워하지마. 내가 곁에 있어줄 테니까." 난 아이들과 부모들을 보며 말했다. "엘프 유치원입학을 축하드리는 의미에서 저희 '라이의집'에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하나씩 받아가세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인형을 선물로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기뻐하며 인형을 받았다. 아아~ 이 피같은 인형들을 공짜로 나눠주다니. 아무리 가게 홍보를 위해서라지만, 너무아깝다. "와아! 예쁜 누나다!" "와아! 예쁜 언니다!" 아이들은 루시아의 미모에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애나 어른이나 미인을 좋아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 잘생긴 오빠도 있는데. 잘생긴 오빠도 좀 쳐다봐 주면 안되겠니? 어쩃든 인형을 다 나눠준 우리는 유치원을 나왓다. 가게는 개점준비가 한창이었다. 10시 개점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때문에 인디 일루니아 여시님 지니 크로니스는 바쁘게 돌아다녔다. 가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누가보면 여기서 유명 연예인 사인회라도 하는 줄 알것이다.자세히 보니 상당수가 지니 팬클럽과 크로니스 팬클럽회원들이다. "지니 오빠를 다시볼수있다니." "그동안 너무 보고싶었어요,지니오빠." "우리에겐 오직 크로니스 오빠뿐이야." "맞아. 난 크로니스 오빠를 위해서라면 죽을수도 있어."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 굉장히 귀여운 아이들이 있대." "응. 나도 들었어, 회색머리 여자애 하나랑 빨강머리 여자애, 빨강머리 남자애가 있다지?" "빨강머리 여자애와 남자애는 쌍둥이 인것같아." "너 봤니?" "응. 전에 한번 봤는데 귀여워 죽는줄 알았어." 아주 드물지만 그냥 인형 사러온 사람들도 있었다. "아들한테 선물할 3단 변신 장난감을 사야지." "딸 생일에 선물할 '바비의 무도회장'을 사야지." 끝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줄. 대부분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뭐 염불에 관심이 많든 잿밥에 관심이 많든 어쩃든 매상만 올라가면된다. 그런…….. "아무리 찾아봐도 내 팬클럽은 안보이네." 왜 안왔을까? 오기가 좀 쑥스러웠나? 개점 시간까지는 이제 10분 남았다. 이미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상태다. 오늘 최대 매상을 올려주마! 시계바늘이 10시를 가리키자 지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줄 서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마치 백화점 폭탄 세일할 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진정들 하세요! 인형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소리쳤지만,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꺄아~크로니스 오빠아~!" "헉! 이쪽으로 오지마!" 난 재빨리 몸을 피하려 했으나 여자들이 좀더 빨랐다. 그녀들은 울으르 몰려와 나를 짓밟고 우르르 사라졌다. 마치 백만 대군이 나를 휩쓸고 지나간것같다. 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또 다시 한 무리의 여자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꺄아!저기 지니오빠다!" "안돼! 오지마!" 으르르! 수많은 발들이 내 온몸을 밟고 지나간다. HP가 100에서 10으로 떨어진 느낌이다. 후후~ 그래도 아직 살아있군. 살아만 있으면 자체 회복 능력으로 HP를 다시 100으로 만들수있다. 크로니스 팬클럽과 지니 팬클럽이 나를 밟고 지나갔으니, 더 이상 밟을 사람도 없겠지? 만약 같은 공격을 한 번 더 받게 된다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뭐, 더이상의 공격이 있을리…………. "앗! 저기 귀여운 아이들이다!" "헉! 안돼애~!" 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만약 그 순간, 몸을 굴려 옆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비록 8클래스를 마스터 하고 빅장과 개나리 스텝, 청룡도법(?) 등의 필살기를 갖춘 마검사라 하더라도 엄연히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인간은 심한 타격을 받으면 죽기 마련,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내가 마검사여서 살아남은 것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죽고도 남았을것이다. 아무리 돈이 생명을 깎아가며 버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목숨까지 걸어야하다니. 이건 좀 심한거 아닌가?가게 안은 난장판을 넘엉서 개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밀려들어온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저번 크리스마스 이후 이렇게 사람 많이 몰린 적은 처음이다. 나 루시아 지니 크로니스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이렇게 여섯명이서 정신없이 일했지만,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다.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2층에서 정신없이 차를 끓이고 쿠키를 굽고 있으며 루시아와 크로니스는 계산을 나와 지니는 팔린 인형을 창고에서 꺼내 채워넣거나 손님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았다. 어린 엘프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도와주었다. 다시 말해 가만히 앉아있었다. 애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니. 아아~ 일손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게다가 사람들이 줄어들기는 커녕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군. 난 하던 일을 지니에게 떠넘기며 말했다. "잠깐만 부탁할게요." "어디가실 생각이십니까?" "지원군을 끌고 오겠습니다. 그떄까지만 전장을 사수해 주십시오." 지니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을 믿고 쵯넝을 다해 버티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럼 잠시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난 가게를 빠져나와 재빨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먼저 집으로 들어가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도착한 나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동안 숨돌릴틈도 없이 일했더니 타는 듯이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후아~!" 찬물을 마시니 좀살것같다. 난 사다리를 타고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내가 생각한 지원군은 라이레얼과 카르가 아닌 영아다. 라이레얼과 카르는 지금 자고 있는데다가, 내가 일을 부탁할만한 입장도 아니다. 하지만 영아는 다르다 영아는 내 사촌여동생이 아닌가? 피는 물보다 진하고 혈연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힘이다. 사촌일걸 최대한 부각시켜 공짜로 부려먹어 주마! 난 그렇게 다짐하며 덮개를 열고 옥탑방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영아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중이었다. "……." 쟤가 웬 일로 이렇게 이른시간부터 글을 쓴다냐? 설마 또 마감이 돌아온건가? 얼마나 집중해서 쓰는지 내가 보고있는 것도 모를정도다. 난 슬며시 옥탑방 안으로 들어가 영아에게 다가갔다. "뭐하니?" 내가 묻자 영아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글써." "무슨글?" "그건....꺄악!" 그제야 내 존재를 깨달은 영아는 깜짝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언제 온거야, 오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영아는 날 보며 소리쳤다. "숙녀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면 어떡해!" "우리사이에 모슨 노크까지 하고 그러니?" "우리 사이가 무슨사인데??" "우리사이는 사촌사이란다. 너희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형제고, 우리는 같은 할아버지를 두고 있어. 세상에 이보다 가까운 사이는 흔치않단다." 난 계획대로 최대한 혈연을 부각시켰다. "그나저나 놀라도 너무 놀라는구나. 마치 나쁜짓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말이야." "그,그게 무슨말이야.오빠? 내,내가 나쁜짓을 하고 있었을 리가 없잖아.호호~" "……" 뭐야 ?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반응이 왜이래? 영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노트북모니터를 슬쩍 덮었다. 그 행동이 수상함의 극치다. 얼마나 수상한지 영아의 이마에 벌써 '죄인'이라고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어쨰서 노트북 모니터를 덮을 걸까? 노트북 모니터를 덮었다는 것은 노트북에 내가 봐서는 안될 무언가 있다는 건데…….. "그그런데 무슨일이야 오빠? "응 무슨일이냐하면……." 난 말을 하는 척하며 재빠릴 노트북을 가로챘다.영아는 깜짝놀라 소리쳤다. "꺄아! 뭐하는 짓이야, 오빠? 빨리 돌려줘!" "……" 이렇게 놀라며 난리를 치는 걸 보니 더더욱 수상하다. "가만히 있지 못해. 이 앞짱구야!" "빨리 돌려줘! 빨리!" 난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든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영아는 노트북을 빼앗기 위해 깡충깡충 뛰어 보았지만, 짧은 다리와 짧은 팔, 빈약한 점프력 등의 악재로 노트북을 회수하지는 못했다. 몇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영아는 두손을 허리에 얹고 날 노려보았다. "대체 왜 그러는데,오빠?" "너야말로 대체 왜 그러는데? 혹시 이 오빠가 노트북을 봐서는 안될이유라도 있니?" "그,그건... 속마음을 잘 숨길줄 모르는 영아는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역시나 노트북에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건가? 영아의 태도는 야동을 보고있는데, 엄마가 방문을 열었을때 청소년들이 보이는 반응과 비슷했다. 하지만 영아는 분명 문서 프로그램을 띄우고 글을 쓰고 있었다. "그,그건 습작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잘됐네. 그럼 이오빠가 보고 평가해 줄게." 내말에 영아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안돼!" "어쨰서??" "너,너무 엉망인 글이라 다른사람에게 보이기 부끄럽단 말이야." "괜찮아. 이 오빠는 엉망인 글 보는게 취미란다." "안돼! 안된단 말이야! 빨리 돌려줘어!" 영아는 죽어도 보여줄수 없다는 듯 몸으로 나를 밀쳤다.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며 우리는 같이 침대에 쓰러졌다. 영아는 계속해서 노트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 안되면 노트북을 박살내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다. 난 노트북이 망가질까봐 두려워 일단 노트북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영아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엎치락 뒤치락. 영아의 공격은 치열했고, 나의 방어도 치열했다. 하지만 이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싸움이었다. 평범한 앞짱구인 영아가 마검사 아이언스 히로를 이긴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결국 영아는 패배했다. 난 영아가 더이상 반항하지 못하도록 박스테이프로 손발을 묶었다. 영아는 몸을 비트는 등 온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손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거풀어 오빠! 대체 나한테 무슨짓을 하려는 거야? 우리는 사촌사이란 말이야! 이러는건 옳지 못해! 그리고 나에게는 지니오빠와 크로니스 오빠와 라이레얼 언니와 루가 있어!" "그래그래 너한테는 지니와 크로니스 와 라이레얼과 루가 있으니까 아무짓도 안할게. 대신 노트북만 잠깐 볼게." "헉! 그건 안돼!" 노트북얘기가 나오니 경악을 하는 영아. 궁금증이 점점 증폭되어간다. 혹시 이 노트북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는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존F..케네디의 암살 파일이라든가…….. 난 영아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하고 노트북 모니터를 열었다. 그리고 영아가 쓰고 있던 글을 읽어보았다. 라이와 루비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 침대에는 한 남자가 누워책을 읽고 있었다. 라이와 루비느 쭈뼛주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라이와 루비 왔구나." 라이와 루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주인님." "네,주인님." 그는 차가운 눈으로 라이와 루비를 훑어보았다. 열살정도 되어보이는 귀엽고 깜직한 두 여자아이. 통통한 볼과 커다란 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엉덩이까지 오는 회색 머리카락과 맑은 회색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라이이고, 어깨를 덮은 빨간색 머리카락과 밝게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루비다. 두 소녀 모두 검은색 원단에 하얀색 프릴이 달린 메이드 복을 입고 있었다. 반팔 소매와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 다리에는 흰색 스타킹과 끝이 뭉툭한 검은색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이러한 복장은 안그래도 귀엽고 깜찍한 소녀들을 더욱 귀엽고 깜찍하게 보이게했다. 초절정 귀염둥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두 소녀는 귀여웠다. 하지만 두 소녀는 애처롭게 몸을 떨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겁에 질려있는것이 틀림없었다. 소녀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히로. 그는 두소녀의 주인이었다. "루비, 이리로 오렴." 히로의 말에 루비는 두려워하며 침대위로 올라갔다. 루비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하짐나 주인님의 말씀을 거역할수는 없었다. 히로는 루비를 껴안았다. 그리고 두손으로 루비의 몸을 어루만졌다. "후후~ 루비는 참으로 귀엽구나." 히로는 루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이어 반대편 볼과 이마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떄마다 루비는 몸을 떨었다. 히로는 손으로 루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루비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히로는 루비의 커다란 눈에 가득고인 눈물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 루비 왜 그러니?" 루비는 울음을 참기위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히로의 손이 엉덩이를 어루만지자, 결국 을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으아아앙~!" 루비가 눈물을 펑펑쏟으며 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히로의 표정을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 맺힌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후후~ 주인님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다니, 루비는 참으로 건방진 메이드구나." "으앙~으앙~ 루비는 싫단 말이에요오." "싫다니? 뭐가?" "으앙~으앙~ 주인님이 루비 몸 만지는 것도 싫고 ,볼에 뽀뽀하는것도 싫어요오. 루비를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주인님." "그래?" 히로는 시선을 라이에게로 돌렸다. 그 차가운 시선에 라이는 흠칫 놀랐다. "루비 교육은 라이가 담당하는걸로 아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히로의 말에 라이는 두손을 모으고 머리와 허리를 숙였다. "죄,죄송해요 주인님 라이가 잘못했어요." "그래? 그럼 잘못했으면 어떻게 해야지?" "벌을 받아야해요." "후후~ 라이는 참으로 똑똑한 메이드구나. 맞아.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라이이리오렴." "예 주인님." 라이는 덜덜 떨며 한발한발 히로에게 다가갔다. 라이가 침대위에 올라가자 히로는 차갑게 말했다. "엎드리렴." 라이는 두손으로 침대모서리를 짚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히로는 그 모습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차 없이 손을 휘둘렀다. 찰싹! 히로의 손바닥이 라이의 엉덩이를 떄렸다. 다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비을 질렀다. "꺄아!" " 이정도로는 아직 부족하지." 히로는 계속 해서 손바닥으로 라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찰싹!찰싹!찰싹! 이를 악물고 참던 라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하지만 히로는 라이가 울든 말든 가차없이 손을 휘둘렀다. "뭘 잘했다고 울어?라이는 나쁜 메이드야! 나쁜메이드는 벌을 받아야돼!" "우엥~우엥~아파요오." "그러니까 루비를 잘 교육시켜야 할거 아니야?" "우엥~우엥~ 잘못했어요오." "지금와서 잘못을 빌어봐야 소용없어!" 찰싹!찰싹!찰싹! 히로는 더욱 세게 라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아픔이 커지자 라이의 울음소리도 다라서 커졌다. 그모습을 본 루비는 울며 히로에게 매달렸다. "으앙~으앙~ 루비가 잘못했어요, 주인님. 라이 떄리지 마세요오." 하지만 히로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찰싹!찰싹!찰싹! "우에에엥~!" 루비는 라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히로는 루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비켜." "으앙~ 루비가 잘못했어요. 시키는거 다할테니까 라이 때리지 마세요 주인님." 히로는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시키는거 다하겠다고?" 루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쩍~네, 주인님. 루비는 주인님이 시키는거라면 뭐든 다 하겠어요. 그러니 제발 라이를 때리지 말아주세요." "그건 루비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 거란다. 루비가 잘하면 라이를 용서해주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주인님 말을 거역한다면 라이는 큰 벌을 받게 될거야.후후후~" 히로는 그렇게 말하며 룹의 몸을 쓰다듬었다. 루비는 눈을 질끔 감았다. '루비가 싫다고 하면 라이가 혼나게 될거야 . 루비는 라이를 위해서라도 참을테야.' 히로는 손을 안으로 넣고 루비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루비의 허벅지는 참으로 부드럽구나." "훌쩍~." 루비는 입을 꼭 다문 채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히로는 루비의 치마를 붙잡았다. "루비가 오늘 어떤 팬티를 입었는지 한번 볼까?" " 아 ,안돼요!" 히로가 치마를 들어올리자 루비는 히로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히로는 입을 루비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라이가 혼나도 좋아?" "아,아니요."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훌쩍~." 루비는 침대에 쓰러져있는 라이를 한번 본 다음 손을 놓았다. 히로는 계속해서 치마를 들어올렸다. 이윽고 루비의 팬티가 드러났다. 귀여운 분홍색 팬티였다. "보, 보지 마세요 주인님." 루비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히로는 천천히 루비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이건……..." 글을 다 읽은 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내가 경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영아는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 재밋엇어 오빠?" "재밌는건 둘쨰치고 이게 대체 뭐니?" 내물음에 영아는 최대한 귀엽게 웃어보였다./ "에헤헤~." "……." 웃지마라.정든다. 난 일단 영아의 손발을 묶은 박스테이프를 풀어주었다. 찌익! "아야! 살살좀 떼 오빠." "시끄러! 니가 지금 그런말 할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영아는 박스테이프가 떨어져 나간 손목과 발목을 어루만졌다. 난 노트북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대체 뭔 소설이니?" "으응 쓰던 글이 하도 안써져서 심심풀이로 한번 써본거야. 맹세코 인터넷에 올릴생각은 없었어." "뭐? 인터넷에 올릴 생각까지 했딴 말이야?" "그럴 생각 없었다니까. 정말이야.오빠." "……" 발뺌하는것이 더욱 수상하다 "후후~ 우리 영아는 정말로 건방진 엘프……가 아니라 앞짱구 구나. 감히 이런글을 쓰다니 말이야." "시,심심해서 쓴거야,오빠.정말이야." "정말은 뭔 정말? 이 앞짱구가 쓰면 다 글이 되는줄 아나? 대체 저소설뭐야? 완전 야설아니야?" 내가 소리치자 영아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야설은 소설 장르으 ㅣ한 분야로서 외국에서는 이미…….." "시끄러!" "응 조용히 할게 오빠." 영아는 재빨리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영아를 노려보았다. 대체 저 소설은 뭐란말인가? 주인인 히로가 메이드인 라이와 루비에게 그렇고 그런짓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있는 소설 "아니, 루시아도 아니고 왜 하필 라이와 루비야?" "기왕 쓰는거 로리물로 쓰면 재밌을것 같아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응, 잘못했어 오빠 벌설게." 영아는 알아서 무릎꿇고 두손을 높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긴 아나보다. 아아~ 정신적 충격이 머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히로가 라이와 루비에게 그렇고 그런짓을 한다는게 말이나돼? "히로는 로리콘이 아니란 말이야! 히로한테는 오직 루시아뿐이야!" "그,그치만……" "그치만은 뭔 그치만?" "아,아니 그만큼 오빠가 라이와 루비와 친하다는걸 강조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쓴것뿐이야. 내맘알지 오빠? "……" 친하면 그렇고 그런짓하는거니? 그나저나 이소설 왜곡이 너무 심하다. 내가 머리 쓰다듬어주고 등 토닥여주고 엉덩이 두드려주면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리고 팬티 보이니까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려? 루비는 오빠한테 팬티 보이면 '아이 부끄러 부끄부끄~' 하며 좋아하는아이다. '보지마세요'등의 말을 한적은 없다. 오히려 팬티를 못 보여줘서 안달이다. 심지어는 내앞에서 치마를 들어올리기 까지 한다. "난 순순한 의미에서 라이와 루비를 사랑하는거야!" "응 오빠가 순순한 의미에서 애들 엉덩이 때리고 순순한 의미에서 애들볼에 뽀보하고 순순한 의미에서 애들 몸 어루만지는거 나도 다 알아." "……어쨰 말에 가시가 있는것 같다." "호호~ 그럴리가. 기분탓이야 기분탓. "됐으니까 일어나." "응." 영아는 재빨리 팔을 내리고 자세를 바로했다. 난 매서운 눈으로 영아를 노려보았다. 내 강렬한 눈빛에 영아는 몸을 움츠리며 최대한 귀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에헤헤~." "하지마라. 재수없다." 귀여운 웃음은 어린엘프들만의 전유물이다. 감히 앞짱구가 해도 될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쳇!" 영아는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난 일단 노트북에 있는 글을 지웠다. 영아는 그걸보며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째려보자 이내 웃음을 지엇다. "이런 글이나 쓰고 있는걸 보면 어지간히 할일이 없나 보구나." "응 뭐……..." "잘됐네. 그럼 다라오렴." 난 영아의 손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어디가는데?" "다라와보면 알아." 난 영아를 질질 끌고 가게로 데려갔다. 가게는 여전히 발 디딜 틈없이 빽빽했다. 영아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와아! 손님 되게 많다." "잘 아는구나." "가게 되게 예쁘다. 아! 저기 우리 루가 있네. 아았! 저여자뭐야? 지가 뭔데 감히 나의 루의 몸에 손을 대는거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어떤여자가 루의 머리를 쓰다듬자 영아는 분노해 소리쳤다. "나의 루에게서 떨어져!" "……" 이젠 '우리 루'도 아닌 '나의 루'다. 영아는 조만간 쇼타물을 하나 쓸것같은 느낌이 든다. 자신과 루를 주인공으로해서. "됐으니까 다라와." "안돼.! 빨리 루에게서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난 난리치는 영아를 질질 끌고 갔다. "날 여기 왜 데려온거야오빠?" "우리 가게에서 일좀 해야겠다. 일손이 너무 부족하거든." "뭐? 나보고 일을 하라고?" 영아는 팔짱을 끼며 나를 보았다. "좋아. 얼마 줄건데? 참고로 난 매우 비싼 전문직 인력이라는걸 말해두겠어." "……잇는놈이 더하다는 말이 맞긴 맞나보구나. 가만히 앉아있어도 떼돈이 굴러들어오는 니가 돈을 밝히는걸 보니까 말이야." "뭐 원래 세상이 그런거 아니겠어?" "시간당…….." "시간당?" "10원." "10원?" 영아는 잠시 10원이 어느정도 되는 액수인지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얼굴을 붉히며 를 냈다. "10만원도 아니고 10원?" "돈 한푼 안줘도 좋으니 우리가게에서 일만 하게 해달라는 애들이 널리고 널렸어. 10원주면 많이 주는거니." 정말이다. 돈은 안줘도좋으니 일만 하게 해달라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다. 어째서 냐고? 그야 당연 우리 가게에 지니와 크로니스가 있기 때문이다. 지니와 크로니스와 같이 일하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깟돈이 대수겠는가? 돈을 주는것이 아니라 돈을 받으며 일을 시킨다 해도 하겠다는 애들이 줄설것이다. "그래도 10원이 말이돼? 10원이면 최저임금에 못미쳐도 한참 못 미치잖아!" "일하는 내내 지니와 크로니스를 가까이 볼수있는데도?" 내말에 영아는 깜짝놀랐다. 머리구조가 단순해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저,정말?" "물론이지 덤으로 루도있어." "루까지?" 영아는 마음이 동하는 듯했다. 사실 영아에게 돈은 별로 상관없는 문제이다. 한달에 집세를 1백만원이나 낼 만큼 돈이 많은데 시급이 몇천원이든 10원이든 무슨상관이있는가? "그, 그치만 10원은 좀…….." "방금 니가 저지른 만행을 벌써 잊었니? 이 오빠가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었으니, 열심히 일해서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응 그런생각 들지않아." "……" 아님말구. 싫다는애한테 억지로 강요해 일 시켜봐야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하라고 하면 하기 싫은것이 사람 심리 아니겠는가? "뭐, 싫으면 말구 니가 싫다면 어쩔수 없지. 다른여자 아르바이트생이나 고용해야지~ 그나저나 그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지니와 크로니스에게 달라붙어 비비적거리면 어쩌려나? 어쩌면 루를 껴안고 뽀뽀하며 귀여워 해줄지도 모르지. 아르바이트생 모집 공고는 여기 붙여놓으면 되려나?" 내말에 영아는 깜짝 놀라 나에게 매달렸다. "아니야 오빠 그냥 내가 할게." 난 짐짓 모른척하며 말했다. "응? 아까 싫다고 하지 않았니?우리 앞짱구 마음은 잘 알겠지만, 앞짱구는 작가라는 직업이 있으니 엉서 올라가서 글쓰렴." "아아니야 오빠 나 정말 하고 싶어서 그래 제발 나엥게 시켜줘." "시급 10원인데?" "응.그거면 충분해." 간절하게 애원하는 영아. 난 어쩔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니뜻이 정 그렇다면야." "고마워 오빠 나 열심히 일할게." "……..." 무지하게 의욕이 넘치는게 수상하다. 설마 일은 안하고 지니 크로니스 루에게 작업을 걸려는 건 아니겠지?? 난영아를 데리고 가게 안쪽으로들어갔다. 손님을 안내하며 매장을 정리하는 지니의 모습이보인다. "아! 사일런스 백작님! 다행히 아직 살아 계셨군요." "예 하지만 이제 한계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지원군을 데리고 왔으니까요." 난 영아를 앞으로 내밀었다. 앞짱구 걸은 쑥스러운지 몸을 비비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지니오빠." "영아님이시군요. 인사드리겠습니다." 지니는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난 영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앞짱구 걸이 이제부터 일을 도와줄거에요." "오빠!" 앞짱구걸이라는 말에 발끈하는 영아. 하지만 아무리그래도 영아가 앞짱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앞짱구를 앞짱구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는가? 한번 앞짱구는 영원한 앞짱구다. 영아는 지니앞에서 소리친것이 부끄러운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찔렸다. 지니는 웃으며 영아에게 말했다. "무슨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제가 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영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영아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예. 오빠 저 열심히 할게요." "……" 뭘 열심히 하겠다는 건지 정말 궁금하다. 일을 열심히 해야할텐데…….... 영아는 슬쩍 지니에게 찰싹 달랄붙었다. 그러자 인형을 고르는척하며 지니를 주시하고 있던 지니 팬클럽 회원 여성들은 눈을 뒤집으로 분노했다. "저년이 감히 나의 지니님에게 달라붙다니!" "나도 지니님의 존안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는데!" "지니님에게 접근하는것들은 전부 죽어야해!" "저년을 당장 묻어버려!" "……" 여자들이 좀 과격하군. 영아는 자신이 생명의윟엽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체 계속 해서 지니에게 찝쩍거렸다. 그모습이 마치 루시아에게 찝쩍거리는 내 모습을 연상시킬정도다. 뭐 어쩃든 일손이 늘어났으니 다행이다. 어느새 점심때가 되엇다. 손님이 없을떄는 다같이 모여먹고, 손님이 조금있을때는 교대로 먹는다. 그리고 지금처럼 손님이 우글우글 할때는 점심도 못먹는다. 인디는 어린 엘프들을 데리고 집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굶더라도 어린 엘프들 밥은 챙겨줘야 할것 아닌가? "올라가서 밥 먹어 루시아" "바빠 죽겠는데 밥 먹으러 갈시간이 어딨어?" "그래도 먹어. 니가 밥 굶으면 내 가슴이 아프단 말이야." 그렇다 . 내가 굶든 지니가 굶든 별 상관없지만, 루시아가 굶는 것은 결코 용납할수없다. "괜찮아. 한끼 굶는다고 죽는것도 아니잖아." "……" 어린엘프들은 한끼굶으면 죽을것 같은데. "내가 더욱 열심히 일할테니까 걱정하지말고 올라가서 밥먹고와." "됐으니까 너나 잘해." "……." 난항상 잘하고 있는데.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만큼 루시아는 자신만 빠질 생각은 없는 듯했다. 몸은 힘들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지폐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이런게 돈 버는 재미라는 거겠지? 아아~ 그나저나 배고프긴 배고프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녔으니 배가 고플만도 하지. 루시아 역시 말은 안했지만 꽤 나 지치고 배고픈듯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시종 미소를 짓고있었다. 루시아도 매상 오르는것이 기쁜모양이다. 그런데 저기서 루시아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남자들은 무엇일까? 감히 나의루시아를 힐끔힐끔 보다니. 불쾌하기 그지없다. 난 보란듯이 루시아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연인임을 과시했다. 후후~ 나와 루시아는 이미 그렇고 그런사이야.그러니 루시아를 넘볼 생각은 하지도마. "이것좀 드시면서 하세요." 인디가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가게로 돌아왔다. 바구니 안에는 방금 만든 신선한 샌드위치와 함께 우유와 주스등이 들어있었다. "애들은?" "밥 먹인 다음 재웠어요." "그래, 잘했다." 인디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꺼내 내려놓은 다음 다시 바구니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자기는 2층에서 일루니아 여사님과 오붓하게 먹을 생각인가 보다. 그래도 이렇게 샌드위치까지 만들어 오다니. 인디의 정성이 제법 가슴에 와 닿는다. 나와 루시아는 잠시 일을 놓고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우리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들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루시아는 그제야 한숨 돌리며 손으로 어꺠를 두드렸다. "간만에 일하니 좀 피곤한것같아." "그래? 그럼 내가 어깨주물러 줄까?" "그래 줄래?" "……." 헉! 나의 루시아가 웬일로 허락을? "응 물론이지." 난 루시아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 재빨리 루시아의 뒤에 서서 어꺠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정성껏 루시아의 어꺠를 주물렀다. "시원해?" "응." 루시아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었다. "맛있다. 역시 형부가 만든건 뭐든 맛있다니까." "뭐, 괜히 가사 드래곤이 아니니까." 나도 샌드위치를 집어먹었다. 부드러운 빵과 함께 신선한 야채가 아삭아삭 씹힌다. 이정도면 샌드위치가게를 차려도 부족함이 없으리. 아니 여는 즉시 대박 날게 분명하다. 배가 어느 정도 차니 좀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루시아 역시 말은 안했지만 나와 같은 생각인듯했다. "저기 누워서 좀 쉬워,루시아." 난 휴게실 한쪽에 있는 간이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흘겨보았다. "내가 저기 누우면 무슨짓을 하려고?" "헉! 그게 무슨말이야? 설마 날 못믿는거야.루시아?" "됏으니까 빨리 일이나 해." "흑~ 너무해 루시아." 나와 루시아는 잠깐의 휴식과 점심식사를 끝마치고 다시 업무일선에 복귀했다. 점심때가 지나자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이젠 학생들까지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걸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겠다. "아이언스 공작님." "예? 바쁜데 왜 말걸고 그러세요/" "큰일났습니다." "예? 큰일이요? 무슨 큰일이요?" "화투치는 바비와 타짜들, 하우스에 간 바비 공주님 세트가 전부 떨어졌습니다." "예? 그런 세트도 나왔어요?" 타짜는 전문적인 도박꾼(특히 화투전문)을 하우스는 도박장을 뜻하는 은어다. 요즘은 바비도 화투치나? "한국인의 정서에 맞춰 이번에 새로 출시된 것입니다." "으음, 왠지 마음에 드는 세트네요. 그나저나 인기가 많나 보지요? 다팔린걸보니." "그렇습니다 남품업체에 좀더 주문을 넣어야할것 같습니다." "그럼 어서 재고가 없는 제품들을 조사해 목록을 뽑아 추가 주문을 하세요." "알겠습니다." 지니는 납품업체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었다. 아아~ 정신없다. 루시아와 크로니스는 계산대에 몰린 사람들로 인해 숨돌릴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계산대에 올려놓은 물건의 바코드를 찍고, 돈을 받아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고, 영수증을 끊어준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도 아름다운 루시아. 대체 루시아는 어떻게 하면 아름답지 않을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힘들어 죽겠어.오빠." 일한지 몇시간이 됐다고 내 옆에 앉아서 다리를 두드리는 영아. 난 영아의 앞짱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글쓴다고 방안에만 처박혀있어서 체력이 약해진거야. 이번 기회에 운동한다고생각해." "쳇! 공짜로 부려먹으면서 말은 잘해요." "…….." 눈치챘나? "공짜로 부려먹긴 누가 공짜로 부려먹어? 시급으로 10원이나 주잖아. 백날 땅을 파봐라. 10원이 나오는지." "요즘은 10원짜리 떨어져있으면 주워가지도 않아. 심지어는 은행에서 조차 잘 안 받아줘." "……." 그건 그렇다. 요즘은 10원은 돈으로 취급도 못받는다. "흠흠, 그래도 10시간 일하면 100원이야. 1만시간 일하면 10만원이고. 그러니 열심히 일하렴. 지니와 크로니스와 같이 일하는 영광은 아무나 가질수 있는 것이 아니야. 게다가 루시아도 볼수있고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도 볼수있지. 이런 미남 미녀들과 같이 일하는건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야." "뭐, 그건 오빠말이 맞아." "그리고……" "그리고?"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 초절정 꽃미남인 이 오빠의 얼굴을 실컷 볼수있는 영광도 함께 누리……." "시끄러워 오빠." "훗~좋으면서 아닌척하기는.하기야 우리는 사촌사이 이니 어쩔수없지. 우리 영아가 아무리 이 오빠를 사랑한다 해도 우리는 이루어질수없는 사이니까.후후후~" "아! 지니오빠!" 영아는 지니를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뛰어가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열심히 비비적 거렸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훗~ 질투심 유발작전이냐?" 영아는 내말을 못들은척하며 지니에게 말했다. "오빠가 잠깐 맛이 갔나봐요. 우리끼리 열심히 일해요." "……" 뭐? 오빠가 맛이가? 이앞짱구가 말이면 다 하는줄 아나? 감히 종업원이 사장에게 막말을 하다니! 아아~ 요즘 세상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넌 왜그런지 모르겠다-sangone88ㅋ)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막 하질 않나. 좋업원이 사장에게 막말하질 않나. 이나라에서 이러면 안되는거 아냐? 우리나라 신분제도를 감히 뭘로 보고…… 영아는 지니와 함께 창고로 사라졌다. 나는 손님들 안내를 맡았다. "둘리 인형세트는 어디에 있나요? "예. 이쪽에 있습니다." "마시마로 인형은 어디있나요?" "예. 그쪽에 있습니다." "헬로우 키티인형은 어디에 있나요?" "예.저쪽에 있습니다." "방가방가햄토리 인형은 어디에 있나요?" "예, 니눈앞에 있습니다. 보고도 모릅니까?" 난 친절하게손님들을 안내해 주었다.(ㅋㅋ) 봉제인형,바비인형,3단변신로봇,기타장난감들이 날개 돋친듯 팔려나간다. 아아~ 이젠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전부 돈으로 보일지경이다. 인형을 사기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아직도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다름이다. "꺄아! 제사랑을 받아주세요 크로니스 오빠!" "아니, 이년이 감히 주제를 모르고 크로니스님께 고백을 하다니!" "죽여버려!" "칼침을 박은 다음 빙글빙글 돌려!" "……" 저런것들은 좀 내쫓았으면 좋겠다. 크로니스가 곤란해 하잖아! 계산을 하는척하며 갑작스레 달려든 여자때문에 크로니스는 곤혹스러워하고있었다. 다행히 주위 여성들과 루시아의 도움으로 한 여성의 광기 어린 행동은 금세 진압(?)되었다.내가 '가게 안에서 고백금지'라고 써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소용이 없다. 그것은 말로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여자는 '크로니스 오빠의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어요' 라는 헛소리를 하며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내가 안 말렸으면 그 여자는 지금쯤 전신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것이다. 지랄도 병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죽으려먼 다른곳에서 죽을것이지, 우리가게에서 죽겠다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혹시 그 여자는 우리 가게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 파견된 에이전트가 아니었을까? 우리 가게는 은근히 적이 많다. 이근처의 인형상권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인형가게들의 견제가 만만치 않다. 실제로 가장 가까이 있던 두가게는 문을 닫기도 했다. 뭐, 가슴아프긴 하지만,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쟁에 밀려 도태되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쟁이 있어야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할테고, 노력이 있어야 제품과 서비스가 발전한다. 우리가게의 전략은 저가 전략이나 고가 전략같은것이 아니다. 요즘같은 시대에서는 웬만한 전략으로는 살아남을수없다. 게다가 우리가게 같은 경우에는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도 아니고 특별히 상권이 발달한 지역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게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 보으며 엄청난 매출을 올릴수 있는 것은 우리가게만의 차별화 된 전략떄문이다. 일명'얼굴마담'전략 지적이고 매너좋은 금발머리 미청년 지니. 고독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의 빨강머리 미청년 크로니스. 이둘이 일단 투톱이다. 그다음으로는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에 현모양처 같은 성격까지 갖춘 인디와 지적이고 성숙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일루니아 여사님이 있다. 여기에 아름답고 청초한 공주님이지만,깜찍한 아이들인 라이 루 루비 도 있다. 인형보다 더 인형 같은 미남, 미녀들이 있는 이곳에 누가 오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미인이야말로 우리가게의 최대 경쟁력이다. 일종의 얼짱 마케팅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시아를 음흉한 눈으로 훑어보는것은 용서할수 없다. 그런놈들은 목을 졸라버리겠어! 감히 아이리스왕국의 제1왕녀인 루시아 공주님을 음흉한 눈으로 훝어보다니! 무릎을 꿇은 다음 얼굴을 땅에 처박고 경배하지는 못할망정! 그러고보니 예전에 어떤 멀쩡하게 생긴놈이 신발에 거울을 달아 루시아의 치마속을 훔쳐보려 한 사건이있었다. 난 즉시 녀석을 붙잡아다가 경찰에 넘…….기려다가 그냥 직접 손봐줫다. 그래도 미수로 그쳤기에 그렇게 심하게 손보진 않았다. 그냥 떡이 될떄가지 팬정도? 만약 루시아의 치마속을 봤다면 살아돌아가진 못했을것이다. 가끔은 라이와 루비의 치마속을 궁금해 하는 놈들도 있다. 일명 로리콘으로불리는 유아성도착증 환자들이다;. 물론 그놈들 역시 떡이 될떄까지 패준다음 집으로 돌려보냇다. 라이와 루비의 팬티를 보는 남자는 나 하나로 족해! 오빠가 아닌 다른남자에게는절대로 팬티를 보여주면 안된다고. 아아~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 보니 나나 루시아나 한시도 마음을 놓을수가 없다. 영업은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임산부인 일루니아 여사님은 오랜시간 일을 할수 없었기에 먼저 집으로 올라갔다.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 곁을 지키고 어린 엘프들을 돌봐줘야 하기 떄문에 같이 집으로 올라갔다. 그런이유로 찻집은 좀더 일찍 문을 닫았다. 하지만 손님들은 여전히 밀렸다. 문닫을 시간이 돼도 손님들이 나가지 않았기 떄문에 우리는 어쩔수없이 1시간 연장 영업을 해야했다,그래도 손님들이 나가지 않았기 떄문에 또다시 30분 연장영업을 해야했다. 그래서 결국 영업은 8시 30분이 되서야 막을 내렸다. 점심은 샌드위치로 대충 때우고, 저녁은 먹지도 못한 터라 모두들 지치고 배고픈 모습이었다. 그래도 다들 표정이 밝았다. 그중 가장 표정이 밝은 사람은 역시 나다. 나는 지폐를 세어 보며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하나,둘,셋,……...이게 다 얼마냐?" 손에 잡히지도 않는 지폐뭉치.1만원짜리가 대부분이고 중간중간에 수표도 있다. "이렇게만 돈 벌면 금방 빚갚고 부자되겠다." 이건 어디까지나 매출금이다. 여기서 인형원가와 세금,전기세,인건비, 등등을 뺴야 순이익이 나온다. 어쩃든 그걸 다 뺸다 하더라도 엄청난 액수임은 분명하다. 아아~ 이 빳빳한 지폐의 감촉. 정말 너무 좋다. 돈많이 벌어서 루시아를 공주처럼 모셔야지~. "힘들지, 루시아?" "응 . 간만에 일했떠니 힘든것 같아. 하지만 장사가 잘 되니까 힘든지도 모르겠어."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나역시 같은 생각이다. 장사가 안돼 쉬면서 파리 날아다니는 거 구경하는것보다 좀 힘들더라도 정신없이 바쁜편이 백배는 더 낫다. 게다가 이 가게는 내 가게이자 루시아의 가게이자 우릭가족 모두의가게이다. 이곳에 일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종업원이 아닌 가족이다. 그런만큼 모두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장사가 잘되면 다같이 기뻐한다. 그야말로 가족 경영이라할수있다. 난 지니를 보며 말했다. "수고하셧습니다,사일런스 백작님." 지니는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저 견마의 힘을 보탰을ㅇ 뿐입니다." "사일런스 백작님의 수고를 어찌 견마지로라 할수 있겠습니까? 겸손도 지나치면 해가 되는 법입니다. 내 월급날에 사일런스 백작님을 치하하도록 하겠습니다." 견마지로 개나말정도의 하찮은 힘이라는 뜻으로 윗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신의 노력을 낮추어 이르는 고사성어이다. 그리고 우러급날에 치하하겠다는 것은 보너스를 지급하겠다는 뜻이다. 아아~ 세상에 나처럼 착한 사장이 또 있을까? 난 고개를 돌려 크로니스를 보았다. "오늘 고생 많으셧죠?" "괜찮아요." "고마워요 크로니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마음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흑~ 정말 고마워요 ." 난 감동해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를 도와주는 크로니스 . 정말 너무 감동적이다. 견마의 힘 어쩌구 하면서 겸손한 척하는 누구와 정말 비교된다. 난 눈물을 닦으며 영아를 보았다. "너도 적당히 고생했구나." "시급은 언제줄건데?" "...." 10원짜리 받아다가 어디다 쓰려고? 하여간 있는 놈이 더하다 그나저나 정말 힘들고 배고프다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도 않고 일을 했더니. 영아는 슬쩍 지니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지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저 피곤해요 오빠." "...." 피곤한데 어쩌라구? 틈만나면 지니와 크로니스에게 찝쩍거리는 영아. 일하는 내내 찝쩍거린 횟수만도 수십번이 넘는다. 그때마다 주위 여자들은 살기어린 눈빛으로 영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영아는 그 눈빛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찝쩍거렸다. 만약 그 자리에 지니와 크로니스가 없었다면 그녀들은 영아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밖으로 끌고나갔을것이다. "오빠아~!" "언니이~!" 영업이 끝난 가게 안으로 힘차게 뛰어 들어오는 어린 엘프들. 나와 루시아는 팔을 벌려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어이쿠!우리 라이 잘 있었어?" "예오빠 라이 잘 있었어요" "루비도 잘 있었어요." "응 그래 우리 라이랑 루비는 참 착하구나." 루시아는 루를 껴안고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점심은 뭐 먹었어?" "헤헤~소고기국에 밥 말아 먹었어요." "맛있었어?" "예. 대다 맛있었어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도 안으로 들어왔다. 난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인디에게 물었다. "애들 저녁 먹였어?" "아직이에요.다들 히로님과 루시아님과 같이 먹고 싶다고해서." 그말을 들은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정말이야.얘들아? 정말로 언니랑 오빠랑 같이 먹고 싶어서 저녁 아직 안 먹은거야?" 어린 엘프들은 다같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에~!" "정말?고마워,얘들아." 루시아는 두팔을 벌려 세엘프를 꼭 안아주었다. 엄청 감동받은 모습. 나역시 감동받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와 루시아와 같이 먹기 위해 저녁을 늦게 먹겠다고 한걸까? 뭔가 다른이유가 있지는 않을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린엘프들이 깨동무를 하며 합창했다. "맛있는거 사주세요오.~!" "……" 결국 이게 목적이었니? 루시아는 눈치 채지 못했는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언니가 맛있는거 사줄게." "와아~!" 기뻐하는 어린 엘프 일동. 뭐, 오늘은 돈도 많이 벌었으니 사줘도 되겠지. 난 기꺼이 지갑을 털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 패밀리 레스토랑은 일정 금액만 내면 샐러드를 양껏 먹을 수 있다. 어린엘프들은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샐러드를 접시에 담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떄문에 나는 정신없이 샐러드를 퍼다 날라야 했다. 아아~ 사람들 눈치 보인다. 그래도 공짜니까 마음껏 퍼가야지~. 본전을 뽑아주마.! "천천히 먹어,얘들아 체하잖아." "네에~!" 대답은 잘하는데 전혀 천천히 먹지 않는다. 잠시후 식사가 나왔다. 바비큐 폭립 찹 스테이크 치킨 샐러드 케밥 등등. 립은 원래 뼈사이에 있는 고기를 썰어서 먹어야 하는거다. 하지만 우리애들은 그런거 없다. 그냥 두손으로 잡고 뜯어 먹는다. 아아~ 어쩜저렇게 복스럽게 먹을까? 누가보면 삼일 정도는 굶었는지 알것이다. 종업원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것이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하다. "오늘은 많이 먹으렴. 오빠가 돈 많이 벌었으니까. 앞으로 돈 더 많이 벌면 우리 라이랑 루랑 루비한테 더욱 맛있는거 많이 많이 사줄게." "정말요? 정말 라이한테 맛있는 거 많이 많이 사줄거에요?" "루비는 또 랍스타 먹고싶어요." "전 강아지 고기랑 멍멍이탕이요." "그래그래. 돈만 많이 벌면 뭐가 문제겠니? 그러니 우리 라이랑 루랑 루비도 오빠 도와서 가게 일 열심히해야돼.알았지? "네에~! "아이구.귀여운것들!" 이제야 예전으로 돌아온것같다 열심히 일하고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이기쁨 보란듯이 떵떵거리며 사는것보다 이렇게 사는것이 더욱 행복하다. 돈으로 가족과 행복을 살수는 없는것 아니겠나? 그래 돈 같은건 필요없어 나한테는 루시아와 어린엘프들과 가족들이 있잖아 나에게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이들이 더 소중해 사랑해,루시아. 사랑해,얘들아. 히로는 우리가족모두를 사랑한답니다. "이거 진짜 맛있다. 그런데 계산은 진짜 오빠가 하는거지? 나중에 나보고 내라고 하면 안돼." "……..." 앞짱구는 빼고.... 재개점 이틀째.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오늘역시 장사가 잘된다. 정말 이대로라면, 몇개월만 열심히 일하면 은행 빚 다 갚을수 있을것 같다. 점심시간이 되자 손님이 좀 줄어들었기에 어제처럼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워야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집까지 올라가 먹을 시간은 없었기에 인디가 도시락을 만들어 가게로 가지고 왔다. "와아! 귀티모양도시락이다." "루비껀 둘리모양이야." "내껀 마시마로." 아이들은 캐릭터 모양 도시락을 보며 기뻐했다. 도시락 하나를 만들더라도 정성을 다하는 인디. 장인 정신의 완성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다. 우리는 다같이 둘러앉아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이러니 돈도 절약되고 맛도 있고 참 좋다. 밥을 다 먹은 나는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인디의 노고를 치하했다. "도시락 맛이 참 좋구나. 애썻다." "맛있게 드셨다니 저도 기뻐요, 히로님." 점심을 먹고 다시 일을 하려는데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가게 안쪽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어떻게 그런말을 할수있어요?" "…….." 앗! 이 목소리는 설마 나의 루시아의 목소리? 난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갔다. 루시아는 손님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두손을 허리에 얹고, 얼굴을 붉히고 눈을 치켜뜬채 언성을 높혔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상대 여자는 아름답지만 성질이 있어 보일것같이 생겼다. 금색으로 물들인 머리, 짙게 한 화장, 귀걸이와 목걸이를 비롯한 예쁜 앵ㄱ세서리등을 볼때 꾸미기를 좋아하고, 허영심이 많고 , 그 허영심을 충족시킬 만큼 돈도 많아 보였다. 그녀는 지지 않고 루시아 에게 소리쳤다. "대체 왜 화를 내는 거에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팔기 싫으면 안 팔면 될것이지 , 왜 소리치고 난리에요?" "뭐라구요?" 루시아는 정말 화난 듯 눈을 부릅뜨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루시아가 이정도로 화내는 모습은 흔치 않다. 이렇게 진심으로 화내는 것은 나이트클럽에서 바람피다 걸렸을때 이후로 처음본다. 대체 무슨일이기에 손님한테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루시아 근처에서는 냉기가 폴폴 날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을것같은 느낌이다. 난 조심스럽게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무슨일이야 루시아?" "글쎄 저 여자가..." 루시아는 화난 목소리로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싸움의 원인은 어린 엘프들이었다. 캐릭터 도시락을 맛있게 먹은 어린 엘프들. 어린 엘프들은 가게 안에서 잠시 놀았다. 하지만 배가 부르니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린 엘프들은 잠시 인형 진열대의 비어있는 곳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로 잠이 들었다. 그때 이 금발 여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진열대에 낮아있는 어린엘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귀여워서 그녀는 어린 엘프들을 가리키며 루시아 에게 말했다. '이건 얼마에 파나요?' 그말을 들은 루시아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라이 루 루비를 팔라고 했단 말이야?" "응."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발 여성을 찢어죽을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으음 루시아도 찢어죽일 듯한 눈빛 스킬을 쓸수 있을 줄이야……. 일루니아 여사님한테 배웠나? 어쩃든 루시아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만하다. 루시아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라이 루 루비를 아낀다. 세 엘프는 루시아 에게 있어서 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처음보는 여자가 어린 엘프들을 팔라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난 루시아의 마음을 이해한다. "좀 진정해 루시아. 너무 그렇게 화내지말고." 그러자 루시아는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화 안내게 생겼어?" "……..."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흑~ 루시아, 미워. 난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달래주었다. 그리고 금발 여성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남의 아이를 팔라고 할수있어요? 아무리 농담이어도 너무 심한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말이에요?" "우리 애들이 초절정 귀염둥이 인거 저도 잘 알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깜찍한 엘프…….. 가 아니라 아이들이죠. 그쪽이 우리 애들 탐내는거 이해해요. 예쁜아이를 가지고 싶은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아이를 돈주고 사겠는 것은 상식 이하아닌가요?" 금발 여성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라니요? 지금무슨 말을 하는게예요??" "……예?" 난 어린엘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들 사겠다고 했다면서요.?" "애들....이라니?" 어린 엘프들은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자고있었다. 쌔근쌔근 자는 모습이 마치 인형 같아 보인다. "…….." 잠깐. 인형같아 보여? "설마 이 애들을 인형으로 착각하신 건가요?" "그게 무슨말이에요? 그럼 인형이 아니란 말이에요?" "…….." 역시 그랬군 난 말을 하는 대신 아이들을 꺠웠다. "일어나렴 애들아 . 여기서 자면 어떡하니? 집에 올라가서 자렴." "우웅~라이 졸려요오." "루비도요오." "우리 그냥 자게 해주세요오." 아이들이 눈을 비비며 말하자 금발 여성은 깜짝 놀랐다. "그,그럼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아이들이 정말로 인형인줄 알았나 보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얘들은 인형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있는 엘프……가 아닌 사람이에요. 이쪽부터 라이 루 루비라는 예쁜 이름도 가지고 있지요." 루시아는 보란듯이 아이들을 껴안고 쓰다듬어주었다. 마침 인디가 1층으로 내려왔기에 난 인디에게 말했다. "애들데리고 집으로 좀 올라가렴. 침대에 잘 눕혀주고와." "예 알았어요 히로님." 인디는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어린엘프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루시아는 팔짱을 낀채 차가운 눈빛으로 금발 여성을 노려보았다. 오해로 판명 났음에도 불구하고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금발 여성을 어쩔줄몰라했다. 하지만 생긴 것 처럼 제법 성절이 있는지 오히려 뻔뻔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곳에 앉아있으니까 파는 인형인줄 알았잖아요." 루시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인형이 아니라 제 자식들이에요!" 그말에 금발 여성은 아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듯했다. "자,자식들이요?" 금발 여성은 루시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놀랄 만도 하지. 루시아는 아무리 봐도 애 엄마로는 안보이니까. 그리고 나이로 봐도 말이 안된다. 어린엘프들의 외모적 나이는 대략 10살 안팎. 루시아가 지금 20대 초반이니, 10살 좀 넘어서 애를 낳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도 하나도 아닌 셋이나. 뭐 친자식이라는 얘기는 안했으니까. 난 루시아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사실이에요 제가 아빠고 루시아가 엄마에요. 방금나간 그 아이들은 우리 자식들이구요." 루시아는 내말에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 여성은 이제 아예 경악을 하고 있었다. 엄마한테 자식을 팔라고 말한 셈이니…… 아무리 오해라고 해도 너무 큰 잘못이다. 금발여성은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는지 먼저 사과했다. "미,미안해요." 하지만 루시아는 쉽게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게 사과하는 태도에요?" 그러자 힘들게 용기 내 사과했던 금발 여성은 발끈했다. "그럼 저보고 어쩌라는 거에요?" 루시아의 눈꼬리가 더욱 위로 올라갔다. "어디서 큰소리에요?" "사람이 실수할수도 있는 거잖아요." "남의 자식을 팔라는 실수는 안하지요." 루시아가 심하게 화를 내면 풀어주기가 굉장히 힘들다. 원래 성격이 좀 도도한건지 공주님이어서 도도한 건지 잘모르겠다. 어쩃든 확실한 것은 루시아도 제법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아아~ 루시아와의 결혼 생활이 벌써부터 걱정되는구나. "그만해 , 륏아." "내가 지금 그만하게 생겼어? 저여자하는말 못들었어? 넌 아이들을 팔라는 얘기를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어떻게 르러수 있어? 니가 그러고도 애들 아빠라고 할수있어?" "실수였다잖아." "실수면다야? 그리고 저게 실수한 사람태도야?" 루시아의 말을 들은 금발 여성을 짜증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저보고 대체 어쩌라는 거에요?" 루시아는 다시 찢어죽일 듯한 눈빛 스킬을 썻다. 금발 여성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미모면,미모 눈빛이면 눈빛 성격이면 성격 어느것하나 밀리지 않는 루시아. 무엇보다 금발 여성은 미모 면에서 루시아의 상대가 되지않았다. 본인은 나름대로 예쁘다고 자부하고 있겠지만, 루시아의 미모에 비한다면 태양앞에 반딧불이라 할수있다. 여자끼리 말싸움을 할때는 아무래도 미모가 뛰어난 쪽이 유리하기마련이다. 남자가 주먹과 칼을 무기로 싸운다면 여자는 미모와 눈물을 무기로 싸운다. 그러니 경국지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다운 루시아는 최고의 무기를 갖추었다 할수잇다. 금발 여성은 제법 성질이 있는 듯했으나 루시아의 미모와 차가운 눈빛 날카롭지만 아름다운목소리 등에 밀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있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번 한번만 니가 용서해줘 루시아." "아니 용서 못해. 나를 모욕한 것은ㅇ 용서할수있지만, 우리 아이들을 모욕한 것은 용서할수없어." "제가 언제 모욕했어요?" 이대로 가다간 끝도 없을것같다. 사실 이번일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다지 큰일도 아니다. 아이들이 관련되어 있는 일이다보니 루시아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뿐이다. 안그러면 손님을 상대로 이렇게 까지 화를 내진 않았을것이다.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가 퍼지는 것이 순식간이다. 만약 이 여자가 앙심을 품고 우리가게에대해 안좋은 글을 올린다면 손님들에게 나쁜 임지를 심어줄수도있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좋은쪽으로 해결해야한다. 난 손가락을 튕겨 지니를 불렀다. 지니는 바로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일이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난 지니에게 명령을 내렸다. " 이 아가씨를 좀 부탁드립니다." 금발 여성은 지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지니의 완벽한 외모에 놀란 다음 바로 반한 것이다. 뻔하디 뻔한 패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고잇을테니, 지니가 알아서 잘 해걸할 것이다. 지니는 금발 여성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네." 금발여성을 기꺼이 지니를 다라나갔다. 루시아는 아직도 화가 안풀렸는지 씩씩 거렸다. 난 루시아를 살짝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토닥토닥. "그만하고 화풀어 아이들을 인형으로 착각해서 그랬다잖아."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이들을 팔라는 얘기를 할수가있어?" "그러니까 시룻였다잖아." "됐어. 실수든 고의든 절대 용서 할수없어. 너 아이들이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그래? 난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 난 타이밍을 놓칠세라 재빨리 말했다. "나도 널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 그러자 루시아는 날 흘겨보았다. "아이들은?" "무,물론 아이들을 위해서도 아깝지않지. 라이 루 루비 모두 내 자식들 같은 존재니까." "자식들 같은존재가 아니라자식이야." "응 자식." 아아~ 어린엘프들에 대한 루시아의 집착은 끝이 없구나. 그 반의 반 만이라도 날 좀 집착해주지 내가 계속 등을 토닥여주자 루시아는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듯했다. 화도 많이 풀렸는지 목소리도 아까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넌 화도 안나?" "……" 사실별로 안난다. 인형처럼 생긴 아이들이 인형 진열대에 앉아 졸고있으니.진짜 인형으로 착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인형이 있다면 누구든 사고싶을것이다. 그러니 그 여자의 행동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루시아입장에서는 화날만도 하지만, 이정도로까지 화를 내는것은 너무 과민 반응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지금은 무조건 루시아편을 들어줘야한다. "물론 나도 화나지. 어떻게 우리 라이 루 루비를 팔라고할수있어? 난 죽을때까지 그여자를 용서할수없을거야! 생각같아서는 한대 패주고싶었다니까. 여자만 아니였으면 바로 묻어버렸을텐데." 내가 발끈 하며 화를 내자 루시아는 표정을 풀었다. 난 재빨리 루시아 옆에 찰싹 붙어앉아 루시아의 몸을 어루만졌다. 결코 흑심이 있어서 이러는것이 아니다. 스킨십은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기 떄문이다. 실제로 루시아는 점점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대신 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지만. 아아~ 너무 부드럽다. 이렇게 계속 루시아의 몸을 어루만질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평생동안 루시아를 지켜줄 자신이 있는데. 루시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새하얀 이마와 초승달 같은 눈썹이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넘어간다. 흠흠 지금은 영업중이니 자제해야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애들은 너무 귀여운것같아. 대체 얼마나 귀여웠기에 인형으로 착각까지 한거지?" "그러게 말이야." 어린엘프들의 귀염성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것이다(원래부터 인간도 아니지만.) 인간이라면 절대 그렇게 귀여울수없다. 그래서 그 여자도 인형으로 착각한 것이다. 세상에 그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있을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테니. "우리애들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뿌듯뿌듯~. 루시아가 뿌듯해 하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온다. 난 그윽한 눈길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너두 귀여워 루시아 막막 귀여워. 가끔은 어린엘프들보다도 더 귀여워. "왜 그런 눈으로 봐?" "아,아니야." 난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지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여자는 어떻게 됏어요? 잘 돌려보냈어요?" 내가 묻자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잘 말씀드려서 돌려보냈습니다. 미안하다며. 연락처까지 주고 가더군요." "……..." 미안한 것과 연락처 주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뭐. 어쨋든 잘 해결 됏다니 다행이네요." 그일 이후로 별다른사건은 없었다. 뭐 여자들이 지니와 크로니스에게 달려드는 사건은 매번 있는일이니 별 상관없고, 그때마다 영아가 눈을 까뒤집고 난리친것도 이미예상되었던 일이니 별 상관없다. 대걸레로 매장 바닥을 닦던 영아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 나 언제까지 여기서 일해야 하는거야,오빠?" "지금이 최대 성수기이니 며칠만 더 일해 . 손님좀 줄어들면 해고해줄테니." "뭐 이렇게 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무엇보다 지니오빠와 크로니스 오빠를 마음껏 볼수있으니까. "후후~ 그게 최대 메리트지." "라이레얼 언니도 여기서 일하면 좋을텐데." "…………." 가게에서까지 백합화를 주도할 생각이냐? "오빠아~!." "언니이~!" "앗! 루는 누나 품으로 오렴." 낮잠자고 다시 가게로 내려온 어린 엘프들. 영아가 먼저 루를 껴안았다. 나는 루비를 루시아는 라이를 껴안았다. "집에서 놀지 않고 왜 내려온거야?" 루시아의 물음에 어린엘프들을 헤헤 웃으며 말했다. "언니랑 오빠 도와주려구요" "루비도 언니랑 오빠도울거에요." "저도 도우러 왔어요 누나." 아이들의 말에 루시아는 감동 받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정말 언니 도와주러 온거야?" "네에~!" 도와주러오기는……. 지들끼리 놀기 심심해서 왔겠지.... "우리도 일하고 싶어요오~!" "정말 잘할수 있겠어?" "네에~ 잘할수있어요오~!" 잘하기는 개뿔이…….. 사고나 안치면 다행이겠다. "으음 무슨일이 좋을까??" 루시아는 아이들에게 무슨일을 시킬지 잠시 고민했다. 사실 이 런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말것도 없다. 쟤들이 할수있는 일이란 얼마 없으니. "아! 입구에 서서 손님들에게 예쁘게 인사하는거야. 어떄? 다들 할수있겠어?" "예. 라이는 막막 잘할자신있어요." "루비는 라이보다 더 잘할거에요." "전 세상에서 제일 인사성 좋은 엘프에요." 마지막 루의 말에 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 "…….헉!" 루가 이런 실수를! 난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그,그러니까 엘프처럼 귀여운 아이라는 뜻이지. 너도 알잖아. 나와 루시아가 애들 엘프처럼 귀엽게 생겼다고 만날 엘프라고 부르는거. 그런뜻으로 한말이니 신경쓰지마. 절대 애들은 엘프가 아니란다. 100퍼센트 인간이야.하하하...."(ㅉㅉ너무 어색하다 ㅋㅋ) "응 나 신경안서 오빠 그런데 어째 오빠가 더 신경쓰는것 같아." "으응? 이 오빠가 그랬니? 하나, 이 오빠가 왜 그랬을까?" 영아는 잠시 나를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잠시후 영아는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뭐, 루가 엘프처럼 귀여운건 사실이니까. 아니, 엘프보다 백만배 더 귀여워."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걸릴뻔했군.(ㅉㅉ 걸렸다) 루 저것은 입조심 좀 할것이지. 어쩃든 루시아가 시킨대로 어린엘프들은 입구에 일렬로 서서 손님들에게 인사를했다. "어서오세요오~!" "라이의집에 와주셔서 감사해요오.!" "안녕히 가세요오~!" "또 오세요오~!" ……..이런식으로 말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이나 나가는 손님이나 깜찍하고 귀여운 어린 엘프들의 모습에 어쩔줄 몰라했다. 귀여움의 도가 지나쳤기 떄문일까? 금방 문제가 드러났다. 손님들이 어린엘프들 몸에 손을 대기 시작한것이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볼을 만지거나 억지로 악수를 한다. 어떤 여자손님은 라이의 머리카락을 뽑아가려고 시도했었고 어떤 변태는 감히 나이 루비의 엉덩이에 손을 뻗기도 했다. 난 재빨리 그놈을 사뿐이 밟아준 다음 가게 밖으로 내던졌다. 루시아 역시 손님들이 아이들을 만지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숨기지않았다. "누구 맘대로 우리 애들을 만지는거야?용서 할수없어!" 그렇다. 얼니 엘프들을 마음껏 만질수있는 사람은 우리가족뿐이다. 그외의 사람들에게는 자격이 없다. 혹시 이것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소유욕? 어쩃든 나는 재발을 막기위해 커다란 종이에 매직으로 커다랗게 글을 써 어린 엘프들 위에 붙여놓았다. 주의! 아이들30센티 이내 접근금지 이 아이들은 '관상용'이노니, 눈으로만 보고 절대 손대기 마십시오. 손을 댈 시에는 형법 제 15조에 의거하여 처벌받을수도있습니다. -주인백 "으음 이정도면 되겠지? 참고로 형법 제 15조가 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써놓으면 있어 보일것 같아서 그렇게 써놓은것뿐이다. 왜 하필 15라는 숫자를 택했냐고 묻는다면, 아이리스 1부가 15권에서 완결났기 때문에 택했다고 대답하겟다. 경고문을 써붙이자 어린엘프들에게 손을 대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하지만 손님들은 어린 엘프들 주위(30센티밖)를 둘러싸고 움직일줄을몰랐다. 수많은 손님들이 디카나 폰카를 꺼내 아이들의 모습을 찍었다. 헉! 누구마음대로 어린엘프들 사진을! 난재빨리 경고문을 하나 더 붙였다. 사진촬영절대금지! 이 아이들은 엄연히 초상권이 있는 아이들입니다. 사진 촬영 시에는 형법 제 28조에 의거하여 처벌 받을수도있습니다. -역시 주인백 당연하지만 형법 제28조도 뭔지 모른다. 그냥 이번권이 1부와 합하면 28권째가 되기때문에 그렇게 써붙인 것뿐이다. 아아~ 이험난한 세상에서 어린엘프들을 보호하는것이 정말 힘들구나. 어린 엘프들 덕분인지 순식간에 손님이 몇배로 늘었고, 우리는 어제처럼 바쁘게 움직여야했다. "씨잉~ 걸레질만 이게 몇번쨰야?" 영아는 투덜거리며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우리가게 주요손님중 하나는 부모와함께오는 유아들이다. 글고있던 음료를 엎지르거나 먹던 음식을 떨어뜨리는 일은 예사다. 그냥 나뒀다가 나중에 한번에 청소하면 되자 않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이 많다보니 장난을 치거나 뛰어다니다가 미끄러질 위험성이 크다. 그렇기 떄문에 바닥이 더러워지면 바로바로 청소해야하는것이다. 영아는 특별한 기술(손님안내하기 판매된인형을 창고안에서 꺼내진열대에 진열하기등)이 없는 관계로 그냥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뭐 다른사람들도 몸으로 떄우는건 마찬가지지만.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최모편집자님은 마감의 칼날을 갈고계실텐데." "……" 니가 언제부터 마감 지켰다고 그러니? 누가들으면 앞짱구걸이 성실작가인줄 알겠다. "…….." 잠깐 . 그러고보니 앞짱구걸은 인기작가잖아. 그렇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못 느끼고 있지만 앞짱구걸은 분명인기작가다. 매스컴에도 몇번 소개 되었을 정도니. "인기 작가가 우리가게에서 대걸레질이나 하고있다니." 뭐 그런식으로 다지자면 공작이 사장이고 공주가 안주인이고 레드드래곤이 계산해주고 백작이 손님 안내해주고 블랙드래곤이과 백작이 커피를 타주고 쿠키를 구워준다. "으음, 생각해보니 인기작가야 아무것도 아니로군." 재개점 삼일째. 역시나 손님이 많다. 보통 첫날에만 반짝하고 그 다음날부터는 손님이 줄어드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첫날에 특히 손님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도 꾸준한 매출이 이어지고 있다. 이동네사람들은 뭔 인형을 그리 많이 사가냐? …….라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게는 인형을 파는것이 아니라 '라이의집'이라는 하나의 브랜드를 파는것이다. 스터벅스는 다른 커피 전문점보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BMW 자동차 역시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더욱 많이 팔린다. 다른 회사 자동차와 성능이 비슷하거나 심지어는 성능이 떨어지는 자동차라도 BMW엠블럼이 부착되어있으면 더 비싼 가격에도 더 잘팔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간단하다. 스타벅스는 단순히 커피만을 파는것이 아니고 BMW는 단순히 자동차만을 파는것이 아니다 그들은 커피와 자동차를 팔며 브랜드의 이미지를 같이 팔고있다. 스타벅스는 한잔의 커피와 함게 도회적인 우아함을 BMW는 자동차와 함께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같이 판매한다. 이것은 BMW자동차가 정말로 도회적이고 세련됐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자동차라 하더라도 BMW엠블럼이 부착된 그 순간부터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되는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게는 인형과 함게 동심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즐거워할수있는 편안한 이미지를 팔고있다. 그리고 그런 전략은 잘 먹혀들어서 인형을 잘 사지 않는 성인 고객들까지도 매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난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2층 찻집에는 많은 손님들이 차를 마시고 쿠키를 먹으며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 50대 할아버지는 남자아이가 장난감 사달라며 바닥에 엎어져 떼쓰는 모습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내가 바라는 가게의 모습니다. 모두가 동심으로 돌아가 편안한 마음으로 웃음짓는것. 난 우리가게에 온 손님들에게 그런 행복을 전해주고 싶다. 돈을 남기기 보다는 사람을 남기고 싶은것이 나의 경영 철학이다(좀 거창한가?) 음식점과 달리 찻집은 주문이 쉴새없이 밀려들지 않는다. 음식점은 밥만 먹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찻집은 차만 마시고 일어서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보통 차를 한잔 시키면 앉아서 1,2시간씩 얘기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편하게 쉬고있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앉아서 책을 읽고 있고, 인디는 그 뒤에 서서 일루니아 여사님의 어깨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너무 행복해 보인다. 세상 어느 부부가 저들 부부보다 행복할까? "아! 오셨어요 히로님?" 인디는 날 발견하고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는 장사 잘되냐?" "예.히로님.전에비해 매상이 많이 올랐어요." "그거 다행이로군. 하긴 인테리어까지 싹 바꿨는데 매상이 올라야지. 안그러면 큰일이지." 난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2층을 한번 둘러본 다음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그순간, 한 무리의 남자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여어, 가게 죽이는데." "손님 많은걸 보니 장사 잘되나봐." "이 불경기에 아주 돈을 쓸어 담겠어." "씨발 뭘 꼬라봐?" 몸에 짝 달라붙는 검은 양복은 입고 안에는 꽃무늬 남방을 입었다. 구두는 끝이 뾰족하게 올라오는 일명 뾰족구두에, 머리스타일도 가지각색이다. 길게길러 파마한 놈이 있는가 하면 정신없이 볶아 부풀린 놈도 있고 치킨 헤드를 한 놈도 있다. 다리는 건들건들, 몸도 건들건들, 말은 한다기보다는 씨부렁거린다는 표현이 좀더 어울릴 만큼 발음이 이상하다. 다시말해 조폭보다는 양아치에 가까워 보이는 놈들이다. 하지만 저놈들은 보통 양아치와는 좀 달라 보인다. 저놈들은 그냥 앙아치를 넘어서는 무언가가있다. 그래서 우리는 저런 놈들을 그냥 양아치와 구분하기 위해 '생양아치'라고 부른다. 그나저나 그냥 양아치도 아닌 생양아치가 우리 가게까지 어쩐일인 걸까?" 그것도 다섯명씩이나 . 아무튼 생양아치들이 건들거리며 괜히 무게를 잡아대니 가게 안의 손님들이 무서워하는 듯햇다. 계산대에 앉아있던 루시아가 그들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죠?" 생양아치들은 루시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한동안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생양아치들 중에서도 대장으로 보이는 한놈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루시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음흉한 눈으로 루시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호오~ 아가씨 죽이는데." 루시아는 눈꼬리를 치켜올린채 생양아치들의 대장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 일 없으면 당장 나가주세요." 그러자 생양아치들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양아대장(너무 길어서 줄임)은 아까보다 더욱 몸을 건들거리며 루시아에게 말했다. "이제 보니까 얼굴만 예쁜게 아니라 성질도 제법인데. 난 성깔있는 여자가 좋더라.크크크." 아아~ 니가 죽여달라고 애원을 하는구나. 양아대장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계속 루시아에게 껄떡거렸다. "일이 없긴 왜없어? 일이 있으니까 이렇게 온거지. 그나저나 아가씨 어느나라사람이야? 백인 치고는 한국말 잘하는데. 혹시 혼혈이야?" 평범한 여자라면 겁을 먹으며 몸을 움츠렸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영업하는 데 방해되니까 좋은 말로 할때 나가주세요." "아이구 무서워라." "크크크~!" 양아대장이 짐짓 무서운 척 엄살을 떨어대자 뒤에있는 놈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아의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생양아치들을 노려볼 뿐이였다. "그보다 아가씨 시간 좀있어?" 루시아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같은 사람한테 할애할 시간은 없어요."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 나도 알고보면 괜찮은 남자라고.응? 어때?" 양아대장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루시아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직였다. 루시아의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넌 죽었어! 나보다는 가까이 있던 지니의 움직임이 좀더 빨랐다. ㅇ양아대장의 손목은 지니의 손에 의해 잡혀있었다. "뭐,뭐야 새꺄?" 양아대장은 놀란 표정으로 지니를 보았다. 몇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지니가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나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으니 놀랄만도 할 것이다. 지니는 대답 대신 웃으며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양아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아 내는 듯한 모습이다. 저 자식은 모르겠지만, 지니가 제대로 힘을 주면 손목을 부러뜨리는것은 일도 아니다. 어쨌든 저 자식은 지니에게 백번 감사해야할 것이다. 지니가 막지 않았으면 내 손에 죽었을 테니. 난 천천히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루시아 옆에 서서 허리에 손을 둘렀다. 루시아는 편소같았으면 '좀 떨어져줄래?' 등의 말을 했겠지만, 이번에는 별 말 없이 내 품에 안겨왓다. 난 양아치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니들은 뭐냐?" 내가 직접 나서자 지니는 양아대장의 손을 놔주었다. 양아대장은 손목이 시큰거리는지 다른손으로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는 넌 뭐야, 새꺄?" "난 이 가게 사장이야. 그리고 이 여자는 내 아내고. 이정도면 얘기 들을 자격이 충분하겠지?" '사장' 과 '아내' 라는 단어때문인지 양아대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이죽거리며 말했다. "이런 어린놈의 새끼가 사장이란말이야? 물려받은 재산이 좀 많나봐?" "그건 니가 알 바 아니지." "하! 이 자식 말하는 싸가지좀보게." 양아대장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나잇살을 먹어도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많이 처먹었는데, 어디서 반말이야? 니가 사장이면 다냐? 사장이면 사람 무시해도 되는거야? 회장이면 아예 인간취급도 안 하겠다? 응?" 불황이 계속되면서 자살자가 속출한다고 한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서다. 뉴스에서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별로 실감이 안났는데, 이 놈들을 보니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얼마나 죽고싶었으면 내 앞에서 발광을 하는 걸까? 참고로 아무리 죽고싶다고 해도 난 이놈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단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을 줄 생각은 있다. 정 죽으려거든 그냥 단체로 한강에 뛰어내릴것이지……. "뭐, 어쨌든 좋아. 우리는 이 지역 상권을 보호해주는 사람들이야. 일종의 치안대라 할 수 있지." "그래서?" "그래서 보호비를 내라는 거지. 우리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땅 파먹고는 살 수 없잖아." "보호비를 내면 우리 가게를 보호해준다는 건가?" 내 물음에 양아대장은 손뼉을 부딪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이상한 놈들이 얼쩡거리지 못하도록 우리가 이 가게를 보호해주는 거지. 우리는 지역경제발전과 상인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그 대가로 약간, 정말 아주 약간의 보호비를 받을 뿐이야." "깡패도 막아주나?" "아아, 물론이지. 우리가 보호해준다고 하면 웬만한 놈들은 이 근처에 발도 들여놓지 못해. 깡패든 조폭이든 우리가 완벽하게 막아줘." "안 내면?" "뭐?" 양아대장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내면 니들이 깡패로 돌변하는거냐?" "뭐, 뭐?" 난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난 니들 보호 같은 거 필요 없거든. 니들이 보호해주지 않아도 이 가게에 얼쩡거릴놈은 없어." 그러니깐 좋은말로 할 때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랑 쎄쎄쎄나 해라." 양아대장과 생양아치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 새끼가 완전 미쳤나? 여자 앞이라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나본데…… 죽고싶냐?" "난 살고 싶은데" "그래? 내가 보기엔 죽고 싶은 것 같은데. 아주 죽여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 같은데." 난 딱 잘라 말했다. "착시현상이다.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랑 쎄쎄쎄 한 다음에 안과 데려가 달라고 졸라라." "이 씹새끼가!" 좋은 주먹 놔두고 말로 하기 힘들었는지, 양아대장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난 발로 녀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퍼억! 명치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지는 양아대장. "켁켁!" 급소를 세게 맞은 터라 숨도 제대로 못 쉰다. 대장이 당하가 뒤에 서있던 생양아치들은 분노했다. 난 달려드는 그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잠깐!" 나의 살기에 놀란 그들은 잠시 멈칫했다.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게는 좁으니까 밖으로 나가자."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던 생양아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차장으로 나온 나는 생양아치들을 보았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양아대장은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개게 안의 손님들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제외하고 멍땅 몰려나와 포위하듯 우리의 주위를 둘러 쌌다. 이 세상에서 남 싸우는 거 구경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또 있겠는가? 모처럼 일어난 이벤트니 난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양아대장은 이를 갈며 말했다. "치사하게 기습을 하다니." "기습한 건 너잖아, 임마. 한 대 맞더니 머리도 좀 이상해진 거냐?" 빠드득! 훗~ 지가 이를 갈면 어쩔꺼야? 루시아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보았다. "헉! 지금 나 걱정해주는거야, 루시아?" "아니. 저 사람들 걱정해주는 거야.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 "……." 그럼 그렇지. "알았어. 적당히 손봐줄게." 나와 루시아의 대화에 생양아치들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루시아가 뒤로 빠지자 난 생양치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누가 먼저 덤빌래? 단체로 덤벼도 좋고."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짜악! 난 말을 하며 다가오는 양아대장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양아대장의 얼굴은 왼쪽으로 완전히 돌아간 상태였다. "대체 언제 때린거지?" "손이 보이지도 않았어." "장난 아니게 빠르다" 구경꾼들의 수군거림. 뭐, 이 정도 가지고 놀라기는……. 뺨을 얻어맞은 양아대장은 놀란 표정을 지우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하! 지금 나 쳤냐? 아주 죽고싶어서……." 짜악! 난 이번에 반대쪽 뺨을 후려쳤다. 양아대장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벌써 두 대나 얻어맞았다. 아까 가게 안에서 맞은 것 까지 치면 세 대다. "어이, 생양아치. 말만 하지 말고 좀 덤벼봐. 나만 때리니까 재미 없잖아." 내 말에 양아대장은 눈을 까뒤집으며 소리쳤다. "이 새끼 죽여!" 양아대장과 생양아치들이 함께 달려들었다. 난 먼저 양아대장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너나 죽어, 임마." 난 최대한 화려한 비주얼을 선보이기 위해 공중으로 뛰어올라 360도 돌려차기를 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내 발 뒤꿈치는 녀석의 머리를 때렸다. 퍼억! 양아대장은 그 한방에 완전히 나가 떨어졌다. 둘러 싼 구경꾼들에게 부딪힌 다름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난 남아있는 네 명의 생양아치들을 보았다. "니들은 안덤비고 뭐 해? 쫄다구면 쫄다구답게 대장의 뒤를 다라야 할 것 아니야? 대장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생양아치들은 주춤거리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렇게 쭈뼛쭈뼛거리던 놈들중에 치킨헤드를 한 생양아치가 소리쳤다. "우리는 넷이고 저 새낀 하나야! 뭘 겁먹어?" "씨발! 밟아!" 여시나 좋은 쪽수 놔두고 일대일로 할 생각은 없는 듯 하다. 언제부터 일대일의 낭만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구리가 대신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씁쓸한 기분이다. 생양아치 네 명이 엽공을 해봐야 생양아치는 생양아치일 뿐이다. 기사단 전원이 공격해도 내 몸에 상처 하나 낼까 말까다. 이런 생양아치들과의 싸움은 싸움이라고 부르기도 아깝다. 난 구경꾼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화려한 공격을 펼쳐서 생양아치들을 쓰러트렸다. 결국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에게 덤빈 생양아치 다섯은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신음하는 신세가 되었다. 싸움이 끝나자 집에 갈 사람은 가고, 가게에 볼 일이 있는사람들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아와 지니 역시 도로 가게로 들어갔고, 나는 뒤처리를 위해 남앗다. 난 쓰러져있는 생양아치들을 깨웠다. "다들 무릎꿇고 앉아라." 이미 확실하게 레벨의 차이를 경험한 생양아치들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내 말에 순순히 다랐다." 난 양아대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니들 뭐하는 놈들이냐?" "그, 그게……." "니들 우리 가게에서 한 것처럼 보호비 어쩌구하면서 이 근처 가게에서 삥 뜯었지?" "……." 대답에 없는덜 보니 삥 뜯었나 보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젊은 놈들이 할 짓이 없어서 삥이나 뜯냐? 그리고 삥 뜯으려면 혼자 뜯으러 다닐 것이지 단체로 몰려다니는 건 뭐냐? 니들 혹시 일진회 출신이냐?" 일진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정작 싸움 잘하는 놈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코흘리개 초딩 삥 뜯을때도 2인1조로 움직이겠는가? 난 이놈들을 교육시켜줄 필요성을 느꼈다. 젊은 나이에 계속 인생을 허비하게 놔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자. 난 순수한 마음으로 생양아치들을 교육시켜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나의 루시아를 희롱한 것도 모자라 손까지 대려 했었지. "……." 으음, 살의가 막막 솟구치는군. 난 생양아치들을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내가 오늘 니들 인간 만들어 주마! * * * * 재개점 일주일째. 별 다른 일 없이 가게 영업은 계속되고 있다. 손님은 지금도 꽤나 많은 편이다. 특히나 요즘이 불경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난 주판을 튕겨가며……가 아니라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매상을 계산해보았다. "후후~ 확실히 리모델링 전보다 수입이 좋아졌군. 비싼 돈 들여가며 리모델링한 보람이 있는 걸." 장사가 잘 되니 기분도 좋아진다. 계속 이런 매상이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아~ 이러다가 청년 재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뭐, 일단은 은행 빚 갚는것이 우선이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이 빌딩을 살 수가 없었다. 그동안 꽤 많이 모아 놓았다고는 하지만, 서울에 있는 빌딩을 사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은행 대출을 껴서 빌딩을 샀다. 살 때 부터 부동산 담보대출을 받아 산 것 이다. 건물 대금을 치르고 남은 돈으로는 리모델링을 했다. 그래도 남은 돈으로는 집(5층)과 가게(1층,2층)을 예쁘게 꾸몄다. 그 결과 나는 깨끗해진 빌딩과 예쁜 집과 아름다운 가게응 갖게 된 대신 빚더미에 앉았다. 은행에서 대출 받은 돈은 전부 변동금리다. 변동금리는 고정금리와는 달리 금융 기관이 시중 금리의 움직임에 맞춰 금리를 변화한다. 고정금리는 시중 금리와 상관없이 처음 계약할 때의 이자만 지불하면 그만이지만, 변동금리는 시중 금리가 올라가면 이자 부담이 늘어나고 기중 금리가 내려가면 이자부담이 줄어든다. 현재는 금리가 매우 낮은 편이라 대출 이자가 그다지 부담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중 금리가 인상되기라고 한다면 대출 이자 역시 다라 올라가게된다. 그럼 대출이자 갚는것도 빠듯할 것이다. 그렇게 이자갚느라 헉헉대다보면 원금 상환일이 돌아오고, 그럼 애써마련한 이 건물을 은행에 빼앗기게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 으음, 대출금을 갚을 때까지만이라도 외식비를 줄이고 싶은데…… 역시 불가능하겠지? 현재 우리 집 식구는 나, 루시아, 라이, 루, 루비,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지니, 크로니스, 라이레얼, 카르……이렇게 11명이다. 여기에 준식구(?)라 할 수 있는 영아까지 포함하면 12명이나 된다. 이 많은 인원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항상 돈에 쪼들린다. 으음, 옥탑방 집세를 좀 올릴까? "……." 안 되겠지? 아무튼 부양가족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신세 한탄을 한다고 해서 줄어들 것 같지는않다. 에휴~ 더 늘어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 잠깐. 더 늘어나? 생각해보면 일루니아 여사님은 지금 임신중이다. 그것도 하나도 아닌 둘을…… 다시말해 쌍둥이를. 뭐야? 그럼 결국 2명이 더 늘어난다는 얘기잖아! 부양가족이 12명에서 14명으로 늘어나는건가? "으음……." 더욱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새악ㄱ이 마구마구 든다. 집은 넓으니 일루니아 여사님이 쌍둥이를 낳았다고 해서 이사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애들 놀이방에 육아시설도 마련해 놓으면 되겠지. 으음,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일에 신경 쓰는 거지? 그 아줌마 일인데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잖아. 하지만 어떤 아이들이 태어날지 정말 궁금하다. 인디를 닮았든 일루니아 여사님을 닮았든 아이들은 엄청 예쁘고 귀엽겠지? 머리는 무슨색일까? 눈은 무슨색일까? 아빠가 드래곤이니 뭔가 좀 특별하려나? 설마 일루니아 여사님의 날카로운 성격이나, 인디의 소심한 성격까지 물려 받는 건 아니겠지? 둘의 성격을 더해 반으로 나눌 수만 있다면 참 좋을텐데.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남의 아기 생각할 때가 아니로군." 그렇다. 남의 아기 생각해봐야 뭐 하겠는가? 짝퉁라이의 동생 같은건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중요한 것은 정품…… 즉, 메이드 인 히로&루시아 라이의 동생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라는 말이 있지만, 라이의 동생은 다르다. 인디&일루니아 여사님이 제작한 라이의 동생과 히로&루시아가 제작한 라이의 동생은 그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 아니, 일루니아 여사님 쪽은 쌍둥이니까 양적인 면에서는 그쪽이 좀 더 유리하려나? 까짓꺼, 그럼 뭐 우리는 세 쌍둥이로 간다.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압도해 주마! 사실 세 쌍둥이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나라도 좋으니 생기기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아~ 루시아를 닮은 딸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뭐, 히로를 닮은 아들도 괜찮……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딸이 좋을 것 같다. "난 무조건 딸을 원해, 루시아." "응? 무슨 말이야?" "아, 아니, 널 닮은 딸이면 예쁠 것 같아서……." 루시아는 손님들이 있는 관계로 화는 못 내고, 개신 세게 흘겨 보았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 있으면 매장 정리나 해. 다른사람들 열심히 일하는거 안 보여?" "으응. 나도 열심히 일할게. 걱정하지 마." 난 자리에서 일어나 인형진열대를 정리했다. 어떤 놈이 사지도 않으면서 인형들을 이렇게 흩트려 놓은 거야? 곰돌이 푸우가 꼭 티거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야겠어? 앗! 백호(白虎)인형의 털에 때가! 아니, 어떤놈이 감히 더러운 손으로 백호 인형을 만졌어! 만졌으면 사가던가! 자세히 보니 수염도 하나 사라졌다. 원래 오른쪽에 세 개, 왼쪽에 세 개여야 하는데 왼쪽에 두 개밖에 없다. 어떤 변태 같은 놈이 백호의 수염을 뽑아갔을까? 불쌍한 백호. 멸종위기의 돌문이라 인형으로라도 개체수를 늘려보려했거늘. 이쩌다가 이런 꼴을 당했니? 누군지는 몰라도 걸리면 내 손에 뒤졌다. 감히 상품 가치를 떨어트리다니! 이 인형은 반품도 안 된단 말이다! 난 최선을 다해 인형을 예브게 정리했다. 마치 인형이 '저를 사주세요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예쁘게 진열해 놓아야 손님들이 많이 사간다. "꺄르르~" "꺄하하~" "헤헤~" "파는 인형 가지고 놀지 마!" 나는 감히 진열대에 있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 엘프들에게 소리쳤다. 생각해보니 백호의 수염을 뽑아간 것도 저것들 짓인 것 같다. "흥! 오빠는 만날 우리보고만 뭐라 그래." "맞아. 오빠 나빠." "난 누나가 백배 천배 더 좋아." 잠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던 아이들은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언니한테 가서 놀자." "오빠는 우리를 싫어하는 게 틀림 없어." "누나는 우리랑 재밌게 놀아줄 거야." 인형을 안고 아장아장 루시아를 향해 걸어가는 어린 엘프들. "……." 그거 파는 인형이라니까. 좀 놓고 가는 게 어떠니? 니들이 살 것도 아니잖니? 계산대는 한산했기에 루시아는 기꺼이 어린 엘프들과 놀아주었다. "라이 부비부비 하고싶어요." "그래. 이리와, 라이야." 루시아는 라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루시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 비볐다. "헤헤~ 어닌 가슴 폭신폭신하고 다뜻해요. 라이는 언니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는 게 막막 좋아요." 그래. 내가 봐도 무지 좋아 보인다. 아아~ 나도 부비부비 하고프다. 라이는 나를 슬쩍 보더니 씨익 웃으며 손으로 루시아의 가슴을 만졌다. "……." 뭐야? 지금 쟤 나 보라고 저러는거야? 이렇게 건방질 수가! 내가 살다 살다 저런 건방진 엘프는 처음 본다. 감히 나의 루시아의 가슴을 만진 것도 모자라 오빠를 보며 씨익 웃다니. "꺄아! 그만해, 라이야. 언니 간지럽단 말이야." "헤헤~ 싫어요." "앗! 루비도 언니 가슴 만질래요." "꺄아! 너희들 정말!" 라이와 루비가 가슴을 만지며 장난을 치자 루시아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보이며 두 엘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콩! 콩! 가볍게 때린 것이기 떄문에 라이와 루비는 머리를 만지며 헤헤 웃었다. 루시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라이와 루비 계속 언니한테 장난 칠 거야?" "아니요오~!" "언니 말 잘 들어야 착한 엘프지?" "네에~!" 아이들이 힘차게 대답하자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이들을 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다. "루도 이리와." 루가 다가가자 루시라는 루를 껴안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헤헤~ 전 세상에서 누나가 제일 좋아요." "응. 나도 루가 좋아." 그 모습을 보는 나와 영아의 눈에 질투심이 어렸다. "……." 응? 나와 영아? 여기서 영아가 왜 나와? 영아는 질투심 가득한 눈으로 루시아를 보았다. "나의 루가 루시아 언니가 제일 좋다니……." 아무래도 영아는 '세상에서 영아 누나가 제일 좋아요' 라고 말해주길 기대했나보다. 꿈도 크셔라~. 루시아는 일을 하는 틈틈이 어린 엘프들과 놀아주었다. 어린 엘프들도 나름대로 루시아를 도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게 영업이 끝나다 우리는 하루 매상을 계산한 다음 불을 끄고 문을 닫고 집으로 올라왔다. 가게와 집이 붙어있으니 동선이 짧아 정말 편하다. 집으로 들어가자 먼저 퇴근(?)한 인디가 저녁을 차려놓았다. 저녁 메뉴는 해물 스파게티. 아이들이 낮에 하도 스파게티 먹고 싶다고 졸라대서 저녁은 스파게티를 먹기로 한 것이다. 때문에 난 일부러 인디를 일찍 퇴근시켜 장을 보고 저녁을 차리게 했다. "와아! 맛있는 스파게티다!" 루비는 스파게티 막막 좋아." "나도 스파게티 대다 좋아해." 우리는 다같이식탁에 둘러앉아 스파게티를 먹었다. "이것 좀 드세요, 언니." 영아는 포크에 스파게티를 말아 라이레얼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카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니가 뭔데 나의 언니데게 들라 마라야? 용서할 수 없어!" 카르는 라이레얼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쟤가 내민 거 먹지 마세요, 언니. 독을 탔을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영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내가 독을 왜 타? 내가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뭐? 나의 언니를 니가 왜 사랑해? 죽여 버리겠어!" 카르의 몸에서 냉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난 재빨리 라이레얼에게 말했다. "말려오, 라이레얼!" "응. 알았어, 히로." 라이레얼은 카르와 영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둘 다 그만하고 저쪽가서 손들고 있어. 니들이 시끄럽게 굴면 우리 히로 식사하는 데 방해된단 말이야." "히로 오빠 다위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언니." "흑~ 너무해요 언니." 아쨌든 감히 라이레얼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는지 카르와 영아는 부엌 한쪽에서 손을 들고 벌을 섰다. 벌을 서는 도중에서 서로의 어깨를 툭툭 치는 등의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라이레얼은 스파게티가 맛있는지 포크로 싹싹 긁어 먹었다.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물 오를 대로 물 오른 20대의 매력과 10대의 순수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라이레얼. 정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가 울고 갈 미모다. "맛있어요?" "응. 맛있어, 히로. 더 줘." 라이레얼은 빈 접시를 나에게 내밀었다. 난 그것을 받아 인디에게 주었고, 인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파게티를 더 퍼주었다. "우리도 더 주세요오~!" 어린 엘프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접시(바닥까지 핥아먹었다는 얘기다)를 내밀며 소리쳤다. "예.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그 순간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던 일루니아 여사님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욱!" "언니, 괜찮아?" 루시아는 재빨리 일어나 여사님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인디도 깜짝 놀라 소스를 푸던 국자를 내팽개치고 일루니아 여사님께 다가갔다. "우욱!" 일루니아 여사님이 왜 헛구역질을 하는 거지?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인디를 보며 소리쳤다. "역시 네놈이 음식에 독을……." 그러자 루시아가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뭔 소리야, 이 뺀질아!" "헉! 뭐, 뭐?" 루시아까지 나를 뺀질이라고 부르다니. 일루니아 여사님이야 원래 그런 아줌마니 상관 없지만, 나의 사랑 루시아까니 나를 뺀질이라고…….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루시아? 널 사랑하는 나에게 뺀질이라니…… 흑~ 히로는 뺀질이 아닌데…… 히로는 안 뺀질뺀질한데.……." "그럼 뺀질이를 뺀질이라고 부르지 뭐라 부르겠어요?" 어느새 괜찮아졌는지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루시아와 인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다시 인디에게 소리쳤다. "니가 만든 스파게티가 얼마나 맛없었으면 일루니아 여사님이 헛구역질까지 했겠어? 니가 그러고도 가사드래곤이라 할 수 있어?" 내 말에 인디는 사색이 되었다. "저, 정말인가요, 일루니아님? 정말로 제가 만든 스파게티가 헛구역질이 나올 만큼 맛없었나요? 흑~." 인디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인디를 껴안고 달래주며 말했다. 아니에요, 인디님. 절대 그렇지 안아요. 인디님께서 만들어주신 스파게티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이제까지 제가 먹어본 스파게티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아이리스 왕궁에서 먹은 스파게티도 이 정도로 맛있지는 않았어요." "저, 정말요?" "예. 제가 사랑하는 인디님께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흑~ 저도 사랑해요, 일루니아님." 또 다시 펼쳐지는 사랑의 파노라마. 부엌이든 거실이든 공원 한복판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정 사랑의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싶으면 자기들 방에서나 연출할 것이지. 지금 염장질 하는 거야, 뭐야? 흥흥! 재수 없어! 가만히 두면 키스하고 애무까지 할 것 같다. 우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애들까지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 수위가 높은 장면들은 애들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루시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더 이상 수위가 올라가기 전에 끼어들었다. "설마 언니…… 그거야?" 그거? 일루니아 여사님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것 같아." 뭐가 그런 것 같아? 난 루시아에게 물었다. "그거가 뭐야?" "입덧 말이야." "입덧?" 아차! 생각해 보니 일루니아 여사님은 지금 임신 중이시군. "으음, 그래. 역시 그랬었어. 내가 입덧인 줄 알았다니까. 후후~나의 예상은 조금도 틀림이 없군." 루시아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지금 와서 그런 말 해봐야 소용 없거든." "……." 그런가? "흠흠, 아무튼 입덧이니 다행이군요. 전 또 독이 들었는지 알고……." 그런데 내가 알기로 입덧은 임신 초기에 주로 일어나는 일로 알고 있는데. 초기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다가 중기에 입덧을 하시다니. 입덧은 개인차가 심하다는 건가? 어떤 임신부는 아무런 증상도 없는 반면, 어떤 임신부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할 만큼 입덧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니 일루니아 여사님이 지금 입덧을 한다고 해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젠 괜찮으세요?" "예. 이젠 괜찮아요, 인디님." "흑~ 일루니아님께서 이렇게 고생하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아기 같은 건 갖지 않는 게 좋을 뻔했어요." "아니에요, 인디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제가 인디님 아기를 얼마나 갖고 싶어 했는지 인디님도 잘 아시잖아요." "흑~ 그렇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예쁜 아기가 태어날 것을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즐거운걸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기를 갖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인 줄 몰랐어요. 몸이 무거워지는 것도, 입덧을 하는 것도 모두 즐거워요. 조금도 힘들지 않아요. 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흑~ 사랑해요 일루니아님. 정말로 사랑해요.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겟어요." "아니에요, 인디님. 표현하지 않으셔도 다 아는 걸요. 왜냐하면 저 역시 인디님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사랑해요 인디님." 뜨겁게 포옹하는 부부. 난 그 모습을 보며 재빨리 루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사랑해, 루시아. 정말로 사랑해.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루시아는 내 손을 부리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다라하지 마." "……." 눈치 챘나?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다시 앉아 스파게티를 먹엇다. 벌을 서던 카르와 영아도 자리에 앉아 먹었다. 먼저 식사를 끝마친 라이레얼은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장사는 잘 돼, 히로?" "예. 리모델링 덕분인지 매상이 많이 올랐어요." "혹시 내가 뭐 도와줄 것 없어?" "괜찮아요. 장사는 저에게 맡기시고 라이레얼은 게임에 투자하세요." "응. 나도 그냥 해본 소리였어." "……."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말인데……." 라이레얼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임에 투자하기 위해 돈이 좀더 필요해." "……예?" "나 용돈 좀 줘, 히로." 라이레얼은 두 손을 내밀엇다. 난 그 손을 보며 말했다. "얼마나요?" "글쎄. 한 50만원정도?" "헉……쓰!" 50만원이라니! 50만원이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그, 그렇게나 많이 필요해요?" "응. 사실은 50만원으로도 좀 부족해. 이번에 새로 나온 휴대용 게임기 사고, 그 게임기 주변기기 사고 게임 몇개 사면 끝이야." "……." 이젠 콘솔게임기도 부족해 휴대용 게임기로까지 진출하려는건가? "아, 안사면 안돼요?" "응. 안 돼." 저, 정말 안돼요?" 내가 다시 묻자 카르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언니가 사야 된다잖아!" 영아도 소리쳤다. "맞아! 오빠는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빨리 나의 언니에게 용돈 줘!" "잔말 말고 빨리!" "……." 니들이 웬일이니? 카르와 영아가 일심동체 스킬을 쓸 줄은 몰랐다. 만나면 항상 싸우기만 하는 것들이 라이레얼을 위해서 하나가 되다니. 역시 라이레얼이라는 건가? 난 어쩔수 없이 지갑을 탈탈 털었다. "아, 아껴쓰세요." 라이레얼은 돈을 챙기며 말했다. "응. 고마워, 히로. 게임하면서 항상 히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을게." "뭐, 감사하는 마음까지야……." 라이레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카르와 영아도 다라서 일어났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엘프들 밥값 대고, 라이레얼 게임비 대고……. 이러니 내가 빚을 못 갚는거다. 이러다가 신용불량자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렇게 되면 판타지 세계로 도피해야 하는 건가? "이건 라이 꺼야." "아니야. 루비가 먼저 찜했어." "라이랑 루비는 많이 먹었잖아. 이건 내가 다 먹을거야." 어린 엘프들은 스파게티 면을 소스가 들어있는 냄비에 몽땅 부은 다음 열심히 먹고 있었다. 두 접시 먹고도 모자라 냄비까지 박박 긁어먹는 어린 엘프들. 정말 너무 복스럽게 먹는다. 어쨌든 저녁식사가 끝이 났다. 지니와 크로니스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어린 엘프들은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루시아는 설거지를 했고, 난 식탁을 정리했다. 아아~ 공주인 루시라가 설거지라니! 주부 습진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이런건 가사 드래곤이 해야 하는 일이거늘. 정리와 설거지를 다 끝낸 우리는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어린 엘프들 옆에 앉아 같이 텔레비전을 보았다. 마친 뉴스를 하는 중이었다. -미국 뉴욕주에서 하얀색 매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반 매보다 작아 크기가 비둘기 정도인 이 매는 부리부터 다리까지 전부 하얀색으로 되어있고, 눈만 파란색입니다. 자유의여신상 근처를 날아다니던 이 매는 관광객들의 제보를 받고 나선 당국에 의해 포획되었습니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이 매가 한국말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흰색 매는 지난 달 파리 에펠탑과 개선문 근처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으며 조류 전문가들은……. 자유의 여신상과 함께 흰색 매가 포획되는 장면이 방송되었다. 그리고 몇몇 관광객들의 멘트가 이어졌다. -저런 매가 있다니. 지금도 놀랍네됴(캐나다 관광객의 말. 자막임.) -온 몸이 하얀색이라는게 믿어져요? 하하,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요(호주 관광객의 말. 역시 자막임.) -분명히 한국말을 했다니까요. 자유의 여신상 구경하러 왔다는 말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한국인 관광객의 말. 이건 자막 아님.) "으음, 말하는 흰색 매라…… 이 세상에는 참 별 동물이 다 있군." 말을 하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말하는 흰색 매라고? 어째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데. 그러고 보니 방금 화면에서 그물에 포획되너 끌려가는 매도 어디서 본 것 같다. 내가 그 매를 어디서 봤더라? 어린 엘프들 역시 뭔가 기억이 날랑 말랑 하는지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잠시 그렇게 고민하던 우리는 동시에 소리쳤다. "라이코스!" 그렇다. 그 매는 다름 아닌 청안백우조 라이코스였다. 판타지 세계…… 정확히는 자이나레스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버들랜드라는 섬에 사는 안백우조. 한때 나의 충성스러운 부하 1호였던 라이코스는 라이를 만난 뒤 라이의 절친한 친구 이코가 되었다. 그 후, 우리가 이 세계로 오자 라이코스는 오직 친구인 라이를 만나기 위해 아이리스 왕궁 지하에 있는 마법진을 동해 이 세계로 건너왔다. 그런데 라이코스가 왜 미국에 있는걸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이가 나에게 물었다. "왜 이코가 미국에 있는거에요, 오빠?" "글쎄다. 그건 이 오빠도 모르지." "그럼 우리 이코 어떻게 되는 거에요?" "글쎄다. 포획되었으니 이상한 실험실에 끌려가 혈액을 채취당하고, DNA분석을 비롯해 각종 실험을 당하고, 결국 해부되겠지." 라이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떳다. "예? 해부요?" "응. 수술대에 묶인 채 날카로운 매스로 온 몸이 조각조각 나는 거야." 라이는 입을 쩍 벌린 채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우에에엥~!" 루시아는 깜짝 놀라 라이를 껴안고 달래주었다. "왜 우는거야, 라이야?" "우엥~ 우엥~ 이코가…… 이코가……." 루시아는 날 노려보녀 소리쳤다. "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라이를 울리는거야?" "아, 아니 뭐,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지." "우에에엥~!" 라이코스는 매과에 속하기는 하지만, 매와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 정도의 지능을 지니고 있으며, 구강 구조가 앵무새와 흡사해 말고 할 수 있다. 그런 매를 포획했는데 그냥 놔줄 리 없다. 하물며 미국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미국은 세계평화(?)와 인류발전(?)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국가다. 심지어는 남의 나라에 폭탄을 퍼부은다음 세계평화를 위해 그랬다고 박박 우기기도 한다. 으음, 라이코스는 살아 돌아오기 글렀군. "우엥~ 우엥~ 이코를 구해주세요오." "응? 구해달라고?" "우엥~ 우엥~ 라이는 이코 없으면 못살아요오." "……." 이제까지 잘 살았잖아. 생각해보면 라이코스는 존재감이 없다. 없어도 어느 정도 없어야지, 정말 너무 없다. 마지막으로 라이코스를 본 게 언제더라? 난 잠시 눈을 감고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가. "아! 영아가 집에 왔을 때구나!" 대학 힙학을 압둔 영아가 기숙사 문제로 우리 집에 잠깐 머무른 적이 있다. 그때 라이코스는 영아를 보며 말을 했고, 놀란 나는 라이코스를 창문 밖으로 집어던진 다음 문을 잠갔다. 그 후에 라이코스는 모습을 감추었지. "……." 그런데 왜 아무도 몰랐을까? 나와 다른 가족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코의 절친한 친구인 라이는 왜 몰랐을까? 뭐, 라이는 평균 기억력 3초를 자랑하는 단순 엘프이니. 아무튼 라이코스가 미국에서 모획된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만약 라이코스가 고문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우리 가족과 판타지 세계에 대해 불면 큰일이기 떄문이다. 그럼 정말로 미국은 탱크와 전투기를 이끌고 판타지 세계로 쳐들어간다고 난리를 칠지로 모른다. 아니, '모른다' 가 아니라 확실하다. 미국은 그러고도 남을 나라다. 숭어가 뛰면 망둥어도 뛴다고 일본도 낄 것이 뻔하다. 미국 옆에 찰싹 붙어 한 밑천 챙기려 들겠지. 뭐, 지들이 그래봐야 드레곤 브레스 맞고 죽기밖에 더 하겠냐만은…… 아무튼 미국이 설쳐대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은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기 힘들 것이며, 판타지 세계로 돌아간 다음 영구 마법진을 파기시켜야 할 것이다. 으음,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라이코스를 구해야겠군. 그런데 어떻게 구하지? 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쯤 연구소 깊숙한 곳에 있을 실험실에서 각종 실험을 당하고 있을 라이코스를 무슨 수로 구해낸단 말인가? 결정적으로 현재 라이코스의 위치조차 파악이 안 된다. "으음, 아무리 8클래스 마스터라지만, 이건 좀 힘든 일이군."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우리 집에는 9클래스 마스터가 셋이나 있으니. 잠깐. 라이코스는 버들랜드 출신이잖아. 그리고 버들랜드는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의 영지고 즉, 라이코스는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르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우엥~ 우엥~ 이코가 불쌍해요오. 우리 이코 구해줘요오." "그래 그래. 알았어. 오빠가 이코 구해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라이야." 훌쩍~ 정말요?" "응. 이 오빠는 정직과 신용의 대명사……." "우에에엥~!" "진짜 구해준다니까! 오빠가 말하면 좀 믿어!" "훌쩍~ 훌쩍~." 라이가 펑펑 울었지만 루와 루비는 라이코스와 별로 안친한 관계로 안 울었다. 하지만 조금은 걱정이 되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그래. 내 니들을 위해서라고 반드시 이코를 구해주마. 난 라이레얼 방으로 향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자 라이레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저에요. 히로." "아! 히로야? 어서 들어와." 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레얼은 침대에 누운 채 패드를 붙잡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르는 라이레얼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 진짜 히로네.” “…….” 그럼 가짜 히로겠습니까? 카르는 경계심 가득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의 언니 방에는 무슨 일이야? 나의 언니한테 찝쩍거리면 가만 두지 않겠어!” “아니,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흥분할 필요까지야…….” 라이레얼은 하던 오락을 잠깐 멈추었다. “무슨 일이야, 히로?” “카르에게 잠깐 할 말이 있어서요.” “카르한테?” “나한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르는 라이레얼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난 언니 꺼야. 날 넘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라이레얼은 울먹거리며 말했다. “히로는 카르 같은 타입이 좋나 보구나. 훌쩍~ 너무해, 히로.” “아, 아리, 꼭 카르 같은 타입만 좋아하는 건 아닌데…….” 참고로 난 모든 타입이 다 좋다. 라이레얼 같이 귀여운 누님 타입도, 카르같이 차가운 동생 타입도, 잠깐. 지금 이게 아니잖아. “큰일 났어요.” “응? 무슨 큰일?” “사실은 말이에요…….” 난 라이코스 납치(?) 사건에 대해 라이레얼과 카르에게 말해주었다. 얘기를 다 들은 라이레얼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감히 나의 비상식략을 채갔단 말이야?” “…….” 비상식량? 청안백오주는 정력과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라이레얼은 라이코스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도 했었지.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라이코스는 정말로 라이레얼 뱃속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라이코스를 빨리 구해야 해요.” 라이레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놈들이 먹어 치우기 전에 빨리 구해야 돼.” “…….” 라이코스는 먹는 게 아닌데 ……. 난 카르에게 물었다. “라이코스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어?” “간다해. 라이코스는 버들랜드 출신이니까.” “그럼 구해줄 수 있겠어?” “내가 왜 니 부탁을 들어줘야하는데?” “그건…….” 내가 말을 못하자 라이레얼이 잘라 말했다. “구해와.” “네, 언니. 당장 구해올게요.” “…….” 역시나 라이레얼의 명령에는 한마디 토도 달지 않는다. 라이레얼을 위해서라면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을 것 같은 카르. 드래곤들 중에는 왜 이렇게 순정파가 많은 건지 모르겠다. 카르는 내가 보는 앞에서 공중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카르의 손바닥 위에 라이코스가 나타났다.\ “헉! 어떻게…….”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마나의 움직임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과연 드래곤이라는 건가? 대체 9클래스 마스터가 어떤 경지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앗! 여기는 어디야?” 라이코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난 라이코스를 집어 들었다. “우리 집이란다.” “앗! 너는……?” “그래. 나다.” “어, 어떻게? 나는 분명 실험실에 있었는데…….” “마법으로 널 이곳으로 워프 시킨 거야.” “그, 그래?” 라이코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시었다. 그리고 이어 눈물을 쏟아 냈다. “흑흑, 너무 무서웠어, 정말 죽는 줄 알았어, 그놈들이 나에게 이상한 실험을 하며…….” “무슨 실험을 했는데?” “내 피를 뽑아가고, 깃털도 뽑아가고, 발톱도 긁어가고…… 말해보라며 쿡쿡 찌르질 않나, 억지로 부리를 벌려보질 않나…….” “그래서 말했어?” “아니, 말하면 더 괴롭힐 것 같아서 부리를 꾹 다물었어.” “그래. 잘했다.” 실험실에서 고통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진다. 내가 집에서 쫓아내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데 무슨 일로 미국에 간 거야?” “집을 나오니 갈 데가 없더라고, 그런데 문득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러 나라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졌어. 그래서 여행을 떠났지.” “프랑스도 갔었냐?” “응. 먼저 일본과 중국을 구경한 다음 유럽으로 떠났지. 유럽 구경 다 한 다음 미국으로 향했고, 뉴욕에 도착해서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하는데 어떤 놈들이 그물을 던져서…… 흑흑, 너무 무서웠어.” 그 순가의 일이 떠올랐는지 라이코스는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그 모습이 심히 불쌍하다. “그래, 고생이 많았구나.” 난 라이코스의 머리(원래 새는 대가리라고 해야 옳다)를 쓰다듬어주었다. 쓱쓱. “그래도 이렇게 집으로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다.” “흑흑, 응. 죽음의 공포보다도 앞으로 나의 친구 라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슬펐어. 앗! 그러고 보니 나의 친구 라이는 왜 안보이는 거지?” “라이는 지금 거실에 있어.” 내가 라이코스를 데리고 거실로 나가려는데, 라이레얼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라이코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라이레얼. 그 눈빛에 라이코스는 몸을 움찔했다. 라이레얼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훑었다. 라이코스의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라이레얼의 방. 어찌 보면 라이코스에게 있어서 실험실보다도 더 위험한 장소다. “저, 저기요, 라이레얼……”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라이레얼은 라이코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비상식량이니까 뒀다 먹어야지.” “하아~.” 나와 라이코스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레얼이 방금 전 스파게티를 먹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라이레얼. 게임 열심히 하세요.” “응. 잘가, 히로. 언제든 부담 갖지 말고 또 와.” 라이레얼은 또 오라고 했지만, 카르는 ‘앞으로는 나의 언니 방에 오지마’라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난 라이코스를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라이는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었다. 난 라이에게 말했다. “오빠가 이코를 구해왔어, 라이야.” 라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라이코스를 보았다. “이코야아~!” “라이야아~!” 라이코스는 내 품을 빠져나와 파닥파닥 날아가 라이의 품에 안겼다. 라이는 라이코스를 꼭 끌어안으며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우엥~ 우엥~ 이코야아…….” “흑흑~ 라이야아…….” 종족을 넘어선 엘프와 청안백우조의 우정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다뜻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훌쩍~ 그동안 어디 갔었어, 이코야? 라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걱정은 개뿔이. 라이코스 없이도 잘 놀아놓고는. 옛날에 라이의 친구는 라이코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루와 루비가 있다. 그 때문이지 라이코스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뭐, 그보다 중요한 것은 라이코스가 존재감이 별로 없다는 거지만. 어떻게 2부 6권에서 사라져서 2부 13권에 나타났는데,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한 걸까? 뉴스를 보지 않았다면, 영원히 모를 뻔했다. 어쨌든 라이 패밀리가 다시 결성되었기 때문이지 라이는 울음을 멈추고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라이코스 역시 매우 기뻐했다. “우리 다같이 재밌게 놀자” “응!” 라이는 라이코스를 안은 채 놀이방으로 향했고, 루와 루비가 그 뒤를 다랐다. 모이면 놀 생각밖에 안하는 어린 엘프들. 라이코스도 왔겠다, 이번 기회에 스터디 그룹 하나 결성하면 어디 덧나니? 아이리스 story 30 다시 판타지 세계로 재개점 10일째. 루시아의 표정이 매우 밝아 보인다. 살포시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나나 매장 안의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까지도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여자 좀 봐.” “너무 예쁘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웬만한 모델보다 훨씬 예뻐.” “어느 나라 사람일까?” 루시아가 미소 짓는 것만으로 매장 안이 환해진 느낌이다. 루시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예쁘지만, 역시나 웃을 때가 가장 예쁘다. 난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으응. 그냥.” “그냥?” “그냥 오빠 결혼식이 다가오니 기쁜 마음이 들어서. 오빠와 결혼 할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해.” “뭐, 직접 보면 알겠지. 반데라스 동생이니 나쁜 여자는 아닐 거야.” “응. 반드시 좋은 여자여야 해.” 오빠가 좋은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라는 루시아. 정말 천사가 다로 없다. 난 슬며시 루시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너희 오빠도 니가 좋은 남자와 결혼하길 바라고 있을 거야.” “응?” “그 좋은 남자란 바로 아이언스 히로…….” “이거 계산해주세요.” “예. 잠시만요.” 갑자기 나타난 손님 때문에 루시아는 몸을 휙 돌려 업무 일선에 북귀했다. “……인데.” 아이씨! 저 손님은 이 중요한 순가에 왜 인형을 사가고 난리야! 내가 괜히 툴툴거리는데 지니가 다가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이언스 공작님” “하세요.” “결혼식과 관련된 일이라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지요” 이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판타지 세계에서 온…… 일명 외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냥 외국인(백인, 또는 혼혈)인 줄로만 알고 있다. 나와 지나가 서로 공작, 백작이라 부르는 것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뭐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직접 묻기도 한다. -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 : 왜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그럼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나 : 지니는 유명한 백작가의 후손이에요. 그래서 제가 먼저 장난으로 ‘사일런스 백작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지니 역시 장난으로 저를 ‘아이언스 공작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냥 별명이나 예명 부르는 거랑 비슷한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드물긴 하지만, 이 세계에는 아직도 군주제를 유지하는 나라들이 있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이야 아직 선진화가 덜 되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영국,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등의 많은 선진 유럽 국가들도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만 해도 군주제다. 그래서 극우파들은 아직도 텐노를 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들 나라들이 군주제를 유지한다고 해서 과거 중세처럼 절대군주제는 아니다. 왕가는 헌법에서 정한 제한된 권력만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거나, 아예 정치와는 상관없는 형식적으로 의례적인 존재로 남는다. 후자의 경우에는 국가와 국민화합의 상징적 존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위와 같이 설명하면 사람들은 대충 이해하고 넘어간다. 어차피 우리 가족들이 백인인 줄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유럽국가에서 온 걸로 여기는 것이다. 난 지니를 다라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요?” “결혼식 관련 일입니다.” “결혼식이요? 뭔가 결정된 거라도 있나요?” “예. 아무래도 먼저 헤리오 왕궁에 들러야할 것 같습니다.” “헤리오 왕궁에요? 뭐 때문에요?” “그곳에서 헤리오 에이미 공주님을 모시고 아이리스 왕궁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예? 우리가 에이미 공주님을 모시고 간다구요?” “그렇습니다.” “왜요?” 지니는 외눈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번 결혼은 아이리스 왕국과 헤리오 왕국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 결혼이 무사히 성사된다면, 양국의 관계는 더욱 우호적으로 변할 것 입니다.” “뭐, 그렇죠, 처남 매부 사이가 되는 셈이니, 게다가 후궁으로 들이는 것도 아니고 왕비로 들이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지요.”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아이리스와 헤리오의 적대국이라 할 수 있는 자바스와 아토리아입니다.” “…….” 자바스와 아토리아. 과거 아이리스를 멸망시켰던 나라들이다. 아토리아가 갑작스레 아이리스를 공격했고, 놀란 아이리스는 아토리아를 막기 위해 동맹국이었던 자바스의 군대를 수도로 끌어들였다. 이것을 성사시킨 것은 아이리스의 두개 공작가였다. 수도로 들어온 자바스 군대는 아이리스를 돕는 대신 왕궁을 공격했다. 때문에 아이리스 왕국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멸망당했다.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전 아이리스 국왕(다시 말해 루시아의 아빠)은 그다지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리 나라가 위험해도, 아무리 주위에서 간신배들이 떠들어대도 다른 나라의 군대를 수도까지 끌어들이다니. 뭐, 이쯤 얘기했으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눈치 했을 것이다. 아토리아와 자바스가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일이 끝난 후 두 나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아이리스 왕국을 나눠 먹는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키레아 왕과 초절정 꽃미남 마검사 아이언스 히로가 다시 세력을 모아 빼앗긴 땅을 되찾고 아이리스 왕국을 재건해 큰 위협이 되자, 아토리아와 자바스는 다시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아이리스는 헤리오와 동맹을 맺었고, 헤리오 위에 있는 개틴 왕국은 헤리오와 철천지원수인 나라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헤리오가 아이리스와 동맹을 맺자, 개틴도 아토리아와 자바스와 동맹을 맺고 두 나라를 견제하는 중이다. 으음, 역시 국제 정세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해. “또 있습니다.” “예? 또 있어요? 아니, 또 어떤 놈들이 감히 처남…… 아니, 키레아 폐하의 결혼을 반대한대요?” “헤리오 왕국의 귀족들과 아이리스 왕국의 귀족들이지요.” “예? 아니, 두 나라 동맹이 견고해지면 국가의 이익인데 어째서……?” “어느 나라에나 국가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족속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건 그렇지요.” 지니의 말이 맞다. 어느 나라에나 그런 간신배들은 꼭 있기 마련이다. 국가와 국민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싸움 정치인들. 키레아 왕이 에이미 공주와 결혼을 하면 아이리스와 헤리오의 동맹이 더욱 견고해지고, 그만큼 양구의 정치가 안정된다. 하지만 동맹이 견고해진다는 것은 왕의 권력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귀족들은 왕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권력이란 무한한 것이 아닌 한정적 자원이다. 왕의 권력이 강해진다는 것은 귀족들의 권력이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귀족들의 권력이 강해진다는 것은 왕의 권력이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도 극심한 권력 다툼에 시달리는데, 절대왕정제야 오죽하겠는가? “으음,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국가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거군요.” “서로 품고 있는 뜻이 다르더라도 목적만 같다면 얼마든지 동지가 될 수 있는 법이지만.” “그 말씀은 쓰레기 귀족들이 자바스나 아토리아와 결탁을 했다는 건가요?”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 하여간 귀족이나 정치인이나 썩은 건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우해서라면 나라 팔아먹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아이리스와 헤리오의 귀족들. 마치 일본에 우리나라를 팔아넘길 매국노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씁쓸하다. “그럼 그놈들이 아이리스 왕국으로 향하는 에이미 공주를 습격 할 거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으음…….” 난 잠시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감히 처남의 결혼식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런 놈들은 뼈와 살을 분리 시켜줘야 한다. 나는 아이리스 왕궁의 충신으로서 이 일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키레아 왕의 결혼식에 문제가 생기면 절대 안 된다. 키레아 왕을 빨리 장가보내야 나와 루시아도 결혼을 할 것 아닌가? 난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쳤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결혼식을 반드시 성사시키겠습니다.” 지니는 감도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아아언스 공장님의 충성심에 존경을 표합니다.” “아니, 뭐 존경까지야……. 그런데 제가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 건가요?” “헤리오 왕궁에서부터 아이리스 왕궁까지 에이미 공주님을 경호해주시면 됩니다.” “경호요?” “그렇습니다.” “잠깐만요 그런데 굳이 마차를 타고 갈 필요가 있나? 그냥 워프 마법으로 이동하면 되잖아요.” 그렇다. 마법을 쓰면 한방에 갈 것을 뭐 하러 암살 위협까지 받으며 마차타고 가는가? 게다가 마법을 쓰면 금방이지만, 타고 가면 시간도 엄청 오래 걸린다. “제가 한 가지 말씀을 안 드렸군요.” “뭔데요?” “에이미 공주님께서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몸을 타고 나셨습니다.” “정말요? 아니, 그런 사람은 드문 걸로 아는데…….” “헤리오 왕가의 핏줄에서는 가끔 나타납니다.” “…….” 왕가의 핏줄은 달라도 뭔가 다르단 말인가? 마법이 통하니 않는 몸. 말 그대로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몸을 뜻한다. 같은 마법아라고 해도 사람마다 효과가 가르게 나타난다. 치료마법을 쓸 경우 어떤 사람은 상처가 금방 아무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잘 아물지 않는다. 이는 술 한 잔만 마셔도 필름이 끊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리 마셔도 멀쩡한 사람이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사람마다 체질이 있고, 마나에 대해 다르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마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경우다. 간적적인 영향의 경우에는 별 상관이 없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몸을 지녔다 하더라도 파이어 볼을 맞으면 타죽는다. 파이어 볼의 경우 불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는 마법이다. 하지만 일단 불이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마법과 상관없이 불로서 존재하게 된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덩어리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불덩어리든 맞으면 타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라이트닝 볼트 역시 같은 맥락이다. 전기의 생성 자체는 마법의 힘이지만, 일단 전기가 만들어지고 나면 그것은 실제 전기와 똑같은 위력을 지닌다. 그래서 라이트닝 볼트를 맞으면 번개를 맞은 것처럼 감전돼 쇼크로 죽는 것이다. 참고로 공격 마법 대부분은 이처럼 간접적 영향이다. 마법으로 무엇을 만든 다음 그것으로 공격하는. 그렇다면 직접적인 영향은 무엇이냐? 그것은 몸에 직접 거는 마법을 뜻한다. 방어 마법, 치료 마법, 회복 마법, 저주 마법, 이동 마법 등이 여기 속한다(물론 전부 속한다는 것은 아니다. 방어 마법의 경우 피부를 돌처럼 만드는 스톤 스킨 마법을 몸에 직접 거는 것이지만, 몸 주위에 방패를 만드는 실드 마법은 다르다).에이미 공주가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몸을 타고 났다면 워프는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다. 경이적인 알코올 분해 능력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독한 술을 계속 마시다보면 언젠가는 취하기 마련이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몸이라고 해서 아예 마법이 앙ㄴ 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영향을 덜 받을 뿐이다. “전 8클래스 마스터입니다.” 아무리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몸이라고 해도 8클래스 마스터인 내가 직접 마법을 쓴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만약 안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우리 집에 드래곤만 셋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9클래스 마스터가 마법을 쓰면, 아무리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몸이라고 해도 워프 안 할 수 있겠어? “아이언스 공작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말씀대로 워프로 이동해도 상관이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차로 이동하는 것을 택한 것은…….” “택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 그러니까 그 여러 이유가 뭐냐고? “이번 결혼식은 큰 행사입니다.” “그렇지요. 한 나라 왕과 한 나라 공주가 결혼하는 건데.”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의 홍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홍보요?” 당연한 얘기지만, 판타지 세계는 이쪽 세계처럼 언론 매체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왕이 결혼을 한다고 하면 수도 사람들은 다 알지만, 먼 지방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한참 뒤에나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언론 매체가 열악한 곳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입소문이다. 입소문은 의외로 엄청난 속도와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주가 탄 마차와 결호 예물을 가득 실은 마차가 행진을 하면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홍보 좀 하자고 위험을 감수하는 건가요?” “물론 아닙니다. 진짜 목적은 다로 있지요” “진짜 목적이요? 그게 뭔데요?” “마차로 이동하면 결혼식을 막기 위해 많은 암살자들이 달려들 것입니다.” “헉!” “더불어 자바스와 아토리아가 결혼식을 방해한다는 것을 부각시키려 에이미 공주님을 암살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트리면, 아이리스와 헤리오의 동맹 강화에 정당한 명분이 주어지고 외교적으로도 좀더 우위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런 좋은 방법이!” 이번 기회에 함정을 파서 매국노들을 일망타진하자는 거다. 덤으로 적대국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동맹을 강화할 명분까지 얻게 된다. 자바스와 아토리아가 이렇게 심한 적대행위를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라고 말한다면, 동맹 가화를 반대하는 귀족득의 입이 쏙 들어갈 것이다. “이거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군요.” “그렇습니다. 이 작전은 저희 누님께서 제안하신 겁니다.” “사실 이 작전은 매우 위험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에이미 공주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매우 큰일이니까요.” “뭐 그렇지요.” 에이미 공주가 죽기라도 한다면, 첫째 문제는 결혼식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문제는 그 책임을 경호를 맡은 사람이 져야한다는 것이다. 아이리스 측 인사가 경호를 맡았으면, 아이리스 왕국은 사고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에이미 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양국 관계가 오히려 나빠질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한 도박이라 할 수 있다. “이 작전은 오로지 아이언스 공작님 덕분에 가능한 것입니다.” “제 덕분에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경호를 맡으시기만 한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아이리스와 헤리오 양 국가 모두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에이미 공주님을 상처 하나 없이 아이리스 왕궁으로 모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작전을 처음 말했을 때는 모두가 반대했지만, 아이언스 공작님께 직접 경호를 하실 거라 말하자 모두가 찬성했습니다. 모두가 아이언스 공작임의 위대한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아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또 쑥스럽네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은?” 지니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 누님께서 이 작전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제 말이 뭘 뜻하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에? 뭘 뜻하냐니요?” “이러한 작전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위대한 아이언스 공작님이 세상에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저희 누님께서 이러한 작전을 세우셨다는 것은 아이언스 공작님의 의대함을 인정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헉쓰!” 그렇단 말인가? 일루니아 여사님도 나의 위대함을 인정하셨단 말인가? 언제나 나를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일루니아 여사님. 그런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의 위대함을 인정했다. 즉, 일루니아 여사님은 예전부터 나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항상 나를 찢어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셨다. 그것도 모자라 나를 뺀질이라 부르며 괴롭혔다. 어째서 그랬을까? 어째서 일루니아 여사님은 그런 행동을 한 걸까? “…….” 서, 설마 나의 위대함을 질투한 건가? 처음에는 어떻게든 나를 다라잡기 위해 노력하셨겠지. 하지만 노력을 하면 할수록 나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그제야 일루니아 여사님은 깨달았다. 내가 저 하늘의 태양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무리 노력대호 다라잡을 수 없는 위대한 존대. 그때부터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를 질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니, 질투를 하지안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언스 히로는 너무나도 위대했기에. “후후~ 그랬었군. 어쩐지 나에 대한 태도가 너무 편협하다 했어. 그것에 질투였을 줄이야.” 아아~ 대체 왜 난 천재로 태어났단 말인가? 범인들의 질투와 시기를 한 몸에 받는 것은 천재의 숙명. 내가 평범하게 태어났으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은 일루니아 여사님의 잘못이 아니다. 다 잘난 내 잘못이다. 내가 조금만 못났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터. 그저 잘나서 죄송스러울 다름이다. “그래서 출발은 언제 할 건가요?” “내일 할 생각 입니다.” “예? 그렇게 빨리요?” “그렇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빨리 출발해요?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요?” “에이미 공주님 경호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 뭐 또 다른 게 있나요?” “모두들 오랜만에 돌아가는 것이니, 고향에도 가보고 여행도 좀 즐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그런가요?” 확실히 판타지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모험을 끝마치고 이 세계로 돌아온 다음에는 한 번도 안 갔으니. 나야 원래 이 세계 사람이나 상관없지만, 다른 가족들은 판타지 세계에 고향이 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고향에도 들르고 여행도 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번 여름에 다들 휴가도 제대로 못 갔다 왔으니, 겸사겸사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네요.” 한창 영업 잘 되는 가게의 문을 도로 닫는 것은 아쉽지만. 다른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나 역시 여행을 좀 하고 싶다. 루시아와 같이 여행을 다니며 판타지 세계의 정취에 흠뻑 젖고 싶다. 여행. 아아~ 이 얼마나 낭만적인 단어인가? 때로는 나도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나 혼자 말고, 루시아와 함께. 일명 부부 동반 여행. 후후~루시아와 단 둘이여행을 즐기기…… 잠깐. 루시아라면 애들을 데려가려 하지 않을까? 그럼 루시아 뒤에 어린 에프들이 졸졸 짜라올 테고…… 그럼 부부 동반 여행이 아니라 가족 여행이 되니……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 난 여행에서까지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건가? 으음. 판타지 세계에 가면 어린엘프들을 떨어뜨려놓을 방법을 찾아야겠군. 그런데 걔들이 쉽게 떨어질까? “그럼 내일 출발하기로 하지요.”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운 루시아를 대신에 계산대 앞을 지켰다. 그런데 갑자기 라이와 루비가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오빠~!” “헉쓰!” 난 라이와 루비를 보고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쟤들 복장이 왜 이래? 라이와 루비가 입고 있는 것은 차이나 드레스. 비단으로 만들어진 차이나 드레스는 소매는 반팔에, 긴치마는 허벅지까지 시원하게 트여있었다. 때문에 그 사이로 다리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회색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긴 회색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묶은 라이. 붉은색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빨강머리를 양쪽으로 모와 하얀 헝겊으로 묶은 루비. 앗! 저것은 일명 만두머리가 아닌가? 안 그래도 귀엽고 깜찍한 것들이 화려한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니 숨이 다 막힐 지경이다. 라이와 루비는 내 앞에서 서서 두 손을 뒤로 깍지 낀 다음 상체를 기울였다. “헤헤~ 어때요, 오빠?” “루비 예뻐요?” “…….” 귀, 귀여워! 내가 아무 말도 못하자 라이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라이가 너무 예뻐서 그러는 거예요, 오빠?” 루비는 검지로 볼을 살짝 누르며 생긋 웃었다. “아니야, 라이야. 오빠는 루비한테 반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게 틀림없어.” 귀엽다. 너무 귀엽다. 너무 귀여워서 죽을 것만 같아. 귀여움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라이와 루비. 대체 이 아이들의 귀여움의 한계는 어디까지인 걸까? 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두 엘프에게 물었다. “그 복장은 뭐니?” “헤헤~ 오늘은 오빠를 위해 차이나 드레스를 입어 봤어요.” “맞아요, 오빠를 위해서 입은 거예요.” 라이와 루비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나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동시에 외쳤다. “오빠의 하트(Herat)를 겟(Get)하겠어요!” “…….” 겟 하긴 뭘 겟 해? “헉! 너, 너희들 설마 오빠의 하트를 노리고 있는 거니?” “헤헤~!” “에헤헤~!” 라이와 루비는 깜찍하게 웃으며 말했다. “니하오!” “워아이니!” “…….” 아주 별 짓을 다한다. 중국말을 또 어디서 주워들어 가지고……. “오빠아~” “응? 왜 그러니, 라이야?” 라이는 몸을 비비 꼬며 말했다. “라이 어때요오? 예뻐요오?” 너무 귀엽고 깜찍한 모습에 난 나도 모르게 라이를 와락 껴안았다. “응, 물론이지. 라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앗! 그럼 루비는요?” “물론 루비도 세상에서 제일 예뻐! 일루와, 루비야” “헤헤~” 난 두 엘프를 품에 안고 엉덩이를 두드려주었다. “아이구, 귀여운 것들!” 1층 매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라이와 루비에게 집중되었다. 모두가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라이와 루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루비의 만두머리가 매우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 옷은 어디서 났니?” 라이와 루비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인디 오빠가 만들어줬어요오~!” “라이 머리도 인디 오빠가 해준 거예요.” “루비 만두머리도 인디 오빠가 해줬어요.” “…….” 그래. 인디일 줄 알았다. 날로 화려해지는 아이들의 코스츔, 산타복부터 시작해서, 간호사복, 메이드복, 경호원복, 차이나 드레스까지! 그 변화무쌍한 모습이 놀라울 다름이다. 아아~ 그나저나 정말 너무 귀엽다. 라이의 양 갈래로 묶은 머리도 귀엽고, 루비의 만두머리도 귀엽다. 어느 쪽이 더 귀여울까? 아무리 비교 해봐도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무한대의 귀여움과 무한대의 귀여움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치마가 너무 트여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잘하면 팬티가 보일 것 같다. 앗! 감히 우리 라이와 루비의 다리를 음흉한 눈길로 쳐다보다니! 당장 그 더로운 시선을 돌리지 못할까! “이건 비밀인데요오…….” 라이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라이는 내 귓가에 대소 속삭이듯 말했다. “오빠를 위해서 귀여운 팬티를 입었어요오.” “헉!” 오빠를 위해서 귀여운 팬티를 입었다니! 대체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라이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라이는 두 손바닥을 뺨에 대고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역시 부끄러워, 발그레~” 매우 좋아하는 모습. 루비도 질세라 나에게 말했다. “루비도 오늘 예쁜 팬티 입었어요. 오빠 보여줄 거예요.” “헉!” 오빠한테 보여주겠다고? 루비 역시 라이와 마찬가지로 두 손바닥을 뺨에 대고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이~부끄러. 부끄부끄~” “……” 뭘 그렇게 좋아하고 그러니? 귀엽고 깜찍한 두 아이가 나란히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좋은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보다……. “방금 한 말 들었어?” “팬티를 보여주겠대?” “대체 어떻게 교육시켰기에 애들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혹시 애들이게 이상한 짓을 한 것은 아닐까?” “왜 아니겠어?” “맞아. 아니면, 애들이 팬티 보여준다는 말을 할 리 없잖아.” “저 남자 좀 이상한 것 같아.” “설마 말로만 듣던 로리변태?” “그럼 밤마다 아이들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밤마다 옷을 벗긴 다음에 엉덩이를 때리는 건가?” “어떻게 저 귀여운 아이들이게 그런 심한 짓을!” “인간도 아니야!” “로리변태는 전부 죽어야 돼!” “…….” 뭐야, 이 악의적인 여론은? 오해성 짙은 루비의 발언 때문에 순식간에 나만 로리변태로 몰렸다. 기왕 그런 말을 할 거면 라이처럼 귓속말로 할 것이지……. 뭐, 생각해보면 귓속말로 그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다. 라이와 루비는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지 계속해서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좋아하고 있었다. 난 주위에서 쏟아지는 다가운 시선에 몸을 움츠렸다. 다행이 그 순간 루시아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매장 안의 사람들이 인형은 안 고르고 한쪽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으응. 그게 말이지…….” 내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루시아는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라이와 루비를 발견했다. “아!” 루시아는 깜짝 놀라 탄성을 내뱉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2층 찻집에서 가져온 커피)마저 떨어트렸다. “아! 루시아 언니다!” 라이와 루비는 아까 나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을 총 모양을 만들어 루시아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외쳤다. “언니의 하트를 겟 하겠어요!” “너무 귀여워!” 루시아는 달려와 라이와 루비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마구 볼을 비볐다. “꺄아~ 숨 막혀요, 언니.” “루비 아파요오.” “앗! 미안해, 얘들아.” 하지만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노하주지 않았다. 껴안은 손을 조금 풀었을 뿐이다. “정말이야? 정말로 언니의 하트를 겟 할 거야?” “예. 라이는 언니의 하트를 노리고 있어요” “언니의 하트는 루비 거예요” “응. 언니의 하트는 라이와 루비 꺼야. 언니는 이미 라이와 루비에게 반했는걸. 왜냐하면 라이와 루비는 세상에서 젤 귀엽고 착한 엘프니까.” 쪽! 쪽! 루시아는 한참 동안 라이와 루비에게 애정 공세를 했다. 얼마나 뽀뽀를 해대는지 라이와 루비의 뺨에 침이 가득 묻어있을 정도다. “우리 라이와 루비 이 옷은 어디서 난거야?” “인디 오빠가 만들어줬어요오~!” “그랬구나. 우리 라이와 루비 몸에 딱 맞게 만들어줬네, 라이와 루비 이옷 맘에 들어?” “네에~” 라이는 루시아의 목에 매달리며 말했다. “언니를 위해서 귀여운 팬티를 입었어요오.” 루비는 루시아를 껴안으며 말했다. “루비는 예쁜 팬티를 입었어요. 이다 언니한테 보여줄래요.” “아이~ 부끄러. 발그레~” “아이~ 부끄러. 부끄부끄~” “…….” 머냐? 오빠한테만 보여주는 거 아니었어? 언니한테도 보여줄 줄이야. 으음, 은근히 충격이군. “혀엉~! 누나아~!” 루는 펄럭거리는 도포 같은 옷을 입고 라이코스를 품에 안고 등장했다. 앗! 저 옷은 일명 황비홍 복장이 아닌가? 난 루에게 물었다. “그 옷은 뭐니?” “전 황비홍이에요.” “응?” “전 황비홍이에요” “…….” 황비홍인데 어쩌라고? 황비홍은 청나라 때의 사람이다 그리고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변발(몽골인이나 만주인의 풍습으로, 남자의 머리를 뒷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깎아 뒤로 길게 땋아 늘인 머리)을 했다. 황비홍 역시 변발을 했다. 하지만 루의 머리 스타일은 그대로였다. “황비홍이면 머리를 밀어야 하는 거 아니니?” “전 머리 안 밀어도 황비홍이예요.” “…….” 황비홍 옷만 입으면 무조건 황비홍이냐? 그럼 히로 옷 입으면 히로고, 루 옷 입으면 루냐? “앗! 루다!” “앗! 이코다!” 라이코스는 파닥파닥 날아가 라이의 품에 안겼다. 라이는 예전처럼 두 손으로 라이코스를 잡고 품에 안았다. “헤헤~ 저 어때요, 누나?” “귀여워.” 루시아는 공평하게 루도 꼭 안아주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으음, 이번 기회에 나도 코스츔을 좀 바꿔볼까? 그럼 공평하게 히로도 안아주려나? “…… 이렇게 해서 내일 출발하기로 했어.” 난 아까 지니와 나눈 대화를 루시아아게 말해 주었다. 얘기를 다 들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가게 영업은 오늘까지만 하는 거야?” “응.” “조금 아쉽네.” “어쩔 수 없지. 돈 버는 것보다는 처남……아니, 너희 오빠의 결혼식이 더 중요하잖아. 그리고 우리 여름에 휴가도 못 갔잖아. 간만에 자이나레스 대륙으로 돌아가는 건데, 후회가 남지 않도록 실컷 놀다 오자.” “응, 그게 좋겠다.” 판타지 세계를 여행한다고 하니 루시아는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했다. “다른 가족들도 다 알아?” “이다 모두 모였을 때 말할 생각이야.” “응” 우리 대화가 끝날 때쯤 루비가 나에게 다가왔다. “루비랑 놀아요, 오빠” “그래. 오빠랑 놀자, 루비야” 난 루비를 번쩍 들어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차이나 드레스의 비단 감촉이 부드럽다. 난 루비의 만두머리와 통통한 볼을 만지작거렸다. 방긋방긋. 생긋생긋. 웃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 으음, 그나저나 치마 옆이 터진 것이 참으로 거슬리는군. 우리 루비 예쁜 다리가 다 드러나 보이잖아. 루비 다리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히로 오빠와 루시아 언니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앗! 라이도 오빠 무릎 위에 앉을래요.” 라이는 라이코스를 안고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자 내 무릎 위에 앉아있던 루비는 내 목에 손을 둘러 나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돼, 라이야. 오빠 무릎은 루비가 차지하고 있어.” 내 무릎은 어째서 1인용인 걸까? 2인용이었으면 라이랑 루비를 동시에 앉힐 수 잇을 텐데 다행이 루시아가 라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언니 무릎 위에 앉자, 라이야” “라이 언니 가슴 만질래요.” “……” 헉! 허락하는 거야? 루시아는 라이의 양 갈래 머리가 맘에 드는지 자꾸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나 역시 루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루비의 머리카락을 만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오른쪽으로 뻗친 더듬이(?)가 참 특이하다. 어떤 머리 스타일을 해도 이 더듬이에는 변함이 없다. 머리를 감으면 물기 때문에 가라앉아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가 조금만 마르면 다시 솟아오른다. 루의 더듬이는 루비와는 반대인 왼쪽으로 나있고, 라이의 더듬이는 루와 루비처럼 긴 더음이는 아니지만, 짧은 더듬이가 두개로 나있다. 분명 같은 머리카락인데 어째서 이렇게 더듬이처럼 솟아있는걸까? 이건 정말 미스터리다. 혹시 이 더듬이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면 엘프들은 이 더듬이를 통해 서로 교신을 한다든가……. 난 더듬이를 눌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눌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눌러도 계속 솟아올랐다. 뭐, 더듬이가 있는 편이 더 귀여우니 그냥 놔두는 게 좋으려나? 영업이 끝나자 나는 또 다시 휴업 팻말을 내 걸었다. 이걸로 벌써 두 번째 장기 유업이다. -라이의 집 임시휴업- 개인적인 사정으로 두 달 정도 휴업을 합니다. 더욱 좋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 뵐 것을 약속드립니다. -주인백- 그동안의 매상을 뒤로하고 휴업 팻말을 걸어야 하는 그 심정. 안 해본 사람들은 절대로 모른다. 그래도 루시아와 같이 판타지세계로 다시 떠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살았던 동굴에도 가보고 싶고, 엘프의 숲도 가보고 싶고, 라나가 살던 마을도 가보고 싶고, 상아탑도 가보고 싶고…… 아무튼 루시아와 함께 여기저기 가보고 싶다. 보람찬 하루 일과를 끝마친 우리들은 집으로 올라가 저녁을 먹었다. 난 저녁식사가 끝나자 몇 가지 핑계를 대 영아를 옥탑방으로 올려 보냈다. 영아는 아직 우리 가족의 정체를 모른다. 그리고 계속 몰라야 한다. 난 가족들을 집합 시켰다. 루시아, 라이, 루, 루비, 지니, 크로니스,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 라이레얼, 카르.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둘러앉았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유는 전달할 말이 있어서 입니다.” 라이레얼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뭔데, 히로? 빨리 말해 봐.” “예.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일 해가 뜨는 대로 판타지 세계로 갈 생각 입니다.” 루시아, 지니,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미 알고 있다.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께 들어서 알 테고, 크로니스는 내가 아까 살짝 얘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어린 엘프들과 라이레얼, 카르는 처음 듣는 얘기일 것이다. “정말이에요, 오빠?” “내일 우리 세계로 돌아가는 거예요?” “정말 돌아가는 거예요?” “응.” 루시아는 한꺼번에 질문을 쏟아내는 어린 엘프들을 진정 시켜주었다. 라이레얼이 뭐라 말하지만, 어린 엘프들의 목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카르기 빽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 니들 때문에 나의 언니가 말을 못하고 있잖아! 다들 조용히 못 해!” 결과는? “우에에엥~!” “으아아앙~!” “엉엉~!” 어린 엘프들이 울어대는 바람에 더 시끄러워졌다. 루시아는 어린 엘프들을 달래기 위해 부비부비 스킬을 썼고, 라이레얼은 그 틈을 타 말했다. “그런데 왜 가는 거야?” “에. 여행과 관광은 부차적인 이유고 일단은 루시아의 오빠인 아이리스 키레아 폐하께서 헤리오 왕국의 제1왕녀 헤리오 에이미 공주님과…….” 난 키레아 왕의 결혼식에 대해 라이레얼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에이미 공주를 호위하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거야?” “예. 바로 그거예요.” “히로도 가는 거야?” “물론이지요, 처남의…… 아니, 키레아 폐하의 결혼식인데 제가 매부……아니, 신하 된 도리로서 당연히 찾아뵈어야지요.” “누구누구 가는 거야?” “뭐, 루시아를 비롯해서 기타 등등이요,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말고 싶은 사람은 그냥 여기 남아있으면 돼요.” “다시 다시 돌아 거야?” “물론이지요, 우리는 잠깐 여행을 가는 것뿐이에요. 우리의 집은 여기잖아요. 뭐, 남는다고 하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헉! 설마 라이레얼은 판타지 세계에 남을 생각이에요?” 내가 깜짝 놀라서 묻자 라이레얼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남고 싶다고 하면 어쩔 거야, 히로?” “저, 정말 그곳에 남을 생각이에요? 판타지 세계로 가서 다시는 안 돌아오실 생각인 거예요?” “그렇다면?” 난 라이레얼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간절한 목소리고 말했다. “안돼요, 라이레얼” “왜 안 되는데?” “아, 아니. 라이레얼이 남고 싶다면 안 될 건 없지만……아무튼 한 번만 다시 생각해봐요, 라이레얼. 이 세계에서, 이 집에서 같이 살면서 재밌었잖아요. 전 라이레얼이 있어서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 라이레얼은 그렇지 않았나요? 라이레얼이 판타지 세계에 남으시면, 자와 헤어지게 되는 거예요. 라이레얼은 그래도 좋나요?” “그래도 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잖아.” “그야 그렇지만…… 하, 하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아, 아무튼 다시 생각해보세요, 라이레얼. 그냥 저랑 다른 가족들과 함께 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요. 예?” 나는 필사적이었다. 라이레얼고 ㅏ헤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라이레어링 있으면 루시아와의 관계 진전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나는 라이레얼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옛날의 연애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라이레얼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고 라이레얼 역시 그렇다. 그래서 난 라이레얼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이 싫다. 안 그래도 친구가 얼마나 없는데, 가장 친한 친구라 할 수 있는 라이레얼이 내 곁을 떠난다니! “내가 떠나는 게 싫어, 히로?” “당연하지요. 라이레얼이 떠나면 제가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훌쩍~ 감동이야, 히로, 알았어. 나 히로 곁을 안 떠날게, 계속 히로네 집에서 살게” “저, 정말요?” “응. 히로가 이렇게까지 날 위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 그리고 난 이세계가 더 좋아. 게임도 있고, 놀 것도 많으니까. 히로랑 함께 이 세계에서 재밌게 살래.” “고, 고마워요, 라이레얼. 흑~ 저는 라이레얼이 떠나는 줄 알고 …….” 난 너무 기쁜 나머지 라이레얼을 껴안으려 했다. 그 순간, 나에게 쏟아지는 눈빛. 루시아의 경멸어린 눈빛과 카르의 얼려 죽을 듯한 눈빛이 동시에 쏟아졌다. - 루시아의 눈빛 : 그 여자 껴안으면 나랑 끝이야! 앞으로 니 얼굴도 안 볼 거야! - 카르의 눈빛 : 나의 언니를 껴안으면 죽여 버릴 테야! 그녀들의 눈빛에 난 슬그머니 라이레얼을 놔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하하…….” 아아~ 이 어색한 웃음. 카르는 라이레얼에게 찰싹 달라붙어 경계모드를 발동 시켰다. 라이레얼은 카르의 흰색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말했다. “나도 갈래.” “라이레얼도 판타지 세계에 가시게요?” “응. 집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해.” “서, 설마 가서 안 돌아오려는 건 아니시겠죠?” 라이레얼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어째서 판타지 세계에……?” “여기저기 놈 놀러 다닐려구. 아! 히로 도와서 에이미 공주 호위 해줄게.” “헉! 정말요?” 최상급 용병 라이레얼. 그녀가 나선다면 에이미 공주를 호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카르는 라이레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면 소리쳤다. “나도 갈래. 언니가 가면 나도 갈 거야” “……” 그래. 니가 왜 그 말 안 하나 했다. “뭐, 가고 싶으면 가야지” 난 고개를 돌려 크로니스를 보았다. “크로니스도 가실 거죠?” 크로니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생각하셨어요. 기왕이면 다같이 떠나는 게 즐겁지요” 라이레얼과 카르에 이어 크로니스도 가기로 결정했다. 이제 남은 건 어린 엘프들 뿐이군. 난 어린 에프들을 보며 물었다. “니들은 어떡할 거니?” 개인적으로 애들은 좀 집에 남아 있었으면 한다. 어차피 영아가 보살펴주면 될 테니. 가끔은 아이들에게 해방되어 부부끼리 오붓한 여행을 다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이런 내 바람이 이루어질리 없다. 어린 엘프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루시아가 먼저 말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그럼 넌 아이들을 떼 놓고 갈 생각이었어?” “아니, 뭐 꼭 떼놓고 간다기보다는……” “아무튼 안돼. 아이들이 안가면 나도 안갈 거야. 난 아이들하고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 “……” 아이들이 안가면 루시아도 안 간다니!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오빠 결혼식 참석도 포기하겠다는 건가? 역시나 우시아는 팔불출 엄마다. “우리 라이랑, 루랑, 루비도 언니랑 헤어져 있기 싫지?” “예, 언니, 라이는 언니랑 헤어져있기 싫어요. 항상 같이 있고 싶어요” “루비도 언니랑 떨어져 있는 거 싫어요. 루비는 언니 옆에 있을래요” “저는 누나밖에 없어요.” “정말? 언니 너무 기뻐, 얘들아” 루시아는 감동 받았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두 팔을 벌려 어린 엘프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린 엘프들도 가기로 결정을 내린 건가? 결국은 온 가족이 다같이 판타지 세계에 가기로 결정되었다. 무슨 설날 대이동도 아니고……. 잠깐. 생각해보니 판타지 세계에서 온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다. 정확히는 판타지 세계에서 온 엘프. 다름 아닌 루엔과 갈리온드. 그 둘은 현재 우리가 옛날에 살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마 지금쯤 온라인 게임 폐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컴퓨터 들어놓은 이후로는 전화 한 번 없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PC방에서 일주일 내내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온라인 게임을 하던 20대 청년이 죽은 일이 있었다. 오랜 기가 씻지 않은 그의 몸에서는 악취가 났고, 의자와 컴퓨터 주위에슨 비듬이 가득했다. PC방 주인이 몇 번이나 집에 돌아가라고 말해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PC방 주인은 노심초사하며 수시로 청년의 상태를 살폈는데, 잠깐 눈을 붙인 줄 알았던 청년이 숨을 쉬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아 경찰에 신고 했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는 깰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그의 캐릭터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온라인 게임은 중독성이 강하다. 특히나 레벨 업(Level Up)중심의 RPG게임은 더욱 그러하다. 자신이 쉬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레벨을 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게임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다른 사람에게 추월당하면 안 된다는,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는 (다시 말해 레벨이 높아야 한다는) 경쟁 심리가 깔려있다. 그러한 경생심리는 온라인 게임 회사들이 의도적으로 조장한 것이다. 그렇게 소위 말하는 페인들이 많아져야 게임이 활성화 되고, 게임이 활성화 될수록 더욱 많은 유저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유저들이 모여들수록(유료 결제 회원이 많아질수록)온라인 게임 회사는 더욱 많은 돈을 벌게 된다. 설마 루엔과 갈리온드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우리랑 같이 판타지 세계에 갈 생각은 있는지 물어보고, 안부 인사라도 한 겸 이다 찾아가 봐야겠다. 하지만 그에 앞서 영아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가 다 떠나고 나면 이 집에 영아 혼자 남게 되기 때문이다. 이 넓은 집을 혼자서 지키려면 꽤나 쓸쓸하겠군. 그것도 두 달이나 혼자 지켜야하니. 가족들이 다 떠나고 혼자서 집을 지키는 것만큼 쓸쓸한 일은 없다. 중학교 때 부모님은 여행을 가시고, 형은 수학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혼자서 외로이 집을 지키……지는 않고, 친구들 불러다가 술 퍼마시고 고스톱을 쳤다. 으음,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 혹시 영아도 친구들 불러다가 놀지는 않을까? 그래서 나중에 집에 돌아왔을 때 입 안이 개판이 되어 있으면 어떡하지? 난 내 집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들로 인해 어지럽혀지는 것도 싫다. 이곳은 우리 가족만의 공간이다. 결코 다른 사람이 침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냥 옥탑방 덮개를 막아버려 이집으로의 출입을 막는 것이 좋지 않을까?어차피 영아는 옥탑방에서만 살아도 될 테니 난 그런 생각들을 하며 사다리를 타고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영아는 노트북 앞에 앉아 키보드를 정신없이 두드리며 글을 썼다. 눈을 모니터를 향해 있고 ,손가락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움직였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들 다해 글을 쓰는 모습. 난 그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영아가 마감 중이라는 것을. 어쩐지 오늘은 가게에도 안 내려오더라. 그러게 평소에 좀 열심히 써놓을 것이지. 영아는 집중에서 글을 쓰느라 내가 올라온 지도 몰랐다. 난 영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영아야, 오빠 왔다~.” 영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계속 글을 쓰며 말했다. “왔으면 저쪽으로 가서 만화책이나 읽고 있어. 나 글 써야하니까 방해하지 말고.” “……” 방해하지 말고 저쪽으로 가라니! 사랑스런 사촌오빠에게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뭘하는 중인데?” “아이미스 마감 중이야” “내일이 마감이야?” “아니, 마감은 사흘 전이었어” “……” 마감이 사흘 전이었는데도 그렇게 열심히 놀았단 말인가? “최모 편집자님이 뭐라고 안 하셔?” “뭐라고 하셔” “뭐라고?” “내일 아침까지 원고 안 끝내면 쫓아오시겠대” “……”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쓰고 있군. “그러게 마감 전에 열심히 쓸 것이지……” “마감 일주일 어기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야! 마감 전에 원고를 끝내는 작가들이 나쁜 거야! 마감 전에 원고를 끝내는 것은 작가가 할 짓이 아니야! 진정한 작가라면 편집자의 독촉과 압박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야 해!” 예전에 최모 편집자님께 들은 말이 생각난다. - 최모 편집자 : 원래부터 나쁜 편집자는 없습니다. 작가가 그렇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지금 영아를 보니, 최모 편집자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간만에 열심히 글 쓰는데 미안하지만, 어쨌든 할말은 해야겠다. 난 노트북을 빼앗아 모니터를 덮었다. “앗! 무슨 짓이야, 오빠?” “글은 조금 이다 쓰렴, 오빠가 할 얘기가 있으니까” “무슨 얘긴데 그래? 나 마감해야 하니까 내일 말해” “내가 지금 하려는 얘기는 매우 중요한 얘기야.” “내일 말하라니까” “그리고 반드시 지금 말해야하는 것이지” 영아는 팔짱을 끼며 날 노려보았다. “좋아.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일단 들어나 볼께. 그 얘기 매우 중요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안 그러면?” “최모 편집자님께 오빠 때문에 마감 못했다고 말할 거야” “헉! 그런 치사한” 어차피 최모 편집자님 오실 때쯤이면 난 이곳에 없으니 상관없다. “내일 우리 가족들이 모두 어디론가 갈 거거든” 내 말에 영아는 깜짝 놀랐다 “뭐? 모두?” “응. 모두” “그럼 지니 오빠랑 크로니스 오빠랑 라이레얼 언니랑 루도?” “응. 5층에 사는 우리 가족 모두. 단 한명도 빠짐없이. 에브리바디” “언제 돌아오는데?” “두 달 정도 걸릴 것 같아. 그래서 가게 앞에 휴업 팻말도 걸어놨어” “두 달씩이나?” 영아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난 친절하게 벌어진 입을 다물려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혼자서 해피하게 집을 지켜……” “무엇 때문에 가는 건데?” “으응. 이번에 루시아의 오빠가 결혼을 하게 됐거든. 그래서 그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나도 갈래” “뭐라?” “나도 같이 간다고. 루시아 언니의 오빠 결혼식에 나도 참석하고 싶어” “뭐, 뭐라?” 난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안돼” “왜 안 되는데?” “그, 그게……아! 결혼식장이 좀 멀어” “어딘데?” “그러니까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외국이야” “외국 어디?” “동유럽 쪽이야” “동유럽 어느 나라?” “그, 그건……” 동유럽에 어떤 나라가 있지? 난 재빨리 여러 나라를 떠올려 보았다. 러시아, 폴란다,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어느 나라라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그래. 루마니아로 하자 흡혈귀의 고향 루마니아 판타지 세계와는 뭔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루마니아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영아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이다. “루시아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이 살던 곳은……” 그 순간 영아가 말했다. “판타지 세계?” “……판타지 세계 아이리스 왕국이라는 곳으로…… 헉!” 난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지금 내가 뭔 말을 한 거지? 스스로 말 하도고 믿을 수가 없다. 난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하하하! 어때? 이 오빠 농담 재밌지?” “농담은 뭔 농담? 루시아 언니가 아이리스 왕국에 사는 거 맞잖아. 정확히는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지. 그리고 루시아 언니의 오빠는 국왕이고, 일루니아 언니랑 지니 오빠는 그 나라 백작이잖아. 라이레얼 언니는 하프엘프 용병이고, 카르랑 크로니스 오빠, 인디 오빠는 드래곤, 라이, 루, 루비는 엘프잖아. 내 말이 틀렸어?” “…….”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쩍 벌렸다. 영아는 친절하게 내 입을 다물려 주었다. 난 영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버버버!” “진정해, 오빠. 그러니까 꼭 백치 아다다 같잖아,” “어버버버!” “벙어리 삼룡이라고 해줄까?” 영아의 말에 나는 분노해서 소리 쳤다. “이런 빌어먹을 엘프……가 아니라 앞짱구를 봤나!” “그것 봐. 지금도 엘프라고 했잖아” “헉!” “다 아는데 뭘 놀라고 그래?” “……” 다 안다고? 난 영아의 표정을 살폈다. 영아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대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다. 다시 말해 영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이 판타지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변명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떻게 알았니?” “오빤 내가 같이 살면서 그것도 모를 줄 알았어?” “……” 모를 줄 알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이 사는데 모를 리 없잖아” “……” 바보인줄 알았다. 영아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영아에게 나는 다른 가족들이 동유럽에서 온 외국인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영아는 그렇게 믿었다. 기숙자 문제로 인해 잠깐 무물 때는 모르고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자퇴를 한 뒤 같이 살게 되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이상한 점은 가족들의 미모 였다. 남자든 여자든 할 것 없이 전부 미남 미녀였다. 너무나도 빼어난 미오에 의심이 생긴 영아는 백인종을 조사해보았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우리가족들은 전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인간들(루시아, 일루니아 여사님, 지니)은 우기면 백인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드래곤들과 엘프는 달랐다. 흰색 머리카락에 은색 눈동자,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지닌 카르, 빨간색 머리카락에 빨간색 눈동자를 지닌 크로니스,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저도로 여자처럼 생긴 인디, 라이, 루, 루비, 라이레얼도 수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이상한 점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들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말을 너무 잘한다는 것.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 살아온 듯 본토 발음을 구사했다. 그리고 말을 하며 절대 모국어를 섞어 쓰지 않았다. 또한 루시아와 내가 라이, 루, 루비를 어린 엘프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일루니아 여사님이 이상한 서류(아이리스 왕궁에서 보내온 서류)를 처리하는 것도 이상하고 ,지니가 나에게 보이는 행동(지니는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항상 존댓말을 쓰고 예를 표했다)도 장난이라고 하기에 너무 이상했다. 한번 이상하게 보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이상해 보였다. 그래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우리가 다른 시계에서 온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아는 작가. 그것도 상상력을 무한대로 발휘하는 판타지 소설 작가다(야오이와 백합물도 쓰긴 하지만). 그래서 영아는 의심했다. ‘혹시 영웅 오빠를 뺀 다른 사람들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닐까?’ 영아는 그 정보를 얻기 위한 대상으로 어린 엘프들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옳은 판단이었다. 단순함의 극치이자 놀고먹고 자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꽉 짜여 있는 빈둥빈둥 엘프들은 영아가 고구마 두 줄짜리 훼밀리 사이즈 피자 세 판을 사주며 구슬리자 별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 영아 : 라이, 루 ,루비는 엘프지? - 어린 엘프 일동 : 네에~! - 영아 : 라이는 몇 살이야? - 라이 : 7백 살 넘은 다음에는 안세요 - 영아 : 루랑 루비는? - 루 : 저는 몇 년 만 있으면 60살 돼요 - 루비 : 루비는 60살 넘은 다음 까먹었어요.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알 거에요. - 영아 : 그, 그렇구나. 그런데 라이는 왜 그렇게 나이가 많은 거야? 엘프는 700살이 돼도 어린이인거야? - 라이: 그거는요……(중략)……에요. - 영아 :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 그럼 너희들 모두 다른 세계에서 온 거야? 그 순간, 어린 엘프들은 피자를 다 먹고 입가심으로 남아있는 콜라도 전부 마셨다. 먹을 것이 다 떨어지자 어린 엘프들을 이성을 회복했다. - 라이 : 앗! 오빠가 언니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 루비 : 루비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 루 : 저는 이제부터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세요. - 영아 : (어린 엘프들 머리를 쓰담어주며)괜찮아. 다 말해도 돼. 오빠가 라이, 루, 루비에게 들이라고 했는걸. - 어린 엘프 일동 : 정말요오? - 영아 : 응, 정말이야. 정말로 오빠가 그렇게 말했어. 그러니까 언니한테 말해줘도 돼. 아! 언니가 이번에는 통닭 시켜줄까? 이렇게 해서 영아는 어린 엘프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몽땅 뽑아냈다. 모두의 정체는 물론이고 나에 대해서까지. “아이런스 이그리드라는 대마법사에게 소환되어서 그의 마법을 물려받고 판타지 세계를 여행했다며? 그러다가 공주인 루시아 언니를 만나 아이리스 왕국에 가서 공작으로 임명되고, 왕국 재건을 위해 싸웠다지?” “……” 아주 다 말했구먼.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거늘. 역시 단순 엘프들이 비밀을 지키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단 말인가? “서, 설마 그걸 믿는 거니?” 영아는 당연 다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믿을 이유가 없잖아” “……” 그걸 믿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보통 사람이었으면 애들이 헛소리 하는 줄 알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아는 보통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특이하다. 그래서인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완벽하게 믿고 있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남은 방법은 두 가지 첫째는 사실대로 말하고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하는 것, 둘째는 마법으로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마법으로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이란 만능이 아니다. 사람의 정신에 손을 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기억을 조작하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기억을 지우는 것은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끼리의 연결고리를 끊어 공백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단지 빨간 과일의 모습만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 죽을 뻔했던 일, 사과 주스를 엎질러 엄마한테 혼났던 일 등이 같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일들은 또 다른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라는 단어 하나만 지워도 기억 전체에 혼란이 생기게 된다. 이번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영아의 기억 한 부분을 지우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갈 수도 있고, 어쩌면 기억 전체가 뒤엉킬 수도 있다. 뭐, 9클래스인 드래곤이 직접 지운다면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일단은 영아와 얘기를 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기억을 지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이 오빠가 하는 말 잘 들어” “응. 잘 들을게” 쫑긋쫑긋. “……” 뭐니, 그 의태어는? 어쨌든 나는 얘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건의 시작은 이 오빠가 고등학교 2학년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단다. 이 오빠는……” 난 내가 겪은 모험을 영아에게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어린 엘프들이 이미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했다. 어린엘프들(특히 라이)이 얼마나 불었는지, 중간에 반 정도를 생략해도 될 정도였다. “……이렇게 다같이 이 세계로 건너와 살고 있는 거란다.” 얘기를 다 들은 영아는 고개를 갸웃 갸웃거렸다. 영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선가 비슷한 얘기를 들어본 것 같은데, 이상하게 오빠 얘기가 낯설지 않아.” “……” 당연하지. 아이미스의 스토리가 바로 내 이야기니까. 하지만 영아는 자신이 쓴 판타지 소설 아이미스와 내 이야기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는데 계속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알아서 납득했다. “라이에게 먼저 들어서 그런가?” “……” 니 소설에 써진 내용 그대로라니까. “그런데 이 사실을 언제 알게 됐니?” “얼마 전에” “그럼 알면서도 지니랑 크로니스랑 라이레얼이랑 루한테 계속 찍쩝거렸단 말이야?” “지니 오빠가 백작이고, 크로니스 오빠가 드래곤이고, 라이레얼 언니가 하프엘프고, 루가 엘프인 것은 상관없어. 난 종족과 지위를 떠나 넷을 모두 좋아하니까” “……” 그 넷은 종족과 지위를 떠나 널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난 짐짓 살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그 사실이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돼. 만약 다른 사람에게 말할 시에는……” “나도 알아.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해선 안 된다는 것, 오빤 누굴 바보로 알아?” “……” 바보로 안다. 사실 영아 머리야 어린 엘프들과 비슷한 수준 아니겠는가? 영아는 갑자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것도 모자라 내 팔을 감싸 안으며 나에게 매달렸다. “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니? 헉! 설마 앞짱구 주제에 이 오빠를 노리고 있는 거니? 아, 안돼. 넌 사촌여동생이고, 난 사촌오빠야. 니가 아무리 이 오빠를 좋아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오빠는 앞짱구보다 루시아 공주님이 백만 배 더 좋아.” “뭔 소리야, 오빠? 미친 거야?” “……아니, 아직 안 미쳤다.” 얜 뻑하면 날 미친 사람 취급하더라. “나도 데려가줘, 오빠.” “응? 뭐라?” “판타지 세계 말이야. 나도 가고 싶어” “헉!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영아의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영아는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판타지 세계에 꼭 가보고 싶어. 나 좀 데려가줘.” “어째서?니가 거기 가서 뭐하게?” “나도 여름에 여행 한 번 못 갔단 말이야. 나도 때로는 마감이고 ㅜ머고 집어 치우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어.” “……누가 들으면 언제는 마감 열심히 했는지 알겠다.” “판타지 소설 작가로서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무협 소설 작가는 칼 한 자루 차고 강호로 떠나야 되냐?” “아무튼 나도 데려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은 싫단 말이야.” “너 내일 아침까지가 마감이라며?” “그러니까 데려가 달라는 거지” “……” 마감을 못 지킬 게 뻔하니 최모 편집자님을 피해 판타지 세계로 도망치겠다는 건가? 아무리 날고 기는 최모 편집자님이라 하더라도 판타지 세계까지 쫓아올 수는 없으니. “너 그런 식으로 해도 출판사에서 안 쫓겨나냐?” “상관없어” “너야 상관없을지도 몰라도, 출판사는 상관이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나 데려가 줄 거지?” 영아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난 딱 잘라 말했다. “안돼” “왜 안 되는데?” “안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우리가 무슨 해외 여행 가는 줄 아니? 우리는 몬스터와 이 종족이 사는 판타지 세계로 가는 거야.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이지 알기나 해?” 영아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닥에 드러누워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난 갈 거야! 오빠가 아무리 날 떼놓고 가려고 해도 소용없어. 난 반드시 갈 테니까!” “아니, 이런 천인공노할 앞짱구를 봤나! 오빠가 안 된다고 했으면 안 되는 줄 알아야지. 감히 땡깡을 부리다니! 드래곤 브레스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앞짱구로다!” “나 데려가줘, 오빠. 데려가주기만 하면 이제부터 오빠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이 될게. 응? 제발 부탁이야, 오빠.” 영아는 내 발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애원했다. “내 사랑 지니 오빠랑 크로니스 오빠랑 라이레얼 언니랑 루가 판타지 세계로 가는데, 나만 여기 있을 순 없어. 제발 날 데려가줘, 오빠. 오빠가 안 데려가 주면 콱 울어 버릴 테야” “니가 울어봤자…….” “우아아앙~!” 영아는 목청껏 울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야야, 그만 울어. 누가 보면 내가 울린 줄 알겠다.” “우아아아아아앙~!” “……” 어쭈! 반항하는 거냐? 그치랬더니 더 크게 울다니. 앞짱구가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훗~ 어디 한번 계속 울어보렴. 이 오빠가 눈 하나 깜빡 하나. 나 아이언스 히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오는 철혈의 공작. 앞짱구의 눈물 다위에 마음이 흔들릴 만큼 줏대 없진 않단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영아는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독기 어린 눈으로 날 째려보며 말했다. “씨잉~ 오빠 정말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응. 이렇게 나온다 이거야” 앞짱구가 화내봐야 어쩔 건가? 영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고 봐, 오빠” “그대 두고 보자꾸나.” 나의 경험에 의하면 두고 보자는 놈 치고 무서운 놈 없다. “오빠가 전에 라이레얼 언니랑 키스한거 루시아 언니한테 이를 거야.” “헉! 뭐라? 그러는 게 어디 있어? 전에 영진이 도와주면 그 일에 대해서 영원이 함구 한다고 했자나! 2부 10권에서 한 말을 벌써 잊은 게냐?” “응, 다 잊었어.” “……” 이게 진짜! “정말 루시아한테 말할 생각이야?” “응. 그 다음 루시아 언니한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할 거야.” 누굴 닮아서 이렇게 끈질긴지 모르겠다. 놔두고 가면 어떻게 해서든 쫓아올 태세다. 난 일단 영아를 뜯어 말렸다. “알았어” “그럼 나 데려가 주는 거야?” “일단 루시아 한테 물어보고” “왜? 오빠가 그냥 데려가면 되는 거 아니야?” “안돼. 모든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루시아의 생각이야” “쳇! 누가 공처가 아니랄까봐” “……” 기왕이면 애처가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아래층에 내려가 루시아한테 물어보고 올 테니, 잔말 말고 기다리고 있어.” “응, 오빠. 난 오빠만 믿을게” 난 일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앗! 오빠다” “오빠아~” 나를 발견한 라이와 루비는 나를 향해 뛰어왔다. 복장은 여전히 차이나 드레스. 오늘 컨셉은 저걸로 나기기로 작정한 건가? 내 앞에서 멈춰 선 라이와 루비는 터진 치마 사이로 다리를 슬쩍 내밀었다. “에헤헤~!” “……” 니들 지금 뭐하는 거니? 내가 어이가 없다는 눈길로 쳐다보자 라이는 생긋(지 딴에는 요염하다고 생각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이 팬티 보고 싶죠, 오빠?” “아니야, 라이야. 오빠는 루비 팬티를 보고 싶어 하는 게 틀림없어” “……” 나는 루시아 팬티가 보고 싶다. 흠흠, 나도 남자다보니…… 예상치 않은 복병(?)을 만난 덕분에 난 라이와 루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루시아를 찾아가야 했다. “무슨 일이야?” “아니, 그러니까……” “오빠가 라이 팬티 보고 싶다고 했어요!” “아니에요. 오빠는 루비 팬티 보고 싶다고 했어요. 루비 치마까지 들쳤는걸요” “정말이야?” “아, 아니야, 루시아. 나는 결백해. 이것들이 사실을 날조하는 것뿐이야. 너도 알잖아. 나는 오직 루시아 팬티만 보고 싶은…….” 어째 루시아의 눈빛이 더욱 안 좋아진다. 난 라이와 루비를 루시아 옆에 내려놓았다(어린 엘프들이 찰싹 달라붙어 있으면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지금 영아를 만나고 왔는데……” 난 방금 전 영아와 나눈 대화를 루시아에게 말해주었다. 얘기를 듣는 루시아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결론은 저것들이 범인이라는 거지. 감히 오빠와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아에게 전부 불다니. 나쁜 엘프들 같으니라고. 피자와 통닭이 그렇게 좋아 더냐?” 내가 매서운 눈길로 째려보자 라이와 루비는 고개를 푹 숙이며 루시아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루시아는 그런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고 그래? 위 라이와 루비 다시는 안 그럴 거지?” “네에~!” “다시는 안 그러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이미 다 불었는데” 찌릿! 루시아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나를 째려보았고 난 고개를 푹 숙였다. 흑~ 아이들만 이렇게 편애하는 게 어디 있어?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의 품을 빠져나와 나에게 달라붙었다. 라이는 내 무릎 위에 앉아 비비적거렸고, 루비는 내 팔에 매달려 비비적거렸다. “헤헤~ 죄송해요오” 이렇게 애교를 떨며 용서를 비니 혼낼 마음이 싹 사라진다. 루시아가 오 ㅐ 아이들만 편애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적당히 귀여워야 혼을 내든지 말든지 하지. “이미 다 알게 됐으면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다니?” “그냥 데려가자” “헉! 진심이야?” “응. 그렇게 가고 싶어 하니 데려가 줘야지. 그리고 우리 다 가는데, 혼자만 남겨두기도 미안하잖아.” “그, 그런가? 아, 알았어. 니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루시아가 이렇게까지 영아 편을 들 줄은 몰랐다. 영아가 평소에 로비를 열심히 해놨나? 난 조심스럽게 루시아에게 물었다. “영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루시아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대답했다. “좋은 동생 같아” “좋은 동생?” “응.” “어떤 면에서?” “아이들과 잘 놀아주잖아. 아이들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라이와 루비가 루시아의 말을 거들었다. “헤헤~ 영아 언니 막막 좋아요. 라이랑 만날 놀아주는 걸요” “루비도 영아 언니 좋아해요. 영아 언니는 루비한테 맛있는 거 잔뜩 사주니까요” “……” 그런 거였나? 영아가 어린엘프들에게 잘해준 것이 루시아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어린 엘프들이 싫어하는 사람이 곧 루시아가 싫어하는 사람이고, 어린 엘프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곧 루시아가 좋아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루시아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더욱 애들한테 잘해줘야겠다. 잠깐. 그런데 아까부터 드는 이 위화감은 대체 뭐지? 간마네 절대 감각이 발동되었는지, 나에게 경고를 해주고 있었다. 난 조용히 일어나 방문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확 잡아당겼다. “꺄아!” 방문이 벌컥 열리자 한 여자가 방 안을 향해 쓰러졌다. 그 여자란 다름 아닌 나의 사촌여동생 박영아. 난 바닥에 쓰러진 영아에게 물었다. “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니?” 잠시 당황하던 영아는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헤헤~ 오빠, 안녕?” “별로 안녕하지 않구나” 영아는 벌떡 일어나 루시아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절 데려가 주신다구요? 고마워요, 언니. 언니는 저의 은인이에요. 이 고마움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해야 할지. 흑~ 언니가 베풀어진 은혜는 앞으로 대를 이어 갚아나가도록 할게요.” 영아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하자 루시아는 영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너도 이제 우리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같이 가는 것은 당연하지.” “가, 가족이요? 우아아앙~!” 가족이라는 말을 들은 영아는 감격의 울음을 터트렸다. 루시아가 말한 ‘가족’이라는 단어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영어를 우리 집에 얹혀사는 하숙인이 아닌 진정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루시아는 영아를 안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영아는 루시아의 품에 안겨 마음껏 눈물을 쏘아냈다. 난 울고 있는 영아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집세는 내야 한다. 알았지?” 루시아는 분위기 깨는 말을 한 나를 째려보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진 빚이 얼만데……. 한 차례 눈물을 쏟아낸 영아는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 루시아는 친절하게 영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언니. 아! 계속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 뭐라고 부르게?” “그렇지만 언니는 공주님이잖아요.” 루시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계속 언니라고 불러줘. 나도 그 편이 더 좋은 걸” 영아의 표저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영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니” 평소 어린 엘프들에게 점수를 다놓은 것이 이런 혜택으로 돌아오는구나. “그럼 난 루엔과 갈리온드 집에 갔다 올게” “거기는 왜?” “같이 갈 건지 물어보려고” “알았어” 혼자 가려했는데 라이레얼이 다라붙었다. 간만에 아빠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루와 루비도 데려가기로 했다. 루시아는 양육권을 빼앗길까 걱정되는지 루와 루비를 데려가는 것을 반대했다. 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양육권을 사수하겠다고 안심시킨 뒤에야 루와 루비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 라이레얼, 루, 루비는 다정하게 루엔과 갈리온드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을 걷자 루비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루비 업어주세요, 오빠” “저도 형한테 업히고 싶어요” “안돼. 오빠는 루비도 루비를 더 좋아하니까 루비를 업어줄 꺼야” “이제까지 루비만 없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저를 업어주세요” 루와 루비는 계속해서 자신을 업어달라고 졸라댔다. 내가 누구를 먼저 업어줄까 고민하는데, 라이레얼이 소리쳤다. “시끄러! 니들 때문에 우리 히로가 곤란해 하잖아.” “루비가 먼저 업히고 싶다고 했는데, 루가 막막…….” “루비는 그동안 많이 업혔으니까, 이번엔 제 차례…….” 쾅! 쾅! 라이레얼은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떠드는 두 엘프의 머리에 예쁜 혹을 만들어주었다. 라이레얼이 나를 위해 폭력까지 불사하다니! 난 너무 감동한 나머지 라이레얼의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라이레얼” “괜찮아. 이제 날 업어주면 돼, 히로” “예?” “내가 히로 등에 제일 먼저 업힐 거야” “……” 그리하여 나는 라이레얼을 업고 걸음을 옮겼고, 루와 루비는 머리에 난 혹을 매만지며 볼을 땡땡하게 부풀린 채 내 뒤를 졸졸 다라왔다. 현관문 앞에 선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난 계속해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띵동! 띵동! 몇 번을 누르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루엔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 오랜만이에요, 루엔” 루엔은 내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히로군요” “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히로 덕분에 잘 지냈어요. 히로는요?” “저도 루엔 덕분에……” “할머니이~!” 루와 루비는 루엔 품으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루엔은 루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동안 애들이 말 잘 들었나요?” “물론이지요. 우리 루와 루비처럼 말 잘 듣는 아이는 세상에 없답니다.” 물론 뻥이다. 내 평생 우리 루와 루비처럼 오빠랑 언니 말 잘 안 듣는 아이는 처음 봤다. “아! 내 정신 좀 봐. 어서 들어오세요” “예.” 난 루엔을 다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청소를 얼마나 안 한 거야? 부엌에는 컵라면 용기가 가득 쌓여있었고ㅡ 거실을 벗어놓은 옷가지들과 과자 봉지들이고 인해 지전후기 그지없었다. 이 집에 입주한 이후 단 한번도 청소를 안 한 것 같았다. 루엔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었다. 머리카락이 떡진 걸 보니 며칠 동안 머리를 안 감았음이 분명하다. 대략 라이레얼의 평소 상태와 비슷하다. 그렇다는 것은 루엔도 게임 폐인이 되었다는 소리? 난 루엔을 다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컴퓨터 두 대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모니터에 나타난 것은 온라인 RPG게임의 화면. 그 앞에는 갈리온드가 앉아 있었다. 갈리온드는 게임에 몰두하느라 우리가 온 줄도 몰랐다. 상태가 안 좋은 것은 갈리온드로 마찬가지였다. 며칠은 씻지 않은 듯한 모습에 퀭한 눈동자. 이건 라이레얼보다 더 심하잖아! 라이레얼은 게임 폐인이긴 하지만, 콘솔과 패키지 게임 중심이다. 콘솔과 패키지 게임은 엔딩이 존재하기 때문에 중독이 그리 심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심하게 중독 되었다고 해도 게임이 끝나면(다시 말해 엔딩을 보면)중독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하지만 온라인 RPG게임은 엔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종착지도 없고 브레이크도 없는 셈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에 빠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심한 경우 게임 상의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심한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루엔과 갈리온드는 그 정도 상태까진 아니지만, 아무튼 심각한 지경임은 분명했다. “아빠” 라이레얼이 불러보았지만 갈리온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라이레얼은 몇 번을 불러도 갈리온드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의자를 확 잡아당겼다. 꽈당! 방금 전까지 존재하던 의자가 사라지자 갈리온드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야 게임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온 갈리온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앗! 나의 사람스런 딸 라이레얼이 여긴 어쩐 일이니?” 라이레얼을 발견한 갈리온드는 바로 껴안으며 부녀의 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빠 요즘 태도가 불성실해. 딸이 한번 불렀으면 바로 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헉! 미안하다, 내 딸 라이레얼아. 아빠가 잠시 미쳤었나 봐.” “앞으로 조심해, 아빠. 자꾸 이런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면 아빠가 싫어질지도 모르니까.” “아, 아빠가 싫어진다니…… 그, 그게 무슨 말이니?” “그러니까 잘하란 말이야” “으응. 물론이지, 내 딸아, 아빠 이제부터 잘할게.” “……” 아무리 온라인 게임 중독이어도 딸한테 꼼짝 못하는 건 여전하다.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히로?”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뭔 가요?” “그러니까 그게……” 난 루시아 오빠의 결혼식 때문에 판타지 세계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루엔은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같이 가시는 게 어떠신가 해서요. 두 분 다 고향 떠난 지도 오래 되셨는데, 이번 기외에 갈이 가셔서 엘프의 숲에서 좀 들려보고, 바람도 좀 쐬고 하는 것이 어떠신지?” “흐음……” 기뻐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반대로 루엔과 갈리온드는 탐탁치 않은 표저이었다. “가고야 싶지만……” “싶지만?” “그사이에 게임을 못하게 되니……” “……” 역시 온라인 게임 때문인가? 이 정도면 심각한 중독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냥 의사를 타진하러 왔을 뿐이지만, 이렇게 온라인 게임 중독에 빠진 걸 보니 반드시 판타지 세계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라도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이레얼은 갈리온드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나 아빠랑 같이 가고 싶어” “헉! 정말이니, 내 딸아?” 갈리온드는 마음이 움직이는 듯 했다. 루와 루비도 루엔에게 달라붙었다. “같이 가요, 할머니이~!” 루엔은 나에게 물었다. “얼마 동안이나 있을 생각이죠?” “두 달 정도 잇을 생각이에요. 이래저래 일이 좀 많은 관계로.” 잠시 고민하는 루엔과 갈리온드. 라이레얼은 갈리온드에게 딱 잘라 말했다. “무조건 같이 가, 아빠” 이쯤 되면 의녀증 환자 갈리온드로선 같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그래. 같이 가자, 라이레얼아” 갈리온드가 허락하자 루엔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집 안에서 게임만 하다보니 몸이 좀 안 좋아 지는 것 같았는데, 이번기회에여행도 하고 재충전도 해야겠어요.” “잘 생각하셨어요. 다같이 가야 재밌지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저희 집으로 오세요. 아!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하니 문단속 잘하세요” “알았어요, 히로. 길드 원들에게도 한동안 접속을 못하겠다고 말해놔야겠네요” “……” 길드원? 그러고 보니 루엔과 갈리온드가 하는 뮤니지로크는 판타지 온라인 게임이다. 검과 마법(Sword&Magic), 이 종족들과 몬스터가 나오는. 판타지 세계에서 온 엘프들이 판타지 게임을 즐기다니! 뭔가 좀 특이하다. 난 루와 루비를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예. 내일봐요, 히로.” “잘 가렴, 내 딸아. 내일 보자꾸나” * * * * 다음날 아침. 루엔과 갈리온드는 밤을 샜는지 피곤한 모습으로 일찍 우리 집에 찾아왔다. 오랫동안 안 씻었기 때문인지 몸에서 약간 냄새가 났다. “아침밥 먹으려면 시간이 좀 있는데, 몸부터 먼저 씻으시겠어요?” 난 루엔과 갈리온드를 거실 화장실로 안내했다. 거실 화장실의 넓은 욕조를 본 둘은 기뻐하며 옷을 벗었다. 둘이 같이 목욕을 하려는 건가? 으음, 부럽다 어쨌든 둘은 욕조에 다뜻한 물을 가득 받아놓고 들어갔다. 그 사이 인디와 루시아는 가족들이 먹을 아침을 준비했다. 오늘은 웬일로 라이레얼과 카르도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밤을 샜군. “하암~ 잘 잤어, 히로?” “예. 라이레얼은 밤새신 거예요?” “응. 떠나기 전에 하던 게임은 다 깨고 떠나려고 밤샜어.” “씻고 식사하실 준비하세요” “응” 거실 화장실은 루엔과 갈리온드가 쓰는 중이었기에, 라이레얼과 카르는 루시아 방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찍 일어난 어린 엘프들을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라이는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손에 요술봉을 들고 있었다. 앗! 오늘은 마법사 컨셉인가? 마법사 복장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라이. 하지만 누구도 이 어린 아이가 마법사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는 마법사가 맞다. 그것도 8클래스 러너인 대마법사. “우리 라이가 마법사 복장을 입었구나.” “예, 오빠. 라이는 마법사잖아요.” “그래, 우리 라이는 마법사지. 마법사 복장이 참 잘 어울리네.” “헤헤~ 라이는 오빠만의 마법사이고 싶어요오” “헉! 정말” “예. 오빠는 용사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리는 마법사 할래요” “아이구. 귀여운 것!” 난 라이를 껴안고 볼을 부비부리 비볐다. 그러자 루비가 나에게 달라붙으며 말했다. “그럼 루비는 트레저 헌터 할래요. 오빠 앞에 설치된 함정은 루비가 다 제거할 거예요” “헉! 정말?” 용사에 마법사에 트레저 헌터까지.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파티 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루는 혼자 앉아있기 심심했는지 벌떡 일어나 말했다. “그럼 전 엘프 할래요” “뭔 소리니? 너 원래 엘프잖니?” “그러니까 엘프 할래요” “……” 파티에 엘프와 드워프가 한 명 정도는 끼어있어야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다종족 파티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엘프가 이미 둘이나 있는데, 또 엘프가 낄 필요가 있나?” 어쨌든 자기가 엘프하고 싶다니까 엘프하게 놔두자 “식자 준비 다 됐어요.” 난 루엔과 갈리온드를 위해 의자를 두 개 더 놓았다. 목욕을 끝마친 루엔과 갈리온드는 말끔한 모습으로 부엌에 나타났다. 루엔의 몸에서 향긋한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아아~ 역시 루엔은 예뻐. 저 스타일리쉬한 미녀를 누가 할머니로 보겠는가? 갈리온드 역시 루엔과 어울릴 만큼 잘생긴 미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입만 열면 주책을 떨어대니 그게 문제다. 가족들이 자리에 모여 앉기 시작했다. 영아도 옥탑방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들어왔다. “마감은 끝냈니?” 나의 물음에 영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그럼 안 끝냈단 말이야?” “응” “오늘 떠나면 두 달 동안 안 돌아온다니까?” 영아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 니가 아주 간뎅이가 부었구나. 나중에 최모 편집자님을 어떻게 보려고 그러니? 여행 갔다 온 뒤의 일은 조금 도 생각하지 않는 영아 대체 아이큐가 몇인 걸까? 날 닮았으면 똑똑할 텐데……. “괜찮아. 최모 편집자님 찾아오실 것을 대비해 문 앞에다 쪽지를 붙여놨어.” “……” 완성된 원고를 붙여놔야지, 쪽지를 붙여놓으면 어쩌니? 대화를 하는 사이 나를 포함한 14명의 가족들이 전부 모였다.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우리는 즐거운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오늘 아침 메뉴는 된장찌개와 불고기. 판타지 세계로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이니 일부터 한식으로 꾸며본 것 같다. 양식이야 거기 가면 실컷 먹을 테니. 구수한 된장찌개가 입맛을 자극한다. “단지 한 수저 먹었을 뿐인데, 시골의 정취가 저절로 느껴지는구나. 네 손맛이 이 정도이니, 그동안 니가 들인 정성을 알 만하구나” 나의 칭찬에 인디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고마워요, 히로님.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할게요.” “그래. 자만하지 않고 계속 정진하다보면 언젠가는 식신(息愼)의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니라.” 난 밥과 함께 된장찌개를 떠먹었다. 루시아 역시 된장찌개가 꽤나 맛있는 눈치였다. “이 불고기를 여기 있는 겉절이에 싸서 먹어봐, 되게 맛있어.” 난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의 밥 위에 반찬을 올려놔 주었다. 그러자 어린 엘프들도 일제히 밥공기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자기들도 밥 위에 반찬을 올려달라는 무언의 압박. 참 별 걸 다 다라한다. 아침식사는 화기애애하게 끝이 났다. 인디는 냉장고 에 있는 음식과 쌀 등에 보존 마법으로 걸었다. 집을 비운 사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도 옷을 입고 짐을 챙겼다. 라이는 아까 말했듯이 검은색 로브를 입었고, 루비는 산뜻한 연두색 원피스 위에 초록색 스웨터를 걸쳐 입었다. 그리고 루는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연두색 반팔을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초록색 긴팔 남방을 걸쳐 입었다. 어린 엘프들은 하나같이 캐릭터 배낭을 메고 있었다. 라이는 키티 모양의 배낭을, 루비는 둘리 모양의 배낭을, 루는 피카츄 모양의 배낭을. 앗! 저것은 2부5권에서도 잠깐 등장했던 마법 배낭이 아닌가? 인디가 제작한 마법 배낭은 안에 무한대로 과자, 빵, 음료수 등을 넣을 수 있다. 여기에 보존 마법까지 걸려있어 안에 넣은 음식은 절대로 상하지 않는다. 드래곤 정도 되니 만들 수 있는 마법 물품이다.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마법 물품이 어린 엘프들 간식 배낭 용도로 사용되다니! 아무튼 이것들이 배낭을 메고 있는 것을 보니, 안에 간식거리를 잔득 챙겼음이 분명하다. 어린엘프들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밝아도 너무 밝았다. 이렇게 이상하리 만치 밝은 걸 보니 소풍 가는 걸로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라이레얼은 짐 하나 없는 가뿐한 몸이었다. 하지만 라이레얼 옆에 있는 카르는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다. 짐을 카르한테 다 떠넘긴 건가? 나 역시 짐을 다 챙겼다. 짐을 작은 마법 주머니 속에 전무 우겨 넣었다. 많은 짐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마법 주머니. 이 마법 주머니는 크로니스가 만들어준 것이다. 9클래스가 만든 것인 만큼 성능이 탁월하다. 마법사라고 해서 보두가 마법 물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법 물품 제작은 마법의 한 분야로서 상당한 내증과 마력을 필요로 한다. 뭐, 나야 아이언스 이그리드에게 마법을 물려받으면서 여러 마법지식들도 같이 물려받았기 때문에 마법 물품 제작에도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래봐야 드래곤에 비하면 어림도 없기 때문에 그냥 드래곤이 만든 것을 쓰고 있다. 영아는 헐렁한 바지와 헐렁한 셔츠를 입었다. 머리 스타일은 앞머리로 앞짱구를 가리고 뒷머리는 모아서 올려 묶은 포니테일 스타일. “헤헤~.” 판타지 세계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지 벌써부터 좋아 죽어가고 있다. 얘가 무사히 판타지 세계 여행을 마치고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서라 그 세계에서 사고치는 것은 아니겠지? 제발 영아 한 사람 때문에 지구인 전체가 욕먹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루시아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남색 스커트와 분홍색 스웨터를 입었다. 긴 머리는 하나로 모아서 땋아 끝을 연두색 댕기로 묶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품이 넉넉한 실크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외투를 걸쳐 입었다. 인디는 바짝 달라붙어서 서서 일루니아 여사님을 부축했다. 하늘거리는 흰색 옷을 입은 인디는 뒤에 류트를 매고 있었다. 흑단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은 하나로 모아 갈게 늘어뜨렸다. 아름답고 중성적인 느낌의 음유시인. ……이 컨셉인가보다. 준비를 모두 끝마친 우리는 집 밖으로 나왔다. 크로니스는 집과 가게에 결계마법을 걸었다. 이 마법을 풀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을 테니, 도둑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법진이 설치된 주차장에 모여 섰다. 난 떠나기 전에 인원점검을 해보았다. 혹시라도 누군가를 빼먹고 가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내 옆에 있고, 라이, 루, 루비는 루시아한테 매달려 있고, 라이레얼과 카르는 저기 있고, 지니는 이쪽에 있고, 영아는 지니에게 찰싹 달라 붙어있고, 인디도 있고, 일루니아 여사님도 계시고, 갈리온드와 루엔도…… 크로니스는 지금 마법 쓸 준비를 하고 있으니…… 다 모인 것 같군.” 인원 점검 완료! 나를 포함해 14명, 다행이 다 모인 것 같다. 크로니스는 날 보며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예? 어디로 라니요? 당연히 판타지 세계……아!” 이 마법진은 크로니스가 설치해 놓은 영구 마법진이다(마법진에는 인식 제어 마법이 걸려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크로니스와 같은 클래스인 드래곤들의 눈에만 보인다). 이 마법진은 아이리스 왕궁 지하에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좌표를 지정하지 않고 마법진을 발동 시킨다면 우리는 아이리스 왕궁 지하로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여행과 에이미 공주 일행의 호위, 당장 아이리스 왕궁으로 가봐야 할 일이 없다. “일단은 엘프의 숲으로 가지요, 그곳에서 각자 갈 길 가는 것이 좋을 듯하네요” “예.” 크로니스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웬만한 마법은 시동어조차 말하지 않도고 쓸 수 있는 드래곤이지만, 차원 이동 마법은 다르다. 차원 이동 마법은 오직 9클래스만이 쓸 수 있는 마법. 난이도로 치면 최상급에 속한다. 루시아는 두려운 마임이 드는지 몸을 살짝 떨었다. 난 루시아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괜찮아, 루시아. 내가 곁에 있어줄게. 루시아의 떨림이 조금 진정되었다. 어린 엘프들은 나와 루시아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영아는 괜히 무서운 척하며 지니의 몸에 달라붙었다. 카르 역시 라이레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처음부터 달라붙어 있었고, 루엔과 갈리온드 역시 처음부터 달라붙어 있었다. 커플 전성시대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엄청난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주위의 풍경이 순식하게 바뀌었다. * * * * 주차장에 있던 히로네 가족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른 아침 시간이어서 가게 건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있었다 하더라고 그 모습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좀 시간이 지나자 모자를 쓰고 가방을 멘 유치원생들이 나타났다. 집이 가까운 아이들은 걸어서 왔고, 좀 먼 아이들은 유치원버스를 타고 왔다. 엘프 유치원 1교시 수업이 끝나갈 때쯤 한 남자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두꺼운 안경을 낀 30대 중반의 남자.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박영아 작가의 담당 편집자 최모. 최모 편집자는 안경을 한번 만지작거리며 건물 옥상을 쏘아보았다. 오늘 아침까지 넘기라고 분명히 최우 통첩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니. 게다가 핸드폰도 안 받고 말이야. 역시 불량 작나는 말로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실력 행사를 하는 수밖에, 최모 편집자는 건물 옆에 나 있는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탑방 앞에선 최모 편집자는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훗~ 숨겠다는 건가?’ 최모 편집자는 계속해서 초인종을 누르며 문을 두드렸다. 띵동! 띵동! 띵동! 쾅쾅쾅! “문 여세요, 박영아 작가님. 숨으셔도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계속 문을 두드리자 종이 한 장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최모 편집자는 허리를 숙여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종이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최모 편집자는 그 글을 읽어보았다. To. 최모 편집자님 가족들과 함께 갑자기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어요. 원고 마무리 짓지 못하고 가서 죄송해요. 원고는 여행 갔다 와서 꼭 마무리 지을게요. 두 달 정도 걸릴 것 같으니, 그동안 절 찾지 말아주세요. 돌아와서 연락드릴게요. 그럼 그동안 몸 건강하세요. from. 영아 최모 편집자는 어이가 없어서 임을 쩍 벌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했다. “이런 불량 작가를 봤나!” 하지만 어쩌랴? 영아는 편집자를 피해 이미 판타지 세계로 떠난 뒤이거늘. 아이리스 Story 31 엘프의 숲 높게 치솟은 나무, 향긋한 풀 냄새,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나무와 풀 천지다.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우리를 비추었다. 이곳은 바로 잊혀진 엘프의 숲. 가게 건물 앞 주차장에서 엘프의 숲으로 이동해온 것이다. 다른 가족들도 신기한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에요, 오빠?”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묻는 루비. 난 루비를 번쩍 안아들며 말했다. “이곳은 루비의 고향이야” “루비의 고향이요?” “응. 루비의 고향인 엘프의 숲” “와아! 정말요?” “응” 뭐, 고향이라고 해도 엘프의 숲은 한반도 몇 배의 넓이다. 그러므로 루와 루비가 살던 마을에 가려면 한참을 가야 할 것이다. 영아는 두 팔을 벌려 한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여기 공기가 되게 맑다.” 영아 말대로다. 공기에서 청량감이 느껴졌다. 호흡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매연으로 찌든 공기를 마시다가 깨끗한 공기를 마시니 폐가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 같다고나 할까? 루시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 뱉었다. 난 다시 인원을 체크해보았다. 인원은 나를 포함해 14명. 빠진 사람은 없다. “……”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한 걸까? 뭔가를 빠트리고 온 것 같은 찝찝한 기분. 내가 대체 뭘 빠트렸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뭘 빠트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바로……. “라이코스!” 어쩐지 안 보인다 했더니, 설마 집에 두고 온 거냐? 그런데, 그 순간 라이의 키티 배낭에서 라이코스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왜 불러?” “헉! 너 거기 숨어 있었냐?” “나의 친구 라이가 가는 곳에 내가 빠질 리 없잖아” “앗! 이리와, 이코야” 라이가 손짓하자 라이코스는 파닥파닥 날아서 라이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루비가 손을 뻗었다. “루비랑 놀자, 이코야” 루도 손을 뻗었다. “내 손으로 와, 이코야” 머리 수준이 비슷한 것들이다 보니 다들 금방 친해졌나 보다. 어린 엘프들은 그새를 못 참고 라이코스와 함께 뛰어놀았다. “멀리 가지 마!” 아이들이 길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루시아는 재빨리 소리쳤다. 차원을 이동할 경우 가장 먼저 해결해야하는 것은 언어 문제다.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원래 이 세계 사람이었기에 원래부터 공용어를 썼다. 한국어는 마법으로 머릿속에 직접 넣어준 것이다. 즉, 모두 한국어와 공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하지만 영아는 다르다. 영어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한국어뿐. 난 크로니스에게 언어 전수 마법을 부탁했다. 크로니스는 영아의 머릿속에 직접 공용어를 넣어주었다. “우와! 신기하다!” 마법이 끝나자 영아도 자유자재로 공용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마법이 편리하긴 편리하다. 마법만 있으면 지긋지긋한 영어 공부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4천만 국민 모두가 영어에 목을 매는 특이한 나라. 오죽하면 아메리카 대륙을 한국인이 먼저 발견했어야 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겠는가? 난 고개를 돌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커플을 보았다.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제 제법 배가 많이 불러 한눈에 봐도 임신부라는 티가 날 정도였다. 임신 초기에는 임신한 것 같지도 않더니, 요즘에는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부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애가 둘이나 들어 있어서 그런가? “그 몸으로 여행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지금은 중요한 시기라 무리하면 안 될 텐데” 나의 물음에 인디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히로님. 일루니아님 곁에는 제가 있자나요” “아니, 뭐 특별히 걱정한 건 아닌데” 어쨌든 드래곤인 인디가 항상 보살필 테니 큰일은 없을 것이다. “이거 받으세요.” 인디는 헤드셋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난 그것을 받아들며 물었다.“이건 뭐니?” “마법 헤드셋이에요. 이걸 쓰신 다음 여기 스위치를 누르시면 상대방과 대화를 할 수 있어요” “상대방이 누군데?” “저와 일루니아님이에요. 언제든 필요할 때 연락 주세요.” “그래.” 이거 은근히 괜찮은 아이템이다. 이런 게 있으면 비싼 돈 내고 핸드폰 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기기 값도 안 들고, 기본료도 안 들고, 통화료도 안 드니. “그럼 저랑 일루니아님은 먼저 가볼게요, 히로님.” “응? 어디로 가려고?” “제 레어로 가려고요.” “니 레어라면…… 흑색 숲?” “예. 일루니아님이 꼭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일루니아님은 여행을 다니기 힘드시니, 공기 좋고 물 좋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듯해서요.” “……” 아주 지극 정성이다. 루시아는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물었다. “언제 올 건데, 언니?” “인디님 레어에서 쉬다가 결혼식 날 찾아갈게.” 일루니아 여사님의 말에 루시아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언니랑 같이 여행하는 줄 알았는데…….” 일루니아 여사님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신 중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무리하면 뱃속에 아이들이 힘들어 하니.” “응. 알았어. 몸조리 잘해, 언니.” “그래. 결혼식 날 보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루시아의 귀에 속삭였다. “그동안 저 뺀질이 조심해. 틈만 나면 분명 덮치려 들 테니까.” “……” 뭐야? 분명 속삭였는데 왜 다 들리는 거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언니. 조심할게.” “……” 헉! 조심하다니! 내가 무슨 감기 바이러스도 아니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루시아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루시아 역시 일루니아 여사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여자끼리의 이런 스킨십. 왠지 모르게 자극적이다. 참고로 남자끼리 저런 스킨십 하면 변태소리 듣기 딱 좋다. 인사를 끝마친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동 마법으로 사라졌다. 루시아는 둘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았어! 이걸로 최대의 방해꾼이 사라졌군! 최선을 다해 루시아에게 찝쩍거려주마! 내가 그렇게 다짐하는데, 카르가 말했다. “나랑 언니도 가볼 꺼야” “응? 어딜?” “버들랜드라면…… 니 레어?” “응. 언니한테 내 레어 구경시켜줄꺼야.” 난 라이레얼을 보며 물었다. “가실 거예요?” “응. 카르가 하도 졸라서 가보려구.” “에이미 공주 호위해준다고 했잖아요.” “걱정 마. 출발 날짜에 맞춰 카르와 함께 헤리오 왕궁으로 갈께.” “기왕이면 같이 여행하면 좋을 텐데. 조금 아쉽네요.” “응. 나도 아쉬워, 히로.” 라이레얼은 아쉬운 마음을 나를 와락 껴안고 귀에 입김을 불어넣는 것으로 달랬다. “저기…… 아쉬운 마음은 알겠지만, 이러는 것은 좀…….” “빨리 가요, 언니,” 카르는 나를 얼려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라이레얼을 억지로 떼어냈다. 카르가 이동 마법을 쓰려는데, 라이코스가 파닥파닥 날아왔다. “버들 랜드라면 나도 갈래.” “앗! 이코야” 라이는 깜짝 놀라 라이코스를 쫓아왔다. 라이코스는 라이에게 말했다. “나도 오랜만에 고향에 들르고 싶어. 날 보내줘, 라이야. 나중에 꼭 돌아올게” 생각해보니 라이코스의 고향은 버들 랜드다. 라이코스도 고향 떠난 지 꽤 오래되었으니, 돌아가고 싶을 만도 하겠지. 라이는 라이코스를 꼬옥 껴안았다. 그리고 아장아장 라이레얼에게 다가가 눈물을 머금고 라이코스를 내밀었다. “우리 이코 잘 보살펴 주세요, 라이레얼 언니.” “응.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보살펴 줄게.” 라이레얼은 침을 꿀꺽 삼치며 그렇게 말했다. “……” 뭐야? 여기서 왜 침을 꿀꺽 삼켜? 뭐, 침을 삼킨 것쯤은 그냥 넘어가자. 이젠 아예 침이 흘러내리려고 있으니. 라이레얼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입맛을 다셨다. 라이레얼의 입에서 분비되는 침의 이 많아질수록, 라이코스의 몸에서 분비되는 식은땀의 양도 많아졌다. 라이코스를 라이레얼에게 건네주려던 라이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라이코스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난 라이레얼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라이코스를 잘 부탁해요.” “응. 걱정 마, 히로. 내가 잘 요리…… 아니, 잘 보살필게.” “…….” 방금 요리라는 단어가 나온 것 같은데. “절대로 잡아먹으면 안 돼요. 저랑 약속해요.” “약속?” 라이레얼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날개 하나랑 다리 하나도 안 될까?” “헉! 절대 안 돼요! 날개와 다리가 가장 맛있는 부위…… 인 것은 둘째치더라도, 라이코스는 라이의 친구란 말이에요. 절대로 잡아먹으면 안 돼요. 아셨죠? 절대로 안 돼요.” 내가 계속해서 당부하자 라이레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히로가 저번에 게임기 사라도 50만 원도 줬으니, 이번엔 히로 말을 다를게. 라이코스 안 잡아먹겠다고 약속할게.” 라이레얼이 약속을 하자 라이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라이코스를 넘겨주었다. 라이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라이레얼은 약속을 개코로 아는 하프엘프다. 라이코스가 과연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라이레얼에게 가는 라이코스의 모습이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부디 무사히 살아 돌아오길. 영아는 재빨리 튀어나와 라이레얼에게 매달렸다. “흑~ 가시는 거예요, 언니?” 영아가 라이레얼에게 매달려 비비적거리자 카르의 눈이 뒤집혔다. “나의 언니에게서 떨어지지 못해!” 카르가 화이트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쟤는 지금 자신의 생명이 풍전등화라는 사실도 모르나? 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카르를 말렸다. “진정하렴. 위대한 드래곤이 이런 일로 흥분해서야 쓰겠니?” “난 진정 못해! 나의 언니에게서 떨어지란 말이야!” 라이레얼은 난동을 부리는 카르에게 한마디 했다. “진정해” 그러자 카르는 바로 움직임을 멈추고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며 말했다. “예, 언니.” “…….” 뭐야? 내 말은 개코로 알아듣더니, 라이레얼이 말하니까 왜 이렇게 바로 알아들어? 라이레얼은 영아의 등을 어루만지며 영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마 후에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때까지 기다려, 알았지?” “흑~ 예, 언니. 저 언니만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아~ 이 장면에서 백합이 날리면 참 멋질 텐데. 나는 영아를 억지로 라이레얼에게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러자 카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레얼과 라이코스를 데리고 사라졌다. “흑흑~ 라이레얼, 언니” 영아는 라이레얼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영아가 이러는 걸 보면 정말로 라이레얼을 사랑……. “앗! 지니 오빠~!” ……하긴 개뿔이 사랑해? 영아는 바로 지니에게 달라붙어 몸을 비비적거렸다. 다 큰 여자애가(비록 유아체형이긴 하지만) 저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지니는 나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가시게요? 어디로 가시게요?” “저는 결혼식을 비롯한 여러 행사 준비를 도와야하니, 먼저 아이리스로 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하긴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이 임심하셔서 일을 쉬고 계시니,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누님 몫까지 열심히 해야지요. 기왕 하는 거 제 몫까지 열심히 하실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만 믿어주십시요, 아이언스 공작님.” “……” 내가 뭘 보고 널 믿니? 널 믿었다가 엿 먹은 게 하루 이틀 일이니? 크로니스는 지니를 아이리스 왕궁 지하로 워프 시켜주었다. 내가 ‘절 버리고 가지 마세요, 지니 오빠’ 라고 소리치며 난리 발광을 하는 영아를 떼놓는 사이 지니의 모습이 사라졌다. 인원이 점점 줄어드는군.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크로니스가 말했다. “저도 이만 가볼게요.” “예? 크로니스도 가시게요?” “안 돼요. 가지 마세요, 크로니스 오빠” 나도 놀랐지만, 지니가 사라지자마자 크로니스에게 달라붙어있던 영아가 더 놀랐다. 크로니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 레어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중에 찾아오세요.” 크로니스는 어쩐 일인지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그 미소를 보는 순간 크로니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크로니스는 적색 산맥으로 가서 이그리드와의 추억의 장소를 돌아볼 생각인 것 같았다. 그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난 그런 크로니스의 마음을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며칠 있다가 찾아갈게요.” “고마워요.” 크로니스는 나를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크로니스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리하여 남은 사람(더하기 엘프)은 나, 루시아, 라이, 루, 루비, 갈리온드, 루엔, 영아였다. 이중에 루엔, 갈리온드, 루, 루비는 엘프의 숲이 고향이다. 라이레얼, 지니, 크로니스가 차례대로 떠나가자 영아는 마지막 남은 루에게 달라붙었다. 영아는 괜히 루의 몸을 더듬으며 볼에 뽀뽀를 했다. 저 정도면 거의 아동 성추행이군. 그저 루의 순결이 걱정될 뿐이다. 난 루엔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인간은 숲에 들어오면 길을 잃는다. 하지만 엘프는 다르다. 엘프는 숨의 종족인 만큼 숲에서 길을 찾는데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루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쪽으로 5킬로미터 정도만 가면 우리 마을이 나올 거예요.” “우리 마을이면……?” “저와 루, 루비가 살던 마을 말이에요.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갈리온드가 살던 마을도 나오지요.” “생각보다 엄청 가깝네요.” “그러게요.” 아무래도 크로니스가 일부터 가까운 곳으로 좌표를 설정한 것 같았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5킬로미터라면 걸어가도 충분할 것이다. 난 루시아에게 말했다. “여기서 5킬로미터 가면 루와 루비가 살던 마을이 나온대. 거기 잠깐 들렸다 가는 것이 어떨까? 애들 고향이니까.” 루시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그리하여 우리는 엘프의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산들바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루시아의 백금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나풀거렸다. 아아~ 저 머리카락의 향기를 맡으며 잠에서 깰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다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긋한 풀냄새. 풀을 밟는 감촉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나무 사이로 나비와 새들이 날아다녔다. 딱다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소풍 가기에 최적의 날씨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마치 삼림욕을 하는 느낌이다. 루시아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내가 은근슬쩍 손을 잡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영아는 신기하다는 듯이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어린 엘프들은 신나게 뛰어다녔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얘들아!” “예,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누나” 간만에 숲에 오니 정말 기쁜가 보다. 확실히 엘프에게는 도시보다 숲이 어울린다. 특히나 어린 엘프들일수록 더욱 숲과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난 어린 엘프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자주 좀 숲에 데려갈 걸. 그동안 너무 루시아 공략(?)에만 집중하다보니 어린 엘프들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써줬다. “라이 잡아보세요, 오빠~!” “루비 잡아보세요, 오빠~!” “……” 뭐야? 여기서 ‘나 잡아봐라’ 놀이가 왜 나와? 분명 말하지만 나는 저런 놀이게 낄 마음이 조금도 없…… “뭐해? 라이와 루비가 잡아보라고 하잖아. 빨리 잡아” “으응.” ……지만, 루시아가 끼라고 하니 껴야 할 것 같다. 난 힘차게 뛰어다니는 라이와 루비를 쫓아다녔다. “앗! 거기서, 라이야! 루비도 거기서!” “꺄하하~ 라이 여기 있어요, 오빠!” “꺄르르~ 빨리 루비를 잡아 보세요!” “……” 니들 잡히면 다 죽었어! 잡아서 땅에 파묻어 주마! 하지만 라이와 루비를 잡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개나리 스텝까지 쓴 뒤에야 간신히 두 엘프를 잡을 수 있었다. “헤헤~ 오빠한테 잡혔다.” “아잉~ 루비는 이제 어쩌면 좋아요?” “헥헥~ 죽겠다.” 내가 이렇게 고생한 이유는 이곳이 숨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간은 길이 나 있지 않은 숲보다는 잘 닦여진 길에서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엘프는 반대다. 엘프는 잘 닦인 길보다 숲에서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엘프가 괜히 숲의 종족인 게 아니다. 평소 같았으면 ‘힘들어요오’, ‘쉬었다 가요오’, ‘못 걷겠어요오’, ‘업어주세요오’ 등의 대사를 남발했을 어린 엘프들이지만, 숲 속에서는 완전히 날아다녔다. 아무리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았다. “빨리 오세요, 언니 오빠.” “빨리오요!” “이쪽이에요, 누나.” 그래도 나야 전설의 용사이니 그나마 낫다. 하지만 루시아는 연약한 공주님이다. 그리고 영아는 체력 약한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작가다. 둘은 이마에 땀까지 흘리며 힘들어했다. 난 재빨리 루시아에게 말했다. “힘들지? 내가 업어줄까?” “됐어.” 딱 잘라 거절하는 루시아. 내가 실망하는데, 영아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나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날 업어줘, 오빠. 나 정말 힘들단 말이야” “나도 널 업어주고 싶지만, 내 등은 앞짱구 탑승 금지란다.” “뭐? 오빠 말 다했어?” “아니. 아직 다 안 했는데?” “됐어. 이제부터 오빠랑 안 놀아줄 거야.” “……” 넌 원래부터 나랑 안 친했단다. 어쨌든 루시아도 힘들고 영아도 힘들어하니, 좀 쉬었다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난 어린 엘프들을 불러 세웠다. “전원 집합!” 내가 소리치자 열심히 뛰어다니던 어린 엘프들은 내 앞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난 어린 엘프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오른쪽 엘프부터 번호 시작!” “하나!” “둘!” “삼!” “……” 마지막에 어떤 엘프가 번호 붙였어? 셋이 나와야지, 왜 삼이 나와? “여기서 잠깐 휴식을 취한다. 실시!” 우리는 큰 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루시아가 앉으려하자 난 재빨리 손수건을 펼쳤다. 후후~ 이 정도 매너는 기본이지. 루시아는 조심스레 손수건 위에 앉았다. 루엔과 갈리온드는 대충 걸터앉았다. 오랜 기간 동안 폐인 생활을 했으니 체력이 많이 약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둘 모두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엘프의 숲에 왔기 때문인가? 어린 엘프들은 배낭 안을 뒤져 주섬주섬 무언가를 ???ㅐ들었다. 빵과 우유였다. 아예 안에서 케이크를 통째로 꺼내는 엘프도 있었다. “……” 무서운 것들. 다른 것은 하나도 안 챙겨왔으면서 먹을 것만 저렇게 많이 챙겨 오다니. 잘 보니 과일도 많이 있다. 난 사과를 몇 개 꺼내 루시아와 영아에게 건네주었다. 과일은 수분과 영양분이 많고 소화가 잘돼 피로회복에 도움이 된다. 깨끗하게 씻은 과일이었기에 우리는 껍질째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괜찮다. 참고로 우리 집 가사 전반을 책임지는 인디는 오로지 유기농 야채와 과일만을 고집한다. 농약을 친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좀 비싸더라도 가족들의 건강을 최우선하기 때문이다(특히 일루니아 여사님 건강을). 그러니 농약 걱정은 안 하고 먹어도 될 것이다. 난 루시아 옆에 앉았다. 불어온 바람이 이마에 난 땀을 식혀주었다. “힘들지 않아?” “괜찮아.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저도 그래요, 언니, 전 꿈에 그리던 판타지 세계에 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요. 이제 곧 엘프의 마을이 나온다니! 엘프들을 직접 만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는 걸요.” “뭔 소리야? 지금 니 눈앞에도 엘프가 있……” 말을 하던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인간과 엘프를 외형적으로 구분하는 가장 확실하면서도 간단한 방법은 귀를 보는 것이다. 인간의 귀는 작고 둥그런 반면 엘프의 귀는 길고 끝이 뾰족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다섯 엘프는 하나 같이 둥그런 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인간인가? 물론 아니다. 한국에서 살 때 엘프가 아닌 외국인처럼 보이게 하려고 마법으로 바꾸어 놓은 것뿐이다. 그 마법이 이 세계에 온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난 마법을 해지하기로 했다. 형태 변환 마법은 몸 전체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귀에만 걸려있다. 이 정도는 나도 간단하게 해지할 수 있다. 마법을 해지하자 둥근 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길고 뾰족한 귀가 나타났다. 난 다섯 엘프의 마법을 전부 해지해주었다. 단지 귀 모양만 바뀌었을 뿐인데 아이들이 백만 배는 더 귀여워 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역시 얘들은 엘프 본연의 모습일 때가 가장 귀여워! 이런 생각은 나만이 아니라 루시아와 영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루시아와 영아는 어린 엘프들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루시아는 라이를 뒤에서 끌어안은 다음 귀에 입을 맞추었다. 영아는 루와 루비의 귀를 같이 만지며 촉감을 비교했다. “얘들이 정말로 엘프였구나.” 영아는 놀라운지 연신 아이들의 귀를 살펴보았다. “어쩐지 인간 치고는 너무 귀엽다 했어.” “훗~ 인간이든 엘프든 우리 애들보다 귀여운 애들이 없어. 그치, 루시아?” 루시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어떤 아이들이 우리 애들보다 귀엽겠어? 우리 라이랑 루랑 루비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팔불출 엄마 루시아는 아이들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뽀뽀를 해주었다. 엘프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엘프의 모습으로 돌아온(그래봐야 귀 모양만 바뀌었을 뿐이지만) 루엔과 갈리온드는 온라인 게임 생각이 나는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 인터넷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 차례 휴식을 끝마친 우리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약 한 시간 정도 열심히 걷자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 한가운데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집들 사이사이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마을은 숲을 밀어내고 만든 것이 아니다. 숲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으로 지어진 것이다. 마치 숲 속에 집이 녹아든 듯한 모습이다. 이 숲 안에 집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마을 입구에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고,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전에 여기 왔을 때와는 다른 쪽으로 온 것 같았다. 전에 왔을 때는 시냇물이 없었으니. 시냇물은 말고 깨끗한데다가 수심이 낮아 발목까지 정도 밖에 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징검다리에 의지하지 않고 그냥 건너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루엔과 갈리온드가 가볍게 징검다리를 건너 먼저 마을에발을 들여놓았다. 나와 루시아는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징검다리를 건넜다. “여기가 우리 마을이에요, 누나.” “루비의 마을에 돌아왔어요, 오빠.” 루와 루비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기쁘기도 하겠지. 엘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형형색색의 머리카락을 지닌 엘프들은 하나같이 미남 미녀들이었다. 영아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러다가 목이 306도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진짜 엘프들이야, 오빠!” “호들갑 좀 그만 떨어라. 그럼 설마 저들이 가짜 엘프들이겠냐?” “그럴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긴 뭐가 그럴 수도 있어? 그럼 저들이 미쳤다고 이 대낮에 뾰족한 귀 매달고 돌아다니겠냐?” 엘프들은 경계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엘프의 숲은 적색 산맥으로 인해 다른 종족의 출입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엘프들은 타종족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이다. “인간이야.” “정말 인간이다.” “인간들이 여기에는 무슨 일일까?” 루시아와 영아는 나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 그러고 보니 저들은 지금 엘프어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엘프의 숲은 한반도의 몇 배의 넓이다. 그리고 마을만도 백여 개가 넘는다. 그중에는 공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엘프어를 사용한다. 엘프어는 모든 엘프들이 기본적으로 익히고 있는 언어다. 하지만 공용어는 선택이다. 공용어는 적색 산맥을 넘어 인가들이 사는 직역으로 갈 때만 필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루엔과 갈리온드는 공용어를 익혔고, 루와 루비도 루엔의 영향 덕분인지 공용어를 배웠다. 우리 라이야 천재이니 당연 공용어를 알고 있고. 우리 집 엘프들은 엘프어와 공용어를 모두 알지만, 루시아와 영아는 엘프어를 모른다. 루시아는 마법으로 한국어만 익혔고, 영아는 마법으로 공용어만 익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엘프들이 말하는 것을 못 알아듣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내가 누군가? 8클래스를 마스터한 위대한 대마법사 아이언스 히로가 아니겠는가? 난 언어 전수 마법을 써서 루시아와 영아에게 사용했다. “아! 이제 들린다.” “정말 들려! 이거 되게 신기하다! 오빠 정말 마법사인가 보내.” “푸하하! 당연하지. 그것도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8클래스 마스터의 대마법사란다.” “응. 나도 알아, 눈곱만큼의 노력 없이 날로 먹은 유일무이한 마법사잖아.” “뭐라?” 내가 확 째려보자 영아는 웃으며 말했다. “헤헤~ 농담이야, 오빠.” “……” 그냥 버리고 올 걸 그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괜히 데려온 것 같다. 어느새 엘프들이 우리 주위를 빙 둘러쌌다. 엘프들은 적대적인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같은 마을에 살던 루엔과 루, 루비는 금방 알아보았다. 갈리온드를 알아보는 엘프들도 많았다. 루엔은 오랜만에 만나는 엘프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앗! 루비다!” “루도 있어!” 라이 정도 되보이는 어린 엘프 십여 명이 루와 루비에게 다가왔다. 루와 루비도 반가워하며 그들을 껴안았다. 친하게 구는 걸 보니 친구들인가 보다. “어머! 다들 귀여워!” 연두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꼬마 엘프, 하늘색 머리카락과 움푹 파인 보조개가 매력적인 꼬마 엘프, 보라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꼬마 엘프……. 하나같이 귀엽고 깜찍한 아이들이다. 영아는 귀여운 엘프들이 떼를 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루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애들이 제일 귀여워.” 누가 팔불출 엄마 아니랄까봐……. 나를 알아보는 엘프들도 있었다. “저 인간 전에 여기 왔던 인간 아니야?” “맞아. 옆에 있는 저 엘프와 같이 왔었어.” 이곳에 사는 엘프들과 같이 온데다가 나와 라이는 전에 한 번 온 적도 있으니 엘프심의 경계심이 많이 풀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무슨 일들이냐?” 소란이 커지자 촌장까지 등장했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 만난 그 촌장이다. 하긴, 몇 년 사이에 촌장이 바뀌었을 리 없지. 난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저에요, 촌장님! 저 기억하지요?” 촌장을 날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자네는…….” 우리는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 안을 걸어가는 내내 엘프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원래 엘프인 루엔, 갈리온드, 라이, 루, 루비는 태연했고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나도 태연했지만, 루시아와 영아는 그렇지 못했다. 루시아와 영아는 몸이 위축되는지 나에게 달라붙었다. 루시아가 달라붙는 것은 기쁘지만 영아가 달라붙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다. 촌장의 집은 예전 그대로였다. 부인과 세 딸도 그대로였다. 그 사이에 딸이 하나 더 늘어났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촌장이 내준 자이에 앉았다. 촌장의 딸들이 음료수를 내왔다. 마셔보니 향긋한 과일주스다. 한번 맛을 본 어린 엘프들은 꿀꺽꿀꺽 마시더니 두 손으로 빈 컵을 내밀었다. “더 주세요오~!” 난 쪽 팔린 나머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남의 집에서는 좀 자제해주려무나. 니들이 그러면 오빠 체면이 뭐가 되겠니? 다행이 촌장의 딸들은 별 말 없이 과일주스를 더 내주었다. 어린 엘프들이 열심히 주스를 마시는 사이 촌장이 나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 “다른 곳에 볼 일이 있는데,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거예요, 루엔과 루와 루비의 고향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요.” 난 조심스럽게 촌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며칠 정도 이곳에 머무를 수 있을까요?” “자네는 엘프의 친구이니 상관없네. 그런데 옆의 있는 두 인간은 누구인가?” 촌장은 경계의 눈길로 루시아와 영아를 보았다. 난 재빨리 둘을 변호했다. “이쪽은 제 애인이고, 이쪽은 제 여동생이에요. 이 둘도 엘프의 친구에요.” 엘프의 친구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루시아와 영아가 어린 엘프들과의 다정한 모습을 직접 현출해 보였으니. 루엔과 갈리온드가 우리 편을 들어주었다. “이 인간들의 신원을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저 역시 보증하겠습니다.” 신원 보증이랑 철저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면, 보증을 선 루엔과 갈리온그가 책임을 져야한다. 엘프들은 인간을 잘 믿지 않지만, 한번 믿음을 준 인간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난 루엔과 갈리온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성인 엘프 둘이 보증을 선다니 상관없겠군. 이곳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하겠네.” “아! 고맙습니다.” 루시아와 영아도 개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허락을 받은 우리들은 촌장의 집을 나왔다. 촌장의 집 앞에는 수많은 엘프들이 몰려있었다. 변화가 거의 없는 엘프 마을인지라 우리들의 등장은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다. 언제 어디서나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영아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자 엘프들 너무 잘 생겼다. 하나같이 다 꽃미남들이야. 그냥 이 마을에서 눌러 살았으면 좋겠다.” “……” 앞짱구 아주 살판났네. 영아의 말이 아니어도 성인 엘프들은 전부 꽃미남 꽃미녀다. 미성년 엘프들은 전부 귀염둥이고. “종족을 뛰어넘는 인간과 엘프의 사랑. 어때, 오빠?” “뭔 헛소리니?” “나의 미모에 반한 남자 엘프가 나에게 청혼을 하는 거지. 나는 ‘당신은 엘프고, 나는 인간이야’ 하고 말하며 그 청혼을 거절해. 하지만 그는 ‘종족 같은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오.’ 라고 말해. 감동 받은 나는 결국 그 청혼을 받아들이지. 하지만 그를 사랑한 한 여자 엘프가 있어서…….” “아주 소설을 써라” 어떤 엘프가 미쳤다고 앞짱구에게 청혼을 하겠는가? 루시아라면 모를까…… 헉! 그러고 보니 주위에 미남들이 지천으로 깔렸다. 그리고 루시아는 엘프를 능가할 정도의 미모를 지니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무슨 일이 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난 재빨리 경계 모드를 발동시켰다. 주위 남자 엘프들은 전부 적이나 다름없다. 루시아에게 찝쩍거리는 것들은 인간이든 엘프든 용서치 않으리. 약 10분 정도 걸은 끝에 우리는 루엔의 집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비웠지만 집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이 집이야?” “예쁘지?” “응. 너무 예쁜 것 같아.” 사실 집 자체는 그냥 평범한 통나무집일 뿐이다. 하지만 주위 배경과 어우러지니 한 폭의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우거진 나무와 풀들, 그 사이로 날아다니는 새들, 맑은 하늘과 내리쬐는 햇볕, 게다가 뒤로 돌아가면 호수도 있다. 루엔은 문을 열어 주었다. 루와 루비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와아! 우리 집이다아~!” 루는 루엔과 함께 이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리고 루비는 이 근처에 살았으니, 이 집에 자주 놀러왔을 것이다. 집 안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있었다. 바닥에 발자국이 찍힐 정도였다. 루엔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먼저 청소를 해야 할 것 같네요.” “예. 그래야할 것 같네요.” 어린 엘프들은 그새를 못 참고 배낭을 풀어놓은 채 놀러 나갔다. 그 사이 우리는 집 안 청소를 시작했다. 나는 창고에서 물통 두 개를 꺼내 호수에 물을 길러 갔다. 호숫가에는 먼저 온 어린 엘프들이 물을 튀기며 놀고 있었다. “앗! 라이랑 같이 놀아요, 오빠” “루비가 오빠랑 같이 놀아줄게요.” “저도요.” “이 오빠도 너희들과 같이 놀아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할 일이 있어서 안 되겠구나.” 난 그렇게 말하며 물통에 물을 길렀다. 물통 하나에 물이 10리터씩은 들어가는 것 같다. 즉, 물통 하나의 무게는 약 10킬로그램이라는 거다. 두 개 합쳐 20킬로그램 훗~ 이 정도 무게쯤이야 가뿐하지. 난 물이 꽉 찬 물통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물은 장력이 있기 때문에 쉽게 넘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장력을 넘어서게 되면 물은 넘치게 된다. 그렇기 에 부드러운 하중 이동이 필요하다. 그런 요령 덕분에 빠른 걸음에도 불구하고 물은 한 방울도 남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어린 엘프들이 내 뒤를 졸졸 다라오는 걸까? “니들 왜 다라오는 거니?” “오빠 도와주려구요.” “오빠 일이 루비 일이잖아요.” “저는 누나를 도울래요.” 기특한 것들 같으니라고. 어린 엘프들과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닥에 물을 끼얹고 먼지를 닦아냈다 .어린 엘프들은 대걸레로 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루시아는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걸레를 물에 적셔 집 안 여기저기를 닦았다. 영아 역시 열심히 걸레질을 했다. 루엔과 갈리온드도 방을 청소하고 창고를 정리하는 등 열심히 일했다. 물은 금방 떨어졌고, 나는 계속 물을 길어 와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열심히 일하자 집 안은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훨씬 깨끗해졌다. 모두가 힘들고 지쳤다. 마침 점심때도 되었기에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탁 위에 식탁보를 펼치고 음식을 차렸다. 음식은 루엔이 근처 집에서 얻어온 싱싱한 과일과 다끈한 빵, 그리고 어린 엘프들의 배낭에 있는 간식들이었다. 힘들게 일한 다음 먹는 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평소처럼 배 터지게 먹은 어린 엘프들은 다시 놀러 나갔다. 영아도 남자 엘프와의 로맨스 어쩌구 하는 헛소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소화도 시킬 겸 산책 좀 하고 올게요.” “그러세요.” 난 루시아를 보며 물었다. “같이 갈래?” “응.” 난 루시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루시아는 이곳 공기가 마음에 드는지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아아~ 루시아와 단 둘이 산책이라니! 어린 엘프들이 없어서 너무 좋다. 이대로 루시아를 으슥한 숲 속으로 데려가면 어떻게 될까? 헉! 설마 역사는 숲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건가? 루시아는 기분이 좋은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이렇게 루시아가 먼저 팔짱을 끼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다. 남들이 보기엔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겠지? 어면 부부처럼 보일지도……. “여기 정말 너무 좋다.” “그, 그래?” “응.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마을이야. 나 엘프 마을에 오는 것은 처음이잖아.” “생각해보니 그러네.” “그리고 이곳은 루와 루비가 설던 마을이잖아. 나 애들이 살던 곳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었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데리고 올 걸 그랬다. 일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거늘.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엘프들은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인간들처럼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니. 손만 뻗으면 먹을 것이 있고, 누운 곳이 바로 잠자리다. 수명도 1천년이나 되니 조급할 필요도 없다. 인간이 없으면 한창 일할 시간이었을 테지만, 엘프들은 각기 편하게 쉬고 있었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한 여자 엘프는 사과를 먹으며 우리를 구경했다. 몇몇 엘프는 날아보는지 손을 흔들기도 했다. 나 역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남자 엘프에게는 그냥 귀찮다는 듯 몇 번 흔들어주었지만, 여자 엘프에게는 엄청 친한 척하며 괜히 아는 척 했다. 아아~ 사방에 미녀들이 있다보니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모르겠다. 내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옆구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끄아악!” 루시아가 내 옆구리를 꼬집고 비튼 것이다. 루시아는 나를 흘겨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흥!” “…….” 앗! 루시아를 옆에 두고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다니! 내가 이런 큰 실수를! “흠흠, 저 구름 참 예쁘다. 마치 히로랑 루시아가 키스하고 있는 모습 같아. 그치?” “흥!” “…….” 삐졌군.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루시아가 삐지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루시아의 화를 풀어줄 수 있을까? “앗! 저기 귀여운 엘프들이네.” “우리 애들이 더 귀여워” “앗! 저 과일 맛있게 생겼다.” “그다지.” “앗! 저 집 예쁘다.” “그래서?” “…….”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별로다. 어쩌겠냐? 루시아를 옆에 두고 잠시 한눈을 판 내가 죽일 놈이지. 우리는 출발할 때와는 달리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산책을 끝마쳐야 했다. 아이들은 어디서 놀다 왔는지 옷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영아는 남자 엘프들과 많이 만나고 왔는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조잘거렸다. 숲 속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여행의 피로와 놀이의 피로(?)가 함께 몰려오는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방이 부족한 관계로 루가 쓰던 방에서 다같이 잠들었다. 영아도 루의 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모포를 깔고 잠들었다. 루엔은 갈리온드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창고를 치워놓았으니 그곳에서 자세요. 아까 깨끗이 청소를 해놓았고, 침대가 없어서 모포를 깔아놓았어요.” “예. 고마워요, 루엔.” 우리는 같이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바닥에는 두툼한 모포가 깔려있었다. 그런데 그 모포가 1인용 두 개가 아니라, 2인용 한 개다. 즉,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루시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옷 갈아 입어야하니까 잠깐 나가 있어.” “으응.” 난 잠시 밖에서 기다렸다. 목소리로 미루어 볼 때 아직까지도 화가 안 풀렸음이 틀림없다. 아아~ 다른 여자 쳐다본 것이 이렇게 큰 죄일 줄이야……. 내가 기다리는 사이 루시아는 머리를 풀고 파자마로 갈아입었다.(루시아의 짐은 마법 주머니 안에 전부 들어있다).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루시아는 조금 피곤한 모습이었다. 루시아는 먼저 이불을 덮고 누웠다. “뭐해? 안 자?” “아, 아니. 물, 물론 자야지” 내가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가면 루시아와 한 이불을 덮고 자게 되는 셈이다. 젊은 남녀가 한 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다니! 혹시 루엔은 나를 생각해서 2인용 모포를 준비해준 건가? 난 루엔의 다뜻한 배려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난 조심스레 발부터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몸을 완전히 집어넣고 루시아를 껴안으려고 했다. 그 순간, 루시아는 손으로 이불 가운데를 그으며 냉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선 넘어오면 죽을 줄 알아” “……응?” “널 믿고 같은 모포 속에서 자는 거니까, 내 믿음을 실망 시키지 마. 이 선 넘어오면 널 짐승으로 볼 거야.” “으응. 무, 물론이지.” 루시아는 싸늘한 눈으로 나를 한번 쏘아보더니 몸을 돌렸다. 나 역시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계속 루시아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생각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상한 생각은 지금도 충분히 들고 있다. 한방에 한 이불. 이런 상황에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만약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날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보나마나 특정 부위에 이상이 있다 생각할 것이다. 신체 건장하다 못해 혈기가 끓어 넘치는 내가 그런 오해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이라도 루시아를 덮쳐버릴까? 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루시아…….” “…….” 아무런 답변이 없다. 자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자고 있는 척 하는 걸까? 난 당장이라도 선을 넘어 루시아를 와락 끌어안고 싶었지만 루시아의 경고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 순간, 떠오르는 한 일화가 있었으니……. 섬에 놀러온 젊은 남녀가 배편이 끊긴 관계로 섬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근처네 있는 여관에 가보니 마침 남은 방이 딱 하나였다. 남녀는 어쩔 수 없이 한 방에서 자기로 했다. 잠들기 전. 여자는 립스틱으로 방 한 가운데에 선을 그어 놓으며 말했다. ‘자는 동안 날 덮칠 생각 하지 마. 이 선을 넘으면 오빠를 짐승으로 여길 거야’ 남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선을 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여자는 갑자기 베개로 남자를 마구 패기 시작했다. 남자는 놀라 뭘 잘못했기에 패는 거냐고 여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자가 울면서 소리치기를……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이 일화에서 우리는 선을 넘으면 짐승, 넘지 않으면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남녀가 유별한데, 젊은 남녀가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잔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방에서 자는 것도 모자라 한 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 루시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같은 이불에서 자는 것을 허락한걸까? 단지 자는 것만 허락한 걸까, 아니면 그 이상의 행위도 허락한걸까? ‘이 선 넘어오면 죽을 줄 알아’ 라는 말은 선을 넘어오라는 의미일까, 넘어오지 말라는 의미일까? 날 믿는다는 것은? 선을 넘어오면 짐승으로 본다는 것은? 내가 넘어올 것을 믿는다는 건가? 짐승처럼 자신을 덮쳐달라는 건가? 내가 이대로 아무 짓도 안 하고 잠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루시아도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라고 소리치며 베개로 날 패려나? 아아~ 모르겠다. 차라리 잠이라도 들어버렸으면 좋겠지만, 정신은 오히려 맑아지고 있었다. 하긴, 루시아와 같은 이불을 덮고 있는데 잠이 올 리 없다. 루시아가 싫어하고 있는데 강제로 엎치는 것은 당연 옳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루시아도 원하고 있다면? 강렬하게 원하고 있는데 부끄러워서 표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루시아 성격으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루시아는 오늘 무슨 속옷을 입었을까? 내가 선물해준 민트블루 색상의 브라와 팬티를 입었을까? 루시아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헐렁한 파자마. 벗기기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잠깐. 그럼 혹시 루시아는 내가 벗겨주길 바라고 일부러 파자마로 갈아입은 건가? 그렇다는 것은 무언의 허락? “…….” 맞아! 그것은 무언의 허락이었어! 나는 대체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거지? 루시아가 같은 방, 같은 이불에서 자는 것을 허락한 것은 오늘밤 어떠한 짓을 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고 이런 짓이나, 저렇고 저런 짓은 물론이고, 그렇고 그런 짓까지! 선을 넘어오지 말라는 말이나 짐승으로 보겠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냥 해본 말일 것이다. 루시아의 본심은 히로가 덮쳐줬으면 하는 것이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나는 저번처럼 크게 후회할 것이다. 어쩌면 천추의 한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 이미 루시아가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겠나? 결심을 한 나는 슬금슬금 루시아 쪽으로 몸을 이동했다. 루시아가 경고한 선을 넘어 조금 더 가자 루시아의 등과 엉덩이가 닿았다. 루시아는 미동이 없었다. 후후~ 깨어있는 거 다 아는데, 잠든 척하긴 는. 이렇게 계속 잠든 척하는 걸 보니 많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어린 엘프들은 자고 있고, 나의 천적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곳에 없다. 거사(?)를 방해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 난 몸을 돌려 루시아를 뒤에서 껴안았다. 부드러운 살결의 느낌이 온몸에 전해져 온다. 난 루시아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루시아의 몸에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난다. 나는 그 냄새를 좋아한다. 이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난 루시아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파자마를 벗기기 시작했다. 단추를 두개 정도 풀자 민트블루 색상의 브라가 보였다. 내가 선물해준 바로 그 속옷이다. 새하얀 살결과 속옷을 보는 순간 내 이성은 저 멀리 날아갔다. 난 손을 뻗어 루시아의 가슴을 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 좋다. 아이들이 왜 그렇게 루시아 가슴에 얼굴 묻고 부비부비 하는 것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내가 브라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루시아가 갑자기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도 루시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똑똑히 보였다. 루시아는 잠시 내 얼굴과 자신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내 손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내 얼굴에 시선을 멈추고 싸늘한 목소리고 말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루시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일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뭐야? 허락한 게 아니었어? 난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아니 니가 너무 더워하는 것 같아서 옷을 좀 벗겨주려고. 그 외에 다른 뜻은 절대 없었어.” “그런데 왜 내 가슴을 만지고 있어?” “무, 무슨 말이야? 내, 내가 언제 가슴을 만졌다고…….” “지금 만지고 있잖아.” 루시아의 말대로 지금 내 오른손은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난 그 손을 보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허억! 이, 이 손이 왜 거기 있을까?” “됐으니까 빨리 치워.” “으응.” 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일단 손을 치웠다. 그리고 루시아의 몸 위에서 내려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루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열려진 단추를 하나씩 잠갔다. 그런데 루시아의 표정과 행동이 이상하게 담담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면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질러야하는 거 아닌가? 대체 루시아는 무슨 생각인 거지? 헉! 설마 잠들어 있느라 그동안의 진행 상황을 몰랐으니, 처음부터 다시 덮쳐달라는 건가? 그렇다면 기꺼이! 단추를 다 잠그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언니 말이 맞았어. 기회만 나면 덮칠 생각밖에 없는 널 믿는 내가 바보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루시아?” “똑바로 누워” “응?” “빨리 시키는 대로 해” 루시아가 시키면 히로는 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이다. 난 시킨 대로 똑바로 누웠다. 그러자 루시아는 이불을 확 덮었다. “헉! 왜 그래, 루시아?” 대답은 루시아의 입이 아닌 발에서 들려왔다. 루시아가 마구 발길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퍼버버버벅! “끄아악!” “이 짐승! 내가 선 넘어오면 짐승이라고 했지? 그런데 넘어온 것도 모자라 내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져?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헉! 아, 아니야, 루시아. 이건 오해가…….” “오해는 무슨 오해? 내가 분명 봤는데!” “아니야. 잠깐만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줘, 루시아!” “니 변명 다윈 듣고 싶지 않아! 이 짐승! 저질! 볕내! 색마! 나가 죽어!” 퍼버버버버벅! “끄아악! 살려줘~!” * * * * 아침 식사시간. 어린 엘프들은 내 얼굴을 보여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과일을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라이가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오빠?” “으응. 사정이 좀 있었단다.” “무슨 사정인데요?” “으응. 그게 말이지…….” 잠자는 루시아를 덮치다가 얼굴에 피멍이 들 때까지 두드려 맞은 거란다. 그리고 집에서 쫓겨나 이슬을 맞으며 밖에서 자다가 지금에서야 기어들어온 거란다. 하지만 이 얘기를 어린 엘프들에게 그대로 해줄 수는 없다. 그러면 가장으로서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에휴~” 한숨이 저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나를 보는 루시아의 눈길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난 정말 억울하다. 난 정말로 루시아가 허락한 줄 알았단 말이다!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은 허락해놓고선 그 이상은 왜 안 된다는 거야? 아아~ 알 수 없는 것이 여자 마음이라더니……. 2부도 벌써 13권째다. 이제 슬슬 허락해줄 때도 된 거 아닌가? 난 과일을 열심히 입에 우겨넣는 라이, 루, 루비를 모여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이 오빠가 못나 아직까지도 너희들 동생 제작에 착수하지 못했구나. 너희들에게 꼭 예쁜 여동생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영아가 안 보이는군. 아침도 안 먹고 남자 엘프 꼬리서 나갔나? 아침식사가 끝나자 어린 엘프들은 또 다시 놀러 나갔다. 루엔과 갈리온드는 친구들을 만난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집 안에 남은 사람은 나와 루시아 둘뿐. 루시아의 분위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 동상에 걸릴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루시아를 화이트 드래곤으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당장이라도 루시아의 시선을 피해 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사과하고 화해해서 옛날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가야 했다. “……” 잘 생각해보니 옛날에도 그리 화기애애하지는 않았군, 화기애애했으면 지금쯤 라이 동생이 등장 했을 테니……. “흠흠.” 난 괜히 헛기침을 하며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루시아는 싸늘한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경멸 가득한 그 눈빛에 나는 몸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결심을 하고 걸음을 내딛었다. “좋은 아침이야.” “……” “숲 속에서 맞는 아침이라니. 너무 낭만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난 이렇게 숲 속에서 너와 함께 아침을 맞으니 기분이 참 상쾌하고…….” 내가 말을 하는데 루시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루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았다. 쾅! “……” 넘어오면 짐승이라더니, 정말로 짐승이 된 기분이다. 루시아가 날 본체만체 하다니……. “흑~ 난 그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뿐인데.” 설마 이대로 영원히 짐승 취급당하는 건가? 물론 그럴 수는 없다. 루시아가 용서해줄 때까지 치맛자락을 붙들고 빌고 또 빌어야 한다. 난 재빨리 루의 방으로 들어갔다. 루시아는 침대 한쪽에 앉아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문 열리는 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난 슬쩍 루시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루이사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저, 저기, 루시아…….” 그러자 루시아는 내 손을 탁 쳐냈다. “가.” “…….” 뭐,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다. 충격 받지 말자. 난 루시아 앞에 오체투지 했다. “미안해, 루시아!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난 너도 원하는 줄 알고 그만……아, 아니, 이게 아니라……아무튼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화가 풀릴 때까지 날 밞아!” 난 이렇게 하면 루시아가 화를 풀고 날 용서해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루시아의 대답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화가 풀릴 때까지 밟아달라고? 알았어. 안 그래도 어제 밟은 것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잘 됐네. 니 뜻대로 화가 풀릴 때까지 마음껏 밟아줄게.” “……” 헉! 이게 아닌데. 어젯밤 정말 처참하게 짓밟혀 얼굴에는 피멍이 들었고 몸 구석구석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또 밟겠다니! “자, 잠깐, 루시아.” 내가 뭐라 말하려는데 루시아는 주저 없이 이불을 덮어씌웠다. 그리고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퍼버버버벅! “끄아악! 살려줘~!” 어젯밤에 이어 또 다시 짓밟힌 나는 초죽음 상태가 되었다. 뼈 마디마디가 끊어질 것만 같다. 루시아는 패느라 지쳤는지 침대에 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흑흑~ 너무해. 널 사랑하는 나를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하게 팰 수 있어? 히로가 루시아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어흐흐흑!” “이걸로 어젯밤 일은 용서해줄게” “헉! 정말?” 루시아의 말에 난 재빨리 울음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우두둑! “헉쓰! 내 허리!” 남자는 허리가 생명인데, 벌서부터 삐걱거리다니. 난 재빨리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언젠가 있을 그날을 위해서라도 허리를 잘 보존해둘 필요가 있다. 내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루시아는 나를 힘껏 째려보았다. “어떻게 잠자고 있는 나를 덮칠 수가 있어?” “그, 그게 말이지……그러니까 여기에는 오해가 좀…….” “오해는 무슨 오해? 내 윗도리까지 벗기고 가슴까지 만졌으면서.” “아, 아니. 벗긴 건 아닌데…… 그냥 단추만 좀 풀렀…….” 찌릿!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죽일 놈이야. 아직 기분이 안 풀렸다면 더 밟아도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기서 더 밟혔다간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난 식은땀을 흘리며 루시아의 말을 기다렸다. 다행이 루시아는 나를 쏘아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됐어. 널 믿은 내가 잘못이지. 언니의 충고대로 조심했어야 했는데.” “……”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남자들은 다 그래?” “아, 아니, 뭐 꼭 다 그런 건 아니고……99퍼센트 정도는…….” 다시 말하지만 난 정말 억울하다. 사랑하는 여자와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데 가만히 있을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짐승.” “헉!” 어쨌든 선을 넘어갔으니 짐승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게다가 웨어울프로 폴리모프 한 전적도 몇 번 있으니. 팔짱을 끼고 날 노려보던 루시아는 한결 풀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는 거야. 앞으로 또 그러면 그땐 정말 용서 안 할 거야.” “응응. 물론이야, 루시아. 용서해줘서 고마워.” 어쨌든 화가 풀려서 다행이다. 여행 내내 냉랭한 상태로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아! 우리 산책이나 갈까? 언제 엘프 마을에 또 오게 될지 모르는데 실컷 봐둬야지.” 나의 제안에 루시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집 밖으로 나온 우리는 어제처럼 마을을 둘러보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위에 미녀 엘프들이 많았지만 난 시선을 정면에만 고정시켰다. 어제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할 수는 없어! 오로지 내 사랑 루시아만 바라볼 테야! 하지만 눈이 알아서 돌아가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애들은 어디서 놀고 있을까?” “글쎄, 멀리가진 않았겠지.” 그 순간, 다섯 명의 꼬마 엘프등(우리 집 엘프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이 모여서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형형색색의 머리카락이 특징인 귀여운 엘프들. 난 그 엘프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희들 혹시 루와 루비를 못 봤니?” 꼬마 엘프들은 나와 루시아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인간이다!” “응. 인간이야” “진짜 인간이야” “저 남자 인간은 전에 본 적이 있어.” 우리를 가리키며 수군대는 꼬마 엘프들. 루시아는 그 아이들을 향해 생긋 웃어보였다, “우리는 나쁜 인간들이 아니야.” 그러자 갈색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착한 인간들이에요?” 루시아는 그 엘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응. 응 착한 인간들이야.” 지금이야말로 나의 스킬이 빛을 발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이언스 히로의 진정한 능력은 마법을 쓰거나 검을 휘두를 때보다 애들을 달랠 때 더 빛을 발한다. 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머리 쓰다듬기 스킬), 등을 토닥여주고(토닥토닥 스킬), 비행기를 태워주고(비행기 스킬), 등에 업어주기(어부바 스킬)까지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금방 경계심을 풀고 친근감을 보였다. 이렇게 단기간 내에 처음 보는 아이들과 친해지다니!그것도 인간을 경계하는 엘프들과! 내 스킬들이 이렇게 대단했단 말인가? 루시아는 아이들이 귀연운지 계속해서 아이들을 만지작거렸다. 여자 아이는 껴안고 부비부비도 해주었다. “나는 루시아라고 해.” “루시아요?” “응. 루시아 언니라고 불러볼래?” “루이아 언니.” “꺄아! 귀여워!” 꼬마 엘프들의 귀여움에 루시아는 아이들에게 말을 건 목적을 상실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야 했다. “루와 루비가 어디 있는지 아는 엘프?” 그러자 두 엘프가 손을 들었다. 난 금발머리 엘프를 가리켰다. “말해봐.” “아까 호숫가에 있는걸 봤어요.” “맞아요. 저도 봤어요.” 루엔의 집 뒤편에 있는 호수를 말하는 것 같다. 난 루시아와 함께 호숫가로 향했다. 꼬마 엘프들의 말대로 루와 루비는 호숫가에 있었다. 그런데 애들 자세가 좀 이상했다. 루와 루비는 바위 뒤에 숨어 고개만 살짝 내밀고 있었다. “니들 지금 뭐하니?” 내가 묻자 루와 루비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쉬잇~!” 뭔지도 몰라도 조용히 하라고 하니 조용히 해야 할 것 같다. 나와 루시아는 조심조심 루와 루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는데?” 루와 루비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호수 쪽을 가리켰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호수 앞에 두 엘프가 서 있었다. 그중 한 엘프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우리 라이고, 다른 엘프는 라이 또래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단정한 금발머리를 한 꼬마 엘프는 손에 꽃 몇 송이를 들고 있었다. 라이는 금발 엘프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로 나오라고 한 거야?” “그, 그게…….” 제대로 말을 못하고 쭈뼛쭈뼛 거리던 금발 엘프는 갑자기 꽃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 이거…….” 라이는 그 꽃을 보며 말했다. “이걸 왜 날 주는데?” “어, 어제 만나서 한 번 같이 놀았을 뿐이지만……아! 이번에 널 처음 본 건 아니야. 저번에 인간과 함께 마을에 찾아왔을 때도 널 봤어. 난 그때부터 널 지켜보고 있었어.” “그래서?” “너, 널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뭐라? 그럼 이 상황이 저 금발 엘프가 라이에게 고백하는 상황이란 말이야? 금발 엘프는 얼굴이 새빨갛게 붉히며 라이에게 말했다. “그, 그래서 말인데……나,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헉!” 이젠 정식으로 교제 신청까지!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발랑 까진 엘프 같으니. 쟤네 부모는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난 라이가 저 금발 엘프와 사귀는 거 절대 반대다. 감히 나의 딸 라이를 넘보다니! 내가 우리 라이를 그렇게 쉽게 넘겨줄 것 같아? 그리고 어린 것들이 뭔 이성 교제야? 어린이면 어린이답게 공부를 해야 할 거 아냐? 나와 루시아, 그리고 루와 루비는 라이를 예의 주시했다. 과연 라이는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후, 라이의 대답이 들려왔다. “미안해.” 그 말을 듣는 순가 금발 엘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내, 내가 싫은 거야?” “아니. 싫진 않아. 다만 남자친구 사귈 생각이 없을 뿐이야.” “어, 어째서?” “라이한테는 오빠가 있으니까.” “오, 오빠라면……같이 온 인간 말이야?” “응. 난 너 같은 어린아이보다 오빠가 훨씬 더 좋아. 막막 좋아.” 라이가 딱 잘라 말하자 금발 엘프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바닥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우앙앙~!” 상황이 종료 되었기에 바위 뒤에 숨어있던 우리들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야.” “앗! 오빠.” 라이는 내 품으로 뛰어왔다. 난 라이를 꼭 껴안고 볼을 비벼주었다. “정말로 오빠가 훨씬 더 좋아? 막막 더 좋아?” “예. 라이는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아이구. 귀여운 것!” 쪽~! 난 라이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귀엽게 웃으며 나에게 비비적거렸다. “헤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딸자식 하나는 정말 잘 키웠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러운 법. 아들을 열 명이 아니라 트럭으로 갖다 준 다해도 우리 라이와는 바꾸지 않으리. 루시아는 울고 있는 금발 엘프를 달래주었다. 하지만 실연의 고통이 너무 큰지 금발 엘프는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난 라이를 내려놓고 금발 엘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토닥토닥 스킬을 써서 울음을 그치게 한 다음 집으로 돌려보냈다. 금발 엘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훌쩍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감히 우리 라이를 넘봤으니 당연한 결과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거란다. 아이야. 너도 언젠가는 좋은 인연을 만날 날이 오겠지. 우리는 다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때가 되자 루엔과 갈리온드, 영아도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는 어제와 똑같았다. 같은 방인 것도, 같은 이불인 것도. 루시아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를 쫓아내지 않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같은 이불을 덮고 자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루시아 옆에 누웠다. 당연 잠이 올 리 없다. 그렇다고 선을 넘어서 루시아에게 접근했다간 정말로 맞아죽을지도 모른다. 쌔근쌔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잠들려 해도 바로 옆에서 루시가아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주로 양을 세기 마련이다. 난 양 대신 귀여운 어린 엘프들을 세기로 했다. “어린 엘프 하나, 어린 엘프 둘, 어린 엘프 셋…… 어린 엘프 백만 스물하나, 어린엘프 백만 스물둘…… 도저히 안 되겠다.” 결국 나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왔다. 루시아가 옆에서 자고 있는데 잠이 올 리 없잖아! 난 루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서는 세 엘프가 뒤엉켜서 자고 있고, 바닥에서는 영아가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다. 난 아이들의 자세를 바로 해주었다. 그리고 영아의 모포 옆에 모포를 깐 뒤 누워 잠을 청했다. * * * * 다음날 아침. 아침식사를 끝마친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영아는 깜짝 놀랐다. “앗! 벌써 떠나는 거야, 오빠?” “…….” 그럼 평생 여기 눌러앉을 줄 알았냐? “나 아직 남자 엘프와의 로맨스를 못 만들었단 말이야.” “너한테 접근하는 남자 엘프가 있긴 하든?” “당연하지. 얼마나 많은데!” “……” 그거야 니가 인간이니 신기해서겠지. “괜찮아, 영아야. 너한테는 루가 있잖아. 루도 남자 엘프야. 좀 어리긴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영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에게는 우리 루가 있어. 누나는 다른 멋진 남자 앨프들 보다 우리 루가 더 좋아. 루도 누나 마음 잘 알지?” “……” 이제까지 수많은 남자 엘프들에게 찝쩍거린 주제에 말은 잘한다. 대체 영아는 누굴 닮아 이런 거야? 내가 궁금해 하는데, 생각에 잠겨있던 루엔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저와 갈리온드는 이곳에 있다가 결혼식 날 아이리스 왕궁에 찾아갈게요.” “예? 같이 안 가실 거예요?” 루엔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의 고향이라 좀더 있고 싶어서요. 갈리온드의 마을에도 들려봐야 하구요.” “으음, 루엔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대신 결혼식 날 꼭 오셔야 해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늦지 않을게요.” 이걸로 루엔과 갈리온드와도 헤어지게 되는 건가? 애초에 14명이었던 인원이 8을로 줄더니, 이제 다시 6명으로 줄었다. 개인적으로는 2명까지 줄었으면 좋겠다. 나와 루시아. 이렇게 2명으로. 잠깐. 생각해보니 루와 루비도 이곳이 고향이잖아. 난 루와 루비에게 물었다. “루와 루비는 어떻게 할래? 이곳에 있다가 나중에 할머니와 같이 결혼식장으로 올래, 아니면, 계속 오빠랑 언니랑 같이 여행할래?” 루와 루비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루시아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루와 루비가 이곳에 남겠다고 할 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루엔과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양육권을 빼앗길 위험도 있으니…… 루와 루비가 이곳에 남겠다고 하면 루시아도 이곳에 남겠다고 할까봐 걱정된다. 잠시 후, 루와 루비는 우리들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힘차게 말했다. “저는 누나랑 같이 갈래요!” “루비도 오빠랑 같이 갈래요!” 루시아는 기뻐하며 두 팔을 벌려 루와 루비를 껴안아주었다. 어쨌든 이걸로 인원은 여전히 6명이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잘 가요, 히로.” “예. 결혼식장에서 봬요.” 난 짐(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을 챙겨 루시아, 영아, 라이, 루, 루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루시아가 나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생각해둔 곳이라도 있어?” 난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깎아지를 듯한 절벽과 붉은빛을 띤 산들이 보였다. 저곳이 바로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영지인 적색산맥이다. 난 그곳을 보며 말했다. “내 모험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으로 갈 거야.” <아아리스 14권에서 계속> 아이리스 2부 14권 Story 32 적색 산맥 적색 산맥. 자이나레스 대륙 서쪽에 위치한 산맥으로 대륙을 둘로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적색 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잊혀진 엘프의 숲이고, 동쪽은 인간들의 대륙이다. 적색 산맥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영지다. 크로니스는 자신의 영지에 인간들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만약 적색 산맥의 험준함과 그곳에서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진작 군대를 이끌고 적색 산맥을 넘어 엘프의 숲으로 진격해 갔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적색 산맥을 넘을 수 없지만, 엘프는 적색 산맥을 넘을 수 있다. 엘프들만이 아는 통행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색 산맥에 사는 몬스터들은 크로니스의 영향을 받아 인간에 대햐서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만, 엘프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래서 엘프의 숲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아예 찾아볼 수가 없고, 인간들의 나라에 엘프가 나타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다. 적색 산맥에 대해 인간들이 아는 것은 이 정도일 것이다. 어차피갈수 없는 곳인 만큼 대부분의 인간들은 적색 산맥에 대해 그다지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많은 인간들은 적색 산맥을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영지이자 대륙의서쪽 끝이라는 정도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적색 산맥은 나에게 큰 의미를 지나고 있다. 적색 산맥은 내 여행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다. 난 그곳에서 이그리드가 살던 동굴이 있고, 크로니스의 레어가 있다. 다시 판타지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곳에 꼭 들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들렀지, 후후∼."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곳은 적색 산맥. 마법으로 이동해온 것이다. 루시아와 영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배낭을 맨 어린 엘프들도 열심히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여기가 적색 산맥이야?" 루시아의 물음에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영지인 적색 산맥이야. 이 쪽으로 올라가면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살던 동굴이 있어" "정말? 나 거기 쪽 가보고 싶어." 루시아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아이리스 왕국의 국부(國父)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그가 키에티트 국왕과 함께 일구어 놓은 업적 덕분에 아이리스 왕국은 대륙의 여섯 강국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이그리드는 루미아드 공주와 결혼은 했다. 그러니 루시아의 입장에서는 먼친척이 되는 셈이다. 정확한 촌수로 따지자면‥‥‥ 으음, 대충 넘어가자. 촌수의 세계는 복잡하고 오묘하기 그지없으니. 영아는 아까부터 실실 웃고 있었다. 난 영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 오빠의 모험이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에 간다고 생각하니 기쁜가 보구나." "무슨 소리야? 이제 곧 크로니스 오빠를 만난다고 생각해서 기쁜건데." "‥‥‥" 어이, 앞짱구걸. 가끔은 사촌오빠한테도 관심 좀 가져주지? "어쨌든 올라가자." 난 루시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우리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엇다. 쿵!쿵! 갑자기 들려오는 발소리. 인간의 발소리 치고는 너무 크다. 게다가 땅에서 진동까지 느껴진다. "땅이 흔들려요, 오빠." "루비 무서워요." "누나는 제가 지켜줄게요." 어린 엘프들은 우리에게 찰싹 당아붙었다. 난 루시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루시아. 내가 널 지켜줄게." 영아는 나에게 앵겨붙으며 말했다. "오빠, 그럼 나는?" "니 몸은 니가 알아서 지켜라." "뭐? 그러는 게 어딨어? 오빠가 그러고도 내 사촌오빠야?" "니 앞짱구로 들이 받으면 웬만한 몬스터쯤이야 아웃 오브 안중이지." "오빠 말 다 했어? 자, 잠깐!몬스터?" "응, 몬스터" 마침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냇다. 키가 3미터에 달하는 근육질의 몬스터. 그들은 거대한 전투용도끼, 일명 베틀액스를 들고 있었다. 그 몬스터는 다름 아닌 오우거.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열마리다. "까아!" 영아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나를 껴안았고, 루시아 역시 두려운지 나에게 몸을 기댔다. 오우거 한 마리는 기사 열 명이 달라붙어도 상대하기 힘들다. 오우거 열마리라면 기사단 전부가 달려들어도 힘이 부필것이다. 즉, 평범한 여행자가 오우거 열마리와 조우한다면 그냥 죽었다고 복창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여행자가 아니다. 나는 8클래스를 마스터 한 전설의 영웅 아이언스 히로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오우거 열 마리 정도는 식후 운동감도 안 된다. 내가 여행을 떠난 첫날밤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갑자기 오우거 열 마리가 나타나 나를 다구리 놓으려고 했다. 당시 나는 마법 사용에 미숙해 오우거들에게 죽을 뻔했다. 그때 살아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아마 크로니스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일로 인해 처음 크로니스와 만나게 되엇군. 어쨌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때는 당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놈들 쯤이야 마법 한방으로 가볍게 해치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럼 폼이 안 난다. 적을 상해하는데 있어서 폼이 뭐그리 중요하냐? ‥‥‥라고 생각하는 사함도 있겠지만,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루시아 앞인 만큼 온갖 폼을 다 잡으며 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우엥∼ 라이는 무서워요오." "으앙∼ 우비도 무서워요오." "저, 저도 무서운 것 같이요." "뭐해, 오빠? 빨리 안 무찔러?" 두려움에 벌벌 떠는 어린 엘프들과 영아. 뭐, 다른 것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라이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8클래스 마법사가 오우거를 두려워하다니. 얘 상아탑 주인 맞아? 뭐, 잘된 일이다. 라이가 가만히 있어주면 내가 더욱 돋보이게 될 테니. 난 짐직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루시아 널 위해서라면 난 목숨도 아깝지 않아!" 그러자 어린 엘프들이 일제히 합창했다. "우리를 위해서는요오∼?" "." 이런상황에서까지 끼어들기냐? "물론 우리 라이, 루, 루비도 마판가지지.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이오빠는 이 한 목숨 초개와도 같이 버릴 수 있단다." "오빠 나는? 날 위해서는?" "‥‥‥." 앞짱구는 또 왜 끼어드냐? 하여간 이것들이 잇으니 될 일도 안 된다. 루시아와 단 둘이 있었으면 분위기가 제대로 상앗을 텐데. 난 오우거들을 보며 소리쳤다. "감히 나의 루시아에게 접근하다니! 네놈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본좌의 청룡도법을‥‥‥ 어라? 청룡도가 어디있지?" 청룡도 일명 라이트닝 블레이드. 판타지 세계에 있을 때는 나름대로 멋지게 차고 다녔지만, 원래 세계로 돌아간 뒤에는 침대 밑에 처박아두엇다. 하도 등장을 안하다보니 '정룡도 왜 안 나와요?' , '청룡도는 어디다 갖다 버렸나요?' , '레드 드레곤 에어에 반품햇나요?' 등의 독자 항의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판타지 세계로 나오면서 들고 왔다(침대 밑에 있는 거 찾느라 고생했다). 그런데 왜 내 허리에 없는거지? "‥‥‥" 아차! 생각해보니 마법 주머니 속에 쑤쎠 박아놓았군. 루시아는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법 주머니를 뒤적거려 청룡도를 꺼내주었다. "여기있어." "으응. 고마워, 루시아." 아아∼ 쪽팔려라. 간만에 폼 좀 잡아 보려 했거늘 이게 무슨 개쪽이란 말인가? 어쨌든 청룡도를 손에 쥔 나는 다시 폼을 잡았다. "자, 와라! 빅장 40단 콤보‥‥‥가 아니라 청룡도법을 보여주겠다!" 나는 그렇게 외치며 청룡도를 뽑아들었다. 스르릉!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청룡도의 시퍼런 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오우거들이 왜 저렇게 가만히 서 있는 걸까? 적색 산맥의 몬스터들은 크로니스의 영향을 받아 인간에게 적새심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을 보기만 하면 앞뒤 재지 않고 공격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앞에 나타난 오우거들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조금도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그것도 모자라몸을 돌리고 왓던 길로 되돌아갔다. "‥‥‥." 뭐야? 니들 그냥 가는 거야? 그냥 가면 어떡해, 임마! 돌아와! 오우거들이 아무 일 없이 돌아가자 괜히 나 혼자서 칼 뽑아들고 설친 셈이 되엇다. 아아∼ 뻘쭘함이 온몸을 휘감는다. "칼 들고 뭐해, 오빠?" "흠흠, 나의 위용에 놀라 모두들 모망갔나 보군. 오우거들도 보는 눈이 재법 잇는 걸. 하긴 눈이 있으면 어찌 감히 위대한 이이언스 히로에게 덤빌 수 있겠어? 아하하하∼!" 난 뻘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써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아와 영아는 그런 나를 불쌍하다는 눈길로 쳐다보앗다. 하지만 어린 엘프들은 달랐다. 어린 엘프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소리쳤다. "대단해요, 오빠!" "최고에요, 오빠!" "형 대따 멋있어요!" "오빠가 루비를 위해 몬스터들을 무찌르다니! 루비는 막막 감동 했어요." "아니야, 루비야. 오빠는 라이를 위해 몬스터들을 무찌른 거야." "무슨 말이야, 라이야? 오빠는 루비를 더 좋아하는게 틀림없어. 그죠, 오빠?" "아니죠, 오빠? 오빠는 라이를 더 좋아하죠? 그래서 라이를 위해 몬스터들을 무찌른 거죠" "라이보다 루비가 더 좋죠? 그래서 루비를 위해 그런 거죠? 빨리 루비가 더 좋다고 말해주세요, 오빠." 라이와 루비는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신경전을 벌였다. 귀여운 것들. 과연 내 여성팬 1호, 2호답다. 난 청룡도를 집어넣고 라이와 루비를 껴안았다. "오빠는 라이와 루비를 위해 무찔러준 거야. 오빠는 우리 라이와 루비를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드래곤도요?" "물론이지. 인디가 이 오빠한테 당하는 거 니들도 봤잖아. 드래곤쯤이야 오빠한테 걸리면 한 방이지." 이 말을 카이네이드가 들엇으면 피떡이 될 때까지 나를 팼을 것이다. 물론 카이네이드가 없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판타지 세계에서 한국으로 건너간 사람(더하기 이종족) 중에 에스카네스와 카이네이드만 다시 안 돌아왓다. 이 둘은 현재 대한민국 서울의 양대 폭력조직이라 할 수 있는 청룡파와 옥룡파의 두목이다. 요즘 들어 도 조직의 세력다툼이 심한지 뉴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 둘이 우리가 판타지 세계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나 알고 잇을지 모르겠네. "그런데 저건 무슨 몬스터야, 오빠?" "으응. 오우거라는 몬스터란다. 웬만한 기가 열 명이 달려들어도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지. 뭐 이 오빠에게 걸리면 한 방이지만." "그런데 왜 그냥 물러간거야?" "그야 당연 이 오빠의 위대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헛소리 하지 말고" "‥‥‥" 헛소리해서 미안라구나 그나저나 오우거가 왜 그냥 물러났을까? 내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미개한(오우거는 지능이 상당히 떨어진다) 몬스터가 한눈에 나의 위대함을 알아볼 수는 없눈 노릇. 그렇다면 오우거가 순순히 물러난 다은 이유가 잇을 것이다. 그이유는 바로‥‥‥. "우리 라이와 루비가 너무 귀여워서?" "오빠!" 영아는 날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리고 루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우리 루가 너무 귀여워서 그냥 물러난 게 틀림없어." "‥‥‥" 이젠 아예 대놓고 편애하는군. 루시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크로니스와 관련이 있는것이 아닐까?" "맞아! 바로 그거야! 내가 지금 그 말을 하여고 했어!" 적색 산맥에 사는 몬스터들은 전부 크로니스의 명형을 받고 있다. 크로니스가 우리를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서 오우거들이 그냥 물러난 것이 틀림없다. 흐음, 이걸로 몬스터들의 공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건가? 여행길이 안전해지긴 하겠지만, 루시아에게 나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우리는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잘 닦여진 길은 아니지만, 걷는데 그리 불편하지는 않앗다. "얼마나 가야 돼?" "하루 정도는 가야할 거야. 다행이 길은 험하지 않으니 안심해도 돼. 몬스터들 공격도 없을 테니, 그냥 등산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응, 알았어." 루시아는 마법 주머니에서 운동화를 꺼내 갈아 신었다. 벗은 구두는 다시 마법 주머니 속에 넣엇다. "너희들도 이리와." 루시아는 아이들 신발도 등산에 편한 운동화로 갈아 신겨 주었다. 영아는 원래부터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니 갈아 신을 필요가 없엇다. 우리는 마치 산책을 하듯이 산을 올라갔다. 아아∼ 루시아와 함께 등산이라니. 감동의 눈물이 막막 흘러내리려고 한다. 루시아의 손을 붙잡고 둘만의 데이트를 즐‥‥‥겼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어느새 내 등에 루비가 탑승했다. 아까 지들끼리 가위바위보 하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헤헤∼ 루비는 오빠 등이 막막 편해요." 루비가 웃음을 짓자 라이와 루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1시간 후에 비켜줘야 해." "그 다음은 내 차례야. 다음은 라이 차례고." "‥‥‥." 누구 맘대로 차례까지 정했니? 언제부턴가 아이들을 업어주는 것에 있어서 내 의사가 무시되기 시작했다. 루시아의 무언의 허락 속에 소유권이 점점 아이들에게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도 엎히고 싶어, 오빠." "‥‥‥." 이젠 영아까지! 감히 어린 엘프들 전용인 오빠의 드에 무림승차하려 하다니! 간뎅이가 부어도 함참 부었다. "지금 니가 업힐 나이니?" "나이는 애들이 더 많잖아." "액면가 말이야! 나이로 치면 라이는 700살이 넘어!" "쳇! 루시아 언니가 업어달라고 하면 당장 좋아하고 업어줄 거면서." "‥‥‥." 그건 그렇다. 루시아를 업을 수만 있다면 이 한 몸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도 두렵지 않다. 하지만 루시아가 업어달라고 하지 않으니 그게 문제다. 급할 거 없었기에 우리는 느긋하게 산을 올라갔다. 그다지 힘들지도 않았다. 힘들어할 때마다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으니. 경사가 가파른 곳이나 절벽샅이 오르기 힘든 곳은 마법으로 날아올랐다. 플라이 마법. 이름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마법이다. 마법을 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쓴 다음이 어렵다. 중력의 영향을 받고 땅에 발을 디디며 살다가 답자기 중력의 영향이 사라지고 허공에 떠오르면 당황할 수밖에 업다. 중력의 영량이 없는 만큼 균형을 잡기도 쉽지가 않다. 게다가 허공은 물 속과는 다르게 부력도 없다. 난 루시아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허리를 잡아주었다. 어린 엘프등은 손을 파닥파닥거리며 좋아했다. 영아도 잡시 힘들어하더니 이내 균형을 잡았다. 땅에 발을 디디자 루시아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허공에 떠 있는 것이 무서웠나 보다. "이거 재밌다, 오빠. 또 하면 안 돼?" "마법이 무슨 놀이기구인 줄 아니? 마법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야. 나중에 때가 되면 다 쓸 테니까 가만히 있어." 그러고 보면 앞짱구걸‥‥‥ 생각외로 판타지 세계애 족응이 빠르다. 문화적 차이라든가 정서적 차이라든가, 뭐 그런 걸 좀 느끼면서 혼한스러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루시아와 다른 가족들도 한국 생화에 적응하느라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영아는 적응을 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는 모습이엇다. 정신세계가 특이해서 그런가? 계속해서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졌다. 산솟은 밤이 일찍 찾아온다. 그리고 해가 저물면 한 치 앞을 구분하기가 힘들어 진다.밤에 산을 오르면 다칠 위험도 있고 길을 잃을 위험도 있다. 나는 적당한 공터를 찾아 야영을 준비했다. 마침 딱 알맞은 장소가 있었다. 헬기 착륙장으로 써도 될 만큼 평평한 곳이다. 난 어린 엘프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모닥불을 만들어야 하니, 나뭇가지를 모아오려 무나." "나뭇가지요?" "캠프파이어 하려는 거예요?" "뭐, 비슷한 개념으로 보면 된단다. 날이 어두우니 셋이서 같이 움직여. 절대 떨어지면 안 돼. 아! 영아 니가 같이 가는게 좋겠다. 아이들 잘 인솔해." "응. 알았어, 오빠" "라이는 마법으로 불을 키렴. 어두우면 다치거나 길을 잃을 수고 있으니." "알았어요,오빠." 라이는 배낭에서 요술봉을 꺼냈다. "라이트!" 요술봉의 머리 부분에서 새햐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빛은 주위 수십미터를 환하게 비추었다. 이정도면 아무 문제 없을 곳이다. 나와 루시아 눈에도 잘 보일 테고. 영아는 어린 엘프들을 데리고 나뭇가지를 모으러 숲 속으로 등어갔다. 8클래스 마법사인 라이가 같이 있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와 루시아는 그사이 식사를 준비했다. 야영지를 선택하는거에 잇어서 가장 중요한 곳은 첫째가 안전한 지역이야 하는 것이고, 둘째가 물을 구할 수 있느냐다. 씻는 건 둘째 치더라도 마실물은 있어야 할 거 아닌가? 덤으로 밥 해 먹을 물도. 우리가 선택한 야영지 주위에는 물이 어뵤다. 계곡을 찾으려면 1킬로미터 이상은 가야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우리에게는 마법 주머니가 있으니. 난 마법 주머니에서 10리터짜리 물통을 꺼네들엇다. 우리가 준비를 하는 사이 영아와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잔뜩 모아왔다. 나는 야영지 한가운데에 그것을 모았다. 영아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마법으로 불붙일 거야?"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에이∼ 그게 뭐야?" "문명의 이기가 있으면 그걸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뭐하러 마법을 쓰니?" 마른 나뭇가지는 불이 잘 붙었다. 난 먼저 잔가지에 불을 붙여 점점 큰 가지로 불이 옮겨 붙게 했다. "따뜻해요, 오빠." "후후∼ 여기서 끝이 아니란다." 난 받침을 설치하도 그 위에 돌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기를 꺼냈다. "그게 뭐예요, 오빠?" "제주 흑돼지 삼겹살이란다. 얼리지 않은 생삼겹살이야. 우리 라이랑 루랑 루비 먹이려고 오빠가 준비해 왔지." "와아∼!" 짝짝짝! 감탄하며 박수 치는 어린 엘프 일동. 박수를 치는 아이들의 입가에는 어느새 침이 플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돌판 위에 고기를 올려놓았다. 마늘과 양파도 올려놓았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난 적가락질을 하려는 엘프들에게 말했다. "안돼. 소고기는 좀 덜 익혀서 먹어도 되지만, 돼지고기는 반드시 익혀서 먹어야 돼. 너희들 배고픈 것은 알지만 다 익을 때까지만 참아." 고기가 익는 동안 나는 기름장과 쌈장을 꺼내놓고, 상추랑 깻잎도 꺼내놓았다. 그리고 고기와 함께 먹으라고 묵은 김치도 꺼냈다. 루시아는 익은 고기를 접시에 덜어주었다. 그러자 어린 엘프들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맛잇니?" 끄덕끄덕. 입 안 가득 든 음식 때문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어린 엘프 일동. 아이들이 복스럽게 멋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쁘다. 몬스터 가득한 적색 산맥 한복판에서 삼겹살 파티를 벌일 거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너희들 식성을 생각해 고기도 넉넉히 준비해왔으니 걱정하지마렴." 처음에는 걸신들린 듯 먹던 아이들은 어느 정도 배고픔이 가셨는지 이제 상푸에 양파와 마늘과 함께 고기를 싸먹기 시작했다. 삼겹상은 기름기가 많아 느끼하니, 야채와 함께 먹을 필요가 있다. 특히 마늘, 양파, 상추, 깻잎 등과 궁합이 잘 맞는다. 묵은 김치에 싸먹어도 제법 맛있다. 준배해온 고기가 어느새 다 떨어졌다. 나름대로 많이 준비해왔다고 생각했거늘‥‥‥. 어린 엘프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밥 볶아주세요오∼!" "‥‥‥." 그래. 니들이 왜 그 말 안 하나 했다. 나와 루시아는 몇 점 남겨둔 삼겹살을 자르고, 깻잎과 김치, 김 등을 잘라 널어 밥과 함께 볶았다. 어린 엘프들은 밥까지 몽땅 입에 밀어 넣었다. "여기서 이렇게 삼겹살 구어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 오빠." 영아의 말대로 확실히 운치가 있긴하다. 이런 거야 말로 야영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어린 엘프들은 배가 부프자 졸린지 눈을 감았다. 루시아는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씻겨주엇다. "졸려요오." "안 돼. 아무리 졸려도 이는 꼭 닦고 자야 돼." 난 그사이 모포를 꺼내 바닥에 깔았다. 두툼하고 폭신하고 따듯한 모포다. 이안에 몸을 집어넣고 자면 잠이 송송 올 것이다. 이를 다 닦인 루시아는 아이들을 잠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파자마를 입은 어린 엘프들은 모포 속으로 쏘옥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내가 불침번 설 테니까 다들 자." 밤이 싶어지면 기온이 내려가기 때문에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한다.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에도 대비해야 한다. 루시아와 영아는 나를 믿고 모포 속에 몸을 집어넣었다. 나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잔가지를 좀더 주웠다.하지만 내일 새벽까지 불을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은 나무 하나를 골라 청룡도로 잘랐다. 날이 워낙 잘 들다보니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자를 수 있었다. "으음,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난 모닥불 옆에 걸터앉았다. 어린 엘프들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영아 역시 깊게 잠들어 있었다. 루시아는 눈을 감은 채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씨가 남아있는 나뭇기지로 불을 붙였다. "후후∼." 간만에 피는 담배여서 그런지 참 맛있다. 그나저나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일루니아 여사님은 몸조리 잘하고 계실까? 라이레얼은 잘 지내고 있을까? 라이코스는 아직 살아 있을까? 지니는 아이리스 왕궁에서 결혼식 준비를 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조만간 세레나와 반데라스도 볼 수 있겠군. "아! 그러고 보니 지금쯥 출산했겠구나." 저번에 왔을 때 3개월째라고 했으니, 지금쯤 출산하고도 남았다. 세레나와 반데라스를 닮았으면 엄청 예쁘겠지? 남자아이일까, 여자아이일까? 왕위를 계승해야하니 기왕이면 남자아이가 좋을 것이다. 생각을 하는 사이 담배가 다 타올랐다. 난 꽁초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다. 그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루시아가 몸을 일르키고 있었다. 루시아는 모포 옆에 벗어놓은 신발을 신고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그냥‥‥‥." "이상한 생각?" "‥‥‥이상한 생각‥‥‥ 헉! 그럴 리가! 날 어떻게 보고 그헌 말을‥‥‥." "짐승." "‥‥‥." 할 말 없다. 잠자는 루시아를 덮치려고까지 했었으니, 더 이상 무슨 병명을 할 수 있겟는가? 루시아는 내 옆에 앉았다.그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별이 참 많다." "으응, 그러네." 새까만 하늘에는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박혀 있었다. 서울의 하늘과는 전혀 다르다. 요즘 서울에서는 별 한두 개 보기도 힘들다. 서울 하늘에 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매연 등으로 인한 공기 오염이 별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내가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을 처음으로 본 것은 어렸을때 어느 섬에서였다.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별들과 함께 은하수를 보았다. 별가루들이 검은 하늘에 흩뿌려진 듯한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후에는 그헌 밤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 밤하늘을 두 번째로 본것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그 밤하늘을 보고있다. 루시아와 함께 "아름답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눈이 촉촉히 젖어들었다. 루시아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모습이였다. 난 그 모습에 이끌려 입을 열었다. "니가 더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나온 말. 루시아는 생긋 웃었다. "고마워." 난 괜히 쑥쓰러워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루시아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잠깐만 이러고 있을께." "으응." 감깐이 아니라 평생 동안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 나는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안 자도 괜찮아?" "충분히 잤어." "왜? 내가 자면 저번처럼 덮치려고?" "헉! 그, 그렇리가! 나, 난 다만 내일 피곤할까봐‥‥‥." "난 괜찮아." "그렇다면야 뭐‥‥‥." 루시아는 나에게 더욱 몸을 기대왔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루시아의 숨소리가 점점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난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잘 자요, 나의 공주님." 밤이 지나 새벽이 되었다. 어렴풋한 안개가 야영지 주위에 깔렸다. 어린 엘프들은 추운지 몸을 웅크렸다. 난 계속해서 장작을 모닥불에 집어넣었다. "으음……." 루시아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떴다. 루시아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지개를 크게 켰다. 몸을 뒤로 젖히니 가슴이 두드러져 보인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루시아의 가슴으로 향했다. 으음, 아침부터 어째 자극적이군. 루시아는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밤새 그대로 있어준 거야?" "응." "어깨 안 아파?" "괜찮아." "그래? 아프다고 하면 주물러주려고 했는데." "정말? 사실은 좀 아픈데." "이미 늦었어." "헉!" 루시아는 말과는 달리 내 뒤로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시원해?" "응응. 막막 시원해." 루시아는 정성스럽게 내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솜씨는 서툴렀지만 루시아의 마음을 잘 알기에 너무 고마웠다. "오빠 벌써 일어났어?" 영아는 잠에서 깼는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루시아는 깜짝 놀라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아이씨! 쟤는 좀더 잘 것이지 왜 벌써 일어나고 난리야? 난 앞짱구걸을 원망스런 눈길로 노려보았다. "이 오빠 불침번 섰다." "아 루시아 언니도 일어났네." 영아가 깨어나는 바람에 산통 다 깨졌다. 나와 루시아는 어린 엘프들이 깨기전에 아침을 준비했다. 가볍게 아침을 먹은 우리들은 다시금 산을 올랐다. 점심때쯤이 되서야 우리는 이그리드가 살던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굴은 절벽의 중간지점에 있었다. 결계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어찌 이곳을 잊을 수 있겠는가? "저기야. 바로 저기가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살던 동굴이야." 루시아는 내가 가리킨 지점을 자세히 보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마법 결계가 처져 있어서 그래." "라이는 마법 결계인지 모르겠어요, 오빠."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저건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만든 결계여서 그래. 드래곤 정도는 돼야 결계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걸." "오빠는 어떻게 알았어요?" "이 오빠야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전인 아니겠니? 후후후~." 우리는 다시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먼저 올라가 결계를 해지했다. 모두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동굴 입구에서 멈칫했다.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좀‥‥‥." 이곳이 바로 나의 모험이 처음으로 시작된 장소다. 다시 말해 시작점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이야‥‥‥.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루시아는 나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나는 이그리드에게 소환 당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이그리드가 죽은 뒤에 이곳을 떠났다. 그 후에 라이와 함께 잠깐 왔었다. 그리고 지금은 루시아와 함께 다시 왔다. 동굴 안은 어두웠다. "라이트!" "라이트!" 나는 허공에 불빛을 띄웠고, 라이는 요술봉 끝에 불빛을 만들었다. 동굴 안이 대낮처럼 환해지자 우리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아는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이그리드님이 사시던 곳이야?" "응." 이곳은 아이리스 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렇기에 루시아의 태도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내 등에 업혀있는 라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말했다. "아! 라이 이곳에 와본 적 있어요." "앗! 기억나니, 라이야?" "예. 전에 오빠랑 왔었어요." "맞았어. 우리 라이는 정말 똑똑한 엘프구나." 그때 오빠 등에 업혀서 오줌 싼 것도 기억할란가 모르겠네. 동굴 안은 미로처럼 얽혀있고 곳곳에 기관 장치와 트랩이 설치 되어 있어 잠깐만 방심해도 바닥이 꺼지고 벽에서 창이 튀어나오고 화살이 날아오고‥‥‥ 뭐, 이런 일은 없다. 이곳은 이그리드가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법 실험이나 하며 안락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 만든 곳이다. 보물을 숨겨 놓거나, 강력한 몬스터를 봉인해 놓은 던전이 아닌 만큼 입구의 결계를 빼면 특별한 위험이 없다. 그나마도 입구의 결계는 출입자들을 막기 위해 설치 된 것일 뿐이다. "여기 이그리드님의 무덤이 있다고 했지?" "응. 내가 만든 무덤이야." "거기로 안내해줄래?" "알았어." 난 루시아를 연못으로 데리고 갔다. 연못의 왼쪽 끝에는 화장실이 있고, 오른쪽 끝에는 내가 만들어 놓은 이그리드의 무덤이 있다. 나와 루시아는 그 앞에 섰다. "여기에 이그리드님이 누워계신단 말이야?" "응." 루시아는 무덤을 향해 예를 표하고 고개 숙여 묵념했다. 영아와 어린 엘프들은 묵념해야하는 분위기라 생각했는지 마찬가지로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난 슬쩍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잠시 후, 루시아는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풍덩! 풍덩! 풍덩! 어린 엘프들은 묵념이 끝나자마자 연못으로 달려가 몸을 던졌다. "꺄하하~." "꺄르르~." "헤헤~." 옷이 젖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수영을 즐기는 어린 엘프들. 그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인다. "너희둘 당장 나오지 못해!" 루시아가 소리치자 아이들은 루시아를 향해 물을 튀겼다. "꺄아! 너희들 무슨 짓이야?" "에헤헤~!" 나는 슬쩍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루시아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몸의 균형이 무너진 루시아는 연못에 빠졌다. 풍덩! 루시아는 얼굴에 묻은 물을 닦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아니, 더운 것 같아서 시원하게 해주려고." "너 정말……." 루시아가 화를 내려는 순간 어린 엘프들이 달라붙었다. "같이 놀아요, 언니." "루비는 언니랑 같이 놀고 싶어요." "전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루시아는 어쩔 수 없이 물 속에서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나와 영아는 연못가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루시아 언니 정말 너무 예쁜 것 같아."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라이레얼 언니가 더 예뻐." "……." 뭐, 객관적으로 본다면야……. 난 물을 튀기며 아이들과 놀아주는 루시아를 보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내 눈에는 루시아가 더 예뻐 보여." "헤에~ 오빠 정말로 루시아 언니에게 완전히 빠졌구나." "물론. 나야 언제나 일편단심 루시아지." 잠시 후, 루시아와 어이들이 연못 밖으로 나왔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루시아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이걸로 닦아." 루시아는 나를 한번 째려본 다음 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닦은 다음 라이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라이는 머리카락이 길기 때문에 잘 관리해야 한다. 특히나 물에 젖은 상태가 되면 무거워져 목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 "발열 마법을 쓰렴, 라이야." "예, 오빠." 라이는 발열 마법을 썼다. 흠뻑 젖은 몸과 옷이 금방 말랐다. 물기에 젖은 라이의 회색 머리카락은 다시 고양이털처럼 부드럽고 폭신해졌다. "아무리 봐도 신기해!" 영아는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마법이 없는 세계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신기할 것이다. 그나마 영아가 판타지 작가여서 이 정도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머리를 부여잡고 혼란스러워했을 것이다. 나는 일행들에게 동굴 여기저기를 소개시켜 주었다. 동굴 안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누워서 자던 침대도, 짐을 챙겨온 창고도, 식료품 저장고도, 라이와 잠시 들렀던 서재도…….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지금와서 회상을 하니 굉장히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그런 파란만장한 모험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험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라이 동생 만들어주는 것만큼 큰 모험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동굴 관광(?)을 끝마친 우리는 내가 옛날에 지냈던 방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이그리드에게 우리 세계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어. 이그리드는 평생에 걸쳐 다른 세계의 존재를 연구했고 죽기 직전에 큰 성과를 거두었지. 그성과가 바로 나고. 만약 시간이 좀더 남아있었다면 이그리드가 직접 우리 세계로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랬구나." 루시아는 이곳에 온 내내 숙연한 분위기였다. "이곳에 계신 줄 알았으면 한번 찾아왔을 텐데." "아니, 뭐 찾아올 것까지야." "나 이그리드님 꼭 뵙고 싶었단 말이야.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뵈었으면좋았을 텐데……." "비록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무덤에 인사는 드렸잖아. 분명 기뻐하고 있을 거야." "으응. 그랬으면 좋겠다." 똑똑! 갑자기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 누구지? "어린 엘프들 번호 시작!" "내가 소리치자 어린 엘프들은 순서대로 손을 들며 번호를 외쳤다. "하나!" "둘!" "셋!" "애들은셋 다 있고, 루시아는 내 옆에 있고, 영아는 루를 껴안고있고…… 그렇다면 전부 있다는 건데……." 대체 누구지? "헉! 설마 유령?" "무슨 말이야, 오빠?" "그렇잖아. 여기 들어온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그리고 우리는 여기 다 있고. 그러니 문을 두드린 것은 유령이 틀림없어.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에게 걸리는 유령이라 해도 한 방……." "크로니스 오빠 아니야? 크로니스 오빠가 적색 산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잖아." "……." 듣고 보니 그렇다. 우리 말고 여기 올 사람은 크로니스밖에 없지. 난 문을 열어주었다. 영아의 말대로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크로니스였다. "오랜만이에요, 크로니스." "예. 오랜만이에요." 크로니스는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제 레어에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지요." 루시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꺼이 초대에 응할게요." 루이 일행의 리더는 나와 루시아. 우리 둘이 허락하면 다 허락한것과 마찬가지다. "그럼 이동 마법을 쓸게요." 크로니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은 크로니스 레어 안에 있는 식당. 마침점 심시간이었기에 크로니스가 점심을 대접하기로 한 것이다. 아직 식사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엘프들은 목에 냅킨을 두르고 양손에 포그와 나이프를 든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어린 엘프들의 눈은 식탐으로 번뜩거리고 있었다. 먼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와 둥그런 빵, 샐러드가 나왔다. 그리고 이어 애플파이 해산물 파스타가 나왔다. 그렇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요리가 몇 번 나온 다음 메인 디쉬인 스테이크가나 왔다. 나와 루시아는 교양 있게 스테이크를 썰어 먹었다. 영아는 우리 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했다. 난 어린 엘프들의 스테이크를 썰어주려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 요는 없았다. 하나같이 스테이크를 두 손으로 잡고 뜯어먹고 있었 기에. "이 스테이크 막막 맛있어." "응응. 소스가 달고 고기가 부드러워." "최고급 고기를 쓴 것 같아." "……." 니네 부모가 굶기든?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아이들 부모로서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린 엘프들은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제히 빈 접시를 내밀며 소리쳤다. "스테이크 리필해주세요오~!" "……." 스테이크 리필이라는 말은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본다. 그리고 보 면 라이는 전에 피자를 리필해 먹었었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나 할까? 크로니스는 별 말 없이 스테이크를 리필(?)해 주었다. "입에 맞으시나요?" "예. 물론이에요. 맛있어요." 루시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어요." 영아도 거들었다. "이러헤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 봐요, 오빠." "……." 어이, 앞짱구걸은 입에 뭍은 소스나 좀 닦고 말하지? "이거 오빠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크로니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영아는 괜히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오빠한테 시집가는 여자는 참 좋을 것 같아요." "……."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설마 '시집가는 여자' 라는 게 앞짱구걸을 뜻하는 건 아니겠지? "와인 드시겠어요?" 크로니스의 물음에 난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 였다. "예. 주세요." 그러자 어린 엘프들도 소리쳤다. "저희도 주세요오~!" 앗!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술을 마시려하다니! "조금만 마셔야 돼. 알았지?" 뭐, 루시아가 허락한다면야……. 크로니스는 얼음물에 잠긴 와인을 꺼내들었다. 라벨이 붙어 있었 지만 뭐라고 써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와인에 대해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어쨌든 척 보아하니 고급 와인인 것 같다(드래곤이 자신의 레어에 서 대접해주는 것이니 만큼 싸구려일 리는 없을 것이다). 크로니스는 나와 루시아와 영아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 리고 어린 엘프들의 잔에도 조금씩 따라주었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스테이크를 먹었다. 레드 와인의 향기가 고기의 텁텁한 맛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이래서 고기 요리에는 레드 와인이 빠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헤헤~ 이 와인 맛있다." "응응. 루비 벌써 얼굴 빨개진 것 같아." "나도 얼굴이 후끈거려." 어린 엘프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 라이를 끌어 다가 무릎 위에 앉혔다. 볼을 만져보니 열기가 느껴진다. 난 라이 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 "우리 라이 많이 먹었어?" "예. 배불러요, 오빠." 난 라이의 배를 만져보았다. 빵빵한 걸 보니 많이 먹긴 많이 먹었 나 보다. 이렇게 먹고도 살이 안찌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하다. 루시아는 와인이 입에 맞는지 계속해서 마셨다. 루시아의 얼굴 은 어느새 빨갛게 변해있었다. "괜찮겠어?" 나의 물음에 루시아는 손을 저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그런데 이 와인 정말 맛있다. 향기도 좋고." 크로니스는 후식으로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내왔다. 어린 엘프 들과 영아는 좋아하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우리는 식사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서 일어나던 루시아는 몸을 비틀거렸다. 난 재빨리 옆에서 부축해주었다. "괜찮아." "……."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마셨는지 혼자서 걷지 못할 정도였다. 난 루시아를 부축 한 채 크로니스의 뒤를 따라갔다. 크로니스가 안내해준 방은 호텔 스위트룸 같은 곳이었다. 중앙 에 넓은 거실이 있고 그 옆에 커다란 방이 있다. 방에는 커다란 침 대가 세 개나 놓여져 있었다. "이곳을 쓰세요." "예. 고마워요, 크로니스." 난 루시아를 침대에 눕혔다. 어린 엘프들은 침대 위를 방방 뛰어 다녔다. 저러다가 스프링 다 망가지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설마 크로니스가 변상하라고 하지는 않겠지? 나와 크로니스는 마주보고 앉아 차를 마셨다. 다른 일행은 레어 스위트룸(이제부터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에서 쉬고 있었다. 난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말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요. 오우거한테 당한 저를 구해줬을 때도 이렇게 마주앉아 차를 마셨는데." 크로니스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웃음을 지었다. "그때가 첫 만남이었지요." "예. 그때 크로니스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덕분에 이렇게 친구가 되었잖아요." 지금이야 친구지만, 한때는 서로를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 만약 크로니스가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랬을 지도 모른다. 지금 크로니스의 마음은 어떨까?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도 이그리드를 사랑하고 계신가요?" 크로니스는 슬픈 눈동자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는 제가 유일하게 사랑한 존재였어요. 그리고 지금도 사 랑하고 있지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더라도 이 마음에는 변 함이 없을 것 같아요." 크로니스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웃음을 지어 보 였다. "하지만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예?" "예전에는 그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마음이 아팠어요.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그러한 감정들은 저를 견딜 수 없게 만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지금도 그를 사랑하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아요. 오히려 행복해요. 이렇게 그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는 것이." 난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크로니스가 행복하다고 말하니, 내 마음이 놓인다. 친구의 행복 은 곧 나의 행복이다. 크로니스는 날 보며 말했다. "전부 히로 덕분이에요." "아, 아니에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정말 고마워요." 크로니스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쑥쓰러 워서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희는 내일 떠날 생각인데, 크로니스는 어쩌실 거예요?" "저는 계속 이곳에 있을게요." "예. 그럼 그렇게 하세요. 아! 결혼식에는 오실 거죠?" "예. 꼭 갈게요." 크로니스를 볼 때마다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든다. 크로 니스는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해주었다. 판타지 세계와 현실 세계 의 시차를 조정해 주었으며(원래 판타지 세계의 1년은 현실 세계의 6 시간이었다. 그것을 크로니스가 인위적으로 조정해 1 대 1로 맞춘 것이 다. 판타지 세계의 1년을 현실 세계의 1년으로), 두 세계를 연결하는 마법진을 설치해주었다. 그리고 수시로 그 마법진을 작동시켜주 었다. 차원 이동 마법을 쓰는 것은 드래곤이라고 해도 힘든 일이다(마 나야 무한으로 끌어다 쓸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엄청난 정신력이 소모 된 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크로니스는 나를 위해 불평 한 번 없이 묵묵히 그 일을 해 주었다. 여기에 더해 가게 일도 열심히 도와주었다. 크로니스가 없었다 면 그렇게 단기간 내에 매출을 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 어찌 고맙고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와서 자리를 빛내주신다면 루시아가 기뻐할 거예요. 저도 마찬 가지구요.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크로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하실 필요도, 미안해하실 필요도 없으세요. 다 제가 좋아 서 하는 일인 걸요." 그래서 더욱 고맙고 미안해요. 커다란 침대가 세 개나 있었기에 우리는 나눠서 자기로 했다. 마침 인원은 딱 여섯 명. 대인(?) 하나에 소인(?) 하나면 딱 맞는다. 즉, 나, 루시아, 영아가 어린 엘프들을 하나씩 데리고 자기로 한 것이다. 나는 라이를, 루시아는 루비를, 영아는 루를 데리고 자기로 했다. 침대가 같은 방에 있으니 영아가 나와 루시아의 눈을 피해 루를 성 추행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불이 꺼진 방 안. 파자마를 입은 라이는 내 품에 안겼다. 난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라이의 길고 뽀족한 귀를 만지작거렸다. "우리 라이 자니?" "아니요, 오빠는요?" "설마 이 오빠가 자면서 우리 라이에게 자냐고 물어봤겠니?" 라이가 품에 안겨있으니 부더릅고 뽀송뽀송하고 푹신푹신하다. "헤헤~ 이렇게 오빠랑 라이랑 단 둘이 자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 겠어요." "응. 이렇게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옛날에 오빠랑 둘이서 여 기저기 여행 다녔잖아.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의 레어에도 같이 가고 그랬지. 우리 라이 기억 안 나니?" "기억나요. 로빠랑 라이는 공동운명체였어요." "응응. 우리 라이 기억하는구나. 오빠는 라이가 상아탑으로 안 돌아가고 오빠 곁에 있어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라이는 상아탑에 있는 것보다 오빠랑 언니랑 같이 있는 게 더 좋 아요. 막막 행복해요." "정말? 우리 라이는 정말로 착한 엘프구나. 오빠를 이렇게 감동 시키다니. 흑~" "헤헤~ 라이가 원래 좀 착하잖아요." "앞으로도 오빠랑 언니 말 잘 들어야 돼. 알았지?" "예. 라이는 앞으로도 오빠랑 언니 말 잘 들어서 세상에서 제일 착한 엘프가 될 거예요." "그래. 라이라면 분명 세상에서 제일 착한 엘프가 될 수 있을 거 야." 라이는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난 두 손으로 라이를 껴앉았다. 우 리는 그렇게 부둥켜안은 채 잠이 들었다. Story 33 레오즈 마을 By. Iris Lucia(ImaGiNatIon)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아침을 먹은 후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겼다. 이제는 떠나 야 할 시간이다. 빈둥빈둥 엘프들은 이곳에서 계속 빈둥빈둥거리고 싶었는지 이 불을 붙잡고 끝까지 바둥바둥거렸다. 하지만 나와 루시아는 그런 어린 엘프들을 끌어내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우리가 준비를 끝마치는 걸 본 크로니스는 나에게 물었다. "어디로 보내드릴까요?" "마을 입구까지만 보내주세요. 옛날처럼요." "예." 크로니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우리가 서있는 곳은 산 아래쪽, 저 멀리 작은 마을이 보인다. 30 분 정도만 내려가면 마을에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우리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마을을 향해 걸었다. 이번에는 루가 내 등에 업혀있었다. 내 등은 여성 전용 이거늘……. 남성 탑승 금지라고 팻말을 붙여놓든가 해야지. "앗! 마을이에요, 오빠." "그래. 나도 보고 있다." 난 감회에 젖은 눈으로 마을을 보았다. 이곳은 헤리오 왕국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레오즈 마을이다. 내가 적색 산맥을 내려와 처음 으로 들른 마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나는 지크 아저씨네 집에 잠깐 머무르게 되었다. 지크 아저씨에게 딸이 둘 있었는데 큰 딸이 니나, 작은 딸이 라나다. 이 레오즈 마을 영주의 아들 다즈는 니나에게 반해 억지 결혼을 하 려 했다. 영주라는 권력을 이용해 횡포를 부린 것이다. 사실 이런 작은 마을의 영주는 귀족이라 하기도 좀 뭐하다. 이 정 도 마을은 대부분 영주령에 속해 있어 촌장을 뽑거나 관리인을 보 내 관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레오즈 마을은 엄연한 독립 영지이다. 아마도 영주는 몰 락한 귀족 가문의 후손인 것 같았다. 손바닥만한 영지를 가진 주제에 그 손바닥만한 영지 내에서 횡포 를 부리다니! 전설의 영웅 아이언스 히로가 그런 악행을 보고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아이언스 히로는 결혼식장에 난입해 덤벼드는 기사들을 제압하고 영주와 영주의 아들을 벌했다. 그것이 전설의 영웅 아이언스 히로의 첫 행보였다. 참고로 라나는 지금 레이트 백작가(세레나의 가문)에 입양되어 세 레나의 동생으로서 예쁘게 크고 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저번 크리스마스 전이었다. 가슴도 나오고 몸매 굴곡이 드러나는 듯 제법 여자 티가 났다. 이제 정말로 몇 년 만 있으면 숙녀가 될 듯하다. 지니는 라나가 몇 년만 지나면 절세 미녀가 될 거라 예언했다. 각 종 바람둥이 스킬을 마스터 레벨까지 끌어올린 지니인 만큼여자 보는 눈은 탁월하다. 여자에 관한 지니의 말은 믿어도 좋다. 조만간 라나도 만나게 될 것이다. 라나는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을까? 하지만 나에게는 루시아가 있다. 라나가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으니 미안할 따름이다. 뭐, 아직은 어리니 자라면서 차차 생각이 바뀌겠지. 우리는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논과 밭에서는 농부들이 열심히 수확을 하는 중이었다. 가을 걷니는 이제 거의 막바지였다. 가을이 끝나면 겨울이 찾아오고, 그때가 되면 농부들은 쉬며 다음 농사를 준비할 것이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지크 아저씨네 집으로 찾아갔다. "정말 알아, 오빠?" "당연 알지. 이 오빠 기억력이 어린 엘프들 수준인 줄 아니?" "아니, 내 말은 그 사람들이 오빠를 아냐는 거지." "당연 알지. 내가 그 집 딸이 오크랑 결혼할 뻔한 걸 구해줬는데, 설마 모를 리 있겠어?" 말을 하고보니, 어째 좀 불안하다. 사람이란 원한은 기억해도 은 혜는 쉽게 잊는 법. 딸내미 구해줄 때는 고마웠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원래 화장실 들어갈 대와 나올 때의 마음은 다른 것 아니겠나? 지크 아저씨네 집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약간 색이 바 란 빨간 지붕과 아담한 정원. 집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설마 이사 간 건 아니겠지? 난 현관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쾅! 쾅! 그러자 문이 열리며 갈색머리에 살집이 푸짐한 아주머니가 모습 을 드러냈다. 방금 전까지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는지 손과 옷은 밀가루 투성이였다. "누구세요?" 아주머니는 날 보았고, 나 역시 아주머니를 보았다. 난 반가운 마 음에 말했다. "레이나 아주머니 맞으시죠?" "아!" 레이나 아주머니는 날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쩍 벌렸다. 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기억 안나세요? 저 아이언스 히로라고 하는데. 왜 그 니나 양 결혼식 때……." 그 순간, 레이나 아주머니는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니나야! 어서 나와 봐라, 니나야! 어서 나와서 누가 오셨는지 봐!"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 20대 초반의 여인이 품에 아기를 안고 나타났다. 갈색머리에 햇 볕에 그을린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나를 보 더니 깜짝 놀랐다. "마, 마법사님?" "니, 니나 양이신가요?" 레이나 아주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나와 일행을 반겼다. 니나 역 시 매우 기뻐했다. 지크 아저씨와 니나의 남편은 논에서 추수를 하 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괜찮다고 했지만, 레이나 아주머니는 그들 을 부르러 논으로 뛰어갔다. 니나는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들에게 음료를 내주었다. 니나의 품에는 여전히 아기가 안겨 있었다. 니나는 3년 전에 결혼을 했다 고 한다. 아이는 남자아이로 작년에 태어났다. 니나의 남편은 동갑내기이자 소꿉친구로 마크라는 이름을 가졌 다. 마크는 니나에게 열렬한 구래를 했고, 그에 감동받은 니나는 결 혼을 허락했다. 마크는 차남이고, 지크 아저씨는 아들이 없다. 그래 서 마크는 지크 아저씨네 집에 들어와 장인, 장모님을 모시며 살고 있다. 일종의 데릴사위인 셈이다. "그동안 힘든 일은 없었나요?" "레이트 백작가에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줘서 그다지 힘든 일은 없었어요." "흐음, 그렇군요. 레이트 백작가가 돌봐주었다면 괜찮았겠네요. 라나는 자주 찾아오나요?" "아무래도 수도까지 거리가 있으니 그렇게 자주 찾아오지는 못 해요. 하지만 1년에 두세 번씩은 꼭 들러요." "우아아앙~!"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아기가 울음을 터트렸다. 니나는 재 빨리 아기를 흔들며 달랬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아기는 저렇게 달래는 것이 아니거늘……. 각종 보스 스킬을 마스터한 내 눈엔 아기를 달래는 니나의 솜씨 가 많이 서툴러 보였다. 역시 초보 엄마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집 안 으로 들어온 사람은 얼굴에 수염이 가득 난 덩치 좋은 아저씨와 햇 볕에 그을린 피부가 인상적인 젊은 청년이었다. "지크 아저씨!" 얼굴에 수염이 가득 난 덩치 좋은 아저씨는 다름 아닌 지크 아저 씨였다. 옆에 있는 청년은 아무래도 니나의 남편인 것 같았다. 즉, 지크 아저씨의 사위. 잠시 후, 레이나 아주머니도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같 이 출발했는데 걸음이 느려 늦게 도착한 것 같았다. 지크 아저씨는 날 보더니 놀라며 말했다. "저, 정말 자네인가?" "저 기억하시나요?" "당연 기억하지. 내 어찌 자네를 잊을 수 있겠나? 마누라가 와서 말했을 때만 해도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정말 자네 맞나?" "예. 저 맞아요. 마법사 히로." 지크 아저씨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지나가던 길에 생각나서 한번 들러봤어요. 폐가 된 건 아니겠지 요?" "폐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자네는 우리 가족…… 아니, 이 마을의 은인이네." "하하~ 뭐, 마을의 은인까지야…… 기왕이면 세계의 은인이라 고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번 띄워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것이 아이언스 히로 의 특성이다. 나를 질타하는 따가운 시선이 뒤에서 쏟아졌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아! 내 정신 좀 봐! 소개하는 걸 깜빡했군. 이쪽은 내 첫째 사위 마크네. 니나의 남편이지." "예. 방금 얘기 들었어요." "이쪽은 영주의 아들과 억지로 결혼할 뻔한 니나를 구해준 은인 이네. 어서 인사드려." 지크 아저씨가 등을 떠밀자 마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니나를 구해주신 것에 대해 뭐라고 감 사의 인사를 드려야할지……." "뭐,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원래 불의를 보면 참지 못 하는 성격인지라." "아닙니다. 말은 쉽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 것을 잘 압니다. 히로님은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아하하~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니 쑥스럽네요." 난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잘 들었지? 나보고 진정한 영웅이래. 우헤헤…… 끄악!" 루시아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좀 해. 부끄럽게 무슨 짓이야?" "아, 알았어, 루시아. 이제부터 자중할게. 제, 제발 이것 좀……." 루시아는 그제야 내 옆구리를 놓아주었다. 난 눈물을 찔끔거리 며 옆구리를 문질렀다. 불쌍한 내 옆구리. 어쩌다가 주인을 잘못 만나 하루가 멀다 하고 꼬집히는 신세가 되었구나. "이쪽 분들은……?" 지크 아저씨가 내 일행을 가리켰다. 난 하나하나 소개시켜주었다. "이쪽은 제 사촌여동생이구요, 이쪽은 제가 기르고 있는 어린 엘 프들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제 아내……." 찌릿! "……는 아니고, 그냥 애인입니다. 흠흠." 너무해, 루시아. 노려 볼 것까지는 없잖아, 남들 눈에는 우리도 충분히 부부로 보일 텐데……. 난 지크 아저씨에게서 좀더 자세한 마을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내에게 당한 영주 일가는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구겼다. 라 나가 레이트 백작가의 양녀로 들어간 다음에는 레이트 백작가가 무서워 더 이상 횡포를 부리지 못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한 영주 일가는 재산을 처분하고 마을을 떠났다. "그럼 마을은 누가 관리하고 있나요?" "마을 사람들끼리 모여 자치회를 만들고 촌장을 뽑았네." "촌장이 누군데요?" "흠흠." 내 질문에 지크 아저씨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이런 태도를 보이 는 걸 보니 누가 촌장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아저씨가 촌장이에요?" "흠흠, 그렇게 됬네. 나는 하기 싫다고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전 부 나를 뽑은 바람에……." "……." 상당히 정치인스런 멘트로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일수록 선거 때 목숨 걸기 마련이다. "아무튼 영주 일가가 사라졌다니 다행이네요." "그렇지. 그 후로 농사도 잘 되고 세금도 줄어서 모두가 기뻐하 고 있네. 전부 자네 덕분이야." "아하하~ 전부 제 덕분이긴 하죠…… 가 아니라, 모두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지요." 난 루시아의 눈치를 보며 재빨리 말을 바꿨다. 내 말을 들은 지크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전부 자네 덕분이야. 모든 마을 사람들이 자네를 칭송 하고 있네. 자네가 떠난 후에 놀라운 소문이 계속 들려오더군." "무슨 소문이요?" "자네가 아이리스 왕국의 공작이 되었다는 소식과 대마법사 아 이언스 이그리드님의 후계자라는 소식 등등. 그 드래곤 사건은 좀 안 됐지만 말이야." "……." 드래곤 사건. 다름 아닌 내가 크로니스와 싸울 뻔하다가 안싸운 사건을 말한 다. 당시 나는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 우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나에게 감명 받은 수 많은 용사와 기사들 이 내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자이나레스 대륙에 사는 모든 사 람들은 내가 싸움에서 이기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하여 싸움 당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계의 운명을 건 싸움이 시작 되었다. 아니, 시작될 뻔했다. 싸우기도 전에 크로니스가 정신을 차 리는 바람에 굳이 싸울 피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내 평생 그렇게 난감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드래곤과 싸울 것처럼 분위기 다 잡아노호 정작 안싸우자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나의 이미지는 전설의 용사에서 전설의 사기꾼 으로 한순간에 추락했다. 아아~ 우째 이런 일이. 뭐, 덕분에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했지만, 나는 대륙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이 대륙 내에서 나보다 욕 많이 얻어 먹은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다시 이 마을에 들러줘서 정말 고맙네." "별 말씀을." "자네의 귀환을 기념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조촐한 파티를 열 기로 했네." "예? 지금 추수 중인데 괜찮겠어요?" "추수도 이제 거의 끝나가니 괜찮네. 마을 사람들 모두 농사일에 지쳐있으니 하룻밤 신나게 놀아 피로를 풀 필요도 있지."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어린 엘프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와아! 라이는 파티 좋아요." "파티에는 마있는 음식이 많이 있을 게 틀림없어." "벌써부터 기대돼." 굳이 어린 엘프들 말이 아니더라도 마을 사람들의 성의를 거절하 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녁이 되자 마을 중앙에 위치한 공터에서 파티가 시작되었다. 이 파티를 위해 돼지를 세 마리나 잡았다. 잡힌 돼지는 내장과 털이 제거된 채 꼬챙이에 뀌어졌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그 위에 소스를 바르고 모닥불 위에 빙글빙글 돌려가며 굽기 시작했다. "와아! 바비큐다!" "루비가 제일 많이 먹을 거야." "아니야, 내가 더 많이 먹을 거야." 어린 엘프들은 모닥불 위에서 지글지글 읽어가는 통돼지를 보며 구침을 삼켰다. 집집마다 창고에 있는 맥주를 꺼내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술을 마시며 웃고 떠 들었다. 통돼지 바비큐는 칼로 익은 부위를 저며 내 접시에 담았 다. 어린 엘프들은 그 옆에 지키고 서서 고기가 한 점씩 나올 때마 다 날름 집어 먹었다. 저것들이라면 소 한마리도 문제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후후~ 역시 우리 집 엘프들은 뭔가 달라." "자자, 뭐하고 있나? 어서 마시게." 지크 아저씨는 내 손에 잔을 쥐어주며 맥주를 가득 부었다. 난 잔 에 가득 담긴 맥주를 원샷했다. 맛이 쓰고 텁텁하다. 질이 안 좋은 보리로 맥주를 담근 게 분명하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어쩔 수 없 는 일이다. 먹을 양식이 우선이고, 술은 그 다음이니. 난 그러한 사정을 잘 알기에질 나쁜 맥주일망정 맛있게 마셨다. "캬아! 좋은데요." "그래? 어디 이 맥주도 한번 마셔보게." 집집마다 맥주를 담그는 방법이 다른 만큼 맛도 조금씩 달랐다. 난 지크 아저씨가 권해주는 대로 여러 종류의 맥주를 차례대로 마 셨다. 루시아와 영아는 맥주를 조금씩 마시며 서로 재밌게 얘기를 나누 고 있었다. 영아가 뭐라고 말을 하니 루시아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 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걸까? 설마 내 욕한 건 아니겠지? 어린 엘프들은 최선을 다해 바비큐를 집어 먹고 있었다. 때문에 안주 공급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안주가 왜 안 나와?" "여기 있던 돼지 어디 갔어?"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는데, 지금은 왜 뼈밖에 없지?" 어린 엘프들의 안주발이 무섭기 무섭다. 술 마시며 노는 마을 남 자들의 시중을 드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처녀들은 어린 엘프들 때 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쫓아내면 간단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생 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복스럽게 먹는 어린 엘프들의 모습에 동네 아주머니들과 처녀들 은 넋을 잃었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있었다니! 메뚜기떼와도 같은 어린 엘프들. 저것들이 지나간 자리엔 풀 한 포기 남지 않는다. 아아~ 지금도 이 정도인데 나중에 크면 어느 정도일지…… 벌 써부터 걱정이 온몸을 휘감는다. "뭐 하고 있어? 안 마시고." "예, 마실게요. 지금 마십니다." 난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계속해서 들이마셨다. 잔은 비워 도 비워도 계속 채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몸을 가누기가 힘들 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 깨어나 보니 내 몸은 침대에 칭칭 묶여 있었다. 방문이 열리더니 지크 아저씨가 들어왔다. 지크 아저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난 깜짝 놀라 물었다. "무,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지크 아저씨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크크, 멍청한 자식. 걸려들었군." "예? 그게 무슨 말……?" "나는 사실 자바스 정보부에 소속되어 있다. 자바스에서는 네 목 을 가져오면 큰 상금을 준다고 했지." "마, 말도 안 돼!" "크크크, 마을 사람들도 전부 한패다. 네 놈의 목을 들고 자바스 로 가면 우리는 귀족이 되어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 난 재빨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무슨 재질로 되어있는지는 몰라 도 사슬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힘으로 이 사슬을 끊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마법을 쓰려했다. 하지만 몸속의 마나 가 움직이지 않았다. "크크크, 네놈의 마나는 이미 봉인했다. 너는 이제 마법을 쓸 수 없어." "헉! 어떻게……?" 나는 8클래스 마스터. 내 마나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가 마법을 쓰거나, 그 마법사가 만든 마법 물품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보다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는 드래곤밖에 없 다. 그렇다면 드래곤이 날 죽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건가? "자, 잠깐. 그럼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은? 앞짱구는?" "크크크, 시간을 끌려는 모양인데 소용없다. 죽어라!" "안 돼애애애!" ……여기까지가 내 꿈이었다. 설마 이걸 진짜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겠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다. 난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우드득! 잠을 이상한 자세로 잤는지 몸속의 뼈가 비명을 지른다. 뼈와 살 이 분리되는 고통에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나는 짚을 채워 넣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눈이 제대로 안 떠 졌는지 눈 앞이 뿌옇게 보였다. 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으윽!" 안 그래도 아픈 머리를 흔들기까지 하니 뇌가 곤죽이 되는 것 같 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데 방문 열리는 소 리가 들렸다. "깨어났어?" "아! 라시아!"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루시아. "여기는 어디야?" "지크 아저씨네 집. 어젯밤 일 기억 안 나?" "응. 술 마시던 도중에 필름이 끊겼어. 별 다른 실수는 안 했지?" "술에 잔뜩 취해 웃통 벗고 춤춘 것 빼고는 괜찮아. 그리고 쓰러 진 너를 일으켜 세우던 어떤 아주머니 치마에 토한 거랑, 집으로 오 는 길에 논에 대고 노상방뇨한 거랑……." "스톱! 거기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전설의 영웅 아이언 스 히로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아아~ 부끄럽도다. "그러게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 "나도 적당히 마시려고 했는데 분위기상 발을 뺄 수가 없었어." "됐으니까 이거나 마셔. 레이나 아주머니께 말해 얻어온 거야." 루시아는 컵을 내밀었다. 받아서 마셔보니 꿀물이다. 달짝지근 한 꿀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니 갈증도 해소되고 두통도 좀 나 아지는 것 같다. "고마워." 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오늘 출발할 거야?" "응. 아침만 먹고 바로 출발하자." "그래." 아침 식사가 끝나자 나는 이만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 자 지크 아저씨네 가족들은 깜짝 놀라며 말렸다. "아니, 벌써 떠난다니!" "겨우 하룻밤 자고 떠나시면 우리가 섭섭해요." "마법사님께 제대로 대접도 못해드렸는데……." "제 아내를 구해주신 은인을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아아앙~!" 우리가 떠나는 것이 서운한지 아기까지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사정을 설명했지만 지크 아저씨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한참의 설 전이 오간 끝에 점심까지 먹고 출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점심은 진수성찬이었다. 레이나 아주머니와 니나는 물론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동원해 식탁을 차렸다. 덕분에 신난 것은 어린 엘프들이었다. "삼 일 연속 진수성찬이야." "응응. 오빠 따라 다니길 잘했어." "앞으로도 우리 형한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말자." "……." 뭐야? 설마 이제까지 먹을 것 떄문에 날 따라다닌 거야? 미군 병사가 탄 지프를 쫓아가며 '기브 미 초콜릿!' 을 외치는 것 과 비슷한 개념인가? 점심을 먹고 나자 정말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이걸 타고 가게." 문 앞에는 포장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포장마차에는 갈색 말 한 마리가 매어져 있었다. 조금 허름해 보이는 마차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 장 보러 갈 때 쓰던 건데, 내 자네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 네." "예? 아니, 그렇게 귀한 걸……." "괜찮네. 우리야 또 만들면 되네." 어쩐지 점심 식사 하는 내내 안 보인다 했더니, 이걸 구하기 위해 서였나 보다. 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귀한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저희는 그냥 떠나겠습니 다." "어허! 그 무슨 섭섭한 소리를! 그러지 말고 타고 가게." "아닙니다. 넣어두세요." "이 마차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너무 죄송스러워서……." "그럼 그냥 타고 가게." "……." 거절했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은 분위기다. 난 어쩔 수 없이 마 차를 받았다. 영아와 어린 엘프들은 포장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루시아는 마부석에 걸터앉았다. 난 루시아 옆에 앉아 고삐를 잡았 다. 그리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떠나는 우리를 마을 사람들이 배웅해주었다. "나중에 또 들르게! 기다리고 있겠네!" "꼭 오셔야 해요, 마법사님!" "다음에는 더 잘 대접해드리겠습니다!" Story 34 마차여행. 수도로 향하는 길에는 산이 위치하고 있다. 그렇게 높은 산은 아 니지만 그렇다고 낮은 산도 아니다. 다행히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잘 닦여 있었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데 별 불편은 없었다. 덜커덩! 덜커덩! "이 마차 왜 이렇게 흔들려? 운전 좀 똑바로 해, 오빠!" "시끄러, 이 앞짱구야! 이건 내 운전 미숙 떄문이 아니라 길과 마 차의 특성 때문이야!" 아무리 잘 닦여있어도 산에 난 길이 울퉁불퉁한 것은 당연하다. 더 이상 뭘 바라는가? 그리고 이 마차는 완충 스프링 같은 것이 전혀 달려있지 않다. 즉, 충격이 분산되지 못하고 그대로 전달된다. 그러니 조그만 충격 에도 마차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뭐, 내 운전이 좀 미숙한 것도 사실이다. 마차를 몰아본 경험이 몇 번 없는 관계로……. "아무튼 잘 좀 몰아. 나 작업하는 데 방해된단 말이야." "작업?" 설마 앞짱구걸이 또 루한테 작업을 거는 건가? 난 고개를 돌려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영아는 마차 한쪽에 쪼그 려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 저 노트북은 언제 챙겨왔을까? 나 몰래 마법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나? "담당 편집자와 마감을 개코로 아는 앞짱구걸이 여행 와서까지 글을 쓰다니. 누가 보면 성실 작가인 줄 알겠구나." "판타지 세계에 왔기 때문인지 아이미스의 스토리가 마구마구 떠오르는 걸 어떡해? 빨리 글로 옮기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단 말이야." "평소에나 그렇게 열심히 쓸 것이지." 갑자기 평소에는 지지라도 공부 안 하던 놈이 수학여행 가서 남 들 다 놀 때 혼자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게 나였다……는 아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정말로 그런 놈이 있었다. 참고로 그놈의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덜커덩! 덜커덩! "내가 몰게."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루시아는 내 손에서 고삐를 빼 앗았다. 앗! 공주님인 루시아가 직업 마차를 몰겠다니! ……라지만, 루시아가 나보다 훨씬 잘 몰았다. 영아는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도 이를 악 물고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고 보니 영아는 마감을 째고 이곳으로 도망쳤다. 정말 다행 인 것은 판타지 세계까지는 편집자가 못 쫓아온다는 것이다. "……." 아니, 최모 편집자님이라면 어째 쫓아올 것 같은 느낌이……. 뭐, 그럴 리는 없을 거다. 차원 이동 마법진은 드래곤 아니면 작동시킬 수 없으니. 어린 엘프들은 마차에 누워 자고 있었다. 흔들림이 심한 마차 속 에서도 잘 잔다. 어느곳에서나 잘 수 있는 스킬은 빈둥빈둥 엘프들 에게 있어서 필수 스킬이나 다름없다. 루시아가 마차를 모니 흔들림이 한결 줄어들었다. 갈색 말은 짐 마링ㄴ지 힘이 제법 좋고 사람 말을 잘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말 타본 지도 꽤 오래 됐다. 안 타본 사람들은 잘 모 를 테지만, 말 타는 거 상당히 재밌다. 취미로라도 한번쯤 배워볼 만하다. "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야? 마법으로 이동해도 되잖아." 루시아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물론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너도 봤다시피 이 포장마차를 막무가내로 떠넘겼잖아. 상황이 그러하니 마법으로 이동하겠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그리고 마법으로만 이동하면 재미없 잖아. 이렇게 여행하는 게 제법 운치 있고 좋지 않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응." 밤이 되기 전에 산을 다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가 떨어지 자 우리는 야영을 준비했다. 저번에 마찬가지로 영아와 어린 엘프 들이 나뭇가지를 모아오고 나는 루시아와 식사 준비를 했다. 저녁 메뉴는 조개 구이. 조개 역시 마법 주머니 속에 잔뜩 넣어 가지고 왔다. 여행 도중 먹는 음식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까다로운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부피가 작아야 하고, 가벼워야 하고, 오래 돼도 쉽게 상하지 않아야 하고, 조리가 간편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왜냐하면 우리에 게는 드래곤이 만들어 준 마법 주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부피, 무게, 유통기한에 제약이 없다. 조리도구를 잔뜩 넣어가지고 다 닐 수 있기 때문에 조리 역시 걱정 없다. 사실 이 정도면 야영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뭐, 대 마법사가 둘 (나와 라이)이나 껴있는 파티이니. 기왕 이렇게 된 거 던전이라도 털러 가볼까? "와아! 조개 구이다!" "응응. 루비는 조개 막막 좋아." "벌써부터 군침이 돌아." "……." 니들이 안 좋아하는 음식이 있기나 하니? 강아지 고기랑 멍멍이탕도 잘만 먹더라. 먼저 식사를 끝마친 나는 포장마차 안에 모포를 깔았다. 일행들 은 그곳에서 잤고, 나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불침번을 섰다. * * * * 마차 여행은 순조로웠다. 별 다른 문제가 없으니 심심할 정도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마차는 느긋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영아는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장면도 빼놓지 않고봐두 려는 듯한 모습. "그만 좀 둘러봐라. 질리지도 않니?" "응. 안 질려. 내 평생 언제 또 판타지 세계에 와 보겠어? 그러니 까 지금 실컷 봐둬야지." 영아는 정신없이 둘러보는 와중에도 루를 옆에 앉혀 놓고 귀를 만지작거렸다. 길고 뾰족한 귀가 어지간히 신기한가 보다. "엘프는 왜 이렇게 예쁜지 모르곘어. 나도 엘프로 태어났으면 좋 았을 텐데." "그럼 최초의 앞짱구 엘프가 탄생하게 되겠구나." "오빠!" "농담이다. 진정하렴." "아! 빨리 라이레얼 언니 만나고 싶어. 지니 오빠도 만나고 싶고. 크로니스 오빠도 다시 보고 싶어." "라이레얼은 조만간 만나게 될 거야. 헤리오 왕궁에서 합류하기 로 했으니까. 아아~ 평화롭다. 너무 평화롭다. 루시아와 단 둘이 하는 여행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럼 신혼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난 고개를 돌려 떨거지 넷(라이,루,루비,영아)을 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에휴~" 산을 다 넘자 잘 닦인 길이 나왔다. 나는 루시아와 교대로 마차를 몰았다. 조금 지나자 작은 성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곳 여관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 다시 출발했다. 아아~ 너무 평화로우니 내가 할 일이 없구나. 산적이라도 한 번 나타날 줄 알았거늘……. 이렇게 길이 잘 닦여 있고, 산적들이 없다는 것은 백성들이 살 만하다는 증거다. 실제로 마을이나 도시의 모습을 봐도 활기가 넘 쳤다. 반데라스가 정치를 잘 하고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세레나의 내조가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흐음, 역시 여자의 내조가 중요하다는 건가?" "무슨 말이야?" "아,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개인적으로 나도 내조 좀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루시아가 내조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가자 발타스라는 제법 큰 도시가 나왔다. 우리는 이곳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여관을 찾아보았다. "아! 저 여관 어때, 오빠? 여관 이름이 '방랑자' 야." 난 영아가 가리킨 여관을 보았다. 언젠가 한 번 본 것 같은 느낌 의 여관이었다. 우리가 여관 앞에 멈춰 서자 한 청년이 나왔다. "마차는 저한테 맡기시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래. 내일 바로 출발해야 하니 말 좀 잘 먹이고 푹 쉬게 해라." "알겠습니다, 손님." 우리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우리 일행이 워낙 눈에 띄다보니 (나와 영아는 동양인, 루시아는 절세 미녀, 어린 엘프들은 초절정 귀염둥 이) 일부러라도 모습을 숨길 필요가 있다. 한 젊은 여성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리고 물 컵을 내려놓 고, 메뉴판을 내밀며 물었다.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뭐 먹을래?" 루시아는 어린 엘프들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 그러자 어린 엘프들이 소리쳤다. "오리구이 먹고 싶어요오~!" 난 메뉴판을 도로 내밀었다. "오리구이를 메인디쉬로 나머지는 알아서 주세요." "예. 그럼 야채수프, 오리구이, 레몬파이…… 이렇게 가져다 드 리겠습니다. 술은 드시겠습니까?" "아니요. 술은 됐습니다. 그보다 큰 방 있나요?" "가장 큰 방이 5인실입니다." "예. 그럼 그걸로 하나 주세요." "예. 2층 오른쪽 끝 방입니다." 어차피 어린 엘프들은 루시아나 내가 안고 자니 상관없다. 오늘은 누구를 안고 잘까? 루비를 안고 자볼까나? 주문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급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여 급은 계산서와 펜을 손에 든 상태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얘 왜 이래?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ㅏㄴ 무슨 일인가 싶어 여급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10대 후반 정도로 보 이는 검붉은 머리카락의 여성. 느낌 탓인지 어째 낯이 좀 익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급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히, 히로오빠?" "응? 히로 오빠라니…… 헉! 설마!" 얘 왜 이래?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여급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10대 후반 정도로 보 이는 검붉은 머리카락의 여성. 느낌 탓인지 어째 낯이 좀 익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급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히, 히로오빠?" "응? 히로 오빠라니…… 헉! 설마!" (저번에 올린 내용입니다. 오타가 좀 있었던 것같아 수정해서 올립니다.) 그제야 난 여급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예전에 이 여관에 들른 적이있었다. 그때 경비대 소속 병사 두 명이 여관에서 일하는 여급을 성추행했다. 전설의 영웅 아이언 스 히로가 그런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는 청룡도를 뽑아들고 그 병사들을 벌했다. 그때 그 여급이 바로 지금 내 눈 앞에 서 있는 여인이다. 이름이 세니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에 그녀는 내 방을 안내해주며 나에게 기습 키스를 했다. 그 게 내 생에 두 번째 키스였다. "세, 세니…… 맞지?" 내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힘차게 고 개를 끄덕였다. "에. 저 세니에요, 오빠." 너무나도 다정하게 오빠라고 부르는 세니. 누가 보면 친한 줄 알겠다. 실제로 친한 줄 알았는지, 루시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루 시아는 나와 세니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누구야?" "아, 아니야, 루시아. 난 결백해." 난 일단 무조건 결백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행동은 루 시아의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세니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으응." 아아~ 루시아의 눈빛이 더욱 안 좋아진다. "오빠가 마지막에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나요." "으응?" "제가 또 올 거냐고 물으니까, 오빠가 제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인 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될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 그랬었나?" "이렇게 다시 만난 걸 보니 오빠랑 저는 인연이 있나 봐요." "그, 그렇게 되나?" 아아~ 루시아 주위에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게다가 절 기억하실 줄은…… 정말 고마워요, 오빠." "으응. 고맙긴 뭘." 아아~ 루시아가 당장이라도 이혼하자고 말할 것만 같다. "아! 내 정신 좀 봐. 금방 음식 가져다 드릴게요, 오빠." "그, 그래줄래?" 세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영아는 나를 보며 실실 웃었다. "……." 뭐니, 그 의미심장한 웃음은? "오빠는 여기저기 동생도 참 많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사 방에 동생을 만들 수 있는 거야? 오빠는 참 대단한 것 같아. 헤헤 ~." "……." 헉! 이 앞짱구가 무슨 소리를! 루시아의 주위에서 냉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루시아 옆에 앉아 있던 라이와 루비는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루시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딱딱하게 끊어 말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봐." "으응. 서, 설명할게." 난 세니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설명했다. "……그래서 내가 그 못된 병사 두 명을 무찌르고 세니를 구해주 었어. 내가 원래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잖아." 나는 설명을 끝내고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세니가 나에 게 기습 키스를 한 얘기는 뺐다. 키스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루시 아는 정말 이혼 하자고 할지도 모른다(라지만, 아직 결혼도 안 했다). 어떻게든 그 사실을 숨겨야 했다. 루시아는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그 다음은 어떻게 됬는데?" "그, 그 다음이라니? 무, 무슨 소리야, 루시아? 난 다음날 바로 떠 났어." "그럼 밤에 무슨 일이 있었어?" "헉! 아, 아니야, 루시아." "그럼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어?" "당연하지! 난 그날 밤 여기서 자지도 않았어." "그럼 어디서 잤는데?" "으음, 그러니까 그날 밤……." 난 그날 밤 왜 이 여관에서 자지 않았는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다보니 가물가물했지만, 잘 생각해 보 니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러 나왔는데…… 아! 사창가에 갔었구 나!" 잠깐. 사창가? "……." 순간, 나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 지만 이미 말은 입 밖으로 나온 뒤였다. 영아는 날 보며 소리쳤다. "정말이야, 오빠? 정말로 사창가에 갔었어?" "아, 아니야.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방금 오빠가 말했잖아. 사창가에 갔었다고. 그렇다는 것은 돈 주고 여자를 샀다는 거야? 그 다음 같이 잤고?" "아, 아니라니까." 영아는 날 보며 소리쳤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난 그래도 오빠를 믿었단 말이야! 비록 저질에, 변태에, 짐승에, 치한에, 색마에, 1년 365일 하루 24시 간을 이상한 생각으로 보내고, 심지어는 루시아 언니를 겁탈하려 고까지 한 오빠지만 사창가 같은 곳에 갈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 았어!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저, 저기…… 목소리가 너무 크지 않니?" 1층 식당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느새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 다. 하지만 영아는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루시아 언니가 불쌍해! 루시아 언니를 한 번이라도 생각했으면 그럴 수는 없는 거야!" 난 쏟ㄷ아지는 주위의 시선에 엄청난 쪽팔림을 느꼈다. "그땐 루시아 만나기 전이었어." "루시아 언니 만나기 전이었으면 돈 주고 여자랑 자도 되는 거 야?" "안 잤다니까!" "됐어! 오빠의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아!" "……그런데 왜 니가 흥분하고 난리니?" "우아아앙~." 잔뜩 흥분한 영아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울지 마세요, 누나." 루는 기특하게도 영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영아는 루를 끌어 안고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니가 울고 난리니?" 그렇다. 지 일도 아닌데 왜 지가 울고 난리란 말인가? 정작 난리 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난 슬쩍 '정작 난리 칠 사람' 을 보았다. 루시아는 아무 말 없이 차분하게 앉아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폭풍전야의 모습 같아서 나 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변명할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박모 작가 의 '마감 변명 3단 콤보' 에 필적하는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찰나 세니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나타났다. 세니는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고개를 돌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은 그날의 키스가 제 첫키스였어요." "……." 빠직! 루시아의 이마에 힘줄 마크가 나타났다. 그리고 루시아의 눈에 서 스파크가 튀었다. 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난 이제 죽었다. * * * * 애초에 이 여관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다. 아니, 그 전에 이 도시 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다. 그냥 도시를 우회했어야 했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지금 와서 후회해 봐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루시아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먹고들 있어." 굳이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어린 엘프들은 수프로 후루 룩 마시고 오리를 해체 중이었으니. 난 재빨리 일어나 루시아를 쫓아갔다. 루시아는 내가 예약한 오 른쪽 끝 방으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았다. 쾅! 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쪽 에서 걸어 잠근 것이다. 난 문을 두드렸다. 쾅쾅! "열어줘, 루시아. 전부 오해야. 내가 들어가서 다 해명할게. 제발 날 들어가게 해줘."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는 답변이 없다. 어쩔 수 없군. 문을 부스고 들어가……면 안 되려나? 변상을 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우린 오늘 밤 이 방에서 자야한 다. 그러므로 문을 부스는 일은 피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것' 뿐인가? 그것이란 다름 아닌 창문 침투다. 난 밖으로 나와 여관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갔다. 군데군데 튀어나 온 것이 많아 2층까지 올라가는 데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난 창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잠깐 내 말 좀 들어…… 응?" 안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헉헉!" "아아!" "……." 뭐야, 이 이상야릇한 거친 숨소리는? 뭐야, 이 이상야릇한 거친 숨소리는? (저번편 마지막 문장) 침대에서 거사(?)를 치르던 남녀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꺄악!" "누, 누구냐?" 너무 미안한 마음에 나는 딴청을 피웠다. "어라? 우리 방이 아니네." 그리고 창문을 도로 닫아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 계속하세요." 완벽한 나의 실수다. 여관 안에서 보면 오른쪽 끝방이지만, 여관 밖에서 보면 왼쪽 끝방이 되는 건데. 나는 왼쪽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창문을 열기 전에 먼저 안을 들여다보았다. 벽 주위에는 다섯 개의 침대에 붙어있고 가운데에는 둥근 탁자와 의자가 있다. 루시아는 왼쪽 벽에 붙어있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난 슬쩍 창문을 열었따. 창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루시아가 고개 를 들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도 돼?" "나가!" 루시아는 소리치며 배게를 던졌다. 난 깜짝 놀라 두 손으로 배게 를 막았다. "……." 잠깐. 두손으로 배게를 막아? "한 손이 아니라? 내 몸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추락 중이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물론 나에게도 날개가 없다. 하지만 대신 마법이 있다. 플라이 마 법으로 날……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내가 있던 곳은 2층이다. 마 법을 써야한다고 생각한 순간 지면은 이미 코앞이었다. "끄아악!" "……해서 그렇게 된 거야. 그때 내가 세레나를 구해낸 거고. 그 일은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다시 벽을 기어 올라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만신창 이가 된 몸으로 루시아 앞에 무릎을 꿇고 해명했다. "니가 사창가에서 세레나 왕비를 구해낸 건 나도 잘 알아. 니가 전에 말해주었으니까." "응응. 이제 내가 사창가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 믿어줄 거 지?" "믿어." "……." 다행이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루시아의 사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왜 사창가에 갔냐는 거야." "그, 그건 산책을 하다보니 실수로……." "그리고 키스는 무슨 말이야?" "그, 그건 세니가 갑자기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는 바람에……." "어쨌든 키스를 했다는 거네?" "그, 그러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도둑 키스……." "결론은 키스를 했다는 거네?" "……." 결론은 그게 아닌데……. 난 각종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이었 다. 어떠한 변명을 해도 소용없자, 난 무조건 싹싹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 루시아. 제발 한번만 용서해 줘. 다시는 안 그럴 게." 그래도 안 되자 루시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용서해주세요, 루시아 공주님. 공주님이 시키는 건 뭐든 다 하 겠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무슨 짓이야? 당장 놓지 못해?" "안 돼! 못 놔! 이혼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애들을 생각해 봐, 루시아. 우리가 이혼하면 라이, 루, 루비는 어떡해? 애들 얼굴을 봐서라도 한번만 용서해둬. 제발! 플리즈!" 애들 얘기가 나오자 루시아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팔불출 엄 마인 루시아에게 애들은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다. 난 계속해서 애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애들은 부모를 보고 배운다고 했어. 우리가 만날 싸우기만 하면 아이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모처럼만에 여행이니 우리가 아이들 을 즐겁게 해줘야할 거 아니야? 니가 계속 화내고 그러면 아이들이 크게 실망해서 라이는 상아탑으로 돌아가고 루와 루비는 엘프의 숲으로 돌아가……." "안 돼!" 루시아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우리 애들은 절대로 보내줄 수 없어! 아니, 정 애들이 돌아가겠 다고 한다면 나도 따라 갈 거야." "……." 애들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나한테 집착했으면 벌써 결혼하고도 남았다. 아아~ 나도 집착 받고 싶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안 생기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화기애 애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지." 루시아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그 사창가에서 아무 일 없었지?" "응. 정말로 아무일 없었어. 맹세할 수 있어." "실수로 간 것도 맞지?" "응응. 저녁 먹고 산책이나 할 겸 걷다가 실수로 들어가게 된 거 야. 믿어줘." "아까 그 여자애가 기습적으로 키스를 해서 꼼짝없이 당한 것도 맞고?" "응응응. 완전히 도둑 키스였다니까.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키스 도 아니야. 그냥 입술만 살짝 스쳤을 뿐이라니까." 나는 최대한 진실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 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용서해주는 거야?" "이번 한 번뿐이야." "응. 고마워, 루시아." 내가 기뻐하자 루시아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애들 때문에 용서해 준 거야." "응. 알아. 아! 배고프지? 어서 내려가서 밥 먹자." "별로 배 안 고파." "그러지 말고 가자." 난 싫다는 루시아를 억지로 1층으로 데리고 내려왔다. 난 우리가 없는 사이 어린 엘프들이 음식을 몽땅 먹어 치웠을 거라 믿어 의심 치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테이블 위에는 오리구이와 레몬파이가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손도 안 댄 것 같은 모습이다. "난 깜짝 놀라 물었다. "헉! 너희들 설마 오빠랑 언니를 위해 안 먹고 기다려 준 거야?" 그러자 어린 엘프들을 대신해 영아가 대답했다. "아니. 아까 시킨 거 다 먹은 다음 또 시킨 거야." "……." 그럼 그렇지. 한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나는 화가 풀린 루시아와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던 도중 문득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식당 가운데에 위치한 테이블에서 경비대 소속으로 보이는 네 명의 병사가 밥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음흉한 시선으로 루시아를 쳐다보았다. "저 아가씨 죽이게 생겼는데." "말이나 한번 걸어볼까?" "관둬. 옆에 있는 남자가 애인인 것 같은데." "저런 비실하게 생긴 놈이 애인이라고?" "킥킥, 혹시 알아? 침대 위에서는 힘깨나 쓸지." 그놈들은 우리보고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나를 욕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루시아까지 걸고넘어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루시아가 내 손을 붙잡았다. "됐어. 저런 사람들 신경 쓰지 마." 루시아는 일이 커지는 것이 싫은지 고개를 저었다. 난 루시아의 얼굴을 봐서 꾹 참았다. 사실 루시아는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기 가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자가 예뻐 좋지 않냐' 라고 생각한다. 물 론 미모도 하나의 능력으로 취급 받는 만큼 예쁘면 좋다. 하지만 가끔은 재앙이 되는 경우도 있다. 미모의 평민 여성이 귀 족들의 표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경우 역시 비슷하다. 만약 루시아가 아름답지 않았다면 저 런 놈들이 찝쩍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녀석들이 조용히 식사만 하고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녀석 들은 그런 나의 바람을 무시하고 건들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이, 합석 좀 해도 될까?"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턱수염이 짙게 난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 는 병사였다. 병사들은 대체적으로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대낮부터 술을 한 잔 했는지 술 냄새가 풀풀 난다. 제복을 차려입은 걸 보니 근무 중인 것 같은데, 술을 마셔도 되는 건가? 뭐, 그것까지는 내가 신경 쓸 바 아니다. "주위에 자리 많은데 골라서 앉으세요. 보시다시피 여기는 꽉 차 있어서." 내가 말하자 맨 앞에 선 병사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한테 물은 거 아니야." 그리고는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일이나 그놈을 한 대 치려고 하는 순간 루시아가 손으로 내 무릎을 눌렀다. 가만히 있 으라는 뜻이었다. 난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병사에게 말했다. "손 좀 치워주시겠어요?" 그러자그 병사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오오! 목소리도 예쁜데. 그러지 말고 우리랑 잠깐 하석하는 게 어때? 우리가 술 한 잔 살 테니까." "됐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어이, 어이. 너무 그렇게 빼지 마. 우리도 알고 보면 좋은 놈이니 까." 루시아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알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식사하는 데 방해되니까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병사 한 명이 루시아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른 병사들 을 말렸다. "그만하고 돌아가자. 좀 있으면 교대 근무 시간이야."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나 보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은 아직까지 도 정신을 못 차렸다. "딱 한 잔만 같이 하자고. 아가씨가 내 친여동생처럼 느껴져서 그래. 내가 진짜 오빠의 마음으로 술 한 잔 사고 싶어. 응?" "저는 그쪽이 친오빠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그러니 그만하고 돌 아가세요." 루시아가 계속해서 딱딱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자, 병사들의 표정 이 험해졌다. 그래도 처음에는 헌팅 비스무레하게 접근하더니, 이 젠 아예 대놓고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잠깐 말 좀 하자니까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아가씨 자꾸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어." 어떻게든 말로 해결해 보려던 루시아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 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뭘 이렇게 해?" "당신들이 저 남자를 이기면 오늘 하루 동안 당신들과 놀아줄게 요. 대신 지면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할 거에요." 병사의 물음에 루시아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른손 손목을 자르는 거에요." "뭐, 뭐?" 루시아의 물음에 병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루시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설마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저한테 접근하신 건가 요?"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지면 목을 내놓지. 내 목숨 대 손목 네 개면 그럭저럭 공평하 지 않아? 게다가 절세 미녀까지 상품으로 걸려있지. 하지만 명심 해. 너희들이 지면 무조건 손목을 자른다. 그때 가서 질질 짜봐야 소용없어. 난 한 번 한다고 했으면 하는 사람이니까. 나와 루시아의 표정을 본 녀석들은 멈칫거렸다. 오른손을 잃으면 칼을 쓸 수 없다. 직장에서도 잘리고 평생을 병신으로 살아야한다. 오른손을 건다는 것은 인생을 건다는 것과 다름없다. 과연 자신의 오른손을 걸 정도의 각오가 되어 있는 놈이 있을까? 맨 처음에 다른 병사들을 말린 병사는 이번에도 다른 병사들을 말렸다. "그만하고 가자. 싫다는 여자랑 놀아봐야 뭐 해? 빨리 가자. 좀 있으면 교대 시간이야." 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다른 병사들도 동조 했다. "가자. 저런 여자랑 놀아봐야 재미도 없어." "이런 데서 소린 피웠다가 나중에 조장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큰 일이야. 돌아가자." 두 명의 병사는 동조했지만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병사는 끝까지 객기를 부렸다. "니 목과 이 여자를 건다고 했지? 좋아. 그럼 나도 내 오른손을 걸지." "야야, 그만해." "돌아가자니까." "조장 알면 큰일 나." 다른 병사들이 말렸지만 그 병사는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소리 쳤다. "시끄러! 지금 나보고 꼬리 말고 도망치라는 거야? 내가 저런 새 끼를 무서워할 것 같아?"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싸우면 영업에 방해가 될 테니까 밖으로 나가지." "나가라면 누가 못 나갈 줄 알고?" 그 병사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어린 엘프들은 테이블 위의 음식을 열섬히 먹고 있었다. 언제 어느 곳에나 최선을 다해 먹는 어린 엘프들. 저것들을 보고 있자니 진정한 장인정신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난 루시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영아는 어린 엘프들을 인솔(?) 해서 우리를 따라 나왔다. 여관 앞마당에서나와 그 병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구경거리 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난 무료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런 나의 태 도에 다른 병사들은 그 병사를 말렸다. "지면 손목을 잘리는 거야. 오른손을 잃는다고! 평생 병신으로 살고 싶어서 그래?" 그제야 그 병사는 조금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까 지 온 이상 쉽게 물러설 수는 없는 듯했다. "시끄러! 이기면 그만 아니야?" 물론 이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건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을 떄의 얘기다. 녀석에게는 매우 안 된 일이지만 나를 이길 확률은 제 로다. 다시 말해 녀석은 승산 없는 싸움에 뛰어든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해도 손목을 자르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고 덤비면 자른다고 햇는데 안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른 놈들은 손목 잘리는 것이 무서워 뒤로 빠졌다. 하지만 저놈 은 나섰다. 만약 내가 저놈의 손목을 자르지 않고 용서해 준다면 처음에 뒤 로 빠진 놈들은 뭐가 되는가? 이건 형평성 문제다. 덤비면 자른다고 말했으면 잘라야 하는 거 다. 쓸데없는 자비를 베푸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난 바닥에 있는 돌맹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법으로 힘 을 강화시킨 다음 그 돌멩이를 꾹 쥐었다. 바사삭! 돌멩이는 모래가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녀석 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난 손을 털며 물었다. "이름이 뭐냐?" "내, 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게?"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팔 병신으로 만들 놈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그래야 나 중에 가족이나 친구들이 복수다 뭐다 달려들 때 구분하기 편하거 든." "닥쳐!" 촤앙! 녀석은 허리에 찬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내 허리에는 청룡도가 매어져 있다. 하지만 난 굳이 뽑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저런 허접한 놈을 상대하는데 뭐 하러 청룡도까지 쓰겠는가? 그냥 주먹으로 몇 번 쓰다듬어 준 다음 손목 자를 때나 쓰면 된다. 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덤벼." "으윽!" 녀석은 공격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칼을 잡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고,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 었다. 술이 좀 깼는지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다. "뭐 해? 빨리 공격해." 하지만 녀석은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난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내가 먼저 공격하지." 그 순간 관중석(?)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오빠(혀엉)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특수문자까지 써놓기가 조금 힘든거 아니네요. ㅠㅠ 오타도계속나는데 ㅠ) 고개를 들어보니 어린 엘프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오빠를 응원해주다니! 난 크게 감동받았다. 고마워, 얘들아. 오빠 힘내서 꼭 이길게. 그래서 저 자식의 오른 손을 잘라 너희들에게 바칠게. 난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녀석은 칼을 떨어트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사, 살려주세요." "……응?" "자,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녀석은 이젠 눈물까지 쏟아냈다. 난 어이가 없었다. "야! 나 아직 아무 것도 안 했어." "흑흑~ 제발 손목만은 자르지 말아주세요. 제가 병신되면 우리 가족은 다 굶어죽습니다." "……." 싸움하려고 분위기 다 잡아 놓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래도 이렇게 엎드려서 울며 비는 걸 보니 손목 잘리는 게 어지 간히 싫었나 보다. 녀석은 내가 악력으로 돌멩이를 가루로 만든 순 간부터 패배를 직감한 듯했다. 그러니 이렇게 싸워보지도 않고 싹 싹 빌지. 어쨌든 다행이다. 싸움을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포기했으니 손목을 자르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보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죗값은 치러야 할 것 아닌가? "잘못했지?" "예예. 잘못했습니다. 제랄 용서해주세요. 제발 손목만은 자르지 말아주세요." "알았어. 손목 안 자를게." 네 말에 녀석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 가지 못 했다. 내가 녀석의 얼굴을 발로 걷어찬 것이다. 퍼억! "도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할 병사가 대낮에 술 퍼 마시고 여자한테 찝쩍거려? 니가 무슨 적군 병사냐?" "자, 잘못……." "잘못했으면 잔말 말고 맞아!" 퍼버버버벅! "으아악!" 나는 녀석을 피떡이 될 때까지 팼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세 명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그 꼴을 당할 뻔했다는 것이 두려운지 몸을 떨 어댔다. 그리고 피떡이 된 병사를 업고 사라졌다. 루시아가 말했다. "너무 심하게 때린 거 아니야?" "손목 자르는 거에 비하면 싼 거지. 그리고 그렇게 심하게 때리 지도 않았어. 한 달 정도 침대에 꼼짝 않고 있으면 다 나을 거야." 나는 여관 안으로 돌아가 식사를 하기 위해 테이블에 다시 앉았 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는 빈 접시만이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대체 언제 다 먹은 거야? 여행 경비가 모자랄까봐 벌써부터 걱정된다. * * * * 다음날. 여관에서 하룻밤 머문 우리들은 아침을 먹고 출발 준비를 서둘렀 다. 세니는 떠나는 나에게 물었다. "또 올 건가요?" "난 세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게 되겠지." 세니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활짝 웃었다. 아마도 세니는 나를 친한 오빠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나 오빠가 없는 세 니이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나에게 특별히 연애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다. 세니는 떠나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또 오세요, 오빠!" 난 세니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루시아가 내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아,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작별인사……." "흥!" "……." 아아~ 평생 동안 바람 피는 것은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 루시아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Story 35 레오 발타스를 떠난 지 4일째. 우리는 드디어 헤리오 왕국의 수도인 레오에 도착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답게 성문 앞에서 검문이 있었다. 나는 병사들이 루시아에게 농을 걸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도 다행 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도 수도의 병사라는 건지 제법 기강이 잡 혀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농을 걸지 않았다고 해서 루시아의 미 모를 그냥 지나쳤다는 뜻은 아니다. 검문하는 병사들은 마부석에 앉은 루시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루시아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뭐, 저 정도는 남자의 본능이니 봐주도록 하자. 우리 때문에 검문이 늦어지자 우리 뒤에서 검문을 기다리던 사람 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웅성거림에 정신을 차린 조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병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다들 정신 차려! 레이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건 실례라는 거 모르나?" "……." 어이, 댁이 제일 빤히 쳐다봤거든. 어쨌든 병사들은 조장의 호통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검문을 시작 했다. "신분증 있으십니까?" "그런 거 안 키웁니다." "예?" "없다는 뜻입니다." 난 손가락을 튕겼다. "어린 엘프들 집합!" 그러자 라이, 루, 루비가 우르르 몰려나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 밀었다. 병사들은 루시아를 봤을 때처럼 깜짝 놀랐다. "에, 엘프다!" 전에도 말했듯이 자이나레스 대륙은 적색 산맥으로 인해 엘프 동 네(?)와 인간 동네(?)가 나뉘어져 있다. 그래서 인간이 엘프를 보는 것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그나마도 인간 세상에 나 온 엘프들은 주로 흑색 숲에 사는 엘프들이다. 참고로 흑색 숲은 블 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의 영지이자 라이의 고향이다. 난 라이를 내 무릎 위에 앉힌 다음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라이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보시다시피 진짜 엘프입니다. 절대 모조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엘프의 부탁들 받아 이 어린 엘프들에게 인간 세상을 관광시켜 주 는 중입니다. 이제 통과해도 되겠지요?" 엘프가 워낙 희귀한 존재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프에 대 해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종족과의 교류를 활성화시키기 위함인지 엘프들의 통행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귀가 뾰족한 것도 그렇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귀염성은 이 아이 들의 엘프임을 말해주기에 충분했다. 병사들은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통과하세요." "예. 계속 수고하세요." 어린 엘프들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성문을 통과해 수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기나긴 여행(사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끝에 도착한 헤리오 왕국 의 수도 레오. 왕궁에 찾아가 왕(반데라스)과 왕비(세레나)를 만난 다음 에이미 공주를 데리고 아이리스로 향하면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난다. 뭐, 여기까지 왔으면 여정이 대략 반 정도는 진행되었다 할 수 있 겠다. 지금이라도 당장 왕궁으로 찾아가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 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늦은 시간에 남의 집 (?)에 찾아가는 것은 결례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밤은 여관에서 머 문 다음 내일 날이 밝으면 왕궁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루시아가 마차를 몰며 물었다. "이 근처 여관 중에 아는 곳 있어?" "……." 아는 곳? 물론 있다. 예전에 세레나와 이곳에 왔을 때 여관에서 머문 적이 있으니. 그 여관 이름이 아마 '휴식 시간'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는 것은 피하고 싶다. 주인이 아직 안바뀌었으면 보통 큰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세레나와 부부라고 속인 다음 한동안 2인실에 머물 렀다. 만약 이 사실을 루시아가 알게 된다면 또 다시 이혼서류를 내밀 것이 분명하다. 안 그래도 루시아한테 찍혔는데, 이번에 또 찍히면 정말 끝장이다. 그래서 난 일부로 다른 여관을 선택했다. 내가 선택한 여관은 수 도 중심가에 있는 최고급 여관이었다. 돈 많은 부호나 귀족들이나 머무를 법한. "돈은 있어?" "응. 크로니스가 준 돈이 꽤 많아. 레어에서 나올 때 크로니스는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주었 다. 인간 세상에 나가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거절할 만한 입장도 아니었기에 난 기꺼이 그 돈을 받았다. "들어가자." "이 마차는 어떻게 할 거야?" "으음, 다시 보내버리는 게 좋겠지?" "응. 그렇게 하자. 레오즈 마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것일 테니 까." 난 '그동안 잘 썼습니다' 라는 쪽지를 붙인 다음 마법으로 포장 마차를 마을 공터로 워프 시켰다. 그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여관 안 으로 들어갔다. 최고급 여관답게 내부 장식이 화려하면서도 고풍 스러웠다. 종업원은 우리의 복장을 보더니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 지만 주머니 속에 있는 금화를 보여주자 표정을 180도 바꾸었다. "가장 좋은 방으로." VIP 손님이라 생각했는지 주인이 직접 안내를 맡았다. 주인이 안 내해준 방은 우리가 예전에 살던 아파트보다도 더 넓었다. 방 안은 화려하기보다는 고풍스러웠다. 수준 있는 귀족들의 취향에 맞춰 제작한 것 같았다. "식사를 준비해 주세요. 최고급으로 10인분." "예? 10인분이요?" 주인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인원은 6명(그중 셋은 어린아이)인 데, 10인분이나 시키니 이상할만도 하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양은 최대한 많이 해서 가져다주세요. 전부 먹을 거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식사는 방으로 보내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어린 엘프들은 침대 쿠션 테스트 중이었다. 다시 말해 침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주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걸 보니 침대가 박살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영아는 방 한쪽에서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렸다. 주인은 생전 처 음 보는 물건에 놀라움을 표시했지만,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묻지 는 않았다. 최고급 여관답게 식사가 끝나자 따뜻한 목욕물이 준비되었다. 먼저 루시아, 영아, 라이, 루비가 들어가 씻고, 그 다음에 나와 루가 들어가 몸을 씻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루는 약간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누나랑 같이 목욕하고 싶었는데." "……." 누나? "루시아를 말하는 거니?" "예." 딱! "아야! 왜 때려요?" "몰라서 묻냐? 감히 남자아이 주제에 루시아와 같이 목욕을 하려 하다니!" "쳇!" 루는 불만의 표시로 볼을 땡땡하게 부풀렸다. "후후~ 감이 볼을 부풀리다니 우리 루가 그런 못된 버릇은 어 디서 배웠을까? 혹시 오이디푸스한테 배웠니? 응?" "저 오이디푸스랑 별로 안 친해요." "……." 안 친한 척 한 다음 뒤통수를 치려는 속셈인가? 비록 상대가 어린아이라 해도 방심할 수는 없다. 언제 어디서 뒤 통수를 칠지 모르니 항상 긴장해야 한다. 아아~ 그나저나 나도 루시아랑 같이 목욕하고 싶다. 내가 라이나 루비였으면, 루시아랑 같이 목욕도 하고 가슴에 부 비부비도 하고……. 라이나 루비를 안고 자는 것도 좋지만, 내가 정말로 안고 자고 싶 은 사람은 루시아다. 루시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고파~. ……라고 말하면 뺨 맞고 쫓겨나겠지? 나와 루는 목욕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루시아와 영아는 라 이와 루비를 무릎 위에 앉힌 채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아! 오빠!" 라이는 루시아의 무릎에서 내려와 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나 에게 달라붙어 몸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오빠는 라이가 어떤 머리 스타일을 하는 게 좋아요?" 그러자 루비도 나에게 물었다. "루비는요, 오빠?" 루도 내 옷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저는요, 형?" "넌 머리 스타일을 바꿀 수도 없으면서 뭘 묻고 그러니?" 그렇다. 안타깝지만 루는 숏커트 머리인 관계로 머리 스타일을 바꿀 수가 없다. 기껏해야 가르마 비율을 조정하는 정도? 하지만 라이와 루비는 다르다. 둘 다 긴 생머리이기 때문에 원하 면 수십 가지 스타일로 바꿀 수가 있었다. 루시아가 말했다. "라이는 생머리가 제일 잘 어울려. 루비도 그렇고." 영아의 생각은 좀 다른 듯했다. "저는 라이가 포니테일 머리를 했을 때가 가장 예쁘던데요. 루비 는 양쪽으로 땋은 머리…… 왜 그거 있잖아요.' "빨강머리 앤?" "응. 맞아, 오빠. 바로 그거. 루비는 빨강머리 앤 머리를 했을 때 가 가장 귀여웠어요." 영아의 말대로 포니테일 라이 컨셉과 빨강머리 루비 컨셉 모두 예쁘고 귀엽다. 하지만 그건 다른 머리 컨셉 역시 마찬가지다. 얘들이 해서 안 예쁜 머리가 어디 있겠는가? "어떤 머리를 해도 어울리다 보니 뭐라고 말하기가 힘드네." 내가 말하자 루시아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그떡 였다. "맞아. 우리 애들은 어떤 머리를 해도 어울려." 이럴 때 맞장구 쳐줘야 루시아의 기분이 좋아진다. "응응. 우리 애들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엘프니까." "당연한 얘기를 왜 자꾸 하고 그래? 입 아프지도 않아?" 루시아의 기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둥둥 떠올랐다. 만약 누군 가가 면전에다 대고 우리 애들을 욕한다면, 루시아는 그 사람과 머 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울지도 모른다. 그만큼 아이들에 대한 루시 아의 사랑은 남달랐다. "정말이에요, 오빠? 정말로 라이는 어떤 머리를 해도 예뻐요?" "루비가 더 예쁘죠? 그쵸?" "둘 다 어떤 머리를 해도 예뻐. 그래서 오빠는 라이와 루비를 세 상에서 제일 좋아해." 난 두 엘프를 안고 통통한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쪽~! 쪽~! 라이와 루비는 괜히 웃으며 몸을 비비 꼬았다. "헤헤~ 오빠가 라이한테 뽀뽀해줬다." "헤헤~ 오빠는 루비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루시아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제 자야하니까 다들 잠옷 갈아입자." "네에~!" 잠시 후, 아이들은 예쁜 파자마를 입고 나타났다. 라이는 잠옷과 한 세트로 보이는 수면용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라이와 루비는 각 각 내 양쪽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라이는 오빠랑 같이 잘래요." "아니야. 오빠는 루비랑 같이 자야해." "안 돼. 라이가 같이 잘 거야." "오늘은 루비가 같이 잘 거야." "오빠는 라이를 더 좋아해." "아니야. 오빠는 루비를 더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또 다시 시작된 라이와 루비의 오빠 쟁탈전. 이래서 인기 많은 남 자는 피곤하다. 라이와 루비가 나와 같이 자고 싶어 하니 루시아의 표정이 안 좋 아졌다. 아이들이 히로 오빠를 더 좋아하면 루시아 언니는 실망하 기 마련이다. 루시아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필살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리 와, 라이야 루비야. 언니가 부비부비 해줄게." 부비부비라는 말에 라이와 루비는 내 손을 놓고 재빨리 루시아에 게 몰려갔다. "라이가 먼저 부비부비 할 거야."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를 했다. 난 부비부비가 거의 끝나갈 때쯤 애들에게 말했다. "오빠가 토닥토닥 해줄게, 얘들아." 그러자 라이와 루비는 물론 루까지 가세해서 나에게 몰려왔다. 우르르~. 아이들이 다 나에게로 가버리자 루시아는 나를 강하게 째려보 았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이냐니? 그냥 애들과 놀아주려는 것뿐이야."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팔 불출 엄마 루시아가 여기서 물러날 리 없었다. 루시안ㄴ 재빨리 반 격을 날렸다.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얘들아." 우르르~. 앗! 먹을 거 하나에 이렇게 쉽게 배신을? "오빠가 어부바 해줄게, 얘들아." 우르르~. 후후~ 역시 어부바 스킬의 위력은 대단하군. "언니 가슴 만져도 좋아, 얘들아." 우르르~. 앗! 히로도 만지고 싶은데. "오빠가 비행기 태워줄게, 얘들아." 우르르~. 아이언스 히로의 필살스킬 비행기 태워주기! 이 비행기 태워주기 스킬은 루시아의 부비부비 스킬과 맞먹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미 부비부비 스킬을 쓴 상황. 후후~ 이걸로 나의 승리 확정인가? 내가 승리의 미소를 짓자 루시아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나타났다. 빠직! 루시아는 세차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흥!" 난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앗!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루시아는 유난히 질투가 심하고 집착이 강하다. 특히 아이들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신보다 다른 사 람을 더 좋아하면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그런 루시아와 아이들 쟁탈전을 벌이다니! 그것도 모자라 이기기까지 하다니! 이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 는 거다. 어린 엘프들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졸 라댔다. "비행기 태워주세요오~!" "……." 얘, 얘들아.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보기와는 다르게 제 법 심각한 상황이란다. 루시아는 그 모습을 더 이상 보기 싫었는지 성큼성큼 침실로 걸 어 들어갔다. 루시아가 사라지고나자 영아는 나에게 소리쳤다. "오빠 제정신이야? 루시아 언니를 화나게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 그러게 말이다. 이 오빠가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아아~ 루시아가 한번 삐지면 삼일밤낮은 가는데…….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이들로 인해 생긴 일이니 아이들을 이용해 풀어야 한다. 난 일단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비행기를 태워 주었다. "꺄르르~!" "꺄하하~!" "에헤헤~!" 간만에 쓰는 비행기 태워주기 스킬이라 힘이 들었지만 아이들은 매우 좋아했다. 영아는 아이들이 행복한 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는 부러워하며 말했다. "와아! 되게 재밌어 보인다. 나도 태워주면 안 돼, 오빠?" "응. 안 돼." "쳇!" 니 나이를 생각하렴. 19살이나 먹은 여자애가 이런 거 하고 싶니? "이제부터 오빠 말 잘 들어. 지금 침실로 들어가서 다들 루시아 언니한테 매달려서 애교를 부리는 거야. 최대한 귀엽고 깜찍하게. 그리고 오빠보다 언니가 더 좋다고 말해. 알았지?" "네에~!" 아이들은 내가 시킨 대로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에 엎 드려있던 루시아는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라이, 루, 루비는 작전대로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가 루시아에게 매달렸다. 부비부비. 비비적. 비비적. "헤헤~ 라이는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루비는 언니가 부비부비 해줄 때 막막 행복해요." "누나는 공주님이잖아요." '귀여워 죽겠어' 라는 표정을 짓던 루시아는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됐어. 어차피 너희들은 언니보다 오빠를 더 좋아하잖아." "아니에요, 언니. 라이는 언니가 더 좋아요." "루비는 오빠보다 언니가 훨씬 더 좋아요." "저는 형보다 누나가 백만 배 더 좋아요. 저한테는 누니밖에 없 어요." 오빠보다 언니를 더 좋아한다는 말에 루시아의 표정이 눈 녹듯 풀렸다. "저, 정말? 정말로 오빠보다 언니가 더 좋아?" "네에~!" 루시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들을 껴안았다. 이쯤이면 되겠지? 난 실망과 절망이 적절히 조화된 패배자의 표정을 한ㄴ 패 침실로 들어갔다. 루시아는 나 보더니 허리를 곧게 세우며 의기양양한 승 리자의 표정을 지었다. 봤지? 애들은 너보다 날 훨씬 더 좋아해.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난 더욱더 절망적인 표정을 지어 루시아를 기쁘게 만들어주었 다. 루시아는 화가 완전히 풀렸는지 웃음까지 지었다. 아이들이 관련된 일이라면 한없이 단순해지는 루시아. 그러는 자신의 모습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는 것을 루 시아는 모르겠지? * * * * 다음날. 바로 왕궁으로 향하려던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레오에서 정기 적으로 열리는 야시장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야시장. 야사가 야한 사진을 뜻하고, 야동이 야한 동영상을 뜻하고 야애 니가 야한 애니메이션을 뜻하듯이 야시장은 야한 시장을 뜻한다. 야시장에서는 수많은 남자들이 모여 그동안 자신이 모은 컬렉션들 을 전시하고 즉석에서 교환하거나 매매하기도 한다. 레오의 야시장은 그 역사가 깊은 만큼이나 제품의 종류가 다양하 고 질이 높다. 하루 거래되는 야사만도 수억 장에 이른다. 야시장 에 모인 야동들을 전부 합하면 수억 기가바이트…… 아니, 수억 테 라바이트는 족히 될 거라 추측이 나올 정도다. 또한 야시장에서는 각종 성인용품과 피임기구등을 팔고 있으며, 즉석 성매매 알선은 물론, 특이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SM클 럽이나 게이바, 레즈바등을 운영하고 있다. ……라는 것은 물론 뻥하다. 대체 뭘 상상하는 거냐! 야시장이 이런 시장일 리 없잖아! 아니, 그건 둘째 치더라도 이런 시장이 있을 리 없잖아! 야시장은 야한 시장이 아니라 밤에 열리는 시장을 뜻한다. 이 세 계의 야시장은 우리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많은 가게, 음식점, 게임장, 노점상 등이 늘어서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며 왁자지껄하게 떠든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가봐서 안다고 대답하겠다. 당시 레이트 백작가는 역적으로 몰려 멸문의 위기에 처했다. 그 모든 것은 세레나의 숙부가 백작의 작위를 얻기 위해 꾸민 일이었 다. 난 세레나와 세레나의 부모님을 구해주기 위해 레오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작전을 짜던 중 심심해서 야시장에 들렀다. 그래서 재밌게 놀았다. 내가 넌지시 야시장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루시아가 말했다. "나 야시장 한 번도 못 가봤는데." 영아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나 야시장 가보고 싶어, 오빠." 어린 엘프들도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라이야시장가고 싶어요오." "루비도 가고 싶어요오." "데려가 주세요오." 우리 일행의 표면적인 리더는 나지만 실권을 쥐고 있는 건 루시 아다. 난 루시아를 보았다. "어떻게 할까?" "가자. 애들이 가보고 싶어 하잖아. 그리고 나도 가보고 싶어. 나 이제까지 한 번도 야시장에 못 가봤거든." "그럼 왕궁에는 언제 가지?" "내일 가면 되지." "그래. 그렇게 하자." 우리는 해가 저물 때까지 여관 안에서 놀았다. 그리고 해가 저물 자마자 야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들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나와 루시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가족 처럼 보일까? 나는 아빠, 루시아는 엄마, 어린 엘프들은(책에 엘프들는이라 나와서 제가 수정했습니다.) 자식, 영아는 그냥 떨 거지(?) 레오의 야시장은 제법 큰 규모였다. 헤리오 왕국의 상업 활성화 정책에 힘입었기 때문인지 예전에 왔을 때보다 규모가 두 배는 더 커진 것 같다. 상점 수가 많아졌음은 물론 손님 숫자도 굉장히 많아 졌다.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는 것이 완전 시장판 분위 기다. "……." 아! 여기 시장판 맞구나. 수많은 음식점, 가게, 게임장, 도박장, 노점상, 야바위꾼까지! "앗! 우리 저거 먹어요, 오빠." "저거 맛있을 것 같아요!" "사주세요!" 어린 엘프들은 먼저 음식점을 지목했다. 이곳에서 사먹기 위해 일부러 저녁을 안 먹고 나왔다. 어린 엘프들은 다들 배가 고픈 모습 이었다. 우리는 천막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한쪽에서 꼬챙이에 꿰어 진 통돼지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고, 가게 주인이자 주방장으로 보 이는 부부가 그 여펭서 열심히 조리를 하고 있었다. 아아~ 고기 익는 냄새가 참 좋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은 통돼지 바비큐를 안주 삼아 술 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난 주문을 했다. "저기서 굽고 있는 통돼지 주세요." "예. 얼마나 드릴까요?" "통돼지 달라니까요." "예. 그러니까 어떤 부위를 얼마만큼 잘라드릴까요?" "다 주세요." "예?" "저 통돼지 통째로 달라니까요." "……." 주인은 어이가 없었는지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내가 돈을 보여 주자 별 말 없이 통돼지를 통째로 내주었다. "싸드릴까요?" "아니요. 여기서 먹고 갈 겁니다." "예? 다 드실 수 있으시겠어요?" "훗~ 모자라지나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주인은 나를 '이 인간 미친 거 아니야?' 라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안 미쳤다. 오히려 너무 정상이다. "얘들아 먹으렴."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린 엘프들은 돼지고기를 집어 먹기 시작햇다. 그 모습이 마치 며칠은굶은 하이에나 같다. 뭔 엘프들이 이렇게 고기를 좋아하는 건지……. 엘프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가축을 기르지 않는 만큼 주로 과일 이나 식용 풀을 먹는다. 상황에 따라서 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그다 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집 엘프들은 고기하면 환장을 한다. 지금처럼 눈을 까뒤집고 덤벼든다. 정말로 내 교육에 문제가 있는 건가? 돼지 한 마리를 해체하는 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 았다. 소 한 마리도 아니고 돼지 한 마리를 누구 코에다 갖다 붙이겠는 가? 주인은 뼈만 남은돼지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어느새 주위에는 구경꾼들까지 몰려 있었다. "봤어? 저 어린애들이 돼지 한마리를 통째로 먹었어."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었을 거야." "난 보고도 믿을 수 없어." "돼지의 살이 마치 녹아내리듯이 사라졌어." 다른 집 아이들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오로지 우리 집 아이 들만이 가능한 일이다. 혹시 여기서 많이 먹기 대회 같은 거 안 하나? 참가하기만 하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인데. 어린 엘프들이 거의 다 먹긴 했지만, 나와 루시아와 영아도 먹을 만큼 먹었다. 식사를 끝마친 우리는 본격적으로 야시장 구경에 나 섰다. 사람이 많았기에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손을 꼭 붙들고 있어야 했다. "앗! 저기 인형가게가 있어요, 오빠! "그래. 인형가게가 있구나." '앗! 저기 야바위꾼이 있어요!" "그래. 야바위꾼도 있구나." 어린 엘프들은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아까지 덩달아 그러는 바람에 난 넷을 함께 챙겨야 했다. 길을 걷다보니 한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 었다. 우리는 그곳(책에 그것으로 나와 수정했음)으로 가 보았다. 한 남자가 탁자에 앉아 손을 올 려놓고 있고, 다른 남자가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자자, 주저하지마시고 도전하십시오. 참가비는 단돈 1골드. 여 기 앉아 있는 친구와 팔씨름을 해서 이기면 열 배인 10골드로 돌 려드립니다. 지면 조용히 일어나시면 되겠습니다. 힘에자신 있는 분들은 주저하지 마시고 도전하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 친구 지금까지 스무 판을 넘게 했습니다. 현재 지쳐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자자, 어서들 도전하세 요." 흐음, 팔씨름 승부인가? 탁자 앞에 앉아있는 남자는 힘깨나 쓰게 생겼다. 우락부락하게 튀어나온 팔 근육을 보니 쉽게 이기기는 힘들 것 같다. 물론 어디까 지나 일반인 기준으로. 영아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한번 해봐, 오빠." "싫어." "왜? 질 것 같아 무서워?" "조크하냐? 내가 이런 장사에 끼어든다는 것 자체가 반칙이야. 굳이 말하자면 어린 엘프들이 많이 먹기 대회 나가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나 할까?" "그럼 잘 됐네. 10골드 버는 거 아냐?" "이 사람들 한 철 장사하는 건데, 내가 그런 돈까지 갈취해야겠 냐?"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호객행위를 하는 남자가 내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힘깨나 쓰게 생기신 분이 왜 구경만 하고 계십니까? 한번 도전 해 보세요." 난 예의를 갖추어 거절했다. "아니에요. 별로 할 마음이 없네요." "그러지 말고 한번 해보세요. 참가비는 단돈 1골드이고, 이기면 열 배인 10골드로 드립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할 수 없다. 난 1골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 그럼 준비해주세요." 난 맞은편에 앉은 남자와 손을 붙잡았다. "시……작!"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자는 힘을 썼다. 아니, 정확히는 힘을 쓰는 척했다. 초반에 너무 쉽게 이겨버리면 그 다음부터 손님들이 안 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더라도 조금 아슬아슬하게 이길 필 요가 있다. 그래야 다음 사람이 도전을 할 거 아닌가? 나 역시 힘을 쓰는 척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팽팽한 접전을 벌 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이제쯤이면 이겨도 되겠다 싶었는지 남자는 본격적으로 힘을 썼다. 내 팔은 맥없이 오 른쪽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탁자에 손등이 닿기 직전 멈춰 섰다. 남자는 조금만 더 힘 을 쓰면 끝이라고 생각한 듯 계속 손에 힘을 주었다. 당사자에게는 매우 미안한 얘기지만, 그건 애처로운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백날 힘줘봐라. 내가 넘어가나. "으윽!" 남자는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내 팔을 눌렀다. 하지만 내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래서 내가 안 한다고 한 건데……." 난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남자가 기를 쓰며 반항했지만 소용 없었다. 난 더 이상 끌지 않고 가볍게 남자의 팔을 넘겼다. 쾅! 남자의 손등에 탁자에 닿으며 승부는 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와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호객행위를 하던 남자는 절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군말 없이 10골드 를 내주었다. 그래도 구경하던 사람들이 재밌다고 생각했는지 너 도 나도 하겠다고 나서서 다행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야시장을 돌아다녔다. 다트 던지기도 해보고 빙고도 해보았다. 그렇게 실컷 놀다가 '이제 슬슬 돌아가야지' 하 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 다섯이 나타나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 다. 행패의 대상은 노점에서 풀빵을 파는 아주머니였다. "누구 맘대로 여기서 장사를 해?" "장사를 하려면 자릿세를 내야할 거 아니야?" "아줌마 정말 이딴 식으로 나올 거야?" 아주머니는 그들을 붙들고 사정했다. "죄송합니다. 며칠만 더 연기해 주세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누구는 땅 파먹고 사는 줄 알아?" 그들은 아주머니를 바닥에 밀친 다음 각목으로 풀빵 만드는 기계 를 부수기 시작했다. 쾅! 쾅!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안 돼요! 이게 없으면 우리 식구 굶어죽어요! 제발 이것만 은 봐주세요! 아주머니가 울며불며 사정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저리 비켜!" "돈 안 내면 어떻게 되는지 본때를 보여주지." 쾅! 쾅! 그들은 가차 없이 각목으로 기계를 부쉈다. 아주머니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안 돼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괜히 나서서 자신 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저것들 또 시작했네." "저 아주머니만 불쌍하게 됐지, 뭐." "경비대가 없는 틈을 타서 설쳐대니, 이겨야 원……." 난 주위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고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야시장이 열릴 떄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장사를 할 수 있다. 즉, 내가 무언가를 팔고 싶다면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판 펴면 그만 이다. 원래 돈이 오가는 곳에는 파리가 꼬이기 마련이다. 지금 행패를 부리고 있는 놈들은 야시장을 활동 무대로 삼고 있는 폭력 조직의 일원이다. 그 폭력 조직은 웬만큼 세력이 있는 상인이나 길드에 소 속되어 있는 상인은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건드려도 문제가 없는 영세 상인들을 중심으로 자릿세를 빙자해 돈을 뜯어냈다. 길거리에 판 펴고 장사하는 영세상인 같은 경우에는 그런 일을 당 해도 어디다 하소연할 곳이 없다. 상인 길드에서 공식적으로 경비 대에 문제를 제기하면 상황이 나아지겠지만, 상인 길드는 침묵했 다. 상인 길드는 노점상과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행패 를 부림으로써 노점이 줄어든다면, 상인 길드로서는 이득이다. 거대 상인들의 잇속에 영세 상인들만 죽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나 없는 놈들은 살기 힘든 법이다. 어느새 풀빵 기계는 완전히 박살났다. 바닥에 흩어진 풀빵은 곤 죽이 되어 있었다. 아주머니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녀석 들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장사하고 싶으면 자릿세를 내란 말이야. 알았어?" 루시아는 내 옆구리를 찔렀다. "왜 보고만 있어? 당장 도와주지 못해?" "아, 알았어. 안 그래도 그러려 그랬어."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난 그리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사람 들은 이상하게 힘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는 경향이 있다. 큰 힘을 가 진 만큼 그 힘을 좋은 일에 써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힘을 가졌다고 해서 꼭 남을 도와줘야한다는 법도 없고, 불의를 보고 참으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통계적으로 볼 때 정의로운 놈은 오래 못 살기 마련이다. 내가 판 펴고 장사하는데 저놈들이 설쳐댔으면 저놈들은 죽었다 고 복창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약간의 정의심을 발휘해 저놈들을 응징한다고 해봐야 나는 내일이면 여기를 떠난다. 그러면 저놈들은 언제 맞았냐는 듯 또 다 시 설쳐댈 것이다. 아예 조직 자체를 붕괴시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봐야 얼 마 후면 또 다른 조직이 생겨날 테고 영세 상인들은 계속 피해를 입 을 것이다. 결국 지금 내가 나서봐야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쩌면 내 가 도와줬다는 이유로 내가 사라지고 난 뒤 저 아주머니는 더 큰 피 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저번 일진회 사건 때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일진들을 박 살낸 것이다. 잡초는 뿌리까지 제대로 짓이겨놓지 않으면 다시 자 라는 법이니. 나는 이렇게 현실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거 기까지 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불쌍한 사람을 봤으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건 루시아 역시 마찬가지다. 천사 같은 외모만큼이나 천사 같은 마음씨를 지닌 루시아가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칠 리 없으니. 루시아의 명을 받은 나는 기꺼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소리 쳤다. "멈춰라!" 뭐야? 어째서 이중창으로 들리는 거지? 내가 나서며 소리치는 순간, 다른 놈이 똑같이 나서며 소리쳤다. 난 고래를 돌려 그놈을 보았다. 그는 망토를 걸치고 후드를 깊게 눌 러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키가 큰 남자 둘이 서있었다. 그 둘 역시 망토를 걸치고 후드를 눌러썼다. "헉!" 처음에 소리친 남자는 날 보더니 깜짝 놀랐따. "너, 너는 설마……." "……." 잠깐.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옆에 있는 두 남자가 나를 제지하려 는 움직임을 보였다. "괜찮아. 아는 사람이야." 그가 말하자 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난 그의 앞에 섰다. 그가 누군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난 그에게 물었다. "니가 왜 여기 있냐?"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 있어?" "난 공주 호위차 왔지. 연락 못 받았냐?" "받기야 받았지. 그런데 왔으면 바로 찾아 올 것이지, 여기는 왜 왔어?" "그냥 한번 놀러 와봤어. 불만이냐?" "아, 아니, 뭐 불만은 아닌데……." "그러는 넌 왜 왔는데? 니가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그, 그게 민생 시찰을 겸해서……." "민생 시찰 좋아하시네." 그의 이름은 반데라스. 헤리오 왕국의 국왕이자 세레나의 남편 이다. 저번에는 가출한 세레나를 쫓아 한국으로 오기도 했었다. 국왕이라는 놈이 정사를 다 내팽개치고 왕비를 쫓아 다른 세계까 지 가다니. 생각해 보면 세레나와 결혼한 것도 끈질긴 스토킹과 집착 때문이 었다. 얼마나 심하게 집착을 했으면 왕비가 짐 싸서 도망갔겠는가? 뭐, 그래도 그 사건 이후에 많이 뉘우친 듯하다. 적어도 자기 아내 스토킹은 안 하겠지? 이런 곳에서 이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국왕이 이렇게 나돌아 다녀도 되는 건가? 뭐,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이 새끼들은 뭐야?" 그렇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이거다. 난 반데라스에게 말했다. "내가 처리하지." "아니야. 내가 처리할게. 넌 쉬어." "안 돼. 루시아가 나보고 처리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처리 해야 돼." "루시아? 루시아 공주님을 말하는 거야? 지금 와 계셔?" "저기 안 보이냐?" 내가 손가락으로 루시아를 가리키자 반데라스는 고개를 끄덕 였다. "니가 처리해." 반데라스는 루시아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루시아는 예의를 갖추어 그 인사를 받았다. 옆에 있는 두 놈은 아무래도 근위병인 것 같았다. 하긴, 국왕이라는 놈이 호위 한 명 없이 밖으로 나올 리 없지. ……라는 것이 일방적인 생각이지만, 저놈은 호위 한 명 없이 한 국으로 왔다. 대체 국왕이란 놈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곘다. 난 먼저 저놈들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보고 멈추라고 했냐, 새꺄?"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녀석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 며 빈정거렸다. "이 씨발 좆만한 새끼가 뒈지고 싶어 환장을 했나?" "……." 이런 썅욕이라니! 쌍놈의 새끼한테 쌍욕을 들으니 가슴이 아프다. 알 만한 사람들(1부 1권부터 차례대로 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나 도 옛날에 욕 좀 했었다. 한때는 대사 중에 조사 빼면 욕과 비속어, 은어만 남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의 말버릇은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법. 나는 라이를 착한 말 고운 말만 쓰는 착한 엘프로 기르기 위해 욕 을 끊었다. 때문에 한때는 금단증상이 나타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완전히 적응된 지금은 거의 욕을 하지 않는다. 하는 욕이 라고 해봐야 '빌어먹을', '젠장' 정도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욕 을 구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욕이 필요한 상황 이다. "그래. 이 엉아가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단다, 좆만한 깡패 새끼 들아. 생긴 건 어디서 부도난 어음처럼 생긴 것들이 지금 뭐하는 짓 들이니? 어여 집에 들어가 엄마랑 쎄쎄쎄하고 기저귀 갈아 입혀달 라고 조르렴." 욕이란 무조건 많이 쓴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상황에 맞게 적재 적소에 써야한다. 방금 전 내 대사 같은 경우에는 어른이 아이를 타 이르는 말투를 함께 씀으로써 욕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끌어냈다 할 수 있겠다. 욕의 기능이 뭐냐고? 욕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가장 기보넞ㄱ인 기능은 상대방 을 화나게 하는 것이다. "이 씨발 새끼가!" 깡패 새끼들이 눈을 까뒤집고 화내는 걸 보니 성공한 듯하다. 난 녀석들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목에 맞아 박살난 풀빵 기계, 발에 밟혀 짓이겨진 풀빵, 넋을 잃은 채 눈물을 흘리는 아주머니. 한 깡패 새끼가 건들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상대가 이렇게 무 방비 상태로 다가오면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 상 황에서 상대가 선빵을 날리면 싸움은 진 거나 다름없다.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으면,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경우다. 난 깡패 새끼가 무방비 상태로 다가오자마자 주먹을 날렸다. 퍼억! 내 주먹이 코를 때리자 녀석은 한 손으로 코를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섰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녀석은 쌍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 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병신 새끼. 무방비 상태로 다가오니까 그런 꼴을 당하 지. 깡패새끼가 싸움의 기본이 선빵이란 것도 모르냐?" 내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어대자 녀석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 히며 분노했다. "죽어, 이 새꺄!" "이쯤 되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진지하고 냉정하게 판단해도 승률이 1퍼센트가 될까 말까인데, 흥분해서 달려들면 어쩌겠다는 건가? 난 슬쩍 옆으로 피한 다음 발을 걸었다. 흥분해 달려들던 녀석은 불썽사납게 쓰러졌다. 콰당! 난 재빨리 녀석들이 쓰던 각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일어서려 는 녀석의 허리를 내리쳤다. 퍼억! "으아악!" 다른 놈들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일진과 양아치들의 초필살 기…… 즉, 다구리를 시도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비열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이언스 히로 아닌가? 난 달려드는 녀석들의 뒤쪽을 보며 말했다. '이 새끼들 죽여!" 그러자 녀석들은 한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것들. 난 그사이 각목으로 얼굴을 내리찍었다. 퍼억! 퍼억! "크악!" "커억!" 두 놈이 얼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이제 남은 상대는 둘. 난 도망치는 척 하다가 흙은 집어 녀석들의 얼굴에 뿌렸다. 촤아악! "으악! 이 치사한 새끼!" "앞이 안 보여!" 난 눈에 흙이 들어가 고통스러워하는 두 놈을 각목으로 마구 팼다. 퍽! 퍽! 퍽! 그리고 다른 놈들도 다시 일어나 반격을 하지 못하도록 골고루 패주었다. "후후~ 각목으로 흥한 자, 각목으로 망한다고 했던가?"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골고루 각목 찜질을 해주었다. 퍽! 퍽! 퍽! 기세등등하던 다섯 깡패는 피떡이 된 채 흙바닥을 뒹굴었다. 구 경꾼들 중에는 차마 그 모습을 보기 힘든지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각목 찜질도 은근히 힘든 일이다. 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 며 숨을 골랐다. 아아~ 상쾌해. 간만에 비열하게 싸우니 참 좋다. 나의 압도적인 무력이라면, 굳 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쉽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비열한 놈들에게는 더 비열한 수법으로 상대해 주는 것이 아이언스 히로의 스타일 아니겠는가? 난 근처 상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얻어 녀석들에게 뿌렸다. 정신 을 차린 녀석들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이 새끼……." "넌 이제 우리 조직한테 죽었어." "크크, 감히 우리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 이 자식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뭐, 그럼 정신 차리게 해주면 되지. 난 녀석들을 또 팼다. 퍽! 퍽! 퍽! "조, 조직이 무섭지도 않냐?" "우리 조직에 찍히면 죽음밖에 없어."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계속 팼다. 퍽! 퍽! 퍽! (퍽퍽퍽이 많이 나오네요 -,. -;;) "그, 그만해, 이 새꺄!" "그만하란 말이야!" "새꺄? 말이야? 이것들이 좀더 맞아야겠군." 난 녀석들을 죽을 때까지 패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각목을 들어 올리자 녀석들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사, 살려줘." "반말?" "사, 살려주세요." "요, 용서해주세요." "뭘 용서해? 니들이 잘못한 게 뭔데?" "그, 그건……." "잘못한 게 없어? 없으면 맞아야지." "자,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데?" "……." 대답이 없군. 난 한 놈을 마구 팼다. 퍽! 퍽! 퍽! 내가 떄린 데만 골라서 또 때리는 만행을 선보이자 다른 놈들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장사 방해했고요, 자릿세 뜯었고요, 폭력도 좀 썼고요……." "좀?" "아, 아니, 많이 썼어요. 폭력 많이 썼어요." "그리고?" "기게 부순 것과 상인들 협박한 것과……." "그래. 뭘 잘못했는지 다들 잘 아는구나.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예?" "어렸을 때 엄마한테 배웠을 거다. 먹는 것은 함부로 하는 게 아 니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밥을 굶고 있는 아이들이 무려 123 만 4567명이나 된다. 상황이 이러한데 음식을 함부로 버려서야 쓰 겠니?" 난 짓이겨진 풀빵을 주웠다. 완전히 뭉개진 풀빵은 흙과 섞여 정 체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난 그것을 깡패들에게 내밀었다. "먹어. 맛있게. 하나도 남기지 말고. 안 먹는 놈은 이 자리에서 죽 여 버린다." 완전히 겁에 질린 녀석들은 억지로 풀빵을 입에 밀어 넣었다. 바 닥에 흩어진 풀빵은 꽤 많았다. 흙만 조금 털고 먹으면 되는 것이 있는 반면, 흙 반 풀빵 반인 것도 있었다. 난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먹게 했다. 녀석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것을 전부 먹었다. 그리고 그중 두 놈은 먹은 것을 전부 토해냈다. 만약 이 자리에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이 없었다면 토한 것까지 도 로 먹으라고 했을 것이다. 구경꾼들 사이에 있는 루시아와 영아는 어린 엘프들의 눈을 가리 고 있었다. 교육상 안 좋은 장면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난 부서진 풀빵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니들이 부쉈으니까 니들이 고쳐라. 새것처럼 반짝반짝하게 만 들어 놔. 당장." 녀석들은 어안이 벙벙한지 아무 말도 못했다. 난 각목을 집어 들 고 다시 팼다. 퍽! 퍽! 퍽! 안 하면 맞아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녀석들은 기계에 달라붙어 고치는 척했다. 하지만 완전히 부서진 기계를 무슨 수로 고치겠는가? "못 고치겠냐?" "……." "못 고치는 게 당연하지. 그걸 무슨 수로 고칠 수 있겠니?" "……." "그럼 왜 부쉈어?" 난 녀석들을 살기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고치지도 못할 걸 왜 부쉈어? 어서 말해봐." "그, 그건……." 녀석들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빨리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자,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주세요." "세상 일이 잘못했다고 빌면 끝날 만큼 만만하면 얼마나 좋겠냐? 부술 때는 좋았겠지. 그런데 이제 원상복구 시킬 생각하니까 앞이 막막하지?" 난 이런 놈들이 정말 싫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놈들은 용서 해줘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더 심하 게 설쳐댄다.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끝날 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잘못을 했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 대 가를 치르지 않는 놈은 절대로 뉘우치지 못하고, 뉘우쳤으면 대가 를 치러야 한다. 지금 내가 용서해줘 봐야 이놈들은 뉘우치지 않는다. 내 장담하 건데 복수하겠답시고 조직을 끌고 올 게 뻔하다. 루시아와 애들만 없었으면 제대로 한바탕 했을 텐데. 다행이 이 자리에 반데라스가 있으니 뒷일을 맡겨도 될 것이다. 난 각목을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 리가 들려왔다. 루시아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조심해, 히로!" 앗! 루시아가 내 걱정을! 역시 루시아는 날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 "죽어!" 난 감동하며 몸을 슬쩍 옆으로 비켰다. 그리고 뒤쪽에서 튀어나 온 손목을 붙잡았다. 그 손에는 잭나이프(칼날을 접어 칼집에 넣을 수 있게 만든 주머니칼)가 들려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난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칼 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빌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는데 어쩌라구?" "사, 살려주세요." "왜? 살려주면 또 뒤에서 찌르게?" 이래서 쓸데없는 자비는 베푸는 것이 아니다. 웬만하면 용서해주려 했는데. 스스로 벌얼 자청하는구나! 난 녀석을 그냥 놔줄 생각이 없었다. 가만히 있던 놈들과 칼로 찌르려 한 놈을 똑같이 취급하면 가만 히 있던 놈들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내가 이놈을 벌해야 이놈은 뒤에서 칼로 찌르려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른 놈들은 가만히 있었던 자신 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형평성 문제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좀 심하게 해야 하지만, 애들도 있으니 가볍게 끝 내자." 난 녀석의 오른손을 잡고 비틀었다. 까드득! "으아아악!" 관절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앞으로는 완손으로 밥 먹어라. 알았지?" 난 녀석을 놓아준 다음 반데라스를 보며 말했다. "민생 시찰이라고 했으니,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반데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일은 내가 잘 처리할게." 난 우리 일행과 반데라스와 함께 야시장을 빠져나왔다. 한적한 곳으로 나오자 어린 엘프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보았다. "오빠 막막 멋있었어요. 라이는 오빠한테 막막 반했어요." "오빠는 최고에요. 루비는 오빠가 막막 좋아요." "형 대따 멋있어요. 저도 크면 형처럼 멋진 남자가 될래요." "푸하하~ 이 오빠 멋진게 하루 이틀 일이니? 뭘 새삼스럽 게 말하고 그러니? 오빠 쑥스럽게시리. 그리고 이 형처럼 멋진 남 자가 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란다. 하지만 우리 루가 지금부 터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멋진 엘프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난 어린 엘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반데라스는 후드를 벗었다. 찰랑거리는 은발과 반데 라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난 반데라스에게 물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근위병." "세레나는 요즘 어떻게 지내?" "헉! 니, 니가 왜 세레나 양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거야? 서, 설마 아직도 세레나 양을 사랑하고 있는 건……." "……." 이 자식 세레나에게 집착하는 건 여전하군. "애는 나왔지?" 아이 얘기가 나오자 반데라스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표정에서 부터 자부심이 좔좔 흐른다. 난 재빨리 물었다. "왕자님이야 공주님이야?" "왕자님." "뭐? 남자애란 말이야?" "응. 세레나 양을 닮아 얼마나 예쁜데." "세레나를 닮았다니 다행이네. 널 닮았으면 정말 큰일이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알아서 해석해라." 반데라스의 오른편에 서 있던 근위병은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 을 열었다. "혹시 아이언스 히로 공작님이신가요?" 어라? 아직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바로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다." 내가 정체를 밝히자 그 근위병은 후드를 벗으며 인사를 했다. "평소 아이언스 공작님의 명성을 듣고 흠모해왔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 앗! 여기도 내 팬이! 아아~ 어떻게 된 게 이놈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라. 반데라스가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뭘?" "나 지금 왕궁으로 돌아갈 건데, 같이 갈 거야?" "으음, 그럴까?" 짐이야 전부 마법 주머니 속에 있고, 숙박료는 선불로 지불했다. 굳이 여관에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난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는 고갤르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영아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우리 왕궁에 가는 거야, 오빠?" "응. 왕궁에 가는 거야." "지, 진짜?" "응. 진짜." 영아는 기뻐하며 나에게 매달렸다. "고마워, 오빠. 내가 살아 생전 왕궁에 가보게 될 줄은 몰랐어. 이 게 다 오빠 덕분이야." "당연 오빠 덕분이지. 오빠의 은혜에 최선을 다해 감사하려무 나." "왕궁이라…… 마치 내가 공주가 된 것 같은 느낌이야." "……." 영아가 공주라……. 그럼 앞짱구 공주라고 불러야 하나? story.36 헤리오 왕궁 우리는 반데라스를 따라 왕궁 안으로 들어왔다. 아아~ 이곳에 오니 옛날 일이 떠오른다. 엘프의 숲에서 레오로 온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소식은 다름 아닌 세레나의 결혼 소식. 반데라스가 국왕으로 즉 위하고, 즉위식 이후에 바로 세레나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다. 난 그 소식을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스토커이자 집착의 화신인 반데라스가 권력을 이용해 세레나와 강제로 결혼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세레나를 구하기 위해 라이, 루엔, 갈리온드와 함께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세레나 구출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문 앞에서부터 병사들이 가로막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세 엘프는 길을 막는 병사들을 전부 무찌른 다음 결혼식장 으로 쳐들어갔다. 내가 문을 박차고 결혼식장에 뛰어들었을 때는 결혼식이 성사될락 말락 하는 급박한 순간이었다. 어쨌든 시간 안에 온 나는 결혼식을 중지 시키고 세레나를 구출 하……려 했으나, 모든 것이 오해였다. 알고 보니 강제 결혼이 아 니였더라. 으음, 간만에 옛날 일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다. 뭐, 지금은 다 추억이다. "와아! 되게 넓다. 복도가 끝이 안 보여." 난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영아에게 말했다. "그만 좀 두리번거리렴. 온갖 촌티를 다 내는 앞짱구 때문에 이 오빠가 매우 쪽 팔리구나." "그치만, 여기는 왕궁이란 말이야. 내 평생 언제 이런 곳에 다시 와 보겠어?" 난 루시아의 눈치를 슬쩍 살핀다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잊었니? 너의 언니가 될 사람이 공주님이란 것을." "공주님? 루시아 언니 말이야?" "너의 언니가 될 사람이 루시아 말고 또 있겠니?" 언니란 여자가 손위 여자를 이르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오빠의 아내를 이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즉, 나와 루시아가 결혼을 하면 루 시아는 영아에게 '언니'가 되고, 영아는 루시아에게 '아가씨' 가 된다. "그건 오빠 생각이지." "누가 뭐라 해도 히로는 루시아와 결혼할 테야. 그리고 우리 라 이에게 예쁜 동생을 만들어줄 테야." "말로는 뭘 못하겠어?" "……." 대체 뭐가 불만인 거니? 아무리 생각해도 영아를 데려온 것은 실수인 것 같다. 그냥 집이 나 보게 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책상자 출판사가 자랑하는 독방에 끌려가 마감 지옥에 시달리게 했어야 했는데. "그런데 이 복도 길어도 너무 긴 거 아니냐? 대체 어떤 놈이 설계했 기에 왕궁이 이 모양이야?" 내가 궁시렁거리자 반데라스가 말했다. "내가 설계한 거 아니야."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국왕의 집무실과 처소가 있는 본궁이다. 그리고 본궁에는 왕비의 처소도 있었다(국왕 처소 바로 옆이란다). 우리가 향하는 곳이 바로 그 왕비의 처소다. 세레나와 아기를 만나 기 위함니다. "다 왔다." 반데라스는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시녀장(으로 보이는 아주머 니)이 문을 열어주었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왕비 마마." 으음, 왕비 마마라……. 세레나도 어지간히 출세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왕비의 방이니 만큼 난 사방에 금딱지 가 붙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커다란 방은 화려함과는 거리 가 멀었다. 깔끔하고 수수하면서도 있을 것은 다 있는…… 아무튼 차분한 느낌의 방이었다. 아마도 세레나의 취향에 맞게 인테리어를 꾸민 것 같았다. 세레나는 창가에 앉아 요람을 흔들고 있었다. "오셨…… 아!" 고개를 돌리던 세레나는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냥 어쩌다보니 오게 됐어." 오랜만에 만난 세레나는 애 엄마가 되어 있었다. 전에 봤을 때보 다 한층 더 정숙하고 차분해진 것 같다. 이젠 정말 어른이라는 느낌 이 들었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나라의 왕비인 세 레나. 처음 만났을 땐 이런 모습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 레나는 굉장히 행복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에요." "1년도 안 됐는데, 뭘." 난 반데라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리 온다는 거 말 안 했냐?" "그게 어쩌다보니." "……." 이 자식 일부러 말 안 한 거 아냐? 세레나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전 에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는 루시아와는 손까지 잡으며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루시아 공주님?" "예, 세레나 왕비님." 공주와 왕비의 만남. 아아~ 뭔가 있어 보인다. 어린 엘프들은 일렬로 나란히 서서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오~!" 그 모습에 세레나는 깜짝 놀랐다. 당연한 일이다. 어린 엘프들의 귀염성에 안 놀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세레나는 '너무 귀여워!' 라는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살작 붉혔 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으응. 그래. 너희들도 잘 지냈니?" "네에~!" 당황하는 세레나의 모습에 루시아는 의기양양해졌다. 마치 '제 자식들이에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아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나도 소개시켜줘야지, 오빠." "아! 널 빼먹었구나." 난 영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내 사촌 여동생이야. 이름은 영아라고 해. 부르기 힘들면 앞짱구걸이라고 불러도 돼." "오빠!" "그래그래. 어쩌다보니 같이 오게 됐어. 인사하렴." 영아는 재빨리 고래를 꾸벅 숙였다. "세레나 왕비님이시죠? 오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세레나는 웃으며 영아에게 말했다. "예. 반가워요. 이곳에 계시는 동안 자기 집처럼 편하게 지내세 요." 영아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왕비님." 난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아들을 낳았다지? 방금 반데라스에게 얘기 들었어. 축하 해." "고마워요." "저기 있는 게 니 아기야?" "예." 우리는 요람 주위에 모였다. 요람에는 작고 예쁜 아기가 누워 잠 을 자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기에게 집중되었다. 루시아와 영 아는 물론 어린 엘프들까지도 숨을 죽이고 잠자는 아기를 지켜보 았다. "언제 낳은 거야?" "두 달 전에요." 반데라스는 세레나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때? 우리 아기 예쁘지?" "……." 우리 아기? 이 아기는 메이드 인 반데라스&세레나이니, 반데라스 입장에서 는 '우리 아기' 가 맞다. 아아~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반데라스&세레나 커플은 이미 제작 완료했고, 인디&일루니아 여사님 커플은 제작 공정이 반쯤 완료되었다. 조만간 완제품을 출 시할 것이다. 하나도 아닌 두 개나. 생각해보니 니나도 마크라는 남자와 결혼해 사내애를 낳았다. 다들 이렇게 결혼해 애 낳고 잘 살고 있는데, 왜 나만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도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싶단 말이다! 하지만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애 낳는 것 역시 혼자 하 는 것이 아니고, 잘 사는 것 역시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루시아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루시아의 마음은 저 먼 곳에 있으니……. "우아아앙!" 요람 안에서 잘 자던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세레나는 놀라 아기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흔들며 달래주었다. "울지 마, 아가야. 착하지?" 으음, 이렇게 아기를 안고 있으니 정말로 애 엄마 같다. 애를 낳 았ㅇ도 세레나의 미모는 여전했다. 색이 짙은 초록색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찰랑거렸고, 허리는 처녀 때처럼 잘록하고 늘씬했다. 누가 세레나를 보고 애 엄마라 생각하겠는가? 출산한 뒤 오히려 아름더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원래의 미모에 원숙미를 더했다고나 할까? "우아아아아앙!" 열심히 달래보았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는 커지기만 했다. 중간의 '아' 가 두 개에서 네 개로 늘었다. 저렇게 미숙하게 달래니까 애가 계속 울지. 역시 아직 초보 엄마라는 건가? "잠깐만 줘봐." "안 돼! 내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 이젠 아기한테까지 집착하냐? "장래 헤리오 왕국의 국왕이 될 아이에게 내가 뭔 짓을 하겠니?" 세레나는 내 말이 맞다고 여겼는지 반데라스를 가볍게 무시하고 나에게 아기를 넘겨주었다. "조심하세요." "걱정 마." 난 세레나에게서 아기를 받아들었다. 엄마의 품을 떠나 낯선 사 람의 품에 안기자 아기는 더 크게 울어댔다. "우아아아아아아앙!" 중간의 '아'가 무려 여섯 개로 늘었다. 난 재빨리 토닥토닥 스킬을 발동시켰다. 토닥토닥~. 그러자 놀랍게도 아기는 금방 울음을 그쳤다. 난 이어서 머리 쓰 다듬기 스킬을 발동시켰다. 슥슥~. 배냇머리(출생한 후 한 번도 깎지 않은 갓난아이의 머릿털)의 감촉이 제법 좋다. 그래봐야 우리 라이의 뽀송뽀송한 머리카락에 비하면 돼지털에 불과하지만(이 말을 세레나에게 하면 화내겠지?). "꺄르르~!" 아기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크게 뜨며 방긋방긋 웃었다. 주위 사 람들은 놀라움으로 표시했다. 반데라스는 입을 쩍 벌렸다. "내,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한 거야?" "후후~ 무슨 짓을 하긴? 그냥 등 좀 토닥거려주고, 머리 좀 쓰다 듬어줬을 뿐이야." 세레나 역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한 거에요?" "아까 등을 토닥거리는 것은 우는 애 달랠 때 쓰는 방법이고, 머 리 쓰다듬어준 것은 애 기분 좋게 만들어주고 싶을 때 쓰는 방법이 야." "아까는 토닥거려도 안 그쳤잖아요." "그냥 토닥거려서는 안 되지. 요령이 필요해." 그렇다. 포인트는 요령이다. 그냥 토닥거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 정도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 다. '스킬' 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그럼 가르쳐주세요." "글쎄. 그게 가르쳐준다고 해서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서……." "언제까지 내 아들을 안고 있을 거야? 이리 내." 난 원하는 대로 반데라스에게 아기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방긋 방긋 웃던 아기는 또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우아아앙!" 반데라스는 엄청 당황했다. "헉! 왜, 왜 울고 그러니? 그, 그치렴, 아가야." "그래서야 그치겠니?" 난 다시 아기를 안아들었다. 그러자 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방긋방긋 웃었다. 난 반데라스를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후후~ 아무리 니 아들은 아빠인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헉! 그, 그런!" 크리티컬 히트였는지 반데라스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 다. 사실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았다. 각종 보모 스킬을 마스터한 나를 그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난 아기를 안고 살짝 흔들어주며 물었다. "그런데 아기 이름이 뭐야?" 내 말에 루시아도 그제야 생각난 듯 세레나에게 물었다. "아직까지 아기 이름도 안 물어봤네요. 이름이 뭔가요?" 세레나와 반데라스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말이죠……." "응? 왜들 그래? 아기 이름이 뭐냐니까?" 내가 계속 묻자 세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 었다. "히로……." "응? 왜?" "히로…… 에요." "응? 히로인데 어쩌라구?" "그게 아니라 이름이 히로에요. 헤리오 히로." "……." 뭐라? 헤리오 히로? "헉쓰! 설마 아기한테 내 이름을 갖다 붙인 거야?" "예." 난 놀라 입을 적 벌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기한테 내 이름을 붙일 줄이야……. "어째서?" 반데라스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어쨌든 니가 세레나 양을 구해준 것은 사실이니까." 세레나가 부연 설명을 붙였다. "이 애가 당신처럼 훌륭하게 자랐으면 해서 당신의 이름을 붙였 어요.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결정해서 미안해요." "아, 아니, 뭐 그런 뜻이라면야……."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서는 아기한테 지인의 이름이나 훌륭한 사 람의 이름을 붙여주는 풍습이 있다고 들은 것 같다(물론 이런 풍습 은 어느 나라나 다 있다). 어쨌든 날 닮으라는 뜻에서 나와 같은 이름으로 지었다니, 왠지 흐뭇한 기분이 든다. "흐음, 이 애 이름이 히로란 말이지? 그럼 헤리오 히로 왕 자가 되겠군. 크면 히로 국왕이 되겠고. 분명 날 닮아 훌륭 한 사람이 될 거야."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 영아는 재빨리 찬물을 끼얹었다. "오빠 닮으면 이 애도 뺀질이가 되는 거야?"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한국으로 보내버릴까? 루시아는 세레나에게 물었다. "저도 한번 안아 봐도 될까요?" 세레나는 기꺼이 허락했다. "예. 안아보세요." 난 아기를 루시아에게 넘겨주었다.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아들었다. 아기는 어느새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내 품이 편하긴 어지간히 편했나 보다. "예쁘다." 루시아는 사랑스런 눈길로 아기를 보았다. 어린 엘프들은 루시 아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앗! 라이도 보고 싶어요." "루비도요." "보여주세요." "응. 알았어." 루시아가 무릎을 궆히자 얼ㄴ 엘프들은 차례대로 손을 뻗어 아기 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귀엽다." "응응. 아기 막막 귀여워." "되게 작다." 루시아는 남의 아기를 너무 오래 앉고 있으면 실례라고 생각했는 지, 세레나에게 돌려주었다. 세레나는 아기를 다시 요람에 눕혔다. 어린 엘프들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라이 졸려요, 언니 오빠." "루비도요. 다리도 아파요." "자고 싶어요."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어느새 밤이 깊었다. 나도 살짝 피로를 느낄 정도니 어린 엘프들 이 자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잠깐만 기다려봐." 반데라스는 우리에게 본궁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주었다. 개인 적인 친분도 친분이지만, 공적인 관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아이리스 왕국의 공작이고, 루시아는 아이리스 왕국의 공주이니. 우리가 같은 방에서 머문다면 안 좋은 소문이 날 수도 있다. 참고 로 시녀들을 통해 퍼지는 소문의 전파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각 방을 쓰기로 했다. 여자 따로 남자 따 로. 루시아, 영아, 라이, 루비가 한 방을 쓰고, 나와 루는 그 옆방을 썼다. 아이들은 피곤한지 그냥 잠자리에 들려 했지만, 우리는 잠든 아 이들을 깨워 억지로 이를 닦게 했다. 씻는 거야 며칠 안 씻어도 상관없지만, 이는 반드시 제 때 닦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집 철칙 이다. 루는 침대에 눕자마자 자연스럽게 내 팔을 벴다. "……." 뭐야? 감히 남자 주제에 내 팔을 베고 자겠다는 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깨끗히 씻은 루는 뽀송뽀송한 모습이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루비랑 참 닮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머리만 좀 기르면 루와 구별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더듬이가 있으니 구별을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루비 의 더듬이는 오른쪽으로, 루의 더듬이는 왼쪽으로 되어있으니. 이 더듬이에 숨겨진 비밀을 알고 싶다. 어째 이 더듬이에 뭔가 커 다란 비밀이 숨어있을 것 같다. 더듬이를 한번 잘라볼까? 그럼 그때부터 서로를 못 알아보는 거 아니야? 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 * * * 다음날. 침대가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잠을 푹 잤다. 역시 왕궁 침대라는 건가? 우리는 국왕 일가와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비록 사 적인 만남이지만, 국왕 일가를 만나는 만큼 어느 정도는 예를 갖춰 야할 필요가 있다. 루시아와 영아는 세레나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로 갈아 입었다. 세레나는 직접 드레스와 장신구를 골라주었다. 루시아는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연두색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 나 화장은 특별히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그 자체만으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목 부분이 왠지 허전했기에 백금색 목걸이를 찼다. 그 외에 다른 장신구는 하지 않았다(루시아는 장신구 다는 걸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평소에도 귀걸이나 목걸이를 하지 않는다. 몸에 걸 친 장신구라고 해봐야 왼손에 낀 커플링이 전부다). 영아는 동양적인 느낌의 하늘색 실크 드레스를 입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은 위로 틀어 올려 보석 핀으로 고정시켰다. 앞머리는 이 제까지 스타일과 마찬가지로 이마를 완전히 덮고 있었고(앞짱구를 가려야 하니), 그 위에 은색 써클렛을 썼다. 그리고 물방울 다이아몬 드가 달린 귀걸이를 끼고, 금색 줄에 색색의 작은 보석들이 매달린 목걸이를 찼다. 또한 팔에는 가느다란 링이 겹쳐진 모양의 팔찌를 찼다. 그 보석과 장신구들은 전부 세레나의 것이었다. 원래부터 공주인 루시아야 드레스를 입어도 별 다른 감흥이 없었 지만, 평민인 영아는 달랐다. 영아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연신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기 뻐했다. "이게 정말 나란 말이야? 믿기지 않아." 그리고는 나에게 물었다. "어때, 오빠? 나 예뻐? 공주님 같아?" 옷이 날개라고 드레스를 입은 영아의 모습은 꽤나 예뻤다. 사실 내가 만날 앞짱구라고 놀려서 그렇지, 영아도 제법 귀엽고 예쁘게 생겼다. "뭐,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구나." 나는 영아를 보며 시큰둥하게 말한 다음 고개를 돌려 루시아를 보았다. "너무 예뻐, 루시아. 세상에서 제일 예뻐. 막막 예뻐. 넌 어떤 옷 을 입어도 예쁘지만, 드레스를 입으니 더 예쁜 것 같아." 그러자 영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날 째려보았다. "뭐야, 오빠?" "응? 뭐가?" "반응이 전혀 다르잖아. 나한테는 그냥 시큰둥하게 말했으면서, 루시아 언니한테는 왜 그렇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거야? 지금 사 람 차별하는 거야?" "차별이 아니라 그냥 느낀 대로 말했을 뿐이란다. 니가 한번 직 접 보렴." 영아는 내 말에 따라 루시아를 한번 본 다음 거울을 보았다. "우앙~." 그리고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루시 아는 영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괜찮아. 히로가 장난으로 그러는 것뿐이야." "그치만 언니한테 비하면……." "독수리 앞에 똥파리?" 내가 끼어들자 루시아는 나에게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찌릿! 알았어, 루시아. 입 다물고 있을게. "그런 생각하지 마. 영아도 충분히 예쁘니까." "고마워요, 언니." 루시아의 위로에 영아는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한 손으로 눈 밑을 잡아당기며 혀를 삐쭉 내밀었다. 일명 메롱. 훗~ 그런 걸로 나를 도발하려 하다니. 가소롭기 그지 없……긴 뭐가 그지없어! 감히 이 오빠한테 메롱을 하다니! 나중에 루시아 없을 때 두고 보자. 세레나는 영아에게 말했다. "마음에 들면 가지셔도 돼요." 이런 말은 어디까지나 '그냥 해본 말' 이다. 참고로 상대방이 이 런 말을 했을 때……. "정말요? 정말로 가져도 되는 거예요? 이 드레스랑 장신구 다 요?" ……절대 이런 대사를 날려서는 안 된다. 영아가 '공짜는 무조건 환영이에요' 라는 표정으로 대사를 날리 자, 세레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드리는 선물이라 생각하세요." "고마워요, 왕비님." "……."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아아~ 오빠로서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중에 따로 불러서 얘기하던가 해야지. 루시아와 영아가 드레스를 입었는데, 어린 엘프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에게 드레스를 입혔다. 라이는 프릴이 잔 뜩 달린 하얀색 드레스를, 루비는 같은 디자인의 분홍색 드레스를. 아이들용 드레스인 만큼 여성스러움보다는 귀여움이 많이 강조되 었다. "어머, 귀여워!" 세레나와 시녀들은 드레스를 입은 아이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꽉 안고 부비부비를 해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깜찍했기 때 문이다. 특히나 지금은 인간도 아닌 엘프의 모습이다(라고 해봐야 다른 것은 귀뿐이지만). 엘프라는 신비감까지 더해져 라이와 루비는 묘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라이와 루비는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한 바퀴 빙글 돌아보였다. "라이 어때요, 오빠? 예뻐요?" "루비가 더 예쁘죠? 그쵸?" "둘 다 너무 예뻐." 루는 내 옷깃을 잡아 당겼다. "응? 왜 그러니?" "형이랑 저는 안 갈아입어요?" "왜? 너도 갈아입혀 주랴?" 라이와 루비가 예쁜 옷을 입는데, 루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난 루에게 검은색 칠부바지와 흰색 티, 그리고 그 위에 검은색 재킷 을 입혀 주었다. 그리고 두툼한 농구화를 신겨주고, 머리에는 검은 색 야구모자를 씌워주었다. "이제 됐지? 맘에 드냐?" "예. 대따 맘에 들어요." 루는 캐주얼한 복장이 마음에 드는지 괜히 멋진 포즈를 취해보았 다. 시녀들은 다들 쇼타 콤플렉스가 있는지 라이와 루비 때보다 더 욱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시녀들이 루를 만져보려 하자 영아는 루를 선점(?)하고, 접근을 원천봉쇄 했다. "꺄아! 우리 루 귀여워. 누나는 루가 너무 좋아." "……." 그만 좀 비벼라. 애 닳아 없어지겠다. 어쨌든 복장을 갖춰 입은 우리 일행은 정원으로 나갔다. 헤리오 왕궁의 정원은 매우 잘 꾸며져 있었다. 먼저 온 시녀들은 숲 한가운 데에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숲은 깔끔하고 아름다운 느낌이었다. 하지 만 나는 이런 인위적인 느낌의 숲보다는 엘프의 숲처럼 자연적인 느낌의 숲이 더 좋다. 우리는 그곳에서 에이미 공주와 에스터 공주를 볼 수 있었다(누 가 에이미고, 누가 에스터인지는 세레나가 말해주었다).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는 배 다른 연년생 자매였다. 에이미 공주가 17살, 에스 더 공주가 16살이다. 에이미 공주는 은발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160센티 정도의 키에 약간 마른 듯한 몸매. 얼굴은 갸름하고 눈은 크고 동그 랗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파란색 눈동자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이 목구비는 오밀조밀하고 예쁘게 생겼다. 새하얀 피부는 관리를 잘 한 덕분이닞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전체적인 느낌은 여자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웠다. 17살이라는 나이에 비해서도 좀 어린 편이다. 다행인 것은 아직 다 자란 것 같 지 않다는 거다. 아무래도 발육이 좀 늦은 듯한데 1, 2년 정도 후 면 정말 미녀가 될 듯하다. 에스더 공주 역시 에이미 공주와 비슷하게 생겼다. 키는 155센티 정도로 에이미 공주보다 약간 작다. 하지만 배 다른 자매여서 그런 지 다른 점도 몇 가지 있었다. 에이미 공주는 색이 짙은 은발인 반 면, 에스더 공주는 색이 옅은 은발이었다. 그리고 약간 보랏빛을 띠 고 있었다. 또한 에이미 공주의 눈은 짙은 파란색인 반면, 에스더 공주의 눈은 보라색이었다. 어쨌든 자매는 매우 친해보였고, 국왕인 반데라스와 사이도 좋아 보였다. 반데라스와 두 공주는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나타나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공주는 우리 일 행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의 잘생긴 외모 때문……은 아니고, 루 시아의 아름다움과 어린 엘프들의 귀여움 때문이다. 루시아는 치마를 붙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말했다. "아이리스 왕국의 제1왕녀 아이리스 루시아입니다. 이렇게 초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아와 라이, 루비는 재빨리 루시아를 따라 인사했다. "영아라고 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라고 해요오." "루비라고 해요오." 아아~ 저 어색한 동작. 루시아는 절도 있는 동작이었지만 그 동작을 따라하는 영아, 라 이, 루비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반데라스 일행도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헤리오 왕국의 제1왕녀 헤리오 에이미입니다. 루시아 공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헤리오 왕국의 제2왕녀 헤리오 에스더입니다. 초대에 응해주셔 서 감사합니다." 이제 내 소개를 할 차롄가? 이 순간을 기다렸도다. 난 갖은 폼을 다 잡으며 말했다. "난 아이언스 히로다. 다들 이름은 들어봤지? 이제부터 오빠라고 불러라." "……." "……." 뭐야, 이 침묵은? 난 재빨리 다음 말을 덧붙였다. "싫음 말구."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우리는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 다과 를 즐겼다. 차는 홍차고, 안주(?)는 산딸기 케이크다. 티타임(Tea Time)이란 말 그대로 차를 즐기는 시간이다. 즉, 중요한 것은 차지 결코 케이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에는 손도 안 대고, 케이크 에 머리를 처박고 먹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할 수 있다. 어린 엘프들은 자기들 몫의 케이크를 다 먹은 것도 모자라 남의 케이크까지 뺏어 먹었다(너무 맛있게 먹는 걸 본 사람들이 자기들 몫의 케이크를 내주었다). 그리고는 내 케이크까지 노렸다. 난 재빨리 케이크를 입에 밀어 넣었다. "미안하다, 얘들아. 다 먹었다." 영아는 날 흘겨보며 말했다. "치사해, 오빠.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애들 입만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냐? 나도 산딸기 케이크 좋아 한다." 어린 엘프들은 불만스러운지 볼을 잔뜩 부풀렸다. 그리고 빈 접 시를 시녀들에게 내밀었다. "리필해주세요오~!" "……." 이것들 혹시 여기를 '케이크 뷔페' 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다행이 시녀들은 군말 없이 케이크를 리필해 주었다. 아아~ 쪽 팔려. 여자들(루시아, 영아, 세레나, 에이미 공주, 에스더 공주, 시녀들 등 등)은 케이크를 복스럽게 먹는 아이들을 귀엽다는 눈길로 바라보 았다. 만날 보는 내가 귀엽다고 생각할 정도인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야 오죽하겠는가? "정말로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전인이세요?" "8클래스 마스터라는데 사실인가요?" "드래곤은 어떻게 생겼나요?"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는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가 아니겠는가? 살짝 삐끗하는 바람에 전설의 용사에서 전설의 사기꾼으로 추락 하긴 했지만 말이다. "예. 저는 8클래스 마스터 맞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8클래스 러너지요." "예? 이 꼬마가요?" "꼬마라니요. 이렇게 보여도 라이는 700살이 넘은 엘프랍니다." "예? 700살이요?" "자기소개 다시 한번 하렴, 라이야." 내가 말하자 라이는 케이크를 먹다 말고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 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라이는 상아탑의 주인이에요. 본명은 라이미안이 구요, 현재 8클래스 러너에요. 열심히 마법을 공부해서 언젠가는 꼭 오빠처럼 8클래스를 마스터할 거예요. 헤헤~" 자기소개를 끝마친 라이는 다시 자리에 앉아 케이크를 먹었다.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는 깜짝 놀랐다. "사, 상아탑의 주인이요?" "상아탑의 주인이면, 마법사 길드의 길드 마스터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 라이가 바로 마법사 길드의 길드 마스터지요. 음하하하~." 상아탑의 주인이면 일국의 국왕과도 맞먹는 지위라 할 수 있다. 우리 라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 것이다. 아아~ 이 뿌듯함. 뿌듯뿌듯~. 나와 루시아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뿌듯함을 감추 지 않았다. 이런 거야말로 자식 가진 부모의 기쁨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루시아는 에이미 공주에게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오빠와 결 혼하게 될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미리 봐두려는 것 같았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일단 외모와 첫인상에는 합격점을 준 것 같았다. 난 루시아와 에이미 공주의 대화를 들으며 에이미 공주의 성격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에이미 공주의 성격은 한마디로 말괄량이 푼수였다. 대략 영아와 비슷한 성격이다. 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에이미 공주는 루시아를 언니라고 불 렀다. 으음, 언니라……. 원래대로라면 루시아가 에이미 공주를 언니라고 불러야 한다. 에이미 공주는 루시아를 아가씨라 부르고. 뭐, 아직 결혼 안 했으니 상관없으려나? 에이미 공주가 말괄량이 푼수인 것과는 반대로 에스더 공주는 병 약한 미소녀 같은 느낌이었다. 창가에 있는 침대에 앉아 바깥 풍경 을 바라보며 책을 읽으면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다. 세레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실제로도 몸이 좀 약하다고 한다. 조금만 무리하면 쉽게 지치기 때문에 격렬한 운동은 무리이고, 하 는 운동이라고 해봐야 가벼운 산책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주로 별궁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나? 에스더 공주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 질문은 주로 나 에 대한 것들이었다. 어떻게 아이언스 이그리드를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대마법사 가 되었는지, 레드 드래곤과 싸울 뻔했을 때는 어땠는지, 모습을 감 춘 뒤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전부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다. 난 적당히 거짓을 섞어 말해주 었다. "그동안 루시아와 함께 엘프의 숲에서 얘들을 길렀어." "엘프의 숲에서요?" "응. 거기서 작은 가게를 차려서 장사를 했어. 어쨌든 먹고 살아 야하니까." "그럼 사일런스 백작님과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도 그곳에 계셨 나요?" "뭐, 그렇지. 엘프의 숲이 공기 좋고 물 좋아서 살기 좋은 동네거 든. 빈 곳에다가 집 지어서 살면 되니, 집값과 땅값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요즘 집값 정말 너무 비싼 것 같아. 정부…… 아니, 국가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니까." "그건 확실히 문제인 것 같아요. 어떤 귀족들은 집값이 오르면 그만큼의 재산이 상승하는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실물경제와 자산경제의 차이점을 모르고 하는 헛소리지요." "그렇지. 부동 자산이 아무리 올라봐야 실물경제에는 아무런 변 화가 없으니까. 오히려 부풀려진 자산경제는 실물경제에까지 위협 을 주기 마련이지." 우리는 한동안 부동산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책을 많이 읽었 다더니 제법 학식이 풍부한 것 같았다. 대화는 점점 심도 있는 쪽으 로 흘러가 각종 경제 용어가 난무했다. 에스더 공주는 간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인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열심히 말했다. 아무래도 별궁에는 대화 상대가 부족한 모양이다. 하긴, 어떤 시녀가 미쳤다고 경제에 대해 심도 있는 지식을 갖고 있겠는가? 드레스, 보석, 장신구, 스캔들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눌 시녀들이야 널리고 널렸겠지만. 부동산에 대한 토론을 끝마친 우리는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왔 다. 에스더 공주는 왕궁 밖으로 나간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인지 모험 이야기에 큰 흥미를 나타냈다. 에스더 공주가 오늘 날 만난 것은 행 운이라 할 수 있겠다. 모험일면 내 전문 아니겠는가? 나야 뭐 인생 자체가 모험인 스펙터클한 인간이니. "오빠(어느새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참 좋겠어요. 여행도 하고, 모험도 하고, 드래곤도 만나보고. 저도 드래곤을 꼭 한번 보고 싶었 는데……." "드래곤이 뭐 별건가? 폴리모프 하고 있으면 인간과 똑같아. 만 날 보다보면 지겹기까지 할 정도야."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우리 가족에게는 드래 곤이라고 해봐야 별 다른 감흥이 없다. 우리 집에만 드래곤이 셋이 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레즈(레드 아님) 드래곤 칼라이스, 가사 드래곤 인디카즈네까지. 그리고 깡패 드래곤 카이네이드와 백수 드래곤 에스카네스도 한때 우리 집에서 살았었다. "엘프의 숲에는 정말 엘프들이 사나요?" "그럼 엘프의 숲에 엘프가 살지 드워프가 살겠니?" "엘프들은 전부 미남 미녀에요?" "응. 전부 예뻐. 얘들을 보면 알 수 있잖니? 물론 그중에서도 우 리 애들이 특히 더 예쁘지만. 그치, 루시아?" 에이미 공주와 대화를 나누던 루시아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애들보다 예쁜 엘프는 이 세상에 없어." 난 다시 에스더 공주를 보았다. "들었지?" "예. 이 아이들 정말 예뻐요." "당연하지. 누구 아이들인데. 얘들이 이렇게 어려보이지만, 그래 도 나이는 너보다 훨씬 많아. 뭐, 하는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은 안 들 지만." "잠깐만 만져 봐도 돼요?" 난 루시아를 보았고, 루시아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만지기 위해서는 루시아의 허락이 필수였다. 에스더 공주는 조심스럽게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라이의 볼을 살짝 만져보았다. 앗! 입가에 생크림이! 난 냅킨으로 라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라이 오빠 무릎 위에 앉고 싶어요." "그래." 난 라이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러자 루시아는 루비를 무릎 위 에 앉혔고, 영아는 루를 무릎 위에 앉혔다.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는 그런 우리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후후~ 어린 엘프들을 무릎 위에 앉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아아~ 이 우월감. 반데라스는 일이 많은 관계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그 후로도 한 시간 정도를 더 얘기했다. 비록 정략결혼이긴 하지만 에이미 공주는 키레아 왕에게 좋은 감 정을 가지고 있었다. "멋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혼자서 무너진 왕국을 재건했잖아 요." "크흐흠!" 나는 최대한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에이미 공주는 말을 바 꾸었다. "무, 물론 아이언스 공작님의 도움도 조금 있었지만요." "크흐흐흠!" "아니, 많이 있었어요."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나 없으면 아이리스 왕국 재건 은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감히 아이리스 왕국 재건을 위해 불 철주야 노력한 나의 공을 깍아내리려 하다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정말 멋지게 생기셨을 거예요." "뭐, 키레아 폐하 정도면 멋지게 생겼지. 그런데 나이 차가 좀 많 이 나지 않나?" 내가 나이 얘기를 하자 루시아는 고개를 획 돌려 나를 강하게 째 려보았다. 찌릿! 난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뭐, 서로 좋다면야 나이 같은 건 아무런 상관이 없지. 왜 사랑에 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고 하잖아." 에이미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어요. 그리고 그 정도 차이 면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전 어린 남자보다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 는 남자가 좋거든요. 오빠한테 키레아 폐하와의 국혼이 성사되었 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내심 키레아 폐하 같은 분께 시집가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키레아 왕의 얘기를 할 때마다 에이미 공주는 눈을 빛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안심했다. 키레아 왕이랑 에이미 공주랑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일종의 국제결혼이군. 헤리오 왕국 여자와 아이리스 왕국 남자가 결혼하는 것이니. 역시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는 건가? 사실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결정판은 나와 루시아이다. 우리는 국경도 아닌 차원을 넘었다. 그리고 루시아는 나보다 두 살 연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룩해 냈다.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물론 대박일 것이다. "……." 생각해보니 영아가 이미 썼군. "키레아 오빠는 정말 멋있는 남자야. 우리 오빠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래." "키레아 폐하가 절 좋아하실까요?"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고마워요, 언니. 언니와 이렇게 얘기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하루 빨리 키레아 폐하를 만나 뵙고 싶어요." 에이미 공주는 상기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이 영락 없는 '사랑에 빠진 소녀' 의 모습이다. 계속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나(책에는 싶었으니로 나왔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본궁의 숙소로 돌아온 나는 루시아에게 물었다. "어때? 언니가 될 사람은 마음에 들어?"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마음에 들어. 외모도 예쁘고, 성격도 착한 것 같아." "좀 말괄량이 같던데." "뭐, 어때? 솔직한 게 좋던데. 가식적인 것보다 훨씬 낫지." "하긴 솔직한 것 같긴 하더라.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의외로 키 레아 폐하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응. 오빠랑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래서 얼마나 안심했는 지 몰라. 정말 다행이야." 루시아는 한 손을 가슴에 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오빠는 자신을 너무 희생해왔어. 이제는 좀 자신의 행복 을 챙기면 좋겠어." 오빠를 생각하는 루시아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난 루시아 옆에 앉아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걱정하지 마. 키레아 폐하는 분명 행복해질 거야. 우리처럼." 루시아는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나를 흘겨보았다. 무언가 불 만이 있는 듯한 모습이다. "왜, 왜 그래? 호,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난 잘못한 것이 있나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못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아의 눈빛은 장난 이 아니었다. "아까 보니까 에스더 공주랑 얘기 많이 하더라." "응? 무, 무슨 뜻이야?" "오빠라고까지 부르던데.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그, 그건 그냥 여동생같이 느껴져서……." "여동생같이 느껴졌어?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이었다는 거야?" "헉! 그 무슨 엄한 말을!" "됐어. 더 이상 너랑 말하기 싫어." "……." 내가 에스더 공주와 다정하게 얘기해서 화가 난 건가? "아니야, 루시아. 정말로 오해야. 내 사랑은 너뿐인 걸 너도 잘 알 잖아. 그리고 난 에스더 공주 같은 스타일 별로 안 좋아해. 너무 어 려보이잖아. 난 그런 어린애보다는 여성스러운 느낌의 연상의 여 인……." "라이레얼?" "라이레얼 같은 스타일……이 아니라 루시아 같은 스타일을 좋 아해. 그런데 여기서 왜 라이레얼 나오는 거야?" "흥!" "……." 내가 다른 여자와 눈만 마주쳐도 의심을 하는 루시아. 옛날 일을 몇 번이고 끄집어내는 루시아. 혹시 루시아는 의부증? 아무리 생각해도 루시아는 시기와 질투가 너무 강한 것 같다. 그래도 난 루시아가 좋아~. 시기와 질투를 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관심조차 갖지 않을 테니. "내 사랑은 오직 너뿐이야, 루시아." "흥!" "사랑해, 루시아." "돼, 됐어." 루시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화가 풀리고 있다는 증거다. 난 재빨리 루시아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세상에서 니가 제일 예뻐. 히로에게는 오직 루시아뿐이야." 루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것은 키스를 해도 좋다는 뜻? 내가 키스를 하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데, 라이와 루비가 우리의 앞에 섰다. 라이와 루비는 마주보며 말했다. "라이 사랑은 오직 루비뿐이야." "흥!" "사랑해, 루비야." "돼, 됐어." "세상에서 루비가 제일 예뻐. 라이에게는 오직 루비뿐이야." "정말?" "응응. 정말 루비뿐이야." "루비에게도 라이뿐이야. 사랑해, 라이야." "츄~" "츄~"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쭉 내미는 라이와 루비. "……." 저것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을 봤나!"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감히 오빠와 언니를 놀리다니! 저쪽으로 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 "우엥~." "으앙~." 라이와 루비는 울상을 지으며 방 한쪽에서 무릎 꿇고 손을 들었 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루시아의 얼굴은 잘 익은(책에는 읽은 이라 나왔네요.) 사과처럼 빨갛게 변해있었다.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아, 아니, 난 그냥……." "흥!"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방을 나갔다. 난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 보았다. 분위기 좋았었는데……. 이게 다 저것들 때문이다. 난 벌을 서고 있는 두 엘프를 강하게 째려보았다. 슬금슬금 손을 내리던 두 엘프는 놀라 다시 번쩍 들었다. "니들 때문에 루시아가 화났잖아! 어떻게 할 거야?" "라이는 한 개도 잘못한 거 없어요." "루비도 잘못한 거 없어요." "……." 헉! 이런 뻔뻔한 것들을 봤나! "니들 남의 나라 왕궁에서 먼지 나게 맞고 싶니? 어디 보자? 쐬빳 따로 쓸 만한 게 있으려나?" 내가 방 안을 두리번거리자 라이와 루비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 했다. "자, 잘못했어요, 오빠. 라이를 용서해주세요." "아니에요, 오빠. 먼저 루비를 용서해주세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라이와 루비. 나는 기꺼이 두 엘프를 용서해……주긴 뭘 용서해줘? 아무리 용서해주려고 해도 용서가 안 된다. 하지만 울먹거리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내가 또 마음이 약해진다. 게다가 내 입으로 말했듯이 이곳은 남의 집(어쨌든 왕궁은 왕이 사는 집이다). 남의 집 에서 집안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하다. 잘못하면 콩가 루 집안으로 비칠 수도 있으니. "좋아. 다들 일어나.' 라이와 루비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리고는 나에게 다가와 몸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떨어댔다. "라이는 오빠가 막막 좋아요." "아니에요, 오빠. 루비가 더 오빠를 막막 좋아해요." "라이가 부비부비 해드릴게요." "아니야. 오빠는 루비가 부비부비 해줄 거야." "……." 뜻은 고맙지만, 너희들 같은 유아 체형으로 부비부비는 무리란 다. 루시아 정도 되면 모를까…… 흠흠. "루시아 언니 좀 찾아올래?" "네에~!" 라이와 루비는 루시아를 찾기 위해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창가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후우~!" 이 담배 한 개비의 여유. 애연가만이 느낄 수 있는 생활 속에 작은 휴식이다. 아아~ 좋다. 담배를 반쯤 피웠을 때쯤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찾아온 건가? 이것들이 웬일로 말을 잘 듣는군. 난 재빨리 담배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루시아가 방 안에서 담배 피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왔어?" 난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헉!"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루시아가 아닌 다른 여인이었다. 수수 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갈색머리 소녀. 아니, 이젠 여자라고 불러야 하나? "라, 라나……니?" "오, 오빠." 라나는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마지막으로 라나를 만난 것은 9개월 전. 라나는 그사이 많이 자라 있었다. 이목구비가 또렷 하고, 몸매의 굴곡이 완연한 것이 이제 더 이상 소녀라고 부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이렇게나 변하다니. 여자애는 원래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건가? "오빠!" 라나는 갑자기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난 얼떨결에 라나를 안 았다. "왜, 왜 그러니?" "흑흑." 라나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난 깜짝 놀라 라 나에게 물었다. "왜 우는 거야?" "흑흑, 보고 싶었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오빠가 사는 세계로 찾아가고 싶었어요." "……." "그런데 오빠가 이렇게 와주다니……." 라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쏟아냈다. 난 웃으며 라나 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랬구나. 오빠가 보고 싶었구나." 끄덕끄덕. "괜찮아. 그래서 이렇게 오빠가 왔잖아.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흑흑, 그치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단 말이에요." "알았어. 그럼 그치게 해줄게." 토닥토닥 스킬을 발동시킬 때란 말인가? 내가 라나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려고 하는데, 또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너희들 왜 자꾸 그러는 거야?" "빨리 들어가요, 언니." "맞아요. 오빠가 언니를 찾아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라이와 루비는 들어오기 싫다는 루시아의 손을 억지로 잡아 당겼 고, 루시아는 못 이긴 척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나와 루시아의 눈이 마주쳤다. 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아! 왔어, 루시아?" 루시아의 표정이 안 좋다. 그것도 그냥 안 좋은게 아니라 매우 안 좋다. 어째서 루시아의 표정이 저렇게 굳은 걸까? 내가 또 무슨 잘못이라도……. "헉…… 쓰쓰!" 내 품에 안겨 있는 라나와 그런 라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토닥 여주는 나. 오해 사기에 충분하다 못해 완벽한 장면이다. 루시아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난 재빨리 변명을 했다. "아, 아니야, 루시아. 모든 것은 오해야. 지금 이 상황을 객관적으 로 볼 경우 충분히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주 관적인 입장에서 잠깐 설명을 하자면…… 응?" 루시아는 나를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침대로 가서 그 위에 있는 배게 를 집어 들었다. "……." 응? 베개? 난 루시아가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헉! 정말 아니야, 루시아. 제발 내 말을 들어봐." 루시아는 양 손에 베개를 쥔 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컷 팬 다음 들어줄 테니까, 일단 맞아." "……." 루시아는 실컷 팼고, 나는 일단 맞았다. 그 과정을 생략하고 공백 으로 처리한 것은 나이 어린 독자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미칠까 두 려워서이다. 일종의 심의삭제라고나 할까? 뭐, 그래봐야 이 글 자체가 정서에 안 좋으니 별 상관없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튼 실컷 얻어맞은 나는 눈물을 훌쩍거렸다. "훌쩍~ 너무해, 루시아. 어떻게 널 사랑하는 나를 이렇게 때릴 수 있어? 루시아는 히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틀림없어. 흑흑…… 우엥~ 우엥~." 사실 베개로 세게 때려봐야 얼마나 아프겠는가? 뭐, 의외로 제법 아프긴 하지만 울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내가 우는 것은 정신적인 충격 때문이다. 루시아에게 무자비 하게 맞았다는 정신적 충격. 육체적 아픔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전설의 용 사 아이언스 히로라고 해도 정신적 아픔까진 참을 수는 없다. "울지 마세요, 오빠. 오빠가 울면 라이도 슬퍼진단 말이에요." "루비가 부비부비 해줄게요, 오빠. 그러니까 뚝 그치세요." 라이와 루비는 양쪽에 서서 훌쩍이는 나를 달래주었다. 생각해 보면 이것들이 원흉이다. 이것들이 루시아를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베개로 무자비하게 맞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지지리도 말 안 든는 것들이 꼭 이럴 때는 말을 잘 들어 서 오빠를 곤경에 빠뜨린다. 이것들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날 패느라 많이 힘들었는지 루시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 다. 난 재빨리 두 손으로 손수건을 바쳤다. 루시아는 그것으로 땀 을 닦아냈다. 라나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까 나를 무자비하게 때 리는 루시아를 말리려 했지만, 루시아의 박력에 놀라 실행에 옮기 지는 못했다. 루시아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라나의 모습이 안 돼 보였는지 웃으 며 말했다. "그렇게 당황해할 필요 없어." "예, 예." 하지만 라나는 여전히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내가 얻어터지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어쨌든 라나도 공범(?) 아니겠는가? 이러니 마치 바람 피다 걸린 것 같은 느낌이다(아주 틀린 말은(책에는 말인으로 나왔음.) 아 니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아직 간통죄를 인정하고 있다. 간통이란 결혼하여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옛날에는 여자의 간통죄만을 인정했다. 즉, 남자가 바람을 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여자가 바람을 피 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엄연한 남녀차별이라 할 수 있겠다. 두 국가 모두 남녀차별임을 인정했다. 재밌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일본은 간통죄라는 것을 아예 폐지해 버렸고, 한국은 남자의 간통 도 처벌하는 법을 입법했다. 일본은 공평하게 둘 다 처벌 안 하겠다는 것이고, 한국은 공평하 게 둘 다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간통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 다. 선진국들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매우 중요시 한다. 간통 역 시 어디까지나개인의 자유이니 만큼 국가가 나서서 처별할 이유 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통이 이혼사유는 될지언정 법적 처 벌 이유는 되지 않는다. 참고로 나는 간통죄 찬성론자도 아니고, 폐지론자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나야 어차피 일편단심 루시아이니. 라나 앞에서 더 이상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난 재 빨리 눈물을 닦고 평소의 카리스마 있는 표정……이 아니라 그냥 그런 표정을 지었다. "설명해 봐." 루시아의 말이 떨어지자 난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설명을 시작 했다. "라나가 갑자기 나타나 날 보더니 울면서 내 품에 뛰어들었어. 난 깜짝 놀라 라나를 달래주려고 했고. 정말이야. 그치, 라나야?" 라나는 루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 오빠 말이 맞아요." 라나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그리고 루시아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갑작스런 라나의 행동에 루시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죄, 죄송하다니? 뭐가?" "허락도 받지 않고 오빠의 품에 안겨서요. 공주님도 오빠를 사랑 하고 있을 텐데." 루시아는 아까보다 더 크게 놀랐다. "무, 무슨 말이야? 내가 저 뺀질이를 사랑하고 있다니?" 난 루시아보다 더욱 크게 놀랐다. "그 말 무슨 뜻이야? 그, 그럼 날 사랑 안 한다는 거야?" "뭐, 뭐?" "날 사랑해, 안 해? 확실하게 말해줘. 대체 루시아의 마음은 어떤 거야?" "시끄러!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헉! 서, 설마 날 사랑 안 하는 거야? 그런 거야?" "괜찮아요, 오빠. 라이가 오빠를 사랑하니까요." "루비도 오빠를 사랑해요." "사랑해요, 오빠아~!" 라이와 루비는 크게 소리치며 손으로 머리 위에 하트를 그려보였 다. 그것도 모자라 둘이 합체(?)해 하트를 그렸다. "……." 니들 지금 뭐하는 거니? 무슨 감동 퍼포먼스 하니? 지금 그게 나올 분위기가 아니잖아! "그나저나 한 명은 어디 갔니? 어째 아까부터 니들 둘밖에 안 보 이는구나." "루는 영아 언니랑 놀러갔어요오." "그, 그러니?" 어쩐지 영아도 안 보이더라.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보며 물었다. "언니는?" 그러자 라이와 루비는 재빨리 아까처럼 하트를 그렸다. "언니도 사랑해요오~!" 난 그 모습을 보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이런 것까지 지기 싫어할 줄이야……. 어떤 의미에서는 루시아도 참 대단하다. 어쨌든 라이와 루비 덕분에 이 일은 대충 마무리되었다. 라이와 루비는 놀러 나가고 루시아와 라나와 나는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시녀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과를 내왔다. 룸서비스인가? 라나는 루시아 때문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쭈뼛쭈뼛거렸다. 라나가 한국에 왔던 때가 생각난다. 세레나를 따라 한국에 온 라 나는 돌아가기 전에 루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오빠가 공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전 절 대 오빠를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나중에 공주님보다 훨씬 예뻐져 서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지금 저 선전포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이다. 라나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루시아와 라나는 연적이 되었다 할 수 있겠다. 여자 둘 남자 하나로 이루어진 삼각관계. 그 삼각관계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를 사이에 두고 싸우다니! 게다가 한 여인은 공주이고, 한 여인은 왕비의 동생이다. 나에게 이런 꿈같은 상황이 일어날 줄이야! "푸하하~!" 찌릿!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루시아가 나를 찢어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 려보았다. 난 재빨리 웃음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미안.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루시아는 나를 가볍게 무시한 다음 생긋 웃으며 라나에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라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공주님." "공주님 말고 언니라고 불러줄래?" "그, 그래도 되나요?" "응. 그쪽이 나도 편하거든." "예. 어, 언니……." 루시아가 편하게 대해주자 라나는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으음, 의외로 화기애애하군. 뭐, 둘이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낫지. 몇 차례 가벼운 얘기가 오가던 도중 루시아가 물었다. "대체 히로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에, 예?" 라나는 당황한 나머지 찻잔을 딸그락거렸다. 사실 나도 그게 궁 금했다. 루시아와 나는 라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라나는 나와 루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는 그냥 오빠의 모든 것이 좋아요.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특별한 이유는 필요치 않잖아요." "……헉!" 나의 모든 것을 좋아한단 말인가? "그랬군. 역시 난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였던 거야." "시끄러." "……." 너무해, 루시아. 라나도 있는데 이렇게 면박을 주다니. "그러는 언니는 오빠의 어디가 좋은 거예요?" 헉! 반격인가? 난 재빨리 귀를 쫑긋 세웠다. 이건 반드시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거다. 루시아는 나의 어디를 좋아하는 걸까? 아아~ 궁금해라. 루시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 "헉……" "아무리 좋게 보려고 애를 써도 좋아할 만한 구석이 없잖아." "……쓰쓰쓰!" 좋아할 만한 구석이 없다니! 어떻게 그런 충격적이고 잔인한 말을! 내 가슴은 완전히 난도질당했다. 내가 심장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는데, 루시아가 말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응? 자리 좀 비켜달라니? 이 자리에 앉고 싶어? 그럼 바꿔 앉 자." "……." "왜 그래?" 루시아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 다음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딱딱한 투로 말했다. "나가." "……." 그런 뜻이었나? "그,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까?" 찌릿! "아, 알았어. 나갈게. 나가면 되잖아." 난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문을 향해 걸어갔다. 솔직히 무지 하게 나가기 싫다. 내가 나가면 방 안에는 루시아와 라나 둘만 있게 된다. 둘 다 지성인이니 머리끄덩이 붙잡고 싸우는 일은 없겠지만, 말싸움을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럴때는 말려줄 사람이 필요한데……. 어쨌든 루시아가 나가라고 하니 나가는 수밖에 없다. 아아~ 남아있고 싶어라. 내가 나가자마자 루시아는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직전에 나에 게 말하길……. "엿들으면 죽어." "……." 날 어떻게 보고……가 아니라, 내가 엿들을 생각이었던 거 어떻 게 알았지? 밖으로 나오니 할 일이 없다. 복도 한가운데서 뭘 하겠는가? 어린 엘프들이나 만나러 가볼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갑자기 품에 아기를 안은 세레나가 시녀와 함께 나타났다(세레나와 항상 같이 다니는 시 녀는 아가씨가 아닌 나이가 지긋하고 펑퍼짐한 아줌마다. 얼굴에 흐르는 관록을 보니 평범한 시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 아줌마가 시녀 장인 것 같다. 왕비는 왕궁의 살림을 책임지는 위치이니. 여기에 더해 보 모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것 같다). "우아아앙!" 세레나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울고 있 었다. 으음, 좀 시끄럽군. 세레나는 날 보더니 반색을 했다. "마침 잘 만났어요. 당신을 찾았거든요." "응? 날 찾았어? 무슨 일로?" 세레나는 갑자기 아기를 내게 내밀었다. "아까부터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아요. 좀 달래주세요." "……뭐?" "빨리요." "……." 뭐야, 이 상황은? 우는 아기를 왜 나한테 떠넘기는 건데? 내가 유모야, 보모야? 난 일단 아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토닥토닥 스킬을 발동시켰다. 토닥토닥~. 세레나와 시녀장은 가까이 다가와 내 손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 했다. 우는 애를 단번에 그치게 만드는 토닥토닥 스킬을 보고 배우 려 하는 것이다. "……." 아아~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가 어쩌다 보모로 전락했단 말 인가? 언제 한번 애 엄마들을 위해 세미나를 개최하든지 해야지……. * * * * 히로를 내보낸 루시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히로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라나는 잔뜩 위축된 모습이었다. 루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긴장 풀어. 히로를 내보낸 건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여자 끼리만 있으면 좀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잖아." 루시아는 괜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차는 식었지만 찻잔은 아 직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난 히로를 사랑해." "예?" 라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는 자기 가 말해놓고도 어색한지 손가락으로 귀밑머리를 꼬았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다른 세계까지 가서 같이 살지는 않았을 거 야. 공주로 대접받는 삶보단 그 세계에서의 평범한 삶이 내겐 더 소 중해. 하루하루가 얼마나 행복한지 나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을 정 도야." 루시아는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일상을 떠올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형부를 도와 가족들의 밥을 차려. 모두와 둘러 앉아 아침을 먹은 다음 일터로 향해. 일터는 아기자기한 인형가게 야. 그곳에서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해. 청소를 하고, 인형을 체크하 고, 손님들을 상대하지. 바쁠 때는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야. 일은 저녁이 돼서야 끝이 나. 우리는 뒷정리를 하고 가게를 나오 지. 그 다음 모두와 함께 저녁을 먹어. 저녁을 다 먹으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거나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고, 그러다가 밤이 되면 예 쁜 아이들을 껴안고 잠들어.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드면 또 다른 하 루가 시작되지." 루시아는 감았던 눈을 떴다. 루시아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으리으리한 왕궁이 아닌 평범한 집이야. 그곳에 는 화려한 무도회도 없고, 시중을 들어줄 시녀도 없어. 하지만 그곳 에는 히로가 있고, 예쁜 아이들이 있고,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사 람들이 있어.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해." 루시아는 히로와 함께 한국에서 살게 된 뒤 진정한 행복이 무엇 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루시아는 그런 행복을 선물해준 히로를 사랑했 다. 라나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예상대로네요. 언니를 처음 본 순간 언니가 히로 오빠를 많이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자의 감이라는 거야?" "예." 라나는 고개를 들어 루시아를 보았다. "저,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아, 아니, 포기할 수 없어요. 언 니가 오빠를 사랑한다는 것도 잘 알고, 오빠가 언니를 사랑한다는 것도 잘 알아요. 저는 오빠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오빠가 언니 와 결혼해서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요. 그래서 몇 번이고 오빠를 포기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하지 만…… 흑흑……."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라나는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 했다. 루시아는 깜짝 놀라 라나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라나의 어깨를 살짝 감싸 안고 달래주었다. "흑흑, 안 돼요. 포기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아무리 오 빠를 좋아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수록 더욱 좋아져요. 그러면 안 되 는 걸 아는데……." '이 애는 정말로 히로를 사랑하는구나.' 라나의 진심을 알게 된 루시아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 가?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루시아는 두 팔로 라나를 껴안았다. 라나는 루시아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냈다. "흑흑, 죄송해요, 언니. 죄송해요." 루시아는 다정하게 라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죄송해할 필요 없어.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 "우아아앙~!" 라나는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루시아는 그런 라나를 따 뜻하게 감싸 안았다. 라나가 울음을 그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라나의 눈은 퉁퉁 불었고, 루시아의 옷은 흠뻑 젖었다. 루시아는 손수건으로 라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라나는 부끄러 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 람 앞에서 울었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부끄러웠다. 라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볼 꼴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루시아는 라나를 꼭 껴안았다. 라나는 놀랐지만 이내 편안함을 느꼈다. '따뜻해.' 루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라나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줄 뿐이었다. 라나는 루시아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 었다. 피부로 전해져오는 따뜻한 감촉. 마치 엄마 품에 안겨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래서 오빠가 이 언니를 좋아하는 거구나.' 라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 * * * "토닥토닥 스킬은 우는 아이를 그치게 하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머리 쓰다듬기 스킬은 아이를 웃게 만드는 데 사용되지요. 그 외의 스킬로는 맛있는 거 사주기 스킬, 어부바 스킬, 비행기 스 킬 등이 있습니다. 이런 스킬들을 마스터 레벨까지 끌어올린다면 우는 아이 그치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부 모가 될 수 있지요." 세레나와 시녀장은 나의 설명을 주의 깊게 새겨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수첩에 필기까지 했다. 여기에 더해 질문까지 했다. 난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세레나를 가리켰다. "말해보새요, 학생." "하지만 제가 토닥토닥거리면 별로 소용이 없던데요." "그게 바로 레벨의 차이라는 겁니다. 레벨이 낮으면 아무리 토닥 거려도 소용이 없지요." "그럼 어떻게 레벨을 올리나요?" "레벨을 올리는 데 속성이란 없습니다. 날로 먹으려는 생각을 버 리세요. 끊임없는 노력만이 레벨 업을 가능케 합니다. 오죽하면 레 벨 노가다라는 말까지 생겼겠습니까? 끊임없이 정진하세요. 뭐, 그 냥 노력하기만 해서는 언제 스킬을 마스터할지도 모르고, 잘못된 방법이 손에 익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죠.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전문가의 설명을 잘 듣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교 정을 해 나간다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그 전문가가 바로 나다. 나는 보모 스킬 분야의 권위자다. 비록 학위증은 없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인정한다. 이 분야에서 누가 나를 따라올 수 있겠는가? 정말로 '아기 엄마들을 위한 토닥토닥 스킬 강좌' 를 한번 개최 하든지 해야지. 난 계속 설명을 해주며 세레나와 시녀장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요 령을 가르쳐 주었다. 둘은 서투론 솜씨나마 열심히 하려는 자세를 보여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토닥토닥 스킬과 머리 쓰다듬기 스킬. 이 두 가지 스킬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임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기본의 중요성 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기본기가 충실해야 어떠한 돌발 상황에 서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괜히 다른 스킬에 눈독 들이지 마십시오. 이 두 가지 기본 스킬만 제대로 익혀도 아이들 상대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스킬의 기본을 잡아주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대충 기본 이 잡혔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강의를 끝마쳤다. "그럼 이걸로 오늘 강의를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끝났다고 집 에 가서 놀지만 말고 꼭 복습하세요. 아셨죠? 중요한 것은 끊임없 는 노력입니다." 세레나가 또 손을 번쩍 들엇다. 난 세레나를 가리켰다. "본 교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세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다음 강의는 언제인가요?" "……." 결국 나는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에 한 시간씩 강의해주기로 세레나와 약속했다. 아아~ 이러다가 '전설의 용사' 가 아닌 '보모' 로 이름을 떨치 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사실전설의 용사는 세상이 어지러울 때나 쓸모가 있지, 평화로 운 세상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보모가 전설의 용사보다 훨씬 더 쓸모가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보모로 이름을 떨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난 남자란 말이다!" 아무래도 남자 입장에서는 보모보다 전설의 용사라는 타이틀이 좀더 끌린다. "으음, 다시 생각해보니 보모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 냥 보모는 좀 밋밋하니까 전설의 보모는 어떨까?" 전설의 보모 아이언스 히로! "역시 좀 이상하려나?" 난 혼자서 중얼거리며 방으로 향했다. 루시아와 라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설마 둘이 싸운 것은 아니겠지? 난 그런 일이 없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도착한 문 앞. 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안을 살폈다. 나가기 전 과 마찬가지로 테이블 주위에 루시아와 라나가 앉아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위치가 살짝 바뀌어 있다. 아까는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의자를 붙이고 앉아있다. 그리고 둘은 서로 의 얼굴을 보며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화기애애~. "……." 뭐야, 이 해피한 분위기는? 루시아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날 발견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나가려면 나가." "드, 들어갈게." 난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루시아와 라나의 얼 굴을 살폈다. 라나는 웃고 있었지만 눈 주위가 빨갛게 부어 있었 다. 그리고 목소리도 어째 좀 이상했다. 내가 없는 사이 울었던 것 이 틀림없다. 그것도 펑펑. 어째서 라나가 울었을까? 난 놀란 표정으로 루시아를 보았다. "헉! 설마 팬 거야?" 그러자 루시아는 버럭 화를 냈다. "뭔 소리야, 이 뺀질아!" "아, 아님 말구." 화를 낼 것까지야……. 찔리는 거라도 있나? "그런 거 아니에요, 오빠. 언니가 얼마나 좋은 분인데요." "응?" 어째서 라나가 루시아 편을 드는 거지? 루시아와 라나는 마치 자매처럼 다정해보였다. 연적이라고는 생 각되지 않을 정도다. 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 * * 출발 때까지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우리는 그동 안 헤리오 왕궁에서 푹 쉬었다. 난 약속대로 하루 한 차례 '아기 엄마들을 위한 토닥토닥 스킬 강 좌' 를 열었다. 처음에는 세레나와 시녀장 둘만 수강했으나 금방 입소문을 타고 퍼져 어느새 수강생이 20명으로 늘어났다. 귀부인 들은 물론 시녀들까지도 강의에 참석했다. 난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강의를 했다. 그 외의 시간은 루시아와 라나와 함께 보냈다. 영아와 어린 엘프 들과 놀아주기도 했다. 가끔은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를 만나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에이미 공주는 어느새 영아와 친해져 서로 말을 놓고 지냈으며, 에스더 공주는 만날 때마다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출발할 날이 점점 가까워왔지만, 라이레얼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우리는 정원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었다. 도시락은 샌드 위치와 쥬스. 이렇게앉아서 먹으니마치소풍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어 린 엘프들은 샌드위치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신나게 뛰어다녔다. 루시아는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언니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일루니아 여사님 말이야?" "응." "뭐, 블랙 드래곤 레어에서 몸조리 잘하고 있겠지." "그렇겠지?" "왜? 걱정돼?" "응." "인디가 옆에 있는데 뭔 일이야 있으려고……." "그래도 걱정된단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언니가 나이가 좀 있잖 아." "괜찮아. 이 세계야 30대 출산이 늦은 일이겠지만, 저 세계에서 는 당연한 일이니까." "게다가 쌍둥이잖아." "쌍둥이인 건 관계가 없지 않나?" "관계가 없긴 왜 없어? 애가 둘이니까 두 배로 힘들 거 아냐?" "……." 그렇게 되나? 루시아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사실 나도 좀 걱정이 되긴 한다. 하지만 그 걱정은 일루니아 여사님 딸들이 엄마 쪽 성격을 물려받 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난 정말로 목매달지도 모른다. "아! 그게 있었구나." "응? 뭐가?" 난 마법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헤어 지기 전에 인디가 준 마법 헤드셋이었다. 루시아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잘됐다! 어서 이리 내." 그리고는 바로 헤드셋을 빼앗아 머리에 썼다. "이거 왜 안 돼?" "여기 스위치를 눌러야 할 걸." 난 헤드셋 옆면에 붙어있는 빨간색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헤 드셋에 귀를 바짝 붙였다. 띠리리리~♬ 리리리~♬ "……." 뭐야, 이 효과음은? 이건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잖아(클래식에 무식한 나지만, 사계 정도는안다). 설마 컬러링이냐? * * * * 히로 일행과 헤어진 일루니아와 인디는 흑색 숲에서 둘만의 행복 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의 레어는 인디 의 성격만큼이나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인디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처가 드래곤이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까지 했으니 어떻겠는가? 인디는 더욱 지극정성으로 일루니아를 모셨다. 아침과 저녁마다 따뜻한 물에 목욕을 시켜주고, 책을 읽어주고, 운동을 도와주고, 잘 때는 자장가까지 불러주었다. 태교를 위한 인디의 노력에는 끝이 없었고, 덕분에 일루니아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일루니아는 인디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인디는 일루니 아의 머리를 매만지며 태교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인디가 한창 얘기를 하는데, 일루니아가 갑자기 손을 붙잡았다. 인디는 얘기를 멈추고 일루니아를 보았다. "왜 그러세요, 일루니아님?" 일루니아는 가만히 인디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댔다. "이 안에 인디님과 제 아이가 있다는 게 믿여져요?" 인디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사실은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아요." "인디님을 닮은 예쁜 아이가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일루니아의 말에 인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일루니아님을 닮은 아이가 좋단 말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 낳는 것은 저니까요." "그, 그런……." 시무룩해진 인디의 표정을 본 일루니아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할게요. 한 아이는 인디님을 닮은 아이로 낳고, 다 른 아이는 저를 닮은 아이로 낳는 거예요. 그럼 됐죠?" 인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인디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해요, 일루니아님. 그게 좋겠어요." 부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으며 마주보고 웃음을 지었다. 아마 히 로가 이 모습을 봤다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을 것이다. 잉꼬부부의 염장질은 그만큼 강력했다. 부부가 한창 애정을 확인하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리리~♬ 리리리~♬ "이 음악은 'G 선상의 아리아' 아닌가요?" 일루니아는 한국에서 클래식을 즐겨들었다. 그래서 한 소절만 듣고도 곡명을 알아맞혔다. "맞아요. 아무래도 히로님이나 루시아님이 연락을 하신 것 같아 요." 인디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 을 머리에 낀 다음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형부에요?"] "루시아님이신가요?" [예. 저에요, 형부.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예. 저와 일루니아님은 잘 지내고 있어요. 일루니아님 바꿔드릴 까요?" [예. 그래주세요, 형부.] 인디는 헤드셋을 벗어 일루니아에게 건내주었다. 일루니아는 헤 드셋을 받아 머리에 썼다. "루시아니?" [응, 언니. 나야. 그동안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어. 인디님이 잘해주셔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몸은 괜찮아? 아기들도 무사한 거지?] "응. 괜찮아. 뱃속의 아기들도 잘 자라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넌 요즘 어떻게 지내? 뺀질이도 지금 옆에 있어?" [잘 지내. 그리고 히로는 지금 내 바로 옆에 있어.] "혹시 뺀질이가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무슨 짓을 했는데?" [엘프의 숲에 있을 때 루엔의 집에서 머물렀거든. 방이 모자라 같 은 방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데, 깨보니까 글쎄……. 헉! 안 돼! 안 돼, 루시아. 그걸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뭐 없던 일이 지어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있었던 일 말하는 건데 왜 안 돼? 안 돼. 아무튼 안 돼. 싫어. 이거 놔. 나 언니한테 말할 거란 말이야. 안 돼! 못 놔!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빨리! 치지직! 치지직! 자꾸 잡아당기지마. 기계 다 망가진단 말이야. 그 기계 아예 부숴버리겠어! 영아야 얘들아, 히로 붙잡아! 안 돼애애애애~!] "……." 헤드셋으로 저쪽의 소란을 전해들은 일루니아는 한숨을 내쉬 었다. '무슨 일인지 대충 알 것 같군. 역시 그 뺀질이랑 루시아를 떨어 트려 놨어야 했어.' 잠시 후, 헤드셋 쟁탈전이 루시아의 승리로 끝났는지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언니?] "응." [결혼식 날 잊지 말고 꼭 와야 돼. 알았지?] "내가 설마 폐하의 결혼식을 잊겠니? 걱정하지 마." [그럼 결혼식 날 봐, 언니. 다음에 또 연락할게.] "다음에는 뺀질이 없을 때 연락해. 뺀질이 목소리만 들어도 태교 에 방해되니까." * * * * "응. 그럼 잘 지내. 형부한테도 안부 전해줘." 루시아는 작별인사를 한 다음 헤드셋을 벗었다. 나는 현재 영아 와 어린 엘프들에게 깔려있는 상태. 루시아는 영아와 어린 엘프들에게 말했다. "이제 풀어줘도 돼." 그러자 영아와 어린 엘프들은 내 위에서 내려왔다. 오빠를 이렇게 잔인하게 깔아뭉개다니. 흑흑~ 내가 이것들을 잘못 키웠어. 자식 키워봐야 다 헛일이라 더니……. 난 벌떡 일어나 루시아에게 따졌다. "너무해, 루시아! 어떻게 그걸 일루니아 여사님께 이를 수 있어! 너무해! 치사해! 부당해!" 루시아는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내가 뭐 없던 일 지어내서 말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 없던 일 지어내서 말한 게 아니니까 이러는 거지. "그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잖아!" "그건 니 생각이고." "……." 그런가? 일루니아 여사님이 이 일을 빌미로 나를 공격해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렵다. 아니, 그 전에……. 영아가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정말이야, 오빠?" "응? 뭐가?" "정말로 자고 있는 언니를 덮쳤어?" "아, 아니, 그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언니는 오빠를 믿고 같은 방에서 잔 걸 텐 데, 어떻게 그 믿음을 배신하고 언니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어? 그동 안 오빠를 인간이라 믿었던 내가 바보였어. 오빠는 짐승이야!" "그러니까 이 오빠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 해……." "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 짐승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아. 흥!" "……." 아니, 그러니까 니가 왜 난리인 건데? 어린 엘프들은 어깨동무를 한 채 눈을 부릅뜨고 나를 보았다. "뭐, 뭐니, 그 의미심장한 눈빛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오빠?" "맞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어떻게 잠자는 누나를 덮칠 수가 있어요?" "라이는 오빠한테 실망했어요!" "루비는 라이보다 더 실망했어요!" "저는 이제 형이 싫어졌어요!" 라이와 루비는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우엥~." "으앙~." "……." 오빠가 언니를 덮친 것 때문에 울려는 건가? 라이와 루비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으아아앙~!" "앗! 너희들 왜 울고 그러니?" 난 깜짝 놀라 라이와 루비를 껴안았다. "우엥~ 우엥~ 라이와도 같이 잤으면서…… 라이는 안 덮치 고……." "으앙~ 으앙~ 루비도 안 덮치고…… 언니만 덮치고……." "……응?" 얘들 지금 뭔 말을 하는 거야? "우에에엥~ 오빠는 루시아 언니만 좋아하고……." "으아아앙~ 오빠는 루비보다 루시아 언니를 더 좋아하는 게 틀 림없어." "……." 결론은 자기들도 덮쳐달라는 건가? 뭘 그렇게 만날 공평한 걸 따지는 건지……. "알았어. 오늘 같이 자자. 오빠가 우리 라이랑 루비 덮쳐줄게. 오 빠가 밤에 자다가 우리 라이랑 루비 볼에 막막 뽀뽀해주면 되는 거 지? 응?" 끄덕끄덕. 라이와 루비는 그제야 울음을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이 들 눈물을 닦아주며 한 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런데 이번에는 루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요?" "……." 어쩌라구? 난 더욱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휴~ 이 형이 자다가 막막 머리 쓰다듬어 주마. 됐지?" 끄덕끄덕. "앗! 우리 루는 내가 덮칠 거야!" 영아는 루를 껴안으며 말했다. "루 자면 언니가 막막 뽀뽀해줄게." "……." 정말로 덮칠 생각이냐? * * * * 출발 하루 전. 드디어 라이레얼이 나타났다. 라이레얼은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그 등장도 화려했다. 라이레얼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카라와 함께 헤리오 왕궁으로 찾 아왔다. 하지만 위병들은 신분증도 없는 라이레얼과 카르를 안으 로 들여보내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위병들은 라이레얼과 카르 의 앞을 가로막은 것도 모자라 그녀들에게 수작을 걸었다.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수작을 걸 만큼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지 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라이레얼과 카르. 둘 모두 평생 살면서 한번 볼까 말까 한 절세 미녀다. 그런 미녀들을 보고 남자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위병들은 본능에 충실했고, 그 대가는 피떡이었다. 뭐, 이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었고,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이미 수십 명의 병사들이 당했다!" 조용하던 왕궁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마침 '아기 엄마들 을 위한 토닥토닥 스킬 강좌' 시간이었다. 열강을 하던 나는 갑작 스런 소란에 놀라 밖으로 나가 시녀에게 물었다. "침입자라니요? 누가 왕궁에 침입했나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것 같아요." "아니, 대체 어떤 놈이 감히 헤리오 왕궁에 침입해 나의 강의를 방해한 거지?" 공짜로 밥 얻어먹는 처지이니,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돼야 식객 소리 안 듣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재빨리 소란이 일어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마침 근위병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본의 아니 게 그들과 달리기 시합을 벌여야 했다. 근위대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나를 스윽 보더니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 뭐야? 이 자식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난 좀더 속력을 높아 근위대 대장을 제쳤다. 그러자 근위대 대장 은 재빨리 따라붙었다.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근위병들에게 소리 쳤다. "더 빨리 달려라!" 훗~ 니가 그래봤자지. 걸어온 배틀을 피하는 것은 남자가 할 짓이 아니다. 난 개나리 스텝을 시전했다. 근위병들은 이를 악물고 쫓아왔지 만 거리는 점점 벌어지기만 했다. 범인의 발놀림으로 어찌 개나리 스텝을 따라올 수 있겠는가? 난 근위병들을 저 멀리 따돌리고 먼저 침입자가 있는 장소에 도 착했다. 정문에서 본궁까지 이어지는 길은 이미 초토화 되어 있었 다. 곳곳에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지는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아직 안 죽었다. 그저 피떡이 되었을 뿐이다. 저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쪽으로 다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병사들을 쥐어 패 고 있는 라이레얼을 볼 수 있었다. 카르가 변환 마법을 풀어줬ㄴ느지 라이레얼의 귀는 엘프처럼 길고 뾰족했다. 으음, 라이레얼은 역시 귀가 길고 뾰족한 편이 예쁜 것 같다. 본연의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라이레얼임을 확인한 나는 손을 흔들었다. "아! 라이레얼!" "아! 히로!" 라이레얼은 병사들을 쥐어 패는 것을 멈추고 뛰어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오랜만이야, 히로." "예.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이것 좀……." "아잉~ 히로는 날 만난 게 반갑지도 않아?" "반갑기야 한데, 이것 좀 풀어주심이……." "훌쩍~ 설마 내가 싫은 거야? 그런 거야, 히로?"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렇다. 세상 어느 남자가 라이레얼 같은 미녀와 껴안는 것을 싫어하겠는 가? 다만 문제는 라이레얼 어깨 너머로 카르가 나를 얼려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너, 너 감히 나의 언니를……." "아, 아니야. 제발 진정해!" 다행히도 카르가 본체로 돌아가 왕궁을 때려 부순다든가 하는 일 은 없었다. 난 몰려온 근위병들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주어야했다. "이 여자 분들은 에이미 공주님 일행을 호위하기 위해 제가 특별 히 초빙한 분들입니다. 절대 침입자가 아니니 다들 돌아가서 일들 보세요." "이 여자들이?" "앗! 그러고 보니 저 여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호, 혹시……?" "서, 설마……?" "용병계의 꽃 라이레얼?" "……." 역시 유명하군.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분이 바로 용병계의 꽃 라이레얼입니다. 초빙하느 라 무지 힘들었습니다." "그 여자야 그렇다 치고 뒤에 있는 여자는 뭔데?" "마법사입니다. 이래보여도 엄청 고위마법사거든요. 전설의 용 사인 저와 맞먹을 정도로 세요.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아요. 거기 좀 비켜주시겠어요?" 나는 인파를 뚫고 우리가 머무는 본궁 숙소로 라이레얼과 카르를 데려갔다. 라이레얼에게서 사정 설명을 들은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아니, 그렇다고 병사들을 다 때려눕혀요?" 그러자 카르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나의 언니가 병사들을 때려눕히든 말든 니가 뭔 상관이야?" "그만하고 앉아." "예, 언니." 라이레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르는 언제 소리쳤냐는 듯 다소 곳하게 자리에 앉았다. 라이레얼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 히로. 내가 좀 성급했나봐. 히로를 볼 면목이 없어. 흑 ~." 헉! 라이레얼이 눈물을! 난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라이레얼.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다 이해해 요. 전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정말?" "물론이죠. 사실 잘못을 따지자면 라이레얼의 앞을 막은 병사들 이 잘못이죠." 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의 언니의 앞을 막는 병사들이 잘못이야." 라이레얼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훌쩍~ 고마워, 히로. 히로를 생각해서라도 앞으로는 안 그럴 게." "예." 아무튼 라이레얼과 카르를 다시 만나게 되니 기쁘다. 난 둘을 자 세히 살펴보았다. 라이레얼은 청바지에 한 사이즈 큰 긴팔 남방을 입고 있었고, 카르는 소매가 긴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둘 모 두 헤어질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응. 카르의 레어에서 편하게 지냈어." 라이레얼이 머라카락을 쓸어주자, 카르는 살며시 라이레얼에게 머리를 기댔다. 두 미녀의 다정한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이렇게 보니 이 둘도 꽤나 잘 어울린다. 여성미 물씬 풍기는 라이레얼과 얼음인형 같은 소녀 카르. 아아~ 예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절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뿐 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내 사랑은 오직 루시아뿐이다. (... - 옮겨쓴이 주) "히로는 잘 지냈어?" "저야 언제나 잘 지내지요."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뭔가 허전하다.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느 낌이 드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무언가가 빠진 것 같은……. 난 그게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난 헤어질 때의 장면과 지금의 장면을 비교해 가며 하나하나 체크해 보았다. 이러니 무슨 숨은그림찾기 하는 것 같군. 한참을 체크한 끝에야 나는 간신히 무엇이 빠졌는지 찾아낼 수 있었다. "라이코스!" 그렇다. 헤어질 때는 라이코스가 있었지만, 지금은 라이코스가 없다. "라이코스 어디 갔어요,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히로. 같이 왔는데, 병사들과 싸우다보니 어느 순 간에 사라졌어." "예?" 난 라이코스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은 바 로…… 라이레얼의 뱃속! "서, 설마…… 잡아먹은 거예요?" 라이레얼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히로. 안 잡아먹었어." "……." 발뺌까지! 이거야 말로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아니, 라이코스 잡 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지만, 오리발은 안 내밀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정말이라니까. 정말로 병사들과 싸우던 도중 사라졌어." "헤어지기 전에 분명 잡아먹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어 떻게 약속을 어기고 잡아먹을 수 있어요? 전 라이레얼을 믿었는 데……." "정말 안 잡아먹었어, 히로. 히로랑 약속했는데 내가 어떻게 잡 아먹을 수 있겠어?" "그럼 라이코스는 어디 있는 거죠?" "그건……." "너무해요, 라이레얼! 라이코스는 라이의 친구란 말이에요! 그런 데 그걸 잡아먹다니…… 라이레얼한테 정말 실망이에요!"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난 정말 안잡아먹었단 말이야. 흑흑, 너무해, 히로." 라이레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먹거렸다. 난 그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쨌든 라이코스를 잡아먹은 것은 나쁜 일이에요. 전 라이레얼 을 믿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절 배신할 수 있어요? 막 막 실망이에요!" "흑흑, 너무해, 히로. 너무해……." "……." 우는 라이레얼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라이코스 를 잡아먹은 것은 정말 너무했다. 라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쾅! 그 순간, 라이와 두 엘프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난 라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든 라이코스가 잡아먹힌 사실을 숨겨야 해! 그렇게 생각한 내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라이가 손을 아픙로 내 밀며 말했다. "보세요, 오빠! 이코가 돌아왔어요!" "……응?" 라이의 손 위에는 라이코스가 있었다. "……." 헉! 뭐야? 니가 왜 거기 있니? 라이레얼의 뱃속에 있던 거 아니었니? 난 랑의 손 위에 있는 것이 라이코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잠시 얼어붙었다. 그럼 라이레얼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다, 다들 나가서 놀렴." "네에~!" 아이들은 힘차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난 조심스럽게 라이레얼에 게 다가갔다. 그리고 더욱 조심스럽게 라이레얼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요……." "흑흑, 너무해, 히로. 내 말은 믿지도 않고…… 흑흑……."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라이레얼은 날마다 라이코스를 보며 입맛을 다셨을 것이다. 가 끔은 바로 튀겨버리고 싶은 심한 충동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레얼은 꾹 참았다. 나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라이레얼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노력했는데, 난 라이레얼 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믿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라이레얼을 범 인 취급하며 추궁했다. 라이레얼이 얼마나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 미안해요, 라이레얼!" 난 라이레얼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카르는 나를 얼려죽일 듯한 눈빛으로 한번 쏘아본 다음 라이레얼을 달래주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그만 우세요." "흑흑~." "제가 잘못했다니까요. 용서해주세요, 라이레얼." "흑흑흑~." "울음을 달래는 데는 토닥토닥 스킬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카르 가 찰싹 달라붙어 있으니, 토닥토닥 스킬을 시전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어요, 라이레얼.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 요." 그러자 카르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너 같은 건 나의 언니에게 용서를 빌 자격도 없어." "……." 카르의 말대로다. 난 라이레얼에게 용서를 빌 자격도 없는 인간 이다. 라이레얼은 화내는 카르를 제지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말 했다. "흑흑~ 너무해, 히로." "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라이레얼. 전부 제 잘못이에요." "훌쩍~ 말로만?" "……예?" "흑흑~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히로 미 워!" "아, 아니에요. 뭐 원하시는 거라도……?" "훌쩍~ 얼마 후면 차세대 게임기가 출시된대." "그, 그래서요?" "흑흑~ 너무해, 히로! 나 상처 받았어!" "제, 제가 그 게임기 사드릴게요!" "훌쩍~ 정말?" "무, 물론이지요." 라이레얼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훌쩍 ~ 좋아. 그럼 용서해줄게." "고마워요, 라이레얼!" 난 라이레얼이 울음을 그치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이래서 함부로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건데. 라이레얼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이 자리에 갈리온드가 없는 것이 다행이다. 만약 갈리온드가 있 었다면 '니가 뭔데 내 딸을 울려!' 등등의 대사를 날리며 날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라이레얼이 카르를 말려준 것도 다행이다. 만약 라이레얼이 말 리지 않았다면 카르는 나를 얼려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출발은 언제야, 히로?" "내일이에요." 에이미 공주의 결혼 행렬을 준비하느라 왕궁 안은 정신이 없었 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레얼까지 나서서 그 난리를 쳤으니……. 으음, 나중에 반데라스한테 사과하던지 해야지. "그동안 나 보고 싶지 않았어? 난 히로 많이 보고 싶었는데." "왜 보고 싶지 않았겠어요? 저도 라이레얼이 많이 보고 싶었답니 다." "감히 나의 언니를 보고 싶어 하다니! 용서하지 않겠어!" "……." 용 서 안 하면 어쩔 건데? "아! 잠깐 같이 나가자, 히로." "예? 어디를요?" "나 시내 구경 좀 시켜줘." "……예?" 카르는 라이레얼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갈래요, 언니." 라이레얼은 고개를 저었다. "카르는 여기 있어. 히로랑 둘이서 갈 거야." "아, 안 돼요, 언니. 절 두고 가지 마세요." "금방 돌아올 거야. 언니 말 들어." "……예." 카르는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 다. "나의 언니한테 찝쩍거리면 죽을 줄 알아." "……." 그래. 그 말 왜 안 하나 했다. * * * * 난 라이레얼과 함께 왕궁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예? 술 드시고 싶으세요?" 낮술은 위험한데. "아니. 찾을 사람이 있어." "찾을 사람이요? 누구요?" "히로도 아는 사람." "예? 그게 누군데요?" "일단 가보자. 분명 여기 있다고 들었으니까." 난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라이레얼을 따라갔다. 라이레얼 은 시내의 술집을 차례대로 들렀다.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는 사람 들은 많았지만, 라이레얼이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 헤리오에 있다고 했는데." "……." "아! 거기를 안 가봤구나." 라이레얼은 무언가 생각난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난 라이레 얼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리하여 도착한 술집은 '전사들의 휴식' 이라는 유치하면서도 진부한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난 술집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째 낮이 좀 익은데……." "기억 안 나, 히로? 여기가 히로와 내가 처음으로 만난 곳이잖 아." "아! 그러네요!" 라이레얼의 말대로였다. 세레나와 헤어진 나는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던 중 우연히 상단 호위병 모집 광고를 보게 되었다. 마침 할 일도 없었기에 푼돈이나 벌 겸해서 상단 호위병으로 지원했다. 그때 상단 호위병들의 집합 장소가 '전사들의 휴식' 이라는 주점 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라이레얼을 만났다. 그리고……. "……." 아아~ 그 다음 일은 생각하지 말자. 뭐, 아무튼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나름대로 추억의 장소라고나 할까? "……." 잠깐. 그럼 라이레얼이 찾는 사람이라는 게 혹시……. 내가 물어보려는 찰나 라이레얼이 먼저 문을 열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난 라이레얼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와보는 이곳은 여전히 퇴폐적인 분위기였다. 약간 어두컴컴한 분위기 속에 덩치 큰 용병들이 술을 마시고 있 는. 당장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게 없을 듯한 분위기다. 아아~ 이런 분위기 정말 너무 마음에 든다. 참고로 '전사들의 휴식' 은 그 이름답게 손님들의 대부분이 용병 이었다. 일거리가 생길 때까지 이곳에서 죽치면서 술을 퍼마시는 것이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갔지만, 용병들은 술을 마시느라 우리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주인은 안에서 요리를 하는 중인지 나와 보지 도 않았다. 라이레얼은 바에 앉아 소리쳤다. "어이, 주인장!" 하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더 크게 소리쳤다. "야, 임마! 손님 왔으니까 나와 봐! 안 나오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 린다!" "……." 아아~ 성격 나온다. 비록 지금은 방 안에 틀어박혀 게임만 즐기는 게임 폐인이긴 하 지만, 라이레얼은 한때 용병계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용병 이었다. 랭크는 무려 SS급. 참고로 용병 랭크에 미모는 포함되지 않는다. 오직 실력만이 포함될 뿐이다. 라이레얼은 육박전에도 능하지만, 주특기는 활이다. 라이레얼이 시위를 놨다하면 반드시 한 명은 쓰러졌다. 이 연약한 팔에서(여자 치고는 근육이 많은 편이지만, 남자 금육에 비 할 바는 아니다)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활을 잘 쏘는 것은 엘프의 피를 이어 받았기 때문이 아닐 까 싶다. 활 하면 엘프 아니겠는가? "어떤 새끼가 요리하는데 부르고 지랄이야?" 덩치가 크고 턱수염이 잔뜩 난 주인이 프라이팬을 들고 나왔다. 생긴 걸 보아하니 왕년에 한 가닥 했을 것 같다. 고리눈을 부릅뜬 주인은 당장이라도 프라이팬으로 우리를 후려 칠 기세였다. 라이레얼은 그런 주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 오랜만." 주인은 라이레얼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헉! 서, 설마……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안 망하고 있었네. 이 가게 금방 망할 줄 알고, 망한다에 돈 걸었었는데." 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싸가지 없는 걸 보니 라이레얼 맞구나!" "……." 이 자리에 카르가 있었으면, 이 아저씨는 지금쯤 얼음 조각상으 로 변해있겠지? 주인은 천장에 매달려있는 종을 흔들며 소리쳤다. 딸랑! 딸랑! "그만 처마시고 여기 주목해!" 그러자 용병들은 궁시렁거렸다. "뭐야?" "뭔데 그래?" "술맛 떨어지게 왜 지랄이야?" 주인은 가게가 떠나가라 우렁차게 소리쳤다. "라이레얼이 왔어!" 그러자 한순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뭐? 라이레얼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라이레얼이 여기 나타났단 말이야?" "어딨어?" 아무래도 안이 어두워 라이레얼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듯했 다. 난 그들을 위해 마법을 썼다. "라이트." 여러 개의 빛의 구가 떠오르자 주점 안은 순식간에 환해졌다. 갑 작스런 빛에 놀랐는지 그들은 눈을 비볐다. 라이레얼은 생긋 웃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바보들." 용병들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헉! 라이레얼이다!" "지, 진짜 라이레얼이야." "혹시 가짜가 아닐까?" "진짜야. 저 귀를 봐." "저 미모! 저 몸매! 저 목소리! 분명 라이레얼이야!" "……." 역시 라이레얼이라는 건가? 용병계를 떠난 지 몇년 되었지만, 라이레얼은 아지까지도 용병 들의 전설이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이젠 용병 일 안 한다는 게 정말이야?" "옆에 있는 놈은 누구야?" 그들 중에는 라이레얼과 친했던 사람도 있는지 말을 걸어왔다. 라이레얼은 터프하게 웃으며 그들의 물음에 일일이 답해주었다. "그동안 아빠와 함께 엘프의 숲에 있었어. 우리 아빠가 엘프잖 아. 이제 용병 일은 관뒀어. 그리고 옆에 있는 귀염둥이는 우리 히 로.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야." 라이레얼은 말을 하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몸에 닿는 뭉클한 감촉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헉! 무, 무슨 짓을……?" 용병들은 '부러운 자식' 이라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용병들 은 계속해서 라이레얼 주위로 몰려들었다. 앗! 이놈들이 라이레얼에게 은근슬쩍 손을 대려 하다니! 고귀한 라이레얼의 몸에 이런 천박한 짓들의 손이 닿게 할 수는 없다. 난 재빨리 방어에 나섰다. "자자, 줄들 서세요. 문화 시민이 지금 뭐하는 짓들입니까? 차례 를 지키세요." "넌 뭐야, 이 자식아?" "비키지 못해!" 용병들은 몸으로 열심히 밀었다. 그러다 자기들끼리 시비가 붙 기도 했다. "거, 밀지 좀 맙시다." "니가 밀었잖아, 임마!" "뭐야, 이 새꺄?" "……." 아아~ 이런 카오스적인 분위기. 정말 너무 싫다. "꺄아! 무서워, 히로." 라이레얼은 몸을 웅크리며 내 뒤로 숨었다. 때문에 용병들은 나 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냄새나는 남자들 품에 파묻힐 것이 뻔하다. 아리따운 미녀도 아니고 냄새나는 남자들이라니! 이는 아이언스 히로의 인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 달려드는 놈들을 가차 없이 때려눕혔다. 처음 몇 놈을 때려눕 히자 용병들은 눈이 뻘게졌다. "이 자식!" "밟아버려!" "죽여!" 용병들은 의자나 접시 등을 집어 들고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 다. 훗~ 해보자는 거냐? 난 기꺼이 녀석들을 상대해 주었다. 퍽! 퍽! 퍽! 난 가볍게 급소에 한 방씩 먹였다. 한 번 쓰러진 놈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아마 술이 깨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어느새 십여 명이 쓰러졌다. 이쯤 되면 위기의식을 느낄 만도 하 건만 술에 잔뜩 취한 용병들은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다. "하아~ 결국 모두 쓰러트리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난 탄식을 하며 손을 휘둘렀다. 퍽! 퍽! 퍽! 잠시 후. 주점 안은 쓰러진 용병들의 부서진 집기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 다. 몇 놈은 쓰러진 자리에서 토를 하기도 했다. 라이레얼은 날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꺄아! 우리 히로 멋져!" 그러자 주인이 소리쳤다. "멋지긴 뭐가 멋져! 가게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난 어떡하라고!" 라이레얼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일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흥분해? 저놈들 이 깨어나면 알아서 치우겠지."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주인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레얼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애들 못 봤어?" "애들? 너랑 같이 다니던 애들 말이야?" "응. 레오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테커와 카웨라면 지금 2층에서 자고 있는데." "그래?" 라이레얼은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방문을 일일이 열었다. 방 안에는 대체로 술 마시고 뻗은 용병들이 시체처럼 늘어 져 있었다. 세 번째 방문을 열었을 때, 우리는 원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 다. 술 취해 멀쩡한 침대 놔두고 버닥에 쓰러져서 자는 두 남자. 그들은 다름 아닌 테커와 카웨였다. 과거 나와 함께 상단 호위병 일을 했었고, 후에는 라이레얼이 이끄는 용병단에 들어가 별 고생 을 다한. 이것들을 다시 보게 되다니! 어째 반갑다. 라이레얼은 쓰러진 놈들을 보더니 말했다. "물." 난 라이레얼이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아래층 에 내려가 물을 길어왔다. 물통을 받아든 라이레얼은 가차 없이 자고 있는 녀석들에게 뿌 렸다. 촤아악! 물세례를 받은 녀석들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얼 굴의 물을 닦아내며 소리쳤다. "뭐, 뭐야?" "어떤 새끼야?" 녀석들을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보았다. 라이레얼은 도도한 표정 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테커가 말했다. "야, 나 아직 술이 덜 깬 것 같은데." 카웨가 대답했다. "나도. 갑자기 헛것이 보여." 둘은 열심히 눈을 비비고 다시 우리를 보았다.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그런 것 같아."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나도 꿈을 꾸는 중인가 봐." "그런데 꿈 치고는 되게 생생한데." "그러게. 이렇게 리얼한 꿈은 흔치 않은데." 라이레얼은 그들에게 소리쳤다. "헛소리 그만하고 일어나!" 그러자 둘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목소리까지 생생해." "그러게. 마치 라이레얼이 옆에서 직접 말하는 것 같아."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너도 라이레얼이 보여?" "그럼 너도?" "……." "……." 둘은 다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다음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보았다. "서, 설마 라이레얼?" "지, 진짜야?" 라이레얼은 생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다들 오랜만." 나도 손을 들었다. "여어, 오랜만이야." "허억! 너, 너는……?" "라이레얼에게 순결을 빼앗긴……." 퍼억! 난 그대로 카웨의 주둥이를 걷어찼다.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임마!" 테커와 카웨는 아직도 이 상황이 꿈인지 의심했다. 라이레얼은 그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후려갈기는 것으로 이 상황이 현실임을 친절하게 일깨워주었다. 그제야 현실임을 알게 된 테커와 카웨는 기뻐하며 라이레얼을 반겼다. 곰팡이 냄새와 남자 냄새로 퀴퀴한 방 안은 얘기하기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1층 주점은 나로 인해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근처 식당으로 이동 했다. 타커와 카웨는 연신 우리의 얼굴을 보았다. "뭘 그렇게 봐?" "아니, 신기해서." 우리는 일단 식사를 주문하고 얘기를 나누었다. 라이레얼이 먼 저 말을 꺼냈다. "왜 너희 둘밖에 없어? 나머지는 어디 가고?" "베네트가 럴크 아이 임신한 건 알지?" "응." "여자애 낳았어. 그 때문에 럴크가 몇 달만 쉬기로 했는데, 애를 보니까 마음이 바뀌었는지 결국에는 일을 그만두었어. 애 놔두고 죽을 수는 없다나, 뭐라나? 뭐, 잘 된 일이지." "완전히 그만 둔 거야?" "이젠 아내와 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니 함부로 죽지도 못 하는데, 어떻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겠어? 완전히 그만뒀어." "그럼 지금 뭐하는데?" "베네트랑 같이 고향으로 내려가 작은 가게를 하고 있어. 그럭저 럭 세 식구 먹고 살 만큼은 버나 보던데." 그렇군. 어쨌든 둘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다니 잘 된 일이다. "카젠은?" "저번에 몬스터 소탕 작전에 나섰다가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 어. 상처가 워낙 깊어 치료를 한 뒤에서 그쪽 다리를 절게 되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는 모 양이야. 소식 들어보니 얼마 전에는 옆집 과부와 결혼까지 했다던 데." 카젠 역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너희는?" "우리야 뭐 먹고 배운 게 이짓밖에 없으니, 계속 이 짓 하고 있 지." "으음, 그렇구나." 테커는 나름대로 침착하게 답변하고 있는 반면 카웨는 별로 침착 하지 않았다. 카웨는 테커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우리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기 나 해?" "아빠랑 함께 엘프의 숲에 있었어.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 엘프 의 숲으로 돌아갈 거야." "다시 사라진단 말이야? 우리를 구원해주러 온 거 아니었어?" "내가 니들을 왜 구원해주는데?" "용병단 다시 안 만들어?" "응. 다시 안 만들어." "일 안 해?" "응. 안 해." 라이레얼은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 짓도 몇번 당하다 보니 이젠 익숙하다. "우리 히로가 날 먹여 살리는데 내가 뭐 하러 일을 하겠어?" "……." 일 좀 하셔도 괜찮은데. "그럼 여기는 왜 찾아온 거야?" "심심해서." "응?" "심심해서 한번 와 봤어." "……." "……." 테커와 카웨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심심해서 오면 안 돼?" "아니, 안 될 것까진 아니지만……." "오랜만에 나타나 그런 소리 하니 맥 빠져서……." 라이레얼은 레몬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사실은 일이 있어서 왔어." "무슨 일?" "니들 지금 일 없지?" "상단 호위 건이 끝난지 얼마 안 되서 이곳에서 쉬면서 일을 찾 아보는 중이야." "그럼 일 하나 해볼래?" "무슨 일?" "나만 믿고 따라와. 보수는 빵빵하게 챙겨줄 테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 위험한 일이야?" 보수가 클수록 위험도 크다. 이건 용병 세계에서 당연한 일이다. "왜 그렇게 잔말이 많아? 내가 하자면 하는 거야!" "그,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우리 히로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 그것도 그러네." 나는 한때 드래곤과 싸우려고까지 했었던 전설의 용사. 테커와 카웨는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하겠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자." 난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제가 설명해도 되죠, 라이레얼?" "응. 히로가 설명해." 라이레얼의 허락을 받은 나는 테커와 카웨에게 말했다. "헤리오 왕국의 제1왕녀 에이미 공주와 아이리스 왕국의 국왕 키 레아 폐하가 결혼한다는 거 알고 있지?" "당연 알고 있지." "언제 알았냐?" "우리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니 꽤 오래 전에 알 았지." "내일 에이미 공주 일행이 아이리스로 출발할 거야. 나와 라이레 얼은 에이미 공주 일행 호위를 맡을 거고." "뭐? 그럼……." "맞아. 그래서 니들을 고용하려는 거지. 공주 일행 호위인 만큼 보수가 재법 짭짤할 거야. 아! 그다지 위험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쩌면 매우 위험할 수도 있어. 이 결혼을 막고 싶어 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으니까." "자바스와 아토리아를 말하는 건가?" "어떻게 알았냐?" "그 정도도 모르면 밥 빌어먹고 살기 힘들지."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테커와 카웨는 잠시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리고는 결정한 듯 내 얼굴을 보았다. "하겠어." "나도." 라이레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 용병단 결성인가? "그럼 짐 챙겨서 내일 아침까지 왕궁 앞으로 집결해." "그래." "알았어." 얘기를 끝마친 라이레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다라서 자 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보자. 가자, 히로." "예." 나는 라이레얼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걸음 을 옮겼다. 물론 라이레얼이 일방적으로 한 것이다. 난 라이레얼과 팔짱을 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있다. 흠흠, 팔에 다는 감촉이 참으로 부드럽군." "저, 저기요." "응? 왜 그래, 히로?" "조, 조금만 떨어져 주심이……." "왜? 설마 내가 싫은 거야?"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다른 사람들 눈도 있고 해 서……." "괜찮아. 내가 다 책임질게." "……." 뭘 책임진다는 건지?" 팔짱이야 그렇다 치고, 나는 아까의 일에 대해 물었다. "테커와 카웨를 찾으려고 나오신 거예요?" "응. 소식도 궁금했고,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해서." "다행이 다들 잘 살고 있는 모양이던데요." "그러게. 럴크와 베네트가 애 기르며 잘 살고 이을 줄은 몰랐어. 의외로 둘이 마음이 잘 맞나봐. 고향에 내려가서 장사를 하고 있다 니. 그 덩치에 그 얼굴로 장사가 잘 될까?" "하하, 글쎄요." "카젠이 농사짓는다는 것도 상상이 안 돼. 뭐, 언젠가 한번 술에 취해 돈 좀 벌면 고향에 내려가 농사짓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 어. 정말로 그렇게 할 줄은 몰랐지만. 사실 그게 현명한 거야. 이 바 닥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테커와 카웨도 좋아 보이던데요." "응. 아직도 둘이 같이 다닐 줄은 몰랐어."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있는편이 마음이 놓일 테니까요." "그렇지." 사실 에이미 공주 일행을 호위하는 데 굳이 예전 동료들의 도움 을 받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저들의 실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봐야 기사 서임을 받은 근위대의 실력에 비할 바는 아니니. 그럼에도 불 구하고 예전 동료들을 찾아 도움을 청한 것은, 그들의 안부가 궁금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예전 동료들이 걱정되었나 보다. 역시 라이레얼은의리가 있다니까. 난 라이레얼의 이런 모습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멋진 여자라는 느낌이랄까?" 멋져요, 누님! ……이라고 소리치고 싶다. 본궁의 숙소에는 루시아, 라나, 카르 영아가 모여 있었다. 내가 라이레얼과 함께 들어가자 그녀들은 하나같이 나를 노려보았다. "응? 왜들 그래?" 내가 모르겠다는 듯 묻자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흥!" 그리고 라나는 울먹거렸다. "흑~." 영아는 날 매섭게 째려보며 라했다. "왜 언니를 데리고 나간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이미 카르한테 다 들었어. 발뺌할 생각하지 마." "응? 듣긴 뭘 들어?"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를 데리고 나갔잖아! 싫다는 언니를 억지 로 끌고 나갔다며!" "헉! 뭐, 뭐라?" 카르는 쪼르르 달려와 라이레얼을 껴안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언니? 혹시 저 인간이 언니 몸에 손을 댄 것은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죽여 버리겠어요!" "괜찮아, 카르." 영아도 잽싸게 달려와 라이레얼을 껴안았다. "오랜만이에요, 언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전 언니 많이 보고 싶었는데…… 매일 매일 언니 생각만 했답니다." 그러자 카르는 영아를 째려보았다. "니가 나의 언니 생각을 왜 해?" "라이레얼 언니가 왜 너의 언니야? 너 정말 웃기는 드래곤이구나." "인간 주제에!" "드래곤 주제에!" 치지직! 카르와 영아의 눈이 마주치자 방전 현상이 일어난다. 저거 스파크 튀는 것 좀 봐. 그나저나 앞짱구가 요즘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가 아니라, 다시 생각해보니 쟨 원래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카르가 드래곤인 것을 알고도 마음껏 개기는 영아. 정말 누구 사촌여동생인지는 몰라도 간뎅이가 부어도 너무 땡땡 하게 부었다. 카르는 라이레얼의 명령 없이는 힘을 쓰지 않으니, 나름대로 안 전하려나? 카르와 영아는 라이레얼을 사이에 두고 계속 신경전을 벌였다. 누님 쟁탈전이라고나 할까? 라이레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둘과 놀아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 루시아, 라나뿐. "……." 어째 아까보다 분위기가 더 썰렁하군. 난 슬며시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 그럼 나도 일이 있어서 이만." 내가 한쪽 발을 방 밖으로 내딛는 순간 루시아가 말했다. "원위치." 후다닥! 난 재빨리 몸을 원위치시켰다. 루시아는 나를 마치 심문하듯 훑 어보았고, 나는 죄수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 여자랑 어딜 갔다 왔어? 그것도 단 둘이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됐어! 니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아!" "……." 그럼 왜 물어 본 건데? 라나는 여전히 훌쩍거렸다. 루시아는 라나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달래주었다. "울지 마, 라나야." "흑~ 예, 언니." "……." 이러니까 내가 마치 나쁜 놈이 된 것 같군. 난 아무 짓도 안 했…… 다시 생각해보니 팔짱은 꼈군. 라이레얼 이 나를 몇 번 껴안기도 했고. 이 정도면 이혼사유로 충분하려나? "아무튼 난 결백해." "나 아직 아무 것도 안 물었거든." "……." 그랬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나 봐?" "그, 그럴 리가!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 반 점이라면 모를까……. 루시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로 나갔는지 육하원칙에 맞춰서 말해봐." "육하원칙?" 갑자기 웬 육하원착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바로 루시아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누가?" "나, 나와 라이레얼이." "언제?" "아까." "어디서?" "시내 주점에서." "무엇을?" "테커와 카웨를." "어떻게?" "잘." "잘?" "잘 만났어." "왜?" "에이미 공주 호위병으로 고용하려고." 즉, 육하원칙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나와 라이레얼은 테커와 카웨를 에이미 공주 호위병으로 고용하 기 위해 시내 주점에서 잘 만났다. 루시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내게 물었다. "그게 다야? 중간에 뭐 빼먹은 일 같은 건 없어?' "무, 물론이지. 내가 중간에 무슨 일을 했겠어?" "예를 들어 그 여자와 팔짱을 꼈다든가……." "……헉!" "아니면, 그 여자와 껴안았다거나……." "……헉쓰!" "왜 그렇게 놀래?" "아, 아니, 너한테 의심 받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결코 찔려 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런데 테커와 카웨는 누구야?" "응. 라이레얼이 용병했을 때의 동료들인데……." 난 그들과 라이레얼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나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놈들인지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 둘을 고용한 거야?" "응. 성격도 괜찮고, 실력도 괜찮은 놈들이니 많은 도움이 될 거 야." 루시아는 그제야 의심을 거두었는지 표정을 풀었다. 라나도 훌 쩍이는 것을 멈췄다. "죄송해요, 오빠. 괜히 의심해서."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지. 다 이해해." 아아~ 루시아도 모자라 라나한테까지 의심을 받다니. 나의 신용도가 어느 정도로 개판인지 알 만하다. 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라나는 집(레이트 백작가)으로 돌아갔다. 나와 루시아는 창틀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해가 지는 모 습이 보였다. "내일이면 드디어 출발이네." "응. 그러네." "도착하면 오빠의 결혼식을 볼 수 있겠지?" "그렇겠지." "빨리 오빠 보고 싶다." "너의 곁에는 내가 있잖아." "니 얼굴은 실컷 봐서 지겨워." "헉!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실컷 봐서 지겹다니! 난 루시아 얼굴을 아무리 봐도 조금도 지겹지 않다. 평생 봐도 지 겹지 않을 것 같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우니.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 라고나 할까? 루시아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아까 의심해서 미안해." "응?" "미안하다고." 루시아가 나한테 사과를! 여자가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법. 그러므로 이 런 때 잘 대처를 해야 한다. 최대한 멋진 대사를 날려주마! 난 재빨리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하지만 그 여자랑 단 둘이 나간 니가 나빠." "……미, 미안."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미안하단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라고 말하 려 했는데. 아아~ 분위기 안 산다. 루시아는 말없이 석양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태양빛에 루시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백금색 머리카락은 약간 붉은빛을 띠며 반 짝거렸다.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름답다."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응? 뭐가?" "아, 아니. 석양 말이야. 저기 좀 봐. 노을이 참 예쁘지 않아? 하늘 이 빨갛잖아." "응. 예뻐. 난 빌딩 사이로 보는 석양보다는 이렇게 산들 사이로 보이는 석양이 더 좋아." "동감이야. 빌딩 사이로 지는 해는 너무 기계적인 느낌이라고나 할까? 낭만이 없잖아." "맞아. 난 역시 이 세계 사람인 것 같아." 난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그럼 우리 여기서 같이 살까?" "응?" "이 세계에서 사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하자. 니가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거니까."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 세계의 삶이 좋아. 이 세계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공주인 걸. 하지만 그 세계에서 나는 그냥 나일 뿐이야. 남들처럼 평범하 게 살아가는." "루시아……." "그리고 그 세계에는 우리 집이 있고 우리 가게가 있잖아. 아침에 일어나서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열심히 일하고, 일을 끝마치고 모두와 함께 둘러 앉아 밥을 먹고. 난 그 삶이 너무나도 행복해." 루시아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 히로. 다 니 덕분이야." "……." 루시아의 표정은 진지했다. 루시아는 내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난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그 세계의 삶이 행복해?" "응. 모두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 행복해." "다행이다." 루시아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 "고마워, 루시아. 너의 행복이 나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나 다름 없어." "히로……." 난 루시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석양빛 에 붉게 물든 루시아의 얼굴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소녀 같았다. 난 그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리고……. 콰앙! "오빠아~!" "누나아~!" ……키스를 하려는 순간 어린 엘프들이 들어왔다. 파악! 루시아는 가차 없이 나를 밀쳐냈다. 그리고 아이들을 반겼다. "어서와, 얘들아." "……." 난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 "어, 어째서……." 어째서 저것들이 이 순간에 등장한 거지?" 어째서 루시아는 나를 밀쳐내고 저것들을 반기는 거지? 설마 루시아는 나보다 저것들을 더 사랑하는 건가? "그런데 언니랑 오빠 뭐하던 중이었어요?" "찰싹 달라붙어 있던데." "재밌는 거 하고 있었죠?" 아이들의 물음에 루시아는 크게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언니는 오빠랑 잠깐 얘기하고 있었어." 그러자 아이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일심동체 의미심장한 눈빛 스 킬을 썼다. "뭐하고 있었어요, 언니?" "얘기하는 것 치고는 너무 가까이 붙어있었어요." "맞아요. 진실을 말해주세요, 누나." 루시아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아, 아니야, 얘들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러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언니가 당황하는 게 더욱 수상해." "맞아. 분명 오빠랑 언니랑 이상한 짓을 하려 했을 거야." "이상한 짓이 뭔데?" "……." 이것들이 진짜! 쾅! 쾅! 쾅! 난 건방진 엘프들의 머리에 혹을 하나씩 만들어주었다. 아이들 은 울상을 지으며 두 손으로 맞은 부위를 문질렀다. "우엥~ 아파요오." "으앙~ 오빠 미워요오." "히잉~ 형 나빠요." "쓸데없는 거 궁금해 한 니들의 잘못이다. 감히 건방지게 어른들 의 세계를 알려 하다니. 100년은 이르다." 어쨌든 이걸로 해결. 난 '잘했지?' 라는 표정으로 루시아를 보았다. 그러자 루시아는 버럭 화를 냈다. "애들을 때리면 어쩌자는 거야?" "나, 난 그냥……." 루시아는 나를 본체만체 하며 아이들에게 다가가 맞은 부위를 어 루만져 주었다. "괜찮아, 얘들아. 언니가 호~ 해줄게." 루시아가 아이들을 다독거려주자 아이들은 루시아에게 찰싹 달라 붙었다. "라이는 에주벝 오빠랑 안 놀고 언니랑만 놀 거야." "맞아. 우리 이제부터 오빠랑 놀지 말자." "나도 형이랑 안 놀 거야." "……." 웃기고 있네. 그래봐야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같이 놀아요오' 라 고 할 거면서 STORY37. 출발 드디어 오늘 에이미 공주가 아이리스로 떠난다. 시집을 가기 위 한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줄을 지어 늘어선 화려한 마차들. 다섯 대의 마차에는 하나같이 헤리오 왕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 중 두 대는 일행들이 탈 마차고, 나머지 세 대에는 예물이 가 득 실려 있다. 공주가 결혼하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국왕 일가는 우리를 배웅해주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간편한 여 행용 드레스를 입은 에이미 공주는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반데 라스와 세레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이곳을 떠나면 에이미 공주는 아이리스 사람이 된다. 다음에 만 날 때는 여동생이 아닌, 아이리스의 왕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반데라스는 그 사실을 잘 아는지 복잡한 표정이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표정이라고나 할 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현재 가장은 반데라스다. 여동생들 시집 보내는 것도 가장인 반데랏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잘 지내." "응. 걱정하지 마, 오빠." 에이미 공주는 세레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 지내요, 언니." "예. 아가씨도요." "이젠 히로랑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겠네요." 응? 히로랑 같이 놀아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영아가 말했다. "그 히로가 그 히로가 아니야, 오빠." "아, 맞다! 반데라스와 세레나의 아들 이름이 히로였지." 헤리오 히로. "후후~ 헤리오 히로라…… 분명 날 닮아 훌륭한 국왕이 될 거 야." "오빠 닮으면 뺸질이 국왕이 되겠지. 그럼 헤리오 뺀질이가 되는 건가? 대체 저 부부는 무슨 생각으로 애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어. 잘못해서 애 인생 망가지면, 그건 전부 이름 탓일 거야." "……." 너 아직도 한국으로 안 돌아갔니? 제발 최모 편집자 님께서 이곳까지 쫓아오셔서 앞짱구 좀 끌고 가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녀올게요, 오빠." "그래. 조심해서 잘 다녀와." "조심하셔야 돼요, 아가씨. 절대 무리하시면 안 돼요." "예, 언니." 에스더 공주는 반데라스와 세레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 응? 에스더 공주가 작별 인사를 왜 해? 반데라스가 나에게 말했다. "내 여동생들을 잘 부탁한다." "여동생…… 들?" "왜? 뭐가 잘못 됐어?" "'들'이면 단수가 아니라 복수잖아." "응. 에이미와 에스더." "에스더 공주도 가는 거야?" "며칠 전부터 가고 싶다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어." "몸도 안 좋다며?" "요즘은 많이 좋아졌으니까 마차 여행 정도는 괜찮을 거야." 반데라스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널 믿는다." "……나보고 뭘 어쩌라고?"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에스더 공주가 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 이며 말했다. "저도 여행이라는 것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언니 결혼식도 보고 싶고요. 짐이 되지 않을 테니 부디 허락해주세요." 에스더 공주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여행을 하고 싶어요오.' ……라는 표정. 어린 소녀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흔들린다. 하 지만 에스더 공주가 내 옆에 있으면 루시아와의 연애 사업에 방해 가 될 게 뻔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에이미 공주를 아이리스까지 안전하게 호위 하는 것이지만, 숨겨진 진짜 목적은 이번 여행을 통해 루시아와의 사이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뭐 그렇다면야……." "고마워요, 오빠. 저 열심히 할게요." "아, 아니, 그러니까……." '뭐 그렇가면야' 다음에 이어질 말은 '다음 기회에 가는 것은 어 떻겠니?' 였다. 하지만 에스더 공주는 내가 허락한 줄 알고 이미 감 사의 인사까지 했다. 그리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기대감에 잔뜩 부푼 모습을 보였다. 이러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잘 갔다 와, 라나야." "응, 언니. 언니도 잘 지내." 라나는 세레나와 작별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 왜 쟤가 작별인사를 하는 거지? 라나는 간편한 옷을 입고 손에는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었다. "서, 설마 너도 가는 거니?" 내가 묻자 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빠." 반데라스는 또 다시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처제를 잘 부탁한다." "……그만 좀 부탁해라." 친인척들을 다 나에게 떠맡길 생각이냐? 에스더 공주에 이어 라나까지 같이 가다니. 루시아와의 연애 사업이 점점 몰락하는 느낌이다. 이러다가 조만간 문 닫는 거 아니야? 세레나는 히로(나 아님)를 안고 히로(나 맞음)에게 다가왔다. "토닥토닥 스킬을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히로를 달래는 데 많은 자신감이 붙었어요." 세레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토닥토닥 스킬을 제법 많이 익혔다. 내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 중 세레나의 성적이 가장 좋다. 이는 세레나가 토닥토닥 스킬을 익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을 의미한다. 스승으로서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 음을 숨기고 점짓 엄하게 말했다. "토닥토닥 스킬은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야. 스킬을 마스터하는 지름길은 끊임없는 노력뿐이야. 그러니 자만하지 말고 계속 정진해." 세레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다고 머리 쓰다듬기 스킬을 소홀히 해서도 안 돼. 두 가지 스킬은 불가분의 관계야. 이 두 가지 스킬을 제대로 익힌다면 분명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야." "예. 끝까지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히로를 안아보 시겠어요?" 세레나는 히로(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히로(역시 나)에게 히로(나 아님)를 내밀었다. 내 품은 여자 전용이거늘. 난 히로를 안아들었다. 잘 자고 있던 히로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 고 나를 쳐다보았다. 말똥말똥~. 그리고 파을 버둥거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아우~ 아우~." "……." 내가 왜 니 아우니? 한번 해보자는 거니? 참고로 이 엉아는 어린애라고 해서 안 봐준단다. 내가 히로(분명 말하지만 나 아님)에게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려고 하는 순간 루시아가 말했다. "나도 좀 안아볼게." "으응." 난 히로를 루시아에게 넘겨주었다.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히로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품에 안은 채 생긋 웃음을 지으며 살짝살짝 흔 들어 주었다. "……." 헉! 좋겠다. 저 히로가 그 히로가 아니라, 이 히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아~ 히로도 루시아의 품에 안기고파. 히로만 안아주지 말고 히로도 안아줘, 루시아. "아이가 참 예뻐요." "예. 고마워요." 루시아는 세레나에게 아기를 넘겨주었다. 이별은 짧을수록 좋은 법. 인사를 끝마친 일행들은 마차에 올라탔다. 일행은 에이미 공주, 에스더 공주, 라나, 루시아, 라이, 루, 루비, 영아, 카르, 라이레얼, 나, 그리고 왕실 근위대 정예 20명이다. 이중 에이미 공주, 에스더 공주, 라나, 루시아, 라이, 루, 루비, 영 아는 보호 대상이다. 원래는 전속 시녀들도 따라 붙어야 한다. 귀족이나 왕족의 여성이 시집을 갈 때에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시녀들을 같이 데려가는 것이 관례이다. 평소에 데리고 있던 하녀 는 따로 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고,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외로워 할 때 같이 온 하녀가 말동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일반 귀족도 아닌 공주가 시집을 가는 것이니 만큼 시녀들은 물 론 시종들과 수행원들까지 따라 붙어야 한다. 하지만 이 여행은 도중에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모르는 위험이 도 사리고 있다. 때문에 보호 대상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그래서 시녀들은 나중에 마법으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에이미 공주, 에스더 공주, 라나가 1번 마차를 탔고, 루시아, 라 이, 루, 루비, 영아가 2번 마차를 탔다. 나와 라이레얼은 호위를 해야 하는 입장이니 만큼 말을 탔다. 라 이레얼은 눈처럼 하얀 핵마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칠흑처럼 까 만 흑마에 올라탔다. 라이레얼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멋있어, 히로!" "하하, 뭘요. 이 정도는 기본이죠." 난 라이레얼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소리 쳤다. "멋져요, 누님!" 건장한 백마 위에 앉아있는 늘씬한 하프엘프 미녀. 길게 흘러내 린 레몬빛 생며리와 그 사이로 보이는 길고 뾰족한 귀. 백옥같이 새 하얀 피부와 물기를 머금고 있는 장밋빛 입술. 저 백마가 마치 유니콘처럼 보인다. 성격이 거칠어 보이는 백마는 미녀가 올라탔기 때문인지 유순하 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아~ 내가 저 말이고 싶다. 그래서 라이레얼 같은 미녀를 등에 태울 수 있는 영광을 누리고 싶다. "나의 언니에게 그딴 소리를 하다니! 죽여 버리겠어!" 카르는 은구슬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소리쳤다. 물론 말만 그렇 게 할 뿐 실체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만약 카르가 죽인다는 말 을 할 때마다 행동으로 옮겼다면, 지금쯤 나는 뼈와 살이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카르는 라이레얼의 명령 없이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착한 드래곤 ~. 카르는 재빨리 라이레얼 뒤에 올라타 라이레얼을 꼬옥 끌어안았 다. 그리고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요, 언니." "……." 아주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한다. 마차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본 영아는 눈을 까뒤집으며 소리쳤다. "라이레얼 언니에게서 떨어져!" 그러자 카르는 보란 듯이 라이레얼을 더욱 세게 껴안았다. 어쨌든 우리는 출발했다. 헤리오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왕실 근위대 10명이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섰다. 그 뒤를 이어 다섯 대의 마 차가 따라갔다. 모든 마차에는 카르가 강력한 보호 마법을 걸었다. 근거리에서 발사한 쇠뇌라고 해도 마차의 벽을 뚫지는 못할 것이 다(물론 유리 역시 안 깨진다). 후미 역시 왕실 근위대 10명이 맡았다. 그리고 나와 라이레얼은 일행이 타고 있는 마차 옆을 지켰다. 테커와 카웨는 시킨 대로 짐을 챙겨 왕궁 문 앞에 서 있었다. "뭐야? 말 타고 가는 거였어?" "우린 말 없단 말이야!" 이 세계에서 말은 꽤 비싼 동물이다. 그래서 정말 고급 용병이 아 닌 이상은 말을 타고 다니는 경우가 드물었다. 난 고삐를 잡고 있던 갈색 말 두 마리를 테커와 카웨에게 넘겨주 었다. 국왕이 내준 말인 만큼 상당히 품종이 좋고 길이 잘 들여진 말이다. 테커와 카웨는 한 번의 사양 없이 말 위에 올라탔다. 그래도 기나 긴 용병 세월을 헛되게 보낸 것은 아닌지, 둘 다 말을 탈 줄 알았다. "이거 주는 거야, 빌려주는 거야?" "일 끝난 다음 가져도 돼?" "……." 줘 봐야 팔아먹을 거면서. 난 준다, 안 준다 딱 잘라 말하는 대신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니들 하는 거 봐서." "쪼잔한 놈." "치사한 새끼." "……." 말 한 마리를 날로 먹으려는 니들이 더 쪼잔하고 더 치사해. 테커와 카웨는 노련한용병다운 모습이었다. 옷 위에는 가벼우 면서도 방어력이 뛰어난 가죽갑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적당한 길 이의 숏소드 두 자루를 찼다. 등에는 롱소드를 비스듬히 찼고, 배낭 과 한 손으로 쓸 수 있는 원형 방패를 멨다. 그 외의 무기(단검 등)는 몸에 잘 숨겨 놓은 듯 했다. 가벼우면서도 실용적인 무장이다. 딱 보아하니 이 두 놈은 꽤나 오래 살 것 같다. 뭐, 실력이 있으니 지금까지 살아남았겠지만. 라이레얼의 무장은 어떻게 되나? 난 라이레얼을 보았다. 라이레얼의 허리에는 얇은 레이피어가 걸려 있었고, 말안장에는 흰색 활이 걸려 있었다. 크기가 작은 것을 보니 각궁이나 복합궁인 것 같다. "……." 그런데 저 무기들이 어디서 튀어 나왔지? 라이레얼이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활은 있는데화살이 없네. 설마 상대가 쏜 화살을 주워서 쏠 생각은 아닐 테고…… 난 말의 속도를 줄여 라이레얼 옆으로 다가갔다. "그 활은 뭐예요?" "으응. 이거?" 라이레얼은 안장에 매인 활을 들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난 그것 을 바당 자세히 살펴보았다. 새하얀 활은 이어 붙이거나 손질한 자 국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재질이 아주 특이했다. "이거 재질이 뭔가요?" "드래곤 본." "예?" "카르의 뼈야." 라이레얼이 말하자 카르는 날 보며 말했다. "내가 언니를 위해 만든 거야. 난 언니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 든지 할 수 있어." "……." 그래서 어쩌라구? 그렇군. 드래곤 본이었군. 화이트 드래곤 본(White Dragon Bone). 어째 너무 새하얗다 했다. "이거 정말 좋은데요. 가볍고 튼튼하고. 그런데 활줄을 걸어놨네 요." 활이란 복잡하고도 정교해 관리하기 까다로운 무기이다. 습기가 차서도 안 되고, 불을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험하게 다뤄서도 안 된다. 활대는 용수철처럼 어느 정도 힘을 가하더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탄성(彈性)이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힘을 가하면 본 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활줄이 활대의 양끝을 계속 잡아댕기면 활대가 안쪽으로 휜다. 그렇기 때문에 활은 쓰지 않을 때 활줄을 풀어놓는다. 하지만 이 활에는 투명한 실 같은 활줄이 걸려 있었다. 활줄은 손 가락이 베이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가늘었다. "이 활은 활줄을 풀지 않아도 괜찮데. 아! 그리고 그 활줄은 카르 의 머리카락이야. 카르가 머리카락에 마법을 걸어 매어준 거야." "그렇군요. 한번 당겨 봐도 되요?" "그 활은 나만 당길 수 있대. 다른 사람이 잘못 만지면 활줄에 손 가락이 잘린다는데." "헉!" 활줄에 손가락을 대려던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손을 땠다. 카르 는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 기대했던 거냐? "그런데 화살은 어딨어요?" "그 활은 화살이 필요 없대. 드래곤이 만든 거여서 그런지 뭔가 다른가 봐." "그, 그렇군요." 난 라이레얼에게 활을 돌려주었다. "그런데 그 활 이름이 뭐예요?" 카르가 재빨리 대답했다. "언니에 대한 나의사랑을 가득 담아 만든 것이어서 화이트 러브 라고 지었어." "……." 화이트 러브(White Love)? 무슨 크리스마스 한정판이냐? "그 레이피어는 뭐예요?" "아! 이것도 카르가 만들어준 거야." 라이레얼은 레이피어를 뽑아들었다. 레이피어의 검신은 역시나 새하얀 색이었다. 살짝 살펴보니 손잡이와 검신이 처음부터 하나 로 만들어진 일체형이다. "이것도 카르의 드래곤 본인가요?" "응." 검집 역시 새하얀 색인 걸 보니 드래곤 본인 것 같다. 하기야 당 연한 일이다. 일반 금속으로 검집을 만들었다간 검집이 먼저 잘라 질 테니. 레이피어는 검신에서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카르의 말로는 각종 빙계 마법이 걸려있대." "뭐, 메이드 인 화이트 드래곤이니…… 아! 이 레이피어의 이름 은 뭐예요?" 이번에도 역시 카르가 대답했다. "언니와 나의 사랑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릴리 소드라 지었어. "……." 릴리 소드?(Lily Sword)? 릴리는 백합이고, 소드는 검이니 합치면 백합검이 되겠다. 과연 이 글의 백합화를 주도하는 레즈 드래곤이 지은 이름답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카르는 나를 노려보았다. "뭐야? 왜 한숨을 쉬는데?" "아, 아니,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아서." "당연하지. 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담아 지은 건데." "……." 어떻게든 이 글이 백합물로 변질되는 것만은 막아야 하는데. 어쨌든 화이트 드래곤의 아이템으로 몸을 도배한 라이레얼. 전 투력이 몇 십 배는 상승했을 것이다. 롤플레잉 게임 등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인공의 레벨만큼이 나 중요한 것이 바로 아이템이다. 최종 보스라 해도 아이템발에는 못 당하는 법. 라이레얼이 있어서 내 마음이 든든하다. 반대로 저 근위대가 있어서 내 마음이 무겁다. 본인들은 기사 서임을 받은 왕실 최정예라 자부하겠지만, 우리에 게는 그저 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들이 따라온 것은 오직 헤리오 왕궁의 입장 때문이다. 공주의 호위를 타국 사람과 용병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는 입장. 그리고 저들이 있어야 타국에 입성할 때 소위 말하는 '뽀대' 가 난 다는 입장. 하기야 공주가 타고 있는 마차인 만큼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 들이 호위를 해야 '뽀대' 가 난다. 그리고 쟤들이 있어야 좀 편한 것도 사실이다. 말과 마차를 관리하는 것은 물론, 숙소를 알아보고 야영지를 세 우는 등의 일 역시 전부 쟤들 몫이다. 참고로 이번 여행을 총괄하는 것은 근위대 대장의 몫이다. 근위 대 대장은 코수염이 난 40대 중반의 남자였다(전에 나랑 달리기 한 사람). 그리고 그의 부관은 20대 후반의 잘생기고 젊은 청년이었다. 어차피 같이 여행을 하게 될 사이인 만큼 난 그들에게 다가가 얘 기를 나누어보았다. 근위대 대장의 이름은 윌리암스 윌리엄. 윌리 암스 가문은 대대로 기사를 배출한 유명한 가문이라고 한다. 그리 고 부관의 이름은 빈센트 오엔. 빈센트 후작가의 차남이란다. "전 아시다시피 아이리스 왕국의 공작 아이언스 히로입니다. 특 별히 맡고 있는 직책도 없고, 영지도 없습니다. 무늬만 공작이라고 나 할까요?" 윌리엄 경(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은 예를 갖추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위명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저번에 봤을 때는 미처 몰라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내가 윌리엄 경과 얘기를 하는데 오엔 경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 뭐야, 저 비웃는 듯한 웃음은? 오엔 경은 건장한 체격에 조각 같은 얼굴을 지닌 미청년이었다. 젊은 나이에 근위대 부관의 자리까지 오른 것을 보면 검술 실력이 상당할 것이다. 게다가 집은 후작가문. 잘생기고, 싸움 잘하고, 집안까지 빵빵하니 여자들이 아마 줄을 설 것이다. 그런데 생긴 게 좀 싸가지가 없어 보인다. 너무 권위의식에 가득 찬 모습이라고나 할까? 오엔 경은 날 보며 말했다. "저 역시 오래전부터 아이언스 공작님의 위명을 들어왔습니다. 드래곤과 싸우려고까지 했었지요. 결국 안 싸웠지만요." "......" 내가 안 싸우는데 니가 뭐 보태준 거라도 있니? "언제 한번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좋게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론은 한판 붙어보자는 거다. 윌리엄 경은 표정을 굳히며 오엔 경에게 말했다. "오엔 경, 그 무슨 실례되는......" 난 손을 들어 윌리엄 경을 제지했다. 그리고 오엔에게(이제부터 경 빼기로 했음) 말했다. "가르침을 받고 싶다면야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강자와의 대련은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지름길이지요. 부족한 실력을 알고 메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내 말에 오엔은 움찔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우헤헤헤~!" 아아~ 상쾌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기에 나는 말의 속도를 늦춰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라이레얼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쟤들이랑 무슨 얘기했어?" "그냥 뭐 인사만 했어요. 어쨌든 한동안 같이 여행할 사람들이니." "난 기사는 싫어." 라이레얼이 말하자 테커와 카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싫어." "나도." 기사와 용병은 원래 사이가 별로 안 좋다. 기사는 정규 병사들 중에서도 최정예다. 그들은 규율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어느 상황에서나 예를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용병은 다르다. 용병에게는 딱히 규울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들은 규율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사는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이고, 용병은 집단보다는 개인이 우선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복장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기사는 모두가 같은 갑옷을 갖춰 입는다. 반대로 용병의 갑옷은 모두 제각각이다. 개인의 특성에 맞춘 갑옷이니 만큼 실용성은 좋을지 몰라도 별로 폼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기사는 용병을 '버르장머리 없는 도적놈' 정도로 취급하고, 용병은 기사를 '겉멋만 들고 잘난 체 하는 애송이' 정도로 생각한다. "저놈들 잘난 체 하는 것만 보면 삼 일은 재수 없어." "기사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면 한 대 패주고 싶다니까." 참고로 실력은 아무래도 기사 쪽이 더 높다. 기사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용병은 길드에 등록만 하면 개나 소나 다 될 수 있는 것이니. 뭐, 테커와 카웨처럼 닳고 닳은 용병이라면 기사를 상대로도 그렇게 쉽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일대일 대련이라면 아무래도 제대로 검술을 익힌 기사 쪽이 더 유리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변수가 있는 실제 전쟁터에서의 싸움이라면 실전 경험이 많은 용병 쪽이 더 유리하다. 참고로 라이레얼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다. 라이레얼이라면 기사 열 명 정도는 가뿐하다. 숲처럼 엄폐물이 있는 곳에서 활로 공격한다면 수백 명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 * * * 여행은 순조롭게 계속되었다. 오늘이 일주일째인데 아직까지 아무 일 없다. 하지만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느낌을 받았기 떄문이다. 휴식을 끝마치고 마차를 출발시키려 하는데 갑자기 라이와 루비가 싸우기 시작했다. "라이가 오빠랑 같이 탈 거야." "아니야. 루비가 오빠랑 같이 탈 거야." "오빠는 라이를 태우는 걸 더 좋아해." "아니야. 오빠는 루비를 태우는 걸 더 좋아하는게 틀림없어." "......" 서로 나와 같이 말을 타겠다고 싸우는 라이와 루비. 그 옆에서 루가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도 말 타고 싶은데......" "......" 어쩌라구? 라이와 루비는 이마를 맞댄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루시아는 싸움이 더 커지기 전에 두 엘프를 말렸다. "그만해, 라이야 루비야. 둘 다 오빠랑 같이 말 타면 되잖아." "......응?" 결국 나는 앞에 라이를 태우고 뒤에 루비를 태웠다. "헤헤~ 이렇게 오빠랑 같이 말을 타고 있으니 라이는 참 행복해요." "루비도 막막 행복해요. 오빠 등 막막 넓어요." 루비는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등에 댔다. 뒤에 여자를 태우면 등에 뭉클한 감촉이 느껴진다거나 하겠지만, 여자애를 태우니 그런 거 절대 없다. 나름대로 비극이라고나 할까? 아아~ 얘들과 같이 타니 정말 폼 안 산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설의 용사 분위기가 났는데, 이젠 보모 분위기가 난다. 라이는 내 가슴에 괜히 몸을 비비적거렸다. 그러자 루비도 질세라 비비적거렸다. "......" 땀난다. 그만해라. 근위병들은 나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참 별 걸 다 부러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레얼 뒤에는 영아가 타고 있었다. 참고로 원래 그 자리 주인은 현재 마차 안에 있다. 그 자리는 영아가 울며불며 매달려 간신히 빼앗은 것이다. 웃으며 좋아하는 영아의 모습 과 울면서 마차 안으로 들어가던 카르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라이와 루비가 나를 사이에 두고 싸우듯이 라이레얼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카르와 영아. 라이레얼은 아까부터 손에 무언가를 들고 꼼지락거렸다. 고삐는 완전히 놓은 상태였고 두 발로만 말을 조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잘 가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라이레얼 이라고나 할까? 난 라이레얼이 뭘 하나 슬쩍 들여다보았다. 라이레얼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휴대용 게임기. 라이레얼은 정신없이 화면을 들여다보며 버튼을 두드렸다. "......" 이 세계에까지 게임기를 들고 온 건가? 어쩐지 금단증상이 안 나타난다 했다. 언제 어디서나 게임을 즐기는 라이레얼의 모습에서 난 진정한 폐인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앗! 또 죽었다." 라이레얼은 예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난 라이레얼에게서 떨어져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는 산길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윌리엄 경의 말에 따르면 밤이 되기 전에 산을 넘어 다음 도시에 도착할 거라고 했다. 근위병들은 호위라는 임무에 충실했다. 그들은 미리 앞을 살피고, 주위를 경계했다. 때문에 우리들은 할 일이 없었다. 테커와 카웨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암~ 아무 일도 없으니 지겹군." "어디서 산적들이라도 안 나타나나?" 기사만 20명이다. 이 정도 규모면 웬만한 산적들은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이 큰 만큼 얻은 이득 역시 크다. 공주에 결혼 예물까지! 성공만 한다면 꿩 먹고 알 먹고 할 수 있다. 뭐, 어디까지나 성공할 때의 얘기지만. 난 윌리엄 경에게 다가갔다. “다음 도시가 어디라고 했지요?” “루크 성입니다.” “그 루크 성만 지나면 아이리스 왕국의 국경이지요?” “예.” “그럼 내일이면 아이리스 왕국의 국경으로 들어가겠네요.” “그렇습니다.” 내일이면 위험이 반쯤은 사라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 밤은 꽤나 위험하겠군.”“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에요.” 역시나 내 예상은 맞아들었다. 길이 통나무와 바위로 막혀 있었던 것이다. 길 양쪽에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마차가 지나갈 수 없다. 마차가 지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길을 막은 나무와 바위를 치워야했다. 근위병들은 말에서 내려 통나무와 바위를 치웠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무리였기에 줄로 말과 나무를 연결한 다음 채찍질을 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마차가 지나갈 만한 길이 만들어졌다. 다행히 그 사이에 공격은 없었다. 우리는 그곳을 무사히 지나갔다. 하지만 길을 치우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린 터라 결국 산을 넘지는 못했다. 아마 그들 역시 이것을 노렸을 것이다.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밤이 되자 우리는 산 속에서 야영할 준비를 했다. 적당한 장소를 찾자마자 근위병들은 간이 천막을 세웠다. 난 일행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오지 마. 그리고 카르는 일행을 지켜줘. 알았지?” “감히 인간 주제에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싫어. 나는......” 난 라이레얼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라이레얼이 잘라 말했다. “지켜, 카르.” 카르는 두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예, 언니. 최선을 다할게요.” “......” 아주 사명감이 넘치시는군. 난 라이에게 말했다. “라이도 잘할 수 있지?” 라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빠. 라이는 최선을 다해 모두를 지킬 거예요!” 상아탑의 주인이자 8클래스 러너인 라이. 비록 어린아이의 모습이긴 하지만, 드래곤과 나 다음으로 강력한 마법사다. 라이는 키티 모양 배낭에서 요술봉을 꺼내들었다. 마력을 증폭시켜주는 저 요술봉까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에이미 공주, 에스더 공주, 라나, 루시아, 라이, 루, 루비, 영아, 카르가 하나의 천막 안에 들어갔다. 9명이 자기에는 좀 비좁았지만 이 편이 더 안전할 것이다. 나와 라이레얼, 테커, 카웨는 천막 근처에 모닥불을 피고 둘러앉았다. 라이레얼은 휴대용 게임기를 꺼내 게임을 즐겼고, 테커와 카웨는 서로 농담 따먹기를 했다. 다들 별로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다. 뭐, 이런 상황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닐 테니. 근위병들은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경계했다. 난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달이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색 숲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 3시간이 지났다. 아직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점점 다가오는 어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적이라면 먼저 숲 속에 숨어 화살로 공격을 할 것이다. 화살은 어디까지나 곡사이기 때문에 숙련된 사람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어둠 속에서는 적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화살도 보이지 않는다. 난 나와 라이레얼, 테커, 카웨에게 마법을 걸었다. “프로텍트 프롬 노멀 미사일.” 화살을 비롯한 투척 무기를 막아주는 마법이다. 정확히는 몸에 닿지 않고 비껴가게 해준다. “이걸로 화살 방비는 완료. 화살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라이레얼. 니들도 마찬가지야.” 테커와 카웨는 신기하다는 듯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데?” “그러게.”“그럼 마법 걸어 놨다고 이마빡에 써붙여주랴?” “아무튼 마법사가 있으니 역시 편하네.” “맞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마법을 배워볼 걸 그랬나?” “......” 마법이 개나 소나 다 쓸 수 있는 건 줄 아나? 10년을 공부하고도 매직 미사일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인간이 태반이다. 난 숲을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니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와 낙엽 밟는 소리. 숲 속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짐승은 아니다. 사람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준비하세요.” 그 순간, 화살이 날아왔다. 쉬이익! 훗! 그래봐야 이미 프로텍트 프롬 노멀 미사일 마법을 걸어 놨다. 화살 따위야 내 몸을 비껴 가...... “......야 하는데, 왜 안 비껴가?” 난 재빨리 손으로 화살을 낚아챘다. 그리고 화살을 살펴보았다. “뭐야? 이건 노멀 하지가 않잖아!” 화살에서 미약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화살에 마법을 건 다음 발사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적에게도 마법사가 있다는 뜻이다. 난 먼저 일행들에게 마법을 하나 더 걸었다. “프로텍트 프롬 매직 미사일.” 이걸로 노멀한 미사일이든, 노멀하지 않은 미사일이든 괜찮을 것이다. 그 순간 엄청난 숫자의 화살이 날아왔다. 우리야 이미 준비하고 있었으니 상관없지만, 근위병들은 깜짝 놀랐다. 윌리엄 경은 당황하는 근위병들에게 소리쳤다. “침착해라!” 그들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자고 있는 다른 병사들을 깨웠다(2교대로 불침번을 서던 중이어서 반은 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갑옷을 입은 채 자고 있었기에 병사들은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크악!” 미처 투구를 쓰지 못한 근위병 하나가 이마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적들은 우리를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적들을 볼 수 없다. 너무 불공평하군. “라이트!” 난 수십 개의 빛의 구를 띄웠다. 그러자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지며 숲 속에 숨어있던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갑작스런 빛에 놀랐는지 화살 세례가 멈추었다. 윌리엄 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공격!” 난 청룡도를 뽑아 들었고, 라이레얼은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테커와 카웨는 한 손에 방패를 들고 숏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싸움의 기본은 선빵 아니겠는가? 저들은 가만히 앉아 선빵을 당하기는 싫었는지 숲 속에 뛰쳐나왔다. “전부 죽여!” 어두운 숲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은 나의 마법 때문에 실패했다. 게다가 적들은 주위를 둘러싸고 화살을 날려대느라 흩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격을 받으면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었다. 물론 최선은 도망치는 것이겠지만, 도망칠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이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적의 숫자는 2백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생긴 것과 싸우는 방법 등을 보아하니 산적이나 용병인 것 같았다. 어찌 보면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둘을 겸업하는 놈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고용되면 용병, 고용 안 되면 산적이라고나 할까? 라이레얼이 시위를 당기는 순간 공기 중에 얼음 결정이 생겨났다. 순식간에 자라는 얼음은 화살 모양이 되었다. 시위를 당기면 자동으로 얼음 화살이 생성되나 보다. 라이레얼은 시위를 놓았다. 쉬이익! 날아간 얼음 화살이 한 놈의 가슴에 맞았다. 놀라운 것은 맞은 부위가 얼어붙으며 피가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다는 거다. 상처 부위를 얼려 세포를 괴사시킨다는 건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겠군. 라이레얼은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심지어는 한 번에 화살 세 개를 생성시키기도 했다. 사수가 원하는 대로 화살 개수를 조절하는 것도 가능한 듯하다. 역시 드래곤이 만든 아티팩트! “젠장! 저 년을 먼저 죽여!” 라이레얼에 의해 부하들이 계속 죽어 나가자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소리쳤다. 그러자 수십 개의 화살이 라이레얼을 향해 날아왔다. 평범한 화살과 마법이 걸린 화살이 뒤섞여 날아왔지만, 라이레얼의 몸에 닿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근위병들은 칼을 뽑아들고 밀려오는 적들과 맞서 싸웠다. 테커와 카웨는 서로 호흡을 맞춰가며 적들을 상대했다. 방패로 막고, 칼로 막고, 방패로 얼굴을 후려치고, 칼로 배때기를 찌르고...... 노련한 용병다운 모습이다. 그들에게도 화살이 날아왔지만, 역시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콰앙! 어디선가 갑자기 불덩이가 나타나 근위병 셋을 태웠다. 두 명은 즉사했고, 한 명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닥을 굴렀다. 아무래도 마법사를 먼저 처리해야겠군. 체력과 방어력이 약한 마법사는 원래 난전에 끼어들지 않는다. 끼어들었다가는 주문도 외기 전에 죽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안전한 후방에서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마법을 쓴다. 아마도 적의 마법사는 숲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난 정신을 집중해 인위적인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보았다. "두 곳? 마법사가 둘이라는 건가?" 난 일단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역시나 마법사는 근처 숲 속에 숨어 있었다. 사실 전장에서 마법사만큼 애매한 존재가 없다. 적과의 거리가 가까우면 당하기 쉽고, 적과의 거리가 멀면 마법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은색 로브를 입고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마법사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뭐냐, 네놈은?" 마법사 주위에는 네 명의 병사들이 거대한 직사각형 방패, 타워실드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마법사를 방어하는 것이다. "죽여라!" 마법사가 소리치자 그들은 방패를 버리고 숏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일제히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청룡도를 휘둘렀다. 서걱! 맨 처음 달려든 놈의 몸이 위아래로 이등분 되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잘리기도 참 힘들 것이다. 이건 장난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하는 전투다. 난 이런 곳에서 자비를 베풀어줄 만큼 멍청하지 않다. 죽여야 할 때를 알고 죽이는 살인자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난 한 놈의 배에 청룡도를 찔러 넣고, 빅장으로 다른 놈의 머리를 박살냈다. 마지막 남은 놈은 그 모습을 보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칼과 방패를 버리고 숲 속으로 도망쳤다. 도망치는 놈까지 따라가서 죽일 만큼 한가하지는 않았기에 난 그 놈을 그냥 놔주었다. "파이어 볼!" 마법사는 그사이 주문을 완성했는지 나에게 거대한 불덩이를 던졌다. 난 한 손을 내밀어 중얼거렸다. "디스펠." 불덩이는 내 몸에 닿기 직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사는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내 마법을......" "당신 마법이 뭐가 대단하다고? 당신이 이름을 말해도 나는 당신을 모르지만, 내가 이름을 말하면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 걸." "너, 넌 누구냐?" "난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인 아이언스 히로라고 하지. 한때는 드래곤과 싸울 뻔한 적도 있으며, 현재는 상아탑의 주인인 라이미안의 보호자지. 참고로 클래스는 8클래스 마스터. 또한 검술과 체술에도 조예가 깊지." "우, 웃기는 소리! 네놈이 아이언스 히로일?리 없어!" "그래서 어쩌라고?" 난 한 손을 펴고 그 위에 작은 불덩이를 만들었다. 빨갛게 타오르던 불덩이는 파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내 하얀색으로 변했다. 마법사는 그것을 보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 난 주저 없이 그것을 마법사에게 던졌다. "으아악!" 마법사는 한순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걸로 한 놈은 처리했군. 난 다른 마법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마법사는 이미 얼음 화살을 맞고 절명한 상태였다. 라이레얼의 솜씨로군. 어쨌든 이걸로 마법사 처리가 끝났다. 난 야영지 주위의 숲을 돌아다니며 숨어서 화살을 쏘는 스나이퍼들을 처리했다. 실력은 근위병들이 우위였지만 적들이 너무 많았다. 숫자로 따지면 10배 이상이다. 게다가 그들의 실력이 허접한 것오 아니다. "저기다! 저곳을 공격해!" 적들은 일행이 있는 천막으로 다가갔다. 난 놀라 그곳으로 달려가려다 안에 카르와 라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적들이 천막 근처에 접근하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얼음 벽돌이 떨어졌다. 쿵! 그 벽돌에 깔린 적들은 곤죽이 되었다. 벽돌은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쿵! 쿵! 쿵! 그 벽돌은 천막 주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천막 주위에는 이내 입구가 없는 이글루가 만들어졌다. 이글루라...... 과연 화이트 드래곤다운 방법이다. 어쨌든 이걸로 적들은 일행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적들을 쓸어버리려고 마음 먹는데 갑자기 말발굽 소리와 함께 땅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서 한 무리의 군마가 나타났다. 그들은 주저 없이 적들을 짓밟았다. 대략 50명 정도의 병력이었지만 갑작스런 기습 공격에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젠장! 도망쳐!” 상당수 적들은 창에 찔려 죽거나 말에 밟혀 죽었다. 그리고 일부 적들은 숲 속으로 도망쳤다. 그제야 말을 탄 병사들은 공격을 멈추었다. 한 남자가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어 들었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난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전 에이미 공주님의 호위를 맡고 있는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예를 갖추어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이셨군요. 전 루크 성의 성주 에드먼드 에녹 남작입니다. 오늘 밤 에이미 공주님께서 루크 성에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밤이 늦도록 소식이 없기에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이렇게 병사들을 이끌고 와봤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에이미 공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먼저 시체부터 치우도록 하지요. 여성분들이 보시기엔 별로 안 좋은 장면일 테니.” 에드먼드 남작은 내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부하들로 하여금 시체를 치우게 하고 주위를 정리시켰다. 그런데 아까부터 윌리엄 경이 보이지 않는다. 마침 오엔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윌리엄 경은 어디 있나요?” “돌아가셨습니다. 근위병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20명 중 대장님을 포함해 11명이 사망했고, 2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나머지 7명은 괜찮은가 보죠?” “경상자가 몇 명 있지만, 다들 약간의 치료가 필요한 수준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에드먼드 남작의 병사들은 적의 시체는 숲 속으로 치웠고, 근위병들의 시체는 야영지 한 곳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그중에는 윌리엄 경의 모습도 보였다. 오엔을 비롯한 살아남은 근위병들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난 근위병들의 시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히로!” 라이레얼, 테커, 카웨가 다가왔다. 라이레얼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깔끔한 모습인 반면에 테커와 카웨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모두 큰 상처는 없는 듯했다. “괜찮아요, 라이레얼?” “응. 난 괜찮아, 히로.” “우리한텐 안 묻냐?” “니들은 뭐 괜찮아 보이네” 카웨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잘못하면 죽을 뻔했단 말이야!” “원래 용병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보수가 큰 만큼 위험도 큰 법이지. 너무 날로 먹으려는 생각은 하지 마시게.” “쳇! 아무튼 이놈들 보통 실력이 아니었어. 적어도 어중이 떠중이들은 아니야.” “그렇겠지. 마법사까지 끼어있었으니.”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은데. 난 이글루에 다가가 얼음벽을 똑똑 두드렸다. “나야. 문 열어.” 그러자 얼음벽에 얼음문이 생겨났다. 문을 연 것은 라이. 라이는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라이 뒤에 서 있는 루와 루비도 고개를 숙였다. “이글루에 어서오세요오~!” “......” 누가 보면 가정 방문 온 줄 알겠다. “어서 들어오세요, 오빠.” “안이 막막 따뜻해요.” “누나가 기다리고 있어요.” 난 허리를 숙여(문이 내 키보다 작았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천막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사라진 상태. 일행들은 안에서 돗자리를 깔고 홍차를 즐기고 있었다. “......” 뭐야, 이 티타임 분위기는? 루시아가 날 보더니 물었다. “일은 끝났어?” “응. 전부 처리했어.” “역시 에이미 공주를 노린 공격인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그렇겠지.” “헤리오를 빠져 나가기도 전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루시아는 앞으로의 여정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카르가 날 노려보며 물었다. “나의 언니는?” “라이레얼은 잘 있어. 작은 상처 하나 안 났으니 걱정하지마. 일행을 지켜줘서 고마워.” “나의 언니의 명령이었으니까. 난 언니의 명령이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래 그래.” 영아는 벌떡 일어나 카르를 노려보았다. “나도 언니가 명령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넌 언니의 명령을 받을 자격이 없어.” “그러는 너야말로 언니한테는 부적격이야. 언니한테는 내가 더 잘 어울려.” “나와 언니의 사랑을 방해하지 마!” “너야말로!” 파지직! 아아~ 스파크 튄다. 난 카르와 영아에게서 신경 끄고 다른 일행에게 일의 경과를 설명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이만 밖으로 나오셔도 됩니다.” 루시아와 일행들은 이글루 밖으로 나왔다. 이글루는 카르가 손을 한번 휘젓자 사라졌다. 기습으로 인한 피해는 인명 피해만이 아니었다. 마차를 끌던 말이 여러 마리가 죽고 몇 대의 마차가 파손돼 수리가 필요했다. 에드먼드 남작은 죽은 말을 대신해 군마들을 마차에 묶도록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가 나타나자 에드먼드 남작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에이미 공주님과 에스더 공주님을 뵙습니다.” “제 때 나타나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에드먼드 남작님.” “아닙니다.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두 분 공주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적들이 다시 쳐들어올지도 모르니 루크 성으로 이동하시지요.” “밤이 깊은데 괜찮겠어요?” “제 병사들이 길을 만들고 공주님을 호위할 것입니다.” 에이미 공주가 보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미 공주는 다시 에드먼드 남작을 보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어요.” “예. 최선을 다해 공주님을 모시겠습니다.” 일행들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마차에 올라탔다. 루시아가 타는 마차에는 카르와 라이가 같이 있으니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에이미 공주가 타는 마차는 좀 불안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노린다면 에이미 공주를 먼저 노릴 것이다. 난 라이레얼과 테커, 카웨에게 말했다. “에이미 공주가 탄 마차 근처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응. 알았어, 히로.” 에드먼드 남작과 오엔의 지휘 아래 마차는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산길을 따라 이동했다. 우리는 에이미 공주가 탄 마차를 보호하며 루크 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아이리스』15권에서 계속) 작가 블로그: http://psungho.egloos.com story 38 루크성 루크 성은 아이리스와 국경 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지 성이라기보다는 요새 같은 느낌이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으로 네 개인데, 그중 동쪽(아이리스쪽) 성문이 가장 튼튼하게 지어져 있다. 우리 일행은 날이 밝을 때쯤에야 루크 성에 도착했다. 에드먼드 남작은 성주 관저로 우리 일행을 데려갔다. 말도 보충하고, 마차도 수리하고, 어제의 피로도 풀어야 했기에 우리는 하루 동안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일행들은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난 복도에서 경비를 섰다. 등에 카르를 업은 라이레얼이 나에게 다가왔다. "안 자, 히로?" "전 괜찮아요. 라이레얼은요?" "나도 괜찮아. 용병으로 고용되었으니 밥값은 해야지." "……." 이럴 때 보면 확실히 프로다. "테커와 카웨는요?" "자고 있어." "그렇군요." 하긴, 어제 그렇게 열심히 싸웠으니 오늘은 좀 쉬어야지. 싸움은 엄청난 심력을 소모한다. 그래서 큰 싸움을 한번 하고 나면 며칠은 쉬어야 한다. 육체적 피로는 둘째치더라도 정신적으로 심하게 지치기 때문이다. 권투 경기의 한 라운드가 괜히 3분이 아니다. 나와 라이레얼 정도 되니 버티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바로 쓰러졌을 것이다. "그나저나 좀 이상하지 않아, 히로?" "라이레얼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오랜 용병 생활의 경험 덕분인지 라이레얼은 감이 제법 예리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공격, 윌리엄 경의 죽음, 때맞춰 나타난 에드먼드 남작. 이곳만 지나면 아이리스 왕국이다. 헤리오 왕국의 간신배들이 손을 쓸 곳은 이곳밖에 없다. "아무래도 오늘밤 무슨 일이 생기겠지?" "그렇겠지요." 어쨌든 일행 중에 드래곤이 끼어 있으니, 일행의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들은 우리 일행에 드래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카르를 그저 마법사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만약 일행 중에 드래곤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일을 꾸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나의 능력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다. 8클래스 마스터라는 것은 알지만, 8클래스 마스터가 어떤 경지인지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하고 있다. 그저 '인간인 이상 칼로 찌르면 죽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나도 인간이니만큼 칼로 찌르면 죽는 것은 맞다. 문제는 칼로 찌를 수 있느냐는 거지만. 상대가 움직여준다면, 이쪽이야 좋다. 어차피 그걸 기대하고 이렇게 마차로 이동하는 것 아니겠는가? * * * * 밤이 되었다. 마차는 수리를 끝마쳤고 말도 구했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출발하면 점심때쯤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일행은 둘로 나누어 잤다. 에이미 공주, 에스더 공주, 라나가 한 방에서 자고 루시아, 라이, 루, 루비, 영아, 카르가 한 방에서 잤다. 에이미 공주가 자는 방은 근위병들이 경호를 맡았고, 루시아가 자는 방은 히로 일행이 경호를 맡았다. 에이미 공주가 자는 방은 2층이고, 루시아가 자는 방은 3층이다. 근위병들은 2층 전체를 점검했다. 애초에 20명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반도 안 되는 7명만 남았다. 대장마자 죽어 부관인 오엔이 대신 대장 역할을 맡아야 했다. 에이미 공주 일행이 머무는 방 주위는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히 제한되었다. 혹시 모를 공격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관저 주위는 루크 성의 성주 에드먼드 남작의 병사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적들은 안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관저 주위를 지키는 병사들을 확인한 에드먼드 남작은 3층으로 향했다. 복도에는 경비를 맡은 히로, 테커, 카웨가 있었다. 히로는 벽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테커와 카웨는 바닥에 앉아 세븐 포커를 하고 있었다. 앞에 돈이 놓인 것을 보니 도박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좋았어. 에이스만 뜨면 내가 이긴다." "에이스는 넉 장 다 내가 가지고 있어." "지랄하네." "진짜야." "뻥카 치지 마, 새꺄. 너한테 한두 번 속아보냐." "빨리 패나 까 봐." "크크, 보고 기절하지나 마라." 자신의 패를 까보이던 테커는 에드먼드 남작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웨는 그런 테커를 보며 소리쳤다. "왜 그래, 임마? 내 패 봐. 진짜 에이스 포커 떴다니까." 테커는 말 대신 카웨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카웨는 의아해 하며 고개를 돌렸다. "허억!" 카웨는 테커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드먼드 남작은 바닥에 놓인 카드와 돈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테커와 카웨는 재빨리 변명을 했다. "이, 이건 잠깐 졸음을 쫓기 위해서……." "바, 방금 시작한 겁니다." 에드먼드 남작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됐네. 어차피 관저 주위에 병사들이 쫙 깔려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걸세." 에드먼드 남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히로는 에드먼드 남작이 온 걸 모르는지 아직까지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한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 "아! 라이레얼요?" "그래. 꽤 유명한 용병이라고 들었는데……." "피곤하다고 들어가서 자고 있어요. 나중에 일 생기면 깨워 달라고 하던데요." "그 여자 마법사도 자고 있나?" "누구요? 아! 라이레얼 옆에 있던 그 하얀 머리 여자애요?" 에드먼드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웨가 말했다. "걔도 자고 있거든요. 필요하시다면 깨워드릴까요?" "됐네. 관저 주위는 우리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자네들도 가서 쉬게." 에드먼드 남작의 말에 테커와 카웨는 반색했다. "저, 정말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네. 내일 떠나야 하니 오늘은 푹 쉬는게 좋겠지." "그, 그러는 게 좋겠지요?" "아이언스 공작님도 쉬시라고 하게. 경비는 내가 맡을 테니." "그렇다면야 뭐……." 카웨는 졸고 있는 히로를 깨웠다. "들어가서 자, 임마." 히로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안 돼. 경비 서야 돼." "어차피 주위의 병사들이 쫙 깔렸는데 경비 서서 뭐 해?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자자. 저 아저씨가…… 아니, 에드먼드 남작님이 책임지시고 경비 서주시겠데." 히로는 그제야 에드먼드 남작을 발견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여기까지 어쩐 일로……." 히로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에드먼드 남작은 그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관저 경비는 제가 책임질 테니 들어가서 쉬십시오." "하지만……." "내일 아침 일찍 떠나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에이미 공주님을 아이리스 왕궁까지 무사히 호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밤은 편히 쉬십시오. 피로로 인해 호위 임무에 지장이 생긴다면 그것은 저의 책임이나 다름없습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에드먼드 남작님을 믿고 들어가 자도록 하겠습니다." "예.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히로와 카웨, 테커는 일행이 자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히로는 많이 졸렸는지 방에 들어가자 마자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테커와 카웨도 졸린것은 마찬가지였는지 금방 쓰러져 잠들었다. 에드먼드 남작은 셋이 자는 모습을 보고 친절하게 방문까지 닫아주었다. 그리고 2층으로 내려왔다. 2층에는 근위병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에이미 공주 일행이 자는 방 앞은 오엔이 지키고 서 있었다. 에드먼드 남작은 오엔에게 다가갔다. 오엔이 물었다. "위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들 잠들었네." "그럼 시작해도 되겠군요." 에드먼드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엔은 비릿한 웃음을 입에 머금었다. 둘의 대화를 들은 근위병들은 조심스럽게 무기를 점검했다. 에드먼드 남작이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다 죽일 건가?" 오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를 죽여야 증거가 남지 않습니다." "위층에 있는 놈들도 말인가?" "물론 입니다. 저희가 일을 처리하고 나오며 불을 지르겠습니다. 그때 제가 흉수들이 서쪽으로 도망쳤다고 말할 테니, 남작님꼐서는 병사들을 서문으로 이끌고 가십시오." "알았네." 에드먼드 남작은 먼저 관저를 빠져나갔다. 오엔은 다른 근위병들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은 위층으로 올라가라. 제일 먼저 아이언스 공작과 라이레얼, 그녀 옆에 있는 마법사를 처치해라. 그들 셋만 없으면 나머지는 별 볼 일 없으니." "알겠습니다." 네 명의 병사들은 위층올 올라갔다. 오엔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는 걸.'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해도 잠은 어쩔 수 없다. 만약 아이언스 공작이 잠들지 않았으면 일이 복잡했을 것이다. 라이레얼과 마법사는 기습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아이언스 공작은 마검사인 만큼 기습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드래곤과 싸울 뻔한 용사라고? 그래봐야 인간에 불과해.' 그는 어젯밤 싸움을 치르고 나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경비를 섰다. 인간인 이상 지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예상대로 그는 잠들었다. '멍청한 놈들. 이곳이 사지인 줄도 모르고 기어들어 왔겠지.' 오엔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에는 세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먼저 에이미 공주를 처리하기로 했다. 에이미 공주는 창가 쪽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엔은 에이미 공주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롱소드가 달빛을 받아 섬뜩한 푸른빛을 발했다. 그는 롱소드를 거꾸로 잡았다. 그리고 주저 없이 에이미 공주의 심장을 찔렀다. 아니, 찔렀다고 생각했다. 파악! 오엔이 롱소드를 든 손을 움직이는 순간 다리에서 따끔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순간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뭐지?' 오엔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몸의 기운이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콰당!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 통증은 부딪힌 곳이 아닌 다리에서 전해져 왔다. 오엔은 다시 몸을 일으키려다 깜짝 놀랐다. '뭐야? 내 발이 왜 저기 있지?' 자신의 오른쪽 다리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다리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엔은 나뒹구는 다리를 본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다리가 잘렸다는 것을. 오엔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으아아악!" 그 순간,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다리 하나 가지고 소리까지 지르고 그러니?" 그 목소리는 침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에이미 공주의 침대 밑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오엔은 더욱 공포에 질렸다. "으아악! 살려줘!" 침대 밑에 있던 남자가 기어 나왔다. 그는 손에 시퍼런 도를 들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 없었다. 지옥의 사신과도 같은 모습. 오엔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 * * * 난 밖으로 기어나왔다. 좁은 침대 밑에 엎드려 있으니 몸이 매우 불편하다. 오엔은 잘린 다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으아아악!" 젊은 놈이 목청도 좋다. 내 손에는 청룡도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청룡도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이 피는 저 자식의 피다. 시퍼런 도신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니 꽤나 끔찍하다. "무슨 일입니까?" 오엔의 비명을 들었는지 근위병들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긴,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질렀으니 복도에 있는 저들이 못 들었을리 없다. 들어온 근위병은 두 명. 그렇다면 네 명이 3층으로 올라갔다는 얘기가 된다. "누, 누구냐 넌?"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근위병들은 다리가 잘린 채 쓰러진 오엔과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 기억 안 나? 이거 섭섭한 걸." 촤앙! 촤앙! 두 근위병은 재빨리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난 그 전에 몸을 움직였다. 싸움의 기본은 선빵 아니겠는가? 난 오른쪽 근위병에게 주저없이 청룡도를 휘둘렀다. 근위병은 놀라 롱소드를 들어 막았다. 파악! 쳥룡도는 롱소드와 함께 그의 팔을 잘랐다. 뿜어져 나온 피가 얼굴에 튀었다. "으아악!" "비명 소리가 너무 개성이 없잖아!" 난 그렇게 소리치며 다른 근위병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겁에 질렸는지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고,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청룡도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파악! 이번에는 깔끔하게 손목만 잘랐다. 아니, 손목이라 하기엔 좀 길게 들어갔다. 팔뚝을 잘랐다고 해야 하나? "으아악!" 난 청룡도를 그의 몸에 댔따. 그리고 살짝 전류를 흘려보냈다. 치지직! "꾸에엑!" 근위병은 전신을 벌벌 떨며 입에 게거품을 물더니 이내 기절했다. 난 다른 놈도 같은 방법으로 기절시켰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 칼 정말 쓸만하다. 그 동안 침대 밑에 처박아둔 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다. 뭐, 그래봐야 현실 세계에서는 쓸 일이 없다. 현실 세계에서 칼 차고 다녀봐야 미친놈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현실 세계에서 나는 전설의 용사가 아니라 '라이의 집' 주인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아직까지 전설의 용사다. 이젠 전설의 용사도 지겨워서 때려치우고 싶은데, 이런 놈들 때문에 못 때려치우고 있다. 난 두 놈을 기절시킨 다음 오엔에게 다가갔다. 오엔은 어느 정도 냉정을 회복한 듯했다. 다리만 멀쩡했다면 덤벼들었겠지만, 한 쪽 다리가 잘려나간 상태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마. 그래도 내 덕분에 지하철 장애인석에 앉을 수 있게 되었잖아." "어, 어떻게……." 오엔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내가 에이미 공주의 침대 밑에 숨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에이미 공주의 침대 밑에 숨어있었던 이유는 야밤을 틈타 에이미 공주를 덮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없겠지? 에이미 공주는 나에게 아주머니가 될 사람이다. 응? 왠 아주머니냐고? 아주머니는 일반적으로 결혼한 여자를 칭하는 말로 쓰이지만, 형의 아내나 손위 처나므이 아내를 칭하기도 한다. 키레아 왕은 나에게 있어서 손위 처남. 그러니 키레아 왕과 결혼 할 에이미 공주는 아주머니가 된다. 그러니 아주머니를 높여서 '아주머님'이라 부르면 되겠다. 뭐, 정확히 따지자면 아직 아주머님은 아니다. 아직 루시아와 결혼을 하지 않은 관계로……. "어떻게 니가 일을 저지를 걸 알았냐고?" 오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땐 죽더라도 그건 알고 싶은 모양이다. 난 기꺼이 말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설쳐대고도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이 자식이 지금 누구를 바보로 아나? 니가 윌리엄 경을 죽였을 때부터 다 알아봤어, 임마." "그, 그걸 어떻게!" 소리치던 오엔은 멈칫했다. 하지만 이미 스스로 인정한 뒤였다. 어젯밤 일어난 쌍무에서 20명의 근위병 중 11명이 죽고 2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난 근위병들의 시체를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시체 검시관은 아니지만 사람은 꽤나 많이 죽여 봤다. 그래서 상처를 보면 어떻게 죽었는지 예측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윌리엄 경은 배와 오른쪽에 큰 상처가 있었다. 적과 맞서 싸우던 윌리엄 경을 누군가가 뒤에서 칼로 찔렀고, 그 때문에 배에 칼을 맞고 죽은 것이다. 근위대 대장을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윌리엄 경이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쉽게 뒤를 내줬을 리는 없다. 근위병들 시체 중에도 뒤쪽에 상처가 난 시체가 많았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난 그때부터 내부의 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죽은 근위병들 중 몇 명은 정말로 적과 싸우다 죽었다. 하지만 몇 명은 아군의 공격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여겨졌던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어젯밤 나타났던 적들. 그들은 별 다른 목적 없이 공격을 해왔다. 공주를 노린 것도, 예물을 노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냥 공격해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적은 공격 그 자체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싸움이 거의 끝나갈 쯤에 에드먼드의 남작이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우연이라 보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에드먼드 남작은 병사들을 지휘에 적들을 죽였지만, 포로는 잡지 않았다. 포로를 잡아 배후를 캐묻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데도 말이다. 난 에드먼드 남작도 한패라는 가정을 세웠다. 그런데 어째서 윌리엄 경이 죽어야 했을까? 난 어젯밤의 공격 자체에 의문을 품었다. 아마도 어젯밤의 공격의 목적은 방해가 될 근위병들을 죽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근위병들은 공주를 죽이려는 자들과 보호하려는 자들로 나뉘어 있었다. 공주 경호야 근위대가 맡고 있으니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공주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공주를 보호하려는 근위병이 같이 있으면 방해가 된다. 그리고 낌새를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래서 어젯밤 싸움 도중 전부 죽여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어젯밤 공격 자체가 음모였단 얘기가 된다. 공주가 죽기를 원하는 자가 용병을 고용해 우리를 공격하라고 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자는 아마도 오엔과 한패일 것이다. 난 오엔이 오늘 밤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내일이면 국경을 넘는데다가 에드먼드 남작이 한패라면 오늘 만큼 좋은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가 움직이기 쉽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물론 아까 자는 척하는 것도 전부 연기였다. 난 방에 들어가 자는 척하며 재빨리 창문을 통해 2층 에이미 공주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 밑에 숨어 오엔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오엔이 예상보다 빨리 움직여줘서 다행이다. 만약 시간이 좀더 지났다면, 온몸에 쥐가 나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에이미 공주의 침대 밑에 잠입하기 전에 일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그에 대한 대비도 해 놓았다. 방문을 여는 즉시 나에게 알려지도록 알람 마법을 걸어놓은 것이다. 내가 잠입한 다음에 해지하긴 했지만. "왜 에이미 공주를 죽이려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하니, 굳이 물을 필요는 없겠지?" 왕권이 강화될 것을 두려워한 귀족들의 음모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국가와 국민의 안녕보다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중요하는 썩은 정치인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대한민국만 해도 전쟁 터지면 미국으로 날아가 성조기 흔들며 'I Love USA!' 라고 말할 정치인들이 널리고 널렸다. "아무튼 니가 이렇게 설쳐댄 걸 보면 빈센트 후작가도 무지 관련있겠군." "무, 무슨 뜻이냐?" "뭐, 너네 아빠 큰일 났다는 뜻이지." "닥쳐!" 오에은 빈센트 후작가와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쩄든 너네 가문은 끝장났어, 임마. 뭘 지금 와서 빼고 그러니?"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방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라이레얼이었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한 놈은 죽이고 세 놈은 기절시켰어." "잘했어요." "그런데 왜 죽이지 말라고 한 거야?" "뽑아낼 게 좀 많아서요. 바로 죽이면 섭섭하죠." 그렇다. 이들을 조져 배후를 캐내야 한다. 그래야 헤리오 왕국의 간신배들을 소탕할 수 있다. 내 말을 들은 오엔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네놈들은 결코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시끄러, 임마. 짜식이 다리 잘리고도 할 말은 많나 보네. 아예 입을 잘라 줄 걸 그랬나?" 난 청룡도를 오엔의 어깨에 댔다. 그리고 전류를 흘려보냈다. 치지직! "으아악!" 오엔은 입에 게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 라나는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는 그녀들이 한번 자면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잠들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미리 수면 마법을 걸어놨기 때문이다. 이런 끔찍한 장면을 여상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난 오엔과 근위병들을 모아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 이동 마법으로 헤리오 왕궁 지하 감옥으로 보냈다. 국왕이나 왕족 드으이 암살을 막기 위해 왕궁은 이동 마법 방해장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마법사들에게나 통하는 얘기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클래스에 오른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일은 이미 반데라스와 얘기가 끝난 상태다. 문제를 일으킨 놈들을 지하 감옥으로 보내기로. 국왕의 허락을 얻은 나는 마법을 쓰기 편하도록 지하 감옥에 마법진을 설치해 놓았다. 오엔과 근위병들은 허공에 사라지듯 없어졌다. "잘 가라." 저들을 조지면 배후에 있는 인물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왕족 시해는 대역죄에 속한다. 비록 미수에 그쳤다 할지라도 가문을 몰살시키는데는 충분하다. 뭐, 국왕의 여동생들 살해하려 했으니 반역으로 몰려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뭐, 반데라스가 잘 알아서 하겠지." 이번 기회에 썩은 귀족들을 제대로 제거해야 할 것이다. 중심에 서 있는 귀족들을 제거한다면, 다른 귀족들은 무서워서라도 앞으로 찍 소리도 못할 것이다. 근위병들은 처리했지만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관저 주위를 루크 성의 병사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다. 물론 그 병사들은 어디까지나 '에이미 공주를 지키기 위해'서 관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르을 다시 하지면, 포위하고 있다는 뜻이된다. 내가 이대로 나가면 에드먼드 남작은 일이 글렀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왕족 시해는 대역죄다. 에드먼드 남작은 우리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공격할 것이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포위를 뚫어야 할 것이다. "으음, 귀찮게 됐군." 난 먼저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 라나를 깨웠다. 에이미 공주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요?"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요?" 난 세 여인에게 방금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세 여인은 깜짝 놀랐다. "오엔 경이 배신을 했단 말인가요?" "예.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잘 묶어서 헤리오 왕궁 지하 감옥으로 보냈으니 안심하세요." 에이미 공주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을 한 건데여,뭐." 에스더 공주와 라나는 동시에 말했다. "고마워요, 오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을 한 두 여인은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난 그녀들에게 말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하니 최대한 빨리 옷을 갈아입으세요." 그 다음 라이레얼에게 말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하니 최대한 빨리 옷을 갈아입으세요." 그 다음 라이레얼에게 말했다. "이분들이 옷 다 갈아입으면 3층으로 데리고 오세요. 최대한 빨리요. 시간이 너무 늦으면 에드먼드 남작이 눈치 챌지도 몰라요." "응. 알았어. 히로." 난 3층으로 올라갔다. 3층 복도에는 테커와 카웨가 서 있었다. 그들은 날 보며 투덜거렸다. "이게 뭐야?" "이틀 연속 싸우는 건 너무하지 않아?" "생명 수당은 따로 주겠지?" "보너스는?" "뭘 그렇게 많은 걸 바라고 그러니? 참고로 생명 수당은 원래 다 포함되어 있는 거란다. 어차피 목숨 걸고 하는 일인 거 뻔히 알고 계약 맺었으면서 웬 딴소리야?" 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아를 비롯한 일행들은 전부 깨어 있었다. 그리고 옷까지 갈아입은 상태였다. 어린 엘프들은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루시아는 날 보더니 말했다. "어떻게 됐어?" "잘 처리했어. 그보다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아." "어떻게 할 생각인데?"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먼저 몸을 피해. 난 남아서 일을 끝낼 테니까."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마차를 끌고 성을 빠져나올게." "알았어." 루시아와 대화가 끝나는 순간 라이레얼이 에이미 공주 일행을 데리고 올라왔다. 난 카르에게 말했다. "일행을 데리고 동문으로 워프해. 나중에 마차를 몰고 빠져 나갈테니 그때 합류하자." "나의 언니는?" 카르의 물음에 라이레얼이 대답했다. "난 남아서 히로를 도울거야." "안 돼요!" 카르는 소리치며 라이레얼에게 매달렸다. "……." 잠깐. 어째 소리가 이중창으로 들린것 같은데. 카르의 반대쪽에는 영아가 매달려 있었다. 영아는 라이레얼에게 몸을 비비적기리며 말했다. "가지 마세요, 언니. 남아서 절 지켜주세요." 카르는 눈을 치켜뜨고 영아를 노려보았다. "나의 언니가 왜 널 지켜? 당장 떨어지지 못해?" "응. 떨어지지 못해." "이이……!" 앗! 카르 화났다. 라이레얼은 카르를 말렸다. "그만하고 히로가 시키는 대로 해." "그, 그치만 언니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걱정할 것 없어. 히로가 날 지켜줄 테니까." "그것도 싫다 말이에요! 저 인간은 언니를 지켜줄 자격이 없어요!" "……." 왜 그렇게 날 싫어하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라이레얼은 카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쪽~. 그러자 카르의 새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 누가 보면 카멜레온인 줄 알겠군. "시키는 대로 해. 알았지?" 카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예, 언니." 아아~ 이런 백합적인 분위기. 배경으로 백합이 날리면 정말 예쁠 것 같다. 주제 파악 못하고, 상황 파악 못하기로 유명한 앞짱구걸은 앞짱구를 들이밀며 말했다. "저도 해 주세요, 언니."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짱구걸의 앞짱구에 뽀보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니?" "뭐? 오빠 말 다했어?" 영아는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다음 다시 라이레얼에게 말했다. "그럼 입술에 해주세요, 언니." "……." 어린 엘프들이 보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외설스런 장면을 연출하겠다는 것이냐? 라이레얼은 공평하게 영아의 이마에도 입을 맞춰주었다. 앞 머리카락을 옆으로 살짝 치우고 튀어나온 이마에 입술을 대는 라이레얼의 모습은 고귀하기 까지 했다. 아아~ 너무 멋져요, 누님. 난 일행을 한 곳으로 모았다. 카르가 이동 마법을 쓰기 직전엔 루시아가 말했다. "조심해." 앗! 루시아가 내 걱정을! "걱정하지마, 루시아. 전부 아웃 오브 안중 시켜버릴테니까."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일행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은 나, 라이레얼, 테커, 카웨뿐. 테커와 카웨는 최선을 다행 궁시렁거렸다. "넷이서 저 많은 적을 상대하자고?" "지금 나랑 장난해?"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일단 내가 나가서 주의를 끌게. 라이레얼은 날 보조해 줘요. 그리고 니들은 마구간으로 가서 말과 마차를 탈취해. 마차 주위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을 테니 조심하고." "알았어." "한번 해보지." "응, 히로. 나 열심히 할게." 작전 회의(라고 하기에는 좀 부실하지만)를 끝마친 우리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난 청룡도로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정문으로 당당하게 나갔다. 관저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싼 병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에드먼드 남작이 보였다. 에드먼드 남작은 날 보더니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는 태연한 척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요." "무엇입니까?"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긴 뭐겠니? 오엔이 실패했다는 거지." "무, 무슨……." "모른 척하기는." 난 병사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너와 오엔이 짜고 에이미 공주와 다른 일행들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내 말에 병사들은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에드먼드 남작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무, 무슨 말이냐!" "왜? 지금 와서 발뺌하려고? 발뺌해봐야 소용없을 텐데. 왜냐하면 오엔과 다른 놈들을 사로잡아 헤리오 왕궁으로 보내버렸거든. 아마 지금쯤이면 감옥에서 술술 불고 있을걸. 왕족 살해 미수죄면…… 으음, 최소한 사형이군. 연좌라는 게 있으니 삼족까지는 무사할 수 없겠는데. 어쩌냐? 니 아빠랑 니 아들은 이제 큰일 났다." "크윽!" 에드먼드 남작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눈을 부릅떴다. 오엔이 불면 에드먼드 남작은 확실히 끝장이다. 끝장나도 본인만 끝장나는 게 아니라 가문 전체가 끝장난다. 난 큰 목소리로 빈정거리듯 말했다. "빈센트 후작이 한 밑천 챙겨준다 그랬나 보지? 하지만 어쩌냐? 한 밑천 챙기기는 커녕 있던 밑천마저 바닥나고 인생 조지게 생겼으니. 그러게 선택을 할 때는 좀더 신중했어야지." "크하하하!" 이를 갈던 에드먼드 남작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궁지에 몰려 맛이 갔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에드먼드 남작이 말했다. "그딴 헛소리를 지어내다니!" "어라? 당신 아직까지 포기 안했어?" "증거가 어딨나?" "글쎄." "에이미 공주님을 모셔 와라! 공주님 앞에서 내가 직접 결백을 밝히겠다." "왜? 모시고 오면 죽이게?"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관저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불길은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져나갔다. 아마도 얘기를 하는 사이 에드먼드 남작의 부하가 불을 지른 모양이다. 에드먼드 남작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오엔 경과 내가 짜고 공주님을 죽이러 했다고? 공주님을 죽인 것은 네놈이 아니냐? 네놈이 오엔 경과 근위병들을 죽이고 에이미 공주님까지 죽였겠지. 그리고 죄를 나에게 덮어씌운 다음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관저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니냐?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만큰 이 에드먼드 남작이 호락호락에 보이더냐?" 난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호락호락해 보여." 저놈은 에이미 공주 일행이 이곳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불을 질러 에이미 공주 일행을 태워 죽이고, 죄를 덮어 씌워 나까지 죽인 다음 범행을 은폐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전부 틀렸다. 저놈은 에이미 공주 일행을 죽이지도 못했고, 나도 죽이지 못할 것이다. 관저를 둘러 싼 병사들 중에는 에드먼드 남작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충성스런 수하들도 있겠지만, 그냥 병사들도 있다. 그들은 에드먼드 남작이 반역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남작의 명령 따르지 않을것이다. 불길은 점점 커졌다. 불이 붙은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길은 관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으음, 등이 좀 뜨겁군. 불이 이렇게 쉽게 옮겨 붙는 것을 보면 미리 준비를 좀 했나 보다. 하긴, 화재만큼 범행 현장을 확실히 은폐해주는 것도 없지. 에드먼드 남작은 날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놈이 에이미 공주님과 에스더 공주님을 죽였다! 저놈을 죽여 두 분 공주님의 원수를 갚자!" 난 질세라 에드먼드 남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놈이 구라 깐다! 저놈을 죽여 신용사회 이룩하자!" 하지만 병사들은 신용사회 이룩보다는 두 분 공주님의 원수를 갚는 쪽이 더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향해 화살을 쐈다. 쉬이익! 난 빗발처럼 날아드는 화살을 요리조리 피했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은 손으로 잡거나 청룡도로 처냈다. 나의 유연한 허리 놀림에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놀랐다. "후후~ 보았느냐? 루시아와의 그날을 위해 단련한 나의 허리 놀림을!" 에드먼드 남작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이익! 뭐 하느냐? 더 쏴라! 더!" "지금도 충분한데 뭐 더 쏠 필요까지야……." 하지만 병사들은 정말로 더 쐈다. 나는 계속 열심히 피했다.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현란한 나의 허리 놀림. 수백발의 화살 중 내 몸에 꽂힌 것은 단 하나도 없었따. 사실 프로텍트 프롬 노멀 미사일 마법을 쓰면 굳이 이 짓 안해도 된다. 하지만 그러면 폼이 안 선다. 그리고 가끔은 허리 운동을 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나중에 기회가 왔을 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 할 수 있다. 중요한 순간에 허리를 삐끗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화살을 전부 피해낸 나는 최선을 다해 뺀질뺀질 웃었따. 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에드먼드 남작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놈은 공주님을 시해한 대역 죄인이다! 죽여라!" 병사들은 칼을 뽑아들고 달려왔다. 루크 성은 아이리스 왕국과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방어용 성이다. 또한 수도로 향하는 길목에 세워진 성이기도 하다. 그런 중요한 곳인 만큼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은 숫자도 많고 훈련도 잘되어 있다. 뭐, 그래봐야 날 상대하기는 무리지만. 전설의 용사이자 마검사인 아이너스 공작을 세상에 그 누가 상대할 수 있겠는가? 난 제일 먼저 달려온 병사를 향해 청룡도를 내리 찍듯 휘둘렀다. 그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대각선으로 몸이 잘려나갔다. 아무리 대단한 검사라고 해도 포위당하면 운신 범위가 좁아지기 때문에 싸우기가 힘들어진다. 때문에 병사들은 내 주위를 포위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적들이 모여 있으면 검사는 싸우기 힘들어진다. 반면 마법사는 싸우기 쉬어진다. 같은 마법을 쓰더라도 범위 안에 적들이 많으면 그만큼 큰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검사를 상대할 때는 밀집해서,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흩어져서 공격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럼 마검사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대책이 없다. 마검사라고 해봐야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서 두 명뿐이기 때문이다. 나와 아이언스 이그리드. 이렇게 단 둘. 마검사란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존재이다. 검사는 근거리 싸움에 강하고, 원거리 싸움에 약하다. 반면 마법사는 원거리 싸움에 강하고, 근거리 싸움에 약하다. 하지만 마검사는 근거리든 원거리든 상관없이 싸울 수 있다. 게다가 나는 보통 마검사도 아니다. '졸라 짱 쎈' 마검사다. 설명이 좀 길었다. 난 몇 명의 병사를 베어 넘긴 다음 청룡도를 바닥에 찍으며 소리쳤다. "체인 라이트닝!"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멀쩡한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가 내리 꽂혔다. 치지직! 한 병사의 머리 위에 떨어진 번개는 사방으로 튕겼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끄아악!" "으아악!" "우에엑!"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도 번개를 맞아본 적은 없지만, 맞으면 무지 아플 것 같다. 온몸이 구워지는 심정은 어떨까? 난 당황하는 병사들에게 가차 없이 청룡도를 휘둘렀다. 일벌백계라고 했다. 내가 적당히 상대해준다면 계속 달려들 테고, 피해는 더욱 커지게 된다. 지금 제대로 실력을 보여줘야 더 큰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쉬이익!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나를 비껴갔다. 당연한 일이다. 그 화살은 처음부터 날 노린 것이 아니었으니. "억!" 화살은 내 앞에 있는 병사의 가슴에 박혔다. 그리고 그 병사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절명했다. 그 병사의 가슴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얼음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왔고, 병사들은 그때마다 쓰러졌다. 카르가 만들고 라이레얼이 쓰는 '화이트 러브'의 위력이다. "……." 으음, 화이트 러브라……. 어째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이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누, 누구냐?" "누군가가 숨어서 화살을 쏘고 있어!" 라이레얼은 어둠 속에 숨어 자리를 이리저리 옮기며 화살을 날렸다. 때문에 적들은 라이레얼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주위만 두리번 거렸다. "어느새 내 주위에는 수십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괴, 괴물이다." "이길 수가 없어." 병사들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며 나와 거리를 벌렸다. 에드먼드 남작은 물러나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죽여라! 저놈을 죽이란 말이다!" 하지만 잔뜩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은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병사들이 물러나자 라이레얼도 더 이상 화살을 날리지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알고 있었다. 누구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는 순간 얼음 화살을 맞고 죽게 될 것을. 난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피 때문에 머리카락이 서로 엉켰다. 난 얼굴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 피가 아닌 병사들의 피다. 한꺼번에 많은 병사들을 상대로 싸우다보니 튀는 피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얼굴에 피 칠한 내 모습이 저들에게는 어떻게 비칠까? 좀 카리스마 있어 보이면 좋겠는데. 난 청룡도를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난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일전을 벌이려 했던, 아이언스 히로다! 자기 실력이 드래곤 슬레이어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주저 없이 덤벼라! 최선을 다해 상대해 주마!" 에드먼드 남작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공격해라! 공격하란 말이다!" 여전히 나서는 병사들은 없다.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이, 아저씨. 거기서 떠들어대지만 말고 직접 덤벼봐! 대장이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거 아냐?"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얼음 화살이 에드먼드 남작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스치고 지나가진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스쳤다면 에드먼드 남작의 귀는 얼어붙었을 것이다. "크윽!" 에드먼드 남작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등을 돌려 도망쳤다. 병사들은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몰라 긴장하느라 에드먼드 남작이 도망치는 것 조차 몰랐다. 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는 더욱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정말로 에이미 공주님을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 뭐야? 죽였냐고 묻는 거야, 죽이지 않았냐고 묻는 거야? "에이미 공주님과 다른 일행은 이미 루크 성을 빠져나갔다. 나는 아이리스 왕국의 공작 아이언스 히로다. 에이미 공주님은 곧 아이리스 왕국의 왕비가 되실 분이다. 내가 장차 왕비가 되실 분을 무엇 때문에 죽이겠는가? 에이미 공주님을 시해하려 한 자는 내가 아니라 오엔 경과 에드먼드 남작이다. 오엔 경은 에드먼드 남작과 짜고 에이미 공주님을 시해하려 했다. 헤리오 왕국과 아이리스 왕국의 동맹 강화로 반데라스 폐하의 권력이 세지는 것을 두려워한 썩은 귀족들의 음모다." 병사들은 내 말에 동의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난 재빨리 소리쳤다. "에드먼드 남작은 대역죄인이다! 그런 대역죄인을 돕는다는 것은 곧 국가에 반역을 하는 것이다!" 병사들 사이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저들 중에는 에드먼드 남작의 사병도 끼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쉽게 나설 수는 없을 것……. "닥쳐라! 대역죄인은 네놈 아닌가?" ……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서는 놈이 있군. 저런 놈은 내가 처리할 필요도 없다. 쉬이익! 소리 친 놈은 입에 얼음 화살을 물고 절명했다. 난 병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또 떠들어 댈 놈?" 당연 없다. 때 마침 테커와 카웨가 마차를 몰고 나왔다. 다섯 대의 마차를 이끄는 말들은 테커와 카웨의 명령에 잘 따라 움직였다. 상황이 종료되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라이레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화이트 러브라는 새하얀 활을 든 라이레얼은 다른 손으로 레몬 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불타는 관저와 병사들의 시체와 어우러져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전장 속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이라고나 할까? 문득 '강한 여자는 아름답다' 라는 말이 떠오른다. 지금 라이레얼의 모습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만큼 아름다웠다. 라이레얼이 왜 용병계의 꽃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다. 아아~ 너무 멋지다. 반해버릴 것만 같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병사들 역시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라이레얼을 보고 있었다. 앗! 이것들이 감히 나의 라이레얼…… 이 아니라, 나의 가족 라이레얼에게 추파를 던지다니! 라이레얼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병사들이 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수고 했어, 히로." "아, 아니에요. 저보다는 라이레얼이 고생했죠. 힘드시진 않으세요?" "응.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히로." "하하, 고맙긴요. 제가 더 고맙지요." 아아~ 이 화기애애한 모습. 남들 눈에는 충분히 연인으로 보일 것이다. 정말 다행인 것은 루시아와 카르가 이미 성을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 둘에게 걸리면 정말 끝장이다. 내가 아무리 마검사 아이언스 히로라 해도 그녀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카르야 어떻게 상대한다 치더라도 루시아가 이혼서류 내밀기 스킬을 쓰면 히로는 무릎 꿇고 싹싹 빌 수 밖에 없다. 난 카리스마 있게 소리쳤다. "길을 비켜라!" 잠시 주저하던 병사들은 길을 비키기 시작했다. 인원은 넷인데 마차는 다섯이다. 말은 사람 말을 잘 듣는 동물이지만, 넷이서 마차 다섯 대를 몰고 이곳을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따로 볼 일이 있다. 난 두 대의 마차에서 말을 풀었다. 그리고 유령 말을 소환했다. "팬텀 스티드!" 검은 안개가 모인 것 같은 유령 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유령 말을 마차에 묶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무조건 앞의 마차를 따라가렴." 라이레얼, 테커, 카웨는 각각 마부석에 올라 고삐를 잡았다. 마차는 천천히 병사들 사이를 지나갔다. 다행히 허튼 행동을 하는 놈들은 없었다. 병사들은 팬텀 스티드를 처음 보는지 놀란 눈으로 유령 말이 이끄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유령 말이 이끄는 두 대의 마차는 앞서 가는 세 대의 마차를 따라 움직였다. 팬텀 스티드는 웬만한 고위 마법사도 소환하는 것을 꺼린다. 소환하기가 어려운 것은 둘째 치더라도 마나 소모량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마나 소모량이 어느 정도냐 하면, 팬텀 스티드를 소환해 타고 가느니 차라리 걸어가는 쪽이 덜 지칠 정도다. 뭐, 이그리드의 방대한 마력을 몽땅 물려받은 나는 마나 소모량에 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말들은 어두운 길을 힘차게 내달렸다. 동쪽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따. 통금 시간인지라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도 성주…… 그러니까 에드먼드 남작의 명령 없이는 위병들이 성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난 성문을 부수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나중에 복구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어차피 마차 하나 지나갈 수 있을 정도만 열면 되니……. 난 마차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라이레얼에게 말했다. "제가 내려서 문을 열게요." "응." "문 여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좀 있으니 먼저 가세요. 처리하고 금방 따르갈게요." 라이레얼은 '할 일' 이라는 게 뭔지 대충 눈치 챈 것 같았다. "알았어. 빨리 와, 히로." "예. 걱정하지 마세요." 난 마차에서 뛰어내려 성벽 위로 올라갔다. 거대한 문은 사람의 힘으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르래 형식의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관장치는 당연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쉬지도 못하고 야근이라니, 병사도 완전 3D업종이로군." 난 청룡도를 뽑지 않고 칼집째 휘둘러 병사들을 기절시켰다. 그리고 기관 장치를 움직였다. 난 장정 다섯 명 정도는 달라 붙어서 밀어야 하는 기관 장치를 혼자서 열심히 밀었다. 끼이익! 성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마차 하나 지나갈 정도의 틈이 생겨나자 다섯대의 마차는 쏜살같이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차가 빠져나가는 것을 본 다음 몸을 돌려 성 안쪽을 향해 달렸다. 난 에드먼드 남작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그는 분명 짐을 싸 도망칠 것이다. 그리고 헤리오의 적대국이라 할 수 있는 자바스, 아토리아, 개틴 등올 망명할 것이다. 적을 그렇게 쉽게 도망치게 할 만큼 나는 자비롭지 않다. 그래서 아까 그가 도망칠 때 추적 마법을 걸어놓았다. 덕분에 나는 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팬텀 스티드를 한 마리 더 소환해 타고 가고 싶었지만, 아까 소환한 놈들만도 마나 소모가 만만치 않다. 난 대신 가속 마법을 걸고 달렸다. 두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가 불이 꺼진 대로를 힘차게 달렸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난 그 마차 앞을 가로막았다. 마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비켜!" 미안한 얘기지만, 비킬 거면 가로막지도 않았다. 난 길을 비키지 않았고, 마차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마부는 깔고 지나갈 생각인지 말에 채찍질까지 했다. 두두두두! 마차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난 청룡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마차가 나를 덮치는 순간 몸을 옆으로 비키며 청룡도를 휘둘렀다. 촤아악! 왼쪽 말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머리는 하늘로 솟구쳤고, 목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몸은 아직 머리가 떨어져나간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발을 놀렸다. 하지만 이내 고꾸라졌고, 한쪽 말이 쓰러지자 다른 쪽 말도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콰앙! 속도를 이기지 못한 마차는 계속해서 나아가다가 전복되었다. 난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 마부는 깔려죽은 듯했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에드먼드 남작이었다. 그리고 이어 몇 사람이 더 기어 나왔다. 에드먼드 남작의 뒤에는 한 중년 부인과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그보다 약간 어려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가족들인 것 같았다. 하기야 왕족 시해 미수라는 대역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것이니 가족들을 남겨두고 갈 리 없다. 난 에드먼드 남작에게 인사했다. "방가방가~." "니, 니가 어떻게……." "사람 죽이려 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그냥 도망쳐서야 쓰나?" 에드먼드 남작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중년 부인은 두 아이를 꼭 껴안았다. 에드먼드 남작은 죽음을 직감한 듯했다. 그는 뒤에 있는 가족을 힐끔 보더니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죽어도 좋다. 하지만 가족들만은 살려다오." 난 피식 웃었다. "웃기고 있네. 우리 일행 다 죽이려 해놓고선 가족들은 살려달라고? 너 양심이 있는 놈이냐?" 에드먼드 남작은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가족들만은 살려 주십시오." 어차피 가족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난 원래 잘못한 놈만 처벌한다. 연좌제 같은 것은 별로 안 좋아한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만 죽일게." "……." "왜? 설마 너도 살려줄 줄 알았냐?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냐?" 난 청룡도를 늘어뜨리고 에드먼드 남작에게 다가갔다. 에드먼드 남작은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은 가늘게 떨렸다.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어려울 뿐, 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난 청룡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내리 그었다. 스윽! 청룡도가 에드먼드 남작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동안 그는 미동이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쏴아아! 그의 몸은 천천히 허물어졌다. "꺄아악!" "우아앙!" 그 모습을 본 중년 부인은 소리를 지르며 기절했따. 그리고 여자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날 노려보았다. 그 눈은 증오와 살의로 가득했다. 난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여동생을 더욱 세게 껴안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여동생만은 지키겠다는 모습이다. 난 그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아이는 여동생을 끌어안은 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아이언스 히로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나중에 커서 찾아오려무나. 언제든 상대해 줄테니." 후한을 남기지 않으려면 죽여 없애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아직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일을 저지를 거라는 가능성 떄문에 미리 처벌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난 청룡도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story39 아이리스 왕국 난 말을 타고 루크 성을 빠져나와 일행을 쫓아갔다. 동문 앞에서 합류한 일행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원경 같은 것으로 망을 보고 있던 라이레얼은 나를 발겨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왔어,히로?" "그건 뭐예요?" "응? 뭐 말이야?" "손에 든 것 말이에요." "이거 야시경이야. 혹시 몰라 챙겨왔어." "......별 걸 다 챙겨오셨군요." "빨리 가자. 나 배고파." "예" 난 출발하기 전에 먼저 라이코스를 찾았다. 라이코스는 라이의 배낭 속엥서 잠을 자는 중이였다. 난 라이코스를 툭툭 쳐서 깨웠다. 라이코스느 부리를 벌려 하품하며 날 보았다. "이 늦은 밤에 왜 깨우고 난리야?" "헤리오 왕궁에 좀 갔다 와야겠다." "뭐? 그 먼곳까지 나보고 돌아가라고?" "그럼 내가 돌아가랴?" "응." "날개 없는 나보다는 날개 있는 니가 아무래도 낫지." 난 라이코스의 의사도 듣지 않고 발목에 쪽지를 묶었다. 그 쪽지에는 오늘 일어났던 일이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반데라스에게 이쪽지를 전해." "싫어, 싫어! 난 내 친구 라이랑 같이 있을 테야!" ".........." 그래봐야 배낭 안에서 잠만 자면서. "라이레얼 부를까?" 라이레얼 이름을 든은 라이코스는 눈빛과 태도를 순식간에 바꾸었다. "어디라고 했지? 날개에 쥐가 나도록 날아 보겠어!" "............." 하긴, 라이레얼 뱃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잠깐 갔다 오는 게 낮겠지. "헤리오 왕궁. 반데라스에게 전해준 다음 돌아오면돼. 국경을 넘어 수도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갈 테니까 알아서 찾아. 하늘에서는 찾기 쉬울걸." "알았어" 라이코스는 파닥파닥 날갯짓을 해 날아올랐다. 라이코스의 모습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랴졌다. 전서웅으로는 제법 쓸만한 라이코스. 뭐,그래봐야 그것도 이 세계에 있을 대 얘기지, 현실 세계에서는 별 쓸모가 없다. 좋은 핸드폰과 이메일 놔두고 누가 미쳤다고 새를 날려 소식을 전달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라이코스가 현실 세계에서 쓸모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말하는 매가 얼마나 돈벌이가 되는데! 연구 기관 등에 임대해주는 것도 제법 짭짤할 것이다. 제비집 만드는 것도 제법 짭짤하고........ 으음,라이코스도 우리 가족이니 빋을 좀 나눠지게 해볼까?고통은 나누면 반이 되는지 어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빋은 나누면 반이 되는 것이 확실하다. 아아~ 은행빋 갚기도 빠듯한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지......... 결혼식 끝나는 대로 빨리 한국에 돌아가 열심히 일해야겠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리스 왕국의 국경을 향해 달렸다. 마차를 끌 말이 없었기에 두 대의 마차는 계속 유령말이 끌어야 했다. 으음, 이거 마나 소모가 상당하겠군. 우리는 휴식도 없이 계속 달렸다. 점심때쯤이 되자 국경 검문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헤리오의 검문소를 통과하고 이어 아이리스의 검문소를 통과했다. 우리는 근처 도시에거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난 이 동네에서 제일 큰 여관을 찾아 귿곳으로 마차를 인도했다. 일행은 마차에서 내려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 안은 한산한 편이였다. 영아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말해따. "우앙~ 엉덩이 아파." 운래 마차를 오래 타면 엉덩이가 좀 아프다. 게다가 빨리 달리기까지 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말하지 않으서 그렇지 꽤 아플 것이다. 난 루시아에게 접근해따. "엉덩이 아프지 않아? 내가 문질러 줄까?" 루시아는 화내는 것도 귀찮은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저리 좀 가줄래?" "..........." 잘 문질로 줄 자신 있는데. 머리 쓰다듬기 스킬은 엉덩이 쓰다듬기 슬킬로도 변형이 가는한데. 내가 한숨을 내쉬는데, 에이미 공주와 에더스 공주, 라나 등이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았다. 약간 두려워하는 듯한 눈빛. 난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헉! 아, 아니야. 방금 말은 그냥 농담이였어. 난 결코 색마가 아니야. 그리고 난 루시아에게만 찝쩍거리지 아무 여자한테나 찝쩍 거리지는 않아. 그러니까 다들 안심해." 루시아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해따. "맞아. 비록 자고 있는 나를 덮치려고 했지만, 히로는 색마가 아니야. 생각해보니 그 전에는 술 취한 나를 덮치려고도 했었지. 하지만 그래도 색마는 아니야. 그리고 그 전에는........." "..............." 어째 반어법인 것 같은데. 난 루시아에게 항의했다. "뭐야? 결국 색마라는 거잖아!"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넌 색마가 아니야. 그냥 성욕을 절제 못하는 짐승일 뿐이야." ".........." 반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않타깝군. "됐으니까 얼굴에 묻은 피나 씻고 와." "응?" 난 그제야 내 얼굴이 피범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크 성을 빠져나와 계속 달리느라 씻을 시간이 없었다. 때문에 피는 굳어 딱지가 된 지 오래였다. 피범벅인 것은 테커와 카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도 그 둘은 이미 씻으러 올라갔다. 나도 좀 씻어야겠군. 난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 몸을 씻었다. 최고급 여관인 만큼 목욕물은 항시 준비되어 있었다. 몸을 깨끗이 씻을 나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일행들 역시 간단한 세면을 마쳤는지 아까보다 깔끔해진 모습 이였다. 아침도 제대로 안 먹고 여기저기 뛰어다녀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프다. 난 자리에 앉으며 루시아에게 물었다. "식사는 주문했어?" "응. 애들 배고프다고 해서 이거저거 많이 주문해 놨어." "잘했어" 영아는 라이레얼에게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저 엉덩이 아파요,언니.하지만 언니가 문질러주면 안 아플 것 같아요.헤헤~~~." 카르는 질세라 영어보다 더욱 열심히 비비적거렸다. "저도 엉덩이 아파도,언니" 난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카르와 영아가 저렇게 열심히 찝쩍거리는데 나라고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한번 실패에 주저 앉을 수는 없다. 아까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리! 난 루시아가 다른 곳을 보는 사이 재빨리 루시아 옆으로 접근했다.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바짝 붙어 앉는......이름하여 바짝 접근 스킬이다. 고개를 돌린 루시아는 바짝 붙어 앉아있는 날 발견하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너무 많이 당해서 적응이 된 것이다. "마차 오래 타면 엉덩이 아프대." "그래서?" "알이라도 배기면 어떡해? 그러지 말고 나한테 한번 맡겨 봐. 내가 최선을 다해 문질러줄게. 내가 문질러주기만 하면 아픈건 금방나아 내가 이러는 건 이 기회를 틈 타 은근슬쩍 너의 엉덩이를 만기기 위해서가 아니야. 오직 너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이러는 거야.정말이야" "어머,그러세요? 그런데 누구신데 아까부터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전 그쪽이 누군지 잘 모르겠으니 좀 떨어져주시겠어요?" "헉!그,그게 무슨 말이야,루시아?나 히로야. 루시아의 귀여운 애완동물 아이언스 히로 기억 안 나?" "예. 기억 안나요." "헉쓰!" 루시아가 히로를 기억 못하다니!우째 이런 말도 않되는 일이! 루시아가 기억 못한다면 히로가 기억하게 해줘야 한다. 내가 웨어울프로 폴리모프하면 루시아는 분명히 나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뭐, 기억 못해도 상관 없다. 사람은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법. 내가 그렇게 결심하는데 라이와 루비가 나에게 다가와 엉덩이를 내밀었다. "응? 이건 무슨 의미니?" 내가 묻자 라이와 루비는 귀옆게 웃으며 말했다. "라이 엉덩이 아파요. 오빠가 쓰다듬어 주세요/." "루비 엉덩이도 아파요. 오빠가 막막 쓰다듬어 주면 좋겠어요." ".........." 내 손이 무슨 약손이니? 루시아 엉덩이를 만지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신 라이와 루비의 엉덩이를 실컷 만지게 되었다. 난 라이와 루비의 엉덩이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에휴~." 내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지..... "헤헤~." "에헤헤~." 라이와 루비의 입에서는 웃음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본 루는 나에게 다가와 슬그머니 엉덩이를 내밀었다 "......" 어쩌라구? "미안타,아그야. 이 엉아의 손은 두 개 뿐이란다." 루가 실망하려는 순간 영아가 말했다. "우리 루 엉덩이는 언니가 쓰다듬어 줄게." 라이레얼에게 열심히 찝쩍거리던 영아는 재빨리 루를 끌어안고 엉덩이를 쓰다듬어주었다. 앞짱구걸 무지하게 바쁘네. 루시아가 루의 엉덩이를 만지면 귀여워해주는걸로 보이는데, 영아가 루의 엉덩이를 만지니 성추행하는 걸로 보인다. 역시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대문일까? 영아을 루를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이다. 그래서 어렸을 대 미리 작업을 걸어두는 것이다. 누나 누나 하다가 `누난 내여 자니까~`하게 되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영아의 이런 계획은 성사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루는 엘프이기 땜ㄴ이다. 엘프는 수명이 긴 만큼 성장도 느리다. 루가 다 자랄 때쯤이면 영아는 늙어 죽어있다. 결국 키워서 잡아먹는 ㄱ서은 불가능 하당 얘기다. "........" 그런데 영아는 왜 이렇게 루에 집착하는 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아는 루가 인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루가 엘프인 것을 알고, 엘프의 성장이 느리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아는 계속해서 루에게 작업을 걸고 있다. 키워서 잡암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말이다. 뭔가 이상하군. 나는 영아에게 물었다. "루는 엘프란다, 영아야." 영아는 루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나도 알아,오빠." "........" 모르는 것 같은데 "그리고 엘프느 성장이 느리단다." "응, 그것도 알아, 오빠." "......" 그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즉 루가 다 자랐을 때 너는 늙어 죽는단다." "응. 그것도 다 알아." "........." 그것도 다 모르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니? 루가 다 자랄 대 니가 늙어 죽는다는 것은, 키워서 잡아먹는 것이 불가능하나는 얘기야." 내 말을 들은 영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헛소리야? 내가 언제 루르 키우서ㅓ 잡아먹는다고 했어?" "........" 뭐야? 그럼 아니였어? 설마 영아는 순수한 마음으로 루에게 접근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영아를 오해하고 있었던 건가? "뭐 하러 키워서 잡아먹어? 난 지금 루의 모습이 가장 좋아." "........헉!" 글너 거였나? 루를 키워서 잡아먹을 생각이 아니라, 그냥 잡아먹을 생각 이였단 말인가? 역시 영아는 쇼타콘? 아무튼 이것으로 루의 순결이 위협받고 있음이 확실해졌다 결국 루의 순결을 지켜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말인가? 안심해라, 루. 이 엉아가 반드시 너의 순결을 지켜주마. 그러는 사이 음이이 나왔고, 아침도 못 먹고 고생한 우리들은 그 음식을 맛잇게 먹었다. 식사를 끝마친 다음에는 다들 씻고 잠들었다. 루시아는 피곤한지 라이와 루비를 껴안고 잠들었고, 라이레언은 카르와 함께 잠들었다. 하지만 난 잘수 없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해야하기 때문이다. 테커와 카웨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뻗었다. 하기야 이틀 밤을 연속으로 설쳐댔으니 뻗는 게 당연하다. 사실 나도 피곤해 죽겠는데 억지로 참고 잇는 것다. 한 2시간 정도 지났을까? 라이레얼이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옆에는 카르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난 라이레얼을 보며 말햇다. "더 주무시지, 왜 나오셨어요?" "잠깐 눈을 붙였떠니 피로가 좀 풀린거 같아. 이제부터는 나와 카르가 경비를 설 테니 히로는 들어가서 쉬어."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히로.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아,아니에요.그럴리가요" "그럼 어서 들어가서 쉬어." "예. 대신 무슨 일 생기면 꼭 깨워주세요." "응. 알았어" 난 여자들이 방으로 들어갔다. 자고 있는 여자들을 덮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상이 있나 없나 살펴보기 위해서다. 안에는 일행들이 모여 자고 있었다.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껴안은 채, 영아는 루를 껴안은 채 참들어 있었다. 에이미 공주와 에스더 공주의 침대는 붙어 있었다. 두 공주님 모두 꿈나라를 여행하느 중이었다. 약간 피곤에 지친 표정 하기야 왕궁에서 곱게 자란 공주님들이 언제 이런 고생을 해보았겠는가? 뭐, 이런 고생들이 나중에 다뼈가 되고 살이 되는 법이다. 왕궁 안에서 할수있는 경험이란 한정되어 있다. 좀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으면 넓은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세장속의 새와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가 세상을 인지하는 범위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넓은 세상에 나와 여러 경험을 하다보면 견문도 넓어지고 생각도 깊어지겠지. "으음...." 에스더 공주가 몸을 뒤처거렸다. 돌아 누어있던 에스더 공주는 다시 돌아 누음으로써 내 쪽을 향하게 되었다. 잠든 에스터 공주의 모습은 마치 꿈구는 소녀 같아다. 흘러내린 은발이 침대위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머리 묶은 끈이 풀린 모양이다. 이대로 가면 머리가 엉킬 텐데. 머리가 짧은 사름은 잘 모르겠지만, 머리가 긴 사람은 머리카락이 자주 엉킨다. 그리고 한번 엉키면 풀기가 매우 힘들다. 최약의 경우에는 머리를 잘라야 하는 수도 있다. 그래서 루시아는 자기 전에 자신의 머리는 물론 라리와 루비의 머리를 꼭 묶어 준다. 으음, 이번에 나도 머리나 길러 볼까? 그럼 루시아가 묶어 주려나? "........" 그럴 리는 없으려나? 난 손을 뻗어 흘러내린 에스더 공주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순간, 에스더 공수가 살며시 눈을 떳다.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에스더 공주는 작은 입술을 열었다. "오빠?" 난 에스더 공주의 이마를 만져주며 웃음을 지었다. "깼니?" "예." 에스더 공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난 침삼 옆에 걸터 앉았다. "나 때문에 깬 거야?" 에스더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때문에 깬거 맏다. 힘든 것은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에스더 공주는 특히 더 힘든 모습이였다. 지구상에는 이미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병약 미소녀. 남자로 하여금 저절로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한다. 참고로 병약 미소녀는 천연기념물이므로 잘 보호해줘야 한다. 멸종되면 큰일이니. 에스더 공주는 상체를 일으키는 것도 힘든지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가느다랗게 숨은 쉬는 모습이 애쳐롭다. 난 여동생을 생각하는 오빠의 마음으로 살짝 감싸안았다. 만약 루시아였다면 주저 없이 '좀 떨어져 줄래?' 라는 잔인한 말을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더 공주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몸을 기대왔다. 에스더 공주의 몸은 약간 차가웠다. "춥니?" 에스더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빠 옆에 있으니 이렇게 따뜻한 걸요." "그,그래?" 전에도 말했지만 난 몸에 열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루시아는 몸이 좀 찬 편이다. 그래서 내 몸으로 루시아의 몸을 따뜻하게 덮혀주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지만 루시아가 허락하지 않는다. 에스더 공주는 내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채구가 작았다. 언제나 하는 생각이지만, 여동생이 있었으면 정말 좋은 것 같다. 우리 집은 2남으로 형제라고는 나와 형 둘뿐이다. 그래서 난 전부터 누나나 여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뭐, 막상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애들 얘기를 들어보면 차라리 남자 형제가 낫다고 하더라. 다행이 어찌어찌해서 하나는 만들었다. 라이레얼. 친누나는 아니지만 친누나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누나다(순수한 의미로). 하지만 여동생은 아직도 먼 얘기다. 라이와 루비는 여동생이라기보다는 딸에 가깝고, 여동생 타입이라 할 수 있는 카르는 내 여동생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난 왈가닥에, 자의식과잉에, 앞짱구인 여자애는 여동생으로 안친다(특별히 영아를 지칭하는게 맞다). 아아~ 나도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에스더 공주는 보호해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 연약하고 귀여운 여동생 타입. 딱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여동생의 못브이다. 만약 이런 여동생이 있다면 정말 아끼고, 사랑하고, 잘 보살펴줄 자신이 있다. 등도 토닥토닥 해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비행기도 태워줄 것이다. 아푸믄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에스더 공주가 여도생처럼 느껴저서 어깨를 감싸 안은 것이지 결코 흑심이 있어서 감싸 안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다. 좀 믿어라. "....." 설사 다른 사람들은 믿더락 질투의 여신인 루사아는 믿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워지시 시작한다. 루시아가 갑자기 일어나 이 모습을 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겪어온 나의 불운에 미루어 보자면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불운은 미루어보자면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불운은 원래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법. 불은울 피하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난 에스더 공주에게 말했다. "피곤할 테니 다시 누워." 그리고 에스더 공주를 자리에 눕혀주려 했다. 그러자 에스더 공주는 더욱 내 품에 안겨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되나요?" "아,아니. 안 될 건 없지만서도......" 에스더 공주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오빠." "......." '안 된 건 없지만서도' 다음에 이어질 말은 '내일을 위해 자두는게 좋을 것 같아'이다. 하지만 이미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차마 다시 누우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난 에스더 공주를 잘 다독여주었다, 아직 어린데다가 가녀리기까지 한 에스더 공주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를 생각하니 괜히 내가 다 미안해진다. "춥지 않아?" 내 물음에 에스더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렇게 오빠 옆에 잇는 걸요." "........" 아아~귀엽다. 이런 여동생이 있는 반데라스는 얼마나 행복할까? 갑자기 반데라스 자식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하기야 그 놈은 예쁜 아내도 있고, 귀여운 여동생도 있고, 사랑스럼 아들까지 있다. 세상을 다 가졌다고나 할까?뭐, 세상을 다 가진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루시아라는 아름다운아내(아직은 아니지만)가 있고, 라이,루 루비라는 사랑스런 자식들도있고, 라이레얼이라는 멋진 누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여동생은 없다(앞짱구는 있지만.) 이번 기회에 세스더 공주의 호적을 이적시켜? "....." 으음, 괜찮은 생각이로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더욱 다정한 투로 에스더 공주에게 말했다. "무섭진 않았어?" "조금 무서웠어요." "그래?" "하지만 오빠 덕분에 많이 무섭진 않았어요. 오빠가 지켜줄 거라 믿고 있었던 걸요." 에스더 공주는 두 손으로 내 옷을 꼭 붙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난 에스더 공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토닥토닥~~~. 에스더 공주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에스더 공주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쌔근쌔근. 미약하게 들려온느 숨소리. 난 조심스럽게 에스더 공주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읖 덮어 주었다. 잠든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좋은 꿈 꿔." 난 에스더 공주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주었다. 순간, 에스더 공주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처럼 보인 것은 내 착각이겠지? 내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디선가 나를 쏘아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 등에서 전기가 찌리릿~하고 올라온다. 그야말로 '등골이 오싹하다' 라고나 할까? 난 이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발 아니기를........ 간절하게 바라면 바랄수록 이워질 가능성은 적다. 어느새 일어난 루시아는 눈을 치켜뜬 채 날 노려보고 있엇다. 난 절망의 구덩텅이에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사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지 않은가? 난 그저 여동생을 아끼는 오빠의 마음으로 에스더 공주를 대했을 뿐이다. 그래,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어. 내가 결백한 건 하닐이 알고 땅이 알아. "......." 하늘도 알고 땅도 다 알지만, 루시아는 몰른다. 루시아는 엉켜있는 라이와 루비를 바로 눕혀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연분홍빛 파자마를 입고 있엇다. 사이즈가 약간 큰지 몸매 굴곡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보는 바와 같이 루시아는 딱 맏는 옷보다 약간 넉넉한 옷을 선호한다. 활동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저 파자마를 벗기려다가 무지하게 얻어맞았었다. "......" 그때를 생각하니 또 암울해지는군. 난 그녀가 허락한줄 알았거늘...... 라이 동생 제작 계획은 아직까지도 제작 준비 단게에 머물고 있다. 이러다가 계획 자체가 폐기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다. 뭐. 그건 나중 문제고...... 지금 중요한 것은 루시아의 오해를 풀어주는 것이다. 난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언,언제 깼어?" 그러자 루시아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 "........" 방금? 상당히 애매한 대답이다.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봤을까? 난 루시아가 최대한 적게 봤기를 바라며 말했다. "내가 그런건......" "여동생을 아끼는 오빠의 마음으로 그런 거라고?" ".........." 어ㄸ허게 알았을까? 루시아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고, 난 차렷 차세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 눈빛을 견뎌야 했다 한참 후,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모두들 자고있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 가겠어." 살았다! 난 너무 기쁜 나머지 루시아에게 다가가 손을 덥석 붙잡았다. "고마워,루시아.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됐어. 라이와 루비 깰까봐 그런 거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질투도 잠시 접어둘 줄 아는 루시아. 진정한 모성애의 발현이라고나 할가? 난 고마음 마음을 담아 루시아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분홍색 파자마를 입은 루시아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정말이지 너무 귀엽고 깜찍했다. 아아~ 이 헐렁한 파자라를 벗기고 파~. "너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뜨끔! "그,그럴 리가!나,날 어떻게 보고 그런말을......" "방금 '뜨끔' 하는 소리가 들린것 같은데." "........" 그냥좀 넘어가 주지. "무,무슨말이야? 그런 소리가 있을 리 없잖아." "흐음,그래?" "응응" 루시아는 잠시 내얼굴을 처다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짐승." "..........헉!" 자주 듣는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에 스크래치가 생긴다. 하지만 나는 그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흑~ 난 짐승이 아니야, 루시아. 그건 한순간의 실수였을 뿐이야. 그러니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줘. 어쨋든 모두가 잠든 야밤에 이렇게 루시아와 찰싹 붙어 있으니 정말 행복하다. "여긴 왜 들어온 거야?" "으응. 라이레얼과 교대했거든. 그래서 니 얼굴이나 한번 보고 자려고." "내 얼굴은 봐서 뭐하게?" "아니, 득별히 뭔가 하자는 것은 아니고......" "덮치게?" "그야 깊이 잠들어 있을 경우 살짝........이 아니라, 그럴 리 없잖아. 히로는 루시아가 허락해 줄때 까지 기다릴테야." 어차피 키레아 왕이 결혼하면 다 허락해주게 되어 있다. 그래 그때까지 조금만 참차. 난 참을 수 있어! ........라지만 솔직히 참기 힘들다. 다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루시아를 덮치고 싶으니 할 말 다 했지, 뭐. 루시아는 눈치가 매우 빠른편.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생각을 하면 귀신같이 알아챈다. 난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재빨리 화재를 돌렸다. "드디어 아이리스에 왔네. 이곳은 키레아 폐하가 다스리는 지역이지. 모국으로 돌아온 기분이 어때?" 루시아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난 어렸을 때부터 이 나라를 떠나 있었으니까." 아이리스가 멸망하면서 루시아는 스웰리어 백작을 따라 쫓기듯 다른 나라로 도망쳐야 했다. 그녀가 다시 이 나라라로 돌아와 오빠와 재회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혼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공주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다 한 루시아. 그런 그녀의 아픔을 나의 따뜻한 가슴으로 감싸주어야 할 텐데........ 루시아는 쌔근 쌔근 자는 라이와 루비를 토닥거려주고 이불도 다시 덮어주었다. 우리 집 엘프들은 잠버릇이 상당히 나쁘다. 뒤척거리는 것은 기본이고, 자고 있는 오빠의 목을 조르질 않나, 가슴 위에 발을 올려 놓질 않나, 침을 질질 흘리질 않나........ 잠버릇이 심한 아이들과 자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아이들과 같이 자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들 잠버릇이 아무리 심해도 불평 한마디 없다. 참고로 나도 루시아가 아무리 잠버릇이 심해도 불평 한마리 없이 같이 잘 자신이 있다. 루시아가 나와 자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난 루시아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졸리지 않아? 내가 재워줄까? 어서 내 무릅을 베고 누워, 루시아." 내 무릎을 치며 말하자 루시아는 내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의 유일한 장점을 솔직함인 것 같아." "응? 정말이야, 루시아?" 루시아가 날 칭찬해주다니!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지? 내가 볼은 꼬집어보는데,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의 유일한 단점은 그 장점을 빼면 아무런 장점이 없다는 거야." "........" 기뻐하던 나는 그대로 얼어 붙었다. 솔직함을 배면 아무런 장점이 없다니! 이럴 댄 화제를 돌리는게 제일이다. "조금만 있으면 키레아 폐하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오빠 얘기가 나오자 루시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응 빨리 오빠를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 그 동안 오빠가 어떻게 살았는지 듣고 싶고,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해주고 싶어" 오빠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는 루시아. 아아~ 루시아라는 여동생이 있는 키레아 왕은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앞짱구 말고 귀엽고 예븐 여동생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난 슬쩍 고개를 돌려 영아를 보았다. 영아는 루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 애 숨 막히겠다. 애를 죽일 작저잉냐? 뭐, 어린 엘프들의 생명력은 보기보다 끈질기다. 하긴,그렇게 열심히 머근데 생명력이 끈기지를 않을 리가 없다. 루시아는 영아가 루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보고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영아의 행동을 조카를 향한 고모의 애정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으음, 루시아가 빨리 진실을 깨달아야 할텐데......... "하암~." 루시아가 입을 크게 벌리며 길게 하품을 했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눈에 들어온다. 루시아는 평소 이를 잘 닦기 때문인지 치아가 매우 새하얗고 깨끗하다. 유치나 덧니, 사랑니 같은 것 없이 28개 치아가 전부 가지런하고, 그 흔한 충치 하나 없다. 그리고 이를 감싸고 있는 입술은 붉고 도톰하다. 단순호치라는 고사성어는 루시아르 위해 만들어진 말이리라. 견물생심이라고, 루시아의 입술을 보고 있으니 키스가 하고 싶어진다. 난 슬쩍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안고 얼굴을 가까이 자겨갔다. 주위 사람들이 전부 자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듯하다. 밀치지 않는 것을 보니 루시아도 그다지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키스한 지도 꽤 오래됐다. 마지막으로 키스한 게 언제였더라? 난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입술 감촉이 느껴졌다. 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루시아는 내 목에 손을 둘렀다. 우리는 서로 끌어안은 채 한참동안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라고 하니 왠지 외설적으로 들린다. 사실 예전에는 이 정도 정면만으로도 19금 판정을 받기에 충분했다. 뭐, 이 소설은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이 이상의 진행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키스를 하는 것도 상당히 실례다. 난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입술을 땟다. 동시에 루시아는 감았던 눈을 떳다. 그녀의 얼굴은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난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루시아는 그런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정생을 하며 고개를 획 돌렸다.어째 어색한 기분이 든다 나는 괜히 어린 엘프들을 살피는 척했다. "라이와 루비는 잘 잘고 있으려나.......헉!" 고개를 돌리던 나는 깜짝 놀랐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라이와 루비가 어느새 깨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냥 깨어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두 엘프는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볼을 잔뜩 부풀리 채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앗!저 표정은 불만 가득한 표정이 아닌가? "아!" 푸시아는 깜짝 놀라 나를 세차게 밀쳤다. 퍼억! 이정도면 밀치네 아니라 때린 거다. 미쳐 대비를 하지 못한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난 충격 받은 표정으로 루시아를 보았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미 아이들에게 고개를 돌린 뒤였다. 루시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라이와 루비에게 말했다. "언, 언제 일어난 거야?" 그러자 두 엘프는 안 그래도 땡땡한 볼을 더욱 땡땡하게 부풀리며 말했다. "언리랑 오빠가 키스할 때부터요." "맞아요. 오빠랑 언니가 키스하는 거 다 봤어요." 루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루시아는 당황하며 두 손을 내져었다. "아, 아니야,애들아. 언니랑 오빠 키스한 거 아니야." "라이가 다 봤어요. 거짓말 하지 말아요." "루비도 다 봤어요. 거짓말 하는 언니는 나쁜 언니에요." "저, 정말 아니야." 라이와 루비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오빠는 라이보다 언니를 더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언니는 루비보다 오빠를 더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 조그만 것들이 질투하기는. 루시아는 라이와 루비를 달래주기 위해 두 팔을 벌려 두 엘프를 겨안아주었다. "아니야,애들아. 언니는 히로 오빠보다 우리 라이와 루비가 백배 천배 더 좋아." ".......헉!" 히로보다 라이와 루비가 백배 천배 더 좋다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루시아의 말에도 불구하고 두 엘프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여전히 ㅃ로통한 표정이다. 그리고는 날 보더니 거세게 항의했다. "너무해요, 오빠!" "언니한테만 키스해주고." "라이보다 언니가 더 좋은 거죠?" "루비는 오빠한테 막막 실망했어요." "그래그래.알았어. 오빠가 잘못했어. 토닥토닥~! 사랑과 정성을 다해 토닥거려주자 라이와 루비는 금방 표정을 풀었다. "언니보다 라이가 더 좋죠? 그렇죠?" "루비가 세상에서 제일 좋죠? 맞죠?" 이런 곤란한 질문을! 난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아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라이와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오빠는 라이와 루비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언니보다 좋아요?" "으응. 물론이지. 라이와 루비도 오빠 맘 알지?" 라이와 루비는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을 띠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에~!" "........" 좀 작게 대답하렴. 자느 사름들 다 깨게다. "이제 다시 자렴. 착한 엘프는 밤에 코~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돼. 우리 라이와 루비는 착한 엘프지?" 끄덕끄덕 "그럼 어서 자렴." 난 라이와 루비를 다시 자리에 눕혀주었다. 그리고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라이와 루비는 눕자마자 잠들었다. 난 아이들이 잠든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순간, 루시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보다 라이와 루비가 더 좋다고? "........응?" ?나에 대한 사랑이 그정도 밖에 안 됐어?" "무, 무슨 말이야, 루시아? 니가 그렇게 말해도 좋다고 허락했잖아." 루시아는 고개를 획 돌렸다. "됐어. 너랑 더 이상 말하기 싫어." "헉!" 이런 어이잆는 경우가! 루시아는 다시 자려는 듯 침대에 누었다. 그리고 라이와 루비를 껴안고 이불을 덮으며 나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자야하니까 이만 나가줘." 말을 마친 루시아는 바로 눈을 감았고, 난 힘없이 몸을 돌려야 했다. 흑~ 너무해, 루시아. story 40 여행의 끝 그 후의 여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국가의 이득은 쌩 까고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아이리스 왕국의 배신자들과 자바스와 아토리아, 개틴등에서 보낸 자객들이 쉴 새 없이 덤벼든 것이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을 정도였다. 위험한 상황도 있었지만, 드래곤까지 끼어 있는지라 일행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에 나는 거의 잠을 안 자다시피 하며 일행을 지켰다. 나만큼 라이코스도 바빴다. 라이코스는 일이 터질 떄마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상황을 전파하고, 답신을 받아왔다. 나름대로 '라이코스의 대활약'이라고나 할까? 산이 있으면 넘고, 강이 있으면 건너고, 숲이 있으면 불 지르고, 바다가 있으면 흙으로 메워…… 어쨌든 매우 험난하고 스펙터클한 여정 끝에 우리 일행은 무사히 아이리스 왕국의 수도에 다다를 수 있었다. "……." 겨우 몇 줄로 그동안의 고생을 요약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뭔 적들이 그렇게 많은 건지……. 특히나 자바스와 아토리아, 개틴(다시 말해 아이리스 왕국의 적대국)은 이 결혼을 막는 데 목숨을 건 듯 총력전을 펼쳤다. 이 결혼이 성사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니 당연한 일이다. 현재 아이리스 왕국은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는 상태 . 그렇기 때문에 이 결혼이 무사히 성사될 경우 다음 왕위는 에이미 공주가 낳은 아이가 물려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리스와 헤리오 두 나라는 사실상 혈맹 광계가 된다.(이미 충분히 혈맹 관계긴 하지만.) 반대로 이 결혼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무산될 경우 불신이 싹틀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양국사이가 악화될 수도 있다. 뭐, 그런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떠나서 나는 아주머니(당연 에이미 공주를 뜻한다.)를 무사히 처남(당연 키레아 왕을 뜻한다)의 품에 인도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래서 항상 최선봉에서 적들과 맞서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나의 가공할만한 무위에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고, 그런 나의 모습에 반한 수많은 여성들이 프러포즈를……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렇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일단은 안심이다. 하지만 아직 왕궁에 도착한 것은 아니고, 왕궁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식이 끝날 때까지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내가 모는 마차는 천천히 아이리스의 수도로 입성했따.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루시아는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곳은 루시아가 태어난 곳이자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녀가 자라났고, 이곳에서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루시아에게는 감회가 새로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루시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루시아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도는 사람이 많고 활기가 넘쳤다. 길은 잘 닦여있고, 건물은 반듯하게 세워져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다. 마치 도시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이다. 이는 아이리스 왕국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안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키레아 왕이 그만큼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수도는 축제 분위기였다……가 아니라 실제로 축제 중이다. 내가 알기로 키레아 왕은 결혼식 전 삼일, 결혼식 후 삼일(다시 말해 일주일)을 축제 기간으로 정했다. 참고로 결혼식은 내일이다. 꽤나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셈이다. 뭐, 늦을 것 같았으면 이동 마법으로 올 생각이었으니, 실제로 늦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기분이 어때, 루시아?"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 난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괜찮아. 니 곁에는 내가 있잖아." "으응." 루시아는 조금은 진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작스러운 함성에 우리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와아아! 그 함성 소리는 우리를 향한 것이었다. 때문에 난 말들이 놀라지 않도록 달래주어야 했다. "에이미 공주님 일행이다!" "왕비님이 오셨다!" "……." 으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니 좀 그렇군. 부끄럽다고나 할까? 우리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어서오세요, 공주님." "아이리스에 온 걸 환영해요." "폐하를 도와 나라를 잘 다스려주세요." 에이미 공주의 인기가 장난이 아니다. 무슨 퍼레이드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마부석에 앉아 있는 나와 루시아는 알아채지 못한 듯 에이미 공주에게만 신경을 썼다. 하긴, 마부가 전설의 영웅(이자 사기꾼) 아이언스 히로 공작과 그의 연인 루시아 공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아마 지금쯤 에이미 공주는 잔뜩 긴장한 채 좁은 창으로 바깥 사정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마부석에 앉아있는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그러고 보니 에이미 공주님을 호위하는 임무를 아이언스 공작님이 맡으셨다고……." "맞아. 아이언스 공작님이 루크 성에서 에드먼드 남작을 죽이고 에이미 공주님을 무사히 탈출시키셨다는 얘기를 들었어." 후후~ 사람들이 드디어 날 알아보기 시작하는군. 이래서 인기인은 피곤하다니까.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손을 흔들어주려는 순간 루시아가 말했다. "혹시라도 손 흔들 생각이라면 그만둬. 쪽 팔리니까." "……." 쪽 팔릴 것 까지야. 난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저 여자 좀 뵈. 백금발에 에메랄드 빛 눈동자야." "키레아 폐하와 똑같아." "혹시 루시아 공주님이 아닐까?" 웅성웅성~! 수도 사람들이 루시아까지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거리는 더욱 혼잡스러워졌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마차가 나아기 힘들 정도다. "조금만 비켜주세요." 목청껏 소리쳐 보았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인파가 반으로 쫙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듯한 모습(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실제로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갈라지는 인파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사일런스 진다. 그리고 지니의 뒤에는 아이리스 왕국의 왕궁 기사단이 서 있었다. 지니는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지금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 웨이터냐? 모시긴 뭘 모셔? "오랜만이에요, 지니 오빠!" 영아는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우리 일행 망신은 영아가 다 시킨다. 역시 떼놓고 왔어야 했는데……. "니 좋을 데로 하세요." 내가 허락을 하자 지니는 손짓을 했고, 왕궁 기사단은 마차 주위를 둘러쌌다. 지니는 무협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멋진 동장으로 거대한 흑마 위에 올라탔다. "꺄아아!" 환호성을 지르는 여성 팬들. 지니의 등장으로 인해 나의 존재가 묻혀 버리는 순간이다. * * * * 지니는 우리를 왕궁 접견실까지 안내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나오실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졸음이 밀려 온다. 난 졸음을 참으며 에이미 공주를 보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 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될 사람과 첫 만남이 아닌가? 긴장이 안 되면 그게 이상한 거지. 뭐, 지금은 어떠한 말을 해줘도 소용없을 것이다. 백번 말해주는 것보다 한번 직접 만나보는게 낫겠지.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는가? 에스더 공주와 라나는 한쪽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라이레얼은 의자에 앉아 졸았고, 카르와 영아는 그 옆을 지켰다. 어린 엘프들은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자기들끼리 떠들었고, 테커와 카웨는 피곤한지 연신 하품을 해댔고, 루시아는 초조함과 기대감 가득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난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응." 대답을 한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안 괜찮은 것 같아." "왜?" "몰라. 가슴이 너무 떨려." "오랜만에 오빠를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도 있고…… 아아~ 오빠를 만나면 제일 먼저 뭐라고 말해야 하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마. 편하게 생각해, 편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으응. 알았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떨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간만에 키레아 왕을 만나는 것인데 어찌 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백금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하나로 묶은 미청년. 그의 체격은 건장했고, 걸음은 당당했다. 진한 눈썹과 또렷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난 그의 모습에서 한 나라의 군주로서의 위엄과 기사로서의 용맹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흉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위엄 있는 군주이자, 용맹한 기사다. 그의 이름은 아이리스 키레아. 내가 모신 군주이자, 이이리스 왕국의 국왕이자,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오빠다. 난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키레아 왕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래. 오랜만이군." 한번 말이 오고가자 그 다음은 더 쉬웠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름대로 바쁘게 지냈지. 자네는?" "저 역시 나름대로 바쁘게 지냈어요. 뭐, 폐하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요. 세상에 국왕만큼 바쁜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하하하!"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럽게 말하자 키레아 왕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멈춘 키레아 왕은 고개를 돌려 루시아를 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동안 많이 예뻐졌구나." "오빠……." 루시아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보석을 만들어냈다. 그 보석은 새하얀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려 이슬이 되었다. 키레아 왕은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흑흑~."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는지 루시아는 울음을 터트리며 오빠의 품에 안겼다. 키레아 왕은 다정하게 여동생을 안아주었다. 난 기뻐하는 루시아와 키레아 왕을 보며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주었다. 두사람은 계속해서 재회의 기쁨을 누리고 싶어 했지만, 그러기에는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중요한 손님도 있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헤리오 에이미라고 합니다." 에이미 공주는 당황한 와중에도 침착하고 절도 있게 인사를 했다. 결혼식 전 날 처음으로 만난 남녀. 할 말도 많고, 들을 말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었다. 루시아는 이제 좀 진정이 되는지 눈물을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 "니가 바라면 그렇게 될 거야. 아마 동화책의 주인공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걸." "응. 오빠가 정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야." 키레아 왕이 행복해지는 것도 좋지만, 낟 좀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키레아 왕 결혼식 올리면 그땐 분명 허락해주겠지?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안 왔네." "으응. 그러게."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내일 온다고 헤드셋으로 연락이 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까지 별 다른 소식조차 없다. "뭐, 알아서 도착하겠지. 설마 까먹기야 할라고." 잠시 기다렸을까, 한참을 기다렸을까? 키레아 왕과 에이미 공주가 문을 열고 나왔다. 키레아 왕은 별 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에이미 공주는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군." "예. 그렇게 하세요." 국왕이라는 직업은 국회의원과 마찬가지인 듯하다.(다시말해 제대로 일하려고 마음먹으며 3D업종이고, 놀려고 마음먹으면 개망고 업종.) 으음, 국왕도 할만한 건 못돼. 키레아 왕이 가고 나자 여자들의 시선은 에이미 공주에게 집중되었다. 가장 먼저 루시아가 질문을 던졌다. "어땠어? 괜찮았어?" 에이미 공주는 먼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잠깐만요. 숨 좀 돌리고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몇 번 호흡을 하자 상기된 표정이 많이 가라앉았다. 에이미 공주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너무 멋진 분이세요. 내 평생 그렇게 멋진 남자는 처음 봤어요. 말씀하시는 것이 얼마나 당당하면서도 자상한지…… 아아~ 가슴두근거려서 혼났어요." 에이미 공주는 키레아 왕을 보고 한눈에 뻑 간 듯한 표정이었다. 키레아 왕이 멋있게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한눈에 뻑 갈 줄이야……. 설마 천생연분이라는 건가? 에이미 공주의 말에 루시아는 크게 기뻐했다. 기뻐한 것은 에스더 공주와 라나도 마찬가지였다. "잘됐다 언니." "축하드려요." 여자들은 에이미 공주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에이미 공주는 결혼식 예행연습 때문에 시녀들에게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방을 배치받았다. 루시아는 예전에 쓰던 방을 어린 엘프들과 같이 쓰기로 했고, 나는 그 옆방을 쓰기로 했다. 에이미 공주는 예전에 루시아의 어머니(당연 아이리스 왕국의 왕비)가 썼고 앞으로 자신이 쓸 방을 쓰기로 했고, 에스더 공주와 라나는 그 옆방을 쓰기로 헀다. 라이레얼과 카르는 그 옆방의 옆방을 쓰기로 했고. 테커와 카웨는 나와 라이레얼에게 이제 그만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벌써 가려고? 결혼식은 보고 가지?" "됐어, 임마. 우리 같은 놈들이 뭔 국왕 결혼식 참석이야? 그런 건 샌님들이나 하라 그래." "맞아, 맞아. 애초에 계약도 에이미 공주를 아이리스 왕국의 수도까지 무사히 호위하는 거였잖아. 그러니 이제 우리 일은 끝난 셈이지. 더 이상 잡아두는 건 계약 위반이라고." "그래도 여기가지 왔는데 그냥 떠나는 게 어딨어? 귀찮더라도 결혼식까지만 참석하고 가." 난 아쉬운 마음에 둘을 만류했다. 라이레얼은 그런 나를 말리며 말했다. "됐어. 히로. 떠나려는 사람 억지로 붙드는 것은 쟤들 말대로 계약 위반이야." "하지만 라이레얼……." "그리고 저 자식들은 주례사 들으면 꾸벅꾸벅 졸 게 뻔해. 결혼 식 장에서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나느니 지금 지 발로 걸어 나가는 게 낫지." 라이레얼의 말에 테커와 카웨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역시 라이레얼이 뭘 좀 아는데." "엉덩이 걷어차인 분풀이로 깽판 놓기 전에 빨리 돈이나 줘." 아무래도 둘은 지금 떠나기로 확실히 마음을 굳힌 것 같다. 난 둘에게 약속한 금액을 지급했다. 그러자 둘은 거세게 항의했다. "뭐야?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보너스도 없어?" "생명수당은 어쩌고?" "시끄러, 임마! 용병이 뭔 보너스와 생명수당이야? 장사 한두 번 하냐?" "쳇! 쪼잔한 자식."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하다니까. 난 이래서 귀족이 싫어." 테커와 카웨는 툴툴거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사실 나도 보너스와 생명수당을 얹어주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테커와 카웨가 원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약속한 것보다 돈을 더 주었다면 이 둘은 분명 받지 않았을 것이다. "개새끼. 어디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나 보자." "빌어먹을 놈. 무덤까지 돈 끌어안고 가나 지켜볼 테다." "……."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웃돈 엊어주면 좋아라고 받아먹었을 것 같은데. "바로 헤리오로 떠날 거야?" "아니. 일단은 이곳 수도에서 일을 좀 찾아볼 생각이야. 물론 그전에 축제를 즐겨야겠지." "맞아 맞아. 실컷 고생했으니까 실컷 놀아줘야지. 돈도 받았겠다 예쁜 여자도 잔뜩 꼬시고 말이야." "좋을 대로 해라." 테커와 카웨는 미리 챙겨온 짐을 등에 둘러맸다. 우리는 진하게 악수를 했다. "잘 가라. 어디 가서 칼침 맞고 뒈지지 말고." "너나 뒈지지 마, 새꺄." "이 카웨 님은 무적이니까 너나 잘 하셔." "의뢰할 거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고." "선금만 두둑이 주면 어떤 일이든 맡아줄게." 아무래도 악수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럼 간다." "잘 있어." "잠깐만." 라이레얼은 떠나려는 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테커와 카웨는 걸음을 돌려 라이레얼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라이레얼은 두 손으로 테커의 머리를 붙잡고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카웨에게도 똑같이 해주었다. 이럴 수가! 만약 이 자리에 카르가 있었다면 저 둘은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카르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니, 그 전에 라이레얼이 왜 테커와 카웨의 이마에 입을 맞춘거지? 테커와 카웨는 당황하면서도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괜히 속이 울렁거리며 토할 것 같다. "뭐, 뭔짓이야!" "누, 누구 맘대로 이런 짓을!" 테커와 카웨는 괜히 화를 내는 척했다. 라이레얼은 팔짱을 낀채 둘을 보며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죽지 마. 이건 전(前) 대장으로서의 명령이야. 뭐, 팔다리 하나 잘리는 것정도는 이해해줄게. 하지만 두 개는 안돼. 세개는 더더욱 안 되고." 난 라이레얼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라이레얼은 진심으로 테커나 카웨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마 생각 같아서는 용병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용병들은 타인이 자신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런 식으로라도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테커와 카웨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따. "어어, 그러니까…… 아, 알았어, 대장. 절대 죽지 않을게. 팔다리도 두 개 이상 잘리지 않도록 노력할게." "나, 나도, 그, 그러니까…… 아! 대장도 죽지 마. 대장도 팔다리 두 개 이상 잘리지 말고." "알았으면 됐어. 그만 가봐." 라이레얼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테커와 카웨는 잠시동안 라이레얼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의 말은 사치라고 생각했을까? 테커와 카웨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음정 박자도 맞지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만 보며 자신들이 갈 길을 걸어갔다. 난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쟤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저런 놈들 또 만나서 뭐해? 하암~ 졸립다.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지~." 라이레얼은 길게 하품을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런 라이레얼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역시 라이레얼은 스타일리쉬하다니까. 너무 쿨하잖아! 멋져요, 누님! story 41 결혼식 신랑이 입장한다. 신랑은 당당하고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이어 신부가 입장한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순백의 신부. 그녀야말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신부는 천천히 신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드레스가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두 명의 시녀가 드레스 끝을 잡고 신부의 뒤를 따랐다. 난 그 장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군."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둘이 너무 잘어울려." 지금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과 신부가 누구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일행들은 결혼식 전에 전부 도착했다. 인디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아침 일찍 도착했고, 크로니스도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갈드리론과 루엔은 결혼식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다행이 늦지는 않았다.) 어쨋들 일행들은 무사히 모였고, 결혼식도 무사히 진행되는 중이다. "신부가 너무 예뻐요" "응. 그러네." 사실 남자는 아무리 꾸며봐야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여자는 다르다. 단지 화장 좀 하고 웨딩드레스 좀 입었을 뿐인데 사람이 달라 보인다. 결혼식의 마력일까, 웨딩드레스의 마력일까? "라이도 웨딩드레스 입어 보고 싶어." "루비도." ".........." 라이와 루비까지 웨딩드레스에 관심을 갖다니. 아무리 어려도 여자는 여자라는 건가? 에스더 공주와 라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에이미 공주를 흘린 듯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말은 안 했지만, 이둘도 지금쯤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루시아는 어떠려나? 난 슬쩍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아는 신랑과 신분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오빠 분명 행복하겠지?" "으응. 분명 행복할 거야." 난 처남의 행복보다 우리의 행복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데......... "아!키스한다." 루시아의 말에 난 하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가, 키레아 왕의 입술이 에이미 공주의 일술을 덮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짝짝짝~! "와아아~!" 우레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사람들의 환호와 축복 속에 결혼식은 무사히 막을 내렸다. 그리고 오늘을 포함해 나흘 동안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 * * * 결혼식을 하기 전에도 엄청 바빴지만, 결혼식이 끝난 뒤에는 더 바빳다. 각종 연회와 행사가 줄을 지어 대기 중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난 연회와 행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빠지려고 했다. 그러자 지니가 말하길......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참석 의사를 밝히셨......" "몇 시라고 했죠? 갈아입을 옷은 준비됐나요? 서두르지 않고 뭐해요!" 결혼식 날 밤. 본궁에서 국왕 부부가 주관하는 연회가 열렸다. 당연 그 규모는 매우 컷다. 이런 식의 연회는 국고를 마이너스 통장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필요하기도 하다. 난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루시아는 노출이 심하지 않은 연녹색 드레스를 입고있었다. 그리고 루시아 옆에는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어린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안 왔네." "응. 일루니아 언니는 임신 중이니까. 언니가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니 형부도 참석하지 않겠대." 보니까 크로니스도 없고, 라이레얼과 카르도 없다. 크로니스야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을 별로 안좋아하니 안 올 걸 테고, 라이레얼과 카르는......자는 중인가? 아니면, 게임중(아까 보니까 휴대용 게임기로 열심히 게임하고 있던데)? 그 외에 다른 사람은 다 나왔다. 갈드리온과 루엔은 이미 입장해 있고, 에스더 공주와 라나도 입장해 있고, 영아는 지니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는 중이었다. "저를 에스코트 해주세요, 오빠.괜찮죠? 그쵸?" "............." 제발 거울을 한번 보고 저런 말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에스코스란 남자가 여자에게 신청하는 것이지, 여자가 남자에게 신청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냥 퇴짜 놔! 사실 연회에서 지니 만큼 피곤한 살마도 없다. 찝쩍거리는 여자가 한둘이어야 말이지(찝쩍거리는 여자의 숫자를 세는 것보다 안 찝쩍거리는 여자의 숫자를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다). "그 부탁은 제가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저에게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지니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영자는 수줍게 웃으며 지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다. 미남과 앞짱구인가? 너무 안 어울리는 거 아냐? 영아는 주위 여자들의 질투심(더하기 적개심)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지니와 함께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어젠 내 차례인가? 난 옷무새를 다시 한번 가다듬은 다음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까 지니에게 들은 대로 대사를 읊었다. "저에게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빨리 내 손을 잡아, 루시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 손 위에 손이 얹어졌다. "예, 오빠. 라이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드릴께요." "아니야, 라이야. 오빠는 루비한테 말한 거야. 그쵸, 오빠?" ".........." 니들한테 한 말 아니거든. "누나는 제가 에스코트 할게요." "정말? 고마워." "........" 앗! 루시아의 에스코트를 루에게 빼앗기다니! 결국 나는 라이, 루비와 함게 입장해야 했다. 조금 기다리자 국왕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레아 왕은 입가에 멋진 웃음을, 에이미 왕비(이제 공주가 아니다)는 볼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응. 그러게." 음악이 울려 퍼졌다. 국왕 부부가 먼처 춤을 추기 시작하지 다른 사람들도 홀로 나가 춤을 추었다. "라이랑 춤춰요, 오빠." "아니야. 오빠는 루비랑 춤 출 거야. 그쵸, 오빠?" "순서대로 춰줄 테니 인내심을 갖고 조금만 기다리렴." 난 먼저 라이랑 춤을 추고, 그 다음 루비랑 춤을 추었다. 긇게 두 엘프와 춤을 추고 난 후 루시아에게 춤 신청을 하려 하는데, 그 순간 라나가 먼저 나에게 춤을 신청했다. 여자가 먼저 춤을 싱청해왔는데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난 라나의 손을 붙잡았다 "가실까요, 레이디?" "예, 오빠." 우리는 홀로 나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라나는 스텝을 밟으며 나에게 물었다.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실 건가요?" "응. 이제 결혼식도 끝났으니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가게도 다시 열어야 하고......" 라나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언제 한번 놀러와. 맛있는거 많이 사줄게." 내 말에 라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라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꼭 놀러 갈게요, 오빠." 곡이 끝나자 우리는 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난 루시아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루시아와 한 곡 춰야 할 텐데........ 그러는 사이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었다. "헉! 저 자식이 감히......" 루시아는 지니와 함께 춤을 추는 중이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이를 박박 갈았다. 감히 나의 루시아와 춤을 추다니! 평소부터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정말로 루시아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나중에 두고 보자. 나는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그 휴식을 그리 길지 않았다. 에스더 공주가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마실래?""예" 난 에스더 공주에게 무알콜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에스더 공주는 조심스럽게 잔을 받아들고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셨다. 에스더 공주는 음료수를 마시는 내내 쭈벗쭈뻣거렸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건냈다. "한 곡 출래?" "예?" 에스더 공주는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난 에스더 공주의 손을 잡고 홀로 나갔다. 에스더 공주가 긴장한 듯 처음에는 스텝을 잘못 밟는 실수를 몇번 했다. 그러다가 내 발도 밟았다. "죄, 죄송해요.오빠" 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사실 좀 아프다. 구두 굽에 밟혀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느 에스더 공주를 생각해 조금도 아프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게 또 한 곡이 끝났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잘 놀고 있어." 난 재빨리 루시아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루시아와 춤을 추리라!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루시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내가 다시 열심히 연회장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데, 한 남자와 어깨가 부딪혔다. "아! 죄송......이 아니라 너 잘 만났다. 니가 감히 나의 루이사와 춤을......" 어개를 부딪친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 그리고 그 옆에 심플한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압짱구가 서 있었다. "혹시 루시아 공주님을 찾고 계신 것입니까?" 루시아 얘기가 나오니 귀가 번쩍 뜨인다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지니는 방금 전까지 루시아와 함게 있으니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급히 물었따. "어디 있는데요?" 지니가 대답을 하기 전에 영아가 끼어들었따. "아까 라이랑 루비랑 데리고 숙소로 올라갔어." "뭐라?" "애들이 피곤하다고 했나봐." "........." 그래서 날 버려두고 애들만 데리고 올라갔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루시아가 없는 연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난 연회장을 외로운 늦대처럼 홀로 어슬렁 거렸다. 더 이상 춤을 출 기분도 아니었기에 난 술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에서는 한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중이었다. "........." 내 앞에서 감히 염장질이냐? 난 그 남녀를 강격하게 째려봐 주었다. "다, 다른 데로 갈까요?" "예. 그, 그게 좋겠어요" 그 남년느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넓은 테라스를 홀로 차지한 채 술잔을 기울였다. 글허게 괜히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 한여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에스더 공주였다 "춤 안 춰? 아까 보니 춤 신청이 끊이지 않던데." 내가 묻자 에스더 공주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좀 피곤해서요." "그래? 그럼 좀 쉬어." "예."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난 테라스 난간 위로 뛰어올랐다. "앗!위험해요, 오빠!" "괜찮아." 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흐음, 분위기 좋군 이 세계는 밤하늘이 매우 아름답다.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밤하늘. 달과 별이 쉬 새 없이 반짝인다.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쏙아져 내릴 것 같은 느낌. 난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저, 저기......" "응? 왜?" 난 고개를 돌려 에스더 공주를 보았다. 에스더 공주는 얼굴은 잔뜩 붉힌 채 쭈뻣쭈뻣거리고 있었다. "저, 저는......" ".........."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린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이렇게 말하기 힘들어하는 거지? 난 잠시 생각해본 끝에 에스더 공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아아~ 그런 거였으면 진작 말을 하지." 난 재빨리 담대를 껐다. "미안.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줄 몰랐어." "아, 아니....." "괜찮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끌려고 했거든." "저, 저는......" "날씨가 춥다. 빨리 들어가자." 난 에스더 공주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째서인지 에스더 공주는 울상이었다. 그러더니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많이 피곤했나 보다. 국왕 부부도 연회장을 빠져나갔고, 일행도 대부분 사라졌다. 그럼 나도 이만 나가볼까? 난 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루시아 방으로 향했다. 어째서나고? 그야 당연 루시아를 보기 위해서다. 키레아 왕도 결혼 했겠다, 루시아에게는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이젠 내 마음을 받아들여주는 것만 남았다. 아아~ 그 동안 정말 오래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 그 기다림도 끝이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내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루시아가 머무는 방문 앞에 도착한 나는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방문에 걸려있는 팻말을 보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짐승 출입금지>. ".........." 뭐야, 이건? "뭐긴 무겠어요? 짐승, 즉 아이언스 공작님은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지요." "예?" 내 뒤에 나타난 사람은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이루니아 여사님은 예의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시아가 그러더군요.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니 히로가 늑대로 변해 나를 덮치러 올지도 몰라. 아니, 분명 덮치로 올 거야. 왜 냐하면 히로는 그제불능의 짐승이니까' 라고 마링죠.그래서 이렇게 '짐승 출입금지' 팻말까지 걸어놓게 된 것이랍니다." "........." 이럴수가! 키레아 왕이 결혼을 했는데도 안 된다는 건가" 내가 입을 쩍 벌리며 소리 없는 절규를 하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더욱 짙은 조소를 지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호호호!" 나의 절망적인 표정을 보는 것이 일루니아 여사님에겐 최고의 태교나 다름없다. 인디는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들 번갈아보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엇다. 그날 밤. 나는 정말로 보름달을 보며 늑대처럼 울부짖어야 했다. "아우우우~!" * * * *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잇는 법이다. 일주일 간의 축제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다른 사람들이 축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듯이 우리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인원을 점검해 보았다. 나,루시아,라이,루,루비,일루니아 여사님,인디 라이레얼,카르,크로니스,지니,루엔,갈드리온,영아. "14명 맞군." 혹시라도 빠트린 사람이 있나싶어 다시 세어 보았지만, 여깃 맞다. 으음, 그런데 이렇게 뭔가 하나 빠진듯한 느낌이 드는 걸까? "잠깐만!" 저 멀리서 흰색 매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파닥거리며 날아온다. "........." 어쩐지 뭔가 하나 빠진 듯했다. 내 앞에 도착한 라이코스는 날개를 불끈 쥐며 항의했다. "뭐야? 나만 빼놓고 가면 어쩌자는 거야?" "미안. 하지만 날 원망하기 전에 존재감 없는 니 자신을 원망하렴." 아무리 생각해봐도 라이코스는 너무 존재감이 없다. "아! 어서와, 이코야." 라이는 라이코스를 두 손으로 잡고 품에 안았다. "그럼 이걸로 정말 다 모인 건가?" 우리는 아이리스 왕궁 지하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비밀의 장소가 있다. 그리고 그 비밀의 장소에는 거대한 3차원 마법전이 설치되어 있다. 떠나는 우리를 배웅해주기 위해 국왕 부부와 에스더 공주, 라나가 따라 옸다, 그리고 크로니스는 마법진을 활성화 시켰다. 키레아 왕은 날 보며 말했다. "가는 건가?" "예. 빨리 돌아가서 가게를 열어야지요." "루시아를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세요." 난 에이미 왕비에게 말했다. "행복하세요" 에이미 왕비는 얼굴에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떡였따. "예. 아이언스 공작님도요." 키라아 왕 부부는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루시아는 키레아 왕의 손을 꼭 붙잡았다. "꼭 행복해야 돼, 오빠. 알았지?꼭이야?" "그래." "오빠........" 눈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루시아는 손으로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안 울려고 연습 많이 했는데....." "괜찮아." 키레아 왕은 루시아를 안아주었다.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루시아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난 울먹이는 루시아엑 말했다. "아주 헤어지는 것은 아니잖아. 다음에 또 놀러오자. 자주 놀러와도 되죠?" 키레아 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따. "물론이네." 난 키레아 왕에게서 루시아를 넘겨받았다. 나 루시아의 눈물을 닦아주고 잘 다독여주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라지만, 이별은 항상 슬프다. 난 에스더 공주와 라나를 보았다. 우리가 떠라고 나면 이둘은 마법진을 통해 헤리오 왕궁으로 떠날 것이다. 귀여운 여동생 같은 에스더 공주와 라나. 생각 같아서는 이 둘을 납치해 가고 싶다. 그래서 내 여동생으로 삼고 싶다. 으음, 계속 보고 있자니 정말로 실행에 옮기고 싶어지는군. 라나는 웃으며 물었다. "정말로 놀러가도 되나요?" "물론이지. 언제든 놀러와. 맛있는 거 많이 사주고, 놀이공원에도 데려가 줄테니까." "저, 저는......" 에스더 공주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 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너도 언제든 놀러 와도 돼." "저, 정말요?" "응. 그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야 돼. 알았지?" "예........." 에스더 공주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인사도 다 끝냈으니 이젠 정말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마법진 바깥쪽에 있는 사람과 마법진 안 쪽에 있는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서로의 모습을 기억해두고 싶다는 듯이. 크로니스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엄청난 마력이 느껴진다. 동시에 마나가 요동을 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바뀌였다. * * * * "아아~ 드디어 돌아왔군." 난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참 긴 여정이었다. 그래도 간만에 여행하니 참 좋다. 옛날 일도 많이 생각 났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만 남은 건가? "피곤해, 히로. 빨리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어." "그럼 제가 어깨 주물러 드릴께요, 언니." 다들 말은 안 했지만 피곤한 듯한 표정이었다. 어젯밤 푹 잤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옸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피로가 몰려오는것 같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쉬자. 나 다리 아파, 오빠." 우리 중 체력이 가장 약한 영아느 특히 더 피곤하지 나를 재촉했다. "그래그래. 빨리 집에 들어가서 쉬자꾸나."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찰나 뭔가 이상한게 보인다. "저게 뭐지요?" "텐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텐트가 왜 여기 쳐져있는 겁니까?" "글쎄요. 그 점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건물 입구 쪽 주차장에는 작은 텐트가 하나 쳐져 있어다. 그렇다는 것은........? "설마 노숙자?" 그 순간, 텐트에서 한 남자가 빠져나왔다. 낯이 익은 사람이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최모 편집자님?" 그렇다. 그 남자의 정체는 바로 최모 편집자님이었다. 난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아니, 여기서 지금 뭐하고 계신 거에요? 혹시 영아 때문에 출판사에서 잘리기라도 하셨나요? 그래서 노숙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다만......" ".......원고를 받아내려고 대기 중이었습니다." ".........." 원고를 받아내기 위해 텐트까지 치고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어느새 영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최모 편집자님은 번개 같은 동작으로 도망치려는 영아의 뒤를 막았다. "원고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 저기 그게요 앗! UFO다!" 영아는 60년대에도 통하지 않았던 방법을 쓴 다음 발에 불이 나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최송해요오~!" ......라고 외치며 말이다. "도망치셔도 소용없습니다!" 최모 편집자님은 도망치는 영아를 쫓아갔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마감 지옥이라니. 작가도 할 만한 직업은 못 되는 것 같군." 뭐, 어떤 작가는 소설 쓰던 중에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외박 나와서 완결 지었다고 하더라. "살려줘, 오빠아~!" 결국 최모 편집자님에게 붙잡혀 질질 끄려가는 영아. 불량 작가의 최후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업자득인 것을. 그러게 진작 좀 써놓을 것이지. 점점 멀어지는 영아의 비명소리. 영아의 모습이 완전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들어가자, 얘들아." "네에~!" story 42 루시아, 히로 부모님과 만나다.(1)p.127~p.147 "하암~." 난 길게 하품을 하며 카운터에 엎드렸다. 어린 엘프들은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라이의 머리와 루비의 머리의 기울어진 각도를 보아하니 조만간 부딪칠 것 같다. 쿵! "......" 결국 부딪쳤군. 단순 엘프들의 머리여서 그런지 소리가 매우 크다. 머리를 부딪친 충격 때문인지 라이와 루비는 눈을 살짝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졸기 시작했다. "........" 어이, 벌써 두 시간째 졸고 있는데 왠만하면 좀 깨지? 뭐, 졸린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판타지 세계에서 서울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째, 예전과 별 다를 것 없는 생활이 이어 지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노곤하고 축축 늘어진다. 지금쯤이면 여행의 피로가 풀릴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으음, 역시 긴 여행을 하고 나면 너무 피곤하단 말이야." 여행이 길었던 만큼 후유증도 크다. 여행할 때는 못 느꼇지만, 돌아와서 일상에 적응하려니 여행의 피로가 한번에 몰려오는 느낌이다. 마침 오늘 손님도 별로 없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지금 쉬어두는 것이 좋겠지? 저녁 때는 바빠질지도 모르니. "거기 엎드려서 뭐해? 카운터에 뭐라도 묻었어?" "헉!루시아!" 들려온 목소리에 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루시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그녀.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오늘따라 더운 예뻐 보인다. 찰랑거리는 플래티나 블론드와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아아~ 저 눈동자에 입을 맞추고 싶어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매우 졸렸는데, 루시아를 보니 눈이 번쩍 떠진다. "졸고 있었던 거야?" "아, 아니야. 졸기는......그냥 허리 세우고 있기 심심해서 엎드려 있었던 거야. 결코 피곤해서 졸거나 그런 것은 아니야. 존다는 것은 저것들......아니, 애들을 두고 하는 말이야." 내 말에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린 엘프들을 보았다. 벽 쪽에 있는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앉자 귀엽게 졸고있느 라이,루,루비. 루시아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너희들 여기서 자면 어떡해? 언니랑 같이 올라가자. 언니가 재워줄게." 루시아는 졸고 있는 어린 엘프들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밀었다. "우웅~라이 졸려요오." "루비도요." "저도 코~ 자고 싶어요." "그렇게 자면 고개 아프잖아. 올라가서 침대에서 자자. 우리 라이랑 루랑 루비는 착한 엘프지?" 루시아가 그렇게 몇 번 어르고 달래주자 어린 엪프들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루시아는 비몽사몽 상태인 어린 엘프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가게를 나가기 전에 나에게 말했다. "졸지 말고 가게 똑바로 봐." "아, 아니야 나 정말로 안 졸았다니까. 난 결백해."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가게를 나가는 루시아. "......" 그냥 솔직히 시인할 걸 그랬나?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이 사라지고 나니 또 다시 심심하다. 심심해도 그냥 심심한 게 아니라 매우 심심하다. 으, 뭐할거 없나? "야호! 뭐해, 오빠?" "헉쓰!" 갑작스레 튀어나온 영아 때문에 난 깜짝 놀랐다. 언제나처럼 앞이마를 완전히 가린 포니테일 머리를 한 영아는 나를 보며 생글 생글 웃었다. "헤에~ 많이 놀랐나보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아를 향해 소리쳤다. "감히 하늘같은 오빠를 놀라게 한 것도 모자라 비웃기까지 하다니! 이런 버르장머리없는 앞짱구를 봤나!" "쳇! 난 오빠가 너무 심심해하는 것 같아 활력을 불러넣어주려고 그런거라고. 고맙게 생각하지는 못할 망정 왜 큰소리야? 오빠를 얼마나 배은망덕한 인간이라 생각하겠어? 그러니까 빨리 사과해." "........" 판타지 세계에서 돌아온 이후 앞짱구가 더욱 막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여행은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했던가? "짜리몽땅한 키와 빈약한 가슴을 보아하니 별로 성장한 것 같지는 않군. 혹시 간뎅이만 성장한 건가?" 내 말에 영아는 눈을 치켜떴다. "치사해!" "뭐가?" "사람의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놀리는 게 얼마나 치사한 짓인데!" "훗~ 그래도 그게 약점인지는 알긴 아니 보구나." "으윽........" 영아는 이를 갈았지만 반박하지는 못했다. 후후~ 감히 말로써 본좌를 이기려 들다니. 10년...아니, 1만년은 이르다! "그나저나 여기엔 어쩐 일이니, 앞짱구야?" "오빠의 뺀질거리는 얼굴 보러 온 것은 아니야." "뺀질거리는 얼굴? 그 불온전한 발언이 설마 이 오빠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뭐라?" "오빠도 만날 나를 앞ㅉ구라는 불온전한 단어로 부르잖아." "앞짱구를 앞짱구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부르니?" "나도 오빠 얼굴이 뺀질거려서 뺀질이라고 부른는 거야." "........" 그놈의 뺀질이 소리 좀 그만 들어쓰면 좋겠다. 루시아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됐으니까 일 없으면 올라가보렴. 니가 여기 서 있으면 가게 매상이 떨어진단다." 영아는 동그란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최대한 날카롭게 나를 째려보았다. "그 말 무슨 뜻이야, 오빠?" "알아서 해석하렴." "됐어. 오빠랑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획 돌리는 영아. 내 말이 너무 심했나? 하지만 이정도로 기죽을 앞짱구가 아니다. 난 영아를 그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았다.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잇을 만큼 굳세고 강하게 키웠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동생을 강하게 키우기 위한 오빠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거다. 그나저나 앞짱구는 대체 무엇 때문에 가게로 내려온 걸까? 뭐, 보나마나다. 크로니스나 지니, 루를 보러 내려온 것이겠지. "크로니스와 지니는 2층에 있어. 루는 방금 루시아가 데리고 올라갔고. 오는 길에 못만났니?"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니야." "응? 그럼 뭐 때문에 여기까지 행차했니?" 크로니스, 지니 , 루가 아니라면 영아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왔다는 것은 설마....... "헉! 설마 이 오빠에게 품어선 안될 마음을 품은 것은........" 내 말에 영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오늘은 오빠의 그 짜증나는 헛소리를 안 듣나 했는데." "........" 미안하다. 짜증나는 헛소리해서. '일 없으면 오라가 주지 않겠니? 니가 여기서 이러는 것은 엄연한 영업방해란다." "작은어머니께 전화 왔었어." "작은어머니라면.....우리 어머니를 말하는 거니?" 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어너니가 무슨 일로 전화하셨는데?" "나도 몰라. 그냥 오빠랑 여행 잘 다녀왔는지 궁금해 하시던데?" 두 달 정도 걸리는 긴 여행이었기에 난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 여행을 간다고 말씀 드렸다. 물론 판타지 세계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유럽 여행 간다는 정도로만 말씀드렸다. "........." 으음. 그러고 보니 이 세계를 여행한 적은 거의 없군. 유럽 여행은커녕 우리나라 여행도 제대로 못해봤다. 학교 수학여행 때 경주 간 게 전부라고나 할까? 아아~ 남들 다 가는 제주도도 한번 못 가보고, 남들 다 타 본 비행기도 한번 못타봤다. 참고로 나는 여행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부터 전국 여행과 유럽 여행 계획을 세웠다. 정작 한 것은 판타지 세계 여행이였지만 말이다. 판타지 세계를 여행한 후, 나의 계획에는 약간 수정이 가해졌다, 루시아와 결혼해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전군 여행을 떠나기로. 2주년 기념은 중국 여행, 3주년 기념은 일본 여행, 4주년 기념은 남미 여행. 5주년 기념은 호주 여행. 6주년 기념은........ 아무튼 계획은 무지하게 세워 놓았다. 하지만 이 계획들이 실현 되기 위해서는 먼저 루시아와 결혼을 해야 한다. 결혼을 해야 신혼여행을 떠나든, 결혼 기념 여행을 떠나든 할 것 아닌가? 하지만 루시아와의 결혼은 아직도 먼 얘기다. 물론 나야 언제든 오케이다. 루시아만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아니, 지금이라도 당장 결혼 가능하다. 문제는 루시아가 언하지 않는다는 거지만. "......." 흑~ 어째서 날 원하지 않는 거야, 루시아? 난 이렇게 널 원하고 있는데........ 키레아 왕도 결혼 했겠다, 루시아에게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난 키레아 왕이 결혼을 하는 즉시 루시아가 날 받아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날 받아주기는커녕 토스를 한 다음 강스파이크를 날린.....걸은 아니지만, 예전과 별반 다른 것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각방을 쓰는 '단순한 동거인' 으로 지내고 있을 뿐이다. "........" 당장 결혼하는 것이 힘들다면 '복잡한 동거인' 으로라도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 그렇고 그런 동거 관계있지 않은가? 뭐, 그건 그런 동거 관계로 지내다 보면 라이 동생도 생기고, 그러다보면 결혼도 하게 되겠지. 일종의 속도위반이라고나 할까? "그게 다야?" "아니. 오빠 바꿔달라고 하시기에 지금 가게에 있다고 말씀드렸지." "그리고?" "그러자 작은어머니께서 오빠 보고 집으로 전화 달라고 하시던데." "그래?" "응." 생각해보면 집에 전화 안 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다보니 집에 연락하는 것을 깜빡하곤 한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자식이 아무리 커도 무보의 눈에는 어리게만 보이는 법. 말은 안하시지만, 우리 부모님도 나 때문에 걱정이 많으실 것이다. 효도를 하지 못할망정 걱정을 끼쳐 드리다니! 혹시 나는 불효자식? "........" 아아~ 직접 찾아뵙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주 전화는 드렸어야 했거늘. 죄책감이 폭포수처럼 내 가슴을 때린다. 자식이 효도를 하려 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금부터라도 효도를 해야겠다. "알았어. 어머니께는 내가 알아서 전화할게. 용무 끝났으면 그만 올라가 보렴." "싫어, 크로니스 오빠랑 지니 오빠 보고 갈 거야." "........" 결국 영업방해를 하겠다는 거군. 사촌동생만 아니였으면 당장 내쫓았을 텐데. 아아~ 그놈의 핏줄이 무엇인지. 혈연, 지연, 학연으로 불리는 삼대 연줄을 타파해야 대한민국이 선진국가로 나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아를 내쫓아? 하지만 영아가 내는 집세가 한두 푼이 아니다. 게다가 가끔씩 쏘는 것도 무시하지 못한다. 으음. 이 글 완결되기 전에 살림이 좀 나아져야 할 텐데. 두 번에 걸친 장기휴업의 타격이 크긴 하다. 여전히 손님은 많은 편이지만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다. 당연 매출도 줄었다. 이러면 비싼 돈 들여 리모델링한 보람이 없잖아! 그래도 점차 손님이 늘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조만간 예전의 매출을 회복할수 있을 것 같다. 그래봐야 빋 다 갚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어린 엘프들을 다 재웠는지 루시아가 다시 가게로 내려왔다. "아까 영아가 내려오던데 무신 일이야?"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어머니께서 전호가 와서, 그 말 해주러 온 거야." "어머니께 전화가 왔어?" "응. 나 없다고 하니까 나중에 전화 달라고 하시고 끊으셨대." "바쁜 건 알지만 부모님께는 자주 연락드리고 자주 찾아뵙고 그래. 나중에 후회해봐야 소용없으니까." "응.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아아~ 이 얼마나 고운 마음씨란 말인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님을 챙기다니. 그저 감동할 따름이다. 순간, 우리 부모님이 부러워진다. 이런 참한 며느리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외모 예쁘지, 마음씨 곱지, 성격 착하지 .......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는 1등급 며느리다. 사실 효도란 별 다른 게 아니다. 루시아같이 참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효도다. 생각해보라. 내가 루시아와 결혼한다면 우리 부모님게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뭐해? 빨리 집에 전화 드려." "으응. 알았어" 그런 의미에서 당장 결혼하자고 말하려 했거늘. 난 카운텅를 루시아에게 맡기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물론 집에 전화를 하기 위함이다. 우리 집 전화번호가.......몇 번이었지? "........." 이럴 수가! 다른 집 전화번호도 아니고 우리 집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다니! 우째 이런 일이! 으음, 너무 오랫동안 집에 전화를 안 하다보니 전화번호까지 까먹었다. 내가 그 동안 부모님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 역시 난 불효자식? 결국 난 수첩을 뒤져 확인을 한 다음에야 집에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띠리리링! [여보세요?] 어머니 목소리다. 정말 간만에 듣는 듯한 느낌이다. "접니다, 어머니. 히로.......가 아니라 영웅이에요." [영웅이니?] "예. 아까 집에 전화하셨다면서요. 영아가 받았다고 하던데." [그래.] "가게로 전화주시기 그러셨어요?" [됐다. 그보다 여행은 잘 다녀왔니?] "예. 무사히 잘 다녀왔어요. 어미니는 잘 지내고 계세요?" [그래, 니 아버지도 잘있다. 니 형도 필리핀에서 잘 지내고 있고.] "다행이네요. 제가 조만간 한번 찾아뵐게요." [그보다 말이다.......] "예. 말씀하세요" [언제 소개시켜줄 것니?] "예? 뭘 소개시켜줘요?" [그 아가씨 말이다. 너와 동거하고 있는.] "아아~ 루시아를 말씀하시는......허억!" 내가 여자.....그러니까 루시아와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은 비밀이다. 부모님께는 그냥 외국인 친구들과 동거하고 있다고 말씀렸을 뿐이다. 뭐, 특별히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말씀드리기가 좀 그랬을 뿐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동거를 한다고 하면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당연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문제는 나와 루시아가 아직 글허고 그런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 아아~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정말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래. 그 루시아인가 뭔가 하는 아가씨 말이다.] "어머니께서 그걸 어떻게.......?"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다. 뻔하지 않은가? 이런 극비사항을 생각 없이 누설할 만큼 개념 없는 사람은 우리집에 오직 한 명. 내 이 앞짱구를 그냥!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촌동생이니 옥탑방에서 집어 던질 수도 없고.......아주미치겠다. 그냥 눈딱감고 내쫓아? [그래서 언제 소개시켜줄 거니?] "에....그게 그러니까 좀 복잡한 사정이....." [이번 주 일요일로 날 잡아놨으니까 그렇게 알아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영아 얘기를 들으니 이미 깊은 관계인 것 같은데, 하루라도 빨리 만나 봐야지. 넌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였니?]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아직 깊은 사이라고 하기에는 진행 단계가 좀....그리고 특별히 숨기려고 한것은 아니....." [됐으니까 이번주 일요일에 그 아가씨 데리고 집에 들러라. 네 아버지도 그렇게 알고 있으니.] "아니, 그러니까 제가 하려는 말은 아직 때가 이르다는......." [뚜뚜뚜뚜] "........." 그냥 끊으셨군. 난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로 판단하건데 작정을 하셨음이 분명하다. 만약 내가 일요일에 찾아가지 않는다면 가게로 쳐들어 오실지도 모른다.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이가? 내가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전부 영아 때문이다. 그래, 영아가 언흉이었어. 앞짱구를 집에 들인 뒤로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어.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그 동안 참고 참아 왔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크로니스 오빠, 오후에 뭐해요? 일 그만두고 저랑 놀러 가면 안돼요? 제가 마감 끝난 기념으로 한 턱 쏠게요." "........" 크로니스에게 찰싹 달라붙어 끊임없이 영업방해를 하는 영아의 모습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마감이 끝나기 개뿔이! 최모 편집자님의 마감 독촉이 시작된 걸 뻔히 아는데! "앞짱구야. 잠시 이리 와보렴." 크로니스가 본ㄴ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난 조용히 영아를 불러냈다. 하지만 영아는 괘씸하게도 내 말을 가볍게 씹으며 계속해서 크로니스에게 수작을 걸었다. "........" 니가 내 인내심을 테스트 하는구나. 말로 안 되면 실력행사는 하는 수밖에. 난 영아의 왼쪽 귀를 붙잡고 휴게실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영아는 목청껏 소리치며 난리를 피웠다. "아야! 이게 무슨 짓이야, 오빠? 꺄아아! 도와줘요, 크로니스 오빠!" "헛소리 그만 하고 잠시 이 오빠 좀 보자꾸나." 우리 가게 매출 떨어지면 전부 얘 때문이다. 난 휴게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나서야 영앙의 귀를 놓아주었다, 영아는 빨갛게 변한 귀를 붙잡으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그래?" "무슨 일인지 정말 모르겠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겟지만 사랑스런 사촌여동생의 귀를 잡아당긴 것을 정당화시킬 만큼 대단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 "......" 사랑스런 사촌여동생? 사랑스럽기는커녕 웬수같이 지긋지긋하다. 옥탑방에서 집어 던지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좋아. 잘 모르는 듯하니 직접 말해 주도록 하지. 너 우리 어머니께 뭐라고 말씀 드렷니?" "응? 작은어머니께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니가 뭐라고 말을 했으니까, 어머니께서 루시아를 소개시키라고 성화를 부리시는 거 아냐?" "정말? 작은어머니께서 그러셨단 말이야? 잘됐다." "......." 잘돼? 뭐가 잘돼? "너 지금 오빠 놀리니?" "그럼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였는데? 이젠 부모님께 소개시켜 드릴 때도 됐잖아. 오빠랑 루시아 언니가 가벼운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결혼식만 안 올리고, 잠만 같이 안 잔다 뿐이지 사실상 부부나 다름없잖아." "뭐, 그건 그렇지." 나와 루시아의 사이가 좀 애매하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이고, 더 나아가 평생을 함게 할 사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남들에게 아내.......는 좀 무리겠지만, 약혼녀 정도로 소개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으리라.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부모님게 소개시켜드려서 확실히 못을 박으란 말이야." "뭘 못 박아?" "뭐긴 뭐겠어? 루시아 언기가 오빠네 집 며느리라는것을 못 박으라는 거지." "우리 집 며느리라면.......헉!" 듣고 보니 그렇다. 지금처럼 진도가 안 나갈 때는 뭔가 게기가 필요한 법. 혹시 아는가?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하게 될지. 그리고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할 일이다. 다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일찍 왔을 뿐이다. "으음, 하긴 지금쯤이면 소개시켜드릴 때가 되긴 했지. 부모님게 알리고 건전한 이성교제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일 테니까." 참고로 나는 건전한 이성교제보다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선호한다. 기왕이면 19금으로. "내가 다 오빠를 생각해서 작은어머니께 말씀드린 거야. 고맙게 생각해." ".........." 고맙긴 개뿔이. 당장이라도 죄를 물어 쫓아내고 싶다. 죄명은 기밀누설죄. 뭐, 이번만은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집행유예로 끝내 주도록 하자. "됐으니까 올라가서 글이나 쓰렴. 마감도 안 끝낸 주제에 여기서 뭐 하고 있는거니? 너의 원고를 목이 빨져라 기다리고 있는 최모 편집자님이 불쌍하지도 않니?" "응. 안 불쌍해." "........." 이런 작가들 때문에 편집자들 수명이 짧아지는 거다. 뭐, 편집자들 때문에 작가들 수명이 짧아지니 상관없으려나? 저녁식사가 끝나자 루시아는 어린 엘프들과 함께 거실 소파에 앉 아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난 그 주위를서성거렸다. "왜 그러고 있어? 텔레비전 보려면 앉아서 봐." "으응, 알았어." 난 어색하게 루시아의 옆에 앉았다. "아까부터 왜 그래?" "뭐가?" "괜히 안절부절못하잖아." "그, 그런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아, 아니야. 걱정거리는 무슨. 그냥 속이 좀 안 좋을 뿐이야." 루시아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보았다. "얼마나 안 좋은데 그래?" "……." 아앗! 내가 루시아를 걱정하게 만들다니! 걱정스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 난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지금은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루시아는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렸다. "흥! 누가 걱정했다 그래?" "……." 그냥 걱정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생각보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애인을 부모님께 소개하는 것.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조금만 의미를 부여하면 매 우 복잡한 일이 된다. 나야 상관없지만 루시아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계속 말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타이밍을 잡기가 쉽 지 않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래, 용기를 내서 한번 말해보는 거야! "저, 저기. 루시아……."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행복에 젖어있던 루시아는 고개를 돌 려 나를 보았다. "왜?"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그게 뭔데?" "그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 "……." 그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좀 난감한데. 내가 입을 다물자 루시아의 눈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설마 너 또 사고 친 거야?" "헉! 사고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또' 라니?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그럼 바람 핀 거야?" "헉쓰! 바람이라니!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며 쏘아 붙이듯이 말했다. "짐승!" "……." 그러니까 난 짐승이 아니라니까.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엄 연한 인간이야(가끔은 상황에 따라 늑대로 폴리모프 하긴 하지만).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 "……." 결국 말하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난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야, 아까 어머니와 통화를 했는데……." 점점 부풀어 오르는 루시아의 눈동자. 그에 따라 점점 심ㄱ가해지 는 표정. "나보고 너희 부모님을 만나라고?" "으응. 뭐 간단하게 요점만 말하자면 그런 거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으응, 그러게.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루시아의 눈 꼬리가 한순간에 확 치켜 올라갔다. "너 자꾸 그렇게 남 말 하듯 할래?" 난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리가! 나도 지금 엄청 심각해. 그리고 너무 그렇게 부담 가 질 필요 없어." "내가 어떻게 부담을 안 가질 수 있겠어?" "그냥 만나보기만 하는 거라니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아." "아니야. 엄청 단순한 문제야." "넌 어쩜 그렇게 니 생각만 하니? 그런 중요한 문제를 혼자 결정 하면 어쩌자는 거야?" 루시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루시아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 충분히 이해한다. 루시아의 입장에서는 뜬금없 는 이야기이자 부담되는 일일 테니. "어머니께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서 나도 깜짝 놀랐어. 부담 이 되었다면 미안해." 내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자 루시아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아무튼 난 몰라. 니가 알아서 해." "……." 나도 내가 알아서 하고 싶다.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말이다. "언니랑 오빠 싸우는 것 같아." "우리 보고는 싸우지 말라고 해놓구선." 보고 있던 텔레비전 프로가 끝났는지 어린 엘프들은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루시아는 아이들 머리를 매만져주며 말했다. "언니랑 오빠 싸우는 거 아니야." "그치만 방금 언니가 화냈잖아요." "언니가 언제 화냈다 그래? 언니 화 안 냈어." 그렇다. 루시아는 화를 안 냈다. 다만 짜증을 냈을 뿐이다. "언니는 오빠랑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너희들은 텔레비전 보 고 있어. 알았지?" "네에~!"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잠깐 나 좀 봐." "으응." 난 루시아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 루시아는 나에게 쏘아 붙이듯이 말했다. "어쩔 거야?" "뭘 어째?" "너희 부모님 만나는 거 말이야." "만나 주면…… 안 될까?" 루시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돼." "……." 안 되면 말구. ……라면 얼마나 좋겠나? "너무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 말아줘. 매정해 보인단 말이야.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단 말이 야." "그러니까 그게 마음의 준비까지 필요할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 라니까. 그냥 나랑 같이 집으로 가서 우리 부모님을 만나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야. 우리 부모님 만나는 게 그렇게 싫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루시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표정을 보아 고민하는 것이 분명하다. 난 그 옆에 앉아 초조하게 루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시아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려나? 한참을 고민하던 루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 만나면 되잖아." "정말? 정말로 우리 부모님 만나줄 거야?" "왜? 만나지 말까?" "아, 아니. 제발 만나줘." 루시아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꿈치를 두드렸다. 상당히 초조해 보이는 모습. "그런데 꼭 이번 주 일요일에 만나야 하는 거야?" "이번 주 일요일에 너랑 같이 가지 않으면 가게로 쳐들어 오실지 도 몰라. 우리 어머니가 좀 다혈질이시거든." 때문에 어렸을 때 밥주걱으로 무던히도 얻어맞았다. 으음, 생각해보면 그때도 내 암흑기였지. "하아~!" 내가 과거를 회상하며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문을 벌컥 열리 며 어린 엘프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야야" 어린 엘프들은 부딪힌 부분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왜 밀고 그래?" "아니야. 루비가 안 밀었어. 루가 민 거야." "나도 안 밀었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어린 엘프들. 서로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서로를 팔아넘기려 하다니. 게다가 이렇게 넘어진 것을 보아하니 문틈에 귀를 대고 엿들었음 이 분명하다. 감히 오빠와 언니의 밀담을 엿듣다니! 들어도 상관없는 얘기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우리가 그렇고 그런 짓이나, 저렇고 저런 짓을 하고 있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라이, 루, 루비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보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귀엽게 웃어 보였다. "에헤헤~!" "……." 뭐니, 그 부담스런 웃음의 의미는? 루시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희들 정말……." "죄송해요오~!" 난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소리쳤다. "이게 죄송하다고 해서 될 일이야? 니들이 아주 간뎅이가 땡땡하 게 부었구나! 내 당장 빅장 40단 콤보로……."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루시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아이들에게 소리를 치고 그래!" "아, 아니, 난 그냥……." 니가 화난 것 같아 대신 혼내주려 했을 뿐인데…… 흑~ 루시아 는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어린 엘프들은 귀엽게 웃으며 나에게 매달렸다. "헤헤~." "응? 왜 그러니?" 내가 묻자 어린 엘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합창을 했다. "우리도 가고 싶어요오~!" "가고 싶어? 어딜 가고 싶어?" "오빠네 집에요오~." "응? 우리 집에? 니들이 우리 집에 가서 뭐하게……가 아니라, 다 시 생각해보니 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p.155 라이, 루, 루비, 비록 종족이 다르고 나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엄연한 내 자식 들이다. 그리고 내 자식들이면 우리 부모님께는 손자, 손녀가 된다. 어찌 보면 루시아를 소개시키는 것 이상으로 어린 엘프들을 소개 시키는 것이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이런 깜찍한 손자, 손녀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면 우리 부모 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효도란 별 다른 게 아니다. 이런 게 진정한 효도다. 루시아를 소 개시켜드릴 때 어린 엘프들을 같이 소개시켜드린다면 부모님의 기 쁨이 배가 될 것이다. 아니, 배 정도가 아니라 따따따블이 될 것이다. "으음, 역시 아내를 소개시켜드릴 때 자식도 같이 소개시켜드리 는 게 좋겠지?" "누가 니 아내야?" 날카롭게 날 바라보는 루시아. 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잠깐 말이 헛나왔어." 난 라이, 루,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래. 니들도 같이 가자꾸나." "와아아~!" 괜히 좋아하는 어린 엘프 일동. 루시아는 루를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라이와 루비를 양 사이드에 앉혔다. "얘들도 데려 갈 생각이야?" p.156 "응, 안 될 것 없잖아. 애들도 가고 싶어 하고. 이번 기회에 다같 이 우리 부모님께 소개시켜드리고 싶어. 너도 애들 떼어놓고 가기 는 싫을 거 아니야?" 루시아는 애들과 1분 1초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팔불출 엄 마. 당연 애들과 같이 가고 싶어 할 것이다. "라이는 언니랑 같이 가고 싶어요오." "루비도요오." "전 누나랑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요." 어린 엘프들의 부탁을 루시아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언니도 너희들과 떨어져 있기 싫어. 우리 다같이 오빠네 집에 가자. 알았지?" "네에~!" 이리하여 어린 엘프들도 같이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으음, 다 가면 가게는 누구한테 봐 달라고 하지? * * * * 오늘은 일요일. 즐거운 주말. ……이라지만, 난 자영업인 관계로 주말이고 뭐고 없다. 오히려 주말에 더 열심히 일한다. 남들은 주 5일제다 뭐다 해서 놀러 다니기에 바쁜데, 난 일주일 내내 일한다. p.157 아아~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누가 '성실한 시민상' 같은 거 안 주나? 어쨌든 원래대로라면 난 오늘도 열심히 가게에서 일을 해야 한 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일이 있는 관계로 가게 일을 쉬기로 했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닌 루시아와 어린 엘프들을 우리 부모님께 소 개시켜드리는 것. 뭐, 나와 루시아가 일을 쉰다고 해서 가게 문을 닫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요일 하루 매상이 얼만데! 그래서 가게는……. "저만 믿어주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나만 믿어 오빠." ……지니에게 맡기기로 했다. 일손이 모자란 관계로 앞짱구의 도움도 받기로 했다.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말이다. 입만 산 이 둘보다는 아무 말 안 하고 서 있는 크로니스가 훨씬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내가 마음 편히 가게를 비울 수 있는 것도 전 부 크로니스가 있기 때문이다. 뭐, 그건 그렇고……. "이제 그만 가자, 루시아. 지금만 해도 숨이 멎을 정도로 예뻐." "잠깐만 기다려봐." "그 잠깐만이 벌써 한 시간째야." 남자의 외출 준비는 10분이면 끝난다. 씻고 옷만 갈아입으면 끝난다. 씻고 옷만 갈아 입으면 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못하다. 사실 예전부터 매우 궁금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여자들은 외출 준비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것인지.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는데도 도무지 모르겠다. "아까 스타일이 좀더 낫지 않아요, 형부?" "으음. 제가 보기엔 지금이 더 좀더 나아요. 아! 이런 스타일은 어때요?" 인디는 루시아의 머리에 빗지릉ㄹ 몇번 했다. 루시아는 거울을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이 스타일보다는 처음 스타일이 더 나은거 같아요, 형부." "그럼 처음 걸로 다시 해볼게요." "……." 내가 보기엔 전에 거랑, 그 전에 거랑, 그그전에 거랑, 그그그 전에 거랑 전부 똑같아 보인다. 대체 어디가 다른 건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혹시 아는사람? 옷도 입고, 화장도 끝마쳤다. 옷은 고전적이면서도, 수수하면서도, 세련된 개량 한복. 꽃이 수놓아진 은은한 붉은색 치마와 분홍색 저고리가 루시아의 청순한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단정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루시아의 청순한 매력을 더욱 돋보리게 한다. 단정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루시아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하늘나라로 날아갈 것만 같은 선녀의 모습이였다. 동시에 단아한 새색시의 모습이기도 하다. 루시아는 피부가 곱고 선이 뚜렷하기 때문에 화장을 할 필요가 없다. 사족(蛇足)이지만, 괜한 화장은 오히려 예쁜 얼굴을 가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간단한 기초화장만 살짝 했다. 화장을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인디. 지금 입고 있는 한복도 인디가 직접 제작해준 것이다. '첫인상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에요'라며 말이다. 라이와 루비는 머리를 말아 댕기까지 묶었다. 귀엽고 깜찍하기가 하늘을 찌른다. 아아~ 인간이…… 아니, 엘프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걸까? 아버지, 어머니가 이 아이들을 보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너무 귀여운 나머지 경기를 일으키시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할텐데. 그나저나 루시아의 준비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이러다가는 날이 저물어도 출발하지 못할 것 같다. "그냥 가자, 루시아. 정말로 예쁘다니까." 내가 계속 재촉을 하자 루시아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기다려보라고했잖아. 왜 자꾸 재촉하는 건데?" "……." 부부가 어째서 외출 직전에 싸우는지 알 것 같다. 지금은 싸우고 어쩌고 할 때가 아니다. 난 입을 꼭 다물고 조용히 루시아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초조해하는 나와 반대로 루시아는 느긋하기 그지 없었다. "어때, 언니? 괜찮은 걱 같아?"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일루니아 여사님께 물었다. 신문을 보시던 일루니아 여사님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냥 대충하고 가. 잘 보여서 뭐해? 시부모님 만나러 가는것도 아닌데." "……." 시부모님 만나러 가는 거 맞는데. "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언니? 시부모님이라니…… 그럴 리 없잖아."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젖는 루시아. 어째 심하게 당황한다. "그럼 굳이 그렇게 열심히 꾸밀 필요 없잖아." 그렇다. 시부모님을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면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꾸밀 필요가 없다. "그, 그래도 첫 만남인데 잘보여서 나쁠 것 없잖아." 그것도 그렇다. 첫 만남인데 잘 보여서 나쁠 것 없다. "……." 루시아의 진심은 과연 무엇일까? 그나저나 준비는 대체 언제 끝나는거야? 내 가슴이 초조하다못해 타들어가고, 어린 엘프들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하품을 찍찍해댈 때쯤 루시아의 외출 순비는 끝났다. 뒷머리는 하나로 땋아 분홍색 댕기로 붂었고, 옆머리는 핀으로 살짝 고정시켰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했다. 나를 향해 몸을 돌리는 루시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난 심장 박동이 정지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의 모습이 이러할까? 세상에서 루시아만큼 한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는 없을것이다. "어때? 괜찮아 보여? 이상하진 않지?" "응응, 안 이상해. 아니, 너무 예뻐." 이대로 루시아를 모쌈(?)해 둘만의 밀월여행을 떠나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부모님께 루시아를 소개 시켜들려야 하는 중요한 날. 안타깝지만 보쌈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신없이 루시아를 바라보던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잘못하면 늦겠는데. 서두르자. " "잠깐만. 선물은 챙겨야지." " 내가 챙길게. 넌 빨리 외투 입어. 그리고 니들은 그만 일어나렴. 언제까지 잘 생각이니?" 아아~ 정신없다. "잘 다녀오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 제가 없는 동안 가게를 잘 부탁드립니다." "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돌아와서 장부 확인할 겁니다." "단 10원의 오차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 우리 가게 외상 안 받는 것도 아시죠?" "물론입니다." "그럼 믿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었기에 난 루시아와 아이들과 함께 재빨리 2층으로 내려갔다. 인원이 많은 마큼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은 없다. 내 차가 있는데 뭐 하러 다른 설 타고 가겠는가? ……라지만, 요즘은 기름값이 비싸 시동 걸 엄두도 나지 않는다. 으음, 이놈의 유가 고공행진은 언제쯤 끝나려나? 고유가라면 이젠 지긋지긋하다. 난 혼자서 궁시렁거리며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루시아는 내 옆자리에 앉고, 어린 엘프들은 뒷좌석에 동기 종기 모여않았다. "헤에~ 라이는 차타는게 막막좋아." "응. 루비는 이대로 오빠랑 바갓가로 떠나고 싶어." "난 누나랑 떠날래." "……." 바닷가 좋아하시네. 거기까지 가는데 드는 기름값은 니들이 낼래? 난 차를 출발 시켰다. "와아~!" 마이카 뉴렉시스턴이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어린엘프들은 기뻐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 저것들 때문에 신경쓰여 운전을 못하겠다. 루시아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돌려 야단을 쳤다. "위험하니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아." "네에~!" 어린 엘프들은 힘차게 대답을 하고 엉덩이를 시트에 붙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0분도 안돼 다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 그래, 니들은 떠들어라. 난 운전을 할 테니. 난 어린 엘프들을 애써 무시하며 운전에 집중했다. 저번에 사고를 낸 뒤 안전운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은 다시 한번 느꼇다. "좀 빨리 갈수 없어? 이러다가 늦겠아." "……." 누구 때문에 늦는 건데? 루시아는 초조한지 연신 나를 채촉했다. "좀더 밟아봐. 너무 느리잖아." "이 도로는 시속 80킬로미터야. 그 이상 밟으면 과속이야." "됐으니까 좀더 밟아.": "……." 무엇이 그녀을 이렇게 초조하게 만드는걸까> "좀 늦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집에서 기다리실텐데." 루시아는 고개를 새차게 저었다. "안 돼. 첫 만남부터 늦으면 이미지가 안 좋아진단 말이야." "……." 뭐, 그건 그렇다. 첫 인상이 끝 인상 아니겠는가? ……라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아. 첫인상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나 할까? 어쨌든 첫 인상 잘보여서 나쁠 것은 없다. "괜찮아. 니 이미지는 충분히 좋아. 니가 얼마나 예쁜데. 너의 아름다움은……." "됐으니까 밟기나해!" "……예." 루시아의 명령이니 마음껏 밟아주마! 부스터 가동! 엔진 임계점까지 카운트 스타트! ……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이 차에는 부스터는 커명 터보도 안 달려있다. 그래도 기아 5단 넣고 밟으니까 쭉쭉 나가긴 한다. 다행히 정체가 없는 시간이라 도로에는 차가 그리 많이 않았다. 내부순환로를 타자 집까지 금방이였다. 부모님이 사시는 곳이자 내가 예전에 살았던 곳은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내부 순환로를 빠져 나오자 중란천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엣날에만 해도 여름 장마 때만 되면 중랑천이 범람 했다. [-- 책에는 중량천이나 나와있는데 중랑천으로 정정해서 옮깁니다.- 옮긴이 SC.R] 다리와 도로가 전부 물에 잠기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허리까지 오는 물을 제치고 보충수업 받으러 학교에 갔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참고로 그 날은 수업을 받지 못했다. 도로에 가득 찬 물 때문에 선생님들이 출든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물이 불어나 헤엄을 쳐서 돌아가야 했다. 아아~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전부 추억이다. 생가해보면 이 동네를 떠난지도 꽤 오래 되었다. 이 동네에서만 십 몇 년을 살았었는데. 난 옛날 일들을 하나둘씩 떠올리며 집으로 차를 몰았다. 내가 옛날에 살았던 집은 24평짜리 아파트. 좁게 생각하면 좁고, 넓게 생각하면 넓은 집이다. 나는 독립을 하고 형은 유학을 떠난 관계로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살고 계신다. "여기가 니가 살던 동네야?" "응. 이곳에서만 10년 넘게 살았어." 난 적당한 자리르 발견하고 주차를 했다. 그리고 재빨리 내려 조수석의 차문을 열어주었다. 여기에 더해 후시아의 손까지 잡아주었다. 이 정도 매너는 기본이라고 할까? 루시아는 한복 치마를 추스리며 차에서 내렸다. "고마워." "아, 아니야.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한 일도 아닌데, 뭐."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고압다는 말을 하는 게 아리내. ……라지만 난 루시아에게 수백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세상에 태어나 줘서 고마워.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날 사랑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 그나저나 애들은 왜 이렇게 안 내리는 거지? 문 열 줄 모르나? 난 생각을 멈추고 차 뒷문을 열었다. 하지만 어린 엘프들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니? 차 안이 너무 안락해서 내리기 싫은거니?" 가장 오른쪽에 앉아있던 라이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응? 이건 무슨 의미니?" 라이와 루비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두 엘프의 뜨거운 눈빛. 그 준빛은 "우리도 언니처럼 해주세요오~' 라고 말하고 있었아. "……. "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지만, 우리 집 애들은 특히 유별 난 것 같다. 뭘 그렇게 따라하려고 하니? 뭐, 간절히 원하니 그냥 해주도록 하자. 어차피 돈 드는 일도 아니니. 난 라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다소곳한 동작으로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린 루비도 마찬가지였다. 숙녀 놀이라도 하는거냐?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넌 뭐니?" 라이와 루비는 여자니까 그렇다 치자. 그런데 남자인 루는 어째서 손을 내미는 걸까? "저도 해 주세요." "입 다물고 빨리 내리렴." "쳇.~" 루는 툴툴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내가 차 문을 잠그는 사이 루시아는 자신과 아이들의 복장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나저나 정말 너무 귀엽다. 긴 머리를 하나로 땋아 댕기로 묶은 라이와 루비. 깜찍 발랄한 소녀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모소 보여주는 듯하다. 루 역시 귀엽기는 마찬가지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와 곱세 차려입은 한복. 마치 나 어렸을 때 모습을 보는 듯하다. "……." 흠흠, 농담 한번 해 봤다. 우리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루시아는 이상하게 안절 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긴장, 불안, 초조. 보고 있는 내가 가름이 다 두근거릴 지경이다. 난 루시아의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괜찮아, 루시아. 내가 옆에 있잖아. 루시아는 조금 진정이 되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스렇게 웃어줘. 너의 웃음이야말로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니까. 루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손 좀 놔줄래" "……." 이게 아닌데. "좀 아프거든." "……미안." 내가 좀 꽉 잡긴 했다. 땡~ 6층에 도착하니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난 복도 끝에 있는 현관문을 가리켰다. "저기가 우리 집이야." "으응." "빨리 들어가자." "으응." 대답과는 반대로 루시아는 몸을 뒤로 뺏다. 난 수리아 손을 잡고 문 앞으로 이끌었다. "자, 잠깐만." "왜 그래?" 루시아는 심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나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러는데, 다음에 다시 오면 안 될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정말 몸이 안 좋단 말이야.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아. 미안 하지만 다음에 다시 오자." 난 루시아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아파 보이긴 아파 보인다. 얼굴도 창백해 보이고, 심하게 당황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이라도 비추고 가자. 바로 문 앞이잖아." "시, 싫어. 나 정말 아프단 말이야. 집에 갈 거야." "많이 아파? 그럼 안에 들어가서 쉬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탈이 날지도 모르잖아." "됐어. 아무튼 난 집에 갈테니까 그렇게 알아." "잠깐만 기다려봐." "싫다고 했잖아.!" 집으로 돌아가려는 루시아와 그걸 말리는 나. 우리가 계속 실랑이를 벌이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엘프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우에에엥~!" "으아아앙~!" "엉엉~!" 어린 엘프들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루시아는 놀라 물었다. "너희들 왜 울고 그래?" "우엥~우엥~ 오빠랑 언니 막막 싸우고……." "으앙~ 으앙~ 루비는 오빠랑 언니 싸운느거 싫어요오." "엉엉~ 싸우지 마세요." "언니랑 오빠 싸우는거 아니야." "훌쩍~ 그치만……." "정말이야. 그러니까 그만 뚝 그쳐." 토닥토닥. 루시아는 아이들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한 아주머니가 현관문을 열며 고개를 내밀었다. 난 그 아주머니를 보고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 아주머니도 입을 열었다. "어머니!" "영웅아!" 아이들을 달래던 루시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어머니와 루시아의 첫 만남이었다. "이쪽이 루시아에요. 얘들 이름은 제일 오른쪽부터 라이, 루비, 루에요." 난 부모님께 루시아와 아이들을 소개시켜드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까부터 눈을 크게 뜨신채 말씀이 없으셧다. 무언가 크게 놀란 듯한 표정. 그 마음 다 이해한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반만년의 역사 동안 단일민족의 맥을 이어왔다. 그런 만큼 동질성은 강하지만 타민족에 대헤스는 배타적 성향을 띠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후진국인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혼혈아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런 현신에서 내가 외국인 며느리(?)를 데려왔으니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 아직 며느리는 좀 이른가? 어쨋든 부모님을 설득해야 한다. 루시아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얼마나 착하고 아름다운 여자인지,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자세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드리는 게 좋을 듯하다. "요즘은 국제결혼이 인기래요. 농촌 총각들이 필리핀이나 베트남 여성을 신부로 맞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에요. 어떤 마을은 두 쌍 중 한 쌍이 외국인 신부래요. 금발의 아내를 찾아 우크라이나나 슬로바키아 등의 동유럽 국가로 원정 맞선을 떠나는 남자들이 해마다 123퍼센트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고,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외국인 여성과 결혼해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것이 필요……." "이 아가씨가 너와 동거한다는 그 아가씨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답변을 드리자면…… 예. 그 아가씨가 이 아가씨 맞아요." 우리 부모님은 매우 평범하시다. 아버지는 행정 공무원으로 구청과장이시고,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책임지시는 주부시다. 아파트 평수도 평균, 수입도 평균, 자동차도 평균, 집안 분위기도 평균……. 아무튼 모든 것이 평균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뽑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없이 우리집을 뽑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외모 역시 평범하시다. 아버지는 가운데 머리가 벗겨져서 옆머리로 윗머리를 덮으신 50대 만년 과장님이시고, 어머니는 파마머리를 한 정현적인 주부시다. 그래도 오늘은 며느리(?)를 소개 받는 날이기 때문인지 두 분 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으시고 치장을 하셧다. 집안도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셧고. 으음, 옛날에는 매우 좁아보였는데 오늘은 어째 썰렁해 보인다. 역시 형과 내가 빠져나갔기 때문이겠지?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난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잔뜩 얼어있었다. 난 루시아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인사올려." 루시아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으응." 루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부모님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며칠 전부터 연습한 덕분인지 절도 있고 유려한 자세가 나온다. "처음뵙겠습니다. 아이리스 루시아라고 합니다." 아아~ 참하다. 참해도 너무 참하다. 부모님께서 루시아를 선녀로 착각하실까봐 걱정된다. 다음에는 어린 엘프들 차례다. 내가 눈치를 팍팍 주자 꾸벅꾸벅 졸고있던 라이, 루, 루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어린 엘프들은 귀엽고 예쁘게 큰절을 했다. 저게 다 설날에 세뱃돈 타 먹으려고 연습한 결과라고 생각하니 조금 섬뜩하다. 다음 설날에는 판타지 세계로 도피하든가 해야지……. "안녕하세요오~!" 어린 엘프들의 힘찬 인사소리. ……까지는 좋은다, 손은 왜 내미는 거니? 오늘은 설날이 아니란다. "이 아이들은……?" "아! 루시아의 사촌동생 들이에요. 그쪽에 사정이 좀 생겨서 저희가 맡아서 그리고 있어요." "에헤헤~!" 괜스레 웃음을 짓는 어린 에프들. 어쨋든 그 웃음은 우리 부모님을 기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이건 선물이에요. 유럽 여행 도중 산 건데 진짜 귀한 술이에요." 난 미리 챙겨온 술병을 내밀었다. 유럽 여행 도중 샀다는 것은 뻥이지만, 진짜 귀한 술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가져온 술은 엘프의 과실주. 제조 방법은 엘프들만이 알고 있어 오로지 엘프들만이 만들 수 있는 진귀한 술이다. 판타지 세계에서도 구하기 힘든 술이고, 이 세계에서는 아예 구할 수가 없는 술이다. "무슨 수링냐?" 예상대로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바로 반응을 보이셨다. "솨일주에요. 무슨 과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쨋든 입에 맞으실 거예요." 어머니께서는 어느새 어린 엘프들의 머리를 스다듬고 계셨다. 라이, 루, 루비는 마구 애교를 떨어댔다. "헤헤~ 아리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소년이에요. 오빠가 막막 귀엽다 그랬어요." "아니에요. 루비가 더 귀여워요. 오빠는 루비를 더 좋아해요." "너희들 버릇없게 무슨 짓이야?" 루시아는 놀라 아이들을 야단쳤다. 그러자 어머니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셨다. "괜찮아." "그, 그래도 죄송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시아. 어머니는 그런 루시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가씨가 정말로 영웅이 애인이야?" "……." 앗!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지시다니! 과연 루시아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난 간절한 눈으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해줘, 루시아! 제발! 이런 나의 바람이 통했을까? 루시아는 살짝 고래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난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예'라니! 루시아는 스스로 내 애인임을 인정하다니! 내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도 깜짝 놀라셧다. 어머니는 루시아에게 몸을 바짝 붗이시며 추긍하듯 물으셨다. "정말이야? 정말로 아가씨가 영웅이 애인이야?" 루시아는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획돌려 나를 보았다. "잠깐 안방으로 와 보렴." 머머니와 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먼저 안방으로 들어가겼다. 난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아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난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을 거야. 나만 믿고 있어." "으응." 난 이미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루시아는 내 전부이자, 내 운명이다. 그녀가 없으면 나도 없다. 나는 더 이상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부모님이 아무리 반대를 하셔도 소용없다. 집을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다시 생각해보니 집은 이미 나왔다). 어쨌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루시아와 헤어질 수는 없다. 난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며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당당하게 부모님을 보았다. "전 그녀을 사랑합니다. 아무리 우리 사이를 반대하셔도 소용없……." 아버지는 내 마을 자르시며 말씀하셨다. "내일 당장 식 올려라." "예?" 내가 당황하는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어떻게 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했다. 생긴 것도 예쁘고 행동도 아주 예의바르더라."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셨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저 아가씨를 놓치면 평생 수회할 거다." "그야 그렇지요." "니 아버지 말이 맞다. 니 주제에 저런 아가씨를 어떻게 또 만나겠니?" "……" 맞는 말씀이시긴 한데, 아들을 너무 비하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쨋든 두 분 다 루시아를 마음에 들어하시는 눈치다. 하기야 어느 집이 루시아 같은 며느리를 마다하겠는가? 난 그래도 확인차 물어보기로 했다. "루시아가 마음에 드시나요?" "마음에 들다 뿐이겠니? 외국인이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한국말도 아주 잘하더라. 아까 큰절하는 모습을 보니 우리나라 문화도 잘 익힌 듯하고. 게다가 첫인상도 아주 좋고. 영아 말을 들어보니 성격도 좋다며?" "물론이죠. 천사가 따로 없다니까요." "그래, 척 보기에도 그런 거 같더라. 애들을 맡아서 기르고 있다는데, 애는 잘 기르니?" "그럼요. 루시아가 애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잘 기르는데요. 현모양처가 따로 없다니까요." 말이 오갈수록 어머니와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지셨다. "애들도 귀여운 게 참으로 마음에 든다. 라이, 루비, 루라고 했던가?" "예" "내 평생 그렇게 귀여운 아이들은 처음 봤다. 어쩌므 그렇게 귀엽고 깜찍하니? 몰랐으면 인형으로 착각할 뻔했다." "하하~ 걔들이 좀 심하게 귀엽긴 하죠.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엘프…… 가 아니라 아이들이에요.……"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줄을 섰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영아한테 들으니 루마니아인이라며?" "……." 별 걸 다 말했군. 하여튼 앞짱구 입싼 건 알아줘야 한다. "예…… 뭐 그렇죠. 어렸을 때부터 한국을 오가서 그런지 한국말을 한국인처럼 잘해요. 그 애들도 마찬가지이구요, 그 애들 부모님은 지금 일 때문에 나가 계세요. 가까운 친척이 루시아 밖에 없어 루시아가 맡아서 기르고있는 거구요." 아아~ 없는 말 지어내기도 힘들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서 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부모님은 더 이상 캐붇지 않으셧다. 어지간히 루시아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나는 부모님과 얘기를 끝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루시아는 창백한 표정을 한 채 잔뜩 얼어 있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듯했지만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가 가득 묻어났다. 어머니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에게 다가가셨다. "아직 식사 전이지?" "예?예." 뭘 그렇게 당황하는 거야, 루시아? 보는 내가 안타까울 정도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차릴테니."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 식사를 준비하셨다. 루시아는 황급히 일어나 어머니를 쫓아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야. 아가씨는 그냥 앉아있아." "아니에요. 제가 할 테니 어머님은 쉬고 계세요." "……." 어머님? 예상치 못한 루시아의 발언에 나와 부모님은 깜짝 놀랐다. 어머님이라니! 이 무슨 며느리가 시어머님을 부르는 호칭이란 말인가? 정신을 차린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번졌다. 어머니는 싱글벙글 웃음을 지으시며 루시아에게 말했다. "그럼 조금만 도와줘." "예, 어머님." 루시아는 어머니가 식탁을 차리는 것을 도와드렸다. 인디와 함께 식탁을 차린 솜씨가 어디 갈 리 없다. 루시아는 빠르고, 확실하고, 싹싹하게 행동했다. 한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식사를 준비하는 루시아의 모습은 현모양처의 모습 그 자체였다. 아아~ 당장이라도 뒤에서 끌어안고 싶다.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 루시아가 집안일 하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매우 만족하신 듯했다. "젊은 아가씨가 어쩜 이렇게 싹싹하게 일을 잘할까?" '아니에요, 어머님." 루시아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들 있는 집이라면 어느 집이든 간에 루시아를 며느리로 삼고 잎을 것이다. 아들이 없는 집이라면 딸로 삼고 싶을테고. 어쨌든 오늘 점심 메뉴는 갈비찜과 부침개. 명절도 아닌데 많이도 준비하셨다. 어린 엘프들은 양손을 수저와 젓가락을 든 채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 벌써 준비 중이냐? 오빠의 체면도 좀 생각해 주는 게 어떻겠니? "에헤헤~." "……." 입 좀 다물지 않겠니? 그러다 침 흘러내리겠다. 루시아는 부끄런운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난 재빨리 말했다. "아침을 안 먹고 왔더니 애들이 배가 많이 고픈가봐요." 어머니는 납득하신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은 먹고 왔어야지. 한창 자랄 때의 아이들인데 얼마나 배가 고프겠니?" "예." 아침을 안 먹고 왔다는 건 물론 뻥이다. 지구가 멸망할 일 있냐?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어린 에프들 아침은 꼭꼭 챙겨 먹인다. 다만 아무리 먹여봐야 점심때가 되면 전부 소화가 될 뿐이다. 아마 얘들은 자기들의 아침을 먹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 먹은 것은 중요치 않다. 앞으로 먹을 것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 어린 엘프들의 신조라고나 할까? 드디러 기다리고 기다리던 갈비찜과 따뜻한 밥이 식탁 위로 올라왔다. 갈비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어린 에프들은 눈빛을 번뜩 거렸다. 당장이라도 갈비찜을 향해 달려들 태세. 어린 엘프들의 식욕은 무한대이고 갈비찜은 양은 한정되어 있다. 당연 먼저 먹는 자가 임자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들 먹어." 상투적인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린 엘프들은 갈비찜을 향해 달려들……려다가 불끈 쥔 내 주먹을 보고 멈칫했다. 식사 예절 안 지키면 주우거~! ……라는 의미를 담은 내 강렬한 눈빛에 어린 엘프들은 먹고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멀했다. "감사합니다아~." "맛있게 먹을게요오~."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손자(?), 손녀(?)를 다정한 눈길로 보며 말씀하셨다. "식기 전에 어서들 먹어." 어머니께서도 한 마디 하셨다. "배고플 테니까 많이 먹어." "예." 라이가 먼저 갈비찌므 하나를 집어 밥 위에 올렸다. 그리고 조신한 동작으로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루와 루비는 그런 라이의 모습을 보고 어색하게 따라했다. 루시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이렇게 (나름대로) 예의 바르게 먹는 모습을 보니 여느 집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정상적인(?) 아이들로 보인다. "제가 한 잔 올릴게요." 난 선물로 가지고 온 엘프 과일주의 마개를 열었다. 알코올이 섞인 향긋한 과일 냄새가 식탁 가득 퍼진다. 난 잔에 수을 가득 부었다. 아버지께서는 향기에 취하신 듯 벌써부터 군침을 삼키셨다. "너도 한 잔 받아라." 아버지는 내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셨다. 내가 애주가는 아니지만 이 엘프 과일주는 정말 좋아한다. 향긋하고 달콤한 술을 계속 마시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취하게 된다. 엘프 과일주의 또 다른 장점은 숙취가 없다는 것이다. 술에 취해 잠들었다 깨어나도 머리가 아프지 않고 기분이 상쾌하다(물론 지나치게 폭음을 한 경우는 예외다). 아버지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시셨다. 나도 술잔을 기울였다. "이건……." 엘프 과일주를 맛 본 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예상했던 일이다. "이 술 이름이 뭐냐?" 업체(?)에서 만든 술이 아닌 만큼 술병에는 라벨이 붙어있지 않았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여행을 하던 도중 어떤 마을에 들러서 산 것이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거짓말이 아니다. 다만 그 마을에 엘프들이 살고 있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하지만 이어진 내 말에 이내 밝은 표정을 시으셨다. "한 박스 사왔어요. 차 트렁크에 실고 왔으니, 이따 빼드릴게요." 아버지는 좋아하시지만, 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이시다. 뭐, 당연한 건가? 아버지는 루시아에게도 술병을 내미셨다. "아가씨도 찬 잔 받지?" "예, 아버님." 아버님이라니! '어머님'에 이어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나오자 아버지의 입이 귀에 걸렸다. 어머니느 팔꿈치로 아버지의 팔을 치며 말씀하셨다. "아가씨가 뭐예요, 아가씨가? 새아기라고 불러얒." "……." 새아기라니! 충격적인 단어들이 마구마구 쏟아지고 있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정도다. 아버지는 루시아를 '새아기' 라고 부르기 어색한지 괜히 헛기침을 하셨다. "흠흠, 그렇게 불러도 되겠니?" 루시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어버님." "……." 충격이 너무 크다보니 오히려 담담핟. 아버지는 잔에 술을 가득 부었고, 루시아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마셨다. "제가 따라드릴게요." 루시아는 술병을 들어 아버지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싱글벙글. 부모님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은 모른다. 어머니는 루시아의 손을 꼭 붙든 채 놓아주질 않으셨다. "어쩜 이렇게 고울까? 앞으로도 우리 영웅이와 헤어지지 말고 잘지내야해 ." "예, 어머님." "영웅이가 좀 뺀질거리고,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기는 하지만 심성은 착한애야." "……." 자식을 띄워주지는 못할망정 깎아내리시다니! 루시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맞아요, 어머님." "……." 내가 언제 뺀질거리고, 언제 사고를 많이 쳤다고? "영웅이가 집 나간 이후에 걱정을 많았는데 새 아기 널 보니 안심이 되는구나." "외모도 예쁘고, 성격도 착하고, 일도 싹싹하게 잘하고…… 우리 영우이가 여자 복은 타고 났나봐? 호호!/" 계속 되는 칭찬에 루시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면 얼굴만 붉혔다. "그만하세요, 어머니 . 루시아 손 닳겠어요." 내 말에 어머니는 날 흘겨보며 말씀하셨다. "벌써부터 어머니 내 팽개치고 아내부터 챙기는 거니?" "어머니!" 어머니의 농담에 루시아의 얼굴은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마큼 빨개졌고, 내 얼굴 역시 새빨갛게 변했다. "그, 그만 말씀하기고 어서 식사 하게요. 밥 다 식겠어요." 난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숟가락을 들었다. 딸그락! "……."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밥을 뜨려고 했는데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난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밥그릏을 보니 밥풀하나 붙어있지 않고 깨끗하다. "……." 뭐야? 이거 왜 이래? 혹시나 싶어 갈비찜이나 들어있는 냄비를 들여다보니 안이 텅 비어있다. 전이나 부침개등 다른 반찬들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이.. "……." 누구짓인지 알 것 같군. 범인이 누구인지 찾을 필요도 없다. 난 고래를 돌려 어린 엘프들을 보았다. 라이, 루, 루비의 밥그릇은 어느새 깨끗이 비워져있었다. 내가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어린 엘프들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날 보았다. '우리는 아무짓도 안했어요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정이 통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안통한다. 니들이 안 먹었으면 누가 먹었겠니? 혹자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음식을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어린 엘프들을 옹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식선에서 해당되는 얘기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우리집 엘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린 엘프들은 계속해서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했는데 계속해서 이런 표정을 지으니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듯한 그런 리얼한 표정 좀 안 지을 수 없겠니?" 어머니는 깨끗해진 식탁을 보고 잠시 놀라렸다. 어린 엘프들은 여전히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아이들이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었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시던 어머니는 다행히 더 이상 캐붇지 않으셨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나. 더 먹고싶니?" 끄덕끄덕. 어린 엘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아니, 엘프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고 할까? 어머니는 다시 따뜻한 밥을 가득 퍼주었다. "감사히 먹을게요오~!" 마치 처음 점심을 먹는 다는 듯 힘차게 인가를 하고 수저를 드는 어린 엘프들. 두 번째 밥까지 빼앗길 수는 없었기에 나도 재빨리 수저를 들었다. 메인 반찬은 어린 엘프들이 전부 먹어치운 관계로 남은 반찬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인디가 차려준 밥도, 루시아가 차려준 밥도 맛있지만, 그 동안 어머니가 차려준 밥이 그리웠다. 어머니가 차려준 밥에는 맛을 뛰어 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말하라면…… 으음, 소중함과 따스함이라고 할까? 그래서 난 맨밥에 김치를 얹어 매우 맛있게 먹었다. 무사히 식사를 끝마친 후. 나와 루시아와 부모님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아아~ 분위기 좋다. 부모님이 이렇게 기뻐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루시아를 데리고 찾아 뵐 걸 그랬다. 으음, 확실히 그 동안 내가 너무 무심하긴 했지. 앞으로는 루시아와 함께 자구자구 찾아뵈어야지~.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려하자 루시아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할게요, 어머님." "아니다, 새아가. 내가 할 테니 넌 좀더 얘기를 나누렴." "아니에요, 어머님." 잠깐의 실랑이 끝에 결국 어머니와 루시아가 같이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호호~." "호호호~." 뭐가 그렇게 좋은지 부엌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부 갈등 같은 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설거지가 끝나자 어머니는 날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새아기랑 같이 나갔다 오는 게 어떻겠니?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말이야. 아이들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어린 엘프들을 어머니가 맡아 주신다면 마음 편히 단 둘이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뜻에 따르겠슴니다." * * * * 난 먼저 루시아에게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거실과 부엌이야 실컷 봤으니 방만 보여주면 된다. "여기가 내 방이야." 두 평 남짓한 좁은 방은 예전 그대로였다. 문 앞쪽에 책상과 책장이 있고, 그 맞은 편에 침대가 있는. 먼지가 없는 것을 보니 어머니가 자주 청소 하셨음이 분명하다. 과거의 향수가 아련하게 밀려온다. 생각해보면 그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만약 그날 땅에 떨어진 금화를 줍지 않았다면, 그래서 판자티 세계로 가지 않았다면…… 난 이곳에서 계속 평번하게 살았을 것이다. 역시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다. 루시아는 천천히 내 방을 둘러보았다. "다시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 "글쎄." 어느 구석 하나 내 손때가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 모든 것이 기억이고 추억이다. 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든 상관없어. 너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말이야." 난 슬며시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루시아는 천천히 내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 "사랑……." 한창 로맨틱한 분위기가 무르익으려는 찰나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어린 엘프들이 뛰어 들어왔다. 벌컥! "오빠아~!" "누나아~!" "……." 뭐야?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이지 여긴 왜 왔어? "니들이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니?" 나의 물음에 어린 엘프들은 서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힘차게 외쳤다. "그냥 와봤어요오~!" "……." 등장만 화려했지, 실속은 없는 것들 같으니. 난 어린 엘프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오빠랑 언니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그 동안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알았지?" "어디 가시는데요오?" "여기 앞에 잠깐 나갔다 올 거야. 맛있는 거 많이 사올게." "네에~!" 어린 엘프들을 떼어놓은 나는 루시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 동네는 인구 밀집 지역으로 엄청난 숫자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뭐, 서울에 인구밀집 지역이 아닌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어디 갈 건데?" "글쎄." 막상 밖으로 나오니 어디로 가야할지 잘 모르겠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그냥 돌아다니자." 난 먼저 집 뒤에 있는 공원으로 가보았다. 공원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은 없었다. 그냥 나무 좀 있고, 쉴 공간 좀 있고, 산책로 좀 있을 뿐이다. "옛날에 여기서 친구들과 많이 놀았어. 한번은 여기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대학생들과 시비가 붙어서……." 난 과거의 추억들을 하나둘씩 루시아에게 말해주었다. 그다지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루시아는 귀를 기울여 들어주었다. 어느새 우리는 팔짱을 낀 채 걷고 있었다. 한복을 입은 백인 미녀의 모습은 주목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주위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걸었다. 난 루시아를 데리고 동네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상가, 놀이터, 지아철역 등등. 동네가 좁다보니 소개시켜주는 것도 금방이다. 동네 구경을 끝마친 우리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어린 엘프들을 위해 근처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를 잔뜩 구매했다. 진열되어 있는 것들을 몽땅 쓸어왔다고 할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 루시아에게 물었다. "어때?" "뭐가?" "오길 잘한 것 같아?" 루시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루시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두 분 다 좋은신 분같아." "그렇게 생각했다니 다행이다." 내 말에 루시아는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 니가 잘 하란 말이야. 미리미리 효도해.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 루시아의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다. 때문에 효도를 하고싶어도 할 수가 없다. 자식이 효도를 하려 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라는 옛말이 떠오른다. 그 말 그대로다, 나중에 효도하겠다는 생각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나중이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루시아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따. 난 괜히 미안한 감정을 느꼇다. 난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루시아는 별 다른 저항 없이 나에게 몸을 기댔다. 그 순간, 내 머릿곳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혹시 이것은 좋은 기회? 주위의 시선이 많았지만 상관없다. 난 한손으로 루시아의 뺨을 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가져가……는데 갑자기 루시아의 두 손으로 내 가슴을 세차게 밀쳤다. "퍼억!" 루시아는 당황하는 나를 바라보며 혀를 쏙 내밀었다. "역시 넌 짐승이야." "헉!" 잘 나가다가 이게 웬 초 치는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루시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아저씨" "루시아……." 루시아는 살며시 내 품에 안겼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나를 사랑해주고 걱정해주는 가족들이 있는 걸." "……." 가족. 루시아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내가 행복해 하는 것도…… 전부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기에 이렇게 살아갈 수있다. "니 말이 맞아." 난 다시 루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루시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난 조심스럽게 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짧고 달콤한 키스. 내가 입술을 떼자 루시아는 감았던 눈을 떴다. "돌아갈까?" "응." 나와 루시아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집으로 향했다. * * * * "좀더 있다 가면 안 되니?" "시간이 많이 늦었잖아요." "그래도……." "다음에 또 올게요." "맞아요, 어머님. 또 찾아뵐게요." 다음에 또 온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난 트렁크에서 엘프 과일주 한 박스를 꺼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다. 어머니는 루시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셨다. "다음에 꼭 놀러 와야 한다. 맛있는 음식 많이 해놓고 있을 테니까." "예, 어머님. 애들 데리고 꼭 다시 올게요." 루시아도 헤어지기 아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해가 저문 지 오래다. 원래는 점심만 먹고 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만류하시는 바람에 저녁까지 먹었다. 지금 출발해도 밤 늦게나 집에 도착할 것이다. "이만 가 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운전해라." 항상 나를 걱정하시는 부모님. 그 마음은 나와 루시아가 어린 엘프들을 걱정하는 마음과 같을 것이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가슴이 찡해진다. 난 운전석에 올라 탔다. 뒷좌석에 올라 탄 어린 엘프들은 한 일도 없으면서 피곤한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드 미러 너머로 뵈는 부모님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난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내부순환로를 탔다. 정체가 심한 시간은 피했기에 집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게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우리는 자고 있는 어린 엘프들을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어린 엘프들을 침대에 눕히고 몸을 씻고 나자 어느새 한밤중이다. 한복을 잠옷으로 갈아입은 루시아는 힘들다는 듯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앗! 루시아가 힘들어하다니! 난 재빨리 루시아의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시원헤?" "응. 고마워." 난 성심성의껏 루시아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루시아는 피로가 풀리는지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커피 한 잔 마실래?" "응. 타줘." 난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하도 커피를 타다보니 이젠 내 커피 타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루시아를 위해 타는 커피인 만큼 나는 사랑과 정성을 다했다. "설탕은?" "두 스푼."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커피를 마셨다.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갖는 커피 한잔의 여유.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으음, 노곤하군. 루시아는 천천히 음미하듯 커피를 마셨다. 거름종이로 걸러낸 원두커피도 아니고, 그저 그런 인스턴트커피일 뿐이지만 정말 맛있다. 커피는 그 맛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오늘 재밌었지?" "응, 가길 잘한 것 같……." 웃으며 말하던 루시아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응? 왜 그래?" 내가 묻자 루시아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쏘아 붙이듯이 말했다. "내가 너희 부모님을 만났다고 해서 혼자 제 멋대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응? 그게 무슨말……?" "내가 너희 부모님을 찾아뵌 것은 어디까지나 한번 인사드리는게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럼 우리 부모님께 '어머님', '아버님' 이라고 한 건 뭐야?" "그건……." 잠시 당황하는 루시아. 난 기회다 싶어 몰아 붙였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널 '새아기' 라고 부를 때도 좋다고 했잖아." "……." 루시아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난 할 말을 찾지 못해 곤란해 하는 루시아를 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루시아의 눈 꼬리가 화악~하고 치켜 올라갔다. 난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미 화난 상태. "흥!" 콧웃음을 치며 고래를 돌리는 루시아. 얼굴에는 '나 삐졌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루시아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예의 콧웃음과 함께. "흥!" "……." 그렇게 매몰찬 태도를 취하지 말아줘, 루시아. 난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과할게." "됐어. 난 다만 니가 쓸데없는 오해를 하는 게 싫을 뿐이야." "오해라니. 누가 오해를 했다 그래?" 물론 우리 부모님이야 심각한 '오해'를 하고 계실 것이다. 어쩌면 벌써부터 축의금 계산하고 계실지도……. 결혼할 사람들은 생각도 안 하는데 주판부터 튕긴다고나 할까? "……" 흠흠. 뭐 생각도 안 하는 건 아닍. 조만간 정말로 식을 올릴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내가 너희 부모님을 '아버님', '어머님' 이라고 부른 것은 두 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야. 다정하게 나를 대해주시는 모습이 마치 부모님 같았다고나 할까……. 으음, 맞아! 그래서 그렇게 부른 거야. 그러니까 착각이나 오해 같은 건 하지 마. 알았어? 그리고 내가 아침에 좀 꾸민 것은 특별히 너의 부모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 끝까지 속직하지 못하기는. 얼굴을 약간 붉히고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변명을 늘어놓는 루시아. 그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다. 하긴, 이래야 루시아답지. 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계속해서 변명을 늘어놓던 루시아는 제 풀에 지쳐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도 설득력이 없음을 아는지 루시아는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 살며시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다음번에 또 갈 거지?" "뭐, 일단은 약속 했으니까……." 루시아는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난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내게 몸을 기대오는 루시아.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 한동안 침묵이 지속되었다. 잠시 후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정신없는 하루였다. 아침부터 그 난리를 피웠으니 많이 피곤하겠지. 난 잠시 동안 잠든 루시아의 얼굴을 보며 정신없는 하루였다. 아침부터 그 난리를 피웠으니 많이 피곤하겠지. 난 잠시 동안 잠든 루시아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녀. 쪽~! 난 루시아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은 기털처럼 가벼…… 지는 않았지만 매우 가벼웠다. 사람 몸이 아무리 가벼워도 깃털처럼 가볍다는 건 좀 이상하잖아. 사람이 무슨 조류도 아니고……. 으음, 그래도 정말 너무 가볍다. 살 좀 쪄야겠는 걸. 난 루시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으로 향했다. 루시아 방에 있는 넓은 침대에는 라이와 루비가 서로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귀여운 것들. 자는 모습도 어쩜 이렇게 앙증맞을까? 생긴 것도 유아틱한 만큼 자는 모습도 굉장히 유아틱하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있는 것은 무슨 심보니?" 나의 루시아가 자는 데 방해되잖아! 난 라이와 루비를 옆으로 살짝 민 다음 조심스럽게 루시아를 눕혔다. "우웅~ 더 먹고 싶어요오." "더 주세요오." "……." 자면서까지 먹는 꿈을 꾸는 거니? 뉘 집 엘프들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대단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라비와 루비는 옆으로 한바퀴 굴렀다. 참고로 그 옆은 침대의 연장선이 아닌 바닥의 시작이었다. 쿵! "……." 잠버릇이 아무리 심하기로서니 침대에서 떨어지다니.. 이런 엘프들과 함께 자는 루시아가 걱정될 뿐이다. 본인이 좋다니 말릴 수도 없고……. 떨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라이와 루비는 잠에서 깼다. 다행히 엉덩이가 먼저 부딪쳤는지 라이와 루비는 울상을 지으며 엉덩이를 문질렀다. "아야야!" "히잉~아파아." 눈을 뜬 라이와 루비는 날 발견하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앗! 오빠다아~읍~!" 난 번개 같은 동작으로 라이와 루비의 입을 틀어막았다. "쉽! 조용히 해. 언니 깨잖아. 알았지?" 난 주의를 시킨 다음 입을 막은 손을 풀었다. 그러자 두 엘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대답했다. "네에~!" "……." 이런 단순한 것들 같은. 더 떠들면 정말로 루시아가 깰지도 모른다. 난 라이와 루비를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 방을 빠져 나왔다. 거실로 나온 나는 두 엘프를 소파위에 내려놓았다. "니들 다시 안자니?" "라이는 안 잘 거에요오." "루비도요오." "아까 잤더니 안 졸려요오." [--책에는 '안 졸려오요'라고 써있어서 오요를 요오로 정정합니다. 옮긴이- SC.R] "헤헤~." "……." 니들은 안 졸릴지 몰라도 이 오빠는 매우 졸립단다. 왜냐하면 아까 니들이 차에서 실컷 잤을 때 이 오빠는 그 차를 운전했기 때문이지. 두 엘프는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같이 놀아요오~! ……라고 말하는 듯한 두 쌍의 눈동자. 난 '이 오빠가 지금 피곤해서 그러는데 다음에 같이 놀아주면 안되겠니?' 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그래도 같이 놀아요오~'라는 눈빛뿐이었다. 방법이 없단 말인가? "그래. 니들이 좋을 대로 하렴. 단 루시아가 깨지 않게 조용히만 해 주렴." 결국 나는 라이와 루비가 지쳐 잠들 때까지 같이 놀아 주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잠든 두 엘프를 다시 방 안으로 옮겨 눕혀주고 이불까지 덮어주어야 했다. 식구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난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참고로 우리 집은 전 구역이 금연이다. 베란다 역시 마찬가지다. 피다가 루시아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부로 죽음이다. 뭐, 그래도 가끔씩 몰래 몰래 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 역할 이라는 게 쉽지 않다. 하면 할 수록 힘들다고나 할까? 그래도 힘들어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보면 나도 부모가 다 된 것 같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실 것이다. 내가 아이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갖듯 우리 부모님도 내 행동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가지실 것이다. 내가 아이들이 보여주는 작은 정성에 크게 감동받듯 우리부모님도 그러실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란 다 똑같은 것 아니겠는가? 자식이 효도를 하려하지만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子欲靜而風不待] 생각해보니 아까 찾아뵈었을 때 못한 말이 있다. 꼭 해야하는 말이었는데 말이다. 날이 밝는 즉시 집에 전화를 할 것이다. 그리고 아까 하지 못했던, 오래 전부터 하고싶었던 그 말을 할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substory 13 사인회 "오빠아~!" 앗! 이건 라이와 루비가 오빠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아니라 영아가 날 찾는 소리로군. 난 소파에 앉아 신무을 펴들며 말했다. "무슨 일이니, 앞짱구야?" 그러자 내 앞으로 뛰어온 영아는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그 앞짱구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앞짱구를 앞짱구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부르니?" "그럼 내가 오빠를 뺀질이라 부르면 좋겠어?" "헉! 뭐, 뭐라?" 뺀질이라니! 어느 순간부터 내 별명이 된 뺀질이. 그 별명의 근원지는 당연 나의 천적 일루니아 여사님이다. '전설의 용사님', '대마법사님', '위대한 아이언스 공작님' 등등의 훌륭한 별명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뺀질이'라는 별명을 지어 부르다니! 여기에는 본좌를 음해하려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음모가 숨어 있음이 분명하다. 난 신문지를 둘둘 말며 말했다. "생활정보지에서 이 집보다 좋은 집을 발견하기라고 했나보지? 왜? 내일 당장 집 빼려구?" "뭐야, 오빠? 지금 내쫓아내겠다고 협박하는거야?" "내가 쫓아내겠다고 협박하는 게 아니라, 니가 쫓겨나고 싶다고 발악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오빠가 뺀질이 소리를 듣는 거야!" 파악! 난 둘둘 만 신문지로 가차 없이 영아의 머리를 후려쳤다. "저쪽 가서 무릎 꿇고 손들어!" 영아는 두 손으로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말했다. "씨잉~ 집두인이면 세입자한데 이래도 되는거야?" "집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사촌오빠로서 때린 거다. 그런데 무슨일로 이 오빠를 그렇게 애타게 찾았니?" "아! 맞다." 영아는 자리에 앉아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교주님이 보고 계셔 마지막 권 원고가 넘어갔거든. 얼마 후면 책으로 나올 거래." "그래서?" "아까 윤승이 팀장님께 전화가 왔거든." "뭐라고 하셨는데?" "완결 기념으로 출간 일에 맞춰 사인회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어." "뭐? 사인회?" 난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사인회라면 설마 작가나 연예인 등이 자기의 책이나 영화, 음반따위를 홍보하기 위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그런 이벤트를 말하는 거니?" "응. 바로 그런 걸 말하는 거야." "……." 사인회라니!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인회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인기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난 잠시 '앞짱구걸 사인회'를 시뮬레이팅해 보았다. 장소는 커다란 서점. 시간은 일요일 오후 1시. 앞짱구걸은 탁자 앞에 앉아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교주님이 보고 계셔의 작가 앞짱구걸의 사인회'라는 큰 현수막이 걸려있다. 서점에는 온 사람들은 그 현수막을 힐끔힐끔거린다. '저거 지금 뭐하는거야?' '앞짱구걸은 누구래?' '사인회라고 써진 걸 보니 작가인가 본데.' '그냥 가자.' '맞아. 저런 이름도 없는 작가의 사인을 받아서 뭐해?' '그러고 보니 사인 받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저 사람 매우 많이 심심하겠다.' '응. 열라 뻘쭘할 것 같아.' 앞짱구걸 주위에 세찬 바람이 위몰아 친다. 휘이잉~. 한 사간에 가까이 앉아 있었지만, 책을 내밀며 사인해 달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람들은 앞짱구걸을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한다. 결국 뻘쭘한을 견디지 못한 앞짱구걸은 탁자 위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린다. '우아아앙~!' 윤승이 팀장과 최모 편집자는 우는 앞짱구걸을 질질 끌고 서점을 빠져나온다. "뭐, 대략 이렇게 되지 않을까?' 그러자 영아는 버럭 화를 낸다. "뭔 소리야! 내 책이 얼마나 잘 팔리는데!" "뭐, 책 판매량과 작가 인지도가 꼭 비례한다고는 볼 수 없지. 사실 사인회는 내가 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의 사인회. 후후~ 여성 팬들이 떼거지로 몰려올까봐 구렵군." 영아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 보며 말했다. "오빠 헛소리에는 충분히 면역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대 패 주고 싶은 걸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으가봐."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랴?"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내 사인회라면 적어도……." 장소는 커다란 서점. 시간은 일요일 오후 1시. 영아는 탁자 앞에 앉아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교주님이 보고 계셔의 작가 박영아의 사인회' 라는 큰 현수막이 걸려있다. 서점 안은 인산인해다. 100미텨 족히 될 법한 줄이 늘어서 있다. 그 긴 줄을 서점 안에 수용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관계로 줄은 밖에까지 이어져있다. 줄은 선 사람들의 손에는 '질투', '교조님이 보고계셔', '아이미스'가 들려있다. 정각 오후 1시가 되자 사인회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책을 내밀고 영아는 사인을 한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사인은 한사람당 두권씩만 가능하다. 아무리 사인을 해도 줄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해도 끝이없다. 결국 영아는 탈진할 때까지 사인을 하고, 윤승이 팀장과 최모편집자의 부축을 받아 서점을 빠져 나온다. "……이 정도는 되야 않겠어?" "글쎄다. 아무래도 내 시뮬레이팅이 맞는 것 같은데." "아니야. 내 시뮬레이팅이 맞아. 100퍼센트 확실해." "……." 저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자의식 과잉도 정도가 있지! 누가 미쳤다고 앞짱구의 사인을 받고 싶어 하겠는가? "그나저나 사인회라고 열었는데 아무도 안 오면 진짜 쪽 팔리겠다. 그치?" "으응. 그야 뭐……." 영아는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 끝을 흐렸다. "으음, 요즘은 작가 사인이 낙서로 취급되는 세상이라던데. 나중에 헌책방에 팔 때 값이 떨어진다나 뭐라나?" "그, 그런가?" 아무래도 그렇지." "그 말 들으니 어째 엄청 우울해." "신경쓰지마. 그나저나 사인회는 할 생각이야?" "한번 해보려구. 서점쪽에서도 요구가 상당하대. 출판사도 원하는 것 같고." "뭐,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그, 그렇지? 하는게 좋겠지?" "응. 한번 해봐." "진짜?" "사인회 해. 빨리해. 무조건해." 난 열심히 영아를 부추겼다. 그러자 영아는 미심쩍은 눈길로 날 보았다. "왜 오빠가 그렇게 난리야?" "응? 난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 오빠는 그저 이번 기회를 통해 니가 더욱 큰 작가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야. 그 외에 다른 뜻은 조금도 없단다." "정말이야?" "응. 설마 이 오빠를 못 믿는 거니?" 난 최대한 믿음직 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마 지금쯤 내 얼굴에는 '신뢰'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아는 믿지 못하겠다는지 의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난 영아가 고래르 돌려 틈을 타 씨익 웃음을 지었다. 후후~ 앞짱구가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지켜봐주마! 그리고 마음껏 비웃어주마! 난 영아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재빨리 웃음을 지웠다. 영아는 손으로 턱을 괸 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쉽게 결정하기 힘든가 보다. "뭘 그렇게 생각해?' "사인회가 보통 일은 아니잖아." "그렇지. 보통 일으 ㄴ아니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뭐, 요즘 개나 소나 사인회하기도 하더라. 텔레비전에 얼굴 한번만 비추어도 너도 나도 연예인이 될 걸로 착가하는 시대이니. "고민할 필됴 없어. 무조건 해."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뭔데?" "첫째로 내가 사인회를 열만한 자격이 있는 작가인지 잘 모르겠어." "물론 자격 없……지 않아. 너 정도면 충분히 가격있어. 이 오빠가 보증하는 거니 믿어도 좋아." 내가 만날 영아를 앞짱구라 놀리며 깍아 내리기에 여념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아의 작가적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 분야에서 인정 박고, 돈도 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현시대는 전문 인력을 필요로 한다. 이거저거 적당히 잘해봐야 아무런 소용없다. 수능 만점? 좋은 대학? 옛날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좋은 대학 나와백수가 된 대졸 미취업자들이 한둘인가? 중요한 것은 단 한 분야에서라도 스폐셜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영아는 이미 성공을 거우었다. 하지만 영아는 만족하지 않았다. 항상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끈임없이 노력한다(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마감을 지키는 것은 절혀 별개으 ㅣ무제지만)> 영아를 가까이서 지켜본 나로써는 사촌오빠의 입장을 떠나 그런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뭐, 감탄하는 것과 앞짱구라고 놀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고, 사인회의 성공 여부 역시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오빠 말 믿어. 너보다 못한 작가들도 얼마든지 사인회하는데 너라고 못할 게 뭐야? 넌 그래도 베슬트 셀러 작가잖아. 수입도 짭짤한." 그렇다. 영아 수입 엄청 짭짤하다. 소녀 재벌이라 불러도 충분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의미에서 집세를 좀더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둘재는 뭐야?' "둘째는 내 사인과 과연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오빠 발대로 작가 사인이 낙서 취급받는 경우도 있잖아. 그럼 너무 비참할 것같다." "그건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경우지. 그리고 사인의 가치는 사인받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가 아닐까? 어떤 독자는 집에 가자마자 구석에 던져 버릴 수도 있고, 어떤 독자는 소중하게 간직할 수도 있지. 뭐, 어쨋든 사인회까지 찾아와사인을 받으려는 독자는 그만큼 니 사인을 원한다는 뜻 아닐까?" "그건 그래." 영아는 별로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으음, 괜히 매가 다 미안해진다. 비난과 조소보다는 창찬과 격려가 충요하거늘. '칭찬은 라이코스도 날게한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셋째는?" "셋째는 오빠 시뮬레이션처럼 될까봐두려워." "……." 아닌 척했지만, 격국 마음이 쓰이나 보다. 하긴, 내 시뮬레이션 대로 진행 되면 좀 그렇지? 아니, 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인가? "으음, 이 오빠의 시뮬레이션대로는 되지 않을 거라 장담해서 널 안심시켜 주고는 싶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 오빠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관계로……." 내가 말끝을 흐리자 영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잠시 고민하던 영아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결정했어." "진짜? 그럼 사인회 할거야?" "아니. 안 할 거야." "……." 뭐라? 사인회를 안 해? 영아가 사인회를 안 하면 스토리 진행에 큰 지장이 생긴다. 아니, 아예 스토리 진행이 안 된다. 난 스토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설득 작업에 나섰다. "무슨 말이야? 니가 사인회를 안 하면 니 팬들은 어쩌라고? 너의 사인을 애타게 원하는 팬들의 함성이 들리지 않아?' 내 물음에 영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리지 않아." "…….' 이렇게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건 루시아의 주특기인데. "흠흠, 우리 영아가 청력이 안 좋나 보구나. 그러게 이어폰을 꽂고 들을 땐 볼륨을 낮춰 들으라고 했거늘." 잘라 말하니까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들잖아! "그러지 맣고 한번 해 봐. 좋은 경험이 될지 혹시 알아?" "하지만……." "작가에게 경험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사인회는 니가 더 큰 작가로 거득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야. 통과의례라고나 할까?' "그래도……" "자신감을 가져. 아까의 뻔뻔함은 어디로 간 거야?" "몰라. 했다가 망신당하는 것보단 안하는게 나아." 말을 끝낸 영아는 옥탐박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안 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출판사도 원하고, 서점도 원하고, 작가(?)도 원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에요, 히로님?" 영아가 올라간 지 얼마 안 돼 루시아와 인디가 부엌에서 거실로 나왔다. 둘 다 앞치마를 입고 있는 걸로 봐서 요리를 하던 중이었나보다. "앗! 루시아. 부엌에서 뭐하고 있었어?" "쿠키를 굽던 중이었어." "정말?" 히로에게 줄 사랑의 쿠키를 굽던 중이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루시아와 인디의 앞치마에 밀가루 만죽이 묻어 있다. 그리고 고소한 쿠키 냄새가 사정없이 코끝을 자극한다. 아아~ 기대된다. 빨리 '히로에게 줄 사랑의 쿠키'를 먹고 싶다. 내가 기대감을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루시아는 딱 잘라 말했다. "애들 주려고 굽는 거야." "……." 그런 거였나? '히로에게 줄 사랑의 쿠키' 가 아니라 '어린 엘프들에게 줄 사랑의 쿠키'였단 말인가? 뭐, 루시아가 직접 만든 쿠키를 먹을 수만 있다면야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애들 먹고 남으면 줄테니까 큰 기대는 하지 마." "……." 애들 먹고 남으면 준다는 것은……? "뭐야? 결국 안 주겠다는 거잖아!" 어린 엘프들이 먹을 걸 남기길 기대하느니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한테 고개 숙이고 사죄하길 기대하겠다. "알았어. 니 몫은 애들이 먹기 전에 챙겨 놓을게." "정말?" "그래. 됐으니까 무슨 일인지나 말해봐. 부엌에서 들으니 사인회 어쩌구 하던데." "으응. 그게 말이지……." 난 빠르고 간결하게 핵심만 요약하고 압축해서 루시아에게 말해 주었다. 얘기를 다 들은 루시아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결론은 너 때문에 안 한다는 거잖아." "아니, 그게 결론이 아닌데……." 난 화제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그보다 우리 내일 일출이나 보러 동해에……." "내가 한번 말 해볼게." "응? 뭘 말해?" "저도 영아님을 설득해 볼게요, 히로님." "아니, 굳이 설득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루시아와 인디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난 하는 수 없이 따라 올라갔다. 영아는 침대에 몸을 기대고 않아 책을 읽고 읶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덮개를 열고 방에 들어서자 책을 덮고 몸을 이르켰다. "루시아 언니랑 인디 오빠가 어쩐 일이세요?"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꼭 일이 있어야만 오니?" 일 있어서 온 거 맞으면서. 어쨋든 영아는 루시아를 반갑게 맞았다. 으음, 그런데 앉을 자리가 없군. 무너진 책더미와 흩어진 만화책들로 인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앉을 자리가 없다. 어째서 만날 치워도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여기 여자 방 맞아? 뭐, 여자 방이 깨끗할 거란 생각은 남자들의 편견에 불과하다. 지저분하게 사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있으니.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난 재빨리 바닥에 흩어진 책들을 정리했다. 나의 번개 같은 손놀림에 금방 두세 사람 앉을 자리가 생겨났다. 루시아와 인디는 그 자리에 앉았따. "차 좀 타와." "응?차?" 난 다방레지가 아닌데……. "빨리." "으응.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내 역할은 이게 아니거늘. 어째 내가 차 타는 장면이 점점 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기분 탓인가? 영아의 방에 별 게 다 있었다. 커피(헤이즐넛, 카푸치노, 파케오레 등등 종류별로 있다), 아이스티(복숭아맛, 레몬맛, 망고맛 등등 역시 종류별로), 핫초코, 홍차, 녹차, 한차 등등. 밤을 새면서 마시려고 잔뜩 사 놓은 것 같다. 그 동안 커피만 탔으니 간만에 아이스티나 타볼까? 마침 쉐이크컵까지 있다. 난 쉐이크컵 안에 물을 붓고, 아이스티를 넣고, 얼음 몇 조각을 넣은 다음 신나게 흔들었다. 우리는 달고 차가운 아이스티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루시아였다. "영아는 참 대단한 것 같아. 어린 나이에 책까지 쓰고 말이야." "아니에요, 언니. 별 거 아닌 걸요." "으음, 아니까 다행이로군."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루시아는 눈을 확 치켜뜨며 날 노려보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입 다물고 있으라는 제스처. 난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얘기 들었어. 사인회를 한다며?" 영아는 고개를 저었따. "아니에요, 언니. 안 하기로 결정했어요. 윤승이 팀장님과 최모편집자님께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 루시아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안한다는 거야?" 영아는 혀를 살짝 내밀며 귀엽게 웃어보였다. "헤헤~ 그냥 자신이 없어서요. 제가 대단한 작가도 아닌데 사인회는 무슨 사인회에요? 저보다 대단한 작가가 얼마나 많은데……." 영아가 주눅든 모습을 보이니 괜히 내 마음이 불편해진다. 의기소침 앞짱구보다는 차라리 자의식과잉 앞짱구가 보기 좋다.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제까지 조용히 앉아 레몬맛 아이스티를 마시던 인디는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영아님은 충분히 대단해요. 영아님 책을 전부 읽어본 제가 하는 말이니 믿으셔도 좋아요." 인디의 말에 영아는 깜짝 놀랐다. "예? 인디 오빠 설마 제 책을 읽어보신거예요?" "물론이에요. '질투', '교주님이 보고계셔', '아이미스' 전부 읽었ㄴ느걸요." 영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심하게 부끄러워하는 모습. 루시아는 손을 뻗어 영아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나도 영아가 쓴 책 다 읽어봤어." "예? 언니도 읽으셨어요?" 영아가 또 화들짝 놀라자 루시아는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왜? 난 읽으면 안 돼?"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일루니아 언니도 얼마나 재밌게 읽었는데." "맞아요. 일루니아님도 정말 재밌게 읽으셨어요." "일루니아 언니까지요?" 영아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자기 책을 읽어주었다는데 왜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다. 나한데는 잘만 보여주면서 말이다. "영아는 좀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그건 아니야, 루시아. 영아가 여기서 더 자신감을 가지면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이 돼.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겠지? "영아님은 충분히 훌륭한 작가세요. 그러니 주저하지 마시고 사인회 하세요." 인디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영아는 여전히 자신감 없는 표정이었다. 루시아는 영아의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날 위해 사인회를 열어주면 안 되겠니? 영아가 사인회를 열면 내가 처음으로 가서 사인을 받을게." "언니……." "그럼 전 두번째로 사인을 받을게요. 해주실 거죠?" "인디 오빠……." 영아는 눈물을 글썽거렷다. "알았어요. 루시아 언니와 인디 오빠를 위해 한번 해볼게요. 설사 다른 사람이 한 명도 안 와도 루시아 언니와 인디오빠만 와주시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루시아는 울먹거리는 영아를 살짝 안아주었다. "훌쩍~ 고마워요, 언니 오빠." 아아~ 감동적이다. 이런 게 가족애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런 게 가족애가 아니가 무엇이겠는가? 라고 써있어서 맞게 정정합니다. --불량 옮김이SC.R] 마치 한 편의 휴먼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보고 내가 또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그런데 정말로 한 명도 안 오면 진짜 뻘쭘하겠다. 그치?" 찌릿!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차갑고 싸늘한 눈빛. 루시아와 영아라면 몰라도 인디까지 날 노려보다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 * * * 어쨌든 사인회를 하기로 결정했고, 영아는 그 사실을 윤승이 팀장님과 최모 편집자 님께 말씀 드렸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이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막상 사인회를 하려고 보니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사인이 없단 말이지?" "응." "……." 그렇다. 이게 바로 치명적인 문제다. 사인회는 말 그대로 사인을 해주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는 것. 당연 사인회를 하기 위해서는 사인이 있어야 한다. 사인이 있어야 사인을 해줄 것 아닌가? "그냥 또박또박 이름 써주면 안되려나? '앞짱구걸'이라고 말이야." "그럼 폼이 안 나잖아. 그리고 내가 왜 앞짱구걸이야? 내 필명은 샤프걸이란 말이야." "응? 그랬었나?" "자꾸 그러면 나도 오빠를 '뺀질이보이'라 부른다/" "오케이. 그만. 거기까지." 사촌끼리 돕고 살지는 못할망정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 문득 정말로 피가 물보다 진한지 의심스러워진다. 난 어쩔 수 없이 영아의 사인을 제작해주어야 했다. 민주주의사회에서는 개인의 선택원이 매우 중시된다. 그래서 한 열 개 정도만 들어 영아가 직접 선택하게 해주었다. 골라 사인하는 재미라고나 할까? 영아는 그 사인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써보더니 하나를 선택했다. '박영아'라는 한글 이름과 필명인'샤프걸(Sharp Girl)'의 약자인 'SG'를 합쳐서 만든 사인이다. 영아는 그 사인이 마음에 드는지 계속해서 종이에 써보며 연습을 했다. 하지만 역시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어째 사인이 다 제각가이다. 같은 사람이 한 걸로는 안 보이는데." "그래서 연습하고 있잖아." "사인회가 언제지?" "이번 주 일요일 오후 1시 '안기문고' 에서 한대. 이번에 새로 생신 서점인데 엄청 크대." "그래?" 그냥 이름 없는 동네 서점은 아니구? 생각해보면 영아가 큰 서점에서 사인회를 갖는다는 건 말도 안된다. 그냥 일므 없는 동네 서점이라면 모를까. 아니면, 헌책방이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려." "그럼 생각하지 마." 앞짱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배알이 골린다. 흥흥! 사인회라니! 웃시지도 않아.! "너의 작가로서의 능력이 너의 앞짱구를 가려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내 말에 사인 연습을 하던 영아는 눈을 확 치켜떴다. "그게 무슨 뜻이야, 오빠?" "아니, 그냥 그렇다구." 영아는 두 손을 허리에 넞으며 말했다. "오빠의 돈이 오빠의 뺀질거림을 가려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뭐라? 뺀질거림?" 난 영아처럼 눈을 확 치켜뜨며 두손을 허리에 얹었다. "말 다 했니, 앞짱구야?" "아니. 다 안했어, 뺀질이 오빠." 파지직! 나와 영아의 눈 빛이 마주치자 방전형상이 일어났다. [마주치차 라고 써있어서 정정합니다. 뺀질거린 옮긴이 SC.R] 그래도 사촌동생이라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 이젠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방빼!" "못 빼!" "내가 이 집 주인이야!" "집주인이면 세입자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응. 집주인이면 이래도 돼." "난 엄연히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어. 오빠가 이러는 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야." "좋아. 그럼 이 시간 부로 옥탑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치우겠어. 그리고 현관문이랑 엘리베이터의 비밀번호도 몽땅 바꿀 거야." "뭐? 그러는게 어딨어?" "내 집 내 마음대로 한다는데 니가 왜 난리니?" "계약 위반이야!" "응? 내가 기억하기로는 계약서에 사다리 치우면 안 되다는 얘기나 비밀번호를 바꾸면 안 된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으윽……" 영아는 이를 박박 갈았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승리의 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걸로 또 내 승리인다? 감히 하늘 같은 오빨에게 대들다니. 억만년은 이르다! 난 분해하는 영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 오빠가 설마 정말로 그렇게 하기야 하겠니? 그냥 너 하는 거봐서 그렇게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니까 앞으로 집세 꼬박꼬박 잘 내고, 오빠한테 대들지 말고, 오빠 말 잘듣고, 그리고 또…… 으음, 아무튼 오빠한테 잘하려무나." 어쨌든 잠깐의 소동은 일단락되고 영아는 다시 사인 연습에 치중했다. 그런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벨이 울려댔다. 영아는 펜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어요, 최모 편집자님?" "……." 최모편집자님? 설마 또 마감 독촉을 시작하시려나? ……라고 생각했는데, 영아의 표정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예? 인터뷰요?" "……." 응? 인터뷰? "내일이요?" "……." 내일? "평생일보라구요?" "……." 평생일보. 한번 구독하면 평생 구독하게 된다는 국내 3대 메이저 신문이다. "에……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도 바로 답변드리고 싶지만…… 알았어요. 조금 생각해보고 바로 전화드릴게요." 영아는 전화를 끊었다. 난 재빨리 영아에게 물었다. "무슨 전화야?" "최모 편집자 님이야." "그건 나도 알아. 내가 궁금한 건 무슨 얘기를 했냐는 거지." "평생일보에서 내일 인터뷰를 하재." "뭐? 그럼 니가 신문에 나는 거야?" "인터뷰를 하면 나겠지. 지면 하나에 다 써준다는데." "뭐라?" 신문의 지면 하나를 통째로 빌려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지면 하나를 통째로 빌어 광고하는 회사는 대기업과 대현 건설사 정도다. 광고가 그러하니 기사는 말할 것도 없다. "……." 잠깐. 생각해보니 이 경우엔 기사 자체가 광고 아닌가? 당연한 얘기지만, 기사는 정보 전달의 역할만이 아니라 광고의 역할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메이저 신문에는 유독 아파트나 부동산 관련 기사(매우 우호적인 쪽으로)가 많은 것 아니겠는가(메이저 신문사 광고 수입의 대부분이 대형 건설 업체다)? 만약 영아의 인터뷰가 기사가 나간다면, 그 기사를 본 사람들은 영아가 쓴 책에 대해 궁금해 할 테고,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책을 사 볼 테고, 그럼 책 판매량이 올라가게 된다. 게다가 사인회 홍보 효과도 있다.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실린다는 것은 공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뭐, 어떻게 보면 책을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뭐, 어떻게 보면 책을 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공인인 셈이지만). 나름대로 유명세를 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인회도 대성황을 이루게 될 것이다. 책 잘 팔리지, 유명세 타게 되지, 사인회 잘 되지……. 인터뷰의 장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할 거야?" 내 물음에 영아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 얜 만날 모른대. 대체 아는 게 뭐야? 여아는 갈등이 되는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당당하게 말했다. "고민하고 말고 할 게 어딨어?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어디있다고?" "그건 나도 알지만……." "고민할 필요 없어. 무조건 해!" "……" 대답이 없는 영아. 항상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보이더니, 왜 이런 때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왜 그러는데? 뭐가 문제야?" 영아는 소파에 앉았다. 난 그 옆에 바짝 붙어 앉고, 어린 엘프들은 우리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얘들은 대체 언제 나타난 거야?). 이렇게 옆에서 보니 작은 체구가 더 작아 보인다. 20살이나 되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실제로는 중고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갸름한 얼굴,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 , 좁은 어깨, 작은 키……. 타고난 유아체형이라고나 할까? 성격만 좋으면 얘도 귀여운 여동생 타입인데, 그놈의 성격이 문제란 말이야. 여아가 오빠 말 잘듣는 앞짱구라니. 상상이 안 되는군. 으음, 역시 영아는 지금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잘 웃고, 뻔뻔하고, 오빠한테 막막 대드는……. 잠시 후, 영아가 입을 열었다. "난 작가는 글로 말하는 거라 생각해. 내가 누구든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 내가 예쁘든 못 생겼든, 키가 크든 작든, 심지어는 남자든 여자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글을 쓰느냐야." "으음, 좀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는 그 자신이 인기에 대상이 된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이 인기 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책(또는 책 속의 주인공)이 인기의 대상이 된다. 독자 입장에서야 책만 재밌으면 됐지 작가가 누구든 상관없지 않은가? "그래서 독자들 앞에 나서는 게 썩 내키지 않아. 어떤 독자는 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텐데, 직접 날 보고 실망이라도 하면 어떻갷? 그래서 내가 쓴 책마저 싫어하게 된다면? 그러느니 차라리 계속 책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으음……." 내가 작가가 아닌지라 영아의 생각을 100프로 이해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난 영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마. 단순하게 생각해, 단순하게. 널 보고 실망을 하든 기뻐하든, 그건 니가 결정한 문제가 아니라 독자들이 결정할 문제야. 거기까진 니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넌 그냥 니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면 돼. 박영아라는 너의 본 모습을 말이야. 그걸로 충분해." "오빠……." 영아는 날 보며 웃음을 지었다. 매우 감동 받은 표정. 영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오빠. 한번 해볼게. 나 인터뷰 할꺼야." "그래, 잘 생각했어. 참고로 창작 생활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무조검 이 오빠라고 말해야 돼. 누구를 가장 존경하냐고 물어도 마찬가지고. 아무튼 좋은 질문이면 무조건 이 오빠라고 대답하려무나. 그리고 책 잘 팔리면 집세 좀 팍팍내고." 토닥토닥~. 난 다정하게 영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린 엘프들은 가만히 앉아 보고 있기 뻘쭘했는지 박수를 쳤다. 짝짝짝~! "……." 뭐야? 박수는 왜 치는 건데? 어쨌든 이걸로 인터뷰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사실 영아가 인터뷰를 하든 말든 나랑은 별 상관이 없다. 집세를 더 낼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열렬하게 나선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인터뷰할 때 '라이의 집' 얘기를 꼭 해야 돼. 위치랑 가게 소개까지 자세히. 알았지?" ……가게 홍보 때문이다. 비록 간접광고긴 하지만 공짜로 광고 할 수 있는 기회(그것도 메이저 신문에)가 어디 흔한가? "꼭 해야 돼. 안 하면 안돼. 알았지?" 영아는 내 품에서 벗어나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았따. 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응? 왜그러니?" "됐어. 오빠랑 얘기한 내가 바보지." "맞아. 니가 바보야." "오빠!" "아! 그러고 너의 본 모습을 보여주라고 했다고 해서 앞짱구까지 보여주면 안 돼. 넌 지금처럼 앞머리로 이마를 가리고 있는게 그나마 보기 좋아. 알았지?" "……." * * * * 인터뷰는 책상자 출판사 근처에서 하기로 했다. 난 영아와 함꼐 집을 나겄다. "너 인터뷰하는데 왜 내가 따라가야 하는 거니?" "그냥. 나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 "이 오빠도 때론 쉬고싶단다." "항상 쉬면서 뭘 그래?" "다름 사람이라면 모를까 만날 마감 펑크 내는 너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참 어색하구나." "오빠!" "소리 지르지 마렴. 운전하는 데 방해 된단다." 여아가 옆에서 열심히 궁시렁거렸음에도 불구하고 난 침착하게 차를 몰았다. 영아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은 캐주얼한 차림이다. 본인은 정장 입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워낙 어려보여 정장이 잘 어울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고생이 여대생인 척 차려입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귀걸이도 끼고 립글로스도 바르니 제법 예뻐 보인다. 머리는 여전히 높게 올려 묶은 포니테일. 촘촘한 앞머리는 이마를 완전히 가리고 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먼저 온 최모 편집자님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 우리는 악수를 나우었다. 최모 편집자님은 이어 영아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다행히 지금은 영아가 마감을 펑크 낸 게 없는지라 분우기가 화기애애했다 (마감 독촉할 때를 제외하면 최모 편집자님도 부드러운 남자다. 문제는 마감 독촉 안하는 때가 거의 없다는 거지만). "오늘 인터뷰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죠?" "예. 알고 있어요." "날씨가 쌀쌀하네요. 들어가서 기다리지요." 우리는 '커피&케이크(Coffee&Cake)' 라는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색 원목과 스테인리스로 인테리어 된 커피숍에선 각종 커피와 수십 종의 케이크를 팔고 있었다.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며, 케이크를 먹는 연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 솔로들이 올만한 곳은 못 되는군. 여긴 커플 소굴이잖아! 나도 커플이긴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정말 싫다. 염장질도 도가 지나치면 범죄라고나 할까?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최모 편집자님은 앉자마자 안경을 한번 매만지시더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따. 다행히 이 커피숍은 금연이 아니다. "같이 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난 최모 편집자님이 내미신 담배를 받아들었다. 최모 편집자님은 친절하게 불까지 붙여주셨다. 약속 시간 까지는 아직도 30분이나 나았다. 너무 일찍 왔나? 우리는 먼저 커피를 주문해 마셨다. 최모 편집자님은 우리에게 출판계 뉴스나 동향을 들려주었다. 나야 어차피 관련 없는 사람이니 건성으로 대충대충 흘려 들었지만, 매우 관련 있는 사람인 영아는 주의깊게 새겨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지요?" 한창 얘기 중에 한 여성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청바지에 니트를 입고 짧은 머리를 질끈 동여맨 20대 중반의 여성. 갸름한 얼굴에는 무테안경을 꼈고, 어깨에는 커다란 더블백을 매고 있었다. "누구신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최모 편집자 님이 일어나셔서 인사를 했다. "어제 통화하셨던 평생일보 문화부 기자 김혜정 양이신가요?" "맞아요. 혹시 최모 편집자님이신가요?" "예. 반갑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그녀는 우리를 둘러보았다. 나와영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박영아님 이신가요?" "예에…… 제가 박영아이긴 한데요……." "반가워요. 전 평생일보 문화부 기자 김혜정이에요." 그녀는 털털한 미소를 지으면 영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아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 한다는 기자가 여자인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젊은 줄도 몰랐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제법 예쁘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 상큼한 느낌을 준다. 활달해 보기고 소탈해 보이는 게 매력이라고나 할까? "저, 저도 반가워요." 영아는 잔뜩 긴장한 듯 말까지 더듬었다. 그녀는 날 보더니 최모 편집자님에게 물었다. "이분은……?" 드디어 내 소개를 할 차례인가? 난 센스 있게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영아의 사촌오빠인……." "박영웅님이십니다." "……박영우님…… 응?" 난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 앞에는 금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끝내주게 잘생긴얼굴과 왼쪽 눈에 낀 외눈안경이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 주는 듯했다. 그는 바로……. "사일런스 지니?" "그렇습니다." "헉! 니가 어떻게 여길?" 지니는 김혜정 기자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두르며 말했다. "혜정님과 데이트를 하다 이곳까지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 뭐야? 또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야? "여기서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 모르긴 개뿔이 …… 다 알고 있었으변서. "이런 우련이라니. 절말 놀랍습니다." "……." 우연 좋아하시네. 필연이겠지.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과 저는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인연 같은 소리 하시네. "예를 들어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든가……." "됐으니까 요즘이 뭐예요?" 내가 퉁명스럽게 묻자 지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 그럼 말을 말든가. 지금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은 나, 영아, 최모편집자님, 김혜정기자, 지니 이렇게 다섯 명. 지니와 김혜정 기자는 누가 요즘 교제하는 사이 아니랄까봐 찰싹 달라 붙어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때문에 영아는 아까부터 울상이었다. "이분은 박영웅님으로 제가 사는 나라의 이름으로는 '아이언스 히러'입니다. 전설의 영웅이라는 뜻이 담겨있지요." "……." 그런 뜻 안 담겨 있거든 뭐, 지니가 아주 없는 말은 한 것은 아니다. 히로(Hiro) 라는 이름은 히어로(Hero)라는 단어를 줄여 만든 것이니.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정말요? 지니님께서 존경할 정로라면 대체……?" "저 같은 것은 감히 발뒤꿈치에도 따를 수 없느 ㄴ만큼 위대한 분이십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은 이 시대의 최고의 학자이자, 현자이자, 철학자이자, 무도가이자, 예술가입니다. 저는 아이언스 공작님과 비교하는 것은 태양 앞에서 반딧불의 밝기를 논하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지니의 화려한 소개에 김혜정 기자는 놀라 입을 버렸다. 이래서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 하고, 뻥도 정도껏 까야하고, 구라도 정도껏 쳐야 한다. 뭐, 전부 거짓말 (또는 뻥, 혹은 구라)은 아니다. 내가 위대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영아 인터뷰 때문에 모인 것 아니었나요? 왜 자꾸 얘기가 덕담쪽으로 흐르는 건지……?" 정작 주인공인 영아는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상태였다. 자신을 인터뷰하려는 기자가 지니의 '요즘 교제하는 여성' 이라는 사실이 꽤나 충격적인가 보다. 뭐,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런거다. 잘생기면 얼굴 값하는 게 당연하지(물론 나처럼 잘생긴 얼굴을 지니고도 일편단심 한 여자만 바라보는 남자도 있다). "아! 죄송해요." 내 말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김혜정 기자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그것은 노트북과 영아가 쓴 소설인 '질투'. 그녀의 노트붕을 켠 다음 책을 영아에게 내밀었다. "먼저 사인을 해주시지 않겠어요? 저도 박영아 작가님 팬이거든요." "……예." 영아는 팽르 꺼내 책의 첫장에 사인을 해주었다. 어제 손이 부르트도록 연습한 그 사인이다. 그런데 그 사인을 연적(戀敵)에게 처음으로 해줄 줄이야……. "혹시 좋아하는 작가 있으신가요?" 김혜정 작가는 바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대신 관심을 이끌어 낼만한 질문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만약 김혜정 기자가 평번한 기자였다면, 영아는 쉴 새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떠들어 댔을 것이다. 하지만 김혜정 기자는 평범한 기자가 아닌 지니가 요즘 교제하는 여성. 다시 말해 연적이다(영아 본인 생각으로는 그렇다.) 영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없어요." 김혜정 기자는 노련한 기자답게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으음, 그럼……." "좋아하는 작가는 없지만, 좋아하는 살마은 있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 "지니 오빠에요." "예? 지니…… 오빠요?" 김혜정 기자는 놀란 눈으로 영아를 보았다. 나와 지니가 아는 사이라는 건 알았어도 영아와 지니가 아는 사이라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다. "두 분이 아는 사이셨어요?" 영아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지니오빠랑 저는 같이 살고 있는걸요." "같이…… 살아요?" 영아는 더욱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명 동거라고 하지요. 지니 오빠와 저는 동거하는 사이에요." "……."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마는……. 이대로 가면 인터뷰고 뭐고 없겠군. 최모 편집자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영아에게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한번 막 나가기 시작한 앞짱구를 멈출 수 없었다. 영아는 이제 아예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큰 충격에 한동안 말을 못하던 김혜정 기자는 정신을 차리고 지니에게 물었다. "사실인가요?" 거짓이라고 해! 지니가 부정해야 그나마 상황이 수습 될 수 있다. 난 지니의 지성을 믿었다. 지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입니다." "……." 그래, 널 믿은 내가 바보다. 상황은 수습하기는커녕 더 키운 지니. 영아는 의기 양양하게 말했다. "들었죠? 오빠와 저는 이런 사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오빠를 포기하세요! 오빠에게 있어서 당신이란 여자는 한순간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해요!" "……." 갈 데까지 갔군. 최모 편집자님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몸을 뒤로 기댔고, 김혜정 기자는 영아를 마주 조려보았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어요. 전 남자의 과거에 신경쓰지 않아요. 중요한 건 지금 지니님의 애인이 저라는 사실이에요. 지니님에게 떨어져야하는 건 당신이에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영아와 김혜정 기자는 뵈는 게 없는지 목청껏 소리치며 싸워댔다. 덕분에 커피숍 안에 있던 연인들은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다. 난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정작 이런 상황을 만든 지니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와 블루베리 쇼트케이크가 제법 잘 어울리는 군요." …… 이딴 소리나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냥 묻어버릴까? "날씨가 참 좋지 않습니까?" "좋긴 개뿔이……." 난 주르륵 주르륵 내리는 소나기를 보며 지니의 정신 상테에 대해 심각한 고찰을 해보았따. 결국 인터뷰는 엉망이 되고 김혜정 기자는 자리를 떴다(라기보다 지니가 먼저 돌려보냈다. 때문에 영아는 자신의 판정승한 걸로 착각하는 중이다). 최모 편집자님은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출판사로 돌아갔다. 영아는 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니에게 매달렸다. 그 모습이 마치 라이레얼에게 매달려 있는 카르의 모습을 연상 시킨다. "맞아요, 오빠. 오늘 날씨 참 좋은 것 같아요. 데이트하기 딱 좋은 날씨에요." "……" 영아가 점점 광녀(狂女)가 되어가는 것 같아 오빠로서 걱정이 많다. 지니는 날 보며 말했습니다. "2차는 어디로 가실 겁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니 좋을 대로 하세요…… 가 아니잖아!" 난 지니를 보며 소리쳤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너 때문에 인터뷰 엉망이 됐잖아! 그게 얼마짜리 인터뷰인지 알기나해? 메이저 신문에 인터뷰 한번 실리면 책이 얼마나 잘 팔리는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오직 하나. 앞짱구의 앞이리 걱정되기 때문……이 아니라, 라이의 집 간접광고를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짜로 광고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괜찮아, 오빠. 책 좀 안팔려도 상관없어. 난 책 판매량보다 지니오빠가 더 소중해." "……" 넌 괜찮을지 몰라도 이 오빠는 안 괜찮단다. 그리고 이 오빠는 지니보다 간접광고가 백배는 더 소중하단다. "걱정 마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 걱정 좀 항 하게 해봐라. 너 때문에 이렇게 걱정하는 거잖아! 아아~ 짜증이 폭풍처럼 미렬온다. 어째서 우리집에는 정상인(나와 루시아 빼고 )이 없는 거지? "……." 다시 생각해보니 인간도 별로 없군. "이 근처에 괜찮은 꼬치구이집이 하나 있습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이런 날씨에 즈릭기 괜찮은 곳입니다." "니 좋을 대로 하세요." 비도 주르륵 내리고, 기분도 별로다. 이런 날에 뜨끈한 꼬치구이와 차가운 소주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영아는 지니를 따라가며 나에게 사정없이 눈피를 퍼부었다.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 오빠?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시지?" '언제까지 나와 지니 오빠 사이를 방해할 생각이야?' '당장 돌아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오빠를 오빠라 생각하지 않겠어.' 난 그 눈빛들을 간단히 무시했다. '싫어~.' 빠직! 훗~ 지가 화 내봐야 어쩔 건데? 난 영아가 혈관 마크가 새겨진 주먹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잘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왜 주먹을 들어올리고 그러니? 설마 그 주먹으로 이 오빠를 때릴 생각이니?" 내 말에 앞서 가던 지니는 뒤로 돌아보았고, 영아는 재빨리 주먹을 뒤로 숨기며 웃음을 지었다. "헤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오빠는 농담이 너무 심하다니까. 그쵸, 지니 오빠?" "……" 영아도 여자긴 여자인가 보다. 이렇게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는 걸 보니 말이다. 어쨋든 우리는 지니가 잘 아는 꼬치구이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바 형태의 주방에서는 각종 꼬치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그리고 이 꼬치구이 전문점의 주인이자 주방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20대 초반의 미녀였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는 지니를 아는체 했다. "……." 이젠 지겹지도 않군 * * * *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영어의 사인회 날이 돌아왔다. 그래도 생애 첫 사인회인 만큼 그냥 갈 수 없다. 영아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열심히 꾸몄다. 코디는 루시아가, 화장은 인디가 담당했다. 둘의 노력 덕분인지 영아는 제법 예쁜 모습이 되었다. "짠! 어때, 오빠?" 헐렁한 구제 청바지에 검은색 스웨터, 그 위에 흰색 파카를 입은 영아는 내 앞에서 한 바퀴 돌아보였다. 귀에는 금색 링을 끼고, 복에는 투박해 보이는 힙합 목걸이를 매고 있다. 그리고 왼쪽 볼에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팬시 반창고를 붙였다. 개구쟁이 소녀 같은 모습. 난 영아를 한번 훑어본 다음 감상을 말해주었다. "여자처럼 꾸며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았는지 일찌감치 포기하고 귀여운 컨셉으로 방향을 돌렸군." 뜨끔! 영아는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 상관 없잖아." "그런데 별로 귀엽지도 않군. 치명적인 걸." "오빠!" "알았어. 귀엽다고 해둘게." "우앙~ 루시아 언니이~ 인디 오빠아~." 루시아와 인디는 울상을 짓는 영아를 달래주었다. "히로가 원래 여자 보는 눈이 없어. 왜냐하면 히로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거든. 짐승의 말은 조금도 들을 가치가 없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돼." "히로님은 솔직하지 못하세요. 그냥 솔직히 예쁘다고 말씀하시면 될 텐데." "충분히 예쁘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맞아요. 영아님은 정말 예쁘세요." 뭐, 일단은 귀엽다고 해두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요." "그래. 몇 명 안 올 걸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릴만도 하겠지." "히로!" "알았어. 더이상 말 안 할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게." 난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영아의 얼굴은 파랗게 질린 뒤였다. 루시아는 당황하는 영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손으로 앞 머리카락을 헤친다음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쪽~. 루시아는 다정하게 영아를 안아주었따.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언니……." 영아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루시아를 보았다. "고마워요, 언니." 인원은 많고 갈 길은 멀었기에 우리는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난 시동을 걸기 전에 다시 한번 확인했다. "기름값은 니가 내는 거다." "알았어. 만땅으로 채워줄 테니까 빨리 가기나 해." 확인을 받은 나는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사인회에 가는 인원은 나와 영아, 인디, 루시아 이렇게 네 명이다. 안기문고까지의 거리는 대략 한 시간 정도, 지금이 11시이고 사인회가 1시이니 시간은 충분하다. 그런데 안기문고 근처까지 오자 갑자기 길이 막히기 시작했따. "뭐해, 오빠? 이러다가 늦겠어." "이 오빠도 빨리 가고싶은 마음뿐이란다. 하지만 빨리 가고싶다고 해서 앞에 있는 차들을 깔아 뭉게고 갈 수는 없지 않겠니? 이 차가 탱크도 아니고 말이야." 난 길을 막고 있는 수 많은 차들을 보며 말했따. "으음, 역시 우리나라는 교통난이 심각해. 땅덩이도 좁고 도로도 좁은데 개나 소나 차를 몰고 다니니 항상 길이 막힐 수밖에. 대중 교통은 폼인 줄 아나?" 뭐, 내가 이런 말할 입장은 아니다. 대한민국 교통난 해소를 위해 폐차할 생각은 없으니. "됐으니까 빨리 갈 방법이나 생각해 봐."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으니까 기다려 봐. 정 안 되면 마법으로 라도 이동시켜 줄 테니/" 그 순간, 영아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아는 재빨리 핸드폰을 받았따. [어디 계시는 겁니까아~!] "……." 최모 편집자 님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어지간히 급하셨나 보다. "죄송해요, 최모 편집자님." [죄송하면 다입니까아~!] "길이 좀 막혀서……." [길이 좀 막히면 다냔 말입니다아~!] "……." 아예 공개 방송을 해라.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아! 저기 보이는 것 같아요." 영아는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앞을 보았다. 내 눈에도 '안기문고'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그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 부근의 쿄통이 막힌 것과 저 줄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책 바겐세일이라도 하나? 누구누구 전집 반값 세일이라든지……." 나는 재빨리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켰다. "먼저 가 있어." "응. 알았어." 난 영아를 데리고 먼저 차에서 내려 안기문고로 뛰어갔다. 안기문고 정문에는 최모 편집자님과 윤승이 팀장님이 대기중이었다. "빨리 오세요. 빨리." 최모 편집자님과 윤승이 팀장님은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난 시계를 보았다. 12시 58분. 1시에 사인회ㅣ 시작이니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나와 영아는 최모 편집자 님과 윤승이 팀장님의 안내에 따라 열심이 뛰었다. "헥헥~ 나 더는 못 뛰겠어." 체력이 약한 영아는 금방 지쳤다. 난 영아를 업고 뛰다시피 해서 간신히 사인회 장소에 도착했다. 안기 분고는 지하 1층 지상 1층 해서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사인회 장소는 지상 1층 중앙이었다. 그곳에는 사인회를 위한 탁자와 '교주님이 보고계셔 완결 기념 작가 사인회'라는 현수막, 그리고 영아가 쓴 책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체 뭐지?" 난 서점 안에 우글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경악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영아가 쓴 책을 손에 든 채 줄을 서 있었다. 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입구까지 늘어선 것을 보니 줄은 밖에까지 이어져 있음이 분명했다. 때문에 서점안은 매우 혼잡스러웠고, 서점 직원들은 사람들을 통제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설마 이 사람들이 다 니 사인을 받으러 온 건 아니겠지?" "그, 글쎄." 이런 상황은 영아 본인도 예상치 못했는지 입을 쩍 벌린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목했다. 난 그런 영아를 탁자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여자애는 누구야?" "설마 샤프걸님?" "저 여자애가 박영아 작가란 말이야?>" "그런 것 같은데." 영아는 자신의 몽타주(?)를 공개한 적이 한번도 없다. 즉, 영아는 지금 처음으로 독자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영아의 너무 어린 모습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영아의 팬들(영아의 사인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니 영아의 팬 맞겠지?)은 주로 여고생이나 여대생들이었고, 여중생이나 직장 여성도 꽤 많았다. 그리고 아줌마들이나 남학생들도 보였고, 매우 드물게 정장을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아저씨도 보였다. "……." 저 아저씨 취향이 독특한 걸까, 아니면 딸을 위해 사인 받으러 온 걸까? 상상을 초월한 사람들의 숫자에 영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얼굴만 붉힌 채 우물쭈물거리는 앞짱구걸.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말 좀 해! 그러는 사이 루시아와 인디가 사인회장에 도착했다. 둘은 영아에게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한번 얼어 붙은 영아는 녹을 줄을 몰랐다. 내가 영아를 녹일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데, 한 남자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아 왔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새치기를 해 탁자 앞까지 온 남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책의 제목은 '교주님이 보고 계셔'. 그리고 그 남자의 정체는 사일런스 지니. "지니 오빠……." 영아는 놀란 눈으로 지니를 보았따. 지니는 영아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사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예." 영아는 자리에 앉아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사인이 끝나자 지니는 책을 집어 들었따. 그리고 영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영아님을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영아님이라면 분명 잘하실 겁니다." "……." 그건 그렇다 치고 니가 여긴 어쩐 일이니? 가게는 어쩌고? "힘내, 영아야!" "힘내세요, 영아님!" 여기에 루시아와 인디의 응원까지 더해지자 영아는 생기를 되찾았다. 영아는 자리에 일어나 줄을 선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숙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박영아라고 해요. 필명은 샤프걸이구요. 그리고…… 으음, 아무튼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하루 열심히 할게요." 뭘 열심히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아는 원기충전 상태였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영아에게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루시아와 인디는 줄의 맨 앞에 섰다. 루시아는 지니에게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다. "내가 제일 먼저 사인 받기로 했는데, 새치기 하면 어떡해?" 지니는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 전혀 죄송한 표정이 아닌데. "이렇게 와주셔서 고마워요, 언니." "무슨 소리야? 나도 영아 팬이라니까." 영아는 정성을 다해 루시아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루시아 다음 차례는 인디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오랜 시간을 기다린 영아의 팬들이었다. 영아는 그들이 내민 책에 사인을 해주며 일일이 악수까지 해주었다. 어떤 팬들은 영아의 손을 꼭 붙든 채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꺄아~ 언니가 쓴 책 너무 재밌어요. 언니 울트라 캡쏭 열라 짱이에요!" "……." 빠순이냐? 어쨌든 사인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는 루시아와 인디, 지니와 함께 뒤에 서서 사인회 장면을 지켜보았다. 인디는 언제 챙겨 왔는지 디지털카메라로 사인회 장면을 연신 찍어댔다. "뭘 그렇게 열심히 찍고 그러니?" "다 추억이잖아요. 그리고 일루니아님께 사인회의 생생함을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어요." "……." 생생함을 전해줘서 뭐하게? 임신 중인 일루니아 여사님은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에 오시기 힘들다. 그래서 같이 오지 못하고 집에 쉬고 계시는 중이다. "그렇게 생생함을 전해주고 싶었으면 디지털캠코더라도 들고 오든가." 내가 빈정거리듯 말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지니가 디지털 캠코더를 들고 사인회 장면을 촬영하는 모습이 보인다. "……." 아주 가지가지해라. "그나저나 앞짱구걸 사인회가 이렇게 대성황을 이룰 줄이야. 이게 다 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덕분이겠지?" 내가 혼자 중얼거리자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루시아와 인디는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았다. 난 괜하 무안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냥 해본 소리인데 노려볼 것까지야……." 나름대로 많이 도와줬다고 생각했거늘……. 사인회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영아는 많이 힘든지 연신 왼손으로 오른팔을 주물렀다. 영아는 컴퓨터로 글을 쓰는 작가. 때문에 펜으로 직접 쓰는 것은 익숙지 않을 것이다. 으음, 많이 힘들어 보이는 군. 영아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계속 사인을 해주었다. 책을 내밀면 사인을 해주고, 책을 내밀면 사인을 해주고, 계약서를 내밀면 사인을……. 응? 계약서? 여기서 계약서가 왜 나와? 영아는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이제까지 해오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인을 하려했다. "잠깐!" 내가 뭐라고 소리치기도 전에 최모 편집자님과 윤승이 팀장님이 먼저 소리치셨다. 최모 편집자님은 영아의 손목을 붙잡았고, 윤승이 팀장님은 계약서를 낚아챘다. 영아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난 계약서를 내민 남자를 보았따.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다급하게 영아에게 말했다. "안녕하심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책과책 출판사 편집팀장으로 있는 김양훈입니다. 저희 출판사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 책과책 출판사? 편집팀장? 난 윤승이 팀장님이 들고 있는 계약서를 받아 살펴보았다. "출판권 설정 계약서…… 위의 저작물을 출판함에 있어 저작권자 박영아를 '갑' 이라 하고, 출판권자 책과책 풀판사를 '을'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계약을…… 뭐야, 이거?" 순간, 최모 편집자님과 윤승이 팀장님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최모 편집자님은 바로 책과책 김양훈이라는 남자에게 따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런 치졸한 방법으로 우리 출판사 작가를 빼가려 하다니!" "어차피 선택권은 작가한테 있는데, 최편집자가 뭔 상관이야?" "이 작식이 진짜 해보자는 거야, 뭐야?" 서로 대화하는 폼을 보아하니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것 같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우리 출판사 작가에게 손 떼!" "니가 우리 출판사에서 작가를 몇명이나 빼갔는지 잊었단 말이냐?" "그건 니가 작가 관리를 못해서지!" "닥쳐!" 말로는 안 되겠는지 두 편집자는 실력행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밀고 당기고, 때리고 맞고…… 아주 볼만하다. 그런데 더욱 볼만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몇 사람이 튀어나와 계약서를 내밀었다는 것이다. "박영아 작가님. 저희 출판사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쟤네 출판사 별 볼 일 없습니다. 저희 출판사야말로………." "계약 하나만 해주세요! 최고의 조건을 보장하겠습니다!" "이 계약 못 따내면 저 짤립니다. 저 짤리면 저희 가족 다 굶어죽어요. 제발 자비를……." "……." 대체 몇개의 출판사가 달려드는 건지. "오른쪽을 막아!" "박영아 작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 최모 편집자님과 윤승이 팀장님은 그야말로 온몸을 내던져 타출판사 편집자들의 접근을 막았따. 영아는 완전히 정신적 공항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타출판사 편집자들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다. "저희 출판사는 마감이 없습니다!" 차라리 팥죽에 팥이 없다 그래라. 지금 저렇게 말을 해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180도 태도를 바꿀 것이 뻔하다. 마감 없는 출판사라는 게 말이 돼? "정말요?" 마감이 없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영아는 고개를 획 돌렸다. 하기야 그 동안 마감에 좀 시달렸어야 말이지. 영아가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출판사 편집자들은 더욱 열심히 달려들었따. 최모 편집자님과 윤승이 팀장님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막았따. 퍽퍽퍽! "죽어! 죽어!" "책상자 편집자의 힘을 보여주마!" "……." 몸싸움만으로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젠 주먹까지 휘두른다. 최모 편집자님과 윤승이 팀장님의 가공할만한 무위(武威)에 타 출판사 편집자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나가 떨어졌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업사. 탁자가 박살나고, 책이 쓰러지고, 책장이 무너지고……. 잘못하다간 우리한테까지 피해가 올 것 같다. 난 편집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틈을 타 영아와 루시아, 인디를 데리고 사인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영아의 첫 사인회는 막을 내렸다. * * * *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 "그래. 그렇게라도 생각해얒." "아니야, 오빠. 정말이라니까. 저번 사인회의 경험을 통해 다음 사인회는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다음 사인회가 있을 때 얘기지." 사인회장이 초토화 되었을 때 조금 걱정했었다. 영아가 그 일로 충격을 받아 앞으로의 작가 생활에 지장이 생길까봐. 하지만 그것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충격을 받아 글을 못 쓰기는커녕 더욱 의기양양해진 것은 아닌가? "있으니까 하는 얘기야." "뭐라?" "사인회 요청이 또 들어왔어. 이번에 새로 개점한 대형 서점인데……." "……." 할 말이 없군. "니 좋을 대로 하세요." "이번에도 같이 가줄 거지?" "넌 이 오빠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니?" 영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가해 보여." "……." 나름대로 바쁨 인생을 살고 있다 생각했거늘. "오빠에게 샤프걸의 두 번째 사인회에서 첫 번째로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줄게." "…… 됐네요." "아! 그보다 내가 이번에 신작을 새로 썼는데 말이야……." "……." 그래서 나보로 어쩌라구? 끊임없는 창작욕만큼이나 끊임없이 솟아나는 자심감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입. 난 옆에서 열심히 조잘거리는 영아를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정말 너무 시끄럽다. "돈도 많이 벌었겠다, 독립하 생각 같은 건 없니?" "응. 없어. 눈곱만큼도 없어." "……." 결국 이 소설은 완결될 때까지 출연하겠다는 거군. "지니 오빠랑 크로니스 오빠랑 라이레얼 언니랑 루가 다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가겠어." "……." 집세를 올려 받아? 아니면, 강제로 쫓아내? "이번에 새로 쓰는 소설의 제목은 '드림워커'인데, 꿈속을 걷는 자라는 뜻이야. 내용이 뭐냐 하면……." "다른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어째서 내가 매번 임상 실험 대상이자가 되어야 하는 거지?" "뭐, 어때서 그래? 내 소설의 첫 독자가 되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몰라서 그래?" "……." 자의식과잉도 지나치면 병이라는데……. 역시 정신과에 한번 데려가는 게 좋겠지? ----에필로그------ 징글벨~♬ 징글벨~♬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송.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오색 전구, 선물,종 등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트리. 작년에 이어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왔다. 난 잠시 작년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정신없이 바빴던 가게 일, 선물을 준비하며 느꼈던 가슴 두근거림, 모두와 함께 즐겼던 파티, 그리고 ……루시아의 키스 아아~ 솔로로서 크리스마스를 저주했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나도 커플 부대에 합류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구나. 크리스마스. 즉, 성탄절은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이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상당히 변질되어 연인들의 날이 되었다. 그렇다! 크리스마스야말로 커플의, 의한, 커플을 위한 날인 것이다! 오죽하면 그 보수적인 루시아가 먼저 키스를 했겠는가? 그것도 혀와 혀가 엉키는 뜨거운 프렌치 키스를. 아아~ 그땐 정말 행복했었다.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이번 크리스마스 떄는 2탄을 기대해도 좋겠지? 으음, 2탄이라……2탄에는 어떤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까? "허억, 설마……." 난 떠오르는 시뮬레이션에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프렌치 키스의 2탄이라면 뻔하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언니,언니" "왜 그래, 라이야?" "오빠가 조금 이상해요." "맞아요. 오빠 막막 이상해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침을 질질 흘리고……." 라이와 루비의 말에 루시아는 두 엘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건 오빠가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서 김칫국만 마시고 있어서 그래." "……."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해? 그 말뜻은 대체……? "그리고 오빠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니까 가끔씩 저렇게 발작을 해도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알았지?" "네에~!" "……." 어떻게 애들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그것도 당사자가 듣는 앞에서! 난 원망을 살짝 담은 눈빛을 루시아에게 보냈다. 하지만 루시아는 나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으음, 모두가 행복해 하는 크리스마스에 나만 혼자 비참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 * * * 크리스마스 시즌은 인형가게 최대의 대목. 작년 매출 통계를 내보니 1년 중 12매출이 가장 높다. 크리스마스하면 선물, 선물하면 인형이 아니겠는가? 난 예산을 아끼기 위해 작년의 쓰던 트리를 창고에서 꺼내 설치 하고 각종 액세서리 및 전구 역시 작년에 쓰던 것을 재활용했다. "와아~ 가게가 예뻐졌어요~!" 어린 엘프들의 말에 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창고에서 꺼내 먼지 털어내고 설치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안 예뻐질 리 있겠니?" 난 캐롤도 크게 틀었다. 캐롤CD 역시 작년에 구매한 것을 재활용했다. 덕분에 돈을 거의 안 들이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라이는 크리스마스 막막 좋아." "응응, 루비도 크리스마스 막막 좋아해. 크리스마스도 루비 막막 좋아하고." "빨리 크리스마스가 오면 좋겠다." 가게 분위기가 확~ 바뀌었기 떄문인지 어린 엘프들은 매우 들뜬 모습이었다. 뭐, 들뜬 사람이 어디 어린 엘프들 뿐이겠냐마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과 연말연시로 인해 모두들 마음이 풀어지고 기분이 들뜬 상태이다. 당연 그만큼 지갑을 꺼내는 손도 가벼워진다. 조금만 소비심리를 자극하면 지갑이 열린다고나 할까? "좋았어, 더욱 열심히 일해서 전년도 12월 매출을 뛰어넘는 거야!" 돈 벌면 뭘 할지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라이의 집' 분점은 어떨까? 자매품! '루비의 집'……은 무리려나? "뭐해? 일 안해?" "아,아니야. 일해. 열심히 일해." 가만히 손놓고 딴 생각할 시간도 없다. 난 카운터에 쌓인 인형에 손을 뻗으며 손님에게 물었다. "이거 계산해 드리면 되나요?" "예." 장사가 잘 되는 것은 좋지만, 바쁜 것은 싫다. 루시아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가할 때마다 루시아에게 찝쩍거리는 것이 내 낙이거늘……. 정신없이 일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하루 매출을 계산하고 가게를 정리한 다음 불을 끄고 가게 문을 닫았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정말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였다. 나와 루시아는 물론이고, 우리가게 종업원인 인디와 크로니스, 지니도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래도 일손이 부족해 라이레얼과 카르, 심지어는 앞짱구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다.(일루니아 여사님은 만삭의 몸이신 관계로 따뜻한 방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중이시다.) "외식이라도 할까?" "와아~!" 나의 말에 어린 엘프들은 일제히 환성을 내지르며 찬성을 표시했다. 하지만 의외로 루시아가 반대를 했다. "그러지 말고 집에 가서 먹자. 언니 밖에 나오기 힘들잖아." "으음, 알았어." 얼굴만큼이나 고운 마음씨를 지닌 루시아. 난 루시아의 뜻에 따라 재료를 사다가 집에서 요리를 해먹기로 했다. 오늘 저녁매뉴는 등심 스테이크와 신선한 야채 샐러드. 루시아와 인디는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럽게 스테이크를 구워 냈다. "많이 먹어, 언니." "많이 드세요, 일루니아님." 요즘 가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계신 일루니아 여사님. 그 이유는 당연 뱃속에 있는 두 공주님 떄문이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배는 임부복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풍만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하기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들어 있으니……. 으음, 예정일이 언제더라? "아." 스테이크를 썰어 드시던 일루니아 여사님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멈칫했다. 루시아와 인디, 그리고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멈추고 일루니아 여사님을 보았다. "왜 그래, 언니?" "괜찮으세요, 일루니아님?" 일루니아 여사님은 괜찮다는 의미로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기가 갑자기 발로 차서 잠깐 놀란 것 뿐이에요." "정말이야 언니?" "아! 지금도 발로 찼어. 한번 들어볼래?" "응." 루시아는 허리를 숙여 일루니아 여사님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잠시 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정말이네." "라이도 들어볼래요오." "루비도 듣고 싶어요오." "저도요오." 호기심 많은 어린 엘프들은 일루니아 여사님을 졸라 결국 순서대로 귀를 대보았다. 번갈아 귀를 대보던 어린 엘프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모 뱃속에 라이 동생이 있는 거예요?" "맞아, 라이야 . 루시아 언니가 전에 여동생이라고 루비한테 그랬어." "응응, 둘이라고 했어." 사실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나도 매우 궁금하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의 아이인 만큼 초절정 귀염둥이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사님 성격까지 닮을까봐 그게 걱정이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식사를 끝마치고 텔레비전을 켜니 마침 크리스마스 관련 영화를 하고 있다, 채널을 돌려보니 가요 프로그램을 하는 중이다. [ 헬리스나비다~♬ 헬리스나비다~♬] 정체불명의 가수들이 떼거지로 몰려나와 캐롤을 부르고 있다. "와아! 캐롤이다~!" 어린 엘프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어깨동무까지 하고 캐롤을 따라 불렀다. "헬리스나비다~♬ 헬리스나비다~♬" 저것들은 가게에서 그렇게 들어놓고 질리지도 않나? 그나저나 어쨰서 같은 가사가 계속 반복되는 거지? 다음 가사는 어쩌고? * * * *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수록 가게 매출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도 더욱 바빠졌다. 루시아와 얘기를 나눌 시간도 없을 정도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루시아와 단 둘이 보내고 싶은데……. 역시 저것들이 문제겠지? "어서오세요오~!" "안녕히 가세요오~!" 어린 엘프들은 문 앞에 서서 가게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라이와 루비는 작년 처럼 산타복을 입었고, 이번에는 루도 산타복을 입었다. 안그래도 귀엽고 깜찍하고 발랄한 것들이 산타복까지 입으니, 정말이지 루돌프가 울고 갈 정도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는 루시아와 나의 사이를 가로 막는 장벽으로 보일 뿐이다. 마치 베를린 장벽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저것들을 떼놓고 기필코 루시아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말리라! 난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했다. 그 순간, 카르가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반드시 언니와 뜨거운 밤을 보내야지." 얼음인형같이 차가우면서도 귀여운 카르. 괜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카르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열심히 일했다. 처음에는 비협조적이었는데, 지금은 매우 협조적이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아서 라이레얼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신형 게임기)을 사주겠다는 목표가 생겼기 떄문이다. 생각하는게 어쩜 이렇게 기특할까? 그에 비해 앞짱구는…… "일 그만하고 저랑 같이 놀아요, 지니 오빠. 이따 시간 있죠, 크로니스 오빠? 아! 라이레얼 언니 크리스마스떄 뭐 하실 거예요? 전 그날 시간 많은데. 앗! 우리 루 어디에 있었니? 누나가 얼마나 찾았는데." "……."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했더니 영업방해냐? 당장 잘라버릴까? 라이레얼은 기지개를 켜며 길게 하품을 했다. "하암~ 나 피곤해, 히로. 나 올라가서 좀 쉬다올게." "예? 일 안 도와주시고요?" "카르가 내 몫까지 열심히 할 거야." 카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언니. 제가 언니 몫까지 열심히 일할 거예요." "그럼 계속 수고해, 히로." "예에…… 편히 쉬세요." 라이레얼은 결국 집으로 올라갔다. 일은 별로 안하지만 아르바이트비는 꼬박꼬박 챙겨가는 라이레얼. 뭐, 라이레얼 말대로 카르가 두 사람 몫을 하는 상관없긴 하지만……. *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크리스마스 이브. 어린 엘프들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라이는 올해 꼭 산타를 볼거야." "루비는 밤 샐거야." "나도." 하지만 그런 결심과는 반대로 어린 엘프들은 저녁 9시가 되자마자 바로 엎드려 잠들었다. 덕분에 나와 루시아는 편해졌다. 우리는 방에 몰래 들어가 아이들 머리맡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양말에 선물을넣어주었다. 루시아는 손수 짠 손장갑과 목도리를 루비와 루의 양말에 넣어 주었고, 난 인형을 라이의 양말에 넣어주었다. 라이를 위해 실물 대비 두 배 크기로 특별히 주문 제작한 라이코스 인형이다. 그나저나 요즘 라이코스가 안 보이는군. 또 어딜 쏘다니고 있으려나? * * * * 크리스마스의 아침이 밝았다. 잠에서 꺠어난 어린 엘프들은 머리맡에 놓인 선물을 보고 막막 기뻐했다. 저것들으 선물을 넣어준 사람이 산타가 아니라 나와 루시아라는 사실을 알려나 모르려나? 어쨌든 기뻐하는 어린 엘프들을 보니 나도 기쁘다. 우리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가게 문을 일찍 다고 가게에서 파티를 하기로 했다. 5시 종이 떙 치자 난 바로 가게 문을 닫았다. 가게 안에 커다란 테이블을 설치하고 그 위에 음식을 잔뜩 진열했다. 사람들도 불러 모았다. 나, 루시아, 루, 루비,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 지니, 크로노스, 라이레얼, 카르, 영아. 여기에 루엔과 갈리온드도 참석했다. 온 가족이 모였다고나 할까? 루와 루비는 루시아가 선물해준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둘렀고, 라이는 라이코스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다들 선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실물(?) 라이코스는 현재 라이의 왼쪽 어깨에 앉아있는 중. "……."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라이코스. 무슨 찬조 출연도 아니고……. 난 전깃불을 끄고 초에 불을 붙였다. 으음, 이러니 확실히 크리스마스 분위기 난다. 난 고개를 들어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는 어린 엘프들을 끌어 안고 행복해하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펑! 펑! 우리는 크리스마스 밤을 축복하며 폭죽을 터트렸다. 어린 엘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라이레얼은 테이블에 놓인 고급술들을 마음껏 마시기 시작했다. 난 루시아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사람이 워낙 많고 정신이 없어 말을 붙이기 조차 힘들었다. "앗! 눈이와요, 오빠." "흰 눈이 막막 내려요오!" "헤헤~" "어! 정말이네." 어린 엘프들 말대로 밖에는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작년에 이어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모두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파티는 밤늦게야 끝이 났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피곤해하자 인디가 부축해 집으로 데리고 올라갔고, 라이레얼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자 카르가 부축해 역시 집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영아는 '나의 언니가 술 취한 틈을 타 카르가 무슨 짓을 할 지도 몰라' 라고 말하며 따라 올라갔다.크로니스는 나와 루시아가 단 둘이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 위함인지 꿈나라에서 놀고 있는 어린 엘프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리하여 남은 사람은 나와 루시아. 우리는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일도 영업을 해야 하기 떄문에 오늘 밤 안에 다 치워놓아야 한다. 음식물과 컵, 테이블 등을 치우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한 시간에 걸친 정리를 끝마친 우리는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올라갔다. 모두 잠들었는지 집안은 조용했다. 난 남은 음식물을 냉장고에 넣어놓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루시아는 피고한지 의자를 뺴서 털썩 주저앉았다. 난 루시아에게 물었다. "차 한잔 할래?"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잔 줘." "커피 마실래, 코코아 마실래?" "으음…… 코코아로 줘.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올 것 같으니까." "알았어." 난 주전자에 우유를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피곤하지?" 응, 조금." 난 우유가 덥혀지는 동안 루시아의 어꺠를 주물러주었다, 평소 같으면 싫다고 했을 텐데 오늘은 왠일로 웃음을 짓는다.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일까? "고마워, 덕분에 좀 나아졌어." 난 덥혀진 우유를 머그컵에 따랐다. 그리고 코코아 분말을 넣고 잘 저었다. 내가 컵에 입을 대는 데 루시아가 제안을 하나 했다. "나가서 마시자." "그래." 우리는 머그컵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탑방의 불은 껴져 있었다. 우리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눈에 비치는 풍경을 즐겼다. 온 동네가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거리와 집들은 형형색색의 전구로 반짝거렸다. 사위가 고요하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느낌. 따뜻한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도 이랬을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천천히 흩날렸다. 이런 날이라면 순록이 썰매를 끌고 달 위를 달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갈수 있을 것 같다. 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코코아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몸을 훈훈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결국 이렇게 가는구나. 결국 루시아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겠다는 나의 원대한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보냈으니…… 뭐, 나름대로 의미가 깊었다고나 할까? "무슨 생각해?" "그냥 이러저런 생각." "야한 생각?" "헉! 그럴 리 없잖아." "흐음~ 그래?" 루시아는 의심 가득한 눈길로 날 보았다. 이번엔 진짜 아닌데……. 내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도로와 가로등 불빛. 나무에 감겨 빛을 발하는 전구. 고요하고 거룩한 밤 나와 루시아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루시아의 손은 차갑고도 따뜻했다. 루시아는 반대쪽 손으로 머그컵을 들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를 홀짝홀짝 마셧다. 문득 루시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무슨 생각해?" 내 물음에 루시아는 물음으로 답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난 잡고 있는 손을 통해 루시아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내말에 루시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좋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어색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침묵이 마치 대화의 연장선 같은 느낌이다. 나와 루시아는 조용한 가운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머그컵이 비었다. 우리는 머그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루시아는 살짝 몸을 움츠렸다. 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내 쪽 으로 끌어당겼다. 말없이 내 품에 안기는 루시아. 난 루시아의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오늘 재미있었어?" "응 재밌었어." 그녀의 체온을 통해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흰눈과도 같은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 난 루시아에게 물었다. "행복해?" 루시아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행복해." 나는 루시아의 대답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내 입술과 그녀의 입술이 겹쳐졌다. 난 두 손으로 루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내 곁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그들이 있기에 나는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이 곁에 있는 한, 그리고 내가 그들 곁에 있는 한 나의 모험은 계속 될 것이다. 항상 처음처럼, 늘 지금처럼, 영원히 행복하기를……. <끝> ------ 작가 후기 ------- 이렇게 해서 히로의 두 번쨰 모험도 끝이 났습니다. 정신없이 쓰다보니 어느세 30권(1부 15권, 2부 15권)이라는 초장편이 되고 말았군요. 아이리스 1부의 주제가 '모험' 이라면 2부의 주제는'가족' 입니다. 환상적인 모험을 끝마치고 돌아온 히로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곁에 있어준 가족 덕분이겠지요. 글을 시작할 꺠만 해다 학생이었는데. 글을 완결 내는 지금은 군인 입니다. 저는 2005년 9월 13일 입대해, 현재 1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군대에 있으니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이리스는 끝이 났지마니, 히로의 모험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저의 모험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그 동안 아이리스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가족들과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저 떄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신 최종인 편집자(최모 편집자?)님께 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현재 공군으로 군 복무중인 친구 승주와 저와 함께 군 생화을 하는 1사단 신병교육대대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다음번에는 더 나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2006년 2월 박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