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 Iris> - 1권 - 1. 이계로의 소환 따각따각- "전력은 1초 동안 공급되는 전기 에너지를 말하며, 전압을 V, 전류를 I, 저항을 R이라고 놓았을 때……." 분필이 칠판을 긁는 소리, 애들이 속삭이는 소리, 물리 선생이 자장가 부 르는 소리.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안 좋다. 아침에 스포츠 신문을 봤더니, 오늘이 쪽빡차는 날이랜다. 휴∼, 오늘 하 루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가야 할텐데……, 근데 어째 느낌상 꼭 무슨 일이 라도 일어 날 것 같다. 나의 재수없는 예감은 비껴간적이 없지. 그러고보면 나도 참 재수없는 놈이란 말이야. "아함∼." 저 선생은 질리지도 않고 수업 하냐? 진짜 대단하다. 물리 선생은 칠판에 공식을 빽빽히 쓰며, 열심히 떠들어데고 있었지만, 어 떻게된게 듣고 있는 얘가 단 한명도 없었다. 말 그대로 저 선생은 지금 혼 자 수업하고 있는 것이다. 지 혼자 묻고, 지 혼자 대답하고. 졸립다. 잠이나 자자. zzz……. "박영웅!" 언 놈이 감히 내 이름을 불러? "박영웅!" 어 또 부르네. "빨리 안 일어나!!!" 이런 언 놈이! 뜨아! 눈을 떠보니 물리 선생이 면상을 일그러뜨리며 내 앞에 서 있었다. 네모 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데 완전히 도시락 폭탄이었다. 갑자기 윤봉길 의사가 생각나는건 어째서 일까? 젠장, 간만에 제대로 걸렸구나! 스포츠 신 문의 운세는 이것을 말했단 말인가! 난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따악-! "쓰∼ 읍." "으하하하." 짜식들 웃기는, 친구가 고통을 받는데. "또 자냐? 또 자? 뒤로 나가서 엎드려 뻗쳐 있어!" 젠장, 지가 재워놓구선. "빨리 안나가!!!" 어, 빨리 안 나가면 도시락 폭탄 터지겠군. 띠리리링-! 이 종소리는 2년동안 한번도 안바뀌는군. 휴대폰 벨소리는 하루에도 몇번 씩 바뀌는데. 1시간 동안이나 엎드려 뻗쳐를 했더니, 팔이 아파죽겠다. 이걸로 액땜한건 가? 난 자리로 돌아와서 책상 위에 엎드렸다. "야 넌 맨날 자냐?" "꺼져라." 지금 나에게 말을 거는 이놈은 서성준이란 놈이다. 성격도 비슷하고 여러 가지 닮은 면이 많아서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좀 띠껍다는 것만 빼면 괜 찮은 놈이라 할 수 있다. "남들 안 걸리게 잘 자는데, 왜 너만 걸 리냐?" "몰라 임마!" "야 이따 독서실로 사와." "뭘?" "꼭 말해야 아냐" "뭘?" "니가 지난번에 사다준거 다 폈어. 이번엔 디스 플러스로 사와라." "니가 사 임마. 귀찮아" "야, 친굴 위해 그 정도도 못해주냐?" 빌어먹을 자식, 이럴 때만 친구냐? "치사한 자식, 이따 밥사줄게" "알았어, 나 잘꺼니까 건들지좀 마" 고등학생 신분에 담배 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쉬운 녀석들도 있 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3살 많은 형이 있기 때문에 형의 신분증을 빌려 서 사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얼굴이 비슷하니까 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흘러서 드디어 8교시가 끝났다. 원래 정규 수업은 6교시까지지만, 모든 학교가 그렇듯이 보충수업이라는게 존재하니…… 젠장, 교육부는 뭐 하는 거냐? "야 오늘 꼭 사와라 알았지?" "알았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다시 나왔다. 우리 학교의 두발 규제는 엽기적인 수준 이여서 거의 삭발이라 하여도 좋 을 정도다. 요새는 교육부 방침도 그렇고 주위 학교들도 두발 자유를 실시 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학교는 강화하면 강화했지 절대 완화는 안될 것이다. 우리 반에 부회장 녀석도 두발자유를 필사적으로 외치며 노 력하고 있지만, '구렛나루' '황비홍' 등이 포진하고 있는 한 절대 불가능해 보인다. 거기다 수능을 얼마 안 남긴 3학년들은 두발자유 결사 반대를 외 치고 있었다. 앞머리 2센치 뒷머리 1센치라나? 3년동안 빡빡 밀고 다녔으 니, 억울하기도 하겠지. "아줌마, 디스 플러스 두 갑하구요, 에쎄 한 갑 주세요." 주인 아줌마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훝어보더니 물었다. "학생 아닌가?" "대학교 2학년이에요" 난 준비해온 형의 학생증을 내밀었다. 아줌마는 학생증을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건네주고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안녕히계세요." 나는 가계 밖으로 나와 횡단 보도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젠장, 그 자식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담배를 사야 하다니. 귀찮아 죽겠군. (당연한 거지만, 집 주위에서는 얼굴이 팔리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멀리 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드럽게 안 바뀌네! 하필 재수 없게, 내가 건너기 바로 직전에 빨간 불로 바뀐것이다. 난 인상 을 찡그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 이건 뭐지? 설마…… 금화? 내 오른쪽 발 옆에 번쩍거리는 동전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 금화였다 500 원짜리 정도 크기에 금색으로 번쩍이는……. 물론 가짜 일수도 있겠지 만……, 당연지사 일단 줍고 보는 거다.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줍는 자가 임자' 난 누가 볼세라 은근히, 그러면서 잽싸게 금화를 주어서 주머니 속에 쑤 셔 넣었다. "푸훗!" 괜히 웃음이 나는군. 표정관리 좀 해야겠어.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돌아 왔다. "진짠가?" 난 침대에 누워 금화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요리 봐도 조리 봐도 분명 금화였다. 금화는 금색으로 번쩍거리고 있었고(당연한가?), 앞면에는 이상한 그림과 문자가 뒷면에는5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영웅아, 빨리 와서 밥먹어라!" "예. 지금 나갈게요" 밥을 먹고 독서실에 가니 성준이가 먼저 와 있었다. "야!, 사왔냐?" "사왔어 임마" "야, 역시 넌 진정한 친구다. 앞으로 더욱 더 친하게 지네자." 빌어먹을 자식, 면상을 한 대 갈겨주고 싶군. "나가서 한 대 피고 오자" "알았어, 가방 놓고."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싸늘했다. 하긴 겨울이니까. 입에서는 담배를 피는 것 같은 하얀 입김이 생겨났다. 성준이와 나는 공원으로 나와 쪼그리고 앉 아서 담배를 피웠다. "야! 이거 봐봐." "이게 뭔 대?" 나는 성준이에게 낮에 주은 금화를 주었고, 성준이는 그 금화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금화?" "응." "너 이거 어디서 났어? 훔쳤냐?" "시끄러 임마! 줏은 거야." "어떤 미친놈이 이런걸 흘려? 솔직히 말해봐? 뽀렸지?" 넌 속고만 살았냐? "맘대로 생각해." "근데 이건 대체 어느 나라꺼냐?" "내가 어떻게 알어? 내놔 임마." 나는 성준이 손에서 금화를 낚아챘다. "다 폈음 들어가자" 아직까지 내가 앉아있는 자리 주위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금화를 다시 꺼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써있는 글자가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글자고, 대체 왜 이런 금화가 횡단보도 앞 에 떨어져있단 말인가? 어쨌든 주웠으니 그걸로 된 건가? 특별히 할 일도 없었기에 물리 책을 펴고 공부를 시작하려 했다. 당연 될 리가 없었다. 여러 가지 계산식들과 지루한 문장들…… 으아! 졸립다. "으하아∼." 얼마나 잔 거지? 시계를 보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졸라 잤군 한 3시 간정도. 난 일어나서 열람실을 나왔다. 세수를 하고 나서 성준이 자리에 가 보았다. 씨발, 의리 없는 새끼, 깨워주지도 않고 혼자 집에 갔어. 앗! 밥도 못 얻어 먹었다. 내일 보자 서성준. 죽었어! 계속 있어봐야 공부가 될 리가 없었기에 난 가방을 싸들고 밖으로 나왔 다. "흐아, 씨발 얼어죽겠네!" 바깥의 찬 공기는 나의 몸을 덜덜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게 깡패 만나기 딱 좋겠군. 집에 가서 뭐하지? 잠도 실컷 잤으니까, 잠이 올리는 없겠고 밤새 만화책이나 봐야되나?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계속 걸었다. 오른손으로는 계속 금화를 만지작 거리면서……. "이건 뭐야!?"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어느 샌가 나의 발밑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있었다. 분명 마 법진이였다. 이제까지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확실했다. 푸른 금색으로 빛나는 그 마법진에는 알아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자와 도식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은 바닥에만 그려진 것이 아니였 다. 바닥에서 뿜어내는 빛들은 허공에도 서로 교차해 여러 가지 도식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중심엔 내가 서있었다. 마법진은 더욱 강렬한 빛을 뿜으며 빛나기 시작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되는거야?" 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 순간, 빛이 폭파하듯이 뿜어졌다. 머리에 현기증이 일었다. 눈 앞이 희미해진다. "으아아아아!" 난 두려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가 다시 내 귀로 들어오는 순간, 난 정신을 잃었다. "으∼ 아∼." 정신을 차려보니 동굴 안이였다. 엥? 왠 동굴? 머리가 어지러웠다. 토, 토 할 것 같다! 발 밑에는 아까 보았던 거대한 마법진이 계속 빛을 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된거지? 동굴 안은 어디선가 터진 웃음소리로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우하하하하." 나는 고개를 들어서 웃음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마법진 바깥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흰 수염을 발끝까지 드리우고 백발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흩어 놓은 늙은이였다. 얼굴에는 칼자국으로 보이는 상처들이 여러개 나 있고, 나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쭈글쭈글한 주름이 가득했 다. "저, 저기!" "으하하하, 우하하하하." 그 늙은이는 나의 목소리를 듣더니, 더욱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두팔을 크게 벌리고 두눈을 부릅뜨고 동굴 천장을 바라보며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젠장,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고, 저 미친 늙은이는 누구야? "이, 이봐요! 당신은 대체?" "크하하하. tjdrhddlek, tjdrhddldi!" 뭐라 그러는 거야? 그 늙은이는 웃음을 멈추고 잠시 날 바라보더니, 이상 한 동작을 취하며 입을 움직였다. "Tongues." 그 늙은이의 몸에 잠깐동안 빛이 나다가 곧 사라졌다. 무슨 짓을 한거지? "너는 누군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궁금한 건 그 쪽이 아니라 이 쪽 이라구! "그러는 당신은 누굽니까? 그리고 여긴 어디 구요?" "크흐흐, 나 말인가? 여기?" 이제야 제대로된 말을 하는구만. "나는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리드라 한다. 그리고 이곳은 자이나레스 대 륙이지. 크하하하." 저 늙은이는 뭐가 좋아서 계속 웃고 지랄이야. 자이나레스? 마법사? 이 늙은이 완전 미친거 아냐? 그 늙은이는 웃음을 멈추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나의 바로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처다 보았다. 젠장, 그 추한 얼굴을 어따 디밀어? "이제 니 소개를 해라." "저, 저는 박영웅인데요." "그리고?" "아, 그리고요 어∼ 중신 고등학교에 다니구요. 어∼ 2학년이에요." "그게 다냐?" "아∼ 예. 아, 아니." 이게 아니잖아! 난 정신을 차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말하지 않았나. 이곳은 자이나레스 대륙이다. 그리고 네 녀석이 지금 있 는 이곳은 대륙의 끝에 위치한 적색 산맥이다." 이 늙은이 진짜 미쳤나보군. 혹시 치매인가? "그 딴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이 곳이 대체 어디냐니까요?" "이곳 말인가? 크흐흐, 하긴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네 녀석은 다른 세계 에서 왔으니까 말이야. 내가 널 이곳으로 소환했다." "예?" 다른 세계? 나를 이곳으로 소환했다고? 이 늙은이 지금 제정신야? "그렇다. 나는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리드다. 내가 너를 이곳으로 소환했 다." 완전히 돌았나보군. 웃기고 있네. 니가 마법사면, 난 드래곤이겠다. 순간 적으로 아까 낮에 주웠던 금화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서, 설마…… 그 금화!" 늙은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금화를 네 녀석이 주었나 보군? 나는 평생을 다른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했다. 분명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도 인간과 비 슷한 존재가 있을 꺼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네 녀석이 나타 났다 크하하하, 이것으로 나의 실험은 성공했다. 내 평생을 바친 연구가 성 공했단 말이다. 크하하하!" 이거 대체 뭔소리를 해대는 거야? 어쨌든 지금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말 아냐? 날 이곳으로 왜 데려 온 거지? 저 늙은이의 말을 한마디로 줄이 면……. '심심해서.' 씨발! 심심하면 지 혼자 소꿉놀이하고 놀것이지, 왜 나를 끌어들이고 지랄 이야!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자, 잠깐만요, 어쨌든 나, 나를 이곳으로 대려온게 당신이란 말이죠?" "그렇다."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라는 거지요?" "그렇다" "그, 그러니까? 한국이 아니라요?" "음∼, 한국? 네 녀석이 살던 세계의 지명인가 보군? 물론 아니다."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 곳이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라니. 이 늙은이가 자신을 마법사라고 했 으니, 이 곳은 판타지 세계인가? 나는 믿기지 않는 일에, 어지러운 머리를 가누며 말했다. "그럼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주세요."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전혀 안타깝지 않은 표정으로 불가능? "왜요? 불러 왔으면 돌려놓을 수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금화를 가지고 있나?" "여기요" 나는 주머니 속에서 금화를 꺼내서 그 늙은이에게 주었다. 그 늙은이는 내 손에서 금화를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네 녀석을 소환하기 위해서 이 금화를 네 녀석 세계로 옮겨 놓았 다. 그리고 금화를 소환하면서 금화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생명체를 소환한 것이다. 그래서 네 녀석이 이곳에 오게 된 거지" 그럼 아까 그 마법진이 소환 마법진이였나? 으아, 미치겠다. 난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혀 소리쳤다. "비…… 빌어먹을. 그럼 똑같은 방법으로 돌려놓으면 되잖아요?" "아∼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씨발, 그럼 어려운 문제냐? "내가 네 녀석을 소환할 때는 좌표점을 몰랐기 때문에 금화를 매개물로 네 녀석을 소환하게 된 거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네 녀석이 어디에 나타 나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 이대로 무작정 다시 소환을 한다면, 네 녀석이 살아서 돌아가게 될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 만약 네 녀석이 그 세계의 좌표를 정확히 알고 있다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군." 아∼ 황당하다. 그럼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건가? "크흐흐, 그 보다 얘기해주지 않겠나? 네 녀석이 살던 세계에 대해서 말 이야." 내 엿같은 기분과는 반대로 이 미친 늙은이는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난 그 모습에 엿같은 기분이 좆같은 기분으로 변했다. "싫어" "뭐라고?" "싫다고, 씨발. 남을 이 딴 곳으로 불러 놓고는 뭐? 내가 살던 세계의 얘 길 해달라고? 내가 미쳤냐? 얘길 하게!" 나는 발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늙은이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퀭하니 파인 두 눈에서는 광기어린 빛이 흘러 나왔다. 이거 잘못건드린거 아냐? "하는 것이 좋을 텐데?" "왜?" "안 하면 죽으니까!!!" 그 늙은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온 몸에서 살기를 내뿜었다. 나는 순간 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위험하다! 그러나 지금 나 역시 제 정신이 아닌 상태. "죽여!" 갑작스런 나에 행동에 그 늙은이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크으…… 이 꼬마 녀석이." "죽이라고! 죽여!! 죽여!!!" 앗! 나에게 이런 용기가? 그 늙은이는 얼굴을 더욱 더 일그러뜨리기 시작했고 몸에서 내뿜는 살기 는 더욱 짙어졌다. 잠깐, 이 늙은이는 마법사라고 했지? 혹시, 마법을 쓸려나? 다른 세계에 사는 나를 소환할 정도니까……, 아! 그리고 아까 대 마법사라고 했잖아. 이거 진짜 죽는 거 아냐? 혹시 죽인 다음에 언데드나 좀비로 만들어서 ……. "좋다" "으아악!" 난 갑자기 그 늙은이가 얼굴을 디미는 바람에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뭐, 뭐가요?" "어차피 네 녀석이 본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아니지, 혹시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군. 본래 세계의 정확한 좌표를 알아낸다면 말이야. 하지만 어차피 그 동안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물론 평생이 될 수도 있겠지. 거래를 하자." "예?" "네 녀석이 나에게 얘기를 한다면, 내가 평생에 걸쳐 모은 마나와 마법지 식, 이 곳의 언어를 네 녀석에게 주겠다." 엥? 이 미친 늙은이가 또 무슨 헛소리를?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 계속 이곳에서 얘기하기도 힘드니까. 따라와라" 그러고 보니 빛을 내뿜던 마법진은 사라져 있었고, 주위에는 이상한 빛들 이 구 모양으로 떠다니고 있었다. 늙은이는 천천히 몸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갔다. 젠장, 따라가야 하나? "계속 그곳에 있을꺼냐?" "젠장, 가…… 간다구요" 나는 가방을 챙겨서 늙은이 뒤를 따라 걸었다. 약 5분 정도 걸었을까? 늙 은이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아담한 편이였다. 방 중앙에는 탁자와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고, 한 쪽에는 침대가 다른 한쪽에는 수백 여권의 책이 책장에 어지럽게 꽂혀 있었다. 허공에는 아까 보았던 것과 같은 빛 덩어리들이 떠있어 방안을 밝게 비춰주었다. "자, 그럼 얘기를 계속하지." 늙은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말을 건넸다. "아까 무슨 말을 한 거죠? 마나와 마법지식, 언어를 주겠다니 대체?" "네 녀석이 들은 그대로다." "다…… 단지 제가 살던 세계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그 것들을 주겠 다구요?" "그렇다" 진짠가? 나는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타산이 맞지 않았 다. 거래란 쌍방이 대등한 조건에서 해야하는거 아닌가? 나보다 위에 서있 는건 이 늙은인데 왜 손해를 보며 거래하려 하는거지? "나를 믿지 못하나?" 당연하지. 너 같으면 믿겠냐? "당신 정도의 능력을 지닌 마법사라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정신계 마법을 걸든지 해서 어떻게든 말하게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리고 그건 별 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구요." "좋다. 그렇다면 설명 해주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평생이 걸쳐서 다른 세계의 존재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그 연구는 성공했다. 네 녀석이 이곳으로 온 거지. 네 녀석은 내 평생을 바친 연구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존재를 쉽게 망가뜨릴 수는 없지. 그리고 네 녀석에게는 중요한 얘기가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는 중요한 얘기다." 매우 심심했나보군. 왜 그런 걸 연구한거지? "그게 단가요?" "부족한가?" "예, 물론 그게 이유라면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당신이 평생 동안 모은 마나와 마법지식을 준다는 것은 믿기 힘들군요. 그리고 만약 제 가 입을 안 연다면, 다시 한번 다른 생명체를 소환하면 되잖아요?" "나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바쁘신가보죠?" 잠시 썰렁한 바람이 우릴 스치고 지나가고, 늙은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의 수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 그런 뜻이었군.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그러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 궁금한 거 풀고 나면, 나에게 줄꺼 다 준다는 거네! 이제야 거래 물품이 조 금 평행선을 이루는군. 그때 괜히 금화를 쥐고 있어 가지고는 이게 무슨 꼴이냐? ……그때가 12 시 30분쯤이었나? 내가 몇 시에 금화를 주웠더라? 6시 30분쯤 주웠잖아. 그럼 6시간만에 소환을 한 거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거었으면, 왜 고작 6시간만에 소환한 거죠, 만약 제가 발견 못했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무슨 소리냐? 6시간이라니? 나는 정확히 1년만에 다시 현세계로 소환했 는데." 엥? 또 헛소리하네. "아니에요. 진짜 6시간……." 늙은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아무래도 네 녀석의 세계와 이 세계의 시간차가 심하게 나는 것 같군" "무슨 말이에요?" "이곳의 1년이 네 녀석 세계에서는 6시간이라는 거다." 아, 이해가 가는군.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그럼 여기서 4년이면 그 곳에 서는 하루가 지나는 거겠군. 그래도 집에 돌아갈 가망이 어느 정도 생기네. 그런데 왜 굳이 날 이곳으로 소환했지? 지가 일로 오면 안되나? "근데 왜 굳이 저를 이곳으로 소환한 건가요? 당신이 직접 오면 안 되는 건가요?" "그것은 내가 이계의 좌표를 모르기 때문이다." "좌표요?" "내가 네 녀석을 소환할 때는 네 녀석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기 때 문에 금화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소환을 했다. 만약 내가 이계로 이동을 할 때는 좌표를 모르기 때문에, 어디서 나타나게 될지 모른다는 거지. 또 알고 싶은 게 있나?" "예, 아주 많은데요." 이봐요. 얼굴 좀 펴요. 인상쓰니까 무섭잖아요! "빨리 물어봐라" "아까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했는데, 얼마나 남은 건가요" "일주일 정도다." 일주일? 인생 다 살았구만. "잠깐만요! 아까 마나 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언어와 마법 주문들도 준다 고 하셨죠?" "그렇다." "마법 쓰는 거 어렵나요?" "어렵다." 젠장, 어렵다고 하네. "저기요, 제가 사실 머리가 좀 나빠서요. 일주일만에 마법 주문과 언어를 외우기에는 힘들 것 같은데요." "후우……." 늙은이는 날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마법 주문과 언어를 준다고 했지, 알려 주는 것이 아니다." 아! 어렵다. 이건 또 뭔소리냐? "좀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면 안 되요?" 그 늙은이는 또 한숨을 내 쉬었다. 얼굴에는 '이렇게 무식한 놈이 존재하 고 있었다니!'라고 써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을 하지, 어렵게 말하면 내가 알아듣냐? "마법을 써서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와 마법 지식들을 네 녀석의 머릿속 으로 직접 옮길 꺼다." 이해가 가는구만.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그런데 그거 부작용은 없나요?" "나 정도의 마법사가 쓰면 그런 일은 없다." "당신 정도의 마법사라는 것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가요? 아까 대마법 사 어쩌구 하던데……." "나 말인가? 크흐흐, 클래스 9마스터다." 갑자기 그 늙은이의 표정에 '나 잘났지?'라고 써졌다. 그래 너 잘났다. 이 쯤에서 한번 띄워 줘야겠군. "클래스 9 마스터라구요?" 나는 괜히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다. "그렇다" 더욱더 잘난 표정이었다. 예상외로 단순한 늙은이었군! "클래스는 몇까지 있는데요?" "클래스는 9까지가 끝이다" 음, 이번엔 좀 놀랐다. 100점 만점에 100점이란 얘기잖아. "그럼 다른 질문, 이 세계에는 인간 외에 엘프나 드워프, 드래곤들도 존재 하나요?" "당연하다." 으아! 당연하긴 뭐가 당연해? "네 녀석이 살던 세계에는 없었나?" "예, 제가 살던 곳에는 인간과 동물 밖에 없어요." "이상한 곳이군."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내가 살던 곳이 이상하냐? 이곳이 이상한 거지. "잠깐! 그렇다면 네 녀석이 엘프나 드래곤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 늙은이는 갑자기 이상하다는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늙은이의 질문에 황당해졌다. 진짜 어떻게 알았지? 혹시 이곳에서 다른 사람이 건너 와서 소설을 썼나? "글쎄요, 여기 살던 사람이 옛날에 건너 왔나보죠?" "음." 그 늙은이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럴 수도 있는건가? 하긴 내가 이 세계로 건너왔는데 이 세계 사람 이라고 내가 살던 곳으로 가지 말란 법은 없지. "또다른 질문, 지금 몇 살이세요?" "나 말인가? 크하하하." 또 왜 웃고 지랄이야! 아! 저 웃음소리 진짜 짜증난다. 인간이 어떻게 저 렇게 웃냐? "글쎄다. 나도 정확한 나이는 기억이 안 나는군. 어두운 동굴 속에 하도 틀어 박혀 있었더니 말이야. 아마 150살 정도일 꺼다."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정상이 아니군. 아까 100년 동안 동 굴에 틀어 박혀 있었다고 했으니…… 50살 때 세상을 등진건가? 혹시 사회 에서 왕따 당한거 아냐? "상당히 오래 사셨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자, 그럼 이제 네 녀석이 얘기할 차례다." "근데요." "또 뭐냐?" 그 늙은이는 참을 만큼 참았던 모양인지, 소리를 질렀다. 늙은이가 참을성 없기는. "저는 네 녀석이 아니라 '박영웅'인데요." "나야말로 당신이 아니라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리드'다" 젠장! 누가 대마법사 아니라고 할까봐서는……. "예. 이그드리씨" "이그리드다" "예, 예. 이그리드 씨. 사실 지금 제가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데 한숨 자고 나서 얘기하면 안될까요?" 난 용기를 내서 말했다. 몇 시간 동안 웃기지도 않은 일들만 계속 일어나 서 그런지 머리는 어질어질 했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늘어져 있었다. "좋다. 어차피 지금은 나도 할 일이 있으니. 좀 있다 얘기하지." 아! 저 늙은이에게 저런 따뜻한 면이! 죽이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쉬도록 해라." 그 늙은이는 말을 마친 뒤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마라." 그 늙은이는 혹시나 해서 나에게 경고했다. 그런데 또 명령조네, 난 니 부 하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나가봐야 집도 절도 없는 신세네요. 끼이익- 기분 나뿐 소리를 내면서 방문이 닫혔다. 방문이 닫히자 방을 밝히고 있 던 불빛들도 사라졌다. 혼자 있게 되니 마음이 심란해지고 있었다. 난 아직 까지도 내가 다른 세계로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진짜 이곳에서 살아야 하나? 엄마가 걱정할텐데. 그러고 보니 그쪽 세계는 지금 1시간도 안 지났겠군. "우∼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스포츠 신문에 운세……, 이렇게 잘 들어맞는 것이였 단 말인가? 진짜 신기하군. 젠장, 오늘 운세 최악인걸 알았으면, 그냥 조용 히 집에 짱박혀 있는 거였는데……. 지금 나의 이 엿같은 기분을 풀어줄 무언가는 없는걸까? 있다. 담배! 나는 황급히 가방을 뒤져보았다. 가방 안에는 에쎄 한 갑과 디스 플러스 한 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오! 나의 이 사랑스런 담배들이여! 난 에쎄 한 개피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자,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설마 이건, 니코틴 중독증상……? "진짠가?" 난 왠지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담배가 줄어들자, 그냥 바닥에 비벼 서 껐다.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난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으∼."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마법진은 사라져있었고, 머리 한쪽에 욱신욱신 쑤셨다. 내 머릿속에는 이상한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수많은 마법의 사용방법들과 여러 가지 언어들……. "아, 그 늙은이!" 난 그제서야 아까 있었던 일들이 기억났다. 그 늙은이가 약속대로 마법 지식들과 언어를 머릿속으로 직접 넣어 준 것이었다. 잠깐 비틀거리며 상 태를 점검해보니, 몸은 그런대로 움직일 만 했고, 두통도 어느정도 나아졌 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군, 형광등 좀 달아두지! "light" 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외쳤다. 그러자 그 늙은이가 했던 것처럼 빛 의 구들이 나타나 주위를 밝혀주었다. 어? 몸의 느낌이 이상하다. 내 몸에는 단전을 중심으로 엄청난 양의 기 같은 것이 모여 있었다. 그리 고 방금 마법을 사용했을 때 그 기들이 몸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확실하 게 느꼈다. 이것이 마나 인가? 그래도 진짜 엄청난데……. 몸에 가득 차있잖아! 아, 그 늙은이는? 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늙은이는 앞으로 쓰러저있었다. 난 가까 이 다가가 늙은이의 몸을 만져보았다.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아주 편안한 표정으 로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행복하다는 듯이……. 인생 살만큼 살다 죽으면 저런 표정이 나오는 건가? 하긴 150살이나 살았 으니……, 무슨 세상에 미련이 있겠냐? 난 그의 몸을 두 팔로 안아들었다. 죽으면 사람 몸이 무거워 진다더니! 진짜 무겁네. 깡마른 늙은이가 왜 이 렇게 무거워? "strength(근력강화)" 음, 한결 가볍구만. 마법이 이렇게 편하다니! 근데 이거 어따 묻지? 시첼 이대로 방치 할 수도 없고, 양지바른 곳에다 묻어 주고 싶지만, 그 늙은이 가 이 동굴 속에 있고 싶다 그랬으니, 어쩌지? 난 시체를 양손에 들고 상당히 고민을 했다. "아! 맞다 연못!" 어?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내가 쓰고 있던 말은 한글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있는 몇가지 언어들중에 제일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었 다. 공용언가? 분명 그 늙은이가 머릿속으로 직접 넣어준 건데……. "하하, 그 늙은이가 약속하난 확실하게 지켰나보네!" 어쨌든 지금은 먼저 이 시체를 연못가에 묻어야 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동굴에서 내가 아는 장소는 내가 쓰던 방과 이 곳, 연못을 제외하면 없 으니……. 연못가의 왼쪽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오른 쪽 끝에는 아무 것 도 없었던 것이다. 난 시체를 안고 연못을 향해 걸었다. 조금 걸으니 두 갈 래 길이 나왔고, 난 연못으로 가는 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체를 계속 안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어느새 연못가에 도착했다. 난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고 땅을 파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걸 손으로 파야하나, 아니면 삽이라도 찾아와야 되나? 마법……? "dig" 난 파낼 땅의 모양을 대충 생각한 다음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동굴 바 닥에는 한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생겨났다. 난 그 늙은이를 그 곳에 눕히고 흙을 덮어 주었다. 난 정말 내 손으로 사람을 묻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 묻었다." 젠장! 재수 없는 늙은이! 뭐 이쁜 구석이 있다고 내가 상까지 치뤄줘야되 냐? 그냥 가고 싶지만, 내가 워낙 예절과 의리를 중히 여기는 관계로 절이 나 하자. 난 그 늙은이의 무덤에 대고 두 번 절을 하였다. 어! 그러고 보니 비석이 없네? 어쩌지? 그 냥 갈까? 그래도 받은 게 있는 데……. 좋아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죽은 사람 비문 하나 정도는 새겨줘야지. 내가 생각한 방법은 간단했다. 비석 대신 동굴 벽에 글을 새기는 것이었 다. 클래스 9 마스터의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드리 150여년의 짧은 생을 마 감하고 이 곳에 잠들다. 동굴 벽에는 멋진 필체로 글이 새겨졌다. 흠, 그 늙은이 글씨하난 잘 쓰는군, 불쌍해서 대마법사라는 말도 붙여준 다. 난 왜 이렇게 착한 걸까?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 필체는 내 필체가 아니다. 난 학교에서도 악필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내가 쓴 글자를 읽는 선생이 단 한 명도 없겠는가? 그 늙은이가 언어에 관한 기억을 전부 나에게 전해주었기 때문 에 내 필체와 그 늙은이의 필체가 같아진 것이다. "아! 정말 잘 썼군, 내가 진짜 문장력 하난 끝내 주는……!" 난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문장을 감상하는 중 치명적인 실수 두 개를 발견 한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걸 어쩌지? 이그드리가 아니라 이그리드였지, 그리고 짧은 생은 무슨 짧은 생이야 150살이나 처먹었으면 살만 큼 산 거지! 씨발 150년이 짧은 생이면 100살 처먹은 노인네가 죽으면 요절했다 그러겠네! 으아, 미치겠다! 잠깐, 기왕 이렇게 된 거 내 이름도 밑에 새겨 넣자. 근데 뭐라고 하지? '박영웅'이라 고 해야 하나? 난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 '박영웅' 이라는 이름은 이 세계의 언어로는 발 음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아주 이상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름은 뭘로 하지? 멋지게 하나 지어야 할텐데? 뭐라고 하지? 내 이름이 '영웅' 이니까, 영웅은 '히어로(hero)'! 너무 이상한데……, 그냥, 줄 여서 '히로' 라고 쓰자. 성은…… 뭐라고 하지? 음∼, 그래. 그 늙은이 성을 따서 '아이언스' 라고 하자! 어차피 남남도 아닌데……. '아이언스 히로' 어감이 아주 좋군. 난 이름을 생각해 내자마자, 마법으로 동굴벽에 새겨넣었다. 클래스 9 마스터의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드리(x) 150여년의 짧은(x) 생 이그리드 긴 을 마감하고 이 곳에 잠들다. -대마법사 아이언스 히로(박영웅)- 일단은 틀린 글자에 X표시를 하고 그 밑에 다시 써넣었다. 그리고 난 클 래스 9마스터니까 대마법사 '아이언스 히로'라고 멋지게 새겨 넣었다. 아 완벽해! 난 왜 이렇게 잘났지! 좋았어 이젠 여행 준비나 해볼까? ……. 아직 머리가 띵 하니까 잠이나 한 숨 때리고 해자. 괜히 무리해서 몸상할 필요는 없지. 난 생각을 하자마자,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난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을 너무 많이 잤더니 오히려 더 피 곤해진 것 같다. 우두둑, 뚜둑 허리와 목의 관절을 대충 풀어준 후에 방밖으로 나왔다. 일단 동굴 탐험 (?)이나 해야겠다. "light" 난 시동어를 외쳐 수십 개의 빛의 구들을 만들어 냈다. 동굴 안은 대낮처 럼 밝아졌다. 난 그 빛들이 날 따라오게 해놓았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못 보던 길이 하나 있었다. 두 갈래 길이 나오기 전에 있는 길인데 그 동안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아서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길로 들어 가 조금 걸으니, 몇 개의 문이 있었다. 끼이익 "여기는?" 난 그 중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늙은이가 띄워 놓았는지 천장에 는 거대한 빛의 구가 떠 있었다. 난 그곳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서잰가?" 방의 크기는 웬만한 도서관의 크기와 비슷했고, 일렬로 서 있는 책장에는 수 만 권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져 있었다. 난 그 방대한 양의 책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늙은이, 공부도 열심히 했나보네! 그 곳에 계속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문을 닫고 나왔다. 이번엔 옆의 문을 열어보았다. "우∼ 욱."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을 바라보니 실험실이었다. 이상한 약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벽 쪽의 선반에는 박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젠장, 변태 같은 늙은이! 난 그 늙은이의 욕을 바가지로 하고 방을 나왔다. 다음 방은 식품 저장고였다. 그 늙은이가 어떻게 100년 동안 동굴 속에서 처박혀 있었는지 이곳을 보니까 이해가 갔다. 무슨 식품 저장고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100년은 먹고 살겠다." 내 말에는 조금에 과장도 없다. 정말 이 정도 양이면, 100년은 배터지게 먹고도 남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공간에 한쪽에는 과일과 야채가 다른 한쪽에는 고기와 생선이 또 한쪽에는 술과 음료로 보이는 것 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이 곳은 방 전체에 '보존'마법이 걸려 있어 절대 음식물이 썩거나 상할 염려는 없었다. "맛있네!" 기왕 이곳에 왔으니 난 그 곳에 있는 과일들을 마구 집어먹었다. 이제 그 늙은이가 죽었으니 내가 이곳 주인이다. 그러므로 이 음식도 내 꺼다. 난 먹는 것을 정당화시키면서 더 이상 안 들어 갈 때까지 과일을 입안에 우겨 넣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 다음 방으로 가보았다. 그 곳은 창고였다.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하고 공기가 탁한 걸로 봐서 한동안은 그 늙은이가 출입을 안 한 것 같았다. 난 탁한 공기를 참아내며 여기저기를 뒤져보았다. "좋은데!" 난 한시간 가량이나 수색한 끝에 쓸만한 물건 몇 개를 발견하였다. 배낭, 망토, 단검 두 개, 그리고 지금 막 찾아낸 지팡이. 젠장 장검도 하나 있으 면 좋을 텐데…… 지팡이의 길이는 약 1m50cm정도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몸체에 끝에는 붉은 색 구가 매달려 있었다. 예쁘게 빛나기는 하지만 보석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특이한 점이 없는 평범한 지 팡이였지만, 보통 지팡이는 아니었다. 일단 엄청나게 강한 protect마법이 걸려있어 강도는 웬만한 다이아몬드보다 강하고, 어느 정도는 마력을 증폭 시켜주는 기능이 있다. 게다가 이 정도면 그냥 짚고 다니는 데도 꽤 쓸만 하였다. 원래 마법 지팡이의 용도는 마법을 시전할 때 편리하게 하기 위해 서다. 초보 마법사의 경우에는 마나의 흐름을 원활히 통제하지 못하기 때 문에 이런 지팡이를 매개체로 사용하면, 훨씬 편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 다. 어쨌든 이 지팡이는 좋은 지팡이라는 얘기다. 다른 것들도 꽤 쓸만했다. 배낭은 적당한 크기에 매기 좋게 되어 있었고, 단검도 손 한뼘 크기에 날이 적당히 서 있어 잘 들 것 같았다. 망토는 새 까만 검은색인데 친절하게끔, 비올 때 쓰라고 모자까지 달려 있었다. 두께 도 적당히 두툼한게 걸치면 따뜻할 것 같았다. 난 폼을 잡으며 망토를 한 바퀴 돌린 다음 내 몸에 걸쳤다. 망토는 내 등과 가슴을 완전히 가려주었 다. 바닥에 닿으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다행히 내 발뒤꿈치쯤에서 멈추었 다. 그런데…… 냄새가 좀 나는군. 나중에 빨아야지. 난 찾은 물건을 대충 챙긴 후에 방을 나왔다. 이젠 뭘하지? 에라 모르겠다. 담배나 피면서 생각하자. 난 방으로 돌아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그 늙은이가 죽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히 말하면 집에 돌아 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씨발, 내가 미쳤다고 돌아가서 수능보고 싶 겠냐? 별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계속 남아 있을 생각도 없 다. 역시…… 돌아가야 겠다. 수능보기는 싫지만 내가 여기서 뭘 하겠냐? 근데 방법이 없잖아! 내가 원래 세계로 다시 돌아가려면 그 곳의 좌표를 알아야 가능하다. 좌 표를 설정하는데는 일단 기준점이있어야 한다.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원래 세계의 도착점의 좌표와 그 좌표의 출발점이 되는 이 세계의 좌표. 이 두 가지를 알아야 가능하다. 그 늙은이의 경우에는 도착점의 좌표 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나를 이딴 곳으로 불 러 온 것이다. 흑흑, 돌아가고 싶어! "앗 뜨거!" 내가 생각을 마칠 때쯤 담뱃불은 내 손가락까지 타올랐다. 젠장. 난 담뱃불을 바닥에 던져 발로 부벼서 껐다. 그러고는 침대에 털썩 누워 내일을 위해 잠을 청했다. 졸립다. 이곳에 와서 잠만 늘은 것 같군. 난 잠 들기 전, 주먹을 쥐면서 힘차게 외쳤다. "난 반드시 돌아간다아∼!!!" 왜냐구? 그 미친 늙은이 띠꺼워서라도 돌아가고 만다. "으∼ 아∼." 난 기지개를 켠 후,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방밖으로 나왔다. 방문을 열고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연못과 창고, 마법진이 그려졌었던 장소 등이 있고, 왼쪽으로 가면 동굴 입구가 있다. 어떻게 아냐고? 그야 오른쪽은 많 이 가봤고 왼쪽은 엄청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니까. 아마 그 늙은이가 동 굴 안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결계를 쳐 놓은 걸 꺼다. "으아! 차다." 볼일을 보고 연못물로 세수를 하였다. 음 머리가 가렵구만. 하긴 일주일이 넘게 목욕을 안 했으니, 나가 기전에 씻고 나갈까? 물이 차갑긴 하지만 냉 수욕한다고 생각하고 하자. 난 생각을 마치자마자 옷을 벗고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으아으, 얼어죽겠네." 연못의 물이 뼛속까지 스며드는데, 졸라리 차가웠다. 다행히 연못의 깊이 는 내가 서 있으면, 딱 머리만 나오는 정도의 깊이였기 때문에 난 그 곳에 서 헤엄을 치며 놀 수 있었다. 추위도 이젠 견딜만하군. 아, 옷이나 빨아야 겠다. 근대 내가 빨아야 하나?…… 나중에 빨자. 난 빨래한 것은 포기하고 물 밖으로 나왔다. "따닥따닥." 난 이빨을 부딪히며 온몸을 떨었다. 물 밖으로 나오니 진짜 얼어죽을 것 같았다. 난 몸을 닦고, 물기가 어느 정도 마르자 적당히 옷을 걸쳐 입었다. 일단 방으로 돌아와 전에 찾아 놓은 물품들을 챙겼다. 잠바와 가방은 그 냥 놓아 두고 나왔다. 어차피 이 세계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으니…… 언젠 가 다시 찾을 날이 있겠지. 그리고는 식품 저장고로 가서 배낭에 가득 식 량을 쑤셔 넣었다. 과일은 부피를 많이 차지하니, 포기하고 대부분 말린 고 기를 쑤셔 넣었다. 단검 하나는 망토의 안주머니에 다른 하나는 가방에 집 어넣었다. 난 망토를 두른 뒤, 배낭을 걸쳤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멋지게 지팡이를 들었다. 여행 준비 완료! 난 그냥 출발하려다 내가 워낙 예절과 의리를 중히 여기는 관계로 그 늙 은이 무덤에 절이나 하고 가기로 했다. 난 연못가로 가 그 늙은이 무덤에 두 번 절을 하고 말했다. "저 이제 떠납니다. 비록 당신 때문에 이 이상한 곳까지 끌려와서 개피 보긴 했지만, 이젠 모든 걸 용서하고 이곳을 떠나려 합니다. 부디 어두캄캄 한 땅속에서도 행복하시길." 난 그렇게 멋있게 연설을 한 후 다시 지팡이를 들고 떠나려 했다. 하지만 억울해서 한 마디만 더하자. "빌어먹을 너 때문에 내 인생 끝장났어. 니가 뭔대 날 이딴 곳을 불러내, 어? 니가 그렇게 잘났어? 궁금하면 니가 이쪽으로 올것이지, 왜 하루하루 를 열심히 살아가던 날 부른거야! 그리고 그딴 쓸데없는 연구는 대체 왜 한건데! 너 미쳤냐? 이계의 존재를 증명한답시고 100년 동안이나 동굴에 짱박혀서 연구를해? 너 또라이지? 또라이 중에서도 개또라이! 내가 서울로 다시 못돌아가면 너 진짜 죽을 줄 알어!" 난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한 마디 치고는 좀 길군. 기분 이 좀 나아진다. 진작에 이럴걸. 젠장 그 미친 늙은이 때문에 이게 무슨 짓 이냐? 내가 왜 여행을 해야돼는데? 잠깐 내가 지금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뭐지? 머릿속으로 그 늙은이 욕을 하다보니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그 책. 그 때 동굴 바닥에 놓아 둔 뒤로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난 할 수 없이 온 길을 다시 걸어서 내가 처음 소환된 장소로 돌아가 책을 가지고 나왔다. 동굴 입구로 와보니 전에 짐작했던 데로 엄청난 결계가 쳐져있었다. 결계 를 자세히 살펴보니 아주 특이한 구조로 생겨 먹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지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면 결계를 뚫어야 한다. 아마 밖에서 볼 때는 이 동굴이 있는지도 모를 꺼다. 단순히 눈속임 만이 아니라 만질 수도 있고, 마나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난 마음을 굳게 먹고 한발 한발 내딛었다. 이제 이 동굴을 나가면 긴 여행 이 시작된다. 난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듯 이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리라. 왜냐? 난 클래스 9마스터고 무지무 지 잘났으니까. 내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 리! 아, 난 너무 잘났구나!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 몸은 이미 결계를 지나갔다. "우하하하!" 난 결계를 지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늙은이가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들 고 두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웃었다. 이런걸 보고 자유를 향한 끝없는 열망이라고도 하지. "이런, 씨발!!!" 난 동굴 밖을 나오기 전부터 밖의 모습을 상상했다. 여기저기로 뻗은 산 맥들,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햇빛, 시원한 바람,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 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난 나무들 그런데 동굴 밖의 풍경은 그게 아 니었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 그렇다. 지금은 밤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밤중. 거기다가 나의 출발을 축복이라도 하듯, 하늘에선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에서 음악 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빠바바바바♬빠바♬빠바바바♬빠♬빠바바바♬빠바바바♬빠 빠 빠♬ (D·O 1집 서곡 운명에 맞서다) 쏴아아-! 난 한동안 장대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아∼ 재수가 없을려니 별일이 다 일어나는 구나. 난 몸을 돌렸다. "한잠 더 자고 나오자." 방금 전에 한 결심은 3분만에 무너지고 난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 퍽-! "쓰읍- 결계!" 아파 죽겠네. "우하하하." 이번엔 진짜다. 동굴 안에서 한잠 때리고 나왔더니, 바깥의 풍경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때는 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봄.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흐 르고, 향긋한 풀 내음을 실은 바람이 불어와 뺨을 어루만진다. 따사롭게 비 치는 햇살 아래 생물들은 자라난다. 산맥과 골짜기들은 끝이 보이지 않게 뻗어 간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산맥을 빽빽히 덮고 있는 나무와 풀 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하늘은 더욱 맑았다. 내가 지금 서있는 이 곳은 절벽의 중간 지점…… 아찔하군. "Fly" 머릿속으로 캐스팅을 한 후 시동어를 외쳐 몸을 띄웠다. 몸이 서서히 떠 오르자 아래의 풍경이 더욱 잘 보였다. 음, 하늘을 나는 기분도 괜찮네. 난 몸을 하강시켜 발을 땅에 딛었다. 한걸음 두걸음, 난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 다. 어두운 동굴에 일주일이 넘게 짱밖혀 있었더니, 따사로운 햇빛이 매우 감동적이었다. "헥 헥." 씨발. 감동도 한, 두 시간이지 한 대, 여섯 시간 걸으니 완전 미칠 지경이 었다. 중력 차단 마법을 써서 무게를 줄이긴 했지만 등에 맨 가방의 무게 도 장난이 아니었다. 든 거라곤 말린 고기와 물, 단검, 책이 전부지만 이거 들고 산길을 걷기엔 무리가 좀 있었다. 내려가는 길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따라서 걸었는데, 어떻게 된게 점점 깊이 들어가는 것 같다. 이런걸 보고 길을 잃었다고 하는 건가? 가다쉬다 가다쉬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었 다. 달밤에 조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노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주위 에 여관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이 런데 여관을 지을 리 없지!) 난 적당한 곳을 골라 자리를 만들고 배낭을 내려놓았다. 힘들군! 그래도 망토 덕에 밤이 되어도 별로 추위를 느끼지 못하였다. 망토가 두툼해서 그 러냐고? 그건 아니다. 그랬으면 낮에 쩌죽었게! 이 망토는 걸치고 있으면 망토 안의 온도가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어 지는 특수한 망토인 것이다. 역시 마법사의 아지트(?)에서 가져 온 거여서 그런지 참 특이하구만. 어쨌 든 망토 덕에 별로 춥지는 않았지만 밤에 혼자 산 속에 있으려니 무서워, 불이라도 켜 놓는게 좋을 것 같아서 일단 나뭇가지를 모았다. "어떻게 불을 붙이지? 마법? 아! 라이타." 난 마법을 쓰려다 주머니에 있는 라이타가 생각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담배피는게 이럴 때 도움이 되네. 끄낸 김에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담배를 피웠다. 주위는 고요했고 밤하늘에 별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서울은 공해 때문에 별이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곳은 감상에 빠질 정도로 잘 보였다. 괜히 가족들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 다. 난 감상에 젖기 싫어 모닥불에 나무를 던져 넣는 짓을 계속 하고 있었 다. 낮에 계속 걸어서인지 몸이 매우 피곤했다. 불침번 서줄 사람도 없으니, 그냥 자야되나? 숲속에 혼자 잔다는 게 무섭 기는 했지만, 몰려오는 피곤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망토를 이불 삼아 누웠 다. 바스락, 바스락-! 무슨 소리지? 내 귀에는 누군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난 옆에 놓아둔 지팡이를 쥐어 들고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스락- 바스락- 쿵- 쿵- 단지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만 나는 것이 아니라 땅에 진동도 느껴졌다. 난 두려운 마음을 감추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쿵-! "이건?" 난 내눈을 의심했다. 내 눈 앞에 나타는 것은 키가 약 3m정도 되고 온몸 이 근육질로 되어 있는 추하게 생긴 거인이였다. 손에는 거대한 도끼를 들 고 있었는데 크기로 보아 도저히 인간이 들 수 있는게 아니었다. "이런, 빌어먹을." 어느새 내 눈앞에는 지금 보고 있는 놈과 똑같이 생긴 놈들이 여럿 나타 났다. 못 되도 열 마리 정도. "오우건가?" "크르르, 인간이다, 인간." 내가 대충 몬스터 이름을 때려 맞추고 있을 때, 한 놈이 가래 끊는 소리 를 내며 말을 했다. "크르르, 인간 죽어라." 맨 처음 나타났던 놈이 도끼를 들고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다리는 덜덜 떨리고, 이빨은 따닥따닥 부딪혔다. 그래도 명색이 대마법산 데. 난 떨리는 다리를 진정 시키며 캐스팅을 완료했다. "power word kill" 그리고 캐스팅을 마치자마자 그 놈에게 마법을 썼다. 그런데 이게 웬일? 마법이 나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마나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마법이 안 나가 당황해 할 때쯤, 그 놈은 어느새 내앞에 다가와 도끼를 내리 찍고 있었다. 난 순간적으로 지팡이를 들어 도끼를 막았다. "으아아!" 다행히 지팡이로 막아 몸이 둘로 분리되는 일을 없었지만, 내리치는 힘에 의해 뒤로 넘어졌고, 그 놈은 계속 날 짖누르고 있었다. 허리에는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고, 하반신에는 감각이 없었다. 젠장, 살아야되, 살아야되. 난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며 간신히 그 도끼를 막아 들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다른 놈들도 서서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진짜 이데로 죽는 건 가? 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공포와 고통으로 인해 머릿속은 새하애졌다. 빌어먹을……, 여기서 죽으면, 그게 무슨 개쪽이냐? "크르르, 죽어라 인간." 날 누르고 있던 놈은 도끼를 들어 다시 나를 내리찍으려 하였다. "으아아아! magic missile!" 그 놈이 도끼를 내리 찍는 순간 난 시동어를 외쳤고, 어느새 만들어진 빛 의 화살이 그 놈의 가슴을 맞추었다. "쿠에엑." 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고, 다른 오우거들도 잠시 주춤했다. 난 그 틈을 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척추가 부러졌는지,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크르르, 죽여라." 내가 저항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한 놈이 그렇게 외쳤고, 다른 놈 들은 나에게 달려들었다. "magic missile!" 누워있는 상태여서 좌표를 설정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그냥 사방으로 매직 미사일 십 여 발 날렸다. "쿠엑" "쿠엑" 오우거들의 짜증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심할 수 없었기에 난 다 시 캐스팅을 했다. "씨발, 제발 좀 죽어라! magic missile!" 세 번 정도 쓰고 나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 합쳐 30발 정도는 쐈으니 아마 놈들은 전부 죽었을 것이다. 어쨌든 살아남은 건가? 허리에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일어나야 되는데……. 난 계속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회복 마법 몇 개가 생각나긴 했지만, 몸속의 마나가 더 이상 움직여 주질 않았다. 젠장, 그 빌어먹을 늙은이 때문에 이런 곳에서 죽게되다니, 내 인 생도 불쌍하군! 난 멀어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한가닥 남은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난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다. 주위에 쓰러져있던 오우거들이 다시 일어나 기 시작했다. 그 들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몸을 도끼로 찍었다. 내 몸은 두 동강이 났고 놈들은 그것을 또 몇 개로 찢었다. 주위는 피로 흥건한데 놈들은 내 몸을 먹기 시작했다. 난 안된다고 소리쳤지만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 몸이 서서히 놈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내 머리는 반쯤 먹혀 뇌수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놈들의 입안으로 들어 가고 있는 내 눈과 마주쳤다. "으아아악!" 난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있고 눈에 보인 천 장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방금 본 장면이 생각나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꿈인가?" 난 몸을 더듬어 보았다. 허리가? 아까 척추가 부러 진 것 같았는데…… 허리에는 더 이상 통증이 느꺼지지 않았고 다리에도 감각이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꿈이지? 오우거 만난데 서 부턴가? 아님 처음부터 모든게 꿈이 었나? 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방은 온통 하앻고 침대나 탁자 등 필요한 몇 가지 가구만 배치되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내 배낭과 지팡 이가 놓여있었다. 대체 여긴 어디지? 분명 오우거한테 공격을 받아서 쓰러 져있었는데? 나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깨어 나신 것 같군요." 목소리로 들어 보건데,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의 남자. 얼굴은 무지 잘생 김. 뭐 목소리와 얼굴이 딴판일 수도 있겠지만……. 난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프?"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엘프였다. 190정도 되는 키에 갸냘픈 몸매, 풀어 헤친채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생머리와 약 20cm정도 되는 뾰족한 귀. 얼굴은 매우 아름다웠다.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에 오똑한 코,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붉은 색 눈동자. 난 넋을 잃고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몸은 이제 괜찮으신가요?" "예, 예" 그가 말을 건네는 바람에 난 얼굴을 붉히며 정신을 차렸다. 엄청 예쁜 얼 굴에 비해 목소리는 분명 남자의 목소리였다. 난 그의 가슴 근처를 바라보 았고 그제서야 그가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생겼냐? 엘프가 이쁘고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정말 이 정도 일줄을 몰랐다. 이 엘프랑 비교한다면 내 얼굴은 추하다고 할 정도였다. 참고로 난 172cm 의 키에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못생긴 얼굴은 절대 아니 다.(가끔씩 못생겼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눈이 삔 놈들) 그냥 그저 그런 얼굴. 몸은 뭐 그럭저럭 표준형이고 머리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 고 보니 진짜 내세울 것 하나 없군. "많이 좋아지신 것 같군요. 하룻동안이나 깨어나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예, 예" 그는 침대에 앉아 내 얼굴에 가까이 하며 말을 했기에 난 매우 놀랐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아름다웠다. 내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이제 새빨개졌 고, 가슴은 쿵쾅쿵쾅 요동을 쳤다. 그런데 내가 하룻동안이나 누워있었나? 난 뛰는 가슴을 진정 시키며 그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딘가요?" "이곳은 제 집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는 생긋 웃으며 말했고, 난 다시 한번 얼굴이 붉어졌다. 웃는 얼굴은 더 예쁘네! 근데 존댓말좀 쓰지마요. 나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엘프는 1000년을 산다고 했으니 실제 나이는 훨씬 많겠군. "당신이 절 데리고 오셨나요?" "예, 산책을 하다 싸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오우거 십여마리와 당신이 쓰러져 있더군요. 다행히 숨이 붙어있길래 이곳으로 데려와 치료를 했습니 다." 그는 내 물음에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척추가 부러진 정도 로 크게 다쳤는데 그걸 치료했다니…… 대단한데! 그리고 무슨 엘프가 산 속에 사냐? 원래 숲 속에 사는 거 아닌가? 거기다가 달밤에 산 속을 산책 해? 말이 안되네. 흠, 뭔가가 이상해!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그는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될 수 있는 한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예쁘냔 말이다! 저렇게 생긴 남자라면 사귀는 것도 고 려해볼 수…… 앗! 내가 무슨 생각을……. 난 잽싸게 머릿속에 있는 이상한 생각을 지운 뒤 아까 하던 생각을 다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프가 이런 곳에 있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척추가 부러진 것을 하룻밤만에 치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치유 마법이 라도 썼나? 난 그의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산 속에 사는 엘프? 엄청 예쁜 엘프? 마법 잘 쓰는 엘프? 붉은 머리 엘프? 엥……, 붉은 머리? '붉은 머리에 산 속에 살면서 마법 잘 쓰고 엄청 예쁜 엘프!' 내 머릿속의 생각들은 하나로 합쳐졌고 난 불길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 다. "레드 드래곤!?"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왔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눈길에 웃음으로 답례를 한 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더니 재미있다는 눈으로 내 표정을 쫒 았다. "후훗…… 눈치가 빠르시군요." 쾅! 난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설마 했는데……? 드래곤! 그들은 세계 최강의 생명체다. 칼로 내리쳐도 기스하나 나지 않는 피부. 대한민국 수재들도 한 수 접어 주는 좋은 두뇌. 마음만 먹으면 나라 하나 를 날려버리는 강대한 마법 등등. 그런데 그 드래곤이 지금 내 눈앞에 있 는 것이다. 그것도 재수 없게 드래곤 중 제일 성깔 드럽고, 싸가지 부도 나 버렸다는 레드 드래곤이! 젠장, 기왕 만날꺼면, 지적이고 인간을 만나면 용 돈 좀 줘서 돌려 보내준다는 골드 드래곤을 만나면 좀 좋냐? 난 용기를 내 그를 보았고, 그 순간 그의 붉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난 잽 싸게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내 얼굴에는 또 다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기 시작했다. 으아, 미치겠다! 이 딴 이상한 세계로 끌려와서는 만났다 는게 미친 늙은이, 오우거, 이번엔 드래곤이냐?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거냐!? "제 소개를 하지요. 전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라고 합니다. 당신은 박영웅 인가요? 저 엘프 아니 저 드래곤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아니, 그보다 정확하 게 발음했다는게 더 신기하군. "예, 예 전 박영웅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난 살려달라는 의미로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떨려서 목소리도 제대로 안나오는군. 차라리 오우거랑 대화 하고 말지. "하하, 그냥 크로니스라고 부르십시오. 실례인 줄 알면서도 당신의 짐을 뒤졌습니다. 죄송합니다." 크로니스의 손에는 낯이 익은 책이 들려 있었다. 저 책이……? 아, 그 늙 은이가 쓴 책이지. "아, 아닙니다.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신데……." "책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재미있더군요. 당신은 이계에서 온 존재인가 요?" "예." 그 책을 재밌게 읽었다니, 취향도 특이하군. 내 얘기 적은게 그렇게 재밌 나? "이그리드는 결국 죽었군요. 인간으로서는 꽤 오랜 세월을 살았는데……." 엥? 이 드래곤이 그 재수 없는 늙은이를 알고 있나? "그 미친 늙은이…… 아, 아니 이그리그씨를 알고 계시나요?" "예, 물론입니다. 그는 제 영지 안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가끔 만나서 차 도 마시고 얘기도 했습니다. 그가 연구하는 것을 보고 쓸데없는 짓이라 생 각했는데, 결국은 성공했군요." 아∼, 그 동굴이 드래곤 영지에 속해있니까, 입주허가를 받고 살았던 거 군. 그런데 옆집에 드래곤이 살고 있었다면, 죽기전에 얘길 해주고 죽었어 야지! 누구 엿 먹일 일 있냐? 꼬르륵-! 이게 무슨 소리? "하하, 배가 고프신가 보군요. 제가 너무 오랫동안 얘기만 했네요. 저 쪽 에 식사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예" 젠장, 내 배에서 나는 소리였군. 쪽팔리게 이럴 때 이런 소리가 나냐? 그 런데 설마 식사하자면서 날 잡아먹는 건 아니겠지? 크로니스는 이미 몸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고 난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뒤 를 따라갔다. 뒤에서 보니 붉은 색 머리가 더욱 이뻐보인다. 허리도 쫙 빠 지고 엉덩이도 빵빵해 보인다. 특히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선이 진 짜 예술이었다. 거기다 바지를 입고 있어 잘은 안 보이지만 다리도 쫙 빠 진 것 같았다. 진짜 죽인다! 난 침을 질질 흘리며 계속 크로니스의 뒤를 따라갔다. 크로니스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식탁이 놓여저 있고 그 위에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앉으십시오." 크로니스는 의자를 빼주며, 나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런 건 내가 해도 되는데, 친절하기도 해라! "감사합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크로니스도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와 스테이크, 야채와 고기를 적당히 섞어 만든 야채고 기볶음(?), 갓 구워낸 듯한 빵, 수십 종류의 파이 등등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참고로 접시와 그릇이 번쩍거리는 걸로 보아 엄청 비싼 것 같았다. 냄새가 끝내주는군! 근데 이거 저 드래곤이 만든 건 가? 크로니스는 생긋 웃으며 나에게 음식을 권했다. "드십시오." "아, 예." 난 기다렸다는듣이 수저를 들어 스프를 떠먹어 보았다. 스프는 정말 맛있 었다. 내 입맛에 정확히 맞춘 간과,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목구멍으로 넘 어가는 이 느낌! 일주일 정도를 말린 고기와 과일만 먹었더니, 진짜 감동이 군. "입맛에 맞으시나요?" 난 입안의 수프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아, 예. 아주 맛있습니다. 이거 직접 만드신 건가요?" "예. 제 취미가 요리거든요. 맛있게 드십시오." "아, 예,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무슨 드래곤이 취미가 요리냐? 내 신부 삼았으면 딱 좋겠구만!…… 앗! 내가 또 무슨 생각을! 크로니스는 아무 것도 손대지 않고, 내가 먹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난 조 금 쪽팔렸지만, 배가 고픈 관계로 되는데로 음식을 집어 입안으로 우겨 넣 었다. "감사히 먹었습니다." 난 내 앞에 있는 음식들을 몽땅 뱃속으로 쓸어 넣은 뒤 물을 마시며 말했 다. "맛있게 드신 것 같아 저도 기쁘군요." 아∼ 이렇게 친절할 수가. 이제부터 내 앞에서 레드 드래곤의 성깔이 드 럽다고 말하면, 면상을 한 대 갈겨버리던지 해야지. "차 한잔 마시겠습니까?" "예." 크로니스가 손을 휘젓자 식탁 위에 있는 식기구와 음식들은 모두 사라지 고, 찻잔이 나타났다. 찻잔 역시 아주 비싸 보였다.(난 왜 이런게 먼저 생 각날까?) 찻잔 안에는 붉은색 액체가 있었는데 냄새가 아주 향긋했다. 홍 찬가? "어쩌다 오우거들에게 당하셨나요?" 크로니스는 차를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아 예, 저 그게……." 나 또한 차를 마시며 그 때 상황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을 하였다. 냄새와 달리 쓰구만! "음 power word kill을 사용했는데, 마나가 움직이지를 않았다구요? 흠∼, 그건 당신이 아직 완전한 클래스 9의 마법사가 아니여서 그렇습니다." "예?" 난 차를 내려놓으며 반문했다. 그 늙은이, 클래스 9마스터라더니, 설마 사 기친거아냐? "아,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군요. 이그리드씨는 확실하게 당신에게 클래 스 9의 마나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죠?" "당신은 클래스 9마스터가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나 운용능력이 완 전하지 않군요." "마나의 운용이요?" "이그리드씨는 1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수련을 해서 클래스 9마스터가 되 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단 한순간에 그 경지에 오르셨습니다. 그래서 어 느 정도까지의 마나는 제어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마나는 제대로 제어하 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거였나? 어쨌든 높은 클래스의 마법은 사용을 못한다는 얘기 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단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 앉히세요." 난 그가 시킨 대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 앉혔다. "이제 정신을 집중해 몸속에 있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도록 하세요." 난 눈을 감은 채 마나의 흐름을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였다. 뭔가 느 껴지는데! 내 몸에는 단전을 중심으로 마나가 모여 있고 그 주위에 마나가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원 위에 원이 그려져 있고, 또 그 위에 원 이, 또 그 위에 원이…… 원의 개수를 세어보니 9개 였다. 그 중 안쪽의 다 섯 번째 원까지는 마나가 움직이는데 그 바깥의 원들의 마나는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었다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데요. 다섯 번째 원을 그리는 마나까지는 움직이 는데, 그 바깥의 원들은 안 움직이는데요." "마나가 원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을 써클이라고 합니다. 상위 써클로 하 위 클래스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반대로 하위 써클을 그 리는 마나로는 상위 클래스의 마법을 시전할 수 없습니다. 당신 같은 경우 에는 5써클의 마나까지만 움직이니 클래스 5 마스터라고 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당신의 몸에는 이미 9써클까지의 마나가 그려져있습니다. 조금만 수련을 한다면 나머지 써클의 마나들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일단 6 써클을 그리고 있는 마나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세요." 아, 그런 거였나? 난 그가 시킨 대로 마나를 움직이려고 정신을 집중하였 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계속 생각을 하자 6써클의 마나가 아주 조금씩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되는데요." "그렇게 계속 수련을 하시면, 높은 클래스의 마법들도 무리 없이 사용하 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이제 눈을 뜨세요." "예" 난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궁금한게 있으시면 또 물어보십시오." 그는 어느새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한 쪽으로 치워놓았다. 난 이미 식어 버린 차를 원샷한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얼마나 사셨지요?" "약 3700년 정도입니다." 으아! 요새 들어 놀랄 일이 많아지네! 어떻게 3700년이나 사냐? 하긴, 드 래곤의 수명은 만년이라고 했으니, 아직 반도 안 살은 셈이겠군. "이그리드씨의 마법 능력은 어느 정도 인가요?" "실제로 현대륙에서 아이언스 이그리드 보다 강한 마법사는 없습니다. 그 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뛰어 넘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와 대결한다면 이 길 자신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비기는 정도 일것입니다." 그 늙은이가 그렇게 강한 마법사였나? 세상에…… 드래곤도 한수 접어줄 정도라니! "아, 맞다. 저기 정령은 어떻게 부르는 건가요? 이그리드씨 말로는, 전 정 령과 계약을 맺는게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정령 말인가요? 정령을 부르려면 일단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계약은 절 대적이여서 한번 계약을 하면 그 정령은 계약자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자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정령 과 친화력이 있다면, 어린아이라도 계약을 맺을 수 있고 반대로 친화력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대마법사라 해도 계약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 법사와 정령술사는 구분되는 거구요. 물론 저희 드래곤 같은 경우에는 타 고납니다만…… 당신은 이계의 존재여서 그런지 정령과 친화력이 없군요. 이그리드도 그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 가요?" 그는 내가 풀이 죽은 것 같아 안돼 보였는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필요한 거라…… 필요한 건 많지. 갈아입을 속옷, 양말, 김치, 새우젓, CDP, 서울행 새마을호 티켓 등등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난 마음속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말했다. 한번 사양은 예의라고도 하지.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필요하신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후훗, 그럼 여행 경비는 있으신 가요?" "……." 경비? 돈을 말하는 건가? 돈이라…… 그렇다. 지금 나는 거지였던 것이다. 가지고 있는 돈이란 이 세계로 날 소환시킨 빌어먹을 금화 하나. 난 어떻 게 돈도 없이 여행할 생각을 했지? "일어나십시오." 난 그가 시키는 대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머리를 살랑거 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잠깐 사이에 주위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었다. 워프 마법을 쓴건가? 원래 마법을 쓰려면 시동어를 외쳐야 하는데…… 드래곤 정도 되니 시동어도 없 이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데 여긴 어디……? "……!" 난 내 앞의 펼쳐진 광경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금! 주위에는 온통 번쩍이는 황금이었다. 엄청난 양의 금덩어리들이 사방에 가득 깔려 있었다. 금뿐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 드, 에메랄드 등 듣도 보도 못한 보석들이 오색 광채를 내뿜으며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금과 보석이 뿜어내는 빛 때문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아마 여기 있는 금과 보석들을 합친다면 성 하나를 쌓고도 남을 것이다. 드래곤 이 황금과 보석을 좋아한다지만 이렇게 까지 그는 생긋 웃으며 나에게 음 식을 권했다. . "마음대로 고르십시오." "……." 마음대로라면 다 가져가도 되나? 여기있는거 다 가져가려면, 덤프트럭 3 0∼ 40대 정돈 필요할 텐데. 대체 얼만 큼 가져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 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보석 감정법이라도 배워두는 건데…… . 난 발밑에 있는 보석을 하나 집어들었다.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의 다이 아몬드 였는데 보석에 대해 조예가 없는 나라도 비싸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세공 솜씨로 봐서 이건 인간이 만든 것 같지가 않았다. "그건 드워프들이 만든 겁니다. 그 정도면 작은 성하나 정도는 살 수 있 을 껍니다." 드워프? 아! 여긴 판타지 세계였지! 그런데 이 다이아몬드 가격이 성을 하나 살 수 있을 정도라고? "여기 이 많은 보석들을 어떻게 다 모으셨나요?" 내 질문에 그는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대답했다. "제가 여행하면서 얻은 것도 있고, 다른 나라 왕들이나 드워프들에게서 가져온 것들도 있습니다." 가져와? 뺏어왔다는 걸 좋게 표현 한건가? 그렇다해도 너무 많은데……. "그렇다해도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하하, 솔직히 말하면 이 중 1/3정도는 아까 말한 방법으로 얻은것이고, 나머지 2/3는 제가 직접 캐거나 만든 것입니다." 캐냈다고? 만들어? 금광을 찾아서 거기 있는 금들을 캐왔다는 건가? 뭐 그건 마법하나 쓰면 간단하게 해결 될 일일 테고…… 만들었다니? 보석을 만들어? "보석을 만들었다는게 믿기지 않으신가요?" 보석이 비싼 이유가 뭔데? 만들 수 없으니까, 희귀하니까 비싼거아냐. "예, 조금은……." 크로니스씨는 옆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예를 들어 이 다이아몬드 같은 경우에는 석탄에 열과 압력을 가해 만든 것 입니다." "아!" 난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 알고 탄성을 질렀다. 음, 그런 얘기였구만. 원래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같은 성분 즉 C(탄소)로 이루어져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석탄과 다이아몬드가 같다는 것은 아니다. 가격부터 차이가 나지 않는가?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엄청난 열과 압력을 받아야 한 다. 그런데 이런 열과 압력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기에는 불가능하므로 다이아몬드는 자연상태에서 극소수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 정도되면 그런 열과 압력을 만들어 내는게 가능할 것이다. 심심할 때마다 석탄을 다이아몬드로 바꾸면 그게 얼마냐? 돈방석이아니라 다이아몬드 빌 딩을 짓는 것도 가능하겠다. 아마 루비나 사파이어도 비슷한 방법으로 만 들어 내는 걸꺼다. 루비나 사파이어는 같은 성분 즉 Al2O3(산화알리미늄)으 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루비는 붉은색이고 사파이어는 파란색이다.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졌는데도 색깔이 다른 이유는 루비에는 소량의 불순물 Cr(크롬)이 섞여져서 붉은색을 띄는 것이고 사파이어는 소 량의 Fe(철)이 섞여져서 파란색을 띄는 것이다. 당연 자연상태에서는 Cr (크롬)보다 Fe(철)이 많으므로 사파이어가 많이 만들어 진다. 그러므로 희 귀성이 더 높은 루비가 가격이 더 비싸지는 것이다. 근데 내가 왜 보석학 강의를 하고 있지? 어쨌든 대부분의 보석들은 별거아닌 물질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단 그것 을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열과 압력이 가해야 한다. 그런데 그 열과 압력을 만들어내 보석으로 바꿨다는 건가? "믿기 힘드신가 보군요?" 그는 기분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믿습니다." "……." 내 대답에 그는 아무말 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거 얼만큼 집어가 지? 많이 집으면 욕먹는거 아냐? 그는 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았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하시는 만큼 가져가십시오." "예." 나는 계속 무슨 보석을 얼마만큼 가져갈까 고민했다. 어차피 전부 쓸 것도 아닌데……, 가져갈 수 있을 만큼만, 가져가자. 많이 가져가봐야 짐만 무거워지니……. 난 결심을 하고 금화와 보석을 양손에 한 주먹씩 쥐어서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이제 됐습니다." "욕심이 별로 없으시군요." "아닙니다. 이 정도만 있어도 여행하는데 충분하니……." 여행하는데 충분하다 뿐이 겠습니까? 평생 놀고 먹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 혹시 칼은 필요없으신가요?" 칼? 그러고 보니 칼도 없군. 마법사가 칼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만은 그래 도 허리에 칼을 차고 있어야 폼이 사니……. "예, 필요는 합니다만……." 아무리 얼굴에 철판 깔은 나지만, 죽어 가는 거 살려주고, 재워 주고, 밥 먹여주고, 돈까지 줬는데 차마 칼까지 달라고 하긴 미안해 말끝을 흐렸다. "……?" 내가 필요하다는 의사를 내비치자마자 주위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깐 황금 천지더니만, 지금은 무기 천지다. 창, 칼, 활, 도끼, 철퇴 등등 사 방에 무기가 진열되어 있는데, 정말 없는 무기가 없었다. "여기서 골라 보십시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수백 개의 칼들이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근데 무슨 칼이 저렇게 생겼냐? 송곳을 크게 만든 칼, 폭이30cm 길이가 2m인 칼,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칼, 톱날 칼 등등 실전에 쓰일까 의심이 갈 정 도의 이상한 칼들도 많았다. 난 그중 제일 예뻐(?)보이는 검을 하나 골라잡 았다. 누가 싸구려라고 할까봐 검집과 손잡이에는 보석이 박혀있는데, 검이 라고 하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운 칼이었다. 여성용으로 만들어 졌는지 무 게도 매우 가벼웠다. 난 검집에서 검을 빼 자세히 살펴보았다. 폭은 약 1.5cm정도, 검신의 길이는 1m정도로 매우 날카로와 보였다. "이건 어떠신 가요?" 난 그 검을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고 그가 건네주는 검을 받아 빼보았다. 아주 심플하게 생기고 매우 긴검이었는데, 손잡이 길이는 약 30cm정도, 검 신의 길이는 약 90cm정도, 폭은 약 5cm정도이고 아까 보았던 얇은 검보다 도 무게가 가벼웠다. 꼭 플라스틱 무게. 게다가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온통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아마 검날과 손잡이, 검집까지 전부 같은 재질로 만 들어 진 것 같았다. 그리고 검신 부분 전체에 수 십개의 마법주문이 새겨 져 있었다. "이 검은?"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가 만든 '라이트닝 블레이드' 입니다. 마나만 주 입시키면 전기 계통의 모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위력을 증폭시켜줍니 다. 게다가 블루 드래곤의 뼈로 만든 검이니, 웬만한 금속들은 힘들이지 않 고 벨 수 있을 겁니다." 이게 블루 드래곤의 뼈로 만든 거라고? 그래서 온통 푸른빛을 띄는 건가? 난 검신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거기 적힌 것들은 전부 전기 계통의 마법 주문들이었다. 물론 나 같은 천재(?) 마법사는 이런 검이 없어도 마법 사용 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지만, 캐스팅을 안하고도 마법을 사용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었다. "그리고 검이 아니라 도입니다." 난 그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검신을 자세히 보았다. 한번더 보니 확실히 날이 한 쪽 밖에 없었다. 도였네! 보통사람들은 도나 검이나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지만 둘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일단 도는 날이 한쪽 밖에 없고, 검은 양쪽에 날이 있다. 그 리고 도는 베기 공격을 위주로 하는 반면에 검은 찌르기를 위주로 공격한 다. 뭐, 어차피 폼으로 들고 다닐꺼니 별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이 도를 허리에 차고 다니면 정말 폼날 것 같다. 직도(直刀)가 아닌 약간 휜 환도(還刀)여서 총길이가 1m20cm나 되는데도 뽑는데는 별로 무리가 없 었다. "아까 그 검이 마음에 드신다면 둘 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이 걸로 충분합니다." 둘 다 가져가면 좋긴 하지만, 나도 염치가 있는 놈이니. 그리고 아까 그 검처럼 보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걸 가지고 나갔다가는 주위에 도둑이란 도둑은 전부 나에게 달려 들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검 아니 도를 저에게 주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물론입니다. 원래 드래곤에게 무기라는 것은 별 필요가 없으니까요." 난 고개를 숙여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옛말에 '생긴 대로 논다' 더니! 정말 옛말 틀린게 없구나! "저기 전 이제 그만 내려갔으면 합니다. 더 이상 패 끼치기는 너무 죄송 해서……." 사실은 이 곳에서 계속 머물고 싶었지만, 나가서 할 일이 있기에 난 눈물 을 머금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만 했다. "패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군요." "아, 아닙니다." "지금은 날도 어둡고 피곤 하실 테니 하룻밤 더 쉬시고 내일 출발하십시 오. 제가 내일 가까운 마을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 죽어 가는 사람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도 주고, 무기 도 주고, 그것도 모잘라 길 안내까지 해주겠다니! 아흐, 아흐, 감동! 또 감 동! 그가 다시 마법을 써 우리는 아까 내가 누워있었던 방으로 이동했다. "필요하신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요." "예,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난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무슨 일 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살다 보니 드래곤도 다 만나고, 역시 오래(?) 살 고 볼일이야! 난 라이트닝 블레이드와 보석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침 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예." 난 짐을 완벽하게 챙겼다. 라이트닝 블레이드는 왼쪽 허리에 멋있게 찼고, 보석과 금화는 품속에 잘 갈무리 해 두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요." "예." 어느 쪽이 출구지? 이 산길을 절세의 미인과 함께 걷게 되다니! 내 머릿속에는 이미 크로니스와의 아름다운 로맨스가 그려지고 있었다. 내가 이젠 완전히 미쳤구나! "워프." "예?" 우거진 나무들, 내리 쬐는 햇빛, 저 하늘을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 "이제 이 길을 따라서 내려가시면, 1시간 안에 마을에 도착할 겁니다." "아, 예." 이런∼ 그 먼 거리를 단숨해 이동해 온 건가? 며칠은 걸려야 되는 거린 데…… 근데 이런 곳의 좌표를 다 기억하고 있네. 드래곤 머리가 좋다더 니……. 같이 산길을 걸으며, 사이를 진전시켜 보려했는데……. 이젠 이별 이구나! 아! 슬퍼라. 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허리를 숙여 그 동안의 일에 대해 감사를 표 시했다.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 뭘요? 은혜라고 할 것도 없지요. 당신이 가는 길에 언제나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하겠습니다." 끝까지 잘해주는구나.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헤어져야…… 으허엉!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그럼 이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크로니스는 내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에 또 보자니, 무슨 소리지? 그냥 예의상 해본 말인가?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을 따라 내려갔다. 산길치고는 완만하고, 간간이 바람도 불어와 길을 가는데 딱 좋은 날씨였다. 한 30분 정도 걸었을까? 난 흐르는 땀을 말리기 위해 길가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망토에서 나는 야리꾸리한 냄새만 아니라면, 기분이 상당히 괜 찮았다. 구리 구리- 쓰바, 다시 생각해보니, 전혀 괜찮지 못하다. 어떻게 망토에서 이런 냄새 가 나는 거지? 무슨 청국장 냄새 같은 게 코를 찔러 오는데 진짜 미칠 지 경이다. 난 라이트닝 블레이드를 꺼내보았다. "이 칼 뭐라고 부르지?" 계속 라이트닝 블레이드라고 부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슨 마법검이라 고 선전할 것도 아니고. 그럼 뭐라고 부르지? 블루 드래곤의 뼈로 만든 거 니까……. '블루 드래곤 = 청룡(靑龍)' "그래 청룡도(靑龍刀)라고 하자. 그러고보니 관공(關公)이 썼던 청룡언월 도(靑龍偃月刀)와 이름이 비슷하구만. 성능이나 한번 테스트 해 보자. 청룡 언월도 보다 좋은지 나쁜지?" 난 청룡도를 뽑아 들고 옆에 있던 나무 앞에 섰다. 환도여서 그런지 스르 릉 하고 부드럽게 뽑히는데, 그 소리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으아아." 난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양손으로 청룡도를 세게 잡고 온 힘을 다해 작 은 나무를 향해 내리 찍었다. "???" 손에 느낌이 없다. 분명 나무를 통과했는데 왜 베는 느낌이 없는거지? 쿵! 나무는 내가 베어놓은 곳을 따라 미끄러져 넘어졌다. 베어 놓은 곳을 살 펴보니 유리처럼 맨질맨질한게 파리도 미끄러져 내릴 것 같았다. 난 어이 없는 표정으로 다시 청룡도를 세게 잡은 뒤 아까 앉았던 바위를 내리쳐 보 았다. 사가각-! 이게 웬일인가? 바위가 무슨 두부 썰리듯 숭숭 썰리는 것이었다. "굉장한데!" 왜 도(刀)집까지 드래곤 뼈로 만들었는지 알 것 같군. 이 정도 날카로움이 면 도를 집어 넣게도 전에 도(刀)집이 먼저 잘려나가겠다. 흠, 폼으로만 가지고 있긴 아까운데. 이제부터 이 길로 나가봐? 마법기사 아이언스 히로! 아! 끝내준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다시 배낭을 둘러메고 출발하려 했다. 그런데……. "배낭이 너무 무겁다." 배낭 안에는 그 늙은이가 쓴 책과 비상식량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어차 피 쫌 있으면 마을인데…… 좋았어. 난 결심을 하고 배낭을 열어 말린 고기들을 꺼내 전부 버렸다. "한결 가볍구만." 몸도 가뿐! 마음도 가뿐! 2. 결혼식장 습격 사건 "마을이다아-!" 난 소리를 지르며 마을 안 쪽으로 뛰어갔다. 조금 뛰어 가다보니 밭에서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덮어 쓰고있고 복장이 매우 개성적이었다. 허클베리핀인가? "안녕하세요." 난 뛰어가 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게 얼마 만에 만나보는 정상적 인 사람이냐? 그동안 미친 늙은이, 오우거, 드래곤 만난거 생각하면……. "어, 그래 자네는 누군가? 이 마을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는 일 손을 멈추었다. "여행 중이에요. 방금 이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딘가요?" "아니, 이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왔단 말인가?" "예, 계속 저 산 속에 살다가 처음 마을로 내려와 보는 거여서요." 난 내가 내려왔던 산을 가리켰다. "뭐…… 뭐라고? 자네가 적색 산맥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하, 농담하지 말게나. 저 곳에는 흉폭한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가 살고 있는 곳이야." 그 아저씨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머리를 휘저었다. "저기 사는 드래곤이 그렇게 흉폭하나요?" "말도 말게. 저 드래곤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살육의 화신이야. 특히 자 신의 영지에 발을 들여놓은 인간은 절대 살려 보내지 않지. 지금은 저 적 색 산맥에 누구도 올라가지 않아. 그 때문에 저 곳은 지금 몬스터들 천국 이 됐지." 몬스터 천국이라? 저도 오우거 열 마리와 미팅했어요. 그런데 크로니스씨 를 흉폭하다고 하다니…… 그 친절한 분을. 잠도 재워줬고 용돈도 받았는 데. 내 잘생긴(?) 외모가 마음에 들었나? 잠깐 저 사람이 레드 드래곤 성깔 이 나쁘다고 했으니 면상을 갈겨야 하나……? 그만 두자. 착한 내가 무슨 폭력을. "어쨌든 여긴 어디에요?" 대화의 내용이 본래의 취지에서 상당히 벗어났기 때문에 난 다시 물어 보 았다. "음, 여긴 헤리오 왕국이네. 그리고 이 곳은 왕국의 맨 끝에 위치한 레오 즈 마을이고." 헤리오 왕국? 젠장 지도가 있어야 어디가 어딘지 알지! 이럴 줄 알았으면 드래곤 레어에서 한 부 얻어 올걸, 아니 그 늙은이 레어(?)에서 라도……. "그런데 자네 뭐하는 사람인가? 정말로 그냥 여행잔가?" 아마 내 이상한 복장 때문에 물어 보는 것 같았다. 검은 망토에 허리엔 도를 차고(물론 망토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나보다. 뭐 짧은 스포츠 머리도 한목 했겠지 만 말이다. 근데 뭐라고 대답하지? 원래 직업은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마법사입니다." "마법사?" "예." 그 아저씨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날 위아래 훑어보았다. "자네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 그 나이에 마법사라니!" 대단한 사람? 마법사가 대단한 사람이란 말인가! 마치 말하는 투가 태어 나서 마법사 처음 본다는 투군. "여기 여관은 어딨습니까?" 정오가 가까워 지니 배도 고프고 피곤해서 집도 풀어야 하기 때문에 난 여관의 위치를 물어 보았다. "흠, 이 마을엔 여관이 없네." "예? 여관이 없어요?" "이런 외진 곳에 누가 찾아오겠나?" 이럴 수가…… 여관이 없다니! 설마, 이 마을에서도 노숙을 해야 한다는 건가! 정말 그래야만 한단 말인가! 난 순간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어떻게 마을에 여관이 없을 수가 있어요? 전 어쩌라구요? 왜 여관 이 없는지 육하원칙에 따라 정확히 서술해보세요! 누가! 언제! 어디서! 무 엇을! 어떻게! 왜!" "……?" 내 연설에 감동받았는지, 아저씨는 입을 쩍벌리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흠, 내가 너무 흥분했나 보군. 난 미안한 마음에 고개숙이고 사죄하였다. "아, 저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흥분해서요." 내가 아무리 발악을 한다 해도, 여관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지팡이로 땅을 긁었다. 벅벅벅-! 여관이 없데. 벅벅벅-! 여관이 없덴다. 벅벅벅-! 나보고 노숙하래. 벅- "자네 그럼 우리 집에 오지 않겠나?" "예?" 갑자기 들려온 말에 난 삽질하는 행동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이 마을엔 여관이 없으니, 자네만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머물게나." 시골 인심 좋다더니…… 앗싸! 노숙 면했다. 으하하하하. 난 기쁜 표정을 감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될까요?" "하하 물론이지, 자 가자구." 아저씬 하던 일을 내팽게 치고 내 손을 이끌었다. "저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아, 하하, 내 소갤 깜빡했었군. 난 지크라고 하네. 자네는?" 지크? 짧네. 성은 뭐지? 저게 성인가? 아님 성이 지고 이름이 크인가? "성은 뭔가요?" "성?" "예" "이보게 난 평민인데 성이 어딨나? 성은 귀족이나 왕족들만 달고 다니는 데……. 자넨 성이 있나?" 평민은 성이 없나? 흠, 하긴 계승할 가문이 없으니 성이 없을지도……, 이 름 외우긴 편하겠네. "아, 아니요. 저도 물론 없지요." 기껏 아이언스라고 달아 놓았는데, 쓸모 없게 됐구만. "자네 이름은 뭔가?" "예, 전 히로라고 합니다." "푸하하. 히로? 재밌는 이름이구만." 어? 히로란 이름이 웃긴가? 얼마나 생각해서(1분) 지어낸 건데……. "자, 다 왔네!" 얘길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다 도착했다. 붉은 지붕에 아담한 집이었는 데 마치 그림 동화의 한 장면에 나올 듯하게 생긴 집이었다. 정문으로 들 어서니 작긴 하지만 아담한 정원이 보였다. 여러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었 는데, 생전 처음 보는 꽃이 있나하면, 낯이 익은 꽃들도 보였다. "여보! 나 왔어." "어머, 벌써 오셨어요? 아직 점심때도 안됐는데……." 대문이 열리며 한 중년 부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갈색머리에 살점이 푸짐 한 아주 자애롭게 생긴 여자였다. 그런데 복장이 아주 특이하군. 메이드복 인가? "저……, 이분은?" "아, 하하. 이 사람은 지금 여행중인데 묵을 곳이 없다고 해서 내가 데리 고 왔어. 자 인사하지. 이 쪽은 내 아내 레이나. 그리고 이 쪽은 히로." "아, 안녕하세요. 전 히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전 레이나입니다. 들어오세요." "예. 감사합니다." 레이나 아주머니는 예상외로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난 아주머니 께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지크씨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그리 넓진 않았지만, 밝고 깨끗해 보였다. 이게 다 안주인이 내조를 잘해서 그런 건가? "아버지 오셨어요?" 어느새 방에서 갈색 머리의 아름답게 생긴 두 소녀가 나왔다. 아니, 정확 히 말하자면, 아름답게 생긴 한 소녀와 귀엽게 생긴 한 소녀였다. 한 소녀 는 나와 동갑정도로 보였고 다른 소녀는 약 10살 정도? 어린 소녀는 언니 처럼 보이는 큰 소녀의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그녀들의 복장도 가관이 었다. 부푼 소매하며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빨간머리 앤이냐?). 어쨌든 나와 동갑 정도로 보이는 소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오똑 솟은 코하며, 붉은 입술, 적당히 그을린 갈색 피부까지. 저 정도 미모면 아 마도 사귀자는 남자들이 줄을 섰을 것이다. 나도 그 줄에 서 볼까? 새치기 한다면 나까지 기회가 올지도. "아, 내가 소개하지, 이 쪽은 내 큰딸 니나, 그리고 이쪽은 작은 딸 라나." "안녕하세요. 전 히로라고 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를 하자 니나도 얼떨결에 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 "……." 나는 니나와의 인사가 끝난 후 라나에게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무지하게 귀엽군. "어, 자네 이쪽으로 오게." 지크씨는 나를 오른쪽에 있는 방으로 불렀다. 끼이익- 방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쪽에는 낡은 침대가 놓여있고, 바닥에는 상자들 이 가득 쌓여있었다. "아무도 안 쓰는 방이 여서 짐을 좀 쌓아 놓았네. 미안하게 됐네. 이 방 밖에는 빈 방이 없어서…… ." "아, 아닙니다. 훌륭한데요. 정말 감사합니다." 내 말은 그냥 빈말이 아니었다. 방은 창고처럼 생겨 먹긴 했지만, 먼지 하 나 없이 깨끗했고, 침대의 시트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그럼 편히 쉬게나." "예." 그는 그 말을 마치고 방밖으로 나갔다. 난 배낭을 풀어 한 쪽에 놓고 망 토도 벗어 놓았다. 그리고 지팡이와 청룡도는 침대 옆에 잘 기대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똑똑똑!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지겨워 잠이나 자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더니 귀엽게 생긴 소녀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 었다. "뭐하세요?" 저 애 이름이 뭐였더라? 니난가? 라난가? 이거 이름을 헤깔리게 지어놔서……. "……니나?" 순간 라나는 발끈하며 방안으로 들어와 나에게 따졌다. "뭐에요? 제 이름도 기억 못하시는 거에요. 전 라나라구요." "하하, 미안 미안. 잠깐 헤깔렸어." 난 왜 둘 중 하날 찍어도 꼭 틀린 쪽을 찍는 거지? 나는 침대에 앉으며 라나에게 사과하였다. 라나는 내 쪽으로 오더니 내 옆에 털썩 주저앉 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아니, 이 애가 지금 날 유혹하려고 그러나? 내가 아무리 잘 생겼(?)다지만. 그런데 옷이 아 주 개성있군. 너무 귀여워. 꽤 맘에 드는데. 저들이 보기에는 내 복장이 이상해 보일까? "옷이 아주 특이하네요." 음, 이상하게 보인다는군. 하긴 청 힙합 바지에 커다란 흰색 남방을 입고 있으니 이상해 보 이기도 하겠지. "응, 내가 좀 멀리서 와서." "오빤 어디서 왔는데요?" 오빠……? 내가 오빠란 말인가!? 듣기 나쁘진 않군. 솔직히 무지하게 기쁘다. 그런데 어디 서 왔다고 하지? 서울에서 왔다고 해야 하나? 난 적당히 웃으며 얼머무렸다. "하하,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에이, 오빠 바보야?" 쿵-! 바보……, 바보……. 내가 바보처럼 보인단 말인가? 이 잘생기고 터프하고 지적으로 생긴 내가…… 바보? "너 지금 몇 살이니?" "음…… 10살. 그리고 우리 언닌 나보다 7살 많으니까, 17살." 라나는 손가락을 들어 열심히 계산을 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아! 살다보니 10살 짜리 꼬마애한테 바보라는 소리를 다 듣는구나! 갑자기 무지하게 비참 해진다. 그런데 여기는 나이 계산을 어떻게 하는 거지? 만으로 계산하나? 만으로 계산하면 니나라는 여자는 나와 동갑인 셈인데. "저기, 라나는 태어날 때 몇 살이었니?" "응? 태어날 땐 당연히 0살이지. 그것도 몰라? 오빠 진짜 바보구나!" 역시 만으로 계산하는군. 그럼 난 이 세계에서 17살이네. 그건 그렇고 애가 언제부터 말을 놨지? 아까부터 은근슬쩍 반말을 쓰네. "우리 언니 이쁘지?" "응, 조금." "조금이라구? 씨이, 우리 언닌 이 마을, 아니 이 나라에서 제일 가는 미인이다." 라나는 쓸데없는 얘기를 묻더니만, 내 대답을 듣고나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얼굴 을 디밀며 따졌다. 무서워라! "미안해. 너희 언니 정말 예뻐. 난 이제껏 살아오며 그런 미인을 만난 적이 한번도 없어서, 뭐라 표현할지 잘 몰랐던 거야. 너희 언닌 한 송이 백합보다 청순하고, 한 송이 장미보다더 아름다워. 저 하늘에 태양이 너희 언닐 질투하지 않을까 두렵구나!" 난 내가 아는 모든 미사여구를 총동원해 닭살이 팍팍 돋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내 말을 들은 라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언닌 세계 제일의 미녀라구." 처음엔 마을 다음엔 나라 이젠 세계냐? 다음 번엔 태양계까지 포함시켜라. "하지만 오빠 말대로 정말 태양이 질투하는 건지도 몰라!" 라나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왜저러지? "……." "와! 이건 뭐야?" 내가 이유를 물어보려는 찰나에 라나는 청룡도와 지팡이를 발견하고는 탄성을 질렀다. "하난 지팡이고, 하난 칼이야." "그럼 오빠 검사야?" 지팡이를 먼저 말했는데, 왜 검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검사처럼 생겼나? 도를 쓰니까 도(刀)사라고 해야하나? "아니, 마법사야." 난 검사라고 말하려 했지만, 애한테는 거짓말을 하면 안되기 때문에. "마법사? 에이…… 거짓말. 오빠가 무슨 마법사야? 마법사는 그렇게 안 생겼다 뭐." 내가 마법사 같이 안 생겼다니? 이 꼬마애가 무슨 소리를…… 나의 지적인(?) 용모를 보면 한 눈에 마법사라는 걸 알 수 있잖아. "그럼 마법사는 어떻게 생겼는데?" "뭐야, 그것도 모르는 거야? 오빠 정말 바보구나. 마법사는 한 손에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 고, 검은 옷에 고깔모자를 쓴 인자한 할아버지야. 아 그리구 흰 수염도 빠지면 안돼.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자격 미달이야. 그런데 오빤 하나도 안 맞잖아." 흰 수염? 마법사가 무슨 산타클로스냐? 애가 동화책을 너무 많이 읽었구나……. 동화책이 이렇게 애를 버려놓다니……. "거기 마법 지팡이 있잖아. 여긴 검은 옷대신 검은 망토 있고. 망토에 모자도 달려 있잖 아." "그럼 이 지팡이가 마법 지팡이야?" "응, 마법 지팡이야." "거짓말. 이게 무슨 마법 지팡이야? 마법 지팡이는 이렇게 후지게 생기지 않았다, 뭐." 아니, 애가 진짜 속고만 살았나? 사람 말을 왜 이렇게 안 믿어! 그거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리드꺼 뽀려 온 거야! 라나는 내가 바닥에 벗어 놓았던 망토를 집어들었다. "푸아, 냄새가 뭐 이래?" 애야 난 그걸 입고 다녔단다. 젠장, 진작 빨았어야 되는 건데……. "그거 100년 동안 안 빤거야." 창고 한쪽에 처박혀 있었으니, 100년 동안 안 빤거 맞겠지? "100년? 오빠 몇 살인데?" "17살." "핏, 오빠 거짓말쟁이. 17살 밖에 안됐으면서 어떻게 100년 동안 안 빤걸 가지고 있어?" 너는 10살 밖에 안됐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사람말을 안 믿냐? 그거 내께 아니여서 그런다. 됐냐? 똑똑똑 으헉, 이번엔 또 누구지? 이런 애 하나 더 나타나면, 나 진짜 미칠지도 모르는데. "예, 들어오세요." 내 말을 끝나자 레이나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레이나 아주머니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기, 식사준비 다 됐습니다. 나와서 드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마침 배고팠는데 잘됐군. "라나야! 여기서 뭐하는거니? 손님 방해되게!" 레이나 아주머니는 어느새 라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대로 두면 라나가 아주머니에게 쥐어터질 확률이 상당히 높았기에, 난 아주머니를 말렸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라나는 레이나 아주머니 앞으로가 손에 들고있는 것을 내밀었다. "엄마! 이것봐. 이거 100년 동안 안 빤거래." 으헉! 저건, 내 망토! 레이나 아주머니는 라나의 손에서 망토를 받아들더니 잠시 후,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레 이나 아주머니는 얼굴에 억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여행을 오래하신 모양이군요." 이틀 전에 시작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빨아드리겠습니다." "아, 저 괜찮습니다." (실제 의미 : 제발 빨아주세요. 저도 더 이상은 입고 다니기가 힘들답 니다. 흑흑.) 난 예절이 넘치는 착한 학생(모범생이라고도 한다)이기 때문에 거절하는 척했다. 보통 국어 에서는 이런걸 반어법이라고 하지. "아니에요. 제가 빨아드릴께요. 어서 나와서 식사하세요." "예." "오빠, 이쪽이야. 빨리 와." 난 뛰어가는 라나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짧지만 무지하게 지루한 지크 아저씨의 기도가 끝나고 드디어 먹는 시간 이 돌아왔다. 식탁의 차려진 메뉴를 보니 레이나 아주머니의 솜씨가 상당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뜨끈한 스프와 갓 구워낸 듯한 빵, 옥수수 볶 음, 여러 가지 야채들. 쌀밥과 김치가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아, 아닙니다. 훌륭한데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하, 음식은 얼마든지 있으니 많이 먹게." "많이 드세요." "많이 먹어 오빠." 난 지크씨 가족들의 권유를 받은 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음식들은 생 긴 것만큼이나 맛도 상당했다. 뭐 크로니스가 만든 것보다는 못하지만 말 이다. 그런데 라나는 왜 내 옆에 앉은 걸까? 먹으면서 보니 라나는 입가에 수프를 잔뜩 묻힌 채 먹고 있었고, 지크씨 는 생긴 것만큼이나 우악스럽게 먹고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먹는게 아니 라, 입안에 쑤셔넣는 것 같다. 반면에 레이나 아주머니와 니나는 얌전하고 조심스럽게 먹고 있었다. 아주 단란한 가족 분위기를 연출하는군. 난 괜히 집 생각이 날 것 같아, 더욱 먹는데만 열중했다. 쾅쾅쾅-! 식사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 어떤 놈이 대문을 무자비하게 두 드렸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이? "지크씨 계십니까?" 밖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오자 지크씨 가족들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 다. 지크씨는 먹던 빵을 내려놓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젠장, 또 그 자식들이군. 당신은 앉아있어. 내가 나가 볼테니." 지크씨는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내 귀에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과의 거리는 꽤 되었지 만, 큰 소리로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잘 들렸다. "안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 "이거 왜 이러십니까? 다 댁을 위한 일입니다." "뭐가 우릴 위한 일이라는 거요?" "소리지르지 마십시오. 댁의 따님과 다즈 도련님이 맺어지는 일입니다. 이 번 일이 성사된다면 당신께서는 다레이아 영주님과 사돈이 되는 겁니다." "난 그런 것에 관심 없소." "댁에서 뭐라 하셔도 이미 날까지 잡아 놓았습니다. 내일 오후 12시에 식 이 있을 예정이니 그렇게 아십시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후훗, 만약 예정된 시간에 신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댁에 무슨 일이 있 을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라니요? 이제 곧 영주님의 사돈이 되실 분을 제가 어찌 감히 협박 을 하겠습니까? 어쨌든 11시 반쯤에 저희가 신부를 모시러 다시 오지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 그런……." "가자." 잠시 후 요란한 발소리와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크씨가 실성한 얼 굴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그러더니 의자에 가까이 와서는 다리가 풀린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여보!" 레이나 아주머니가 지크씨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쾅-! 지크씨는 손으로 식탁을 세계 내리치더니 두 손으로 자기 머릴 잡고 미치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젠장. 그 놈들은 어떻게든 니나를 데려갈 생각이야. 젠장, 내가 어 떻게 해야 되는 거지! 빌어먹을, 대체 어쩌자는 거야!?"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않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동안 숨막힐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니나는 갑자기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꼭 깨물고 고 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제가 가겠어요." "어, 언니!" "니나야!" 니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억지로 담담한 척하며, 라나와 레이나 아주 머니의 표정을 번갈아가면서 보았다. "제가 가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안된다 니나야. 그 돼지 같은 놈들한테 절대 너를 넘겨줄 순 없어." "하지만 제가 안가면 우리 가족들은……." 쾅-! 지크씨는 식탁을 한번 치더니,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해도 그건 절대로 안돼!" 아하∼ 단란한 식사 시간은 저 멀리 멀리∼. "맞아 언니! 그건 안돼." "하, 하지만……" 그들 부녀는 된다 안된다를 두고 입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대충 무슨 일 인지 짐작이 가는군. 그러니까 영주의 아들이 니나를 보고 한눈에 뻑가 돈 과 빽을 써서 억지로 데려오려 한다는 스토리겠지. "말씀 도중 죄송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대충 짐작은 가지만 조금 더 확실히 알기 위해 난 지크 씨에 직접 물어보 았다. 내 말을 들은 그들 부녀는 입씨름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 제가 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힘닫는데까 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지크씨 가족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 지크씨가 크게 한숨을 쉬 더니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후우∼, 알았네. 우리 가족은 시골에 살지만 그래도 괘 잘사는 편이네. 이런 집도 있고 크진 않지만 내 땅도 가지고 있어." 자영농이란 얘기군. "이 마을의 영주는 다레니안 다이스라고 하는데 아주 나쁜놈이야. 돈을 꿔주고 높은 이자를 받아 먹는 식으로 돈을 갚지 못하면 땅을 빼앗는 짓도 서슴 없이하는 놈이지." 고리대금업자란 말이군. "내 딸 니나는 이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네. 흠흠, 이런 얘기한다고 그 런 눈으로 보지 말게.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이건 진짜야." 누가 뭐래요? 지크씨는 어색한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몇번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 다. "그런데 얼마전에 영주의 아들 다즈란 놈이 니나를 보고 반해서, 그 때부 터 계속 니나와 결혼 시켜 달라고 조르고 있어." "영주의 아들이면 그래도 괜찮은 신분 아닌가요?" "신분이 문제가 아니야! 그 놈은 지 아버지를 닮아 나쁜짓이란 나쁜짓은 다 저지르고 다니는 망나니 같은 놈이야. 니나가 그런 놈 한테 시집 간다 는건 절대로 안돼." 쾅-! 작작 좀 치세요. 식탁 뽀갤일 있습니까? "그럼 결혼 안하면 되잖아요?" "당연 나도 안 된다고 했지. 하지만 놈들은 막무가내야. 이제는 사병까지 동원해 딸을 내 놓지 않으면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협박하고 있어. 게다가 내일 식을 올린다고 날짜까지 잡아 놓고 억지로 결혼을 하려 하고 있어.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지크씨는 두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더니 아까하던데로 좌우로 힘차게 흔들 어 댔다. 저러니까 마치 테크노 댄스 추는 것 같군. 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흠, 그래서 아까 태양의 질투 어쩌구 했을 때 라나의 표정이 그랬나? 근 데 내가 도와줘야 하는건가? 내가 무슨 용사도 아니고. 아니지, 그래도 얻 어먹은게 있는데……. 하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클래스 5마스터였지. 아, 이거 갈등 때리네. 구해? 말어? 나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라나가 내 팔을 붙잡더니 애원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알았어. 구해주면 될꺼아냐! 밥도 얻어먹었는데 그 정도도 못해주겠냐? 귀 여워서 봐줬다. "좋습니다. 제가 도와드리지요." "뭐?" 내가 결심을 하고 말하자 테크노 댄스를 추던 지크씨가 반문했다. "제가 니나 양의 결혼식을 막아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요?" "자, 자네가 어떻게?" 지크씨는 니가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혹시나 하는 심 정에 나에게 기대를 거는 눈치였다. 걱정하지마십시오. 공주님은 제가 지켜 드리지요. 푸하하하. "제가 처음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법사라고." "자, 자네가 정말 마법사인가?" 엥? 이게 무슨 말이야? "아니, 아까 말했잖아요!" 지크씨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그거야 농담인줄 알고." "오빠 진짜 마법사야?" 나 진짜 미치겠네! 이 집안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람말을 안믿는 거지? 가문의 전통인가? "제가 여기서 거짓말 해봐야 뭐하겠습니까?" "그, 그야 그렇지만!" 난 지크씨 가족들의 얼굴을 훝어 보았다. 전원이 완벽하게 퍼팩트하게 안 믿는 눈치였다. "좋습니다. 그럼 식후 운동하는 셈치고 보여드리지요." 난 마지막 남은 빵을 입에 넣고 일어나자, 지크씨 가족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더니 나의 뒤를 따라왔다. 난 마당의 가장 구석진데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저걸로 하지요." 월계수 나무같은데 크기는 약 7m정도로 매우 굵고 단단하게 생겨 먹었 다. 지크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뭘 말인가?" "저걸 마법으로 박살 내겠습니다." "……?" 내 말에 지크씨 가족들은 역시 전원 안 믿는 눈치였다. 아! 라나는 그래도 조금 믿는 눈치다. 그래, 그래도 나 믿어주는건 너 밖에 없구나!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나의 환상적인 솜씨를 보면 믿어 주겠지. "아, 맞다. 오빠 내가 마법 지팡이 가져다 줄게." 라나는 갑자기 마법 지팡이가 생각난듯 손뼉을 짝 부딪혔다. "괜찮으니까 그냥 여기 있어." "왜? 마법 지팡이가 있어야 마법 쓸 수 있는 거 아니야?" "마법 지팡이가 없어도 이 오빠, 마법쓰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단다." "그럼 그 지팡이 왜 들고 다니는거야?" 흠, 10살짜리 꼬마치곤 꽤 예리한 질문이군. "폼나잖아." "……?" "그리고 그거라도 들고 다녀야 마법사처럼 보이고." "……?" 자 그럼 시작할까? 난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재빠릴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Lightning Bolt! Fire Ball! Ice Arrow!" 치지직- 콰쾅-! 쩌적- 라이트닝 볼트로 나무를 두 쪽 내버린 다음, 파이어 볼을 날려 박살내며 태운다. 화재의 위험이 있으니, 불탄 곳에 얼음 화살을 던져, 불을 끊다. 크 하하하, 이거야 말로 연속 마법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 참고로 연속 마법이란 아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남아도는 마나와 강인한 정신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뭐, 이 몸한테는 매우 쉬운일이지만 말이 다. 음하하하, 나무 몇 개만 더 있으면 아예 스페이스 매직 쇼를 펼치는 건 데. "어때요?" 난 화려 동작을 취하며 몸을 돌렸다. "……." "……." "……." "……." 지크씨 가족 일동은 모두 입을 벌리고 눈을 둥그렇게 뜬체 얼어있었다. 마치 못볼걸 본 사람처럼. 내가 마법사라는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저 그럼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 지크씨는 아까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개만 까딱 까딱 거렸다. 난 좀비같이 서 있는 그들에게 인사한 뒤 집안으로 들어갔다. 안 따라오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꺼지? 똑똑- "예, 들어오세요." "헤헤, 오빠." 라나가 방문 사이로 얼굴만 살짝 내민 채 인사 했다. 언제 묶었는지 긴 갈색 생머리는 노란색 리본으로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리본으로 머 릴 묶으니까 더 귀여워 보이는군. "라나구나. 들어와." "헤헤." 내 말이 떨어지자 마자 라나는 나에게 달려들어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무릎 위에 앉으란 말은 안했는데……. 어쨌든 나쁘진 않군. "오빠!" "왜?" 라나는 내 무릎위에 편하게 자리를 잡은 후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거, 열살이나 되는 숙녀(?)를 무릎위에 앉혀도 되는건가? 그러고 보니 진짜 귀엽네. 몇 년만 더 지나면, 니나보다 훨씬 예뻐질 것 같은 데…… 이걸 아예 키워서 데리고 살어? "아까 거짓말쟁이라고 해서 미안." "정말?" "응." "좋아, 이 오빠가 특별히 이번 한번만은 용서해 줄게." "헤헤, 고마워 오빠!" 라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쪽-! 아니, 애가 무슨짓을? 요즘 애들 조숙하다지만(까졌다고도 한다), 어떻게 이런 짓을!? 어쨌든 여자한테 뽀뽀 받는게 좋긴 좋네. 이거 얼굴 빨개지면 안되는데…….(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한테 뽀뽀 받아봤다. 비록 열살짜리 애지만, 그래도 감동!!!) "아, 오빠 그리고 그 망토 말이야." "어, 그거 왜?" "그 망토 100년 동안 안 빨았다는 것도 믿어줄게." 그 말을 믿어준다고? 마법을 보여줬으니 마법사라고 믿는 걸테고 망토는 뭘로 믿어 주는걸까? 드디어 내가 진실가이(眞實guy)라는 것을 알았나? "왜?" "그 망토 알고보니 흰색이었어." "???" 어라? 그 망토 검은색이잖아? 애가 색맹인가? 아니지. 색맹도 검은색과 흰색은 구별하는데. "우리 엄마가 빨았는데, 막 빨아도 빨아도 검은물이 계속 나오더라고. 그 렇게 몇 시간 동안 계속 빠니까 조금씩 흰색이 나오던데." "……!" 헉! 그 망토가 진정 100년 동안 안 빤거란 말인가! 아니, 아무리 100년 동 안 안 빨아도 그렇지, 어떻게 검은 망토가 흰 망토로 변하냐? 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라나에게 물었다. "정말이야?" "응, 지금도 엄마가 계속 빨고 있어. 내일은 돼야지 제 빛깔 나올꺼래." 쓰바, 이런 쪽 팔린! 이제 아주머니 얼굴을 어떻게 보냐? "근데 오빠 안 무거워?" 뭐가? 아, 애 지금 내 무릎 위에 있지. "응, 하나도 안 무거워." 난 무릎 위에 있는 라나를 끌어당겨 라나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몸을 밀착시켰다. 이건 어디까지나 라나가 동생같이 귀여워서 이러는 거다. 저∼ 얼∼대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10살짜리 꼬마애한테 무슨 흑심이 있겠냐……. ……. 솔직히 말하면 아주 약간……, 아니 조금 더……, 씨바, 그래 나 로리타 콤플렉스다. 라나는 앙증맞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오빠 이 리본 어때?" 난 라나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져보았다. 여자(10살 짜리도 여자로 봐야하 는건가?)의 머리카락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맨날 감아서 그런지, 상당히 부 드러웠다. "예뻐. 라나는 원래 예쁘지만, 리본 메니까 더 예뻐 보여." "헤헤, 정말?" "응. 정말." 예뻐보이는건 사실이니까. 똑똑똑-! 아니! 이 좋은 분위기에 어떤 놈이? "드, 들어오세요." 난 라나를 들어 내 옆에 앉혀 놓은 뒤 이 행복한 시간을 방해한 놈의 면 상을 보기 위해 손수 문을 열었다. "흠, 흠……." 지크씨와 니나였군. 젠장 뭐라 할 수도 없고……. "무슨 일로……?" "흠, 아까는 미안했네." "뭐가요?" 혹시 나 들어간 후에 자기들끼리만 후식을 먹었다던가……? "마법사인걸 의심했던 거 말일세." 그것 때문이었군! 앞으로는 사람 말 좀 믿고 사시죠. 불신사회 타파하고 신용사회 이룩하자! "괜찮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불신사회 타파하고 신용사회 이룩에 동참 ……." "……?" 이런! 머릿속에 있던 말이 그대로 튀어 나왔군. "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은 아니실 테고……?" "사실 자네의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싶어서 온 거네." 계획? 나에게 계획이란 것이 있었던가? 그냥 되는 데로 사는 게 나의 인 생수칙인데……. "하하하, 계획이요? 사실 지금 계획을 짜는 중이었습니다. 일단 앉으세요. 앉아서 얘기하죠." "어, 그러지." 회의를 하려면 모두가 마주보는 강강수월래 대형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나와 라나는 침대의 가운데 쪽으로 들어가고 지크씨와 니나는 아까 우리가 앉아있던 자리에 걸터앉았다. "오빠가 언제 계획을 짰어? 방금 까지 나와 얘기하고 있었잖아." 이 계집애가! 내가 계속 거짓말을 지어내야겠냐? 안 그래도 가뜩이나 내 말을 안 믿는데. "라나야! 그건 아니야. 라나와 얘기하면서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있었 어." "핏! 거짓말." 쪼그만 게 사람말 안 믿기는……. "이왕 회의 할꺼면 아주머니도 부르죠." "내 아내 말인가? 아아, 됐네, 지금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지금은 점심 먹은 후 4∼ 5시간 정도 지난 때…… 주부가 제일 할 일 없 는 시간일텐데…….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쁘시죠?" "어, 그게 말일세……, 지금 빨래중이네." "……." 빨래? 이런 쪽팔린. 그 망토를 아직까지 빨고 있단 말인가!? 난 쪽팔린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잽싸게 일 얘기를 꺼내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저의 계획은……." 젠장, 뭘 알고 있어야 계획을 세우던지 말던지 하지. "그런데 영주의 사병은 어느 정돈가요?" "사병의 숫자 말인가? 대략 30명 정도네." 30명이라…… 좀 많군. 내가 아는 사람도 17 : 1 로 밖에 안 싸웠는데. "센가요?" "물론 우리 같은 평민들보다야 세겠지만 아까 자네가 보여줬던 마법정도 면 한번에 쓸어 버릴 수 있을 껄세. 월급 받아서 술이나 퍼마시러 다니는 놈들이 뭘 할 수 있겠나?" 이 아저씨 열 뻗쳐도 단단히 뻗쳤구만. "혹시 그들 중에 마법사는 없습니까?" "물론 없네. 이런 시골 마을에 마법사가 있을 리가 있겠나?" 아무래도 이 나라에는 마법사가 별로 없나보군. 그래서 내가 마법사라는 걸 못 믿은 건가?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놈들이 니나를 데리러 오면 일단은 식장으로 가 지요. 그 다음에는 식장에서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나에게 무슨 계획이 있겠는가! 식장으로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알았네. 그런데……." 지크씨는 대답을 하면서 끝을 약간 흐렸다. "말씀하세요." "자네는 지금 여행중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가 떠난 뒤의 일을 걱정하는 건가? 하긴 내가 떠나고 나면 그 놈 이 다시 찝적 거릴 지도 모르지. "저기 혹시 형제가 있으십니까?" 내 갑작스런 질문에 지크씨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대답했다. "형제라면 남동생이 하나있고 그 밑에 여동생이 하나있네." "어디 살고 있나요?" "음, 하나는 자바스 왕국에 살고 있고, 또 하나는 수도에 살고 있네. 그런 데 그건 왜 묻는건가?" 둘다 멀리 살고 있네. 이산가족인가? "그럼 자바스 왕국에 살고 계신 분은 누구죠?" "그 곳이라면 여동생이 살고 있지." "여동생분 성함은 어떻게 되고 가족관계는 어떻게되요?" 계속되는 나의 질문에 지크씨는 당황해하는 모습이었고, 니나와 라나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지크씨는 계속 대답해주었다. "여동생 이름은 제이시네. 가족은 남편과 아들 둘이 있고." 아들 둘이라? 괜찮게 됐군. "알겠습니다. 혹시 일이 끝나고 제가 떠나더라도 절대 피해가 가지 않도 록 하겠습니다." "저, 정말 그래주겠나?" "물론입니다." 내가 확답을 하자 지크씨와 니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잠시 머뭇거리다 니 나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하하, 뭘요? 아무것도 아닌걸요" 난 미인의 인사를 받자, 조금 쑥쓰러워서, 웃으며 얼머무렸다. 똑똑똑- "식사들 하세요." 아주머니 목소리군.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가? "자, 그럼 일어나지." 지크씨의 말에 우리는 모두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지크씨는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살 짝 실눈을 떠보니 니나와 레이나 아주머니 역시 눈을 감은 채 열심히 기도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 라나와 눈이 마주쳤다. 라나 역시 실눈을 뜬 상태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귀엽게 웃었다. 난 라나에게 귀에다 대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웃지 말고 기도나 해." "오빠나 잘해." 나쁜 계집애. 하여튼 한 마디도 안져요. 지겨운 기도가 끝나고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메뉴가 진짜 장난이 아니었 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고기 수프, 기름기가 좔좔 흘러내리는 닭구이, 닭찜, 닭조림, 닭도리탕, 닭튀김, 닭발, 닭갈비, 닭닭닭……. 식탁 위에는 온 통 닭요리 뿐이었다. 오늘 '국가 제정 공식 기념일 닭고기 먹는 날' 인가?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많이 드세요." (레이나 아주머니) "많이 들게." (지크씨)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어요." (니나) "다 먹어 오빠." (라나) 난 먹기 전에 지크씨 가족들의 친절한 인사를 한 마디씩 받았다. 아주머 니 이게 차린 게 없는 거면 제대로 차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라나야 이걸 다 먹으면 내가 인간이냐? 오우거지. "잘먹겠습니다." 그들의 성의를 거절 할 수 없었기에(배가 고팠기에) 수저를 들어 닭고기 수프부터 맛을 보았다. 난 원래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후추를 팍팍 뿌리고 먹었다. 따뜻한 수프에 잘 조화된 야채들과 닭고기! 맛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오빠 이거." 내가 닭고기 수프를 다 먹고 수저를 내려놓았을 때, 라나가 닭찜의 한쪽 다리를 찢어 나에게 건네었다. 아이고, 귀여운 것! 이쁘기도 하지. "고마워, 라나도 많이 먹어." 난 라나의 손에서 닭다리를 받아들고 열심히 뜯어먹었다. 이것도 맛있군. "우물우물……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인가 보죠. 닭요리가 이렇게나 많이 나온걸 보니." 닭다리 하나를 거의 다 뜯었을 때쯤 난 그들에게 물었다. 잠시 그들은 침 묵하더니 곧 레이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야……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까요." 귀한 손님……? 귀한 손님이 누구지? 설마……, 나? 난 먹던 손을 잠깐 멈추고 그들의 눈을 살폈다. 역시……. 그들은 날 완전히 용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딸을 악마의 손에서 구해내는 용감한 용사. 그렇다면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이 음식들은 반듯이 딸 을 구해내라는 무언의 압력? 만약 못 구해내면 먹은 거 다시 뱉어내라든 지……. 레이나 아주머니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침 집에 있는 고기가 닭고기 밖에 없어서…… 원래 더 좋 은 고기들로 대접해야 하는 건데……." 참, 별걸 다 미안해하네. "아닙니다. 제가 사실 닭고기를 제일 좋아하거든요. 하하, 그럼 감사히 먹 겠습니다." 식사 분위기가 죽었기에 난 다시 분위기를 살리려고 기쁜 표정을 지으며 앞에 있는 닭찜부터 해치우기 시작했다. "하하하, 정말인가? 닭고기를 좋아한다니 정말 잘됐군. 이 요리들은 우리 집 뒷마당에 기르고 있던 닭들을 잡아서 만든 거네. 원래 10마리 있었는데 지금은 6마리가 남았지. 하하…… 일 끝나고 나면 나머지 6마리도 잡도록 하겠네." 우욱-! 지크씨의 말을 듣자 식도에서 아래로 내려가던 닭들이 다시 올라오기 시 작했다. 저 말은 딸을 구해내면 닭 6마리를 주고, 못 구해내면 4마리 살려 내라는 건가? 젠장, 소화 안되게 하는 소리만 골라서 하네. 난 그날 죽을 때까지 닭고기를 먹고, 죽을 때까지 화장실에 들락날락 거 려야 했다. "지금 몇 시죠?" "글세 아마 11시 반정도 됐을 걸세." 우리는 10시쯤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계속 식탁에 둘러 앉아있는 중 이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니나를 데리러 놈들이 올 것이다. 그 때문에 지 금 분위기는 완전 초상집 분위기였다. 오히려 당사자인 니나는 가만히 있 는데 가족들이 더 안절부절이었다. "아, 저기 망토 다 빨았거든요. 가져다 드릴께요." 레이나 아주머니는 갑자기 생각난 듯 의자에서 일어나 망토를 가지러 갔 다. "그거 진짜 흰색이니?" 주위의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라나에게 물 어 보았다. "응, 오빠. 엄마가 어제 밤새도록 빨아서 결국은 다 빨았는데 그거 진짜 흰색이야. 새하얀 흰색." 음, 그래서 아주머니의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군. 그러고 보니 몸도 약간 안 좋아 보이던데…… 혹시 이것도 딸을 구하라는 무언의 압력? "받으세요." 레이나 아주머니는 어느새 가져온 망토를 나에게 내밀었다. 망토는 정말 하앻다. 눈부시게 새하얗지는 않은 약간 투명한 듯한 흰색이었다. 난 망토의 깨끗함에 감탄을 표명했다. "정말 하얀색이네요!" 망토에서 더 이상 냄새가 안 난다는 것에 대해 감동하고 있는 나에게 아 주머니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망토의 재질은 뭔가요?" "예?" 재질이 뭐냐니? 100% 순면 아니었나? 자세히 보니 면은 아닌 것 같고, 합성섬윤가? "천이 아주 특이하던데요. 튼튼하고, 물에도 안 젖고, 때도 안타고……." "예? 때가 안탄다구요?" 때가 안 타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흰색이 검은색으로 변할 정도로 때가 탔는데……. 내 질문에 아까까지의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모두 궁금함을 표명했 다. "예. 이 망토가 검은색 이였던 것은 천 사이에 때가 껴서 그런 게 아니라, 천 위를 검은색 때가 덮고 있었던거에요." 그 말은 설마…… 때가 하도 쌓여서 천 위에 막을 형성했다는 말인가? 그 러고 보니 망토 두께가 조금 얇아진 것 같군. 한 반정도. 무게도 줄었어. 쾅쾅쾅- "지크씨! 지크씨! 계십니까?" 그놈이다. 어제 찾아왔던. 내가 저 능글맞은 목소리를 어찌 잊으리! "놈들이군." 지크씨의 표정이 굳었다. 순간 나를 제외한 전원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휩싸였다. 쾅쾅 "지크씨! 지크씨!" 밖에서는 계속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려 대고 있었다. 지크씨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니나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꼭 물고 있었고, 라나는 두손으로 내 옷을 꼭 붙들고 있었다. "괜찮을 꺼야." 난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나는 조금 진정된 듯 보였지만, 꼭 잡은 두손을 놓지는 않았다. 난 라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뒤, 대문 쪽으로 향했다. 잠시후 지크씨가 문을 열자 능글맞게 생긴 놈이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그 놈 뒤에는 협박하러 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허리에 칼을 찬 떡대 두명이 시립해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지크씨. 따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 지크씨는 인상을 찡그릴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을 사람들과, 이웃 마을 영주님까지도 아름다운 두 연인을 축복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빨리 채비를 하고 나오십시오." 아름다운 두 연인? 놀고 있네. 미녀와 야수겠지. "알았네." 지크씨는 짧게 대답을 마친 후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지크씨와 눈 이 마주치자 나는 의미 없는 웃음을 지었다. "오∼! 드디어 결심을 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지크씨께서는 이제 영주님 의 사돈이 되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제일 훌륭하신 다즈님과 제일 미인이 신 니나양이 맺어 지다니…… 전 이 마을에 사는 일원으로서 정말 기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 어서 준비를 하고 나오십시오." 저 인간은 아예 입을 찢어 양쪽 귀에 걸어 놓았다. 아마 이번 결혼을 성 사시키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나 보다. 옛말에도 '중매 잘 서면 술 석잔, 못 서면 따귀 세 대'라고 하지 않았나. 너 한텐 국물도 없어 짜샤. "알겠네. 잠시만 기다려주게." "알겠습니다. 그럼 빨리 채비를 하고 나와 주십시오." 그는 특유의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문에서 물러났다. 그가 문에서 물러나 자 띠꺼운 표정으로 시립해있던 떡대 두명도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눈앞 에서 사라지자 가족들의 시선은 나에게 집중되었다. "빨리 준비하죠." "그건 그렇지만……." 지크씨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다. "저만 믿어 주십시오. 반드시 따님에게는 아무 일 없게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얘기하자, 그들은 약간 안심하는 표정이었 다. "응. 난 오빠 믿어. 반드시 오빤 언니를 지켜줄꺼야. 언니를 악마의 손아 귀에서 구해줄꺼라구. 그럴꺼지 오빠? 반드시 그럴꺼지?" 넌 또 왜 나서냐? 누구 부담감 줘서 죽일 일 있냐? 그리고 악마는 누가 악마야? 걔가 악마면, 난 천사냐? "물론이지. 그 딴 놈들은 이 오빠에게 한방감도 안된다구." 어헉, 닭살 돋는다. 내가 꼭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다니……. "알겠네. 그럼 자네만 믿겠네." "그럼 이제 나가지요." 난 말을 마치고 앞장서서 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라나가 내 망토를 붙잡 고 늘어졌다. "왜?" "오빠, 지팡이랑 칼 안가져가도 되?" "응. 그건 폼으로 가지고 다니는 거야. 그리고 식장에 그런걸 어떻게 가지 고 들어가냐?" 다행히 라나는 내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문밖 을 나서자, 지크씨와 가족 일동이 모두 뒤따라 나왔다. 마당을 지나자, 화 려한 이두마차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마차는 흰색으로 곳곳에 화려한 문 장이 새겨져있고, 말도 세트로 맞춘 건지 백마 두 마리가 매어져있었다. 그 리고 마차 옆에는 아까 보았던, 갑옷 입은 남자 둘이, 흑마를 타고 있었다. 아까 본 그 놈은 앞으로 나서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나오셨군요. 지크씨. 그런데 이자는……?" "……." 지크씨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니나의 사촌인 히로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좋아했는데 이번엔 헤리오 왕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왕 온 김에 그 동안 한번도 찾아 뵙지 못한 숙부님을 뵙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떠날 생각이었는데, 오늘 니나의 결혼식이 있다고 해서, 저도 참석할 생각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듣자하니 니나는 이 마을 영주님의 아들이신 다즈님과 결혼을 하신 다기에, 저도 두분을 축복 하고 싶습니다. 결혼식장에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방금 생각해낸 말을 아부 조로 말했다. 그 놈은 내 얼굴을 잠깐 보 더니, 지크씨를 처다 보았다. 진짜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지크씨는 잠시 당 황하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계획을 대충 눈치채고 말을 맞추었다. "흠…… 이 아이는 저의 조카가 맞습니다. 제 여동생 제이시의 아들이지 요." 그 놈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나를 보았다. "조카라고? 그러기엔 별로 닮지 않은 것 같군." 젠장, 깜박했다. 머리색부터 틀린데 닮아 보일 리가 없지. 내가 왜 그 생 각을 못했지? "……예. ……맞습니다. 안목이 상당히 날카로우시군요. 사실 저는 고아였 는데……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지금까지 저를 키워 주셨습니다.…… 저는…… 저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여행을 다니면 서 돈을 벌고 있는 겁니다. 비록 양자지만, 그 분들은 저의 친부모님과 다 름이 없습니다." 난 그 짧은 시간에 머리를 굴려, 순식간에 말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그 놈 은 내 모습을 보더니 믿는다는 눈치를 보였다. 내 모습이 어땠냐……? 난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을 지었고, 지크씨는 안쓰럽다 는 듯이, 내 어깨를 조용히 감싸안았다. 거기다 라나는 아예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참 감동적이군.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요. 마차에 오르십시오." 마차 안은 전철처럼 서로가 마주보면서 앉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한쪽에는 나와 라나, 니나가 앉고 다른 쪽에는 지크씨와 레이나 아주머니, 그 놈이 앉았다. 마차 내부는 상당히 넓어 6명 앉아있는데도 별로 불편함 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잠시 후 마차는 덜그덕 거리며 움직였고, 그 놈은 우리의 무료함을 달래 주려함인지, 고객 써비스 차원에서 혼자 열심히 떠 들어댔다.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영주님과 그 아드님은 매우 훌륭한 분 이시니 당신들의 선택은 매우 훌륭했다.' 라는 내용이었다. 당연 아무도 귀 담아 듣지 않았다. 약 10분 정도 지났을까? 마차는 궁전처럼 보이는 저택에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지요." 우리가 마차에서 내리자, 하인으로 보이는 여자와 남자들이 달려나왔다. "니나 양께서는 준비를 하셔야하니 가족분들께서는 먼저 식장에 들어가 계십시오. 이 분을 신부 대기실로 모시고 가라." "예. 이쪽으로 가시지요. 아가씨." 두 시녀는 공손하게 대답을 한 뒤, 니나를 데리고 사라졌다. 지크씨 가족 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 다. 지크씨는 빠른 동작으로 나를 따라오더니 나에게 따졌다. "자네 대체 어쩌자는 건가? 니나가 끌려가는 걸 왜 보고만 있나?" 난 지크씨에게 대답하는 대신 옆에 있는 라나를 보았다. "라나야! 언니는 세계 제일의 미녀지?" 라나는 잠시 멀뚱멀뚱하다가 손가락을 빨며 대답했다. "응. 우리 언닌 세계 제일의 미녀야." "그럼 말이야. 언니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싶지 않아?" "응. 보고 싶어." 난 다시 지크씨를 보았다. "따님께서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 싶지 않습니까?" "뭐, 그야 보고 싶긴 하지만……." "그럼 됐습니다. 니나가 웨딩드레스 입고 식장으로 등장하는 순간, 제가 판을 업지요. 원래 제일 중요한 순간에 파토 내야지 재밌잖아요." 내 말에 지크씨는 약간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식장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두 명의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두 놈이 예복을 입고 있 는 걸로 봐서, 아마 영주와 그의 아들일꺼라고 생각했다. 난 영주와 그 아들을 보고, 왜 전에 지크씨가 돼지 같은 놈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둘은 진짜 돼지같이 생겨먹었다. 영주는 그렇다 치고, 다 즈란 놈은 나와 동갑이거나 한, 두 살 많아 보이는데, 그 나이에 똥배가 나 와서 바지가 찢어지려 그러고, 얼굴에는 기름기가 좌르르 흘러내렸다. 말로 만 듣던 오크가 저렇게 생겼을까? 진짜 꿈에 나올까 두려운 얼굴이다. "잘 지냈나? 지크." 영주가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지크씨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흠, 건방진 태도군.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그냥 넘어가도록하지. 내 아들 과 당신 딸이 결혼하는 날이니까 말이야. 푸하하하." "안녕하십니까. 장인어른." 그 아들 놈, 다즈라고 했던가? 그 놈은 진짜 밥맛없는 미소를 지으며 지 크씨에게 인사했다. 지크씨는 장인어른이란 말을 듣고, 더욱 인상을 구겼 다. 내가 봐도 저런 사위를 두면 삼대가 고생할 것 같아 보였다. 아니, 저 자식 얼굴이 유전된다면, 삼대가 아니라 백대까지도 고생할 꺼다. "가자." "예. 아버지." 둘은 그 재수 없는 몸뚱이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갔다. 그들이 가자, 라나 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흥, 재수 없어." "너 말이 너무 심한거 아니야?" "그래도 재수없는 건, 재수없는 거다. 뭐." 난 뾰루퉁한 표정으로 있는 라나의 머리를 잠깐 쓰다듬어 준 다음, 다즈 의 뒤를 쫓아갔다. "안녕하십니까. 전 니나의 사촌 되는 히로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즈님을 직접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난 그 자식 앞으로 다가가 비굴하다고 생각 될 정도로 허리를 숙인 뒤 손 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 그 자식은 아무 말 없이 띠꺼운 표정으로 나를 한번 훝어 보더니 다른 손 님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난 그 건방진 태도에 화가나 뭐라고 한 마디 해줄 생각으로 그 자식을 따라가는데 사병으로 보이는 놈이 갑자 기 나를 밀쳤다. 난 갑작스레 당한 일에 바닥에 넘어 질 수밖에 없었다. "흥, 평민 주제에 감히 어느분께 접근하는 거냐? 좋은 말로 할 때 저 쪽 으로 꺼져." 그 놈은 한 손으로는 검을 빼들 자세를 취하며 거만한 목소리로 소리쳤 다. 흠, 나보다 높은 곳에 서 있다는 자만심 때문에 그런 건가? 좋아. 누가 높은 곳에 서있는지 좀 있다 확실하게 알려주도록 하지. 퍽- "컥." "죽기 싫으면 어서 썩 꺼져 이 자식아. 어디서 그 따위 눈으로 노려봐." 도전적인 눈빛으로 자기를 노려본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 놈은 오른 쪽 발로 나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정통으로 맞았는지 복부에서는 엄 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예. 죄송합니다. 당장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난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조심해 새꺄. 한번만 더 그 따위로 하면 그 땐 진짜 죽여 버리겠 어." "예, 예.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몰라 뵙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 겠습니다." 그 놈은 나를 한번 째려보더니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역시 평민들은 패야지 말을 듣는 다니까' 등의 소리를 궁시렁 거리며 다른 곳으로 걸어갔 다. 그 놈의 모습 내 눈에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난 아픈 복부를 쓰다듬으 며 일어났다. 아마 저놈은 잠시 후에 일어날 일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처 음에는 적당히 끝내려 그랬는데…… 마음이 바꿨어…… 네 녀석만은 박살 을 내주지. 난 비틀거리며 지크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니 자네 왜 그러나?" "괜찮으신거에요?" "오빠 어디 다쳤어?" 지크씨의 가족들은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걱정어린 말을 한마디씩 던졌다.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말을 하자 복부의 통증이 더 심해져 고통에 의해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들은 더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그 사병이란 놈들, 정말 성질 드럽던 데요." "그 놈들 한테 당한 건가?" "예. 좀 있다 당한 만큼 복수해 줘야죠." 난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뭐? 어떤 놈이 오빨 때렸어? 씨잉, 누구야? 내가 가서 혼내줄게." 라나는 그 귀여운 얼굴에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열살짜리 여 자애가 열받은 표정을 지어봤자지. 이런 모습이 오히려 더 귀엽게 보이는 군. "하하, 괜찮아. 이 오빠가 조금 있다 혼내줄꺼야. 언니도 구해내고. 라나는 그냥 보고 있기만 하면 돼." "정말?" "응, 이 오빠만 믿어." "알았어." 라나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풀고 다시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도 귀여워 보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진짜 라나를 좋아 하고 있는 건가…… 설마……. 그 때 식장 안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곧 식이 시작될테니, 하객들은 안으로 모여주십시오." "식이 시작된데요. 들어가지요." "알았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우리 쪽 자리에는 평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신랑쪽 하객들은 그래도 좀 사는 집안 차림 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신랑 측 하객은 영주한테 잘 보이려고 온 놈이나 초청 받아 온 놈인 것 같았고, 신부 측 하객들은 안 오면 무슨 일을 당할 지 몰라 억지로 끌려나 온 것 같았다. 난 머릿속으로 어떻게 녀석들을 박 살을 내줄까를 궁리했다. 일단 다즈란 놈을 죽도록 팬 다음에 사병들을 매 직미사일로 날려버리고, 영주는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랑 입장." 엥? 언제 식순이 여기까지 진행됐지? 난 진행자가 크게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나더니, 다즈가 모습을 들어냈다. 그 돼지 같이 생긴 얼굴에 미소까지 띄고 나타났는데, 보고있기가 매우 괴로웠다. 라나는 내 귀를 잡더니 작은 목소 리로 속삭였다. "보고 있기가 괴로워." "나도 동감이야." 신랑 입장이 끝나고, 다즈는 주례자 앞에 섰다. 이제는 신부 입장할 차롄 가? "신부 입장." 진행자가 큰 소리로 '신부 입장'을 외치자, 웨딩 마치가 흘러나오고, 모든 하객들의 시선은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두 소녀의 에스코트를 받 으며 걸어 나오는 아름다운 신부가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니나는 정 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길게 끌리고 있고, 얼굴은 흰색 면사포로 살짝 가렸다. 또 손에는 흰색 꽃으로 만들어진 부케를 들고 있어, 청초한 매력을 자아냈다. 단지 옷하나 바꿔입은 것인데, 방금 전까지 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걸 보고 웨딩드레스의 마력이라고 하는 건가? 면사포 때문에 얼굴은 안 보이지만, 니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푸들(?) 표정이겠지. 은은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신부는 천천히 걸어왔다. 다즈라는 놈을 보 니…… 역겹군. 그 놈은 웨딩드레스 입은 니나의 모습을 보고,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 다. 이제 니나와 부부가 되다고 좋아 미치겠지……. 하지만 세상이, 니 뜻 대로 될 만큼, 그렇게 만만하냐? 신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다즈라는 놈은 입이 찢어지고 있었고, 그 와 반대로 지크씨의 가족들은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라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결국 신부행진은 끝나고, 니나는 다즈의 옆에 서게 되었다. 주례자는 나란 히 선 둘을 보고, 주례사를 읽기 시작했다. "신랑 다즈군은, 신부 니나양을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는가?" "예!" 그 놈은 식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고, 난 그 순간 이마에 손을 짚었다. 제발 니 주제를 알아라. 너 같은 돼지랑 니나가 어울리겠냐? "그럼 신부 니나양은, 신랑 다즈군을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는가?" "……." 그 질문에 니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씨발, 당연하지. 누가 오크랑 결혼하고 싶겠냐? 주례자는 갑작스런 상황에 헛기침을 몇번 하더니 다시 물었다. "흠, 흠. 신부 니나양은, 신랑 다즈군을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는가?" "……." 니나는 역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식장 분위기는 크게 술렁거 리기 시작했다. 반대쪽을 보니 영주가 뒤에 서있는 사병들에게 눈짓을 하 고있는 것이 보였다. 음, 지금 나서는게 제일 멋있어 보이겠군. 나는 천천히 일어나 식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망토를 걸친 소년이 갑자 기 식장 가운데로 들어서자 주위 하객들은 크게 웅성웅성거렸다. 난 몸을 돌려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지크씨, 아주머니, 라나, 영주놈, 뒤쪽 에 시립해있는 사병들. 이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난 숨을 크게 들이 마쉰 다음, 배에 힘을 줘서 외쳤다. "여러분, 저는 니나의 사촌인 히로라고 합니다." 난 말을 멈추고 다시 하객들을 둘러보았다. 하객들은 나에게 관심을 보이 며,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를 멈추었다. "전 제 사촌인 니나가 이 마을에서 제일 잘생기고 제일 훌륭하신 다레이 아 다즈님과 결혼을 한다기에, 기쁨을 금할 길이 없어 이 결혼식에 참석하 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즈님을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왼손으로 다즈를 가리켰다. "이자는 건방지기 짝이 없을 뿐아니라, 얼굴도 아주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오크를 본적은 없지만, 저는 확신 할 수 있습니 다. 오크도 이 자식보다는 잘생겼을 것입니다." "푸하하하!" 내 마지막 말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난 뒤돌아 붉으락푸르락하 는 녀석의 면상을 치어다보며 말했다. "니가 인간이냐?" "……." 내 말에 그놈은 화를 내며 뭔가를 말하려 하였지만, 말하지 못했다. 내가 바로 면상을 갈겼으니까……. 퍽-! "우욱." 경쾌한 소리가 나고, 그 놈은 양손으로 코를 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손의 느낌으로 봐서는 코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너무 세게 때렸는지 손가락이 얼얼했다. 난 비틀거리는 그 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무릎으로 다시 한번 면상을 찍었다. 퍽-! "으윽." 이번엔 이빨을 맞았는지, 그 놈은 한 손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바닥에 완 전히 엎어졌다. 난 그놈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아까 인사만 받아줬어도, 이정도까진 안 했다. 다 자업자득이니까 날 원 망하지 말도록." "자 자식 잡아!"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던, 영주는 이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영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30명이나 되는 사병들이 칼을 뽑아들고 나를 향해 뛰어왔다. 난 힘들게 뛰어오는 그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 며 말했다. "그래? 어떤 놈이 먼저 죽고 싶은 거지?" 내 말에 30명의 사병들은 바로 멈춰 섰다. 나의 따뜻한 미소 때문에 멈춘 것 같지는 않고, 내 주위에 떠있는 수십 개의 빛의 화살들 때문에 멈춰선 것 같았다. 매직 미사일은 한번에 9개 이상은 사용할 수 없다. 현재 내 주 위에 떠 있는 수십개의 빛화살은 3개를 제외하면 전부 짜가다. 그냥 눈요 기꺼리! 원래 마법은 화려하고 마법사는 폼을 잡아야 하는 법이다. "마법사다." 하객들 중 누군가가 외치자, 주위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칼 버려." 난 사병들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승기를 잡았을 때는 조 용히 말하는게 더 효과적이다. 이 쪽에서 조용히 나갈수록, 저 쪽에서는 뭔 가 믿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고,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자식들 은 칼을 왜 안 버리냐? 사병들은 내 말에 움찔하면서도, 칼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아예 뛰 어들 자세까지 취하고 있었다. 마치 기회를 봐서 공격하겠다는 듯이……. "매직 미사일." 시동어를 외치자, 공중에 장전되어 있던 빛화살중 하나가 날아가, 아까 내 복부를 걷어찼던 놈의 오른쪽 어깨를 뚫고 지나갔다. 당근 이 빛화살은 진 짜였다. "으악." 그 놈은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화살이 뚫고 나간 자 리에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칼버려!" 한번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자, 사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칼을 버 렸다. 아∼ 이 순간 <주유소 습격 사건>이 생각나는건 왜 일까? "원산폭격!" 왜 반응이 없지? 난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원산폭격 실시!!" 사병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도 하는 놈이 없었다. 난 주위에 떠 있은 화살들을 발사했다. 화살들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가 벽에 박혔다. 사병들은 사색이된 얼굴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난 온힘을 다해 외쳤다. "원산폭격 실시!! 안해 이 새끼들아!! 다 죽여버린다!!!" "저기……." 사병들 중 제일 띨빵하게 생긴 놈이 손을 들었다. 질문을 하고 싶은 모양 이었다. "뭐야?" "저기…… 원산폭격이 뭐죠?" 그렇군. 깜빡했다. 이 놈들이 원산폭격이란 말을 알 리가 없지. "땅에다 대가리 박으라고 새끼들아!!!" "예." 그제서야 원산폭격의 참 의미를 깨달은 사병들은 우렁찬 대답과 함께, 땅 에 머리를 박았다. "자세 흐트러지면, 목에 구멍난다." 난 사병들에게 주의를 준 뒤, 앞자리에 앉아있는 영주에게 다가갔다. 영주 는 내가 다가오자, 몸을 매우 격렬하게 떨었다. 약간 떠는 것 같은데도 붙 어있는 지방살이 많으니, 온 몸의 살들이 요동을 처서 매우 격렬하게 떠는 것으로 보였다. 난 손에 Strength스트랭스 마법을 건 뒤, 잔뜩 쫄고있는 영 주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야! 너 죽고 싶지?" "아닙니다. 마법사님." 마법사님이라? 듣기에 나쁘진 않군. 영주는 상황파악이 잘되는지 나에게 존댓말까지 쓰고 있었다. "그럼 살고 싶어?" "예. 제발 살려 주십시오." 영주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눈물을 쏟 을 준비를 하면서……. "아냐. 내가 보기엔 너 죽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마법사님." "진짜 죽기 싫어?" "예. 마법사님." "씨발, 죽기 싫은 놈이 내 사촌을 건드려?" 쿠당탕-! 난 영주를 던졌다. 영주는 하객들이 있는 곳에 떨어지면서, 하객들은 그 자리를 피했고, 애꿎은 의자들이 박살났다. 난 영주가 떨어진 곳으로 뛰어 가서, 다시 그 놈의 멱살을 잡았다. "야. 솔직히 말해봐. 내 사촌 니나랑 니 아들이랑 잘 어울리냐?" 영주는 아까부터 준비를 하고 있던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좌우로 힘차게 흔들었다. 그 바람에 삼중턱이 요동을 쳤고, 나는 매우 괴로워해야 했다. "아닙니다. 마법사님." "그래. 그걸 아는 놈이 억지로 결혼을 시키려해?" "저, 전 그런 적 없습니다. 단지……." 퍽-! 난 왼손으로 그놈의 아구리를 날렸다. 약하게 때렸으니, 별로 아프진 않을 것이다. 아니, 아주 약간은 아픈 것 같군. 눈물의 양이 많이 진걸 보니까 말이야. "씨발, 니가 그런 적이 없다고? 어제도 어떤 새끼가 협박하러 오던데? 아, 맞아 그 새끼 어딨지? 저기 쯤 있었던 것 같은데." 난 일어나 중매쟁이 노릇을 했던 놈을 찾아내, 영주 앞에 끌고 왔다. "너 어제 숙부님 집에 와서 협박했었지?" "아닙니다. 마법사님. 저는…… 저는 그런적 없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야?" "예. 예. 정말입니다. 마법사님." "뭐, 아니라니 할 수 없군, 그럼 죽어." 난 말을 마치고 손에서 빛의 화살을 생성 시켰다. 투명한 녹색의 빛화살 이 자신의 목에 겨누어지자, 그 놈은 그제서야 어제 일이 생각난 듯, 눈물 을 흘리며 열심히 빌었다. "아닙니다. 협박했습니다. 협박했어요. 협박했으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흑 흑." "그랬지? 좋아, 그럼 협박하라고 누가 시켰어? 솔직히 말하고 말고는 니 맘이야.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이 나왔을 시에는 니 목에 구멍하나가 나고 말고는 내 맘이야." "저 자에요." 그 놈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가락으로 영주를 가리켰다. 난 그 놈 을 놓아주고 다시 영주에게 다가갔다. "니가 그랬다는데?" "아. 예. 저 마법사님……." 그 놈은 변명을 하려다 공중에 떠있는 화살이 무서웠는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습니 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흑흑." 기름이 좔좔 흐르는 얼굴에 애처로운 빛을 띄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자의 얼굴을 보는 것은 매우 괴로웠다. 난 그 놈을 한번 노려본 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니나는 이미 가족들의 품에 안겨있었고, 주위 하객들은 무서워 하면서도, 재밌는 구경을 놓치기는 싫은지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사병들은 그 래도 목에 구멍나기는 싫은지, 비틀거리는 자세로 계속 원산폭격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 땀을 뻘뻘 흘리며 자세를 취하는 그들이 불쌍해 보여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했다. "모두 일어서. 단……." 그들은 내말에 이젠 살았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다. '단' 이라는 조 건을 제시하는 단어가 앞에 붙자, 다시 대가리를 박았다. "어깨에 구멍 뚫린 놈은 그대로 있어. 그놈은 조금 후에 나랑 볼일이 있 으니까." 내 말이 끝나자, 어깨에 구멍 안 뚫린 놈들은 전부 일어섰다. 딱 한 놈만 그대로 있었는데, 그 놈의 어깨에 흘리다만 핏자국이 있어, 그놈이 어깨에 구멍 뚫린 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가리를 땅에 박고있어 표정을 볼 수 없다는게 매우 안타까웠다. 난 바닥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다즈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 영주 의 옆에 앉혀 놓았다. "대가리 들어." 그 놈이 조용히 머리를 들자, 난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 렸다. 내가 그 놈의 얼굴에 해놓은 짓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코뼈는 주저앉았고, 얼굴은 흘린 코피로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난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눈 깔어 새꺄!" "예." 그 놈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눈을 깔았다. "아직도 니나랑 결혼하고 싶냐?" "아닙니다. 절대 그럴 생각 없습니다." 다즈는 힘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자기가 쓰러져있는 동안, 사병들은 완전 박살 나있고,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상황을 파악 한 것 같았다. 난 옆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그 놈들 앞에 놓고, 거꾸로 돌 려 앉았다. 양손은 등받이 위에 결쳐놓고. "그래. 당연 그래야지. 너랑 니나랑 결혼한다는게 말이나 되냐? 그렇지?" "예." "그래. 그걸 잘 아는 놈이, 억지로 결혼식을 하려해? 니들 억지 결혼식이 불법인거 잘 알지?" "……." 두 놈은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아 몰라 새끼들아!" "예, 압니다. 잘 압니다." 큰소리로 물어보니, 대답이 잘 나오는군. "씨발. 그걸 잘 아는 새끼들이 그 딴 짓을 해!" 난 깔고 앉았던 의자를 번쩍 집어들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두 녀석은 사전에 짰는지, 동시에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외쳤다. "진짜야?" "예!" 난 그들의 우렁찬 대답을 듣고, 의자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풀이 죽어있는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니들도 진짜 운 없다. 하필 찍어도, 내 사촌을 찍냐?" "……." "어쨌든 이 몸이 매우 여행을 좋아하는 관계로, 내일 수도로 떠날 생각이 다. 내가 만약 다시 이곳에 왔는데 우리 숙부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예. 물론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껍니다." 난 다시 영주놈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갔다댔다. "그 땐, 다레이아 성을 쓰는 놈들은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질꺼다. 갓난 아기부터, 무덤에 있는 놈까지…… 알겠나?" "예. 예. 물론입니다." "좋아, 잘 알아들었다니 기쁘군. 그런데 말이야…… 내가 내일 수도로 떠 난다니까." "예. 잘 다녀오십시오." 영주가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서, 나는 인상을 쓰면서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했다. "쓰파, 내가 간다는데, 마차, 물품, 여행경비 정도는 대줘야 할꺼아냐!? 너 지금 나보고 걸어가라는거냐!?" 영주는 그제서야 내 말뜻을 이해하고 열심히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물론입니다. 제가 물론 해드려야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완벽 하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난 선심쓰는 척하며 말했다. "좋아. 한 번 믿어보도록하지. 아침밥 먹고 출발할꺼니까, 정확한 시간에 마차 보내라. 아, 그리고 마부만 오게 해. 아침부터 니 면상보고 기분 잡치 기는 싫으니까. 만약 준비한게 마음에 안들었다 할 시에는 내가 다시 이곳 으로 찾아 오도록하지." 영주는 최대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예. 마법사님 마음에 들도록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겠습니다." "알았어." 난 영주를 내려놓고, 혼자서 힘들게 대가리를 박고 있는 놈에게 다가갔다. "일어서." "예." 그 놈은 힘찬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고, 머리에는 땅에 박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어깨에 피는 굳어 엉키 어있었고, 상처가 작아서인지 출혈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난 정중하게 물었다. "아프세요?" 그 놈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안 아프단 말이에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쩌죠? 전 아까 맞은 복부가 아직까지 아픈데……." "아깐 정말 죄송했습니다. 감히 몰라 뵙고, 용서해 주십시오." 그 놈은 잘못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잘못 건드렸다고 생각했는지, 붉게 변 한 얼굴로 수없이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빌었다. 난 그 놈의 눈을 마주보 았다. 그리고 그 놈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잘못한 걸 안다니까 다행이네요. 원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잘 인정 하려 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과거의 잘 못들을 되풀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인지해야 한다 는 겁니다. 내 말 잘 이해했어요?" "예." 지랄한다. 내가 말하고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니가 어떻게 이해를 해? "좋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과거의 원한을 청산하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게 어떨까요?" "예?" "씨발! 니가 아까 나 친거 10배로 갚아줄게." "……." 무소식은 희소식. 무대답은 긍정의 의미. 너 오늘 죽었어! 난 손에 스트랭스 마법을 걸고, 그 자식의 복부를 찍었다. 퍽-! 한 방에 녀석은 뒤로 나가 떨어졌고, 입고 있단 갑옷은 순식간에 찌그러 졌다. 난 바닦에 큰대자로 뻗어있는 그 놈에게 다가갔다. "크으윽, 크윽." 그 놈은 너무 아파서 비명도 제대로 못지르고 있었다. 난 엎어져있는 놈 의 복부의 다시 주먹을 갔다댔다. 불쌍해서 스트랭스 마법은 해지했다. "한 대, 두 대, 세대……." 퍽퍽퍽-! 주위의 관중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어, 녀석의 살과 내 주먹이 부딪 히는 소리는 건물 안을 가득 매웠다. 잠시 후, 나는 예정되었던 열 대를 채우고 아픈 손을 흔들며 일어났다. 쓰읍, 손이 너무 아프다. 그 놈은 이미 일곱 대 째에 눈깔을 뒤집고 기절해있었다. 주위를 둘러보 니 관객들은 완전히 얼어있었다. 심지어는 지크씨까지도 놀란 표정으로 있 는데, 라나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내가 자길 보고 있다는 것을 알자,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이런 광경을 보고 웃다니? 저 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 까. 그래도 귀여우니까……. 나는 웃으며 라나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다시 영주에게 다가갔다. "이로써 과거의 일은 해결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미래에 대해 얘기 해볼 까?" "예?" "앞으로 우리 숙부님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는 말 이다. 눈 똑바로 뜨고 잘 봐도라." 난 오른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머릿속으로 캐스팅을 하자 내 손바닥 에는 커다란 불덩이가 생겨났다. 관객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자기들 머 리통보다 더 큰 불덩이를 바라보았다. 난 왼손으로 벽쪽에 있는 사람들에 게 비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행히 잘 알아들었는지, 그들은 모두 벽에 서 물러났다. "Fire Ball." 콰과광-! "끼아악." "으아악." 내 오른손 손바닥에 있던 불덩이는 날아가 벽에 부딪혔고, 관객들은 소리 를 지르며 그 순간을 만끽했다. 벽은 완전히 박살나 바깥의 풍경이 대단히 잘 보였다. 조준을 잘해서 정확한 곳에 맞추어서 안쪽으로 파편도 별로 튀 지 않았다. 벽주위가 불타며 내가 있는 곳까지 열기가 전해졌기에 나는 다 시 한번 마법을 쓰기로 했다. "월 오브 아이스." 순식간에 벽주위의 온도가 급격히 얼음 벽이 생겨나고 화재는 진압되었 다. 난 고개를 돌려 영주 부자를 보았다. 그들 둘은 사색이 되어, 자기들이 방금전의 쇼에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표현했다. "잘 알았지?" "……." 그들 둘은 말로 하는 대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 다. 난 걸어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사했다. "오늘 즐거웠다. 다음에 또 보자." 녀석들은 아마 다시는 날 보기 싫을 것이다. 내가 지크씨에게 다가가자, 라나가 뛰어들어와 내 품에 안겼다. 난 라나 를 두손으로 번쩍들어 가슴에 안았다. "굉장해 오빠! 대단해 오빠!" "나 멋있었냐?" "응응. 진짜 멋있었어. 너무 멋있었어. 오빠 최고야! 나 이제부터 오빠 존 경할께!" 니가 뭘 좀 아는구나. 음하하하. 난 라나를 내려놓으려 했지만, 라나는 두손을 내 목에 감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난 어쩔 수 없이, 라나를 안은 채 지크씨를 돌아보았다. "가지요. 숙부님." "으, 응. 그러지." 우리는 결혼식 보러 왔다가, 재밌는 구경을 한 사람들을 뒤에 두고 그 곳 을 나왔다. 난 라나를 가슴에 안고 갔고, 니나의 웨딩드레스 치마는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길었기에, 레이나 아주머니가 뒤에서 에스코트를 해주었 다. 하늘의 구름은 유유히 흘러가고, 해는 높이 떠 사방을 비추었다. 왠지 사 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날씨. 우리는 그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걸었 다. 근데 아까 힘을 너무 많이 써서 피곤하다. 거기다가 라나까지 안고 있 으니……. "저기요, 여기서 집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한 40분정도 걸릴껄세." 40분이라…… 미치겠군. "조금 빨리 가죠. 니나 양은 웨딩드레스 때문에 걷기도 힘든데." "어떻게 말인가?" "어떻게 오빠?" "잠깐만 기다리세요." 난 라나를 내려놓고 주위에 떨어져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 리고 그 막대기로 길 한가운데에 커다란 마법진을 그렸다. 15분 정도 후, 이상한 도식과 그림이 잔뜩 그려진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지크씨네 마당 좌표를 기억해 놓은게 천만 다행이었다. "여기 가운데로 올라서세요. 그림은 밟지 마시구요." 라나는 깡충깡충 뛰어서 마법진 위에 올라섰고, 지크씨와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나는 그들이 완전 히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나도 들어갔다. 마법을 쓰려는 순간, 라나가 원 밖 으로 발을 뺏다, 집어 넣었다를 반복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애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내 머리로 여자(?)의 생각을 이해한다는건 무리인가? 난 라나에게 소리 질렀다. "라나야!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원 밖으로 발 내밀지마!!" "핏!" 라나는 내 말에 뾰루퉁해지더니, 입술이 10cm는 삐져나왔다. 난 라나가 조용히 있는 모습을 확인한 뒤, 시동어를 말했다. "워프." 시동어를 외침과 동시에 마법진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오고, 그 빛들은 우 리를 감싸안았다. 순식간에 주위 사물들의 모습이 완전히 뒤바꿨다. 우리 앞에는 붉은 지붕 에 흰색집이 보였다. 지크씨네 집의 마당으로 이동한 것이다. "어떻게……?" "이동 마법이에요. 간단한 거지요." 솔직히 간단한건 아니다. "굉장해 오빠. 정말 대단해. 존경스러워." 뭐 존경까지야. 난 원래 대단하단다. 우하하하. 난 열심히 나를 칭찬하고 있는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들어가지요. 니나양, 웨딩드레스가 잘 어울리는데요." "예…… 감사합니다." 면사포는 걷어올렸진 상태여서, 나는 니나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을 똑 똑히 볼 수 있었다. "푸하하, 그때 영주놈 표정 봤나? 진짜 끝내주더군." "아니야, 아빠. 사병들이 머리 박고 있던게 더 웃겼어." "푸하하. 그래, 그래. 그 놈들 머리 박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10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것 같더군. 하하하." 난 식사를 하면서, 그들의 칭찬을 계속 들어야만 했다. 레이나 아주머니와 니나는 가만히 듣고 있는 수준이었고, 지크씨와 라나는 죽이 맞아서, 서로 의 말을 맞장구 쳐주며 웃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지크씨는 오늘 은 기쁜날이라면서, 어제 말한 대로 6마리 닭의 목을 비틀려고 했다. 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옵니다' 라는 등의 말을 해서 지크씨를 겨우 말렸고, 다행히 4마리 닭의 목은 온전히 있을 수 있었다. 내가 미처 구하지 못한 다른 두 마리는 식탁 위에서 자신들의 알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요리 된 채로. 솔직히 나는 이런 종류의 식사에는 별로 익숙하지가 않다. 여기서 이런 종류의 식사란, 아저씨 한명과 꼬마 여자애 한명이 식탁위의 음식들에게 무자비하게 파편을 튀기며 떠들어 대는 식사를 말한다. "그런데 자네 너무 심하게 한거아닌가?" 그래도 나는 교양이 있는 사람이기에 입에 있는 음식물은 식도를 통과시 키고 나서 대답했다. "우물우물, 꿀꺽. 아니에요. 그 정도는 해야지 다시는 안 기어오르죠. 앞으 로 '숙부님' 만 보면 쫄아서 도망갈걸요." "숙부님? 푸하하. 그래. 나도 자네 같은 조카가 생겨서 기쁘네. 하하하." 웃는건 좋은데 제발 파편 튀기지는 마세요. 난 지크씨가 무자비하게 날리는 파편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도 역시 제일 볼만했던 건, 니나양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이었어요. 정말 아름답던데요. 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 온 줄 알았습니다." 난 니나를 보았고, 니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얼굴을 붉혔다. "아니에요." 내가 자꾸 니나의 미모를 칭찬하자, 라나는 삐졌는지 이상한 말을 했다. "흥. 나도 웨딩드레스 입으면 예쁘다 뭐." "……." 난 그 말을 듣고, 10살짜리 여자애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손에 부케를 들 고, 얼굴을 살짝 면사포로 가린 채 수줍어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우헤헤헤." "푸하하하." 난 그 모습을 상상하다 크게 웃었고, 지크씨도 나와 똑같은 모습을 상상 했는지, 나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내 입과 지크씨 입에 들어있 던 음식물들은 날아가 식탁에 골고루 뿌려졌고, 라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왜 웃어?" "아냐, 아냐. 너무 웃겨…… 아니, 너무 예쁠 것 같아…… 푸훗, 푸후, 푸 하하하하." "으하하하." 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지크씨는 아예 뒤로 자지 러지고 있었다. 니나와 레이나 아주머니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거 리며 웃고 있었다. 라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 며 소리질렀다. "씨잉. 웃지마!" "알았어, 라나야. 미안해. 안 웃을게. 푸후후, 아하하하하." "쿡쿡쿡." "으하하하하." 콰당-! 난 다시 한번 웃었고, 지크씨는 결국 의자에서 엎어져 바닥을 뒹굴며 웃 었다. 레이나 아주머니와 라나도 더 이상은 웃음을 참기 힘든지, 식사를 포 기하고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씨잉……. 으아아앙." 라나는 진짜 화가 났는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며 자기방으로 뛰어 갔다. 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쩌지 못해 계속 웃고 있었다. 이들이 진짜 가족이란 말인가! 라나야, 니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만하구나. 그러니까 좀 착실하게 살지. 나는 그래도 라나편(패싸움하냐?)이었기 때문에, 웃고 있는 매정한 가족들 에게 한마디 쏘아 붙이고 라나의 뒤를 쫒아갔다. "아니, 왜 애를 울리고 그래요!? 라나야!!" 난 매정하게 웃는 그들을 뒤로하고 라나의 방으로가서 문을 활짝 열어 제 쳤다. "젠장, 여긴 내 방이잖아." 난 재빨리 문을 닫고 옆방의 문을 열었다. "번지수가 틀렸다." 그 방 침대 위에는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놓여 있고, 라나가 없는 걸로 봐 서 니나 방인 것 같았다. 난 두 개 남은 방 중에서 라나방으로 보이는 방 의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제대로 찾았다. 작은 침대 위에 라나가 엎어져서 펑펑 울고 있는 것으로 봐서 라나 방이 확실했다. 난 다가가 라 나의 작은 어깨를 움켜쥐었다. "라나야∼." "훌쩍 훌쩍∼. 왜 왔어, 씨잉?" "미안해 라나야. 라나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상상하니까 너무 귀여워 서, 그래서 웃은 거야. 절대 다른 뜻은 없었어." 난 라나를 일으켜 내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라 나는 조금 울먹거리다 이제 진정된 모습이었다. "훌쩍∼, 정말?" "응, 정말이야. 자, 이제 나가서 식사 마저 하자. 알았지?" 우는 애 달래기 무지하게 힘들구나. 내 다시는 어린애를 울리지 않으리! 난 겨우겨우 우는 라나를 달래 식탁으로 데려 왔고, 지크씨는 라나를 보 고 다시 광소하며 바닥에 없어 졌다. 그 때문에 라나는 울면서 다시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저거 친아버지 맞나? 어떻게 달래 논건데……. 식사를 끝마친 후 침대에 누워 오후에 일어났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 늙은이가 나에게 넣어준 힘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였다. 그 늙은이는 이 힘을 얻는데 100년이란 시간을 소모했다. 그러나 난 한 순간에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다. 내가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만약 내가 이 힘을 가지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면, 나를 건드렸던 놈들을 전부 박살내버릴꺼다. 제일 먼저 재수없게 맨날 내 앞에서 깝죽댔던, 정재훈이란 놈부터 죽여버려야지. 마법을 사용해 살해 한 다면 증거도 남지 않을테니까……. 대체 그 늙은이는 왜 이 힘을 나에게 준 것일까? 약간 맛이 가 보이긴 했 어도, 미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 힘이 악한 일에 사용 될 수도 있다 는 것을 모를리는 없을테고. 나를 착한 놈이라고 생각했나? 아마 그럴리는 없을꺼다. 내가 자기 앞에서 싸가지 없게 행동한 것만 봐 도, 내 성깔 드럽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을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 그 눈으로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지. 그럼 이 힘을 악한 일에 사용해도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 걸까? 아니면……, 나한테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이것은 내 몸인가? 그러고보니 전에 우오거에게 당해, 척추 부러진 이후로, 몸의 느낌이 약간 이상했다.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전에 비해 훨씬 좋아진 느낌이다. 역시 드래곤에게 치료를 받으니까, 애프터도 확실하다. 부작용도 없고 말 이야. 앞으로 다칠 때 마다 찾아가야 되나? 난 눈을 감았다. 이 힘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정 재훈 그 자식을 죽여버릴 수도 있고……. ♬이 힘을 가지고♬서울로 간다면♬정말 좋겠네∼♬정말 좋겠네∼♬마법 쓰고♬검을 쓰는♬멋진 내 모습∼♬이 힘을 가지고♬서울로 간다면♬정말 좋겠네∼♬정말 좋겠네∼♬ (어린이 구전 동요. 원제 :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변제(변한 제목) : 이 힘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간다면, 정말 좋겠네. 작곡 : 알 수 없음 작사 : 박영웅 편곡 : 박영웅 표절 : 박영웅 노래 : 박영웅) 난 낮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지금은 즐거운 아침식사 시간이다. 아니, 아침식사 시간인 것은 맞지만, 별로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 모인 사람 중 한명이 조금 후에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식사가 시작된 이후로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있 었다. 덕분에 난 이 소화 안되는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끝마쳐야만 했다. "잘먹었습니다." "다 드셨어요? 조금 더 드시지……." "아닙니다. 많이 먹었습니다." 그리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많이 먹었다. 모두들 먹는 시늉만 할뿐, 음식에는 별로 손을 대지 않 았다. "오빠, 어디로 갈 꺼야?" 난 라나를 보았다. 라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글쎄, 일단 수도로 가보려고. 뭐, 꼭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야." "……그래." 식탁에는 어색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를 빨리 벗어나 고 싶었다. 다행히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마차가 도착한 모양이군요." 난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따라 일어났다. 난 방 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 방을 나오자 문 밖에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마법사님. 저는 닐스라고 합니다. 이번에 마법사님을 모시 고 수도까지 가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는 나에게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난 당황해서 바로 고개를 숙였 다. "안녕하세요. 전 히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밖에 마차 대기 시켜 놓았습니다. 나오시지요." 난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어제 우리가 식장까지 타고 갔던 마 차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난 마차 앞에 서서 뒤돌아 지크씨 가족들의 모 습을 보았다. "안녕히계세요." 난 그들에게 인사했다. 라나는 울먹이며 앞으로 나와 내손을 꼭 붙잡았다. "오빠, 꼭 가야되는거야?" "특별히 갈 곳은 없지만, 가야지. 잘 지네. 언니말 잘 듣고." 난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난 라나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라나는 내 품안으로 뛰어들 어왔고……, 내 입술에 촉촉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대체 뭐지? 라나는 내 목을 꼭 감싸안은 채 계속 그대로 있었다. 잠시 후 라나는 입 술을 떼어냈고, 난 라나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 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라나의 입술이 떨어졌는데도, 내 입술에는 아 직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있었다. 생애 첫 번째의 키스. 열 살짜리 여자애한테 당했음. 나쁘진 않은데. 난 웃음을 지었다. 라나는 다시 나를 껴안았다. "가지마. 나 오빠 사랑해. 그러니까 가지마. 그냥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살 자. 아빠랑, 엄마랑, 언니랑 같이살자. 응? 그러자?" 첫키스에 이어서 사랑고백. 미치겠군. 난 라나를 천천히 떼어냈다. 라나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어있었다. 난 손을 들어 라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라나는 계속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 를 바라보았다. 난 라나의 눈을 마주 보았다. 울고 있는 라나의 모습은 전 혀 어린애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난 마음이 흔들리는 것 을 느꼈다. 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 라나야. 난 꼭 가야할 곳이 있어. 그 곳은 갈 수 없는 곳일지도 몰라. 하지만 가기 위해 노력은 해보고 싶어. 내가 그곳에서 이곳으로 왔으 니, 분명 이곳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도 있을 테니까." 라나는 내 말을 듣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오빠는 라나 안 사랑해? 그래서 가려는 거야?" 난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오빠도 라나 사랑해." "아니야! 오빠는 라나를 사랑하지 않아. 오빠 거짓말쟁이!" 라나는 내 팔을 밀쳐냈다. 그리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집으로 뛰어갔 다. 난 라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지켜보았다. 난 고개를 돌렸다. 입을 가린 채 울고있는 니나와 레이나 아주머니, 무표정한 얼굴로 땅을 보고 있는 지크씨의 모습이 보였다. 지크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있었 지만, 그 뒤에 숨겨진 슬픈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난 이번에 마부석에 앉 아있는 닐스씨를 보았다. 닐스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품속을 뒤지더니 주머니 하나를 건내주었다. "저기 이건 영주님께서 여행경비로 쓰시라고 주신 겁니다." 난 그의 손에서 주머니를 건네 받아 열어 보았다. 안에는 금화 10개가 빛 을 받아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내서 보니 100이라는 숫자 가 새겨져 있었다. 10개니까 총 1000골드군! 짜식이 여행경비 좀 달라니까 딸랑 금화 10개 밖에 안주냐? 혹시 저 마부가 빼돌린거 아냐? "이게 답니까?" 나의 물음에 그는 펄쩍 뛰며 말했다.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표정에 는 두려움과 애처로움이 섞여져 있었다. "물론입니다. 마법사님. 제가 어찌 마법사님께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저는 영주님께 받은 그대로 전해드린 겁니다. 전 열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마법사님." 아님 말지. 뭘 저렇게 쫄아? "이 곳에서 수도까지 가는데 1000골드로 충분할까요?" "예?" 나의 말에 마부는 물론이고 슬픈 기색을 보이고 있던 지크씨의 가족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1000골드? 그 쪼잔한 영주 놈이 자네한테 1000골드나 줬단 말인가?" 난 놀라는 지크씨에게 무덤덤하게 물었다. "예. 많은 건가요?" 이 곳 화폐 단위를 알아야 놀라든 말든 할꺼아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1000골드면 우리 가족이 1년은 놀고먹을 정도 의 돈이야." 생각보다 큰 금액이구만. 역시 몇 대 쥐어박았더니 뱉어 내는 것도 많군. "여기서 수도까지는데 얼마 정도가 필요한가요?" "많이 든다 처도 100골드면 충분할 껍니다. 마법사님." 나의 질문에 그는 굽신거리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 끝에 붙은 마법사님 소리 좀 뺄 수 없나? 난 주머니에서 금화 8개를 꺼내 지크씨의 손에 올려놓았다. 지크씨는 800 골드라는 거액이 손에 올려지자 매우 당황해 했다. "자, 자네, 이걸 왜……?" "받아 두세요." 난 어쩔 줄 몰라하는 지크씨의 손을 잡고 억지로 금화를 움켜쥐게 했다. "어차피 전 수도까지만 가면 되니, 돈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가족들과 좋 은 일에 쓰세요." "이, 이건 받을 수 없네." "도로 가지고 가세요." "맞아요. 저희는 이걸 받을 수 없어요. 도로 가져가세요." 지크씨는 나에게 다시 금화를 내밀었고, 그런 지크씨의 행동이 옳다는 듯 레이나 아주머니와 니나도 한마디씩 했다. "괜찮습니다. 정말 저에겐 필요 없는 돈이에요. 두 분께서 좋은 일에 쓰세 요." 난 내민 지크씨의 손을 거절했다. 레이나 아주머니는 울며 말했다. "하지만…… 저희도 염치가 있지…… 딸을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데……." 난 그런 레이나 아주머니의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별로 도와 드린 일도 없는데요. 아주머니와 지크씨, 니나와 라나에게 받 았던 친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마치 저희 어 머니 같은 느낌이었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난 터져 나오는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말을 들은 레이나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니나 역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 개 숙여 울고 있었다. 난 그런 그들을 보며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지 금 입을 열면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자네 라나의 말대로 이 곳에 있으면 안되겠나? 어차피 특별히 갈 곳도 없다면 우리집에서 같이 살게나." 지크씨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갈 곳이 없는 건 아니에요. 단지…… 언제 갈 수 있을 지는 몰라요. 어쩌 면 평생 갈 수 없는 곳일 지도……." 난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말을 이었다. "라나에게 말해주세요. 만약…… 만약…… 5년이 지나도 그 곳으로 가지 못한다면…… 반드시 이 곳으로 돌아오겠다고…… 반드시 이곳을 다시 찾 아오겠다고……." 난 뒷말을 잊지 못했다. 레이나 아주머니와 니나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지크씨는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기가 괴로워 몸을 돌려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의 문을 닫기 전에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언제 다시 만날지…… 아 니, 평생 다시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모습을 확 실하게 기억해 두고 싶었다. 호탕하게 웃던 지크씨, 어머니 처럼 다정했던 레이나 아주머니, 영주의 아들이 탐낼 정도로 아름다운 니나, 그리고 우리 예쁜 라나. 동화책 그림과도 같은 집에 살던 그들의 모습을 난 기억하고 싶었다. "……안녕히 계세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라나에게도…… 잘 지내 라고 전해주세요." 마지막 인사를 던지며 결국 한방울의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난 말 을 마친 뒤 마차의 문을 천천히 닫았다. 더 이상 지체하면…… 이 곳을 떠 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후 마차는 약간 덜그럭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에 비치는 지크 씨의 가족들은 조금씩 뒤로 이동했다. 그들이 멀어졌다고 생각 될 때쯤, 뒤 에서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히 가세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꼭 다시오세요. 라나가 계속 기다리고 있을 꺼에요." "잘 가게. 정말 고마웠네." 젠장. 겨우 그저께 만난 사람들과 헤어지는 건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냐? 이별할 때 우는 놈들이 제일 멍청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빌어먹을…… 눈물이 멈추질 않네. 난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계속 그렇게 있었 다. 마차가 출발한지 약 4시간 정도 지났다. 덜그럭 거림은 더 심해지고, 주위 에 나무가 많아지는 걸로 봐서 산으로 들어 온 것 같았다. 마차는 점점 느 려지더니 곧 멈추었다. 난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 니 확실히 산속이었다. 아마 산을 넘어야지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나 보 다. "이 곳에서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 마법사님." 닐스씨는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난 웃으며 말했다. "길이 좋지 않네요." "예. 이 산만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잘 닦여진 길이 나옵니다. 일단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그 쪽에 앉아계세요." 난 가장자리의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닐스씨는 마차안을 열심히 뒤 지더니, 여러 가지 음식들을 가져왔다. 난 닐스씨가 건넨 빵을 씹으며 물었 다. "이 산을 벗어나려면 얼마나 걸리나요?" 닐스씨 역시 빵을 뜯으며 대답했다. "내일 오후쯤이면 벗어날 수 있을껍니다. 오늘은 산속에서 노숙을 해야합 니다. 이 산은 특별히 위험한 동물이나 몬스터들은 없지만, 그래도 산속에 서 밤을 지내기는 무섭지요. 그래서 마차로 이동할 때는 동이 터오르기 직 전에 출발합니다. 그러면 해가 지기 직전에 산을 넘을 수 있거든요." "그렇군요." 난 고개를 들어 마차를 보았다. 마차에 매여진 말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 고 있었다. 좋은 종자여서 그런지, 4시간이나 산길을 달려왔는데도, 별로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저기 마법사님. 술 드시겠습니까?" "술이요? 마차안에 술도 있어요?" "예. 물론입니다. 영주님께서만 드시던 최고급 포도주와 와인들이 있습니 다. 영주님께서는 마법사님이 여행에 불편하지 않게 모든 편의를 돌봐주시 라고 하셨습니다." 난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영주를 생각했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에요. 술은 됐어요. 그보다 그 영주놈 진짜 불쌍하게 됐네요. 아들 결혼하는 날에 그 꼴이 되었으니……." 닐스씨는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 놈이 그동한 한짓을 생각하면 그것도 약한 겁니 다. 저도 어제 식장안에 있었는데 얼마나 통쾌하던지…… 마법사님은 우리 마을에 영웅이십니다." 난 그의 말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아저씨도 쌓인게 많았구만. "영주가 안 좋은 짓만 골라서 했나봐요?" "물론입니다. 그 놈이 한 짓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저도 먹고살려 고 그 놈 밑에서 마부짓을 하고 있지만, 울화통이 터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진짜로 니나의 사촌은 아니였나보죠?" 닐스씨는 마지막 말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우리들이 이별하는 모습 을 보고 알아차린 것 같다. 난 라나 생각에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예. 하지만 진짜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에요. 언젠간 다시 찾아 뵈야지 요. 지금은 일단 라나 애인이라고 해두지요." 내 마지막 말에 닐스씨는 웃음을 지었다. 10살짜리 여자애의 애인이 라……! "자, 다 먹었으면 출발하지요." "알겠습니다. 마법사님." 우리는 간단한 식사를 끝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말들도 쉬어야 했기에 두 번정도 중간에 휴식을 취하고 나서 계속 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머리 위에 해는 저 멀리 서쪽으로 사라졌다. 닐스씨는 야영하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후, 말들을 마차에서 풀어 나 무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는 주위에 돌들을 모아 불을 지필 준비를 하였다. "아, 그건 제가할께요. 아저씬 식사준비나 해주세요." 닐스씨는 나뭇가지를 모으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로 걸어갔다. 난 주 위의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원을 그리고 있는 돌 안에다 던져 넣었다. 닐스 씨는 여러 가지 물건을 꺼내더니, 그 중 숯으로 보이는 검은 물건을 가져 와 돌 안에 넣었다. 숯을 바닥에 고르게 깔자, 그는 돌멩이 두 개와 심지로 보이는 것을 꺼냈다. 불을 붙이려그러나? "그건 뭐하는데 쓰는거에요?" 닐스씨는 손에 들고있던 심지와 돌멩이를 올려 보았다. "이거 말입니까?" "예." "이건 부싯깃이라고 하는 겁니다만…… 이 부싯돌을 부딪혀서 불꽃을 튀 게 한 다음, 그 불꽃을 이 부싯깃에 옮겨 붙게 하는 겁니다." 그의 말투는 어떻게 이걸 모를 수 있냐는 투였다. 난 라이타를 꺼내 숯에 다 불을 붙였다. "됐지요." "어, 어떻게……?" "별거아니에요. 닐스씨가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작게 축소시켜서 만든거 에요." 갑자기 날 바라보는 닐스씨의 눈빛이 존경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역시 마법사님이여서 특이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다니시는 군요." 담배 피는 고딩들은 수십개씩 가지고 있는 건데…….(참고:일회용 라이터 는 여러 곳에서 꽁짜로 준다. 당구장, 술집, 횟집, 까페 등등) "그렇게 특이 한건 아니에요. 빨리 식사 준비나 하지요." "알겠습니다. 마법사님." 닐스씨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닥불에 팬케이크를 굽는가하면, 계란 후라 이도 만들었다. 고기류는 보관 문제 때문인지 전부 훈제시키거나 말린 것 이다. 어쨌든 우리는 맛있게 먹었고, 그렇게 저녁식사는 마무리되었다. 닐 스씨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난 나무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웠다. 어차피 지 금 내가 할 줄 아는게 없으니, 별로 도움 될 것 같지 않을 것 같아서다. 정 리가 끝나고 우리 둘은 모닥불을 마주보고 앉았다. 닐스씨가 엉덩이를 들 썩이며 입맛을 다시는 걸로 봐서 마차 안에 있다는 고급술을 마시고 싶은 모양이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식사도 끝났는데, 술이나 한잔하지요." "예!" 내 말에 닐스씨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라는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나 마차 안에서 술을 꺼내왔다. 닐스씨는 유리로 만들어진 잔에 조심 스럽게 술을 따라 나에게 건네주었다. 난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 만, 혼자서 마시기에는 닐스씨가 조금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일단은 받 아 두었다. 난 잔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맞아보았다. 향긋한 포도향이 나는 걸로 봐 서 포도주 인 것 같았다. 술잔을 입에 가져가 조금만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향긋한 포도향이 입안을 가득 매웠지만, 동시에 약간 쓴맛이 났다. 난 입안 에 머금고 있는 액체를 억지로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닐스씨를 보니 이미 한 잔을 다 마시고 또 한잔 마시고 싶은 눈치였다. "마음껏 드세요." "예, 알겠습니다." 닐스씨는 재빨리 술병을 움켜잡고 한잔 더 따랐다. 그리고 그 술을 입가 로 가져가다가 내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다시 내려놓았다. "그냥 이만 하지요. 오늘 불침번도 서야하는데……." 난 웃으며 말했다. "지금 농담하세요. 오늘 내내 마차를 몰았고, 내일도 마차를 몰아야 할텐 데, 어떻게 불침번을 서요? 오늘 불침번은 전부 제가 설 테니까, 아저씨는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세요." "그러시겠습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닐스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마셨다. 결국 닐스씨는 고급 포도주 한병 을 한방울도 안 남기고 아작을 내버린 다음, 입맛을 다셨다. 별로 취한 것 같지도 않다. 밤이 점점 깊어가며 모닥불은 불씨만 남기고 꺼졌다. "이제 그만 마차안으로가서 주무세요." 닐스씨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모포를 가지고 와서 이곳에서 자겠습니다." 난 예전엔 검은색이었지만, 지금은 눈부시게 하얀색이 된 망토를 살짝 들 어 보이며 말했다. "그냥 들어가서 자세요. 날씨도 쌀쌀한데. 전 이 망토를 걸치고 있어서 추 위를 안타요." 닐스씨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님.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난 일어나 마차로 걸어가는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말 놓으시고 마법사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제 이름은 히로입니다." 닐스씨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히로님." 미치겠군. "아저씨도 잘 자요." 닐스씨의 모습이 마차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난 청룡도로 모닥불을 휘저 었다. 나뭇가지들이 뒤집히면서 밑에 있던 불씨들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 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수백 수천개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달도 어딘가에 있으련만, 나무에 가려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난 계속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떠있는 별 중, 어딘가에 내가 살던 세계가 있을 것 만 같았다. 물론 내가 있는 이곳은 다른 별이 아니라, 다른 차원이다. 이곳 은 내가 살던 곳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다. 난 고개를 내렸다. 말들마 저 자고 있었다. 밤은 길고 할 일은 없었기에, 나는 매우 심심했다. 검술 연습이나 해볼까해서 청룡도를 들고 몇번 휘둘러 보다 그만두었다. 씨바, 언제 칼을 휘둘러 봤어야지. 이번에는 마법 수련을 해보기로 했다. 크로니스가 말해 준데로, 마음을 가 라앉히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난 내몸에 그려진 마나의 원을 느낄수 있었 다. 난 6써클을 그리고 있는 마나를 움직이기 위해 계속 정신을 집중시켰 다. 조금씩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세상은 조용했고, 나 혼자만이 존재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은 조금씩 깊어갔다. 3. 사창가에서 만난 아가씨 아침 동이 터올 때쯤, 마차에서 나오는 닐스씨의 모습이 보였다. 닐스씨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펴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대로 밤을 새신 겁니까?" 난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어서 주위는 어둑어둑했고, 공기는 차가워 주위에는 옅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예. 빨리 식사하고 출발하지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빵과 치즈 등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다. 식사 후, 닐스씨는 나무에 묶여져 있던 말들을 풀었다. 난 마차 안으로 들 어가려는데 갑자기 재미있게 생각났다. "저기요." "예.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마차 지붕에도 탈 수 있는 건가요." 닐스씨는 말들을 동여매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원래는 짐을 싣는 곳이지만, 지금은 올려놓은 짐이 없으니 위에 타셔도 무방합니다." 난 대답을 듣고나서 마차 바퀴를 밟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마차 지붕은 평평하고 넓어서, 나하나 누우면 크기가 딱 맞았다. 그곳에 누워있으니 희 미하게 안개낀 하늘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차는 덜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움직였고, 내 눈에 보이는 하늘 은 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누워있으니, 아까 까지는 느끼지 못했 던 피로가 몰려왔다. 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맑은 하늘의 모습이 보였다. 해는 높이 떠서 나 를 비추고 있고, 하얀 구름들은 두둥실 흘러간다. 난 몸을 일으켰다. 45도 각도로 내려다보니, 열심히 말을 몰고 있는 닐스씨의 모습이 보였다. 난 닐 스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얼마나 잤죠?" 닐스씨는 위를 잠깐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안전운전을 위해 다시 앞 을 보았다. "벌써 일어 나셨군요. 아마 5시간쯤 주무셨을 겁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도시에 도착할 수 있으니, 점심은 그곳에서 먹지요." "예." 난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 산길은 벗어나고 평평한 길이다. 주위에는 논밭 들이 펼쳐저있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수도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지요?" "글쎄요. 아마 지금 이 정도로 간다면, 일주일 정도면 도착할겁니다." 일주일이라? 난 다시 마차에 누웠다. 라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지크씨는 800골드가지고 뭐할까? 짤짤이나 하고 있을까? 잠깐 지금 나한테 돈이 ……. 난 상체를 일으킨 다음, 주머니에 있는 돈을 전부 털어 보았다. 보석은 4 개가 있고, 금화는 총 9개가 있었다. 영주에게 받은 100골드 2개, 드래곤 레어에서 가져온 100골드 한 개, 500골드 5개, 날 이 곳으로 소환시킨 빌어 먹을 5골드 한 개. 난 금화를 자세히 살펴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영주 에게 받은 100골드짜리와 드래곤 레어에서 가져온 100골드짜리는 서로 다 른 형태였다. 영주에게 받은 금화를 자세히 살펴보니, 640년이라는 연도를 발견할 수 있었고, 반면 레어에서 가져온 금화와 빌어먹을 5골드짜리에는 전부 0년이라고 새겨져있었다. 그렇다면 이 2개의 금화와 7개의 금화 사이 에 640년이나 차이가 난다는 얘긴데……. 지금이 몇 년이지? 난 닐스씨에게 물어보려다 잠깐 멈추었다. 지금이 몇 년이냐고 물어보면,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다. 난 잠시 머리를 굴린 다음 좋은 생각 을 해냈다. "닐스씨!" 닐스씨는 잠깐 고개를 꺾어 나를 보았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닐스씨 자식이 어떻게 되세요?" "제 자식 말입니까?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습니다." "그럼 첫째 아들이 태어난 해가 어떻게 되나요?" "아마 가이아스 왕국력으로 634년이었을 껍니다." "지금 그 아이가 몇 살이죠?" "지금 열살입니다. 그런데 그건 왜……?"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난 말을 마치고 다시 금화를 보았다. 10년전에 634년이었으면, 지금은 644 년, 그럼 이 금화는 644년 전에 만들어졌단 얘긴데……. 흠∼ 팔면 얼마나 나올까? 난 500골드짜리 금화를 살펴보다 매우 놀랐다. 이건 황금으로 만들어진게 아니였다. 황금보다 몇배나 더 비싼, 백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금 화의 앞면에는 푸른 금속으로 만들어진 드래곤이 새겨져있는데, 그 솜씨가 얼마나 정교한지 온 몸의 비늘 하나하나가 다 새겨져있고, 마치 살아 움직 이는 느낌이었다. 눈에는 작은 보석을 박아 넣었는지, 붉은색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500원짜리보다 약간 커다란 크기에 이런 것을 새겨 넣었다는 것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난 레어에서 가져온 보석과 금화와 영주에게 받은 금 화를 따로 분류해 넣었다.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히로님." 닐스씨의 말에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는 거대한 성벽이 버티고 있었고, 그 가운데 커다란 성문이 있는 것이 보였다. 성문 앞에는 수비병으 로 보이는 갑옷 입은 남자 두명이 서있었고, 마차가 성문을 통과할 때 나 에게 경례를 했다. 아마 마차를 보고 나를 귀족으로 생각했나보다. 성문을 통과하자 여러 가지 건물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차 지붕에 앉아있어서 사람들을 내려다 봐야 했기에, 당연 머리 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느끼는 거지만, 이 세계 사람들 의 머리카락 색깔은 정말 컬러풀했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녹색, 보라 색, 갈색 등등 어떻게 저런 머리색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자아낼 정도다. 같 은 녹색이어도 색깔마다 개성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연두색, 연녹색, 진녹색 등등. 가끔가다 검은색 머리카락도 보여, 상당한 동질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난 고개를 숙여 닐스씨를 보았다. 당연 뒷통수 밖에 안보였다. "배가 고프니까, 아무 음식점으로 가요." "알겠습니다." 닐스씨는 가까운 음식점으로 마차를 몰았다. 마차가 음식점 앞에 도착하 자, 난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저는 마차를 대놓고 오겠습니다." "알았어요. 빨리 오세요." "예." 닐스씨는 마차를 어디론가 몰았고, 난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심때 가 지나서인지 음식점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난 구석에 있는 아무 테이블에나 걸터앉았다. 카운터에서 한 아주머니가 물잔을 들고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시겠습니까?" 인상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는 정중하게 물었고, 난 고민에 빠졌다. 무슨 메뉴가 있는지 알아야지 주문을 하지! 그 때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닐 스씨의 모습이 보였다. 닐스씨는 나를 발견하더니 테이블로 와 앉았다. "뭘 드실꺼죠? 돈은 많으니까, 마음대로 주문하세요." 닐스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주문했다.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소고기 수프, 주세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날 보았다. 난 손가락 두개를 펼처보였다. "같은 걸로 두 개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주머니는 카운터로 갔고, 난 앞에 놓인 물잔으로 목을 축였다. "수도까지 가려면, 몇 개의 성을 지나야 하나요?" 닐스씨는 피곤한지, 몸의 관절을 풀면서 대답했다. "앞으로 두 개의 도시를 지나쳐야 합니다." "다음 도시는 얼마쯤 더 가야 되죠?" "세무까지요? 아마, 이틀은 걸릴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밤은 이곳에서 묵을 건가요?" "예. 그래야 할겁니다. 말들도 쉬어야 하고, 물품도 구입해야 하니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쪽에서 음식을 날라오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 다. 아주머니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프와 스테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난 아주머니에게 인사한 다음, 앞에 놓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일단 수 프를 떠먹고, 스테이크를 잘라먹었다. 이곳의 음식이 맛있긴 했지만, 자극 적인 맛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별로였다. 우리는 식사를 끝마치고 닐스 씨는 마차를 가지러 가고, 난 계산을 위해 카운터로 갔다. 아주머니는 내가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70실버씩 1골드 40실버 입니다." 난 잠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내가 돈이 없어 그 러는 줄 알고, 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가 그런 표정을 지 은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곳 물가가 의외로 쌌기 때문이다. 아 니,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의외로 많아서이다. 난 '돈도 없는 주제에 밥을 먹어?' 라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아주머니께 100골드짜리를 내밀 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내민 100골드짜리를 보고 입이 쩍 벌어지더니, 곧 열심히 거스름돈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여기 98골드 60실버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난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받고 그 음식점을 나왔다. 음식점 앞에는 닐스 씨가 마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난 금화 몇 개를 뺀 다음, 가죽 주머니 를 닐스씨에게 건네주었다. 닐스씨는 내가 건네준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말했다. "이걸…… 왜?" 난 마차 지붕으로 올라갔다. "너무 무거워서요. 아저씨가 가지고 계세요. 이제부터 계산도 아저씨가 하 시구요." 닐스씨는 잠깐 멀뚱멀뚱 돈주머니를 바라보다, 품속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미 마차 위로 올라간 상태여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닐스씨 의 뒤통수만 볼 수 있었다. 닐스씨는 여관으로 마차를 몰았고, 우리는 여관 에 짐을 풀어놓았다. 난 아직 피로가 다 안 풀려서 침대에 뻗었고, 닐스씨 는 물품을 구입하러 간다면서 나갔다. 난 깨어나서 저녁을 먹고, 다시 잤 다. 다음날 우리는 동이 트기 전에 출발해 성을 벗어났다. 마차 여행은 매우 지루한 일 이였기에 닐스씨와 나는 여러 가지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 세계 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걸 물어보면 아무래도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게 들킬 것 같아서 포기했다. 닐스씨는 주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나, 영주의 악행에 대해서 얘기했고(난 영주의 악행에 대한 부분이 나올 때마다, 그 놈을 좀더 팼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했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반죽음을 만들어 놓고야 말리라.) 나는 주로 내가 읽은 소설책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었다. 참고로 그 때마다 닐스씨는 나를 매우 존경스러운 눈빛 으로 바라보았다.(연애 소설 얘기가 그렇게 재밌었나?) 닐스씨와의 계속된 대화에서 알아낸 정보로는 이 세계에서는 남자는 17살, 여자는 15살부터 성인으로 친다는 것이다. 혼기도 남자는 17∼ 25, 여자는 15∼ 20 이라고 한다. 고로 나도 이 세계에서는 성인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달력은 한달을 30일로 계산하고 12달이 있어 1년이 360일이라고 한다. 어쨌든 우 리는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려(우리 말고 말순이랑 말돌이가) 이튿날 정오에 세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마차 위에서 오늘 묵고 갈 여관을 물색했다. 그러던 나에게 한 여관 이 눈에 들어왔다. 여관 이름은 '방랑자'. 특별하게 크다거나 하진 않았지 만,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방랑자라? 지금 내 처지와 똑같군. 어디로 갈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방랑자. "닐스씨!" "예." 내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부르자, 닐스씨는 위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저기, 저 여관으로 가지요. 방랑자라고 써진 여관이요." 닐스씨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한번 보더니, 다시 위를 보았다. "저 여관 말씀이십니까?" "예. 오늘은 저기서 묵지요." "알겠습니다." 닐스씨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앞을 보며, 여관으로 마차를 몰았다. 마차가 여관 앞에서 멈춰 서자, 난 날렵한 동작으로 멋있게 마차에서 뛰 어 내렸다. 쿵-! 젠장, 착지를 잘못했다. 난 아픈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귀족의 것으로 보이는 마차가 여 관 앞에 멈춰 서자, 한 남자아이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허리 숙인 각도나, 표정을 봐서는 교육이 잘된 애 같군. 난 나보다 4살정 도 어려보이는 소년에게 멋있게 말했다. "방은 있냐?" 근데 엉덩이를 계속 문지르고 있어서 별로 멋있어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 다. "예. 물론입니다. 마차는 저에게 맞기시고, 안으로 드세요." "아니다. 마차는 내가 직접 가져다 놓지. 넌 마구간으로 안내만 해라. 히 로님께서는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전 이 애들 놓아두고 오겠습니다." 어느새 마차에서 내려 내 옆에 선 닐스씨가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와 닐스씨는 마차를 몰고 여관 뒤쪽으로 갔다. 난 여전히 아픈 엉덩이 를 문지르며 여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점심 때여서 그런지, 테이블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밥과 술을 먹거나, 잡담을 하고 있 었다.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카운터에서 한 소녀가 다 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소녀는 내게 깍듯이 인사하고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식사하러 오셨나요?" "예. 묵을 거지만, 일단은 식사부터 하죠." "알겠습니다.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소녀는 말을 마치고 구석에 있는 한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난 따라가 면서 그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나이는 대략 15세 정도로 보였는데, 검붉은색 생머리와 귀여운 얼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머리색깔이나 생김 새로 봐서는, 아까 여관 앞에서 우리를 맞이했던 소년의 누나로 보였다.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내가 테이블에 앉자 소녀는 공손한 태도로 물어보았다. "여긴 뭐가 맛있죠?" 내 물음에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오늘은 특별히 오리구이가 맛있습니다." 오리구이가 맛있다는군. "오리구이를 매인디쉬로 나머진 알아서 주세요." 나머지는 알아서 달라는 말에 소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종이를 꺼 내 열심히 적었다. "그럼 일단, 야채 수프에 오리구이. 그리고 후식으로는 레몬파이를 드리겠 습니다. 그리고 술은 드시겠습니까?" "……." 내가 술은 됐다고 말하려는 순간, 저기 닐스씨가 여관 문을 열고 들어오 는 모습이 보였다. 난 닐스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에요. 닐스씨." 닐스씨는 내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이 쪽으로 걸어 왔다. "식사로는 오리구이 시켰어요. 괜찮죠?" "예. 괜찮습니다. 히로님." 갑자기 나타난 동행이 아들뻘 되는 소년에게 존댓말을 쓰는게 이상했는 지, 소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닐스씨 술 마실 건가요?" "예. 히로님께서만 허락하신다면……." "아니에요. 제 허락 받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냥 원하시는 데로 드세 요. 아가씨! 술은 맥주로 주세요. 아, 그리고 아까 제가 주문한거 전분 2인 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소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에 카운터로 달려갔다. 식사가 나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기에 난 닐스씨와 여러 가지 잡담 을 떨었다. 얘기를 하며 카운터 쪽을 바라보니, 여관 앞에서 만났던 아이와 주문을 받았던 소녀의 모습이 같이 보였다. 내 예상대로 남매가 맞나보다. 아이는 소녀에게 뭐라고 얘기했고, 그 말을 들은 소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 며 이쪽을 바로 보았다. 소녀의 눈이 내 눈과 마주치자, 소녀는 무안한 듯 후딱 고개를 내리며, 뭔가를 열심히 쓰는 척했다. 아마 아이는 화려한 마차 를 보고, 내가 귀족이라고 소녀에게 얘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녀는 내가 귀족이란걸 알자,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 치니까 시선을 피한거고. 난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동안 더 닐스씨와 잡담을 떨다보니, 음식을 날라오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소녀는 테이블로 오자, 음식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놓았 다. 수프와 잘 토막난 오리구이, 맥주.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후식은 조금 후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맛 있게 드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난 소녀의 말을 웃으며 받았다. 소녀는 내가 그런 말을 한게 이상한지, 잠 시 얼굴을 붉히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고 카운터로 후다닥 달려갔다. 내가 무섭나? 어쨌든 나와 닐스씨는 앞에 놓인 음식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과연 종 업원이 권해준 음식이어서 그런지, 음식은 맛있었고, 조금의 불만도 없었 다. 그런데 수프를 다 먹고, 오리구이를 뜯어먹을 때쯤 소화를 방해하는 이 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놔주세요." "하하, 아가씨 왜 이래? 잠깐 여기 좀 앉아보래는데." "이러지 마세요." "어허. 이 아가씨 참. 우리가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잠깐 시간좀 내 달라니까." 난 먹던 오리다리를 계속 뜯으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았다. 약 10m 쯤 떨어진 테이블에서는 칼을 차고 갑옷을 입은 두 남자가 아까 주문을 받 은 소녀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킬킬킬. 아가씨 몸 좋은데. 오늘밤 나와 함께 즐길 생각 없어?" "흑흑……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말라니! 난 이러고 싶은데. 아가씨도 지금 즐기고 있는거 아냐? 안 그래?" "안 그렇기는 당연 그렇지. 원래 계집들은 싫다고 하면서 다 쫓아오기 마 련이라고. 푸하하." "흑흑……." 두 남자는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아예 대놓고 소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소녀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다른 테 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발끈 했지만, 누구 하나 나설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안쪽에서 주방장으로 보이는 아저씨와 아까 그 소년이 뛰처 나왔다. "손님. 제 딸년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 모양인데 제발 그냥 놔주십시오. 제 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누나를 놔줘요." 주방장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했고, 아이는 소녀를 잡고 있는 남자에게 매달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저 주방장이 이 여 관의 주인이고, 자식들과 같이 여관을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오호, 실수라? 그래 이 계집이 실수를 좀 했지. 당신 사과같은 건 필요 없어. 대신 이 아가씨가 사과를 해야겠다. 몸으로 말이야. 푸하하하." 그 놈은 말을 마치고 재수없게 웃었다. "아이고, 손님. 제 딸년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제발 그냥 놔주십시오." 주방장 아저씨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그냥 놔달라고? 싫은데 어쩌지? 다치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꺼져있 어." 옆에 있던 놈의 말에도 불구하고 주방장 아저씨와 아이는 계속 빌었다. 제발 딸을 놓아달라고.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랬잖아." 퍽-! 옆에 놈은 주방장 아저씨와 아이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니들 지금 뭐하는거냐?" "소녀를 내려놔." "니들이 그러고도 경비대냐? 깡패지." 상황이 갈 때까지 갔다고 생각했는지, 주위 사람들의 야유가 퍼부어졌다. 그들은 주위사람들의 반응에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이더니, 그 중 한놈이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어떤 놈이야! 불만있는 놈들은 다 나와. 목이 잘리고도 계속 말할 수 있 는지 보자." 미친 새끼가 밥먹는데 소화안되게 졸라 까대는군. 안그래도 요새 기분이 안좋은데, 스트레스나 좀 풀어볼까? 놈이 칼을 빼들자, 두려웠는지 여관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그 들을 노려보면서도 나설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에 끼 여들어서 다치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좀 조용해졌군." 그 놈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칼을 다시 집어넣으려 하였다. 난 다 뜯어 뼈 밖에 남지 않은 오리다리를 내려놓은 뒤, 놈들에게 걸어갔다. 칼을 집어넣 으려던 녀석은 내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다시 칼을 빼들었다. "넌 뭐야 이 자식아." 난 그 놈의 모습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까 불만있는 놈들은 나오라고 하지 않았냐? 그래서 나왔다." 내 말에 그놈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나오란 다고 진짜 나오다니, 이거 완전 미친놈이구만. 니가 감히 우리 둘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냐?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이 자식아. 너 같은 꼬맹이 목 자르는 건 일도 아니야." 난 얼굴에 그린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목이 잘리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 "이 자식이." 그 놈은 검을 양손으로 고쳐 잡았다. 여차하면 공격하겠다는 자세다. 난 얼굴에 놈을 주시하며, 천천히 청룡도를 빼들었다. 청룡도를 완전히 빼들 자, 청룡도의 시퍼런 날이 드러났다. "그…… 그 검은?" 녀석은 청룡도의 파란색 날에 놀랐는지, 약간 주춤하는 모습이었다. "니가 알꺼없어. 그리고 이건 검이 아니라 도야. 너 바보냐? 그런 것도 모 르게." "이 자식이!" 나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녀석은 검을 앞으로 세우고 달려들었다. 지금 와 서 생각해 보는 거지만, 난 진짜 사람 열받게 하는데는 뭔가 있는 것 같았 다. 어쨌든 놈의 검이 가까이 다가오자, 청룡도를 비스듬하게 내리쳤다. 쨍강-! 순간 그 놈은 달려오는 자세를 멈춘 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 았다. 칼이 부딪히면서 마찰음이 나오리라 생각했던 녀석의 기대와는 달리, 녀석의 검은 완전히 절단되어있었다. 전혀 힘을 주지 않고, 아래로 내리 그 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두껍게 생긴 검이 두동강 난 것이다. 난 청룡도를 올 려 놈의 목에다 갔다댔다. "이…… 이봐! 장난이었다구. 장난." 녀석은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무마해보려했다. "장난이었다고?" "그, 그래. 장난었어. 진짜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고. 단지 칼을 빼들어 겁 만 좀 주려고 했던 것 뿐이야." "난 장난이 아니었는데." 녀석은 나의 살벌한 표정을 보더니 온몸을 덜덜 떨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더 떨렸다. 오른손에 약간의 힘을 준 다음, 왼쪽으로 그어버리면 녀석 의 목은 잘리게된다. 별로 힘을 주지 않아도, 단지 옆으로 긋는 행위만 하 여도 잘리는 것이다. 난 최대한 오른팔의 떨림을 자제하면서, 녀석의 목이 잘리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난 손에 스트랭스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청 룡도는 계속 녀석의 목을 겨눈 채 몸을 앞으로 움직여 녀석과의 거리를 줄 였다. "이…… 이봐. 자…… 잠깐." 퍽-! "우욱." 녀석의 안타까운 외침과는 상관없이, 난 왼주먹으로 그 녀석의 안면을 후 려쳤다. 녀석은 아픈지, 뒤로 물러나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흠, 스트랭스 걸은 주먹으로 맞으면 아프구나. 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기쁜 마음에 청룡도를 바닥에 꽂아 놓고 녀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퍽퍽-! "크억." 면상을 두 대 더 갈겼다. 녀석은 진짜 아픈지, 이번엔 얼굴을 가릴 생각도 못하고 축늘어졌다. 기절했다는 말이다. 얼굴을 보니, 눈은 퉁퉁부었고, 입 술은 찢어졌고, 코뼈는 주저앉았다. 난 기절한 놈을 바닥에 던져 놓은 뒤, 청룡도를 뽑아 들고, 소녀를 잡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 놈은 한 놈 이 완전히 뻗는 모습을 보고 꽤나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한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그 놈은 몸을 주춤거렸다. "저…… 저기." "니가 뭔데 그 아가씰 건드려?" "아, 나…… 난." "그 아가씬 여기 들어올 때부터 내가 먼저 찍어 놨어. 식사하고 나서 말 이나 걸어 볼까 했는데, 니가 뭔데 나보다 선수를 처. 어?" "그…… 그게." "좋아. 뭐 다수의 의견이라는게 있으니, 한 번 들어보지." 난 주위 테이블들을 둘러보았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들을 쫙 한번 둘러 본 후, 목소리 를 크게 하고 말했다. "여러분! 저는 이 아가씨를 여기 들어올 때부터 찍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는 도중, 여기 있는 이 놈이 먼저 선수를 쳤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 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 아가씨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 놈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이 놈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면, 저는 미련 없이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난 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이벙벙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잠시 후 상황 파악이 됐는지, 외치기 시작했다. "저 놈은 뭐냐? 니가 훨씬 낫다." 내가 낫다는군. 기뻐라. "세니가 마음에 들었다니! 둘이 사궈라." 음, 저 소녀 이름이 세니인가 보군. "내일이라도 결혼식 올려라." 그건 너무 빠르지 않을까? "저 놈을 쫓아내라. 저 딴놈이 무슨 경비대냐?" 쫓아내라고 하네. "니가 뭔데 세니를 건드려 이 자식아. 세니는 이 여관에 자랑이라구. 어서 꺼져." 반응이 무지하게 좋군. 난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당황하고 있는 녀석에게 말했다. "잘 들었지. 다수의 의견이, 너보단 내가 이 아가씨한테 잘 어울린 덴다. 그러니까 넌 이쯤에서 꺼져줘라." 난 말을 마치고, 세니라는 소녀를 그 녀석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녀석 의 멱살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들었다. "와아∼." 주위 사람들은 내 괴력에 놀라움을 표현했다. 17세의 소년이 30살 처먹은 떡대를, 거기다 갑옷까지 걸친 놈을 한손으로 들어 올렸으니,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할지도……. 난 왼손으로 녀석을 들어올린 상태에서 오른손에 있는 청룡도를 다시 도 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녀석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 곳에서 꺼져라. 한 번이라도 더 내눈에 띄면, 그 땐 정말 죽여버린다." 내가 멱살을 잡고 있어, 말로 하진 못했지만, 녀석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 이는 걸로 내 말을 잘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잘 알아들었다니, 기쁘군. 하지만 말이야…… 니 친구가 저렇게 됐는데, 너 혼자 멀쩡하면 우정에 금가지 않겠어?" "……." 도리도리? 금 않간단 얘긴가? 좋은 우정인가보군. 부럽다. "아니야. 아니야. 같이 일을 벌였으니, 책임도 같이 져야지." 퍽퍽-! "으악." 난 손에 최대한 힘을 빼고, 녀석의 눈을 한방씩 때려 주었다. 아마 내일 아침 일어나면, 자신의 얼굴이 귀여운 팬더 버전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확 인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쥐고 있는 왼손을 풀어 녀석을 바닥에 내려주었 다. 쾅-! 내려가는 소리한번 경쾌하군. 난 주저앉아서 두손으로 눈을 비비고 있는 녀석에게 친절하게 말을 건넸 다. "저 새끼 데리고 꺼지는데 30초. 1초 늦을 시에 한 대씩 추가." 녀석은 그 말을 듣자 온 몸에서 힘이 솟구치는지, 벌떡 일어나 기절한 놈 을 엎고 재빨리 달렸다. 그런데 눈이 잘 안 보이는지, 여기저기 들이 받고, 간신히 28초 되는 때에 여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3초만 늦었어도 아예 반 죽여 놓는 건데……. 난 주저앉아 울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괜찮아?" "……." 소녀는 울음 때문에 말할 수가 없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장사하는 것도 좋지만, 저런 놈들은 조심하라구." 난 손을 뻗어 소녀의 몸에 묻어 있는 먼지들을 털어 주었다. "휙, 휙. 멋있는데." "대단한데 젊은이. 두 놈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말이야." "여기로와. 내가 술 한잔사지." 난 주위 사람들의 환호성에 고개 숙여 적당히 답례를 한 후, 아까 못한 식사를 마저 하기 위해 자리로 돌아왔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히로님." "뭘요. 식사나 마저 하죠." "예." 나는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닐스씨를 애써 무시하며 식사에 열중했다. 앞에 있는 오리토막을 완전히 아작 내고 후식을 기다리 고 있는데, 저 쪽에서 소녀와, 소년, 주방장이 오는 것이 보였다. "후식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까 일은 정말 고맙습니다." 소녀는 조금 진정됐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까 일 때문에 얼굴은 아직 붉은색을 띄었다. "저희 누나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손님, 아까 제 딸년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귀족 자제 분 이 신걸 모르고 실례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들은 정중하게 나에게 감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나는 주방장이 마지막 에 한 말이 웃겨서 웃음을 참아야 했다. "큭큭…… 큭 …… 푸하하하." "푸하하하." 내가 결국 참지못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닐스씨도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 다. 난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그들을 보면서 계속 웃었다. "하하, 그러니까 제가 귀족이라는 얘긴가요?" "예. 그게……." "저, 마차 때문에요?" "예. 마차에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있던데……." "그 마차가 귀족 것인 건 맞아요. 하지만 저 마차의 주인은 제가 아니지 요." "예? 그럼……." "잠깐 빌린거에요. 몇 대 패주면서 빌려달라고 하니까, 친절하게 빌려주던 데요." "하하하." "하하……." 닐스씨는 그 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겨우 멈춘 웃음을 다시 터트렸다. 나 도 웃긴 했지만, 라나의 얼굴이 생각나서, 마지막에는 씁쓸한 웃음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아까 일은 괜찮습니다. 따님이 미인이신 만큼 주의하셔야 겠는데 요." 난 말을 마치고 일어나, 소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새빨개진 얼굴로 아무 말 못하는 소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이름이 뭐니?" "……세니." "세니! 예쁜 이름이군." "나이는?" "여…… 열 다섯 살이요." 음, 역시 생각데로 15세였구만. "난 17살이다. 이름은 히로.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라." "……?" 난 소녀의 어깨에서 손을 뗀 뒤 허리를 숙여 옆의 소년과 눈을 맞추었다. "이름은?" "로니에요." "그래 로니. 나이는 어떻게 되지?" "12살이에요." 젠장, 한 살 빚나갔군. "그래. 남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자를 지켜줘야 하는 법이야. 아까 멋 있었다. 빨리 자라서 누나를 지켜줘야지." "예. 전 형처럼 세져서, 반드시 누나를 지켜줄꺼에요. 아, 저기…… 형이라 고 불러도 되요?" 로니는 쑥스러운지 몸을 배배꼬았다. 난 로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 다. "좋을 데로……." 로니는 눈을 크게뜨며 웃음을 지었다. 난 다시 의자에 앉았다. "후식이나 먹죠." "어, 그러지." 나와 닐스씨는 후식으로 놓인 레몬파이를 집어들고 먹기 시작했다. 잘 구 워진 파이에 레몬즙과 꿀이 잘 스며들어있는 파이였다. 아무튼 맛있었다. "저기 손님. 어쨌든 딸을 구해주신 감사의 표시로 뭔가를 해드리고 싶습 니다." "아니에요. 그런걸 바라고 한일도 아닌데요." "아닙니다. 은혜를 입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죠. 부탁하실게 있으시면 말씀만 해주십시오." 난 들고있는 레몬파이를 전부 입에 넣은 다음, 주방장 아저씨를 바라보았 다. "음, 정 그러시다면……." "……." 주방장 아저씨는 내가 무슨 대단한 부탁이라도 할까봐, 대단히 긴장하고 있었다. 저거 땀흘리는 것 좀 봐. 난 가볍게 웃은 다음 말을 이었다. "저녁이나 맛있는 걸로 대접해주세요." 주방장 아저씨는 내가 의외로 간단한 부탁을 하자,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 다. "예. 알겠습니다. 저녁은 제가 확실히 대접하겠습니다." "식사는 다했으니, 방을 잡고 싶은데요. 닐스씨! 1인실 방 2개로 쓰지요." "예." 난 다시 주방장 아저씨를 보았다. "방값까지 계산하면 얼마죠?" "아, 저 괜찮습니다. 계산 안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먹었으면 당연 값을 내야죠? 얼맙니까?" "저기……." "오리구이 2인분은 1골드 20실버 구요. 방 값은 1골드 50실버씩 3골드에 요. 맥주값은 20실버지만, 특별히 빼드릴께요." 오! 너 장사하는데 소질이있구나. 주방장 아저씨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로니가 잽싸게 튀어나오더니 가 격을 불렀다. 난 그런 모습이 귀여워 보여 그냥 웃었다. "로니! 아, 저 죄송합니다." 세니는 재빨리 로니를 잡아끌었다. 난 닐스씨를 보며 말했다. "들었죠, 아저씨. 전부 4골드 20실버래요." "알겠습니다. 히로님." 닐스씨는 주머니를 뒤져, 안 받으려는 주방장 아저씨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자, 그럼 방으로 안내해 주실 까요." "예. 세니야! 이 분들 방으로 모셔다 드려라." "절 따라오세요." 난 숙박부에 내 이름을 적은 뒤, 세니를 따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자, 약 10여개의 방이 보였는데, 세니는 그 중 두 방 앞에 멈춰 섰다. "여기에요." "고마워요." 난 세니에게 인사를 하고 왼쪽 방으로 들어갔다. 닐스씨? 당연 오른쪽 방 으로 들어갔지. "저기,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카운터에 말씀해주세요." 세니는 나를 앞질러 들어와, 재빨리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시트는 잘 정 돈되어 있었기에, 정확히 말하면, 그냥 한 번 만저보는 행동이었다. 난 세 니에게 한 번 웃어 준 다음,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니는 침대정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이제 그만 내려가 봐. 아저씨 기다리겠다." "……네." 세니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대답한 뒤,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다. "……." 내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세니의 입술이 나를 덮쳤다. 내 입술에는 부드 럽고 따뜻한 세니의 입술이 느껴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라나의 작은 입술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짧지만 긴시간이 지 나가고, 세니는 입술을 떼었다. 내 눈에 비친 세니의 모습은 매우 예뻐 보 였다. 세니는 붉게 물든 얼굴로 뭐라고 말하는 것 같더니, 부끄러운지 몸을 돌려 방을 뚸처나갔다. 어이없는 얼굴로 앉아있는 나에게 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요…… 오빠!" 미치겠군. 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손을 입술로 가져가, 천천히 입술을 만 졌다. 생애 두 번째의 키스. 또 강제로 당했음. 젠장, 원래 세계에 있을 때는 여 자 사귀는 것조차, 꿈도 못 꿨는데, 여기 와서 완전히 운발이 트였군. 불현 듯 내 머릿속에는 라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헤어진지 일주일도 안돼서 바 람을 피다니…… 잘못하면 맞아죽을지도……. 난 라나가 뾰루퉁한 얼굴로 화를 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방을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때 지난 점심을 먹 고 있는 몇몇 사람들과, 세니, 로니의 모습이 보였다. 세니는 나를 발견하 고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가시는 건가요?" "응. 방안에만 있기 심심해서." 아까의 일 때문인지, 세니와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검붉은색 머리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잘 어울리는군. "어디 가는데요? 형." 로니는 나와 세니의 사이에 끼여들며 물었다. 갑자기 끼여든 로니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는 약간 가라앉았다. 짜식이 그렇다고 해도 이 좋은 분위기 를 방해하다니, 장사한다는 놈이 눈치가 없군. "글쎄. 그냥 바깥 구경이나 좀 하려고." 난 말을 마치고 여관을 나가려 하였다. 그 때 뒤에서 세니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저…… 저기." "응?" 뭐야? 설마 지금 여기서 사랑 고백을 하려고? 이러면 안돼는데…… 나한 테는 라나가 있는데. 그리고 지금은 주위에 사람들도 있고하니, 기왕 하려 면 사람들 없는 곳으로 가는게……. "빨리 돌아오세요. 아버지께서 근사한 저녁, 대접해드린다고 열심히 준비 하는 중이에요." 그럼 그렇지. 대체 나는 왜 이렇게 말도 안돼는 생각을 자주하는 걸까?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께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번엔 진짜로 여관을 나가려 하였다. "……오빠." 작게 들리는 세니의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지, 세니는 다른 곳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로니는 무슨 일인지 모 르고, 어리둥절한 표정만을 지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소리없이 웃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 칼을 차고 다니는 경비대들, 바쁘게 돌아다니는 남자들. 나는 특별히 갈 곳 이 없었기에,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쪽으로 걸었다. 아무생각 없이 걷다보 니, 어느새 골목길로 들어와 있었다. 꾸불꾸불 굽이진 골목길을 계속 가다 보니, 저기 앞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아이가 나를 발견하고 외쳤다. "앗! 적이다. 모두 전투태세를 취하라." 약 15명 정도 되보이는 아이들은 나무칼을 뽑아 들고, 대형을 만들었다. 난 영문도 모른 채 나의 앞을 가로막은 아이들을 보았다. 대장으로 보이는 아이는 멋지게 폼을 잡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는 세무 기사단이고, 난 이 기사단의 대장이다. 너는 누군데 감히 우 리 구역에 들어 오는거냐? 소속 사단과 이름을 밝혀라." 니가 전쟁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짜샤. 나는 애들을 좀 놀려줄 생각으로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청룡도를 빼어들 자세를 취했다. "나는 레드 드래곤 기사단에 속해있는, 히로라고 한다. 너희들이 말로만 듣던 세무 기사단이군. 오늘 너희들의 목숨을 거두어 가겠다." 나는 말을 마치고, 청룡도를 완전히 빼들었다. 청룡도를 완전히 빼들자,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대장이 외쳤다. "강적이다. 퇴각하라!" 애들은 대장의 명령을 받기 전에 이미 튀고 있었다. 난 잽싸게 달려가, 도 망가는 대장을 붙잡았다. 대장을 못 움직이게 꽉잡아두고 크게 외쳤다. "너희 대장은 내가 잡았다. 숨어있는 거 다안다. 빨리 나오지 않으면 대장 의 목숨은 없다." "저기요, 형. 죄송해요, 잠깐 장난친거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흑흑." 대장은 내가 무서운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나는 더욱더 살벌한 표정 을 지었다. "시끄럽다. 기사로서 목숨을 구걸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흐흑, 저 기사아니에요, 형. 살려주세요." "아니, 이젠 기사로서의 긍지마저 버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흑흑, 형. 저 진짜로 기사아니에요. 저처럼 어린기사 봤어요? 전 진짜칼 을 만져 본 적도 없다구요. 장난이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흑흑." 난 울고 있는 대장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너희 대장은 이미 나에게 잡혔다. 빨리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대장의 목숨을 거두어 가겠다."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골목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았다. 나 는 좀 더 강도 높은 협박을 쓰기로 했다. "셋 셀동안 나오지 않으면, 대장의 목을 자르겠다. 나와서 항복하면, 모두 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하나…… 둘." "으앙, 살려주세요. 형. 으아앙." 대장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내 팔에 울며불며 매달렸다. 난 대장을 잡고 있는 손을 꽉 조이며, 마지막 숫자를 외치려 하였다. 그 때 골목 여기 저기에서 아이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셋." 내가 크게 외치자,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튀어 나와, 순식간에 집합했다. 숫자를 세어보니 대충 맞는 것 같았다. "잘못했어요. 형. 저흰 기사단이 아니에요. 제발 대장을 놔주세요." "으앙. 우리 형 놔줘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와앙. 용서해주세요." 15명이나 되는 아이들은 나에게 용서를 빌며 매달렸다. 난 그 모습을 보 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음, 대장을 위해 이렇게 다시 집합하다니…… 테이스 기사단의 용맹함은 상상을 초월하는군." 난 주머니에서 5골드짜리를 꺼내 대장에게 주었다. "이건 내가 너희 기사단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주는 거다. 군자금으로 쓰 도록 하여라." 말을 마치고 대장을 놓아주었다. 아이들은 내가 갑자기 웃으며, 5골드라는 거금을 건내주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청룡도를 집어 넣고, 망토를 휘날리며 멋지게 말했다. "내 이름은 히로다. 다음에 붙게 되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실력을 키우도록." 나도 참 유치하게 노는군. 내가 어쩌다 이런 짓까지 하게 됐냐? 난 걸음을 옮겨 아이들 사이를 지나쳤다. 아이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 길을 만들어 주었다. 어느 정도 걸어가다 뒤를 돌 아보니, 아이들은 나보다 반짝이는 금화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대장 주위에 몰려 돌아가면서 금화를 깨물어 보는 상황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 다. 난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그 골목길을 벗어났다. 골목길을 나오자, 내 앞에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이곳은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 점심 먹고 할 일 없어서 구경 나온 주부들, 1실버라도 깎으려고 실갱이 벌이는 사람들, 여러 가게를 돌아다니며 물건 을 나르는 사람들로 매우 북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시장 바닥에 온 것이다. 약 5m쯤 떨어진 곳에 과일가게가 보였다. 난 부딪히는 사람들을 피하며 그 곳으로 갔다. 내가 가게 앞으로 다가서자 주인 아주머니는 바로 일어났 다. "어서 오세요." "사과 한 개에 얼만가요?" "예, 40실버입니다. 제철 과일이 아니여서 조금 비쌉니다. 하지만 다른 가 게에 비하면 우리 가게는 싼편입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상인 정신을 발휘하며 열심히 말했다. 난 주머니에서 1 골드를 꺼내 아주머니에게 내밀었다. "2개 먹을께요." 난 앞에 있는 사과를 집어 껍질채 베어먹었다. 사과의 단물이 입안에 들 어오자, 약간 시큼한 느낌이었다. 아주머니는 앞의 주머니를 뒤져서 20실버 를 꺼내었다.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그보다 묻고 싶은게 있는데……." 난 다 베어먹은 사과를 옆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하나를 집었다. "예. 뭐든지 물어보세요." 아주머니는 거스름돈을 안 받는 다는 말에 기뻤는지, 매우 친절하게 말했 다. "이 주위에 보석상점이 있나요?" "보석상점이요? 예, 있습니다. 이 길로 쭉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보석상 점이 하나 나와요." 난 아주머니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그리고는 인사를 한 뒤 그곳으로 향했다. 사실 이 곳에 오기 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금화의 가 치가 궁금했었다. 그리고 계속 여행을 해야 하니, 돈이 많이 필요했다. 600 년 전 금환데, 못해도 몇배는 처 주겠지. 보석의 가치도 궁금했지만, 성하 나 살 수 있을 정도의 가치라고 했으니, 별로 남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았 다. 혹시라도 도둑 길드에서 알게된다면, 동원 가능한 인원을 총동원해 뺏 으려고 할 테니까……. 과일 가게 아주머니가 말한데로 쭉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니 '보석 상점'이 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가 보였다. 업종과 이름이 상당히 잘 매치가 되는 가게였다. 난 보석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쪽에는 손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장소로, 탁자가 두 개 놓여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보석을 진열해 놓은 유리 진열대가 보였다. 그 안쪽에는 40정도 되보이는 아저씨가, 안경을 끼고 보 석을 감정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손님이 들어오자 인사를 하려다, 의외로 나이 어린 소년이 들어오자, 말끝을 약간 흐렸다. 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유리 진열대를 사이에 놓고 말했다. "금화를 바꾸러 왔습니다." 그는 잠깐 나를 훝어 보더니, 다시 보석을 감정하는데 열중하였다. "돈 바꾸러왔다고. 그래 얼마짜린가?"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지, 성의 없게 대답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도 별 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작은 돈으로 바꾸러 온게 아닙니다. 금화를 팔려고 왔습니다." 내말에 그는 감정하던 보석을 내려놓고, 안경을 벗었다. "그래? 옛날 금화 말인가?" "예." "언젯적 금화지?" 난 말로 하는 대신 주머니에서 100골드를 꺼내 그에게 건내주었다. 그는 잠시 금화를 살펴보는 것 같더니, 곧 경악에 찬 표정으로 물들었다. 하긴 600년 전의 금환데. "자, 자네…… 이 금화, 어디서 난건가?" "글쎄요…… 그건 얘기하자면 길구요. 얼마나 처 주실수 있나요?" 난 차마 드래곤 레어에서 집어 온 거라고 말하기가 그래, 대충 얼머무렸 다. 다행히 그는 금화에 집중하고 있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금화를 바라보았다. 다시 내얼굴을 보다, 다시 금화를 봤다. 그 짓을 대여섯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흠…… 이 정도 금화면…… 내 특별히 1000골드를 쳐줌세." 난 그 금화의 가치가 10배라는데 매우 놀랐다. 하지만 저 아저씨의 아까 그 경악에 물든 표정으로 판단했을 때, 분명 10배 이상일 꺼라는 확신이 들었다. 난 놀란 표정을 감추며 담담해게 말했다. "1000골드요?" "그래. 1000골드를 쳐줌세." 그는 내가 이 금화의 가격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잠깐 긴장한 모습 이었다. 난 화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에서 금화를 빼앗았다. "저는 이 금화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별로 팔고 싶은 생각이 없습 니다. 실례했습니다. 안녕히계십시오." 난 그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예상한 대로 놀라서 뛰어 나오며, 내 앞을 가로 막았다. "하하, 이 친구. 농담한번 한거가지고 뭘 그러나? 장난이었네, 장난. 자자, 일단 앉게." 그는 웃음을 지으며, 억지로 내 손을 붙잡아 탁자에 앉혔다. 난 못이기는 척하며, 의자에 앉았다. "잠깐만 기다리게. 내, 차를 내옴세." "괜찮습니다." 난 아직도 화가 덜 풀린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닐세. 간만에 찾아온 귀한 손님인데, 차 한잔 대접하지 않아서야 말이 안되지.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아까 감정하던 보석을 후다닥 치우고, 가게 안 여기저기를 뒤졌다. 잠시 후 그는 레몬티로 보이는 차 두잔을 가져와 한잔을 나에게 건넸다. "자, 그럼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해볼까?" "……." 그는 조급한 듯 얘기를 꺼냈지만, 난 묵묵히 차를 마셨다. 그는 내가 아직 까지 화가나서 그런 줄 알고 열심히 사과했다. "아깐 미안했네. 그냥 농담으로 한번 해본 말이었네." 난 차를 내려놓으며, 약간 누그러진 듯한 말투로 말했다. "다음부터 그런 장난은 치지 마십시오. 진정으로 가치있는 보석은, 그 가 치를 알아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알겠네, 이 사람아. 내가 어찌 이 금화의 가치를 모르겠나. 아깐 정말 농 담이었네." 나는 계속 되는 대화 속에서 이 금화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 금화, 얼마 쳐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말을 빙빙돌려 말하기가 귀찮았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는 나의 질문에 얼마를 부를지 매우 열심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너무 비싼 가 격을 부르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싼 가격을 부르자니 내가 다시 뛰처 나갈 것 같아서 고민하는 듯 했다. 정확히 내가 레몬티를 2/3정도 마셨을 때, 그 가 입을 열었다. "2200골드로 어떤가?" 나는 그가 무지하게 고민한 끝에 결정지은 가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 증거로, 별로 덥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 글송글 맺혀있었다. 나는 다시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 "2200골드라……?" "왜, 왜 그러나? 가격이 마음에 안드나?" 그는 내가 가격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러는 줄 알고, 다시 땀을 흘렸다. 하 지만 나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짜식이, 2200골드나 되는 걸 1000골드에 사기 치려고 해? 만약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반도 안되는 가격에 사 들였겠구만. 원래 장사라는게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직업이란 것은 알지만, 진짜 심하군.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이 금화의 가격은 2200골드도 넘을 것 같은데……. 1000골드면 한 가족이 1년은 먹고산다. 2200골드면…… 나 하 나 정도는 5년은 놀고먹을 수 있겠군. 난 그를 한번 더 떠보기로 했다. "이 금화의 희소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요? 아마 지금 와서 이것을 구하기는 상당히 힘들껍니다." "물론이네. 나도 그래서 그 금화를 꼭 손에 넣고 싶었다네." 금화란 화폐다. 아무리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돈처럼 통용되는 화폐 인 것이다. 그런 것이 지금에 와서 20배 이상으로 가치가 뛰었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그 때 당시에 물가가 지금보다 싸서, 이 금화의 가치도 단순히 새겨진 숫자 이상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6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 금화가 거의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두 번째를 노리고 질문했는데, 다행히 잘 먹혀든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원래 다른 곳으로 가면 더 비싸게 팔 수 있지만, 주인 아저씨 께서 그렇게까지 나오시니 2200골드에 팔도록 하겠습니다." "저, 정말 그래주겠나? 고맙네.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내손을 덥썩 붙잡더니, 감사를 표명하고, 금고로 달려가 돈을 꺼냈 다. 잠시 후, 그는 금화를 다 셌는지, 가죽주머니에 금화를 담아 탁자로 돌 아왔다. "보게." 그는 가죽주머니의 입구를 벌려 내가 보기 쉽게 해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들 10개가 들어있었다. 숫자를 보니 100이 써진게 7개, 500이 써진게 3개였다. 난 말없이 주머니를 챙긴 뒤, 금화를 그에게 건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손 에 100골드짜리 금화가 들어오자,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난 그 의 표정을 보자, 잠깐 후회하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한 3000골드 불러버리 는 건데. 젠장.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차 맛있었습니다. 그럼……." 난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려고 문쪽으로 걸어가 는데 그도 일어나 날 붙잡았다. "잠깐 기다리게. 자네 혹시 이곳에 사나?" 그건 왜 묻는거지? 난 그의 물음을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답했다. "아닙니다. 여행중인데 잠시 이곳에 머무는 중입니다." "그런가? 어쨌든 내 이름은 타실이라고 하네. 우리집은 이 곳에서 왼쪽으 로 두 블록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세 번째 있는 집이네. 혹시라도 다른 좋은 물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그런 말이었군. 팔 물건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말.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잘가게." 난 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보석상점을 나왔다. 그 후 여기저기 돌아다니 다 보니 해가 저무는게 보였다. 난 여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 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을 까먹었다. 젠장, 이거 방향감각 고치지 않으 면 평생 고생하겠군. "늦으셨네요." "예, 닐스씨. 좀 헤매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젠장, 지나가는 사람 다 잡아 물어물어 겨우 찾아왔다. "식사 나왔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세니는 김이 모락모락나는 음식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 다. 주방장 아저씨가 근사한 저녁을 대접한다고 하더니 진짜 진수성찬이다. 닐스씨와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눈앞에 놓인 음식들을 해치우는데 신경 을 집중시켰다. 지금 주위에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식사와 술을 하려고 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건 이들이 술안주거리로 올려놓 은 얘기였다. 전부 내가 낮에 한일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이봐 친구. 낮에 멋있었어." "니가 그놈의 경비대놈들 표정을 봤어야 되는건데 말이야." "글쎄, 저 친구가 신기(神技)의 칼솜씨로 한번 내리그으니까 녀석의 칼이 두동강이 났다니까. 정말이야." "그게 말이돼?" "정말이라니까. 야! 랜던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러니까, 그 덩치 큰놈의 멱살을 한 손으로 들어올려서 말이야……." 나는 식사를 하는 내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일이 인사를 해야 했 다. 몇몇 사람들은 술을 권하기도 했는데, 정중히 사양하느라 매우 힘들었 다. 닐스씨는 아예 술판에 껴서 낮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 시 작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듣고 있다가, 내가 활약 하는 대목에서는 '우오'하며 탄성을 질러댔다. 내가 한일은 어느새, 수백의 경비병들을 무찌 르고 레이디(세니)를 구해낸 것으로 부풀고 있었다. 쓰파, 내가 한 일이라 곤, 두 놈 손봐준 것 밖에 없단 말이다! "그 때 갑자기, 저 친구가 칼을 빼들고 나서서, 레이디 세니양.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그대를 지켜주겠소 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경비병들이……." 내가 언제 저런 닭살 튀기는 말을 했었지? "다 덤벼라. 레이디 세니양에게 찝쩍거린 네 녀석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우와! 계속해봐. 계속." 씨발, 내가 무슨 세일러문이냐? 여기 있다간 진짜로 미치겠다. 식사를 대충 끝마치고 사람들의 시선이 닐스씨에게 집중된 틈을 타 난 여 관을 몰래 빠져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카운터에 서 있는 세니한테 걸렸다. "나가시는 건가요?" "응. 잠깐 바람 좀 쐬려고." "일찍 돌아오세요." "으응." 어째 대화 내용이 꼭 일하는 남편 배웅해 주는 것 같네. 난 말을 마치고 잽싸게 밖으로 나왔다. 밤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 고 지나가자, 정신이 맑아졌다. 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 다. 주위의 집들은 거의 불이 켜져 있어,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런게 인간 세상의 느낌일까? 집집마다 풍겨오는 빵굽는 냄새, 단 란한 가족의 웃음소리, 그리고 패는 소리, 맞는 소리, 우는 소리, 깨지는 소 리, 비명 소리……? 챙그랑-! "꺄악." "나가 죽어 이년아. 그래 남편은 밖에 나가서 뼈빠지게 일하는데 바람을 펴?" "흑흑. 아니에요, 여보. 저 진짜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우아앙. 아빠, 엄마 때리지마." "거짓말하지마. 내가 너같은 화냥년과 결혼한게 잘못이지. 이 애도 그 놈 의 아이지?" "아니에요.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에요. 흑흑." "웃기는 소리하지마. 대체 몇 놈하고 놀아난거야?" 참 별 집이 다 있다. 난 한숨을 내쉬며 빠른걸음으로 그 집을 지나쳤다. 난 여관을 나온 뒤, 계속 걸었다. 앞으로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착잡하기만 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본다고는 했지만, 그건 여행을 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 하다. 내가 어느 세계에 존재하고 있느냐는, 나와 별 상관없다. 방법을 찾 으면, 돌아가는거고, 못 찾으면 여기 그냥 눌러 사는거다. 난 언제까지 이 런 목적 없는 여행을 계속해야만 할까? 일단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걸 먼저 알고 싶은데……. 그걸 알아야 여행을 어떻게할지……, 아니, 그 전에 여행을 할지 말지를 결정 하지. 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다음 뒤 를 봤다. 대충 봐서, 상당히 많이 걸어 온 것 같다. 이번엔 앞을 봤다. "……." 여기가 어디지? 젠장, 길을 완전히 잘 못 들었군. 내 앞에 나 있는 길 양쪽에는 휘양찬란한 불빛을 내뿜는 형형색색의 집들 이 있고, 길에는 술취한 남자들이 어지럽게 걷고 있고 있다. 그 이상한 불 빛을 내뿜는 집에서는 팔과 다리, 가슴 등이 다 들어나 보이는 야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길을 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얼굴에는 분을 잔뜩바 르고 입술은 새빨갛다. 몸에는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쳤으며, 몸매는 풍만해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가슴이 흔들린다. 이곳은 하룻밤의 욕망을 분출하는 곳. 돈만 주면 옷을 벗는 여자들이 있는 곳. 가정과 일, 그 모든 것들을 생 각하지 않고 오로지 한순간의 욕망에만 충실한 곳. 이런 미친!…… 사창가에 왔군. "어머, 거기 잘생기신 분. 저희집으로 오세요. 잘 해드릴께요."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드세요? 이 쪽으로 와보세요." "아잉! 오빠. 내가 잘 해줄게. 호호." "호호. 여기로 와. 내가 오늘밤 끝내주게 해줄게. 한번만 들러봐." 난 가슴을 흔들며 유혹하는 여자들을 애써 무시하며 걸었다. 솔직히 나도 남잔데, 그냥 여기서 아무 여자나 골라잡아 즐기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 다. 하지만 지금 기분이 별로 안좋아서…… 일단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 는지부터 알아내야만……. 그런데 이 물컹하는 느낌은 뭐지? 난 옆으로 고 개를 돌리다 깜짝 놀랐다. 짙은 화장을 하고 쫙빠진 몸매에 짝 달라붙는 옷을 입은 예쁜 여자가 내 팔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애교 섞인 목 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어머, 오빠 너무 잘생겼다. 오늘 우리집으로 와라. 앙, 오빠∼." 17년 인생살면서 잘생겼단 소린 처음 듣는군. 자세히 뜯어보니까 꽤 이쁜 데, 나이는 스물 두, 셋 정도. 하지만 겨우 그 정도 유혹에 넘어갈 이 몸이 아니지…… 잠깐, 어차피 정보를 얻으려면 사창가도 나쁘진 않겠군. 돈만 주면 뭐든 아는데로 말할테니까. 저 쪽에서 나를 오빠라고 불렀으니까 반 말써도 되겠지? "좋아. 가지." 난 무표정한 얼굴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머, 오빠 정말이야? 아앙, 역시 화끈하다니까. 자 여기로."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빨간 불꽃'이라는 간판이 써진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가게 이름 한번 유치하군. 그건 그렇고 내가 왜 니 오빠냐?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는데……. "언니, 손님 모셔왔어." 그녀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로 보이는 곳에 서 있는 여자에게 손 을 흔들었다. 저 여자가 여기 주인인가 보군? 나이는 약 마흔 정도로 보였 는데, 지금은 얼굴이나 손등에 주름이 약간 씩 잡혀있지만, 젊었을 때 한 미모 했을 것 같아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흥흥거리는 소리를 내며 인사 했다. "어머, 손님. 어서 오세요." 여기 여자들은 '어머' 소리가 아주 입에 붙었구만. 난 가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게 한 쪽에서는 짙은 화장을 한 여자 대, 여섯명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잡담을 하고 있었고, 분 냄새와 술 냄새, 여 자 냄새 등이 코를 찔러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암컷 냄새라고 해야 하 나? 발정기의 암컷 냄새. "어떤 아이를 원하세요? 손님. 특별히 찾는 아이라도……." 여자를 고르라는 건가? "똑똑한 애로." "예?" 내 말에 주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당하기도 하겠지. 세상에 사 창가 와서 머리 좋은 여자 찾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겠냐? 보통 이런 업 종에 종사하는 여자들은 머리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배운 여 자는 이런 업종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여자들은 배 우질 않기 때문이다. 사창가가 몸파는 곳이지, 지식 파는 곳은 아니니까. 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가슴 큰 여자는 머리가 나쁘다'. 물론 귀족이나 왕족을 등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들은 다르겠지만, 이 곳은 돈 몇 푼 쥐 어주면 벗어 재끼는 여자들만 있는 곳이니……. "똑똑한 애로." 난 다시 한번 말했다. 주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웃음을 지었다. "손님, 사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이가 있는데…… 귀족집 아이거든요. 저희 가게에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애여서 다른 가게로 팔아 넘길까 생각 하는 중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귀족? 귀족집 딸이 뭐 하러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도박 빚 때문에 팔려왔 나? 어쨌든 귀족집 딸이면 아는게 많긴 하겠군. "얼마면 되나?" 내 물음에도 주인은 계속 뜸을 들이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저기, 손님. 경험이 많은 아이 보다는 순진한 아이가 좋으신가요?" 그건 또 왜 물어? 하기야 노련한 창녀보다는 순진한 창녀가 났겠지. 들어 오자마자 하자고 옷벗고 설치면 곤란하니까. "그렇다. "사실 그 아이가 저희 가게에 어제 처음 왔거든요…… 그래서 아직 한번 도 손님을 안 받은 처년데……." 주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몸 판 여자보다는 깨끗한 여자가 났겠지. "진짜 처년가?" "예, 물론입니다. 손님." 진짜 처녀라고 하네. "얼마를 내면 되나?" "예?" "얼마를 내면 되냐고 물었다." "아, 예. 그게…… 그 아이가 좀 비싸서요……." 주인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마치 설마 니 주제에 그런 큰 돈을 낼 수 있겠냐는 것처럼. 지가 아무리 비싸봐야 2000골드를 넘겠냐? "돈은 얼마든지 있다. 얼마인지 말해라." 내가 재촉하자 주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그 정도 아이면 200골드는 받아야겠지만…… 아직 교육을 못 받은 아이니 손님에게만은 특별히 150골드에 드리지요. 교육? 사창가에서도 교육을 하나? 설마 그 교육이란거……혹시 남자 즐겁 게 해주는 방법 가르치는 거 아냐? 교육 못 받았다니, 진짜 다행이군. "그 아이로 하겠다." 난 간단하게 대답한 뒤 주머니 속에서 200골드를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 다. 100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금화 두 개가 카운터 위에서 빛을 발하자 주 인은 물론이고, 아까부터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들도 놀란 표정을 지 었다. 그러나 주인은 곧 놀란 표정을 풀고 살랑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금화 를 챙겼다. 그러고는 잠시 계산대를 뒤지며 무언가를 찾았다. 돈 거슬러 줄 려고 그러나?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 내 말에 그녀들은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긴 50골드나 되는 돈 을 팁으로 주는데 놀라지 않을 리가 없지.하하 주인은 특유의 회복력으로 잽싸게 정신을 차린 뒤 말했다. "감사합니다. 손님. 즐거운 밤 되십시오. 호호, 애들아. 이 손님 특실로 모 셔가렴. 아이는 조금 후 방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오호, 특실씩이나. 주인의 손짓에 앉아서 잡담하던 여자 둘이 일어나 이 쪽으로 걸어왔다. 난 두 여자의 안내를 받으며 가면서 말했다. "아, 그리고, 옷은 좀 제대로 입혀서 보내도록. 화장도 지우고." "호호, 예. 알겠습니다. 손님." 젠장 그 웃음은 뭐냐? 설마 내가 여자 옷벗기는 걸 즐긴다고 생각하는 건 가? 씨발, 난 17세의 순진한 학생이라구. 내가 안내된 곳은 우리집(24평) 거실보다도 더 넓은 방이었다. 방안은 화 려한 조명으로 빛나고 있어, 환하면서도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방 한 가운데에는 더블침대, 아니 더블침대 두 개 합쳐 놓은 크기에 침대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고, 한 쪽에 놓여진 탁자 위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들 과 술병, 재떨이 등이 놓여져 있었다. "그럼 손님, 재미있게 즐기세요." 두 여자는 눈웃음을 치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져 놓고 나갔다. 즐기긴 뭘 즐겨? 난 망토와 청룡도를 풀러 의자에 걸쳐놓은 뒤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음, 푹 신푹신하군. 내가 살던 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그래서 난 매일 바닥에서 이불 깔고 잤 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쑤셨다. 그것뿐인가? 아니다. 겨울에는 밤에 잘 때마다 냉기가 올라와 허리까지 욱신거렸다. 거기까지는 다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밤마다 이불 깔고 아침마다 이불개는거. 이거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진짜 미친다. 밤에는 피곤해서 깔기 귀찮고, 아침에는 졸 려서 개기 힘들다. 한번은 겨울에 안깔고 그냥 잤다가, 다음날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독감에 구토증이라나? 내가 가장 이해할 없는 일 중 하나가, 하필 그 날 왜 눈이 왔었냐는 것이다. 그때 그날 밤 기온 영하 12도, 진짜 얼어죽을 뻔했다. 방에 침대가 없는 사람은 나의 고통을 알 것이다. 참고로 형방에는 침대와 컴퓨터, 미니컴포너트. 모두 다 있다. 1월이면 군대가니까, 3개월만 지나면 그 방이 내차지가 돼는 거였는데…… 괜히 이상한 세계로 빨려 들어와서는……. 내가 침대 위를 뒹굴며 향수에 빠져들 때쯤,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손님. 부탁하신 애, 데려왔습니다." "들여보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들어왔다. 밖에 있는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잘해' '떨지 말고' 등의 전혀 도움이 안되는 쓸데 없 는 말, 몇 마디를 소녀에게 던진 후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난 침대에 누워있는 채 내 눈앞에 있는 소녀를 찬찬히 훝어 보다 매우 놀랐다. 나이는 약 십 오육세 정도. 새하얀 살결에 붉은 입술. 작고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 어깨를 지나 허리 한가운데까지 와있는 예쁜 녹색 머리카 락. 그려 놓은 듯한 선명한 눈썹과 두려움을 가득담고 있는 커다란 적갈색 눈동자. 굳게 다문 앵두는 붉디 붉어서 터질건만 같다. 적당한 키에 몸매도 균형 잡혀 있다. 그 청초한 몸에 새하얀 드레스…… 마치 한 송이 백합같 군. 내가 위아래로 훝어 보자 소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 었다. 누가 잡아먹냐? 난 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말했다. "이리와." 소녀는 몸을 떨면서 한 걸을 한걸음,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난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소녀에게 명령했다. "일단 앉어." 소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다소곳이 걸터앉았다. 나하고 최대한 거리를 두 려는 듯 보였다. "이름이 뭐냐?" "……." 내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이름이 뭐냐니까? 내가 약간 짜증이 섞인 듯한 말투로 다시 한번 묻자 소녀는 몸을 움찔했 다. "……레드레이아." 모기만한 목소리긴 하지만, 그래도 들리긴 들리는군. "본명은 어떻게 되지?" "……." "그건 가게에서 쓰는 명칭일꺼 아냐? 귀족 출신이라고 하던데, 본명은 뭐 냐?" "……." 젠장, 뭐라고 말을 하긴 한 것 같은데 들려야 말이지. 난 짜증이 나서, 얼굴을 찡그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두번 묻게 하지마. 이제부터 내가 두 번묻게 될 시에는 옷을 하나씩 벗 어야 할꺼다. 본명은 뭐지?" "레이트…… 세레나……." 그 이름 하나 말하느라고 그렇게 시간을 끄냐? "레이트 세레나라…… 예쁜 이름이군. 좋아. 그럼 일단 니가 이 세계에 대 해서 아는데로 말해봐." "……?" "난 17년 동안 동굴 속에 처박혀 살다가 얼마 전에 세상에 나왔어. 그러 니까 이 세계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설명 좀 해보라고." 정확히 말하면 17년 동안 공부만 하다가, 이런 이상한 세계에 떨어지게 된 거지만…… 아∼,이럴 줄 알았으면 좀 착하게 살걸. "……." 세레나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우물쭈물 거릴 뿐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난 할 수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레나의 얼 굴을 마주보았다. 내가 표정을 굳힌 채 계속 쳐다보고 있자, 세레나는 조심 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릴까요?" "니가 알고있는데서부터, 내가 알아야 되는데까지." "……." 진짜 미치겠다. 말을 좀해라 말을. 난 세레나의 코앞에 얼굴을 갖다대며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아가씨!" 내가 얼굴을 갖다대서 놀란 건지, 아니면 갑자기 존댓말을 써서 놀란 건 지, 세레나는 그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예." "여기서 아가씨 잡아먹을 생각 없어요. 지금 나한테는 아가씨와 즐기는 것 보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게 더 중요해요. 안 잡아먹을테 니까 빨리 얘기해요." "……." 젠장.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라.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세레나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인가요?" "예. 정말입니다. 아가씨." "만약 이 곳에 대해 알고 싶다면, 책을 읽어보면 되잖아요. 혹시 글을 못 읽으시나요?" 쾅! 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책! 그렇다. 정보를 얻고 싶으면 책을 읽어보면 되는거다. 일반적으로, 도서(圖書)는 옛날부터 내려 오며 인류의 가장 우수한 지성인(知性人), 예지자(叡智者) 들의 두뇌의 총 화(總和)를 축적한 저장고(貯藏庫)라 하겠다. 그 속에는 인문 과학, 사회 과 학, 자연 과학, 문학, 미술, 음악 등 학술(學術)과 예술(藝術)에 관한 것은 물로느 기타 취미(趣味)와 오락(娛樂) 등 인간 생활에 관계된 것으로 없는 것이 거의 없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 속에 가시가 돋친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영어로 Human make book, book make human. 맞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한거지? 이 세계에 대해 알려면 책 몇권만 사서보면 되는거였는데…… 으아, 미치겠다. 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해를 하다가 세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세레나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머리를 쥐어 뜯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있었다. 난 쪽팔려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렇군요. 이 곳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려면 책을 읽으면 되는 거였군 요. 책은 지식의 보고(寶庫)이자……." "……." "아, 아. 이게 아니지. 흠흠…… 어쨌든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그럼 나가 서 일 보세요." "예?" 세라나는 큰 소리로 반문했다. 그러고보니 저 아가씨 여기 들어와서 처음 으로 큰 소리를 내는군. 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아가씨한테 볼일 끝났으니까. 이제 그만 나가 보라구요." "……." 반응이 왜 저리지? 나가는게 싫은가? 설마…… 나와 함께 뜨거운 밤을 보 내고 싶어서…… 흠흠, 안돼는 데…… 난 아직 미성년자여서…… 생각해보 니 그 쪽도 미성년자군…… 어쨌든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세레나의 반응을 열심히 좋은 쪽으로 해석하던 나에게 모기 만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지금 나가면 언니한테 혼나요." 흠, 생각해보니 그렇군. 손님 받으라고 방안에 처넣었으니 그냥 나가면 혼 나겠지. 그냥 내가 좋아서 나가기 싫다고 말해도 되는데. 난 일어나 탁자로 가, 반쯤 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는 술병 을 하나 꺼내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럼 이 세계에 대해서 좀 얘기해 봐요. 어차피 밤새 할 일도 없을 테 니……." 난 말을 마치고 술을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겼다. "쿨럭쿨럭." 젠장, 깜빡했다. 난 술을 못 마시지. 그런데 무슨 술이 이렇게 독하냐? 목 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네. "푸훗." 술 마시려다 기침만 하는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세레나가 작은 소리로 웃 었다. 긴장이 좀 풀렸나보군. 난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아가씬 나이가 어떻게 되죠?" 내 물음에 세레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16살이에요." 이 몸보다 1살이나 어리군. 세레나가 나보다 1살 어리다는게 확실해지자 나는 본격적으로 말을 깠다. "난 17살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말 놓을게." 난 세레나의 얼굴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밤은 길고 할 일은 없다구. 빨리 얘기나 해봐. 나 피곤하니까 최대한 간 단명료하게." 잠시 침묵하던 세레나는 곧 입을 열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 일단 가이아스 왕국이 성립된 때부터 얘기해 드릴께요. 그 이전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거든요." 확실히 긴장이 많이 풀어져 보이는군. "좋을데로." "예전에, 즉 가이아스 왕국이 세워지기 전에는, 약 100여개의 국가가 존재 했어요. 그 국가들은 서로 밥먹듯이 싸움을 했고……." 마치 그 옛날 할머니 무릎위에 앉아서 할머니가 해주는 이야기를 듯는 것 처럼, 난 세레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세명의 영웅이 나타났어요." "영웅?" 영웅이면 내 이름이잖아. 내가 셋 씩이나 나타났단 말인가? 입에서 뿜어내는 담배연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연기 가 흔들리면서 그녀의 모습도 흔들린다. 모두가 잠든 이 밤에 조용히 얘기 를 나누는 레이디와 마법사. 마치 동화책에 한 부분 같군. "예. 전사 가이아스 에카스, 마법사 넨 이드, 전략가 젝 니켈. 이 세 사람 은 에카스를 왕으로 각 국가를 통합하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강했고, 백성 들은 그들을 따랐어요. 결국 대륙력으로 1027년, 가이아스 왕국력으로는 0 년이 되는 때에 최초로 이 대륙은 하나로 통합 됐어요." 세레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었다. 난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생각 했다. 아무래도 이 곳은 대륙력과 왕국력을 같이 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이아스 왕국은 번영했어요. 하지만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듯이, 하나 의 왕국도 오래 지속 될 수는 없었어요. 왕은 무능해지고, 귀족들은 자신의 이득만 챙기고, 백성들은 가난에 힘들어 할 때쯤, 각지에서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1400년대 초반부터 분열이 시작된 가이아스 왕국은 결 국에는 1432년에 32개의 국가가 난립하게 되었어요. 그 후 약 100여년에 걸쳐 싸움을 하여 1533년에는 17개의 국가가 성립됐어요" 마치 주나라 때의 춘추전국시대 같군. 아니 한나라 때의 삼국시대라고 봐 야하나? "계속해봐." "그 17개국들은 또다시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했어요. 하루에 수천명이 죽어 나가고, 강과 대지는 피로 물들었어요. 그렇게 서로 미친 듯이 전쟁을 한 결과 가이아스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1564년에는 헤리오, 체라네, 개 틴, 자바스, 아토리아, 아이리스, 이렇게 6개국만 남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상태로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 얼마 전에는 아이리스 왕국이 바스라와 아토 리아에 의해 멸망당했어요." "얼마전이라면?" "3년전이에요. 아이리스 왕국은 군대의 숫자가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만한 나라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아토리아가 공격해 들 어오자, 자바스의 군대를 수도로 끌여들이는 바람에……." "그들이 배신을 했나보군." "예. 믿었던 자바스 왕국이 갑자기 배신을 해 순식간에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시해됐어요. 고위귀족들의 배신과 국교를 맺고 있던 나라의 배신. 이 때문에 아이리스 왕국은 싸움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자바스와 아토리아에게 멸망당했지요." "……그래." 아이리스라……? 난 세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까 따라 놓은 술을 입에 적셨다. 내가 술 을 못하는데다가 술이 워낙 독했기에, 그냥 마시는 동작만 취했다. 세레나의 입을 통해 이 대륙의 역사를 전해들은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정말로 역사는 반복되는 건가? 분열되있던 나라들이 하나 로 합쳐진다. 하나로 합쳐진 나라는 다시 분열된다. 분열된 나라들은 다시 하나로 합쳐지길 원한다. 멍청한 인간들에 의해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 며, 역사는 반복 될 것이다. 사람을 많이 죽인자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영웅의 손에 죽은 자는 악당이 될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먹이 삼아 강해 질것이며, 그 강자는 강해진 힘으로 더 많은 약자를 먹이로 삼을 것이다.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대. 전쟁하는 국가들 이 모여있는 시대. 전국시대(戰國時代). 지금 이 대륙의 사정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세계에서도 비슷한 역사는 계속 되고 있었다. 만약 대륙이 다시 합쳐진다 하여도 얼마 못가 다시 분 열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역사들은 계속 될 것이다. 젠장, 짜증나는군. 나와 세레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하고 은 은한 조명아래 그녀의 모습은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난 술잔을 내려놓 은 뒤, 담배를 꺼냈다. 생각 안하고 피워대서 몰랐었는데, 담배 각에는 이 미 두개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배낭에 한갑 더 있으니 정확히는 22개가 남은 셈이다. 거의 2주만에 한갑을 다 핀셈이군. 난 아쉬운 마음을 뒤로 감추고 물려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넌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거지?" "……흑…… 흑." 세레나는 갑자기 울음 터트렸다. "이봐!" "……흑…… 흑." 젠장, 난 계집애 우는 건 질색이다. 제발 울지좀 마라. 난 두손으로 떨리고 있는 세레나의 작은 어깨를 살짝 움켜잡았다. "아가씨! 울지 마세요. 사정을 말해야 내가 도와줄꺼 아닙니까. 예? 아가 씨!" 내가 사정조로 말하자 세레나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처다 보았다. 그 누가 여자 우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진짜 미치겠군. 200골드나 냈는 데 그냥 본전뽑아버려? "저는…… 훌쩍…… 저는…… 훌쩍." 난 울먹이면서 말하는 세레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처다 보았다. 대체 뭐 라 그러는거냐? 세레나는 한참을 울먹인 뒤에야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저희집은 백작가에요. 그런데 얼마 전에 집에 병사들이 들이 닥쳐 어머 니와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저는 그 때 숙부님 댁에 있었는데…… 그런 데…… 흑흑." 세레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난 세레나의 말을 조합 해 대충 어떻게 된일인지 알 수 있었다. 거 참,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왜 이렇지? 지크씨네도 그렇고 말이야……. "죄목이 뭐래?" "바…… 반역……." 반역죄라. 당연 참형이겠군. "누군가가 모함한거냐?" "……." 세레나는 계속 울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숙부가 그런건 아니겠지?" "……." 끄덕끄덕? 맞다고 하네. "왜 그런 짓을 했데?" "직위가…… 백작…… 직위…… 흑흑." 음, 그러니까 숙부라는 놈이 백작직위가 탐나서 자기 형제를 모함한거구 만. "숙부가 널 이곳에 팔아 넘긴 거냐?" "……." 또 끄덕끄덕. "얼마에 팔려왔냐?" "……." 세레나는 그건 왜 묻냐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예쁜 얼굴은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계속 울어서인지 눈가는 약간 부어 있었다. 그래도 원판이 하도 예뻐서 그런 모습조차 아름답게 보였다. 남자 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고나 할까…… 혹시 이 여자 그걸 노리고 일부러 운거아냐? "얼마에 팔려왔는지 알아야지, 내가 널 빼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 이제 울음은 멈춘 상태 것만, 세레나는 말로 하지 않고 손가락 7개를 펴 보였다. "7만골드?" "……." 도리도리? 아니란 얘긴가? "설마…… 7천골드?" "……." 끄덕끄덕. 맞다고 하네. 난 그녀가 겨우 7천골드에 사창가로 팔려왔다는 것을 알자, 화기가 치밀 었다. 난 옆에있는 술병을 집어 들어 벽에 던졌다. 챙그랑 술병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고, 붉은색 액체가 흘러나와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적셨다. "씨발, 숙부라는 놈이 7만골드도 아니고 겨우 7천골드에 조카를 사창가로 팔아 넘겼단 말이야? 아니 뭐 그딴 새끼가 다 있어!?" 세레나는 내가 갑자기 화를 내자 겁을 집어먹었다. "이, 이미 부모님께 손을 쓴 이상…… 저란 존재는 껄끄러웠을 꺼에요." "오호∼ 그러셔? 씨발, 그래도 그렇지. 딸같은 애를 7천골드 받고 사창가 에 팔아 넘겨?…… 좋아, 일단 이곳을 나가자." "……?" "이곳에서 나가자고. 너도 여기서 몸팔고 싶은 생각은 없을 꺼아냐?" "……." 끄덕끄덕. "그럼 따라나와." 난 그녀를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복도를 좀 걷고 계단을 내려가자 카운 터의 모습이 보였다. 난 그녀를 내 옆에 꼭 붙여 놓고 주인 앞으로 다가갔 다. "어머, 손님. 어쩐 일이시죠? 혹시 이 아이가 무슨 실수라도……." 주인은 내가 여자가 마음에 안 들어 따지러왔는 줄 알고, 당황한 모습으 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한 쪽에서 잡담을 하고 있던 여자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는지, 이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이 아이를 데려가고 싶다." "예?"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얼마를 내면 되나?" 그제야 대충 상황을 파악한 주인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손님.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이 아이는 우리 가게에 없으면 안돼는 중요한 애여서요……." 씨발, 다른 곳으로 팔아 넘긴다고 할 때는 언제고? "얼마를 내면 되냐고 물었다." 난 무표정한 얼굴로 주인의 눈을 쏘아보았다. 주인은 이런 상황이 아무렇 지 않은지 얼굴에 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뭐 정 그렇게 손님이 원하신다면…… 1만5천골드에 넘겨드리지요." "푸하하." 난 주인의 말에 웃음부터 터뜨렸다. 옆을 보니 세레나는 그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놀랍기도 하겠지. 하루사이에 자기 몸값이 배 이 상 뛰었으니. "내가 듣기로 이 아이는 7천골드에 팔려왔다고 하던데…… 하루사이에 몸 값이 두배나 뛰었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잘못알고 있는 건가?" 주인은 내가 세레나의 몸값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는지 잠깐 흠칫했다. 하지만 다시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건 아니에요 손님. 이 정도 아이면 저희 가게에서 1년만 굴려도 그 이상은 벌어들일 수 있어요. 손님께서 이 아이를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특별히 싸게 넘겨드리는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2만골드 이상은 받 아야한다구요." "푸후후…… 푸하하하." 난 주인의 말에 오른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가게 안에 여자들은 모두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살벌한 표정으로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못 내겠다면?" "그럼 저 아이는 데려갈 수 없습니다. 손님." "그래도 데려가야 겠다면?" 내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주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어머, 그건 안돼요 손님. 그냥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세요." 난 얼굴에 미소를 지웠다. "어쨌든 난 이 아이를 데려가야겠다." 주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주인은 손을 들어 박수를 두 번 쳤다. "뭐 손님이 정 그렇게 나오신다면 할 수 없죠. 애들아." 젠장, 저것들은 뭐야? 주인이 '애들아' 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자, 우람한 근육을 가진 불량써클 맴버 5명이 문을 박차고 튀어 나왔다. 머리까지 빡빡민걸보 니…… 보통놈들이군. 하여튼 꼭 싸움 못하는 놈들이 머리를 밀고 다닌다 니까. 실력으로 안되니까 외모로라도 승부할려고 말이야. 설마 '부처님 오 신날 파'는 아니겠지? "무슨 일입니까? 누님!" 그 불량써클의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누님이래! 무 서워라. "아! 별일 아니야. 이 손님이 문제를 조금 일으켜서 말이지…… 손님! 지 금이라도 다시 방으로 들어가세요." 주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말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내 용은 두들겨 맞기 전에 알아서 꺼지라는 내용이었다. 난 옆에서 떨고 있는 세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렇겐 못하겠는데." "어머, 그럼 할 수 없죠. 애들아! 이 손님 좀 밖으로 모셔다 드려라." 주인은 대단히 아프게 팬 다음 길가에 내던지라는 말을 상당히 정중하게 말했다. 주인의 명령을 받은 떡대 좋은 5명은 손가락 관절을 '우두둑' 꺽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난 폭력을 싫어하는 착한 학생이기 때문에 좋은 말로 그들 에게 경고했다. "니들에게 원한은 없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한 발 자국이라도 더 다 가온다면 몸에 한부분 정도는 박살을 내주지." "푸하하. 야! 저 꼬마 녀석이 뭐라고 까덴거냐?" "글쎄요. 왠 개가 짖는 소리여서 못 알아들었는데요." "그래? 미친개한테는 매가 약이지. 이거 오늘 몸 좀 풀겠구만." "푸하하하." 아! 난 착하게 살려고, 무의미한 싸움을 피하려고 하는데…… 저들은 왜 나의 이 따뜻한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후우." 난 가볍게 한 숨을 내쉰 뒤, 나의 따뜻한 마음을 몰라주는 불량써클 맴버 5명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파이어 애로우." 순간 만들어진 5개에 불화살은 그들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들은 날아 오는 불화살을 보면서 어떠한 동작도 취하지 못하고 놀란 표정만을 지었 다. 5개에 불화살은 그들의 목주변을 스친 뒤 벽에 박혀 '파앙' 소리를 내 며 폭파했다. "마…… 마법사다." "마법사야." "꺄악." 불화살 5개 날아가는 모습을 본 가게안의 모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량써클 맴버 5명의 목에는 화살이 스치고 간 작은 화상 자국이 남아 있 었다. 1cm만 옆으로 겨냥했어도 그들 목에 구멍 하나씩 뚫렸을 것이다. "미친개가 뭐라고?" 난 두눈을 부릅뜬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내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홀드 퍼슨." 잠시 후 그들은 놀란 듯 외쳤다. "몸이 안 움직여." "어…… 어떻게 된 거지?" 안 움직이라고 마법을 걸었으니까 안움직이는게 당연하지. 난 그들 바로 앞에 서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를 한모금 빨아들 인 뒤 불량써클 두목의 얼굴에 내 뱉었다. "콜록콜록." 매운가 보군. 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그 놈들을 올려다(나보다 키가 크니까) 보았다. "내가 아까 경고했었지? 신체 일부분 정도는 박살을 내주겠다고 말이야." 내 말을 들은 5명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난 손에 스트랭스 마법을 걸고 제일 쫄다구로 보이는 놈에게 다가갔다. 양손으로 놈의 오른팔을 잡은 뒤…… 힘차게 뒤로 꺾었다. 우두둑 "으아∼ 으아악."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밖으로 굽으니까 꽤 아픈가보군. 관절이 박살나 팔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니 아프기도 하겠지. 그런데 지금 밤이 깊었는 데 저렇게 소리질러도 되는 건가? 신음 소리 내면서 즐기고 있는 사람들 방해될텐데. 혼자만 당하면 억울하니까, 난 친절하게도 한명 한명 계속 손 봐줬다. 다 음 놈은 팔을 거꾸로 한바퀴 돌려 어깨 관절을 빼놓았고, 그 다음 놈은 무 릎을 뒤로 꺾어 놓았으며, 그 다음 놈은 발목을 비틀어 놓았다. 그들은 관절이 안 돌아가는 쪽으로 꺾이는 고통에 죽어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그리고 그 시각, 청각 효과를 만끽한 관객들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관람하고 있었다. 난 마지막으로 남은 두목의 앞에 섰다. 담배가 다 타들어갔기에, 한 개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젠장, 한갑 다폈군. 난 담배 각을 사납게 구긴 뒤 바 닥에 버렸다. 그리고는 두목에게 친절하게 물었다. "간만에 힘썼더니, 피곤하구만. 내가 해줄까? 니가 할래?" "예. 제가하겠습니다." 음, 지가 하겠다는군. 난 그들에게 걸려있는 마법을 해지했다. 마법이 해지되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이미 당한 놈들은 박살난 부위를 잡으며,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 러워하고 있었다. 사내자식들이 질질 짜기는. "야! 그만 짜. 자고로 사나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세번만 운다고 했다. 직 장에서 짤렸을 때 한번. 마누라고 짐싸서 친정으로 튀었을 때 한번. 애새끼 가 집안에 있는 돈 싸그리 긁어가지고 가출했을 때 한번. 니들이 지금 직 장에서 짤렸어? 마누라가 튀었어? 그것도 아니면 애새끼가 가출을 했어? 사내 자식들이 뭐가 서럽다고 눈물을 짜?" "으…… 으아…… 으으윽……." 이런 씨발. 안 그치네. "우는 놈들은 이 상황을 즐기는 걸로 간주하고, 한번 더 해주겠다." "……." 조용하군. 역시 애들은 패야지 말을 듣는 다니까. "야! 넌 왜 안해? 니 친구들은 다 저러고 있는데, 너 혼자만 이러고 있어 서 되겠어? 하기 힘들어? 내가 해죠?" "아닙니다." 우두둑- "크아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두목의 왼손은 손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자신의 오 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비튼 것이다. "잘했어." 난 용감하게 손목을 비튼 두목을 칭찬한 후에 주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8천골드를 주지. 이 아이를 내게 넘겨라." 주인은 거절할 생각을 못하는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돈이 없으니 내일 점심때쯤 받으러 와. 돈은 그 때 줄께." "……." 지금 돈을 받지 못한다는 말에 주인은 뭔가 따지려 했으나, 나의 살기 가 득한 눈과 마주치자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난 멍청이 서있는 세레나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다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어 고개를 돌렸다. "아, 깜빡했군. 나는 지금 '방랑자' 라는 여관에 묵고 있고, 내 이름은 히 로다. 8천 골드는 그 때 확실하게 주도록 하지. 그리고 말이야, 이건 널 위 해 하는 말인데…… 혼자 찾아 오는게 좋을 꺼야. 괜히 저런 놈들 데리고 와서 시체 늘릴 생각은 하지마." 난 말을 마치고 오른손을 주인을 향해 뻗었다. "아이스 애로우." 주변의 공기가 냉각되면서 얼음 화살이 생성됐다. 그 얼음 화살은 두려운 표정으로 서있는 주인 여자에게 날아가, 그녀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 벽에 박혔다. 주인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만졌다. 그녀의 손에 끈적끈적 한 붉은 액체가 묻고, 그녀는 그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고는 경악스러운 표 정을 지었다. "알았지?" "……." 끄덕끄덕. 잘 알아 들었나보군. 하긴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데 못 알아들으 면 바보라고 할 수 있겠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수십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문밖에 몰려있는 것 이 보였다. 술에 취한 남자들, 야한 옷을 입은 여자들, 떡대 좋은 대머리들. 아까 비명소리를 듣고 몰려 온건가? "비켜." 난 간단하게 한마디 던진 뒤 세레나를 데리고 그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 들은 내가 뿜어내는 위압감 때문인지, 아니면 안에서 한 행동 때문인지, 양 쪽으로 갈라져 길을 만들어 주었다. 난 그들 사이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나의 살기 가득한 표정에 야한 옷을 입은 누나들은 말을 걸지 않았고, 세 레나와 나는 사창가 지역을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당신…… 마법사였어요?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 난 세레나를 데리고 열심히 걸었다. 원래는 아까 낮에 갔었던 시장쪽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된게 이상한 길만 나오는 것이었다. 마침 길에는 가로등 하나 안 켜져 있어, 매우 어두웠다. 게다가 더 어두운 분위기 연출 을 위해서 달마저 구름에 가려저있었다. "저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내가 어두운 골목길을 계속 헤매고 있자, 세레나는 무서운지, 작은 목소리 로 물었다. 지금 시간은 약 새벽 4시. 이런 늦은 밤에 어두운 골목길로 끌고 왔으니,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하 겠지. "적어도 여기서 니 옷 벗길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 너랑 즐기려고 했으 면, 아까 거기서 즐겼어." 내 말에 세레나는 두려워하는 표정과 안심하는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이 성적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심을 해야겠는데, 골목길에 남자와 단 둘이 있 다는 사실에 안심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여기다." 약 1시간쯤 열심히 헤맨 끝에 간신히 시장에 도착했다. 새벽 5시경이니, 당연 가게는 모두 문을 닫고, 거리는 썰렁했다. 난 그곳에서 쭉가서 오른쪽 길로 꺾었다. 아까 낮아 왔었기 때문에 보석상점을 쉽게 찾아 낼 수 있었 다. "여기는…… 왜?" "니 몸값은 마련해야 할꺼 아냐?" "하지만……." 세레나는 말끝을 흐렸다. 아마 끝에 '……'은 '이 곳은 문을 닫았잖아요' 겠지. 물론 나도 여기가 문을 닫았을 꺼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씨바, 내가 바보 냐? 새벽 5시에 보석상점이 하고 있을꺼라고 생각하게.) 지금 나는 타실씨 의 집으로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까 100골드짜리를 약 20배정도에 팔았으니, 500골드짜리를 팔면, 1만골드 정도는 충분히 나올 것이다. 그럼 그 돈으로 세라나의 몸값을 지불할 수 있게 된다. 난 타실씨가 말해준데로 왼쪽으로 두 블록 가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양쪽 으로 쫙늘어선 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번째 집이랬지." 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타실씨의 집을 찾아 보았다. 보석상점을 운영해 서 그런지, 다른 집들보다 훨씬 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앞에 문패를 조 사해보니, '타실' 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저 있었다. 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무자비하게 문을 두드렸다. 쾅쾅-! "타실씨! 타실씨!" 쾅쾅쾅-! "타실씨!" 한 참을 두드리자, 안에서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쾅쾅-! "타실씨!"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약 20세 정도 되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나와 세레나를 보더니 약간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몇신지 아십니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난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타실씨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나와 세레나를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주무십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몰라도, 날이 밝으면 찾 아오십시오." 음, 알고 보니 아들이었구만. 그는 말을 마치고 문을 닫으려 하였다. 나는 닫히려는 문을 억지로 잡았 다. "저는 지금 바쁩니다." "아니, 아무리 바쁘다 그렇지, 지금이 몇신데 이러시는 겁니까? 아버지는 내일 가게에 나가봐야 하니 지금은 주무셔야 합니다. 날이 밝으면 가게로 오세요." "그럼 잠깐 깨워서, 말씀이라도 전해주십시오. 아까 낮에 100골드 팔고 간 사람이라고, 다른 물건이 있어서 팔러 왔다고." 그는 나를 잠깐 노려보았다.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는 말을 마치고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나는 옆에서 고개를 숙 이고 있는 세레나에게 말했다. "금방 나올 꺼야." "……." 한 3분쯤 지났을까, 타실씨가 헐레벌떡 문을 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머 리는 헝클어져 있고, 눈은 초점을 맞추지 못해 흐릿하게 뜨고 있다. 마치 '나 잠자고 있던 중이었어요' 라고 주장하는 것 처럼 보였다. "하하, 자넨가?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인가?" "좋은 물건이 있어서,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오게 됐습니 다." "그래? 무슨 물건인데 그러나?" "적어도 아까 팔았던 100골드짜리와는 비교도 안돼는 물건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내 말에 타실씨는 졸린 듯한 눈을 번쩍 떴다. "그렇습니다." 500골드짜린데, 100골드와 비교가 안돼는 것은 당연하지. "알았네. 일단 들어오게. 들어와서 얘기하지. 어, 옆에 아가씨도 있었구만. 자네 애인인가?" "……." 세레나는 아니라고 부인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인을 해 봐야, 더 인정하는 꼴일테니……. 어쨌든 나와 세레나는 타실씨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의 내부는 밖에서 생각했던데로 상당히 넓었다. 타실씨는 우리 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는 잘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여러 가지 장식과, 화려한 탁자, 푹신하게 보이는 쇼파등이 있었다. "자자, 앉게. 아가야! 차 좀 내오거라." "예, 아버님." 타실씨의 말에 주방에서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아들이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평범하게 생긴 미인이 차를 들고 나 왔다. 그녀의 옆에는 아까 보았던 남자가 같이 있었다. 그녀는 네 잔의 차 를 탁자에 올려놓고, 다시 주방으로 갔고, 남자는 타실씨 옆에 앉았다. "아깐 죄송했습니다. 귀한 손님인줄 모르고……." 그는 아까 화냈던게 미안한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런 늦은 밤에 찾아온 저희가 잘못한거죠." "그보다, 자네가 팔 물건이란 건 뭔가? 보석인가? 금환가?" 타실씨는 조바심이 나는지,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급하게 물었다. 나는 차를 천천히 입가에 가져가며 시간을 끌었다. 약간의 뜸을 들이고 나서 나 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팔려는 것은 아주 귀중한 물건입니다." "그거야, 나도 알고 있네. 그래 대체 무슨 물건인가? 빨리 말하게." 나는 계속 뜸을 들이다, 타실씨가 조바심으로 얼굴이 붉게 변했을 때쯤 말했다. "가이아스 건국년에 나온 500골드 금화입니다." "뭐라고?" "예?" 타실씨와 그의 아들은 동시에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난 영문을 모른 채 세레나를 보았는데, 세레나는 그 예쁜 얼굴에 '경악'이라는 두 글 자를 써놓은 뒤,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생각 외로 비싸게 받아 먹을 수 있겠다는 것을. "저, 정말로 왕국력으로 0년에 발행된 금화란 말인가?" 난 여러말 하는 대신,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금 화에 새겨진 드래곤의 눈이 빛을 받아 번뜩거렸다. 타실씨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 금화를 집어들었다. "진짜야! 진짜 건국년에 나온 금화야!" 타실씨와 그의 아들은 넋을 잃고 금화를 바라보았다. "오오! 이 정교한 세공! 역시 드워프의 솜씨군!" 저 금화 드워프가 만든 거였나? 어쩐지…… 세공 솜씨가 너무 완벽하다 했어. "그럼 얼마를 처 주시겠습니까?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흥정할 생각 이 없습니다. 그쪽이 제시한 금액이 마음에 들면 팔고, 아니면 그냥 나가겠 습니다." "……." 내 말을 듣고 타실씨는 매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타실씨는 금화를 요리조리 돌려보며, 감정하였다. 약 5분쯤 지났을까, 타실씨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네, 대체 이 금화는 어디서 난건가?" "낮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얘기하자면 깁니다. 얼마를 주실 수 있는지 그것 만 말씀해주십시오." 내 태도가 건방지다고 생각했는지, 타실씨의 아들은 약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타실씨는 내 태도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이 온 신경을 금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 정도 금화면…… 5만골드, 아니 6만 골드를 쳐주지." "예?" 타실씨가 제시한 금액을 듣고 세레나와 타실씨의 아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나는 타실씨가 제시한 금액이 엄청나다는 것은 알겠는데, 아직 이 세계의 화폐 단위에 익숙하지 않아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곳에다 팔면, 이 보다 비싸게 받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은 6만골드까지네." 타실씨는 말을 마치고 내 표정을 살폈다. 안 팔면 어쩌나 하는 심정인 것 같았다. 난 어차피 예상한 금액보다 훨씬 많이 받게 되었기 때문에, 별로 불만은 없었다. "좋습니다. 6만골드에 팔기로 하죠." 내 대답이 떨어지자, 타실씨는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는 횡재 했다' 하는 표정이었다. "알았네. 잠시만 기다리게 내 6만골드를 챙겨 옴세." 타실씨는 금화를 탁자에 내려놓고, 잽싸게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세레나 를 보며 한번 쓰윽 처다본 다음, 이젠 식어버린 차를 한번에 마셨다. 잠시 후 타실씨는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자, 여기 있네. 현금으로 2만골드고, 나머지는 4만골드는 자룬 상단에서 발행한 전표일세." 전표? 수표를 말하는 건가? 난 묻는 듣한 표정으로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세레나는 잠시 내 눈빛을 마주하다가, 아까 내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말을 상기해내고 말했 다. "자룬상단이면, 이 대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단이에요. 자룬 상단에서 발행한 전표면, 대륙 어느 곳에서든지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어요." 난 세레나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난 한가지 착각한게 있었다. 그 것은 바로 금화의 개수였다. 이 세계에서 최고 단위의 화폐는 500골드인 것 같은데, 6만골드면 금화 120개가 된다. 2만골드라해도 금화 40개가 되는 것이다. 그걸 무거워서 어떻게 들고 다니냐? "저기요. 그럼 1만골드만 현금으로 주시고, 나머지 5만골드는 전표로 주세 요." "음, 알았네." "잠깐만요. 2만골드 정도는 보석으로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다시, 일어나려는 타실씨를 붙잡았다. "보석으로 말인가?" "예." 타실씨는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내가 속인다면 어쩌겠나?" 타실씨는 자기가 보석의 가치를 속이고 대충 넣어 주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고 있었다. 난 별 표정 없는 얼굴로 타실씨를 보았다. "물론 저는 보석을 볼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상인으로서의 자 존심을 믿습니다. 알아서 2만골드어치의 보석을 챙겨주세요." 타실씨는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알았네. 잠깐만 기다리게." 잠시 후 타실씨는 가죽주머니 하나를 들고 왔다. "이정도면 충분히 2만골드는 될껄세. 내 이름을 걸고 맹세 할 수 있네." "알겠습니다." 난 금화가 들어있는 주머니와 보석이 들어있는 주머니, 전표를 챙기며 일 어났다. "그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늦은 밤에 찾아와서 죄송했습니다." "아닐세. 자네 덕분에 가이아스 건국년에 만들어진 금화도 구하고, 정말 고맙네." 타실씨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와 세레나는 타실씨네 집을 나왔다. 시간이 꽤나 지났는지, 아침해가 서 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난 걸으면서,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세레나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그 500골드짜리, 드워프가 만들었다는게 사실이야?" "모르셨어요?"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금화를 가지고 있었냐는 듯한 말투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밖으로 나온지 얼마 안됐다구."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해주었다. "그 500골드짜리 금화는 드워프들이 직접 세공을 한거에요. 금화에 미스 릴로 만든 드래곤을 새겨 넣었다는 것은, 인간의 솜씨로는 불가능하지요. 가이아스 왕국이 건국될 당시에 에카스 왕은 오크에게 침략받고 있던 드워 프들의 왕국을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나라가 건국되고 나자, 드워프들은 은 혜를 갚기 위해, 에카스 왕을 찾아왔어요. 그 때 에카스는 드워프들에게 500골드 금화를 제작해 줄 것을 부탁했고, 그래서 만들어진게 그 금화에요. 건국년에 만들어진 금화는 지금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특히 500골드 짜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마 당신이 마음만 먹었더라 면, 훨씬 비싸게 받을 수도 있었을 꺼에요." 난 세레나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레어에는 쌓여있던 데…… 혹시, 드래곤들이 수집하는 바람에 금화가 몽땅 사라진건가? 어쨌 든, 아직 4개나 남았으니, 두고두고 쓸 수 있겠군.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거죠?" "그야 당연히 여관으로……, 응?" 젠장! 잘못왔다. 여긴 또 어디냐? 우리가 여관에 도착한 때는 이미, 해가 저 하늘 높이 떠, 사람들이 일을 나갈 때 쯤이었다. 밤새 한잠도 못자고 걸아다녀서 피곤해 죽을 지경이다. 세레나를 보니 나 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흑흑, 길만 제대로 들었으면, 3시간 정도 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난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주인 아저씨 대신 세니가 앉아 있었다. "오빠, 지금 들어오는거에요?" "어. 일이 좀 그렇게 되서. 닐스씨는 위에 있지?" "예. 불러드릴까요?" "아니. 그보다 방 하나 더 있어?" 그제서야 세니는 내 옆에 있는 세레나를 발견했다. "이 여자분은……?" "나도 잘 몰라. 어젯밤 처음 만난 사이야." "예?" 세니는 내 말을 이상한 쪽으로 해석했는지, 화난 표정을 지으며 쏘아 붙 였다. "뭐…… 원하신다면, 2인실 방으로 바꿔 드릴게요." "아니에요. 저흰 그런 사이 아니에요." 세레나는 놀라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세니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렸나보다. 하긴 밤사이에 여자를 하나 끼고 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 도 하지. 그것도 엄청난 미인을……. "아니에요. 2인실 방으로 바꾸어 드릴 테니 두분께서 편하게 쓰세요." 말끝이 이상하게 올라가는 걸 보니, 비꼬는 것 같군. 여자의 질투인가? "1인실 방으로 하나 줘. 이 아가씨 쓰게." 몸이 피곤해 말하기도 힘들었기에 난 최대한 간단하게 말했다. 다행히 이 번에는 세니가 잘 알아들은 것 같은 눈치다. "그럼…… 부부 전용 특실로 바꿔드릴까요?" 젠장. "나 지금 피곤해죽겠으니까, 두 번 말시키지마." 세니는 눈을 개슴츠레하게 뜨고, 눈동자를 위, 아래로 움직였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무엇을 하다 왔길레, 그렇게 피곤할까요오?" 니가 아주 정곡을 찌르는구나. "적어도 이 여자랑 옷벗고 뒹구느라고, 피곤한건 아니야. 아무튼 나 지금 피곤해 죽을 지경이어서, 이 여자랑 즐길 기운도 없어. 힘이 좀 생기면, 그 때 2인실 방으로 바꾸든지 할 테니까, 지금은 일단 1인실 방으로 하나 내 줘." "……." 세니는 새빨개진 얼굴로 나와 세레나의 얼굴을 번갈아 처다 보았다. "알았어요. 오빠의 옆방이 비어있으니, 여자분께서는 그 방을 사용해주세 요." 닐스씨가 내 오른쪽 옆방이니, 왼쪽 방으로 안내하면 되겠군. "알았어. 이 아가씨 방은 내가 안내할께. 넌 쉬고있어. 아! 참. 그리고 지 금부터 잘꺼니까 나 찾아 온 손님 있으면 깨워줘. 여관비는 이따 지불할 께." "예." 난 세니와의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세레나에게 말했다. "올라가자." "……." 끄덕끄덕. 난 세레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방을 안내해줬다. 같은 1인실 방이여 서 그런지 방의 크기나 가구의 배치는 똑같았다. "하암∼. 밤새 한잠도 못 잤으니까, 여기서 잠이나 자. 무슨 일 있으면, 옆 방으로 오고. 나도 졸려 죽겠다." 난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뒤에서 세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왜?" 세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죠? 어젯밤 처음 만난 건데. 제 몸에는 손도 안데시고……." 난 피식 웃었다. "뭐야? 그럼 내가 니 옷을 벗긴 다음에 즐겨주길 바라는 거냐? 너 보기보 다 밝히는 구나." "아, 아니에요." 세레나는 내가 진짜 그렇게 할까봐 놀랐는지, 뒤로 물러나며 손으로 몸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 모습에 난 소리 없는 웃음을 냈다. "니 몸에 손을 안데는 건, 지금 힘이 없어서고, 널 도와주는 건…… 음, 그냥 심심해서라고 해두지. 돈과 시간이 남아 돌아서말이야." 세레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피곤함 때문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으려고 뒤를 돌아보니, 세레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계속 서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잠이나 자. 자고 나서 얘기하자. 편히 숴라." 난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힘든 걸음으로 내 방으로 들 어갔다. 망토와 청룡도를 바닥에 던져 놓고 돈주머니는 가방에 쑤셔 넣었 다. 몸이 가벼워지자, 침대에 털썩 몸을 던졌다. 피곤해서 손가락 하나 움 직이기 싫었다. 해는 높이 올라 방안을 환하게 비추었지만, 난 쏟아지는 햇 살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똑똑똑- "오빠!" 똑똑 "오빠!" 음, 누구야? 어떤 새끼가 자꾸 문을 두드려? 쾅쾅 "오빠! 오빠!" 아, 진짜 누구야? 어젯밤 한잠도 못 자서 잠 좀 잘려 그러는데……. "오빠! 오빠!" "알았어!" 난 크게 소리 대답한 뒤 안 움직이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침대에서 일어 났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에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바깥에 세 니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난 희미하게 보이는 초점을 맞추려고 애썼다. "무슨일이야?" "아래층에 어떤 여자가 와 있는데, 오빠를 찾아요." 손님? 아 그 여자 말이군. 빨간 불꽃 이였던가? 빨리도 찾아왔군. 실컷 잘 자고 있는데……. 혹시 인과응보인가? 아까 타실씨 잠깨운 것 때문에. "알았어. 잠깐 기다리라고 전해줘." "예." 세니는 대답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갔다. 난 세수를 하고, 침대 밑을 뒤져 1만골드가 담겨져 있는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 주머니를 들고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한쪽 탁자에 '빨간 불꽃'의 주인 여자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정확히 점심때에 맞춰서 왔는지, 주위에는 밥을 먹는 사람들이 탁자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난 그녀와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 주위에 특별히 이 상한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선, 시킨 대로 혼자 찾아온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주무시던 중이였던 것 같은데, 깨우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주인 여자는 긴장감이 넘치는 얼굴로 정중하게 말하였다. 어제 손좀 봐주 었더니, 태도가 완전히 바뀌는구만. "아니에요. 제가 지금 오라고 했으니……. 그 보다 아직 식사전이시면 같 이 식사나 하죠. 제가 사겠습니다." 그녀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설마…… 저와 식사를 하기 싫으신 가요?" 내가 한 쪽 팔로 턱을 괴면서 말하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같이 먹겠다는 뜻으로 알죠."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니! 여기 주문 받어." 난 테이블 사이를 바쁘게 뛰어 다니며 주문을 받는 세니를 불렀다. 세니 는 내 목소에 나를 돌아보더니 웃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예. 주문하세요." "세니. 오늘은 더 예뻐보이네." 으아! 내가 말하고도 닭살이 돋는다. 내 칭찬에 세니는 얼굴을 붉혔다. "아이, 빨리 주문이나 해요." 여자란 알 수 없는 동물. 아침까지만 해도 삐져있다가, 지금은 또 왜 이러 냐? "맛있는 걸로 2인분." "맛있는거?" "세니가 알아서 골라줘." "음, 그럼 소고기 스테이크 어때요?" "괜찮겠어요?" 난 주인 여자에게 물었다. "예. 좋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2인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오빠." 세니는 주문을 다 받아 적고 나서 카운터로 갔다. 그녀는 나와 함께있는 게 부담스러운지,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자, 나는 시선을 둘데가 없어 그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들어 윗층을 보 니 방에서 나오는 세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난 손을 들어 외쳤다 "야! 여기야." 세레나는 나를 보다가 옆에 있는 주인여자를 보고, 잠깐 흠칫하는 것 같 더니, 조용한 걸음으로 내려왔다. "앉아. 세니 아까 시킨거 1인분 추가." 난 세레나에게 자리를 권한 뒤, 세니에게 외쳤다. 세니는 세레나를 보고 예쁜 얼굴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고기 스테이크 시켰어. 괜찮지?" "……." 끄덕끄덕. 그냥 말로 해라, 말로. 난 바디랭귀지를 별로 안 좋아한단 말이다. 잠시 후, 세니가 3인분의 식사를 날라왔고,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에서 식사를 했다. 세레나는 고개를 숙여, 음식만 보았고, 나는 주인 여자 를 보았으며, 주인 여자는 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다른 테이블을 보았다. 그렇게 즐거웠던 식사시간이 끝났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들 얘 기하기 바빴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제가 어제 얼마를 드린다고 했죠?" "저기…… 8천골드를 주신다고……." "아, 아 그랬었지. 요새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요. 그런데 이 아이를 그 곳 에 팔아 넘긴 사람이 누구죠?" "저기…… 그건……." 주인 여자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 놈들이 다시 찾 아오거든, 멀리 있는 다른 가게로 보내버렸다고 하세요. 목이 계속 붙어있 고 싶으면 그 놈들에게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껍니다." "예." 주인 여자의 표정을 보니,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건히 드러났다. "좋아요. 그럼 약속한 돈을 드리지요." 난 말을 마치고 주머니를 열어 탁자위에 뒤집어 놓았다. 촤르르르- 순식간에 탁자위에는 500골드 금화 20개가 빛을 발했다. 다른 테이블에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던 얘기를 멈추고 탁자를 가득 매운 금화를 보았다. 난 그 금화 중 4개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정확히 8천골드입니다. 세 보세요." 난 말을 마치고 세레나를 잡아 일으켰다. "올라가자. 세니, 계산은 조금 후에 할께!" 우리는 넋을 잃고 금화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한 개라도 흘릴까봐 열심히 쓸어 담는 주인 여자를 뒤로 한 채 2층으로 올라갔다. 난 2층으로 올라서 자마자, 닐스씨의 방으로 가 방문을 열어 재꼈다. 닐스씨는 침대에 누워 있 다가, 나와 세레나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일어났다. "식사는 하셨나요?" "예. 아까 했습니다. 어젯밤에 안 들어 오셨더군요. 그런데 이 여자분 은……?" "나중에 얘기해 드릴께요. 어쨌든 이제부턴 이 아가씨도 동행입니다." "예?" "얘긴 나중에 하지요. 지금 출발할 수 있지요?" "예. 물론입니다." "그럼 지금 빨리 마차 준비해주세요. 저도 이 아가씨랑 금방 내려갈께요. 아, 그리고 카운터에 가서 돈 좀 지불해주세요. 식사비랑 여관비, 아직 계 산 안했거든요." "알겠습니다." 닐스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난 내 방으로 가서 짐과 청룡 도를 챙겼다. 세레나는 맨몸으로 왔으니 당연 챙길 물건이 없었다. 난 세레 나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세니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 나를 보고 다가왔다. "이제 가는 거에요?" "응." 세니는 고개를 숙였다. "또…… 올 건가요?" 난 손을 들어 세니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세니는 고개를 들었다.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게 되겠지." 세니는 활짝 웃었다. 난 세니를 뒤로하고 여관문을 나섰다. 여관 앞에는 닐스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십시오. 히로님." "수도로. 될 수 있는 한 빨리 가주세요." 닐스씨는 내말을 듣고, 잠시 날 물끄러미 바로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올라가." 난 세레나를 부축해 마차에 오르게 한 다음, 나도 올라갔다. 앞을 보니 로 니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 가요. 형." "잘 있어라. 닐스씨 출발해요." 난 문을 닫으며 외쳤다. 잠시 후 마차는 약간의 진동과 함께 움직이기 시 작했다. 난 멀어저가는 '방랑자' 를 지켜보았다. 뒤에서 손을 흔드는 로니와 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난 의미없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출발한지 2시간이 지났는데도 세레나는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별로 긴장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백작집 딸이었으니, 이 마차보다 훨씬 좋은 마차도 많이 타봤겠지. 세레나는 내가 계속 자길 보고있자, 시선을 피하려다, 조용히 얘기를 꺼냈 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죠? 그 소녀 당신을 좋아하고 있던 것 같던데 ……." "몰라서 묻냐? 반역죄면 무조건 참형이야. 니네 부모를 구하려면 우린 한 시라도 빨리 수도로 가야한다고." 부모님 얘기가 나오자 세레나는 걱정이 되는지,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런데 넌 수배 안됐냐? 반역죄면 보통 삼족이 처형당하는거 아냐?" 세레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맞아요. 하지만 반역을 일으킨 사람의 아랫대의 여자들만은 괜찮아요." 간단히 말해 딸들만 살아남는다는 얘기군. 어차피 여자니까 죽이지 않아 도 괜찮다는 건가? "좋아. 그렇다해도, 니가 수도로 가는건 위험해. 대체 어떻게 된일인지, 일 단 자세히 설명이나 좀 해봐. 설마 그 숙부란 놈 혼자서 일을 꾸민건 아닐 꺼 아냐?" 잠시 동안 세레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기다리기 지루해서 재촉 을 하려고 할 때쯤, 세레나는 입을 열었다. "저희집은 백작가문이에요. 레이트 백작가지요. 아버지 성함은 레이트 리 키드에요. 숙부님 성함은 레이트 리나드구요.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당연 장남으로서 백작 직위를 물려받았어요. 숙부님은 권력에 관 심이 많으셨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직위를 물려받으려 했어요. 하지만 그게 실패하자,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게 됐어요. 결국 힐카인 후작 과 공모해 아버지를 모함했어요. 증거를 조작하고 사람들을 매수했어요. 그 리고……." 세레나는 말을 잊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난 세레나를 대신해 뒤의 말을 이었다. "널 사창가로 팔아 넘겼지." 세레나는 흐니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그 숙부란 놈 족치는 거보다는 후작이란 놈 족치는게 더 빠 르겠군." "그건 불가능해요!" "가능하고 말고는 내가 정해. 그 보다 문제는 너야." "예?" "니가 다시 수도로 돌아온걸 알면, 그 숙부라는 놈이 가만히 안 있을걸." 세레나는 이제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 "그럼 어떻게……?" 난 세레나의 몸을 자세히 훝어 보았다. 역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길게 늘어뜨린 진초록색 머리카락이었다. 난 일어나 세레나에게 다가갔다. 흔들 리는 마차 안이여서 균형잡기가 힘들었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세레나는 내 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몸을 움찔했다. "그 머리카락 색깔만 바꾸면, 괜찮을꺼야." 세레나는 내 말을 듣고 눈을 깜빡거렸다. 어떻게 바꾸냐고 묻는 듯한 눈 빛이었다. "가만히 있어." 난 세레나의 머리에 손을 올려 놓은 뒤, 캐스팅을 시작했다. "프로모프 아더." 시동어를 외침과 동시에 그녀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난 다시 자리에 앉아 그녀를 보았다. 단지 머리색깔만 바꾼 것인데도, 이미지가 완 전히 달라보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염색을 하나보다. "됐어. 이제 이 정도면 녀석들도 몰라볼 꺼야." 세레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머리카락이 기니까 자기 머리카락을 자기가 볼 수 있었다. 난 스포츠 머리여서 앞머리 한 가닥 안 보이는데 말이다. 어쨌든 세레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바뀌었 다는데 대단한 놀라움을 표명했다. 닐스씨가 전속력으로 마차를 몰아준 덕분에 3일 째되는 날 밤, 우리는 헤 리오 왕국의 수도 레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에서 검시가 심했지만, 닐 스씨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를 가리키면서 영주님의 아들과 그의 아 내가 결혼 기념으로 신혼여행 온 것이라고 해서 간단하게 통과했다. 하지 만 영주의 아들이라고 지칭당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지하게 기분 상 하는 일이었다(씨발, 내가 오크라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냐?). 뭐 내 아 내라고 했을 때, 세레나의 표정도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성 문을 통과해 적당한 곳에 멈추어 섰다. 마침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서, 이별하기엔 아주 좋은 날씨였다. "드디어 도착이군요." "그렇군요. 히로님." "아저씨는 내일 돌아가실껀가요?" "예.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그래야겠지요." "그냥 여기서 헤어지죠. 우리는 따로 할 일이 좀 있어서요." 닐스씨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하지요." 난 오른손을 내밀었다. 닐스씨도 오른손을 내밀어 내손을 붙잡았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아, 그리고 돈 남은건 아저씨가 그냥 가지세요." "저야말로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히로님." "라나에게 안부전해주세요." 난 말을 마친 다음, 세레나의 손을 잡고 제일 가까운 여관으로 뛰어갔다. '휴식 시간' 이라는 이름의 여관으로 들어가자, 산적 수염을 기르고 있는 아저씨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게나. 두명인가?" "예. 일단 방을 먼저 예약하지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숙박부를 펼쳤다. "방은 어떻게 하겠나?" 난 세레나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세레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난 다시 고개를 돌려 주인에게 말했다. "2인실 방으로 하나주세요. 한 열흘 정도 머물거니까, 지금 선불로 계산할 께요." 내 말에 세레나는 내 팔을 붙잡아 땅겼다. 난 다시 세레나를 쳐다보았다. 세레나는 눈으로 왜 2인실방을 예약하냐고 묻고 있었다. 난 세레나의 눈빛 을 무시했다. "2골드씩 전부해서 20골드네. 여기 이름을 적게나." 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지불한 후, 숙박부에 이름을 적었다. "자네 아내인가?" 난 웃으며 대답했다. "예. 결혼한지는 얼마 안되었습니다." "하하, 저런 미인을 아내로 맞다니, 자네도 생긴것과는 다르게 꽤 능력있 나보군. 따라오게." 씨발, 나 생긴게 어때서…… 물론 세레나에 비하면 아주 약간 딸리긴…… 솔직히 많이 딸리긴 딸린다. 난 세레나의 손을 붙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양쪽 벽에 침대가 하나 씩 놓여있는 방으로 우릴 안내한 후, 밑으로 내려갔다. 난 문을 닫고, 배낭 을 풀어놓았다. 세레나는 밀폐된 방에 나와 단둘이 있게 되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난 지팡이를 침대 밑에 넣어 놓은 후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앉아." 세레나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반대쪽 침대에 걸터앉았다. "왜 2인실 방으로 온거죠?" 그녀의 물음에 난 웃음을 지었다. "몰라서 묻냐? 지금 넌 무지하게 위험한 상황이야. 니가 수도 안으로 들 어온걸 알면, 그 숙부란 놈하고 후작이란 놈이 가만히 있지 않을걸. 만약 무슨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나랑 같이 있는 편이 안전해. 니 몸에 관심 있는 건 아니니까 괜한 기대는 접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레이아라는 이름 을 사용해." 그리고 한방을 쓰면 우리 사이가 좀 더 가까워 질꺼 아니겠냐? 푸하하하. 난 세레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대충 둘러대었다. 내 말을 들은 세레나는 약간 안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배 안고파?" 내 물음에 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별로 배 고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쉬고 있어. 나 잠깐 밑에 층에 내려갔다 올게." 난 말을 마치고 방을 나왔다.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할 일이 있 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밑층으로 내려가니, 늦은 밤이여서 그런지 손님 은 한명도 없고 주인 혼자 열심히 컵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은 날 발견하고는 닦던 컵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가?" "레몬 주스한잔 주세요." "기다리게." 난 카운터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잠시 후 주인은 주스 를 가져왔다. 난 천천히 주스를 마시며 주인에게 물었다. "저기 이곳으로 오다가 소문을 들었는데, 레이트 백작이 반란을 일으키려 고 했다는게 사실인가요?" 주인은 잠깐 나를 보더니 계속 컵을 닦으며 말했다. "이미 공개처형 날짜까지 발표 됐네." 난 놀라서 먹던 주스를 다시 컵에 뱄었지만, 다행히 주인은 컵 닦는 데만 열중해 내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게 언제죠?" "글쎄. 아마 4월 1일이었을 걸." 오늘이 몇일이지? 내가 오늘이 몇일인지 물어보려는 찰나에 주인은 말을 이었다. "오늘이 3월 26일이니, 오늘을 제하면 5일 밖에 남지 않은 셈이군 참, 세 상이 어찌되려고 그러는지……." 주인은 말을 마치고 한숨을 쉬었다. "레이트 백작은 어떤 사람인가요?" 주인은 컵이 잘 닦였는지 불빛에 비추어 보며 말했다. "뭐 귀족이란 놈들이 다 똑같은 놈들이지만, 그중에 그나마 괜찮은 놈이 야. 다른 귀족놈들은 개틴과 쌈박질 하는데만 핏대를 올리고 있는데 그나 마 우리 같은 평민들 챙겨주는 놈이지. 레이트 백작의 동생이 개망나닌데 아마 그 놈이 백작이 되려고 힐카인 후작과 공모해서 꾸민일 일껄. 수도 사람들 전부가 공공연하게 아는 비밀이니까 비밀도 아니지. 그런데 그 멍 청한 국왕만은 모르고 있어. 후작의 아첨에 완전히 빠져가지고 꼴에 국왕 이라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빈 주스잔을 주인에게 내밀었다. 주인은 주스 잔을 가져가며 말했다. "10실버네." 난 주머니에서 1골드짜리를 꺼내 올려놓았다.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주인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금화를 챙겼다. 난 2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들 어갔다. 방의 불은 계속 켜져있는데, 세레나는 침대 한쪽에 웅크린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마 내가 올라 오기를 기다리다가 피곤해서 잠든 것 같았다. 난 그녀를 들어 침대에 제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세레나 는 살짝 눈을 감은 채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었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녀를 어루만졌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 지 었다. 세레나가 자는 모습을 보니, 여자라기 보다는 동생(지금은 머리도 검 은색이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그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부드 러운 살결이 내 입술에 닿는 순간, 세레나는 잠깐 몸을 뒤척였다. 난 입술 을 땐 다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은 꿈꿔요. 아가씨." 난 램프의 불은 끈 다음 반대쪽 침대로 가서 눈을 감았다. 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눈을 떴다. 주위의 사물들은 희미하게 보이다 가, 잠시 후 제 모습을 찾았다. "일어나셨나요?" 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침대와 침대 사이에 놓여진 탁자에 다소곳하게 앉았는 세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보다는 조금 밝아 진 모습이었다. 난 몸의 관절을 풀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응.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지?" "아마 11시쯤일꺼에요." 11시라? "식사는 했어?" "아니요." 이제야 제대로 말을 하는군. 맨날 도리도리 아니면 끄덕끄덕이더니. "내려가서 밥이나 먹자." "예." 난 청룡도를 허리에 차고 망토를 둘렀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의자에 앉 아서 쉬고있는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주인은 우리를 발견하더니, 의미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일어난 건가? "예." "한창 좋을 때긴한데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나." 저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거지? 우리는 식사를 끝마친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목적은 적의 진지 탐사였다. "야, 빨리 좀 걸어." 난 멈춰서서 헥헥거리며 따라오는 세레나를 기다렸다. 무슨 계집애가 운 동을 그렇게 안했는지, 겨우 30분 걸었는데 저 모양이다. 세레나는 간신히 내 앞까지 와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래도 귀족이랍시고 헥헥 거리지 않 으려고 입을 열지 않고 코로만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 처음 걷는거냐? 아직 30분도 안걸었는데 벌써 왜그래?" "집에 있을 때는 마차만 타고 다녀서……." 얼씨구, 자랑이다. "자, 다 쉬었으면 빨리 가자." 난 앞장서서 걸었다. 한걸음, 두걸음……응, 왜 안따라와? 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세레나는 굼뱅이 걸음으로 기어오고……. "야!!!" 결국 우리는 걷는 것을 포기하고 길가에 있는 택시(가 아니라, 자가용 마 차(自家用 馬車))를 잡아탔다. 우리는 지금 매우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저택 앞에 있는 길 한 구석탱이에 서있다. "여기냐?" "예." 난 힐카인 후작이란 놈의 저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3층짜리 흰색 건물 인데 정원이 우리 학교 운동장 반만하다. 문 앞에는 띠껍게 생긴 떡대 두 명이 창을 들고 서 있고, 간간히 개소리가 들려 오는 걸로 봐서, 정원에 개 떼를 풀어 놓은 것 같다. 물론 치와와나 푸들 종류는 아닐 것이다. 바우와 우 같은 똥개 종류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도배르만, 세퍼드, 진돗개 등등 안봐도 비디오다. 그렇다면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는 것은 무리 일테고…… 역시 공중으 로 잠입하는 수 밖에 없겠지!? 난 후작이란 놈의 저택을 완전히 탐사(관광)한 다음, 세레나에게 말했다. "가자." 뒤에서 세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정말 후작의 저택으로 처들어갈 생각이세요?" 난 뒤따라오는 세레나와 속도를 비슷하게 맞추었다. 세레나가 내 옆에서 나란히 걷게 되자, 난 대답했다. "물론." 세레나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작의 저택은 위험해요." "세상에 안 위험한 일이 어딨어? 그리고 이 방법 밖에는 없잖아." "그래도 후작의 저택은 너무 위험해요. 차라리 숙부님을……." 난 세레나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넌 그 새끼를 아직까지 숙부님이라고 부르냐?" 세레나는 내 표정을 보고는 약간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진짜 그 숙부라는 새끼 생각만 해도 피가 끓어 오른다. 어떻게 16살짜리 조카를 사창가에 팔아 넘길 생각을 했을까? 그 새끼 인간맞나? "저, 저기……." 난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세레나를 보고, 머리 끝까지 올라왔던 피를 다시 발바닥으로 내려 보냈다. 내가 당한일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열받는거지? "어쨌든 리나드라는 놈은 안돼." "왜요?" 귀족집 딸이라고 깝죽거릴 때는 언제고, 지금 보니 매우 무식하군. 난 한숨을 푹푹쉬며 세레나에게 말했다. "몰라서 묻냐? 니 숙부란 놈은 일이 어떻게 되던간에 죽게 되있어. 너 같 으면 죽을꺼 뻔히 알면서 협조를 해주겠냐? 반면 후작을 족치면, 그 놈은 모든 죄를 리나드에게 덮어 씌우고 자기는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을껄. 그러니까 내가 후작에게 찾아가서 잘 부탁하면 니네 부모도 다 구할 수 있 을꺼야." 세레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부탁한다고 해서 후작이 도와줄까요?" 난 걸음을 멈추고 세레나를 야려 보았다. 진짜 짜증난다. 지금 이 여자는 내가 부탁이라고 했던 말을 아주, 지극히 사전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고있 다. 자기는 정말 순수한 환경속에서만 살아왔다고 주장하듯이……. 난 다시 걸음을 재촉하면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입안에 칼 쑤셔 넣고 부탁하면 어떤 부탁이든지간에 다 들어줘." "……." 할말 없지? 메롱. "그런데, 지금 어디가는 거에요?" "옷가게." 난 고개를 돌려 세레나를 한번 본 다음 그 뒤의 말을이었다. "20일 동안이나 속옷도 안갈아 입었더니 찝집해 죽겠다." 그 순간 세레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20일이요?" "응. 10일째 되는 날, 뒤집어 입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갑자기 날 보는 세레나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더러운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난 기분이 나빠져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도 5일 동안 안 갈아입었잖아." "그,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요!"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사실이었다. 우리는 3일 동안 마차를 타고 오면서 1개의 도시와 4개의 마 을을 지나쳤지만, 내가 계속 재촉하는 바람에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 면서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당연 옷가게에 가 옷 살 시간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 입자고." 그 후, 우리는 몇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 옷가게의 위치를 알아냈다. 세레 나의 얼굴을 본 몇몇 남자들은 침을 흘리며, 옷가게까지 친절하게 모셔다 드리겠다고 말했지만, 난 정중히 거절했다. 개중 몇 명은 나의 정중한 거절 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친절봉사 써비스를 베푸려고하는 바람에 난 청룡도 까지 빼들어야 하는 수고를 겪어야만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종류의 옷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고, 한쪽 탁 자에 아주머니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서오세요. 무슨 옷을 찾으시나요?" 난 손가락으로 세레나를 가리켰다. "이 여자 입을 옷 좀 사려구요. 평범한 걸로 몇 벌 골라주세요." "어머, 애인이신가보죠?" 난 세레나의 얼굴을 한번 본 다음 말했다. "아내입니다." "어머, 그러시군요. 아내 분이 정말 미인이시네요." 주인은 부러운 눈으로 세레나의 몸을 잠시 훝어 보더니 몇가지 옷을 골라 주었다. 난 그 옷들을 한번 쓰윽 본 다음 말했다. "갈아 입고와." 주인이 친절하게 가게 한쪽을 가리켰다. "탈의실은 저쪽입니다." 세레나는 탈의실로 가고, 난 내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난 몇가지 옷을 훝 어보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무슨 옷이 이러냐? 화려한 옷은 무슨 광대복장 같고, 평범한 옷은 전혀 평범하지 못하다. 다 른건 다 참겠는데 대체 이 몸빼바지는 뭐냐? 난 3분 정도를 고른 끝에 그나마 제일 무난하게 생긴 검은 옷을 한벌 골 랐다. 어디까지나 그나마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이거 입고 서울 시내 돌 아다니면 지나가는 사람들 한번씩은 다 처다보겠다. "어머, 너무 잘 어울리세요!" 주인 아주머니의 진심어린 탄성에 난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평범하 게 생긴 파란 옷을 입은 세레나가 서 있었다. 깜깜한 밤일수록 달은 빛나 보이고,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해야 말로 휘양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법 이다. 지금 세레나의 모습이 그러하다. 옷이 날개라는 말을 아는가? 이 말은 졸라리 이상하게 생긴 년도 제대로 입혀놓기만 하면 인간같아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에는 옷이 인물 을 뒷받침해주는 경우고, 지금 세레나의 경우는 완전히 그 반대였다. 평범 한 옷 때문에 오히려 세레나의 미모가 더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세레나는 수줍게 물었다. "어때요? 어울려요?" "뭐, 그런대로 봐줄 만해." 젠장, 얼굴 빨개진 거 들키면 어쩌지? 난 당황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돌아서서 옷을 고르는 척 했다. 이 미 다 골랐지만……. "나도 옷이나 갈아 입어야겠다." 난 빠르게 세레나를 스쳐지나가 탈의실로 들어갔다. 아! 이곳에서 세레나 의 채취가 물씬 풍겨오는 구나! 이 17세의 건장한 청년의 마음을 송두리채 뺏아간 그대의 이름은 세·레·나! 내가 이젠 완전히 미쳤구나! 원래 세계 로 돌아가면 정신병원이라도 한번 가봐야겠군. 난 옷이 몸에 걸리적거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항상 힙합바지와 남방 을 입는다. 힙합바지의 장점은 다리에 달라붙지도 않고 통풍도 잘된다는 것이다. 남방은…… 글쎄? 그냥 좋아서 입는다. 뭐, 옷입는데 꼭 이유가 필 요한가? 난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왔다. 내 체형보다 약간 큰걸로 샀기 때문 에 움직임에 별 불편은 없었다. 하지만…… 디자인이 졸라리! 졸∼라∼ 리∼!! 마음에 안든다. 패션의 선두주자인 내가 이런 쪽팔리는 옷을 입어야 하다니……. 차라리 벗고 다닐까? 난 한숨을 푹푹 쉬며 주인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주문제작은 안하나요?" 주인은 내가 또 뭔가를 살 것 같은 뜻을 비추자, 입이 찢어지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로 저게 상인정신이야! "물론합니다, 손님. 저희 가게에서는 손님이 원하시는 모든 옷을 제작해 드립니다." 난 벗어 놓은 힙합바지와 흰색 남방을 주인에게 건내주었다. "지금 이 옷들과 똑같은 걸로 만들어 주세요. 크기, 모양, 전부 똑같게요."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웃옷은 3벌 바지는 2벌이요. 색상은 전부 검은색으로 해주세요." "검은색으로요?" "예. 전부 검은색으로요. 아주 새까만 색으로요." 주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부 해서 얼마지요?" 주인은 종이에 열심히 끄적거리며 말했다. "음, 부인 옷 7벌과 손님옷을 합하면…… 전부해서 38골드입니다." 난 세레나를 보았다. 세레나는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난 시선을 아래로 이동시켜 세레나의 손을 보았다. 어느새 세레나의 양 손 에는 옷이 들어있는 종이팩이 가득 들려있었다. 가득??? 어! 저 년이 언제 저렇게 많이 골랐지? 몇 벌사라고 했더니 7벌이나 사? 지가 돈낼것도 아니면서! 썩을년! 난 분을 삭이면서 주인에게 말했다. "저기 주문한 옷은 언제쯤 찾을 수 있지요?" "3일 후에 찾으로 오십시오." 난 주머니에서 50골드를 꺼내 올려 놓았다. "이 옷들 빨아주시고, 주문한 옷을 내일까지 만들어 주신다면 50골드를 내겠습니다." 갑자기 주인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앞에 있던 금화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 추었다. 주인은 어느새 생글생글 웃으며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주인은 종이를 건내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손님. 내일 찾으러 오십시오." 종이를 보니…… 영수증이구만. 난 종이를 주머니에 집어 넣은 다음, 망토를 걸치고 가게를 나섰다.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잠시 우리는 말 없이 걸었다. 세레나는 '이 옷들이 너무 무거워요!' 라는 제스처를 해보였지만, 난 무시했다. 내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세레나 는 방법을 바꾸었다. "아, 이게 너무 무겁네요. 누가 좀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숙녀가 무거 운 짐을 들고가는데……. 아이, 너무 무거워라!" 저 싸가지 없는 년이? 지가 샀으면 지가 들어야지 누구 보고 들라 그래? 돈도 안낸 주제에 말이야. "너무 무겁네요. 원래 레이디가 무거운 짐을 들고가면 대신 들어주는게 예읜데……." 세레나는 혼자 궁시렁거리며 말했지만, 실상인 즉, 완전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세레나가 궁시렁 거리는 말이 아니였다. 계집애가 옆에서 궁시렁거리는 것은 참으면 되지만, 나를 노려보는 저 많은 남자들 은 어찌 해야한단 말인가! 사지가 멀쩡한 남자가 앞장서서 걸어가고, 그 뒤를 가녀린 여자가 무거운 짐을 들고 따른다. 보통 때라면 별 신경 안써도 될 일이겠지만…… 여자가 졸라리 예쁘다! 이러면 얘기가 완전히 틀려진다. 졸라리 예쁜 여자가 무거 운 짐을 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를 제외한 모든 남성들은 결코 참을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낸다. 나야 뭐, 남녀평등 사상법에 근거하여, 여자도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자가 팔이 없냐? 다리가 없냐? 새천년을 맞이한 지금, 3D업종에만 남자를 종사시킨다는게 말이나 되는 가? 여자도 무거운 짐을 지어야 한다. 여자도 막노동을 해야 한다. 여자도 군대에 가야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니가 내 대신 애 낳으면, 내가 니 대신 군대간다, 이 자식아!…… 쩝, 이러면 진 짜 할말 없다. 어쨌든 지금 길에 있는 남자들은 세레나가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어 반쯤 맛이 간 상태 였다. 저 눈물까지 흘리는 놈은 완전히 맛이 간 상태고. 한편, 지금 세레나를 향해 다가오는 저 남자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 다. '아름다운 레이디여! 그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내가 이렇게 왔 소. 이제 그대가 지고 있는 그 무거운 짐을 나에게 지어 주오. 내 그대를 위해서라면 지옥의 불구덩에라도 뛰어들겠소. 그대가 지고 있는 모든 짐을 내가 대신 짊어 지겠소.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무거워보이니 벗어서 내게 주시오. 내 그대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들어 주리라!' 미친 변태 새끼! 난 주위의 반응과 세레나가 궁시렁거리는 소리에 더는 참지 못하고 세레 나에게 말했다. "내가 들어……." "고마워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레나는 쇼핑백을 내밀었다. 정확히 4개의 쇼핑 백. 지는 하나도 안들고 전부 나보고 들라는 소리다. 난 열받아서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지만, 나를 야려보는 저 수많은 '레남모(레이디를 위하는 남자 들의 모임)' 회원들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4개의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내 가 세레나의 손에서 짐을 받아 들자, 많은 남자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표정은 '아, 저 짐을 내가 들고 싶어라.' '짐을 나에게 넘겨라!' '들고 싶다. 들고 싶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진짜 세상엔 별 미친놈들이 많이 있 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난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앞장서 걸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자 세레나는 쪼르르 달려와 나의 옆에서 걸었다. 우리 사이에 찬 바람이 쌩쌩 불고, 나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어지자, 세레나는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지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검은색을 좋아하시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옷을 전부 검은색으로 사셨잖아요." "검은색이 좋아서 검은 옷을 산건 아니야."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요?" "검은 옷은 오래 입어도 때가 안타잖아. 먹다가 흘려도 모르고. 한 3개월 정도는 안빨아도 되고." 세레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겨, 겨우 그 이유 때문에……?" "그 이상 중요한 이유가 어딨어!"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놀랐는지 세레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 아무리 그래도 그, 그런 비위생적인……." "시끄러! 니가 빨래 해줄 것도 아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왜 그렇게 말이 많어!!" "……." 세레나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만보며 걸었다. 괜히 이상해진 분위기에 난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야! 삐졌냐?" 세레나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전…… 빨래 할 줄 몰라요." "그래……." 휘이잉.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뺨을 스치면∼, 휘이잉. 잠시 동안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청소는? 요리는? 뜨개질은?" 세레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좌우? 신부 필수 과목…… 이 아니라, 인생 사는데 필수 과목을 하나도 할 줄 모른다고? 청소랑 요리는 나도 할 줄 안다. "그럼 할 줄 아는게 뭐야?" 세레나는 발끈하면서 말했다. "그, 그런 것들 말고는 다 할 줄 안다구요." 난 마음 속에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동안 잊고 지 냈지만, 세레나는 귀족이다. 레오즈 마을에서 설쳐댔던 다레이아 집안 놈들 과 똑같은 귀족이라는 말이다. 세레나의 얘기를 듣자 책에서 읽었던 귀족 놈들 한다는 짓이 생각났다. 지 손에는 물 한방울 안묻히고, 남들 부릴 줄만 알고. 나라가 어려워도 굶 어죽는 건 평민들이니 지네끼리는 배터지게 처먹어데고, 그것도 모자라 남 은 음식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할 줄 아는 일이라곤 평민들 등쳐먹는거와 왕한테 아부하는 것 밖에 모르는 쓰레기 같은 존재들.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과 똑같은 인간 말종들. 그래도 우리나라 국회의원 들은 할 줄아는게 좀 많다. 구라까기, 세금 삥당치기, 국민들 삥뜯기, 쓸데 없는 일에 돈쓰기, 남 씹어대기, 욕하기, 삿대질하기, 쌈질하기, 국회 개판 만들기 등등. 뭐 들리는 풍문에 따르면 서류심사시에 단증을 제출하면 가 산점이 붙는다고도 한다. 태권도 몇단, 합기도 몇단, 이런거 말이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말이야, 내가 어디선가 주어 들었던 건데 말이야. 귀족 부인들 하는 일이, 남의 집 족보 외우고, 수십명씩 몰려다니며 어떤 집 누가랑 누가 사 귄다라는 얘기하고, 술 퍼마시고, 춤추고, 도박하고, 그런 것 밖에 없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세레나는 눈을 치켜 떠 여우눈을 만들었다. "그, 그건 아니에요!" "그럼 또 뭐하는데?" "많은 책을 읽어서 지식을 쌓고, 예의범절을 익히고 사교를 위해 춤추는 것도 배우고, 또…… 또……." "비싼 옷 사는 방법 배우고, 비싼 장신구 고르는 법 배우고, 평민들 등쳐 먹는거 배우고, 하인들 괴롭히는거 배우고, 도박판에서 돈따는 법 배우고, 또 뭐 있냐?" "그런 것들은 안배워요!" "그래? 그럼 말구. 그런데 말이야…… 니가 배운 것들 중에 지금 이 상황 에서 써먹을 거 하나라도 있냐?" "……." 세레나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할 말이 없는지 얼굴만 붉혔다. 난 빈정거리 는 투로 말했다. "뭐, 아가씨 같이 고귀한 귀족님께서 그런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시 겠죠. 가만히 있으면 하녀들이 청소해주고, 밥 만들어주고, 최고급 드레스 와 장신구 달아주고. 아가씬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겠지요. 아가씨가 명령만 하면 똥오줌이라도 치워줄텐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무 도회 장에 나가서 다소곳하게 앉아있으면 멋진 남자가 와서 데려갈텐데 얼 마나 좋아요. 가뭄이나 홍수가 나 평민들은 굶어죽어도 아가씨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교양 쌓는 답시고 읽은 책 내용이란 것들은 전부, 국왕을 찬양하라, 귀족 들 잘났다, 우리 귀족들 덕에 평민들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 외에 쓸 데 없는 시문장들과 소설들. 아가씨가 읽은 책들 중에서 평민들의 생활에 대한 것은 하나도 없었겠지요. 가뭄이 들면 굶주림을 참다 못해 자기 자식 까지 잡아 먹어야하는거라든가, 폭설 때문에 집이 무너저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 내용들은 하나도 없었겠지요. 귀족들이 남의 딸이나 애인 등을 빼앗 아 첩으로 삼는 내용들은 하나도 없었겠지요. 귀족들에게 억울하게 죽어간 평민들 얘기는 하나도 없었겠지요." 난 말을 마치고 세레나를 보았다. 세레나는 울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 고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세레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세레 나가 다른 귀족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왜…… 왜 그런……?" 세레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나오는데로 지껄여 봤어. 지금 너 하는짓이 너무 병신 같아서." 세레나는 울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들어 날 쳐다 보았다. "귀족이었을 때는 돈있고, 권력있으니까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었겠지. 그런데 지금 넌 대체 뭐냐? 귀족이란 허울하나 벗으니까 완전히 병신된거 아냐? 니가 빨래를 할줄 알아, 요리를 할줄 알아, 읽은 책들이라곤 실생활 에는 전부 쓸데 없는 내용들이고. 뭐, 그나마 낳은 점을 찾으라면 그래도 얼굴 반반한 건 들수있겠네." 난 잠깐 말을 멈추고 울고 있는 세레나의 얼굴을 보았다. 진짜 반반하다! "여자는 외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고 하 지…… 만 진짜 좆까는 소리지. 안그래?" 세레나는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 보았다. "사람을 처음 봤을 때 판단하는 기준은 전부 외적인거야. 그 사람의 얼굴, 직위, 돈 그리고 쓰리 싸이즈(이게 제일 중요하다). 예전에 너는 모든 것을 갖추었겠지만, 지금은 외모 하나 밖에 안 남았지. 뭐, 그래도 얼굴 이쁜건 고맙게 생각해라. 솔직히 니가 못생겼으면 내가 널 도와 주기나 하겠냐?"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세레나는 이제 울음이 좀 진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 그랬던거지? "아니 뭐, 그냥.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은, 음∼ 음∼ 그러니까 말이야. 이건 누군가한테(영어 선생) 들은 말인데 여자 나이 40이면 인생의 내리막길이 라 그랬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듯이, 니 얼굴도 평생을 간다는 보장은 없지. 술집 가봐라, 돈만 주면 예쁜 여자 줄선다, 줄서. 그러니까 말년에 남 편 바람피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착실하게 살어! 착실하게!!" "???" "그러니까, 제대로 살라고! 집안에 처박혀서 인형처럼 가만히 있지만 말 고. 니방 청소 정도야 니가 할 수있는거 아냐? 꼭 그거 하나 하기 싫어서 하녀들을 부려먹어야겠냐? 청소하면 운동도 되고 좀 좋아!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서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데로 이래라 저래라 살다가, 나이 차면 다 른 귀족집에 시집가고, 거기서 애 낳고, 그 다음 죽고. 이렇게 살아서 무슨 재미가 있겠냐? 할 일 있으면 하고, 할 일 없으면 찾아서 하고, 그래야 인 생 사는 재미가 있지. 넌 저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도 느끼는게 없냐? 이 맑은 하늘 아래서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느끼는 게 없냐고!?" 이런 씨발! 난 내 말에 내가 감동해서 하늘을 처다보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지금은 비가 오려는지 우중충한 색깔의 먹구름이 껴서 맑은 하늘 은커녕, 태양조차 보이지도 않고, 사람들은 거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금 길에 있는 사람은 비가 올까봐 걸음을 재촉하는 몇몇 사람들 뿐이었다. "흠흠, 어쨌든 착실하게 살라는 말이야. 알았지? 착실하게." 난 말을 마치고 세레나의 눈치를 살폈다. 세레나는 고개를 숙이고 진지하 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3분 정도 지났을까? 세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요." "하하 그래…… 뭐!?" 고맙다고 하네. 그렇다면 이건…… 내가 한 인간에게 의지를 심어주었다 는 뜻! 되는데로 막살아가던 한 인간을 절망의 끝에서 구해주었다는 뜻!! 어두운 동굴에서 쓰러지던 인간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는 뜻!!! 갑자기 주위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으로 뒤덥히고, 저 하늘에 서 한줄기의 서광이 내려와 나를 비추었다. ♬빰빠바바바♬빰빠바바바♬빠바바바바♬빠바바바바바♬(국기에 대한 경 례) 난 밀려드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서서 쇼핑백을 내려 놓고,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갔다댔다. 아! 이 벅차오른 감동. 후둑, 후두두둑 아니? 이 영광스런 순간에 비가……! 난 그 순간 환상에서 깨어났다. 세레나는 멈춰서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 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미친거 아닌가 하고! 저 안 미쳤어요, 아가씨. "뭘봐? 뛰어!" 난 세레나의 손을 잡고 뛰었다. 다행히 여관까지는 거의 다 왔기 때문에, 금방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방으로 올라와, 뒹굴뒹굴 거리며 시간을 때웠다. 밤이 되어도 비는 계속 내리고, 어쩔 수 없이……. "안 그치네. 야! 아무래도 내일 가야겠다." "예." "잠이나 자자. 불꺼." "예." ……거사일은 내일로 미뤄졌다. <1권 끝> <아이리스 Iris> - 2권 - Part 1. 백작가 데릴사위 날씨는 화창하고, 마음은 심란하다. 우리는 낮에 잠깐 옷가게에 가서 주문 한 옷들을 찾아온 뒤로 계속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주인 아저씨는 나 를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하라고 하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방에서 안 나온다는 사실에 주인 아저씨는 여러가지 불필요한 상상을 하는 모양이었다. 일명 '2세 탄생 프로젝트' 였던가? "붕대는 왜 사오신거에요?" "이거?" 난 손에있는 물건을 들어보였다. "얼굴에 감으려고." "……?" "남의 집에 무단침입하는데 얼굴은 가려야 할꺼아냐? 그리고 혹시라도 다 치면 치료도 해야되고." 세레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 몇시냐?" "아마 9시 쯤일껄요." 9시라. 12시쯤은 되야지 쳐들어 갈텐데. "정말로 후작의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응." 세레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후작의 저택에는 클래스 4 익스퍼트인 대마법사가 있다구요. 당신이 아 무리 강한 마법사라도 그 자를 이길 수는 없어요." 흠, 마법사라. 상대 측에도 마법사가 있으면 약간 피곤해질 수있다. 마법을 사용하면 주 위의 마나가 움직이게 되고, 마법사는 그것을 감지 할 수 있다. 그렇게 되 면 몰래 들어가서 후작과 미팅하고 온다는 계획이 뽀록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좆되는거다. 하지만 지금은 늦은 밤. 마법사도 인간인데, 잠정도는 자 겠지? "난 클래스 5마스터야." "예?" 세레나는 벌떡일어나며 외쳤다. 얼굴에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굳은 의지 가 닮겨져 있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내가 너한테 구라까서 뭐하겠냐?" 세레나는 어느정도 수긍하는 눈빛이었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는 것 같았 다. 난 세레나에게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이 대륙에 마법사 능력은 어느 정도지?" 세레나는 어이벙벙한 얼굴로 나를 처다 보았다. 마법사면서 그걸 모르냐 는……. "빨랑 말해." 세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는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일단은 알고 있는데로 말씀드릴께 요." "좋을데로." "일단 마법사가 되려면 두가지 조건이 있다고 알고 있어요. 첫째는 마법 을 캐스팅하고 공간 좌표를 계산할 수 있는 머리고, 둘째는 마나의 운용능 력이죠. 실질적으로 그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 아요. 마법사라는 것은 선택받은 사람만이 될 수 있는거죠. 그 사람들이 평 생을 수련했을 때 클래스 3정도까지 갈 수 있다고 해요. 그리고 그 중에서 천재로 불리는 사람들은 약 클래스 4∼ 5정도. 아마 4클래스를 넘어가는 마법사 수는 한 국가에 100명 안팍일꺼에요." 한 국가에 100명? 무지하게 적군. "너무 적은거아냐?" "100명이란건 어디까지나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 숫자에요. 그 외 의 마법사들까지 치면 더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그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 지는 않을꺼에요." "마법사 숫자가 왜 그렇게 적은거지?" "마법사라는 직업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니까요. 자기 주위에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오직 마법 연구와 수련에만 매달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법사들 중에는 결혼도 안한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게다가 살상능력을 가지기 위해 서 검사들은 칼을 한번 휘두르면 되지만, 마법사들은 몇십년을 수련해야되 요. 진척도가 잘 보이지 않으니,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나 라에서는 마법사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 등을 설립해 놓았지만, 별로 그렇 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가이아스 건국 이후로 마법사 숫자는 계속 줄고 있는 실정이에요." "그럼 현재 대륙 최고의 마법사는 누구야?" "아토리아 왕국의 궁정 마법사인 라에즈 타마에가 클래스 8러너로 알려져 있어요." 겨우 클래스 8러너가 최고의 마법사? "그 사람 몇살이래?" "아마 올해로 87살일거에요." 살만큼 살았구만. 아니지 내가 아는 어떤 미친 늙은이는 150살까지 살았 는데. 난 담배를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 클래스5마스터 인가요?" "응. 뭐가 잘못됐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대륙 최고의 마법사인 셈이에요." "뭐?" 입을 크게 열다가 담배를 떨어트렸다. 어쩔 수 없이 발로 비벼서 끈 다음 한 개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이제까지 17세의 나이에 클래스 5를 마스터한 사람은 한명도 없어요. 넨 이드도 18살에 마스터했고, 죽음의 마도사도 18살에 마스터했어요." "죽음의 마도사?" 넨 이드는 가이아스 왕국의 건국을 도왔던 마법사라고 했고, 죽음의 마도 사는 또 누구냐? 별호가 매우 유치하군. "예. 현재까지 그 둘은 최고의 마법사로 알려져 있어요. 넨 이드는 전무후 무한 클래스 9마스터고, 죽음의 마도사는 클래스 8마스터에요. 그가 죽음의 마도사로 불리는 것은 그의 마법이 너무 잔인해서에요. 실제로 그는 전쟁 에 참여해서 수 만의 사람들을 죽였어요. 아토리아 왕국의 속국에 불과했 던 아이리스 왕국이 6나라중 하나로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전 장의 사신 덕분이었죠." "그 망해버렸다는 나라?" "예. 그는 아이리스의 궁정 마법사였거든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다 타오른 담배를 입에서 뱉어냈다. '아이언스 이그리 드' 이 늙은이도 클래스 9를 마스터한 마법산데 역사에는 이름이 남지 않 았군. 담배 연기 때문에 입안이 텁텁해저서 물을 한잔 따라 마셨다. "클래스 9마스터는 한명 더 있어." "예?" "나한테 마법을 전해준 늙은이, 그 인간도 클래스 9마스터였어. "그, 그게 정말인가요?" "어. 별로 상관 없는 얘기니까 그만두지. 그런데 엘프 중에 클래스 9마스 터는 없냐?" 세레나는 계속 말했고, 난 물을 마시며 그녀의 얘기를 들었다. "엘프들은 마법종족이라고 불릴만큼 마법에 소질이 있고, 인간의 열배가 넘는 수명을 살지만, 그들중에는 클래스 9마스터가 없어요. 전해지는 얘기 에 따르면, 그들은 별로 열심히 마법을 익히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클래스 7이나 8정도까지가 한계라고 해요. 그리고 그들이 마법을 익혔다 해도, 잊 혀진 숲 밖으로는 나오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별 상관 없을꺼에요." "……그래." 보통 판타지에서보면 아름다운 엘프 여인과 같이 여행 다니던데 말이 야……. "당신이 정말로 클래스 5마스터라면 어느 곳에 가도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어요." "그건 왜?" "아까도 말했지만, 5 왕국 전부 마법사가 부족해요. 특히 클래스 5이상의 마법사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지요. 그나마 그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요. 오 늘 내일 하는 사람들도 꽤있으니까요. 아마 17세의 나이로 클래스 5를 마 스터한 마법사가 나타났다고하면, 각국에서 모셔가려고 할껄요." "평민인데도?" "마법사는 평민이든 아니든 상관 없어요. 숫자가 워낙 적다보니 평민이라 도 능력만 있으면 작위를 주지요. 실제로 귀족이 되기위해서 마법을 익히 는 사람들도 있어요." 흠, 그래. 이 몸이 귀족이라? 그것도 괜찮겠는데.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출발해야 겠다." 세레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았다. 마치 가지말라고 애원하 듯이……. 내 착각인가? 난 세레나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야, 야. 걱정하지마. 내가 누구냐? 클래스 5를 마스터한 대마법사 아니 냐? 조용히 후작만 만나고 올테니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거기 서있지만 말고 얼굴에 붕대나 좀 감아봐." 세레나는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에 든 붕대로 내 얼굴을 천천히 감기 시작했다. "야! 눈은 가리지마. 눈 가리면 어떻게 작업하냐?" "예." 진짜 못감는군. 창문에 얼굴을 비춰보니 매우 이상하게 감겨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굴 은 다 가려졌다. 이렇게 감았는데 풀어지지 않았다는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마법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아서, 일단 세레나의 머리카락에 걸 려있는 마법을 해지했다. 역시 세레나는 검은색 보다는 초록색 머리카락이 더 잘 어울린다. 아무래도 흰색 망토는 너무 튀기 때문에 난 망토를 벗어 놓고 청룡도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 그 다음, 탁자위에 있는 물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약 5분 후, 마법진은 완성되고 난 그 위에 올라섰다. 도착 지점은 후작 저 택의 옥상!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난 세레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레나는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깜짝 놀랐다. 난 놀라서 얼굴을 만져보고, 그제서야 내 얼굴에 붕대가 감겨져 있 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동 마법을 써서 후작 저택으로 가려고. 조용히 들어가서 조용히 후작 과 대화를 나눈 다음, 조용히 나오는 거야. 어때?" 세레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 "달이 저렇게 밝은데 괜찮을까요?" "……." 음, 한가지를 깜박했구만. 난 캐스팅을 시작했다. "인비저빌리티." 내가 시동어를 외치는 순간……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다. 이러언∼ 마법 실팬가? 어디 다시 한번. "저, 저기요…… 저기요……." 갑자기 세레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꺅!" 내가 말하는 순간, 세레나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세레나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지금 어딨는거에요?" "나 여깄잖아." "어디요?" "나 여기……." 난 손가락으로 내가 있는 곳을 열심히 가리키다가 곧, 세레나가 왜 저러 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인비저빌리티 마법은 성공한거다. 음하하하. 그럼 그 렇지, 이 천재 마법사님께서 실패할 리가 없지! "지금 마법 걸어놔서 내 모습이 안보이는거야. 어쨌든 나 갔다 올테니까, 여기서 꼼짝말고 있어. 그리고 지금 내가 마법진 그려 놓은 주위에 절·대 아·무·것·도 놓으면 안돼!!! 알았어!?" 난 끝에 말을 매우매우 강조했고, 세레나는 엉뚱한 곳을 보며, 고개를 끄 덕였다. 난 확인 겸 한번 더 말했다. "잘못하면 공간의 틈새에 갇혀서 죽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나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여기에 아무것도 놓지마. 아예 이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마." 세레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무지하게 불안해진 다. 저 계집애가 어제 나한테 욕먹은거 복수하려고 여기에 아예 침대를 옮 겨 놓으면 어쩌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워프." 주위의 모습은 방안에서 도시의 야경으로 바뀌었다. 난 지금 후작 저택 옥상으로 워프한 것이다. "플라이" 난 하늘을 날아 옥상에서 정문으로 천천히 몸을 옮겼다. 주위에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 의 모습이 보였지만, 나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난 정문 앞에 몸을 띄운 채 계속 기 다렸다.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갈까 라는 생각을 할 때 쯤 한 하녀가 쓰레기통으로 보이는 것 을 낑낑대며 들고 나왔다. 난 그 순간을 놓히지 않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저택안 곳곳에는 불이 켜져있었다. 난 공중에 뜬채 계속 몸을 이동시켰다. 몇몇 사람들을 지나처가고 후작의 방으로 가던 나는 중대한 실수 한가지를 깨달았다. 젠장, 후작 방이 어디붙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나는 일단 후작방이 3층에 있을꺼라 예상하고, 3층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원래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높은 층에 있는 법이다. 3층으로 올라가자, 텅빈 복도의 모습이 보였다. 3층에 있는 방만해도 열 개가 넘었기 때문 에, 어디가 후작의 방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하녀의 모습이 보였다. 난 그녀를 따라갔다. "♬흐흐흥♬ 흥흥♬ 흐흐흐흐흥♬" 그녀가 코너를 도는 순간 난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그녀는 온몸을 뒤틀며 소리를 지르 려했다. 난 한손으로는 그녀의 몸을 감싸고 다른 한손으로는 그녀의 입을 꽉 막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녀는 반쯤 맛이 간 것처럼 보였다. 하긴 안보이는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껴안고 있고 목소리까지 들려오는데…… 완전 맛가지 않은게 정말 다행이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만약 거짓으로 대답을 한다면, 그 즉시 죽여버리 겠다. 알겠나?" 하녀는 오로지 살고자하는 욕망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시 그녀의 귓가에 속삭 이듯이 말했다. "후작의 방은 어디냐?" 그녀는 손을 뻗어 한 방을 가리켰다. 난 그녀가 가리키는 방을 확실히 기억해뒀다. "그럼 이제 그만 쉬어라. 슬립Sleep." 그녀는 몸이 풀린 듯 축 늘어졌다. 귀를 대보니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잠든 것이다. 난 그녀를 안 보일 만한 곳으로 끌고가 그곳에 눕혔다. 내일 아침이면 깨어나겠지. 난 하녀가 가르처준 방으로 몸을 이동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안에 불은 꺼져있 었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으로 주위의 사물 정도는 분간 할 수 있었다. 커다란 방 한 쪽에는 침대가 놓여있고, 그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난 그 침대에 서서히 다가가, 마법을 해지해 모습을 드러낸 다음 땅에 발을 딛였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수염 을 길게 기른 늙은이였다. 아마 이 자가 후작일 것이다. 난 조용히 청룡도를 빼들고 누워있 는 늙은이의 목에 겨누었다. 그때 그 늙은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웁." 난 손으로 그 늙은이의 입을 막고 청룡도를 목에 갔다댔다. "소리 지르면 죽여 버리겠다. "끼아악∼." 어쭈 이자식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만. 소리 지르면 죽인다고 했는데 소리를 질러…… 잠 깐, 지금 이 자식은 입이 막혀 있잖아. 그리고 방금 그건 여자 비명소린데. 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15세 정도로 보이는 예쁘장한 소녀가 이불로 몸을 가린채 죽어 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후작이 뜨거운 밤을 같이 보내기 위해 방안 으로 끌어들인 하녀 같았다. 다 늙어서 정력이 넘처나나 보다. 씨발, 부럽다. "끼아아악∼." 소녀는 내 얼굴을 보더니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한밤중에 얼굴에 흰붕대를 감고 나타 난 의문의 사나이. 설마 미이라 처럼 보이지는 않겠지? 어쨌든 이 미친년이 질러대는 소리 때문에 조용히 일을 처리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물건너 갔다. 난 소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꺼져." "끼아악!" 소녀는 그 말을 듣자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알몸으로 방안을 뛰쳐나갔다. 난 잽싸게 고개를 돌렸지만, 타이밍이 조금 늦어 토실토실한 엉덩이 밖에 보지 못했다. 여자의 나체를 올 라이브All Live로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깝다. 그나저나 이젠 어쩌 지? 사병들이 몰려올텐데. 난 띠꺼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후작을 슬립Sleep 마법으로 잠재웠다. 바깥의 복도는 소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난 청룡도를 꽉 움 켜쥐고 복도로 나갔다. "으아아아." 칼을 뽑아든 사병이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톤스킨." 키기긱- 내가 시동어를 외친 순간과 그 자식이 칼을 내리친 순간은 동시였다. 칼은 기묘한 마찰음 을 내며 옷을 뚫고 내 몸을 긁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몸이 잘리는 일만은 면한 것이다. 내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내가 알던 싸움과는 차원이 틀리다. 그 자식은 칼을 옆으로 휘둘렀다. 난 순간적으로 왼팔을 들어 막았다. 카앙-! 쇠가 부딪히는 마찰음이 생기며 그의 검은 튕겨져 나갔다. 팔이 부러질 듯 아파왔다. 마나 를 왼팔에 집중시키지 않았다면 팔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그가 검을 내리치려는 모습이 보였다. 난 반사적으로 온힘을 다해 청룡도를 휘둘렀다. 난 나의 도가 부딪혀 그의 검을 막을 줄 알았다. 막기 위해 휘둘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틀렸 다. 청룡도의 위력을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부딪힌 그의 검은 잘려나가고 청룡도는 호선을 그리며 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주위의 모든 것들이 느려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 지 않았다. 주위의 시간이 느려진 것인지 내 의식의 흐름이 빨라진 것인지 알수 없었다. 난 손에 힘을 빼려고 했다. 제발 청룡도가 멈추어 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가속도가 붙 은 청룡도는 계속 날아가 그의 목에 하나의 선을 그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천천히 왼쪽으 로 움직였다. 그리고…… 절단면을 따라 움직이던 머리는 바닦에 떨어졌다. 그의 목에서는 피가 솟구쳤고, 머리는 바닦을 굴러 내 발에 부딪혔다. 난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저, 저자는 날 죽이려 했어. 그래서 죽인거야.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어. 나, 난 최선의 선택을 한거야. [니가 죽였다.] 아니야. 아니야. 난 죽이지 않았어. 난 주위를 살펴보았다. 목이 분리된 채 쓰러져있는 시체의 모습과 복도 양쪽에서 칼을 들 고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들이 왜 이쪽으로 오는거지? [너를 죽이기 위해서다.] 나를 죽이려 오는 거라고? [그렇다. 살고 싶은가?] 그래. 살고 싶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거야? [죽여라.] 뭐? [저들은 널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다. 살고 싶다면 저들을 죽여라] 안돼. 난 못해. 나, 난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넌 이미 사람을 한명 죽였어. 또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건 없잖아?] 아니야 내가 죽인게 아냐. 난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니가 죽이지 않는다면 저들이 널 죽일거다.] 아니야. 아니야. 난 살고 싶어. 난 아직 죽기 싫어. [세상은 약육강식, 강하면 살고 약하면 죽는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죽기전에 죽여라] 나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까워 지고 있다. 그들은 칼을 높이 처들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말이 머릿속에 각인 된다. [죽여라.] 난 웃었다. 달려오는 그들을 향해 웃음 지었다. [그래. 그거다. 죽여라. 저들은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들이다. 너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이다. 지금 기분이 나쁘지? 걱정하지마 저들을 죽이면 기분이 좋아질꺼야.] 정말 그럴까? [물론이지. 아까의 녀석의 목을 자를 때의 감촉을 잘 생각해 봐. 어땠지?] 모, 모르겠어. [모른다고? 천만에, 넌 알고 있어. 살과 근육, 뼈를 자르는 감촉이 칼을 타고 손으로 전해 졌잖아. 그리고 그 순간 너의 몸에는 전율이 느껴졌지. 니가 느끼는 것은 나도 느낄 수 있 어. 아까 그 놈의 표정을 생각해봐? 널 두려워 하고 있었어. 넌 예전의 니가 아니야. 너에게 는 힘이 있어. 하지만 저들은 널 무시하고 있어.] 무시해? 날? [그래. 그러니까 다시는 널 무시하지 못하게 혼을 내줘. 니가 지닌 강한 힘을 보여줘서 저 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어. 그럴꺼지? 어?] 그의 말은 달콤했다. 이런걸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하는건가? 난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럴게. 난 내 앞에 있는 놈에게 청룡도를 휘둘렀다. 청룡도는 놈의 칼과 갑옷을 베고 몸속까지 파 고 들었다. 기분 좋아. [그렇지? 기분좋지?] 응. 난 미친 듯이 청룡도를 휘둘렀다. 놈들은 나를 공격했지만, 나의 몸을 건들지는 못했다. "……셋, 넷, 다섯……." 난 숫자를 셌다. 내가 왜 숫자를 세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숫자를 세면 기분이 더 좋아질 것 같았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서있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었다. 어떤 사람은 허리가 잘렸고, 어떤 사람은 목이 잘렸다. 또 어떤 사람은 양팔이 잘리고 심장이 꿰뚫렸다. "……열." 내가 열까지 셋을 때, 서있는 사람은 한명 뿐이었다. 얼굴에 검버섯이 핀 늙은이었다. 아까 나에게 불덩이를 던진 놈이다. 날 무시했어. 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뒷걸음질 치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빛의 화살이 날아와 나에게 부딪혔다. 불덩이가 날아와 나에게 부딪혔다. 전기가 날아와 나 에게 부딪혔다. 어느새 그와 나에 거리는 반보로 줄어있었다. 난 청룡도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내리 그었 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보인다. 청룡도는 그의 두개골을 파고 들었다. 청룡도 는 점점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의 몸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물컹한 느낌인데. 지금 뇌를 자르고 있는 건가? 이젠 갈비뼈. 키킥, 이번엔 내장인가? 기묘한 감촉이 청룡도를 타고 내 손 끝에 전해진다. 온몸이 전율로 떨리고 있다. 힘! 지상 최강의 마법사가 전해준 힘! 이 힘만 있으면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나를 위협하지 못한다. 내 앞에 서 있는 늙은이의 몸이 둘로 나누어지기 시작한다. 척추를 중심으로 정확히 그어 놓은 선에 따라 나누어진다. 한 부분은 왼쪽으로 쓰러지고, 다른 한 부분은 오른쪽으로 쓰러 지면서 몸안에 있던 장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간, 신장, 창자, 내장 등등. 난 핏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장기들을 보고 웃었다. "열 하나." 난 피가 흥건한 복도에 쓰러져 있는 열한구의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죄책감 같은 것은 느 껴지지 않았다.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제…… 할 일을 해야겠지? 난 방으로 들어가 후작을 깨웠다. "네, 네 녀석은 대체 누구냐?" 난 대답하는 대신 후작의 멱살을 잡아 벽에다 밀어 붙였다. 그리고는 피 가 뚝뚝 떨어지는 청룡도를 목에다 들이댔다. 나는 억지로 씩 웃으며 물었 다. "니가 힐카인 후작이냐?" "그, 그렇다. 넌 대체 누구길레 이런짓을 하는거냐?" 난 후작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닥치고 묻는 말에 대답해. 니가 레이트 백작을 모함했나?" 갑자기 레이트 백작 얘기가 나오자 후작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위엄을 지키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런적 없다. 레이트 백작은 반역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에 잡혀간 것 이다." 난 후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자식은 거짓말에 도가 텄는지, 내 눈을 피하려 들지도 않았다. 하여튼 정치하는 놈들은……. "정말인가?" "그렇다. 난 레이트 백작과 일절 관련이 없다." 난 고개를 숙이고 후작의 멱살을 잡은 손을 늦추었다. 후작은 목을 꽉 죄 고 있던 손이 풀리자 살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관련이 없단 말이지. 그럼 내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모양이군. 죽 어라!" 난 눈을 부릅뜨고 후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청룡도를 들어 후작을 찌 르려는 자세를 취했다. "자, 잠깐. 나한테 대체 왜이러는 거냐?" "관련이 있다면 협박이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레이트 백작과 일절 관련이 없다고하지 않았나? 협박할 가치도 없는 놈은 죽어야지. 그럼 잘가라." 난 말을 마치고 청룡도로 녀석을 찔러 들어갔다. "잠깐!" 후작이 외치는 소리와 함께 청룡도는 후작의 목을 스치고 벽에 박혔다. "왜 그러나?" "내가 했다. 내가 모함했다." 후작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사실을 토해냈다. 난 후작을 땅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얼굴에 청룡도를 겨누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알겠군." 후작은 계속 떨고 있었다. 난 청룡도를 점점 후작의 목 가까이 들이대며 말을 이었다. "레이트 백작은 나의 은인이다. 3일내로 구해내라." 후작은 당황하며 외쳤다. "자, 잠깐. 이미 그는 그의 신병은 국왕 전하께 넘어갔다. 그러니……." 난 녀석의 멱살을 잡아 다시 일으켰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곳까지와서 부탁하는거아냐. 그리고 지금 난 니 죄를 묻고 있는게 아니야. 그 리나드라고 하는 놈한테 죄를 전부 뒤집어 씌우든지해서 구해내란 말이야. 알았어!?" 공포에 떨고있는 힐카인 후작의 모습이 내 눈동자에 비쳤다. "아, 알겠다. 하지만 3일은 불가능하다. 일주일만다오. 일주일이면 내가 어 떻게든 해보겠다." "일주일?" 난 잡고있던 후작의 멱살을 놓았다. 목이 자유로워지자 후작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밖으로 나가 복도에 가서 쓰러져있는 시체 한구의 머리 를 붙잡아 한손으로 들어올려 후작 앞으로 다가갔다. 후작은 내가 갑자기 시체를 손에 들고 나타나니까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머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콰직, 콰직, 콱 이상한 소리를 내며, 두개골 안으로 손가락이 파고 들었다. 힘의 강도를 높히자 퍽 소리를 내면서 두개골이 완전히 함몰됐다. 시체의 머리에서는 뇌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면서도 별로 잔인하다는 느낌 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난 시체를 바닦에 떨어트 렸다. 그리고 오른쪽 가슴에 부분을 청룡도로 그었다. 갑옷과 살, 뼈가 한 번에 잘리는 느낌이 청룡도를 타고 내손에 그대로 전해져왔다. 다 잘라내 고 그 부분을 들어냈다. 붉은 심장의 모습이 보였다. 난 무엇에 홀린 듯 손 을 뻗어 심장을 움켜쥐었다. 따뜻함이 느껴졌다. 불과 5분전까지만 해도 살 아서 움직이던 심장이었다. 난 심장을 움켜쥔 손을 서서히 들었다. 여러개 의 핏줄이 딸려 올라오고 있었다. 난 사납게 그 핏줄을 뜻어냈다. 난 도려 낸 심장을 들고 후작에게 걸어갔다. 후작은 두려움과 공포로 이미 제정신 이 아닌 것 같았다. 나도 지금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난 억지로 후작의 입을 열어 그 안에 방금 도려낸 심장을 처넣었다. "우웩, 우웨엑." 후작은 입안에 사람의 심장이 들어오자 토를 하기 시작했다. 난 아무 느 낌없이 후작이 사람의 심장을 입안에서 뱉어내는 모습을 보았다. 난 후작 의 머리카락을 잡고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얼굴을 가져다 댔다. 후작은 이미 날 인간으로 보고있지 않았다. 난 그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좋아. 일주일에 시간을 주지. 만약 그때까지 일이 해결되지 않았을 시에 는 니 심장을 니가 먹게 될거다." 후작은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웃음을 지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한 꺼번에 밀려오고 있었다. 난 이불을 들어 손과 청룡도에 묻은 뇌수와 피를 닦아 냈다. 내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을 생각했다. [돌아가라.] 난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말에 따라 행동했다. 청룡도에 묻은 피로 바닦 에 이동 마법진을 그렸다. 아마 이 마법진을 보고 추적할 수 있는 자는 이 세계에 없을 것이다. '이그리드' 그 늙은이 보다 강한 마법사라면 모를까. 마법진을 다 그린 다음, 난 그 가운데 섰다. "워프." 시동어를 외치자, 마법진에서 빛들이 뿜어져 나와 내 몸을 감쌌다. 주위의 모습이 바뀌었다. 걱정하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세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난 무표정한 얼굴로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세레나는 걱정하는 표정 으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아마 내 몸에 묻은 피를 보고 말하는 것 같다. 난 웃었다. 왜 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웃어야 할 것만 같았다. "괜찮냐고? 크흐흐, 당연 괜찮지.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 보여줄까?" 쾅쾅쾅-! 난 방의 벽을 미친 듯이 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쳤을까? 손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난 혀로 손에 묻은 피를 핥았다. "크하하. 오늘 얼마나 재밌었는지 알어? 넌 상상도 못할걸. 글쎄 오늘 내 가 11명이나 죽였어. 크하하하. 11명이라고 11명. 어? 하나가 모자르네." 난 미친 듯이 웃으며,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세레나를 향해 10손가락 을 쫙 펴보였다. "크하하하하. 이제까지 맞고 살기만했던 박영웅이 이제는 11명이나 죽였 다고, 그것도 보통 놈들이 아니였어. 크크, 보통 놈들이 아니였지. 기사 10 명에 마법사 1명. 오늘 얼마나 즐거웠는지 알어? 내가 그중 한놈은 심장까 지 뽑았다고. 어? 아가씨. 으하하하하." 난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칠 것만 같 았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서부터 엉킨거지?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된거야? 나, 난 죽일 생각이 없었어. 난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니가 죽였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레나의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너, 넌 대체 누구야?" [난 너다.] "웃기는 소리하지마!" [넌 사람을 죽였어.] "아니야. 내가 죽인게 아니야. 니가, 니가 시켰잖아!" [내가 시켰다고? 천만에, 난 너 자신이다. 난 니 안에서 꿈틀대는 본성을 밖으로 표현하게 해준 것 뿐이다.] "본성?" [그렇다. 넌 그동안 당하고 살아와서 모르겠지만, 니 본성은 그 누구보다 도 잔인하다. 그 놈들이 널 괴롭힐 때도 넌 힘이 없어서 당하고만 있었지. 하지만 니 머릿속에서 그 놈들은 몇백번이고 찢겨저 죽었어. 너한테 힘만 있었다면, 넌 그 자리에서 그 놈들을 죽였을꺼다. 넌 이제 예전의 박영웅이 아니야. 넌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얻었어. 본능에 따라 행동해라.] 그의 말투는 순간순간 바뀌었다. 어떨 때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하기 도 하고, 어떨 때는 달콤한 말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잘 알아둬. 죽음과 파괴. 이것이 너의 본성이다. 아까 사람들을 죽이면서 쾌감을 느꼈던 것은 너도 부인할 수는 없겠지? 안그래?] "아냐. 난 그런적 없어." [그 때의 일을 잘 생각해봐. 그 때 느껴지던 전율을……] "싫어! 싫어!! 싫어!!!" 난 비틀거리며 뒷걸음 치다 침대에 주저 앉았다. 난 두손을 눈 앞에 갔다 댔다. 두 손에는 마른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난 그 손을 보며 미소 지 었다. 두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세레나는 나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괜찮으신거에요?" "어? 괜찮냐고? 어, 괜찮아. 난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아. 나…… 난…… 으 아아아아!" 난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안고 소리질렀다. 내가 죽였던 사람들이 눈 앞에 보였다. "하아, 하아, 하아." 난 거친숨을 내쉬었다. 씻고 싶다. 이 피 뭍은 옷을 빨리 벗어 버리고 싶다.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난 얼굴을 감고 있는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옷을 벗었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 놓고 싶었지만, 손가락 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난 겨우 옷을 다 벗고 알몸이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세면대를 향해 걸었다. 손을 물에 담그자, 물은 순식간에 붉은색 으로 바뀌었다. 난 몸을 닦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몸에 뭍은 피를 씻어 내고 싶었다. "제가 해드릴께요." 세레나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나를 닦아 주었다. 피는 오래전에 굳어 있 었다. 세레나는 느린 동작으로 나의 온몸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세레나 는 마른 수건으로 몸을 한번 더 닦아 준 다음, 나에게 옷을 건내주었다. 난 천천히 그 옷을 입었다. 난 남방의 단추를 잠가 보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떨리고 있어 불가능했다. 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침대에 주저 앉았 다. 세레나는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옷의 단추를 하나씩 잠가 주었다. 난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내, 내 배낭에 다, 담배 좀……." 내 목소리는 이상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만 떨고 있던 것이 아니라 온몸을 떨고 있었다. 세레나는 담배와 라이타를 나에게 건내주었다.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타의 부싯돌을 돌리 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난 손을 떨다가 라이타를 놓쳤다. 세레나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것을 집어 불을 붙여 주었다. "물 떠다드릴께요." 세레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난 세레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안돼! 가지마. 계속 내 옆에 있어. 떨어지지마. 제발." 세레나는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알았어요. 계속 옆에 있을께요." 세레나는 다시 내 옆에 앉았다. 난 한손으로 담배를 피면서 다른 한손으 로는 세레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만약 세레나가 조금이라도 나에게 떨 어진다면 그 놈이 다시 말을 걸어 올 것 같았다. 난 세레나의 손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가지마. 가지마. 계속 내 옆에 있어야돼. 알았지? 그럴꺼지?" 세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는 어느새 다 타들어가 난 다시 한 개피를 꺼내었다. 담배를 피고 싶지 않았다. 담배의 맛도 느낄 수가 없 었다. 단지 담배를 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난 담배를 피면서 계속 세레나를 보았다.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혼자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계속 피워대던 담배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비어있는 오른 손을 보았다. 오른손을 다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따뜻한 느 낌이 나를 지배했다. 뭉클한 느낌이 얼굴에 전해저왔다. 세레나는 가슴에 나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너무 피곤해서 그런거에요. 그만 쉬세요." 몸에 떨림이 멈추었다. 난 두팔을 들어 그녀를 안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 도 없다. 그녀의 말대로 쉬고 싶다. 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난 눈을 떴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난 세레나의 품에 안긴 채 계속 창문을 바라보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세레나는 가끔씩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따뜻하다. 쉬고 싶었다. 이대로 세레나의 품에 안긴 채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의 풍경은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밤이 찾아 온 것이다. 어제와는 또 다른…….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후둑, 후둑, 후두둑. 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밥 먹자." 나와 세레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사를 했다. 세레나의 머리카락은 다시 검은색으로 바 꾸어 놓았다. 난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밖을 주시했다. 비 내리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밥을 다 먹은 다음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고 맨 정신으로 있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독하다는 '드래곤 하트'라는 술을 열병째 마셨것만 취하기는커녕, 어떻게 된 일인지 정신이 점점 더 맑아저 오고 있었다. 잔에 담겨진 붉은색의 술을 보니, 내가 술을 마시고 있는지 피 를 마시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난 잔에 있는 술을 헌번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걱정 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 세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걱정하지마. 이정도로는 안취해." 난 술병을 들어 잔에 따랐다. 잔에 담겨진 붉은색 액체가 일렁이면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 과 겹처 보였다. 난 그 생각을 지우기위해 술을 마셨다. "이제 그만하세요. 많이 취하셨어요." "취해? 내가 취했다고? 웃기는 소리하지마. 닥치고 술이나 따라봐." 난 희미하게 풀린 눈동자로 세레나를 보며 술잔을 내밀었다. 세레나는 체면한 표정으로 술 병을 잡았다. 잔에 일렁이는 붉은색 액체가 채워지자 나는 다시 그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겼 다. "어이! 이봐. 아가씨 꽤 미인인데. 어때, 저런 술주뱅이는 놔두고 우리랑 놀아보는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난 고개를 들었다. 세레나 뒤에 5명의 남자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 한명은 세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슴을 더듬으려 하고 있었다. 난 웃음이 났다. "아가씨한테 이 놈은 너무 안어울리잖아. 적어도 우리정도는 되야지." "어이! 넌 거기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어라. 이 아가씨는 우리가 보살펴줄게." "그래그래. 걱정하지마.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라고. 오늘밤에만 귀여워해주고 다시 돌려줄 게." 난 그들이 떠들어데는 말에 웃고 싶어졌다. 난 술잔을 잡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미친 듯이 웃었다. "크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들이 날 보고 뭐라고 말을 했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저들이 누구고 어디서 왔는 지, 내가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좆같은 기분을 풀어줄 쓰레기들이 내 눈 앞에 있다는 것이다. 난 눈을 떴다. 챙그랑-! 내 손에 쥐고 있던 유리잔이 깨졌다. 눈 앞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죽어." 난 벌떡일어나 의자를 집어들고 한 놈의 머리를 찍었다. 그 놈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내 손에 있던 의자는 박살나고, 열받은 다른 4명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여러개의 주먹이 동시에 날아왔다. 난 손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난 그들이 내지르는 주먹을 맞고 쓰러졌다. 그들은 바닦에 누 운 나를 발로 밟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나를 짓누르고 있는 다리들 뿐이였다. 그 다리들은 들어올려졌다. 그 다리가 올라간 순간 내 눈에 는 머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아무런 생각 도 할 수 없었다. 어젯밤의 광경들이 내 눈을 덮쳐왔다. 허리가 잘린 채 죽어있는 사람, 머 리가 터져 뇌수를 흘러내리는 사람, 몸이 반으로 갈라져 온몸의 장기가 쏟아져 나온 사람. 그가 말을 걸어왔다. [죽여라.] 죽여? [저들은 널 무시하고 있어.] 무시? [왜그러는거야? 니가 가진 힘이면 저런 놈들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냥 죽여. 너를 먼 저 건든건 저들이야. 죽여라.] 나한테 명령하지마. 죽이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남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난 웃었다. 이상한 광기가 나를 휘감고 있었다. 참을 수 없었다. 참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를 휘감고 있는 광기에 몸을 맞겼다. 난 앞에있는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주먹이 얼굴에 닿는 순간, 녀석은 뒤로 날라가 뻗었다. 난 웃음을 지으며,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을 팼다. 주먹이 닿을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난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피 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난 옆에 있는 의자를 집어 들었다. "죽어! 죽으라고 새끼들아! 죽어!" 난 의자를 들고 미친 듯이 쓰러진 놈들을 내리 찍었다. 고통을 느끼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만해요. 이제 그만해요." 등에 따뜻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순간 나를 감싸고 있던 광기들은 유리처럼 깨져서 산산이 흩어져 내렸다. "하아, 하아." 난 바닦에 피칠을 한 채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의자를 내려 놓았 다. 세레나는 내 등을 꼭 껴안은 채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약간의 떨림이 전해져 오는 걸로 봐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녀의 손을 잡아 풀고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세레나는 내 가슴에 안겨왔다. 향긋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고 따뜻한 체온이 몸으로 전해져왔다. "제발 이러지말아요. 제발……."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마'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지금 내가 세레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렇게 머리를 쓸어주는 것 밖에는 없었다. 주위에 테이블에 술마시는 사 람들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울고있는 세레나를 달 래 놓은 뒤 주인에게 가 금화를 내밀었다. "남는 돈은 치료비니까, 저 놈들 깨어나거든 알아서 주세요. 그리고 한번만 더 내 눈에 띄 면 죽여버리겠다고 전해주세요."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난 세레나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올라갔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후둑, 후둑, 후두둑-! 빗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난 눈 앞에 아른 거리는 어젯밤의 광경을 잊기 위해 세레나의 얼굴을 보았다. 정말 아름다웠다. 세상에 그 어떤 여자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난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만저보았다. 손에 따뜻 한 느낌이 전해저왔다. "나 좀 안아줄래?" 세레나는 나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심장 고동소리가 느껴진다. 천천히 뛰는 그녀의 심장 소리에 맞추어 흥분이 가라앉는다. 난 두손으로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 졌다. 계속 이대로 있고 싶었다. 영원의 시간 속에서 그녀와 단 둘이 있고 싶었다. 난 천천 히 눈을 감았다. 잠들기 직전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잘자요." 난 눈을 떴다. 나를 보고 미소짓는 세레나의 얼굴이 보인다. 난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어젯밤 마신 술로 인해 머리는 깨질 것 같이 아파왔지만 기분은 매우 상쾌했다. 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가 내린 후, 맑게 개인 하늘의 모습이 보였다. 따뜻한 태양 아래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 습이 보였다. 나쁜 기억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다. 처음 살인을 한 사람이 나타내는 반응은 두가지라고 한다. 첫번째는 자기 가 죽인 사람을 생각하면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고, 두번째는 무 섭고 두렵기는 하지만, 곧 괜찮아지는 경우다. 원래 모든 일은 처음이 중요 한거다. 사람을 한번 죽이고 난 후, 그 다음부터는 별 두려움 없이 살인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난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오늘 이렇게 기분 이 좋지. 난 세레나를 보았다. 세레나는 미소짓고 있었다. 나도 미소를 지었다. "날씨 한번 끝내주게 좋은데! 오늘 데이트나 할래?" "예." 세레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밖으로 나가려다 침대위의 얼룩을 발견했다. "야, 이거 왜 이러냐?" 세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짧게 대답했다. "피." 피? 아! 그때 몸에 피칠하고 앉았을 때 생긴건가 보군. 어떻게 하지? 주 인이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텐데……. 흠∼. 잠시 고민을 하자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난 세레나에게 말했다. "나 먼저 내려갈테니까 10분 정도 있다 내려와." 난 세레나의 대답 하기도 전에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점심때인지 테이블은 식시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난 주인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주인은 나르던 맥주를 내려놓고 나를 보았다. "어, 무슨일인가?" "저기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뭘? 아아, 그 놈들 팬거말인가? 괜찮네. 그놈들이 먼저 자네 아내를 건드 린게 잘못이니까. 근데 자네 보기보다 제법이던데. 그 덩치들을 한방에 보 내버리고 말이야. 그 놈들 요새 이 거리에서 설처대는 놈들이었는데 이제 는 얼씬도 못할걸세. 그 놈들 악질 중 악질이니까 너무 죄책감 가지기는 말게나. 예쁜 아내가 있는게 좋은 것만은 아닌가보군. 그런 날파리들도 꼬 이고 말이야. 하지만 부럽긴 부럽군, 하하하." 주인은 마지막 말이 약간 어색했는지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난 그 모습에 실없는 웃음을 지은 다음 본론을 끄집어 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 방 침대 씨트 좀 갈아주십시오." "알았네. 그런데 침대 씨트에 뭐 묻기라도 했나?" 내가 그 질문 할줄 알았다. 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아까 생각해냈던 변명을 했다. "예. 제 아내가 어제 그날인 줄 모르고 알몸으로 자다가 피를 좀 흘려서 요." 푸우우, 크어억, 켁켁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인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테이블에서 곳곳에 서는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했다. 맥주를 마시던 사람은 마주보고 앉은 사 람의 얼굴에 맥주 브레스를 뿜었고,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던 사람은 사 례가 들렸는지 괴로워했고, 음식물을 씹고 있던 사람은 입안의 파편을 사 방으로 날렸다. 하지만 나는 주위의 사태와는 무관하게 나의 잔머리에 대 해 감탄을 표명했다. 난 왜 이렇게 머리가 잘돌아가는거지? 그 상황에서 그런 변명을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나말고 또 있을까? 아! 난 정말 대 단한 놈이구나! 난 주위를 둘러보다, 2층에서 세레나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세레나는 나에게 다가왔고 난 세레나의 손을 잡아 여관 밖으로 끌었다. "그럼 저희 나갔다 올 동안 갈아주세요." 여관 밖으로 나오자 난 세레나의 손을 풀었다. 세레나는 어리둥절한 표정 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 테이블 곳곳에서 난리가 났던데." "몰라." 난 세레나를 앞서가며 말했다. 세레나는 빠른 걸음으로 나를 뒤쫒아 오더 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를 약간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 같던데……." "몰라." "대체 무슨일이에요?" "신경꺼! 니가 알거없어. 어쨌든 씨트 바꿔준댔으니까 그걸도 됐잖아." 차마, 내 입으로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 만약 알면 날 죽이려 하겠지! 세레나와 같이 밖으로 나온 건 좋았는데, 지금 내꼴은 말이 아니다. 술도 못마시는 주제에 독주를 10병이나 마신게 화근이었다. 거기다가 어제 녀석 들에게 맞은 것 때문에 멍이 들어 온몸이 욱신욱신 쑤셨다. 마법을 사용하 면 치유가 가능하지만,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 몸이라는게 병 을 이겨내야지만 면역이 생기지, 마법이나 약물 등에 의존하다 보면, 자체 재생 능력이라던가 면역성이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병에 걸리거나 다쳤 더라고도, 지 스스로 치유가 되게 냅두는게 장땡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 병에 걸렸는데 약을 안먹는다거나, 배때기에 사시미가 들어왔다 나갔는데도, '전 제 몸을 믿어요. 살들이 알아서 붙을 꺼에요. 건드리지 마 세요.' 이러라는 건 아니다. 자연 치유가 가능한 것은 그대로 나두고 위급 한 상황에만 약이나 마법에 의존하라는……. "우웩, 우웩." "괜찮아요?" 너 같으면 괜찮겠냐? "야! 보고있지만 말고 등이라도 좀 뚜드려봐. 우우욱." 세레나는 내 등을 두드려주었고, 덕분에 위에서 소화되는 음식을 밖으로 배출하는 작업은 조금 수월해졌다. 이미지 완전 쫑나는 순간이다. "우웩." 결국 약 10분간의 피나는 작업 끝에 상황은 종결되었다. 난 세레나가 내 미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뒤,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야. 데이트 코스는 어떻게 할까?" 우리가 길을 걷는 동안 사람들은 전부 우리를 처다 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레나를 처다보았다. 여자들의 시선은 그렇다치고, 저 침흘리는 놈들은 뭐냐? 난 보란 듯이 세레나와 바짝 붙어서 걸었다. 내 평생 또, 언제 이런 미녀 와 데이트할 기회가 오겠는가! 기회가 왔을 때 즐길만큼 즐겨야지! 아! 남 자들의 질투어린 시선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찌르는구나. 난 여러 가지 상상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걷고 있는데, 앞에서 보라색 머리를 뒤로 묶은 놈이 걸어오는게 보였다. 옷차림과 뒤에 기사 두명이 따 라 다니는 걸로 봐서 귀족인 것 같았다. 키는 180정도, 머리는 보라색, 생 긴건 완전히 뺀질이. 그 놈은 세레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하며 말을 건냈다. "저는 기네즈아 남작가의 둘째 아들인 기네즈아 미가엘이라고 합니다. 저 의 눈길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역시 귀족이었군. 그런데 옆에 있는 나는 안보이냐? 세레나는 당황하면서 이름을 말하려했다. "세……." 그 순간 난 세레나의 어깨를 잡아 내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 여자의 이름은 레이라라고 합니다. 전 남편이구요." 내 말에 그 자식은 약간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나를 내려 다보며 재수없는 미소를 지었다. "오. 남편분이 계셨군요. 그런데 결혼반지가……?" 새끼가 별걸 다 캐묻네. 그 자식은 시선을 아래로 낮추어 세레나의 손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난 그 자식을 올려보면서, 역시 재수없는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예. 저희집이 워낙 가난해서, 아내한테 결혼반지하나 못해주었습니다. 이 런 저를 믿고 결혼해준 아내가 고마울 뿐이지요. 언젠가는 돈을 벌어서 반 드시 호강시켜줄겁니다." 아! 역시 나의 말빨은 거의 환상이구나!! 어떻게 순식간에 이런 말들을 생 각해 낼 수 있는 걸까? 그 자식이 나를 보는 눈빛이 변했다. 나를 졸라리 패고 싶은데, 주위의 시 선 때문에 무지하게 참는 모습이었다. "흠, 그러셨군요. 만약 돈이 필요하다면 저희집으로 찾아오십시오." 내가 거지냐? 난 머리에 핏줄이 돋아났지만, 재수없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차라리 거지한테 구걸할지언정, 기네즈아 가에는 얼씬도 안하겠습니다." 이번엔 뒤의 기사들까지 열받은 모양이다. 기사 중 한놈이 칼을 뽑아들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감히 도련님께 무슨 말버릇이냐?" 어쭈 잘하면 한 대 치겠다. 쳐봐! 쳐봐!! 그 재수없는 자식은 한손을 뻗는 행동을 함으로써 기사의 행동을 저지시 켰다. "어쨌든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으시다니, 정말 부럽군요. 그리 고 오래 살고 싶으시다면 다음부터 입 조심하십시오. 가자." "그쪽이야 말로 조심하십시오." 그 놈은 잠시 날 노려보다, 기사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 난 아직까 지 나와 밀착해있는 세레나를 보았다. 세레나는 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있 었다. "우리도 가자." 우리는 여기저기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햇빛은 따뜻하게 우리를 비추고, 기온도 선선해 덥지도 춥지도 않고, 옆에는 미인이 있고…… 딱 한가지만 해결하고 나면 나의 기분이 매우 좋아질텐데…… 그래, 간단하게 해결하고 다시 산뜻한 기분으로 데이트를 하는거야! 난 세레나의 손을 잡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골목 여기저기를 헤매 서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았다. 햇빛이 안들어와 약간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 왔을 때, 난 뒤를 돌아 보며 말했다. "나와!" 잠시 후, 골목 한쪽에서 세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세레나에게 찝적대던 놈이었다. 기네즈아 였던가? "훗, 내가 쫒아 오는걸 알면서도 이런 곳으로 오다니, 멍청한거냐 아니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냐?" "글쎄요." 그 놈은 계속 웃고 있었다. 자신감에서 나오는 웃음인가? "길게 말하지 않겠다. 50골드를 주지. 그 여자를 오늘밤 내게 넘겨라. 하 룻밤만 즐기고 돌려보내 주겠다." 역시 목적은 그거 였군. 세레나랑 옷벗고 뒹구는거. 그 놈의 말에 세레나는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팔을 꼭 잡았다. 난 웃으며 말했다. "50골드는 너무 적은거 아닙니까. 조금만 더 쓰시면……." 그 놈은 웃었다. 조금만 더 돈을 쓰면 세레나를 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놈은 인심을 쓴다는 투로 말했다. "좋다. 70골드를 주지." "저기 조금만 더 쓰시지요." 그 놈의 표정이 바뀌었다. "대체 얼마를 달라는거냐?" 그 말을 기다렸다. 난 얼굴에 사람을 열받게 만들 만한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100만골드만 주신다면, 손 한번 잡아보게 해드리지요." 새끼들이 전부 열받았다. 그 놈이 말했다. "미친놈이었군. 손좀봐줘라. 여자분은 정중하게 모시고." 두놈 중 한놈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난 조용히 손에 스트렝스 마법을 걸 었다. 그 자식은 손가락을 우두둑 거리며 내 앞에 섰다. "지금이라도 도련님께 무릎을 꿇고 빌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거다." 난 말하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퍽-! "으윽." 난 온힘을 다해 왼팔로 그 자식의 얼굴을 쳤고, 그 자식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기절했다. 상태를 보아하니 완전히 안면함몰이다. 당분간은 호빵맨 같은 얼굴로 살아가야 할거다. 순간 기네즈아라는 놈 뒤에 서있던 다른 한놈이 칼을 뽑으려는 모습이 보 였다. 난 재빨리 달려가 왼손으로 그놈의 멱살을 잡고 벽쪽으로 밀어 붙였 다. 그 다음 오른손으로 그놈의 얼굴을 찍었는데, 그놈이 얼굴을 비트는 바 람에 벽을 찍었다. 벽은 퍽 소리가 나면서 구멍이 뚫렸다. 자기 어깨에 돌 가루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자식은 이제서야 확실히 잘못건드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늦었군, 그래. 난 이번엔 피하지 못하게 확실하게 잡아 놓은 다음 면상을 찍었다. 퍽-! "컥." 난 손을 털면서 쓰러지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몸은 벽을 타고 미 끄러지다가 옆으로 누웠다. 이제 주변 정리는 끝났으니 메인 매뉴로 넘어갈 차례다. 난 기네즈아 미 가엘이란 놈을 보았다. 그 놈은 자기 호위병이 피떡이 된 모습을 보고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제정신을 회복하고 달려들었다. 내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어쭈? 감히 시비를 걸어 놓고, 튀어? 난 바로 그 자식을 쫒아가 멱살을 잡고 벽쪽으로 밀어 붙였다. 그 자식은 얼굴에 비굴한 표정을 띄고 말했다. "자, 잠깐, 나, 난 남작가의……." 퍽 난 그 자식의 아구리를 한 대 쳤다. "남작간데 어쩌라구?" "평민 주제에 감히 날……." "그래, 나 평민이다. 너 오늘 평민한테 죽어봐라." 퍽 "날 때리면……." 퍽 "널 때리면 뭐?" 퍽 "내가 아버지에게 이르면……." "사내 자식이 쪽팔린 줄 알아라. 어떻게 20살도 더 처먹은 놈이 아빠한테 이른다고 협박하냐? 내가 감방에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넌 죽이고 들어간 다. 감히 누구 아내를 넘봐." 퍽 "난……." 퍽 "잠깐만, 우리 말로 해결……." "니가 먼저 주먹으로 하자 그랬잖아." 퍽 "도, 돈이라면 얼마든지……." "나 돈많어." 퍽 "내가 잠깐 실수했다. 한번만……." 퍽 "저기……." 퍽 퍽 퍽 퍽 퍽 "제가 잘못했습니다, 감히 몰라 뵙고. 제발 살려주십시오." 흠, 이제야 제대로된 말이 나오는구만. 짜식이 진작에 이랬으면 맞지나 않 지. 꼭 맞은 다음에 정신을 차려요. 난 피떡이 된 그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놈의 얼굴은 퉁퉁 부어서 두 배로 커보였다. 녀석은 눈 주위가 찢어져 얼굴을 피로 도배하고 있었다. 난 피떡이 된 그 놈의 얼굴이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씨익 미소를 지어준 다음, 손을 들어 다시 녀석을 치려했다. "그만둬요." 세레나가 내 오른팔을 붙잡았다. 난 세레나의 얼굴을 보았다. 세레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난 들었던 오른손을 내려 놓았다. "그만둘테니까, 울 생각 하지마." 순간, 세레나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고, 그 자식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 다. 아직 안끝났어! 난 그 순간 잡고있던 멱살을 푼 다음, 멱살을 풀어 자유롭게 된 왼손에 힘을 주어 녀석의 얼굴을 찍었다. 퍽-! 녀석은 비명도 못지르고 기절했다. 난 쓰러진 놈의 몸을 열심히 밟아주었 다. 세레나는 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된거 용돈이라도 좀 벌자. 난 그 놈의 품을 뒤져 돈주머니를 꺼냈다. 열어보니 약 300골드 정도되는 돈이 들어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거에요?" "뭐하긴. 수고비 챙기고 있잖아." "무슨 수고비요?" "세상 모르고 날뛰는 놈들 정신차리게 해줬으니, 수고비 정도는 받아야 지." "……." 난 돈주머니를 품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한 반나절 정도면 깨어날거야. 기네즈아 남작가라고 했으니까, 나중에 니 가 손좀 봐줘. 아! 날씨한번 무지하게 좋다. 야! 하던 데이트나 계속하자." 세레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어이없는 웃음만을 지어 보였다. 우리는 그 후에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광장, 박물관, 공연장 등등. 세레나는 처음 보는 신 기한 구경들(자기 집과 다른 귀족집, 왕궁 밖에 가본 곳이 없다고 했다. 진짜 귀족들 왜이러 냐?)에 재미있어했고 나도 꽤 재미있었다. 세레나도 지친 것 같았고, 배도 고팠기에 우리는 근처의 큰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난 입에 있는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이제 뭐하지?" "……글쎄요." 우오∼! 저 완벽한 자태를 보라. 포크를 든 왼손과, 나이프를 든 오른손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 커다란 스테이크를 가로 2cm, 세로3cm의 토막으로 잘라놓는 손 놀림, 고기를 입에 넣고 최소의 움직임 만으로 씹어먹는 입 놀림, 밥을 먹는 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를 해결하는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고 있는 저 얼굴. 진짜, 누가 귀족아니랄까봐, 무지하게 교양있게 먹는군. "여보, 지금쯤 가면 될까요?" "아마, 그럴걸." "아빠, 빨리가자. 빨리." "거, 참. 우리 꼬마 공주님께서 야시장이 그렇게 구경하고 싶어?" "응. 꼭 보고 싶어." "아이구, 알았어요, 우리 공주님. 아빠가 가서 맛있는거 많이 사줄게." "와아! 정말?" "물론이지. 여보 일어나." 그 말을 끝으로 옆 테이블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야시장이라? 난 세레나를 보았고, 세레나도 나를 보았다. 우리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치지직 스파크가 튀고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가자." "가요." 의기투합(意氣投合). 이심전심(以心傳心). 부부일심동체(夫婦一心同體)(?) 죽이 맞은 우리는 먹던 음식을 팽개치고 방금 나간 사람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약 10분 정도 이리저리 걷다보니 드디어 우리는 야시장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지 만, 쫙 늘어선 가게들이 형형색색의 불을 밝히고 있어, 전혀 어둡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야시장의 풍경은 내가 예전에 가봤던 곳과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수십개의 음식점들과 도 박판, 여러 가지 게임들. 일단 우리는, 커다란 통돼지를 꼬챙이에 꿰어 놓고 숯불에 돌려가며 굽고 있는 가게 안으 로 들어갔다. 가게에는 이미 술을 퍼마시며 고기를 안주 삼아 먹는 손님들로 가득했고, 일부 손님들은 아예 탁자 위에 엎어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우리가 고기를 2인분 시키자, 덩치 좋 은 주인은 즉석에서 돼지 살을 베어 접시에 올려 놓았다. 난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돼지고 기를 집어 소금이 찍어 먹으며, 그 맛에 매우 커다란 감동을 느꼈고, 세레나는 속이 느글거 리는지 잠깐 나 먹는 모습만 보다가, 맛있을거라고 생각했는지 집어 먹기 시작했고, 먹다보 니 맛있다고 생각했는지 열심히 먹어댔다. 우리는 고기를 다 먹고나서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결국 양손에 꼬치 하나 씩을 들고 가게를 나왔다. 우리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난 단검을 던저 사과를 맞추면 상품을 주 는 게임에 참여했다가, 10개를 던졌는데 한 개도 못 맞춰서 세레나에게 엄청난 쪽팔림을 당 했다. 그 다음, 우리는 얌전히 입에 꼬치를 물고, 구경하고 다니는데, 한쪽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난 입에 있는 고기를 우물거리며 그곳으로 갔다. 물론 세레 나는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자 자, 맞추면 두 배, 맞추면 두 배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린데……. "자 자, 여기 이 컵들을 잘 보세요. 이 구슬이 어디있는가만 맞추시면 됩니다. 1골드거시면 2골드로, 10골드거시면 20골드, 100골드거시면 200골드입니다. 맞추시기만 하면, 무조건 두 배로 드립니다. 무조건 두배로 드립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자 자, 그냥 보고 계시지만 마시고, 한 번 도전해 보세요." 둘러싸 구경하는 사람들 틈을 헤집고 들어가니, 어떤 남자가 탁자위에 컵 세 개를 올려 놓 고, 열심히 설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런 사람을 뭐라고 하더라?…… 아, 맞다. 야바위 꾼. 이 세계에도 이런 직업이있다니…… 놀랍기 그지 없군. 구경꾼 중에 떡대 좋은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이보시오, 거 정말 맞추기만 하면 두 배로 주는거요?" "예. 물론입니다, 손님.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좋아. 한번 해보지. 50골드를 걸겠어." 남자는 주머니에서 10골드짜리 열개를 꺼내 탁자위에 올려 놓았다. "좋습니다. 자 여기 분명히 구슬을 넣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야바위꾼은 구슬을 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준 다음, 한 컵안에 넣었다. 그리고 빠른 손 놀림으로 컵의 배치를 이리저리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한 20바퀴쯤 돌렸을까? 야바위꾼은 컵에서 손을 땠다. "자, 어디에 거시겠습니까?"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50골드를 가운데 컵 앞에 놓았다. "여기!" 야바위꾼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여기에다 거시겠습니까?" "물론." "저기, 한번 더 생각해보시지요?" "필요없어. 무조건 가운데야." 야바위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컵을 들었고, 그 안에서는 구슬이 흘러나왔다. "푸하하하, 역시 가운데였구만. 자 빨리 돈 내놔." "알겠습니다." 야바위꾼은 인상을 찡그리며 50골드를 건내주었다. "하하하, 50골드 걸고 50골드 벌었어. 이거 돈 벌기 무지하게 쉽구만!" 그 남자는 크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자, 이번엔 어느 분께서 하시겠습니까?" 야바위꾼 말이 끝나자 마자, 사람들은 저마다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하지." "아니야, 이번엔 내 차례야." "무슨소리 하는거야, 내가 아까부터 줄서있었는데." "자 자, 몇분이고 괜찮습니다. 원하시는 곳에 거십시오." 야바위꾼은 다시 구슬을 컵 안으로 넣더니, 빠르게 컵들을 섞었다. "자 자, 잘 보시고 거십시오." 세레나는 그 모습을 보다 호기심이 생기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도 한번 해보지 그래요?" 난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거 다 속임수야. 저렇게 섞는 척하다가 적당한 데서 구슬을 빼돌린다고." "아까 그 남자가 할 때는 있었잖아요." "그 놈은 한 패니까 그렇지." "……?" "한 놈이 먼저 돈을 걸어 쉽게 딸 수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는 손님들이 돈을 걸게하는거 야." "그럼 세 곳 모두 돈이 걸렸을 때는 어떻게 해요?" 음, 꽤 예리한 질문이군. "그것도 간단해. 컵을 까보는 척하면서, 돈이 제일 적게 걸린 컵으로 다시 구슬을 집어 넣 는거야. 군중심리라는 것 때문에, 대부분 한 곳으로 돈이 몰리거든." 세레나는 그제서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나 사람들은 거는 족족 돈을 꼴고 있었다. 그래도 아까 그 남자가 50골드따가는걸 보고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계속 액수를 올려가며 걸고 있었다. 원래 도박이란게 딱 한번만 더 하면 딸 수 있을 것 같아, 계속 하다가는 나중에는 집까지 말아먹게 된다. 그러니까 선을 정해서 이 이상 꼴면 안 한다라는 확고부동한 의지가 있고 나서야, 도박판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건, 돈 좀 꼴았다고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 흥분을 하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기분을 표정으로 나타내게 된 다. 이렇게되면, 고스톱 칠때는 그림만 맞추게 되고, 포커칠 때는 패를 다 알려주게 된다. 도 박 할 때 중요한건, '포커페이스!' '절대 평상심!' 이 두가지다. 물론 어느정도의 실력은 수반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구. "이런, 맞추신 분이 없군요. 자 그럼 다시하겠습니다." 어느새 또 한판이 끝나고, 사람들은 씨발씨발거리며 다시 돈을 꺼내 놓았다. 난 그 모습을 보다가 좌판 앞으로 다가가 100골드짜리를 꺼내 놓았다. "100골드를 걸도록 하지." 야바위꾼은 탁자위에 놓인 100골드를 보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빨리 섞기나 해." "알겠습니다." 야바위꾼은 빠르게 컵을 뒤섞기 시작했고, 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컵을 주시했다. 역 시나 일곱 바퀴 쯤 섞었을 때, 야바위꾼은 컵을 뒤로 처서 구슬을 빼냈다. 그리고는 계속 섞 는 척 하다가, 컵을 멈추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빠른 동작이였지만, 이상하게도 난 확 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때 후작집에서 사람을 죽인 뒤로, 눈이 좋아진 것 같단 말이야…… 특히 사람들 움직임이 느리게 보이는게…… 마법을 익혔더니 동체시력(動體視 力)도 좋아진건가? "자, 거십시오." "난 여기." "난 여기로 하지." "나도 여기." 6명은 왼쪽 컵에, 3명은 가운데 컵에 4명은 오른쪽 컵에 걸었다. 난 100골드를 집어 왼쪽 컵 앞에 놓았다. 이렇게해서 왼쪽 컵에는 312골드, 가운데 컵에는 77골드, 오른쪽 컵에는 52 골드가 걸려지게 되었다. 야바위꾼은 실실 웃으며, 컵에 손을 가져갔다. "자, 그럼 이제 열어 보겠습니다." 난 손을 뻗어, 컵을 집으려는 야바위꾼의 손을 저지했다. "왜 이러십니까?"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닌 것부터 까보자고." 난 말을 마치고 바로 가운데 컵과 오른쪽 컵을 들었다. 역시나 그 곳에는 구슬이 없었다. 난 컵을 내려 놓으며, 야바위꾼에게 말했다. "자 남은건 직접 까시지요." 야바위꾼은 날 노려보며, 마지막 컵을 열었다. 여는 순간 그 놈은 손가락을 튕겨 구슬을 집 어 넣었다. "이런, 구슬이 여기에 있었군요." "으하하하, 내가 여긴 줄 알았다니까!" "역시 여기였어!"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돈을 더 거는건데." 자기가 건 곳에서 구슬이 나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야바위꾼은 계속 날 노려보며, 사람들에게 돈을 건내주었다. 쫌 미안하긴하군. 나 때문에, 600골드나 날렸으니까. 난 야바위꾼이 건내주는 200골드를 받고, 세레나와 함께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대단한데요. 어떻게 하신거에요?" "아까 봤잖아. 원래 저런 놈들은 이렇게 상대해야되. 뭐 웬만하면 안하는게 좋지만 말이야. 혹시라도 배우고 싶은 생각있으면 말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테니까. 이래봬도 도박판에서 는 꽤 날리는 몸이거든." 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저런건 하고 싶지도 않아요." 난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까딱 거리며 대꾸했다. "이런 이런 이런. 어이 이봐, 너 지금 도박을 우습게 아는데, 저런건 도박축에도 못낀다고. 도박하면 역시 카드 게임이지. 고스톱, 섰다, 포카, 블랙잭 등등 유익한 게임이 얼마나 많은 지 알아?" "흥, 그런거 잘해봐야 아무 소용 없잖아요." 난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소리를? 이런 게임들이 얼마나 유익한데. 좋아 내가 특별히 너한테만 알려주도록하지. 한번만 말할꺼니까, 잘들어둬. 예를 들어, 고스톱 같은 경우에는 밤새서 치 기 때문에, 체력단련이 되고, 여려명이서 같이 치기 때문에 친목도모를 할 수 있으며, 또 갈 때까지 간 상황에서 고를 하는건, 담력을 키워주고, 하루 종일 꼴다가도 막판에 흔들고 쓰리 고에 멍따에 피박에 광박까지하면, 이 한판만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어 끝까지 방심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가르쳐주고, 쓰리고까지 간 상황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삼광으로 나는건,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굴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잘만치면 수입도 꽤 짭짤하다는거지." 세레나는 내 말에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회복하고는 나에게 물 었다. "그런데 고스톱이 뭔가요?" "뭐야? 고스톱을 모른단 말이야? 아니, 사천만 국민이 즐겨하는 스포츠를……." 아차, 여긴 다른 세계였지. 쩝, 여기에 화투가 있을리가 없지. 이렇게된거 내가 이 세계에 고스톱을 전파해 버려? 그럼 먼 훗날에 이 내가…… '오광선인(五光仙人).' '삼광대사(三光大師).' '피박도사.' 등으로 불리지 않을까? "흠 흠, 어쨌든 그런 게임이 있어. 아주 재밌는거지. 나중에 시간나면 가르쳐주든지 할께." 난 헛기침을 몇번하면서 대충 얼버무렸다. 다행히 세레나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몇번 끄덕 이더니 그냥 넘어갔다. 아무말 않고 걷는 내 눈에 잡화점 하나가 들어왔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저기 좀 들어갔다 올께." "예." 난 세레나를 나눈 채 길 한쪽에 있는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목적은 물론 담배를 사는거였 다. 난 가게 주인에게 몇번이고 물어보았지만, 내가 피는 담배는 존재하지 않고, 있는 거라 곤 담뱃잎을 말아 놓은 시가 같이 생긴 담배와 여러가지 모습의 곰방대였다. 난 할 수 없이 담뱃가루와 필터, 종이, 풀 등을 사서 그곳을 나왔다. 어쩌겠냐?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피워야지. "뭐 사셨어요?" "좀 있으면 자연히 알게될꺼야." 나와 세레나는 잠시 동안 별필요 없는 말들을 하면서 걸었다. 지금 쯤이면 질릴만도 하겠 구만, 세레나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띄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듯 나를 길 한쪽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에은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좌판을 하나 벌려놓고 여러 가지 장신구를 팔고 있었다. 세레나는 좌판 앞으로 다가가 이것 저것을 만저보았다. "와아∼ 예쁘다!" 아가씨는 손님이 오자, 기쁜 표정을 지으며, 판촉을 개시했다. "어머,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옆에 계신 애인 분께서 몇 개 골라주세요." 애인? 난 뒤를 돌아보고 옆을 돌아보고 다시 앞을 보고 사방을 돌아보았지만, 세레나의 주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곤 나 혼자 뿐이었다. 세레나는 아예 좌판 앞에 죽치고 앉아서 구경하기 시작했고, 주인 아기씨는 연신 세레나를 칭찬하면서, 판촉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어머, 정말 너무 예쁘세요! 이건 어때요? 어머, 진짜 너무 잘 어울린다!" 하긴, 세레나 정도의 미모면 어떠한 장신구라도 커버할 수 있지. "애인분께서도 서 계시지만 마시고 같이 골라주세요." 누가 애인이야? 졸지에 세레나의 애인으로 낙인찍힌 난 할 수 없이 세레나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장신구 들을 만지작거렸다. 장신구들은 이런 시장바닥에서 파는 것인 만큼, 그렇게 비싼것들이 아니 였다. 금같은 경우는 도금 처리한 것 같고, 박혀있는 보석들은 그냥 비스무리하게 생긴 모조 품이었다. 뭐 그래도 꽤 예쁜 것들이 많았다. 그러고보니 드래곤 레어가 생각나는군. 거기서 이런 장신구들도 좀 집어 올걸. 졸라 후회된다. 기회가 왔을 때, 뽕을 뽑았어야 되는건 데……. 세레나는 장신구를 골리다가 잠깐씩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 사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마음껏 골라. 사달라는데로 다 사줄테니까." 내 말에 세레나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레나 앞에 있는 아가씨는 더욱 기쁜 표정 을 지으며, 판촉에 열을 올리다 못해, 아예 불타 오르고 있었다. "많이 골라요, 아가씨. 남자들이 이렇게 잘해주는 때도 지금밖에 없다구요. 결혼 한번하고 나면 태도가 싹 바껴요. 저도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을 조금 미루는 건데……." 음, 이제보니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였구만. 이 세계는 혼기가 너무 빨라서 말이야. 어쨋든, 주인 아가씨…… 가 아니라 주인 아줌마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가며 세레나가 더욱더 많은 물건을 사도록 유도했다. 세레나는 주인 아줌마와 열심히 떠들면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이 재밌어 웃 음을 지으며 지켜보았다. 그 순간, 온몸이 섬뜩해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살기!> 누구지? 난 잽싸게 뒤를 돌아보았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 엄마를 잃어 버렸는지 울고있는 꼬마. 물건값을 흥정하는 아줌마.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특별하게 이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으응. 아무것도 아냐." 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후우∼, 내가 왜이러지? 내가 무슨 무협지 주인공도 아닌데, 살기같은 걸 느낄리가 없잖아. 살인을 한 뒤부터, 몸의 감각이 약간 이상해진 것 같아. 병원에라도 한번 가볼까? 세레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난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괜찮아." "저기……." "괜찮다니까. 걱정하지마." "저기…… 그게 아니라……." 세레나는 두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난 세레나의 양손에 들린 장신구들을 보았다. 목걸이 1 개와 반지 1개, 머리핀 2개. 꽤 양호하게 골랐군. 난 주인에게 물었다. "전부 얼맙니까?" 주인은 세레나 손에 들린 장신구들을 보며, 계산하기 시작했다. "음∼ 1골드에다 70실버, 그리고 머리핀이…… 전부해서 2골드 70실버입니다. 하지만 애인 분께서 미인이시니, 특별히 2골드 50실버에 드릴께요." 2골드 50실버라∼. 난 주머니를 뒤져 금화를 꺼냈다. 100골드짜리 몇 개와 500골드짜리 몇개…… 끝? 이런, 잔 돈이란 잔돈은 아까 잡화점에서 몽땅 다 써버렸군. "여깄습니다." 난 할 수 없이 주인 여자에게 100골드를 건내주었다. 주인 여자는 금화를 받더니 입을 쩍 벌리고, 놀라서 더듬 거리며 말했다. "저, 저기 손님. 죄송하지만, 지금 거스름돈이 70골드 정도 밖에……." 하긴, 노점상이니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 가끔씩 깡패 같은 놈들이 나타나면 돈 뜯길 때도 있을테니까 말이야. "괜찮습니다. 그럼 그냥 받아두세요. 어차피 그 돈 도박판에서 딴거니까요." 난 말을 마치고 세레나와 함께 그 곳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잽싸게 튀어 나오더니 우리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럴 순 없어요. 잠깐만 이 곳에서 기다리시면, 돈을 바꿔다 드릴께요." 난 손을 내저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지금 빨리 가봐야 하기 때문에, 기다릴 시간이 없군요. 가긴 어딜가냐? 가자니 오라는덴 없고, 남느니 시간이로다. "그, 그럼 돈 대신 물건이라도 몇 개 더 가져가세요. 이대로 가시면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주인 여자는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난 한숨을 쉬며 다시 좌판 앞에 앉았다. 저 여자 의외로 좋은 사람이었구만. 공짜로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네. 보통은 거스름돈 안 받겠 다고 하면 좋아서 날뛰던데. 쩝, 공정거래 법을 이렇게 잘지키는 장사꾼은 또 처음이군. 난 좌판 앞에서 몇 개의 장신구들을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고, 그 사이에 주인 여자는 거스름돈을 다 챙겼는지, 묵직한 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대충 안을 보니, 은화와 금화가 섞여서 빛을 발하는데, 대략 봐도 200개 이상은 넘어 보였다. 내가 이래서 그냥 가려 그랬던 거다. 이 무거운 주머니를 대체 어떻게 들고가냐? 이렇게된거 길가에 돈을 한번 쫙 뿌려볼 까? 난 진짜 어쩔 수 없이, 돈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주인 여자는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하아∼ 전혀 안녕히 갈 수 있을꺼 같지 않다. 이 무거운 짐을 어떻게 들고간담? 난 힐끗 옆에 서 있는 세레나를 보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 이거 받어." "이걸 왜……?" "내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러니까, 니가 좀 들어라." "……?" 난 당황해하는 세레나에게 돈주머니를 떠 넘긴 다음, 앞장 서서 걸어갔다. 세레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돈주머니를 들고 날 따라왔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너무 무거운지, 양손으로 감싸 안 듯이 들고 있었다. 잠시 걷다가 세레나를 보니,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많이 힘들어?" 세레나는 내가 들어줄 마음에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별로 안 무거워요." 얼씨구 말은 잘한다. 주제에 반어법을 구사해? 지금 세레나는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얼 굴 표정과 제스처는 '아∼ 졸라리 무거워요! 나처럼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는 도저히 들 수 없어요. 아∼ 이러다가 쓰러질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다른 남자의 경우에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빨리 이리줘. 내가 들어줄게.' 라고 말한다. 반면 나의 경우에는…… "그래? 별로 안무겁지? 무겁다 그러면 들어줄려 그랬는데, 의외로 근력은 좀 있나보네? 그 럼 계속들어." "……." 세레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난 그런 세레나를 무시한 채 휘파람까지 불면서 걸어 갔다. 결국 체력의 한계를 느낀 세레나 때문에, 우리는 적당히 분위기 좋은 곳 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무슨 계집애가 그렇게 체력이 약하냐? 그것 좀 들고 걸었다고 10분도 못 걷고 비틀거려?" "죄송해요." 흥,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해봐여 설득력이 없네요. 난 나무에 기대어 앞을 보았다. 이곳에 앉으니 야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장을 가득 매우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나고, 상점들도 하 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야시장이 파하고 있는 것이 다. "저기……." "응. 왜?" 난 세레나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세레나는 아까 산 목걸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나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걸어 주시겠어요?" "그러지 뭐." 난 세레나 손에서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세레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돌아 앉았다. 그리고 내가 목걸이를 걸기 쉽도록 머리카락을 쓸어 왼쪽 어 깨로 넘겼다. 난 조심스런 동작으로 세레나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목걸이를 걸려고 움직이다보니, 자연히 세레나의 목을 만지게 되었고, 그때 마다 세레나는 조금씩 움찔 거렸다. "목선 예쁘네?" "예?" "목선 예쁘다고." 세레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 순간, 난 세레나의 목부터 시작해 귓볼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자, 다 됐어." 세레나는 우와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더니, 몸을 돌려 나와 정면으 로 마주보았다. "어, 어때요?" 가느다란 금줄에, 가운데는 마름모꼴의 루비(당근 짜가) 하나가 박혀있는 목걸이. 예상했던데로 세레나의 새하얀 피부와 매우 잘 어울렸다. "예뻐." "정말요?" "그래. 그런데 너무 싸구려라는게 흠이다. 돈도 많은데 한 1000골드 정도 되는 걸로 하나 더살까?" "아니에요. 이걸로 충분해요. 전 이게 마음에 드는걸요." 세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으로 목걸이를 살짝 움켜쥐었다. 훗, 귀엽게 굴기는. "이제 그만 일어나자." "예." 세레나는 일어나면서 돈주머니를 집으려 그랬고, 난 빠르게 손을 뻗어 먼 저 돈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세레나는 돈주머니를 집으려 그랬던 그 자세 그대로 나를 보았다. 난 앞장서서 걸었다. "뭐해? 안따라와?" 세레나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작게 웃었다. "갈께요." 훗, 대신 들어줘서 쪼금 감동했나보군. 우리는 충분히 놀만큼 놀고, 볼만큼 봤기 때문에 이제 그만 여관으로 돌 아가 쉬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런 나를 가만히 두지 않 았다. 야시장을 뒤로 하고 인적없는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나타난 4명의 남자가 우리를 둘러싼 것이였다. 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니들은 또 뭐냐?" 4명 중 한 놈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흐흐, 설마 니 놈이 아까 한짓을 잊은건 아니겠지?" 녀석이 밝은 쪽으로 나오면서 대충 얼굴의 윤곽선이 들어나자, 난 그놈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야바위꾼 새끼가 사기나 치고 있을 것이지,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냐?" 난 주위 놈들을 훝어보았다. 역시나 한 놈은 맨 처음 50골드를 건 호객꾼 이였고, 나머지 두 놈은 처음보는 놈들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올 것을 대비 해 양쪽에서 망을 보던 놈들인가 보다. "네 녀석 때문에, 오늘 하루 매상이 완전히 박살났다고. 그러니까 네 녀석 이 책임을 저야할꺼아냐?" 난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파며 대꾸했다. "내가 미쳤냐? 책임을지게. 그러니까 누가 사기치래?" 4명의 표정이 순식간에 살발하게 바뀌었다. 난 짐짓 쫄은 표정을 지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그 놈들은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선심쓰듯이 말했다. "흠, 이제야 조금 분위기 파악을 했나보군. 딱 500골드만 내." 난 귓구멍을 파던 손가락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들은 매우 화난 표정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귓구멍을 파던 손가락이 가운데 손가락이였던 것이다. 허, 그것 참 이상하군. 내가 왜 가운데 손가락으로 귀를 파고 있었 지? "지랄하네. 500골드가 뉘 집 개 이름이냐? 괜히 여기서 깝죽대다가 맞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다른 곳으로 꺼져라." "이 미친 새끼가!" 그 놈들은 말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을 바꾸며, 전투대형을 취했다. 참고로 전투대형이란게 매우 얍삽하게시리 앞에 두명, 뒤의 두명으 로 포위하는 것이었다. "크흐흐, 좋은 말로 달래보려 했더니, 듣지를 않는군." "오호, 이제 보니 옆에 있는 아가씨가 꽤 미인인데." "500골드를 내기 싫으면, 그 아가씨를 넘겨도 되." "그래그래. 이 정도 미인이면 500골드의 가치는 충분하지." 난 세레나에게 물었다. "나 지금 싸우기 싫은데, 니가 저 놈들한테 가면 안될까?" 세레나는 단호하게 외쳤다. "안되요!" 안될줄 알았다. 난 다시 그 놈들을 타일렀다. "니들은 한번 등장했다가 사라질 놈들이야. 그러니까 그냥 가라. 어차피 사라질꺼 맞고 사라지는 것 보다는 안 맞고 사라지는게 훨씬 낫잖아." "닥쳐." "야! 니들은 만화책도 안보냐? 이렇게 4명이서 비겁하게 공격해서 이기는 내용 봤어? 봤냐고? 결국은 다 정의가 승리하게 되어있어." "이 새끼가! 니가 우리 4명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냐?" "응." "씨발. 너 오늘 죽었어, 새꺄!" 난 험한 말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구해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역시 나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어쩔수 없지 뭐, 맞고 싶다는데 때려주는 수 밖에. 퍽퍽퍽퍽퍽 결국 5분도 안되서, 녀석들은 온몸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이 짓도 많이 하다보니, 요령이 붙는군. 한달전까지만 해도 싸움이라곤 오 락실가서 100원짜리 넣고 KOF(King Of Fighters) 한거 밖에 없는데…… 지금은 이게 무슨 꼴이냐? 30 : 1 로 싸우질 않나, 11명을 죽이질 않나? 아예 이길로 나설까? '마음에 안드는 놈 있으면 까드립니다.' 라고. 음, 그 러고보니 문구명도 꽤 괜찮군. 난 고개를 돌려 세레나를 보았다. 세레나도 이젠 이런걸 보는게 지겨워졌 는지, 담담한 표정으로 구경만하고 있었다. 난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야! 가자." 세레나는 내 뒤를 쫒으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이 사람들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정확히 뼈 하나씩 밖에 안부러뜨렸는데." "……!" "뭐해? 빨리가자니까." 같은 시각. 힐카인 후작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둠으로 휩싸 인지 오래지만, 방안에 불을 켜지않았다.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어둠속에 있는 것이 더 안심 이됐다. 하녀라도 방안으로 끌어들여 즐겼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생각할게 너무 많았다. '놈은 대체 누군가? 놈이 누구길래 레이트 백작을 돕는건가?' 리나드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레이트 백작은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놈이 있 는 한은 자신의 입지가 위험했다. 일은 완벽했다. 증거도 충분했으며, 증인들의 증언도 확실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모든게 끝나는건데……, 그런데……, 대체 그 놈은 누구란 말인가? 그 놈이 누구길래 자신의 저택까 지 처들어 왔단 말인가? 후작은 그 날의 일을 회상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채, 어둠속에서 눈빛을 번뜩이던 남자를……. 놈은 4클래스의 마법사 와, 자신의 사병 10명을 죽였다. 놈은 실력이 뛰어난 검사다. 조사를 해본 결과, 놈은 레이트 백작의 딸과 같이 있었다. 머리카락 색은 검은색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미뤄봐서, 레이트 백작의 딸이 확실했다. '리나드 녀석, 사창가에 팔아 넘겼다고 하더니, 이딴 일하나 처리를 못하다니!' 어쨌든 상관 없다. 죽은자들의 유족에게는 엄청난 양의 금액을 지불해 입을 막았고 그 날 일을 목격한 하녀들은 사살하거나 돈을 쥐어주고 저택에서 내보냈다. 저택 안에서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자는 자신의 측근 몇 명 뿐이다. 소문이 날 염려는 없다. 그리고…… 어쌔씬 길드에 의뢰를 한 이상 그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20만 골드! '두 년놈의 목숨 값으로는 비싸지만, 이걸로 놈이 제거된다면……. 크크큭, 넌 실수한거다. 넌 그날 밤 나를 죽여야 했다. 이젠 이곳에 앉아서 놈이 죽었다는 소식만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 놈이 곧 죽는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때엔 술이 빠질 수 없었다. 후작은 상당한 애주가기 때문에 언제나 방한 쪽에 있는 찻장에는 고급술들이 진열 되어 있었다. "술이나 한잔 할까?" 힐카인 후작은 술을 꺼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역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동 시에 약간은 쉰듯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술이라……? 그거 좋지. 나도 한잔 주지 그래?" 후작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방 한 구석에 앉아있던 인영은 천 천히 일어났다. 그가 가까이 다가옴에따라, 그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짧은 머리카 락의 남자였다. 허리에는 긴칼을 차고 있으며, 왼손에는 이상한 물건이 들려있었다. 그는 그 물건을 후작의 발 앞에 던졌다. 후작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한 발자국 뒤로 물 러섰다. "흐억……." 그것은 11개의 사람 머리였다. 11개의 머리들은 머리카락이 하나로 묶인 채,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작은 그 물건이 사람 머리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비명을 지르려 하였다. 하지만 목소리 가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그가 자신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뽑아들었다. 시퍼렇게 빛나는 환도! 후작은 막혀진 입을 간신히 열어 한 단어를 내뱉었다. "히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오호! 이거 영광인데. 힐카인 후작님께서 내 이름을 다 알고 계시고 말이야. 그래, 보내준 선물은 잘 받았다. 그런데 선물이 너무 커서 받는 쪽이 부담되더군. 그래서 일부분 정도는 돌려주는게 예의라고 생각했지." 놀랍게도 그는 며칠전 자신의 저택을 방문했던 손님(?)이었다. 자신의 사병들을 죽이고, 자 신의 목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이덴 손님. '저 놈이 대체 어떻게 여기로 들어온거지?'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겨우 어쌔씬 11마리가지고. 날 죽일 수 있을꺼라 생각했나?" 후작은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콰당-! 그는 후작을 방 한구석으로 내 던졌다. 그 덕에 입이 자유롭게된 후작은 소리를 지르려 하 였다. "소리지르고 싶으면 질러. 밖에 있는 개들이 빠른지, 내 청룡도가 빠른지 확인하게 해줄테 니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후작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소리를 그대로 삼켰다. 그는 침대에 걸터 앉은 채, 손가락으로 청룡도의 도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보물을 다루는 듯한, 매우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후작은 안나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서 물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거냐?" 그는 하던 행위를 멈추고, 후작을 처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흑갈색 눈동자와 마주 대하자, 후작은 몸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아! 그거말인가? 그거야 간단하지. 쓰레기 같은 마법사 세 놈이서 친 결계를 뚫고 들어오 는 건 일도 아니거든."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발 씩 후작에게 다가갔다. 후작은 땅을 짚고 있는 두손을 움직여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곧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벽 때문에 멈추어야만 했다. 그는 살기가 충문한 눈으로, 떨고있는 후작을 내려다 보았다. "감히 나에게 어쌔씬을 보내다니……, 그 대가는 치뤄야겠지?" 후작은 애써 태연한척하며 물었다. "워, 원하는게 뭐냐?" 그는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작은 다시 한번 몸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혀 를 내밀어 청룡도의 도신을 핱았다. "내가 원하는거 말인가?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을텐데." "레, 레이트 백작 말인가?" 푸욱-! 청룡도는 후작의 목을 스치고 벽 깊숙히 박혔다. 그는 후작의 멱살을 잡아서,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래. 바로 그거야. 잘 알고있구만. 난 또 까먹은 줄 알았지." 콰당-! 후작은 다시 바닥에 내동댕이 처졌다. '허억!' 후작은 이상한 기운이 자신을 옥죄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에서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후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랫도리가 축축 해졌다. "한번 더 기회를 주지. 약속한 기간 안에 백작을 구해내라. 전에 내가 경고했던대로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 말을 끝나는 순간, 바닥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은 그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빛 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후작은 전에 들었던 '경 고'를 떠올려 보았다. '니 심장을 니가 먹게 될꺼다.' 후작은 경고를 생각해내자,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놈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놈은 언제든지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다. 후작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방법을 알아 낼 수 있었다. '레이트 백작을 살려야만 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레이트 백작을 살려야만 한다.' 후작은 두 주먹을 불끈쥐었다. 후작의 방을 나온 그는 약 10km 높이의 공중에 떠서 한 남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는 짧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허리에는 푸른색 빛이 도는 길다란 환도를 차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와 똑같은 색의 머리를 하고있는데, 남자와는 달리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매 우 긴 머리카락이었다. 그 머리카락은 아직 소녀티를 채 벗지못한 청초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과 매우 잘 어울렸다. 아이언스 히로. 레이트 세레나. 이것이 그들의 이름이다. 공중에 떠있는 그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힘들게 살려 놓았는데, 또 죽을 뻔 했군요. 겨우 어쌔씬들이 내뿜는 살기조차 알아채질 못 하다니, 어떻게 된겁니까?" 그의 말은 틀렸다. 어쌔씬은 암살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암살을 하자면 상대방이 알 아차리지 못하게 접근을 해야하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살기를 감추는 것은 필수다. 그렇 기 때문에 일반인이 아니라 훈련을 받은 자들이라도 그들의 살기를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거기다 그들이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아, 알아차리긴 했군요.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제가 도와드리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의 목은 후작의 저택에 걸려있겠지요. 아직 능력이 완전하게 깨어나지 않은 겁니까? ……하긴, 아직은 완전하지 않겠군요. 그를 만나야 완전히 깨어나는 걸까요? 히로와 세레나는 얘기를 하며 걷고 있었다. 그는 웃고있는 세레나의 얼굴을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예상외의 변수가 생겼군요. 이러면 곤란한데……. 설마 저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까?" 그는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뭐, 어찌되었든 별로 상관은 없겠지요. 당신은 반드시 그를 만나야 합니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않든.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이그리드가 실패할 경우에는 제가 도와드리지요." 그의 몸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이미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여관에 돌아가면 뭐하지?" "글쎄요. 전 일단 목욕이나 했으면 좋겠어요." "목욕……? 목욕이라……? 목욕 좋지. 나랑 같이 할래?" "예?" "서로 등밀어 주면 좋잖아." "제가 미쳤어요!!!" "싫음 말것이지, 뭘 그리 화를 내시나?" 히로와 세레나는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채, 사이좋게 툭탁거리 고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나와 세레나는 목욕을 했다. 물론 같이 했다는 것은 아 니다. 솔직히 나는 무지하게 같이하고 싶었는데, 세레나가 완강하게 거부했 다. 그리고 이 여관은 남탕과 여탕이 완벽하게 구분되어 있었다.(당연한건 가?) 어쨌든 목욕을 하고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난 목욕을 끝마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걸로 봐서, 세레나는 계속 목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인비저빌리티 써서 한번보러갈까……? 그 만두자. 이 나이에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싶지는 않으니. 난 세레나 침대에 털썩 누웠다. 침대는 매우 깨끗했다. 내 침대씨트 갈면 서 세레나 침대씨트까지 갈아준 것 같다. 난 침대에 약간 남아있는 세레나 의 체취를 느끼면서 한참 동안을 뒹굴거렸다. 참고로 난 여자 체취 맡으려 고 킁킁 거리며 코를 들이대는 변태가 아니다. 다만 심심해서! 내가 거의 심심해서 미치기 일보직전까지 갔을 때, 세레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순간…… 난 눈알이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오오옷! 대체 저 도발적인 자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목욕하느라 빨갛게 상기된 뺨. 더욱 새햐애진 피부. 그녀의 신체 곳곳에 장식품처럼 붙어 있는 진주 같은 물방울들…… 아∼ 휴지!(코피 닦으려고.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시길.) "뭐하고 계셨어요?" 세라나는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자기 침대에 걸터 앉았다. 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세레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내가 계속 물끄러미 처 다보고 있자, 세레나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내 눈길을 피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귀여운 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가 아니라 생각 하려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섹시해 보이는거지? 혹시…… 날 유혹하려 고??? "흠, 흠." 난 헛기침을 몇번 한 다음, 세레나의 침대로 가 그녀의 옆에 밀착해 앉았 다. 세레나는 내가 엉덩이가 밀착될 정도로 가까이 앉자, 잠시 당황하더니, 곧 몸을 약간 옆으로 움직여 나와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나도 다시 움직 여 엉덩이를 밀착시키고, 다시 세레나는 옆으로 움직여 거리를 벌리고, 나 는 다시 밀착시키고, 세레나는 다시 벌려놓고……. 결국 침대의 끝에 도달해 세레나는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게 되었다. 창밖의 달빛이 안으로 들어와 세레나의 얼굴에 비치고, 달빛을 받으며 수 줍게 얼굴을 붉히는 세레나는 매우 아름다웠다. 난 슬며시 세레나의 손을 잡았다. "저기, 전……." 세레나는 내 손을 뿌리치려 하자, 난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말이야. 널 사창가에서 빼주기도 하고, 니네 부모 구하려고 후작네 집까지 처들어 갔잖아. 내가 널 위해 이렇게 까지 해줬는데, 너도 나한테 뭔가 해주는게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안그래?" 세레나는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기 도, 돈이라면 지, 집에 돌아가는 즉시……." 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은 다음, 살며시 내쪽으로 끌어 당겼다. "내가 돈을 원하는 줄 알아? 나 돈 많다는건 너도 잘 알텐데." "그, 그럼…… 뭘……?" 난 나를 회피하고 있는 세레나의 턱을 돌려, 얼굴을 마주보게 했다. "내 눈을 잘봐. 지금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세레나는 잠시 내 눈을 보다가 울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모, 모르겠어요." 난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한번 내 쪽을 보게 하려고 억지로 돌렸다. "다시 한번 잘봐! 정말로 내가 원한는게 뭔지 모르겠어? 난…… 니가 필 요해." 난 세레나의 눈을 보았고, 세레나는 내 눈을 보았다. 세레나의 커다란 눈 망울에 물이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은 그녀의 상기된 볼을 타고 천천히 아래로 흘러 내렸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전 아직……." 아니, 이 여자가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외쳤다. "지금 난 담배가 피고 싶어!" "……?" 세레나의 눈물이 멈췄다. 세레나의 표정이 두려움에서 황당함으로 바꼈다. 난 일어나서 아까 잡화점에서 산 물건들을 꺼내 놓았다. "내가 너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그 빨간 불꽃인가 하는데서 폈던 거 있잖아. 그 담배 기억해? 가늘고 긴거!" "예…… 기억이……." "좋았어. 자 여기 재료 있으니까 만들어라. 두께와 길이는 여기 써진데로. 내가 친절하게 설명서까지 그려 놓았다. 내가 너한테 그정도까지 해줬는데 너도 이정돈 해줘야지. 나 잘테니까, 내일까지 100개 만들어 놔." 세레나는 말도 안된다는 듯이 외쳤다. "배, 백개나요?" "그래, 100개. 내가 다 세볼테니까 속일 생각하지 말고. 그럼 수고 해라." 난 말을 마치고 침대에 누었다. '이럴 순 없어!' 라는 듯이 외치는 세레나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법이 어딨어요!?" 난 돌아누우며 말했다. "여깄어.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는 법. 법과 정의는 힘으로만 관 철된다. 억울하면 나랑 맞짱 뜨던가." 아, 조용하다. 피곤한 하루였던 만큼, 잠이 빨리 오는구나. 난 그날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담배를 피고 있었다. 입에 20개 물고, 양 쪽 콧구멍에 10개씩, 귓구멍에 10개씩, 심지어는 눈구멍에까지 10개씩. 총 합 80개를. 그래, 담배피다 죽어도 좋다. 같은 시각. 왕궁에서 멀리떨어진 빈민가. 퀴퀴한 냄새가 물씬 풍겨나오는 골목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낡은 집. 바람이 불 때마다, 휘날리는 먼지와 쓰레기. 같은 성벽으로 둘러싸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중심부와 변두리의 빈부 격차는 엄청났다. 왕궁에서 화려한 무도회가 벌어지는 순간에도, 이곳에 사 는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빈민가 골목 한 구석에서 누더기를 걸쳐 입은 남자가 누워있었다. 남자는 이 빈민가에서도 제일 하층에 속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남자는 항상 길 한구석에 앉아서 불쌍한 표정을 짓고, 두 눈빛으로 '저는 무지무지 불쌍한 놈이여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하루 에 일과였다. 남자는 남들이 소위 말하는 '빌어먹을 놈' 이었다. 대부분의 교양있는 사 람들은 남자의 직업을 가리켜 '거지'라고 표현한다. 남자는 이 '빌어먹는' 분야에 한해서는 마스터라는 칭호를 내려도 될 만큼 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제 아무리 돈에 미친 수전노나 시베리아 벌판 같이 바람이 쌩쌩부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도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불쌍하다는 감정이 끓어오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놋쇠 그릇 안에 돈 을 던져 넣었다. 그만큼 남자의 얼굴은 불쌍하게 생겨먹었다. 남자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를 늙은 거지라고 불렀고, 그도 그렇게 불리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지금 늙은 거지 앞에 서있는 이 남자 는 늙은 거지를 다르게 불렀다. "어쌔씬 길드, 헤리오 지부장. 이름은 없음. 길드원 사이에서는 3호로 불 리고 있음. 7살 때부터 훈련을 받아, 12살 때부터 실전에 투입. 그 후 53년 동안 677건의 암살을 성공. 뭐 틀린건 없나?" 정확했다. 늙은 거지의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전 대륙을 샅샅이 뒤져도 5명을 넘 지 못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어쌔씬은 음지에서 활동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비밀이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로 잡힐 때를 대비해 언제나 입에 독을 물고 있다. 바로 자결할 수 있도록. 그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늙은 거지는 자신의 정체가 들켰음을 직 감했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11명의 어쌔씬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그는 그들의 표적이되고도 멀쩡하게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승산이 없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늙은 거지는 입안에 있는 독을 깨물어 자결하려 하 였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입에 뭔가를 처넣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물렁한 고기. 비릿한 피의 맛. 대체 무엇이지? 늙은 거지는 이제까지 수백명의 사람을 죽여왔다. 그 때문에, 늙은 거지는 자신의 입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순간에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사람의 심장! 늙은 거지는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지부장님께서 보내주신 분들은 잘 대접해드렸습니다. 실력은 별로 더군 요. 요새 길드에 인재가 없는겁니까? 아니면 제가 우습게 보인 겁니까?" 늙은 거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자신을 빨리 죽여주는 것이였다. 될 수 있는한 고통없이. 가능한한 빠르게. 그는 청룡도를 만지작 거렸다. 달빛을 받은 청룡도의 시퍼런 날에서는 유 감없이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늙은 거지에게 다가갔다. "내 이름은 너도 잘 알다시피 히로다. 지금 세레나라는 미모의 아가씨와 함께 여관에 머물고 있지." 그는 청룡도를 휘둘렀다. 몇 년동안 감지 않은 늙은 거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이발하니까 훨씬 보기 좋군…… 이런 씨발." 그는 청룡도에 엉겨붙은 비듬 덩어리를 보고는 되는데로 얼굴을 구겼다. 퍽-! 그는 청룡도의 날이 없는 부분으로 늙은 거지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야. 머리 좀 감고 다녀. 새끼가 청결에 대한 개념이 없어요. 임마, 머리 감아서 남주냐? 남줘?" 그는 손수건을 꺼내 청룡도를 쓱쓱 닦기 시작했다. "의뢰는 누가 했지? 뭐? 힐카인 후작이라고? 하긴, 그 인간이 나한테 원 한이 좀 있지. 의뢰비는 얼마나 받았나? 뭐? 20만 골드? 짜식들이 많이도 받아 처먹었구만. 그런데 11명의 어쌔씬은 어떻게 모았냐? 뭐? 수도에 5명. 동쪽에 4명 남쪽과 북쪽에 1명씩 모았다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그래, 지 부장이란 자리 꿰어차고 앉아 있는 놈이 오크 10마리 모아서 드래곤 상대 하고 보내냐? 50년이 넘게 한 직종에 종사를 했으면, 상대방의 능력 정도 는 파악을 했어야지."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늙은 거지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저 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거지?' 그는 자신이 쥐도 새도 모르게 추진했던 일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렇 다는건……. '정보가 새고 있는 건가?' "세상에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건드려도 되는 놈과 건드려선 안되는 놈. 참고로 난 후자에 속한다. 근데 날 왜 건드려!!!" '으헉.' 그의 두 눈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눈빛을 마주 대하는 늙 은 거지는 살기 때문에 숨막혀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자는 지금 죽 기를 각오한 자신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살기를…….' 숨막힐 것 같은 공기의 흐름이 멎었다. 그는 뿜어내던 살기를 멈추었다. "개틴의 수도에서 선술집을 경영하는 반케르그한테 전해라. 나를 노리는 건 포기하라고. 한번만 더 날 건드린다면, 그땐 길드 전체를 전멸시키겠 다." 늙은 거지는 이제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길드 마스터의 위치까지…….' "나중에 또 보는 일 없도록하자." 그는 말을 마치고 늙은 거지에게서 몸을 돌렸다. '죽여야한다.' 길드 마스터의 위치까지 알고 있는 놈이다. 길드 마스터의 위치를 안다는 것은 길드 내에 모든 일들을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늙은 거지는 머리 카락 속에 숨겨 놓았던 작은 칼을 움켜쥐었다. 그는 완전 무방비 상태로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칼을 던지기만 하면, 놈을 죽일 수 있다. 칼 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기 때문에 급소를 맞추지 못하더라도 놈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늙은 거지는 칼을 들어 그의 등을 겨냥했다. 챙그랑- 칼은 늙은거지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늙은 거지는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죽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늙은 거지는 비틀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섬주섬 자신이 깔고 앉았던 거적 때기와 몇가지 물품을 챙겼다. '빨리 마스터를 만나 이 일을 알려야겠군.' 그가 사라진지 몇분 지나지 않아, 늙은 거지의 모습도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빈민가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 며, 허공을 향해 혼자서 중얼거렸다. "당신은 왜 쓸데없는 일을 벌려놓아 사람……, 저를 귀찮게 만들고 그럽 니까? 일단은 당신이 벌여 놓은 놀이에 장단은 맞추어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의 이벤트는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3일의 시간을 드리지요. 그 때까지 이 수도를 떠나 그곳으로 가십시오. 만약 그러지 않으시겠다 면……, 당신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그 여자를 없애겠습니다."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처다 보았다. 달은 구 름에 가려, 빛을 잃어가고, 별들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몇 시 간만 지나면 해가 뜰 것이다. "히로…… 박영웅……. 이그리드, 넌 대체 그 소년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 는 거지?…… 이그리드……, 나의 유일한 친구……." 그는 씁씁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으으∼." 난 신음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술은 나와 안맞나 보다. 어떻게 숙취가 이틀동안이나 계속되냐? 갈증나 죽겠네. "일어나셨어요?" 세레나는 나에게 물컵을 내밀었다. "응." 난 세레나의 손에서 물컵을 받아 벌컥벌컥들이 마셨다. 음, 맛이 달짝지근 하군. "뭐냐 이건? "꿀물이에요. 숙취로 고생하는 것 같길레 주인아저씨한테 말해서 얻어왔 어요." 그래, 역시 나 생각해주는건 너 밖에 없구나! 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빈컵을 세레나에게 주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세 레나의 기분이 좋아보이는데…… 나의 착각인가? 세레나는 물잔을 탁자에 내려 놓았고, 물잔과 탁자가 부딪히면서 소리가 나고, 자연히 내 시선은 그 쪽으로 향했다. 탁자 위에는 물통과 빈컵 두 개, 그리고 규격 사이즈 대로 가늘고 길게 만들어진 담배들. 한 개, 두 개, 세 개…… 열 개, 끝??? 난 세레나에게 말했다. "아니, 왜 담배가 10개 밖에 없어?" 세레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늦은 밤이 었는데 어떻게 100개를 만들 수 있었겠어요. 10개도 겨 우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내일까지 만들라고 하셨잖아요. 말씀하신 때가 1 시 쯤이었으니, 오늘 밤 12시까진 시간이 있는거지요." 이, 이런…… 가증스러운! 난 한동안 생글생글 웃는 세레나의 얼굴을 처다보다가 비틀거리며 바닦에 쓰러졌다. 그리고 두 손으로 바닦을 박박 긁었다. 흑흑. 그래, 여자란 원래 저런 존재였어. 남자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잠시나마 속은 내가 미친놈이지! 그렇다해도 어떻게 청순가련형의 여자가 하룻밤 사이에 청순가증형으로 바뀔수 있는거지? 이제 이용가치가 끝났다 이거냐? 지를 위해 남의 집까지 처들어갔는데, 이제 끝났으니 상관없다는 거냐? 속았다. 그것도 완전히. 저 여자는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시켜서 날 이용해 먹은거야! 내 어찌 그대를 탓하리요. 속은 놈이 잘못이지……. 난 바닦을 긁는 것만으로는 나의 격한 감정을 표현 할수 없어, 맨땅에 헤 딩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여자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리라, 맹세하면 서……. 난 일어났다. 그리고 세레나를 똑바로 처다보았다. 그래, 니가 그렇게 나 온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다, 이거야! "오늘 200개 만들어라." 세레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게 어딨어요!?" "시끄러! 너 땜에 내가 개피본걸 생각해봐! 나 같으면 옷이라도 벗었어." 세레나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라? 삐졌나? 농담이었는 데. "저기 세레나……." 내가 장난이었다고 사과하려는 순간, 세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옷을 벗을께요!" 콰광!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이 몰려오는구나! 그런데 어째서 내 머리위로만 몰 리는거지? ♬빠바바바바♬빠바♬빠바바바♬빠♬빠바바바♬빠바바바♬빠 빠 빠♬ (D·O 1집 서곡 '운명에 맞서다') 간만에 듣는 음악이군. 동굴 나올 때 듣고나서 처음인가? 쏴아아 난 내리는 비를 맞으며 고개를 들었다. 세레나는 웃옷의 단추를 하나, 둘 씩 풀더니, 마침내 단추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옷은 그녀의 어깨 곡선을 타고 흘러내리……. "안돼!!!" 난 재빨리 달려가 세레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다행히 옷은 더 흘러내리지 않고 멈추었다. "100개만 만들어. 100면 돼." 세레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기다가 눈웃음까지 쌀짝 치면서 말했다. "정말요?" 가증스러운 계집애! 어쩌겠냐? 힘없는 내가 당해야지. "응, 물론이지. 부담갖지 말고 니 마음 내키는대로 만들어. 자, 자,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난 말을 마치고 이 심각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틀어 밖으 로 나가려 했는데……. "끼아악∼."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고, 그 곳에는 웃옷이 반쯤 흘러내린 채, 양손으로 가슴 근처를 가리는 세레나가 서있었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거지? "가슴 크네." 짝-!!! 맞을 줄 알았다. 우리는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 밥을 먹었다. 세레나는 맛있게 먹고 있었지 만, 난 절대 그러지 못했다. "저, 음식이 입에 안맞나요?" 난 세레나를 한번 처다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음식은 입에 맞는데, 뺨이 아파서 못먹겠어." 진짜 너무 아프다. 어떻게 싸대기 한방에 쌍코피가 날 수 있는거지? (사 실 꼭 맞아서 났다고 만은 볼 수 없다. 하지만 난 맞아서 난거라고 믿고 싶었다. 죽이는 미녀가 웃옷을 반쯤 벗은 채 가슴을 살짝 가린다고 생각을 해보라. 비록 속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절로 코피가 흐르지 않는가?) 그 런데 지가 보여주고 지가 패는 건 또 무슨 경우야!!! 멍들었으면 어쩌지? 여자들이……. '애 애, 저 남자 얼굴좀 봐봐.' '어머, 왼쪽뺨에 손바닥 자국이 있네!' '여자랑 억지로 하려다 싸대기 맞았나봐?' '그럼 저 남자 치한이야?' '그래, 치한이야.' '어머 재수없어, 빨리 피하자.' '그러자 애. 아으, 진짜 재수없어. 어떻게 저런 인간 말종이 거리를 활보하 고 다니는거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태어난 후, 여자한테 싸대기 맞아보긴 또 처음이네! 참 이상한 곳에 와서 별 이상한 경험을 다 해보는구나. "후우∼." 난 땅이 꺼저라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반사적으로 그만……." 난 세레나를 처다 보지도 않고 말했다. "시끄러." "여자 몸을 보면서 그 정도 대가는 당연한거라구요." 하아∼, 저 계집애가 시간이 지날수록 뻔뻔해 지는구나! 난 세레나를 야려보면서 말했다. "너도 내 알몸 봤잖아." 세레나는 당황하면서 말했다. "제가 언제요?" "그때. 피닦아 줄 때!" 세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때 일이 생각나서 그 러…… 잠깐, 그땐 경황이 없어서 생각을 못했었는데 진짜 알몸이었잖아! 팬티 한 장 안걸친! 뜨아∼ 이런! 나의 순결이∼! 책임져! 책임져!! 내 인생 책임져 이 년아!!! 난 쪽팔림을 모면하기 위해 잽싸게 다시 화재를 돌렸다. "야, 패더라도 어떻게 쌍코피가 나오게 패냐?" 세레나는 포크를 내려 놓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로 말했다. "죄송해요오." 죄송한걸 아는 년이 사람을 그렇게 패냐? "정말 죄송해요." "됐어." "용서해주세요오." "됐다니까!" "저기 그럼 제가 먹여 드릴께요!" 무어라? 아니, 이 아가씨가 무슨??? "자, 아∼." 세레나는 포크로 고기를 찍어 내 입에 갔다 댔다. 이런 행복한 경우가! 역시 이래서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거야!! 난 행복감에 젖어서 입을 벌렸다. "아∼, 우물우물. 꿀꺽." 아! 맛있다. 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세레나가 집어 주는 음식들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그렇게 행복한 식사 시간이 끝나고, 2층으로 올라가려 할 때 결국 주인에게 한소리 들었다. "지금이 한창 좋을 때인거 다 이해하지만, 너무 티내지는 말게. 이래가지 고 결혼 못한 사람 어디 살 맛 나겠나!" 무지하게 부러웠나 보군! 억울하면 결혼해요. 설마 저 나이에 결혼을 못한 건 아니겠…… 산적수염과 구렛나루 때문에 못했을지도. 그럼 내가 이제까지 노총각 앞에서 신혼티를 냈다는…… 아!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더니, 나의 별 의미없는 행동이 타인에게 커다 란 상처가 되었을줄은……!!!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우리는 방으로 올라왔다. 난 지금부터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을 즐기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식후 땡'. 국어 선생이 말하기를 식후에 피는 담배야 말 로, 인생사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난 세레나가 만들어 놓은 담배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세레나는 손재주가 있는지 아주 잘 만들어 놓았다. 크기와 모양 모두 합격이다. 난 담배를 입 에 물고 불을 붙인 다음, 젖먹던 힘까지 발휘해 연기를 들이 마셨다. "쿨럭 쿨럭, 쿨럭 크윽-!" 졸라 쓰군. 그래도 이거라도 있는게 어디냐?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레나에게 말했다. "뭘봐? 너도 필레?" 그 후, 우리는 계속 여관안에 짱박혀 있었다. 난 사람들에게 술을 사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캐물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만한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 다. 어쨌든 공개 처형이 취소된걸로 봐서는, 후작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다 늙은 주제에 죽기는, 죽기보다 싫은가보다. 할 일이 없어 매우매우 심심해지자, 세레나는 담배 만드는데 열중했다. 나? 나야 당연 세레나가 만들어 놓은 담배를 피는데 열중했다. 진짜 심심하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었다. 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세레나가 만들어 놓은 담배를 피고, 괜히 세레나 툭툭 건드리고, 세레나는 짜증을 내고, 열받아서 억지로 키스하려다 싸대기 한대 맞고, 난 삐져서 누워있고, 세레나는 달래주고……. 으아! 심심하다. 너무나도 심심해진 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방법 이 없다. 세레나와 즐기는 수 밖에, 크흐흐흐. "뭐?" "음∼, 짝이요." "짝?" "예." "둘, 넷, 여섯, 여덞…… 젠장, 또 꼴았어. 야, 이번엔 니가 잡아." "예." 오죽이나 심심하면, 내가 세레나와 짤짤이를 하고 있겠냐? 그런데 무슨 계집애가 이렇게 짤짤이를 잘하냐? 벌써 60골드나 꼴았어. 흑흑, 그래도 도 박판에서는 꽤 날리던 몸이었는데……. 난 주인 아저씨에게 소식을 전해듣고, 달음박질쳐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 리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 그 곳에는 두 명의 남녀가 2세를 만드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착각을 했군요. 저 신경쓰지마시고 하던거 계속하 세요." 여자는 황급히 시트로 몸을 가렸고, 남자는 화난 표정으로 날 처다보았다. "부디 맨땅에 헤딩하지 마시기를……. 화이팅!" 난 주먹을 꼭 쥐며 힘내라고 덕담까지 해줬다. 그 다음 인사를 꾸벅하고, 옆방으로가 문을 활짝 열어 재꼈다. 침대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세레나는 헥헥 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난 빠르게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야! 기쁜 소식과 더 기쁜 소식이 있어. 뭐 먼저 들을레?" "……?" "됐어. 기쁜 소식 먼저 들어. 기쁜 소식은 니 부모는 풀려나고 니 숙부는 잡혀갔어. 더 기쁜 소식은 니 몸에 1만골드의 상금이 걸렸어. 니네 부모가 너 찾는다." "저, 정말이에요?" 세라나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래." 세레나는 내 품으로 뛰어들어왔다. 난 세레나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녀 는 고개를 살짝 들면서 말했다. "정말이에요? 진짜 정말이에요?" 진짜 정말? 가짜 정말도 있나? 난 볼을 타고 흐르는 세레나의 눈물을 살짝 닦아 주었다. 그리고 웃었다. "네. 아가씨. 아가씨 부모 다 풀려났어요. 백작 직위도 다시 되찾았구요. 그러니까 빨리 가자구." 세레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짐을 대충 챙긴 다음 세레나를 데 리고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희 갑니다. 안녕히계세요." "자네 벌써가는건가? 열흘 동안 머문다고 하더니…… 이봐 숙박비 남은거 가져가야지!" "그냥 아저씨 가지세요." 난 세레나의 손을 잡고 여관을 뛰처 나갔다. 여관 앞에는 마차가 한 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타고 왔던 귀족 집 마차가 아닌 달구지 같이 생 긴 마차였다. 마부가 어딨나 살펴 보았더니, 마차에 기대 편하게 쉬고 있었 다. 난 마부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레이트 백작가까지 갑시다." 마부는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이봐! 지금 나 쉬고 있는거 안보여. 나중에 출발……." 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10골드짜리를 그에게 튕겼다. "레이트 백작가까지. 최대한 빠르게." "알겠습니다. 손님. 빨리 타십시오." 역시 돈이 제일이라니까. 난 세레나를 들어서 마차에 올려준 다음 나도 마차에 올랐다. "출발하겠습니다." 마차는 덜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바람의 저항에 세 레나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주위의 건물은 빠르게 뒤로 이동하고 마차는 수도의 여기저기를 누볐다. 난 눈을 감고 달려드는 바람을 느꼈다. 기분이 좋았다. 단지 바람 때문만은 아니였다. 나와는 별 상관 없는 세레나의 일 때문에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세레나가 사창가에 팔려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화가 났다. 세레나의 부모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 뻤다. 세레나가 힘들 때, 내가 곁에 있어 주었다. 내가 힘들 때에는 세레나 가 곁에 있어주었다. 난 여자를 밝히긴 하지만 누구를 좋아해 본적은 없다. 아니 한명있다. 라 나. 처음에 세레나를 보았을 때, 단순히 예쁘게 생긴 여자라고 느꼈다. 지금도 그런가? "저기요." "왜?" "도착했어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던 거에요? 몇번이나 불렀는 데……." 그러고보니 마차가 멈춰있었다. 얼굴에 느껴지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빨리 내리자." 난 먼저 내려서 세레나를 받아주었다. 우리가 완전히 내리자 마부는 인사 를 하고 다른 곳으로 마차를 몰았다. "여기가 니네 집이냐?" "예." 난 내앞에 있는 커다란 흰색 저택을 바라보았다. 대충 크기를 보아하니 후작의 집과 비슷한 크기였다.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자 갑옷을 입은 두명 의 병사가 가로막았다. "무슨일이냐?" 세레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세레나에요." 순간 병사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라나 아가씨! 정말 세레나 아가씬가요?" "예. 저 몰라보시겠어요?" "저기…… 머리색이……." 아차, 아직 마법을 해지하지 않았군. 난 세레나 옆으로 가서 세레나의 머리에 손을 올려 놓고 마법을 해지시켰 다. 꼭 손을 올릴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그냥 세레나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한번더 만져보고 싶었다. "세라나 아가씨! 정말 세레나 아가씨군요. 지금 당장 백작님께 알려드리겠 습니다." 세레나의 머리카락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병사들은 허둥지둥 대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화려한 옷을 입은 옅은 갈색머리의 남자와 세레나 와 같은 진녹색 머리를한 여자가 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 을 본 세레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들에게 뛰어 들었다. "세라나!" "아버지! 어머니!" 세레나는 그들의 품에 안겨 마음껏 울었다. 세레나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 자도 세레나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감 격적인 부모녀상봉.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감동적 이지는 않을꺼다. 그런데……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꺼지? 난 신경도 않쓰이나? 누구 덕에 다시 만났는데. 내가 기다리기 지겨워 담배라도 하나 빼물까 하고 생각할 때 쯤, 세레나 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날 발견했다. "세레나. 저 분은……?" "……." 세레나는 자기 아빠한테 뭐라고 말을 했지만, 너무 작게 말해서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탄성을 질렀다. "뭐라고? 그런 일이!" 세레나의 아버지는 나에게로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난 레이트 리키드라고 하네. 자네는?" "전 히로라고 합니다. 할 얘기가 많으니까 들어가서 하지요." 세레나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쪽에서는 여전히 모녀가 부둥켜 안은 채 울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응접실에서 대화를 해야하겠지만, 내가 설명해야 할 내용들 이 1급 비밀(세레나가 사창가에 팔려갔던거, 내가 후작 깠던거 등등)에 속 한 것들이기에 부득이하게 서재에서 대화 하게 되었다. 난 이런 궁전 같은 집에 앉아 있다는게 매우 부담스럽다. 특히 이 쇼파의 감촉, 앉는 순간 엉 덩이를 부드럽게 받혀 주는 이 촉감 때문에,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 이다. 하지만 촉감보다 더 부담스러운건, 앉아있는 대형과 저 세레나의 아버지 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다. 앉아 있는 대형은 2 : 2 마주보는 대형으로 처음 2는 중년 부부 둘, 두 번째 2은 자라나는 청소년 둘. 이러니까 꼭 처 갓집에 결혼 승낙 받으러 온 것 같잖아. 잠깐, 아예 이 기회에 '아버님! 어 머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제가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라고 말해볼까? 그럼 당장 쫒겨 나겠지? 그런데 세레나! 넌 대체 왜 이렇게 나랑 붙어있는 거냐? 너 때문에 대화에 집중이 안되잖아. 아! 자꾸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 이 느껴진다. 이 푹신한 쇼파를 침대로 사용하고 싶어라. 세레나의 아버지는 자기 동생이 세레나를 사창가에 팔아 넘겼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살기를 팍팍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우 열받는지 담배를 빼물었다. 아까부터 이 부담스러운 분위기에 담배를 피고 싶었던 나는 기 회다 싶어, 은근 슬쩍 담배를 하나 빼물었다. "그러니까 자네 혼자서 후작집에 처들어 갔다는 건가?" "예." 난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세레나와 세레나의 어머니는 서재를 가득 매 운 담배 연기에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와 세레나의 아버지는 무 시하고 계속 줄담배를 폈다. 여기서 줄담배란, 불을 한번 붙인 뒤에 계속 피는 것을 뜻한다. 담배가 다 타들어 갔으면, 다시 하나를 빼 물고, 다 타 들어간 담배를 돌려서 불을 붙이고 그 담배 다폈으면 다시 하나를…… 젠 장, 이러다 몸 망가지는 거 아냐? 지금은 우리가 담배를 피면서 얘기한지 약 2시간이 지났다. 그 때문에 커 다란 서재안은 온통 담배 연기로 가득 찼고(누가 엿들을까 싶어, 창문과 방문 모두를 닫아 놓았다. 옛말에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다' 고 하지 않았나!), 세레나와 세레나의 어머니는 완전히 죽을 지경이었 다. "콜록. 여보 담배 좀 그만 피세요. 몸 상하겠어요. 끊은지 얼마 됐다고 다 시 피는 거에요!" "당신은 가만있어. 내가 지금 담배 안피게 생겼어?" 세레나의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연신 콜록거리며 손수건으 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있는 세레나를 보니 별반 다를 바 없 는 상황이었다. "제발, 끄세요. 너무 많이 피웠어요." "시끄러. 나도 피기 싫은데 만든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피우는 거야." 내 말에 세레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침을 해댔다. 우리는 그렇 게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두 여인을 나두고 다시 대화에 빠져 들었다. 뭐, 대화라고 해봐야, 거의 내가 말하고 세레나의 아버지는 고개만 끄덕이 는 거였지만 말이다. "후우, 그렇게 된거였나?" "예."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를 위해 그렇게 까지해주시다니……." 세레나의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감동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담배 연기 때문에) "정말로 고맙네. 자네 덕에 우리 가족 모두가 다시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됐네. 정말 고맙네." 세레나의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담배를 재떨이에 버렸다. 재떨이에는 이 미 우리가 버린 꽁초가 수북히 쌓이다 못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자, 식사시간도 된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일어나지." 그 말에 두 모녀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둘은 아까부터 기침하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진짜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아마 진작에 나 가고 싶었던 것 같은데, 세레나의 어머니는 내 얘기를 듣느라고 못 나간 것 같고, 세레나는…… 세레나는…… 젠 왜 안나갔지? 뭐, 엉덩이가 무거워 일어나기가 힘들었나보지. 하긴 저렇게 마른 듯이 보여도, 실제로는 진짜 볼륨있는 몸매야. 크흐흐, 솔직히 난 세레나의 가슴이 그렇게 클 줄은 몰랐 는데 말이야. 지금 보니 엉덩이도 진짜 빵빵하군. 이런 여자를 가리켜 쭉쭉 빵빵이라 그러는건가? 저 예쁘장한 얼굴에, 그런 도발적인 몸매를 숨기고 있는 줄 누가 알겠어. 아! 보고 싶어라. 그녀의 알몸을 볼수만 있다면, 이 한몸 다바처……. "저기요!" "응, 왜?" "안 일어나요?" 난 세레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내 입안에는 침이 가득고여 흘 러내리고 있었고, 세레나의 부모는 날 아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 었다. 저렇게 멍청하게 생긴 놈이 정말로 후작을 깠을까 하는……. "아, 저, 쇼파가 너무 푹신해서요."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세레나의 아버지는 고개를 한번 끄덕 이더니,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 나갔다. 난 세레나와 함께 그 뒤를 따라갔 다. 난 세레나의 부모가 앞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은근슬쩍 세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 내 손이 그녀의 어깨위에 올려지고, 난 그녀를 살짝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러면 세레나가 화를 내면서 손을 뿌리치겠지. 화내는 모습도 상당히 귀 엽지. 흐흐, 세레나 놀려먹는 것도 꽤 재밌단 말이야. 설마 부모까지 다 있 는데서 싸대기 때리진 않겠지? 1초, 2초, 3초…… 엥? 이제 뿌리칠 때가 됐는데. 분명 세레나도 자신의 어깨 위에 이물질(?)이 올려저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이상하게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아,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 석해야 하는거지? 1번, 세레나가 날 좋아한다. 2번, 세레나는 음탕해서 남자라면 다 좋아한다. 3번, 예전에 오른쪽 어깨를 다쳐, 어깨에 감각이 없다. 4번, 나 따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5번, 지금은 단지 부모 때문에 참고 있는 거다. 나중에 둘만 있게 되면, 멱살잡고 죽을 때까지 싸대기 때린다. 아무래도 1번이……. 아니야, 현재 정황으로 미뤄봐서는 5번일 가능성이 제일 커. 이런, 빨리 손을 떼야 되는데…… 떼기 싫다. 그래. 죽을 땐 죽더 라도 일단 현재를 즐기고 보는거야. 아! 손에 닿는 이 감촉. 조금만 손을 아래로 내리면, 가슴도 만질 수 있는데, 한번 죽음을 각오하고 시도해 볼 까? 내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 세레나의 아버지는 서재 문을 열고(위 의 상황은 불과 15초 동안 이루어진 것임), 그 순간 밖에 시립해 있던 하 녀는 깜짝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런, 나와 세레나의 은밀한(?) 관계를 들킨 건가? 난 놀라, 세레나의 어깨의 올려 놓은 손을 잽싸게 회수했다. 젠장, 어쩌지? 저 하녀가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닐텐데……. '어떤 남자가 세레나 아가씨를 희롱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다니까, 내가 확실하게 봤어. 세레나 아가씨는 막 싫어하는데 그 변 태 같이 생긴 남자가 억지로 아가씨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니까.' '정말?' '그러∼엄. 그 인간이 글쎄…….' '어머 어머. 세상에∼.' '이거 비밀이니까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마.' '알았어. 걱정하지마, 얘.' 그럼 이 하녀는 또 다른 하녀한테 이 얘기를 똑같이 해준다. 물론 마지막 에 '이거 비밀이니까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마.' 라는 말까지도 똑같이 얘기한다. 이렇게 소문은 퍼져나가고 그 도중에 점점 살이 붙어, 내가 세레 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는 사실이…… '이렇게 손을 뻗어 온 몸을 더듬었데.' '아가씨의 전신을 애무했데.' '글쎄, 옷을 벗기려 그랬데는거 있지.' '옷을 벗겼데.' '그 남자가 세레나 아가씨를 겁탈하려 그랬데.' '겁탈했데.' 이 상황까지 와서, 세레나가 헛구역질이라도 한번 하면…… '그 일로 인해 세레나 아가씨가 지금 임신 중이레.' '다음 달이 분만일이라며.' '지금 이 저택 어딘가에 애를 숨겨 놓고 기르고 있데. 혹시 밤에 애기 울 음 소리 들리지 않니?' 이렇게까지 된다. 여자 손목 한번 잡아보고 인생 망쳤다는 남자들 얘기가 뻥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예상은 빚나갔다. 난 복도로 나와 서재 안을 바라본 순간, 이 하녀가 왜 그렇게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서재안은 세레나의 아버지와 내가 3시간 동안이나 피워덴 담배로 인해, 완전 안개가 깔려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그 안개속 을 뚫고 4개의 인형이 걸어 나오자, 하녀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였던 것이다. 난 식탁 앞에 앉아서 매우 큰 고민을 해야만 했다. 식탁은 4명이 앉아있 기에 비정상적으로 컸고, 내 앞에 놓인 접시 양쪽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1 열 횡대로 쫙 늘어서 있었다. 대체 뭐부터 집어야 되는거지? 세레나는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바깥 쪽 것부터 사용하세요." 누가 그걸 모르냐? 중학교 가정시간에 다 배웠어! 난 중간 정도 크기의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이것만을 써서 식사를 끝마치리라! 지금 배고픈데 식탁 앞에서 예절 따지 게 생겼냐? 난 결심을 하고, 저기 매우 교양있게 잡수시는 세 분과는 달리, 그냥 대충 대충 먹기 시작했다. 커다란 식당안에는 오직 내가 음식 먹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저 인간들은 나와 입구조가 다르게 생겼는지 먹는 소리를 절대 내 지 않았다. 진짜 신기하다. 귀족들은 입구조까지 다르다. 역시 귀족은 아무 나 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대체 이 인간들은 뭐냔 말이다. 한쪽에 하녀 5명이 서서 우리가 먹는 모습을 뚫어지게 처다 보는데 진짜 미칠 지경이었다. 왜 남 먹는걸 빤히 처다 보는 거지? 남 먹는거 처다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추잡한 짓이란 걸 모르나? 참고로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은 줬다 뺏는 거다. 하아∼, 식사도중 다른 곳에 신경을 쓰다보니 배가 슬슬 아파오는군.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는 모습을 본, 세레나의 어머니 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왜 그러시죠? 음식이 입에 안맞으시나요?" "아닙니다. 충분히 맛있습니다. 잠깐 급한일이 있어서요." 세레나는 손에 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 놓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나중에 해결하세요." 내가 지금 나중에 해결하게 생겼냐? 난 대답을 하는 대신 조용히 문을 향해 걸었다. "어디 가시는거에요?" "몰라도 돼." "어디 가시는지는 말해주셔도 되잖아요." 내가 왜 화장실 간다고 너한테 일일이 보고를 해야하는 건데? "남에 일에 신경끄고 밥이나 먹어." 세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을 가로 막았다. 이 년이 왜이레? 이 때, 뱃속에서 밀려오는 통증으로 인해 이마에 혈관 마크 하나가 뽈록 튀어나왔 다. "비켜!" 세레나는 두 팔까지 벌리며 절대 못 비키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냈다. "싫어요." "좋은 말로 할 때 비켜." "싫어요. 갑자기 나가려는 이유가 뭐에요?" "몰라도 된다고 했잖아!" 난 짜증이나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키웠다. 하지만 세레나는 요지부동 이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는지 세레나의 부모는 자리에서 일어났 고, 하녀들은 세레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가실건가요?" "……?" "이대로 가실꺼냐구요? 최소한 보답할 기회 정도는 주셔도 되잖아요! 지 금 이대로 떠나시면 어떡해요?" 아니, 이 여자가 지금 뭔 소리 하는거야? 어느새 세레나의 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눈 큰 여 자들은 울음이 많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난 복부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참아내며, 항문조예법(港門造詣法)으로 나오 려는 응가를 붙잡아두었다. 젠장, 이러다 변비걸리는거 아니냐? "나 지금 여기 떠나려는게 아니고 급히 해결 할 일이 있어서 그래. 그러 니까 빨리 비켜." 흐억, 이젠 말하기도 힘들다. "안되요. 못 비켜요. 분명 이대로 떠나실거잖아요!" 점점 호흡은 가빠오고, 얼굴은 노랗게 변한다. 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애원하듯이 말했다. "나…… 안 떠나. 그러니까 제발 비켜줘." "거짓말하지 마세요. 안 그럼 식사 도중 무슨 일로 나가시려는 거에요?" 으헉, 괄약근이 이젠 한계다. 안돼! 참아야돼!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세레나의 면상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똥 누러간다, 이 계집애야! 안 비켜!! 안 비키면 죽는다!!!" "???"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고, 엄창난 긴 장감과 침묵이 감돌았다. 아! 쪽팔려, 쪽팔려. 내가 이래서 말 안하려 그랬 는데, 저 싸가지 없는 년 때문에 이게 무슨 개쪽이냐? 난 급하게 세레나를 밀쳐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밖에는 긴 복도가 있 고, 수십개의 문이 늘어서 있는……. 뜨아! 미치겠다. 난 잽사게 다시 식당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빨.리. 화.장.실. 어.딘.지. 말.해. 안. 말.하.면 전.부. 죽.여.버.린.다." 난 살기를 팍팍 내뿜으며 한글자 한글짜씩 딱딱 끊어서 말했다. 다행히 한 하녀가 앞으로 나왔다. 나이는 약 15세 정도 되어보이는 앤데, 상당히 귀엽게 생겼다. 지금은 얼굴이 약간 겁에 질려 있긴 하지만, 뭐 그것도 상 당히 귀엽게 보였다. 겁먹은 한 마리에 토끼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이따 말이나 걸어 봐야겠군. 윽,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거지? 급해 죽 겠는데. 난 하녀의 손목을 잡고 사납게 끌어 복도로 나왔다. "빨리 안내해." "예." 하녀는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아주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어쭈, 남은 지금 죽어 가는데, 걸어? 난 앞서가는 하녀 등 뒤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뛰어!!!" "예!" 난 달음박질 치는 하녀의 뒤를 쫒아가 간신히 화장실 안으로 골인했다. 그리고 잽싸게 바지를 내린 다음, 쪼그려 앉아서 일을 보았다. 푸드득, 푸득, 푸득 아∼ 살겠다. 마치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엄청난 쾌감이 몸을 감싸 안았다. 진짜, 이 기분은 당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거다. 마치 뭐랄 까? 안 풀리던 수학 문제가 갑자기 풀린 기분? 아니면, 길에서 주은 복권 이 당첨된 기분? 그것도 아니면, 쓰리고(Three Go) 판을 당할 뻔 했는데, 달광(月光)먹고 난 기분? 아! 어떤 말로 이 기분을 표현하리오! 약 3분에 걸친 일이 끝나고 일어나려고 보니……. "아니, 이런 개같은 일이!" 난 비어있는 휴지걸이를 보고 절규를 했다. 씨바, 휴지가 없다. 난 너무나도 큰 허탈감에 손톱을 세워 벽을 박박 긁었다. 그리고 흐느끼 기 시작했다. "흑흑, 빌어먹을……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나보고 어쩌라고." 대체 어떤 새끼가 휴지를 다 쓴거야!? 다 썼으면 갔다 놔야 할꺼아냐!? 화장실에서 일을 끝 마쳤는데 휴지가 없는 것을 알았을 때에, 이 당혹스 러움. 이것도 당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거다. 이럴 경우에는 몇가지 해 결 방법이 있긴 한데……. 1번, 바지 안 주머니를 뜯어서 닦는다. 2번, 양말을 벗어서 닦는다. 3번, 팬티를 찢어서 닦는다. 4번, 그냥 쪼그리고 앉아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 5번, 안 닦고 그냥 나온다. 난 몇번을 선택해야 하는거지? 세레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냐구? 그래, 뭐 무지하게 쪽팔리다는 것만 빼면 무지하게 괜찮지. 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까 내가 5분 동안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서 생각해낸 방법은 결국 6번이 었다. 그건 바로 마법! 마법은 원래 쓰라고 있는거다. 매우 고난이도의 마 법인 원소 소환(Conjure Elemental) 마법으로 물의 원소를 소환해서, 겨우 뒤를 처리했다. 똥딱는데 5클래스의 마법을 사용하다니! 쓰바, 아이언스 이 그리드가 울겠다. 세레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난 포크로 사납게 스테이크를 찍어 입에 처 넣었다. 어차피 개쪽 당했는 데, 체면 차려서 무슨 소용있겠냐? 세레나와 세레나의 부모는 아까 내말을 듣고 밥맛이 뚝 떨어졌는지, 포크 로 깨작깨작 거릴 뿐, 입에 넣지는 않았다. 지들은 화장실도 안가나?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먹는데만 열중하자, 세레나는 내가 화났다고 생 각했는지, 열심히 잘못을 빌었다.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결코 용서가 안돼. 화장실에 휴지만 있었어도 내가 참는다. 흑흑, 내가 진 짜 그 휴지 한 장이 없어가지고,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마법을 썼 던 것만 생각하면……. 난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들고있던 포크가 엿가락 처럼 휘 었다. 엥? 이게 왠일? 나도 혹시 유리겔라 같은 초능력이…… 쩝, 난 지금 마법산데, 초능력이 대수냐? 난 들고 있는 포크를 내려 놓은 다음, 다른걸로 집어 들었다. "이봐요! 삐졌어요?" 그래, 나 삐졌다. 난 고개를 들어 세레나를 보았다. 세레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 라며, 고개를 숙였다. "야! 그거 안 먹을꺼지?" "예?" 난 포크로 세레나의 접시 위에 있는 고기를 가리켰다. "그거 말이야. 그거." "예. 안 먹을건데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세레나의 접시에 있는 고기를 내 접시에 덜었다. 난 고기를 집어 먹으며, 다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아! 똥 한번 싸고 왔더니, 입맛이 땡기는구나!" 푸우우-! "꺄악." 결국 세레나의 아버지는 마시던 물을 브레스로 뿜어냈고, 그 물은 고스란 히 반대편에 앉아있는 세레나의 어머니가 뒤집어 썼다. "마님!" 뒤에 시립해 있던 하녀들은 깜짝놀라, 수건을 들고 뛰어와 세레나 어머니 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세레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보았고, 난 커다란 고기를 입에 문 채, 어 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힘든 식사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서재로와 티타임을 즐겼다. 세레나와 세레나의 어머니는 교양있는 자세로 차의 향기와 맛을 음미하고 있었지만, 세레나의 아버지와 나는 식사 후 정기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예전에 국어 선생이 말한 명언 중 하나가 '식후연초면 불로장생이라!(食後 煙草不老長生)' 다. 굳이 뜻을 해석하자면, 밥 먹고 나서 피는 담배는 건강 하고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지름길이란 뜻이다. 이건 정말 현실성 있는 얘 기다. 옛날 중국 후한 말기(삼국시대라고도 한다)에 성도 뒤쪽에 자리한 금병산 정상 부근에 허름한 집 한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수십년 동안 도 를 깨우치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연초 도사(煙草道士)' 라고 불렀다. 그는 기어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머리가 하옇 게 샌 노인이 될 때까지, 도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사색하고 또 사색하 고 탐구하고 또 탐구했지만, 도의 진리라는 것이 워낙 심오하고 방대해 도 저히 깨우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밥먹은 직후 마음을 비우고 하늘 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그는 배에서 느껴지는 포만감에 온몸이 나른해지 는 것을 느끼며, 담배를 하나 빼물었다. 그리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연 기를 내뿜으며 이렇게 중얼 거렸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로다!' 이 말과 동시에 그는 도를 깨우쳤고, 한 마리 학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올 라갔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그후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금병산 정 상에는 학이 한 마리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그 학은 입에 담배를 물고 있 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날아다닌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담뱃불이 붙어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 고사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 모른다. 알게 뭐냐? 어쨌든 담배는 좋은거란 얘기긴 것 같다. 알아서 해석하도록. 난 그때 당시 이 고사를 듣고 나서 어린 마음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 다. 그리고 그 후부터 학이란 동물을 숭상하기 시작했다. 가끔씩 동물원에 가면 학 우리 안에 불붙힌 담배를 던져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학 우리 안 에 불이나, 동물원 관리자한테 맞아 죽을 뻔 하기도 했지만, 난 아직도 그 일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 후에 한 세 번 정도 그 짓을 더하고 나니까, 이 젠 동물원에 가도 들여 보내 주질 않는다. 방화범으로 경찰에 신고하기 전 에 돌아가라나? "담배만 피지 마시고, 차도 좀 드세요." "너나 마셔." 세레나의 아버지는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부벼 끄고, 이상한 주머니 하나 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받게나." "뭡니까?" "약속했던 1만 골드네." 흠, 돈주머니였군. 난 피고있던 담배를 뱉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물론 돈이 필요 없다는건 잘 아네. 그리고 자네가 우리를 도와준거에 비 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하지만 최소한의 성의라고 생각하고 받아주게." 옆에서 보고있던 세레나와 세레나의 어머니도 한 마디씩 했다. "그냥 받아두세요." "얼마 안되지만 받으세요. 저희도 감사의 인사 정도는 하게 해주셔야죠." 젠장, 어쩌지? 받자니 돈 바라고 한 것같고, 안 받자니 저들이 부담스러워 할 것같고. 그렇다고 저 무거운 돈주머니를 들고 가기는 더 싫고.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받아두겠습니다." 난 배낭을 열어 보석이 든 주머니를 돈주머니 옆에 꺼내 놓았다. "이게 뭔가?" "보석입니다. 2만 골드 정도 될꺼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걸 왜……?" "부탁드릴게 좀 있어서요." 난 여기오기 전 레오즈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얘기했다. 결혼식 장가서 깽판치고, 사병들 대가리 박게하고, 영주 놈 아구리 날린 것 까지. "……이렇게 해놓고 떠나오긴 했는데, 조금 마음에 걸리더군요. 아무래도 그 영주가 다시 보복을 할 것 같아서요." 세레나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아직까지도 그런 놈이 있단 말인가?" "예. 그래서 말인데, 그 놈 어떻게 할 수 없을까요?" 세레나의 아버지는 걱정말라는 투로 말했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영지와 붙어있는 마을의 영주라면, 아마 몰락한 귀족일걸세. 걱정하지 말게나. 그 놈은 내가 반드시 잡아 넣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3만 골드로 그 가족들을 잘 좀 보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알았네. 하지만 이건 필요없네. 자네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킬테니 도로 집어 넣게."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가지고 계시다가 그 가족들한테 주세요." 세레나의 아버지는 잠시 돈주머니와 보석주머니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 다. "알겠네. 그런데 자네 그들과 대체 무슨 관곈가? 단순히 하룻밤 묵었다고 해서 그 정도로까지 도와주다니." 난 담배를 하나 빼물며 말했다. "아까 제가 그 여자한테 동생이 있다고 했었죠?" "그 라나라는 애 말인가?" "예. 지금 10살인데 아주 귀엽게 생겼죠." 세레나의 가족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날 처다보 았다. 궁금하냐? 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 애가 제 애인이에요." "???" 놀랄 줄 알았다. "그러니까 제 애인, 잘 좀 부탁드립니다." "???" 난 고개를 내 저으며,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잠깐만요!" 세레나는 잽싸게 일어나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지금 어디가시는 거에요?" 앗! 아까 식당에서와 같은 상황이군. "밖에. 너 여기까지 데려다 줬으면, 내 역할도 끝난거아냐? 또 뭐 부탁할 꺼 있냐?" 세레나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요.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하룻밤 정도는 자고 가셔도 되잖 아요." 음, 그도 그렇군. 내가 또 언제 이런 궁궐같은 집에서 자보겠냐? 때맞춰 세레나의 부모도 한마디씩 했다. "그래. 세레나 말대로 자고 가게." "그래요. 이대로 보내면 저희 마음이 편치 않아요." 음, 뭐 그렇게까지 원하신다면야, 하룻밤 정도는 있어드리지요, 푸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만 신세지고, 내일 일찍 떠나겠습니다." "신세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원하시는 만큼 편하게 머무세요." 원하는 만큼? 아예 이곳에 눌러 살어? 세레나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빨리 오세요. 제가 방까지 안내해 드릴께요." "알았으니까, 잡아 땡기지 좀 마." 나는 세레나의 손에 이끌려 3층에 있는 방에 도착했다. 세레나는 문을 열 고 들어갔다. "여기에요." 난 웬만한 호텔 특실보다 좋은 방을 보고는 입이 쩍 벌어졌다. 오옷! 저 더블 침대 좀 봐! 무지하게 푹신하겠다. 난 삼단뛰기로 침대에 몸을 날렸다. 풀썩- "야∼ 이거 무지하게 좋은데." 세레나는 침대에서 뒹구는 내 모습을 보고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여기서 푹 쉬세요. 몰래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시구요. 제 말 좀 들어 요!!!" 난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며 말했다. "다 듣고 있어. 내가 왜 도망치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 이 안락감.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졸음이 밀려오는구나! 난 세레나에게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봐." 세레나는 삐진듯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절대 그냥 가시면 안되요." "알았다니까." 세레나는 몸을 돌려 복도로 나가려 하였다. 어, 아직 말 안한게 있는데……. 난 세레나의 등뒤에 대고 외쳤다. "야! 룸써비스도 부탁해." 세레나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룸…… 써비스요?" 아, 여기는 호텔이 아니였지. 방이 매우 좋아서 착각을 하게 되는구만. "음, 그러니까 음료수나 과일같은 거 말이야."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난 세레나가 나가자 본격적으로 침대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좌로 두바퀴 구르고 우로 두바퀴구르고, 몸을 튕겨보기도 하고, 다시 좌로 세바퀴. 쿵-! "쓰읍." 난 아픈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젠장, 좌로 두바퀴만 굴렀어야 했 는데……. 똑똑- 누구지? "들어오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예쁘게 생긴 하녀가 음료수와 과일 등이 있는 접시 를 들고 들어왔다. 흠, 아까 화장실 안내해준 하녀로군. "안녕하세요." 하녀는 들어오자 마자,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난 손을 뻗어 하녀 의 손에 들린 접시를 받아들었다. 하녀는 내가 접시를 받아들자 매우 놀라 는 표정이었다. "고마워." "아, 아닙니다. 뭐 또 필요하신건 없으십니까?" 난 과일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전혀 없어. 그런데 니 이름은 뭐냐?" "예?" 하녀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얼굴이 새빨게진 걸로 봐, 상당히 당황하 고 있는 것 같았다. 하녀는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는 로나이시라고 합니다." "그래? 예쁜 이름이네." "……." 로나이시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난 히로. 잘 부탁한다." "예." 로나이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잠시 우리는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별로 상관 없었지만, 로나이시는 나 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게 매우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로나이시는 새빨 개진 얼굴로 계속 내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응? 뭔데?" 로나이시는 떠듬거리며 말했다. "저기 목욕물 받아 놓았습니다. 지금 씻으시겠습니까?" 목욕? 뭐, 때 벗기는 것도 괜찮겠지. 난 손에든 음료수를 원샷한 다음, 쟁반을 내려 놓았다. "그러지. 목욕탕은 어디냐?" "따라오십시오." 로나이시는 앞장서서 걸었고, 난 그 뒤를 따라갔다. 목욕탕은 물을 데워야 하기 때문인지, 1층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탕을 보면서 옷을 벗고 들어가려 하였다. 그런 데……. "야! 뭐해?" "예?" "니가 나가야 내가 옷을 벗고 들어갈꺼 아냐?" 로나이시는 새빨개진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저기 저는 목욕 시중을……." 목욕 시중? 그건 또 뭐냐? 설마 이 여자가 때밀이라는……. "됐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넌 그만 나가봐." "저기 그래도 아가씨께서……." "아가씨? 세레나를 말하는거냐?" "예." "그 계집애는 왜 쓸데없는 걸 시켜서 사람 곤란하게 만드냐? 세레나한테 는 내가 잘 말할테니까 그냥 나가있어. 내 몸 정도는 내가 씻을 수 있다 고." "등은……?" 이 여자가 진짜 친절하게 구네! 그러고보니 등이 가렵긴 하군. 목욕할 때 마다 여기는 손이 안닿아서 손도 못댔으니까. "알았어. 그럼 등 닦을 때 부를테니까, 그 때까진 밖에 나가있어." "예." 로나이시는 쭈삣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로나이시가 나가는 모습을 본 나 는 한쪽에 옷을 벗어 놓고 탕속으로 들어갔다. 시원하구만. 난 5분 동안 탕속에서 시간을 때운 다음, 5분 동안 몸을 완벽하게 씻었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엇이든지간에 빨리빨리 하는걸 좋아하기 때문 에, 목욕 같은건 10분이면 발톱에 때까지 끍어내고도 차 한잔(참고 : 냉차 3초, 온차 30초) 할 시간이 남는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3년에 걸처서 만 드는 건물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작업하면 3개월이면 뚝딱이다. 뭐, 성수대 교라던가, 삼풍 백화점처럼 부실공사가 많다는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신문이나 TV같은 언론매체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 빨리빨리 병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예전 같으 면 뭐든 서두르는게 병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요즘 같이 하루에도 엄청 난 양의 정보가 쏟아지고 폐기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도 있다. 하루도 아닌 몇 시간 몇 초 마다 국제 정세가 바뀌고, 어제 암기 했던 지식들은 오늘 쓸모가 없어진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 응하려면 당연 사람들도 빨라져야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 빨 리빨리 기질을 잘 살려보는 방안은 없을까? 무조건 배격하는 것보다, 장점 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는 태도가 옮지 않을까? 어쨌든 난 목욕을 끝마치고 옷을 입었다. 목욕하기 전에 벗어논 옷을 또 입는다는게, 조금 찝찝하긴 하군. 내가 문을 열고 나오자, 밖에 서있던 로나이시는 깜짝 놀랐다. "저기……." "목욕 다 했어. 방으로 올라가자." "예. 로나이시는 고개를 숙이고 들릴랑말랑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러니까 처음에 세레나를 만났을 때가 기억나는군. 진짜 저랬는데, 맨날 도리도리 아니면 끄덕끄덕. 지금은 졸라 싸가지 없어졌지만…… 뭐 그래도 지금이 훨씬 낫지. "갈아입으실 옷은 이 곳에 있습니다." 난 로나이시의 말에 방 한쪽에 있는 커다란 장롱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고는 바로 닫았다. 옷장에는 수십벌의 옷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결코 내가 입 을 수 없는 옷들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음에 드시는 옷이 없으시나요?" "당연하지. 지금 나보고 이런 쪽팔린 옷들을 입으란 말이냐?" 내 말에 로나이시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저기, 그럼 마님께 당장 말씀드려, 다른 옷들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난 베낭을 집어 안에 있는 옷들을 꺼냈다. "잠깐만 뒤돌아 있어." 로나이시는 뒤로 돌았고, 난 안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주문제작해 만든 검은 남방에 검은 힙합바지로 갈아 입었는데…… 진짜 똑같이 만들어 놓았 군. 몇벌 더 만들어 달라 그럴꺼 그랬나? 난 벗어 놓은 옷을 로나이시에게 던졌다. "이거 내일 아침까지 빨아달라 그래." "예. 알겠습니다." 로나이시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옷을 들고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하녀가 나가는 모습을 본 나는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며 생각을 했다. 일단 수도까지 오긴 했는데, 이젠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후작이란 놈이 마음에 걸려 빨리 벗어나는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내일은 어디로가 지? "으아! 미치겠다." 난 귀찮은 생각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음, 이러니까 잠이 오는군. 목욕까지해서 몸도 나른하고 말이야. 잠이나 자자. …………. 똑똑똑 마침 잠들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난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야?" "세레나 아가씨 오셨습니다." 그 하녀 목소리군. "들어오라 그래."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문이 확 열리며 세레나가 나타났고, 그 뒤를 하녀 로나이시가 따라 들어왔다. "내려가 있어." "예. 아가씨." 세레나의 명령에 로나이시는 토하나 달지 않고, 밖으로 사라졌다. 난 침대 에서 뒹굴거리며 세레나에게 말했다. "야! 걔 왜 내보내? 예쁘게 생겨서 말이나 조금 붙여볼까 했는데." 세레나는 이마에 혈관 마크를 그리며 말했다. "흥, 하녀들 꼬실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리고 방금 나간 그 애는 제 하 녀라구요." "로나이시가?" 세레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로나이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당연 아까 물어봤지. 꽤 귀엽게 생겼던데 말이야. 야! 혹시 걔 어떤 스타 일의 남자를 좋아해?" 내 물음에 세레나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어느새 세레나의 이마 양쪽에는 2 : 3 의 비율로 혈관마크가 불거져 나와 있었다. "어쨌든 당신 같은 남자는 안 좋아해요!" 왜 이렇게 화를 내는거지? 내가 로나이시한테 찝적거리는게 싫은가? 잠 깐, 그렇다는건 설마……! "너 설마……." "예?" "좋아하고 있는거야?" "무, 무슨 소리에요?" 세레나는 평소답지 않게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런 세레나의 모습을 보고, 나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다 이해하니까, 솔직히 말해. 좋아하지?" "아,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세레나는 양손을 내저으며 극구 부인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세레나의 지금 행동은 내 짐작이 맞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해주 었다. 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레나에게 말했다. "내가 눈치 하나만은 남들보다 백배는 빨라. 니 마음은 이미 다 알고 있 으니까 솔직히 말해. 좋아하지?" 세레나의 얼굴이 잘악은 사과처럼 새빨게졌다. "그건……." "빨리 말해봐. 좋아하지? 좋아하고 있지?" 끄덕. 세레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말로 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좋아한단 말인가? 세레나에게 그런 취미가 있었을 줄 은…… 하아∼,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건가. 다분 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세레나에게 그런면이. 난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말이야?" 끄덕. 세레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의 얼굴은 빨개질데로 뺄개 져 한번만 더 물었다가는 위험수치를 넘을 것만 같았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랬었군.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아까 그렇게 화를 냈던거였어? 난 그것도 모르고. ……정말 미안해." 세레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니야. 진짜 미안해. 나라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누군가가 찝적덴다면 화 냈을꺼야.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을께." "……?" "난 니가 로나이시를 좋아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 "정말로 사랑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고백하는게 좋을꺼야. 가까이 있다고 안심하다간 다른 놈이 채갈지도 모르거든. 물론 고백하기 힘들다는거 잘 알아. 하지만 용기를 내. 니 마음이 진심이라면 로나이시도 반드시 받아들 여줄꺼야. 그나저나 니가 여자를 사랑하고있었다니…… 조금은 충격인걸. 아아, 걱정하지마. 난 레즈비언에 대해 별로 나쁜 감정이……." "지금, 무슨 소리하시는 거에요!!!" 갑자기 세레나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내 두개골이 좌우로 흔들렸다. 쓰 바, 무슨 계집애 목소리가 이렇게 크냐?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지? 내 가 설마 잘못 집었나? 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로나이시 좋아하는거 아니였어?" 세레나는 뻘개진 얼굴로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제가 여자를 왜 좋아해요!!?" 음, 저렇게 미친 듯이 날뛰는거 보니까, 잘못집은 것 같군. 난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럼 아까 좋아한다고 한건 뭐였어?" "그, 그건……. 지금 뭐하시는거에요!? 숙녀가 들어왔으면 침대에서 일어 나야 할꺼아니에요? 언제까지 계속 뒹굴거리고 있을 꺼에요? 빨리 못일어 나요?" 난 세레나의 광분에 완전히 쫄아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렇게 화를 내시나?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이렇게라도 시간 때워야 지." "할 일이 없긴 왜 없어요? 저녁 먹어야 되니까 빨리 일어나요." "알았어." 난 몸을 튕겨 침대에서 일어나, 세레나와 같이 방을 나왔다. 우리는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1층 식당을 향해 걸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1층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딛었을 때, 분노가 조금 사그라든 세레나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 완전히 풀렸는지, 다정한 목 소리였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무슨 느낌?" 세레나는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뭐랄까……? 굳이 말하자면, 이 세상 사 람이 아닌 것 같다고 해야하나." "……!?" 그걸 어떻게……? 난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것을 느끼며, 넌지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솔직히 그렇잖아요. 입고 있는 옷도 약간 이상하고, 평민인데도 귀족들한 테 막대하고, 마치 이 곳의 가치관은 자신과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행동 하고 있잖아요." 휴∼ 다행히 짐작만이었나보네. 그런데 여자의 직감이란거, 무시 할게 못 되는구만. 난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건 내가 개성적이여서 그런거야. 그리고 내가 언제 귀족들한테 막대했 냐?" 세레나는 입술을 앞으로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흥, 그건 저만해도 그렇잖아요. 제 앞에서 그렇게 막나가는 남자는 당신 밖에 없다구요. 처음 만났을 때, 한살 더 많다고 말 놓는다고 했을 때, 제 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원래대로라면 지금 대화 할때도 당신이 존댓 말을 쓰고, 제가 반말을 써야 한다구요." "내가 미쳤냐? 너한테 존댓말을 쓰게. 억울하면 너도 말까." "됐어요. 저는 그렇게 교양 없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네요. 그래도 우리 가족을 구해준 사람이니까 예의는 지켜야죠." 흠, 그러셔? 잘났수다. 대화거리가 거의 다 떨어져 가길래, 난 궁금하지도 않을 것을 괜히 물었 다. "그런데 다른 남자들은 니 앞에서 어떻게 하는데?" 세레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좔좔 읖기 시작했다. "제 앞에서는 언제나 격식과 예의를 갖추고,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언 제나 존댓말을 사용해 상대방을 존중해주고, 조금이라도 무거운 물건을 들 고 있으면, 당장에 들어주고, 무슨 부탁을 하던지간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들어주며………… 어쩌구 저쩌구…… 궁시렁 궁시렁…… 뭐라 뭐라…… 음, 그리고……." 진짜 괜히 물었다. "됐어! 그만해!" 난 이어지는 세레나의 말을 끊었다. 역시 귀족이란거 아무나 하는게 아니 다. "어머, 레이디의 말을 중간에 끝는 것도 실례라구요." 난 충고하는 세레나를 무시하며 물었다. "내가 이상한거냐?" 세레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쩝, 미치겠군. "그 놈들은 전부 가식적이잖아. 그 놈들 중에 반반한 얼굴과 화려한 말빨 로 여자들 울리고 다니는 놈들도 한 둘이 아닐껄? 그놈들이 니가 얼굴 예 쁘고, 몸매 좋고, 가슴 크고, 엉덩이 빵빵하고, 희고 부드러운 살결에, 육감 적으로 생긴……." 앗! 내가 무슨 소리를? 난 세레나의 몸을 훝어보며, 설명하다가 세레나가 무서운 표정으로 날 노 려보는 것을 깨닫고,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렸다. "흠 흠, 잠깐 딴 곳으로 셌군. 어쨌든 그 놈들이 니가 괜찮게 생겼고, 백 작 딸이라는 것 때문에 너 한테 잘 보이려 그러는거지, 진짜 널 좋아해서 그렇게 하는 놈이 몇놈이나 되겠냐?" "그건…… 그래요." 세레나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바닥 생활을 경험하더니만, 귀족들 의 가식과 위선의 대해서 조금은 느낀 모양이었다. 난 두손을 뒤로 돌려 깍지를 끼며 말했다. "그래도 이 몸은 가식적이진 않다고. 비록 배운게 없어서 예의나 격식은 차리지 못하지만 말이야." 내 말에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그래." 나도 세레나를 마주보며 웃음을 지었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세레나의 부모는 자리에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 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아까 점심 때 보다 훨씬 편했다. 아까 이미 쪽팔릴만큼 팔았 기 때문에, 난 전혀 식사 예절에 억매이지 않고, 음식을 처먹었다. 심지어 는 하녀들과 세레나의 부모까지 날 '인간이 어떻게하면 저렇게 교양없이 음식을 처먹을 수 있을까?' 라는 눈빛으로 노려 보았지만, 난 소스가 묻어 있는 손가락을 입으로 쪽쪽 빠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들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해 버렸다. 어쨋든 난 저녁을 식사를 마치고, 또 다시 서재로 가서 세레나 일가족과 대화를 한 다음, 방으로 올라왔다. 내가 방으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넘어간 한 밤중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잠이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서 시체 놀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세레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난 마침 매우 심심했던 참이었기 에 세레나와 실없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니가 여기 왠일이냐? 이런 쓸데 없는 얘기하러 온건 아닐테고."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레나는 고개를 숙인채 머뭇머뭇 거리며 작 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꼭 떠나셔야 하나요? 그냥 여기서 머물면 안돼요?" "그 말은 나보고 니네 부모한테 고용되서 일하라는 얘기냐?" 세레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그,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난 세라나의 반응이 재미있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무슨 뜻인데. 설마 너 나 좋아하는거 아냐? 사랑하는 사람을 이대 로 떠나보내기 싫어서 이렇게 한밤중에 날 찾아온거고 말이야. 안그래?" 세레나는 작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 끄덕???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인다는 것은 긍정을 표시하는 제스처. 내가 한 말이 '설마 너 나 좋아하는거 아냐' 였으니, 고개를 끄덕였다는 건 '나 너 좋아한 다' 라는 뜻!!! 난 너무 당황해서 억지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리려 했다. "하하, 그래?…… 이, 이봐 농담하지 말라구. 괜히 마음 심란해져서 잠 못 자잖아." 세레나는 고개를 들어 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난 그녀의 눈을 피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세레나는 달빛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나는 입술을 열었다. "농담 아니에요." 세레나는 한단어 한단어 또박또박 발음했다. 난 잘못들었나 싶어 데이터 에러를 검색해 보았지만, 그녀의 말은 확실했다. 그녀의 말은 내 머릿속에 버그 하나 없이,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입에 물고있는 담배를 떨어트렸고, 불씨가 옮겨 붙으면서 카펫이 타들어갔다. "이런, 카펫 다 타겠네." 난 카펫을 무자비하게 밟았고, 화재(?)는 금방 진압되었다. 불이 붙은 것 도 아니고 단순히 불씨가 타들어가는 것이 었지만, 난 일부러 과장된 행동 을 취했다. 난 세레나에게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뭐 살다보면 이럴 수도 있는거야. 나중에 카펫값 물어내라고 하지마. 니 네 집 잘살던데 이 정도는 봐주라고." "……." 세레나는 계속 내 얼굴을 응시했다. 난 뒷머리를 긁적거리다 할 수 없이, 세레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내 눈동자에도 세 레나의 모습이 비칠까? 마치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진심이냐?" 내 목소리는 많이 진정되어 있었다. "예." 세레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레나 가 지금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난 천천히 뒷걸 음질 처 침대에 주저앉았다. "니가 진짜로 날 좋아한다고?" "……예." 세레나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잠시 그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여기 앉아." 세레나는 천천히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난 담담하게 말했다. "넌 지금 날 좋아하는게 아니야." "아니에요!" 세레나는 날카롭게 외쳤지만, 난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계속 들어. 넌 귀족이니까 이제까지 잘먹고 잘살았었겠지. 무도회다 파티 다 쫒아 다니면서 똑같이 잘사는 귀족놈들만 보아왔을테고. 그러다가 한순 간에 부모는 감옥으로 끌려가고 넌 사창가로 떨어졌어. 그 때, 한 남자가 나타나 널 구해줬지. 그 남자는 이제까지 니가 보아 온 남자들과는 완전히 틀렸지. 전혀 여자 를 배려해줄지도 모르고, 귀족인 자신에게 반말을 마구해대고. 하지만 가식 과 위선은 없었어. 돈이 필요해서 도와준 것도 아니고, 니가 필요해서 도와 준 것도 아니야. 그냥,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와줬지. 넌 그 남자에게서 이제까지 보아왔던 남자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다른 매력을 느꼈어.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을 도와준것에 대한 고마움이 합쳐 저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야." 난 말을 마치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는 위아래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무릎을 움켜잡은 손위로 떨어졌 다. "그런건…… 아니에요. 그런건……." 난 일어나 창밖으로 보았다. 오늘따라 달빛이 밝아 보이는 느낌이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세레나를 보았다. "니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어떻게 할건데? 난 어쨌든 간에 난 내일이면 이 곳을 떠날거야." 세레나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그래……."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너 빨래할 줄 알아? 밥은? 싸움은? 마법은? 아니, 그건 빼더라도, 너 하 루 종일 걸을 수 있어? 한 달이고 속옷도 안갈아 입고 꽤재재한 몰골로 다 닐 수 있어? 늑대 울음소리 들리는 산속에서 밥대신 말린고기 뜯어 먹을 자신있어?" 솔직히 이건 아니다. 몇번 산속에서 자보긴 했지만, 늑대 울음소리는커녕 토끼 짖는(?) 소리도 안들리던데. "……흑흑." 세레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난 말하고 싶었다. 나와 같이 가자고, 내가 널 지켜주겠다고, 이대로 헤어지는 것은 싫다고, 널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녈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하지? 단순히 내가 좋으려고, 한 여 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 아닐까? 대체 내가 언제부터 세레나를 좋아하게 된거지? 처음 살인을 하고 무서워 하고 있는 날 안아줬을 때부터? 마차여행을 하면서? 아니, 어쩌면 처음 만 났을 때부터? 내가 왜 사창가에서 만난 여자를 위해 살인까지 해가면서 도와준거지? 대 가를 받으려고? 아니야. 그래서 한 일이 아니야. 그냥 그 때는 도와주고 싶 은 마음만 있었어. 무조건 이 여자를 도와줘야 겠다는, 이 여자를 위해서 뭐든지 해야겠다는……. 이런게 누굴 좋아한다는 느낌인가? 이 것이 사랑 인가? 내가 세레나를 사랑고 있는 건가? 그녀는 귀족집 딸이다. 교양과 미모를 겸비한 여자다. 굳이 나와 같이가 고생 할 필요는 없다. 난 갈 곳도 없는 몸이다. 설사 갈 곳이 있다해도, 그 곳으로 갈 수 있다해도…… 내가 그녈 데리고 갈 수 있을까? 그녈 위해 여 기 남아있을 수 있을까? "너 같은건 데리고 가봐야 짐밖에 안돼. 사람 짜증나게 하지 말고 니 방 으로 돌아가." 난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으로 보았다. 달 은 천천히 기울고 별들은 더욱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진건 가? 유리창문에 그녀의 모습이 비친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뒤에서 나를 안았다. 그녀를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 이듯 말했다. "오늘밤만…… 오늘밤만이라도 같이 있어줘요." 난 몸을 돌려 세레나를 보았다. 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 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흥분에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난 손으로 계속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따뜻하다. 난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난 내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데었다. 입술에 따뜻한 느낌이 전해져 오고…… 난 그녀의 입안에 혀를 집어 넣었다. 그녀의 혀와 내 혀가 엉키고……. 달콤하다. 부드럽다. 밤이 깊어가는 가운데 우린 그렇게 서로를 안은 채서로의 입술을 느꼈다. 얼마나 지났을까?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고, 난 입술을 떼었다. 그녀의 감았던 눈이 천천히 떠지고, 그녀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우리는…… 침대에 엎 어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맞긴다는 듯, 무방비 상태 로 누워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멍해 져 마치 텅빈 것 같다. 난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내 손이 그녀의 가 슴에 닿고, 뭉클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손에 약간 힘을 줘,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자, 그녀는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을 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들었다. 난 눈을 감았다 떴다. 세레나의 모습이 확실 히 눈에 들어온다. 하하, 내가 지금 뭐하는거지? 난 그녀의 가슴을 쥐고 있 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일어났다. 난 창밖을 주시하며 담배를 꺼냈다. "왜죠? 전…… 전 안돼는건가요?" 세레나는 울고 있었다. 난 대답을 하지 않고, 한 동안 세레나가 우는 모습 을 지켜보았다. 세레나의 울음이 조금 진정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난 입을 열었다. "내 생활 신조가, 책임지지 못할 여자 건드리지 말고, 건드린 여자 책임지 자야. 괜히 한때의 객기로 나중에 일만들고 싶지는 앉아. 그리고……." 난 담배 연기를 뿜으며 세레나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애라도 하나 데리고 나타나면 곤란하잖아." 내 말이 재밌었는지, 세레나는 우는 중에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난 애인까지 있는 몸이라구." "그…… 라나라는……?" "그래. 비록 10살 밖에 안됐지만 끝내주게 예쁘지." 난 웃음을 지었다. "너랑 같이 있었던 요 며칠간 꽤 재밌었어. 넌 어때?"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로 됐잖아. 서로 재밌었으니까. 너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고. 난 그걸로 충분해." 세레나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고 있었다. 그런데 눈물은 왜 계속 흘리 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레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섰 다. "정말 고마워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두 팔로 내 목을 감싸고 천천히 얼굴을 들이댔다. 난 눈을 감았다. 부드럽고 촉촉한 그녀의 입술이 내 마른 입술을 덮고…… 그래, 이걸로 충 분해. 난 세레나를 내 보낸 뒤, 창가에 앉아 담배를 폈다. 그러고보니 흡연량이 많이 늘었군. 예전엔 일주일에 한갑이었는데, 요샌 하루에 한갑하고도 반을 더 피니…… 몸 상하는건 시간문제겠는데. "후우∼." 난 깊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내가 왜 세레나를 안지 못한걸까? 예전에는 기회만 생기면 총각딱지 띄겠 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강간하는 것도 아니고, 대준대는 대도 못하다니! 나 도 진짜 병신같은 놈이군. 두려운건가? 솔직히 말하면 두렵다. 만약 세레나가 사창가 여자였다면 부담없이 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여자들은 몸파는게 직업이고, 한 두 번 하는게 아 니니까. 강물에 배 지나간다고 표시나냐? 하지만 세레나는 귀족집 딸이다. 거기다가 오리지날 처녀…… 아니, 생각해보니까 처녀라는 확증은 없군. 심 증은 있는데 말이야. 뭐, 처녀 맞겠지. 나도 아직 안해봤는데, 설마 지가 해 봤을라고. 만약 세레나를 안는다면, 난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없겠지. 난 순진한 애를 건드려 놓고 발뺌하는 그런 놈이 아니거덩. "모르겠다." 난 담배를 창밖으로 뱉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어쨌든 세레나를 그냥 돌려보낸건 잘한 짓 같다. 괜히 한순간의 객기로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 놓으면 나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테니까. 젠장, 플 레이보이되기는 글렀군. 그냥 할꺼 그랬나? 쪼금 아쉽긴하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는데…… 솔직히 쪼금 많이……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까, 무지하게 아쉽다. 이런 젠장, 이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내가 미쳤지! 난 배게에 얼굴을 파묻고 절규했다. "씨발, 그냥 해 버릴걸! 건드린 다음 일은 내가 알게뭐야?" 에라, 모르겠다. 정 하고 싶으면 나중에 사창가나 한번 들르지 뭐. 난 꿈을 꿨다. 나와 세레나가 서로를 껴안고 침대에서 뒹구는 꿈을…… 근데 왜 둘 다 옷을 벗고 있는 거지? 눈을 떴을 때, 세레나는 침대 한쪽에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 었다. 내가 입가에 흘린 침을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나자, 세레나는 물컵을 내밀 었다. 난 컵에 있는 음료를 마시며 물었다. "언제부터 여깄었어?" 세레나는 살짝 미소지었다. "아까 전 부터요." 난 미소짔는 세레나의 얼굴과, 화창한 하늘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흠∼ 일어날 때, 날씨는 화창하고 미인이 웃으며 반겨준다. 꽤 괜찮은 아 침인데. 미인의 품에 안겨서 일어났다면 더 좋았을텐데……." 세레나는 내가 건낸 컵을 받아들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드릴 수도 있는데……." 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됐어. 이 나이에 벌써부터 여자 치마폭에 휩싸이고 싶진 않아." 세레나는 잠시 쿡쿡 거리며 작게 웃었다. "식사나 하러 가요." "알았어." 난 옷을 대충 정리했다. 세레나는 침대에 앉아서 남방 단추 잠그는 것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무슨 꿈이라도 꾸셨나요? 자는 내내 웃고 있던데……." 뜨끔. "하하,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웃고 있었다고……." "정말이에요. 제가 들어오기 전부터 베게를 끌어안고 침을 질질 흘리며 웃고있었단 말이에요. 무슨 꿈 꾸셨어요?" 이 여자가 진짜 예리하게 구네. "몰라." "그러지 말고 말해줘요." "기억안나." "거짓말하지 말아요. 안다고 얼굴에 써져있는데……, 궁금해서 그러는거니 그냥 말해줘요." "진짜 몰라." 세레나는 의미 심장한 눈빛으로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훝어보았 다. "왜, 왜 그래?" "뭔가 숨기는게 있는 것 같네요."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숨기는게 있다고…… 하하. 그런 눈빛으로 보 지마. 좋은게 좋은거라구." 내가 지금 무슨 소릴하는거지? 세레나는 얼굴 표정이 싹 바뀌었다. "말해요."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말하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라. 너 같으면 말하겠 냐? "해요!" "몰라!" "……." 휴∼ 이제 끝났나 보군. 난 옆에있는 이불을 들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크억, 뭐하는 짓이야!" 갑자기 세레나가 내 뒤로 돌아가 목을 잡고 매달린 것이다. "빨리 말해요." "모른다…… 그랬잖아…… 일단…… 이거 좀…… 켁켁." "흥, 말하기 전까지는 못놔요." 이…… 싸가지 없는 년. 내 얼굴은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 호흡 곤란 때문도 있겠지만, 흔들릴 때 마다, 등에 닿는 세레나의 가슴 감촉 때문에……. "…… 알았어…… 말할게……." "빨리 말해요." "이걸…… 놔야 말하지…… 켁켁." 세레나는 내 목을 감싸고 있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풀었다. "이제 얘기해봐요." "하아∼ 하아∼ 잠깐 숨좀 돌리고." 좋아. 니가 그렇게 나온다면, 말해주도록하지. 듣고 나서 후회나 하지 말 도록. 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세레나에게 어젯밤 꿈 얘기를 해주기 시작했 다. "흠흠, 그러니까 말이야. 꿈에서 내가 여기 이렇게 누워서 자고 있었거든, 그러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깨보니까, 니가 옆에 있더라구. 너는 내가 빤히 보고있는 걸 알면서도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이 하나 둘씩 발밑으로 떨어지고, 니가 알몸이 됐을 때, 이렇게 말하더라구." 난 잠깐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세레나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절 가지세요♡.' 야 야! 인상쓰지말고 계속 들어. 어쨌든 그렇게 말하더 니 갑자기 내 품으로 뛰어드는 거야. 니가 그렇게 나오니까 내가 어쩌겠 어? 난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손을 뻗어 니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쥔 다 음…… 응응응 해서…… 그 다음에 응응응…… 그러자 니가……." 난 그동안 정보의 바다(인터넷)를 돌아다니며 읽었던 소설들을 총동원해 아∼주 리얼하게 얘기를 해주었다. "……니가 이렇게 누워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누워가지고, 그 때 왼쪽팔이 여깄었고, 오른쪽 팔은 요 아래쪽을 더듬고 있었어. 넌 요렇게 누워가지고 눈을 꼭 감고 두손으로 씨트를 움켜쥐고 있었고……." 덤으로 직접 침대 여기저기를 만지며 시각적 정보까지 제시해주었다. "……그래서 난 혀를 살짝 내밀어 니 귓볼을 핱아……." "그만해요!" "왜 그래? 이제부터 재밌어질려 그러는데.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맞아. 내가 귓볼을 핱은 다음……." "그만해요! 그만해요! 그만하라구요!" 세레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옆에있는 베게를 집어서 던졌다. 난 가볍 게 베게를 잡아낸 다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이거 왜 이러시나? 니가 얘기해 달라 그랬잖아." 세레나는 이미 얼굴이 빨개질데로 빨개져 타오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러고보니 내 얘기를 들으면서 은근히 흥분했나보군. 흠흠, 그 동안 여러 싸 이트 돌아다닌 보람이있네. 잠깐, 이거 성희롱에 속하는거 아닌가??? "그거…… 정말이에요?" 세레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고, 난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니가 그 때 이렇게 말했잖아. '아! 좋아요. 으흥, 거긴 안되요, 아흠.'" "그만해요!!!" 세레나는 이제 거의 울려는 표정이었다. 난 그런 세레나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웃어댔다. "왜 웃어요!?" 난 손가락으로 살짝 눈물을 닦은 다음 말했다. "그냥. 재밌어서." "……." 난 은근슬쩍 세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예." 난 세레나의 작은 어깨를 살짝 감싸 안은 다음, 방을 나왔다.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우리는 다시, 서재에 모였다. 세레나의 아버지는 쓸 데없는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다가, 결국 적당한 시점에서 하고 싶은 말 을 꺼냈다. "자네, 우리집에 머물 생각없나?" "……." 세레나의 아버지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세레나에게 대충 들으니, 특별히 갈데도 없다고 하던데, 그냥 우리집에서 머물게나." "제가 이 곳에 머문다는 걸, 후작이 눈치채면 귀찮아질껍니다." 세레나의 아버지는 이미 생각해 놓은게 있는지, 바로 대답했다. "아아, 그건 걱정하지말게. 자네는 현재 클래스 5마스터. 그 나이에 그 경 지를 이룩한자는 아무도 없었네. 지금 클래스 5 마스터면, 나중에는 8클래 스까지도 올라갈 수 있겠지. 자네가 전하를 알현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후 작이라해도 자네를 어찌하지는 못할꺼야." "……?" 무슨 소리지? 전하라니? "알고는 있겠지만, 모든 국가에서는 마법사 숫자가 매우 부족하네. 현재 우리 국가도 클래스 4 이상의 마법사는 100명 안팎이야. 5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는 그 숫자의 1/3도 안되지. 이런 때에, 17세에 나이로 클래스 5를 마스터한 자가 나타난다고 생각해보게. 자네는 당장에 작위를 받고, 궁정마 법사로 들어갈 수 있을꺼야. 물론 거기에는 나도 적극 힘써주겠네. 그리고 후작도 자기가 한 일이 있으니 함부로 입을 열지는 못할껄세." 흠, 국왕의 총애를 받으면 안전하다는 말인가? 뭐, 후작이야 뇌물 쳐먹고 모함했다는 사실을 지 입으로 떠벌릴리는 없겠고……. "그리고……." 응? 아직 안 끝났나? 세레나의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원한다면 내 여식과 결혼을 시켜주겠네." 콰광-! 내가…… 지금…… 뭔 소리를…… 들은거지……? 세레나와 나를 결혼시켜 준다는……!? 세레나의 어머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에요, 당신? 세레나와 결혼 시킨다는게?" "……." 세레나의 아버지는 마누라가 옆에서 발광을 하거나 말거나, 계속 날 처다 보고 있었다. 난 살짝 고개를 돌려 세레나를 보았다. 세레나는 무표정한 얼 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양손은 떨림을 억제하기 위해 치마 를 꼭 쥐고 있었다. 난 느린 동작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세레나의 아버지가 한 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알았네. 자네라면 반드시 거절할꺼라고 생각했네. 그래도 자네를 꼭 잡아 두고 싶구만. 왠지 이대로 보내면 나나 딸 아이나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 말이야. 하하, 그냥 중년의 주책이라고 생각하게." "죄송합니다." "하하, 아닐세. 죄송은 무슨 죄송. 우리 가족 구해준 것만으로도 자네한테 갚지 못할 큰 빚이 있는데.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빚을 갚겠네. 내,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난 옆에 기대어 놓았던, 청룡도와 지팡이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쇼 파에서 일어났다. "전, 이제 그만 떠나겠습니다. "……벌써 가는건가?" "예. 갈 곳은 없지만, 자꾸 떠나고 싶네요." "알았네." 세레나의 아버지는 일어섰다. 아마도 대문 앞까지 배웅해 줄 생각인가 보 다. "아버지는 앉아계세요. 제가 바래다 드릴께요." 대화가 시작된 직 후부터,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세레나가 입을 열었다. 세레나의 아버지는 잠시 세레나와 나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 다. "그럼 난 여기서 작별하도록하지. 잘가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회가 온 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네." "안녕히가세요. 언제든 한번 꼭 다시 찾아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계십시오." 난 세레나의 부모한테 인사를 한 후, 서재를 나왔다. 세레나는 내 뒤를 따 라나왔다. 걷는 동안에도 세레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저택을 나설 때 쯤, 한 하녀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저기요. 하아∼ 하아∼." 로나이시군. 세레나의 직속 하녀(이자 세레나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있 는…… 흠흠). "무슨 일이야?" 로나이시는 빨개진 얼굴로 숨을 몇번 몰아 쉰 뒤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 다. "저기, 이거. 하아∼." 앗! 저것은…… 내 옷이구만. 어제 빨래해 놓으라고 떠넘겼었지. 이거 참, 그걸 까먹고 있었다니. "고마워." 난 로나이시의 손에서 옷을 받아들어 배낭에 집어 넣었다. "지금…… 떠나시는 건가요?" "응, 잘있어라.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화장실까지 안내해준 은혜 갚을게." "……." 난 로나이시와 작별 인사를 한 후에 다시 걸었다. 세레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표정만을 지으며, 내 옆에서 걸었다.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지는군. 장난이라도 좀 처볼까? 하지만 세레나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장난 칠 마음도 싹 달아난다. 저 택을 나서 정원에 들어 설 때 쯤, 되서야 세레나의 입이 열렸다. "다 와가네요." "……응." 우리는 정문에 도착했다. 세레나는 철통같이 정문을 수비하는 병사 둘에 게 뭐라고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세레나는 병사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 다. "정말 가실건가요? 저 잘할 자신 있는데…… 빨래랑 청소같은거요." 난 손을 뻗어 세레나의 머리카락을 살짝 빗어 넘겨 주었다. "됐어. 난 이런 곳에는 안어울리는 놈이야." 세레나는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거절할걸 알면서도 용기 내서 말해본건데……." "미안하게됐군." 세레나는 금새 표정을 바꾸었다. "그럼 며칠만 더 머물다 가실래요?" "그건 싫어." "핏……." 세레나는 삐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훗, 어리광 부리기는……. "야. 그런 표정지어도 소용없어. 이 몸은 떠난다면 떠나는 사람이야." "후우, 알았어요. 간다는데 보내줘야죠. 조금 더 당신한테 도움이 되고 싶 었는데……." 세레나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 억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내밀었다. "아무래도, 제가 당신한테 해줄 수 있는건 이 것 밖에는 없는 것 같네요." 하하, 귀엽게 굴기는. 갑자기 떠나기가 싫어지는데. "고마워." 난 세레나 손에 있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딱딱한 종이각에 가지런 하게 들어있는 담배였다. 이제 진짜 이별의 시간이군. 이별이란건 질질 끌수록 힘들어지니 빨리 끝 내야지. 난 세레나를 보았다. 세레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마지막은 멋있게 끝내고 싶었기에, 난 허리를 숙인 다음, 세레나의 손을 잡고, 손등 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세레나의 살결이 내 입술에 닿았다. 난 입술을 떼며 말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가씨. 그동안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럼……." 난 말을 마치고 바로 몸을 돌렸다. 세레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자신 이 없었다. 난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그 곳에서 멀어졌다. 세레나의 눈에는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자신과 가족들을 구해준 뒤에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떠나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나 할까? 아니면, 여자 하나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떠나는 바보로 보일까? 그 순간, 뒤에서 울먹이는 듯한 세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당신 후회할꺼에요! 나같이 멋진 여자를 찬 걸 후회할꺼라구요! 다시 만났을 땐…… 다시 만났을 땐, 당신이 알아보지 못 할만큼 멋있어질테니 까!!" 저렇게 보인다는군.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른손을 올려 좌우로 힘껏 흔들었다. 그래, 마음껏 멋있어져라. 니가 언제 날 다시 보겠냐? 떠나가는 히로의 모습을 보면서 손을 흔드는 세레나의 눈에는 눈물이 흘 러내렸다. 흘러내린 눈물은 뺨을 타고 내려와 땅을 적셨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제발 가지 마세요.' 지금이라도 당장 뒤돌아서서 자신에게 돌아올 것만 같았다. 눈물 때문에 히로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세레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넓은 대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도. 히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자. 세레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 다. '나쁜 자식. 나같이 예쁜 여자를 버리고가? 그래, 넌 얼마나 잘 사나 보자.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식.' 세레나는 눈물을 멈춰보려 노력하였으나, 한번 흘러 내린 눈물은 쉽게 멈 추지 않았다. 세레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16세, 꿈많은 소녀의 첫사랑은 끝났다. 가이아스 왕국력 644년 4월 8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재에 있는 중년 남녀는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입에 담배를 물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소녀랑 몇마디 말을 나누더니, 미련없이 등을 돌려 길을 걸어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렸 다. 그 모습은 창을 통해, 그대로 중년 남자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중년 남자 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슬퍼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파진 것이다. 그리고 아까운 남자를 놓쳤다는 것에 대해서도. 중년 여자는 커다란 쇼파에 앉아, 중년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온몸에 교양과 기품이 넘쳐 흐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여자의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둘은 세레나의 부모인, 레이트 리키드와 레이트 셀리오네였다. 셀리오네는 아까부터 말을 꺼내려 하였지만, 남편의 모습에 말을 꺼낼 기 회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리키드가 담 배를 끄느라 잠깐 틈을 보인 것이다. 셀리오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 을 꺼냈다. "당신 미쳤어요? 그런 근본도 모르는 남자와 세레나를 결혼시킨다니." 셀리오네는 남편의 변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리키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기대를 무참하게 박살냈다. "겨우 세레나 하나로 그 남자를 붙잡는다는 것은 무리였나? 이럴 줄 알았 으면 재산도 전부 준다고 할걸……." "당신……." 셀리오네는 기가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운 딸이 다. 딸은 그런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예쁘고 착하게 자라났다. 사 교계에서 세레나라는 이름은 미모와 학식을 겸비한 훌륭한 여인이라고 평 가가 자자했다. 다른 귀족 가문은 물론이고, 왕세자인 반데라스 왕자 조차, 자신의 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다. 그런 딸을 갑자 기 나타난 평민, 그것도 근본도 제대로 모르는 거렁뱅이 같은 자에 시집을 보낸다고 하다니……. 그 순간 셀리오네는 자신의 남편이 미치지 않았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술 더떠서 전 재산을 그 히로라는 소년에게 주겠다니……. 셀리오네는 힘겹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명색이 귀부인인데, 흥분해 서 날뛰는 꼴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당신……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에요? 그 남자가 대체 뭐라고, 세레나와 재산을 주겠다고 하는거에요? 그 자가 5클래스의 마법사여서 그래요? 우리 가족을 구해줘서? 아무리 그래도 그런 평민한테 우리 딸을……." 흥분을 억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셀리오네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그딴 이유 때문이라면 돈 조금 쥐어주고 끝냈어." "그럼 뭐 때문에요!?" 셀리오네는 더 이상 참지못하고 목소리의 톤을 높혔다. 리키드는 담담한 표정으로 셀리오네를 바라보며 담배를 물었다. 셀리오네는 그제서야 자신 이 교양없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진초록색의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 거렸다. 리키드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딸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지금은 문관이지만, 나도 한때는 칼을 들고 전쟁터를 누비던 때가 있었 지." "……." 셀리오네는 지금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10년도 더 지난 일을 지금 왜 꺼내는건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소년은 선골(仙骨)이야." 셀리오네는 깜짝놀라 몸을 기대고 있던 쇼파에서 벌떡일어났다. 선골이라 니? 세리오네의 놀라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키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약 100여년 전에 저런 골격을 가진 남자가 있었지." 셀리오네는 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 대륙에 사는 사람치 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고, 전설로 남아 있는 인물. 가이아스 에카스의 용맹과 넨 이드의 마법, 잭 니켈의 책략을 한 몸에 지 닌 인물. 아이언스 이그리드. 셀리오네는 심하게 더듬거리며, 남편에게 물었다. "그, 그럼 그 소년이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아들…… 아, 아니 손자란 말이 에요?" 리키드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얼굴에는 작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만약 그렇다면…… 난 오늘 그를 놓친 사실을……." 리키드는 힘들게 다음 말을 이었다. "평생 후회해야겠지." 그 소년이 정말로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핏줄일까? 아니라고 하기에는 닮은 점이 너무 많았다. 칠흙같은 어둠을 연상시키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깊이를 알수 없는 흑갈색 눈동자. 새하얀 망토와 붉은색 구가 달린 길다란 지팡이. 그리고 무엇보다 도 확실한 증거는…… 수천년 동안 단 한번 밖에 나타나지 않은 골격.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평생 동안 단 한명의 여인만을 사랑했다. 루미아드 공주. 하지만 루미아드 공주는 선천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래 서 그가 53세의 나이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그의 핏줄은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겨우 50대의 나이로 죽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만약 그 후에 아이를 낳았다면? "레오즈…… 세무……레오…… 그리고 아까 걸어간 쪽으로 나가면 동문 (東門)이니까……." 리키드는 몇번을 중얼거리다가 뭔가를 깨닫고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동남쪽이야." "예?" 리키드는 눈을 크게 뜬 놀란 표정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셀리오네는 남 편의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키드는 아 내가 자신을 보던 말던, 황급하게 말했다. "그 소년의 진행방향 말이야. 동남쪽 방향이야. 이대로 동남쪽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지?" 셀리오네는 심하게 당황하는 남편을 이상한 눈으로 보며 대답했다. "여기서 동남쪽 방향이면, 라네제잖아요. 계속 가면 자바스 왕국이……." 셀리오네의 눈이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부부는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셀리오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케이튼 성. 아이리스……." 이미 알고있던 사실이었지만, 아내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자, 리키 드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까지 사람보는데는 따를 자가 없을 꺼라고, 자부해왔었는데, 그런데 그런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눈앞에서 놓 치다니……. "크흐흐, 크하하. 역시 그 소년이 죽음의 마도사의 후인이었어. 빌어먹을, 이거 눈알을 뽑아버리던지 해야지!" 리키드는 이상한 말을 지껄이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쇼파에 주저 앉았 다. 셀리오네는 멍한 표정으로 남편을 보았다. 리키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자기 사나운 동작으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집어 던졌다. 부드러운 융단 위에 떨어진 담배는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융단을 태웠 다. "젠장! 내가 미쳤지. 죽음의 마도사의 핏줄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빌어먹 을! 그 놈이 아이언스 성을 쓰는 걸 알았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 두었어야 했는데! 씨발, 검은색 머리카락에 흑갈색 눈동자 일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건데, 아니 그 지팡이만 해도. 아니, 선골. 젠장! 설마설마 했는 데 진짜 일 줄이야! 이런, 빌어먹을!!!" 리키드는 같은 장소를 빠른 속도로 돌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셀 리오네는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남편의 저런 모습은 무관 을 은퇴한 이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리키드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이리스는……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히로……, 히로……, 아이언스 히 로. 젠장, 그 놈 때문에 대륙의 역사가 새로 써지겠군." "……." 길을 떠나는 소년. 주저앉아 울고있는 소녀. 화를 내는 남자. 그런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 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은 천천히 동 남쪽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자이나레스 대륙 역사상 마검사(魔劍士)라고 불릴만한 인물은 단 한명밖 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아이리스의 왕 키에티트와 함께 지팡이 하나를 들고 광활한 대륙을 종횡 무진 했던 인물. 죽음의 마도사로 불리며 대륙을 공포에 떨게 만든 인물.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마검사가 아니다. 어째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마검사란 말 그대로 마법(魔法)과 검(劍)을 같이 쓰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검(劍)을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도(刀)를 들었나? 아니다. 그럼 창? 그것도 아니다. 그럼 도끼? 역시 아니다. 그럼 워 해머? 메이스? 핼버드? 철퇴? 낫?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가 들었던 무기는 바로, 스태프(지팡이) 였다. 지팡이가 무기? 지팡이도 무기에 속하나? 무기에 속하긴 속한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그 이유는 <지팡이가 애인 보다 좋은 5가지 이유> 1. 마법을 쓸때 마나의 운용 측면에 있어 상당한 편의성을 제공한다. 2. 마력을 증폭시켜준다. 3. 유사시에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 4. 지팡이는 언제 어디서나 허약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지지대가 되어준 다. (마법사들 중에는 노약자들이 많다.-거의 전부라고 보면 된다-) 5. 폼난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한때 장안에 화재(火災 읽다가 재미없어서 몽땅 태워버렸다고 한다)를 불러일으켰던, '5가지 이유 시리즈' 에서 발췌- 아이언스 이그리도도 마법사다. 그도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하지만 그 사 용 용도가 다른 마법사들과는 완전히 틀렸다. 지팡이는 마법 사용할 때 쓰라고 있는거다. 그는 그 지팡이를 적의 머리 를 뽀개는데 썼다. 상상이 가는가? 마법사가 말을 타고 일기투에 나와서, 지팡이로 적을 죽이는 모습이. 상상 이 잘 안되겠지만,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수만의 군대가 대치한 가운 데, 혼자서 말을 몰고나가, 적장의 머리를 뽀개거나, 뼈를 함몰시켜 죽였다. 약 30여년 동안 치룬 전투에서, 그는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마검사는 단 한명밖에 없는걸까? 마법과 검이 상반관계에 있어서? 그런 이유도 있긴 있다. 마법을 익히려면 지식을 쌓아야한다. 이와는 반대 로 검을 익히려면 체력을 쌓아야한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국영수 100점에 체육 100점을 맞는 놈들이 있듯이, 어느 세계에서나 문무를 겸비한 잘난 놈들은 있기 마련이다. 이 잘난 놈들은 마검사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하였다. 이들이 이 렇게 마법과 검을 같이 익히려하는 것은 시너지 효과 때문이다. 마법100 + 검술100 = 전투력200 이 아니다. 마법과 검을 같이 쓸 수 있다면, 그 효과 는 몇 배에서부터 몇 십배까지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실패하였다. 왜 실패 했을까? 이들이 실패한 이유는 수천년 동안 대륙에 이어져 내려온 한가지 법칙 때 문이다. '마나의 운용능력이 뛰어난 자는 몸이 허약하다.' 대륙에서는 이 법칙이 완벽하게 지켜져왔다. 당연 이것과 대우 관계에 있 는 '몸이 허약하지 않은 자는 마나의 운용능력이 뛰어나지 않다.' 라는 법칙 도 성립한다. 이 법칙 때문에, 고위 마법사들은 평생을 빌빌거리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 이 법칙으로 코를 푼 다음, 무참히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사람이 태어났다. 대체 누군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연 아이언스 이그리드다. 그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마검사라 함은 마법사가 일반인 정도의 체력을 길러 검을 들고 싸우거나, 검사들이 1클래스의 마법을 간신히 익혀서 사용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은 어느 것 하나 최고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한 마디로 죽도 밥도 아닌 놈들이다. 하지만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달랐다. 그는 마법과 검에 있어서 모두 최고 의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골격이 몇천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선골이기 때문이었다. 선골! 검술과 마법을 익히는데 제일 적합한, 아니 완벽한 골격.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몸. 이 골격을 가진 사람은 이제껏 아이언스 이그리드, 단 한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사라진지 100년이 지난 지금, 그와 똑같은 골격을 가진 사람 이 출현한 것이다. Part 2. 코를 꿰이다 세레나의 집을 떠나온 뒤,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빨리 이 수도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갈데도 없고, 오라는데도 없고……. 이렇게 된 이상, 전통적인 방법(손바닥에 침뱉은 다음 손가락으로 쳐서 튀기는 쪽으로 가기)을 써야하나? "이보게 젊은이. 잠깐 나 좀 보게." 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돗자리 하나를 깔아 놓고, 앉아있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나이가 얼마나 들었는지 수염과 머리카락, 심지어는 눈썹까지도 하얗게 샜다. 난 노인에게 다가갔다. "무슨일이십니까?" 노인은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말을 건냈다. "자네……, 점 볼 생각 없나?" 점? 이 세계에서도 점을 보나? 어쨌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 노인에게 물어볼까? "좋습니다. 한번 봐주십시오. 복채는 여기있습니다." 난 주머니에서 10골드짜리 몇 개를 꺼내, 노인 앞에 놓아두었다. 노인은 금화를 보고, 잠깐 입을 쫙 벌리더니…… 곧, 날 의식하고 표정관리를 했 다. "흠흠, 잠깐 손 좀 줘보게. 아, 그 손 말고 오른손." 난 노인이 시킨데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설마 손금도 보는건가? 노인은 한동안 내 얼굴과 손을 번갈아가며 처다 보았다. "쯧쯧, 자네 방금 소중한 사람과 헤어졌구만. 그래그래, 어차피 인연이 아 닌게야. 음, 어디보자∼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그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될 꺼야. 이런이런, 자네는 역마살이 끼었어, 한곳에 정착할 만한 팔자가 아니 야!" 난 노인의 말에 맞장구를 처주었다. "맞습니다, 어르신. 정말 쪽집게군요. 그럼 제가 지금 어디로 가야 할까 요?" 솔직히 난 점같은건 믿지 않는다. 인간이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다 예측한 다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겠나! 지금 이 노인이 말한것도 조금만 생각하 면 쉽게 알수 있는 사실이다. 우울한 표정을 보고 누군가와 헤어졌다는 것 을 알았을테고, 복장을 보고 여행자라는 것을 알았을꺼다. 언젠가 국어선생이 말하기를 정신과의사나 무당, 점쟁이 등은 전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전부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주 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결혼할 남녀가 궁합을 보는데, 궁합이 나쁘다고 헤어지는 경우를 봤는가? 사실 가끔씩 헤어지는 놈들도 있긴하다.(진짜 특 이한 놈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결과가 나오던 간에 결혼 을 한다. 이들은 일단 결혼을 기정 사실로 정해놓고, 그냥 덕담이나 한마디 들을려고 궁합을 보는 것이다. 결과가 좋게 나오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 고,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보란 듯이 잘살면 되지 라는 생각을 갖는다. 나 중에 부부싸움할 때 그 일을 끄집어 내지만 말이다. '내가 그래서 너같은 년과 결혼하는게 아니였어.' '흥, 누가 할 소리를. 결혼해서 손해본건 나야, 나.' '젠장, 그때 명동의 쪽집게 도사말만 들었더라도……!' '그렇게 억울하면 물르면 되잖아.' '그래 너 말잘했다 이년아! 물러, 물러.' '좋아, 물러. 무르자고 하면 누가 겁낼줄알고.' '당장 이혼서류가저와. 이 지긋지긋한 인생도 이젠 끝이다.' '그래 좋아.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즐겨보겠다 이거야.' 위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부부싸움시다. 실제로 이 상황에서 이혼하는 경 우는 거의 없다. 둘다 계속 무르자고 얘기만 할뿐, 서류를 가져오진 않는 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뭐, 아주 가끔은 여자 가 열받아서 이혼서류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렇게되면 남자는 자존심 때문 에 도장을 찍고, 여자도 자존심 때문에 그 서류를 제출하고…… 그렇게 결 혼 생활은 쫑나는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아주 가끔씩 일어나는 일 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도록. 솔직히 말해 요즘 이혼이 늘고 있는 추세긴하다. 참 요즘 사람들은 왜 그 렇게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물질 문명이 발달될수록, 인간관계 는 점점 더 삭막해저가고, 이럴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가정인데, 그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 이혼! 이거 진짜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이혼을 할 때 제일 중요한 문제는 자식이다. 멀쩡히 잘살던 부모가 찢어지면 그 자식은 누구를 따라가야 한 단 말인가? 결국 방황을 하다 나쁜길로 빠져들고, 나중에는 부탄가스나, 본 드까지……. 아무튼 요즘 결혼과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 정말 반성 해야 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 참을 인 세 개면 이혼도 면한다. 이혼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자. 이혼하고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 이혼서류 백장이 어도 도장찍어야 효력있다. 금술 좋은 부부 이혼서류에 먼저 서명한다. 원 숭이도 이혼……. "이보게! 이보게!" "아, 예. 무슨일이십니까 어르신." "거 젊은 사람이 가는 귀가 먹었나? 몇 번을 불렀는데 왜 못알아들어!" "죄송합니다." 난 이게 문제다. 뭐 하나 생각하다보면, 꼬리꼬리를 물고, 결국은 끝을 보 고야 마는……. "아무튼 내가 점을 보니까 말이야. 자네는 동남쪽으로 가야돼." "동남쪽이요?" "그래 동쪽. 자네는 동쪽으로 가면 입신양명하고 천생배필을 얻을 수 있 어." 입신양명에 천생배필까지! 그래. 속는 셈치고 동쪽으로 가보자. 어차피 우리나라도 동방예의지국(東 方禮義之國), 동이민족(東夷民族), 동방의 등불 등으로 불리지 않았나! 동쪽 으로 가면 새로운 인생이 날 기다리고 있을꺼야. 그래, 난 동쪽으로 가는거 다. 대한민국의 남아 박영웅의 이름을 천하에 떨처보는 거야. 동쪽아 기다 려라, 내가 간다. 닻을 올려라! "이봐! 이봐!!!" "예? 무슨일이십니까." 난 노인이 부르는 소리 때문에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거 젊은 사람이 자꾸 왜 그래!?" "저, 죄송합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됐네." 노인은 의미심장한 눈동자로 내 얼굴을 찬찬히 훝어 보았다. 그러다가 손 으로 만저보기도 하고, 눈을 뒤집어 까 보기도 했다. 노인은 한동안 그짓을 반복하다가 손을 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흠, 자네 관상이 아주 좋구만!" "예?" "허, 참.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아∼ 천기를 누설하면 안돼는 데……." 돈을 더 달란 얘기군. "저, 어르신. 돈이라면 더 드릴테니 그냥 말씀해주세요." 내말에 갑자기 노인이 자기 무릎을 치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예끼! 자네는 내가 지금 돈 때문에 이러는 걸로 보이는가? 복채는 아까 받은 걸로 충분해. 다만 내가 이 사실을 말하고나면, 천기를 누설한 죄로 하늘의 벌을 받을까, 그게 두려워서야." 사이비 점쟁이가 별말을 다하는구나! 이거, 사람 무지하게 궁금하게 만들 고 나서 돈뜯으려는 수작 아닌가? 그래도 무지하게 궁금하다. 으아, 궁금하 다. 난 매우매우 궁금했기 때문에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했다. "그래도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어르신.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인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한숨을 쉬다가, 다시 생각을, 다시 한숨을 쉬 다, 결국은 입을 열었다. "하아∼, 알았네. 난 어차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니까……, 내 천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말해주겠네. 아, 돈은 됐네. 복채라는건 너무 많 이 받아도 안 좋은 법이거든." 참 장황하군. 난 내밀던 금화를 다시 회수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진짜 돈이 필요 없나? 사이비 점쟁이는 아닌가 보네.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얘기를 시작했다. 그 표정이 너무 리얼해 마치 천 (天)과 지(地)의 정기(精氣)를 받은 도인처럼 보였다. "하아∼ 그럼 이제 얘기하도록 하지. 자네는 지금 소중한 사람과 헤어지 고 오는 길이야. 그리고 얼마전, 약 한달 전쯤에 주위의 모든 사람과 헤어 졌어. 내 말이 틀린가?" "……." 잠깐, 한달전이면 내가 이 세계로 온 때잖아. 저 노인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자네는 반드시 동남쪽으로 가야돼. 그곳에선 자네를 위해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어. 어찌보면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어. 하지 만 자네는 반드시 그 운명에 말려들게 될껄세." "그게 무슨말이에요?" "너무 묻지말게. 나도 이렇게 밖에는 모르니까. 계속하지. 자네는 자신이 가진 힘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있어. 자네 마법사 맞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아, 하늘의 뜻까지 아는 내가 그걸 모를까봐. 5클래스 마스터지!?" 어? 이 노인……, 설마 진짜 쪽집게 도사?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노인은 자신의 말이 계속 들어맞자,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까 딱였다. "다 아는 수가 있어. 아무튼 자네가 가긴 힘은 너무 엄청나." "예, 뭐 클래스5 마스터니까……." "그게 아니야! 자네는 자신이 단순히 마법사라고 생각하겠지만, 자네가 가 진 힘은 마법이 전부가 아니야." "그럼요?" "아아, 나중에 알게될껄세. 아무튼 자네는 조금씩 힘을 각성하고 있어. 그 힘이 전부 깨어났을 때, 자네는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될꺼야." "그래서요?" "아! 그래서요는 무슨 그래서요야? 힘이 있으니까 좋은 곳에 사용하라는 거지!" "좋은 곳이면…… 착한 일에요?" "꼭 착한 일에 쓸 필요는 없겠지. 힘을 어디에 사용할지는 자네 마음일테 니까. 자네의 신념(信念)에 따라 행동하게나. 아, 그리고 마법사라는건 될 수 있는한 숨기고 다니게." "왜요?" 노인은 내가 계속 되묻는게 열받았는지 호통을 질렀다. "아!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 그럼 마법사라고 마빡에 써붙이고 다닐꺼 냐!? 나 마법사에요라고 광고하고 다닐꺼야!?" "아, 아니요. 그럴 생각은 없는데요." "그럼 시키는데로 해!" "……예." 젠장. 드럽게 떽떽 거리는군. "아무튼 자네는 나중에 선택에 기로에 서게될꺼야. 거기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대륙의 영웅이 될 수도 있고, 희대에 악당이 될 수도 있겠 지. 뭐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냥 이쁘장한 처자하나 꼬셔서 평범하게 살 수도 있겠고." "제가 영웅이나 악당이 되요?" "자네가 잘 모르나 본데, 영웅이나 악당이 종이 한장 차이지. 시대가 어느 쪽을 향해 손을 들어주느냐와 역사가 어떻게 써지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거 든. 왜 이런말도 있지 않나. 성공하면 황제요. 지면 역적이라고." 흠, 그건 그렇군. 역사라는건 결국 승자에게 손을 들어주는거니까. 아무튼 선택을 하라면 3번을 선택하고 싶군. 얼굴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랑 결혼 해서 잘먹고 잘산다면, 더 이상 무슨 바람이 있겠냐?(나는 작은 것에 큰 행복을 느끼는 소박한 놈이다) 영웅이나 악당도 잘난 놈들이나 하는 거지, 나같은 놈이 무슨 영웅을……, 음, 다시 생각해보니 나도 영웅은 영웅이군. 이름만. "그래서요?" 내가 되묻자마자, 노인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참 무서울 정도로 정정하시군. "아! 그래서요는 무슨 그래서요야!? 자꾸 되묻지좀마! 내 말은 선택할 순 간이 왔을 때, 잘 선택하라는 말이야!! 운명이 닥쳐왔을 때, 그것을 피하려 들지말고!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라고! 맞서!! 무 조건 맞서!!! 알았어!?" 어째…… 많이 들어본 말이다. 저거 혹시…… 사자후 가사? ♬운명을 피할 수 없다라면∼♬그대여 그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라 후∼♬ 소년에 여름에 찾아냈다∼♬여기 영원히 부서지지않는 다이아몬드∼♬(이 현도 1집 '사자후') 흐음∼, 저 노인이 이 노래를 알까? 모를까? "알겠습니다." 노인은 날 노려보며, 씩씩거리며 혈압을 낮추는데 주력했다. 잠시 후, 노 인의 얼굴빛에 제빛깔로 돌아왔을 때, 노인은 입을 열었다. "내가 해줄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네. 그럼 잘가게나." 드디어 끝난건가? 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저는 어르신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동남쪽을 향해 떠 나겠습니다. 안녕히계십시오." 난 노인에게 인사를 한 다음 길을 떠났다. "이봐! 이봐!!" 무슨일이지? 난 노인이 질러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네 지금 어디로 가나?" "저야, 당연 동남쪽으로……." 노인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동남쪽은 저쪽이야!" 어? 저쪽이었나? "아, 예. 알겠습니다." 난 몸을 180도 돌려 걸어갔다. "거,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따두고 다니나!?" "죄송합니다. 제가 방향치여서요." "쯧쯧, 젊은 사람이 말이야!" 젊은게 죄냐? 젊은 만큼 실수도 많이하고 시행착오도 겪어보는거지. 뭘 그런거 가지고 그러냐? 내가 다시 한번 점보면 인간이 아니다! 노인은 혀를 몇번 찬 다음, 돌아서 누었다. 낮잠을 자려나 보다. 난 노인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한 다음, 계속 걸었다. 동남쪽을 향 해……. 그러고보니 춘추전국시대 최고의 책략가이자, 손자병법서의 저자인 손무도 길가에서 한 점쟁이 노인을 만났다. 그 점쟁이 노인은 손무에게 입 신양명할 꺼라고 예언을 하면서 동남쪽에 있는 정(鄭)나라로 가보라고 하 였다. 손무는 노인이 말한데로 정나라로 갔고, 그 곳에서 오자서가 보낸 백 비를 만났다. 백비의 설명을 들은 손무는 친우(親友) 오자서의 복수를 도와 주기 위해 백비와 같이 오(吳)나라로 건너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자서와 함께 초나라를 쳐 큰 공을 세워,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렸다. 뭐, 말년에는 산속에서 평화롭게 살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까 노인이 말한데로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숨기고 다니는게 좋을 것 같다. 세레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현재 모든 나라가 마법사 부 족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마법사는 납치, 유괴, 회유, 제거, 강간(?) 대상 1 호라고 한다. 마지막 것은 조금 과장된 것 같지만, 어쨌든 그만큼 마법사는 국가 전력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4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는 혼 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난 클래스5 마스터다. 거기다가 17세의 나이.(클래스5 마스터 평균 나이 : 약 55세) 이 정도면, 납치, 유괴, 회유, 제거, 사위감(?) 0호다. 어쨌든 이제 부터는 전사처럼 행동해야 겠군. 블루 드래곤 뼈로 만든 청룡도도 있겠다. 내가 무슨 걱정이겠냐? 저벅, 저벅, 탁, 탁- 소년은 빠른 걸음을 놀렸다. 두 발이 땅을 누르는 소리와, 지팡이로 땅을 치는 소리가 약하 게 들려왔다. 이윽고 소년의 모습이 길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낮잠을 자던 노인은 천천히 몸 을 일으켰다. 노인의 눈이 기묘한 빛을 내면서 빛났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회색이던 눈이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으로 변한 것이다. 노인의 붉은색 눈동자를 번뜩였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는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나의 곁에만 있어 주길 원하는건 그저 나의 욕심일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슬픔들이 나의 사랑일까∼♬" 난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여기 사는 이들이 과연 이 노래의 제 목을 알고나 있을까? 상처(喪妻-마누라가 죽었다는 뜻-가 아니다)라는 노 랜데……. "♬나 한순간도 널 놓치기가 싫어♬ 하지만 그 말을 할 순 없어♬ 내 가 슴 속 깊이에선 언제나 내 곁에 있는 널 원하지만♬ 내 곁에 있는 널 원하 지만♬" 이런, 벌써 끝났군. 이럴 때, CDP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거야 원, 내가 부른 노래를 내가 들어야 하다니……, 무슨 자급자족하는 것도 아 니고……. 이젠 또 뭘 부르지? 다음 부를 노래를 선곡하는 나에게, 재미있는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상단 호위병 모집> 저희 자룬 상단에서 상단 호위병을 모집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자룬 상단은 현재 대륙 최고 규모의 상단입니다. 여러분의 용기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시면, 정말 큰 후회를 하실껍니다. 출발 일시 : 4월 9일 도착 일시 : 5월 10일 (여러가지 사정에 의해 조금 늦어지거나, 빨라질 수 도 있습니다) 보수 : 100골드 모집 인원 : 약 100명 관심있으신 분들은 동문 쪽에 위치한 주점 '전사들의 휴식' 에서 문의 바랍 니다. 오오! 상단 호위병이라……? 이거야 말로, 판타지 세계의 미학이 아니겠는 가! 난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려 보았다. 젊은 그대! 자룬 상단으로 오라! 흠, 이 문구를 들으니, 갑자기 무지 하고 싶어진다. 한번 참여해봐?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저쪽에서 아줌마와 아가씨가 걸어가는 모 습이 보였다. 난 뛰어가서 그녀에게 물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당연 아가씨에게 물었다. 뭐, 아가씨라고 해도 나보다 한, 두 살 많이 보이는 여 자였지만……. "저기……." 그녀는 나를 쏘아보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뭐에요!" 그녀의 눈빛이 이상하다. 눈동자를 위, 아래로 굴리는 것이, 날 변태나 치 한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한……. 난 그녀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제일 좋은 방법 을 택했다. "저기, 말씀 좀……."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 말을 가로챘다. "예. 뭐든 물어보세요." 이렇게 빠를수가! 어떻게 저렇게 빠르게 금화를 낚아 챌수 있는거지? 잔 상조차 남기지 않았다. "저기 라네제는 여기서 어느쪽인가요?" "라네제는 이곳에서 동쪽에 있답니다. 말을 타고 가면 3일 정도, 걸으면 일주일 정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그 도시에는……." "예, 감사합니다." 잘못하다간 오늘 하룻동안 저 여자가 떠들어대는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아 서, 인사하고 그 자리를 잽싸게 지나쳤다. 정말, 여자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찬바람이 쌩쌩 불다가 도, 1골드 하나에 태도가 바뀌는…… 참, 아무리 물질만능주의 사회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사회가 삭막해졌을 줄이야……, 아∼ 무서운 세상이여! 어쨌든 라네제가 동쪽이라고 했으니, 상단 호위병으로 따라가는 편이 좋 을 것 같다. 식사와 잠자리도 다 그쪽에서 대줄테니 편하기도 하겠고. 빨리 '전사들의 휴식' 이라는 곳으로 가야겠다. 근데…… '전사들의 휴식' 은 어 디 붙어 있는거지? 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아가씨는 이미 저 먼 곳으로 떠나……. "아가씨! 잠깐!!!" "여기에요." "예, 고맙습니다. 이건 감사의 표시로……." 그녀는 빠르게 손을 뻗어 내 손에 있는 금화를 가져가며 말했다. "어머, 아니에요. 이런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닌데……." 솔직히 말해라. 이걸 바라고 한 일이라고. 대체 가져가면서 저런말을 하는 건 무슨 저의지? "그럼 안녕히계세요." "예. 안녕히 가십시오." 난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벽을 붙잡고 흐느꼈다. 흑흑, 겨우…… 겨우 5분 거리에 10골드나 뜯겼어! 세상에 무슨 여자가 저 렇게 돈을 밝히는 거지! 혹시 전생에 사채업자가 아니였을까? 한 블록 갈 때 마다 멈춰서면서,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난 돈을 주고, 그 녀는 다시 걷고, 다시 멈추고, 다시 돈을 주고, 다시 가고……. 저런 여자랑 결혼하면 진짜 고생길이 훤하겠다. 맨날 월급뜯기고 용돈 못받고……. 난 눈물을 쏟으며, 주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떡대 좋은 남자들이 수십개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참 퇴폐적인 분위기로군. "무슨일이십니까?" 난 고개를 돌려서 방금 질문을 던진 사람을 처다보았다. 나이는 약 30대 중반 정도. 긴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묶었고 커다란 안경을 쓴, 전형적인 학자풍의 남자다. "당신은……?" "저는 총책임자입니다." 이 자가 총책임자군. "아, 저는 상단 호위병을 모집한다기에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 자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훝어보더니, 물었다. "무슨…… 특별한 기술이라도 있으신가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내 지팡이를 자세히 보았다. 난 어깨를 한번 으쓱 하며 대답했다. "뭐, 특별한 기술은 없습니다. 다만 싸움을 좀 하지요. 아! 이 지팡이는 그 냥 들고 다니는 겁니다. 여행하는데 하나 필요해서요."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내 외 모나 나이로 어디가서 마법사라고 주장하기는 힘든 것 같다. 그냥 팬 써비 스 차원에서 파이어 볼이나 한방 날려줄까? "용병이신가요?" "아니요. 여행잡니다." 남자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솔직히 이번 일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실력이 없으시다면……." 난 그의 말을 잘랐다. "실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내 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계속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 테이 블 한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봐! 꼬마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온거냐? 어린애는 집에가서 놀 아라." "푸하하하." 주점 안은 웃음소리로 가득찼다. 난 탁자를 홀 안을 둘러보면서, 방금 나 를 꼬마라고 부른 놈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홀안에는 거의 100여명의 사람 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난 그 놈을 발견해 낼 수 없었다. 그럼 스스로 나오게 만들어야 겠지. 난 자신있는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방금 까댄 놈 누구냐? 실력있으면 한번 나와보지 그래?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만 말고 말이야." 잠시 홀안은 조용해졌다. 끼이익- 의자끄는 소리가 나더니, 한 떡대 좋은 남자가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엄청난 키와 덩치. 적갈색 스포츠머리에 얼굴에 칼자국까지……. 오우 이 런, 생긴 것 한번 드럽게 생겼군. "방금 뭐라고 했니? 꼬마야?" "못 들었나 보군. 넌 귀머거리냐? 마누라 품에서 애교나 더 부리고 와라!" "푸하하하."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고 그 자식의 표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학자풍 의 남자는 별로 말릴 생각이 없는지 뒤로 물러났고, 난 배낭과 지팡이를 내려 놓았다. 우두두둑- 녀석은 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관절을 풀었다. 그 때 마다 우두둑 소리가 들려오는데……, 진짜 소름끼친다. 저거 진짜로 인간의 몸에서 나는 소릴 까? 녀석은 왼손으로 턱을 잡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목관절도 풀기 시작했다. 관절 푸는 작없이 끝나자 녀석은 씩 웃으며 어린애 달래는 투로 말했다. "아가야! 지금이라도 사죄하고 돌아간다면, 그냥 보내줄게." 그리고 난 단 한 마디로 그 말을 받아쳤다. "지랄하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또 다시 폭소가 터저나왔다. "푸하하하, 이거 럴크가 한방 먹었군 그래." "휘이익, 입담이 제법인데 꼬마." "한판 붙어 보라고. 꼬마야! 럴크를 눕혀버려." "이봐, 꼬마야! 빨리 도망치는게 좋을걸. 럴크가 열받으면 뼈 한 두개 뿌 러지는 걸로는 안 끝나. 빨리 튀어. 크하하하." 럴크라는 자식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답례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날 보고 재수없게 웃으며 말 했다. "아가야! 진짜 나랑 해볼생각이니?" 난 싸우기 편하게 망토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그 자식을 치어다 보며, 빈 정거리듯이 말했다. "왜? 질까봐 겁나냐? 그럼 지금이라도 기회를 줄테니까, 거기로 조용히 꺼져서 술이나 퍼마셔. 괜히 내 앞에 깝죽거리다 맞으면 아프잖아." 럴크의 표정이 변했다.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뭐야? 벌써 쫄은거냐?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때 꺼져."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럴크는 잠시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 하다가, 천천 히 표정을 가라앉히더니, 씩 웃었다. 같은 웃음이지만, 아까와는 느낌이 틀 렸다. 잔인한 미소라고나 할까? 먹이감을 앞둔 짐승같은……. "제법이군. 내 앞에서 그렇게까지 말을 하다니. 그 용기가 가상해서라도, 상대해주지." 난 한발 자국 뒤로 물러 나면서, 작은 목소리로 시동어를 외쳐, 손에 스트 랭스 마법을 걸었다. "그만 까대고 덤비기나 해." 럴크는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발끝이 움직이고 내쪽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난 날아오는 주먹을 보며, 잽싸게 몸을 옆으로 돌려 간신히 주먹을 피했 다. 장난이 아닌데. 덩치는 산만한 주제에 뭐가 이렇게 빨라? "제법인데." 그 자식은 말을 마치고 다시 주먹을 날렸다. 주먹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날아오니…… 젠장, 뒤로 피해야겠군. 난 빠르게 뒤로 몇걸음 물러나 주먹을 피한 다음,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았다. 저 놈의 움직임은 이제까지 내가 상대한 사람들 중에서 제일 빠르다고 할 수 있다. 후작집에 있었던, 사병들의 움직임도 저 정도까지는 아니였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폭주상태여서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젠장!" 난 욕을 내뱉으며 날아오는 주먹을 또 피했다. 럴크는 내가 자신의 주먹 을 여러번 피하자, 약간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주먹이 날라왔다. 빌어먹을! 뭐가 이렇게 빨라? 젠장, 피하기엔 늦잖아. 피할 수 없다면…… 되받아 친다! "으아아아!" 난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내질렀다. 빠각! 주먹과 주먹이 부딪히고, 순간, 찌잉 하는 느낌이 주먹을 타고 오른팔 전 체에 전해졌다. 우리는 각자 팔을 움켜쥐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뭐야? 무슨 주먹이 저래? 마치 돌덩이를 때린 것 같잖아. 스트랭스를 건 상태에서도 힘에서 밀리다니……. 그 순간, 관중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봤냐? 봤어? 저 꼬마가 럴크의 주먹을 쳐냈다고." "우연이겠지." "이봐 꼬마 제법인데! 제대로 싸워봐. 저 자식을 눕히라고." "무슨 헛소리야! 럴크가 저딴 놈한테 질 것 같아? 이봐 럴크, 그만 봐주고 꼬마를 죽여버려." "우오오오! 빨리 싸워. 빨리."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두 가지가 불 구경과 쌈 구경이라더니……, 완전 발광을 해라. 발광을. 럴크는 느린 동작으로 팔을 매만졌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제법이군." 나 역시 팔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그 말 97번만 더 들으면 100번이다." 럴크는 재밌다는 웃음 지었다. "이제보니 실력이 꽤 있는 놈이었군. 이 럴크 님의 팔을 저리게 하다니 말이야. 하긴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까댄거겠지. 그럼 이제부터는 제대 로 해볼까?" 럴크에 눈빛이 바뀌었다. 자세를 약간 아래로 낮추면서 공격할 태세를 취 하는데…… 젠장, 저 새끼 진짜 제대로 할 생각인가? 난 럴크의 눈빛을 마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럴크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주먹이 날아 왔다. 난 오른손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처낸 다음, 왼손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녀석은 몸을 비틀어 내 주먹을 피했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더니 내 복부 쪽 으로 주먹을 날렸다. 빠악 젠장, 이거 장난이 아닌데……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까? 아니면, 익스플로젼 같은 걸로……. "으아!" 우리 둘은 계속 서로의 주먹을 치고 피했다. 걸쳐 있는 망토가 약간 걸리 적 거리기는 했지만, 크게 지장이 되지는 않았다. 싸움의 분위기가 무르익 어 갈수록 관중들의 열기도 점점 달아 올랐다. "하아, 하아∼ 하아." 그렇게 약 3분 정도 싸우고 나자, 온 몸에 땀이 흐르고 호흡이 거칠어졌 다. 반면에 저 자식은 지치지도 않는지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대로는 승산이 없어. 주먹의 위력만으로 따지면, 거의 똑같다고 볼 수 있지만, 체력면에서 내가 확실히 열세였다. 그리고 계속 주먹으로 처내고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한 대로 맞으면 상황이 틀려질꺼다. 내 몸은 전형적인 고딩 몸인데 비해, 저 자식은 강철과도 같은 근육과 탱크 같은 갑빠로 온몸을 무장하고 있었다. 둘이 동시에 맞는다고 할 때, 누가 떨어져 나갈 것인지는 안봐도 비디오였 다. 럴크는 내가 어느정도 호흡을 가다듬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봐준다는건가? 좋아, 봐준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난 뒤로 두어걸음 물러난 다음, 날아오는 주먹을 아래로 찍었다. 퍽! "젠장." 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오른팔끼리 부딪힌 순간, 녀석이 발로 공격 한 것이다. 왼팔로 간신히 막긴 했지만, 몸이 뒤로 밀려나는 것까지는 어떻 게 할 수가 없었다. 젠장, 싸움에는 발도 있었지. 빌어먹을, 손도 상대하기 힘든데, 발까지 쓰 면 어쩌자는 거야? 그나저나 위력이 장난 아니군. 팔이 지끈거리는데……. 녀석은 '오호! 제법하는데' 하는 표정을 잠깐 지어보이더니, 다시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입가에는 재수없는 미소까지 지으며. 방법이 없나? 이대로 지면 이게 무슨 개쪽이냐? 지금이라도 공격 마법을 쓸까? 방법이…… 방법이…… 방법이…… 있다! 난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저 띠꺼운 놈을 쓰러트릴 방법을 생각해내고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난 어차피 마법산데, 굳이 정당하게 싸울 필요는 없지. 얍삽하게 싸 우자. 얍삽하게. 럴크는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내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는 약간 의 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나와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상당히 신중 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난 주먹을 꼭 쥐었다. 그리고 녀석과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으아아아아!" 무차별 난타를 시작했다. 녀석은 갑자기 달려드는 내 모습을 보고 잠깐 흠칫하더니, 곧 손으로 가드를 만들어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난 상관하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 왼쪽, 오른쪽, 아래, 위…… 젠장, 한 대 정도는 맞아줘라. 스트랭스를 걸어 놓은 주먹이니 만치, 막아도 꽤 아프긴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막는 쪽 보다는 때리는 쪽이 훨씬 체력 소모가 심하다. 막는 쪽은 맞는 부위만 조금 저리고 끝나지만, 때리는 쪽은 주먹질 하느라 근육 에도 무리가 가고, 호흡도 가빠진다. 녀석도 그것을 잘 알기에 적당적당히 막기만 할 뿐, 반격을 하지는 않았다. "하아, 하아." 난 힘 닿는데 까지 주먹질을 한 다음에 뒤로 물러섰다. 그 주먹들은 허공 을 가르거나, 녀석의 가드에 막혀, 한 대도 제대로 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헤이스트." 난 스트랭스를 해지한 다음, 녀석이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헤 이스트를 걸었다. 럴크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죽어라아아!" 난 오른손을 뒤로 뺀 다음, 마지막 발악인 것 처럼 왼손을 내질렀다. 헤이 스트를 건 상태기 때문에 주먹은 엄청난 속도로 녀석에게 날아갔다. 녀석 은 흠칫하며 가볍게 막아냈다. 그리고는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였다. 이미 체력이 다하고, 스트랭스까지 해지한 이상, 스피드만 빨랐지 막을 가치도 없는 솜주먹이었던 것이다. 난 녀석이 주먹을 막느라 주춤거리는 순간, 오른손으로 청룡도를 뽑았다. 스르릉- 청룡도는 환도 특유의 곡선을 그리며, 푸른색 빛을 뿌리며, 도집에서 뽑혀 나왔다. 도(刀)를 제일 빠르게 쓰는 방법은 발도술이다. 도(刀)집이 받침대 역할 해 그 길을 따라 도가 뽑히기 때문에 스피드가 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청룡도는 매우 좋은 도다. 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도 집과 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 다가 헤이스트까지 걸고 있다면……. 나 조차도 생각 못한 스피드로 날아간 청룡도는 럴크의 목에 닿았다. "내가 이긴 것 같군." 주위는 다시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관중들은 침 삼키는 소리 만을 내며, 우리를 주시했다. 럴크는 잠시 움찔했지만, 그렇게 두려워하는 표정은 아니였다. 오히려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는 표정이었다. "킥, 제법이군." 묵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도 꽤나 태연한데…… 대체 무슨 자신감에 서 저러는거지? "설마 얍삽하다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럴크는 씩 웃으며 답했다. "물론. 어차피 처음부터 주먹으로만 승부하자고 말한적은 없으니까 말이 야. 그런데 꼬마야! 살인을 해본적은 있니?" 오호, 이제보니 내가 절대로 자신을 죽이지 못할꺼라고 생각하고 있나 보 군. "꼬마야 사람을 죽인다는건 말이다……." 저 자식 왜 저래? 잠깐이었지만 럴크의 눈에는 두려워하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럴크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아까에 비해서는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난 잠시 녀석을 관찰하다가 곧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아까 럴크가 지어보였던 미소를 지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11명을 죽였지. 사람죽인다는 거, 별거아니던 데. 칼이 워낙 고급이여서, 그냥 휘두르기만 했는데, 알아서 다 죽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아무래도 오늘 12명으로 늘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예전에 후작집에 처들어가 사병들을 죽인 뒤, 피를 제대로 닦지 않아, 청 룡도 도신 전체에는 피가 엉켜서 굳어있었던 것이다. 흘∼ 이 몸을 사람하나 죽이지 못하는 샌님으로 보면 곤란하지잉∼. 이 몸은 11명이나 죽인 관록이 있다고. 럴크는 다시 씩 웃었다. 아까와 같은 비웃는 듯한 웃음은 아니였다. "킥, 한방 먹었군. 내가 졌다." 오호! 패배를 인정하신다 이건가? 흘, 나의 화려한 전적에 1승이 추가됐 군. 난 럴크의 목에 닿아 있던 청룡도를 회수했다. 닿을랑 말랑한 간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스쳤는지 럴크의 목에서는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 었다. 럴크는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쳇, 이 럴크님이 이런 꼬마한테 지다니. 뭐야? 피까지 나잖아! 잘못하면 죽을뻔했군, 그래." 난 청룡도를 도집에 집어 넣고 바닥에 내려 놓은 지팡이와 배낭을 집어 들었다. "이봐, 잘 기억해 둬. 이 몸은 꼬마가 아니라 히로다." "……히로? 좋아! 기억해두기로하지." 럴크는 말을 마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휘이익, 꼬마! 제법인데." "방금 봤어? 저 꼬마가 럴크를 이겼다고." "그 순간 칼을 뽑다들다니, 진짜 얍삽한데." "저게 발도술이라는건가? 난 태어나서 이렇게 빠르게 칼뽑는걸 본적이 없 어." "그건 니가 멍청해서고." "이봐, 럴크! 저런 꼬마한테 지고도 쪽팔리지도 않냐?" "시끄러. 닥치고 술이나 퍼마셔." 관중들은 다시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럴크를 보니, 4명 의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별로 기분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 히려 자신도 즐길만큼 즐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럴크는 내가 자길 보 고있다는걸 알자, 한손을 들어보였다. 난 그 모습에 그냥 피식 웃었다. 짝짝짝- "대단하시군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실력을 갖추고 계시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남자였다. 총책임자. "별거 아닙니다." "아, 아 무슨 말씀을…… 제 평생 그렇게 빠른 검은 처음 보았습니다." 당연하지 헤이스트까지 걸었는데. "그럼 호위병으로 넣어 주시는 겁니까?"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물론입니다. 이 정도 실력을 갖추고 계신분을 빼놓을 순 없지요. 이곳의 식비나 숙박비 모두는 저희 상단에서 지불하는 것이니 마음껏 즐기 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니 그 때까지 푹 쉬시기를……." 즐기라는거야? 쉬라는거야? "알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다른 곳으로 갔고, 난 구석에 있는 탁자로 가 앉았다. 그리고는 비싼 음식을 시켰다. 내가 돈내는게 아니 니까. 격렬한 운동을 한 직후여서, 맛있게 먹고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싸우는거 보니까 제법이던데." 난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나이는 나보다 10살정도 많고, 덩치는 럴 크와 비슷한 정도. 얼굴은 흉악하게 생겨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벌 하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의외로 좋은 놈일지도……. "별로." 상대방이 먼저 반말을 쓰니,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왔다. 남자는 의자를 빼 앉았다. "그거 발도술이라는거냐? 진짜 빠르더군. 이런 곳에서 도를 쓰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너 혹시 체자레 출신이냐?" 체자레라면…… 나라 이름인가? "아니." "체자레 출신도 아니면서 도를 쓰다니, 특이하군." "……?" 이곳 출신은 도를 안쓰나?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남자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아, 이쪽 놈들 대부분은 검을 쓰거든. 짜식들이 양날 달린 걸 좋아해서 말이야. 도를 쓰는 놈들도 있긴 한데, 대부분 이따만한 대도(大刀)나, 직도 (直刀)를 쓰지, 그런 길다란 환도를 쓰는 놈은 없어. 그런 환도는 체자레 쪽에서만 생산된다고 하더군. 아! 그런데 아까보니 날이 새파란색이던데, 뭘로 만든거냐?" 흠, 환도는 체자레에서만 생산한다고? 뭐, 이 청룡도야 블루 드래곤이 만 든거니까. "나도 잘 몰라." "그래?" 대화가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남자는 입이 심심한지 맥주를 시켰다. "내 이름은 테커다. 3년 전부터, 이 바닥에서 굴러먹고 있지. 용병들 사이 에선 꽤 알려진 몸이야." "난 히로." 잠시 후, 주인이 맥주를 가져왔고, 테커는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아까보니까 진짜로 잘싸우더군. 럴크도 이 바닥에서는 꽤 실력있는 놈인 데…… 난 럴크가 지는 모습은 오늘 처음봤어. 비록 얍삽한 방법에 지긴했 지만……." 뭐가 얍삽이야!? 어쨌든 럴크란 녀석 꽤 유명한 놈인가보군. "그런데 너 반사신경이 대단하더군. 주먹이 날아오는 방향만 보고도 팔로 막아내거나 쳐내다니 말이야. 그런 능력은 거의 실전을 통해서만 길러지는 건데, 너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했구나." 테커는 그렇게 말하며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새끼가 맞고 싶나? 뭐, 내가 어려부터 고생 좀 하긴 했지. 학교에서 힘 있는 애들한테 맨날 얻어터지고 말이야. 그러고보니 정재훈 그 새끼 생각 이 난다. 합기도 좀 익혔다고 깝죽대는 새끼. 씨발, 마법 익힌 기념으로 그 새끼를 먼저 죽였어야 하는 건데. 내가 서울로 돌아가기만 해봐라, 넌 제거 대상 1호야. 난 끓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아까의 싸움을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이상했다. 럴크의 눈빛과 주먹을 보면, 어디로 공격할지 대충 공격 루트가 보인 것이다. 그리고 럴크의 주먹을 피할때도 머리로 생각해서 피 했다기 보다는, 거의 몸이 알아서 반응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는건…… 내가 쌈질에 엄청난 소질이 있다는 얘긴가? 하기야 그동안 맞고만 살았지, 싸움 이란 걸 한번도 제대로 해본적이 없으니까……. 이제보니 난 동체시력도 좋고, 반사신경도 좋고…… 음하하하하, 이제부터는 전사 히로라고 불러다 오! 난 나의 잘남에 감동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상단 호위병은 하는 일이 뭐지?" "뭐?" 테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단 호위병은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너 그것도 모르고 여기 온거냐" "응." 테커는 씩 웃으며 말했다. "별로 하는 일은 없어. 그냥 중간에 산적떼 만나면, 피터지게 싸우는거지. 상당히 재밌는 일이야. 가끔가다 목에 상금이 두둑하게 걸린 놈들 잡으면 돈도 버는 거고." 별로 재미 없을 것 같은데. "헤이! 남자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하고 있어?" 앗! 예쁜 목소리다. 난 고개를 들어 방금 말한 사람을 처다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 르게 한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엘프?" 여자는 아무말 하지 않고, 웃으며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까딱까딱 거렸다. 난 다시 물었다. "하프 엘프?" "정답." 오∼ 저게 하프엘프인가? 진짜 예쁘게 생겼네. 나이는 20대 초반. 키는 약 180cm정도. 갸름한 얼굴에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 뒤로 넘 겨 끈으로 묶은 레몬빛 생머리. 엘프에 피가 섞여 있다는 표시인 길고 뾰 족한 귀. 착 달라 붙는 흰 블라우스와 가죽 바지. 상당히 볼륨있는…… 아 니 엄청나게 볼륨있는 몸매. 오! 저 가슴 큰 것 좀 봐. 완전 내 이상형이야. 여자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빼 앉았다. 난 얼굴이 달아오르 는 것을 느끼며, 여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잠깐만. 목 좀 축일께." 여자는 테커와 잘 아는 사인지, 테커가 들고 있는 맥주잔을 뺏었다. 그리 고는 원샷하기 시작했다. 앗! 저 위치는 테커의 입술이 닿았던 자린데…… 이건, 간접키스? 젠장, 테커 자식…… 부럽다. 하지만 테커는 그런것에는 신경도 안 쓰고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맥주를 시켰다. 뺏길걸 대비해서 5 잔이나. 무식한 자식! "캬아∼, 역시 끝내준다. 아까 뭐라고 했지?" "……." "아, 아. 알았어. 내가 무슨 일로 왔냐고 했었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양손으로 턱을 괴더니, 고개를 45도 각도로 기울였다. 그 덕분에 우리 둘은 눈높이가 똑같아 졌고, 눈동자를 마주 보게 되었다. "그냥. 니가 마음에 들어서." 앗!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번역하자면 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는…… 이런, 내가 아무리 멋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첫눈에 반하냐?…… 후 후, 잘생긴 내가 죄지 누구를 탓하겠냐? "아까 보니까 제법이덴데. 꼬마처럼 보이는 주제에 럴크를 다 이기고 말 이야." 뭐? 꼬마? 으아!!! 딴 사람은 몰라도, 예쁜 여자한테 어린애 취급받는 건 못참아! "……." 내가 꼬마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여자는 팔을 뻗어 내 팔을 움켜쥐 었다. 그리고는 조금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 너 이런 가느다란 팔로 럴크의 주먹을 되받아 친거야? 이야∼ 요 꼬마가 제법 근력이 있나본데." 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 이름은 히로입니다." 여자는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곧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 이제보니 너 내가 꼬마라고 불러서 화난거야? 에이∼ 무슨 남자가 그런걸로 삐져? 너 진짜 어린애구나. 후후, 알았어. 이제부터 히로라고 불 러주면 되잖아. 자, 들어봐. 얼마든지 불러 줄 수 있어. 히로. 히로. 히로." 난 한손으로 이마를 집었다. 내가 진짜 17년 인생살면서 이런 성격의 여자는 처음 본다. 뭐 이런 여자 가 다 있냐? "아차차, 내 소개를 안했군. 자, 이제 나에 대해 가르쳐줄게. 한 번만 말할 꺼니까 잘들어둬 꼬마. 아니 히로 우후웅∼♡. 이름은 라이레얼. 나이는 꽃 같은 23세. 주특기는 활쏘기. 장점은 귀엽고 발랄하다는 것. 단점은 너무 예쁘다는 것. 이것 때문에 귀찮아 죽겠어. 남자들이 너무 찝적거리거든. 뭐, 어쩌겠어. 이쁜 내가 죄지. 어머, 히로.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이건 정말이 라구." 듣다 못한 테커가 끼어들어 한 마디 했다. "지랄한다." "넌 닥치고 있어." 다행히 테커는 아무말 안하고 다시 맥주잔을 들었다. 라이레얼이라? 예쁜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나보다 6살 연상. 그런 데 정말 장점이 귀엽고 발랄일까? 혹시 귀뾰족하고 지랄을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닐까? "자, 그럼 계속한다. 내 별호는 '천재 미녀 엘프 궁사'. 뭐 일부 용병들 사 이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레이디 라이레얼' 이라고 부르기도 해. 아이, 부끄러워라. 히로도 그렇게 불러줘." 라이레얼은 말을 마치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양손으로는 V자를 만들어 흔들고 있고. 아! 귀여워라! 그런데 천재 미녀 엘프 궁사는 대체 뭐지? 정말 저런 별호 로 불리는 걸까? 난 고개를 획 돌려 테커를 보았다. 테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름은 라이레얼. 나이는 사그라드는 23세." "닥쳐!" "너나 닥쳐. 여자 나이 20이면 저물어가는 해라고. 방금 봤듯이 성격은 지 랄 같음. 주특기는 남자 후리기. 장점은 그나마 반반한 얼굴. 단점은 너무 많아서 열거 불가능. 별호는 활질하는 엘프년. 용병들 사이에서는 꽤 많이 알려진 년이야. 나쁜 쪽으로 말이지." 음∼ 역시, 이런거야 말로 제대로된 정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어째 맥 주 뺏긴 것 때문에 불받아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남자 후리기라니……??? 이어지는 테커의 말. "일부 용병들 사이에서는 엘프년 앞에 씨발이나 병신 등의 단어를 첨가하 기도 해." "활질하는 씨발 엘프년…… 활질하는 병신 엘프년……." 난 밖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몇번 중얼거린 다음 말했 다. "훨씬 어감이 좋군요." 거의 욕이나 다름없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레얼은 전혀 화 난 표정이 아니였다. 라이레얼은 맥주잔을 들며 말했다. "흥, 그건 이 라이레얼 님의 미모를 시기한 놈들이 만들어낸 얘기고." "미모 좋아하시네. 니 얼굴은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범죄라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레이디 라이레얼? 아주, 지랄을 해라. 어떤 미친 놈이 그렇 게 부르냐?" "만나는 남자들마다 다 그랬다, 뭐." "씨발, 그 남자들은 전부 눈깔이 빠졌냐?" "닥쳐. 그러는 넌 뭐가 잘랐다고, 내 앞에서 지랄이야, 지랄이. 난 히로랑 얘기하러 온거니까 넌 그만 꺼져." "내가 왜 꺼져? 나중에 끼어든 니가 꺼져야지." 난 험악한 말을 내뱉으며 말싸움 하는 둘을 냅두고, 먹던거나 마저 먹기 로 했다. 괜히 남에 싸움에 끼어들어서 등터지기는 싫으니까. 한참을 먹다가, 난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 를 들어 보니, 테커는 얼굴을 되는 데로 구기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술을 마시고 있었고, 라이레얼은 예쁜 미소를 지으며 홀짝홀짝 맥주를 마 시고 있었다. 흘,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테커가 패했나보군. 그러게 왜 여자와 말싸움 을 하냐? 난 둘의 표정을 힐끔 본 뒤, 다시 먹는데 열중했다. 그런데…… 라이레얼 이 왜 자꾸 나를 처다보는 거지? 신경쓰여서 밥을 못먹겠잖아. "뭘 그렇게 보세요?" 라이레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니가 너무 귀여워서." 챙-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완전히 얼어 붙었고, 내 손에 있던 포크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보고…… 나보고…… 귀엽데! 내가 귀엽단 말인가!? 저렇게 예쁜 여자 눈에 내가 귀엽게 보인다는 말인가! 아! 벅차오르는 이 감동! 그렇게 귀여 우면 가지셔도 되요. 절 가지세요오! "어머, 얼굴 빨개졌네. 너무 순진한거 아냐? 난 순진한 남자가 좋더라 ……." 라이레얼은 의자를 옮겨, 내 옆에 바싹 붙었다. 난 최대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노, 놀리지 마세요." "어머, 놀리는거 아냐. 너 정말 귀여워." 라이레얼은 바닥에 떨어진 포크를 주어 손수건으로 쓱쓱 닦았다. 그리고 는 고기를 찍어서…… "자, 아∼ 해봐. 내가 먹여줄게." 아니, 이 여자가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자, 아∼." 흥, 그런다고 누가 입을 벌릴 줄…… 이런 몸이 제어가 안돼! "아이, 잘했어요." 내가 주는 음식을 받아 먹는 묘기(?)를 선보이자, 라이레얼은 기쁜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이러니까 내가 꼭 먹이달라고 꼬리흔드는 개 같군. 개면 어떠냐? 예쁜 여자가먹이주는데. 멍멍! 먹이주세요♡. "아잉, 너무 귀여워." 허걱, 이게 무슨……. 갑자기 라이레얼은 내 머리를 당겨 자신의 커다란 가슴에 파묻었다. 얼굴 전체에 뭉클한 느낌이 전해지고…… 얼굴 느낌으로 대충 크기를 재 보니 88? 아니 90은 되는 것 같은데…… 아∼ 숨막혀…… 정신이 혼미해진 다……이대로 죽어도 좋아! 라이레얼은 진짜로 내가 숨막혀 죽을 까봐 걱정됐는지, 금방 나를 놓아주 었다. 그냥 이대로 죽도록 냅두시지……. 이 끝내주는 광경을 보고도, 테커는 전혀 부러운 표정을 짓지 않고, 콧구 멍을 후비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남자 사냥꾼이 또 시작이군. 이번 먹잇감은 걔냐?" ……남자 사냥꾼? 테커는 맥주를 들지 않은 손으로 라이레얼을 가리켰다. "이 년 말이야. 이 년. 남자 꼬시는데는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 지 금까지 이 년에게 걸려서 인생 망친 남자들도 꽤 된다고." "……." 무슨 소리지? "흥, 무슨 상관이야? 난 다만 마음이 이끄는데로 행동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라이레얼은 부인하는 모습이 아 니였다. 그러고보니 테커도 별로 시비거는 것 같지는 않군. 그냥 장난 거는 건가? 그건 그렇고 이 여자 상당히 개방적이군. 마음만 맞으면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뭐, 여자라고 결혼하기 전까지 꼭 순결을 지킬 필요는 없겠지. 단지 즐기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정말로 둘이 사랑하고 마음이 맞는다면야……. 세레나 같은 경우에는 뒤 따르는 책임이 무서워서 못했을 뿐이지, 언제든 지 기회만 온다면…… 흐흐흐. 기왕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으니……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기자. 그래, 사람은 원래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하는 법 이야. 그래도 내 아내가 될 여자에게는 내가 처음이었으면 좋겠다. 아∼ 간사한 인간이란 존재여……. 식사는 이미 끝마쳤기 때문에, 난 둘이 말싸움하는 모습을 보면서 담배를 피기로 했다. 담배가 반 쯤 타들어 갔을 때…… "저기, 히로! 히로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예? 뭘요?" 라이레얼은 두손을 다소곳하게 모으고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아∼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오∼. 응?" 이런, 갑자기 나에게 왜 그런 질문을? 난 테커를 보았고, 그제서야 어떻게된 일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오호라! 이제보니 이 인간들이 말싸움하다 끝이 않나니까, 나를 끌어들여? "뭐, 저야 라이레얼…… 양?" 뭐라고 부르지? 6살 연상인데 그냥 이름 부르기 그렇고. 난 여자한테는 친절하단 말이다!(예쁜 여자한테만.) "아앙, 히로오∼. 양이 뭐야? 그냥 라이레얼이라고 불러." 하하, 어떻게 그럴 수가…… 6살이나 연상인데. 난 다시 말했다. "라이레얼 누님은……." 라이레얼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누님이 뭐야!? 내 나이가 몇이라고 누님이야!?" 나보다 6살이나 많으면서……. 난 쫄아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누나?" 라이레얼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음…… 누나…… 누나…… 누나라? 괜찮은데. 좋아, 앞으로는 누나라고 불러. 다시 한번 불러봐." "누, 누나." "와아, 잘했어요. 한번만 더 해봐, 한번만 더." "누나." "까하하, 나보고 누나래! 아이, 귀여워." 라이레얼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내가 개냐? 자꾸 머리 쓰다듬게. 그런데 기분이 좋아지는건 왜 일까? 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저는…… 라이레얼 누나가……." "응. 계속 말해, 히로." 라이레얼은 반짝이는 레몬 빛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우수에 찬 표정과 귀여운 표정이 결합된 얼굴로. 젠장, 그런 표정으로 이쪽을 보면 어쩌자는 거냐? 자꾸 안아주고 싶어지 잖아! "아주." "아주?" "지랄 같다는 거겠지." "넌 좀 닥쳐! 호호, 얜 신경쓰지말고 계속말해, 히로." 아∼ 갑자기 말하기가 싫어진다. 원래부터 말하기 싫었지만. 지들 싸움에 왜 날 끼고 그러냐? 솔직히 말해야 하나? 어째 말하고 나면 라이레얼의 육 탄공세가…… 말하자! "아주 예쁘다고 생각해요. 성격도 활발하고." 그 순간 테커는 얼굴을 구겼고, 라이레얼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남잔데 어쩌겠수? 저런 예쁜 여자가 저런 귀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무조건 여자 편을 들어야지. 라이레얼은 기쁜지 양팔을 뻗어 나를 껴안았다. 테커는 맥주잔을 쾅 소리 가 나도록 탁자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흥분해 시뻘개진 얼굴로 외쳤 다. "예쁘긴 개뿔이 예뻐? 씨발, 넌 눈이 삐였냐? 아님, 예쁜 여자가 다 얼어 죽었냐? 그리고 활발이 뭐야 활발이!? 저런 지랄같은 여자가 활발하다는게 말이되?" "아앙, 역시 히로가 여자보는 눈이 있다니까. 아앙∼ 귀여워, 음 쪽쪽쪽." 라이레얼은 갑자기 내 뺨에 키스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난 그녀를 밀 쳐내고 싶었지만(싫었지만) 기뻐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 가 없었다(있어도 않했다). "뭐야? 오늘 밤은 그 꼬마냐?" 응? 이 목소리는……. 끼이익- 잠시 의자 끄는 소리가 나더니 큰 덩치를 가진 남자가 내 맞은편에 앉았 다. "라이레얼. 그런 꼬마가 무슨 힘을 쓰겠냐? 적어도 나 정도는 되야지. 그 런 꼬마는 놔두고, 오늘밤은 나랑 즐겨보는게 어때? 충분히 만족시켜줄테 니까." 이제보니 럴크였구만. 나한테 깨진 놈. 푸하하하. 라이레얼은 나를 안고있는 팔을 더 강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우리둘은 더욱 더 밀착하게 되고…… 미치겠다. 럴크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오호∼ 저 자식 혹시 라이레얼을 좋아하는거 아냐? 주제에 눈은 높아가지 고. "흥, 난 너같이 냄새나는 덩치보다는 여기, 이 귀엽게 생긴 히로가 훨씬 좋다고." 아니, 뭐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필요까지는…… 사실, 내가 저 넘보다 훨 씬 낫긴 하지 "뭐? 저런 비리비리한 꼬마놈이 나보다 낫다고?" 비리비리?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말을 막하네. "……." 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나 보다는 라이레얼이 한발 빨랐다. "그럼 이 비리비리한 히로한테 진 너는 뭐지? 졌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 어. 난 오늘밤 히로랑 같이 잘꺼니까." ……?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거지? 쾅-! 럴크는 인상을 쓰면서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그건 저 꼬마가 얍삽해서고. 그 상황에서 칼을 뽑아들줄 누가 알았겠 어!?" 씨발, 괜찮다고 말할때는 언제고, 지금와서 얍삽하다고 말하냐? "시끄러. 넌 진 주제에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그치 히로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누나. 라이레얼는 유혹하는 눈빛으로 나를 처다보았고, 난 그 눈빛을 피하기 위 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볼에 약간 이상한 느낌이……! 난 고개를 그대로 놔둔 채 눈동자만 움직여 곁눈질로 내 뺨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 보았다. 으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거냐? 라이레얼은 찌∼ 인하게 내 볼에 입술을 부비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 보는 럴크는 폭파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럴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이봐, 꼬마! 일어나! 다시 한판 붙어보자!" "싫어." "뭐야 피하는거냐!?" "응." 럴크는 붉으락 푸르락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난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피했다. 럴크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방법을 바꾸었다. 갑자 기 표정을 풀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흐흐, 그래? 그럼 이건 나의 부전승이군." 어쭈? 그렇게 나오시겠다? 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좋을데로." "……." 럴크는 당황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다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헛소리 말고, 당장 나와! 결판을 내잔 말이다, 결판을!" "싫다니까." 내가 미쳤냐? 너 같이 무식한 놈과 또 싸우게. "넌 히로가 싫다는데, 왜 자꾸 그래?" 다행히 싸우기 싫어하는 나의 마음을 라이레얼이 눈치 챘는지, 옆에서 나 를 거들어 주었다. 라이레얼이 내 편을 드는 모습을 본 럴크는 더욱 광분 했다. "이건 남자들의 싸움이야! 여자는 빠져!" "남자면 다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너 같은 놈이 야. 뭐든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골빈 놈들. 흥, 세상일은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다고." 맞는 말이군. 럴크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씩씩 거리며,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혔 다. "좋아. 그럼 주먹말고 다른걸로 결판을 내자." 아, 자식. 진짜 끈질기게 구네. 그냥 냅두면 끝까지 포기할 것 같지 않아, 난 어쩔 수 없이 물었다. "뭘로?" 허크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술." "술?" "그래. 술로 결판을 내자. 먼저 쓰러지는 쪽이 지는 걸로." 이런, 이 자식이 나 술 못마시는거 어떻게 알고……. 옆에서 테커가 한마디 했다. "야! 그게 말이되냐? 이 새끼들 중에서도 너보다 술 잘마시는 놈을 못봤 는데, 이런 꼬마랑 술내기를 하겠다니?" "넌 닥치고 있어. 어떻게 할거냐 꼬마?" 난 도와달라는 의미로 라이레얼을 보았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 아무말도 해주지 않았다. 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술 잘 못하는데." 럴크의 입이 양쪽으로 길게 찢어졌다. "크크크, 뭐야? 남자가 되가지고서는 술도 못마시는거냐? 킥, 이제보니 진 짜 어린애잖아." 어쭈? 이 자슥이 뭐? 어린애? 이 새끼가 사람 성질 완전히 버려 놓네. 으 아! 너 오늘 죽었어! 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탁 뱉었다. "좋아. 한번 마셔보자. 걸어온 싸움, 피할 이유는 없겠지." "킥킥. 좋아." 럴크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테커는 우리둘의 얼굴을 번걸아가며 보 다, 손을 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주인장! 여기 술 있는데로 다 가져와!" 이거 어째 완전히 걸려든 것 같다. 라이레얼도 한 마디 했다. "포도주도 한병 같이!" 저쪽을 보니 주인이 낑낑대며 술을 날라오고 있었다. 라이레얼이 물었다. "너 술 몇번이나 마셔봤어?" "한번밖에 마셔본 적 없는데요." "……." 잠시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고…… 럴크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한 번이래, 한 번. 푸하하." 저 새끼는 뭘 저렇게 좋아해? 니가 술값이라도 보태줬냐? 라이레얼이 또 물었다. "주량이 얼마나 되는데?" 내가 주량이 얼마나 되지? "글쎄요. 그 때 마셨던게……, 드래곤 하트라는 술 열병이었어요. 제일 독 한걸로 달라니까 주인이 그걸 주더라구요." "……." 또 다시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고…… 또 왜 이럴까? 라이레얼은 다급하게 물었다. "정말이야? 정말이야, 히로?" "예. 근데 뭐가요?" "정말 드래곤 하트를 10병이나 마셨어?" "예." 쾅- 럴크는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쓰파, 3번만 더 치면 탁자 박살나겠다. 작 작 좀 쳐라, 이 자식아. 무슨 힘자랑하러 여기 왔냐? "웃기는 소리하지마, 꼬마. 어디서 구라를 까고 있어?" 저 인간 대체 왜 저러냐? "내가 너한테 구라까서 뭐하겠냐?" 옆에서 라이레얼이 말했다. "드래곤 하트는 왠만한 남자들도 3병 이상은 못 마셔. 너 정말 10병이나 마셨어? 정말이야? 정말?" 오호,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는건…… 나의 주량이 남들의 3배 이상이라는 얘기!…… 푸하하하, 역시 나같이 잘난 남자는 못하는게 없구만. 싸움이면 싸움, 마법이면 마법, 담배면 담배, 이젠 술까지, 음하하하하. 그래, 누가 먼 저 쓰러지는지 어디 한번 맞짱 떠보자. 어느새 주인은 술을 날라왔고, 탁자 위에는 엄청난 양의 맥주가 올려졌다. "뭐야? 무슨일이야?" "이 꼬마가 럴크와 술내기를 한다는데." "뭐? 럴크랑?"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우리가 앉아있는 탁자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쓰러져도 침실까지는 무사히 갈 수 있 을꺼라는 안도감이 생겼다. 그게 내가 될지 럴크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 만……. 나와 럴크의 앞에 약 700cc정도 되는 맥주잔이 놓여지고…… 씨발, 이걸 원샷해야 하나? 나의 고민은 럴크가 맥주잔을 들고 원샷하는 모습을 본 순간,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저 자식이 하는데, 내가 못하겠냐아!? 난 터프한 동작으로 맥주잔을 잡은 다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다 때려 치고 나갈까, 생각하는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이레 얼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레얼은 와인잔에 포도주를 조금 따라 놓고, 홀짝 홀짝 마시고 있었다. 그래. 마시자. 라이레얼이 저런 눈으로 보는데, 어떻게 안 마실 수가 있겠 냐? 난 맥주잔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쫙 들이키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젠장, 쓰다. 그것도 졸라리 쓰다. 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 마시는거지? 지 금이라도 그만 둘까? "와아∼ 잘마시는데. 좋아, 이기는 사람은 오늘밤 나와 같이 자는거다." 푸우우-!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컵안에 뱉어냈다. 방금 들은 말을 정리하자면, 이 술내기의 상품으로 라이레얼이 걸리게 된다는……. "정말이야, 라이레얼?" "물론. 나 같이 예쁜 여자는 거짓말을 안한다고." 럴크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저 눈빛은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의 눈빛 이다. 죽음을 각오한 사신의 눈빛이다. 먹이를 노리는 늑대의 눈빛이다. 여 자에 미친 남자의 눈빛이다! 색욕이 넘쳐흐르는 야수의 눈빛이다! ……마 지막거 두개는 좀 그렇군. 씨발, 어쨌든 질 수 없다. 저런 짐승같은 놈한테 라이레얼을 넘겨줄 순 없어. 내 이 한몸 희생해서 라이레얼을 지키겠다. 덤 으로 라이레얼과 뜨거운 밤을 같이 보내도 좋고……, 흠흠, 나도 남자다. "이보아 꼬마. 이줴 그만 포기하쥐 그레에?" "너나 포기해, 짜샤."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안난다. 아무튼 탁자위에 놓인 맥주통에 내용물 은 반 이상 줄어있었다. 이미 럴크는 한계에 다달았다. 얼굴은 시뻘개졌고, 호흡도 이상하다. 혀도 꼬이기 시작했고, 몸도 맛이가기 시작했다. 녀석은 이미 끝났다. 하지 만…… 쓰러지지 않고 있다. 아직 눈빛이 살아있다. 무엇이 저자를 저렇게 버티게 하는가? 쓰바, 뻔할 뻔자지. 오직 라이레얼과 뜨거운 밤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일 념만으로 저렇게 버티고 있는거다. 에라, 이 자식아! 꿈깨라 꿈개. 넌 이미 끝났어. 럴크는 맛이 간 반면에, 내 상태는 상당히 양호했다. 몸이 약간 제어가 안 되기는 하지만, 대뇌의 기능만은 멀쩡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마시면 마실수 록 몸은 무거워지는 반면에 정신은 점점 더 맑아지고 있었다. 아마 특이체 질인가 보다. 아무튼 이 상태라면 계속 마실 수는 있겠지만,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술에 있다. 대체 언제까지 내가 이 역겨운 노란 액체를 목구멍을 넘겨야 하는건가? 남들은 술이 맛있다고들 하지만, 나한테는 쓰디 쓴 액체일 뿐이다. 남들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난 이상하게 기분이 드러워지고 있었다(이것도 특이 체질이다). 그러니까 제발 좀 쓰러져라. 쓰러져! 쓰러 져! 쓰러져! 콰당-! 럴크가 쓰러지는 소리다. 나의 응원에 힘입었는지, 드디어 럴크가 다운된 것이다. 럴크는 술잔을 꼭 움켜쥔 채 바닦에 누워있었다. 불쌍한 자식. 하필이면 나같은 상대를 만나가지고……. 이건 이거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거겠지? 우헤헤헤, 이겼다. 이겼어. 내가 이겼다아∼ 우헤헤헤헤! "내가 이긴 것 같군. 다음부턴 상대를 봐가면서 덤비도록." 안주나 집어먹으면서 구경하고 있던, 테커가 몇 마디 했다. "너 표정과 대사가 전혀 매치가 안된다는거 알지? 그렇게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그런 폼나는 대사를 해봐야 소용없어." 넌 안주나 처먹어라. "히로가 이겼네. 아앙∼ 그렇게 나랑 자고 싶었어?" 라이레얼은 나를 껴안았다. 라이레얼은 우리가 술내기를 하는 동안, 포도 주 한병을 아작 낸 상태였다. 입에서는 향기로운 포도 냄새가 폴폴 풍겨오 고, 술기운 때문인지 양쪽 뺨은 잘 익은 사과 처럼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 다. 눈동자는 살짝 풀어져있고 촉촉하게 젖어있다. 라이레얼의 레몬빛 눈동 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날 가져.' 이제야 술취했다는게 좀 실감나는군. "그럼 오늘 같이자는거다. 알았지, 히로?" 너무 취해서 헛소리까지 들리는구나. 정신은 끝내주게 멀쩡하지만, 몸은 완전히 맛이갔다. 손가락하나 움직이기 싫다. 난 안 움직이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졸려요." "졸려? 그럼 그냥 이대로 자. 이 누나 품에 기대서. 아이∼ 귀여워." 난 눈을 감았다. "이거 럴크가 먼저 쓰러졌는데……, 그럼 이 꼬마가 이긴 셈이되는거니까, 야 이거 어떻게 되는거야?" "야, 꼬마한테 돈 건 놈 누구야?" "나야, 나! 으하하하, 나라고 나." "뭐야? 카웨 너야? 야, 이 자식 하나 뿐이야? 그럼 배당이 얼마야? 야 피 라렌, 너 얼마 걸었어?" "나? 나 럴크한테 10골드." "쓰바, 내 돈! 내 도오오온∼." 이 미친 새끼들이! 남 술마시는데 누가 먼저 쓰러지는데 돈을 걸어? 그리 고 나한테는 한 놈 밖에 안 걸어? 이 개새끼들. 주위에서 떠들에 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간혹가다 라이레얼의 목 소리도 들려왔다. 뭐라고 떠들어데는거지? "으∼ 아∼." 난 머리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 앞에 보이는 세계는 빙글 빙글 돌아가고, 눈을 몇번 감았다 뜨자, 조금씩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다. "벌써 일어난거야?" 응? 이 목소리는 설마…… "자, 물." "라레이얼?" "응. 자 빨리마셔. 힘들면 이 누나가 먹여줄까?" "됐어요." 난 라레이얼의 손에서 물컵을 받아들었다. 차가운 물이 입안으로 넘어 들 어오자,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난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 났다. 라이레얼의 모습이 확실히 눈에 들어온다. 라이레얼의 옷이 아까와 틀리다. 활동하기 편해보이는 바지에 위에는 흰 블라우스 대신, 쫙 달라붙 은 쫄나시…… 하아, 가슴 굴곡이 다 보여. 라이레얼 가슴 큰 건 아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쫄나시를 입은 모 습을 보니, 정말 환상적이었다. 너무 환상적이여서 눈에 감동의 눈물이 고 이기 시작했다. 내가 아까 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었지…… 진짜 행복했 어. 완전히 어깨까지 들어난 흰 팔은, 가느다랗지만 상당한 근육이 붙어있었 다. 여자 팔에 근육이라면 안 어울릴 수도 있겠지만, 라이레얼은 매우 잘 어울렸다. 건강미가 넘친다고나 할까?(같은 근육이 붙었어도 못생긴 여자 면, 못생긴 주제에 근육만 길렀다고 하고, 라이레얼 같이 예쁘게 생긴 여자 면, 건강미가 있다고 표현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적보다는 내적인 아름 다움이 중요한데……) 주특기가 활질이라고 하더니만, 팔 근육을 많이 기 른 모양이었다. 방 크기가 작고 침대가 하나인걸로 봐서 라이레얼 혼자서 쓰는 1인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는 내 배낭, 지팡이, 청룡도, 망토가 대충 놓 여져(완전히 처박혀) 있었다. "지금 몇시에요?" 라레이얼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글쎄, 한 12시 쯤 됐을걸. 여긴 내방." 난 창밖을 보았다. 밖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있어 불이 켜진 이 방과 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라레이얼의 방이라고? 여자방치곤 꽤나 지저분하군. "제가 왜 여깄는거죠?" "기억안나? 럴크랑 술마시다 럴크를 눕히고, 그 다음에 너도 뻗었잖아. 아 까 술마시는 거 보니까 제법이던데…… 난 술 잘마시는 남자가 좋더라 ……. 어쨌든 뻗어있는 너를 이 방까지 내가 데리고 올라 왔으니까 고맙게 생각해." 흘…… 귀여운 남자도 좋고, 강한 남자도 좋고, 순진한 남자도 좋고, 술 잘마시는 남자도 좋고…… 남자라면 다 좋다는 얘긴가? 아니면 내가 좋다 는 얘긴가? "고마워요." 난 한쪽에 처박혀 있는 내 짐들을 집어들었다. "뭐해?" "나가려구요." 난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라이레얼이 껴안았다. 앗! 등에 가슴 감촉이……. 라이레얼은 내 귓가에 대고 애교부리듯 말했다. "아앙∼ 가면 싫어어∼. 오늘밤 나랑같이 자기로 했잖아∼." 제가 언제요? 혼자서 정해놓구서는. "저, 저기 전……." 왜 목소리가 떨리는 거지? 술이 덜 깼나? 제발, 귀에 숨결 좀 불어 넣지 마세요. "여기 방 다 찼어. 지금 이 시간에 다른 여관으로 갈수도 없겠고…… 그 냥 이 방에서 자." 하하……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남녀칠세부동석인데 어찌 남녀가 한 방에서 잠을 잘 수가…… 길 바닥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 수는 없어 요. "예. 그럴께요." 이런, 입이 제멋데로……. 아니야, 방이 다 찼다는데, 어쩌겠어? 이 시간에 다른 여관을 찾아 볼수도 없고. 이런 경우는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이야. 그 래, 이 상황에선 이게 최선의 선택이야. 그럼 그럼. "와아! 정말? 그럼 여기서 같이 자는 거다. 알았지? 뭐? 같이 자? 한문으로 바꾸면…… 동침(同寢)? "예." 이런, 또 입이……. 라에레얼은 내 손에서 짐을 빼앗아 다시 구석에 던졌다. 그리고는 내 손 을 잡고 억지로 침대로 끌고가, 침대에 내던졌다??? "무, 무슨 짓이에요?" 라이레얼은 위에서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라이레얼은 당연하는 투로 말했다. "자야지. 잠 안잘꺼야?" "여기서 같이…… 요?" "응." 현재 우리의 상태는 내가 위를 보고 누워있고, 그 위를 라이레얼이 덮치 는 포즈……. 잘못하면 당한다! "저, 저기…… 아무리 그래도……." "뭐, 어때? 침대가 좀 좁긴 하지만 우리둘이 같이 자는덴 별로 지장 없잖 아." "지, 지금 그런걸 말하는게 아니잖아요!" "그럼 뭘 말한건데?" 안되겠어. 이대로 가면 이 여자의 패턴에 말려들어 순결(?)을 빼앗긴다. 난 팔을 뻗어 억지로 라이레얼을 밀쳐냈다. 그리고 침대에서 벌떡일났다. 난 일부러 단호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 "어쨌든 한 침대에서는 못자요. 전 바닥에서 잘께요." 라이레얼은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쳇, 남자가 되가지고 서는……. 알았어. 이 누나가 베게랑 이불 가지고 오면 되는거지?" "괜찮아요." "바닥이 차가운데 어떻게 자려고 그래? 내가 주인한테 말해서 얻어올테니 까, 여기서 꼼짝말고 기다리고 있어." "저기 정말 괜찮은데……." 망토 하나만 걸치고 자면 하나도 안 추워요. 이 망토는 푹신하고 따뜻하 고……. 하지만 라이레얼은 밖으로 나간지 이미 오래다. 난 방 한구석에 널부러져 있는 짐들을 정리하고 망토를 잘 게어 놓았다. 흠, 난방까지 되는 망톤데 오늘은 쓸모가 없겠군. 그녀와 나의 뜨거운 열기로 오늘밤을 불태울……. 콰당-! 이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옆방에서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호기심에 귀를 벽에 바싹 붙이고 소리를 듣기 위해 집중했다. "으악! 뭐하는거야?" "시끄러!" 이 목소리는…… 라이레얼? "야! 그걸 왜 가져가?" "필요해서 그래." "난 어떻게 자라고!?" "그냥 알아서 자. 이불 없다고 잠 못자냐?" "난 못자." "그럼 자지마." "안돼. 제발 가지마. 제발 베게랑 이불은, 아니 이불만이라도 두고 가." "이거 안놔?" "못놔." 퍽- "끄어억." 얕은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린 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 부위를 맞았는지 대충 알만하군. 저벅저벅- 앗! 발소리다. 난 잽싸게 벽에서 떨어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라이레얼이 들어왔다. 라이레얼은 손에 든 물건을 들어보이며, 깜찍하게 말했다. "짠! 이 누나가 베게랑 이불 얻어왔어." 얻어와? 뺏어 온거 아니였나? "주인한테 말하니까 바로 주더라." 옆방에서 자는 사람이 주인인가? 라이레얼은 이불을 몇번 털더니, 침대 바로 옆에 깔기 시작했다. "자, 다 됐다. 여기서 자, 히로." "예. 고마워요." 라이레얼은 살짝 웃으며 물었다. "정말 고마워?" "예." 그런데 저 미소가 불안해 보이는건 왜 일까? 라이레얼은 잠시 미소를 짓고 있다가, 한쪽 어깨를 살짝 올리며 눈웃음까 지 쳤다. "그럼 키스해줘." "하하, 뭐 키스 정도라면…… 예!?" 저 여자가 방금 키스해달라고…… 설마…… 잘못들은거겠지?…… 그래. 잘못들은거야…… 요새 귀가 나빠져서 큰일이라니까…… 보청기라도 하나 사서 낄까? "응. 키스해줘." 이거 아무래도 내 귀는 정상인 것 같은데…… 그럼 저 여자 입이 잘못된 건가? 라이레얼은 얼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 못하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는 두팔로 내 목을 감싸안았다. "키스해줘." 안돼. 어떻게 오늘 처음 만난 여자와 키스를…… 저번에 세나랑 그랬었 지…… 맞아. 만난 기간이 중요한게 아니야. 서로의 마음이 얼마나 잘 맞느 냐가 중요한거야! 어차피 라나랑 세레나랑도 해봤는데, 한 명 더 해본다고 안될건 없지.…… 게다가 이 여자는 하프엘프…… 내 평생 언제 또 하프엘 프를 만나보겠냐?…… 드디어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는 여자를 만났는 데…… 그래.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아.……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 뭐, 어차피 키스 정도야 미국 에서는 인사에 불과하니…… 그래. 그냥 인사 한번 한다고 생각하자. 난 결심을 하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댔다. 라이레얼은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반짝이는 레몬빛 눈동자 로 그저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의 입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점점 가까워가고, 그녀의 뾰족한 귀가 파르르 떨리고…… 그리고…… 그녀의 입 술이 느껴졌다. 1초, 2초, 3초…… 정확히 3초가 지난 후, 난 입술을 땠다. 그 때까지도 라이레얼은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얼굴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기……." 라이레얼은 방금 전까지 내 입술에 닿아있던 입술을 열어 따지듯이 말했 다. "뭐야 이게? 이게 무슨 키스야?" 뭔소리 하는거야? 그럼 이게 키스가 아니면 뽀뽀냐? "예? 읍." 갑자기 라이레얼의 입술이 부딪혀왔다. 라이레얼의 혀가 능숙한 솜씨로 입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혀와 서로 엉키기 시작했다. 입안에 향긋한 포도 내음이 퍼지고, 그녀의 혀는 내 입안 곳곳을 탐닉했다. 끝내준다. 이런걸 보고 딥키스(Deep Kiss)라고 하는건가? 내 평생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난 라이레얼에 혀가 이끄는데로 가만히 있었다.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 고 있었다. 아마 라이레얼도 내 심장박동수가 두배 이상 빨라졌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라이레얼은 입술을 뗐다. 난 천천히 눈을 떴다. 라이레얼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레얼은 생긋 웃으 며, 한쪽 눈을 감았다. "이정도는 되야지, 키스라고 할 수 있지∼. 안그래 히로?" "……." 물론입니다. 누님. 난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얼굴 빨개졌네." "술기운 때문에……." "그으래? 아닌 것 같은데…… 누나가 한 번 더 해줄까?" 라이레얼은 그렇게 말하며 양팔로 내 목을 감았다. 난 살짝 라이레얼을 밀친 뒤, 바닥에 깔아 놓은 이불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누웠다. "뭐해?" 난 일부러 반대쪽을 보면서 대답했다. "자야죠." "벌써?" "12시 넘었잖아요.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많이 자둬야죠." 라이레얼은 나를 넘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침대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서 내가 누워서 라이레얼을 올려다보고, 라이레얼은 나를 내 려다 보는 상황이되었다. 라이레얼은 예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뜨거운 밤을 불사르는게 어때?" 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게 좋을까? 난 고개를 옆으로 획 돌렸다. "혼자서 불살라요." "아∼ 잉 나 혼자서 어떻게∼?" 앗! 침 튀겼다. 라이레얼이 아래를 보며 말하다보니, 입을 벌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내 얼 굴로 침이 튀겼다. 난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내며 말했다. "저 피곤해요. 그냥 잘래요." 그리고 바로 눈을 감았다. 라이레얼은 뭐라고 궁시렁 거리더니, 일어나 램 프의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주위가 깜깜해지자, 그제서야 여자와 한방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라이레얼은 침대에서 계속 부시럭거리고 있었다. 난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라이레얼의 목 소리가 들렸다. "너 아까 마법썼지?" 뜨끔-! 어떻게 알았지? 이미 다 알고있다는 말투였기에, 난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부시럭, 부시럭-! 몸을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라이레얼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냥. 감으로.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 팔에 근육도 없으면서, 럴크의 주먹을 쳐낸 것도 그렇고……. 반쪽 뿐이만, 이 누나는 마법 종족이라 불리 는 엘프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비록 마법을 쓰진 못해도, 느낌으로 알 수 있어." "……." 음, 그렇군. 여자의 직감……. "걱정하지마. 니가 마법사라는거 아무한테도 말 안할테니까. 마법사라는 걸 숨길 정도면, 너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고마워요." 잠시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이레얼이 뒤척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라이레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잠든 것 같지는 않았 다. ……어색하군. 난 이 어색함을 타게하기 위해, 이번에는 내가 라이레얼에게 질문을 던지 기로 했다. "하프엘프의 특징은 뭔가요?" "뭐?" 질문이 조금 이상했나? 난 질문을 조금 수정했다. "하프엘프와 인간의 다른 점은 뭔가요?" "음∼ 글쎄. 별로 다른 점은 없어. 그냥 귀뾰족한 인간이라고나 할까…… 수명도 인간과 거의 비슷하고 말이야. 그냥 엘프의 외모에 인간의 수명을 가졌다고 생각하면되. 인간과 다른 점이라고는 귀뾰족하다는 거하고, 미의 종족이라고도 불리는 엘프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인간들보다 훠∼ 얼∼씬 예쁘다는 것 밖에 없으니까. 뭐, 나야 원래부터 예쁘지만. 아이∼ 내가 말하고도 조금 부끄럽네. 하지만 뭐, 사실인데 어쩌겠어." 또 시작이다. 혹시 라이레얼은 공주병이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니 공 주병은 아닌 것 같다. 왕비암 말기 정도? 이대로 가면 라이레얼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를 계속 듣게 될 것 같아서, 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느 쪽이에요?" "응?" "엄마와 아빠?" "음, 아∼. 아빠야." 주어를 생략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레얼은 내 질문에 정확히 답해주었다. "난 아빠가 훨씬 좋아." "……?" "보통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하고 물으면 여자는 대부분 아빠를 선택 한다고. 근데 그건 왜 물어?" "……." 쓰파, 질문의 요지를 완전히 비껴가는군. 진짜 너무한다. "그게 아니라, 아빠와 엄마 중 어느 쪽이 엘프냐구요?" "뭐? 아아∼ 그거. 그럼 진작에 그렇게 물었어야지. 아빠야." 다시 이야기꺼리가 떨어졌다. 난 몸을 뒤척이며,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았지 만, 아까 실컷 자서 잠이 오지 않았다. 라이레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빠 진짜 멋있다. 이 레몬 빛 머리카락과 눈동자도 아빠한테 물려 받은거야. 아빠는 원래 잊혀진 숲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곳 생활이 너무 따 분해서 밖으로 여행 나왔데. 어느 날, 산을 넘는데……." 라이레얼의 얘기는 대충 이러했다. 한 남자가 산길을 걷고 있었다. 남자는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느린 동 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레몬빛 눈동자의 레몬빛 머리카락을 가진 엄청난 미남, 길고 뾰족한 귀. 그렇다. 그는 엘프였다. 엘프는 해가 지기 전까지 산을 넘을 생각으로 발 걸음을 재촉했다. 그 때……. "끼아악, 살려주세요∼." 어디선가, 위험하니 도와달라는 전형적인 멘트가 산속에 울려 퍼지고, 엘 프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약 3분 정도 열심히 뛰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10살짜리 소녀와, 그 소녀를 잡아먹을 듯이(진짜 잡아먹을 듯 이) 노려보는 오우거의 모습이 보였다. 엘프는 당장 뛰어들어 소녀를 구하 고 싶었으니, 거리상으로 보서 오우거가 소녀를 공격하는게 먼저였다. 엘프 는 재빨리 화살을 꺼내 줄에 걸었고,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오우거의 눈을 꿰뚫었다. 엘프는 기왕 활 끄낸 김에 뽕을 뽑자는 심정으로, 계속 화살을 쐈고, 그 화살들은 어김없이 오우거의 급소에 박혔다. 이미 화살만으로 게 임은 끝났지만, 엘프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레이피어를 빼들고 다가가 오우거의 목을 자른다(일명 확인사살이라고도 한다). 소녀는 죽음에 순간에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보게 되고, 그게 사람이 아 니라 엘프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도 엄청 잘생긴. 흡사 백마탄 왕자와도 같은…….(한 마디로 모든 여자의 이상형) 이 때, 소녀는 엘프에게서 운명 적인 사랑을 예감한다. ♬빠바바밤♬빠바바밤♬빠바∼ (베토벤의 운명) 엘프는 다정한 목소리로 소녀에게 사정을 묻고, 그제서야 자기 처지가 생 각난 소녀는 펑펑 울며 말한다. "흐윽, 흑, 흐윽…… 우리 아빠…… 흐윽…… 아빠…… 하러…… 흐윽…… 안 돌아와…… 그래서…… 내가…… 흐윽…… 우에에에엥∼." 엘프는 깜짝 놀라 우는 소녀를 달랜다. 엘프는 엄청나게 좋은 머리를 회 전시켜, 소녀의 말을 조합해보고,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좋은 머 리와 잘생긴 외모는 엘프의 필요 충분 조건이다. 엘프도 아무나 하는게 아 니다.) 그 쯤해서 난 물었다. "그 소녀가 엄마였나보죠?" "응." 라이레얼의 얘기는 계속됐다. 소녀는 일찍히 어머니를 여희고 아버지와 단둘이서 이 산속에 살고 있었 다. 이 위험한 산에 사는 이유는 사냥감이 풍부해서다. 많지는 않지만 간간 히 나타나는 몬스터들 때문에, 사냥꾼들이 왠만하면, 이곳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며칠 전, 소녀의 아버지가 사냥하러 나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된(걱정되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서) 소녀는 아버지를 찾기위해 집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조금 깊 숙히 들어가자, 길을 잃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오우거를 만났다. 이 때 자신이 '짠!' 하고 나타나 소녀를 구해준 것이다. 엘프는 소녀에게 아버지를 꼭 찾아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약속한지 1시간도 안돼, 소녀의 아버지를 찾아온다. 반 쯤 파먹힌 시체를……. 소녀는 시체 앞에서 펑펑울고, 엘프는 소녀를 달래주며, 장례를 치뤄준다. 장례를 치르는 도중 소녀는 모종의 결심을 하는데……. '아버지마저 죽었으니, 이젠 나 혼자야. 나 혼자서 이 험난한 세상을 살 순 없어. 그래, 저 엘프를 잡자. 생긴 것도 잘생겼고,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딱 내 이상형이야! 이제부턴 저 엘프한테 엥겨붙어 같이 살아야겠다. 그리 고 결혼해서 아들 하나에 딸 하나 낳고 잘 먹고 잘 사는 거야!' 엘프는 소녀의 이러한 생각을 모르고 소녀를 위로해주기에 급급하다. 결 국 장례는 끝이나고, 떠나려 할 때에……. 라이레얼의 아빠 :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갈길이 바빠서 이만. 라이레얼의 엄마 : 흑흑, 어디 가세요? 라이레얼의 아빠 : 저야 여행중이니, 이제 다른 곳으로……. 라이레얼의 엄마 :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흑흑, 이 험한 산속에서 연약 한 소녀 혼자 어찌 살라고……. 라이레얼의 아빠 : (떼어 내려고 애를 쓰며) 이것 좀 놓으십시오. 전 가야 합니다. 라이레얼의 엄마 : (더욱 꽉 움켜 잡으며) 흑흑, 못놔요. 살려놨으면, 책임 도 지셔야죠. 라이레얼의 아빠 :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애쓰며) 어, 어떻게 책임을 지 라는 겁니까? 라이레얼의 엄마 : (철거머리 처럼 달라 붙으며) 저 데리고 사세요. 라이레얼의 아빠 : 예!? 라이레얼의 엄마 :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무조건 엥겨 붙는다) 이리하여, 열살짜리 소녀에게 발목을 잡힌 엘프는 여행을 포기하고, 소녀 의 집에 눌러 앉게된다. 남녀가 한 집에 사니, 그 다음부터는 안봐도 비디 오다. 엘프가 소녀를 키워서 따 먹었는지(?), 소녀가 엘프를 덮쳤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들은 종족(여자:인간, 남자:엘프), 나이(여자:10 살, 남자:약 300살로 추정), 국가(여자:?, 남자:?, 어쨌든 다르다)를 뛰어 넘 는 사랑을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무르익었을 때쯤, 그 둘은 서로의 사랑 을 불사른다. 침대 위에서……. 그 증거로 라이레얼이 지금 내 눈앞에 있 다. 처녀가 애 낳는거 봤냐? 라이레얼은 말을 멈추었다. 난 숨을 죽인 채 라이레얼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라이레얼의 목소리는 점점 감상적으로 변했다. 과거의 일을 회상 하다보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나보다. "아빠는 나한테 글도 가르쳐 주고, 활질과 칼질하는 법도 가르쳐줬어. 마 법도 가르쳐주긴 했는데, 도저히 못배우겠더라고. 내가 15살 때, 엄마가 죽 었어. 엄마는 몸이 약했거든. 엄마가 죽고 나자 아빠는 약간 이상해졌어. 하는 짓은 평소 그대로 였는데, 왠지 맛이 간 것 같더라고. 그 후, 아빠는 역시 인간세상에는 나오는게 아니였다고 하더니, 잊혀진 숲으로 돌아갔어." 난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돌아가요? 라이레얼 혼자 놔두고요?" "응. 그때는 어쩔 수 없었거든. 아빠는 슬픔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였고, 나도 그런 아빠보는게 힘들었고…… 그래서 내가 그냥 가라고 했어. 그 후 에……." 라이레얼은 산을 내려왔고, 그 동안에 익힌 기술을 써먹으려고 용병이 되 었다. 라이레얼은 어렸을 때 부터 엘프아빠한테 현란한 칼질과 백발백중의 활질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용병계에서 이름을 떨친다.(나는 여기서 조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라이레얼의 아름다운 외모와 활발(하다못해 조금은 지랄같은)한 성격도 한목했다. 아무튼 라이레 얼은 용병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남자를 사귀었고, 또 헤어졌다.(원래 만 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여기서 헤어졌다는 건, 사귀던 남 자가 죽었거나, 라이레얼이 찼거나, 둘중 하나다. 어떤 남자가 미쳤다고 라 이레얼을 차겠는가? 성격에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문제가 있긴하지만 외모만은 A급에 속하는데) 걔중에는 라이레얼을 잊지 못해 술로 하루를 지내며 취했다하면 미친 듯이 라이레얼의 이름을 부르며 목놓아 우는 놈들 이 있었다. 이들의 망가진 모습을 본 다른 용병들은 라이레얼을 두려워해 이런 별명을 붙였다. <남자 사냥꾼> 용병들 사이에서는 '라이레얼과 사귀는 것은 인생 망가지는 지름길' 이라 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지만, 많은 용병들은 라이레얼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원했다.(나도 망가지고 싶다) 아무튼 라이레얼의 뒷부분 얘 기를 축약하자면은 '자신은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찝쩍대는 용병들이 많 아 용병생활하기가 너무 피곤하다'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결 론은 '어쨌든 오늘밤 너는 나와 함께 불 살라야 한다.-뭘 불 사른 걸까?-' 로 끝을 맺었다.(참 미성년자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는 라이레얼이다.) 난 단호하게 답했다. "싫어요." "아앙∼, 왜? 이 누나가 잘 해줄께." 뭘 잘해줘요? 뭘? "하자." "싫어요." "하자." "절대 싫어요." "왜 싫어?" "그러는 라이레얼은 왜 저랑 하려고 해요?" "그야 니가 좋으니까." 날 좋아한데……. 진심일까? 라이레얼 말은 믿기가 힘들어서……. "왜 좋아하는데요?" "그걸 몰라서 물어. 내 주위의 남자들을 봐. 전부 덩치 크고 골빈 놈들 아 냐. 나도 때로는 좀 약하게 생긴 남자를 원한다고." 저 말은 내가 약하다는 얘긴가? 이래보여도 클래스 5 마스턴데. "어쨌든 하기 싫어요." "왜 싫어?" "싫으니까 싫어요." "그럼 지금부터 싫은걸 좋은 걸로 바꿔." "싫은걸 좋은 걸로 바꾸기도 싫어요." "그럼 싫은걸 좋은 걸로 바꾸기 싫은걸 좋은걸로 바꿔." "싫은걸 좋은 걸로 바꾸기 싫은걸 좋은걸로 바꾸기도 싫어요." "그럼 싫은걸 좋은 걸로 바꾸기 싫은걸 좋은걸로 바꾸기도 싫은걸 좋은걸 로 바꿔." 이렇게 라이레얼과 나의 입씨름은 계속 되었다. 나중에 문장이 너무 길어 지자 숨이 차서 몇번이고 쉬어 말해야만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난 지 쳐서 헉헉 거리며 숨을 몰아쉬었고, 그건 라이레얼도 마찬가지였다. 라이레 얼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좋아. 마지막으로 묻겠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잘 선택해. 히로, 정말로 나랑 할 생각 없어?" 없을리가 있겠습니까? 아∼ 하고 싶다. 이대로 저 침대 위로 뛰어 올라, 라이레얼을 안고 싶다. 하지만…… 난 아직 미성년자니까 순결을 지켜야 되! 절대 여기서 순결을 잃을 수는 없어!! 좋았어, 인간 박영웅. 부동(不動) 의 마음(心)으로 참을 수 있다 이거야!!! 난 대답을 하지 않고 일부러 규칙적인 숨소리를 냈다. 자는 척 한 것이다. "히로. 빨리 대답해." "……." "히로." "……." "히로, 자?" "……." "히로. 히로." "……." "우웅, 자나보네. 재미없어." 라이레얼은 아깝다는듯이 몇 마디 더 궁시렁거리다가 꿈나라로 여행을 떠 났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들리는 숨소리가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쌔 근쌔근 거리는 귀여운 숨소리. 난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으응? 이게 무슨 느낌이지? 뭐야? 왜 이렇게 따뜻해? 누가 난로라도 가져 나 놨나? 오옷! 난로가 숨을 쉰다. 그것도 내 귀에 숨결을 불어 넣으며 ……. 표면감촉은 마치 여자 피부와도 같이 부드럽군. 판타지 세계다보니 이상 한 물건이 많네. 여자 피부를 가진, 숨쉬는 난로라……? 앗! 이 감촉은 여자 가슴…… 크기는 약 90정도…… 라이레얼과 같네. 라 이레얼…… 라이레얼…… 라이레얼……. "라이레얼?" "으응, 히로, 깨어났어? 후우∼." 라이레얼은 내 귓가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아니, 이게 무슨……. "저기, 라이레얼?" "으흥, 왜?" "지금 뭐하시는거에요?" "뭘하긴, 우리 히로 즐겁게 해주려고 그러지." 라이레얼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내 그곳(?)을 만졌다. 뭐? 어딜 만 져? "뭐하는 짓이에요!?" 난 억지로 라이레얼을 밀쳐냈다. "히로, 왜 그래?" "……." 난 눈 앞의 광경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부시게 새하얀 가슴. 칠 흙과도 같은 어둠을 뚫고 들어온 달빛이 그녀에 반라의 몸을 비추었다. 사 진이나 동영상이 아닌 3D입체 영상.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물로 보는 여자 의 가슴.(사진이나 동영상으로는 질리도록 봤다) "하아, 히로∼." 라이레얼이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가슴이 흔들린다. 만지고 싶다. 만지고 싶다. 만지고 싶다. 만지고 싶다………… 안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 는거야?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하자. 쓰바, 이러니까 더 진정이 안된다. 난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꼭 감고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 다. "히로." 라이레얼은 내 어깨를 잡고, 바닦에 눌렀다. 그리고 덮치듯이 내 배 위로 올라왔다. 반라의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난 그녀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왜, 왜 이러시는거에요?" 라이레얼은 내 말을 한귀로 흘리고, 내 뺨을 핱기 시작했다. 기분 좋 다…… 이게 아니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흐응∼." 라이레얼은 이제 귓볼을 핱고 있었다. 정신차리자. 정신차리자. 정신차리자, 박영웅. 까딱 방심하다가는 순결(?) 을 빼았긴다. "순진한 얘 데리고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아앙∼ 처음도 아니면서 왜그래?" 처음이 아니라니? 뭐가 처음이 아니야? 이 여자가 사람을 어떻게보고? "무슨 소리에요? 전 이제까지 여자라고는 모르고 살아왔다구요." 라나, 세레나만 빼구요. 라이레얼은 깜작 놀라, 잠시 애무(?)하는 동작을 멈추었다. "정말이야? 정말이야, 히로? 정말로 여자랑 한번도 자본적이 없어?" 그럼 미성년자인 내가 여자랑 자봤겠습니까? "예. 그러니까……." "아앙∼ 그랬구나. 난 또 경험이 있는 줄 알았지이∼." 어째 라이레얼의 입다에 미소가 번지는 것 같다. 나같은 순결한 얘를 먹 게(?) 됐다는사실에 기뻐하는거 같은……. 라이레얼은 나를 찐하게 끌어안았다. "걱정하지마, 히로. 이 누나가 다 알아서 해줄께." 으아! 미치겠다! 뭘 알아서 하겠다는거야!? "뭘 알아서해요?" "히로는 그냥, 이 누나가 이끄는데로 가만히 있으면되." 가만있으면 먹힐텐데(?)……. 난 순결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제발 이러지마세요. 전 순결을 중요시하는 건전한 청년이에요." "그래? 여기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은데?" 흐읍, 자꾸 어딜 만져? "저기…… 그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물건이라서……." 라이레얼은 내 귀에다대고 속삭였다 "안심하고 이 누나한테 모든걸 맞겨." "그게 불안하다 이거에요." 자꾸만 느껴지는 라이레얼의 체취 때문에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고 있었 다. 나는 끝내주게 생긴 여자의 육탄공세를 견뎌낼 만큼, 수양이 깊지 못하 단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영상 보는 시간에 정신수양이나 해둘걸. 정신을 집중하자. 마음을 가다듬자. "아앙∼ 히로오∼." 굳이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는거야 말로 인간의 본능인데……. 그녀의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라이레얼은 천천히 내 입술을 핱았다. 라이레얼이 늑대로 변했다. 그리고 나를 덮쳤다. 난…… 당했다. "으흥∼." 뭐지? 이 부드러운 느낌은? "흐음∼, 히로∼." 따뜻한 숨결이 내 뺨을 스친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일?…… 무슨 일…… 라이레 얼!!! 난 눈을 번쩍떴다. 라이레얼의 두팔이 내 목을 감고 있었다. 라이레얼의 머리가 내 머리 바 로 옆에 놓여져 있었다. 라이레얼의 다리가 뱀 처럼 내 몸을 휘감고 있었 다. 그리고…… 둘 다 옷을 벗고 있었다. 대체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 하∼ 암∼. 뭐야, 벌써 일어난거야?" 라이레얼은 크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라이레얼의 얼굴을 보니 어 젯밤의 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난…… 따먹혔어(?). 하룻밤 사이에 나의 순결이……. 갑자기 엄청나게 서러워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 다. "응? 우는거야? 우는거야 히로?" "흑흑." "아앙∼ 왜 울어, 히로?" 라이레얼은 내 머리를 자기 쪽으로 돌려 눈물을 닦아주었다. 라이레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니 서러워지다 못해 비참해졌다. 으어헝, 저렇게 예쁜 얼굴을 한 여자가…… 나 같은 순결한 청년을 방안 으로 끌어들여 잡아 먹다니……흑흑, 내 순결은 어떻게 하라고…… 난 미 성년자란 말이다!!! "어젯밤에 그렇게 좋았어? 눈물을 흘릴 정도로?" "……한 소년의 순결을 무참히 짓밟아 놓고…… 흑흑,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요?" "뭐 어때? 너도 즐길만큼 즐겼잖아." "뭘 즐겨요!?" "그럼 즐기도 않았으면서, 일곱번이나 했단 말이야?" "……!!!???" 일곱번? 일곱번……? 내가 일곱번이나 했단 말인가? 어떻게 하룻밤에 사 이에 일곱번을……?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그래서 아까부터 다리가 후들거리던 것 이었나? 라이레얼은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말했다. "굉장했어, 히로. 내가 먼저 지치기는 처음이야. 아∼ 어젯밤 생각만 하면, 아직까지도 황홀해." "전 죽고 싶어요." 눈물은 이미 멈춘지 오래였다. 난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 자국을 쓱쓱 닦 아 지웠다. "아잉∼ 정말 최고야, 히로. 어때? 이 누나랑 사궈볼 생각은 없어? 누나가 잘 해줄게." "……." 내가 '그냥 죽여주세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문 두드리는…… 아니, 문 뽀개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 상당히 격렬하게 두드리는군. 원래 무식한 놈들이 문을 세게 두드리지 법 이지. 쾅쾅-! "라이레얼! 라이레얼! 아직도 안 일어났어!?" 이 목소리는…… 테커 잖아. 쾅쾅-! "빨리 나와, 이년아! 다른 놈들은 전부 다 나가고 없다고." 쾅쾅-! 작작 두드려라. 문 뽀개지겠다. 쾅쾅쾅-! "라이레얼!" "나갈테니까, 닥치고 좀 있어!" 라이레얼은 신경질이 나는지 소리를 빽 질렀다. 라이레얼의 목소리에 쫄 았는지 문 밖에서는 더 이상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라이레얼은 당당하게 시트를 걷고 일어 났다. 그 바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라이레얼의 알몸이 내 앞에 드러났다. 오오! 죽이는 몸매! 끝내주는 몸매! 환상적인 몸매! 판타스틱한 몸매!…… 또 뭐가 있더라? 라이레얼은 바닥에 널려져 있는 옷을 하나씩 집어 입기 시작했다. 난 안 보는 척 하면서, 열심히 눈동자를 상하좌우로 굴렸다. 라이레얼은 바지를 걸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랫도리를 다 입었다. 그리 고 고개를 획 뒤로 젖혀 머리카락을 정리하는데,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 쳤다. 난 얼굴을 붉히며 잽싸게 고개를 돌렸고, 라이레얼은 재미있다는 미 소를 지었다. "아앙∼, 뭘 그렇게 힐끔힐끔 봐, 히로? 그냥 고개 돌려서 자세히 봐. 어 차피 하룻밤을 같이 지낸 사인데, 뭘 그래?" 딱 걸렸다. "제, 제가 어, 언제 봤다고 그래요?" 이런 얼굴 표면 온도가 점점 올라간다. "어머, 그럼 안 봤어?" "……예." 솔직히 양심에 조금 찔린다. 라이레얼은 한걸음씩, 내 쪽으로 걸어왔다. 라이레얼은 바지만 걸친 반라 의 몸이기 때문에, 걸을 때 마다, 커다란 가슴이 조금씩 흔들렸다. 꿀꺽! 이거,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하나? 상의를 다 벗고 있는 여자를 빤히 보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보자니 또 아깝고……, 하아∼ 왜 이렇게 좋 은 일 밖에 안 일어 나는 걸까? 이런, 아래쪽에서 이상 반응이……. 제발 작아져라! 작아져!! 작아져!!! 어? 어째서 더 커지는 거지? 으아! 라이레얼이 거의 다 왔어. 부탁이다 제발 작아져라. 젠장, 작아지기 싫으면 커지지라도 마라. 라이레얼은 어느새 다가와 코가 거의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댔다. "후후, 얼굴 빨개졌네. 귀여워. 누나 가슴보고 흥분한거야? 응? 정말 그런 거야 히로? 응? 응?" 제가 성불감증 환자에요? 반라의 여자를 보고 안 흥분하게. 난 고개를 돌려, 라이레얼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붙들고 억지로 돌려 다시 시선을 맞추었다. 라이레얼의 레몬 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커진다. 흥 분 게이지가 맥시멈에 도달한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다. "오, 옷이나…… 가, 가져다 주세요." 될 수 있는 한 흥분을 억제하면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는 심 하게 떨렸다. 라이레얼은 내 뺨에 입술을 부비며 말했다. "니가 집어." 나도 생각 같아서는 그러고 싶다. 하지만…… 난 알몸이란 말이다!!! "저, 저기……." "왜? 부끄러워?" 부끄럽다 못해, 쪽팔려요. "아앙∼ 뭐 그런거 가지고 그래? 어차피 볼꺼 다 봤는데. 설마 어젯밤의 그 뜨거웠던 정사를 잊은건 아니겠지?" 너무 잘 기억하고 있어서, 그게 문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인데…… 남자의 과거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일까? 한 남자의 순결이 무참이 짓밟 힌 그날의 밤. 흑흑, 난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아울!…… 월월 월!!…… 아울!!!(달밤의 늑대 울음소리) 확-! 어째 몸이 썰렁하다. 어느새 라이레얼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 내 몸을 덮고 있던 시트가 들려있 었다. 그렇다는건……? "으아!" 난 황급하게 그곳을 가리며 외쳤다. "뭐하는 짓이에요!? 씨트 돌려줘요." 라이레얼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싫어." "빨리요!" "손 뒤로 치우면 돌려줄게." 손을 뒤로 치워? 내가 미쳤냐? "제가 미쳤어요? 절대 안되요." "그럼 계속 그대로 있던가." 미치겠다. 라이레얼은 양손에 있는 시트를 인질(?)로 삼은 채, 나의 누드쇼를 강요했 다. 내 얼굴이 빨개지면 빨개질수록, 라이레얼의 미소는 점점 짙어지고 있 었다. "어머, 커졌네. 설마 흥분한거야, 히로?" "으아!"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보이고 말았다. 이럴 수가……. "우와! 굉장해, 히로. 지금까지 내가 본 남자들 중 최고야. 몸푸는 셈 치고 우리 한번 더 할까?" "혼자서 몸 풀어요. 순진한 총각 히롱하지 말고." "니가 왜 총각이야?" "예……?" 아! 어젯밤 순결을 잃었지. 쾅쾅쾅-! "야 이 미친 년놈들아! 작작 좀 해!! 여기가 니들 신혼집이냐!? 빨리 챙기 고 나와 이 미친새끼들아!!!" 테커는 기다리다 열받았는지, 정말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누가 미친년이야!? 넌 닥치고 찌그러져 좀 있어!!" 라이레얼은 문을 향해 소리질렀고, 난 그 틈을 타, 잽싸게 옷을 챙겨 입었 다. 5초만에 남방 단추채우기 만 빼고 옷입기 완료. "뭐야? 너 벌써 다 입은거야?" "예. 빨리 나가죠." "흠∼, 그러자." 라이레얼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 "라이레얼! 윗옷!!" 내가 외쳤을 때는 이미, 라이레얼이 문을 연 뒤였다. 문 밖에 서있던 테커 는 멍한 표정으로 라이레얼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조금씩 아래로 이 동시켰다. 그리고 그 시선은 라이레얼의 가슴에서 멈추었다. 테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라이레얼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죽어!!!" 뻐걱-! 테커는 면상을 맞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참 터프하기도한 라이레얼이다. 라이레얼과 내가 옷을 입고 방을 나섰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테커는 라이레얼의 가슴을 본 대가로 왼쪽 눈이 시퍼렇게 멍이드 는 중상을 입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난 바우와우가 생각나 한참을 킥킥거렸 다. 테커는 라이레얼에게 뭐라고 궁시렁거리며 항의를 했지만, 라이레얼은 나같은 미인의 가슴을 보는데 그 정도 대가는 당연하다고 말하고 자꾸 궁 시렁거리면 오른쪽 눈도 왼쪽 눈과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는 말을 덧붙였 다. 라이레얼 성질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다는 것을 알고 있는 테커는 조용히 왼쪽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야, 이 년아. 뭐하느라고 이렇게 늦게 나온거야?" 라이레얼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대답했다. "시끄러. 원래 여자가 외출 준비하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이야." 그러자 테커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너도 여자에 속하냐?" 퍼억-! 휘휴∼, 니가 아주 매를 버는 구나, 매를 벌어. 조용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어쨌든 라이레얼에게 맞은 테커는 눈깜짝할 사이에 바우와우에서 팬더로 변신했다. 이렇게 또 다시 시간을 지체한 우리는 빠르게 여관을 벗어나 집합장소로 향했다. 처음에는 우리 셋만이 걷고 있었지만, 집합장소에 가까워 올수록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졌다. 대부분 호위병에 지원한 자들로 어제 먹은 술 의 휴유증 때문에 비틀 거리며 걷거나 이마를 찡그리며 손으로 머리를 부 여 잡은 사람들이 태반이였다. 아침에 해장국도 못 먹었나 보다. 아! 그리고보니 난 아침밥도 못 먹었잖 아. 이런……. 북어국이 먹고 싶다. 콩나물국도. 숙취엔 그게 최곤데……. 해장국 타령을 하는 나에게 아주 특이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남자 가 다른 남자를 두손으로 잡고 질질 끌고가는 모습이였다. 끌고가는 남자 는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끌리는 남자는 누군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 다. 누구였더라? 분명히 어디선가 봤는데……. 내 궁금증은 테커의 한마디로 풀렸다. "럴크군." 흠, 럴크였군. 어제 나랑 술내기 한 놈. 테커는 손을 들어 럴크를 끌고가는 남자를 아는 채 했다. "여, 카웨!" 카웨라 불리는 남자는 우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터커, 라이레얼! 지금 나오는 거냐? 야, 테커 너 눈이 왜 그 모양이냐?" 라이레얼한테 쥐어터져서 저렇게 됐데요. 테커는 라이레얼을 야려보며 말했다. "묻지마 씨발아." 카웨는 별 관심이 없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라? 꼬마도 있었구만." 난 열받아서 소리쳤다. "누가 꼬마야!?" 그 순간 카웨는 들고 있던 럴크를 내팽게치고 힘차게 달려와 나를 껴안았 다. "으하하하. 반가워." 으윽, 이 자식 변태아냐? 나 같은 미소년(?)만을 노리는……. 제발 이것 좀 놔라. 난 남자한텐 취미 없단 말이다. "고마워, 친구. 으하하하." 이 자식 머리에 나사 하나 빠진거아냐?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나한테 고마워해? 난 두 팔을 밀어 카웨를 밀쳐냈다. 하지만 카웨는 뭐가 그리 좋은지 뒤로 밀리면서도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뭐가 고마워? 난 니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대답은 카웨가 아닌 테커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이 자식 어제 니 덕에 돈 좀 만졌거든." "뭐?" "너랑 럴크랑 술 마실 때, 너한테 건 유일한 놈이야. 결국 니가 이기는 바 람에 이 자식 혼자서 돈을 씩쓸어갔지." 오호, 그런 일이. 그러고보니 기억이 조금 나긴하는군. 라이레얼이 갑자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술도 잘마시는 우리 귀여운 히로." 이젠 라이레얼이 속삭이면 무서운 생각이 먼저든다. 이힝∼ 여자는 무서 워. "크하하, 왠지 느낌이 와서 걸긴했는데, 진짜 이길 줄은 몰랐어. 그 때 보 니까 꼬마 주제에 눈빛하난 마음에 들더라고." 너 보는 눈이 있구나. 내 눈빛이 멋있긴 해. 카웨는 내 앞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역시 도박은 배당이 큰 쪽에 걸어야 제맛이라니까. 야 꼬마야. 내 이름은 카웨다. 나이는 스물 넷이지." 니가 도박에 대해서 조금 알긴 아는구나. 이 자식 점점 마음에 드는데. 나 역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도박이라면 나도 한 도박하지. 그리고 난 꼬마가 아니야. 히로다. 나이는 열일곱이고. 앞으로 한번만 더 꼬마라고 부르면 박살을 내버리겠어." 서로의 소개가 끝나자, 녀석은 다시 한번 크게 웃으며 나를 껴안으려고 달려들었다. 난 잽싸게 뒤로 물러나 남자와 껴안는 볼상스러운 꼴은 간신 히 피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난 남자한테 취미없어." "나도 남자한텐 취미 없어. 하지만 넌 마음에 드는군. 덕분에 돈을 듬뿍벌 었으니까 일 끝나는데로 한잔 사도록하지." 내 앞에서 술 얘기 하지마라. 끔찍하다. "기대하지. 난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 적당히 대꾸했다. 테커는 아까부터 까딱거리 던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럴크를 가리켰다. "저 녀석은 왜 저러고 있냐?" 그래. 나도 그게 궁금했었어. "어제 이 놈이랑 술 마신 뒤 계속 저 모양이다. 완전 혼수상태야." 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정도로 퍼마셨는데 지금 깨어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두 놈이 서 여관술 반 이상을 처먹었잖아." "그런데 넌 어째 멀쩡하다." "그러고보니 그렇네. 야, 너 괜찮냐?" 나야 언제나 괜찮지. 그런데 약간 이상하긴 하군. 숙취도 거의 없고 말이 야. 어젯밤 라이레얼한테 따먹히는 바람에 술이 다 깼나? 난 이번에도 적당히 대꾸했다. "난 술에 강하거든." 다행히 둘은 대충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술에 강해진거지? 어렷을 때부터 술이라고는 입에 대본적도 없는데……. 혹시 엄마가 나를 배고 술을 마셨나? 그래서 태아일 때부터 술맛을 알았다던가. 음주, 흡연, 그리고 여자……. 라이레얼한테 따 먹혔지. 라이레얼한테……, 순결을…… 잃었었지. 흑, 난 이제 더러워진 몸 이야. 히잉, 라이레얼 미워! "후우∼."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갑자기 귀 안으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난 깜짝 놀라 옆으로 비켜섰고 내 귀에 바람을 불어 넣은 범인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생각해?" "그냥 이거저거요." 차마 말을 못하겠다. 라이레얼은 눈을 감았다가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리고는 혀를 내밀어 입 술 주위를 살짝 핥았다. 한마디로 끝내주게 도발적인 표정을 지었다. "내 생각?" 맞긴 맞지. "예." "아이, 기뻐." 라이레얼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와락 끌어 안았다. 아! 그녀의 가슴이 ……. 난 라이레얼의 체온을 조금 느껴볼 생각으로 두 손을 그녀의 등에 두르고 깍지를 꼈다. 라이레얼은 자신의 등에 내 손의 감촉을 느꼈는지, 나 를 더욱 세게 끌어 안았다. 같이 껴안았다해도 라이레얼이 나보다 약 10cm정도 크기 때문에 내가 안긴 꼴이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렇게 행복한데. 아∼, 난 왜이리도 여자에게 약하단말인가! 지금 나를 안 고 있는 이 여인은 나의 순결을 무참히 짓밟은 여자인데……. 라이레얼은 뜨거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이 부드러운 분위기 에 녹아들어 정렬적인 눈빛으로 그녀의 눈빛을 받았다. 눈빛을 통해 서로 가 서로의 마음을 알아낼 때 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사랑해, 히로." "저……." 분위기에 휩쓸려 '저두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분위기 깨지는 소리가 들 려왔다. "미친 년, 놈들 지랄하고 자빠졌네." "작작해라 이 씨발들아."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시기한 테커와 카웨의 발언이었다.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만약 '저두요' 라고 말했으면, 어떻게 됐 을까? 잘못하면 평생 라이레얼한테 코껴서 살게되는 그런 사태가……. 정 말 고마워 얘들아. 니들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난 천천히 라이레얼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라이레얼의 품안에 서 빠져나왔다. 라이레얼은 표정을 굳혔다. 화가난듯한 표정이었다. 라이레 얼은 천천히 테커와 카웨한테 걸어갔다. 그리고……. 퍽! 퍽!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왜 쳐 이 년아!" "이 씨발년이!" 라이레얼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좋은 분위기가 깨지는 바 람에 조금 화났나? 라이레얼은 걸어가다가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럴크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 고 럴크의 얼굴을 사뿐히 즈려 밟았다. 아무래도 많이 화났나보다. 여자는 분위기를 잘타는 생물이라던데. 난 이 불행한 사태에 마음속으로 시를 한수 읊었다. 분위기가 깨져서 가실 때에는 말없이 뒤에서 야려보겠습니다 완전히 맛간 용병럴크 술퍼먹여 가실길에 버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맛간 럴크를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소. 열받고 빡돌아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뒷다마 까겠습니다. "저 씨발년이 치고 튀네." "씨발 개같은 년!" 남자 새끼들이 뒷다마 까기는……. 이러한 여러 가지 트러블을 겪은 후에 우리는 간신히 집합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수십대의 짐마차가 늘어서 있고, 상단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리로 쌓으라, 저리로 쌓으라, 줄이 너무 느슨하다, 꽉 묵어라, 등등의 소리를 지 르며 인부들을 지휘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늦게 왔는지 짐은 거의 실은 상태였다. 잠깐 그 자리에서 짐 실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상단 호위병들 은 알아서 조를 나누기 시작했다. 행동의 편의성과 이탈자 방지를 위해서 인 것 같았다. 총 인원이 100명이 조금 넘었기에 대략 10명이 한조가 되고 조의 짱(조장)을 선출했다. 나와 라이레얼은 당연히 한조가 되었고, 카웨와 현재 혼수상태에 빠져있 는 럴크도 같은 조가 되었다. 그 외에도 여자 한명과 남자 4명이 같이 행 동하게 되었다. 조장은 테커가 맡기로 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지 약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짐 실기, 짐 점검, 조짜 기 등등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각 조는 커다란 짐마차에 나누어 올라탔다. 짐마차는 위가 뻥뚤린 오픈카 였다. 좋게 생각하면 통풍이 잘되는 구조고, 나쁘게 생각하면 비새는 구조 였다. 난 마차 위에 올라가 적당한 곳에 앉은 다음 지팡이를 내려놓고 배낭을 풀었다. 청룡도는 허리에서 풀로 왼쪽어깨에 기대었다. 라이레얼은 내 옆자 리에 밀착해서 앉았고 테커는 내 맞은 편에 카웨는 럴크를 집어 던진 다 음, 럴크를 깔고 앉았다. 저래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어제 정말 혼수상 태에 갈 때까지 마셨나 보다. 잠시 후, 마차는 덜그럭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위의 집들은 점점 뒤로 이동하고, 마차는 커다란 성문을 지나 탁트인 하늘로 나왔다. 어젯밤 술판의 휴유증 때문인지, 마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 둘씩 쓰러져 잠 에 빠져들었다. 테커도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잠들고 라이레얼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날씨 한번 끝내주네." 태양은 부르럽게 대지를 어루만지고, 바람은 선선히 다가와 내 이마에 흐 르는 땀을 닦아주고, 아름다운 요정이 내 어깨에 기대고, 못생긴 남자가 코 를 골고……. "드르렁…… 푸우우……, 드르렁…… 푸우우……." 테커 저 자식이 분위기 다 깨는군. 난 라이레얼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왼손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고 라이타를 찾아보니, 왼쪽 주머니에 없었다. 남방 주머니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오른쪽 주머니에 있다는 얘긴데……, 이걸 어쩐다? 오른 팔을 움직이면 라이레얼이 깰텐데……. "후우∼." 난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입에서 뺐다. 아무리 담배를 피고 싶다해도, 단 잠을 자는 요정을 깨울수는 없지. 따각 따각- 덜그럭 덜그럭- 말이 걷는 소리와 마차가 흔들리는 소리, 라이레얼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누군가가 부르는 콧노래 소리. 평화롭군. "음냐……, 좋아…… 우웅……." 라이레얼은 입맛을 다시며,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난 손을 라이레얼의 머 리카락으로 가져갔다. "음……."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닿는 순간, 라이레얼은 몸을 살짝 뒤척였다. 난 손을 떼고, 라이레얼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상큼한 레몬빛 머리카락, 뾰족한 귀, 긴 속눈썹이 살짝 덮고 있는 눈, 오 똑한 콧날, 작고 붉은 입술, 그 입술과 대조를 이루는 새하얀 피부, 가느다 랗고 새하얀 목……. 진짜 요정같아. 하프 엘프도 요정에 속하나? 라이레얼 성격을 보면 요정이라고 보기엔 조금 무리수가 있지 않을까? 따뜻한 햇살 때문인지, 어제 라이레얼한테 시달리느라 잠을 못자서인지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난 따뜻한 햇살과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기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내가 다시 눈을 떳을 때도 라이레얼은 여전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자고 있었다. "깼냐?" "어." 테커는 어느새 일어났는지 무료한 표정으로 날 처다보고 있었다. 다른 용 병들은 거의 자고 있었고, 그나마 깨어있는 몇 명도 다시 잠을 청하거나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수도에서 그렇게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길은 그런데로 평탄했다. 고 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해는 정가운데서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직 정오전인가? 우두둑- 뚜둑- 난 라이레얼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목관절을 풀었다.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자서 그런지 목을 돌릴 때 마다 관절이 비명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거 원래 이렇게 재미없는 일이냐?" 테커는 길기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지금만 그런거야, 지금만. 며칠만 지나면 짐을 노리는 놈들이 개떼들 처 럼 달려들껄. 임마 상단 측에서 돈이 남아돌아 우릴 고용했겠냐." "그건 그렇군." "한가해서 뭐 나쁠게 있냐. 아무 일도 안하고 돈 받으면 좋지. 쓸데없는 생각하지말고 잠이나 자둬. 밤에는 또 불침번이다 뭐다 이거저거 할게 많 으니까. 게다가 넌 어제 라이레얼한테 시달리느라 잠도 못잤을꺼아냐?" 으윽, 저 자식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테커는 어느새 옆에 있는 놈을 베게 삼아 누운 다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뚝뚝- 응? 갑자기 마차 바닥에 물이 한 두방울 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 난 고개를 꺽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하늘에 밝게 빛나는 태양. 개떼 처럼 무리를 지어가는 흰구름. 전혀 비가 올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대체 이 물은 뭐지? 난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펴보다가 그 정체불명의 물에 근원지를 찾아 낼 수 있었다. 으윽, 괜히 봤다. 백치처럼 헤 벌어진 라이레얼이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 내리고, 흘러내 린 침은 100% 완전 방수가 되는 내 망토를 타고 내려와 마차 바닥으로 흘 러내렸다. 엘프에 대한……, 아니 여자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다. 어젯 밤 거의 다 깨져서 깨질 환상이나 있나 모르겠지만. 난 손수건을 꺼내 라이레얼 입가로 가져갔다. "으흠……." 손수건이 입가에 닿는 순가 라이레얼은 살짝 몸을 비틀었다. 난 라이레얼 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입가를 닦아주었다. "흐음, 히로……. 아앙, 거기는 안돼……, 으음…… 응, 거기……, 거기가 좋아……." "……." 두렵다. 라이레얼은 대체 꿈속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난 라이레얼의 입가를 다 닦은 다음, 망토에 묻은 침을 닦아 내었다. 그런 데 닦아 내자마자 라이레얼의 입에선 다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난 할 수 없이 또 닦았다. 그런데 또 흘러내렸다. 라이레얼 입안에는 왜 이리도 많은 침이 있는 것일까? 많은 것까진 이해 하겠는데, 왜 흘리는 걸까? 흘리는 것 까지도 이해하겠는데 왜 내 어깨에 흘리는 걸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또 흘러내렸다. 정말 끊임 없이 흘러내 린다. 난 닦는 것을 포기하고 손수건을 다시 집어넣었다. "아, 히로……, 굉장해……, 으음." 난 잠꼬대하는 라이레얼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이렇게 침흘리면서 자는 모습을 보니 귀엽긴하군. 어제 날 겁탈(?)했던 여 인으로 보이지 않아. 겁탈……, 겁탈……. 이런, 안좋은 기억을……. 흑, 그 래. 난 이제 더 이상 총각이 아니야. 난 순결을 잃었어. 난 더러워진 몸이 야, 흑흑! "♬난 이제 더 이상∼♬총각이 아니에요∼♬그대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 요∼♬" (제목 : 합방식合邦式 노래 : 박영웅 표절 : 박영웅) 난 순결을 잃은 슬픔을 노래로 승화시키며, 침흘리며 자는 라이레얼을 계 속 지켜보았다. "뭐? 너 설마 저 꼬마랑……?" "응. 했어." "크억!" 으음, 깜빡 잠들었나? 라이레얼 자는 얼굴을 바라보다 나도 잠이 들었는데, 아까부터 계속 여러 사람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눈을 뜨기가 귀찮아 아직 완전히 잠을 깨지 않은 비몽사몽(非夢似夢)한 상태에서 그들의 얘기를 경청했다. "라이레얼이 어제 저 녀석하고 밤새 그짓해대는 바람에 난 잠도 못잤다 고." 카웨 목소리군. "너 옆방이었냐? "어. 밤새도록 라이레얼 아∼ 아∼ 거리는 신음소리와 저 꼬마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야,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내 눈봐. 잠못자서 퀭하 니 들어가지 않았냐?"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라이레얼 옆방에서 잘걸." 이것들이 지금 무슨 얘길하는거야? "야, 카웨 쟤네들 몇번이나 했냐?" "나도 몰라. 세 번까진가 세다가 잠들어서." "세, 세 번? "이야, 저 녀석 제법인데." "세번……, 크윽. 세 번……." "야, 럴크 인상 펴!" "그런데 잘도 셌다. 너 혹시 시끄러워서 잠못잔게 아니라 혼자서 그짓하 느라 잠 못잔거 아냐?"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러고보니 저 녀석 아까부터 왼손을 떨고 있었어." "아니야!" "좆까지말고 솔직히 불어 임마." "맞아. 이 자식이 라이레얼 신음소릴 듣고 그냥 잤을 리가 없지." "닥치고 있어, 린저. 죽여버린다!" 뭐? 죽여? 무슨 얘기를 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점점 살벌한 쪽으로 치 닫는 것 같아서, 난 살짝 실눈을 떴다. 카웨의 화난 모습과 그 옆에 있는 남자가 능글맞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레얼은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재밌다는 듯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잉, 새신랑 처럼 뭘 그리 부끄러워해!?" 린저라는 남자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느끼 하게 내뱉었고, 주위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이!" 카웨는 정말 열받았는지 주먹으로 린저의 턱을 가격했고, 린저는 뒤로 떨 어져 나가면서도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으아! 왼손으로 맞았어. 카웨의 그곳을 위로해주던 그 손으로." 그의 능글맞은 대사에 사람들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카웨는 열받아서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린저라는 남자는 열받은 카웨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지 또 다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카웨의 왼손은 용도도 많다네♬그곳을 위로하는데도 쓰고♬주먹으로도 쓰고♬다음 번엔혼자서 즐기지 마세요♬여자와 함께 즐겨주세요♬" "크하하하하!" 사람들은 이제 아애 배를 부여 잡고 마차 바닥을 굴렀다. 카웨는 드디어 뚜껑이 열렸는지 번쩍 칼을 뽑아들었다. 왼손에. 저 자식 왼손잡이였나? "그리고 이 손으론 칼도 뽑을 수 있지!" 카웨는 살기를 팍팍 내 뿜으며 한걸음씩 린저에게 다가갔다. 누가 안 말리나? 잘못하면 피보게 생겼는데. 그 순간, 갑자기 발이 하나 날아와 카웨의 발뒷꿈치를 가겼했다. 그렇게 세게 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달리는 마차 위였기에 카웨는 중심을 잡지 못 하고 넘어졌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카웨를 발로 찬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테커였다. "씨발들아, 안 닥치냐? 시끄러워서 잠을 못자겠잖아." 무지하게 공감이가는 말이다. 갑자기 저 녀석과 친해지고 싶은 것은 왜일 까? 카웨는 발떡 일어나 외쳤다. "너 죽고 싶어!?" 테커는 붉으락푸르락하는 카웨의 얼굴을 한번 힐끗 처다본 다음, 뉘집 개 가 짖냐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밤새 혼자서 그짓하느라 잠도 못잔 새끼가 기운 이 넘쳐나냐?" 카웨는 발끈해서 외쳤다. "안 했어!" "했어." "안 했어!!" "했어." "안 했다니까!!!" "했어. 확실해. 넌 분명히 했어." "씨발, 증거있어?!" "어, 있어." "까봐!" 테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했는데, 니가 안했겠냐?" "……." 휘이이잉- 썰렁한 바람이 마차를 휘감기 시작했다. 카웨는 어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 물었다. "뭐?" 테커는 하품을 길게 하며 대답했다. "나도 했다고." 나도 했다 = 테커도 했다 = 테커도 그짓을 했다 = 테커도 라이레얼과 나 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 테커도 옆방이었다 카웨도 나와 똑같은 추리를 했는지,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 너도 옆방이였냐?" "어." 가설 : 카웨는 했을 것이다. 근거1 : 라이레얼과 나의 신음소리가 옆방까지 들렸다. 근거2 : 카웨는 안 할놈이 아니다. 근거3 : 다른 옆방에있는 테커는 했다. 결론 : 카웨는 했다. 이거 말이되는 추린가? 테커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웨를 무시하고 라이레얼에게 물 었다. "야, 근데 니들 정말 세 번 밖에 안했어? 내가 들은 것 만도 다섯 번이 넘었는데." "다섯번……?" 주위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라이레얼은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 까딱거렸다. "후훗, 니들은 히로가 겨우 다섯 번 밖에 안했을꺼라고 생각하니? 첫경험 이 나같은 미년데 다섯 번 밖에 안했을 리가 없잖아." "첫경험……?" "응. 히로는 내가 처음이었데." 으윽, 라이레얼……! 순식간에 마차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럴크는 열받아서 게거품을 물고 있 었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이야, 너 좋겠다. 드디어 순결한 얘 따먹는데 성공했네. 축하해." 뭘 축하해, 뭘? 그렇게 축하 인사를 건넨건 베네트라는 여자였다. 라이레얼과 함께 우리 조의 유이(唯二)한 여성이었다. 나이는 라이레얼과 비슷해보이고 키는 나보 다 약간 크거나 비슷했다. 뭐, 그정도만 해도 여자로는 충분히 큰 키였지 만, 워낙 주위에 떡대들이 많다보니 상대적으로 작아보였다. 건강하게 보이 는 그을린 갈색 피부, 약간은 찢어진듯한 눈에 조금은 튀어나온 이마, 시원 시원한 이목구비. 전체적으로 좋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팔과 다리에 붙은 근육이 장난이 아니다. 라이레얼은 근육이 안쪽에 붙는 반면에 이 여자는 바깥쪽으로 탱탱하게 근육이 붙어있어 엄청난 위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나 저런여자 무서워한다. 라이레얼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방긋 웃으며 축사를 받았다. "응, 고마워. 다음엔 너도 한번 따먹어봐. 젊고 순진해서 그런지 저돌적이 고 힘이 넘쳐. 아∼ 어젯밤은 정말 황홀했어." "그게 정말이야? 알았어. 나중에 기회를 봐서 따먹어야겠군." 베네트는 그렇게 말을하며 나를보며 입맛을 다셨다. 난 자는 척하는 도중 에도 그녀의 눈빛이 무서워서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허락할게. 걱정말고 따먹어. 근데 얘가 너무 순진해서 조금은 반항 할지도 몰라. 나도 설득하는데 조금 애먹었어." 누구맘대로 허락을……? 설마 나 지금 여자한테 따먹힌 다음 버림받은 건 가? 라이레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흑흑, 몸도 주고 마음도 줬는데, 이제와서 버림받게 되다니……, 으아앙, 라이레얼 미워! 베네트는 씨익 웃으며 걱정말란 투로 말했다. "아아, 그런건 상관 없어. 그냥 적당한 곳으로 끌고 들어가 겁탈하면 되니 까. 정 반항하면은 묶어놓고 하지, 뭐." 거, 겁탈? 무, 묶어? 이 여자 혹시 새디스트아냐? 아님, 나같은 미소년(?) 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강간마? 베네트는 계속 나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눈빛은 겁에 질린 토끼 를 궁지에 몰아 놓고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는 호랑이의 눈빛과도 같았다. 흑흑, 하늘이시여, 제가 순결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예? 이미 순결을 잃지 않았냐고요? 흑흑,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더 이상 여자한테 당하는건 싫어요. 뭐, 라이레얼한테는 한번 당했으니까, 또 당해도 상관없 긴 한데, 저런 여자한테까지 당한다면 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굶주 린 여자 하나 구해주는 셈 치고, 그냥 한번 대 주라고요? 제가 무슨 몸파 는 놈인줄 아십니까! 전 미성년자입니다!!! 라이레얼은 베네트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히로는 어쨌네, 저쨌네, 이 랬네, 저랬네. 아무튼 결론은 한번 쯤은 먹어볼만한 남자라는 것이었다. 참 무서운 여자들이었다. 본인을 앞에 두고도 어떻게 겁탈이네, 강간이네 하는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난 두 여자들이 대화를 하는 동안 두려움에 몸을 떨 어야 했다. 다행히 한 남자의 개입으로 두 여자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나의 정력을 궁금하게 여긴 테커였다. "야, 라이레얼! 몇번이나 했냐니까?" 정말 끊질기게도 물어보는구나, 너. 라이레얼은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가락 일곱 개를 쫙 폈다. "이, 일곱 번!" "크억!" 테커는 놀라 소리를 질렀고, 럴크 입을 쩍 벌리다 턱이 빠졌다. 그 외에 사람들은 럴크를 교훈 삼아 턱이 빠지지 않을 만큼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인간이 하룻밤에 일곱 번을 할 수 있는거지?" "맞아. 그것도 라이레얼을 상대로." "굉장하다." "역시 덩치와 정력은 비례 관계가 아니라는건가." "저 녀석은 인간이 아니야. 그짓하는 기계야!" 뭐? 뭘하는 기계? "야, 린저 넌 한번만 해도 지치지?" 린저라는 남자는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남자는 양보다는 질이야!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단 한 번을 하더라도 얼마나 끝내주느냐, 얼마나 만족을 시켜주느냐가 중요한거 라고!" 맞는 말이긴하다만……. "하여튼 거기도 작은 새끼가 말은 잘해요!" "뭐? 너 말 다했어?" "그래, 다 했다." "한번 대 볼까? 니께 큰지 내께 큰지?" "좋다. 대 보자." "까." "좋아, 까." 뭘 까 이것들아! 둘은 그렇게 말하며 바지를 내릴듯한 포즈를 취했다. 난 더 이상의 추한 꼴은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 라이레얼이 벗는다면 모를까, 무슨 남자 놈들이 바지를 벗는다고 지랄이야! 다행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던 놈이 둘을 말렸다. "씨발들아, 찌그러져라. 안 그래도 작은 놈들끼리 도토리 키재기하냐?" 테커였다. "뭐? 너 죽을래!?" 둘은 어느새 의기투합해 같이 테커에게 씨발거렸다.. 그런 그들을 보다못한 라이레얼이 나섰다. "니들 다 조용히 해. 니들이 히로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히로는 양뿐만 아니라 질도 완벽하다고. 음, 뭐랄까? 한번한번에 최선을 다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히로는 일곱 번을 하면서도 처음과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했어. 난 정말 몇번이고 기절할뻔 했다고." 라이레얼, 칭찬해주는건 고마워요. 하지만 그런 종류의 칭찬은 받고 싶지 않아요. 흑흑, 쪽 팔려서 이젠 어떻게 여깄지? 기회봐서 탈영(?)할까? 아무튼 라이레얼의 연설이 효과가 있었는지, 둘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 며 자리에 앉았다. 테커는 다급한 목소리로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야, 일곱 번이니 했다면, 니들 대체 언제 잔거야?" 내 기억으로는 내가 눈감을 때 해가 떠오르고 있었어. "음∼ 글쎄. 아마 일곱시 쯤일걸." "일곱시라면……, 그럼 밤새 그짓을 한거야!?" "응." 테커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할 말을 잃어 버린 모양이었다. 다른 남자들은 나를 존경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이런 것도 존경의 대상이되나? "밤새도록 해도 지치지 않는 남자라. 좋았어. 반드시 먹고 만다." 베네트는 어느새 탄탄한 근육이 붙은 두손을 불끈 쥐고 있었다. 라이레얼 은 말리기는커녕 베네트를 부추겼다. "응, 잘해봐.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걸." 나는 땅파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진짜 죽고 싶다. 라이레얼이 갑자기 내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히로, 히로. 잠깐 일어나봐. 베네트가 너랑 하고 싶데.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그냥 한번 대 주는게 어때?" 흐윽. 이대로 날 버리시는건가요, 라이레얼? 난 눈을 뜨지 않았다. 무조건 자는 척 했다. "아앙, 빨리 일어나봐, 히로." 난 자고 있다. 난 자고 있다. 난 자고 있다. 라이레얼은 나를 더욱 세게 흔들었다. "히로. 히로. 히로. 히로." 전 자고 있어요. 전 자고 있어요. 전 자고 있어요. "야, 왠만하면 그냥 쉬게 나둬. 어젯밤 밤새도록하느라 피곤했을텐데. 그 리고 이따 나한테 먹히려면 지금 체력을 많이 회복해 둬야지." "아, 그렇구나." 제발 누가 날 좀 죽여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같은 이치로 부엉이 목을 비틀어도 밤은 온다. 잠깐, 부 엉이는 목이 360도 돌아가나? 음, 그럼 부엉이 눈깔을 뽑아도 밤은 온다고 해두자. 아무튼 내가 상단 호위라는 막중한 임무를 띄고 머나먼 여정을 출발한 이 영광스러운 날에 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왔다. 해가 저 산 너머에 걸리자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일단 야영할 만한 터를 잡아 짐을 싫은 마차들은 한곳에 몰아두었다. 그리고는 인원 점검과 짐 점검을 끝 마친 뒤 불을 피우 기 위해 땔감을 줏어오고 물을 떠오고. 난 커다란 바위에 걸터 앉아 담배를 한모금 빨며 그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 다. 자세히 둘러보니 앉아서 쉬고 있는 것은 나 혼자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아마도 여기서 나이가 가장 적다 보니 편의를 봐주는 것 같았다. "저 녀석은 왜 일안하고 혼자 쉬고 있냐?" "야야, 그냥 놔둬. 제 어젯밤 라이레얼과 일곱번했데." "일곱번!?" "그래. 아마 당분간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걸." 저것들이……. 내가 입에 문 담배를 뱉어내고 다시 한 개피를 꺼낼 때 쯤, 한 여자가 내 옆에 걸터 앉았 다. 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계세요." 잽싸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뻗어온 손이 엄청난 악력으로 내 어깨를 잡 아 눌렀다. "이봐, 얘기 좀 하자는데 왜 피하려 그래." "저, 전 그쪽과 별로 할 얘기 없는데요." "난 있어." "……." 여자는 씨익 웃었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베네트였다. 아까 라이레얼과 미소년(?) 공략 계 획을 추진하던……. 마차에 탈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허리에 엄청나게 큰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다. 그리고 근육도 더 우람해보여. 나 오늘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베네트는 내 어깨에 올려 놓은 손을 조여 억지로 밀착시켰다. "야, 귀염둥이." "예……." 귀엽게 봐주시는건 고맙지만, 이런 것은 별로……. 베네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 마음에 든다." "예……." 전 그쪽이 별로 마음에 안들어요. 베네트는 한손으로는 내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내몸을 천천히 더듬었다. 가슴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배를 타고 내려와 허벅지를 더듬고……. 으윽, 주위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 은데 이런 대담한 짓을. 난 몸을 비틀어 베네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베네트의 손 놀림은 더욱 대담해졌다. "제, 제발 이러지마세요." 베네튼 나를 꽉 끌어 안으며 말했다. "앙탈부리지마." 정말 너무 무섭다. 난 그녀의 눈빛에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저쪽에서 라이레얼의 모습이 보였다. 난 처절하고 불쌍하고 애절한 마음을 담은 눈빛으로 라이레얼을 보았지만, 그녀는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다. 마치 나의 최후를 지켜보겠다는 듯이……. 베네트가 더듬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그 손으로 내 턱을 잡아 억지로 돌려 자신의 얼 굴을 마주보게 했다. 이 포즈는 설마? 베네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래도 공략 지점은 내 입술이 아닌가 싶다. "으윽." 난 억지로 고개를 돌리려 애썼지만 베네트의 손 힘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나 이대로 당하는거야? 라이레얼, 제발 도와줘요! 하지만 라이레얼은 나를 버렸다. 이 상황은 나의 힘으로만 해쳐나가야 한다. 베네트의 입술 과의 거리는 불과 10cm. 난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쳤다. "싫어!!!" 이대로 나는 입술을 빼앗겨야만 하는가? 첫키스부터 시작해서 난 왜이리 당하는 키스가 많 은거지? 이제 더 이상 당하는 것은 싫어! ……. 응? 왜 안하지? 한 동안이 지나도록 내 입술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천천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베네트는 멀뚱멀뚱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네트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 다. 베네트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캬하하하하, 너무 귀여워. 하하하하." 웃음 소리 한번 호탕하군. 베네트는 그렇게 배를 부여 잡고 한참을 웃다가 내 어깨를 탁탁치며 말했다. "뭐야? 내가 진짜 키스 할꺼라고 생각했어?" "……." "이봐 이봐, 난 이래뵈도 애인까지 있는 몸이라구. 그런데 키스할까봐 무서워서 눈을 꼭 감 고있는 표정이라니. 캬하하하." 애인이 있었어!? 아무튼 나를 건드릴 생각은 없다는 말이 겠지? 살았다. 난 베네트가 나를 겁탈(?)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베 네트는 두 손으로 내 볼을 잡고 양쪽으로 잡아 당겼다. "요, 귀염둥이. 확실히 어린애다 보니 귀여운 맛이 있어. 라이레얼이 왜 건드렸는지 알꺼 같군." "이거 조 나여."(이것 좀 놔요.) "난 라이레얼과 친구라고.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내가 친구가 건드린 남자를 건드릴 것 같아?" "아이오. 이거 조 나조요"(아니요. 이것 좀 놔줘요.) 베네트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볼을 놔주었다. 난 한마디 항의도 못하고 조용히 빨 갛게 부어오른 볼을 쓰다듬었다. 베네트는 그런 나를 보며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한번 다셨 다. "야, 요루드. 잠깐 와봐!" 베네트가 그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자, 저쪽에서 장작을 줍고 있던 한 남자가 장작을 땅에 내동댕이 친 다음 이곳을 향해 열나게 달려왔다. 남자는 순식간에 우리 앞에 선 다음 숨을 고르며 물었다. "헉헉, 무슨 일이야?" 베네트는 일어나 그 남자 옆에 섰다. 그리고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인사해, 히로. 이 쪽이 내 애인. 이름은 요루드. 약골이고 조금 멍청하긴 하지만 그런데로 괜찮은 놈이야." 베네트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요루드라는 이 남자는 조금 특이해 보였다. 새하얀 정도까지 는 아니지만 그런데로 하얀 피부와 조금은 마른듯한 몸매. 서글서글하게 생긴 인상에 약간 은 억지로 짓는 듯한 저 미소. 키는 약 175cm정도로 베네트보다 조금 컸지만, 둘을 나란히 세워놓고 보니 요루드 쪽의 분위기가 휠씬 여성스러워 보였다. 호탕하게 웃으며 남자의 어깨를 탁탁치며 애인이라고 당당하게 소개를 해주는 여자와 어색 한 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붉히는 남자. 이상한 커플이군. 혹시 이 남자 베네트한테 겁탈당 해 순결을 잃어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는거 아냐? 어쨌든 소개를 받았기 때문에, 난 내 소개를 해야 했다. "난 히로. 별로 소개할만한 특징은 없어." "으응……." 요루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니가 특징이 없긴 왜 없어? 요루드, 얘 이래보여도 라이레얼과 하룻밤에 일곱번이나 한 놈이야. 어때? 대단하지?"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거지? "으응……." 요루드는 베네트의 말에 더욱 얼굴을 붉혔다. 빨리 베네트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눈 치였다. 하지만 베네트는 그런 요루드의 마음을 모르는지 팔짱까지 끼면서 말했다. "우리 자기도 그러면 좋을텐데.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 자기? 자기라는 건 설마, 허니(Honey)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겠지? "으응……." "으흥, 자기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아무래도 우린 마음에 통하나봐. 자기야, 이제부 턴 자기도 힘 좀 써봐아∼." 베네트는 요루드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애교……, 애교……, 애교……. 우욱, 어제 먹은 술이 넘어올려 그런다. "으응……." 이 인간은 '으응' 밖에 할 줄 모르나? 아무튼 우리가 소개를 끝마치고 몇마디 말을 더 나누었을 때 쯤, 테커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야! 밥 처먹어." 저 자식은 입만 열었다하면 왜 쌍소리가 튀어나오는 거지? 어느새 사람들은 곳곳에 불을 피워 놓고 둘러 앉아 커다란 냄비에 뭔가를 열심히 끓이고 있었다. 테커와 라이레얼이 있는 곳, 즉 우리조가 모여있는 곳에도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놓 고 커다란 국자로 냄비를 휘젓는 모습이 보였다. 힘차게 국자를 젓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카 웨였다. 아마도 저 놈이 취사병인가 보다. 라이레얼은 빨리 오라는 뜻인지 나에게 계속 손짓 을 보내고 있었고, 럴크는 그런 라이레얼을 보고는 나를 열심히 갈궜다. "자기야, 빨리 식사하러 가자. 내가 먹여줄께." "으응……." 베네트는 요루드를 질질 끌고 모닥불로 갔다. 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들의 뒤를 따라 갔다. 어? 한동안 머리를 안감았더니 비듬이 좀 나오네. 우리는 모닥불을 삥 둘러 앉았다. 난 라이레얼과 최대한 거리를 두기 위 해,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런데 라이레얼은 내 옆에 앉아있는 럴크를 발길질 해서 내 쫒은 다음, 그 자리에 앉았다. 럴크는 인상을 쓰며, 나를 야려보며, 궁시렁거리며, 다른 곳에 앉았다. 조리가 끝났는지 카웨는 커다란 국자로 쇠로 만들어진 그릇에 수프로 보 이는 음식을 퍼 주었다. "자, 이거 먹어, 히로." 난 라이레얼이 건네주는 그릇을 받아들었다. 약간은 갈색이도는 국물에 큼직큼직한 건더기 들이 떠다니는 수프였다. 수저를 받아 수프를 떠 먹어 보았다. 맛이 상당히 괜찮았다.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까지는 아니였지만, 이런 야외에서 타오르는 모닥불 을 보며 먹기엔 충분히 훌륭했다. 동료들과 음식을 먹으며 떠들고 있던 카웨가, 날 보더니 크게 소리쳐 물 었다. "야! 이 몸이 만든 수프 맛이 어때?" 난 그릇을 한번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런데로 괜찮군." 카웨는 기쁜지 먹던 그릇을 내려 놓고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 니들 다 들었지? 저 녀석도 이 몸의 요리 솜씨를 인정했다. 아, 이거 빨리 돈 모아서 고향에 음식점 하나 차려야 하는데." "강아지 음식점?" "테커, 니가 지금 이 몸의 요리를 개밥에 비유했냐? 얘들아, 테커가 내일 부터 굶고 싶덴다." "쪼잔한 자식. 먹을거 갖고 협박하기냐?" "얘들아, 내일 식사는 테커가 직접 만든데." "알았어, 이 자식아. 맛있다. 맛있어. 됐냐?" "으하하하하! 드디어 너도 이 몸의 요리 솜씨를 인정하는구나. 하긴 내가 요리를 잘하긴 잘하지." "그래. 그러니까 설거지도 니가 해라." "뭐!?" 사람들은 정말 신나게 떠들어댔다. 우리 조가 모여있는 이곳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커다란 웃음소리와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캠 프 파이어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라이레얼은 예쁜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빵을 반으로 뚝 잘라 나에게 건내 주었다. "자, 히로. 이것도 먹어." 난 라이레얼이 건네주는 빵을 받았다. 밀빵이었다. 빵을 수프에 찍어먹으 며 반대편을 보니 베네트는 진짜로 요루드에게 음식을 먹여 주고 있었다. 요루드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주는데로 받아먹었다. 주 위에 인간들이 전부 싱글이것만 이 커플은 그런거에는 신경도 안쓰는 듯 했다. 정말 뻔뻔하고 느끼하고 재수없는 커플이 아닐 수 없다. 아차, 나와 라이레얼은 커플에 속하나? 설마……. "히로, 아∼ 해봐." 라이레얼은 적당한 크기로 찢은 빵에 수프를 묻힌 다음, 먹여주려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아마도 베네트가 하는 짓을 보고 따라하고 싶었나 보다. 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됐어요. 저 신경쓰지 말고 라이레얼이나 먹어요." "왜 그래, 히로? 그러지 말고 아∼ 해보라니까. 누나가 먹여줄께." "됐다니까요. 그리고 이제부턴 저한테 신경끄세요." 일부러 신경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는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라이레얼은 굳어있는 내 얼굴을 보고는 재밌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히로? 설마, 나한테 화난거라도 있어?" "예." 라이레얼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금방 다시 웃으며 물 었다. "뭔데? 응? 뭣 때문에 화난건데?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진짜로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난건지 모른단 말인가? 정말로 무엇을 잘못 한건지 모른단 말인가? "됐어요. 라이레얼은 잘못한거 하나도 없으니까, 드시던거나 마저 드세요. 저한테 말걸지 마시구요." "자꾸 왜 그래? 내가 실수한게 있다면 말을 해줘야 할꺼아냐? 빨리 말해 줘. 응?" "자꾸 말걸지 말라니깐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조금 올라갔다. 라이레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난 갑자기 무안해져, 고개를 반대편으로 획 돌렸다. 잠시 후, 라이레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고개돌려." 딱딱한 명령조의 음성이었다. 난 라이레얼의 말을 따르기 싫어 그냥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다시 명령했다. "이쪽으로 고개돌려. 나 진짜로 화내기 전에." 아까보다 더 딱딱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정말 화가났는지 끝이 조금 떨렸 다. 쳇, 화내야 할 사람은 난데.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전까지의 상냥하고 귀여운 라이레얼은 없 었다. 대신 굳은 표정에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 있는 화난 라이레얼이 있을 뿐이었다. 라이레얼은 다시 명령조로 말했다. "빨리 말해." "뭘요?" 라이레얼의 긴 귀가 살짝 올라갔다. 아마도 화가 나면 귀가 올라가나 보 다. "몰라서 물어?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말하란 말이야." 라이레얼의 화난 표정을 대하자 상대적으로 난 쫄아들었다. 난 여자한테 너무 약하다.(예쁜 여자한테만) "라이레얼이야말로 몰라서 물어요?" "그래. 그러니까 빨리 말해봐." 무섭다. 아까까지 방긋방긋 웃던 여자가 순식간에 이렇게 화를 내다니. 내 가 화나게 만든건가? 미안해서 어쩌지? 뭐라고 사과를 하지? ……잠깐. 생 각해 보니까, 내가 이렇게 쫄 필요가 없잖아. 먼저 잘못한건 라이레얼인데. 그래. 괜히 주늑들지 말고 당당하게 말하자. 당당하게. "아까 마차에서 무슨 얘기 했어요?" "마차? 마차에서라면…… 린저가 여자한테 키스하려다 따귀 맞은 얘기. 카웨가 도박장에서 돈 안내고 튄 얘기. 음, 그리고 서로를 불살랐던 우리의 어젯밤 이야기. 또……." "그런 얘기 말고요." 라이레얼은 앙칼지게 물었다. "그럼 뭐!?"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단 말인가? 순진한 미성년자의 가슴에 못을 박은 그 얘기를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베네트랑은 무슨 얘기 하셨어요?" "응?" "베네트랑 무슨 얘기 하셨냐구요?" "내가 무슨 얘길해? 그냥 이런저런……." 라이레얼은 이제서야 생각이 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귀엽 고 깜찍한 표정을 지으며 베시시 웃었다. "헤헤, 그때 깨어있었어?" 난 라이레얼의 표정이 풀린 것을 확인하고,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 깨어있던 덕분에 라이레얼이 베네트한테 뭐라고 말하는지 똑똑히 들 었지요." 라이레얼은 갑자기 애교모드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아이잉, 뭘 그런거 가지고 그래. 그거 다 농담이었어. 설마 내가 베네트 같은 얘한테 우리 귀여운 히로를 넘기겠어? 히로는 내 맘 잘 알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라이레얼은 어느새 내 옆에 딱 붙어서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팔에 뭉클 거리는 가슴 감촉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난 얼굴 달아 오른 것을 감추기 위해서 삐진 척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흥, 그렇다면 아까 베네트한테 키스 당할뻔 할 때, 왜 보고만 있었어요?" "응? 뭐? 그런 일이 있었어? 난 몰랐는데." 라이레얼은 치사하게시리 모르는 척 잡아때고 있었다. 난 짐짓 화난 척, 목소리를 높혔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 때 그 모습을 보면서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 잖아요." "내, 내가 그랬나?" 아직까지 잡아 때다니, 이런 치사한. "예. 그랬어요. 제가 처절하고 애절한 눈빛을 보냈는데도 라이레얼은 그냥 무시했어요," 라이레얼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변명을 늘어 놓았다. "아하하, 그랬나? 하, 하긴 다시 생각해보니 기억이 조금 난다. 아이잉, 그 건 내가 안 할줄 알았기 때문에 그냥 있었던 거야. 만약 진짜로 할려 그랬 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렸다구." "흥, 할지 안할지 라이레얼이 어떻게 알았어요?" "쟨 애인까지 있는 몸이라구. 잘 봐. 지금도 저렇게 애인한테 열심히 먹여 주고 있잖아. 자세히 생각해봐, 히로. 내가 히로를 버릴 리가 있겠어? 응? 히로는 날 못믿는거야?" "예." "아앙, 그러지 마∼. 내가 잘못했어∼." 앗싸! 이제 주도권을 내가 잡았다. 난 애써 찰싹 달라 붙어 있는 라이레얼을 무시하며 말했다. "라이레얼이 뭘 잘못하게 있겠어요. 잘못이 있다면 다 멍청한 제가 잘못 이지요." 라이레얼은 내 팔에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미안해, 히로.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흥." "아잉, 용서해 줘∼. 아, 그러지 말고 우리 식사나 계속하자. 자 이 누나가 먹여 줄게. 아∼." 라이레얼은 아까 나한테 먹이려다 실패한 빵을 다시 내밀었다. 난 반대편 으로 고개를 돌렸다. "먹기 싫어요." "그러지 말고. 자 아∼." "배불러요." 라이레얼은 몇번이고 나한테 먹이려고 했지만, 난 계속 거절했다. 아직 화 가 안 풀린 이유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잘들 논다' 라고 말하는 듯한 주 위의 눈빛 때문에 도저히 받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베네트 커플 도 정말 대단하다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음식을 먹여주다니. 어? 상황이 바꿨네. 이젠 요루드가 떠주고 베네트가 받아먹고 있잖아. 으윽, 닭 살이다. 몇 번이나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레얼은 계속 나에게 빵을 내밀었 다. "히로, 그러지말고 먹어." "싫어요." "그럼 이거 하나만 먹어. 응? 그럼 더 이상 먹으라고 하지 않을게." "싫다니까요!" 싫다는데 라이레얼이 자꾸 권유하는 바람에 난 나도 모르게 짜증섞인 목 소리를 내뱉었다. 라이레얼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어졌다. 라이레얼은 고개를 떨구며 물었 다. "히로, 내가 먹여주는게 싫어?" "예." 흥, 이것도 다 쇼하는 거겠지. 이젠 더 이상 안 속아. "너무해." 뭐가 너무해, 뭐가? 순진한 미성년자의 가슴에 못을 박은게 누군데. 라이레얼은 들고있던 빵을 힘없이 떨어 트리고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약간 씩 몸을 떨기 시작했다. 뚝뚝- 땅에 물이 한, 두 방울씩 떨어졌다. 난 라이레얼의 입가를 보았다. 깨끗했 다. 이번엔 라이레얼의 눈가를 보았다. 드러웠다. ……아니, 이게 아니라 가 린 두손 사이로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대체 왜 우는 거지? 설마 내가 받아먹기 싫다고 해서? "저, 저기 라이레얼. 설마 우는 거에요?" "흑흑…… 흑, 흐윽." 내가 말을 걸자 라이레얼은 소리 내서 흐느꼈다. 라이레얼의 어깨가 위, 아래로 들썩였다. 라이레얼의 귄기는 축 늘어진 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내가 울린건가? 그럼 내가 달래줘야 하나? "저기 라이레얼. 울지 마세요." 난 조심스럽게 라이레얼의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내 손이 라이레얼의 어 깨에 닿는 순간, 라이레얼은 내 품으로 파고 들어와 안겼다. "흑흑……, 흐으윽……." 라이레얼은 나를 껴안은 채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더욱 서럽게 울어 댔다.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하는거지? 난 라이레얼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울지마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울지 마세요." 토닥토닥- 주위에 둘러 앉은 사람들은 식사를 끝마치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다. 환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잘생긴 남자(?)의 품에서 울고있는 미녀. 그 미녀를 달래주는 미남(?). 이거야말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날로 삭막 해져가는 우리 사회에 귀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야, 저 년 왜 저려냐?" "글세. 아마 설거지 하기 싫어서 저러는게 아닐까?" "그럼 설겆인 누가 하지?" "글세." "만든 것도 너니까 설거지도 니가 해라." "죽을래?" 날로 삭막해져가는 사회에 인간의 최소한의 감정마저 메말라 버린 테커와 카웨였다. "흑흑, 흐으윽……, 흐윽흐윽." "울지마요. 울지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토닥토닥-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한걸까? 그거 안 먹겠다고 한게 그렇게 잘못하건 가? 난 빠르게 라이레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어르고 달래주 자 라이레얼은 조금씩 울음을 멈추었다. "흑흑……, 끄윽…… 흑, 흑 끄윽……." 라이레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있 었다. 라이레얼의 얼굴이 이 모양이라면……, 젠장. 역시나 예상했던데로 내 남방도 라이레얼의 눈물과 콧물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 면, 망토라도 입고 있을걸. 괜히 벗었네. 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라이레얼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눈을 닦아 주고 입을 닦아주고. 앗! 그리고보니 이거 아까 침닦았던 건데. 얼굴을 대충 닦고, 손수건을 코로 가져갔다. "라이레얼, 흥!" "패앵-!" 건더기가 조금 많이 나오는군. 난 건더기가 손에 묻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접었다. "괜찮아요,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녀의 약간 부운 눈과 축 늘어진 귀 가 내 마음을 안쓰러워 보였다. "히로……." "예." "히로는 내가 싫어?" "아, 아니요." 라이레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럼 좋아?" "저……." 라이레얼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래. 히로는……, 히로는……." 라이레얼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난 놀라서 라이레얼의 어깨를 잡고 외쳤 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정말 너무너무 좋아요." 라이레얼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정말?" "예, 예. 물론이에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려니까, 식은땀이 다 나는군. "그럼 이거 먹어." 라이레얼은 이젠 다 식어버린 수프와 빵을 내밀었다. 내가 두손으로 그것 을 받아들려고하자 라이레얼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먹여줄게." "예? 아, 저기…… 괜찮아요. 그냥 제가 알아서 먹을께요." "내가 먹여주는게 싫어?" 설마 다시 울려는건? 난 두 손을 저으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아니, 절대 그런건 아니에요! 다만……." "다만?" "주위에 사람들도 많고하니, 다음……." 라이레얼의 귀가 급속도로 처졌다. "……이 아니라, 지금 먹여주세요. 사실 아까부터 라이레얼이 먹여주길 바 라고 있었어요." "정말? 알았어. 히로가 그렇게 까지 말하니까 내가 먹여줄게." 라이레얼의 귀는 어느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다. 라이레얼은 방금 울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망할, 완전히 속았다. "자, 아∼." 젠장, 내가 미쳤지. 여자한테 또 속다니. 다시는 여자한테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아∼ 여자라는 존재가 무섭다. 여자라는 존재가 싫어진다. "아∼." 난 눈물을 머금고 입을 벌렸다. 라이레얼은 입안으로 음식을 넣어주었다. 난 그것을 열심히 씹어 먹었다. 주위에 사람들은 우리를 '잘 논다, 잘 놀 아.'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너무 쪽 팔린다. "잘했어 히로." 내가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라이레얼은 생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힘든 식사는 끝이 났다. 정말 다시는 하기 싫은 경험이었다. 끔찍한 하루였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였다. 더 큰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거지는 누가 하지?" "글세." "니가 해라." "싫어." "그럼 누가 하지?" "가위바위보나 제비뽑기로 정할까?" "굳이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그럼 누가 할 놈이라도 있냐?" "설거지란 말이지……." 테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다음 말을 이었다. "사회적 통념에따라 제일 늦게 먹은 놈이 하는 법이지." 주위 사람들은 공감하는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제일 늦게 먹은 놈이 누구지? 설마……. "야, 히로! 이것들 다 냇가로 들고가서 깨끗이 씻어라!" 젠장. 망했다. 황당해하는 내 눈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라이레얼의 모습이 비칠 뿐이었다. "잘 씻어와, 히로." "예……." 라이레얼은 씻어야 할 그릇들을 냄비 속에 던져 넣었다. 그것도 모잘라 정말 너무 친절하게 냇가의 위치를 가르쳐 주며, 열심히 씻으라고 격려까 지 해주었다. 정말 너무 고마운 라이레얼이다. 흐윽, 난 그래도 예의상 도와준다는 말 정도는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런식으로 나오다니……. 인간성 드러나요, 라이레얼. 난 커다란 냄비를 낑낑거리며 들고가다 뒤로 돌아 처절하고 애절한 눈빛 으로 라이레얼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뭐야, 그 눈빛은? 설마 연약하고 아름다운 나보고 이 추운날에 찬물에 손을 담그라는건 아니겠지?" 난 용기를 내서 말했다. "맞는데요." 연약? 게다가 지금은 봄이여서 별로 춥지도 않은데……. 라이레얼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긴 귀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미안해, 히로. 나 히로를 도와주고 싶지만……, 그렇지만……, 나 사실 어 렷을 때부터 큰 병을 앓고 있었어." 난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슨 병인데요?" "찬물에 손을 담그면 죽게되는 병이야." 휘이잉∼ 아, 춥다. 라이레얼은 농담을 해도 하필 이렇게 썰렁한 농담을……. "하하, 지금 그거 웃자고 한 소리죠?" "진짜야." 난 너무 황당해 다시 물었다. "그럼 세수나 목욕은 어떻게 해요?" "그 땐, 예외야. 이 병은 설거지하려고 손을 담글 때만 발병하거든." 아∼, 무지하게 편리한 병이다. 진짜 치사하다, 라이레얼.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이런 꼼수를 쓰다니. 정말 인간성 드러난다. "정말 미안해, 히로. 하필 이런 병에 걸려서 히로를 도와주지 못하다니. 만약 히로가 내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면……, 난 죽어도 좋아. 내가 죽더라도 나 히로가 설거지 하는 걸 도와줄 게." 라이레얼은 어느새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 한쪽에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파옴을 느꼈다. "됐어요, 라이레얼.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사실 저 설거지 아주 잘해요. 제 주특기가 설거지고 제 취미도 설거지고, 제 흥미도 설거지고, 제 인생의 기쁨도 설거지에요." 라이레얼은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라이레얼 손에 찬물이 묻는다면 제 가슴이 찢어질거에요. 제가 옆에 있는 한은 절대로 라이레얼 손에 찬물 묻히는 일은 없을꺼에요. 그러니 라이레얼은 제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쉬세요. 라이레얼이 우는 모 습을 보니 제 마음이 너무 아파요. 라이레얼은 웃는 모습이 더 예뻐요. 아 름답게 웃는 라이레얼의 모습이야 말로 저에겐 어둠속에 내려진 한줄기의 빛과도 같아요. 그러니 라이레얼의 아름다운 미소를 제게 보여주세요. 라이 레얼의 웃음으로 저에게 행복과 기쁨을 선물해주세요." 난 말을 마치고 라이레얼은 눈치를 살폈다. 라이레얼은 눈물을 흘리는 가 운데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욱." "우웨엑." "우욱, 느끼해 죽을 것 같아. 우우욱." "흐억, 저 자식은 완전 버터야." "내 평생 저런 역겨운 대사를 듣게 될 줄은……. 으윽, 속이 느글느글해서 죽을 것 같아." ……주위에 사람들은 방금먹은 수프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라이레얼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씩 나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그녀가 내 앞에 서게되자 난 두손으로 그녀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 었다. 라이레얼은 자신의 얼굴에 닿아있는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고마워, 히로. 그럼…… 이걸로 빡빡 문질러. 절대 건더기 묻어 있지 않 도록. 알았지?" 난 손을 펴 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철수세미였다. 철수세미……. 또 속았다. 또 속았어. 또 속았단 말이다! 어떻게 알면서도 속을 수가 있 는 거지? 내가 미쳤지. 라이레얼 성격 뻔히 아는데, 괜히 분위기에 휩쓸리 는 바람에……. 난 방금전 내가 내뱉었던 대사를 곰곰히 되씹어 보았다. 그러자 속이 느 글느글해지면서 위 속에 음식물이 역류할 조짐을 보였다. 으윽, 내가 진짜 미쳤었나보군. 난 하늘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하늘이시여. 제가 정말로 저런 느끼한 말들을 내뱉었단 말입니까? 어이하 여 저를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전 버터가 아니란 말입니다! 냇가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이미 설거지를 끝마쳤는지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 봄이여서 그런지 냇가의 물은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난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철수세미로 쇠그릇을 빡빡 문질렀다. 다행히 아직 해는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산 너머에 걸려있었다. 난 해가 지기 전 에 끝낼 생각으로 빠르게 그릇들을 닦았다. 참, 태어나서 설거지해보긴 또 처음이군. 요리 한적은 많아도 설거지 한적 은 한번도 없는데. 진짜 이곳에와서 안하는 짓이 없다, 안하는 짓이 없어. 잠시 후, 나의 엄청난 노동의 대가로 번쩍거리는 그릇들과 수저, 냄비가 탄생했다. 오옷! 내가 닦은 거지만 진짜 깨끗하군. 난 왜이리도 청결하단 말인가? 난 깨끗이 닦은 그릇들을 바라보며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 수건을 꺼내 물속에 넣고 열심히 비볐다. 라이레얼이 콧속에서 나온 건더기들이 물위를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것이 라이레얼의 콧물이란 말인가? 참 누리끼리하군. 앗! 그리고보니 옷 에도 묻었잖아. 남방을 물속에 넣고 빨기에는 날씨가 조금 추웠다. 그리고 나중에 말리기 도 귀찮고. 난 손에 물을 묻혀 조심스럽게 콧물이 묻은 부분을 문질렀다. 그렇게 몇번을 하고 나자, 그런데로 깨끗해졌다. 어차피 검은색이여서 티도 별로 않날 것이다. 설사 난다해도 신경쓸 놈도 없겠고. 라이레얼의 눈물과 콧물이 묻은 남방이니까 기념으로 간직하자. 내가 그 무거운 냄비와 그릇들을 들고 낑낑거리며 다시 모닥불로 돌아왔 을 때, 테커를 제외한 전원은 침낭에서 자고 있었다. 요루드와 베네트는 재수 없게 시리 서로를 껴안고 자고 있었다. 하지만 베 네트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엄청나게 불행해 보이는 요루드의 얼 굴을 보자, 진짜 불쌍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 지만……. 라이레얼은 그 옆에서 정말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잠들어 있었다. 잠자는 표정하나는 정말 예술이군. 성격도 저 외모만큼만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난 한쪽에 냄비를 내려 놓고, 모닥불 주위에 앉으려 하였다. 그러자 테커 는 손을 길게 뻗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넌 저쪽으로 가서 적당한 곳에 불피우고 있어." "뭐?" "저쪽가서 불피우라고. 여기서는 뭐가 공격해오는지 잘 안보이잖아. 저쪽 에서 잘 지키고 있다가 수상한 놈이나 맹수들이 공격해오면 신호해." "내가 그걸 왜 해야 되는데?" "니가 불침번이니까." 하긴, 숲속에서 자는거니까 누군가가 불침번을 서야겠군. 그런데……. "왜 내가 불침번이야?" "누가 너 보고 혼자하래? 니 다음은 요루드니까 2시간 정도 지나면 깨 워." 나 없는 사이에 순서까지 정해놨나? 난 망토와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순서는 누가 정한거야?" 테커는 알면서 뭘 묻냐는 투로 대답했다. "라이레얼." 역시……. 한군데도 빠지는데가 없어요. "그 년 한테 고맙게 생각해, 임마. 그래도 너 생각해 준다고 억지로 첫번 째로 넣어줬으니까." "그건 왜?" 테커는 너 불침번 처음 서보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난 내가 처음이 든 말든 니가 뭔상관이냐는 눈빛으로 테커를 보았다. 테커는 불을 뒤적거 리며 설명해주었다. "불침번 설 땐, 첫 번과 마지막이 제일이지." "어째서?" "넌 자다 일어나서 불침번서고 다시 자면 기분이 좋겠냐?" "……." 아∼ 그렇구나. 순서정하는데도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단 말인가? 그럼 라이레얼이 정말 내 생각해줘서……. 그래. 라이레얼은 날 좋아하고 있는거 야. 날 단물 빠진 껌으로 생각하는게 아니였어. 흑흑, 난 그것도 모르고 그녀를 울리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 죽 일 놈이야. 용서해줘요, 라이레얼. 나의 사랑이 부족해 그대를 의심했군요. 그대는 이 리도 날 생각하고 있었건만……. 이제부턴 그대의 사랑을 무조건 믿겠어요. 그러니 저의 무지를 용서해주시고 저의 사랑을 받아주세요. 고마워요, 라이레얼. 그대가 나에게 보여준 사랑은 제 가슴 속에 영원이 간직되 지친 내 인생에 한줄기 빛이 되어줄꺼에요. "야, 너 미쳤냐? 갑자기 왜 헤벌레 웃으며 눈물을 흘리고 지랄이야?" 눈물? 난 눈가를 만져보았다. 촉촉한 물기가 손에 느껴졌다. 아∼ 너무 감동을 하다보니 눈물이 다 흘러내렸구나. 난 너무 감성이 풍 부해서 탈이라니까. 난 두 손으로 눈물을 쓱쓱 지웠다. "라이레얼은 몇번째야?" 라이레얼, 설마 저를 첫 번째로 밀어주신 대신, 자신은 두 번째나 세 번째 를 택한건 아니시겠죠? 만약 그렇다면 제 마음이 너무 아플꺼에요. 테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년은 불침번 안서." 난 놀라서 물었다. "왜?" "시간을 계산해보면, 한명이 빠지게 되어있거든. 그래서 제비뽑기를 했지. X표시가 된걸 뽑는 사람은 빼주기로. 그러자 라이레얼이 그러더라고. 히로 는 내꺼니까, 히로 것도 내가 뽑아야 된다고. 그래서 그냥 뽑으라 그랬지. 라이레얼이 뽑은 것 중 하나에 X표시가 있었어. 그러자 그 년은 널 첫 번 째로 밀은 다음, 자신은 쏙 빠졌지." "자, 잠깐 그렇다면 내가 빠질 수도 있었단 말 아냐?" "그렇지." 이럴 수가! 내 그대를 믿었건만……. 어쩜 인간이 이렇게 치사하게……? 라이레얼은 인간이 아니라 하프엘픈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신의 남 자를 장난감 처럼 가지고 놀면서 이용해 먹을 수가 있는거지? 그대를 잠시나마 믿었던 제가 바보였어요. 제가 더 이상 누굴 탓하겠습니 까. 전부 멍청한 제 잘못이지. 흑흑, 라이레얼. 정말 미워요. 난 힘이 쭉 빠진 다리를 힘들게 옮겼다. 뒤에서 테커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야! 불씨는 가져가야지." "필요없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평평하고 시야가 넓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대충 주위에서 나 뭇가지를 모아 라이타로 불을 붙였다. 장작이 그리 많지 않아 작은 불이었 지만, 시야를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별로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에, 난 담배를 쪽쪽 빨며 청승맞게 앉아 있었 다. 저벅저벅- 누구지? 난 왼손으로 허리에 매어져 있는 청룡도를 움켜쥐며 몸을 일으켰다. 한동 안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하고 있자, 어둠속에서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곧, 그 인영은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갑옷으로 상반신을 두르고,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있었지만,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표 시하고 있는 남자였다. "이봐, 눈 좀 풀라고. 심심해서 얘기나 하러왔더니 그렇게 째려봐서야 ……." 내가 언제 노려봤다고……, 어쨌든 같은 편인 것 같군. 난 굳은 표정을 풀고, 다시 바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내가 경계를 푸는 모습을 보고는 씩 웃으며 다가와 적당한 곳에 걸터 앉았다. 그는 잠시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질겅질 겅 씹기 시작했다. 껌인가? "그건 뭐야?" "이거?" 내 질문에 그는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빼서 들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오 징어 다리 같이 생겼는데 방금까지 입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지, 침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응." 그는 그것을 다시 입안에 넣으며 말했다. "육포. 왜? 너도 먹을래?" 육포? 육포라면 고기를 훈제해서 말린건가? 아무튼 좋지. 안 그래도 아까 부터 입이 심심했는데. 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주머니에서 육포를 한 움큼 집어 나에게 던졌다. 난 그것을 받아, 이젠 꽁초밖에 남지 않은 담배를 뱉어내고 육포를 씹었다. 딱딱한 고기에 씹을 때마다 짠물이 빠져나오는게 상당히 괜찮았다. 난 육포의 맛을 음미하며 그를 보았다. "아까 입에 물고 있던건 뭐 였냐?" "담배." "담배?" 난 대답을 하는 대신, 한 개피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무게가 가벼워서 궤 도가 약간 휘어졌지만, 그는 한 손을 길게 뻗쳐 정확히 잡아 냈다. "특이하군. 담배를 종이에 말아서 피다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육포를 뱉어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모닥불 안에 있는 장작을 하나 꺼내들어 불을 끈 다음 남아있는 불씨로 불을 붙였 다. "후우∼. 맛이 끝내주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놈 중에서도 이렇게 담배를 피우는 놈이 있었지. 담배는 종이에 말아서 피워야 제맛이라나?" 오호, 이 세계에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누군데?" 그는 담배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몰라. 이젠 기억도 잘 안나. 이름이 뭔지도 기억이 안나고, 어떻게 생겼 는지도 기억이 안나. 기억나는 거라곤 그냥 담배를 종이에 말아서 피웠다 는 사실 뿐이지." 잠깐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쓸쓸한 빛이 스치고지나갔다. "다시 만나고 싶어?" "별로. 그리고 만나고 싶다고 해도, 만날 수 없어. 그 녀석은 연기가 되 하늘로 날아갔거든. 난 그 모습을 보면서 녀석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종 이담배를 피웠지. 그때 그 담배 맛 이란……. 내가 피워본 것 중 최고였어. 내 평생 그 보다 맛있는 담배는 피워본 적이 없었지." "……그래."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러냐? 갑자기 둘 사이에 무거운 분위기가 깔리자, 그는 부담스러웠는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이봐,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어차피 옛날에 뒈진 놈인데 신 경써서 뭐해. 아! 그러고보니 내 소개도 안 했군. 난 카젠이라고 한다. 보다 시피 칼 하나가 갖고 밥빌어먹는 용병이지." "난……." 내가 자기소개를 할려는 찰나, 그는 손을 휘저으며, 내말을 끊었다. "아아, 알어, 알어. 넌 히로지?" "어……." 저 녀석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히로……. 칼로 럴크 목을 자르고, 술로 럴크 몸을 난도질한 놈." 내가 럴크 목을 잘랐던가? 그런적 없던 것 같은데……. 아무튼 이 몸의 업적에 대해서 잘알고 있구만. 그나저나 저 놈이 그걸 어떻게 안거지?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더니……. 으하하하! 나의 용감무쌍함이 어느새 만천하 에 소문이 뻗쳤구나. "하룻밤 동안 라이레얼과 일곱 번 한 놈." "으헉!" 설마 그 일도 소문이 났단 말인가? 카젠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입에 문 담배를 뱉어냈다. "뭘 그리 놀라고 그래? 난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 사실을 니가 어떻게……?"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여기 모인 놈들 중에 그 사실 모르는 놈도 있 냐?" "그, 그 말은 전부 알고 있다는……?" "당연하지. 여기 모인 놈들 중, 그 사실 모르는 놈은 단 한놈도 없어. 애 새끼들 아까 내내 그 이야기 하던데. 라이레얼이 순결한 애 하나 꼬셔서 밤새 그짓꺼리했다고." "……." 흑흑,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더니……. 나 이제 쪽팔려서 어떻게 살지? 과 거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장가가기도 힘들텐데……, 아무래도 무슨 방 법을 쓰던지간에 라이레얼과 멀어져야겠다. 그래. 누구도 날 알아볼 수 없 는 곳으로 가서, 과거를 숨기고 새롭게 출발하는거야! 이번엔 좀 성격 좋 고, 순종적인 여자랑 사궈야겠다. 그런데……, 내 얼굴로 그게 가능할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난 저 하늘에 새처럼 자유로왔는데, 순결을 짓밟힌 그 날밤 이후로, 라이레얼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아∼ 처량한 내 신세! 난 한숨을 푹푹쉬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왠지 내 신세가 사그 라드는 모닥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모닥불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할 생각으로, 장작을 집어 던지려 하였 다. 그런데……, 장작이 없다. 젠장! 좀 많이 줏어다 놀걸. 카젠은 찡그린 내 인상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다가 장작이 없어서 그런다는 사실을 알아 채고는 몸을 일으켜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갔 다. 모닥불이 거의 사그라 들 때 쯤, 그는 장작을 잔뜩 안고 나타났다. 너도 도움이 되는구나. 우리는 모닥불을 다시 크게 키운 다음, 담배를 피며, 육포를 씹으며 실없 는 대화를 나누었다. 의미없는 대화에 슬슬 질려갈 때 쯤, 어둠속에서 한 곱상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젠은 손을 들며 그 청년을 아는 채 했 다. "어, 요루드." "아직 시간 다 안된 것 같은데……." 요루드는 조금 쑥쓰러운지, 뒷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조금 일찍 깨어나게되는 바람에……." 요루드는 나와 카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카젠은 갑자기 야리꾸리한 미소를 지으며 요루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흐음∼, 어째서 요루드가 빨리 깨어났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일찍 일어 나게 되었을까?" 카젠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요루드를 훝어 보았고, 요루드는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일 없었어요." 엥? 지금 무슨 소리하는거야? 카젠을 보니 그 역시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그냥 장난 삼아 던진 말인데, 저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다니……. 카젠은 짐짓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난 아무것도 말한적 없는 데……." "……."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요루드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하지만 너 무 늦었어. "대체 뭘까? 무슨 일이 있었길레 요루드가 일찍 깨어난 걸까? 아∼ 궁금 하다."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믿어주세요." 저렇게 말하니까 꼭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같잖아. 카젠은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오호∼ 그렇게 말하니까, 더욱 궁금해지는군. 야, 넌 어때?" 왜 날 끌어들이시나? "나도 궁금해."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도 안오고 특별히 할 일도 없 었기에, 요루드 얘기라도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요루드를 보았다. "자, 말해." "뭐, 뭘요?" 카젠은 인상을 우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뭐야? 너 설마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그냥 넘어갈 셈이야? 나 궁 금한건 못참는거 알지? 어? 알아? 몰라?" 요루드는 잠시 당황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저기……, 그게……." "뜸들이지 말고 빨랑 말해." 카젠은 정말 궁금해서 미치겠는지 계속 재촉했다. 요루드는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그게……, 제가 베네트랑 같은 침낭에서 잤거든요." "나도 봤어." "그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그런데 갑자기 베네트가…… 몸을 더듬기 시작했어요." "몸을 더듬어?" "……예. 가슴을 더듬고……, 허벅지를 쓰다듬고……, 그리고……." 갑자기 주위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와 카젠은 요루드에 얘기에 온 정 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요루드는 부끄러운지 새빨게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거기도……." "……." 거기? 거기라면……. "크크크…… 크하하하!" 카젠은 배를 붙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그래서……, 베네트가 거기를 더듬으니까, 무서워서 도망왔다는 거냐? 크하하하." 별로 웃기지도 않는데……. 요루드는 발끈해서 외쳤다. "그, 그것 때문에 도망나온건 아니에요!" 카젠은 웃음을 멈추고 요루르들 보았다. "그럼 뭔대?" 요루드는 고개를 푹숙이며 대답했다. "베네트가……, 갑자기 하고 싶다면서,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길 래……, 그래서……." "푸하하하! 그러니까 여자랑 그짓하기 무서워서 도망나왔다는거냐? 하하 하……." 카젠은 이젠 아예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고 있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 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요루드를 보았다. 흑흑, 어쩜 이리도 내 처지와 비슷할까? 정말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낀 다. "참, 근데 베네트는 어쩌다 만나게 된거야?" 요루드는 말하기 좀 뭐한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얘기하자면 좀 길어." 흠, 길다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긴 얘기 좋아해." 요루드는 아까보다 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얘기하자면 시간이 좀 걸려……." "나 시간도 많아." "나도 듣고 싶군. 대충 어떻게 된건지는 알지만, 그래도 본인한테 자세히 듣는 편이 더 좋겠지." 어느새 카젠은 웃음을 멈추고 요루드의 얼굴을 빤히 처다보았다. "아, 저기……, 그게……." 요루드는 몇번이고 말을 더듬더니,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하인드 스토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3년전……. 장소는 산적 토벌을 위해 각지의 용병들이 모인, 주점 '술집'. "업종과 이름이 무지하게 잘 어울리는군." "어. 나도 전에 그런 집 본적있어." "뭐였는데?" "보석상점이었는데 이름이 '보석상점'이더라구." "개성없는 놈들. 야! 요루드 계속해." "……." 곳곳에서 모인 다양한 용병들이 술을 퍼마시고 있는 가운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점에서 사람 들락날락 거리는 게 뭐 신경 쓸 일이겠냐만은 대부분에 용병들은 방금 들어온 남자에 대해 서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 이유는 남자의 외모 때문이었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에 마른 몸매. 잘만 꾸미면 여자라고 우겨도 될듯한 남자. 남색을 즐기는 놈들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며 요루드에게 접근하려하였 다. 요루드는 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 았다. 남색을 즐기는 몇몇 용병이 침을 질질 흘리며, 요루드에게 접근하려는 찰 나, 한 여자가 요루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체 누군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연 베네트다. "남자가 남자한테 접근해?" "몰라서 묻냐? 용병들은 예쁘게 생겼으면 남자, 여자 안가려." "……그러냐?" 무서운 것들……. 나도 조심해야겠다.(?) "당연하지. 게다가 여자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전문적으로 남자만 노 리는 놈들도 있어." 미친 변태들. "그런데 요루드는 용케 멀쩡하네." "그야, 당연하지. 어떤 미친놈이 베네트 애완동물을 건들겠냐?" "제, 제가 왜 애완동물이에요!?" "그럼 라이레얼은 왜 안 건드리는거야? 미모로 따지자면 라이레얼만한 여 자도 없을텐데." "그 년이 죽이게 생기긴했지. 흐흐흐, 그 빵빵한 엉덩이하며,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이라. 흐흐, 벗겨 놓으면 더 볼만할텐데." "남의 여자가지고 이상한 생각하지마." "야! 라이레얼이 왜 니 여자야?" "……." 앗! 내가 무슨 헛소리를…… 라이레얼이 내 여자라니……, 안돼. 난 절대 라이레얼을 좋아해서는 안돼. 내 이상형은 귀엽고 순종적인 여자야. 나이는 한 5살 정도 연하……. 이렇게 보면 라나가 딱 내 이상형인데……. 아∼ 라 나가 보고 싶다. 라나야! 넌 지금 무엇을 하며 지내니? 이 오빠는 니 생각 에 잠 못이루고 있단다. 5년만 지나면 내게로 와라. 이 오빠가 귀여워해줄 게, 흐흐흐. 이런 내가 어린애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한거지? "아무튼 라이레얼은 아무나 건들 수 없어. 그 년 생긴 것과는 다르게 한 가닥 하거든." "라이레얼이?" "그래. 그 년 팔 두께가 내 반밖에 안되지? 하지만 힘은 그년이 나보다 더 쎄. 전에 손이라도 한번 잡아볼려고 팔씨름하자고 했다가,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 라이레얼이 그렇게 쎄단 말이야? 그러고보니 그날 밤 라이레얼이 내 어깨 를 눌렀을 때, 난 꼼짝도 못했었지. 하아∼ 라이레얼이 점점 무서워진다. 나 무사히 라이레얼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잘못하면 평생 코껴 서 살아야 할 것 같은데……. "힘뿐만이 아냐. 그년 칼질과 활질도 장난아니게 잘해. 거기다가 그 년을 여신처럼 떠받드는 놈들도 있으니……." "뭐!?" "그년에 추종자들이 꽤 있다고. 용병들이 믿을거라곤 돈과 동료뿐이지. 돈 은 이 짓거리 하는 목적이고 동료는 목숨을 지켜주니까. 같이 싸우는 놈 실력이 좋아봐. 그럼 살아남을 확륙이 높아저. 라이레얼이라면 얼굴도 이쁘 고 실력도 왠만한 놈들보다 좋지. 이런 년이 동료가 되면 환상이지. 그년 덕에 목숨구한 놈들도 꽤 돼. 활질이라면 따라올자가 없으니까. 만약 누군 가가 라이레얼을 강간했다치자. 그럼 그 녀석은 열흘도 못가 사지가 찢기 고 눈깔이 뽑힌 변사체로 발견될걸." "……." 라이레얼을 강간한 놈은 그렇다치고, 강간당한 놈은 어떻게 되는거지? 설 마 나도 내일 쯤 변사체로 발견되는거 아냐? "앗차! 어쩌다 이런 얘기로 빠져들었냐? 요루드! 계속." "……그러니까 어디까지……, 아! 베네트가 옆에 앉은데 까지였죠?" 요루드한테 잘된 일인지 안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베네트가 옆에 앉자, 다른 남자 용병들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괜히 베네트 랑 붙어서 좋을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베네트도 한가닥 하나보네." "당연하지. 안 그러면 이 빈약한 놈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겠냐?" "무슨 말씀이에요? 저도 칼이라면 꽤 다룹니다." "시끄러, 임마. 베네트가 너 구해준게 한, 두 번이 아닌데 무슨 헛소리야? 아무튼 얘기나 계속해." "알았으니까, 자꾸 말 끊지 마세요." "내가 끊었냐? 저 녀석이 끊었지." "아무튼 한번만 더 끊으면 저 얘기 안합니다." 베네트는 곱상하게 생긴 요루드를 보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먹음직스럽 게 생긴 남자가 제발로 굴러들어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요루드는 베네트의 웃음을 보며 이유 모를 오한을 느꼈다. 베네트는 의자 를 끌어 요루드 옆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주인에게 말해 있는 술, 없는 술 다 시켰다. "야! 너 이름이 뭐야?" "……." 요루드가 대답을 하지 않자, 베네트는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를 쫙 깔며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니까?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어?" "제, 제 이름이요……?"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어?" 요루드는 베네트의 넘처나는 박력에 감동을 받았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 리로 이름을 불었다. "저, 저는…… 요루드라고…… 하는데……요." 베네트는 요루드의 몸을 위, 아래로 훝어보며 말했다. "좋군." (해석 : 오늘 밤 가지고 놀기 '좋' 게 생겼 '군'.) 요루드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베네트는 은근 슬쩍 요루드의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요루드는 정말 싫었지만, 베네 트가 무서워서 뭐라 말도 못하고 그냥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주인이 끙끙거리며 술을 날라오고, 베네트는 요루드에게 술을 권 한다. "마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당시에도 술을 좋아하지 않던 요루드는 당연 거절 한다. 그러자 베네트는…… "뭐야!? 너 지금 내가 권하는 술을 거절하겠다는거야!?" "저, 저기 전 그게 아니라……." 쾅-!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권한 술을 거절한다는건 나를 무시한다 는 것과 다름없어!" 요루드는 그 웃기지도 않는 말에 입을 쩍벌린다. '그런 의도 확대의 오류를…….' 하지만 어쩌겠는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이 있는데. "저…… 그런 뜻은 아니에요. 제가 술을 못해서……." 쾅-! "닥쳐! 술 못하고 말고가 어딨어!? 마시라면 무조건 마시는거야!이 술을 거절한다면 나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이겠어. 자, 선택해. 나랑 맞짱 뜰거냐? 아니면 술을 마실꺼냐?" 그래도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선택권을 준다는 것은 좋은 생 각이긴 하지만, 어느걸 선택하든지 요루드에게 좋은건 하나도 없다. 이건 마치 '칼로 목을 찌를래? 사약을 마실래?' 라고 물어보는 것과 똑같은 것이 다. 당연 요루드는 이 말도 안되는 양자택일법에 놀라 다시 한번 입을 벌렸 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이런 흑백논리의 오류를…….' 요루드는 술이 싫었다. 정말 마시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맞짱뜨는게 낫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루드는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쾅-! "마실꺼야!? 안 마실꺼야!?" 요루드는 금이 쩍쩍가는 탁자를 보는 순간 마음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목숨은 소중한 법이다. "저, 마실께요. 사실 아까부터 마시고 싶었어요." "크하하, 당연 그래야지." 요루드는 눈을 꼭 감고 그 쓰디쓴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잘 마시는군. 자, 한잔 더 마셔." "예?" 당연 한잔이 끝이 아니였다. 베네트의 목표는 눈앞의 남자를 술로 혼수상 태로 만들어 놓은 다음, 방으로 끌고가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것이었으 므로……. 요루드는 베네트가 너무 무서운 나머지 권하는데로 술을 받아마 신다. 하지만 여기서 베네트가 한 가지 착각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요 루드가 말술이었다는 점이다. 베네트는 점점 초조해졌다. 탁자 위의 술은 점점 줄어드는데 눈 앞에 있 는 장난감(?)은 베터리가 떨어질 기미를 안 보였다. 이건 완전히 에너자이 저 저리가라다. 참다 못한 베네트는…… "어! 저게 뭐지?" "예? 어디……." 퍽-! 요루드의 뒷통수를 후려 갈겼다.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공격받은 요루드는 당연 기절했고, 베네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요루드를 들 쳐 업고 방으로 올라갔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다." "그야……, 너도 그런식으로 당했으니까," "허억!" 여자가 접근해와서 술을 퍼먹이고 방으로 끌고간다……. 어디서 많이 들 어본 스토리다 했더니, 이제보니 내 얘기잖아. "어, 어떻게 된거지?" "베네트가 한 걸 보고 라이레얼도 한번 해보고 싶었나보지." "……." 진짜 할말 없다. 무서운 여자들……. "그럼 너도 강간 당한거야?" "응……." "그래서 지금까지 끌려다니는거야?" "으응……." "그럼…… 나도 끌려다녀야 되는 거야?" "아마, 그럴걸." "……." "야! 잡담은 그만하고 얘기나 계속해." 요루드는 조용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베네트는 요루드의 모습을 보며 침을 질질 흘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요루드의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 작했다. 상의를 다 벗기고, 하의를 벗기려할 때, 요루는 깜짝 놀라 깨어났 다. "여, 여기가 어디죠?" "내 방." "예? 제가 왜 여기……." "내가 데리고 왔으니까." "아,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볼테니……." "누구 맘대로 나가? 어?" "예?" "들어올 땐 니 맘대로 들어왔지만 나갈 땐 그렇게 안돼." "제, 제가 언제 제 맘대로 들어왔나요?" "시끄러! 닥치고 옷이나 벗어!" "예?" "벗어!" "아, 안되요. 저, 전……." 요루는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나처럼(?) 필사적으로 저항 했다. 하지만 베네 트는 장난감(?)의 반란을 진압한 뒤, 재미있게 가지고 논다. 다음날. 요루드는 침대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고 있고, 베네트는 요루드 어깨를 감싸안은 채 개운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흑흑,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시끄러. 너도 좋았으면서 뭘 그래?" "흑흑……, 흑흑……, 으아아앙." "닥쳐! 남자가 그런 일 가지고 질질 짜냐?" "으아아앙." "어쭈, 계속 울어? 야, 그쳐. 안 그쳐?" "으아아앙." "으아! 울지말라니까! 계속 울면 눈깔을 뽑아버린다!" "……뚝." 베네트는 흑끅거리며 울음을 참고있는 요루드가 얼마나 귀여운지 와락 껴 안았다. 그리고 요루드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흐흐흐, 너 귀여운게 꽤 마음에 드는데……. 좋아, 앞으로 넌 내 애인이 다." 요루드는 우는 와중에도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베네트를 처다본다. 베 네트는 요루드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그렇게 기뻐? 넌 내 애인이니까, 이제부터 내가 영원히 널 지켜줄게. 도망치거나, 다른 년한테 한 눈 팔면 죽는다는거 알 지?" '영원히…….' 요루드는 이 단어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완전히 코꿰었다는 것을. 그리고 영원히 이 여자의 마수에서 놀아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는 기절했다. "……그렇게 해서. 전……." 요루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요루드의 눈이 촉촉히 젖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 요루드. 뭐 그런거 가지고 울고 그래?" 카젠은 아까 전 나에게 강탈해간 담배를 길게 빨며 말했다. "요루드는 그렇다치고 넌 왜 우냐?" 울어? 내가? 난 깜짝 놀라서 내 눈가를 만져보았다. 언제 흘러내렸는지 손에 물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너무 공감이 가는 얘기여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나 보다. 난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은 다음, 요루드에게 다가가 살짝 껴안았다. "울지마, 요루드. 너만 그런 일 당한거 아니니까." "……흑." 요루드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계속 울었다. 요루드가 우는 모습을 보 니 나도 점점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는 동병상련이라네∼. "미친놈들. 아주 지랄을 해라." 카젠은 역겹다는 투로 말한 뒤, 몸을 일으켰다. 난 요루드의 울음이 멈춘 걸 확인 한 뒤, 일어나 물었다. "어디가?" "자러. 시간 다 됐어. 잘 자라." 카젠은 올때와 마찬가지로 숲속으로 사라졌다. 난 멍히 그 모습을 바라보 다가 요루드에게 말했다. "나도 자러가야겠군. 수고해, 요루드." "……응." 난 몸을 돌려 우리 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우리 조가 사이좋게 모여 자는 곳에 돌아왔을 때, 이곳 역시 불침번 이 바뀌어 있었다. "너냐?" "나야." "너였군." "나였어." 의미 없는 대화가 오고 간 후, 난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럴크의 맞은 편 에 앉았다. "너 다음은 누구야?" "카웨." 괜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작게 타오르 는 모닥불만을 바라보았다. "너, 라이레얼 좋아하냐?" "뭐?" 난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해서 반문했다. 럴크는 모닥불을 뒤척이며 다시 말했다. "라이레얼 좋아하냐고?" "그, 글쎄……." 갑자기 그런건 왜 묻는다냐? 럴크는 내 얼굴을 쓰윽 처다보더니 다시 모닥불로 고개를 돌렸다. "난 좋아해." "……." 알아, 짜샤. 럴크는 잠시 회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혼잣말 하듯이 얘기를 시 작했다. "내가 라이레얼을 만난건 4년 전이었어. 정확히 어디서 만났는지 뭣 때문 에 만났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그 모습만은 기억난다. 킥, 몸매 진짜 죽 이더군. 그때 옆으로 다가가 은근슬쩍 가슴을 만졌었거든." 뭐? 이 미친놈이 감히 남의 여자 가슴을……. 난 분노로 인해 올라오는 흥분을 가라 앉히며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복날에 개패듯이 뚜드려 맞았지. 무슨 여자 힘 이 그렇게 쎈지……. 야, 눈이나 풀어, 임마. 니가 노려봐봐야 하나도 안 무 서워. 아무튼 며칠 후, 같이 싸움에 참가하게 됐거든. 그런데 상대 쪽수가 생각보다 많더라구." "얼마나?" "우린 약 40명 정도였는데, 그쪽은 100명이 넘었어." "용케 살아 남았네." 럴크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용병이라는게 목숨걸고 돈 버는 직업이니까. 그런데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아마 라이레얼 아니였으면 뒈지고도 남았을걸. 이야∼, 진 짜 잘싸우더라. 무슨 여자가 그렇게 칼질을 잘하는지……. 노란색 머리카락 을 휘날리며, 레이피어를 휘두르는데, 한 번에 한 놈씩 골로보내더라. 싸움 이 끝나고 온몸에 피칠을 한 채, 칼을 닦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이뻐보이 던지……, 그 때 반한 이후로 지금까지 아다니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까 지 같이 자진 못했어. 한번 대달라고 해도 싫다더라." "……." 라이레얼이 미쳤냐? 너 같은 놈한테 대 주게. 나 같아도 안 대줘, 임마! 럴크는 갑자기 씨익 웃더니,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야, 그런데 라이레얼과 잘 때 어떤 느낌이었냐? 하프엘프니까, 뭐가 좀 다르냐? 예를 들어 거기가……." "시끄러!" 이 미친 변태 새끼가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럴크는 그 변태같은 웃음을 계속 유지한 채 다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좀 말해봐." 난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알고 싶으면, 직접 해봐." 럴크도 미간을 찡그렸다. "씨발!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했지." "어쨌든 그딴거 묻지마." "알았다, 알았어. 이렇게 계속 따라다니다보면 언젠가 한번 대 줄 날이 있 겠지." "……." 꿈도 꾸지 마세요. 그나저나 몸이 꽤 피곤하군. 어젯밤의 휴유증 때문인지, 아니면 밤이 너무 깊었는지 자꾸만 눈커풀이 감겨왔다. 이제 잘 때가 됐나? 새나라의 청소년은 일찍자고 일찍일어나야 하는 법이다. 고로 나는 자러간다. 음하하. 난 목을 크게 한바퀴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이젠 자야겠다. 계속 수고해라." "어." 난 사람들이 자는 곳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침낭 속에 몸을 파묻고 자지만, 난 침낭이 없으니 망토를 두르고 자야 한다. 뭐, 보통 망토와는 틀 리게 난방도 되고 쿠션도 좋으니까 별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난 라이레얼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은 누워도 몸이 아프지 않을 정도 로 바닥의 흙을 고르고 옆에 청룡도와 지팡이를 내려 놓았다. 준비 작업을 다 끝내고 누우려는 찰나, 침낭 밖으로 빼꼼히 나와있는 라이레얼의 얼굴 이 보였다. 난 가까이 다가가 라이레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살짝 감긴 눈커풀. 길고 진한 속눈썹과 그린듯한 초생달 모양의 진한 눈 썹. 오똑한 콧날. 인중을 따라 이어지는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 그리 고…… 접혀진 뾰족한 귀. 예쁘다. 난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꿀꺽- 왠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 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도 죄가 아닐까? 두 얼굴이 코가 맞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갑자기 라이레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으악!" 난 깜짝 놀라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라이레얼은 방긋 웃으며 큰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깨, 깨있었어요?" "응." "언제 부터요?" "히로가 내 옆으로 왔을 때부터. 엘프는 귀가 밝다잖아." "그, 그런가요?" 라이레얼은 뒤척이더니 침낭 속에 파묻힌 몸을 빼냈다. 그리고는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처다봤어?" "그, 그냥요." 라이레얼은 내 목에 두 팔을 감아 나를 살짝 껴안았다. "예뻐서?" "……예?" "예뻐서?" "예……." "후훗, 좋아." 라이레얼은 목을 감은 손을 조여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난 땀냄새와 함께 느껴지는 향기에 정신이 아찔했다. "불침번은 잘섰어?" "예." "힘들지는 않았고?" "라이레얼이 걱정해준 덕분에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내가 미쳤나? 왜 말이 막나오는 거지? "지금 잘려는거야?" "예." "침낭은 있어?" "아뇨." "그럼 내 침낭에서 자." "예?" 그, 그럼 라이레얼은 어쩌구요? 라이레얼은 내 눈빛에서 내 마음을 읽었는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내 침낭에서 자." "하지만……." "괜찮아, 히로." "라이레얼……." 라이레얼이 이렇게 날 생각해 주고 있었나? 자신의 침낭을 내줄 정도 로……. 라이레얼은 정말로 날 아껴주는 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난 나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 모습을 보던 라이레얼은 깜짝 놀라며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왜 울어, 히로?" "흐윽……." 난 더 이상 참지못하고 라이레얼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아앙, 왜 울어? 울지마아∼." "흑……, 라이레얼……, 흑, 너무…… 너무……, 고마워요." "뭐야? 지금 감동해서 우는거야?"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 으며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 "……예." "그럼 키스해 줄래?" "……."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라이레얼은 입술을 겹쳐왔다. 갑자기 당한 기습에 난 눈을 감으며 약한 반항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내가 움직이 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어깨를 꽉 잡은 다음 천천히 혀를 밀어 넣었다. 으윽, 안돼요, 라이레얼. "읍, 읍." 라이레얼은 능숙한 솜씨로 혀를 놀려 내 입안 구석구석을 았다. 난 라 이레얼의 힘과 테크닉(?)에 밀려 반강제적으로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호흡이 거의 위험수위에 다달았을 때 쯤, 라이레얼은 입술을 뗐 다. "자, 빨리 들어가." "……라이레얼." "빨리." "……." 라이레얼은 다시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는 날 억지로 침낭 속에 밀어 넣었 다. 침낭 속에는 방금까지 라이레얼이 누워있어서 그런지 따뜻한 온기와 아찔한 향기가 느껴졌다. 아! 라이레얼의 온기. 행복해 미칠 것 같다. 난 침낭 속에 깊숙히 몸을 파묻으며 라이레얼을 보았다. "고마워요." "고맙긴, 뭘." 정말 너무 고맙다. 라이레얼은 혹시 천사가 아닐까? 날 위해 자신의 침낭 을 내 주다니……, 그런데 라이레얼은 어디서 자지? 설마 그냥 땅바닥에서 자려는건……. 어? 라이레얼이 왜 이 침낭 안에 발을 집어 넣는거지? 어? 몸도 집어넣네. 라이레얼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침낭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 공간 이 넓지 못한 침낭이기에 나와 라이레얼의 몸은 필연적으로 맞 붙을 수 밖 에 없었다.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어느새 다 들어와 나를 껴안았다. 난 어떻게든 피해보려 했지 만, 침낭 속이 좁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체 라이레얼이 왜 이곳으로 들 어온단 말인가? "왜 이곳으로……?" 라이레얼은 나와 몸을 꼭 밀착하고 손으로 내 등을 더듬으며 말했다. "같이 자면 따뜻하잖아. 히로도 좋지?" "……." 좋긴 개뿔이……. 젠장, 또 속았다, 또 속았어. 그럼 그렇지. 라이레얼이 미쳤다고 자기 침낭을 그냥 내주겠냐? 속은 내가 미친 놈이지. 그나저나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 나간담. "저기요. 라이레얼." "응? 왜?" "저기……, 저는 그냥 바닥에서 자면 안될까요?" 라이레얼은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절대 안돼." "……." 안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껴안고 자자니……. 내 가슴에는 라이레얼의 가슴 감촉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 귓가에는 라이 레얼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 뺨에는 라이레얼의 입술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뭐하시는거에요?" "애무." 미치겠다. 미치겠어. 난 고개를 돌려 라이레얼의 입술을 피하며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까, 이런 짓 좀 하지마세요. 전 그냥 자고 싶어요." "그냥 자. 누가 뭐래?" 라이레얼은 커다란 눈을 예쁘게 깜빡이며 대꾸했다. 라이레얼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붙어있었기에 뺨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라이레얼이 가만히 있어야 자지요." "우웅, 그건 좀 힘든데……." "제발……." 라이레얼은 내 간절한 표정을 보더니 깜찍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훗, 알았어. 대신 나 좀 껴안아 줘." "예?" "나 껴안아 달라고." "하하……, 하……." 난 그냥 자고 싶을 뿐인데……. "빨리 안아줘∼." "……예." 난 두 팔로 살짝 라이레얼을 감싸안았다. 팔이 감기자마자 라이레얼은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라이레얼은 내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잘자, 히로." "라이레얼도, 잘 자요." 이렇게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막을 내리는구나. <2권 끝> <아이리스 Iris> - 3권 - Part 1. 날아라 라이코스 내가 눈을 떴을 때, 라이레얼의 얼굴이 보였다. 라이레얼은 내가 깨어난 걸 알자, 모닝 키스를 퍼부었다. 다른 사람들은 씻기가 귀찮은지 손가락에 물을 묻혀 눈꼽만 떼어 내는 지 저분한 짓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워낙 청결을 중요시 여기는 관계로 라이 레얼과 함께 냇가에 세수를 하러가기로 했다. 라이레얼은 친절하게도 손수 내 얼굴을 씻어 주었다. 그 다음, 머리를 감 고 라이레얼과 쎄쎄쎄 좀 하고 돌아오니, 어느새 카웨가 아침식사를 준비 해 놓았다. 라이레얼은 친절하게도 손수 떠서 먹여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인상을 찡 그리며 노려보았지만, 이젠 면역이되서 쪽팔리지도 않았다. 아침 밥을 대충 먹고 나자 빠르게 주변을 정리한 뒤, 출발했다. 라이레얼 은 졸린지,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맞은 편을 보니 베네트가 요루드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 다. 난 웃으며 요루드에게 말했다. "그렇게 당하고도 끝까지 붙어있는걸 보면 베네트가 어지간히 좋나보네?" 요루드는 씁씁한 웃음을 지었다. "……맞아.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진 것 같은데." "글세……." 난 잠들어있는 라이레얼의 얼굴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어느새 침을 흘리 고 있었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라이레얼이 왜 이렇게 예쁘게 보이는걸까? 눈에 콩깍지가 씌였나? 눈에 씌인 콩깍지 벗기는 마법은 없나?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라이레얼을 좋아하고 있는게 내 진심인 것 같다. 이러면 정말 큰일인데……. 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럴크, 테커, 카웨, 그리고 나. 지금 네 사람의 눈동자는 기묘한 빛을 내며 마주보고 있었다. 마지막 장이 들어오고……, 이제 운명의 순간인가? 세 남자는 느린 동작으로 마지막 장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난 여섯 개 의 눈동자를 동시에 처다보았고, 잠깐이었지만 그들의 눈에 스쳐가는 표정 을 확실히 읽어낼 수 있었다. 테커와 허크는 끝났군. "넌 안펴봐? 빨리 펴봐." "나중에요." 라레이얼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재촉했지만, 난 네 장의 카드만 든 채, 마지막 장은 그대로 놔두었다. 상단 호위병이랍시고 그냥 수레 위에 앉아서 아무짓도 하지 않는다는 것 은 정말 지루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포카를 치고 있다. 그렇다! 이 세계에서도 트럼프는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포카라는 게임 까지. 규칙은 약간 달랐지만, 기본 뼈대는 똑같다. 큭큭큭, 패를 잡은 이상 이 몸의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해주마. 딱딱한 침묵. 그 침묵을 깬 것은 다름아닌 테커였다. "난 죽었어." 테커는 5장의 카드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또 다시 침묵. 카웨는 표정을 굳힌 채, 눈동자만 돌리고 있고, 럴크는 조금 고민하는 표 정이었다. "자, 걸지." 럴크는 그렇게 말하며, 판돈으로 깔린 2골드 위에 1골드를 던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웨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금화를 던졌다. "어떻게 할꺼냐?" 카웨의 물음에 난, 금화 4개를 던지는 걸로 답했다. "1골드 받고, 3골드 더." 럴크의 손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킥, 럴크 자식, 이제 떨어져 나갈 때가 됐군. 내 예상대로 럴크는 잠시 머리를 쥐어 뜯다가 결국 패를 던졌다. "드롭(게임 포기)." 난 고개를 돌려 카웨를 보았다. 카웨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몇 개의 금화를 던졌다. "3골드 받고, 5골드 더." 아까 테커가 들고있던 패는 아무것도 아니였을 것이다. 럴크는 원페어 정 도……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이 녀석은 최소한 투페어 이상……. 게임이 시작될 때부터, 이들의 눈빛에서 읽어낸 정보였다. 원래 사람이란 동물이 그때 그때의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게 되어있기 때문에, 잘만 관찰 하면 그것들을 알아낼 수 있다. 이들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패를 받을 때마다, 얼굴을 구기며 탄식하기도 하고, 억지로 좋아하는 척도 해보았지만, 이 몸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은 순간 눈에 스쳐가는 미세한 떨림을 잡아 내는 것이다. 도박을 할 때는 절대로 감정을 숨겨야만 한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 러내는 것은 그대로 패배와 연결된다. 유능한 도박사 일수록 감정을 숨기는데 능하다. 그리고 생초보들일수록 감정을 나타내는데 능하다. 그래서 도박판에서는 이 둘을 상대하기가 가장 힘들다. 도박사들은 그렇다 쳐도, 생초보 같은 경우에는, 너무나도 많은 감 정들을 밖으로 표출해내기 때문에, 어느게 진짜인지 알 수가 없어, 의외로 상대하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상대들은 도박판에서 적당히 굴러먹은 놈들……. 이런 놈 들이 상대하기 제일 쉽지. 상대방의 감정을 잘 읽어내는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도 능하다. 저들은 지금 즐기기 위해서나, 돈을 따기 위해서 도박을 한다. 그 럼 나는? 아무 생각 없다. 아무 느낌 없다. 나는 말 그대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서 도박을 하는 것이다. 도박판에서 필수 능력에 속하는 절대 감정.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도 하고, 거짓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때로는 진짜로 도 표현해내는 능력. 상대방이 절대 자신의 패를 알 수 없게 만드는 능력. 이 능력이야 말로 신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 내가 이 능력 덕분에 수학여행 한 번 갔다하면, 가방안에 빈도시락통 대 신 돈다발을 짊어지고 돌아온다. 여기서 잠시 나의 파란만장했던 도박인생을 살펴보자면…… 중학교 수학여행 갈 때 가져간 돈은 2만원이였는데, 올 때 있는 돈은 17만 2천 7백원. 액수 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이틀 밤을 새며 일(?)해서 번돈이다(3박 4일 수학여행이었는데, 마지막 3일 째에는 애들이 판에 안끼워 줬다. 넌 카지노 에나 가서 도박하라나?). 신성한 노동의 대가. 난 이 액수를 만들기 위해, 4개 반, 7개 방을 휩쓸었다. 그 때 얻은 별명이 '도신'. 수학여행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와서는 절대 저 놈과는 화투를 치지 말라는 규칙이 생겼을 정 도다. 화투 뿐만이 아니다. 판치기, 짤짤이, 포카 등등의 게임에서도 나는 소외당해야만 했다. 난 이때 우리 사회에 대한 원망을 토해내야만 했다. 어째서 이 사회는 능력이 있는 자들을 몰아내는 걸까? 나의 능력을 마음 껏 펼칠 수는 없을까? 그 후, 나는 중학교에서 어떠한 도박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신 은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란 바로, 고등학교를 멀리 배정받은 것이 다. 난 이때 신의 은총에 감사했다. 같은 중학교에서 올라온 애들은 13명. 그나마 전부 다른반. 이 곳에서는 나의 정체를 아는 자가 없다. 그리고 다가온 그날. 1학년 3박 4일 경주 수학여행. 이 때야 말로 나에게는 최고의 기회다. 1년 치 용돈을 한방에 벌 수 있는……. 수련회와는 달리 수학여행은 여행과(?) 에 속하기 때문에, 애들이 돈을 많이 가져온다. 난 밤을 위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잠을 이루려 하였다. 하지만 밀려드는 흥분감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늘밤이다. 오늘밤……. 그리고 드디어 해가 저물어가고, 우리는 콘도에 도착했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302호. 애들은 총 11명. 이 중 실력이 있어보이는 자는 3명 정도……. 밤이 깊어지자 애들은 바닥에 담요를 깔고 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난 일 부러 초반에는 판에 끼지 않았다. 다만 희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 만 보았다. 귀여운 것들. 그래, 열심히 해라. 누가 따던 간에 마지막에는 전부 내 주 머니 속으로 들어올테니……. 아이고, 귀여운 것들. 나의 돈줄들. 약 30분 후, 한 녀석이 5천원정도 꼴고 일어나고, 남은 두명은 재미있게 구 경하고 있던 나를 지목했다. 난 몇번을 사양한 끝에 판에 참가하였다. 도박판에서 많은 돈을 따기 위해서는, 절대 계속 따서는 안된다. 계속된 실패는 사람에게 극심한 좌절감을 심어주므로, 때때로는 일부러 작게 저주 는 지혜도 보여야만 한다. 조금만 더 하면 본전까지 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어, 판을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 둬야 한다. 큰 것을 얻기위해 작은 것을 버려라. 도박인생 5년만에 배운 교훈이다. 패가 돌기 시작하고…… 난 나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6시간 후, 5명의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 벌이는 7만 3천 2백원. 저들이 음료수 사먹을 돈까지 털어서 낸 돈이다. 흘흘, 우리방은 전멸이고…… 오늘밤은 옆방으로 정벌(?)을 나가야 겠군. 이튿날 밤. 시시했다. 3방을 전멸 시켰지만, 벌어들인 돈이라곤 겨우 11만 7천 1백원. 짜식들이 소심해가지고는…… 쓰리고 판 한번 먹고 자리를 뜨면 어쩌자는 거냐? 나같으면 오기로라도 계속 하겠다. 그래가지고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하겠냐? 삼일날 밤. 마지막 밤. 광란의 밤. 이제 마지막 기회다. 302호실은 나를 포함하여 11명이 자는 곳이다. 하지만 현재 약 20명의 사 람들이 모여있다. 각 방에 도박사들이 더 이상 상대가 없어서 이 곳으로 몰린 것이다. 심지어는 국어 선생과 윤리 선생까지……. 수학여행은 입시 공부에 지친 아이들에게 잠깐이라도 쉬라고 만들어 놓은 이벤트이다. 더불 어 애들 가르치느라 불받은 선생들도 머리 좀 식히라는 이벤트. 이런 이벤 트에 스승과 제자가 같이 화투를 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 다. 술을 마셔도 꼬장만 부리지 않으면, 왠만큼 봐줄만 하면 그냥 넘어간 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사제간의 정을 더욱 돈독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현재 여기 모인 9명의 전사(?)들은 이틀 동안 각 방의 토벌을 끝낸 상태 기 때문에, 판돈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실제로 몇놈의 주머니에서 수십개 의 동전이 흘러 내렸다). 그건 물론 두 선생도 마찬가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둘은 지도 차원에서 수학여행을 따라온 각반 담임들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고 한다. 아마 그 선생들은 머리식히러 왔다가, 머리카락까지 다 태우고 돌아 갈 것이다. '잠자는 목소리' 물리 선생은 애 7살 생일 선물 로 사줄 자전거 값을 뜯겼다고 하고, '황비홍' 한문 선생은 결혼 기념일날 마누라한테 받은 금장 로렉스까지 풀렀다고 한다. 이 때 그 시계를 찬찬히 어보던 국어 선생이 던진 한마디. "가짜군." 이어지는 국어 선생의 말. "이거 청계천에서 정확히 3만 2천원 하는거야." 농담은 잘 하되,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는 믿을 수 있는 남자, 국어 선생 김. 오. 영. 이 말을 들은 황비홍은 완전히 폭주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네명의 고 수가 투입됐다. '필라FILA(맨날 필라 추리닝만 입고 다닌다). 럭비(젊어서 럭비 좀 했단 다). 구렛나루(구렛나루가 환상이다. 턱까지 내려온다). 람보(키가 2m 좀 안됨. 우리 학교, 아니 우리 구에서 제일 큰 인간. 이 키 때문에 젊어서 청 소년 농구 국가대표로 맹 활약을 펼쳤다고 한다).' 이 네명의 고수들은 간신히 황비홍을 진압했고, 쓰러지기 직전 황비홍의 마지막 절규. "이 놈의 여편네! 집에 들어가면 주욱었어어어!" 어쨌든 황비홍을 진압한는데 성공한 이 네 사람은, 국어 선생 김오영에게 개평을 두둑히 받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국어 선생이 오른손에 차고(왼손에는 자기 시계)있는 금장 로렉스 시계를 보니, 꼭 믿지 못할 만 한 얘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거실 여기저기에 담요를 깔았다(이 때문에 담요가 모자라 추위에 떨면서 맨 몸으로 잔 놈도 꽤 된다). 잠시후, 3개의 담요가 깔리고,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판을 벌이기 시작 했다. 고수들의 게임답게 점당 200원! 1시간, 2시간, 3시간……. 시간이 흐를수록 경기자(?)들의 수는 줄어갔다. 어떤 이들은 지쳐서 잠이 들었고, 어떤 이들은 판돈이 떨어져 눈물을 머금고 판을 떠나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개평으로 받은 돈 몇푼가지고 점 10원으로 초라하게 판을 벌 이고……. 나와 치던 두 놈도 본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각자방으로 자러갔다. 그 때 내 앞에 나타난 두 남자. 국어 선생 김오영과 1학년 전체 짱 임진빈. 우리 셋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난 타오르는 그들의 눈빛에서 그 들의 투지를 읽어 낼수 있었다. 국어 선생, 김오영. '윤리 선생을 밟고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러고보니 윤리 선생이 안보이는군. 1학년 전체 짱, 임진빈 '짱은 나다.' 저 놈한테 쓰리고판 먹이면 나중에 화장실로 끌려가 맞는거 아냐? 그리고 잘하는건 개뿔도 없지만, 도박 하나만은 신의 경지에 다달은 나. '저 둘의 돈을 긁어내, 수학여행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어야겠다.' 다시 3시간 후. 난 자리에서 일어나 떠오른 태양을 맞이했다. 삼일 밤을 새서 화투를 친 탓에 허리가 뻐근했지만, 기분은 매우 좋았다. 내 뒷주머니에는 지폐 뭉치 가 가득 꽂혀져 있었고, 내 양쪽 주머니에는 동전들이 수북하게 차 있었다. 그리고…… 내 오른손에는 금장 로렉스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 때가 나의 전성기였다. 이날 밤의 일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것이다. 흔들고, 쓰리고에, 피박에, 광박에, 멍따. 다 합치면 32배, 거기다가 5광에 고도리까지…… 30만 2천 8백원이였던 가? 싼걸 3개나 먹고 싹쓸 2번에, 내는 패마다 뒤끗이 붙고…… 정말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만한 판이였다. 이 판으로 인해 임진빈은 전재산(약 12 만원)을 털리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방으로 돌아갔고, 국어 선생 김오영은 10만원짜리 수표 2장과 로렉스 시계를 나한테 주었다. 그 후, 에필로그를 말하자면,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3일 후, 한문 시간에 '황비홍'이 들어왔는데, 나에게 그 시계 어디서 샀냐고 물었다. 난 당당하게 도박판에서 김오영 선생님께 땄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황비홍은 완전히 맛이 갔다. "엎드려 뻐쳐!" "제가 뭘 잘못했길레……." "이게 이젠 선생님한테 대들기까지! 어쭈구리 셔츠를 구겨서 입고 다녀? 어, 머리도 안 감고, 손톱도 안깍았어. 너 이 시간 끝나고 학생부로 따라 와!" 이 날 난 학생부로 끌려가 복장불량에 태도불량으로 먼지나게 얻어 맞았 다. 그리고 국어 시간에는 이런 말을 들었다. "그래, 쥐꼬리만한 봉급받아서 생활하는 선생, 등처먹으니까 기분좋든? 너 때문에 난 집에서 마누라한테 맞아 죽을 뻔 했어. 당장 나가서 손들고 서 있어!!!" 그 후부터, 한문 선생과 국어 선생이 나를 맨날 갈궜다. 진짜 학교 생활하 기 힘들었다. 그리고 로렉스 시계는 짝퉁이여서 그런지 7개월 만에 망가졌 다. 후에, 2학년으로 올라가 수련회에 갔지만, 그 때는 아무도 나를 판에 끼워 주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나를 잘 모를 것 같은 이과 애들이 있는 방으로 찾아가 보았지만, 그곳에도 나의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당근 거기서 도 안끼워줬다. 아! 지존무상(至尊無上)이라! 이상 나의 도박판 답사기 끝. "포기할꺼냐?" 흥, 이 몸이 포기할 리가 없지. 이번 판은 반드시 내가 이긴다. 도신의 명 예를 걸고. 거기다가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지. 그건 바 로…… 라이레얼이 옆에 붙어있다는 거. 이런 미인이 옆에 붙어서 응원을 해주는데 내가 질 리가 없잖아. 참고로 난 라이레얼에게 내가 딴 돈의 30%를 주기로 약속했다. 뭐, 나야 돈이 넘쳐흐르니까. "3골드 받고 10골드." 카웨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현재 나의 패는 J쓰리플과 ♠2, 그리고 히든 카드 한 장. 저 히든 카드를 열면 무엇이 나올까? 2면 풀하우스, J면 포카, 조커여도 포카, 그외의 것이 라면…… 그냥 쓰리플. 이번 게임은 J쓰리플만으로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만 하다. 굳이 히든 카드를 뒤집어 마음을 흔들 필요는 없겠지. 난 네장의 카드를 꽉 움켜쥐었다. 돈은 차츰차츰 쌓이기 시작하고……. 약 150골드 쯤에서 멈추었다(카웨의 돈이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나야 뭐 천문학적인 액수를 소지하고 있으니 70, 80골드 쯤이야 껌값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마차 안에 타고있는 모 든 사람들의 시선이 판돈으로 깔린 150골드와 우리 둘에게 쏠렸다. 잠시 초조한 시간이 흐르고…… "자, 까지." 카웨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패를 내려 놓았다. 풀하우스군. 젠장, 망했다! "우오! 풀하우스야." "카웨, 오늘 도박발이 좀 받나본데." "저 꼬마 아까 돈 좀 쓸더니만, 완전 임자 만났군." 카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사색이 된 얼굴을 보고 자신이 승리했 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깐, 아직 저 녀석 패를 안봤어. 자 까봐." 라이레얼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어떡해, 히로? 내가 지금이라도 판 엎을까?" "됐어요." 난 들고 있던 패를 바닦에 내려 놓았다. "J쓰리플!" 난 손을 내 밀어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렸다. "잠깐. 아직 한 장 남았어." 난 손을 히든 카드 위에 올려 놓았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숨은 멈추 고 내 손에 시선이 집중됐다. 이 긴장감. 이 흥분감……, 진짜 끝내주는군. 난 천천히 카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카웨의 패는 Joker, ♠7, ♣7, ♥2, ◆2. 나의 패는 ◆J, ♥J ♣J, ♣2, Hidden card. 내가 이기려면 이 히든 카드가 ♠J나 ♠2가 나와야 한다. 젠장, 확률이 너무 적어. 테커나 허크가 들고 있지 않았다는 가정을 한다 해도 1/17 약 0.6% 정도…… 으아! 미치겠다. 여기서 지면 돈이 문제가 아 니라 무지하게 쪽팔리는데. 꿀꺽! 난 침을 한번 삼킨 뒤,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면서 카드 의 그려진 숫자와 그림이 내 눈속으로 들어오고…… "제기랄!" 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인상을 구겼고, 나와는 반대로 카웨는 얼굴을 쫙 피며, 환호를 질렀다. "좋았어!" 좋긴 개뿔이……. 난 씩 웃었며 히든 카드를 던졌다 "좋기야, 좋지." <♠2> "풀하우스. 같은 풀하우스지만, 이 몸의 패가 더 높군. 푸하하하, 미안하게 됐다." "……." 카웨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혼백이 빠져나 간 사람 같다. 저런 것이 패자의 모습인가……, 아∼ 비참해라. 누가 그랬 던가?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와아! 이겼다! 이겼어! 역시 히로라니까. 우웅, 귀여워. 음 쪽쪽쪽." 라이레얼은 매우 기뻐하며 내 목을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역시 행운의 여신이 옆에 붙어있으니까, 게임도 잘 풀리는구만. 아! 행복 해라. 돈따고, 칭찬받고. 육탄공세도…… 우하하하.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테커와 럴크가 복장터지는 소리를 한마디 씩 했다. "그러게 나 처럼 진작 죽지……." "이제까지 계속 꼰 주제에 무슨 깡으로 끝까지 갔냐?" 난 양팔을 쫙 벌려 마차 바닥에 가득 쌓여있는 금화와 은화를 쓸어 담았 다. 라이레얼은 아예 주머니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히로, 30%야, 30%. 알지?" "알았어요." "히로, 그러지 말고 우리 반띵하는게 어떨까? 응?" "좋을데로 하세요. 전 괜찮으니까." "와∼, 정말? 아우, 고마워. 역시 통이 크다니까, 쪽쪽쪽." 라이레얼은 돈을 다 쓸어 담은 다음, 내 얼굴을 붙잡고 다시 키스 세레를 퍼부었다. 난 행복감에 젖은 얼굴로 카웨를 바라보았다. 카웨는 나와는 반 대로 아주 비참한 모습이었다. 난 그를 바라보며 조소(嘲笑)를 지었다. 멍청한 녀석! 감히 '도신' 이라 불리는 이 몸과 승부를 내려하다니…… 10 년은 더 있다가 와라. 난 어려서부터 도박에 소질이 있었다. 짤짤이, 판치기, 동전던지기, 딱지치 기, 구슬치기, 오목, 화투, 트럼프 등등 못하는 도박이 없다. 도박뿐만이 아 니다. 도박 외에도 내기에 관련된 게임이라면 못하는게 없다. 바둑, 장기, 체스 등등 이런것들도 상당한 수준급이다. 뭐, 세레나의 경우에는 내가 일부러 저준거고…… 진짜 저준거다…… 진 짜…… 씨바, 솔직히 까발리면, 진짜 꼴았다. 무슨 계집애가 그렇게 도박을 잘하냐? 나중에 계모임할 때 실력 발휘 좀 하게 생겼더구만……. 으아! 짤 짤이는 내 주종목이 아니란 말이다! "이럴 순 없어!" 라이레얼과 함께 돈을 쓸어담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나에게 카웨의 절 규가 들려왔다. 카웨는 두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처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서 몇몇 사람이 위로해주고(약을 올리고) 있었지만, 카웨의 절 규는 멈추기는커녕 그 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불쌍하군. 개평이라도 좀 줄까? 라이레얼은 매끄러운 손으로 애무하듯이 매를 쓰다듬었다. 매도 기분이 좋은지 잔뜩 몸을 웅크리며, 라이레얼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꺄아∼ 너무 귀여워." 다른 용병들은 묘하게 눈을 빛내며 매를 바라보았다. 같은 눈빛으로 같은 매를 보고있지만 머릿속의 생각은 전부 다른 것 같았다. 럴크는 '저 매가 되고 싶다. 저 매가 되어 라이레얼의 품에 안기고 싶다. 라이레 얼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고 싶다.' 테커는 '저거 털을 몽땅 뽑은 다음에 속을 제거하고 불에 구워먹으면 딱일텐 데……. 킷털도 부리도 전부 흰색인걸 보니 고기도 야들야들 하겠지? 아∼ 고놈 참 맛있게 생겼다.' 카웨는 '저거 팔면 얼마나 나올까? 부리도 발도 흰색인 희귀종이니까 비싸게 받 아먹을 수 있겠지? 아, 쓰바, 저걸 내가 줏었어야 되는 건데 말이야. 젠장, 저 자식은 운도 좋아.' 그 외, 이름을 알 수 없는 피해망상증 환자. '저 놈 눈깔이 파란색이네. 어? 날 갈구고 있어? 어? 계속 갈궈. 너 지금 나랑 맞짱 뜨자는거냐? 죽고 싶어? 엉?' 이런걸 보고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 하는건가? 라이레얼 품이 따뜻해서 좋은지 매는 라이레얼 가슴에 파묻힌 채 웃음을 지었다. 입이 아닌 부리가 달린 새가 어떻게 웃겠냐만은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라이레얼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왕관 처럼 깃이 세워 져 있는 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괜히 열받는다. 감히 매 주제에 내 여자(?)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 니……. "히로, 이거 이름은 뭘로 할꺼야?" "글쎄요."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지었네. 나같이 훌륭하신 분의 부하가 되었으니, 멋진 이름 하나는 지어줘야 하는데 말이야. 매가 계속 라이레얼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자, 난 그 꼴이 보기 싫어 왼팔 을 내밀며 외쳤다. "야!" 푸드덕, 푸드덕- 내 목소리를 들은 순간, 매는 날개를 퍼덕이여 라이레얼 품에서 빠져나와 내 왼손에 안착했다. 원래는 휘파람을 불어야겠지만, 내가 휘파람을 못 부 는 관계로……. 뭐 어떤가? 의미만 통하면 된거지. 난 매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매 역시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자세 히 보았다. 흰 깃털에, 흰 발톱에, 흰 부리. 그리고 왕관처럼, 세워 올린 세 개의 깃 (젤이라도 발랐나?). 결정적으로 앞의 것들과는 극심한 대조를 이루는 커다 란 파란색 눈동자. 정말 특이한 놈이다. 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특이하게 생긴 매는 처음 본다.(솔직히 말하면 매라는 새를 처음본다. 생각해 보라. 서울 도심 한가운데 무슨 매가 있겠는가?) 난 오른손으로 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게 세워진 세 개의 깃이 손을 간지럽게 했다.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특이한 놈이다. 보통 새들이 어딘가 에 앉았을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발을 웅크리는게 정상인데, 이 놈은 발을 평평하게 편 채 내 팔 위에 앉아 있었다. 만약 발을 웅크린다면, 발톱이 내 살갗을 파고 들겠지? 난 매가 앉아있는 손을 크게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매는 발에 접착제라 도 붙였는지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앉았다. "야! 너 진짜 나 따라올꺼야?" 매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신기하게 생각하 며 다시 물었다. "니 처자식은 어쩌고?" 매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없다는 뜻인가? "없어?" 끄덕끄덕. "병든 노모도 없고." 끄덕 "여우 같은 마누라도." 끄덕 "토끼 같은 자식들도." 끄덕 "몽땅 없냐?" 끄덕끄덕. "그럼 친구는? 그것도 없어?" 끄덕끄덕. 난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매와 얘기하는 나에게 제정신이 아니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난 말못하는 동물과 얘기하는 것이 재밌어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너 혹시 왕따냐?" 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안쓰러운 눈빛으로 매의 눈을 바라 보았다. 아마도 특이종, 일명 돌연변이여서 다른 매들한테 왕따 당했나보다. 하여 튼 이 사회는 튀는 존재를 용납하지 못한다니까. 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매의 눈빛을 보며 회상에 빠져들었다. 1시간 전. 난 빵을 하나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레얼은 내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더니 바로 물었다. "어디가?"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께요." 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숲 안으로 들어갔다. 향긋한 녹내음이 코속에서 부터 퍼져오고, 새들이 지져귀는 소리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빽빽하 게 들어선 나무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나를 비추고, 식후에 나른함이 온몸 을 지배한다. 행복이란게 별게 아니라니까! 어느 정도 걸었다고 생각되자, 난 근처에 커다란 바위에 걸터 앉았다. "까아악-!" 이게 무슨소리? 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은 편을 보니, 매와 뱀이 싸우고 있 는 모습이 보였다. 뱀은 무늬가 없고 머리가 삼각꼴인걸로 봐서 독사인 것 같았다. 그런데 퍼덕거리는 매의 생김새가 조금 이상했다. 크기는 보통의 매와 똑같지만 온 몸이 순백의 흰색이다. 깃털과, 발, 심지어는 부리까지. 거기다가 눈은 번뜩이는 파란색으로 몸 색깔과 극히 대비를 이루고 있었 다. 매 중에 저렇게 생긴 놈도 있나? 저거 혹시 염색한거 아냐? 난 흥미가 생겨 숨을 죽이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매와 뱀의 싸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치열해 졌다. 상황으로 봐서는 뱀이 훨씬 유리한 것 같은데, 매는 도망치지 않고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열심히 싸웠다. 난 자세 히 관찰하던 도중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매의 왼쪽 날개에 약간이긴하 지만, 피가 조금 묻어있었다. 날개를 다쳐서 높이 날지 못하는 것이다. 뱀이 몸을 솟구쳐 물려고 하면, 매는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라, 뱀의 머 리를 쪼았다. 상황은 매에게 매우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일단 매 는 상처를 입은데다가, 부리로 쪼는 공격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반면 뱀은 한번 물기만 하면, 독으로 끝장을 낼 수 있다. 뱀은 자꾸 공격이 실패하자,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땅으로 내려왔다. 그 러자 매도 지쳤는지, 날개를 퍼덕이며, 조금씩 고도를 낮추었다. 쉬이익- 그 순간, 뱀의 몸이 하늘로 솟구치더니 매의 다리를 물었다. "까아악-!" 매는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날개를 퍼덕였지만, 꽉 다문 뱀의 입에서 벗어 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뱀은 다시 땅으로 내려왔고, 매는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땅에 떨어진 매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뱀은 천천히 매를 입 속으로 집어 넣기 시작했다. 매의 몸 1/3 정도가 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매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뱀에게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다. 이제 쯤 도와줘야겠군. 난 청룡도를 빼들고 다가갔다. 그리고 뱀의 머리를 겨냥해, 그대로 내리 찔렀다. 푸욱-! 청룡도는 별 다른 저항 없이, 뱀의 머리를 뚫고 땅속까지 박혔다. 뱀은 마 지막 발악이라도 하는지, 몇번 심하게 꿈틀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난 뱀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매의 발을 빼주었다. 발이 빠지자마자 매 는 도망치려고 날개를 퍼득거렸지만, 날아오르지는 못했다. 난 도망치려는 매를 붙잡았다. 왼쪽 날개를 펴보니, 아까 생각했던데로, 상처가 나있었다. 아마도 작은 화살에 맞은 것 같은데,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다. 이번엔 발을 보았다. 뱀의 이빨에 물려서 피가나는데다가, 아무래도 독니에 조금 스친 것 같다. 치료해줘야겠지? 난 매를 아까 앉았던 바위 위에 올려 놓았다. "치료해 줄테니까, 살고 싶으면 그대로 있어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나 그냥 간다." 매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날개를 퍼덕이는 동작을 멈추었다(다시 생각 해보니 지쳐서 멈춘 것 같다). 난 매의 상처에 손을 대고, 머릿속으로 캐스팅을 시작했다. "큐어Cure." 내 손에서 빛이 나오고, 그 빛은 매의 상처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젠 해 독을 해야 겠지? "안티포이즌." 다시 내 손가락에서 빛이 나와 아까 뱀에게 물렸던 상처에 빨려들어갔다. 강한 독이거나 여러 가지를 배합해서 만든 독이라면 이정도 마법으로는 치 유가 힘들겠지만, 단순히 뱀독이니 안티포이즌만으로도 충분했다. 난 손을 떼며 말했다. "이제 날아봐." 매는 날개를 푸드덕 거리며, 날기위해 노렸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비틀거 리며 날다가, 점점 익숙해지는지 제대로 날기 시작했다. 매는 날아 올라, 내 머리 위에 한바퀴 원을 그린 다음, 다시 바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파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나를 처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정말 특이하게 생겼다. 몸이 흰색인건 그렇다 치고, 머리 위에 세운 세 개의 깃털은 뭐지? 혹시 이 놈이 짱인가? 난 손에 들고있던 빵을 잘게 찢어 앞에 내려 놓았다. "먹어." 매는 배가 고팠는지, 사양 한번 하지 않고 흰부리로 빵을 쪼아먹기 시작 했다. 잠시 후, 매는 빵 하나를 아작내고 입맛을 다시며 날개짓을 했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왼팔을 내밀어 보았다. 이게 왠 일? 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팔 위에 턱 걸터 앉았다. 이건 설마…… 매도 생명의 은인을 알아 본다는건가? 아! 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이란 말인가? 세계가 점점 구역화되가며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마저 피상적으로 변해가는 지금, 이렇게 은인을 알아보고 따르는 훌륭한 매가 있었다니……. 갑자기 예전에 국어 선생이 해준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가 생각난다. 쩝, 그렇다해도 내가 지금 애완동물이나 키울 짬밥은 아니지. 난 주위를 대충 둘러 본 다음, 남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외쳤다. "자, 이제 박씨를 물어와." "……." 매는 말 못하는 짐승이었기에, 황당하다는 표정만을 지어보였다. "빨리 남쪽으로 가서 박씨를 물고와!" 매는 나의 명령을 씹었다. 어, 이럼 치료해준 보람이 없는데. 뱀한테 당할 뻔한거 구해주고, 상처 치 료까지 해줬으면,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서 박씨를 물어와야되는거 아닌 가? 난 다시 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쒸, 그럼 박씨 대신 여자라도 하나 낚아와." 매는 전혀 날아갈 생각을 안하고 팔을 타고 올라와, 왼쪽 어깨에 앉았다. 무슨 매가 이럴까? 왜 날아가서 박씨를 물어오지 않는걸까? 난 한동안 생각을 한 끝에, 그 이유를 알아 낼 수 있었다. 우쒸, 매가 아니라 제비였지. 제비는 철새니까 때가 되면 남쪽으로 날아간 다. 그러나…… 매가 무슨 볼 일이 있다고, 남쪽으로 가겠냐? 난 고개를 살짝 돌려 어깨에 앉아있는 매를 보았다. "야. 내려." 매는 당당하게 내 말을 씹으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난 고개를 돌려 매가 주시하는 곳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매는 지금 폼을 잡 고 있는 것이다. "야! 내려와. ……안 내려와!?" 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였다는건…… 안 내려오겠다는건가? 뭐, 때가 되면 지가 알아서 날아가겠지. 빨리 돌아가자. 라이레얼 걱정하겠다. 내가 돌아오자 마자 라이레얼은 내 어깨에 앉아 있는 매를 가리키며 물 었다. "히로, 그 새는 뭐야?" "글쎄요? 그냥 줏었어요." "히로! 이름은 뭘로 할꺼냐니까!?" 라이레얼의 외침에 난 회상에서 빠져나와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글쎄요……, 뭐, 특별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어서……." 언제 이름을 지어봤어야지……. 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주위에 앉아있는 덩치들을 쭉 둘러보았다. "이봐 동지들! 뭐 산뜻한 이름 생각나는거 없나?" 용병들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눈만 껌뻑였다. 라이레얼은 나에게 가까 이 다가가 매를 만지작 거리며 용병들에게 말했다. "그래. 좋은 이름 생가나는거 있으면 말해봐." 라이레얼 말이 떨어지자 마자 우렁차게 돌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 레얼한테 잘 보이고 싶어 앉아있던 놈들이 열심히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이다. 쿠르르르- 저 것들은 머리를 얼마나 안썼으면, 생각한번 하는데 돌굴리는 소리가 다 날까? 한참이 지난 후, 카웨가 입을 열었다. "매구이는 어떨까?" 그 말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앞다투어 말하기 시작했다. "매후라이드는?" "매탕." "통매." "매바베큐." "매도리탕." 이것들이……. 내가 앉아있는 놈들을 전부 땅속에 묻어 버릴까 생각하는 도중, 라이레얼 이 앞으로 나서며 카웨를 발로 걷어찼다. "닥쳐. 니들히 감히 저 귀여운 매를 음식으로 생각해!?" "하지만 맛있게 생겼잖아!" "닥쳐!" 퍽퍽퍽퍽-! 라이레얼은 카웨를 정말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역시, 그래도 이 불쌍한 왕따 매 생각해주는건 라이레얼 밖에 없구나! 나도 감동하고 매도 감동해 우리 둘이 사이좋게 눈물을 흘리는 사이 구타 가 끝났는지 라이레얼은 손을 탁탁 털고 있고, 카웨는 바닥에 얼굴을 처박 고 있었다. 라이레얼은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야! 니들은 머리가 그렇게 밖에 안 돌아가?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아니 멋있어 보이는 매를 보고도 그따위 이름 밖에 안 떠올라?" 라이레얼은 말을 마치고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매를 바라보았다. 라이레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라이레얼은 손을 뻗어 매를 만지려 하였다. 매는 본능적으로 라이레얼의 손길을 피했 다. 불쌍한 왕따 매는 어느새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라이레얼의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아잉∼, 왜 피하고 그러니? 이 누나는 너에게 아무해도 끼치지 않는단다. 자, 어서 이리 오렴." 말을 하느라 입을 연 순간, 라이레얼의 입가에서는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 다. 라이레얼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까 했던 말. 재빨리 말을 바꾸긴 했지만 확실히 들 었다. 맛있어 보이는……. 맛있어 보이는……. 그리고 대체 저 주르륵 흐르는 침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불안해. 너무 불안해. "안돼요!" 난 소리치며 잽싸게 매를 뒤로 숨겼다. "왜 그래, 히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거에요?" 라이레얼은 잠깐 흠칫하더니, 곧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호호, 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러니? 난 그냥 귀여워서 잠깐 만 저보려는 것 뿐인데." "거짓말말아요! 방금전까지 라이레얼의 눈빛은 그게 아니였어요." "호호호, 내 눈빛이 어쨌다고 그래? 나처럼 순진무구한 눈빛가진 여자 본 적있어?" 라이레얼은 그렇게 말하며 예쁜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모르는 남자가 보 면 한 눈에 넘어갔겠지만 이미 라이레얼의 실체를 아는 나로써는 가증스러 워 보일 뿐이었다. "그럼 지금 라이레얼의 입가에 흐르는 침은 뭐에요?" "응? 내가 무슨 침을 흘린다 그래? 그건 니가 잘못본거야." "지금도 침이 흘러내리는데 무슨 소리에요! 그냥 포기해요. 이 조그만거 잡아 먹어봐야 얼마나 나온다 그래요!" 라이레얼은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입가의 침을 닦으며 태도를 바꾸었다. "히로오∼, 자꾸 그러지 말고 그냥 먹자. 어차피 주운건데 어때? 응?" 애교모든가? 주위를 둘러보니 앉아있는 놈들 역시 침을 주르륵 흘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건 테커와 카웨였다. 카웨는 이미 무슨 요리로 만들지 생각까지 다 해놓은 것 같았다. 난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매를 보았다. 매는 불쌍하게도 식은땀을 주르 륵 흘리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물도 흘 리는 것 같다. 걱정하지말아라. 감히 누가 너를 잡아먹겠느냐? 내 온몸을 바쳐 너를 지 켜주마. 한번 살려줬는데 두 번은 못살려 주겠냐? 그나저나…… 맛있게 생 기긴 맛있게 생겼군. 침이 꼴깍 넘어간다. 꿀꺽- 내가 침을 삼키는 순간 공포를 참지못한 매는 그대로 눈을 뒤집어까고 기 절했다. 불쌍한 놈. "히로도 방금 맛있게 생겼다는 생각했지?" 뜨끔. "하하, 무슨 소리에요?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거짓말마. 그러지 말고 우리 반반씩 나눠먹자니까." 난 단호하게 외쳤다. "안돼요! 라이레얼은 양심도 없어요? 라이레얼은 이 매가 불쌍하지도 않 아요? 이제까지 왕따로 살다가 드디어 제대로된 주인을 만났는데. 어떻게 그렇게 야만적인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이 매의 눈빛을 보세요. 이 처절 한 눈빛을 보고도 잡아먹자는 말이 나와요?" 난 매를 들어 라이레얼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라이레얼은 자신의 코앞에 있는 매의 눈과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라이레얼의 입에서 는 침이 한가닥 흘러내렸다. 허억! 역효과다. 난 다시 잽싸게 매를 뒤로 숨겼다. 라이레얼은 그런 나를 보며 배시시 웃 었다. "히로. 저기, 그럼……, 우리 다리 하나만 잘라먹는건 어떨까?" 방금 기절한 매가 움찔거렸다고 생각한건 나의 착각일까? 난 황당해서 소리쳤다. "무슨 토막살인 할 일 있어요!!?" "그럼 날개 하나만." "안돼요! 다리도 안돼고 날개도 안돼요! 깃털 하나 뽑을 생각하지마세요!" 나의 단호한 외침에 라이레얼은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우웅, 매는 정력에 좋다던데." 겨우 그것 때문에……. "여자가 정력키워서 뭐하게요? 그리고 라이레얼은 지금도 충분히 강력해 요." 내 말을 들은 라이레얼은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바닥을 부딪혔다. "맞다. 그럼 히로가 먹으면 되겠구나!" "예?" "어차피 내가 먹으려했던건 다 히로를 위해서였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냥 히로가 먹는게 더 낫잖아." "저, 저를 위해서 라니요……?" 라이레얼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양손을 달아오른 뺨에다 대고 수줍 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잉∼, 다 알면서 뭘 그래? 내 정력이 강해지면 좋은건 히로 아니야?" "제가 왜 좋아요!?" "뭘 부끄러워 하고 그래? 설마 그 뜨거웠던 밤을 벌써 잊은거야?"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에요?" "괜찮아. 다 이해해, 히로. 아무튼 그 매는 히로 혼자 다 먹어. 그리고 ……, 아이∼ 더는 부끄러워서 못 말하겠어." 라이레얼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너무 가증스러운 모습 이 아닐 수 없다. 난 함숨을 내쉬며 말했다. "계속 말하지만 전 이 매 잡아먹을 생각없어요." 라이레얼은 미간을 찡그리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럼 우리의 뜨거운 밤은 어쩌고!?" "그, 그건……." "시끄러! 무조건 먹어!" 이건 먹는게 아닌데……. 내가 라이레얼에게 이 매는 먹으려고 줏어온게 아니라고 어떻게 설명할까 를 생각하는 중, 카웨가 슬며시 일어나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험험, 이봐." "넌 왜?" "저기, 그거 요리는 내가 해줄테니까, 나 국물 좀 나눠주면 안될까? 요새 몸이 좀 허약해서……, 험험." 이 미친놈이……. "넌 애인도 없잖아." "뭐 꼭 애인있어야만 하냐? 그리고 내 왼손은 폼으로 달린 줄 알아?" 카웨는 그렇게 말하며 왼손을 들어보였다. 저 왼손이야 말로 카웨의 애인 이자 동반자라고 할 수 있다. 카웨의 말을 통해 매고기가 정력에 좋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자 주 위에 앉아있는 놈들은 난리도 아니였다. 애인도 없는 놈들이 왜 그렇게 먹 고 싶어하는지……. 아무튼 저 놈들의 눈빛 때문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왕 따매는 다시 기절하고야 말았다. 라이레얼은 나를 톡톡치며 말했다. "그럼 이따 저녁 때 요리해서 먹어." "예?" "그리고 밤에……, 알지?" "알긴 뭘 알아요?" "아잉∼, 알면서 뭘 그래?" 라이레얼은 뇌살적인 눈빛을 보내며 나를 껴안았다. 난 매를 보호하기 위 해 두 손을 뒤로 돌린 상태기 때문에 성희롱(?)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어떠한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날 위해서 히로가 먹어." "그래서 먹기가 싫어요." "아앙∼, 그러지 말구∼." "야! 잠깐! 그런거라면 우리 요루드가 먹어야지." "어? 베네트?" 어느새 베네트는 내 앞으로 다가와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이레얼 은 나를 껴안은 손을 풀고 베네트에게 말했다. "요루드가 이걸 왜 먹어?" "몰라서 물어? 하루에 일곱 번이나 하는 놈에게 뭐가 아쉬워서 정력제를 먹여?" 정력제? 난 고개를 돌려 매를 보았다. 매는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 비틀거리는 모 습으로 서 있었다. 그나저나 니가 언제부터 정력제가 된거니? 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정력제(?)를 위로하고 있는 사이, 라이레얼과 베 네트의 대화는 점점 말싸움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너 웃기는 소리 하지마! 우리 히로는 요즘 몸이 많이 허해져서 몸보신 해야돼!" 내가 누구 때문에 몸이 허해졌는데……. 요새는 라이레얼 생각만 해도 머 리카락이 빠진다. "허약하기로 따지면 우리 요루드가 더 허약하지!" "요루드가 허약하든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누가 너한테 달랬어? 야! 히로! 당장 손에든 정력제 내놔." "예?" "니가 뭔데 히로한테 내놓으라말아야! 주지마, 히로." "저기요……, 이건 정력제가 아닌데…… 요." "그러는 넌 뭔데? 니 남자만 생각하면 다야. 내 남자도 생각해줘야 할꺼 아냐?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엄연히 살아있는 생물인데……." "내 남자 챙기기도 바쁜데 니 남자를 왜 챙겨야 줘야 되는데?" 라이레얼과 베네트의 말싸움은 더욱 발전해, 이젠 삿대질까지 하고 있었 다. 그리고 내 손에 있던 정력제(?)는 둘의 대화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기 절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 매를 더 이상 살아있는 생물로 보고있 지 않았다. 전부 정력에 좋은 음식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저거 요루드가 먹어야 돼!" "저걸 요루드가 왜 먹어!?" "요루드 정력이 더 약하니까!" "니 애인 정력 약한게 내 탓이야!?" "그래. 니 애인 정력 강해서 좋겠다!" 아! 쪽팔려. 쪽팔려. 저 쪽에서 요루드가 고개를 푹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불쌍한 놈. 얼 마나 쪽팔릴까?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요루드를 한번 본 다음 고개를 푹숙였다. "싸가지 없는 년!" "니가 더 싸가지 없어!" "뭐! 이 년이?" "이 년? 너 죽을래!?" 라이레얼과 베네트와 말싸움은 드디어 머리채를 쥐어 뜯으며 싸우는 걸로 발전했다. 정말 획기적인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죽어, 이 년아! 죽어!" "너나 죽어!" 머리카락을 쥐고하는 싸움인 만큼 머리가 긴 라이레얼이 불리 했다. 하지 만 라이레얼은 양손으로 베네트의 머리카락을 움켜 쥠으로써 그 불리함을 커버했다. 두 여인은 그렇게 서로의 머리끄뎅이를 잡은 채, 쌍시옷이 들어 간 욕(씨발년, 싸가지 없는 년, 싹퉁머리 없는 년, 쓰레기 같은 년 등등)을 내뱉었다. 아무튼 말려야 겠군. 이러다가 라이레얼 머리카락 다 뽑히겠다. 난 빠르게 라이레얼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매는 언제 깨어났는지 잽싸게 내 어깨 위 로 올라왔다. "참아요, 라이레얼." 난 뒤에서 라이레얼의 허리를 움켜 잡았다. 그러자 저쪽에서 요루드가 달 려와 베네트의 두 팔을 잡았다. "참아, 베네트." "못 참아!" "나도 못 참아. 이거 놔, 히로. 저 년 오늘 나한테 죽었어!" "놔, 요루드. 놔!" 우리는 한 참 동안, 여자 허리를 안고 씨름한 결과, 간신히 둘을 떼어 놀 수 있었다. 난 품에 안겨있는 라이레얼을 토닥여 주었다. "왜 싸우고 그래요?" "난 안 싸울려 그랬는데 제가 먼저 시비 걸잖아." "그래도 라이레얼이 참지 그랬어요."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자꾸 정력제를 내 놓으라고 하는 바람에……. 으 아앙, 나 무서웠어, 히로." 라이레얼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울지마요." 토닥토닥- 방금 전까지만해도 자신과 맞짱뜨던 라이레얼이 갑자기 서럽게 울어대자 괜히 나쁜년이 된 라은 베네트는 폭파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저, 저 가증스러운 년!!!" 폭파했다. "으아앙, 무서워." 라이레얼은 몸을 웅크리고 내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라이레얼은 그 상태 에서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나 지켜 줄꺼지?" "예?" "나 무서워. 히로가 지켜줘." "……예." 반대편을 보니 베네트는 분노로 얼굴이 시뻘개진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질 러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힌 것은 요루드가 팔을 붙잡고 있어 달려들지 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거놔, 요루드! 나 오늘 저 년과 결단을 내겠어!!" "참아." "진정하세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넌 정력제나 내놔!" "이거 정력제가 아니라니깐요." "구라까지마! 그렇게 말하고 나서 너 혼자 다 먹을려 그러지!?" "으아앙! 무서워, 히로." "안 먹어요!" 요루드의 힘이 빠져서 베네트가 튀어 나오려 할 때쯤, 내가 언제까지 라 이레얼 등을 토닥여줘야 하나 생각할 때 쯤, 이 지루한 싸움을 말려줄 한 남자가 등장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다른 조들은 이미 출발 준비를 끝마쳤는데." "앗! 총책임자." 총책임자는 안경을 올리며 대답했다. "한슨입니다." "예, 한슨 씨." "그나저나 식사 끝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준비를 안하셨습니까?" "아, 저기 그게……." 난 고개를 살짝 돌려 내 어깨에 앉아있는 매를 가리켰다. "얘 때문에……." "예? 새가 뭘 어쨌다고……." 한슨은 끝의 말을 흐렸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부풀렸다. 그는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매를 자세히 살폈다. "이건……." 한슨은 세밀하게 매를 관찰하며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설마 정력에 좋다는걸 눈치 챈건가? "영물(靈物)이군요." "예?" 한슨은 안경을 고쳐쓰며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이건 영물입니다. 고대 시절부터 존재했다는." "영물…… 이요?" "예. 그렇습니다." 설마 영물이라면……? 백호나 봉황 같은걸 말하는건가? 난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매를 보았다. 매는 자신이 영물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가슴을 쫙 펴고 폼을 잡고 있었다. 니가 정녕 영물이란 말이냐? 응. 너 진짜 영물이야? 그렇다니까. 근데 왜 영물 같이 안생겼어? 내가 영물 같이 안생겼다니,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를……? 내 이마에 써져있지 않냐? 영물이라고. 써져있긴 개뿔이……. 라이레얼도 흥미를 느꼈는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이게 영물이라구요?" 난 왼팔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어깨에 앉아있던 매는 퍼덕이며 날아와 내 팔 위에 안착했다. 한슨은 다시 매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제가 알기로 이 매는 청안백우조(靑眼白羽鳥)라 불리는 겁니다. 고대 시 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00년도 더 전에 출현했었다고 합니다만, 멸종 한 걸로 되어있지요. 상상 속에 생물이라는 얘기도 있구요. 그런데 이 매가 실존 하고 있다니 정말 놀랍군요. 그런데 이 매를 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겁니까?" "아까 죽을 뻔한거 살려줬더니 안떠나고 계속 따라오던데요." 한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청안백우조는 성격이 까다로워 사람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번 따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충성 을 바친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청안백우조를 따르게 하다니……, 당신도 보 통 사람은 아닌가 보군요." "하긴 우리 히로가 잘나긴 잘났지." 그만해요, 라이레얼. 남편(?) 자랑은 팔불출인거 몰라요? 난 매의 머리 위에 난 세 개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런데 상당히 잘 알고 있네요." "제가 그런 쪽에 조금 관심이 많아서요. 이렇게 운송 지휘자로 일하는 것 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동물들을 연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청안백우조를 만나게 되다니, 저도 참 운이 좋군요." 호오, 동물 학자셨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영물이라면 무슨 특이한 능력이라도 있나요?" 한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청안백우조는 어느 정도 지능이 있어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예. 아까부터 말을 알아듣긴 하더라구요." "그리고 하루에 만리(萬里)를 날아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일껍니다." "만리요?" "예." 십리(十里) = 4km. 백리(百里) = 40km. 천리(千里) = 400km. 그렇다면 만리(萬里)는? "이게 하루에 4000km를 날아간다구요?" "예.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난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매를 처다보았다. 니가 하루에 만리를 날아간다고? 당근이지. 지금 내가 그걸 믿어야 하냐? 싫음 마. 난 다시 한슨을 보았다. "또?" "예? 또라뇨?" "뭐 그런거 말고 다른 거요. 예를 들어 금강불괴지신이여서 도검에 상처 를 입지 않는다거나, 보름달을 보면 몸집이 말처럼 커저 사람을 태우고 난 다거나, 입에서는 불을 내뿜고 발톱으로는 바위를 가른다거나, 뭐 그런거 요." 한슨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게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또 뭐가 있나요?" "답니다." "예?" "아까 말한게 답니다." "예!? 아니 영물이라면서 사람말 알아듣는거랑 빨리 나는거 밖에 못해 요?" "다른 매는 그것도 못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난 매를 노려보았다. 그럼 그렇지. 니가 영물은 무슨……. 무슨 소리야? 시끄러. 짜가 영물 주제에. 내가 왜 짜가야!? 사람말 알아 듣는다고 영물이면 개도 영물이겠다. 빨리도 날잖아. 너 나만큼 빨리나는 거 봤어? 봤다. 뭐? 비행기. ……??? 난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참 능력도 없는 영물이네요." "뭐, 꼭 그렇게 보실건 아니죠. 아! 그리고 이건 별로 신빙성 없는 얘기지 만 청안백우조는 육질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육질이 좋다면……?" "먹으면 맛있다는 얘기죠." 어째 라이레얼의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 같은데, 나만의 착각일까? 난 팔에 올려진 매를 보았다. 맛있게 생겼다. 무, 무슨 소리. 나, 난 하나도 맛이 없어. 그거야 먹어보면 알 수 있겠지. 아니야. 나 정말 맛이 없어. 매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있어요?" "예.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무조건 하세요." "청안백우조는 먹으면 맛있을 뿐 아니라……." "아니라?" 한슨은 안경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정력과 미용에도 탁월한 효과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잡아 먹을 생각이시면 조금만 나눠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요새 피부가 푸석푸석 해서." "정력과 미용에 탁월한 효과…… 요?" "그렇습니다." 털썩- 청안백우조라는 짜가 영물이 기절하는 소리다. 난 측은한 눈길로 매를 바 라보았다. 라이레얼과 베네트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매를 보았다. "야! 정력제 내놔!!!" "주지마, 히로!" "빨랑 안내놔!" "히로가 미쳤어!? 이걸 너한테 주게! 이건 나와 히로가 나눠서 먹을꺼야!" "웃기는 소리 하지마! 그건 우리 요루드꺼야!" "험험, 나 국물 나눠주는거 있지마." "나도 좀 나눠줘, 나도." "나도." "나도." "저도 좀 나눠 주십시오. 요새 피부가 조금 안 좋아서." 이 쪼그만 새 하나를 대체 몇 명이서 나눠 먹으려고……. 한 바탕의 소동이 끝나고 우린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난 마차 한구석 에 앉아서, 기절했다 깨어난 매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비틀거리는 것은 라이레얼거 베네트의 눈빛 때문이겠지? "침 좀 그만 흘려요." "아니, 그냥 맛있어 보여서." 난 라이레얼 힐끔 노려보며 말했다. "자꾸 그런 눈빛으로 보니까 얘가 자꾸 비틀거리잖아요." "응, 알았어." 으이그, 정말 알긴 알은건지……. "그런데 얘 이름 뭐라고 하죠? 아까 정하려다가 결국 못정했잖아요." "글세……. 근데 굳이 이름을 정할 필요가 있을까?" "왜요?" "어차피 좀 있다 먹을텐데. 음식에 이름 붙여 놓으면 좀 그렇잖아." "……." 진짜 할 말이 없다. 난 라이레얼에게 신경을 끄고 오직 청안백우조만을 바라 보았다. 이름은 뭐가 좋을까? 부르는 사람 부르기 쉽고 듣는 매 기분 좋은 이름이 없을까? 이미지를 떠올리자, 이미지를. 오오, 떠오른다. 떠오른다. 떠오른다. 떠올랐다! "그래. 그거야! 이제부터 니 이름은……." 매는 기대감이 충만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라이코스야!" "……." 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때 마음에 들지?" 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마음에 든다고." 다시 세차게 가로저었다. 난 미간을 찡그렸다. 난 매의 눈을 바라보며 눈 으로 물었다. 야! 라이코스가 왜 싫어? 강아지 이름 같잖아. (이 놈이 어떻게 알았을까?) 강아지든 매든 그게 그거지. 아니야. 달라. 난 영물이야. 영물이든 어쨌든 주인은 나니까 내 맘이야. 싫음 딴데로가. 이런 치사한…….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 죽겠다고? 하하, 당연하지. 누가 지은 이름은데. 아무튼 니 이름은 이제부터 라이코스다. 자, 날아! 라이코스!" 라이코스는 인상을 되는데로 찌푸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참으로 표정이 풍부한 매다. 난 왼 팔을 내밀며 외쳤다. "라이코스!" 그러자 라이코스는 빠른 속도로 내려와 팔 위에 앉았다. 난 라이코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했어, 라이코스." 다시 저녁이 찾아들었다. 우리 조는 짐을 풀고 커다란 모닥불에 삥 둘러 앉았다. 며칠 동안 이짓을 하면서 느낀거지만 진짜 할 일없는 직업이다. 호 위병이랍시고 취직하긴 했는데 적이 있어야 호위를 하던지 말던지 하지. 이러다 짤리는거 아닌가? 이제까지 계속 그래왔지만, 오늘도 역시 요리는 카웨가 하고 있었다. 누가 특별히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궁시렁거리며 나서서 하는걸 보면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나보다. 카웨는 커다란 냄비 안에 여러 가지 야채를 넣더니 열심히 젖기 시작했 다. 난 뭘 만드나 궁금해서 카웨 뒤로 슬쩍 다가가 보았다. 냄비 안에는 걸 쭉한 갈색 국물과 당근, 감자, 호박 등의 여러가지 야채가 뒤섞여 있었다. "지금 뭐 만드는 거야?" 카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고기 스튜." 호오, 고기 스튜? 간만에 고기먹겠군. 그런데 냄비 안에 왜 고기가 없는 거지? 난 냄비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물었다. "그런데 고기는 어딨어?" "저깄잖아." 카웨는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난 눈으로 카웨가 가리킨 지점을 따 라가 보았다. 라이레얼이 흰색 매의 깃털을 하나씩 뽑는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도마와 숫돌을 준비해 놓고 사악사악 칼을 가는 베네트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정말 너무 정겨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베네트는 칼을 다갈았는지 날을 달빛에 비춰보며 매털을 뽑고있는 라이레 얼에게 말했다. "잊지마. 다리 하나랑 날개 하나다." "알았어. 걱정마." 라이레얼이 매털을 뽑으며 대답했다. 흠, 둘이 화해했나보군. 다행이다. 난 따스한 눈길로 그 정겨운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나저나 저 털 뽑 히고 있는 매를 보니까 라이코스가 생각나는군. 라이코스는 어디갔지? 어디갔을까……?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 있는걸까……? ……? 그 순간 라이레얼에게 깃털을 뽑히고 있는 흰색 매가 눈에 들어왔다. 그 매의 눈은 파란색이었다. "베네트, 털뽑기 귀찮은데, 그냥 잡자." "왜? 잘 안뽑혀?" "응." "알았어. 그럼 꼭 붙들고 있어. 한번에 끝낼테니까." 라이레얼은 버둥거리는 매의 대가리와 몸통을 붙잡았다. 그리고 베네트는 식칼을 높히 처들었다.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빛나는 식칼이 눈을 시리게 했다. 베네트는 그대로 식칼을 내리쳤다. 난 베네트에게 달려들며 소리쳤 다. "스토오오오옵∼!!!"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나는 지금도 라이코스가 살아있다는게 믿기지 않 는다. 그건 라이코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내가 소리치며 달려든 순 간 간발의, 정말 간발의 차이로 식칼이 라이코스 목을 빚겨갔다. 난 라이코 스를 안고 뒹굴며 라이레얼과 베네트에게 외쳤다. 이건 음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두 여자는 내 말을 씹었다. 결국 나는 이 쪼그만 거 먹어봐야 얼마나 나오겠냐고, 키워서 잡아먹는게 낫지 않겠냐고 두 여 자를 설득했다. 그렇게 힘들게 설득한 끝에 나는 간신히 라이코스를 잡아 먹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라이코스의 정신적 피해 보상은 누가 해주냐는 말이다! 난 라이코스를 쓰다듬었다. 라이레얼이 무자비하게 털을 뽑은 바람에 라 이코스 몸 여기저기에는 땜빵이 가득했다. 그래도 머리 위에 나있는 세 개 의 깃털 안뽑은게 어디냐? 카웨를 비롯한 다른 놈들은 고기스튜가 야채스튜가 됐다고 씨발씨발 거렸 지만, 지네가 씨발씨발 거려봐야 어쩌겠는가? 난 받은 빵을 잘게 쪼개서 바닥에 던져놓았다. 그러자 라이코스는 빠르게 그 빵들을 쪼아먹었다. 그러고보니 매는 육식동물아닌가? 뭐 영물이니까 아무거나 잘 먹겠지. 난 라이코스가 먹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며 받은 스튜를 떠먹었 다. 카웨 녀석 요리 하난 잘하는군. 정말 스튜의 맛은 그 누구도 트집 잡지 못할 만큼 훌륭했다. 한가지 아쉬 운 점이 있다면, 고기가 없다는 정도……? 라이레얼은 정말 특이한 방법으로 스튜를 먹고 있었다. 라이레얼은 스튜를 한 숫갈 떠먹고 라이코스를 한번 처다보았다. 그리고 또 한 숫갈을 떠먹고 또 라이코스를 한번 처다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자 린고비가 밥 한숫갈 떠먹으면서 천장에 매달아 놓은 조기를 처다보는 것을 연상케 했다. 즉, 라이코스는 반찬 대용이란 얘기다. 라이코스는 빵을 쪼아 먹으면서도 그 살기어린 눈길에 잠깐씩 몸을 움찔거렸다. 난 라이코스가 불쌍하긴 했지만, 그래도 특별히 해가 되는 일이 아니였기 에 그냥 못본 채 했다. 그런데 스튜를 반쯤 먹었을 때, 라이레얼의 행동이 조금 이상해졌다. 한 숫갈 떠먹으면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을 처다보는게 아닌가? 그리고 다음 숫갈을 떠먹을 때는 세 번, 그 다음은 네 번, 그 다음 은 다섯 번……. 등차수열로 점점 라이코스를 보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 다. 그와 더불어 눈도 점점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라이코스는 그 눈길 에 빵을 쪼아먹다 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이레얼이 스튜 한 숫갈에 라이코스를 열 번째 처다볼 때, 라이레얼은 라이코스에게서 눈을 때지 않았다. 난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라이레 얼은 조심스럽게 스튜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빵을 쪼아먹는 라이코스를 덥썩 잡아서 자신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 모습은 결코 라이레얼이 라 이코스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는 분명히 라이코스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안돼요!!!" 난 먹던 슈트를 내던지고 라이레얼에게 달려 들었다. 라이코스는 이미 머 리 부분부터 시작해서 목부분까지 라이레얼의 입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난 매의 다리를 붙잡고 잡아 땡기기 시작했다. "뱉어요!" "이어."(싫어) "뱉어요!!" "아이으에 왜 에어."(맛있는데 왜 뱉어) 난 우격다짐으로 라이레얼의 입을 벌려 간신히 라이코스를 빼내었다. 라 이코스는 얼굴에 흥건하게 침이 묻은 채로 기절해 있었다. 난 라이코스를 품에 안고는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라이레얼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호호, 그냥 간이 맞나 보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깃털에 조금 때가 탄 것 같아서." 간이 맞나 보려고……. 간이 맞나 보려고……. 난 화가나서 소리질렀다. "아니, 살아있는 매의 간을 왜 봐요!?" 라이레얼은 내 박력에 조금은 수그러진 태도로 대답했다. "……그냥." "라이레얼 자꾸 이럴꺼에요!? 라이레얼이 무슨 야만인도 아니고, 어떻게 매를 산 채로 입에 넣을 생각을 해요? 라이레얼이 그러고도 인간이에요?" 라이레얼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히로. 난 하프엘픈데……." "……." "헤헤." "아, 아무튼 하프엘프든 인간이든지 간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아니, 오히려 하프엘프면 인간보다 더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거 아닌가 요?" "호호호, 히로.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제가 지금 흥분안하게 생겼어요!? 라이코스는 그냥 매도 아니고 청안백 우조라 불리는 영물이라구요. 이건 대륙내에서 몇마리 존재하지도 않는 천 연기념물이에요. 천연기념물! 아시겠어요?" "……?" "라이코스를 잡아먹는다는건 자연 생태계에 크나큰 악영향을 미치는거에 요! 그리고 그런 짓을 하면 YMCA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난 말을 마치고 씩씩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라이레얼은 몸을 잔뜩 웅 크린 채,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맛 정도는 봐도 상관 없잖아." 난 얼굴을 라이레얼 바로 앞에다 대고 소리쳤다. "상관있어요!!" 갑자기 라이레얼은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끄내 더니 입에 물었다. "너무해, 히로." 너무하긴 개뿔이……. 라이레얼은 이제 아예 펑펑 울고 있었다. 입으로는 손수건을 물어 뜯으며. 만약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말 슬픈 광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근데 이미 라이레얼의 정체를 다 알고있는 내 눈에도 슬픈 광경으로 보인다. "흑흑, 히로." "울지마요." "너무해." "너무하긴 또 뭐가 너무해요?" "흑흑, 히로, 설마 애정이 식은거야?" "……." "그 날의 뜨거운 밤을 벌써 잊은거야?" "……." 그건 진짜 잊고 싶다. "내가 그 매를 먹으려던건……, 흑흑……, 전부 히로를 위해서 였는데 ……." 난 한숨을 내쉈다. "뭐가 날 위해서에요?" 라이레얼은 물어 뜯던 손수건을 빼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히로, 나 사실……." "사실 뭐요?" "나 사실……." "빨리 말해요." "나 사실……." 난 짜증이 나서 빽 소리쳤다. "짜증나게 굴지말고 빨리 말해요!!" 그러자 라이레얼은 살짝 고개를 들고 말했다. "임신했어." 쿵-!!! "노, 농담이죠?" 라이레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실이야." 라이레얼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배를 어루만졌다. "내 뱃속에는 히로와 나의 아이가 자라고 있어." 쿵-! 쿵-! 순간 해머가 내 머리를 두 번 강타했다. 나의 몸은 천천히 옆으로 기울었 다. 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이, 히로도 참. 일주일만에 임신이 될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날은 확실 히 안전한 날이었다구." "그것 참 다행이네요." "놀라서 기절까지 할줄은 몰랐어. 용서해줘." "용서해드릴께요." "정말? 고마워." 난 지금 라이레얼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있다. 너무 큰 충격 탓인지 정신차린지 시간이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그래 도 다행인 것은 임신했다는거……, 농담이랜다. 아! 화낼 기운도 없다. 이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흑흑, 만약 진짜로 임신했었다면, 난 그대로 코꿰 어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라이레얼과 함께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 다음 라이레얼과 정식으로 혼인을 하고 그 다음 애낳고 그 다 음 도란도란 행복한 가정을 꾸며나 가는 가장이 되어……. 아! 정신이 다시 혼미해 진다. 17살에 애아빠가 왠말이냐? 아무튼 미성년자가 관계를 맺을 때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괜히 한번의 불장난으로 미혼부(?)가 될 수도 있다. 미성년자는 아직 신체적, 정신적 성 장을 완전히 거치지 않았음으로 그짓(?)은 될 수 있는한 자제하도록 하고 웬만하면 키스 정도로 끝내라. 정 못참겠으면 피임이라도 확실하게 하고 하던지. 그러고보면 요새 낙태아가 참 큰 문제란 말이야. 낙태하는 여성 대부분이 미성년자라는 것도 문제고. "히로. 아직도 몸에 힘이 없어?" "예." "미안해∼." "괜찮아요." "어머, 설마 삐진거야? 아이잉, 정말 미안해∼." "정말 괜찮아요." 난 1시간 정도 라이레얼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결과, 간신히 힘을 되찾 고(?) 일어설수 있었다. 내가 일어서자마자 라이레얼은 헛구역질을 시작했 고, 그 모습을 본 나는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지금 다시 라이레얼의 무릎 을 베고 누워있다. "아이, 히로도 참. 일주일만에 입덧을 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한번 더 말 하지만 그날은 확실히 안전한 날이었다구." "그것 참 다행이네요." "놀라서 기절까지 할줄은 몰랐어. 용서해줘." "용서해드릴께요." "정말? 고마워." 그렇게 밤은 지나갔다. Part 2. 청룡도의 비극 대륙력 1671년 4월 20일 내가 상단 호위병으로써 부푼 꿈을 안고 출발한지 어느새 10여 일이 지났 다. 그 동안 난 베네트와 라이레얼 및 기타 등등의 사람들로부터 라이코스 를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로 노력해야 했다. 요 며칠간 라이코스 의 생명이 위험했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위의 모두가 적이다. "히로오∼." 특히 방금 내 이름을 부른 여자가 제일 위험한 적이다. 이 여자한테서 라 이코스를 지키느라 요샌 잠도 제대로 못자고 있다. 한번은 자는 도중 이상 한 느낌이 들어서 일어났는데, 글쎄 라이코스가 털이 몽땅 뽑힌 채로 끓는 물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 아닌가? 난 정말 이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라이코스가 영물이여서 다음 날이면 뽑혔던 깃털이 새로 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듯이 오늘 역시 밤이 찾아왔다. 그러고 보면 요새 밤이 자주 찾아오고 있다. 하루에 한번꼴로.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난 그냥 나무등걸에 기대 쉬고 있었다. 피로도 풀 겸 눈을 감으려 하는데 반대편에서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 꽉잡어."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어디서 앙탈이야? 그냥 가만히 있어." "으아, 이러지 마세요! 전 남자 싫어요." "난 좋아." "베네트! 도와줘요!!" 약 세놈 정도가 요루드를 꽉 붙들고 있고 동성연애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 는 로리운이란 놈이 요루드와 키스 하려고 준비 중이다. 난 구해줄까 생각 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있기로 했다. 다른 놈들 역시 말리기는커녕 박수 치 면서 구경하고 있었다. 박수 제일 크게 치고있는 사람이 라이레얼과 베네 트라는 사실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베네트는 자기 애인이 남자와 키스한 다는 것에대해 별 거부감이 없나보 다. 하긴, 라이레얼은 전에 나를 베네트에게 팔아(?)넘기려 했었지. 무서운 여자들……. "흐흐, 앙탈부리니까, 귀여운데." "으아!" 쪽-! 결국 로리운은 요루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비는데 성공했다.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역겨운 장면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으윽, 남자끼리 저게 뭐하는 짓이냐? 로리운은 키스를 마치고 킬킬 웃으며 일어섰다. "오우! 요루드의 입술, 제법 달콤한데." 미친 변태 새끼……. 요루드는 자싵을 붙잡고 있던 패거리들이 잡고있던 손을 놓아주자마자 벌 떡 일어섰다. "자꾸 이럴꺼에요? 한, 두 번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럼 저 키스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단 말인가? 저 미친 자식은 남자가 뭐 가 좋다고, 키스를 하냐? 하긴, 생긴거 보니까 여자한테 인기 없게 생기긴 했다. 그래. 넌 평생 남자 입술이나 빨면서 살아라. 요루드는 머리 끝까지 화가 올랐는지 칼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제가 분명 말했죠. 한번만 더 이런 짓하면 가만히 않있겠다고." 로리운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오오! 사랑하는 요루드여. 그래서 지금 그대가 나에게 칼을 겨누겠다는 겁니까?" 주위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루드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 히며 소리쳤다. "필요하다면 해야겠지요. 분명 말하지만 전 동성연애자가 아닙니다. 저한 테는 베네트가 있다구요." "아이, 자기야, 여기서 그런 말 하면 어떡해. 나 부끄럽잖아." 베네트는 한쪽에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고,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남자들 이 일제히 토하기 시작했다. "요루드. 정말 나와 한판 해볼참이야? 난 사랑하는 그대에게 상처입히기 싫은데." "당신이나 조심해시지요."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특히 요루드는 진짜로 열받았는지 눈동자 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한 손을 들어 올리 면서 소리쳤다. "맞짱!" "맞짱!" "맞짱!" "맞짱!" 둘이 한판 붙으라는 얘기다. 이 소리를 라이레얼과 베네트가 가장 크게 외쳤다는 사실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둘은 모닥불로 걸어 나왔다. 요루드와 로리운은 칼에 손을 가져간 채, 서 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은 천천히 서로의 무기를 뽑았다. 요루드의 무기 는 약 1m정도 되어보이는 직도(直刀)였고 로리운의 무기는 약 1.5m정도 되어보이는 바스타드 소드였다. 흠, 정말로 한판 붙을려나? 난 나무등걸에 등을 길게 기대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옛말에 싸움 구경 과 불 구경이 제일 재밌는거라고 했다. "야! 너 우리 자기한테 상처 하나라도 내면 죽을 줄 알아!" "하하, 걱정하지마, 베네트. 내가 설마 사랑하는 요루드에게 상처를 입히 겠어?" "그럼 갑니다." 요루드는 도를 비스듬하게 들고 로리운에게 달려 들었다. 요루드는 그 상 태에서 아래에서 위로 도를 빠르게 내리쳤다. 챙! 로리운은 씩 웃으며 가볍게 공격을 막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요루드 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면서 두 손으로 도를 잡고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 이 베었다. 로리운은 바스타드 소드를 거꾸로 세워 요루드의 공격을 막은 다음, 반 걸음 정도 옆으로 움직이면서 요루드와의 간격을 넓혔다. 칼의 길 이가 요루드 것이 더 짧은 만큼, 거리가 길어 질수록 요루드에게 불리했다. 요루드는 로리운을 자신의 도 간격 위에 두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빠르게 파고 들었다. 하지만 로리운은 역시 만만찮은 상대가 아니였다. "오! 사랑하는 나의 요루드. 오늘은 왠일인지 그대가 나에게 자꾸 다가오 려 하는군요. 내 그대의 대쉬를 받아주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 관계로 다 음 기회로 미루겠소. 하하하." 등의 헛소리를 하면서 쉽게 간격을 내주지 않았다. 요루드와 로리운의 칼싸움은 상당히 볼만했다. 요루드가 화려한 동작으로 도를 휘두르면 로리운은 가볍게 공격을 막고 간격을 넓힌다. 요루드는 다시 간격을 좁힐려고 파고 들면 로리운은 바스 타드 소드를 크게 휘둘러 요루드와 떨어진다. 요루드가 찌르기를 하면 살 짝 흘린 다음, 반동을 이용해서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른다. 공격은 주로 요루드가 하는 편이었고 로리운은 요루드의 칼을 막거나 흘 릴 뿐, 특별히 큰 공격은 하지 않았다. 이건 거의 로리운이 요루드를 가지 고 노는 수준이었다. 요루드도 꽤 잘 싸우는 걸로 보이지만 저 로리운이란 놈, 실력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로리운이 끝낼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벌써 옛날에 끝났을 것이다. 그건 요루드도 잘 알고 있을텐데……. 난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저거 로리운이 요루드 갖고 노는 거죠?" "응." 라이레얼은 저녁에 먹다 남겨둔 빵으로 라이코스를 살살 유혹하고 있었 다. 라이코스는 빵이 먹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제까지 당한 것으로 미루어 라이레얼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는지 쉽게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근데 왜 계속하는거죠?" 라이레얼은 라이코스 입에 잘게 찢은 빵을 넣어주며 대답했다. "연습이 되니까." "예?" "자세히 봐봐. 로리운이 적당적당히 상대해주면서 요루드에게 어디를 어 떻게 공격해야 할지 가르쳐주고 있잖아. 요루드고 그걸 알기에 계속 휘두 르는거고." 난 감명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제보니 싸움이 아니라 대련이었구만. 그래서 베네트도 말리지 않은거 고." "그리고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말도 있잖아."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옵니까? 싸움인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달으고 있었다. 요루드는 지쳤는지 도를 든 팔을 조금 아래로 내리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반면 로리운은 이마에 땀 한방울 나지 않았다. 확실히 로리운이 움직임을 최소한 것에 비해 요루 드의 움직임은 너무 컸다. "사랑하는 요루드. 벌써 지친거야?" "하아∼ 하아∼, 아직은 견딜만 합니다." "그러지 말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하지. 어때?" "그러죠." 둘은 각자의 무기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요루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 자마자, 베네트는 요루드에게 다가가 땀을 닦아 주었다. "우리 자기 수고했어." "아니에요. 그나저나 간만에 싸워보니 조금 힘든데요." "그렇지? 걱정하지마. 내가 조금 있다 몸보신 시켜줄테니까." 베네트는 그렇게 말하며 라이코스를 슬쩍 처다보았다. 라이코스는 열심히 빵을 쪼아먹다가 갑자기 몸을 한번 움찔했다. 과연 영물은 영물인가 보다. 이리도 빨리 살기를 알아채다니. 시간이 흘렀는지 모닥불에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까 모아놓은 장작인 이미 다 떨어졌다. 라이레얼은 라이코스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앉아 있는 떡대들을 향해 외쳤다. "야! 아무나 가서 장작 좀 줏어와!" 그러자 라이레얼한테 잘보이고 싶은 럴크가 벌뻑일어나 장작을 구하러 어 두운 숲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모닥불이 거의 사그라들 때 쯤, 럴크와 이름 모를 한 명이 커다 란 통나무를 질질 끌고 나타났다. 럴크는 통나무를 모닥불 근처까지 운반 한 뒤,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이 정도면 오늘 밤 사용하기엔 충분하겠지." 충분하다 뿐이겠냐? 아예 캠프 파이어를 해라. 테커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야. 그거 줏어온거냐, 베어온거냐?" "당연 줏어왔지.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니까 쓰러져 있던데." "……그래." 럴크가 가져온 통나무는 곳곳이 썩어들어가 거의가 검은색을 띄고 있었 다. 아마도 벼락을 맞았다던가 해서, 오래전에 죽은 나무 같았다. "야! 멍청이 서있지만 말고 빨랑 쪼개. 불 다 꺼지겠다." 라이레얼의 앙칼진 목소리에 대, 여섯 명의 남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정말 라이레얼은, 자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한테 뭐 시키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시킨다고 하는 놈들은 또 뭐냐? 퍽- 퍽- 용병들이 무기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나무는 곳곳이 떨어져 나갔다. 썩은 나무다 보니 쉽게 쪼개지고 있었다. 쪼개진 나무들을 모닥불 속에 던져 넣 자, 불길은 다시 크게 타올랐다. 나도 한번 쪼개볼까? 그러고보면 청룡도(靑龍刀)를 안뽑은지도 상당히 오 래됐단 말이야. 그래도 명색이 블루 드래곤 뼈인데, 녹슬지는 않았겠지? 난 청룡도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가, 히로?" "장작 패려구요." "뭐? 아이, 히로는 그런거 할 필요 없어. 그런건 힘 밖에 없는 저 멍청한 놈들한테 맞기고 히로는 그냥 마음 편히 숴." 잠깐 동안 힘 밖에 없는 멍청한 놈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괜찮아요. 그냥 식후 운동겸 하는건데요, 뭐." 난 통나무 앞에 섰다. 테커는 투 핸디드 소드로 나무를 내리찍은 다음, 이 죽거리며 말했다. "어이, 라이레얼의 애완동물께서 여긴 왠일이야?" "니들이 너무 불쌍해서 도우러 왔어." 그러자 테커는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오오! 니가 힘써준다면 내가 어찌 가만있겠냐? 야! 장작은 이 녀석이 다 만든다니까, 우리는 응원이라도 해주자!" 그 말을 끝으로 열심히 나무를 쪼개던 놈들은 들고있던 무기를 내팽게 치 고 모닥불 주위에 쪼그려 앉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 짝짝짝, 짝짝짝짝, 짜작! "쪼개라! 쪼개라! 쪼개라!" "힘내라! 힘내라! 힘내라!" 이것도 응원이라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주위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난 용감하게 청룡도를 빼 들었다. 스르릉- 솜털이 다 곤두설 것 같은 음향과 함께 청룡도는 그 모습을 들어냈다. "이야! 칼 죽이는데!" "비싸보인다." "야! 날이 파래보여." "나도 파래보여." 이 멋진 도를 보고도 그 정도 말 밖에 못하다니……. 니들의 아이큐(IQ) 와 이큐(EQ)가 심히 의심스럽다. 이 무식하고 감성 없는 놈들아! 달빛을 받은 청룡도는 말그대로 정말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흠, 이러니 까 내가 꼭 전설속에 나오는 용사라도 된 것 같군. 난 청룡도를 높히 치켜든 다음, 적(?)을 향해 내리쳤다. 스윽- 스윽- 역시나 생각했던데로 별로 힘을 넣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무는 잘 잘 렸다. 바위도 단칼에 베는 청룡도인데, 썩은 나무 쯤이야. 그렇게 여러번 칼질을 하고 나자, 커다란 통나무는 훌륭한 땔감으로 탈바 꿈했다. 난 나무가 완벽하게 잘린 것을 확인하고 청룡도를 집어넣었다. 주 위 사람들을 의식해서 최대한 멋진 동작으로 집어넣었다. 테커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진 채 입을 쩍벌리고 있었다. "야! 니들 왜 그러냐?" 테커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좌우로 크게 저었다. "너……, 어떻게 한거냐?" "뭘?" "어떻게 자른거야?" "아∼, 내 칼이 좀 고급이거든. 썩은 나무 쯤이야 한방에 끝나지." 한 순간, 녀석들의 눈이 번쩍 빛났다. 니들이 빛내 봤자지. 난 몸을 휙돌려 라이레얼 옆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와! 그 칼 굉장하다. 저기, 히로. 그거 나 주면 안돼?" "절대 안돼요." "핏……." 의외로 라이레얼은 쉽게 포기하고 다시 라이코스와 놀기 시작했다. 난 주 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데, 앞에 요루드 가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저기……, 그 도(刀) 말이야. 한번만 써보면 안될까?" "뭐?" "아까보니까 명기(名器)인 것 같아서. 이따 로리운이랑 한판 할 때, 한번 사용하고 싶은데……." 요루드는 그렇게 말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긴, 그래도 전사인 데 좋은 무기를 발견했으면 한번 쯤은 사용하고 싶겠지. "좋아." "어, 고마워." 요루드는 정말 기쁜지 미소를 지었다. 난 허리에 매어져있는 청룡도를 끌 러 요루드에게 건냈다. 요루드가 청룡도를 잡으려고 손을 내민 순간, 난 깜짝 놀라 청룡도를 든 손을 뒤로 뺐다. "안돼." "어?"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왠지 청룡도를 다른 사람 손 에 건네서는 안될 것 같았다. 난 청룡도를 다시 허리에 맸다. 요루드는 그 모습을 보더니 어색한 표정 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미안해." "아니야, 남의 무기를 빌려 달라고한 내가 잘못이지. 무기는 생명인데 말 이야." 난 요루드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청룡도를 건내주기는 싫었다. 왜지? 특별히 청룡도에 애착이 있는것도 아닌데. 아니면, 요루드가 방금 말한데로, 무기는 생명이여서 그런가? 난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난 청룡도의 손잡이를 어루 만졌다. 약간은 따뜻한 기운과 약간은 차가운 기운이 손에 느껴졌다. 난 청룡도의 손잡이 를 꽉 움켜쥐었다. 이상한 느낌이 몸에 느껴졌다. 마치 청룡도와 내가 공명 을 하는 듯한 느낌이다. 난 그 느낌에 더 집중하기 위해 눈을 살짝 감았다. 청룡도의 안에 잠들어있는 무언가가 내 손을 타고 몸 전체에 흘렀다. 날카로운 기. 뜨거운 빛. 하얀 전류. 파괴의 힘. 그리고……. "야! 너 그러는게 어딨어? 빌려주기로 했으면 줘야 할것이니야!" 난 눈을 떴다. 베네트의 화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그건……." "시끄러! 남자 새끼가 한번 말한건 지켜야 할꺼아냐. 빨랑 내놔!" "저기……. 앗! 무슨 짓이에요!?" "잠깐만 빌리자구." 베네트는 내가 말하는 사이 빠른 손놀림으로 내 허리에 매저 있는 청룡도 를 끌렀다. 난 청룡도를 빼앗으려고 달려들었지만, 베네트는 그것을 요루드 에게 던졌다. "안돼!"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요루드는 이미 청룡도의 손잡이를 잡은 상태였다. 요루드는 청룡도를 손에 쥔 채, 눈을 껌뻑이며 나를 처다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돼긴 뭐가 안돼? 자기야! 그걸로 로리운을 박살내!" 요루드는 쭈삣거리며 나를 처다보았다. 청룡도를 빌려도 되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난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요루드는 웃음을 지 었다. "야! 쫌만 더 쉬자. 일어나기 귀찮다." "그러지요." 날카로운 기. 뜨거운 빛. 하얀 전류. 파괴의 힘.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 기분은 여전히 이상했다. 꼭 무슨 일이라 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느새 손에는 축축히 땀이 베어들었다. 난 담배를 하나 빼물었다. 찰칵찰칵- 손에 땀이 묻어서 부싯돌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난 간신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라이레얼 옆에 앉았다. 라이레얼은 때리고, 꼬집고, 할퀴는 등 약간 은 새디스트하게 라이코스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왜 그랬어, 히로?" "뭘요?" "왜 안빌려줄려 그랬어? 요루드가 먹을까봐?" "아니에요." "그럼 왜?" "그냥,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 담배가 반쯤 타들어갔을 때, 로리운은 벌떡일어나 외쳤다. "다시 한판 땡기자." 요루드는 청룡도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네트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힘내, 요루드! 히로 녀석이 좋은 칼도 줬으니까, 제대로 한판 붙어봐." 불길한 예감이 점점 엄습해온다. 흘러내린 땀 때문에 손바닥이 끈적거린 다. 난 손을 펴 번들거리는 땀을 바지에 닦았다. "안색이 안좋은데. 어디 아파, 히로?"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가 자꾸 왜이러지? 왜 이렇게 신경이 예민해졌지? 난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몸에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요루드와 로리운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모닥불을 옆에두고 대치했다. 로리 운은 바스타드 소드를 가슴 한 가운데로 들어 올렸다. "덤벼." "이번엔 쉽지 않을껍니다." "오오! 무기가 좋아지니까 자신감도 붙은건가?" "아까 보셨겠지만 이 도는 보통 도가 아닙니다." "흠, 진정한 실력자는 무기탓을 하지 않는 법이지." "그럼 갑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요루드는 청룡도의 손잡이와 도집만 꼭 붙들고 있을 뿐, 뽑지는 않고 있었다. 어디를 공격할까 탐색하는 모습이었다. 베네트는 손바닥을 열심히 치며 요루드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자기야, 힘내! 몸에 기스하나라도 나면, 오늘 잠 못잘줄 알아!" 저것도 응원이라고…….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응원이었지만, 오늘밤 잠을 못잔다는 말에 힘을 얻었는지, 요루든 한 손으로는 도집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 잡이를 움켜쥐고 천천히 뽑기 시작했다. 긴장감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젠 손뿐만 아니라 온몸에 땀이 흐르는 것 같다. 스르릉 소리가 섬뜩하게 청각을 자극하며, 청룡도는 천천히 뽑혀나왔다. 달빛을 반사해 푸르게 빛나는 도신은 시리게 시각을 자극했다. 1m가 넘는 장도(長刀)이기에 발도하는 동작은 지루할 정도로 느렸다. 원 래부터 저렇게 느린건지 아니면, 내 눈에만 느리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도는 어느새 반 이상 뽑혀 나왔다. 날카로운 기. 뜨거운 빛. 하얀 전류. 파괴의 힘.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우(杞憂)였나? 한 순간에 긴장이 풀렸다. 요루드는 발도를 끝마친 다음, 청룡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달빛을 받 은 청룡도는 눈이 아찔할 정도의 백광(白光)을 뿜어냈다. 저것은 단순히 달빛을 반사한 빛이 아니다. 난 벌떡일어나 소리쳤다. "안돼!!!" 퍼어엉-! 살점이 사방으로 날렸다. 요루드가 있던 자리에는 아직까지 백색 전류가 흐르고 있는 청룡도만이 놓여져있었다. 피가 완전히 증발했는지 공기 중에 는 붉은색 수증기가 떠다니는게 눈에 보였다. 날카로운 기. 뜨거운 빛. 하얀 전류. 파괴의 힘. 그리고…… 난 느린 동작으로 얼굴에 달라붙은 살점을 만졌다. 투둑- 살점은 흙과 같이 손에 닿자마자 부서져 내렸다. 피부중의 물기도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이다. 뇌룡(雷龍)의 마력.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 다. 시간이 정지했다. 잠시 동안 우리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존재했다. 따닥따닥-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흩날리는 불씨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 작했다. 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 어떻게……." 베네트는 눈이 풀린 채, 멍하니 서있었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베네트의 동공이 축소되었다. 베네트는 바닥에 놓여저 있는 자신의 칼을 집었다. "이 자식……. 죽여버리겠어!!!" 베네트는 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베네트!" 라이레얼은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가로막았다.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베 네트는 억센 팔로 라이레얼을 밀친 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난 직감 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두려움에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질렀다. "으아아아!!!" 죽는다. 베네트는 길이가 1m 두께가 30cm 정도 되보이는 기형검을 머리 위로 들 어 올렸다. 죽는다. 베네트는 내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죽는다. 머리가 텅빈 느낌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에서 베네트를 향 해 달려드는 라이레얼의 모습도,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도, 주위에 널려져 있는 요루드의 살점도, 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베네트의 칼도, 전 부 나하고는 상관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죽는다. 이상했다. 방금전까지 느꼈던 죽음의 공포는 서서히 사그라 들었다. 죽는다. 순간, 눈의 초점이 달라졌다.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베네트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바닥의 돌맹이와 풀들의 모습까지.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피부에 달라 붙은 공기의 흐름과 주위 사람들의 마음까지.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벌레들이 우는 소리와 풀이 숨쉬는 소리까지. 죽는다. 금방이라도 내 머리를 쪼개 놓을 것 같던, 기형검은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다가왔다. 죽는다. 난 내 옆에 뉘여져 있는 스태프를 움켜 잡았다. 베네트의 얼굴이 점점 크 게 보였다. 일그러진 미간. 광기에 휩싸인 눈. 슬프게 흐르는 눈물. 난 스태프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살 수 있다! 캉! 베네트의 기형검이 부딪히자, 팔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베네트는 공 격이 무효로 돌아간 것을 알고 검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난 오른발의 뒷 꿈치를 들고 튕기듯이 뒤로 물러나며 일어섰다. 베네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면서 검을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빠르다. 아니, 느리다. 이상했다. 눈으로는 빠르게 보이는데, 머리는 느리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난 스태프를 비스듬이 세웠다. 검이 부딪히는 순간, 체중을 오른발로 옮기 며 스태프를 안쪽으로 끌어 당겼다. 캉-! 무섭지 않았다. 두렵지 않았다. 저것은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네트는 검이 튕겨져 나갈 때의 반동을 이용하여 반바퀴 돌며 오른쪽 허 리 부근으로 검을 휘둘렀다. 젠장, 회전으로 힘과 가속이 같이 붙었어. 어떻게 막지? 어떻게……? 흘려보낸다. 난 빠르게 스태프를 쥔 손의 위, 아래를 바꿔 잡았다. 그리고 체중을 왼쪽 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스태프를 세웠다. 캉! 베네트의 검과 내 스태프가 충돌했다. 검과 닿은 부분을 주축으로 위는 아래로, 아래는 위로 이동시킨 다음, 지 그시 누른다. 키기긱- 기묘한 마찰음과 함께 베네트의 검은 뒤로 흘렀다. 한 순간, 체중이 앞쪽 으로 쏠리며 베네트의 자세는 흐트러졌다. 난 손에 쥔 스태프를 놓아버리 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베네트의 일그러진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스쳐갔 다. 난 허리가 완전히 젖혀진 순간,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앞으로 튕기며, 주먹을 내질렀다. 빠아악-!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주먹은 베네트의 왼쪽눈과 귀 사이를 정확히 가격 했다. 난 주먹을 움켜쥐며 한발짝 뒤로 물러섰고, 베네트는 쓰러졌다. "하아∼, 하아∼." 난 거친 상체를 숙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쉈다. "이, 이자식!" 베네트는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풀렸는지 잠시 비틀거리다 다시 주저 앉았다. 베네트는 울면서 절규했다. "젠장! 젠장!! 젠장!!!"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았으니 당분간은 못일어나." 난 비틀거리며 청룡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청룡도는 도신 전체에 백 색의 전류를 머금은 채 웅웅거리며 떨고있었다. 난 허리를 숙여 청룡도를 집었다. 치지직거리는 전류가 팔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뜨겁지 않았다. 따뜻했다. 난 청룡도를 들었다. 대부분의 전류는 내 몸을 타고 땅으로 흘러갔지만, 도신에 새겨진 수십개의 마법주문에는 아직 전류가 남아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난 남아있는 전류를 빨아들였다.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면서 청룡도의 진동도 멎었다. 난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 도는……, 나 밖에 잡을 수 없어." 난 도집을 집어 청룡도를 집어 넣었다.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환상 같이 느껴졌다. 난 비틀거리며 걸었다. "히로……." 라이레얼은 슬픈 표정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라이레얼을 스 쳐지나갔다. 라이레얼은 나의 망토를 잡았다. 난 걸음을 멈추고 라이레얼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라이 레얼은 입으로 몇마디 웅얼거리다가 포기하고 손을 떨구었다. "흐윽, 흐윽, 흐흐흑, 으아아아-!" 난 베네트의 울음을 뒤로한 채,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완벽한 어둠. 달빛마저 나무들에 의해 차단되어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난 그 어둠속에 녹아들었다. "빌어먹을." 그 때와 똑같다. 난 왼손으로 덜덜 떨고있는 오른손을 지그시 눌렀다. 내 탓이 아니야. 떨림이 심해지고 있었다. 흥분이 사그라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요루드의 표정. 굉음과 함께 터져나간 머리. 사 방으로 흩어진 살점. 붉은색 증기. 몸을 움직일 때, 제일 먼저 움직이는 곳은 눈동자다. 두 번째로 움직이는 곳은 주축이되는 발의 엄지 발가락이다. 상대방의 눈동자와 발끝을 동시에 보고 있으면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다. 어디로 움직일 것인지, 어떻게 움직 일 것인지. 난 그것들을 한눈에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아까 베네트와 싸울 때, 그건 내가 아니였다. 온 몸의 감각이 미쳐날뛰는 듯한 느낌.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했 다. 상대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디를 공격하려하는 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니야. 미칠 것 같다. 난 오른손을 누르는 것을 포기하고 왼손으로 담배를 빼물었다. 라이터를 켜자 작은 불이 눈 앞에 생겨났다. 난 그 불을 담배에 갔다 댔다. 치익 하 는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이 붙었다. 난 한 모금 깊게 빨아 들였다. 연기가 목구멍으로 넘어 오자 흥분이 조금 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머리가 조금씩 차가워졌다. 그제서야 냉정한 사고가 가능해졌다. 칼이라곤 잡아본적도 없는 내가, 후작의 사병을 11명이나 죽일 수 있었던 이유. 그날 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난 나무 등걸에 몸을 기댄 채, 그날의 일을 회상하려 애썼다. 손의 떨림은 어느새 거의 멎어 있었다. 난 청룡도를 크게 휘둘렀다.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청룡도는 사병의 검을 부수고 목에 한줄기 혈선(血線)을 그었다. 잘려진 사병의 머리는 내 발쪽으 로 굴러왔다. 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갑옷을 걸친 9명의 사병이 달 려왔다. 내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한 놈이 달려들었다. "죽어라!" 크게 움직일 필요조차 없었다. 난 달려드는 놈을 향해 가볍게 청룡도를 휘둘렀다. 청룡도는 놈의 갑옷을 베고 심장까지 파고 들었다. "둘." 퍽-! 난 방금 죽은 놈을 발로 차서 청룡도를 빼냄과 동시에 뒤의 놈들의 움직 임을 막았다. 난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발로 걷어차 오른쪽으로 옮겨놓고 왼쪽 벽에 몸을 붙였다. 그런데로 넓은 복도였지만 시체로 막아 놓았기에 한번에 달려들 수 있는 인원은 2, 3명으로 한정되었다. 난 오른쪽 어깨를 왼쪽 벽에 꼭 붙인 채, 오른 팔로 청룡도를 휘둘렀다. 앞쪽에 서있던 놈중 하나의 목이 잘려나갔다. "셋." 난 청룡도를 빠르게 회수한 다음, 오른쪽에 있는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억!" "넷." 난 심장에 박힌 청룡도를 빼지않고 그대로 옆으로 움직였다. 내 앞에 있 던 놈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찌르기를 했고, 난 청룡도에 꽂혀있는 놈으로 검을 막았다. 푸욱-! 이미 죽은 놈의 뱃속을 뚫고 검이 삐죽 나왔다. 난 왼손으로 죽은 녀석을 밀면서 청룡도를 빼냈다. 그러자 검은 더욱 튀어나왔다. 난 청룡도를 내질 렀다. 청룡도는 앞의 시체를 뚫고 뒤에서 찌르기를 한 놈의 배를 꿰뚫었다. "으헉!" "다섯." 오른쪽에 서있는 놈이 검을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난 청룡도를 빼서 휘두르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난 청룡도가 두 시체에 꽂혀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옆으로 그었다. 키기기긱- 살과 갑옷이 갈리는 소리가 나면서 청룡도는 두 시체의 허리를 찢고 놈의 허리마저 갈라놓았다. "크아아!" "여섯." 놈의 상체는 힘없이 앞으로 무너졌고 난 뒤로 몸을 튕겼다. 잘려진 허리 에서는 여러 가지 장기들이 흘러내렸다. "젠장, 보통놈이 아니야. 조심해." "함부로 달려들지마. 조심스럽게 움직여." 몇놈이 죽고나자 그제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지, 사병들은 줄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주위에 시체들로 녀석들의 행동반경이 줄어들었지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한 녀석이 피에 미끄러지면서 잠깐 자세 가 흐트러졌다.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달려드었다. 녀석은 내가 다가오 자 깜짝 놀라 검을 휘둘렀지만 난 왼쪽 어깨를 뒤로 살짝 빼, 가볍게 피한 다음, 녀석의 오른팔을 잘랐다. "으아악!" 녀석은 신음을 내뱉으며 비틀거렸고, 난 녀석의 왼팔마저 자른 다음 심장 에 차가운 청룡도를 꽂아넣었다. "억!" "일곱!" 난 옆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검을 발견했다. 낮다! 막기는 늦었다. 난 허리를 뒤로 꺽었다. 몸이 반쯤 넘어간 상태에서, 난 균형을 잡기 위해 도집을 움직여 바닥과 닿게 하였다. 쉬이익-! 녀석의 검은 간발의 차이로 내 몸 위를 훝고 지나갔다. 난 왼손으로 도집 을 비스듬하게 바닥에 닿게 만든 다음, 한 순간에 세우면서 그 반동으로 몸을 튕겨 일어섰다. 놈은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린 상태기 때문에 청룡도 를 슬쩍 갔다 대자 몸이 두 조각으로 잘려 나갔다. "큭!" "여덞." "파이어 볼Fire Ball." 마법산가? 난 청룡도의 마나를 주입했다. 치지직 거리는 스파크가 튀며 도신 전체에 는 백색의 전류가 흘렀다. 난 청룡도로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처냈다. 퍼어엉-! 파이어 볼은 둘로 갈라지며 복도 벽에 부딪혀 폭파했다. 귀찮군 난 빠르게 청룡도를 휘둘러 한 놈씩 처리했다. 청룡도의 흐르는 전류 때 문에 갑옷이나 검에 닿기만 해도 녀석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아홉." "놈을 막아!" 늙은이는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죽어라!" "열!" 난 가로막는 사병의 목을 벤 다음, 늙은이를 쫒아갔다. 콰당-! 늙은이는 피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늙은이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문을 외웠다. "모, 모든 것을 파괴 할, 할 수 있는 히, 힘이여, 여. 지, 지금 내 손 끄, 끝에 매, 맺혀……,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치지지직-! 주문도 제대로 외우지 않은 마법이다. 내 예상대로 라이트닝 볼트는 내 바로 앞에서 소멸했다. 늙은이는 크게 놀라더니 두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다시 주문을 외웠다. "……대, 대지를 뒤덮고 있는 마나……, 지금 빛으로 내, 내 앞에…… 화 살의 형상으로……. 매직 미사일." 1클래스 마법을 쓰면서 주문이나 외우고 있다니, 완전 병신이군. 난 청룡도로 날아오는 매직 미사일을 처냈다. 자, 다음은 뭘 보여 줄꺼지? 늙은이와 나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늙은이는 계속 뒷걸음치면서 다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화, 화려하게 타오르는 부, 불꽃의 힘이여, 지금 내, 내 손에 응축되 어……, 파괴의 힘으로……, 내 앞의 적을……, 파이어 볼Fire Ball." 자그마한 불공이 나에게 다가왔다. 막을 가치조차 없다. 난 슬쩍 몸을 비키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피했다. 콰앙-! 거리는 이제 반보거리다. 늙은이는 얼굴에 애처로운 빛을 띄며, 입을 열었 다. "사, 살려……." 청룡도는 천천히 늙은이의 몸을 갈랐다. 두개골부터 사타구니까지……. 경 악스러워하는 표정의 얼굴도 둘로 나뉘었다. 몸인의 장기들이 전부 바닥으 로 쏟아져 내렸다. 난 시체에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열 하나." 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이 피에 젖은 채,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 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웃고 있었다. 광기에 휩싸인 듯한 웃음 이 아닌, 정말 순수한 웃음을. "하아∼." 난 감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눈을 떴다. 흥분이 다시 고조되고있었 다. 담배는 어느새 다 타올랐기에 난 그것을 바닥에 뱉었다. 오른손이 희미 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하, 저게 내 모습인가? 피에 젖은 채, 천진난만에게 웃는 인간이……." 그건 정말 나인가? 피에 굶주린 악귀(惡鬼)가.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눈을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마찬가지다. 내 모습은 어둠의 일부분이 되어있었다. "악귀라? 크흐흐,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난 머리카락을 붙잡고 억지로 웃었다. 저벅저벅-! 흥분감 때문인지, 감각이 다시 살아 날뛰었다. 난 지금 다가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사람은 아닌가? "히로……."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내 앞까지 다가왔다. 빛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날 찾 은 것이다. 라이레얼은 내 옆에 앉았다. "뭐 하고 있었어?" "……."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 라이레얼은 내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어둠속때문에 라이레얼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희미한 윤곽만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난 억지로 입 을 열었다. "요루드가 죽은거……." 라이레얼은 내 머리를 붙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따뜻하고 뭉클 한 느낌이 전해졌다. "알아, 히로. 그건 히로 탓이 아니야." "……." "히로도 모르고 있었지. 그렇지?" "……." 라이레얼은 내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킨 채, 천천히 내 머리를 쓰 다듬었다. "괜찮아, 히로. 두려워하지마." "……않아요." "어?" "두렵지가 않아요." "……." "무섭지 않아요." "……." "그래서……, 두려워요." 내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난 억지로 다음 말을 이었다. "저, 저 이상하죠? 사람을 죽였는데, 죄책감 따위도 안느끼고. 하, 하지만 이상하게 두렵지가 않아요. 흐, 흥분감만 남아있어요. 그래서……, 두려워 요." "괜찮아. 괜찮아, 히로. 요루드가 죽은건 히로 탓이 아니야." 라이레얼은 내 몸을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난 이제 다시 요루드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슬펐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머리로는 슬프다고 생 각했지만, 가슴에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괜찮아, 히로." "……고마워요." 보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오늘따라 별은 더욱 밝게 빛나고 있다. 대륙력 1671년 4월 21일 베네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움켜쥔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 안 몇번이나 눈이 마주쳤지만, 특별히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우리는 식사를 끝마치고 출발했다. 라이레얼이 말하기를 요루드의 살점들은 잘모아서 불에 태웠다고 한다. 마차 에 올라타자 라이레얼이 몸을 기대왔다. 주위의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다만 요루드의 모습이 안보이는 것 뿐.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특별한 행동은 없었지만 모두가 의식적으로 나를 피하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변한건 아무것도 없다. 이제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이 죽었어도, 변한건 아무것도 없다. 태양은 뜨겁게 우리를 비추었다. 대륙력 1671년 4월 26일 출발한지 보름여만에 드디어 적이 출현했다. 숫자는 100여명. 우리와 비슷한 숫자다. "죽어라!!" 푸욱-! 청룡도는 부드럽게 놈의 갑옷을 뚫고 폐에 박혔다. 난 빠르게 청룡도를 회수한 다음, 앞의 두놈의 머리를 잘라 냈다. "으억!" "으윽!" 단조로운 비명이군. 개성없는 놈들. "비, 빌어먹을, 새끼!" 주위의 놈들은 칼을 나에게 겨눈 채,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난 내 발밑에 있는 머리통을 걷어찼다. 피 범벅이 된 머리통은 앞의 녀석 허벅지에 부딪혔다. "뭐해? 빨리 안 덤비고. 아까 그 기세는 어디 간거냐? 빨리 덤벼." "씨, 씨발! 죽여!!!" 한 놈이 소리치자 세 놈 정도가 한번에 달려들었다. 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거리를 만든 다음, 청룡도를 휘둘러 놈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쉬이익- 어디선가 화살이 날라오고 있었다. 직접 보지 않고 듣는 것 만으로도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날아오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난 왼쪽 어깨를 살짝 안쪽으로 빼는 것만으로 간단히 화살을 피했다. 난 왼쪽에 서있는 놈의 팔을 자르며, 오른쪽 놈의 공격을 피했다. 지루했다. 저 놈들이 절대 나를 죽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몸에 감각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느새 내 주위에 서 있는 놈은 두 명으로 줄었다. "크큭, 이제 두 놈이군. 자, 어느 놈이 먼저 덤빌래? 그냥 둘다 같이 덤비는게 어때?" 놈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한 채, 뒷걸음질 쳤다. 난 청룡도의 도신을 핱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쫄아? 빨리 안 덤벼?" "으, 으으윽." 결국 놈들은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쭈, 튀시겠다!" 난 놈들을 쫒아가려하였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만둬!" 라이레얼이었다. "왜 그래요? 쫒아가서 마저 죽여야죠." 라이레얼은 내 양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싸움은 이미 끝났어! 제발 진정해." 난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이레얼의 말대로 이미 싸움은 끝나 있었다. 적들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 고, 피곤과 피에 절은 사람들의 모습만이 보였다. 내가 서있는 주변에는 10여명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왜 그러는거야, 히로?" "뭐가요?" "너 답지 않아." "저다운게 뭔데요?" "자꾸 그런식으로 말돌리려 하지마. 넌 변했어." "전 그대로에요." 라이레얼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요루드 때문에 그래? 그건 히로 탓이 아니라고 했잖아." 요루드……. 잊고 있었다. 죽은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건만, 어느새 잊어가고 있었다. "요루드 얘긴 꺼내지 말아요!" 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라이레얼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왜 사과를 하는거지? 잘못한건 난데. 난 무안해져서 라이레얼의 팔을 밀쳤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마차로 돌아갔다. 마차에 올라와 보니, 테커와 럴크를 비롯한 대, 여섯명 정도가 있었다. 테커는 다른 놈의 몸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고 럴크는 몸의 피를 닦은 후, 누워서 쉬고 있었다. 조용히 검을 닦는 베네트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린저가 안보이네." 테커는 붕대를 다 감은 후, 탁소리가 나게 한번 치더니, 별일아니라는 말투로 말했다. "그 자식 뒈졌어." "……." "화살에 대가리를 직빵으로 맞았더라고. 그나저나 너 잘싸우던데. 니 덕에 우리조는 피해가 적었다. 그런데 아 무리 그렇다해도 산적들이 나타나자 마자 칼을 움켜잡고 미친 듯이 휘두르는건 뭐냐? 산적들 씨를 말릴 셈이 냐? 너 요즘 제정신이 아니라는거 알어? 라이레얼이 많이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요루드가 죽은건 너 때문이 아니니까 너무 죄책감 갖지마. 어차피 그 비실거리는 놈은 얼마 안있어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닥쳐!" 베네트였다. 베네트는 검을 다 닦았는지 조심스럽게 검집에 꽂아 넣었다. 테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네네, 닥쳐드리지요." 베네트는 나를 한번 노려본 다음,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난 베네트가 완전히 눕는 모습을 보고 테커에 게 물었다. "피해는 어느정도야?" "일단 물자피해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야. 애새끼들은 30명 정도 뒈졌고. 그 외에도 10명 정도는 중상이 야. 몸에 기스 안난 놈들은 우리 조가 제일 많아. 하긴 나와 럴크가 있는데다가 라이레얼과 베네트있지. 그리고 요새들어 피에 젖은 악귀(惡鬼)행새를 하는 너도 있는데 피해가 많다면 말이 안되겠지." "당연하지. 우리 히로가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데. 니들 머리가 그대로 달려있는건 전부 히로 덕인 줄 알아." 라이레얼은 어느새 와서 내 옆에 앉았다. 라이레얼은 손에든 물수건으로 내 망토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그래 도 방수가 되는 망토 덕에 몸에 피는 거의 묻지 않았다. 난 꼼꼼하게 피를 닦아주는 라이레얼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라이레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아까 화낸거요. 일부러 제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라이레얼은 수건을 내려 놓고 두 손으로 뺨을 만지며 말했다. "아아, 뭐 그런 것 갖고 그래. 히로가 나의 마음을 알아줬으니, 그걸로 됐어." "키스해드릴까요?" "뭐? 웁." 난 그대로 라이레얼의 입술을 덮쳤다. 주위의 눈이 있기에 난 입술만 부딪히는 짧은 키스로 끝내고 얼굴을 땠 다. 라이레얼은 상기된 내 얼굴을 보더니 방긋 웃었다. "어? 히로가 왠일이야? 먼저 키스를 다하고. 설마 드디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라이레얼의 진가(眞價)를 알 은거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레이디 라이레얼은 또 뭐냐? "좋을대로 생각하세요." "아이, 히로. 그렇게 말하면 부끄럽잖아." 라이레얼은 그렇게 말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모습을 본 테커는 피 닦던 물 수건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작작해 이 미친것들아! 지금 애새끼들 다 죽어 나자빠졌는데 그런짓이 하고 싶냐?" 라이레얼은 깜짝 놀랐다는 듯이 나에게 안겨들었다. "아앙, 무서워∼! 나 지켜줘, 히로." 테커는 그 모습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하더니, 곧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라이레얼 등을 토닥여주며 테커가 보고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팔, 다리가 잘려나간 사람, 배가 찢어져 신음하는 사람, 물을 달라며 고통스럽게 소리지르는 사람. 상단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빠르게 돌아다니며 이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테커의 말대로 중상자는 10여명 정도였다. 테커는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40명 정도의 희생으로 100명을 물리쳤으면 그런데로 양호한 편이야.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겠군. 아직 반 정 도 밖에 오지 않았는데, 숫자가 반으로 줄었으니……."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우리 조는 겨우 2명이 죽었을 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차가 텅 빈것같이 보였다. 처음에 10개 조였던 호위병들은 그 숫자가 줄어 8개 조가 되었다. 테커의 말대로 이제부터가 문제일 것이다. 앞으로도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할텐데, 숫자가 이렇게 줄어서야……. 뭐, 정힘들면 마법이라도 써야지. "우웅, 히로……. 음냐." 라이레얼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속편하게 자고 있었다. 아까부터 다시 오른손이 떨리고있었다.. 난 오른손이 떨고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주머니에 집어 넣고 라이 레얼을 일부러 왼쪽에 앉게 하였다. 난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담배를 빼 물었다. 몇 명을 죽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점점 두 손이 피에 물들어가는 것 같았다. 난 담배를 길게 빨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손의 떨림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난 왼손 으로 오른손을 꽉 눌렀다. 빌어먹을, 제발 누가 날 좀 막아줘. 난 인상을 찡그리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대륙력 1671년 5월 4일 3일 전에 있었던 두 번째 전투로 인해, 이제 싸울수 있는 인원은 대략 40명 정도로 줄었다. 부상자들은 데리고 다니기에도 무리가 있고 치료도 해야하기 때문에 가까운 마을에 떨구어 놓았다. 지금 우리는 커다란 산등성이를 지나고 있다. 많은 마차가 지나다녔는지 길은 꽤 다져저있는 상태였다. 레나제 로 가려면 반드시 이 산을 넘어야 한다고 한다. 테커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여기가 제일 위험해. 하루에도 수십대의 마차가 지나다니는 길목에 산적이 없을 리가 있겠냐? 빌어먹을, 여기 만 넘으면 레나제는 탄탄대로인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확실히 하루 동안에 산을 넘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해가 뜨기도 전에 산을 올랐지만, 반도 안내려왔는데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 총책임자 한스는 마부들을 재촉하며, 조금이라도 빨리 산을 넘으려 했다. 이젠 내려가는 것만 남았다. 세, 네 시간 정도면 산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난 입에 담배를 물었다. 테커는 옆에있는 카웨를 툭툭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아무도 안나타니까 더 불안하다." "그래." "어째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지?" "그래." "내기 할까? 난 나타난다에 걸지." "그럼 얘기가 안되잖아. 나도 나타난단데." "……그래." 아주 나타나라고 빌어라 빌어, 새끼들아! 라이레얼은 자신의 코 앞까지 온 담배연기를 손을 휘저어 없앤 다음, 테커에게 물었다. "그 놈 이름이 뭐였지?" "누구?" "산적 두목." "자이크…… 였나? 글쎄, 기억이 잘 안난다. 아마, 맞을 꺼야." "돈은?" "죽이면 3천. 살리면 5천." "이야, 5천 골드면 한동안은 놀고먹을 수 있겠다." "넌 지금있는 돈만으로도 평생은 놀고 먹잖아." "아니. 그 돈은 쓰면 안되는 돈이야." "왜?" 라이레얼은 팔을 내 목에 두르고 안겨들어오며 말했다. "히로와 나의 결혼자금이거든. 그치 히로?" "……." 미치겠다. 테커는 '저것들 또 시작이다.' '미친것들. 마차 안에 지들만 타고 있는 줄 알어.' '씨발, 애인 없는 놈은 어디 서 러워서 살겠냐?' 등등의 말을 궁시렁거리며, 고개들 돌렸다. 난 라이레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라이레얼." "응?" "잠이나 자요." "……." 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난 잠결에 이상한 느낌을 느끼고 눈을 떳다. 잠잔게 1시간도 안되었는지 해는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어슴프레 빛을 내고 있었다. 한명, 두명, 세명……. 빌어먹을! 난 내 어깨에 기대 자고 있는 라이레얼을 흔들었다. "라이레얼! 라이레얼!" "우웅, 왜?" "일어나 봐요." "흐아암∼." 라이레얼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기지게를 폈다. "왜 그래, 히로?"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은 좁고 길 양쪽에는 나무가 빽빽히 들어 차 있었다. 한 마디로 매복하기 딱 좋은 지 형이다. "조용히 얘들 깨워요." "응?" "얘들 깨우라구요. 적이에요." "확실한거냐?" 라이레얼이 아닌 테커의 목소리였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애들 깨워." 테커는 별말하지 않고, 주위의 자는 놈들을 툭툭쳐서 깨우기 시작했다. 쉬이익- 퍽-! "적이다!" 삼, 사십여 대의 화살이 양쪽 숲속에서 날아오고, 동시에 사방에 횃불이 타올랐다. "니 말이 맞군." 정면과 양쪽 숲, 삼면에서 산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좁은 길이기에 마차를 돌려 달아난다는 것은 불가 능했다. 아마도 운송물자는 놓고 도망가라는 뜻인 것 같았다. 총책임자 한스는 말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맨 앞에 서있는 놈은 큰 키에 산적 수염을 하고, 깡통로봇 같은 갑옷에 길이가 2m정도는 되보이는 투 핸디드 소디를 들고있기에, 한눈에 산적이라는 것과 두목이라는 것을 알 아볼 수 있었다. 한스는 크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산적두목은 산적두목답게 무식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가 대장인가 보지? 크하하, 이봐! 산적이 이런 산속에서 길을 막고있으면 뭘 원하는지 몰라서 물어? 이거 나 보다도 덜 배웠나 보군." "하하하하! 웃기는 소리 좀 하지마쇼, 두목. 세상에 두목보다 덜 배운 놈이 어딨어요?" 주위의 산적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두목은 인상을 찡그렸다. "시끄러, 이자식들아!! 니들 보단 똑똑해!" "어구, 우리 보다 똑똑한게 자랑이슈?" "닥쳐!" 진짜 무식한 티 낸다. 테커는 주위를 둘러보며 나에게 물었다. "몇 정도 되보이냐?" 횃불을 밝혔다 해도, 주위에 어스름하게 깔린 어둠 때문에 적들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200정도." 내 말에 주위의 있던 사람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오차는?" "플러스 마이너스 20." 테커는 고개를 끄덕였고, 라이레얼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잘 안보이는데."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요." 난 어조를 확실하게 함으로써 대화를 중지할 것을 전달했다. 다행히 라이레얼은 내 뜻을 알았는지 더 이상 묻 지 않았다. 한스는 큰 소리로 물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어느정도의 통행료라면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물자를 전부 놓고 꺼져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지." 산적두목은 이죽거리며 말했고, 주위에서는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스는 애써 침착한 척 하며 말했다. "저는 이 상단의 총책임자이기 때문에 운송물자를 포기하는 짓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적당선에 타협 하는게 어떨까요? 그게 당신들한테도 더 유리할껍니다." 산적 두목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턱을 어루만졌다. 그 행동은 거만하기 그지없어 타협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래? 좋아. 그럼 나도 통행세를 받는 정도로 끝내기로 하지. 1천만 골드는 어때?" 주위에서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1천만 골드를 우리 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천억원 정도 된다. 이 운송물자를 가격을 다 합친다 해도, 1천억원을 넘을 리가 없다. 저 말은 타협할 생각이 없다는 말과 동일했다. 테커는 인상을 쓰면서 중얼거렸다. "협상은 깨진 것 같군." 테커는 자신의 무기인 투 핸디드 소드를 두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라이레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언제든 무 기를 빼들 자세를 취하였다. "당연하지. 200 대 40인데 뭐가 아쉬워서 저 놈들이 물러나겠냐?" 난 청룡도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끈적끈적 달라붙는 땀의 느낌이 나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긴장 때문인 지, 흥분 때문인지, 온 몸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몸 안의 세포들이 미친 듯이 숨쉬고 있었다. 반쯤 타오른 담배에서 나온 연기가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어차피 당신들은 이 물건들을 가져가봐야, 제대로 처분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통행료나 먹고 떨어지라 이거냐?" 한스는 두목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두목은 한스를 보며 미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싫다면?" 한스는 허리에 차고 있는 곡도(曲刀)에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싸우는 수 밖에는 없겠지요." "크크큭, 크크크…… 크하하하!" 촤아앙-! 두목은 몸을 뒤로 젖히며 큰 웃음을 터트렸고, 한스는 더 이상 참지못하고 허리에 찬 곡도를 뽑아들었다. 협상은 깨진 것 같군. 씨바, 전쟁이다. 스르릉- 난 청룡도를 뽑으며 소리쳤다. "협상 결렬이다!!!" "으아아아!" "으아!" 이 말을 기폭제로 사람들은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고 적을 향해 돌격했다. 난 빠른 속도로 몸을 튕겨나가 내 앞에 있는 놈의 머리를 겨냥해 청룡도를 내리쳤다. 놈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다음, 반월도로 밑을 그었다. 하지만 놈은 착각한게 하나 있었다. 내 청룡도는 놈의 방패를 자른 다 음, 머리까지 잘라 놓았다. "으악!" "덤벼!" 바위도 두부처럼 베는 청룡도다. 흥분이 머리 끝까지 솟아올랐다. 몸의 감각들은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져, 이젠 주위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난 빠르게 움직여 두 놈의 목을 더 잘랐다. "우리야차차차!" 내 옆에서 싸우는 테커는 투 핸디드 소디를 양손으로 널찍하게 잡은 채, 말그대로 미친 듯이 휘두르고 있었다. "씨발들아, 빨리 덤벼!" 우리 조는 말그대로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지만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하다해도, 쪽수에서 밀리니까 게임이 안되는 것이다. 200 대 40 이라……. 양변을 40으로 나누면……, 5 대 1. 한 사람당 5명은 죽여야된다는 건가? "씨발, 너무하잖아. 개새끼들아!!!" "으악!" "윽!" 우리 조가 이정도로 밀리고 있으면, 다른 곳은 볼 필요조차 없었다. 아마 거의 괴멸 적전일 것이다. 쉬이익- "빌어먹을!" 난 욕을 내뱉으며 날아오는 화살을 처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은 쪽수가 많다보니 앞에있는 놈들은 개떼처럼 공격해오고, 뒤에있는 놈들은 화살을 쏘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활질하는 놈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점이다. 난전이여서 적과 아군이 섞여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숙련된 궁사들만이 화살을 쏘는 것 같았다. 난 앞에 서있는 놈의 목을 베며, 일부러 큰 빈틈을 보였다. 그러자 옆에있던 놈은 방패를 버린 채, 칼을 두손으 로 잡고 달려들었다. 난 그 놈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놈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쉬이익- 퍽-! 놈은 등에 화살을 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까 화살을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 때문에 일부러 빈틈을 만들고 녀석이 달려들기를 유도해, 방패로 삼은 것이다. "젠장!" 몇발 밖에 안 날라온다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나마 나는 괜찮은 편이었다. 예민해진 감각들이 어디 화살이 날아오는지 어떻게 막거나 피하면 되는지 다 알려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놈들은 그렇지 않았 다. "작작 쏴라! 씨발들아!!" 테커는 투 핸디드 소드를 X자로 휘두르며 화살을 공격을 함과 동시에 화살을 튕겨냈다. 베네트는 검의 폭이 넓 었기에 세웠다 눕혔다하며 적당히 방어하고 있었다. 어느새 내 주위에 시체들이 10여 구가 넘어가고 있었다. 놈들은 내가 강하다고 판단했는지 적당한 거리에서 견 제만 할뿐 공격하지는 않았다. 난 그제서야 어느정도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편이 밀리고 있는게 확연하게 보였다. 마부들까지 검을 빼들고 싸우고 있었지만, 바닥에 쓰러지는 것은 아 군들 뿐이었다. 게다가 저 놈들의 두목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생긴거 보니 제법 싸울 것 같이 생겼는 데. "으아아아!" 난 고개도 안돌리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놈에게 청룡도를 휘둘렀다. 청룡도는 놈의 검을 박살낸 다음 가슴 을 길게 그었다. 놈은 달려들 때 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게 기습을 하면서 대체 소리는 왜 지르냔 말이다. 달려든 놈이 죽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녀석들은 소리를 지르며 한번에 달려들었다. 쉬이익- 뒤? 나를 향해 날아오는게 아니였다. 화살은 내 어깨 위를 지나 앞에있는 녀석의 목줄기를 꿰뚫었다. "끄으어억!" 녀석은 칼을 버린 채, 두 손으로 목을 부여 잡더니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난 다른 놈의 뱃속에 청룡도를 박아 넣으며, 살짝 뒤를 돌아 보았다. 라이레얼이 한손엔 활을 들고, 한손으로는 V자를 그리며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하아∼, 진짜 긴장감 없는 여자라니까. 그래도 귀엽긴 하군. 난 한숨을 내 뱉으며, 다시 싸움에 열중했다. 대체 이 새끼들은 쪽수가 몇이나 되는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 었다. 내 옆에서는 테커와 카웨가 상당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둘은 전혀 현란하지 않은 단순무식한 검술로 적을 착실하게 베어넘겼다. 진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출난 지휘자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싸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난전, 아니 패싸 움 형식으로 변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위치를 지키며 싸우고 있던 사람들도 위치를 이탈해, 누가 적인지 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지원사격을 하던 라이레얼도 레이피어를 빼들고 싸움에 나섰다. 잘 싸운다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난 계속해서 적들을 베어 넘겼다. 실력으로만 따지만 우리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적들의 쪽수가 너무 많 았다. 내 주위에 쓰러진 놈들은 이제 삼십 정도를 헤아렸다. 하지만, 이 놈들은 골이 비어있는건지, 내가 만만해보이 는건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끼아악!" 라이레얼의 비명소리? 창, 칼이 부딪히는 소리, 기합과 비명 소리 등으로 주위는 매우 소란스러웠지만, 난 높은 톤의 여자 비명소리를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분명 라이레얼이다. 여기서 그렇게 예쁜 목소리로 비명 지를 수 있는 사람은 라이레얼 밖에 없으니까. "라이레얼!" 난 라이레얼의 이름을 외치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오른팔에 화살이 박힌 채, 왼손으로 힘들게 레이피어를 휘두르고 있었다. "크흐흐, 꽤 잘빠졌는데 이 계집." "이봐, 죽이지는 말라고. 죽이면 즐길 수가 없잖아." "이 정도 계집이면 두목이 좋아서 뒤로 자빠지겠군." "두목이 시식한 다음에는 우리 차례도 올꺼야. 흐흐." 다섯 놈이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라이레얼을 압박했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왼손에 든 레 이피어로 다섯 개의 칼을 받아치고 있는 것이다. "흥! 난 이미 몸도 마음도 히로꺼라고!" 라이레얼,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도 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다니……. 흑흑, 라이레얼 은 역시 일편단심 저 뿐이군요. 하지만 싸움 중에 그런 말 듣기는 좀……. 라이레얼은 다섯 개의 칼을 막아내며, 한 놈의 어깨를 찔렀다. 그 놈이 쓰러지는 순가, 라이레얼은 다른 놈의 목줄기에 레이피어를 박아 넣었다. 놈들이 입은 갑옷 때문에 일부러 밖으로 들어난 급소만 공략하는 것이다. "젠장, 보통 년이 아니야!" 그래, 보통년이 아니라, 하프엘프지. 두 놈이 쓰러졌어도 금방 보충이되었다. 다른 두놈이 껴 다시 다섯놈이 된 적들은 빠르게 라이레얼을 공격했다. 아까의 공격은 놈들이 방심했기에 먹힌것이다. 라이레얼을 도와주러 가려해도 주위를 포위한 놈들 때문에 쉽지 않았다. 난 청룡도를 계속 휘두르며 어떻게든 라이레얼 쪽으로 다가가려고 애썼다. 챙그랑! "라이레얼!!!" 라이레얼의 레이피어가 힘없이 먼 발치로 떨어졌다. 오른쪽 어깨부근에 화살을 한대 더 맞는 순간, 한놈이 레이 피어를 날려버린 것이다. 라이레얼은 왼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놈들은 음탕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라이레얼에게 접근했다. 라이레얼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크흐흐, 몸매 죽이는데." "얘들 정액받이로 쓰기엔 딱 좋겠군." "야, 저 년 귀 좀 봐! 혹시 엘프아냐?" "어? 정말 그렇네. 흐흐, 혹시 이년 두목의 첩으로 들어가는거 아냐?" "일단 그 전에 우리 먼저 즐기자고." 난 걸리적 거리는 놈들을 베며 소리쳤다. "내 여자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마!!!" 하지만 주위가 워낙 시끄러워서 놈들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 했다. 만약 라이레얼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젠장, 절대 그런 일은 없어. 내가 절대 그런 일이 생기게 놔두지 않아. 라이레얼은 나에게 있어서 누나나 엄마와도 다름 없으니까.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라이레얼을 지키겠다! "빌어먹을! 좀 비켜라, 새끼들아!! 난 라이레얼한테 가야된다고!!!" 어느새 라이레얼을 둘러싼 포위망은 거의 좁혀들었다. 라이레얼은 고개를 숙여 체념의 의사를 나타냈다. 저항을 포기했다고 생각한 놈들은 방심하며 접근했다. 그 순간. 푸욱- "내가 니들 따위한테 잡힐 것 같애?" "크억, 이 계집이." 라이레얼은 어깨에 박혀있는 화살을 뽑아 한 놈의 목줄기에 찔러넣었다. 그 놈은 가래끓는 소리를 몇번 내더니, 곧 쓰러졌고 다른 놈들은 무기를 치켜들었다. "좋아! 니 년이 그토록 죽기를 원한다면, 죽인 다음, 시간(屍諫)해주지!" "흥, 할 수 있으면 해봐!" 이젠, 정액받이고 뭐고 필요 없는 것이다. 방심하다 벌써 셋이나 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방심도 없을 것이다. 한 놈이 검을 치켜들었다. 라이레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라이레얼이 죽는다면……? 라이레얼이 죽는다면……? 난 청룡도를 앞으로 세웠다. "라이트닝 스피어!!!" 청룡도의 도신에 백색의 전류가 흐르고 그 전류는 앞으로 빠져나가며 창의 모습을 취했다. 그 뇌전(雷電)의 창 은 빨르게 날아가 검을 치켜든 놈의 가슴을 맞추었다. "으아아아!" 녀석은 소리를 지르며 몇번 몸을 흔들더니, 머리가 삐죽삐죽 선 상태로 뒤로 쓰러졌다. 감전되 쇼크로 죽은 것 이다. "제길, 마법사다!" "마법사가 있어!" 놈들은 재빨리 라이레얼에게서 물러났다. 라이레얼은 구했지만 내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마법을 쓰느라 나 도 모르게 몸의 균형을 앞으로 옮겼는데, 빈틈이 너무 커진 것이다. 지금 내 머리 위에는 빠른 속도로 칼이 내 려오고 있었다. 몸을 피하거나 청룡도를 들어 올려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어떻게……? 어떻게……? "빌어먹을!!!" 난 소리치며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뒤에서 흰색빛을 그리며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까아악-!" "으아악!" 흰색 매는 날개를 쫙 펴더니, 녀석의 얼굴에 달라 붙었다. 라이코스였다. 마차 안에 있다가 내가 위험한 걸 보 고는 날아온 것 이었다. 녀석은 라이코스를 떼어네하는 바람에 검을 떨어트렸고 난 그 사이에 몸을 틀었다. 녀석은 미친 듯이 두 팔을 휘두르며, 라이코스를 떼어내려 했다. 녀석이 라이코스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라이코스는 위로 날아 올랐다. 녀 석의 얼굴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녀석은 두 눈을 부여 잡으며, 괴성을 질렀다. 라이코스의 발에는 녀석의 두 눈알이 들려있었다. 발톱으로 동공을 파낸 것이다. 난 청룡도로 재빨리 녀석의 배 를 갈랐고, 녀석은 비명을 멈추고 고꾸라졌다. 난 피를 뒤집어 쓴 채, 웃으며 말했다. "너도 영물은 영물이구나." 라이코스는 씩 웃으며 내 어깨에 앉았다. 정말 표정이 다양한 매가 아닐 수 없다. 난 다시 청룡도에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자 청룡도에는 치지직 거리는 백색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난 그 상 태에서 청룡도를 휘둘렀다. "비켜!!" 내 주위의 있는 놈들은 청룡도에 흐르는 전류를 보고는 싸울 생각도 못하고 좌, 우로 갈라지졌다. 난 빠르게 달 려 라이레얼 옆에 다달았다. "라이레얼!" "어! 히로 왔어?" 라이레얼 애써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난 괜히 멋진 웃음을 지어보이며 라이레얼 앞으로 나섰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레이디 라이레얼을 지키러 왔어요. 뒤로 좀 물러나계시겠어요?" 라이레얼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후훗, 정말?" 난 내 주위에 개떼처럼 모여있는 놈들을 향해 청룡도를 겨누며 말했다. "예.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께요. 라이레얼의 예쁜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안되잖아요." "후우, 알았어, 히로." 라이레얼은 내 뒤에 바짝 붙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카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 저 새끼들 또 시작이야!" 그러자 반대편에서 테커의 목소리가……. "씨발, 이젠 짜증도 안난다!!" 하여튼 애인도 없는 것들이……. 아무튼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군. 난 청룡도를 가슴 앞쪽에 세우고 견제하듯이 칼끝을 조금씩 움직였다. 놈들의 시선은 내 칼끝을 쫒았다. 칼끝을 왼쪽으로 움직이니 저 놈들 눈동자도 왼쪽으로 움직이고, 오른쪽으로 움직이니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오른 쪽! 왼쪽!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이것도 꽤 재밌군. 젠장, 뒤에 라이레얼이 있으니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쪽에서 치고들어가자니 완전히 미친짓 같고……. "꾸르르륵-!" 쉬이익-! 내 고민을 알았는지 라이코스는 순식간에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가운데 있는 놈의 얼굴에 붙었다. 정말 화살과 도 같은 속도다. 가운데 있는 놈은 라이코스를 떼어내느라 두 손을 허공을 향해 마구 휘저었고 그 바람에 포위 진형이 어느정도 무너지게 되었다. 난 그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움직여 오른쪽의 놈들을 공격했다. "으억!" "크악!" 순식간에 두 놈이 쓰러졌다. 뒤에서 칼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위험하다! 난 왼발을 앞으로 내밀어 체중을 옮긴 다음, 빠르게 몸을 비틀었다. 사악- 이마에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 방금 내 이마에 상처를 낸 놈에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놈은 칼을 크게 휘두르는 바람에 안쪽이 완전히 비 어있었고, 난 가볍게 가슴을 찌른 다음, 청룡도를 회수할 수 있었다. 난 뒤로 물러나며, 왼손으로 이마를 만져보았다. 뜨거운 피가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난 입술을 내밀어 흘러내린 피를 핱아보았다. 짜고 비릿한 피맛이 미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젠장, 1cm만 깊게 들어갔어도 완전히 죽을뻔 했군. 난 청룡도를 옆으로 비스듬히 늘어뜨린 다음,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장난은 끝났다!" 놈들은 칼을 늘어뜨린 내 포즈와 내 말투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주춤거리는 모습이었다. 라이레얼은 내 어깨를 톡톡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와, 멋있어 히로." 하하, 제가 한 멋하긴해요. 하지만 지금 목숨이 왔다갔거리는데……. "제발 가만이 좀 계세요." 한동안 우리는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 손바닥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청룡도를 고쳐 잡았다. 후우∼, 미치겠군. 저쪽이 움직여야 이쪽이 움직이는데. "꾸르륵!" "어! 라이코스!" 언제 날아왔는지 라이코스는 몸에 피칠을 한 채, 내 머리위에 앉았다. 난 라이코스를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당연 보일 리가 없었다. 자기 머리위에 올라와있는 새를 자기 눈으로 보면 그게 인간이냐? "죽어라!" "으아아!" 순간, 놈들은 소리를 지르며 한번에 돌격해왔다. 앞에 셋, 왼쪽에 둘, 오른쪽에 셋, 뒤에 하나. 이걸 기다렸다! 좋아, 아홉명 전부 죽었어! 아! 뒤는 라이레얼이니 까 빼야되는 구나. "라이레얼! 뒤로 빠져요!" "싫어! 나도 싸울꺼야!" "예?" 난 그 짧은 순간에도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라이레얼은 어느새 오른팔을 지혈하고 왼손에는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있었다. 아까 내가 싸우던 도중 줏었나 보다. 난 크게 소리쳤다. "오른쪽!" "알았어!" 마음이 통했는지 라이레얼은 재빨리 내 오른쪽에 섰다. 아까 라이레얼 실력으로 미뤄봐서 세명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오른손의 청룡도로는 정면에 있는 놈들을 겨냥했고, 왼손은 쫙 펴서 왼쪽에 놈들을 겨냥했다. "버닝 핸즈Burning Hands!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화르르- 치지직-! "으아!" "으어!" 내 왼손에서는 부채꼴 모양의 불이 뿜어져 나오고, 청룡도에서는 백색의 전류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난 왼쪽에 있는 놈들에게 달려갔다. 불에 그을려 눈을 못뜨고 있었기에, 죽이는 것은 매우 간단했다. 난 몸을 돌려 오른쪽으로 뛰어가며 외쳤다. "가운데 있는 놈들을 죽여요!" 라이레얼은 왼손으로 두 놈을 상대하다가 내가 오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로 빠졌다. 한 놈은 죽인 것 같다. 가운데 있는 놈들은 죽지는 않았지만 전기쇼크 때문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죽이기에 별로 힘이 들지는 않 을 것이다. "윈드 월Wind Wall!" 난 바람의 벽을 일으켜 칼을 빚겨가게 만든 다음, 청룡도를 휘둘렀다. 놈은 내 공격을 쉽게 막았고 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아, 하아∼." 감각이 예민하고 무기가 고급이여도 체력의 한계는 있었다. 아니, 오히려 예민해진 감각 덕에 더 빨리 지친 것 같다. 칼쓰는 법을 몰라 너무 크게 휘두른 것도 문제가 된 것 같고. 난 지쳤다는 사실을 알리기않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미 놈들은 눈치챈것같 은 분위기였다. 난 머릿속으로 재빨리 캐스팅을 끝낸 다음, 시동어를 외쳤다. "미러 이미지Mirror Image!" 곧 내 주위에는 머리에는 붉은색 매가 둥지를 틀고 있고 피칠한 흰색 망토를 걸친 채, 파란색 도를 치켜들고 있는 5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성공한 것 같군. 미러 이미지의 단점은 움직이면, 정체가 들통난다는 것이다. 6클래스 마법 프로젝트 이미지Project Image라면 시전자가 움직이면 투영된 허상들도 똑같이 움직이지만, 미러 이미지는 시전자가 움직여도 허상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진짜를 구별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5클래스 마스터인 관계로 6클래스의 마법 을 사용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뭐, 상관 없겠지. 단 몇초만이라도 속아주면되니까. "마법사가 어떻게 검을 쓰는거지?" "빌어먹을! 어느게 진짜야!?" 놈들은 진짜를 구별하지 못해,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난 빠르게 스텝을 밟으며 내 오른편에서있는 놈에게 청룡 도를 내질렀다. "이 놈이다!" 유언치고는 조약하군. 난 놈의 목줄기를 꿰둟은 다음, 몸을 비틀며 외쳤다. "아이스 애로우Ice Arrow." 퍼억-! "꺽!" 다른 한 놈은 이마에 얼음 화살이 박힌 채, 뒤로 고꾸라졌다. "끝났나?" 내 주위에는 더 이상 서있는 놈이 없었다. 난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숨을 쉴 때마다 팔과 다리의 근육이 찌릿찌릿하게 저려왔다. 난 힘들게 고개를 들었다. 라이레얼이 앞에서 웃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움직일 수 있겠어?" "아직은요." 주위에서는 아직도 비명소리와 칼부딪히는 소리가 끊기지 않고 들려왔다. 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완전히 풀렸는지 다시 주저앉을 뻔 했지만, 라이레얼이 붙잡아 일으켜 주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나는 잠깐의 노력 끝에 혼자서 일어설 수 있었다. 라이레얼의 오른팔에는 아직도 화살 하나가 박혀있었다. "아프지 않아요?" "뭐? 아, 이거. 견딜만 해." 상당히 아픈지 아까부터 미간을 조금 찡그리고 있었지만, 라이레얼은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난 억지로 웃었 다. "다행이네요." 난 한 걸음 걸어보았다. 다리에 힘이 없어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것 같았지만, 어느정도는 움직일 수 있었다. "전 얘들한테 가볼께요. 라이레얼은 잠깐 쉬고 계세요." 라이레얼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몸도 움직이기 힘들면서 무슨소리야?" 난 청룡도를 움켜잡았다. "몸은 움직이지 못해도 마법은 쓸 수 있어요." 난 라이레얼을 뒤로 한채, 아직도 칼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다리는 쇠추라도 달아논 것 처럼 무거웠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늘어졌다. 이 상태로 언제 저기까지 달려가냐? 난 천천히 캐스팅을 한 다음, 시동어를 외쳤다. "큐어 힐!" 잠깐 동안 몸에서 노란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큐어 힐은 몸을 회복해주는 마법 이 아니었다. 다만 몸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줌으로써 몸을 움직이기 쉽게 해주는 마법이다. 아마 마법이 풀리 고 나면, 온몸의 근육이 끊어지는 고통을 맞볼 것이다. 뭐, 아무렴 어쩌겠는가? 난 그 상태에서 전력질주를했다. 바람에 섞여 오는 피내음. 뺨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 난 눈을 감고 그것들을 느꼈다. 다시 감각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난 천천히 눈을 떴다. 처음으로 보인 것은 적들이 누군가를 포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난 청룡도를 치켜들었 다. "비켜!" 난 마구잡이로 청룡도를 휘둘렀다. 몇 명의 팔과 다리가 허공으로 날리자, 포위망은 쉽게 뚫렸다. 난 한 놈의 목을 자르며, 포위망 안쪽으로 들어왔다. "너……." "베네트!" 포위망 안에 있던 것은 베네트였다. 베네트는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머리부터 발끝까 지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대부분이 산적들의 피지만 일부는 자신의 피도 섞여 있었다. 갑옷은 군데군데 찌 그러져있었고, 몸 여기저기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보였다. 체력이 한계에 다달았는지 커다란 기형검은 아래로 늘 어뜨렸고 입으로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정말 이제까지 버틴게 신기할 정도였다. 난 베네트 앞으로 나섰다. "뒤로 물러나요!" 베네트는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억지로 검을 들어올렸다. "흥! 웃기는 소리하지마. 누가 너따위 한테 도움을 받을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틀거리는 폼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게 없었다. 지금까지 버틴것도 여자이기 때문에 가 능했을 것이다. 저놈들이 잡아서 즐길 목적으로 생포하려 했을테니까. 놈들은 죽기 전에 유언이라도 남기라고 하는건지 비웃음을 지으며 접근하지 않았다. 난 놈들을 노려보며, 청룡 도를 들어올렸다. "그 몸으로 싸우겠다구요? 제 생각엔 그게 더 웃기는 소리 같은데." "닥쳐! 요루드를 죽인 놈한테 도움 받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 베네트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아직까지도 요루드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다. 난 쓸쓸한 눈으로 베네트를 보았 다. 베네트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요루드의 죽음이 나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아마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남한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안식을 찾으려는 것일지도……. "이봐! 정의의 용사씨!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래." "뭐야? 젓비린내 나는 꼬마가 무슨 정의의 용사야? 죽을 자리도 못찾는 병신이라면 모를까." "크하하, 그러니까 좀 덤벼보라고. 여자를 구하려고 나타났으면 뭐라고 하나 보여줘야 할꺼아냐?" 놈들은 조소를 내뱉었다. 좋아, 그 주둥아리를 찢어주지. 난 청룡도를 안쪽으로 당겨, 크게 휘두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래. 이제부터 실컷 보여주마! 난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놈들은 내 비장한 표정을 보고서도 여유만만이었다. 난 오른발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도록. 난 소리를 지르며 왼발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놈들은 빠르게 검을 치켜 들며, 내 공격에 대비했다. "온다!" 푸욱-! 난 힘차게 청룡도를 바닥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주저 앉듯이 무릎을 꿇었다. "항복하겠습니다!" "뭐?" 순간, 싸늘한 바람이 우리를 스쳐갔다. 놈들의 얼굴에는 황당하다는 표정과 함께 한줄기 땀이 나타났다. 잠시후, 그 중 한놈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야! 항복할꺼면 뭐하러 그렇게 폼 잡았어?" "그냥요……." "……." "……." "씨발, 웃기는 놈이군." 뭐, 웃기는 놈? 이 새끼가 죽을려고. 난 인상을 찡그리며 크게 외쳤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 놈들은 아까보다 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에있는 베네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심히 짐작이간다. 놈들은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거 완전 바보아냐?" "하, 그런 것 같은데." "이봐, 계집! 너도 포기해. 구하러온 용사님께서 이렇게 무릎을 꿇으셨는데, 계속 앙탈부려서 되겠어?" "흥! 헛짓거리하지 말고 덤벼!" "오! 끝까지 앙탈을 부리시겠다." 놈들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한걸을 씩 다가왔다. 난 계속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더 가까이와라. 조금만. 놈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베네트의 거친 숨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이대로 저놈들한테 죽을 생각인가? 흥, 내가 있는 한, 그렇겐 안돼지.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베네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신호하면 공격해요." "뭐?" 뒤에서 베네트의 반문이 들려왔지만,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가까이 온다. 가까이. 조금만 더, 조금 더. 조금……, 지금! 난 청룡도를 움켜진 손에 힘을 더 했다. 그리고는 마나를 주입하며 크게외쳤다. "월 오브 라이트닝Wall of Lighting!" 치지지직-! "으아아아!" "으아아!" 순간, 땅에서 하얀색 전기가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위로 솟구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감전시켰다. 놈들은 소 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후아! 위력 한번 끝내주는군. 난 뒤를 돌아보았다. 베네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난 땅에서 청룡도를 뽑아 녀석들에 게 달려들며 외쳤다. "뭐해요!? 마법이 끝났으니 곧 회복할꺼에요! 빨리 죽여요!" 내 말을들은 베네트는 정신을 차리더니, 빠르게 움직였다. 난 왼쪽은 베네트에게 맞겨두고, 오른쪽에 정신못차 리는 놈들 세 놈을 향해 청룡도를 내리쳤다. 찌릿찌릿- 제기랄! 근육이 한곈가? 투둑- 투둑- 다리 근육에 섬유질이 끊어지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난 근육이 터져나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청룡도를 빠르게 휘둘렀다. "제길!" 한 놈은 그래도 몸을움직였지만, 감전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해 칼을 떨어트렸고 난 손쉽게 가슴에 청룡도를 찔 러 넣었다. "크억!" "뒈져라!" 난 가슴에 박힌 청룡도를 뽑은 다음, 크게 휘둘렀다. 놈의 목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내 얼굴에 뜨거운 피가 튀었다. "젠장!" 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베네트는 놈들을 전부 처리했는지, 바닥에 없어져 쉬고 있었 다. 베네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에게 물었다. "너……, 마법사 였냐?" "예." "그런데 어떻게 칼을 쓰는거지?" "글쎄요." "……." 베네트는 더 이상 말할 기운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난 예민해진 감각에 집중 했다. 피 냄새. 칼이 부딪히는 소리. 적들은 100여 명 정도, 우리편은 20여 명 정도. 젠장, 많이도 죽였군. 시간이 없어. 빨리 적의 대장을 죽여야 돼. 난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앞쪽으로 뛰어갔다. 투둑- 투둑- "크윽-! 거진 다 와가던 중, 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졌다. 빌어먹을! 근육이 한계다. "야! 왜 그래?" "젠장, 죽겠군." 테커는 내 몸을 붙잡고 일으켜주었다. 난 몸을 테커에게 맞긴 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예민해진 감각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이정도인 지, 근육의 고통은 정신이 오락가락 할정도로 강했다. 이미 거의 앞쪽에 와 있었다. 이 정도 거리면 충분히 일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젠 빨리 끝내는 수 밖에 없어." "뭐? "플라이Fly!" 시동어를 외치자, 내 몸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점 점 넓어지며, 전투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뒤에 왼쪽은 나와 라이레얼의 활약으로 적들이 전부 죽어있었다. 라이레 얼은 마차에 앉아 있다가 내 모습을 봤는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팔의 상처는 화살을 뽑고 옷을 찢어 묵은 걸로 대충 치료를 끝냈것 같다. 흠,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 난 라이레얼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앞쪽을 보았다. 앞쪽은 거의 전멸 직전 이었다. 마차가 길을 막고 있는 덕에 적들이 한번에 공격을 하지 못해 그 나마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다. 난 매가 먹이를 찾듯이, 내 먹이감을 찾아보 았다. 매가 먹이를 찾듯이……? 그러고보니 라이코스는 지금 어딨는거지? 아직까지 내 머리 위에 있나? "야!" 푸드덕- 라이코스는 내 머리 위에서 내려와 내 어깨에 앉았다. 지금 라이코스의 모습은 청안혈우조(靑眼血羽鳥)라고 해도 믿을 만큼 피를 잔뜩 뒤집어 쓰 고 있었다. "마, 마법사!" 사람들은 싸움하는 것을 멈추고, 나를 처다보았다. 난 청룡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산적 두목의 모습이 보였다. 호위병인지 동생인지 하는 놈들 네명이 두목을 둘러싸고 있었다. 난 심호흡을 크게 한번한 다음,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마법사다!" 갑자기 주위가 웅성거리시 시작했다. 효과과 있나 보군. "니들이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제발 좀 물러나 줘라. 부탁이다. 두목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랄같은 수작! 너 혼자서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냐!?" 역시 저 새끼를 죽여야 게임이 끝나겠군. 훈련받은 병사가 아닌 산적이니 대장이 죽으면 다 흩어지겠지. 난 씨익 웃었다. "내가 못할 것 같나?" 산적두목은 약간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두목 옆에있는 쥐새끼같이 얍삽하게 생긴 놈이 튀어나오며 말했다. 아마도 참모(參謀)인가 보다. "마법사란 놈들은 체력은 약해서 비실데기만 하고 제대로 된 마법 하나 쓰기만 하면, 지쳐서 몸도 제대로 못움직이는 놈들이지! 그러고 네 놈은 기 껏해야 2클래스 마법사일텐데,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줄 모르겠군!" 2클래스? 지금 쓰고있는 이 플라이 마법도 3클래스에 속하는데, 제는 무 슨 헛소리냐? 그 놈은 산적두목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 놈의 마법은 별 볼일 없는 겁니다. 저 놈의 나이를 보십시오. 아직 새 파란 애송이 주제에 얼마나 강한 마법을 쓸 수 있겠습니까. 어렸을 때, 배 운 몇가지 마법가지고 우리를 위협해 여기를 벗어나려는 것이 틀림 없습니 다." 놈은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은 나를 비롯한 앞쪽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산적두목과 산적들은 그제서야 내 모습을 자세 히 살펴보았고, 곧 얼굴에 약간 나타났던 두려움의 빛은 사라졌다. 산적두목은 폼을 잡으며 팔을 앞으로 휘젓자, 쥐새끼같이 생긴 놈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이 몇가지 하찮은 재주가지고 감히 우리를 희롱하는구나! 쏴라! 저 녀석은 마법이 뭔지도 모르는자다!" 어이, 내가 마법이 뭔지도 모르면, 지금 여기 어떻게 떠있겠냐? 하지만, 저 쥐새끼의 말은 반 정도는 맞췄다. 플라이 마법을 쓰면서, 공격 마법을 쓰는데는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1클래스 마법 정도. 즉, 5클래스 마법사라 도 이렇게 공중에 떠있는 상태로는 1, 2 클래스 마법사랑 다를게 없다는 소리다. 뭐, 나야 9클래스 마법사의 마법을 물려받았으니, 조금 상위 마법 까지는 가능하지만 말이다. 물론 저 쥐새끼는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다. 플 라이 마법이 몇 클래에 속했는지도 모르는 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 가. 그냥 지껄인 말이 대충 맞아든 것이다. 아무튼 공중에서 화살을 피하기 에는 문제가 좀 많은데. 이동 속도도 느리고 몸을 움직이기도 어색하고, 결 정적으로 머리 위만 빼고 다른 모든 방향에서 화살이 날라오는데, 어떻게 피하냔 말이다! 일부러 위압감을 조성하기 위해 하늘로 떠올랐는데, 저 쥐새끼 때문에 다 뽀록났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조용히 땅에 발붙이고 있는건데. 하지만, 저 녀석도 한가지 모르는게 있다. 그건 바로……. 쉬이익- 곳곳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난 청룡도에 마나를 주입하며 외쳤다. "아티팩트가 죽이게 좋다는 거지! 라이트닝 베리어!" 치지직- 청룡도에서 흰색 전류가 흘러나와 내 주위를 감쌌다. 날아온 십여대의 화 살들은 전기 베리어에 부딪힌 다음,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으악!" 밑에 있는 놈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떨어지는 화살에 맞았나 보다. 난 전기 베리어를 해지하고는 그 쥐새끼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봐! 쥐새끼! 너 아까 잘도 지껄이더군." "이 이놈이!" "내가 특별히 니가 틀린 부분만 지적해주지. 첫째로 난 5클래스 마스터다. 둘째로……." 난 잠시 시간을 끌며 말을 이었다. "전부는 불가능해도 니들 정도는 가볍게 죽일 수 있다는 거지." 두목과 두목 주위의 있던 놈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두목은 투 핸디드 소드를 들며 외쳤다. "죽여라! 놈을 죽여!!" 꽤 멋진 대사였지만, 내 눈에는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으 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땅에 발 붙이고 있는 니들이, 허공에 떠있는 날, 어떻게 공격하겠니? 난 청룡도를 아래로 향하게 해, 두목을 겨누며 외쳤다.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치지직-! 길게 뻗어나간 백색의 전기는 두목 바로 옆에있던 쥐새끼를 맞추었다. 쥐새끼는 전기를 맞더니 비명을 지르다 쓰러졌고, 전기는 튕기듯이 옆으로 이동해 쥐새끼와 붙어 있던 덩치 큰 놈을 맞추었다. 그렇게 전기는 한 놈을 죽이면, 옆에 놈으로 건너뛰고 그 놈을 죽이고 나면 다시 옆으로 건너뛰었다. "으아아악!" "아아아!" 엄청난 비명과 약간의 살타는 냄새 끝에, 두목 주위의 놈들은 전부 사라졌다. 바로 옆에 붙어있던 놈들은 체인 라이트닝에 의해 감전사로 죽었고, 조금 떨어져있던 놈들은 몇놈이 죽는 모습을 보고 칼을 내던지고 멀찌감치 도망가 있었다. 난 빠르게 고도를 낮추다, 어느정도 안전 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냥 마법을 해지해 굴러 떨어지듯이 땅으로 내려왔다. 난 두목을 노려보며 말했다. "발악해봐!" "……뭐?" "발악해보라고!!" 두목은 인상을 찡그리며, 투 핸디드 소드를 치켜들었다. "이, 이 자식!" 두목은 빠르게 발을 놀리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치켜들은 투 핸디드 소드가 대각선으로 비스듬이 베어들어왔다. 난 왼쪽 어깨를 바깥 쪽으로 빼면서 오른팔에 든 청룡도를 위로 휘둘렀다. 카강-! 두 개의 칼이 부딪힌 순간, 두목의 칼은 튕겨 나갔고, 난 뒤로 밀리며 넘어졌다. 놈의 칼이 잘려나갈 줄 알고 방심했던게 화근이었다. 그래도 두목 정도되니 좋은 칼을 쓰나보다. "죽어라!" "으아아!" 두목은 누워있는 나에게 투 핸디드 소드를 내리쳤고, 난 소리를 지르며 청룡도로 막았다. 칼이 맞닿는 순간, 난 마나를 청룡도에 집어 넣었다. 치지지직-! "으악!" 도신에 전기가 흐르고, 놈은 깜짝 놀라더니 칼을 놓았다. 전기가 녀석의 칼을 타고 올라가 손을 감전시킨 것이 다. 두목이 잠깐 몸을 움직이미 못하는 사이, 난 발로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몸이 앞으로 쏠려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놈은 앞으로 넘어졌고, 난 재빨리 몸을 일으켜 놈의 다리를 잘랐다. "크아!" 두꺼운 부츠 때문인지, 팔의 힘이 다해서인지 완벽하게 잘라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킬레스 건을 완전히 끊어 놓았으니, 일어서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두목은 엎어져있는 상태에서도 손을 뻗어 자신의 칼을 움켜쥐려 하였다. 난 청룡도를 녀석의 손에 박아넣었다. 청룡도는 가볍게 녀석의 건틀렛을 뚫고 땅속까지 박혔다. 푸욱-! "으아악!" "발악해봐!" 흥분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으으." "발악해봐!!" 난 청룡도를 뽑은 다음, 녀석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두목의 머리가 잘리려는 순간. "멈춰!!" 난 어디선가 들려온 앙칼진 비명에 청룡도를 멈추었다. 난 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여인을 보았다. 라이레얼 이었다. "싸움은 끝났어. 죽일 필요는 없잖아." 라이레얼의 말에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이레얼의 말대로 싸움은 끝나있었다. 병기가 부딪히는 소리는 어느새 멎어있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서있었다. 적들은 두목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일찌감치 내뺀 것이었 다. 난 언제든 두목의 머리통을 꿰뚫을 자세를 하였다. "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라이레얼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제발 그만둬, 히로. 이러지마." 라이레얼이 왜 나를 말리는지 알 것 같다. 내 손이 피로 물드는 것이 싫은 거겠지. 내가 피에 미친 악귀(惡鬼) 로 변해가는게 싫은 거겠지. 난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흥분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난 오른손을 보았다. 오른손은 아주 조금 씩 떨고 있었다. 흥분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피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화가났다. 이것이 내 모습 이라는게. 피와 죽음에 무감각해져간다는게. 난 발악하듯이 소리질렀다. "이 자식 때문에 수십명이 죽었어요! 저도 죽을 뻔하고 라이레얼도 죽을 뻔했어요!! 어째서 이 놈을 살려줘야 한다는 거죠?!!!" "그만둬, 히로. 그 놈을 죽인다고 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웃기는 소리 하지말아요! 라이레얼이 뭐라고 해도 전 이 놈을 죽일꺼에요!" "안돼!" 라이레얼은 화가난 표정을 지었다. 난 라이레얼의 화난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난 라이레얼을 노려보며 말했 다. "제가 이 놈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를 세 가지만 대보세요." 그러자 라이레얼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첫째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내 부탁이니까. 남자라면 예쁜 여자 부탁을 들어주는게 당연한거 아니야?" "……." 휘이잉∼. 아! 긴장과 흥분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라이레얼은 어쩜 저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할까? 그리고 어떻 게 자기 자신이 저런 말을 내 뱉을 수 있는걸까? 난 억지로 표정을 유지했다. "두 번째는요?" 라이레얼은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채, 당당하게 말했다. "니가 내 남자니까." "……예?" "원래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들어야 하는 법이야." "……." 더 이상 캐묻지 말자. 계속 물었다가는 개쪽 당할 것 같으니. "세 번째는요?" 라이레얼은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세 번째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라. 난 잘됐다고 생각하 며, 청룡도를 치켜들었다. "세 번째는 없나보군요." "아, 아니야, 히로. 잠깐만 기다려." "기다릴 수 없어요. 전 이 녀석을 죽이겠어요. 라이레얼이 뭐라고해도 제 마음은 바뀌지 않아요." 난 라이레얼이 무슨 소리를 하든지 절대 멈추지 않을 꺼라는 각오로, 청룡도를 내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라이 레얼이 뭐라고 외치고, 난 청룡도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만둬, 히로! 살리면 상금이 두배야!!" 상금……? 난 라이레얼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이, 히로. 죽이지마∼." "상금…… 이라뇨?" "아아, 그거 말이지. 그게 죽이면 3천 골드거든, 그런데 살려서 데려가면 5천 골드야. 굳이 죽여서 2천 골드 날 릴 필요는 없잖아. 그치∼? 그래서, 말인데……, 우리 상금 받으면 반띵하면 안될까?" "겨,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무슨 소리야! 겨우 그런 이유라니? 2천 골드가 카웨네 집 개 이름인 줄 알어?" "야! 거기에 날 왜 끌어들여!?" "야! 거기에 날 왜 끌어들여!?" 겨우 상금 몇 푼 때문에……. 아! 정신이 혼미해진다. 난 청룡도를 도집에 집어 넣었다. 라이레얼은 내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죽이지 않는거지?" "라이레얼 마음대로 하세요." 라이레얼은 가증스럽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증말?" "……." 할 말이 없다. 라이레얼이 그럼 그렇지. 난 또 왠일로 착하게 나온다 했네. 결국은 돈 때문이었나? 난 날 위해 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히잉, 라이레얼 미워! 젠장, 라이레얼 때문에 흥분이 풀려서 죽일 마음도 않생긴다. 난 그자리에 큰대자로 쓰러졌다. 내 눈앞은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찌릿찌릿한 느낌이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 다. 확실히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체력으로 1시간 동안이나 칼질하며 뛰어다닌다는 것은 무리였다. "으윽!" 통증이 조금씩 심해지는군. 아아, 모든게 귀찮다. 그렇게 생각하니 고통이 느껴지건 말건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통증은 계속 심해졌지만, 난 조용히 눈을 감았 다. 아프다는 것도 귀찮다. 이대로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여! 꽤나 멀쩡한 것 같군." 이게 멀쩡해 보이냐? 난 들려온 말에 억지로 눈을 뜨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테커!" 난 테커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이건 상대방이 테커라는게 놀라서가 아니다. 테커의 지금 모습이……. "어." 난 잠들고 싶다는 욕망을 억지로 뿌리치며, 힘들게 입을 열어 물었다. "팔은 어쨌어?" 테커는 씨익 웃어보였다. 하지만 한눈에도 억지 웃음이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어색한 웃음이었다. "잘렸어." 테커의 모습은 처참했다. 오른쪽 팔이 어깨죽지부터 잘려나갔고, 왼팔로는 잘려진 부분을 꽉 눌러 지혈하고 있 었다. 난 다시 물었다. "팔은 어쨌어?" "잘렸어. 너 하늘로 날라간 다음, 잠깐 방심했더니, 어느새 사라져있더라고. 씨발!" "팔은 어쨌어?" "아까 잘렸어. 젠장, 팔이 하나 뿐이니 투 핸디드 소드도 못쓰겠군." "팔은 어쨌어?" "잘렸다니까. 이제부턴 바스타드 소드로 바꿔야겠다." "팔은 어쨌어?" "잘렸다니까! 자꾸 묻지마, 임마. 빌어먹을, 왼팔 하나만으로 검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역시 투 핸디드 소드가 짱인데." "팔은 어쨌어?" "잘렸다니까, 임마!!" 테커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난 계속 찾아오는 수마(睡魔)와 싸우며 소리 질렀다. "팔은 어쨌냐니까, 임마?!!" "잘렸뎄잖아!!!" 난 정말 힘들게 상체를 일으켰다. 으윽, 근육이 끊어질 것 같군. 난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잘린 팔은 어쨌냐고?!!" 테커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 물어?" 난 온힘을 다해 소리쳤다. "야! 이 병신아! 팔이 잘렸으면 줏어와야 할꺼아냐?!! 빨랑 가서 줏어와! 세포가 죽기 전에 치료하면 다시 붙일 수 있어!!!" "뭐?!!" 테커는 어안이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어벙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테커를 계속 노려보았다. 테 커는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어디론가 튀어갔다. 눈 앞에서 테커가 사라지자 다시 졸음이 몰려오며, 오 직 쉬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안들었다. 하지만 한 여인이 말을 거는 바람에 다행이 잠에 드는 것은 피할 수 있 었다. "그거 정말이야, 히로?" "아, 라이레얼." 라이레얼의 얼굴이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라이레얼은 옷 소매로 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그거 정말이야?" "뭐요?" "그거 말이야, 그거." "그게 뭔대요?" "잘린 팔 다시 붙인다는거." 라이레얼은 피를 대충 닦아낸 다음, 내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 놓았다. 음, 이러니까 무지 편하군. "빨리 붙이면 가능해요." "그렇구나. 히로! 히로!!" "……왜요?" "자지마." "……예." 이런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있었군. 난 억지로 눈을 치켜떳다. "난 히로가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인줄 몰랐어. 기껏해야 2, 3 클래스인 줄 알았는데……. 아잉, 역시 내가 남자 는 잘 고른다니까." "별로 대단한건 아니에요." 솔직히 엄청 대단한거에요. "아니야, 히로. 오늘 히로가 보여준 마법은 정말 굉장했어. 그래서 말인데……." "야! 줏어왔어!!" 난 몸을 일으켰다. 대략 8명 정도가 내 주위에 서있는 것 같았다. 피로 때문에 눈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테커, 카웨, 베네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테커는 여전히 왼팔로 지혈을 하고 있고, 테커의 오른팔은 카웨가 들고 있었다. 이렇게 팔과 사람을 따로 놓고 보니 상당히 기괴해 보였다. 난 손을 내밀었다. "팔." 그러자 카웨가 내 쪽으로 테커의 팔을 던졌다. 하지만 조준이 빚나가서 팔은 내 옆에 떨어졌다. "야, 이 새꺄! 왜 남의 팔을 던지고 지랄이야!" "어? 니꺼였냐? 깜빡했다. 난 또 내 팔인 줄 알았지." "이 씨발 새끼가……." 난 팔을 줏어들며 조용히 말했다. "닥쳐라!" 테커는 내 도움을 받아야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카웨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지쳐서 말할 기운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난 조심스럽게 팔의 절단면을 살폈다. 예리한 칼로 한번에 잘렸는지 절단면은 매끈했다. 하지만 잘린지 시간이 좀 흘러서 인지 절단면의 피는 응고되어가고 있었다. "야! 누가 술 좀 가져와! 될 수있는한 독한걸로." "술?" 라이레얼은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내 주위에 있는 한 남자의 뒤통수를 때린 다음, 그가 손에 들고있던 술병을 빼앗아 내 손에 건냈다. 난 싸움이 끝나자마자 술퍼마시는 미친놈이 누군지 알고 싶었지만, 일단은 치료를 위해 참기로 했다. 난 술병을 코에 가져가 보았다. 속까지 파고드는 자극적인 냄새가 상당히 독한 술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난 그 술을 팔 절단면에 부었다. 그리고 술병을 테커에게 건내주었다. 테커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왼손으로 잘린 부분에 술을 부었다. "앉아." 테커는 내 앞에 앉았고, 카웨가 잘린 팔을 잡아 주었다. 난 절단면을 이리저리 맞추어 본 다음, 맞게 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카웨에게 꼭 잡고 있게 하였다. "제대로 잡고 있어. 잘못하면 이상하게 붙을 수도 있으니." "알았어." 난 잘린 팔과 살이 닿아있는 부분에 손을 가져다대고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여기 팔이 잘린 가련한 양이 질질짜면서 제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샘물을 찾듯, 내 몸속의 마나가 작은 힘이되어, 아니 큰 힘이되어 테커의 잘린 팔을 붙여줄꺼라 믿어 의심치 아니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테커같은 놈 팔을 고치는데 마나를 사용한다는게 좀 아깝긴하지만 그래도 인생이 불쌍한 놈이기에 한번 쯤은 고쳐주고 싶습니다. 큐어 크리티컬 운즈." 주문을 영창하는 도중, 곳곳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으나, 난 무사히 주문 영창을 끝마치고 시동어를 말했다. 그 순간, 내 손에서 파란 빛이 흘러나오고, 그 빛은 테커의 상처로 빨려 들어갔다. 서서히 테커의 팔이 붙기 시작했다. 뼈가 붙고 힘줄과 신경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살이 붙었다. 난 팔이 완전히 붙은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뒤로 엎어졌다. 그래도 내가 엎어지는 걸 알고 라이레얼이 잽싸게 무릎을 받혀준 덕에 뒤통수를 땅에 들이 박는 일은 없었다. 라이레얼의 무릎은 부드럽고 따뜻해서 베게 대용으 로 쓰기에는 딱이었다. 난 라이레얼의 무릎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잠에 들려는 순간, 테커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야! 이거 안 움직이는데." 난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야, 카웨! 테커 팔 좀 쳐봐." "어?" "한번 때려보라고." "알았어." 퍽-! 세게도 치는군. "으아! 이 미친 새끼가, 왜 남의 팔을 치고 지랄이야!" "저 녀석이 처보래잖아." "팔이 아프다는건 감각이 있다는 거야. 감각이 있다는건 팔이 제대로 붙었다는 거고. 한번 움직여봐." "잘 안움직이는데." "그야 잘렸다 붙였으니까 당연하지. 아마 한동안은 움직이기 힘들꺼야. 하지만 지금부터 재활훈련을 열심히 하 면 한달 정도면 전과 다름없이 움직일 수 있을꺼야." "재활훈련?"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계속 팔을 움직여. 밥먹을 때도, 담배 필 때도 쉬지 말고." "……으으." 용을 쓰는 듯한 테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팔에 쥐가 난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짜릿짜 릿한 전기가 오르는. 그래도 외팔이 안될려면 그 정도 고통은 참아야지, 어쩌겠냐? 난 이번엔 진짜 잘려고 했다. 하지만……. "저기, 히로. 히로." "또 왜요?" "아까 주문 외울 때 말이야, 그거 원래 주문이 그래?" "아니에요. 저만 좀 특이한 거에요." "그래? 왜 그러는데?" "저 지금…… 피곤해 죽겠어요. 그러니까…… 다음에…… 설명……." 이젠 입 움직이기도 힘들다. 아! 죽을 것 같아. "알았어, 히로. 더 이상 묻지 않을게." "……고마워요." 아! 이제 드디어 잠을 자는구나! 난 편한 마음으로 수면 속으로 퐁당 빠져들었다. 그런데……. "뭘, 그런데 말이야…… 우리 부부용병으로 나가는게 어떨까? 난 칼쓰고 활쏘고 히로는 마법쓰고. 어때? 돈벌이 좀 될 것 같지? 아! 그보다 식을 먼저 올려야겠구나. 그럼 우리 결혼식은 언제할까? 내일 당장하는게 어때?" 난 라이레얼의 말을 듣는 순간, 잠들다 말고 기절했다. Part 3. 두 남자의 비밀 "오빠, 일어나!" 누구지? "오빠! 오빠!!" 난 안떠지는 눈을 억지로 치켜떴다. 흐릿한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시간이 지나자 초점이 명확해지 면서 앞에있는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라나?" "응, 오빠. 빨리 일어나." 라나는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내 몸을 잡고 흔들었다.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라나는 긴 치마와 짧은 반 소매 티를 입고 연갈색 머리카락은 흰색 리본으로 질끈 묶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얘가 왜 여기있 는거지? "라나야, 니가 왜 여기……?" "아이, 무슨 소리야 오빠. 아직 잠이 덜 깼어? 밥 다 됐으니까 빨리 나와." 라나는 내 옷을 잡고 나를 문 밖으로 이끌었다. 나는 멍하니 라나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거실로 나오자 라나 는 방문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세수하고 식탁으로 와." "저기……." 라나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보이며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빨리!" "아, 알았어." 이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빨리가∼." "으, 응." 라나는 두 손으로 내 등을 떠밀있고, 난 어쩔 수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예전에 살던 우리 집과 똑 같은 구조였다. 세면대가 있고 양변기가 있고 욕조가 있는. 난 찬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확 깨어나면서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싸움이 끝난 뒤, 기절한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건 그렇고 라나가 왜 여기있는거야? 자기네 집 은 어쩌고? 혹시 쟤 가출한거아냐? 설마 열살짜리 꼬마애가 가출을……? "오빠! 빨리 나와!" "어!" 난 화장실을 나와 라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갔다. 주방에는 라나가 국자를 들고 서있고 원목으로 만들어 진 4인용 식탁 위에는 방금 퍼낸 듯한 국과 밥이 놓여져 있었다. 라나는 나를 보더니 베시시 웃었다. "헤헤, 오빠." "이게 대체……." "자 자, 빨리 앉아. 라나가 오빠를 위해서 열심히 만든거니까 맛있게 먹어야 돼." "……응." 니가 이걸 왜 만드니? 난 자리에 앉았고, 라나도 앞치마를 풀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자, 빨리 먹어." "어, 어." 난 어색한 동작으로 수저를 들었다. 라나는 눈으로 빨리 먹으라고 말했다. 난 라나의 눈빛에 어색한 미소를 지 으며 수저로 국을 떠 먹었다. 국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술마신 다음날 일어나서 먹는 콩나물국으로 국물이 짜지 도 맵지도 않고 시원했다. 흠, 이정도로 끓일려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할텐데. 이걸 진짜 라나가 끓였 나? 라나는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어때, 오빠? 맛있어?" "응. 맛있어." 그러자 라나는 두손을 볼에 갖다 대더니 베시시 웃었다. "헤헤, 정말?" "응. 그런데 이거 라나가 끓인거야?" "응. 그 국도 내가 끓이고 밥도 내가 만든거고, 여기 나물이랑 김치도 다 내가 만든거야." "그, 그래……." 이거 완전히 어린애인줄 알았는데 요리 솜씨가 제법이네. 이걸 그냥 데리고 살어? 한 5년 정도 지나면 본격적 으로 사귀고, 또 5년 지나면 결혼……, 흐흐흐.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오빠, 국 식어. 빨리 먹어." "알았어." 난 수저와 젓가락을 들고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고, 라나는 젓가락으로 갖가지 밑반찬을 집어 내 밥 위에 올 려 놓았다. "많이 먹어, 오빠." "응. 라나도 많이 먹어." "응." "아! 잘먹었다." "더 안 먹어?" "아아, 너무 많이 먹어서 더 이상 들어갈데가 없어." 라나의 요리 솜씨는 정말 훌륭했다. 난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텅 비어있는 세 개의 밥그릇을 감상했다. 라나는 빠르게 그릇들을 치우며 말했다. "그럼 나 설거지 할테니까, 오빤 쉬어." "응." 라나는 싱크대에 그릇을 다 밀어넣은 다음, 받침대를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흠, 키가 작으니까 저런 방법을 쓰는군. 난 그냥 의자에 앉아서 설거지하는 라나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귀여워라∼. 라나는 세제를 물에 풀고, 수세미로 그릇들을 박박 닦은 다음에 마른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그릇들을 정리했다. 몇번 그릇이 깨질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도 있었지만, 라나는 접시 한 장 깨지 않고 설거지를 끝마쳤다. 라나는 앞치마를 풀면서 말했다. "오빠, 주스 마실래?" "응." "그럼 내가 거실로 가져갈테니까, TV라도 보고있어." "응." 라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오랜지 주스를 꺼내 예쁜 컵에 따랐다. 난 라나가 컵을 쟁반에 받치는 모습까지 본 다음, 거실로 나왔다. 쇼파에 앉아서 리모콘으로 TV를 켰다. 채널을 이러저리 돌리던 중, 라나가 주스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자, 오빠. 마셔." "응." 난 라나가 두손으로 건내주는 오랜지 주스를 받아들었다. 난 주스를 마시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TV, 비디오, 오 디오, CD장식장, 거실에 붙어있는 커다란 액자. 난 액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액자 안에는 웨딩드레스를 입 은 라나가 서있었다. 다소곳한 모습으로 면사포를 쓰고 손에는 부케까지 든 채. 흠, 어린애인줄만 알았더니 저 렇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색다른 매력이 느껴지는군. 전혀 10살로는 안느껴저. 아이, 귀여워라∼. 난 이번엔 시선을 옆으로 옮겨 보았다. 라나 옆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라 나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니! 어떤 놈팽이가 감히 나의 라나와 팔짱을……? 난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푸우우-! "오빠, 왜 그래?" "켁켁, 쿨럭!" "오빠, 괜찮아?" 라나는 황급히 수건을 가져와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난 주스가 목에 걸린 관계로 한참을 켁켁 거린 후, 간신 히 라나에게 말을 꺼냈다. "라, 라나야. 저, 저건 대체?" "아아, 저거 말이지." 라나는 베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내 옆에 털썩 앉더니 찰싹 달라붙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결혼 사진이잖아. 오빠와 나의. 아이∼." "그, 그래. 결혼 사진인건 나도 아는데. 왜 저기 너랑 내가 서 있는거냐?" 라나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라나는 열을 식히려는 듯 두손을 뺨에 댔다. "아이, 오빠도 차암∼. 우리 며칠전에 결혼했잖아. 저건 그때 찍은 결혼 사진이구." 쿵-! "겨, 결혼이라니……." 라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오빠 설마……." "……?" "하, 하지만……. 그, 그래도……." 라나의 빨간 얼굴은 더욱 빨게졌다 라나는 부끄러워서 어쩔줄 모른다는 포즈로 고개를 푹숙이더니 손가락을 꼼 지락거렸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라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오, 오빠라고 부르다가……, 그렇게 부르기는……, 아이, 참……." "……??" "하, 하지만 오빠가 원한다면 그렇게 부, 부를게." "……???"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야? 라나는 몇번을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여, 여보∼." 쿵쿵-!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나와 라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형 침대에 앉아있었다. 천장에는 대형 거울이 붙어 있고 벽지는 요란한 분홍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여, 여긴 설마…… 러브호텔? <심의 삭제> 주위의 풍경은 다시 바뀌었다. 내 눈에는 라이레얼의 얼굴이 보이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방긋 웃었다. "어, 히로. 깨어났네." 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부서질 것 같이 아팠다. 난 인상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는 덜그럭거리며 움직이고 태양은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마차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 반 정도는 꾸벅꾸벅 졸고있고 나머지 반 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 여기는……?" "마차지. 아직 잠이 덜깼어?" 그럼, 그게 꿈이었나? 라나와의 신혼 생활이? 으윽, 평범한 고등학생인 내가 그렇게 불건전한 꿈을 꾸다니! 세레나도 아니고 어떻게 라나와……. 이건 범죄 야! 내가 열살짜리 꼬마애와 XX하고 YY하고 ZZ하는 꿈을 꾸다니! 변태 중년도 아닌 내가! 설마 내가 로리타 컴플렉스란 말인가? "아니야!!!" 난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친 다음, 마차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 그건 아니야! 난 변태 중년이 아니야!! 난 정상적이고 건전한 사고 방식을 가진 소년이야! 몸과 마음 모두 건전한! 아니지, 몸은 버렸지만 마음만은 건전한 소년!! 그래 난 건전하고 모범적인!!" 라이레얼을 비롯한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중얼거리며 마차 바닥에 헤딩하는 행 위를 멈추지 않았다. 난 로리타가 아니야! 난 로리타가 아니야! 난 로리타가 아니야! "야! 로리……." 난 벌떡일어나 카웨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난 로리타가 아니야!!!" "누가 뭐래, 임마! 난 그냥 로리운한테……." "시끄러!!!" 뻐정-! 카웨는 뒤로 나가 떨어졌고, 난 두 주먹을 쥐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난 로리타가 아니야!!!" "제가 사흘동안이나 누워있었다구요?" "응." 라이레얼의 얘기로는 내가 사흘 동안 누워서 잠만 잤다고 한다. 흠,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 마차는 덜그덕 거리 며 약간은 거칠은 길을 지나고 있었다. 인원은 정말로 팍 줄어있었다. 약 20명 정도. 어? 그런데 저 여자들은 누구지? 난 우리 마차와 조금 떨어진 곳에있는 마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여자들은 뭐에요?" "아, 쟤네 말이지." 내가 가리킨 마차에는 약 20여명의 예쁘장한 여자들이 타고 있었다. 그녀들은 서로의 몸을 붙인 채, 조용하게 앉아있었다. "산적에게 끌려갔던 여자들이야." 대답을 한건 테커였다. 테커는 내가 처방(?)해준데로 오른손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고 있었다. 테커는 팔을 움직 일 때마다, 꽤나 힘이드는지 인상을 쓰며 설명해주었다. 테커의 설명은 이러했다. 내가 산적두목을 박살낸 후, 싸움은 우리편의 승리로 확실하게 굳어졌다. 나의 화려한 마법과 쇼맨쉽 덕에 사기 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산적들은 이리저리 도망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편이 도망가는 놈들을 그냥 놔둘리는 없었다. 당연 몇놈 잡아서 조졌고, 조짐 당한 놈들은 자신들의 아지트를 술술 불었다. 우리편은 착한 사람들을 삥 뜯는 나쁜 산적들의 뿌리 뽑아야된다는 일념으로 아지트로 처들어갔다……, 라고 테커를 비롯한 몇 명은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돈 몇푼 건지려고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총책임자 한스는 졸개들에게 '어차피 니들 대장은 잡혔으니, 니들도 사업을 접어야할꺼다. 사장이 끝장 나고 회사가 망한 상황에서 사원들이 먹고사는 방법은 회사 건물 안에 남아있는 비품이라도 터는 수 밖에 없 다. 지금 니네가 그 행위에 동참한다면 한 몫 크게 떼어주겠다. 그러니까 그 돈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 고스톱 이라도 쳐라.' 라는 등의 말을 해서 졸개들을 회유한다. 뭐, 진짜로 저렇게 말했겠냐만은 아무튼 졸개들은 쉽게 배신을 때린다. 물론 산적들이 배신때리는 행위에 대해 죄의식을 느낄리는 없었다. 거래가 성립되자 우리편은 부상자를 남겨두고 졸개들을 앞세워 용감히 산적들의 산채로 처들어간다. 산채는 부 상당한 사람들과 늙은이들 몇 명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또 한바탕 싸움이 일어날뻔 했으나, 한스는 교묘한 말빨로 이들마저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우리편은 산채 안의 금화와 패물 등, 돈이 될만한 물건들은 몽땅 들고 나온다. 그런데 산채를 뒤지던 도중 잡혀 있는 여자들을 발견한다. 당연 풀어준다. 돈될만한 물건을 전부 챙긴 우리편은 배신한 산적들에게 돈몇푼 쥐어주고 풀어준다. 그리고나서 산채에 불을 지르고 여자들을 데리고 나온다. 당연 이 여자들은 이미 몸을 다 망쳐놓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특별히 갈곳도 없다. 그래서 일단은 우리편이 데리고 가기로 했다. 갈 곳 없는 여자들을 산중에 버리 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편은 부상자들 치료하고 산적들에게 빼앗은 물품을 실고 아무튼 이거저거 하느라 이틀 정도의 시간을 허비 한다. 그리고 출발한다. "참, 감동적인 얘기다." "별로." "팔은 움직일만 하냐?" "별로." "그래도 외팔이 보다는 보기 좋잖아." "그렇긴 하지." "크크크, 그렇긴 뭐가 그래? 꼭 자위하다 쥐난 것 처럼 맨날 부르르 떨고있는데. 킥킥, 바이브레이션은 죽이겠 군." 퍽-! "하여튼 새끼가 비유를 해도." "왜 쳐 이 새꺄!" "찌그러져라." 테커와 카웨는 서로에게 열심히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여튼 할 일 없는 놈들이다. "히로." 라이레얼은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히로가 자고 있는 동안 내가 열심히 간호했어. 고맙지?" 내가 자고있는 동안 라이레얼이 간호를……? "저, 정말이에요?" "그러엄. 내가 히로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 이럴 수가 라이레얼이 내 간호를 해주다니! 아, 감동! 감동! 난 라이레얼에게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냈다. "고마워요, 라이레얼." "아잉, 뭐얼? 당연한 일을 한건데." "라이레얼!" "히로!" 우리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흐듯이 서로의 이름을 외치며 서로를 껴안았다. 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에 대한 주위의 반응은 바로 튀어나왔다. "저 새끼들 또 지랄한다." "아, 짜증나!" 방금 전까지만해도 피터지게 싸우던 테커와 카웨는 얼굴이 시퍼런 멍이든 채, 어깨동무를 하며 열심히 나와 라 이레얼을 갈구고 있었다. 짜식들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지. 어느덧 시간은 지나 저녁 먹을 때가 되었다. 원래는 몇시간 후에 먹어야 정상이나, 내가 배고프다고 말하자마자 라이레얼이 마차를 멈춘 다음, 한슨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바람에 몇 시간 앞당겨지게 되었다. 테커를 비록한 다른 놈들은 저녁 일찍먹기 싫다고 열심히 씨발씨발 거렸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지들이 씨발씨발 거려봐야 어쩌겠는가? 식사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차를 길에서 조금 떨어진 적당한 곳에 세우고, 장작 주워와서 불피고, 요리하고. 요리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기에 난 먼저 빵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인원은 여자들까지 포함해서 40여명 정도였기에, 요리는 카웨와 다른 두명이 맡았다. 난 빵을 꾸역꾸역 입에 집어 넣으며 물었다. "그럼 며칠이나 더 가야 도착하는 겁니까?" 한슨이 대답했다. "약 15일 정도입니다." "15일이라……. 오늘이 몇일이죠?" 라이레얼이 대답했다. "7일." "그럼 22일?" 다시 한슨이 대답했다. "예." "많이 늦어졌네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예정일이 10일이었던 것 같은데." "별로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6월 1일 까지만 도착하면 되는거니까요." "그래요? "그렇습니다." 한슨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 덕에 물건들은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용되었으니 그 정도 일은 해야지요." 내가 겸손한 모습을 보이자 라이레얼은 내 목에 매달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우리 히로 아니였으면 어떻게 됐겠어?" "전 별로 한것도 없는데요, 뭐." "아잉, 무슨 소리야?" 라이레얼은 일부러 가슴을 내 등에 밀착시켰다. 아! 남자의 본능이……. 흠흠, 자제해야지. 자제! 한슨은 우리의 러브러브한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당신이 마법사 일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마법사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칼을 휘두를 정도의 체력이……." "사랑해, 히로." "라, 라이레얼." "그리고 어떻게 그 나이에 그 정도의 마법을 구사 할 수 있는……." "키스해줘." "어, 어떻게 여기서……." "흐음 흠 흠,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한슨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라이레얼은 내 옆에 찰싹 붙어서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정말 미치겠다. "히로." "왜요?" "그때 기억나?" "그때라니요?" "아이, 그때 말이야. 그때." "예?" 라이레얼은 두 손바닥을 뺨에 붙인 다음, 꿈꾸는 소녀의 모습을 취하며 말했다. "히로가 구하러와줬을 때. 나 그때 정말 감동 먹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아! 있었구나. "하하, 뭐 그런걸 가지고." "아니야, 나 정말 감동 먹었어. 그때 히로가 나 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 내가 뭐라고 했었지? 서, 설마……. "그 때 히로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레이디 라이레얼을 지키러 왔어요. 뒤로 좀 물러나계시겠어요' 라고 말했어. 내가 그때 얼마나 감동을 먹었는지……!" "……." 내가 왜 저런 말을 했을까?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그 다음에는 뭐라고 했는 줄 알어?" "……." "'라이레얼의 예쁜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안되잖아요' 라고 그랬다. 아이, 히로도 참. 예쁜건 알아가지고." 그렇게 말하며 라이레얼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와 더불어 라이레얼의 예쁜 레몬빛 머리카락도 찰랑찰랑 흔들렸다. 그와 더불어 난 정말 미치겠다. "저, 저기 그땐 제가 제정신이 아니였거든요." "뭐!?" 순간, 라이레얼은 정색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앗! 이런. 라이레얼 삐졌다. "저, 저기요……." 라이레얼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때……,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한거였어?" "아, 아니 뭐, 꼭 그렇다기 보다는……." 빨리 뭐라고 말을 해야되는데. 이러다 라이레얼 또 울면 어쩌지? 라이레얼은 고개를 들었다. 내 예상대로 라이레얼은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으윽, 여자를 울리나니! 최악이다, 박영웅!! "라,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방긋 웃었며,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아이, 히로. 나 또 감동 먹었잖아. 자꾸 그렇게 감동 받을 말만 골라서 하면 어떡해∼. 히로, 미워!"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내 생각만 하다니……. 아! 진짜 너무 감동이야." "……." 제 정신이 아니였으니까, 라이레얼 생각을 한거죠. 참, 좋은 쪽으로만 해석 하시네요. 라이레얼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히로. 나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어? 난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히로가 도와주러 올꺼라는 걸 끝까지 믿고 있었어. 왜냐면 히로는 내……." "하하하! 뭘 그런걸 가지고. 야! 카웨 아직 멀었냐!? 빨리빨리 좀 해, 짜샤! 배고파 죽겠어!!" 저쪽에서 카웨가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닥쳐!!" 라이레얼은 더 이상 아무말 하지 않고, 나를 껴안고만 있었다. 분명 아까 라이레얼이 하려던 말은 '내 남편이니까' 로 생각된다. 아! 미치겠다! 이젠 꼼짝 없이 라이레얼과 결혼하게 생겼구나. 안돼! 난 절대 라이레얼과 결혼 할 수 없어. 나의 이상형은 귀엽고 깜직하고 순종적인 여자야! 라나같은. 으아! 여기서 라나 생각이 또 왜 나는거야! 그 앤 열살이라구! 열살!! 열살이면 초등학교 4학년. 그래. 진정하자 박영웅! 딸 같은, 아니, 동생 같은 얘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흐윽, 라나야. 이 오빠는 정말 너에게 흑심하나 없단다. 이 오빠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널 좋아하는거야. 그래, 맞아. 난 순수한 마음으로 라나를 좋아하는거야. 절대 변태 로리가 아닌. "무슨 생각해, 히로?" "글쎄요……." "후훗, 내 생각했나보구나." "……." 좋을대로 생각하세요. "야! 처먹어라!!" 우리는 취사병, 즉 카웨가 만들어준 수프를 꾸역꾸역 먹었다. 난 한손에는 접시를 다른 한손에는 수저를 들고 걸신들린 듯이 퍼먹었고, 라이레얼과 테커는 한팔을 다친 관계로 다치지 않은 팔로 조심스럽게 떠먹었다. 테커야 팔이 아프든말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라이레얼이 왼팔에 붕대를 감고있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다 아파왔다. 난 당장이라도 라이레얼의 팔을 치료해주고 싶었으나, 상처가 그리 심각한게 아니였고, 또 마법으로 치료를 하다보면 내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정말 눈물을 머금고 치료를 포기해야만 했다. 흑흑, 라이레얼. 제 맘 이해하죠? 단란한 식사시간에 화기애애한 대화가 빠질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 "그때 내가 싸우는거 잘들 봤지? 하하, 내가 몇 명이나 죽였는지 알어?" "싸우진 않고 피해만 다닌 주제에 죽이긴 개뿔이 죽여." "야, 테커! 너 접시 내려놓고 먹은거 토해." "치사한 새끼!" 테커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밥그릇을 빼앗기기는 싫은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카웨는 방금 자신의 입에서 뺀 수저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도 좀 싸우긴했지. 나 만큼은 아니였지만 말이야." 웃기고 있네. 라이레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에서 수저를 꺼내 카웨에게 던졌다. 퍼억-! 수저는 당연 카웨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고 카웨는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뭔 짓이야, 이년아!" 라이레얼은 이번엔 접시를 던졌고, 카웨는 조용히 찌그러졌다. 하지만 카웨가 조용히 찌그려져있는데는 시간적 한계가 있었다. 카웨는 다시 테커를 붙잡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저 녀석, 칼 진짜 죽이던데. 그때 보니까 칼이나 갑옷까지 전부 아작을 내더라구." "생긴거부터 비싸게 생겼잖아." "씨발, 나도 저런 칼 하나만 있었으면." "꿈깨, 임마." "쓰읍, 그냥 저 새끼 자는 사이에 갖고 튈까?" 다 들린다. 다 들려. "갖고 가 봐야 쓰지도 못할텐데." "내가 왜 못 써?" "너 그러다 요루드 꼴 난다." "닥쳐!!!" 베네트였다. 베네트는 인상을 찡그리며 테커와 카웨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테커도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난 쓴 웃음을 지으며 접시를 내려놓고 청룡도를 만지작 거렸다. 베네트 때문에 잠시 대화가 멎었지만, 카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넌 좋겠다." "뭐가?" "칼이라도 하나 건졌잖아." "아, 이거." 테커는 왼손으로 자신의 옆에 놓인 투 핸디드 소드를 들었다. 무게가 꽤나 무거운지 왼팔에는 힘줄이 몇가닥 불거져 나왔다. 그나저나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혹시……? "야! 그거 걔꺼 아냐?" 테커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걔꺼 맞아." 여기서 지칭하는 '걔' 란 그때 만났던 산적두목을 뜻한다. 지금 테커가 손에 들고있는 검은 그 산적두목이 쓰던 투 핸디드 소드였다. 내가 쓰러트린 다음, 줏어왔나 보다. 하긴, 내 청룡도와 부딪혀서 잘려나가지 않을 정도라면 꽤 좋은 검이겠지. "맞아! 그런데 그 새끼는 어떻게 됐냐?" "누구?" "걔." "걔?" "어." "걔야 잘있지." "걔가 어떻게 잘 있는데?" "온몸을 꽁꽁 묶은 다음, 자결하지 못하게 재갈까지 물려놨어. 그 새끼가 혀 깨물면 2천골드가 그냥 날아가거든." "그런데 왜 살리면 상금이 올라가는 거냐?" "몰라서 묻냐?" "어." 테커가 입을 열려는 찰나, 라이레얼이 내 목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국가는 공개처형을 원해." 호오! 그런 중요한 이유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레얼은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기 히로. 그거 상금 말이지……, 5천골드 받으면 나 좀 나눠주면 안될까?" "……." 난 라이레얼의 눈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귀엽게 보이고 싶은지 눈을 커다랗게 깜빡깜빡 거렸다. 귀엽군, 흠흠. 난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라이레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흠, 무지하게 부드럽군.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라이레얼은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흥흥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세……, 나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2천 골드 정도면, 뭐. 아이, 히로도 기억나지? 그놈 죽일뻔 했던거. 만약 그때 내가 안 말렸으면 어쩔뻔했어? 그러니까 나 2천 골드만 줘. 응?" 흐음, 2천 골드라? 뭐, 상관 없겠지. 돈이야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거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응!?" 이렇게 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라이레얼은 눈을 크게뜨고 되물었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이내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저기, 히로." "말씀하세요." "저기 말이야, 우리 그렇게 하는 것 보다……, 차라리 반띵 하는게 어떨까? 응?" "반띵?" 반띵이면 2천 5백 골드? 라이레얼은 방긋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라이레얼을 위해서라면 5백 골드 쯤이야. "좋아요. 상금은 라이레얼과 반띵할께요." "정말!? 아잉, 역시 히로야, 우웅." "아앗! 라이레얼!" 쪽쪽쪽-! 라이레얼은 내 볼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고, 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미인의 키스를 위해서라면 5백 골드 쯤이야. "저 새끼들 또 시작이다." "넌 금전감각이 있는거냐, 없는거냐? 어떻게 저런 년한테 2천 5백 골드나 주냐? 그럴 돈 있으면 차라리 날 줘." 난 카웨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높히 치켜들며 말했다. "내가 미쳤냐? 너한테 줄 돈 있으면 차라리 테커한테 주겠다." 그러자 카웨는 인상을 쓰며 벌떡일어났다. "뭐!? 감히 그런 심한 욕을……!" "씨발아! 그게 왜 욕이야!?" "당연 욕이지. 크윽, 내가 너같은 놈과 비교되다니." "그건 내가 할 소리다." "호오, 자기 팔까지 잃어버리고다니는 주제에 할 말이 있다이거지?" "이 씨발이!" 퍼억-! "어쭈! 첬다 이거지?" 퍼억-! "죽어!" "너나 죽어!" 둘은 접시를 내던지고는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둘은 한참 동안을 싸웠고 결국 승자는……, 라이레얼이었다? "조용히해! 우리 히로 밥먹는데 방해되잖아!!" "죽어, 이 새꺄!" "씨발, 너나 죽어." "호오, 니들이 우리 히로 밥먹는데 감히 먼지를 피워?" 라이레얼은 즉시 주변에 손에 잡히는 물건을 전부 집어 던졌고, 접시를 맞아 얼굴이 수프 범벅이된 테커와 카웨는 조용히 찌그러졌다. 흐음, 역시 라이레얼은 강하다. "자, 히로, 내가 다 처리했으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해."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뭘 먹으라구요?" "그야……, 어? 먹던거 어디갔어? 벌써 다 먹은거야?" 난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라이레얼이 방금 집어던졌잖아요." 그렇다. 라이레얼이 아까 손에 잡히는데로 집어 던질 때, 내가 들고있던 접시와 수저 역시 날아갔던 것이었다. 라이레얼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호호, 그렇구나. 호호…… 호호……, 뭐해, 이것들아!! 우리 히로가 먹을게 없다는데 당장 준비해 와야 될꺼아냐!!?" 라이레얼은 카웨를 보며 소리쳤고, 카웨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아까 맞은 것 때문에 삐졌나보다. 하지만 지가 삐져봐야 어쩌겠는가? "빨랑 다시 안퍼와!!?" 라이레얼은 옆에 있는 바위를 집어 들었고, 카웨는 두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아, 알았어, 퍼올게! 진정해, 라이레얼. 진정해." "히로 앞으로 가져오는데 30초." "야, 30초라니? 어떻게 30초에……." "1, 2, 3……." 라이레얼은 조용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카웨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동작으로 냄비 안에 수프를 퍼서 내 앞에 갖다 바쳤다. "허억, 허억, 여기." "수고했어." 카웨는 욕을 궁시렁거리며 테커의 옆으로 가 앉았고, 난 다시 수프를 떠먹었다. 난 이미 다 식어버린 수프를 마시듯이 먹고 냄비로 가 또 퍼 담았다. 냄비에는 아직도 상당량에 수프가 남아있었다. 난 아예 냄비를 내 앞으로 끌어다 놓고 퍼먹기 시작했다. 사흘을 굶었더니,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누워서 빵을 뜯어 먹는다거나 노래를 흥얼거린다던가 하며 편하게 쉬고 있었다. 테커는 나무 등걸을 기대 누워,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을 그러다가 꽤나 심심한지 테커는 벌떡 일어나 나에게 물었다. "야! 니가 내 팔 붙여줄 때 말이야." "어." "그때 쓴 마법이 몇 클래스였냐?" 마법 얘기가 나오자 흥미가 생기는지 테커와 나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테커와 한슨은 마법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난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이 나이에 5 클래스 마법을 쓴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까. "그냥 별거 아닌 마법이야. 한 2, 3 클래스 정도." "흐음, 그래?" 테커는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대신 다른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법은 어떻게 쓰는거야?" 흐음, 무지하게 어려운 질문이다. "그건 왜 묻는데?" 난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대충 넘어가려했다. 하지만 이 자식은 누구 엿먹일 일 있는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법쓰는 걸 몇번 보긴 했는데, 정말 엄청 신기하더라구. 그래서 원리나 좀 알고 싶어서. 설명 좀 해봐." "글세…… 내가 설명해준다고 해서 니가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속마음 : 내가 설명이나 제대로 할수 있을까?) "그러니까 쉽게쉽게 설명해보라고." "내가 쉽게 설명한다 해도 니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마법이란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라구."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 여겼는지 테커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 씨발! 못알아들어도 좋으니까 설명이나 해봐." 이 자식, 강하게 나오네. 난 도와달라는 의미로 슬쩍 라이레얼을 보았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도 궁금하다는 뜻을 나타냈다. 주위의 있는 사람들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전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치겠군. 내가 무슨 마법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하루 아침에 마법을 쓸 수 있게 됀건데 내가 뭘 알고 있겠냐? 아, 쓰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게하지? 난 정말로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없는건 둘째 치고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거 설명하는거라면 나보다는 차라리 1클래스도 마스터하지 못한 부실한 마법사가 훨씬 잘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최소한 책이라도 몇권 읽었을 것 아닌가! 난 마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마법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흐음, 그러니까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말로는 표현을 못하는. 왜 말로 표현이 힘드냐 하면, 그건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여서 설명이 힘들었다. 지금 내 상황은 어떠한 수학 문제가 나오든지 간에 쉽게 답을 쓸 수는 있지만, 식은 못쓰는 경우와 똑같았다. 실제로 몇몇 천재들은 이런 일이 있다고 한다. 4차 5차 방정식의 문제를 한번 스윽 훝어보고 답을 쓰지만 식은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1 + 1 = 2 라는 계산식을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건 당연한거다. 1 + 1은 당연 2이다. 이걸로 끝이다. 이식은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천재들은 4, 5차 방정식을 1 + 1 의 계산식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식을 쓸 필요가 없다. 왜 그런 답이 나오게 됐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저 답이 나왔을까?' '어떻게 문제를 푼걸까?' 하는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나도 이와 마찬가지다. 나는 5클래스 이하의 어떤 마법이든지 쓸 수 있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쓰는지 제대로 설명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 당연한거니까. 나는 천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둔재는 절대 아니다.(가끔 둔재라고 하는 선생들도 있다. 눈이 삔 놈들. 내가 둔재면 세계 인구 9할이 정신박약아겠다.) 하지만 마법에 있어서 만큼은 천재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얼마전에야 깨달은 거지만 칼도 잘쓴다. 흐음, 생각해보니 난 왜 이렇게 잘난걸까? "야! 빨리 설명해 보라니까." 자식이 재촉하기는……. 아무튼 당장은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난 시간을 벌 생각으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이거 다 먹고 설명해줄게." "그걸 언제 다 처먹어?" "시끄러 임마! 밥먹는덴 개도 안건드린댔으니까 찌그러져있어." 난 수저로 냄비 안의 남은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기위해 뜨겁지도 않은데 괜히 호호 불면서 먹었다. 어차피 나 때문에 저녁을 빨리 먹게됐던터라, 야영준비를 하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다. 그러기에 테커는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뭐 정 안되면 불침번설때도 시간은 있으다. 아무튼 결론은 시간은 남아돌고 나는 반드시 설명을 해줘야한다는 것이다. 흐음, 어떻게 설명을 하지? 그냥 대충 둘러댈까? 아니야. 다른 놈들이면 몰라도 테커 저 놈은 뭘 좀 아는 것 같아. 으음……. 냄비 안의 수프는 점점 줄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 수저로 냄비 바닥까지 박박 긁어 먹으며, 어떻게 설명할까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찰 하였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고, 난 수저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테커에게 말했다. "으음, 그게 그렇게 알고 싶냐?" 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알아서 뭐하려고?" "그냥." "너 나중에 얘들 앞에서 괜히 유식한 척 하려 그러는거지?" "내가 유식한 척을 하든말든, 빨리 설명이나 해, 임마." 정말 미치겠군. 난 인상을 쓰며 말했다. "좋아! 되든 안되든 설명해줄게. 한번만 말할꺼니까 잘 들어둬라. 니들한테 다 뼈가되고 살이되는 얘기다." 난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한번 스윽 보았다. 주위에 사람들은 각자 편한 자세로 누워서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으음,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 해줄까?" "아이, 씨발아! 니 꼴리는데로 해!" "아, 왜 화를 내고 지랄이야! 설명해주면 될꺼아냐!" 그런데 어떻게 설명을 해주냐는 말이지. 쓰읍, 할 수 없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데로 지껄여보자. 어차피 저 무식한 것들이 뭘 알겠냐. 난 결심을 한 다음,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니들이 알지 모를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은 마나로 구성되어있어. 여기서 마나란……." 그 순간, 테커가 내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알아 임마! 대자연에 분포되어있는 기(氣)를 말하는 거지? 공기부터 시작해서 나무, 풀, 바람, 심지어는 이 돌맹이에까지 들어있는. 그러니까 그건 넘어가." 그래 임마! 넌 아는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 "넌 알아도 다른 놈들은 모를꺼아냐." 내 말이 맞았는지 다른 놈들은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난 테커를 노려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아까 어디까지 말했지? 아! 마나 설명하던 중이었지. 어, 그러니까 마나란…… 어……, 어……, 대자연에 분포되어있는……." "그건 아까 말했잖아, 히로." 으윽, 라이레얼. 제발 끼어들지 좀 마세요. "으음 제가 그랬었나요?" "응. 그랬어, 히로." "정말요?" "응, 정말." "미안해요. 제가 잠시 착각했었나봐요." 라이레얼은 방긋 웃으며 내 두손을 꼬옥 붙잡았다. "아니야, 히로. 그리고 우리 사이에 미안하다는 말은 쓰는게 아냐." "그럼 무슨 말을 써요?" 라이레얼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볼에 살며시 홍조를 띄웠다. 참고로 라이레얼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면 나는 정말로 불안해진다. "으음, 예를 들어 사랑해 허니 라던가, 키스해 줄게 라던가, 아니면 오늘밤 라이레얼과 뜨거운 밤을 같이 보내고……." 난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크게 외쳤다. "그러니까 마나란 말이지. 대자연에 골고루 분포되어있는 기를 뜻하는거야! 아까 테커가 말한데로 주변에 공기는 물론이고 생물과 무생물도 마나를 가지고있어. 니들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라던가 들고있는 칼이라던가 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카웨의 코에서 나오는 코딱지라던가, 저기 앉아서 발톱에 때 파내는 놈의 발톱에 때까지 마나를 가지고 있어." "야! 남이 코딱지를 파던 말던 니가 뭔 상관이야?" 카웨의 항의가 들려왔지만, 난 무시하고 얘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덧붙여 라이레얼이 나를 붙잡고 온몸을 부비부비하는 것 역시 무시하기로 했다. 으윽, 그런데 무시가 안된다. 라이레얼, 자꾸 가슴을 밀착시키면 어쩌자는 거에요? "마법사들이 마법을 쓸려면은 일단 마나가 있어야 되. 그런데 이게 주위에 있는 마나로는 마법을 쓸 수 없거든." "왜?" "주위에있는 마나는 자기 마나가 아니니까. 아까 생물과 무생물 모두 마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잖아. 여기서 무생물은 단순히 마나를 가지고 있을 뿐이야." 난 바닥에 돌을 하나 집어들며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있는 이 돌맹이는 무생물이야. 무생물은 처음에 가진 마나의 양을 늘릴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어. 이 돌맹이를 주먹으로 처서 돌가루로 만든다 해도, 그 가루들이 가진 마나의 양을 합하면 처음 돌맹이가 가졌던 마나의 양과 똑같아. 즉, 물질의 본질이 변한다해도 마나의 양에는 변화가 없는 법이지." 주위의 사람들은 알아듣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테커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지 눈을 반쯤 감고는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난 호흡을 한번 가다듬은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생물은 달라. 생물은 자신이 가진 마나의 양을 변화시킬 수 있어. 니들이 지금 공기를 들어마시는건 마나를 들이마시는 것과 같아. 그리고 숨을 내뱉는 것은 마나를 뱉어내는 것이지. 아까도 말했듯이 공기에도 마나가 포함되어있으니까. 니들이 호흡을 한다고 해서 체내의 마나가 늘어나는건 아냐. 물론 흡기시에는 잠깐 늘어나긴 하지만, 배기시에 다시 빠져나가거든, 혹시 공기를 들이마신 다음에 숨을 멈추면, 마나가 몸에 쌓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을 위해서 말하는데, 그건 한마디로 병신 삽질하는 짓이다. 물론 우리 중에는 그런 멍청한 놈은 없겠지만 말이야." "크억! "켁켁!"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몇놈이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이 놈들은 아까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호흡을 멈췄다가, 그 다음 내용을 듣고 사레들린 놈들이다. 진짜 무식한 놈들이다. 그 중에 카웨가 끼어있었다는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마나는 단순히 호흡으로만 몸을 출입하는게 아니야. 마나가 입으로만 빠져나간다면 온 세상 마법사들이 전부 입에서 마법을 쏘겠다. 니들 입으로 불화살 날리는 마법사 본적있냐? 마나는 입으로 출입하는게 아니라, 온몸을 통해서 출입해. 지금 니들이 누워서 코딱지 파고있는 이 순간에도 주위의 마나는 니들 몸을 들락날락 거리지. 아무튼 마나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 마법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지."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나에게 집중되어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알아듣는 놈들은 반도 안되었다. 아마도 이 놈들은 내 얘기를 듣고 있다는데 의의를 두고있는 것 같았다. 이래 놓구선 나중에 술마실 때, '내가 잘 아는 마법사가 하나있는데, 한번 마법에 대해 배운적이있었지. 마법? 그거 별거아냐.' 라고 말할 것이다. 어쨌든 이해하는 놈들도 몇명 있는 것 같으니 설명이나 계속하자.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나가 있어야 되. 그래서 주변에 있는 마나를 몸속에 축적하는 거지." 그 순간, 카웨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난 손가락으로 카웨를 가리켰다. "말해봐, 학생." "야, 그런데 그거 마나라는 거 몸에 쌓으면 뭐 좋은 거라도 있냐? 마법쓸 때 빼고 말이야. 흠흠, 대자연에 기라고 했으니 몸에 상당히 좋을 것 같은데."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나를 몸에 쌓는다고 해서, 지금 카웨, 저 자식이 생각하는 것 처럼 체력이 좋아진다거나 정력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 "우웅, 그래? 나도 히로가 정력 좋은게 그것 때문인 줄 알았는데." 라이레얼은 제발 가만히 좀 있어줘요. 난 라이레얼 말을 못들은 척 하고 설명을 계속했다. "마나는 공기와 같다고 생각해. 니들은 공기 많이 마시면 몸이 좋아지냐?" 테커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야, 야. 다 알아들었으니까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해." "알았어. 아무튼 마법사는 몸에 마나를 축적해서 마법을 사용하지. 이 마나가 몸속에 축적 될 때는 말이야, 심장을 중심으로 원의 모양으로 축적 되. 그걸 '써클' 이라고 부르지. 그리고 분명이 말해두지만, 구가 아니라 원이다. 써클이 올라갈 때 마다, 원은 하나씩 늘어나. 전에 그려진 원 바깥 쪽에 말이야." "그럼 클레스는 뭐야?" 오오, 테커의 예리한 질문. 난 잠시 생각한 다음, 입을 열었다. "으음, 클래스는 마나와 마법 주문을 포괄해서 칭하는 말이야. 음 마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주문과 구동원리를 모르면 쓸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 마법을 쓰는게 정말 장난 아니게 어렵거든. 일단 마나의 양을 계산해야 되고, 그 다음 좌표 계산에 마나 배치에, 아무튼 니들 머리로는 매직 미사일 하나의 좌표를 계산 하는데도 하룻밤은 꼬빡 새야될걸." 내 말에 누워있던 놈들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놈들이 지들 무식하단 얘기는 잘 알아듣나보다. 하지만 어쩌겠냐? 그게 진실인데. "마법을 쓴다는건 그정도로 어려워. 마법사들이 마법 몇 개 쓰고 나면, 비틀 거리는게 그 때문이지. 니들도 어려운 생각을 하다보면 머리가 아픈 경우가 있었을꺼야." 카웨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난 없는데." 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 그건 니 머리로는 어려운 생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 "하하, 그런가…… 뭐 이 자식아!?" 카웨는 발광을 했고, 주위에 있는 놈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들도 똑같은 주제에 끄덕이기는…… "자, 그럼 어려운 부분은 대충 넘어가기로 하고, 이젠 마법의 구동 원리에 대해 설명하도록하지." 난 숨을 크게 들이마쉬며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마법을 쓴다는 것은 마나를 형상화 시키는 걸 말해.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어, 그래. 도자기 굽는 걸로 비유를 해보자. 니들 도자기 어떻게 만드는 지는 알지?" 전원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가 무식한 니들에게 뭘 바라겠냐? "그럼 도자기가 아니라 흙으로 탑을 쌓는다고 생각해봐. 진짜 탑 말고 한 30cm 정도. 장난으로 만드는거. 몰라? 얘들이 해변가에서 많이 만들잖아. 그거 생각할 수 있겠어?" 전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니들 레벨이다. "음, 그러면 마나를 흙으로 생각하고 마법을 쓴다는 것을 탑을 쌓는다고 생각해봐. 흙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탑이 만들어지는건 아니야. 흙으로 탑을 쌓기 위해서는 손재주가 필요해. 이 손재주가 마법주문과 공식이야. 잘 생각해봐. 처음으로 탑을 쌓는 놈과 10년 동안 밥도 안처먹고 탑 쌓는 짓만 한 놈이 있다고 하자. 누가 더 잘만들겠냐? 당연 10년 동안 밥도 안처먹고 탑쌓은 놈이 잘만들겠지. 이와 마찬가지로 마법도 많이 써본 놈, 즉 숙달된 놈이 훨씬 잘쓰지. 알겠냐?" 전원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그냥 설명을 강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말로 설명을 해주다보니 내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마법이란건 결국은 마나를 형상화 시키는 작업이야. 흙으로는 어떠한 물건이든 만들어낼 수 있어. 처음에는 같은 흙이지만 손으로 몇번 주물럭 거리고 나면, 그릇이 될수도 있고, 도자기가 될수도 있고, 인형이 될 수도 있어. 마법은 이와 같은 이치야. 처음에는 똑같은 마나일 뿐이지만, 주문이라는 형상화 작업을 거치고나면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지. 불이든 물이든 번개든." 이제 앉아있는 놈들은 내 얘기를 듣고있지 않았다. 그나마 테커와 카웨가 제대로 듣고 있고, 다른 놈들은 어퍼져 자고 있었다. 그리고 라이레얼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큰 귀를 반으로 접어 귀를 꼭 막고 있었다. 어려운 얘기들으니 머리가 아파오나 보다.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내 설명은 계속 되었다. 쭈욱∼. "지금 이 바닥에 있는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 수 있을까? 답은 없다야. 이딴 흙으로는 도자기를 만든다는게 불가능해. 이걸로 도자기를 만들면 굽는 순간, 쩍쩍 갈라져. 도자기를 만들려면 입자가 고운 점토나 찰흙이있어야 하지. 점토나 모래나 다 같은 흙이여도 둘 중에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점토야. 보통 흙으로는 도자기를 못만들어. 하지만 반대로 점토로 탑을 쌓는다거나, 소꿉놀이하는 것은 가능하지. 내가 지금 뭘 말하려는지 알아?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마나 역시 똑같은 마나가 아니라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마나의 구분은 써클로 이루어져있어. 예를 들어 내가 파이어 볼을 쓴다고 하자. 파이어 볼은 3클래스 마법이야. 내가 이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최소 3써클 이상의 마나가 필요해. 2써클을 그리는 마나는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절대 파이어 볼을 쓸 수 없지. 반면에 5써클을 그리는 마나로는 파이어 볼을 쓴다는 것이 가능해. 점토로 탑을 만드는게 가능하듯이 말이야. 자, 이제 대충 설명이 끝났다. 야, 테커, 이제 만족하냐?" 테커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역시 테커의 머리로도 내 설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나? 내 딴에는 알기 쉽게 설명해준건데. 짝짝짝짝-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난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한슨이 대단히 감명을 받았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 저 인간 언제 이쪽으로 왔지? 한슨은 박수치던 손바닥을 내리며, 말했다. "훌륭합니다. 마법이란 어려운 학문을 그렇게 쉽게 설명을 하다니. 정말 존경을 금할 길이 없군요." 그래, 니가 뭘 좀 아는구나. 역시 사람은 머리를 쓰는 직종에 종사해야 한다니까. 그래야 두뇌 개발이 되지. 저 바보 놈들은 안 그래도 무식한데 가뜩이나 무식한 직종에 종사하니 머리가 제대로 움직일 리가 있나. 에라이, 무식한 놈들아! "하하, 뭘 좀 아시는군요. 하긴 제가 생각해도 정말 훌륭한 설명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쪽이야 오죽 하시겠습니까, 하하하." 원래 잘난 사람이 잘난체 하면 상당히 재수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겸손하라는건 아니다. 적당한 겸손은 미덕이지만 너무 겸손하면 그것만큼 밥맛이 또 없다. 나야 뭐, 워낙 잘난 놈이기 때문에 조금만 겸손한 척 하면 남들이 욕한다. 잘난 놈 주제에 겸손하기까지 하다고. 그래서 난 내가 잘난 짓을 하면 잘난 척을 한다. 왜냐? 그 이유는 난 너무 잘났기 때문이다. 원래 잘난 놈들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법이다. "흠흠, 아무튼 그건 그렇고, 한가지 궁금한게 있군요." "뭡니까?" "아까 당신이 마법 주문에 대해 설명할 때 말입니다. 아, 일단 이 질문을 먼저 하지요. 마법사들이 마법 주문을 외우는 이유는 무엇이죠?" 난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마나를 형상화 시키기 위해서죠. 하위 클래스의 마법이라면 공식에 대입하는 것 만으로도 마법을 사용한다는게 가능하지만, 상위 클래스 마법은 단순한 공식 만으로는 힘들지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구요. 실제로 입으로 주문을 영창한다면 그냥 마법을 시전할 때보다 3배에서 4배 정도는 빠르게 형상화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머릿속으로만 외고 입밖으로 내지는 않는다면, 이것 역시 형상화 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리지요." 한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음,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운다는 것은 마나의 형상화 작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문을 욀 때는 그때 그때 사용하는 마법과 관련이 깊은 언어를 사용해 주문을 욉니다. 맞습니까?" "예. 공부 좀 하셨나보군요. 정확히 맞습니다. 만약 파이어 볼을 쓰는데 주문이 물에 관련되어있다면 마나의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지요. 이런 경우는 아예 주문을 안외우니만 못한 꼴입니다." "음, 제가 제대로 알고있는 것이 맞군요. 그럼 일단은 계속 말하겠습니다. 중간에 틀린 점이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예." "주문이라는 것은 해당 마법에 대하여 가장 깊게 관련되어있는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방금 당신이 말했듯이 파이어 볼을 쓰려면 불에 관련된 단어들을 나열해 주문을 외어야지요. 예를 들어 '작열하는 화염이여, 그 불길로 내 앞에 있는 적들을 집어 삼켜라' 처럼요. 고대 시절에는 모든 마법사들이 각자의 주문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 주문은 점점 정형화 되었지요. 마법 학교에서는 그 정형화된 주문을 외우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마법사들의 주문은 거의 똑같지요." 음, 그건 몰랐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그렇겠죠. 정형화된 주문을 외운다면 처음에는 마법 성장이 빠르겠지요. 하지만 후에는 성장 속도가 둔화됩니다. 결국은 그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실제로 파이어 애로우나 플레임 애로우나 똑같은 마법입니다. 이 시동어를 말하면 같은 마법이 나가지요. 하지만 이 마법을 파이어 애로우라고 외운 사람이 플레임 애로우라는 시동어를 말하면 마법은 나가지 않습니다. 머릿속의 이미지와 연결이 안되니까요. 결국은 처음에 머릿속에 박혀진 대로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마법은 어디까지나 창조적인 학문입니다. 정형화된 식으로만 익힌다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그런 일이 생깁니다." 한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경을 고쳐썼다. "그럼 이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테커씨의 팔을 고쳐주었을 때, 말입니다." "예." "그때 외운 주문은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예?" "당신이 큐어 크리티컬 운즈 마법을 쓸 때, 말입니다. 그때 당신이 외운 주문은 마나의 형상화하고는 거리가 먼 주문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런 주문은 마법을 쓰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위 마법사라 하더라도 그런 주문으로는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했습니다. 그것도 완벽하게요.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그, 그건……."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릴 수 밖에 없었다. 한슨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웃기지도 않는 주문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과거에 단 한명 밖에 없었고, 지금도 한명 뿐이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나. 이 늙은이는 9클래스 마스터다. 9클래스 마스터는 주문의 제약 쯤은 가볍게 넘어버린다. 심지어는 시동어라는 개념 조차도 쓸데 없는 것이다. 나는 9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써클은 5까지가 한계이지만 그외의 마법지식은 9클래스와 같다. 나에게 있어서 주문이란 것은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일 뿐,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는 대답을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어떠한 말도 할수 없었다. 한슨의 마법 지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아마 거짓으로 둘러덴다면 즉시 알아챌 것이다. "대답하기 곤란하신가 보군요. 그럼 다른 질문을 하지요." 난 한슨의 말에 긴장했다. 누워있는 사람들 중 반정도는 우리 쪽을 처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한슨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보는 듯한 그런 기분나쁜 눈동자다. 난 한슨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난 한슨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무슨 뜻이지요?" 한슨은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기분 변화 없이 얼굴 근육만을 움직이는 웃음을. "당신이 지금까지 보인 능력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제 상식으로 이해가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이 인간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지? 한슨은 몇걸음 움직여 내 옆쪽에 붙었다. 그리고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테커 씨의 팔을 치유할 때 쓴 마법. 아마 큐어 크리티컬 운즈였죠. 그건 제가 알기로 5클래스에 해당하는 마법입니다. 제말이 틀렸나요?" 이 자식.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어. 한슨은 곁눈질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나이에 5클래스의 마법을 쓴다라……, 크큭, 솔직히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절대 밑지 않았을 것 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신기한 것은 당신이 도(刀)를 쓴다는 점입니다. 마법사는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해 육박전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당신같은 고위마법사라면은 더더욱 그렇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런것에 제약을 받지 않는 듯 싶군요. 아니 그정도가 아니군요. 당신은 모르셨겠지만 산적들과 싸울 당시 전 당신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보지도 않고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고, 누가 어떤식으로 공격을 할 것인지 이미 알고있다는듯이 적이 공격하기전에 한발 앞서 움직이더군요." 상당히 동요될만한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감정은 이상하리 만치 가라앉았다. 한슨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었다. 한슨은 얼굴을 약간 일그러뜨리는 미소를 지었다. "대체 어떻게 된거지요?" 어느새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있었다. 아까의 한슨과 마찮가지로 기분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안면근육의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되 물었다. "뭘 말입니까?" 한슨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말을 꺼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자신을 숨겼습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정도의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구요. 저기 앉아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당신을 평범한 마법사라고 믿고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마법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있었다면 그렇지 못했겠지요. 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저희와 접촉을 한겁니까?"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해는 산 중턱에 걸려 천천히 함몰되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은 언뜻보면 아름답게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핏빛을 연상시킬 뿐이었다. '피로 물든 하늘.' 모든 느낌이 한번에 몸에 다가왔다. 감각이 다시 극도로 예민해지고 있는 것이다. '죽어간 사람들의 비명.'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담배 한가치를 꺼냈다. '비릿한 피맛.'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타를 꺼냈다. 그리고 담배에 갖다대고 불을 켰다. 내 손은 라이타의 불과 노을에 젖어들면서 붉은 색을 띄었다. '피에 젖은 손.' 난 애써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들을 지웠다. 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한슨에게 말했다. "말은 다 끝나신 겁니까?" "……." 난 고개를 돌려 한슨을 보았다. 한슨도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나를 마주보았다. 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묻지요. 당신은 누굽니까?" "……?" 한슨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난 목구멍을 넘어들어가는 텁텁한 연기의 맛을 느끼며 눈을 빛냈다. "당신……, 일게 물자수송 책임자 치고는 상당히 박학다식하군요. 당신의 능력으로 겨우 이런 일에 종사하고 있다니……, 만약 제가 직접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비록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난 한슨이 상당히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글쎄요……. 과연 별게 아닐까요? 마법사도 아니면서 마법의 클래스까지 외우고있을 정도면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한슨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그 인상은 이내 웃음으로 바뀌었다. 한슨은 가라앉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역시 보통이 아니군요. 아무래도 당신과는 따로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군요." 한슨은 뒤로 물러나, 나에게서 떨어졌다. 다른 놈들은 눈을 멀뚱멀뚱하니 뜨고는 우리를 처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귓속말로 나누었던 얘기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슨은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자자, 충분히 쉰 것 같군요! 그럼 이제 야영준비를 서두릅시다. 이제 곧 해가 떨어질껍니다!" 한슨의 말에 누워있던 놈들은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어기적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라이레얼은 어느새 일어나서 양팔로 내 목을 휘감고 있었다. "흐음, 히로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어?" 라이레얼의 레몬빛 머리칼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킁킁. 냄새 좋은데. "다 들으셨어요?" "응. 엘프는 귀가 좋잖아." 성격도 좋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말하지 마세요." "뭘?" "아까 한슨이랑 말한거요." "왜?" "그냥요." "우웅, 싫은데……." "부탁드릴께요." "으음, 좋아." "고마워요." "뭐얼……." 라이레얼은 나를 더 강하게 끌어 안았다. 으음, 왠지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난 상체 부분에 힘을 빼고 라이레얼에게 기댔다. "그런데 히로가 아까 한 말은 뭐야?" 난 대답을 하는 대신, 머리를 한번 갸웃거렸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내 머리를 한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히로가 한슨에게 한 말 말이야. 한슨도 뭔가 숨기는게 있는거야?" "으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히로가 모르면 누가 알아?" "정말이에요. 하지만 뭔가가 있는건 확실해요." "어떻게 알아?" "일단은 느낌이 그래요. 그리고 아는게 상당히 많더군요. 뭔가 수상하지 않아요? 마법도 못하면서 마법 클래스까지 줄줄 외우고 있다니. 제가 보기엔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 같은데." "으음, 듣고보니 그렇네." "맞아요. 거기다가 고대 시절부터 존재했다는 청안백우조의 정체도 알고있었잖아요.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으음, 그것도 그렇네." 난 내 몸에 맞닿아있는 라이레얼의 촉감을 느끼며 생각에 빠져 들었다. 으음, 정말 부드럽단 말이야.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라이레얼은 품은 왜이리도 따뜻한 걸까? 난 온몸에 찌릿찌릿하게 느껴지는 라이레얼의 촉감을 더욱 강하게 만끽하기 위해, 살짝 눈을 감았다. 그나저나 한슨이란 작자 정말 수상해. 대체 뭐하는 놈일까? 흐음, 라이코스가 청안백우조라는 것을 알고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그런데 라이코스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설마 매탕이 되서 라이레얼 입속으로 들어가진 않았겠지? 으음, 라이코스……? 라이코스라……? 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다. 없어. 난 나를 감싸안고있던 라이레얼의 팔을 밀친 다음, 전후좌우, 동서남북, 사방팔방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역시 없었다. 그렇다는건 설마……? "왜 그래, 히로? 적이라도 나타났어?" "라이레얼." "왜?" "라이코스 어디갔어요?" "응?" "라이코스 말이에요. 제 매. 청안백우조." 순간, 라이레얼은 뜨끔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라이레얼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라이레얼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호호, 그 매 말이지? 그거 날아갔어. 히로가 자고있는 동안에 저 멀리 날아갔어. 정말 나쁜 새다. 그치? 어쩜 은혜도 모르고 그냥 날아갈 수 있을까? 호호, 히로, 그 매는 잊어버려. 그런 싸가지 없는 매는 빨리 잊어버리는게 정신 건강에 좋아. 아! 대신 내가 다른 매 잡아줄게. 내가 잡은 다음, 두 날개를 똑 분질러 아무대도 못날라가게 해줄게. 호호호." 라이레얼의 저 표정. 저 어색한 말투. 조리가 맞지 않는 말.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라이코스는……. "무, 무슨짓을 한거에요?" "응? 무슨 짓이라니? 나, 난 아무짓도 않했어. 정말 그냥 날아간거야. 정말이야." 난 라이레얼을 노려보며, 머릿속으로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가설 : 라이코스는 라이레얼의 뱃속에 있을 것이다. 근거1 : 청안백우조는 정력과 미용에 좋다고 한다. 근거2 : 라이레얼은 정력에 좋은 음식이라면 물불을 안가린다. 근거3 : 라이레얼은 그 동안 몇번이고 라이코스를 살인, 방화, 섭취 하려고 했었다. 근거4 : 주위의 놈들도 똑같은 놈들이다. 라이레얼이 라이코스를 잡아먹는다 해도, 말릴 놈들은 결코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절대 없다. 근거5 : 라이레얼의 행동을 막아 줄, 즉 라이코스를 지켜줄 유일한 인물은 히로는 잠을 자고 있었다. 결론1 : 라이레얼은 라이코스를 잡아 먹었다. 결론2 : 라이코스는 라이레얼에게 잡아 먹혔다. 결론3 : 라이코스는 죽었다. 결론4 : 라이레얼은 정력이 강해졌다. 마지막 결론4는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군. 하지만 라이코스는……?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응? 내가 뭘?" 난 라이레얼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라이레얼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있어요!? 전 라이레얼을 믿었는데." 라이레얼은 당황하며 말했다. "무, 무슨 소리야, 히로?" "다 알아요!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저기, 히로. 난 하프엘픈데……." "……." 잠깐, 얼굴에 한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하, 하프엘프든 어쨌든!" "아야, 이거 좀 놔, 히로. 아프단 말이야." 라이레얼은 정말로 아픈지 고개를 돌리며 살짝 인상을 썼다. 앗! 흥분하다 보니 너무 세게 쥐었나보다. 난 라이레얼의 어깨에서 황급히 손을 땟다. "미안해요. 어깨 괜찮아요?" "으응, 괜찮아. 히로." 라이레얼은 방긋 웃었다. 난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흐음, 라이레얼의 웃음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정말 너무 예쁜 미소야. ……. 앗차! 이게 아니지. 난 황급히 화난 분위기를 잡으며, 다시 소리질렀다. "너무해요, 라이레얼! 전 정말 라이레얼에게 실망했어요! 그래도 전 라이레얼을 믿었는데……." "무, 무슨 소리야!" "라이레얼이 라이코스 먹었죠!? 먹었죠!?" "아, 아니야. 난 정말 아니야." "거짓말!" 라이레얼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저, 정말이야." "이 짐승!" 순간, 라이레얼은 화를 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히로? 내가 짐승이라니?" 이런, 내가 너무 심한 말을했나? 하지만 라이코스의 죽음 때문에, 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당연 라이레얼의 화난 얼굴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라이레얼은 짐승이에요! 짐승! 짐승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불쌍한 매를 잡아먹을 수가 있겠어요!?" 솔직히 내가 지금 화난 이유는 단순히 라이코스가 죽었기 때문만이 아니였다. 라이코스는 기껏해 봐야 조금 특이한 매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라이코스는 매 이상의 존재였다. 라이코스는……, 라이코스는……, 내 비상식량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라이레얼 혼자 맛있게 꿀꺽하다니. 이런 비극적인 일이 어찌하여 일어났단 말인가! 아아, 하늘도 무심하셔라. "난 정말 안먹었어. 믿어줘, 히로." 라이레얼은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니, 눈물만이 아니였다. 라이레얼은 큰 귀를 축 늘어뜨리고,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며, 최대한으로 슬퍼보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정말로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흑흑, 정말이야, 히로. 믿어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은 더 이상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라이레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흐느꼈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내가 라이레얼을 핍박하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연출된 행동이다. 난 확신할 수 있다. 한두번 당해본 것이 아니기에. 난 라이레얼의 여린 어깨를 살짝 감싸안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안 먹었어요?" "으응. 믿어줘, 히로, 흐윽." 라이레얼은 손가락을 살짝 벌려 그 사이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다시 우는 척 했다. 걸렸어요, 라이레얼. "으아앙, 그 표정은 뭐야, 히로? 내 말을 못믿는거야?" 라이레얼의 말을 믿느니, 소금항아리에 곰팡이 쓸었다는 말을 믿고 말지. "으아앙!" "미, 믿어요! 믿을께요." 라이레얼이 크게 울음을 터트리자, 난 깜짝놀라 라이레얼을 껴안으며 달래주었다. "믿을께요. 믿을께요. 무조건 믿을께요!" "으아앙, 히로!" 라이레얼은 나를 껴안은 다음, 내 가슴에 얼굴이 비비며 울기 시작했다. 라이레얼이 이 행동을 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두가지다. 첫째는 고개를 숙이기 때문에 표정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눈물과 콧물을 전부 내 옷에다가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따 갈아입어야겠다. 토닥토닥. "흑흑흑, 너무해, 히로. 내 말을 그렇게 못 믿어?" "아니에요, 믿어요." 믿긴 개뿔이……. 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코 라이레얼을 믿고 있지는 않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라이레얼의 말을 믿느니 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을 믿고 만다. "흐흑, 뭐야 그 눈빛은? 흑흑, 날 못믿겠다는거야?" 당연하죠. "제 눈빛이 어떻다고 그러세요? 전 무조건 라이레얼을 믿어요." 아, 내가 과연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만 하는 걸까? 토닥토닥. "흑흑, 정말 고마워, 히로. 흐끅, 나…… 정말 히로를 사랑해." "……예." 저도 라이레얼을 사랑하고 있…… 을 까요? 난 한동안 라이레얼을 어르고 달래주었다. 라이레얼의 울음이 조금 잦아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라이레얼." "……응?" 라이레얼은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햇살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무서운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순식간에 울다 웃다 하다니……. "어떻게 ……어요?" "응? 뭐가?" 난 라이레얼의 레몬빛 머리칼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구워 먹었어요? 끓여 먹었어요?" 순간, 라이레얼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히로!!!" 내가 라이레얼에게 말을 걸려는 찰나, 카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 년놈들아! 니들은 왜 일 안해!?" 후훗, 어리석은 녀석. 감히 이 몸이 일을 하길 바라냐? 잠깐, 저 녀석이라면 혹시 라이코스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있지 않을까? "야! 너 내 매 못 봤냐? 흰색 매." 카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말을 꺼냈다. "아, 그거 말이지. 그거 라이레얼이……." 퍽-! 어디선가 돌맹이가 날아와 카웨의 이마를 맞췄다. 카웨는 뒤로 발라당 엎어졌고, 난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며 범인을 찾아보았다. 날아온 각도와 거리로 봐서는……. "라이레얼!" 난 라이레얼을 쏘아보았다. 라이레얼은 마치 자기가 않던졌다고 주장이라도 하듯이, 머언 하늘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어! 카웨가 왜 쓰러져있어?" 거기다가 마치 몰랐다는 듯이, 나에게 묻기까지 했다. 정말 너무 가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카웨는 이마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 바닥에 없어져 있었다. 포즈를 보아하니 완전히 개구리가 복상사한 포즈였다. 난 카웨가 죽었나 싶어, 발로 힘껏 걷어차 보았다. 퍽-! "으악!" 카웨는 벌떡 일어나 한손으로는 이마를 지혈하며, 한손으로는 라이레얼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년이야! 저 년이 그 매를……." 퍽-! 또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 카웨를 맞췄다. "호호호, 너 그게 무슨 헛소리니? 호호, 히로. 쟤 말은 신경쓰지마. 호호호." "라이레얼은 가만히 좀 있어요! 카웨. 계속 말해." 돌이 코에 맞았는지, 카웨는 쌍코피를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카웨는 벌떡 일어났다. 이마와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괴기스러워 보였다. "저 년이 너 자고 있을 때, 그 매를 먹으려 했어. 빵으로 매를 살살 꼬드껴가지고, 잡은 다음에, 털을 몽땅 뽑고 펄펄 끓는 물 속에 집어넣으려 했어. 그때 그 매가 얼마나 처절하게 울부짖었는지, 진짜 보는 내가 다 가슴이 아프더라." "닥쳐!" 퍽-! 세 번째 돌맹이가 날아와 카웨를 강타했다. 하지만 우리의 카웨는 꿋꿋하게도 쓰러지지 않았다. "아무튼 탕에 들어가기 일보직전에 그 매가 탈출했어. 깃털도 없는 날개를 퍼덕여, 숲속으로 날라갔지. 그런데도 저 년은 어떻게든 그걸 먹어보겠다고, 도망치는 매한테 활까지 쐈어. 그때 숲속에서 '꾸웩' 소리가 들려 온 걸로 봐선 아무 죽었을 꺼야. 진짜 그 매 살아있다면, 기적이다. 기적!" 퍽-! "닥쳐!" "내가 왜 닥쳐!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래서 닥치라라는 거야! 누가 너보고 사실대로 말하래?" 퍽퍽퍽- "으악!" "그만 둬요!" "이거 놔, 히로! 이 놈은 좀 맞아야 돼!" 라이레얼은 무자비하게 카웨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라이레얼을 말리는데 저쪽 어디선가 테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물 끓인 놈이 저 놈이야!" "어?" "라이레얼이 그 매 잡아먹으려 했을 때, 저 녀석이 좋아라고 물 끓였어." "……." 그랬단 말인가. 카웨 니가 감히……. "라이레얼." "응? 왜, 히로?" "계속 패요." "알았어." 라이레얼은 방긋 웃은 다음, 카웨를 바닥에 눞혀 놓고 지근지근 밟았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설 : 라이코스는 살아있다. 근거1 : 라이레얼이 먹지 않았다. 근거2 : 라이코스는 영물이다. 근거3 : 무협지나 판타지를 보면 영물은 쉽게 죽지 않는다. 근거4 :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이다. 결론 : 라이코스는 살아있다. 정말 완벽한 연역적 추론 방법이다. 혹시 난 천재가 아닐까? 난 라이코스가 살아있다는 확실한 결론을 수립한 다음, 두 손을 입에 모아 소리쳤다. "라이코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난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쳤다. "라이코스!!" 역시 반응이 없었다. 아니, 반응이 있긴 했다.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날 처다본 것. 그들의 눈빛은 나를 미친놈으로 매도하고 있었지만, 난 나의 사랑하는 비상식량(?)을 찾기 위해 다시 한번 소리쳤다. "라이코스!!!" 난 이젠 되었다 싶어, 라이코스가 날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1분이 지나도, 2분이 지나도, 3분이 지나도 라이코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흑흑, 혹시 나의 비상식량이 죽은게 아닐까? 맞아, 라이레얼은 활질을 잘하니까 맞추었을 지도……. 흑흑, 불쌍한 라이코스야. 평생 연애 한번 못해보고 왕따로 살다가 이제야 좋은 주인을 맞났는데, 이렇게 죽어버리면 어떡하니? "히로, 울지마." 라이레얼은 따뜻하게도 슬퍼하는 나를 감싸 안아주었다. "흑흑, 라이코스가 불쌍해요." 난 울면서 라이레얼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라이레얼은 내 등을 토닥여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히로. 그런 싸가지 없는 매는 빨리 잊어버려. 히로한테는 내가 있잖아." "흑흑. 그 싸가지 없는 매를 죽인 라이레얼은 대체 뭐에요?" "응? 나? 난 세상에서 제일 예쁜 레이디 라이레얼이지." "흑흑." 내가 말을 말지. 난 라이레얼 품에 안긴 채,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 버린 라이코스를 추모했다. 그런데 그 순간, 눈물 때문에 희미해진 내 눈동자에 무언가가 비쳤다. 그것은 한 마리의 새였다. 온 몸이 새하얗고 눈동자는 파란색인. 라이레얼이 외쳤다. "앗! 정력제다!" 내가 외쳤다. "앗! 라이코스다!" 라이코스는 숲 한쪽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당했으면 날지도 못할까. 난 라이레얼을 밀치고 뛰어가 라이코스를 품에 안았다. 라이코스는 내 품에 안겨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너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응. 나 살아있었어. 불쌍한 것.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나 정말 죽을뻔 했어. 흑흑, 저 여자 무서워. 그래. 나도 저 여자 무섭단다.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말렴. 내가 곁에 있잖니. -흑흑, 정말 고마워. 고맙긴. 내 비상식량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거지. -비상식량……? (앗차! 말이 헛나왔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었구나, 하하하. 난 그것도 모르고 날 데리고 다니다가 잡아먹으려는 줄로만 알았잖아. 하하, 니가 그럴 리가 없지. 안 그래? (이 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매 주제에 눈치는 빨라가지고.) 하하하, 물론이지. 우린 친군데 그럴 리가 있겠니? -훌쩍, 정말 고마워. 고맙긴, 뭘.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당연하지. 난 라이코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라이레얼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어느새 침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호호, 너 살아있었구나. 잠깐 누나한테 와보겠니? 누나가 예뻐해줄게." 라이레얼은 손을 쭉 내밀었다. 세상에, 어쩜 인간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라이코스한테 할 짓, 못할 짓, 다 해놓고 다시 손을 내미는 저 뻔뻔함이라니. 앗차! 라이레얼은 하프엘프지. 혹시 엘프들의 성격이 전부 이런 게 아닐까? 난 라이코스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안돼요! 라이레얼은 양심도 없어요? 라이코스한테 그렇게 몹쓸 짓을 해놓고는 어떻게 또 달라고 할 수가 있어요." 내 말에 라이레얼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수습하며 말했다. "흐음, 히로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뭐, 할 수 없지." 어라? 웬일로 이렇게 포기가 빠르다냐? 으음, 라이레얼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오호, 과연 영물이군요. 그 처절한 상황을 겪고도 다시 주인 곁으로 돌아오다니……. 으음, 그나저나 살아있다는 게 더 신기하군요." 한슨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한슨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라이코스의 여기저기를 관찰하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오호, 동물학자님이시군요." 내 말에 한슨은 안경을 고쳐쓰며, 웃었다. "하하, 동물학자라니요? 전, 상단의 일개 수송 지휘자 일 뿐입니다." 난 한슨에게 얼굴을 내밀며, 조소를 지었다. "그럼 동물학자도 아니면서 고대의 영물이라는 라이코스, 아니 청안백우조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거죠? 당신은 정말 똑똑하군요." 한슨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청안백우조는 상당히 유명한 새입니다. 저 말고도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요?" 난 톤을 조금 높혀서 되물었다. 그러자 한슨은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청안백우조는 아이리스 가문의 문장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리스의 국기(國旗)지요. 한 나라를 나타내는 문장인데, 제가 그걸 모를리 있겠습니까." "아이리스의…… 국기요?" 한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상하는 청안백우조가 아이리스의 문장입니다. 모르셨습니까?" "제가 그걸 알 리가 없잖습니까." "흐음,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문장이면 상당히 유명할텐데……." "상당히가 아니라 엄청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거죠? 라이레얼 알고 있었어요?" 라이레얼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당연하지. 내가 모를리가 있겠어. 호호, 나 같이 예쁜 여자는 모르는게 없단다." 표정을 보아하니, 몰랐던 것이 틀림없다. 난 확신할 수 있다. 난 라이레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봐요. 모르고 있잖아요." 라이레얼은 소리를 빽 질렀다. "알고 있었다니까!!" 성격 나온다. 성격 나와. "알았어요. 알고 있었다고, 해둘께요." "해두는게 아니라, 진짜 알고 있었어!" "라이레얼, 아이리스 국기, 본 적이나 있어요?" "당연하지!" "그럼 그거 바탕이 무슨 색이에요?" "바탕……. 호호, 글쎄에∼. 본지 하도 오래되서 기억이 잘 안 난다. 호호호."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휴우∼." 그러자 라이레얼은 내 목을 움켜쥐고 흔들며 외쳤다. "뭐야! 그 제스쳐는!!!" "켁켁, 이것 좀 놔요!" 한슨은 잠시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또 모르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기 계신 분들 중 대부분이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말은 좋지만, 해석을 하면 이렇다. '똑똑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무식한 사람들은 모르고 있더군요.' 으음,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이 무식한 놈들에게 뭘 기대하기는 무리인 것 같다. 하지만 난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용병들에게 외쳤다. "야! 니들 중 아이리스 국기 본 사람 손들어 봐." 20명 거의 다가 손을 들었다. 당연 옆에 있는 라이레얼도 손을 들었다. 난 다시 물었다. "그럼 거기에 그려진 그림이 뭔지 아는 사람?" "하! 너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카웨였다. 카웨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거 날아오르는 새 그림 아냐? 맞지?" 어! 저 놈이 아나 보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너 그 새가 뭔지 알아?" 카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야! 명색이 요리사인 내가 그것도 모르겠냐? 그거 비둘기 잖아. 흰색 비둘기? 맞지?" "……." 으이그, 내가 미쳤지. 저딴 놈한테 답을 기대하다니……. 퍽-! 순간, 테커가 카웨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야, 이 미친놈아! 그게 왜 비둘기야!" "왜 쳐!? 그게 비둘기가 아니면 뭐야!" "그건 말이지……." 오오, 테커! 그래도 역시 니가 다른 놈들 보단 좀 낳구나. "참새야. 흰색 참새." "……." "어! 그거 참새였냐? 난 닭인 줄 알았는데." "야! 그거 독수리아니였어?" "그게 왜 독수리야? 그거 기러기야, 임마!" "이 자식이 어디서 개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어? 너 기러기 본적이나 있어? 그건 페리카나야, 임마! 그 흰색 털 보면 모르겠냐?" "닥쳐! 그건 거위야, 거위!" "이게 어디서 거위같은 소리하고 있어. 그건 오리야!" "오리나 거위나 그게 그거지." "칫! 멍청한 놈들. 그렇게 생긴 새는 타조라고 부르는거야. 타조! 내가 확실하게 알어. 아이리스의 국기에 그려진 그림은 분명 날아오르는 타조의 모습이야." "야! 이 바보 자식아! 타조는 못 날아!" "하, 웃기고 있네! 세상에 못 나는 새가 어딨냐? 새가 못 날면 그게 새냐?" "그럼 넌 닭이 나는 거 봤냐!?" "어, 듣고 보니 그렇네." "야야야! 조용히 좀 해봐!!" 순간,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어? 저 놈이 누구였더라, 예전에 본 기억이 나는데……. 아! 맞다. 카젠이었지. 전에 불침번 설 때, 함께 요루드와 베네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은. 요루드……. 젠장,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군. 카젠은 주위를 조용히 시킨 다음, 말했다. "야! 아이리스 국기에 그려진 그림이라면, 날아오른 흰색 새의 그림 맞지?" 난 한슨을 보았다. 한슨은 나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카젠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하, 역시 그렇군. 니들이 그 새가 타조니, 거위니 하지만, 절대 아니야. 난 예전에 그 그림과 똑같이 생긴 새를 본적이 있어. 아니, 얼마 전에도 봤어. 진짜 그 깃발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아. 모습은 물론이고 깃털의 색, 심지어는 눈깔의 색까지." 카젠은 거기까지 말하고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손 위에 있는 라이코스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자식 제법 똑똑한데. 니가 드디어 아이리스 국기에 그려진 그림이 지금 내 손 위에 있는 이 매라는 것을 알아챘구나. 나는 카젠에게 씩 웃어보였다. 카젠은 내 웃음을 받은 다음, 용병들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그 새는 까마귀야!!!" "……." 진짜, 할 말이 없다. "야! 니들 왜 그러고 있어? 내가 정답을 말했으니, 박수라도 쳐줘야 되는 거 아냐. 빨리 박수 안쳐?" "에라, 이 자식아! 죽어라, 죽어!" 용병들은 일제히 카젠을 향해 돌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다시 강력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새는 닭이라니까!" "웃기지마 비둘기야!" "독수리!" "페리카나!" "까치나 까마귀나!" "그건 뻐꾸기야!" "닥쳐! 니들 다 죽을래!? 누가 뭐래도 그건 타조야!!" "이 병신아, 타조는 못 난다니까!" "내가 왜 병신이야? 병신아!"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그건 거위야, 거위!" "이게 꼭 지 같은 소리만 하고 있어." "죽을래!!?" "너나 죽어, 새꺄!" 퍽-! "어, 이게 쳤어? 죽어, 죽어!!!" 퍽-! "으악!" "좋아, 니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힘으로라도 타조라는 것을 증명해주지." "흥, 내가 니들을 다 때려 눕히고 그게 비둘기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시켜주겠어!" "좋아! 떠!" 퍽- "죽어!" 퍽- "죽여!" 퍽- "싸워!" 퍽- "덤벼!" 퍽- "으악!" 퍽- "꾸웩!" 퍽- "끄윽!" 20명의 용병들은 주변의 돌이나 나무를 집어 들고 피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놈은 모닥불에서 불이 붙은 장작을 빼내 휘두르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무식하게 싸우다 서로가 지쳐갈 때 쯤, 한 놈이 크게 외쳤다. "잠깐, 그거 혹시 앵무새 아니야?" 그 순간, 거짓말처럼 싸움이 멈췄다. 용병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손에 든 무기를 떨어트렸다. "맞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 바로 그거야! 앵무새! 나도 사실 앵무새라고 생각했었어!" "하하, 그렇구나. 그래. 맞아. 앵무새야, 앵무새." "아하하하, 앵무새였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그래. 앵무새라니까, 앵무새. 하하하." "아∼. 앵무새!" "그래. 앵무새!" "하하하하." 용병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앵무새를 복창했다. "앵무새라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던 20명의 용병들은, 내 모습을 보고는 동시에 소리쳤다. "그 제스처는 뭐야, 이 자식아!!!" 난 그들을 무시하며 한슨에게 말했다. "저 무식한 놈들은, 내버려 두고 우리끼리 얘기하죠." "너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거냐!!!" 난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시끄러. 난 무식한 놈들과는 얘기 안해." "뭐야!? 용병들은 어깨동무한 팔에 힘을 주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나를 갈구고 있었다. 그래, 실컷 갈궈봐라. 니들이 갈궈봤자지. "야, 이 무식한 놈들아! 세상에 흰색 앵무새도 있냐?" 내 말에 용병들은 전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 듣고보니 그렇네." "야, 그런데 앵무새는 대체 어떻게 생겼냐?" "어, 너도 몰랐냐? 난 니가 앵무새라길레 그런 줄 알았지." "아니, 나도 옆에 있는 놈이 그렇다고 하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아. 역시나 이 무식한 놈들은 앵무새가 무슨 새인지도 모르면서, 한 놈이 그렇게 말하니까 죽어라고 복창한게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군중심리의 무서움이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옆에 사람들이 맞다고 우기면, 맞는 걸로 착각하게 된다. 설사 아니라는 확신이 있더라도 절대 말하지 못한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소신있게 NO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은 집단 구타(다구리) 당한다. 모두가 NO라고 말할 때, 당당하게 YES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은 집단 따돌림(왕따) 당한다. -왈딱 CF에서 발췌-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대체 어떤 새끼가 앵무새 이름 꺼냈어!?" "너 잖아, 새꺄!" "나 아냐, 임마. 나도 옆에 놈이 그러길래 따라한거야. 맞아, 이 놈이었어." "웃기는 소리 하지마! 이 앵무새 같은 자식아!" "앵무새? 너 앵무새가 어떤 새인지나 알어!?" "이 자식이 누굴 바보로 아나? 앵무새는 앵무, 앵무 하고 우는 새 아니야, 임마!" "이게 어디서 앵무새같은 소리하고 있어!" "어! 잘하면 사람 치겠다. 쳐봐! 쳐봐!!" 퍽-! "어쭈, 쳤어!" "니가 치래매." 퍽-! "으아아." "좋아. 다 죽어라, 이 무식한 놈들아!" "너나 죽어, 짜샤!" 단순, 무식, 난폭의 대명사인 이들은 서로의 무기를 빼들고 다시 피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저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머리 나빠질라. "정말 무식한 놈들이다. 아이리스 국기에 그려진 새는 여기에 이 맛있어 보이는, 아니, 멋있어 보이는 라이코슨데. 그치, 히로?" 진짜 뻔뻔하다. 아까 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무도 라이레얼은 지금 저기서 얘들을 때려눕히며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그 새는 닭둘기야!' 아! 안 봐도 비디오야. 너무나도 선명한 영상이다.(여기서 닭둘기란, 너무 많이 처먹어서 날지 못하게 된 비둘기를 일컫는 말이다.) "어라? 왜 대답이 없어?" 난 라이레얼을 바라보았다. 라이레얼은 눈빛을 반짝이며, 내가 '예' 라고 대답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라이레얼의 저 예쁘고 귀여운 얼굴을 보니 도저히 말 할 용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대답 대신에.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내 목을 움켜잡고 소리쳤다. "뭐야, 그 한숨의 의미는!!?" "켁켁, 별 뜻 없었어요." "웃기는 소리! 요즘 태도가 아주 불량해, 히로! 자꾸 이러면 재미없어! 알았어?" 성격 나온다. 성격 나와. 이건, 완전히 깡패잖아. "켁켁, 잘못했어요, 라이레얼." 용서를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레얼은 내 목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면서, 더욱 세게 흔들었다. "정말 반성하기는 한거야!?" "켁켁, 물론입니다, 누님! 그, 그러니까 이, 이것 좀……." 나는 혀를 길게 빼 문 채, 필사적으로 내 목을 가리켰다. 어느새 팔마저 푸르죽죽해지고 있었다. 제발, 살려줘요, 라이레얼 누님! 라이레얼은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곧 황급히 놀라며 손을 뗐다. "어머. 괜찮아, 히로?" "하아∼ 하아∼. 라이레얼이 보기에는 괜찮아 보여요?" 라이레얼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전혀 안 괜찮아 보여." "……." "우웅, 미안해, 히로." 라이레얼은 나를 살며시 껴안았다. "숨쉬기 많이 힘들지? 걱정하지마, 이 누나가 인공호흡해줄게." "예? 인공호흡이요?" 안 돼! 나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라이레얼은 어느새 입술을 겹쳐왔다. "우, 웁." 라이레엘은 내 등 뒤로 손을 깍지끼고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고는, 입 안에서 능숙하게 혀를 놀렸다. 아~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이, 이건 진짜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야. 난 몸에 힘을 쭉 빼고 라이레얼에게 몸을 맡겼다. 라이레얼은 두 손으로 나의 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계속 내 입술을 헤집었다. 죽어도 좋아. 잠시 후, 라이레얼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누구 것인지 모를 한 가닥의 침이 나와 라이레얼의 입술 사이로 길게 늘어졌다. 라이레얼은 그 침을 입 안으로 빨아들이고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좀 진정이 돼?" 아, 아니요. 절대 진정이 안 돼요. 실제로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라이레얼 누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라, 라이레얼……." "히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의 몸을 살짝 껴안았다. 이 포옹신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질리지가 않는다. 아∼ 코 끝을 스치는 향긋한 라이레얼의 땀내음. 사랑해요, 라이레얼. 난 한참을 라이레얼의 향기에 취해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싸우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용병들은 어느새 싸움을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나와 라이레얼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 죽인다. 저런게 딥키스인가……?" "마, 맞아. 아마도 그럴꺼야." "우와아∼." 용병들은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이레얼은 소리를 빽 질렀다. "뭘 봐!? 이 무식한 것들아!! Part 4. 나는 떠나야 해 뚝- 난 나뭇가지를 손을 꺽어 모닥불 안에 던져 넣었다. 모닥불은 잔가지와 낙엽만으로 작게 불타올랐다. 밤이 되서 기온이 내려가기는 했지만, 약간 서늘한 정도였기에 불을 크게 만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전부 자고 있었다. 사흘 동안이나 잠을 잤기에, 한동안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난 오늘 밤 내내 혼자서 불침번을 서기로 자청했다. "후우∼." 난 내 뱉은 담배 연기는 도너츠 모양으로 공중에 퍼져나갔다. 으음, 정말 완벽한 도너츠다. 난 이걸 완성하기까지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다. 가끔씩은 찜빵이 나오기도 하고 어쩔 때는 붕어빵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은 도너츠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역시 목표를 향해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아∼, 난 정말 담배를 피면서, 많은 인생의 진리를 깨우친다. "담배 인삼 공사 만세! 만세!! 만세!!!" 난 만세 삼창을 외친 다음,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만약 깨어났으면 엄청 쪽 팔렸을 것이다. 으음, 내가 드디어 미쳐가는구나. 난 멋쩍은 생각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캄캄한 하늘을 별들이 아름답게 수 놓고 있었다. "제길." 밤하늘 처다보며, 감상에 잠기다니. 이게 무슨 궁상이냐? "카악- 퉤!" 난 가래침을 뱉은 다음, 발로 비볐다. 침을 뱉고 난 뒤에는 이렇게 발로 비비는게 좋다. 사실 침을 뱉지 않는 것이 더 좋긴 하지만, 담배를 피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침을 뱉게 되어있다. 담배를 피고나면 연기 때문에, 입안이 텁텁해 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침을 이렇게 발로 비비는 이유는, 타인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길을 가다 침을 밟았다고 생각해보라. 순간, 기분이 얼마나 더럽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침을 뱉은 다음, 자신의 발로 비벼줘야 한다. 이런 조그만 행위 라도 실천을 한다면, 우리는 너와 나, 나와 너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룩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 만세! 그런데 설마 자기 침 밟고 기분 더러워하는 사람은 없겠지? 어느새 담배는 손 끝까지 타올랐다. 난 손에 남은 꽁초를 버린 다음, 다시 한가치를 빼물었다. "꾸르륵-!" 라이코스는 바닥을 쪼다 말고, 비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 먹었냐? -응. 더 먹을래? -응. 제길, 능력도 없는 주제에 엄청 먹는군. -나, 난 그 여자 때문에 삼일을 굶었단 말이야. 그래, 먹어라 먹어.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데. 난 옆에 있는 딱딱한 빵을 집어 라이코스 앞으로 던졌다. 라이코스는 부리로 몇번 빵을 쪼아보더니, 곧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걸 어떻게 먹어? 왜? -너무 딱딱하잖아. 게다가 이건 보리빵이야. 나 밀빵 아니면 안 먹는거 알지? (매 주제에 별걸 다 챙기네.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다.) 침 뭍혀서 먹어, 임마. -우쒸! 라이코스는 화를 내며 빵을 머리로 받았다. 그러자 딱딱한 빵은 금새 부서저 내렸다. 라이코스는 그 부서진 조각들을 쪼아먹기 시작했다. 난 그런 라이코스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긴장이 몰려왔다. 몸에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한 순간, 공기의 느낌이 달라졌다. 이상 감각이 눈을 뜬 것이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평소 때 였다면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난 두 손을 깍지 낀 다음, 눈을 감았다. 얼마 동안을 그러고 있었다. 난 눈을 떴다. 밤이 깊어가면서 모두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내 귀를 자극했다. 라이코스도 피곤했는지 빵을 쪼아먹다 말고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있었다. 난 손에 남은 꽁초를 버리고 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빼물었다. 난 청룡도로 바닥을 긁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그 누군가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형. 성준이. 난 써 놓은 이름들을 보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으음, 내 교우관계도 꽤나 빈약하군. 어떻게 친구가 한 놈뿐이냐? 난 한참을 고민했지만, 지구상의 사람 중에는 더 이상 쓸 이름이 없음을 깨닫고 이번엔 다른 세계로 눈을 돌려보기로 하였다. 라나. 니나. 세레나. 으음, 이번엔 어떻게된게 전부 여자 이름이군. 그것도 '나' 자 돌림으로. 앗! 한 명이 빠졌다. 난 밑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라이레얼. 난 고개를 돌려 라이레얼을 보았다. 라이레얼은 침낭 속에 몸을 깊게 파묻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안아주고 싶을 만한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여자는 겉과 속이 다르니 조심하라고. 난 그 조심을 안한 대가로 지금까지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다. 하지만 저 예쁘고 귀여운 얼굴을 보고있으면,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다. "비참하구만." 어디서부터 엉킨건지 모르겠다.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이곳에 존재해야만 할 이유가. 자세히 생각해보면 우스운 얘기였다. 이곳이나 그곳이나 나란 존재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데……. 어차피 나같은 놈 하나 없어져도 세상은 잘만 굴러간다. 으음, 다시 생각해보니, 이곳에서는 그래도 내 존재 가치가 어느 정도는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정말 재밌었다. 미지의 세계의 화끈한 모험.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이었다. "공부?" 안해도 된다. 지금 퍼자고 있는 저 무식한 놈들을 보고있으면, 가끔은 내가 천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 이상 무슨 공부가 필요하겠는가. "학교?" 있지도 않다. 설사 있다하더라도 절대 안 간다. "대학 수학 능력 시험?" 말이 필요 없다. 설마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나는 이곳으로 와서 힘을 얻었다. 수백명을 죽일 수 있을만한, 그런 막강한 힘을. "그래서 즐거운가?"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 강해지면 뭐하냐? 써먹을 때도 없는데. 별로 써먹고 싶지도 않고. 난 손을 펴보았다. 한동안 손을 자세히 과찰하다가, 코 끝으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무언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이건……. "피 냄새군. 빌어먹을……." 그래. 이 냄새는 평생지워지지 않겠지. 죽어간 사람들이 흘린 피니까. 뭔 상관이겠냐? 지들 팔자가 개같아서 죽은건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죽어도 싼 놈을 죽였어. 난 아무 죄 없어. 너도 잘 알잖아?" 생명이란 소중한거야. "엿같은 소리. 그놈들 생명보단 내 생명이 백배는 더 소중해." 나도 참 이기적이군. "그렇지 않았으면, 죽었겠지." 피냄새에 익숙해지고 있어. 지금 당장 사람을 죽인다해도 아무런 감정이 생겨나지 않아. "좋잖아. 기죽을 필요 없어. 죽이고 나서 슬퍼한다면, 그건 위선이야." 언젠가는 대가를 치루게 될꺼야. 생명의 무게라는 것은 그렇게 가벼운게 아니거든. "제길……. 너 자꾸 재수없는 소리만 골라서 할래?"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난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 "돌아갈 수 없어." 난 변했다. 살인을 한 순간부터, 아니, 그 늙은이에게 마법을 물려받은 순간부터, 아니, 이곳에 온 순간부터. 언제 변했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야. 중요한 건 변했다는 사실이지. "원래 세계는 돌고 도는 법이야.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도 모르냐?" 돌아간다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는 없어. "별 상관없잖아. 돌아갈 방법도 없는데. 9클래스 마법도 못쓰고, 좌표도 모르고, 그냥 이대로 살다 뒈지는 거지, 뭐." 난 꿈을 꾸고 있었다.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따뜻한 금속이 손에 닿았다. 난 그 금속들을 꺼내보았다. 금화였다. 10골드짜리 5개. "이거 팔면 얼마나 나올까?" 글쎄……. 그런데 그건 왜 묻지? 나 돈 많잖아. 하긴, 가방 안에 금화만해도 한보따리 들었지. 게다가 드래곤 레어에서 가져온 보석도 있고. 드래곤 레어에서 나는 더 많은 보석들을 들고 나올 수 있었다. 인간의 재물욕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난 두 주먹만으로 만족했다. '욕심이 별로 없으시군요." "그건 아니야. 다만……." 금전 감각을 상실했을 뿐이지. 난 아직 꿈을 꾸고 있었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허리가 부서질만큼의 보석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금화를 주머니 속에 다시 집어넣기가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바닥에 던졌다. 금화가 모닥불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여도,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하……." 웃음이 입을 비지고 나왔다. 그래. 금화. 모든 것의 시작은 금화 때문이었지. "빌어먹을……. 그때 줍는게 아니였는데." 발 밑에서 금화가 빛나니까 잠시 눈이 뒤집혔었다. 하기야 발밑에 금이 있는데 안 줏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 만약 안 줍는다면, 그건 착한게 아니라, 띨띨한거다. 후우∼ 내일은 뭘 한다냐? 심심하군. "나는 꿈을 꾸고 있는건가?" 깨어 날 수 있다면 좋겠군. "영원히 깰 수 없겠지." 언젠가는 깨어날 꺼야. "차라리……." 난 손에 든 담배를 힘없이 떨어트리며, 눈을 감았다. 난 눈을 떴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폐속을 가득 채웠다. 바닦에는 수십개의 꽁초가 떨어져있었고, 모닥불은 불씨조차 남기지 않고 꺼져있었다. 라이코스는 언제 일어났는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잘잤냐? -별로. 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우두두둑- "제길……." 앉아서 자는게 아니였는데. 난 관절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일어나셨군요." 난 고개를 돌려 방금 말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쪽도." 한슨은 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건냈다. "마시겠습니까?" "예." 난 건내주는 컵을 받아, 입 안에 들이 부었다. 담배 연기 때문에 텁텁해진 입이 조금은 나아졌다. 사탕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한슨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일어날 때까지 시간이 좀 있군요. 잠깐 얘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직 시간이 이른지,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자고 있었다. 난 그들의 모습을 한번 훑어 본 다음,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이코스는 빠른 속도로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3, 4분 정도 걷자, 앉을 많한 크기의 바위가 나왔다. 난 그곳에 걸터 앉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한슨은 내 앞에서서 내가 담배에 불을 붙일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난 아무말 하지 않고, 담배를 폈다. 담배가 반쯤 타들어갔을 때쯤, 한슨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하나 주시겠습니까?" 난 놀란 눈으로 한슨을 보았다. "담배도 피시나요?" "가끔은요." 난 담배를 한가치 꺼내 한슨에게 건내주었다. 한슨이 입에 담배를 물자,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한슨은 그 모습을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불을 내는 도구라……. 신기하군요. 마법 아티팩트인가요?" "글쎄요.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요." 한슨은 능숙하게 담배를 폈다. 담배 연기는 차가운 공기를 뜨겁게 뎁히며,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부싯돌을 마찰시켜 불씨를 일으키고, 그 불씨는 심지에 붙어 불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건 심지가 없이 허공에 불이 붙는군요." 예리하구만. "허공은 아닙니다. 여기 이쪽에 가연성 기체가 있지요. 불씨는 그 가연성 기체에 튀어 불을 일으키는 겁니다." 한슨은 턱을 어루만졌다. "흐음, 가연성 기체라……." 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한슨도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난 담배를 땅에 던지며, 말했다. "의미 없는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지요." 한슨도 담배를 땅에 던진 다음, 발로 비비며 말했다. "그럴까요?" "대체 무엇을 알고 싶은 겁니까?" 한슨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특별히 알고 싶은 것은 없습니다. 당신 같이 강한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별 문제 될 것은 없으니까요. 그저 당신과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흐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저랑 얘기를 하고 싶다구요?" "그렇습니다." "흐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의문이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자, 한슨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다만 당신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것 뿐입니다." 나에 대해서 조금 알고 싶다? 설마 내가 이계에서 왔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난 한슨을 노려보며, 씨익 웃었다. "저에 대해 알고 싶으시다면, 그쪽의 정체를 먼저 밝히는 편히 좋지 않을까요?" "하하, 저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뭘 숨기고 있겠습니까?" 어쭈 피하시겠다. "별 볼일 없는 걸로 따지면, 저도 만만치는 않죠. 그래서인진 모르겠지만, 제 눈엔 당신이 대단한 사람을 보입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 아닌가요?" 한슨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당신은 대단합니다. 제 눈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군요. 하하……." 그는 어색한 웃음으로 말 끝을 흐렸다. 난 한동안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한슨은 내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한슨은 몇 번의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흠흠, 그럼 제가 먼저 말씀드리지요. 일단 제 이름은 헤이체르 하이스네입니다. 이제 제 정체를 아시겠지요?" 헤이체르 하이스네? 그럼 한슨은 가명이었나? 난 한슨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한슨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슨은 분명……, 지명수배자 일 것이다. 특수절도에 폭행 및 강간 혐의로 수배를 받아 쫒겨 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상을 바꾸기 위해 일부러 안경을 쓰고, 그 누구도 모르게 과거를 숨긴 다음, 가명을 쓴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우리 나라에서는 범죄자들에게 새 삶을 살 기회는 절대 주지 않는다. 한번 범죄자는 영원한 범죄자이다. 한번 빨간줄 그어지면 영원히 지울 수 없다. 범죄자들이 죄값을 치루고 나와, 한번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다짐하고 취직을 하려한다고 해도, 사회에서는 범죄자들에게 절대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범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 방법은 하나 뿐이다. 도둑질하던 놈은 다시 도둑질하고, 강도짓 하던 놈들은 다시 강도짓하고, 코흘리개들 코묻은 돈 삥뜯던 놈들은 다시 삥뜯고, MIB(뜻 1, Man In Black의 약자. 뜻 2, 조폭 집단을 좋게 일컷는 말. 뜻 3, 영화. 한때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기도 했었다. 스토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맨인블랙이라 불리는 조폭집단이 있었는데, 외계에서 온 조폭들이 자신들의 나와바리(지구)에서 설쳐대자 자신들의 나와바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과 싸우는 멋진 조폭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결말은 나와바리(은하)를 확장하면서 끝난다. 한마디로 검게 시작해 검게 끝나는 영화다. 초특급 하이퍼 슈퍼 스펙터클 네오 클래식 퓨전 무비.)회원이었던 놈들은 다시 가입하고, 유부녀 강간했던 놈들은, 다시 강간하고……. 이들이 다시 이렇게 전의 직업전선으로 복귀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욕할 수 없다. 그들도 먹기 살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마지막 유부녀 강간하는 놈만 빼고. 이제부터 우리는 범죄자들이 다시 개심하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좋은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흐음,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얘기들을 하는 것일까?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슨은 분명 범죄자라는 것이다. 솔직히 생긴것만 봐서는 한슨은 범죄자처럼 안생겼다. 상당히 지적이고 건실하게 생겼다. 하지만 사람은 겉만봐서는 모르는 법이다. 생긴 걸로만 보면 평범한 사람들 보다는 사기꾼들이 훨씬 멀쩡하게 생겼다. 흐음, 아무래도 한슨의 죄명에 사기 죄를 추가해야 할 것 같다. 한슨은 자신의 본명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흠흠, 제 이름을 들었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범죄자군요." "헤이체르 공작가의……. 예!?" 헤이체르 공작가? 설마…… 공작의……. 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한슨은 내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당신……." "맞습니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역시 그랬어! "공작가를 상대로 사기를 친겁니까? 아니면, 공작의 딸을 강간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특수절도 입니까? 설마 지속적으로 폭행 및 협박을 일삼은 것은 아니겠지요?" "……." 내 말을 들은 한슨은 눈이 휘둥그래 해졌다. 난 그 모습을 보고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이 사람은 대단한 남자야.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스케일부터가 다르구나! 난 감탄을 하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한 나라의 공작가를 상대로 범죄 행각을 벌이다니. 당신의 그 넓은 배포에 감탄했습니다. 그럼 지금 상단에 몸을 담고 있는 것도 짭새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겠군요. 수송을 핑계대며 여기저기로 돌아다닌다면, 수사망에 걸리지 않을테니까요. 당신은 정말 최고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겁니까? 설마 공작가의 딸을 납치한 다음, 창고로 끌고가 약간의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을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해 시중에 배포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내시진 않으셨겠지요?" "아, 아니, 저는……." 난 당황해하는 한슨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마음을 편히가지세요. 전 당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당신을 다시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저 공작이니 백작이니, 칭호쓰는 놈들 아주 싫어합니다. 전에 어떤 놈이 제 앞에서 남작의 아들이라고 깝쭉거리길레 다신 어디가서 그런 행동 못하도록 쥐어 패줬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자신을 가져요, 자신을. 당신은 좀도둑이 아닌, 대도(大盜)에요. 민중의 영웅입니다. 헤이체르 공작가. 저도 잘 압니다. 아마도 백성들의 피고름을 짜먹는 그런 싸가지 없고 싹퉁머리 없는 놈들이겠지요. 만약 제가 나중에 헤이체르 성을 쓰는 놈을 만나면, 아예 반죽여 놓겠습니다." "제가 공작의 아들……." "아 아, 잘 알겠습니다. 공작의 아들놈을 쥐어팼군요. 잘하셨어요. 정말 잘하셨어요. 원래 그런 놈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립니다. 헤이체르 공작의 아들이라구요? 보나마나 얼굴은 뺀질뺀질하게 생겨 먹어서 재수 없고 밥맛 없는 놈이겠죠. 그런데 그놈 이름이 뭐죠?" "헤이체르 하이스네……." "아∼, 헤이체르 하이스네. 이야, 이름부터 아주 뻔뻔하고 재수 없는 분위기가 팍팍 풍기네요. 아무튼 이름만 들어도 알겠습니다. 헤이체르 하이스네. 이놈 아주 밥맛 없고 싸가지 없고, 생긴건 그지같이 생긴데다가 친구도 없는 왕따죠?" 난 한슨의 대답을 기다렸다. 금방이라도 내말에 맞장구를 칠 것 같던 한슨은 이상하게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한숨을 내쉈다. 잠시 후, 한슨은 커다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우∼. 제가 헤이체르 하이스네입니다. 헤이츠르 공작가의 둘째 아들이지요." 갑자기 왠 쓸데없는 소리야? 자기 본명이 헤이체르 하이스네라는 것은 아까 밝혔잖아.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름이 기네요?" "이름이 깁니다." 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아까 당신이 쥐어팼다는 공작가의 아들 이름이 뭐였죠?" 한슨은 계속 한숨을 내쉈다. "헤이체르 하이스네입니다." "그럼 그쪽 본명은요?" "헤이체르 하이스네입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인가요?" "동명동인(同名同人)입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 "……." 흠흠, 내가 잠깐 실수한 것 같군. "황당하군요." "저도 황당합니다." "……." "……." 흠흠, 이젠 뭐라고 말하지? "아까 헤이체르 공작가 사람 만나면 반죽여놓겠다고 한거 취소하겠습니다." "……." "그리고 뻔뻔하고. 재수 없고, 밥맛 없고, 싸가지 없고, 뺀질뺀질하다고 했던 것도 취소하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 한동안 나와 한슨은 서로를 마주보며 있었다. 난 어색한 침묵이 싫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공작의 둘째 아들이 왜 이곳에 있는거죠? 집안사정이 어렵나요?" "집안사정은 괜찮습니다." "그럼 집에서 쫒겨났나요?" "그건 아닙니다. 제 발로 걸어나왔지요." "왜 그러셨나요?" "지금부터 그걸 말씀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말씀하시죠." "알겠습니다." 한슨은 얘기가 길어질 것을 예상했는지 내 반대편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안경을 벗어 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싶이 저는 헤이체르 공작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아버지 로히츠 공작님은 4남 3녀의 자녀를 두셨습니다." 총 7명이군. 이런, 이 집은 가족계획이 필요하겠어. "많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많다보면 생기는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한슨은 내가 대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는지,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난 별 생각 하지않고 답을 말 할 수 있었다. "계승권." 한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여자는 뺀다하더라도 4명입니다. 당연 공작 직위의 계승을 두고 싸움이 나지 않을리 없죠. 막내인 리하르는 나이가 어리고 몸이 약해, 가문을 계승하기엔 무리입니다. 하지만 제 형님 하란시아나, 셋째 라유드 같은 경우에는 가문을 계승권을 자신이 확보하고 싶어합니다." "당신은요?" 한슨은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없다고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저한테는 가문을 계승할 권한이 없습니다." "왜죠?" "전……, 공작가의 진짜 자식이 아니니까요." "……?" 한슨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난 그의 손에 담배를 건내준 다음, 불을 붙여주었다. 한슨은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다. "저의 어머니는 하녀입니다. 아버님께서는 간간히 어머님을 침실로 부르셨고, 그래서 제가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한 나라의 공작으로써도 한 국가의 아버지로써도 말이죠. 심심해서 건드렸던 하녀가 배가 불러온다. 보통 귀족집에서는 돈 몇푼과 함께 내쫓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를 잘 돌봐주시고, 저를 양자로 맞이하여 당신의 자식으로 키워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지금 헤이체르 성을 쓰고 있습니다. 집을 나온 뒤로는 그냥 한슨이라는 이름을 쓰지만요." 그 헤이체르 공작이란 사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군. 자신이 건드린 여자는 자신이 책임진다. 흐음, 멋진데.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죠?" "저택에 계십니다. 지금은 그곳에 하녀장이십니다. 당신의 부인께서도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지네시는데는 별 불편 없을 껍니다. 비록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감정이 없으시지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곁에 계시는 것을 원하시거든요." "그런데 꼭 어머니를 남겨두고 집을 나올 필요가 있으셨나요?" 내 질문에 한슨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 "튀어 나온 못은 망치를 맞기 마련이죠." 난 한순간에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재주가 많은 것도 피곤하군요." "그렇습니다." 같이 행동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한슨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생긴 것도 그런대로 잘생겼고, 검술도 꽤 익힌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였다. 상당한 지식. 빠른 상황 판단력. 상대방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 이 정도의 남자는 흔치않다. 내가 지금 한슨에게 받는 느낌은 세레나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느낌과 비슷하다. 한슨은 한 나라의 백작과 맞먹는 위압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아마도 한슨의 형제들은 한슨의 재주가 자신들보다 뛰어난 것을 알고, 분명 제거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슨은 그것을 미리 알아 차리고 공작위에는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밖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밖으로 몸을 피하신 것은 잘한 일 같군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 물론입니다. 신생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죽었고 중이는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안전했습니다. 그리고 집 안에 남아있던 오상은 죽었고 도망친 오자서는 살아 남았습니다. 당신도 안에 있었다면 죽음을 피하지 못했겠지요." 한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이는 누구고 오자서는 누굽니까?" "……." 흠흠, 잠깐 실수했군. 춘추전국시대 사람들 이름을 여기서 꺼내다니. "아아, 별로 중요한 사람들은 아니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당신은 공작위를 계승하기를 포기한겁니까?" 한슨은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당신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난 별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겨우 수송 책임자로 썩을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당신은 분명 공작위를 계승하게 될 것입니다." 한슨은 표정을 굳히며 일어섰다. 그리고 내 앞을 왔다갔다 거리며, 중일거리 듯이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 저는 공작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서 있지요. 하지만 분명 한걸음 씩 그곳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시운이 다시 저를 따를 때. 저는 지금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한슨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내 다른 질문을 꺼냈다. "제가 왜 공작이 되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재주를 시험하고 싶으신 거 겠지요. 당신의 재주를 마음껏 펼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자리가 있어야 할테니까요." "하하하, 하하하!" 한슨은 갑자기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정말 미친 듯이 웃어 재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한동안 미친 듯이 웃던 한슨은 한순간에 웃음을 멈추고 정색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정말 대단하군요.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모든 것을 꽤 뚫어보시다니. 저도 그런면에서는 꽤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에게는 한수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제 정체에 대해서는 대충 아셨을테니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십시오." 난 잠시 턱을 붙잡고 고민해야 했다. 지금 한슨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한슨은 내가 뭐라도 되는 듯한 아주 대단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난 쥐뿔도 없는 놈이다. 밝힐 정체도 없는 놈이다. 굳이 하나 밝히라면 다른 세계에서 건너왔다는 거. 하지만 지금 그 말을 했다가는 미친놈 취급받기 쉽상이다. 솔직히 나 같아도 안 믿는다. 그리고 한슨이 뭘보고 내 말을 믿겠냐? 난 계속 머리를 쥐어 뜯으며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했다. 한슨은 주위를 몇번 서성거리다가 하늘을 한번 쳐다 본 다음, 말했다. "해가 높히 떴군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것 같습니다. 당신과의 대화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됨을 깨달았다. 그리고 언제 고민했냐는 듯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도록 하지요."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한슨은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려 먼저 야영지로 걸어갔다. 난 한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야! 그게 아니지!" "닥쳐!" 이게 무슨 소리지? 야영지에 가까이 다가 갈 수록 누군가가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빠르게 발을 놀렸다. "이건 내꺼야!" "그게 왜 니꺼야? 내가 주은건데." "닥쳐! 이건 내가 흘린거야." 이 목소리는……, 라이레얼? 난 깜짝 놀라 야영지를 향해 빠르게 뛰었다. 잠시 후, 야영지가 나타나면서, 라이레얼과 카웨가 재만 남은 모닥불 근처에서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걸 니가 왜 가져? 내가 줏은 거잖아!" "이건 내가 흘린거라니까!" "이 년이 어디서 강아지 하품하는 소리를……." 퍽-! "왜 쳐!?" "맞을 짓을 했잖아. 아무튼 금화나 내놔!" "내가 미쳤냐!? 이걸 너한테 주게." "너 맞을래?" "이미 쳤잖아!" 흐음,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군. 난 테커 옆으로 가서 물었다. "야, 저 둘 왜 싸우는거야?" 테커는 내 얼굴을 한번 스윽 보더니, 다시 라이레얼과 카웨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게 말이지……." 테커의 설명은 이러했다. 카웨는 해가 뜨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맛있는 아침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일념하나로 아침 준비를 서두른다. 물을 떠오고 재료를 손질하고, 아무튼 부지런하게 준비했다. 이거저거 대충 다 끝내고, 모닥불에 불을 지피려는 순간, 땅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한다. 카웨는 기쁜 마음에 그것들을 줍고, 마치 심마니가 '심봤다'를 외치듯이, 이렇게 외친다. "앗! 50골드다!" 그 말이 카웨의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쌔근쌔근 잘 자고 있던, 라이레얼의 눈이 번쩍떠졌다. 라이레얼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침낭을 빠져나와 카웨에게 소리친다. "그거 내꺼야!" 짧게 요약하면, 카웨가 줏은 돈을 라이레얼이 자기가 흘린거였다고 바득바득 우기고 있다는 것이다. "진짜 황당하다." "별로. 처음부터 봤으면 더 재밌었을텐데. 니가 라이레얼 일어나는 모습을 봤어야 했어. 50골드란 말이 들려오자마자, 귀가 쫑긋 서면서, 순식간에 침낭을 나와 카웨 앞에 서더라고. 그 속도가 진짜 얼마나 빠르던지. 이야, 난 인간이 이렇게 빠를 수 있구나, 라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니까." 진짜, 너무 선명하게 영상이 떠오른다. 아∼, 라이레얼. "근데 너 어디에 있다 온거냐?" 예리한 질문. 대충 얼버무려야지. "큰일 좀 보느라고." "음." 테커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묻지 않았다. 참고로 여기서 큰 일이란, 쪼그리고 앉아서 힘을 주는 것을 말한다. 솔직히 이것 만큼 중요한 일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생리적 작용이라는 것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중학교 가정시간에 배워서 알겠지만, 인간의 활동은 일하는 시간, 여가 시간, 생리적 시간 등으로 나뉘어진다. 신문을 본다거나 놀러간다거나 하는 것은 여가 시간에 포함된다. 응가를 한다거나, 생리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당연히 생리적 활동 시간에 포함된다. 그런데 중학교 때, 가정시험에 이런 문제가 하나 출제됐었다. 지금도 확실히 기억난다. 주관식1. 응가를 하면서 신문을 보는 일은 어떤 활동에 포함될까요? 내 평생 제일 황당했던 시험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답을 이렇게 썼다. 답 : 퓨전 활동 시간. 틀렸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교에서 이런 답을 쓴 놈은 너 하나 뿐이라고, 먼지나게 맞았다는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않다. 이런 애매한 문제는 학교 시험에 내지 않을 것을 선생님들께 강력히 권하는 바이다. 아무튼 내가 이렇게 과거의 가슴 아픈 기억들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라이레얼과 카웨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건 내꺼야!" "내가 줏었어!" "내가 흘린거야!" "구라까지마!" 라이레얼과 카웨의 싸움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카웨가 머리에 총맞지 않은 이상 자기가 줏은 것을 라이레얼에게 양보할리도 없겠고, 라이레얼은 뻔뻔하게도 자기가 흘린거라고 우기니. 참고로 저 금화는 어젯밤 내가 흘린거다. 흘렸다기 보다는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지만. 아무튼 라이레얼은 내가 흘린 금화를 자기가 흘린거라고 끝까지 주장하고 있었다.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이다. 라이레얼의 인간성은 이제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말 싸움을 하던 카웨는 많이 지쳤는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야,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주은거긴 하지만 너한테 반 줄게. 어때? 그거면 되지?" 카웨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보는 타협안이다. 하지만 뻔뻔한 라이레얼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웃기지마! 그건 내 돈인데 내가 왜 너랑 나눠? 전부 내놔!" "이 싸가지!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어머∼, 물론 아니지. 난 하프엘프거든. 그러니까 빨리 금화나 내놔." 라이레얼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50골드를 다 먹어치우기 위해, 별 짓을 다하고 있었다. 진짜 눈뜨고는 못보겠다. 둘의 싸움을 한심하든 표정으로 지켜보던 테커가 말했다. "카웨 녀석. 50골드를 줏었으면, 그냥 입다물고 조용히 찌그러질 것이지, 병신같이 그걸 외쳐가지고는. 라이레얼에게 걸린 이상 10골드나 건질지 모르겠다." 그 말에 난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라이레얼이 돈 밝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 일줄이야. 라이레얼. 제발 추한짓 좀 그만해요. "그런데 저것들은 언제까지 싸울 생각이지? 배고파 죽겠다." 나도 배고프다. 역시 취사병인 카웨가 저 모양이니, 맴버 전체가 굶게 되는구나. 제발 적당히 좀 해요, 라이레얼. 난 배가 고팠기에 어쩔 수 없이, 둘의 싸움을 말리기로 했다. 그래. 내가 안말리면 누가 말리겠냐? 난 라이레얼에게 다가갔다. 라이레얼은 내 얼굴을 보자 기뻐하며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어, 히로. 마침 잘왔어. 히로가 카웨한테 얘기 좀 해줘." 라이레얼은 나에게 한쪽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다시 카웨를 보며 말했다. "사실 내가 그 돈 흘렸을 때, 히로가 옆에 있었어. 히로, 어젯밤에 내가 여기다가 50골드 흘린거 봤지? 10골드짜리 5개. 봤지? 그치?" 라이레얼은 다시 나를 보며 열심히 한쪽 눈을 깜빡였다. 진짜 저러고 싶을까?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그게 말이 되요, 라이레얼. 만약 제가 옆에 있었다면, 그때 당장 알려드렸겠지요. 제발 거짓말을 하더라도 말이 되는 거짓말을 하세요. 진짜 꼭 그러고 싶으……, 우웁." 라이레얼은 두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자, 히로 말 들었으니, 이제 잘 알겠지!? 그 돈은 내가 흘린 돈이야. 빨리 내놔!" "뭔, 헛소리야! 저 녀석은 아니라고 하는데." "시끄러! 그건 무조건 내꺼야!" 성격 나온다. 성격 나와. 난 내 입을 막고 있는 라이레얼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레얼. 그거 제꺼에요." "응?" "그거 제가 어젯밤에 불침번 서다가 흘린 돈이에요." "……." "……." 휘이잉∼. 한 순간, 싸늘한 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카웨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니 돈이냐?" "어." 카웨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몇 마디 궁시렁거리며 나에게 금화를 건내주었다. "쳇! 좋다 말았네." 난 금화를 주머니에 찔러 넣은 다음, 라이레얼을 보았다. 한동안 계속 보고 있자, 라이레얼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 호. 그거 히로 돈이였어?" "예." "아∼, 그랬구나. 그나저나 카웨 저 놈 진짜 나쁜 놈이다. 히로 돈을 자기꺼라고 우기다니. 그치?" 흡연하다 걸린 놈이, 만화책 보다 걸린 놈보고 뭐라고 한다더니. "그러는 라이레얼은 어떻구요. 전 라이레얼에게 실망했어요." 솔직히 이젠 실망한 건덕지 조차 없다. 라이레얼은 나한테 살짝 매달리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호, 호, 호. 아이∼, 히로. 설마 내가 먹으려고 그랬겠어? 난 그 돈 뺏어다가 우리 히로 용돈이라도 줄려 그랬지. 호, 호." 뻔뻔해. 뻔뻔해. 뻔뻔해도 너무 뻔뻔해. 난 내 목에 매달려서 귓가에 숨을 불어 넣는 라이레얼을 무시하며 카웨에게 말했다. "야! 카웨. 배고프니까 밥이나 빨리해라." 그러자 카웨는 인상을 쓰며 외쳤다. "시끄러, 임마! 너 때문에 괜히 좋다 말았잖아. 아, 씨발, 간만에 돈 좀 줍나했더니." 역시 그것 때문에 꽁해있는군. 난 주머니에서 10골드를 꺼내 카웨의 면상에 던졌다. 퍽-! "그거 줄테니까, 밥이나 빨리 해!" 금화는 카웨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고, 전에 라이레얼에게 돌 맞은 상처가 다시 찢어지면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하지만, 카웨는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금화를 덥썩 줏었다. "좋았어! 이 몸이 최고의 요리를 대접해주마! 우하하하!" 10골드 하나가 저리도 좋을까? 카웨는 빠른 동작으로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이레얼은 내 목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나도 줘, 히로!" 10골드 덕인지, 카웨는 두명의 보조 취사병과 함께 빠르게 아침을 만들었고,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난 내 손으로 먹고 싶었지만, 먹여주고 싶다는 라이레얼의 간절한 부탁을 어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정말로 어쩔 수 없이 라이레얼이 건내주는 음식을 받아 먹었다. "자, 아∼, 해봐, 히로." "아∼, 텁." "아이, 잘했어요." 이런 식이었다. 정말 행복해 미치겠다. "아잉, 히로. 이렇게 귀엽고 예쁜 라이레얼이 먹여주는데, 귀엽고 예쁜 라이레얼에게 뭐 해줄꺼 없어?" "뭐, 뭘해줘요?" 라이레얼은 방긋 웃으며 두 손을 쫙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나 용돈 좀 줘, 히로." "……." 그래. 결국은 이게 목적이었던거야. 어쩐지 잘해준다 했어. 난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서 10골드짜리를 꺼내 라이레얼 손바닥에 올려 놓았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 히로 설마 10골드 밖에 안 줄 생각은 아니겠지? 카웨한테도 10골드 줬는데, 나한테도 10골드를 준다면 그건 히로가 나랑 카웨를 똑같이 취급한다는 얘기겠지? 아니야, 설마 히로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라이레얼에게 10골드만 줄 리가 있겠어? 분명 더 줄꺼야? 그치 히로?" "……예." 난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20골드를 라이레얼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다. "꺄아, 고마워, 히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라이레얼이 내 얼굴에 키스세례를 퍼붓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팬케이크를 찢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라이코스는 내 어깨 위에서 내려와 팬케이크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그래. 많이 먹어라, 나의 비상식량아. 난 한동안 라이코스가 열심히 먹는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테커와 카웨는 서로 열심히 주먹을 날리며 빵을 뜯고 있었다. 그리고 카젠은 입에 잎담배 하나를 물고 누워있었다. 이건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약간 특이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서 20여명의 여자들이 조심스럽게 빵과 수프를 먹고 있는 것이다. 난 그 여자들을 가리키며 테커에게 물었다. "저 여자들은 뭐야?" 테커는 카웨에게 주먹질 하던 것을 잠깐 멈추고 여자들을 힐끔보더니 대답했다. "산적들 소굴에서 구해 온 여자들. 기억 안나냐? 내가 전에 얘기했잖아." "음……." 맞아. 그랬었어. 난 그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정확히 18명이었다. 나이는 적어 보이는 여자는 15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자는 25살 정도로 보였다. 그리 눈에 띌만한 미녀는 보이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예쁘게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전부 시골에서 살아서 그런지 눈은 순해보이고 피부는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다. 15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잠깐 고개를 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푹숙였다. 그리고는 약간 몸을 떠는 것 처럼 보였다. 그건 단순히 그녀 하나만 그런 것이 아니였다. 그녀들 전부가 가시방석에 앉은 듯이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난 잠시 생각해보다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여자들은 평범하게 살다가 산적들에게 끌려가 몸을 망쳤다. 그 후, 도망치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살던 도중, 우리들이 나타나 구해줬다. 여자들은 우리를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매음굴 같은 산적 소굴을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따라왔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개처럼 끌고 다니면서 범할 수 있고, 적당히 즐긴 다음에 사창가에 팔아 넘길 수도 있다. 아니, 지금 당장 덮쳐 버리는 수도 있다. 아무튼 저 여자들은 우리를 무서워하고 있다. "야, 그런데 저 여자들은 어떻게 처리한데?" "글세. 갈 곳이 있는 사람은 돌려 보내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도시에 도착하는 즉시 방법을 강구해봐야겠지. 한슨은 상단에 의뢰해서 일자리를 찾아 줄 생각인가봐. 뭐, 어떻게든 되겠지. 사창가 같은데 팔아 넘기지는 않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으음, 아무튼 그건 나중 문제니까,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저 여자들을 안심시켜주고 싶은데. 내가 가서 말하자니 조금 그렇고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아! 있다. 라이레얼! 난 라이레얼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라이레얼." "응? 왜, 히로?" 난 손가락으로 그녀들을 가리켰다. "저기, 저 여자들 말이에요." "응? 저 여자들이 왜?' "저 여자들이 아무래도 우리를 믿지 못해 지금 상당히 불안해 하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라이레얼이 가서 안심 시켜주세요. 같은 여자끼리니까 저 여자들도 믿을꺼 아니에요." 라이레얼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걱정말고 나한테 맞겨, 히로." "예." 솔직히 약간은 불안하다. 설마 라이레얼, 우리들이 전부 색마(色魔)라던가, 아니면 굶주린 늑대라던가 하는 말은 하지 않겠지? 제발 안심시켜줘요, 라이레얼. 안심! 라이레얼은 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나 그녀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들 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다가, 몇분 정도 지나자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라이레얼은 귀여워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카웨는 라이레얼이 여자들과 다정하게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는 테커에게 물었다. "야, 저 년 저기서 뭐하는거냐?" 테커가 대답했다. "글세. 여자들 상대로 삥이라도 뜯나본데." 으음, 역시 라이레얼의 이미지는 상당히 안 좋다. 하긴, 그 동안 한 짓이 있으니. "시끄러 이것들아! 라이레얼이 간만에 착한 일 좀 해본다는데, 니들이 테클을 걸어?" "뭐? 라이레얼이 착한 짓?" "이게 어디서 고양이 다이빙 하는 소리를." 말을 말자 말을 마. 라이레얼은 한참을 더 여자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아까 처음에 말을 걸었던 여자와 같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여자의 나이는 대략 20세 정도로 보이고, 얼굴도 예쁘장한 편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저, 저는 베라라고 합니다. 저희들을 구해주셨는데 이렇게 늦게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저, 저희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말투도 딱딱하고 표정도 굳어 있었다. 아무튼 저쪽이 인사를 했으니, 이쪽도 답을 해야겠지? 난 먹던 빵을 라이코스에게 던져주고 벌떡 일어났다. "아, 예, 저는……." 내가 소개를 할려는 찰나, 라이레얼은 내 목을 끌어 안으며 나 대신 말했다. "얘는 히로. 잘나가는 마법사야. 칼도 잘쓰고. 지금은 내 애인. 어때, 베라? 잘 생겼지? 그치?" "예……." 그 여자, 즉 베라는 고개를 숙이며 우물쭈물 거렸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베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이∼. 예가 뭐야 예가? 아까 말 놓기로 했잖아. 나보다 나이도 한 살이나 많으면서. 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들으면 닭살이 돋는다고." "으, 응……." 반 말로 대답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어색한 모양이었다. 음, 아무튼 말까지 놨군. 역시 라이레얼에게 맡기길 잘했다. "그리고 히로는 밤 일도 끝내주게 잘해. 정말 한번 해보면 헤어날 수가 없다니까." 라이레얼은 베라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하지만 다 들렸다. 진짜 쪽팔린다. 한번의 불장난으로 평생을 발목 잡히게 될 줄은……. 흐흑, 그때 참았어야 했는데. "자, 그리고 이 놈은 카웨. 요리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멍청이야." "아, 안녕하세요. 전 베라라고 합니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카웨의 입이 헤벌쭉 찢어졌다. 라이레얼이 멍청이라고 말한 것은 들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카웨는 양손으로 베라의 손을 붙잡고 열심히 흔들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전 카웨입니다. 취미는 요리고, 특기도 요립니다. 나중에 시간 나시면 제가 언제 식사나 한번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이미 대접했어, 임마. 아까 여자들이 먹은 아침은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거니? 인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카웨는 베라의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하하, 정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군요. 사실 제가 그 산적들과 싸울 때, 제일 열심히 싸우긴 했습니다만, 하하, 어떻게 제 입으로 제 무용담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예……. 이, 이것 좀……." "정말 손이 고우시군요. 여기 서 있는 무식해보이는 여자와는 비교도 안됩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 퍽-! 맞을 짓을 했어. 맞아도 싸. 라이레얼은 카웨를 완전히 바닥에 눕혀놓은 다음, 베라를 대리고 다니며 여기저기 소개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런 서로가 서로를 더 알아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끝마쳤다. 하지만 PC방을 갔다 오면 중간고사가 기다리고 있고, 오락실을 갔다 오면 기말고사가 기다리고 있듯, 식사를 끝마친 우리에게는 설거지라는 막강한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서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결코 설거지를 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난 눈빛으로 그들과 맞서는 대신, 라이레얼과 바싹 붙었다. 감히 어느 누가 라이레얼과 짝짝꿍하는 나에게 설거지를 시키겠는가? "야, 카웨. 이제 설거지를 할 때가 되지 않았냐?" "맞아. 니가 해라." "웃기는 소리! 저번에도 내가 했어!" "야, 테커 너 밖에 없다." "난 왼팔이 맞이 가서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런건 라무한테나 맞기라고." "내가 미쳤냐?" "야, 히로. 니가 좀 희생하는게 어때?" 그럴 줄 알았다. 난 라이레얼 품속으로 파고 들며 라이레얼에게 속삭였다. "라이레얼. 저 설거지 하기 싫어요. 라이레얼이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라이레얼은 나를 꼭 끌어 안으며 외쳤다. "니들이 뭔대 우리 히로한테 설거지 하라 마라야! 니들 다 죽을래!?" 고마워요, 라이레얼. 라이레얼 덕에 나는 설거지 당번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놈들의 분위기는 정말 장난이 아니였다. "설거지 할래? 죽을래?" "내가 죽을 지언정, 설거지는 않한다." "대가리에 칼맞고 설거지 하는 것보단, 그냥 하는게 낫지 않겠냐?"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해도 결코 설거지를 하지 않으리!" 이젠 거의 설거지 때문에 살인 날 분위기였다. 그래. 싸워라, 싸워. 이 무식한 것들아. 싸워서 죽은 놈이 설거지해라. "죽여!" "죽어!" "까!" 용병들은 서로의 무기를 뽑아들었다. 이제 누군가는 칼침을 맞고 설거지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저기 설거지는 저희가 할테니 여러분들은 쉬고 계세요." 베라였다. 베라를 비롯한 대, 여섯 명의 여자들은 어느새 냄비와 식기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무기를 내던지고 여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아닙니다!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용병들은 빠른 속도로 여자들이 들고있는 식기와 냄비들을 빼앗았다. 베라를 비롯한 여자들은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 아니, 저기, 설거지는 저희들에게 맞겨주세요. 그 동안 많이 신세졌는데, 이 정도는 저희들이 해야……." 카웨가 앞으로 나서며 힘차게 말했다. "설거지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숙녀분들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사실 저희 설거지하는거 아주 좋아합니다. 그치 얘들아?" "물론!" 좋아하긴 개뿔이……. 방금 전까지 설거지 안 하려고 살인까지 하려고 했던 주제에. "아, 아니에요. 저희들이 할테니……." "저희가 어찌 숙녀분들 손에 물을 묻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기 저 무식해보이는 라이레얼이라면 모를까." 순간 라이레얼은 옆에 있는 돌을 집어서 던졌고, 카웨는 들고있던 냄비로 그 돌을 간신히 막아냈다. 많이 당하다 보니 방어율도 올라가나 보다. "그, 그래도……." "괜찮습니다, 숙녀분들. 저희들이 잘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저희들 설거지 아주 잘합니다. 저희들의 주특기가 설거지고 저희들의 취미도 설거지고, 저희들의 흥미도 설거지고, 저희들 인생의 기쁨도 설거집니다!" 어디서 무지하게 많이 들어 본 대사다. 카웨는 뒤를 돌아보며 힘차게 외쳤다. "좋아, 얘들아! 설거지 하러 가자!" "우와아아아-!"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용병들은 냄비와 식기를 들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싸늘한 바람이 그 자리에 남은 다섯명에 여자들의 치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휘이잉∼. 제 자리에 남아있는 용병들은 테커를 비롯해 몇 명 되지 않았다. 전부 여자들에게 점수 딸려고 설거지하러 몰려 간 것이다. 내 생각에 분명 그 놈들은 설거지하는 곳에서 누가 설거지 할 것인가를 두고 다시 피터지게 싸우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무식하다 못해, 재미있는 놈들이다. 잠시 후, 용병들은 반짝이는 냄비와 식기들을 들고 나타났다. 몇 놈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피가 줄줄 흐르는 걸로 봐선, 한바탕 했나보다. 아무튼 빠진 사람 없이 전부 모이자, 한슨은 앞으로 나서며 얘기를 꺼냈다. 용병들은 한명도 졸지 않고 한슨의 얘기를 경청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한슨이 꺼낸 얘기는 아주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그러니까 산적들에게서 빼앗은, 아니 탈환한으로 고치는게 나을 것 같군요. 아무튼 산적들에게서 탈환한 금액은 주화와 보석만 약 2만 골드. 그 외에 무기, 식량, 물자 들을 합치면 대략 3만 골드가까이 됩니다. 이 물품들은 저희 상단에서 사들이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합이 5만 골드군요. 게다가 라키 산의 산적들에게는 상금이 걸려있습니다. 전원 소탕시에는 2만 골드군요. 거기다가 저희 상단 측에서 지불하는 보수는 100골드, 힘든 전투를 거쳤으니 추가 보수 150골드가 추가되어 250골드입니다. 그런데 호위병들 중 5할 이상이 죽었으니, 그들의 몫은 여러분들게 돌아갑니다. 물론 그분들의 몫은 100골드 씩입니다. 중상 때문에 여기 안 계신 분들께도 나중에 상단에 찾아오시면 돈을 지급해드립니다만, 뭐, 이건 상관 없는 얘기군요." (꽁돈 7만 골드 ÷ 20) + 보수 250골드 + 100골드 = 3850골드 음, 한 사람에 약 3850골드 씩 돌아가는군. 난 빠르게 암산을 끝마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가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져있는 용병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나뭇가지로 바닥에 숫자를 쓰고 있었다. 난 슬쩍 옆에있는 카웨가 써 놓은 식을 보았다. 30000 + 20000 + 250 + 250 / 20 + 5 = ??? 대체 어떻게 하면 식이 이렇게 세워지는 거냐? 카웨는 잘 안되는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계산을했다. 한참 후, 카웨는 계산을 끝마쳤는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끝났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용병들이 카웨에게 물었다. "야, 한 사람 앞에 얼마씩 돌아가냐?" 카웨는 팔짱을 끼며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하, 바보 자식. 그거 하나 계산 못해서 이 몸한테 물어보냐. 좋아, 내가 특별히 대답해 주기로 하지. 한 사람 앞에 돌아오는 돈은 자그마치 4258골드야. 4258골드!" "정말!?" "당연하지. 확실해. 내가 검산까지 해봤어!" "이야, 너 진짜 똑똑하다. 그 어려운 계산을 해내다니……." "하하, 뭐 별거 아니지." "야, 잠깐만. 난 2733골드가 나오는데." "난 3358골드가 나왔어." "시끄러, 임마. 3776골드야!" "웃기고 있네. 4128골드야!" 용병들은 서로 틀린 답을 맞다고 우기며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저 놈들을 보고 있으니 생각 나는 건데 꼭 시험이 끝나고 나면, 틀린 답을 서로 맞추어 보고 맞았다고 좋아하는 놈들이 있다. "내가 맞어!" "내가 맞다니까!" 라이레얼은 내 목을 끌어 안으며 속삭였다. "저 놈들 진짜 무식하다. 그치, 히로?" "라이레얼은 얼마가 나왔어요?" "나? 난 계산 안했어." "왜요?" "어차피 한슨이 다 알아서 말해줄텐데, 내가 굳이 머리 쓸 필요가 없잖아." "……." 으음, 이런대는 또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아무튼 라이레얼이 저 놈들 보단 똑똑하다는 사실이 확인 되자, 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를 닮는다는데 라이레얼이 무식하면 큰일이지. 험험, 우리의 2세를 위해 공부 좀 열심히 해요, 라이레얼. 한슨은 용병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싸움이 어느 정도 소강 상태로 들어가자 다시 말을 꺼냈다. "여러 분들게 돌아가는 돈은 한사람 앞에 대략 3850골드입니다. 하지만……." 한슨은 잠깐 고개를 돌려, 산적들에게서 구해온 여자들을 처다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저 여자분들은 평온하게 살던 도중, 산적들에게 끌려 몹쓸 짓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산채에 처들어갔을 때, 저 여자분들은 그곳에 계셨으므로, 비록 우리가 구했다고는 하나, 저 분들께는 산적들의 재산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유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산적들의 재산 중, 5할 정도는 저분들의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용병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5할이면 막대한 양의 금액이었다. 용병들은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테커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난 찬성." 카웨도 손을 들었다. "나도. 어차피 100골드짜리 일이었는데, 뭐 별 상관 있겠냐." 그러자 용병들은 하나, 둘 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에이, 씨발.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제길……. 저 새끼가 손드는데 그냥 있을 수도 없고." "야, 이 미친놈들아 다 손들면 어떡해?" 걔중에는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놈들도 있었지만, 아무튼 전원 찬성으로 여자들에게 돈을 나눠 주기로 했다. 금액은 한 사람 앞에 약 1300골드 정도가 줄어 들었지만, 대충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한 사람 앞에 돌아가는 금액은 2500골드가 되었다. 원래 보수가 100골드 였던 만큼, 그 25배를 받게 된 용병들은 땡잡았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산적 두목 자이크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5000골드를 더 받게 된다. 물론 이 돈은 전에 라이레얼과 약속한대로 반으로 갈라야 한다. 이렇게 하여 나에게 돌아오는 보수는 5000골드가 되었다. 이 금액은 레나제에 도착하는 즉시, 상단 지부에서 지급해준다고 한다. 국가에서 상금이 나오려면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탓이다. 대신 산적소탕을 국가에 보고하는 것은 상단의 몫이다. 어차피 상단 측에서 돈 손해는 없다. 보름간 약간의 자금이 묶이게 되지만, 산적을 소탕은 상단의 공으로 돌아가게 되니 상단 측에서도 환영하고 있다고 한다. 돈 계산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마차가 덜거덕거리며 움직이자 라이레얼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자기 시작했다. 난 조심스럽게 라이레얼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레몬 빛 머리카락 사이로 길고 뾰족한 귀가 모습을 들어냈다. 난 귀를 살짝 만져보았다. 말랑말랑한게 감촉이 좋았다. "음냐." 내 손길을 느꼈는지 라이레얼은 몸을 뒤척였다. 난 라이레얼의 머리를 계속 쓸어 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에 건너와 라이레얼을 만나게 된 건 정말 행운인 것 같다. 라이레얼은 나에게 정말 잘 해주었다. 때로는 엄마 같이, 때로는 누나 같이, 때로는 애인같이……. 만약 라이레얼이 옆에 없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시골에 예쁜 집을 하나 지은 다음, 라이레얼과 결혼해서 그 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얘도 두, 셋 정도 낳고……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난 미쳐가고 있었다. 몸은 이상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은 죽어간 사람들의 생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난 고개를 들어 용병들을 보았다. 저들은 언제나 즐거워 보인다. 쉬고 있는 순간에도, 싸우는 순간에도, 죽어가는 순간에도. 저들은 동료의 죽음을 간단한 농담 하나로 흘려 버린다. 하지만 저들의 가슴 속에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슬픔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저들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다.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서로 묶여 있지만, 어차피 저들은 남일 뿐이다. 저들은 저들이고 나는 나다.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려 해도 단편적인 지식들만 머리로 이해할 뿐, 마음 속의 감정들은 느낄 수 없다. 언제부턴가 나는 느끼고 있었다. 저들과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저들만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 할 것이다. 나는 다른 세계의 존재니까. 괴롭다. 슬프다. 쓸쓸하다. 외롭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 속을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는 가운데, 나는 혼자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런 게 '군중 속의 외로움' 인가? 난 라이레얼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라이레얼은 귀가 간지러운지, 잠시 몸을 뒤척였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늘은 언제나 푸르게 흐르고 있었다. 이 하늘은 언제나 이 모습 그대로 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죽는다 해도, 언제나 그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래, 언제나 그럴 것이다. 난 지금 확실하게 마음을 정했다. 오래 전부터 생각했지만, 인정하지 않았던 일을 지금에야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떠날 것이다.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오라고 부르는 곳도 없다. 하지만 나는 갈 것이다. 어디로든 갈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찾기 위해. 그리고 먼 훗날 라이레얼을 다시 만난다면 난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제 순결을 돌려줘요……." 밤이 되었다. 밤. 어두운 밤. 새까만 밤. 만물이 잠드는 밤. 부엉이가 울어대는 밤. 구워서 까먹으면 맛있는 밤. 삶아서 먹어도 맛있는 밤. 마지막 거 두 개는 빼자. 아무튼 어둠이 대지와 창공을 뒤덮고 있는 지금, 난 작은 모닥불 앞에 앉아있었다. 모닥불은 불길을 일렁거리며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는 청룡도를 차고, 등에는 베낭을 매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짐은 이게 전부였다.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된다. 난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라이레얼에게 다가갔다. 라이레얼은 침낭에 몸을 파묻고 깊은 잠 속에 빠져있었다. 자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작별 인사를 한다고 해도 라이레얼은 듣지 못할 것이다. 깨운 다음에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만, 그렇게되면 내가 떠나지 못 할 확률이 100%이다. 라이레얼의 눈물 어린 호소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고, 라이레얼의 강력한 힘에 뒷덜미를 잡힐 수도 있다. 만약이란 것은 절대 없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그냥 자고 있는 라이레얼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로 했다. 라이레얼이 듣지 못해도 상관 없다. 원래 작별 인사라는 것은 한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낮에 그렇게도 많이 잤건만, 라이레얼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쌔근쌔근 잘 자고 있었다. 난 라이레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라이레얼은 귀가 좋고 기척을 잘 감지하기 때문에 이렇게 가까이 갔다간 깰 위험이있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눈을 띄지 않았다. 난 조심스럽게 라이레얼에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짧은 키스를 마치고 난 입술을 뗐다. 도둑 키스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레얼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라이레얼이 깨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바라고 있었다. 라이레얼이 벌떡 일어나 가지 말라고 말해주기를. "음냐, 용돈 줘 히로……. 우웅……." 하지만 라이레얼은 이렇게 잠꼬대까지 하면서 자고 있었다. 이건 분명 떠나라는 하늘의 계시다. 그래. 하늘의 뜻이 그렇다는데 내가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냐? 난 라이레얼의 얼굴을 찬찬히 뜻어 보았다. 잠자고 있는 라이레얼의 모습은 한 마디로 천사였다. 눈을 뜨는 순간 악마가 되긴 하지만. 긴 속눈썹. 오똑한 코. 숨쉴 때 마다 움직이는 길고 뾰족한 귀. 새하얀 피부. 레몬빛 생머리. 전부 기억하고 싶었다.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았다. 난 손을 뻗어 라이레얼의 볼을 만져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잘 있어요, 라이레얼." 난 짧은 인사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라이레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난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라이레얼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 라이레얼과 헤어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떠나야만 했다. 멋있게 표현하자면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그냥 표현하지면 미치지 않기 위해. 아무튼 나는 떠나야만 했다. 난 무덤덤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걸음씩 걸었다. 라이레얼의 숨결이 희미해 지고 있었다. 라이레얼의 느낌이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난 그렇게 라이레얼을 떠났다. 숲 속으로 약 3분 쯤, 걸어들어 갔을 때,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짙은 어둠 속이었기에 어렴풋한 윤곽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거리가 좁혀지자 그는 입을 열었다. "떠나시는 겁니까?" "예." 그는 한슨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슨의 눈동자가 빛났다. 난 한슨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지요?" 한슨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간단합니다. 아까부터 왠지 안색이 복잡해 보이더군요. 저녁 식사 때는 조심스럽게 짐을 점검했고, 그리고 굳이 불침번을 자청한 것도 약간은 이상하더군요. 그래서 당신이 떠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예리한 남자다. "그런데 제가 이 쪽 길로 올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야, 당연하지요. 이 쪽으로 가야 길이 나올테니까……, 아니, 설마 모르셨습니까?" 이 쪽으로 가면 길이 나와? 이런, 떠난다는 사실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어디가 길인 지도 잊어버렸군. "아, 예. 뭐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알았으니까 됐습니다." 순간, 한슨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말했다. "흠흠, 이 쪽으로 쭉 가시면, 날이 밝기 전에 길이 나올껍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반나절 정도를 더 걸으시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옵니다." 흐음, 그랬군. 마을이라? 일단 마을로 가는게 좋겠지? 좋아. 이제부터 맘 잡고 걸어보자. "감사합니다. 안녕히계세요." 난 인사를 하고 한슨을 지나쳤다. 그러자 한슨은 황급히 내 망토를 붙잡았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전 아직 당신의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한슨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있다 말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또 이 질문이군. 제길……. 난 대답을 하는 대신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달과 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노란 광을 뿜어내는 별들은 라이레얼의 레몬 빛 눈동자를 상기시켰다. 마음이 심란하다. 라이레얼……. "제 몫의 돈은 라이레얼에게 주세요. 급료, 상금 전부 다요. 그리고 라이레얼에게는 아무 말도 말아주세요." 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한슨을 지나쳤다. 난 몇 걸음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 보았다. 한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난 중얼거리 듯이 말했다. "히로." "예?" "아이언스 히로." "……?" "그게 제 이름입니다." 한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동안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한슨은 중얼거리 듯이 말했다. "아이언스 히로라……. 멋진 이름이군요." 난 씨익 웃었다. 왠지 모르게 즐거웠다. 뭔가 앞으로 재밌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난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잘 있어요, 라이레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아이리스 Iris> - 4권 - Part 1. 아름다운 결말 만약 당신에게 외모는 정말 예쁘지만 성격이 초토화인 여자와, 성격은 정말 좋지만 얼굴이 좀 안생긴 여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정말 난제(難題)가 아닐 수 없다. 외모를 따르자니 성격이 초토화고, 성격을 따르자니 외모가 초토화다. 대체 어느 쪽을 택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럼 여기서 두 타입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외모가 아름답고 성격이 초토화인 여자> 1. 같이 다닐 경우 - 정말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지나가는 남자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2. 같이 식사 할 경우 - 역시 좋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입맛이 살아난다. 설사 음식이 맛없더라도 상관 없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먹다보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다. 3. 친구들에게 소개를 시켜 줄 경우 - 이 날은 공짜 술 얻어 먹는 날이다. 친구들이 여자 친구의 친구들 좀 시켜달라고 아부하며, 2차, 3차까지 대준다. 4. 여자가 애교를 떠는 경우 - 미친다. 행복해 미친다. 5. 키스를 한다거나 기타 등등의 조금은 부적절한 행위를 경우 -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아름다운 조명 밑에서 하기를 권장하는 바이다. <외모가 좀 안 생기고 성격이 좋은 여자> 1. 같이 다닐 경우 - 정말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지나가는 남자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2. 같이 식사 할 경우 - 역시 좋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식욕이 뚝 떨어진다. 다이어트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다. 3. 친구들에게 소개를 시켜 줄 경우 - 이 날은 공짜 술 얻어 먹는 날이다. 친구들이 불쌍하다고 2차, 3차까지 대준다. 4. 여자가 애교를 떠는 경우 - 미친다. 말 그대로 진짜 미친다. 5. 키스를 한다거나 기타 등등의 조금은 부적절한 행위를 경우 -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불을 끄거나 최대한 어두운 곳에서 하기를 권장하는 바이다. 음, 아무래도 분석이 너무 편파적인 느낌이다. 다시 분석해 보자. <외모가 아름답고 성격이 초토화인 여자> 6. 의견 충돌이 일어 났을 경우. - 조심해야 한다. 잘 못하면 주먹 충돌까지 가는 수도 있다. 7. 생일날 선물 없이 집에 놀러간 경우 - 쫒겨난다. 어떤 여자는 선물 대신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8. 말싸움하는 경우 - 위험하다. 성격이 초토화인 여자와 말싸움을 하다보면, 자신의 성격이 초토화 되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9. 싸구려 반지를 선물하는 경우 - 그 자리에서 집어 던진다. 가끔씩은 웃으며 받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럴 경우 십 중 십은 집에 와서 버린다. 다음 날, 왜 안끼고 왔냐고 물어보면, 아끼느라고 안 낀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10. 결혼했을 경우 - 3년 이내에 이혼 할 가능성이 높다. 3년까지는 그래도 콩깍지 현상 때문에 버틸 수 있다. <외모가 좀 안 생기고 성격이 좋은 여자> 6. 의견 충돌이 일어 났을 경우. - 별 상관 없다. 서로 간의 의견을 조정해서 해결하면 된다. 정 합의가 안될 경우 그녀가 양보하는 경우가 많다. 7. 생일날 선물 없이 집에 놀러간 경우 - 반갑게 맞아준다. 마음만이면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8. 말싸움하는 경우 - 그녀가 먼저 사과하고 끝낸다. 사실 말 싸울 할 일도 별로 없다. 9. 싸구려 반지를 선물하는 경우 - 은반지던 구리반지던 상관없다. 알류미늄 깡통 뚜껑을 주어도 별 말 안한다. 어느것이던지 소중히 간직한다. 10. 결혼했을 경우 - 이혼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처음 3년 간은 얼굴 마주치기 힘들어도, 3년만 지나면 정들어서 못 헤어진다. 음음, 어째 아까보다 더 편파적인 느낌이다. 아무튼 이것은 정말 선택하기 어렵다. 나는 고민했다. 내가 정말로 선택의 기로의 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고민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결정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박영웅 : 만약 너한테 외모는 정말 예쁘지만 성격이 초토화인 여자와, 성격은 정말 좋지만 얼굴이 좀 안생긴 여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꺼야? 임진빈 : (당연하다는 말투로) 너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니? 예쁜 여자가 성격도 좋은거야. 박영웅 : (한줄기 땀이 흐른다) ……. 그 놈에게 물어본 내가 바보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박영웅 : 만약 너한테 외모는 정말 예쁘지만 성격이 초토화인 여자와, 성격은 정말 좋지만 얼굴이 좀 안생긴 여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꺼야? 이진기 : (역시 당연하드는 말투로) 야, 뭐 그런걸 질문하고 그러냐? 그냥 둘 다 택해. 양다리 걸치는거야. 박영웅 : (땀이 좀 많이 흐른다) ……. 역시 내 주위에는 이런 놈들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외에 몇 명에게 물어 보았지만, 이렇다 할 만한 대답은 없었다. 서성준 : 예쁜 여자랑 사귄 다음에 성격을 개조시켜. 조종윤 : 성격 좋은 여자랑 사귄 다음에 얼굴을 뜯어 고치라고 해. 진짜 이런 놈들을 친구로 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아무튼 뚜렷한 대답을 얻지 못한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내 몸은 수척해졌지만, 연구에는 별 다른 진전이 없었다. 어느날 학교에 갔더니, 자율 학습 시간에 우리 담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황임숙 : 너 무슨 고민있니? 얼굴이 반쪽이 됐다. 황임숙. 1학년 5반의 담임. 30살의 노처녀. 선 100전 100패의 신화창조. 성격 드럽고, 얼굴 안 생긴 여자의 대명사. 노처녀에게 연애에 대해서 질문하느니, 붕어에게 달리기 하는 방법을 질문하는게 낫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노처녀에게 연애관련 질문은 금기였다. 솔직히 담임이 노처녀가 되고 싶어서 되었겠는가? 연타로 100명의 남자에게 딱지를 맞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 나이에 혼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한가닥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질문했다. 박영웅 : 저기 그게 외모는 정말 예쁘지만 성격이 초토화인 여자와, 성격은 정말 좋지만 얼굴이 좀 안생긴 여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을까요? 황임숙 : 음, 왜 예쁜 여자가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하는건데? 박영웅 : 대체적으로 그렇잖아요. 황임숙 : (화를 내며) 뭐!? 너 지금 내 성격이 나쁘다는 거니? 박영웅 : (입에서 위액이 흐른다) 아니에요, 선생님. 선생님의 성격은 너무 좋아서 탈이에요. 담임의 말의 파장은 정말 엄청났다. 창가에 앉아있는 애들은 일제히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벽에 앉아 있는 애들은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애들은, 가방에서 커터칼을 꺼내 배를 가른다던가, 옆 짝의 머리를 붙잡고 헤딩한다던가 하는 행동을 취하였다. 그리고 난 애들에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아침부터 사람 비위를 뒤짚어 놓느냐며 쉬는 시간에 먼지나게 맞았다. 난 애들에게 얻어 맞으면서, 얼굴과 성격, 둘 다 초토화인 여자에게 질문을 한 나 자신을 원망했다. 쓰으, 성격이 드러우면 얼굴이라도 예쁘던가. 그 후로, 담임이 성형수술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결국 원판불변의법칙은 깨지 못했다는 얘기도 같이 들었다. 나 어렸을 때(중학교 때까지)는, 여자는 얼굴만 예쁘면 장땡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고등학교 입학 시부터) 여자는 얼굴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더라도 성격이 초토화면 그건 정말 수습이 안되는 것이다. -여자는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 물론 나도 이론상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여자가 예쁘게 생겼으면, 눈 돌아가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다. 아무리 어쩌니 저쩌니 해도 사람의 첫인상은 외모로 결정난 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 근래에 들어 나는 그 이론을 몸소 체험해 보았다. 라이레얼. 오오! 나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그 이름. 나의 순결을 빼앗아가고, 나의 돈을 빼앗아가고, 나의 마음까지 빼앗아 간 그 여인. 전 그대의 아름다움에 눈알이 튀어나오고, 그대의 향기에 콧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끔찍했던 첫날밤의 추억은, 한줄기 비수가 되어 제 마음에 꽃혔습니다. 아아! 라이레얼! 솔직히 라이레얼의 성격이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너무 특이하다. 난 라이레얼을 만나고 나서야 세상에 이런 성격을 가진 여자도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대가로 많은 것을 지불해야만 했다. 지금 나는 생각한다. 여자는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고 외모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지금 나는 결심한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외모와 성격, 둘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외모도 아름답고 성격도 좋은 여자를! 그래! 나는 할 수 있어! 분명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름답고 성격 좋은 여자가 있을 꺼야! "그대여! 나를 기다려 주시오! 지금 백마 탄 히로가 그대를 찾아가오!" 나는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목마른 사슴에 샘물을 찾듯, 대머리 독수리가 썩은 고기를 찾듯, 백수가 직업을 찾듯, 쓰리고의 위험에 처한자가 똥광을 찾듯, 사랑을 찾아 헤메는 한 마리의 늑대였다. "그런데 여긴 어디냐?" 하이스네의 말대로라면 훨씬 전에 길이 나와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숲을 헤매고 있었다. 이런 걸 보고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것인가? 나는 나무를 뚫고 들어 온 밝은 햇살을 받으며, 결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대여!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지금 백마 탄 히로가 백마와 함께 길을 잃었소!" 사랑을 찾아 헤메는 나의 여행은 계속 된다. 해가 지고 시작 할 때 쯤, 간신히 길이란 것을 찾을 수가 있었다. 정말 이 숲을 빠져나오기까지 너무도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빠져나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배고파 죽겠다. 으윽, 난 왜 떠나오면서 식량이란 것을 준비 할 생각을 못 했을까? 앞으로 반나절은 걸어야 마을이 나온다고 했는데. "미치겠군." 난 지팡이를 짚으며 열심히 걸었다. 하지만 꼬박 하루를 굶고 보니,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았다. 난 길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 앉았다. "라이레얼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내가 사라져서 좋아하고 있을까? 아니면, 슬퍼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칼 휘두르면서 '우리 히로 당장 데려와!' 라고 외치고 있을까? 라이레얼에게 정말 너무 미안하다.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이렇게 떠나다니. 만약 다음에 다시 라이레얼을 만나게 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에라, 모르겠다." 역시 이렇게 궁상떠는 것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남자라면 지나간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앞을 향해 전진해야하는 법이다. 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해는 내가 걷는 방향으로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대략 1시간이 지났을 무렵, 해는 내 앞쪽에 위치한 산에 걸렸다. 난 내 앞쪽에서부터 은은히 퍼져나오는 노을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기에,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프다. 이러다 아사(餓死)하는거 아닌가? 잠깐! 나에게는 급할 때 도와주는 친구. 라이코스가 있었지! "라이코스!" 내가 라이코스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 라이코스는 내 어깨에서 내려와 내 코 앞에서 날개짓을 하며, 충성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그 눈빛에는 주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영물의 자존심이 담겨있었다. "라이코스. 넌 역시 나의 믿음직한 부하 1호다. 너의 그 훌륭한 마음은 내 결코 잊지 않으마. 사랑한다, 라이코스." - 그, 그게 무슨 소리……. 역시 눈치 빠른 영물이다. 난 라이코스가 날개를 퍼덕여 도망치려는 순간, 두 손을 뻗어 덥썩 붙잡았다. 라이코스는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처다보았다. 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라이코스를 처다보았다. "난 널 원해." - 난 별로 원하지 않는데. "상관 없어. 나만 원하면 그걸로 끝이야." - 야, 그런게 어딨어. 그동안 우리가 함께했던 그 많은 시간들을 생각해 봐. "그래. 우린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 하지만 이젠 헤어져야 할 때 구나." - 헤. 헤어지다니? 그 무슨 섭섭한 소리를……. 난 항상 너와 함께 있고 싶은데. "나와 항상 함께 있고 싶다고?" - 응, 응. 물론이지. 그러니까, 날 잡아먹는다던가 그런 일은 하지마? 알았지? 나는 라이코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동물의 생존본능이었다. 생을 향한 애착은 바퀴벌레 같은 미물도 가지고 있는 것인데, 하물며 영물인 라이코스가 가지고 있지 않을리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인간 박영웅도 생에 대한 애착이 많다 못해 넘쳐난다는 것이다. 일단 내가 살고 나서야 뭘, 하던말던 할게 아닌가? 법에도 정당방위라는 것이 있다. 정당방위란 말 그대로 정당한 방위다. 조금 더 풀어서 얘기하자면,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남을 죽여도 상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 들었다. 난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였다. 이러면 살인 죄가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자신이 살기위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살인 한 사람에게 '그냥 칼침 맞고 죽지 그러셨어요.' 라고 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인간도 동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특히 이성적이어서, 아무리 내가 살기 위해서라지만, 결코 동료를 배반하는 그런 행위는 할 수 없다. 내가 이곳에서 굶어죽는다 하더라도 어찌 라이코스를 잡아 먹을 수 있겠는가? 난 라이코스의 눈빛을 마주보며, 힘차게 외쳤다. "라이코스 우리는 영원히 함께하는거야." - 그래. 고마워. 역시 넌 진정한 친구야. 난 니가 날 배신하지 않을꺼라고 생각했어. 넌 그 여자와 다를 꺼라 생각했어. "그 여자?" -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무늬만 엘프. "라이레얼?" - 응. 아무튼 정말 고마워. 나 영원히 너와 같이 있을게. 절대 널 떠나지 않을게. "그래. 우리 헤어지지 말고 영원히 함께하자." 난 말을 마치고 입을 벌렸다. 라이코스는 다급한 눈빛으로 말했다. - 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뭘 하긴?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한 작업을 하지." - 하, 하나가 되기 위한 작업이라니? "이제 넌 내 뼈와 살이 되는거야. 넌 내 몸 속에서 영원히 나와 함께하게 될꺼야." - 그러는게 어딨어? "여깄어." 난 위험에 처했다고 친구를 배신하는 그런 놈은 아니다. 하지만 배가 고프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법이다. "잘 먹겠습니다." "야이, 치사한 자식아!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야, 치사하다니? 원래 인생이란 게 다 그런거야.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먹지 않으면 먹힌다. 넌 약육강식의 법칙이라는 것도 모르냐?" "시끄러! 니가 지금 죽을 만큼 굶었어? 겨우 하루 굶어 놓구선, 동료를 잡아먹으려해? 그리고 난 영물이야, 영물! 세상에 배고프다고 영물을 잡아먹는 놈이 어딨어?" "니가 영물이었냐?" "나 영물 맞아! 청안백우조!" 난 대화 도중, 무언가 아주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구랑 말하고 있는거지? "방금 누가 말했냐?" "나야, 나." 어째 말소리가 라이코스 입에서 흘러나온 듯……. 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니가 말한거야?" "응." 분명 라이코스가 대답했다. 분명 라이코스의 흰부리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는 건 설마……? "너 앵무새 였구나?" "난 매야!" 지금 이게 말이 되는건가? 세상에 말하는 매가 있다니. 나 태어나서 말하는 매는 처음본다. 어떻게 매가 말을 할 수 있는걸까? "너 앵무새 맞잖아?" "아니라니까." 라이코스는 고개를 휘저으며,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새의 말을 어떻게 믿냐? "맞잖아, 앵무새." "아니야. 난 매과에 속하는 영물이야." "그럼 앵무새도 아닌데 어떻게 말을 하는거냐?" "영물이니까." 어째 상당히 설득력있는 말이다. 질문 : 라이코스는 매과에 속하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답 : 영물이니까. 질문2 : 영물은 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답2 : 영물이니까. 질문3 : 왜 대답이 전부 '영물이니까' 일까요? 답3 : 영물이니까. 내가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이 놈은 '영물이니까' 한 마디로 끝내버리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영물이라고 우기는데 내가 어쩌겠는가? "너 말 할 줄 아는거야?" "아니까 말을 했지. 그럼 넌 말 할 줄 모르는데도 말하냐?" 매 주제에 상당히 논리적이다. 1. 말을 할 줄 알아야 말을 할 수 있다. 2. 라이코스는 말을 했다. 3. 그러므로 라이코스는 말을 할 줄 안다. 이 놈이 삼단논법까지 알고 있었을 줄은……. "그럼 너 말 할 줄 알면서, 왜 이제까지 아무 말 안했어?" "말 할 필요가 없었잖아. 눈빛만으로 얘기가 다 통했는데." "그럼 지금은 왜 말하는거야?" "눈빛가지고 씨도 안먹히니까, 말했지!" "그랬나?" "내가 잡아먹지 말라고 몇번을 신호했는데. 그런데 날 잡아먹으려 해?" 어느새, 라이코스의 눈에는 배신과 상처로 얼룩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 눈물을 보고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여자가 운다면 모를까, 매 주제에 울어 봤자지. 잠깐! 그런데 이 놈의 성별은 뭐지? 남자? 아니면, 여자? 그것도 아니면, 설마……, 반음양(半陰陽)? 분명, 목소리는 성인 남자의 목소린데. "야." "왜 불러, 이 치사한 놈아." "너 성별이 뭐냐?" "뭐야!? 너 내 성별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니가 마빡에 써붙이고 다닌 것도 아닌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그, 그래도. 동료의 성별 정도는 알아 뒀어야지." "니가 왜 내 동료야?" "같이 여행하니까 동료지!" "어, 그런건가? 난 니가 내 부하인 줄 알았는데." "……." "아무튼 너 성별이 뭐냐니까?" 라이코스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남자." "그렇구나." 그런데 보통 이런 경우에는 숫컷이라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나는 결국 라이코스를 먹는 것을 포기하고 터벅터벅 걸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말하는 짐승을 잡아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 배고프다. "야, 너 사냥 같은 거 못하냐?" "뭐?" "영물이라면 사냥도 잘 할꺼아니야?" "글세." "야, 너 설마 영물이라면서 사냥도 못하는거야?" "난 풀만 뜯어먹어도 먹고 사는데 지장없거든." "잘났다." 나와 라이코스는 마주보며 이야기 했다. 걸으면서 어떻게 마주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 놈은 지금 내 지팡이 위에 앉아있는 것이다. 구(球) 위에 두 발바닥을 꼭 붙이고 앉아있는데, 조금에 흔들림도 없다. 영물이라더니 쓸데없는 재주만 골라서 익혔나 보다. "야, 나 배고프다. 토끼라도 한 마리 잡아와라." "숲에는 토끼가 안 산다." "얼씨구. 매 주제에 아는 것도 많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지고 달이 떠올라 있었다. 난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계속 걸었다. 하지만 나온다던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마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민가라도 하나 나왔으면 좋겠다. 달그닥, 달그닥- 이게 무슨 소린가? 이건 소린 설마……. "마차네." "그렇군." 라이코스의 말대로 이 소리의 정체는 마차였다. 지금 내 전방 200m정도에서는 마차 하나가 달그닥 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난 마차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마차는 한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짐마차였고, 그 안에는 대, 여섯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긴 걸로 봐서는 전부 여자 같았다. 난 길 한쪽에 서서 오른쪽 팔을 쭉 내밀었다. 잠시 후, 마차는 지척의 거리로 다가왔고, 그 순간 나는 처절하고도 비굴한 빛을 얼굴에 띄웠다. 쪽팔리긴 하지만, 배고픈데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말의 걸음이 느려졌다. 마차는 내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좋았어! 방향은 반대이니 얻어 타지는 못하겠고, 식량이나 좀 얻자. 난 마차에 탄 사람들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말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이 달 밝은 밤에 어디로 가시는지요? 저는 요 앞에 있는 마을에 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지금 식량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배가 고파 걸을 수가 없군요. 그래서 말인데, 불쌍한 사람 도와주는 셈 치고, 먹을 거 조금만 나눠 주시면 안될까요? 먹다 남은 빵이라도 좋습니다. 부디 저의 간청을 물리치지 말아주시 옵소서. 아! 저 상습범 압니다. 정말 태어나서 이런 짓 처음해 보는 겁니다." "저, 저기……." "아! 식량을 나눠주시겠다구요? 감사합니다." "호, 혹시……."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이면 됩니다. 조금. 제가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습니까?" "히로 씨?" "예?" 아니 이 여자가 어떻게 내 이름을? 난 방금 내 이름을 말한, 말을 모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20세 정도의 예쁘장한 시골 여인.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누구시죠?" "……." 여자는 잠시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억이 안나는 걸 어쩌겠는가?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여자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어제 만났었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만났었죠?" 여자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저 베라에요. 기억안나세요? 산적들에게 잡혀있던 걸 구해주셨잖아요." "……." 아! 기억났다! 맞아. 어제 라이레얼의 소개로 인사까지 했었지. 으윽, 배가 고프니까, 기억력 감퇴까지 오나보군. "아하하, 기억납니다. 제가 지금 배가 좀 고파가지고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작동을 안하네요. 하하, 아무튼 이렇게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갑네요." 베라는 내가 자신을 기억해 내자,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보니 마차에 앉아있는 여자들도 다 한번씩은 본 얼굴이다. 음음, 단체로 소풍이라도 가나? "그런데 지금 어디 가시는거에요?" "저희 마을이요." "예?" "저희 마을로 가요." "……." 마을? 저 쪽에도 마을이 있었나? "히로 씨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거에요?" "아, 저 말입니까? 전 마을로 가는 중인데요." "……." "혹시 오는 길에 마을 못보셨나요?" "저기……, 제가 알기로는 이 쪽에 마을이 없거든요." "그래요? 이상하네. 한슨이 말하기로는 분명 이쪽에 마을이 있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다면 답은 세 개 뿐이다. 1. 한슨이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2. 한슨이 나를 속였다. 3. 나는 한슨에게 속았다. 한 마디로 한슨은 나쁜 놈이다. 으윽, 내가 순진하고 순결(?)하다는 걸 알고 이런 사기를 치다니. 지가 무슨 공작가의 둘째 아들이야? 사기꾼 주제에. 역시 그 말도 뻥이었던 거야. 나쁜 자식. 두고 보자. "저, 저기 혹시……." 베라는 머뭇 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하였다. 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하기 좀 그런 내용인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난 베라가 말할 내용이 뭔지 잘 알고 있다. 이건 분명 사랑 고백이다. 분명 나에게 사랑 고백을 할려고 여기까지 쫒아 온 거다. 흠흠,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랑 고백 씩이나……. 뭐, 어쩌겠어? 나 같이 잘난 남자를 놓치기 싫어서 그런 것일텐데. 수많은 여자들의 가슴에 한줄기 사랑만을 남기고 사라지다니. 아! 나는 죄많은 남자여라! 난 베라에게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말하세요. 전 어떤 말이든 받아들일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베레는 머뭇거리다가 내 귀에다 입을 가까이 했다. 아, 그녀의 숨결이 느껴진다. "저, 저기요." "예. 말씀하세요. 전 마음의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다음에 이어질 말을 뻔하다. '저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일 것이다. 확실하다. 틀리면 내 손에 장을 지져도 좋다. 아니, 삭발해도 좋다. 그런데 라이레얼과 헤어진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다른 여자와 썸씽이……. 음, 생가해보니 하루도 지나지 않았군. 미안해요, 라이레얼. 저 원래 이런 놈이었어요. 하지만 여자가 먼저 고백해 오는데 모른 척 할 수는 없잖아요. 전 정말 어쩔 수 없는 놈이에요. 정말 미안해요, 라이레얼. 하지만 라이레얼이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면, 한눈 파는 것 정도는 양해해 주세요. 언제 생각나면 돈다발 싸들고 찾아갈께요. 그나저나 이 여자 시간을 오래 끄는군. 그렇게 부끄러운가? 난 괜찮은데. 베라는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조심스럽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반대로 오신 것 같은데요." "……." 이게 무슨 말? 난 한참 동안을 얼어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반대 쪽으로 계속 걸어왔다는 겁니까?" "예." "그렇다면 제가 미친짓 했다는 거네요?" "……예." "한마디로 삽질했다는 얘기네요?" "……?" 잠깐, 내가 동쪽으로 가고 있었지? 그렇다면 마을은 당연 동쪽에 있겠지? 가설 : 나는 동쪽으로 걷고 있었다. 근거1 : 내가 걷는 방향으로 해가 졌다. 근거2 : 해는 서쪽으로 진다. 결론 : 나는 서쪽으로 걸었다. 즉, 나의 가설은 틀렸다. 어흐흐흑, 밥까지 굶으면서 열심히 걸었는게, 그게 반대방향이었다니……. "흑흑…… 흑." 너무나도 원통하고 분해, 눈물이 다 나왔다. 정말 내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난 라이코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말했다. "야, 반대로 오는 동안, 넌 왜 아무 말도 안했어?" "니가 안물어봤잖아!" 안물어 본다고 아무 말도 안하다니. 그래. 넌 평생 그렇게 수동적인 인생을 살아라. "저, 저기……." "뭡니까?" 베라는 마차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마을로 가실꺼면, 같이 가시지요." "말씀 없으셨어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난 눈물을 닦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마차에 앉아있는 네명의 여인들에게 자기 소개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 아시죠?" "……예." 내 소개가 끝나자, 여자들도 하나, 둘 씩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제일 나이가 적어보이는 갈색 단발머리 여자의 이름은 카라. 나이는 16라고 한다. 어깨까지 오는 곱슬머리를 검은색 천으로 묶은 여인은 마샤. 나이는 18이라고 한다. 양쪽에 주근깨가 깨알 같이 박혀있어, 소녀틱해 보이는 여인은 수잔느. 줄여서 그냥 수잔. 나이는 15이라고 한다. 가장 얌전해 보이는 여인은 수젠느. 줄여서 그냥 수젠. 수잔과는 자매라고 하고 나이는 19이다. 당연 수젠이 언니다. 아무튼 이렇게 소개가 다 끝나고 나자, 난 두 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여자들은 당황해 했다. 하지만 난 당당하게 말했다. "먹을 것 좀……." "……예." 여자들은 음식을 건네 주었고, 나는 천년묵은 돼지가 꿀꿀이죽을 퍼먹 듯, 엄청난 속도로 빵과 치즈를 입에 우겨 넣었다. "끄어억……."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자연스럽게 입에서 트림이 나왔다. 여자들은 빠르게 입냄새가 미치는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흠흠, 이미지 관리에 막대한 소해를 봤군. 난 마차 한구석에 몸을 기댔다. 달은 밝고 주위는 조용해, 상당히 운치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차는 다시 덜그덕 거리며 움직였다. 난 지나가는 말투로 여자들에게 물었다. "라이레얼이 뭐라고 해요?" "난리도 아니었어요." 대답을 한건 말을 모는 베라였다. 베라는 느긋하게 말을 몰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서야 히로 씨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어요. 처음에는 산책이라도 하러 갔나, 해서 기다렸지요.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시더라구요. 그러자 라이레얼이 울며불며 소리치더라구요. '우리 히로 어따 숨겼어!' 하고. 그리고는 활을 들고는 용병들을 향해 겨누며, '우리 히로 안 찾아오면, 니들 다 죽을 줄 알아!' 라고 소리쳤어요. 그러자 용병들은 깜짝 놀라 여기저기 다 들쑤시며, 찾아다녔는데 결국은 못 찾았지요." 베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숨을 돌렸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베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참을 찾아도 못 찾자, 라이레얼은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펑펑 울었어요. '히로가 날 버렸어.' 하면서요. 저녁 때 쯤 되서야 라이레얼이 울음 조금 멈추었고, 용병들은 마차를 움직일 수 있었어요. 저희는 숲을 벗어나 길이 나오자마자, 한슨 씨 일행들과 헤어졌구요. 그때까지도 라이레얼은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어요. 헤어질 때 한슨 씨가 말하더라구요. 마을로 가게되면 히로 씨를 만나게 될꺼라고. 그런데 히로 씨가 반대로 걸어오는 바람에 이 곳에서 마주쳤네요. 그런데 히로 씨는 왜 라이레얼을 떠나 온 거에요? 라이레얼을 사랑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난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라이레얼이 그 정도로까지 슬퍼 할 줄은 몰랐다. 나 같은 건 그냥 스쳐가는 인연으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난 정말로 라이레얼을 사랑했을까? 모르겠다. 라이레얼을 좋아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건 연인으로서의 감정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가장 믿음직한 존재. 가장 의지 할 수 있는 존재. 마치 어머니나 누나 처럼, 나를 감싸주는 듯한 느낌이다. 라이레얼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안정된다. 몸이 편해진다. 이해 할 수 없는 감정. 내가 조금 더 나이를 먹는다면, 지금 내 감정을 알 수 있을까? 그 때가 되면, '나는 라이레얼을 사랑했어' 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을까? 라이레얼이 보고 싶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른다. 베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말을 몰 뿐이었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베라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하지만, 그건 그 순간 만이지요. 라이레얼은 정말로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러나 당신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을 뿐이에요. 히로 씨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나봐요? 하지만 그게, 라이레얼을 버리고 떠나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요? 아니면, 당신에게 있어서 라이레얼은 단지 잠깐 스쳐간 여자에 불과하나요?" "……." "저는 히로 씨의 생각을 알 수 없어요. 히로 씨가 라이레얼의 생각을 알 수 없었던 것 처럼요." 베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난 쥐어짜듯이 말했다. "저는 제 감정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어쩌면 타인의 마음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게 더 힘들 수도 있어요." "전 잘 모르겠어요. 제 마음도, 타인의 마음도. 제 생각도, 타인의 생각도." 베라는 뒤를 돌아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후훗, 아직 어리군요." 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내 볼에는 촉촉한 물기가 흐르고 있었다. "예. 전 아직 어려요. 사랑을 하기에는요."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어린아이에요. 당신도, 나도, 라이레얼도." 이 눈물은 누구를 위해, 흘리는지 알 수 없었다. 라이레얼을 위해 흘리는 것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을 위해 흘리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라이레얼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식적으로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상관 없었다. 난 지금 슬프고, 울고 싶으니까. "아마 날이 밝을 때 쯤에 마을에 도착할꺼에요." "……." "저는 이 길을 잘 알아요. 많이 다녀보았으니까요. 3개월만에 다시 와보네요." 베라의 목소리가 점점 젖어들었다. 다른 네명의 여인들은 두 다리를 모아 꼭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놈들에게 잡혀있던 여자들 중 8명이 우리 마을 사람이에요. 그 중에는 제 친구도 있지요. 그 친구는 마을로 가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왜죠?" "몸을 망쳤으니까요. 여러 남자에게 강간당한 여자가 고향으로 돌아와봐야, 멸시 밖에 더 받겠어요? 물론 겉으로는 이해하는 척하며 위로해주겠지요. 속으로는 창녀라고 욕하면서. 아마 그녀는 그게 두려웠을꺼에요. 전 그녀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그 애는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게 더 낳을 수도 있으니까요." 조용한 밤에 마차가 흔들리는 소리와 여자들이 흐느끼는 소리만 느리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내 눈에 흐르는 비는 멈춰 있었다. "당신들은 왜 돌아가려하는거죠?" "잊을 수 없으니까요." 대답을 한 건, 역시 베라였다. 베라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전 그 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마샤의 오빠지요. 우리는 결혼하기로 서로 약속했어요. 지금도 유효 할지는 모르지만." "남자를 믿지 마세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는 그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염치 없는 여자라고 욕해도 좋아요. 그 남자가 그렇게 욕한다하더라도, 전 할 말이 없으니……. 그리고 단지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전 돌아가야 해요. 그곳에는 제 가족이 있고, 제 집이 있고, 제 추억이 있으니까요. 전 그곳을 떠날 수 없어요. 그건 카라, 마샤, 수잔, 수젠 전부 마찬가지 일꺼에요." "……추억이라? 좋은 말이네요. 어느 곳에 있던지간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비록 그곳이 갈 수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추억이라는 것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여자들이 우는 소리는 마치 귀곡성 같았다. 차라리 실컷 소리내어 울면 괜찮을텐데, 숨을 죽이고 흐느끼니, 듣는 나는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소리를 내고, 눈물을 흘려요. 듣는 사람은 저 밖에 없어요." "으아아." "엉엉엉." "흐윽, 흑흑." 여자들의 울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울음소리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난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감상에 빠질만큼 아름다운 밤이다 내가 깨어난 건 그후, 몇시간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직 해는 완전히 떠오르지 않았고, 여자들은 전부 퉁퉁부은 얼굴을 한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베라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은 길을 따라 알아서 잘 걸어가고 있었다. 라이코스는 마차 바닦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강아지의 모습과 흡사했다. 난 라이코스를 발로 툭툭건드렸다. "야, 자냐?"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응, 자. "자는 놈이 빨리도 대답한다." "난 영물이니까." 이 놈이 정말로 '영물이니까' 한 마디로 다 끝내려 그러내. "그럼 계속 자라." "응." 여자들과 라이코스가 깨어난 것은 해가 떠오를 때 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멈춰서 아침을 먹고가야 하겠지만,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온다기에 그냥 강행군을 벌이기로 하였다. "저기요……." "예. 무슨 일이에요, 히로 씨?" "저기 그 호칭 말이에요." "예?" "히로 씨가 뭡니까? 히로 씨가? 아니, 제 나이가 몇이라고 뒤에 '씨' 가 붙어요? 그리고 베라 양……, 아니, 베라 씨……, 아니 베라 누님. 음음, 그냥 누나로 하지요. 아무튼 베라 누나가 저보다 나이도 더 많은데,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라이레얼한테도 말 놓았으니, 저한테도 말 놓으세요. 어차피 전 누나보다 나이도 어리니까요." "예……. 아니, 으으응." 이렇게 해서 베라와의 호칭문제는 해결했다. 그럼 이번에는……. "제 나이가 열일곱입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거나 같으신 분들은 말 놓으시고, 나이가 적으신 분들은 존댓말과 함께, 오빠라는 호칭으로 불러주세요." "예." "……응." "알았……어." "예." 이렇게 해서 호칭문제는 완전히 끝났다. 정오가 조금 못되었을 무렵, 길 양쪽으로 밭이 펼쳐졌다. 밭이 있다는 것은 그 밭을 일구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이 시대 농업이라는 것이 노동집약적인 산업이기 때문에, 사람은 당연 뭉쳐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뭉쳐있다면 그건 당연 마을일 것이다. 지금은 5월 중순. 농부들에게는 분주한 시기다. 물론 농부들은 겨울을 제하면 언제든 분주하지만. 아무튼 밭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이 세, 네 명 정도 보였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반가움 때문인지, 여자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두려움도 조금은 섞여있어, 전체적으로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난 청룡도를 움켜쥐었다. 만약 사람들이 이 여자들을 창녀 취급하며 멸시한다면, 전부 혼내 줄 생각이다. 몸 망친 것도 서러운데, 욕까지 먹어서야 쓰겠나? 몸 망치고 싶어 망친 것도 아닌데. 아무튼 난 여자들 편이다. 음하하하! 나는야 정의의 사자! "꼴깝떠네."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라이코스가 던진 말이었다. 난 그대로 라이코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왜 때려!?" "영물이니까." "……?" "영물은 맞아도 되." "……왜?" "영물이니까." "……." 후훗, 이겼다. 마차를 발견했는지 일하던 사람들이 일손을 놓고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거기, 혹시……, 베라 아니니?" 말을 꺼낸 건 40대 중반의 아주머니였다. 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베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와 베라의 얼굴을 비롯한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정말, 베라구나. 정말 베라야." "저희도 있어요, 아주머니." "수잔, 수젠. 아니, 마샤랑 카라까지." "안녕하세요." "으, 응." 여자들은 반갑게 인사했고, 아주머니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왜 내 모습을 발견하지는 못한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 채 하는건가? "동네 사람들! 다 나와봐요! 동네 사람들! 빨리 나와봐요! 베라, 마샤, 카라, 수잔, 수젠이 돌아왔어요! 동네 사람들∼!!" 저 목소리. 저 박력. 저건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오직 '아줌마' 만이 가능한 일이다. 아! 어느 시대에나 아주머니들은 강력하구나. "뭐? 그게 정말이야?" "누가 돌아왔다고? "어머나, 세상에!" 농경 사회의 기본은 협동이다. 혼자서 농사짓는 사람 본 적있는가? 가끔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에 불과하다. 농사는 서로서로 도와가며 짓는 것이 정석이다. 아닌 곳도 있다고? 그래. 아닌 곳도 있다. 제발 따지지 좀 마라. 아무튼 서로 돕기 위해서는 집이 붙어있어야하고, 이 마을은 서로 열심히 돕는 지 집이 따닥따닥 붙어있다. 그래서 방금 그 아줌마의 외침에 순식간에 십여명의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남자들은 대부분 일을 나갔는지, 아주머니들과 젊은 여인들. 그리고 코흘리개 꼬마들 몇 명이 다였다. 앗! 예쁜 여자도 있다! "수잔! 수젠! 정말 너희들이니? 정말?" "엄마!" "어머니!" 수잔과 수젠은 얼굴이 새까맣고 투박한 여인의 품 속으로 달려들었다. "으아아앙, 엄마!" "흐흑, 어머니." 세 여인은 서로 껴안고 울고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카라도 중년 여인과 부둥켜 안은 채, 울고 있었다. 하지만 베라는 억지스런 미소를 지은 채, 혼자 서 있었다. 난 베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들 어디 가셨나봐요?" 베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 아니야." 아직 호칭이 어색한가 보다. 베라는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안계셨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산적들에게……." 베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난 베라를 살짝 끌어당겼다. 여자가 슬퍼할 때, 어깨를 빌려주는 것이야 말로 남자의 의무이자, 권리이자, 친절, 봉사 정신의 효시인 것이다. 베라는 나를 끌어 안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 라이레얼이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 잠시 후, 일 나갔던 남자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누군가가 부르러 갔었나 보다. 아니면, 저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일터에까지 들렸을지도. "정말이야? 여자들이 돌아왔다는 게? 이 여편네 또 허풍떠는거 아냐?" "정말이라니까요. 당신은 내 말을 그렇게도 못 믿어요?" "내가 당신 말을 믿느니 소금 항아리에 곰팡이 쓸었다는 말을 믿고 말……, 아니, 저게 누구야? 카라 잖아. 아니, 어떻게?" 남자들까지 몰려오자 정말 난장판이 벌어졌다. 서로 얼싸안고, 얼굴을 만져보고,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물을 흘리고. "완전 개판이네." 내 어깨에 앉아있는 라이코스가 지껄인 말이었다. 난 라이코스의 주둥이를 비틀어 버리고 싶었지만, 두 손이 베라에 의해 묶인 상태이므로, 조용히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베라!"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나와 베라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너무 급하게 돌렸는지, 라이코스가 내 어깨에서 낙하(落下)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방금 베라의 이름을 외친 사람은 키가 크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남자였다.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베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첼!" 베라는 그 남자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있는 힘껏 나를 밀치고, 그 남자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미첼. 미첼. 미첼. 으아앙!" "베라. 살아있었잖아? 살아있었잖아? 으아아!" 남자는 베라를 껴안고 힘껏 들어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빙글빙글 돌리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난 땅에 누운 상태에서 생각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자기 남자 보이자마자 나를 이렇게 쓰러트리다니? 내가 무엇 때문에 이 마을에 왔을까? 라이코스는 내 머리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휴우, 불쌍한 니 신세." 이젠 매 한테까지 동정을 받는구나. 으아! 저 매를 삶아 먹어!!?? "으음, 그래. 다들 무사한 걸보니 정말 반갑구나." 우리는 지금 대략 50여 명 정도는 거뜬히 앉아있을 수 있는 강당에 삥 둘러 앉아 있다. 방금 말을 꺼낸 사람은 백발을 무자비하게 엉클어 놓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낮술을 했는지 검버섯 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웃기는 촌장이다." 난 라이코스의 부리를 왼쪽으로 비틀었다. 이 놈의 새 주둥이를 꼬매버리던지 해야지. 지금 빨갛게 달아오른 코를 벌름거리는 저 노인이 이 마을 촌장이라고 한다. 코 색깔을 보니 하루, 이틀 술 마신게 아닌 것 같다. 매일 같이 퍼마신게 분명하다. 사람들이 서로 껴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눌 때, 내가 땅 바닥에 엎어져 라이코스를 향해, 이를 갈고 있을 때, 저 노인은 한손에 술병을 들고 조용히 등장했다.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웬 아가씨들이야?' 정말 웃기는 촌장이다. 아무튼 나와 다섯 여인. 그리고 그녀들과 관계된 사람들이 저 촌장과 함께 이 곳에 있다. 이 곳은 마을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건축한 집으로, 마을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거나, 서로 간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 원만하게 해결하는 장소이다. 가끔씩 반상회를 열기도 하고 아이들이 놀기도 한다니, 회의장 겸, 재판소 겸, 놀이터 겸, 마을 회관 이다. "그러니까 이 놈과 이 놈의 패거리들이 산적들을 전부 조진 다음, 니들을 구해줬다는 말이냐?" "패거리가 아니라 상단 호위병이에요, 촌장님." "아! 똥이나 변이나, 그게 그거지!" "예. 맞아요, 촌장님." 촌장은 술기운이 오르는지 자꾸만 코를 만지작거렸다.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던 촌장은 갑자기 손가락을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자네!" "너 부른다." 난 라이코스의 부리를 끈으로 묶은 다음, 배낭 속에 처넣었다. 자식이 낄 때, 안 낄 때 구분을 못하고 있어. "예. 무슨 일이십니까?" 촌장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그냥 심심해서 불러봤어." "……." 이 노인이 제 정신이 아니구만. 촌장은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다섯 여인에게 말했다. "그 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냐?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다." "흑흑." 여자들은 그 동안의 일들이 생각났는지, 모두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가족들도 같이 흐느꼈다. 난 감정변화를 억제하며,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신파극도 이젠 지겹다. 사람들은 대충 여자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누구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일까? 추억이란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인가?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던, 여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마리와 미나. 제니스는 그 놈들을 따라갔다고 했나?" "예." "그래. 그들은 좋은 사람인 것 같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하지만 그 년들은 집에서 지 부모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각도 않하나?" 촌장의 말이 끝나자 몇몇 여자들이 또 울음을 터트렸다. 그 울음은 점차 전염이 되었고, 10여 분 정도 지나자, 울지 않고 있는 사람은 나와 촌장 뿐이었다. 촌장은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가겠나?" "여기 있습니다." 한 소녀가 탁자 위에 술병과 술잔을 내려 놓았다. 소녀의 이름은 이사엘로 짧게 자른 단발머리가 시원시원해 보이고, 장식 없는 은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귀여운 소녀이다. 이사엘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촌장에게 말하였다. "술은 조금만 하셔야 되요. 아셨죠, 할아버지?" "그래. 알았다. 내 걱정은 말고 나가봐라." 이사엘은 사뭇 걱정스런 모습으로 집을 나섰다. 내가 궁금해할까봐 걱정이되었는지, 촌장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방금 나간 아이가 내 손녀딸이네. 자네가 구해온 수잔, 카라와는 둘도 없는 친구사이지. 그동안 같이 놀 계집애가 없어서, 혼자 심심해 했는데 잘됐구만." "그런데 부모들이 안 보이는군요." "아! 부모! 당연 안 보일테지. 내 눈에 안보이는데 자네 눈에 보일 리가 있나? 왜 안보이는지 알아? 모르지? 그러면 내가 자네에게만 특별히 알려주지. 내 아들놈과 며느리년은 제작년에 병으로 뒈져서 사이좋게 땅 속에 묻혔어. 으이그! 후레자식 같은 놈! 늙은 지 애비를 두고 먼저 땅 속으로 가다니! 저 어린 것은 어찌 살라고." "……." 괜한 것을 물었군. "자네 그 아이가 몇살인지 아나?" "글쎄요." "열 넷이야! 열 넷! 어때? 좋은 나이지?" "……예." "내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나 젊었을 때 수 많은 여인들을 건드리고 다녔지만, 지금 이사엘 보다 예쁜 여자는 단 한명도 없었네. 이건 내 손녀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이사엘은 정말 예뻐!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예."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네. "킥킥, 그래, 그래. 자네도 보는 눈이 있긴 하구만. 자네 내 손녀딸 보다 예쁜 여자 본적있어?" "……." 솔직히 말하면 있다. 세레나. 라이레얼. 그리고 라나. 흠흠, 라나가 예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관점이서 봐서 그런 것이지, 결코 내가 로리타 콤플렉스여서 그런 것 아니다. 촌장의 딸이라는 이사엘도 예쁘긴하다. 정확히 말하면 귀엽다고 할까? 하지만 위에 예를 든 세 여인에 비하면, 상당히 딸리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라이레얼! 아마도 내 생각엔 라이레얼 보다 예쁜 여자는 세상에 없을 것 같다. 그 희고 부드러운 살결. 돈만 보면, 별빛처럼 반짝이던 레몬 빛 눈동자. 머쉬멜로우 같이 부드러운 입술. 커다란 가슴. 빵빵한 엉덩이.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나의 온몸을 애무하던 그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흠흠. 내가 또 무슨 생각을? "자네 왜 대답이 없나?" "아, 예. 정말 예쁩니다." 갑자기 들려온 촌장의 물음에 나는 라이레얼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촌장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껄껄 웃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자네가 데리고 살어!" "예! ……예?" 아니, 이 노인이 무슨 말을……? "그 정도면 몸은 실한 것 같고, 생긴 것도 그만하면 됐고……. 좋아! 결정했네! 자네 내일 이사엘과 결혼해!" 이 노인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나저나 요새 들어 왜 이렇게 혼인 상담이 많이 들어오는걸까? 라나는 같이 살자 그랬고, 세레나는 떠나지 말라 그랬고, 라이레얼은 부부 용병으로 나서자 그랬고. "……싫은데요." "아니, 왜 싫어?" 난 길게 끌기가 귀찮아, 한번에 끝내기로 했다. 이 말 한마디면 떨어져 나가겠지? "저 여자 경험 있습니다." 과거가 있는 남자를 누가 받아주겠냐? 아아! 남자의 과거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촌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 뭐 여자랑 잔 게 문제 될 일 있나? 남자라면 원래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봐야 하는 법이야." 촌장이 쉽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할 수 없이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서 해야 했다. "좀 많습니다." "많어? 얼마나 되는데?" "한 열명 정도……." "열 명? 으음, 생각보단 적구만. 괜찮네. 내 다 용서할테니, 이제부턴 이사엘만 바라보고 살게." 이렇게 되면, 얘기가 틀려진다. 난 하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저…… 사실 숨겨 놓은 자식이 있는데요." "자식?" 촌장은 나를 위아래로 훝어 보았다. 그리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이야?" "예. 물론입니다. 딸이 하나 있는데요, 이름이 라나에요. 지금 10살인데 어찌나 귀여운지, 깨물이 주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라나 같은 딸을 낳는 것. 솔직히 말하면 내 목표다. 라나야! 5년 후에 오빠가 찾아갈테니, 우리 결혼해서 너 같이 귀여운 딸 하나 낳아 행복하게 살자. "자네 지금 몇 살인가?" "열 일곱입니다." "딸이 몇 살이라고? "열 살…… 인데요." 앗차! 실수. "자네 꽤나 조숙했군." "저희 세대가 원래 좀……." "흠흠, 아! 지금 내가 손님 앉혀 놓고 뭐하는 짓이지? 미안하네. 늙을 만큼, 늙었더니 기억력이 영……. 자 아무튼 한잔 받게." 촌장은 탁해 보이는 곡주를 내 앞에 놓은 커다란 술잔에 가득 부었다. 아마도 곡식 찌꺼기를 긁어모아 발효시킨 것 같았다. 촌장은 자신의 술잔에도 한 가득 부은 다음, 잔을 입에 댔다. 꿀꺽꿀꺽- 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촌장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일부의 술은 입가를 타고 흘러 옷을 적셨다. 탁! "크아! 좋다!" 촌장은 탁자가 부서질 정도로 세게 술잔을 놓은 다음, 소매로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았다. 나는 멀뚱멀뚱 앉아서, 지금 내 앞에 놓인 술을 마셔야하나 고민했다. "뭐하나? 안 마셔?" 촌장이 날카롭게 물었다. 난 할 수 없이 한 모금만 마시자는 심정으로 술잔을 들어 입에 댔다. 그런데……. "좋아. 좋아. 더 쭈욱∼. 더 쭈욱∼. 어허! 어허! 남자라면 원샷이지!" 촌장이 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원샷을 해야했다. 난 쓴 입맛을 다시며, 잔을 내려 놓았다. 좋은 술 일수록 끝맛이 좋다고하는데, 이 술은 얼마나 안 좋은지 입 안부터 시작해, 목구멍까지 텁텁하게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 자네 하는 일이……?" "여행잡니다." "여행자? 내가 듣기로는 마법사라 그랬는데." "마법사는 부업입니다." "오호! 그런가?" "예." 촌장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술 잔이 반쯤 채워졌을 때, 촌장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거기 자네!" "예!" 촌장의 눈이 다시 풀렸다. "한잔 더 하겠나?"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촌장은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마법사라……, 마법사라……. 자네 몇 클래슨가?" "……." 난 촌장의 물음에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대체 이 노인이 클래스를 어떻게 아는거지? 내가 대충 알기로 이 마을 사람들은 마법은 물론이고 마법사 조차 구경도 못해본 사람들이다. 마법에 대해서는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무지하고, 심지어는 마법을 단순한 눈속임 정도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클래스를 안다는 것은 마법에 일부라도 안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면, 어디서 줏어 들었던가. 촌장은 내 얼굴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왜? 촌 구석 촌장 주제에 어떻게 클래스를 아는지 궁금한가? 뭐, 궁금해 할 필요 없어. 그냥 오래 살다보니 여기 저기서 줏어들었다고 생각해." "……예." "아무튼 몇 클래슨가?" 나는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게 2, 3 클래스 정도……. 하하, 제 나이에 마법을 익혀 봐야 얼마나 익혔겠습니까? 그냥 흉내나 조금 내는 수준이지요." "흐음, 2, 3 클래스라……." 촌장은 깊은 생각을 하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자네 늙은이 속이면 뭐가 남나?" "예?" "늙은이 속이면, 뭐가 남아?" "무슨 말씀인지……." "자네 내가 바보로 보이나? 하긴, 천재인 자네 입장에서는 내가 바보로 보일수도 있겠군." "아니, 저기……." "나 바보 맞네. 그러니까 신경쓰지 말고 제대로 말해보게. 자네 몇 클래스야?" 촌장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전부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자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3 클래스 맞아요.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거 아니에요?" 촌장은 술잔에 술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가 자네를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라, 자네가 나를 과소평가하는 거 겠지.": "예?" 촌장은 내 반문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난 이 마을 촌장이네. 이런 시골 구석진 마을에 촌장이여봐야 뭐 대단할 게 있겠나? 물론 없네. 재밌는 사실 하나 말해줄까? 사실 난 귀족일세." "예!?" 난 아까보다 더 크게 물었다. "뭐 귀족이라 그래봐야 재산도 없고 영지도 없는 거지에 불과해.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는 지독히도 노름을 좋아하셨지. 그래서……. 아아, 쓸데 없는 얘기는 관두고 간단하게 말해주지. 내 할아버지는 노름으로 재산을 다 날렸네. 그리고 아버지는 능력없는 주제에 돈 좀 벌어보겠다고 깝치다가 완전 망했고, 그리고 난!" 촌장은 씨익 웃었다. "자네가 보다시피 이 모양 이 꼴 일세. 자, 그럼 이제 자네도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두고 진실을 말해보게." "……." 촌장의 눈은 더 이상 술취한 늙인이의 눈이 아니였다. 사람의 생각을 간파하려는 듯한 느낌. 이 느낌은……. 그래. 한슨에게 받았던 느낌과 똑같군.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5 클래스." "……." 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촌장은 들고있던 술잔을 움켜쥐며, 말했다. "너 방금 뭐라고 지껄였냐?" 욕을 들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저 욕은 나에게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욕일테니까. 난 다시 말했다. "5 클래스." 촌장은 술잔에 남아있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뻘개진 얼굴을 찡그렸다. "지랄. 염병. 이런 육시랄! 내가 칠십년 넘게 살면서 별 미친 놈들을 다 만나봤지만, 이런 미친 놈은 또 처음보네. 씨팔! 세상에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 열 일곱에 5 클래스가 뭐냐? 5 클래스가? 이봐 너!" "……." "너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냐? 뭐 처먹고, 뭐 하고 다닌 놈이야? 사창가에서 계집질이나 하고 다녔냐? 아니면, 술 집에서 술만 퍼마시고 다녔냐?" "……." "니미 씨팔! 차라리 여섯 살에 계집애랑 빠굴 뜨고, 일곱 살에 애 낳아 길렀다는 말을 믿고 말지." 촌장은 화기가 치미는지 입 안으로 계속 술을 퍼부어댔다. 얼마 안가 술은 다 떨어졌고, 마지막 한방울이라도 마시려고, 술병 입구를 핥던 촌장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땠다. 한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촌장은 숨을 씩씩 내쉬며, 달아오른 술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난 지금 내 앞에서 욕을 지껄이고 있는 노인에 대해 궁금증을 느꼈다. 촌장은 내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느낌이 그러했다. 저 촌장은 대체 누구일까? 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라이타의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부턴 아껴써야 겠군. "촌장님은 누구시죠?" 촌장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코를 만지작 거렸다. "촌장? 나 말이냐? 니가 보다시피 몰락 귀족의 후예로 지금은 시골 촌구석에서 촌장질이나 해먹고 사는 노망난 늙은이지." "아닌 것 같은데요." 난 강하게 말하며, 촌장의 얼굴을 뜷어지게 쳐다보았다. 촌장은 멋쩍은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술기운이 확 깨는 구만. 흠흠, 아까 욕한 거 미안하네. 너무 충격적인 얘기여서 말이야. 그나저나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군. 그 나이에 5 클래스라……. 자네 진짜 나이가 몇인가?" 이젠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고 싶나 보다. "열 입곱 확실합니다." "그래? 그럼 지금 내가 대륙 최고의 마법사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건가?" "……." 촌장은 계속 코를 만지작 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눈치였다. 촌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뭐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네. 아까 말한데로 난 노망난 늙은이에 불과하니까. 그래도 젊었을 땐, 가문을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뼈빠지게 공부했지. 하지만 나중에 보니 남은 게 없더군.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있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은 술이 마시고 싶은지 계속 입맛을 다셨다. "잘린 팔을 붙일 정도의 마법이라면 최소 4 클래스 이상의 마법사여야지. 난 자네를 4 클래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네. 그런데 5 클래스라니…….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울다가겠군." "예!?" 난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확실하게 들렸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분명 그 미친 늙은이의 본명(本名)이다. 그 후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이름은 절대 잊을 수 없다. 그 눈빛! 마지막으로 나에게 마법과 지식을 건내 주는 순간, 번뜩거리던 눈. 그것은 죽어가는 자의 눈빛이 아니였다. 살아있는, 살아가는 자의 눈빛이었다. 그는 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랬을까? 난 더듬거리며, 물었다. "다,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거죠?" 촌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응? 뭐? 이름이라니? 아! 아이언스 이그리드?" "예." 숨도 못 쉴 지경인 나와는 반대로 촌장은 너털너털 웃음까지 터트렸다. "하하, 자네 지금 무슨 소리 하나? 세상에 아이언스 이그리드 모르는 사람도 있나?" "……." "아이언스 이그리드. 역사에 기록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마검사(魔劍士). 18살에 클래스 5를 마스터. 50살 쯤에 클래스 8마스터. 전신(戰神) 이라 불렸던 키에티트와 함께 활약해, 당시 속국에 불과했던 아이리스를 강남의 패자로 만듬. 뭐 빠진거 있나?" "……." "아! 루미아드 공주와의 로맨스는 빼기로 하지. 워낙 지겨워서 말이야." "……." 난 점점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 미친 늙은이, 아니,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 할 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그리고 젊었을 때, 꽤나 활약했다. 잠깐, 키에티트?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맞아. 세레나한테 들었지. 아이리스의 왕이었던 사람. 그러면 죽음의 마도사는? "죽음의 마도사는……?" "그건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별호 잖나. 사신 마도사(死神 魔道士)나, 악귀(惡鬼)도 별호고. 왜? 몰랐나?" 그랬었군. 어쩐지 그렇게 잘난 인간이 안 알려졌다 했어. 이제보니 나만 모르고 있었군. 아이언스 이그리드라……. "그럼 지금 그의 후손들은 지금 어디……?" 나의 질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난 탁자의 머리를 박고 곯아 떨어진 촌장의 모습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드르렁- 쿠울- 드르렁- 쿠울- 난 촌장이 코고는 것에 개의치 않고,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지금도 그 모습이 확실하게 기억난다. 190에 육박하는 큰 키에 흰 수염을 발 끝까지 드리운 노인. 나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쭈글쭈글한 얼굴과 거친 말투. 어느 것 하나 잊혀지지 않았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마도사. 믿기지가 않는다. 그럼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마법과 지식을 물려 받은 나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난 두 팔을 벌리고 크게 심호흡했다. 더운 공기가 입안으로 빨려들어오는 바람에 더욱 답답해졌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는 찰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예." 난 그제야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미첼이었다. 베라의 연인. 그는 곯아 떨어진 촌장과 나를 번갈아 살폈다. 난 그 모습에서 나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씀하시죠." "예?" "지금 저한테 말할 게 있는 것 같은데, 말하세요. 귀는 언제든 뚫려있으니까요." 미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집에 좀 잠깐 오실 수 있겠습니까?" "예." 난 대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첼의 집은 촌장의 집에서 10분 거리 정도였다. 미첼의 집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나를 반긴 것은 마샤와 그녀의 어머니였다. 둘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충열되어 뻘겋게 부어 있었다. 나와 미첼이 식탁에 앉자, 마샤의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요리를 내놓기 시작했다. 급해서 많이 준비는 못했는지 밀가루 음식들과 과일이 전부였다. 마샤와 마샤의 어머니가 자리를 비키자, 미첼은 내 앞에 놓인 컵에 우유를 따랐다.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차리진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난 미첼의 얼굴을 자세히 처다보았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게,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그리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당한 호감을 느끼게 했다. 나이는……? "몇 살이시죠?" "스물 다섯입니다." "그럼 저보다 많으시군요. 말 놓으세요." "아닙니다. 이게 편합니다." "그러면 좋을데로 하세요." 미첼은 계속 머뭇머뭇 거렸다. 낯가림이 심하고 나와 대화하는 것을 어색해하는 것 같다. 그는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저기……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마을 여자들을 구해주신거요. 원래 진작에 인사를 드려야 했으나, 제가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습니다." 겨우 그 얘기 할려고 그렇게 머뭇거린거야? 이 남자 진짜 한심하군.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닌데요 뭐. 게다가 저 혼자서 한 일도 아니고 상단 호위병들과 같이 한 것이니, 저에게 감사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난 정중하게 말했고, 미첼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베라와 마샤에게 대충 얘기 들었습니다. 산적들을 몰살 시킨 것도 전부 히로 씨가 한 일이라 하더군요." "마샤의 오빠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베라 누나의 약혼자시구요?" "예." 난 우유를 한모금 마신 다음, 뒷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 남자는 충분히 잘 알고 있다. 동생과 약혼녀가 전부 몹쓸 짓을 당했는데, 지금 이 남자의 심정은 어떠할까? 지금은 일단 무사히 돌아온 것 만으로도 기뻐하는 것 같다. "베라 누나와 결혼하실건가요?" "예?" "베라 누나와 결혼하실꺼냐구요?" 미첼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표정을 다 잡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남자를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일까? 저 선해보이는 인상 속에는 어떤 얼굴을 숨기고 있을까?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라이레얼 덕에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그 아름답고, 귀엽고, 다정한 모습 뒤에 그런 화끈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무섭다. "베라 누나를 사랑하시나요?" "물론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해 줄 만큼?" "……예." 미첼의 대답은 신념에 가득차 있었다. 그 모습은 거짓된 모습이 아니였다. 하지만 내 느낌에 그 대답은 나에게가 아닌 자신에게 들려주는 듯했다. 자기 스스로 베라를 사랑하고 있다고, 억지로 납득시키고 있는 것이다.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갑다. 난 왼쪽 눈을 비볐다. 쓰라린 고통 때문에 현재의 상황이 더 잘 이해되었다. "산적들에게 잡혀있던 여자들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는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요?" 미첼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미첼은 입술을 움찔거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 한참 후에야 미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압니다." "알아요? 그래도 베라 누나를 사랑하나요?" "……." "왜 대답을 못하지요? 아까는 모든 것을 이해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그건……." "그럼 제가 말해드리지요. 당신은 너무 순진해요. 너무 순진해서, 한 여자만 사랑하고 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순진함 때문에 당신은 여자의 과거를 인정하지 못해요. 당신은 지금 계속 대뇌고 있겠지요. '난 베라를 사랑해' '베라가 무슨 일을 당했던지 나와는 상관 없어'. 그렇게 하면서 억지로 자신을 납득시키려 하겠지요. 당신은 순진해서 베레 누나의 과거를 덮어주려 하겠지요. 하지만 그게 다에요." 미첼은 입을 벌린 채, 꼼짝 않고 있었다. 난 반쯤 타오른 담배를 컵 안에 던져 넣었다. "당신은 여자의 과거를 모른 채 해줄 수는 있어도 이해 할 수는 없는 사람이야. 당장은 사랑한다고, 위로해 준답시고 잘 해주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잊혀져. 그리고 나이가 들었을 때, 당신은 베라를 창녀 취급하겠지. 불쌍해서 받아줬더니, 걸레질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아니야!!!" 미첼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고는, 타오르는 안광(眼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 당신 말대로 나, 난 그 사실을 인정 할 수 없어. 다, 당신 말대로 난 그 사실을 덮어두려했고, 모른 채 하려했어. 하지만 난 베라를 사랑해.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베라를 사랑한다고!" 그는 미친 듯이 외쳤다. 저 모습은 자신에 대한 위선과 가식일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뭐하시고 계신거죠?" "……." "가서 베라 누나에게 말하세요. '당신을 사랑해. 나와 결혼해줘' 라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껄요. 빨리 가시는 게 좋을 거에요." 미첼은 눈을 번쩍떴다. 그리고는 바로 뛰쳐 나갔다. 그 모습에 더 이상 머뭇거림이나 두려움은 없어 보였다. 이것으로 충분한 걸까? 모르겠다. 아무튼 진실한 사랑이라면, 어떻게든 잘 되겠지. 난 탁자 위에 팔을 기대고 우유를 들이켰다. 거의 다 마셨을 때 쯤, 내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케엑!" 난 헛구역질을 하며 그것을 목에서 빼내었다. 난 그것을 본 순간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떤 미친 놈이 컵 안에다 담배꽁초를 버린거야?" "차린 거 한번 겁나게 많아 버리네. 내 평생 이런 상은 또 처음 받아보는군." 식탁에 차린 음식을 본 촌장이 한 말이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보내온 음식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대략 3일 정도는 먹을 양이었는데, 이것도 그나마 선별해서 받은 것이라고 한다. 다 받았으면 상다리 부러졌겠군. 지금 마을은 잔치 준비가 한창이다. 벌써 소까지 한 마리 잡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오늘밤 잠자긴 다 틀린 것 같다. "안 먹고 뭐하나? 아침, 점심 다 안 먹었으니 배고프지 않나?" "괜찮습니다." 배가 고픈 것은 사실이지만, 입맛은 별로 없었다. 지금 쯤 미첼은 어떻게 했을까? 베라에게 청혼 했을까? 난 사과주스를 한모금 들이켰다. 달작지근하고 맛있지만, 미지근한 게 마음에 안들었다. 이 곳에 냉장고가 있을 리가 없으니 이 정도는 참아야겠지. 하지만 찬 게 마시고 싶은데. 난 컵을 꽉 쥐어잡고, 마법을 시전했다. "아이스 Ice." 컵 안의 주스는 서서히 얼기 시작했다. 촌장은 흥미롭다는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컵 안의 주스가 거의 다 얼자, 난 주스 병에다 컵을 거꾸로 가져다 댔다. 컵 바닥을 톡 하고 건드리자, 안의 얼음은 쏙 빠져나와 병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얼음이 녹으면서, 주스는 차가워 질꺼다. "으음, 마법 쓰는 거, 간만에 보는군." 나도 간만에 써보는 것 같다. 얼음은 생각보다 금방 녹았다. 난 어느 정도 차가워진 주스를 다시 컵에 따랐다. 마법이란 거 생각보다 편리하구만. "이따 저녁에 축제를 벌일 꺼라네. 자네도 참석하겠지?" "예." "그럼 지금은 쉬게나." "그러지요." 난 주스를 한번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촌장이 자신의 집에서 묵으라고 끝까지 우기는 바람에 난 이 곳에서 자게 되었다. 촌장은 나를 커다란 방으로 안내하였다. 비어있는 방이었지만, 청소를 잘해 놓아서 그런지 깨끗해 보였다. 짚을 넣어서 만든 침대도 꽤나 푹신했다. 난 짐을 푼 다음, 침대에 앉았다. "방이 마음에 드나?" "예. 괜찮은데요." "마음데 든다니 다행이군. 이 방은 병에 걸려 죽은 내 아들과 며느리가 썼던 방일세." "예?" "그 땐 진짜 끔찍했지. 온몸에 붉은 반점이 나고 상처에선 고름이 질질 흘렀으니까. 뭐 그 후 깨끗이 청소했으니 별 신경쓰지 말게나. 그럼 편히 쉬게." 촌장은 방에서 나갔다. 으음, 솔직히 찜찜하긴 하다. 하지만 이런 것에 초월한지 오래다. 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그는 대체 누구일까? 이미 죽은 그는 나와 무슨 관계일까? 난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하나? 난 이런저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다가 잠들었다. 여긴 어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 때문에 귀가 멍멍했다. "으리야!" 무언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난 황급히 손에 든 스태프로 그것을 막았다. 카앙! 그것은 튕겨져 나갔고, 그와 동시에 내 몸은 뒤편으로 쏠렸다. 어느정도 거리가 생기자 난 '그것' 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낫이었다. 거대한 사신(死神)의 낫. 데스 사이즈. 그것은 은은한 붉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난 그 붉은 빛이 무엇인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낫은 사람의 피를 먹고 있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으며 살기(殺氣)와 예기(銳氣)를 키워나가는 것이다. 다시금 사신의 낫이 움직였다. 난 낫의 궤도를 정확하게 본 다음, 고개를 숙였다. 낫은 정확히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낫을 회수하려 하였다. 난 그 순간 스태프를 치켜 세웠다. 낫은 스태프에 걸렸고, 난 스태프를 든 손을 뒤로 뺏다. 예상대로였다. 낫이 끌려가면서, 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 머리를 붙였다. "죽어라." 그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난 손을 꺽어서 잡은 스태프를 그의 얼굴에 내리 찍었다. 퍼억! 그의 두개골을 깨는 데는 실패했다. 그 동안의 전투로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스태프의 끝은 정확히 그의 왼쪽 눈을 뚫고 뇌까지 파고 들었다. "으아아아!"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기울어졌다. 난 스태프를 놓고 그의 손에 들린 사신의 낫을 빼앗았다. 데스 사이즈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런 무거운 무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공격 패턴은 단순했던 것이다. 난 왼손으로 낫을 휘둘렀다. 서걱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목이 잘리고, 그 목이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 난 그의 눈에 꼬챙이처럼 박혀있는 스태프를 빼내었다. "으아아! ……의 개들을 몰아내자! ……님과 ……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 ……는 무적이다! ……은 우리의 것이다!" 함성 소리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적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쯤에서 완전히 끝내야 한다. 적의 사령관이 죽었다는 것을 알면 적들은 알아서 물러 날 것이다. 난 데스 사이즈 끝에 달린 창 끝을 바닥을 향해 찍었다. 푸욱- 창 끝에 그의 머리가 꿰어졌다. 난 낫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소리쳤다. "케이하아 마이츠는 죽었다! 이 싸움은 ……의 승리다!" "우와아아아!" 내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휘관이 대부분 죽은 상황이어서 그런지 적들은 질서 없이 후퇴하고 있었다. 이번 싸움으로 1, 2만 정도는 족히 섬멸했을 것이다. 난 데스 사이즈와 스태프를 늘어 뜨린 채, 말 머리를 돌렸다. 내 주위에 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난 그제서야 내가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온 몸이 피로 뒤덮혀있었다. 그녀가 싫어 할텐데……. 이 전투로 ……는 끝났다. 조금만 더 싸우면 강남 전역은 ……의 땅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반드시 그녀와……. 내가 얼마나 잔거지? 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은 꽤나 자라, 예전에 스포츠 머리에서 더벅머리로 멋지게 탈바꿈 하였다. 난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꿈을 꾸었다. 꾸긴 꾸었지만, 무엇을 꾸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 한참을 생각해 보았지만,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꿈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다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분이 더러워졌다. 으음, 아무래도 개꿈이었나 보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튀어들어왔다. 소녀는 내 모습을 보더니 당황해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죄송해요. 자고 계신 줄 알고 그만……." "아니야. 방금 일어났어." 소녀는 촌장의 딸 이사엘이었다. 14살이라니까 말 놓아도 되겠지. "지금 막 잔치가 시작 됐어요. 나오시겠어요?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으음, 인기인은 괴로워. 뭐, 어쩔 수 없지. 팬 써비스 차원에서 한번 쯤 나가주는 수 밖에. "갈게." "예? 정말이요? 이야, 잘됐다. 거절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뭐 준비하실 거 있으세요? 없으시죠? 그럼 빨리 가요." 아까 촌장에게 간다고 말했었는데. 못 들었나? 아무튼 상당히 발랄한 소녀군. "빨리 가요. 빨리요." "알았어." 거 참 무자비하게 재촉하는군. 짝짝짝짝- "와아아아!" 난 박수와 환호를 한 몸에 받으며, 입장했다. 잔치는 넓은 공터에서 벌어졌는데, 노인들부터 어린아이까지 대략 70, 80명 정도가 모여있었다. 중앙에 있는 화덕에는 고기를 굽고 있고, 왼쪽에 있는 화덕에서는 돼지 한 마리를 통채로 돌려가며 살을 태우고 있었다. 그 외에 술이나 과일 등도 충분히 마련해 놓았다. 대략 보기에 그 양은 여기 모인 인원 수에 맞춘 것 같다. 그리 풍족한 마을이 아니다보니, 낭비 풍조는 없나 보다. 공터에는 몇 개의 불대가 세워져 있었다. 지금은 해가 걸려있어서 괜찮지만, 나중에 해가 완전히 지면, 불을 피울 것이다. "제가 카라의 애미 되는 사람입니다. 정말 감사의 인사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아닙니다. 전 별로 한 일도 없는데요, 뭐." "전 수잔과 수젠의 어머니입니다." "예." "전 아버지." "예." "전 친척." "……예." "전 친구." "……예." "전 그냥 좀 아는 사람." "……예?" "전 모르는 사람." "……예!?" 나는 한 시간이 넘게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야 간신히 앉아서 쉴 수 있었다. 무슨 인간 관계가 이리도 복잡하냐? 잔치는 말 그대로 잔치처럼 벌어졌다.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고기 뜯고. 제일 신이 난 것은 아이들과 주당들이었다. 아이들은 평생 고기 구경 못해 본 것 처럼 허겁지겁 먹었고, 주당들은 고기 안주를 집어먹으며, 마음껏 술을 퍼마셨다. 충분히 흥겨운 잔치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즐거워했고 나도 즐거웠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격리. 저들과 나는 너무나도 떨어져 있는 존재였다. 나는 다만 손님일 뿐이다. 이 기분을 느낀 순간, 난 이곳을 빨리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러분! 잠시만 주목해 주십시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을 때 쯤, 한 남자가 가운데로 나와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난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왁자지껄 떠들던 소리가 거짓말 처럼 멎었다. 미첼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크게 외쳤다. "저는 지금 여기서 중대한 발표를 하나 하려 합니다!" 그래. 너는 발표해라. 나는 들어주마. "저 미첼은 베라와 결혼하겠습니다!" 그래. 너는 결혼해라. 나는……, 결혼? 장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이건 군중심리다. 옆사람이 조용히 하니까 자신도 따라서 조용히 하는 거다. 따라서 한 사람이 박수치기 시작하면, 다 박수를 친다. 짝짝짝- 난 천천히 두 손바닥을 부딪히기 시작했다. 조금씩 박수소리가 커졌다. 그리고는 한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아!" 사람들이 모자를 집어던지고 술잔을 뒤집어엎는 행동을 하는 동안, 나는 베라에게 다가갔다. 베라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숙이고 있었다. 난 베라의 옆에 서서 말했다. "뭐해요? 빨리 가봐요." 베라는 옆에 선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다음,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 하지만 난……." "자신감을 가져요. 주늑들지 말고. 누나는 예뻐요." "……." "빨리 가서 말해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 "설마 이대로 슬픈 추억으로 간직할 생각은 없겠지요?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사랑은…… 좋은거에요." "……." 베라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난 그냥 웃어보였다. 베라는 갑자기 쿡쿡 거리며, 웃었다. "고마워." "천만에요." 베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람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눈을 크게 뜨고 둘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베라는 미첼의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미첼은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다음, 베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를 사랑해. 나와 결혼해줘." 아까 내가 말해준 대사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하는군. 개성 없는 자식. 베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아아!" 난 웃음을 지었다. 사랑이란 역시 좋은거다. 미첼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베라를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사람들은 연신 결혼하라는 말과 축하한다는 말을 외쳐댔다. 으음, 결혼이라……? 난 느린 걸음으로 가운데로 나섰다. 내가 앞으로 나서자, 마을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두 손을 흔들어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는 서로를 껴안고 있는 연인을 보며, 말했다. "방금 저 남자가 저 여자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럼 양가 부모님들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여자 측은 부모가 안계시는군요. 그럼 남자 측!" 그러자 한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 나야 좋지요! 베라 같은 아이가 또 어딨다고. 난 무조건 찬성이요!" "우와아아!" 다시 한번 함성이 터져나왔다. 저 아주머니는 미첼의 어머니다. 그럼 아버지는 어디있지? 설마 모자(母子)가정인가? "이봐, 베르겐은 어딨어? 베르겐!" "여깄는데." 난 말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벌개진 얼굴로 곯아 떨어져 있었다. 옆에 있던 아저씨는 그 남자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말했다. "이봐! 일어나봐! 자네 아들 미첼이 베라와 결혼한데!" "무어……?" 남자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자네 아들이 베라와 결혼한다고!" "뭐? 내 아들이 결혼한다고?" 남자는 고개를 갸웃갸웃 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해! 결혼 해!" 그리고는 다시 픽 쓰러졌다.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또 터져나왔다. 어찌되었건 부모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내 장담하건데, 저 사람 술에서 깨어나면 분명 기억 못한다. 나중에 '뭐? 내가 결혼을 허락했다고? 내가 언제?' 이런 말 지껄일 게 뻔하다. 뭐, 그건 그때 일이니 그때 가서 알아서 하겠지. 난 함성 소리가 잦아든 틈을 타 다시 소리쳤다. "그럼 이렇게 된거 그냥 지금 여기서 결혼식까지 올리죠! 마을 사람들 다 모여있겠다, 먹을 것도 충분하겠다, 뭐가 문제입니까!?" "우와아아!" 그 어느 때 보다 큰 함성이 터져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결혼 해!'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되자 당황한 것은 당사자들이었다. "대체 무슨 말입니까? 지금 결혼식이라니……." "쇠뿔도 단김에 빼고, 카드도 한번에 긁으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냥 지금 해요." "하지만 아무 준비도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후한 말에 제갈량이 말하기를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했습니다. 뜻은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이루어주는 것은 하늘이다. 당신들은 그냥 하늘이 이루어주기나 기다리고 있어요. 무슨 준비를 한다 그럽니까?" 솔직히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렵고 유식해 보이는 말을 골라서 쓰다보면, 상대방이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아니, 일을 꾸몄어야 하늘이 도와주죠." 맞는 말이다. 조금 강적이군.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결코 안된다. "옛 성현들께서 말씀하시길 결혼은 붙이고, 이혼은 말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유명했던 누군가가 말하기를 결혼은 밑져야 본전이라 하였습니다. 무조건 지금 하세요. 손해 볼 것도 없는데, 뭘 그리 망설이십니까?" "……." 이쯤에서 군중을 동원해야 한다. "이분들이 지금 당장 결혼한답니다!" "와아아아!" 아, 귀 아프다. "지금 무슨 소리를? 아니에요! 아닙니다, 여러분!" "그만들 두세요!" 두 남녀는 황급히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요, 쏟아진 우유요, 싸버린 광이요, 굼뱅이에게 걸은 마권(魔圈)이다. 아무튼 이것으로 두 남녀는 오늘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이건 전부 내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그럼 주례는 아는 것 많고, 나이도 많아,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이 마을에 촌장님게서 해주시겠습니다!" "저기 촌장님께서는 지금 이 모양이신데요." 한 남자가 촌장을 가리켰다. 촌장은 아까 미첼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완전히 곯아 떨어져 있었다. 어! 이러면 얘기가 틀려지는데. 그럼 주례는 누가 서? 난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지금 촌장님께서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주례를 보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구 주례보고 싶으신 분?" 지원자는 없었다. 그런데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이상했다. 그들의 눈빛에서 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저 눈빛 위험해. 잘못하면 내가 주례를 서야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지도. 난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결혼은 인륜지대사로서 이렇게 즉석에서 팝콘 튀기 듯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두 남녀가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 시간을 가지고, 양가 부모들께서는 며느리와 사위감을 미리 평가를 해 놓은 다음, 혼수 준비를 비롯하여 축의금과 다이아몬드 반지 결혼 지참금 등은 거의 필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즉석에서 화투판 벌이 듯이 벌이는 결혼식을 결코 인정 할 수 없을 뿐 더러, 3분 요리식 결혼은 후에 조속한 이혼을 발생시킨다는 점을 여러분들게 주지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 볼 뿐이었다. 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지금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나도 지금 주례 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저들과 마찬가지로 선택권이 없다. 어쩌겠냐? 까라면 까고, 박으라면 박아야지. 아! 태어나서 별 짓을 다해보는구나. 주례까지 서보게 되다니. 이제 안한 짓은 결혼식 밖에 없나? "수고했네." "예." 난 촌장이 따라주는 과일주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촌장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운 다음, 술병을 내려 놓았다. 이사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촌장에게 말했다. "아까도 많이 마셨으니까, 정말 조금만 마셔야 되요. 알았지요?" "그래. 걱정하지마라." "이 분도 쉬어야 하니, 너무 오래 붙잡아두지 마시구요." "알았으니, 너는 들어가서 쉬거라." "진짜 조금만이에요. 조금만." 이사엘은 방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 '조금'을 강조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거다. 그나저나 아까는 정말 황당했다. 내 평생 주례를 서게 될 줄이야. 후우, 아까 일만 생각하면 아직까지 아찔하다. 대체 내가 어떻게 주례를 섰더라? "흠흠, 그러니까 신랑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오나, 혹은 전쟁, 내란, 폭동, 이상 기후. 지각 변동, 혜성 충돌 등이 일어 나더라도 영원히 신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예!" 대체 결혼식에서는 왜 뻔한 질문을 주고 받는 것일까? 그냥 간단하게 키스만 하고 끝내지. 아, 이제는 또 뭐라고 말하냐? 그냥, 되는데로 말하자. 설마 어떻게든 되겠지. "그럼 신부는 눈사태, 산사태, 낙석, 우박, 화재, 홍수, 흉년 등의 자연 재해는 물론이거나와, 혹시라도 신랑이 살인, 강도, 방화, 절도, 납치, 감금, 유괴, 스토킹, 사기 도박, 야바위, 사채 놀이, 공무 집행 방해, 음주 운전, 중앙선 침범, 안전벨트 미착용, 과속, 뺑소니, 신호 위반, 불법 운전면허 취득, 불법 무기 소지, 공정 거래법 위반, 신분증 위조, 학력 위조, 마약 밀매, 세금 포탈, 도굴, 문화재 밀반출 등의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지른다 하여도, 영원히 신랑을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하는가?"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그러게 누가 나보고 주례 보게 하래? 시킬 놈을 시켜야지. "……예." 오오, 그래도 사랑한데. 역시 사랑이란 위대해! 아까 말한 범죄를 다 저지르면 대체 몇 년 형이냐? 아니, 몇 년 형인 건 둘째 치고 별이 몇 개냐? 아무래도 사회에 적응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 할 것 같군. "이것으로써 두 남녀의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안 섰다면 더 기뻤겠지만, 기왕 섰으니 기쁜 척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은 농촌입니다. 농촌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농사 지어먹고 사는 동넵니다. 그럼 잘먹고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열심히 농사지으면 됩니다. 농사를 둘이서만 짓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여러 분들도 아시다시피 지금 이 시대에는 농사 짓는 기계가 없습니다. 혹시 경운기 보신 분? 안 계시죠? 저도 안 계실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농사를 열심히 짓기 위해서는 일손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럼 일손을 늘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 역시 답은 간단합니다. 얘를 많이 낳으면 됩니다. 농경 사회에서의 재산은 땅과 자식입니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잘 키운 열 아들, 땅 문서 부럽지 않다' 라는. 못들어 보셨나요? 이런 가방끈이 짧으시군요. 혹시 국졸(國卒)이세요? 전 그래도 고등학교 재학중입니다. 지금은 물론 휴학중이구요. 사실 저는 휴학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시대의 흐름이 그것을 원하더군요. 물론 나중에 졸업장 딸껍니다. 우리 사회는 대졸자(大卒者) 아니면, 사람 취급을 안해주거든요. 흠흠, 아무튼 부부는 매일 같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여, 조기 출산과 다산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국가 경제의 발전과 사회의 전반에 걸친 중요한 일입니다. 국민이 없으면 나라가 존속이 될 수 없듯이, 새로운 새싹들이 마구마구, 무자비하게 태어나야 나라가 발전합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진짜 막 낳진 마시구요, 그냥 적당히 기를 만큼만 낳세요. 뭐, 설마 이 시대에 인구 억제 정책을 쓰는 것은 아닐테니. 아무튼 이것으로 신랑 미첼 군과 신부 베라 양의 결혼이 성사 되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자, 이제부터 실컷 먹고 즐깁시다!" "우와아아!" 아마도 신랑, 신부는 물론이거니와 마을 사람들 전부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결혼식 주례사였을 것이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사촌형 결혼식 할 때 잘 봐두는 거였는데. 그 때 주례사 말할 때, 조는 바람이 이게 무슨 꼴 이냐. 잘 들어 둘걸. "정말 감명 깊은 주례사였네." "제가 감명 깊을 정도였으니, 그 쪽이야 오죽 하시겠습니까." 촌장은 웃으며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촌장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내일 떠날건가?" "예."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디로 갈 생각인가?" "글쎄요." 목적지가 없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네." 촌장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천천히 술을 마셨다. 한동안 우리는 말 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나는 멀쩡했지만, 촌장은 낮부터 마신 술로 인해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술잔을 놓지 않았다. 촌장은 눈을 개슴츠레하게 뜨고 히죽 웃었다. "너 내 얘기 좀 들어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촌장은 꼬부라진 혀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난 말이야 한 때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지. 그땐 진짜 미친 듯이 공부했어.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어. 가문을 부흥시키고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러 말이야. 그런데 이게 뭐야? 실컷 죽어라고 공부하고 나니 아무도 몰라 주더군. 암만 능력이 있으면 뭘하나? 써먹을 기회가 없는데. 난 그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썼지만, 계속 마시다보니 이것도 먹을만 하더군. 그래서 계속 먹었지. 계속 먹다보니 맛있더군. 그래서 더 먹었지." 촌장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난 좌절했어. 여태까지 내가 해온 것이 한번에 무너저 내렸지. 정말 열받더군. 그 땐 진짜 공작이고 백작이고 다 죽여버리고 싶었어. 왜 나를 안 써준거지? 왜 내 능력을 무시한거지? 난 훌륭해. 많은 것을 알고있어. 그런데 왜 나는 안되는거지?" 촌장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의 얼굴은 술기운과 분노 때문에 완전히 시뻘개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나에게 별로 감흥을 주지 못하였다. 촌장의 말은 실패자나 무능력자가 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촌장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순간적으로 술을 깬 것 같았다. "난 억울하고 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냉정해지더군. 10년이 넘은 시간이 흘렀을 때, 난 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알고보니 난 그리 대단한 놈이 못되었어. 그저 책에서 얻은 지식만 가지고 깝죽거리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던거야. 한마디로 병신이지. 의지는 있되 능력은 없는. 나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한 나라의 재상이 아닌, 한 마을의 촌장이야. 지금은 그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촌장은 혀도 꼬지 않았다. 난 갑자기 술기운이 얼굴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촌장이 술에서 깨자 내가 취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의지라는 것이 있다면 병신은 아니죠." 촌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고마운 말이군. 하지만 차라리 병신이 었으면 좋겠어. 의지가 없다면 좌절도 없었을테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나는 촌장이 왜 나에게 신세한탄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술을 따르던 중 술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입맛만 다셨다. 난 아까부터 궁금했던 사실 하나를 촌장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손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뭐?" 촌장은 의아하다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손이라니? 그의 후손은 없어. 아이언스라는 성을 쓴 것은 오직 이그리드 하나 뿐이야." "예?" 촌장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술을 들이켰다. "자네 역사 공부 좀 해야겠군. 아니, 그게 아니라도 책 좀 읽게.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아이리스 루미나드의 사랑이야기 관련 소설만 해도 수십권이 넘는데. 잘 들어둬.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50평생 살면서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오직 하나 뿐이야. 키에티트의 누나인 루미나드 공주. 어디까지나 전해저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이 공주는 기가막히게 예뻤다고 하네. 어떻게 보면 제 3기 전란은 여자 하나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어. 루미나드 공주가 기가막히게 예쁘다는 얘기를 들은 아토리아의 왕이 공주를 첩으로 달라고 했거든. 당연 보내주기 싫었겠지. 50살 먹은 늙은이 한테 17살짜리 공주를, 그것도 4번째 첩으로 보내라니, 나 같아도 안 보냈어. 그런데 지가 싫으면 어쩔꺼야? 아이리스는 아토리아의 속국에 불과한데. 국력만 따져도 무려 80가 넘게 차이나. 군사력은 말할 것도 없었지. 그런데 이 때 이그리드가 나타났네. 키에티트는 당장 이그리드와 손을 잡았고, 둘은 빠른 속도로 주변의 다른 속국들을 통합했어. 그리고는 강남 전역을 휩쓸었지. 나중에는 아토리아가 열이 머리 끝까지 올라 20만 군대를 일으켜 강남에 보냈네. 그럼 이제 어떻게 됐는지 아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촌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말을 이었다. "완전히 개 박살났네. 후에 다시 강을 건너 돌아왔을 때는 병력의 3할 이상을 잃은 뒤였어. 20만 중 살아돌아 온 사람이 15만도 안됐지. 그리고……, 아! 맞아.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손이 어디있냐고 물었었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의 후손은 없네. 대가 끊긴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식을 못 낳았거든. 그렇다고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고자라는 것은 아니네. 문제가 있었다면 루미나드 공주한테 있었지. 이 여자가 몸이 하도 약해서 얘를 낳을 수 없었거든. 몸이 약한 것도 약한 것이지만 더 큰 문제는 아예 얘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거지. 여자는 물론이고 처남이자 왕인 키에티트까지 첩을 들이라고 권유했지만 이그리드는 끝까지 루미나드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았어. 그리고 루미나드가 죽자 자신도 모습을 감췄지. 뭐, 그 뒤로는 얘기가 많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얘기도 있고, 흑마법을 열심히 익혀 루미나드를 다시 살려냈다는 얘기도 있지. 심지어는 신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드래곤을 친구 삼아 남은 여생을 보냈다는 얘기도 있어." "마지막 것이 신빙성이 제일 높군요." "뭐!?" "불가능한 건 아니잖습니까. 드래곤을 친구로 삼는다는 게." 촌장은 황당하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드래곤을 친구로 삼어? 차라리 신이 되었다는 말을 믿고 말지." 믿거나 말거나. 촌장의 눈이 급속도로 풀어졌다. 잠깐 깼던 술기운이 다시 몰려온 것이다. "자네는 어느 쪽에 속하나?" "……." "나는 의지는 있되 능력은 없는 인간이지만, 자네는 어떤가?" 난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능력은 있되 의지가 없는 인간이죠." 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병신이군." 쿵-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난 왕궁의 동쪽 화원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가볍다. 기분이 좋아 진다. 난 손을 코에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다행히 피냄새는 나지 않았다. 피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그녀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피냄새를 싫어했다. 그러기에 난 그녀를 만날 때 마다, 수십번이고 목욕을 해야했다. 만개(滿開)한 꽃들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오셨어요?" "어."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안개꽃들 사이에 서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안개 꽃과 그녀의 모습이 잘 어울린다. 그녀는 천천히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눈이 빛을 발했다. 옅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 그 눈동자는 새하얀 피부와 심한 대조를 이루는 동시에,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핏기가 없는 창백한 입술. 새하얀 피부. 허리까지 내려온 백금발의 머리카락. 하얀 드레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갸냘픈 몸매가 위태로워 보인다. 난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얼마나 계실건가요?" "글세." 난 그녀를 끌어 안았다. 그녀의 몸은 힘없이 내 가슴에 파묻혔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생각이든다. 난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눈을 쳐다 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꽤 치열했다고 들었어요. 몸은 괜찮은 거에요?" "어. 충분히 멀쩡해." 그녀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제발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요. 저는……, 저는……." 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마. 천하에 나를 죽일 수 있는 놈은 없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전 두려워요. 당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다시는 당신을 못보게 되면 어쩌나 하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 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은 천천히 흘러 내렸다. 난 그런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랑해."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난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사랑해요.' 난 눈을 번쩍 떴다. 짚과 흙으로 만들어진 투박한 천장의 모습이 어둠속에서 어슴프레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는……? 그래. 여기는 촌장의 집이었지. "제길. 꿈이었나?" 난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탁자 위에는 어젯밤 잘 놓아둔 지팡이와 청룡도, 망토가 있었다. 난 망토를 걸쳐입고, 청룡도를 허리에 찼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손에 들고 배낭을 맸다. 난 나가려고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망설여야 했다. 뭔가가 빠진 것 같은데? 아주 중요한 게 말이야. 그게 대체 뭐지? 난 뭔가 빠트린게 있나, 방안을 뒤져보았다. 한참을 뒤지고 나서야, 난 빠트린 물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순간, 침대 위에 놓여진 조그만 물건이 보였다. 난 가까이 다가가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 보았다. "이 자식……." 나의 친구이자, 동료이자, 부하이자, 비상식량인 라이코스였다. 앵무새지만, 본인은 죽어라 매라 우기는 영물. 어제 분명 탁자 위에서 자는 걸 확인했는데, 대체 언제 침대로 기어들어 왔을까? 매 주제에 진짜 잘도 잔다. 어떻게 서서 자는 것도 아니고, 약 먹은 병아리 처럼 픽 쓰러져서 자고 있을까? 난 왜 이런 특이한 자세로 잠을 자는 지에 대해서 묻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이 놈의 대답은 뻔하다. '영물이니까.' 그래 너 잘났다. 난 자고 있는 라이코스를 배낭 속에 처 넣었다. 깨면 알아서 기어나오겠지. 난 조용히 집 밖으로 나섰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별빛은 점점 희미해지며, 나에게서 멀어졌다. 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아침밥을 먹은 다음,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눈을 뜬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어차피 저들에 기억 속에는 내가 남아있을 테고, 내 기억 속에는 저들이 남아있을 테니, 굳이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겠지. '사랑해요.' 걷는 내내 그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 내 귓가에 맴돌면서도 멀어져가는 목소리. 새하얀 피부. 새하얀 드레스. 백금발의 머리카락. 그녀는 누구였을까? 난 꿈 속에 나타났던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떠올려 보았다. 희미했다. 그녀 주위의 모든 것들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뭔지 알수는 없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그 여인을 알지 못했다. 본 적이 없음은 물로니거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 조차 보지 못했다. 하긴,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이 세상에 존재 할리는 없었다. "으음, 모종의 여인과 키스하는 꿈이라?" 꿈은 현실의 불만을 해소시켜 주는 공간이라 던데? 혹시 난 욕구불만? 흠흠, 무슨 소리! 나 같이 건전한 청년이 욕구불만이라니! 그러면 나는 왜 한번도 본 적 없는 여자와 키스하는 꿈을 꾼거지? 혹시, 그녀가 내 이상형? 그래, 맞아. 그녀가 내 이상형일 수도 있어. 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 될 정도의 미모. 다소곳한 성격.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 맞아! 완전 내 이상형이야! 그 이상형과 키스하는 꿈을 꾸다니. 키스. 키스. 키스. 순간, 나는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허억! 어떻게 이런 일이……." 입을 맞춘 순간, 잠에서 깨다니? 이런 재수없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니, 어떻게 그 순간에 내가 깨어날 수 있는거지? 입술을 겹쳤으면, 다음 작업으로 들어가야 하는건데……. 제길, 망했다. 이제 그녀를 어떻게 다시 만난단 말인가! 난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으윽, 실수다." "뭐가요?" "뭐긴 뭐겠어요? 키스를 하려는데 그 순간 잠에서 깬……. 예?" "뭐야? 라이레얼과 키스하는 꿈을 꿨나보구나." 난 방금 말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시죠?" "후훗, 그 사이에 또 까먹은거야?" 다시 한번 목소리를 듣자 누군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베라였다. 그런데 베라가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베라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수수한 옷과 흰색 머리 수건이 그녀와 잘 어울렸다. 그녀는 내 앞에 서서 내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인사나 하려고." 난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전에도 그랬으니까. 전에도 아무 말 없이 라이레얼을 두고 사라졌으니까." "그래요?" "응." 베레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점점 짙어지면서 장난기가 섞였다. 베라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나와."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 네 명의 여인이 모습을 들어냈다. 난 그녀들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몰래 떠나는 것은 물건너 갔군요." 그녀들은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베라 언니의 말이 맞았네요." 난 주위를 둘러 보며, 말했다. "설마 더 있는 건 아니겠죠?" 수잔이 대답했다. "후훗,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니." "다행이군요." "호호호." 여자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수잔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나에게 내밀었다. "저기, 이거……." "이게 뭡니까?" "먹을 걸 좀 쌌어요. 전 처럼 굶으면 안되잖아요." 으음, 비참했던 그 때가 떠오른다. 난 왜 또 식량 없이 여행 할 생각을 했을까? 난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여자들은 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베라는 아직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 본 다음, 나에게 말했다. "고마워." "뭐가요?" "모든 게. 우릴 구해 준 것도 고맙고, 미첼과 결혼시켜 준 것도 고맙고, 주례 서 준 것도." "하하, 주례 얘기는 하지 마세요." 베라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평생 기억에 남을 결혼식이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라이레얼이 왜 너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아." "……." "붙잡아도 소용 없을 것 같으니, 붙잡지는 않겠어." 베라의 눈가에 조금씩 물이 고였다. 베라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잘 가." "잘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난 여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몸을 돌렸다. 이제 진짜 이별이다. "안녕히 계세요." 저 여자들이 전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란다. 그나저나 이젠 어디로 가냐? Part 2. 꿈 속의 여인 "아, 힘들다. 야! 우리 잠깐 쉬면서 도시락이나 까먹자." "……." "빨리 좀 걸어. 굼뱅이를 삶아 먹었니? 왜 이렇게 느려터졌어?" "……." "야! 나 배고프다니까. 밥 줘! 밥!" "제발 좀 닥쳐주겠니?" "싫은데." "왜 싫으니?" "난 영물이니……. 으악! 무슨 짓이야!?"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라이코스의 목을 잡아 비틀었다. "이거 놔! 이거 안 놔!? 너 내가 누군 줄이나 알어?" "니가 누군데?" "난 영물……. 으악!" 난 라이코스의 목을 한바퀴 비틀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라이코스의 얼굴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라이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뼈가 부러져 죽은 것이다. 허억! 내가 이런 잔인한 짓을 하다니? 설마 본 사람은 없겠지? 난 사방팔방을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죽은 라이코스의 시신(屍身)을 끌어 안고 통곡했다. "흐윽, 미안하다 라이코스. 이건 어디까지나 실수이자 정당방위였으니 저승에 가서라도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그리고 너의 시체는……. 너의 시체는……. 내가 고기 한 점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어주마. 아아! 라이코스는 갔습니다. 시끄럽던 그 쫑알대던 소리는 정말로 나를 열받게 하였습니다. 아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라이코스는 죽어서 고기를 남기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난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아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감고 잠시 묵념했다."하느님 아버지. 오늘도 저에게 일용할 매고기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누가 매고기야?" "응? 그야 당연 너……. 어? 니가 왜 말을 하는거냐?" 라이코스는 어느새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말 할 줄 아니까." 어디선가 들어본 답변이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라이코스가 살아있는 걸까? 분명 머리를 한바퀴 돌렸는데. 혹시 이 놈……. "너 부엉이였구나!" "내가 왜 부엉이야!?" "부엉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목을 한바퀴나 돌렸는데 살아있을 수 있는거지?" 라이코스는 배를 쭉 내밀며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영물이니까." "……." 이렇게 해서 라이코스를 잡아먹는 것은 또 물건너 가고 말았다. 아무튼 나는 이번 일로 인해 이 놈이 부엉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부엉이가 어떻게 말을 하는 걸까? "야, 이길로 쭉가면 뭐가 나오냐?" "글세, 내 기억에는……. 아! 맞다! 그게 나온다." "그게 뭔대?" "그거 말이야, 그거." "그거가 뭔대?" "그게 그거지, 뭐." 퍽-! "왜 때려!?" "너 또 맞을래?" "……." 역시 라이코스에게 물어본 내가 멍청했다. 라이코스는 눈을 부라리며 열심히 빵을 쪼아 먹었다. 그런데 그 먹는 폼이 흡사 닭과 같았다. 닭이라……. 혹시 이 놈의 정체는 닭? 으음, 충분히 현실성이 있어. "너 닭이지?" 라이코스는 바로 소리쳤다. "아니야!" "먹는 폼 보니까 닭 확실한데." "이, 이건 어렸을 때 버릇이 되서……, 아무튼 난 닭 아니야!" "그래. 너 닭 아니야. 너 닭 아니니까, 진정해." 이 놈은 분명 닭이다. 에라이, 닭 같은 놈아! 우리는 식사를 끝마치고 일어섰다. 라이코스가 말하 길, 이 길을 따라 쭈욱 가다보면 커다란 도시가 하나 나온다고 한다. 자신은 영물이니까, 영물 말을 믿으라는 말까지 덪붙이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믿음이 안생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놈이 영물이라는 것 자체를 못 믿겠다. 니가 영물이면, 난 신이겠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으니 어림잡아도 15시간 이상은 지난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다리가 빠져라 걸었지만, 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이게 길인지 조차 의심스럽다. 지금으로부터 10시간 전 쯤, 라이코스는 자신이 지름길을 안다며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지름길은커녕 어째 빙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야, 이거 길 맞어?" "당연하지. 이거 길 확실해." "그런데 왜 걷는 사람이 나 밖에 없냐?" "그건 이 길이 지름길이여서 그래." "지름길이면 사람이 더 많이 다녀야 되는거 아니냐?" "듣고 보니 그렇네." 이 놈과 대화하다 보면, 내가 바보가 되는 느낌이다. 매가 말을 해봐야, 새대가리가 어디로 가냐? 나는 거의 일주일 동안을 열심히 헤맨 끝에 간신히 헤론드란이라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지름길이라는 결코 길 같지 않은 길을 헤매는 동안 식량은 라이코스가 구해다 주었다. 그래도 꼴에 영물이라고 사냥을 해왔는데, 잡아온 것이 전부 새 종류다. 참새, 종달새, 딱따구리. 이 놈은 동족으로서의 자비심 마저 팔아치운 놈이었다. 무서운 자식. 어떻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족을 식량으로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덕분에 맛있게 먹긴 했다만. 그런데 더 황당한 점은 그 새고기를 이 놈도 먹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새가 새를 먹다니! 내가 개가 개고기를 먹고, 돼지가 돼지고기를 먹은 모습은 봤어도 새가 새를 먹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언제나 대답은 하나였다. '영물이니까.' 아무튼 이제 새고기가 맛있다는 것을 았으니, 나중에 기회 봐서 이 놈도 잡아먹어야 겠다. "어디로 갈꺼야?" "글세. 일단 여관이나 알아봐야지. 니 덕에 고생만 실컷 했으니까." "쳇! 이렇게 일찍 도착한 게 누구 덕인데? 나 아니었으면, 넌 아직까지도 죽어라 걷고 있었을걸." "웃기고 있네." "야! 아무튼 여관이나 빨리 잡어. 나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어." 그래. 내가 여관에 들어 가기만 하면, 아주 펄펄 끓는 물 속에 담궈주마. 자식이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매 주제에 무슨 목욕이야! 사람들은 길을 걷는 도중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새가 말하니까 신기한가 보다. 난 라이코스에게 말하지 말라는 주의를 준 후 여관을 찾아 걸었다. 헤론드란은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였지만, 전체적으로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바쁘게 걸어다니고, 거리에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고,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도 나고. 왠지모르게 예감이 좋다. 이 도시가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여기서 며칠 머무르며 행로를 정해야겠다. "거기 자네 잠깐 나 좀 보세." 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돗자리 하나를 깔아 놓고 앉아있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나이가 얼마나 들었는지 수염과 머리카락, 심지어는 눈썹까지도 하얗게 새어있었다. 난 노인에게 다가갔다. "자네……, 점 볼 생각 없나?" "예!?" "아, 점 볼 생각 없냐구?" "점…… 이요?" 뭔가가 이상하다. 어째 무지하게 익숙한 광경이다. 언젠가 한번 이 같은 일을 겪었던 것도 같은데……. 혹시 이게 데자뷰 현상인가? "자네 관상이 아주……, 너!" "예?" 내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던 노인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리고는 앙상한 두 손으로 내 머리를 움켜쥐고 돌려가며 보았다. "너 그때 그놈이지!" "예!? "너 그때 그놈 맞잖아!" "예, 아니……." 난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어! 그때 그 점쟁이!" "그래! 날세! 나야!" 노인은 반갑게 외쳤다. 이 노인은 내가 세레나의 집에서 나온 직 후, 만난 그 노인이 확실하다. 나는 낯선 땅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게 너무 반가워, 노인의 두 손을 꼭 움켜잡으며 말했다. "어르신. 그 동안 기체 만수무강하셨는지요?" "나야 언제나 만수무강하네만, 자네는 어떤가?" "저야 뭐 언제나 잘 지네지요.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왜? 난 여기 오면 안되나?" "하하,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냥 한번 물어본 겁니다." "으음, 그런가? 아무튼 기왕 만났으니 점이나 보고 가게." "예. 그러지요." 나는 금화를 몇 개 꺼내 노인 앞에 내려 놓고, 손을 내밀었다. "아! 그 손 말고 오른손. 자네 점 처음보나? 왜 자꾸 왼손을 내밀어!" "죄송합니다. 오른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다 보니." 노인은 약 한달 전과 마찬가지로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보며, 열심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어디보자, 상판은 그 정도면 되었고, 명줄도 이만하면……. 이런이런 이게 아닌데, 흐음, 그래도 이 정도면 먹고 살만은 하겠군. 어디보자 어디보자……." 한참을 들여다 본 후, 노인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못 본 사이에 고생을 많이했구먼." "아, 예. 고생이라면 정말 많이하긴 했지요." "거 얼마나 고생을 많이했는지, 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 "예? 상도 바꿔요?" 노인은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아! 당연하지! 세상 만물이 변화한다는 것이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절대 진리인데, 상이라해서 안 변하겠는가?" "듣고보니 그렇네요." 노인은 내 얼굴을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 눈을 뒤집어 까보며 말했다. "으음, 내가 보기엔 말이야. 자네 뱀에 물렸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야 점궤에 그렇게 나오니까." 뱀? 내가 뱀에 물린 적이 있던가? 분명 누군가 물리긴 물린 것 같은데. 난 라이코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야, 우리 중 뱀에 물린 경험있는 사람?" 라이코스는 침묵했다. 난 다시 물었다. "그럼 뱀에 물린 경험있는 영물?" 라이코스는 날개 한쪽을 번쩍 들었다. "저요!" "맞아. 니가 물렸어. 난 안 물렸고." 난 다시 고개를 돌려 노인에게 말했다. "저기요, 어르신. 아무래도 점을 잘못보신 것 같은데요. 전 뱀한테 물린 적이 없습니다." 노인은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라이코스를 주시했다. "자네 어깨에 앉아있는 그 놈은 뭔가?" "아, 이 놈 말씀이시군요. 이 놈 앵무샙니다. 그래도 새 주제에 공부를 좀 했는지, 말도 할 줄 알아요." 갑자기 노인의 날카롭게 빛났다. "말하는 새라……. 팔면 비싸겠구만."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맛있어 보이는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사실 이게 바로 고기 좋고, 육질 좋아, 맛도 좋기로 소문난 청안백우조라는 매입니다." 노인은 얼굴에 흥미롭다는 빛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이게 바로 청안백우조구만. 어쩐지 깃털에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고기에는 육수가 주르륵 흘러 나로 하여금 군침을 자아 내게 하더군." "시끄러 영감탱이!" "오호! 진짜 말도 하는군. 그럼 자네가 이 놈한테 양해를 좀 구해주겠나? 잡아먹어도 되냐고." 라이코스는 갑자기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난 라이코스가 도망치지 못하게 두 날개를 꼭 잡은 다음, 물었다. "혹시 너의 살점을 조금만이라도 떼어 줄 용의 없니?" "안돼! 없어! 결코 없어! 절대 싫어!" 라이코스는 고개를 열심히 저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나는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이 놈이 거부하네요." 노인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어쩔 수 없군. 그럼 하던 얘기나 계속하세. 내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 맞아. 뱀에 물렸다는 말을 했었지." "예.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뱀에 물린적이 없습니다." "맞아. 자네는 뱀에 물린 적이 없어." "예!? 아니, 아까와는 말씀이……." 노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쯧쯧, 내가 말한 뱀은 그 뱀이 아닐세." "예?" 뱀도 이 뱀 저 뱀 나눠져 있나? "내가 말한 뱀은 꽃뱀일세." "예!? 꽃뱀이라면……." "너 여자한테 물린 적있지!?" "예!?" 노인은 눈을 부릎뜨며 외쳤다. 그것은 자신의 말이 결코 틀릴리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넌 강간당했어! 맞지!?" "……예!?" 강간……. 내가 강간(强姦)을 당했던가? 생각해보니 당한 것 같기도 하군. 그것은 분명 싫다고 거부하는 나를 라이레얼이 마음대로 가지고 논 것이니까. 하지만 그때 당시 정황을 분석하자면, 화간(和姦)에 속하는 것 같은데. "넌 꽃뱀한테 물려서 순결도 빼앗기고, 돈도 빼앗기고, 마음마저 빼앗겼어! 내말 맞지!" "……예!?" "아! 왜 자꾸 되물어! 맞아, 안 맞아? 그것만 말해!" "저기, 맞기는 한데……." 그럼 라이레얼이 꽃뱀이었단 말인가? 으윽, 내가 독사보다도 더한 꽃뱀에 물렸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쯧쯧, 불쌍한 놈. 어쩌다 꽃뱀에게 물려가지고는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했나. 괜찮아, 괜찮아! 이제부터는 다 잘될꺼야." 노인의 말에 나는 두 귀가 번쩍 트였다. "정말요? 정말로 다 잘될까요?" "아! 속고만 살았어! 내 말만 믿어! 자네는 이제부터 무조건 잘 되!" "칫! 그 말을 누가 믿냐?" 난 준비해 놓았던 노끈으로 라이코스의 주둥이를 묶은 다음, 가방 속에 처 넣었다. 그리고는 노인에게 바짝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구체적으로? 그럼 복채를 더 내게." "그 동안 많이 쪼들렸나 보죠? 갑자기 복채 타령을 하다니." "험험, 요새 노후를 준비하는 중이거든. 돈 많은 자네가 좀 양해해주게." "전에는 복채를 많이 받는 것도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때는 여윳돈이 조금 있어서 생활의 윤택함이 좌르르 흘렀었네. 하지만 요즘은 이 장사도 잘 안되고 해서 빈티가 좌르르 흐르고 있어. 알겠나?" "알겠습니다." 난 노인의 앞에 100골드에 가까운 돈을 탈탈 털어 놓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노인은 돈을 쓸어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얼굴을 가까이 붙이자 노인은 내 귀에다 대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건 정말 극비일세. 내 원래 천기를 누설하면 안되지만, 자네에게만은 특별히 말해주겠네."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 이거 장사꾼들이 맨날 써먹는 방법이다. '원래 이 가격에 드리면 안되는데 손님께만 특별히 드리겠습니다. 어디가서 이 가격에 샀다는 말 절대 하시면 안되요. 그러면 저 상가에서 매장당합니다.' 이 말을 듣고 기쁜 마음에 샀는데, 나중에 2, 3 배는 더 돈을 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거 판 놈은 사기죄로 진짜 매장 당하는 경우가 생긴다. "자네가 앞으로 성공하려면 말일세……." "예." 나는 긴장감과 초조함을 억누르며 노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노인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본 다음, 아주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일단 여관에 가서 짐 풀고 푹 쉬게. 이 골목 쭈욱 가서 왼쪽으로 돌면 '좋은 인연을 맺어주는 만남의 광장' 이라는 여관이 있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써비스도 그만이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거기 종업원이 끝내주게 예쁘다는 거지. 어때 자네도 마음이 끌리지? 자 그럼 어서 가게." "……." "뭐 하나 안가고?" "그게 답니까?" "아니, 뭐가?" 나는 노인의 천역덕스러운 대꾸에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아니, 뭐가' 라니요? 100골드나 드렸는데 그게 다에요? 분명 아까는 천기누설 어쩌구 했잖아요."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 점궤가 이렇게 밖에 안 나오는데, 난들 어쩌겠나? 탓할려면은 나를 탓하지말고 자네 상판을 탓하게. 자네 상판에 그렇게 밖에 안 써져 있어." "억울합니다. 교묘하게 책임을 전가하시다니. 어르신께서 하신 일은 분명 과대, 허위 광고에 속합니다. 저는 이 일을 도저히 묵과 할 수 없으므로 소비자 보호 센터에 신고하겠습니다. 제가 신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YMCA 아주머니들 전부가 달려옵니다." 내가 협박조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눈을 감은 채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래. 신고하려면 신고해. 난 아무 잘못 없어." 이건 완전 똥배짱이다. 배 째고 싶으면 째라는 거다. 이럴 수가! 내가 멀쩡하게 생긴 할아버지한테 사기를 당하다니. 역시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무서운 세상. 내가 멍청한 얼굴로 계속 바라만 보고 있자, 노인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크게 호통을 쳤다. "아! 안 가고 뭐해! 장사 방해하는거야 뭐야!?" 난 노인의 박력에 밀렸지만, 이대로 물러 날 순 없었다.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못 갑니다. 구체적인 답변을 주실 때까지 전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노인의 얼굴에 분노가 나타났다. 노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 자네를 생각해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군. 좋아! 그냥 말하겠네. 너 나랑 만나고 헤어진 그날, 밤에 여자랑 잤지!" "예!?" "아! 잤어, 안 잤어!?" "자, 자긴 했는데요." "맞아! 잤어! 그리고 그 여자 인간이 아니지!? 맞지!?" "예. 인간이 아니긴 아닌데……." "그 여자 하프엘프지!?" "그걸 어떻게……." "그 여자 머리랑 눈깔이 누런 색이지!?" "레몬 색이긴 한데……." 노인의 목소리는 귀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컸다. 그 바람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 여자 가슴크지!?" "예……. 뭐 그런 것 같긴 한데……." "그 여자 예쁘지!?" "예쁘긴 합니다만, 그걸 어떻게……." "그 여자 키 크지!?" "큽니다." "그 여자 몸매 좋지!?" "환상입니다." "그 여자 능숙하지!?" "예? 뭐가요?" "뭐긴, 뭐야. 밤일이지! 능숙해 안 능숙해!?" "저기, 그게……. 굳이 따지자면 능숙한 쪽에 속하는 것 같은데요……."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사람들이 더 모이기 시작했다. 모인 사람은 어느새 10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노인은 관중의 눈길에 힘입었는지 더욱 박력있고 기운이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여자 귀 길지!?" "예. 보통 사람들보다는 길더군요." "그 여자 살결 희고 부드럽지!?" "끝내줍니다." "그 여자 가슴 부드럽고 탄력있지!?" "예!?" "아! 빨리 대답해! 부드럽고 탄력있지!?" "……예." "그럼 만졌을 때 기분은 어땠어?" "감동적이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좋아. 그럼 마지막 질문. 너 그날 그 여자랑 일곱……." 난 황급히 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노인 완전히 쪽집게 도사다. 대체 어떻게 라이레얼 살결이 희고 부드럽다는 것과 여자 가슴이 부드럽고 탄력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노인은 자신의 입을 가로막은 내 팔을 치우며, 외쳤다. "아! 왜 막어!? 넌 그날 잠자리에서 그 여자랑 분명 일곱……." 난 다시 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나와 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어지는 노인의 말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난 노인의 입을 막은 손에 힘을 꽉 주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제가 잘못했습니다. 쪽팔리니까 제발 그 얘기는 하지 마세요. 그날 밤은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난 천천히 노인의 입을 막은 손을 풀었다.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흠흠, 알았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내 더 이상은 말 않도록하지. 그나저나 젊다는 건 정말 부럽군. 나도 전성기 때는 다섯 번까지는 해봤네만……." 노인은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 용기를 잃지 말게. 그 정도 정력이면 어디가서 꿇리지는 않을테니……." "어르신. 제발 그만." "알았네." "그럼 전 이만.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둘러 싼 관중들을 헤치고 내 갈 길을 걸어갔다. 조금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니 십여 명의 관중들이 서로 자신이 먼저 점을 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저 노인 당분간은 안락한 노후 생활을 보낼 것 같다. 나는 노인이 말한대로 '좋은 인연을 맺어주는 만남의 광장' 이라는 여관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무지하게 긴 이름을 가진 여관이다. 간판 갚에 세배는 더 들겠군. 다행히 여관은 멀지 않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왼쪽으로 돌아서 조금만 걸어가자, 바로 '좋은 인연을 맺어주는 만남의 광장' 이라고 써진 커다란 간판을 매단 2층짜리 건물이 나온 것이다. 난 빨리 쉬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여관에 가까워 질수록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여관 입구 쪽에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은 방을 잡지 못해 줄을 서고 있는 모습은 절대 아니였다. 나는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서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았다. 족제비 같이 생긴 놈들 셋이 한 여자를 둘러 싸고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자는 약간 곱슬진 파란색 단발머리에 편해 보이는 바지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뒷모습 밖에 안 보여서 잘 모르겠지만, 몸매는 상당히 갸냘프다. 그리고 여자 치고는 키가 상당히 크다. 약 175 정도. 나보다 크잖아! 족제비 같이 생긴 세 놈은 밥맛 없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여자에게 치근덕거렸다. 그제서야 나는 대충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분명 저 세 놈은 불량배다. 그리고 저 여자는 예쁘다. 불량배는 예쁜 여자에게 찝적거린다. 그리고 여자는 당연 싫어한다. 하지만 싫어한다고 포기할 불량배가 아니다. 그렇게 쉽게 포기 할 것 같았으면 애초부터 불량배 짓 안 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요약을 하자면, 싫다는 여자에게 불량배들이 의지와 끈기와 신념을 가지고 찝적거리는 상황이다. 나는 그냥 여관에 들어가기로 했다. 도와줘도 될 법 하지만 이젠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 것을 질색이다. 솔직히 너무 뻔한 것 같다. 여자가 위험에 처하면 정의의 사도가 등장하는 것. 가끔씩은 등장 안 할 때도 있어야, 불량배들도 먹고 사는 거다. 그래. 그냥 눈 딱 감고 모른채 하자. 괜히 귀찮은 일에 말려들면 나만 손해지. 나는 그렇게 마음 먹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이봐, 아가씨. 아가씨 내가 누군 줄 알아? 그냥 잠깐 얘기나 좀 하자는 건데 왜 자꾸 빼." "조금 후면 오빠가 오실거에요." "킥킥, 오빠가 온다구? 아가씨를 보면 오빠가 어떻게 생겼을 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그러지 말고 잠깐만 시간 내줘. 이렇게 부탁할께." 나는 이 상황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여인을 도와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다시 생각을 했고, 저 불량배들이 단순한 불량배가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 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놈들은 옆에 말을 한 마리 씩 끼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네가 쾌걸 조로도 아닌데 왜 말을 가지고 다니겠나? 돈과 권력. 둘 중 하나를 등에 업고 있다. 둘 다 일 수도 있겠군. 난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분명 저 중 하나가 돈이나 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리더고 나머지 둘은 그 놈에게 붙어다니며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 먹는 쓰레기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여자에게 주로 치근덕거리는 놈은 한 놈이었다. 눈이 길게 찢어져 있고, 짙은 노란색 머리를 뒤로 넘겨서 끈으로 묶은 놈. 얼굴은 그런대로 무난하게 생긴 편이었지만, 쭉 찢어진 눈과 말려 올라간 입고리 때문에 밥맛 없어 보였다. 그 놈 양쪽에 서 있는 놈들은 체격이 상당히 좋았다. 저 놈들은 보디가드 겸 친구인 것이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저 놈들의 우정이란 것은 뻔하다. 상황이 불리해 지면, 서로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 저 놈들의 우정이다. 난 기분이 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 왼손은 어느새 칼자루를 움켜 쥐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칼자루를 놓았다. 그냥 모른 척 하는 편이 좋다. 돈이든 권력이든 저 놈들이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면 건드려 좋을 게 없다. 어차피 저 여자는 나와 조금의 연관도 없다. 난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돌아서 여관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한 놈이 지른 소리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뭘봐!? 구경 났어? 빨리 꺼져!" 갈색 머리의 남자가 크게 소리치자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자리를 떴다. 잠깐 사이에 여관 앞에는 나와 불량배 세, 여자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자리를 뜨는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그냥 멀뚱멀뚱 서 있었다. 갈색 머리의 남자는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넌 뭐야, 새꺄!? 뭐 얻어 먹을 게 있다고 여기서 알짱거려? 빨리 안 꺼져!?" "어이, 좋은 말 좀 써, 듀칸. 여기 계신 아가씨가 놀래잖아." "하하, 미안." 나는 흥미가 생겨 그들이 말하는 걸 계속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내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자, 갈색 머리의 남자는 다시 소리쳤다. "빨리 빨리 꺼져, 새꺄!" 나는 순간 울컥했지만, 다행히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뭘 노려봐!? 눈 안 깔아? 너 죽고 싶냐?" "조용히 해." "하지만 저 새끼가……." "됐어. 그냥 놔두면 지가 알아서 꺼지겠지. 자꾸 너 때문에 말이 끊기잖아. 그게 아가씨께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나 알아?" "미안." 금발 머리가 약간은 짜증이 난 것 같은 말투로 말하자 방금 전까지 길길이 날 뛰던 갈색 머리는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난 그 모습이 재밌어 피식 웃었다. 그러자 갈색 머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치켜떴다. "저는 당신들과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요. 여관으로 들어가겠어요." 여자는 한 걸음 앞으로 걸었지만, 바로 불량배들에게 가로 막혔다. "비켜주세요."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아가씨. 얼굴 좀 반반하다고 자꾸 튕기면 서로 재미없어. 난 참을성이 있지만, 이 친구들은 별로 참을 성이 없거든. 딱 차 한잔 같이 하면 돼. 차 한잔만 같이 하면 조용히 보내주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어. 어때 아가씨?" 난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옆을 지나가는 동안 나는 호기심이 생겨 살짝 고개를 돌려 보았다. 대체 어떻게 생긴 여자길래 저런 쓰레기들한테 추근덕거림을 당하는지 알고 싶었다. 여자는 곤란한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입맛을 다시며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여자는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 여자……. 낯이 익어. 여자는 아름다웠다. 피부의 핏줄이 전부 파괴된 듯 살결은 하얗다.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붉다. 커다랗게 뜬 눈 안에서 반짝이는 옅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 그 눈동자는 나에게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몸매는 갸냘프며, 얼굴은 갸름한 계란형이다. 그 모습은 마치 곧 깨질 것 같은 유리 같았다. 상당히 이지적인 미모였다. 나는 이상하게도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주 친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분명 어디선가 만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 한가지 확실 한 것은, 나는 저 여자를 알고 있다. 저 여자는……. "야! 뭘 뚫어지게 쳐다봐? 빨리 꺼져!"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한 순간에, 기분이 하강곡선을 그렸다. 난 한 걸음씩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대체 어디서 봤더라……? 여자와 나의 거리가 다섯 걸음 정도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넌 뭐야? 진짜 죽고 싶냐?" 갈색 머리였다. 난 반쯤 치켜뜬 눈으로 녀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켜." "뭐?" "비켜." 갈색 머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내가 누군지 알어?" "비키라고 말했다. "뭐?"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달았다. 나는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발도(拔刀)를 함과 동시에 녀석의 머리를 날려버리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 때문이었다. "거기서 뭐하는거냐, 제시?" "아! 오빠." 녀석들과 나의 시선은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키가 2m가 넘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키는 매우 컸지만, 몸에 균형이 잘 잡혀있는 덕에 키가 크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대신 강하고 무식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파란색 머리카락은 완전히 헝클어 늘어뜨려 놓았고, 턱수염과 구렛나루는 손질을 안해서 마구자비로 자라 있었다. 허리춤에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활동하기 편하게 반팔 티를 입고 있는데, 팔의 근육이 장난이 아니였다. 근육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보디빌더들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안쪽으로 탄탄하게 붙은 근육은 상당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내가 알기로는 저런 근육이 더 강하다. 보디빌더들의 근육은 단순히 근섬유만을 키운 것이다. 그렇게 몸이 터질 듯이 근육이 붙어있으면, 근육의 무게와 부피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다. 단순한 주먹 싸움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일검(一劍) 승부시에는 별 도움이 안된다. 진짜 근육이란, 오히려 근육의 부피가 작다. 그리고 밖으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 붙는다. 그건 예전 홍콩 최고의 스타였던 이소룡을 보면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그의 덩치나 체형은 일반인과 비슷하다. 그는 그 체형에서 온 몸이 근육질이다. 같은 근육질이지만 보디빌더와 이소룡을 같이 세워 놓으면 이소룡이 왜소해보인다. 그렇다고해서 이소룡이 보디빌더 보다 힘이 약하지는 않다. 보디빌더의 근육을 쓸데 없이 양만 늘린 근육이라면, 이소룡의 근육은 최대한 양을 줄이고 질을 높힌 근육이다. 같은 힘을 낼 수 있다면, 근육의 크기는 작은 게 좋은 것이다. 지금 저 남자의 체형을 보자면, 흡사 이소룡과 같았다. 몸에 군살은 하나도 없고, 최대한 부피를 줄인 근육이 몸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남자는 들고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여자에게 말했다. "왜 나와 있어? 그냥 여관에 있으라고 했잖아. "죄송해요." "그런데 이 놈들은 뭐냐? 아는 놈이야?" "아니요."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여자의 옆에 섰다. 가까이 서게되자, 그 남자 키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머리와 목이 더 있었다. 어림 잡아도 40cm 이상 차이난다. 남자의 키는 대략 2m 10cm 정도였다. 여자는 남자의 뒤쪽에 붙었고, 남자는 나와 세 놈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흰 뭐하는 놈들이냐?" 세 놈은 이미 저 남자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하지만 셋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인지 이내 평정을 회복했다. 금발 머리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말했다. "니가 이 아가씨의 오빠인가보지?" 남자는 마지막으로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는 앙상한 뼈마디만을 남긴 채,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렇다고 해두지. 그럼 이제 아까 내가 한 질문에 답변을 좀 해주겠나? 니들 뭐하는 놈이냐?" 금발 머리는 재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너 우리가 누군지 알아?" 남자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넌 내가 누군지 아냐?" "뭐?" 남자는 뼈만 남은 사과를 금발 머리의 얼굴에 던졌다. "꺼져." 순간, 셋은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그들의 옆에 서있는 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털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게 말 볼 줄 모르는 내가 봐도 꽤나 좋은 말 같았다. "괜찮은 말이군. 아껴서 타라. 이만 들어 가자, 루시." "예."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여관으로 이끌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금발머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거기 서!"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너 내가 누군지……." "니가 누군지는 알고 싶지 않아.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금발 버리 옆에 있는 갈색 머리와 붉은색 머리가 주먹을 쥐었다. 갈색 머리야 아까 깝죽거리던 것을 생각하면 별로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붉은 머리는 과묵하고 침책해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 보였다. 남자는 셋이 공격할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고 씩 웃었다. 거의 비웃음에 가까울 정도로 여유있는 웃음이었다. 남자는 주먹을 쥔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말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퍽-! 나는 말을 공격해 길길이 날뛰게 해서, 그 틈을 타 도망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남자의 주먹이 말의 머리에 닿는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나며 말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풀썩 소리와 함께 쓰러진 말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말의 머리는 보기 좋게 찌그러져 있었다. 두개골이 함몰되어 뇌 속으로 파고 든 것이다. 남자는 주먹을 폈다. 조금도 아프지 않은 모습이었다.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꺼져." "제, 제길. 두고보자." 금발 머리는 그렇게 외치며, 황급히 말을 타고 도망쳤다. 붉은 머리도 여전하 과묵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랐고, 말이 죽어서 타고 갈게 없어진 갈색 머리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두 다리를 열심히 놀렸다. 이제 대낮의 여관 앞에는 남자와 여자, 나, 그리고 죽어 나자빠진 말 한 마리가 있을뿐이엇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 보았다. 순간, 여자와 나의 눈이 맞았다. 난 아무 말고 할 수 없었다. 옅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 쓸쓸하고 따뜻한 느낌. 분명 언젠가 만났어. 대체 언제였지? "이 녀석은 뭐야, 루시?" "아!"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이 놈도 한 패냐?" "아, 아니에요. 이 분은 절 도와주려 하신걸요." "그런데 왜 여기 계속 서 있냐? 야! 너 뭐야?" "예? 전 그냥 여관에 들어가려고……." "그래? 그럼 빨리 들어가." "예." 난 대답을 하고 아까부터 들어가려 했던, 여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천천히 그들 곁을 스쳐갔다. 여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여자 대체 누구지? 분명 아는 여잔데……. 여관은 노인이 말한대로 깔끔했다. 나는 일단 식사를 먼저 하기로 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잠시 앉아있자, 종업원으로 보이는 소녀가 쪼르르 달려왔다. "뭐 드시겠어요?" "닭 종류로 주세요. 요즘 들어 새가 좋아졌거든요." "으음, 그럼 닭 감자 조림은 어떠세요?" "좋아요. 그걸로 가져다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대략 15세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노인 말대로 상당히 예뻤다. 흠흠, 그런데 그 노인 설마 손녀딸 같은 애한테 흑심을……? 주문이 끝난지 얼마 안되서 한 남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이었다. 남자는 나를 보더니 씨익 웃으며, 여자를 끌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내 앞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남자는 칼을 식탁 구석에 올려 놓으며, 어느새 꺼내든 사과를 베어 물었다. "뭐 시켰냐?"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 나한테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대답했다. "닭 감자 조림이요." "맛있겠군. 우리도 그걸로 시킬까?" "그렇게 하세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남자는 계산대 옆에 앉아있는 소녀에게 외쳤다. "이봐! 여기 주문받아!" 소녀가 일어서려는 순간, 계산대에 서 있던 주인은 소녀를 말리고 자신이 직접 걸어왔다. 주인이 옆에 서자 남자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친구랑 같은 걸로 두 개." 주문이 끝났는데도 주인은 가지 앉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계속 안절부절 했다. 남자는 주인을 한번 힐끔 쳐다보았다.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십니까? 주문 끝났으니까 가시죠." 주인은 결심을 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손님. 죄송하지만, 나가주셔야 겠습니다." "뭐!?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어제는 잘만 재워주더니, 지금 와서 왜 그러는거지?" 주인은 억지 웃음을 지었다. 표정 관리 하기가 상당히 힘든지 볼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정말 죄송합니다. 돈은 전부, 아니 두 배로 돌려드릴테니 저희 여관에서 나가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는지 인상을 풀었다. "무엇 때문인지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주인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까 손님과 시비가 붙었던 남자가 하나스엘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하시라인으로 이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 바닥에서 그 자한테 잘못보이면 계속 장사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는 조용히 물러 갔지만 분명 패거리들을 이끌고 다시 들이닥칠겁니다. 손님께서도 빨리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역시 믿는 게 있으니까 설쳐댔던건가? "그거 재밌군." 남자는 웃고 있었다. 남자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사과를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이봐, 주인장. 그럼 나한테 잘못 보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는 손을 움켜쥐었다. 특별히 힘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냥 단순히 손가락을 오무리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반쯤 남은 사과는 완전히 뭉그러진 채 과즙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인은 화들짝 놀랐다. 남자는 씨익 웃으며 주인에게 말했다. "당신이 어찌되는 나하고는 상관 없어. 빨리 음식이나 가져와." 남자의 눈은 반쯤 치켜 떠있고, 입꼬리는 약간 위로 말려올라간 상태였다. 그 모습은 굉장한 살기를 느끼게 했다. 주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 났다. "이걸로 닦아요." "어, 고마워." 남자는 여자가 건내준 손수건으로 손을 닦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모든 남자들이 한번 쯤은 만나보길 희망하는 병약한 미소녀의 모습이었다. 얼굴은 상당히 예쁘다. 하지만 절세의 미녀까지는 아니였다. 미모만 보고 따지자면은 라이레얼이 우세하다. 하지만 이 여자는 보통 여자들과는 다른 약간은 이지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여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여자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누군가요?" "아!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안했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름이나 좀 알지. 내 이름은 웰리스다. 그리고 여기 이 얘는 내 여동생 루시. 지금은 여행 중이야. 그럼 이제 니 이름이나 말해봐." 루시…….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걸까? "제 이름은……." 루시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히로입니다." "오호! 히로. 웃기는 이름이군. 뭐 너보다 더 특이한 이름 가진 놈들도 많으니까 상심하지마." "아이언스……." "뭐?" "아이언스…… 히로." 웰리스와 루시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웰리스는 오른손을 탁자 위에 걸치며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뭐? 너 귀족이야? 성을 쓰게? 그리고 내가 알기로 아이언스는 성을 쓰는 사람은 한명 밖에 없는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전 마법삽니다." 그 말에 루시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웰리스는 재밌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오호! 마법사? 그럼 그 지팡이는 마법 지팡이겠군." "예." "그럼 지금 몇 클래슨가?" "5 클래스 마스터." "오오! 5 클래스 마스터. 어린 나이에 굉장하군. 그럼 스승은 누구지? 설마 독학으로 배운 건 아닐테고." "이그리드." "뭐?" "아이언스 이그리드." "오오! 니 스승이 아이언스 이그리드였군. 그래, 맞아.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제자라면, 그 나이에 5클래스 마스터라는 것도 이해가 가지." 웰리스는 조소를 지었다. 루시는 말 없이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 거렸다. 정상적인 사고가 힘들어졌다.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기운이 전부 빠져나갔는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내 얘기를 좀 들어보겠나? 보다시피 난 검사야. 내 스승은 전신(戰神)이라 불리던 키에티트지. 그러고보니 너와 나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가 되는군. 니 스승 이그리드와 내 스승 키에티트가 친구였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난 그의 밑에서 검술을 배웠는데, 지금 실력은 단신(單身)으로 백만 군대를 상대할 정도지. 2년 전에는 일검(一劍)으로 십만을 도륙한 적이있어. 지금은 아마도 백만 쯤은 가볍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이 정도면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제자이자 클래스 5 마스터인 너에게 명함 정도는 내밀 수 있겠지?" "충분합니다." "킥킥, 그래?" 웰리스는 내 말을 완전히 농담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농담 같아 보였다. 100년 전에 사라진 사람의 제자라니……. 하지만 루시의 표정이 약간 이상했다. 놀란 듯한 표정. 설마 내 말을 믿은건가? 루시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그리드는 살아있나요?" "아니요. 돌아가신지 약 2개월 정도 됐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오호! 그럼 이그리드가 150년이 넘게 살았다는 건가? 어디보자 올해 죽었으면……, 153 살이군. 루미아드도 없으니 긴긴 외로운 밤을 어떻게 달랬을까? 100년 동안 자위했으면, 양손이 완전히 부르텄겠군." 옆에서 웰리스가 빈정거리듯이 말했지만, 루시는 개의치 않고 다른 것을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그를 만났나요?" "적색 산맥입니다." "적색 산맥이라면, 크로니스의 영지군. 그 말은 이그리드가 레드 드래곤 밑에서 꼬봉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 그 반대 일 수도 있겠군. 아니면, 드래곤과 죽이 맞아 우정을 맹세하고 서로 친구 사이로 지냈나?" "맞습니다." "뭐!?" "친구로 지냈는지 아닌지는 잘 몰라도 둘은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웰리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죽음의 마도사께서는 이제 드래곤까지 친구로 삼으셨군. 내 평생들은 얘기 중 제일 황당한 얘기야. 차라리 니가 드래곤 레어에 들어 갔다가 용돈 좀 얻어서 나왔다는 얘기를 하지 그래?" 웰리스는 여전히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하지만 이 인간은 원조 쪽집게 도사인지 전부 답만 골라서 때려 맞추고 있었다. "그것도 맞습니다. 진짜로 용돈도 주더군요." "그 성깔 드럽기로 소문난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가 너한테 용돈을 줬다고?" "예." "기왕이면 잘드는 칼도 하나 꽁짜로 받았다 그러지 그래?" 진짜 쪽집게다. 이젠 두려울 정도다. 분위기가 자꾸 농담을 하는 식으로 흘러가자, 나도 이제부턴 농담 식으로 받아 넘기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아주 황당한 칼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 칼은 잡은 상태에서 마나를 주입하면 전기가 치지직 흐릅니다. 그리고 저 아닌 다른 사람이 칼을 붙잡으면, 엄청난 양의 전류가 몸 속으로 들어와 몸 속의 수분을 전부 증발 시킵니다. 전에 제가 아는 사람 한명이 칼을 붙잡았는데 바로 몸이 터져서 죽더군요. 쇠를 진흙처럼 송송 썰어버리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겠군요." 그러자 웰리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오오! 그거 참 좋은 칼이군. 혹시 그거 블루 드래곤의 뼈로 만든 것 아닌가? 전기가 흐른다고하는 걸 보니 블루 드래곤의 뼈인 것 같은데." 이 인간 완전 괴물이다. 농담은 농담인데 내용은 진담이다. "맞습니다." "그럼 혹시 지금 자네가 차고있는 칼 아닌가? 손잡이가 퍼런 걸 보니 맞는 것 같은데." "역시 맞습니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아니, 뭐 그 정도야 보통이지. 그런데 한번만 잡아봐도 될까?" "안됩니다." "아아, 깜박했네. 자네 아닌 다른 사람이 만지면 몸에 전류가 흘러 터져 죽는다 그랬지?" "그렇습니다." "으음, 그거 참 아깝군. 블루 드래곤 뼈로 된 칼을 한번 만져보고 싶었는데." 우리가 그렇게 말은 농담이고 내용은 진담인 대화를 주고 받고 있을 때, 루시는 고개를 숙인 채 손톱 끝을 살짝 물어 뜯고 있었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더 지났을 때, 요리가 도착했다. 우리는 대화를 중단하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난 식사를 하는 틈틈히 루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쾅-! "저 새끼들이야!" 내가 수저로 감자를 떠먹는 순간, 갑자기 문이 부서지며 20여 명의 남자가 들이닥쳤다. 덕분에 감자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난 인상을 찡그리며 수저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앞에 앉은 웰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들은 우리가 앉은 식탁 주위를 포위했다. 구석이여서 벽을 등지고 있으니 실제 포위당한 범위는 180 도 정도다. 완전 포위만 아니라면, 한번 해볼만하다. 벽으로 도망칠 수는 없지만, 벽은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이 새끼. 아까는 잘도 까불었겠다." 금발 머리가 말했다. 저 놈 이름이 뭐였더라? 하나스엘이었던가? 맞아. 그런 것 같군. 아버지 힘만 믿고 설쳐대는 병신. 저런 놈들은 진짜 밥맛이다. 우리 주위를 포위한 남자들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확실히 이렇게 천장이 낮고 걸리적 거리는 것이 많은 곳에서는 장검보다는 단검이 유리 할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싸워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자는 놔두고 이 두 새끼는 완전히 끝장내. 죽여도 상관없어.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줄꺼야. 알았지?" 하나스엘이라는 파파보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다른 남자들은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아가씨. 아까 내말을 안 따른 것을 후회하게 해주지. 큭큭, 걱정하지마. 너도 꽤 즐겁게 해줄테니까. 기대하라고." 녀석은 꽤나 자신있게 지껄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하였다. 저런 말은 자신이 유리한 상황일 때 해야 폼이 나는 법이다. 나는 마법과 청룡도를 같이 쓴다면, 조금은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이 놈들을 전부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는 있다. 으음, 지금 기분 같아선 전부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저 하나스엘이란 놈은 완전 바보였다. 아니면, 아까 웰리스가 주먹 한방으로 말머리를 박살냈을 때, 눈을 감고 있었나 보다. 맨 주먹으로 말머리를 가볍게 부수는 사람을 겨우 20명으로 상대하겠다는 말인가? 게다가 저 놈들은 그렇게 쎄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단순한 시정 잡배들이다. 나 같았으면 훈련받은 정규군을 100명 정도 데려왔다. 우리들이 아무 반응도 없자, 하나스엘은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난 어쩔 수 없이 반응을 보이기로 했다. 난 피식 웃었다. 그러자 이 놈은 더 화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내가 잘못한건가? 웰리스도 나와 마찬가지로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앉아있는 루시를 보며 말했다. "그냥 앉아있어. 조용히 해결할테니." 금발 머리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달았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까!" 20 명의 남자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난 앉은 상태에서 의자를 뒤로 밀며, 청룡도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청룡도에 피가 묻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웰리스가 주먹으로 벽을 친 것이다. 적들의 움직임은 한순간에 멈추었다. 그들은 경악한 모습으로 한 발짝 씩 뒤로 물러섰다. 웰리스한테 맞은 벽의 모습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주먹은 벽에 완전히 박혀있고, 그 주위로는 금이 쫙쫙 가 있었다. 웰리스는 웃으며 벽에 박힌 주먹을 뺐다. "뭐해? 안 덤벼?" 적들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야 이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 알아 차린 것이다. 저들은 이 싸움을 단순한 장난으로만 여겼다. 상대는 기껏해야 주먹이고, 칼을 뽑아든다 해도 20명이면 쉽게 제압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웰리스가 칼을 풀어 놓은 상태에서 맨 몸으로 일어서자 우습게 보고 덤벼들려 하였다. 하지만 저들은 한가지 착각한 게 있었다. 왜 칼을 놔두고 맨몸으로 일어섰을까? 그것도 20명이나 되는 적을 상대로. 그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주먹이란 것은 일격필살의 공격이 힘들다. 급소를 맞지 않는 한, 주먹에 맞아서 죽는 경우는 별로 없다. 기껏해야 멍들거나, 조금 심하면 뼈가 부러지는 수준이다. 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웰리스의 주먹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저 주먹에 맞고서 멍들길 바란다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저 정도 위력의 주먹이라면 비껴 맞아도 사망(死亡)이다. 제대로 맞으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는다. 웰리스는 한걸음 씩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적들은 그와는 반대로 한걸음 씩 뒤로 물러섰다. 웰리스의 덩치와 힘에 완전히 제압당한 것이다. 웰리스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야? 간만에 몸 좀 풀려하는데, 도움을 안주네." 그 말에 하나스엘은 발끈하며 외쳤다. "아이, 씨! 죽여!" 하지만 그의 말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웰리스의 기도(氣道)에 겁먹은 탓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말에 설득력이 부족하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덜덜 떨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누가 미쳤다고 덤비겠냐? "죽여! 죽여, 새끼들아! 저 새끼 죽이고 저 씨팔년 내 앞으로 끌고와! 내가 맛본 다음 니들한테 넘겨줄테니 빨리 끌고와!" 그 말은 자신의 아군들에게 별 용기를 주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 대신 적을 화나게 하였다. 웰리스의 표정이 변했다. 눈이 부릅떠 지고, 입꼬리가 내려갔다. "너 방금 뭐라 그랬냐? 내 여동생이 씨팔년이라고?" 진짜 열받은 모습이었다. 웰리스는 막대한 양의 살기를 에누리 없이 내뿜고 있었다. 그 살기에 적들은 물론이고 뒤에 있는 나까지 위축이 될 지경이었다. 웰리스는 주먹과 목의 관절을 풀어 뚜둑 소리를 내며 하나스엘에게 한걸음씩 다가갔다. 하나스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지만, 웰리스의 살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이대로 놔두면 웰리스는 저 놈을 죽일 것이다. 그렇게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나는 생각을 마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여 웰리스의 앞을 가로 막았다. "뭐냐?" 웰리스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을하는 대신 청룡도를 들어 올렸다. 웰리스는 흥미롭다는 눈길로 청룡도를 보았다. 나는 마나를 오른손으로 돌려 청룡도에 주입했다. 치지직- 스파크가 튀며 흰색의 전류가 청룡도를 타고 흘렀다. 순간, 적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걸음 씩 뒤로 물러섰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꺼져. 설마 마법사와 괴물같은 주먹을 가진 인간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겠지?" 내 말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적들이 일정거리 이상 떨어진 것이다. 내 말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청룡도에 흐르는 눈이 부시도록 하얀 전류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빠, 빨리 죽여!" "얘, 얘기가 틀리잖아. 난 마법사가 같이 있다는 얘기는 못들었다고." "나도야. 마법사가 있다면……." "씨팔! 그냥 덤벼!" "말이되는 소리를 해." 내부 분열인가? 그렇다면 게임은 끝났군. 그런 내 생각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웰리스였다. 웰리스의 몸이 잠깐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열걸음이 넘게 앞으로 튀어나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하나스엘의 두개골을 감싸 들어 올렸다.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무서울 정도의 순발력이다. 웰리스는 남은 왼손은 주머니에 찔러넣고, 하나스엘의 두개골을 움켜 쥔 오른손을 여유롭게 흔들어 보았다. 대충 봐도 7, 80kg은 되어보이는 사람을 들고 있으면서도 전혀 무게감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적들은 자신들의 리더가 잡히자 자세를 낮추어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웰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내 손가락이 이 놈의 두개골을 파고들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손에 약간의 힘을 주었다. 그러자 하나스엘은 공중에서 소리를 지르며, 발광했다. 웰리스는 부탁 어조로 말했다. "이봐. 식사하는데 방해되니 저 친구들 좀 나가라고 해주겠어?" 말만 들으면 부탁인데 현재 상황까지 고려한다면 이건 완전 협박이었다. 하나스엘이 아무 대답 없자, 웰리스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으아아!" 머리에 골고루 압박이 오자 하나스엘은 조금 아파했다. "으아아아악! 나가 새끼들아! 나가!" ……좀 많이 아파했다. 하나스엘의 말에 적들은 조금씩 동요했다. 하지만 선뜻 물러나지는 않았다. 웰리스는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아아아! 나가! 나가라는 말 안들려!? 나가 새끼들아!" "이봐, 이 친구가 나가라잖아." 그들은 웰리스의 웃음과 하나스엘의 처첨한 모습을 보고는 하나, 둘 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난 이 쯤에서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난 라이트닝 애로우를 공중에 다섯 발 띄웠다. 이거 맞으면 죽지는 않지만, 당분간은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진다. "라이트닝 애로우!" 시동어를 외침과 동시에 다섯 개의 전기 화살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화살은 정확히 놈들이 들고 있는 단검에 맞았다. "으아아!" 실수로 한 발이 빚나가 차마 말 할 수 없는 곳에 맞았다. 불쌍한 자식. 얼마나 재수 없는 놈이길래 맞아도 거길 맞냐? 빚맞은 놈은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다른 네 놈은 단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들의 손바닥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난 아직까지 전류가 흐르는 청룡도를 치켜 들며 말했다. "꺼져!" "제, 제길! 두고보자!" 녀석들은 한마디 씩 궁시렁거리며 빠르게 도망쳤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여관은 아주 조용해졌다. 안에 있는 사람은 우리들과 주인, 종업원이 전부였다. 다른 손님들은 전부 단체로 소풍이라고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싸우는 틈을 타 무전취식(無錢取食)을 한 것이다. 웰리스는 휘파람을 한번 길게 불며 중얼거렸다. "휘유! 조용해서 좋군." 난 상황이 끝났다고 파악하고 청룡도에 있는 마나를 다시 흡수한 다음, 도집에 넣었다. 웰리스는 장난삼아 하나스엘을 들고있는 손을 몇번 흔들어 보인 다음, 손을 폈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녀석은 잽싸게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놔둘 웰리스가 아니였다. 웰리스는 도망치는 녀석의 뒷덜미를 낚아 채, 면상을 식탁에 내리 찍었다.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몸을 흔들었지만, 웰리스가 목 뒤쪽을 지그시 누르자 얌전해졌다. "아까 한 말 좀 다시 해보겠나? 내 여동생에게 씨팔년이라 그런 것 말이야." "그만두세요." 루시가 말했지만, 웰리스는 듣는둥 마는둥 하며, 하나스엘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으아아!" "니가 내 여동생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면, 내 기분이 아주 좋아질 것 같은데……? 어때? 그렇게 할 용의 있어?" 하나스엘이 대답이 없자, 웰리스는 팔을 조금 더 심하게 비틀었다. "으아아!" "이제 조금 마음이 바꿨나? 아니면……." "할께요! 시키는대로 다 할께요!" 역시 근성없는 놈이었다. 나 같아도 저랬겠지만. 결국 녀석은 비틀거리며 루시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루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웰리스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녀석과 눈을 맞추고 씩 웃었다. 그 모습은 오히려 인상을 찡그렸을 때보다 더 무서웠다. 옆으로 슬쩍 보는 내가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그걸 마주보고있는 녀석의 심정은 어떨까? 녀석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였다. 오줌을 지리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웰리스는 녀석의 볼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다음에 올 때는 군대(軍隊)라도 끌고와라. 알았지?" 말이 끝나자 마자 웰리스는 녀석을 집어 던졌다.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여관 밖으로 뛰쳐나갔고, 웰리스는 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 앉았다. "제길 입맛만 버렸군."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난 먹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웰리스는 내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손을 아래로 저었다. "앉아." 단순한 어조였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부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경하고 명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약하다. 난 괜한 시비 붙고 싶지 않아 그냥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웰리스는 아까 먹다 그만둔 음식을 다시 퍼먹기 시작했다. "아까 니가 했던 얘기는 정말 재밌었어. 이그리드의 제자니, 마법사니, 드래곤 뼈로 만들어진 칼이라니 하는 것들 말이야. 난 전부 농담인 줄 알고 재밌게 들었어. 그런데 지금 보니 반 정도는 진짜더군." 그는 수저를 내려 놓고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부터 진짜인지 설명해봐." "글쎄요……."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웰리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라는 찰나 아무 말 않고 앉아있던 루시가 그것을 제지했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처다보며 말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고 싶어요.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길. 눈을 보고 있으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저 여자에게는……. 루시의 표정은 진지했고, 말투 또한 정중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반드시 그 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애써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냥 전부 농담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루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난 웰리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지금 웰리스의 표정은 '좋은 말로 할 때, 불지 그래?' 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보다는 루시의 무표정한 모습이 더 두려웠다. 난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자리를 뜨려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베낭에서 흰 물체가 기어 나왔다. "아이씨! 노끈 푸느라 죽는 줄 알았네." 그 물체는 다름 아닌 라이코스였다. 라이코스는 날개로 머리 주변을 만지작 거리면서, 눌린 세 개의 깃을 세웠다. "앗! 닭이다!" 라이코스는 재빨리 식탁으로 날아 올라 내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루시와 웰리스는 라이코스가 닭똥집을 뜯어 먹는 모습을 보고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매가 닭고기를 뜯어 먹는 모습은 내가 봐도 경악스러 울 정도다. 이 놈은 고기를 다 뜯어먹은 다음, 뼈에 육수까지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라이코스는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응? 뭘 봐? 매가 밥먹는 거 처음 봐? 남이 밥먹는데 처다보는 게 제일 추잡한 짓이야. 알어?" 라이코스야. 니가 매 주제에 공부 좀 했구나. 루시는 내 요리를 다 먹고, 이젠 자신의 요리 그릇까지 끌어 당겨 먹는 라이코스의 모습을 보고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이, 이건……." 저 여자가 뭐라고 말하려는 지는 내가 잘 안다. 분명 라이코스의 정체에 대해 질문 할 것이다. 나는 빠르게 가능 답변항을 정리해 보았다. 1. 답 : 매입니다. 이유1 : 본인이 매라고 주장합니다. 이유2 : 생긴 게 매 같이 생겼습니다. 이유3 : 그냥 매인 것 같습니다. 2. 답 : 앵무새입니다. 이유1 : 말을 할 줄 압니다. 이유2 : 지능이 상당히 높습니다. 이유3 : 어떻게 보면, 앵무새랑 조금 닮았습니다. 3. 답 : 닭입니다. 이유1 : 먹는 폼을 보십시오. 이유2 : 머리 위에 세운 세 개의 깃털은 벼슬이 퇴화한 것입니다. 이유3 : 가끔 말하는 걸 보면, 완전히 닭대가리 입니다. 4. 답 : 영물입니다. 이유1 : ??? 이유2 : ??? 이유3 : ??? 4번 영물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답변도 가능하겠군. 아무래도 그냥 앵무새라고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루시는 이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영물이군요." "예. 맞습니다. 이 놈은 변종 앵무새……. 예!?" 분명 저 여자의 입에서 영물이라는 말이 나왔다. 영물. 영물. 영물. 하하, 내가 잘못들었나 보군. 난 웃으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루시는 라이코스를 주시하며 말했다. "영물이라고 했어요. 영물 청안백우조. 아닌가요?" 청안백우조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같다. "맞아. 지금보니까 그런 것 같군. 하루에 만리를 날 수 있다는 영물, 청안백우조. 정말 신기한데." 옆에 있는 웰리스는 자신의 수염을 어루만지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이 놈이 영물이라니……. 난 라이스를 덥썩 붙잡았다. 그리고는 이 놈이 끝까지 입에 물고 있던 닭다리를 뺀 후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 영물이야?" "뭐!?" 라이코스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젠 이 놈이 반항까지한다. "너 영물이냐고?" "당연하지! 내가 영물이 아니면, 누가 영물이야!" 역시나 언제나 처럼 본인은 끝까지 자신이 영물이라고 우긴다. 이런 것은 보통 자의식과잉, 과대망상증, 자아정체성의 혼란, 혹은 희망사항이라고 한다. "니가 어딜 봐서 영물이야?" "내가 뭐가 어때서!? 척보면 영물 같이 생겼잖아! 이 사람들은 바로 알아보는데 넌 자꾸 왜 그래?" 이 놈이 끝까지 거짓말을……. 난 고개를 들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본인은 끝까지 영물이라고 우기내요." 루시는 땀을 조금씩 흘리며 말했다. "그것 영물 맞아요. 청안백우조라는 영물인데, 아이리스의 문장에도 새겨져 있어요." 모두가 미쳤을 때는 제정신인 사람이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나는 비록 정상이지만 라이코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라이코스가 영물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대로 라이코스가 영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물러나야 하는가? 아니면 라이코스가 영물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켜야만 하는가? 아아, 고민된다. 내가 고민에 젖어 정신을 못차리는 사이, 라이코스는 내 손을 빠져나가 식탁 위를 뚜벅뚜벅 걸었다. 그리고 루시 앞에 서서 오른 쪽 날개를 스윽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저는 청안백우조라 불리는 매과에 속하는 영물입니다. 영물이요. 영물 잘 아시죠? 분명 말해두지만 저는 영물입니다. 그리고 이름은 라이코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 예." 루시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내밀어 라이코스의 날개 끝을 붙잡았다. 라이코스는 날개를 몇번 흔든 다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파란색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웰리스를 처다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난 남자랑은 악수안 해." 진짜 싸가지 없는 매다. 웰리스는 열받았는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라이코스를 잡으려 하였고, 라이코스는 빠르게 내 어깨 위에 앉았다. 그리고 부리에 묻은 소스를 내 망토에 닦았다. 난 이 놈의 뒤통수를 후려 갈긴 다음,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이 놈의 앵무새가 싸가지가 좀 없어서……." "진짜 싸가지 없군." "오빠!" 루시는 웰리스에게 가만있으라고 경고한 후, 나를 처다보았다. "당신이 왜 청안백우조를 데리고 있는 거죠?" 그녀는 강경한 눈빛으로 나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마땅한 답변이 생각나지 않았다. "으음, 글쎄요……. 그냥 심심했는지 자꾸 따라다니네요. 그래서 비상식량……. 아니, 그냥 여행의 좋은 동료로 생각하고 데리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라이코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저기……. 라이코스…… 씨." "그냥 편하게 라이코스라고 부르세요, 아가씨." 라이코스는 정중하게 말했고, 루시는 다시 땀을 흘렸다. 무슨 매가 이렇게 행동하냐? 아무래도 지금 하는 짓을 보니 이 놈은 제비가 틀림없다. 그래, 맞아. 여자한테 말하는 태도나 말투, 표정을 보면 제비가 틀림없어. 에라이, 제비 같은 놈아! "무슨 이유로……. 으음, 그러니까…… 어째서 이 분과 같이 다니시는거죠?" "그냥 심심해서요." "그, 그래요? 그럼 다른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예. 어려워 마시고 어떤 질문이든 해주세요. 성심성의껏 답해드리겠습니다." 점점 이 놈이 제비라는데 확신이 간다. "제가 알기로는 청안백우조는 멸종했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죽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있냐는 거죠?" 라이코스의 날카로운 말에 루시는 당황해하며 손을 저었다. "그, 그런 뜻은 아니에요. 기분이 나쁘다면 사과드릴께요. 전 그냥……." 난 보다 못해 라이코스를 내 어깨에서 끌어 내렸다. 그리고 목을 움켜쥐고 내 앞에 다 놓았다. "아무래도 이 놈을 어려워하는 것 같으니, 제가 대신 질문해 드리지요. 너 왜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냐?" "뭐? 아니, 어디서 그런 싸가지 없는 말을……." 난 그대로 라이코스의 목을 비틀었다. "다시 질문."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영물이야!" 난 라이코스의 목을 비틀고, 털을 뽑고,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마지막에는 노끈으로 두다리를 묶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다. 루시와 웰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제 우리 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자." 라이코스는 볼에 경련을 일으키며 씨익 웃었다. "그래. 그러자." 아아, 강자의 무력 앞에 굴복하는 그대의 이름은 라이코스. "아까 질문의 답." "으응, 그건 말이지,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이 한동안 드래곤 영지에 처박혀서 밖으로 안나갔거든, 그래서 인간들이 우리가 전부 죽은 줄 알았나봐." 루시는 이번에 나이가 몇이냐는 질문을 했고, 나는 그대로 그것을 반복해 라이코스에게 들려주었다. "내 나이? 글쎄, 난 아직 어린데." "몇 살인데 그래?" "한 700살 정도 밖에 안됐어." 나는 결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믿는 눈치였다. 아무튼 그런식으로 질문이 몇번 오갔고, 라이코스는 성심성의껏 답변해주었다. 대화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난 적당히 기회를 봐서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행히 그들은 잡지 않았다. 난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방을 잡았다. 방은 2층에 있었다. 난 여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에요,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카운터에 말씀하세요." 소녀는 방안에 있는 램프에 불을 켰다. 어두웠던 방안은 램프의 불빛으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방의 구조는 매우 간단했다. 작은 크기의 침대와 탁자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탁자 위에는 목마를 때 마시라고 물과 컵이 놓여져 있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잠깐만요." 난 나가려는 그 소녀의 손을 붙잡았다. "예! 왜 이러……." 그 소녀는 내가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봐 걱정되었는지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잡힌 손을 빼려 하였다. "이거요." 난 소녀의 손을 펴 그 위에 1골드 짜리 금화 하나를 올려놓았다. "이, 이건?" "팁이에요. 받아두세요." 소녀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저기 그래도……." "그래도 됩니다. 받아두세요."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흐음, 보면 볼수록 귀엽군. "그럼 편히 쉬세요." "예." 소녀가 밖으로 나가자 난 배낭과 망토, 검과 지팡이를 대충 던져 놓은 다음 침대에 뛰어 들었다. 푹신푹신해서 좋군. 난 침대 위에서 편하게 자세를 잡고 눈을 감았다. 아까 본 여자의 얼굴에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루시……. 예쁜 이름이군. 그녀를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뭐랄까? 아주 따뜻하면서도, 그리운 느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주 오래 전에 본 것 같기도 하고, 내 앞에 있어도 아주 멀리있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가까이있는……. 제길, 말이 안되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군. "♬나의 머리엔 온통 그대의 생각뿐. ♬나의 마음엔 온통 그대의 모습뿐. ♬꿈속에서도 그댄 날 떠나지 않네. ♬오 내가 사랑에 빠졌나봐!♬" 난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맑고 청아한 내 목소리를 타고 방 곳곳으로 흘러갔다. "야! 시끄러워!" 대체 이놈은 왜 나와 같이 있는 걸까? 밤이 갚어 갈 무렵, 라이코스는 침대 구석에 누워 잠이 들고 나는 긴긴 외로운 밤을 혼자보내기 위해 청룡도로 허벅지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똑똑똑 그냥 들어오라고 하고 싶지만, 이럴 때는 먼저 정체를 물어봐 주는 게 예의다. "누구시죠?" "저에요." "저가 누군대요?" "그, 그게…… 루시에요." 그럼 아까 그 여자. 난 황급히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문 밖에는 루시와 그녀의 오빠인 웰리스가 같이 서 있었다. "들어오시죠." "고맙군." 그들은 문을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 느낌은 마치……. "제길!" 내가 눈치를 채고 칼자루를 움켜쥐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웰리스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단검을 빼들어 내 목에 겨눈 것이다. "제법인데. 어떻게 안 거지? 어어, 움직이지 말라고. 혹시라도 소리 지를 생각이나, 마법 쓸 생각을 하고 있다면 포기해. 아까도 봤겠지만, 난 그렇게 좋은 놈이 아니거든." 목젖에 예리한 칼날이 닿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빠른 속도로 평정심을 회복했다. 아까는 순간 적으로 위험을 직감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의 위험이 감지되지 않았다. 이 남자는 날 죽이지 않는다. 그렇게 확신한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웰리스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잠시만 가만히 있어주면 돼. 너한테 알아볼 게 몇 가지 있거든." "……." "니가 정말로 이그리드의 제자인지,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지금은 어디로 가는지." "제가 이그리드의 제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실꺼죠?" "죽인다."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정말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제가 이그리드의 제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보실거죠? 제 말은 믿지 않으실텐데." "아아, 그런 건 걱정할 것 없어. 몇가지 간단한 조사만 거치면 되니까. 루시." 웰리스는 턱으로 내 짐들을 가리켰고, 루시는 천천히 내 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 것 없었다. 지팡이랑 망토, 베낭이 전부였다. 루시는 내 베낭 안을 잠시 뒤지더니, 빨간 표지의 책을 꺼내 들었다. 저런 책이 내 베낭 안에 있었던가? 아! 맞아. 그 늙은이한테서 받은 책이지. 내 얘기를 자신의 나름대로 해석해 적어 놓은 책. 루시는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는 대략 훝어 본 뒤, 책을 덮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웰리스에게 말했다. "이건 이그리드가 쓴 책이에요. 필체를 보니 확실해요." 루시는 책을 내려 놓고, 이번에는 내 망토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과도로 보이는 작은 칼을 꺼내 망토를 찔러 보았다. 저것은 분명 나의 망토를 찢어서 코를 풀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망토는 찢기지 않았다. 아아! 다행이다. 저거 보온, 냉방 효과가 끝내주는 건데. 루시는 몇번 더 찔러 본 다음, 찢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칼을 집어 넣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칼을 거두세요." 루시의 말에 웰리스는 내 목을 겨누던 단검을 회수했다. 난 목주위를 어루 만지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째서 이런 일을 했냐고 물어 본다면 대답해 주실껍니까?" "일단은 앉아서 얘기하죠." 루시와 웰리스는 탁자 주위에 앉았다. 의자는 두 개 뿐이었기에 난 침대에 걸터 앉는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소동이 일었났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코스는 잘 자고 있었다. 나는 굳이 라이코스를 깨우고 싶지 않아, 녀석을 베게 밑에 집어 넣었다. 루시는 손에든 빨간 표지의 책을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당신은 정말 이그리드의 제잔가요?" 저 여자의 의도를 짐작 할 수가 없다. 대체 왜 그렇게 내가 이그리드의 제자라는 것에 집착하는 거지? "글쎄요. 그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제자라면 제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제가 그의 마법을 물려 받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럼 당신은 이그리드를 만난 적이 있나요?" "물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이그리드와 제가 만난 미친 늙은이가 동일 인물이라면 말이죠." 루시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톱 끝을 깨물었다. 아마도 버릇인가 보다. 웰리스는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던 간에 지켜만 보고 있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지금 어디있나요?" "죽었습니다." 루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약간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가 죽을 때 당신에게 남긴 말이 있나요?" "없습니다." 난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또 다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그와 정확히 무슨 관계인가요? 혹시 그의 핏줄인가요?" 이 질문은 상당히 불쾌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저는 단지 10 일 정도를 그와 같이 지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동굴 속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와 만나게 된거죠?" 이 질문에는 마땅한 답변이 없었다. 그 늙은이가 이계에 있는 나를 소환했다는 대답은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적당히 얼버무려도 되겠지만, 난 그냥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다른 것을 묻겠어요." 그녀는 침대 옆에 널부러져 있는 내 망토와 지팡이를 가리켰다. "저것들은 어디서 난거죠?" "그 늙은이, 그러니까 이그리드의 동굴에서 가지고 나온 겁니다. 창고에 있더군요." "당신은 저것들이 무엇인지 아나요?" "물론 압니다. 지팡이랑 망토죠." "……. 저것이 지팡이랑 망토라는 것은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저것들은 특별해요. 제가 알기로 저팡이는 현자의 지팡이에요. 강도는 미스릴을 능가하고 마법력을 배로 증가시켜준다는. 그리고 저 망토는 칼라이스의 망토에요. 어떠한 검이나 창으로도 뚫리지 않지요. 그것은 방금 제가 확인했어요. 저 두 개의 물품은 모두 이그리드가 살아 생전에 쓰던 것들이에요." "……." 그랬었군. 어쩐지 골동품 같아 보이더라. 팔면 얼마나 나올까? 루시는 다시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당신은 이그리드에게 무엇을 배웠나요?" "전 아무것도 배운 게 없습니다. 마법도 배운 것이 아니라 받은 것 입니다." "마법을…… 받았다구요?" "예. 그는 죽기 전에 제 머릿속으로 각종 마법 지식들을 넣어주었습니다." "말도 안돼!" 그녀는 경악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거죠?" "실제로 마법에는 그……." "그건 저도 알아요. 7클래스에 속하는 마법이지요. 자신의 기억을 다른 사람 머릿속에 옮기는 거요."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그건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금지된 마법이잖아요. 마법 시전 도중 죽는 사람이 태반이고 살아남는다 해도 백치 신세를 벗어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는 대마도사였으니까요." 루시는 작은 탄성을 지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는……." 그녀는 중간에 말을 흐리고,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갔다. 난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분명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무슨 관계가 있다. 그리고 나한테 무언가 숨기는게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라는 것……. 그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다. 잘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우리의 대화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길, 느낌이 안 좋아. 한동안의 지루한 침묵이 끝나고 루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책을 가리켰다. "이 책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난 고개를 저었다. "대충은 압니다만, 저는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원하시면 지금 읽어보세요." 루시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그럼 당신은 이 책을 읽을 수 있나요?" "물론이지요. 글을 아니까요. 혹시 글을 모르세요?" "저, 저도 글을 알아요. 하지만 이 책은 읽을 수 없어요." 글은 알지만, 읽을 수는 없다. 이거 말이 되는 건가? "어째서죠?" 루시는 의아한 빛을 띄웠다. "설마…… 모르고 있었나요?" "뭘요?" "이 책을 한번이라도 펴 본적 있으세요?" "없는데요." "그럼 이 책이 어떠한 언어로 쓰여져있는지 아나요?" "그야……, 공용어로……. 아닌가요?" 루시는 대답 대신 내 쪽으로 책을 밀었다. 난 그 책을 받아 아무 페이지나 펴 보았다. "이런, 미친……." 나는 황당함을 금 할 수가 없었다. 루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언어는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창조해낸 언어에요. 그는 고대어와 룬어, 엘프어, 공용어 등의 7개의 언어를 조합해서 그 언어를 만들어냈어요. 문자로 표기는 가능하지만 음(音)을 낸 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는 그 언어를 가지고 8, 9 클래스 마법을 정리해 놓았어요. 그리고 그 문자는 아이언스 이그리드 자신만이 읽을 수 있지요." 루시의 말 그대로였다. 이 언어는 공용어가 아니었다. 아이언스어. 굳이 표현하지면 그렇게 된다. 이것은 뜻은 있지만 음은 없는 반쪽짜리 문자였다. 나는 페이지를 마구 넘겨보았다. 화려한 필체로 써진 기형적인 문자들만이 페이지를 빽빽히 채우고 있었다. "그랬었군. 그래서 나만 읽을 수 있다는 건가……." "예!?" 루시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옆에 있는 웰리스는 깜짝 놀라 팔짱을 풀었다. 그녀는 나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 그럼 당신은 그, 그 언어를 읽을 수 있나요……?" "예. 읽을 수 있긴한데……." "저, 정말인가요!?" "예." 루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말도 안되……." 가끔씩은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이곳으로 건너 온 것 부터가 그렇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동도 하는데,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나겠나? "상아탑에 마법사들이 전부 기절하겠군." 웰리스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난 웰리스에게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웰리스를 대신해 루시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상아탑에서 보관중인 이그리드의 저서는……." "잠깐만요. 그런데 상아탑이 뭐죠?" 루시는 당혹스러워 했다. "상아탑을 모르시나요?" "예. 모르니까 물어봤죠." "……." "이번엔 내가 설명하지." 웰리스가 말을 받았다. "상아탑 이란 마법사 길드를 말하는거야. 어때? 이젠 알겠지?" "너무 간단한데요. 좀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안될까요?" 웰리스가 말하려는 순간, 루시는 그것을 제지하였다. "됐어요. 그냥 제가 설명할께요. 상아탑은 마법사 길드를 칭하는 말이에요. 중앙 산맥인 청색 산맥에 108층짜리 탑이 세워져있는 데 이것이 상아탑이에요. 1만 명이 넘는 마법사들이 이곳에서 실험과 연구를 하지요. 상아탑은 단순히 마법사 길드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중앙 산맥에 건설된 도시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해요. 그곳에는 마법사들과 그들의 가족 등, 약 1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어요." 으음, 상아탑이라……. 굉장한 동네군. 우리 나라는 63층짜리가 최고 높인데, 108층 씩이나 되는 탑이 있다니. 걸어서 올라가려면 3박 4일은 걸리겠군. "그런데 제가 이 반쪽짜리 문자를 아는 것과 상아탑의 마법사들과는 무슨 관계죠?" 루시는 한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잠깐 어디서부터 설명을 할까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그리드는 자신이 만든 언어를 가지고 8, 9 클래스 마법들을 정리해 놓았어요. 혹시 마법의 역사에 대해 아시나요?" 난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대 시절에 마법은 줄기가 잡혀있지 않은 상태였어요. 처음으로 그 마법들을 정리하게 시작한 게 가이아스 왕국의 궁정 마법사였던 넨 이드에요. 그는 마법 클래스를 1에서 9까지 완벽하게 정리해 놓았어요. 그리고 그 자신은 9 클래스를 마스터했지요. 후대의 마법사들은 모두 넨 이드의 저서를 보고 마법을 익혔어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뭐죠?" "넨 이드는 천재중에 천재였거든요." "그런데요?" "그는 마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고, 그 마법을 익히기 쉽게 해석을 해놓았어요.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다는건가요?" "맞아요."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넨 이드란 사람은 마법을 정리할 때, 자기 딴에는 알기 쉽게 해석을 한답시고 해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자신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는 쉽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이것은 거의 6살짜리 아이에게 법가사상(法家思想)과 유가사상(儒家思想)을 비교해가며, 현재 주변 국가들을 고려하여 상황을 분석했을 때, 자국이 어떠한 사상을 취해야만 유리한지에 대해 설교하는 것과 다름 없다. 법가 사상은 강력한 법으로 나라를 통치한다. 부국강병(富國强兵)에는 유리하지만 공포 정치와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쓴다는 단점이있다. 대표적으로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들 수 있다. 분서갱유는 말 그대로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 속에 생매장 시킨 것이다. 사가(史家)들은 이 사건을 보고 진시황을 폭군이라고 욕하였다. 하지만 진나라는 550 여년에 걸친 전란 시대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통일한 국가다. 이 때, 당시 사상의 난립은 거의 심각한 수준이었다. 동양의 사상들은 전부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말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진(秦)은 모든 국가를 통일하고도 나라 안은 사상 대립으로 항상 시끄러웠다. 결국 한번 쯤은 이제까지 나온 사상들을 전부 쓸어버려야 했던 것이다. 밭에 불을 지르면, 재를 거름 삼아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 듯, 분서갱유 이 후에는 다시 새로운 사상들이 싹트고 자라났다. 이런 짓을 했어도 결국은 3대 째에 가서 망하고 말았지만…….(실제로는 2대에 불과하다. 3세 황제가 즉위한지 한달도 안되 나라가 폭삭 망했다.) 반면 유가 사상은 예(禮)와 의(義)로써 백성을 통치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정치(理想政治)에 불과하다. 유가로 나라를 통치하다보면, 예와 의를 모르는 자들이 하나, 둘 씩 생겨나며 나라가 분열된다. 그리고 이것은 강력한 힘. 즉 법가 사상을 지닌 나라에 의해 통일 된다. 흔히들 치세(治世)에는 유가(儒家). 난세(亂世)에는 법가(法家)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을 조절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넨 이드가 해석하고 정리해 놓은 마법서는 아무도 알아 보지 못 했다는 것이다. 생각이 너무 길었나……? "마법사들은 대부분 천재에요. 하지만 그들도 넨 이드의 저서를 해독하지 못 했어요. 그래도 그 중에서 조금 더 뛰어난 사람들은 어느 정도 해독이 가능했어요. 그들은 수천명의 마법사들을 끌어모아 상아탑에 자리를 잡았어요. 상아탑은 고대 시절에 드래곤이 마법으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하지만 그곳은 버려진 땅이기에 아무도 그곳에서 살지 않았지요. 그들은 그곳에서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잘 아시겠지만 마법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시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막대한 양의 광물이 필요해요. 그것들 중에는 석탄이나 화강암 같은 싸고 구하기 쉬운 것들도 있지만, 다이아몬드나 루비 같이 비싼 것들도 있어요. 그들은 그 재료들을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충당했지요. 그 대가로 그들의 광산 운영을 도와주기로 하구요. 이 것은 서로에게 득이되는 일이었어요. 결국 그들은 대륙력으로 1121년 9월 18일에 쿠루부루 광산에서 동맹을 맺어요. 그 후, 드워프들은 상아탑 주위에 거대한 도시를 건설해주었고, 길드의 마법사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데려와 그곳에 정착했지요. 마법사들은 열심히 실험과 연구를 하였고, 그들은 결국 3클래스의 마법까지는 완전히 해독을 하는데 성공해요. 상위 클래스의 마법들은 부분적으로 해독하구요. 특히, 8클래스 부터는 공식이 복잡해지면서 거의 해독이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후에 한 남자가 이것을 전부 해독하는데 성공해요." "아이언스 이그리드." "맞아요. 그는 마법사면서도 기사들보다 더 육박전(肉薄戰)에 능했던 특이한 남자였어요. 그는 마법과 군사 지식에 있어서는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웬만한 천재 마법사들도 이해하지 못하던 넨 이드의 저서를 그는 한번 보고 이해했어요. 그는 15살에 나이에 4클래스를 마스터했고, 18살에 나이에 5클래스를 마스터했어요. 50살에는 8클래스까지 마스터하구요." 루시는 숨이 차는지, 아니면 생각을 하는지 거기서 말을 끊었다. 난 그 미친 마도사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두 팔을 벌리고 미친 듯이 웃어대던 그 모습. 그는 결국 9클래스를 마스터했다. "이그리드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넨 이드가 남긴 마법사를 해독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채 1년도 안되서 마법서를 전부 해독했지요. 그것은 정말 마법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업적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7클래스까지의 마법만 공용어로 해독을 해놓고, 8클래스부터는 자신만이 읽고 쓸 수 있는 아이언스어로 해독을 해놓았어요. 상아탑에서는 후에라도 그가 그것을 다시 공용어로 번역하기를 기대했어요. 하지만 그는 루미아드 공주가 죽던 날 아무 말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지요. 상아탑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그들은 당장 수천명의 마법사들과 레인저를 풀어 이그리드를 찾게 하였어요. 하지만 결국은 놓치고 말았지요. 상아탑의 마법사들은 이그리드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연구에 매달렸어요. 넨 이드의 저서를 실험과 연구를 통하여 분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언스어로 쓰여진 책들을 비교하며 언어의 규칙성을 찾기위해 노력해요. 하지만 소득은 거의 없었어요. 특히 이그리드가 남긴 문자 같은 경우에는 워낙 특이성이 많은 기형적인 문자기 때문에 어떠한 규칙성도 찾을 수가 없었지요. 이그리드가 사라진지 100년이 넘게 흘렀지만, 8, 9클래스의 마법은 아직도 해독되지 못했어요. 8클래스의 마법은 부분적으로 해독이 되긴 했지만, 9클래스의 마법은 아예 손도 못 댔지요. 이제는 마법은 8클래스가 끝이다, 라고 주장하는 마법사까지 나오는 실정이에요." 루시의 지루한 설명이 끝나고, 나는 그제서야 여러 가지 의문을 정리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사랑하는 여자가 죽자, 삶에 미련을 버리고 '휙!' 사라진 것이다. 순진한 건지 띨띨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했다. 그리고 숨는답시고 기어들어간 곳이 드래곤 영지다. 당시 대화를 상상해보면……. 크로니스 : 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이그리드 : 저기요……, 제가 갈 곳이 없어서 그러는데, 방 하나만 분양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크로니스 : 왜 갈 곳이 없니? 너 가출했니? 이그리드 : 아니요. 가출은 아닌데요. 크로니스 : 그럼 왜? 이그리드 :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그게……, 사랑하는 여자가 죽는 바람에……. 흑흑, 사라지면 괜히 멋있어 보일 것 같아서……. 크로니스 : 야. 짜지마. 불쌍해 보이잖아. 나잇살이나 처먹어서 지금 뭐하는 짓이니? 이그리드 : (계속 운다) 흑흑흑. 크로니스 : 알았어, 알았어. 내가 동굴 하나 분양해줄게. 이렇게 해서 이그리드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영지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다달이 월세를 가지고 드래곤 레어로 찾아간다. 드래곤은 늙은이가 셋방살이 하는 게 불쌍해보여서 차를 몇 번 대접해준다. 그러자 이 늙은이는 주책 맞게도 이 드래곤과 자신이 친한 줄 안다. 그런데 한 동안 이 드래곤이 안 만나준다. 그리고 월세는 통장으로 입금시키라고 말한다. 혼자서 놀기가 심심해진 이그리드는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찌어찌하다가 완전히 우연으로 연구가 성공해, '박영웅' 이라는 잘생기고, 멋지고, 훌륭한 새 나라의 청소년을 이 쪽으로 불러 들인다. 그리고 영웅이에게 무릎 꿇고 '제발 나랑 대화 좀 해줘.' 라고 빈다. 왕따와 치매에 대한 심각성을 익히 잘 알고 있던 영웅이는 늙은이가 불쌍해서 같이 놀아준다. 후에 이그리드는 죽을 때가 다 되서야 자신이 그 동안 싸가지 없게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착한 청소년 영웅이에게 자신의 마법과 여러 가지 지식들을 물려준다. 이 것이 바로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일대기이자, 새 시대의 새로운 영웅, '박영웅' 의 탄생 비화인 것이다. 아아! 감동적이다. "무슨 생각하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화가 너무 길어졌다. 나는 창 밖을 보며 대충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아마도 대략 새벽 2시 쯤 됐것이다, 루시는 말을 많이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탁자에 올려진 물병을 열어 컵에 따라 마셨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피곤하고 지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잠은 별로 오지 않았다. 너무 중요한 사실들만 골라서 듣다보니 그런 것 같다. 루시도 별로 잠 생각이 없는 그냥 담담하게 컵을 기울이고 있었다. 원래 무엇이든 하다보면 잠 정도야 쉽게 이기는 법이다. 반면에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보면 오는 것은 잠 밖에 없다. 그 증거로 우리 둘은 멀쩡하지만, 대화에서 소외되어있던 웰리스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떨군 채, 자고 있다. 대체 저 인간이 언제부터 잤는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한 마디도 안 한다 했어. "당신은…… 아이리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아이리스라……. 그 나라 망한 나라 아닙니까?" 루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그녀의 눈에는 쓸쓸함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저 얼굴을 똑바로 처다볼 자신이 없다. "저도 한가지 묻지요. 당신들은 왜 그렇게 내가 이그리드의 제자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거죠? 아까부터 5클래스 마스터인 것에는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이그리드의 제자라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어요." "그, 그건……." 루시는 말을 잊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을 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며 고민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뭘 도와 달라는 거죠?" "그, 그건……." "그리고 남보고 도와달라고 할 때는 자신의 정체부터 밝혀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여행자로 보이는 여자가 대륙의 역사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고, 그녀의 오빠는 말을 한방에 즉사 시킬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전 분명 제가 누군지에 대해 그 쪽에 잘 알려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쪽은 저에게 모든 걸 숨기시니, 불공평하군요." "전…… 아직 당신을 믿지 못해요." "어떻게하면 믿으실꺼죠?"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제자임을 입증할 방도라…….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이 책이라도 읽어주고 싶지만, 책 내용이 말도 안되는 내용이고, 또 저 여자는 이것을 읽을 수 없기에, 그냥 적당히 지어서 말한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나는 그 늙은이과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는 나를 잘 알았겠지만, 나는 그를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그는 나에게 이런 힘을 준 걸까? "증명 할 방도가…… 하나 있군요." "……?" "당신은 이그리드의 필체를 알고 있나요?" "예." "그럼 위조 필체 정도는 쉽게 알아 볼 수 있겠군요."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그럼 됐습니다." 난 가방에서 팬을 꺼냈다. 그리고 책 뒤 쪽 페이지의 여백을 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의 행동을 주시했다. 난 펜을 종이에 대고 휘갈기 듯이 글씨를 썼다. > 아이언스 히로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화려한 필체 였다. 난 그 것을 그녀에게 내 밀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것을 자세히 보았다. "어떤가요?" "어, 어떻게……." "아까도 말했 듯이 그는 마법을 제 머릿속으로 직접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언어에 관한 것들도 같이 넣어주었지요. 그래서 그와 필체가 똑같은 것입니다. 이젠 저를 믿을 수 있나요?" 루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네요. 이 필체는 확실하니까요." "그럼 말씀해 보시죠. 왜 그렇게 아이언스 이그리드에게 집착을 하는지, 그리고 나한테 무엇을 원하는지." 그녀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난 그녀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난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내 들었다. 담배 끝이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하자,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난 연기가 빠져나가라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담배를 피다보니 한 여자가 생각난다. 세레나. 그러고보니 한동안 잊고 있었다. 좋은 얘였는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난 그녀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날 그곳에서 그녀를 두고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은 아마 나보다 훨씬 좋은 남자를 만나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하니까 괜히 아까워진다. 이건 완전 계륵(鷄肋)이다. 내가 갖자니 싫고, 남주기는 아깝고. 으음, 일부 사람들은 10원짜리라고도 한다. 담배 하나가 다 타들어가고 두 번째 담배가 반 정도 탔을 때 쯤, 루시는 입을 열었다."제 이름은……, 루시아에요. 아이리스 루시아." 그녀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난 아무 말도 못하고 입에서 담배를 떨어트렸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나마 조금씩 몰려오던 잠기운은 완전히 달아났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나는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그리고 웰리스는 위태로운 자세로 자고 있었다. 루시아……. 아이리스 루시아. 그리운 느낌. 나는 오랫동안 그다려왔다. 그녀와 다시 만날 날을. 그녀? 그녀가 누구지? 루시아. 고대어로 해석하자면 에메랄드라는 뜻이다. 루미아드. 철자를 아이언스어로 바꿔서 쓰면, 에메랄드라는 뜻이 된다. 이그리드가 그 문자를 만든 것은 루미아드를 만난 후였으니, 그녀의 이름에 에메랄드라는 뜻을 붙인 것이다. 에메랄드. 녹주석(綠柱石). 취록색(翠綠色)을 띠는 아름다운 보석. 내 기억으로는 5월의 탄생석으로 청순을 상징한다. 어머니가 5월 생이여서 잘 알고 있다. "에메랄드라는 뜻이군요." "맞아요." 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이름이에요."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제 이름이요……? 별 뜻 없어요. 히어로hero의 약자지요. 뜻을 해석하자면 영웅 정도." "……영웅." 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창공(蒼空)에서 빛나는 푸른별들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생각 할 시간을 조금 주시겠습니까? 날이 밝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서 자고있는 웰리스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세요." 웰리스는 바로 눈을 떴다. "무슨 일이야?" "방으로 돌아가요." 웰리스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한번 노려 본 다음, 몸을 일으켰다. "이따 보자." 웰리스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은 방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내 생각인데 저 웰리스라는 인간 아무래도 자면서 우리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저렇게 쉽게 물러날 리가 없지. 난 생각에 몰두했다. 하지만 혼자 생각하면은 심심하다. 그래서 난 라이코스를 깨우기로 했다. "야! 일어나봐." 하지만 라이코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날개를 물어 뜯었다. "으아아! 너 뭐하는 짓이야!" 라이코스는 그제서야 눈을 떴고, 난 라이코스에게 카운셀링을 요청했다. 라이코스는 내 얘기를 듣고나서 날개로 부리를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이야…… 그냥 그 여자를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왜?" 라이코스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예쁘잖아." "……." 이 놈의 매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나는 라이코스에게 물어본 것을 후회하며 녀석을 꽁꽁 묶어 베겟 속에 처 넣었다.\ 아이리스 루시아. 그녀는 아이리스의 왕족이다. 특별한 증거는 없지만 확실했다.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는데 난들 어쩌겠나? 아무튼 그녀가 아이리스의 왕족이라면 루미아드 공주의 후손일 것이다. 물론 직계 후손은 아니다. 하지만 피가 몇 방울 정도는 섞여있을 것이다. 대체 루마아드와 이그리드의 관계는 무엇이며, 나와 그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녀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말하였다. 물론 장바구니를 들어달라거나, 빌려 준 돈을 대신 받아오라거나,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분명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여기서 거절하면 그녀는 자신이 갈 곳으로 가고, 나는 나 갈 곳으로 가면 되는 거다. 좀 줄여서 말하자면, 자기 갈 길을 가자는 거다. 하지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녀를 따라가야한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갈 곳이 내가 가야할 곳이다. 난 손을 쥐었다 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날이 밝아왔다. 나는 간밤에 한 숨도 못자고 고민했다. 이미 결정은 내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했다. 똑똑똑-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누군지 알았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남녀가 모습을 들어냈다. 당연 그들이었다. 둘은 방 안으로 들어와 탁자 주위에 앉았다. 여자는 나처럼 한잠도 못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반면 남자는 많이 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거 얼굴에 개기름 흐르는 것 좀 봐. 밤에 라면이라도 끌여 먹었나? 이미 마음을 결정했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다.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나를 주시했다. "당신들을 따라가겠습니다." 여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는 활짝 웃었다. 남자는 그냥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런데 두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난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본명이 뭡니까?" 대답은 남자가 받았다.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스윈이다. 스웰리어 스윈. 별명은 미친개지." 미친개. 왠지 딱 어울리는 별명이다. "그럼 두 번째 질문." 난 여자의 파란색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그거 염색한거죠?" "예? ……예." 루시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연설명까지 해주었다. "이건 큘리아라는 꽃의 꽃잎에서 추출한 원액으로 염색한 거에요. 10번 정도는 감아도 괜찮아요. 그 이후부터는 조금씩 물이 빠지지만요. 그리고 원래 제 머리색은……." "백금발이죠?" "예!? 그건 어떻게……." "왠지 느낌이 그런 것 같더군요." 웰리스는 벌떡 일어났다. "대화 끝났으면 나가지. 3시간 안에 이 도시를 뜬다. 아! 그리고 내 머리색은 금발이다. 나도 염색한거야." "안 물어봤는데요." "……." "……." "그럼 지금 물어봐." "무슨 색이죠?" "금색. 나가자!" 우리는 마시장에서 말을 사가지고 나왔다. 내가 탈 말은 연한갈색털로 뒤덮힌 숫말이었다. 말 값은 스윈이 충분히 지불했다. 말을 산 뒤에 우리는 마구를 사고 그 외에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스윈은 계속 재촉을 했고, 그 바람에 가격 흥정조차 제대로 못해보고 부르는대로 금화를 꺼내야 했다. 그런데 말을 끌고 여관으로 돌아 오던 도중,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난 이 사실을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말하기로 하였다. "저기요……." "왜?" "저 말 못타는데요." "……." 순간적으로 스윈과 루시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윈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말을 못 탈 수도 있는거군. 으음, 지금 말 타는 법을 가르치기에는 시간이 별로 없고…….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보기와는 다르게 낙천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여관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출발하지 못했다. 출발을 하려는 우리의 앞을 50여 명의 남자들이 가로 막은 것이다. 앞에 서있는 놈은 역시나 그 놈이었다. 그 놈. 난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너냐?" 스윈도 한마디 했다. "질리지도 않나?" 루시아는 말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 새끼들 죽이고, 여자만 내 앞으로 끌고 와." 금발 머리가 소리쳤다. 내가 보기에 저 놈은 정말 루시아에게 반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이건 완전 집착이다. 가질 수 없으니까, 더 가지고 싶어하는 집착. 아마도 저 놈은 어렸을 때부터 필요한 것은 뭐든지 손에 넣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정말로 가질 수 없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기 위해 꼴깝을 떤다. 그래도 바보는 아닌지 이번엔 좀 제대로 된 녀석들을 데려왔다. 척 보니까 다들 한가닥 씩 하게 생긴 놈들이다. 어젯밤에 머리카락 하나 안 비친 이유가 이 놈들을 모아오기 위해서였나 보다. 하지만 모아봐야 어쩔 것인가? "정신연령이 완전 유치원생 수준이군. 엄마가 사탕 안주니까 땡깡 부리는 것 좀 봐." "아무래도 상대해줘야 할 것 같군. 귀찮지만 말이야." 50명이나 되는 남자들은 장검을 뽑아들고 한 걸음 씩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멀찌감치 도망친지 오래다. 이 놈이 이 바닥을 꽉 잡고 있다 했으니, 경비병들이 오지 않을 것은 뻔하다. 그냥 상대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 이런 놈들 상대하는 것은 간단하다. 저 금발 머리 애송이만 잡아서 족치면 게임이 끝나는 것이다. 금발 머리는 이미 스윈의 힘을 잘 아는지라 가장 뒤쪽에 서서 큰 소리만 치고 있었다. "감히 나에게 모욕을 주었겠다. 니 놈들은 이제 다 죽었어!" 저 정도면 거의 정신병 수준이다. 하지만 이 놈은 자신이 맛이 갔다는 것에 아랑 곳 하지 않고,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킥킥, 거기 여자! 이 놈들을 살리고 싶다면, 지금 거기에 옷 벗고 춤 춰. 알몸으로 1시간만 춤추면 손 끝 하나 안건드린다고 약속하지." 변태 자식! ……이라고 욕하고는 싶지만, 솔직히 루시아가 알몸으로 춤추는 것, 나도 보고 싶다. 몸매가 하늘하늘거리는데 춤추면 어떤 느낌일까? 루시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스윈에게 말했다. "그냥 제가 벗을까요?" "됐어." 으음, 아깝다. 스윈은 천천히 허리에 찬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들었다. 바스타드 소드의 길이는 대략 내 청룡도와 비슷했다. 두툼한 칼날이 잘 갈아져 있어 그런대로 괜찮은 칼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스윈은 검신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치며,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여유로운 척 해도 50명을 한번에 상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난 청룡도를 뽑기 위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스윈은 청룡도를 뽑으려는 내 손을 제지했다. "그냥 구경이나 해." 난 스윈의 눈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었다. 단순한 호기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난 반쯤 뽑은 청룡도를 다시 꽂아 넣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스윈은 바스타드 소드를 왼손으로 바꾸어 들었다. 그리고 칼을 바닥으로 늘어뜨린 다음, 팔을 X자로 교차시켰다. 그리고 씩 웃으며, 자신의 주위를 반원으로 둘러 싼 50명의 남자들에게 말하였다. "덤벼!" 하지만 그들은 선뜻 덤벼들지 못했다. 스윈이 뿜어내는 살기가 장난이 아닌 것이다. 뒷모습만 보고 있는 나도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내 옆에 서 있는 루시아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달려들면 죽는다. 저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집단에 소속되어있으면 겁이 없어지는 법이다. 도덕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라 하더라도, 그 사회가 도덕적이 될 수는 없다. 왜 이렇게 되냐 하면은, 만약 개인이 범죄를 저지른다 가정하자. 그러면 그 개인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저야하고 타인에게 질시를 받게 된다. 반면 사회가 범죄를 저지르면, 그 책임 역시 사회가 진다. 개인들은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시킬 수가 있다. 오죽하면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겠는가. '모두가 하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다.' 개인이 집단에 소속되면서 자신의 의무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집단 이기주의가 괜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스윈은 개인이고, 저들은 집단이다. 난 저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달려들면 죽는다. 하지만 설마 내가 죽겠냐? 이들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공포까지 타인에게 전가시킨다.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용기를 얻는 것이다. "죽여!" "으아아!" 한 놈이 크게 외침과 동시에 그들은 일제히 스윈에게 달려들었다. 스윈이 팔이 잠깐 움찔거렸다. 곧 제일 앞에서 달려들던 놈의 목이 잘리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유연한 동작으로 칼을 휘둘렀다. 다섯 개의 검을 한번에 튕겨내는 모습은 살벌하다 못해, 예술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스윈은 몸에 피가 묻지 않게 주의하며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엄청난 힘으로 휘두르는 칼은 적의 무기까지 부수며 두개골을 파고 들었다. "으아아!" 스윈이 한 놈의 배를 찌른 순간, 뒤에서 몇 놈이 달려들었다. 칼을 뽑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스윈은 칼을 뽑지 않았다. 대신 칼 끝에 사람을 꽂은 채, 휘둘렀다. 사람과 칼에 맞은 녀석들은 쉽게 나가떨어졌다. 스윈은 웃으며 칼에 꼬치처럼 꿰인 사람을 빼내 집어 던졌다. 바닥에는 10여 개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적들은 잠시 주춤거렸다. 스윈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빨리 덤벼. 난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 적들은 이제 공포심 때문에 달려들었다. 이 싸움은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저러 놈들이 저 인간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저 정도 실력이면 완전히 괴물이다. 스윈은 왼손으로는 적들의 목을 자르고, 오른손으로는 적들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긴 거리는 칼로 상대하고, 짧은 거리는 주먹으로 상대했다. 가끔씩은 발도 몇번 나갔다. 주먹이나 발에 맞은 사람들은 전부 한방에 즉사했다. 채 10분도 되지 않아, 50여 명의 적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흥건하게 피바다가 된 거리에 누운 시체들의 모습은 각자 개성이 넘쳤다. 목이 없는 놈. 주먹에 맞아 안면이 움푹 들어간 놈. 발에 맞아 내장이 터진 놈. 그 중 특별히 잔인한 시체가 몇 구 있었는데, 그 시체들은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몸이 완전히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갈라진 틈새로 내장과 창자들이 쏟아진 모습들은 별로 아름답지 못했다. 스윈은 아직까지 살아서 꿈틀거리는 창자를 발로 밟으며 하나스엘에게 다가갔다. 놈은 그 자리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다. 스윈은 놈의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녀석의 두개골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번쩍 들어 올렸다. "두 번까지는 봐줬다." "자, 잘못했어요." 녀석은 덜덜 떨며 빌었다. 스윈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은 저번에도 들은 것 같은데."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으으으……." "이런 이런." 스윈은 녀석의 아랫도리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녀석이 오줌을 지린 것이다. 상당히 쪽팔리겠지만,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그게 문제겠는가? "잘가라, 오줌싸개." "억!" 스윈은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고 퍽 소리가 나며, 녀석의 두상(頭狀)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스윈은 축 늘어진 녀석의 몸을 몇 번 흔들어 보인 다음, 바닥에 집어 던졌다. 스윈은 목을 돌리며 말했다. "간만에 몸 좀 풀었군." 저건 진짜 괴물이다. 그렇게 힘든 싸움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더 황당한 것은 몸에 피도 별로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움직이면 저렇게 되는걸까? 매우 잔혹스러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 감흥은 없었다. 나는 담담하게 시체에 칼을 닦는 스윈의 모습을 보았다. 내 옆에 서 있는 루시아도 별 감흥이 없어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피비린내를 맡으면서도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괜찮으신가보죠?" "익숙하니까요." 스윈은 어느새 칼을 집어 넣고 우리의 앞에 서 있었다. "빨리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는 여관 뒤 쪽으로 뛰어가 순식간에 세 마리의 말을 끌고 왔다. 짐은 이미 다 챙긴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는 짐을 안장 뒤에 실었다. 스윈의 말은 거대한 흑마였다. 그는 날아오르다 싶이해서 말에 올라탔다. 루시아의 말 역시 결이 좋아보이는 흑마였다. 그녀는 차분한 동작으로 말에 올라탔다. 내 말은 아까 산 갈색말이었다. 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말 못 타는데요." 스윈은 인상을 찡그렸다. "맞아. 그걸 잊고 있었군." 그는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잠시 후, 그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그리고 몸을 기울이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봐." 남자랑은 악수하기 싫은데……. 하지만 난 그의 살벌한 눈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다. "으악!" 그 순간 그는 나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고 자신의 뒤에 나를 올려 놓았다. "꽉잡아! 간다!" 그는 한 손으로는 칼을 뽑아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말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먼저 가, 루시." 루시아는 노련한 솜씨로 말의 배를 찼다. 흑마는 투레질을 하며 앞으로 돌진했고, 스윈은 두 마리 말을 몰며 그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우리는 대낮의 거리를 세차게 질주하였다. 난 남자의 몸을 껴안고 있는 것이 심히 불쾌했다. 하지만 손을 놓으면 말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꼭 붙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루시아 뒤에 탈 걸……. 예상대로 성문 앞에는 경비병들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하긴, 50명이 넘게 죽었는데 안 알려졌다면 그게 더 이상한거다. 그나마 시간이 촉박해서 호출을 못했는지 경비병들은 1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루시는 말의 속도를 살짝 늦추었고, 스윈은 루시를 앞질러 나갔다. 스윈은 말의 돌진력을 이용해 경비병의 창을 튕겨내고 머리를 둘로 갈랐다. 스윈은 현란한 솜씨로 대, 여섯명의 경비병을 도륙했고 나머지 놈들은 길을 터주었다. "으하하하!" 스윈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난 신이나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오빠! 달려!" 음음, 다행히 바람 소리 때문에 아무도 못들은 것 같다. 우리는 성 밖을 빠져나와 대로를 질주했다. 루시아는 스윈의 말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파란색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말을 모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로 하여금 코피를 자아내게 하였다. 음음, 자세히 보니 가슴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라이레얼이 말을 타면 어떻게 될까? 분명 감동적일꺼야.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꺼야. 아! 라이레얼. 말이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가랑이 사이가 아파왔지만 내 기분은 매우 좋았다. 스윈은 더욱 속도를 놓혔고, 난 한 손을 흔들며 크게 외쳤다. "빠라바라바라밤!" 대략 잡아서 5시간을 넘게 달린 후에야 스윈은 말을 멈추었다. 지금 우리가 멈춘 이곳은 이름 모를 숲이었다. "잠깐 쉬었다 가지." 스윈은 멋지게 말에서 뛰어내렸고, 나는 추하게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으윽, 가랑이 사이가 아릿하게 아파온다. 루시아는 어느새 말에서 내려 말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난 스윈에게 말했다. "말타는 솜씨가 환상이네요. 어떻게 두 발로만 말을 조종 할 수 있는거죠?" 스윈은 말을 묶어 놓는다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잘 훈련된 말이다보니 도망칠 염려가 없나 보다. 스윈은 대신 말이 쉬기 편하게 뒤에 올려 놓은 짐을 내려 놓았다. "오래 타다보면 다 그렇게 되. 게다가 전쟁터에서는 양손을 다 써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거든." 스윈은 육포를 뜯으며 적당한 바위에 걸터 앉았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편하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거죠?" "아이리스요." 루시아가 대답했다. 그녀는 수통을 꺼내 한 모금 마신 다음, 손에 따라 붉게 달아오른 자신에 얼굴에 뿌렸다. "얼마나 가야되는거죠?" "한 달." 이번 대답은 스윈이 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물고 있던 담배를 뻐끔뻐끔 빨았다. 왠지 아까 급하게 나오면서 뭔가를 빼먹고 온 것 같다. 난 짐을 점검해 보았다. 망토는 입고 있고, 청룡도는 차고 있고, 지팡이는 베낭에 가로로 찔러 넣었고. 특별히 빠트린 물건은 없었다. 난 안심을 하며, 다시 담배를 피웠다. 한 동안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출발하기 위해 일어섰다. "자, 이제 그만 가지." "예." 말에 올라타려던 스윈은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건 뭐냐?" 난 고개를 돌려 스윈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 곳에는 흰색 매 한 마리고 열심히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던지 저 멀리 떨어져있던 매는 금방 내 앞에 도착했다. "너 이 자식!" "어! 니가 여기 웬일이냐?" 매는 갑자기 날개를 들어 나를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이 치사한 자식!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친구야!" 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영물도 아니고 매도 아닌, 변종 앵무새 라이코스였다. 물론 본인은 언제나 자신이 영물이라고 주장을 한다. 스윈과 루시아는 라이코스를 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이코스는 그 시퍼런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흑흑, 난 널 믿었는데……. 어떻게 날 버리고 혼자만 갈 수 있어……. 흑흑, 나쁜 자식." 그 모습은 정말로 처절하고 비굴해, 나로 하여금 이 놈이 영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한 손 위에는 라이코스를 올려 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라이코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해. 내가 실수로 비상식량……. 아니, 너를 두고 왔구나. 그런데 여기까진 어떻게 알고 쫒아 온거냐?" "흑흑, 나는…… 흑흑, 후각이 발달해서…… 흑흑……." 더 이상 안 들어도 알겠다. 이 놈의 변종 앵무새는 후각이 발달해서 한달이 넘게 씻지 않는 나의 발냄새를 맡고 이 곳까지 쫒아온 것이다. 참 개도 아니고, 무슨 매가 이렇게 쓸데없는 재주가 많은 지 모르겠다. 난 라이코스를 토닥여주었다. 토닥토닥- "괜찮아. 이제 울지마." 하지만 라이코스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라이코스는 자신의 날개로 눈물을 닦아내며 계속 울어댔다. "흑흑, 너도 그 여자랑 똑같아." "그 여자?" "흑흑, 잘 알잖아. 무늬만 엘프." "아아, 라이레얼 말이지?" "응." 난 계속해서 우는 라이코스를 어르고 달래주었다. 생각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잡아먹고 싶었지만, 팔면 비쌀 것 같다는 생각에 차마 그리 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아까부터 황당한 표정으로 라이코스를 바라보고 있다가 라이코스가 어느 정도 울음을 멈추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놀랍군요. 주인을 한번 정하면 평생을 따라다닌다고 하더니, 정말이네요." 솔직히 생각 같아선 이제 그만 좀 따라다녔으면 좋겠다. 이 놈이 무슨 패밀리어도 아니고 왜 자꾸 찝적대는거지? 루시아는 문득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청안백우조는 사람 말을 못하지 않나요? 말을 듣기는 해도 말을 하진 못한다고 적혀있었는데……." 으음, 나도 이 놈이 말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자식이 듣기만하면 됐지, 무슨 말까지 하고 그러냐? 라이코스는 루시아를 한번 처다보더니 황급히 눈물을 닦고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아가씨. 원래 저희들이 말을 별로 안하다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뿐이에요. 저희는 공용어, 고대어를 비롯해서 엘프어, 훈어까지 못하는 말이 없답니다." 루시아는 놀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대단해요." "뭘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요." 아무튼 라이코스의 말을 해석하자면, 이 놈은 번역기의 기능까지 갖추었다는 말이다. 솔직히 이제까지 보여준 재주 중에서 제일 쓸만한 재주다. "라이코스야." "응? 왜?" "우리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자." "……그래." 라이코스의 눈빛에는 '이 놈이 갑자기 왜 이럴까?' 라는 의구심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나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이제부터 라이코스를 아끼고 사랑해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지, 나중에 라이코스 목에 '말하는 번역기' 라는 팻말을 걸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 받고 대여해 줄 생각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튼 새로운 여행의 동료이자 나의 부하인 라이코스는 우리의 새로운 동료가 되었고, 우리는 더 큰 희망을 안고 출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전 말 못 타는데요." "알고 있어. 말 타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일단 니 말에 올라타기나 해." "저…… 어떻게 올라타는 지도 잘 모르거든요." 스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 뒷덜미를 잡아 번쩍들어 말 위에다 앉혔다. "이제부터 니가 할 일은 그냥 말 위에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거다. 발 꼭 붙이고, 고삐 꽉 잡고, 알았지?" "……예." 난 말 위에 앉아있기가 심히 불안했다. 혹시라도 이 놈이 발광을 하면 어쩌지? 하지만 나와는 반대로 라이코스는 용감무쌍하게 말의 머리 위에 앉아있었다. 난 깜짝 놀라 라이코스를 뜯어 말렸다. "야, 당장 내려와." "왜?" "말이 발광 할 수도 있잖아. 너야 죽든 말든 별 상관은 없지만, 난 어떡하냐?" "훗훗, 그럴 리는 없으니 걱정하지마." "왜?" "내가 아까 얌전히 있으라고 명령했거든." 라이코스가 말에게 명령을 내려? 그 말은 라이코스는 동물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니, 어떻게 동물과 대화를……. 다시 생각해보니 라이코스도 동물이군. 하도 싸가지 없게 굴어서 인간인 줄 착각했어. 으음, 그래도 라이코스는 조류고 말은 포유류인데, 대화가 잘 통할까? "너 말이랑 대화가 가능해?" 라이코스는 가슴을 쭉 피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이래뵈도 난 라이코스……. 아니, 영물이라고. 흠흠, 아무튼 난 영물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어." 결코 믿지 못하겠다. 거짓말이 확실하다. 차라리 라이레얼이 착하다는 말을 믿고 만다. "너 거짓말이지?" "칵!" 라이코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어쭈 이젠 반항까지? "좋아. 그럼 명령을 한번 내려봐." "무슨 명령?" "으음, 천천히 걸으라고 한번 해봐." 물론 걸을 리 없다. 만약 걷는다면 내가 이제부터 라이코스한테 존댓말을 쓴다. "야! 걸어." "허억!" 놀랍게도 말이 걸었다. 천천히 한 걸음 씩 걸었다. 라이코스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자, 어때?" "말도 안되! 이건 우연이야!" "뭐!? 너 자꾸 그럴래?" "좋아. 그럼 이번엔 뒤로 걸어보라고 해봐. 그럼 믿어 줄게." "너 또 딴 소리하기 없기다. 야! 후진!" 라이코스의 말에 앞으로 걷던 말은 천천히 뒷걸음 질을 쳤다. 오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스톱! 자 어때? 할 말 없지?" 라이코스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식의 눈빛에는 자신감과 자만심과 싹퉁머리 없음이 가득했다. 설마 이제부터 내가 라이코스에게 존댓말을 써야한단 말인가? "흠흠, 우연인 것 같은데……." "뭐시라?" 라이코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 그런 라이코스를 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이 말이 니가 시키는대로 따른다면, 정말로 믿어줄께." 라이코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엔 진짜 딴 소리하기 없기다." "알았어." "자, 아무거나 주문해 봐." 라이코스는 자신있는 표정이었다. 기다려라. 내 곧 그 표정을 일그러지게 해주마. "그 말 보고……, 물구나무 서서 자신의 꼬리를 입으로 문 다음, 구전 가요 세 곡만 부르라고 해봐." "……." 라이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 붙었다. 훗훗, 못 할 줄 알았어. 드디어 우리는 휴식을 끝내고 출발했다. 원래는 스윈이 자신의 말은 두 발로 조종하고 한 손으로는 내 말을 조종해주려 하였다.(나머지 한 손은 뭘 하냐고 묻지마라. 코를 파던 비듬을 털던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라이코스 덕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라이코스는 말에게 스윈의 말의 꽁무니를 졸졸 쫒아다니라고 명령하였고, 내 말은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내 말은 의외로 노예근성이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라이코스가 말에게 명령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나도 참 쪼잔한 놈이다. 원래 승부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내 옆에서는 루시아가 고삐를 흔들며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말을 타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을 정도였다. 병약해 보이는 미소녀가 건장한 말 위에 타고 질주하는 모습이라……. 참으로 언벨런스한 모습이여서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나는 한동안 그녀의 아름답고 우아한 승마를 감상하다가 이내 한 숨을 쉬었다.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해서였다. 세상에……. 고삐조차 잡을 줄 몰라서 말목을 꼭 끌어안고 있는 나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추해보인다. 어릴적 꿈 속에 나왔던 내 모습은 이게 아니였다. 나는 멋진 백마에 올라타서 고삐를 움켜쥐고 '이랴' 하고 소리친다. 백마는 푸른 초원을 멋지게 질주하고 나는 아름다운 흑발 날리며 주변의 경치를 감상한다. 가는 곳 마다 미소녀들이 두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꺄아! 오빠! 사랑해요!' 나는 백만불짜리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나의 모습에 반해 그대로 쓰러진다. 그나마 강심장인 여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결국은 거리를 꽉 매운 미소녀들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말을 멈추고, 소녀들은 나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얻기 위해 나에게 달려든다. 난 그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녀를 골라 그녀에게 백장미 꽃을 내민다. 그녀는 감격해하며, 그 꽃을 머리에 꽃는다. 난 그녀의 손을 잡아 내 앞에 앉힌다. 다른 여인들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다. 난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 안고 말을 달린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 세워져있는 호텔을 향해……. 아앗! 어째 끝이 좀 이상하게 끝난다. 예전엔 이게 아니였던 것 같은데. 여인숙이었나? 으음,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아무튼 지금 나의 모습은 꿈속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말 위에 탔다는 사실을 제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아아! 비참은 나의 모습이여. 난 탄식을 하면서도 혹시라도 떨어질까 무서워 더욱 세게 말목을 끌어 안았다. 우리는 중간에 몇 번 쉰 것을 빼고는 거의 한밤 중이 될 때까지 달렸다. 적당한 장소가 나오자 난 자고 갈 것을 제의했고, 이 인간들은 다행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우리는 말에서 내려 노숙할 준비를 하였다. 불을 피워 대충 요리를 만들어서 먹고 낮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휴식을 취했다. "내일도 이렇게 달려야 하나요?" "물론." "말들이 힘들텐데." "다음 도시에 도착하면 말을 바꿀테니 그건 걱정하지마." "그런데 이렇게 빨리 달려야 할 필요가 있는건가요?" "있어." 스윈은 턱으로 루시아를 가리켰다. 루시아는 어느새 자신의 두 다리를 꼭 끌어 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긴, 내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저 여자는 오죽하겠나. 역시 여자의 몸으로 이런 강행군은 무리였던 것이다. "아무튼 빨리 가는 게 좋아. 제길, 자바스 놈들 완전히 박살을 내주겠어." 자바스……? "제가 그곳으로 가면 뭘 해야 하는거죠?" 스윈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아무튼 5클래스 마스터니까 쓸모는 있겠지. 그런데 너 칼은 쓸 줄 아는거냐?" "아, 예. 조금은……." "사람 죽여 봤어?" "예." "몇 명?" "대략 3, 40명 정도." "으음……. 너 몸 허약하지 않냐? 그러니까 말을 오래 타면 지치고, 몸에 힘도 별로 없고 조금만 힘든 일을 하면 금방 헉헉대고." 설마 날 그렇게 봤단 말인가……? "전혀 안 그런대요. 제가 체력이 약한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흠. 신기한데." 스윈은 흥미롭다는 눈길로 나를 훝어보았다. 난 그의 느끼한 시선을 피하며 질문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거죠? 체력이 강한 마법사도 있을 수 있잖아요." 스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랄 쌈싸먹는 소리 하네. 마법사들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몸이 약해야만 마법을 익힐 수 있지. 그 특징은 몸에 마나를 쌓으면서 더 심해져. 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건 아마 자연의 마나를 강제로 압축시켜서 몸 쏙에 쌓기 때문에 그런 걸꺼야. 아무튼 마법사들 중에는 체력이 강한 놈이 없어. 딱 두 놈만 빼고." 그래서 내가 뛰어다니면서 마법을 썼을 때, 다들 놀란 것이었나? "그게 누구죠?" 스윈은 씩 웃으며 하늘을 가리킨 다음, 나를 가리켰다. "이그리드와 너." "……." "내 눈으로 보기엔 말이야……. 지금 니가 지닌 골격은 선골(仙骨)이야. 마법은 잘 모르겠지만, 쌈박질 하기에는 가장 좋은 골격이지. 이그리드라면 몰라도 왜 너까지 이런 골격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겠군." 음음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보고 잘났다라는 말이다. 뭐, 내가 마법을 익힌 것이 아니니 체력이 약하지는 않다만, 내 골격이 싸움 하기 가장 좋은 골격이라고? 으음, 어쩐지 예전부터 잘났다했어. 아아, 대체 나의 천재성은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야, 니 칼 좀 보자." 스윈의 말에 나는 청룡도를 빼들었다. 스윈이 손을 내밀어 청룡도를 쥐어보려 하자, 난 고개를 저었다. "전에 한놈이 그랬다가 몸이 가루가 됐었죠." 스윈은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난 청룡도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마나를 조금 흘려넣었다. 치지직- 백광이 도신에 타오르며 화려하게 새겨진 시동어들이 모습을 들어냈다. "진짜 죽이는군. 그런데 거기 써진 낙서는 뭐냐?" "……." 마법검에 써진 시동어를 보고 낙서라고 말을 하다니……. 이건 정말 무식해도 너무 무식하다. "이 검(劍)은 마법검(魔法劍)입니다." "그거 도(刀)잖아." "……. 그럼 마법도(魔法刀)라고 해두지요." "오호! 그래? 그거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 스윈은 탐욕어린 눈동자로 청룡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도는 타인이 잡을 수 없는거다. 생각 같아서는 돈 받고 대여해주고 싶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낮의 여행에 너무 지쳤기 때문에 그만 자기로 하였다. 스윈은 침낭을 깐 다음, 이미 자고 있는 루시아를 번쩍 들어 침낭 속에 넣어주었다. 그 모습은 정말 오빠와 여동생 같아 보였다. 설마 저 인간 루시아를 좋아하는 건……. "루시아를 좋아하나요?" "뭐?" 내 말에 스윈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얘를 좋아하냐고? 좋아하기야 하지. 뭘 착각하나 본데, 얘는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야. 얘 삼촌이 내 친구거든."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휴우, 다행이다. 아무튼 이제 우리도 잠들기로 했다. 불침번은…… 라이코스가 자청해서 선단다. "내가 왜 불침번이야!?" 우리는 라이코스의 말을 들을 가치도 없는 말로 취급하고 잠에 빠져 들었다. 하나, 둘, 셋, 넷, ……열 둘? 난 눈을 뜨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스윈이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스윈은 씩 웃으며 나에게 중얼거렸다. "제법이군." 난 머리 맡에 놓아두었던 청룡도를 허리에 차고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눈동자가 하나, 둘 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 주위를 빼곡히 둘러쌌다. 그들은……. "늑대군." 그렇다. 늑대였다. 예전 양치기 소년 사건 때, 한번 등장하고, 후에 아기 돼지 삼형제 사건 때도 또 등장하고, 아무튼 여행과 모험, 동화에 끈질기게 등장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놈들이다. 늑대는 상당히 지능적이고 팀플레이에 능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정말로 그렇다. 루시아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나와 스윈은 루시아를 가운데 놓고 그 양쪽에 섰다. 늑대들은 스윈이 뿜어내는 살기 때문에 공격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만만하게 보였는지 한 놈이 어깨를 움츠렸다 피며 도약했다. "컹!" 한 놈이 뛰니 그 옆의 몇 마리가 같이 뛰었다. 이건 완전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 격이다. 난 청룡도를 뽑아듬과 동시에 두 마리 늑대의 배를 갈랐다. 난 피가 튀지 않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녀석들은 피비를 뿌리며 나자빠졌다. 늑대들은 흥분했는지 남은 열마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난 청룡도에 마나를 집어 넣고 늑대들을 내리찍었다. 살이 베임과 동시에 베인 부분이 타는 장면은 시각에는 별 지장이 없었지만 후각에는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타오르는 저들의 살 냄새를 맡으니 개고기가 생각나는 것은 나도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네 마리 째 처리했을 때에는 스윈이 여덞 마리를 모두 저승으로 보낸 뒤였다. 스윈은 칼에 묻은 피를 늑대 가죽에 닦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대로 수확은 있군." "예?" "이 놈들 가져다 팔면 돈이 되거든." 그렇군. 스윈이 칼을 집어넣는 동작을 보자 의문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왼손잡이 아니셨어요?" 이번에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싸운 것이다. 아까 헤론드란에서 싸울 때는 왼손에 들고 싸웠는데. "난 오른손잡이야." "그럼 아까는……." 스윈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만만한 놈들은 왼손으로도 충분하지." "……." 그랬군.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스윈은 늑대의 시체를 한 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바스타드 소드를 다시 뽑아 늑대의 가죽을 벗기려하였다. 난 그 모습을 보고는 망토 안에 넣어두었던 단검을 꺼내 던졌다. "그걸로 벗기세요." 스윈은 단검을 뽑아 자세히 보았다. 한뼘 크기의 단검은 장식이 없는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날이 잘 벼려저있었다. 스윈은 날을 자세히 관찰해 보다가 그것으로 늑대의 배를 갈랐다. 단검은 아주 부드럽게 늑대 가죽을 파고 들었다. "이거 좋은데. 어디서 산 거냐?" "줏었어요." "뭐? 어디서?" "이그리드의 동굴에서요." "그래? 몇 개나 줏었는데?" "두 자루요." 스윈의 눈이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그것은 탐욕에 물든 인간의 모습이었다. 스윈은 고개를 들어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두 자루라……. 하나만 나 주지 그래?" 그의 눈빛은 시퍼런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그의 금갈색 눈동자는 활활 불타올랐다. 그는 손에 든 단검의 날을 만지작 거리며 계속 나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이것은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그의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가지세요." "고마워." 그는 씩 웃으며 다시 늑대 가죽을 벗기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 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죽인 늑대들은 배가 찢어지고 두개골이 쪼개졌지만, 그가 죽인 늑대들은 전부 가죽에 상처 하나가 없었다. 난 늑대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아고, 이내 늑대들이 칼로 베인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들 어떻게 죽인건가요?" "때려서 죽였지." "……." 생각난다. 주먹 한방에 말 두개골이 박살나던 모습이. 상상이간다. 주먹과 발길질 한방에 '깨갱' 거리며 즉사하는 늑대들의 모습이. "그럼 쓰지도 않을 칼은 왜 뽑았어요?" "칼을 들고 있으면 녀석들이 쫄거든." 그렇군. 스윈은 늑대 가죽을 다 벗긴 다음, 내가 죽은 늑대들을 보았다. 그는 상처자국을 자세히 살피고는 탄성을 질렀다. "이거 진짜 죽이는군. 어떻게하면 이렇게 되는거지?" 스윈은 일어나 나에게 말했다. "칼 좀 뽑아봐." 난 그가 시킨대로 청룡도를 뽑았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청룡도의 시퍼런 날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이게 블루 드래곤의 뼈로 만든거라고?" "예. 그렇게 말하더군요." "죽이는군."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내 청룡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완벽한 살인 무기군. 마나만 주입하면 칼에 전기가 흐른단 말이지?" "예." "전기가 흐르는 칼이라……." "그게 그렇게 대단한건가요? 전기가 흐른다고 해봐야 막대한 양의 마나를 쑤셔넣지 않는 한, 감전되 죽는 것도 아닌데." 내 말에 스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그 칼에 위력을 모르는거냐?" "예?" 스윈은 한숨을 쉬며 설명을 해주었다. "칼로 사람을 베면 어떻게 되냐?" "아프겠지요." "맞아 아프지. 살이 쭉 찢어지니까 당연 아프지. 그럼 아프면 어떻게 해야할까?" "치료해야죠." "맞아 치료해야지. 그럼 그 치료는 어떻게 할까?" "그야 상처난 곳을 꼬매고 붕대로 둘둘 감아야겠지요." "그럼 상처 부위가 불에 탔으면 어떻게 될까?" "……." 난 그제서야 스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청룡도에 베이면 상처가 남과 동시에 전기 때문에 상처가 타오른다. 이것을 치료하려면 타오른 부분을 다 도려내야 하는 것이다. 이 시대 의술이야 뻔하기 때문에 잘 못하면 상처 하나 때문에 골로가는 수도 있다. 스윈은 자신의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것을 아래로 늘어뜨린 다음, 나에게 말했다. "그 걸로 한번 내리쳐봐." 난 머뭇거렸다. "그럼 그 칼 박살날텐데요." "상관 없으니 해봐." 난 어쩔 수 없이 청룡도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온 힘을 다해 그의 칼을 내리쳤다. 카앙! 한 순간 불꽃이 튀나 싶더니 스윈의 칼은 완전히 잘려나갔다. 난 고개를 들어 스윈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쩌죠?" 다행히 스윈은 별로 화난 표정이 아니였다. 그는 자신의 칼에 잘려진 단면을 보며 혀를 찼다. "완전히 못 쓰게 됐군. 꽤 마음에 들었던 건데." "죄송합니다." "됐어. 아무튼 끝내주는 칼이라는 게 확인됐으니 간수나 잘 하라고." 스윈은 부러진 칼을 칼집에 집어 넣었다. 나도 청룡도를 도집에 집어넣었다. 스윈은 다시 늑대의 가죽을 벗기는데 열중했다. 루시아의 잠을 깨우기 싫었는지 흙으로 피를 지우고, 저만치 떨어져서 작업했다. 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까지 않자면 이틀째 밤새는거다. 난 연기를 내 뱉으며 내 발 밑에서 퍼자고 있는 라이코스를 보았다. 자식이 불침번 서라고 했더니, 죽어라고 잠만 퍼자고 있었다. "이 놈이 말모는 재주만 없었어도, 완전히 삶아 먹는건데……." Part 3. 한자리에 모이다 "이랴!" 스윈은 힘찬 함성을 외치며 말을 몰았다. 스윈이 말을 모는 실력은 거의 입신에 경지에 이르렀다. 스윈은 자신의 말은 두 발로만 조종하며, 두 손으로는 세 마리 말의 고삐를 묶어 잡고 있었다. 혼자서 말 네 마리를 조종하는 것이다. 그 모습은 그 옛날 중원 대륙을 휩쓸었던, 북방의 기마민족, 몽골족을 생각나게 하였다. 루시아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을 몰았다. 무리하다 싶을 정도의 여행이었지만, 그 동안 지친 기색 한번 보이지 않았다. "가자!" 난 고삐를 치며, 소리쳤다. 지난 한달 동안의 질주 덕에 난 말을 꽤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난 갖은 폼을 다 잡으며 말을 몰았다. 물론 이것은 폼에 불과하다. 실제로 말을 모는 것은 저기 말 머리 위에 앉아있는 변종 앵무새였다. 헤리오의 국경을 넘은 지도 벌써 3일이나 지났다. 국경을 넘기 전, 스윈은 세 마리 말을 더 구입했고, 우리들은 말을 번갈아타가며, 쉴새 없이 달렸다. 물론 그 세 마리 말은 현재 스윈이 혼자서 다루고 있다. 난 말을 스윈 옆에 바짝 붙이고 소리쳤다. "얼마나 더 가야 되는거죠!?" "이 속도로 달리면 오늘 밤!" "예!?" "빨리 달려! 목적지는 케이튼 성이다!" 말을 무자비하게 달린 끝에 우리는 예정된 시각에 예정된 장소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에 타고있던 말은 거의 죽기 직전까지 달리게 한 다음, 풀어 주었다. 그리고 스윈이 몰고 있던 말로 갈아탄 뒤, 다시 한참을 달려서야 간신히 이곳까지 왔다. 하루 내내 몸이 상하로 흔들리다보니 두 개골이 다 덜그럭 거린다.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어 휴식을 취하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했다. "제길, 자바시의 똥개새끼들이 뭐 처먹을 게 있다고 여기서 알짱거리고 있어?" "진정하고 성으로 들어 갈 방법이나 생각해봐요." 루시아는 차분하게 스윈을 흥분을 가라앉혔다. 지금 우리가 성 앞에서 말을 멈춘 이유는 성을 두루 포위하고 있는 막사들 때문이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려면 저 막사들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데 우리의 인원만으로는 무리였다. 스윈은 얼굴을 붉히며 궁시렁거렸다. "씨발, 성안으로 들어가려면 저 새끼들을 지나야 하는데. 몰래 지난다 해도 쉽게 성문을 열어주지는 않을테고……." 그 말은 스윈의 말이 맞았다. 혹시라도 몰래 저 녀석들 사이를 지나간다 해도, 성에서 문을 열어줄지는 의문이었다. 이런 한밤중에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도 안가는 놈들에게 성문을 열어줄리는 절대 없다. 그렇다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자니 그 때는 저 놈들이 전부 깨어 있을 때다. 아아, 난제로다. 스윈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 뿐이야." "뭔대요?" "그냥 돌진하는거지." "……." 진짜 무식한 방법이다. 하지만 스윈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그는 계속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대로 저 녀석들을 뚫고 서문으로 가자고." "그럼 쫒아올지도 모르는데요." "당연 녀석들은 쫒아 오겠지. 우리는 계속 달리다가 성문 앞에서 뒤돌아 싸우는거야." "……?" "성문 앞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면, 성 안 병사들도 다 깨어날테고 우리인 것을 알릴 수만 있다면 키에라든 발리스든 아니면 진 녀석이라도 성 밖으로 뛰쳐나오겠지." 무모해 보이지만, 상당히 설득력있는 얘기다. 어쩌면 그게 최선의 방책일 수도 있다. 난 의견에 찬성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스윈 자신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문제가 하나 있어." 스윈은 턱으로 루시아를 가리켜 보였다. 확실히 저 여자를 대리고 저 곳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난 싸워하니 안 되고, 넌 니 한몸 지키기도 벅찰 것 같고. 루시아를 지켜 줄 사람이 없어. 한 30분 정도만 버티면 되는데." 루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방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난 잠시 고민 했고, 곧 이 상황을 타개 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저기요……." "왜?" 난 내가 입고 있는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망토 안 찢어진다면서요. 그럼 이 걸 입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내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맞아. 그렇게하면 되겠군." 우리는 휴식을 취하며, 한밤중이 되기를 기다렸다. 대략 새벽 2시가 됐을 무렵, 우리는 말을 몰고 천천히 막사 근처로 다가갔다. 한동안 관찰한 끝에 우리는 괜찮은 길을 발견했다. 그곳은 진책도 없고, 서문까지의 거리도 거의 최단거리였다. 우리는 각자의 말 위에 올라탔다. 내 망토는 루시아가 입고 있었다. 절대 찢어지지 않는다니 타박상을 입는다면 몰라도 몸이 베이거나, 뚫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자!" 스윈의 힘차게 소리치며 말배를 걷어찼다. 루시아는 그 뒤를 따랐고, 나는 제일 후미에서 그들을 쫒아갔다. "잘 해, 라이코스!" "알았어!" 라이코스는 말 머리 위에 앉아 말의 행동을 지시해 주었다. 난 고삐에서 손을 때고 두 손을 자유롭게 하여 언제든 마법을 쓸 수 있게 하였다. 두두두두두- 세 마리 말은 힘차게 땅을 울리며 적의 막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누구냐!?" 역시나 막는 놈이 나타났다. 스윈은 대답을 하지 않고 녀석에게 달려들었고, 녀석은 황급히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이 스윈에게 통할리 없었다. 스윈은 날아오는 창을 옆구리 낀 다음, 그대로 들어올렸고 녀석은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곳곳에서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제길! 적이다!" "빨랑 튀어나와!" 막사 안에서는 투구 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스윈은 방금 빼앗은 창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사람들의 머리가 허공에 날았다. 스윈이 싸우는 모습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그의 창은 적들의 투구까지 둘로 쪼개 놓았다. 스윈은 재빨리 못쓰게 된 창을 버리고 다시 창 한자를 빼앗아 휘둘렀다. 나와 루시아는 그가 피로 칠해 놓은 길을 열심히 달렸다.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길을 막는 적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제발 저 새끼들이 쫄았으면 좋겠다. 쫄아라. 쫄아라. 쫄아라." 나는 빠르게 주문을 영창한 다음 시동어를 외쳤다. "팬타즈멀 킬러 Phantasmal Killer!" 순간,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십명의 적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물론 그 틈을 놓칠 스윈이 아니였다. 스윈은 창으로 몇놈을 내리찍은 다음,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퍼억 "으악!" 말은 그대로 사람의 두개골을 밟고 지나갔다. 불쌍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별로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제길, 화살을 쏴!" 드디어 스윈이 걱정하던 상황이 튀어나왔다. 비처럼 퍼붓는 화살 속에서는 루시아를 지킬 수 없게 된다. 루시아는 망토의 후드룰 뒤집어 쓰고, 죔새를 조였다. 그래도 망토 덕에 맞으면 아프기는 하겠지만 몸에 꽂히지는 않을 것이다. 난 루시아의 뒤에 바짝 붙으며 주문을 영창했다. "하느님 아버지. 제가 화살에 맞아 죽지 않도록 굽어살펴 주소소." 분명 말하지만 난 기독교인이 아니다. 난 무교(無)敎)다! "프로텍트 프롬 노멀미사일!" 내 뒤와 옆에는 얇은 방어막이 펼쳐졌다. 난 정신을 집중시켜 방어막의 범위를 루시아에게까지 넓혔다. 방어막을 넓히면 대신 두께가 줄어든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쏘는 것도 아니니 걱정할 건 없을 것이다. 이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당장 죽을 염려는 없어졌다. 스윈은 선두에 서서 현란한 동작으로 두 자라의 창을 휘둘러 날아오는 화살들을 전부 튕겨내었다. "하하하! 계속 덤벼보라구! 미친개 스윈을 상대로 얼마나 잘싸우는 지 보자." 스윈의 말을 들은 적들은 입을 쩍 벌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미, 미친개!" 스윈의 무차별 적인 살육 덕분에 포위망은 거의 뚫렸다. 난 화살을 막아야 했기에 프로텍트 프롬 노멀미사일 마법을 계속 유지해야만 했고, 결국 싸움은 스윈 혼자 도맡아 했다. "막지마! 막는 새끼들은 죽는다!" 스윈은 크게 소리치며, 앞을 막는 적들을 찔러 죽였다. 창은 갑옷을 뚫고 들어가 심장에 꽂혔고 그것도 모자라 등 뒤로 삐죽 튀어나왔다. 그러니 창의 날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는 그 창에 미련을 두지 않고 손을 놓았다. 그리고 방금 죽은 놈의 창을 뺏어 들었다. 포위망이 완전히 뚫리자 스윈은 말의 속도를 줄이며 소리쳤다. "먼저 가!" 루시아의 말이 선두에 섰고, 그 뒤를 내가, 그리고 제일 후미에 스윈이 붙었다. 적들은 정신을 차렸는지 허겁지겁 말을 타고 우리의 뒤를 쫒아왔다. 난 뒤를 돌아 화실이 날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프로텍트 프롬 노멀미사일 마법을 해지하였다. 그리고 대충 주문을 영창한 다음, 뒤돌아서 시동어를 외쳤다. "펌블Fumble!" 몇 마리의 말이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또 몇 놈들은 손에서 무기를 떨어트리기도 하고 말에 굴러떨어지기도 하였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목청 껏 웃어댔다. "하하하!" 이렇게 말이다. 나와 루시아는 성문을 향해 죽어라고 달렸다. 만약 저 놈들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는 수 밖에 없다.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는지, 성벽 위에서는 하나, 둘 씩 불이 켜지고 병사들이 모여있었다. 뒤에 있던 스윈은 사자후를 내질렀다. "문 열어 새끼들아! 나 미친개가 돌아왔다!" 스윈의 건방진 말투에 열받았는지 병사들은 문을 열어줄 생각조차 안하는 듯 했다. 설마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하는건가? 우리는 성문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성문 앞에는 깊고 넓은 해자가 파여있었다. 이렇게 되면 도개교까지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난 뒤를 돌아 보았다. 적들이 개떼처럼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개떼란 강아지 떼라는 말이 아니다. 개미떼를 줄여서 말한 것이다. 우리는 해자 근처에 도달해서야 말을 멈추었고, 스윈은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루시아를 지켜!" 내 한몸지키기에도 바쁜데 무슨…… 스윈은 그 말을 끝으로 적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시간을 벌 속셈인거다.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우리라는 것을 성안에 알려야 해요." 난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보았다 수십개의 횃불이 불을 밝히고 있는 덕에 보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수백여 명의 병사들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두 남자가 눈에 띄였다. 한 남자는 20대 중반 정도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 왼쪽에 기립해있는 남자는 흰수염을 배까지 기른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 풍채와 기운을 보니 전혀 노인 같지 않았다. 으음, 황충이 살아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난 성벽 위에 높히 솟아있는 깃발에 시선이 갔다. 그 깃발은 파란색 바탕 안에 흰색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새는……. "니가 왜 저기 그려져있냐?" 난 라이코스에게 물었고, 라이코스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깃발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몰라." 만약 이 나라가 위태롭다면, 그건 전부 라이코스의 탓이다. 라이코스 같은 놈이 국기에 그려져 있으니, 그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빨리 방법을 생각해봐요." 스윈은 수천명의 적들을 상대로 좌충우돌 하고 있었다. 난 목청껏 소리질렀다. "열려라 참깨!!!" 물론 이렇게 한다고 열어 줄리는 없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난 바보가 아니다. 나는 다만 저들의 시선을 모을 생각으로 그런 것 뿐이다. 난 손을 들어 올렸다. "라이트!" 빛의 구들이 나와 루시아 주위에 떠올랐다. 이제 성벽 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시아!" "공주님!" 성 위의 사람들의 소리쳤다. 루시아도 그들을 보며 소리질렀다. 백금발의 청년은 빠르게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성문을 열어라!" 스윈은 사방의 적들과 치고박고 싸우고 있었다. 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사람의 목과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저 정도면 거의 살인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수준이다. 저게 바로 파괴의 미학인가? 스윈이 싸우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피를 끓게 하였다. 물론 이것은 아군한테만 해당되는 말이다. 적군은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크르르르-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나며, 도개교가 내려 오기 시작했다. 성문이 열릴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성벽 위에서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데스 사이즈를 가져와! 저건 미친개다!" "하지만 모습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닥치고 가져와! 저렇게 싸우는 놈이 미친개 말고 또 있냐!?" "화살을 쏴라!" 성벽에서 화살이 빗발치듯이 날아왔다. 혹시라도 스윈을 맞출까 싶어 스윈과는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만 화살을 퍼부었다. "자꾸자꾸 덤벼! 뭐하는 거냐, 똥개 새끼들아!" 스윈은 큰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도개교는 반 쯤 내려온 상태였다. 시간을 벌어야 해. "갔다 올께요." "잠깐만요!" 난 그대로 말의 배를 찼다. 잘 다루지는 못해도 직진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두두두- 힘차게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오며, 내 기분은 점점 고조되었다. 난 청룡도를 뽑아들었다. "너만 믿는다, 라이코스." "알았어!" 적들이 가까워졌다. 적은 달려오는 내 모습을 보고는 창을 옆으로 휘둘렀다. 말은 잽싸게 머리를 숙였다. 난 청룡도에 마나를 주입하고 휘둘렀다. "죽어라!" "으악!"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적이 죽었다. 간만에 해보는 살인이다. 하지만 이 곳은 전쟁터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내 목표는 오래 사는 거다. "라이트닝 볼트!" 청룡도에 빛 줄기는 길게 뻗어나가 스윈 주위의 적들을 맞추었다. "제갈, 마법사다." 적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고, 난 그틈을 놓치지 않고 스윈의 옆에 붙었다. "왜 왔냐?" "도와주러요." "걸리적거리지나 마." 제길, 괜히 왔다. 쉬이익-!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화살이 우리 앞에 있는 적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 화살은 한명의 목을 뚫고 지나가 다음 사람의 가슴까지 뚫었다. 실로 엄청난 위력이다. 스윈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늙은이군." "……?" "귀궁(鬼弓) 디아케 발리스!" 화살은 계속 날아왔다. 거의 스피어 정도의 크기의 화살은 어김 없이 두세명의 몸을 꿰뚫었다. "자자, 제대로 싸워보자고." 스윈은 큰 소리치며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난 별로 싸우고 싶지 않다. 분명 말해두지만 난 평화주의자다. "덤벼 짜샤들아! 덤벼!" 그런데 말 머리 위에서 깝죽거리는 라이코스 때문에 적들이 열받아서 덤빈다. 난 전기가 흐르는 청룡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치직! "으악!" 칼들이 부딪힌 순간, 상대방이 소리를 지르며 칼을 놓았다. 칼도 쇠다보니 전기가 흐른 것이다. 오옷! 이 칼 생각보다 쓸만하잖아. 나와 스윈은 완전히 포위된 채, 싸웠다. 나는 열심히 싸웠다. "걸리적거리지 말랬잖아!" 물론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창칼이 나를 덮쳐오는데 이것저것 생각 할 여유가 없었다. "으리야!" 난 날아오는 창을 아래로 비꼈다. 제길, 땅에 발 붙이고 싸우는 거라면 모를까, 난 마상전투(馬上戰鬪)는 해 본 역사가 없단 말이다! "이히히힝!" 빗겨간 창은 내 말의 목을 찔렀다. 말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앞발을 굴렀고 나는 잽싸게 말에서 떨어졌다. 라이코스도 순식간에 말 머리에서 날아 내 어깨에 앉았다. 내 말은 몸에 몇 개의 창이 더 찔린 다음, 바닥에 쓰러졌다. 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위에서 나를 향해 찔러들어오는 창이 보였다. 죽는다. 공포가 몸을 휘감았다. 피 할 여유가 없었다. 말을 타고 있어서 몰랐는데 떨어지고 보니 적이 너무 높아보인다. "씨팔!" 쉬이익- "컥!" 내가 눈을 부릅뜨며 욕을 내뱉는 순간, 스피어만한 화살이 날아와 적의 몸을 꿰뚫었다. 적은 화살의 위력에 뒤로 완전히 넘어갔다. 누가 쏜 거지? 난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망루(望樓) 위에 올라서서 대궁(大弓)을 들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보았던 그 노인이다. 노인은 다시금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몸의 피가 끓어 오른다. 살의(殺意)가 몸을 가득 채운다. 누군가가 나의 전의(戰意)를 북돋고 있었다. 이 느낌은……, 그래, 맞아. 그때와 똑같아. 난 한걸음 물러서, 위에서 찔러온 창을 피하였다. 그와 동시에 청룡도를 휘둘러 창의 자루를 두동강 내고 바로 말의 목을 베었다. "히이이잉!" 말 들이 미쳐 날뛰며 기수를 낙마시켰다. 난 몸을 돌려 뒤에서 날아오는 창을 막아냈다. 스윈은 내 모습을 보면서 씩 웃었다. "뭐야? 한가닥 하는 놈이잖아." 당신에 비하면 한참 멀었어. "돌격하라!" 와아아-! 뒤쪽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성문이 열린 것이다. 난 싸우는 것도 잊고 뒤를 돌아보았다. 은빛 갑옷을 입은 남자를 선두로 한무리의 군사가 뛰쳐나왔다. 성벽 위를 보니 한 남자가 무언가를 낑낑거리며 들고 오고 있었다. 활을 쏘던 노인은 대궁을 놓고 재빨리 그것을 잡았다. 노인은 몇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앞으로 달렸다. 그리고 투창 자세를 취하며 그것을 던졌다. "미친개!" 노인은 힘차게 외쳤고,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조심해요!" "알어!" 콰앙-! 땅이 울리고 먼지가 솟아났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자 머리쪽을 땅 속에 깊숙히 박고 있는 그것이 보였다. 그것은……. "데스 사이즈!" 스윈은 말의 배를 차 그것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것의 바로 옆에 있던 적은 황급히 손을 내밀어 그것의 자루를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뽑히지 않았다. 어느새 그것의 앞에 도달한 스윈은 주먹으로 적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건 내꺼야!" 적은 두개골이 깨진 채, 말에서 굴러 떨어졌고, 스윈은 재빨리 그것을 잡아서 뽑았다. 그것은 붉게 날이 선 낫이었다. 사신의 낫. 눈부시게 붉은 날은 저것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피가 뭍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의 길에는 대략 잡아도 3m가 넘어보였다. 스윈은 그것을 들고 미친 듯이 웃어 재꼈다. "으하하하! 이걸 다시 손에 잡게 되다니!" 스윈은 무게를 실어 낫을 휘둘렀다. 수명의 목이 한번에 잘려나갔다. "미친개다!" 적들은 더 이상 스윈에게 가까이 붙을 생각을 못하였다. 사신의 낫을 손에 넣은 스윈은 광기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보였다. 왜 별명이 미친개인지 알 것 같군. "컨퓨전Confusion." 난 뒤에서 달려들던 놈들에게 마법을 건 다음, 목을 날려버렸다. 두두두-! "죽여라!"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그들은 적을 죽이며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땅의 진동을 가늠해보니 적들의 후미 부대도 달려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이 이상했다. 습기가 몸을 끈적하게 만들었다. 비가 오겠군. 툭툭- 투두둑- 쏴아아-! 내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쏫아져 내렸다. 비는 시원했다. 내 몸에 묻은 피를 씻고 지나갔다. 라이코스는 날개를 활짝 피고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하늘 높이 날아오른 라이코스는 두 날개를 퍼덕이며 소리쳤다. "끼이이이익!" 쇠가 유리를 긁는 그런 소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라이코스에게로 향했다. 라이코스의 날개는 흰 빛을 발했다. 라이코스의 눈에서는 푸른 안광이 폭사했다. 그 모습은 사람의 전의를 끓게 만들었다. 물론 아군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청안백우조다!" "아이리스의 수호신이다!" 수호신 같은 소리하네. 대체 어떤 놈이 외친거냐? 저 놈을 수호신으로 섬기느니 차라리 나를 섬겨라! "끼이이이익!" 라이코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고, 그와 함께 아군의 사기도 올라갔다. 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청룡도를 휘둘렀다. 우리를 둘러 싼 포위망이 무너지고 있었다. 몇 명이 말에서 굴러떨어지나 싶더니, 은빛 갑옷을 입은 자를 시작으로 한무리의 군사가 모습을 들어냈다. "스윈!" 스윈은 사신의 낫을 휘둘러 다시 몇 명을 저승으로 보낸 다음, 고개를 돌렸다. "키레아군.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는데. 아니지, 이젠 폐하라고 불러야하나." "괜찮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스윈도 크게 웃었다. "루시아는 만나봤지?" "예." "많이 예뻐졌지?" "예. 못 알아 볼 정도던데요." "그럼 이 놈이나 한번 봐봐. 아이언스 성을 쓰는 놈이다." "예?"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백금발의 머리카락. 에메랄드 빛 눈동자. 그와 똑같아.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서 날뛴다.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멍하니 나를 처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당신은……." 뒤의 말은 함성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난 비 때문에 완전히 늘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오랜만이군." 대륙력 1671년 6월 22일. 우기(雨期)가 시작되었다. <1부 완결> 외전. 최고의 와인 대륙력 1671년 6월 10일 화창한 날씨. 지금은 햇빛이 내리쬐는 정오였다. 햇빛은 따사롭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날씨가 좋군." 한 남자가 거리를 걷던 중, 잠시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남자는 푸른 물감으로 그려진 것 같은 하늘을 보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앞으로 내려와 시야를 가리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남자는 여타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눈에 띄었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로 준수한 용모이고, 청갈색의 긴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 끈으로 묶었다. 단점이 하나있다면, 피부가 하얗고 몸이 허약해 보인 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은 남자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리의 압축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지금,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부자이거나 귀족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남자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쓰며,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걸음이었다. 잠시 후, 남자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커다란 저택이었다. 남자는 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두 명의 병사 중, 나이가 들어보이는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트 백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병사는 꼿꼿한 동작으로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하이스네 님이시군요.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남자는 병사에게 인사를 한 후, 문을 지나처 저택으로 향했다. 레이트 백작의 손은 빠르게 종이 위를 고 지나갔다. 그의 손이 거쳐가자 흰 종이 위에는 검은색의 잉크가 화려하게 번졌다. 잠깐 동안의 필기가 끝난 후, 레이트 백작은 펜을 잉크병에 꽂아 놓은 다음, 종이를 들어 자신이 써놓은 글을 보았다. "제길……." 레이트 백작은 인상을 찡그리며, 종이를 구겨 뒤로 던졌다. 몇 장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며 매달린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레이트 백작은 의자에 길게 몸을 뉘웠다. '빌어먹을. 쓰레기 같은 놈 하나 죽이고나니 처리 할 일이 산더미 같군.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반 병신 만들어 놓는 건데…….' 별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레이트 백작은 잠시 쉬기로 마음을 먹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 순간, 누군가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 레이트 백작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서재에 들어올 수 있는 인물은 세명에 불과했다. 지금은 하녀장이 된, 자신을 키워준 유모.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귀여운 딸. '아니, 이제는 하나 더 인가?' 레이트 백작은 얼마 전에 새로 생긴 자신의 딸을 생각하며 웃음을 지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레이트 백작은 네명 중, 누구 일까 조심스럽게 점 처보았다. '음, 이 느낌은……, 셀리오네?' 곧, 문이 완전히 열리며 초록색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린 한 여인이 나타났다. 레이트 백작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하고,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무슨 일이지?" 셀리오네는 서재 바닥에 가득히 쌓여있는 종이 뭉치들을 보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 또……." 레이트 백작은 깜짝 놀리며, 자신의 아내의 앞을 가렸다. 그리고 아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빠르게 화재를 돌렸다. "무슨 일이야, 여보? 서재까지 찾아온 걸 보니, 중요한 손님이라도 찾아왔나 보지?" 셀리오네의 눈은 여전히 바닥의 종이 뭉치들을 향해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그 모습을 보고는 이마에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또 아내의 그 지겨운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건가?' 셀리오네는 종이 뭉치에서 눈을 떼고, 자신의 남편을 보았다. 레이트 백작의 이마의 땀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셀리오네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거론하지 않고,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해 얘기했다. "응접실에 헤이체르 공작가의 둘째 아드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레이트 백작은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흐음, 그 녀석이 여기는 왠 일이지?"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레이트 백작님.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하이스네는 레이트 백작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트 백작은 가벼운 손짓으로 앉으라고 말한 다음, 자신도 그 반대편에 앉았다. "그래. 어쩐 일이지?" 하이스네는 앞에 놓은 찾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하하, 제가 뭐 꼭 일이있어야만, 형님을 뵙겠습니까? 일도 무사히 끝마치고해서 안부나 물으러 온겁니다." 레이트 백작은 눈을 들어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서로 피를 섞은 사이는 아니였다. 하지만 친동생보다 더욱 가까운 사이였다. 레이트 백작은 10여년 전, 하이스네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언변과 지식에 감탄했다. 그 후로 서로 친하게 지나다보니 어느새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이스네는 형제들의 견제를 받는 입장이기에 최대한 정치 권력에서 멀어보여야만 했다. 레이트 백작은 자신의 동생이 하녀의 몸을 빌어 태어난 것 때문에, 계승권 싸움에서 제외 된 것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다. 헤이체르 공작의 자식 중, 제대로 된 남자는 하이스네 하나 뿐이었다. 하란시아나 라유드는 힘만 쓸 줄 아는 멍청이들이었다. 그 둘의 능력은 하이스네의 반, 아니, 반의 반에도 못 미쳤다. "그래. 그런 놈이 형님이 죽다 살아났는데, 지금에서야 찾아오는거냐?" 하이스네는 웃으며 손을 내 저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얼마나 형님 걱정을 많이하는데. 전 형님 때문에 상단에서 겨날 뻔 했습니다." "그건 왜?" "형님이 처형 당한다는 말 때문에, 한동안 수도에 발이 묶였다가, 풀려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간신히 밖으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형님 때문에 수송이 얼마나 늦어졌는지 아십니까? 저야 물론 당장이라도 형님을 뵈려가려고 했지만, 아시다시피 전 상단에서 겨나면 갈 곳이 없는 몸입니다." 레이트 백작의 오른쪽 눈썹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곧 풀어지더니, 너털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녀석. 말 솜씨는 여전하군. 그런 말 할 여유가 있으면, 한번이라도 더 들르지 그러냐?" "맞아요. 자주 좀 들르고 그러세요." 셀리오네는 어느새 다가와 레이트 백작의 옆에 앉으며 하이스네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 형수님." 셀리오네는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자신의 남편 앞에 있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차가 어느 정도 채워지자, 찻병을 내려 놓은 다음, 웃으며 하이스네에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예. 정말 그렇군요, 형수님. 그나저나 못 본 사이에 형수님은 더욱 아름다워지셨네요." "아, 아니에요." 셀리오네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예의 상 해본 말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세상 어떤 여자가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는가? 하이스네는 반 정도 마신 차를 내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다른 여자들은 나이를 먹으면 주름살 생긴다고 울상인데, 형수님은 점점 더 아름다워 지시니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아니에요. 제 나이가 몇인데……." "아닙니다. 형수님은 나이가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정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세레나와 자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 입니다." "아이, 농담도……." 셀리오네는 번지는 미소를 억지로 참으며, 두 손을 내 저었다. 내심 남편의 의제(義弟)가 보는 눈은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은 레이트 백작의 한마디로 무너져 내렸다. "야, 너 자꾸 헛소리 할래? 지금 셀리오네 나이가 몇인데, 세레나와 자매라니. 세레나가 그렇게 늙어보이냐?" "여보!" "농담이야, 농담. 당신이 얼마나 예쁜데." 레이트 백작은 화난 셀리오네의 표정을 보고는 대충 얼머무렸다. 셀리오네는 소리를 질렀고, 레이트 백작은 셀리오네의 화난 표정을 보고 는 대충 얼버무렸다. 하이스네는 부부가 사이좋게 다투는 모습을 재미있다 는 표정으로 지켜본 다음,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세레나는 외출했습니까? 모습이 안보이는군요." 셀리오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예. 잠깐 옷사러 나갔어요." '귀여운 동생과 함께요.' 셀리오네는 얼마 전에 생긴 둘째 딸을 생각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 이스네는 입을 가리고 웃는 셀리오네를 보며 어리둥정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트 백작은 품에서 나무각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고, 그것을 열어 안에 있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자세히 지켜 보던, 하이스 네는 불쑥 입을 열었다. "형님만 피십니까?" 잠시 후, 두 남자는 사이 좋게 입에 담배를 문 채,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 다. "오늘 저녁에 왕궁에서 무도회가 있다지요?" "얼굴도 안 비치는 놈이 정보는 빠르구나." "가실겁니까?" 레이트 백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얼굴은 비쳐야겠지. 폐하와 다른 귀족들한테 견제 받고 있는 입장이니까. 제길, 또 그 골빈 놈들만 모여 있는 곳에 가야 되는 건가!" "말씀이 심하시군요. 그나저나 저 번 무도회는 재미있으셨는지요?" 하이스네는 일부러 말끝이 약간 올렸다. 레이트 백작은 턱을 어루만지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재밌기야 진짜 재밌었지. 너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레이트 백작의 모습에 하이스네는 서서히 피 가 머리 쪽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이스네가 수도로 돌아왔을 때, 그 소문은 이미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알 만큼 수도 내에 쫙 퍼져있었다. 사실 소문은 이미 예전에 퍼졌지만, 하이스 네는 어제 저녁 쯤에야 수도에 도착했기에 어젯밤에야 간신히 그 소문을 들은 것이다. 하이스네는 펍에서 술을 마시던 도중 장정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 순간, 두개 골 뚜껑이 열리는 줄 알았다. 하이스네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사람이 무식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가 있습니 까?" "내가 뭘 했다고?" 쾅-! 하이스네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셀리오네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 했지만, 그는 개의 치 않고 말을 이었다 "형님이 제 정신이십니까? 아무리 화가 나셨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죽이려면 밖에 나가서, 아니, 최소한 무도회 장은 벗어나서 죽이셨어야지요!" 레이트 백작은 담배를 재떨이 부벼 끈 다음, 웃으며 말했다. "그 자식이 열받게 하잖아." "형님은 정말 왜 그러십니까!" "시끄러, 임마! 여기가 니 집이냐? 자꾸 소리지르지마!" "형님이 소리지르게 만들습니까!" "닥쳐! 끝이 좋으면 모두가 좋은거야!" "형님의 그런 사고 방식이 잘못됐다는겁니다!" "니가 지금 날 훈계하는거냐!?" "예! 훈계하는 겁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솔직히 그때 형님이 운 이 좋아서 살아남은 거지, 다른 나라였으면, 목이 잘려도 열 개는 잘렸을껍 니다!" "이 자식이, 진짜……!" "조용히 좀 해요!" 갑자기 들려온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에 말이 잘리고, 레이트 백작은 아내 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가만있어!" 순간, 셀리오네의 얼굴에는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의제(義弟)와 싸웠으면 싸웠지, 왜 자신에게 큰 소리란 말인가? 이 집에 들어와 얼마나 고생을 했 는데, 이제와서 이런 대접이라니!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뭐?" 그럼 누가? 세 사람은 일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초록색 머리카락 을 곱게 빗어 넘긴 소녀가 눈을 치켜뜨고 서 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놀란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세, 세레나. 너 언제부터 와 있었냐?" "아까 아버지와 삼촌께서 큰 소리 치실 때부터요." "흠흠. 미안하게 됐다." "으음, 미·안·하·세·요?" 딱딱 끊어서 말하는 세레나의 말투에 레이트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 작했다. 어찌된 일인지 그 남자에게 차인 뒤부터, 성격 파탄자의 길을 걷고 있는 딸이었다. 안 그래도 안 좋은 성격, 이젠 거의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 에 이르렀으니. '저걸 누가 데려간담? 혹시 내가 평생을 데리고 살아야 하나?' 심히 걱정되는 레이트 백작이었다. 세레나는 양 손을 허리에 올리고 숨을 들이마쉈다. 이건 분명 일갈의 사 자후(獅子吼)를 내지르기 위한 준비동작이다. 이것을 눈치 챈 레이트 백작 과 셀리오네는 일제히 귓구멍을 틀어 막았다. 하이스네는 부부가 동시에 귀를 막는 동작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그 순간 세레나의 앙 칼진 목소리가 방 안 전체에 퍼졌다. "대체 정신이 있으신거에요, 없으신거에요! 얘가 보고있는데 싸우면 어떡 해요!! 그런 모습 보여주면, 라나의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구요!!! 자꾸 집 안에서 큰 소리 치실꺼에요!!!" '니 목소리가 더 커.' 세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이스네는 얼얼한 귀를 붙잡으며, 세레나 의 목소리에 감탄하고 있었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더니, 결국은 득음했구나. 장하다, 세레나. 너의 목 소리는 이제까지 내가 들어본 소리 중에 제일 크다.' "왜 다들 귀를 막고 있어요! 제 말을 듣는 거에요, 마는 거에요!!" "어, 언니……." 세레나의 옆에 서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귀여운 소녀는 두려움 가득한 얼 굴로 세레나를 올려다 보았다. 세레나는 눈물을 글썽이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는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이 것 보세요! 라나가 무서워하고 있잖아요!!" "어, 언니……." 갈색 머리의 소녀는 세레나의 치마자락을 붙잡았고, 세레나는 허리를 숙 여 소녀를 끌어 안았다. "괜찮아, 라나야. 무서워 할 것 하나 없어." 세레나는 소녀를 다독거려주며 말했지만, 소녀는 이상하게도 더욱 무서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니까, 라나야. 떨지마. 아버지가 잠시 큰 소리 치시긴 했지만, 라나 한테 그런거 아니니까, 전혀 무서워 할 필요 없어." 소녀는 떨며 말했다. "언니가 더 무서워." "뭐?" 세레나는 어리 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세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이 정도로 무서웠는데, 저 어린 여자아이는 얼마나 무서웠 을까?' "미안해, 라나야. 언니가 또 큰 소리로 말했지.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면서, 맨날 그러고……. 언니, 무서워." "그래, 그래. 언니가 잘못했어. 언니가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떨지 마, 라나야." "히잉……." 하이스네는 어린 소녀를 껴안고 달래주는 세레나의 모습을 보며, 머리 위 에 커다란 퀘스천 마크(?)를 그렸다. 저 소녀는 대체 누구길래, 세레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일까? 하이스네는 한동안 고민하다 가장 쉽고, 확실하 고, 간단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하이스네는 갈색 머리의 소녀를 한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청초하면서도 성숙하고, 몸 곳곳에 우아한 기품이 배여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레이트 백작은 고개를 돌려 청초하면서도 성숙하고, 몸 곳곳에 우아한 기 품이 배여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처다 보았다. 길게 기른 갈색 생머리. 커다란 눈망울.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 작고 붉은 입술. 꼼지락 거리는 작은 손. 아무리 보아도 귀여운 10살짜리 여자아이였다. 그 귀엽고 깜찍한 모습에, 레이트 백작은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안하더니만, 그런 이유가 있었군. 그러니 셀리오네 가 주선해 준 중매를 전부 거절했지. 흠흠, 그나저나 이 녀석에게 그런 취 미가 있었을 줄이야. 어디보자……, 베르나제 남작의 넷째 딸이 지금 12살 이었지. 으음, 아니야.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아. 그럼, 비토스코 백작의 여섯째 딸? 아마, 지금 9살이었지? 아니야, 아니야. 키르게오드 남작의 아 홉째 딸이 가장 낳겠군. 세 달 전에 걷기 시작했다니까, 녀석도 마음에 들 어할꺼야.' "형님!"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자신있는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 조만간 중매 한번 서마." "갑자기 왠 중매 얘깁니까? 저 아가씨가 누구냐고 물었는데." "아아, 저 얘 말이냐?" "예." "내 딸이다." "예?" 하이스네는 순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린 채, 한손으로 라나를 가리켰다. "하하, 형님께서 착각을 하셨다본데, 제가 지금 가리킨 사람은 세레나가 아니라, 세레나 품에 안겨있는, 저 청초하면서도 성숙하고, 몸 곳곳에 우아 한 기품이 배여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가리킨 겁니다." "그래, 맞다. 저 얘가 내 딸이다." "그러니까 제가 가리킨 것은 세레나가 아니라, 저……." "청초하면서 성숙하고, 몸 곳곳에 우아한 기품이 배여있는 아름다운 아가 씨를 가리킨거지. 맞지?"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내 딸이라니까. 세레나도 내 딸이고, 세레나 품에 안겨있 는 청초하면서도 성숙하고, 몸 곳곳에 우아한 기품이 배여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내 딸이야." "……." 하이스네는 고개를 돌려 셀리오네를 보았다. '뭐라고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형수님. 저 말이 진짜입니까?' 셀리오네는 어리둥절해하는 하이스네의 모습을 보고는 살포시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은 저 청초하면서도 성고, 몸 곳곳에 우아한 기품이 배여있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형님의 딸이라는 얘기다. 그렇 다는 건 자신에게 조카가 하나 더 생겼다는 얘기다. '대체 뭐가 어떻게……?' 하이스네는 빠르게 머릿속으로 가능성이 있는 사항들을 정리해보기 시작 했다. 잠시 후, 그 가능성들에게는 번호표가 붙었고, 하이스네는 입을 열었 다. "방탕했던 젊은 날의 산물이군요." 순간, 레이트 백작은 정색을하며 말했다. "난 젊었을 때도 셀리오네 하나 뿐이었어." "누가 들으면 진짜 그런 줄 알겠어요." "정말이야, 여보. 내가 만난 여자들은 많았지만, 정말로 사랑한 여자는 당신뿐이란 걸 당신도 잘 알잖아." "흥." 셀리오네는 코웃음을 쳤지만,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젊었을 때, 남편에게 꼬이는 날파리들을 쫒아내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자들을 석상(石像)으로 보게 하느라 얼마나 많은 힘을 들였던가? 결국 진드기처럼 달라붙어있던 시안브레드 공작가의 둘째 여식을 떼어내고 나서야, 간신히 레이트 백작가의 장남과 허니문이라는 커다란 문을 통과 할 수 있었다. 그 때,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여해 남 몰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시안브레드 공작가의 둘째 여식을 보며 셀리오네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승리감을 맛보았다. 자신은 수십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모든 처녀들의 우상이던 남편을 차지한 것이다. 이러한 힘든 투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남편은 지금도 자신만 바라봐야 하고, 먼 훗날에도 자신만을 바라봐야 한다. 원래 사랑은 움직이는거다. '내가 그때 미쳤었지. 발에 채이는 여자들 다 놔두고 셀리오네와 결혼을 하다니……. 그리고 세레나 쟤는 왜 또 그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날 이렇게 피곤하게 하나. 역시 그 놈이 선견지명이 있었어. 발목 잡히기 전에 차고 떠나다니.' 레이트 백작은 공처가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을 내쉈다. 하이스네는 첫 번째 가능항이 퇴짜를 맞자, 두 번째 가능항을 꺼냈다. "숨겨 놓은 자식입니까?" "아니." '이런…….' 두 번째 가능항 마저 퇴짜를 맞자, 하이스네는 최후의 가능항을 꺼내기로 했다. 자신조차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람일이란 혹시 모르는 것이다. "요즘 왕궁 감옥은 남녀 합방으로 운영되나보죠?" "넌 두달 만에 10살짜리 얘가 생기나 보다?" '역시 아니었군.' 하이스네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농담이었습니다, 농담. 그럼 어째서 저 아가씨가 형님의 딸이자, 제 조카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제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어느새 세레나와 라나는 레이트 백작의 옆에 위치한 쇼파에 앉아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쇼파에 몸을 파묻고 즐거워하는 라나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넌 어째서 이 아이가 내 친딸이라고만 생각하는거지?" "……." 하이스네는 그제서야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양녀를 들인거지? 하이스네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고,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아 낼 수 있었다. "흠흠, 형님에게 그런 취미가……." 순간, 레이트 백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너 죽을래!? 그리고 그런 취미는 니가 가지고 있잖아!" 하이스네도 지지않고 일어나 외쳤다. "아니, 제가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그럼 아니냐?" "전 어디까지나 정상입니다." "정상? 정상 같은 소리하네. 그래, 정상인 놈의 눈에 10살짜리 여자 아이가 청초하면서도 성숙하고, 몸 곳곳에 우아한 기품이 배여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보이냐? 니가 그 동안 그 많은 중매를 왜 거절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아니, 그거야 상대 여자분의 환심을 얻기 위한 수식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독신주의자입니다." "그러니까 10살짜리 여자 아이에게 환심을 얻으려는, 그게 이상하다는거야!" "아이에게 고무적인 말을 해주어,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창조성과 자아정체성을 개발, 발전 시켜주려한 저의 의도를 그런 식으로 비약하지 말아주십시오!"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제가 형님인 줄 아십니까!" "시끄러워요!!!" 둘이 언성을 높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세레나가 소리를 질렀고, 라나를 포함한 네명은 일제히 귀를 틀어 막았다. '니가 더 시끄러워. 제발 조용히 좀 살자.' "언니, 무서워. 우이잉." "아앗! 미안해, 라나야." 한 동안의 소란이 진정되고, 다섯은 조용히 차를 마시며 과자를 집어먹었다. "맛있니?" "응. 맛있어. 라나는 쿠키 무지 좋아해." "그래. 많이 먹어, 라나야." 레이트 백작과 그의 부인, 그리고 하이스네는 두 자매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흐뭇한 표정으로 새로 생긴 둘째 딸을 지켜보다, 하이스네에게 말했다. "오늘 밤 자고 갈꺼냐?" "예." "내일은?" "마찬가지입니다." "며칠이나 머물꺼냐?" "아마 당분간은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만 신세 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형수님?" "물론 저야 언제나 환영이지요." "그래, 그렇게 해라. 뭐,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고."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일주일간은 아름다운 형수님을 매일 볼 수 있겠군요. 정말이지 저는 그게 제일 기쁩니다." "아이, 무슨 말씀이세요. 놀리지 마세요." 셀리오네는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지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레이트 백작은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아내의 모습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자식이 아부하기는. 못 본 사이에 사탕발림만 늘었군. 그 말빨로 여자를 꼬셨으면, 장가를 가도 수십번은 갔겠다.' "뭐야? 너 내 마누라한테 관심있는거냐?" 하이스네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모르셨습니까? 형수님이야 말로 제가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 십니다. 지금이라도 형님과 갈라서기라도 한다면, 바로 청혼 할 생각입니다." 셀리오네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이, 농담 좀 그만하세요. 자꾸 그러시면 저 화낼꺼에요." "그래. 맞다. 눈이 삔 것도 아닌데, 자꾸 그런말하면 안 돼지. 안경까지 썼으면서, 눈이 그렇게 낮아서야 어디 써먹기나 하겠냐?" 순간, 셀리오네의 눈에서 불똥이 튀어나오고, 그녀는 시동생이 눈치 채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온힘을 다해 남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으헉!" "앗! 왜 그러십니까?" "어머, 여보."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못 본척했지만, 전부 보고 있었던, 하이스네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아, 적당히 말해서 분위기를 맞춰줄 것이지, 꼭 이상한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쳐요. 아무튼 형수님한테 바가지 긁힐려면 오늘밤 잠은 다 잤겠군.' 레이트 백작은 찡그려지는 얼굴을 억지로 펴며, 꼬집힌 허벅지를 열심히 문질렀다. '아프다.' 하이스네는 그런 레이트 백작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일어나지. 라나와 세레나도 올라가서 좀 쉬고." "예, 아버지." "……." 라나는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녀로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아직 레이트 백작을 어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트 백작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친해지려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같이 지내다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족이 될 것이다.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군요." "그렇지?" "예. 사실은 형님께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 "재밌는 얘깁니다." "재밌는 얘기라……." 레이트 백작은 잠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자리를 옮길까, 아니면, 사람을 물릴까?"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우리가 뭐 역모하는 것도 아니니. 알려저도 상관 없는 얘깁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형님네 가족아닙니까." "그럼 말해." 하이스네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에든 찻잔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형님네 집에는 마실게 차밖에 없습니까?" 레이트 백작은 그 말의 의미를 금방 알아 들었다. "으음, 그래, 알았다. 내가 그럼 1610년 카우라 산 와인을……." "형님. 이건 재밌는 이야기입니다." '녀석…….' "좋다. 그럼 1598년에 만들어진……." "흠흠, 정말 재밌는 얘깁니다. 재밌는 얘기." "그, 그렇다면 1546년……." "형님! 이건 정말로 재밌는 얘깁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거냐!? 1546년에 만들어진 그리마우 산 카르베는 세상에 다시 없는 명주야!" "하지만 형님의 집에는 더 훌륭한 명주가 있지않습니까?" "야, 야, 그건……." "1466년 카우라 산 와인. 현재 세상에 다섯병 남았다고 일컬어지는 명주. 카우라 산 와인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명품. 형님의 조부께서 암시장을 통해 힘들게 구하셨지만, 그 분은 결국 입 한번 대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요. 전대 백작님께서는 술을 못하신 관계로 지금 형님의 손에 무사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야, 이 자식아! 그건 내가……." "죽을 상황에서도 안 마신거죠. 심지어는 애주가인 저희 아버님께서 금은보화를 갔다 바치며, 한 모금만, 아니, 혀만 대보자고 사정을 했는데도 매몰차게 거절을 하셨죠." "자, 잘도 알고있구나." "물론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저도 맛 좀 보고 싶습니다." "……." "제가 이번에 해드릴 얘기는 정말 재밌는겁니다. 아마도 술 값 정도는 충분히 치르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으드드득-! 레이트 백작은 심하게 이를 갈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개 같은 자식!" "뭘 그렇게 떠십니까? 그냥 한번에 뽑으세요." "몇 시간 째 그러고 있는거에요? 빨리 열어요, 아버지." "그냥 뽑아요, 여보." "우웅, 라나가 대신 해드릴까요?" "시끄러! 조용히 해! 다 조용히 해!" 레이트 백작은 두 손을 세게 저으며, 소리 친 다음,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다시 마개따기를 움켜잡았다. 심은 박아 놓았으니, 이제 당기기만하면, '퐁' 하는 소리와 함께 200년이 넘은 와인이 개봉될 것이다. 1466년 카포이에드 산 와인은 고알콜의 레드 와인이었다. 그 맛은 너무 강렬해, 한 번 맛본 자들은 신이 내린 와인이라고 극찬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술이 어떤 술이던가? 조부님께서 사놓으시고 아까워서 입 한번 대 보지 못하신 술이다. 그런데, 이걸 지금 개봉해야한다니. 저승에 가서 조부님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레이트 백작은 그 동안 자신의 조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마시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막상 꺼내고 나면 병만 핥아 보고 집어 넣은 조부님을. 하지만 그 명주가 자신의 손에 들어오자 똑같은 행동을 수십번이고 반복해야만 했다. '흐윽, 이게 어떤 술인데……. 이게 어떤 술인데…….' 레이트 백작은 극심한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최고의 명주를 맛보고 싶은 욕망과, 아껴두었다 나중에 맛보고 싶은 욕망. 하지만 이번에 다시 넣어 놓으면, 언제 다시 꺼낼지 모른다. 조부처럼 맛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뜰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계기가 오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 따는 거다. 따는 거야!' "빨리 좀 따십시오. 그 자세로 지금 몇 시간쨉니까?" "알아. 따면 될 것 아냐!" "남자가 왜 그렇게 결단력이 없습니까? 형님이 그러고도 남자입니까?" "시끄러, 자식아! 딴 다니까!" "좋습니다. 그 자세입니다. 그 자세에서 힘을 주어서 뽑으세요. 형님은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어요!" "뽑는다!" "뽑으세요." "뽑는다!" "뽑으세요." "으아아!" 힘찬 기합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에 레이트 백작은 마개따기를 힘차게 당겼고, '퐁' 하는 소리가 나며, 코르크 마개는 완전히 뽑혀 나갔다. 레이트 백작은 모든 힘을 소진한 듯, 비틀 거리며 뒷걸음질 쳐 쇼파에 주저 앉았다. 레이트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코르크 마개를 바라 보았다. '하늘이시여. 제가 정말로 이 술병을 개봉했단 말입니까? 으윽, 조부님. 이 못난 후손을 용서하소서.' "잘했습니다, 형님. 정말 멋진 한판 승부였습니다." "우웅, 술이다, 술." "라나도 저거 마시고 싶어?" "응. 마시고 싶어." 레이트 백작이 술병을 개봉한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탁자 위에 놓인 다섯 개의 술잔이었다. "이, 이 술잔들은 대체……." "사람이 다섯이니, 술잔도 다섯이지요. 뭐 이상한 점 있어요?" "당신은 술 안 마시잖아." "오늘부터 마시기로 했어요. 최고의 명주라는데 맛 정도는 봐도야 나중에 후회를 안하죠." "세레나……." "냄새가 좋은데요. 저도 한잔만 마실께요." "라나……." "라나도 술 좋아해요." "라나야, 너 술 마셔본 적 있어?" "응, 언니. 전에 엄마가 찬장 위에 숨겨놓은 사과주 꺼내서 마신 적 있어. 주스인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술이더라." "그래서?" "으응, 술인 걸 알았지만 맛있어. 그래서 계속 먹었어. 깨어나서 보니까 한병을 다 마셨더라." "그래서?" "엄마한테 엉덩이가 새빨개 질 때까지 맞았어. 우웅, 그 때 정말 아팠다." "라나야, 저건 포도주야." "그럼 포도맛 나?" "응. 포도맛 나." "우와, 맛있겠다." 레이트 백작이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동안, 하이스네는 술병을 들고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조금 씩만 따라라. 그거 넘치겠다. 야, 조금 씩만 따르라니까!" "잔에 반도 안채웠습니다, 형님. 자꾸 쪼잔하게 굴지 맙시다." "야, 야. 넘쳐." "아직 따르지도 안았습니다. 제발 진정하세요." 레이트 백작의 처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이스네는 결국 다섯개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레이트 백작은 이제는 반 이상 비어버린 술병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기왕 개봉한 것 맛이나 보자는 심정으로 잔을 움켜잡았다. '자식이 많이도 따랐구나.' 예로부터 와인의 맛을 즐기는데는 3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눈으로 빛깔을 즐기고, 두 번째는 코로 향기를 즐기고, 마지막은 입으로 맛을 즐긴다.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는 앞의 두 단계를 충실히 지켰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술잔을 입에 댔다. "으음." 둘은 와인을 입에 머금은 채,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하기 위해 노력했다. 잠시 후, 둘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이, 이 맛은……." "진짜 끝내주는군요." "……그래."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는 멍한 표정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세 여인은 그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입에 댔다. "맛있네요." "괜찮은데요, 아버지." "쓰다." 레이트 백작은 세 여인의 대사에 다시 한번 절규해야 했다. '이 명주를 마시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저거라니. 헤이체르 공작이 마셨다면, 눈물을 흘리며 극찬을 했을텐데.' 하이스네는 술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그는 아직도 1466년 카포이에드 산 와인이 주는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정말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강렬한 포도의 향이 혀 끝부터 시작해 입 안 전체를 감싸고, 톡 쏘는 듯한 그 맛이 목구멍으로 넘어 갈 때는……, 됐습니다. 여기까지만 하지요. 더 이상 말했다가는 제 말재주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할테니까요. 정말 제 아버님께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렇게도 이 와인을 맛보고 싶어했는데." "동감이다. 나는 지금 살아있는게 이렇게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이 맛을 못보고 죽었더라면, 요단강을 건너며 회한의 눈물을 뿌려야 했을꺼다. 아, 조부님!" 두 남자의 극찬의 세 여인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 와인이 그렇게 대단한거에요? 그냥 다른 와인보다 조금 더 향긋하고 산뜻한 것 뿐인데."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아버지. 그냥 다른 술보다 맛이 좀 더 괜찮네요. 뭐 별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맛아, 언니. 이거 사과주보다 더 맛있어." "그러니, 라나야?" "응. 진짜 맛있어." "그래, 그래. 저기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그거 먹고 또 먹어." "응, 언니." 술잔을 들고 홀짝홀짝 마시는 라나의 모습에 레이트 백작은 살아 생전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조그만게 벌써부터 술 맛을 알아가지고 1466년 카포이에드 산 와인을 끝장내려 하다니. 안돼! 그것만은 막아야 해.' 레이트 백작은 조심스럽게 걱정어린 말투로 말했다. "험험, 사랑하는 나의 딸, 라나야. 과음은 몸에 해로운 거란다." 라나는 괜찮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라나는 술 좋아해요." "험험험, 그게 아니라, 술을 많이 마시면, 밤에 잠을 잘 못잔단다." 라나는 어린 나이에 기특하게도 레이트 백작의 걱정을 덜어 줄 생각이었는지, 더욱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나는 술 많이 마시면, 밤에 잠 잘와요." 레이트 백작은 계속되는 라나의 조리있는 답변에 미칠 지경이었다. '제발 그것만 마시고 그만마셔라. 부탁이다. 라나는 이런 레이트 백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홀짝홀짝 마실 뿐이었다. 한참 동안, 술잔을 들이키던 중, 레이트 백작은 자신이 왜 술병을 개봉하게 되었는지 고찰하게 되었고, 그 이유를 깨닫자 마자, 하이스네에게 말했다. "너 아까 재밌는 얘기 한다 그러지 않았냐?" "아, 그렇군요. 깜빡했습니다." "그럼 빨리 얘기해라. 만약 시시한 얘기면, 저 술병으로 네 녀석의 머리통을 박살내주마." "하하, 형님도 참 그런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하시다니……." "진담이다." 레이트 백작은 당장이라도 술병을 들어 머리를 내리 칠 것 같은 행동을 취했고, 하이스네는 레이트 백작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이제 말씀드리지요. 아, 눈에 힘 좀 푸세요. 무서워서 어디 말이나 꺼내겠습니까?" "빨리 말해." "알겠습니다." 하이스네는 언제나 짓고 있던 옅은 미소를 지웠다. 어느 정도 말을 꺼낼 분위기가 잡히자, 하이스네는 안경을 한번 만지작 거린 다음, 입을 열었다. "제가 수송 일 때문에 레나제까지 갔다 온 건 알고 계시지요?" "음." "가는 도중, 산적을 만났습니다. 숫자가 200이나 되더군요. 정말 죽을 뻔 했습니다." "그 얘기는 대충 알고 있다. 두목을 생포하고 부하들은 완전히 와해시켰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동생 일에는 관심이 많으시군요." "그런데 죽을 뻔 했다는 건 무슨 말이냐? 니 실력은 내가 잘 알고 있어. 200정도면 다 죽이진 못해도, 니 한 몸 정도는 쉽게 피할 수 있었을텐데." 하이스네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슬쩍 안경을 올려 썼다. "글쎄요…….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장식품 정도로만 생각하는 서생이 아닙니까?" "웃기는군." "저는 검술이라는 걸 몰라야 합니다. 잘난 머리 때문에 안 그래도 피곤한데, 검술 실력까지 알려지면, 대낮에 거리 활보하기도 힘들어 집니다." "하란시아 놈이 어쌔씬 길드를 통채로 매수를 해서라도 널 제거하려 하겠지." "여하튼 그 위기에 순간에서 저를 비롯한 다른 용병들을 구해준 남자가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두목인 자이크를 생포한 것도 그가 한 일입니다." 하이스네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레이트 백작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예? 그래서라니요?" "지금 니가 한 얘기들 중에서는 재밌는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머리로 술병을 깨는게 좋겠지?" "진정하십시오, 형님. 제 얘기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려는 건 그 남자의 정체입니다." "그래. 그 남자의 정체가 뭔데? 개틴의 왕족이라도 되냐? 아니면, 서거하신 전대 폐하의 환생이라도 되냐?" "방금 그 말은 왕족 모독죄에 해당한다는 거 아시죠? 그리고 그 남자의 정체는 형님께서 앞서 말하신 두 명 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뭐가 흥미로운데?" 레이트 백작의 눈이 점점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이스네가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정보라는 얘기다. 대륙 정세에 영향을 미칠 만한. 하이스네는 레이트 백작의 표정을 보고, 이제야 재밌어진다는 듯, 얼굴에 짙은 미소를 띄웠다. "마법을 쓰더군요." 순간, 레이트 백작은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대륙 내에서 마법을 쓰는 자들이 한, 둘이던가? "탑의 주인(마법사 길드 마스터)이라도 되나 보지?" "우습군요. 탑의 주인이 나타나봐야 저희와는 상관 없잖습니까? 상아탑은 어떤 국가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요. 전 그 정도 얘기로 1466년 카포이에드 산 와인을 얻어 먹을만큼 낯이 두꺼운 놈이 아닙니다." "그러면 뭔데? 그놈이 고대에 존재했다는 키가 10m가 넘는 거인족이라도 되냐?" "키가 10m가 넘는 거인이 마법을 쓴다면, 정말 무시무시 하겠군요. 그를 보는 순간, 각 국가의 왕들이 전부 심장마비로 사망해, 왕권다툼이 처절하게 일어난다면, 제가 얻어먹은 술값 정도는 해결 할 수 있겠네요." "……." "농담은 이쯤에서 그만두지요. 그 남자는 키가 2m도 안되는 인간입니다. 외모는 정상입니다. 하지만 가장 특이한 것은, 이름입니다. 이름이 아주 특이하더군요. 제 평생 그런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레이트 백작은 술잔을 든 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셀리오네와 세레나, 라나는 주위의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어느새 하이스네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하이스네는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세 여인이 무거운 분위기에 거부감을 느껴 할 때 쯤, 하이스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하이스네는 숨을 길게 들이 마신 다음, 뒤의 말을 이었다. "히로……. 아이언스 히로……. 이것이 그의 이름입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일어 났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유리그라스였다. 쨍그랑! 그라스가 깨지는 소리가 맑게 울려퍼지는 순간, 두 여인이 벌떡 일어나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다. "히로!" "오빠!" 두 여인의 행동에 하이스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이스네는 세레나와 라나의 얼굴을 번갈아 본 다음, 레이트 백작에게 물었다. "아시고 계셨습니까?" 황당하기는 레이트 백작과 셀리오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레이트 백작은 너무 놀라서 오히려 담담해 질 지경이었다. "알다 뿐이겠냐?"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에게 아이언스 히로와 자신들과 있었던 일을 세세히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하이스네는 고개를 숙이고 그 얘기를 경청했다. 하지만 하이스네는 레이트 백작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얘기가 거의 끝나갈 때 쯤,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온 세레나가 자신의 멱살을 흔들며 소리질렀기 때문이다. "그 남자 지금 어딨어요!? 어딨냐구요!? 삼촌이 숨기고 계신거죠! 빨리 말해요!" 하이스네는 세레나의 행동에 정신을 차리지 못 할 지경이었다. 여자가 멱살을 잡고 흔들어 봐야 얼마나 힘이 있겠냐만은, 문제는 질러대는 소리가 거의 사자후에 가깝다는 것이다. "세, 세레나. 지, 진정해라." "그 남자 어딨어요! 숨겨봐야 소용 없어요! 당장 데리고 와요!" "그, 그게……." "빨리 안 말해요!?" "이, 이걸 놔야 말하지." 세레나는 멱살을 잡은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요. 빨리 말해요. 그 남자 어디다 숨겼어요?" "아니, 숨기나니. 어디서 그런 말도 안돼는 소리를……." "말해요!" 하이스네는 귀를 막으며, 세레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 알았다. 말할겠다. 말할테니 제발 조용히 좀 살자." "앉아, 세레나. 라나도 앉고." 레이트 백작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고, 세레나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하이스네에게 "죄송해요." 라고 말한 다음, 쇼파에 주저 앉았다. 라나는 손을 다소곳히 모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히로와의 뜨거운 첫기스의 추억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다시는 오빠를 만나지 못할꺼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곳에서 히로의 소식을 듣게 되다니. "음음, 결론부터 말하면, 전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뭐!?" "예!?" "안돼!" 레이트 백작, 세레나, 라나가 동시에 외쳤다. 세레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하이스네의 멱살을 잡고 흔들려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사람이 먼저 하이스네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야, 이 자식아!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이언스 히로라면 어떤 수를 써서든지 잡아뒀어야지! 아니면, 행선지라도 알아 두던가!" "켁켁, 형님. 이것 좀 놓으세요." "내가 지금 놓게 생겼어!" 하이스네의 발은 지면에서 약 10cm정도 떨어져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레이트 백작의 힘은 젊었을 때 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괜히 '열혈 백작' 이라는 칭호가 붙은 것이 아니다. 한번 열받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게 레이트 백작의 스타일이었다. 하이스네는 공중에서 발버둥을 치며, 레이트 백작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어디로 가는지는 압니다." "뭐?" 레이트 백작은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하이스네는 쇼파에 주저앉아 목을 어루만지며, 숨을 몰아 쉈다. "그래. 그는 어디로 갔지?" 붉어진 얼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하이스네는 고개를 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형님도 잘 알고 계실텐데요." "젠장! 그렇군." 레이트 백작은 발을 굴렀다. 어째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가 정말 아이언스 히로라면, 한 곳에 머물러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그곳' 으로 향했을 것이다. "아이리스!" "잘 아시는 군요. 바로 맞췄습니다." "우아아앙, 오빠아-!"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의 대화를 지켜보던, 라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오빠를 만날 수 있을꺼라 생각했다. 분명 다시 재회 할 수 있을꺼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레이트 백작은 엉엉 우는 라나를 보고는 한숨을 내쉈다. 처음에 만났을 때, 당돌한 표정으로 '전 히로 오빠 애인이에요.' 라고 말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처음에는 어린 여자아이의 사랑놀이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조숙하게도 라나는 진심으로 히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마 세레나가 그를 사랑하는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 정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정신연령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자신의 딸이었다. 레이트 백작은 다시 한숨을 내쉰 다음, 시선을 세레나에게로 옮겼다. 세레나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마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세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었다. "세레나……." 세레나는 호흡을 길게 들이 마시고 있었다. 아마도 울음을 참으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레이트 백작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딸의 눈에서 살기가 돌았다. 세레나는 눈물을 뿌리며, 힘껏 소리쳤다. "이 나쁜 자식!!!" 레이트 백작은 잡고 있던 딸의 손을 놓고, 귀를 막았다. 하이스네와 셀리오네도 귀를 막았다. 라나도 울다말고 귀를 막았다. 세레나를 제외한 전원이 귀를 막았다.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식!!! 으아아앙!" 결국 세레나도 울음을 터트렸다. 레이트 백작은 구슬프게 우는 두 딸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니 말을 요약하자면, 아이언스 히로는 아이리스로 떠나가고, 너는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는거냐?" "예. 그렇습니다. 제 말이 그 말이고 그 말이 제 말입니다." "그렇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늘려서 말해!" "그거야 객관적인 사실만을 형님께 전달하려 하다보니……, 아니, 그런데 왜 화를 내십니까?" "시끄러!" 하이스네는 아이언스 히로와 있었던 일을 레이트 백작에게 자세히 일러 주었고, 레이트 백작은 필요한 내용들만 잘 알아들었다. 하이스네는 세레나의 눈치를 보고는 얘기 할 때, 라이레얼을 쏙 빼고 얘기했다. 만약 '그 히로라는 남자 라이레얼이라는 하프엘프와 부적절한 행위를 했는데요' 라고 말한다면, 세레나가 벌떡 일어나 사자후를 내지를 것 같아서였다. 하이스네는 세레나와 라나 쪽을 가리키며 레이트 백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이언스 히로의 얘기를 하는 동안 이 여자분들이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이스네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이언스 히로와 세레나는 밤에 같이 불장난을 했을꺼란 짐작이었다. 라나는 아직 어리니까 병원놀이 정도. 레이트 백작은 세레나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여자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보통……." 레이트 백작은 말끝을 흐렸고, 하이스네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차였군요." 레이트 백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차였어. 그것도 완벽하게." "세레나도 참 안됐군요." "후우, 세레나 뿐만 아니라 라나도 차였어." "예?" "둘 다 차였어." "아버지!!!" 세레나의 외침에 하이스네는 귀를 막으며, 생각했다. '라나가 차인걸 보면, 로리 취향은 아니겠고. 세레나가 차인 걸 보면 귀족 취향도 아니겠고. 그 하프엘프 여인과는 행복한 날들을 보냈으니, 연상에다가 강한 여자 취향인가? 아니야, 혹시 미모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수도……. 그래, 맞아. 세레나도 미녀라는 평을 많이 듣긴 하지만 그 여자에 비하면 보름달 앞에 반딧불이지. 아니, 이건 너무 심하니까 보름달 앞에 촛불 정도로 해두자.' "너 지금 무슨 생각하냐?" "별 생각 안합니다. 그나저나 세레나를 차다니……. 그 남자 여자 보는 눈이……." "눈이?" "있군요." "삼촌!!!" 세레나는 어느 정도 울음이 멈춘 상태였다. 하지만 라나는 아직까지도 엉엉 울고 있었다. 세레나는 라나의 머리를 살며시 자신의 품에 안았다. "괜찮아, 라나야. 울지마." "으아앙, 언니 오빠가……. 히로 오빠가……." "그래, 그래. 언니가 니 맘 다 알어." "으아앙." "울지마, 라나야. 아! 이거 마셔. 이거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꺼야." 세레나는 탁자에 놓여있는 술병을 들어 라나와 자신의 잔에 가득 따랐다. 라나는 훌쩍이며 와인을 들이켰고, 세레나도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잔을 기울였다. 레이트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쇼파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셀리오네는 자신이 이 대화에 끼이들 수 없음을 느끼고 일찌감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레이트 백작이 열바퀴 째 돌았을 때, 하이스네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정신 사납습니다." 레이트 백작의 귀에는 하이스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레이트 백작은 눈을 감은 채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두서 없는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햇다. '아이리스. 아이언스 히로. 아이언스 이그리드. 아이리스 키에티트. 아이리스 키레아. 4장군. 미친개. 미친개. 미친개 스윈. 스웰리어스 스윈. 미친개 킬시스. 아이리스 킬시스. 아이리스의 광견(狂犬)들. 흑광견(黑)狂犬). 흑철갑기마대(黑鐵鉀騎馬隊). 그들은 죽었을까? 아니면, 아직 살아있나? 현재 아이리스의 국력으로 자바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 모사로는 사일런스 지니, 사일런스 일루니아. 장군으로는 디아케 발리스, 카인트 켈 등이 버티고 있다. 그러나 군사력이 너무 부족해. 하지만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손이 등장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러나 과연 그 녀석의 능력이 과연 죽음의 마도사로까지 불렸던 이그리드와 엇비슷할까? 언뜻 보기에 마력과 무력은 이그리드와 맞먹을 정도였다. 그러나 두뇌! 녀석의 지력이 아이언스 이그리드를 따를 수 있을까? 녀석의 야망이 강남을 벗어날 수 있을까? 녀석은 천하의 모사들과 더불어 천하를 논할 수 있을까? 녀석이 아이리스를 재건할 수 있을까!?' 레이트 백작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는 하이스네를 노려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목적어를 생략한 이상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하이스네는 바로 레이트 백작의 의중을 파악했다. "아이언스 히로의 능력이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능력과 같다고 가정한다면, 3 대 7. 아이리스 키에라가 아이언스 히로를 포용할만한 배포를 가졌다고 가정한다면, 5 대 5. 미친개 두 마리와 흑광견들이 지옥에서 살아돌아온다고 가정한다면, 7 대 3."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의 속 마음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아무 생각도 담지 않고 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웃으며,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천하를 주름잡았던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패기도 결국은 강남을 넘지 못했지."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강남을 넘지 못했다. 재담가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는 속담이었다. 실제로 제 3기 전란을 일어났을 때, 대륙은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이름만으로도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만약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10년만 더 전쟁을 했다면, 자바스와 헤리오까지 넘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루미아드 공주가 죽던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그 때문에 아이리스는 강북 쪽으로는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강남에 안주해야만 했다. 하이스네는 바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는 약 30년만에 국력이 80배가 넘은 아토리아를 상대로 강남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물론 80배라는 것은 전쟁 초기였을 뿐이지만, 전쟁 후기에도 국력은 5배 정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아토리아는 북방 훈족들 때문에 군사를 강남으로 돌리지 못했지." "군사를 더 움직인다 했더라도, 아토리아가 과연 아이리스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몇 십만을 더 증원했다 한들, 강남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라이데자로의 전투를 잊으셨습니까?" "음……." 물론 레이트 백작은 그 전투를 잘 알고 있었다. 라이데자로 전투. 처음에 아이리스 키에티트와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켰을 때, 아토리아는 단순히 속국의 작은 반란 정도로만 취급했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3년만에 주변의 속국들을 완전히 통합했다. 그 때, 아토리아의 재상이었던, 베니아스 로뮤는 아이리스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대군을 일으켜 한번에 쓸어버릴 것을 제시했고, 지배층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정병과 농병을 합친 20만에 이르는 군대를 일으켰다. 이 숫자는 아토리아의 잔여 병력 전부에 해당했다. 이 때 당시 아이리스의 병력은 많이 쳐봐야 3만 5천을 넘지 못했고, 대략적으로 3만 정도로 추산되었다. 약 7배 차이의 병력.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7배의 병력 차이는 어떠한 것으로 극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두 군대가 맞닥뜨린 곳은 좁고 험한 지역도 아닌 라이데자로 평원이었다. 이 말도 안되는 싸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 이그리드는 퇴각하려는 키에티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곳에서 한 발 물러난다면, 다시는 앞으로 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말을 돌려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이 전투에서 이그리드는 반나절 동안이나 적진을 휩쓸었고, 키에트티는 그 틈을 타서 적군을 각개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그리드가 세운 공은 웬만한 장군들이 평생의 걸쳐 세운 공을 능가하였다. 쓰러트린 깃발이 5개. 죽인 적의 기사들 숫자가 약 100여 명. 게다가 당시 대륙 최고의 마법사로 불리우던 카자스 휴이를 죽이고, 강도가 미스릴과 맞먹고 마법의 위력을 배로 늘려준다는 현자의 지팡이와 어떠한 검으로도 뚫리지 않는다는 칼라이스의 망토를 전리품으로 얻음. 케이하아 마이츠 휘하의 6장군을 혼자서 죽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공은 총사령관이자 아토리아 최고의 장수인 케이하아 마이츠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마법사와 장군의 결투. 이그리드는 이 일기투에서 마법을 쓰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이그리드가 호승심 때문에 마법을 쓰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그리드가 마이츠를 맞닥뜨렸을 때는 더 이상 마법을 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그리드는 무력만으로 마이츠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마이츠의 무기인 데스 사이즈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마법사가 장군을 상대로 마법이 아닌 힘과 기술만으로 이긴 것이다. 더 황당한 점은 그 때, 이그리드는 충분히 지친 상태였다는 것이다.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도 이그리드는 마이츠를 이긴 것이다. 아무튼 이 전투에서 아이리스는 승리했고, 그 후로 아토리아는 계속 패해, 결국은 강남 전역을 아이리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아토리아의 군대가 세이쥬르강을 넘어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병력의 3할 이상을 잃은 뒤였다. 아이리스는 이 한 전투로 강남을 얻었고, 아토리아는 이 한 전투로 강남을 잃었다. 레이트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집어 들고 있었다. 하이스네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집어 들었다. 둘은 담배를 피며,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이스네는 레이트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추상적인 생각들이었다. 레이트 백작은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보며, 물었다. "너는 어느 쪽이냐?" 하이스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자바스는 너무 크고, 아이리스는 너무 작습니다. 개틴은 불가능하니 말 할것도 없겠군요." "현재 정황으로 본다면, 자바스와 연합을 해야 해. 하지만 아이언스 히로. 그 놈이 마음에 걸리는군." "저도 자바스를 생각하고 있습니만, 요즘 들어 왠지 아이리스가 좋아지는군요." "어느 쪽이냐?" 레이트 백작의 물음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이스네는 심하게 떨리는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이리스." 레이트 백작은 재미있다는 웃음을 지었다. "재미있군. 나랑 대답이 같다니 말이야." 하이스네도 짙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부터는 더 재미있겠군요."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니. 이제부턴 바빠질꺼야. 니가 할 일이 생겼다." "예?" "오늘 밤 왕궁 무도회에 나와서 춤을 좀 춰야겠다." "예?" 하이스네는 황당하다는 눈길로 자신의 형을 올려다 보았다. 형은 빙글빙글 웃고있었다. 재밌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형님도 알다시피 전 그 쪽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니. 넌 오늘 밤 반드시 춤을 춰야 해." "예?" 레이트 백작은 응접실 한쪽으로 성큼걸어갔다. 그 곳에는 장식용 레이피어와 롱소드가 걸려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레이피어를 빼들어 하이스네에게 던졌다. 장식용이라해도 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이스네는 빠르게 일어나 손을 내밀어 정확히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레이트 백작은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빼내어 그 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담배는 연기를 내뿜이며 꺼졌고, 레이트 백작은 그것을 뒤로 던졌다. "무도회에서 그거 들고 춤춰라." "……." 하이스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레이피어를 바라보았다. 손잡이부터 시작해 심지어는 검신에까지 보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말 그대로 장식용 검이었다. 하이스네는 고개를 들어 레이트 백작을 보았다. 레이트 백작은 어느새 셀리오네의 옆에 앉아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거들고 하란시아랑 춤춰." "……." 하이스네는 그제서야 레이트 백작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피식 웃는 하이스네의 모습을 보고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 동안 춤 연습은 많이 했지?" 하이스네는 레이피어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어느새 하이스네는 즐겁다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질리도록 했습니다." "그럼 오늘밤 솜씨를 좀 발휘해 봐." "벌써요?" "그 동안 충분히 기다렸어." "좋군요." "아무튼 니가 말해준 얘기는 충분히 재밌었다. 1466년 카포이에드 산 와인 한병을 내놓을만한 가치가 있었어." "별 말씀을." "반만 마시고 남겨놓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군. 한 잔 더 받아라." 레이트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술병을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레이트 백작은 황당해하며, 하이스네에게 물었다. "술병 어디갔냐?" 하이스네는 대답 대신 조용히 한 쪽을 가리켰다. 레이트 백작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두 딸이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사이좋게 서로 머리를 기대고 자는 모습이 보였다. "자매간의 우애(友愛)가 참 보기 좋구나." "조금 밑을 보시죠." 하이스네의 말에 레이트 백작은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붉은 색 융단 위로 병하나가 굴러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레이트 백작은 그 병에 붙어있는 라벨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쩍 벌렸다. 레이트 백작은 그 상태에서 술병과 두 딸과 하이스네를 번갈아가며 쳐다 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보시는 대로입니다." "그 말은……." "예. 형님께서 보신 대로 두 따님께서 1466년 카포이에드 산 와인을 완전히 끝장냈습니다." "억!" 레이트 백작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한참 동안, 그 자세로 있던 레이트 백작은 눈을 부릅뜨고 하이스네에게 외쳤다. "왜 안 말렸어, 이 자식아!" "그야 둘이 잔에 가득따라서 마시는 동안 형님께서 아무 말씀 없으시길레, 전 그냥 그러려니 했죠." "……." "아니, 그런데 왜 저한테 큰소리십니까? 제가 마셨습니까?" 레이트 백작은 이번에 자신의 아내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얘들이 술을 마시면 말려야 할꺼아냐!?" 셀리오네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는 당신은 얘들이 술취해 잘 때까지 안말리고 뭐 했어요!" 레이트 백작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하이스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둘이 술취해서 자는 모습을 보니 참 아름답군요. 형님은 좋으시겠습니다. 예쁜 딸이 하나도 아니고 둘 씩이나 있으니." 하이스네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그 모습에 화낼 기운조차 사라졌다. "내, 내 와인이……." 레이트 백작은 결국 1466년 카포이에드 산 와인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허물어져 내렸다. <아이리스 Iris> - 5권 - 프롤로그 1671년. 대륙의 정세가 빠르게 돌아가는 해였다. 여전히 헤리오와 개틴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자바스와 아이리스의 전쟁 역시 끝나지 않았다. 아토리아는 국가 기반을 더욱 확고히 다져 놓았고, 3년 전 점령한 아이리스의 영토를 자국에 융화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제 3기 전란 이후, 중립국임을 선포했던 진명(秦明)은 자국내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대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1671년 7월 18일. 이 날에는 대륙이 격동 할만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우기가 끝남과 동시에 아이리스 키에라가 왕으로 즉위하고 아이리스를 왕국으로 선포한 것이다. 자바스의 맹력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년간이나 항전한 인물이 아이리스 키에라였다. 자칫하면 사방으로 분열 될뻔한 군대를 끌어모은 것도 아이리스 키레아였다. 키레아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치지 않았을 뿐, 아이리스의 실질적인 왕이었다. 그가 왕으로 즉위를 한다고 해서 달리질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의 일이라는 것은 원래 절차를 중요시 여기는 법이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한 것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것은 절차를 따랐느냐, 따르지 않았느냐이다. 키레아가 왕으로 즉위했다는 것은 현재 그가 이끄는 세력들이 단순한 반란군의 무리들이 아니라 아이리스의 군사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던 인물들은 정식으로 작위를 받게 됨을 의미한다. 각 국가들은 이런 아이리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뿐, 그리 깊이 신경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관식이 벌어진 얼마 후, 각 국 왕실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루시아 공주와 미친개라고 불리던 스웰리어 스윈이 살아서 대관식장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분명 놀랄만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놀란 이유는 이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자바스가 왕궁을 점령했을 때, 루시아 공주와 스윌리어 스윈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미친개로까지 불리는 남자와 그가 데리고 있는 여자가 그리 쉽게 죽지는 않았을 꺼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한달 정도 전부터 신빙성이있는 소문으로 나돌았었다. 타국이 놀란 이유는 이번에 공작의 작위를 수여받은 인물 때문이었다. 아이리스는 3년 전, 2명의 공작이 나라를 팔아먹다시피 해서 폐망 직전까지 간 나라다. 현재 아이리스의 공작은 만토이펠 안기 한명 뿐이었다. 이번에 작위를 수여받은 공작의 이름은 '아이언스 히로' 였다.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마법과 지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자. 그가 정말로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리스의 상징은 청안백우조를 데리고 다니고, 이그리드가 창조한 언어인 아이언스어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두가지 사실만으로도 '아이언스 히로' 라는 인물이 각 국가의 주시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1671년. 자이나레스 대륙의 4기 전란이 시작되었다. Part 1. 수상한 암호문 천장에 매달려있는 샹들리에에서는 화려한 불빛이 뿜어져나왔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듣는이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고, 곳곳에서 하늘거리는 여인네들의 옷자락은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유흥과 환락이 가득한 무도회장. 말끔하게 빼입은 남자 귀족이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에게 춤을 신청하였다. 여인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치맛단을 살짝 들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표명하였다. 이윽고 남녀는 미끄러지는 듯한 동작으로 홀 가운데로 들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레이트 백작은 인상을 찡그리며 이 곳에 들어섰다. 그런 그를 제일 먼저 맞아 준 것은 그의 의동생이자 이 무도회의 주인공이었다. "늦으셨군요, 형님." "온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해." 레이트 백작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가족인 세 여인을 보았다. "난 이 친구랑 조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셋이서 재미있게 놀아. 세레나는 라나 잘 보살펴주고." "예." 세라나는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고, 셀리오네는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 말 않고 부채로 입을 가린 다음, 세레나와 라나와 함께 여인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는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하인 하나가 술잔이 놓여있는 쟁반을 받혀 들고 미끄러듯,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녔다. 레이트 백작은 그 하인이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술잔 두 개를 낚아챘다. 순간, 하인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레이트 백작을 쳐다았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깨닫고는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에게 술잔을 건냈다. 하이스네는 그 술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여전히 예법이라는 것을 잘 모르시는군요. 하인의 걸음을 멈추게 한 다음 술잔을 가져와야지, 그냥 낚아채면 어쩝니까?" "그 말은 다음부턴 발이라도 걸라는 거냐?" 하이스네는 한숨을 내쉈다. "됐습니다. 얘기나 하지요." 레이트 백작은 술잔을 기울이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홀에 있는 사람과 2층 발코니에 있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족히 200명은 넘을 것 같았다. 레이트 백작은 이 사람들의 시선이 은근히 자신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레이트 백작은 애써 주위에 신경을 끈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노인이 술잔을 들고 레이트 백작의 옆에 섰다.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얗게 탈색되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였지만, 눈빛만은 선명하게 빛나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 동안 잘 지냈나?" "저야 언제나 잘 지내지요." 레이트 백작의 대답에 노인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지내겠지. 암, 잘 지내고 말고. 1466년 카포이에드 산 와인 한병을 꼴깍 다 마신 놈이 잘 못 지내서야 쓰겠나?" 레이트 백작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그만 좀 하십시오. 저도 한 잔 밖에 못 마셨다니까요. 나머지는 전부 저 애들이 마셨어요." 노인은 레이트 백작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한 녹색머리의 아가씨가 갈색머리의 소녀를 붙잡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명 그 둘은 레이트 백작의 두 딸이었다. 노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젠 딸들에게 뒤집어 씌우나? 자네가 그 정도로 치사한 인간일 줄은 몰랐네." "삐지셨습니까, 영감님?" 순간, 노인의 머리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노인의 정체는 하이스네의 아버지이자 헤리오의 공작이었다. 그런데 영감님이라니? 헤이체르 공작은 인상을 찡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그럼 내가 안 삐지게 생겼나? 내가 그렇게 부탁했을 땐 모른 척하더니만, 나 없는 사이 그걸 홀라당 다 마셔버려? 그것도 하이스네와 함께. 그리고 영감님이 뭔가? 그게 한 나라의 공작에게 붙이는 존칭인가?" "공작이면 공작답게 처신하십시오. 겨우 술 한잔 못 얻어 마셨다고 삐지는게 공작입니까?" "내가 그 술 한잔 얻어먹으려고 자네에게 얼마나 부탁했는지 아는가? 죽기 전에 1466년 카포이에드 산 와인을 한모금이라도 마셔보고 싶은 늙은이의 소망을 그렇게 무참히 짖밟다니. 그러고도 자네가 인간인가?" "쪼잔하게 굴지 마십시오. 저도 한잔 밖에 마시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제 두 딸이 먹어 치웠다고 말씀드렸을텐데요. 따지시려거든 그 얘들 한테 따지세요." "흥,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믿지 않으시면 어쩌실 껍니까?" 헤이체르 공작은 피식 웃었다. "자식놈이 이젠 아비한테까지 대드는군. 이 땅의 인륜(人倫)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레이트 백작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제가 왜 영감님 아들입니까?" "자네, 하이스네와 의형제라며? 하이스네가 내 아들이니 그 형인 자네가 내 아들인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레이트 백작은 뭐라고 반박을 하려했지만, 특별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헤이체르 공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있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술잔을 들이켰다. 하이스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레이트 백작에게 말했다. "이기지도 못 할 싸움을 왜 하고 그러십니까?" "시끄러." "여기는 내 집이니 시끄러우면 자네가 나가게." "영감님 집이면, 영감님 아들인 제 집도 되는데, 제가 왜 나갑니까?" 셋은 다시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한 곡이 끝나자 춤추던 연인들은 파트너를 바꾸었다. 다른 곳이 시작될 때쯤, 테이블에 한 남자가 합석했다. "하하, 두 분께서는 만나기만 하시면 싸우시는 군요." 남자의 이름은 유나이세르 미르케이였다. 헤리오의 후작 중 하나로, 헤이체르 공작과 레이트 백작과는 예전부터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다. 현재는 중앙 권력에서 상당히 밀려나 있어 후작이긴 하지만, 레이트 백작보다도 발언권이 약했다. 하지만 권력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그를 무시 할 자는 현재 아무도 없었다. 오랜 경험으로 쌓은 지식과 연륜으로 대륙의 정세를 유동적으로 파악하는데는 그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나이세르 후작은 하이스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축하하네, 하이스네. 아니, 이젠 차기 공작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하이스네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후작님." 지금 이 무도회는 하이스네를 헤이체르 공작가의 후계자로 삼은 것을 축하하고 알리는 자리였다. 한달 전쯤, 하이스네는 자신의 형이자 헤이체르 공작가의 후계자였던 하란시아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하란시아는 자신의 검술 실력만 믿고 하이스네를 우습게 보았다. 하지만 싸움이 시작되자, 그는 자신이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이스네는 맹수(猛獸)였다. 다만 이제까지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란시아는 이 결투에서 패하였고, 헤이체르 공작은 후계자를 하이스네로 바꾸었다. 사실 헤이체르 공작은 전부터 하이스네를 눈에 두고 있었다. 장자(長子)인 하란시아는 패기와 열정이 넘치는 반면에 거만하고 경솔하였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봐도 한 나라의 공작감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자(赤子)를 폐하고 서자(庶子)를 내세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절차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주위의 시선이 문제였다. 무언가 계기가 필요하였다. 다행히 하이스네는 문무(文武)에 뛰어났고, 그 재능을 발휘하고 싶어했다. 레이트 백작과 어울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헤이체르 공작은 대견스럽다는 눈길로 하이스네를 쳐다보다, 유나이세르 후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요즘 아이리스 쪽의 분위기가 험악하더군요." 테이블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헤이체르 공작 쪽으로 모아졌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사람들은 모두 헤이체르 공작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있는 넷은 조금씩 움직여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왠지 공기가 무거워지자 주변의 사람들은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반면 테이블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리커린트 백작, 비토스코 백작, 베르나제 남작, 키르게오르 남작 등 일명 주전파(主戰波)로 대표되는 인물들이었다. * 셀리오네는 자신의 남편이 있는 구석 테이블로 여러 귀족들이 몰리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쉈다. "여기까지 와서 회의라니. 정말 너희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셀리오네는 지금 불쾌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세레나는 어머니의 기분을 풀어 드리기 위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 사정이 사정이니 만큼." "그래. 니 아버지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좋은 딸을 둬서 좋겠다. 반면 매일 같이 짜증만 내는 악처(惡妻)를 둬서 슬프겠고." 셀리오네의 투정에 세레나는 실소(失笑)를 흘렸다. 정말이지 이렇게 투정 부리는 모습을 보면 꼭 어린아이 같았다. 라나는 과일 주스를 홀짝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여러 가지 음식을 열심히 집어 먹고 있었다. 가족들 중 아무도 예법을 가리킨 적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음식을 집어 먹는 라나의 동작을 추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나는 그런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먹어댔다. 세레나와 셀리오네도 그런 라나를 말리지 않았다. 한번 밑바닥 인생으로 떨어지고 난 후에야 그 예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쓸데 없는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먹어 라나야. 체하겠다." "응, 언니." 라나를 다독거리는 세레나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흰 옷에 금색 자수가 놓아진 화려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은색 머리카락은 말끔히 뒤로 넘겨 정리되어 있었고, 옅은 눈썹은 반달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다. 외모는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몸 어디에도 흠 잡을 곳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연약해보이는 그런 면이 있었다. 남자의 뒤에는 경무장을 한 두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셀리오네는 입가를 가린 부채를 접으며 황급히 치마를 살짝 들고 고개를 숙였다.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반데라스 왕자님." "예." 반데라스 왕자라 불린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헤리오의 왕세자였다. 현재 헤리오의 국왕은 헤리오 이야센트이다. 그는 한명의 왕비와 두명의 첩을 두었지만, 자식은 단 세명 뿐이었다. 그나마도 둘은 공주고 왕자는 반데라스 하나 뿐이었기에 그가 왕세자로 채택 된 것이다. 세레나는 역시 정중한 동작으로 왕세자께 인사를 드렸고, 왕세자는 얼굴을 붉히며 그 인사를 받았다. 세레나는 라나를 인사시킨 다음, 여러 과일을 집어 먹으며 라나와 얘기를 나누었다. 반데라스는 헛기침을 몇번하며 세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 "예?" 세레나는 고개를 들어 반데라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순간, 반데라스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홀 중앙으로 돌리며 말했다. "추, 춤은 안 추시나 보죠?" 반데라스는 말을 내뱉은 순간, '이게 아닌데' 하고 후회하였다. 원래는 멋진 모습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춤 신청을 한 다음, 같이 홀 중앙으로 나가 스텝을 한번 밟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만 서면 자꾸 위축이 되는 바람에 이상한 말을 꺼내게 된 것이다. 세레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 오늘은 좀 피곤해서요." "그, 그러시군요." 반데라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엄청난 좌절을 해야만 했다. '춤은 안 추시나 보죠?' 사실 이 대사는 같이 춤을 추고 싶다는 간접적인 의사표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레나는 이것을 눈 한번 깜짝 안하고 무참히 거절하였다. 그로써는 좌절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반데라스는 쉽게 세레나 주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한, 두 번 차일 것은 각오한 일이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세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십니까?" "예?" 세레나의 반문에 반데라스는 깜짝 놀랐다. '실수다. 그런 사생활 침해적인 질문을 하다니? 세레나 양께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지만 세레나는 그런 것에 별 개의치 않았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개의치 않아하지만 반데라스는 혼자 괜히 개의하고 있었다. 세레나는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어요. 예를 들면 카드 게임 같은거요." "음음, 맞아요." 세레나의 옆에 있던 라나는 과자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는 라나의 입에 물려있는 과자를 빼며 말했다. "언니가 입에 음식물있는 채로 말하지 말랬지?" "음음." 라나는 입 안에 남아있는 과자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데라스는 그런 라나를 재미있다는 눈길로 바라 보았다. "이 아가씨가 전에 입양했다던……." "예. 맞아요." 반데라스는 계속해서 라나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이 무도회장에는 라나보다 어린 소녀들도 많았다. 여러 가문들과 안면을 익히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파티란 파티는 죄다 쫒아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이 소녀는 다른 소녀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반짝반짝 빛났고, 입에는 계속 음식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라나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반데라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한테 관심 갖지 마세요. 전 임자있는 몸이에요." "아, 아니, 저기……." "더 이상 아무 말도 마세요. 전 이미 몸도 마음도 히로 오빠꺼에요." 순간 반데라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세레나 양이 오해하면 안 되는데.' 물론 세레나가 오해 할 리가 없었다. 누구처럼 10살짜리 여자애를 꼬드겨 키스를 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세레나는 라나의 팔을 살짝 꼬집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너 왕자님께 그게 무슨 말이야? 빨리 죄송하다고 말 해." 세레나는 라나가 왕세자께 정중히 사죄를 드리자마자, 라나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반데라스는 멍한 표정으로 그런 세레나를 바라 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여, 역시 오해한게 틀림 없어.' 세레나는 단지 같이 있으면 라나가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자리를 피한 것 뿐이지 결코 오해 같은 것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데라스는 세네나가 오해하고 있다는 오해를하며 한숨만을 푹푹 내쉬었다. * "그가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라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선전용 조작일 가능성도 배재 할 수는 없습니다." 유나이세르 후작의 말을 반박한 것은 헤이체르 공작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헤이체르 공작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아이리스로서는 구세주라도 나타나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까지 제 3기 전란을 일으켰던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존재가 남아있었다. 지금 국가가 망해가는 시점에서 그의 후계자가 나타났다고 하면 그것은 대대적인 선전 효과를 발휘한다. "그는 이그리드의 후계자입니다. 그건 제가 목숨을 걸고 장담 할 수 있습니다." 말을 꺼낸 사람은 레이트 백작이었다. 애초에 같은 생각을 얘기했던 유나이세르 후작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상아탑의 마법사들은 왜 움직이지 않는 걸까요?" 가만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비토스코 백작은 상아탑의 얘기가 나오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아탑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 집단입니다. 하지만 그가 아이언스어를 알고 있다면 반드시 움직일 것입니다. 수백년이 넘게 해독되지 않았던 8, 9클래스의 마법을 해독 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났는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상아탑이 아이리스의 손을 들어 줄 것이란 말인가?" "물론 직접적인 개입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아이리스를 도와주는 수밖에 없겠지요. 듣자하니 아이언스 히로의 어깨 위에도 머리라는 것이 달렸다던데, 아무런 조건 없이 이그리드의 저서를 번역 해 줄리는 없지요. 만약 그가 전쟁이 끝난 다음, 번역을 해 주겠다고 하면, 그는 불사신이 됩니다." 베르나제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이언스어를 알고있는 유일한 인물인 그가 죽으면 8, 9클래스 마법은 영원히 사장 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상아탑에서는 좋든 싫든 그를 보호해 주는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헤리오에는 두 개의 정치적 집단이 존재하였다. 하나는 주전파(主戰波)고 다른 하나는 주화파(主和波)이다. 주전파의 중심은 헤이체르 공작과 레이트 백작이고, 주화파의 중심은 케이지라 공작과 힐카인 후작이다. 하지만 힐카인 후작이 죽고, 케이지라 공작이 실각을 함에 따라 현재 대세는 주전파로 기우는 추세였다. 헤리오는 제 3기 전란 이후, 개틴과의 사이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그 원인은 제 3기 전란 때에, 개틴에 포로로 잡혔던 당시 헤리오의 제 3왕자 필리아누에 있었다. 제 3왕자이니만큼 권력과의 연관성은 멀었지만, 필리아누는 아시론 왕이 가장 아끼던 왕자였다. 아시론 왕은 필리아누 왕자와 포로로 잡은 133명의 기사를 교환 할 것을 제시했고, 개틴에서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필리아누 왕자가 왼쪽 어깨에 입은 찰과상 때문에 하루 아침에 죽은 것이다. 개틴은 필리아누 왕자가 병으로 죽었다고 말하였지만 아시론 왕이 이를 믿을리 만무했다. 치명상도 아닌 찰과상 때문에 하루 아침에 죽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시론 왕은 필리아누 왕자가 독살 당했다 생각을 하고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133명의 포로를 전부 사형시킨 다음, 그 시신을 전쟁터에 내다 버렸다. 이에 광분한 개틴은 필리아누 왕자의 시신을 133토막 내서 고깃국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병사들로 하여금 먹게 하였다. 이후, 두 나라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이제는 손을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하였다. 주전파는 '개틴과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다.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사라져야지만 다른 나라가 살 수 있다' 는 입장이고, 주화파는 '두 나라는 협력을 해야한다. 좁은 서쪽에서 치고받지 말고 동으로 전전해야 한다' 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헤리오와 개틴이 손을 잡는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달을 따다가 팔광(八光)에 박아 넣는 것 만큼 힘든 일이었다. 한 마디로 주화(主和)라는 것은 몽상가들이 지껄여대는 헛소리에 불과하였다. 1668년. 아이리스가 자바스와 아토리아의 공격에 강남의 대부분을 내주는 바람에 헤리오는 자바스와 직접적으로 국경이 맞닿게 되었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자면 재빠르게 자바스와 동맹을 맺어 개틴을 공격하는 것이 옮다. 하지만 문제는 자바스가 너무 커져버렸다는데에 있었다. 만약 동맹군이 개틴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고 가정을 하자. 그렇다면 자바스는 분명 도움을 준 대가로 막대한 양의 공물을 요구 할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칼을 거꾸로 드는 수도 있다. 3년 전에도 우방국(友邦國)이었던 아이리스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으니, 또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래저래 동맹을 맺기에는 위험한 상대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틴과 자바스가 연합을 한다면, 대륙의 남서쪽에 완전히 고립되는데, 그렇게되면 패배는 자명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경악 할만한 일이었다. 만약 아이리스가 다시 일어 설 수만 있다면, 자바스는 아이리스와의 전쟁에 발이 묶여 쉽게 움직이지는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리스와 동맹을 맺는 것은 위험했다. 만약 아이리스가 자바스에 패한다면 그 다음 타겟이 누가 될지는 자명 할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륙의 눈과 귀는 온통 아이리스에 향해있었다. 아이언스 히로. 그의 능력에따라 각 국이 취해야 할 입장이 틀려지게 된다. "상아탑 마법사들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한 국가의 능력과 맞먹습니다." "그가 아이언스어를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한가?"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할겁니다. 그가 자신이 이그리드의 후계자라는 것을 입증 할 방법은 그것 밖에 없을테니까요." 여러 귀족들은 서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언성을 높히기 시작했다. 과연 상아탑은 움직일 것인가? 움직인다면 그것이 대륙이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인가? 챙그랑-! 갑자기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홀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이에 놀란 악사들은 연주하던 악기를 멈추었고, 춤을 추던 연인들을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은 2층 발코니 창을 깨고 들어 온 불청객에게로 모아졌다. 불청객은 그 시선이 부담되는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부끄럽잖아." 싸늘한 바람 한줄기가 홀 안을 스쳐가고, 몇몇 심장이 약한 여인들은 이 괴현상에 두려움을 느끼며 풀썩 쓰러졌다. 그녀들의 옆에 있던 남자들은 재빨리 그녀들을 부축하는 등,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레이트 백작은 중앙 샹들리에 바로 밑에 떠 있는 불청객을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건 뭐야?"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었지만, 옆에있던 하이스네가 안경을 올려 쓰며 대답했다. "어디선가 많이 뵌 듯한 분이시군요." 하이스네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청객이 하이스네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헤이! 오랜만이야!" 하이스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나야 뭐 언제나 잘 지내지." 사람들은 하이스네와 불청객이 아는 사이라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새가 말을 한다는 것에 대해 더 큰 의아함을 느꼈다. 말하는 새. 그렇다. 지금 2층 발코니의 유리창을 깨고 난입한 불청객은 바로 라이코스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흰색 깃털들, 그리고 날카롭게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 자타(自他)가 공인하는 영물이지만 히로 혼자 꿋꿋이 영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영물. 라이코스는 날개짓을 하여 샹들리에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라이코스의 발은 끈으로 연결한 작은 항아리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항아리 안에는 돌돌말린 종이들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사람들은 새가 말을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누군가 한명이 나서서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앞으로 나선 것은 레이트 백작이었다. 레이트 백작은 고개를 들어 라이코스를 똑바로 쳐다보려 하였지만, 샹들리에의 불빛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이트 백작은 손으로 빛을 살짝 가리며 크게 외쳤다. "넌 뭐하는 놈이냐?"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라이코스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폭사하였다. 라이코스는 두 날개를 쫙벌리고 위로 멋지게 날아 올랐다. 쿵-!!! 그러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고 아래로 떨어졌다. 라이코스는 비틀거리며 다시 날아오른 다음, 크게 외쳤다. "넌 뭐하는 놈이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주는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영물 중의 영물, 귀여운 영물. 라이! 코스! 창공을 누비는 나 라이코스에겐 아름다운 내일, 화려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다." 순간, 라이코스의 몸에서는 새햐얀 빛이 내뿜어졌고, 사람들은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대사는 그렇다치더라도, 날개를 X자로 교차한다거나 몸을 한바퀴 돌리는 등의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행위는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라이코스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한심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사실 전에 히로 앞에서 했다가 바로 국통 속으로 들어갈 뻔 했다) 라이코스는 눈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비록 인간들이 자신의 고난이도의 행위예술을 몰라준다 할지라도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레나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 손들어 주세요!" 세레나는 멍하니 말하는 새를 바라보다 그 새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깜짝 놀랐다. 라나는 잡고 있던 세레나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아는 사이야, 언니?" 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모르는 사이야." 라이코스는 천천히 날개 짓을 하여 세레나 근처에 있는 테이블로 날아왔다. 그리고 발에 든 항아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다음,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라이코스는 세레나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다, 히죽 웃음을 지었다. '우와, 예쁘게 생겼다.' 레이트 백작은 말하는 새가 자신의 딸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세레나가 있는 테이블로 뛰어왔다. 뛰어 온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헤이체르 공작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전파 귀족들도 같이 뛰었다. 그 말하는 새를 가까이서 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하이스네가 던진 말 때문이었다. '아이언스 히로와 같이 다니는 매입니다.' 10여 명 정도의 주전파 귀족들이 라이코스가 앉아있는 테이블 주위로 모여들자 사람들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라나는 라이코스가 신기한지 힐끔힐끔 쳐다보며 세레나의 팔을 꼭 붙들었다. 세레나는 라나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 말하는 새가 어떻게 자신을 알고있는지 궁금하였지만, 새는 아무 말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만 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라이코스를 향하여 심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딸에게 무슨 볼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안돼!" 라이코스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순간, 레이트 백작은 라이코스의 목을 비틀은 다음, 사지를 조각내 후라이드 치킨을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감성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지성인이었기에 꾹 참았다. 하이스네는 그런 레이트 백작을 보며 한마디 했다. "눈에 핏발 섰습니다."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의 말을 못들은 척하며 라이코스에게 소리쳤다. "내 딸 보면서 히죽히죽 웃지만 말고 말을 해봐!" "내 딸?" 라이코스는 핏발이 서 있는 레이트 백작의 얼굴과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세레나의 얼굴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날개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둘이 무지하게 안 닮았네. 이 아가씨 니 친딸 맞아?" "이 쌍놈의 새가!" 결국 레이트 백작은 참지 못하고 라이코스에게 달려 들……뻔 했지만, 다행히 옆에 있는 하이스네가 레이트 백작을 붙들었다. "참으십시오, 형님. 매가 한 말을 가지고 뭘 그리 흥분하십니까?" "새꺄! 그럼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 문관이 된 뒤로는 성질이 많이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한번 불 받으면 앞 뒤 가리지 않는 성격이 어디 갈리 없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열혈백작' 이겠는가? 라이코스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날개로 부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레이트 백작의 염장을 질렀다. "흥분한 거 보니 진짠가 보네." 레이트 백작이 다시 달려드는 순간, 누군가가 덮썩 라이코스를 붙잡았다. "우와, 귀여운 새다." 라이코스를 붙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라나였다. 라나는 두 손으로 라이코스의 날개를 붙잡은 다음, 몸을 요리조리 비틀며 자세히 관찰하였다. 라이코스가 화를 내려는 찰나, 라나는 라이코스 머리 위에 있는 세 개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라나의 질문에 라이코스는 화를 내려 하던 것도 있고, 방긋 웃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나로 말 할 것 같으면 라이코스라고 할 수 있지. 영물 중의 영물. 진짜 영물 중의 최고의 영물. 그 누구도 내가 영물임을 부인하지 못 할 정도로 진품이 확실한 진짜 영물. 바로 매과의 영물 청안백우조 라이코스라고 할 수 있지! 아! 가끔씩 자신이 영물이 아니면서도 영물을 자칭하고 다니는 사이비들이 있으니, 절대 그런 유사품들에 속지마. 알았지?"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라이코스는 히로가 자신을 영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영물인 것을 알려 주어, 자타(自他)가 공인하는(히로 포함) 진정한 영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라이코스의 목표였다. 레이트 백작은 분노를 삭히며 하이스네에게 물었다. "저 놈이 영물이야?" 하이스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영물 맞습니다. 아이리스의 상징인 청안백우조이지요." "그런데 왜 영물 같이 안 생겼어?" "영물이 꼭 이마에 영물이라고 써 붙이고 다닐 이유는 없지요. 대신 말을 하잖습니까? 말하는 매가 영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이스네의 설명에 주위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이트 백작 혼자 고개를 저으며 하이스네에게 또 다른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그 질문에는 하이스네도 쉽게 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싸가지가 없다는 말은 부정하지 않았다. "으음, 글쎄요. 뭐 영물이라고 꼭 착하라는 법은 없지요. 원래 사람들도 그렇듯이 영물들도 다 개성이 있는게 아닐까요?" "싸가지 없는 것도 개성에 포함되냐?" "그럴 걸요." 세레나는 라나의 손에 들린 라이코스에게 말했다. "저 한테 무슨 볼 일이시죠?" "아! 맞다!" 그 질문에 라이코스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라나의 손에서 빠져나와 다시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가져 온 항아리 단지에서 돌돌말린 양피지 한 장 부리로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세레나에게 내밀었다. 세레나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것을 펴 보았다. 거기에는 수려한 필체의 글이 적혀 있었다. 세레나는 떨리는 손을 진정 시키며 천천히 그 글을 읽어 보았다. > 세레나에게 > 그 동안 잘 지냈니? 나는 잘 지낸다. > 솔직히 옆에서 떠들어 대는 변종 앵무새 한마리만 없었으면 더 잘 지낼 수 있을 >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이 놈이 내 어깨에 말뚝을 받은 것 같아서 괴롭기 그지 없다. > 아무튼 안부가 궁금해서 편지 보낸다. 그 때 그렇게 헤어진게 미안하기도 하고. > 뭐, 지금 쯤이면 좋은 남자 만나서 같이 고스톱 치고 있을지 모르겠구나. 혹은 장 > 인, 장모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광이나 팔고 있을지도 모르고. > 사실 기쁜 소식이 하나 있어. '나 이번에 공작 먹었다.' > 잘 있어라. > 그럼 이만. > 추신 - 나가리 판에서는 광 값도 두 배로 받아. > 아이언스 히로. "뭐라고 썼냐?" 궁금증을 참지 못한 레이트 백작이 물었다. 하지만 세레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양피지에 적힌 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보낸 것이었다. 그가. 아이언스 히로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홀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라나는 세레나의 팔을 흔들며 물었다. "언니! 왜 그래, 언니?" 세레나는 울음을 참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잘 있데."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군데?" 세레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라나가 기다리는 그 오빠." 순간, 라나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라나는 덥썩 세레나를 껴안으며 외쳤다. "정말? 정말이야? 정말 히로 오빠가 보낸거야?" "응." 양피지가 힘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이스네는 황급히 그 양피지를 줏어 들었다. 레이트 백작과 헤이체르 공작을 비롯한 주전파 귀족들은 바로 하이스네의 뒤에 서서 양피지에 적혀있는 글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누가 쓴거냐?" "맨 끝에 아이언스 히로라고 쓰여져 있군요." "뭐!?" 귀족들의 얼굴에 경악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레이트 백작은 양피지를 뺏을 듯한 동작을 취하며 하이스네에게 물었다. "뭐라고 써져있냐?" "잠깐 기다립시오." "빨리 말해봐." 레이트 백작의 재촉에 하이스네는 양피지에 적힌 글을 천천히 말하였다. "나가리 판에서는 광 값을 두 배로 받으라고 써져있군요." "뭐!?" 귀족들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나가리 판에서 광 값을 두 배로 받으라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유나이세르 후작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암호가 아닐까요?" 그 말에 헤이체르 공작이 동의하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리커린트 백작이 물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일까요?" 비토스코 백작은 한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나가리라는 말은 판이 깨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광 값이라는 것은 빛의 가격이라는 것인데……." "그렇군요!" 베르나제 남작은 눈을 번쩍 뜨더니, '수수께끼는 전부 풀렸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귀족들의 시선이 전부 자신에게 향하자 베르나제 남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요? 나가리는 판이 깨졌으되 다시 새로운 판이 시작되는 것을 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광 값은 빛 값으로 해석 할 수 있으니, '빛 값' 과 '빚 값' 은 음(音)이 같습니다. 그럼 '나가리 판에서는 광 값을 두 배로 받는다' 라는 것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면 빚을 두 배로 값아주겠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베르나제 남작의 말이 끝나자 모든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베르나제 남작과 친분이 두터운 키르게오르 남작은 너털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과연 베르나제 남작 님이시군요. 아이언스 히로의 말을 그리 쉽게 해석하시다니." "하하, 뭐 별거 아닌 일입니다." 정말로 별거 아닌 일이긴 했지만, 칭찬을 하는 사람도 칭찬을 받는 사람도 별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단 한 문장이 해석되자 귀족들은 다른 문장의 해석에도 관심을 나타내었다.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의 손에서 양피지를 뺏어다가 바닥에 펼쳐 놓고, 자신은 그 앞에 털썩 주저 앉았다. 굳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지 않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레이트 백작의 생각대로 겉치례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몇 명의 귀족들은 양피지 주위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나머지 귀족들은 스크럼을 짜는 것처럼 그 주위를 발디딜 틈 없이 에워 쌌다. 그 모습은 마치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은 어느 시골 마을에 한 아이가 조금은 불량하면서도 재미있는 빨간 표지의 책(예를 들면 플레이 보이(Play Boy - 해석:노는 아이들)지 같은 것)을 학교에 들고 오면, 많은 남자 아이들이 그 주위를 뺑 둘러 서로간의 유대감을 증대시키고 풍부한 상상력을 키워나가는 상황과 흡사하였다. 세레나는 눈물을 흘리는 라나를 껴안아 달래며, 울음을 참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셀리오네는 옆에서 두 딸을 다독거려 주었다. 반데라스 왕자는 대체 무슨 내용이길레 세레나 양이 저런 태도를 보일까 궁금해서 슬쩍 양피지를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 내용은 마치 상대 여성분의 안부를 묻는 연애편지와 흡사하였다. 글씨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상대 여성분을 위하는 마음이 녹아 든 듯 하였다. 여기서 상대 여성분이란 세레나 양을 뜻한다. '그럼 설마 아이언스 히로가 세레나 양을……?' 전에 아이언스 히로가 세레나 양과 만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세레나 양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사람도 아이언스 히로라 들었다. 게다가 아이언스 히로는 세레나 양의 삼촌이 되는 헤이체르 하이스네에게도 접근을 하였고, 레이트 백작은 세레나 양과의 정략결혼을 제시한 적도 있다. 둘이 충분히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을 만한 사실이었다. 반데라스 왕자는 극심한 좌절감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오늘 자신의 춤 신청을 거절 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안돼. 난 이대로 물러 날 수 없어.' 그렇다. 이렇게 물러나면 남자가 아니었다. 남자라면 무조건 부딪혀 봐야 하는 것이다. 반데라스 왕자는 전의(戰意)를 다지며 세레나에게 다가섰다. 우는 여자를 달래주는 것이야 말로 가장 점수를 많이 딸 수 있는 기회이며, 남자의 임무에 충실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세, 세레나 아가씨……." 반데라스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세레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원래 남자가 울 때 손을 내밀어주면 바로 손이 잘린다. 왜냐하면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사회적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에 남자는 우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한다. 반대로 여자가 울 때 손을 내밀어주면 여자는 그 손을 기쁜 마음으로 잡는다. 이유는 역시 사회적 인식 때문에 여자는 울어도 되고, 누군가에게 기대어도 되는 것이다. 우는 여자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저랑 부르스 한판 땡기실래요?' 라고 권유를 한다면 부르스 땡기다가 호텔까지 직행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이유야 당연 여자는 슬플 때, 누군가가 같이 있어주길 원하니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둘 다 집이 호텔 일 수도 있는거고. 아무튼 반데라스는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세레나에게 손을 내민 것이지만, 여기서 한가지 착각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레나는 이미 라나에게 자신의 슬픔을 나누어주고 있고, 라나의 슬픔을 나누어 받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물론 이 상황에서 세레나와 라나는 서로의 슬픔을 반반씩 나눠 갖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쌤쌤이 된다. 이것은 질량보존의 법칙과 에너지보존의 법칙으로도 설명 될 수 있는 것이다. 뭐, 잘못하면 시너즈 효과에 의해 슬픔이 배로 증폭 될 수도 있는 거고. 설명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세레나는 이미 라나와 부등켜 안고 있었기 때문에 반데라스 왕자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반데라스는 세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계속 그대로 서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랬지만, 세레나는 반데라스를 완벽히 무시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소뇌 계층의 귀족들은 한쪽에 모여서 아이언스 히로의 편지를 해석하는데 골몰하고 있고, 춤을 추던 사람들은 대부분 홀 안을 빠져나갔다. 근처 정원에서 레슬링이라도 한 판 벌이려는 것이다. 순간, 반데라스 왕자는 자신이 왕따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며 한숨을 내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떤 퍼런 눈을 가진 매가 자신을 보며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혀를 차고 있는 것이었다. *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를 비롯한 귀족들은 편지 문장을 해석하느라 골몰하고 있었다. "'세레나에게'. 이 문장은 대체 무슨 뜻이지? 세레나는 세레나. 내 딸이 잖아." 레이트 백작의 궁금증에 답한 것은 아까 나가리 어쩌구하는 문장을 훌륭하게 해석한 베르나제 남작이었다. "세레나 아가씨께서는 레이트 백작가의 영애십니다. 레이트 백작가의 영애면 당연 헤리오의 귀족이지요. 그럼 '세레나에게' 라는 말은 헤리오의 모든 귀족들을 하나로 지칭한 말이 아닐까요?" 유나이세르 후작은 감명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편지는 현재 헤리오의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는 귀족들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그렇다고 한다면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이건 마치 '이 암호를 풀 수 있으면 풀어 봐라' 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베르나제 남작은 비장스러운 태도로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능력을 내보이며 우리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반드시 이 암호를 풀어 아이언스 히로의 콧대를 꺽어 놓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럼 다음 문장 '그 동안 잘 지냈니? 나는 잘 지낸다.' 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하는게 좋을까요?" 귀족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한때, 전 대륙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갔던 자의 후계자이니 만큼,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는 헤리오의 수뇌 계층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이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서도 아이언스 히로가 보낸 편지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 망신이었다. 한참 동한 의견이 오고 간 끝에,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은 역시 베르나제 남작이었다. "'그 동안 잘 지냈니?' 라는 질문은 현재 우리 헤리오의 상황을 빗대어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현재 우리 헤리오는 자바스와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반대로 등을 돌릴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입니다. '그 동안 잘 지냈니?' 라는 질문은 그런 헤리오의 정치적 상황을 비웃는 아이언스 히로의 간접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나는 잘 지낸다' 라는 말은 현재 아이리스의 상황을 나타냅니다. 즉, 아이리스는 절대 이대로 물러 나지 않고, 다시 강남의 영토를 회복 할 것이라는 간접적 표현입니다." 베르나제 남작의 말이 끝나자 다른 귀족들은 '이런 간단한 말에 그런 깊은 뜻이 숨어있었구나' 라고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새삼 아이언스 히로라는 자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연애 편지처럼 단순해 보이는 편지에 헤리오의 정치적 성향을 풍자함과 동시에 자국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과연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라고 칭할만 하였다. "'솔직히 옆에서 떠들어 대는 변종 앵무새 한 마리만 없었으면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이 놈이 내 어깨에 말뚝을 박은 것 같아서, 괴롭기 그지 없다' 라는 문장은 어찌 해석하면 좋을까요?" 이번에 대답을 한 것은 유나이세르 후작이었다. 사실 말을 별로 안 해서 그렇지 요즘 시대에 태어났으면 각종 퀴즈대회를 휩쓸었을만한 인물이 바로 유나이세르 후작이었다. 유나이세르 후작은 앞에서 베르나제 남작이 해석한 것을 참고 삼아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떠들어 대는 변종 앵무새란 아무래도 청안백우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깨에 말뚝을 박았다는 것은 영원히 아이리스에 머물며 아이리스를 수호 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에 '괴롭기 그지 없다' 라고 말을 한 것은 굳이 청안백우조의 도움이 없어도 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럼 안부가 궁금해서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아이리스가 우리 헤리오의 정치적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겠군요." "그렇습니다." 문장이 하나, 둘씩 해석되자 귀족들은 점점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는 누구라고 말 할 것도 없이 서로 말문을 열어 아이언스 히로가 쓴 편지의 해석을 말하였다. "그 때 그렇게 헤어져서 미안하다는 말은, 우리 헤리오와 손을 잡는 것을 거부하고 자바스와 동맹을 맺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쯤이면 좋은 남자 만나서 같이 고스톱을 치고 있을지 모르겠구나라는 것은, 현재 새로운 동맹 상대를 만나 일진일퇴(GOSTOP)를 하고 있냐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으니…… 아! 이 말은 우리 나라가 자바스와 동맹관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뜻인 것 같군요." "그럼 장인, 장모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광이나 팔고 있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해석을 하면 좋겠소?" "제 생각에 장인, 장모라는 것은 자바스를 제외한 타국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광이나 팔고 있다는 말은……. 여기서 광은 창고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바스가 만약 개틴과 동맹을 맺는다면 앉아서 우리 헤리오가 고립되어 위험한 상황에 처 할 것이므로 광(廣)에 있는 물자들을 전부 공물로 갔다 바칠 수 밖에 없을 꺼라는 얘깁니다." 백자장도 맞들면 났다고 여러 귀족들이 서로 의견을 제시하자 편지의 해석은 금방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 이번에 공작 먹었다' 라는 문장의 해석은 쉽지 않았다. 이들이 해석한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 헤리오의 모든 귀족들에게 > 현재 헤리오의 정치적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리스는 다시금 힘을 키워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청안백우조가 아이리스의 수호신으로 이 땅을 영원히 지켜줄 것이지만, 자국(自國)은 청안백우조의 도움이 없이도 혼자 일어 설 수 있습니다. > 우리 아이리스는 헤리오의 정치적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전에 헤리오에 등을 돌리고 자바스와 동맹을 맺었던 점에 대해서는 사과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 지금 헤리오는 자바스와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식 외교 관계를 지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자바스가 개틴을 비롯한 타국과 동맹을 맺는다면, 헤리오는 대륙의 남서쪽에 완전히 고립되어 막대한 양의 공물을 타국에 바쳐야 할 것입니다. > 이번에 자국 군대의 사기와 용맹은 한층 올라갔습니다. > 해석 불능. > 헤리오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그럼 이만. > 추신 - 앞으로 일어 날 전쟁에서 아이리스는 3년 전의 뼈저린 상처를 배로 보복 할 것입니다. > 아이언스 히로. "대체 '나 이번에 공작 먹었어' 라는 문장은 무슨 뜻이오?" "글쎄요. 이 문장은 너무 난해합니다." 편하게 읽으면 그냥 '나 공작 작위를 받았어' 라는 말이 되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문장 내에 깊은 뜻이 있을거라는 의견만이 분부했다. 라이코스는 옆에 있는 과일을 집어 먹으며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귀족들을 바라 보았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왜 단순히 안부를 묻는 편지를 저리 복잡하게 해석할까?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코스는 빨리 이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밤은 짧고 할 일은 많다. 오늘 밤 내로 개틴, 자바스, 아토리아, 진명의 왕궁에 들려 중요한 서찰(書札)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집배원이냐?' 투정을 해봐야 어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안 가면 잡아 먹겠다는데 힘 없는 매가 무슨 발언권이 있겠는가? 라이코스는 부리로 파란색 끈으로 묶인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다음, 들고 왔던 항아리를 다시 들고, 아까 깨고 들어왔던 창문으로 날아 올랐다. 창공을 날아가는 라이코스의 입에는 잘 조리된 거위 다리 하나가 물려 있었다. * 귀족들은 아직 회의중이었기에 라이코스가 날아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반데라스 왕자 혼자 세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린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한줄기의 흰색 빛이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청안백우조가 일어난 자리에는 돌돌 말린 한 장의 양피지가 놓여져 있었다. 반데라스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그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묶인 끈을 풀은 다음, 그 양피지를 펼쳐 보았다. "아이리스를 배신하고 자바스와 아토리아 붙은 두 공작을 죽이겠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먹었다' 는 과거형입니다. 베르나제 남작의 말 대로라면 '먹겠다' 처럼 미래형이 되어야 합니다." "대체 점심으로 공작새 요리를 먹었다고 말한 사람은 누굽니까? 지금 저랑 장난하는 겁니까?" "전 아닙니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 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언스 히로라고 공작새 요리를 안 먹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설사 먹었다 해도 이 편지에 그걸 쓸 이유가 없잖습니까?" "혹시 자랑하고 싶은게 아닐까요? 맛있는 공작새 요리를 먹어 너무 기쁜 나머지 말이죠." "제 생각엔 이것은 현재 아이리스의 식량 사정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현재 군량이 다 떨어져 공작새 마저 잡아 먹고 있다." "그렇게 자국의 약점을 쉽게 노출 할 만큼 아이리스가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혹 그것에 반대 일수가 있습니다. 즉, 자국에는 군량이 남아 돌아 때로는 공작새 요리까지 지급 된다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작새는 관상용 새가 아닙니까? 그걸 왜 잡아 먹을까요?" "으음, 아이언스 히로는 전에 청안백우조도 잡아 먹으려 한 사람입니다. 굳이 공작새라 할지라도 잡아 먹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요." 이렇게 각 귀족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혼자 왕따를 당한 반데라스 왕자 혼자 양피지를 읽으며 멍청히 서 있었다. 양피지에 써진 글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이여서 반데라스는 한동안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잘못 읽었나 확인을 하기 위해 다시 한번 양피지를 펼쳐 보았다. '이럴 수가! 이게 사실이라면…….' "잠깐만요!" 반데라스는 황급히 귀족들에게 외쳤다. 하지만 귀족 중에는 아무도 왕따 당하고 있는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반데라스는 스크럼을 짜고 있는 귀족들을 뚫고 들어가 보려 했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를 스크럼 가운데로 던져 넣었다. 레이트 백작은 아이언스 히로의 편지를 보고 있던 중, 갑자기 그 위를 다른 양피지가 덮자 짜증을 내며 그 양피지를 치우려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하이스네가 덥썩 그 양피지를 집어들며 외쳤다. "잠깐! 이건 사일런스 지니의 필체입니다." 사일런스 지니. 그는 아이리스의 군사(軍師)였다. 그의 이름은 당대 최고의 모사, 최고의 재담꾼, 최고의 카사노바, 그리고 최고의 문장가(文章家) 등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필체(筆體)도 화려하였지만, 그의 문체(文體)에 비하면 필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수려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가 장례식에서 조문(弔文)을 하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연애편지(戀愛便紙)를 쓰면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그가 결혼식에서 축하 연설을 하면 그 부부는 평생 행복하게 살았고, 그가 악담을 하면, 그 악담을 받은 사람은 국제적인 왕따가 되었다. 그가 친필로 쓴 글들은 적게는 수천 골드에서 많게는 수만 골드까지 거래 된다. 많은 여성들이 그의 달콤한 말과 아름다운 얼굴에 반해 순결을 바쳤다. 외모, 무력, 지력, 정치력, 통솔력 등등, 모든 면을 살펴 보아도 조금의 헛점도 없는 한 마디로 완벽한 인간이었다. 그의 글은 세계를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식간의 사람들의 시선은 하이스네가 들고 있는 그 양피지에 향했다. "뭐라고 써있습니까?" 하이스네는 빠르게 양피지를 훑어 보았다. 그리고 안경을 올려 쓰며 입을 열었다. "'나 공작 먹었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여기 쓰여져 있군요."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하이스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이스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앉아 있던 귀족들도 영문을 모른 채, 일어 섰다. 하이스네는 충분히 뜸을 들인 다음, 양피지를 다시 돌돌 말며 말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지요. 오늘 자정을 기해 아이리스 키레아가 아이리스의 32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이 서찰은 대관식이 끝난 직 후, 청안백우조 편으로 보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언스 히로는 공작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순간, 홀 안에 정적이 흘렀다.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의 손에 있는 양피지를 빼앗아 펼쳐 보았다. 그는 앞에 있는 미사여구들은 다 제쳐 버리고 끝 부분에 써진 중요한 문장만 읽어 보았다. > ……하여, 1671년 7월 18일, 아이리스 키레아 님이 아이리스의 제 32대 왕으로 즉위하셨다. 이는 만천하에 아이리스의 위명을 떨치기 위해서이며, 선대 왕이신 아이리스 키에티트 님의 의지를 물려 받아, 아이리스는 반드시 강남의 영토를 회복 할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이번에 정식으로 작위를 받은 귀족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 공작 : 만토이펠 안기 > 공작 : 아이언스 히로 > 후작 : 디아케 발리스 > 후작 : 라이어즈 카루드 > 백작 : 사일런스 지니 > 백작 :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 백작 : 기타 등등……. 대관식을 했던 안 했던 아이리스 키에라는 아이리스의 왕이었다. 현재 왕족의 핏줄로 남아있는 것은 그와 공주인 아이리스 루시아 뿐이었다. 정치가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공주가 왕 위를 물려 받을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은 전란의 시기다. 강력한 왕권으로 군대를 통솔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여자가 왕위에 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래저래 왕이 될 사람은 키에라 뿐이고, 실제로도 그는 지금까지 왕 노릇을 해왔다. 그런데 지금 새삼스럽게 대관식을 열어 정식으로 왕좌에 즉위했다는 것은, 이제부터의 전쟁은 산발적이 아니라 국가의 총력을 쏫아 붓겠다는 얘기다. 그리고 아이언스 히로가 아무리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라지만, 한번에 공작의 작위를 내린 걸 보면,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아니,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아이리스 키레아와 아이언스 히로, 즉 3기 전란이 일어났을 때와 같은 정치적 체계를 구성하겠다는 말이다. 그게 단순히 대외 선전용인지 아닌지는 상관 없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아이리스가 드디어 자바스와의 전면전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자바스와 아이리스는 전쟁(戰爭)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의 소규모 전투(戰鬪)만을 했을 뿐이다. 이유는 아이리스는 군대 규모가 작고 원정을 나갈만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케이튼 지역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 못하고, 자바스 입장에서는 굳이 강을 너머서까지 군대를 보내 이미 망하디시피 한 나라를 공격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리스 키레아가 정식으로 왕좌에 앉았다면 얘기가 틀려진다. 자바스는 이제까지 아이리스의 잔존 세력을 반란군으로 취급하였다. 하지만 아이리스 키레아가 정식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은 아이리스라는 국가가 아직 존재를 하고, 그가 이끄는 군대는 아이리스 군이라는 얘기가 된다. 자바스는 이미 케이튼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을 시켰고, 국가에서 발행하는 지도에도 그렇게 명시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새로운 나라가 새워졌다. 이것은 자바스의 도전하는 반역(反逆)이었다. 이 일은 그대로 넘어 갈 수가 없었다. 만약 자바스가 군대를 보내지 않는다면, 이것은 반역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국에게 자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자바스는 반드시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킬 것이다. 문제는 그 시기였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길면 한달 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뭐라고 써있는가?" 헤이체르 공작이 물었다. 레이트 백작은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손에든 양피지를 헤이체르 공작에게 넘겼다. 그리고 빠르게 홀 안을 뛰쳐나가며 밖에 있는 하인들에게 외쳤다. "당장 마차를 준비해!" 하이스네는 레이트 백작의 뒤를 쫒아가며 말했다. "어느 세월에 마찰 타고 갑니까? 저를 따라 오십시오. 마굿간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둘은 눈깜짝 할 사이에 홀 안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헤이체르 공작은 멍한 표정으로 서찰을 읽다가 눈을 번쩍 뜨며, 하인들에게 외쳤다. "마차를 준비해! 당장 왕궁으로 간다!"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는 귀족들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왕궁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나이세르 후작님께서는 이 곳에 없는 다른 귀족들에게 기별을 넣어 주십시오." 유나이세르 후작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엇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 왕궁엘……." 유나이세르 후작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헤이체르 공작이 외쳤다. "아이리스 키레아가 32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언스 히로는 공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귀족들은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아까 하이스네가 한 말을 상기하고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헤이체르 공작은 흥분을 가라 앉히며 조용히 말했다. "서두릅시다. 빨리 이 일을 폐하께 알려야 합니다." Part 2. 참모총장 아이언스 히로 내리쬐는 햇빛, 타오르는 열기, 시원스럽게 부는 바람. 그리고…… 이해 할 수 없는 이 기분. 나는 손에 든 담배를 빙글빙글 돌리며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 산뜻한 걸음으로 회랑을 걸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아이리스의 왕궁이었다. 왕궁. 누가 들으면 내가 무지 좋은 곳에 사는 줄 알겠다. 하지만 왕궁이란 말 그대로 왕(王)이 사는 궁(宮)이다. 으리으리한 63층짜리 집이던, 곳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이던 왕이 살고 있으면 무조건 왕궁이 된다. 이곳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63층짜리 커다란 집도 아니다. 그냥 적당히 구색만 갖춘 거대한 저택이었다. 그래도 정원과 안의 건물을 다 합치면 크기는 꽤 큰 편이다. 원래 이 시대가 인구수가 적기 때문에 조금 사는 집이라고 하면 이 정도 크기는 기본인가 보다. 서울은 땅 값이 비싸서 최대한 높이 짓는게 남는 장산데. 난 건물을 빠져나와 정원을 걸었다. 정원이라고는 하지만 꽃 하나 제대로 안 피어있고, 잡초만이 무성하게 나있다. 몇 년 정도는 손질을 안 한 모습이었다. 난 햇빛이 비치지 않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몸이 좀 피곤했다. 게다가 이상한 포즈로 잠을 잔 탓에 목뼈가 오른쪽으로 약간 휘어져 있었다. 난 목에 펭귄표 파스를 붙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지만, 이내 이곳에는 약국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만 내쉈다. 난 라이타를 켜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젠 라이타 가스도 거의 다 썼다. 아마도 몇 번만 더 키면 버려야 할 것 같았다. 난 고개를 꺽어 하늘을 보았다. 가을 하늘을 맑고 푸르렀다. 가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해석하면 하늘은 높아지고 말은 비대해 진다. 조금더 현실 상황과 결부시켜서 설명을 하자면 로켓을 쏘아 올리기에는 부적절하고, 말고기를 먹기엔 적절한 시기다. 담배 연기를 길게 흡입하며, 한창 인생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을 때, 그림자가 내쪽으로 드리워지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한 개비 주시겠습니까?" 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통채로 넘겨 주었다. 그 동안 이 인간이 내게 얻어 간 담배를 다 합하면 족히 한보루는 될 것이다. 그러고보면 꼭 학교에 이런 놈이있다. 담배랑 라이타 안 가지고 다니면서 남한테 '한 까치만 한 까치만' 하며 얻어 피는 놈. 그리고 나서 걸리면 자기는 안 폈다고 끝까지 발뺌한다. 이런 놈 주머니에는 물증이 나오 질 않으니, 결국은 담배 가지고 다니는 놈들만 엉덩이에 불나게 얻어 터지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는 인사를 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불씨를 꺼내 능숙한 동작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색을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제가 방해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사색(思索)은 개뿔이……. "아닙니다." 나는 대답을 하며 그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사실 그가 웃는다는 것은 별로 특이할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지금 내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이름은 사일런스 지니였다. 현재 나이 22세. 183cm의 키에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미남. 그의 얼굴은 조각을 깍아 놓은 듯, 새하얗고 선이 확실하였다. 방금 피부박피 수술을 마친 듯한 그의 피부는 잡티는 커냥 점하나 찍혀있지 않았다. 길게 기른 금발은 올빽으로 넘겨 파란색 끈을 꽉 묶어 한쪽으로 흘러 내리게 하였고, 붉은색의 입술은 끝이 조금 올라가 있어 항상 웃는 것처럼 보였다. 눈은 그리 큰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언제나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연륜 깊은 노인 같았다. 그가 눈 뜨는 것을 몇 번 본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반대로 모든 일에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젊은이 같았다. 지니는 왼쪽에 낀 외눈안경을 매만졌다. 듣기로는 왼쪽 눈의 시력이 오른쪽 시력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안경을 꼈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순 폼으로 끼고 다니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안경 덕에 지니의 지적이고 엘리트적인 분위기가 한층 부각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의 외모는 그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의 직책은 제 1군단 참모였다. 참모(參謀). 조금도 알아듣기 쉬운 말로 바꾸면 군사(軍師)나 모사(謀士)정도로 바꿀 수 있다. 군대를 움직이는데에 그의 발언권은 대단하였다. 게다가 그는 아이리스의 군대를 유지시키는데에 한 몫하고 있었다. 만약 지니가 없었다면, 이 나라는 망해도 오래 전에 망했을 거라고 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책략은 몇 만의 군대와도 비견될만하였다. 지니는 참모이자 일선에서 직접 뛰는 장수(將帥)였다. 직접 싸우는 모습은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듣기로는 웬만한 장군들보다 전투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아직 끝난게 아니다. 솔직히 설명하는 내가 다 지겹다. 하지만 몇 줄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아무튼 이 사일런스 지니라는 인간은 예술에도 조예가 깊다. 한마디로 예술가(藝術家)라는 말이다. 음악(音樂), 미술(美術), 체육(體育) 등에 조예(造詣)가 깊다. 연주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쓰고, PT체조도 잘 한다. 생긴 것 잘생긴 놈이 능력까지 출중하면 그 다음은 생각 할 필요조차 없다. 이 놈은 한때 동네 처녀란 처녀는 다 건들고 다녔다던데, 정말 재수없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자식이다. 이런 놈들 때문에 나 같이 평범하고 순진하고 순결(?)한 남자는 여자 구하기가 더 힘들어 진다. 이놈은 전세계 모든 남성의 적임과 동시에 모든 여성의 적임으로 이런 놈은 반드시 국제적 왕따를 시켜 다시는 고개를 들고 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지니가 정중하게 질문 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이 정원을 몽땅 전세 낸 것도 아닌데 못 할게 할 이유가 없었다. "공작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나는 바로 지니의 말을 맞받아쳤다. "백작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니는 뭐가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 바라보다 문득 많은 의문점이 생겨났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시기하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에 비래하여 존경심과 시기심이 커진다. 그런데 이 인간을 보고 있으면 존경심이나 부러움, 동경 등의 감정은 생겨도 이상하게 시기심은 생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람을 매료시키는 카리스마 때문일 것이다. 재수 없을 정도로 잘난 사람이지만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할 정도의 카리스마. 잘난 놈이 재수 없지도 않으니, 더 재수 없어진다. 아무튼 지니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던가, CD 플레이어를 무료로 대여해 주는 친절을 베풀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나를 등쳐먹는다거나, 빈대 붙어서 내 피를 쪽쪽 빨아먹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난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바닥에 던진 다음, 지니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은 지도 모르는 놈을 공작의 자리에 앉혀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잘났다고는 하지만, 저까지 잘났다는 보장은 없잖습니까? 게다가 지금 국가 상황도 별로 안 좋은 것 같은데, 이런 때 일수록 능력 위주로 사람을 선발하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솔직히 공작 자리는 그렇다 치고 대체 저를 참모총장으로까지 추대한 이유는 대체 뭡니까?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혈연, 지연, 학연을 철폐해야지만 경제가 살아나고 인재 등용이 활발해져, 결론적으로는 국가의 발전과 연계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신겁니까?" 지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대답하였다. "으음, 대단히 감명 깊은 말씀이었습니다.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다원론적인 시각으로 국가를 바라보고 계시군요. 특히 혈연, 지연, 학연을 철폐하자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저의 좁은 식견이 한층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종종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이 인간은 항상 이런 식이다.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귀찮을 때는 상대방을 잔뜩 추켜세우는 말을 하며, 말을 회피한다. 하지만 난 오늘 확실히 따져야 한다. 솔직히 공작까지는 나도 이해 할 수 있다. 그 늙은이가 공작이었으니까, 그 후계자인 나도 공작 직위를 받는다. 조금 황당하기는 하지만 여기까지는 말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참모총장이라는 자리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참모총장(參謀總長). 해석하자면 참모들 중에 짱, 즉 우두머리라는 얘기다. 모든 군(軍)을 통솔하고 전략(戰略)과 전술(戰術)을 짜는 총 책임자다. 현재 군단 참모는 나를 포함하여 3명이다. 사일런스 지니 백작과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내가 참모총장이니 결국 그 둘은 내 밑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전략을 짜낼 머리는커녕, 군사지도조차 읽을 수 있는 머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일을 시키더라도 최소한 뭘 아는 놈을 시켜야 할 것 아닌가? 지도도 못 읽는 놈을 참모총장이라고 데려다 놓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아무리 이 사회가 빽을 중시하는 사회라지만 이건 너무 한거다. 현재 아이리스 군대 수는 대략 3만 정도이다. 적다고 생각 될지도 모르지만, 거의 망하다시피한 국가기에 3만이라는 군사도 간신히 채운 것이다. 징병을 하고 패잔병들을 끌어 모아서 말이다. 군사 수가 적은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당백(一當百)이라고 말하긴 하는데, 당연 구라라고 보면 된다. 3만 군대가 일당백이라면 300백만 군대를 상대 할 수 있단 얘긴데, 씨바, 그 정도면 대륙을 초토화 시키고도 남겠다. 아무튼 지금 아이리스는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놈한테 3만 군사(이게 아이리스의 전체 병력이다)의 목숨을 맞긴 것이다. 거의 제정신으로는 할 수가 없는 짓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일을 사일런스 지니에게 따지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 인간이 나를 참모총장으로 추대한 것이다. 참고로 전 참모총장은 사일런스 지니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번 즉위식에서 정식으로 작위를 수여받으며 자신은 군단 참모로 한걸을 물러서고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뼉다귀 같은 나를 자신의 상관으로 앉혔다. 이 인간이 지금 나랑 장난 하자는 건가? 하지만 더 황당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 참모총장이 되었는데도 반대한 사람이 몇 명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라는 점에 대해 아주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다. 호랑이의 자식 역시 호랑이라 믿으며. 하지만 그런 믿음은 상당히 위험하다. 호랑이가 가끔은 개새끼(욕이 아님, 강아지로 해석)를 낫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선이다. 아버지 유비는 촉 나라를 세우고 제위에 오르는 등, 수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 아들인 유선은 그 수 많은 업적들을 전부 말아 먹었다. 말아 먹어도 그렇게 철저하게 말아 먹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렇게 말아 먹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면에서는 유선도 굉장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다시 담배를 빼 물며, 확실한 어조로 지니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설명 좀 해주시죠? 저도 이젠 참모총장인데 알 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군단참모 님?" 군단참모라는 말에 지니는 고개를 조금 갸우뚱거렸다. "지금 그거 명령인가요?" 명령(命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시킴. 다시 말해 내가 사일런스 지니에게 말하라고 시킴.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참모총장인 내가 군단참모인 사일런스 지니에게 순순히 불라고 말하는 것.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 맞습니다." 지니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더니 다시 내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지요. 현재 아이리스의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5개 국가가 서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기에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하지만……." "6개 국가 아닌가요?" 나의 질문에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명 같은 경우에는 대륙의 북쪽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만, 자국의 영토 내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으니 예외로 치겠습니다. 진명이 만약 중립국임을 선포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면, 지금 대륙의 지도는 다른 모습일테니까요." 그 얘기는 나도 들은적이 있다. 진명(秦明)이라는 나라는 대륙의 북쪽에 있는 강대국이다.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아이리스 키에티트가 손이 맞고, 발이 맞고, 스텝이 맞아, 짝짝꿍 하다가 일으킨 전쟁.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제 3기 전란 때 아이리스 다음으로 영토를 가장 만힝 확장한 국가다. 하지만 진명은 1564년, 즉 제 3기 전란이 종결되는 순간 바로 중립국임을 선포하고 자국 영토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다. 듣기로 진명은 현재 대륙 최고의 강대국이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진명은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었다. 언젠가 역사가들이 진명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았는데, 진명이 영토 확장을 포기한 이유는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5개 국가의 문화는 거의 엇비슷한 편이다. 서양 중세쯤으로 말이다. 하지만 진명의 문화는 다른 5개 국과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5개 국가가 서양식의 문화라면 진명은 동양식의 문화다. 입는 옷, 먹는 음식, 건축 양식, 정치 체계, 군 체계, 왕권의 구조……. 아무튼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틀리다. 만약 진명이 군사 공격을 통해 영토를 얻는다 치면, 그 영토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문화로 동화(同化)시켜야 한다. 하지만 수 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문화가 하루 아침에 바뀔 리가 있겠는가? 아니, 오히려 진명이 타국의 문화에 물들 가능성도 있다. 어찌되었든, 진명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중립국임을 선포하고 외교 관계도 폐쇄 정책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중립국(中立國). 중립국이란 무엇인가? 중립주의를 외교 방침으로 하는 나라이다. 너무 어려운가? 그럼 중립주의(中立主義)는 무엇인가?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대립하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정책을 지키려는 외교상의 처지이다. 쉽게 설명을 하자면, 진명은 어느 나라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느 나라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타국의 군대가 자국의 영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군대를 몰아낸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군대 돌리느라 바쁜데, 어떤 미친 나라가 진명을 건드리겠는가? 그리하여 진명은 1564년 이후로 소규모 전쟁 한번 한 적이 없다. 지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얘기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으음, 생각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난 고개를 끄덕여 얘기를 계속하라는 뜻을 전달하였다. "현재 대륙의 균형은 자국이 멸망 직전까지 가면서 상당 부분이 무너진 셈입니다. 아이리스의 영토의 대부분이 자바스와 아토리아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그 두 나라는 강성해지고, 나머지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약해진 셈입니다. 그리고 아이리스는 그 나라들보다 더 약하구요. 국가가 약해지다보면, 국민들은 자국이 가장 강성했던 때를 그리워합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니의 말투는 상당히 매끄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나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니의 입을 통해서 들으면, 꼭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같은, 그게 아니면 알고 있던 사실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아무튼 지니의 말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러한 흡입력이 있었다. 지니는 경청(敬聽)하는 나의 태도를 충분히 살핀 다음, 말을 이었다. "아이리스가 가장 강했던 때는 아이리스 키에티트 님과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이 강남을 휩쓸었을 때입니다. 그때, 아이리스는 군대 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땅이 넓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보다 더 안 좋았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두 분께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아니하시고, 당시 최고 강대국이었던 아토리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강남 전역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셨지요. 지금 국민들은 그 때를 원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왕과 최고의 군사(軍師). 국가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반드시 아이리스가 다시 패권(覇權)을 잡을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지요." 지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보았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그런데 지금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 5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 아이언스어를 해독, 그리고…… 아이리스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청안백우조를 수족(手足)처럼 부리는 능력. 당신은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과 비슷합니다. 그 분의 무력(武力)과 지력(智力)을 따를 수만 있다면요. 무력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청룡도와 절대 감각이면 됩니다. 하지만……." 지니는 말을 끊었다. 현재 그의 말을 분석해보면 이러하다. 지금 아이리스가 어렵기 때문에 국민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꿈꾼다. 독일 국민이 히틀러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처럼, 러시아 국민이 스탈린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처럼. "머리에서 나오는 책략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지요. 아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군사지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걱정 하실 건 없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해낼테니까요." 지니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이제 곧 자바스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테니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하거든요." "예!? 대규모 병력이라뇨?" "아! 모르고 계셨습니까? 뭐 모르셨으면 지금 아셨으니 별 상관 없겠군요. 저녁 때 회의가 있을 예정이니 식사하시고 꼭 참석하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지니는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한숨을 내쉬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머릿속은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난 옆에 누군가가 와있음을 알게 되었다. 짧은 백금발의 단발 머리를 바람결에 휘날리고 있는 여인. 그녀는 흰색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잘 어울린다. 그녀는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그곳이 흙바닥인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는 성격이 털털하다고 설명 될 수 있으나, 다른 면에서 생각하면 그 옷을 빠는 사람을 전혀 배려해 주지 않는 싸가지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공주다보니 절대로 지 빨래는 지가 하지 않는다. 참고로 내 빨래도 결코 내가 하지 않는다. 루시아는 나를 보며 계속 웃고 있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다. 왠지 모르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요즘은 점점 그 분위기에 동화되는 느낌이다.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어요?" "왜 나 같은 놈을 공작 자리에 앉혔느냐에 대해서요." 내 대답에 루시아는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자기 때문에 내가 이 나라로 오게 된게 미안한 모양이었다. 미안할거면 데려오질 말았어야지. 루시아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정원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잡초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공작이라는 작위가…… 싫으신가요?" 루시아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인간의 욕망이란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명예욕(名譽慾), 권력욕(權力慾), 재물욕(財物慾). 이 세 가지로 말이다. 나도 인간인지라 권력에 대해 욕심이 없을리 없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언제나 책임이라는 것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 나라가 강대국이고 잘 살고, 다른 나라와 맞짱 뜰일도 없다면, 공작이 하는 일은 침대에 누워 코딱지 파다가, 심심하면 라이레얼 같이 예쁜 여자 불러서 철인 3종 경기를 벌인다던가, 그것도 심심하면 옆집 후작이랑 뒷집 백작 불러가 고스톱 한판을 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이고 내가 공작 자리에 앉아있는 나라는 천하에게 제일 가는 약소국이다. 게다가 조금만 있으면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한다. 이런 나라의 공작이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건가? 답은 별거 없다. 피터지게 싸우고, 좆나게 나라를 위해 일하면 된다. 휴가는커녕 퇴근 시간 한번 제대로 못지킨다. 집에서 처자식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도, 나는 좆빠지게 일만해야 한다. 아아! 병든 노모와 라이레얼 같이 아름다운 처와, 라나 같이 귀여운 딸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나는 집에 한번 못 들어간다. 이게 공작이냐? 머슴이지. 이 나라에 와서 근 한달 동안, 내가 한 일은 별 것 없었다. 스윈에게 칼쓰는 법 좀 익히고, 승마 기술을 익힌다는 핑계로 말타고 놀러다녔다. 그 덕에 이제는 라이코스 없이도 혼자 말을 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드디어 라이코스를 잡아 먹을 때가 온 것이다. 사실 어제 색다른 맛의 새고기를 먹어 보았다. 처음에는 칠면조 인 줄 알고 먹었는데, 알고보니 공작새 요리란다. 음음, 특식이여서 그런지 맛있긴 맛있었다. 아아! 불쌍한 공작새여! 그러고보면 어제 세레나에게 쓴 편지가 잘 갔는지 모르겠다. 라이코스 편에 보내긴 했는데, 아무래도 별로 믿음직 스럽지가 않다. 세레나는 그 편지를 읽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3분 요리 하듯 후딱 쓴 편지라 내용은 거의 없었지만 세레나의 안부를 묻는 나의 따뜻한 마음이 듬뿍 담겨있었는데. 후우, 그 때 그렇게 쉽게 헤어지는 바람에 고스톱 치는 방법도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다. 멋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맞고나 한번 치고 싶었는데. 잠깐! 그럼 세레나는 '나가리 판에서는 광 값도 두 배로 받아라' 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 했을까? 설마 이상하게 해석한 것은 아니겠지? 난 한참 동안 세레나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내 옆에 루시아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였다. 이런, 내가 옆에 아리따운 아가씨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니……. "저에게 공작의 작위를 내린 이유는 대외선전용이겠지요. 지금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예가 이곳에 나타났다! 아직 우리 국가에는 희망이 있다! 하고 말이죠." 루시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그것을 긍정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착각하고 있어요. 당신은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아이리스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을 하고 이곳으로 데리고 왔겠지요. 하지만 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마법 좀 쓸줄 아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지요. 기대가 큰만큼 실망도 큰 법입니다. 쓸데없는 기대감이란 일찌감치 버리는게 좋아요. 제에게 무슨 큰 일을 하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살아 돌아오는 걸 기대하는게 어때요?" 내가 가장 걱정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요즘은 왕궁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다. 병사들이나 주민들이 내 얼굴만보면 기립박수 치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가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라고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선전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미치겠는 것은 그 선전의 내용은 황당하다고 밖에 설명 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께서는 100년 전에 이미 아이리스가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셨다. - 중략 -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죽음을 앞두시고 아이리스를 위기에서 구해 줄 인물을 찾으셨다.그렇게 몇 년을 헤맨 끝에 그분께서는 적색 산맥에서 한 어린 소년을 발견하였다. 그 소년은 드래곤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몸에서 찬란한 기운을 내뿜었다. 어떤 흉악한 몬스터도 감히 소년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였고, 적색 산맥의 모든 자연은 그에게 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그리드 님께서는 그 소년이야 말로 자신의 후계자라 생각하여, 그 소년을 데려다 기르며,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소년은 영특하기가 비길데 없어 스폰지가 물을 빧아들이 듯, 모기가 피를 빨아들이 듯, 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 듯, 이그리드 님의 가르침을 전부 흡수하였다. 후에 그분의 예견대로 아이리스는 위기에 처하였고, 이그리드 님께서는 자신의 수명이 다 되었음을 깨달으셨다 이그리드 님은 소년에게 청룡도라는 뇌룡의 힘을 지닌 무기와 칼라이스의 망토, 현자의 지팡이 등을 내려 주고 아이리스를 위기해서 구하라 명하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셨다. 소년은 이그리드 님을 땅에 묻은 다음,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정들었던 적색 산맥을 떠났다. 그리고 아이리스로 오는 중이던 아이리스 루시아 공주님의 일행과 합류하여 이 곳에 도착하였으니, 그 소년의 이름이 바로 아이언스 히로다……. 이 것이 바로 항간에 떠돌고 있는 아이언스 히로의 이야기였다. 언젠가 우연히 들었었는데, 난 내 얘긴지도 모르고 감탄사만 연발했었다. 아! 그 늙은이가 아이리스의 위기를 예견하고 미리 비밀병기를 제조해 놓았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게 왠일인가? 어찌하여서 마지막에 나의 이름이 나오는 것인가? 대체 어떻게 하면 소문이 저렇게 날 수가 있는 것인가? 난 열심히 소문의 근원지를 추적해 보았다. 역시 나의 예상대로 이 소문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사일런스 지니다. 자기 말로는 군의 사기를 높히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건 정말 너무했다. 몬스터가 감히 접근을 못하긴 개뿔이 못하나? 내가 몬스터 만나서 뒈질뻔 한게 엊그제 같은데……. 루시아와 나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으으! 날씨가 조금 추워진 것 같다. 망토를 괜히 벗어 놓고 왔나? 난 루시아를 쳐다 보았다. 루시아도 조금 추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석대로라면 내가 멋지게 겉옷을 벗어 루시아의 어깨를 덮어 주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옷의 그대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줄꺼요.' 그러면 루시아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하면 당신이 너무 춥잖아요. 그러지 말고 같이 덮어요.' 그럼 나는 의연한 자세로 사양을 한다. '괜찮소. 남자에게 이 정도 추위는 아무 것도 아니오. 그대의 따뜻한 모습을 보는 것이야 말로 내가 따뜻한 것이나 다름 없소.' 그럼 루시아가 내 품에 안겨오며 말한다. '저의 체온으로 당신을 녹여 드리겠어요.' 여기까지 왔으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바로 남은 옷마저 벗어제끼며 말한다. '그럼 우리 찐하게 몸을 부벼대, 이 추위를 한방에 날려 보냅시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나는 지금 위에 남방 한벌을 제외하고 나면 아무 것도 걸친게 없다. 내가 미친척하고 이 옷을 벗어 루시아에게 주면, 난 변태 취급 받아 따귀 맞기 쉽상이다. 그리고 만약 겉옷을 입고 있었다해도 결코 그것을 벗어주지 않는다. 내가 추운데 지금 남 걱정하게 생겼는가? 난 일어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루시아가 계속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관계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계속 앉아있어야 했다. 으음, 남들이 보면 둘이 데이트하는 줄 알겠다. "니들 데이트하냐?" 역시! 나는 바람과 같이 나타난 불청객을 쳐다 보았다. 이 곳에서 나와 루시아에게 반말을 쓰는 인간은 단 한명 밖에 없었다. 스웰리어 스윈. 제 3사단 사단장. 미친개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싸움광.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와 루시아를 내려다 보았다. 앉아서 올려다 보기에는 목이 너무 아팠기에,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올려다봐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루시아도 치마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시아가 완전히 일어서자 나는 내 키가 루사아 보다도 작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이! 군단참모장. 아까 지니 녀석이 그러는데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거라며." "저도 듣긴했습니다." "그래? 그럼 벌써 책략을 짜놨겠군. 자, 어서 말해봐. 대체 자바스의 똥개들을 어떤 방법으로 물리칠거지?" 대체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솔직히 그 질문은 내가 하고 싶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물리 칠건지? 왜 순진한 애 데려다가 참모총장 자리를 시켜 놔서 국가를 말아먹으려 하는지? 난 정색을하며 대답했다. "그건 국가 비밀입니다." 순간, 스윈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하지만 비밀은 비밀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국가의 사활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군사(軍師)들의 책략이란 승패를 판가름 할 중요한 요소지요.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책략이 새어나간다는 것은 곧 전쟁의 패배와 직결되는 겁니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저는 아이리스의 참모총장으로서 함부로 군 기밀을 발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 알고 싶으시면 나중에 전략회의 때 참석하세요." 나는 조용히 스윈의 반응을 기다렸다. 화를 낼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스윈은 너털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음하하! 역시 대단하군. 그래. 군단 참모장이라면 그 정도는 되야지. 난 떠 지니 녀석이 왜 너 같은 놈을 참모총장으로 추대했는지 의아해 했었는데, 그 정도로 신중하다면 확실히 참모총장 자격이 있지. 니 머릿속에 천하를 뒤집어 엎고, 국가를 움직일 만한 책략이 가득 들었다는데, 기대 하도록 하지." "누가 그래요? 누가 제 머릿속에 천하를 뒤집어 엎고, 국가를 움직일 만한 책략이 가득 들었다고 그래요" 스윈은 바로 대답하였다. "사일런스 지니." 그리고 크게 웃으며 자리를 벗어 났다. 난 한동안 썰렁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인간이 나를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내 머릿속에 있는 거라곤 사람 복장을 뒤집을 뻔뻔함과 국가를 말아먹을 멍청함 밖에 들지 않았는데. 아! 이 놈의 나라가 드디어 미쳐서 돌아가는 구나. 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루시아가 나에게 물었다. "어디 가시죠?" 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왕하고 독대(獨對) 좀 하려구요." * 나는 몇몇 사람들을 지나쳐 키에라 왕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궁 안의 귀족들은 나에게 인사나 경례를 하면서도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들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기 마련이다. 저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내가 워낙 잘났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야 잘난 거 빼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안녕하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누군가가 톤이 높고 날카로운 발음으로 나의 이름을 딱딱 끊어서 말음하였다. 난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곳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어깨까지 내려 온 아름다운 금발. 치켜 올라간 눈. 언제나 날카롭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 그녀는 얼굴의 반정도를 가리는 커다란 검은색 뿔테 안경을 올려썼다. 내 생각엔 저 멋대가리 없는 뿔테 안경을 금테나 은테 등으로 바꾸면 이미지가 훨씬 부드러워 질 것 같다. 그녀가 뿔테 쓴 모습은 마치 여자 기숙사의 사감 같은 느낌이다. 그녀의 이름은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였다. 왠지 어디선가 비슷한 이름을 들어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그녀는 사일런스 지니의 누나였다. 그런데 왜 성 앞에서 '샤이' 가 붙었는가? 그 이유는 어제부로 지니와 일루니아 둘 다 백작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을 구분하기 위해 일루니아의 성 앞에는 '샤이'를 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니를 부를 경우에는 '사일런스 백작' 이라고하면 되고, 일루니아를 부를 때에는 '샤이 사일런스 백작' 이라고 하면 된다. 날 부를 때는 '잘생기고, 용감하고, 터프하고, 똑똑하고, 훌륭하고,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는 순결한 아이언스 공작님' 이라고 부르면 되고. 그녀는 사일런스 지니의 누나인 만큼, 상당한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얼굴도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선이 확실한 것이 날카로우면서도 지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하지만 위로 치켜 올라간 눈썹과 눈, 멋대가리 없는 안경, 굳게 다문 입술, 세상 모든 일에 불만을 가진 듯한 눈빛 등등으로 인해 여학교 사감이라는 이미지가 지적인 이미지에 중첩되었다. 그녀의 키는 대충 160 정도이고 나이는 나보다 조금 많았다. 한 11살 정도. 내 나이가 17살이니 그녀의 나이는 28살 밖에 안된다. 28살. 사회가 급속도로 진보하여, 여성의 권위가 올라가고 YWCA가 테트리스를 끼고 박는 게임이라 하여, 음란물로 규정하는 21세기에서도 28살이라는 나이는 노처녀로 취급 될 수 있다. 그런데 여자 혼기가 15살에서 20살 정도로 규정된 이 사회의 시각으로 보자면, 28살은 노처녀 중에서도 노처녀, 즉 못생기고 능력 없는 여자로 취급당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루니아는 노처녀긴 하지만, 못생기거나 능력 없지는 않다. 예전에 그녀의 미모에 반한 많은 귀족들이 청혼을 희망했지만, 그녀는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야 당연 한 남자에게 억매이기 싫어서이다. 게다가 일루니아의 능력은 웬만한 남자 수백명을 능가한다. 보통 남자들은 자신이 여자보다 우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야 뭐 진보된 사회에서 살다 온 놈이기 때문에 내 아내가 될 여자가 나보다 잘났다고 해서, 자괴감을 느낀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나라(아이리스가 아니라 대한민국)만 해도 10년 전에는 '여자는 집에 밥하고 빨래나 하면 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자고로 여자를 밖으로 돌리면 안된다' 등의 사고 방식이 팽배해 있었다. 당연 이 사회에서는 그 팽배한 의식이 수십배 뻥튀기 되서 팽배해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 일루니아가 결혼을 했더라면 지금처럼 정계(政界)로 진출하기는커녕, 집에서 밥하고 빨래……는 안 하겠군.(생각해보니 밥과 빨래는 하녀들이 다 알아서 한다) 아무튼 일루니아가 사회 생활을 하는데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꽃 피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일루니아의 직위는 무엇인가? 일루니아는 대체 여자의 몸으로 무슨 일을 하는걸까? 제2 군단참모. 이것이 일루니아의 직위이다. 제1 군단참모가 사일런스 지니이니 남매가 군의 행동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셈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시대는 여자를 식모나 파출부 정도로 보고 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여자가 그런 고위직에 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고위직에 앉은 여성은 있다. 그 여성들은 대부분 기사나 마법사이다. 왜 이 여성들이 등용되었는가? 그야 기사는 힘이 세거나 싸움질을 잘하면 등용했겠고, 마법사는 마법을 잘 쓰면 등용했을 것이다. 너무 당연한 대답인가? 자꾸 따지지마라. 원래 대답 자체가 당연한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일루니아의 직책은 참모이다. 즉 모사이다. 한 마디로 머리 쓰는 직종이다. 일루니아가 하는 일은 열나게 빡세게 머리를 굴려 좋은 책략을 짜내는 것이다. 만약 열나게 빡세게 머리를 굴렸는데도 좋은 책략이 나오질 않으면 압축기에 대가리를 들이 밀어서라도 좋은 책략을 짜내야 한다. 기사는 무력을 보고 등용하고, 마법사는 마법력을 보고 등용한다. 당얀 참모는 지력을 보고 등용한다. 하지만 지력이라는 것은 측정의 기준이 없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하나의 생각이 엿 같은 생각일 수도 있고, 훌륭한 생각일 수도 있다. 일루니아가 여자라는 신분의 벽을 극복하고 자신의 지력과 정치력을 인정 받아 국가를 좌지우지 할만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한지를 말해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요, 아·이·언·스 공·작·님." 내가 인사에 답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서 그냥 멀뚱멀뚱 서 있자, 일루니아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글자 한 글자 똑똑 끊어서 정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말하였다. 난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화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거나 화를 낼 때는, 언제나 이마에 세 개의 주름살이 생겨났다. 저 주름살을 보고 있으니 노처녀라는 생각이 더욱 확실하게 든다. 난 그녀의 이마를 살피던 중, 그녀의 머리카락의 결이 상당히 안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피가 흐르는 남매이니 머리 색은 똑같이 빛나는 금발이다. 하지만 사일런스 지니는 찰랑찰랑거리고 살랑살랑거리는 머리인데 반해, 일루니아의 머리는 푸석푸석하고 윤기가 없었다. 그 이유야 지니는 머리를 자주 감고, 일루니아는 머리를 자주 감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지니야 워낙 인간이 바람둥이다보니 매일매일 피부 관리와 머릿결 관리를 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신의 잘생긴 외모를 부각시키는 일에는 결코 시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반면 일루니아는 아무리 시간이 남아돌아도 자신의 외모를 갈고 닦는 대는 결코 시간 투자를 하지 않는다. 목욕은 대략 한달에 한번 정도하고 머리는 대충 3일에 한번, 심하면 일주일에 한번 정도 감는다.(내가 직접 조사한건 아니다. 내가 스토커도 아니고 여자 목욕 횟수 조사해서 어디다 쓰겠는가? 이건 지니가 직접 말해준거다) 하지만 별로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똑똑한 커리어 우먼이 지저분하게 하고 다닌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 지저분함이 그녀의 교양과 지식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골 빈 나이트 걸(밤마다 나이트에서 몸 흔드는 여자)이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 그건 바로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가둬버려야 한다. 멍청하고 지저분한 여자를 어디다 갔다 쓰겠는가?(여성 비하적인 발언이라 욕하지마라. 멍청하고 지저분하면 쓰일데가 없는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일루니아는 여전히 날카롭고 반항적인 눈매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젠 아예 제 말을 대놓고 무시하는군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잠시 생각 좀 하느라." 누가 누구를 무시하는데? "그럼 제가 참·모·총·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걸 방해 한 셈이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엑센트를 팍팍 주지 않아도, 내가 참모총장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다. "전혀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제·2·군·단·참·모·님." 난 군단참모라는 말에 엑센트를 팍팍 주었다. 이에는 이! 엑센트에는 엑센트다! 나는 공작, 그녀는 백작. 나는 참모총장, 그녀는 군담참모. 작위로 보나, 직위로 보나 내가 위다. 게다가 나는 그녀의 직속상관이었다. 그녀의 주름살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를 스쳐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물론 가기 전에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한번 갈구어주는 행위는 잊지 않았다. 나는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예쁜 여자에게 약하다.(나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남자가 그러하다. 솔직히 내가 조금 심하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일루니아는 충분히 예쁘다. 다른 귀족 여자들이 아무리 예쁘다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비교조차 안 된다. 솔직히 예쁘면 뭐하는가? 입을 여는 순간 깡통 두드리는 소리 밖에 안 나는데.(골이 비었다는 말이다) 일루니아는 외모도 예쁘지만 내면에서 풍겨나오는 지적인 분위기가 사람을 매료시킨다. 하지만…… 너무 싸가지가 없다. 원래 참모라는 자리가 남들에게 명령하는 위치에 있다. 명령을 하다보면 가끔은 싫은 소리 해야 할 때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욕을 바가지로 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당연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야하겠지만, 그녀의 공정한 처사와 지적 매력으로 그것을 막는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욕을 먹었어.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할까? 그래. 난 욕먹을 짓을 한거야.' 라고 생각하게 하거나 아니면 '일루니아에게 욕 얻어 먹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 드럽지가 않아'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결론만 말하자면 일루니아는 싸가지 없는 여자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서 나 혼자 그녀를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걸까? 내가 그녀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건 아니다. 내가 뭐하려고 예쁜 여자에게 반감을 갔겠는가? 그럼 그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것 역시 아니다. 난 예쁜고 지적인 여자를 좋아하고, 일루니아는 예쁘고 지적이다. 전혀 싫어 할 이유가 없다. 그럼 나보다 훨씬 똑똑하기 때문에? 금방 말했지만 나 지적인 여자 좋아한다. 그럼 무슨 이유에서 내가 그녀를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건가?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나에게만 싸가지 없게 행동한다는데에 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나만보면 갈군다. 그리고 나만 보면 시비다. 그리고 나만 보면 짜증을 낸다. 그리고 나만 보면 화를 낸다. 그리고 나만 보면 틱틱거린다. 그리고 나만 보면…… 아무튼 나를 재수없게 보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그녀에게 갈굼 당할만한 일을 한적이 없다. 나는 여성 비하적인 말을 내뱉은 적이 없으며, 그녀의 인격에 모독이 될만한 말을 한적 역시 없다. 또한 나는 그녀를 음탕한 눈길로 바라본다던가, 아니면 엉덩이를 슬쩍 만진다거나 하는 성추행을 한적이 없으며, 바닥에 거울을 떨어트려 은근슬쩍 그녀의 치마속을 옅보려 한적 역시 결코 없다고 맹세 할 수 있다. 그래. 솔직히 나도 남자다보니 생각은 몇 번 해봤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살인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 듯, 내가 머릿속으로 그녀의 치마속을 옅봤을지라도 직접 실행에 옮기지 않았으면 그것 역시 죄가 아니다. 그러면 그녀가 왜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가? 난 처음에 나의 잘남을 시기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유없이 갈굼 당하는 것이 싫어 지니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지니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원래 저희 누님이 좀 그렇습니다. 그냥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세요.' 씨바, 노처녀 히스테리면 히스테리지, 왜 그 히스테리를 나한테 푼단 말인가? 휴우, 힘 없는 내가 어쩌겠냐? 갈구면 갈굼 당하고, 때리면 맞아야지. 나는 생각을 하던 도중 어느새 왕의 집무실이 가까워져있음을 깨달았다. 커다란 문에는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반짝이는 칼을 찬 두 남자가 헬버드를 들고 있었다. 이 둘은 왕의 직속 근위병이었다. 근위병 수는 정확히 10명인데 이렇게 궁 안에 있을 때는 2명 씩 번갈아가며 왕에게 붙어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붙였다. "안녕하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별로 안녕 못하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신가요?" 나의 물음에 두 근위병은 '예' 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왼쪽에 서있던 근위병이 말하였다. "안에는 디아케 후작님이 계십니다." 난 짜증난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서요?" 근위병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당혹스러운 표정만을 지어 보였다. 난 그런 근위병을 무시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공작이자 참모총장이니 국왕 근위병따위는 짬밥수로도 누를 수 있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랗고 삭막한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덩치가 커다랗고 수염이 긴 노인과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20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다가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정중하게 나에게 인사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청년은 정중하지는 않지만 절도있는 동작으로 나에게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여기엔 어쩐 일로……?" '너 만나러 왔다!'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난 간신히 참았다. 난 고개를 까딱거려 인사의 답례를 한 후, 의자를 하나 빼서 걸터 앉았다. 나의 이런 싸가지 없는 행동에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청년은 아무런 표정도 지어보이지 않았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나의 물음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에게 몇마디 말을 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허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방을 나섰다. 이윽고 문이 닫히자, 청년은 의자 하나를 가져와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시죠?" 청년이 나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이 청년이 바로 현재 아이리스의 국왕인 아이리스 키에라였다. 180정도 되는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확실하고 눈이 매서운 남자. 어깨까지 올 정도로 기른 백금발 머리카락은 묶지 않고 그대로 늘여트려 놓았고, 눈동자는 루시아와 마찬가지로 에메랄드 색이다. 키에라 왕의 나이가 27살이니 루시아 하고는 8살 차이가 나는 셈이다.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루시아와 많이 닮았다. 이 남자에게선 묘한 매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매력은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감히 범접 할 수 없게하였다. 지금 그의 눈빛은 차분히 가라 앉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관식 때 보았던 그 타오르는 눈동자를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이 남자가 강렬한 카리스마 때문에 왕위에 있는지, 아니면 왕위에 있기 때문에 카리스마가 있다고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 눈 앞의 남자가 내가 우습게 볼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만하든 만만하지 않든 할 말은 해야겠다. 난 다리를 꼬고 두 손을 깍지꼈다. 한 마디로 건방진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키에라 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왜 공작이 된거죠?" 키에라 왕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 드린 것 뿐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이 나라는 추첨을 통해 작위를 내리나 보죠?" "그렇진 않습니다. 전란시기이다 보니 능력을 보고 작위를 내리지요." "그럼 제가 왜 공작이 된거죠?"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 드린 것 뿐입니다."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난 미치고 환장할 기분이 들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제가 왜 참모총장이 된거죠?"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직책을 그대로 물려 드린 것 뿐입니다." 미치겠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만약 키에라 왕이 내 복장을 뒤집어 놓으려고 의도한 것이라면 그 의도는 100% 성공하였다. 흥분하면 안 돼. 흥분하면 안 돼. 나는 참을인(忍)자를 되뇌며 흥분을 가라 앉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도박에서 그렇하듯이 대화역시 그렇다. 먼저 흥분하는 쪽이 주도권을 뺏기기 마련이다. 나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머릿속이 차가워야지만, 저 남자를 상대 할 수 있다. "현재 아이리스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3만입니다." "그럼 그 3만이 전멸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리스는 멸망합니다." 키에라 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이젠 어느 정도 대화해 볼만 하겠군. "멍청한 지휘관이 군대를 이끈다면 어떻게 될까요?" "패합니다." "그럼 제가 지시를 내리는 아이리스의 군대는 어떻게 될까요?" 키에라 왕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물쭈물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 그의 기대에 부응해주기 위하여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저를 어떻게 보셨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곳에 와서 하루 아침에 공작이 되었고, 역시 같은 날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저는 3만의 목숨을 짊어지게 된 셈이죠. 아니, 생각해보니 3만이 아니군요. 그 3만이 전멸하면 아이리스 자체가 멸망하게 되니 전 지금 아이리스 국민 전체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는 셈이겠군요. 저에게 수십만의 목숨을 짊어 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난 키에라 왕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을 요구했다. 키에라 왕은 대답을 하기가 곤란한 듯, 질문으로 대답을 하였다. "어째서 없다고 생각을 하시는 거죠?" "등 뒤에 무능한 아군은 눈 앞의 용맹한 적군보다 무서운 법입니다." 나의 말에 키에라 왕은 웃음을 지었다.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 남쪽에 나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 님을 참모총장으로 추대한 사람은 사일런스 백작님이십니다." "사일런스 백작 님의 추천이면 하늘을 땅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까?" "사실 사일런스 백작 님 외에 다른 한명이 추천하였습니다." 지니 외에 나를 추천한 사람이 있다고? 대체 어떤 골빈 놈이지? 내가 장담하는데 그 놈은 분명 첩자다. 나 같은 놈을 참모총장 자리에 앉혀 나라를 말아먹게 하려는 자바스의 첩자! "그 골빈 사람은 누굽니까?" "접니다." "……."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국왕이라는 자가 이렇게 생각이 없어도 되는 건가? "제 정신이십니까?" "전 언제나 제정신입니다." 제정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원래 술 취한 놈은 끝까지 자기가 술에 안 취했다고 우겨대고, 미친놈은 언제나 자신이 제정신이라고 우겨댄다. 키에라 왕은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합니까?" "확실히 기억합니다." "저 역시 확실히 기억합니다. 그럼 그때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저를 보시고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오랜만이군.' 그 말에는 대체 무슨 뜻이 담겨있었을까요? 그때 공작 님과 저는 처음 만났었는데 말이죠." 키에라 왕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약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재밌는 사실 하나를 알려드리지요. 그 '오랜만이군' 이라는 말. 공작 님께서 먼저 말 하지 않으셨으면 제가 말했을 겁니다." 난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내가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바로 그것이었다. '오랜만이군.' 지금 키레아 왕의 말은 그때, 그 비오는 날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느낌을, 그 역시 똑같이 받았다는 얘기다. "공작이라는 작위가 싫으십니까?" "싫습니다." "참모총장이라는 직위가 싫으십니까?" "싫습니다." "아이리스에 대해 애국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저를 왕위로 섬기고 따를 생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백성들을 보살피고 군대를 지휘해 적군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겁니까?" "……." 이번에도 말문이 막힌 것은 나다. 대체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는가? 공작 작위가 싫고 참모총장 자리가 마음에 안 들면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다. 난 애국심도 없고 왕에 대한 존경심도 없다. 이곳을 위해 싸울 이유도 없다. 이곳 백성을 위할 필요도 없다. 이 나라가 전쟁을 하건 말건 난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그럼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겁니까?' 이 질문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어찌보면 매우 간단한 행동인데도 난 그것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였다. 이곳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째서 나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거지? 이제 떠나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나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하기 귀찮은 질문이었다. 아니, 생각 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이었다. 난 더 이상 키레아 왕과 할 얘기가 없음을 깨달았다. 난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을 향해 걸었다. 내가 문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그가 말하였다. "당신을 만나면 언제나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대답을 한 다음,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몸이 피곤하다. 하지만 이번 대화로 인해 얻은 것은 많았다. 역시 키레아 왕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최소한 한 나라 군주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갖추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멸망하다시피한 나라를 끌어 안고 아직 항전을 하고있는지도 몰랐다. 자, 그럼 이제 나는 무얼하면 좋을까? * 상아탑, 넓은 정사각형 모양의 방. 높은 천장에 뚫어져 있는 수십개의 창문들. 빛을 굴절시키고 반시키는 거대한 렌즈와 거울. 그렇게 모은 빛의 에너지를 저장하는 여러 가지 마법 도구들. 방의 가운데에는 대략 성인 열명 정도가 누워자도 될 정도의 크기인 거대한 탁자가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 위에는 수백여개에 이르닌 비커와 삼각플라스크, 시험관들이 어지럽게 놓여져 있었다. 갑자기 한 삼각플라스크에서 빛나는 무색 액체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것과 동일한 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플라스크 안의 액체들이 일제히 끓었다. 커다랗고 동글동글한 안경을 쓴 회색머리의 소녀는 빠르게 시험관 두, 세 개를 손에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삼각플라스크를 연결하는 관을 빼낸 다음, 시험관에 든 액체를 플라스크 속에 부어 넣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부글부글 끓던 액체들이 한 순간에 멈추었다. 소녀는 빙긋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플라스크 액체를 잠시 살펴 안정적인 물질인 것을 확인한 다음, 탁자 한 구석이 펼쳐 진 커다란 책을 들여다 보았다. "음음, 어디보자. 이젠 뭘 해야하나? 아! 맞다! 이제 유리 조각을 넣어 보면 되겠구나." 소녀는 두리번거리며 유리조각을 찾았다. 하지만 그 흔하던 유리 조각은 쉽게 보이질 않았다. "어! 유리 조각이 어딨지?" 소녀는 울상을 지으며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었다. 없는 것이 찾는다고 해서 갚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소녀는 미리 유리 조각을 준비해 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리조각이 없으면 유리 조각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소녀는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빈 플라스크 하나를 손에 들었다가, 허공에서 손을 놓았다. 쨍그랑-! 플라스크는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부딪힌 순간, 맑은 소리를 내며 산산히 부서졌다. "어! 부서졌네!" 소녀는 마치 실수로 깨트린 것처럼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손이 베이지 않게 조심스런 동작으로 적당한 크기의 유리 조각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소녀는 무색의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삼각 플라스크를 바라 보았다. 이것과 같은 색의 플라스크는 전부 12개였다. 이 플라스크 안에 들어있는 액체는 다이아몬드를 액화시킨 것이었다. 그냥 싸구려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순도가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다이아몬드만 고르고 골라 액화시켰다. 당연 매우 가격이 비싸다. 이 실험에 들어간 다이아몬드 값을 합친다면 도시 하나는 족히 사고도 남는다. 소녀는 시간 간격을 두고 유리 조각을 하나씩 플라스크 속에 집어 넣었다. 12개의 플라스크에 전부 유리 조각을 집어 넣고 나자, 소녀는 힘들었다는 듯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제 정확히 1분 30초만 지나면 되는 것이다. 조금씩 시간이 흘렀다. 소녀는 한쪽 벽에 붙어있는 마법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초조한 듯 탁자 주위를 서성거렸다. 시간이 됐다! 소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시간 간격을 두고 핀셋으로 플라스크 안의 유리 조각을 끄집어 냈다. "잘 되야할텐데." 소녀는 주문을 외우 듯 중얼거리며, 탁자 한쪽에 12개의 유리 조각을 일렬로 늘어 놓았다. 그리고 로브 안에서 작은 망치를 꺼내 들었다. "제발…… 이번에는……." 소녀는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망치로 유리 조각을 세게 내리쳤다. 쨍그랑-! 유리 조각은 힘 없이 깨졌다. 아니, 깨진 것이 아니라 쪼개졌다. 산산히 부서진 조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일정한 결을 따라 쪼개졌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깨졌던 쪼개졌던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실험은 실패한 셈이니. 소녀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 11개나 되는 실험물이 남아있다. 12개의 삼각플라스크 안의 용액은 액화 다이아몬드였다. 하지만 각각의 용액이 전부 농도가 틀렸다. 아무튼 이 중 하나만 성공하면 되는 것이다. 소녀는 다시 망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쨍그랑- 쨍그랑- 쨍그랑- 쨍그랑- 쉴새 없이 소리가 난 끝에 결국 남아있는 유리 조각은 하나도 없었다. "아아! 또 실패다!" 소녀는 그 자리에 턱썩 주저 앉았다. 너무 많이 실패하다보니 이젠 좌절감도 못 느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플라스크 안의 액화 다이아몬드가 끓으며 푸른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돼!" 소녀가 소리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12개의 플라스크에 담긴 액화 다이아몬드는 카멜레온 처럼 색을 변화하며 더욱 심하게 끓는 것이었다. "실드Shield! 월 오브 아이스Wall Of Ice! 월 오브 아이언Wall Of Iron! 월 오브 스톤Wall Of Ston!" 소녀가 외침과 동시에 플라스크의 용액이 연쇄적으로 폭발하였다. 그 온도는 수백도에 다달았기에 실드와 얼음벽을 뚫고 쇠벽을 달구었다. 한참 후, 열기가 어느 정도 사그라 들자, 소녀는 돌벽을 제외한 나머지 마법을 해지한 뒤, 다른 마법을 썼다.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폭발로 일어났던 먼지들이 회오리 바람에 의해 창문으로 빠져나가자, 소녀는 시야를 어느 정도 확보하여 주위를 둘러 보았다. 실험실 안은 이미 초토와 되어 있었다. '우와! 칼리한테 혼나겠다.' 소녀가 그렇게 생각을 한 순간, 커다란 철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여인은 한바탕 폭풍이 휩 쓸고 간 모습을 한 내부를 보고, 살을 데울 정도로 뜨거운 공기를 느끼고는 방금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 할 수가 있었다. 여인은 조용히 주문을 외었다. "아이스 스톰Ice Storm." 순간,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녀는 돌벽을 해제시키고 여인을 보며 헤헤 웃었다.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엔 또 무슨 실험을 하고 계셨습니까?" 소녀는 될 수 있는한 귀여운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으응, 그게 그러니까 글래스틸Glassteel 마법을 실험했거든. 칼리도 잘 알지? 8클래스 마법 중에 그…… 유리를 강철 같은 강도로 바꾸는 마법 말이야. 액화 다이아몬드에서 담궈 놓으면 될 줄 알았는데……. 헤헤, 그게 잘 안되네." 여인은 인상을 쓰며 눈을 부릅떴다. "이번 주에만 벌써 17번 실험실을 날려먹었군요."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응응, 미안해 칼리." 소녀는 이제부터 잔소리가 시작 될 것을 예상하고 귀를 막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여인은 길게 한숨을 한번 내쉬고 용건만 말하였다. "할 얘기가 있습니다. 중요한 얘기니 지금 당장 탑의 최상층으로 올라가지요." 그 말에 소녀는 방긋 웃음을 지었다. "응. 알았어." 여인은 열려진 문을 가리키며 소녀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소녀는 잔소리를 듣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여인은 초토화된 실험실 내부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는 한숨만을 푹푹 내쉬며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둘은 좁게 나있는 회랑을 걸었다. 일렬로 늘어서 있는 방들은 전부 단단하고 커다란 철문이 닫혀있었다. 폭발의 여파가 밖으로 미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둘이 있는 곳은 상아탑의 13층이었다. 실험을 하다보면 연쇄 폭발이 일어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닌 관계로 실험실은 탑의 하층부에 있었다. 둘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직경이 50여 미터에 이르는 뻥 뚫린 원 앞이었다. 그 원은 1층부터 시작해 108층까지 원통 모양으로 뚫려있었다. 소녀는 원 안에 집어 넣고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약 2미터 정도의 작은 원반이 허공에 생겨났다. "타." 소녀는 그 위에 올라타며 여인에게도 어서 오르라는 손짓을 하였다. 여인이 원반 위에 올라오자 소녀는 다시 마나를 주입했고, 둘이 올라타있는 원반은 빠른 속도로 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상아탑의 중심부에는 원통 모양의 길이 뚫려 있었다. 이곳은 마나가 수직으로 흐르는 공간이었다. 이곳에 마나를 주입하기만 하면 그 주입량에 따라 적당한 크기의 원반이 생겨겨난다. 그리고 그 원반은 수직으로 흐르는 마나를 따라 위, 아래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탑의 높이가 108층이나 되다보니 일일이 계단을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 하였다. 게다가 구조자체가 동선(銅線)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이동수단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예를 들면 실험실은 10층에서 30층 사이에 있고, 숙박시설은 60층에서 80층 사이에 있다. 식량 창고는 98층에 있고 식당은 45층에 있다. 집무실은 100층에서 108층 사이에 있고, 회의실은 4층과 5층에 있다. 만약 실험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회의를 한 다음,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숙소에 돌아가서 잠을 잔다고 하면, 10층에서 45층으로 이동을 한 다음, 4층으로 이동하고, 그 다음은 108층으로 올라가서 60층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즉, 계단을 오르내리다보면 하루의 일과가 전부 끝난다는 말이다. 탑의 주민들은 이 이동수단을 써클이라 불렀다. 원래 정확한 명칭은 업다운써클Updowncircle이었는데, 너무 길다는 이유로 그냥 써클이라고 부른다. 쉽게 이해하자면 엘리베이터 비슷한거다. 써클의 이동 속도는 빠른편이었다. 하지만 상아탑의 높이가 워낙 높았기에 이동에 걸리는 시간은 꽤 길게 느껴졌다. 대략 1, 2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업다운써클은 최상층에 멈춰섰다. 둘은 써클에서 내려 회랑을 이동하기 시작했가. 그들이 다시 멈춰선 곳은 흰색 문 앞이었다. 그 문에는 작은 인형이 몇 개 달려 있었고, 가운데에는 '라이의 방' 이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꼭 노크 하고 들어오세요. 안 하고 들어오면 라이 삐짐' 이라는 경고문이 달려 있었다. 여인은 문을 열려 하였다. 그 순간, 소녀가 여인의 옷을 붙잡으며 말했다. "잠깐! 노크를 하고 열어야지. 노크 안하면 라이 삐져." 소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제발 노크를 해주세요' 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손등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방의 주인은 여인의 뒤에 서 있었기에 대답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제 들어가도 되죠?" "응." 여인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의 크기는 대략 50평 정도였다. 놀라운 것은 방의 모습이었다. 방 한쪽에는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고 그 맞은편에는 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탁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쪽 벽에는 커다란 옷장들과 책장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여기까지는 꽤 정상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벽에는 온통 알록달록한 색의 벽지가 도배되어 있고 방안 곳곳에는 수백개의 인형이 굴러다니고 있다. 게다가 침대시트와 이불에는 귀여운 동물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천장에 달려있는 샹들리에는 리본을 맨 작은 인형들이 매달려 있었다. 한마디로 유치하다고 밖에 설명 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유치하다는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된다. 유치찬란하다! 여인은 이 방에 한, 두 번 들어와 본 것은 아니지만,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여전했다. 소녀는 방으로 돌아온게 기쁜지 폴짝폴짝 뛰어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뒹굴며 커다란 흰색 고양이 인형을 끌어 안았다. 그 고양이 인형은 얼굴이 펑퍼짐하고 귀여운게 어린 소녀들이 딱 좋아하게 생겼다. 소녀는 고양이 인형이 마음에 드는지 끌어 안은 채, 얼굴을 부벼댔다. "응응, 나 없는 동안 잘 있었어, 귀티?" <헬로우 귀티> 귀티가 철철 넘치는 고급스러운 인형이라고 해서 고양이 인형에 소녀가 붙여준 이름이다. 여인은 그런 소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개성이니 생각하며 억지로 넘어갔다. 소녀의 외모는 대략 10살 정도로, 어떻게 보면 라나보다도 어려보였다. 인형을 가지고 놀기에 전혀 이상할게 없는 나이다. 하지만 문제는 소녀의 실제 나이가 710살이라는데에 있다. 어떻게 인간이 710년이나 살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소녀는 710년을 살았다. 그럼 결론은 소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 소녀는 인간이 아니다. 소녀는 바로 엘프였다. 소녀의 이름은 라이미안이고 귀가 옆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확실한 순종 엘프였다. 현재 710살. 엘프 나이 710살이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겨도 이상할게 없는 나이다. 하지만 소녀의 외모는 130cm의 키에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볼, 작고 뾰작한 귀, 아직 발육이 덜 되어 밋밋한 젖가슴 등, 완벽한 10살 엘프 아이의 외모였다. 이렇게 된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이런 모습이 된 때는 400년 정도 전, 즉 그녀가 300살 정도에였다. 그녀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소녀 취향이었다. 그래서 평소 때는 폴리모프 마법으로 자신의 외모를 10살 정도의 엘프 소녀 모습으로 바꾸어서 다녔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실험을 통해 만든, 시약을 마셨다. 그 시약은 머리를 맑게 해주는 용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으니, 비율의 부조화와 이상한 시약의 첨가, 그리고 몇 가지 변수로 인해, 머리를 맑게 해주는 시약이 성장을 정지시키는 시약으로 바뀐 것이다. 라이미안은 폴리모프 마법을 해지하였다. 하지만 마법을 해지하여도 10살짜리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시약 때문에 정상적인 성장이던, 마법적인 성장이던 전부 정지된 것이다. 라이미안은 몇 십년 동안 몸을 다시 원상태로 되돌릴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라이미안은 평생을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에 한동안 절망하였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좋게 좋게 생각하자며, 더욱 소녀적인 취향이 집착하였다. 여인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는 라이미안의 행동을 애써 무시하였다. 사실 710살 먹은 엘프가 10살짜리 아이처럼 노는 것은 별로 특이 할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상아탑 내에는 그 보다 더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수백명도 더 있기 때문이다. 동성연애자는 기본이다. 게이, 호모 등도 많지는 않지만 몇몇 있다. 여자 속옷만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변태적인 늙은이가 있나 하면, 사시미로 자신의 몸을 회뜨며 쾌감을 느끼는 새디스트도 있었다. 어떤 늙은이는 자신이 밥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고 실험만 계속하다가 굶어 죽었다. 또 어떤 사람은 실험 중 폭발에 의해 두 팔이 다 잘려나가, 발로 실험을 하였는데 또 폭발이 일어나 두 발이 잘려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으로 실험을 하고 있다. 상아탑 내부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마법사였다. 고위 마법사들 중에서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꽤 되었다. 그에 비하면 인형을 가지고 논다던가, 방을 유치찬란하게 꾸민다던가, 귀엽게 행동한다거나 하는 로리타 적인 취향은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칼리? 중요한 일이라며." "예." 여인은 바닥에 깔린 인형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의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형을 밟으면 라이미안이 인형이 아프네 어쩌네하며 엉엉 울어 재끼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이름은 칼리로 70살 먹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외모는 대략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 역시 성장을 멈추는 시약을 마신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시약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는 폴리모프 마법으로 젊은 여성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마나가 충만한 상아탑 내부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외부로 나가면 할머니의 모습이 되는 수 밖에 없다. 칼리는 탑의 주인인 라이미안의 개인 비서였다. 그런 중요 요직에 있는 만큼, 마법력 역시 뛰어났다. 칼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제가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말해드린 걸 기억하시나요?" 라이미안은 여전히 귀티 인형을 끌어 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억해." "어제 아이리스에서 대관식이 있었습니다. 아이리스 키에라가 32대 왕으로 즉위하고 아이언스 히로는 공작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정말?" "예. 아무튼 이제 그가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후계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걸 왜 자신에게 묻느냐는 듯한 라이미안의 태도에 칼리는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라뇨? 드디어 아이언스어를 해독 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아무런 생각도 없으십니까?" 라이미안은 대답을 하는 대신 귀티 인형을 내려 놓고,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둔 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통 안에서 막대가 달린 커다란 눈깔사탕을 꺼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럼 이제 8, 9클래스 마법도 해독 할 수 있는거야?" "예. 아마도 그럴겁니다." 상아탑 마법사 중에서 마나가 8써클인 사람은 라이미안을 포함하여 10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마나가 8써클이면 뭐하는가? 8클래스에 해당하는 마법은 몇 개 밖에 해독되지 않았는데. 지금도 수많은 마법사들이 8, 9클래스 마법을 해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언제 해독이 끝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적게는 수 백년에서 많게는 수 천년이 걸릴 수도 있다. 아니, 넨 이드나 아이언스 이그리드 같은 천재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한 영원히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요?" 칼리의 물음에 라이미안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냥 사탕만을 쪽쪽 빨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고민을 한 끝에 라이미안은 입을 열었다. "조금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언스 공작이 우리 쪽에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니까." "자바스에서는 지금 아이리스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만간 본국에서 강남으로 군사를 보낼 것입니다. 만약 잘못해서 아이언스 공작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우리로서는 큰 일입니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면, 마법사들을 보내. 절대 아이언스 공작을 지키라고 말이야. 그리고……. 음음, 나머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나 지금 졸리거든." 칼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윽고 칼리가 방을 나서자 라이미안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대륙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어. 곧 대규모 전란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럼 상아탑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하지?' 비록 취향이나 행동거지가 풋풋한 10살 소녀라 해도, 그녀는 탑의 주인이었다. 현재 대륙이 폭풍전야의 분위기인데 상아탑이라고해서 그 폭풍을 벗어날 수는 없다. 전쟁이 일어나면 마법사들은 당연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싸울 것이다. 게다가 아이언스 히로가 전쟁에 참여한다면 상아탑으로서도 발을 뺄 수가 없게된다. 고대로부터 수천년 동안 상아탑은 어떠한 국가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넨 이드는 마법사들에게 '마법은 살상을 위한 무기가 아니다' 라는 말을 강조하였다. 반면,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전부 쓸어버린다. 그 방법이 칼이던 마법이던 상관 없다. 쓸어버리기만 하면 되는 거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넨 이드는 마법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했지만,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마법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제 3기 전란 이후 마법은 전쟁 도구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국가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오로지 공격용 마법과 살상용 마법만을 중심적으로 익혔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마법이 진보하기는커녕 퇴보 할 것이다. 빨리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라이미안은 한숨을 내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일단 한숨 자고나서 생각해야 겠다.' 라이미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헬로우 귀티 인형을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귀티 인형을 번쩍 들고는 침대를 뒹굴며 말했다. "다 잘 될거야." Part 3. 자바스 회의 석상에는 20명 정도의 귀족들이 앉아있었다. 국왕도 앉아있긴 했지만, 이 회의를 주도하는 사람은 국왕이 아니라 클라시온 공작이었다. 이 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전부 작위를 받은 귀족들로 매우 바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이곳에 모였다. 오늘 데이트 약속이 있던 사람은 여자에게 뺨 맞을 각오를 하고 이 곳에 나왔고, 술 약속이 있던 사람은 다음에 자신이 술 값을 낼 각오를 하고 이곳에 나왔다. 그럼 왜 이들이 여기에 모여있어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한 마리 새 때문이었다. 날이 밝기 얼마 전, 갑자기 흰색 매 한 마리가 쏜살 같이 날아왔다. 그 매는 자바스 왕궁의 서쪽 창문을 뚫고 들어와 동쪽 창문을 뚫고 나갔다. 그리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한 장의 양피지만이 떨어져 있었다. 그 양피지를 주은 사람은 궁에서 일하는 어린 하녀였다. 하녀는 깨진 유리들을 쓸어담던 중 양피지를 발견하고는 펴서 읽어 보았다. 하지만 하녀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그 양피지를 그냥 버리려 하였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녀장에게 보여 주었다. 그 다음 일은 굳이 설명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녀장은 그것을 재상의 비서에게 보여주었고, 비서는 다시 재상에게 보여주었고, 재상은 입에 개거품을 물며 왕의 침실로 달려갔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인해서 날이 새기도 전에 자바스 왕궁에는 난리가 났고, 날이 밝자마자 고위층 귀족들을 불러 회의를 연 것이다.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회의 성삭 가운데 앉아있는 늙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자바스 폐슈아로 자바스의 13대 국왕이었다. 자바스의 건국은 1410년. 아이리스의 건국은 1407년으로 시기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아이리스는 현재 32대 국왕인 반면, 자바스가 13대 국왕이라는 것은 자바스의 왕권이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얘기였다. 사실 아이리스는 제 3기 전란 이전만 해도 왕의 교체가 하루가 멀다하고 이루어졌었다. 심한 경우는 하루에 왕이 세 번 바뀐적도 있었다.(물론 그때 죽은 왕들은 대관식을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왕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제 3기 전란 이후에 아이리스 왕권은 많이 안정되었다. 하지만 단 몇십년 사이에 급격한 성장을 했기 때문에 국가 자체는 불안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이 현실로 들어난 것은 31대 국왕 아이리스 키르나스에 와서였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아이리스의 32대 국왕이 즉위하고 정식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 서찰에 적힌 내용이 사실입니까? 혹 누군가가 거짓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입을 연 것은 카스미렐 후작이었다. 그는 상당히 신중한 사람으로 클라시온 공작과는 친분이 깊은 관계였다. 그의 말처럼 그 서찰이 가짜 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는 없었다. 아이리스는 거의 멸망하다시피했다. 대규모 공격 한번이면 국가의 맥을 끊거나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아이리스 병력은 대략 3만 정도였다. 수가 적은 만큼, 그들은 절대로 성 밖으로 나와서 싸우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성전을 해야한다는 얘긴데, 케이튼 지역까지 군대를 보내자면 보급선이 길어진다. 게다가 공성전에는 적의 병력의 세 배 정도는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리스에는 아직 쟁쟁한 귀족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현재 자바스가 가장 주시하고 있는 인물은 아이리스 키에라, 아이언스 히로, 사일런스 지니,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디아케 발리스, 스웰리어 스윈 등이었다. 아이언스 히로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정말 굉장하다고 밖에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멸망한 나라를 끌어 안고 끝까지 항전을 하는 아이리스 키레아, 천재라고 밖에 말 할 수가 없는 사일런스 남매, 그리고 키레아 왕을 도와 군을 이끄는 귀궁 디아케 발리스, 이기기 위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싸움을 하는 미친개 스웰리어 스윈. 비록 3만 군대에 겨우 강남의 땅 한조각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도저히 무시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점령지 백성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자바스가 강남의 아이리스 영토를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아이리스의 백성이었다. '나는 아이리스의 백서이야' 라고 하는 의식구조가 3년만에 '나는 자바스 백성이야' 로 바뀔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자바스는 아이리스의 31대 국왕을 시해하였으며, 아이리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도 백성들을 공격하는 짓을 서슴없이 하였다. 더욱 큰 문제는 자바스가 점령지 백성들에게 식민지 정책을 썼다는데에 있다. 단 기간에 전쟁을 일으키면서 자바스는 많은 국고를 소모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늘어난 군대와, 점령지는 오히려 국가의 부담이 되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였다. 점령지 백성들을 쥐어짜내 국고를 채우고, 군대를 먹이면 되는 것이다. 당연 점령지 백성들은 자바스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자바스가 군대를 일으켜 아이리스를 공격한다면, 점령지 곳곳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 동안 자바스는 아이리스에게 무력시위만 할 뿐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젠 얘기가 틀리다. 아이리스가 정식으로 왕의 칭호를 쓴다면, 좋던 싫던 간에 반드시 공격을 해야만 한다. 케이튼 지역은 자바스의 영토다. 직접적으로 점령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대외적으로 그렇게 선전하였다. 그곳에 반란군(叛亂軍)이 살고 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래도 반란군 정도라면 웃어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 왕(王)이 살고 있고, 그 왕은 그 지역을 자국의 영토라 명했다. 자바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나라에 왕이 두명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반역(反逆)행위이며 자국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타국의 시선 때문에라도 반드시 숙청을 해야만한다. 그런데 서찰이 가짜라면? 그렇다면 자바스는 대의명분(大義名分) 없이 아이리스를 공격하는 셈이다. 만약 타국이 이런 공작을 펼쳤다면, 자바스와 아이리스를 싸움 붙인 후, 적당한 시점에서 이득을 얻으려 할 것이다. "이 서찰이 가짜일리는 없습니다." 세이티아 공작이 그 말에 반박하였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요?" 클라시온 공작은 모두에게 서찰을 보여주었다. "이 서찰을 누가 썼는지 아시겠습니까?"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 필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서찰을 쓴 사람은 분명……. "사일런스 지니입니다. 지금은 제1 군단참모이자 백작이지요. 혹시나 해서 필체를 확인해 보았는데, 확실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의 필체입니다. 그 사실은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맹세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장난으로 이런 서찰을 보냈다는 것은 억지입니다. 그리고 이 서찰을 전달한 자는 아이리스의 상징인 청안백우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열흘 정도 후면 케이튼 지역에서 연락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굳이 연락을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대책을 강구하여야만 합니다." 클라시온 공작의 말에 회의장 안은 숙연해졌다. 잠시 후, 그 숙연함을 깨고 한 남자가 소리쳤다. 남자는 필리즈 백작으로 성격이 다혈질이고 강력한 힘으로 자국의 권위를 세워야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强硬派) 중 한명이었다. "당장 군대를 보내야 합니다! 자국이 가만히 있으니 아이리스 놈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국가 명줄이라도 이어온게 누구 덕이었습니까? 이번에 놈들을 쓸어버리지 못하면 언제 다시 기어오를지 모릅니다." 그 말에 세이티아 공작과 휘커린트 후작, 크리아스 자작, 팔레인 자작 등이 동조 하였다. "맞는 말입니다. 대외적인 시선을 고려해서라도 반드시 아이리스를 쓸어버려야 합니다. 만약 이번에 우리가 가만히 있는다면 타국은 자바스를 우습게 볼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번 일은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리스가 왕국을 표명한 것은 우리에게 명분을 제공해 준 셈이니까요. 사실 언제까지고 강남에 불씨를 남겨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남쪽의 화근을 제거하고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야 할 것 입니다." "아이리스는 저력이 있는 국가입니다. 지금은 비록 군사수가 몇 만 밖에 안되는 약소국이라지만 언제 다시 일어설 줄은 아무도 모릅니다. 제 3기 전란 초기만 하더라도 아이리스의 병력은 1만 2천 정도에 불과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병력으로 강남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필리즈 백작 님의 말씀대로 이번에 반드시 멸망시켜야만 합니다." 강경파(强硬派) 귀족들의 강경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온건파(穩健派) 귀족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사실 그들로서도 전쟁을 피하자고 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반역을 묵살하자는 것은 반역에 동조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건파 귀족들도 아이리스는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시기가 너무 일찍 왔다는 것이다. 온건파 귀족들의 침묵은 곧 긍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회의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아이리스를 공격해야 하는가?' 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아이리스의 병력은 대략 3만입니다. 하지만 그 수를 절대 만만히 보면 안됩니다. 제1 사단장 디아케 발리스, 제2 사단장 카인트 켈, 제3 사단장 스웰리어 스윈. 그리고 참모로는 아이언스 히로, 사일런스 지니,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등입니다. 이 중 아이언스 히로를 제외하고는 다들 잘 알고 계실겁니다. 현재 아이언스 공작에 대해서는 정보가 불충분한 상태입니다. 그가 호랑이 일지 고양이 일지는 두고보면 알겠지요. 하지만 그를 제외하고서라도 나머지 인물은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상대들입니다." 세이티아 공작이 거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봐야 오합지졸일 뿐이요. 이미 쫄딱 망해버린 나라의 군대가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소? 우리 자바스의 군대만 보면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달아나기가 바쁜데." 순간, 회의실 안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모습에 클라시온 공작은 한숨을 내쉈다. 확실히 이들은 너무 아이리스를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것은 좋지만, 그 자신감이 자만심으로까지 이어진다면, 후에 반드시 허를 찔리게 되는 것이다. 이미 70이라는 나이를 훌쩍 넘겨버린 페슈아 왕은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소. 아이리스 놈들은 지금이 1530년인 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요."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여기서 국왕이 말한 1530년이란 3기 전란이 일어난 시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세이티아 공작은 재빨리 입을 열어 국왕의 비위를 맞추었다. "하하, 아무래도 역적 무리들에게 달력이라도 하나 보내줘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회의장 안의 웃음 소리는 식을 줄 몰랐다. 이들은 이미 전쟁에서 승리 할 것이라는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다. 강경파 귀족들이 웃고 떠드는 반면 소수의 온건파 귀족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어졌다. 클라시온 공작은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아이리스의 병력 수가 적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높고 두터운 성벽에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는 반면, 우리는 수 백 키로미터를 이동해야 합니다. 당연 보급선이 길어지고 병사들은 지칠 것입니다." 그 말에 대해서는 다행히 이견(異見)이 없었다. 트레빌렌 백작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클라시온 공작 님의 말씀이 옮습니다. 비록 병력 수는 우리가 많다하나 우리는 전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싸움을 하여야합니다. 그리고 점령지 백성들의 시선도 무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안 그래도 그들은 자국에게 원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아이리스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면 그것이 불씨가 되어 그 동안 억눌렀던 반감이 한번에 폭발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점령지 각 지역에서 주민들이 들고 일어선다면, 그 지역은 무정부 상태가 될테고 그러면 그 틈을 타 헤리오나 개틴이 개입 할 것입니다." 순간, 왕을 비롯한 강경파 귀족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 트레빌렌 백작의 말은 반역의 무리들을 공격하지 말자는 것인데, 그것은 자바스 왕실을 무시하난 발언이었다. 왕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챈, 세이티아 공작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럼 트레빌렌 백작 님께서는 지금 아이리스와의 전쟁을 반대하고 계시는 겁니까?" 트레빌렌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저 역시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아이리스를 공격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전쟁은 찬성하 되, 공격은 반대한다니. 세이티아 공작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페슈아 왕이 낮고 탁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트레빌렌 백작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지금 자바스의 왕실에 도전하는 역적 무리들을 그냥 놔 두자는 말인가?" 트레빌렌 백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그러자 페슈아 왕은 주름진 얼굴을 찡그리며 호통을 쳤다. "그럼 아까의 발언은 대체 무슨 뜻인가!?" 클라시온 공작은 재빨리 트레빌렌 백작을 대신해 국왕에게 말하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폐하. 사실 저의 의견도 트레빌렌 백작 님과 같습니다." "뭐라?" 페슈아 왕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아까 트레빌렌 백작에게 보인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라시온 공작은 왕으로서도 쉽게 무시하지 못할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직위나 정치적 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수 많은 책략들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아이리스의 땅을 얻게 된 것도 그의 책략 덕이었다.(아이리스 입장에서 보자면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녀석이 바로 클라시온 공작이다) 클라시온 공작은 말을 이었다. "지금 아이리스를 공격하게 되면, 분명 점령지 백성들의 반감이 증폭 될 것입니다." "그깟 놈들이 무에 그리 대단한 말이오?" "모름지기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하였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반역 무리들의 수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클라시온 공작은 말은 구구절절 옮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페슈아 왕의 입장에서는 그저 우려가 너무 지나치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떻게 공격을 흐느냐는 의제가 공격을 흐느냐 마느냐로 바뀐 것이다. 클라시온 공작은 트레빌렌 백작에게 물었다. "트레빌렌 백작 님께서는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트레빌렌 백작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이리스의 행동은 자국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이 일을 그냥 넘어 간다면 우리 자바스는 타국에게 고개를 들지 못 할 것입니다. 반드시 전쟁을 일으켜 자국의 권위를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선공(先攻)은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아이리스가 자국을 공격 할 때까지 기다리잔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병력 수는 기껏 3만입니다. 군량이라도 떨어지지 않는한 그들은 절대 케이튼 성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군사 수가 적기 때문에 적은 양의 군량으로도 오래 버틸 수가 있습니다. 만약 아이리스가 나오 길 기다린다면, 해가 넘어 갈 것입니다." "그 사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쩌실 생각입니까?" 회의장 안의 시선은 전부 클라시온 공작과 트레빌렌 백작에게로 쏠렸다. 트레빌렌 백작은 실권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능력에 비해 성격이 너무 소심 할 뿐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발언을 할 때도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예를 들어, 좋은 생각을 전부 말한 다음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을 자신이 밀어부치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발언을 한 뒤, 언제나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리고 그 동의를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장을 밀어부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공은 적어지지만 그에 따라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경우도 적어진다. 클라시온 공작은 그런 트레빌렌 백작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트레빌렌 백작과 논의를 하고 그의 주장을 자신이 밀어부쳤다. 이는 공을 가로채기 위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가를 위함이었다. 만약 클라시온 공작이 공을 전부 가로챘다면, 트레빌렌 백작은 지금 이 곳에 앉아 있지도 못 했을 것이었다. 트레빌렌 백작은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한참을 뜸을 들인 다음, 입을 열었다.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켜 아이리스를 향해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리고 군대를 남하시켜 케이튼 성 주변에 진을 친 다음, 무력시위를 합니다." "잠깐! 그 말은 지금 수 만의 군대를 아이리스 쪽에 묶어 놓자는 말이요!?" 갑자기 소리친 사람은 세이티아 공작이었다. 세이티아 공작은 흥분했는지 자리에서 벌떡일어나서 말을 이었다. "현재 점령지를 지배하고 국경을 수비하는데 얼마의 병력이 들어가는지 아시오? 대략 35만 정도요. 그런데 수 만에 이른 군사를 아이리스에 묶어 두자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세이티아 공작의 말에 트레빌렌 백작은 얼굴을 붉힐 뿐 아무 대답도 못 하였다. 분명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소심한 성격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이 것을 눈치 챈, 클라시온 공작은 황급히 주제에 나섰다. "세이티아 공작 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병력을 언제까지고 아이리스에 묶어 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번 전쟁은 속전속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합니다." 클라시온 공작은 말을 마치고 주변 공기를 진정시켰다. 이렇게 되자 세이티아 공작은 자리에 앉는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세이티아 공작이 트레빌렌 백작의 말에 따지고 든 것은 클라시온 공작을 망신주려 한 것이었다. 트레빌렌 백작의 말을 반박하면 자연스럽게 클라시온 공작이 트레빌렌 백작의 편을 들거라 생각했다. 그 때 미리 생각해 놓았던 말을 내뱉어 클라시온 공작을 망신 줄 생각이었는데, 뜻 밖에 클라시온 공작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자 할 말이 없어진 것이다. 클라시온 공작은 조용해진 회의장 안을 한번 둘러본 다음, 부드러운 어조로 트레빌렌 백작에게 물었다. "방금 세이티아 공작 님께서 하신 말씀은 트레빌렌 백작 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트레빌렌 백작 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무슨 생각이 있으시기 때문이 아니십니까?" 클라시온 공작은 트레빌렌 백작에게 입을 열 것을 재촉하였다. 트레빌렌 백작은 예상 밖으로 자신의 발언 비중이 커지자 적당히 물러 날 생각이었지만, 자신에게 쏠린 시선과 클라시온 공작의 기대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대군이 케이튼 지역으로 향한다면 아이리스는 당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방어를 굳힐 것입니다. 성 밖에서 아이리스 군이 스스로 나와 아군을 공격 할 때까지 무력 시위를 하는 것이 병력소모를 줄이고 명분도 얻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규모 군대가 그 곳에 발이 묶인다면 타국과의 전쟁에도 무리가 따를테고요." 여기까지는 당연한 말이었다. 이제부터 트레빌렌 백작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야한다. 트레빌렌 백작은 많이 떨리는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귀족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 보고 있었다. '잘못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섰지만 하던 말은 계속하기로 하였다. 자신감을 얻어서가 아니라 '일이 잘못되도 클라시온 공작이 뒤를 봐주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케이튼 지역, 즉 아이리스는 우리 자바스와 붙어 있고, 동시에 헤리오와도 맞붙어 있습니다. 케이튼 지역에 자국의 병력을 증강시키면 아이리스를 위협하는 형세가 되겠지만, 그와 동시에 헤리오도 위협하게 됩니다. 헤리오가 국경에 자국의 병력이 증강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리 없습니다. 분명 헤리오도 케이튼 지역에 병력을 증강시킬 것입니다. 헤리오는 자국과의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지금 자국과 전쟁을 일으켰다간, 북쪽에서 개틴의 공격을 받게 될테니까요. 그렇기에 자국의 군대와 헤리오의 군대를 국경에서 맞닥뜨려 전쟁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헤리오는 불안에 떨 것입니다. 그럼 그때 양국이 서로 동맹을 맺고 아이리스를 협공하는 것 입니다. 무,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에 불과하니 실제 행동에 옮기는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를 것…… 같습……니다." 트레빌렌 백작은 의도적으로 말 끝을 흐렸다. 회의장 안의 분위기는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만약 누군가가 방귀를 뀐다면 매우 쪽 당하고 왕궁에서 왕따 당할만한 그런 분위기였다. 대규모 군대의 무력시위로 아이리스와 헤리오를 동시에 위협한다. 그리고 불안감에 빠진 헤리오를 회유해 아이리스를 협공한다. 직접 말하지는 않앗지만 당연 헤리오로 하여금 선공(先攻)을 하게 해야 할 것이다. 점령지 백성들의 원성이 헤리오로 쏠리도록 말이다. ……. 계속되는 침묵. 트레빌렌 백작은 자신이 얼토당토한 말을 한 것 같아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있을 걸, 하는 후회감이 들었다. 한참 후,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휘커린트 후작이었다. "헤리오가 아무런 이득 없이 자국을 도와 아이리스를 공격할리는 없습니다." 순간,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 그 말에 반박하였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득이 있습니다. 후에 헤리오가 개틴과 전쟁을 할 때, 자국이 출병(出兵)해 줄 것을 약조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아이리스를 공격하는데 협조 할 것입니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트레빌렌 백작의 든든한 후원자 클라시온 공작이었다. 클라시온 공작은 흥분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그는 언제나 침착하였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레빌렌 백작의 생각은 정말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곳에 앉아있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 누가 자바스가 헤리오의 힘을 빌어 아이리스를 공격 할 것이라 생각하겠는가? 클라시온 공작은 흥분을 가라 앉히려 생각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열변을 토해냈다. "대략 10만 정도의 병력을 아이리스로 보내 케이튼 성 주위를 물 샐 틈 없이 포위합니다. 물론 키에라 왕이 절대 성 밖으로 나올리는 없습니다. 그들은 수가 3만 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그 3만이 그들에게는 전력(全力)입니다. 우리는 피해가 크더라도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그들은 이긴다하더라도 병력 피해가 크면, 그것이 곧 패배나 다름 없습니다. 여하튼 그 정도의 병력이 케이튼 성 주위에서 무력시위를 벌인다면, 헤리오는 깜짝 놀라 국경 근처에 병력을 증강 시킬 것입니다. 물론 케이튼 지역에 우리 군병력이 증강 된 것에 불만을 품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반역자를 처단한다는 명분이 있으니 뭐라 반박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양쪽에 대군이 맞닥뜨린 상황에서 우리가 동맹을 제의한다면 그들은 감히 거절하지 못 할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후에 헤리오가 개틴을 공격 할 때, 동시 출병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아이리스를 협공 할 것을 제의합니다. 헤리오가 이 제의를 거절 할리는 없습니다.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가 개틴과 손을 잡고 자국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무서워서라도 우리의 제의를 승낙 할 것입니다. 게다가 헤리오는 개틴과 양립 할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제의를 좋아라 승낙 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아이리스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클라시온 공작은 숨이 차는지 더욱 벌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쉈다. 말은 길었지만 결국 내용은 트레빌렌 백작의 말을 다시 한번 번복 한것과 다름이 없었다. 트레빌렌 백작은 클라시온 공작의 말을 듣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쉈다. 이제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클라시온 공작이 대부분의 책임을 지고, 자신에게까지 책임이 돌아오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물론 공(功) 역시 대부분 클라시온 공작에게 돌아가겠지만, 그런 것은 별 상관 없었다. 그저 아무런 탈 없이 이 자리에 앉아있다가 적당한 시점에 조용히 물러나는 것만이 트레빌렌 백작의 작은 소망이었다. 클라시온 공작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병력 손실로 아이리스를 멸망시키고, 점령지 백성들의 원성은 헤리오에게 돌린다. 그리고 후에 헤리오를 도와 개틴을 쳐, 또다른 땅을 얻는다. 명분과 실리를 전부 챙길 수 있는 완벽한 계책이다. 그 동안 자바스는 헤리오와 개틴 양국 중 어느 나라와 동맹을 맺을지 저울질 해왔다. 클라시온 공작을 비롯한 온건파 세력은 헤리오와 동맹을 맺을 것을 주장하였고, 세이티아 공작을 비롯한 강경파 세력은 개틴과 동맹을 맺을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클라시온 공작의 정치적 세력이 훨씬 컸기에 헤리오와 동맹을 맺는 쪽으로 대세가 기우는 추세였다. 클라시온 공작이 헤리오와 동맹을 맺으려는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개틴은 강하고 헤리오는 약하다. 아이리스 만큼은 아니었지만, 헤리오는 3기 전란 때, 급속도로 영토를 넓힌 국가다. 그때 얻은 땅 대부분은 개틴의 영토였다. 당시 개틴은 서대륙의 최강국이었다. 하지만 북(北)의 진명과 남(南)의 헤리오, 그리고 동(東)의 자바스에게 동시에 공격을 받는 바람에 막대한 영토를 빼앗기고 강국으로서의 명성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틴이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다. 자바스 세력을 10이라고 본다면 개틴은 8, 헤리오는 6 정도다. 개틴이 지금이라도 당장 헤리오와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인다면, 헤리오를 멸망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변국들 때문이었다. 위에는 북방의 호랑이 진명이 버티고 있고(중립국이라고는 하지만 헛점을 비치면 어떻게 행동 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동에는 아이리스를 흡수하여 강대해진 자바스가 버티고 있다. 이 두 나라를 무시하고 헤리오에 총력전을 폈다가는 두 나라다 멸망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그래서 현재는 소규모 전투만 계속 벌이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개틴은 강하고 헤리오는 약하다. 강한 나라를 도와 약한 나라를 쳐봐야 강한 나라는 별로 고마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국에게 돌아오는 이득도 그만큼 작을 것이다. 반면 약한 나라를 도와 강한 나라를 친다면, 약한 나라는 매우 고마워 할 것이다. 그리고 자국에게 돌아오는 이득도 상당 할 것이다. 둘째는 국가적 감정 때문이었다. 제 3기 전란 때, 개틴의 땅을 차지 한 것은 헤리오만이 아니다. 빼앗은 영토의 크기를 따지자면 진명, 자바스, 헤리오 순이다. 개틴이 지금은 웃으며 동맹을 제의한다고는 하지만 3기 전란 때의 뼈 아픈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다. 만약 헤리오와의 전쟁이 끝나면, 아니,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로는 국경 수비력에 있었다. 개틴과 맞닿아있는 국경은 3기 전란 때 얻은 영토이고, 헤리오와 맞닿아있는 국경은 3년 전 아이리스를 멸망시키면서 얻은 영토이다. 현재 강남 쪽의 영토는 제대로 정리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당연 수비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개틴이 자국을 공격한다면 충분히 막아 낼 수가 있었다. 그들이 공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토의 영지니 말이다. 하지만 헤리오가 공격을 한다면 방어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제대로 관리조차 되지 않는 영토를 적군과 싸우며 지켜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이유들로 인해 클라시온 공작은 헤리오와 동맹을 맺어 개틴을 압박하는 것을 주장해왔다. 이번에 트레빌렌 백작의 계책을 그대로만 따른다면 아이리스를 멸망시킬 수 있고, 헤리오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게 된다. 클라시온 공작이 기뻐하는 반면, 페슈아 왕과 세이티아 공작의 심기는 상당히 불편하였다. 세이티아 공작이 불편해 하는 이유는 이번에도 클라시온 공작에게 공을 빼앗겨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트레빌렌 백작의 입에서 나온 말을 자신은 반박했고, 클라시온 공작은 동조하며 강력하게 밀어부쳤다. 트레빌렌 백작은 클라시온 공작의 심복이나 다름 없으니, 이번 일이 성공 할 경우 모든 공은 클라시온 공작 쪽에 돌아가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좁아 질 것이다. 세이티아 공작은 어떻게든 그 보다 더 좋은 계책을 짜내야 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은 계책이라는 것이 있을리 없었다. 완벽한 계책이다. 절대 실패할리 없는. 그 사실이 세이티아 공작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이번 전쟁은 무조건 이기는 전쟁이었다. 어떤 책략을 쓰던간에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병력 피해를 줄이냐는 것인데, 그 점에서 보자면 트레빌렌 백작의 계책이 가장 최선이었다. 왕이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대 수가 겨우 3만 밖에 되지 않은 약소국을 치는데 타국의 힘을 빌린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망한 것이나 다름 없지만, 한때 아이리스는 전란을 주도했던 국가였다. 3기 전란기 때 아이리스가 보여주었던 저력은 전 국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런 국가를 자신의 대(代)에서, 자신의 힘으로 멸망시키고 싶은 것이 페슈아 왕의 심정이었다. 후대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기록되도록 말이다. 페슈아 왕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꼭 반역자들을 치는데 타국의 힘을 빌려야만 하겠소?" 클라시온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왕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자신의 주장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야 말로 최선의 방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공성전을 한다면, 그 피해는 수 만에 이를 것입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클라시온 공작은 더 이상 설명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클라시온 공작의 말은 쓸데 없는 명예(名譽) 보다는 병사들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말이었다. 페슈아 왕은 입을 다물었다. 클라시온 공작의 말이 마음에 안 들지만은 그것이 전부 국가를 위함인 것을 알기에 뭐라 말 할 수가 없었다. 페슈아 왕은 애써 불편한 심기를 감추며 회의장에 앉아있는 모든 귀족들에게 말하였다. "더 이상 의견이 없으면, 클라시온 공작의 말을 따르도록 하겠소. 병력 차출과 필요한 비용, 치중 등은 전부 클라시온 공작에게 일임 할 것이니, 잘 처리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왕의 말에 세이티아 공작은 다시금 절망감에 빠져 들었다. 어떻게든 이번 작전에 개입하여 조금이라도 공을 나눠 가질 생각이었는데, 그것마저 불가능해 진 것이다. "그럼 회의를 마치겠소." 늙은 왕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라시온 공작은 트레빌렌 백작과 함께 회의장을 나서 왕궁 정원으로 나왔다. 엿듣는 자를 방지하기 위해 회의장 안은 높이 있는 있는 몇 개의 창문을 빼면 완전 밀폐 된 공간이었다. 그리고 여러 귀족들이 내뿜어내는 기운 때문에 분위기는 언제나 무거웠다. 그런데 이렇게 밖으로 나와 새로운 공기를 마시니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번 일이 잘 될까요?" 트레빌렌 백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클라시온 공작에게 물었다. 클라시온 공작은 너털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하하, 뭘 그리 걱정히시는지요? 그 모든게 트레빌렌 백작 님의 머릿속에서 나온게 아닙니까?" "그, 그거야 저는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을 뿐인데…… 공작님께서……." 트레빌렌 백작은 여전히 소심한 모습으로 책임을 회피하려했다. 클라시온 공작은 크게 웃으며 트레빌렌 백작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말했다. "하하하! 하기야 트레빌렌 백작 님께서는 생각만 말씀하셨으니 책임 질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트레빌렌 백작은 잠시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클라시온 공작은 아직 처리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기에 트레빌렌 백작에게 양해를 구했다. "전 이만 돌아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차출 병력을 생각해 내야 할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기, 제 생각에는……." 트레빌렌 백작은 무언가를 말하려하다,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역시나 소심한 성격 때문이었다. 클라시온 공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던 말을 계속 할 것을 재촉하였다. "하던 말씀 계속 하시지요." "아닙니다. 잠깐, 실언 한 것 뿐입니다." 클라시온 공작은 분명 도움이 될 말이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트레빌렌 백작을 닥달했다. 트레빌렌 백작의 '제 생각에는……' 으로 시작된 말은 전부 중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저도 돌아가기는 글렀군요. 집으로 돌아가봐야 트레빌렌 백작 님의 말씀이 궁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테니까요. 일을 늦게 처리해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게 된다면 전부 백작 님 탓입니다." 클라시온 공작은 장난으로 던진 말이지만, 트레빌렌 백작은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말을 듣자마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트레빌렌 백작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제이서스 기사단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일단 무력시위를 하는 것이니 굳이 훈련된 정예병을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머릿수가 많다는 것만 보여주면 되니까요." 역시 예상했던대로 트레빌렌 백작의 말은 중요한 것이었다. 클라시온 공작은 귀가 솔깃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국경 부근에 헤리오의 군대가 증강되고 두 나라가 동맹을 맺으려면 어느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빠르면 2달, 길면 3달 정도가 걸릴 것이라 생각 됩니다. 그 때가 되면 아이리스는 정치적으로 고립 될테니 항복을 하거나 끝까지 항전을 하겠지요. 하지만 끝가지 항전을 한다고 보는게 좋을 겁니다. 그들은 죽으면 죽었지 항복은 안 할테니까요. 어찌되었든 그리되면 결국은 공성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기마병 수는 줄이고 궁병의 수를 늘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트레빌렌 백작 님께서 생각하시는 차출 병력은 어느 정도 입니까?" "제 생각에는 본국에서 차출되는 병력은 대략 3만이면 족하다고 여겨집니다. 1만 5천이 제이서스 기사단 8천이 궁병, 1만이 치중부대로 말이죠. 그리고 아이리스를 견제하는 강남의 3만 군대를 합류시키고, 강남 쪽에서 추가로 징병을 한다면 대략 8, 9만 정도의 군세를 이룰 수 있을겁니다." 구구절절이 옮은 말이었다. 소심한 성격은 꼼꼼한 성격과도 연관이 되는지 어느새 이렇게 정확한 병력의 수까지 생각해 놓았단 말인가? 만약 트레빌렌 백작이 소심하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요직을 차지하고 앉았을 것이다. 클라시온 공작은 그 점이 매우 안타까웠으나 개인의 개성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이렇게라도 그의 능력을 국가를 위해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트레빌렌 백작 님의 생각 잘 들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군요." 클라시온 공작은 크게 기뻐하며 인사하였다. 하지만 트레빌렌 백작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트레빌렌 백작은 한참을 뜸을 들인 다음,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불안합니다. 이번 일이 왠지 잘못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아니, 어찌하여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트레빌렌 백작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마치 온 세상의 고민을 혼자 떠안고 있는 듣한 모습이었다. 클라시온 공작은 얘기를 들어두면 분명 도움이 될거라 생각하고 트레빌렌 백작의 말을 기다렸다. 트레빌렌 백작은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모든 생각을 말하였을 때, 중요한 것을 하나 빠트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트레빌렌 백작은 고개를 들어 클라시온 공작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언스 히로입니다." 순간, 클라시온 공작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말하려는 줄 알았는데, 겨우 아이언스 히로의 이름을 말하려 그렇게 힘들어했단 말인가? "하하, 아이언스 히로가 이번 일과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이요? 그는 그저 능력 없는 일개 공작에 불과합니다." "글쎄요. 라이데자로 전투를 잊으셨습니까? 그때, 아이리스는 겨우 3만을 조금 넘는 병력으로 아토리아의 20만 대군을 쳐부셨습니다. 기공법(奇攻法)도 아닌, 정공법(正攻法)으로 말이죠. 아이언스 이그리드. 아이리스 키에티트. 이 둘은 인간으로서 한계에 다달은 능력을 지닌 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 인간의 능력이여 봐야 그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마법과 싸움에 천재였다 하더라도 그 혼자서 몇 명이나 상대 할 수 있겠습니까? 최대한으로 쳐봐야 1만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리스 키에티트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그럼 현실적으로 그들이 20만 대군을 쳐부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해냈습니다. 아이리스 왕과 아이언스 공작. 이 둘이 다시 만났다는 것 때문에 저는 불안합니다. 둘을 따로 놓고 생각하면 모르겠지만, 그 둘을 같이 놓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아이리스는 무시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이언스 공작이 어떠한 능력을 가졌는 지는 아무 것도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는 단순한 대외선전용에 불과합니다. 그가 지금 5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가진 최대의 무기는 그의 마법에 있지 않고, 그의 머리에 있습니다. 아이언스 히로는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발 끝에도 못 미치는 존재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클라시온 공작의 단호한 어조에 트레빌렌 백작은 조금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저는 불안합니다. 원래 전쟁에는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법이지요. 제 생각에는 아이언스 히로, 그 자가 이번 전쟁에 최대 변수가 될 것 같습니다." 트레빌렌 후작이 길게 뿜어낸 한숨은 바람을 타고 아이리스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무렵 이번 전쟁의 최대 변수로 지목된 아이언스 히로는 코를 파던 중, 라이코스에게 '지저분한 자식' 이라는 말을 듣고 열받아, 억지로 라이코스의 입을 벌리고 파낸 코딱지를 쑤셔 넣던 중이었다. Part 4. 참모총장의 자질 1671년 8월 20일 "백작 님의 예상대로 일이터졌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하하, 뭐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럼 몰랐던 나는 뭐냐? 지금 나는 사일런스 지니와 회랑을 걷는 중이다. 설마 우리 둘이 데이트를 하느냐고 물을 사람은 없겠지만, 노파심에서 설명하는데 이 인간과 나는 목적지가 같기 때문에 같이 걷는 것 뿐이다. 결코 나는 동성연애자나 호모가 아니다.(사실 지니의 외모가 동성연애자들이 보면 환장하게 생기긴 했다) "그럼 어찌 하실 생각인가요?" 지니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뭐 대단한 생각이 있겠습니까? 일개 군단참모인 저로서는 참모총장님의 고견을 따를 뿐입니다." "……." 요즘들이 이 인간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나를 참모총장 자리에 앉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자주든다.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른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만약 아이리스가 패한다면 참모총장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인지 지니는 잠시 외눈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사형입니다." "……." 왜 웃었니? 사실 예상했던 대답이긴 했다. 이제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반역자들이 반역에 실패하면 죽는 것은 관례였다. 성공하면 왕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라. 하지만 이 곳은 다른 세계다. 꼭 내가 살던 세계와 법이 같으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발 형 좀 줄여줘라. 세상에 사형이 뭐냐? 쪽팔리게……. "정말로 사형인가요?" "정말로 사형입니다." "어떻게 형을 좀 줄일 방법이 없을까요?" 지니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열심히 무릎 꿇고 사죄한다면 형량이 좀 내려 갈 수도 있겠군요." 다행이다. 난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만약 잡히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겠다. 음음, 비겁하다 욕하지 마라. 누구 뭐래도 목숨은 소중한 법이다. "형량이 좀 내려간다면 사지(死地)를 자르는 정도에서 그칠 수도 있겠군요. 반역자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자손을 남겨서도 아니되기에 눈알을 파내고, 고막을 파괴하고, 혀를 자르고, 거세를 하는 것은 뭐 당연한 일이니 굳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 "왜 그러십니까? 이 전쟁이서 패해 사로잡힌다하더라도 목숨은 건질 수 있으니 전혀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씨바, 부담이 팍팍 생긴다. 차리리 그냥 죽고 말지. 내가 미쳤다고 사지를 자르고, 눈깔을 파내냐? 그리고 포경 수술도 아니고 거세는 대체 뭐냐? 난 결연한 표정으로 지니에게 말했다. "반드시 승리해야 겠군요."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공작님께서는 패할 생각을 가지고 계셨나요?" 나와 지니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누님." 지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싸가자 없는 여자.'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이다.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님이셨다. 올해 만 28세인 노처녀 중에 슈퍼 노처녀. 울트라 스페셜 미라클 퍼팩드 다이나믹 밀리터리 판타스틱 노처녀! 그녀의 최대 무기는 짜증과 히스테리. 오죽하면 내가 저 여자 때문에 이사를 가고 싶을 지경이다. 일루니아는 회의 때 쓸 것인지 둘둘말린 기다란 종이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를 얘기하고, 국가가 멸망해도 자기 한 목숨 살아남을 궁리만 하시다니. 과연 아이언스 공작님 답군요." 쇠로 유리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그녀는 은쟁반에 옥구른 듯한 미성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릴라가 하품하다 고박 쓰는 그런 악성도 아니었다. 그냥 그럭저럭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를 내며 말하는 것은 순전 나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시죠. 아이언스 공작님." 상대가 나를 갈군다 해서 나 역시 상대를 갈구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한쪽이 화를 내면 다른 한쪽이 웃어줘야, 이 사회가 싸움 없이 원만하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녀의 상관이 아닌가? 당연 경험과 연륜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내가 참아야만 한다. 왜 성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지 않은가? 니 원수를 사랑하라. 덤으로 친구의 이성 친구는 사랑하지 마라.(해석 : 남의 아내를 넘보지 말라) 그래. 난 저 여자를 사랑한다.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라는 여자를 사랑한다. 저 28살의 노처녀를 사랑한다. 비록 나이차가 11살이나 나지만 그래도 사랑한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는데 11살의 나이차는 구렁이 담 넘어가 듯 가볍게 극복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루니아기 28살이라지만 아직 피부도 탱탱한 편이다. 이마의 주름살과 눈가의 잔주름만 빼면 말이다. 음음, 자꾸 사랑한다고 외치다보니 정말로 저 여잘 사랑하게 될 것만 같다. 저 정도 미모면 어디가서 빠지지도 않고, 나이도 많으니 누나처럼 포근하게 느껴지고, 머리도 좋으니 생활력도 강하겠고. 아! 나 저 여자 마음에 든다. 난 결심을 하고 또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기야 하겠냐? "죄송합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제가 잘못했음을 뼛 속까지 시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해와 같은신 마음으로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그런 실언(失言)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용서를 해주심으로서 저의 이 타락한 영혼을 주님의 품으로 안기게 해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아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주님께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리라! 저는 그대에게 용서를 구함으로 새 삶을 얻을 것이니, 이제는 아이언스 공작이 아니라, 주님의 아들이라 불러주소소.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용서해 주시면 안될까요?" 난 말을 마치고 일루니아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그런데 일루니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인상이 일그러져 이마에 선명한 주름살 세 개가 드러나고 눈빛은 날카롭다 못해 아예 독기(毒氣)를 내뿜고 있었다. 그 눈빛은 한 줄기의 비수가 되어 내 여린 가슴을 헤집고 갈갈이 찢어 놓았다. "정말 구제불능이군요. 공작님과 얘기한 제가 멍청하다는 생각 밖에는 안 듭니다. 그리고 잘못은 공작님이 아니라 제가 한 것 같군요. 수준도 안 맞는 사람한테 말을 걸었으니까요. 제발 앞으로는 공적인 자리 외에 서로 마주치지 않았으면하는 바램입니다." 일루니아는 말을 마치고 내 어깨를 세게 밀친 다음, 가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뻥 뚫린 가슴을 붙잡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럴 수가! 저 여자가 나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었다! "큭큭…… 크크큭…… 큭…… 푸하하하하!" 난 배를 움켜잡고 교양이 없이 웃어 재끼는 지니를 바라 보았다. 가제는 게편, 초록은 동색, 팔은 안으로 굽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남자는 예쁜 여자 편이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금발이 너무해 등등의 속담처럼 지니는 일루니아 편이었다.(참고로 일루니아는 금발이다) 그래도 자기 누나라고 편들고 있다. 내가 자기 누나한테 한방, 그것도 스트레이트로 얻어 맞았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우헤헤, 웃겨 죽겠다' 라는 표정을 지으며 정말로 죽음을 자초하고 있었다. 씨바, 누나 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 나한테도 누나가 있었으면 지금 웃고 있는 저 사일런스 지니를 뺨이라도 한 대 때려줬을 텐데. "뭐가 그렇게 재밌나요?" 나의 질문에 지니는 내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웃어 재꼈다. "푸하하하하!" 이 인간이 지금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구나. 지니는 간신히 웃음을 참은 다음, 입을 열었다. "흠흠, 죄송합니다, 공작님. 너무 재밌어서 그만 저도 모르게 무례를 범하게 되었군요. 흠, 아무튼 정말 대단하십니다." "예? 뭐가요?" 지니는 빙글빙글 웃으며 안경알을 만지작 거렸다. "이제까지 제 누님의 독설에 그렇게 당당하게 맞선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흥분해서 횡설수설하거나 꼬리를 말고 도망가기 바빴지요. 하하, 그런데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빈정거림으로 맞서셨으니, 아마 제 누님도 한방 먹은 기분일겁니다." 지니는 말을 마치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도 아까 자신의 누나 표정이 떠올랐나 보다. 난 잠시 아까 내가 보여주었던 말과 행동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해 보았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자, 난 그 행동이 그녀에게는 자신을 비웃으며 빈정거린다는 심각한 오해를 강렬하게 야기시킬 수있을만한 가능성이 풍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실수다! 내가 생각 없이 던진 말에 그녀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난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로 지니에게 물었다. "이제 전 어쩌면 좋죠?" 지금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앞으로 다가 올 무스한 갈굼과 히스테리.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짐싸서 이사하는게 좋을 것 같다.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설마 저희 누님께서 아이언스 공작님을 어떻게 하기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누님 성격이 좀 그래서 그렇지 속 마음은 참 괜찮은 분이십니다." 지니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내 손을 덥썩 움켜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누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뭘 잘 부탁해요?" 난 손을 뺄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지니는 더욱더 세게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보면 이 인간 힘도 상당히 세다. "이제까지 저희 누님의 독설에 정정당당하게 빈정거림으로 맞선 사람은 오직 아이언스 공작님 한분 뿐이십니다." "빈정거림이 별로 정정당당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여하튼 저는 그 모습을 보고 대단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이야 말로 누님의 운명의 상대십니다. 제 누님을 추하다 여기시 아니하신다면, 부디 제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 할 말이 없다. 말아먹을! 또 혼담이야! 이 세계에서는 나처럼 잘난 사람이 그리도 없단 말인가? 어찌하여 나만 보면 결혼하자고 달려드는가? 물론 나만큼 잘난 사람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은, 아니, 불가능 하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러면 절대 안 된다. 난 대학 졸업 할 때까지는 결혼 할 생각이 없단 말이다! 난 매정하게 지니의 손을 뿌리쳤다. "전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습니다." 나의 단호한 태도에 지니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쉈다. "그랬군요. 후우,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시면 제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 다리를 놓아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왜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결혼에 대해 그리 깊게 관여를 하시는지요? 원래 그런 일은 본인에게 맞겨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나서지라도 않으면 누님께서 언제 결혼을 하시겠습니까?"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무지하게 공감이 간다. "누님께서는 남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누님은 평생을 처녀로 늙어 죽을 겁니다. 누님이 30살이 넘기 전에 좋은 남자를 만나 잘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별로 작은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런데 혹시 나이드신 누님을 다른 곳으로 치우고 혼자서 자유 연애를 즐겨보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지니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내 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사실 그런 것도 있긴 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남자의 적이자 여자의 적, 한마디로 공공의 적! 나와 지니는 일루니아 때문에 지체되었던 발걸음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회의의 늦은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 천천히 걸어도 되는건가요?" "됩니다." "어째서요?" "그야 저와 공작 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군요. 그럼 더욱 천천히 걷도록 하지요." "예." 우리 둘은 잡담을 나누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회의장에 도착해보니 왕을 비롯하여 사람들 전부가 자리에 착석해 있는 상태였다. 나와 지니 빼고 말이다. 일루니아는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참모총장이라는 요직에 앉아계신 분께서 회의에 늦으시다니, 정말 뜻 밖이군요. 여기 계신 분들 전부가 공작 님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하였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합니다." 난 정말 억울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늦었는데. 그리고 늦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난 옆에 서 있는 지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군단참모라는 요직에 앉아계신 분께서 회의에 늦으시다니, 정말 뜻 밖이군요. 여기 계신 분들 전부가 백작 님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하였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었으면 합니다." 치사하다고 말하지마라. 이게 바로 연대 책임, 공동 운명체라는 거다. 지니는 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작 님." 난 지니의 인사를 받자마자 바로 일루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백작 님." 내가 사과를 했다고해서 쉽게 받아 줄 일루니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작 님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신 이 분들게 사과하세요." 난 다시 지니에게 말했다.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백작 님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신 이 분들게 사과하세요." 지니는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주의 하도록 하겠습니다." 난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주의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에게 말한 것이 자신의 동생에게 그대로 돌아가자 일루니아는 더 이상 트집을 잡지 않았다. 난 그 사실에 안도하며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보았다. 빈 좌석은 두 곳이 있었다. 한 곳은 키에라 왕의 오른쪽 자리이고, 다른 한 곳은 왕의 왼쪽이자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님의 오른쪽, 즉 왕과 일루니아의 사이에 낀 자리다. 나는 결코 그녀의 옆에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왕의 왼쪽 자리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앉으려고 의자를 빼는데, 그 순간 누군가가 번개 같이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감사합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 이렇게 의자까지 빼주셔 저를 배려해주시다니.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앉은 사람은 바로 지니였다. 난 너무도 황당하여 따지 듯이 지니에게 말했다. "이 자리 제가 먼저 찜했습니다." 그러자 지니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대답했다. "여긴 제 자립니다. 공작 님 자리는 저 자리구요. 설마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라는 그런 황당한 말씀은 하지 않으시겠죠? 여긴 지정좌석제입니다." "……." 그런가? 그런게 어딨어? 난 못 들었는데. 혹시 이 인간이 사기치는게 아닐까? "전 지정좌석제라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너무 당연한거여서 굳이 말씀 드릴 필요가 없었나 봅니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아셨으니 빨리 착석하시지요." 주위 사람들은 '쪽팔린 짓 그만하고 빨리 자리에 앉으라는 눈빛을 강렬하게 보내왔다. 특히 일루니아의 시선이 제일 강렬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루니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니 찬바람이 쌩쌩 몰아친다. "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키에라 왕의 그 말로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개떼처럼 밀려오는 자바스의 군대를 막을 산뜻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공모합니다' 였다. 직접적으로 현수막을 만들어 벽에 걸어 놓지는 아니하였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회의를 하는 겁니까?"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스윈의 질문에 일루니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설명해 주었다. "지금 자바스의 대군이 남하하고 있습니다." 스윈은 적당히 건방진 자세를 취하며 다시 물었다. "그 놈들을 쳐들어 오는 것과 회의를 하는게 무슨 상관인데? 그냥 나가서 깨부시면 되는거 아니야?" 보통 사람들 같으면 저 무식한 발언에 황당해 아무 말도 못하였겠지만, 일루니아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번 회의를 통해 어떻게하면 그들을 깨부실 수 있을지를 회의하려는 겁니다." 일루니아의 조리있는 말에 스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루니아는 가져온 여러개의 종이를 탁자 위에 펼쳤다. 그곳에는 적의 지휘관들과 숫자, 보급선, 예상 경로, 그리고 아이리스의 세력 등이 아주 자세히 나와 있었다. 일루니아는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자국을 공격하려는 자바스의 군대 수는 20만 정도라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동요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숫자입니다. 사일런스 백작 님과 추정해 본 바에 따르면 적의 수는 대략 10만 정도 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순간,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놀라는 빛이 확연히 떠올랐다. 10만. 20만이 아닌게 다행이긴 하지만 확실히 많은 숫자다. 아이리스 병력이 3만이니 3배가 넘는 숫자. 난 그래도 군대 숫자 개념이 말 그대로 숫자적인 개념만을 떠올리기 때문에 별로 충격이 적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10만 군대의 진형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지 기기 찬 모습이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의한거지만 저와 사일런스 백작 님은 적의 수가 8만 5천에서 9만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의 본국에서 직접 출병된 군대의 수는 3만입니다. 이 중 1만 2천이 제이서스 기사단, 8천이 궁병, 나머지는 치중 부대라 하더군요. 그리고 자국을 견제하는 강남의 군대 3만, 또한 여기에다 추가로 징병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충 8만 5천 정도가 나옵니다." 정말 대단하군. 난 감탄을 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저렇게 확실한 수를 산출해 낼 수 있었을까? 일루니아가 말한 적군의 수는 거의 맞아들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 내가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 보았다. 난 괜히 어색해져 헛기침을 몇번하며 말했다. "흠흠, 적군의 수는 정확히 8만 7천 5백 명이라고 하던데, 직접 보시지도 않으시고 거의 맞추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과연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는 제2 군단참모 직책을 맞을만한 그릇입니다. 사실 제가 전부터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을 매우매우 존경해왔었는데, 지금에서야 말씀드리게되는군요. 아무튼 저는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을 존경하고, 또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 드레스 입고 멀뚱멀뚱 앉아 있는 골빈 여자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커리어 우먼이 더 아름다운 법이거든요. 아! 여기서 자신의 일이란 주부의 일도 포함됩니다. 아이를 기르고 밥하고 빨래하는 모습,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의 어머니께서 그러셨 듯이, 그리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께서 그러셨 듯이,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사돈의 팔촌에 어머니께서 그러셨 듯이……." "잠깐만요!"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일루니아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급했기에 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아까 적군의 병력 수가 얼마라고 하셨죠?" "8만 7천 5백 명이요." "공작 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거죠?" "어제 라이코스가 그렇게 말하던데요." 순간, 일루니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루니아는 무언가를 말하려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지 계속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그런 일루니아의 심정을 알았는지 지니가 대신해서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럼 어째서 말씀 안 하신겁니까?" "하하, 저야 당연 농담인 줄 알았죠. 세상에 누가 변종 앵무새가 한 말을 그대로 믿습니까?" 일루니아는 아예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고, 지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그럼 적의 군대 편성이 어떻게 되있는지 아십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라이코스가 말 안하던데요. 아! 말이 5천 마리 정도 있고, 군량과 이상하게 생긴 목재들이 매우 많다고 하더군요." 지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눈 안경을 만지작 거렸다. "기마병 5천에 공성 병기도 꽤나 있나 봅니다. 그 기마병이야 당연 제이서스 기사단 일테니, 그럼 기사단은 5천의 기마병에 7천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겠군요." 이렇게 해서 적의 숫자가 판별 되었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디아케 발리스 후작 님이셨다. "그들을 상대 할 방법은 있는 겁니까?" 디아케 발리스 후작 님은 70이 넘는 할아버지였다. 정확히는 73세. 현재 후작이자 제 1사단 사단장을 맡고 있음. 나이가 많다고 해서 원로원에서 나왔냐는 질문을 하면 안된다. 이 할아버지는 당당한 현역이다. 키가 190cm 가까이 되고 온몸이 근육질인 것이 완전 보디빌더 저리 가라다. 솔직히 말이 70대지 수염 밀고 머리랑 눈썹 염색만 한다면 40대 정도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디아케 후작이 절대 수염을 밀리 없었다. 배까지 드리운 풍성한 흰 수염이야 말로 디아케 후작 님의 자랑이자,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다. 수염, 머리, 눈썹 등, 얼굴의 털이 전부 흰색인 디아케 후작은 정적이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마치 그 자리에 수 백년 동안 존재해 온 태산 같았다. 디아케 후작은 풍기는 인상만 강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강하다. 3년 전, 모시던 국왕이 시해되고 나라가 혼란에 처했을 때, 키에라 왕을 데리고 도망친 것도 그고, 후에 병력을 끌어 모아 키에라 왕을 보좌하며 나라를 지켜낸 것도 그다. 디아케 후작은 칼도 잘쓰지만, 그의 진가는 활솜씨에서 발휘된다. '백발백중(百發百中)' '원 샷, 원 킬(One Shot, One Kill)' 그를 위해 존재하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하튼 생긴 것이나 행동거지나 완전 황충과 똑같았다. 황충. 누군지 아는가? 후한 말, 유비를 도와 촉나라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노인. 후에 오호장군으로까지 추대되지만 결국은 화살에 맞아 절명하고 만다. 나이 70대의 노인이었지만 힘이 젊은이 못지 않았으며, 늙어도 힘이 줄지 않는 이상한 노인이었다. 그리고 운동으로 노화를 방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몸으로 입증한 현대 의학의 지대한 공로자라 할 수도 있다.(실제로 운동을 하면 50%까지 노화를 방지 할 수 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내가 보기에 디아케 발리스 후작은 황충의 클론(CLON)판이나 다름 없었다. 디아케 후작이 쓰는 무기는 투 핸디드 소드와 길이가 3m에 이르는 대궁이었다. 인간이 이것을 당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대궁. 그 줄은 오우거의 힘줄로 만들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지금 생각해보면 발리스라는 이름도 발리스타에서 따오지 않았나 생각 된다. 예전에 들은 얘긴데 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노인이 둘 있다고 한다. 첫째가 디아케 발리스 후작이라면, 둘째는 만토이펠 안기 공작이었다. 만토이펠 안기 공작. 나이는 68세로 디아케 발리스 후작과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한다. 디아케 발리스 후작이 군대를 담당하였다면, 만토이펠 안기 공작은 정치, 재정, 외교 등 전반적인 나라 살림을 담당하였다. 지금 재상의 직책을 맡고 있다는데, 이제까지 직접 만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만토이펠 공작이 워낙 바쁜 이유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이유는 이 성이 있지를 않다는 것이다. 케이튼 성은 아이리스 영토에서(그래봐야 얼마 안되지만) 가장 큰 성임과 동시에 가장 최전방에 위치한 케이튼 지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병력이 이 곳에 집결해 있고, 왕도 군인 중 한 명이기에 이 곳 왕궁을 짓고(지은 건 아니고 폐허가 된 저택을 수리해서 쓰는 거다. 간판만 바꿔 달았다 생각하면 이해가 좀 편할 것이다) 이 곳에서 정사를 돌보고 있다. 그럼 만토이펠 안기 공작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말타고 3일 정도 걸리는 켈튼이라는 성에 있다. 켈튼 성은 군량과 치중의 대부분을 쌓아 놓은 아주 중요한 성이다. 그러기에 만토이펠 공작이 직접 그 곳을 관리하고, 그 곳에서 나라 살림을 도맡아하며 중요 사항은 파발마로 통해 서찰을 보내는 것이다. 현재 아이리스는 2 공작 체제를 택하고 있다. 한명의 공작은 나라를 돌보고, 다른 한명의 공작은 군을 돌보는 형태이다. 만토이펠 안기 공작이 나라를 돌보니, 당연 다른 한명의 공작인 아이언스 히로 공작은 군을 돌봐야 한다. 그런데 나는 참으로 한가하다. 솔직히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1. 사일런스 지니 백작과 잡담 하기 2.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과 말싸움 하기. 3. 라이코스랑 놀아주기. 4. 정원 산책하기. 5. ……. 6. ……. 7. ……. 생각해보니 백수가 따로 없다. 어떻게 된게 공작이 되기 전보다 공작 된 후가 더 한가한 것 같다. 이래가지고는 완전 무늬만 공작이다. 아! 나도 빨리 실권을 쥐어야 하는데, 회의 할 때마다 나를 왕따시키는 분위기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회의는 계속 되었다. "자바스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입니다." "그럼 그에 대한 대비책은 확실한 겁니까?" "사실상 대비책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병력의 차이가 워낙 많이나다 보니 우리 측은 방어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는 수 밖에요." 일루니아의 말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무거워진 회의장 분위기는 바로 공기를 통해 전염되었고,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얘기를 듣는 나에게도 뭔지 모를 중압감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예상은 했었지만, 그 정도라니……." 방금 말을 꺼낸 사람은 카인트 켈 백작이다. 탁한 금발(그냥 누리끼리한 색)을 짧게 기르고 턱수염이 뾰족하게 나있는 그는 46세의 남성이었다. 현재 제2 사단 사단장을 맡고 있으며 실력도 상당히 뛰어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제 2 사단장의 부관으로 카인트 알렌 자작이다. 이름에서 보면 알겠지만, 카인트 켈 백작과 카인트 알렌 자작은 같은 핏줄이다. 그것은 누리끼리한 금발에서도 확연히 들어난다. 정확히 둘은 부자지간이다. 카인트 알렌 자작은 얼굴 선이 확실하고 근육이 잘 발달 된 것이 터프하면서도 핸섬해 보이는 꽤 잘생긴 22세의 청년이었다. 피부는 기름기 흐르는 근육질로 외모에서부터 '나 싸움 잘해' 라는 인상을 팍팍 풍겼다. 그리고 실제로도 싸움을 꽤 잘 한다고 한다. 카인트 자작을 2사단장 부관으로 추천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이자 2사단장인 카엔트 켈 백작이었다. 그럼 이 인간이 지 아들이라고 예뻐해서 부관 자리에 앉혔는가? 그건 아니다. 카인트 켈이 지 아들을 예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그런 팔푼이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보좌 할 만한 능력이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아들을 추천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저 부자(父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보다 잘나서 그러느냐고? 그건 절대 아니다. 사실 저들이 나보다 조금 잘 난 것은 사실이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질투심을 느낄 내가 아니다. 난 그렇게 쪼잔한 놈이 아니다. 그럼 내가 왜 저들을 싫어하는가? 그건 저들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서 나를 갈구는 순위를 뽑아보자면…… 1위.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2위. 카인트 알렌 3위. 카인트 켈 일루니아는 톡톡 쏘아 붙이니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예를 들면 평소에 나를 갈구던 한 아이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씨바, 너 열나 재수 없다' 라고 말해 주면, 오히려 속이 편하다. 왜냐하면, '아! 이 새끼가 나를 재수 없다고 생각해 맨날 갈구는 거구나' 라고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 말 없이 마주칠 때마다 나를 갈궈대는 놈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대체 속마음을 알아야 뭘 하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닌가? 카인트 부자는 나를 볼 때마다 열심히 갈군다. 둘 중 어떤 놈이 더 재수 없냐고 물으면 당연 카인트 알렌을 뽑겠다. 왜냐하면, 카인트 켈 백작은 나를 만나면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 본다. 그리고 몸을 휙 돌려 가던 길을 걸어간다. 나 따위는 상대 할만한 가치도 없다는 건가? 좋아. 아무튼 여기까진 참는다. 카인트 알렌 자작은 나를 만나면 요상야릇한 눈빛으로 나를 훑어 본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혀를 찬다. 그리고 나를 무시한 다음, 가던 길을 걸어간다. 내가 이것 때문에 미치겠다. 대체 왜 나를 보고 피식 웃느냔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한 대 쥐어패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싸움에선 내가 밀린다. 괜히 한 대 때렸다가 잘못하면 병원으로 실려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놈이 치사하게 하관폭행죄로 법원에 나를 고소 할지도 모른다. 그럼 돈 없고 빽 없는 나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 유해 2년을 선고 받고 호적에 빨간 줄을 긋게 될지도 모른다. 아아! 어떻게든 저 놈 얼굴에 스트레이트를 한방 먹여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들이 나를 갈구는 이유는 나의 벼락 출세가 마음에 안 들어서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 측의 일방적인 낙하산 인사 행정이 부하 직원들로 하여금 불만을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은 전시(戰時)이기 때문에 그 불만이 더욱 컸다. 실제로 이 곳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어리다. 어려도 한참 어리다. 하지만 직위로 따지면 이곳에서 서열 2위다. 아니, 아이리스라는 국가 전체에서 직위로 나를 누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이리스 키레아 국왕 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가 전체로 살펴본 것이고, 군(軍)만 두고 보면은 키레아 왕과 나의 직위는 비슷하다. 즉, 내 말은 감히 왕이라 하여도 무시 할 수가 없고, 나는 가끔씩 왕의 말을 무시해도 된다. 왜냐? 그야 참모총장이니까. 어찌보면 그들이 이러한 인사 행정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다 내가 잘났기 때문인데. 아아! 세상은 어찌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단 말인가? 난 생각을 마친 후, 고개를 들다 이상하게 회의장 안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카인트 켈 백작의 말 이후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것이다. 이게 무슨 침묵 시위 대회도 아니고 왜 입을 열지 않는 걸까? 원래 회의라는 것이 자유롭게 서로의 생각을 말하여 그 중에서 좋은 생각들을 조합, 보수, 땜빵하여 가장 좋은 생각을 만들어야 하는 아닌가? 현재 회의장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하여 10명이었다. 아이리스 키에라 왕 - 아이리스 32대 왕, 군 원수(軍 元首) 아이언스 히로 공작 - 참모총장 사일런스 지니 백작 - 제1 군단참모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 제2 군단참모 디아케 발리스 후작 - 제1 사단 사단장 라츠란스 피에츠 백작 - 제1 사단 사단장 부관 카인트 켈 백작 - 제2 사단 사단장 카인트 알렌 자작 - 제2 사단 사단장 부관 스웰리어 스윈 백작 - 제3 사단 사단장 시잔 디어린 자작 - 제3 사단 사단장 부관 이렇게 10명. 이 중, 나를 공작으로 인정하고 갈구지 않는 사람은 키에라 왕, 사일런스 백작, 디아케 후작, 스웰리어 스윈 백작, 시잔 디어린 자작 5명이었다. 그 외 5명은 나를 무늬만 공작으로 취급하고 매일 같이 갈구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10명이나 앉아 있는데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자 회의장 안의 분위기는 무겁고 썰렁하였다. 계속된 침묵 때문에 더욱 입을 열기가 힘들어 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결국엔 누군가 하나가 총대를 매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나야 결코 총대를 매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 지루한 침묵에 몸이 근질근질 할 때쯤 다행히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들의 군대는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습니다. 본국에서 출병한 군사는 기껏 3만에 불과합니다. 현재 자국을 견제하는 군사와 새로 징병되는 군사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숫적 우세와 막대한 양의 물자는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전쟁을 오래 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군대 수가 적은 만큼 적은 양의 군량으로도 적들보다 훨씬 오래 버틸 수가 있습니다. 반면 자바스는 엄청난 길이의 보급선을 지탱해야만 합니다. 강남에서 댈 수 있는 물자의 양에는 한계가 있을테니, 결국에는 본토에서 운반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식민지 정책에 의해서 강남쪽 백성들의 자바스에 대한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보급선은 그들의 점령지 지역을 타고 들어올테니, 당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 할 것입니다. 강남쪽 백성들이 보급선을 통해 막대한 양의 물자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요. 당장은 별 무리가 없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보급에는 차질을 빗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지쳐가겠지요. 지금은 8월 입니다. 현재 징병도 대부분 끝마 친 상태고 전쟁 물자들도 이미 준비된 상태입니다. 적군이 이 곳까지 몰려오는데에는 짧으면 20일, 길어야 한달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9월입니다. 몇 달만 더 지나면 겨울이 닥쳐오지요. 우리는 농성전을 벌여 전쟁을 오래 끌어야 합니다. 3, 4달만 버틴다면 보급선의 문제와 추위를 견디지 못해 쇠약해진 군대는 결국 물러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은 사람은 사일런스 지니 백작이었다. 나는 솔직히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 감명을 받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지니의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일단 내가 읽은 여러 전쟁 소설에서도 나오 듯이, 원정을 나간 쪽은 기다린 쪽보다 훨씬 불리하기 마련이다. 일단은 먼 길을 이동하여야 하기 때문에 군사들의 피로가 가중된다. 그리고 보급선이 길어지기 때문에 군량 수송에 차질을 빗게 된다. 손자 병법서에는 이런 말이 써져있다. 기용전야에 승구면 즉둔병좌예한다.(其用戰也, 勝久則鈍兵挫銳) 뜻을 해석하자면, '어떤 싸움을 함에 있어 승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면, 곧 군사들이 둔해져 날카로움이 꺽인다' 이다. 지니가 노리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최대한 시간을 오래 끌어 적의 날카로움을 꺽은 다음, 결국에는 제풀에 지쳐 퇴각하게 하는 것. 그러고보니 이런 말도 생각난다. 고로 지장은 무식어적이니 식적일종은 당오이십종이요. 기간일석은 당오이십석이니라.(故智將務食於敵. 食敵一鐘, 當五二十鍾. 忌稈一石, 當五二十石) 뜻을 해석하자면,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장군은 적의 것을 먹도록 힘쓴다. 적의 한 종을 먹는 것은 본국의 20종을 먹는 것과 같으며, 적의 말먹이 한 섬은 본국의 20섬과 맞먹는다'. 즉, 보급선이 길면 그만큼 불리하단 얘기다. 본토에서 쌀 한 가마니를 보내는 것은, 곧 본토에서 20가마니를 소비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 정도로 보급에 들이는 인력과 시간의 소비가 크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가 입는 피해보다는 원정을 나온 적군의 피해가 훨씬 막대하다. 지니는 그것을 알기에 저렇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오래 끌면 피해는 우리 쪽도 큽니다. 지금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는 3, 4 달이라고 하셨는데, 솔직히 저는 그 정도 버티는 것에도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고 봅니다." 반론을 말한 사람은 디아케 후작이었다. 특별히 지니의 생각에 반대를 해서 그렇게 말한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조금 더 지니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간에 디아케 후작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전쟁을 끌면 적의 피해가 막심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피해도 무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로 병은 문졸속하고 미도교지구니라.(古兵聞 速, 未睹巧之久也) 뜻을 해석하자면 '그러므로 전쟁을할 때, 빨리 결말을 지어야 한다고는 들었으나 교모한 술책으로 오래 끌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 이다. 그러니까 전쟁을 빨리 결말을 지어야 한다. 물론 위의 말은 공세(攻勢)를 취하는 쪽의 입장이고, 수세(守勢)를 하는 입장에서는 전쟁을 오래 끌어야 한다. 하지만 전쟁을 오래하면 국가가 피폐해 지는 것은 공세나 수세나 마찬가지다. 지니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역시 나의 자랑스러운 부하 직원 사일런스 지니 백작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다. 그리고 지니는 그 믿음을 배신치 않았다. "저 역시 전쟁을 그리 오래 끌 생각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자바스는 우리 아이리스만이 적이 아닙니다. 아이리스 쪽에 칼을 들이대다보면 뒤에서 누군가가 옆구리를 찌르죠. 실제로 자바스가 아이리스 쪽에 돌린 군대는 8만 7천이지만……." "8만 7천 5백입니다." 내가 지니의 말을 정정해 주자, 다른 사람들은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 보았다. 하지만 당사자는 나에게 고개를 숙여 고마워하였다. "감사합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 방금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말씀해 주셨 듯, 아이리스를 공격하는 군대는 8만 7천 5백입니다. 하지만 그 군대의 보급선 유지와 그에 지출되는 비용 등은 잘못하면 국가의 기반을 흔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을 오래 끌면 자바스는 분명 헛점을 들어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주변의 국가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지요. 진명은 모르겠지만, 아토리아, 개틴 등은 반드시 움직일 것입니다." 지니는 말을 마치고 숨을 돌렸다. 회의장 안은 다시 조용해 졌다. 디아케 후작은 '흐음' 하는 감탄사만 낼뿐, 지니의 말에 더 이상 반론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지니의 생각 이상으로 좋은 생각은 없을 듯 하다. 지금에 와서야 느끼는 거지만, 지니는 정말 말을 잘한다. 이 인간이 말하면 거짓말이도 진짜처럼 들릴 것 같다. 조금 과장하자면 알면서도 속을 가능성이 높다. 말을 조리있게 하는 것도 있지만, 목소리가 부드럽고 어조의 변화를 뜻대로 조종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이 무조건 맞다고 느끼게 한다. 만약 지니가 귀족가으로 태어나지 않고, 평민이나 빈민으로 태어났다면, 분명 사기꾼으로 대성했을 것이다. 잘 생긴 얼굴, 죽이는 말빨, 다양한 표정 변화 등등. 사기꾼으로서 필요한 재능은 전부 갖추었다. 아!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다. 키레아 왕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왕이 그런 행동을 취하자 다른 사람들도 갑자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들 중에는 실제로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민하는 척만 하는 사람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지금 스윈의 목이 정확히 67도의 각도로 왼쪽으로 꺽여져 있다. 이것은 분명 눈을 감고 생각을 하는 척하다가 잠이 든 것이다. 음음, 저 인간은 대체 왜 회의에 참가 한 걸까? 듣기로 스윈이 행동은 저렇게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해도, 실제로도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해서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 그의 실력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몸에서 나오는 거니까. 장군으로서의 능력을 따진다면 스윈은 전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장수라고 한다. 그가 싸우는 모습은 미친개가 사람을 물어 뜯는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만큼 강하고, 끈질기고, 잔인하고, 미친 것 같단 얘기다. 전에 이 성으로 들어올 때, 싸우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지니에게 들으니 그 정도는 장난이라고 한다. 그냥 밥 먹고 식후 운동 정도 한 것으로 생각하라고 말 하였다. 진짜로 싸움이 절정에 달았을 때, 그가 싸우는 모습은…… 직접 보면 안다고 한다. 생각을 하다보니 졸립다. 어차피 내가 이 곳에서 하는 일도 없는데 굳이 나 하나 잔다고 해서 회의 진행에 차질을 빚는 경우는 절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자면 분명 사람들은 나를 갈굴 것이다. 특히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여사 님의 날카롭고 싸늘한 눈초리와 카인트 알렌 씨바 새끼의 재수 없는 눈빛이 심히 두려웠다. 나는 잠을 참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잠은 전염 된다고. 저기 저 쪽에 앉아있는 스웰리어 스윈 백작 님께서 당차게 고개를 떨구시고 나팔을 부는 듯한 우렁찬 콧소리를 내며 천하를 질주하던 아이리스 장군의 기개를 담아 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심히 부러웠고, '나도 저리 되고 싶다' 라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백작이긴 하지만 강력한 무력과 실권을 가지고 있는 스웰리어 스윈 백작과 공작이긴 하지만 강력한 무시와 갈굼을 받고 있는 아이언스 히로 공작은 분명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솔직히 스윈이 회의장에서 침낭을 깔고 얼굴만 쏙 빼놓은 채 몸을 침낭 속에 파뭏고 잠을 잔다 해도 누가 그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잘못 건드렸다간 맞아 죽는데. 하지만 만약 내가 회의장에서 깜빡졸았다치자, 그러면 지나가던 개까지 지랄을 해댄다. '야 이 씨바 새꺄! 너 한번만 더 졸면 눈깔을 파버린다!' 이렇게 말이다. 물론 이런 심한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을 꺼다. 무늬만 공작이어도 공작은 공작이니까. 하지만 속으로는 백번도 넘게 내 욕을 해댈 것이다. 아! 졸립다. 그래. 잠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그냥 잠깐만 자고 일어나자.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눈을 스르르 감는데, 그 순간 키레아 왕이 말했다. "지금으로선 농성전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 됩니다. 구체적인 생각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일런스 백작 님?" 난 졸다가 깜짝 놀랐지만,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냥 감을 때와 마찬가지로 스르르 떴다. 설마 본 사람은 없겠지? 난 시침을 뚝 때며 은근슬쩍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옆에있는 일루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일루니아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잠이 오냐? 잠이 와?' 그래. 난 잠 온다. 제길, 하필이면 저 여자한테 걸리냐? 난 속으로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카인트 알렌 자작의 눈과 마주쳤다. 그 놈은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난 순간적으로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똥개 취급 받았다는 생각에 그 놈에게 달려들려 하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아이리스의 두 명 밖에 없는 공작이다. 그래. 조금이라도 잘난 내가 참자. 지니는 멋진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정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곳 케이튼 성은 예전에 중요한 군사 거점 기지였기에 성벽이 높고 두터워 방어를 하기에 상당히 유리합니다. 하지만 성의 크기가 워낙 크다보니 그만큼 방어하는데에도 많은 인력이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 당장 켈튼 성에 있는 군량을 이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을 개수하고 화살을 비축해 놓아야 합니다." 지니의 말에는 별로 중요한 내용이 없었다. 솔직히 저 정도 말은 나도 하겠다. 키에라 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망하지 않은 것을 보면 처음부터 당연한 대답을 기대했나 보다. "제 생각 역시 사일런스 백작 님과 동일 합니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듯 하니, 이제 그만 일어서도록 하지요." "잠깐만요, 폐하." 손을 들며 입을 연 사람은 카인트 알렌 자작이었다. 키에라 왕은 알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카인트 자작 님?" 알렌은 들었던 손을 내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난 순간적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사일런스 백작 님과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참모총장이신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는 한마디 말씀도 없으시군요. 아이언스 공작 님게서는 참모총장이니 만치 분명 무언가 생각하시고 계신 바가 있으실꺼라 생각 됩니다. 저는 아이언스 공작 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말은 좋았다. 나에게 발언권을 주겠다니. 하지만 그 뜻은 매우 좋지 않았다. 굳이 돌려서 말 할 것 없이 지금 저 인간이 한 말은 '쪽 당해봐라' 는 뜻이었다. 발언권을 주더라도 뭘 아는 놈한테 줘야지 나한테 발언권을 준다는 것은 엿 먹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이었다. 키레아 왕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는 할 말이 있으십니까?" 있을 리 없다. 나는 그냥 '사일런스 백작 님의 생각과 동일합니다' 라고 말하여 이 위기를 넘어가려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알렌이 말하였다.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분명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는 사일런스 백작 님과는 매우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이언스 공작 님?" 그래. 안 그렇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집중 되었다. 뭐라도 좋으니 빨리 머리를 굴려 좋은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으라는 무언의 압력을 주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 조금은 기대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내가 괜찮은 말을 하지 못하면, 매우 쪽 당하고 무시 당할 것은 당연지사였다. 난 숨을 크게 들이 마쉬며, 순간적으로 머리를 빠르게 굴려 보았다. 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다. 아! 미치겠네. 내가 전쟁을 해본 일이 있어야 뭘 말하던지 말던지 하지. 초조하게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내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붕어빵에는 붕어가 들어있지 않고, 고래밥에는 고래가 들어있지 않지만, 계란빵에는 계란이 들어있다네' 등의 쓸데 없는 생각들 뿐이었다. 대체 계란빵에 계란이 들어있는 것이 지금 이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참고로 호도과자에도 호도가 들어있긴 하다) 그래. 일단은 전쟁 소설 읽은 걸 떠 올려보자. 그럼 좋은 생각이 나겠지. 나는 열심히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는 아무 생각이 없으신 것 같군요." 딱딱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이 말을 한 사람은 알렌이 아니라 일루니아였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가 지금 매우 고소해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저 여자는 나를 매우 무시하고 있다. 내가 능력에 비해 조금 큰 직위를 맞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무시 당할만큼 내가 바보는 아니다. 이래뵈도 나는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란 말이다! 이 나이에 5클래스 마스터 된 사람 있어? 없지? 난 탁자에 주먹을 내리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쾅-! "화공(火攻)입니다! 화공을 쓰는 겁니다!" 순간, 회의장 안은 조용해 졌고, 한기마저 감돌았다. 그 동안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일루니아와 알렌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 보았다. 이것은 분명 나의 계책에 놀라서 그러는 것이리라! 자신감을 얻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아군은 적고 적군은 많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화공으로 적을 섬멸해야 합니다. 불을 지르면 적들의 엉덩이에는 불이 붙을테고, 그러면 적들은 뜨거워서라도 물러날 것입니다." 앉아있는 사람들은 무언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쩍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 아이언스 공작 님의 신선한 책략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면 분명 하나 같이 기립 박수를 치리라. 그리고 일루니아는 눈물을 흘리며 내 품에 안겨 '흑흑, 감히 제가 세기의 책략가를 몰라 뵈었군요. 과연 참모총장 님이세요. 부디 이제까지의 무례는 용서해주시고,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指導鞭撻) 부탁드려요.' 라고 말을 할테고, 알렌 저 놈은 내 앞에 무릅을 꿇고 '감히 당대 최고의 모사를 몰라 뵌 죄.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외칠 것이다. 그럼 나는 신발로 녀석의 머리를 사뿐히 즈려 밟으며 '그래. 내가 생각해도 너는 죽어 마땅하다. 당장 나가서 목을 매거라' 라고 말 해준다. 아아! 그래. 정말 좋은 생각이다. 화공! 그 누가 이 상황에서 화공을 생각했겠는가? "굉장하신 말씀이셨습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 말을 꺼낸 사람은 사일런스 지니 백작이었다. 지니는 상당히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왜 내가 이걸 생각 못했지?' 하는 표정이었다. 후후후, 하지만 이미 내가 먼저 말을 했다네! "정말 굉장하군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이었다. 드디어 히스테리 노처녀께서도 내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난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별거 아닙니다. 발상을 조금만 전환하면 확실히 좋은 생각을 해낼 수 있기 마련이죠. 화공! 그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불로 공격하는 거 재밌지 않나요? 하하, 뭐 이 정도 생각은 암 것도 아니니, 너무 충격 받지 마세요. 참모총장으로서 좋은 책략을 생각해 내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죠. 별거 아닙니다." "정말로 별거 아니군요." "하하, 물론이죠. 정말로 별거…… 예!?" 나는 말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말하다 말고 반문하였다. 일루니아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일루니아의 표정이 매우 이상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보려 하여도 일루니아의 표정은 감탄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누구 것인지 모를 한숨이 회의장 전체에 울려퍼졌다.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깜짝 놀라야만 했다. 어떤 이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어떤 이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혀를 튕겼다. 또 어떤 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인상을 찡그린 채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고 있었다. 아! 저 새끼는 왜 맨날 나만보면 피식 웃는거냐? 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 다들 왜 그러십니까? 저의 산뜻하고 신선한 계책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일루니아는 크게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일루니아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지니가 말했다. "그만 두십시오,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 일루니아는 지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니는 눈빛으로 앉으라는 뜻을 비췄고, 일루니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 앉았다. 지니는 머쓱하게 서 있는 나에게 말하였다. "아이언스 공작 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실효성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아시다시피 화공을 하려면 기후, 습도, 바람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화공만으로는 적에게 타격을 주기 힘듭니다. 불을 지른 다음, 공격하여 적을 혼란 상태에 빠트려야 하는데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병력이 없습니다. 잘못 공겨했다가는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화공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적의 수는 8만입니다. 아니, 8만 7천 5백입니다. 실제로 화공을 펼친 다음, 3만의 군대를 투입한다면 승리 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8만 7천 5백은 자바스 군의 일부인 반면, 3만이란 숫자는 아이리스의 전력(全力)입니다. 설사 아군이 이긴다하더라도 1만 정도 피해가 생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진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최소한의 병력 손실로 적군을 막아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 안에서 방비를 굳히고 농성전을 벌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확실히 옮은 말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싸늘한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라길래 한번 기대를 걸어봤는데, 그것이 철저하게 박살나자 화가 난 모양이다.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다. 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알렌이 나를 보고 피식 웃었지만, 화낼 기운도 없다. 그래. 실컷 비웃어라. 아무래도 참모총장은 사임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직위만 높으면 뭐하냐? 능력도 없는데. 내가 생각해도 나 같은 놈에게 군대를 맡겼다가는 3분만에 전멸 당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난 그냥 마법사나 할랜다.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더 이상 얘기해 봐야 쓸데 없는 일이기에 키에라 왕은 회의를 마쳤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일어서서 나가기 시작했다. 스윈은 길게 하품을 하며,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게 가만히 찌그러져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뭐하러 나섰다가 무식을 뽀록내냐?" 이 인간이 사람 복장 터지게하네. "회의 시간에 졸아 놓구선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으세요?" 스윈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졸은 내가 낫겠냐? 아니면, 헛소리하고 쪽 당한 니가 낫겠냐?" 난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백작 님이 낫네요." 스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어깨를 한번 툭 치고 걸어나갔다. 난 일어서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잠시 눈을 감고 그대로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회의장 안에 남아있는 사람은 세 명이었다. 나, 지니, 일루니아. 이렇게 셋. 지니는 외눈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정중한 태도로 나에게 말하였다. "그런데 왜 화공이라는 말씀을 하신겁니까?" 이제는 이 인간까지 나를 우습게 본다. 말은 정중했지만, 완전 빈정거리는 것 아닌가? 난 퉁명스럽게 대꾸하였다. "그냥 불이 좋아서요." 지니는 대단히 감명 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불이 좋아서 화공을 한다……. 뭐, 다른 이유는 없으십니까?" 그래. 마음껏 빈정거려라. 나도 마음껏 받아주마. "다른 이유요? 물론 있지요. 화공을 하면 적이 불에 타서 죽게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럼 화형시키는 것과 다름 없지요?" "그렇지요." "화형은 산뜻하잖아요. 시체 썩는 냄새도 안 나고." "대신 시체 타는 냄새가 나지요." "그거 잘 됐네요. 시체 타는 냄새는 고기 굽는 냄새와 비슷할테니 병사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난 지니와의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일루니아를 보았다. 일루니아는 아까부터 무언가가 못마땅한 모습이었다. 분명 그 무언가는 나일 것이다. 난 일루니아에게 그동안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제가 참모총장으로 있는게 불만이시죠?" "예." 너무나 당연하게도 일루니아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일 사임할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일부터는 저보다 훨씬 뛰어나고 훌륭한 제 인계자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 참모총장직을 맡아 수고해 주실겁니다." 지니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제 인계자가 아이언스 공작 님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돌려드리려는 겁니다." 난 말을 마치고 회의장을 나섰다. 아마도 이제부터 저 둘은 나를 씹기 시작 할 것이다. 그리고 지니는 나 같은 놈을 참모총장직에 추천한 것을 후회하며 지금이라도 내가 사임한 것을 기뻐 할 것이다. 아이씨! 쪽 팔려. 진짜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비틀거리며 걷는 나에게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보니 루시아 공주와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회의는 잘 하셨어요?" 그녀에 질문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웬만하면 참모총장직 사임하려구요." 내 말에 루시아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 어째서죠?" "그야 제가 사임하지 않으면 저 쪽에서 절 짜를테니까요. 퇴학 당하는 것 보단 자퇴 하는게 훨씬 보기 좋잖아요." "……." 그래. 할 말이 없겠지. 난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쉈다. 그런데 아니면 아닌거지, 그렇게 쪽 줄건 또 뭐냐? * 작은 방 안에는 침대와 커다란 탁자, 책장, 옷장이 전부였다. 일루니아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조만간 감아야 할 듯 싶었다. 일루니아는 탁자에 아무 의자나 빼서 앉았다. 탁자 위에는 군사 지도 여러 개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몇 개는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몸이 좀 피곤했다. 일루니아는 안경을 벗어 옷에다 슥슥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쓴 다음, 군사 지도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뒤적거린 끝에 원하던 지도를 찾아 낸 일루니아는 그 지도를 제일 위에 놓고 유심히 살펴 보았다. 똑똑-! 들려온 노크 소리에 일루니아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백금색 단발 머리에 커다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순간, 일루니아는 찡그린 표정을 지우고 생긋 웃었다. "무슨 일이세요, 루시아 공주 님?" 루시아는 일루니아의 앞에 서서 두 손을 깍지껴 뒤로 돌린 다음, 웃으며 말했다. "그냥 한번 와봤어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 두 여인은 그 상태로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푸훗-!"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깔깔거리며 웃던 루시아는 일루니아를 껴 안으며 말했다. "뭐하고 계셨어요, 언니?" 일루니아는 한 손으로 루시아를 안아주며 다른 손으로는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그냥 이거저거 생각 좀 하느라." 일루니아는 의자에 앉으며 루시아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였다. 루시아가 자리에 앉자 일루니아는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군사 지도를 한 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그냥요. 언니 얼굴도 볼겸해서." "그래?" 일루니아는 머리를 매만졌다. 자꾸만 끈적거리는 것이 조금 신경에 거슬렸다. 루시아는 일루니아의 상한 머리카락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에요, 언니? 머리카락이 왜 이래요?" "원래 이래." "거짓말하지 마세요. 사일런스 백작 님 머릿결은 좋잖아요." 루시아는 잠시 일루니아 머리카락에 얼굴을 들이데고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니, 머리 언제 감았어요?" 일루니아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세, 아마 3일 전쯤일걸. 루시아는 기가 차다는 듯 입을 적 벌렸다. "찝찝하지도 않으세요?" "뭐 조금 찝찝하긴 하지. 하지만 적응이 되면 괜찮아." 일루니아의 대답에 루시아는 한숨을 내쉈다. 그리고 일루니아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아무리 꾀죄죄한 모습으로 다닌다 해도 사일런스 지니와 같은 핏줄인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촌스럽고 지저분하긴 하지만 조금만 꾸미면 훨씬 나아 보일 것 같았다. "언니는 결혼 언제 하세요?" 일루니아는 갑자기 나온 결혼 얘기에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왠 결혼 얘기야?" "그냥요. 언니도 언제까지나 혼자 살 건 아니잖아요." 일루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난 독신주의자야." "에이, 말도 안돼." 루시아는 일루니아의 대답에 야유를 보냈다. 일루니아는 안경을 올려쓰며 같은 질문을 루시아에게 하였다. "넌 결혼 언제 할래?" 루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에 드는 남자 생기면요." "마음에 드는 남자?" "예. 잘 생기고, 능력 있고, 돈 많고, 저를 사랑해주는 그런 남자요." 루시아의 화려한 조건들에 일루니아는 혀를 내둘렀다. "넌 평생 결혼 못하겠다." "음음, 글쎄요. 설마 평생을 기다리는데 지가 안 나타나고 배기겠어요?" "그런 남자는 이미 다 결혼했어." "그런가?" 일루니아는 루시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루시아의 머릿결이 부르러웠기에 손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카인트 자작 님은 어때? 그 정도면 괜찮은 남자잖아."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긴한데,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너무 제비처럼 생긴데다가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거든." "제비처럼 생긴걸로 따지자면 지니가 더 하지 않아?" "그래도 지니 오빠는 사람 무시하지는 않잖아." "그럼 지니는 어때?" 루시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얼굴, 능력 전부 합격이지만 지니 오빠는 안 돼." "왜?" "바람둥이잖아." 일루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해진 루시아는 탁자 위에 놓인 군사 지도를 잠시 훑어 보았다. 어떻게 읽는 지는 모르지만 그냥 보는 것이다. 지도에는 일루니아가 해놓은 표시가 한 가득이었다. 혹시라도 남들이 볼까봐 그 표시는 특이한 문양으로 되어 있었다. 이 표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지니와 일루니아 둘 뿐이었다. "너 요즘 조용히 지낸다." "응? 내가 뭘?" 사실 루시아의 성격은 공주라는 직위와 거리가 멀었다. 직위에 억매이고 싫어하고 천방지축으로 돌아 다니는 말괄량이 아가씨가 루시아의 본 모습이었다. 일루니아와 야자를 트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는 무조건 오빠, 많은 여자는 무조건 언니였다. 하지만 요즘 루시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게다가 마치 청순가련하고 순진한 공주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잘 놀지도 않고, 바지 대신 매일같이 치마만 입고, 옅은 화장에다가 부드러운 말투. 누구보면 너 진짜 공준 줄 알겠다." "나 공주 맞잖아." "그래. 공주긴 공주지. 워낙 공주 같지 않아서 문제지만."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일루니아에게 말하였다. "그 남자 지금 착각하고 있어." "응?" "그 남자 말이야. 아이언스 히로." 아이언스 히로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일루니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이 왜?" 루시아는 두 손을 깍지낀 다음 위로 들어올려 크게 기지개를 폈다. "그 얘는 내가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비운의 공주인 줄 착각하고 있어. 아마 나를 보고 청순가련한 여자로 여기고 있을 걸. 일부로 걔 앞에선 말도 별로 안하고 괜히 무게 잡고 있었거든." 루시아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웃었다. 일루니아는 그 모습을 보고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속고있는 아이언스 공작이 불쌍 할 따름이었다. "아이언스 공작이 마음에 드니?"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음에 든다기 보단 좀 재밌는 사람 같아." 일루니아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누구세요?" "접니다, 누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들어와." 일루니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지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지니는 루시아를 발견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루시아 공주님?" "응, 오빠." 지니는 의자를 빼 앉았다. 루시아는 지니가 뭔가 중요한 일 때문에 왔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자리를 비켜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둘이 재밌게 얘기 나눠요." 루시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루니아도 같이 일어섰다. "벌써 가게?" "응. 어차피 잠깐만 들릴 생각이었거든." "잘가. 자주 좀 들리고." "응, 언니." 루시아는 일루니아를 껴안으며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지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 가요, 오빠." 지니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히가십시오, 공주 님." 루시아는 지니가 존댓말을 쓰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냥 웃어 넘겼다. 지니는 상대방의 나이와 신분에 관계 없이 전부 존댓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런 존댓말은 여자를 꼬시는데 아주 큰 메리트였다. 루시아가 방을 나서자 일루니아와 지니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지니는 일루니아의 표정과 루시아가 앉아 있었던 자리를 번걸아가며 보았다. 그릭 한 손으로 이마를 집으며 말했다. "공주 님의 입맞춤을 받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더군요." 지니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감을 잡은 일루니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이마에는 세 개의 주름살이 생겨났다. 지니는 그 모습을 짐짓 못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 "누님께서 그동안 왜 남자한테 관심이 없으셨는지 알만 하군요. 설마 루시아 공주 님과 금단의 사랑을 꿈꾸시고 계신건……." 일루니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쾅-! "너 헛소리 할꺼면 당장 나가." 지니는 불똥이 튀는 누님의 눈을 보고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농담이었습니다, 누님. 사실은 드릴 말씀이 조금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말인데?" 지니는 탁자 위에 올려진 군사 지도들을 훑어 보았다. 그리고 맨 위에 올려져 있는 지도를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누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일루니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니는 한 손을 탁자 위에 걸치며 말했다. "아까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하셨던 말씀 때문입니다." "화공 말이야?" "예."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도 인정했잖아." "전 불가능하다는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쓰기에는 많은 무리수가 있다고 했지요." 일루니아는 한숨을 내쉈다. "사실 나도 그 화공이라는 말 때문에 생각을 좀 하는 중이었어. 농성전을 하자고는 했지만, 그것 역시 최선의 방책은 아니니까." 지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지금 아이리스는 아주 중요한 기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나라를 재건국한거나 다름 없지요. 이런 때에 적이 무서워 성 안에만 틀어 박혀 있는다면 사기가 떨어지고 타국들은 더욱 아이리스를 우습게 볼 겁니다. 제 생각에 이번 전쟁은 3개월이면 끝날겁니다. 아이리스의 패배로 말이지요." 지니의 발언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싸우기도 전부터 패배주의적인 발언을 한다면 그것은 군대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내부의 결속력을 약화 시킨다. 일루니아는 지니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바스의 군대가 케이튼 지역에 온다. 그리고 그들은 무력 시위를 펼친다. 그러면 국경 부근에 자바스의 병력이 증강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란 헤리오는 재빨리 국경 부근의 병력을 증강시킨다." 다음 말은 지니가 받았다. "전쟁을 피하고 싶은 헤리오와 아이리스를 직접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명분이 필요한 자바스는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헤리오와 자바스의 대군은 아이리스를 공격한다. 이거야 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군요." 일루니아는 놀란 표정으로 지니의 얼굴을 보았다. 아까 말을 안 하길래 모를 줄 알았었는데 지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아까 3개월 내에 아이리스의 패배로 전쟁이 끝난다는 것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리. 지니는 일루니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미리 대답하였다. "클라시온 공작의 생각이야 뻔한거 아닙니까? 어제 이리 재 보고 저리 재 봤는데도 그 이상 좋은 방법은 없을 듯 하더군요. 저라고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럼 어쩔 방법이야? 그걸 알면서도 농성전을 하자고 주장한데에는 무슨 생각이 있었을 것 아냐?"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적들이 그런 책략을 쓴다고 해서 저희로서는 농성전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요. 농성전을 준비한 다음, 헤리오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헤리오가 그리 쉽게 동맹을 맺어 줄리 없지요. 설사 동맹을 맺는다 하더라도 아이리스가 힘이 약하고 위험에 처해있는 이상 좋은 대접을 받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건 너무 이상적인 거 아냐?" "맞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화공이란 말씀을 하시더군요." 일루니아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길게 뉘었다. 머릿속이 엉클어진 살타래처럼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여자의 몸으로 참모 자리에 올라 섰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을 인정 받았다는 얘기다. 일루니아의 이름은 타국에도 잘 알려져 있고, 당대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모사였다. 일루니아는 여자라고 무시 받는 것이 싫어서 더욱 실력을 쌓았다. 그런데…… 아이언스 히로라는 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참모총장 자리를 꿰어 찼다. 나이도 어릴뿐더러 실력은 형편 없었다. 일루니아는 지니의 생각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언스 히로를 참모총장 자리에 추천 한 것일까? 아이리스의 대체적인 인사 행정은 사일런스 지니 백작과 만토이펠 안기 공작이 맡고 있었다. 지니는 수 많은 반대를 누르고 무조건적으로 아이언스 히로를 참모총장에 추천하였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다른 귀족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키에라 왕이 그 추천을 받아 들였다는 점이다. 일루니아는 동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아이언스 공작을 참모총장 자리에 앉힌거야?" 지니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전에도 말씀드렸잖습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저 역시 농남하는 거 아닙니다." 지니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탁자 위에 놓인 지도들 중 필요한 지도를 몇 개 찾았다. "지금은 이것에 대해서나 얘기하죠. 그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구요." 일루니아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어차피 나도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야 하니까." 지니는 길게 숨을 들이 마쉰 다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까 농성전을 주장한 이유 중 보급선 유지 문제가 있었는데, 사실상 자바스는 보급선을 유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치중 부대가 1만이라면 9만에 가까운 군대가 3개월 동안 먹을 군량 정도는 한번에 나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까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말씀하셨던 화공이란 것 말입니다. 그것은……." *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았다. 아까 회의가 끝난 후 방으로 돌아와 바로 잤더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다시 잘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나에게는 지금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난 능숙한 동작으로 촛불을 켰다. 탁자 위에는 잉크병과 펜, 그리고 아무것도 써지지 않은 종이 한 장이 놓여져 있었다. 난 펜을 들어 잉크를 듬뿍 묻혔다. 종이에 글자를 쓰려는 순간, 침대 위에 누워있던 라이코스가 말했다. "지금 뭐해?" "넌 몰라도 된다. 이것은 남자 혼자 안고 가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야." 라이코스는 순식간에 침대에서 탁자 위로 날아왔다. "나도 남잔데."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보통은 수컷이라고 하지." "아무튼 지금 뭐하는 건데?" "내가 뭘 하든말든 그걸 매가 알아서 뭐하게?" 라이코스는 머리 위에 나있는 세 개의 깃털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궁금하잖아." "그럼 계속 궁금해 해." "야! 이 치사한 자식아!" 역시나 나의 예상대로 라이코스는 날개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난 라이코스와 좀 더 놀아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나의 기분은 심히 불쾌하다. 감히 변종 앵무새따위에 말씨름을 하고 싶지 않다. 아! 아까 쪽 당했던 일이 비디오 리플래이 하듯이 너무나도 확연히 떠오른다. 그냥 입다물고 가만히 있을 걸, 괜히 나섰다 이게 무슨 쪽이냐? 난 라이코스를 저 멀리 밀쳐 내고 펜을 들어 종이 위에 큼직하게 썼다. > <사직서> 이 글씨를 보니 이제야 명퇴 당하는 느낌이 온다. 명예 퇴직. 그래. 나는 명예롭게 퇴직하는 거다. 절대 짤리는게 무서워서 미리 사직서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거 퇴직금은 나올라 몰라. 난 가슴 속에 차오르는 슬픔을 가라 앉히고 다음 줄에 계속 썼다. > 저에게 참모총장이라는 큰 직위를 맡겨주신 점에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요즘 저는 아내의 병환과 딸 아이의 가출 때문에 심기가 심히 불편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업무로 인해 저의 몸은 지쳐가고, 여러 귀족들의 시기 때문에 저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졌습니다. 여기까지 쓴 다음, 펜을 내려 놓았다. 방금 쓴 문장을 읽어보니 중요한 실수 몇 가지가 발견되었다. 일단 나 아직 미혼이다. 당연 딸 아이도 없다. 결코 병이 들거나 카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업무로 인해 몸이 지쳐간다고 했는데, 나 1시간도 일해 본 적 없다. 서류에 싸인을 해보기는커녕 서류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했다. 후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펜을 들었다. 원래 반드시 사실만을 말하라는 법은 없는 법이다. 이런 서찰 일수록 될 수 있는 한 수련하고 애절한 내용으로만 쓰면 되는 것이지 굳이 사실이고 거짓말이고 따질 필요가 없다. 언제 정치가들이 진실을 얘기하는 것 봤는가? 원래 정치인이면 모든 특권이 보장되는 법이다. 대표적인 예로 야당총재 님께서는 315평이라는 아주 좁은 빌라에 살고 계시고 그 분의 아들은 몸이 너무 아파 군대도 가지 못하였다. 이런 불행한 환경에 처해있는 야당총재 님께서 설사 거짓말을 몇번 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죄겠는가? 어찌되었는 나도 한 나라의 중요한 위치에 서 있고, 최고로 높은 작위를 받았으니 약간의 거짓말 정도는 애교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펜을 들었다. > 저는 얼마 전부터 저의 능력 부족을 뼛 속까지 시리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요즘들어 지병이 다시 재발하여 일하는데 많은 애로사항이 꽃 피고 있습니다. 그 지병은 전문 의학 용어로 '연속갈굼타격분노폭발촉진아다마데굴데굴정신병원직행병' 입니다.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지속적으로 갈굼을 당하면 분노 폭발을 촉진시켜 머리가 돌아버려 정신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하는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 저는 저에게 지어진 막중한 책임과 만 백성들의 기대, 그리고 수 많은 여성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그 동안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하지만 세 명의 지속적인 갈굼과 저 자신의 의욕 상실로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세 명은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님, 카인트 켈 백작 님, 카인트 알렌 자작 님이지만, 이름을 말하면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 이름은 밝히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카인트 알렌 자작 님은 저를 보고 여러번 피식 피식 웃어 댔었지만 가중 처벌 시켜달라는 말 역시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폐하의 기대에 못 미쳐드린 점 다시 한번 사죄드리며, 저 아이언스 히로 공작은 오늘 1671년 8월 20일을 기해 참모총장직을 사임하겠습니다. 나는 사직서를 다 쓰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쉈다. 비록 실권이 없는 자리긴 했지만, 그래도 내 평생 올라본 자리 중 제일 높았던 자리였는데.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래 사람은 물러날 때와 나설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김영삼 할아버지처럼 주제도 모르고 여기저기서 깝치다보면, 자기는 둘째 치고 나라를 말아먹는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물러난다. 난 내가 쓴 사직서를 다시 찬찬히 훑어 보았다. 명문이라고 부르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꽤나 잘 쓴 글이다. 난 흡족한 기분이 들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뭔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게 뭐지? 난 잠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이런이런, 가장 중요한 말을 빼먹다니. 난 펜촉에 잉크를 듬뿍 묻혀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밑 쪽에다가 썼다. > 추신 - 퇴직금과 연금은 주시길 바랍니다. 안 주신다거나 액수가 적을 경우에는 바로 노동 조합에 신고 할 예정이니 그 점 유의 하십시오.> "됐다!" 난 소리치며 종이를 번쩍 들었다. 이제 이것을 왕에게 제출하기만 하면 나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두둑한 퇴직금과 연금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놀고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직서를 접으려는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이 야심한 시간에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난 문에다 대고 크게 외쳤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면 들어오시고, 별 볼 일 없으신 분이면 그냥 돌아가주세요." 그러자 문 너머에서 질문이 들려왔다. "백작이면 높은 겁니까? 낮은 겁니까?" 오호! 백작이라! 공작인 나보단 낮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봐줄만 하지. "들어오세요." 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용히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이며 사죄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일런스 백작이었다. 난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이미 들어왔습니다." "그럼 조금 더 깊이 들어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니는 더 깊이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난 그와 마주보는 쪽에 앉은 다음 그를 보았다. 지니는 외눈 안경을 만지작거리다가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종이를 보고 나에게 물었다. "이 것은 뭡니까?" "직접 읽어 보세요." 지니는 사직서를 들고 촛불에 비춰가며 보았다. 잠시 후, 지니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여기 뭐라고 쓰신 겁니까?" 난 아까와 똑같이 대답했다. "직접 읽어 보세요." "저야 물론 직접 읽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안 읽혀지는 군요." "안 읽혀지다니? 설마 글을 모르십니까?" "아니요. 물론 글은 압니다. 다만 여기써진 글을 모를 뿐이지요." "예!?" 난 지니의 말에 깜작놀라 지니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낙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젠장, 아이언스어로 썼잖아. 그렇다. 나는 지금 1억이 넘는 인구가 사용하고 있는 공용어를 놔두고 전세계에서 나 혼자만 사용하는 아이언스어로 쓴 것이다. 아! 생각해보면 이거 읽을 수 있는 생명체가 나를 제외하고 한명 더 있긴 하다. 그 레드 드래곤. 이름이 크로니스였던가? 요즘 업무가 바빠 깜빡 잊고 있었군. "아이씨! 왜 하필 이걸로 써가지고." 어찌되었든 사직서는 다시 써야 할 것 같아. 지니는 고개를 돌리다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 라이코스를 보고 말했다. "아이리스의 상징인 청안백우조께서 잘 주무시고 계시는군요." "예. 저 놈은 맨날 자는게 일이니까요." 난 지니를 똑바로 쳐다보며 현재 가장 중요한 사항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런데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지니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사실 일이 좀 있어서 그럽니다." 일이라? 무슨 일이지? 내가 생각을 하는 사이 지니는 주위를 한번 두리번 거리더니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내가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자 지니는 입을 내 귀에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저희 누님께서 아이언스 공작 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허억!"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그러자 지니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에다 가져다댔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안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잠시 후, 어느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난 조용한 목소리로 지니에게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물론입니다. 제가 언제 아이언스 공작 님께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다. 사일런스 지니는 사기꾼에 딱 적합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나에게 거짓말을 한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런데 무슨 일로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님게서 저를 뵙자고 하시는 거죠?" "그건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잘 아시고 계실텐데요." 지니는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거지? 내가 뭘 잘 알어? 설마…….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난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지니에게 물었다. "언제 뵙고 싶다고 하시던가요?" 아닐꺼야. 그래, 아닐꺼야. 그 여잔 맨날 나만보면 틱틱 거렸는데, 절대 그럴리 없어. 난 불안한 상상을 떨쳐 내려 매우 애를 썼다. 하지만 나의 이런 노력은 들려온 지니의 대답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저희 누님은 아이언스 공작 님을 지금 당장 뵙고 싶어합니다." 지금. 지금. 나중도 먼훗날도 아닌 지금. 난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어느새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이 정도 어둠이면 지금은 밤이라 해도 절대 손색이 없으리. 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뵙자고 하시던가요?" 지니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확실하게 대답하였다. "누님의 방입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 난 지금 지니를 따라 일루니아의 방으로 가고 있었다. 다 큰 처녀가 한 밤중에 방으로 남자를 부른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러고보면 그 동안 일루니아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행동들이 전부 이해가 된다. 그 동안 나를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말싸움을 건 것. 이 것은 분명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다. 좋아하는 이성이 있는데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면 괜히 괴롭히고, 시비걸기 나름이다. 왜 어렸을 때 다들 그러지 않나? 좋아하는 여자애가 놀고 있으면 고무줄 끊고 도망가고 아니면 아이스께끼하고.(아이스께끼 - 애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 여자아이의 치마를 들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꼭 팬티를 보기위한 것 보다는 상대 여자아이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참고로 커서도 이런 짓을 했다가는 성추행으로 잡혀 들어가니 반드시 주의하길 바란다. 또 하나 참고로 말하자면 난 인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아이스께끼를 한 적이 없다. 정말이다. 이것은 하늘에 두고 맹세 할 수 있다. 예전에 한번 여자아이의 바지를 벗긴 적은 있어도 치마를 들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인간 박영웅. 알고보면 순진하고 착한 놈이다.) 언제부턴가 일루니아는 나에게 끌리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눈 감으면 잘생긴 아이언스 공작의 모습이 떠오르고, 음악을 듣다보면 매력적인 아이언스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길가다 스쳐지나간 여자에게서 아이언스 공작의 향기를 느끼고, 꿈에서 아이언스 공작과 찐한 키스를 하고. 물론 일루니아는 처음에 이런 감정들을 부인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이언스 공작을 사모하는 감정은 사그라들긴커녕 증폭되어 갔고,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자신의 동생을 통해 몰래 아이언스 공작을 자신의 방으로 부른다. 아! 이것이 바로 28세 노처녀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난 그녀가 나를 원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한동안 망설여야 했다. 그 이유는 11살의 나이차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래.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나이차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게다가 일루니아는 미모와 지성을 갖춘 인텔리전트한 여성이다. 결국 나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이렇게 지니를 따라가고 있다. "아직 멀었나요?" "다 왔습니다." 지니는 회랑의 끝쪽에 있는 문에서 발을 멈춰섰다. 아마도 이곳이 일루니아의 방이리라. 지니는 손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접니다 누님. 아이언스 공작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지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난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킨 다음, 지니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일루니아의 방은 전체적으로 지저분한 편이었다. 특히 지도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촛불을 환하게 켜 놓은 방 안 한쪽에는 일루니아가 앉아있었다. 아아! 오늘따라 그녀가 아름다워 보인다. 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일루니아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지니가 나를 지나쳐 걸어가더니 일루니아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니, 어째서 지니가 저 곳에 앉는단 말인가? 지니는 이곳까지 나를 데려다 준 것으로 소임이 다하지 않았나? 당연 일루니아와 나의 따끈따끈한 밤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줘야지. 지니의 모습을 보니 결코 일어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 인간이 이렇게 눈치가 없었나? "앉으세요." 일루니아의 말에 나는 의자를 빼 앉았다. 내가 앉자마자 일루니아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지도를 펼쳤다. 약자(略字)와 이니셜이 난무하는 것을 보니 군사 지도가 틀림 없었다. 나는 지도는 왜 펴나,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입을 열었다간 괜히 무안 당할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요." "예!?" 일루니아의 말에 나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아니, 회의라니? 무슨 회의? 지니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군요. 사실 아무래도 농성전을 벌이는 것이 별로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아서 새로운 계책을 짜내려 합니다." "새로운 계책을 짜내는데 왜 절 불러요?" "그야,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는 참모총장이 아니십니까? 책략을 수립하는데 당연 참모총장 님께서 참여를 하셔야죠." 그럼 일루니아가 긴긴 밤을 외로이 보내기 싫어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회의 하자고 부른 거였단 말인가? 이런 젠장, 완전 당했다. 회의하는 줄 알았으면 미쳤다고 내가 이곳에 왔겠냐? 잠이나 한숨 더 자지. 난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루니아와의 썸씽이 파토난 이상 내가 굳이 이 곳에 있을리 없는 것이다.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니는 외눈 안경을 만지작 거리며 능청을 떨었다. "아니 참모총장 님께서 가시면 어떻게 회의를 진행합니까?" "저 참모총장 사임했습니다." "언제요?" "지금이요." 난 말을 마치고 방을 나서려 하였다. 그 순간, 뒤에서 지니가 소리쳤다. "참모총장은 되기도 힘들지만 그만 두기는 더욱 힘듭니다." "그거 사임하면 그만 아닙니까?" "물론 사임하면 그만이긴 합니다. 하지만 임기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즉, 한번 참모총장이 되면 4년 임기를 마치셔야 사임 하실 수 있습니다." "예!?" 그런게 어딨어? 난 못 들었는데. 이렇게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심야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지니의 말이 심히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뚜렷한 증거가 없기에 일단은 믿기로 하였다. 그나저나 내 임기가 끝날 때까지 이 나라가 무사히 있을 수 있을까? "낮의 회의 때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는 화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 뭡니까?" 지니와 일루니아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쳐다 보았다. 난 탁자 위에 손을 팔굼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건 그냥 한번 말해본 거에요. 소수로 다수를 공격하는데는 화공이 짱이 잖아요. 그런데 헛소리 말라고 쪽 줄 때는 언제고 왜 다시 묻는거죠?" 지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아까 아이언스 공작 님의 말씀을 듣고 화공의 실효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몇가지 조건만 따라준다면은요." 난 깜짝 놀라 지니를 쳐다 보았다. 지니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다. 언제나 얼굴에 떠올라있던 옅은 웃음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표정이 진지한 것은 일루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순간적으로 난 둘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다. 지니는 말을 이었다. "일단 장소, 기후, 바람 등이 따라줘야 합니다. 그리고 화공만으로는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없습니다. 곳곳에 병사를 매복해 혼란에 빠진 적을 공격해야 합니다." 지니는 탁자 위에 펼쳐진 군사 지도에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곳은 케이튼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군사 지도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그 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곳은 키히르시아 숲이에요." 나의 궁금증을 풀어준 사람은 일루니아였다. 일루니아는 그 지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손가락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키히르시아 숲은 나무들이 크고 빽빽하여 화공을 벌이고 병사들을 매복하기 좋은 장소에요. 게다가 주위에 산이 많으니 대규모의 군대를 숨기기에도 적합하지요." 난 나도 모르게 점점 둘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말하는 일루니아의 표정에는 생기가 넘쳐 흘렀다. 긴 금발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커다란 안경을 낀 채, 하나의 일에 전념하는 그 모습을 보니 가슴 속에 무언가가 요동을 치는 느낌이었다. 지니가 말했다. "적을 이 곳으로 유인해 화공을 푼다면 충분히 승리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은 가을이니 날씨가 건조합니다. 숲 전체에 불을 지르는데는 별로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생각하시고 계신 바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순간, 일루니아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지금 진지했다. 지니의 말은 흥미로웠고 왠지 모르게 나를 끌어 당겼다. 지니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지니는 잘 모르는 날 위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지니의 설명은 이러했다. 키히르시아 숲의 길은 구불구불하고 좁았다. 9만의 병사가 이곳으로 들어 온다면 일렬로 늘어 설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당연 부대 간의 긴밀한 연락은 불가능해 질 것이다. 적들은 군량과 마초 등 막대한 양의 치중을 가지고 있다. 이 치중은 당연 후군(後軍)에 있을 것이다. 치중 부대까지 숲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불을 지른다. 그러면 적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며 도망치려 할 것이다. 앞길은 우리 군이 막는다면, 뒷길로 달아나야 할텐데 뒷길은 자신들이 들고 온 치중에 의해 막혀있다. 앞길과 뒷길이 전부 막혀있다면 적들은 샛길을 통해 날아나려 할 것이다. 그럼 우리 군은 그 샛길에 매복해 있다가 도망치는 적들을 섬멸한다. 확실히 말이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석연찮은 점도 몇가지 있었다.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화공을 쓰려면 바람이 도와줘야 합니다. 바람은 어떻습니까?" "아쉽게도 바람은 우리편이 아닙니다." 해석하자면 바람이 뜻대로 불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화공은 반드시 바람을 필요로 한다. 바람이 없으면 불이 번지는 속도가 느리고 바람이 반대로 불면 아군이 타죽는다. 그 유명한 적벽대전도 동남풍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그럼 어쩌지요? 바람이 없으면 화공을 쓸 수 없잖습니까?" "그건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아시고 계실겁니다." 난 뜸금 없는 대답에 놀라서 지니를 쳐다보았지만, 지니는 빙그에 웃기만 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거라는 의미였다. 난 잠시 생각을 해 보았고, 얼마 지니지 않아 지니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마법으로."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마법으로 바람을 비는 겁니다."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바람이 한번 불고 그칠 것도 아니고 불이 사방으로 번질 때까지 계속 불어야 하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몇 명이나 되겠나?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알았는지 일루니아가 입을 열었다. "다른 곳에서라면 키히르시아 숲에서는 가능 합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숲 같이 자연의 기가 풍부한 곳에는 마나가 증폭되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려는 일은 없는 바람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아니라 불고 있는 바람의 각도를 조금 조절하는 겁니다. 다행히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부는 것은 아니니까요." 숲은 나무와 풀 바위 등 그 자체가 자연이기에 자연적으로 기가 많이 모이게 된다. 그리고 그 기들이 특정 지점에 모이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 이유는 풀, 나무, 바위 등이 하나의 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기들이 뒤엉켜 있는 곳도 있다. 이런 곳에서는 기의 방해를 받아 마나의 운용이 힘들어지므로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다. 일루니아의 말은 현실성이 있었다. 마나를 증폭시킨다면 바람을 빌기 조금 수월해지고, 그리고 각도만 조금 꺽는 것이라면 바람을 비는 것에 비해 힘이 반에 반도 안 든다. 이제 좀 해볼만 하겠군. 난 흥분이 머리 끝까지 솟아오른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다음은요?" 8월 20일 밤부터 시작된 회의는 23일 새벽에 끝났다. 삼일 밤을 꼬박 새가며 회의한 것이다. 진짜 인생의 회의가 느껴지는 회의였다. 나도 많은 생각을 제시하였고, 그중 대부분은 쪽 먹고 빠구 당했지만, 나머지는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들여졌다. 회의가 끝나자 나와 일루니아는 탈진 상태로 쓰러졌다. 반면 사일런스 지니는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회의 결과를 가지고 작업에 들어간다며 방을 니섰다. 그리고 나와 일루니아는 사이 좋게 한 방에서 잠이 들었다. 어쨌든 나의 소망대로 동침을 하긴 한 것이다. Part 5. 폭풍전야 1671년 9월 1일.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과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 사귄다.> <아이언스 공작은 밤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침실에 들락거린다. 이곳은 하녀A가 목격한 사실이다.> <둘은 11살의 나이차를 뛰어 넘어 서로간의 애틋한 감정을 아름답게 키워나가고 있다. 이것은 연상녀, 연하남 커플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사일런스 백작은 샤이 사일런스 백작과 아이언스 공작의 중매를 주선했고, 첫눈에 반한 둘은 즉석에서 결혼 일자를 잡는 등 벌서부터 국수 먹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위의 말들은 요즘 항간에 떠도는 최고의 이슈. 아이언스 히로 공작과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의 열애설 일부를 나열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저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몰라도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다. 그래도 위의 것들은 그나마 났다. 그럼 다음 소문을 알아 보자. '아이언스 공작은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애첩이다.' '욕정을 이기지 못한 샤이 사일런스 백작은 회의를 핑계로 밤에 몰래 아이언스 공작을 불러내 뜨거운 정사를 나누었다.' '아이언스 공작은 자신의 정치적 적대 세력인 샤이 사일런스 백작을 꺽기 위해 몰래 침실로 들어가 겁탈하였다.' '둘의 결합은 우수 인자 교배를 위한 것이다. 아이언스 공작의 마법과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두뇌. 이 두가지를 합친 우수한 인재를 얻기 위해 둘의 결합이 이루어 졌다.' 아! 씨바! 정말 씨바란 소리 밖에는 안 나온다. 대체 이 소문들은 뭐란 말인가? 아니, 이것은 소문이 아니다. 아이언스 공작의 천재성과 정치적 세력을 두려워한 누군가가 퍼트린 악성 루머다. 애첩? 겁탈? 우수 인자 교배? 씨바, 이게 SF인 줄 아나? 난 정말 열받았다. 하지만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원래 이러한 악성 루머는 당사자가 가만히 있으면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TV도 라디오도 인터넷도 없는 이 곳에서 소문은 일파만파로 확산되었다. 어제 50명이 알고 있었으면 오늘은 100명, 내일은 200명, 모레는 400명, 글피는 800명……. 정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마치 피라미드 회사나 세균전 등을 보는 듯 하다. 내가 보기에 이 소문들은 다분히 정치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이것은 아이언스 공작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게 하여 공작 자리를 가로채려는 정치적 모략이다. 어떠한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가? 당연 근거 있다. 얼마 전부터 하녀들이 내 얼굴만 봐도 피해다닌다. 어린 하녀 하나 잡아서 물어봤더니 '아이언스 공작은 강간마라네' 하는 소문이 왕궁 전체에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아이씨, 장가 가긴 다 틀렸잖아. "안녕하십니까, 아이언스 공작 님? 아니, 이젠 매형이라고 불러드려야 겠군요." "칵!"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나의 염장을 지르는 사람은 사일런스 지니였다. 그래. 어찌보면 저 인간 때문에 소문이 퍼진 걸 수도 있다. 내가 요 며칠 간, 나의 정보 요원(라이코스)으로 하여금 소문의 근원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그 결과 S 백작이란 인물로 밝혀졌다. S 백작. 그는 대체 누구인가? 설마 사일런스 지니 백작인가? 난 싸늘한 눈빛으로 지니를 노려 보았다. 지니는 굳이 내 눈길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히 내 눈을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매형께서 이 처남을 그리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시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칵! 누가 매형이야!?" 나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것에 당황 할 지니가 아니다. 지니는 은근슬쩍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건드렸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건드렸어야 책임을지지!"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제가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저희 누님과 함께 한 침대에서 다정히 껴안고 자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자꾸 발뺌 하실겁니까?" 나와 일루니아가 한 침대에서 잤다는 말. 그래. 그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게 어찌 된 일이냐하면……. 내가 잠에서 깼을 때는 새벽이었다. 추워서 깬 것이다. 그때는 비몽사몽간이었기에 난 그곳이 내 방인 줄 착각하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침대 위에는 따뜻한 무언가가 있었다. 난 당연 그게 라이코스인 줄 알았다. 그래서 끌어 안고 잤다. 라이코스 크기가 사람만한 것에 조금 이상함을 느끼긴 했었지만, 그땐 너무 졸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실컷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 누군가가 바로 사일런스 지니였다. 난 나의 결백함을 열심히 주장했지만 지니는 결코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 책임지라고 나한테 난리 인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결백하다. 지니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뭘 잘 부탁해요?" "전 아이언스 공작 님을 처음 본 순간, 누님과 천생연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욕정을 이기시지 못하시고 제 누님을 겁탈하여 이렇게 두분이 맺어지게 되었으니, 저로서는 정말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누가 겁탈을 해!? 이 인간이 진짜 생사람 잡네!" "자꾸 왜 이러십니까? 진실을 부인하려 하지 마세요." "당신 누나한테 물어 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공작 님께서 그러시면 안 되지요. 제 누님은 이제까지 남자라곤 모르고 살아오셨습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이 첫 남자였는데 어떻게 그러 실 수 있습니까?" 진짜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다. 저 실실 웃는 모습을 보니 분명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 없으리. "당신이 소문 낸 거죠?" "예?" 지니는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소문의 근원 S 백작. 샤이 사일런스 백작은 당사자니까 소문을 냈을리 없고. 그래. 역시 사일런스 백작이 범인이었다. 난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른 척 하지 마십시오. 백작 님께서 소문 냈잖아요." "무슨 소문 말입니까?" "악성 루머요. 제가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을 거, 겁……. 아무튼 상당히 안 좋은 짓을 했다고 소문 냈지요?"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전 아닙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백작 님 아니면 그런 짓 할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전 아닙니다. 전 그저 스웰리어 백작 님께 아이언스 공작 님과 제 누님이 같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는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말한 적 없습니다." "……." 스웰리어 백작? 그럼 설마 S 백작이라는 게……. "여기 서서 뭐하냐?"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나와 지니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헝클어진 금발머리에 제대로 다듬이 않아 마구잡이로 나있는 수염을 가진 덩치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지니는 허리를 약간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스웰리어 백작 님." "나야 언제나 잘 지네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에게 다가 왔다. 이 남자는 바로 스웰리어 스윈 백작. 3사단 사단장이자 아이리스 최고의 장수. 그리고…… S 백작. 난 스윈의 앞에 서서 스윈 보고 고개를 좀 숙이라고 하였다. 스윈의 키가 나보다 월등이 크기 때문에 귓속말을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스윈이 고개를 숙이자, 난 스윈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당신이 소문 냈지요?" "응? 무슨 소문?" "내가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께 매우 불쾌한 일을 저질렀다는 악성 루머." 내 말이 끝나자 스윈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거. 난 그냥 지니 녀석한테 들은데로 말한 것 뿐인데."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니가 일루니아를 겁탈하려했다고 말하던데." "예!?" 지니가 소문의 근원지였군! 난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지니를 쳐다 보았다. 그러자 지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누님의 방 침대에서 아이언스 공작 님과 누님이 다정하게 서로를 껴안고 잤다고 말했습니다." 이 인간이 끝까지 거짓말을. 내가 화를 내려는 순간, 스윈이 말했다. "그래. 그게 그 말이지. 그러니까 요점은 이 녀석이 일루니아를 겁탈하려 했다는 거 아니야?" 난 다시 스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아니, 어떻게 말이 그렇게 됩니까?" 스윈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일루니아의 방에서 일루니아의 침대에서 둘이 같이 잤데며. 일루니아의 방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니가 겁탈하려고 한게 맞는 거지."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니? 난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한참 후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다녔어요?" "몇 번 안 했어. 그냥 만나는 사람에게 한번씩 해줬지." "……." 아아! 감격스럽다. 드디어 악성 루머 유포자 S 백작의 실체가 드러났구나. 아! 기분 좋다. "왜 그런 표정을 짓냐? 어디 아프냐?" 스윈에 질문에 난 '너 때문에 그런다, 짜샤!' 라고 소리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스윈은 아이리스 최고의 장수고 난 아이리스 최고의 비실이다. 괜히 덤볐다가는 뼈도 못추리는 경우가 생긴다. "여기 모여서 뭣들하고 계세요?" 뒤에서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우리는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아! 누님." "여! 일루니아." "……." 금발 머리를 올빽으로 넘겨 묶고 얼굴에는 여전히 멋대가리 없는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고, 손에는 말아 놓은 군사 지도를 들고 있는 그녀는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님이었다. 악성 루머에 매우 많이 괴로워하는 나와는 달리 이상하게 그녀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악성 루머의 피해는 여성측이 더 크게 받는 법인데다 잘못하면 혼사길이 완전 막힐 수도 있는데도 신경을 끄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결혼 할 마음이 없나 보다. 일루니아는 우리 셋을 보며 말했다. "잠시 후면 회의가 시작합니다. 빨리 가시지요." 나를 쳐다보는 눈빛도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소문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지니는 일루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들고 계신거 주십시오.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됐어." 일루니아는 그 한마디 말과 함께 지니를 스쳐 걸어갔다. 지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두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리고 일루니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난 걸어가는 일루니아를 보고 한숨을 내쉈다. 어느새 내 얼굴은 화끈거리고 있었다. 이거 소문 때문에 괜히 의식하게 되네. 스윈은 멍하니 일루니아를 바라보고 있는 내 등을 퍽 소리나게 쳤다. "뭐해? 가자." "예." * "무슨 일로 회의를 하자는 겁니까?" 카인트 알렌이 여전히 띠껍고 밥 맛 없고 재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 표정보다 더 마음에 안 드는 것은 피식 피식 웃어대는 저 입술이다. 진짜 생각 같아서는 저 입술을 뭉개버리고 싶다. 하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저 놈의 주둥아리를 뭉개버리겠나? 난 자리에서 일어서서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쁘신 분들께서 제 말을 듣고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주시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역시 참모총장이라는 감투가 좋긴 좋군요. 제가 이렇게 여러 분들을 모이시라고 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럽니다. 설마 제가 고스톱이나 치자고 여러 분들을 불렀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제가 왜 여러 분들을 이곳에 모이라고 하였나?" "용건만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난 알렌의 말을 가볍게 씹어 넘기고 하던 말 계속 이어서 했다. "전 국가의 사활을 걸고 하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는 비책을 마련해 왔습니다."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는 놀라운 빛이 떠올랐다. 자신의 말이 씹힌 것에 분노를 느끼던 알렌까지도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후후후, 그럴 수밖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리가 없지. 이번 회의를 소집한 것은 나였다. 그리고 소집 이유는 아이언스 공작의 머리에서 나온 천재적 전술 강의 때문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말한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알렌이었다. 알렌의 표정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확고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난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 제2 사단장 부관께서 하신 그 질문은 참모총장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직위를 앞 세워 말하긴 했지만 쉽게 물러날 알렌이 아니었다. 알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좋은 생각이 있으셨다면 어째서 저번 회의 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시간이 얼마 없는 지금에서야 말씀을 하시는지요?" 알렌의 말에는 나를 우습게 보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실 내가 그 동안 만만한 모습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저런 놈한테 덜 떨어진 놈 취급받는 것은 정말 열받는다. 난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밀 유지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럼 그 전쟁에서 승리 할 방법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난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화공입니다." 순간, 알렌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한번 놀라운 빛이 떠올랐다. 알렌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하! 정말 황당하군요. 저번 회의 때 화공은 불가능하다고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 난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기에 알렌의 말을 잘랐다. "누구 맘대로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하고 가능하고는 제가 정합니다. 사일런스 백작 님은 일개 군단참모이고 저는 참모총장입니다. 책략을 수립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사용하는 것도 제 뜻에 따라야 합니다. 제가 화공을 쓰겠다고 하면 화공을 쓰는 겁니다." 알렌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니는 내 편이었기에 그냥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보여주는 카리스마적인 나의 모습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확실히 그 동안 너무 우습게 보였던 것 같다. 감히 2 사단 부관 따위가 기어오르다니. "지금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 몰 생각이오!?"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예쁘다고 분기탱천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외친 사람은 알렌의 아버지 카인트 켈 백작이었다. 이 아저씨도 한번 화나니까 표정이 상당히 무서웠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 아닌가? 백작 주제에 감히. "누가 죽음으로 내몬다고 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뭐란 말이오? 지금 우리에게는 농성전을 벌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소!" 켈은 잡아 먹을 듯이 나를 노려 보았다. 부자가 한 팀을 이뤄서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그건 니 생각이고!" 나의 외침에 장 내는 한 동안 조용해졌다. 잠시 후, 알렌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당 카인트 백작 님게 사과 하십시오." 난 사과 하는 대신 가운데 손가락을 높히 치켜 들었다. "엿 같은 소리하네. 내가 미쳤다고 사과를 하냐?" 전부터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맨날 저 피식 피식 웃는 얼굴에 일침을 가하는 것을. 나의 예상대로 알렌의 얼굴은 처참하다 싶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알렌은 나에게 달려들려 하였고, 나는 재빨리 의자를 번쩍 집어 들었다. 회의장 안이니 만큼 무기 소지는 금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알렌에게는 주먹이라는 신체적 무기가 있었다. 원래 권투 선수의 주먹은 흉기로 취급되는 법이다. 권투 선수가 주먹으로 사람을 패면 흉기로 사람을 공격한 것과 똑같은 형벌을 받는다. 이것은 권투 선수만이 아니라 모든 무술 유단자들이 마찬가지다. 아무튼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의자를 집어들은 것은 결코 치사한 짓이 아니다. 나와 알렌이 접전하여 유혈사태가 벌어지려는 순간,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알렌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보고 있는 내가 몸을 움찔하고 반응 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났고, 알렌은 형편 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재수 없긴 하지만 알렌은 상급 장군이다. 그런 알렌을 한방에 때려 눕힐만한 인물은 이 곳에서도 몇 명 없었다. "씨발,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인상을 찡그린 채 그런 말을 내뱉은 사람은 스웰리어 스윈 백작이었다. 알렌은 정신이 없는지 머리를 흔들며 스윈을 올려다 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스윈은 목을 좌우로 꺽으며 카인트 백작에게 말했다. "장 내가 너무 시끄러워서 조용히 좀 시켰수다. 왜? 불만 입니까?" 순간, 카인트 백작은 눈을 부릅뜨며 살기를 뿜어냈다. 제길, 이대로 가단 적군과 싸우기도 전에 내부 분열로 전멸하겠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내 탓이 컸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줄 모르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상 닥치게 되니 난감하였다. 난 이제 어쩌냐는 뜻으로 지니를 쳐다 보았다. 지니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동요하지 말고 그냥 밀어붙이란 뜻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니는 다이케 후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둘의 싸움을 중재하라는 뜻이었다. 디아케 후작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디아케 후작이면 연륜과 직위면에서 남들보다 위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군에 관한 그의 실권은 거의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이 몸소 나서면 웬만한 사람은 조용히 물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윈은 웬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늙은이는 빠져." 연세가 지긋하신 분께 말투가 너무 싸가지 없지 않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스윈은 원래 말버릇이 이렇다. 지니는 상대방의 신분과 성별, 직위 등에 상관하지 않고 모두에게 존댓말을 쓰는 반면, 스윈은 그 반대였다. 상대가 왕이든 공작이든 노인이든 상관 않고 반말을 찍찍 내뱉었다. 그래도 왕에게는 그나마 존댓말을 좀 섞어서 한다. 디아케 후작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닥쳐라 이 놈!" 주름이 가득한 눈가와는 달리 눈동자는 번뜩거리며 생기가 가득했다. 스윈은 인상을 찡그리며 디아케 후작을 노려 보았다. 순간, 둘의 몸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옆에서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다. 잠시 후, 스윈이 먼저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리 듯이 말했다. "쳇! 늙은이가 목소리만 커가지고." 정말로 둘이 싸웠으면 어떻게 됐을지 몰랐지만, 아무튼 이번은 스윈이 먼저 고개를 꺾은 것이다. 그래도 디아케 후작이니까 한 수 저준 것 같다. 만약 카인트 백작이었으면 유혈사태가 났겠지. 스윈이 자리에 앉자 장 내는 순식간에 가라 앉았다. 디아케 후작은 주위를 둘러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에 앉으시오." 목소리도 그렇게 크지 않았고 어조도 부드러웠지만, 반드시 따라야 할것만 같은 강제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켈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앉았다. 스윈까지 한 수 접어주었는데 자신도 이쯤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알렌은 바닥에서 일어서 비틀거리며 자리로 걸어갔다. 난 손에 들고 있던 의자를 내려 놓고 앉았다. 한 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까의 사건 때문에 공기가 너무 차가워져 있어 누구도 말을 꺼낼 생각을 못 하는 것이다. 한참 후, 키에라 왕은 여러 귀족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비록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다고는 하지만 분명 아이리스 공작 님께서는 군의 참모총장이십니다. 좋은 책략을 말하는 것은 누구나 자격이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참모입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새로운 책략을 생각해 내, 그것을 쓰겠다고 하시면 여러분들께서는 그 의견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카인트 켈 백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런 새파란 애송이에게 수 만의 목숨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스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아이씨, 저 인간은 적군이야, 아군이야? 도와 줄 땐 언제고 어째서 지금 뒤통수를 치는 거야? 키에라 왕은 조용한 어조로 타이르 듯이 말했다. "카인트 백작 님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군의 위계질서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법입니다. 비록 틀린 명령을 내리셨다 하더라도 아이언스 공작 님이 참모총장인 이상 여러분들은 그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한 것은 저 아이리스 키레아입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저를 거역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참모는 아이언스 공작 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군단 참모로 사일런스 백작 님과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이 계십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책략을 말씀하신다하더라도 반드시 두 분 중 한분이 동의를 해야만 책략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아이언스 공작 님의 책략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카인트 백작은 목에서 울리는 작은 심을 소리만 내뱉을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은 키레아 왕의 말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현재 아이리스의 참모 체계는 한 명의 참모총장과 두 명의 군단참모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사단에 배치된 참모들이 따로 있다. 사단 참모들은 발언권이 약하고 사단 내에서만 권한을 가지므로 실제 군사 회의에서는 참모총장과 군단참모만이 책략을 짜내는 것이다. 이것은 축구 경기에 주심·부심 제도와 비슷하였다. 즉 참모총장 한 명의 발언은 군단참모 두 명의 발언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말해도 사일런스 남매가 사이 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반대를 한다면 그 책략은 승인을 얻을 수 없다. 반면 사일런스 남매가 지금 당장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책략을 제시하더라도 내가 지랄 같이 반대를 해대면 그 역시 승인을 얻을 수 없다. 하나의 책략이 승인을 얻으려면 반드시 참모총장과 한 명의 군단참모의 동의가 있어야만 한다. 지금 켈은 내가 헛소리를 해대면 사일런스 남매가 반대를 하며 쪽을 주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미 사일런스 남매는 사전에 나와 짰기 때문이다. 지금 켈이 하는 짓은 괜히 짜고치는 고스톱 판에 껴서 쓰리고에 피박, 광박 다 쓰는 짓이었다. 키에라 왕은 나에게 말했다. "아까 화공을 쓰신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최대한 무게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긴 하지만 전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아이리스의 공작이고 군의 참모총장입니다. 그 동안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지냈기로서니 몇몇 분들께서 저를 만만하게 보시고 계시는 군요. 카인트 백작 님과 카인트 자작 님." 난 번뜩이는 눈빛으로 카인트 부자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절대 용서치 않겠습니다. 하극상은 군의 위계질서 자체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으니까요. 다음에 한번 더 이런 일이 생긴다면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게 하겠습니다." 순간, 알렌은 눈을 부릅뜨며 나에게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켈은 손을 내밀어 알렌을 막으며 어디 한번 지켜보자는 눈짓을 보냈다. 저 알렌이란 놈은 진짜 아버지 하나 잘 둔거다. 만약 지금 나에게 달려 들었으면, 당장 영창 보낼 생각이었다. 알렌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 보았다. 잠시 후, 두고보자는 뜻 같았다. 그래. 잠시 후에 두고보자. 니 면상 일그러지는 것을 똑똑히 보아 주마. 난 씨익 웃으며 장 내를 둘로 보았다. 그리고 샤이 사일런스 백작에게 말했다. "부탁하신 지도 가져오셨나요?" "예." 일루니아는 사무적인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에 놓아둔 지도를 탁자 위에 폈다. 지도의 크기는 탁자를 반 정도나 가릴만큼 컸다. 이 지도는 케이튼 성과 그 주변의 지형을 나타낸 지도였다. 지도에는 아무 것도 써져있지 않았다. 이제부터 내가 써야하는 것이다. 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니는 나를 보더니 목을 살짝 꺽어보이며 의미 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난 눈을 크게 뜨며 웃음을 지었다. * 난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그것은 일루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의 몸으로 3일 동안 밤샘하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몸보다는 머리가 더 지친 것 같았다. 머리를 많이 굴리면 머리에 쥐가 난다던데, 일루니아는 정말로 쥐가 났는디 두 손으로 머리를 주무르는 시늉을 했다. 지니는 꽤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저렇게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누가 3일 밤을 샌 사람이라 믿겠는가?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드디어 끝났네요." "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 "제가 한게 뭐 있다고. 수고는 두 분께서 하셨지요." 솔직히 내가 이번 회의에 왜 참가했는지 모르겠다. 뭐 좋은 생각도 몇 개 내긴 했지만 말이다.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 회의 결과는 10일 후에 군사 회의에서 발표하도록 하지요. 전 그전에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책략은 전부 아이언스 공작 님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고 전부 아이언스 공작 님이 짠 것입니다. 저와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은 아무 것도 도와드리지 않았습니다." "예!?" 난 놀라서 눈을 번쩍뜨며 되물었고 그것은 일루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일루니아는 그대로 반쯤 잠든 상태에서 완전히 깨어나 지니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니는 외눈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 님을 참모총장에 추천한 것은 저 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 이유는 대내외에 우리 아이리스가 재기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는 마법을 제외하시면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능력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전투력 면은 어느 정도 제한다 쳐도 참모로서의 능력은 많이 떨어지지요. 저는 처음에 당신을 보았을 때, 당신이야 말로 아이리스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인물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회의를 통해 저의 확신이 맞았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내가 아이리스를 일으켜 세울 인물? 하하. 황당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군. 세상에 인재가 다 죽었나? "하하, 농담하지 마세요." 난 말을하다 지니의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 지니의 눈빛이 아니었다. 특별히 번뜩거린다던가 살기를 뿜어낸다던가 하는 것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사람의 마음을 읽는 눈빛. "세부적은 책략을 짠 것은 저와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이지만 전체적인 책략을 짠 것은 아이언스 공작 님이십니다. 지금 아이리스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3기 전란을 일으킨 아이리스 키에티트 님과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이 지배하던 그 시대를 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타남으로써 그 때가 도래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분명 아이리스가 승리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를 이끈 것은 당신이어야 합니다." 지니는 말을 마치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난 한동안 그의 눈을 마주보다가 어이 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일루니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지니가 하는 말은 자신과 일루니아가 힘들게 짜낸 책략을 나보고 가로채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 책략대로만 적이 따라준다면 승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연 그 공은 내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일루니아는 뭐라고 말할까? "맞는 말이야. 지금 아이리스는 정치, 군사, 외교 등 모든 면이 적국에 비해 열약해. 이런 환경에서 자바스 같은 강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려면 백성들 모두가 믿고 따를만한 사람이 필요해. 영웅이라는 거 말이야.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과 애국심을 심어줘야 해. 지금 영웅이 될만한 사람은……." 일루니아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당신 밖에 없을 듯 하군요. 아이언스 공작 님." 난 너무 황당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사일런스 백작 님은 그렇다치더라도 일루니아 백작 님, 아니, 샤이 사일런스 백작 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지니는 평소처럼 눈을 가늘게 뜨더니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럼 발표는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해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군사 회의에서는 주늑드실 필요 없습니다. 참모총장은 왕조차 뭐라고 할 수 없는 위치입니다. 다른 귀족들이 기어오른다면 권위로 눌러 버리세요." 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니는 웃으며 방을 나섰다. "그럼 전 일을 처리하러 가보겠습니다. 3일 밤을 새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조금 쉬십시오." 지니가 방을 나갔으니, 이제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은 일루니아 뿐이다. 난 일루니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샤이 사일런……." 난 일루니아를 부르려다 말을 멈추었다. 일루니아는 어느새 침대 위에 올라가 잠을 자고 있었다. 혹시 자는 척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가까이 다가갔지만, 숨소리를 보니 자는 것이 확실했다. 이런, 안경도 벗지 않고 자다니. 난 그녀의 안경을 벗겼다. 일루니아가 안경을 벗은 모습은 어떻게 보면 귀여웠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28살의 노처녀라 생각할까? 난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 위에 이불을 덥어 주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려 하였지,만 그녀가 자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라고 하면 조금 오바(Over)고, 그냥 언제나 도도한 모습만으로 보이던 여인이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것이 재미있어 나로 하여금 구경하고 싶은 욕구를 자아내게 하였다. 난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그녀가 자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꿈 속에서 내가 자는 모습을 구경해야 했다. * "전에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 농성전을 주장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계책은 문제점이 많습니다. 일단 이 계책은 적들이 공성전을 할 것이라는 것을 염두해두고 있습니다. 그럼 적들이 공성전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바스가 하려는 것은 공성전이 아닙니다. 케이튼 지역은 자바스와 헤리오 양국에 국경과 맞닿아 있는 곳입니다. 만약 자바스가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 이 곳에서 무력 시위만을 벌인다면, 위협을 느낀 헤리오는 국경 부근에 병력을 증강시킬 것입니다. 만약 자바스와 헤리오가 동맹을 맺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자국은 두 나라의 병력에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는 보급선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자바스 군에게는 보급선이 필요가 없습니다. 위의 식 대로라면 전쟁은 3개월만에 끝날테니까요. 분명 자바스 군은 3개월치 식량을 한번에 운반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성만 믿고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는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난 말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람들은 굳이 놀라운 표정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에 회의 석상에서 비실거리던 놈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어려운 소리만 골라서 해대는데 놀라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놀란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말한 농성전의 위험성이었다. 디아케 후작은 지니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 말이 정말이오, 사일런스 백작?" 마치 못 믿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지니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언스 공작 님의 말씀에는 틀린 점이 없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농성전을 주장했던 이유는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하시니 전 그것에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지니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지니의 말은 당대 최고의 모사의 말이다. 당대 최고의 모사가 별 볼일 없는 놈 취급했던, 나 아이언스 히로의 말을 인정한 것이다. 난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자국은 얼마 전 대관식을 치뤄 왕국을 선포함으로서 재건국을 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이 처들어 오는데 성 안에 틀어박혀있는다면 군의 사기에도 도움이 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3만으로 9만 가까이 되는 군대를 상대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알렌이었으면 단단히 쪽을 줄 작정이었지만, 아쉽게도 디아케 후작이었다. 디아케 후작은 평소에 나에게 잘 해주고 나를 도와주려 애쓴 사람이기에 난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난 부드러운 어조로 디아케 후작에게 말하였다. "디아케 후작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3만으로 8만 7천이나 되는 군대와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요. 비록 우리는 훈련된 정예병이고 저들은 얼마전 징병을 하여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병사라 하여도 숫자의 차이는 무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이긴다 하더라도 병력의 피해가 크면 다시는 재기하지 못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하기에 제가 화공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난 일루니아가 펴 놓은 지도를 보며 말했다. "케이튼 성으로 오는 길 왼쪽에는 키히르시아라는 커다란 숲이 있습니다. 이 숲은 초묵이 빽빽하게 자라있고 길이 구불구불하여 화공을 쓰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마침 지금은 가을이라 날씨마저 건조합니다." 스윈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한쪽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그 숲으로는 어떻게 끌어 들일건데? 그 놈들이 멀쩡한 길 놔두고 그 쪽으로 돌아갈 리 없잖아." 난 씩 웃으며 말했다. "돌아가게 해야지요." "저도 한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손을 번쩍 든 사람은 시잔 디어린 자작이었다. 제 3사단장 부관. 다시 말해 스윈의 부관. 저 사람은 회의에 와서 한 마디도 안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솔직히 지금도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 어찌 되었든 스윈의 부관이면 내 편인 셈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시잔 자작은 두 손을 깍지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궁금한 것은 바람의 방향입니다. 화공을 쓸 때는 바람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바람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부는지 궁금합니다." 스윈이 옆에서 맞장구쳤다. "그래.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어." 아주, 주책을 떨어라. 난 당당하게 말하였다. "사실 그 점에 대해 설명을 하려했습니다. 질문하셨으니 지금 말씀드리지요." 난 일루니아에게 눈짓을 하였고, 일루니아는 다른 지도를 꺼내 처음에 폈던 지도 위에 폈다. 그 지도에는 키히르시아 숲의 세부적인 모습이 그려저 있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숲 같이 자연이 기가 풍부한 곳은 기가 모이는 곳이 있고, 기가 빠져나가는 곳, 기가 헝클어진 곳 등 여러 곳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나무와 풀, 바위 등 자연적인 물체들이 하나의 진을 형성하며 생겨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저의 특수 첩보 요원(라이코스)으로 하여금 기가 풍부하여 마나가 증폭 될 수 있을만한 장소를 찾아내게 하였습니다. 찾아 낸 장소는 이 곳입니다." 난 펜을 집어 들어 지도 여기저기에 표시를 하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기에는 우리 측 마법사가 너무 약합니다." 현재 아이리스에 4클래스 이상인 마법사 수는 나를 포함하여 13명에 불과하다. 최고 레벨로는 6클래스 익스퍼트까지 있지만 비리비리한 늙은이여서 마법력이 나의 반도 안 된다. 내가 5클래스 마스터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움직 일 수 있는 써클이 5써클이 한계이기 때문이다. 실제 나의 마법력은 7클래스 마스터도 상대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나만 잘나면 뭐하나? 다른 놈들이 형편 없는데.(사실 놈들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전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어서) "그래서 저는 이 곳에다가 마법을 증폭시키는 마법진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4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들이 이 마법진 안에서 마법을 쓰고 3클래스 이하 마법사들 두, 세 명 정도가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 넣으면 적은 양의 마나를 몇 배로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순간,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마나를 증폭시키는 마법진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저 사람들은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저 정도로 놀란 것이다. 만약 마법사가 들었다면 벌써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실제로 아무리 자연적으로 마나를 증폭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게 증폭 마법진이다. 이것은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직접 만들어 낸 것 같은데, 그 늙은이는 진짜 천재였나 보다. 거의 인간의 머리로는 생각해 낼 수가 없는 마법진이였다. 솔직히 나 그거 그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 무슨 마법진이 그리도 복잡한지. 그런데 그리기도 힘든 마법진을 만들어 낸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놈일까? 그 때, 그 늙은이 시체 두개골을 열어봤어야 하는건데. 아무튼 그 마법진을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전쟁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3클래스 이하의 마법사들도 사용 할 수 있다는 점과 마나를 몇 배로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말이다. "정말 그런 마법진이 있습니까?" 키레아 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 물었다. 난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누굽니까?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후계자가 아닙니까? 그 마법진은 그 분께서 살아 생전에 만들어낸 것으로 오직 저한테만 알려주신 겁니다." 내 말에 키레아 왕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그 동안 너무 만만하게 보인 탓에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나 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마법 지식에서만큼은 나를 능가 할 사람은 없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말이다. 내 마법 지식은 드래곤과 맞먹는다. 아니, 어쩌면 드래곤을 능가 할 수도 있다.(실제로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마법력은 웬만한 드래곤과 맞먹는다고 전에 크로니스가 말 했었다) 난 숨을 들이 마시며 계속 말했다. "아시다시피 화공을 쓰게 되면 적들을 혼란에 빠트릴 수 있고 부대 간의 연락 체계를 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군 부대의 연락 체계도 끊어지게 됩니다. 불이 여기저기서 치솟으면 부대 간의 긴밀한 연락이 불가능해지고 각 부대는 독자적으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번 작전은 서로 간의 긴밀한 연락이 필수입니다. 그래서 연락병으로는 당대 최고의 앵무새, 라이코스를 이용할 작정입니다." "오오!"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라이코스를 연락병으로 사용한다는 것. 이건 정말 획기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방법을 생각해 낸 사람은 바로 아이언스 히로, 즉 본인이다. 내가 전쟁터에 나가서 죽자살자 싸우는데 라이코스 혼자 놀고 있으면 안 되지 않은가? 사실 이 책략의 전체적인 부분은 내 머릿속에서 나온 거다. 난 현재 아이리스 상황이 박망파(博望坡) 전투와 비슷하다고 생각을 했고, 박망파 전투에 대해 사일런스 남매에게 얘기해 주었다. 박망파 전투는 삼국지에 나오는 전투로 유비가 제갈 공명을 얻은 직후 일어난 것이다. 당시 유비는 신야라는 작은 고을과 수천 밖에 되지 않는 군사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 때, 조조 군의 하후돈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이 곳에 처들어 온다. 조운은 적은 군사로 하후돈의 대군을 박망파로 유인한 다음, 대군이 박망파 안으로 들어오자 사방에 불을 질렀고 당황한 군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大敗)하였다. 사일런스 남매는 이 얘기를 기초로 현실에 맞게 개조하여 확실한 책략을 짜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책략을 짜는데 있어 내가 가장 큰 공로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내가 굳이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사일런스 남매가 알아서 잘 했을 것 같다. "이미 키히르시아 숲을 완벽히 조사하여 군사를 매복해 놓을만한 장소를 물색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군사가 전부 매복을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함정을 파놓는 등 부비트랩을 이용 할 생각입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몇가지 의문점이 생기는 군요. 첫째로 부비트랩을 이용 하신다고 하셨는데 적들은 이미 코 앞까지 와있습니다. 지금 함정을 설치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둘째로 적의 수는 8만 7천입니다. 불을 지른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당황하지 않고 반격을 한다면 오히려 아군이 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이언스 공작 님?" 띠꺼운 표정을 짓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질문한 사람은 카인트 알렌 자작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고 '너 한번 엿 먹어봐라' 하는 심정으로 물어 본 것 같다. 하지만 이 녀석은 잘못 집어도 한참을 잘못 집었다. 이미 그것에 대한 대답은 완벽히 준비했단 말씀.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나선 인물은 사일런스 지니 백작이었다. 지니는 외눈 안경을 만지며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난 고개를 끄덕여 '그래 니가 말해라'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지니는 알렌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첫째로 지금 함정을 설치하기에는 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카인트 자작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적군은 이미 가까이 와 있습니다. 함정을 설치할 시간도 없을뿐더러 잘못해서 적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저에게 비밀리에 키히르시아 숲에 함정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함정의 설치는 거의 끝난 상태이니, 그 점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지니의 말에 알렌은 인상을 찌푸렸고, 다른 귀족들은 탄성을 질렀다. 미리 준비해 놓은 아이언스 공작의 선견지명에 감탄한 것이다. 물론 나는 지니에게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자기가 해 놓고선 나한테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 것이다. 난 지니의 말을 이어서 말했다. "둘째는 제가 말씀 드리지요. 적군이 8만 7천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3만은 강남 땅에서 아이리스를 견제하던 군사. 그리고 2만 7천은 이번에 새로 징병한 군사. 1만 2천은 제이서스 기사단. 8천은 훈련된 궁병. 1만은 치중. 이중 정예병이라고 불릴만한 군사는 대충 2만 5천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아이리스를 견제하던 군사와 이번에 새로 징병한 군사의 대부분은 과거 아이리스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만약 화공을 당해 수세에 몰리고 지휘 개통이 마비된다면 이들은 분명 우리 측으로 전향 할 것입니다." 이것은 지니가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적의 군세가 크긴 하지만 알고보면 별거 없다는 얘기다. 적의 병력 중 대충 4, 5만이 과거 아이리스 백성이었다. 이들은 강제 징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바스 편에 선 것이다. 하지만 불을 질러 적의 지휘 계통을 마비시킨다면 우리 쪽으로 전향 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전향을 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저항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부 지니가 말해 준 것이다. "그런데 적들을 어떻게 키히르시아 숲 속으로 끌어들일 생각입니까?" 질문을 한 것은 시잔 디어린 자작이었고, 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적군의 총사령관은 가이즈 칼슈타인 백작이고 부사령관은 필립스 일라이드 백작입니다. 가이즈 백작은 성격이 급하고 호전적인 반면 필립스 백작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입니다. 그 둘이 잘 조화를 이루었기에 제이서스 기사단이 이제까지 유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적은 3개의 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1군단 군단장은 총사령관 가이즈 백작이 맞고 있고 그의 부관은 샤크 다비르 자작입니다. 그리고 2군단 군단장은 부사령관인 필립스 백작이고, 부관은 카루드 라이어즈 남작입니다. 3군단 군단장은 그레이엄 하스핀 자작이고 그의 부관은 크레이안 알리 남작입니다." 난 말을 멈추고 잠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제 이 이름들 외우느라 정말 힘들었다. 무슨 이름이 그렇게나 긴지. 그냥 세 글자로 하는 것이 산뜻하고 좋잖아. "방금도 말했지만 적의 총사령관은 가이즈 칼슈타인 백작입니다. 이 자는 성격이 급하므로 미끼를 던져주면 분명 그것을 물려 들것입니다." "그렇게 만만하진 않을 걸." 새끼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며 입을 연 사람은 스웰리어 백작이었다. 스윈은 손톱에 묻어 나온 귓밥을 후 불며 말을 이었다. "그 새끼 성격 급한 것은 나도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그 새낀 전쟁터에서 수 십년을 굴러먹은 놈이야. 웬만해선 얕은 수 따위에 걸려들지 않을 걸." 태도는 건방지고 말투는 싸가지 없었지만 상당히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제 지니에게 들어 이 몸도 알고 있다는 말씀.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커다란 미끼를 던져 주어야지요. 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삼키고 싶어 할만큼 커다란 미끼를." 회의는 이후로도 한참 동안 계속 되었다. 역시 그 긴 내용을 전부 다 외운다는 것은 무리였기에 난 중도에 몇번이나 틀릴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 때마다 지니가 나서 대타로 설명 해 주었다. 당대 최고의 모사들(나 빼고 사일런스 남매)이 3일 밤을 새서 짠 책략은 완벽했고 그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알렌은 끝까지 몇 가지를 걸고 넘어졌지만 난 가볍게 씹어 주었다. 나의 책략은(정확히는 사일런스 남매의 책략) 군단참모 두 명의 동의를 얻어 만장일치(그래봐야 세 명이지만)로 승인을 얻었다. 책략의 설명이 끝나자 난 각 장군들에게 임무를 부여해 주었다. 알렌은 역시 띠꺼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군말 않고 내 명령에 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스윈도 따르고 디아케 후작도 따르고, 사이런스 남매도 따르고, 심지어는 왕까지 따르는데 지가 감히 개길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하여 회의는 끝났고 이제는 며칠 후에 있을 전쟁만이 남았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깨지고 폭풍을 온 몸으로 맞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폭풍이 이길지 내가 이길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Part 6. 숲속의 불 1671년 9월 16일 자바스 군대 8만 7천은 케이튼 지역으로 들어왔다. 창을 들고 걷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무리한 행군을 둘째치더라도 자신의 나라를 공격해야 한다는 사실에 힘이 쭉 빠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에도 탈영을 모의하던 십 수명의 병사들이 목이 잘렸다. 부대 곳곳에 첩자를 심어 놓았기 때문에 조금의 불손한 움직임에도 목이 달아나기 십상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높이 솟아 있는 깃발은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펄럭거렸다. 완전히 펼펴진 깃발에는 포효하는 황금 사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제이서스 기사단의 문장이었다. 자바스 군은 아이언스 공작이 말했던 대로 세 개의 군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기마대가 주축을 이루는 1군단과 보병이 주축을 이루는 2군단. 그리고 수송 부대와 호휘병들이 주축을 이루는 3군단. 총사령관이자 제이서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가이즈 백작은 오늘이 넘기기 전에 케이튼 성에 도착 할 생각이었다. 부사령관이자 2군단 군단장인 필립스 백작은 가이즈 백작의 옆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닙니까?" 가이즈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내로 케이튼 성에 도착해 진채를 세워야 하네."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걸세." 필립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이리스 군대가 성 밖으로 나올 것도 아니기에 별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필립스 백작은 말을 몰아 자신이 지휘하는 2군단으로 돌아갔다. 정오를 지나 해가 조금씩 기울 때쯤, 전방을 살피던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앞에 말을 탄 병사들이 있습니다!" 가이즈 백작이 고개를 돌려 보니, 100명 정도 되는 무리가 말과 함께 있었다. 조금씩 흩어져서 주위를 살피는 것이 정탐 나온 병사들이 분명하였다. 가이즈 백작은 그들의 무리들 중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백박의 머리카락과 백발의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과 그 노인의 옆에 서 있는 백금발 머리의 청년이었다. 가이즈 백작은 크게 소리쳤다. "아이리스 키레아! 디아케 발리스!" 그의 목소리에 아군은 물론이고 정탐하는 병사들까지도 깜짝 놀랐다. 그들 무리는 자바스의 군대를 발견하더니 황급히 말 위로 올라탔다. 가이즈 백작은 앞 뒤 잴 것 없이 그들을 향해 말을 달렸다. 무력 시위만 할뿐 절대 아이리스를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긴 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틀렸다. 지금 이 곳에서 아이리스 키레아를 사로 잡기만 한다면 전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전부 끝나버리는 것이다. 키레아 왕은 디아케 후작과 몇 마디 말을 나눈 다음,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디아케 후작은 10여 명 정도 되는 기마병과 함께 적들을 막아섰다. "네 이 놈들!" 디아케 후작은 커다란 외침과 함께 활을 당겼다. 다아케 후작의 활솜씨야 이미 전대륙에 소문이 쫙 나 있었다. 가이즈 백작은 날아오는 스피어만한 화살을 보고는 감히 막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몸을 비틀어 피했다. 그러자 가이즈 백작 뒤에 있는 기사 하나가 화살에 맞고는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자바스의 군대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디아케 후작은 겁을 먹었는지 말머리를 돌려 키에라 왕을 쫒아갔다. 가이즈 백작이 보니 그들이 가는 방향은 숲 속이었다. '숨을 생각인가?' 그 동안 무리한 행군을 계속한 덕에 군대의 이동 시간은 3, 4일 정도 단축 되었다. 키레아 왕이 몸소 정찰을 나온 것은 아직 자바스 군대가 케이튼 지역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 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곳에서 자바스 군을 만나게 되자 숲으로 숨으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가이즈 백작은 더욱 빠르게 말을 몰았다. "빨리 움직여라! 키레아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쫒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거리가 조금 좁혀졌다고 생각하면 다시 벌어지고, 놓쳤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눈 앞에 있었다. 1 군단장 부관 샤크 다비르 자작은 말머리를 가이즈 백작의 옆에 붙이며 말했다. "뭔가 이상합니다. 우리를 꾀어들이는 수작 같습니다." 가이즈 백작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키레아는 우리 군이 온 것을 모르고 정탐을 나온 것이다. 그리고 반란군의 잔존 세력들이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나?" 키레아 왕의 기마대는 키히르시아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바스 군대는 그들을 따라 숲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왔다. 들어가는 길은 넓었지만 갈수록 길이 좁아졌기에 자바스 군은 전열(戰列)이 흐트러지고 낙오자가 생겼다. 어느 정도 깊이 들어오자 가이즈 백작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적에 책략이 아닐까?' 가이즈 백작은 이쯤에서 쫒는 것을 멈출가,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눈 앞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군마가 보였다. 이미 멈추기는 늦었다. 어떻게는 빨리 키에라를 잡아야 한다. 가이즈 백작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눈 앞에서 달리는 군마 때문에 포기 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그저 힘을 다해 말을 몰 뿐이었다. 그러던 중, 눈 앞에서 달리던 군마들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가이즈 백작은 깜짝 놀라며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어디로 갔지?' 가이즈 백작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날은 저물고 주변에는 초목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였으며, 풀들이 얼기설기 엮어져있어 말을 달리기에도 무리 같아 보였다. 그제야 가이즈 백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길! 언제 여기까지 들어왔지?' * 한 마리의 종달새가 날아왔다. 종달새의 다리에는 작은 종이끈이 묶여 있었다. 한 병사가 종달새에게 다가갔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종달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는 조심스럽게 종달새의 다리에서 종이끈을 풀었다. 거기에는 한 마디 말이 적혀있었다. <시작해> 병사는 고개를 돌려 한 노인을 보며 말했다. "시작하십시오." 노인의 이름은 퓌른으로 4클래스 익스퍼트 마법사였다. 퓌른은 지름이 10m 가까이 되는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의 주위에는 2클래스 마법사 두 명이 있었다. 그 둘은 손을 내 밀어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퓌른은 눈을 감은 다음, 지팡이를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주문의 영창이 끝나자 퓌른은 눈을 번쩍 뜨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바람의 움직임이 온 몸에 느껴졌다. "윈드 스톰Wind Storm!" * 부사령관이자 2 군단 군단장 필립스 백작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20년 넘게 전장에서 살아온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병사들은 많이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좁은 숲길을 걷느라 발이 부르텄기에 여기저기서 불만이 들려왔다. 필립스 백작은 계속해서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냈다. 장수가 흔들리면, 병졸들도 흔들리는 법이다. "땅이 질펀하군." 땅에 심하게 젖었는지 말굽에 땅에 닿을 때, 몸이 약간 가라 앉는 느낌을 받았다. 며칠 전에 비라도 온걸까? '비? 요근래 비가 온적은 없었는데. 설마…….' 필립스 백작이 뭔가를 눈치 챈 순간, 뒤에서 병사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필립스 백작은 아까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젠장, 발이 다 젖었잖아. 뭐야? 이건 기름이잖아." '기름? 빌어먹을!' "멈춰! 멈추라고!" 필립스 백작은 목청껏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앞쪽의 병사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멈추려하였으나, 뒤에서 오는 병사들 때문에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 놈들아! 멈추란 말이다!" 2 군단장 부관인 카루드 라이어즈 백작은 필립스 백작의 옆으로 붙으며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백작님?" "제길 화공입니다! 화공!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며칠 간 비가 오지 않아 나무랑 풀들이 바짝 말랐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지세가 험해 쉽게 군사가 움직일 수……." 필립스 백작은 말을 하다 멈추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바람이……."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은 분명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다. 한 병사가 소리쳤다. "불이다!" 갑자기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한번 솟아오른 불길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전진하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집어 삼켰다. "퇴각하라!" 필립스 백작은 크게 소리쳤지만 병사들은 우왕좌왕 할뿐 도움이 될만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앞은 전군의 기마대 때문에 막혔을 것이다. 그리고 뒤는 후군이 끌고 온 막대한 양의 치중과 공성 병기에 의해 막혔을 것이다. 숲 길로 들어오며 기마대를 앞 세우고 군수 물자를 뒤에 두었다. 좁은 길 때문에 기마대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앞 길을 막을 것이고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는 뒷 길을 막을 것이다. "젠장!" 필립스 백작은 욕설을 지껄이며 말에서 뛰어 내렸다. 정상적인 길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니 샛길을 찾아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필립스 백작은 아직 불길이 미치지 않은 샛길을 찾아 달렸다. 병사들은 일관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좁은 길에서 계속 방황했다. 안 그래도 좁은 길인데 그곳에서 큰 몸동작으로 움직이니 밟혀 죽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훈련 한번 받지 못한 병사들이 태반이기에 그 정도는 더욱 심각했다. 필립스 백작이 먼저 샛길을 찾아 달리자 기사들은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 사방에서 치솟은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연기가 폐까지 가득 차올랐다. "제길! 어떻게!" 가이즈 백작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도를 생각해보았다. 병사들을 통제하는 것은 무리한 행군에 의한 피로와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1군단 군단장 부관인 샤크 다비르 자작이 가이즈 백작에게 말했다.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가이즈 백작은 신경질 적으로 외치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진군하라!" 어차피 뒷글은 병사들과 치중에 의해 막혀 있을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앞으로 전진하여 한시라도 빨리 이 숲을 빠져나가야 한다. 가이즈 백작의 이런 판단은 틀린 점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선두에 있는 5천의 기마대였다. 좁고 험한 길에서 덩치 큰 말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그 것은 아군의 생로를 막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부우웅-! 숲을 울리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가이즈 백작의 앞에는 연대 정도 되는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상하는 청안백우조의 모습을 그린 깃발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그들의 선두에는 아이리스 키레아와 디아케 발리스가 서 있었다. 순간, 가이즈 백작은 자신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도 잊고 적을 향해 돌격했다. "키레아!!!" 키레아 왕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칼을 빼들고 말을 몰아 뛰쳐나갔다. 챙-! 말머리가 맞붙음과 동시에 서로의 무기가 엇갈렸다. 가이즈 백작은 온 힘을 다해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키레아 왕의 실력도 만만치는 않았다. 뒤에서 두 명의 기사가 가이즈 백작을 돕기 위해 말을 달렸다. 그러자 디아케 후작은 화살을 시위에 먹여 당겼다. 퍽-! 퍽-!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가슴을 꿰뚫었고 두 명의 기사는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자바스 군은 어느 누구도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가이즈 백작은 점점 초조해졌다. 키레아 왕은 무리한 공격은 하지 않으며 방어하는데만 충실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려는 것이다. 가이즈 백작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창을 짐짓 크게 휘둘러 보인 다음,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퇴각하라!" 가이즈 백작을 비롯한 기사들은 황급히 샛길을 찾아 말을 달렸다. 그 와중에 말들끼리 부딪히는 바람에 낙마한 기사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 키레아 왕은 도망치는 가이즈 백작을 보고만 있을 뿐, 뒤 쫓지 않았다. 디아케 후작은 어느새 키레아 왕의 옆에 붙어있었다. 키레아 왕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이즈 백작 님께서 무사히 도망치시기를 빌어야 겠군요." 디아케 후작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길에 미친개한테 물리지만 않는다면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병사들은 이미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키레아 왕은 크게 소리쳤다. "항복하라! 무기를 버리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다지만 자바스 군의 수는 아이리스에 네, 다섯 배였다. 하지만 혼란과 지휘 체계의 마비, 피로 등으로 실제로 싸우는 병사들은 제이서스 기사단 뿐이었다. 그 외의 병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전부 무기를 땅에 던지고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몇몇 지휘관들이 항복하려는 병사의 목을 치자, 흥분한 병사들은 지휘관을 때려 눕히고 무기를 버렸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제이서스 기사단은 싸움을 포기하고 샛길로 도망쳤다. * 3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그레이엄 하스톤 자작은 앞쪽 전체가 불길에 뒤덮힌 것을 보고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 할 수 있었다. 숲의 입구는 자신들이 끌고 온 군수 물자에 의해 완전히 막혀 있었다. 그레이엄 자작은 스스로 퇴로를 막은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최대한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바람이 거세졌다. 이 정도라면 이 곳까지 불길이 닿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레이엄 자작은 순식간에 상황 판단을 끝내고 소리 질렀다. "모든 물자를 버리고 퇴각한다!" 그러자 3군단장 부관인 크레이안 남작이 소리쳤다. "지금 제 정신이십니까? 이 것을 포기하면……." "그럼 목숨을 포기하고 싶나!? 최대한 빨리 전열 갖추어 퇴각해야 한다!" 크레이안 자작의 그런 판단은 매우 옮은 것이었다. 지휘관이 침착하고 빠르게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제법 명령에 따랐다. 3군단은 재빨리 근처에 넓게 트인 길로 도망쳤다. * 사일런스 백작은 1개 대대 병사들과 함께 숲의 입구 쪽에 매복해 있었다. 지니는 자바스의 3군단 군사들이 재빨리 전열을 갖추어 퇴각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명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엄 자작 님께서는 상황 판단이 빠르신가 보군요?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어찌되었든 우리에게는 고마운 일이니 빨리 가서 놓고 가신 물건들을 줏어와야겠군요." 사일런스 백작과 병사들이 있는 위치는 잠시 후면 화마(火魔)가 덮치는 구역이었다. 병사들은 조금 불안해하는 반면 사일런스 백작은 옅은 웃음을 짓고 있을뿐, 다른 표정 변화는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순식 간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밀려오던 화마는 아이리스 병사들을 피해 다른 쪽으로 방향을 꺽었다. 사일런스 백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지휘를 잘 하시는군요." 이번 전투에 총책임자는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었다. 아이언스 공작은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과 함께 숲에 가운데 지역에서 라이코스를 이용해 전군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지금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도 그것이었다. 사일런스 백작은 병사를 몰고 길로 나왔다. 그리고 군수 물자를 실은 마차들을 나무와 풀로 숨겨 놓았던 샛길로 운반하기 시작했다. * 불길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불길은 하늘의 별이 무색할 정도로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타오르는 숲을 감상하였다. 어느새 예민해진 감각들은 불어오는 바람 하나 놓치지 않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고기 익는 냄새가 풍겨왔다. 지능이 높을수록 고기가 맛있다는데 사람 고기는 맛이 어떨까? 일루니아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난 무덤덤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저들 중 몇 명이나 살 수 있을까요?" "반 정도는 죽을 겁니다." "반이면 대략 4, 5만은 되겠군요." 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라이코스를 보았다. 라이코스는 주변에 백여마리에 가까운 종달새를 모아 놓고 설교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십 여 마리의 종달새들은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갔다. 난 한숨을 내쉬며 일루니아에게 물었다. "왜 결혼 안 하시는 거에요? 순간, 일루니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녀에 표정에 당황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되요." 잠시 후, 일루니아는 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 님 같은 남자와 결혼하게 될까봐 무서워서 결혼을 못 하는 겁니다." "그러셨군요." 튕기기는. 난 다시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수만이 죽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내 한 목숨만 살아있으면 전혀 상관이 없지요." 적들이 살아 남기는 글렀다. 불에 타 죽은 자만도 수만에 이를 것이다. 도망칠 샛길은 라이코스를 통해 전부 조사해 놓았다.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병사들은 샛길에 설치해 놓은 함정을 피하지 못 할 것이다. 설사 피한다 해도 30여 개의 소대와 9개의 중대가 곳곳에 매복해있어, 적들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진짜 운이 좋아서 숲을 빠져 나온다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과 찐하게 한판 떠야 할 것이다. 사일런스 남매와 내가 짠 책략은 그렇게 완벽했다.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샤이 사일런스 백작이 각본을 짰고 사일런스 백작은 짜여진 각본으로 연극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연극 무대를 청소했다. 그 만큼 한 일이 없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내 손으로 수만을 죽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별로 감흥이 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루니아와 같이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것일 수도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일루니아는 내가 빤히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안경 너머로 나를 노려보았다. 난 그런 그녀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 지금 그녀의 표정은 귀엽다고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 * 2군단 군단장인 필립스 백작과 부관인 카루드 백작은 샛길로 몸을 달리고 있었다. 뽑아 든 칼은 적을 공격하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걷는데 방해가 되는 나무나 풀을 자르는데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피로와 두려움 때문에 적이 나타난다 해도 칼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 할 것 같았다. 필립스 백작은 길을 헤치고 나가던 중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재빨리 칼을 들어 휘둘렀다. 챙-! 화살 하나가 힘없이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필립스 백작은 깜짝 놀라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외쳤다. "복병이 있다! 조심해라!" 필립스 백작이 그렇게 외치는 동안에도 뒤에 병사들은 하나, 둘 픽픽 쓰러졌다. 날이 어두운데다 나무라는 엄폐물에 가려져 있으니 복병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필립스 백작은 날아오는 화살의 방향을 보며 복병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저기다!" 위치를 파악한 필립스 백작은 칼을 고쳐 들고 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카루드 백작과 병사들이 쫓았다. 이런 숲 속에서 한 지점에 매복 할 수 있는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병력으로는 우리가 우세하다. 필립스 백작의 이런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지만,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그것은 복병들이 일부러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조금 달리자 적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그 순간, 필립스 백작은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지니가 병사들을 데리고 와 파놓은 함정이었다. 떨어진 것은 필립스 백작만이 아니었다. 카루드 백작을 비롯한 수십의 병사가 같이 떨어졌다. 필립스 백작은 함정에서 빠져 나오려 하였다. 그 순간 위에서 빗발치듯이 화살이 날아왔다. 그 화살은 필립스 백작의 두개골은 물론 신체 각 부위를 관통하였고, 그것은 카루드 백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함정에 빠져 이름도 없는 궁병에게 죽다. 황금 사자의 깃발 아래 수십년 동안 전쟁터를 누빈 맹장치고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순식간에 지휘관을 잃어버린 2군단은 어찌 할 줄 몰랐다. 그 순간, 곳곳에서 복병이 튀어 나와 그들을 포위하였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대부분이 그 말을 따랐지만,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무기를 고쳐 들고 싸웠다. 하지만 이내 사기 저하와 피로 때문에 죽임을 당하거나 무기를 떨구었다. * 가이즈 백작이 이끄는 1군단은 샛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샛길은 말이 다니기 힘들었기에 아예 길을 새로 만들며 걸었다. 앞 선 병사들이 벌목도를 꺼내 들고 초목을 자르며 말이 다닐 수 있을 만큼 길을 넓히는데 주력했다. 가이즈 백작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실핏줄이 붉어져 나온 것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더욱 터지다 못해, 폭파 할 것만 같았다. '제길! 어쩌다 이렇게 됐지!? 어쩌다!'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성안에 얌전히 틀어 박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리스 군이 언제 나와서 이 곳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불은 대체 누가 지른 것인가? 아니, 불을 지를 생각을 해낸 사람은 대체 누군가? 절대 질 리 없는 싸움이었다.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쪽은 적의 세배에 다다라는 병력에다가 용맹한 제이서스 기사단까지 있다. 적은 기껏해야 패잔병들 긁어모은 잡병들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가이즈 백작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그리고 말은 무엇에 걸렸는지 제대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곳곳에 팽팽하게 걸어놓은 밧줄이 말의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가이즈 백작은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아이리스 놈들!!!" * 3군단을 이끄는 그레이엄 자작은 다른 군단에 비하면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화살들과 함정, 그리고 복병들에 의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짐과 동시에 병사들의 숫자까지도 떨어졌다. 그래도 그레이엄 자작의 신속한 퇴각 결정과 정확한 지휘 덕에 불길을 뚫고 도망치는 병사들치고는 꽤 질서가 잡혀 있었다. 그레이엄 자작은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병사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쉈다. '3군단이 이 정도면…….' 제일 뒤쪽에 있던 병사들마저 이 지경까지 왔다. 그럼 숲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1군단과 2군단의 상황은 더욱 심각할 것이다. 연기와 함께 사람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람이 계속 변화하는 바람에 불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어떻게 이 정도의 바람을 부를 수 있는 거지?' 아이리스는 패망한 국가이니 만치 마법사 수가 많지도 않았고 능력도 형편없었다. 지금 바람이 부는 모습을 보아하니 분명 마법사가 비는 것이 틀림없는데 아이리스 마법사의 능력으로는 이런 바람을 오랜 시간 동안 불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설마 아이언스 공작이 개입되어 있는 건가?' 넨 이드와 함께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 아이언스 히로. 그라면 분명 오랜 시간 마법 바람을 일으키게 할 무슨 비책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레이엄 자작은 아이리스에 대한 분노와 아이언스 히로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멍청하게 적의 계략에 말려든 가이즈 백작에 대해서도 분노가 일었다. '제길!' 그레이엄 자작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묵묵히 말을 몰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구를 원망하는 것보다 빨리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 동이 틀 때쯤, 아이리스는 수만의 포로를 생포하고, 수만의 자바스 군은 불에 타 죽고, 가이즈 백작 등은 간신히 키히르시아 숲을 빠져 나왔다. 숲을 빠져 나오는 동안 함정과 복병 때문에 이미 대부분의 병사가 죽었것만 숲을 빠져 나와서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가이즈 백작은 숲 밖으로 나오자마자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스웰리어 백작이 이끄는 연대급 군대와 맞닥뜨렸다. 숫자는 비슷했지만 오랜 행군으로 지쳐있고, 거의 하루 동안 밥도 못 먹고 뛰어 다녔고, 방금 전 대패를 해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군대와 한 곳에서 밥을 배불리 먹고 대기하던 군대가 맞붙었으니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하였다. 가이즈 백작은 형식적으로 미친개 스윈과 싸우다가 다른 기사들이 스웰리어 백작을 막는 사이 재빨리 도망쳤다. 그리고 그나마 살아남은 군사들 대부분은 이미 싸울 힘이 없었기에 항복하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2군단 같은 경우에는 군단 지휘관 두 명이 함정에 빠져 몰살되는 바람에 병사들은 지리멸멸하여 거의가 항복하거나 사망하였다. 3군단은 앞의 군단에 비하면 상황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레이엄 자작이 워낙 상황 판단을 빠르게 한 덕에 전열을 유지할 수 있었고, 샛길이라고 부르기에는 넓고 탄탄한 길로 나왔기에 복병과 함정에 피해도 그리 많이 받지 않았다. 몇 번은 복병을 공격해 패퇴시키기도 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까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숲에서 나오자마자 카인트 켈과 카인트 알렌이 이끄는 3개 대대 정도의 군대와 맞닥뜨렸지만, 침착하게 맞서서 오히려 그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 악몽 같은 밤이 지났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아 아직 차가운 공기가 대지를 덮고 있을 무렵. 가이즈 백작은 수백의 병사들과 함께 숲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부관인 샤크 자작은 물통을 가이즈 백작에게 내밀었다. 가이즈 백작은 한번의 사양 없이 그 물통을 받아 목구멍에 들이켰다. 빈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물을 마시니 어느 정도 살 것 같았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밤새 불길을 피해 도망 다니고, 복병을 피해 도망 다니고, 함정을 피해 도망 다니고. 가이즈 백작은 이를 갈았지만 당장 어찌 할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대입니다!" 샤크 자작은 그렇게 소리치며 말 위로 올라섰다. "적이다!" 가이즈 백작은 깜짝 놀라 그렇게 소리치며 자신도 말 위에 올라탔다. 하지만 병사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공격을 받는다면 분명 전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다가 온 군대는 그레이엄 자작이 이끄는 3군단이었다. 가이즈 백작은 놀라며 물었다. "치중은 어찌하였소?" 그레이엄 자작은 가이즈 백작을 노려보며 차갑게 대답했다. "전부 버리고 왔습니다." 그 말에 가이즈 백작은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뭐요!? 그 많은 치중을 전부 버리고 왔단 말이오!? 그게 아이리스에 손에 넘어가면 어찌되는지 알기나 하시오!?" 순간,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그레이엄 자작은 가이즈 백작의 눈을 마주보며 외쳤다, "그럼 내가 어찌했어야 합니까!? 치중을 포기하고 재빠르게 도망쳤기에 이 정도 숫자를 건진 것이지. 만약 미적미적 거렸다면 적에 의해 전멸 당했을 꺼요!?" 가이즈 백작은 화가 나긴 했지만 대꾸할 말을 찾지는 못하였다. 사실 그레이엄 자작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3군단은 운반병과 호위병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 개의 군단 중 제일 약한 군단인 것이다. 그런데도 수천의 군사가 살아 남았다는 것은 그레이엄 자작의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샤크 자작은 재빨리 중재에 나섰다. 자바스 군은 서로 지니고 있던 음식을 나눠 먹으며 다시 휴식을 취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숲을 빠져 나온 자들이 하나, 둘 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점심때쯤이 되서야 자바스 군은 휴식을 끝내고 이동을 하였다. 가이즈 백작이 수를 가늠해보니 대략 7천 정도였다. 그나마 말을 타고있는 병사는 1천명에 불과하였다. 패배였다. 그것도 완벽한 패배. 자바스 군은 힘없이 케이튼 지역에서 물러났다. 1671년 9월 17일. 자바스 군은 아이리스에 발을 들여 놓은 지 하루만에 병력에 9할 이상을 잃고 퇴각하였다. 포로로 잡힌 숫자가 3만 1천, 불에 타죽은 숫자가 2만 2천, 접전 중 죽거나 복병, 함정 등에 의해 죽은 숫자가 2만 7천 정도였다. 게다가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를 아이리스에게 빼앗겼으며, 제이서스 기사단은 지리멸멸했고, 필립스 일라이드 백작, 카루드 라이어즈 백작, 크레이안 알리 남작 등 유능한 많은 장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간 병사는 겨우 6천 9백 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전체 병력에 1할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이번 전투로 인해 아이리스는 케이튼 지역을 뛰쳐나와 다시 한번 강남을 질주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대륙에 거센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번 불기 시작한 바람은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룰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수 많은 장군들은 말 한 필과 칼 한 자루에 몸을 의지하고 대륙을 달릴 것이며, 수 많은 모사들은 서로 간의 처절한 머리 싸움을 벌일 것이다. 각 국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여 행동 할 것이며, 적이 될 자와 친구가 될 자를 선별해 낼 것이다. 칼과 창이 부딪힌다. 말이 질주한다. 깃발이 하늘을 찌른다. 고통 받는 자의 비명소리가 대륙을 진동시킬 것이다. 바야흐르 4기 전란이 시작 된 것이다. <5권 끝> <아이리스 Iris> - 6권 - Part 1. 두 여자 어두운 오각형의 회색방. 방 안에는 커다란 원형 석상이 놓여져 있고, 그 주위에 돌로 만들어진 의 자가 단단히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방의 크기는 넓었지만 20m가 넘는 천장의 높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좁아 보였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벽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야광주가 박혀 있었다. 야광주의 빛은 옅은 녹색이며, 빛이 그리 밝지 겨우 사람의 형체를 구분할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 곳의 이름은 '탑의 석상' 으로 상아탑의 마법사들이 회의를 할 때 쓰 는 장소이다. 하지만 실제로 회의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마법사는 탑의 서열0에서 100까지인데 이들은 마법 수련이나 연 구를 하느라 회의에 빠지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결정은 '탑의 석상'(원래의 뜻은 석상이 있는 방이지만, 그 방에서 벌어진 회의 나 그 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뜻하기도 한다) 대신 서열0위인 탑의 주인 라이미안, 서열 7위인 칼리와 그녀의 보조 서열 78위 아리와 80위인 시 리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지금 탑의 석상에는 23명의 마법사가 모여있었다. 전통적으로 탑의 석상 에는 23명만이 들어 올 수 있었다. 22명도 아니고 24명도 아닌 굳이 23명 인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석상 주위에 23개 의 의자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자가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 에 1명이 빠지면 허전한 느낌이 들고, 1명이 더 오면 누군가는 서 있어야 만하기 때문에 회의 참석하는 수는 23명이 가장 적절했다. 만약 회의에 참 여하려는 지원자가 많으면 보조 의자라도 가져다 두려만, 지원은커녕 오라 고 무릎 꿇고 빌어도 정원을 채우기가 힘드니 절대 23명 이상이 탑의 석상 에 모이는 일은 없었다. 지금 라이미안은 근 10년만에 탑의 석상에 마법사들을 소집하였다. 대부분 의 마법사들이 마법 수련과 실험을 핑계로 안 오려고 발악을 하였지만, 라 이미안이 바닥에 드러누워 울면서 땡깡을 부리고 칼리가 머리끄뎅이를 잡 고 끌어낸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이 곳에 모였다. 라이미안은 라이트 구를 만들어 자신의 턱 아래 뜨워놓고 '히히' 하며 웃 거나 눈커풀을 뒤집는 등 장난을 치고 있었다. 탑의 석상은 어두웠기에 라 이미안의 그런 장난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성공 할 수도 있었지만 꼼지락거리는 손가락과 볼살이 통통한 귀여운 얼굴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 다. 라이미안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장난을 치고 있었다. 보 다 못한 칼 리가 레이테이트 마법으로 라이트 구를 천장으로 띄우며 말했 다. "장난 그만 치세요." 순식간에 장난감을 빼앗긴 라이미안은 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 지만, 칼리는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그리고 조 용히 주문을 영창하더니 몇 개의 라이트 구를 한번에 만들어내 공중에 띄 워 올렸다. 공중에 떠있는 라이트 구는 환한 빛을 그 빛은 탑의 석상을 밝 게 비추었다. 라이미안은 투정을 부려도 칼리가 아무 반응이 없자 화가나 석상 위에 배 를 깔고 누워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석상 주위에 앉아있는 늙은 마법사들을 보고는 입술을 꼭 다물며 생각했다. '나는 탑의 주인이야. 체통을 지켜야해.' 라이미안은 체통을 지키기 위하여 우는 대신 석상 위에 올려 놓았던 <헬로 우 귀티> 인형을 끌어 안았다. 인형을 끌어 안고 볼을 부벼대는 라이미안의 모습은 체통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지만 본인은 체통을 유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칼리는 당장이라도 넙적한 고양이 인형을 뻣어다가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라이미안이 일주일, 아니, 한 달은 펑펑 울 어델테니 하는 수 없이 참았다. 하지만 언제고 반드시 저 고양이 인형을 살 해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절대 버리지 않았다. 한 노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탑의 석상에 소집 한 이유가 뭡니까?"` 노마법사의 이름은 미르펠로 탑의 서열 13위이다. 실험을 하던 중 라이미안 이 바닥에 드러누워 땡깡을 부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끌려왔기 때문에 지금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다. 라이미안은 미르펠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귀티와 계속 장난을 치고 있었다. 칼리는어차피 라이미안에게 별 기대를 안 했었기에 실망하는 빛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바쁜 시간을 할애해서 모여주신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여 러분들을 소집한 이유는 아주 중요한 사항 때문입니다." 킬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석상 주위에 앉은 마법사들을 둘러 보았다. 지금 모인 사람들을 종족별로 분류해보면 인간 10명에 엘프 7명, 하프엘프 6명이 다. 나이별로 분류를 해보자면 50세 미만은 4명, 50세 이상은 19명이다. 클 래스 별로 분류를 해보자면 7클래스 미만은 4명, 이상은 19명이다. 어찌되 었든 상당히 중요한 사람, 엘프, 하프엘프들이었다. 상아탑은 철저한 민주주의 제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라이미안이 서열 0위로 탑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탑의 주민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탑 의 석상에서 소수의 인원만이 벌인 회의는 곧바로 외부에 공표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들은 대부분 투표에 붙여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 하였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서만 이루어진다고. 정부에서 투표를 하자고 했으면 투표를 해야 할 것 아 닌가? 아무도 투표를 안 하는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 질리 없었다. 그래서 현재는 수뇌 계층들의 독재체제로 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독제라 해도 사실은 별 것 없었다. 상아탑이라는 조직이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집 단이 아니기 때문에 공금 횡령 등의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나봐야 아 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목적은 마법을 연구하고 수련해 자신 의 이상을 실현하는데에 있지 금전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을 끄고 있었다. 상아탑은 진명에서 생활 물품과 식량을, 중앙 산맥 쿠부루루 광산에서 드워 프들에게 수천 종류의 광물을 수입하고 있다.(말이 수입이지 거의 무료로 원조 받는 것이다) 이 양이 워낙 풍부했기에 상아탑은 재정적인 어려움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당연 마법사들이 금전문제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 는 것이다. 칼리의 말이 이어졌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지금 대륙은 4기 전란이 일어날 조짐을, 아니, 이 미 일어났습니다." 칼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표정을 보니 모두 들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심지어는 라이미안 조차 몰랐다는 듯한 표 정이었다. 라이미안은 귀티 인형이 옷 속에 숨겨 놓았던 눈깔 사탕을 꺼내 입에 물며 칼리에게 물었다. "응? 언제 4기 전란이 일어났어?" 칼리는 참을성이 많은 여성이었다. 70년이면 인간으로서는 거의 다 살은 인생이기에 그녀는 언제나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라이미안 의 어벙함에도 웬만하면 그냥 웃어 넘기는 지경까지 올라섰다. 하지만 이 순간 만큼은 열이 머리 끝까지 솟아 올랐다. 칼리는 자신의 빨강 머리 보다 더 빨개진 얼굴을 하고는 소리쳤다. "아이리스 키레아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후, 자바스와 전쟁을 치뤘다고 어제 말씀드렸잖습니까!?" 라이미안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멍하니 칼리를 쳐다 보았다. 이내 그 커다 란 눈망울에 구슬 같은 눈물이 모이기 시작했다. "으아앙!" 라이미안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물고 있던 눈깔 사탕을 손에 들고 목 청 껏 울어재끼기 시작했다. 칼리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푹 내쉈다. 탑의 석상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마법사들은 아이리스와 자바스가 전쟁을 치뤘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며 서로 떠들어 댔고, 라이미안은 자 신이 울고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자 오기가 생겨 더욱 크게 울 어 댔다. "아니, 3기 전란이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4기 전란이 일어납니까?" "3기 전란이라는 것도 있었나요?" "한 10년 전 쯤, 일어났었습니다." "전 10년 전에도 그 소식 못 들었습니다." "아마 15년 전이었나 봅니다." "맞소. 나도 15년 전 쯤에 그 소식 들었소." 정말 갈수록 가관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륙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 는지 알기는커녕 언제 전란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 이 서열 0에서 100까지는 몇 명을 제하고 나면 거의가 마법 수련과 연구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관심사는 오직 마법뿐, 언제 어떤 나라가 전쟁을 했는 지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칼리는 이 우매한 사람들에게 3기 전란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 인지 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다. "3기 전란은 아이리스 키에티트와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께서 손을 잡고 일 으킨 전쟁입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탄성을 질렀다. 확실히 마법사들 에게는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이름이 가장 친숙했다. 상아탑 마법사들의 최대 우상을 꼽자면 '넨 이드' 와 '아이언스 이그리드'. 이렇게 둘을 꼽을 수있다. 넨 이드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700년 전 사람으로 최초의 통일 국가 가이아 스 왕국을 세운 개국 공신이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흩어져있던 마법 들을 클래스 별로 분류하였다. 그가 분류한 마법서는 현재 상아탑에서 보 관 중이고 그가 분류한 체계에 따라 후대의 모든 마법사들은 마법을 익혔 다.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 사람으로 3기 전란을 일으 켜 아이리스가 강남 전역을 장악하도록 만든 인물이다. 원래 마법사들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다. 그리고 그 허약한 몸은 자연의 규칙을 어기면 서 마나를 억지로 몸에 쌓으면서 더 허약해 진다.(이것은 인간에게만 해 당되는 사항이다) 하지만 그는 15세라는 나이에 4클래스 마스터, 18세라 는 나이에 5클래스를 마스터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 다. 그는 마법을 전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마법을 어떻게 사용하면 더욱 큰 파괴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상아탑에서 가장 금기시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가 상아탑에서 신(神)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넨 이드가 남겨놓은 마법서를 전부 해독했다는 데에 있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몰라도 넨 이드는 마법 분류를 자신의 시선을 기준으 로 해 놓았다. 그는 체계 조차 잡히지 않았던 마법을 클래스 별로 분류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당연 다른 사람과 지식 능력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5클래스까지는 대부분, 5에서 7클래스까지는 어느 정도 해석이 가 능하였다. 하지만 8클래스와 9클래스의 해석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공식 조차 없이 답이 도출된 마법도 있으며, 공식이 있다해도 대입이 불가 능하였다. 설사 대입을 하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 았다. 마법이란 주문을 외고 공식을 써서 마나를 지정된 장소에 보내는 등, 과정 자체가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넨 이드가 정리해 놓은 마법서에는 공식은 여기저기 나돌아다니고 바로 답이 도출되는 형식이니 그것을 보는 마법사들은 정말 미치는 기분이다.(얼마나 간단명료하게 해 놓았냐면, 넨 이드가 분류해서 기술한 마법서는 9클래스까지 합쳐 108권에 불과했다. 아 이언스 이그리드가 이 108권을 해석해서 다시 기술한 책은 1079권이었다. 참고로 이그리드가 해석한 마법서도 마법사가 아니면 읽기 힘들다. 그러니 넨 이드의 마법서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130년 전 쯤에 이런 마법사들의 고민을 풀어 줄 구세주가 나타났으 니, 그가 바로 아이언스 이그리드다. 상아탑에서는 그를 넨 이드와 비슷한 수준으로, 아니, 더욱 훌륭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그리드의 천재성은 넨 이드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이리스가 강남 전역을 차지하 고 3기 전란이 사그라들 때쯤, 넨 이드의 마법서를 해독하는 작업에 착수 하였다. 그리고 그 작업은 1년도 채 안 되서 끝이 났다. 수 백년 동안 수 만명의 마법사들이 달려들어도 못한 일을 이그리드는 혼자서 1년만에 해낸 것이다. 탑의 입장은 넨 이드를 더 우위에 두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아이언스 이그리드를 우위에 두고 있다. 넨 이드는 마법을 최초로 분류, 정리한 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마법을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 그가 마법을 얼마나 사용했는지, 그의 마법력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역사서를 뒤져보는 수 밖에 없 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살펴 본 결과 그가 위력이 강한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반면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자신의 능력것 마법을 사용하였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냐면은 상아탑에서 그에 대한 평가 중에 '그는 마법을 남발하 였다' 라는 문장이 있을 정도다. 사실 마법의 위력이라는 것은 누가 더 마 나를 많이 쌓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맞는 마법을 얼마나 적 절하게 사용했느냐가 마법의 위력을 결정 짓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그리드는 최고였다. 다수이냐 소수이냐, 기공법이냐 정공법이냐에 따라 그는 적절한 마법을 사용하였고, 그 마법은 적에게 최대의 피해를 입혔다. 이그리드의 관심사는 살상용 마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마법 을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니, 익혔다기보다는 그냥 어쩌다보니 알게 되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는 살상용 마법을 제외한 다 른 마법도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상아탑의 마법사들은 마법 능력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넨 이드 보다는 고위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던 아이언스 이그리드를 더 높히 평가하고 있었다. "3기 전란이 일어난 것은 1528년입니다. 지금이 1671년이니 143년 전이군 요." 일어난 연도는 1528년도지만, 가장 절정이 달했을 때는 1530년 대 중반 이 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3기 전란이라고 하면 130년 전이라고 말 을 하였다. 칼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엘프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전란 얘기를 꺼내는 겁니까?" 칼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대륙이 3번의 전란을 거치는 동안에도 우리 상아탑은 언제나 중립을 지 켜왔었습니다. 마법이 살상 무기로 전락되는 것을 방지하고 적을 만들지 않음으로서 상아탑의 안전을 도모할 생각으로 말입니다. 지금 대륙은 자바스의 대군을 아이리스가 물리침으로서 4기 전란이 일어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 국들은 현재 군비를 증강시키고 군수 물자를 확보하는 등,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 예전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나라에도 손을 들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 표하고 중립을 유지하면 될 것 아니오?" 칼리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아 니, 모르시겠군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마법 학교를 설립하여 마법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르치는 마법은 전부 살상용 마법입니다. 아시다시피 마법이란 하나의 학문이자 연구의 대상이고, 끊임 없는 수양으 로 자신을 더욱 높은 경지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칼리의 말에 석상 주위에 앉아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모인 이 들은 마법에 미치다시피한 고위 마법사들이다. 이들이 마법을 수련하는 목 적은 더 강력한 마법을 쓰고 싶어서가 아닌, 마법을 수련하고 싶어서이다. 즉, 결과보다는 과정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은 마법을 수련하 며 기쁨을 느끼고, 마법이 강해지는만큼 정신도 강해지는 것을 즐기고 있다. 마법이 좋아서. 마법이 재밌어서. 이것이 이들이 마법에 미치는 이유였다. 하지만 현재 대륙의 사정은 그렇지 못 하였다. 단기간에 강한 살상용 마법 을 익힌 마법사들을 양산하다보니, 써클을 늘리거나 클래스를 마스터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무조건적으로 마나를 쌓은 다음, 몇 개의 강력한 살 상 마법만 골라서 익혔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마법 수련이라는 것은 정신 수련의 일 종이라고 말할 수있을만큼 정신력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위의 수련 방 법은 정신은 뒷전으로 밀어 놓고 기술에만 치중하는 방법이기에 후에 더 높은 경지로 진보가 불가능하게 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마나가 역류하여 폐인(廢人)이 될 수도 있었다. "그 동안 우리 상아탑은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유지하며 대륙의 마법에 물 드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상아탑의 마법은 더욱 진 보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륙은 마법을 전쟁에 쓰기 위한 살상용 도 구로 생각을 하고 더 커다란 파괴력을 지닌 마법사를 양산해 내기 위해 노 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결과 살상용 마법의 경우에는 상아탑에 버금 가는 진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답니다. 마법사들은 정신 수련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마나를 늘리고 소수의 공격용 마법 을 익히는데에만 힘을 쏫아 붓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다시피 마 법이라는 것은 하나의 학문입니다. 일정한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져나가야 만 높은 경지에 다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대륙에서 살상용 마법이 진보를 이루었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자면 살상용을 제외한 다른 마법들은 제자 리 걸음을 면치 못했다는 겁니다. 이대로 가면 100년 안에 대륙에서는 살 상용 마법을 제외한 다른 마법들은 설 자리를 잃어 버릴겁니다. 그리고 사 람들은 마법을 살상용 무기로 인식하겠지요. 지금 대륙의 마법은 진보했다 기 보다는 오히려 퇴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 동안 상 아탑이 수수방관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석상에 앉아있는 자들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 정도로 대륙의 마 법이 타락한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라이미안은 눈깔 사탕을 오드득 깨물며 말했다. "이번 전란을 거치는 동안 또 다시 마법이 살인 무기로 사용된다면 그건 마 법의 퇴보를 부추기는 짓이야." 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다가 발을 뺄 수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전란에 는 아이언스 히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순간, 앉아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랐다. "아이언스 히로는 누굽니까?" "아이언스라면 이그리드 님의 성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이언스 히로라는 자는 대체 누구길래, 감히 이그리드 님의 성을 쓰는 겁니까?" "둘이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소. 이그리드 님께서는 자손을 남기지 아니 하셨소." "친척일 수도 있잖아." "이그리드 님은 고아셨소." "그럼 숨겨둔 아이?" "헛 소리 그만해!" 잠시 동안 탑의 석상은 난장판이 되었다. 칼리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만을 푹푹 내쉈다. 전에 한번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제자인 아이언스 히로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고 탑 전체에 방송을 한적이 있었다.(수십명의 마법사를 동원하여 탑 전체에 메시지 마법을 건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마나가 풍부한 상아탑 내부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이들의 모 습을 보아하니 아무도 귀담아 듯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제발 바깥 세상 일에도 관심을 좀 가져라.' 칼리는 장내를 조용히 시킨 다음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언스 히로란 자는 현재 아이리스의 공작입니다." "아이리스의 공작? 아이리스의 공작은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이잖아요." "꼭 한 나라의 공작이 한 명이란 법은 없지요." "그럼 아이리스에는 아이언스라는 성을 가진 공작이 둘이나 있단 말씀이십 니까?" "둘이면 어떻고 셋이면 어떻겠습니까?" "잠깐!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군. 그럼 아이언스 히로는 차기 공작이라는 건가?" "근데 왜 성이 아이언스입니까?" 칼리는 다시 장내를 조용히 시킨 다음, 말했다. "아이언스 히로는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께서 말년에 얻은 제자입니다. 현 재 17세이고 클래스 5마스터입니다. 그리고……." 칼리는 잠시 호흡을 끊었다가 말을 이었다. "아이언스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순간,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질 식할것만 같은 긴장감이 몰아쳤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한 엘프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그리드의 저서를 번역할 수 있는 겁니까?"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것으로 사료됩니다." "흐음." 누군가가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방금 칼리가 한 말은 너무도 충격적이었 다.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현실감이 없었다. 수천년 동안이나 풀리지 않았 던 8, 9클래스의 비밀이 풀릴지도 모른다니. 그 동안 8, 9클래스를 연구하기 위해 들어간 인력과 비용은 천문학적이었 다. 한 도시의 1년 예산이 한번 실험에 날라갔다. 연구와 실험을 하다 사 고로 죽은 사람도 수 천에 이르렀다. 여기있는 마법사들 중 5할 정도는 7클래스를 마스터한 자들이었다. 이 중 에서도 8써클의 마나를 축적한 자는 약 10명 정도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들 은 8클래스 러너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8클래스 마법은 전체에 1할도 제 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기에 마나는 있어도 마법을 익힐 수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8클래스 마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솔직히 9클래스 마법은 별로 현실성이 없었다. 8클래스는 그래도 조금이나 마 알려져있고, 실제로 8클래스를 마스터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물론 그 하나는 아이언스 이그리드다) 하지만 9클래스는 일부는커녕 아예 뭔지조차 모르고 실제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없다. 기록상으로보면 넨 이드가 9클래 스를 마스터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거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9 클래스는커녕 8클래스의 마법을 사용했다는 기록조차 없다. 오죽하면 몇몇 학자들은 '9클래스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까지 말을 할까? 하지만 위의 주장대로라면 넨 이드의 저서와 그것을 해석해 놓은 이그리드 의 저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생각할게 무어가 그리 많겠소? 그냥 당장 그 자를 데려와 아이언스어를 번 역하게 합시다." 칼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이언스 히로는 아 이리스의 공작입니다. 현재 아이리스는 6국 중 가장 세력이 약한 국가입니 다. 이번에 자바스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도 기적에 가깝지요. 분명 아이언 스 히로는 자국의 이득을 위해 우리 상아탑에게 막대한 요구를 할 것입니 다." "요구를 하면 들어주면 되잖소?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땅이 필요하다면 땅을 주시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상아탑은 아이리스의 손을 들어주는 꼴이 되고 맙니 다. 그럼 아이리스와 적대관계에 있는 자바스와 아토리아 등을 적으로 돌 리게 되지요. 그것은 상아탑이 이제까지 해왔던 중립 외교주의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그 동안 대륙에서 숱한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상아탑 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8, 9클래스 마법을 포기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칼리가 말하려는 순간, 라이미안이 인형을 흔들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아이언스 히로가 번역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사장 될 수도 있으니까요." 칼리는 라이미안의 말에 동조하였다. "그렇습니다. 상아탑은 절대 8, 9클래스의 마법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 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아이언스 히로가 과연 상아 탑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그리드 님께서는 전란이 끝 날 때까지 상아탑과 인연을 맺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후에 상아탑에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아니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히로는 다릅니다. 그는 아이리스를 일으켜 세울만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막대한 군수 물 자를 요구 할 것이고, 대안이 없는 상아탑으로서는 그의 요구 조건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칼리의 말이 끝난 후, 탑의 석상에는 잠시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아까처 럼 충격에 의한 침묵은 아니고 잠시 각자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라이미안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아이리스에 마법사들을 보내려 그랬거든. 아 이언스 히로를 지키라고 말이야. 그런데 우리 마법사들이 찾아가기도 전 에 이미 전쟁이 끝나 버렸어. 다들 농성전을 할꺼라 생각했는데 나와서 싸우는 바람에. 음음, 아무튼 아이언스 히로도 그렇지만 마법의 타락은 정말 심각한 문제야. 어차피 이번 전란에 상아탑이 발을 빼기는 글렀어. 계속되는 마법의 무기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상아탑의 성명을 발표하고 전 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돼." 라이미안의 말에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칼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라이미안 님의 말씀에 반대하시는 분이 없으니 이것은 탑 전체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으로 받아들여졌다. 앉아있는 자들 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가득했다. 결국은 상아탑도 전란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말인가? * 날이 어둡다. 불어 온 바람은 흙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어지럽혔고 푸석푸석한 땅에서 자라난 식물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이렇게 날씨가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코스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사실 앵무새와 함께 산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산책이 아니면 할 일이 없었기에 심심해서 하는 것이었다. 저번 전투 이후에 나를 갈구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어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화공을 생각해 낸 것도 나고, 그것을 발표한 것도 나다. 당연 공의 대부분이 나에게 돌아왔다. 이번 전투의 제 1공은 바로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다.(참고로 2위는 사일런스 백작, 3위는 샤이 사일런스 백작이다) 그 때문에 나를 못 마땅해 하던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여전히 못 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대 놓고 불만을 표시하지 못했다. 일루니아는 아직까지 나를 갈구긴 했지만, 예전처럼 적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매일 나만보면 가시 돋힌 말을 내뱉긴 하지만 그것이 귀여운 투정이라 보이는 것은 왜 일까? 후후후, 어찌되었든 도도한 노처녀께서도 드디어 아이언스 공작님을 인정하기 시작했군.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반가운 얼굴이 둘이나 내 앞에 나타났다. 지적인 금발의 여인과 그 여인에게서 한 걸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금발의 미청년이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거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설명을 하자면 이 둘은 사일런스 남매였다. 지니는 나를 보고 반갑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아이언스 공작 님. 공작 님께서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산책을 하시면서 마음을 정화하시니, 저로서는 감동을 받지 아니 할 수가 없군요." 얼굴은 웃고 있고, 말투는 정중하고, 태도까지 정중했지만, 내용이 정말 특이했다. 나는 가끔씩 '이 인간이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든다. 과중한 업무? 산책을 하며 마음을 정화? 감동을 받아? 지나가던 앵무새가 웃겠다. "우헤헤헤! 감동을 받았데!" "웃지마! 이 앵무새야!" 난 내 어깨에 앉아있던 라이코스의 목을 틀어쥐고 흔들었다. 앵무새 주제에 감히 인간을 비웃다니! 이런 주제도 은혜도 모르는 과대망상증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켁켁! 너 내가 누군지 알어?" "이 변종 앵무새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네!" "켁켁! 난 영물……켁!" "이 놈이 또 영물을 사칭하네." 난 한참 동안 라이코스를 흔들다가 나를 지켜보는 싸늘한 눈빛을 인지하고는 행동을 멈추었다. 나를 싸늘하게 응시하시는 분은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님이셨다. 이럴수가! 그 동안 쌓아왔던 이미지 다 망가졌다. 난 기절한 라이코스를 저 멀리 집어 던지고 황급히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 백작 님께서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간을 내어 오누이끼리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시며 마음을 정화하시니, 저로서는 감동을 받지 아니 할 수가 없군요." 나의 정중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더 싸늘해지기만 하였다. 아! 야속한 여인이여! 일루니아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 나를 무시한 것이다. 지니는 걸어가는 누님의 뒷모습과 황당해하는 내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 곳에서 아이언스 공작 님과 담소를 나누어 아이언스 공작 님께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군요. 이대로 그냥 가는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용서합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의 하해와도 같은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만." 지니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루니아의 뒤를 쫒아갔다. 난 멀어져 가는 사일런스 남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면 저 둘은 정말 특이한 남매다. 일단 미모.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는 원숙함과 도도함, 그리고 지적이기도 하고, 가끔은 귀여운 모습도 보이는 여인다. 미모는 기준치 이상이기는 하지만 절세의 미녀는 아니었다. 그저 꽤 예쁜 수준이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사람을 매료시킨다. 그녀의 당당하고 인텔리전트한 모습을 접하다보면 왠지 모르게 빨려드는 느낌이다. 뭐, 사일런스 지니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인간은 수 많은 여자들을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 하나 때문에 아직까지도 여자들이 옷 벗고 달려들고 있다. 사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광경을 한번 목격했었다. 어느 날 지니와 함께 왕궁 복도를 걷다가 빨랫감을 들고 걷는 하녀를 만났다. 양쪽 볼에 주근깨가 가득한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였는데, 지니의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니는 그런 하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얼굴이 달아오른 것 같은데 어디 아프신가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하녀는 더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빨랫감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기절했다. 아마 하녀는 기절하는 순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 나를 걱정해주시다니!' 아무튼 그리하여서 지니는 하녀를 들쳐 안고 방으로 데려갔는데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중에 듣기로는 그 하녀 방 침대 시트를 다시 빨았다고 하던데, 침이라도 흘렸나? 두 번째로 지력. 이것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사일런스 남매의 천재성이야 아이리스만이 아니고 전 대륙에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상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밌는 점이 있다.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는 오직 군사적 전략, 전술에만 조예가 깊다. 반면 사일런스 지니는 전략, 전술을 비롯하여 외교, 정치 등등 다방면에 걸쳐 두뇌가 발달되어 있다. 한 마디로 천재인 것이다.(두뇌 외에도 싸움, 예술 등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다는 것은 전에 얘기했었다) 전체적으로 봐서 누나인 일루니아가 동생에 비해서 능력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둘 다 천재라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아들, 딸을 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물론 행복할 것이다. 잘생기고 머리 좋은 자식을 뒀는데 기쁘지 않을리 있겠는가? 하지만 사일런스 남매의 부모님은 전부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10년 전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3년 전 수도가 침략 당했을 때, 끝까지 왕궁을 지키다 죽었다고 한다.(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당대 최고의 모사 사일런스 남매의 아버지인 사일런스 리스 백작 님께서는 무관이라는 사실이다.) 뭐 아무려면은 어떻겠는가? 난 한숨을 내쉬며 아까 집어 던졌던 라이코스를 찾아 보았다. 하지만 어디로 날라갔는지 이 놈의 앵무새가 깃털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신이 들면 알아서 날아 오겠지. 난 더욱 홀가분한 마음으로 못다한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정원 산책이라하면 만개한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고 향기로운 꽃향기를 맡아야겠지만, 지금 나는 무성한 잡초를 감상하고 썩어가는 풀향기를 맡고있었다. 정말 한가한 나날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 왕궁에서 한가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전투가 끝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장군들이나 참모들은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가장 바쁜 사람은 두 명의 군단 참모, 즉 사일런스 남매였다. 붙잡힌 포로 관리, 부대 재편성, 물자 보관, 무기 수거 등등. 진짜 놀고 있는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현재 붙잡힌 포로들 대부분은 케이튼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칼린 성에서 수용 중이다.(수용소가 모자라 폐허가 된 저택 몇 개를 수용소로 개조하였다) 포로 숫자는 3만을 헤아리는데 이 수는 아이리스의 전군을 상회하는 숫자였다. 당연 관리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힌 점은 포로들 대부분이 과거 아이리스의 백성이었다는 것이다. 3년에 걸친 자바스의 착취와 노략, 강제 징병 등은 점령지 백성들의 반감을 최고로 만들었고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너도나도 전향하기를 희망하였다. 반면 수용 포로 중 제이서스 기사단도 얼마 있었는데 그들은 죽으면 죽었지 항복하지는 안겠다고 끝까지 개기고 있었다. 용맹스런 제이서스 기사단의 긍지가 어쩌구 저쩌구……. 긍지가 밥 먹여 주냐? 어차피 그런 놈들 길들여 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고 맨 입으로 풀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몸값이라도 받을 때까지는 잡고 있어야 한다. 이번 전투로 아이리스가 얻은 이득은 거의 천문학적이었다. 조금 시각을 바꿔서 말하자면 자바스의 손해가 천문학적이다. 일단 포로 3만. 이중 전향시킬 수 있는 숫자가 대략 2만 5천 정도라고 한다. 순식간에 군사 수가 늘어나면 유지가 힘들어 지는 법이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그것을 매꾸고도 남을 만한 군량과 치중, 공성병기 등 막대한 군수 물자를 손에 넣었다.(후군, 즉 자바스의 3군단이 운반하고 있던 70% 정도를 우리가 노획했다. 미쳐 노획하지 못한 30%는 불과 함께 사라졌다. 지니가 말하기를 퇴각을 할 때는 절대 군수 물자를 남기고 가는 법이 아니라고 한다. 가지고 가거나, 가져 갈 상황이 되지 못하면 태워 버린다고 한다. 이유야 뭐 너무도 당연하다. 적의 손에 물자가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레이엄 자작이 그냥 퇴각했던 이유는 그때 당시 시간이 없었는데다가 가만히 놔둬도 불에 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우리측 마법사는 바람의 방향을 바꾸었고 대부분의 군수 물자를 건질 수 있었다) 지금도 1만 정도의 군사들이 키히르시아 숲에서(지금도 숲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열심히 무기와 갑옷, 방패 등을 건져내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피해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레이엄 자작이 빠른 판단으로 3군단을 퇴각시키는 바람에 군수 물자를 편하게 얻을 수는 있었지만 그 쪽에 매복해 있던 두 개 소대가 전멸하였다. 그리고 숲에서 빠져나와 카인트 부자가 이끄는 3개 대대를 마주쳤을 때도 죽기 살기로 싸우는 바람에 우리 군도 꽤 많이 죽었다. 여기까지는 싸우다 죽은 것이니 그런데로 괜찮다. 그러나 어떤 소대는 소대장이 매복 장소를 불길이 덥치는 방향으로 잡는 바람에 소대 전체가 화형 당했고, 또 어떤 소대는 자기들이 파놓은 부비트렙에 자기들이 걸려 전멸했다. 어찌되었던 죽은 수는 1할에 조금 못 미치는 2천 5백 정도였다. 3만 군대로 8만 7천 군대와 맞서 싸우며 8만 7천 군대를 거의 전멸까지 몰아 넣은 것치고는 아주 양호한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비실이와 보디빌더가 싸웠는데 비실이는 손가락 하나 삐끗하고 보디빌더는 사지가 잘려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지니 말로는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전투라는데, 그럼 내 이름도 역사책에 쓰여지려나? 카히르시아 숲 전투 이후 나는 많은 무력감을 느꼈다. 키레아 왕은 통솔력이 있다. 스윈은 싸움을 잘한다. 사일런스 남매는 머리가 좋다. 심지어는 앵무새 라이코스는 잘 날아다닌다. 난 통솔력은커녕 통솔 당하는 능력도 없으며 싸움도 못하고 머리는 지진아에서 조금 벗어나는 수준이고, 하늘을 날지도 못한다. 그래. 나 할 줄 하는 거 아무 것도 없다. 아! 하나 있긴 하다. 마법. 그 늙은이가 나에게 물려준 마법. 내가 하는 일 없이 매일 빈둥거리기만 하니까 우습게 보일지는 몰라도 나 5클래스 마스터다. 5클래스 마스터는 아무나 되는 줄 아는가? 적어도 나정도는 되야 명함에 5클래스 마스터라고 새길 수 있다. 그래. 결심했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마법을 수련해 궁극에 필살기를 개발해야 겠다. 난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먼 훗날 내 모습을 상상했다. 넓은 평원에서 아이리스 군 100명과 자바스군 100만이 대치하고 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 병사들이 일당백이 아닌, 일당만으로 싸워도 비기는 싸움은데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병사들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은 한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군에 아이언스 히로라는 당대 최고의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언스 히로는 멋지게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내가 저들을 물리치겠소.' 루시아 공주와 일루니아는 내 말을 듣더니 황급히 나를 말린다. '아니 됩니다. 어찌 단신으로 저들을 상대하려 하시는지요?' 나는 그녀들의 손을 꼭 잡으며 안심시켜 준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들의 사랑만 있다면 내가 무슨 일이든 못하겠소? 그대들은 나를 믿고 기다려 주시오.' 그 순간, 비위약한 병사들은 느끼함을 참지 못해 구토를 하며 기절한다. 다른 병사들은 느끼함을 극복하기 위해 입 안에 소금이나 간장을 털어 넣는다. 난 적들에게 외친다. '나는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제자 아이언스 히로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의 마법은 아이언스 이그리드를 훨씬 능가한다. 그러니 목숨이 아깝거든 당장 말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 마누라랑 레슬링이나 해라!' 내 말에 감동 받은 자바스 군은 황급히 군사를 돌린다. 어!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 활약 할 수가 없잖아. 안 되겠다. 다시 상상상하자. 군사를 돌리는 것은 함정이었다. 그들은 도망치는 척하다가 다시 공격해 들어온다. 물론 아이언스 히로 공작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언스 히로는 적들에게 호통을 친다. '내 너희들을 불쌍히 여겨 살려주려 했것만, 너희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아아! 내 살생을 아니하려 했것만 상황이 이리되니 어쩔 수가 없구나. 오오! 통제라!' 아이언스 히로는 이렇게 적에게마저 자비심을 자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시작 된 것.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이언스 히로는 두 팔을 벌리며 외친다. '메테오 스윔!' 순식간에 검은 하늘이 열리며 웜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홀로 빨려 들어 온 운석들은 화이트 홀로 빠져 나와 적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쾅쾅쾅-! 운석은 정확히 10개. 1개에 10만씩 죽였다. '10*10만=100만' 이라는 공식 그대로 적들은 전멸하였다. 내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은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며 무기를 땅에 떨구고 박수를 친다. 그리고 루시아와 일루니아는 치마를 나풀거리며 내 품에 안긴다. 난 넓은 가슴으로 두 여인을 안으며 이렇게 외친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요!' 난 상상을 마치고 눈을 떴다. 아! 정말 너무 감동적인 상상이다. 정말로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아. 오늘부터 열심히 마법 수련을 하자. 오늘 6클래스를 마스터하고, 내일 7클래스를 마서터하고, 글피에 8클래스를 마스터한다면……. 음음, 일주일 안에 9클래스 마스터하는 것은 일도 아니군. 넌 결심을 굳히고 마법 수련을 하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그런 나에게 바람에 흩날리는 치맛자락이 보였다. 황폐한 정원과 조화를 이루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닌듯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녀는 루시아 공주님이셨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희고 창백한 피부는 나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였고,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나를 빨아들였다. 찰랑거리는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나풀거리는 흰옷. 난 숨이 멎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 보았다. 마치 여신 같은 느낌이다. 그녀의 모습에서 진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분명 언제 어디선가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혹시 꿈 속에 봤나? 루시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 예."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머릿속에 혼란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루시아는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그녀는 내 앞에 멈춰서더니,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요. 어디 아프신가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무안한 듯 손을 내렸다. 하지만 이내 괜찮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그녀의 호의를 거절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빨리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텐데. 난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어, 언제나 건강해요." 제길, 내가 왜 이렇게 떠는 거지? 미치겠다. 루시아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에요." "아, 예. 저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자꾸 무슨 헛소리냐? 왜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드는거야? 루시아는 당황하는 내 모습이 재밌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거리며 웃었다. 잠시 동안 우리는 그 상태로 서 있었다. 루시아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보았고, 나는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땅을 바라보다가 루시아의 아름다운 모습에 끌려 정신 없이 그녀를 바라 보았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엉키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얼마 전에 전투는 정말 굉장했어요. 사일런스 백작 님께서 아이언스 공작 님께서 아주 큰 활약을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인간이 또 헛소리를 했나 보군. "아닙니다. 제가 뭐 한 일이 있다고." 사실 정말로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이언스 공작 님이 계시지 않으셨다면 이길 수 없었을 꺼에요. 만약 아이리스가 패했다면 공주인 저는……, 흐윽." 루시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눈가에 맺혀있던 물기는 구슬이 되어 하나, 둘씩 바닥에 떨어졌다. 난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녀를 덥썩 끌어 안았다. 루시아는 기댈 사람이 필요했는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원래는 가슴에 묻어야겠지만 루시아의 키가 나보다 더 큰 관계로 어깨에도 간신히 묻은 거다. "흑흑."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향기가 온 몸으로 느껴졌다. 갸날픈 그녀의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아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더 이상 이성이 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난 그녀의 여린 몸을 꼭 끌어 안았다. 그 순간이었다. "루시아 공주님!"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나와 루시아는 깜짝 놀라 서로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 보았다. 허리에 소검을 찬 금발 머리의 청년. 건장한 체구에 구릿빛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와 강렬한 인상. 한 눈에 보아도 강한 전사의 모습이었다. 그 전사의 이름은 알렌으로 카인트 자작이었다. 알렌은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 오더니 루시아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루시아 공주님을 뵙겠습니다." 루시아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루시아와의 인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알렌은 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알렌이 말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습니다, 카인트 자작 님." 루시아는 소매로 눈물을 지우며 나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이언스 공작 님. 제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아닙니다." 알렌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와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인사를 하는 척하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내 귀에 속삭였다. "이따 자정에 이 곳에서 뵈요." "……." 루시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렌과 함께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멀어져가는 루시아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대체 그 말에 의미는 무엇일까? 한 밤중에 만나서 담배 한 개비나 같이 피자는 것은 아닐테고……. * 알렌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루시아는 알렌의 뒤를 따라 걸었다. 루시아의 얼굴은 무표정 했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차있었다. '쳇! 분위기 좋았었는데.' 조금만 더 밀어 붙였으면 넘어 오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훼방꾼 때문에 완전히 물 건너 갔다. 루시아는 걸움을 멈추었다. 알렌은 금방 뒤따라오는 걸음 소리가 멈춘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자리에 서서 뒤를 돌아 보았다. 루시아는 알렌을 보며 말했다. "오빠가 부른다는 것 거짓말이죠?" "그래." 알렌은 한마디 변명 없이 사실을 인정했다. 루시아는 잠시 알렌을 노려 보다 몸을 돌렸다. "저 이만 가볼께요." 루시아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알렌의 억센 손이 루시아의 여린 손목을 붙들었다. "왜 이래요!?" 루시아는 깜짝 놀라 손을 빼려했지만, 여자의 힘으로 그 일이 가능할리 없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루시아는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동작을 멈추었다. 잠시 동안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 보았다. 알렌은 잡았던 손을 풀며 말했다. "너 왜 그러는거야?" 손목을 보니 하얀피부가 새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루시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알렌을 노려 보았다. "뭐가?" 이렇게 건방진 태도로 나오자 알렌은 오히려 안심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자식 앞에서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거야? 그건 니 모습이 아니잖아." 그 자식이란 아이언스 히로 공작을 뜻하는 것일테고 그런 모습이라는 것은 청순 가련한 모습을 의미할 것이다.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흥! 내 모습이 뭔데?" 알렌은 다시 루이사의 손목을 움켜 잡았다. 그리고 루시아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런게 니 모습이야. 건방지고 당당한 모습." 루시아는 온 힘을 다해 알렌의 손을 뿌리쳤다. "그건 오빠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고." 알렌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알렌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럼 그 자식이 생각하는 니 모습은 붙잡아 주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고, 보호해 주지 않으면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한 공주의 모습이겠군." "오빠 정말 왜 그래!?" 알렌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질렀다. "그 놈한테 접근하지마!" 순간, 루시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알렌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눈 앞의 남자가 두려워졌다. 언제나 그랬다. 이 남자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부터 질렀다. "내, 내가 접근하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나름대로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막상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알렌은 루시아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 "그 놈 앞에서 그런 태도 보이지 마." "시, 싫어." "니가 그렇게 행동할 때마다 나는 미치는 기분이야." "니, 니가 뭔데?" "널 사랑하니까!" "싫어!" 알렌이 소리지름과 동시에 루시아는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알렌은 귀를 막고 있는 루시아의 손을 억지로 치우며 말했다. "내가 3년 동안 어떤 기분으로 널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 "몰라! 그딴 건 알고 싶지도 않아." 루시아는 악에 받힌 듯 소리쳤다. 알렌은 루시아를 벽 쪽으로 밀어 붙이며 말했다. "사랑해." "지랄하지마!" "사랑해." "미쳤어. 나 갈거야. 이 손 놔." 알렌은 루시아의 손목을 쥔 손에 더큰 악력을 가했다. 루시아는 몸을 뒤틀며 손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알렌은 앙탈을 부리는 루시아의 모습을 차가운 눈길로 훑어 보았다. 백금발의 머리카락, 하얀 피부,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 윤기가 흐르는 붉은 입술. 이지적인 모습. 풍기는 분위기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놈한테 빼앗길 수 없어.' 처음 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마법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평범한 소년. 어떤 피를 물려 받았는지도 모르는 잡종이다. 그런데 루시아는 그 놈에게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보였다. 그 놈 앞에서는 옷도 얌전하게 입고 행동도 조신하게 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남자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놈이 공작이어서 그래? 공작이어서 그래!?" 알렌은 소리를 지르던 중 루시아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습을 보아하니 아까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발견을 하지 못한 것 뿐이었다. 루시아는 알렌의 시선이 옆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니는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는 한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리 다정하게 나누시는지요?" 지니는 실눈을 뜬 채 입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렌은 웃으며 말하는 지니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루시아는 알렌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손목을 빼고 알렌을 밀친 다음, 지니 쪽으로 걸어갔다. 지니는 웃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카인트 자작님께서는 죄송하지만 잠깐 루시아 공주님께 할 얘기가 있습니다." 알렌은 지니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루시아 공주님께 할 얘기가 있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석을 하자면 괜히 남의 일에 훼방 놓지 말고 조용히 꺼지라는 뜻이었다. 루시아가 당황해서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지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카인트 자작님과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저는 이 자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시간이 많으니 두 분께서 편하게 얘기 나누십시오." 알렌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말로 사일런스 백작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력으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지지는 않을꺼라 자신하지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알렌은 한동안 지니를 노려보며 획하고 몸을 돌렸다. 지니는 화를 삭이며 걸어가는 알렌의 뒤에다 대고 말했다.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인트 자작님." 이윽고 알렌이 완전히 사라지자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니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루시아는 지니에게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오빠." 지니는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도와드리다니요?" 루시아는 황당해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거에요?"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만 카인트 자작님과 루시아 공주님의 대화를 방해한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루시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아는데 모르는 척 하는거야?' "그럼 내가 알렌 오빠와 계속 얘기하도록 놔두지 왜 불렀어?" "그건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공주님." "할 얘기라는게 대체 뭐에요?" 루시아의 물음에 지니는 눈을 반쯤 뜨고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랑합니다, 루시아 공주님." 순간, 루시아의 이마에서 힘줄이 튀어 나왔다. 루시아는 온 힘을 다해 지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지니는 루시아의 발동작을 보고도 굳이 피하려 들지 않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겉 보기에는 호리호리한 몸이지만 계속된 훈련으로 근육에 힘만주면 돌처럼 단단해지는 몸이다. 여자의 발차기 따위에 아플 리 없었다. 아프기로 따지면 루시아의 발이 더 아플 것이다. 하지만 왠일인지 지니는 굉장히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루시아는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오빠 같은 바람둥이는 진짜 재수 없어!" 지니는 어느새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우고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공주님. 하지만 아까의 말은 저의 진심……." 퍽-! 지니의 목이 아래로 꺾였다. 이번엔 루시아가 때린 것이 아니었다. 지니는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사람을 쳐다 보았다. "누님." "너 여기서 뭐하고 있어?" 지니의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일루니아였다. 군단편성을 하던 중 지니가 뛰쳐 나가서 안 돌아오자 무슨 일인가해서 내려와 본 것이었다. 그런데 감히 동생 같은 루시아에게 마수를 뻗치고 있지 않은가? 지니처럼 잘난 인간이 뒤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모를리 없었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알채는 것은 더욱 간단했다. 하지만 지니는 짐짓 놀란척하며 일루니아에게 말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저는 지금 루시아 공주님께 청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순간 일루니아는 벙찐 얼굴이 되었다. 루시아에게 접근을 하는 것은 보았지만 청혼이라니? 일루니아는 지니를 가리키며 루시아에게 물었다. "얘가 진짜 그랬어?"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일루니아는 인상을 팍 쓰며 지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퍽-! "너 제정신이야!?" 지니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루시아 공주님을 향한 제 마음은 언제나 진지합니다." 퍽-! 일루니아가 다시 뒤통수를 후려치자, 지니는 얼굴에 웃음을 지우며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이리도 루시아 공주님을 사랑하시니 제가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두분께서는 부디 주위의 시선에 굴하지 말고 서로의 사랑을 아름답게 가꿔가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날테니 두분이 오봇하게 말씀 나누십시오." 두 여인이 어이없어하는 사이 지니는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일루니아가 정신을 차리고 지니에게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루시아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일루니아에게 말했다. "나 언니 사랑해." 일루니아는 되는데로 인상을 구긴 다음, 안경을 벗어재끼며 소리쳤다. "넌 또 왜 그래!?" "아이, 인상 쓰지마 언니. 주름살 늘어." "시끄러! 이 계집애야!" * 하나의 우주. 그 우주 안에는 아홉 개의 우주가 존재한다. 각 우주는 고리 형태이다. 하나의 핵이 존재한다. 핵은 구의 형태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아홉 개의 우주는 핵에서 나오는 중력을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붙들려 있다. 핵 주위에 작은 고리 형태의 우주가 있다. 그리고 그 우주 밖에는 또 다른 고리가 핵과 고리를 감싸고 있다. 그 고리는 아홉 개가 있다. 안쪽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우주는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다. 바깥 쪽에 존재하는 네 개의 우주는 잠을 자고 있다. 하지만 그 잠은 불안정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휴화산처럼. 난 여섯 번째 우주를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우주는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우주가 반응을 하는 것은 충격을 줄 때뿐이었다. <오늘 자정에 이 곳에서 뵈요.> 내 안의 우주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난 의식의 내면에서 현실로 빠져 나왔다. 눈을 떠보니 방 안이었다. "제길." 난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원래 마법 수련이라는 것이 정신 집중만 하면 되기에 어떠한 자세든 상관이 없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보통 가부좌를 튼다고 하는데 난 귀찮아서 그냥 침대에 누웠다. 역시 편안한 자세로 있으니 정신 집중이 잘 되긴 잘 됐다. 솔직히 내가 수련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밀려오는 잠을 쫒아내는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수련을 끝마쳤다. 수련의 결과는? 한 마디로 삽질이었다. 잠이나 더 잘걸 괜히 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처음에는 쉬울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해보니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를 움직이려고 노력을하면 움직이긴 움직였다. 그러나 조금만 정신이 흐트러져도 마나는 바로 정지했다. 생각만 하면 즉각 움직이는 5써클까지의 마나와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난 다섯 시간 동안이나 삽질을 한 끝에야 6써클의 마나를 활성화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의 머릿속에 있는 막대한 양의 마법 지식과 나의 몸 안에 있는 엄청난 마나는 내가 오랜 시간 수련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 라는 말처럼, 나는 자고 일어났더니 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만약 내가 직접 6써클의 마나를 몸 속에 그렸다면 그 마나가 움직이지 않을리 없었다. 하지만 그 마나는 남이 내 몸 속에 넣어준 것이기에 내 힘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휴우, 미치겠군. 6클래스의 마법은 못 쓴다는 것이 판명된 이상 굳이 내가 마법 수련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던가 라이코스와 놀아주는 게 낫지. 그나저나 나의 앵무새 라이코스는 대체 어디 갔기에 안 오는 걸까? 혹시 누구한테 잡아 먹힌 것은……? "그럴 리가 없지." 난 애써 불안한 생각을 지웠다. 말하는 번역기이자 날아 다니는 비상식량 라이코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먹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창 밖을 보니 아직 햇빛이 땅을 적시고 있었다.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이다. 루시아의 목소리가 환상처럼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오늘 자정에 이 곳에서 뵈요.'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설마 오늘 밤 나와 뜨거운 밤을 하얗게 불사르자는 얘기……? 웃기고 있네. 하도 많이 속아서 이젠 안 속는다. 밤에 만나자는 것은 말 그대로 그냥 만나자는 것이지,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낯 뜨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칠 필요는 없다. 공주라는 여자가 그렇게 헤플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는 청초하고 순수하기까지 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여신 같이. 그녀는 정말 너무 이지적인 느낌이다. 내가 이제까지 본 여인 중 최고로 아름다운 여인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라이레얼을 뽑겠다. 아아! 라이레얼 생각을 하니 또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 여인. 남자의 과거는 용서 받을 수 없단 말인가? 아무튼 라이레얼은 아름답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뭔가를 지니고 있었다. 라이레얼이 생기발랄하다면 루시아는 청순가련했다. 라이레얼이 강한 반면 루시아는 연약했다. 루시아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가녀린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아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지켜주고 싶다. 곁에 있고 싶다. 나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운명적인 사랑이다. 난 그 동안 많은 여자들의 외모만 보고 사랑에 빠졌었다.(라나는 제외다. 난 라나의 순수한 모습이 좋았던 것 뿐지 결코 다른 뜻은 없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로리콘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난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녀의 외모, 성격, 사회적 직위, 금전 상태 등등을 전부 포함해서 말이다.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 모든 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영웅이가 생각하는 루시아 분석표> 외모-게임 속에서나 등장 할 법한 병에 걸린 미소녀 스타일 성격-조용하고 차분함. 순수하고 착함. 사회적 직위-아이리스의 공주 금전 상태-???(그래도 공주니까 돈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이번엔 루시아를 운명의 상대로 생각하는 나, 박영웅의 분석표를 보자. <영웅이가 생각하는 영웅이의 분석표> 외모-평범 그 자체. 옆집 갑돌이. 뒷집 철수. 성격-솔직히 싸가지 없음.(인정할 건 인정하자) 사회적 직위-아이리스의 공작. 군의 참모총장 금전 상태-그래도 먹고 살만큼은 가지고 있음. 위의 분석표를 보니 나하고의 레벨 차이가 너무도 확연히 난다. 이럴 수가! 이제야 마음에 드는 연인을 만난나 싶었는데 이리도 내 자신이 부족하다니. 어쩔 수 없이 나한테 맞는 여인이란 라이레얼이란 말인가? <영웅이가 생각하는 라이레얼의 분석표> 외모-세계 최고를 달리는 미인. 얼굴, 몸매, 피부 등등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곳이 없다. 성격-솔직히 좀 문제가 많다. 하지만 모든 것은 외모가 커버해 준다. 사회적 직위-용병. 금전 상태-???(매우 많을 것으로 예상. 활달한 성격에 비해 금전 관계에서는 굉장히 쪼잔한 모습을 보임. 살림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 외모를 제하고는 나하고 잘 맞는 것 같다. 아아! 역시 나는 라이레얼의 애완견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그러고보니 지금쯤 라이레얼은 뭘 하고 있을까? 설마 술집을 때려부수며 내 이름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난 한 동안 라이레얼을 생각하다 다시 루시아를 떠올렸다. 그녀가 왜 자정에 나를 보자고 했을까? 몸이 달아 올랐다.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와 밤에 단 둘이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흥분이었다. 난 침대에 누워 빨리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 하늘은 까맣다. 수천, 수만개의 별들이 아름답게 까만 하늘을 수 놓았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난 낮에 루시아를 만났던 정원에 서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댔다. 대충 시간을 가늠해보니 자정이 조금 넘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왜 나오지 않는 걸까? 설마 한껏 기대에 부풀게 해놓고선 바람을 맏힐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 아닐꺼야. 루시아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그럴 리 없어. 어느새 바닥에는 수십개의 담배 꽁초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날씨가 꽤 쌀쌀하긴 했지만 칼라이스의 망토라는 신축성 좋고 보온 잘 되는 망토를 걸치고 있어, 조금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오는 흥분감 때문에 덥기까지 했다. 그녀는 나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다시 담배 하나를 빼무는 나에게 저 멀리서 뛰어오는 한 여인이 보였다. 달빛과 별빛을 받으며 나에게 달려오는 그녀는 한 마디로 여신이었다. 흰 피부, 백금발의 머리카락, 흰색 드레스. 마치 순수의 여신이 강림한 듯한 모습이다. 그녀의 뛰는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았다. 난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그 바람에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는 바닥에 떨어졌다. 난 이러한 상황에서도 루시아는 담배 피는 남자를 싫어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고는 잽싸게 발을 놀려 흙으로 바닥의 꽁초를 덮었다. 루시아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춘 다음, 숨을 몰아 쉈다. 템포가 빠른 호흡과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은 금방이라도 그녀가 쓰러질 것처럼 보이게 했고, 난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짝 부축해 주었다. 루시아는 하늘의 별보다 더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아- 하아-.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지요?"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는데요 뭘." 난 그녀에게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은 주었다. 루시아의 이마에 맺혀있던 땀 한방울이 그녀의 가녀린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그녀의 땀을 닦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띠라 내 주머니에는 손수건은 물론이고 휴지 비슷한 것 조차 없었다. 난 하는 수 없이 남방 소매로 그녀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루시아는 옅은 웃음 지으며 고맙다는 뜻을 표시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저를 보자고 하신거죠?" 루시아는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당신을…… 알고 싶어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뜻 밖이었다. 만약 라이레얼이 저런 말을 했다면 '우리 뜨거운 밤을 하얗게 불사르며 서로를 느껴보자' 라는 뜻이었겠지만 루시아가 말하니 '우리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서로에 대해 알아나가는 것이 어떨까요?' 라는 뜻으로 다가왔다. "구체적으로 뭘 알고 싶은데요?" 루시아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냥 이런저런 것들이요." 난 방금 전까지 루시아가 처다 보았던 하늘을 바라 보았다. 몇번이고 보았던 하늘이지만 오늘따라 특별했다. 난 루시아에게 물었다. "좀 걸을까요?" 나와 루시아는 한동안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우리가 걷는 산책로가 이상하리만치 어둡고 으슥했다. 이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나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밤에 몰래 밀회를 하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둘은 너무도 사랑하였지만, 양가 부모들의 반대가 너무도 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막을 길이 없어 매일 같이 밤에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결국 사랑하는 그녀는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되고, 분노한 여자측 부모는 그녀를 죽이려 한다. 그녀는 어렸을 때 자신을 키워준 유모의 도움을 받아 필사적으로 저택을 빠져나와 남자를 만난다. '우리 사랑을 위해 떠납시다.' '어디로요?' '그대의 사랑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소?' '아아! 사랑해요.' 남자는 자신이 물려받게 될 수백억의 유산을 포기하고 여자와 멀리멀리 떠난다. 그들은 새로 정착한 땅에서 아이를 낳고 1년간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여자측 부모가 보낸 킬러들이 들이닥쳐 여인을 죽인 것이다. 분노한 남자는 3단 변신을 하여 그들을 무찌르고 여인의 시체를 껴안고 소리친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아! 진짜 너무 슬픈 러브 스토리다. 난 왜 이리 감수성이 풍부한 걸까? 이번 기회에 아예 소설가로 한번 나서 볼까? 난 생각을 멈추고 루시아를 보았다.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걷는 나와는 달리, 루시아는 걷는 건지 나는 건지 의심이 안 될 정도의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미끄러지 듯이 걷고 있었다. 이대로 그녀를 업고 야반도주를 할까? 순간, 그녀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웃기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아는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옅은 웃음을 띄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 자꾸 가슴이 떨리는 걸까? 루시아는 치마를 몇번 만지작거리더니 곧 평평한 땅에 주저 앉았다. 순간, 난 그녀를 따라 앉아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서 있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예." 그녀의 따뜻한 배려로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와 나와 루시아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소곳하게 눕혀져 있던 그녀의 치마가 수려한 곡선을 그리며 나풀거렸고, 나의 시선은 그녀의 다리가 모인 접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가 지금 저 성스럽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무슨 흑심을 품고 있는 거냐? 에라이 추잡한 놈!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치마를 정리하였다. 문득 난 그녀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싸늘한 날씨에 가녀린 여인이 얇은 옷 한벌만 걸치고 나왔으니 어찌 춥지 않겠는가? 난 왜 진작 그녀가 추위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는지 한탄을 하며, 재빨리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건냈다. "이거, 걸치세요." 루시아는 추워하는 모습이 역력함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래도 걸치세요."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럼 당신이 추울 것 같아요. 저는 괜찮으니 당신이 걸치세요." 나는 그녀의 비단결 같은 마음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공주들은 자기가 추우면 옆 사람이야 얼어 죽던 말던, 자기 몸 하나 덥힐 궁리만 하는데, 루시아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공주가 또 있을까? 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에 어깨에 망토를 둘러 주었다. 루시아는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난 그녀의 옆에 주저 앉았다. 밤 하늘의 달과 별은 우리를 반기는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루시아는 말 없이 하늘을 바라 보았다. 난 잠시 그녀의 옆 얼굴을 쳐다 보다, 고개를 꺽어 그녀가 바라보는 하늘을 보았다. 별들은 정말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난 그 별들을 연결하며 별자리를 만들어 보았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자 머릿속에서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난 루시아와의 첫만남부터 떠올렸다. 그 도시 이름이 헤론드란이었던가? 아무튼 그곳에서 루시아와 스윈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둘을 따라 이 나라로 왔다. 왜냐? 난 청안백우조라 불리는 앵무새 라이코스의 주인이자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제자니까. 난 이 나라에서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앉았고 이 나라 공주와 밤에 몰래 밀회를 즐기는 중이다. 난 생각을 하던 중 문득 이상한 점 몇 가지를 발견했다. 나와 루시아는 우연히 그 도시에서 마주쳤고, 나와 라이코스도 우연히 숲 속에서 마주쳤다. 알고보니 루시아는 아이리스의 공주고, 라이코스는 아이리스의 상징이다. 그리고 나는 아이리스를 위해 평생을 싸워왔던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마법을 물려 받은 인간이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어쩌면 이렇게 우연과 우연이 겹칠 수 있는 걸까? 마치 서로 짠 것 같은 느낌이다. 난 다시 상황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려 하였다. 그 순간, 내 어깨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고 내 코에 아릿한 향기가 밀려 왔다. 순간, 난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어떠한 상황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내 목을 간지럽혔지만, 난 몸이 굳어서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아! 진짜 미치겠다. 루시아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아름다워요." "예. 그렇네요." 난 뭐가 아름다운지는 모르지만, 예의상 무조건 맞장구 쳤다. 루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루시아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낯설지가 않았어요. 꼭 어디선가 한번 뵌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요?" 루시아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내게 기대왔다. 난 거부하지 못하고 그녀를 살짝 안았다. "따뜻하네요." "예." 포근했다. 오랫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찾은 느낌이다. 잠시 후 루시아는 내 품에서 빠져나와 몸을 일으켰다. 난 그녀를 따라 일어나던 중, 너무도 당연한 사실 하나를 떠 올렸다. 루시아의 키가 나보다 크다. 난 지금 이 순간, 나를 이렇게 낳아주신 우리 부모님과 우리나라(대한민국)의 거지 같은 교육 현실이 원망스러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키가 작아서 나도 작다, 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유전적 요인이 성장에 관여하는 것은 실제로 30%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환경과 후천적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완전 개판이다. 교육은 백년지계(敎育 百年之計)라는데 어떻게 된게 우리나라 교육 계획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뀐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교과서만 달달 외울 것을 권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으로는 부족하니 문제지도 열나게 풀어야만 한다. 보통 고등학생의 하루 일과를 알아 보자. <아침 6시에 기상. 그리고 등교. 저녁 5시까지 수업. 1시간의 저녁 식사 후, 밤 11시까지 자율학습. 그리고 학원가서 새벽 1시까지 공부.(이건 옵션이다)> 보통 회사원이 7시에 출근해서 6시쯤 퇴근한다.(회사에 따라 차이는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6시 30분쯤 등교해서 빠르면 밤 11, 늦으면 새벽 2시에 집에 돌아온다. 이게 인간이 할 짓인가? 물론 아니다. 그래서 '학생' 과 '사회인' 은 엄격히 구분되는 법이다. 왜냐? 학생은 인간이 아니니까.(공부하는 기계다) 그럼 이렇게 교육을 시키면 애들이 똑똑해지는가? 그렇다. 똑똑해 진다. 이렇게 공부했는데도 똑똑해지지 않으면 그건 지진아다. 아니, 지진아라도 학교에서 패면서 가르치니까, 졸업할 때쯤 되면 그래도 어느정도 똑똑해져서 나온다. 하지만 똑똑해져봐야 어디다 쓰냐? 애가 똑똑해져봐 실제로 쓸데는 얼마 없다. 왜냐? 인성교육이 안 됐으니까. '도덕' 이라는 과목 다들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험 100점 맞아도 애가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성교육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성교육이라는 거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통 말로는 이렇게 얘기한다. '공부를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 웃기고 있네. 교육부 방침이 뭔지 아냐? 바로 이거다. '공부를 잘 해야 사람이 된다.' 그래. 니들끼리 다 해먹어라. 공부 못하는 놈이 인간성 더러우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별 거 없다. 그냥 사고치고 감옥 간다. 좀 심한 경우에는 살인하고 감옥간다. 진짜 심한 경우에는 연쇄 살인 저지르고 사형 당한다. 하지만 생각을 해봐라. 연쇄 살인범 한 놈이 열심히 사람을 죽였다고 했을 때, 몇 명이나 죽일 수 있겠냐? 기껏해야 10명 정도고, 진짜 끈기와 재능을 겸비한 노력파 연새 살인범이라면 100까지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둑놈 하나가 열심히 훔쳐봐야 얼마나 훔치겠는가? 기껏해야 수십억이다. 그럼 공부 잘하는 놈이 인간성 더러우면? 이런 놈이 백화점 공사에 관여하면 한방에 수백명을 죽일 수 있다.(부실 공사로 백화점 붕괴) 이런 놈이 정치인되면 나라를 완전히 말아 먹는다.(예도 많다. 전XX, 노XX, 김XX 등등. 이건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다. 실제로 정치인들 중 90%가 이런 놈들이다.) 이런 놈이 기술 개발에 참여했다가 연구 자료 가지고 다른 나라로 튀면 수천억이 날아간다. 뭔가 재밌지 않은가? 이게 바로 인성교육은 뒷전으로 밀어두고 오직 국영수만 머릿속에 집어 처 넣은 결과다. 전문인력 양성하는 거? 그래. 그거 좋다. 하지만 전문 인력이 되기에 앞서 먼저 인간이 되야 하지 않겠는가? 제발 공부를 시킬 땐 시키더라도 인간을 먼저 만든 다음에 공부를 시켜라. 무슨 나라 말아먹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흠흠, 교육 얘기가 나오니 잠시 흥분했다.(지금은 비록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지만, 나 아직 고등학생이다) 아무튼 성장에는 후천적인 노력이 70%나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후천적 노력이란, 운동과 식습관 등을 말하는 것이다. 나 운동해서 키 크게하고 싶다. 하지만 학교 공부하느라 도저히 운동할 시간이 없다. 밤 12시에 학교 운동장을 달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러면 다음날 등교는 어떻게 해? 그리고 무거운 물건을 오래 들고다니면 키가 안 큰다고 한다. 그런데 나 학교 다닐 때, 가방 무게가 5kg이 넘었다. 교과서, 공책, 문제지, 보충수업 교재, 사전 등등. 등교할 때 마다 철인 3종 경기하는 느낌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괜히 키가 작은 게 아니었다. 애들을 이 모양으로 굴리는데 키가 클 리가 있겠는가? 아아! 진짜 이런 생각하니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가 싫어진다. 어차피 돌아 갈 방법도 없긴 하지만. "무슨 생각 하세요?" 생각을 끝마칠 때쯤,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차마 키가 작아서 고민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대충 지어내서 말했다. "현재 대륙의 상황과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것을 활성화시켜 많은 전문 인력을 배출시켜 국가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서는 세계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그러한 사항에 대해 심각한 고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루시아는 잘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난 그녀가 내 말을 이해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말한 내가 못 알아듣는데 듣는 사람이 알아 들을리 없잖은가? 루시아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가녀린 손으로 내 손을 살짝 쥐었다. "왜 이러……." 난 말을 잊지 못 하였다. 그녀의 눈가에 반짝이는 눈물들. 그 눈물들은 그녀의 여린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전…… 두려워요." 루시아는 손을 놓고 내 품에 안겨 들었다. 난 깜짝 놀라면서도 그녀를 받아들였다. 난 두 손으로 그녀를 살짝 껴안았다. "제가 지켜드릴께요." 내 의도와는 상관 없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이것이 나의 진심이니. 한 동안 흐느끼던 루시아는 내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냈다. "죄송해요. 제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네요." 루시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뺨은 붉게 상기 되어 있었고 입술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녀를 보았다. 루시아는 나의 의도를 짐작했는지 아니면, 나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렸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의 메마른 입술은 촉촉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시간이 멈추었다. 찰나이면서도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른 후, 난 입술을 뗐다. 키스라고 부르기도 뭐 했다. 단순히 입술이 닿았을 뿐이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내 몸 속으로 들어온 느낌들은 생생히 살아 있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녀를 볼 수 없어 애꿋은 하늘만 쳐다 보았다. 이런 미친! 내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지? 아이씨, 미치겠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냐? 아니야, 루시아도 내가 키스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맞아. 거부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웃기고 있네. 갑자기 덮치길래 무서워 말을 못 한거지 기다리긴 개뿔이 기다려? 일국의 공주가 뭐가 아쉬워서 너 같은 개뼈다귀와 입맞춤을 하고 싶겠냐? 아니야! 진정한 사랑은 신분을 초월하는 거야. 아주 쇼를 해라. 신분은 둘째치고 외모를 한번 생각해 봐라. 그녀가 공작새라면 넌 똥파리다. 그녀가 태양이라면 넌 성냥불이야. 너 같은 놈은 성냥팔이 소녀와 데이트나 해. 갑자기 거기서 성냥팔이 소녀가 왜 나오는 거냐? 아아! 미치겠다. 루시아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설마 날 공주 성추행 죄로 잡아 넣지는 않겠지? 그럼 나는 강제 키스죄로 실형을 언도 받을지도 몰라. 안돼. 난 결코 호적에 빨간줄을 그을 수는 없어. 아!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나 해주세요. 아니면, 따귀라도 한 대 때리던가. 순식간에 떠오른 수백가지의 생각들로 내 뇌는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순간, 내 어깨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난 생각을 멈춤과 동시에 내 어깨에 닿은 손길의 정체를 보았다. 루시아는 망토를 다시 내 어깨에 걸쳐 주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난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심연의 밑바닥에 가라 앉아있던 용기까지 다 끄집어 내어 루시아를 보았다. 루시아는 슬픈 눈동자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아아! 역시 나란 인간에 대해 실망한게 틀림 없어. 이 더러운 자식! 순결하고 고결하며 성스럽기까지한 그녀에게 대체 무슨 추잡한 짓을 한거냐? 넌 인간 말종 같은 놈이야! 난 사죄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물론 몇 마디 사죄를 한다고 해서 빼앗겼던 그녀의 입술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사죄를 해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바닥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 생각이다. 내가 말을 하려는 순간, 루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이에요." 난 입을 다물며 그녀가 한 말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처음? 처음이라니? 뭐가 처음이라는 거지? 설마……. 난 그녀의 말 뜻을 알아차리자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럴 수가! 나 같이 더럽고 비열하고 얍삽하고 쫀쫀하고 치사하고 싸가지 없고 추잡한 놈이 그녀의 첫 키스를 빼았다니. 이런 죽일 놈! 넌 죽어야 해! 나는 자해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저도 처음입니다.." 생각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차마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 보며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은근히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겼다. 거짓말의 여파인지 심장이 세게 뛰고 몸이 조금씩 떨렸다. 난 혼자서 이곳에 왔어. 설마 나의 어두운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겠지? 나는 차마 성스럽고 고결한 그녀에게 내가 여자 경험이 있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순결하고 순진한 그녀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을까? 난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중, 실수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루시아는 여전히 슬픈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이 들킨걸까? 다시 눈치를 살피던 나에게 아름답게 웃는 루시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듯한 여신의 미소였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도 고혹적인 미소. 온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셀 수 없을만큼 수 많은 감정들이 내 몸 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당신을 믿을께요." 루시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난 조금씩 멀어지는 그녀를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당신을 믿을께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환청처럼 내 귓가에 맴돌았다. 난 그 자리에 털썩 누웠다. 온 몸에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힘은 이미 오래 전에 다 빠져나갔다. 그런 나를 지탱해주었던 것은 루시아였다. 감동, 슬픔, 쾌락, 흥분. 온 몸에 흥분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그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게 사랑인가? 확신은 서지 않았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난 눈을 감았다. Part 2. 천하를 움직일 사람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 경비를 서는 병사들을 제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불이 꺼지지 않은 방이 하나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의 방이었다. 사일런스 남매는 전쟁이 끝난 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전쟁 전에는 책략을 짜느라 골머리를 썩더니 이번엔 전후 처리 문제로 골머리가 썩다 못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일루니아와 지니는 커다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며 앉아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서로의 얼굴을 볼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탁자에 위에 놓여져 있는 수백장의 서류를 처리하는 것도 바쁘기 때문이다. 일루니아는 며칠 새 표가 날 정도로 얼굴이 핼쓱해졌다. 원래부터 조금 마른 몸이었는데 과중한 업무로 인해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몸 상태가 안 좋아 진 것이다. 반면 지니는 상당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똑같이 잠을 자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니는 여전히 수려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루니아는 빠른 손놀림으로 서류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눈에 초점이 흐려진 관계로 원하는 서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제길, 군단편성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자연스럽게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일루니아는 안경을 벗어 옷에 몇번 문지른 다음 다시 썼다. 그리고 다시 서류를 뒤적거렸다. 지니는 힘들어하는 누님의 모습을 보고는 펜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조금 쉬었다 하시지요." "이것만 끝내고." '이것만' 이라고 말은 했지만, 일루니아가 펜을 내려 놓은 때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연관된 서류를 전부 처리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일루니아는 기지개를 쭉 편 다음, 지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있어서 인지 몸의 근육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니는 비틀거리는 일루니아에게 말했다. "피곤하신 것 같군요. 조금 주무십시오." 일루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일을 하시더라고 쉬시면서 하셔야지요. 그러다가 몸 상합니다." "잠을 못 잔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저는 남자잖습니까." 지니의 대답에 일루니아는 독기어린 눈으로 지니를 쏘아 보았다. "뭐야!? 그럼 난 여자여서 안 된다다는 거야? 내가 여자인 것과 일하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데!?" 앙칼진 일루니아의 물음에 지니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누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일루니아는 차가운 눈길로 잠시 지니를 쳐다보다 고개를 획 돌렸다. 지니는 화난 누나의 모습이 재미있어 웃음을 지었다. 확실 일루니아의 앞에서 여자, 남자 구분을 한 것은 실수였다. 굳이 성차별 주의적 발언이 아니더라도 일루니아는 자신 여자 취급 받는 것을 싫어했다. 일을 할 때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참모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니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은 화가 났다. 일루니아가 참모이긴 하지만 원래부터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뇌의 능력으로만 친다면 다른 사람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낫은 수준일 것이다. 그런데도 군의 참모에 오른 이유는 전부 노력에 의해서다. 하지만 범인(凡人)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코 천재(天才)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일루니아는 20년 가까이 하나의 분야, 전략과 전술만 파고 들었다. 정말 밥 먹는 시간, 잠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공부했다. 하지만 6살 어린 동생인 지니를 이길 수는 없었다. 지니는 정치, 경제, 외교 등의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대고 있고 음악, 미술 등의 예술에다가 심지어는 장군으로서의 능력도 최상급이다. 일루니아는 이런 지니를 군사학 한 분야로도 이길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마음껏 미워하고 싶지만, 동생이어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일루니아로서는 콤플렉스를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루니아는 동생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내 동생이지만 진짜 잘 생겼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 보니 건조하고 푸석푸석했다. 지니의 매끄러운 피부와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지식이나 외모 모두 6살 어린 동생이 자신을 능가한다. 일루니아는 내심 세상은 불공평하다며 투덜거렸다. 순간, 아까 루시아가 했던 말이 떠 올랐다. <나 그 남자 꼬시러 간다.> 오늘 자정에 만난다고 했으니 지금쯤 만났을 것이다. '그 인간이 뭐가 좋아서 그러는 거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언스 히로. 루시아는 대체 그 인간의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내숭을 떠는 걸까? 마음에 드는 부분이 눈꼽만큼도 없는 밥맛 없는 남자. 그 놈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해도 자연스레 이가 갈렸다.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언스 공작을 참모총장 자리에 앉힌거지?" 창 밖을 내다보던 지니는 갑자기 들려온 물음에 웃으며 대답했다. "자리에 앉히다니요? 저는 그저 추천만 했을 뿐입니다." 일루니아는 눈을 크게 뜨고 지니를 쏘아 보았다. "헛소리 하지마. 난 널 누구보다도 잘 알아. 내 동생이니까. 니가 아무 생각 없이 아이언스 공작을 참모총장 자리에 앉혔을리는 없어. 솔직히 대답해 봐." 잠시 후, 지니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누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대외선전용입니다. 어차피 아이언스 공작님은 실권이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짜악-! 갑자기 일루니아가 뺨을 때리는 바람에 지니의 말이 멈추었다. 지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루니아를 보았다. 일루니아는 화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제대로 대답해." 지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20년 가까이를 같이 살아 온 핏줄을 속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누님께서는 아이리스가 다시 강남의 패권을 쥐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일루니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머리를 굴렸다. 아이리스가 다시 강남의 패권을 장악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일단 자바스와 전쟁을 치뤄 자바스를 강남 밖으로 몰아내고 다시 아토리아와 전쟁을 해야한다. 국력의 차이가 수배 이상이지만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잘 살린다면 자바스와의 전쟁은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토리아를 이길 수 있을까? 국토의 면적만 두고 따지자면 자바스가 아토리아 보다 조금 위다. 하지만 실제 유용한 토지의 면적이라던가 국력을 비교해보면 아토리아가 훨씬 위다. 이것은 표면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모사들은 아토리아를 진명 다음 가는 강국으로 꼽고 있었다. 일루니아는 애초에 아토리아와의 전쟁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일단은 자바스를 강북으로 몰아내고 녹색 산맥까지의 땅을 얻는다. 그리고 왕국을 재건한 다음 힘을 기른다. 아토리아와 전쟁을 한다면, 그건 자신이 아닌 다음 대(代)가 할 것이다. "자바스를 몰아내고 강남의 반을 차지 할 수는 있을거야. 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해. 적어도 내 대(代)에서는 말이야."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아이리스는 다시 강남의 패권을 장악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강을 너머 대륙으로 진출할 겁니다." 순간, 일루니아는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아이리스는 대륙의 6국 중 가장 약소국이다. 강남을 되찾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류이테르강을 넘겠다니? 일루니아는 잠시 지니가 헛소리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지니의 표정은 더할나위 없이 진지했다. "너,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충분히 가능합니다. 130여년 전 아이리스 키에트티 님과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은 수 만의 병력으로 강남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이 지금보다 나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불리했다면 불리했겠지요." "그건 아이언스 이그리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어." 일루니아의 말이 맞았다. 전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전부 아이언스 이그리드 때문이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은 마력과 전투력. 전장을 휩쓰는 그는 한 마디로 사신(死神)이었다. 수 만의 병사들을 뚫고 지나가 장군의 목을 베는 일이 그에게는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는 것보다 쉬워 보였다. 그런 인간 같지 않은 능력을 가진 아이언스 이그리드 때문에 적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아군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지력, 무력, 전투력, 마력, 지휘력, 정치력. 모든 것이 완벽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운까지 따라 주었다. 제 3기 전란 당시, 아토리아는 북방의 훈족이 국경을 넘어 공격해 오는 바람에 전 병력을 강남으로 돌리지 못했다. 만약 아토리아가 전 병력을 강남으로 돌렸다면 승패는 어찌되었을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리스에서는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함께 전란을 일으켰던 아이리스 26대 국왕 아이리스 키에티트를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동급에 올려 놓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아이리스 키에티트는 장군의 능력으로도 최상급이었고, 군주로서의 자잘도 뛰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범인에 비해서이지, 감히 아이언스 이그리드와는 비할 수 없었다. 아이리스 키에티트는 모든 능력면에서 아이언스 이그리드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둘 사이가 어긋나지 않았던 이유는 둘이 친구라는 것과 이그리드가 루미아드 공주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께서 하셨던 일이면 아이언스 히로 공작 님께서도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일루니아는 점점 어이가 없어졌다. 순간적으로 동생이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떻게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아이언스 히로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모든 능력이 완벽에 가까운 그런 인간이었다. 반면 아이언스 히로는 마법을 쓰는 것을 제외하면 그냥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생긴 것도 볼품 없고,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닌다. 천하의 명기라 불릴만한 칼을 허리에 차고 있지만, 어떻게 쓰는 건지도 제대로 모른다. 아이언스 이그리드는커녕 사일런스 지니와 비교를 해봐도 퀄리티가 한참 떨어진다. "너 미쳤어? 너 지금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지니는 대답 대신 누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일루니아는 그 눈을 보고 지니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루니아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물었다. "너, 넌 지금 아이언스 히로가 천하를 움직일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천하를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닙니다." 갑자기 지니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강압적인 기운이 지니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방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를 중심으로 천하가 움직입니다." 지니는 말을 마치고 다시 눈을 반쯤 감았다. 일루니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 그를 중심으로 천하가 움직인다고?" "그렇습니다." "넌 어떻게 그걸 아는 거지?" 지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하기 싫은 것이다. 일루니아는 천천히 자신의 동생을 살펴 보았다. 역시 지니의 능력은 자신의 능력을 훨씬 뛰어 넘었다. '사일런스 지니.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일루니아는 눈커풀이 무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데다가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몸이 나른해진 것이다. 일루니아는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지금은 밀려오는 잠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이윽고 일루니아가 완전히 바닥에 쓰러지자, 지니는 한숨을 내쉬며 누님을 안아 들었다. 일루니아의 몸은 매우 가벼웠다. 식사량은 많은 편이지만 원래부터 살이 안찌는 체질인데다가 일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살이 붙지를 못하는 것이다. 지니는 요 며칠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누님의 얼굴을 보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몸이면서도 그렇게 무리해서 일을 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니는 조심스럽게 일루니아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안경을 벗긴 다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일루니아는 어느새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그만큼 피곤했다는 증거였다. 지니는 평온하게 잠든 누님의 얼굴을 바라보다 허리를 숙여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누님." 사실 잠을 못 잔 것으로 따지면 지니가 더 했다. 그래도 일루니아는 조금씩 선잠을 취하긴했지만, 지니는 아예 잠을 자지 않았다. 자신이 잠을 자지 않고 일한 것을 알면 누님도 잠을 자지 않을꺼라는 것을 잘 알기에 적당히 잔 것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지니는 탁자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오늘 밤에도 잠을 자기는 힘들 것 같았다. * 햇살이 눈부셨다. 자꾸만 누군가가 조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을 끄고 싶었지만, 조잘대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난 하는 수 없이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바로 밝은 햇살이 눈으로 들어왔다. 난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가 천장을 훔쳐갔다! 난 나의 생각이 맞을 거라 확신하였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었지?" 내가 있는 곳은 왕궁 뒷편에 위치한 정원이었다. 꽃은 한 송이도 없고 잡초들만 무성하게 자라 있는 모습이 인위적인 것을 배재한 자연적인 정원이라는 생각을 들게했다. 나는 잠시 내가 왜 이곳에서 잠을 잤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한 연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루시아." 맞아. 어제 그녀와 만났었지. 그리고……. 어젯밤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확연히 떠 올랐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일어났던 일. 난 어느새 내 입술을 더듬고 있었다. 따뜻했던 그녀의 입술. 하얗게 빛나던 그녀의 모습. 아아! 그대는 한 줄기 바람처럼 내게 다가와 나의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달아났군요. "아주 제정신이 아니구만." "그래. 그녀는 나를 미치게 만들어. 나는 제정신이 아니……." 갑자기 매우 불쾌한 기운이 내 몸을 엄습하는 바람에 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흰색 매 한 마리가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난 그 매에게 물었다. "너 어디갔다가 지금 왔냐?" 그러자 라이코스는 가슴을 쫙 펴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비지니스 사업차 잠시 여기저기 돌아다녔지." 순간, 내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당혹스러움은 분노로 바뀌었고, 난 라이코스를 걷어차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 분노를 삭힐 수 있었다. "왜 때려!?" "억울해 하지마라, 라이코스. 이것이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행할 수 있는 비합법적 폭력이니. 억울하면 니가 지배자가 되던가." 라이코스가 소리쳤다. "난 이미 지배자야!" "니가?" "나는 그 이름도 유명한 창공의 지배자 청안백우조!" 너무도 황당한 말이었기에 나는 다시 라이코스를 걷어찼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뒤에서 라이코스가 꿱꿱 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별로 신경 쓸 가치가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 앞으로의 행로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다. 방문을 열자 이상한 냄새가 밀려왔다. 특별히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니지만, 조금은 퀘퀘한냄새. 난 전부터 궁금했다. 왜 남자 혼자 사는 방에서는 이런 냄새가 나는 걸까? 똑같이 청소를 하고 똑같이 생활을 해도, 여자 방에서는 결코 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아! 이해할 수 없는 일. 난 방 안으로 들어가 망토를 벗어 던졌다. 노숙을 했지만 그리 피곤하지 않은 이유는 아무래도 이 망토 덕인 것 같았다. 쿠션이 좋은데다가 난방까지 되니까. 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자꾸만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 그녀의 슬픈 눈동자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당신을 믿을께요.' 환청처럼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그래!" 난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뱉음과 동시에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재빨리 침대 밑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손에 딸려 온 것은 다름 아닌, 차가운 물빛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장도(長刀)였다. 청룡도. 희대(稀代)의 명기(名器)라 불릴만한 무기이지만, 내 손에 들어와 침대 밑에 처박히는 신세를 면치 못한 저주받은 도(刀). 난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집을 잡은 다음, 양쪽으로 당겨 보았다. 그러자 스르릉 거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청룡도가 시퍼런 날을 드러냈다. "오오!" 정말 언제보아도 화끈하게 생긴 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끈하다기 보단 차갑다. 금방이라도 피를 부를 듯한 모습.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칼 쓰는 법을 익혀봐야 겠다. 난 그렇게 결심을 하고 청룡도를 다시 칼집에 넣었다. 생각 같아서는 혼자서 수련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워낙 아는 것이 없기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러자 떠오른 사람이 한명 있었으니, 그는 바로…… 사일런스 지니. 문관(文官)이기도 하고, 무관(武官)이기도 하고, 예술인(藝術人)이기도 하고, 체육인(體育人)이기도 한, 우리 시대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먼트. 나 이 인간이 칼 쓰는 거 한번도 본적 없다. 생긴 것도 완전 기생오래비처럼 생겨가지고 싸움도 그리 잘할 것 같지는 않다. 생긴 것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이다. 그것도 오빠 부대 몰고 다니는 학자. 아무튼 생긴 것은 이래도 웬만한 장군급 레벨을 갖춘 무관이라고 하니 한번 부탁해보기나 하자. 난 청룡도를 움켜쥐고 방 안을 뛰섰다. 똑똑-! "계시나요?" 문 앞에서 대답을 기다렸지만 나에게 돌아 온 것은 침묵 뿐이었다. 혹시 자고 있나? 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 순간 내 왼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시죠?" 고개를 돌려보니 복도 한쪽에 어리게 보이는 두 명의 하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하녀들은 나를 발견하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예전에 떠돌았었고, 지금도 열심히 떠돌고 있는 악성 루머. '아이언스 공작이 샤이 사일런스 백작을 강간했다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악성루머는 악성루머일 뿐이다. 어찌 순진하고 순결하고 착한 나를 소문 하나만 듣고 나쁜 놈이라 평가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법이다. 난 문을 여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들은 내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더니 덜덜떨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 아닌가? "저, 저기요……." "꺄악!" 내가 입을 연 순간, 한 하녀가 소리를 쳤고, 둘은 동시에 도망치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자신들에게 이상한 짓을 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잠깐!" 난 그녀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얘기를 해야 풀어주든 뭘하든 할 것 아닌가? 난 하는 수 없이 그녀들을 쫓아 달렸다. 하녀들은 내가 쫓아오는 모습을 보더니 더욱 크게 소리를 질러대며 복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치마를 움켜쥐고 질주를 하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마치 저 넓은 몽골고원을 뛰어 다니는 야생마를 연상시켰다. 어느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가 안 보일 정도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과의 간격은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저 여자들은 뭘 먹고 컸길레 저렇게 빠른 걸까? 지쳐서 도저히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를 하려하는데, 그 순간 한 하녀가 다리가 엉키며 넘어졌다. 그러자 동료 하녀는 순간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쓰러진 하녀가 외쳤다. "난 괜찮으니 너라도 도망가." "하, 하지만." "난 이미 틀렸어." "아, 안돼. 너를 두고 나 혼자 갈순 없어." "바보야! 너라도 살아남아야지. 빨리 가! 어서!" 서 있는 하녀는 잠시 쓰러진 하녀의 얼굴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는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걱정하지마, 유나. 내가 사람들을 불러 올게." "빨리 가!" 하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쓰러져있는 하녀는 고개를 땅에 묻고 오열을 토하기 시작했다. 난 그 모습이 너무도 황당하여 기가 막할 지경이었다. 저 둘의 행동은 마치 전쟁터에서 친구를 남겨두고 도망쳐야만하는 그런 비장한 상황을 연상케 하였다. 물론 지금은 그런 비장한 상황이 아니다. 지들끼리 오해하고 지들끼리 쌩쇼(Live Show)를 하는 것이다. 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쓰러진 하녀에게 다가섰다. 어느새 하녀는 몸을 돌려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볼에 주근깨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잘해봐야 15살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였다. 내가 조금씩 다가오자 하녀는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슬금슬금 뒤로 이동시켰다. 하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난 하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씨익 웃어주자, 하녀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체념을 한 듯한 표정. 아! 진짜 이 여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 "이봐요." 난 하녀를 일으켜줄 생각으로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하녀는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오, 오지 말아요. 저, 저는 아직 어려요. 그, 그러니 제발……." 이렇게 말을하며 눈물을 펑펑 흘려 대는데 진짜 보고있는 내가 다 감동 받을 지경이다. 어린데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내가 일으켜주기 위해 하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뭘하시는 겁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지니는 내 얼굴과 하녀의 얼굴, 그리고 내 포즈와 하녀의 포즈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순간, 하녀는 나를 밀쳐내더니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는 듯한 행동을 취하며 지니에게 외쳤다. "도와주세요, 사일런스 백작님." "아니, 무슨 일이시길레……." 지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녀는 벌떡 일어나 지니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차마 말을 하지는 못하고 지니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만 하였다. "흐윽, 흑흑." 지니는 울고있는 하녀를 살짝 안아 달래주며, 내 얼굴을 쳐다 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해보이다가, 내 손에 청룡도가 들려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왜 지니를 찾아왔는지 깨닫고는 지니에게 말했다. "저기……." 그 순간, 지니가 조금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난 혹시 내 뒤에 먼가가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지니를 바라보자, 지니는 긴 한숨을 한번 내쉰 다음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예? 뭐가요?" 지니는 울고 있는 하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아이언스 공작님이야 말로 제 누님의 반려자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직 정식으로 교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아이언스 공작님의 외도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곳에 오신 후로 외로움을 많이 타셔서 여자를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런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지르려 하시다니. 정말 아이언스 공작님은……" "잠깐!!!" 난 두 팔을 벌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지니의 얼굴을 보았다. 지니의 표정은 경멸보다는 동정을 담고 있었다. "지, 지금 무슨 소릴하시는 겁니까?" 지니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부인하셔도 소용 없습니다. 전 이미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아! 진짜 미치겠다. 난 결백하단 말이다! "그게 아닙니다. 전 그저 오해를 풀어주기 위하여……." "그럼 손에 들고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건 청룡도……." "제가 알기로 청룡도는 한동안 아이언스 공작님의 침대 밑에 놓여져 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것을 가지고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거야 간만에……." 원래는 '칼쓰는 방법을 익히려고' 라는 말이 이어져야하지만 지니가 말허리를 자르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지니는 확신에 가득찬 어조로 말했다. "간만에 쌓인 성욕을 풀기 위해서 가지고 나오셨겠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차오르는 성욕을 억제하시지 못하여 청룡도를 들고 방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지니가는 하녀를 청룡도로 위협하여 부정한 짓을 저지르려 하셨습니다. 울며 애원하는 여성분을 무참히 짓밟으려 하셨습니다. 어찌 인간으로써 그러 실 수가 있읍니까? 아무리 여자가 필요했다 하더라도 밤마다 아이언스 공작님을 생각하며 잠을 못이루시는 저희 누님을 놔두시고 어찌 다른 여자를 강제로 범하려 하셨습니까?" "……."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지니는 내가 본심을 들켜 당황해서 그러는 줄 알고 더욱 목소리를 높혀 말했다. "여자가 필요하셨으면 저한테 말씀을 하셨어야지요. 그럼 제가 좋은 곳으로 안내해 드렸을텐데. 지금과 같이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참모총장이자 공작이신 분이 정사를 돌볼 생각을 하지 아니 하시고 궁에서 일하는 하녀를 강제로 범하려했다는 소문이 외부로 알려진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아이언스 공작님의 명예는 땅을 추락할 것입니다." 이미 추락할만큼 추락했다. 강간마라는 소문까지 낫는데 더 이상 추락할 데가 어디있냐? 그리고 너만 조용히 하고 있으면 외부로 알려질 리가 없잖아! 왜 자꾸 악성루머를 조장하는 거냐? "아이언스 공작님은 아직 젊습니다. 이런 일로 인생을 망치시면 안 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이야 말로 아이리스를 이끌어 갈 선구자십니다. 제발 정신차리십시오." 너 때문에 정신 차리긴 글렀다, 임마! 지니의 품에 안겨있는 하녀는 꺽꺽 거리며 마지막 울음까지 짜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지니의 품에 안겨있고 싶어 억지로 우는 것이 틀림없다. 그 증거로 하녀는 두 손으로 지니를 꼭 껴안고 있다. 안 그래도 능력있고 핸섬에서 전부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주자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 하녀는 지금쯤 나에게 감사하고 있지 않을까? 이미 자포자기한 나에게 여러사람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도망쳤던 하녀와 십수명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하녀가 사람을 불러오겠다고 하더니 진짜로 불러왔나 보다. 그 하녀가 소리쳤다.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이 저와 유나를 겁탈하려했어요!" 이젠 변명할 생각도 없다. 그냥 매장시켜라. * "그러니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그 여성분의 오해를 풀기 위해 쫓아 갔다가 부정한 짓을 저지르려했다는 오해를 받았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진작에 말씀을 하셨어야지요. 잘못하면 저까지 오해 할뻔 했잖습니까?" 이미 오해 했잖아! 난 아까 몰려 온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해 보았지만, 누구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강간 미수로 그치자 치사하게 변명해댄다는 오해만 더 샀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연무장이라 이름 붙여진 공터였다. 난 연무장이면 바닥에 대리석 쫙 깔리고 관중석이 있는 장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냥 공터였다. 그나마 다른 곳보다 낫은 점을 꼽아보라면 땅을 잘 골라 놨다는 것 정도. "그런데 저는 왜 찾아오셨습니까?" 아! 맞다. 괜히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먹을뻔 했군. 난 청룡도를 움켜쥐며 말했다. "사실 제가 칼 쓰는 법을 조금 배워보려 하거든요. 그래서 사일런스 백작님께 가르침을 받으려구요." 지니는 나와 청룡도를 번갈어보더니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외눈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흐음, 갑자기 검술을 배우시겠다니……. 이해 할 수가 없군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마법사가 아니십니까?" "마법사는 검술 배우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 아이언스 공작님은 제외십니다. 아무튼 검술을 배워두는 것도 좋겠군요. 그런데 왜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싸움 좀 하신다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지니는 다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요즘 업무가 바쁜 관계로 시간을 낼 수 없을 듯 합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검술을 배우고 싶어하시니, 제가 카인트 자작님께 잘 말씀드려……." "됐습니다." 난 일언지하에 지니의 말을 잘랐다. 카인트 알렌. 그 놈에게 검술을 배우느니 차라리 내 몸을 청룡도로 회 뜨겠다. "그럼 다른 분이라도." "됐습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잠시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원래 천재에게는 스승이 필요 없는 법입니다. 저는 천재답게 저 혼자 검술……이 아닌 도법을 익혀 보겠습니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저만의 필살기를 개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지니는 대단히 감명받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대단하십니다. 선대가 만들어 놓은 것들을 답습하지 아니 하시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그 정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언제나 저에게 크나큰 가르침을 주시니, 제가 그 은혜를 어찌 값아야 할지 망막합니다." "하하, 뭐 그런걸 가지고 은혜까지야." 지니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런 대단한 능력과 진보적인 사고 방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리 겸손하게 말씀을 하시니 저로 하여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드시는 군요. 그럼 저는 업무가 바빠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오늘 아이언스 공작님께 받은 가르침을 영원히 머릿속에 새겨 두겠습니다." "뭐, 영원히 머릿속에 새길 필요는 없고, 그냥 이틀에 한번 정도 다시 떠올리기만 하세요. 원래 반복 학습이라는 게 상당히 중요한 거거든요." 지니는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아! 그리고 언제 시간나시면 저희 누님의 방에 한번 들리십시오." "제가 왜요?" "요즘 과중한 업무 때문에 저희 누님이 많이 피곤해 하십니다. 이런 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주시면 누님께 큰 힘이 될 겁니다." "……." "그럼 다음에 뵐 때까지 안녕히계십시오." 지니는 말을 마치고 멀리멀리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나는 넓은 공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쉈다. 큰소리를 땅땅 치기는 했지만, 나 혼자서 무슨 검술을 익히냐? 그냥 낮잠이나 한숨 자야지. 난 두 손을 베게 삼아 하늘을 바라보며 누웠다. 눈을 감으니 그녀의 생각이 떠올랐다. 땅을 낮게 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내 기분을 흔들어 놓았다. '당신을 믿을께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날 날 바라보던 그 슬픈 눈동자. 그 눈동자의 의미는 무엇이 었을까?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난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다. 검술을 배우고 싶어하는 것도 전부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 난 눈을 떴다. 내 앞에는 아름답게 웃고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게 바로 눈에 착시현상인가 보다. 난 눈을 한번 감았다 떠 보았다. 그런데 여전히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잠깐! 어떻게 얼굴이 이렇게 정면으로 보일 수 있는거지? 생각해보니 난 지금 누워있다. 즉 누워있는 내 눈에 상대방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인다는 것은 상다뱅도 누워있다는 얘기다. 내가 지금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니, 난 등을 땅에 대고 누워있고, 그녀는 등을 하늘에 대고 누워있다. 햇빛을 많이 받으니 눈이 완전히 맛이 갔나 보군. 난 그냥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으악!" 난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눈 앞에 사람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냥 그대로 계십시오." "누, 누구세요?" 눈 앞에 여인은 빙긋 웃었다. "하하, 절 모르시겠습니까?" 미성이긴 했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난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관계로 얼굴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았는지 웃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는 것은 나에게서 조금 떨어짐과 동시에 허공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거다. 진짜 황당하군.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난 그녀의 전체적인 모습을 찬찬히 뜯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얼굴은 대단한 미인이다. 웃고 있는 듯한 빨간색 눈동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색 생머리. 그리고 뾰족한 귀. 분명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얼굴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난 다시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등을 대고 있는 땅이 꼭 90도 각도로 세워져있는 벽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땅 쪽으로 쏠리던 내 몸의 무게가 내 발 쪽으로 쏠렸다. 지금 나는 허공에 발을 대고 땅을 기댄채 서 있었다. "중력을 당신의 발쪽으로 옮긴 뿐입니다." 난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내가 살던 세계가 90도 뒤집어진 느낌이다. 서 있는 나에게 정면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날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난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 좋으니까, 이것 좀 바로 할 수는 없을까요?" "알겠습니다." 순간, 땅이 다시 나를 끌어들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중력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 온 것이다. 난 허겁지겁 땅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어느새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아니, 그녀가 아니라 그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떠올랐다. 그는 내 표정 변화를 눈치챘는지 재밌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야 기억 나셨나 보군요." "아, 예." 어찌 잊을 수 있으리. 저 아름다운 얼굴과 붉은색 눈동자와 머리카락. 저 엘프는 분명 적색 산맥에 사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다. 내 생명의 은인이자 이그리드의 친구. 그런데 저 드래곤이 왜 여기있는 거지? 심심해서 놀러왔나?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그는 어느새 내 앞으로와 섰다. "저랑 얘기 나눌 시간이 있으십니까?" "아, 예. 시간이야 언제나 넘쳐나지요." 내 대답에 크로니스는 눈을 반쯤 감으며 웃었다. "그럼 일단 앉지요." 난 그가 이끄는 대로 방금까지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크로니스는 나와 몸이 붙을 정도로 가까이에 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난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그가 입을 열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는 수 밖에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즐거우신가요?" "예!?" 나의 반문에 그는 그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크로니스는 몸을 일으켰다. 난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걸으면서 얘기 할까요?" 앉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예." 어쩌겠냐? 그냥 시키는데로 따라야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이 곳까지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습니까?" 난 그 동안 있었던 수 많은 일들을 일일이 늘어 놓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최대한 간단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열심히 걸어서 왔습니다." 그는 수긍한다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려 하였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질문을 해야할 지 감이 잡하질 않았다. 크로니스는 그런 내 생각을 알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여러가지를 묻고 싶으시다면, 당장 필요한 것을 먼저 물으십시오.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요." 으흠, 당장에 필요한 질문이라……. 난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질문을 떠 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왜 내 마법에는 진전이 없는가?' 와 '단 시간 내에 검술을 익힐려면 어찌해야하는가?' 이다. 크로니스는 내 질문을 듣더니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예술적이여서 순간적으로 로뎅의 조각상이 떠오를 정도였다. 잠시 후, 크로니스는 입을 열었다. "제가 전에 열심히 수련을 하면 6써클의 마나도 사용할 수 있을거라 말씀드렸을 겁니다." "예. 저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수련을 해도 잘 안 되던데요. 일단 집중을 하고 있으면 마나가 움직이기는 하는데 마법을 쓰려고 집중을 조금만 풀면 바로 움직임을 멈춥니다. 몇번이나 해보았는데도 전혀 진전이 없어요." 내 대답이 끝나자 크로니스는 다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당신의 마법이라는 것은 결국 이그리드의 것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겁니다. 아무런 노력의 대가 없이 그냥 얻은 힘이지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은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해도 그 이상은 힘듭니다." "그럼 어쩌면 좋지요?" 크로니스는 대답을 생각해 놓았는지 바로 입을 열었다.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의 몸에 쌓여있는 마나와 써클을 전부 제거하고 다시 처음부터 마나를 쌓는 겁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조금 무리겠군요. 지금부터 마나를 쌓는다고 했을 때, 10년 내에 5클래스에 도달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니까요. 두 번째 방법은 각성을 하는 겁니다." "각성이요?" "예. 마법이란 것은 정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의 몸 속에 있는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육체적 문제가 아닌 정신적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6클래스의 마법을 쓸 수 없는 것은 당신의 정신이 그것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죠?" "그건 당신의 정신이 당신의 마법력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정신이 견디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마법을 쓰다보면 폭주를 하거나 붕괴할 위험이 있거든요." 너무 어려운 말이어서 솔직히 이해가 잘 안간다. 하지만 대충 요약을 해보면 내 정신력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어려운 마법을 쓰면 위험하다는 거다. 그래서 내 정신이 6클래스의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말이다. 고로 내가 6클래스의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정신력이 강해져야 한다. 이거 맞게 해석한건가? "그럼 각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내 질문에 크로니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참고 기다리시면 언젠가는 6클래스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날이 올겁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되면 되는거고 안 되면 안 되는거다, 라는 건가? 미치겠군. 난 한숨을 내쉬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래. 어차피 이젠 검술 쪽으로 나갈 때가 됐다. 쪽팔리게 뒤에서 마법만 날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잘 나가는 참모총장인데 적어도 필살 기술 몇 개 정도는 구비해 둬야지. "제가 이제부터 검술을 익혀보려 하거든요. 어떻게하면 단시간 내에 강력하고 화끈한 기술을 익힐 수 있을까요?" "강력하고 화끈한 기술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그냥 무조건적으로 파워가 센 거요. 칼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10만씩 죽는 그런 기술이요." 크로니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난 그 모습을 보고는 내심 기대감을 가졌다. 그냥 장난으로 말해본 건데도 불구하고 크로니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기술이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다. 역시 드래곤이니까 뭔가 달라도 다른 것이다. 만약 내가 그 기술을 익힌다면…… 50번 휘두르면 대륙 통일. 그리고 500번 휘두르면 인종 말살. 아마도 모든 이들이 나를 우러러 보겠지? "한번에 10만을 죽일 수 있는 기술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순간, 귀가 솔깃해졌다. "그게 뭔가요?" 크로니스는 웃음을 지었다.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드래곤 브레스라면 10만을 죽이는 것도 가능합니다." "드래곤 브레스요?" "예." "드래곤 브레스라면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거 제가 쓸 수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다른 것을 말씀해주세요." 크로니스는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난 주위를 둘러 볼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왕궁을 한 바퀴 돌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평평한 연무장이 그 증거이다. 참 많이도 걸었군. 뭐지!? 순간, 나는 뇌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느낌을 받는 순간, 고개를 숙였다. 사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 뭔가가 지나갔다. 내가 고개를 숙이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난 어이없는 눈길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내 옆에 있는 엘프를 보았다. 붉은색 머리카락에 키가 큰 엘프는 손에 붉은색 검을 들고 웃고 있었다. 그 엘프는 칼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음을 지었다. "제법이군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방금 저 엘프가 나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만약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면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난 두, 세 걸음 뒤로 물러선 다음 청룡도를 뽑았다. 하지만 당황해서인지 도는 그리 쉽게 빠져나오지 않았다. 난 칼집을 거의 버리다시피해서 간신히 청룡도를 뽑아 들고 크로니스를 겨누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크로니스는 나의 외침에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그 아름다움 속에 숨어있는 섬뜩함과 잔인함.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이다! 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크로니스는 가벼운 동작으로 나에게 검을 겨누었다. "빠르게 움직이십시오." 발 끝이 움직인다. 왼쪽? 오른쪽? 오른쪽이다! 눈은? 역시 오른쪽이다. 난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른 동작으로 몸을 왼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크로니스가 조금 빨랐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붉은 검은 내 왼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나 빠른 동작인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어이없이 피가 흐르는 왼팔을 바라보는 사이 크로니스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아래! 난 그의 행동을 느끼고 재빨리 두어 걸음 정도 뒤로 물러 섰다. 그러자 그 곳에는 붉은 색 호선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발과 몸이 따로 놀았을 것이다. 제길! 난 크로니스에게 뭐라고 외치려하였만, 크로니스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입을 열틈도 없이 검을 휘둘러 대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간발에 차이로 그것을 피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뭡니까?" 크로니스의 말에 난 내 손에 청룡도가 들려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것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지금 내 상대는 내 목숨을 구해주었던 드래곤이니.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는지요?" "자, 잠깐!" 푸욱-! 나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크로니스의 검은 내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잠깐 동안의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크로니스가 검을 뽑는 순간, 분수 같은 피가 뿜어져 나오며 횃불을 살에 댄 듯한, 그러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아악!!!" "느려터졌군요." 크로니스는 조금의 감흥도 없는 듯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피묻은 칼을 스윽 보더니 다시 검을 휘둘렀다. 피가 빠져나온다. 고통이 온 몸을 휘감는다. 정신이 점점 희미해진다. 나에게로 다가오는 붉은 검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 너무도 당연한 진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난 몸을 뒤로 튕기며 온 힘을 다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카강-! 푸른색 도와 붉은색 검이 맞부닥치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었다. 자세가 불안정한 데다가 팔힘이 약해서 내가 휘두른 청룡도는 별 위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붉은색 검을 비껴가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몸에 힘이 빠져나갈수록 머릿속은 냉정해졌다. 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크로니스를 바라 보았다. 크로니스는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살려 놓은 다음, 가지고 놀다 죽인다. 난 그에게 있어서 장난감에 불과한 존재였다. 어차피 그는 드래곤이고 나는 인간이다. 우리는 생각이 틀리고 행동이 틀리다. 죽여 버리겠어! 네 놈의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주지. 피가 끓어 올랐다. 심연(深淵)의 및 바닥에 잠자고 있던 힘이 느껴졌다. 난 힘들게 청룡도를 들어 올렸다. 시간이 없다. 왼쪽 어깨에서 출혈이 너무 심했다. 1분 이상은 버틸 수 없다. "으아아!" 난 기합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외침과 함께 크로니스에게 달려들었다. 크로니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선제 공격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그는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러 내 왼쪽 팔을 베어 왔다. 어차피 왼쪽팔은 끝났다. 굳이 막을 생각은 없었다. 난 방어를 포기하고 청룡도를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이겼다! 난 나의 생각을 확신했다. 나의 왼팔이 잘리고, 난 크로니스의 허리를 비스듬히 베었다. 눈 앞이 희미해졌다. 희뿌연 안개만이 내 눈을 가로 막았다. 피와 함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난 바닥에 풀썩 엎어졌다. 작은 경련이 이따라 몸을 건드렸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았다. *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난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 여인은 손을 델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난 그녀를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이웃나라에 늙은 왕이 있었다. 그 왕은 탐욕스럽고 포악했다. 그 왕은 내가 사랑하는 그 여인을 가지길 원했다. 나는 결코 그녀를 늙은 왕에게 넘겨 줄 수 없었다. 아니, 늙은 왕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넘겨 줄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나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다. 늙은 왕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위협하였다. 그녀만 늙은 왕에게 넘겨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이 곳에 사는 수 만의 백성들과 수 천의 군사들에게 아무런 위험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 수 만의 목숨보다는 그녀의 행복이 더 소중했다. 전쟁은 계속 되었다. 우리는 숫적인 열세를 딛고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어느덧 전쟁의 목적은 변절 되었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수성에서 공성으로. 전부 힘이 없어서이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이유도, 내가 그녀 곁에 있을 수 없는 이유도. 현재는 전국시대(戰國時代).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 대륙을 그녀에게 선물하리.' 북으로 북으로. 땅은 점점 넓어졌고 그녀는 기뻐했다. 대륙의 한쪽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은 순식간에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대륙 전쟁으로 번졌다. 각 국은 자국의 이득을 위해, 새로운 영토를 얻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대륙 전체가 전화(戰火)에 휩싸였다. 하루에도 수만이 죽었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나와는 상관 없다. 난 이렇게 살아있고 그녀는 행복해 하니까. 전쟁은 계속되었다. 지루할 만큼 피에 무감각해졌다. 수십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전쟁이 끝났다. 한낱 속국에 불과했던 나라는 대륙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만큼 커져 있었다. 하지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이미……. * 아무 무늬도 없는 천장.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계. 눈을 떠보니 낯익은 곳이었다. "깨어 나셨어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는 나보다 더 놀라며 몸을 움찔했다. "여, 여긴……?" "당신의 방이에요." 낡은 탁자. 개어 놓지 않고 널부러트려 놓은 망토. 낡아서 달그락거리는 창문. 내 방이 확실했다. 난 눈을 돌려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녀는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숙여 내 눈길을 피했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니 루시아의 손에 들려있는 흰색 물수건이 보였다. 내가 묻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자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서……." 내가 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해 대니 걱정이되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말인가? 아! 감동스러워라! 악몽이라……? 악몽이긴 악몽이었다. 진짜 재수 없는 꿈이었다. 간만에 드래곤을 만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드래곤이 어째서 나를 죽이려 했던걸까? 혹시 개꿈? 가능성이 높다. 내가 워낙 재수 없는 인간이다보니 꿈도 재수 없게 꾼다. 하지만 꿈이라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고통까지 그대로 느껴졌으므로. 잠깐! 설마! 난 내 왼팔을 살펴 보았다. 옷을 걷고 보아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쉈다. 역시 개꿈이었다. 루시아는 땀에 흠뻑 젖은 내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으신가요?" "예. 잠깐 나쁜 꿈을 꾸었네요." 난 옷을 고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허리를 숙여 침대 밑을 뒤져보니 오래 전에 넣어 놓았던 청룡도가 보였다. 난 배를 바닥에 붙인 다음 팔을 쭉 뻗어서 청룡도를 꺼냈다. "뭐하시는 건가요?" 루시아의 물음에 난 침대 밑에서 꺼낸 청룡도를 보여 주었다. 루시아는 흥미롭다는 눈길로 청룡도를 보았다. "이건……." 난 부드러운 동작으로 청룡도를 칼집에서 빼냈다. 방은 조금 어두운 편이었지만, 청룡도는 그 차가운 칼날을 유감 없이 드러냈다. "어때요?" 루시아는 조금은 두려우면서도 관심이 가는 지 희미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청룡도의 날을 살펴보고 있었다. 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런 그녀를 향해 청룡도를 휘둘렀다. 서걱- 베었다! 손에 느낌이 확실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어디갔지? 난 재빨리 벽을 등에 지고 사방을 둘러 보았다. 10평 안팎의 방에는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있지 않았다. 난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나오라고 한다고 나올 리가 없었다. 난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청룡도를 몸 앞에 세웠다. 식은땀이 온 몸에 흐른다. 대체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걸까? 아직도 악몽을 꾸는 기분이다. "이건 꿈이 아닙니다." 어느새 내 반대편에는 붉은 머리의 엘프가 서 있었다. 난 다리를 적당히 벌려서 자세를 더욱 탄탄히 했다. 언제 공격할 지 모른다. 웃으면서 칼을 휘두르는 자다. "그 칼로 저를 막으실 수 있겠습니까?" 난 그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자신감을 과시하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로 너를 죽이려한다면, 니가 칼을 들고 있어봐야 나를 막을 수 있겠냐? 당얀 막을 수 없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일이 힘 빼지 말고 칼 내려 놔라.' 아마도 이런 해석이 맞을 것이다. 난 청룡도를 아래로 내렸고, 크로니스는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다행히 특별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내 앞에서 서자, 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째서 그러신거죠?" 크로니스는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 "당신의 능력을 알아 본 것 뿐입니다." "능력 두 번만 알아봤다간 송장(送葬) 치우겠군요."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크로니스의 귀에는 농담처럼 들렸는지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기분 상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악의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니 기분 푸십시오." 솔직히 악의(惡意)가 없어서 더 무서웠다. 살기를 대 놓고 드러내는 것이 낫지, 살기를 감춘 채 검을 휘둘러 대니 잘못했으면 이 나이에 제삿상 받아 먹을 뻔했다. 제삿상 차려줄 자식도 없긴 하지만. 크로니스는 의자 하나를 빼서 앉았다. 그리고 나에게도 편하게 앉으라고 권하였다. 난 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반대쪽에 의자 하나를 빼서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가 아닌 나였다. "완전히 똑 같더군요." 이 말은 그가 루시아의 모습으로 변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크로니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 채셨죠?" "그냥 느낌이 그랬어요." 이 이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크로니스는 루시아와 똑 같은 모습으로 변신해있었다. 게다가 성격과 행동거지까지도 똑 같았다. 만약 내가 이성적으로만 생각했다면 그냥 루시아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성은 나에게 루시아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고, 나는 그 감성에 따랐다. 내가 확실한 이성보다 불확실한 감성에 의존했던 것은 이번 경우에는 감성이 훨씬 정확했기 때문이다.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쉽게 칼을 휘두를 수 없었겠지. "인간의 느낌만큼 정확한 것도 없는 법입니다. 보통 육감(六感)이라고 하지 않나요?" 오랜만에 듣는 얘기다. 육감. 일명 식스 센스(Six Sense). 한 때 영화로 나와서 히트까지 친 작품. 인간에게는 오감(五感)이라고 해서 다섯가지 감각이 있다. 여기서 다섯가지 감각이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뜻한다. 그리고 아직 미지로 남아 있는 여섯 번째 감각인 육감. 오감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감각. 사물의 신비한 점이나 깊은 본질을 직감적으로 포착하는 마음의 기능. 난 이 육감으로 루시아의 모습을 한 크로니스를 꿰뚫어 보았다.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난 예전부터 신기(神氣)가 조금 있었다. 나 태어났을 때만 해도 동네에서 신동(神童) 낫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 들은 놈은 커서 별 볼일 없게 된다고. 그래. 그 말이 맞다. 크니까 확실히 별 볼일 없어지더라. 솔직히 어렸을 때, 신동 소리 한번 안 들어 본 놈이 어디있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육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맞다. 인간은 누구나 육감을 지니고 있다. 육감(肉感). 쫙 빠진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걷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저 여자 육감 죽인다.' 이게 바로 육감이라는 거다. 육체에서 풍기는 성적 느낌. '저 가스나가 어디서 옷을 홀딱 벗고 있어!? 으이구, 어떤 집안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미쳤구만, 미쳤어. 저 가스나는 춥지도 않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긴 있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감수성이 매마르고 육감(肉感)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아주머니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 육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발달 되어 있는가, 이지요. 당신의 오감과 육감은 인간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난 크로니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뜻인가? 크로니스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제가 검을 휘둘렀을 때 말입니다. 그때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피했나요?" "그, 그땐 그냥…… 그러고 싶어서……." 대답하고 보니 진짜 이상하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갑자기 휘두른 칼을 피하다니. 하지만 그 때는 정말로 그랬다. 날카로운 기운이 머릿속에 꽂힌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어느새 나는 고개를 숙였다. "사람을 죽여 본 적 있으신가요?" 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 죽였지요?" 크로니스의 붉은색 눈동자가 조금 수축했다. 투명한 물 속에서 피가 번지는 듯한 느낌. 내면을 들여다보는 눈. 난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으로 점점 빨려들어갈 뿐,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필요에 의해서." "필요하면 살인도 한다는 건가요?" "상대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단순한 정당방위라 말하고 싶은 겁니까?" 숨 쉬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살인이라? 난 필요에 의해 사람을 죽였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이제와서 정당방위니 어쩌니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되었든 난 그들을 죽였으니까. 난 정의니 뭐니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걸로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역겹기 그지 없는 짓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이곳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 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몇 명이 죽던지 간에 내 목숨이 가장 소중하니까. "살인을 할 때 기분은 어떻했습니까?" 난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그만 하지요. 기분이 별로 안 좋군요." 크로니스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 본론을 얘기하지요. 인간에게는 오감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 미지의 감각인 육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육감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니 오감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도록 하지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오감을 사용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피부로 느끼지요. 이 오감의 능력이라는 것은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특정 감각만이 기형적으로 발달합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경우도 있겠고,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경우도 있겠지요." "너무 긴데요. 좀 줄여서 말씀해주시면 안 되나요?" "알겠습니다. 그럼 요점만 간단하게 말씀드리지요. 오감 중에서 싸움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감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시각, 청각, 촉각 아닌가요? 후각과 미각은 싸움과 별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 "맞습니다. 후각과 미각도 도움이 되긴하지만 앞의 세 감각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지요. 그럼 말입니다. 혹시 싸움을 하는 도중 몸에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나요?" 감각이 예민해져? 난 그 동안 겪어 왔던 그 많은 전투들을 떠올렸다.(실제로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얼마 생각하지 않아 그 예가 될만한 것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처음으로 살인을 했을 때. 산적들과 싸울 때. 그리고 방금 전, 크로니스가 검을 휘둘렀을 때. "예. 있는 것 같아요. 아니, 확실히 있어요." 크로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감각이라는 겁니다." "절대 감각이요?" "간단한 겁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당신을 공격했다 칩시다. 그럼 당신은 그 공격을 피해야겠지요. 훈련된 검사는 살기를 눈치 채고 상대방의 공격을 피합니다. 제가 아까 당신에게 한 공격은 잘 훈련된 자라 할지라도 쉽게 피할 수가 없는 빠른 공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피했지요. 그것이 바로 절대 감각입니다. 제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육감으로 인지하고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해 공격을 피했습니다. 처음 공격은 육감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두 번째 공격부터는 어떠했을까요? 그 때부터 당신은 제 공격을 바라 볼 여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제가 오른쪽을 찌르면 왼쪽으로 피하였고, 왼쪽을 찌르면 오른쪽으로 피했습니다.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고 피한거지요?" "그, 글쎄요……." 크로니스는 당혹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별 다른 감흥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육감의 일종인가? "설명하기 힘들겠지요. 당신은 그저 몸의 감각이 시키는데로 움직였을 뿐이니까요. 절대 감각은……." 크로니스의 설명은 지겨우리만치 계속 되었다. 난 졸음을 참고 견디며 그의 말을 경청한 끝에 그 긴긴 문장을 짧게 요약할 수 있었다. 일단 나의 몸에는 절대 감각이라는 이상 감각이 있다. 이것은 오감의 능력을 극대화 시켜주고 육감 또한 발달시켜 준다. 이 감각은 평소에는 잠을 자고 있다가, 위기의 순간이 닥쳐오면 갑자기 몸에 나타난다. 절대 감각이 언제 깨어나는 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하지만 나의 경험 상으로 봤을 때, 절대 감각을 깨우는 몇 개의 코드가 있는 것 같다. 살인을 했을 때. 피를 봤을 때. 죽는다는 위기감을 느낄 때. 분노했을 때. 결국 다 조합해보면 결론은 하나다. 흥분 했을 때. 신체가 흥분을 하면 오감이 미쳐 날뛰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불확실하다. 크로니스의 말은 결국 위험하면 몸에 감각이 알아서 도와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인데 걱정이 안 될 리가 있겠는가? 그 절대 감각이라는 것만 믿고 적들과 싸우는데 만약 위기의 상황이 닥쳐와도 감각이 깨어나지 않으면? 그럼 바로 죽는거다. 불확실성에 목숨을 맡길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불확실을 확실로 만들어야 한다. Part 3. 전란의 조짐 1671년 9월 29일 레이트 백작은 1610년 산 와인 한병과 함께 와인 잔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떨어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것을 탁자로 옮겼다. "넌 집에 안 들어가냐? 누가 보면 이 곳이 니 집인 줄 알겠다." 레이트 백작이 푹신한 쇼파에 앉으며 한 소리 하자, 반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대답하였다. "집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요? 아름다운 형수님의 얼굴도 매일 같이 볼 수 있고." "헛 소리 그만해." 보통 한 집의 안주인은 손님이 오랫동안 머무는 것을 싫어한다. 손님의 이것저것을 챙겨주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손님이 시댁 쪽이면 더욱 그러했다. 원래 남의 집에 오래머무는 것이 예의가 아니므로 적당한 때에 손님이 알아서 짐 싸서 나가야 한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나갈 때를 알고 나가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물러 날 때를 쉽게 알고 쉽게 물러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다. 안주인이 차마 손님에게 대놓고 나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 지속적으로 갈궈서 알아서 자기 발로 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눈치 없는 식객이나 배짱 하나로 먹고 사는 놈 한테는 통하지 않는 법이다. 하이스네의 경우에는 안주인인 셀리오네에게 입발린 소리로 매일 같이 아부를 늘어 놓는다. 이 아부도 상당히 고난이도적으로 하여서 상대방이 아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끔 만든다. 때문에 며칠이 아닌 한달 이상을 장기체류하여도 눈초리를 받지 않고 편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레이트 백작이 와인을 잔에 따르자마자, 하이스네는 손을 뻗어 잔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잔을 들어 올리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읽었다. "자바스 군대 패주(敗走). 살아남은 숫자는 7천명 정도. 7천명이라면 1할도 안되는 숫자군요. 이건 좀 심하군요. 게다가 군수 물자의 반 이상을 아이리스에게 빼앗겼군요. 3만 정도의 군사도 아이리스 수중에 들어갔구요. 이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바스가 아이리스에게 갖다 바친 줄 알겠습니다." 레이트 백작은 와인잔을 집어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문학적인 손해를 봤지. 아이리스는 그만큼 힘을 얻었고. 병신 같인 군대를 숲 속으로 끌고가다니." "이번 경우는 자바스가 군사 수가 많았기 때문에 패한겁니다. 군사 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치중도 늘어났고, 숲 속에서는 부대끼리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전부 타죽었으니까요. 차라리 군사 수가 적었다면 이 정도까지 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이스네는 와인을 마시며 종이에 그려져 있는 지도를 보았다. 그 지도에는 자바스 군의 이동경로부터 아이리스 군의 매복 장소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자바스가 대군을 일으켜 아이리스를 공격한다고 하였을 때, 대부분의 중신들은 자바스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결과는 뜻 밖이었다. 자바스는 전멸(全滅)을 간신히 피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강남에서 물러났다. 게다가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와 군사를 아이리스에게 빼앗겼다. 원래 전쟁이라는 것이 이긴 쪽이던 진 쪽이던 막대한 피해를 입기 마련이다.(그래서 이긴 쪽은 진 쪽한테 전쟁 배상금이라는 명목으로 피해금액을 뜯어낸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이번 전쟁으로 인해 오히려 이득을 봤다. 군수 물자 획득, 수 만의 군사 획득, 군의 사기 진작, 국가의 단결 등등. 갑작스레 늘어난 군사는 나중에 짐이 될 것이다.(군사 수가 많다고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 군사를 먹여살릴 여력이 없다면 차라리 적은 수의 군사를 강하게 훈련 시키는 것이 낫다) 하지만 당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이스네는 종이 뭉치를 던지 듯이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상황은 자바스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여기서 그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레이트 백작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늙은 왕이 노망나서 헛짓거리라도 해댄다면 자바스가 망하는 건 시간 문제겠군." 하이스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잘못하면 자바스는 아이리스에게 패한 것보다 더 큰 손해를 입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가 말하는 것은 자바스의 정치적 상황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단순히 군사적 싸움만은 아니다. 외교,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된다. 이번에 자바스의 출병을 결정하고 책략을 짜고, 지휘관들을 선발하는 등, 대부분의 일을 처리한 사람은 클라시온 공작이다. 당연 패배에 따른 책임도 전부 그가 지게 된다. 현재 자바스의 정치적 세력은 두 개의 세력으로 갈려있다. 세이티아 공작을 주축으로하는 친(親) 개틴 파와 클라시온 공작을 주축으로하는 친(親) 헤리오 파다. 세이티아 공작은 분명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클라시온 공작을 실각시키려할 것이다. 만약 클라시온 공작이 실각하게 된다면 자바스는 스스로 목을 조이는 그러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8만 7천 군대가 겨우 3만 군대에게 패배했습니다. 이번 전투는 아이리스와 자바스, 둘 모두에게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자바스는 어떻게 해서든 되 살아나려는 아이리스의 날개를 꺽어야만 했고, 아이리스는 강남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날개짓을 해야 했으니까요. 피해가 큰 만큼 그 동안 자바스를 위해 헌신했던 클라시온 공작이라도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겠지요. 뭐, 우리에게나 아이리스에게나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가 내려 놓은 종이 뭉치를 보았다. 이것은 아이리스에 있는 정보원들로부터 힘들게 얻어낸 정보였다. "그런데 정말로 책략을 짠게 아이언스 공작일까?" 하이스네는 한숨을 내쉈다.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사일런스 백작과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도움을 받았겠지요. 여기 매복 지점을 보십시오. 분대를 수십개로 나누어 매복을 시켰는데 거의 완벽하게 탈출로를 막아 놓았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건 사전에 숲 전체를 조사했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부비트랩까지 설치했으니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을 겁니다. 그렇다면 거의 한달 전부터 준비를 했겠지요. 자바스 군이 이 쪽으로 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론이 뭐야?" "간단합니다. 전체적으로 책략을 짠 사람은 아이언스 공작, 세부적인 책략을 짠 사람은 사일런스 백작과 샤이 사일런스 백작일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단 책략을 발표한 사람은 아이언스 공작입니다. 단순히 이름만 내건 것일 수도 있으나 그건 아닐겁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언스 공작을 참모총장 자리에 앉힌 사람은 키레아 왕과 사일런스 백작입니다. 사일런스 백작이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을 참모총장 자리에 앉혔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당연 아닐 겁니다. 대외 선전용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전시(戰時)이니만큼 능력 없는 자가 요직에 앉아있으면 국가가 망하기 쉽상이니까요. 그렇다면 얘기는 간단해 집니다. 아이언스 공작은 분명 자신의 두뇌를 십분 활용하여 화공이라는 계책을 내놓았고 사일런스 백작과 샤이 사일런스 백작은 그 계책을 세분화했겠지요. 아직 아이언스 공작은 자국 군대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테니까요. 게다가 잘 아시다시피 샤이 사일런스 백작만큼 세부적인 책략을 짤 수 있는 사람은 대륙 내에서 다섯 명을 넘지 못합니다. 촘촘한 그물을 뿌리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곳에 들어 온 물고기가 무사할리 없잖습니까?" 레이트 백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하이스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씨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레이트 백작은 머릿속이 복잡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저 놈은 왜 저렇게 신나게 떠들어대는 거지?' 확실히 하이스네의 얼굴은 상당히 밝아 보였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 왕궁에서는 중신들이 상대방 얼굴에 침을 튀어가며 싸우는 중이었다. 아이리스와 자바스. 어느 쪽에 서야 이득인가? 레이트 백작 자신은 아이리스 편이지만, 그래도 그 결정이 맞았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자바스 편에 서는 것보다는 낳다고 생각을 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 뿐이다. "어떻게 생각해?" "뭘 말입니까?" "아이리스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까?" 하이스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럴 겁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상아탑도 움직일 것입니다." "아토리아는?"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요." 아이리스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는 국가는 자바스만이 아니었다. 아토리아는 3기 전란 때 아이리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했다. 지금도 아토리아는 '아이언스 이그리드' 라면 이를 갈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아이언스 히로가 나타나 자바스의 대군을 전멸시켰다. 자바스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토리아지만 아이리스가 강남을 회복할 듯한 조짐을 보이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아마도 아토리아는 자바스와 아이리스의 전쟁이 한참 무르익었을 때쯤 개입하여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이득을 얻으려 할 것이다. 담배를 뻑뻑 펴대는 레이트 백작의 머리속에는 얼마 전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레이트 백작은 담배를 내려 놓으며 하이스네에게 말했다. "너 그 소문 들었냐?" 하이스네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한숨을 내쉈다. "제발 완성된 문장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 소문' 이라고 물으시면 그게 어떤 소문인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웬 여자 하프엘프 하나가 자기가 아이언스 공작의 부인이라며 수도 내에 술집을 초토화 시키고 있다는 소문 말이야. 이름이 아마 라이레얼이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이스네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 예. 저도 듣긴 들었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엽고, 섹시한 라이레얼이 이끄는 무적의 용병단' 을 수도에 머물게 한 것은 바로 하이스네였다. 혹시나 나중에 아이리스와의 관계에서 도움이 되지 안을까 싶어서 이다. 그녀는 아이언스 공작과 싶은 관계를 맺은 여인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것은 하이스네의 실수였다. 언제나 열정(熱情)이 넘치는 이 하프엘프 여인은 매일 같이 패거리들을 이끌고 술을 마시러 다녔고, 술만 마셨다하면 자기가 아이언스 공작의 부인이라고 떠들어댔다. 당연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비웃었고, 열받은 라이레얼은 술집을 초토화시켰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박살난 술집만 해도 수십개에 이르렀다. 이대로 계속 갔으면 수도 내의 술집이 전부 문을 닫았겠지만, 위험을 감지한 술집 주인들은 수도에서 가장 큰 술집인 '호프(Hof)집에는 호프(Hope)가 있다' 에서 한 세기에 한번 열릴까 말까한 프라임 미팅(Prime Meeting)을 개최했고 그 결과 각자의 왼쪽 새끼 손가락을 깨물어 혈판장(血判狀)에 서명을 하여 수도 경비대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용맹한 헤리오의 수도 경비대는 대부분의 술집이 '수리중' 간판을 걸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후, 잽싸게 출동하여 라이레얼이라는 흉폭한 범죄자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터졌으니 그건 바로 용병들의 집단 시위였다. '기물 파손, 폭행, 공갈 협박, 무전취식, 공무 집행 방해, 공무원 폭행 등등, 크고 작은 32가지 죄목으로 라이레얼 체포. 정상을 참작한다 하여도 징역 30년 이상이 예상 됨.' 이 소문은 일파만파로 용병들에게 퍼져나갔다. '애들아! 우리의 친구 라이레얼이 체포되었데.' '무어라? 우리의 친구 라이레얼이 체포?' '아니 어떤 싸가지 없는 놈들이 감히 라이레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뭉치자 전우들이여! 그 이름도 찬란한 라이레얼 위해!' '우오오!' 라이레얼이 누군가? 용병들의 희망이자 꽃이 아니던가? 라이레얼이 체포 되었다는 소문은 용병들에게 하늘과 땅이 뒤집어 지는 것 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분노한 수천의 용병들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라이레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즉시 혈판장에 서명을 한 술집에 대해서는 불매 운동을 벌이는 한편, 업무를 방해하였다.(예를 들면 칼을 차고 술집 문 앞에 서서 술 마시러 온 놈에게 휘두르는 등등) 결국 무자비한 폭력 앞에 무릎을 꿇은 술집 주인들은 고소를 취하하기에 이르른다. 하지만 라이레얼의 죄가 어디 한둘인가? 공무 집행 방해, 공무원 폭행 등등 공권력에 대항한 죄는 결코 용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술집 주인들의 고소 취하 덕에 형량이 10년으로 줄었지만, 그걸 그냥 수긍할 용병들은 없었다. 라이레얼 체포 10일 째 되는 지금, 헤리오의 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데 두 따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하프엘프 여인이 아이언스 공작 부인이라고 자칭하는 사실을 말입니까?" 레이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애들 알았다간 난리 날걸." "그럼 수도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세레나와 라나만 모르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레이트 백작은 한숨을 내쉈다. "내가 일찌감치 하녀들에게 입단속 시켰어. 너 세레나 성격 알지? 걔 성격에 얼마나 난리를 치겠냐? 후우, 예전엔 안 그랬는데 어떻게 커가면서 점점 지 엄마 성격을 닮아가는건지. 게다가 라나는 떠 어떻게 하냐? 목청 껏 울어째낄텐데." "형님도 나름데로 고충이 많으시군요." "원래 내 나이 대가 다 그래. 너도 결혼 해봐, 임마! 마누라와 자식들 등쌀에 인생 살기가 힘들어 진다. 이래서 결혼은 미친 짓이고 무자식이 상팔자인 법이야." "새겨 듣도록 하겠습니다."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는 그 자리에서 몇 마디 더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쾅-! "아버지!" 레이트 백작은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덩그러니 열려진 문 앞에는 세레나와 라나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세레나와 라나는 순식간에 레이트 백작의 앞에 다가와 따지듯이 말했다. "어떻게 된거죠!? 하프엘프가 아이언스 히로의 부인이라는 게 정말이에요? 아버진 알고 계시죠?" 하이스네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레이트 백작 대신 둘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진정들하고 내 말을……." "아니죠? 거짓말이죠? 그렇죠?" 라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하이스네는 할 말을 잃었고, 당황해 하는 레이트 백작의 얼굴을 한번 본 다음, 고개를 휙 돌렸다. 이 것은 '형님 딸이니 형님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라는 의미였다.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를 향해 '의리 없는 자식. 니가 그러고도 의형제냐?' 라는 눈빛을 지어보인 다음, 부드러운 어조로 타이르듯이 두 딸에게 말했다.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진정하렴." "제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어떻게 수도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저희만 몰랐을 수가 있는 거죠!? 아버지께서 입단속 시킨거죠!? 그런거죠!?" 레이트 백작은 귀를 막으며 생각했다. '내 청각이 좋은건가? 아니면, 세레나의 목소리가 큰 건가? 말싸움할 땐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하는데 지금 내 상황이 불리하기 그지 없구나.' "험험, 그런데 그 사실은 어떻게 안 거지?" 레이트 백작의 질문에 이번엔 세레나가 당황했다. 세레나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수천명의 사람들이 시가지 행진을 벌이고 난리가 났는데 제가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를 수 있겠어요?" "뭐!? 시가지 행진?" 순간,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는 황당으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 한 낮의 수도 대로(大路)에는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약 3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온갖 무장을 차려 입고는 열을 맞추어 행진을 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땅이 쿵쿵 울리는 모습은 엄청난 위압감을 자아냈다. 그 3천명의 사람들은 거의 덩치가 좋고 험악하게 생긴 남자들이었다. 멋모르고 대로에 서 있던 사람들은 감히 그들에게 대항을 하지 못하고 길을 내주기 바빴다. 그들은 수백여개에 이른 피켓을 들어 올리며 일제히 소리쳤다. "라이레얼을 석방하라!" 그들은 머리에 노란띠를 묶고 결연한 표정을 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표정에는 행군을 막는 자는 가차 없이 베어버리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옅보였다. 카웨는 피켓을 내렸다 올렸다 하며 소리를 치다, 옆에 있는 테커에게 물었다. "야, 우리가 꼭 이런 짓까지 해야 되는거냐?" "그럼 어쩌냐? 라이레얼이 없어서 용병단이 망하게 생겼는데." 카웨는 한숨을 내쉈다. "다 좋은데 말이야. 이 노란색 머리띠 좀 풀으면 안 될까? 쪽 팔리게 노란색이 뭐냐, 노란색이. 이런 짓 할땐 보통 빨간색을 매야 하는 거 아냐?" 테커는 고개를 끄덕으며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쉬었다. "맞긴한데, 어쩌겠냐? 라이레얼이 죽어도 노란띠 매고 시위하라고 하는데." 카웨와 테커, 그리고 럴크, 베네트, 카젠 등등.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엽고, 섹시한 라이레얼이 이끄는 무적의 용병단' 의 단원들이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시위대의 선두였다. 수도 경비대는 용병들이 시가지 행진을 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빠르게 출동하였다. 하지만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일단 숫적인 면에서 밀리는데다가 저들은 일반 시민도 아닌 용병이 아닌가? 지금 같은 전란 시기에 용병 짓을 해먹는다는 것은 일정 실력이 뒷받힘 된다는 뜻이다. 만약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한다면 용병들은 분노하여 무기를 뽑아들테고 경비대와 용병들이 맞붙는다면 수도 전체에 폭동이 일어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현재 수도 경비대는 왕궁 근위대에 도움을 요청하고 사태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다행히 용병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행진만 할뿐 특별한 소동은 일으키지 않았다. 용병들에 소리에 놀라 잠을 깬 아이가 울어 재끼자 유모가 열받아서 아이를 집어던져 아이의 목이 90도 각도로 꺽인 것과 대낮에 '2세 만들기 프로젝트' 를 진행시키다 남자가 깜짝놀라 발기 부전이 되어 상대 여자에게 차인 것을 제하고는 그리 커다란 피해도 없었다. "라이레얼을 석방하라!" "석방하라! 석방하라!" "경비대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내뱉은 이 외침은 공명이 되어 점점 커졌다. 처음에 3천명으로 시작한 시가지 행진은 수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하였다. 매일 같이 침대에 누워서 과자 집어먹고 마누라에게 '집에서 뒹구느니 차라리 나가서 놀고 와' 라고 바가지 긁히는 남자들은 갑자기 일어난 이 재밌고도 흥미진진한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는 마누라에게 '비지니스 업무상 나갔다 오겠소' 라고 말하고 뛰쳐나와 행진의 뒤를 쫓아갔다. 이런 일은 확실히 1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다. 행진을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행진의 뒤를 쫓아갔고, 수도 내 곳곳의 회사들은 '오늘은 휴무' 간판을 내걸고 이 행진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3천으로 시작한 행진이 한 시간 후쯤엔 2, 3만 명으로 불어났으니 수도 경비대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이 교체되거나, 착취에 견디다 못해 폭동이 일어날 때도 이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겨우 라이레얼이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수도 전체가 마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장장 3시간에 걸친 시가지 행진이 멈춘 곳은 수도 중심부에 있는 대규모 광장. 이름하여 '만남의 광장' 이었다. 만남의 광장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지금 만남의 광장에는 정말 입추(立錐)의 여지 없이 사람들이 들어섰다. 수 만의 사람들이 광장 안에 있고 폭동과 반란을 두려워하는 수도 경비대와 왕궁 근위대는 광장 주위를 물 셀틈 없이 둘러 싸고 있었다.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 1000명 이상의 인원을 모으는 것은 불법임으로 원칙 대로라면 이 시위를 주도한 자들을 체포하여야 한다. 하지만 용병만 3천명에 시민들까지 합치면 수 만이다. 만역 체포를 했다간 당장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타워 실드를 들고 서 있는 경비대와 근위대는 제발 아무 일 없이 저들이 해산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광장을 내리 쬐는 가운데 카웨와 테커, 럴크 등등 이 시위를 주도한 자들은 즉석에서 마련한 단상 위에 올라 섰다. 근위대는 당장이라도 저 놈들을 쏘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저 쪽에서 먼저 칼을 뽑지 않는 한, 어떠한 공격도 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기에 이를 갈며 참았다. 카웨는 단상에 올라서자 숨을 길게 들이 마쉬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사람 뿐이었다. 사람 수가 워낙 많다보니 주늑이 들만도 하것만 카웨는 더욱 당당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상에 서 있는 사람이 뭔가 말을 하려하자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점차 잦아 들었다. 카웨는 오른 손을 힘껏 들어 올리며 외쳤다. "여러분! 우리의 친구이자 우상인 라이레얼이 지금 감옥에 갖혀 있습니다! 죄목이 공갈 협박에 기물 파손에 무전 취식 등등 셀 수가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무전 취식이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라이레얼이 언제 돈 내고 밥 먹은 적 있습니까!?" 카웨의 말이 너무도 지당하였기에 단상 앞 쪽에 서 있던 용병들은 일제히 피켓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없다! 없다!" 여기에 라이레얼이 누군지도 모르는 시민들까지 가세히 소리를 질러대니 땅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카웨는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기물 파손이랍니다! 접시 몇 개 깨트리고 의자 몇 개 부순 것 가지고 기물 파손이랍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라이레얼은 열받으면 주위에 있는 모든 물건을 집어 던집니다! 원래 물건이라는 것은 부수라고 만들어 놓은 겁니다! 정 박살나는 게 억울했으면 미스릴이나 드래곤 본으로 만들었으면 될 것 아닙니까!? 이것은 라이레얼 탓이 아니라, 물건을 약하게 만든 사람들 탓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옳다! 옳다!" 사실 라이레얼이 부순 것은 접시 몇 개가 아니라 술집 수십개였지만 그런 것들이 여기 모인 이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리고 공갈 협박! 제가 알기로 이제까지 라이레얼한테 협박 안 당하고 돈 안 뜯겨 본 용병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당한 것을 마치 자신만 당한 것인냥 고소를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리고 여기 있는 죄목들 중 가장 황당한 죄목, 공무 집행 방해죄와 공무원 폭행 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공무 집행 방해라니! 저는 라이레얼이 잡혀가는 그 순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한 여인의 인권이 무참이 유린 되었던 그 현장을! 이제부터 저는 그 상황을 오로지 진실되게 여러분들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제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당장 벼락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카웨는 거기서 잠시 숨을 돌렸다. 뒤에서 보고있던 테커는 한숨을 내쉬며 베네트에게 말했다. "저 녀석 생각보다 잘하는데." 베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소질이 있어. 그런데 벼락은 안 떨어지나?" "저 녀석 구라치는 솜씨에는 하늘도 감복할 걸." 카웨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침 삼키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카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카웨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들렸다. "때는 1671년 9월 20일. 우리의 사랑스런 라이레얼이 무자비한 경비대에게 잡혀 간 날입니다. 아시다시피 라이레얼은 여자입니다. 나이 23에 키 180.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 답게 피부는 하얗고 얼굴은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그녀의 레몬 빛 눈동자는 언제나 촉촉하게 젖어있고 그녀의 탐스러운 레몬빛 머리카락은 폭포수처럼 그녀의 어깨 밑으로 흘러내렸습니다. 두 손으로 잡아도 감히 잡히지 않는 풍만한 가슴과 한 팔로 가볍게 안을 수 있는 날씬한 허리, 그리고 그 허리 밑에 위치한 오우거의 힘줄보다도 더 탱탱한 엉덩이. 그녀는 한 마디로 완벽한 여인입니다. 붉고 촉촉한 그녀의 입술은 모든 이들로 하여금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하였고, 그녀의 젖은 눈동자는 우리들로 하여금 언제나 야릇한 감정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녀가 날렵하게 레이피어를 휘두르면,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찰랑거리며 빛이 났고, 그녀의 길고 뾰족한 귀는 작은 소리까지 감지하여 우리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터져나온 라이레얼의 외모 찬양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카웨의 설명을 들으면서 많은 이들이 라이레얼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이것은 전부 카웨의 계획에 의한 것이다. 남자는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 라이레얼은 예쁘다 - 그러므로 우리는 라이레얼을 좋아한다 - 그런데 경비대가 라이레얼을 체포하였다 - 예쁜 여자를 체포한 놈은 나쁜 놈이다 - 그러므로 경비대는 나쁜 놈이다 - 고로 나쁜 경비대에 대항하는 우리는 착한 용병이다. 좀 특이하긴 하지만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라이레얼은 외모만 예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전투 능력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녀가 레이피어를 한번 휘두르면 수 백의 적이 죽어나갔고, 그녀가 활을 쏘면 수 천이나 되는 적의 심장이 꿰뚫렸습니다. 그녀 덕에 얼마나 많은 적들이 죽었고 얼마나 많은 용병들이 목숨을 건졌습니까? 그런 그녀가! 그런 그녀가 지금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저는 보았습니다! 그날 라이레얼은 술에 취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무자비한 수도 경비대 수십명이 달려와 그 여린 라이레얼의 손목을 붙잡고 억지로 끌어냈습니다. 감히! 감히! 저 지저분한 놈들이, 국가의 개들이 우리의 친구 라이레얼의 손목을 붙잡았습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부시고 아름다워 만지기도 두려운 그 손목을 말입니다! 이 중에서 라이레얼 손목을 잡아보신 분 계십니까!? 우리도 못 잡아본 라이레얼의 손목을 저 놈들이 감히 잡아 보았단 말입니다!" 순식간에 용병들은 분노로 물들었다. 라이레얼이 체포된 사실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경비대 놈들이 감히 라이레얼의 손목을 붙잡았다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황당해진 것은 경비대였다. 체포하려면 손을 묶어야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손목을 잡는 것은 필수다. 죄인보고 '니가 알아서 묶어'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저들은 그 갸녀린 라이레얼의 몸을 마치 장난감이나 되는양 만지작거렸습니다. 그것은 라이레얼이 한 소년을 가지고 논 것보다는 덜한 것이었지만, 아무튼 심했습니다. 그틈을 타 어떤 놈들은 라이레얼의 가슴에 슬쩍 손을 대기도 했습니다. 전 그때 흐르던 라이레얼의 눈물을 기억합니다. 라이레얼은 그 놈들의 추행에 구역질을 느꼈고, 결국 참지 못해 한 놈의 얼굴에 토를 하였습니다. 저런 썩어빠진 경비대 중 한 녀석이 영광스럽게도 라이레얼에게 신성한 세레를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 무식한 놈들은 감히 그것이 어떤 영광인지도 모르고 발악을 해댔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우리의 연약하고 고귀한 라이레얼은 손을 내저었습니다. 그러자 여러명의 경비병들이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라이레얼의 손을 낚아챘습니다. 라이레얼은 하는 수 없이 팔을 빼내기 위해 몸을 비틀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몇 놈이 바닥을 구르며, '내 팔이 뿌러졌어!' '내 다리!' '내 거기! 으윽, 결혼이 다음 달인데!' 등등,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이것은 분명 경비대의 위험 수당을 올리기 위한 자해 공갈입니다!" 카웨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한 장면을 머리에 떠올렸다. 한 아름다운 여인이 두려움에 떨며 서 있다. 주위에는 덩치가 크고 흉칙하게 생긴 남자 수십명이 서 있다. 이 흉칙한 남자들은 킬킬 웃으며 여인의 온 몸을 더듬는다. 여인은 수치심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내밀어 저항한다. 그러자 여러 남자가 여인의 손을 움켜 잡으며 '저항해도 소용 없어! 포기하고 우리 뜻에 따라!' 하는 등의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 본다. 그 눈빛에는 욕망과 탐욕이 가득 차 있다. 여인은 공포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는 팔을 빼기 위해 몸을 흔든다. 그런데 갑자기 몇 명이 바닥을 구르며 소리친다. '으악! 이 년이 사람 죽인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여인은 깜짝 놀라 눈물을 흘리고, 흉칙한 남자들은 그녀에게 달려든다. 이 것이 카웨가 말하는 '라이레얼 체포 사건의 진실' 이었다. 사람들은 한 여인의 인권이 무자비하게 짖밟힌 이 사건에 분노와 슬픔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말과 진실은 언제나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 진정한 진실은……. 한 여인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다. 술집 안은 수천의 군마(軍馬)가 휩쓸고 간 듯 완전히 폐허가 되어있다. 수십 명이 이르는 남자들은 곤봉을 들고 여자를 포위하고 있다. 그들 중 한 남자가 나서며 말한다. "폭행, 기물 파손, 무전 취식 등의 죄목으로 너를 체포하겠다." 여인은 주정을 부리 듯 웃으며 말한다. "체포? 체포가 뭔데? 니들이 날 체포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누군 줄 알고. 우쒸! 우리 히로만 오면 니들 다 죽었어." 경비 대장은 한숨을 내쉬고는 죄인의 손에 밧줄을 묶기 위해 손목을 잡는다. 그 순간 라이레얼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경비 대장의 얼굴에…… 우웩-! 토를 한다. 얼굴에 토사물을 뒤집어 쓴 경비 대장은 머리를 부여 잡으며 절규한다. "으악! 내 핸섬한 얼굴이!" 당황한 경비대는 라이레얼의 손목을 붙잡는다. 그 순간. 퍽- 퍽- 퍽- "자식들이 감히 누구한테 덤벼!" "안 되겠다! 전원 돌격!" 퍽- 쾅- 쿠당탕- 빠각- 그렇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다. 참고로 그때 라이레얼 체포 나섰던 경비대 대부분은 현재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라이레얼을 석방하라!" "석방하라! 석방하라!" "경비대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우리는 우리의 요구 조건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요구 관철을 전쟁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옳다! 옳다!" "우리는 요구 조건은 단 하나! 라이레얼의 석방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라이레얼 해방 군' 을 조직하여 24시간 철야 농성을 벌일 것이다! 만약 3일 내로 라이레얼이 자유의 몸이 되지 아니한다면 감옥의 철창을 부수고 벽을 허물 것이다! 라이레얼은 우리의 동지다! 라이레얼은 예쁘다! 라이레얼은 섹시하다! 동지들이여! 우리 손으로 라이레얼을 구하자! 저 습하고 차디찬 지하 감옥에서 흐느끼며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라이레얼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라이레얼을 구하지 않으면 누가 라이레얼을 구한단 말이더냐!" "우오오!!!" 미칠 듯한 함성이 다시 한번 대지를 흔들었다. 카웨는 자신의 뜻대로 대중이 따르자 기쁘기 그지 없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열광이 발광으로 이어졌고 발광이 지랄로 이어졌다. "이 머리띠! 이 머리띠가 어째서 노란색이냐!? 이 머리띠는 아주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머리띠는 라이레얼의 머리카락 색깔이자, 라이레얼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다! 자! 모두 다 같이 노란 머리띠를 머리 위로! 흔들어!" 순식간에 열광한 관중들은 일제히 노란 머리띠를 머리 위로 흔들어댔다.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니 노란 파도가 치는 것이 무슨 매스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테커는 단상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소리지르는 카웨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신났구만, 신났어. 좋아 죽네." 럴크가 말했다. "저 녀석이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짓을 해보겠어. 그냥 구경이나 하자. 그런데 라이레얼이 과연 석방 될 수 있을까?" 베니트가 대답했다. "형량이나 더 안 늘어나면 다행이겠다." 카젠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이런 짓이 효과가 있을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경비대와 근위대는 노란띠를 흔들며 발광을 하는 카웨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저 놈이 문제다! 저 놈이 관중을 흥분시키고 있어!" 근위대는 상부의 지시는 없었지만 만약을 대비해 5명의 저격자(Sniper)를 높은 건물 위로 올려 보냈다. 카웨 하나 때문에 '만남의 광장' 은 '흥분의 광장' 으로 변해가고 그에 따라 경비대의 지원 병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제길! 계집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경비대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용병들에게 있어서 라이레얼이란 존재는 가히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용병들에 희망이자 우상인 것이다. 게다가 한동안 즐거운 일이 없어 심심했던 사람들까지 합쳐지는 바람에 이번 집회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사상 초유의 사태로 까지 번진 것이다. 이 날의 데모는 카웨의 말대로 철야 농성까지 이어졌고, 그 다음 날 아침까지도 계속 되었다. 결국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감옥을 부수고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용병들이 말했던 3일째가 돌아왔다. 수도는 긴장 상태에 빠졌고 어떤 이는 피난 짐까지 싸 놓았다. 성난 용병들과 흥분한 경비대와 근위대가 서로 대치를 하고 서로 무기를 겨눌 때쯤, 왕궁에서 파발마 하나가 달려와 희소식을 전한다. 1671년 10월 1일 징역 10년 7개월을 받고 복역 중이던 라이레얼은 국왕의 특사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된다. 특사장에는 이렇게 써져있었다. <죄인 라이레얼은 평소 용모가 단정하고 행실이 올바러 타인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이 특별사면장을 수여한다> 간단히 말해서 모범수로 복역 13일만에 풀려난 것이다. 용병들과 경비대의 충돌로 인한 국가 전력 약화 우려와 헤이체르 공작과 레이트 백작의 강력한 주장 덕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어찌되었든 라이레얼은 석방 된지 하루만에 패거리들을 이끌고 술마시러 다니다가, 또 술집을 초토화 시켰다. 국가에서는 차마 또 다시 라이레얼을 잡아 넣을 수 없어서 벌금형에 처했더니 라이레얼이 하는 말. "내가 미쳤다고 돈을 내냐?" 그리하여 주위에 용병들이 대신 벌금을 내주었으니, 결국 불쌍하게 된 것은 술집 주인들과 용병들이었다. 이번 일로 인해, 라이레얼의 이름은 대륙 전체에 잘 알려지게 된다. * <아이리스 Iris> - 7권 - Part 1. 외교사절단 히로 왕따. 다구리. 이지메. 이 세 단어의 공통점을 아는가? 이 세 단어에는 모두 집단이 개인을 괴롭힌다는 뜻이 들어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집단이 개인을 괴롭히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집단에 소속되면서 나타나는 죄의식 감소와 집단원의 행동을 따라하지 않음으로서 그 자신이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라고. 난 여기 모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지는 않는다. 증오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무관심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에 대해 무관심했다. 아무도 나의 존재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봐! 아이언스어를 아는 것은 바로 나라고! 그러니 제발 나에게 관심을 좀 가져! "흠흠!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주변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그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진짜 너무 하는군. "그러니까 라이미안 님께서는 아이언스어를 번역할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 거군요." "응. 라이는 아이언스어를 번역할 사람이 꼭 필요해." "이것은 라이미안 님의 뜻은 물론이거나와 탑 전체의 뜻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 회의실에 모여있는 사람은 대략 10명 정도였다. 저번처럼 군사 회의는 아니기 때문에 참모들과 장군들이 모여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모여있는 사람은 일급 참모 세명(나 포함)에 이급 참모 5명, 그리고 우리측 마법사 둘(나 제외), 상대측 마법사 둘(라이미안과 칼리) 이다. "8, 9클래스 마법이라 하면 대략 몇 권이나 됩니까?" "365권입니다. 8클래스 마법서가 130권. 9클래스 마법서가 135권." 굉장하군. 하루에 한권씩 번역해도 1년이 꼬박 거리는군. 아니지, 이곳은 한달이 30일로 12달이 이니까, 한달하고도 5일이나 더 걸리잖아. "그런데 정말 9클래스 마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겁니까, 칼리님?" 저렇게 존칭을 쓰며 어벙한 질문을 해대는 사람은 현재 아이리스의 궁정 마법사 아루바였다. 현재 6클래스 익스퍼트, 나이는 대략 60대 중반 정도로 추정.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존재합니다." "9클래스 마법을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아루바의 질문에 칼리는 고개를 저어야 했다. 하긴. 9클래스 마법을 쓰는 자가 없으니 9클래스 마법을 본적이 있을리 없지. "그럼 어떻게 9클래스 마법의 존재를 확신하시는 겁니까? 아이언스 공작님도 8클래스 마법까지 밖에는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어! 난 5클래스인데. "하지만 넨 이드 님께서는 9클래스를 마스터하셨습니다." "그건 전설에 불과합니다." 난 계속되는 둘의 대화 속에 '아이언스 공작' 이 '아이언스 히로' 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언스 이그리드' 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즉, 아루바의 말은 이러하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께서 9클래스의 마법을 익히지 못하신 것을 보면 9클래스 마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어거지를 쓰는 것 같지는 않고 정말 9클래스의 존재가 궁금해서 그러는 모양이다. 하지만 당신의 주장은 틀렸어. 그것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아이언스 공작님은 9클래스의 마법을 번역하셨습니다. 그럼 아이언스 공작님이 있지도 않은 마법을 번역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 번역 안 했어. 난 둘의 말싸움을 지켜보다가 이쯤에서 내가 나설 차례라 생각하고 멋지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분께서는 조용히 하시고 자리에 착석해주십시오." 그 순간, 일루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귀빈들이 오신 자리에서 이런 무례를 범하시다니. 조용히 앉에 계실 것 아니시면 회의장을 나가 주세요." "아, 아니. 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뭐가 그게 아닙니까?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자신이 얼마나 큰 무례를 범했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이것을 잘못하면 상아탑과 아이리스의 국제 문제 번질 수 있는 일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당장 칼리님께 사죄드리시고 회의장을 나가 주세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설마 말 싸움 하는 거 말렸다고 그러는 건가? "저기……." 난 변명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일루니아가 나를 찢어서 가루로 만들어 삶아 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죄를 하고 몸을 돌려 회의장을 나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흑흑,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어구헌날 나만가지고 뭐라 그래. 노처녀 미워! 방에 가서 라이코스랑 놀아야겠다. 그런데 라이코스가 방에 있으려나? 내가 회의장을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지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왜 그러시죠?" "아이언스어를 알고 계신 분은 이 중에 아이언스 공작님 한분 뿐인데 아이언스 공작님을 회의장에서 내보내도 되는 걸까요? 게다가 아이언스 공작님은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유일한 전인이시자 아이리스의 공작이자 5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십니다. 상아탑의 귀빈들과의 대담에서는 꼭 필요하신 분이 아닐까요?" 난 재빨리 뒤를 돌아 보았다. 예상대로 사람들은 전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에 속하지 않는 엘프 하나는 막대 사탕을 쪽쪽 빨고 있었다. 으음, 설마 모두들 내가 아이언스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잠시 까먹고 있었단 말인가? 이건 기회다! 그 동안 실추 된 내 이미지를 회복하고 아이언스 공작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야! 난 볼을 타고 떨어지려는 눈물을 재빨리 닦고 좌중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곳은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굳이 제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군요. 전 이만 제 방으로 돌아가 라이코스와 함께 국제 정세와 이 시대 교육의 필요성과 도로망의 확충, 그리고 말을 할 수 있는 매의 구강 구조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을 할 예정이오니 여기 계신 분들께서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난 말을 마치고 다시 멋지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 제스처를 취하였다. 어디까지나 취하기만 했다. 후후, 빨리 나를 붙잡아라! "잠깐만요, 아이언스 공작님!" 이 목소리는 노처녀? 음하하, 드디어 노처녀께서 아이언스 공작님께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군.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해! 난 천천히 몸을 돌려 일루니아를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일루니아는 눈을 치켜 뜨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정말 무례하시군요!"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내 입은 쩍 벌어졌다. 또 뭐가 문제야? "상아탑의 귀빈들이 힘든 걸음을 하셨는데, 공작이라는 사람이 회의 도중 어찌 나갈 수 있겠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은 예의라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누가 나가라고 했는데! 나도 참을만큼 참았다. 여자라고 해서 봐주려고 했는데 이젠 아예 사람을 개 취급한다. 만약 내가 여기서 또 다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저 여자는 계속해서 나를 우습게 볼 것이다. 지금 확실하게 말해둬야 한다. '부셔버리겠어!' 라고. 난 인상을 굳히며 일루니아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난 조용히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쳇, 여자라서 봐줬다. 내가 착석을하자 회의는 환기 된 분위기로 계속 진행되었다. 칼리는 나를 쓸쩍 보더니 지니에게 말했다. "상아탑은 8, 9클래스의 마법을 번역해 줄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마법의 부흥과 후학 양성 차원에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희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뭐, 책 번역해주는 것 쯤이야. 일루니아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것은 조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군요." "거절하시는 겁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지금 회의의 결론이 나지 못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왕따를 당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왕따 당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회의의 결론이 나지 못하는 이유로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칼리는 '헬로우 키티' 인형을 껴안고 사탕을 쪽쪽 빨아대는 라이미안을 대신해 '아이언스 공작이 상아탑을 위해서 8, 9클래스의 마법을 번역해 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지니와 일루니아는 '된다' '안 된다' 확실히 답하지 않고 지금처럼 말을 돌리며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사람 헤깔리게 하고 있다. 차라리 확실하게 '안 된다' 라고 말한다면 '왜 안 돼! 왜 안 돼!! 니가 뭔데 안 돼!!!' 라고 소리라도 지를텐데, 그러지도 못하니 칼리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난 옆에 앉아있는 지니에게 조용히 물었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지니는 이 회장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이기에 나의 말을 무시하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무엇 말씀이십니까?" 지니의 목소리는 굉장히 작았지만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물었다. "왜 이렇게 회의를 질질 끌지요? 어차피 저 쪽의 요구조건이야 뻔한 것이니 '된다' '안 된다' 로만 대답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만 번역을 공짜로 해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요." "지금 이렇게 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는 협상을 하지 않아도 손해볼 것이 없다라는 식의 모습을 보여주어 상대방으로하여금 조바심을 자아내게 하여 우리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쪽을 보십시오. 상당히 초조해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난 고개를 들어 고양이 인형과 놀고 있는 엘프 소녀를 보았다. "별로 초조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럼 좀 옆을 보십시오," 난 고개를 조금 돌려 열을 내고 있는 칼리를 보았다. 흐음, 연로하신 나이에 많이 힘드시겠어. "굉장히 초조해하는 군요." "바로 그겁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칼리를 보았다. 칼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땀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답답해서 저러는 것이다. 이도저도 안 되니까. 아무래도 저 할머니는 협상 쪽에는 별 소질이 없는 것 같다. 매일 같이 마법만 연구해서 그런가? "아시다시피 현재 아이언스어를 알고 있는 자는 국경과 종족을 뛰어 넘어 오직 아이언스 히로 공작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런데 못 해주시겠다고 하면 어떡합니까?" 일루니아는 굉장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은 현재 아이리스의 공작이자 군의 참모총장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이 하루라도 업무에서 손을 떼시면 지휘 체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저희라고 왜 상아탑에 도움을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현재 너무나도 중요한 업무를 맡고 계시기에 마법서를 번역을 하는데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뭐? 내가 하루라도 업무에서 손을 떼면 지휘 체계가 안 돌아가? 이 여자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365권이나 되는 마법서를 번역하느라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상아탑이 얼마나 아이언스 공작님을 필요로 하시는지 저희도 잘 압니다만, 저희의 사정도 생각을 해주십시오." 무늬만 공작이던 내가 아이리스를 움직이는 요주의 인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칼리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뭐라 말하려했다. 그 순간, 라이미안이 칼리의 로브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라이, 화장실 가고 싶어." 너 화장실 가고 싶은데 어쩌라고? 칼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참으십시오." 라이미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 아까부터 계속 참았단 말이야." 난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일런스 백작과 샤이 사일런스 백작을 대신해 정중하게 탑의 주인에게 물었다. "큰 겁니까, 작은 겁니까?" 순간, 찢어 죽일 듯한 시선이 나에게 집중 되었다. 이봐, 왜들 그래? 애가 화장실 가고 싶다는데 그거 먼저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니야? "작은 거." 라이미안은 대답과 함께 몸을 비비 꼬았다. 으음, 꽤나 참았나 보군. 지니는 상아탑의 두 귀빈의 표정을 한번 살핀 다음, 외눈 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 "회의가 너무 길어진 것 같군요. 오늘은 이만 해산하도록 하고 내일 이어서 하도록 하지요." 무어라? 내일 이어서 해?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가 그럴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발을 맞춰야하는 지금 회의를 이틀이나 끌 수는 없습니다! 느리게 흐르는 물은 돌멩이조차 옮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반면 세차게 흐르는 물은 바위도 옮길 수 있습니다. 기획은 참신하게! 행동은 신속하게! 회의는 될 수 있는한 짧게! 오늘 내로 끝내요!" 지니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제 정세를 생각하시며 아이리스가 도태되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애국심에는 감히 제가 감탄 하지 아니 할 수 없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난 고개를 돌려 푸르딩딩해진 얼굴을 한 채 몸을 꽈배기처럼 비비 꼬고있는 라이미안을 보고 차마 회의를 속행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애가 오줌 마렵다는데 어쩌겠는가? 빨랑 화장실로 보내 줘야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라이미안님의 화장실 안내를 좀 맞아 주십시오. 그리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바닥에 떨어진 휴지 좀 주어 주시고요. 설마 문화시민이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뒷정리도 하지 아니 하시고 회의장을 나서는 것은 아니시겠죠? 회의는 잠시 해산하고 내일 다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어느새 일루니아는 라이미안을 번쩍 들고있는 칼리와 함께 회의장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회의장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고 있었다. 제길, 어떤 놈이 쓰레기를 이렇게 많이 버렸어? * 몸이 아픈게 어떨까? 치통, 두통, 생리통에 깡통까지. 이거저거 다 갖다 붙이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업무가 바쁘다고 해? 검술 훈련한다고 해? 그냥 몰래 도망갈까? 난 방에 누워 내일 회의에 빠질 핑계에 대해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로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지? 회의에 참가하기는 죽기보다 싫은데. 이런저런 생각들로 방 안을 뒹굴뒹굴 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난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가지고 상대가 누군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소리가 조금 낮은 쪽에서 들린다. 그리고 문을 내리치는 손의 힘이 그리 세지 않다. 게다가 "누구 없어요? 없으면 라이 삐짐." 이라는 말 소리가 나는 것으로 짐작해보아 저 문 밖에 있는 상대는 탑의 주인인 라이미안이다. 확실하다.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내 손목을 잘라도 좋아! 난 방문을 열었고 나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하였다. 문 밖에는 넙적한 고양이 인형을 끌어 안고 있는 어린 여자 엘프가 서 있는 것이다. 으음, 드디어 수련의 성과가 나타나는군. 문 두드리는 소리만 가지고 상대를 파악하다니. 뭐, 말 소리도 듣긴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 난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가셨던 일은 잘 해결 되셨습니까?" 라이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요?"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야? "시원하셨습니까?" 라이는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는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데로요." "다행입니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변소에 빠져서 헤엄이나 치고 있을 것이지. 난 라이를 방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의자를 하나 내 주었다. 라이는 의자에 앉자마자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난 반대쪽 의자에 앉으며 정중하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정말 누추하긴 하군요. 그리고 여쭈어보면 안 되요. 그냥 입 다물고 계세요." 이 꼬마가! 아이언스 히로 공작은 원래 인품이 두둑하고 마음이 너그럽기 때문에 채 열살도 안 되 보이는 꼬마 계집애가 싸가지 없게 말을 한다고 해서 화를 내는 등의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다만 분을 삭이기 위해 활짝 웃을 뿐이다. "뭘 그렇게 실실 웃어요? 허파에 바람 들어갔어요?" 아무리 인품이 두둑한 아이언스 공작이라 할 지라도 가끔식은 참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 자그마한 주둥이를 깔끔하게 손 봐주마!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라이가 입에 물고있는 막대 사탕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을 내 입에 넣었다. 와드득-! 사탕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난 필요 없어진 막대를 바닥에 버리고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야! 너 임마!" "왜요?" 여전히 싸가지 없게 두 눈 똑바로 치켜 뜨고 나를 노려본다. 난 얼굴을 최대한도로 일그러뜨리며 힘줄이 울긋불긋 나있는 주먹을 치켜들었다. "너 자꾸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굴면 죽어!" 보통 꼬마 같았으면 당장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흑흑, 잘못했어요, 아이언스 공작님. 당신 같이 잘생기고 멋진 남자에게 대들다니! 제가 잠시 돌았었나 봐요.'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엘프 소녀는 보통 꼬마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싸가지 없는 꼬마였다. "흥! 때리려구요! 못 때릴걸요! 전 탑의 주인이라구요." 으으!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울어! "어디 때려봐요! 때려봐요! 당장 칼리에게 이를테니까." 내가 이 꼬마를 때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칼리라는 여자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이 꼬마를 때리면 정계의 요직에 앉아있는 노처녀가 나를 갈굴까봐 무서워서이다. '아이리스의 공작이라는 자가 상아탑의 귀빈을 폭행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 상황은 자칫 잘못하면 상아탑과의 정치적 문제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당장 라이미안님께 사죄하시고 밖에 나가서 제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무릎 꿇고 손 들고 계세요. 오늘 내로 반성문 500장 써서 제출하고요.' 그래. 참는 것이 좋겠다. 잠깐의 실수로 평생 고통을 당하며 살 수는 없으니. 라이는 내가 때리지 못 할 것을 알았는지 방긋 웃으며 나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때려봐! 때려봐!! 못 때리지? 메롱, 메롱!" 빠악-! 이게 무슨 소리? 난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서 라이를 보았다. 라이는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울음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마 내가 때린건가? 주먹에서 은은한 통증이 전해져오는 걸로 봐서 내가 때린게 확실한 것 같다. 으윽, 분노를 참지 못해 나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나 보군. "으아앙!!!" 일갈의 사자후 같은 울음 소리. 귀가 다 멍멍하군. 아차!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난 재빨리 라이의 입을 틀어 막았다. "조용히 해." "으아아앙!"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제발 울지마. 부탁이야. 노처녀가 알면 나 죽어. 제발!" "으아아아앙!" 원래 꼬마들이 울 때는 아파서 우는 경우보단 남이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는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엄마가 장난감을 사주지 않자 길바닥에 누어 운다던가, 지금처럼 겨우 꿀밤 한 대 맞은 것 가지고 목을 놓아 운다던가. 라이는 정말 서럽게 목청껏 울어재끼고 있었다. 눈물은 또 얼마나 펑펑 쏟아대는지 이건 완전 수도꼭지다. 진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바캉스 가던 중 교통 사고가 나서 일가친척이 다 사망한 줄 알겠다. 난 최선을 다해 라이의 입을 틀어 막았지만, 라이의 울음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이대로 가면 노처녀가 이 소릴 듣고 뛰어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울지마! 자꾸 울면 때려 준다!" "으아앙!" 딱-! "으아아앙!" 제길, 역효과다. 라이는 넙적한 고양이 인형이 엄마라도 되는지 두 손으로 꼭 끌어 안고 최선을 다해 울어 재꼈다. 난 그 모습에 울화통이 터져 라이의 손에서 <헬로우 귀티> 인형을 빼앗았다. "으아앙! 귀티! 귀티!" 라이는 우는 와중에도 인형을 빼앗기자 깜짝 놀라며 인형에게 달려 들었다. 내가 인형을 든 손을 높히 치켜 들자 라이는 깡총깡총 뛰며 인형을 되 찾으려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단 나는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난 재빨리 방구석으로 가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고양이 인형의 목에 겨누며 말했다. "움직이지마! 조금이라도 움직이면이 고양이 인형의 목숨은 없다!" 순간, 라이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난 다시금 단검을 겨누며 말했다. "울지도 마! 울면 이 고양이 인형의 목에서 솜이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게 될꺼다." 라이는 재빨리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어깨를 들썩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게 하였지만, 난 아까 당했던 일을 상기하고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흑흑, 제발 귀티를 그냥 풀어 주세요."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라이는 자신의 두 손을 꼭 붙잡더니 기도하는 포즈를 취한 채,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요. 귀티를 살려주신다면, 뭐든 다 할께요." 으음, 정말 황당하군. 난 혹시나 하고 벌인 일이 이렇게 되자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제껏 보아왔던 영화나 책에서 사람을 붙잡고 협박하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인형을 붙잡고 협박하는 것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것은 기회다! 저 싸가지 없는 꼬마의 버릇을 고쳐줄 기회! 라이가 너무 서럽게 울고 있었기에 차마 나는 계속해서 단검을 고양이 인형의 목에 겨누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단검을 치우는 대신 두 손으로 인형의 목을 움켜 쥐었다. "나의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에게 싸가지 없게 굴지 말 것. 둘째, 나를 오빠라고 부를 것. 셋째, 오늘 있었던 일을 칼리나 노처녀에게 이르지 말 것. 넷째, 이빨은 하루에 세 번 꼭 닦을 것. 다섯째, 회의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을 꼭 다녀올 것. 이 요구 중 하나라도 관철 안 될 시에는 주저 없이 이 고양이 인형의 목을 조르겠다." "다 들어드릴께요. 다 들어드릴께요. 이제부턴 착하게 행동할께요. 오빠라고도 부르고요. 이빨도 깨끗이 닦고, 사탕도 많이 먹지 않을께요. 화장실도 잘 다녀올께요. 밥 먹기 전에 손도 꼭 씻을 께요. 그러니 제발 귀티를 놓아 주세요. 흑흑." 으음, 왠지 내가 아주 나쁜 놈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애를 공갈 혁박하는 그런 나쁜 놈. 아아!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정말이야?" 라이는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약속드릴께요." 설마 어린애가 약속을 어기진 않겠지? "좋아. 인질을 풀어 주도록 하겠다." 난 인형을 조심스럽게 라이에게 건내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인형을 와락 껴안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으앙! 미안해, 귀티야. 그동안 많이 무서웠지? 미안해. 내가 널 지켜주지 못 했어. 미안해, 귀티야." 아주, 쇼를 해라. 난 이산 가족 상봉보다 더 감동적인 이 장면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쉈다. 어찌되었든 애 교육은 확실히 시킨 것 같군. 이젠 좀 고분고분 해 지려나? * 이튿날 회의. 오늘의 회의는 속도감 있는 전개가 펼처졌다. 드디어 우리측의 참모들이 원하는 조건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니는 마법서를 번역 해 주는 대가로 밀과 철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 양이 조금 문제였다. 나는 귀지나 파며 혼자 놀았고, 라이미안은 귀티를 꼭 끌어 안고 볼을 부벼대며 놀았지만, 지니, 일루니아, 칼리 등등은 정말 입에 침이 튀기도록 열심히 말했다. 원래 얘기가 길어지다보면 말하는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게 되고, 대답하는 사람도 자기가 무엇을 대답하는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가끔씩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처음에 번역 문제에서 시작한 얘기는 어느새 밀의 생산 방식과 철의 강도에 대한 토론으로 바뀌었으며, 이 얘기는 또 다시 마법의 타락으로 변질 되었다. 지니의 말에 따르자면, 상아탑도 이번 전란은 비껴갈 수 없을꺼라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유일하게 아이언스어를 알고 있는 아이언스 히로가 아이리스의 공작으로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마법의 타락을 염려한 상아탑이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지금 칼리가 하는 말은 전에 지니가 나에게 했던 말과 일치하였다. 2시간이나 지났건만 회의는 아무 진척이 없다. 내가 보기엔 협상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사람이 복잡한 상황에 직면을 하면 복잡하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복잡한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가끔은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성도 있다. 어찌되었든 이대로가면 내일까지 회의가 계속되는 것은 불보 듯 뻔한 일이다. 반드시 오늘 내로 끝을 내야 한다. 난 머릿속으로 이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한 다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잠시 여기를 좀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일루니아의 시선이 가장 인상적이다. 저 시선의 의미는…… 쪽팔리게 굴지 말고 당장 앉어! 음음,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군. 하지만 이번엔 나도 충분히 생각을 했다는 말씀. 이번에야 말로 나의 이미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사람은 이런 호기를 놓쳐서는 아니 되는 법. 아이언스 공작의 크리스마스……가 아닌, 카리스마를 보여 주지. "제가 정리한 바로 상아탑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8, 9클래스 마법서를 번역해 줄 것. 둘째, 마법의 살상화를 막을 것. 맞습니까?"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아. 역시 완벽하게 정리했군. 회의 시간에 졸지 않길 잘했다. 물론 졸았으면 노처녀가 내 목을 졸라 질식시켰을 테지만. "그리고 아이리스 측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마법서 번역의 대가로 막대한 양의 밀과 철을 달라. 둘째……는 없군요. 어쨌든 맞습니까?"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렇게 복잡하게 끌고 그럽니까? 제가 간단하게 정리해 드릴께요. 일단 상아탑 측에서는 반드시 마법서를 번역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 마법서를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요?" "예." "그리고 상아탑 측에서는 반드시 마법서를 번역해야만 합니다. 풀리지 않았던 마법의 신비를 풀고 후학의 양성을 위해서 말이죠. 그 마법서를 번약할 사람은 저 밖에 없으니 상아탑은 좋던 싫던 우리측의 요구를 들어줘야 겠지요? 싫으면 시집을 가던가 다른 사람에게 알아보던가." 내 말에 칼리는 인상을 구길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난 웃으며 말을 있었다. "그리고 마법의 타락 문제 말인데요. 그것도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현재 6개 국가 중에서 마법사 보유 수가 가장 적은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지니가 대답했다. "아이리스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장 적지요. 아시다시피 전쟁에서 마법사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직접 나서서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뒤에서 대량 살상용 마법을 퍼부어대기 때문이지요. 어찌되었든 아이리스는 마법사 수가 부족하고 단기간 내에 마법사 수를 늘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회의 석상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집중되었다. 일루니아의 눈빛은 죽일 듯한 눈빛에서 팔, 다리 하나쯤 잘라버릴 듯한 눈빛으로 많이 순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한번이라도 삽질할 시에는 당장 땅 속에 묻어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난 그 눈빛에 주늑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상아탑에서 대량 살상 마법 금지령을 내리는 겁니다. 그러면 각 국가에서는 전쟁에 마법사를 동원할 수 없게 되니 당연 공격용 마법사들을 양성하는 일을 포기하겠지요. 뭐, 그 대신 치유 마법사들을 대량으로 양성할 수는 있지만, 그건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으니……. 그리고 아이리스는 어차피 마법사 수가 적으니 그런 금지령이 떨어진다 하더라고 별 피해가 없을테고…….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어째 사람들의 눈빛이 이상하다. 으음, 아무리 눈치 빠른 나지만 저 눈빛의 의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난 주위에 이상하고도 오묘한 눈빛을 견디다 못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제부턴 조용히 듣기만 할께요." 사람은 나설 때와 찌그러져 있을 때를 잘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찌그러져 있는 것이 현명했다. 내가 미쳤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구분조차 못 하다니. 여전히 계속되는 싸늘한 분위기. 으음, 그냥 농담 한번 했다고 웃어 넘겨 주면 안 되나? "그거 말 된다. 그치 칼리?" 침묵을 깨고 입은 연 사람……이 아닌 엘프는 바로 라이미안. 일명 라이. "그렇군요." 들려오는 칼리의 목소리.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이십니다. 감히 범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훌륭한 생각을 하시다니.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과 같은 참모라는 것이 자손만대의 영광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지니의 황당하기 그지 없는 칭찬. "하하, 뭐 자손만대의 영광까지야. 그냥 적당히 3대 정도의 영광으로만 아세요." 역시 사람은 겸손 할 줄 알아야 한다. 가만히 보고만있던 일루니아도 입을 열어 한마디했다. "웬일로 조금 도움이 되는 말을 하셨군요. 한번 검토해보기는 하겠습니다." 설마…… 지금 노처녀가 날 칭찬한건가? "하하하! 뭐 이 정도야 기본이죠. 한 나라의 공작이자 참모총장이자 클래스 5 마스터로서 그 정도의 책략과 지략을 발휘하지 못한데서야 어디 고개나 들고 다니겠습니까? 사실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제 머릿속에는 셀 수도 없는 책략이 가득 들어있답니다. 제가 워낙 잘났어야 말이죠. 하하하! 자, 우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잘생기고 멋지고 똑똑한 아이언스 공작을 위해 박수를 한번씩 쳐 주는 것이 어떨까요? 하하하!" 난 웃으며 그렇게 말하였고, 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짝짝짝-! "오빠, 멋있어요. 훌륭해요." 으음, 역시 어제한 가정 교육이 효과가 있었군. 라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한심하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내가 간만에 좋은 생각을 말하고 노처녀한테 칭찬까지 받았는데 이 정도 오버는 양해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어찌되었든 나의 얘기 덕에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약 1시간 정도 더 진행된 회의는 결국 이상한 결론을 도출해내며 막을 내렸다. "그럼 저와 아이언스 공작님이 상아탑을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왜 제가 가야하는 거죠?" "그야 이 곳에서 아이언스 공작님의 지략을 따를 자가 없기 때문이지요." 황당하군. "이 곳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이 가야지, 그럼 누가 갑니까?" 으음, 아무래도 노처녀의 말이 정확하겠지. 상아탑은 정말로 '대량 살상 마법 금지령' 을 발표할 생각이다. 하지만 발표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각 국가는 그 동안 살상용 마법사를 열심히 양성해왔다. 그런데 지금와서 갑자기 그 마법사들 보고 '살상 마법은 쓰지 말고, 집에 가서 TV나 보세요. 원한다면 유선 방송 정도는 달아드릴 용의가 있으니' 라고 말한다면 정말 집에가서 TV를 보겠는가? 당연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TV가 없다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유선 방송을 달아줄 수 없다는 것은 셋째치고라도 힘들게 양성한 마법사를 그냥 놀려먹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단거리 달리기만 죽도록 연습한 선수를 자유형 종목에 내보내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다. 물 속에서 달리라는 건지, TV에서 마술쇼나 보라는 건지. 어찌되었든 상아탑이 금지령을 발표한다면 마법사가 많은 나라는 손에 손을 잡고 '우리는 죽어도 그리 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배를 째세요.' 라고 외쳐댈 가능성이 다분하다 못해 확실하다. 물론 아이리스는 마법사 수가 적다 못해 거의 없기 때문에 목청을 높혀서 '저희는 상아탑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칭찬해 주세요' 라고 외쳐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적으로 마법사의 수가 적고 능력이 약한 나라를 끌여 들여 동맹을 맺어야 한다. 현재 자바스와 개틴 등이 상당 수의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리스를 제하고 가장 마법사 수가 부족한 나라는 바로 헤리오다. 헤리오는 개틴과 원수지간인 나라다. 헤리오가 개틴에 비해 땅이 넓기 때문에 군사 수는 많지만 마법사 수는 압도적으로 개틴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군사 수가 적은 개틴이 헤리오와 국방 능력에서 밀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상아탑으로 가서 상아탑과 동맹을 맺고 즉시 헤리오로 가서 또 동맹을 맺는다. 이렇게 되면 대륙의 6개 국가 중 2개 국가가 연합을 하는 셈이다. 대륙 북쪽의 어마어마한 땅을 차지하고 있는 진명은 상아탑의 손을 들어 준다고 보면 된다. 원래 중립국인데다가 상아탑과는 엄청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것은 마법 부흥과 학문 발전에 대한 원조라며 엄청난 양의 식료품과 물자를 상아탑에 무료로 퍼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진명은 막대한 군사를 보유한 국가이기에 굳이 마법사를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개틴, 자바스, 아토리아이다. 이 중 자바스와 아토리아는 상아탑의 금지령을 어기기 힘들 것이다. 그 이유는 상아탑이 자바스와 아토리아의 국경에 있는 중앙 산맥, 일명 청색 산맥, 영어로 블루 마운틴즈(Blue Mountains)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상아탑은 청색 산맥의 가장 험준한 곳에 위치한 신(혹은 드래곤. 어찌되었든 인간이 건설한 도시는 아니다)이 건설한 도시이다. 위치 자체가 천연의 도시기 때문에 절대로 공격해 들어갈 수가 없다. 반면 상아탑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것은 굉장히 간단하다. 상아탑(도시 말고 그냥 탑) 내부에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자연적으로 생성되어 흐르고 있다. 이 마나가 모이는 곳은 대략 탑의 중앙 부근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마법진을 그리면 굳이 마법사들이 진을 뺄 필요 없이도 먼 거리를 자유자재로 이동이 가능하다. 이것은 탑의 내부로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미리 약속으로 마법진을 열 시간과 좌표를 정해두면,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탑의 내부로 이동할 수 있다. 물론 너무 멀리 있으면 안 되겠지만. 어찌되었든 상아탑은 자바스와 아토리아의 국경 사이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만약 이 두 나라가 금지령을 어길 시에는 수 천명의 마법사가 배낭을 싸고 피크닉을 가서 한 사람당 마법 하나씩만 써주면 된다. 그러면 당연히 웬만한 도시 하나 정도는 초토화 된다. 이렇게 되면 남은 것은 개틴 하나. 이렇게 되면 얘기는 간단해 진다. 모든 나라가 상아탑의 금지령을 지키는데 이 나라만 안 지킨다면 모두가 예스(Yes)할 때 노(No)한 것처럼 왕따 당하기 마련이다. 조금 고상하게 말해 외교적 고립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대량 살상 마법 금지령' 이 현실화 되기 위해선 하루라도 빨리 헤리오와 아이리스가 동맹을 맺고 이 두나라는 상아탑의 금지령을 착실히 지키겠다는 서약서, 일명 외교적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럼 상아탑과 붙어있는 자바스와 아토리아는 하는 수 없이 금지령을 지키겠다는 외교적 계약을 맺을테고 홀로 남은 개틴은 어쩔 수 없이 금지령을 지키게 된다. 아아! 진짜 완벽하면서도 복잡한 상황이다. 물론 위에 나열한 상황들은 내가 직접 연구하고 탐구하여 생각한 것이 아니다. 아까 내가 '상아탑에서 대량 살상 마법 금지령을 내리는 겁니다' 라고 말을 마친 순간, 사일런스 백작의 머릿속에 떠오른 일련의 생각들이다. 지니는 나에게 상황을 굉장히 자세히 예를 들어서, 나이 먹어서 시집도 못 간 누구와는 매우 다르게,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나는 한번에 알아 들었다. 요즘 하도 할 일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각 국의 군비 상황을 기록해 놓은 서적 등을 뒤적이다 보니 이젠 나도 대륙의 정세를 어느 정도 파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튼 사일런스 지니는 정말 잘난 인간이다. 얼굴 잘 생겼지, 머리 똑똑하지, 성격도 좋지, 게다가 여자도 잘 꼬시지. 이 인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절대 한 여자에게서 만족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한번 건드린 여자는 절대 다시 건드리지 않는다.' 이 것이 바로 사일런스 지니의 좌우명이다. 이 인간 때문에 왕궁 안의 처녀가 남아나질 않는다. 가끔은 궁을 나가서 며칠씩 있다 돌아오기도 하는데 대체 그 며칠 동안 무슨 짓을 하며 돌아다녔을까? 내가 보기에 지니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 그렇게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여자를 찾아 돌아다니지.(사실 지니가 찾아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의 경우 여자가 달라 붙는다. 무슨 인간 자석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여자들이 달라 붙는지) 지금 난 상아탑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짐을 챙기는 도중 재밌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챙길 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청룡도를 허리에 차고 망토를 몸에 두르면 준비 끝이지 뭐. "어디 가는거야?" "외교 사절로 상아탑에 간다." "언제 돌아오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무튼 나 없는 동안 집 잘 지키고 있어라." "내가 같이 가줄까?" 같이 가줘? 웃기고 있네. "왜? 따라오고 싶나 보지?" "아니. 그냥 너 심심할까봐." "음하하! 외교 사절로 가는 내가 심심하겠니, 아니면, 남아서 집 지키고 있는 니가 심심하겠니? 따라오고 싶으면 솔직히 따라오고 싶다고 말해. 뭐, 데리고 갈 용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까." "누, 누가 같이 가고 싶데!" "싫으면 마. 그럼 나 간다." 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몸을 휙 돌렸다. 그러자 갑자기 뒤에서 파다닥- 거리는 것이 날아와 내 어깨에 턱 하니 앉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같이 가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예감이 불길하거든. 니가 위험에 처하면 나 말고 누가 널 구해주겠니?" 매 주제에 자존심만 세 가지고. 짐을 챙기던 중, 침대 위에서 약 먹은 병아리 모양을 한 매가 툭 떨어졌다. 알고보니 라이코스. 이 놈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허구헌날 출장을 간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돌아와 정보를 하나씩 물어다 준다. 그런데 이젠 할 일이 없는지 나를 따라오겠다고 한다. 생각 같아서는 목에 줄하나 매달고 집이나 지키게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어깨에 올려 놓고 가면 멋있을 것 같아서 그냥 데려가기로 했다. 라이코스와 함께 방을 나와 연무장 쪽으로 가니 칼리와 라이미안, 지니, 일루니아 등등이 서 있었다. 그리고…… 오오! 나의 천사. 나의 희망. 나의 사랑. 나의 아내……는 아니고 애인. 루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고 고귀하여 차마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면 너무 오바고 그냥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정도 였다. 인간이 전구도 아니고 형광등도 아니고 발광체는 더더욱 아닌데 어째서 눈이 부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눈이 부신데 내가 어쩌겠는가? "먼 길을 떠나신다고 하시길레 배웅 나왔어요." 아아! 외교 사절로 떠나는데 이런 루시아 공주님께서 직접 배웅을 나와 주시다니. 정말 외교 사절 떠나는 보람이 있다. 난 남들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루시아의 두 손을 번쩍 움켜쥐며 말했다. "제가 반드시 이번 동맹을 성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아이리스는 세계화 시대에 발맞춘 글로벌 월드 유니버스 아이리스로 발돋움하게 될 것입니다.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저만 믿으세요." 루시아는 생긋 웃음을 지었다. "믿을께요." "믿긴 뭘 믿어요. 제발 실수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네요.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하니 만약 실패할 경우에는 청색 산맥에서 몸을 묻는다는 각오로 열심히 하세요." 노처녀의 눈빛을 보니 몸을 묻는다는 각오로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몸을 묻는다는 각오로 열심히 했는데도 일이 뜻데로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정말 몸을 묻으라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묻지 않는다면 직접 나서서 묻어주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 바닥에 몇 달을 굴러먹었는데 설마 실패하겠습니까? 만약 실패할 경우에는 라이코스를 산맥에 묻고 돌아올 것을 약속드립니다." "왜 날 묻는데?" "그러니까 그 정도 각오로 열심히 하겠다는 뜻이지요." 루시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일은 어찌되어도 상관 없으니 몸 조심하세요. 설사 일이 뜻데로 풀리지 않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요." 일루니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몸은 어찌되어도 상관 없으니 일이나 잘 하세요. 설사 일이 뜻데로 풀리지 않으면 돌아올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시고요." "예." 일루니아가 마지막에 초를 치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 때, 저쪽에서 칼리가 말했다. "마법진이 준비되었습니다. 출발하도록 하지요." 연무장 가운데에는 지름이 10m가 조금 넘는 마법진이 그려저 있었다. 마법진의 모습을 보니 이동 마법진의 모습에 연결 마법진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연결 마법진은 도착 지점에서 열고 있는 마법진과 연결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적은 양의 마나로도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착 지점에서 게이트를 열어주는 셈이니까. 난 지니와 함께 마법진의 중앙 부근에 섰다. 칼리와 라이미안도 섰다. 라이미안은 이 와중에도 귀티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칼리는 주문을 외우며 마법진을 발동 시켰다.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칼리가 상당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보다는 못하지만. 나라면 그렇게 긴 주문은 안 외워. "워프."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일루니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모습은 사라졌다. *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에 수백명은 될 것 같은 마법사들. 내가 상아탑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것을 확인한 마법사들인 마법진을 유지하는 것을 멈추고 재빨리 이 쪽으로 뛰어왔다. 마법진의 크기가 워낙 큰 덕에 마법사들이 우리에게 오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난 주위를 자세히 둘러 보았다. 온통 흰색의 벽들. 엄청난 크기의 원형 공간은 새하얀 흰색으로 덮혀져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갑갑한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상아탑의 최하층 부입니다. 상아탑은 청색 산맥에 내재해 있는 마나가 모이는 장소이기에 언제나 마나가 풍부합니다. 특히 이 곳은 탑의 내부를 가득 매우고 있는 마나를 모으기 가장 적합한 장소지요." 칼리의 설명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수십명의 마법사들이 우리 앞에 도착하였다. 라이미안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과 인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우와! 안녕, 아리. 방가방가, 시리. 모두모두 안녕. 제가 돌아왔어요. 저 없는 동안 잘들 지내셨어요? 몸이 아프진 않고요? 제가 탑의 주인으로서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왔어요. 모두들 칭찬해주세요. 아잉! 칼리, 나 머리 쓰다듬어 줘." 난 아이리스의 공작으로 본의 아니게 외교적 정치적 임무를 띄고 이 땅에 왔기 때문에 최대한 멋지게 보이기 위해 아무나 마구 째려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는 지요?" 그 아무나에 속한 지니가 물었다. "제 눈에서 위압감과 카리스마가 느껴지나요?" "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언제나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계시니까요." 그래. 내가 좌중을 압도하긴 하지. 내가 말 한마디만 하면 분위기가 썰렁해 지니까. 칼리와 몇 마디 나누던 마법사들의 시선이 갑자기 나에게 집중 되었다. 그러자 지니가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상아탑의 마도사님들. 저는 사일런스 지니로 아이리스의 백작이고 현재는 외교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이 분은 최고의 마법사이자 최고의 참모이자 최고의 지식인이자 최고의 학자이자 최고의 미남이자 최고의 공작이자 아이리스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굉장히 중요한……." 난 지니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내가 잘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면 조금 부끄럽잖아. 지니는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본 다음 말을 이었다. "……분이셨던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제자 아이언스 히로 공작님이십니다." "……." 할 말이 없군. 이 인간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오오! 이 분이 바로 아이언스 이그리드 님의 제자 분이시군요." "그런데 굉장히 평범하게 생겼군요." "외모야 평범하면 어떤가? 마법 실력만 좋으면 되지. 자네 현재 클래스가 어떻게 되나?" "전 5클래스 마스터입니다." "5클래스? 별 볼 일 없잖아." 이 늙은이가! "이 나이에 5클래스 마스터면 대단한 겁니다. 그러는 노인장께서는 대체 몇 클래스 인지요?" "흠흠, 난 7클래스라네." "거, 보아하니 7클래스 마스터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기껏해야 1, 2 클래스 차이 아닙니까? 마법 좀 잘한다고 사람 무시하지 맙시다. 사람은 마법이 다가 아닙니다." "흠흠, 미안하게 됐네." 잠시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간 뒤, 우리는 휴식이라는 명목으로 방 하나를 배정 받았다. 레비테이트 마법이 걸린 장소에서 원반 하나를 타고 상층으로 올라갔다. 우리에게 배정된 방은 시설도 좋고 전망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 아무튼 굉장히 좋은 방이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잘 주무세요. 잘 안 주무면 라이 삐짐." 칼리와 라이미안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우리는 짐을 풀기 시작했다. 짐은 가지고 온 것이 거의 없었기에 풀 것도 거의 없었다. 라이코스는 어느새 내 어깨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쩐지 조용하다 했어. 난 라이코스를 침대 위에 던지고 청룡도를 방 구석에 세워 두었다. 지니는 멋지게 생긴 롱소드를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창가를 바라 보았다. 그러고보니 지니가 검을 쓰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한번도 본 적 없는데. 스윈의 말에 따르면…… '그 녀석 굉장한 실력을 갖추었지. 마음 먹고 덤벼들면 나도 좀 힘이 드니까. 만약 지니 녀석이 참모가 되지 않고 오직 검술 하나만 파고 들었으면 장난이 아니었을 걸. 뭐, 녀석은 참모 역할을 더 좋아하는 것 같지만. 자신은 교양인이라고 칼 쓰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 하지만 녀석도 이 스웰리어 스윈님의 상대는 안 되지. 왜냐하면 난 최강이거든. 푸하하하!' 지니는 창턱에 몸을 기댄 채, 계속해서 밖을 바라 보았다. 무슨 일인지 수심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후우-!" 얼씨구. 이젠 한숨까지 내쉬네. 지니의 얼굴은 눈이 축처져 내리고 피부가 거무틔틔한 것이 정말 누가보면 회사에서 짤리고 마누라는 바람나서 얼굴도 모르는 놈팽이와 도망가고 하나 남은 자식은 선생 폭행으로 경찰서에 잡혀간 줄 알 것이다. 지니가 저런 표정을 짓는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난 그 이유를 안다. 아마도 아이리스와 상아탑과 헤리오의 동맹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이번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기에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이번 일이 실패할 경우 아이리스는 재기의 기반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지니의 '애국심(愛國心)'은 가히 나의 '애루시아심(愛Lucia心)' 과 비견 될만큼 굉장하기 때문에 저렇게 심하게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것이다. 솔직히 외교 사절단이랍시고 달랑 둘이서 왔는데 지니는 대체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나? 난 옆에 있는게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겠고. 그러니 지금 지니의 상황은 혈혈단신, 사고무친, 사면초가, 단독외교, 홀로서기, 피박광박 등의 사자성어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내가 할 일은 명확하다. 지금 지니의 긴장감과 걱정을 덜어 주어 외교 사절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난 웃으며 지니에게 다가갔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니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아무리봐도 지니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욱 심각해 보인다. 난 지니의 기분을 풀어줄 목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런 표정 하지마세요." "제 표정이 어떻습니까?" 좋았어. 지금이야 말로 농담을 해 지니를 웃겨줘야 겠군. "지금 표정은 마치 루시아 공주님이 저에게 전해주라고 편지를 주었는데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과 저를 연결해주고 싶은 마음에 차마 그 편지를 건내주지 못하고, 그렇다고 건내주지 않자니 공주님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고, 하니 편지를 전해 줄 수고 없고, 전해 주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는 것 같군요. 하하하!" 순간, 지니의 얼굴에서 어둠이 싹 가셨다. 나의 농담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나도 외교 사절단으로 와서 도움이 된 건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예?" "그 편지는 아까 루시아 공주님께서 직접 제 방에 오셔서 주고 가신건데 그걸 어떻게 아이언스 공작님이……." 무어라? 그럼 정말로 루시아가 나에게 편지를? "뭐해요? 빨리 내놓지 않고!"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사실 저희 누님이 시간이 없어서 편지를 못 썼을 뿐이지 누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이런 편지 수백장 쯤은……." "전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편지 수백장 보다는 루시아 공주님의 편지 한 장이 더 중요하니 빨리 줘요." "아니, 저희 누님의 마음을 어찌 그리 폄하 하십니까? 저희 누님께서는 언제나 아이언스 공작님을 그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고 계십니다. 저희 누님의 마음은 루시아 공주님의 마음보다 열배, 백배, 뜨겁고 강력합니다. 그러니부디 루시아 공주님의 편지는 잊으시고 저희 누님만을 생각하시는 것이……."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아니, 루시아가 저한테 전해주라고 한 편지를 왜 사일런스 백작님이 가지고 계세요. 당장 내놔요. 당장!" "저기, 한번 더 재고 해보심이……." "어디서 재고 같은 소리를 하십니까? 빨랑 줘요. 빨랑 안 주면 당장 우편물 불법 취급죄로 고소하는 수도 있어요." 지니는 고소한다는 나의 말이 두려웠는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품 속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난 낚아채 듯 지니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와 재빨리 봉투를 뜯었다. 난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내다 아까보다 더욱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니에게 말했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곱게 접힌 종이를 펴보니 고운 글씨로 써진 그녀의 마음이 보였다. 친애하는 아이언스 공작님께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중요한 임무를 띄시고 먼 곳으로 떠나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언제나 제 곁에 계실 줄 알았던 공작님께서 떠나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편지를 쓰기에 앞서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전에 우리가 만났던 그 곳을 기억하세요? 공작님께서는 저를 부드럽게 안으시고 살짝 입을 맞춰 주셨지요.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해요. 그때 공작님께 느꼈던 그 따뜻함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에요. 요즘 공작님께서는 많이 힘들어 보여요. 매일 같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시느라 잠시도 쉬지 못해 그런 것이겠지요. 언제나 무거워 보이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제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프답니다. 일 보다는 제발 건강을 먼저 생각하세요. 제게 있어서 공작님의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요. 부디 빠른 시일 내에 몸 건강히 돌아오세요. 소녀는 그 곳에서 언제나 아이언스 공작님을 기다리겠어요. ps. 전 아이언스 공작님의 카리스마적인 모습에 반했답니다. 앞으로도 멋진 카리스마를 보여 주세요. 기대하고 있을께요. 어흐흐흑-! 내 뺨을 타고흐른 눈물이 하나, 둘 씩 편지 위로 떨어진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내 가슴 속으로 전해온다. 세상에 이런 착한 마음씨를 가진 여인이 있었다니. 얼굴 예쁜 여자가 마음씨도 곱다더니 정말 착해도 너무 착하다. 내 그대를 위해 반드시 이번 일을 성사시키고 말겠소. 그리고 그대가 나의 카리스마적인 모습에 반했다면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보여주겠소. "뭐라고 쓰여있습니까?" 난 카리스마적으로 지니를 확 째려 보았다. "제 사생활에 간섭하지 마십시오. 붕어빵엔 붕어가 없고 국화빵엔 국화가 없지만 호도과자에는 호도가 있고 계란빵에는 계란이 있고 파전에는 파가 있고 김치전에는 김치가 있고 화투에는 삼광 달광(팔광)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의심하지 말라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말씀은 잘 깨우쳤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내용이……?" "서른 다 되도록 시집도 못 간 노처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쓸만한 그런 내용입니다. 됐습니까?" "저희 누님이 썼으면 그것보다 열배는 잘 쓸 수 있습니다." "어허! 시집도 못가고 연애도 못해본 노처녀가 어찌 감히 러브레터를 쓸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이건 오직 루시아 공주님만이 쓸 수 있는 겁니다. 더 이상 아무 말씀 마세요." 난 편지를 다시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지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쓴 입맛을 다셨다. *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의 방. "일이 잘 풀릴까?" "아마 그렇겠지. 그 인간은 단순해서 니 편지를 본 순간 죽어라 일할테니까." "언니가 자꾸 구박하니까 아이언스 공작이 맨날 주늑들잖아." "맘에 안 드는 걸 어떡해?" 루시아는 일루니아의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일루니아는 루시아에게 신경을 끄고 상아탑과 헤리오와 동맹을 맺을 경우 처리해야할 상황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뒹굴거리며 일하는 일루니아의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아는 갑자기 생각난 듯 일루니아에게 말했다. "언니." "왜?" "아이언스 공작이 알까?" "뭘?" "그 편지 사실은 언니가 불러준 거 내가 받아 적기만 했다는 거." "그 단순한 머리로 그걸 어떻게 알겠니? 아마 지금쯤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그 편지 읽고 있을 걸." "그런데 연애 한번 못 해본 언니도 러브레터 쓸 줄은 아네. 신기하다." "조용히 해라. 나 일해야 되." "솔직히 말해봐, 언니. 나 부럽지?" "그런 남자 사귈 바에는 여자랑 사귀고 만다." "그럼 나랑 사귈래?" "입 안 다무니?" "왜 그래? 서른살 먹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언니가 불쌍해서 내가 특별히 사궈주겠다는데." "너 죽어!" 일루니아는 펜을 내던지고 루시아에게 달려들었다. 그 시간에 히로는 눈물을 흘리며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일루니아가 불러 준 것을 루시아가 받아 적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끝없이 뻗어있는 책장. 그 책장에 꽃혀있는 수 많은 책들. "이 곳에는 중요한 마법서들이 몽땅 다 있어요. 저쪽 끝에는 넨 이드님이 집필하신 마법서가있고, 이쪽에는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이 집필하신 마법서." 난 라이미안의 안내를 받아 이그리드의 저서가 보관된 도서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이 곳은 굉장히 중요한 장소로 일정 서열이 되지 못한 마법사들은 발도 못 붙인다고 한다. 나야 뭐 이그리드의 제자이니 별 상관 없이 들어올 수 있지만. 난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아무 책이나 한권 뽑아 들었다. 엄청난 크기에 엄청난 두께. 펴보니 깨알 같은 글씨들이 여백조차 남기지 않고 박혀있다.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번역하고 있어?" 한권 번역(말이 번역이지 그냥 이 글을 저 글로 바꿔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똑같이 베끼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 정도 두께의 책을 어느 세월에 베낀단 말인가?)하는데 한달은 걸리겠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칼리가 그랬어요." 그래. 나도 니 나이 땐 그런 말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니 알게 되더라. 세상엔 가능한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있다는 것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내가 라이와 도서관을 둘러보는 동안 지니는 칼리와 함께 회의에 참석해 있다. 또 회의. 이젠 회의 소리만 들어도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튼 지니라면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잘난 인간이니까. 게다가 상아탑의 인간들은 외교 협상과는 별 상관 없다 못해 아예 관련이 없기에 지니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그리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정말 이걸 번역하는 게 가능할까?" "하면 된다, 라고 칼리가 그랬어요." 역시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온 아이다. 세상을 이렇게 밝게만 바라보다니. 으음, 어째서 난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린걸까? "세상엔 해도 안 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단다." "안 되면 되게 하라고 칼리가 그랬어요." 너 요즘 새마을 운동하니? '안 되면 되게 하라' 는 경제 개발 5개년 개획이나, 새마을 운동 때나 써먹던 말인데. 요새는 군대에서 써먹고. 도서관을 다 둘러보고 방으로 돌아오니 지니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난 그의 옆에 걸터 앉았다. "일은 잘 되었나요?" "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되었습니다. 상아탑 마법사들은 전부 좋으신 분들이더군요." "좋은 게 아니라 만만한 거 겠죠." "하하,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그나저나 이젠 어쩌실 건 가요?" "뭘 말씀이십니까?" "일이 잘 해결되었다면 이 곳에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다시 아이리스로 돌아가나요?" 지니는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 한 구석을 빙글빙글 돌며 손으로 턱을 괴는 등,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취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 폼이 꽤나 멋있다는 것이다. 이곳에 지니의 여성팬이 없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군. "그게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뭐라구요? 아니, 어째서, 왜? 무엇 때문에? 설마 내가 루시아와 만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건 아니시겠죠? 만나지 못하게 막는다 해서 사랑까지 막을 수 있을 꺼라 생각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실수하신 겁니다. 분명 말하지만 전 루시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설마 제가 그런 야비한 방법으로 아이언스 공작님의 사랑을 막기야 하겠습니까? 정말 저라는 존재가 아이언스 공작님의 눈에 그렇게 밖에 비치지 않는 겁니까?" "네." "……." 나의 단호한 대답에 지니는 잠시 할 말을 잊은 것 같았다. 그러게 왜 남의 러브레터를 중간에서 가로챘나? 그냥 조용히 뱉어낼 것이지. "흠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리도 저를 불신하시니, 저는 심히 죄송스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쓸데없는 수식어는 그만 붙이고 결론만 말해 주세요." "예. 결론은 헤리오로 갈 생각입니다." 으음, 어느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확실히 이대로 아이리스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헤리오로 가야겠지. 하지만 말이야…… "아이리스에 들렸다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상황 보고에 외교권도 위임 받아야 하고, 열심히 일했으니 휴식도 좀 취하고." 루시아 얼굴도 보고.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일급 외교관인데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외교부 장관이시니 외교에 관해서는 현재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잠깐!" 설마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 잘못 들었을리 없다. 지니가 잘못 말했다면 모를까. 난 정색을 하고 물었다. "누가 외교부 장관이라고요?" "당연 아이언스 공작님이십니다." 당연? 뭐가 당연해? "누구 마음대로 제가 외교부 장관이에요? 그리고 언제 임명 됐어요? 왜 제가 외교부 장관을 해야하는 거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저번 회의 때,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언스 공작님의 출중하신 능력이라면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실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에 모든 임원들이 만장 일치로……."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다. 분명히 말하건데 나를 외교부 장관으로 추천할만큼 정신나간 인간은 단 한명 밖에 없다. "누가 추천했나요?" "그야 당연 아이언스 공작의 타인이 범접할 수 없을만한, 타인의 흠모의 대상이 될만한, 1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천재성과 위대함을 미리부터 깨우쳐 언제나 아이언스 공작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다니는 제가 추천을 하였습니다. 감히 영광스럽게도 제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니 정말 그 감동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군요." 그래. 역시 너 였어. 너 일줄 알았어. 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는 거지? 어째서 자꾸만 이상한 직책은 몽땅 나에게 맡기는 거지? "전임 외교부 장관은 누구였나요?" "접니다만." 그래. 또 너 였어. 너 일줄 알았어. "그럼 현재 제가 맡고 있는 직책은 참모총장에 외교부 장관이군요. 설마 또 다른 직책이 있는 것은 아니겠죠?" "왜 없겠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그 두 직책 외에도 크고 작은 십여가지의 직책을……." "거기까지. 더 듣고 싶지 않아요. 더 들었다간 미쳐버릴 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난 지니와 대화를 그만두기로 하고 내 침대에 누웠다. 침대 한 구석에 라이코스가 약먹은 병아리처럼 뻗어있는 것이 보이길레 슬쩍 발로 밀어 침대에서 떨어트리고 편하게 휴식을 취했다.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은 사슴. 결혼을 못해 슬픈 노처녀는 일루니아. 정신 연령이 낮아 슬픈 엘프는 라이. 머리가 비어서 슬픈 매는 라이코스. 마지막으로 너무 잘나고 완벽해서 슬픈 인간은 바로 나. 아아! 그녀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하는데 맡고 있는 직책이 너무 많아 시간이 없구나. 나의 마음을 담아 종이학 천마리를 접어 예쁜 유리병에 담아 선물하고 싶건만 노처녀에게 '이런 짓 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왕궁 복도라도 청소하세요!' 라고 욕먹을까봐 하지도 못 하겠고. 복도가 너무 넓어서 청소하기도 힘들겠고. "헤리오에는 언제쯤 갈 건가요?" "아직 일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니…… 아마 삼일 정도면 될겁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지니의 말 대로라면 난 이 곳에서 삼일이나 놀아야 한다는 거다. 뭐하고 놀지? 아! 심심하다. * 1671년 10월 10일 오늘은 내가 상아탑에 온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에 일어나는데 굉장히 기분이 좋다. 몇 가지 이유를 분석해본 결과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아마도 주위에서 나를 못 잡아먹서 안달이 난 노처녀가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의 핸섬한 얼굴을 깨끗이 닦고, 머리에 기름을 치고 거울을 보니 내 모습이 눈이 부셔 차마 바라 볼 수가 없다. 아아! 인간이 이리도 멋있어도 된단 말인가! 난 자고있는 라이코스를 한번 밟아 준 다음 방을 나섰다. 오늘은 분명 좋은 만남이 있을 것이다. 스포츠 신문의 오늘의 운세란을 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냐고? 으음, 그냥 예감이라고 하자. 게다가 오늘은 10월 10일. 10이 두 개나 겹쳤는데 설마 좋은 일이 안 생기겠는가?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10 두 개면 장땡이라하여 길일로 삼았다. 좋은 일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는 날인 것이다. 약 30분 정도 위, 아래층을 왔다갔다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니 내가 지금 어딨는지 모르게 됐다. 간단히 말해 길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곳이 어딘가? 바로 상아탑이다. 언제나 마나가 넘쳐나는. 게다가 나는 시간 밖에는 남아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조급할 필요가 없다. 난 여유롭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간만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는데…… "이거 왜 이러지?" 라이터가 안 켜진다. 내가 이제껏 17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긴박하고, 황당하고, 어이없는 사태는 정말 간만이다. 간만에 담배를 피는데 간만에 이런 당혹스러운 일이 생기다니. 자세히 보니 라이터의 가스가 다 되었다. 이래서 1회용 라이터는 안 된다니까. 난 라이터를 뒤로 휙 던졌다. 그리고 손가락을 한번 튕기며 말했다. "Fire."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이 생겨났다. 난 그 불꽃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런데…… "아! 뜨뜨!" 불꽃이 안 꺼진다. 원래 공격형태의 마법을 압축시켜서 작은 불꽃으로 만들었으니 불꽃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꺼지질 않는 것이다. "으아! 손가락이 타들어 간다! 나 죽네!" 난 입으로 불고, 손을 미친 듯이 흔들고, 손가락을 발로 짖이겨봐도 불꽃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이언스 히로 공작, 담배 피려다 분신 사망> 내일 자 신문의 헤드 라인. 아아! 적과 싸우다 장렬히 사망하는 것도 아니고 담배 피다 사망하면 그 얼마나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냐? 나 죽거든 내 무덤에 꽃 한송이 놓아주오. 그럼 나는 그 꽃으로 그대를 회상하리다. 나 죽거든 내 무덤에 잔소리를 해주오. 그럼 나는 그 잔소리로 노처녀를 회상하리다. 나 죽거든 내 무덤에 막대 사탕을 버리지 말아주오. 만약 그런 짓 하면 진짜 주-우-거! 죽는 마당에 왜 이렇게 시상이 팍팍 떠오른 걸까? 내 이름으로 된 시집 하나는 내고 죽어야 하는 건데. "으아아! 나 죽네! 물! 물! 손가락 탄다! 손가락 타! 나 죽어-!" 상황이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산소를 제거하여 불이 더 이상 타오르지 못하게 막는 수 밖에. 산소를 제거하려면 불꽃이 있는 주위를 완벽히 밀폐 시켜야 한다. 난 황급히 불이 붙은 손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그 순간…… 촤아악-! "괜찮아요?" 지금 내 모습은 괜찮다기 보단 물에 빠진 히로 꼴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난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물기를 대충 닦았다. 내 앞에는 내 나이 정도 되보이는 여자애가 들고 있기도 위태해 보이는 커다란 물통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여자애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죄송해요." 순간, 나는 짜증이 확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난 눈을 부릅 뜨고 인상을 팍 쓰며 소리쳤다. "죄송할 줄 알았으면, 하질 말았어야지!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죄송하다면 다야!? 너 사람 죽여 놓고도 죄송하다고 할래!?" 소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나의 멋진 모습에 반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눈에 물방울이 고이는 것이…… 설마 치사하게 울진 않겠지? "흑흑, 저는 그냥 위험해 보이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흑흑…… 죄, 죄송해요. 흐으윽-!" 소녀는 주저 앉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으음, 설마 내가 울린건가? "제 이름은 뮤리아에요. 17살이고 이 곳에 온지는 5년 정도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 상아탑 마법 학교 1학년 FH반 18번이에요. 부모님께서는 과일 가게를 하고 계세요. 파는 과일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사과를 중심으로 팔아요. 왜 사과를 중심으로 파냐면요, 사과는 맛있고, 가격이 싸고, 몸에 좋아 남녀노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사과 5개를 사면 방울 토마토 2개를 덤으로 얹어주는데요, 왜 덤으로 얹어주냐면요, 사과의 아삭 베어무는 느낌과 방울 토마토가 입에 터지는 느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덤으로 얹어줘요. 10개를 사시면 방울 토마토 4개가 아닌 5개를 얹어줘요. 왜 그러냐면요……."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이 소녀의 방. 내가 웃옷을 벗어 물기를 쭉 짜내는 사이, 이 소녀는 자기 소개겸 자회사 광고를 하고 있었다. 하필, 방수와 보온이 되는 칼라이스의 망토를 방 안에 놓고 나온 이 시점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정말 머피의 법칙 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니 마나 주입을 멈추면 불이 꺼지게 되어 있는데, 내가 왜 그걸 실천에 옮기지 못한걸까? 간만에 마법을 쓰다보니 완전히 감이 죽었나 보다. 만약 파이어 볼이라도 썼었다면 지금쯤 온 몸에 불을 붙이고 뒹굴고 있겠지? 어찌되었든 나의 예감은 정확히 맞아 들었다. 소녀의 나이는 17세로 나와 동갑이다. 얼굴은 정말 평범하게 생겼다. 하지만 평범보다는 어벙에 가까울 것이다. 노란색에 가까운 긴 금발 머리는 양쪽으로 땋아 내렸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하다. 뭐, 이정도까지는 평범으로 봐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겁에 질려있는 듯한 커다랗고 큰 눈. 그 눈 위에 있는 완전 원형의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 축 늘어진 어깨. 내가 아는 어떤 노처녀도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지만, 그 노처녀는 지적으로 보이는데 반해 이 소녀는 뭔가 좀 모자르게 보인다. 게다가 걷는 모습과 행동이 소심하고 어벙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나의 이 추리를 입증이라도 하듯, 아까의 행동과 지금의 말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난 젖은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뮤리아를 보았다. 뮤리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보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도와주려고 한 건데. 내가 너무 심했나? 난 사과를 하려다 마음을 고쳐 먹었다. 만약 내가 지금 사과를 한다면 이 애가 나를 우습게 볼 수도 있다. 내가 노처녀에게 매일 무시를 당하는 것도 첫인상을 잘못 심어줬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저자세로 나올수록 나는 더욱더 밀어 붙어야 한다. 난 인상을 팍 쓰며 뮤리아에게 말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뮤리아는 고개를 살짝 들고 눈알을 굴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요." 이럴 수가! 감히 나를 모르는 자가 세상에 존재를 했다니! 지나가는 매도 내 이름은 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자기 소개를 하는 수 밖에 없군. 소개는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소개가 길면 지루함을 느낄 수 있고, 전부 인식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어중한간 사람이란 인식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짧게 하여서 포인트를 팍팍 넣어주는 요령이 필요하다. "내 이름은 아이언스 히로. 현재 아이리스의 공작. 아이리스 군(軍)의 일급참모 중에 우두머리. 즉, 참모총장이다. 내 밑으로는 혼자서 잘난 만능 엔터테이먼트이자 멀티플레이인 바람둥이와 성질 나쁜 노처녀가 있지. 그리고 난 외교 장관으로 상아탑과 아이리스의 외교적관계를 더욱 돈독히함과 동시에 서로 협력을 하여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협상안을 체결하기 위해 이 곳으로 왔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직책들을 맞고 있지만 그것은 국가적 기밀 사항이여서 차마 말할 수는 없고, 대신 도박판에서 돈 따는 것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지. 마지막으로 나는 18세다. 그러니 오빠라고 부르렴." 너무 짧았나? 다음부터는 조금 길게 해야겠다. 뮤리아의 얼굴은 당혹스러움과 어이 없음으로 물들었다. 잠시 우물거리던 뮤리아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기요. 아이언스 히로라면…… 설마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제자인가요? 맞아. 소개가 너무 짧다보니 그걸 빼먹었군. "그래. 내가 바로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수제자 아이언스 히로다.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말년에 나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제발 제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길레 내가 특별히 그 부탁을 들어 주었지." "우와! 그게 정말인가요?" 뮤리아의 입에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갑자기 어깨가 으쓱거리는 군. 그래. 그 동안 내가 자각을 못해서 그렇지, 난 잘나갔던 마법사의 제자였어. 그것도 수제자(제자가 한명 밖에 없었던 관계로 나 밖에 수제자가 될 사람이 없다). "두 말하면 잔소리, 세 말하면 헛소리, 네 말하면 개소리. 나의 천재성은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감탄을 하다 못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지. 그래서 그는 나의 힘을 봉인하려고까지 했었어. 하지만 감히 그러하지 못했지." "왜요?" "그건……." 제길, 실수다. 다음 스토리를 생각을 안 하고 말했어. "비밀이야. 절대 말할 수 없어.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 대륙은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몰라." "그렇군요." 이런 황당한 헛소리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랍기 그지 없다. 이 여자애의 정신적 레벨을 다시 한번 인식하는 순간이군. "저기요." "뭐야?" 뮤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우물거렸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쳇! 또 사랑 고백인가 보군. 이젠 지겹다. 미안하지만 나에겐 루시아가 있단다. "그게…… 제가 알기로 아이언스 공작이 17세인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18세라고 하시기에 제가 잘못 알고 있나 해서요." 대체 내가 17세라는 정보는 어디서 입수한 거지? 대체 왜 그런 쓸데 없는 정보를 알고 있는 거지? "그래. 나 17세 맞아. 그러니 말 놓아도 되. 나 참, 존댓말 쓰는 게 그렇게 억울했나?" "저기, 미안……." 미안하다면서 바로 반말이 튀어나오는 군. 잠시 대화가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난 앉을 곳을 찾기 위해 방 안을 둘러 보았다. 5평 정도의 방 안은 대체로 깨끗한 편이었다. 두 개의 책상과 두 개의 침대. 그리고 붙박이 옷장 등등. 잠깐! 책상과 침대가 두 개라는 것은……?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사니?" "으응. 까르닌느라고 나와 동갑인 애야." 그럼 이 곳은 기숙사인가? 그것도 여자 기숙사? 잠깐, 그러고보니 아까 뮤리아가 자신이 '상아탑 마법 학교 1학년 FH반 18번' 이라 그랬잖아. 그렇다는 건 이 곳에 학교가 있단 얘긴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명색이 마법사 길드인데다가 최대 마법 원산지인 상아탑이 학교 하나 운영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참고로 절대 손해보지 않는 장사가 종교 단체 운영과 교육 기관 운영이다. "그럼 너 마법사야?" 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마법을 배우고는 있지만 마법사가 되려면 아직 멀었어." 뮤리아는 말을 마치고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려는 순간 뮤리아는 고개를 번쩍 들며 두 손을 모아 힘차게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칼리님처럼 위대한 마법사가 되고 말겠어." "지금 몇 클래스인데?" "1 클래스." "몇 년 동안 배웠는데?" "5년." 한숨이 절로 나오는 군. "그래. 언젠가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언젠가는' 말이야." 뮤리아는 내 말을 잘 알아들었는 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난 웃으며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마. 행복은 클래스 순이 아니니까." "고마워." 여기서 한가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전교 1등을 하는 애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고 말을 하면 굉장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전교에서 꼴등인 애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고 말을 하면 굉장히 설득력이 없다. 무슨 말이던 간에 잘난 놈이 말을 해야 설득력을 지닌다는 말이다. "그런데 히로는 클래스가 어떻게 되?" 이젠 다정하게 이름까지 부르네. 말을 놓았으니 볼장 다 봤다는 건가? "5클래스." 난 무덤덤하게 말했다. 원래 굉장한 얘기는 자랑스럽게 말하기보다는 편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래야 상대방이 더욱 놀랄 것이고 잘난체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예상대로 뮤리아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굉장해!" "뭐, 이 정도야 기본이지. 앞으로 9클래스를 마스터할 이 몸에게 5클래스 정도는 거쳐 가는 관문에 불과하다고. 푸하하!" 뮤리아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존경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우러러 봤다. 난 담배를 입에 물며 발 하나를 의자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래. 그럼 이제 니가 다니는 그 학교 얘기나 좀 해봐. 상아탑 마법 학교 1학년 FH반 18번 뮤리아." 내 말에 뮤리아는 나를 우러러 보는 것을 중지하고 얘기를 시작했다. "학년은 1학년에서 6학년으로 나뉘어. 각 학년은 클래스 별로 나뉘게 되. 3학년까지만 수료하면 졸업을 하게 되고, 진짜 마법사가 되어 길드에 자동 등록이 되. 4, 5, 6학년은 더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거야. 아! 이 것은 마법사가 되기 위한 과정일 뿐이야. 다른 길, 예를 들면 학자나 연구원의 길을 택하면 수료 과정이 틀려." 3학년까지가 졸업인 것은 3클래스부터 한 사람의 마법사로 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클래스적인 기준이고 그 외에 다른 능력과 지식이 있는 사람은 그 것으로 길드에 등록될 것이다. 4, 5, 6학년은 아마도 대학원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마법 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마나와 친화력이 있다는 얘기다. 3클래스까지는 10년이든 20년이든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4클래스부터는 얘기가 다르다. 4클래스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재능이 없으면 결코 이룰 수가 없는 경지다. 혹시 기연이라도 얻으면 모르지만. 하지만 여기서 좀 난감한 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재능이라는 것의 기준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재능이라는 것이 일정 기준을 두고 있다, 없다를 말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특별히 밖으로 표출되는 것도 아니기에 4클래스를 익힐 수 있는 재능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상아탑에서는 3학년을 수료한 후, 4학년으로 진학을 할지, 다른 길로 빠질지는 개개인의 판단에 맞길 것이다. 그리고 6학년까지가 교육 과정의 끝인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가르칠 수 있는 범위가 6클래스까지에서 한정되기 때문이다. 7클래스부터는 가르침을 받나 혼자서 독학을 하나 별 상관이 없다. 게다가 가르칠 선생도 없다. 7클래스 수가 많지도 않은데다 거의가 나이 먹어서 기침만 해대는 노인들이고, 7클래스 정도 되면 연구하랴, 배운 마법 써먹으랴 바빠서 강단에는 도저히 설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1학년 FH반에 속해있어. 한번의 인원은 대략 15명에서 20명 정도 되거든. 그리고 내 룸메이트인 까르린느는 3학년 SS반. 까르린느는 현재 최연소 3학년이야. 정말 천재지.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아. 나 같은 바보랑은 완전히 틀린 애야. 비교조차 안 되." 으음, 갑자기 침울한 분위기. 이쯤에서 위로를 해줘야겠지. "뭐, 그런걸 가지고 그러시나? 너도 남들보다 못하는 건 아니잖아." 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내가 속한 FH반은 1학년 중에서도 열등반이야. 가장 가망이 없는 애들만 모아 놓은 곳이라구." 그래. 내가 선생이라도 너 같은 애는 열등반에 넣었겠다. 그런데 FH라는 거 혹시 Fucking Head의 약자 아니야? 으음, 설마……. 옷을 살펴보니 물기가 많이 빠진 상태였다. 이제 앉아도 되겠지? 난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여자애가 등장했다. 키는 165. 나이는 나와 동갑. 머리색은 윤기가 흐르고 번쩍번쩍거리는 금색. 얼굴은 제법 괜찮게 생겼다. 눈은 크고 예쁘게 생겼지만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로 번뜩인다. 뮤리아는 안으로 들어온 소녀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녀는 방안을 둘러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야? 내가 분명 돌아오기 전까지 청소 끝마쳐 놓으라고 했잖아! 왜 시키는데로 안 해?" "미, 미안해." "미안하다면 다야!? 너 사람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고 할래!?"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듯한 말이다. "뭘 멍청히 서 있어? 당장 청소 안 해?" "아, 알았어." 뮤리아는 빠른 동작으로 자신의 주변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난 기가막혀서 그 동작을 바라 보고만 있었다. 마치 주인과 하녀 같군. "넌 뭐야!?" 소녀는 이제서야 나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소리쳤다. "니가 왜 내 의자에 앉아 있어? 당장 안 일어나?" 이게 니 의자였니? 그냥 앉아서 미안하다. 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뭐야!? 다 젖었잖아! 어떻게 된거야, 뮤리아!? 어떻게 이 남자가 내 방에 있는 거야?" 뮤리아는 굉장히 당혹스러워하며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난 손가락으로 소녀를 가리키며 뮤리아에게 물었다. "이 싸가지 없는 계집애는 누구냐?" 순간, 소녀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뮤리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걔는…… 까르린느라고…… 3학년 SS반." 오호! 이 싸가지 없는 애가 뮤리아의 룸메이트였군. 그런데 왜 뮤리아를 하녀 부리듯 하는 거지? 난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똑똑하고 예쁜 여자애와 모자르고 안 생긴 여자애. 이 둘이 같이 다닌다면 누가 주도권을 잡는 지는 뻔하다. 아마도 까르린느는 일찌감치 뮤리아의 소심하고 어벙한 성격을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편한 쪽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뮤리아는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고마워하며 까르린느가 시키는 것은 뭐든 다 했을 것이다. 으음, 이제보니 진자 나쁜 계집애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인데 룸메이트를 저렇게 무시하다니. 덤으로 나까지 무시하고. "누가 싸가지 없는 계집애라고? 너 다시 말해봐." 아마 성격이 이 모양 이 꼴로 초토화된 데에는 주변 아이들이 떠 받들어 주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예쁘고 똑똑하다면 확실히 모든 남자들의 귀감이 될만하다. 그러면 당연히 남자애들은 이 여자애를 여왕처럼 떠받을었을 테고 이 여자애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애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지지도만 확보할 수 있다면 반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한번 장악한 권력은 그리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권력을 한번 맛 본 상태에서 그걸 포기할리도 없고. 까르린느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것이다. 일단 더욱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어 추종자들로 하여금 팬클럽을 형성하게 하였으며, 마법을 열심히 수련하여 클래스도 높히고, 가끔은 싸인회를 벌여 우매한 민중을 어루만져 주는 등의 행동을 취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해서 까르린느의 권력은 지지기반을 확고히 한 하나의 아성(牙城)으로 탈바꿈하고, 어떠한 강자(强者)라도 감히 그녀의 권력에 이빨을 들이대지 못하게 된다. 만약 까르린느의 말 한마디면 사람 하나 왕따 만드는 것은 식은죽 먹기일 것이다. 그리고 뮤리아는 그것이 두려워 까르린느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게 되고. 그러다보니 까르린느는 콧대가 높아져 더욱 애들을 부려먹고. 완전 악순환의 반복이다. 아아! 나의 추리력은 왜 이리도 완벽하단 말인가? 단지 두 여자애의 대화만으로 교내의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과 장악한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한 방법까지 알아내다니. "왜 대답이 없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까르린느. 3학년 SS반. 아까 뮤리아가 말했잖아. 너 혹시 바보냐?" "뭐!?" 분노. 또 분노. 그래. 분노해라. 분노는 평정심을 잃게 만들기 때문에 분노를 하면 반드시 주도권을 빼앗기기 마련이다. "잠깐! 너 3학년이면 3클래스겠네. 어떻게 17살에 3클래스가 된 거지?" 나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신기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분노했던 까르린느의 얼굴에는 갑자기 웃음이 번졌다. 거만함과 자신감이 담겨있는 웃음. 마치 '후후! 이제서야 내가 잘난 것을 알아보시는 군. 그래. 나는 3클래스야. 니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룰 수 없는 3클래스의 경지란 말이다. 그러니 당장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해. 난 너와는 격이 다른 인간이야. 난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뻐. 이제까지 나를 본 남자들 중 그따위 나에게 군 남자는 없었어. 나는 최고의 미모와 지성을 자랑하는 고귀한 여성이란 말이다!'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런 걸 비속어로 표현하자면 '병신 육갑떠네' '아리스 보다도 못한 년' 등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으음, 생각해보니 아리스 보다도 못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군. 자기가 아무리 예쁘다고 잘난척을 해봐야 루시아에게 비하면 보름달 앞에 반딧불이요, 봉황 앞에 까마귀다. 루시아를 다이아몬드라 한다면 까르린느는 길에서 굴러 다니는 모난 돌맹이에 지나지 않으며, 루시아가 한 송이 백합이라면 까르린느는 길거리에 피어있는 잡초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루시아를 더욱 아름답게 빛내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녀의 고결한 성품(性品). 기품있고 조신한 행동. 여러 왈가닥 여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오직 공주만이 가질 수 있는 그 고귀함! "흥! 내가 3클래스인 것도 몰랐단 말이야?" 제길, 루시아를 생각하는 나의 상념을 깨트리다니. 난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3클래스야?" "당연하지. 너 같은 게 3클래스가 되려면 평생 노력해도 안 될걸." 난 한숨을 내쉈다. "그래. 니 말대로 난 평생을 노력해도 3클래스는 못 될꺼야." "호호호! 이제야 주제 파악을 좀 하는 구나." 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지금 5클래스인 내가 어떻게 3클래스가 될 수 있겠니? 푸하하! 어떻게 아직까지 3클래스에서 빌빌거릴 수가 있냐? 너 진짜 바보 아니냐?" 급변하는 까르린느의 얼굴. 얼굴이 붉어졌다 푸르댕댕하게 변하는 것이 꼭 썩은 생선 같다. "거짓말 하지마!" "진짜야." 방금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던 뮤리아가 한 말이다. "얘가 바로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제자 아이언스 히로야. 지금 5클래스……." "그, 그게 정말이야?" "응." 당혹. 경악. 황당. 지금 까르린느의 상황을 어떠한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난 팔짱을 끼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난 5클래스. 넌 3클래스. 너 같은 게 5클래스로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아? 주제 파악을 좀 하거라. 나의 스승이신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이런 말을 했었지. '행복은 절대 클래스순이다' 라는. 겨우 3클래스 주제에 그렇게 건방을 떠니까 넌 항상 그 모양 그 꼴인거야. 평생 밑바닥을기며 골목 대장 노릇이나 하며 살아라. 그리고 위대한 아이언스 히로님을 우러러 보고 경배해! 음하하하!" 까르린느는 너무 분노한 나머지 입술을 꼭 깨물고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사실 남들이 보면 너무 심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너무 심하잖아." 뮤리아가 벌써 너무 심하다고 하는 군. 사실 까르린느 꽤 예쁘게 생겼다. 교내 여왕 행세를 하기에도 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그런데도 굳이 내가 예쁜 여자를 괴롭히고 쾌감을 느끼는 데에는 아주 깊은 이유가 있다. 새디스티냐고? Never!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살던 곳이 어딘가? 바로 아이리스의 왕궁이다. 그럼 내 곁에 붙어있는 사람은 누군가? 주로 사일런스 남매다. 그렇다! 나는 그 동안 사일런스 남매의 잘남에 눌려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매일 같이 욕을 얻어 먹는 한 마리 가련한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샤이 사일런스 백작. 아아! 오죽 그녀에게 시달림을 당했으면, 그녀의 눈빛만 쳐다봐도 다리가 후들거릴까? 특히 요즘들어 업무가 많았던 탓인지 그녀는 나를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으로 생각을 하였다. 날 만나기만 하면 매일 같이 두드렸다. 어떤 날은 나를 찾아와서 두들기기도 했다. 그 때, 나의 기분은 비참 그 자체였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어느 날은 정말 도망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나를 잡아준 사람은 루시아.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당장 짐싸들고 라이코스와 함께 가출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저리 차이며 살아왔던 나이기에 나 가슴 속은 언제나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걸 지금 표출한 것이다. 가끔은 나도 남을 밟아 보자. 사람에게는 딱 두 종류가 있다! 남을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어. 참고로 난 위에 있는 사람이다! 흠흠, 여기까지는 단순한 핑계에 불과했다. 내가 까르린느에게 분노감을 느끼고 어떻게든 그녀를 밟으려 하는데에는 정말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다. 만약 이 이유를 듣는다면 누구든 나의 이 행위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바로 까르린느가 노처녀와 닮았다는 것이다. 얼굴 생김새는 별로 닮지 않았지만, 나를 쏘아보는 눈빛, 그리고 앙칼진 말투, 거만한 행동, 그리고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 등등. 상당히 노처녀와 흡사하다. 으음, 이런 걸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 한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상황에 빚대어 보자면 '아이리스에서 뺨 맞고 상아탑에서 화풀이 한다' '노처녀에게 뺨 맞고 여자애에게 화풀이 한다' 등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음하하하! 나는 5클래스. 너는 3클래스. 이 정도면 거의 하늘과 땅 차이군. 개도 태양을 보고는 짖지 않는다 했거늘 감히 주제도 모르고 짖어대다니! 어찌 감히 뱁새의 눈으로 봉황의 웅대한 날개짓을 바라보려 하느냐?" 까르린느는 독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찢어죽일 듯한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꼭 깨문 아랫입술에서는 선혈이 한가닥 흘러 내렸다. 그 모습에 난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자, 잠깐! 장난으로 좀 놀린건데 반응이 너무 심각한 거 아니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지금 까르린느의 상황은 거의 대륙을 바닷속으로 가라 앉힐 기세였다. 빠드득-! 갑자기 들려온 이 가는 소리. 까르린느의 노란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튀어나올 기세였다. 난 맹세코 이제까지 저런 무서운 눈빛은 본적이 없다. 꿀꺽-! 침이 절로 넘어가는군. 제길, 건드려도 한참을 잘못 건드렸다. 누가 이렇게 살벌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았나? 뮤리아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우리를 바라 보고 있었다. 이봐! 너라도 쟤 좀 말려봐. 저러다가 진짜 눈알 튀어나오겠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뮤리아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난 까르린느의 찢어죽일 듯한 눈빛을 계속해서 정면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이 눈빛에 비한다면 노처녀의 눈빛은 애교에 불과하였다. "이, 이봐……." 짜악-! 좀 진정시켜주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까르린느가 갑자기 자신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짜악- 짜악- 짜악- 까르린느는 양손을 번갈아 쓰며 자신의 뺨을 몇 대 더 후려 갈겼다. 설마 분노로 인해 뇌에 산소 공급이 부족해져서 미쳐버렸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자신의 드레스 치마를 잡고 쭈욱 찢기 시작한다. 잘 안 찢어진까 이빨로 물고 양 손으로 당겨서 찢는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자신의 목덜미 부근을 긁어 상처를 낸 다음, 머리카락을 헝클고, 가슴이 보이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어깨 부근의 천을 뜯어 내고 등등. 설마……. 난 그녀의 생각을 확실히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제길, 내가 저 미친 짓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니. 시간이 없다. 빨리 이 곳을 피해야만 했다. 내가 방문 쪽으로 내달리는 순간, 까르린느가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꺄아악-! 살려 주세요!" 내가 방을 뛰쳐 나왔을 때는 이미 비명 소리를 들은 수 많은 여자들이 복도에 나와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전부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난 어이가 없어하며 그들을 둘러보는데 다시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악-!" 이대로라면 정말 강간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 난 앞 뒤 잴 것 없이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비켜!" 복도에 늘어서 여자들이 너무 많았는지라 난 그들을 밀치며 길을 만들었다. 다시 뒤쪽에서 까르린느의 비명이 들려오고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여자 하나가 소리쳤다. "잡아!" 난 앞에 있는 여자들을 밀치며 계속 달렸다. 제길,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독한년. 무시 좀 당했다고 사람을 이렇게 엿 먹이다니.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고 회를 떠버릴 거 그랬나? 우르르-! 이건 무슨 소리? 뒤를 돌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수십명은 될 법한 여자들이 손에 이것저것을 들고 내 뒤를 좇아 오고 있는 것이다. "저 놈 잡아! 여자 기숙사에 들어와 까르린느에게 몹쓸 짓을 하려 했던 놈이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 그래? 그 년이 혼자 삽질한 거지.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년이다. 분명 이제까지 단 한번도 무시를 받은 적이 없고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년일 것이다. 그러니 성격이 저 모양이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짜 패 주는 건데. 뺨을 한 백대 후려 갈기고 눕혀 놓고 밟아 버렸어야 했는데. 분명 오늘은 새로운 만남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재수 없는 만남일 줄은 예상도 못 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청룡도마저 방에 놓아두고 왔으니 이젠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게다가 저 뒤의 여자들은 그냥 여자들이 아니다. 마법 학교 기숙사에서 사는 여자니 당연 마법을 쓸 줄 알 것이다. 어떻게 마법사들을 상대로……. 잠깐! 생각해보니 나도 마법사잖아. 그것도 5클래스. 그렇다면 맞서 싸울 수도 있지 않을까? 난 힐끔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더욱 힘을 내서 달렸다. 미치겠군. 저 정도 인원이면 방법이 없잖아. 지금 나는 저들에 비해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다. 일단 저들은 다수(多數)가 나는 단수(單數)다. 그리고 나는 좇기는 입장이고 저들은 좇는 입장이다. 결정적으로 나는 이 곳의 지리를 잘 모른다. "거기 서!"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니들 같으면 서겠냐?" 그러자 뒤에서 말히길. "강간범이 도망간다! 저 놈 잡아라! 모두들 나와요!" 으음, 정말 우르르 몰려 나오는 군. 앞 쪽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갑자기 튀어 나오는 바람에 길이 막혔다. 다행히 내 오른편에 비상구가 뚫려있었기에 난 그 곳으로 내달렸다. * 업무의 효율성에 대해 논하자면 통신망의 중요성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다. 광케이블은커녕 구리선 하나 깔려 있지 않은 이 곳에서 통신 방법이란 사람이 직접 달려가서 전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잘 훈련된 비둘기나 매를 이용한다 거나. 그러나 이런 전근대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이 대륙에서도 광통신을 능가하는 최첨단 통신망을 구비한 곳이 있으니, 그 곳이 바로 상아탑이다. 워낙 마나가 풍부한데다 그 흐름마저 뜻 대로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상아탑 내부에 거미줄처럼 쌍방향 통신망을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지금 그 통신망은 확실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이언스 공작이 여자 기숙사에 잠입. 3학년 SS반 3번 까르린느를 범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현재 도주중입니다. 그 뒤를 여자 기숙사 사감 선생 7명과 까르린느의 친위대가 좇고 있습니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온 칼리의 제자이자 보조인 시리의 말은 이러했다. 잠시, 회의장 안에는 싸늘하게 식은 공기가 감돌고…… "이건 모함입니다." 조용하게 얘기를 꺼낸 사람은 사일런스 지니였다. 지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뛰어난 성품을 지녀 타인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분이십니다. 공작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도에 어긋난 짓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정말입니다. 지금 하층에 위치한 기숙사 쪽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칼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말이 사실이야?" 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확인된 믿을만한 정보입니다." 칼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화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상아탑 내에서는 누구라도 상아탑의 법에 따라야 합니다. 만약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정말로 그런 행동을 하셨다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할 것입니다." 흥분한 칼리와는 달리 지니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법이야 어찌되었든 상관 없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으셨을테니까요. 전 아이언스 공작님을 믿습니다." 지니의 말에 칼리는 조금은 흥분을 가라 앉혔다. 부스럭- 부스럭- "우와! 맛있다!" 라이미안은 아직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는지 막대 사탕의 껍질을 벗기고 열심히 빨아 먹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있어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엘프기에 칼리는 조용히 나가 주길 바랬었다. 그러나 같이 놀 사람이 없어 심심하다는 이유로 이 곳에 죽치고 있더니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의 염장을 지르는 행동을 한 것이다. 칼리는 라이미안에게 소리쳤다. "지금 사탕이 목에 넘어가요!?" 라이미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사탕 사과 맛이야. 맛있어." 그 태연한 모습에 칼리는 복장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끼며, 라이미안이 물고 있는 막대 사탕을 빼앗았다. "사탕 많이 먹으면 이빨 썩는다고 했잖아요!? 당장 방으로 돌아가 이빨 닦아요!" "흑흑…… 우에에엥!" 라이미안은 칼리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평소 같으면 달래줬을 칼리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뭘 잘했다고 울어요?" "우에에엥!" "자꾸 울면 혼내줄꺼에요." "으아아앙!" 라이미안의 울음 소리가 계속해서 높아지는 가운데 지니는 조용히 칼리에게 말했다.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도주중이시라는데 그 쪽으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Part2. 자해공갈단 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 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체력이 남들보다 모자르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없다. 게다가 요근래 하도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운동을 열심히 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남들보다 우월한 체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지금 이 순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체 기숙사 생활하는 인간들이 왜 저렇게 체력이 좋단 말인가? 저들은 엄청난 체력과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교묘히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난 계단을 오르 내리는 등 어딘지도 모르는 길로 내달렸지만, 저들은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서기 일 수 였다. 상아탑의 구조 자체가 워낙 미로처럼 되어있다보니 지리를 모르는 자만 손해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기저기로 뻗은 길이 많다는 것. 그리고 상아탑 내부가 매우 넓다는 것. 상아탑은 말이 탑이지 높이를 제한 밑변만으로도 웬만한 도시 하나의 크기였다. "거기 서!" 뒤를 돌아보니 선두에서 나를 좇아오는 사람은 마귀할멈처럼 생긴 여자였다. 내 장담하건데 저 여자 분명 여자 기숙사 사감 선생이다.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시끄러 이 늙은이야! 한쪽의 말만 듣고 어찌 이리 사람을 핍박한단 말이더냐?" 내 말에 마귀할멈이 열받았는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소리쳤다. "닥쳐! 이미 모든 정황이 확실한데 어디서 발뺌을 하려 해? 그리고 결백하다면 왜 도망쳐?" "니들이 좇아 오니까 도망을 가는 거지. 안 그러면, 내가 뭐하러 이렇게 열나게 달리겠냐?" 난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고 달리는데만 열중하였다. 그런데 내 앞에 윗층에서 나를 좇아왔던 남학생들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중 가장 앞쪽에 서있는 덩치 좋은 남자가 소리쳤다. "저 놈이 까르린느를 강간하려 했던 놈이다!" 그러자 뒤에서 여러 함성들이 터져나왔다. '저 놈의 피부를 벗겨 농구 코트를 깔아' '손톱 사이에 대나무를 박아 넣어 피를 몽땅 뽑아' '몸의 관절을 전부 부순 다음 창 밖으로 던져' 등등. 상아탑에서는 마법만이 아니라 고문 방법까지도 가르치나 보다. 난 남학생들이 막고 있는 길이 아닌, 다른 통로로 뛰어갔다. 통로의 끝에는 계단이 있었다.난 계단을 오르려다 위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날다시피해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득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느낌인데……. 왜 저들은 이 통로가 있다는 걸 알면서 미리 막지 않은 걸까? 이건 마치 내가 도망갈 길을 뚫어준……. 이런, 제길! 실수다! 저들은 지금 몰이를 하고 있었다. 길 여기저기를 막으며 나를 한쪽으로 몰아 넣은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궁지에 몰아 넣었을 때,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빌어먹을! 아까 그 놈들을 전부 패죽이는 한이 있었어도 거기를 뚫고 지나가야 하는 건데.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계단 밑에서 사람들이 몰려 오는 것이 보였다. 이번 층으로 몰아 넣겠다는 얘기다. 난 밑에 놈들을 전부 밟아 버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갈까, 생각하다 마음을 바꿨다. 난 아무 죄도 없이 결백하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싸가지 없이 행동하는 여자애에게 엿 먹여 준 것 밖엔 없다. 그런데 대체 왜 나에게 강간이라는 천인공노할만한 범죄의 굴레가 씌여져야 하는 가? 독한년! 내가 감방에 가는 한이 있어도 네 년의 싸대기는 한번 후려갈겨 주고 가마. 어찌되었든 나는 결백하기 때문에 나의 결백을 입증해야만 한다. 무턱대고 밟아주면 괜히 죄목만 늘어날 수도 있다. 그래. 몰이를 할려면 몰이를 해라. 지금은 니들 뜻에 따라주지. 하지만 순순히 사냥감이 되지는 않을 거다. 생각을 마친 순간, 내 앞에는 축구장 크기만한 커다란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는 풀과 꽃들이 자라고 높은 천장에서는 따사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법으로 상층부에서 햇빛을 끌어와 정원을 건설한 것이다. 열심히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다른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들어 온 통로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완전 외통 수에 걸린 것이다. 아아! 그래.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지. 어차피 이제는 마지막! 단 한 놈이라도 더 저승길 동무로 끌고 가리라.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들은 벽을 등지고 선 나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물셀틈 없이 포위하였다. 눈짐작으로 봐도 대략 1000명은 넘어 보였다. 그들 중, 특히 남자들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난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입에는 불을 붙이지 않는 담배를 물고, 등을 벽에 기대 최대한 여유로워 보이는 자세를 취하였다.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뭘 갈궈, 새끼들아! 눈 깔아!" 적들은 나의 반응에 화를 내면서도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서 1000명을 맞서는데 조금의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일기당천(一騎當天). 이 것은 지금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사자성어가 아닌가? 어차피 죽을거라면 최후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리. 원래 사람은 언제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마귀할멈이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와 말했다. "네 녀석은 지금 강간죄로 몰려있다. 상아탑의 법으로 강간죄는 사형이다. 그런데 무엇을 믿고 그리 방자한 거냐?" 강간이 사형? 아아! 생각보다 형량이 높구나. "잠깐! 난 강간죄가 아니야. 정확한 죄목을 따지자면 강간 미수가 되겠지." "강간 미수도 사형이다." 제길! 무슨 법이 그 따위야! 난 들이 마시지도 않은 연기를 내뱉는 척하며 마귀할멈을 쏘아 보았다. "너 기숙사 사감이지?" "그렇다." "몇 클래스야?" "6클래스다." 6클래스. 후후, 그 나이 먹도록 겨우 6클래스냐? 좋아. 한번 해볼만 하군. 난 담배를 뱉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 순간, 6명의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젊어 보이는 여자도 있었지만 폴리모프 마법으로 젊게 보이는 할머니들이었다. 느낌 상으로 전부 나보다 클래스가 높은 사람들이다. 설마 전부 기숙사 사감? 7명의 할머니들은 하나 같이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살기가 가득한 눈빛. "자, 잠깐! 설마 이 곳에서 날 죽이려는 건 아니지?" 마귀할멈이 대답했다. "끌끌끌. 맞다, 꼬마야."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그냥 잡아서 끌고 갈 생각 아니었나?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난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변호사를 불러줘." 마귀할멈이 소리쳤다. "헛소리 마라! 즉결 처형이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광기에 물든 눈빛을 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장렬한 죽음,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내뱉긴 했지만, 난 결코 죽을 생각이 없다. 아직 루시아랑 입맞춤 한번 밖에 못 해봤는데 그 다음 진도를 나가기도 전에 죽는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낄낄낄! 즉결 처형은 농담이었다. 지금 순순히 잡힌다면 죽이지는 않겠다. 어차피 법정에서 죽을 테니까." 후우-! 그럼 그렇지. 엄연히 법이 존재하는데 즉결 처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아무튼 이젠 목숨이 보장 되었으니 순순히 잡혀가야 하는 건가? 흥! 웃기는 소리. 법정에 끌려가면 돈 없고, 빽 없고는 나 같은 놈은 보나마나 사형이다. 게다가 나의 결백을 증명하려면 지금 끌려가서는 절대 안 된다. 반드시 이 곳을 무사히 빠져나가 증거를 확보해 나의 결백을 증명해야만 한다. 아아! 누가보면 영화 '도망자' 찍는 줄 알겠다. 난 가운데 손가락을 높히 들었다. "내가 미쳤다고 니들 같은 허접 쓰레기들한테 순순히 잡히냐? 다 덤벼!" 다 덤비라고 말은 했지만, 결코 저들이 덤빌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저들은 전부 마법사이니 캐스팅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난 마귀할멈이 있는 쪽으로 돌진했다. 마귀할멈은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수인을 맺었지만, 너무 늦었다. "매직 미사일Magic Missil!" 1클래스 마법 쯤이야 언제든 준비해 놓고 있었다는 건가?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 준비는 했다는 말씀. 난 날아오는 빛의 화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디스펠 매직Dispell Magic." 갑작스레 달려들면 하급 마법으로 시간을 끌려하는 것은 진작에 예측했었다. 하급 마법에 캐스팅 시간이 거의 없는 간단한 마법이라면 당연 매직 미사일이다. 상대방이 무슨 마법을 쓸지를 예측하고 있다면 디스펠 매직을 순식간에 쓰는 것은 일도 아니다. 난 마귀할멈을 어깨로 밀쳐 넘어뜨리고 손을 뒤로 돌렸다. "파이어 볼Fire Ball." 난 등 뒤에 6명의 적을 두고 한 명에게만 돌진할 만큼 미련하지 않다. 미리 쉐도우 매직Shadow Magic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이어 볼은 어차피 잠깐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 5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들이 저런 마법에 유치하게 당할리 없지.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이 나에겐 천금보다 더 중요하다. 엄청난 수의 인원이 나 하나를 포위하는 것. 누가 봐도 내가 불리해 보인다. 내가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보면 상황을 다르게 파악할 수 있다. 지금 나의 목적은 저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사히 이 곳을 빠져 나가는 것이다. 그럼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무차별적으로 마법을 난사해? 그건 완벽하게 미친 짓이다. 만약 한명이라도 죽는다면 저들은 눈을 뒤집고 나에게 달려들 것이다. 내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질을 잡는 수 밖에 없다. 1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나를 둘러 싸고 있는 것. 바꾸어 말하면 1000명이나 되는 인질이 내 주위에 있으니 이 중 하나만 골라잡아서 인질극을 벌이면 되는 거다. 난 인파들 사이로 뛰어 들어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 하늘 붙잡았다. 그리고 왼팔로 목을 조이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잡은 다음, 외쳤다. "움직이지마! 이 년의 목이 돌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내가 행동을 마쳤을 때, 내 주위의 마법사들은 전부 캐스팅을 마친 상태였다.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살상용 마법은 아니고 행동 불능용 마법이었다.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비틀어 버린다. 어이! 설마 자기 목숨이 아니라고 해서 한 생명이 죽는 걸 그냥 방조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자 이 여자애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애가 울면서 소리쳤다. "개자식! 젤라를 놔 줘!" 난 크게 웃었다. "푸하하! 내가 미쳤냐? 겨우 잡은 인질을 놔주게?" 마귀할멈이 말했다. "인간으로 어찌 그리 사악하단 말이냐?" "흥! 웃기고 있네! 먼저 죄 없는 나를 핍박한 것은 니들이었잖아!" "죄가 없긴 왜 없어?" "제대로 정황도 알아보지 않고 사람을 강간범으로 몰아 사형을 시키려 한 주제 말이 많구나. 난 절대 순순히 잡혀갈 수 없어. 당장 그 싸가지 없는 계집애를 잡아 조져 나의 결백을 증명해야 한단 말이다! 당장 그 계집애 데려와!"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당장 그 아이를 놔주고 순순히 잡힌다면 더 이상의 죄는 묻지 않으마." "지금 나랑 장난하냐? 어차피 사형이라며! 더 이상의 죄를 물어도 사형이고 안 물아도 사형인데 내가 미쳤다고 잡히냐? 니들 바보 아니야?" 언제까지 이 상황에서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주어진 상황에선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정 안 되면 얘 목을 비틀어버린 후,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싸움을 벌이는 수 밖에. "다들 뒤로 물러서! 난 피를 보고 싶지 않다. 우리 평화적으로 해결해 보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자꾸나." 나의 간절한 부탁에서 불구하고 적들은 감히 물러서지 않았다. 나에게 잡힌 여자애는 흐느끼며 말했다. "흑흑, 제발 살려주세요." "시끄러, 젤리." "젤라에요." "젤리든 젤라든! 너 지금 니 목숨이 누구 손에 있다고 생각하니? 니가 지금 젤란지 젤린지 따지게 생겼어? 어?" "흑흑, 죄송해요." "죄송한 거 알면 됐다. 편의상 이제부터 젤리라고 부를게." "흐으윽, 살려 주세요." "울지마라, 젤리야. 사람은 언제 죽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거다. 치매 걸려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다 죽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차라리 이 곳에서 대의(大義)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가문의 이름을 드높히는 일이라 생각하여라." "흑흑, 저 고아에요." "그래. 그럼 더욱 잘 되었구나. 너 죽어도 슬퍼해 줄 가족이 없으니 죽더라도 민폐끼치지 않게 되니 그 얼마나 기쁜 일이냐. 넌 진짜 운 좋은 거야." "으아아앙! 전 오래 살고 싶단 말이에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예." 아아! 하필 내가 인질로 잡은 애가 장수(長壽)를 꿈으로 삼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혹한 인연인가? 기왕이면 죽고 싶어 환장한 애를 잡았으면, 죽이더라도 마음이 좀 편할텐데. "아이야! 예로부터 수명어천(壽命御天)이라하여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있다 하였느니라. 그러니 만약 지금 니가 내 손에 죽는다면 그것은 전부 하늘의 뜻이니 결코 나를 원망하지 말지어다. 알았니?" "원망 안 할테니, 살려주세요." "싫어." "으아아앙!" 이 나이에 이렇게 눈물을 흘려대다니! 나 유치원 다닐 때, 여자애에게 얻어 맞고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이 정도로는 안 울었다. 난 손에 힘을 주어, 여차하면 비틀어버릴 자세를 취하고 적들에게 소리쳤다. "방금 대화를 들었으면 잘 알 것이다! 이 젤리라는 소녀는……." "젤라에요. 흐윽." 아이씨! 진짜 비틀어 버릴까? "젤라는 언제나 생명 연장의 꿈을 꾸고 있고, 장수가 목표이며,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한다! 이 소녀가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당장 그 까르린느라는 년을 내 앞으로 데려와!" 웅성웅성-! 아직 확실히 결정을 못하고 있군. "단지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그 계집애와 직접 대면하여 나의 결백을 입증해 주마. 만약 내 결백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순순히 투항하겠다. 하지만 니들이 따르지 않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일단 이 계집의 목을 비틀고 무차별 마법을 난사하겠다. 방금 내 실력을 봤으면 알겠지만, 나 그렇게 만만한 놈 아니다." 다시 웅성웅성-! 잠시 후, 마귀할멈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좋다. 하지만 만약 네 녀석이 정말로 까르린느를 범하려 하였다는 것이 확정되면 순순히 투항해야 한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그러도록 하지." 내 말이 끝나자 사감 선생 한명이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장거리 이동이 아니고 좌표가 확실하다보니 마법진은 그리 크지 않았고 그리는데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사감 선생이 마법진을 통해 사라지자 난 이를 악 물었다. 죽었어! 감히 이 몸을 엿 먹이려 하다니! 그 대가는 확실히 치르게 해주마! 내 눈 앞에 다시 보이기만 하면 요절을 내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지만, 막상 까르린느가 내 앞에 나타나자 난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하면 여인이 저렇게 불쌍해 보일 수 있는 걸까? 내 앞에 나타난 까르린느의 모습은 처참과 불쌍,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 멍이든 가녀린 팔.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오른 눈. 그 부어오른 눈으로 아직까지 울고 있다. 가느다랗고 긴 그녀의 금발은 미친년 산발한 모습처럼 되어 있고, 목덜미에는 손톱 자국이 가득하다. 오! 맙소사! 뺨은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손바닥 모양의 멍이 들었다. 진짜 독한년이다. 어떻게 멍이들 정도로 자기 뺨을 후려칠 수 있단 말인가? 그 솜씨로 자해 공갈단의 리더를 했으면 벌써 떼부자 됐겠다. 맨살을 들어내기 민망해서 인지 커다란 옷을 몸에 걸치고 있지만, 저 옷만 걷어내면 처첨하리만큼 갈기갈기 찢어진 드레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귀할멈은 까르린느의 모습을 보고는 눈이 뒤집혀 나에게 외쳤다. "이렇게 정황이 확실한데 어디서 발뺌을 하려 하느냐!?" "썅! 난 진자 억울하단 말이다! 변호사를 불러!" "그건 법정에 가서 말해라!" 이대로 순순히 투항해야 하나? 아니야. 절대 그럴 수는 없지. 아무리 무전유죄(無錢有罪)라지만 이건 너무 한 거다. 난 결박하단 말이다! 게다가 죄목도 쪽팔리게 강간죄가 뭐냐? 만약 루시아가 이 소문을 들으면 나를 어떻게 보겠어? 난 반드시 나의 결백을 증명해야만 해! 그래서 루시아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나서야 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눈알까지 굴리던 나에게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가. 그녀는 바로 뮤리아. 아마도 까르린느를 따라왔으리라. 맞아! 뮤리아라면 나의 결백을 증명해 줄 수 있을거야! 왜냐하면 그 장소에서 저 미친년이 삽질해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을 테니까. "난 굉장히 결백하다! 나의 결백은 뮤리아가 증명해 줄 것이다!" 난 뮤리아를 바라 보며 말했다. "뮤리아, 빨리 진실을 말해. 저 년이 혼자서 삽질한 거라 털어 놓으라고." 하지만 뮤리아는 우물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답답해하며 말했다. "빨리 말해!" 여전히 우물쭈물.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뮤리아에게 쏠려 있었다. 그 와중에도 까르린느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흐느끼고 있었다. 정말 그 노력이 가상하다. 하지만 저 년의 삽질은 이제 곧 들통이 날 테니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후, 거기에 드러눕고 흙까지 뿌리는 짓이라 할 수 있겠다. "저, 저기……." 뮤리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룸메이트이니 말하기 조금 힘든가 보지? 뮤리아는 결심을 했는지 눈을 꼭 감으며 크게 외쳤다. "저 남자가 까르린느를 강간하려 했어요!" 이런 씨발! 나의 판단 미스Miss였다. 저 년이 미리 뮤리아가 손을 써 놓은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죽여버리겠다느니, 왕따를 시킨다느니. 정말 친위대 남자애들을 불러 강간하겠다고 협박했을 수도 있겠군. "저, 저 남자가 까르린느를 강간하려 했어요. 오, 옷을 찢고…… 목을 조르고…… 까르린느가 반항하자 뺨을 때렸어요. 그리고…… 억지로……." 뮤리아는 더듬거리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차마 나를 보고 있을 자신은 없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씨팔! 개새끼들!!" 난 인질로 잡고 있던 여자애를 한쪽에 내동댕이 쳤다. 그리고 주저 앉아 울고 있는 까르린느에게 달려 들었다. 그 순간, 키 큰 남자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난 주저 없이 그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 찬 다음, 남자가 비틀거리는 사이 팔꿈치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죽을 땐 죽더라도 저 년은 밟아보고 죽으리!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을 실현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까르린느 앞을 인파가 가로막아 버린 것이다. "비켜, 새끼들아!" 난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해댔지만, 길을 뚫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그들도 나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이건 완벽한 다구리다. 난 내 온 몸을 구타하는 손들을 느끼며, 이 놈들을 몽땅 죽여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씨팔!" 생각해보니 다 죽이는 것은 무리일 것 같으니, 딱 한 놈만 잡아서 죽이기로 했다. 마침 나에게 재수 없게 걸린 놈이 하나 있었다. 감히 내 뒤통수를 때려? 난 온 몸을 난타하는 주먹에는 신경을 끄고 내 뒤통수를 때린 놈을 패기 시작했다. "죽어 새꺄! 죽어!" 내가 아예 눕혀 놓고 밟으려는 순간,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두십시오!" 이 목소리는 설마…… 사일런스 지니? 지니는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인파를 헤치며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지니의 뒤에는 칼리가 있고 작아서 잘 보이진 않지만 회색 머리칼이 언뜻언뜻 보이는 걸로 봐서 라이도 있는 것 같다. "그만 두십시오." 지니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다시 말하였다. 지니는 인파를 헤치고 내 앞에 섰다. 갑자기 등장한 인물들 때문인지 나를 다구리하던 손들이 멈췄다. 난 패고 있던 놈을 발로 한번 걷어 차준 다음, 지니를 보았다. 혈혈단신(孑孑單身),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 처해있던 나에게 지니의 등장은 한줄기의 빛이나 다름 없었다. 갑자기 이제까지의 설움이 끓어 올라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아이언스 공작님을 믿습니다. 평소 아이언스 공작님의 성품으로 봐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결코 그런 불의한 일을 저질렀을리 없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라도 아이언스 공작님의 결백함을 증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니의 눈에는 나를 믿는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난 그 모습에 가슴이 찡- 할 정도의 감동을 느껴야만 했다. "넌 뭐야?" 이 와중에 분위기 파악을 못한 남자 한 놈이 지니에게 시비를 걸었다. 지니는 예의 그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어쭈 비웃어!?" 퍼억-! 남자는 그대로 지니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나이도 나와 비슷해 보이는 놈인데 주제도 모르고 감히 지니에게 주먹질을 해대다니! 지니는 맞은 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빠악-! 순식간에 주먹을 휘둘러 남자의 얼굴을 때렸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도 놀랄만한 속도와 위력이었다. 그 증거로 맞은 남자는 한방에 나가 떨어져 기절했다. "갑자기 때리시다니. 매너가 없으시군요." 순간, 정신을 차린 한 놈이 소리쳤다. "밟아!" 우리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인원들이 순식간에 우리에게 달려 들었다. 으음, 다시 다구리가 시작 된 건가? 퍼억- 퍽- 퍽- 경쾌한 타격음. 지니는 웃으며 빠르고 화려한 동작으로 주먹과 발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한 놈씩 병신이 되서 나자빠졌다. 약 20명 정도가 순식간에 쓰러지자 상황을 판단한 적들은 얼굴에 사색을 띄며 뒤로 물러섰다. 쓰러진 사람들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분명 한 대만 맞았는데도 얼굴이 보기 흉할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뭐야? 저건 턱이 완전히 나갔잖아. 이 놈은 광대뼈가 무너졌고. 이 놈은 이빨이 다 부러졌고. 난 쓰러진 사람들을 살피던 중, 다시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도 몇 명 껴있었던 것이다. 평소 여자라면 무조건 꼬시고 보던 지니가 여자애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다니! 지니의 표정은 언제 주먹질을 했었냐는 듯, 평온하고 깨끗했다. 그 모습에 저들은 더욱 두려움을 느끼는 듯 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칼리는 지니의 주먹질에 완전히 뻗은 십수명의 사람들을 보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지니는 여자 꼬실 때나 쓰던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질문은 제가 하고 싶군요. 전 이 분들을 지금 처음 보았는데 갑자기 주먹질을 해대는 바람에 저 자신을 방어했을 뿐입니다. 제 생각엔 이 분들께서 먼저 잘못을 하신 것 같군요." 지니의 말에 칼리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어 소리쳤다. "잘못이라면 먼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지니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칼리를 쏘아 보았다. 칼리는 그 눈빛에 잠시 움찔하는 듯 했다. "상아탑에서는 잘못을 하면 무조건 주먹부터 휘두르나 보군요. 게다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용의자일 뿐이지, 범죄자는 아닙니다. 협상을 위해 상아탑을 찾은 외교 사신을 확실한 물증도 없이 범죄자 취급하는 일은 아이리스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군요." "흥! 확실한 물증이 없다니요! 지금 이 소녀의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칼리는 까르린느를 가리켰다. 까르린느는 어느새 울음을 멈추고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몸을 조금씩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난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날 엿 먹인 다음, 적당히 밟아주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지금과 같이 일이 너무 커지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상아탑의 최고 권력자인 칼리와 라이미안이 등장한데다, 잘 생기고, 말 잘하고, 싸움 잘하는 지니까지 등장해 '외교 어쩌구' 등등의 말을 하니,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지니는 처참하게 당한 까르린느의 모습을 보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달래준다 어쩐다하며 접근을 해서 꼬셨을텐데 말이다. "설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 소녀를 저렇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칼리는 발작적으로 한걸음 나서며 외쳤다. "그럼 아닙니까? 현장을 목격한 확실한 증인까지 있습니다."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라면…… 뮤리아겠군. 라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까르린느를 살펴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흑흑." 라이미안의 질문에 까르린느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아까의 나쁜 기억이 떠올라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 처럼. 라이미안은 말을 걸며 까르린느를 이리저리 살펴 보았고, 지니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한 증인이란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뮤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자기 발로 나선 것이 아니라 뒤에서 누가 밀어서 나선 것이다. 지는 차분한 어조로 뮤리아에게 물었다. "정말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 소녀를 저렇게 만드셨습니까?" 뮤리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칼리는 그런 뮤리아의 어깨를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다독여 주었다. "괜찮으니, 사실 대로만 말하세요."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뮤리아는 작게 대답했다. "예. 저 사람이 그랬어요." 이어지는 지니의 질문. "저 소녀의 머리를 저렇게 만든 것도, 뺨을 때린 것도, 옷을 찢은 것도, 전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하신 일입니까?" "예." 이 년들이 진짜 작당을 하고! 결국 난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야! 이 썅년아! 너 죽을래!?" 저 년이야 그렇다치고 뮤리아까지 이렇게 배신을 때리다니! 내가 한걸음에 달려가 뮤리아의 면상을 밟아버리려는 순간, 지니가 내 앞을 막아 섰다.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렇게 행동을 하신다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진실이 어떻게 밝혀져요? 이 년들이 이 따위로 입을 맞추고 사람을 엿 먹이는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밟아버린 다음, 진실을 불게하는 수 밖에 없다고요!" 지니는 내 어깨를 붙잡으며 내 눈을 똑 바로 쳐다 보았다. "절 믿으싶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제가 반드시 아이언스 공작님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지금 지니의 모습은 정의를 위해 언제나 열심히 쌈박질을 하는 태권V보다 더 멋있고 훌륭했다. 하지만…… "그런 느끼한 눈으로 절 보지 마세요. 토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어디서 여자들한테 써먹던 눈빛을 나한테 써먹고 있어. 지니는 시선을 뮤리아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하였다. "아이언스 공작님이 저 여자분을 겁탈하려 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나요?" "예." 뮤리아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과 저 여자분은 처음에 같이 방 안에 있었고, 갑자기 아이언스 공작님이 방으로 뛰어 들어와 여자분을 겁탈하려했다는 것이 되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면 말이죠." 뮤리아는 이제 대답할 생각도 못하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난 지니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저 두 년이 입을 완벽하게 맞추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을 통해 점점 범위를 좁혀가다보면 결국 자기 모순에 자기가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 인간 혹시 안기부 출신인가?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군요. 둘이 같이 방 안에 있었다면 어째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 여자분을 겁탈하려는 순간, 당신께서는 어째서 소리를 지르지 않으신 거죠? 어째서 저 여자분이 저 지경이 되어서 스스로 소리를 지를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죠?" 뮤리아의 얼굴은 새파랗다 못해 거의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이 상황을 두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칼리와 다른 사람들도 침묵을 지킨 채, 뮤리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사람에 속하지 않는 엘프 하나는 열심히 까르린느의 주위를 맴돌며 정신을 사납게 하고 있었다. "그, 그건…… 저, 저 남자가…… 소리를 못 지르게……." "소리를 못 지르게 제압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예." 지니는 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상하군요. 제가 아무리 보아도 당신의 몸에는 줄로 묶이거나, 결박을 당한 흔적이 조금도 없습니다. 설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눈빛만으로 제압했다고 말씀하시진 않겠죠?" "그, 그래요! 저, 저 남자가 누, 눈빛으로 절……." 어이가 없다. 거짓말이 들통나게 생겼으니 아주 쇼를 하는 구만. 내가 눈빛만으로 제압했다고? 아예 눈빛으로 강간까지 했다고 말하지 그러냐? 이 대답에 대해서 모두들 어이 없어 했지만 오직 한 명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였다. "하긴 그렇군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강렬한 눈빛이라면 여자분 하나 제압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요." 이 인간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 잘 나가다가 갑자기 왜 이래? 난 지니의 옆구리를 찔렀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저야 물론 제정신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강렬한 눈빛은 평소 남자에 관심이 없던 저희 누님까지 사로잡지 않으셨습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하던 심문이나 계속 하세요." "알겠습니다." 지니는 다시 뮤리아에게 물었다. "처음에 두 여자분께서 방 안에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아이언스 공작님이 들어와 까르린느 양을 겁탈하려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입니까?" "……예. "그럼 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까르린느 양을 겁탈하려 했을까요?" "그, 그거야…… 까르린느는 예쁘니까……." "으음, 정말 이상하군요. 까르린느 양이 예쁘다는 사실은 잘 알겠지만 루시아 공주님이나 저희 누님에 비한다면 명함도 내밀기 힘듭니다. 평소에 그런 미인분들과 같이 살아오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뭐하러 까르린느 양을 겁탈하려 하였을까요?" 이봐! 거기 당신 누님이 왜 들어가는데? 지니의 질문에 대답을 한 사람은 뮤리아가 아닌, 칼리였다. 칼리는 뮤리아를 보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쏘아 붙이 듯 말했다. "남자란 다 똑같은 생물이지요! 옆에 여자가 있어도 다른 여자를 건드리고 다니는 게 남자 아닌가요?" 맞는 말이긴 한데, 칼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 조금 이상하긴 하다. 다 늙은 할머니께서 어찌 이리 남자에 대한 편견이 있으실까? 지니는 한숨을 내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황당해지는 군. "그런데 왜 했어요?" 지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인간이 진짜! 지니는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까르린느를 바라 보았다. 라이는 여전히 까르린느 주위에서 발발 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는 저 여자분이 저렇게 된 것은 스스로 자해를 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군요? 이 여자애가 뭐하러 자해를 했겠습니까? 말이 안 되잖습니까?" 화를 내는 것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 칼리. 언제나 여유로운 지니. 아아! 이 순간 우리편이 이길 거라는 예감이 팍팍 드는 것은 예감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우리라. "까르린느양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두 가지 이유로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이언스 공작님에 대한 보복입니다." 오오! 당신 정확히 맞췄어. "보복이라니요?" 지니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까르린느양은 분명 아이언스 공작님의 멋진 외모와 훌륭한 성품을 보고 반해서 교재 신청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이미 루시아 공주님과 저희 누님이 계시기에 분명 교재 신청을 거절하였을테고, 저 여자분은 그것에 앙심을 품고 이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잘 나가다 왜 삽질이니? 그리고 거기에 니네 누님이 왜 들어가는데? 역시나 어이가 없어 아무런 말도 못하는 사람들. 그 와중에 꿋꿋하게 다시 입을 여는 지니. "둘째는 상아탑이 사주했을 수도 있습니다. 협상의 우위를 점하려고 말이지요." "헛소리!" 칼리는 거의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분노로 인해 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다. 하지만 지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확신에 찬 모습으로 당당하게 소리쳤다. "어찌되었든 까르린느 양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증거라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지니는 여전히 믿음직스럽게 대답을 하고는 까르린느에게 다가갔다. 까르린느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지니를 올려다 보았다. 지니는 잠시 할퀸 자국이 가득한 까르린느의 목을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목의 상처는 스스로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아, 아니에요!" 까르리느의 가련한 외침. 아아! 불쌍해 보인다. "목을 조를 때는 상처가 이런 식으로 나지 않습니다. 목의 윗쪽 보다는 아랫쪽에 상처가 생기고 정면보다는 측면에 생기지요. 그리고 목을 조를 때의 상처는 손톱이 더 깊이 들어갔어야 합니다. 이는 목을 조를 때, 손을 움켜주기 때문이고……." 지니는 나를 돌아 보았다. 난 재빨리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지니는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평소 손톱을 자주 깍지 않으셔서 상당한 길이의 손톱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아, 아니에요. 분명 저 남자가 이렇게 한거라구요. 저 남자가…… 흑흑……." 까르린느는 덜덜 떨며 소리치다,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궁지에 몰리니 결국은 동정표를 얻기 위함인가? 솔직히 까르린느가 우는 모습은 정말 슬프기 그지 없었다. 오죽하면 보고 있는 나까지 사건이 이쯤에서 종결되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하지만 지니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지니의 모습은 파이프 담배 하나만 입에 물려 주면 셜록 홈즈를 능가할 기세다.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목의 상처를 스스로 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데, 자꾸 이렇게 발뺌을 하시니 정말로 곤란하군요." "결정적 증거라는 게 대체 무엇 입니까? 설마 아이언스 공작님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술책을 부리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칼리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자신감보다는 억지성이 가득했다. 아마 자신도 어느 정도 일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증거는 바로……." "어! 얘 손톱에 피가 묻어 있어." "바로 그겁니다." 중간에 지니의 말을 자른 엘프는 당연 라이였다. 아까부터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뭔가를 발견해 내는 군. 라이는 기쁜 듯, 활짝 웃으며 '나 잘했지? 칭찬해 줘!' 등등의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난 라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고, 라이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까르린느는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손은 자주자주 씻었어야지. 지니는 까르린느에게 말하였다. "대체 왜 까르린느 양의 손에 피가 묻어있는지 모르겠군요. 설마 반항을 하던 중, 아이언스 공작님의 몸에 상처를 내기라도 하셨습니까?" "그, 그래요. 반항을 하던 중…… 저, 저 남자를……." 그래. 이제 무덤은 다 팠으니 드러 누울 차례구나. 흙은 내가 덮어줄게. 지니는 나를 보았고, 난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벗은 내 몸에는 다구리 당한 흔적만 조금 남아 있을 뿐, 긁혀서 피가 난 곳은 없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예 스트립쇼를 할까요?" 지니는 까르린느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까르린느를 옹호하던 사람들의 눈에도 전부 불신의 눈초리가 가득했다. 까르린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전 아니라구요…… 전 아니에요…… 저, 전 피해자라구요…… 흑으흑." 아아! 하지만 이젠 저 눈물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를 어찌할꼬? 라이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까르린느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쟤 왜 울어?"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그냥 삽질하는 거야. 넌 신경쓰지마." "삽질이 뭐에요?" 으음, 어린애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인가? "저런 행동을 보고 삽질이라고 한단다." 까르리느는 펑펑 울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보려 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한쪽에 멍하니 서 있던 뮤리아는 까르린느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 이제 그만해. 다 들통났어." 한 때는 완전 범죄를 계획했 것만 완전히 걸려서 쪽박 차게 생겼으니! 오오! 통재라! "아니야! 난 아니야!" 발악에 가까운 절규. 지니는 이미 무너진 애에게 결정타를 먹일 생각인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니 더욱 확실한 증거를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뺨에 있는 멍자국은 아이언스 공작님께 맞아서 생겼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아닌 것 같군요." 그렇지! 그게 바로 확실한 증거였어! 난 손바닥을 쫙 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손바닥을 까르린느의 뺨에 살짝 가져다 댔다. 역시나 사이즈Size가 맞지 않았다. 나의 손바닥에 비해 보잘 것 없이 작은 멍자국. "미안한데, 내 손이 조금 더 크다. 니 손 정도면 딱 맞을 것 같은데, 한번 대 보지 그래?" 이젠 정말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겠군. 까르린느는 더 이상 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칼리나 다른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하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쟤 정말 자해한거야?' '대체 왜 그랬을까?' '정말 차였나 보네.' '그런데 정말 싸이코 같은 년이다.' '그래. 마치 아리스 같은 년이야.' '너 아리스랑 친구해라.' 등등. 그런데 아리스는 누구지? 혈혈단신(孑孑單身),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면초가(四面楚歌). 방금의 나의 상황을 말해주던 고사성어들이 이제는 그대로 저 애에게 돌아가니, 이 어찌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으리오! 지니는 눈을 번쩍 뜨며, 크고 위엄있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로서 아이언스 공작님의 결백은 증명 되었군요. 아직도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사건의 정황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아이언스 공작님을 마치 범죄자처럼 몰고가다니! 이건 명백히 아이리스를 무시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아탑에서는 어찌하여 이런 행동을 하셨는 지요? 만약 이대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누명을 씌시고 처형된다면 그 사태는 대체 어떻게 감당하실 생각이셨습니까?" 묵묵부답(默默不答), 유구무언(有口無言). 어찌 입이 열 개라 해도 할 말이 있으리오. 난 벗은 웃옷을 다시 입으며 인상을 팍팍 썼다. 굉장한 분노감을 몸소 표현하기 위해 카리스마적인 눈빛으로 아무나 마구마구 쏘아 봐 주면서. 칼리는 너무도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설마 저 여자애가 자해를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지니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와 흥분이 가득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데 결코 지니는 흥분 상태가 아니다. 다만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즉, 이번 사건으로 인해 '본인은 매우 열받았음' 이라는 인상을 주어 어떻게든 협상의 우위를 점할 생각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세계가 멸망하더라고 결코 흥분하지 않을 지니가 왜 사건이 다 끝난 마당에 괜히 흥분을 하겠는가? 흥분 하나마저도 생각해서 하는 인간. 이게 바로 지니다. 아아! 존경스럽다. 지금 지니의 얼굴에서 새하얀 광체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착시 현상인가? "죄, 죄송합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정말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드릴 말이 없군요." 지니는 더욱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죄송하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운명을 달리하실 수도 있는 일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사람을 죽여 놓고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저 여자분 혼자서 이런 범행을 실행에 옮겼다고는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을 할 수가 없군요. 제 생각엔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칼리는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저희 상아탑은 이번 일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저 여자분이 상아탑 마법 학교의 학생인데도 말입니까?" 분노와 결의에 찬 지니의 목소리. 목소리에 넓은 초원을 질주하던 기운이 새록새록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야말로 말로만 듣던 사자후(獅子吼)이다.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상아탑은 절대 아닙니다. 저희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입장인데 어찌 그런 일을 저질렀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칼리님이나 라이미안님께서 사주하지 않으셨다해도 다른 누군가가 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죄를 뒤집어 씌워 아이언스 공작님을 상아탑에 잡아두려는 술책일 수도 있고, 아니면, 8, 9클래스 마법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한 누군가가 저지른 일일 수도 있지요." "그, 그건……." "설사 상아탑이 사주하지 않았다해도 아까 칼리님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어찌 정확한 근거도 없이 단지 여자분의 말씀 하나만 믿고 아이언스 공작님을 범죄자로 몰아 붙이셨나요? 만약 제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일이 어찌될 뻔했습니까? 만약 아이언스 공작님께 조금의 불상사라도 일어났다면 그건 단순히 아이리스만의 손실이 아닌, 상아탑과 그 외 여러 국가들을 포함한 범국가적인 손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 지니는 갑자기 흥분한 모습을 풀고 한숨을 내쉈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평소의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칼리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흥분을 하여 보이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아, 아닙니다. 편하신데로 말씀하십시오." 저자세로 나오는 칼리.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제가 잠시 흥분 때문에 예의를 잊은 점에 대해서는 백배 사죄드릴테니, 그 일에 대해 저를 꾸짖지 말아 주십시오. 정 저의 죄를 문책하시겠다면 벌을 달게 받을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역시 저자세로 나오는 지니. 갑자기 고자세에서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니가 화를 내며 칼리를 몰아 붙인다. '니들이 짜고 이런 일을 벌였잖아!' 칼리는 당연 이번 일과 별 관련이 없지만, 아까 잘못한 것 때문에 무조건 지니의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 '죄송합니다. 제발 화 푸세요.' 하지만 지니는 더욱 화를 낸다. '누구 마음대로 화를 풀어?' 만약 이 상태가 계속 된다면 정말 결백한 칼리로서는 분노를 느끼게 된다. '난 결백한데 왜 자꾸 쏘아 붙이는 거야? 가! 가란 말이야! 널 만나고 나서 마법이 제대로 써진 적이 단 한번도 없어! 가!' 이런 상황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지니는 순간적으로 흥분한 모습을 풀고 저자세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 칼리는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지니의 저자세에 몸둘바를 몰라하며 어떻게든 지니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 노력은 이 쪽이 저자세이니 당연 저 쪽도 저자세가 될 수 밖에 없다. 같은 저자세이지만 현재 우위는 이 쪽이 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이 쪽은 광땡(38, 18, 13)을 잡은 거고, 저 쪽은 장땡(1010)을 잡았다고 할 수도 있다. 장땡이 광땡에게 패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니 칼리로서는 지니에게 패할 수 밖에 없다. 으음, 오랫동안 노처녀의 눈치밥을 먹으면서 살다보니 절로 눈치가 느는구나. 어찌되었든 이 상황에서 칼리가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그럼 달게 받으시죠. 야! 너 아래층에 내려가서 매 하나만 가져와. 매 없으면 야구배트로. 기왕이면 알리미늄 배트로 가져오렴' 등등의 말을 해야만 한다. 이것 외에는 다시 주도권을 잡을 방법이 없다. "아닙니다. 먼저 잘못은 제가 한걸요. 그러니 전혀 신경쓰지 마십시오." 역시 그런식으로 말할 리는 없다. 하지만 솔직히 나 같으면 그렇게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웬만해선 이렇게 예의 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제가 가장 존경하고, 저희 누님께서 사모하시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안 좋은 일을 당할뻔 했다는 사실에 잠시 이성을 잃었습니다." 정말로 이 인간이 나를 존경하는지 굉장히 궁금해 진다. 난 지니와 칼리의 대화를 듣던 중 문득, 아까는 몹쓸 놈한테 겁탈을 당할뻔한 비련의 여주인공에서 이제는 역적(逆賊)으로 몰리게 된 누군가를 쳐다 보았다. 으음, 굉장히 떨고 있군. 하지만 자기가 자기 무덤을 판 꼴이니 누구를 원망하리오! 난 까르린느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였다. 이대로 저 계집애를 용서해 줄지, 아니면, 죄를 물어 완전 조져 놓을지. "무고죄면 형량이 얼만가요? "강간 무고면 사형입니다." 새파랗게 질리는 까르린느의 얼굴. 후후후, 설마 자신이 사형을 당하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난 주저 앉아 닥쳐올 운명을 예상하고 두려움에 덜덜떠는 까르린느 앞에 당당하게 섰다. 그리고 황야의 무법자처럼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들었지? 사형이래. 넌 이제 죽는거야. 17년이나 살았으면 어느정도 인생의 재미를 알았을테니 별로 삶의 미련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내가 아까 젤리한테 말했 듯이……." "젤라라니까요!" 한쪽 구석에서 소리치는 젤리. "젤리든 젤라든! 똥이든 변이든! 화장실이든 뒷간이든! 셜록 홈즈든 셜록 지니든! 지금 그게 중요해? 한 가련한 소녀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난 젤리를 한번 쏘아봐 준 다음, 다시 까르린느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아까 젤리에게 말했 듯이 수명어천(壽命御天)이라하여 예로부터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거라 했으니, 니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더라도 결코 나를 원망하지 말고 하늘을 원망할 지어다. 그리고 시신은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아! 한 소녀의 생명이 이렇게 사르라져 다시 하늘로 돌아가니 이 모두는 하느님께서 너를 어여삐여기심이다. 이제 곧 어린양, 그것도 어린 암놈 한 마리가 다시 주님의 곁으로 돌아갑니다. 어차피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데, 일찍 가나 늦게 가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부디 천국에 가서는 사기나 공갈 등은 치지 마시길 바라며, 이제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까르린느양에게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성자, 성녀, 루시아 공주님의 이름으로 아멘!" 더더욱 새파랗게 질리는 까르린느양의 얼굴. 그래! 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어. 더욱 열심히 놀려줘야 겠다. 난 목소리 톤을 조금 바꾸어 말하였다. "네 이 년!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아무 반응이 없군. 설마 모르는 건가? "하루 살다 죽을 하루살이 주제에 어찌 감히 대붕의 날개를 꺽으려 하였느냐? 내 네 년 때문에 넓은 창공을 날아보지도 못하고 주저 앉을 뻔 했으니 그 죄는 어찌 보상할 것이며, 그로 인해 생기게 될 엄청난 파장에 대해서는 어찌할 생각이었느냐? 내 당장 이 곳에서 너를 참하여야 마땅하나, 엄연히 국법이라는 것이 존재하니 친히 네 년을 법정에 세워놓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하리라!" 으음, 갑자기 나의 모습이 왜 이리 멋있어 보인단 말이냐? 이때 기립 박수가 나오면 굉장히 멋있을 텐데. 짝짝짝-! "굉장히 멋있어요, 오빠." 그래. 그래도 호응해 주는 엘프는 정신 연령이 낮아 정신 나간 너 밖에 없구나. 난 까르린느에게 약을 올리듯 말했다. "뭐 특별히 할 말은 없니? 변명이라도 좀 해보렴. 이렇게 끝나면 재미없잖아." "저, 전……." 드디어 입을 여셨군. 어떤 변명이 나오는지 기대가 되는 걸. 까르리느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중인격이에요!" 다중인격? 얘가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저에게는 여러 가지 인격이 있어요. 아까 그 행동은 제가 아닌 다른 인격이 한 짓이에요." 이 년이 이 따위로 아리스스런 변명을 찌결여 대다니! 솔직히 정식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하면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 했다. 그런데 씨바스럽게도, 정말 씨바스럽고 아리스스럽게도 다중인격이라는 얼렁뚱땅한 말로 넘어가려 하다니! 이 계집애가 다중인격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확신할 수 있다. 난 눈을 부릅뜨고 뮤리아를 보았다. "야! 너! 너 아까 저 아리스 같은 년이랑 작당을 하고 나를 엿 먹이려 했었지?" 뮤리아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 미안해. 그, 그렇게 안 하면 까르린느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하겠다 그래서……." 난 칼리를 보았다. "위증죄면 형량이 어떻게 되나요?" "최하 5년형입니다." 난 다시 뮤리아를 보았다. "들었지. 최하 5년이랜다. 5년 동안 감방에서 푹푹 썩다보면 니 Fucking Head도 조금은 제대로 돌아가겠네. 넌 어떻게 생각해?" Fucking Head. 굳이 해석하자면 '빌어먹을 두뇌' '좆 나게 안 돌아가는 머리'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유사어로는 'Chicken Head'나 '아리스 Head' 정도가 있다. 뮤리아는 5년 감방 살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듯 말했다. "흑흑, 내가 잘못했어. 한번만 용서해줘. 뭐든 시키는대로 다 할게. 부탁이야. 내가 감방에 들어가면 우리 부모님께서는 충격 받아 쓰러지실지도 몰라." 솔직히 뮤리아에게는 별 감정 없다. 아까는 조금 화가 나기도 했지만, 뮤리아는 어디까지나 위증을 강요 받았을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뮤리아도 피해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까르린느가 제대로 사죄를 하지. "난 너 때문에 죽을 뻔 했어! 그런데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부모님이 어쩌구 저째? 위기에 상황이 닥치니 치사하게 부모님까지 끌어 들이는 군. 헛소리는 필요 없어! 넌 무조건 감방행이야! 너 같은 애는 콩밥 좀 먹어봐야 되." "흑흑, 제발 용서해 줘. 제발!" 뮤리아는 이제 내 발을 두 팔로 움켜 잡았다. "제발 살려줘. 아니,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흑흑. 제가 잘 못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이봐! 이렇게까지 비참해질 필요는 없잖아. "야! 발 좀 놔." "흑흑, 살려 주세요." "누가 죽인데. 그냥 5년 동안만 콩밥을…… "안 되요! 전 콩밥 먹기 싫어요!" "콩밥도 먹다보면 적응되기 마련이야. 그러니…… 아이씨! 자꾸 잡아 당기지 좀 마. 바지 벗겨져!" "흑흑흑! 살려 주세요, 히로님." 이거 비굴해져도 너무 비굴해지는데. 얘 평소에도 이렇게 살았었나? 난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 입을 열었다. "네가 네 죄를 인정하고 이렇게 용서를 구하니, 내 특별히 너를 어여삐여겨 감방을 가는 것만은 면하게 해주마. 너의 차후 행방은 내 친히 결정할터이니 그 때까지 자중하고 있거라!" 내 말이 끝나자 뮤리아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코가 땅에 닿을 듯 엎드려 절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히로님." 아무리 생각해도 얘는 인성 교육을 좀 받아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비굴해질 필요는 없잖아. 양반은 얼어죽어도 곁불은 쐬지 않는다고, 사람은 언제나 당당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뭐, 그래도 잠깐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감방에 가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이 들기는 한다. 이제 뮤리아는 끝났으니 주범을 심판할 차례군. 난 인상을 펴고 활짝 웃으며 까르린느에게 말했다. "아까 했던 변명 좀 다시 해봐." 까르린느는 약간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 난 다중인격이야. 여러 인격이 있어서……."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군. 난 뮤리아에게 물었다. "얘 정말 다중인격자야?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감방 간다고 생각해." 내 말을 들은 뮤리아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걔 다중인격자 아니야. 병이 있다면 왕비병 정도인 걸." 아까까지는 한 팀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적이 되었군. 난 다시 시선을 까르린느에게로 향했다. "야! 니가 진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한다면, 나도 이번 일을 크게 벌릴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다중인격이라는 씨바스럽고 아리스스런 말로 적당히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말고." "아니야! 정말 난 다중인격이야!" 절규에 가까운 까르린느의 목소리. 그래. 그럼 넌 정신병원 가라. 정신병원에 가서 아리스랑 놀아라. 둘이 같이 죽었다 살아난 다음에 남자 가지고 놀아라. 니네 친구들까지 다 정신병원으로 불러서 아예 조직을 재건해라. 난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니와 칼리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얘 그냥 사형시켜요!" * 하루에 한번씩 어김 없이 밤이 찾아 온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마법의 도시 상아탑이지만 밤이 찾아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탑과 도시 전체에 불을 밝혀 어둠은 몰아낼 수 있지만 말이다. 방 안은 곳곳에 켜진 불로 낮과 다름 없이 밝았다. 지니는 편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난 목을 창틀에 걸치고 도시의 야경을 바라 보았다. "후우-." 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니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언제나 별 생각 없이 사는 저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냥 한숨 한번 쉬어 봤습니다." "걱정거리가 있으시면 언제든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제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아이언스 공작님의 걱정거리를 해결해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난 시선을 지니에게로 돌렸다. 지니는 그 특유의 마스코트인 외눈 안경을 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은 상당히 두껍고 커, 백과사전 정도의 크기였다. 하지만 지니는 책을 읽는 건지 마는 건지 그 빽빽한 페이를 휙휙 넘겼다. 누가 보면 훑어 본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건 아니다. 지니는 지금 속독(速讀)으로 책을 읽고 있는 거다. 머리가 워낙 좋다보니 저 정도 속도로 읽어도 모든 내용이 이해가 되나 보다. "아까 주먹을 휘두르셨잖아요." 지니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하며 나를 보았다. "하하, 아이언스 공작님 앞에서 변변치 못한 솜씨를 보여드렸습니다." 그게 변변치 못한 솜씨면 난 땅에 머리 박고 반성해야 겠다. "일 하시는 것도 바쁘셨을 텐데 주먹질은 언제 익히셨어요?" "예전에 호신용으로 조금 익혀두었습니다." "호신용이요? 살상용이 아니고요?" "하하하. 전 무력(武力)을 쓰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말로서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지요." "그럼 아까는요?" "그거야 제가 가장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이 위험에 처하셨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리 행동한 것이지요." "그런데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었나요?" 지니는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쉈다. 그리고 외눈 안경을 벗고, 묶은 머리를 풀었다. 촤라락- 끈의 구속에서 벗어난 지니의 금색 머리카락은 바람도 불지 않는데 멋지게 휘날렸고, 지니의 눈은 밤하늘에 별이 폭격이라도 맞은 듯, 아름답게 반짝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여자였다면 주저 없이 지니의 품에 안겼으리. 지금 이 순간 내가 호모였다면 주저 없이 지니의 품에 안겼으리. 지금 이 순간 내가 정상적인 남자인 관계로 지니를 재수 없다고 생각하리. "아이언스 공작님." 지니의 뜨거운 눈빛. 지니의 간드러지는 목소리. 난 주저 없이 고개를 돌렸다. "전 호모도 아니고, 게이도 아니고, 트랜스 젠더도 아니고, 야오이라면 치를 떨다 못해 이를 벅벅 가는 사람입니다." "흠흠, 전 다만 존경의 눈빛으로 아이언스 공작님을 쳐다 본 것 뿐입니다." "그럼 앞으로 존경하지 마세요."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잠시 헛기침을 하는 지니. 그리고 이내 진지한 얼굴로 다시 나를 바라 본다. "공작님께서는 자각을 하지 못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작님께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저희 누님, 키레아 폐하, 루시아 공주님 등등이요." "그래서요?" "공작님께서는 충분히 지도자가 될만한 자질을 갖추고 계십니다." "그래서요?" "지도자는 때로 몇 만의 목숨을 단지 종이조각만도 못하게 여겨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요?" 지니는 다시 한숨을 내쉈다. 내가 이해를 잘 못하니 답답한가 보다. 사실 나는 지니의 말을 대충 이해하긴 했다. 하지만 조금 더 확실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냥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머릿속에 각인 될 정도로. "제가 그 자리에서 까르린느양을 죽인 것은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까르린느양은 고의든 실수든 간에 분명 아이언스 공작님께 해를 입혔습니다. 이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결코 용서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죽일 마음이 없었다 하더라도 까르린느양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반성할 기회를 주는 편이……." 다시 들려오는 지니의 한숨. "그것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다중인격이라는 얼토당토하지 않는 말로 대충 넘어가려는 것을." 그건 그렇다. 까르린느가 한 잘못은 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의가 아니었다. 까르린느는 나를 강간 미수범으로 몰아 넣어 당황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모욕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일이 너무 커졌고, 내가 죽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거짓말을 했다. 아니면, 자신이 안 좋은 상황으로 몰리게 되니까.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만약 까르린느가 정말 자신의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빌었다면 그냥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 주는 정도로 끝냈을 것이다. 따귀 몇 대 정도는 옵션으로 추가하고. 그렇게 되었다면 적당히 좋은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까르린느는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다중인격이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하였다. 다중인격(多重人格). 이중인격(二重人格)에서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된 정신병. 이중인격의 뜻이 1. 한 사람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때때로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일, 또는 그 성격. 2. 인격 장애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이상 심리. 이다. 다중인격은 이중인격보다 더 심한 것이므로 극심한 정신병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굳이 속된 말을 쓰자면 '싸이코' 정도로 표현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다중인격이라는 것은 정말 심각한 정신병이다. 다른 인격이 한 일을 지금의 인격이 모를 정도로 말이다. 굉장히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한 육체 안에 여러 영혼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나 장소 등에 따라서 그 인격들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이 인격들은 아예 다른 존재이다. 원래의 인격과 식성, 취미, 특기, 좋아하는 것 등등이 전부 다르다.(물론 우연히 같을 수도 있다. 왜 취미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둘인가?) 더 간단한 설명을 위해 굳이 예를 들자면, '아리스' 라는 사람 안에 A, B, C라는 인격이 산다고 가정하자. 이 중 대표적인 인격은 A라고 역시 가정하자. 여기서 대표적인 인격이란 원래의 인격을 말한다. 날 때부터 다중인격이었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자라는 도중 다른 인격들이 생겨난다.(원래 있었던 인격이 잠을 자고 있다가 깨어 난 것일 수도 있다. 나 정신학 박사 아니니 너무 따지지 말자. 안 돌아가는 머리로 설명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아리스의 A인격만을 본다. 그리고 아리스도 A인격만을 보여준다. 다름 사람들이 A인격을 한 아리스를 보았을 때, 그 사람들은 아리스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아리스의 몸을 차지하는 시간이 A인격이 가장 많았다. 그런데 점점 B와 C의 인격이 몸을 차지하는 시간이 늘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점점 혼동이 온다. '나는 아리스가 맞는데. 그런데 내가 아까 무슨 행동을 했지? 1시간 동안의 기억이 없네. 잠깐, 내가 아리스가 맞긴 한거야?' B인격이 행한 일을 대표 인격인 A인격이 모르는 일도 생기고, A인격은 평소 거짓말을 굉장히 잘하고 남자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C인격은 굉장히 얌전하고 남자 손도 못잡는 순둥이이다. 뭔가가 점점 이상해진다. 전부 자신이긴 한데, 전부 자신이 아니기도 하다. 어느 것이 본인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결국 정신병원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정신병원의 차가운 바닥에서 A인격이 남자를 가지고 노는 동안, B인격은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놀고, C인격은 자신이 다중인격이라고 열심히 주장을 한다. 이게 바로 다중인격이다. 물론 내가 설명한 거니까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다중인격이 이런 양상을 띈다. 물론 위의 경우는 조금 심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중인격이라는 것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되기 싫다고 해서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까르린느가 정말로 다중인격이었다면 뭔가 특이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최소한 잠깐 만났던 나한테는 아니더라도 룸메이트였던 뮤리아에게는 말이다. 나에게 모욕을 당하고 옷을 찢었던 까르린느. 그리고 궁지에 몰리자 다중인격이라는 씨바스런 변명을 했던 까르린느. 이 둘은 분명 다르다. 인격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상황과 기분이 다르다. 아아! 왜 하필이면 허구만한 변명 중에 다중인격이라는 변명을 했을까? 다중인격이 아닌 다른 변명을 했다면 분명 용서해 줄 수 있었는데.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조금 더 강인해 지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 지금 상태로도 최강이에요. 더 이상 강해지면 세계의 균형이 무너집니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충분히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정신적인 강인함입니다. 지도자는 때로 냉정해져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부디 아이언스 공작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저희 누님을 위해서라도……." "그냥 이대로 살지요." "그럼 루시아 공주님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강인해 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건강에 좋겠지? "내일을 위해 그만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을 듯 하군요." "먼저 주무십시오.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난 다시 침대에 누웠고, 지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잡는 가느다랗고 긴 지니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 온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손일 뿐이다. 하지만 저 손에는 얼마나 많은 피가 묻어 있을까?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마치 당연한 일인냥 하는 살인. 때가 되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Part3. 히로의 강의시간 똑똑똑-! "아무도 안 계세요?" "그래. 아무도 없으니까 돌아가!" 난 문을 향해 그렇게 외친 다음, 다시 이불을 덮어썼다. "아무도 없는데 대답하는 건 누구에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 "궁금해서요." "방 안에는 아무도 없고 목소리만 남아있는 거야!" 똑똑똑-! 아이씨! 진짜 짜증나게 하네. 난 베게를 집어 문에 던졌다. 그리고 소리쳤다. "가! 가란 말이야! 널 만나고 나서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한번도 없어! 가!" "알았어요. 가라면 갈께요. 루시아가 보낸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가라면 가야지요. 안녕히 계세요." 뭐? 루시아? 그녀가 이 먼 곳까지 편지를 보냈단 말인가? 인편으로 보내는 것은 불가능할텐데……. 설마 E Mail? 루시아가 편지를 보냈다는 말에 눈이 절로 떠지고, 잠이 확 달아났다. "잠깐!" 난 문을 향해 소리치고는 순식간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머리를 빗은 다음,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갔어? 설마 루시아 편지를 가지고 그냥 간 건 아니겠지? "여기에요." 밑에서 들려온 목소리. 시선을 조금 낮추어 보니 넙적한 고양이 인형, 일명 <헬로우 귀티>가 보였다. 그리고 귀티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귀티가 말을 하긴 뭔 말을 해! 너 지금 인형 놀이 하냐? 귀티 인형이 옆으로 치워지자 라이의 통통하고 귀여운 얼굴이 나타났다. 난 주먹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루시아 편지 어딨어? 당장 내 놔! 설마 미리 뜯어본 것은 아니겠지? 그랬으면 주-우-거!"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편지는 없어요." 무어라? "편지가 없긴 왜 없어!? 없으면 만들어 와!" "편지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오빠 깨우러 간다고 그러니까 안 일어나면 루시아 편지를 가지고 왔다 그러라길래 그랬을 뿐이에요." "아니,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의 자식이 그 따위 술책을 부렸어? 그리고 루시아가 니 친구냐? 루시아 공주님이라 불러!" "사일런스 지니가 그랬데요. 빨리 가서 혼내 주세요." "시끄러! 고자질하는 게 얼마나 나쁜 일인 줄 알어? 너 저쪽으로 가서 손 들고 있어!" 으음, 사일런스 지니.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내 잠을 깨우는데 쓰다니. 그런 거 생각할 시간있으면 더욱 열심히 일이나 하란 말이다. 뭐, 지금도 열심히 일 하고 있긴 하군. 아니야, 어차피 이번 외교건도 다 내 공으로 돌아올 텐데 더욱 열심히 일 하지 않으면 곤란해. 그래. 죽을 때까지 일해라, 사일런스 지니. 재주는 니가 넘고 공은 내가 챙기마. "그런데 무슨 일로 내 잠을 깨운거니?" "심심한 것 같아 놀아주려고요." "누가 심심해?" "오빠가요." "내가 왜 심심해?" "사일런스 지니가 그랬어요. 제가 회의장 안에서 귀티랑 놀고 있으니까 '정 심심하면 아이언스 공작님과 같이 노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도 상당히 심심하거든요' 라고 말하던데요." 역시 사일런스 지니. 필요없는 꼬마를 치우는 방법도 가지가지 구나. 정말 존경스럽다. "미안하다. 내가 요즘 워낙 바쁜 관계로 너랑 놀아주기가 힘들다. 그냥 너 혼자 놀아라." 잠이나 더 자야겠다. 난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라이가 따라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설마 진짜로 나랑 놀 생각인가? 아니야, 내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지. 어떻게 이런 꼬마와 논단 말인가? 잘못하면 나의 지적 레벨과 카리스마적인 외모에 커다란 손상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렇게되면 방법은 하나 뿐. 난 내 침대에서 자고 있는 라이코스를 흔들었다. "야! 일어나! 날이 밝았어! 일찍 일어나는 매가 벌레도 많이 잡는데." "난 벌레를 잡아먹는 게 아니라 새를 잡아 먹어. 그리고 난 영물이어서 안 먹어도 사는데 별 지장은 없어." 그래. 너 영물이어서 좋겠다. 영물은 원래 하루 종일 잠만 자냐? "야! 일어나! 루시아에게 편지가 왔어!" "편지가 왔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제법이군. 루시아 편지가 왔다는데도 일어나지 않다니. "야! 일어나! 라이레얼이 너 좀 보자는데." "뭐!?" 온 몸의 털이 빳빳하게 서면서 벌떡 일어나는 라이코스. 그리고 하늘로 날아 오른다. "어디야? 어딨어?"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날아오르다가 결국은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고 아래로 추락한다. 멍청한 놈. 니가 영물이면 똥파리도 새가 되고, 38따라지도 38광땡이 되겠다. 라이코스는 아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재빨리 주위를 살핀다. 무엇 때문에 라이코스가 저리 두려움에 떠는 걸까? 과거를 잠시 회상해보면 라이코스가 이렇게 심하게 놀라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라이레얼에게 잡혀서 국통 속으로 들어갈뻔 했던 경험. 그냥 산 채로 라이레얼의 입 속으로 들어갔던 경험. 언제나 라이코스만 보면 침을 질질흘리던 라이레얼의 눈빛. 정력에 좋다는 허왕 된 소문만 믿고 언제나 라이코스를 못 잡아먹어서 안 달이났던 라이레얼. 아아! 내가 라이코스였어도 저런 반응을 보였겠다. "안심하렴. 사실 라이레얼이 왔다는 건 나의 재치있는 조크Joke였다." 라이코스의 털들이 다시 빳빳히 선다. 라이코스는 쫙 찢어진 눈으로 나를 째려보며 소리쳤다. "할 조크가 있고 안 할 조크가 있지! 어디서 그 따위 조크를 해! 심장마비로 죽을 뻔 했잖아!" "미안하다." "미안하다면 다야! 너 청안백우조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고 할래!?" 요즘들어 이런 종류의 말을 자주 듣는다. 미안하면 그걸로 끝이지, 뭘 그렇게 따지고 드는지. "어쨌든 잠이 좀 깬 것 같으니 우리 토킹Talking이나 좀 해보자꾸나." "시끄러! 나 다시 잘꺼니까, 토킹하려면 너 혼자 토킹해!" "어떻게 혼자서 토킹을 하니?" "그럼 스토킹이라도 하던가!"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라이코스의 말빨이 굉장히 많이 늘었다. 이젠 웅변 대회 나가도 상장 하나 정도는 타올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말빨이 는 것에 대한 옵션인지 굉장히 건방져지기도 했다. 라이코스와 나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 왕과 시종, 보스와 부하, 라이레얼과 나…… 정도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마지막 건 제하도록 하자. 아무튼 라이코스는 절대 나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건 명백한 하극상이다! 난 이상을 쓰며 카리스마적인 눈빛으로 라이코스를 쏘아 보았다.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라이레얼한테 전화한다." "뭐!? 전화를 해!?" 다시 잠자리에 들려다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라이코스. 이제야 완전히 잠에서 깬 듯 하군. 그건 그렇게 내가 미쳤다고 라이레얼한테 전화를 하냐? 전화기가 없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라이레얼을 만나는 것은 너보다 내가 더 기피하고 싶다. "얘는 누구야?" "어! 이제부터 너와 놀아 줄 라이코스라고 한단다. 그럼 둘이 재미있게 놀아라." 그러자 라이코스가 말하길. "내가 왜 얘랑 놀아야 되?" 라이코스는 굉장히 귀찮은지 부리가 한 뼘은 더 튀어나왔다. 난 작은 목소리로 협박하 듯 말했다. "자꾸 반항하면 진짜 라이레얼한테 전화한다." 다시 쏙 들어가는 라이코스의 부리. 그래. 지능 수준이 맞는 놈들끼리 놀아야지. 아이큐만 따지면 둘이 완전 환상의 콤비다. 사일런스 지니가 책략으로 라이를 나에게 치웠다면, 나 역시 책략을 부려 라이와 라이코스를 동시에 치웠다. 음하하하! 지니 보다 내가 한 수 위군. 그럼 난 다시 잠이나 자야겠다. * "내가 말했지. 나는 창공의 지배자 라이코스다! 어찌 니들이 감히 나에게 덤비려 하느냐?"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긴, 내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독수리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지." "우와! 대단하다!" "하하, 뭐 이 정도를 가지고. 사실 여기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해. 이제부터가 진짜 재밌으니까 잘 들어봐." "응." "독수리들이 두려움에 떨긴했지만 나쁜 상황은 여전했어. 왜냐하면 독수리들은 17마리고, 난 혼자였으니까. 하지만 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어. 난 더욱 당당한 모습으로 독수리들을 노려 보았지. 그리고 재빨리 책략을 짜내기 시작했어. 어떻게 해서든 포위된 상황을 벗어나야 했거든. 포위망만 풀면 그 때부터는 각개 격파를 하여 17마리의 독수리들을 전부 무찌르는 것은 일도 아니거든. 결국 난 결심을 하고 가장 약해보이는 놈을 기습공격했어. 놈들은 깜짝 놀랐지. 난 손으로 놈의 목을 잡아 비튼 다음, 발톱으로 날개를 찢었어. 그리고 빠르게 날개짓을 하여 도망치기 시작했지. 물론 결코 내가 무서워서 도망간 것은 아니야. 작전상 그렇게 한 것 뿐이지. 아무튼 나의 책략 대로 동료를 읽어 화가 난 독수리들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나를 좇아오기 시작했어. 난 어느 정도 도망치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녀석들을 향해 몸을 돌렸어. 나의 책략대로 녀석들은 나를 제대로 처다보지도 못했지." "왜?" "왜냐하면 내가 태양을 등지고 있었거든. 난 태양을 등지기 위해 녀석들을 유인한 것이었어." "굉장해! 굉장해! 너 굉장히 똑똑하구나!" "으하하! 당연하지! 사실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사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나 태어났을 때 우리 동네에 신응(神鷹) 태어났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커서 큰 영물 될꺼라는 소문이 자자했다니까. 아무튼 녀석들은 태양 때문에 나를 처다보지 못하였고,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녀석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발로 테클을 걸기도 하고 손으로 목을 비틀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날개를 이렇게 빳빳하게 세워 단칼에 적의 목을 참하였지. 결국 이 싸움은 나의 승리로 끝났어. 후에 이 싸움은 모든 새들에게 알려졌고, 지금은 전설로 전해지고 있지. 그 후로 독수리들은 나만 보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기 바쁘다니까. 하하하!" "와아! 재밌다! 또 다른 이야기 없어?" "없긴 왜 없어? 내가 다른 이야기도 해줄게. 이건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 얘긴데……." 퍽-! 베게에 맞은 라이코스는 뒤로 넘어갔지만, 이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가서 놀아 이것들아! 왜 남의 방에서 알짱거리고 있어!?" 그렇다. 이 놈들이 아이큐 수준이 딱 맞아서 지들끼리 히히덕거리며 노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이 방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다. 놀아도 조용히 놀아주면 좋으련만 매 하나는 말도 안 되는 무용담을 지껄이고 있고, 엘프 하나는 좋아라고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다. 뭐? 17 대 1? 손으로 목을 비틀어? 매 한테도 손이 있냐? "뭐하러 나가서 노냐? 난 여기가 좋아." 생각해보니 라이코스와 라이를 붙여놓은 것 부터가 완전 실수였다. 처음에 덜 떨어진 엘프와 같이 놀아야한다는 사실에 굉장한 불만을 토로하던 라이코스는 어느새 손발이 맞아서 짝짝궁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자신이 덜 떨어진 매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굉장히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이 두 놈이 이 방에서 놀 것이라고 누가 예측을 했겠나? "맞아요! 이코랑 노는데 방해하지 말고 잠이나 자세요." 이코? 설마 라이코스의 약자? 아니면, 애칭? 라이코스를 라이라고 부르면 자신과 헤깔리니 그렇게 부르는 건가? "시끄러 이 것들아! 니들이 조용히 해야 내가 잠을 자지!" "그럼 나가서 주무세요." "그래! 니가 나가서 자!" 이 것들이 진짜! 난 손에 잡히는 것은 다 집어던지며 외쳤다. "나가! 당장 나가!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잠시 들리는 궁시렁거리는 소리. "너무해. 자기 멋대로야." "맞아. 저 녀석이 원래 좀 싸가지가 없어. 착한 우리들이 이해하자." "라이는 이해 못 해." "그냥 나가자. 제 저렇게 보여도 성질 더러워. 나가서 내가 드래곤 7마리랑 싸운 얘기 해줄게. 원래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내가 너 한테만 특별히 얘기해 주는 거야." "우와! 정말?" "물론이지. 우린 친구잖아." "고마워, 친구야." "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아아! 짜증난다. 덜 떨어진 것들이 좋다고 짝짝궁 대는 모습을 보니 괜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껴져!!!" 궁시렁거리며 방을 나서는 라이 패밀리(라이미안 + 라이코스). 아아! 속 시원하다. 다시는 저것들이 내 앞에서 알짱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아이씨! 잠이 안 온다. 저것들 때문에 잠이 완전히 깼다. 그런데 라이코스가 드래곤 7마리랑 싸운 얘기를 해준다고? 정말 싸웠을까? 어떻게 싸웠을까? 그 드래곤의 종류는 어땠을까? 설마 드래곤들 중에 크로니스도 껴 있었을까? 아아! 궁금하다. 그래도 라이코스가 얘기를 재밌게 하긴 하는데. 그래. 생각해보면 아까 얘기도 꽤 재밌었어. 생각해보면 매가 말하는 것 자체가 재밌잖아. 라이코스 녀석. 나갈 땐 나가더라도 그 얘긴 해주고 갈 것이지. 잠깐! 생각해보니 지금 난 혼자잖아. 이제부터 뭐하지? 밖에 나가서 돌아니다간 어제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고. 이런 제길! 쫓아 내지 말고 같이 놀았어야 했는데. 이런 제길! 쫓아 내지 말고 같이 놀았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좇아가서 껴 달라고 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쪽 팔려. 혹시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똑똑똑-! 그럼 그렇지. 지들이 놀아봐야 어디서 놀겠어. 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래. 니들이 정 이 곳에서 놀고 싶다면, 내가 특별히 허락해 주도록 하마. 빨리 들어와서 아까하던 얘기들 계속하렴." "으, 응?" 이게 뭐야? 라이 패밀리가 아니잖아. "넌…… 1학년 FH반 18번 뮤리아!" "으, 응." "니가 여긴 어쩐 일이야?" "그, 그게……." "일단 들어와." "으, 응." 난 뮤리아를 방 안으로 들인 다음,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며 대화를 시작하였다. "무슨 일로 찾아 온 거야?"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뮤리아. "그, 그게…… 어제 내가 너한테 잘못을 많이 했잖아……. 그런데…… 제대로 사과도 못한 것 같아서……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 사과를 못 했다고? 어제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빈 정도면 충분히 사과가 된 거 아닌가? "하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사실 넌 까르린느에게 협박 받아서 그런거니 별 잘못 없어. 그리고 사과라면 어제 충분히 받았고 말이야. 사실 미안하다면 내가 더 미안하지. 그때 너무 화가 나있어서 괜히 너한테 화풀이 했잖아." 아아! 내가 드디어 인간 됐구나! 뮤리아는 펄쩍 뛰며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잘못은 내가 했는 걸. 히로가 사과할 필요는 전혀 없어." 그래.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예의상 한번 해본 말이었어. "그런데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 온 거야?" "저기 그게……." 뮤리아는 자신의 품을 뒤적거리더니 편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건냈다. "이거……." 받아보니 편지가 맞았다. 펴보니 엄청나게 화려한 필체가 내 눈에 들어 온다. 한 획, 한 획 힘이 살아 숨쉬는 것을 보니, 사일런스 지니의 필체였다. 저 바다보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저 하늘보다 높은 뜻을 가지고 계신 아이언스 공작님. 제가 존경하는 공작님께 이렇게 지면으로 인사를 드리게 된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전 이 곳 상아탑에 와서 우매한 마도사들이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고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을 얕보고 있다는 참으로 어이없고도 비분강개할만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께 청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1671년 10월 11일 오후 8시 27층 S038 강의실에서 우매한 상아탑의 마도사들에게 아이언스 공작님의 위대한 명언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신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아이언스 공작님과 저희 누님의 앞 날에 언제나 밝은 등불이 함께 하기를 바라겠습니다. ps 이 일은 확정된 것이 오니 반드시 나가셔야 합니다. 황당. 당혹. 짜증. 분노. 이게 편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대체 무엇인가? 나보고 강의를 하라고?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내가 강의……? 난 너무도 당혹스러운 나머지 편지를 찢을 생각도 못하고 그냥 먹어버렸다. 종이가 조금 질기군. "뮤리아." "응?" "1671년 10월 11일 오후 8시에 위대하신 마도사이신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제자 아이언스 히로가 강의를 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니?" 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응. 그 소문은 상아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 소문이 퍼진 건 12시를 전후해서야.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제자가 강의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청자들이 줄을 섰지. 하지만 4, 5, 6학년들 중 30세 이하의 남녀에게만 신청서가 배분되었어.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신청자는 1000명이 넘는데 좌석은 100개로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좌석 배분은 번호표를 나누어 주었는데, 방금 끝이났어. 좌석을 얻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번호표가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는데…… 정확한 가격은 잘 모르겠어." 나의 인기가 이 정도 였단 말인가? 잠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강의를 해야하는 사람은 나고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상아탑 마법 학교의 고학년들이다. 당연 굉장히 머리가 좋다. 게다가 내 강의를 듣기 위해 이런 난리가 난 것을 보면 나의 강의에 굉장한 기대를 걸고 있음이 당연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강의를 뭣 같이 한다면…… 맞아 죽을 지도 모르잖아! 옵션으로 굉장한 쪽팔림까지 감수해야 하고. 으음, 대체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는가? 강의를 취소하라고?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일런스 지니가 누군가? 당대 최고의 참모다. 이 인간이 나보고 까라고 하면 무조건 까야한다. 사일런스 지니가 이번 일을 계획한 것이 나를 엿 먹이려 한 건지, 아니면, 잠시 헤까닥 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사일런스 지니가 결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채, 이번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다. 왜냐하면 지니는 당대 최고의 모사니까. 만약 내가 지금 상황에서 '저 강의 못 합니다. 절대 못 합니다. 그냥 배째세요. 아이씨! 죽어도 못 해!' 라고 말한다고 가정을 하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 당연 나의 지적인 이미지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나의 훌륭한 성품은 추락을하다 못해 땅을 뚫고 지하로 들어간다. '진짜 짜증난다. 지가 이그리드님의 제자면 단가.' '겨우 강의 한번 하는 거 가지고 드럽게 생색내네.'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어. 어째 이그리드님은 그런 놈을 제자로 키운거지?' '내 생각에 제자라는 것도 다 구라인 것 같아. 강의를 못하겠다고 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잖아.' '맞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아이언스 공작의 이미지는 드럽고, 치사하고, 싸가지 없는 구라돌이라고 인식이 되고, 심각한 경우에는 이 일이 정치상에 가지 번져 이번 협상이 완전히 파토 날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노처녀가 말했던 대로 청색산맥에 뼈를 묻어야만 한다. 물론 아직 내가 죽진 않았으니 생매장을 당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면 나는 루시아와 결혼도 못 해보고 죽는 불쌍한 총각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며 '씨바, 그냥 강의 할 걸' 이라고 외치고 다녀야만 한다. "안돼! 절대 그렇게 될 수는 없어!"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 섰다. 여기서 무너질 아이언스 공작이 아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투자했던가?(사실 별로 투자하지도 않았다. 자고 일어나니 공작이 되있고, 다음 날 참모총장이 되있고, 그 다음 날 외교부 장관이 되어 있었다. 씨바, 생각해보니 진짜 노력한 거 없네) 어떻게 해서든 이번 강의를 성공적을 마쳐 아이언스 공작의 지지기반을 더욱 확고이 하고 나의 추종 세력을 육성하여 단단한 권력의 아성을 구축해야겠다. 한번 앉아 본 권력 자리를 어찌 내주리오! 일단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래. 먼저 강의의 주제를 정하는 거야.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강의 주제를. 그리고 강의 주제에 맞추어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강의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강의에 입을 복장과 머리 스타일, 말투와 어조 등등을 다 계획해야 하니…… 으음, 시간이 빠듯하군. 잠깐! 강의 날짜가 언제였지? 난 손가락을 입 속에 넣어 아까 삼킨 편지를 꺼내보려 하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뮤리아에게 물었다. "강의 날짜가 언제지?" "10월 11일." "어제가 10월 10일이었지?" "응." "그럼 오늘이 10월 11일이지?" "응." "그럼 내년에 강의 하는 거야?" "아니. 올해 하는 건데." "그럼 오늘 강의를 하는거야?" "응." 이런 빌어먹을! 그럼 지금 몇 시간도 채 안 남았잖아. 이 시간 동안 나보고 뭘 어쩌라고? 으으, 사일런스 지니. 니가 날 제거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설마 나의 정치적 세력이 두려워 진거냐? 니 자리를 전부 빼앗았다고 화가 난거야? 사실 내가 뺏지도 않았잖아. 전부 니가 준 거지. 으아!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7시 45분. 운명의 초시계는 점점 흘러 간다. "이제 그만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시간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시끄러! 니가 뭔 상관이야!?" "미, 미안해…… 나, 난 그냥……." "그냥 찌그러져있어!" "아,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줘." 난 미안한 마음을 감추고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뮤리아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윽! 강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생각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대체 어떻게 마법에 대해 강의를 한단 말인가? 나 같은 사이비 마법사가 어떻게 강의를! 어억! 너무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신경성 위궤양이…… 으윽, 갑자기 맹장이 터지려 그런다. 복막염인가?…… 허억! 두통까지…… 허걱! 이빨이 아파. 치통!…… 으악! 갑자기 배가. 생리통…… 커억!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머리가 완전히 비었어. 깡통! 씨바…… 종합병원에 데려다 줘. 똑똑똑-!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어떤 놈이 문을 두드려? "아이언스 공작님 계십니까?" 이 목소리는……? 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빛나는 미소. 더욱 빛나는 머리카락. 더더욱 빛나는 눈빛. 아! 완전히 전구가 따로 없다. "아직 이 곳에 계셨군요. 어서 강의를 하러 가십시오.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수 많은 학생들이 자리에 착석해 있습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이고도 인간이 저리 뻔뻔하게 웃을 수가 있단 말인가? 허억! 다시 위궤양이. "너, 너……." 난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지니를 쏘아 보았다. 지니의 멱살을 잡고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심정으로 한판 승부를 벌이려는 순간. "아! 오전에 마법진을 통해 저희 누님께 경과를 보고 드렸습니다. 그리자 루시아 공주님께서 마법진으로 이 편지를……." 지니의 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편지. 난 순식간에 그 편지를 낚아챘다.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진작 건내 줬어야지요!" "죄송합니다. 일이 조금 바빠서. 아! 저희 누님께서는 시간이 없으신 관계로 편지를 못 쓰셨지만 그 마음만은 언제나……."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마음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지요?" 몰라서 묻냐? 난 지니에게 신경을 끄고 재빨리 편지를 펼쳐 보았다. 오오! 이것은 루시아의 필체가 아닌가?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이 글자 하나 하나에 녹아 있는 듯 하구나. 글자의 모습 또한 그대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기 그지 없으니 내 이 편지를 읽는 동안 그대의 얼굴을 떠 올리리오. 난 편지를 읽기 전에 먼저 편지를 코에 대고 살짝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아아! 그녀의 향긋한 체취가 이 편지지에도 베어 있구나!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아이언스 공작님께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보내주신 경과문을 읽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상아탑의 마법사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신다는 얘기가 쓰여져 있더군요. 저는 그 것을 보고 제가 그 곳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답니다. 그 곳에 있었더라면 아이언스 공작님의 훌륭하신 강의를 감히 청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잘 하실 거라 생각 하지만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걱정하는 마음에 몇 마디 올리겠습니다. 강의를 하실 때, 절대 주늑들지 마시고 당당하게 강의 하세요. 아이언스 공작님은 훌륭하신 마법사시니 떨지만 않는다면 잘 해낼 수 있으실 거에요. 그리고 지금은 비록 곁에 없지만 제가 언제나 아이언스 공작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 주세요. 부디 강의를 훌륭하게 끝마쳐서 아이리스의 위엄을 드러냄과 동시에 저에 대한 마음을 보여 주시길, 소녀 간절히 기원하겠어요. 언제나 몸 건강하세요. "어흐흐흑!" 이렇게 감동적이고, 슬프고, 아름다운 편지라니! 나의 차가운 가슴에 불씨를 당기는 그대의 이름은 바로 루시아. 그대의 마음은 잘 알았소. 내 그대를 위해 최선을 다해 강의를 하리라! 무사히 강의를 끝마쳐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확실하게 보여주리라!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알아서 뭐하게요?" "그냥 궁금해서 그럽니다." "제발 부탁이니 남의 연애 생활에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전 아무도 모르게 루시아 공주님과의 사랑에 불씨를 당기고 싶으니." 이제 방법은 하나 뿐이다. 당당하게 가슴을 쫙 펴고 멋지게 강의를 하는 수 밖에. 나의 완벽한 능력을 보여주도록 하지.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 어렸을 때 꿈 중에 46번 째 꿈이 선생되는 거였다. 공무원이니 상당히 안정적이고, 합법적으로 사람을 구타할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여고로 발령 받기만하면 꽃밭 속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거다. "저는 이만 중요한 강의를 하러 가야하니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이 곳에서 쉬시면서 대세의 흐름을 어떻게 아이리스 쪽으로 돌릴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이나 하고 계십시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대세의 흐름을 어떻게 아이리스 쪽으로 돌릴지에 대한 심각한 고찰은 다음 기회에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훌륭하신 강의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다면 이 인간도 내 강의를 듣는다는 얘기? "순번표는 받았나요?" "전 특별 참관인 자격으로 공작님의 강의를 듣습니다." 그래. 너 잘났다. 난 지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정말 운 좋으신 겁니다.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인 제 강의를 듣게 되다니. 이 일은 정말 다시 없을 영광인 것입니다. 제 강의를 잘 듣고, 제가 어떻게 강의를 했는지 루시아 공주님께 꼭 말씀드려 저와 루시아 공주님의 사이를 진전시켜 주십시오. 만약 일이 잘 풀려 제가 부마가 된다면 사일런스 백작님께도 한 자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리도 저를 생각하여 주시니 제가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일만 잘 되면 제가 참모총장 자리를 드리도록 하지요. 옵션으로 외교부 장관 자리도 추가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강의에 늦지 않으려면 빨리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도록 하지요." 우리의 대화를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뮤리아는 내 말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서며 지니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뮤리아양도 계셨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어어! 얼굴이 붉어졌어. 설마 지니에게 반한 것은 아니겠지? "뮤리아양도 같이 가시지요." "예." 다소곳한 대답. 더욱 더 붉어지는 얼굴. 역시 얼굴만 잘 생기면 어떤 종류의 여자든 다양하게 꼬실 수 있다는 거냐?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난 인상을 쓰며 뮤리에게 말했다. "넌 순번표도 없잖아!" 지니가 답했다. "뮤리아양도 특별 참관인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인정이 되어서요." 나와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 너와 특별한 관계겠지. * 강의실을 향해 이동하는 나의 발걸음은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사실 내가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난 지금 강의를 하러 가는 거지, 혼나러 가는 게 아니니까. 강의실이 가까워 질수록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그러더니 강의실에 거의 도착을 하자 사람 수는 장난이 아니게 늘어났다. 길을 뚫고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다. "이 사람들은 뭡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순번표를 구하지 못해 아이언스 공작님의 강의를 들을 수 없는 분들이십니다." "그럼 집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여기서 알짱거리고 있어요?" "아마도 아이언스 공작님의 얼굴이라도 보려 그러는 것이 아닐까?" 지니는 그 와중에서도 뮤리아를 챙기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뮤리아양?" "예." 기어들어가는 뮤리아의 목소리. 아아! 저 목소리에는 소녀의 수줍음이 가득하다네! 아! 짜증난다네! 인파들에게서 뮤리아를 보호하려는지 살짝 감싸 안고 걸음을 옮기는 사일런스 백작. 그리고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이대로 죽어도 좋아' 라는 표정을 지은 채, 기절하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잡아내며 걸음을 옮기는 뮤리아. 사일런스 지니. 외교 사절로 왔으면 일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여자나 꼬시고 있다니. 당장 돌아가서 노처녀에게 이르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남의 동생가지고 뭘 궁시렁거리는 거에요? 사일런스 백작은 매일 같이 여자와 노닥거리면서도 일만 잘해잖아요. 그런데 아이언스 공작님은 뭡니까? 하는 일도 없이 매일 같이 빈둥거리고, 여자 꼬실 재주도 없어서 이상하게 생긴 매와 놀고 있고. 당장 가서 반성문 원고지 1000매 써와요.' 욕 먹을까 두렵다. 원고지 1000매면 책 한권 분량인데 반성문으로 책 만들 일 있냐? "왜 저한테는 괜찮냐고 안 물어봐요?" 옆에 있는 여자만 돌보지 말고 나를 좀 돌보란 말이다! "그야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관리가 뛰어난 분이시니, 굳이 제가 챙겨드리는 것은 공작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사일런스 지니. 언제 어느 순간에서의 돌발적인 질문이라도 절대 막히지 않고 대답하는 군. 어찌어찌, 겨우겨우 우리는 강의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강의실 안은 넓고 큰데 구조가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있었다. 꼭지점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고 그 앞쪽에는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강의하는 사람을 잘 볼 수 있게 함인지 강의하는 자리가 가장 낮은 곳에 있고, 좌석이 단계별로 높은 곳에 위치한 형태였다. 짜작- 짜작작-! 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난 깜짝 놀랐다. 내가 강의실에 발을 들여 놓은 순간, 착석해있던 전원이 일어나더니 열심히 박수를 치는 것이다. 특별히 나의 위대함을 찬양하기 위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옆사람이 치니까 따라서 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옆사람은 대체 왜 치는지 그걸 잘 모르겠다. 혹시 신기해서 치는 건가? '저 사람이 이그리드님의 제자야?' '그런 것 같은데.' '너무 평범하게 생기지 않았어?' '맞아.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은 당대 최고의 미남이라고 했잖아.' '완전 속았어. 이그리드님의 제자라면 진짜 잘 생겼을 줄 알았는데.' '옆에 있는 남자는 어때?' '우와! 저 남자 죽인다. 진짜 잘생겼어.' '어머! 생긴 게 완전 예술이다.' '그래. 저 사람이 이그리드님의 제자라면 믿겠다.' '그런데 옆에 있는 계집애는 누구야?' '못 생긴 주제에 어디에 감히 붙어있는 거야!' '강의 끝나고 저 남자에게 데이트 신청이나 해야겠다.' '저 남자 이름이 뭐야?' '사일런스 지니 백작이래.' '뭐? 백작? 생긴 것도 잘 생긴데다가 능력까지 좋네! 아아! 정말 너무 멋있게 생겼다. 인간이 저렇게 멋있게 생겨도 되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진짜 옆에 있는 평범하게 생긴 누구와는 굉장히 대비된다.' 듣기 싫은데도 계속 들려온다. 그제서야 나는 이 박수 소리의 대부분은 여자들이 치는 것이며,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일런스 지니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궁시렁거리며 지니의 외모에 대해 극찬을 하고, 나의 외모에 대해 씹어 대는 여자들. 나도 나름대로 꽤 잘 생겼다고 자부를 했건만 지니의 옆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 메주 취급 받는 구나. 정말 너무들 하는 군. "그럼 훌륭한 강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니는 화사한 웃음을 나에게 지어 보인 다음, 뮤리아와 함께 특별 참관인 자리에 앉았다. 특별 참관인 자리는 굉장히 특별하게도 가장 앞쪽에 있었다. 별로 안 특별한가? 그런데 앉아있는 엘프 중 특별한 엘프는 있었다. 다른 엘프에 비해 특별하게 덜 떨어진 엘프. 그리고 그 특별하게 덜 떨어진 엘프와 놀고 있는 특별하게 덜 떨어진 매. 이제는 라이 패밀리들이 이 곳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히는 구나. 그런데 드래곤 7마리랑 싸운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니? 난 무대의 정중앙에 놓인 탁상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제가 바로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수제자 아이언스 히로입니다. 오늘 제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주신 여러분들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특별 강의를 위한 준비인지 강의실에 마법을 걸어 놔 목소리가 잘 울려퍼지도록 해 놓았다. 그것도 아주 청아하게. 그런데 중요한 건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끝나고 빨리 데이트 신청이나 해야겠다.' '내가 먼저 할꺼야. 넌 기숙사로 돌아가 무좀이나 치료해.' '넌 남자 친구 있잖아.' '지금 이 순간 헤어졌어.' '나쁜 년! 감히 양다리를 걸치려 하다니!' '시끄러. 무좀녀! 발바닥에 무좀약이나 바르고 떠들어.' '흥! 변비 때문에 매일 아침 두 시간 동안 화장실에 힘주는 주제에.' '뭐!? 치질 걸려서 의자에 앉아있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날 모욕해?' 계속해서 들려오는 궁시렁 거리는 소리. 이 곳에 있는 여자들의 관심은 온통 지니를 향하고 있다. 난 완전 꿔다 놓은 보릿자루다. 그나마 남자들이 나를 조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이 엄청난 소외감과 분노감! 이건 나에 대한 모욕이자, 감히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수제자인 나를 향한 정면 도전이다. 좋아! 그 도전을 받아주도록 하지. 내가 얼마나 창조적으로 강의를 하는지 잘 경청하고 뼛속 깊숙히 새겨라! 쾅-! "주목!" 난 손바닥에 얼얼한 것도 참으며, 앉아있는 남녀를 쏘아 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상아탑 인사들에게 굉장한 감사를 드립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전부 바쁜 시간을 쪼개서 왔을 거라 예상합니다. 기숙사에서 굴러다니다가 심심해서 온 분도 계시겠지만, 본인이 굉장히 부끄러워할테니 굳이 그 점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기왕 여기에 왔으니 뭐 하나라도 건지는 것이 있어야 여기까지 걸어 온 노동비 정도는 벌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원래는 특별히 마법의 역학 이론과 상대성 법칙에 대한 만유인력 법칙의 유전자 상대성 우월 이론을 결합한 초특급스페셜울트라매가파워 이론에 대한 강의를 하려 했으나 어차피 알아들을 사람도 없을꺼라 생각하기에 특별히 다른 주제로 강의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강의할 주제는 바로 이겁니다." 난 백묵을 들고 뒤에 있는 칠판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렸다. <외모 지상주의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 순간, 경악을 하는 청중들. 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는 강의를 하러 왔으니 어디까지나 강의만하면 된다. 굳이 강의의 주제가 마법에 한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저희는 마법학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왔습니다." 난 그 남학생에게 말했다. "그럼 밖으로 나가세요." 입을 다무는 남학생. 그러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불만에 가득 찬 궁시렁거리는 소리. 난 칠판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강의를 들으시는 분들 중 한명을 추첨하여 특별히 여기 계신 사일런스 지니 백작님과 하루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의실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흐르고…… 우와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 천둥과 같은 박수 소리. 전부 여학생들이 치는 거다. 나의 데이트를 즐길 자리를 마련해 줘도 저렇게 좋아할까? 외모 지상주의의 문제점이 다시 한번 드러나는 순간이군. 강의실 안에 어느 정도 조용해 지자, 난 강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중에선 친밀감을 유지하며 친해지닌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얼굴만보고 스쳐지나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첫 번째로 인식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외모입니다. A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을 합시다. 이 A는 집도 잘 살고, 능력도 좋고, 품행이 바른 아주 착실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A는 키 165에 몸무게가 85kg, 허리는 40인치인 뚱보에다가 얼굴에는 분화구가 여기저기 뚫려있고, 몸에 붙은 살덩이에서 개기름이 좌르르 흘러내립니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이 A와 우연히 마주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떠한 생각이 들까요? 당연 '이건 아니다' 다른 생각이 강렬하게 머리를 두드릴 것 입니다. 특히 여자분들은 더 하겠지요. 그리고 A가 왜 이런 몸매를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려고 하지 않은 채, A는 뚱뚱한 돼지라는 인식을 받을 겁니다. 예를 들면, 여자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진짜 뚱뚱하다. 완전 돼지야. 인간이 얼마나 나태하면 저런 몸을 가지게 될까? 저래서 앞으로 걸아다닐 수나 있을까? 혹시 옆으로 굴러 다니는 거 아니야? 아우! 징그러워!' 이것이 A의 첫인상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A의 첫인상일 뿐 전부는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A와 친구가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A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A의 집이 잘 산다는 것과, A가 능력이 있다는 것과, A가 굉장히 착하다는 걸 말이죠.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A를 다시 인식하게 됩니다. 'A가 생긴 건 완전 쉣 인데 그래도 전체적으로 괜찮은 애야.' 그리고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도 A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생긴 것만 빼면 괜찮은 인간이니까요. 시간은 점점 흐르고 A는 많은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A는 친하게 지내는 여성들 중 b라는 여성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 옵니다. 평소 여자에게 관심이 없던 A지만 b가 귀엽게 생겼고 미소를 지을 때마다 볼에 보조개가 파이는 모습에 완전 반했거든요. 얼마 동안 그 마음을 혼자서 간직하고 있던 A는 b에게 고백을 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밤을 새서 러브 레터를 쓰지요. '사실 나 전부터 너를 좋아해 왔어. 나의 마음은 스카이 콩콩처럼 미친 듯이 뛰고, 나의 머릿속은 언제나 뒤죽박죽이야. 나는 너를 내 몸에 붙어있는 살들만큼 사랑해.' 등등의 내용을 쓰지만 별로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A는 종이를 구겨 버리고, 다시 쓰고, 버리고, 다시 쓰고를 무한 반복하며 며칠 밤낮을 새서 간신히 러브 레터를 완결 시킵니다. 그리고 그 것을 들고 b를 만나러 가지요. b를 만나기만하면 러브 레터를 것 내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입은 열리지 않고 결국 튀어나온 말은 '오늘 날씨가 참 좋지?' '너 밥 먹었니?' 등등의 헛소리 뿐. 몇번을 b의 앞에서 서성거리던 A는 결국 결심을 하고 a에게 러브 레터를 건냅니다. '이거 내 마음이야.' A는 러브 레터를 전해주고 새빨게진 얼굴로 집까지 뛰어 옵니다. '어쩌지? 내 마음을 받아 들일까? 아아! 난 몰라.'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요." 난 말을 멈추고 강의실 안을 둘러 보았다.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운 채, 내 얘기를 집중하고 있었다. 으음,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 어렸을 때 45번 째 꿈이 구전 동화 강연자가 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고등학생은 대가리가 너무 크니 어린 유치원생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b는 A의 마음을 받아들였을까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 백날 상의를 해봐라. 그런다고 답이 나오냐?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3할 정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그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분?" 6할 정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손 안 드신 분은 뭐하시는 분입니까? 어깨가 부서졌습니까? 다시 기회를 줄테니 제대로 손 드세요. 만약 안 들면 쫓겨 납니다.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시는 분?" 2.5할 정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그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분?" 7.5할 정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그 사이에 마음 바뀐 사람들이 많군. 난 아까 봐두었던 평범하게 생긴 남학생을 지목하였다. "거기 머리 샛노랗고 촌스럽게 생긴 학생. 어째서 b가 A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요?" 그 남학생은 촌스럽다는 말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성격이 좋고, 능력이 좋아도 생긴 것에 매우 많은 문제점이 발견된다면 b는 결코 A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솔직히 키 165cm에 몸무게 85kg 허리둘레 40인치면 조금 심각한 거 아닌가요? 정말 옆으로 굴러다녀야 하잖아요." 난 이번에 조금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을 지목하였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 정도. 딱 내 스타일이네. "이 남학생의 옆에 옆에 옆에 뒤에 옆에 대각선 뒤에 왼쪽 옆에 앉은 여학생은 어떻게 생각하지요?" 촌스럽게 생긴 남학생의 옆에 옆에 옆에 뒤에 옆에 대각선 뒤에 왼쪽 옆에 앉은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말하기 전에 머리를 쓸어 넘기고, 살짝 웃음을 짓는 걸로 봐서 자신의 외모에 꽤 자신이 있나 보다. "저의 의견도 방금 말한 남학생과 동일합니다. 외모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분명 잘 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A의 외모 정도라면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키나 얼굴은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키가 작고 얼굴이 못난 것은 A의 탓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몸무게가 85kg에 허리가 40인치라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A가 얼마나 나태했는 지를 보여주는 증거니까요. 비만은 곧 나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남자와 사귀는 것은 저로서도 사양하고 싶네요." 재치있는 여학생의 마지막 말에 학생들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으음, 좋았어. 이제 좀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군. "이번엔 b가 A의 마음을 받아드렸다고 생각하시는 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손들어 주세요." 두, 세명 정도가 손을 들었다. 의외로 참여율이 높다. 일반 입시 위주 교육에서는 손들라 그러면 절대 안 드는데. 난 그 중 한 여학생을 지적하였다. 왜냐고? 그야 남자 목소리보다는 여자 목소리가 듣기 좋으니까. "A의 외모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람은 외모가 전부가 아닙니다. A의 성격이 좋고 정말 진심으로 b를 좋아한다면, b도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말도 잘하는 구만.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침 넘어가는 소리들. 과연 b는 A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것인가? 아니면, 냉정하게 거절하였을 것인가? "b는 A의 마음을 거절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탄성. 모두들 궁금해하며 내 얘기를 기다린다. "그럼 다시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지요. 다음 날, A는 친구들을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그 친구들 중에는 b도 끼어있었지요. 하지만 그 날 A는 b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b는 나오지 않았거든요. A는 며칠을 계속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밤을 지샙니다. '내 마음을 받아 줄까? 아니면, 거절할까? 제발 받아줘야 할텐데.' 그리고 불안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b와 함께 데이트를 하고, 손을 잡고, 서로의 어깨를 감싸는 등 긍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A가 b를 다시 만난 것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어찌할 줄 모르고 얼굴을 붉히며 서 있는 A에게 다가온 b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해. 니 마음은 고마워. 나도 너를 좋아해. 하지만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지,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야. 정말 미안해.' 이 때 A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당연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느낌이겠지요. A는 다리가 풀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억지 웃음을 지으며 간신히 대답을 합니다. '으응. 괜찮아.' b는 A를 반하게 만들었던 그 예쁜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그래.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지내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둘은 이미 좋은 친구가 되기는 글렀습니다. 어찌되었든 A는 b에게 차인 것이니까요. 후에 A가 b에게 말을 걸면 b는 '이 애는 나를 이성으로 보고 있어' 라는 생각을 할테고 A는 그 반대로 '얘가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둘은 일정 선을 그어 놓고 더 이상 접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난 여기까지 말한 후, 다시 학생들의 반응을 살펴 보았다.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대체적으로 내 얘기를 재밌게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잠시 제 외모에 주목해 주십시오. 어떤 생각이 듭니까? 어떤 사람은 못 생겼다고 생각하겠고, 또 어떤 사람은 잘 생겼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대체적으로 평범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수긍하는 분위기. 이봐! 이럴 때는 잘 생겼다고 말해야지. "그럼 만약 제가 b에게 러브 레터를 주었다고 가정합시다. b는 제 마음을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거절 할까요?" "거절 해요!" 이구 동성. 쓰읍, 내가 어디가 어때서 거절을 해? 난 한창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잘 나가는 공작이라고! "그럼 여기 특별 참관인석에 앉아서 옆에 앉은 뮤리아양을 다정하게 보살피고 있는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b에게 러브 레터를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순간, 소란스러워 지는 강의실. '아! 뭐야 사일런스 백작님이 뭐하러 b에게 러브 레터를 줘? 나한테 준다면 모를까.' '왜 그걸 너한테 줘? 나한테 주지.' '사일런스 백작은 내꺼야.' '그런데 옆에 앉아있는 저 계집애는 누구야? 별로 생기지도 않은게 어디서 꼬리를 치고 있어!' '니가 더 안 생겼어.' 지니의 인기 때문에 강의가 힘들 지경이다. 빨리 화제를 돌려야 겠다. "사실 b가 거절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럼 제가 러브레터를 건냈을 때, b는 어떻게 거절할까요? 거절 패턴은 아까 말했던 것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이 거절 뒤에 숨겨진 b의 생각이 아주 중요하지요. 아까 b는 A의 러브 레터를 받고 교제 신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 러브 레터를 받고 교제 신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A와 외모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점이 동일하다고 가정을 하겠습니다. 즉, 성격이나 집안 친밀도 등이요. b는 A와 굉장히 친하였습니다. A는 친절하고 성격도 좋은 등 여러 장점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b는 절대로 A를 이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쩌면 A의 뚱뚱한 외모를 보고 설마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b는 더욱 A와 친하게 지냈고 A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혹시 이 애도 어느 정도 나를 좋게 보고 있지 않을까? 아니, 최소한 싫어하지는 않을꺼야. 싫어하는 애와 이렇게 친하게 지낼리 없으니까.' 결국 A는 혼자만의 상상을 하다 b에게 고백을 하였고 차였습니다. 그리고 저도 b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였습니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저 여자에게 차인적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제가 찼을 지 언정." 우우우우-! 지축을 흔드는 야유 소리. 모두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소리친다. 우우우-! 모두들 엄지를 치켜 세운 다음, 손목을 비틀어 엄지를 아래로 내린다. 우우우-! 그리고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높히 든다. Fucking!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 속으로만 손가락을 들었다. 나의 지적인 이미지를 이런 곳에서 망칠 수는 없으니.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절대 놓치지 마시고 잘 들으세요. 거기 왼쪽에 있는 검은 머리 여학생 옆에 있는 남자의 여자친구로 보이는 여학생. 졸지 마세요. 한번만 더 졸면 퇴장입니다. 그럼 이제 b의 심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제가 고백을 했을 경우를 살펴보지요. 제가 b에게 러브 레터를 건냅니다. 그러자 b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미안해. 니 마음은 고마워. 나도 너를 좋아해. 하지만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지,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야. 정말 미안해.' 이렇게 말입니다. 그럼 이 때 b의 심정은 어떨까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얘가 전부터 나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나의 섹시한 외모에 반할걸까? 아니면, 나의 귀여운 미소에 반한 걸까? 아무튼 보는 눈이 있네. 시력 좋나 봐. 나도 꽤 인기가 있네. 정말 예뻐서 세상살기 힘들다. 또 다른 남자들이 고백해 오면 어쩌지? 아! 예쁜 것도 죄야.' 뭐, 이 정도로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대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반면, A에게 러브 레터를 받았을 때, b의 심정은 어떨까요? 과연 제가 러브 레터를 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인기 있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고 기뻐했을 까요? 안타깝게도 그건 아닙니다. 그 때 b는 이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아! 뭐야 진짜! 뚱뚱한 돼지 주제에 감히 누굴 넘 봐!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설마 내가 지랑 사궈줄꺼라 기대라도 했단 말이야? 불쌍해서 조금 친하게 지내줬더니 이젠 기어 오르네. 그 돼지가 이제까지 날 이성으로 봐라봤다니. 아! 기분 나뻐.' 뭐, 이 정도로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제 러브 레터를 받았을 때는 자신이 다른 여자들보다 예쁘기 때문에 러브 레터를 준 거라 생각을 하고 자신의 미모에 대한 우월감과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A가 러브 레터를 건냈을 때는, 자신이 다른 여자들보다 만만하고 우습게 보여서 감히 러브 레터를 건냈다고 생각을 하여 분노와 짜증을 느꼈습니다. A의 뚱뚱하고 못 생긴 외모는 러브 레터를 받은 여자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잠시 침묵. 모두들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다. 그리고 나도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갑자기 강의를 하다보니 친구 녀석의 일이 생각나 그대로 읊조리긴 했다만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지? 아! 참고로 난 절대 b에게 고백한 적 없다. 그냥 어디까지나 가정한 것 뿐이다. 내가 고백을 했어봐. b는 당장 '사실 나도 예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니가 고백하지 않았으면 내가 고백하려 했는데. 하지만 너는 너무 멋지고, 잘생기고, 능력도 출중해서 감히 나 같은 여자가 바라 보는 것조차 힘들었어. 하지만 이렇게 니가 먼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니, 너무 기뻐. 나 지금 죽어도 좋아.' 이렇게 말하며 나의 품에 안겨 올 것이다. 물론 지금 나에겐 루시아가 있으니 이렇게 대답하는 수 밖에 없다. '죽어도 좋다면, 그냥 죽어라. 난 루시아와 데이트를 해야하니. 아! 장례식 때는 꼭 불러줘. 부조금 내줄게.' 물론 내가 꽁돈을 그냥 날릴 리는 없다. 내가 미쳤다고 부조금을 내냐? 사실 여기에는 깊은 속 뜻이 숨어있다. 3만원 정도 부조금으로 내고, 상갓집에서 밤새 고스톱을 쳐 10만원 정도 딸 생각이다. 내 실력 정도면 상갓집에서 10만원 따는 건 라이레얼 품에 안기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지. 만약 모여있는 사람들이 고스톱을 안 친다면, 섰다도 자신있다. 상대가 38광땡을 잡으면, 나는 장사(10, 4)를 잡으리. 단풍과 흑싸리 두 장으로 담요 위를 평정해 버리겠어! "비약이 너무 심하신 것 같은데요. 설마 그래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인데, 그 정도로까지 심하게 생각을 했겠어요?" 누군가 봤더니 초반에 의견을 얘기했던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 정도 심하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상당히 불쾌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그 쪽이 A에게 러브 레터를 받았다면 기분이 좋았을까요?" 당장 대답을 하지 못하는 여학생. 아무래도 아닌 쪽에 속하겠지. "그럼 아까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서…… 아니, 상황을 조금 바꾸어 보도록 하지요. b는 C를 좋아합니다. C는 외모도 잘 생겼고, b와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 굉장한 친밀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사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A가 있고 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C에 이은 또 다른 신종 캐릭터 D가 있습니다. D는 외모가 굉장히 잘 생겼고, 성격도 굉장히 좋아 주위 여자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습니다. D도 b를 좋아하여 고백을 하였습니다. b는 D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지만 예전부터 함께 했던 C와 헤어질 수 없어 그 고백을 거절합니다. 거절 패턴은 전과 동일합니다. 현재 상황은 b와 C가 반쯤 사귀는 상태고 A와 저와 D는 b에게 차인 상황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A와 저와 D는 b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한테 거절 당하고 많이 생각해 봤는데 그래도 난 니가 좋아. 난 절대 널 포기할 수 없어. 니가 나를 마음에 들어할 때까지 계속해서 니 옆에 머물겠어.' 그럼 이 때 b는 어떻게 생각을 할까요? 당연 개인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먼저 제 경우에는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 정말 예쁜 건 알아 가지고. 계속 옆에 붙어 있겠다고? 나한테 그 정도로 반했나? 좀 귀찮은데.' b는 약간의 우월감과 동시에 약간은 귀찮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b의 옆에는 저보다 잘 생기고 친밀도도 높은 C가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D의 경우입니다. '아! 이렇게 잘 생긴 남자가 뭐가 아쉽다고 나를 좇아 다니는 걸까? 나한테 그렇게 매력이 있었나? 주변에 다른 여자애들도 많은데 그 애들 다 내팽게 치고, 임자 있는 날 좇아다니다니! 아무래도 나한테는 다른 여자에게는 없는 매력이 숨겨져 있나 봐.' 굉장한 우월감과 함께 D라면 영원히 자신을 좇아다녀도 상관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C와 D 사이에 끼게 된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원망스럽습니다. '몸이 두 개였다면 둘 다와 사귈 수 있는 건데. 일처다부제였다면 양다리 걸치는 건데.' 마지막으로 A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A가 '영원히 니 옆에서 머물겠어' 라는 말을 한 순간부터 b의 머리는 하얗게 변합니다. 그리고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낍니다. b는 선택을 합니다. A가 모르는 곳으로 도피 이사를 갈 것인지, 아니면 경찰에 신고를 할지. 구애(求愛)와 스토킹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잘생긴 남자가 하면 구애고, 키 165에 몸무게 85, 허리 40, 얼굴에 분화구가 뚫린 남자가 하면 스토킹입니다. 이것이 외모 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이 시대의 현실입니다." 한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말씀해 보세요." "사람은 외모가 전부가 아닌데 생긴 것을 가지고 사람을 그렇게 비하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b에게 고백한 A의 마음은 진심이었을텐데, 그렇게 되면 A의 마음은 대체 뭐가 되나요? 못 생긴 사람은 사랑도 할 수 없다는 얘긴가요?" 맞는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그걸 얘기하려 했었다. "맞습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외모가 전부가 아니지요. 지금 제가 얘기 할 것이 그것입니다. 이해가 쉽도록 아까 A의 경우를 다시 보도록 하지요. A는 b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였고, 후에는 스토커 취급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A는 초토화 된 외모를 제하면 전체적으로 괜찮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외모가 못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차여도 정말 비참하게 차였지요. 그가 건넨 러브 레터는 지금 갈갈이 찢어진 채 쓰레기통 속에 있으니까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 까요? 단지 A가 못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사실 여기서 A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 하였습니다. 그 실수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한 가지 하도록 하지요." 난 방금 정 말한 남학생을 지적하였다. "혹시 지금 사귀는 여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 없을 줄 알았다. "그럼 만약 그 쪽 앞에 성격과 집안, 능력 등등 모든 것이 같지만 외모만은 다른 두 여자가 서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럼 예쁜 여자를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덜 예쁜 여자를 택하겠습니까?" "그야…… 당연…… 예쁜 여자를……."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다. "뭐 당연 예쁜 여자를 택하겠지요. 여기 계신 모든 남자분들께서도 전부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럼 이번엔 아까와 마찬가지로 외모 외적인 부분은 전부 같지만,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과, 짧은 단발 머리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를 지닌 귀여운 여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름다운 여인? 아니면, 귀여운 여인?" 남학생들에게 손들기를 시켜보니 7 대 3의 비율로 아름다운 여인쪽이 더 많은 표를 차지했다. 나도 아름다운 여인쪽에 손을 들긴 했다. 사실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은 루시아였거든. 잠깐! 그러고보니 라이레얼도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를 지녔잖아. 으음, 하지만 성격이 좀……. "대체적으로 아름다운 여인 쪽이 더 많은 표를 차지하긴 했지만, 귀여운 여인 쪽도 싫다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미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는 것이지요. 어떤 남자는 병약한 미소녀를 좋아할 수도 있고, 어떤 남자는 건강하고 활달한 여인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남자는 두꺼운 안경을 낀 지적 스타일의 여인을 좋아할 수도 있고, 어떤 남자는 키가 작고 자그마한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건 로리콘에 속하니 조심하고요. 아! 전 절대 로리콘이 아닙니다. 아무튼 이렇듯 개개인의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연예 시뮬레이션에서는 다양한 스타일의 여자를 대거 등장시켜 플레이어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요. 물론 위의 열거한 스타일의 여인들은 전부 일정 수치의 미모를 밑바닥에 깔아두고 있습니다. 연예 시뮬레이션이 뭐냐구요? 궁금하면 정품 게임을 사서 해보세요. 그럼 얘기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각자의 미적 안목은 전부 다르고 절대적인 미의 기준치는 없습니다. 만약 미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면, 예쁜 여자 100명을 일렬로 세워 놓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고르라고 한다면 모두가 같은 여자를 골라야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여자를 고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겠지요. 개인의 미의 기준이 다르 듯, 시대가 요구한 미인의 조건도 다릅니다. 어느 시대에서는 살점이 풍만하게 붙은 여인을 최고의 미인으로 치는 반면, 다른 시대에는 끔찍할 정도의 개미 허리를 가진 여인을 최고의 미인으로 칩니다. 이것은 장소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어떤 곳에서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한 여인이 미인일 수도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아담한 키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이 미인일 수도 있습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른 미의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준으로 사람의 외모를 평가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의 취향 차이가 존재하지만요. 여기서 아까 예를 들었던 A는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b는 기준치 이상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곳에서 미의 기준은……." 샘플이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저 곳에 샘플이 앉아있구나. "사일런스 백작님. 옆에 계신 여자분을 데리고 잠시 나와주셨으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제 도움을 필요로하시니 제가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영광으로 알고 공작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냥 나온다고하면 될 것 같다 뭘 그렇게 길게 말하시나? 지니는 다정하게 뮤리아를 에스코트하여 앞으로 나왔고, 그 모습에 앉아있는 여학생들은 굉장한 분노감을 표시하였다. '저 년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다시는 걸어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놔야 해.' '머리털을 몽땅 뽑아 버려.' '아아! 저 년이 감히 사일런스 백작님의 손을 잡다니! 손목을 잘라!' 너무 과격하군. 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샘플을 쳐다 보았다. 본명 : 사일런스 지니 작위 : 백작 나이 : 22세 맡고 있는 직책 :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다. 요즘은 은근슬쩍 나에게 떠맡기고 있는 추세다 취미 :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다. 어찌보면 취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특기 :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다. 못 하는게 아무 것도 없다. 아마 뜨개질을 시켜도 1시간 안에 스웨터를 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그 중에 가장 잘하는 것을 하나 뽑아보자면 여자 꼬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모 : 183cm의 키에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전형적인 서구형 미남. 조각을 깍아놓은 듯 새하얗고 선이 확실하다. 눈빛은 온화하기 그지 없고, 얼굴에는 항상 환한 미소가 넘쳐 난다. 잘 생긴 이미지로는 부족한지 지적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왼쪽 눈에 외눈 안경을 끼고 있다. 문관(文官)이긴 하지만 무관(武官)의 속성도 같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몸에는 탄탄하게 근육이 붙어있다. 유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한마디로 완벽한 외모라고 할 수 있다.(아이씨! 진짜 비교 되네) "여기 있는 샘플은…… 아니, 사일런스 백작님은 현재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시킨 남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의가 끝난 후, 한분을 추첨하여서 일일 데이트 자리를 마련해 줄터이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 자꾸 떠드니까 강의하기가 힘드네요. 거기 여학생! 자꾸 꺅-꺅- 소리지르지 좀 마세요. 여기기 콘서트장입니까? 아니면, 그 쪽이 까마귀입니까? 떠드시는 분은 추첨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으음, 갑자기 너무 조용해 지는 군. "아이언스 공작님. 어째서 제가 일일 데이트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돕게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하라면 하세요. 데이트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잖아요. 그리고 이게 다 사일런스 백작님을 위한 겁니다. 그 동안 업무가 너무 과중했으니 가끔은 머리도 식혀야지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또 제가 도움을 드릴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봉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언제든 말해주마. 뮤리아는 상당히 불쾌하고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지니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니 보다. 하지만 어쩌겠니? 설마 지니가 정말로 너를 좋아할 거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이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처다보지도 말고 사일런스 지니 같은 남자는 손도 잡지 말아라. 괜히 상사병 걸려서 너만 손해다. 벌써 팬클럽만 해도 수천개가 넘는 지니가 뭐가 아쉬워서 너랑 사귀겠니. 뭐, 하룻밤 정도는 사귀어 줄 수도 있겠다만. "여기 계신 이 분은 사일런스 지니 백작님으로 현재 나이 22세의 잘나가는 청년입니다. 외모는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중요한 건 단순히 외모만 뛰어 난 것아 아니라는 것이지요. 천문, 지리, 화학, 수학, 국어, 영어, 윤리, 사탐, 과탐 등등 모르는 것이 없으며 수능 점수가 400점 만점이고 내신 또한 뛰어납니다. 사일런스 백작님이 못하시는 일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여자 분에게도 매우 친절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보기에는 몸매가 단순히 호리호리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탄탄한 근육이 붙어있습니다. 싸움도 굉장히 잘 하지요. 어디가서 이런 남자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물론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 오늘 여기 잘 오신 겁니다. 여자분들은 눈요기한 것만으로도 여기 온 본전을 뽑았을테고, 남자분들은……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 뻔 했군요. 뭐, 너무 비참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이런 남자가 길거리에 널려있는 것은 아니니. 아무튼 여기 계신 사일런스 백작님을 주목해 주십시오. 여기 계신 분들 중 사일런스 백작님이 못 생겼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단 한 분도 안 계실 겁니다. 그럼 이번엔 사일런스 백작님의 옆에 서 계신 뮤리아양을 주목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일런스 백작님과 뮤리아양을 같이 주목해 주십시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아마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겁니다. '남자가 아깝다.' 그렇습니다. 남자가 아깝긴 합니다. 하지만 사일런스 백작님의 생각은 다를 것입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지니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뮤리아양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외모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우욱-! 속에서 넘어 올 것 같아. 지니의 말도 안 되는 칭찬에 뮤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환하게 웃었다. 아봐! 설마 너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방금 사일런스 백작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아시겠지만 사일런스 백작님의 미의 기준은 굉장히 특이합니다. 물론 정말로 예쁜 여자와 사귀었을 때도 있지만 사일런스 백작님은 대체적으로 여자를 안 가리는 편이거든요. 어찌되었든 가끔 이렇게 미의 기준을 특이하게 놓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 꼭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얼굴이 잘 생겼다, 못 생겼다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은 관점일 뿐입니다. 절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는 잘 생긴 사람보다 못 생긴 사람에게 더욱 호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즉, 잘 생겼다, 못 생겼다 하는 것은 결국 개성에 불과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 사는 모든 남자들이 전부 사일런스 백작님처럼 생겼다고 가정을 해보십시오. 그렇게되면 잘 생긴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못 생긴 사람이 있어야 잘 생긴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 하는 것은 상대적 비교에 의해 가리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못 생긴 사람은 정말 못 생긴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잘 생긴 사람에 비해서 못 생겼을 뿐입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사람의 생김새는 잘 생겼다, 못 생겼다를 떠나 각자의 개성인 것이지요. 그럼 이제 아까 제가 말씀드리려 했던 것을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제가 아까 분명 A가 b에게 고백을 할 때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결정적인 실수는 바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A의 키가 165고 얼굴에 분화구가 뚫린 것은 A의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A는 85kg인 몸무게와 40인치인 허리는 분명 줄일 수가 있었습니다. 어떠한 여자는 날씬한 남자보다는 뚱뚱한 남자에게 더 호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b는 어떠한 여자가 아닌 일반적인 여자였기에 날씬한 남자를 좋아하였고, A를 잔인하게 차 버렸습니다. 만약 A가 정상 체중이었어도 b가 그렇게 했을까요? A가 진심으로 b를 좋아하였고, 정말 b와 사귀는 것을 원했다면, 고백을 하기 이전에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어야 할 것입니다. A가 노력을 해서 체중을 60kg까지 감량을 한 다음, b에게 고백을 하였더라면 b는 그 노력에 감동을 받아서 사귀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퇴짜를 놓더라도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을 하겠고, 자신을 위해 그 정도로 A가 노력했었다는 것을 영원히 기억해 주겠지요. A는 조금의 노력도 없이 b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기를 원했고, 결국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A의 실수는 이 것만이 아닙니다. 애초에 A가 b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이유가 뭐였는지 기억하십니까? 귀엽게 생겼고 웃을 때 보조개가 파이는 모습이 예뻐서이죠. 자신의 모습은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예쁜 여자만을 찾았으니 그 결과가 비참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대체적으로 수긍하는 분위기. 이제 슬슬 강의를 끝내야 겠군. 할 얘기도 얼마 없고, 목도 아프다. "이제까지 저는 키가 작고, 못 생기고, 뚱뚱한 A의 예를 통해 외모의 중요성에 대해 강의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는 등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타인의 외모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신경을 씁니다. 저는 한 때, 이런 고민을 한적이 있습니다. '외모가 정말 예쁘고 성격이 나쁜 여자와 외모는 쉣 인데 성격이 정말 천사인이 여자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걸까?' 사실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 외모는 사람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지만 일부분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공부를 잘한다' '성격이 좋다' 처럼 외모가 잘 생겼다는 것은 하나의 능력에 속합니다. 외모가 잘 생겼으면 남자는 30% 여자는 70%를 먹고 들어가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외모가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는 다른 것에도 치중할 수가 있습니다. 못 생겼는데 능력이 뛰어나고, 성격이 정말 좋다면 예쁜 사람과도 사귈 수 있는 것이고, 정말 잘 생겼는데 성격이 아주 뭣 같으면 아무도 사귈 수 없는 것 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외모는 하나의 능력입니다. 다른 능력과 마찬가지로 노력하면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피부에 각질이 있는 사람은 피부 관리를 해서 깨끗한 피부를 만들 수 있고, 뚱뚱한 사람은 운동을 하여 살을 뺀 건강한 몸을 만들 수 있고, 다리가 굵은 여자는 미용 체조를 하여 각선미를 키울 수가 있습니다. 주어진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하십시오. 외모는 어느 정도 개조가 가능하지만 고칠 수 없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가꾸어 놓은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갖고 다른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외모가 안 되면 다른 걸로 커버하면 되니까요. 좋은 성격, 많은 돈, 안정된 직장, 페라리 등등 커버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분명 잘못 된 일입니다. 그렇다고 외모를 완전 제하고 평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과 동시에 역시 잘못 된 일입니다. 외모를 포함하여 그 사람의 전부를 보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꾸미고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여러분들은 학생입니다. 지금 열심히 마법 공부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공부를 해서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을 내공이라 한다면,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외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공을 포기하고 내공에만 치중하다 보면 똑똑한 메주가 되기 쉽고, 내공을 포기하고 외공만 쌓다보면 골빈 킹카가 됩니다. 모두들 내공과 외공을 같이 키워 진정한 무림 고수가 되어 종국(終局)에는 중원을 평정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제 강의를 이만 마칠까 합니다. 오랜 시간 졸지 않고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잠깐의 침묵. 이어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치고 있다. 오오! 하늘이시여! 제가 정말로 강의를 무사히 끝마치신 겁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제 기대를 배반하지 않으시는 군요. 정말 훌륭합니다. 제 평생 이렇게 가슴에 와닿는 멋진 강의는 처음 들어 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정말 타의 모범이 되실만한 출중한 능력을 지니신 아이리스에 결코 없어서는 아니 될 지도자라 할 수 있으실 겁니다.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의 밑에서 일 한다는 것이 영광스럽기 그지 없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뭐 영광까지야…… 그런데 전부 맞는 말이긴 하네요. 하하하!" 아직까지 이어지는 박수 소리. 그래. 더욱 세게 쳐라! 손바닥이 부서질 때까지 쳐라! 나를 경배해라! 나의 위대함을 찬양해라! 문득 드는 생각. 저들은 내 강의에 감동해서 박수를 치는 걸까? 아니면, 내 강의가 끝났다는 것에 기뻐서 박수를 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 강의가 끝났으니 지니에게 접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박수를 치는 걸까? '꺄악! 사일런스 백작님!' '이제야 사일런스 백작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어. 그 동안 강의 듣느라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 '지니 오빠! 여기 좀 봐줘요.' '사랑해요, 지니 오빠!' '내가 데이트 상대로 뽑혀야 할텐데. 아아! 하느님! 제발 제가 사랑하는 사일런스 백작님과 데이트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시끄러, 치질 걸린 년아!' '하느님! 변비 걸린 년은 신경쓰지 마시고 저 좀 잘 봐주세요.' 이 것들이! 내가 방금 전까지 분명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고 강의를 해주었거늘 어찌 지니의 외모에 반해 나를 무시한단 말이냐? 외모가 전부가 아니야, 이것들아! 외모는 일부분일 뿐이니, 전부를 봐. 지니가 사실 외모 빼면 남는 것이…… 상당히 많군. 생각해보니 지니는 외모를 빼도 잘난 인간이잖아.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갑작스럽게 굉장히 지니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 갈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저기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는 지니의 팬클럽에게 얻어 맞을까봐 차마 후려 갈길 수가 없다. 강의를 한 사람도 나고, 주인공도 나인데, 어째서 지니의 인기가 더 많은 거지? 으윽, 생리통이 다시 도진다. 빨리 지니와 데이트할 여자를 추첨하고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야 겠다. 난 대충 아무 여자나 지적하려고 고개를 들다 깜짝 놀랐다. 저 살기 등등한 푸르딩딩한 눈빛은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나를 지적하지 않으면 평생 저주하겠어. 저주하겠어. 저주하겠어. 죽여버리겠어.' 허억! 잘못하면 살해당하겠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가? 내가 누구 하나를 선택한다면 선택 받지 못한 다른 49명의 여자들은 나를 찢어 죽이려 달려들 것이다. 으윽!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한단 말인가? 어떻게? 잔머리에 대가! 에드립에 천재! 나의 얍삽한 머리는 이 상황에서도 빠르게 돌아가며 순식간에 해결책을 내 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비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 것만 이 정도 일 줄이야! 역시 난 천재야! "그럼 이제 사일런스 지니 백작님과 일일 데이트할 상대 여자분을 추첨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3초 간의 함성과 함께 더욱 높아지는 박수 소리. 그렇게 기쁜가? "제가 추첨을 하면 아무래도 공정성이 떨어질 것 같으니 저를 대신하여 상아탑의 지존, 탑의 주인, 최고의 마법사이신 라이미안님께서 추첨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이미안님?" 난 특별 참과인석에 앉아있는 라이를 불렀다. 그런데 라이는 대답이 없다. 자세히 보니 엎드려서 졸고 있다. 아니, 자고 있다. 라이코스와 함께. 라이 패밀리는 지금 숙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이런 씨! 감히 내가 열심히 강의를 할 동안 엎어져 잤단 말이야? 안 되겠어. 너 뒤로 나가서 손들고 있어. 그리고 내일까지 나를 대신해 노처녀에게 제출할 반성문을 원고지 1000매에 써 와! 어찌되었든 저 덜 떨어진 엘프가 자고 있다면 나는 다른 방법을 취애야 한다. 한참 숙면을 취하고 있는 어린 아이를 뒤통수를 후려갈겨 깨울 수는 없지 않은가? 난 뮤리아를 보았다. "뮤리아. 너 설마 어제 나한테 진 빚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으, 응?" "니가 추첨해라." 난 말을 마치고 주저 없이 강의실을 뛰쳐 나왔다. 아아! 강의를 무사히 마치니 정말 기분 좋다. 친구의 경험과 여기저기서 주어 들은 얘기를 짬뽕해서 들려준 것이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사실 그 강의 내용은 나한테는 별로 쓸데 없는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나에겐 성격도 천사고, 외모도 천사인 루시아가 있으니까, 아아! 루시아 보고 싶다. 그런데 외모는 예쁜데 성격이 나쁜 일루니아양께서는 뭘하고 계실까? Part4. 크로니스 다시 등장 일루니아는 굉장한 분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뒹굴뒹굴, 데굴데굴. "신경 쓰이니까, 나가!" 루시아는 여전히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말했다. "어머,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말씀이 너무 경박하시네요. 어떻게 백작이나 되시는 분이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어요? 아이언스 공작님을 좀 본받으세요." "시끄러!" 일루니아는 바쁜 업무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잔 데다가 외교 사절로 간 사일런스 백작과 아이언스 공작 생각에 스트레스가 머리 끝까지 쌓여있는 상태였다. 가끔씩 샌드백으로 두드리던 아이언스 공작이 사라져서 그 스트레스를 풀지 못한 관계로 이젠 머리를 뚫고 올라올 기세다. '차라리 지니 혼자만 보낼 걸.' 아이언스 공작을 이 곳에 남겨두고 지니 혼자만 보냈다면 이렇게 그 쪽의 일이 걱정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스트레스도 실컷 풀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 지니가 전부 잘해 놓았는데 아이언스 공작이 막판에 초치는 거 아니야?' 걱정되기 그지 없다. 원래는 자신이 따라갔어야 했지만,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일급참모진이 전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일이다. '아! 걱정 되. 지니가 잘 하고 있겠지? 그래. 잘 하고 있을꺼야. 그런데 지니가 잘 하면 뭐해? 아이언스 공작이 전부 망쳐 놓을 텐데.'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요즘들이 이마에 주름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뭔가 고민이라도 있으신지요? 상아탑 일은 저의 나이트이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잘 해치울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이 걱정해야하는 것은 어떻게하면 하루라도 빨리 좋은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나이 30넘은 노처녀라니! 소녀는 생각만해도 끔찍하답니다." "나 농담할 기분 아니야. 조용히 해."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루시아는 일루니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일루니아는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하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 비슷하게 말하였다. "후우-! 드래곤이라도 나타나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뭐? 드래곤? 푸훗-!" 루시아는 베게를 껴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일루니아는 진지하였다. "솔직히 그렇잖아. 드래곤이 있다면 굳이 군대를 양성할 필요도 없고, 내가 이렇게 매일 같이 군대를 재편할 필요도 없고, 지니가 상아탑까지 가서 동맹을 맺을 필요도 없고. 드래곤 한 마리만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건데." "어느 드래곤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아무래도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가 제일 낫겠지. 가장 흉폭하기로 소문이 난 드래곤이니까. "푸하하! 크로니스가 아이리스를 도와 줘? 그 전에 먼저 때려부시지 않을까?" "웃지마 이 계집애야! 나도 답답해서 그냥 해본 소리니까." * 두 여인의 대화를 들은 크로니스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젊은 황제는 장수들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고, 늙은 공작은 큰 성을 다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프엘프 여인은 술을 마시며 싸움을 하고 있고, 레이트 백작가의 자매는 누군가를 만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아이언스 공작은 잠을 자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눈을 감은 채, 보고 듣던 크로니스는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떴다. 붉은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는 순간, 크로니스는 입을 열었다. "상아탑으로 가셨군요. 에스카네스의 영역으로 말이지요." 크로니스는 잠시 왕궁 안은 거닐었다. 찾는 사람은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크로니스는 잠시 그 쪽으로 갈까, 고민하였다. '에스카네스와는 만나고 싶지 않은데.' 그 쪽으로 가면 반드시 에스카네스가 접촉을 해 올 것이다. 지금 크로니스는 타 드래곤의 접촉을 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분명 자신이 하는 일을 막으려 들테니까. "준비한 선물은 건내드려야 겠지요." 결심을 한 크로니스는 머릿속으로 이동 마법을 생각하였다. 적색 산맥에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영지라면 청색 산맥은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의 영지였다. 에스카네스의 나이는 7500 살로 크로니스보다 무려 3000년 가까이를 더 살았다. 적색 산맥에 발을 들이기만 하면 무조건 죽이는 크로니스와는 달리 에스카네스는 자신의 영역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산맥에는 누가 살던 상관을 하지 않고 레어 주위에만 강력한 마법을 동원해 그 누구도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그 마법이 유지되는 것을 보고 에스카네스가 그 곳에 있을 거라 짐작을 할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1000년이 넘도록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에스카네스의 레어에 누군가가 발을 들였다. 크로니스는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마법진들이 길을 막았지만 그것들은 크로니스에게 마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온통 푸른색으로 칠해진 벽. 크로니스는 속도를 줄여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길고 부스스한 파란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늘어뜨리고 며칠은 손질하지 않은 듯 지저분한 턱수염을 지닌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오랜만이군, 크로니스." 남자의 입에서 약간 굵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크로니스는 이가 드러나는 웃음을 지었다. "오래라고 하면 오래라고 할 수 있겠지." 에스카네스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오게. 어찌 되었든 일단은 내 집에 찾아 온 손님이니." 에스카네스는 말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크로니스는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그를 따라 걸어갔다. 잠시 동안 둘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둘이 도착한 곳은 정사각형 모양의 방이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벽은 전부 푸른색이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물을 연상시키는 차가운 푸른색이 아닌 하늘을 연상시키는 옅은 푸른색이었다. 에스카네스가 손짓을 하자 둘이 들어온 입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크로니스는 에스카네스를 쳐다 보았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나?" "아아! 이제는 지겨워. 더 이상 존재할 의미가 없어졌지. 조만간 스스로 소멸할 생각이네." 크로니스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조만간이라고 해봐야 수백년 후가 될 것이다. 존재할 의미가 없다는 것은 소멸할 의미도 없다는 것과 같으니까. "그런데 어쩐 일로 나를 찾아 온 건가?" "그건 니가 더 잘 알고 있을텐데." 에스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개입하지 않는 게 좋아." "개입하고, 안 하고는 내 자유야." "원칙은 자유에 앞 선다." "그러는 넌 원칙을 얼마나 잘 지키지? 애초에 원칙을 어긴 것은 너와 이드가 아니었던가?" "나는 인간의 힘을 사용했을 뿐이다." "나도 인간의 힘을 사용할 거다! 내 일에 참견하지마!" 크로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혔다. 찡그린 인상과 부릅 뜬 눈은 이미 평정심을 잃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에스카네스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인간이 죽은 뒤, 감정을 제어하지 못 하는 군.' 에스카네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크로니스를 보았다. 드래곤은 원래 인간들처럼 쉽게 감정 변화를 느끼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때는 헤츨링 때뿐이다. 헤츨링 시기를 지나 9클래스를 마스터 해 성년이 되면, 이성의 힘이 감성을 완전히 억누르게 된다. 어떠한 일에도 흥분을 하지 않고, 어떠한 일에도 슬퍼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느끼기 전에 먼저 머리로 생각을 하고,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행동한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9클래스를 마스터 했다는 것은 곧 세계를 멸망시킬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9클래스는 써클로 이루어진 마나가 구분이 없어지며 자연계의 마나를 무한정으로 가져다 쓸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육체의 제약이 완전히 사라지고 필요한 것은 마나가 모인 드래곤 하트(인간에게는 심장) 뿐이다. 육체의 제약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반신(半神)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런 존재가 이성으로 감성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그렇기에 9클래스는 오직 드래곤만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런데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이 세상에 나타났고, 그는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9클래스의 경지에 올랐다. 하지만 9클래스에 올랐다고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육체의 제약은 벗어났지만 심장의 노화로 인해 결국 금방 죽고 말았다.(드래곤의 입장에서) 그 인간이 죽은 후, 아니, 어쩌면 관계를 맺은 순간부터 일지도 모른다. 크로니스는 점점 감성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그 것은 사랑이었겠지. 드래곤의 입장에서 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크로니스는 진지하였다. 죽은 인간에게 계속해서 집착 할 정도로.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난 간섭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 곳에 온 거다." "물론 막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어떤가?" "너도 이계의 인간을 도운 적이 있잖아! 그런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지!?" "넌 이성을 잃었어. 이래서는 더 이상 드래곤이라고 할 수도 없겠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니가 잘 알거다." 크로니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순간, 에스카네스의 모습이 변하였다. 여덟쌍의 날개를 펼친 거대한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의 푸른색 눈동자가 빛났다. <인.간.때.문.에.흔.들.리.지.마.라.> 쇠가 긁히는 듣한 기계 음성이었다. 에스카네스의 말은 메아리처럼 울려퍼져 크로니스의 귀에 들어왔다. 크로니스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드러냈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마!" <착.각.하.지.마.라.그.소.년.은.그.가.아.니.다.> 크로니스이 얼굴은 흉악하다 싶을 정도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닥쳐! 니가 뭘 알아!?" <난.모.든.것.을.알.고.있.다.> "닥치라고 했잖아!" <더.이.상.세.계.의.일.에.영.향.을.미.치.지.마.라.냉.정.해.져.라.현.재.를.유.지.해.라.> 에스카네스가 내는 소리는 하나의 공명이 되어 크로니스의 귀에 들어왔다. 크로니스는 귀를 막으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방해하지마! 니가 뭘 알아!? 니가 뭘 알아!? 넌 아무 것도 몰라! 넌 알 수 없어!" <모.든.것.을.너.의.마.음.대.로.하.려.하.지.마.라.세.계.를.흘.러.가.게.놓.아.두.어.라.> "세계를 바꾼 것은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난.의.지.를.가.지.고.행.동.하.였.다.지.금.의.너.는.단.지.집.착.을.하.고.있.을.뿐.이.다.멈.추.지.않.으.면.위.험.하.다.> "닥쳐!!!" 크로니스의 목소리가 에스카네스의 소리를 억눌렀다. 순간, 크로니스의 주위를 구성하던 세계는 유리가 깨지 듯 부서져 내렸다. 크로니스는 차가운 눈길로 자신을 응시하는 에스카네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크로니스는 충혈 된 눈을 부릅뜨고 발작적으로 외쳤다. "내 일에 간섭하지마! 간섭하면 죽여버리겠어!" 크로니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주저 없이 모습을 감췄다. 홀로 남게 된 에스카네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 예전에 친구들과 고스톱을 쳤을 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난 한창 판의 흐름을 타서 돈을 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차례가 세 번이나 돌았는데도 패를 한 장도 못 먹은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번째 차례에서 화투패 중 최고의 패로 불리는, '비풍초똥팔삼' 에 속해있기도 하는, 쌍피와 광이 같이 들어있는 똥을 조카와 함께 싸버린 것이다. 그걸 B라는 놈이 먹었다. 그리고 다음 차례 때 B는 고Go를 외쳤다. 원고- 투고- 나는 어떻게 해서든 패를 먹어야만 했다. 쓰리고- 이제는 절대로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피를 한 장이라도 먹으면 피박이니. 난 광박이나 면하자는 심정으로 홍단을 삼광(사쿠라광)에 내리쳤다. 그리고 한 장 뒤집었는데…… 벚꽃이 나왔다. 그렇다. 또 싼 것이다. 두 번째 뻑. 더욱 미치겠는 건 그걸 B가 먹었다는 것이다. 줄 피도 없다, 이 놈아. 포고-! B는 결국 금단의 영역 포고를 외치고 말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싸서 쓰리뻑을 만들어 게임을 끝내는 수 밖에. 하지만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인가? 먹을 수 있는 패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마지막 남은 단풍을 담요 위로 던졌다. 뒤집어 보니 역시나 꽝이었다. 결국 B는 포고를 성공시키고야 말았다. 5광, 홍단, 청단, 고도리, 솔을 흔듬, 멍따, 포고. 내 평생 그렇게 화려한 패는 본적이 없었다. 49장(48+1. 마지막 1은 조카다. 참고로 조카는 쌍피로 친다)의 화투패 중 90%정도가 녀석의 앞에 놓여져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본 점수가 50점이 조금 못 되었다. 점 100이었으니 겨우 5000원에 불과하였다. 정말 5000원만 줬냐고? 웃기는 소리. 고스톱의 점수는 먹은 걸로 계산되는 것보다 몇 배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50점은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계산한 점수에 불과하였다. 그럼 이제 계산을 시작해 보도록 하자. 광박 2배. 피박 2배. 멍따 2배. 흔들었으니까 2배. 포고니까 4배. 2 * 2 * 2 * 2 * 4 = 64 50 * 64 = 3200 이해가 되는 가? 기본 점수 50점이 3200점으로 불어났다. 고스톱 3명이서 칠 때는 3점이면 나는 걸로 친다.(두 명이서 칠 때는 7점) 점 100이라고 하였을 때, 300원만 지급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3200점이 났다. 가볍게 32만원만 지급해 주면 되는 것이다. 32만원. 고스톱 한판에 32만원이 나왔다. 순간,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난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충격을 맞봐야만했다. 한 때 도신(賭神)이라 불렸던 나 였것만 이렇게 비참한 패배를 당하다니! 또 다른 피해자 C는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C의 앞에 놓인 패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패. 그나마 있던 피들마저 B가 싼 것들을 먹으며 전부 쓸어 간 덕에 피박도 면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아! 나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참 미안하군. 세 명이서 고스톱을 칠 때는 고를 한 놈보다 그 옆의 놈이 더 잘 쳐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좀 어려운 얘기니 예를 들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 것은 국가간의 분쟁 상태로도 예를 들 수 있다. a, b, c 라는 세 나라가 있다. 이 나라는 전부 적대 관계이다. 어떻게든 다른 나라를 제치고 자신이 1등이 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옅보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a국이 엄청나게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위기 의식을 느낀 b와 c는 적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돕기 시작한다. a국이 b국을 침략하면 c국이 나서서 b국을 도와주는 등, 둘이 힘을 합쳐 a를 견제한다. 좀 더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도록 하겠다. 방금 경우에는 B가 크게 나고 있었다. B의 독주가 계속 될 경우에 C와 나는 엄청난 돈을 잃게 되어 있다. 이런 경우에는 둘이 협력을 해야 한다. 상대방에서 날만한 패를 밀어주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광을 2개 먹었다면 일부러 앞에서 광을 깔아 주고, 청단이나 초단을 먹었다면 청단이나 초단을 깔아주어 상대가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어떻게든 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300원 잃는 게 낫지, 32만원 잃는 게 낫겠는가? 게다가 독박이라는 제도도 있으니 한푼도 잃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는 순번이 내가 선. C가 다음, B가 마지막이었으므로 내가 C에게 패를 밀어주어 나게 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겐 밀어줄만한 패고 없었고 그나마 먹은 것도 전부 싸버린 관계로 오히려 B가 크게 나는 것을 도와준 셈이 되었다. B는 3200점이라는 경이할만한 점수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우리에게 32만원을 내놓을 것을 재촉하였다. 난 한숨을 쉬며 담요를 바라보다 문득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먹은 패가 단 한 장도 없다. 고스톱 판에는 재밌는 규칙이 몇 가지있다. 피가 기준치에서 미달되면 피박을 써서 돈을 2배로 줘야 한다. 그러나 피를 한 장도 안 먹은 경우에는 피박을 씌지 않는다.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바로 지금이다. 패를 단 한 장도 먹지 않은 경우에는 고스톱을 치지 않은 것으로 간주. 돈을 물지 않아도 된다. B가 3200점 난 것이 기적이었다면, 패를 단 한 장도 먹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우하하하! 난 살았어! 지금 나의 기분이 그 때와 같다.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졌다가 간신히 살아난 느낌. 내가 강의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해도 나는 청색 산맥에 뼈를 묻어야만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외모가 지니와 비교를 당하면서 나는 외모 지상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을 생각할 수 있었고, 결국은 그 것으로 강의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결과는? 한 마디로 퍼팩트Perfect. 오락실에서 대전 격투 게임을 하였을 때,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상대를 쓰러트리면 You Win이라는 말과 함께 나오는 그 Perfect. 나의 강의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고 난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꽤 인기가 많아졌다. 상아탑에서는 나를 명예 교수로 임명하기로 하였으며, 지금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쇄도를 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떠돌 정도다. '상아탑 마법 학교 학생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아이언스 공작의 강의를 들은 학생과 듣지 못한 학생.' 아아! 몸은 하나인데 강의건은 수백 개가 들어오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물론 나는 어디까지나 외교 사절로 상아탑을 방문 한 것이기에 강의 요청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있다. 사실 한번만 더 강의 했다가는 나의 밑천이 들어날까봐 두렵기도 하다. 잔머리 굴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에드립으로 넘기는 것도 한, 두 번이 한계이다. 이젠 지니가 외교 문제를 끝마치기만 하면, 이 곳을 뜨는 일만 남았다. 그 때까지 난 이 방 안에서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난 사과맛 사탕을 제일 좋아해. 어떤 때는 포도맛 사탕이 가장 맛있을 때도 있어. 이코는 어떤 사탕을 좋아해?" "난 사탕 안 먹어." "왜?" "이빨이 없거든." "빨아 먹으면 되 잖아." "난 사탕 같은 것보다는 쿠키 종류를 좋아해." "이빨도 없는데 쿠키는 어떻게 먹어?" "그냥 삼켜." 정말 너무 잘 어울린다. 라이 패밀리. 어쩌면 저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어쩌면 저렇게 수준 높은 사탕과 쿠키와 이빨 간의 상관 관계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일 수 있을까?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자꾸 남의 방에서 알짱거리는 거야!?" 그렇다. 이것들은 벌써 2시간 째 내 방에서 죽치고 놀고 있었다. 정말 분노감이 용트림을 하듯 내 머리 끝까지 올라온다. 특별히 시끄럽다거나, 방해가 된 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신경이 쓰인다. 회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귀여운 엘프 여자아이와 흰색 매가 다정하게 노는 모습. 다른 사람들이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포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가와 머리라도 한번씩 쓰다듬어 주겠 것만, 나는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둘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이상하리만치 분노가 인다. 라이코스의 목을 비틀어 주고 싶고, 라이미안의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다. 둘의 입에서 행복한 웃음이라도 나오는 때에는 복장이 뒤집어 질 지경이다. 아아! 대체 내가 왜 아이들 노는 모습에 이렇게 분노를 느껴야 하는 걸까? 설마 이 게 나의 인간성이란 말인가? 남이 기뻐하는 모습에 복장이 되집어지는 것이 나의 인간성? 이런 인간성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 살기 정말 힘들다. 난 라이 패밀리들을 내 방에서 쫓아 내려다가 마음을 고쳐 먹고 무기를 챙긴 다음, 방을 나왔다. 이제부턴 좀 더 착하게 살아야 겠다. 사일런스 지니는 매일 같이 바쁘다. 일을 열심히 하니까. 난 매일 같아 한가하다.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으니까. 더 이상 이대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난 어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하신 훌륭한 강의를 듣고 너무 감동 받아서 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 같이 외모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떻게든 다른 능력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 다른 능력이라 한다면, 마법과 검술, 책략 등이 있겠다. 단 시간 내에 책략을 짜낼 머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마법과 검술 정도라면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검술! 어떻게든 제대로 익혀야 한다. 후에 나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도 있다. 게다가 내가 가진 무기는 라이트닝 블레이드로 세상에 다시 없을만한 살인 무기다. 지니가 얼굴로 30%는 먹고 들어간다면, 난 내가 가진 무기만으로도 50%는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70% 정도는 먹고 들어가는 것 같다. 전기계 마법을 마음데로 사용할 수 있고, 강철이 아닌 웬만한 철 정도는 그냥 베어 넘기고, 무게도 가볍고. 차라리 스윈 같은 전투력이 뛰어난 무장에게 주면 정말 최고의 힘을 발휘하겠지만, 아쉽게도 나 밖에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건 불가능 하다. 결국 청룡도의 힘을 그냥 버릴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검술을 익혀야만 한다. 내가 걸음을 옮긴 장소는 까르린느 사건이 일어났던 공터였다. 난 느릿느릿 까르린느가 죽었던 장소로 가 보았다. 풀 밭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있는 듯 했다. 난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휴우∼." 누구지? 난 방금 한숨을 쉰 사람을 보았다.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풀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은 뮤리아였다. 난 뮤리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으, 응. 히로구나." 뮤리아는 내 얼굴을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긴 한숨. "왜 그래? 걱정거리라도 있어?" "그게……." 뮤리아는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예의상 물어 본 것인데 이렇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니 조금 그렇군. "사일런스 백작님이……." 맞아. 사일런스 지니의 특별 추첨 데이트 날이 오늘이군. "지금쯤 어떤 미모의 여성분과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는 거야?" "응." "그래서 넌 기분이 안 좋은 거고." "응." "꿈 깨." "응?" 난 뮤리아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어차피 사일런스 지니나 나나 볼일만 끝나면 바로 이 곳을 뜰거야. 니가 아무리 지니를 좋아해 봐야 어차피 떠나야 하는 남자야. 그냥 재빨리 마음 접는 게 널 위한거야."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걸." "안 되면 되게 해야지." "하지만……." 이런, 아무래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군. "야! 상대는 사일런스 지니야. 설마 지니 같이 잘난 남자가 정말로 널 좋아할 거라 생각해?" "나도 알아." 맥빠진 뮤리아의 대답. "그럼 왜 미련을 갖는 건데?" "사랑하니까." 닭살 돋는다. 뮤리아는 진심인 듯 보였다. 저 소심한 아이가 사랑한다는 말을 얼굴조차 붉히지 않고 당당하게 하는 것을 보면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그나저나 사일런스 지니 정말 대단하군. 단 하루만에 어린 소녀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다니. 내 얼굴이 지니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청승 그만 떨고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 뮤리아는 여전히 우울해보이는 얼굴을 한 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느릿한 걸음으로 내 앞에서 사라졌다. 그 뒷모습에는 쓸쓸함과 슬픔이 가득 배어 나왔다. 갑자기 지니에게 분노가 느껴진다. 어린 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채 뺏고는 무책임하게 나 몰라라 하다니! 물론 지니는 별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뮤리아 혼자 난리를 떠는 거지만 그래도 너무 잔인하긴 하다. 지니는 언제쯤 좋은 여자 만나서 제대로 사귈까? 아차! 내가 지금 남 연애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난 잠시 어떻게 하면 단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검술을 익힐 수 있을 지를 고민하였다.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절대 아니다. 진짜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내가 익혀야 할 검술은 일반적인 검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냐하면 내 손에 들린 무기가 일반적인 무기와는 전혀 다르니까. 청룡도는 일단 날이 굉장히 잘 서 있어 잡고 휘두르기만 해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상대의 무기를 단번에 동강내지는 못해도 갑옷을 뚫고 뼈에 박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 힘을 위주로 무조건 상대를 밀어 부치기 보다는 빠른 속도를 위주로 적당히 치고 빠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청룡도의 특성상 마법과 함께 병용해서 사용할 수 있다. 이건 설명을 하기가 조금 힘들고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할 것은 해야 하니까. 청룡도의 검신을 보면 마법 스펠들이 깨알 같이, 정말 돋보기로 들여다 보아야 자세히 보일만큼 깨알 같이 새겨져 있다. 사실 이렇게 스펠을 새기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다. 내 손에 칼 하나만 있어도 똑 같이 새길 자신있다. 중요한 것은 새겨진 스펠에 마법을 걸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 마법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를 대신해 캐스팅을 해주는 대리인이라 할 수 있겠다. 잘 알다시피 마법이란 상당히 머리를 굴리는 작업이다. 검을 휘두르면서 멋지게 마법을 날리는 것…… 굉장히 멋있어 보이지만, 그리 만만하진 않다. 그나마 나 정도 마법사여야 가능한 일이다.(클래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 수준을 말 하는 것이다) 하나의 머리로 구구단을 1단부터 외고 9단부터 외워 5단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보다 약간 어려운 일이기에 상당히 유용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기가 힘들다. 보통 검과 마법을 같이 사용하자면 먼저 마법을 써서 선수를 친 다음, 칼을 들고 달려가 휘두르는 경우와 적당히 칼싸움을 하다가 다른 사람을 가드로 내세우고 잠시 뒤로 빠져 마법을 쓰는 경우 등이다.(하급 마법의 경우에는 칼싸움 도중 쓸 수 있도 하지만,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청룡도만 있다면 칼을 휘두르는 중에도 강력한 마법을 마음껏 구사할 수가 있다. 전기 계열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게다가 전기 계열의 마법에는 강력한 공격용 마법들이 많이 포진해 있기에 별 문제는 없다. 만약 내가 싸우는 도중 밀린다 싶으면 청룡도에 마나를 집어 넣으며 마법 이름을 외치기만하면 해당되는 마법이 순식간에 나간다. 정말 편리한 칼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어찌되었든 청룡도의 특성상 빠른 속도를 위주로 치고 빠지며 중간중간에 마법을 함께 쓰는 것이 가장 적합한데…… 그럼 어떻게 수련을 해야 하지? 전에 크로니스가 말하길 일단은 몸의 감각을 키우라고 했는데, 그게 말처럼 쉬어야 말이지. 그건 그렇고 간만에 많은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땐 담배를 한 개비 피는 게 제일인데. 난 생각과 동시에 행동하였다. 입에 담배를 물고 라이타로 불을 붙이려 하는데…… 으음, 라이타가 없군. 저번처럼 마법으로 불을 붙여야 하나? 만약 잘 되면? 실수도 한, 두 번인 법이다. 설마 내가 실수 하겠냐? 아니지, 저번처럼 또 난리가 일어난 다면 이번엔 까르린느 업그레이드 버전이 내 앞에 나타날지도 몰라. 그래도 이거 아니면 방법이 없잖아. 난 계속 고민하였다. 그냥 담배를 피지 말지,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일지. 찰칵-! "아, 예. 고맙습니다." 난 옆 사람이 내미는 지포라이타에 감사의 인사를 한 다음,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길게 빨았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내가 이 맛에 인생을 사는 거야! "저도 하나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난 담배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잠깐! 이 사람은……? 난 고개를 들었다. 붉은색 머리. 붉은색 눈. 멋있다 보다는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엘프. "크로니스!" 크로니스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것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게 좀 문제가 있거든요." 우리는 공터 한쪽에 편하게 앉아 담배를 피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필요할 때만 갑자기 불쑥 나타나니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간만에 크로니스의 저 아름다운 미소를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문제가 뭡니까?" "아무래도 잘 안 되요. 정말 목숨의 위험을 느끼는 순간이 왔을 때는 눈 앞이 하옇게 변하며…… 그러니까 그게…… 맞아요! 마치 세상이 변하는 느낌이 들면서……." "세상이 어떻게 변합니까?" "으음, 그러니까 그게 말로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그냥 느낀대로만 말씀 하십시오." "그러니까…… 뭐랄까…… 이제까지 시각으로만 인식하던 세상이……. 사실 보통 주변을 인식할 때, 시각에 많이 의존을 하잖아요. 물론 청각도 있지만, 그건 시각에 비해 극히 미미하고요. 귀를 막아도 주변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눈을 감으면 주변을 인식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요?" "간단히 말하자면 여러 가지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할 수 있었어요. 눈으로 세계를 보고, 귀로 세계를 듣고, 피부에 닿는 촉감으로 세계를 느꼈어요. 그것들은 전부 다르게 인식이 되었고 제가 느끼기에는 겹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제 눈 앞에 있는 풍경은 시각과 청각, 촉감으로 인식이 되었지만, 제 뒤에 있는 풍경은 청각과 촉감으로만 인식 되었어요. 그러니까…… 맞아요! 뒤를 볼 수 있었어요. 제 주위에 360도 전부를 요." 크로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절대 감각이라는 겁니다. 목숨의 위협이 있을 때만 그 감각이 깨어난다는 것인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만약 정말로 위험할 때, 그 감각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 때는 어쩔 생각이십니까?" 난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게 문제였고, 전에도 크로니스는 그 점에 대해 얘기를 했었고, 나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햇었다. 하지만 별로 나아진 점은 없었다. "이그리드는 평생을 절대 감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예?" 나의 스승이시자 위대한 대마도사이자 나의 원수이기도 한 이그리드가? "전투 때만이 아니라 언제나 절대 감각이 깨어있었지요. 그는 타인과 다른 세계를 보았습니다. 사실, 지금 당신이 느끼고 있는 것은 절대 감각의 일부일 뿐입니다." "예?" 그게 일부였다고? 내 주변을…… 보이지 않았던 등 뒤까지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게. "이그리드가 절대 감각을 완전히 깨운 때는 루미아드 공주가 죽었을 때입니다." "루미아드 공주라면……." 이그리드가 사랑했던 여자였지. 루시아와 같은 핏줄을 가진 여인. 크로니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섬뜩해 지는 것을 느꼈다. 크로니스의 웃음 속에 뭔지 모를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난 잠시 숨도 쉬지 못하다가 다시 크로니스를 보았다. 크로니스의 웃음은 아름답고 따스하였다. 잘 못 본 건가? 분명 섬뜩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그리드가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크로니스의 어조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 난 그제야 안심을 하였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예뻤나요? 그 여자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만큼." 크로니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어찌보면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녀의 모습을 본 것은 이그리드의 기억 속에서 였으니까요. 분명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대단한 미인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미인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만이 아니 겠지요." 그렇군. 어제 내가 그 주제를 가지고 강의를 했으면서도 잊어버릴 뻔했군.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외모를 포함한 전부겠지. 아이리스 루미아드라는 여자의 전부. 잠깐! 혹시……. 뭔가가 기억이 날 듯 하다. 루미아드. 그래. 언젠가 꿈 속에 나왔던 그 여인. 그 여자가 루미아드인가? 이그리드가 사랑했던. 난 오래 전에 꿈 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온통 흰색으로 보여지는 그녀의 모습 뿐이다. 흰색 피부, 흰색 옷, 백금발의 머리. 하얗다. 어느 색에도 물들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외모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난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일.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은 언제나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 눈빛은 언제나 나에게 말하였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난 눈을 번쩍 떴다. 순간,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크로니스는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꿈 속에서 그녀를 만났어요." "어떠했나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굉장히 슬퍼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뭔가 그리운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뭐랄까…… 손에 잡고 있는데도, 멀리 있는 것 같은." "개꿈이군요." "예!?" 크로니스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음을 지었다. 지금 크로니스는 농담 비슷한 말을 건넨 것이다. 그런데 정말 개꿈이었을까? 뭐 개꿈이면 어떻고 용꿈이면 어때. 어차피 꿈일 뿐인데. "절대 감각이 완전히 깨어나면 어떻게 되나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주변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건 깨어나지 않아도 마찬가지 잖아요." "범위와 정확도가 넓어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1km 밖에 있는 물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니까요." "설마……." "정말입니다. 자신이 느끼고 싶어하는 것은 뭐든 느낄 수가 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감각이 예민해 진다 해도 인간의 감각으로는 한계가 있을텐데요. 인간의 청각으로 1km 밖에 물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너무 억지 아닌가요?" 크로니스는 입을 벌리며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하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그 동안 당신이 느꼈던 세계도 인간의 감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겠지요." 듣고보니 그렇네. 크로니스는 한 박자 쉰 다음, 말을 이었다. "그것은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은 어디까지나 일부분에 불과하지요." "그러면?" "매게채를 통해 느낀다고 생각하십시오. 설명하자면 기니까요." 크로니스는 왠지 의도적으로 대답을 피하는 듯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의 손에서 잠시 붉은 빛이 일러이는 듯 했다. 그 빛은 하나의 막대기를 이루더니. 이내 칼로 변했다. 칼의 모양은 일반 롱소드와 흡사하였다. 온통 붉은색이라는 것만 제외하고. "칼을 뽑으십시오." 대련을 하자는 건가? 난 끔찍했던 저번 대련이 생각났지만 아무 말 없이 청룡도를 뽑아 들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덤비십시오." 어쩌면 내가 대련을 하는 것을 원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크로니스가 뭐하러 나와 대련을 하려 하겠나? 전부 나를 위해서지. 난 칼 끝을 크로니스의 미간을 향해 겨누었다. 크로니스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 앉아 있었다. 그 눈에서는 아무 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느 쪽으로 움직일 거지? 잠시 동안의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내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진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생각은 확신에 가깝게 나에게 다가왔다. 난 칼을 겨눈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크로니스는 눈빛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땀이 비오듯 흐르기 시작하고 몸이 조금씩 떨려 왔다. 난 그 변화를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정신을 칼 끝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도는 심해졌다. 이젠 다리마저 후들거릴 지경이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힘이 부쳐서. 크로니스의 모습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처음과 같이 여유있고, 강해보이는 모습이었다. 나 혼자 제풀에 지쳐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었다. 되던 안 되던, 죽던 살던 부딪혀 보는 수 밖에. 난 숨을 길게 들이 마쉰 다음,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왼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돌진하였다. "언제까지 누워계실 겁니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크로니스의 얼굴. 허리까지 오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며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자세가 포근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나는 지금 크로니스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음이 확실하다. 부드럽군. 이렇게 남의 다리를 베고 누워 본 것이 얼마만이냐?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난 그대로 더 있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죠?"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죠?" "약 10분 정도." 10분이나 기절해 있었다는 건가? 난 아까의 일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달려드는 순간, 크로니스는 물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칼을 휘둘렀고, 그 다음 바로 기절했으니, 어디를 어떻게 맞아서 어떻게 쓰러졌는 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시 한번 할까요?" 크로니스는 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재빨리 일어났다. 크로니스는 다시 덤벼 보라는 뜻인지 아까와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이런 식의 대련이 도움이 되나요?" "그거야 당신에게 달린 일이지요." 난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칼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크로니스에게 달려 들었다. * 라이미안과 라이코스는 열심히 놀던 중, 더 이상 놀거리가 없어 심심해 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미안이 먼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라이는 심심해." 라이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도 히로 오빠가 옆에 있었을 때가 재밌었는데." "맞아." 둘은 동시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코야." "왜?" "우리 나가서 놀자." "그래." 라이코스는 닭이 날갯짓 하듯 파다닥 날아 올라 라이미안의 머리 위에 앉았다. 라이미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통통- 튀는 걸음으로 방 안을 나섰다. 라이 패밀리가 도착한 곳은 넓은 공터였다. "여기가 라이의 놀이터야. 우리 여기서 재미있게 놀자." "그래. 그런데 저기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응. 영물의 명예를 걸고 확신할 수 있어." 챙- 챙- 끼기긱-! 키가 작아서 잘 보지 못하는 라이미안이지만 소리는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긁히는 듯한 소리. 라이미안은 갑자기 몸을 푹 숙였다. 덕분에 깜짝 놀란 라이코스는 날갯짓을 해 간신히 추락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하는 라이코스. 라이미안은 그런 라이코스에게 손가락 하나를 자신의 입에 가져대 보였다. "쉬잇, 조용히 해." 어리둥절해진 라이코스지만 일단은 라이미안이 시키는대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라미안은 다시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건 긴급 상황이야. 절대 적들에게 들켜선 안 되. 우리는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거야." 뭐가 긴급 상황이고 어째서 저들을 적이라고 하는 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라이코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미안은 몸을 풀밭에 붙이고 유격 훈련을 하듯 포복 자세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라이코스는 타조처럼 재빠르게 라이미안의 뒤를 좇았다. 라이 패밀리가 적들의 얼굴이 어느 정도 보일만한 곳에 도착했을 때, 라이미안의 옷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밖으로 드러난 살 여기저기에는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라이미안은 살갗이 따가워서 울고 싶은 것을 참으며, 살짝 고개를 들어 적을 보았다. 검은색 머리카락의 남자와 붉은색 머리카락의 엘프는 치열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앗! 저 놈은 히로……." 라이코스가 입을 연 순간, 라이미안은 두 손으로 라이코스의 부리를 감싸 쥐었다. "쉬잇!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라이미안의 주의에 라이코스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라이미안은 부리에서 손을 놓았다. 둘은 히로와 엘프가 싸우는 모습을 잠시 지켜 보았다. "히로 오빠가 이기고 있네." "그러게. 이상하다. 저 놈의 실력으로는 어림 없는 일일텐데." 라이 패밀리가 보기에는 확실히 히로가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히로는 빠른 공격으로 엘프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엘프는 공격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방어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히로는 큰 동작으로 빠르게 공격을 하느라 점점 지쳐가는 반면, 엘프는 작은 동작으로 가볍게 흘리듯 방어를 하고 있기에 거의 힘을 쓰지 않고 있었다. 라이미안은 히로를 살피다가 옆에 있는 엘프를 자세히 보았다. "저 엘프 나쁜 엘프인가 봐." "왜?" "히로 오빠랑 싸우잖아." "히로도 나쁜 놈이잖아." "그럼 나쁜 히로 오빠랑 싸우는 엘프는 뭐야?" "더 나쁜 엘프지 뭐." 라이 패밀리 간의 비슷한 수준의 대화가 몇 번 오고간 후, 결국 제풀에 지친 히로는 숨을 몰아 쉬며 칼을 늘어 뜨렸다. 엘프는 웃으며 말했다. "벌써 지치신 겁니까?" "예. 힘들어 죽겠어요." "일어나시지요." "조금 쉬었다하면 안 될까요?" 거리가 멀었기에 라이 패밀리에게 둘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라이 패밀리가 보기에는 히로가 패해서 쓰러졌고, 엘프가 서서 뭐라고 말을 하며 히로를 공격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어떡 해? 이러다 히로 오빠 죽겠어." "뭐, 저 녀석이야 죽던 말던……." "안 돼!" 결심한 라이미안은 엎드려 있는 자세에서 벌떡 일어서 외쳤다. "이 나쁜 엘프! 정의의 수호자 나 라이미안이 혼내 주마!" * 난 숨을 몰아 쉬었다. 진짜 저건 인간이 아니었다. 아! 원래 인간이 아니지. 어찌되었든 굉장하다. 나의 현란한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다니.(사실 별로 현란하지도 않았다. 그냥 열심히 휘둘렀다고 표현하는 것지 정확하다) 역시 크로니스. 크로니스는 나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은 듯 했다. 하지만 말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정말 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아! 힘들다. 하지만 힘들어도 어쩌겠는가? 일어서야지. 난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려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나쁜 엘프! 정의의 수호자 나 라이미안이 혼내 주마!" 우두둑-! 난 고개를 돌리다 깜짝 놀라 목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맛 봐야만 했다. 바람부는 벌판에 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손가락으로 이 쪽을 가리키고 있는 소녀. 소녀는 석양의 무법자처럼 눈을 부릅뜨고 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런 소녀의 머리 위에는 흰색 매가 앉아 있었다. 저 것들은 라이 패밀리잖아. 정신 연령이 낮아 정신이 나간 유치한 것들.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결국은 제 발로 나오는 군요. 저 것들은 대체 뭡니까?" 저 것들? 크로니스도 저 것들을 저 것들이라고 생각하네. "별 신경 안 써도 되는 것들입니다." "아는 사이인가요?" "알고 싶지는 않은 사이지요." 나와 크로니스가 고차원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이 라이 패밀리는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라이는 두 손을 허리 얹고, 눈을 크게 뜨고 크로니스를 올려다 보았다. 난 라이가 주먹을 쥔 두 손으로 크로니스의 허리깨를 토닥 토닥 두드릴 줄 알았다. '이 나쁜 엘프! 나쁜 엘프!' 등의 헛소리를 동반하며. 하지만 다음 순간, 라이가 벌인 일은 놀라웠다. "리버스 그래피티Reverse Gravity!" 마법사의 능력에 따라 일정 범위 안의 중력을 바꾸어 적을 하늘로 떨어트린 다음, 마법을 풀어 땅으로 떨어트리는 고난이도의 7클래스 마법. 그걸 라이가 썼던 말인가? 아! 얘가 정신 연령은 낮아도 탑의 주인이었지. 대상은 아마도 크로니스 였으리.(설마 나까지 대상에 넣었겠냐?) 하지만 크로니스는 레드 드래곤이다. 마법으로는 절대 당할리 없었다. 난 그래도 크리니스가 마법을 써서 라이의 마법을 중화시키거나 막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라이의 마법이 통했냐고? 당연 안 통했다. 순간, 깜짝 놀라는 라이. 라이의 표정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 표정은 마치 '어! 이럴 리가 없는데'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라이는 다시 손을 뻗으며 마법을 썼다. "파워 워드 스턴Power Word Stun." 역시 안 통했다. "프리즈매틱 스프래이Prismatic Spray." 이 것도 상당히 고난이도의 마법이지만 역시 안 통했다. "소드Sword!" 이럴 수가! 이 꼬마가 소드까지 쓸 줄 알다니! 그나저나 캐스팅도 많이 해 왔다. 어쩜 이렇게 7클래스의 마법들만 골라서 열심히 캐스팅 해 왔냐? 라이의 앞에는 반짝이는 검이 나타났다. 라이는 눈을 부릅뜨고 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검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크로니스에게로 날아갔다. 난 크로니스가 들고 있는 칼로 멋지게 그 검을 내리칠 줄 알았다. 정말 그랬냐고? 당연 내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이제까지 계속 빗나갔잖아. 크로니스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가 크로니스를 찌르려던 검은 크로니스의 몸 주위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라이에게로 날아갔다. 이럴 수가! 스펠 터닝Spell Turning이다! 깜짝 놀라는 라이. 자신이 쓴 마법이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다. 라이는 방어벽을 만들 생각인 듯 했지만, 미리 캐스팅을 해놓지 못 했는지 지금 캐스팅을 하고 있었다. 당연 캐스팅이 끝날 때쯤이면 저승에 가서 까르린느와 같이 놀고 있을 것이다. "꺄악!" 결국 라이는 아이답게 캐스팅을 포기 하고 주저 앉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반짝이는 검은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라이의 몸을 뚫고 지나가나 싶던 검은 라이의 몸 바로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크로니스가 마법을 거둔 것이다. 난 아찔한 감정을 느끼며 식은 땀을 닦아냈다. 휴우-! 정말로 죽이는 줄 알았네. "으아아앙!" 울음을 터트리는 라이. 그런 라이의 머리 위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라이코스. 그래, 라이야. 억울하기도 하겠지. 7클래스의 마법을 갖다 부었는데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 하다니! 순간, 라이의 울음 소리가 멎었다. 난 라이가 왠일로 울음을 멈추었나 신기해서 살펴 보았는데 울음만이 멈춘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멈추었다. 어라! 그러고보니 바람도 멈췄잖아. "타임 스톱Time Stop. 9클래스 마법이군요." "그렇습니다." 마법사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 시간을 정지시키는 마법. "어디까지 정지 된 건가요?" 만약 우리가 있는 이 지역의 시간만 정지되었다며 다른 곳에 시간은 계속 가고 있을 것이다. "전부 정지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역시 드래곤이라는 건가? 그럼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크로니스와 나, 둘 뿐이겠군. 크로니스는 울고 있는 상태에서 멈춰버린 라이미안을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제법이더군요. 저 정도면 드래곤을 제한 다른 종족 중에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니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방금 라이가 펼쳤던 마법은 정말 굉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위력만이 아니었다. 4개나 되는 7클래스의 마법을 미리 캐스팅 해 놓은 뒤 한번에 다 썼다는 것. 이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캐스팅은 마법을 쓰는 그 순간에 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미리 해 놓는 것이 그때 그때 하는 것보다 훨씬 힘드니까. 그런데 라이는 했다. 그것도 4개나. 결론만 말하자면 라이의 머리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유치하게 노는 지 정말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혹시 머리가 너무 똑똑해서 돌아버린 거 아니야? "불청객도 등장했으니 저는 이만 사라지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니, 벌써요? 조금 더 있다 가시는 것이……." "방금 했던 대련을 생각하시고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럼 이만." 어느새 크로니스의 손에 있던 붉은색 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크로니스는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어 갔다. 설마 집까지 걸어 갈 생각인가? "아! 이걸 잊을 뻔 했군요." 크로니스는 몸을 돌리더니 나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멋지게 호선을 그리며 나에게 날아오는 은색의 작은 물체. 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팔을 뻗어 그것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실수로 놓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는데……. 아니! 이 것은 아까 불을 붙여 주었던 지포라이타가 아닌가? 나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선물 중 다섯 번째가 지포라이타였다.(참고로 첫 번째 받고 싶은 선물은 정치인 이모씨가 군대도 못 간 병약한 아들과 함께 사는 315평짜리 아담한 빌라, 두 번째는 힘드신 정치인들 연금에 보태 쓰라고 여러 기업에서 조금씩 주었던 주식, 세 번째는 정치인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라고 채소밭으로 나눠 주었던 땅, 네 번째는 정치인들 세금 낼 때 보태라고 비밀 계좌에 입금시켜 주는 돈.) 그런데 내 친구들은 치사하게도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선물 목록 1에서 5까지는 아무 것도 사주지 않았다. 누구는 생일 아니어도 매일 같이 들어오 것만 어째서 나에겐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지. 어찌되었든 이제라도 5개 목록 중 하나가 입수 되니 정말 기쁘다. 이젠 4개 목록 밖에 남지 않았군. 난 지포라이타를 꼭 손에 쥔 다음, 고개를 들어 크로니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크로니스의 모습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뿅- 하고 사라졌다. 역시 집까지 걸어가지는 않는 군. "으아아앙! 우에에에엥! 엉엉엉!" 다채로운 울음 소리. 마법이 풀렸군. 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지포라이타를 열었다. 찰칵-! 으음, 소리가 끝내 주는 군. 부싯돌을 긁어 불을 붙인 후, 라이타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아마도 기름으로 켜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딱 보아하니 영구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이 틀림 없었다. 부싯돌만 긁으면 언제나 불꽃이 나오도록. 크로니스가 이렇게 나에게 필요한 선물을 줄 줄이야! 이제부터 크로니스의 성의를 봐서라도 열심히 담배를 펴야 겠다. "으아아앙!" "그만 좀 울어!" 난 라이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라이코스는 라이의 머리 위에 앉아서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요 며칠 사이에 친해진 친구라고 지금 날 갈구고 있는 것이다. 흥! 웃기지도 않아! 난 라이에게 다가갔다. 라이코스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난 굉장히 이상한 점을 느껴야만 했다. 어째서 이 놈이 이렇게 빤히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인가? 난 라이 앞에 서서 라이코스를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놈 기절했군! 아마도 반짝이는 검이 되돌아 왔을 때, 깜짝 놀라 기절했을 것이다. 쓸모 없는 매 같으니라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깡도 없으면 어쩌자는 거니? "우에에에엥!" 라이는 여전히 목청껏 울어대고 있었다. 정말 이 정도로까지 슬픈 것일까? 대체 뭐가 슬픈 것일까? 자신의 마법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면, 졌다는 것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그냥 땡깡을 부리려고? 나 인간 박영웅. 우는 어린 여자 아이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달래줄만큼의 따뜻한 마음씨는 지녔었 것만 요즘 들어서 완전히 버렸다. 울긴 뭘 울어! 왜 울어? 니가 뭔데 울어? 울면 다야? 운다고 일이 해결 되? 울 시간 있으면 방에 가서 공부 하나라도 더 해! 세상 일은 눈물로 해결할 수 없어. 너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이 아닌 오직 깡과 근성이야. 자 빨리 일어나서 니 방으로 돌아가 헬로우 귀티하고나 놀아. 아아! 난 인생을 너무 빨리 알아 버렸다. 울고 있는 여자 아이를 보고도 이런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원래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불쌍하다, 달래주고 싶다 등의 마음이 먼저 떠올라야 하는 것 아닌가? 나에게 더 이상 착한 인간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래. 어차피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려면 착한 인간성이라는 것은 독이 될 수도 있어. 난 악과 깡으로 험난한 인생을 해쳐 나가리! "엉엉엉!" "아이씨! 내가 울지 말랬지!" "으아아앙!" "니가 뭘 잘했다고 울어? 니가 울 자격이나 있어? 그러게 누가 주제도 모르고 덤벼들래?" "우에에에엥!" 어째 라이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눈물의 양이 더욱 많아진 것 같다. 아마도 내 말에 화가 나서 더 크게 우는 것 같다. 정말 내 평생 이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우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열심히 울 수 있을까? 차리라 그 노력을 다른 곳에 투자해라. 난 잠시 라이를 달래주려 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처럼 보여도 라이는 어디까지나 탑의 주인이었다. 아까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저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무지막지한 공격용 마법들을 퍼부어 대는 것을. 누누히 말 하지만 그거 아무나 쓸 수 있는 거 아니다. 나도 못 쓰는 거다. 난 아직 5클래스니. 난 라이가 알아서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언젠가 체력이 다하면 울다 지쳐 잠들게 되어 있다. 그러면 나는 라이를 대롱대롱 들고 방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다음 날 쉰 목과 퉁퉁 부은 눈을 보고 내가 어제 왜 그렇게 울었나 후회하겠지. 잠깐! 지금 나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하는 이 냄새의 정체는 무엇이지? 꾸리꾸리, 지릿지릿.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를 표현한 말들이다. 나의 코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이 냄새를 나는 언젠가 맡아 본 적이 있다. 난 잠시 그게 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 맞아. 아까 화장실에 일 보러 갔을 때 였어. 그렇다면 이 냄새의 정체는……? "푸하하하! 너 오줌 쌌구나!" "으아아앙!" 어쩐지 너무 열심히 운다 했어. 이제보니 오줌을 싸서 울었던 거군. 라이의 눈은 이제 거의 폭포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눈물이 펑펑 나오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라이의 하얀 치마가 젖어 있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어이구! 많이도 쌌네. 아마도 라이코스가 기절한 때와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검이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쌌으리라.(솔직히 그 상황에서 안 싸는 게 이상한 거다) "푸하하하! 오줌이래! 오줌! 세상에 치마에 오줌 싸는 애가 어딨어! 나도 안 그러겠다! 푸하하하!" 난 이제 바닥을 구르며 웃어대고 있었고, 라이는 더욱 크게 열심히 울어 댔다. 애가 오줌을 싸고 당황해서 울고 있는데 달래주지는 못할 망정 이 무슨 몹쓸 짓이냐고? 그래.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달래주고 싶다. '라이야. 인생을 살다보면 오줌을 싸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어요.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화장실을 이용하긴 하지만, 살다보면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고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 그러니까 라이가 울 필요는 없어요. 어서 노처녀한테 가서 속옷 빨아달라 그래.'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너무 재미있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 가? 라이가 오줌 싼 게 뭐 그리 큰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너무 재미있다. 정말 너무 재미있어서 미칠 것 같다. 아까 라이가 라이코스랑 다정하게 노는 모습을 보고 복장이 뒤집혀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 라이가 오줌 싸고 우는 모습을 보니, 행복감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우헤헤헤헤! 오줌을 쌌대요! 동네 사람들! 다들 나와 보소! 얘가 오줌을 쌌어요! 상아탑의 주인 라이미안이 오줌을 쌌어요! 쌌어요. 쌌어요. 오줌을 쌌어요! 포장지를 싼 것도 아니고, 고스톱 치다 싼 것도 아니고, 오줌을 쌌어요." "으아앙! 하지마, 하지마!" 울면서 나에게 매달려 애걸복걸하는 라이의 모습에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좋아지는 걸까? "야! 떨어져! 오줌 묻어! 우헤헤헤!" "으아아앙! 제발 하지마세요. 제발요." 우는 라이를 보고 드는 생각. 내 인간성도 이젠 갈 때까지 갔구나! 하지만 재밌는 걸 어떡 해? 푸하하하! Part4 라이레얼이라니까? ' "벌써 여기저기 진 빚만해도 1만골드가 넘어. 이러다가 파산할 지경이야" "왜 그렇게 많아?" "그 동안 술집 전전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퍼 마셨는데 이 정도 안 나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군." 라이레얼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니들이 나눠서 갚어." 순간, 분노하는 용병 일동. 일명 라이레얼 패거리, 줄여서 라이 패거리라 불리는 테커, 카웨, 럴크, 카젠, 베니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왜 우리가 갚어!?" 라이레얼은 붉은 입술 사이로 술을 들이 부은 다음, 뻔뻔하게 대답했다. "니들도 마셨잖아." 기가 막히는 라이 패거리. "헛소리 마! 우리가 마신 건 너 혼자 마신 거에 반도 안 돼!" 라이 패거리의 항변에 라이레얼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못 내겠다는 거야? 니들 언제 내가 돈 내고 밥 먹고, 돈 내고 술 마시는 거 봤어? 본 적 없지? 그럼 무조건 니들이 내야할 것 아니야!?" 너무나도 당연하고 뻔뻔스러운 말이었기에 라이 패거리들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 하였다. 주변이 조용해 지자, 라이레얼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라이 패거리들은 그 모습을 어이 없게 바라 보았다. 지금 라이레얼이 있는 술집은 수도 내에서 꽤 잘 나간다고 알려진 술집이었다. 지금은 해가 저물 때쯤. 원래 이 시간이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잔하고 가는 한잔족과 아예 이 곳에서 말뚝을 박을 것을 각오한 먹고죽자족이 바글거려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이 패거리들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열심히 술을 가져다 나르는 술집 주인의 얼굴에는 '오늘 장사 다 했다' '제발 술만 마시고 가주었으면' 등등의 생각이 나타나 있었다. "그 표정은 뭐야!? 내가 여기 온 게 불만이야!?" "아, 아닙니다, 손님. 손님 같이 아름다우신 분을 저희 가게에 모시게 되어 가문에 다시 없을 영광입니다." '그래, 이 년아. 불만이다. 그것도 굉장한 불만. 왜 매일 우리 가게만 오는 거냐? 날 죽일 생각이냐? 제발 부탁이니 우리 가게에 오지 마라. 너 때문에 손님이 다 떨어져 나갔다. 제발 부탁이야. 다른 곳으로 가 줘. 너 때문에 굶어 죽게 생겼어!' 술집 주인은 자신의 속마음에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을 하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성 밖에서 집 짓는 일을 주로 하는 목수다. 집에 성 안에 있기에 도개교가 올려지기 전에 돌아와 근처 술집에서 술 한잔씩 걸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과인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였다. "내 마누라는 말이야, 내 힘에 반해서 나랑 결혼했다고. 평소에는 내가 다른 여자 궁둥이만 쳐다 본다고 삐져 있다가도 침대 위에서 한번 안아주면 당신이 최고라고 어찌나 꼬리를 흔들어 대던지." "하하하! 이 사람 농담도……. 그런데 술 마시고 들어가면 마누라가 잔소리 하지 않나?" "무슨 소리! 사내 대장부가 술 한잔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어떻게 계집이 짖어 대." "하하! 맞는 말이야." 빛나는 라이레얼의 눈동자. 라이레얼은 반쯤 감긴 눈으로 문가에 있는 남자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뭐? 계집이 어쨌다고?" 남자들은 가운데 테이블을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서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미녀를 보았다. 레몬색 머리카락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풀어져 있고 작고 하얀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는 모습이 정말 평생에 다시 보기 힘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남자들은 잠시 여자의 얼굴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미녀의 귀가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허억! 라이레얼이다!" "뭐? 라이레얼?" 놀라는 남자들. 저기 앉아있는 미녀가 소문으로만 듣던 라이레얼이란 말인가? 수도 내 술집 80%이상을 초토화 시키고, 그 중 30%는 완전히 문을 닫게 만들고, 체포 될 때 경비대 17명을 병원 신세지게 만들어 버리고, 체포 된 후에는 3000명의 용병을 동원하여 수도를 쑥밭으로 만들뻔 했다는 살아 있는 전설로 남아있는 여인. 남자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는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괴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저렇게 아름다운 미녀라니? 하지만 놀라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으니……. "튀어!" 누가 소리쳤는 지는 모르지만, 그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남자들은 술집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요즘 수도 내에 떠도는 속담 중 유명한 속담이 하나 있었으니 '취한 라이레얼 옆에서 술 마신다.' 해석을 하자면 '기름을 몸에 뿌리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외에 유명한 속담들을 또 살펴보자면 '라이레얼이 술 값 낼 일이다.' 해석은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정도. 비슷한 속담으로는 '라이레얼이 술 끊을 일이다' 가 있다. '술집 주인 라이레얼 보듯 하다.' 해석은 '굉장히 아니꼽지만, 대 놓고 말을 하지는 못한다' 정도. 적절하게 써먹을 때는 빨리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불청객이 찾아 왔을 경우. '엘프도 엘프 나름이다.' 해석은 '어떤 집단이던 간에 변종은 존재한다' 정도. 보통 엘프하면 좋은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 중에서도 굉장히 이상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데에서 유래한 속담. '라이레얼도 한 인기한다.' 해석은 '성격은 뭣 같아도 얼굴만 예쁘면 남자들은 환장한다' 정도. 얼마 전 있었던 설문 조사에서 결혼하고 싶은 여자 1위에 라이레얼이 뽑힌 것을 보고 여자들이 탄식을 한 것에서 유래한 속담. '마치 라이레얼 같다.' 해석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르다' 정도. 이런 속담들은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하다. 전부 말하자면 책 한권이 부족할 정도다. 바야흐르 지금 헤리오의 수도는 라이레얼 신드롬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라이레얼이 술을 마시는 사이, 라이 패거리들은 긴급 대책 회의를 시작하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 중 나이가 가장 많아 진지하고 현명한 카젠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대로 가다가는 용병단이 파산해 차디찬 바닥을 굴러다니며 구걸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 일동. 이번에는 카웨가 입을 열었다. "저 년이 원래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서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어."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일동. 테커가 말했다. "뭐 좋은 해결책 없어?" 카웨가 대답했다. "방법이 있다면 히로 녀석을 이 쪽으로 불러오는 거지." 그 말에 테커가 대답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공작이나 된 놈이 미쳤다고 여기 오겠냐? 게다가 여기 온다 해도 라이레얼을 만나려고 하겠어? 그 가슴 아팠던 과거들이 줄줄이 알려질텐데." 다시 또 고개를 끄덕이는 일동. 베네트가 말했다. "어쨌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이제 우리의 선택은 하나야. 지금 여기서 라이레얼을 버리고 도망을 가던가, 아니면, 평생 라이레얼 뒤를 좇아다니며 대신 술 값을 계산해 주던가." 지금 베네트의 발언은 상당히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발언에 마음이 심하게 동요 될만큼 그 동안 비참한 생활을 해 온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사실 그 동안 라이레얼의 술 값을 대신 내 주느라 얼마나 많은 돈이 나갔던가? 수입은 들어오지 않는데 지출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니 정말 죽을 맛이다. 이 적금 깨서 다른 적금 매꾸고, 이 카드 긁어서 다른 카드 매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대로 가면 분명 파산이다! 사실상 라이 패거리들에게는 별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네트가 라이레얼을 버리고 도주를 하자고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냥 해본 말이 불과하였다. 라이레얼이 용병 대장이기 때문에 라이레얼을 버린다는 것은 사실상의 용병단 해체를 의미하며 의리상으로도 라이레얼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라이레얼의 술값에 돈을 퍼 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꽁꽁 묶고 데리고 다니는 게 어떨까?" 카웨의 말에 놀라는 일동들. 럴크가 말했다. "오오! 왠 일이야, 카웨? 니가 맞는 말을 할 때도 다 있네." "하하하! 원래 내가 똑똑 하잖아.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나 태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 어머니가 그 놈 똑똑하다고 동네방네 소문 다 내고 다녔잖아." "야! 니 어머니는 너 낳고 3개월만에 다른 놈과 눈이 맞아 집에 있는 돈 될만한 물건은 다 챙겨서, 심지어는 밥 그릇에 수저까지 챙겨서, 집 나갔다며?" "그러니까 3개월 전에 그런 거지. 자식이 말을 못 알아 듣네." 카웨와 럴크의 의미 없는 대화가 잠시 진행 되는 동안, 진지하게 고민하던 테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가 라이레얼을 묶을 거지?" 그렇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이거야 말로 완전히 고양이 목에 방울 걸기다. 누가 저 흉폭한 하프엘프 라이레얼의 몸을 꽁꽁 묶을 수 있겠는가? 침묵하는 일동. 라이레얼은 술을 마시던 중, 한 쪽에서 궁시렁거리는 집단을 보고 소리쳤다. "야! 니들 거기서 뭐해? 이리와서 같이 술 마시자." 한숨을 내쉬는 일동. 결국 회의는 라이레얼과 같이 술을 마시며 이 빌어먹을 상황을 잠시라도 잊어보자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라이레얼을 비롯한 6명의 용병들은 먹고 죽자라는 심정으로 술을 입에 들이 붓기 시작했다. "니들은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이제 우리 히로 만나면 난 공작 부인이야. 그럼 내가 니들에게 다 한 자리씩 나눠 줄게." "그래. 고마워." "야! 라이레얼! 나한테는 대장군(大將軍) 자리 하나만 줘. 내가 100만 대군 몰아 보는 게 소원이었다." "푸하하!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걱정마, 테커.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그럼 100만 대군의 짬밥은 내가 다 책임질게." "그래. 너 밖에 없다, 카웨." 이렇 듯 모두가 취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쯤 술집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는 갈색 머리에 안경을 쓴, 현재 헤이체르 공작가의 후계자 하이스네였다. 하이스네는 텅 빈 술집을 둘러보던 중, 라이레얼과 기타 용병들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옮겨 그들 앞에 섰다. "그 동안 안녕들 하셨는 지요?" 하이스네의 얼굴을 가장 먼저 알아 본 사람은 그나마 덜 취해 있던 카젠이었다. "어! 자네는 한슨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보시다시피 우리 용병 대장 라이레얼의 상태가 이 모양이어서 당분간 일은 힘들 것 같네. 그리고 그 동안 일도 안 줬잖아." "잠시 여러분들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그럼 말하슈." 하이스네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곳은 얘기할만한 장소가 아닌 것 같으니 장소를 옮기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라이레얼은 술에 취해 상체를 탁자에 붙인 채, 고개를 살짝 꺽어 술을 조금씩 입에 흘려 넣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이스네의 말을 듣고는 물었다. "어디로 옮겨? 난 이 장소가 좋은데." 하이스네는 정중하게 답하였다. "레이트 백작가입니다." 6명의 라이 패거리는 커다란 마차에 앉아 레이트 백작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용병들은 달그락 거리는 마차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진동이 별로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푹신하고 포근한 의자에 굉장한 감명을 표시하고 있었다. "야! 이 마차 끝내 준다." "그러게 말이야. 쿠션이 환상이야." 마차 안에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난리 발광을 해대는 용병들을 보고도 하이스네는 웃음만 지었다. 라이레얼은 한쪽에 몸을 기대고 앉아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며 용병들을 비웃었다. "흥! 어린 것들. 겨우 이 정도 마차에 그렇게 난리를 피우다니. 내가 공작 부인이 되면 이 것보다 백배는 더 좋은 마차를 타고 다닐텐데. 후후후." 라이레얼의 핀잔에도 마냥 신이 난 용병들. 사실 라이레얼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관계로 움직일 힘이 없어서 그냥 앉아있는 거지 평소 때 같았으면 마차가 부서져라 뛰어다녔을 것이다. 잠시 후, 마차는 커다란 문을 통과해 정원을 지나 현관 앞에 멈춰 섰고 용병 일동은 아쉬운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라이레얼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관계로 베네트가 끌다시피 해서 마차에서 내려왔다. 당연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현관 안으로 들어가려면 누군가가 라이레얼을 업어야만 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투철한 동료애가 발현 되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군. 그 나마 가장 적게 마신 내가 업도록 하지." "아니야, 카젠. 넌 나이도 많아서 힘들텐데 그냥 내가 업을 게." "시끄러, 럴크. 넌 속마음이 시커매서 안 되. 여자보기를 돌 같이 하는 내가 업을 게." "웃기는 소리! 당연 라이레얼의 충실한 오른팔인 내가 업어야지." "뭔 헛소리야? 오른팔은 나야." "활 쏠 때는 왼손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지." 정말로 투철한 동료애인지 아니면 단순히 예쁜 여자 한번 업어보고 싶어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은 베네트가 나섰다. "시끄러 이 것들아! 다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 가지고서는 어디 감히 라이레얼의 몸에 손을 대려 그래? 라이레얼은 내가 업고 간다." 베네트는 가볍게 라이레얼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응접실에는 네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의 남자는 레이트 백작이고 세 명은 셀리오네와 세레나, 라나였다. 이윽고 응접실로 하이스네와 술에 잔뜩 취한 여섯 명의 남녀가 들어오자 셀리오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라나와 세레나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레이트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서 술 취한 손님들에게 말하였다. "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자리에 편히들 앉으십시오." 라이 패거리는 응접실 내부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쇼파에 앉은 후에는 쇼파의 푹신함에 놀라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라이레얼은 쇼파 한 쪽에 앉아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고는 빨갛게 상기 된 얼굴로 숨을 쌕쌕 몰아 쉬었다. 윤기가 흐르는 레몬 빛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얼굴을 살짝 가리고, 레몬 빛 눈동자는 멍하니 풀려있는 것이 마치 추파를 던지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무방비적인 라이레얼의 모습은 정상적인 남자라면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가슴에 불씨를 당기기에 충분하였다. 용병단의 대표격인 테커는 레이트 백작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른 겁니까, 형씨?" 건방진 테커의 말투에 셀리오네는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찮은 용병들이 감히 레이트 백작가에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며 들어온 것도 모잘라, 백작 보고 형씨라니! 이건 백작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막상 '형씨' 소리를 들은 레이트 백작은 태연했다. "아! 잠시 물어 볼게 있어서 보자고 했어. 초면에 반말을 쓰는 것을 보니 네 녀석도 별로 말투에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인 것 같으니 나도 말 놓지. 수도 내에서 명성이 자자한 라이 패거리를 이렇게 실제로 만나 보게 되니 굉장히 영광이군. 넌 어떻게 생각하냐?" "저도 동감입니다, 형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용병들이었다. 테커는 귀족을 만난다는 사실에 초반부터 강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당당하게 말을 놓았다. 그런데 귀족인 레이트 백작의 입에서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히 현란한 반말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상대가 말 놓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흠흠, 뭐 영광이랄 것 까지야. 아, 아무튼 용건이나 말하슈." 테커는 기왕 이렇게 된거 반말로 밀고 나가자고 생각을 하고 편하게 말하였다. 술에 가득 취한 라이레얼을 제외한 다른 용병들은 그런 테커를 보며 약간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테커는 그 표정을 '대단하다, 테커! 백작 앞에서도 전혀 주늑이 들지 않고 당당하다니. 우리는 너를 존경해.' 정도의 의미로 받아 들였지만, 사실은 '대단하다, 테커! 얼마나 무식하면 백작 앞에서 현란하게 반말을 구사하니? 너의 무식에 존경심을 표한다.' 정도의 의미였다. 라이레얼은 술에 절여있던 머리가 어느 정도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초첨을 맞춰보니 넓고 잘 꾸며진 응접실 안이었다. 라이레얼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한슨……, 중년 아저씨……, 화장을 떡칠한 아줌마……, 어린 여자애……, 어린 꼬마……." 라이레얼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나는 대로 읊조렸다. 대상들 중 가장 화가 난 것은 당연 셀리오네 였다. '뭐? 화장을 떡칠한 아줌마?' 정말 살다살다 이런 모욕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아까 저 무식한 것들 중 하나가 남편을 형씨라고 불렀을 때는 참았지만 자신이 화장을 떡칠한 아줌마라는 소리를 듣고는 결코 참을 수가 없었다. "어! 떡칠 아줌마가 인상을 쓰니까 곧곧에 주름이 드러나네. 아아! 화장으로 주름을 감추고 있었구나. 그 정도면 화장이 아니라 변장이겠다." 셀리오네는 이제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만 뻥긋 거릴 뿐이었다. 경악하기는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년이 미쳤나?' 레이트 백작이 누군가? 이래뵈도 정계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왠만한 후작보다도 영향력이 센 백작이었다. 게다가 주어 들은 소문으로는 헤이체르 공작과도 연계 되어 있다는 소문이다. 언제나 헤이체르 공작의 후계자와는 의형제 사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 아까 백작에게 반말을 한 것은 애교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귀부인에게 화장을 떡칠한 아줌마라니! 그리고 사과는 못할 망정 염장을 지르다니! '이제 우리는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라이 패거리는 당당했다. 왜냐하면 라이레얼이 껴 있는 이상 감방에 가더라도 다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테고 그러면 쉽게 풀려 날 수 있다. 그래도 저번에는 상대가 경비대 몇 명이었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세도가 중 하나인 레이트 백작이다. 정말 쉽게 풀려 날 수 있을까? "이, 이 천박한 것이 감히……!" "진정하시오, 셀리오네. 사실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소." "뭐, 뭐라구요!? ……어헉!" 셀리오네는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셀리오네의 귀에는 남편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소. 틀린 말 한 것도. 틀린 말.' 하이스네가 레이트 백작을 대신해 하녀들을 불렀고 하녀들은 깜짝 놀라며 백작 부인을 방으로 모셨다. '형님 또 바가지 긁히실 일만 남으셨군.' 하이스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레이트 백작과 안방 마님 사이가 안 좋으면 시동생이 눈치를 보며 살 수 밖에 없었다. 편안한 식객 노릇을 하고 싶었던 하이스네의 계획에 차질을 빗게 되는 것이다. "저런저런. 나이가 지긋하신 아주머니께선 혈압을 조심하셨어야지." 여전히 술에 취해 말하는 라이레얼. 동료 용병들인 이제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제발 부탁이니 죽을 때, 죽더라도 너 혼자 죽어라. 괜히 멀쩡한 우리까지 끌어 들이지 말고.' 레이트 백작은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두 딸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네." 라이레얼은 귀찮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뭔데? 나 졸리니까 빨리 말해. 빨리 말하고 꺼져." '야! 이 년아! 여기 니네 집 아니야. 그러니까 꺼져도 니가 꺼져야지! 제발 부탁이니 정신 좀 차려라.' 정신 나간 행동을 하는 라이레얼 덕분에 동료 용병들은 서로를 껴안은 채 두여움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태연한 레이트 백작. "사실 물어 볼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애들이지." 레이트 백작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두 딸을 가리켰다. 이제는 두 딸이 하프엘프 여인에게 질문하는 것을 듣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라이레얼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세레나와 라나의 얼굴을 한번씩 훑어 보더니 반쯤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 둘. 나한테 질문할 게 뭐야? 빨리 질문 해. 이 언니가 친절하게 답해 줄게." 먼저 입을 연 것은 세레나였다. "당신이 수도 내에서 공공연하게 아이언스 히로 공작의 부인이라고 떠들고 다닌다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응." 짧고 간결한 라이레얼의 대답. 세레나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아이언스 공작의 부인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거죠? 아이언스 공작과 대체 무슨 관계길래? 당신이 그럴 자격이나 있어요?" 이를 악물고 대들 듯이 묻는 세레나. 라이레얼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호호호! 너 같은 꼬마가 뭘 알겠니." 세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저 꼬마 아니에요!" "그래. 그래. 꼬마들이 꼭 그렇게 말을 하더라." 세레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이빨을 바득바득 갈며 눈을 부릅뜨고 라이레얼을 쳐다 보았다. 라이레얼은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재밌어 졌다. "어머, 애! 그런 눈으로 보면 이 언니가 너무 무섭지 않겠니? 아이! 무서워라." "역겨우니 제발 코웃음 치는 소리는 내지마, 라이레얼." "맞아. 그건 좀 오바over다." 동료 용병들의 핀잔. 라이레얼은 술 기운이 섞인 호흡을 몰아 쉬며 말했다. "내가 왜 히로 부인인지 궁금하다, 이거지? 좋아. 원래는 너 같은 꼬마에게는 충격적인 일이라 말 안 하려했지만 니가 궁금하디니까 얘기 해 주도록 할게. 사실 이 언니는 말이지……." 귀가 솔깃해지는 세레나와 라나. "우리 히로와 찌-이-인 한 하룻밤을 함께한 사이거든." 순간, 얼어 붙는 세레나와 라나. 라이레얼의 대답에 충격을 받은 것은 세레나와 라나만이 아니었다. 레이트 백작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라이레얼은 놀라는 세 부녀를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후! 뭘 그리 놀라고 그래? 다 큰 어른들에게 그 정도는 당연한 거란다. 꼬마들에겐 조금 충격이었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친 것은 라나였다. 라나의 표정에는 믿을 수 없다는 마음과 믿기 싫다는 마음이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 피식 웃는 라이레얼. "못 믿겠다는 건가? 뭐 그럴 수도 있지. 좋아. 그럼 이 언니가 믿게 해줄게. 증인1!" 카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웨는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더니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저는 그 날의 일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한 소년의 순결이 무참히 짓밟혔던 날이니까요. 그날 라이레얼은 순진한 히로를 꼬셔 여관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다음은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좋았어. 증인2!" 럴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카웨와 마찬가지로 손을 얹고 얘기를 시작했다. "저도 그 날의 일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전 그 때 마침 옆방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는 남녀의 처절한 신음 소리였습니다. 저는 그 날 밤 잠을 못 이루고 혼자 스스로를 달래야만 했습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날 들렸던 옆방의 신음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느낌입니다." "좋았어. 뭐, 이 정도면 믿겠지? 못 믿겠다면 더 많은 증인을 불러 올 수 있어. 일을 처리하는 내내 히로와 나는 신발과 신발 밑창에 들러 붙은 개똥처럼 계속 붙어다니며 뜨거운 애정 행각을 펼쳐왔으니까." 말을 마친 라이레얼의 표정은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동료 용병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세레나와 라나는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정말 일까? 정말 그랬을까?' 자매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라이레얼은 어쩔 줄 몰라하는 자매를 위해 한번 더 쐐기를 박기로 결심하였다. "아마도 우리가 펼친 애정 행각에 대해서는 저기 앉아 있는 한슨이 설명해 줄 수 있을 거야." 순간, 자매의 눈은 하이스네에게로 돌아갔다. 하이스네는 당황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며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두 자매는 동시에 외쳤고, 하이스네는 이것저것 둘러 데느니 그냥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것이 사실이었다. 아이언스 공작과 라이레얼양께서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것도 맞고 종종 뜨거운 애정 행각을 목격한 적도 셀 수가 없이 많았다. 아마 키스 하는 장면만도 10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밤이 늦어서 졸립군요. 저는 이만 돌아가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제게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대화들 나누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하이스네는 말을 마치고 번개 같이 응접실을 빠져 나갔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식객 노릇을 관두고 자신의 집인 헤이체르 공작가로 돌아갈 생각이다. 레이트 백작은 기가 막혔다. '아니, 그럼 저 놈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숨겼어? 뭐하러 숨겼어? 뭐 때문에 숨겼어?'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레이트 백작은 당장 소리쳤다. "너 거기 안 서, 이 자식아!" 하지만 하이스네는 이미 응접실을 완전히 빠져 나간 뒤었다. 레이트 백작은 화가 났지만 레이트 자매는 슬펐다. 그 믿기지 않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는 거 아닌가? 용병들은 의문에 잠겼다. 카웨가 조용히 테커에게 물었다. "야! 아까 저 여자애들이 왜 한슨과 친한 것처럼 행동한 거냐" 테커가 말했다. "그 보다 왜 한슨이 우리를 이 곳까지 데려온 거지? 그리고 아까 행동을 보니까 이 곳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혹시 한슨 상단 일 때려 치우고 여기 집사로 취직한 거 아니야?" "확실히 얼마 전부터 상단에도 나오지 않던 것 같은데." "그런데 아까 저 형씨보고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그래. 나도 확실히 들었어." 용병들이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레이트 백작은 큰 소리로 용병들에게 말했다. "그 자식은 헤이체르 하이스네로 헤이체르 공작가의 후계자야." 테커가 되 물었다. "예? 후계자요? 하이스네요? 한슨은요?" "한슨이 하이스네야. 정확히 말하자면 한슨은 가명이고 하이스네가 본명이지. 그리고 얼마 전에 정식으로 후계자 인정 받았고, 나와는 의형제 사이야." 놀라는 용병 일동. 그리고 이내 궁시렁거리는 회의. "야! 하이스네가 한슨이래." "아니야. 한슨이 하이스네야." "그 놈이 귀족이었어?" "어쩐지 자식이 굉장히 귀족틱하게 생겼다 했어." "귀족이 왜 상단에 있었던 거야?" "심심했나 보지." "그럼 가명은 왜 썼을 까?" "이름이 너무 길었나 보지." "하이스네가 헤이체르 공작가의 후계자만 굉장히 잘 나가는 거네. 헤이체르 공작가면 최고의 세도가 잖아." "그럼 하이스네가 귀족인 게 우리에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그야 아무래도 좋겠지. 이야! 그러고보면 우리가 대단한 인물을 알고 있었던 거네." "그러게 말이야. 역시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역시 언제나처럼 회의는 단순한 말장난을 끝났다. 하지만 이 와는 반대로 확실한 결론을 도출해 내고 회의를 끝낸 소녀가 있었다. 라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입을 열었다. "난 오빠를 절대 포기 못 해! 오빠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고 해도 다 용서해 줄꺼야!" 라이레얼은 비장하게 외치는 라나에게 시큰둥하게 물었다. "넌 뭐니, 꼬마야?" 라나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당당하게 외쳤다. "전 히로 오빠 애인이에요!" 순간, 너무도 당황하는 용병 일동. 대략 10살 남짓 해 보이는 여자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오리라 예상이나 했겠는가? 다시 시작되는 용병 회의. "저 꼬마애가 히로 애인이래." "진짜 기가 막힌다. 저 꼬마가 조숙한 걸까? 아니면, 히로가 유치한 걸까?" "내 생각엔 그 녀석이 먼저 저 꼬마애에게 손을 뻗힌 것 같아." "그럼 히로가 로리콘이라는 거야?" "사실이 그렇잖아." "그런데 해도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저 어린 아이에게 마수를 뻗힐 수가 있어?" "원래 그 놈이 그렇게 생겼어." "맞아. 언젠간 내가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 언제나처럼 말 장난으로 끝나는 용병 회의. 라이레얼은 라나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너 같이 쪼그만게 히로 애인이라고? 국통 속에 있는 라이코스가 웃겠다." 라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웃지 말아요! 정말이란 말이에요!" 라이레얼은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그래. 꼬마야. 너 히로 애인하렴. 어차피 부인은 나니까. 어머, 그럼 너는 정부(情婦)가 되겠구나? 내가 히로한테 애첩으로 삼아보라고 한번쯤은 권유 해 볼게. 호호호!" 라이레얼과 라나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세레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나쁜 자식. 내가 침실해서 꼬셨을 때는 눈 하나 깜박 안 하더니, 겨우 저런 하프엘프에게 넘어가? 나쁜 자식! 어디 만나기만 해봐.' 레이트 백작은 특이한 반응들을 보이는 자신의 두 딸에게서 신경을 끄고 이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도 전에 결정을 내렸다. "잠시 내 집에 좀 머물게." "예?" 반문하는 용병들. 그런데 그 순간 큰일이 터지고 말았으니. 우웨엑-! 라이레얼이 비싸보이는 융단 위에 마구잡이로 토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목구멍을 넘어오는 것은 대부분 고체가 아닌 액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양이 조금 많았다는 것이다. 응접실은 라이레얼의 토로 완전히 물바다가 되었고,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용병들과는 달리 이 상황에서도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는 레이트 백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적어도 이 걸 다 치울 때까지는 말이야." * 아무도 없는 공터. 나는 이 곳에 매일 같이 출근을 하고 있었다. 사실 매일 같이 라고 해봐야 오늘이 이틀 째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다. 지난번 크로니스와 대련 때, 크로니스는 나의 현란한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었다. 대단한 힘과 빠른 속도로 막아낸 것이 아니라, 그저 보통 성인 남자의 힘과 속도 정도만 발휘해서 막아냈다 아마 막았다기 보다는 흘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내가 찌르기를 하면 어느새 검을 건드려 놓아 방향을 바꾸었고, 휘두르면 살짝 막으며 칼을 지그시 아래로 내려 흘려 버렸다. 정말 허공에 칼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내가 이제 어찌해야 하는 가? 어찌하긴. 속도를 위주로 하는 빠르고 현란한 검술을 익혀야지. 그리고 여기에다 마법을 병행할 수 있다면, 내가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코야, 어제 그 엘프 너무 무서웠어. 어떻게 내 마법을 다 막아 낸 걸까?" "글세. 잘 나가는 엘프인가 보지." "그래도 너무 무서웠어. 라이는 너무 무서워 오줌까지 쌌는 걸." "난 기절까지 했어. 너무 상심하지마. 원래 니 나이 때 오줌 싸는 건 당연한 거니." "나 나이 많은데." "그럼 노망 났나 보지." 어째서 라이 패밀리가 이 곳에서 놀고 있는지 분노감보다 궁금함이 앞선다. 대체 어째서 저 것들이 내 눈앞에서 계속 알짱거리는 걸까?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저 것들은 설마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란 말인가? 검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정신 수양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저런 것들 때문에 계속 흥분을 한다면 나의 정신 상태에도 많은 악형양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 것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나 할 일을 하기로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앞에 가상의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적을 향해 칼을 겨누고…… "이모션Emotion!" 갑자기 라이가 마법을 썼다. 그리고 나에게 말하였다. "같이 놀아요, 오빠." 겨우 그 말을 하려고 4클래스의 마법을 쓴 거냐? 지금 라이가 나에게 쓴 마법은 이모션이라 하여 대상에게 한 가지 감정을 심어주는 마법이다. 즉, 지금 같은 경우에는 친밀감을 주어 나로 하여금 자신들과 같이 놀게 하려는 수작이다. "헛소리! 내가 니들 같이 유치한 것들과 놀 것 같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굉장히 놀고 싶다. 역시 7클래스 마법사가 써서 그런지 굉장히 강력하게 효과나 나타나는 군. 차라리 증오심을 심어주지 그랬냐? 난 손을 뻗었다. "피어Fear!" 대상이 공포에 질려 도망가도록 하는 4클래스 마법. 라이는 새하얀 얼굴이 표백되더니 재빨리 나에게서 도망쳤다. 역시 어린아이에게는 잘 통하는 마법이다. 사실 스윈이나 지니 정도만 되어도 아예 통하지 않는데. 라이는 땅에서 노는 것이 재미없어졌는지 라이코스와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다. 라이코스는 매니까 당연 날갯짓을 해서 떠올랐고, 라이는 마법을 써서 떠올랐다. "플라이Fly." 놀 때 쓸 마법 있으면, 세계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어떻겠니? 이 것들이 하늘에 동동 떠다니며 까르르 웃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는 바람에 내 심정이 과히 좋지 않다. 잘 알다시피 내가 원래 남 행복한 꼴은 못 보는 성격이잖냐? 그나저나 정말 방해가 되는 군. 자리를 옮길 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것들은 내가 어디를 가든 졸졸 좇아 다니며 놀 놈들이다. 내가 한숨을 길게 내쉬는 사이,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사일런스 지니였다. 지니는 언제나처럼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용건을 얘기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제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사실 별로 안녕하지 못하고 방해가 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제 넓은 아량으로 넘어 가 드리도록 하지요. 용건이나 빨리 말하세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하해와 같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방금 전 상아탑과의 얘기가 전부 끝났습니다." "잘 해결 되었나요?" "예. 아이언스 공작님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보통 경우라면 단순한 인사치례였겠지만, 이번에는 진짜 내 덕분이다. 내가 까르린느와 벌인 일 때문에 지니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결국은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맺었을 것이다. "그럼 언제쯤 헤리오로 떠나나요?" "아마 조금 후에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빨리요?" "예. 아무래도 지금은 촉각을 다투는 상황이니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도 그 동안 정 들었던 곳인데, 좀 놀다 가는 것이……." "하루라도 일찍 아이리스로 돌아가 저희 누님과 루시아 공주님을 만나 뵈는 것이……." "당장 출발하도록 하지요. 짐은 제가 다 싸 놓았습니다."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준비성이 철저하시군 요." * 우리는 헤리오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마법진은 어제부터 준비를 해서 완전 준비가 끝난 상태기에 짐을 챙겨 출발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헤리오로 갈 인원은 나와 지니, 그리고 칼리뿐이다. 이제 아이리스와 상아탑과 헤리오 간의 동맹관계가 성사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나와 나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간편한 짐을 챙겨 방을 나섰다. 생각 같아서는 상아탑을 추억할만한 기념품이라도 몇 개 사서 루시아에게 선물해 주고 싶지만, 기념품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 관계로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기념품을 사가면 노처녀가 '이런 거 사올 돈 있으면 군자금에나 보태세요. 하여간 제대로 하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진짜 짜증나 죽겠어. 뭘 봐요? 이 기념품은 제가 압수할 테니 정원에 잡초나 뽑아요.' 이렇게 말할까봐 두렵다. 그런데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정원 자체가 전부 잡초인데 그걸 어느 세월에 다 뽑고 있어? 그리고 기념품은 왜 압수를 하는 건데? 노처녀 미워. 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마법진 주위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마법사들이 포진해있었다. 그리고 배웅 나와있는 사람들도 가득했다. 라이 패밀리는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으윽고 우리가 이동 마법진에 올라서려 하는데…… "꺄악! 지니 오빠 가지 마세요." "오빠, 가면 저 죽어버릴 거에요!" "오빠! 오빠는 떠나지만 제 가슴속에는 언제나 오빠가 살아 숨쉬고 있을 거에요." "사랑해요, 오빠!" "가지 마요! 오빠, 가지 마세요!" 라는 피켓까지 들고 있는 여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지니에게 소리치는 모습이 보인다. 지니의 여성팬들은 당장이라도 지니에게 뛰어들고 싶어하는 모습이었지만 경비원으로 보이는 푸른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어 차마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싸움은 굉장히 치열했다. "비켜, 이 못생긴 것들아!" "생긴 것도 뭣 같은 놈들이 지니 오빠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막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내가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그렇게 누누이 말하였는데 어찌 며칠 되지도 않아 이런 일이 생기는 거냐? 지니는 자신의 팬클럽 여성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쓰러지는 수많은 여성들. 지니의 옆에서 걷고 있는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거지?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그래. 난 부록이나 다름없는 존재야. 지니가 월간잡지라면 난 그 잡지 살 때 딸려오는 부록. 일명 덤으로 끼워 주는 상품. 제길, 난 부록이야! 난 들러리야! 손을 흔들던 지니는 누군가를 발견한 듯,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뮤리아가 서 있었다. 순간 숨을 죽이는 팬클럽 여성들. 지니는 뮤리아의 앞에 서서 말하였다.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게 감사드립니다."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뮤리의 얼굴은 병에 걸렸나 싶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이제 기절하는 일만 남았다. '아! 사일런스 백작님!' 하면서 말이다. 지니는 뮤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뮤리아양은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본 어떠한 여성보다도." 우엑-! 넘어 올 것 같아. 저 느끼한 얼굴로 저런 밥맛없는 말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는 말이었는지 뮤리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뮤리아였으면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생긴 게 쉣 이예요. 정말로 제가 아름답게 보이신다면 안과를 한번 찾아가 보세요.' 이어지는 지니의 말.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언젠가 뮤리아양의 아름다운 모습을 또 뵈었으면 좋겠군요." 이봐! 사일런스 백작!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해. 애가 착각하잖아. 지니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뮤리아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이럴 줄 알았어. 그리고 팬클럽 여성들은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에 굉장한 탄식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마법진 위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별을 더 감상해야만 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라이 패밀리의 이별. "으아아앙! 가지마, 이코야! 라이는 이코랑 헤어지기 싫어. 이코랑 헤어지면 라이 삐질 거야." "흑흑! 나도 슬퍼, 라이야. 이제야 겨우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났는데 너와 헤어지기는 정말 싫어. 너랑 헤어져서 저 싸가지 없는 히로 녀석과 같이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너무 슬퍼." 저 자식이! "우에에엥! 싫어! 싫어! 나 이코랑 헤어지기 싫어!" "흑흑! 나도야." 이 때 갑자기 떠오르는 좋은 생각. 이 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 쓸모 없는 라이코스를 치워버릴 기회. 그냥 이대로 라이코스를 이 곳에다 버리고 가는 것이 나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난 나의 천재적인 머리에 감탄하며 이렇게 말을 하려 하였다. '둘이 그렇게 헤어지기 싫다니. 이 오빠는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니가 그토록 원하니 내가 특별히 너를 어여삐 여겨 라이코스를 이 곳에다 버리고, 아니, 놓고 갈 테니 둘이서 열심히 놀아라.' 그런데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지니가 말했다. "두 분께서 그렇게 헤어지기 싫으시다니, 제 가슴이 굉장히 아픕니다. 라이미안님께서 그렇게 원하신다면 차라리 청안백우조 라이코스를 따라 저희와 함께 헤리오로 가시는 편이 어떠할까요?" 그 말에 놀라는 나와 칼리. 나는 라이 패밀리가 헤리오까지 따라온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칼리는 아마도 있어서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라이가 따라온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리. 저런 걸 탑의 주인이랍시고 대롱대롱 가져가면 헤리오에서 뭐라고 생각하겠나? "그래! 나 이코랑 같이 갈래! 나 이코랑 영원히 안 헤어질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코야? 우리는 영원한 친구잖아." "흑흑! 그래, 라이야. 나한테는 너 밖에 없어." 어린 소녀가 매를 껴안고 흐느끼는 모습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었다. 이 장면을 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감동 받은 나머지 눈물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단한 분노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것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심히 편치 않구나. 옆을 돌아보니 분노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칼리. 칼리는 분노감과 함께 좌절감까지 느끼는 모습이었다. 어찌되었든 상황이 이리 되어 헤리오로 가게 된 사람은 나와 지니 칼리였다. 왜 아까와 똑같냐고? 그건 아니다. 덤으로, 부록으로 엘프 하나와 매 하나가 끼게 되었으니. 아무튼 우리는 마법진 위에 섰고, 마법사들은 마법진에 마나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빛이 내 몸을 감싸는 사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지니가 정말 일을 잘 처리했을까? 뮤라아는 혹시 상사병 걸리는 게 아닐까? 라이는 오줌 싼 거 아직도 안 들켰나? 크로니스는 또 언제 나를 찾아올까? 그리고…… 세레나를 만날 수 있을까? 휘양찬란한 빛은 우리의 몸 전체를 감싸 안았고, 순간, 시야가 하얗게 흐려졌다. 외교 사절 - 01 -------------------------------------------------------------------------------- Ip address : 210.120.128.11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H010818) 우리가 도착한 곳은 흰색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건물이었다. 밑에는 아직까지 이동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 빛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 들었다. 난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라진 마법진 바깥쪽에는 다섯명의 마법사가 오망성의 위치에 서 있었고,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는 마나 증폭 기구로 쓰이는 수정구가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에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딘가요?" "헤리오입니다." 지니가 대답하였다. 물론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기에 난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헤리오의 수도 레오입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댁한테 물은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미천한 제가 감히 하늘 같은 지식을 지니신 아이언스 공작님께 얕은 지식을 뽐내려 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갚기 힘들 것입니다." "그럼 그냥 죽으세요." "죽어도 갚기 힘들기 때문에 오래도록 아이언스 공작님 곁에 머물러 천천히 갚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니는 웃으며 대답을 하였고, 난 그 모습에 감탄을 하였다. 역시 사일런스 지니!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럼 그냥 죽으세요'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을텐데 이렇게 쉽고 빠르게 받아치다니. 아아! 역시 그대는 천하 제일의 모사란 말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칼리는 아까 내가 본 마법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모두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었지만, 칼리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다. 난 라이코스를 품에 안고 웃음을 짓는 라이에게 물어 보았다. "여기가 어딘지 아니?" "여기는 상아탑 H·M 지부에요." 지부? 지부(支部)라면 본부(本部)에서 파생된 부록 같은 존재? 그리고 H·M이라는 것은 혹시 Herio Metropolis의 약자? 난 내 생각이 맞느냐는 눈빛으로 라이를 보았고, 라이는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그 모습을 보고 황당했다. 니가 내 생각을 어떻게 알어? 어찌되었든 우리가 헤리오의 수도로 온 것은 분명하였다. 상아탑의 천연 마나와 마법사들 덕에 굉장히 먼거리를 굉장히 편하게 이동하였군.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와 최고급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식사를 하는 인원은 지니와 나와 라이 패밀리였다. 칼리는 지부에 남아있겠다고 하였고, 라이는 남아 있어봐야 하는 일이 없으니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우리는 최고급 음식점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음식점은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난 전망이 좋은 2층에서 먹고 싶었고 라이 패밀리도 같은 의견이었기에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최고급 음식점답게 2층의 전망은 굉장히 좋았다. 한쪽이 발코니 형식으로 완전히 뚫려 있어 따사로운 햇살을 그대로 받을 수 있고, 비가 오면 그대로 비를 맞을 수 있다. 물론 지금은 햇살이 내리쬐니 비를 맞을 걱정은 없다. 우리는 가장 끝 쪽에 앉았다. 어느새 다가온 여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고, 난 주문을 하기 위해 그 것을 펼쳤다. 그리고 바로 지니에게 건냈다. 뭘 알아야 주문을 하지. "이 것을 왜 저에게……?"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시키십시오. 전 언제나 대중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지니. 그리고 이내 묻는다. "무엇을 시킬까요?" "그야 당연 가장 비싼 걸로." "알겠습니다." 원래 정치인들이 나랏일을 할 때는 무조건 돈이 많이 드는 법이다. 다른 나라에 일이 있어서 가는 경우에는 중간에 대, 여섯 나라 들려 관광과 쇼핑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잠을 자더라도 최고급 호텔, 한 끼니를 먹더라도 최고급 음식점에서 먹어야 한다. 이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 사항이다. 생각을 해보라. 나랏일을 한다면 돈을 대주는 물주(국민)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관광과 쇼핑을 하더라도 절대 자기 돈으로 하지 않는다. 숙박비와 식비 역시 마찬가지고.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결코 정치인이 될 자격이 없다. 국민 세금으로 나랏일을 하는 경우에는 무조건 쓰고 보는 게 장땡이다. 어차피 세금이야 매달 걷는 건데 뭐가 걱정인가?(국민을 한 글자로 표현하자면 <봉>, 두 글자로 표현하자면 <물주>. 만만한 게 국민이지.) 지금 나도 외교 사절로 이 나라에 온 것이니 무조건 비싼 거 먹어야 한다. 솔직히 그 동안 노처녀 눈치 보느라 눈치밥만 실컷 얻어 먹었지, 제대로 음식 한번 먹어 본 적이 없다. 밥 먹는 도중 노처녀 생각이 떠오를 때면 어찌나 목이 막히던지. 지니는 여종업원을 불러 이것 저것을 주문하였고, 여급은 뜨거운 눈빛으로 지니를 훑어 보며 지니의 말을 경청하기 보다는 지니의 외모에 경탄하고 있었다. 이런 경종을 울릴일 같으니라고. 생각 같아서는 여종업원에게 경고를 먹여주고 싶지만, 저 여자가 나를 경계할 것 같아 참는다. 여종업원은 주문을 다 받은 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라이는 내 옆에 앉아 라이코스와 놀고 있었다. 길게 기른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귀를 보고 있으면 라이레얼이 생각 난다. 으음, 아무튼 라이는 굉장히 귀엽게 생겼다. 전체적으로 약간 통통하게 생긴 것이 옆으로 굴리면 잘 굴러갈 것 같다. 특히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을 보면 살짝 꼬집어 흔들어 주고 싶은 욕망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구친다. 커다란 눈망울과 삐죽거리는 작은 입술. 언제나 촐싹 거리는 몸짓. 아아! 정말 귀엽다. 소녀가 저렇게 귀여워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나의 손은 근질거리고 있었다. 라이코스와 다정하게 놀면서 꺄르르- 웃음을 짓는 라이의 표정을 보니 괜한 분노감이 생겨난다. 대체 이 분노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가 요 며칠간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결과 한 가지 결론을 내렸는데, 사실 별로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결론이 아닌 가설로 얘기를 해보자면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원초적인 파괴적 본능이 아닌가 싶다.(너무 거창한가?) 라이는 굉장히 순수하다. 하지만 굉장히 순수와 거리가 멀다. 세상에 찌들어 온갖 권모술수를 쓰는 것이 나의 진정한 모습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어릴적 순수함은 눈꼽만큼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난 라이가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어린시절 나의 순수함을 회상한다.(나도 그 때는 정말 순수했었다. 그 때는 고스톱도 안 치는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난 그 순수함을 다시 가질 수 없다. 그러기에 나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파괴본능이 살아나 그 순수함을 박살 내려 하는 것 같다. 왜냐? 내가 가지지 못한 걸 남이 가지고 있으면 억울하니까. 아아! 나의 얍삽한 머리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긴 하지만, 위의 설명은 솔직히 너무 과장이 심하고, 어이가 없고, 내가 말하고도 내가 황당하다. 그러면 좀 더 현실적인 가설을 얘기해 보도록 하자. 어렸을 때,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으면 앞에 나서서 말하지 못하고 그 주위에 머물면서 괜히 괴롭혔던 기억이 다들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없다면 지금 그렇게 해라.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끄집어 당기고, 회사원인 경우에는 같은 부서 여사원의 뺨을 한번 때려 줘라. 굉장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이런 추억 하나쯤은 있어야 인생 살아가는 맛이 난다.) 고무줄 놀이하는 여자애의 치마를 들추고, 연필을 빼았고, 괜히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고, 별명을 지어 놀리고. 아무튼 내가 라이를 괴롭혀 주고 싶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 하하! 아무렴 내가 이런 꼬마애에게 관심이 있겠는가? 하하하! 이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에도 나의 눈에는 라이의 뒤통수만이 어른거렸다.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뒤통수. 일반적인 사람들은 한번씩 쓰다듬어 주고 싶은 심정을 느끼겠지만, 난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한층 우월한 사람이기에 다른 심정을 느낀다. 아! 패주고 싶어. 손을 쫙 펴고 각도를 잘 잡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저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가격한다. 그럼 빠악- 소리와 함께 잠시 침묵이 흐른다. 라이는 얼굴을 찌푸린 채, 두 손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감싸고, 잠시 후, 고개를 들며 커다랗게 울어 재낀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아아! 너무도 그 모습을 보고 싶다. 내가 결국 충동을 참지 못하고 라이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려는 순간 음식들이 줄을 지어 올라왔다.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내가 라이를 때렸다면 지금쯤 울며불며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이젠 <헬로우 귀티>를 인질로 잡을 수도 없잖아. 잠깐! 그러고보니 라이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인 <헬로우 귀티>는 어딜 간 거지? 여종업원들이 지니를 정신 없이 바라보며 정말 정신 없게 음식을 올려 놓는 사이, 난 라이에게 물었다. "야! 너의 베스트 프렌드Best Friend 헬로우 귀티는 어디 갔니?" 갑자기 라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흥! 이제 귀티랑은 안 놀아." 순간, 나는 놀랐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귀티가 뭘 잘못 했기에 귀티랑 안 놀아? 귀티가 이젠 빈티나니? 아니면, 어디 다치기라도 한거야? 다쳤으면 치료를 해줘야지 그냥 버리면 어떡해? 너 당장 가서 귀티 데려와." 지금에서야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그 동안 귀티를 좋아했었다. 그 넙적하고 펑퍼짐한 얼굴을 볼 때마다 어찌나 감동스러운지 콧물이 다 흐를 지경이다. "귀티는 남자 친구 사귀었다고 라이랑은 놀아주지도 않아요. 귀티 나뻐!" 왠 남자 친구? 인형에게도 남자 친구가 있니? "남자 친구 이름이 뭔데?" "쥐티 마우스에요." "쥐티 마우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친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다. "어떻게 생겼는데?" 라이는 잠시 생각하고 말하였다. "으음, 귀는 이렇게 크고요, 몸은 검은색이고, 손에는 흰 장갑을 끼고 있어요. 옷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로 빨간색 멜빵 바지를 입고 있고요……." 계속되는 라이의 설명을 들으며 <쥐티 마우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던 나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야! 그건 쥐티 마우스가 아니라, 디즈니의 상징 미키 마우스잖아." 그러자 라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나를 노려 보았다. "아니야! 걔 이름은 쥐티란 말이야! 쥐 같이 생겼다고 해서 내가 쥐티 마우스라고 이름 붙인 거야! 오빠는 왜 자꾸 내 친구들에게 이상한 이름을 붙이려 그래! 오빠 나뻐!" 순간, 음식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 되었다. 라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정말 화난 것이다. 나의 몸을 엄습해 오는 두려움. 이 애도 화 나니까 무섭군. 난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니면, 말지…….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사람 무안하게……. 쥐티던 귀티던 니 마음대로 해." 라이는 그제야 화를 풀고 자리에 앉았고, 난 짝퉁이 판을 치는 이 시대의 현실에 한탄을 하였다. "드시지요, 아이언스 공작님." 지니는 정중하게 나에게 권하였다. 역시 지니는 예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라이 패밀리는 예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내가 포크를 들기도 전에 지들끼리 열심히 먹고 있는 것이다. "많이 먹어, 이코야." "걱정하지마. 너나 많이 먹어. 많이 먹어야 쑥쑥 크지." "라이는 많이 먹어도 언제나 이 모습인 걸." 난 이름도 모르는 새 요리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지니는 언제나처럼 고상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꺅꺅- 거리는 여종업원들. '어머! 저 남자 좀 봐. 너무 멋있지 않니?' '그래. 식사하는 모습이 거의 예술이야.' '맞아.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는 평범한 누구누구와는 굉장히 비교된다.' '마치 극과극을 달리는 것 같아.' 이건 나의 생각인데, 여종업원들이 말하는 평범한 누구누구는 분명 라이와 라이코스가 틀림 없다. 어린 여자 엘프와 매가 같이 음식을 먹는 모습은 정말 너무 평범하기 그지 없으니까. 난 외모로만 평가하는 이 시대의 현실이 너무 원망스러워 마구마구 열심히 음식물을 입에 쓸어 넣었다. "아니, 아이언스 공작님. 어찌하여 그러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시는 지요?" "시끄러워! 못 생긴 놈이 어떻게 먹던 댁이 무슨 상관이야?" 주변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목소리. '어머, 못 생긴 게 성격도 굉장히 드럽다.' '그러게 말이야. 못 생겼으면 성격이라도 좋아야지. '저러니까 여자를 못 사귀지.' '맞아. 맞은편에 앉은 굉장히 잘 생기고 성격도 좋은 누구누구와 굉장히 비교 된다.' 대체 저 여자들은 지니가 성격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설마 잘 생긴 남자가 성격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가?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려는 그런 무식한 오류를 범하다니! 그리고 저 것들은 왜 일 안 하고 남 먹는 것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지? 난 먹던 음식을 내 팽게치고 지니에게 말하였다. "이 음식점 주인을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벼운 손짓. 그 손짓을 본 십여명의 여종업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순식간에 지니에게 다가섰다. "무슨 일이신가요?" 방긋방긋 웃는 여종업원들. 역시 웃으며 말하는 지니. "주인을 불러주시겠습니까?"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 나가는 여종업원들. 사일런스 지니 백작님께서 내리신 임무를 반드시 수행하고야 말겠다는 투철한 직업 의식이 돋보인다. 잠시 후, 여종업원들은 주인과 함께 올라왔다. 펑퍼짐한 중년 남자 같이 생겼고, 실제로도 그러한 주인은 허리를 깍듯이 숙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주인의 표정과 몸동작에는 서비스와 친절로 타업소와의 차별화를 기획, 최고의 음식점이라는 명성을 지키고 말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돋보였다. 주인이 이러는 사이에도 여종업원들은 정신 없이 지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손가락으로 지니를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여종업원들을 가리켰다. "이 것들 좀 치워 주세요. 아까부터 계속 이 쪽만 보고 있어요. 식사 하는데 방해 되서 목에 넘어가질 않아요. 남 먹는 거 바라보는 게 가장 치사하다는 것도 모르나 보죠? 대체 종업원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신 건가요? 만약 이 일이 시정되지 않고 계속 유지될 시에는 이 음식점에 대한 나쁜 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투고 할 겁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주인. 주인은 땀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연신 허리만 굽신 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손님.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주인은 여종업원들을 몽땅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저 여자들은 내일쯤 다른 직장을 알아보지 않을까 싶다. 지니의 추종자들이 사라지고 나자 식사를 하기가 한층 수월 하였다. 하지만 나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와! 이거 너무 맛있다." "그러게. 역시 훌륭한 영물이 되려면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한다니까." "정말?" "그래. 그나저나 이거 다 먹어가는데 더 시키는 게 어떨까?" "그러자. 아줌마! 여기 이거 한 그릇 더 요!" 물론 그 이유에 내 주위에서 알짱거리는 라이 패밀리가 빠질 수 없다. 하지만 이 것들은 둘째 이유에 불과하다. 그럼 첫째 이유는 무엇이냐? 그건 크로니스 때문이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그 동안은 별 생각 없이 만나왔었는데 저번 만남 이후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한번 진지하게 생각 해 보았다. 크로니스는 어째서 나를 돕는 걸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고,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 처음 크로니스를 만났을 때,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때 받은 도움은 단순한 호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간만에 만난 인간이니 서비스나 조금 해 주자는 차원에서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나를 찾아 온 걸까? 왜 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일까? 아무래도 다음에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 겠다. 계속 이대로 있는 것은 찜찜하니까. 식사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아 볼 것이 몇 가지 있어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저도 같이 갈까요?" "괜찮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일어서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편히 쉬고 계십시오." 지니는 말을 마치자마자 뭐가 그리 바쁜지 바람처럼 사라졌다. 해지기 전까지 돌아온다고? H·M 지부에서 만나자는 건가? 어쨌든 그 때까지는 실컷 놀 수 있겠군. 아직 해가 한창 높이 떠 있으니까 말이야. 난 라이 패밀리와 함께 식사를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불길한 것이 확실했다. 난 무시하고 그냥 일어서려다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건 절대 감각의 힘이야. 절대 감각이 나의 신변에 무언가 위험이 닥친 것을 알고 경고 해주는 것이 틀림 없어. 만약 이 경고를 무시하면 어떻게 될 지 몰라. 이 불길한 예감의 정체는 무엇이지?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난 잠시 생각한 끝에 그 불길한 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망할! 사일런스 지니! 그렇다. 지니가 계산을 안 하고 먼저 일어 선 것이다. 난 당연 지니가 돈을 낼 줄 알고 실컷 시켜 먹었는데 물주인 지니가 먼저 나갔다. 그럼 계산은 누가 하지? 어쩐지 아까 나가는 발걸음이 너무 빠르다 했어. 이제보니 이 것은 나를 옭아 매려는 수작이었군.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아이언스 공작을 철저히 파멸 시키겠다는 거냐, 사일런스 지니? 정말 사일런스 지니가 나에게 이럴 줄은 몰랐다. 아주 남매가 세트로 나에게 물을 먹이고 있다. 노처녀라면 이해가 가지만 믿었던 사일런스 지니가 이럴 줄은. 혹시 노처녀가 이번 일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아닐까? 그래.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노처녀라면 그러고도 남아. 아아! 노처녀! 이 곳에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구나! 제길, 수중에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데 어쩌지? "다 먹었는데 왜 안 일어서요, 오빠? 아직 배 고파요? 더 시킬까요?" "그래. 우리 좀 더 시켜 먹자."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라이 패밀리. 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 내기 위해 고민하였다. 자고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아이언스 공작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지, 무전취식(無錢取食)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라이야! 잠깐 오빠 무릎 위에 좀 앉아 봐." 라이는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내 무릎에 앉았다. 난 양 손으로 라이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분명 말 하지만 이것은 결코 유아 성희롱이 아니다. 난 다만 라이의 몸에서 한 개의 동전이라도 나오길 바라는 처절한 심정으로 이 짓을 하는 거다. 몸 수색이 끝나자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주머니에 든 거라고는 막대 사탕 밖에 없냐? 너 이런 거 자꾸 먹으면 이빨 썪어! 난 다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잘 알다시피 이런 경우에 정상적인 두뇌 회전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야말로 잔머리와 애드립, 객기로 승부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상황을 너무 어렵게 해석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지금 상황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해 보면…… 1. 음식을 먹었다. 2. 음식을 먹었으니 돈을 내야 한다. 3. 나는 돈이 없다. 4. 돈이 없으니 당연 돈을 낼 수 없다. 결론 : 돈을 낼 수 없으니 돈을 내지 않으면 된다. 역시 간단하군. 어찌되었든 나는 돈을 낼 수 없으므로 지금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난 진지한 표정으로 라이를 바라 보았다. "라이야!" "왜요?" "튀어!" 나는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앞 서는 사나이. 난 바로 몸을 날렸다. 어차피 발코니 형식으로 되어있기에 뛰어 내리기만하면 바로 음식점을 나가게 된다. 비록 이 곳이 2층이기는 하지만 나의 현란한 몸놀림과 천부적인 균형감각만 있다면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착지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콰앙-! "괜찮아요, 오빠?" 위에서 들려오는 라이의 목소리. 넌 이게 괜찮게 보이냐? 제길, 다리뼈가 부러진 것 같아. 난 비틀거리며 일어서 아직 2층에 남아있는 라이에게 외쳤다. "넌 거기서 뭐하고 있어? 빨리 안 내려와?" "전 계단으로 내려갈 께요." 무전취식을 하는 주제에 당당하게 카운터 앞을 통과하시겠다? 지금 장난하냐? "당장 뛰어 내려!" "알았어요. 가자, 이코야." "그러자꾸나." 라이코스는 새 답게 날개를 퍼덕이며 뛰어 내렸다. 그런데…… 쿵-! "쓰읍! 영물 죽네!" 저거 새 맞아? 어떻게 날지도 못하냐? 라이는 플라이Fly 마법을 써서 천천히 내려왔다. 으음, 이제보니 저런 방법도 있었군. 라이가 땅에 발을 딛였을 때쯤 누군가가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요! 어딜 가시는 겁니까!?" 난 음식점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시끄러! 맛도 없는 음식 먹어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야지!" 그러자 주방장으로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대문을 박차고 뛰쳐 나왔다. 요리를 하던 중이었는지 양 손에 식칼을 든 채. 난 깜짝 놀라 라이를 껴 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거기 서!" 대머리의 외침. 라이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왜 도망가는 거야?" "지금 그걸 몰라서 묻냐?" "응." 라이코스는 날아서 나를 쫓아 오다가 날갯짓하기가 귀찮았는지 내 어깨 위에 앉았다. 그리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돈 없이 밥 먹으면 이렇게 되는 거야." "너 많이 해봤구나." "당연하지. 내 주특긴데." 하긴, 매가 무슨 돈이 있었겠니? 잠시 뒤를 돌아보니 사람들이 우르르 쫓아오고 있었다. 이게 전부 다 사일런스 지니 때문이다. 내가 2층에서 뛰어 내린 것도, 이렇게 라이를 안고 발바닥에 불 나도록 뛰는 것도. 두고보자, 사일런스 지니! 내 이 원한은 두고두고 갚아 주마. 그런데 얘는 조그만 게 왜 이렇게 무겁냐? 팔 아파 죽겠네. "야! 안 쫓아 오냐?" 나의 정찰병이자 라이의 친구인 라이코스는 날아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그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만에 열심히 달렸더니 힘들어 죽겠군. 라이코스는 언제나처럼 라이의 회색 머리카락 위에 앉았다. 그러고보면 둘의 이런 모습은 정말 굉장히 잘 어울린다. 난 라이에게 말하였다. "이젠 안전해 졌으니 우리 서로의 갈 길을 가도록 하자. 넌 라이코스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던 지부로 돌아가던 맘대로 하렴. 난 잠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닐테니. 아!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긴 아저씨가 사탕 봉지 쥐어 주며 같이 가자 그래도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인신매매범이라하여 아주 질 나쁜 사람이거든. 그럼 이만 헤어지자. 잘 있어. 이따 보자." 난 말을 마치고 나의 갈 길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어째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난 고개를 획 뒤로 돌렸다. 라이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인다. 난 다시 몇 걸음 옮기다 또 뒤를 돌아 보았다. 라이는 또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난 라이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너 왜 따라오는 거야? 니 갈 길을 가." "저기……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저 갈 데 없는 데." 니가 무슨 집 나온 비행 청소년이니? 갈 데가 없긴 왜 없어? "그럼 지부로 돌아가."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 칼리랑 둘이만 있으면 칼리가 잔소리한단 말이에요. 저 그냥 오빠랑 있을래요." 그래. 그 마음 내가 다 이해한다. 나도 노처녀랑 둘이만 있으면 노처녀가 잔소리 해. 이렇게 되어 난 라이를 데리고 시내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 힘든 일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산책을 하여 마음을 풀어주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래야 나이들어 결혼도 못한 누구누구처럼 짜증을 부리지 않게 된다. 라이는 시내의 모습이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방을 열심히 둘러보고 있었다. 어찌나 열심히 둘러보는지 정신이 다 사나울 지경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주위 사람들 모두가 라이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라이를 보고 수근거리는 많은 사람들. '어머, 저 아이 좀 봐요. 정말 너무 귀엽지 않아요.' '그러게 말이에요. 진짜 저런 딸 하나만 있었으면.' '귀가 뾰족한 것을 보니 엘프인 모양인데요.'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런데 저 아이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매는 뭔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맛있게 생겼네요.' 사람들은 대부분 라이가 굉장히 귀엽고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식으로 말을 하였다. 데리고 가 신부로 삼았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남자들도 몇 명 있었지만 이런 놈들은 제정신이 아니니 제하도록 하자. 아무튼 라이와 함께 다니니 사람들의 이목을 너무 끄는 것 같다. 아! 난 조용히 살고 싶었거늘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구나. 라이는 자신을 구경하는 사람들까지도 재밌다는 듯 구경하였지만, 나는 결코 그러지 못하였다. 지금 내 기분은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 곳에서 라이를 버리고 나 혼자 홀가분하게 다니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라이가 길을 잃을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난 사람들의 시선을 될 수 있는 한 피하기 위해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골라서 다녔고 그러다보니 이상한 골목길로 들어오게 되었다. 난 걸으면서 라이에게 투덜거렸다.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왜요? 라이는 잘못한 거 없는데." "관두자. 내가 어린애 데리고 무슨 얘기를 하겠냐?" 산책이나 하려 그랬 것만 라이 때문에 완전 글렀군. 난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에게 골목 한쪽에서 거적대기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난 거지인가 싶어 다가가 보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거지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거적대기 위에 앉아있는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얼마나 나이가 들었는지 머리카락과 수염은 물론이거니와 눈썹까지 하얗게 새 있었다. 지그시 뜬 눈에서는 '인생 다 살았다. 죽어도 그만, 안 죽어도 그만' 이라는 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아니, 한번이 아니라 두 번쯤 봤나? 내가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 노인은 잠깐 내 얼굴을 쳐다 보았고, '별 싱거운 놈이 다 있네' 라는 눈빛을 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앗! 당신은!" "앗! 네 녀석은!" 아아! 기억난다! 점을 봤다하면 쪽집게처럼 알아맞추는 쪽집게 도사. 언제나 나의 위험을 미리 예견해 주었으며, 별거 아닌 일을 굉장히 큰 일처럼 과장해서 말해주는 노인. 점 조금 봐주고 엄청나게 많은 금화를 갈취하였던 악덕영업인. "아니, 이 곳에는 또 어쩐 일이세요?" "그냥 발 가는데로 가다보니 다시 이 곳이더군. 그런데 네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냐!?" 노인의 말투는 '넌 이 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왜 이 곳에 있느냐' 는 듯한 말투였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어디있든 댁이 무슨 상관이슈.' 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난 예의를 아는 착한 젊은이기에 결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이 할아버지는 누구야?" 라이는 내 옆에 다가와 물었다. 난 친절하게 대답하였다. "이 할아버지는 쪽집게 도사란다. 어서 인사드리렴. 어린 아이는 인사를 잘 해야하는 법이야." 라이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노인은 깜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 하고 거의 절을 하다시피 몸을 숙였다. "말씀 놓으십시오, 어르신." 어? 이게 무슨 일? 난 순간적으로 노인이 미쳤나 생각하였다. 전에 만났을 때만해도 정정했었는데 그 사이에 노망이 들었단 말인가? 아니면, 치매? 어르신이라니? 누가 어르신이야? 라이가? "왜 그러시나요? 혹시 눈이 잘 안 보시나요? 얘는 어린애입니다." 노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보며 인상을 썼다. "어허! 하늘은 속일 수 있어도 나는 못 속이여! 척 보기에도 이 분은 내 나이의 몇 배나 되는 인생을 살아오셨는데 어린애라니? 네 녀석이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거냐?" 몇 배나 되는 인생? 척 보기에 이 노인 백살은 넘어보인다. 난 라이에게 물었다. "라이야! 니 나이가 지금 몇 살이니?" 라이는 눈을 크게 뜨며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작은 손을 쫙 펴서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라이는 입으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천천히 구부렸다. 손가락을 7개 구부리더니 나를 올려다 보았다. 7살이라는 건가? "잘 모르겠어. 어쨌든 700살이 넘은 건 확실해요." 700살. 그래. 그러고보니 전에 그렇게 들었었지. 그 동안 하도 유치하게 굴어서 잊어 버리고 있었어. 그런데 저 노인은 그걸 어떻게 안 거지? 난 노인에게 물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아셨는 지요?" 노인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자신의 수염을 쓸어 넘겼다. "어허! 천기(天氣)까지 읽는 내가 그걸 알아내는 것 정도는 기본이지. 저 분의 얼굴에서는 7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딘 관록이 보이시고, 저 분의 눈동자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은 마음이 담겨져 있으니 내 어찌 저 분의 나이를 짐작하지 못 하겠나?" 난 아무리 봐도 통통한 젖살과 귀여운 눈망울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상한 건가, 이 노인이 이상한 건가? 라이는 노인의 말을 다 듣더니 감탄을 하며 박수를 쳤다. "와아! 대단해요!" 노인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아닙니다. 말 놓으십시오, 어르신." 남들이 보면 정말 치매 걸린 줄 알겠군. 다행히 주위의 사람은 없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바쁘게 걸어 다니는 몇 명만이 보일 뿐이었다. "알았어, 할아버지. 그런데 할아버지 점쟁이야?" "예. 그렇습니다, 어르신." "그럼 점 잘쳐?" "흉내는 낼 줄 압니다만, 어르신 앞에서 보일만큼의 능력은 되지 못 합니다." "에이! 그럼 헛 살았네." 말을 놓으라고 놓는 너나 그걸 당연하게 받아 들이는 저 노인이나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노인은 라이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는 내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것도 뚫어지게. 그리고 말했다. "자네 점 볼 생각 없나?" 그래. 내가 이 말을 기다렸었어. 난 재빨리 노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물론 볼 생각 있습니다. 제가 사실 얼마 전에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여자와 잘 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좀 알아보고 싶거든요. 잘 되겠죠? 뭐라고요? 결혼은 문제 없다고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봐도 우리는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환상적인 커플이거든요." 노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호통을 쳤다. "니가 점쟁이야!? 니가 점 봐!?"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고 그래.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뭐고 손이나 내밀어 보게. 아! 이 손 말고 오른손! 왜 맨날 왼손을 내밀어!" 버릇이 되서. 노인은 눈을 크게 뜨고 내 손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점괘가 어떻게 나올까? 잠시 후, 노인은 입을 열었다. "그래. 여자를 만났다고?" "예. 그 여자는……." "굉장히 아름답지?" "예." "굉장히 높은 신분이지?" "예." 역시 쪽집게 도사. 전부 알아 맞추는 구나. "굉장히 성격이 과격하지?" "예?" 아니, 과격이라니? 그녀의 성격 어느 부분이 과격하단 말인가? "성격이 과격하지 않아?" "예. 절대 과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걸요." 나의 대답에 노인은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허! 그럴 리가 없는데. 점괘로 보면 분명 성격이 그러한데 말이야. 그렇지 않다고 하니 이거 참 이상한 일이군." "대체 점괘가 어떻게 나왔는 데요?" 노인은 나의 손을 잡고 다시 손금을 살피며 말했다. "점괘에는 성격이 과격하고 털털하여 말괄량이 기질이 다분하다고 나왔는데." "하하! 그럴 리가요. 그녀가 얼마나 차분하고 조용한데요. 말괄량이 기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걸요. 혹시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분명 점괘에는 그렇게 나왔다니까." "그럼 점괘가 잘못 됐나 보죠." "어허!" 노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찌 그런 소리를 해!?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 하늘보다 노인장이 더 무서워요. 노인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다시 내 손을 보았다. "내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네. 다른 것이나 계속 보도록 하지." 다행이군. 그나저나 이젠 쪽집게 도사도 한물 갔구만. 점괘가 틀리게 나오다니 말이야. 노인은 한 동안을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손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라이는 내가 놀아주지 않으니까 심심한지 한쪽에 쪼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후우-!" 노인의 한숨. 난 깜짝 놀라 물었다. "왜요? 뭐가 또 이상해요? 설마 그 여자와 인연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인연이긴 한데, 그리 좋지는 못하군." "뭐가 안 좋은데요?" "여자의 기(氣)가 너무 세." "기가 세면 어떻게 되는데요?" "완전히 잡혀 살게 되는 거지. 한 마디로 공처가(恐妻家)가 되는 걸 세." "공처가요?" "그래." "하하, 그럴 리가요? 그녀가 얼마나 연약한데." "외모로 전체를 판단하려 하지 말게. 장미는 가시를 품고 있고, 예쁜 버섯일수록 독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이 노인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가? "그런데 말이야, 지금 보니 자네 상(像)이 별로 안 좋구만." "예?" 노인은 갑자기 나의 얼굴을 앙상한 두 손으로 움켜쥐고 가까이 끌어 당겼다. 그리고 코가 맞닿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내 얼굴을 노려 보았다. "저, 저기 왜 이러세요?" 노인의 눈은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조그만 것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반쯤 죽어가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최악이야!" "예?" 최악이라니? 뭐가 최악이란 말인가? "내 살다살다 이렇게 재수 없는 상판때기는 처음 보는 군. 정말 재수 없어. 이렇게 재수 없는 관상은 1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야!" "예?" 노인은 내 얼굴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무엇엔가 놀란 듯 벌떡 일어나 깔고 앉았던 거적대기를 둘둘 말기 시작하였다. 이 자리를 뜨려는 것이다. 난 황급히 노인의 바짓가랑이를 움켜 잡았다. "어디 가세요?" "이디던 이 곳만 아니면 되네. 에이, 카악- 퉤-! 재수 없는 상판때기를 보니 나까지 재수 없어지는 군. 잘 있게. 난 이만 가보겠네." "안 되요!" 난 노인의 바짓가랑이를 더욱 세게 움켜 쥐었다. "이거 왜 이래? 바지 벗겨저!" "못 가요! 말씀은 해 주시고 가셔야지요." "그건 천기(天氣)……." "천기이기 때문에 누설을 하면 천벌을 받게되므로 말해 줄 수 없다는 말씀이시죠?" "잘 아는 구만. 니가 점쟁이 해." "제발 말해주고 가세요. 말해주기 전에는 못 가요." "이거 놔!" "죽어도 못 놔요." 내 분명히 말 하는데 지금 이 노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괜히 쪽집게 도사 명성을 얻었겠나? 내가 하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버티자 노인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내 자네와의 인연도 있으니 특별히 얘기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난 자세를 바로하고 노인의 얘기를 경청할 준비를 하였다. "지금 자네의 상은 최악일세.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어. 자네의 오늘 운세는 악운에 악운이 겹쳐 있어. 분명 방금 전에도 안 좋은 일이 있었을 걸세.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린 바람에 위험한 상황에 처 했었지. 그런데 용케도 잘 빠져 나왔구만." 난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쪽집게 도사님. 사실 아까 밥값 내기로 했던 사람이 안 내고 그냥 간 바람에 죽어라 도망쳤습지요." 노인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데요?" "잠시 후만 되어도 자네는 무거운 짐을 등에 실고 가까운 거리를 돌아가게 될거야." 무거운 짐을 등에 실고 가까운 거리를 돌아가? 무슨 비유 같은 건가? "그리고 해가 지면……." "해가 지면요?" "해가 지면 자네의 악운은 최고조에 달할 걸세. 특히 자정에서 동이 틀 때까지를 조심하게. 커다란 재앙이 닥칠 거야. 자네가 이 재앙을 피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그게 뭔가요?" "아무 곳에도 가지 말고 방에 조용히 틀어 박혀 날이 밝기를 기다리게." "예? 아니, 무슨 재앙이길래?" "시끄러! 자꾸 되 묻지 좀 마.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냥 그런 줄 알어! 아무튼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큰 화를 입게 될 거야. 그럼 잘 있게. 자네의 재수 없는 상판때기를 계속 보고 있자니 나까지 재수 없어지는 느낌이구만. 카악- 퉤-!" 노인은 걸죽한 가래침을 한번 뱉은 다음, 쏜살 같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노인의 말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해가 지면 재앙이 닥친다고? 재앙을 피하려면 방에 조용히 틀어 박혀 있으라고? 보통 같았으면 미신이라고 코웃음도 안 쳤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저 노인은 분명 화(禍)를 피하라고 하늘이 보낸 사자(使者)가 틀림 없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잠만 자야 겠군. 난 앞으로 닥칠 화를 미리 알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늘을 보니 몇 시간 후면 어두워 질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 봐야 겠군. 난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라이에게 다가갔다. "라이야, 집에 가야지." 라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라이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라이코스라도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이 녀석도 가만히 있었다. 난 라이를 살펴 보았다. 쿨- 쿨- 자고 있군. 완벽한 숙면을 취하고 있어. 난 라이를 톡톡 건드려 보았다. 하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라이코스도 같이 자고 있었다. 내가 라이를 발로 걷어 차 깨우려는 순간, 아까 그 노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잠시 후만 되어도 자네는 무거운 짐을 등에 실고 가까운 거리를 돌아가게 될거야.> 난 입을 쩍 벌렸다. 설마 내가 라이를 등에 업고 길을 헤메야한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되! 내가 뭐 때문에 라이를 업어야 하는 건데? * * * * * 역시나 점쟁이의 말은 확실했다. 나는 라이를 업고 두 시간 가까이 헤멘 끝에야 간신히 H·M 지부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지금에야 안 사실인데 거리는 굉장히 가까웠다. 내가 반대로 가지만 않았어도 10분 내에 올 수 있는 거리였다. 내가 특히 열받은 점은 라이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무거웠다는 사실이다. 이런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엄청난 무게가 나오는지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치 쌀가마니를 등에 진 기분이니. 라이코스는 새니까 무게가 별로 안 나간다치자. 그럼 내 등에 엄청난 하중을 가하고 있는 것은 거의가 라이의 몸무게라는 결론이 나온다. 대체 뭘 먹고 컸길래 이렇게 무겁니? 너 같은 애는 삼일은 밥 한끼 안 주고 쫄쫄 굶겨야 되. 그래야 음식의 소중함을 알고 몸무게도 이렇게 많이 나가지 않지. 내가 지부 안으로 들어서자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칼리와 지니는 동시에 나를 쳐다 보았다. 그와 동시에 내 등에 업힌 라이도 쳐다 보았다. 칼리는 입을 크게 벌리며 이마를 짚었다. 지금 칼리의 표정을 해석하자면 '또 사고치고 들어 왔어. 이번엔 어떻게 혼 내주지? 제발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 가자' 정도가 되겠다. 난 그런 칼리의 표정을 보고 '얘를 그 자리에 버리고 왔어도 그리 심하게 욕 얻어 먹지는 않을 것 같으니 그냥 버리고 올 거 그랬다' 는 생각을 하였다. 난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내 등에 있는 것을 그냥 바닥에 내동댕이 칠지, 아니면, 조용히 침상에 눕혀 줄지 고민하였다. 다행히도 그런 내 고민을 눈치 챘는지 칼리가 손을 뻗었다. "저에게 주십시오." 난 라이를 내려 칼리에게 건내 주었다. 칼리는 라이를 살짝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재우려는 지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으음, 그런데 등이 좀 축축한 것 같군. 이런 제길! 침까지 흘렸잖아! 내 등이 그렇게 편안했냐? 지니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여쭈어 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천기가 그러한데 인간의 힘으로 어찌 그것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잠깐. 지니의 저 웃는 상판때기를 보니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맞아! 저 놈이 돈을 안 내고 튀었었지. 그 때문에 난 2층에서 뛰어내려야 했고. 라이를 업고 오느라 체력을 전부 소진해 삭신이 쑤셨지만 난 그 것에 개의치 않고 번개 같이 지니에게 달려 들었다. "너!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멱살까지 움켜 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니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이긴 무슨 말이야? 니가 돈 안 내고 먼저 일어선 바람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솔직해 말해봐. 너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지? 아니면, 니네 누나가 시켰어? 시켰지? 맞지?" 여전히 웃고 있는 지니. 그 웃음이 나에게는 비웃음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 오늘 이 자리에서 사일런스 남매와의 악연을 청산하고야 말리라.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저는 먼저 일어서면서 분명 계산을 하고 나갔습니다." "예?" 아니, 그럼 뭐야? 지니가 먼저 계산을 하고 나갔다는 거야? 그럼 왜……?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설마 지니는 계산을 하고 나갔는데, 나 혼자 지레짐작하고 2층에서 뛰어 내리는 등의 생쇼를 벌인건가? 그런데 그 놈들은 왜 쫓아 온 거지? 혹시 이 인간이 거짓말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맞아. 지니는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 없어. 당대 최고의 모사답게 잔머리도 수준급이니까 말이야. "먼저 계산을 하고 나가며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무엇을 더 시켜 드실지 몰라 돈을 두둑히 지불하였습니다. 돈이 남으면 아이언스 공작님께 돌려드리라고 주인에게 말하였는데 돌려 받으셨는 지요?" 뭐야? 그럼 그 사람들이 쫓아 온 것이 돈 돌려 주려 그런 거였단 말인가? 겨우 돈 몇푼 돌려주려고 그렇게 살벌하게 쫓아 왔단 말인가? "설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저를 '밥값도 안 내고 도망친 놈' 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난 지니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그리고 지니의 옷깃을 바로 세워주며 말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잠시 장난을 좀 쳤다고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송구스럽군요. 하하하!" 지니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의 유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요. 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저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계신 것 아닌가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리 섭하게 하십니까? 악감정이라니요? 제가 사일런스 백작님을 얼마나 좋아하는 데요. 어! 여기 먼지가 묻어 있군요. 제가 털어드리겠습니다." 난 조심스럽게 지니의 옷을 만져 주었고, 지니는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역시 지니가 나를 배신할리 없지. 잠시나마 지니가 '밥값도 안 내고 도망친 놈' 이라는 인상을 가진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아! 미안해라. 우리는 앉아서 얘기를 나누기로 하였다. 난 별로 나눌 얘기가 없었지만, 지니는 있는가 보다.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언제까지 여기 머물건가요? 먼저 숙소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긴 잠잘 곳도 마땅치 않을 것 같은데."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말씀이 맞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헤리오의 국왕과 고위 귀족들을 만나뵈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숙소를 정해야지요." "그건 차후에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헤리오의 국왕과 고위 귀족들은 언제 만날 건가요?" "그게 말입니다……." 지니는 중요한 말을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국왕을 알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희가 외교 사절인 것을 가만하더라도 알현 신청을 해 놓고 빠르면 3일, 길면 일주일 정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아이언스 공작님과 저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래서요?" "오늘밤에 왕궁으로 찾아 갈 생각입니다." "찾아가요?" "예." "사전에 얘기가 잘 되었나 보죠?" "아닙니다. 그냥 찾아가는 겁니다." "그럼 무단으로 잠입하자는 얘긴가요?" "그렇습니다." 난 지니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니의 표정은 진지하였다. 하지만 표정이 진지하면 뭐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아니, 동맹을 맺기 위한 외교 사절단을 보고 왕궁으로 무단 잠입을 하라고요?" "그렇습니다." "그거 말이 되는 얘긴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 풀릴 수 있을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아이리스는 헤리오에 비해 약소국이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우리입니다. 그 때문에 헤리오는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손을 내미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을 겁니다. 이런 때야 말로 미친 듯이 행동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그들의 머리속에 확실하게 각인 시켜 주어야지요." "뭘 각인 시켜요?" "아이리스가 절대 아래가 아니라는 것." 지니의 눈이 간만에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입가에 맺힌 웃음에는 조소(嘲笑)가 섞여있는 듯 했다. 즐거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난 지니를 마주보고 피식 웃어 주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니는 아이리스를 위해 싸우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일까? 이제까지는 전자라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 지니의 표정을 보니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지니의 말에 따르면 오늘 밤 12시에 왕궁 홀에서 무도회가 있다고 한다. 왕궁에서 열리는 만큼 웬만한 고위 귀족들은 거의가 참가를 하고 국왕도 참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지니가 아까 먼저 일어 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보를 수집하러 갔던 것이다. 무도회의 규모와 참가 귀족들의 수와 종류, 침투 루트 등등. 물론 이 것들을 조사하기 위해 지니가 복면을 둘러 쓰고 왕궁에 들어갔다 나오지는 않았다. 그냥 왕궁에서 일하다 잠시 외출한 하녀를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이 감히 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군요. 잠시 시간이 있으시다면 저 쪽으로 가서 커피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떠할까요?' 등등의 말로 꼬셔서 정보를 캐냈을 것이다. 출발 시간이 1시 정도이므로 아직 4, 5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난 이 시간 동안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2층 숙소로 올라왔다. 물론 이 숙소라는 곳이 완벽한 숙소는 아니다. 그냥 지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쓰지 않는 남은 방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까 대충 살펴본 결과 이 지부라는 곳이 뭐하는 곳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일단 지부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본부인 상아탑과의 연결 통로 역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아탑은 마법 길드이자 마법의 본산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길드에 가입한 마법사 수는 전체 마법사의 70%에 육박하고 있고, 상위 클래스일수록 퍼센트가 올라간다. 7클래스 이상의 마법사는 거의가 다 길드에 가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는 상아탑이 범국가적인 단체이고 마법의 본산지라는 것과 상아탑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상위 클래스로의 발전이 힘들기 때문이다. 상위 클래스일수록 일반에서 구할 수 있는 마법서적은 극도로 제한 되어 있다.(이와는 반대로 5클래스 이하의 마법서는 손만 뻗어도 움켜 쥘 수 있다) 그렇기에 길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마법을 익히는 것이 힘들어 진다. 아무튼 지부는 본부와의 연결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본부에 전달하기도 하고, 길드 가입원을 늘리기도 한다. 이러한 지부는 각 국의 중요 도시에 하나씩은 반드시 존재해 있다.(아이리스 쪽 지부는 3년 전 전쟁 때 박살났다.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간에 지부가 존재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각 국가들은 이 것을 두고 상아탑이 너무 손을 뻗히는 것 아니냐며 맘에 들어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지네가 맘에 들지 않으면 어쩌겠나? 상아탑을 상대로 싸울 것도 아닌데. 아무튼 상아탑도 다른 나라들이 이런 식의 간섭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지부의 수와 활동 법위를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축소 시켜 놓았다. 왜냐면 상아탑은 국가들의 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혹은 관련이 없고 싶어 하는) 마법 길드일 뿐이니까. 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크기의 방 안에는 침대가 하나 있고, 한쪽에는 나와 지니의 짐이라고 할 수도 없을만큼 작은 짐들이 놓여져 있었다. 침대 위에는 먼저 선수를 친 라이가 쌔근쌔근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라이코스는 베개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난 바닥에 누워서 잘까 생각하다가 모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침대에서 자기로 하였다. 다행히 침대는 크기가 어느 정도 커 두 명이 자도 그리 불편하지는 않아 보일 것 같았다. 2인용 침대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고, 1인용 침대라고 하기에는 크니, 1.5인용 침대 정도가 알맞을 것이다. 난 발로 라이를 슬쩍 반대편으로 밀고 한 쪽에 누웠다. 아! 아까 라이를 업고 왔더니 삭신이 다 쑤신다. "우웅! 잘못했어, 칼리. 다시는 안 그럴게." 라이는 꿈을 꾸는 지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난 자고 있는 라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라이는 오줌 안 쌌어." 안 싸긴, 뭘 안 싸? 니가 안 싸면 누가 싸? 난 계속해서 중얼대는 라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 * * * * "야! 거기 졸지 말랬지!" 따악-! 갑작스런 공격에 난 눈을 번쩍 떴다. 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다들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따악-! 다시 무언가가 날아와 나의 머리를 가격하였다. "거기,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책상 밑에는 부러진 분필이 구르고 있었다. 그럼 내가 분필에 맞은 건가? 아니, 어떤 놈이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의 머리에 분필을 던졌어? 난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어떤 싸가지 없는 자식이 감히……." 말을 하던 중 나는 칠판에 서서 한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였고, 그 순간 반사적으로 외쳤다. "노처녀!" 여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내 주위에 앉아있는 학생들은 깜짝 놀라며 책상 위에 놓여있는 수학 교과서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뭐라고 말했지, 박영웅?" 일루니아가 이를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 저 그게……." "좋아. 지금은 수업중이니 종치면 교무실로 따라 와." 일루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교탁 위에 놓인 수학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삼각함수에 대해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왜 여기에 있고 노처녀는 왜 저기에 있는 거지? 게다가 노처녀 복장은 왜 저래? 일루니아는 흰색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금색 머리카락은 원래처럼 뒤로 넘겨 끈으로 묶여 있었고, 얼굴에는 여전히 멋대가리 없는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잠깐, 노처녀의 복장이 저렇다는 건……? 이런! 내가 왜 교복을 입고 있는 거지? 내가 의아해 하는 사이 노처녀가 수학책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어제 내 준 숙제 다들 해왔겠지? 안 해온 놈들은 앞으로 나와!" 숙제? 무슨 숙제? 학생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대충 보아하니 5명 정도가 일어섰다. 나도 일어서야 하는 건가? 난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앞으로 나가는데 낯이 익은 사람과 엘프가 보였다. 사일런스 지니와 라이였다. 교복을 입고 있는 것도 모자라 둘이 짝이다. 난 잠시 멈춰서 지니에게 말을 걸었다. "숙제 해 왔어요?" "물론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학생의 본분은 숙제인데 제가 어찌 감히 숙제를 아니 해 올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희 누님께서는 체벌이 엄하여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는 한 숙제를 해오는 것이 신상에 이롭습니다." 난 라이에게 물었다. "넌 숙제 했냐?" "당연하지. 오빠는 또 숙제 안 해 왔나 보네. 라이처럼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이나 가겠어?" 그래. 너 잘났다. 너나 공부 열심히 해서 일류대 가라. 라이의 회색 머리 위에는 언제나처럼 라이코스가 앉아있었다. 난 잠시 라이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순간, 일루니아가 외쳤다. "거기 안 나오나?" "나, 나갑니다." 난 재빨리 앞으로 나갔다. 숙제를 안 해온 학생들은 나를 포함하여 6명이었다. 일루니아는 손에 든 몽둥이를 현란하게 휘두르며 말했다. "숙제를 안 해왔을 때는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었겠지. 자 한놈씩 대." 대긴 뭘 대? 한 아이가 칠판을 짚고 섰다. 그러자 일루니아가 매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퍽-! 허억! 저러다가 애 잡겠다. 열대를 채운 학생은 입에 개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리고 기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학생도. 그 다음 학생도. 그리고 이번에는 내 차례. 난 칠판을 짚고 섰다. 일루니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 오늘따라 노처녀의 기분이 더욱 안 좋아 보인다. 빠악-! "쓰읍!" 노처녀의 몽둥이가 나의 엉덩이를 가격한 순간, 난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다시 대!" 다시 대긴 뭘 다시 대? 이렇게 열 대 맞았다간 진짜 뼈도 못 추리겠다. 내가 미쳤다고 그걸 그냥 맞고 있냐? 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노처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건 부당합니다!" 노처녀는 흥미롭다는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뭐가 부당한데?" "솔직히 그렇잖아요. 겨우 숙제 좀 안 해왔다고 사람을 이렇게 패도 되는 겁니까? 그리고 왜 저만 차별하세요? 다른 애들은 맞을 때, 퍽- 퍽- 소리가 나더만 왜 제가 맞으니까 빠악- 소리가 나요? 이거 뭔가 잘못 된 거 아니에요?" "그래서 불만있냐?" "불만 있겠습니까? 담배도 있습니다." 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난 코로 연기를 내뿜으며 노처녀에게 말했다. "자꾸 이렇게 공작을 능멸해도 되는 겁니까? 제가 그 동안 참고 살았는데 정말 저한테 이러시면 재미 없지요. 아니, 하극상도 정도가 있지 왜 자꾸 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입니까?" 일루니아의 인상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마에 선명하게 새겨진 세줄의 주름살. 그런 표정을 지은 채 튀겨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으음, 다리가 후들거리는 군. 나 지금 떨고 있냐? "좋아! 너 말 잘했다. 솔직히 니가 공작인데 하는 게 뭐가 있어? 이제까지 니가 공작 되서 한 일 있으면 하나라도 말해봐! 없지? 없지? 그리고 니가 뭔데 루시아를 꼬셔? 실력이 안 되니까 공주라도 꼬셔서 어떻게 해볼 생각인가 본데 그러면 재미 없지. 세상에 주제를 알아야지 어디서 그 얼굴로 루시아를 꼬시려 해? 제발 주제 파악 좀 해라, 이 인간아! 니가 공작 된 후로 내 주름살이 얼마나 많이 늘었는지 알어? 난 잠잘 때마다 너 때문에 나라가 폭삭 주저 않는 꿈을 꿔! 다음날 일어나서 나라가 그대로 있으면 그게 얼마나 신기한지 아냐? 너 때문에 내가 신경성 탈모에 피부 트러블, 변비까지 생겼어! 생각해보니 내가 시집을 못 가는 이유도 다 너 때문이야!" 난 입을 쩍 벌렸다. 그래. 다 인정한다 치자. 그런데 니가 시집 못 간게 왜 내 탓인데? 나도 참을만큼 참았다. 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 내고 일루니아를 향해 손가락질을하며 외쳤다. "시끄러, 노처녀! 너 시집 못 간게 왜 내 탓이야? 니 성격이 그 모양이니까 시집을 못가는 거지! 게다가 이마의 그 주름살인 뭐냐? 당장 가서 주름살 제거 수술이라도 받는 게 어때? 자신이 시집을 못간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타인에게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 니가 알기나 해? 너 인생 그렇게 살지마! 그리고 왜 허구헌날 나만 보면 꽥꽥- 거리는 거냐? 내가 니 밥이야? 내가 니 샌드백이야?" "너 지금 말 다했어?" "그래! 말 다했다! 아! 그 동안 쌓여있는 말을 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그리고 루시아는 내 여자니까 넘보지 마! 어디서 감히 정상인 루시아를 레즈로 만들려 하고 있어!" "웃기는 소리! 루시아는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해!" "뭐? 나이 삼십 먹도록 시집도 못간 주제에!" "이 무늬만 공작인 놈이!" 일루니아는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내 던지고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조르는 힘이 장난이 아니다. 난 숨통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최선을 다해 일루니아의 손을 풀기 위해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커억! 이게 무슨 짓……!" "죽어라, 이 화상아! 죽어!" "커억-! 공작 살려!" 난 눈을 번쩍 떴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꿈이었나? 잠깐, 그런데 왜 지금도 내가 숨을 못 쉬는 거지? 뭐야? 라이가 양팔로 내 목을 감싸고 있잖아. "음냐. 라이는 나쁜 엘프가 아니야. 이제부터 착한 엘프가 될 게. 라이는 착한 엘프." 그래. 너 착한 엘프인거 잘 아니까 이것 좀 풀어라. "커억-! 라이야- 오빠 죽는다!" 내가 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는 목에 감은 두 팔을 풀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내 힘으로 알아서 풀어야 한다. 난 온 힘을 다해 라이의 팔을 풀기 위해 애를 썼다. 그 결과 간신히 머리를 빼낼 수 있었다. "하아- 살았다." 난 숨을 쉴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안도했다. 방안에는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려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라이는 침대에 몸을 부비적거리고 뒤척이는 등 온갖 난리를 치며 잠을 자고 있었다. 애가 잠 버릇이 참 나쁘군. 조금만 늦게 일어났어도 숨 막혀 죽었겠다. 난 아까 꾸었던 꿈을 생각해 보았다. 보통 때는 꿈을 꾸고나면 대략적인 윤곽만 기억날 뿐이었는데 이번에는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난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아아! 정말 재수 없는 꿈이었어. 하필이면 꿈속에서 노처녀를 만날게 뭐람. 혹시 노처녀가 무슨 짓을 한게 아닐까? 내 이름이 써진 인형에 못을 박거나 불을 지르는 등에 일을 말이야. 노처녀의 저주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길래 꿈속에서까지 나타나 나를 죽이려 한 걸까? 그런데 왜 하필 수학 선생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혹시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노처녀의 이미지가 수학 선생으로 형상화 되어 나타난 건가? 난 입에 담배를 물고 크로니스에게 받은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코로 연기를 내뿜는데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오늘 그런 꿈을 꾼걸까? 세상에 이유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날 수 없는 법이다. 분명 누군가가 굴뚝 밑에서 담배라도 피고 있으니 연기가 올라오는 거지.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 갈 수가 없다. 나의 절대감각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끈임없이 말해주고 있다. 평소에 나는 일루니아를 무서워 했기에 이런 꿈을 꾼거다. 하지만 왜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다른 날도 되는데.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잊고 싶었던 노처녀가 내 꿈속에 나타나 나에게 히스테리를 부린 것에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악이야!> <지금 자네의 상은 최악일세.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어. 자네의 오늘 운세는 악운에 악운이 겹쳐 있어.> <해가 지면 자네의 악운은 최고조에 달할 걸세. 특히 자정에서 동이 틀 때까지를 조심하게. 커다란 재앙이 닥칠 거야.> 설마? 아니지, 설마는 무슨 설마야? 그 쪽집게 도인이 한 말이 그대로 다 들어 맞았는데. 해가 지면 악운이 최고조에 달한다 그랬지. 그래서 노처녀가 나오는 꿈을 꾼 건가? 맞아. 노처녀가 나오는 꿈을 꾼 것은 재앙이라고 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어. <아무 곳에도 가지 말고 방에 조용히 틀어 박혀 날이 밝기를 기다리게.> 맞아. 아까 노인이 재앙을 피하고 싶으면 이렇게 하라고 말 했었지. 덜컥-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촛불을 들고 들어왔다. 지니였다. 지니는 촛불을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일어나 계셨군요, 아이언슥 공작님." "예. 방금 일어났습니다." "그럼 지금 출발하도록 하지요." "예? 출발이라니요?" "헤리오의 왕궁으로 말입니다." "왕궁이요?" 맞아. 아까 지니가 그렇게 말했었지. 자정에 무도회가 있으니 그때 무단 잠입을 하자고 말이야. 짧은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아까 노인이 했던 말이 떠 올랐고, 난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특히 자정에서 동이 틀 때까지를 조심하게. 커다란 재앙이 닥칠 거야.> 달그락- 달그락- 우리를 실고 온 마차는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난 바지 주머니에 라이코스를 쑤셔 넣고 등에는 라이를 업고 있었다. 라이가 아직까지 자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이 어린애가 잘 시간이긴 하다. "죄송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하하! 뭘요?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러다 허리 부러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칼리의 표정이 '죄송해서 미치 겠어요' 라고 말하고 있어 일단은 괜찮다고 말하긴 했지만 지금 나의 상태는 결코 괜찮지 못하다. 설마 이걸 업고 왕궁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어? 오빠가 왜 나를 업고 있어?" 들려오는 라이의 목소리. 살았다! "쓸데 없는 질문은 관두고 당장 내려와." 라이는 폴짝 뛰어 땅으로 내려왔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두 손으로 눈을 부비고 있었다. 칼리는 품에서 빗을 꺼내 헝클어진 라이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여긴 어디야?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왕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로(大路)였다. "이코는 어디있어?" 난 주머니에서 라이코스를 꺼내 라이에게 던져 주었다. 라이는 기뻐하며 그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난 지니에게 물었다. "잠입 경로는 어딘가요? 담을 넘나요, 아니면, 땅굴로 들어가나요?" 지니는 웃음을 지었다.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문을 통해 들어갈 생각이거든요." "예? 문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잖아요." "지키고 있다해서 들어가지 못하란 법은 없지요." 뭐야? 그럼 이건 잠입이 아니잖아. 문으로 당당히 들어간다면 이게 무슨 잠입이야? 지니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칼리와 라이도 그 뒤를 따랐다. 홀로 남게 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헤리오의 왕궁은 작은 성 모양이었다. 방어 목적의 성은 아닌 단순한 과시용이었다. 어떻게 아냐고? 그야 방어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면 벽이 저렇게 낮을 리가 없지. 게다가 해자도 없잖아. 만약 수도가 국경 쪽에 있었다면 이런 사정은 완전히 틀려졌을 것이다. 국경에 수도가 있다면 언제 수도가 침략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왕궁 자체가 내성처럼 지어지기 마련이다. 성이 함락 되더라도 왕궁 안에서 끝까지 항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가 성문으로 걸어가는 사이 마차 한 대가 달그락 거리며 우리를 지나쳐 갔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병사는 마차에 붙어있는 문장을 보고는 헬버드를 바로 세우고 경례를 붙였다. 우리가 지나가도 그럴까? 우리는 성문 앞에 섰다. 그러자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 우리 앞을 막아 섰다. 입은 복장이나 행동 등을 보니 월급만 꼬박꼬박 타 먹으면서 농땡이 피우는 놈들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 명의 병사 중 가장 짬밥이 높아 보이는 병사가 물었다. 지니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전 아이리스의 사일런스 지니 백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 분은 아이언스 히로 공작님. 이쪽 분은 탑의 주인 라이미안님과 칼리님입니다. 국왕 폐하를 알현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순간, 병사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해석하자면 '이거 미친 놈들 아니야?' 정도.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다. 수는 겨우 4명. 그나마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은 사일런스 지니 정도. 난 그냥 평범한 소년의 모습. 칼리는 그냥 예쁜 여자. 라이는 눈을 비비며 하품이나 해대는 꼬마애. "일단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돌아가 기다리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다만 결코 보고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저 말을 해석하자면 '좋은 말로 할때 알아서 꺼져라' 정도가 되겠다. 이젠 지니가 화려한 말빨로 저 녀석을 누르고 문을 통과하는 일만 남았군. 지니는 외눈 안경을 만지작 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하하! 뭐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제가 좀 급한데 어쩌지요?"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지니는 번개 같은 속도로 움직여 오른손으로 병사의 턱을 올려치고 왼손으로는 병사의 손에 들린 헬버드를 낚아 챘다. 그 다음에 발로 병사의 배를 걷어찼고 병사는 반항 한번 못해보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니의 행동이 너무 빨랐던 데다 생각도 못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삐이이익-! 남은 세 명의 병사들은 헬버드를 겨누며 재빨리 호각을 불었다. 난 너무 황당해서 지니를 쳐다 보았다. 하지만 지니는 날 보지 않고 병사들을 향해 움직였다. 병사 하나가 내리치는 헬버드를 들고 있던 헬버드로 막음과 동시에 헬버드를 버리고 팔꿈치로 목젖을 가격한다. 그리고 다른 병사가 휘두른 핼버드를 가볍게 손을 막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무릎으로 복부를 가격한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쓰러지려는 병사의 뒷덜미를 잡아 마지막 남은 병사에게 던지고 그 병사가 주춤하는 사이 왼쪽으로 몸을 움직여 잠시 공중으로 날아 뒤돌려 차기를 한다. 아마도 마지막 뒤돌려 차기는 서비스가 아닌가 싶다. 아니면, 그냥 때려도 쓰러지는 놈을 굳이 큰 동작으로 때릴 필요는 없지. 지니는 나를 보고는 예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난 그 모습에 반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예술이다. 생긴 모습도 예술이지만 싸우는 모습은 더 예술이다. 정말 싸움 잘한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는 걸까? "가시지요, 아이언스 공작님." 삐이이익-! 지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들려오는 호각 소리. 어둠 속이여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니는 달리기 시작했고, 난 그 뒤를 따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라이와 칼리가 여유롭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가 헤이스트Haste 마법을 쓴 것이다. 칼리와 자신에게만. 기왕이면 나한테도 좀 써주지. 왕궁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어두운 편이었다. 하지만 정원 곳곳에 불이 켜져 있고,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쪽을 보니 창문들 사이로 휘향찬란한 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 쪽이 중앙홀인가 보군. "저기 있다!" 빨리도 발견하네. 지니의 달리기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나마 나와 일행들을 생각하며 느리게 달려주는 것 같았다. 난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지니의 옆에 바짝 붙었다. "이거 너무 무식한 방법 아닌가요? 언제나 지적으로 일을 처리하시는 사일런스 백작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군요. 스웰리어 백작님이라면 모를까." "이게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도회장에 들어갈 때까지 잡혀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아! 병사들이 보이는 군요. 무기를 뽑으시되 살생은 자제하여 주십시오." 지니의 말대로 십수명이 병사들이 앞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망토를 펄럭이며 청룡도를 뽑아 들었다. 지니는 달리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병사들에게 달려 들었다. 그리고 주먹과 발을 현란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상대를 전멸시킬 목적이 아닌 길을 뚫을 목적이있기에 그 동작은 간결하고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멈춰라, 이 놈!" 멈추긴 뭘 멈춰? 니들이나 멈추지 그래. 병사 몇 명이 우리들에게 달려 들었다. 난 황급히 자세를 취했지만, 라이는 졸린 듯한 눈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대 병사의 표정은 조금 황당한 듯 했다. 병사는 라이를 보자 후두르려던 칼을 멈추고 라이의 몸을 손으로 잡았다. 어린 아이니까 차마 죽이지 못하고 생포하려는 것이다. "쇼킹 그래스프Shocking Grasp." 순간, 라이를 잡고 있던 병사는 벼락에 맞은 듯 깜짝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더니 픽- 쓰러졌다. "제길! 마법사다!" 그래. 정확한 지적이었다. 이 쪽에는 마법사가 셋이나 있었지. 7클래스 이상의 마법사 둘에 5클래스 마법사 하나. 난 청룡도를 들어 올렸다.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청룡도 끝에서 전기가 뿜어져 나가고 병사들은 재빨리 흩어졌다. 하지만 미쳐 피하지 못한 병사들인 그대로 전기에 감전 되어 온 갖 발광을 하다 쓰러졌다. 역시 갑옷 입은 병사들에게는 전기 공격이 제일이군. 전도율이 좋으니까 말이야. "마녀다!" 칼리는 지니의 뒤쪽에 붙어 지니가 싸우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칼리의 모습은 20대의 여인이 아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 잡힌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폴리모프 마법을 해지한 것이다. 병사들이 마녀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 "어! 칼리! 내가 그 모습하지 말라고 했잖아!" 라이가 소리쳤지만 칼리는 못들은 듯 했다. 폴리모프 마법이 얼마나 제약이 심한데 그걸 걸고 어떻게 제대로 마법을 쓸 수 있겠니? 지금은 외모보다 실력으로 말해야지. 지니쪽에 신경쓸만큼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병사들이 전열을 갖추어 달려드는 것이다. 마법사이니만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쓰러트리겠다는 건가? "피어Fear!" 병사들은 잠시 겁에 질린 듯 주춤하였다.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휘몰아친 바람은 병사들을 뒤로 넘어 뜨렸다. 휘우! 대단하군. 내가 썼다면 속도를 절반 정도로 떨어 뜨리는 것에 그쳤을 텐데. "홀드 퍼슨Hold Person." 다시 몇 명의 병사가 얼어 붙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펌블Fumble." 몇 명의 병사가 무기를 떨구며 볼쌍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역시 고위 마법사가 둘이나 있으니 굉장히 편하군. 시간차 마법을 쓰니까 상대를 완전히 가지고 놀 수 있잖아. "꼬마들이라고 무시하지 마! 당황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 꼬마들? 그럼 그 꼬마에 나도 속하는 건가? 병사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일정 거리를 두고 우리를 견제할 뿐 달려들지는 않았다. 옆을 보니 수십명의 병사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지니와 칼리 콤비가 해결을 한 것이다. 지니쪽에 서 있는 적이라고는 기껏해야 열 명. 이래서야 잠입 작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군. 초토화 작전 정도면 어울리겠다. 삐이이익-! 다시 들려오는 호각 소리.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 아마도 다른 쪽에 있던 병사들이 달려오는 것이리라. 시간이 별로 없군. 재미도 별로 없고. 난 청룡도를 집어 넣고 여유롭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지포 라이터의 부싯돌을 긁어 불을 붙인 다음, 지포 라이터를 라이 앞으로 내밀었다. 라이는 눈 앞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말했다. "파이어 참Fire Charm!" 우리 귀여운 라이. 마법도 아주 잘 써요. 뭘 먹고 이렇게 마법을 잘 쓸까? 지포 라이터의 불은 베일처럼 부드럽게 위로 솟아 올랐다. 그리고 춤을 추듯 화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통하지 않는 놈도 있는 법이다. 결국 마법이라는 게 정신적인 면에 많이 작용을 하니, 정신력이 강하다면 통하지 않게 되거든. "이 놈들아! 뭐하는 거야? 정신 차려!" 난 멋지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부하들을 닥달하고 있는 놈을 바라 보았다. "아이언스 공작님!" 지니가 외쳤다. 지니쪽은 완전 해결 된 모양이었다. 칼리도 어느새 다시 20대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난 라이터를 끄려다 황당함을 느꼈다. "야! 니가 매혹되면 어떡해?" 라이가 멍한 표정으로 라이터에서 솟아오른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쓴 마법에 자기가 걸리다니. 정말 도움이 안 되는 군. 삐이이익-! "야! 정신 차려!" 불을 껐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의 표정은 여전히 멍했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 "이런 씨!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난 라이를 안아 들고 지니와 칼리를 쫓아갔다. "어디에요?" "저 쪽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물은 게 저쪽이 어디냐는 거 였어. 우리는 정원을 가로질러 궁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지니가 전부 때려 눕혔다. 왕궁을 지키는 병사들인데 왜 계속 한방에 쓰러지는 걸까? 이건 병사들이 약하다기 보다 지니가 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힘도 센 데다가 기술이 굉장하다. 간결한 동작으로 급소만을 정확히 가격한다. 역시 굉장한 인간이야. 지니는 길을 잘 알고 있는 듯 복도 여기저기를 돌았다. 난 길은 모르지만 지금 지니가 맞게 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저 쪽에서 음악소리가 잘 들려오거든. "침입자다!" 순식간에 좁은 복도를 막는 두 명의 병사.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쳐 두 병사의 머리를 걷어 차 쓰러트리는 지니. 아예 영화를 찍어라. 와이어 액션도 아닌 것이 왜 그리 화려하냐? 음악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웅성대는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복도는 이제 일자형태의 외길이었다. 그리고 그 외길에 끝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문이있었다. 덤으로 문 앞에는 십여 명의 병사가 서 있었다. 게다가 뒤에도 수십명의 병사가 서 있었다. 복도가 좁아 한번에 두 명 이상은 상대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앞에 있는 병사들을 다 처리할 때까지 뒤에 있는 병사들이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월 오브 아이스Wall Of Ice!" 우리 뒤편에 굉장히 두꺼워 보이는 얼음 벽이 생겨났다. 내 팔에 안겨있는 라이가 마법을 쓴 것이다. 귀여운 것. 어쩜 그리 이 오빠의 마음을 잘 알고 마법을 썼니? 난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라이야. 뭐 좀 강력한 마법 없니?" "무슨 마법?" "으응. 저 앞에 있는 놈들이 한방에 쓰러질만한 마법." 라이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파워 워드 스턴Power Word Stun." "잘 했어, 라이코스……가 아닌, 라이." 크로니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마법이었지만 앞의 병사들에게는 굉장히 확실하게 통했다. 7클래스 마법이니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버텨내기 힘들지. 십여명의 병사들은 전부 무기를 버린 채, 굼벵이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공격 자세를 취했던 지니는 빙긋 웃으며 문을 발로 걷어찼다. 눈을 자극하는 화려한 조명과 아름다운 옷들. 귀를 자극하는 발랄하고 부드러운 음악 소리. 최대한의 규모로 열린 이번 무도회의 화려함은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앞으로 삼일간 계속 벌이질 이 무도회에는 수도 내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는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조금이라도 안면을 익혀두려는 신흥 귀족들까지 엄청난 숫자가 몰려 들었다. 초대를 받지 못했거나 작위가 안 되는 귀족들의 경우에는 인맥을 통해야만 간신히 들어 올 수 있었고, 이도 저도 안 되는 귀족들은 눈물을 삼키며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다. 자정에 열린 무도회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열기를 더 해가고 있었다. 하인들은 쉴 새 없이 술잔을 들고 다니며 귀족들에게 건내야 했고, 하녀들은 음식이 떨어진 곳이 있나 없나를 잘 살펴 계속 보충해야 했다. 악사들은 계속 된 연주로 팔이 떨어질 것 같이 아파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했다. 헤이체르 공작은 웃으며 레이트 백작에게 다가섰다. "듣자하니 자신이 아이언스 공작의 부인이라고 자처하는 하프엘프 여인이 자네의 집에 머물고 있다지? 그래. 대체 무슨 생각인가? 설마 그 나이에 새장가라도 들려는 건가?" 레이트 백작은 쓴 웃음을 지었다. "헛소리 하지 마십시오. 셀리오네가 아직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제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아무튼 하프엘프 여인이 자네의 집에 있는 것만 맞나보군." "하이스네에게 들어 다 알면서 뭘 그렇게 물어 보십니까?" "어허! 어디 나만 알다 뿐이겠나? 그 사실은 수도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세. 그 여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가?" "영감님께서도 관심있으십니까?" 헤이체르 공작은 '영감님' 이라는 호칭에 잠깐 움찔했지만 별 내색은 하지 않았다. '무식한 것. 공작한테 영감이 뭐냐? 하여간 꼭 배우지 못한 티를 내요.' 헤이체르 공작은 수염을 매만지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 나이 때 되면 여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하지." "하긴 그렇긴 하겠네요. 영감님 나이 정도면 인생의 내리막길이요, 지는 태양이니." '이 자식이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뭐야? 공작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 헤이체르 공작이 얼굴을 붉히며 뭐라 말하려는 순간, 여러명의 귀족들이 다가왔다.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유나이세르 후작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무도회는 올해들어 처음이라 할 수 있겠네요. 많은 귀족분들께서 오신 덕에 인사를 하느라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유나이세르 후작과 같이 등장한 비토스코 백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무도회라면 많은 비용이 들어갔을 것 같군요. 게다가 삼일이나 계속된다고 하니." 비스토코 백작이 한 말은 여자와 춤추는데 정신을 팔고, 안면을 익히느라 고위 귀족들을 쫓아다니며 인사를 해대는 대부분의 귀족들을 제외한 일부 제정신이 박힌 귀족들만이 공감하고 있었다. 레이트 백작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쓸데 없이 날리는 돈을 군대에 가져다 부었으면 벌써 개틴을 박살 내고도 남았겠군." "가끔은 이런 연회가 있어야 귀족들을 어루만질 수 있지요. 혹시 누군가가 연회가 없는 것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면 어쩌실 겁니까?" 하이스네는 어느새 레이트 백작의 옆에 서 있었다. 레이트 백작은 하이스네의 손에 들린 술잔을 빼앗아 들이 마셨다. "귀족들은 어루만질 수 있어도 백성들은 어루만질 수 없을 걸." "그래도 이미 벌인 일을 어쩌겠습니까? 일단은 즐기기로 하지요. 형수님과 두 여자분께서는 충분히 즐기시는 것 같은데요." 레이트 백작이 고개를 돌려 다른 귀부인들과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는 셀리오네를 보았다. 세레나는 구석진 곳에 앉아 접근을 하는 다른 남자들을 열심히 물리치며 라나를 돌보고 있었다. "아! 요즘 라이레얼양께서는 어떻게 지내시고 계십니까?" "말도 마라. 정말 내 평생 그런 여자는 처음 본다." "하기야 그 정도 미모를 가진 여인을 보기는 쉽지 않지요." "외모 말고 성격 말이야. 내 진짜 살다살다 그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 봤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남의 집에서 생활하는 여자가 대체 왜 그렇게 당당한 거냐?" "그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만약 안 생긴 여자가 내 집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면 절대 참지 못했을 거다." * * * * * 세레나는 의자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옆자리 앉은 라나에게 말했다. "재미 없지?" "응, 언니." 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한 남자가 다가와 춤을 신청하였다. 세레나는 웃으며 좋은 말로 거절하였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 마음은 전혀 반대였다. '자꾸 찝적 거리지 말고 꺼져!' 거절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수십명의 남자들이 돌아가며 춤 신청을 해대니 화가 날만도 한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기분이 굉장히 안 좋은 상태였다. 믿고 있었던 히로가 배신을 하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질 않나, 그 놀아 난 여자는 집에 죽치고 앉아 매일 같이 속을 박박 긁어 놓질 않나. 라이레얼은 집안에서 세레나를 마주칠 때마다 특유의 웃음 소리로 한번 비웃어 준 다음, 자신의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며 빈약한 몸매라고 놀리고, 히로와 하룻밤을 같이 지낸 것을 강조하는 등, 세레나를 반쯤 미치게 만들었다. 세레나는 어머니께 물려 받은 특유의 다혈질적인 성격과 소음에 가까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맞서 소리를 질러댔고, 그냥 듣고만 있을리 없는 라이레얼이 맞서 싸우는 바람에 레이트 백작가의 저택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평소 자신의 히스테릭한 성격을 잘 인식 하지 못하던 세레나도 요즘 들어서는 심각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심신을 가라 앉히기 위해 정신 수양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고. 하지만 이 무도회장은 세레나가 정신 수양을 하기에 부적합한 장소였다. 지금만하더라도 한 쪽에 모여 자신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뭐라고 떠들어 대는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신경이 쓰임과 동시에 짜증이 치밀었다. '저 것들은 저기서 뭘 저렇게 떠들어 대고 있는 거야?' 남자들이 모여서 떠들어 대는 이유는 다름이 아닌 어떻게 하면 세레나를 꼬셔 볼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빼어난 미모에 나날이 입지 세력을 굳혀가는 레이트 백작의 영애이다. 여자로서의 매력도 충분한데다 정치적 세력까지 등에 업고 있는 여인이니 어떻게 해서든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잘 꼬셔서 결혼까지 하면 더 좋겠고. 머리에 기름칠을 잔뜩하고 얼굴에서도 개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한 남자가 세레나에게 다가왔다. 세레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이 느끼하게 생긴 놈은 또 뭐야?' "안녕하십니까, 레이트 백작님의 영애 세레나양. 저는 레일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요." '너 남작 작위 받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세레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축하드려요, 레일 남작님." "아! 이름은 레일이고 성은 라일입니다." '라일이나, 레일이나 그게 그거지. 너 지금 나한테 시비거는 거냐? 한번 붙어 볼래?' "죄송합니다, 라일 남작님. 그런데 무슨 일로……?" "하하! 아름다운 레이디께 말을 거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아까부터 쭉 지켜 보았는데 춤은 한곡도 추지 아니 하시고 계속 앉아만 계시더군요.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십니까?" '내 몸이 안 좋던 말던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자기 일이나 잘 신경쓸 것이지 여기 있는 인간들은 왜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거야?' "예. 아까부터 머리가 좀 어지럽네요." "아! 그러셨군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빨리 사라져라. 그게 도와주는 거다. 니 느끼한 얼굴을 보고있자니 느끼해 죽겠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쉬면 괜찮아 질꺼에요." "하하! 그럼 심심하실테니 제가 같이 있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지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넌 할 일도 없냐?' "고맙긴 한데, 라일 남작님께서 힘드시지 않을까요? 기왕 무도회에 참석하셨으니 즐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레이디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는 말을 들으니 즐길 기분이 들지 않는군요. 그냥 세레나양의 옆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한쪽에서 여러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반데라스 왕자는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하는 동안에도 시선은 한쪽에 앉아있는 세레나를 향해 있었다. 마침 한 남자가 세레나에게 춤 신청을 하는 중이었다. 반데라스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안 되! 허락하면 안 되! 절대 안 되! 니들이 뭔데 감히 세레나양의 손을 잡으려 그래? 아직 나도 못 잡아 본 손을! 니들이 지금 왕족을 능멸하려 드느냐? 이건 반역이야! 세레나양의 손을 잡기만 해봐. 그럼 당장 반역죄로 가문을 몰살 시킬꺼다!' 다행히 이런 반데라스의 생각을 알았는지 세레나는 정중히 거절을 하였고, 가문이 몰살 당할뻔한 위기에 처했던 남자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야 했다. 하지만 어디 춤 신청을 하는 남자가 한, 둘인가? 수십명의 남자가 아예 줄을 서서 신청을 해대고 있었다. '안 되! 제발 그만해!' 반데라스는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이를 벅벅갈고 있었다. 세레나가 춤 신청을 모두 거절하고 나서야 반데라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안도를 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느끼하게 생긴 남자 하나가 세레나에게 접근한 것이다. 반데라스는 당연 세레나가 거절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왠 걸? 둘이 웃으며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분노. 세레나양의 미소가 저 느끼한 놈에게 향할 때마다 이마에 핏발이 하나씩 선다. '그래. 난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용기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는 법. 당당하게 그대의 앞에 나서리라.' 반데라스는 이를 악물고 성큼성큼 세레나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쫙 피고, 고개를 빳빳히 세우고 걸음은 힘차게. 정말 남자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세레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조금씩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까지 춤 신청을 했던 남자들이 전부 퇴짜 맞았잖아. 그럼 나도 퇴짜 맞지 않을까? 퇴짜 맞으면 어쩌지? 세레나양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싫어하지는 않을까? 싫어하면 어쩌지?' 어깨는 축 늘어지고, 고개는 푹 꺽어져 바닥을 바라본다. 걸음은 주춤주춤, 몸은 쭈삣쭈빗, 땀을 삐질삐질. 아까의 당당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소심한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데라스 왕자가 다가오자 세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아름답게 웃는 세레나의 얼굴. 반데라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예.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지냈어요." '잘 지내긴 뭘 잘 지내? 요즘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전쟁이다. 그 라이레얼인지 뭔지 때문에 내가 얼마나 스테레스를 받는데.' 생각은 이러했지만 반데라스의 등장 덕에 버터 같이 느끼한 놈과의 얘기를 중단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세레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라일 남작은 반데라스 왕자가 세레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인사만하고 황급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저, 저기……." '뭐라고 말할까? 좋아한다고 고백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일러. 일단 춤을 신청하도록 하자. 같이 춤을 추면서 세레나양의 손도 잡아보고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 보자. 그리고 멋지게 청혼을 하는 거야. 그런데 세레나양이 나를 좋아할까? 아마 좋아하지 않겠지? 그럼 어쩌지? 좋아하게 만들어야 겠지? 그러려면 같이 춤을 추자고 해 보자. 스텝을 밟으면서 서로의 사랑을 키워가는 거야.' 세레나는 땀을 비 오듯 쏟으며 그 자리에 얼어붙은 반데라스를 이상하든 눈길로 바라 보았다. "왜 그러시죠? 어디 아프신가요?" "아, 아닙니다. 그, 그러니까 가, 같이 춤을……." 10년치 용기를 전부 쏟아 부은 반데라스의 말이 끝나려는 순간 열려진 문으로 근위병 하나가 뛰어 오며 소리쳤다. "침입자입니다!" 순간, 웅장하게 흐르던 음악이 멈추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빠르게 대처하는 것은 근위대였다. "적은 몇 명인가?" "그, 그게……." "빨리 말하지 않고 무얼 하는가?" "4명인 것 같습니다." "뭐? 겨우 4명을 못 막아 그러는 건가?" "4명 중 고위 마법사가 3명입니다. 게다가 리더로 보이는 자의 무술이 워낙 뛰어난 지라." "어디로 향하고 있던가?" "이 곳입니다." 작게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들. 근위 대장은 크게 소리쳤다. "폐하를 비롯한 헤리오의 왕가를 보하하여라!" 레이트 백작은 여러 귀족들과 대화하는 것을 관두고 앞으로 나섰다. "여자들은 문에서 최대한 떨어져 뒤쪽 벽으로 붙으시오! 남자들 중 싸움에 자신이 있거나 한 목숨 죽어도 별로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앞쪽으로 나서고 남이야 죽던 말던 자기 한 목숨은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여자들과 같이 뒤쪽 벽에 붙으시오!" 레이트 백작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여자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뒤쪽 벽에 붙었고, 남자들도 대부분이 뒤쪽 벽에 붙었다. 남자들은 그래도 체면상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자들보다 더 두려워하는 자들도 다수였다. 왕가 직속 근위대는 늙은 국왕의 주위를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둘러쌌다. 두 명의 왕녀는 근위대의 도움을 받아 국왕의 뒤쪽에서 보호를 받았다. 세레나도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였다. 반데라스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래. 지금이 기회야! 지금아야 말로 세레나양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 점수를 따는 거야.' 반데라스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났는지 세레나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냐?" 원래 반데라스가 생각했던 대사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세레나양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이 헤리오 반데라스가 이 한 목숨 다 바쳐 레이디 세레나의 명예와 목숨을 보호하겠습니다.' 이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트 백작이 다가 온 것이다. "아니, 왕자님께서는 여기서 뭘하시고 계십니까?" "아, 예. 저는 세레나양을 보호……." "아! 그러셨군요. 이봐! 근위대는 뭐하고 있나? 왕자님께서 보호해 달라 그러시잖아. 당장 튀어 와!"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자님은 근위대가 잘 지켜드릴겁니다." 반데라스가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근위대가 우르르 몰려왔다. "저희가 반드시 왕자님을 지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근위대는 반데라스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반데라스는 끌려가면서도 처절하게 외쳤다. "아니, 제가 보호 받고 싶다는게 아니라……." '아아! 이제 세레나양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저 혼자 살자고 도망가는 그런 놈으로 생각하겠지. 아이씨! 진짜 이게 아닌데.' 레이트 백작은 근위대에게 끌려가는 반데라스를 보고 혀를 찼다. "남자가 되어 가지고 저래서야." 그리고 세레나에게 말하였다. "넌 라나 데리고 어머니랑 같이 뒤쪽에 있어." "아버지는 요?" "나야 당연 침입자를 박살내야지." "형님!" 레이트 백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이스네가 소리쳤다. "빨리 가 있어." 근위대는 어느새 문을 완전 봉쇄하고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포진을 하고 있었다. 레이트 백작이 다가오자 하이스네는 아까 근위병에게 얻은 검을 던졌다. 레이트 백작은 한 손으로 가볍게 검을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왠 침입자지?"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안 되지요." "설마 개틴에서 보낸 것은 아니겠지." "그것도 저한테 물으시면 안 되지요." "혹시 반역자들인가?" "왜 자꾸 저한테 물으십니까? 침입자들이 들어오면 그때 직접 물어 보세요." "어쭈! 너 지금 나한테 반역하는 거냐?"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옵니까?" 둘은 장난식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사실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대체 어떤 간 큰 놈들이 왕궁에까지 침입을 했단 말인가? 이 곳에는 왕족과 고위 귀족들이 전부 몰려 있다. 놈들도 그것을 알고 오늘을 거사일로 정했을 것이다. 아마도 놈들은 살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고위 마법사가 셋이나 온 걸보면 왕과 귀족들을 죽인 후, 자신들도 죽을 생각일 것이다. '빌어먹을! 이젠 안 되니까 별 짓을 다 하는군.' 레이트 백작은 이번 일을 벌인 것이 개틴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홀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아무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여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고, 남자들은 기회다 생각하고 그런 여자들을 안아서 달래주고 있었다. 물론 그 반대로 두려움에 떨며 여자의 품에 안기는 남자들도 있었다. 세레나는 어머니의 옆에서 라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퍽- 으악- 끄억- 빠각- 문 바깥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침입자들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증거이다. 싸우려는 자들을 제하고 모두가 뒤쪽 벽에 붙어있는 가운데 헤이체르 공작은 앞쪽도 뒤쪽도 아닌 가운데쯤 서서 술잔을 들이켜 말했다. "이거야 원, 오라는 아이언스 공작은 오지 않고 이상한 놈들만 오는 군." 헤이체르 공작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내 기억에 레이트 백작께서 아이언스 공작이 조만간 외교 사절로 올꺼라 예언을 했었는데 그 조만간이 아마 한참 지났지? 아니 그러한가?" 레이트 백작은 고개를 돌려 헤이체르 공작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옵니까?" "아니, 나야 뭐 오라는 아이언스 공작이 오지 않고 이상한 놈들이 온다길래 그러는 거지." "아이언스 공작은 반드시 옵니다." 헤이체르 공작은 조소를 지었다. "그래? 대체 언제 온다 그러나?" '이 영감이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레이트 백작은 인상을 찡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튼 온다니 까요! 예를 들어 지금 당장이라도 저 문을 박차고 들어올 수도 있어요!" 콰앙- 우지끈-! 레이트 백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커다란 문은 박살나 쓰러졌고 그 사이로 네 명의 남녀가 걸어들어 왔다. * * * * * * 놀랍게도 지니가 걷어 찬 문은 한번에 박살났다. 부실 공사 때문인지 지니의 발차기가 강력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튼 박살났다. 난 라이를 품에 안은 채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검을 뽑아든 수십명의 근위병들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벽에 붙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녀들이 보였다. 난 그들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처음 와 보는 이 곳에서 낯익은 얼굴 둘이 보였다. 산적 같이 생긴 초록색 머리 중년 남자.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갈색 머리 삼십대 남자. 초록색 머리의 중년 남자는 레이트 백작이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갈색 머리의 남자는 아마 하이스네였을 꺼다. 헤이체르 공작가의 후손이라 하였는데 지금쯤 후계자가 되었나 몰라. 여기 있는 걸 보니 된 건가? 그런데 레이트 백작의 표정과 하이스네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적개심이 섞여있는데 둘의 표정에만 황당함이 가득하였다. 하이스네는 고개를 돌려 레이트 백작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한 레이트 백작의 표정. "그, 글쎄다." 둘의 알 수 없는 대화. 어찌 되었든 이제 아는 얼굴을 만났으니 더 싸울 필요는 없겠지.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누가 반역자야? 내가 묻기도 전에 근위병들이 우르르 달려 들었다. 지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세 명을 때려 눕혔다. "이 쪽으로!" 나와 칼리는 지니가 뚫어 놓은 길로 뛰었다. 라이는 내가 들고 있으니 굳이 뛸 필요 없고. 지니는 여러 개의 테이블을 발로 걷어차 쓰러트렸다. 난 지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리케이트를 만들자는 건가? 난 지니를 도와 테이블을 모조리 쓰러트렸다. 주위의 테이블이란 테이블은 몽땅 쓰러트려 놓고는 한숨 돌리는데 근위 대장으로 보이는 자의 손에 단검이 들린 것이 보였다. 이봐, 설마 그걸 던지려는 것은 아니겠지. 쉬익-! 어! 던졌어! 난 깜짝 놀란 나머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실드Shield." 챙-! 라이의 방어막에 부딪힌 단검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라이미안님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칼리의 외침. 내가 너무 놀란 나머지 손을 들어 올린다는 것을 라이를 들어 올려 방패로 썼던 것이다. 라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보았다. "이잉, 라이를…… 방패로 썼어……." "아, 아니. 난 그저 반사적으로……." "우와아아아앙!" 울음을 터트리는 라이.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정말로 고의가 아닌데. "야! 미안해! 울지마!" "우에에엥!" 홀안의 사람들의 호기심 섞인 눈초리가 전부 나에게 집중 되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저기 그렇게 바라들 보시니 굉장히 쑥스럽네요." "쳐라!" "아니 뭐 그렇다고 칠 것까지야." 우르르 몰려오는 근위병들. 탁자 밑으로 몸을 숨긴 뒤 지니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좀 해 봐요."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요?" "댁이 벌인 일이니까 댁이 수습하세요." "그럼 저를 도와 지원 사격을 해 주십시오." 지원 사격? 난 지니의 행동을 보고는 지원 사격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지원 사격이라는 것은 말만 거창할 뿐, 그냥 손에 잡히는 데로 던지는 것이었다. 난 한 손으로 라이를 안고 달래며 다른 한 손으로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닥치는 데로 집어 던졌다. 접시, 포크, 나이프, 술잔 등등. 그러자 근위병들도 무언가를 던졌다. 어! 어떤 놈이 칼집을 던졌어. 근위병이 저래도 되는 거야? 난 재빨리 라이를 들어 올렸다. 따악-! 머리를 감싸쥐고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보는 라이. "흑흑, 라이를 또…… 방패로 썼어……." "아, 아니. 저 그게 버릇이 되서……. 그런데 이번엔 왜 안 막았니?" "우아아아앙!"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정말 라이미안님을 죽일 속셈이십니까?" "고의가 아니라니까요!" 난 라이를 안아서 달래주며 지니를 보았다. "이제 어쩌실건가요?" "저분들게 양해를 구해야지요." "양해를 구한다고 받아줄까요?" "그건 해봐야 알겠지요." 지니는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항복 제스쳐군. 그러자 근위병들이 칼을 아래로 내렸다. 무기는 내렸지만 결코 긴장을 푼 것은 아니었다. 지니는 테연한 어조로 말하였다. "저는 사일런스 지니라 합니다. 본의 아니게 이런 무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의 말씀을 먼저드리겠습니다." 순간, 탄성을 질러대는 사람들.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소문이 자자한 사일런스 백작을 직접 눈 앞에서 보았다는 것. 둘째로는 소문보다 훨씬 잘생겼다는 것. 특히 두 번째가 압도적이었다. 어떻게 아느냐? 그건 간단하다.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 중에 여자의 비율이 월등히 많거든. 난 지니를 따라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니에게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 되었다. 이런 순간이야 말로 반드시 아이언스 공작의 멋지고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이잉, 라이를 방패로 썼어. 오빠 나뻐. 오빠 미워." 얘 때문에 이미지 다 망가지겠네. 난 안고 있던 라이를 칼리에게 건냈다. 칼리는 한숨을 내쉬며 라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나를 대신해 달래주기 시작했다. 난 소개를 하기 전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옷깃을 바로하고 웃음을 짓는 등 이미지 관리를 하였다. 그런데 소개를 하려는 순간. "야!" 어디선가 들려온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 난 혹시라도 아는 사람인가 싶어 쳐다 보았는데 진짜 아는 사람이다. "넌……!" 연녹색 드레스를 입은 초록색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인. 아직은 소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귀여우면서도 성숙한 얼굴. "……누구냐?" 얼굴은 분명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였더라? 여인의 표정이 무섭게 변한다. 그러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악을 쓰듯 말했다. "이 나쁜 자식! 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와장창-! 지금 분명 저 여자 목소리 때문에 유리창이 깨져나간 것 맞지? 우와! 진짜 신기하다. 만화책에서 많이 봤는데 실제로도 가능했단 말인가? 그런데 너무 시끄럽다. 난 손가락을 두 귀에 찔러 넣은 채 가만히 있었다. 이 것은 결코 혼자 오바over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귀를 막고 있으니까. 내 옆의 사일런스 지니를 비롯하여 대치 상태에 있는 근위병들까지. 심지어는 울고 있던 라이까지 울음을 그치고 귀를 막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저 정도면 거의 입신의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여인에게 집중 된 가운데 갈색 머리카락에 살짝 그을린 피부를 가진 꼬마 여자 아이 하나가 여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데 어째 저 여자애도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 것 같은 느낌이다. 굉장히 귀엽게 생겼는 걸. 여자애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았다. "너무 해요, 오빠. 어떻게 그러 실 수가 있어요?" 내가 뭘 어쨌다고? 여자애의 말을 들은 지니는 진지한 표정을 나에게 물었다. "숨겨 놓은 따님입니까?" 이 인간이 농담을 해도 진짜 짜증나게 하네. 난 지니의 말을 무시하고 여자애를 주위 깊게 살펴 보았다. 갈색 머리카락. 커다란 눈. 통통한 볼. 살짝 그을린 피부. 푸른 하늘색 드레스. 입고 있는 드레스와는 달리 별로 귀족틱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민이라는 느낌이 팍팍 든다. 순간, 떠오르는 하나의 의문. 나의 첫키스 상대가 누구였더라? "넌……!" 난 여자애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라나구나!" 그렇다. 저 귀여운 아이는 라나였다. 아!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왜 그랬나 싶다. "그런데 니가 여기 왜 있는 거냐?" 라나가 대체 왜 이 곳에 있는 건가? 여기는 귀족들만 모이는 무도회가 아닌가? 그런데 라나가 무슨 일로 이 곳에 왔단 말인가? 하녀로 취직이라도 했나? 요즘 취업이 힘들다던데 어린 나이에 이런 좋은 직장을 구하다니. 정말 훌륭하다. 라나는 자신을 기억해 준 것이 기쁜지 눈물을 글썽이는 중에도 활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부들부들 떨며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으니. "넌 왜 그렇게 몸을 떨고 있냐, 세레나?" 세레나? 맞아! 저 여자는 세레나 잖아! 세레나였어! "너 세레나 맞지?"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잠시 머리를 집었다. 아! 나의 기억도 갈 때까지 갔구나. 그래도 한 때는 좋아했던 여인인데. 사실 세레나를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한 책임이 전부 나에게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저렇게 예뻐질 줄 누가 알았냐? 코도 높아진 것 같고, 쌍커풀도 짙어진 것 같고, 피부는 더욱 하얗게 탈색된 것 같고, 몸매도 더욱 좋아졌고. 종합 성형수술이라도 받았나? 이제 두 여자의 이름을 전부 기억해 냈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으니. "대체 둘이 왜 같이 있는 거지?" 이미 대치 상태의 팽팽한 긴장감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들 무기를 놓고 우리에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근위 대장의 얼굴에는 '그래. 나도 그게 궁금했어' 등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대체 니가 그걸 왜 궁금해 하는 건데? 세레나와 라나는 다정하게 붙어 있었다.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누군가가 나섰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레이트 백작이었다. 레이트 백작은 나에게 걸어오며 말하였다. "자네가 도움을 주라고 한 뒤에 시간을 내서 한번 찾아가 봤지. 귀엽게 생긴 게 꽤 마음에 들더군. 세레나도 좋아하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입양했지." 순간, 나의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오는 말이 있었으니. '아니,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그래요?' 하지만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 말을 도로 삼켰다. 그 순간, 사일런스 지니가 앞으로 나섰다. "귀하가 열혈백작이라 명성이 자자하신 레이트 백작님이시군요.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옮겨서 얘기했으면 합니다." "그래. 그러는 것이 좋겠군." 레이트 백작의 주위에 몇몇 귀족들이 다가왔다. 대충 보아하니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고위 귀족들 같았다. 난 그들에게 시선을 떼고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홀을 둘러 보았다. "그런데 이건 다 누가 치우나요?" "자네에게 치우라고 하지는 않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근심이 가득한 자가 있었다. 근위 대장은 우리를 적으로 생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상당히 헤깔리는 듯 했다. 이대로 넘어가자니 피해가 너무 막심한 것 같고, 싸움을 하자니 상대방이 중요 인사인 것 같고. 뭐 어쩌겠냐?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좋게좋게 해결해야지. 나의 부탁을 받은 레이트 백작은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라나가 사는 마을로 갔다. 간만에 만난 가족들과 다시 헤어지기는 뭐하니 가족 여행겸 아내와 딸을 동반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도착한 마을에는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알고 보니 영주 아들의 결혼식이었다. 라나의 언니인 니나야 뒤에 엄청난 능력의 마법사가 버티고 있으니 후한이 두려워 포기를 하였고 대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물론 외모 지상주의가 판치는 요즘 현실에 그 얼굴로는 평범하게 결혼하기 힘드니 담보로 맡겨둔 집 문서와 땅 문서로 협박에 협박을 거듭하여 간신히 하기로 한 결혼이다. 때마침 마을에 도착한 레이트 백작은 사정을 대충 알아 본다. 그리고 이 결혼식이 강제로 결행 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결혼식장으로 뛰쳐 들어간다. 그리고 결혼 서약을 하려는 신랑과 신부를 향해 소리친다. '이 결혼은 무효야!' 영주의 아들인 신랑은 입을 쩍 벌린다. '왜? 무엇 때문에? 니가 무슨 권리로 무효라는 거지?' '내가 무효라면 무효다!' 이런 억지스러운 레이트 백작에 주장에 화가 난 영주는 사병들을 출동시킨다. 이미 위대하신 아이언스 공작님의 화려한 마법에 한번 당한 전적이 있던 사병들이지만 아직까지 쪽수로 밀면 당할자가 없다는 구시대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였다. '우리가 수가 훨씬 많다! 이번에는 무조건 다구리를 놓는 거야!' 우르르 몰려가는 사병들. 하지만 레이트 백작이 누군가? 백작이다. 너무 당연한 대답이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나. 아무튼 백작이기 때문에 사병이 세트로 있다. 비록 단란하게 가족 여행을 왔다지만 명색이 백작인데 호휘병 정도는 대동해야 하지 않겠나? '부하들아. 밟아 줘라.' 우르르 몰려가는 레이트 백작가의 사병. 레이트 백작가의 사병들은 무관 출신인 레이트 백작의 수하들 답게 전투력도 장난이 아니다. 레이트 백작가의 사병들은 영주의 사병들을 다구리 놓기 시작한다. 완전 떡이 된 다음에야 백기를 흔들어대는 영주의 사병들. 레이트 백작은 그들을 한쪽에 일렬로 정렬 시켜 놓고 무릎 꿇고 손들기를 시킨다. 손 내리는 놈은 손을 잘라버린다는 협박과 함께. 영주의 사병 대장은 쪽수만 믿고 설쳐댄 것을 후회하며 '씨바, 씨바' 거린다. 그러자 옆에 있는 사병이 이른다. '옆에 있는 애가 자꾸 궁시렁거려요. 혼내 주세요.' 궁시렁 거린 놈도 나쁜 놈이고 고자질 한 놈도 나쁜 놈이니, 둘에게만 특별히 물통을 들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준다. 그제야 다른 놈들은 입을 꾹 다물고 손드는 것에 열중을 한다. 레이트 백작은 영주에게 다가간다. 영주는 놀라며 이렇게 말한다. '뭐, 뭐야? 나, 난 영주야. 날 건드리면 무사하지 못할 걸.' 레이트 백작은 이렇게 말한다. '난 백작이야.' 그리고 영주를 받아 버린다. 그리고 떡이 될 때까지 밟는다. 지근지근. 놀란 영주의 아들은 도망가려 하지만 역시 레이트 백작이 받아 버린다. 그리고 정말 잔인하게도 '거기' 를 밟아 버린다. 게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영주의 아들. 레이트 백작은 손을 탁탁 털며 말한다. '이제 다시는 결혼 할 일 없겠군.' 이렇게 두 번의 결혼식 모두 파토가 나고 불구가 되버린 영주의 부자는 영원히 지역 사회에서 매장되어 버린다. 중앙 정계의 요직에 앉아있는 백작의 눈에 잘못 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일화였다. 일을 마무리 지은 레이트 백작은 라나네 가족들을 만난다. 라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인 니나까지 백작이나 되는 귀족이 자신의 집에 와서 자신들을 마주보고 있다는 것에 굉장한 부담감과 불안감을 느끼며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가운데 라나만 당당하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다. '히로라고 아십니까?' 레이트 백작의 물음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족들. 라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말한다. '전 히로 오빠 애인이에요.' 순간, 황당해지는 레이트 백작 일가. 그리고 세 사람 머릿속에 동시에 '그 놈은 로리콘이었어!' 라는 생각이 떠 오른다. 세레나는 그런 라나가 귀여웠는지 웃으며 말한다. '어머, 나도 그 남자 애인인데.' 발끈 화를 내는 라나. 그리고 매우 굉장히 쓸데 없는 발언을 한다. '전 히로 오빠랑 뽀뽀도 해 봤어요.' 다시 입을 쩍 벌리는 레이트 백작의 일가. '역시 그 놈은 로리콘이었어!' 점점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다. 레이트 백작은 라나네 가족과 얘기를 더 나눈 뒤, 내가 건내주라고 했던 보석들을 건내 준다. 어차피 보석으로 건내 줘 봐야 쓰기 힘들 것 같으니 그 보석들은 레이트 백작이 전부 현금화 시켜 놓았고, 건내 주는 것은 현금이었다. 엄청난 액수에 놀라는 라나의 아버지 지크씨는 조심스럽게 그 돈을 받아 든다. 이제는 슬프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 하지만 발걸음을 때려는 순간 라나의 당돌하면서도 귀여운 얼굴이 눈에 들어 온다. 괜히 라나가 마음에 드는 레이트 백작과 세레나. 즉석 가족 회의 개최. 안건은 라나를 데려가느냐, 마느냐. 레이트 백작. '난 찬성.' 세레나. '저도 찬성.' 마지막으로 레이트 백작가의 안주인. '난 잠시 고려.' 고려 끝에 저렇게 귀엽게 생긴 아이라면 한번 길러보는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 이어지는 결정. '나도 찬성!' 만장 일치로 가족 회의 끝. 레이트 백작은 라나를 입양하고 싶다고 정식으로 라나네 가족에게 말한다. 그러자 라나네 가족 즉석 가족 회의 개최. 하녀로 보내는 것도 아니고 직접 딸로 입양을 한다는데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다. 아니, 굉장히 좋은 거다. 평범한 농부이자 평민의 딸이 귀족집의 영애가 된다는데. 게다가 조건 또한 파격적이다. 언제든 라나를 보러와도 되며 라나가 원한다면 언제든 이 곳으로 오게 해준다는. 결국 헤어지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라나네 가족들은 찬성표를 던진다. 라나는 어린 나이기에 귀족들이 사는 집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을 떠나 가족들과 헤어진다는 것에 슬퍼한다. 하지만 세레나가 잘 말한다. '우리를 따라오면 히로 오빠를 만나게 해줄 수도 있어.' 그러자 순식간에 바뀌는 라나의 마음. '저 그냥 이 사람들 따라 갈래요. 안녕히 계세요. 아버지, 어머니, 언니. 그 동안 길러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뵈도록 하지요. 뭐하고 계세요? 빨리 출발하지 않고.' 순간, 좌절하는 가족들. 라나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탄식한다. '이래서 딸 자식은 키워봐야 헛일이라니까! 내가 자식 농사를 잘 못 지었어!' 이렇게 해서 레이트 백작은 라나를 데리고 수도로 돌아온다. 그리고 라나와 세레나는 자매처럼 다정하게 지내며 아이언스 공작이 이 곳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이렇게 된 일이네." "그냥 간단하게 마음에 들어서 입양했다고 하시면 되지 뭐가 그렇게 길어요? 지금 소설 쓰십니까?" "자네가 물었잖나!?" "왜 입양했냐고만 물었잖아요!" "그러니까 대답했잖아!" "너무 길다니까요!" 우리는 지금 탁자가 있는 커다란 방안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충 보아하니 귀빈실인 것 같았다. 지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고만 있었다. 라이는 퉁퉁 불은 눈을 한 채 코를 풀고 있고, 칼리는 한숨만을 푹푹 내쉬고. 지금 칼리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걸 상아탑에 버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그 심정이 심히 이해가 간다. 반대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레이트 백작을 비롯한 헤리오의 고위 귀족들이었다. 헤이체르 공작, 유나이세르 후작, 비토스코 백작, 베르나제 남작 등등. 이름 외우느라 정말 힘들었다. 하이스네도 있긴 하지만 의자가 모자른 관계로 옆에 서 있었다. 헤이체르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 분이 상아탑의……." 칼리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에 앉아있는 라이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여기 계신 분은 상아탑의 대표이시자 탑의 주인이신 라이미안님이십니다." 라이는 칼리의 품으로 파고 들며 손을 살짝 들고 흔들었다. "안녕."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흔드는 헤리오의 귀족들. 잠시 후, 그들은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레이트 백작은 서 있는 하이스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하이스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레이트 백작의 손에 시가를 올려 놓았다. 레이트 백작이 시가를 물었다. 그러자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지포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놀라는 레이트 백작을 비롯한 헤리오의 귀족들. 이어지는 수근거림. "저 것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아마도 마법 무구인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불이 나오다니. 신기하기 그지 없군." "과연 아이언스 공작입니다." "제 생각에 저 동그란 부분이 부싯돌인 것 같고, 저 심지가 부싯깃인 것 같은데요. 아래쪽에 기름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그리 신기한 물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불 붙이는 도구를 전체적으로 축소시켜 놓은 거잖습니까?" "어허! 무슨 소리! 저건 마법 무구가 틀림 없네." 둘 다 맞았다. 전체적인 구조는 일반 지포라이터와 같지만 기름 대신 마법으로 켜지는 것이니. 기름은 언젠간 떨어지잖아. 난 담배를 빼물었다. 그리고 지포라이터를 휙휙 돌리는 등 온갖 쇼를 다한 다음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헤리오의 귀족들. "대체 불 붙이기 전의 저 동작은 뭘까요?" "글쎄요. 하나의 의식이 아닐까요?" 사실 크로니스에게 이 지포라이터를 받은 후, 하라는 검술 훈련은 안 하고 이것만 연습했다. 노처녀가 알면 또 잔소리 듣겠군. 설마 아까처럼 꿈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 짝짝짝-! 갑자기 들려온 박수 소리. 라이는 대단히 감명 받은 얼굴로 손바닥을 열심히 부딪히고 있었다. "굉장해요! 멋있어요! 훌륭해요!" "하하하! 뭘 이런 걸 가지고." 라이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라이의 통통하고 귀여운 손을 바라 보았다. "어쩌라고?" "그거요." "그거라니? 설마 그걸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걸 달라는 거에요." "니가 그걸 받아서 뭐하게? 안 돼! 그런 건 어린애가 만지는 게 아니야! 너 불장난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기나 해? 불장난하면 너 밤에 오줌 싸." 울먹 거리는 라이. 라이의 커다란 눈망울은 '안 주면 라이는 울어 버릴거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칼리의 얼굴을 보니 '웬만하면 주세요. 여기서 울면 얼마나 쪽 팔려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하는 수 없이 지포라이터를 라이의 손에 건냈다. 화색이 도는 라이의 얼굴. 라이는 재빨리 뚜껑을 열고는 부싯돌을 긁었다. 화악 솟아오르는 불꽃. 감동하는 라이의 표정. 그리고 이어지는 껐다, 켰다의 무한반복. 헤리오의 귀족들은 일제히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저 것이 과연 기품과 교양이 넘처 흐른다는 탑의 주인 라이미안님의 모습이란 말인가? 엘프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깨지는 구나.' 이렇게 말하는 듯한 저들의 표정. 칼리는 이제 거의 포기한 듯 했다. 난 행복에 겨워하는 라이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솟아 올랐다. 어쩜 뒤통수가 저리 동글동글하고 예쁠까? 진짜 한 대 때려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 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은발을 뒤로 빗어 넘긴 청년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이고 키는 나보다 조금 컸다. 꽤 준수하게 생긴 외모긴 하지만 어쩐지 주늑이 들어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얼굴선이 얇아서 그런가? 난 지니의 옆구리를 찔렀다. "왜 그러시는 지요?" "저 남자가 들어왔을 때, 옆구리를 찔렀는데 어찌하여 저 남자가 누군지를 묻는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셨는 지요?" "죄송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아이언스 공작님의 의중을 깨닫지 못한 저를 꾸짖어 주시어도 저는 할 말이 없사오나, 지금이라도 대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성심성의 껏 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뭘 그렇게 길게 말하시는 지요? 그냥 말해요." "반데라스 왕자입니다." 그랬었군. 왕자인 동시에 왕세자. 현재 국왕에게는 아들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하니, 저 남자가 왕좌에 오르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연약해 보이고 자신이 없어 보이는 듯한 모습일까? 왕족이라면 고개를 빳빳하고 당당하게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반데라스 왕자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이니 내일 날이 밝은 후에 얘기를 나누자고 하셨습니다. 아이리스의 귀빈분들과 상아탑의 귀빈분들은 이어지는 무도회에 참석하셔도 좋고 이만 쉬러 가셔도 좋습니다. 만약 숙소가 잡혀있지 않으시다면 이 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오늘은 영업이 끝났으니 내일 개장하면 오라는 얘기다. 난 지니를 쳐다 보았다. 지니는 말했다. "그럼 무도회에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뭐라? 무도회에 참석을 해? 난 지니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그냥 돌아가서 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 동안 열심히 일 했으니 무도회장에서 적당히 즐기는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전 일 한 거 없는데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너무 겸손하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춤은 출 줄 아세요?" "제 주특기입니다." 이 세상에 니가 안 하는 게 어딨고, 못 하는 게 어딨겠냐? 너 잘났다. "이렇게 되었으니 무도회장 가서 계속 얘기하도록 하지." 레이트 백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귀족들도 대부분 일어섰다. 라이는 아직까지 지포라이터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돌려주는 것이 어떻겠니?" 라이는 장난을 멈추었다. 그리고 기다린 귀를 축 늘어뜨리더니 처량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저기요. 이거 저 주시면 안 되요?" 그렇게 말하는 라이의 표정은 너무도 귀엽고 불쌍해 보였다. 그래. 내 너를 위해서 무엇이든 못 해주겠니? 니가 원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오줌 쌌던 일도 영원히 비밀로 지켜 줄 수 있다. "절대 안 돼!" 난 단호하게 말하며 라이의 손에 들린 지포라이터를 빼앗았다. 순간, 눈물을 글썽이는 라이.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애가 운다고 자꾸 들어주다보면 버릇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지포라이터는 애들이 가지고 놀기에 너무 위험한 물품이다. 잘못해서 불이라도 지르면 어떡해? 생각해 보면 라이는 마법사니 불을 지르려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대형 방화를 일으킬 수 있지만 그래도 지포라이터를 가지고 노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흑흑, 너무 해요." 손수건을 입에 물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라이. 귀는 여전히 축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밖으로 나가려던 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아! 어찌 저리 불쌍해 보인단 말인가? 저 아이를 위해 우리가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성금이라도 모아 전달해?' 칼리도 얼어 붙었다. '또 울어! 또 울어! 진짜 미치겠다!' 나도 얼어 붙었다. 애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얼어 붙었냐고? 그거 아니다. 지금 라이의 모습이 귀엽고 불쌍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얼어 붙은 이유는 공포 때문이었다. 손수건을 입에 물고 귀를 축 늘어뜨린 채 눈물을 뚝뚝 흘려대는 라이의 모습은 마치…… 라이레얼을 연상시켰다. 아아! 라이레얼! 순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이에게 외쳤다. "왜 울어? 왜 울어!? 니가 뭔데 울어!? 세상일이 눈물로 해결 되는 줄 알어? 당장 뚝 그치지 못 해!" "으아아앙!"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는 라이. 그 위로 라이레얼의 모습이 중첩된다. "시끄러! 니가 뭘 잘했다고 울어!?" 난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라이의 울음소리와 수근대는 목소리들. "과연 아이언스 공작이군.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가."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군요. 아마 다른 사람이라면 결코 저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무도회장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다시금 그 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춤을 추었다. 남자도 춤을 추었지만 내 눈에는 여자만 보인다. 난 그런 무도회장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힐끔힐끔 혹은 대 놓고 보며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고 있었다. 난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느낌에 심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냥 조용히 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선이 내가 아닌 내 옆의 지니에게 집중 되어 있었으니까. '저 사람이 바로 당대 최고의 모사라는 사일런스 백작이네.' '정말 굉장하군. 저 두뇌에서 천하를 뒤집을만한 책략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말이지?'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내가 어떻게 아나? 별 신경쓰지 말게.' 이 곳에서 나의 인지도가 굉장히 낮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순간이다. 반면 지니의 인지도는 장난이 아니었다. '어머, 어쩜 저렇게 멋있게 생겼을까?' '인간이 저렇게 잘 생겨도 되는 걸까?' '아! 춤 한번 춰 봤으면.' 여자들의 시선은 전부 사일런스 지니를 향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로 방금까지 옆에 끼고 있던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지니만을 바라보고 있다. 지니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10명 중 한명 꼴로 뒤로 넘어간다. 저거 기절한 거 맞지? 어딜가나 지니는 여자들의 시선을 끈다. 잘 생긴 외모만으로 100명 중 99명을 홀딱 반하게 하고 나머지 한 명은 사회적 지위와 카리스마, 타고난 언변, 넘쳐흐른 지식 등으로 홀딱 반하게 한다. 나도 어디가서 절대 꿀리지 않을만한 외모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 지금의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지니의 옆에 서있기 때문이다. 잘난 나지만 지니의 옆에 서는 순간, 사과 살 때 껴주는 방울 토마토, 컴퓨터 살 때 껴주는 마우스, 다이아몬드 반지 살 때 껴주는 은반지, 잡지 살 때 딸려오는 부록이 된다. 제발 날 잡지 부록으로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뭐, 이렇게 외친다고 해서 누가 나에게 신경이나 쓰겠냐? 여자들은 주춤거리며 지니에게 조금씩 접근하고 있었다. 흰색 드레스를 입은 귀여운 여인하나가 용기를 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 나이 정도 되보이는데 아직 어린티가 물씬 풍겼다.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여인은 힘들어하는 듯 했다. 그래. 천하의 사일런스 백작님께 다가오는데 어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냐? 니 마음 내가 다 이해한다. 여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도 내 앞에서. 순간 나는 얼어 붙었다. 설마 나에게 춤 신청을 하려고? 여인은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든 뺨이 어찌나 귀엽게 보이는 지. 그래. 니가 용기를 내서 춤을 신청하였으니 내 특별히 한곡 춰 주도록 하마. 하하하! 그럼 그렇지! 지니가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이 아이언스 공작님과 어찌 비교 할 수 있으리. 혹시 저 곳에 있는 저 많은 여인들도 나를 쳐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저기요." "예. 말씀하세요." 목소리도 가느다랗고 아름답다. 정말 마음에 드는데. 이 곳에 와서 이렇게 새로운 인연을 만나다니. 오늘은 정말 운이 좋다. 아까 그 점쟁이가 최악이 어쩌구 한 얘기는 완전 헛소리에 불과하였나 보다. 여인은 정말 부끄러운지 계속 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난 그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하! 부담 가지지 말고 말씀하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떠한 부탁이던 제가 최선을 다해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춤 한번 정도는 춰 줄 수 있다니까. 너무 부담 갖지마. "저기…… 옆에 계신 분께 한곡 같이 추고 싶은데 괜찮으시냐고 물어봐 주시겠어요?" "예?"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밀려오는 엄청난 분노와 좌절. 그럼 그렇지. 누가 지니의 옆에 있는 별 볼일 없는 나를 보겠어? 역시 난 부록이었어. 그래. 난 부록이야! 덤이라고! 난 인상을 쓰며 말했다. "싫어!" 당황하는 여인. 난 날카로운 눈으로 여인을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딱딱 끊어 말했다. "니가 직접 말해! 내가 니 하인이냐? 그런 부탁을 들어 주게. 넌 입도 없냐?"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는 여인. 그래. 역시 나에게는 이런 역할이 어울린다. 괜히 여자에게 심술을 부리는 악당 역할.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지니는 깜짝 놀라는 듯하며 나를 만류하였다. 그러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니에게 안겼다. 지니는 넓은 가슴으로 여인을 안고는 잘 다독여 주었다. "무서워요." "괜찮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은 원래 좋으신 분인데 지금은 기분이 좀 좋지 않을 뿐입니다. 레이디께서는 마음을 가라 앉히십시오." "그래도 무서워요.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지켜 주실 꺼죠?" "물론입니다. 레이디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던 하겠습니다." "아아! 사일런스 백작님!" 아예 영화를 찍어라. 여인은 할리우드 액션과 오버 액션을 결합한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하며 사일런스 지니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지니는 정말 재수 없게도 그 연기에 맞장구를 쳐주고 있다. 그런데 너무 꽉 끌어 안는 거 아닌가? 저러다 지니 허리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대체 아까의 수줍음은 어디가고 저런 생쇼를 벌이는 걸까? 지니는 결국 그 여인과 춤을 추기로 하고 홀의 중앙으로 나갔다. 저 여자 결국 소원 풀었군. 축하한다. 다른 여인들은 그 여인을 굉장히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곡이 끝나는 데로 반드시 춤 신청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난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춤추는 지니를 보았다. 지니가 춤추는 모습은 마치…… 물 찬 제비 같았다. 저건 정말 한 두번 놀아본 솜씨가 아니다. 저 정도 솜씨라면 강남 유명 카바레에서 '사모님, 한 곡 땡기실까요?' 라는 말을 수 없이 내뱉었을 것이다. 완전 제비족이다. 저 물 흐르는 듯한 발놀림. 최대한 여성을 배려해 주는 몸짓. 그리고 어떠한 여자라도 반하게 만드는 미소. 아! 신은 불공평 해! 이건 불공평한 정도가 아니야. 원래 얼굴이 저렇게 잘 생겼으면 성격이 드럽다던가, 머리가 바보라던가, 그것도 아니면 병에 걸려 다 죽어가야 한다던가 해야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한 사람에게 모든 능력을 다 쏟아 부을 수 있는 거지? 신이지만 정말 너무한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순간 엄청난 외로움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제각기 웃고 떠드는 사이 나는 슬프다. 가슴이 차가워지는 듯한 이 느낌. 내가 이 곳에 왜 왔을까?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데. "후우-!" 정말 한숨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다. 그 것도 나에게.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옆에 쪼그려 앉는다. "좀 더 옆으로 붙어라. 나 지금 외롭다." 라이는 말 없이 내 옆에 바싹 붙었다. 난 침울해진 라이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지포라이터 안 줬다고 삐진거야?" 라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요." "그럼 왜 그러는 데?" "자꾸 운다고 칼리한테 야단 맞았어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난 라이의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너무 상심하지마." 라이는 조금은 밝아진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순간, 난 라이를 끌어 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반해서 그러냐고? 절대 아니다. 루시아가 있는 마당에 내가 이런 조그만 애에게 반할 리가 있겠냐? 다만 나는 지금 라이에게서 끈끈한 동지애를 느껴서이다. 나를 반겨줄 이 하나 없는 이 곳에서 나에게 신경을 써주는 것은 오직 라이 하나 뿐이다. 비록 그 신경을 써준다는 것이 매일 귀찮게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고마울 따름이다. "라이야, 그 동안 내가 너무 심했지? 사과할게. 미안해." 이 말은 진심이다. 사실 그 동안 내가 라이에게 너무 못 되게 굴었었다. 괜히 가만히 있는 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지. 지금 많이 반성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러하다. 라이의 표정은 감동 그 자체였다. 라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푸근해 지는군. 난 간만에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따뜻한 기분을 맛 보았다. 역시 세상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착하게 살면 이렇게 기분도 좋아지기 마련이지.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앗! 여자 목소리다. "물론입니다. 제가 시간이 남아 돌거든요. 그런데 무슨 얘기를…… 세레나?" 내 앞에 서있는 여인은 세레나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라나가 서 있고. 난 두 여인을 잠시 살펴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라이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라이는 아직 내 옆에 딱 붙어있는 상태였다. 난 라이를 옆으로 밀쳤다. "저리 가서 혼자 놀아라. 방해 된다." 라이는 웃으며 말했다. "같이 있으면 안 되요?" 난 웃으며 라이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안 돼!" 울먹이는 듯한 라이의 표정. 난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나가서 울어라. 시끄럽다." 라이는 아까 칼리에게 혼났기 때문인지 초인적인 인내심을 동원하여 울음을 참았다. 하지만 참아봐야 크게 울지 않을 뿐, 눈물은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라이는 소리 내어 울지 않기 위해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는지 나에게 소리쳤다. "오빠, 나뻐!"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저 먼 곳으로 뛰어가는 라이. 잠시나마 라이를 향해 끈끈한 동지애를 느꼈던 내가 우스워지는 구나. 역시 나에게는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악역이 어울려. 그나저나 라이만 보면 왜 이렇게 괴롭히고 싶어지는 걸까? 이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가, 아니면 라이한테 문제가 있는 것가? 난 고개를 돌려 세레나를 보았다. 세레나는 새초롬하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반면 라나는 굉장히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라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 동안 잘 지냈니?" 라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라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의 품에 달려들었다. "오빠!"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는 당황하였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고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세레나에게 말했다. "넌 잘 지냈냐?" 세레나는 기분이 좋지 않은지 싸늘한 눈으로 나를 노려 보았다. 왜 이러지? 간만에 만났으니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날 만난게 별로 안 기쁜가? 왜 안 기뻐? 내가 지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뭐하시느라 그 동안 연락 한번 없으셨어요?" "연락이 없었다니? 그때 라이코스를 통해서 편지 보냈었잖아." 내 말을 들은 세레나는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왜 속였어요?" "내가 속이긴 뭘 속여?"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후계자였다는 거요." "야, 그건 니가 안 물어 봤으니까 안 말 한거지. 그나저나 너 무지하게 예뻐졌다. 예전에도 한 미모하는 얼굴이었는데 지금보니 장난이 아닌데. 너 성형수술이라도 받았냐?" 순간, 얼굴이 빨게지는 세레나. 겉으로 나타내지 않기 위해 매우 애를 쓰고 있었지만 좋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역시 여자는 칭찬에 약하다. 특히 외모에 관련된 칭찬에. 내가 한 말은 단순한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 세레나는 몰라 볼 정도로 아름다워져 있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어린티가 났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소녀에서 여자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 지금 세레나가 그 단계에 있다. 청순하면서도 귀여워 보이는 외모. 여기에 옵션으로 기품과 교양까지 겸비되어 있다. 실제로도 겸비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외모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난다. 아! 정말 아름답다. 예전에 좋아했던 감정이 다시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 같아. 세레나는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아름다워 보인다. "넌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요." 새초롬하게 대답하는 세레나. 난 웃음을 지었다. "잘 지냈다니 다행이네. 라나랑은 지낼만 해?"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동생 생겨서 좋겠네." "정말 그래요." 우리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세레나의 어깨너머로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은발의 청년. 반데라스 왕자였다. 반데라스 왕자는 그 허여멀건 한 얼굴을 조금 붉히고 있었다. 어찌보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반데라스 왕자는 계속 이쪽을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고개를 획 돌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나를 쳐다 보았다. 잠시 주춤주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반데라스 왕자는 내 앞에 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고 허리를 숙였다. "귀하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난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귀하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반데라스 왕자님." 말씀을 듣긴 뭘 들어? 지금 방금 니가 누군지만 들었다. 반데라스 왕자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나는 '어라? 왕자도 지포라이터로 장난치고 싶나?' 라는 생각을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포라이터를 꺼내 주려다가 악수를 청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어색한 듯한 반데라스 왕자의 웃음. 반데라스 왕자는 내 모습을 조금씩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잡은 손을 놓았다. 반데라스 왕자는 나한테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고는 세레나를 보았다. 순간 반데라스 왕자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건 표정과 행동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저랑 춤 한곡 추시겠습니까?" 딱딱하고 굳은 말투. 완전히 얼어붙었군.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과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안 보이시나요?" 싸늘한 세레나의 말투. 아마도 왕자 때문에 나와의 대화가 끊긴 것이 화가 났나보다. 콰과광-! 천둥 소리와 함께 반데라스 왕자의 머리 위에서만 내리는 비. 반데라스 왕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죄송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떠나가는 반데라스 왕자의 뒷모습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나의 예민한 청각으로 들어보니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 하다. 난 이 상황을 조합하여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저 남자가 세라나를 좋아하는 군. 세레나는 반데라스 왕자쪽은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지금 세레나의 표정은 마치 '없어져서 속 시원하네' 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세레나에게 말을 건내려는 찰나 홀안에 흐르던 음악이 멈추었다. 난 스피커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물론 아니었다. 그냥 한 곡이 끝났을 뿐이다. 그런데 홀 중앙에는 정말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이 춤은 추지 않고 전부 지니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남자들까지도. 그리고 한쪽에는 여자들이 일렬로 줄을 서 대기하고 있었다. '밀지마, 이 년아.' '자꾸 어떤 년이 새치기를 하는 거야?' '순번을 지켜.' '웃기는 소리. 먼저 신청하는 사람이 장땡이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그 틈에 끼어들어 암표라도 팔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물 밀 듯이 밀려왔다. 곡이 끝나서 더 이상 지니를 붙잡아 둘 수 없게 된 여인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지니를 놓기가 너무 아쉬웠는지 갑자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풀썩 쓰러지는 여인. 지니는 그게 쇼라는 것을 알면서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무슨 일이십니까?" 바닥에 쓰러지려는 여인을 두 손으로 받혀든 지니. 여인은 지니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파요." "그럼 앉아서 쉬십시오.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사일런스 백작님. 이대로 조금만있으면 괜찮아 질 것 같아요." 그 모습을 보고 엄청난 분노를 느끼는 여인들. 심지어 어떤 여인은 손에 들고있는 부채를 두 손으로 부러뜨리기도 한다. '저 싸가지 없는 년이 생쇼를 하고 있어.' 그 모습을 보고 역시 엄청난 분노를 느끼는 남자들. '너 혼자 여자를 싹 쓸이 하면, 우리는 뭘 하란 말이냐?'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얼굴 잘 생긴 데다가 춤까지 잘 추니 여자들이 안 넘어 갈리 있나? 난 세레나에게 말했다. "너도 저기로 가서 줄 서지 그래." "제가 왜요?" "그냥. 저기 저 많은 여자들이 줄 서 있는 것을 보면 괜히 줄 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니?" "별로요." 세레나와 대화를 나누는데 어디선가 굉장히 암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나를 감싸 안았다. 나의 절대 감각(자꾸 절대 감각이라는 말을 쓰는데, 사실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고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으로 알 수 있건데 분명 이 것은 어디선가 저주파가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저주파를 보내고 있어. 그게 누굴까?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반데라스 왕자가 붉어진 얼굴로 몸을 배배꼬며 이를 바드득 바드득 갈고 있었으니. 반데라스 왕자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안 돼! 제발 세레나양과 얘기하지마! 니가 뭔데 세레나양과 감히 얘기를 나눠? 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냐? 세레나양! 제발 그 남자와 얘기하지 말고 절 봐주세요. 제발 저의 마음을 알아 주세요. 그 남자는 세레나양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답니다. 세레나양을 행복하게 만들어 드릴 남자는 오직 저뿐이에요.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제 품으로 달려 드세요. 제가 반드시 세레나양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많이도 말하고 있다. 그렇게 좋아하면 이쪽으로 와서 고백하지 왜 거기서 혼자 쇼하고 있냐? 난 반데라스 왕자의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세레나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래요?" 세레나의 질문에 난 웃으며 말했다. "그냥. 손이 가늘고 예뻐서 한번 잡아보고 싶어서." 빨개지는 세레나의 얼굴. "한번 잡아봤으면 그만 놓으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손을 뿌리치지 않는 세레나. 세레나의 손이 예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잡고 싶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잡고 싶은 손이라면 루시아의 손이지. 난 세레나의 손을 잡은 채, 살며시 반데라의 왕자를 보았다. 반데라스 왕자는 입에 거의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감히 니 주제에 세레나양의 손을 잡아? 네 놈! 당장 그 손을 놓지 못할까! 어찌 그 더러운 손으로 세레나양의 고운 손을 잡느냐? 나도 못 잡아본 손을. 세레나양! 당장 그 손을 뿌리치세요. 허억!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당장 그 손을 놔. 당장!' 그래. 놓아주마. 난 세레나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죽을 것 같았던 반데라스 왕자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저 놈 이제보니 왕자가 아니라 스토커잖아. 그 동안 세레나가 이런 스토커한테 시달리고 있었단 말인가? 반데라스 왕자의 저주어린 시선 때문에 내가 이 곳에서 세레나와 대화를 나누기 굉장히 부담스럽다. 난 장소를 바꾸기로 마음 먹었다. "할 얘기도 많은데 장소를 옮기자."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라나를 번쩍들었다. 으음, 꽤 많이 무거워 졌군. 그 동안 많이 큰 건가? 우리가 이동한 장소는 테라스였다. 옅은 조명이 있어 분위기 있는 테라스. 난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세레나와 라나는 말 없이 나를 보았다. 이 둘을 다시 만난 것이 기쁘기는 한데, 하나씩 따로 만났으면 더 좋을뻔 했다. 같이 만나니까 무슨 얘기를 해야할 지 잘 모르겠잖아. 난 애꿎은 머리만 벅벅 긁어댔다. 라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 오빠를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았어." 그래. 어떻게 보면 다시 만나는 않는 것이 좋았을지도. "하지만 언젠간 오빠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거라 믿고 기다렸어." 어린애가 말을 참 조숙하게 한다. 라이는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굉장히 어린 반면, 라나는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굉장히 높다. 이건 나 보다도 높잖아! "그래."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내 품으로 뛰어오는 라나. 라나를 안고 다독여 주는데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체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내가 라나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귀여운 동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가 깜찍하게 생겼으니 머리라도 한번씩 쓰다듬어주면 좋잖아. 하지만 라나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오빠가 아닌 이성으로. 정말 너무 조숙한 애가 아닐 수 없다. 유치원 다니는 여자애들이 가끔씩 이런 말을 한다. '나 커서 아빠랑 결혼할꺼야.' 보통의 경우 부모님들은 웃어 넘긴다. 왜냐하면 이 여자애들이 유치원을 지니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로 가는 동안 자기가 유치원 다닐 때 했던 말은 완전히 잊어 먹고 멋진 남자 쫓아 다니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애가 나이 먹어서도 '난 죽어도 아빠랑 결혼할꺼야' 등등의 말을 한다면 부모들은 조금씩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한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을 돌리게 만들려 애를 쓰고, 만약 노력을 했는데도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어머니께서 직접 나서 몽둥이로 다리 몽둥이를 분지른다. '이 놈의 계집애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감히 내 남편을 넘 봐!?' 그렇다. 아무리 아빠가 좋다고 해도 아빠는 유부남인데다 아빠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몽둥이를 들고 지키고 계신데 어찌 아빠에게 접근이나 할 수 있겠는가? 결론은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니 포기하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얘기다. 비유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라나도 비슷한 상황이긴 하다. 라나가 전에 말했었다. '나 오빠 좋아해. 나랑 사귀자.' 난 당연 웃어 넘겼다. 이렇게. '파하하! 어린애가 참으로 조숙하구나. 그래. 그럼 라나가 엄마하렴 내가 아빠할 게. 여기있는 헬로우 귀티 인형은 딸이라고 생각하자.' 어린 아이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사랑보다는 동경에 가깝다. 라나와 나의 나이 차이가 무려 7살이나 난다. 나이차만 보더라도 결코 이루어질래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는 아니다. 생각해보니 7살 차이는 그리 큰 것이 아니군. 아무튼 라나는 지금 어리다. 이 어린애가 예전에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는 '아! 이 애가 나를 좋은 오빠로 생각하는 구나. 난 어차피 여동생도 없으니 잘 해주어야 겠다' 라고 생각을 했지만, 지금 라나의 행동을 보니 라나가 나를 정말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 없다. 이것은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어떻게 라나를 이해시키지? 사실 지금 라나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더 큰일이 있으니, 그건 바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로리콘으로 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어머, 알고보니 아이언스 공작이 10살짜리 어린애를 꼬셔 키스까지 했데요.'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데요. 아이언스 공작은 12살 이상의 여자는 여자로 치지도 않는데요. 할머니로 생각한다나.' '맞아요, 맞아. 8살에서 10살 정도의 여자 아이를 가장 좋아하지요. 지금 신부감으로 봐둔 9살짜리 여자애가 있는 모양이던데요.' '살다살다 별 꼴을 다 보네요. 어쩜 멀쩡하게 생겨서는 어린 아이나 밝히는 색마였다니.' 이렇게 되면 아이언스 공작이 매장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게다가 루시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어떻게든 빨리 라나를 이해시켜야 한다. '니가 지금 이러는 것은 어린날의 치기(稚氣)일 뿐이야. 넌 사랑과 동경을 헤깔리고 있어. 난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야. 생각해 봐. 니가 17살이 되어 결혼 적령기에 들어서면, 그때 내 나이 24살이다. 그때쯤이면 나는 지팡이를 짚고 양로원에 다니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너보다는 늙었어. 그러니까 너는 니 나이에 맞는 니 나이 또래의 애를 사랑해야 해. 나이의 차이는 그 무엇으로 극복할 수 없는거야.' '그런데 왜 2살이나 많은 루시아 공주님을 좋아하는 거에요?' '아니? 니가 루시아를 어떻게 알지? 아무튼 2살 차이쯤은 가볍게 극복 할 수 있으니 좋아하는 거지.' '7살 차이도 극복할 수 있어요.' '그건 아니야. 7살 차이랑 2살 차이랑 같니?' '통계에 따르면 여자가 남자보다 3살 어린 것이 가장 이상적인 수치이니, 그 수치로 비교했을 때, 나는 오빠와 4살 차, 루시아 공주님은 5살 차이가 나니까 나이차로 따지면 루시 공주님이 더 많이 나요.' '너 대체 언제 통계 자료까지 분석했니? 똑똑하기도 해라. 하지만 사랑에는 원래 국경도 없다는데 나이차가 무슨 상관이니?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나이 같은 것은 상관 없단다.' '그럼 나이차가 상관 없으니 계속 오빠를 사랑할래요.' '야! 그게 아니지. 나이차는 무엇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거라니까.' '아까 내가 사랑에 국경도 나이도 상관 없다고 말했잖아요.' '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 했어!?' 시뮬레이션을 분석한 결과 설득이 상당히 힘들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냥 무자비하게 차 버려? '라나야. 미안하지만 이 오빠는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이제 그만 오빠를 놔 줘.' '라나는 절대 그럴 수 없어!' '왜 그렇게 나한테 집착을 하는 거야? 난 루시아를 사랑해.' '나도 오빠를 사랑해!' '니가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해?' '어려도 알 건 다 알아요!' '아무튼 난 이제 니가 싫어졌어. 가! 가란 말이야! 제발 가!' '오빠랑 헤어지느니 콱-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겠어요!' '야! 안 돼! 죽긴 왜 죽어!? 아직 앞길이 창창한데!' 시뮬레이션 분석 결과 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아!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라나의 여린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좋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역시 오빠는 라나를 만나러 다시 와 주었어. 라나는 지금 행복해."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에 얼굴에 부비적거리는 라나. 아! 진짜 미칠 것 같다. 이 일이 루시아에게 알려진다면 난 차이게 될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어린 라나를 매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예전에 아이언스 공작님과 사귀셨다는 그 분이시군요." "무슨 소리!" 난 고개를 돌려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를 지껄인 사람을 보았다. 내가 언제 라나랑 사궜어? 난 로리타 콤플렉스가 아니야!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춤 안 추시고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잠시 쉬러 나왔습니다." 하긴 여자들이 계속 춤 신청을 해대는 바람에 쉬지도 못했을 테니. 잠깐! 그런데 아까 지니가 한 말은……? 지니를 쳐다 보자, 지니는 외눈 안경을 올려 쓰며 부드럽게 말하였다. "방금 전에 레이트 백작님께 들었습니다." 그랬었군. 난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건 허왕된 소문일 뿐입니다. 설마 그 것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세레나는 말 없이 나와 지니를 바라 보고 있었다. 지니를 바라보는 저 눈빛은…… 다행이 '아! 사일런스 백작님!' 하는 눈빛은 아니다. 그냥 호감어린 눈빛일 뿐이다. 가끔은 이렇게 지니에게 반하지 않는 여자도 있다. 정말 아주 가끔. "그런데 지금 어째서 그 아가씨를 껴 안고 있는 지요?" 뭐? 내가 언제? 이건 라나가 나를 껴 안고 있는 거지, 내가 라나를 껴 안고 있는 게 아니잖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날카롭게 빛나는 지니의 눈빛. 저 눈빛은 설마…… 까르린느 사건 때의 셜록 지니? 지니는 조심스럽게 나와 라나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 어찌하여서 이 어린 숙녀분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지니. 난 굉장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무, 무슨 소립니까?" "발뺌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 여성분과 입맞춤을……." "아, 아니라니까요!" "아이리스에서 아이언스 공작님만을 생각하시며 눈물을 짓는 저희 누님을 놔두시고 어찌……."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이 무슨 상관이에요!" "루시아 공주님을 놔두시고 어찌……." 난 지니의 손을 움켜 잡았다. "정말 아니에요. 제발 믿어 주세요. 전 결백해요." "결백하다고 말씀을 하셔도……." 결코 믿지 못하겠다는 지니의 저 표정. 안 돼! 어떻게든 지니에게 해명을 해야 되. 만약 지니가 아이리스에 가서 루시아에게 헛소리를 떠들어 댄다면…… 아아! 분명 차이겠지. 그리고 난 로리콘으로 찍혀 평생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게 될지도 몰라. 내가 해명을 할라는 찰나 라나는 눈물어린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오빠 아직도 라나를 좋아하지?" 대체 이 상황에서는 어떠한 대답을 하여야 하나? 난 세레나의 얼굴을 한번 보고 지니의 얼굴을 한번 보고 라나의 얼굴을 한번 보았다. 지니가 보고 있으니 당연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야겠지만, 라나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하지도 못 하겠고. 그냥 테라스 밖으로 몸을 던질까?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갑자기 홀안이 굉장히 시끄러워졌다. 그 덕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그 쪽으로 쏠렸고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시끄러운 거지? 궁금해서 홀안으로 들어가려보려 하는데 라이가 통통 뛰는 걸음으로 테라스로 들어왔다. 라이는 홀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떤 여자가 오빠 찾는데." "뭐?" 아니, 이 곳에서 나를 찾는 여자가 있어? 세레나와 라나가 아닌. 설마 외상값 받으러 온 주방 아줌마인가?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질문. "예쁘니?" "응." 라이의 대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후후후, 예쁜 여자가 나를 찾아?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쁜 여자라니까 무조건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나를 찾아왔다는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다시 홀안으로 돌아왔다. "그 여자는 어딨니?" "저기." 라나는 손가락을 들어 문쪽을 가리켰다. 난 그 쪽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커다란 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완벽한 몸매, 새하얗고 매끈한 피부, 길고 아름다운 레몬빛 생머리. 그리고 그 모든 것과 잘 조화되는 듯한 하늘색 연한 물빛 드레스. 아! 정말 완벽하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 나온다. 홀안의 사람들은 전부 입을 쩍 벌리고 완전히 풀린 눈으로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은 주위를 둘러보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설마 나에게 인사하는 건가? 난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여인의 인상착의 중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다. 귀가 길고 뾰족하네. 왜 귀가 길고 뾰족할까? 귀가 길고 뾰족한 것은 엘프의 전매 특허인데. 그런데 여인의 얼굴이 굉장히 낯익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히로!" 여인의 외침.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나의 가슴 한쪽을 파고든다. 설마…… 이 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겠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라이레얼 맞잖아! 지니는 여인의 얼굴과 나를 번갈아보고는 나에게 물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난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알긴 뭘 알아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여자는 오빠를 아는 것 같은데요." 난 황급히 라이의 입을 틀어 막았다. 빨리 몸을 숨겨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이거 미치겠네. 라이레얼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 온 거야? 아니, 대체 어떻게 들어 올 수 있었던 거지?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영물 잠도 못 자게." 라이코스는 주변의 소란 때문에 잠이 깼는지 라이의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머리에 있는 세 개의 깃털을 정리하고는 반쯤 감긴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앗! 라이레얼이다!" 라이코스의 흰색 깃털이 새파랗게 질렸다. 라이코스는 눈을 번쩍 뜨며 라이의 주머니에서 날아 올랐다. 그리고…… 와장창-! 번개 같은 속도로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아! 어디가 이코야!" 라이가 황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라이코스는 이미 저 하늘로 날아가 버린지 오래. 아차! 지금 내가 얘들 신경 쓸 게 아니지. 날 먼저 신경써야 하잖아. 라이레얼은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 모습. 지니는 나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아시는 분 같은데요." 나도 몰라. 이젠 발뺌하기도 글렀어. 라이코스처럼 저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나갈까? 라이레얼은 레몬빛 눈동자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역시 히로구나! 히로!" 와락-! 라이레얼이 나를 꼭 끌어 안았지만, 난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머릿속이 멍해져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절망의 종소리만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이제 내 인생은 끝이야! 내 머릿속에 낮에 만났던 점쟁이의 말이 울려 퍼졌다. <최악이야!> <내 살다살다 이렇게 재수 없는 상판때기는 처음 보는 군. 정말 재수 없어. 이렇게 재수 없는 관상은 1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야!> <지금 자네의 상은 최악일세.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어. 자네의 오늘 운세는 악운에 악운이 겹쳐 있어.> <해가 지면 자네의 악운은 최고조에 달할 걸세. 특히 자정에서 동이 틀 때까지를 조심하게. 커다란 재앙이 닥칠 거야.> <아무 곳에도 가지 말고 방에 조용히 틀어 박혀 날이 밝기를 기다리게.> 라이레얼은 나를 껴안고 놓지 않았다. 따뜻한 라이레얼의 품.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히로도 나 많이 보고 싶었지?" 보고 싶기야 했지요. 다만 이런 상황은 좀 피하고 싶네요. 라이코스가 부럽다. 라이코스가 정말 부럽다. 그 순간 그렇게 적절한 타이밍으로 도망을 치다니. 역시 라이코스는 영물이었어. "왜 대답이 없어, 히로?" 대답 대신 눈물만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어. 라이레얼을 다시 만난 이상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어. "설마 너무 감격해서 우는 거야?"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다시 나를 와락 껴안았다. "역시 히로는 나를 사랑하는 구나. 나 감격해서 눈물이 나오려 그래." 내 인생은 끝났어. 내 인생은 끝났어. 나는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얗게 비어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들리는 것은 라이레얼의 목소리와 느껴지는 것은 라이레얼의 따뜻한 체온. 딸랑딸랑-! 구슬프게 울려퍼지는 절망의 종소리. "히로 오빠를 놔 줘요! 당신이 뭔데 히로 오빠를 껴안아요!?" 갑자기 들려온 라나의 목소리. 난 그 목소리 덕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라이레얼은 나를 껴안고 있던 손을 풀고 라나를 보았다. "또 너구나 꼬마야. 분명 말 해두지만 난 히로와 뜨거운……." 안 돼! 의지였을까, 본능이었을까? 난 믿기지 않는 움직임으로 간신히 라이레얼의 입을 틀어 막을 수 있었다. 라이레얼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내 팔을 치웠다. "왜 그래, 히로?" 난 깜짝 놀랐다. 라이레얼의 질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홀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라이레얼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어 전부 라이레얼의 미모에 홀딱 반해 입을 헤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라이레얼의 미모에 시선이 빼앗겨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라이레얼이 나를 왜 껴안았는지에 대해 굉장한 의문과 함께 굉장한 분노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기 저 남자들의 표정이 전부 '저 놈 대신 나를 껴안아 주세요' 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라이레얼이 '난 히로와 뜨거운 하룻밤을 어쩌구……' 등등의 말을 지금 이 순간 내뱉는다면 잘 나가던 아이언스 공작은 그대로 정치 인생을 접어야만 한다. 아니, 정치 인생을 접는 정도에서 끝날 리가 없다. 이 곳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말하겠지. '아이언스 공작이 라이레얼이라는 하프 엘프는 이러저러 한,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에요. 둘이 까만 밤을 하얗게 불 살랐다고 하는데 캠프 파이어라도 했나 봐요.' 소문은 날개 돋힌 듯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심지어는 매스미디어에서까지 그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9시 뉴스 속보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이리스의 공작이자 참모총장이자 외교부 장관인 아이언스 히로와 라이레얼이라는 미모의 하프 엘프 여성이 불륜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져 세간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은 모월 모일 밤, 술을 많이 마셔 심하게 취한 상태에서 라이레얼이 묵고 있는 여관방으로 찾아가 그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금 제 옆에는 아이언스 공작이 있으니 본인에게 직접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라이레얼이라는 하프 엘프 여인과 불륜 관계라는 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전 몰라요. 술 취해서 기억이 안 나요.' '누가 먼저 덥쳤나요?' '전 모른다니까요.' '이미 모든 정황이 확실한 상황에서 자꾸 그렇게 발뺌하시면 저희 보도국이 곤란하지요. 시청자들을 위해 오직 진실만을 말씀해 주세요.' '그래! 했다! 했어! 이제 됐냐!?' '예. 아이언스 공작이 드디어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내일 이 시각에는 <충격 영상. 대체 그 날 밤 그 여관방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특집 방송 때문에 뉴스를 하루 쉬도록 하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들, 편안한 밤 되십시오.' 공중파를 타면 그걸로 끝이다. 내가 정치인 누구처럼 뒤에 무슨무슨당이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과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파멸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완전 매장! 더 이상 이 사회는 나를 용납하지 않는다. 다른 국가에 망명을 하고 싶어도 받아주지도 않는다. 난 사회와 완전히 격리되어 아무도 없는, 아무도 모르는 무인도로 가 혼자 평생을 쓸쓸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겠지. 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라이레얼의 손을 덥썩 붙잡으며 말했다. "제가 그 동안 라이레얼을 얼마나 많이 보고 싶어했는지 잘 아시죠? 사실 저 긴긴밤을 언제나 라이레얼 생각만 하며 보냈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너무 기뻐서 어쩌할지를 모르겠어요." 라이레얼은 감격한 얼굴로 나를 끌어 안았다. "나도야, 히로. 나도 언제나 히로 생각만 했어." 난 라이레얼의 품에 안겨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이 장소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만약 라이레얼이 이 곳에서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난 정말 파멸이다. 빨리 라이레얼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 라이레얼과 아름다운 러브신을 보이고 있는 나를 많은 사람들이 질투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남자들이었지만 그들 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세레나와 라나. 이 둘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말을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표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말을 못하고 있었다. "우아아앙!" 순간 라나는 울음을 터트리며 세레나에게 안겼다.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에게 설명해 봐야 당연 믿어주지 않겠지. 지니가 나에게 다가왔다. "대체 이 분은 누구십니까?" 니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이 쪽은 라이레얼이라고…… 그, 그냥 아는 사이에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아는 사이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너 지금 공작 말에 반박하는 거냐? 니가 감히 관료제의 위계 질서와 권위에 도전하는 거냐? 난 지니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끈적끈적하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라이레얼을 쳐다 보았다. "라이레얼." "왜 히로?" 라이레얼 역시 나를 끈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꿀이나 물엿, 끈끈이나 딱풀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끈적하지는 못하리라. 난 그 끈적함에 온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간만에 만났는데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전 라이레얼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나도 그래, 히로. 내가 그럴 줄 알고 아까 이 곳에 오면서 어두운 장소를 물색해 뒀어. 우리 밖으로 나가 최대한 으슥하고 어두운 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즐기자." 어째서 최대한 으슥하고 어두운 곳으로 가야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른 사람들과 떨어지는 것이 중요하였다. 결정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라이레얼은 내 팔에 팔장을 꼈다. 그리고 자연스럽고 우와한 걸음으로 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지니가 나를 이상하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고 세레나는 혈압이 올라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고 라나는 펑펑 울고 있었다. "오빠, 어디가?" 라이가 내 옷깃을 잡으며 물었다. 난 상황 파악을 못하고 행동하는 라이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워 통통한 볼때기를 꼬집어 주려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 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역시 사람은 위기에 상황에 닥치면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기 마련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이 무너지면 솟아날 구멍을 뚫는 것이다. 드릴로 뚫던 수저로 파내던 어떻게든 뚫는다. 핀치에 몰리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날 길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생존 본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난 라이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오빠는 말이야…… 잠깐…… 이 언니랑 얘기 좀 하고 올게." 라이 역시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묻고 싶은 눈치였다. 난 눈을 부라렸다. "뭐해, 히로?" 난 라이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대답이 없자 라이레얼은 나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난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라이를 쳐다보았다. 라이야! 이제 믿을 것은 너 밖에 없어. 부탁해.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아까 라이레얼이 말한 최대한 으슥하고 어두운 곳. 우리는 그 곳에서 밀담을 나누기로 하였다. "히로." 라이레얼의 강렬한 눈빛. 그래도 나를 이런 눈빛으로 쳐다봐 주는 것은 라이레얼 밖에 없다. 하지만 어째서 그게 라이레얼인 거냐? "우리 간만에 만난 기념으로 일단 찌-인-하게 키스나 한번 때리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이, 히로도 잘 알면서." 잘 알긴 뭘 잘 알아요? 아무튼 라이레얼의 모습을 보니 당장이라도 키스할 기세다. 라이레얼의 촉촉한 입술. 아! 예전의 아름다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구나. 난 라이레얼을 와락 껴안았다. "키스하기 전에 잠깐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얘기는 무슨 얘기? 빨리빨리 진도를 나가야지." 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밤은 길고 시간은 많아요."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까?" "내일도 날 이고 모레도 날 이에요.. 해는 뜨고 또 지고, 그렇게 세상은 움직여요. 너무 급하게 행동하지 마세요. 일단 대화를 나누며 무드를 조성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라이레얼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이렇게 최악의 상황을 약간이나마 모면한 나는 라이레얼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드레스는 뭐고, 여기에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지금 라이레얼이 입고 있는 옷은 장신구가 달려있지 않은 평범하면서도 화려한 물빛 드레스였다. 내 생각에 장신구는 일부러 달지 않은 것 같다. 만약 달았다면 물빛 드레스의 아름다움이 감소했으리. 예전의 라이레얼의 복장은 활동이 편한 여행복 정도였다. 그 여행복으로도 라이레얼은 굉장히 아름다웠지. 하지만 지금 이렇게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니…… 차마 눈이 부셔 바라보지를 못할 것 같다. 라이레얼이 예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라이레얼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보질 못 했다. 외모로만 본다면 정말 완벽하다고 밖에 말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라이레얼에게 이런 아름다운 옷을 입혀 놓으면, 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라이레얼은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나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난 그 설명을 다 들은 후,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그, 그러니까…… 세레나 집에…… 아, 아니, 레이트 백작가에……." "응. 지금 친구들과 함께 그 곳에 있어." 이럴수가! 어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재수 없는 일이! "그럼 여기에 들어 온 것도, 이런 타이밍에 등장한 것도 전부……." "아까 누가 집으로 와서 레이트 백작이 부르니 빨리 왕궁으로 들어와 보라고 하더라. 난 안 갈려 그랬는데 히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기로 마음 먹었지. 그래서 이 드레스를 입고 온 거야." 잠깐! 그렇다는 건 설마……. 난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서, 설마 뜨거운 밤 어쩌고 하는 얘기를 걔들에게 한 것은 아니겠죠?" "걔들이 누군데?" "세레나와 라나 등등이요." 라이레얼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이, 히로도 참. 날 어떻게 보고." 난 애써 기쁜 표정을 감추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숨기고 싶은 과거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레나와 라나에게 알려진다니. 이건 정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당연했지." "예?" "우리 둘이 찐한 밤을 보낸 얘기야 만난 당일 날 했지." 자연적으로 쩍 벌어지는 입. 어째서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거지? 대체 내가 무슨 지은 죄가 많아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너, 너무해요, 라이레얼." 눈물이 절로 흘러 나왔다. 라이레얼은 깜짝 놀라며 나를 끌어 안았다. "왜 그래, 히로?" 왜 그러긴. 이제 곧 끝날 내 인생이 불쌍해서 그러지. "어, 어떻게 그 얘기를 남에게……." "어라! 그거 남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당연 안 되지요.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겁니까? "전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라이레얼은 굉장히 감격한 표정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것도 굉장히 강렬하게. 난 라이레얼의 따뜻한 촉감을 느끼기 보다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히로. 난 히로가 그런 줄도 모르고." 젖어드는 라이레얼의 목소리.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잔머리의 대가인 나로서도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 졸려." 라이레얼은 나를 껴안은 채 말했다. 난 라이레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럼 주무세요." "안 돼. 난 오늘밤을 불태워야 해." 하지만 라이레얼은 오늘밤을 불태우지 못하였다. 나에게 기대어 새근새근 자기 시작한 것이다. 난 잠든 라이레얼을 풀밭에 살짝 눕힌 다음,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지금 나의 기분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죽고 싶었다. 진짜. "이런 씨!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대체 왜! 으아아!" 난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고1 수업 시간에 국사 선생에게 똥 마렵다고 말해 살짝 빠져 나와 화장실에서 담배 피다 걸려 일주일 내내 교무실에서 얻어 터져 한달 동안 기어 다녔을 때도 지금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저벅저벅- 누군가가 풀을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 난 그 누군가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라이야." 라이는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입으로 쪽쪽 빨며 이 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아마도 사탕이 떨어졌나 보다. 라이는 내 앞에 오더니 배시시 웃었다. "라이 잘 했지요? 칭찬해 줘요." "그래. 잘 했다. 난 힘 없이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이레얼이 저렇게 뻗어 자게 된 것은 전부 라이의 덕이었다. 난 아까 라이레얼에게 끌려 홀안을 빠져 나오며 라이에게 몰래 라이레얼을 잠들게 하라고 매시지Message 마법으로 말하였고, 라이는 내 말 대로 몰래 라이레얼을 잠 재운 것이다. 물론 슬립Sleep 마법으로. 내가 재울 수도 있었지만, 라이레얼은 엘프의 피가 섞여 눈치가 빠르고 마법에 대한 내성력이 강하다. 성공한다는 확신도 없는데다 들킬 위험이 있었기에 나보다 고위 마법사인 라이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 저 여자는 왜 재운거야?" 그렇게 물어본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보통 남자가 여자를 강제로 재우는 경우는 그렇고 그런 저렇고 저런 이유에서 이지만, 난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라이는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난 라이와 라이레얼을 번갈아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내 주위에는 이런 변종 엘프들만 모이는 걸까? 나는 일단 잠든 라이레얼을 안아 들기로 하였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라이레얼을 들기는 무리였다. 나는 라이를 '니가 도와야 하지 않겠니?' 라는 눈빛으로 보았고, 라이는 나를 '내가 왜요?' 라는 눈빛으로 보았다. 하는 수 없이 나 혼자 라이레얼을 안아 들려는데 그 순간 나와 굉장히 친한 사람이 등장하였다. "지금 뭐하고 계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제 사생활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니는 라이레얼과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제가 굳이 알려한 것은 아니지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분과 내연의 관계……."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지니가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다. 배짱으로 나가는 수 밖에.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지금 저를 모함하시는 겁니까?" 지니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지금 공작의 말을 못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감히 어떻게 공작의 말을 못 믿을 수가! 그대가 그러고도 백작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자꾸 토 달지 마세요!" "그래도……." "전 댁과 더 이상 할 얘기 없습니다!" 지니가 자꾸 꼬치꼬치 캐물으려는 기색을 보이자 난 소리를 버럭 질러 일을 마무리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런 얕은 수법이 넘어갈 지니가 아니었다. "그럼 루시아 공주님께 사실을 보고하여도 괜찮을까요?" 아이씨! 이 놈은 무슨 말만 나오면 루시아 이름을 꺼내고 있어. 진짜 치사하다. 당대 최고의 모사라는 놈이 루시아 이름 하나 가지고 이렇게 울궈 먹어도 되는 거야? 니가 그러고도 아이리스의 참모진이냐? "저, 전 억울합니다." "뭐가 억울하신지요?" "그, 그건……." 지니는 내 손을 덥썩 움켜잡았다. 밤의 어둠 사이에서도 지니의 핸섬한 얼굴은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물론 내 얼굴은 그냥 어둠에 묻혀 있었다. 이게 잘 생긴 사람과 안 생긴 사람의 차이인 것이다. 지니는 진지한 어조로 말하였다. "전 언제나 아이언스 공작님의 편입니다. 그건 아이언스 공작님도 잘 알고 계실겁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은 저에게 언제나 많은 가르침을 주셨기에 저는 그 가르침에 대한 보답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믿고 고민을 털어놓으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 아이언스 공작님을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아 공주님은요?" "물론 비밀도 지켜 드립니다. 설마 저를 못 믿으시지는 않으시겠죠?" 난 눈을 감고 머리를 굴렸다. 과연 지니를 믿어야 하는가? 지니를 믿고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끝까지 잡아 때고 이 것은 정치적 모함이다, 라고 부르 짖어야 하는가? 지니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지니가 나를 얼마나 도울 수 있을까? 혹시 이 일을 빌미로 지니가 나를 협박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자기 누나를 이용해서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수 많은 생각 끝에 나는 지니를 믿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정 저를 믿지 못 하시겠다면, 그냥 루시아 공주님께 사실을 보고……." "어허! 무슨 말씀을! 제가 사일런스 백작님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고 의지하겠습니까?" 난 감격한 얼굴로 지니의 손을 흔들었다. 지니는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도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박박 갈았다. 진짜 치사하다. 허구헌날 루시아 이름만 팔고 있어. 지니와 단기적인 결속 관계를 맺기로 하였으므로 난 지니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라이레얼을 좀 옮겨 주시겠어요." 지니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지는 않고 몸을 뒤척이며 '히로, 어쩌구 저쩌구' 라고 잠꼬대를 하는 라이레얼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나와 지니가 자리를 뜨려는데 라이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오빠." "왜?" "이코 못 봤어?" "변종 앵무새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아니? 라이레얼이 이 곳에 있는한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을테니 신경 꺼라." "그럼 이코 어디간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지금쯤 국통 속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지." 순간, 라이의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라이랑 같이 이코 찾자." "싫어." "라이가 오빠 도와줬으니까 오빠도 라이 도와 줘야지." "지금 내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너 돕게 생겼냐? 저리 안 비켜!" 난 끝까지 내 옷깃을 잡고 놓지 않는 라이를 매정하게 밀쳤다. 그러자 라이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이코야!" 지니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난 두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빨리 가지요." "이제 말씀해 보십시오." 나와 지니는 잠든 라이레얼을 레이트 백작가로 돌려보내고 지부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가 두 개 놓여있는 2층 숙소에서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밤은 너무나도 깊었다. 이제 얼마 후면 동이 틀 것만 같았다. 지니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창가 주위를 빠른 걸음으로 맴돌았다. 어두운 방안에는 촛불 하나만이 불을 밝히고 있어 상당히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내가 과연 지니에게 진실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마도 지니는 나의 사정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짐작하는 것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엄연히 틀리다. 지니가 짐작하는 것은 가설이지만. 내가 그 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 것은 진실이 된다. 만약 지니가 나쁜놈이라면 그것을 약점 삼아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 혹은 '진실이 밝혀지는 게 싫으면 우리 누나랑 결혼해!' 등등의 말도 안 되는 협박을 일 삼을 수도 있다. "저를 믿고 말씀해 주십시오." 웃기는 소리. 믿긴 뭘 믿어? 원래 인생이란 혼자 살아가는 것.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믿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 타인을 믿는다는 것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지니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빨리 안 말하면 노처녀한테 이른다'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아! 결국은 나의 어두운 과거를 밝히는 수 밖에 없단 말인가?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그건 반드시 지켜져야 할 비밀이야. 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잠이나 자지요." 지니도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정 말씀하시기 싫으시다면 저도 어쩔 수 없군요." 보나마나 또 루시아 이름 꺼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젠 안 통해. 루시아에게 얘기하면 난 무조건 아니라고 발뺌할 거다, 그리고 이것은 공작을 공격하는 정치적 공작이라고 지니를 공격하는 거다. "라이레얼양께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잠깐!" 역시 당대 최고의 모사 사일런스 지니. 라이레얼에게 직접 물어보겠다니. 라이레얼이 비밀을 지킬 확률은 0%. 말할 확률은 100%. 그래. 라이레얼의 외설적인 말을 지니에게 들려주느니 차라리 내 입으로 순화시켜서 말해주자. 뜨거운 밤은 따뜻한 밤으로 찐한 키스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순화시키리. "그냥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어쩔 수 없이 난 지니에게 나의 어두운 과거를 줄줄이 말하였다. 라나를 만나고, 세레나를 만나고, 라이레얼을 만나고, 그 후에 어찌어찌하여 루시아를 만나 아이리스까지 오게 되었다고. 라이레얼과 하룻밤을 같이 보낸 얘기도 물론 하였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한창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유망한 청년이다. 한 문장을 얘기할 때도 강세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문장의 의미와 전달 강도가 틀려지게 된다. 이것은 문단도 마찬가지다. 나는 일부러 다른 문장을 중요한 듯 말하고 라이레얼과 하룻밤을 같이 보낸 일은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였다. 즉, 라이레얼을 만난 그 과정을 아주 상세하고 스펙타클하게 얘기를 한 뒤, '뭐 그러다가 하룻밤 같이 자고 나서 출발을 했어요' 라고 살짝 얼버무린 뒤, 그 뒤에 얘기를 다시 스펙타클하게 진행시킨다. 이렇게 되면 청자가 듣기에는 같이 남녀가 같이 하룻밤을 보낸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말씀의 요점은 라이레얼양과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는 것이군요." 역시 나의 얕은 재주로 사일런스 지니를 속여 넘기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어찌되었든 이제 말할 것도 다 말했으니 지니의 도움을 청하는 수 밖에 없겠지? "그럼 이제 제가 어찌하면 좋을까요?" 난 진심으로 도움을 구걸하는 모습으로 지니를 쳐다보았다. 지니는 한손으로 머리를 짚고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예? 뭐가요?" "매일 같이 아이언스 공작님을 생각하시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시는 저희 누님을 놔두시고 어찌 다른 여인과 하룻밤을……." 지니의 표정은 정말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나에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실망도 보통 실망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댁이 그런 소리할 자격이나 있어요? 전 하룻밤이지만 댁은 이제까지 몇 명의 여자와 몇날밤을 지샜잖아요." "그것도 그렇군요." 이봐. 그렇게 쉽게 인정하면 어떡해? 지니는 자리에서 일어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럼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합니까? 어떻게든 라이레얼과 하룻밤을 같이 보낸 일이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특히 루시아 공주님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지요." 지니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아이언스 공작님의 말씀의 요지는 과거의 불미스러운 일을 완벽하게 은폐시키고 싶다는 겁니까?" "예. 그렇긴 한데 그렇게 표현하니 제가 무슨 정치인 아들 병역 비리 은폐에 관련이라도 있는 듯 하군요."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의 발언은 언론 자유를 독단적으로 침해하여 진실을 왜곡시키겠다는 말씀이신데……." "예. 뭐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워낙 정치부 기자들이 정치인들 콩고물이나 받아 처먹으면서 왜곡된 보도를 하고, 정치인의 아들 중 80% 이상이 군대를 가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자기 아들 둘은 군대에서 빼 버린 '이' '해충' 같은 정치인들이 북한을 적대국으로 인식하여 전쟁을 벌이자는 말에 대해서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군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제가 뭐 꼭 정치인 아들이 군대를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수심이 짙게 드리운 지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원했다. 제발 이 최악의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내라. 안 그러면 난 파멸이다. 제발 부탁이야, 사일런스 지니. 나 좀 구해 줘. 나중에 니 아들 병역 비리 생기면 내가 잘 은폐 해 줄께. 정치인 좋다는 게 뭐냐?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지니는 고개를 들었다. 당대 최고의 모사 사일런스 백작님의 입에서 어떤 좋은 말씀이 나오실까? 난 기대하였다. "남자의 과거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 것이 당대 최고의 모사라는 사일런스 백작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는 표현은 이런 때 써야 어울리겠지? 정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지니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댁의 입에서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난 겨우 한 명이지만 댁은 수백명이잖아! 그런데 뭐? 남자의 과거는 용서받을 수 없어? 내가 용서 못 받으면 댁은 어쩔꺼야!" "듣고 보니 그렇군요." 이봐. 그렇게 쉽게 인정하면 발끈한 내가 무안하잖아. 지니는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현재가 중요하지 과거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은데……." "물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 하기는 뭐 하지만 전 완전히 당한 겁니다. 그 일에는 제 개인적인 감정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전 억울하다니까요!" "진정하십시오." "너 같으면 진정하겠냐!?" 너무나도 무책임한 지니의 모습에 난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자기 일 아니라고 이래도 되는 거야? 그래도 많은 시간을 같이 행동한 동지인데. "전 언제나 아이언스 공작님의 편입니다. 제발 저를 믿어 주십시오." "댁을 믿으면 뭐 좋은 방법이라도 알려 주실 건가요?" "일단 앉으십시오.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냉정하게 생각하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흥분은 금물입니다." 이건 맞는 얘기다. 난 지니의 충고에 따라 호흡을 가다듬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듯 하자 지니가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는 법입니다. 솔직히 막말로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설마 루시아 공주님께도 과거가 있나요?"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과거란 '지나간 때. 지난 날. 지난 일' 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날에 있었던 남녀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나는 너무도 훌륭하고 아량이 넓은 남자이기에 절대 여자의 과거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인생 살다보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남자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것에 신경을 써서 무엇 하겠나? 물론 루시아가 예전에 다른 남자와 사귀었다 하더라도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떤 놈이 감히 루시아와 사궜어!?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장 그 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말리! 어떤 놈이 감히 나의 루시아와 연애질을…… 허억! 분노 때문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아. 그 놈을 죽여 버리겠어!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그럼 그렇지. 루시아가 나 말고 다른 남자를 사귀었을 리가 있나? 하하하! "참고로 저희 누님도 없습니다." 그 얘긴 왜 하는 데? 그리고 니네 누나가 연애 한번 못 해본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 성격에 어디 가서 남자를 사궈? "아무튼 과거 없는 사람이 거의 없는 만큼, 아이언스 공작님의 과거도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을 듯 합니다. 솔직히 살다보면 실수 한번 정도는 저지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다.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에 불과하였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실수 한번 한 걸 가지고 그러나. "그런데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남자의 과거에 대해 신경을 쓰시나요?"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지니는 한 호흡 쉰 다음, 말을 이었다. "굉장히 신경을 쓰십니다." 아니 그럴 수가! "만약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다른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 것을 아시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을 저지르실지." 지니는 끔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을 저지르다니? 설마…… '전 아이언스 공작님을 믿었었는데 이렇게 저를 배신하시다니.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살아갈 마음이 없사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저를 잊어 주시고 하프엘프 여인과 함께 행복하게 사세요. 그럼 소녀는 이만.' 안 돼! 어찌 자살을! "참고로 저희 누님은 남자의 과거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 나이에 남자의 과거까지 신경 쓰면 어떻게 시집을 가냐? 아차!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난 재빨리 짐을 챙겼다. 지니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뭐하긴요? 당장 이 곳을 뜰 겁니다. 루시아 공주님께서 묻거든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갔다고 전해 주세요. 괜히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마시고요." 짐을 다 챙긴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발을 딛었다. 그래. 루시아의 행복을 위해 떠나자. 믿었던 남자의 배신으로 루시아가 죽는 모습을 보느니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자. 내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하는데 어디선가 손이 튀어 나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사건을 해결하려 하셔야지 이렇게 회피하려고만 하시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해결할 수 있어야 해결을 하지요. 이것 좀 놔요! 전 가야 되요!" "아이언스 공작님이 없으시면 저는 어쩝니까?" "이제까지 댁 혼자서도 잘 해왔잖아요." "그건 아이언스 공작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이 이대로 저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떠나신다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손 좀 놔요!" 모두가 알다시피 나는 지니에 비해서 지능 지수가 많이 부족하다. 덤으로 힘도 부족하다. 지니는 강제로 나를 끌어내 침대에 다시 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심각하였다. 필요하다면 마법까지 써서 이 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나 때문에 루시아를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대로 떠나신다면 루시아 공주님께서 무슨 일을 저지르실지." 넌 왜 맨날 루시아 얘기냐? 이젠 진짜 질렸다. 하지만 자꾸 루시아 얘기가 나오는데 이대로 떠날 수는 없다. 일단 떠나는 것을 보류해 둔 채 지니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하였다. "비록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하프엘프 라이레얼양과 불륜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허! 불륜이라니? 우리 둘 다 혼인 전이고 미성년자도 아닌데 불륜이라니? 대체 어떤 근거로 그런 무시무시한 단어를 사용하시는 거죠?" "그럼 불륜 대신 혼전 성교라고 표현하도록 하겠습니다." "혼전 성교라니? 그냥 썸씽Something 정도로 표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하프엘프 라이레얼양과 썸씽이 있었다 하더라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당장 루시아 공주님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으니 해결해 보려 노력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 이 일은 라이레얼양과 대화를 통하여 천천히 풀어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듣고 보니 그렇다. 난 라이레얼이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보려 하지도 않고 피할 생각만 했다. 하지만 지니의 말을 듣고 보니 아직 나에게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을 수습 할 시간이. "뭐 정 안 되면 라이레얼양과 살림을 차리고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뭐라고요?" 난 내가 잘 못 들었나 싶어 귓구멍을 후볐다. 지니는 웃음을 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 정도의 미모를 갖춘 여자분은 제가 알기로 없습니다. 라이레얼양과 결혼을 하신다면 그것 나름대로 행운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이언스 공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건 그렇다. 외모적으로만 봤을 때 라이레얼을 이길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 아마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격에 문제가 너무 많아. 아아! 라이레얼 성격이 조금만 좋았더라면. 아니, 루시아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당당히 라이레얼을 택했을 텐데. 밤이 늦은 관계로 졸음이 몰려왔다. 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옆에 있는 침대에 누울꺼라 생각했던 지니는 그냥 서 있었다. "안 자요?"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먼저 주무십시오. 전 처리해야 할 일이 조금 있어서요." "그럼 그러도록 하세요." 지니는 촛불을 끄고 방을 나갔다. 대체 저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잠은 언제 자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지니가 자는 모습을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언제나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으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정말 재수 없는 날이다. 라나와 세레나와 라이레얼을 만난 것까지는 좋았다 치자. 하지만 세 명을 동시에 만난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셋이 서로 알고 있다니. 정말 최악이다. 난 일을 어떻게 수습 할 지에 대해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역시나 지니는 방안에 없었다. 창밖에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늦잠을 잔 것이다. 하지만 어제 워낙 늦게 잠이 들었으니 그리 많은 시간을 잔 것은 아니다. 난 얼굴을 대충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도 지니는 없었다. 일단 배가 고팠기에 밖에 나가서 뭐라도 사먹기로 했다. 난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짐을 뒤져 금화를 몇 개 꺼냈다. 그리고 밖으로 나섰다. 날씨는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따뜻하다 못해 더울 정도다. 난 콧노래를 부르며 가볍게 걸었다. 지금 나의 상황이 좋지 않지만 기분까지 좋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런 때 일수록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야 한다. 난 음식점을 찾기 위해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大路)로 갔다. 큰 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니까 음식점도 많겠지. "저기요, 이거 가져가세요." 걸음을 재촉하던 중 난 아주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뾰족한 하얀 모자를 눌러 쓰고, 하얀 옷을 입은 어린 소녀 하나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것이다. 보통 때 같았으면 받지 않았을 사람들도 소녀가 안 되 보였는지 다들 한 장씩 받아 챙겼다. 보통 때 같았으면 받자마자 땅에 버렸을 사람들도 버리지 않고 읽어보았다. 문득 나는 전단지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정보화 시대와는 아직 거리가 먼 이 시대에 전단지라는 발전된 광고 수단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소녀가 내 앞을 가로막더니 전단지를 내밀었다. "이거 꼭 한번 읽어 봐 주세요." 난 전단지를 받아 들고 가던 길을 가며 읽어보았다. 나의 예상대로라면 이 전단지에는 <냉장고 특가 세일.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만. 덤으로 에어콘도 세일.> 등등의 내용이 쓰여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전단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이코를 차자주세요. 이코를 보신 분은 라이에게 열락 주세요. 이코를 차자주신 분께는 라이가 마싣는 거 사드릴께요.> 맞춤법이 굉장히 많이 틀렸군. 그런데 이코가 뭐지? 라이는 누구야? "이거 가져가세요." 소녀는 계속 전단지를 나눠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난 소녀를 붙잡았다. "야, 넌 대체 누구길래 라이코스가 국통에서 영물이라고 소리치는 짓을 하고 있는 거냐?" 귀엽고 통통하게 생긴 어린 여자아이였다. 굉장히 낯이 익은. 난 소녀가 쓰고 있는 -동화책에 나오는 마녀들이나 쓸법한- 흰색 고깔 모자를 벗겨 보았다. 그러자 뾰족하고 길죽한 귀 두 개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결이 부드러워 보이는 회색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왔다. "라이야." "오빠." 수백장은 될법한 전단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는 소녀는 라이였다. 라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우아앙!" 그리고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자 난 당황한 나머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얘는 내 딸이에요." 역시나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다. 난 재빨리 라이를 토닥여 주었다. "너 갑자기 왜 울고 그래?" "우아아아앙!" 라이는 더욱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렸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물어본다고 해서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대답해 줄리는 없다. 난 지금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저 자식이 저 어린 여자아이에게 이상한 짓을 하려 해서 저 여자아이가 우는 걸꺼야' 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세상에 저 어린 아이를 성추행하다니." "정말 인간 말종이군." "아까 엉덩이를 쓰다듬는 걸 제가 봤어요." 대체 왜 우는 아이를 달래주는 나의 순수함을 그렇게 변태적으로 왜곡하는 거지? 내가 치한처럼 생겨서 그러나? 만약 지니가 달래 줬어봐. 당장 박수치고 난리 쳤겠지. 내가 욕까지 먹으면서 굳이 라이를 달래줄 필요는 없다. 난 우는 라이를 놔두고 슬쩍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야! 이 것 좀 놔!" 라이가 내 바지를 잡고 놓지 않는다. "돌리던 전단지나 마저 돌려. 남의 바지 붙잡지 말고." "으아앙!" 죽으면 죽었지 못 놓겠다는 태도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쳐다보고 있는데 어린 아이를 쥐어 팰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엉엉엉!" 누가 너에게 잘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마법이라 대답하지 말고 징징 짜는 거라 대답해라. 너만큼 마법 쓸 수 있는 사람은 있지만 너만큼 징징 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난 라이를 안아 들었다. 일단 어디로든 대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에에엥!" "그만 좀 울어." 아침밥도 안 먹었는데 이게 무슨 생고생이람. 난 라이를 데리고 가까운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을만한 음식을 시켰다. 호화스러운 음식점이 아닌 간소하고 서민적인 음식점이었기에 음식 자체가 간단했고 간단하다 보니 굉장히 빨리 나왔다. 난 빵에다 버터를 발라 한 입 베어 물었다. 별로 맛있지는 않지만 그런데로 먹을만 했다. "넌 안 먹냐?" 라이는 퉁퉁 불은 눈을 한 채, 내 반대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침도 아니고 점심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대였기에 음식점 안에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의 귀여운 외모는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을 전부 끌어들이고 있었다. 특히 계산대에 앉아 있는 -주방장 겸 주인 아주머니의 딸로 보이는- 주근깨 가득한 소녀가 라이를 '귀여워, 죽겠어' 다는 강렬한 눈빛으로 쳐다 보고있었다. 내가 화장실을 간다면 그 사이 저 소녀가 라이를 납치해 갈지도 모른다. 내가 계속해서 음식을 권하자 라이는 자신의 앞에 놓은 빵을 먹고 우유를 홀짝홀짝 마셨다. 난 그 사이 라이가 들고 있던 수백장의 전단지를 살펴보았다. <내 친구 이코를 차자주세요. 이코 안 차자주면 라이 삐짐.> <이코가 업써져써요. 이코가 보고시퍼요. 이코를 보시면 라이에게 말해주세요.> <라이를 도와주세요. 라이를 도와 이코를 차자주세요.> 삐뚤빼뚤한 글씨. 뭔 말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 엉망인 맞춤법. 게다가 전단지의 내용이 전부 틀리다. 그렇다면 복사한 것이 아니라는 건데. 자세히 보니 직접 쓴 거다. "너 이거 언제 다 썼냐?" 라이는 빵을 입안에 가득 집어넣고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어제 밤 새서요." 정말 할 일이 없나 보다. "뭐 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걸 작성했니?" "이코를 찾으려고요." 내가 이 상황에서 웃어야 하는 걸까? 말아야 하는 걸까? 정말 어이가 없다. 난 라이의 빈 잔에 우유를 따라주며 말했다. "넌 개새끼, 아니, 강아지 찾는 전단지도 못 봤냐? 니가 라이코스를 찾고 싶으면 전단지의 라이코스의 생김새와 특징, 잊어버린 시간과 장소, 그리고 니 연락처 정도는 써놔야지. 달랑 <이코를 차자주세요> 라고만 써 놓으면 이코가 누군지 알고 사람들이 찾아?" 내 말을 들은 라이는 치즈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걸 꼭 적어야 되요?" 어이 없다는 듯 되 묻는 저 표정. '내가 그걸 왜 적어야 하는데?' 라는 도전적인 표정이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라이코스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적어 놔야 사람들이 라이코스를 찾을 것이고, 니 연락처를 적어 놔야 찾아서 너한테 연락을 할 것 아니냐? 너 핸드폰 같은 거 없냐?" "핸드폰이 뭐에요?" "요즘 단말기 값이 비싸서 칼리가 안 사주나 보다. 그럼 집 전화 번호라도 불러라." "집 전화는 또 뭐에요?" "니네 집 정말 가난하구나. 그럼 주소라도 적어 놔." 난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전단지 뭉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종이가 아깝다. 그 종이로 딱지 접어 쳤으면 지금쯤 골목 대장 되어 있겠다. 하지만 라이가 그러고 싶어 그랬겠냐? 다만 라이코스를 찾고 싶다는 순수한 동심으로 종이를 낭비해 가며 전단지를 만든 거겠지. 그러고 보면 난 참 나쁜 놈이야. 라이의 순수한 동심을 언제나 짖밟기만 하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초간만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1초, 2초, 3초. 반성 끝. 그래. 이제 반성도 다 했으니 다시 라이의 동심을 짖밟아 볼까나. 동심을 짖밟을 땐 짖밟더라도 일단 배부터 채워야 겠다. 배가 고프니 아무 것도 못하겠잖아. 난 빵을 집기 위해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어라? 빵이 다 떨어졌네. 그 많던 빵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 라이야. 볼 찢어지겠다. 그렇게 많은 빵을 한번에 입에 우겨 넣으면 안 되지. 라이는 입안을 빵빵하게 채운 빵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뒤통수를 때려 전부 뱉어내라고 윽박을 지르고 싶지만 보는 사람이 많아 참는다. 그런데 치즈와 버터는 언제 다 먹었니? 하는 수 없어진 나는 다시 빵을 한 가득 시켰다. 내가 빵을 하나 집으려는 찰나 라이가 양손에 하나씩 쥐고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나의 인내심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전 그렇게 좋은 놈이 아니란 말입니다. 쾅-! 난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만 좀 처먹어! 니가 돈 낼꺼야?"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라이. 이내 손에 든 빵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울음을 터트린다. "으아아앙!" 덕분에 라이의 입에서 나온 파편들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난 바구니를 들어 파편들을 막아냈다. 라이가 계속 울어대자 식당 안의 사람들은 전부 우리를 쳐다보았고, 절구통과 드럼통을 합쳐 놓은 듯한 주인 아주머니가 주방에 뛰쳐나왔다. 주인 아주머니는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에 인상까지 쓰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목소리나 표정 하나 하나에서 아줌마 특유의 중압감이 느껴진다. "저 그게…… 얘가 빵을 다 먹어서……." 내 딴에는 당당하게 대답하려 했것만 아주머니가 워낙 박력 있게 생긴 관계로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다시금 얼굴을 붉히며 인상을 썼다. "겨우 빵 하나 때문에 어린 아이를 울려?" "아니, 저 그게…… 빵 하나가 아닌데……." "사내자식이 쪼잔하긴 왜 그렇게 쪼잔 해? 메이야! 빵 한 가득 가져와라!" 아주머니의 말을 들은 카운터 소녀는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가 빵을 정말 한 가득 가져왔다. 먹다 죽을만큼 말이다. "이 정도면 불만 없지? 치사하게 어린아이 먹는 것 가지고 뭐라 그러다니. 정말 쪼잔해서 못 봐주겠네." 아주머니는 몇 마디 궁시렁거리더니 솥뚜껑 같은 손으로 라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한 순간에 쪼잔한 놈으로 낙인 찍혀 버린 나는 라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많이 먹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걱우걱 먹고 있는 라이. 아! 정말 패주고 싶다. 먹을 것 다 먹은 우리는 식당을 나와 대로를 거닐며 산책을 하였다. 라이는 배가 부른지 뒤뚱뒤뚱 걸었다. 하지만 엉터리 전단지만은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흰 고깔 모자에 하얀 원피스. 라이의 모습은 너무도 귀여워 당장이라도 납치범들이 달려들 듯 하였다. "넌 이제 뭐할꺼니?" "이코를 찾을 거에요." 나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는 라이. "어떻게 이코를 찾을 건데?" "열심히요." 역시 바로 대답하는 라이. '너 지금 나랑 장난하니?' 라고 한번 물어 본 후에 한 대 쥐어박고 싶다. 하지만 어린 아이와 쓸데없는 시비를 벌이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 "그럼 너는 열심히 라이코스를 찾아라. 나는 갈 데가 있어 먼저 가마. 이따 보자." 난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라이가 내 옷을 잡고 놓지 않는다. "야! 그 손 놔. 옷 늘어나." 라이는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너무도 깨끗하고 맑아 잃어버린 나의 동심을 다시 되찾아주는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잃어버린 동심이 있어야 말이지. 난 어렸을 때부터 이 모양이었어. "라이랑 이코 같이 찾아요." 너 하나만으로도 짜증나 죽겠는데 내가 미쳤다고 라이코스를 찾아서 너랑 짝짝꿍하게 만드냐? 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이 오빠는 지금 굉장히 바쁘단다. 라이레얼을 만나러 가야 되거든. 그러니까 우리 이쯤에서 헤어……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 혼자 레이트 백작가로 찾아가기는 뭐한데 라이랑 같이 가? "너 레이트 백작가에 가지 않을래?" "제가 거기를 왜요?" 자꾸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시키면 무조건 해줬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네. "니가 같이 가주면 나도 라이코스 찾는데 협조해 줄게." 난 달콤한 말들로 라이를 꼬시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라이코스를 찾는데 협력을 해 줄 생각이 없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비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투자하냐? 뭐 약속이란 어기라고 있는 거니까. "같이 갈께요." 역시 어린 아이여서 꼬임에 쉽게 넘어 온다. 이렇게 해서 나와 라이는 레이트 백작가에 같이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레이트 백작가가 대체 어디쯤 붙어 있는 거지? "잠시 기다려 주세요." 하녀는 그렇게 말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난 라이와 응접실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세 명의 여자를 기다렸다. 라이레얼, 라나, 세레나. 고레벨 순서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최고 레벨은 당연 라이레얼이다.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미인계를 잘 사용할 줄 안다. 게다가 뻔뻔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두 번째는 라나. 어린아이여서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다. 어떤식으로 얘기를 해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마지막은 세레나. 뭐 세레나야 지성이 있는 귀부인이니 내가 조금만 얘기해도 잘 알아들을 것이다. 게다가 세레나는 나를 별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친구로서의 호감 정도. 우리는 예전에 끝난 사이니. 이 장소에서 반드시 이 세 명을 정리하고 나의 어두운 과거를 영원히 땅 속에 묻어 버리리.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 앉아있는 라이는 지루한지 계속해서 몸을 뒤척거렸다. 난 줄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세 여자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콜록콜록-!" 라이는 담배 연기 때문에 기침을 해댔다. 담배는 피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지만 옆에서 연기를 맡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다. 특히 어린아이에게는 굉장히 좋지 않다. 지금 많은 양의 담배 연기가 라이의 코로 들어가고 있다. 만약 후에 라이가 발육부진이 된다면 거기에는 내 책임도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를 위해 담배를 꺼야 하나? 천만의 말씀. 난 법을 잘 지키는 훌륭한 모범 시민이다. 당연 금연법도 잘 지킨다. 만약 이 장소에 금연 딱지가 붙어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담배를 껐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 봐도 금연 딱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이 곳은 흡연구역인 것이다. 난 보란 듯 담배를 두, 세 개씩 입에 물고 라이의 얼굴을 향해 연기를 내뱉었다. "콜록 콜록-!" 라이의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변한다. 간접 흡연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다. 라이의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고 불쌍하게 보였기에 난 하는 수 없이 담배를 껐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끝나자 세 명의 여자가 동시에 등장했다. 약 40분 정도나 기다렸다. 세레나는 치마밑단이 바닥에 질질 끌릴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초록색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보이도록 위로 틀어 올렸고, 얼굴에는 옅은 화장이 되어 있었다. 라나는 적당히 수수한 모습. 라이레얼은 열심히 눈을 비비며 눈곱을 떼고 있다. 입가에 침 자국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실컷 자다 나왔나 보다. "무슨 일이에요?" "뻔하지. 나 보고 싶어서 온 걸 거야. 그렇지, 히로?" 라이레얼의 어이없는 발언에 난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일단 전원 착석. 난 세 여자를 보며 마음을 가라 앉혔다. 남들이 뭐라 하여도 난 아이리스의 외교부 장관이다. 직책만으로 보면 협상의 귀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각 국의 정상들과 외교 협상을 벌이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려면 그에 상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난 내 자신에게 협상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이 있기에 외교부 장관의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 잠재된 능력을 꺼내 보여야만 한다. 여자 세 명도 설득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다른 나라와의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여자 세 명 설득하는 것이 어려울까, 아니면, 각 국의 정상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울까? 전자(前者)가 훨씬 어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동안 잘 지냈니?" "어제 봤는데 무슨 소리에요?" "난 잘 잤어, 히로." "저 잘 지내고 있어요." 일단 부드러운 대화로 긴장을 푼다. 난 쓸데없는 얘기들을 적당히 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대화는 한 순간 끊겼다. "왜 그래요?" 세레나가 묻자 난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인 후 폭탄 선언을 하였다. "나 사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그러나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대체 왜 놀라지 않는 거지? 난 세 여자의 표정을 살펴 본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 여자 모두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난 크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 여자가 누구냐면……." 아! 자기 이름이 불릴거라 기대하는 저 여인들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잘나서 여자들에게 고통만을 안겨 주는 걸까? 내가 조금만 못 났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지니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리스 루시아라고, 아이리스의 공주야." 콰과광-! 효과음 죽이는 군. 5.1 채널 사운드 카드에서 베토벤의 운명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 "그, 그런……."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라나였다. 라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으아앙!" 울면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가슴 아프지만 이걸로 한 명은 패스. 세레나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입술 근처가 파르르 떨리는 것으로 봐 마음의 동요를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전 이만 일어나 보겠어요." 세레나는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을 나갔다. 이걸로 두 명 패스. 이제 남은 것은 라이레얼 하나다. 라이레얼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난 라이레얼이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지만 라이레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라이레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흑흑, 너무해, 히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몸 주고 마음까지 줬는데 이제 와서 나를 버리는 거야? 흑흑!" 라이레얼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난 라이레얼이 화를 내며 나를 죽도록 팰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슬프게 울다니. 역시 내가 나쁜놈이었어. 라이레얼을 울리다니.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되.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흑흑흑." 라이레얼은 고개를 저으며 슬프게 울고 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녀가 내 앞에서 울고 있을 때 나는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난 손을 내밀었다. "저기요, 울지 마세요." "흑흑, 다 필요 없어! 손 치워!"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 죽일 놈이야! "흑흑, 이젠 모든 것이 끝났어! 그래. 그 여자가 그렇게 좋다면 그 여자랑 살아! 난 이대로 죽어 버릴테니!" 뭐? 죽어? "안 돼요, 라이레얼! 라이레얼 같은 미녀가 죽는다는 것은 국가적 손실을 넘어 세계적 손실이며 전 세계 여성들의 미모 수치를 한 단계 낮추는 결과를 초래한다고요!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라이레얼의 미모에 환장하는 빠돌이 같은 남성 팬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을 위해서라도 라이레얼은 죽으면 안 돼요!" 라이레얼은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흐느낌이 멈췄다. 라이레얼은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라이레얼의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눈물 자국 하나 없고, 표정도 싸늘하기 그지없다. 라이레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라이레얼의 목소리에는 장난기마저 섞여 있었다. "내가 미쳤어? 누구 좋으라고 죽어? 안 그래, 히로?" 라이레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라이레얼은 코가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후훗, 잘 들어둬, 히로. 난 절대 히로를 포기할 수 없어. 뭐, 히로가 정 그 여자가 좋다면 첩으로 들여 앉혀. 하지만 본부인은 나야. 확실히 명심해 두길 바래. 알았지, 히로? 아이, 귀여워." 라이레얼은 내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춘 후,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유유히 사라졌다. 내 정신력은 이 정도 거대한 충격을 이겨낼만큼 강하지 않았기에 난 한동안 멍하니 있어야 했다. "왜 그래, 오빠?" 라이가 내 몸을 잡고 흔들었다. 난 머리카락을 붙잡고 절규하였다. 제길! 역시 라이레얼은 강적이었어! 그럼 그렇지. 라이레얼이 나를 쉽게 놔줄리 없었어. 이제 내 인생은 끝났어! 파멸이야! 난 평생 라이레얼의 종으로 살아야 되! 라이레얼을 위해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돈을 벌어와야 해. 루시아와도 이제는 끝이야! 잘 있어요, 내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저는 떠나렵니다. 저는 영원히 라이레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오빠, 오빠!" 난 옆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라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이를 와락 껴안았다. "라이야! 이제 오빠는 어쩌니?"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아! 죽고 싶어라! 난 라이를 껴안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 "라이 배고파." 슬픈 와중에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아까 그렇게 처먹고도 배가 고파? 너 같은 애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고 제 3세계 아이들이 굶어 죽는 거야.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는 하루에도 수천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니가 지금 배고프다는 얘기가 나와?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라이는 엘픈데……." "누가 엘프인 거 몰라서 그래? 엘프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니가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처먹어 대는 건 자연 파괴야! 니가 탑의 주인이면 다야? 탑의 주인이면 그렇게 많이 처먹어도 되는 거야?" "으아앙!" "울지마! 지금 울고 싶은 건 나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어린애를 윽박지르며 풀고 있다니. 이 얼마나 추한 모습인가. 나도 정말 타락했구나. 난 이제 인간도 아니야. 난 울고 있는 라이를 안아 들고 질질 끌리는 걸음으로 레이트 백작가를 나섰다. 오늘따라 날씨가 화창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날씨마저 나를 엿 먹일 속셈인가? "야!" 정원을 걸어 나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맞은편에 덩치큰 사람 5명이 보였다. 척 보아하니 조직 폭력배가 분명하다. 내가 만만하게 보이니 내 돈을 뜯어내려는 속셈이다. 감히 아이언스 공작을 우습게 봤다 이거지! 좋아! 니들 오늘 잘 걸렸다. "하하! 이게 얼마만이야?" 한 놈이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괜히 친한척하며 다가와 돈을 뜯는 것은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다. '야! 오랜만이다. 너 나 잘 알지?' '잘 모르는데요.' '모른긴 왜 몰라? 우리 옛날에 자주 만났었잖아. 그건 그렇고 말이야, 내가 지금 돈이 좀 필요해서 그러는데 100만원만 꿔 줘라.' '저 돈 없어요.' '우리 사이에 이러면 안 되지. 간만에 만난 친구가 돈 좀 꿔달라는데 니가 이럴 수 있어? 내가 나중에 값는 다니까.' '정말 돈 없어요.'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한 대다. 좋은 말로 할 때 주머니 털어.' 이 자식 생긴걸 보니 완전 양아치다. 이 놈은 번들거리는 낯짝으로 웃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간만에 만나니 진짜 반갑다." 반갑긴 뭐가 반가워? 너 오늘 죽었어! "하하. 그래." 난 한 손으로는 라이의 엉덩이를 받쳐들고 다른 손으로 녀석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녀석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빠악-! 두개골이 박살나는 듯한 소리가 나며 녀석이 쓰러졌다. 난 두개골이 진동하여 균형을 잡기 힘은 와중에도 녀석을 지근지근 밟았다. "죽어, 이 자식아! 죽어! 세상에 삥 뜯을 사람이 없어 내 돈을 뜯으려 그래? 너 오늘 잘 걸렸다!" "무슨 짓이야!" 뒤쪽에 서 있던 네 명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이런 놈들 수법이야 뻔하다. 네 명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동서남북 네 방위를 차단한 후 다구리를 놓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치한 수법이 아이언스 공작에게 통할리 없다. 겨우 네 명이면 나를 공격하려 들다니. 가소롭기 그지 없군. 난 양 손으로 라이의 허리를 잡고 앞으로 쭉 내밀었다. "가볍게 보내줘라, 라이야."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치지직-! 라이의 손에서 뻗어나간 번개는 네 명의 몸을 차례로 쓸어 버렸다. 별로 강력하게 쓰지 않은데다 한 놈한테 쓸 것을 네 놈에게 나눠 썼으니 타격이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네 명의 양아치는 그대로 풀밭에 쓰러졌다. 전기 충격기에 당한 것처럼 몸이 찌릿찌릿 하겠지. 이런 것을 보고 손 안 대고 코 푼다고 하는 건가? 난 손을 탁탁 털며 유유히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아아! 겁 모르는 바보들을 상대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이젠 마음을 가다듬고 라이레얼을 설득할 방법이나 생각해 보자. "너, 너 이 자식!" 쓰러져 있던 놈 중 한 명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의 옷에 손을 대다니!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게로구나! 난 가볍게 녀석의 면상을 걷어 차 주었다. "으헉!" 녀석은 나가 떨어졌다.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려는데 맨 처음 나에게 달려 들었던 놈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소리쳤다. "야! 히로! 니가 우리한테 이럴 수 있어? 공작 됐다고 이래도 되는 거야?" 녀석의 말은 나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녀석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난 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넌……!" 그래. 맞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야. 녀석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임마! 나야 나!" "……누구냐?" '나' 가 누군지 소개 정도는 해야지 내가 알지. 그냥 '나' 라고 하면 니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아냐? 녀석은 얼굴을 시퍼렇게 달구며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이젠 나도 몰라보냐? 라이레얼과 한 팀이 되어 고통의 시간을 같이한 것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냐?" 뭐라고? 그렇다면 설마 이 놈들은……? 라이트닝 볼트에 맞아 쓰러졌던 네 명이 덩치들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난 그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이들이 신종 캐릭터가 아닌, 기존에 등장했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음음, 사람 얼굴 기억하는 게 이렇게 서툴러서야, 어디 인생 제대로 살아가겠나? "너 이 자식!" 덩치들은 나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고 있었다. 난 그들의 얼굴을 한번씩 쳐다 보고 슬쩍 몸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모른척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거기 서, 임마!" 간만에 친구들을 만났으니 술이 빠질 수 없다. 난 술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내 친구들은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술집에 앉아있다. 테커, 카웨, 럴크, 카젠, 베네트. 이 다섯명은 각자 아픈 부위를 문지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난 그들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 동안 잘들 지냈냐?” 여전히 싸늘하게 노려보는 용병 일동. 난 그들의 눈빛을 피해 카운터로 고개를 돌렸다. “이봐요, 주인장! 여기 술 한 가득!” 잠시 후, 정말로 술이 한 가득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카웨는 나한테 얻어맞은 이마 부위를 문지르며 말했다. “대체 보자마자 공격한 이유가 뭐냐?” “하하하! 원래 남자들의 우정은 주먹에서 나오는 거 아니겠냐?” “그래. 너 말 잘했다. 그럼 우정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나한테 몇 대만 맞아라.” “남자 자식이 쪼잔하게 몇 대 맞은 걸 가지고 그렇게 나오냐?” 카웨의 성격은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테커가 물었다. “라이레얼은 만나 봤어?” 아! 라이레얼 이름을 들으니 또 다시 두통이! 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커가 다시 물었다. “뭐라 그래?” 난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묻지마.” 고개를 돌리던 중, 베네트와 눈이 마주쳤다. 베네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난 괜히 피하는 것이 어색해 마주 보며 웃었다. 요루드의 죽음.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나에게 50, 요루드에게 50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산은 정말 쓸데없다. 요루드가 죽은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재수가 없어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네트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까지 나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혹시 지금쯤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을 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 애는 누구야?” “그래. 나도 그게 궁금했어.” “설마 너…….” 갑자기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저 꼬마애랑 그렇고 그런 짓을…….’ ‘그래.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 ‘저 순진한 아이에게 의사 놀이를 하자고 꼬드겨서…… 속닥속닥……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한 거 아니야?’ ‘분명 그랬을 것 같아. 저 놈은 로리타 콤플렉스야. 어린 아이를 밝히는 놈이라고.’ 이 놈들이 일부러 다 들리도록 속닥거리고 있었다. 난 그대로 이 놈들을 받아버릴까 생각하다 마음을 가라 앉혔다. 난 라이의 고깔 모자를 벗겼다. 길고 뾰족한 귀고 튀어나옴과 동시에 회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흘러 내렸다. 용병들은 라이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술집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전부 라이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라이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 애 혹시…….” 그래. 이 애가 바로 탑의 주인 라이미안이다. 소문이 그새 퍼졌나 보군. “……라이레얼 딸이냐?” 난 그대로 카웨를 받아버렸다. 아이언스 공작은 참을성이 별로 없단다. “라이야. 니 소개나 한번 하렴.” 라이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라이미안이에요. 상아탑의 주인이고 이코의 친구에요. 이코는…… 흑흑, 이코는…… 흑흑…… 우아앙! 이코가 보고 싶어!” 이 것도 내가 울린 거에 포함 되는 건가? 난 재빨리 라이를 달래 주었다. “이따 라이코스 찾는 거 도와줄테니까 그만 울어.” “엉엉엉!” “자꾸 울면 안 도와 준다.” 뚝-! 용병들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라이를 보았다. 난 라이의 머리에 모자를 다시 씌워 주었다. “라이레얼하고 얘기는 어떻게 됐어?” 테커의 질문에 난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설마 둘이 살림 차리기로 한 거야?” 난 다시 카웨를 받아버렸다. 카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아! 왜 자꾸 건드려!” “자꾸 맞을 짓을 하니까 건들지.” 시비가 붙으려는 것을 테커가 나서서 말렸다. 그 사이 카젠은 묵묵히 잔에 맥주를 넘치도록 따라서 사람들에게 돌렸다. 난 술을 마실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분위기 깨기 싫어 한 잔 받아 두었다. 테커가 말했다. “일단 얘기나 해 봐.” “무슨 얘기?” “그 동안 있었던 일들 말이야. 그리고 라이레얼과는 어떻게 할 건지.” “니들이 먼저 해.” “뭐 그러지.” 테커는 맥주를 조금 마신 후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떠난 후 라이레얼을 주축으로 용병단을 만들고 내가 아이리스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라이레얼이 심하게 행동하다 감옥에 가고, 대규모 시위를 벌여 라이레얼 빼내고, 얼마 전 레이트 백작가로 들어가고. 얘기는 꽤 흥미진진했다. 이들이 특별한 이야기꾼은 아니지만 얘기 자체가 워낙 엽기적인 데다 용병 특유의 억양과 걸걸한 목소리, 현란하게 구사하는 욕과 비속어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테커가 얘기를 마칠 때쯤 낮술을 마시고 있는 주당들은 우리 테이블 근처에 모여 있었다. 라이는 안주로 나온 여러 가지 요리를 손으로 마구 집어먹고 있었다. 정말 열심히 먹는다. 대체 저게 어떻게 다 들어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테커의 얘기를 다 들은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라이레얼이 그렇게 나를 생각했었다니. 난 그 동안 다른 여자에 관심이 팔려 라이레얼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아아! 죄책감이 온 몸을 휘감는 구나. 그런데 공작 부인 어쩌고 한 것은 좀 그렇다. 유망한 청년 매장할 일 있나? “이제 니 차례다.” 그래. 어차피 이 놈들은 나의 어두운 과거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숨길 것이 뭐가 있으리. 하지만 한 순간의 나의 고민을 -그것도 여자에 관련된- 타인에게 털어놓는 일은 쉽지가 않다. 난 별로 마시고 싶지 않은 맥주를 반잔이나 마셨다. 으음, 입안이 좀 텁텁해 지는 군. 난 아까 나온 거위 통구이의 다리를 먹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거위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어째서 다리와 날개가 없는 거지? 이 거위는 사지(四肢)가 없는 장애 거위였단 말인가? 사지가 없으면 장애 중에서도 일급 장애잖아. 당황하는 나의 눈에 비치는 라이의 모습. 라이가 입에 물고 있는 다리. 그리고 라이의 앞에 놓여있는 뼈다귀들. 아! 분노감이 용솟음을 치는 구나. 얍삽하게 비깃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가장 맛있는 부위인 날개와 다리만 다 먹었어. 이제 똥집과 가슴살만 뜯어내면 끝나는 구나. 하는 수 없이진 나는 오징어 다리를 하나 입에 물고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내 얘기는 별 볼일 없었다. 한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를 잘 묘사했다면 굉장히 길어졌겠지만 그냥 단편적인 사실만을 나열하다보니 채 5분도 되지 않아 얘기가 끝이 났다. “그러니까 넌 라이레얼을 떠나고 싶은데 라이레얼이 너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거야?” “그렇지.” 역시 테커는 그나마 머리가 돌아간다. 다른 놈들은 내 얘기를 듣고 ‘그냥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테커는 요점을 정확히 집어낸다. 현재 다른 놈들은 술에 얼큰하게 취해있는 상태였다. 난 술에 취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술 냄새가 나는 곳에서 취한 사람들과 같이 있다보니 왠지 나도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걸 보고 분위기에 취한다고 하는 건가? “그 여자는 예뻐?” “누구?” “니가 좋아하는 여자.” 아주 정확하고도 훌륭한 질문이었다.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라이레얼 보다도?” 이렇게 질문을 하면 대답하기가 조금 애매하다. 실제 완벽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분석을 하자면 라이레얼이 더 예쁘다고 할 수 있지만, 나의 주관적인 관점으로는 루시아가 더 예뻐 보인다. 말투, 행동, 외모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예뻐 보인다. 콩깍지 현상 현재 99% 진행. 남들이 뭐라 욕해도 상관없어.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걸 어떡해? “적어도 내 눈에는.” 대답이 조금 이상했나? 하지만 테커는 잘 알아들은 듯 했다. 우리는 한 동안 말 없이 술을 들이켰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테커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말이야 라이레얼은 너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 그게 문제라는 거 아니겠냐?” “뭐 대부분의 용병들이 그렇듯이 라이레얼도 성에 대해서는 개방적이지. 언제 죽을 지도 모른 상황에서 한 사람에게만 목매며 성욕을 자제하는 것은 미친 짓이거든. 내일 당장 죽을 지도 모르는데 여자를 안고 싶으면 당장 안아야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일수록 현재를 중요시 여긴다. 미래가 확실한 사람은 현재의 시간을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 예를 들면 학생은 공부를 하고, 직장인은 승급 시험을 준비한다. 학생에게는 수능을 봐야 한다는 미래가 확실하고, 직장인에게는 승급 시험날이 온다는 미래가 확실하다. 그렇기에 이들은 현재의 시간을 기꺼이 미래를 위해 투자할 수가 있다. 혜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와 3일 후면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면 이들은 당장 공부를 때려 친다. 그리고 멸망하기 전 3일 동안 어떻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미친 듯이 놀지에 대해 계획표를 작성하여 실천에 옮긴다. 용병들을 비롯하여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 즉, 언제 죽을지 모르는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들은 현재에 모든 것을 건다. 여자를 안고 싶으면 그냥 돈을 들고 사창가로 찾아간다. 그리고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질펀하게 논다. 뭐, 개중에는 열심히 싸워 열심히 돈을 모으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라이레얼은 마음만 맞는다면 남자와 하룻밤 자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즉,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이라는 거지. 라이레얼 성격상 자기 싫다고 떠난 남자를 붙잡지는 않거든.” 듣고 보니 그렇다. 성에 보수적인 여자일수록 한번 사랑한 사람을 쉽게 떠나보내지 않는다. 키스라도 한번하면 평생을 책임지라며 난리를 쳐댄다. 반면 성에 개방적인 여자일수록 서로의 마음이 변했을 때 상대를 쉽게 떠나보낸다. ‘어차피 너 나 좋아서 만났고, 나도 너 좋아서 만났는데 이제 그게 아니면 갈라서야지.’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왜?” 왜 나는 붙잡는 거지?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혹시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뭐?” “라이레얼은 니가 떠난 후 다른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그리고 이제 다시 널 만났는데 니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니 화가 날 수 밖에. 그래서 그냥 투정부리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자기 싫다는 남자 억지로 옆에 잡아둘 라이레얼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렇게 되는 건가? 너무 복잡하다. 남녀 관계와 간단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복잡해도 너무 복잡하잖아.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정 라이레얼한테 미안하면 괜찮은 남자 하나 소개시켜 주고 뒤로 빠져.” “흐으으윽!” 갑자기 어디선가 귀곡성이 들려왔다. 순간 술집 안의 모든 사람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흐으으으-!” 귀곡성이 다시 들려왔고 몇 명은 이빨을 따닥따닥 부딪혔다. 정말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귀곡성이다. 마치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를 듣는 느낌이야. “이건 저주야! 예전에 이 곳에서 죽은 처녀 귀신의 저주라고!” 누군가가 귀를 막고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을 보니 저주로 죽기 전에 공포로 죽을 것 같았다. “저주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나의 질문에 테커가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옛날 옛날 아주 옛날. 호랑이가 담배를 피며 사자와 맞고를 치고 있을 때, 한 남녀가 있었다. 모든 얘기가 다 그렇듯이 이 남녀는 서로 사랑했다. 편의상 이 남녀를 철수와 영이로 칭하도록 하겠다. ‘영이. 그대는 너무도 아름답소.’ ‘철수씨! 당신도 너무 멋있어요.’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 ‘아이, 몰라요.’ 아무튼 이 둘은 보고 있는 사람이 복장 터질 정도로 닭살 커플이었다. 하지만 모든 얘기가 다 그렇듯이 이 둘은 헤어져야만 했다. 철수가 일이 생겨 몇 년 동안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던 것이다. 둘은 어둡고 으슥한 둘만의 아지트에서 작별을 나눈다. ‘영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겠소?’ ‘물론이에요, 철수씨. 저는 철수씨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만약 평생 돌아오지 않는다면 평생을 기다리겠어요.’ ‘고맙소, 영이. 그럼 우리 헤어지는 기념으로 뽀뽀나 한번 할까?’ ‘아이, 몰라요.’ 이렇게 작별을 끝마치고 철수는 다른 곳으로 떠난다. 홀로 남게 된 영이는 1년을 한결 같이 철수만을 기다린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록 철수는 돌아오지 않는다. 말이야 평생을 기다린다고 했지만 평생을 기다리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참다 못한 영이는 철수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철수는 그 곳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 아이까지 -그것도 쌍둥이로- 나아서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영이는 반쯤 정신이 나가버리고 만다. 영이가 비틀거리며 도착한 곳은 어느 술집이었다. 영이는 그 곳에서 맥주를 한 병 시킨다. 정신이 나가있던 터라 원래 잔에 따라 마셔야 할 맥주를 접시에 따라 먹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고 만다. 그런데 더 엽기적인 것은 접시에 얼굴을 대고 맥주를 마시다가 숨이 막혀 죽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접싯물에 코 박고 죽은 것이다. 영이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철수 일가족 모두가 아침 식탁에서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람들인 이 사건을 두고 접싯물에 코 박고 죽은 영이의 저주라 말하였다. 영이가 접싯물에 코 박고 죽은 장소가 바로 이 술집이다. 정말 황당하다 못해 웃기는 얘기다. “흐으으- 으으윽-!” 흐느끼는 듯한 귀곡성.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난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저주다! 이제 우리는 모두 접싯물에 코 박고 죽게 될 거야!” 술에 취해 완전히 맛이 간 놈이 소리쳤다. 난 녀석의 코를 접싯물에 박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흐으으-!” 기분이 점점 음산해 진다. 마치 소리가 바로 옆에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야. 마치 라이의 자리에서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야. 마치 라이가 소리를 내는 듯한 느낌이야. “너 어떻게 된 거야?” 난 테이블에 업어져있는 라이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보았다. 라이는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줄줄 흘러내린 눈물은 라이의 통통한 볼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닥을 보니 물이 한 가득 고여있다. 완전히 수도 꼭지다. “흐으으윽-.” 라이는 다시 특유의 귀곡성을 내며 울었다. 난 라이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왜 그래? 누가 때렸어? 뭐가 문제야?” 라이는 한참을 울먹이더니 간신히 대답하였다. “흐으윽- 이코가 보고 싶어.” 할 말이 없다. 난 주위를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어떤 놈이 라이한테 술 먹였어!?” 그러자 한 놈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내가 그랬는데.” 카웨였다. 내가 테커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이 놈이 라이한테 술을 1L가 넘게 먹였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웨의 멱살을 잡았다. “또 너야?” 카웨는 황급히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먹인 게 아니라 이 애가 내 잔을 가져갔어.” “그래서?” “그래서 잘 마시길레 주량이 얼마나 되나 시험해 보려고 계속 부어줬지.” 난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그랬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카웨도 웃었다. “하하하!” 난 한 순간에 인상을 팍 구겼다. “지금 웃음이 나와, 임마! 애한테 술먹인 게 자랑이냐?” “자, 잠깐!” 난 그대로 카웨의 이마를 받아버렸다. 카웨는 눈을 뒤집어 까며 뒤로 넘어갔고, 난 손을 탁탁 털었다. 자식이 자꾸 사람 성질 긁고 있어. 난 울고 있는 라이를 안아 들었다. 테커는 술잔을 비우며 물었다. “갈거냐?” “얘 데려다 줘야지.” “잘 가라.” 용병들은 쓰러진 카웨를 놓아두고 자기들끼리 술을 마셨다. 난 펑펑 울고 있는 라이를 달래 주며 술집 밖으로 나왔다. 난 걸음을 옮기며 테커가 한 말을 곰곰이 되 새겨 보았다. 테커는 이 사건의 본질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같이 생활하다 보니 라이레얼의 습성과 행동 양식을 잘 파악하고 있나보다. ‘정 라이레얼한테 미안하면 괜찮은 남자 하나 소개시켜 주고 뒤로 빠져.’ 으음, 괜찮은 남자라. 어디 괜찮은 남자가 있어야 말이지. 나 같이 잘난 남자 말고 라이레얼의 마음에 드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나보다 잘난 남자라고 해봐야 사일런스 지니 밖에는 없는데. 사일런스 지니? 난 고개를 저었다. 지니는 너무 잘나서 라이레얼 정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거다. 솔직히 지니가 뭐가 아쉬어 라이레얼을 좋아하겠나? 라이레얼의 미모에 환장하지 않는 이상. “흑흑…… 이코야…….” 라이가 우는 모습을 보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떠나간 친구가 보고 싶어 술로 마음을 달래고 눈물로 슬픔을 달래다니. 정말 착한 어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걱정하지마렴. 이 오빠가 꼭 라이코스를 찾아 줄게.” “흑흑, 정말?” 얘가 속고만 살았나? 내가 지부에 거의 다 왔을 때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고 잘찾아 들어갔다. 내가 문에 들어서자 나를 반긴 사람은 그 이름도 유명하고 옆에 서 있는 아이언스 공작이 ‘덤’ 같이 보이도록 만드는 사일런스 지니 백작이었다. 지니는 내가 라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올라가서 재우고 오라고 말하였다. 라이는 울다 지쳐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난 2층으로 올라가 라이를 침대 위에 던져 놓고 짐을 풀고 있는 방으로 들어 갔다. 안에는 지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언제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있어 웃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굳어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나가 계셨던 겁니까?” 왠지 모르겠지만 강력한 질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물어 본다면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은데. 난 라이레얼을 만나고 온 일과 간만에 친구들을 만나 술집에 같던 일을 말하였다. 지니는 내 얘기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내 얘기가 끝나자마자 다그치듯 말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예?” 지니의 목소리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화가 나있는 것 같았다. 지니는 쉽게 흥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신 차분하고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전달하였다. “오늘 헤리오의 국왕과 귀족들을 만나기로 한 사실을 잊으셨나요?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찾으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아십니까?” 아차! 그랬었지. 라이레얼만 신경쓰다보니 그걸 깜박 잊고 있었다. 상대는 지니다.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놔 봐야 통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냥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속편하다. “저기 그게 사실은 어떻게 된 거냐면요. 그러니까 그게 제가 꼭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되서…… 그러니까…….” 싸늘한 지니의 눈빛. 난 그냥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지니는 한 호흡 쉰 다음 말했다.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의 사정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은 이 곳에 외교 사절로 오셨지 놀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의 사생활을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이 일에 지장을 준다면 얘기가 틀려집니다. 공과 사는 엄격히 구분 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이언스 공작님께 맞겨진 아이리스의 운명을 생각하시고 최선을 다해 일에 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니의 말은 구구절절 옮았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 동안 내가 너무 무책임했던 것은 사실이다. 지니가 그것을 일깨워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니는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현재 말할 처지가 못 되는 지라 당연 둘의 대화는 멈추었다. 아무런 말 없이 침묵의 시간 속에 있자니 가시 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먼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이 자리를 피할 수도 없으니 그저 지니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수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니의 모습은 전혀 화나 보이지 않았지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정확히 표현을 한다면 화가 났다기 보다는 나에게 실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것은 정말 몹쓸 짓이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다. “죄송합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니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지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흥분한 나머지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께 무례를 범하고야 말았군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앞으로 잘 하세요’ 라고 말하고 끝내기 마련이다. 그럼 나는 ‘예.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니는 나에게 죄송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 없으신 아이언스 공작님이 안 계시니 저는 헤리오의 귀족들을 맞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아이언스 공작님께 투정을 부렸습니다. 부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아까 제가 범한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거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지니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적어도 빈말로 이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번에는 완전히 나를 엿 먹이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좋습니다. 그럼 이번만 특별히 용서를 해 드릴테니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세요.’ 라고 말 한다면 그건 뻔뻔하도 못해 무식한 짓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못은 제가 했는데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이러시면 제가 몸둘 바를 모릅니다. 제가 죽일 놈이니 저를 꾸짖어 주세요’ 라고 한다면 우습게 보일 것이 뻔하다. 자신이 저자세로 나와 상대로 하여금 더욱 저자세로 나오게 만드는 것이 지니의 주특기가 아닌가?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아이언스 공작의 잔머리는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이렇게도 안 되고 저렇게도 안 되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적당히 얼버무리며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뭐, 용서라고 할 것이 있겠나요? 정 용서를 받으시고 싶다면 용서해 드릴테니 너무 부담 가지는 마세요. 그건 그렇고 가셨던 일은 잘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사일런스 백작님의 출중하신 능력이라면 헤리오와 국왕과 귀족들을 상대로도 일을 잘 풀어나갔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듣고 싶은데, 바쁘지 않으시다면 감히 저에게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주었으면 대단히 감사하겠지만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바쁘시고 피곤하시다면 구딩 들려주시지 않으셔도 상관 없긴하지만 그래도 듣고 싶긴 하네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듣고 싶으시다는데 제가 어찌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적당히 얼버무린 것 같다. “그럼 말씀해 보세요.” 지니라면 당연 일을 잘 처리했을 것이다. 혹시 벌써 헤리오와 동맹을 체결하였을 지도 모르지. “아! 오늘 헤리오의 국왕께서 건강이 악화 되신 관계로 회담을 주최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회담은 내일로 미루어졌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예. 아이언스 공작님의 부재시 회담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해도 끔직 합니다. 내일 회담에는 참석하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하여 부족하나마 저의 생각을 정리한 문서를 준비하였습니다.” 지니는 방 한쪽의 테이블로 걸어 가더니 한 뭉치나 되는 종이들을 나에게 건냈다. 대충 살펴보니 깨알 같은 글씨로 이루어진 어려운 용어들이 현란하게 쓰여져 있었다. “이게 뭔가요?” “내일 회담에서 하실 말씀을 짧고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겁니다.” “별로 짧고 간략한 것 같지 않은데요.” “오늘 외워 두시면 내일 도움이 될 겁니다.” 이걸 다 외우라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주입식 교육이 사람을 얼마나 멍청하게 만드는지 알기나 하는가? 학교에서 뭘 외우라고 시켰어도 외우는 대신 몸을 때우기를 선택한 사람이 바로 나이다. 난 어떠한 폭력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주입식 교육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이걸 다 외우라니? “저기 이 걸 꼭 외워야만 하나요?”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난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처리할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지니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다음 방을 나섰다. 처리할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자리를 비켜 준 것 같다. 난 침대에 누워 머리맡에 촛불을 가져다 놓고 종이 뭉치를 읽기 시작했다. “현 시점에서 대륙의 균형은 안정적이라 볼 수 없다. 3기 전란 후 계속 이어져 내려오던 균형은 아이리스가 힘이 많이 축소 되며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3년이 지난 지금 대륙의 균형은 완전히 어긋나 있다고 불 수 있을 것이다. 북방 쪽에 위치한 국가들은 강성한데 비해 남방 쪽에 위치한 국가들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각 국가들의 목표는 결국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있다. 부국강병을 하자면 영토의 확장은 필수 조건이다. 북방의 국가들은 미개척지인 광활한 북쪽의 영토로 뻗어나가는 것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변방의 훈족들과 북방의 호랑이 진명이 가로 막고 있다. 북쪽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이 거대한 두 세력을 상대로 싸워야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리수이다. 이들과의 전쟁에 승산이 없는데다 전쟁을 벌이는 사이 남방 국가들이 배후를 공격할 경우 진퇴양난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바스, 아토리아, 개틴은 남방 국가들을 합병하여 국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후한거리를 제거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북방 국가들의 사정과는 달리 남방 국가들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기가 막힌다. 지금 내가 국사 공부를 하고 있는 건가? 아! 머리 아퍼.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싶은 마음이 분수처럼 솟아 오른다. 하지만 지금 이 것을 훑어 보지 않는다면 내일 굉장히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것이 뻔하기에 난 이마에 머리띠를 동여 매고 열심히 읽었다. 헤리오의 고위 귀족들이 속속들이 입실하였다.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아는 얼굴도 조금 있었다.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 딱 두 명. 좌석 수를 보니 상대방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껏해야 10명 정도. 우리측의 숫자는 넷이다. 나와 지니. 그리고 라이와 칼리. 이번 회담이 워낙 중요하기에 라이는 라이코스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참석하였다. 난 라이에게 회의 도중에 울면 앞으로 다시는 라이코스를 보지 못하게 될 거라는 이상한 협박을 하여 절대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문서로 작성하여 지장까지 찍게 하였겠지만 어린 아이는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냥 구두 약속으로 끝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올 사람들은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의장석에 앉는 한 명만 빼고. 헤리오의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오시지 않는 걸까요?” “활동하시기에는 아직 무리인 것 같소.” “그럼 회담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라는 거요?” 지니의 표정은 상당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다. 하루라도 빨리 동맹을 체결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야 그런쪽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니 애가 탈 것도 없지만, 지니는 상당히 초조할 것이다. 하지만 지니는 그런 것들을 절대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이거야 말로 외교의 기본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헤리오의 국왕이 아닌 그 아들. 그러니까 반데라스 왕세자였다. “폐하께서는 아직 건강이 좋지 못하신 관계로 오늘 회담은 제가 주관하도록 하겠습니다.” 난 지니의 귀에 속삭였다. “이거 잘 된 일인가요?” “잘 못 된 일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데라스 왕자는 자연스럽게 의장석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회담이 시작 되었다. 지니는 차분하면서도 확실한 어조로 이 곳에 온 목적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전 아이리스와 헤리오의 동맹을 주선하기 위해 이 곳에 왔습니다.” 말을 돌려서 하거나 질질 끌지도 않고 정말 용건만 간단히 말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저 쪽에서 ‘예. 그럼 동맹 맺지요’ 라고 대답할리 없다. 헤이체르 공작이 입을 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스는 자바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맹국이 필요합니다.” 별로 구체적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헤리오측은 다 알아 들었다. 유나이세르 후작이 물었다. “어째서 그 동맹국이 헤리오인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정말 예의상 던진 질문이다. “아이리스와 인접해있는 국가는 자바스와 아토리아와 헤리오입니다. 하지만 이 중 자바스와 아토리아와는 원수지간이니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상대는 헤리오뿐이지요.” 유나이세르 후작이 다시 물었다. “사실 얼마전 자바스에서 사신이 왔었습니다. 자국과 연합하여 아이리스를 공격하자 하더군요.” “그래서 동맹을 체결하셨습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이라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지니가 물었다. “그럼 자바스와 아이리스 중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유나이세르 후작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 것을 택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국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릴 겁니다.” 자국의 이득이라? 결국 중요한 것은 득(得)과 실(失)이다. 어차피 아이리스도 헤리오와 동맹을 맺는 쪽이 얻는 것이 많을 거라 여기고 있으니. 지니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이 곳에 온 목적과 일치하는 군요. 전 헤리오에 득(得)을 주기 위해 왔습니다.” 레이트 백작이 말했다. “득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요?” 지니는 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지요?” “아이리스는 분명 헤리오보다 소국(小國)입니다. 소국이 대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는 이유는 뻔하지 않겠습니까?” 은근히 아이리스를 무시하며 자국을 치며 세우고 있다. 저런식의 말을 들으니 마치 우리가 구걸이라도 하러 온 것 같다. “그럼 자바스는 대국이기 때문에 동맹을 맺으면 득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아이리스보다는 낫겠지요.” 완전히 아이리스를 무시하는 발언이다. 국력이 약하니까 사신까지도 푸대접을 받게 되는군.지니의 표정에는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난 그 모습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지니에게는 무언가 믿는 것이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지니는 절대 자신이 아래 위치한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협상을 제의하지 않는다. 협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대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지니는 어떻게든 자신의 위치를 이들과 대등하게 만들 것이다. 아니면, 더 높은 쪽으로 만들지도 모르지. 이 자들이 동맹을 맺어달라고 난리를 치도록 말이야. “자바스와 동맹을 맺어 아이리스를 공격한다면 득이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이리스와 동맹을 맺어 자바스를 공격하는 것보다야 훨씬 이득이 있겠지요. 영토를 넓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요.” 자바스와 협공을 하여 아이리스를 멸망시키고 사이 좋게 땅을 나누어 먹는다는 얘기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니들은 끝장이야’ 정도가 되겠다. 땅따먹기 하듯 아이리스 땅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대단한 착각에 빠져있군. 지니는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보여주는 부드러운 미소가 아니라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순간, 헤리오의 귀족들의 표정이 살짝 변하였다. 이들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구걸하러 온 사람들인데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리스를 멸망시켰을 경우군요. 얼마 전 아이리스가 자바스의 10만 대군을 전멸시킨 사실을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비토스코 백작이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얕은 꾀에 걸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책략이 얕은 꾀란 말씀이십니까? 전쟁은 숫자 놀음이 아닙니다. 단지 숫자가 많은 군대가 이긴다면 머릿수만 비교하면 됐지 전쟁을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비스토코 백작님의 선대 중 모사들이 많았고, 헤리오의 8대 국왕 샤이긴 폐하께서는 책략을 써서 개틴의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스토코 백작님의 말씀대로라면 이분들이 쓴 책략이 전부 얕은 꾀에 속한다는 겁니까?” 한 명 떨어져 나갔군. 만약 얕은 꾀라고 한다면 자신의 조상과 선대 국왕을 싸잡아 욕하는 것이 되겠고, 아니라고 하자니 자신의 말을 번복한 것이 될 것이다. 잘못된 단어 선택을 한 비스토코 백작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물러섰다. 아마도 회담이 끝날 때까지 아무 발언도 하지 못할 것이다. 또 다시 누군가가 질문을 해왔고 지니는 여유있게 맞받아쳤다. 세상에 감히 말로써 지니를 이기려 들다니. 차라리 수저로 사막의 모래를 퍼다 나르는 것이 현실성있겠다. 의장석에 앉아있는 반데라스 왕자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있었다. 지니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지니에게 이성적 관심이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반데라스 왕자를 자세히 보니 지니에게 반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것은 아니고 그냥 순수한 동경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잘 생겼을까? 내가 저렇게 생겼으면 세레나양도 나를 좋아하겠지? 아! 나의 외모가 부족하여 감히 세레나양에게 다가 설 수가 없구나. 하늘은 어찌하여 이 몸을 이렇게 나게 하셨는가!’ 역시 독심술이라는 것은 편한 것이다. 이렇게 표정만으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수가 있고. “헤리오는 반드시 아이리스와 동맹을 맺어야 할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헤리오가 아이리스에게 손 벌릴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리스가 헤리오에 손 벌릴 일은 있어도 말이지요’ 라는 대사가 의도적으로 생략 되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개틴과 자바스, 아토리아가 동맹을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콰과광-! 직접적으로 효과음이 울려 퍼지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이런 표현이 쓰여질 정도로 지니가 던진 말의 위력은 굉장하였다. 헤리오의 귀족들은 그렇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하이스네가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개틴과 자바스는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하고, 자바스와 아토리아는 서로 적대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개틴은 아토리아와 이제까지 아무런 인연이 없었는데 갑자기 삼국이 동맹을 맺는다니요?” 역시 이 중에서 지니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따를 자는 아무도 없군. “그에 대한 대답은 여기 계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해 주실 겁니다.” 지니는 나를 가리켰고 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리오의 귀족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언스 공작이 무슨 말을 할지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좋다. 내 우매한 너희들을 위해 단비와도 같은 나의 잔소리를 들려 주마. “사일런스 백작님의 말씀데로 개틴과 자바스, 아토리아 삼국이 동맹을 맺는 것은 이미 기정화된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어 본 자는 앉아있는 귀족들 중 가장 짬밥이 높다고 일컬어지는 헤이체르 공작이었다. 하이스네의 아버지기도 하지. 주름진 얼굴과 형형한 눈빛에서부터 엄청난 관록이 느껴지는군. “그건…….” 난 자연스럽게 입을 열다 멈칫했다. 왜 세 국가가 동맹을 맺는지 나는 굉장히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 달달 외웠거든. 그런데 문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거저거를 다 외우다보니 그것들이 머리에서 섞여져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밤새서 수학 공식을 달달 외웠는데 막상 문제가 나오면 어떤 공식을 어떻게 대입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나를 향하는 저 뜨거운 시선들. 만약 내가 지금 ‘저는 잘 모르겠으니 사일런스 백작님께 물어 보시죠’ 라고 말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거다. 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 붙었다. 반데라스 왕자는 이런 나의 사정을 눈치 챘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하하! 니가 감히 세레나양에게 찝적거리더니 결국은 천벌을 받는 구나! 그러니까 조용히 세레나양에게 물러나. 세레나양은 너 같은 놈에게는 안 어울려.’ 이제는 대놓고 욕을 해댄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아무튼 이대로 조용히 물러날 아이언스 공작이 아니다. 난 당당하게 말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그 이유를 모르시다니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순간, 속으로 발끈하는 헤리오의 귀족들. 하지만 역시 밖으로는 표출하지 않고 안으로만 울분을 삭혔다. ‘너 두고보자’ 라는 눈빛을 하며. “그 이유라는 것이 궁금하군요.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헤이체르 공작의 재촉에 난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삼국이 동맹을 맺을 거라 확신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건 바로…….” 오오! 저 기대에 찬 눈빛들. 말도 안되는 이유를 말하면 당장이라도 매장시켜 버리겠다는 의자가 돋보인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애드립의 천재 아이언스 공작이 아닌가? 이제까지 위험하고 쪽당할 상황을 수백번이나 헤쳐온 아이언스 공작이 겨우 이 정도 위기에서 무너질 것인가? 이건 라이레얼을 다시 만났을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사일런스 백작님은 허튼 소리를 한적이 단 한번도 없으십니다.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검은 것을 희다고 말씀하시면 검은색이 흰색으로 변할 정도 입니다. 지금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그리 될거라 말씀하셨으니 설사 그리 될리 없더라도 그리 될겁니다. 당대 최고의 모사가 말하면 그냥 그런 줄 아세요.” 내 맡투가 확신에 찬 당당한 말투였기에 헤리오의 귀족들은 순간적으로 입을 벌리며 ‘아! 그렇구나’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헤이체르 공작이 인상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짝짝짝-! 옆에 들려오는 박수 소리. “재미있었어요, 오빠.” 헤이체르 공작은 나를 추궁하지 못하였다. 상대는 상아탑의 수장이자 어린아이이다.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인 것이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운 것. 니가 나를 구해줬구나. 지니가 수습에 나섰다. 지니의 설명은 굉장히 복잡하고도 장황하였다.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상대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였다. 지니의 얘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아이언스 공작의 등장으로 가장 위기감을 느낀 나라는 아토리아다. 제 3기 전란 때 아이언스 이그리드한테 깨지고 깨져서 국력이 무자비하게 약화 되었으니, 이번엔 아이리스의 국력이 약할 때 반드시 밟아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단은 사이가 좋지 않은 자바스와 손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개틴은 혼자서 헤리오를 상대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자바스를 끌어들여 헤리오를 공격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힘을 합쳐 아이리스를 멸망시킨다. “하지만 그 전에 자국이 자바스와 동맹을 맺는다면 삼국 동맹은 깨지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레이트 백작이 정곡을 찔렀다. 하지만 훌륭하신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것은 동맹을 맺을 수 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국가 사이의 의리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본다면 의(義)보다는 이(利)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의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의는 곧 신용입니다. 신용을 잃은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바스와 동맹을 맺고 아이리스를 친다면 당장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자바스는 아이리스의 오랜 동맹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배신을 해 아이리스를 멸망의 지경까지 몰고 간 국가입니다. 이런 국가가 단기적 동맹을 맺은 상대에게 과연 약속을 지키실 거라 보십니까? 설사 약속대로 아이리스를 멸망시켜 그 땅을 나누어 갔는다 해도 그 다음에는 어쩌실 겁니까? 그 다음에도 동맹 관계가 유지될 거라 보십니까? 확신컨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분명 그 때는 개틴과 새로운 동맹을 맺고 헤리오를 칠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자바스의 지형을 보면 횡(橫)으로 뻗어나기 힘든 구조입니다. 게다가 개틴과의 국경은 확실하다 싶을 정도로 확립되어 있고 전쟁을 일으킬 명분도 없습니다. 하지만 헤리오라면 다르겠지요. 3년 전만 하더라도 헤리오와는 국경이 맞닿아 있지 않았습니다. 후에 아이리스를 공격해 영토를 얻고 난 후에야 국경이 맞닿게 되었지요. 만약 이런 상황에서 아이리스가 완전히 멸망하여 영토를 나누게 된다면 국경 자체가 불분명해 질테고 땅을 나누는 과정에서 시비를 걸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자바스는 이번 기회에 남방국들을 정리하여 후미를 튼튼히 해 놓으려 할 겁니다.” 청산유수(靑山流水)로다. 인간의 말발이 얼마나 좋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헤리오의 귀족들은 모두들 감탄한 표정이었다. ‘과연 사일런스 백작이군.’ 그 다음은 나를 보며 또 감탄한 표정을 짓는다. ‘대체 저 놈은 왜 와서 가만히 앉아있는 걸까?’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대체 내가 왜 이 곳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건가? 훌륭하시고 위대하신 사일런스 백작님의 말씀이 계속 될 수록 헤리오 귀족들의 반론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어느새 회담의 분위기는 동맹을 맺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동맹은 무슨 동맹! 니 동생이나 챙겨!’ 라고 말하면 당장 쫓겨 날 것이다. “그런데 아이리스와 헤리오가 동맹을 맺는다 하더라도 개틴, 자바스, 아토리아 삼국을 당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자국은 개틴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그렇다면 아이리스는 혼자 자바스와 아토리아를 상대해야한다는 것인데 그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아이리스가 상대하는 것은 자바스뿐입니다.” “아니, 아까는 아토리아가 아이리스를 공격할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헤리오 귀족들의 눈에는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드디어 당대 최고의 모사 사일런스 백작의 말꼬투리를 잡은 것이다. 그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정색을 하며 지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지니가 실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지니가 실수한다는 것음 말도 안 된다. 지구가 멸망하고 대륙이 가라 앉아도 지니는 실수하지 않는다. 왜냐고? 그거야 사일런스 지니는 실수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니까 그렇지. “아토리아의 상대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나도 그게 궁금해. 어젯밤 지니가 나에게 주었던 자료에도 그것은 나와 있지 않았다. 결국 알아서 찍으라는 건데. 헤리오 귀족들의 의견은 분분하였다. 아토리아와 국격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자바스와 아이리스. 자바스는 동맹 관계이니 상관 없을테고 아이리스는 아니라고 하고. 그러면 남은 것은…… 설마? “북방의 훈족입니다.” 황당하고 어이없고 기가막힘. 대체 이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 북방의 훈족이란 모두들 짐작하 듯이 북쪽에 있는 훈이라고 칭해지는 부족 연합체이다. 설명이 조금 부족한 것 같으니 장황하게 하도록 하자. 아이리스, 헤리오, 개틴, 자바스, 아토리아, 진명. 이 6나라의 공통점은 국왕 지배체제라는 것이다. 즉, 전제군주제도를 체택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북방의 훈족들은 대륙 북쪽의 미개척지를 비롯한 광활한 토지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토지의 대부분이 사막이고 척박한 땅이어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보니 자연 유목 민족이 되었다. 이 훈족들의 숫자와 군사력을 합하자면 한 국가의 세력과 맞먹는다. 하지만 이들은 부족 연맹체로 아직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뭐 대부분의 유목 민족이 그러하듯 유목만 해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다. 먹고 살기 위해서 타국을 침략해야만 한다. 이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아토리아와 자바스다. 이들은 겨울이 될 때쯤이면에 엄청난 수의 군대를 끌고 아토리아를 공격하였다. 아토리아는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필사적인 것은 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침략이 실패한다면 겨울 내내 굶어죽게 생겼으니 죽기 살기로 덤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동안 훈족들의 아토리아 침략은 계속 되었다. 아이리스가 3기 전란 때 아토리아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훈족들의 침략 때문이었다. 아이리스가 밑에 두드려 대고 훈족들이 위에서 두드려 대니 강국이라 칭하던 아토리아가 심하게 패한 것이다. 결국 매년마다 정기 행사처럼 일어나는 훈족들의 침략 때문에 아토리아는 스트레스성 장염에 걸리고 복통에 치질에 설사까지. 아무튼 중병을 앓게 된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토리아는 대대적인 수술비를 들여서라도 훈족이라는 병원균을 처치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군대를 일으켜 훈족을 공격했냐고? 그런 질문을 하는 자의 아이큐가 궁금하다. 역사상 살펴 보아도 북방에 위치한 기마 민족을 공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 중국 한(漢)나라가 대대적으로 북방 기미 민족을 공격한적이 있다. 그냥 국경 부근에서 쫓아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씨를 말려 버리려고 작정을 하고 공격을 하였다. 이들이 하나의 국가였다면 도시와 수도를 공격하여 하나 하나 박살을 내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들은 유목 민족이다. 가축을 먹일 풀이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한다. 당연 도시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사람이 모여야 도시가 생길 것이 아닌가? 다른 나라 군대가 공격을 해오면 도시 국가들은 성벽을 높게 쌓고 수성을 준비해야 하지만 유목 민족들은 그냥 집을 들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이들의 집이라는 것은 파오라는 이동식 천막이기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데에 이삿짐 센터를 부를 필요도 없다. 한나라는 수년에 걸쳐 변방의 유목 민족들을 쫓아다녔지만 엄청난 노력과 비용만 들이고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그렇기에 아토리아는 군대를 일으켜 훈족을 공격하는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돈을 가지고 변방에 엄청난 길이에 장성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그쪽 주민들을 이주하게 하고 많은 군대를 주둔시켜 국경을 요새화시켰다. 이 일은 아토리아가 전력을 기울인 대대적 토목공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원 된 인부와 군대 숫자만 해도 70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 때가 1567년이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훈족들은 조금 난감하였다. ‘상대가 저렇게 열심히 장성을 쌓았는데 또 쳐들어 가면 미안하잖아.’ 뭐, 이런 이유에서 난감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침략을 해서 식량을 뜯어와야 할텐데 이렇게 장성을 쌓으면 쳐들어가기 곤란하잖아.’ 장성을 쌓았다고해서 훈족이 침략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생활 공간이 너무도 척박하다보니 언제나 인구 수에 비해 식량이 모자르다. 타국을 공격해 식량을 빼앗지 않으면 10명 중 2명 정도는 굶어 죽어야 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전쟁이라는 것은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 1567년 가을이 끝나갈 때쯤 훈족들은 다시 군대를 몰고 아토리아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아토리아는 준비를 철저히하고 있었다. 보병보다는 기마병의 전투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략적으로 기마병은 보병의 4배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게다가 이 기마병이 태어날 때부터 말에서 생활을 했고 말을 수족처럼 다루고 심지어는 말과 대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공성전에서는 얘기가 틀리다. 말을 타고 성벽을 기어 오를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들은 공성전을 치러본 경험이 전무하였다. 결국 훈족은 2개월만에 전쟁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들은 이제 살길이 막막하여 굶어 죽었는가? 그것은 아니다. 다행히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식량이 나올 구멍이 생긴 것이다. 북방의 강호(무림이 아니라 강한 호랑이)이자 훈족들과 국경이 닿아있는 진명에서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해주기로 한 것이다. 진명은 엄청난 크기의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다. 그 농지가 얼마나 비옥하냐면 2년 3작이 가능할 정도다. 게다가 진명은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평당 생산률도 굉장히 높다. 그런데 어째서 훈족들이 진명을 공격하지 않고 아토리아를 공격했냐고? 그야 아토리아가 만만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장 차비가 필요해서 삥을 뜯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타겟이 둘 있는데 한명은 태권도 유단자고 한 명은 코흘리개 유치원 아이라고 역시 가정해 보자. 둘 중 누구한테 삥을 뜯어야 하나? 아무래도 돈이야 태권도 유단자가 많겠지만 미쳤다고 태권도 유단자를 상대로 삥을 뜯냐? 치료비가 더 많이 나오겠다. 당연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흘리개 유치원 아이를 상대로 삥을 뜯을 것이다.(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코흘리개 유치원 아이의 코 묻은 돈을 뜯느니 차라리 집까지 걸어간다) 이것은 나를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내가 언제 한번 노처녀한테 큰 소리 치는거 봤냐? 반면 라이는 매일 구박한다. 때리고 욕하고 소리지르고. 훈족이 진명을 침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명의 군대가 워낙 강력했기에 진명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국경 부근에서 무참히 깨졌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 용기를 내서 또 다시 침략했지만 역시 무참히 깨졌다. 결국 진명의 대한 침략은 포기하고 만만한 아토리아를 침략했던 것이다. 아무튼 진명의 식량 무상 원조로 훈족들은 굶어 죽는 것을 면했다. 그리고 진명은 매년 일정량의 식량을 원조할 것을 약속한다. 언제나 굶주림에 지쳐있던 훈족은 당연 진명에 고마워한다. 심지어는 진명을 ‘아버지 국(國)’ 이라 부르며 열열히 섬긴다. 단편적이고 직설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진명이 뭐하러 변방의 기마족에게 식량을 퍼주어 그들의 세력을 키우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중요한 정치적 계략이 숨어있다. 진명이 훈족에게 식량을 지급해 준 시기는 아토리아가 장성을 쌓은 시기이다. 그럼 그 전에는 대체 왜 가만히 있었나? 당연 훈족이 아토리아를 침략해 주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침략이 불가능해지자 그때 선심을 쓰는 척 해서 훈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식량의 양만해도 그렇다. 배부른 매는 사냥을 하지 않는 법이다. 만약 진명이 많은 양의 식량을 원조해 주었다면 훈족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진명은 언제나 약간 모자른 듯한 양만을 원조해 주었다. 주린 배를 추스를 수 있을만큼은 주되 절대 그 이상은 주지 않는 것이다. 그 양이라도 감지덕지 받아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매년 식량을 원조해주는 것보다 차라리 농지 개간법과 농사법을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자급자족(自給自足)하도록 해야한다. 하지만 그리 하지 않은 것은 훈족이 그대로 유목 민족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농경을 시작한다면 당연 한 곳에 정착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부족 연맹체제는 전제 군주제로 바뀌어 강력한 국가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주변국들에게는 위협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진명은 그것을 막고 싶은 것이다. 식량이 지급되는 이상 훈족들이 아토리아를 상대로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킬 이유는 없다. 이제까지 없었고. 그런데 지금 지니의 발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나와 같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헤리오의 귀족들. 지니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뭐하러 이 자리에서 거짓을 말씀드리겠습니까? 훈족이 아토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은 확실한 일입니다.” 헤이체르 공작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오?” 헤이체르 공작의 표정에는 불쾌함이 역력하였다. 헤이체르 공작은 관록이 있는 귀족이다보니 이 곳에 나올 때 분명 차비를 단단하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회담 내내 지니의 현란한 말솜씨에 밀렸고, 이제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범위 밖의 사실들이 나오니 불쾌감이 드는 것이다. 솔직히 훈족이 아토리아를 공격할 것이라 누구 생각했겠나? “제 말을 못 믿으십니까?”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믿지 못하겠소. 갑자기 훈족이 움직인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오.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한 나로서는 그대가 거짓을 말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소.” 어느새 말투마저 바뀌었다. 처음에는 깍듯한 존대(尊對)였는데 지금은 평대(平對)다. 난 지니의 자신감이 불안했다. 대체 무슨 확신이 있기에 저렇게 확신있게 말하는 걸까? 만약 훈족이 아토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에 지니는 한순간에 당대 최고의 모사에서 당대 최고의 구라쟁이로 전락하고 만다. “저에게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헤이체르 공작의 표정에는 조소마저 담겨있었다. 마치 ‘내놓을 거 있으면 내놔 봐’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마 지니가 내놓을 증거가 불확실한 것이나 조작된 것임을 확신하는 듯 하다. 만약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어떻게 이것이 확실한 증거임을 확신할 수 있냐며, 몰아 붙일테고. 사실 지니가 어떤 문서를 내놓더라도 저 쪽에서 ‘그건 가짜야!’ 라고 말한다면 이 쪽은 할 말이 별로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도 반박하지 못 할만한 확실한 증거는 한가지 밖에 없다. 훈족과 아토리가 지금 이 시간에 싸우고 있는 것. 지금 이 시간에 전쟁을 하는 중이라면 지니가 한 말은 미래의 가정이 아닌 과거의 사실이 된다. 이렇게 되면 반박을 할 수가 없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일어나지 않을 거라 우길 수는 있어도, 이미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우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지금 훈족과 아토리아가 싸우고 있을리는 없으니…… “지금 이 시간 훈족이 아토리아의 국경을 공격하고 있다면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겠습니까?”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순간,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며 지금 지니가 농담을 한 건가, 아니면, 내가 잘 못들은 건가,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의 귀는 멀쩡했고, 지니의 입도 멀쩡했다. 그리고 지니는 이런 곳에서 농담을 할만큼 제정신이 아닌 인간은 아니었다. 헤이체르 공작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떤 증거를 내밀던 간에 맞받아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맞받아칠 수 없는 증거가 등장한 것이다. “그, 그게 정말이오?” 그래. 믿을 수 없겠지. 나도 믿기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개틴, 자바스, 아토리아 삼국 동맹에 대항하는 삼국 연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지니의 폭탄 선언. 헤리오의 귀족들은 이제 할 말을 잃었다. 삼국 동맹에 대항하는 삼국 연합? 대륙에는 6개의 국가가 있다. 삼국 동맹에 관련된 세 개의 나라를 빼면 남는 나라는 아이리스, 헤리오, 진명. 그렇다면 진명을 끌어들인다는 얘기? 진명은 최북방에 위치한 국가로 국력이 6개 국가 중 최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564년 중립을 선포한 이후 어떠한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고 어떠한 나라와도 전쟁을 하지 않았다. 아까 말했지만 엄청난 크기의 옥토를 가지고 있어 최고의 식량 생산국이며 부국강병을 국가의 원칙으로 내세워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양성하였다. 추산되는 병력의 숫자만도 대략 80만명에 이른다. 만약 강제 징병을 해 군대를 동원한다면 그 수는 500만에 이를 것이다. 만약 진명을 아군으로 전쟁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 전쟁은 승리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중립국인 진명을 대체 어떻게 끌어들인다는 말인가? “아직 정식으로 동맹을 체결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어느 정도 얘기가 되어있습니다.” 회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헤리오 잘났다는 십여명의 귀족들은 사일런스 지니 한명에게 완전 KO패 당한 셈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어떤 패턴으로 공격할지를 알아야 방어를 하는데 지금 같은 경우는 완전 변칙 공격에 가까우니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헤리오의 귀족들이 지니를 보는 눈빛에는 존경심마저 깃들어 있었다. ‘이런 자가 있는한 아이리스는 망할 일이 없겠구나!’ 지니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칼리가 나서서 상아탑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대량 살상 마법 금지령’ 얘기가 나오자 헤리오의 귀족들은 상당히 기뻐하였다.(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마법사 수가 적은 헤리오로서는 반길 수 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이윽고 회담은 막바지에 치달았다. 라이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단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의 심기는 심히 불편하였다. 이 걸 또 내가 업고 가야 하는 건가? 불안해. “아이리스는 군사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바스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퍼부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면 당연 후방쪽이 비게 되지요. 아이리스가 헤리오 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국의 영토를 침략하지 말 것. 그리고 약간의 군사와 물자의 원조입니다. 물론 추후 아이리스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헤리오와의 군사적 행동을 같이할 것을 약속해 드립니다.” “진명이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확실한 건가요?”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동맹은 자동 파기 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후에 아이리스가 자국의 도움만을 얻은 뒤 등을 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국은 이보다는 의를 중시하는 국가입니다. 전란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단기적 이득을 위해 의를 버리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니의 저 확신에 찬 표정과 당당한 말투만 봐도 아이리스는 신용도가 넘치는 국가라는 것을 헤리오의 귀족들에게 확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귀족들 중 대표격인 헤이체르 공작이 회담 내내 나만큼이나 가만히 있었던 반데라스 왕자에게 말했다. “제 의견은 진명이 참여한다는 조건 아래 아이리스와 동맹을 맺었으면 합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귀족들이 줄줄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대체로 아이리스와 동맹을 맺자는 얘기였다. 몇 명은 좀더 신중을 기하자고 했지만 가볍게 무시 되었다. 모두의 얘기를 들은 반데라스 왕자는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후, 반데라스 왕자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이 일에 전권을 저에게 일임하셨습니다. 여러 귀족분들의 의견에 따라 아이리스와의 동맹을 체결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진명이 동맹에 참여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헤리오는 상아탑의 ‘대량 살상 마법 금지령’ 을 지킬 것을 약조드립니다. 정확한 합의 내용은 내일 문서로 작성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렇게 해서 회담이 무사히 끝났다. 사일런스 백작의 외교적 수완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사일런스 백작의 충실한 들러리라는 것 역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반데라스 왕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씩 일어섰다. 지니마저 일어서자 나도 일어섰다. 하지만 유독 한 엘프만 일어나지 않고 있어 나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내가 보모도 아닌데 왜 맨날 저 애를 업어야 하는 건가? 난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돌려 사일런스 지니를 보았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지니는 겸손하게 말했다. “이 모두가 아이언스 공작님 덕분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미리 진명과 훈족에게 손을 써놓지 않으셨던들 어찌 이런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아이언스 공작님의 선견지명 덕분입니다.” 이게 무슨 라이레얼이 라이코스 잡아먹자 라이미안이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냐? 자리에 일어나 있던 헤리오의 귀족들과 왕족에 속하는 반데라스 왕자는 모두 입을 쩍 벌리고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 그럼 그 모든 것들을 아이언스 공작이 미리 손을 써두었단 말인가?’ ‘회담 내내 가만히 있길레 바보인 줄 알았는데 역시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제자라는 건가?’ ‘과연 사일런스 백작이 스스로 밑에 있기를 자청할만 하군. 대체 어떻게 손을 썼길레 수년간 꼼짝하고 있던 진명과 훈족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단 말인가?’ ‘아이언스 공작의 능력이 사일런스 백작보다 위라는 건데 그럼 대체……?’ ‘어찌 저런 인물이 아이리스에는 둘씩이나 있단 말인가? 아아! 하늘은 어찌하여 헤리오에 저런 인물을 내려주지 않는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하더니 아이언스 공작의 지혜가 아이언스 이그리드님 못지 않구나.’ 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한지 본인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난 지니의 미소를 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재주는 사일런스 지니가 넘고 이득은 아이언스 히로가 챙긴다. 즉, 지금 지니는 자신의 공을 전부 나에게 덥어 씌우려는 생각이다. 아! 내가 진정한 정치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진정한 정치인은 간도 없고 쓸개도 없고 배알도 없고 수치심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아서 기자가 ‘어디어디에 3000평에 이르는 땅을 소유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라고 물었을 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전 모르니까 비서한테 물어 보세요’ 아니면 ‘재산 관리는 장모님께서 하고 계십니다’ 아니면 ‘노후를 대비하느라 땅 좀 사놓을 수 있지 뭘 그런걸 가지고 그러시나요?’ 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들이다. 이들에게 일반인 수준의 양심과 수치심을 기대하면 안 된다. 일반인은 너무나도 창피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닐 정도의 수치심을 느낄 일도 진정한 정치인들은 얼굴 한번 붉히지 않는다. 내가 진정한 정치인이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사일런스 지니에게 ‘하하하! 다 내 덕분인 줄 아세요’ 라고 당당하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반인이었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 일도 없는데 괜히 인사치례 받고 공을 세운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이다. 아! 진정한 정치인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역시 옛말 틀린 것 없다.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어도, 정치인은 아무나 못 한다.’ 회담이 끝났기에 더 이상 왕궁 안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우리는 여러 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왕궁을 나섰다. 인사를 할 때마다 나를 존경과 감탄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귀족들의 눈빛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데라스 왕자의 눈빛. ‘니가 그렇게 잘났어? 니가 그렇게 잘나서 감히 세레나양의 마음을 사로 잡아? 난 아직 니가 세레나양의 손을 잡은 사실을 잊지 않고 있어! 두고 봐! 세라나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나다.’ 그 눈빛을 마주보고 있다니 격려까지 해주고 싶더라. ‘그래. 열심히 사로잡아라. 난 이제 진정한 사랑을 찾아 세레나에게서 떠나련다.’ 왕궁을 나와 대로를 걷는 나의 등에는 무거운 짐이 얹혀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하하! 뭘요. 뭐 별로 무겁지도 않으니 그렇게 부담되지도 않아요.” 웃기는 소리. 많이 무거워서 굉장히 부담된다. 칼리는 안쓰럽게 죄송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고, 그때마다 나는 괜찮다는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괜찮지 못하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 밤에도 실컷 자더니만 왜 맨날 이상한 곳에 잠이 드는 거야? 상대가 라이가 아닌 루시아였다면 내 허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기쁜 마음으로 업고 다닐텐데. 난 고통을 잊기 위해 지니에게 말을 걸었다. “뜻하신 대로 일이 처리 되어 기쁘시겠습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전부 아이언스 공작님 덕분입니다.”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요.” “정말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계시지 않으셨던들 제가 어찌 이번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전부 아이언스 공작님의 공입니다.” 지니가 자꾸 헛소리를 해대니 차마 부끄러워 고개를 들수가 없어 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진명과 훈족에게 손을 썼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정확히 말한다면 진명쪽에만 손을 썼지요. 훈족들이 움직인 것은 진명이 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요?” “전부 칼리님 덕분이었습니다.” 칼리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난 고개를 갸웃 거리며 지니를 보았고 지니는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상아탑과 진명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겁니다.” “뭐 조금은 알고 있지요.” 상아탑은 하나의 도시이자 국가이다. 하지만 고지대에 살고 있는만큼 자체적 식량 생산 능력이 부족하고 실제로는 아예 식량을 생산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상아탑이 배부르게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이유는 진명의 무상 원조 때문이다. 그것도 아무 조건 없이 마법 발전을 위한 원조라며 말이다. 상아탑이야 국가의 이득에 의해 움직이는 집단이 아니니 진명과 뒷거래가 있을 거라는 추측은 하기 힘들다. “사실 예전에 진명쪽에서 상아탑을 통해 아이리스와의 회담을 제의해 왔습니다. 충분히 우리를 도울 의사가 있다는 표현이었지요. 그래서 전 칼리님을 통해 북방의 훈족이 아토리아의 국경을 침략하게 해달라고 진명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 청이 먹혀들어 갈지는 미지수였지요. 하지만 진명은 조건 없이 이 청을 수락하였습니다.” 칼리가 진명과 아이리스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거군. 어쩐지 요즘 바빠보이더라. 그런데 진명이 그렇게 쉽게 움직였다니 믿기가 힘든데. 진명도 분명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리 한 것일텐데. 난 잔머리를 총동원하여 진명의 속셈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 지니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지니를 보았지만 지니는 그저 웃음만 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거지? 역시 알 수 없는 인간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금 내가 할 일은…… 맞다! 라이레얼! 아! 또 다시 두통이! 목 주위에 찝찝하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 내린다. “야! 침흘리지마!” 칼리가 보고 있는데 이걸 쥐어 팰 수도 없고. 정말 미치겠다. 모두가 달콤하게 잠을 자는 시간. 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입에 불붙은 담배를 문채 창가에 서 있었다. 깊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뭐 깊은 생각을 할 때 꼭 이런 포즈를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밤길을 오고가다 멋진 나의 모습을 보고 혹시나 반할 여자가 있을까 해서 최대한 폼을 잡고 있는 것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꽤 있었다. 수도니까 치안이 잘 되있어 범죄률이 적나보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창가에 서 있는 내 모습에 반한 여자는 없었다. 아아! 이 곳의 여자들은 너무 보는 눈이 없어. 뭐 설사 눈이 멀었거나 정신이 이상한 여자가 나한테 반해 이 곳까지 올라 온다 하더라도 ‘전 사귀는 여자가 있습니다’ 라고 말할 생각이지만. 난 아무래도 박력이 부족한가 싶어 한 쪽 발을 창틀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한팔을 다리에 걸치고는 인상을 쓰며 담배 연기를 뻑뻑 내 뱉었다. 거기 지나가는 아가씨! 여기 멋진 남자가 있어요! 여길 좀 봐요! 똑똑똑-!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아마도 나에게 반한 아가씨가 너무도 나와 얘기하고 싶은 나머지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고 벽을 타고 2층으로 올라와 창문을 두드리는 것이 확실하다. 그럼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없지. 아가씨를 맞이 해야겠군. 난 일단 창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러자 왠 앵무새 하나가 잽싸게 안으로 들어왔다. 앵무새는 빤질빤질한 얼굴로 감히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 보았다. 으음, 옆집 앵무새가 길을 잘못 찾아왔나보군. 난 앵무새의 대가리를 틀어 쥐고 밖으로 창밖으로 내던졌다. 그런데 이 놈의 앵무새가 파다닥 거리며 다시 안으로 날아 들어오더니 나에게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뭔 짓이야!?” 앗! 앵무새가 말을 한다! 아! 앵무새는 원래 말을 할 줄 알지. 난 다시 앵무새를 잡아 창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이 놈이 다시는 못들어 오도록 재빠르게 창문을 닫았다. 앵무새는 쏜살 같은 속도로 날아왔지만 내가 창문을 닫는 속도도 쏜살 같았기에 목이 끼고 말았다. “야! 빨리 열어!” 내가 미쳤다고 여냐? 난 힘을 주어 창문을 닫았다. “어억! 야! 목 부러져!” 니 목 부러지지. 내 목 부러지냐? 내가 어떻게 공작 자리에 올랐는지 니가 알기나 해? 난 이제까지 남을 밟고 일어섰다. 남의 고통을 나를 위한 발판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고보면 나도 참 인생을 더럽게 살았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느라 힘이 느슨해진 사이 앵무새는 좁은 틈을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난 기가막혀서 앵무새를 향해 외쳤다. “야! 니가 뭔데 여기 들어와?” “나야 나! 나 모르겠어?” “니가 누군데?” “나 영물이잖아.” 영물? 영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라이코스의 특기 중 하난데. 난 앵무새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흰색 부리에 빨간색 깃털. 깃털 끝은 초록색와 푸른색 계열로 아름답게 장식 되어 있다. 이리 보아도 앵무새고 저리 보아도 앵무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었으니 첫째는 머리 위에 바짝 서있는 깃털 세 개가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눈이 파란색이라는 것. 으음, 설마 이 앵무새가 라이코스일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하는 짓이나 생긴 걸로 봐서 라이코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색깔이 앵무새이니 라이코스라 부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생긴 모습이 라이코스와 붕어빵이니 라이코스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다. 어떻게 이런 특이한 앵무새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너 라이코스 맞지?” 앵무새가 고개를 끄덕인다. 난 앵무새를 붙잡고 소리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라이코스는 부리를 벌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파하하! 이게 다 삶의 지혜라는 것이지. 나라고 언제까지 라이레얼에게 당할 것 같냐? 난 지능 지수가 월등히 뛰어난 영물이라고.”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 여자에게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조금 머리를 썼지. 너 카멜레온 알지?” “물론 알지.” “그 카멜레온은 천적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의 색깔과 자신의 몸 색깔을 똑 같이 만든단다. 풀 속에서는 녹색으로, 나무 위에서는 갈색으로 말이야. 그래서 나도 보호색을 사용하기로 했지. 우하하! 어때 나의 책략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게 보호색이냐? 염색이지.” “그게 그거지.” 그런데 정말 신기하다. 진짜 깃털색이 앵무새랑 똑 같잖아. “페인트로 칠한거야?” 라이코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깃털의 색깔을 바꿨어.” “깃털이 리트머스 종이도 아닌데 그냥 막 변해?” “그게 다 내가 영물이니까 가능한 거야.” 미치겠다. 정말 쓸데없는 재주만 골라서 가지고 있구나. 라이코스는 날개를 쫙 펼쳐 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때? 앵무새처럼 보이지?” 난 어이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앵무새처럼 보이기는 한다만.” “우하하! 좋았어. 그럼 라이레얼도 날 알아보지 못할테니 이제 당당하게 세상에 나설 수 있겠군. 아아! 나는 왜 이렇게 머리가 좋을까?” 스스로 감탄하는 모습이 꼴불견이다. “아! 맞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 라이는 어디갔니?” 똑똑똑-! 노크 소리가 굉장히 부담스럽다. 난 문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세요!” 하지만 매너가 없는 상대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아장아장 걸어 들어왔다. 새하얀 원피스 잠옷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군. “니가 이 시간에 여기에는 어쩐일이냐? 어린아이는 잘 시간이야. 당장 방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누워.” “낮에 많이 자서 잠이 안 와요.” 너 그럴 줄 알았다. 그러니까 낮잠은 적당히 잤어야지. 라이는 눈을 비비며 방긋 웃었다. “라이랑 같이 놀아요.” 난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이 어린아이의 입에서 같이 놀자는 말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올 수가 있는 것일까? 이건 완전히 나를 자기 친구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쉽게 말하자면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거다. 하지만 어린아이한테 뭐라고 할 수는 없으니 참도록 하자. 난 손가락으로 매에서 앵무새로 이미지 변신을 확실히 성공시킨 라이코스를 가리켰다. “정 놀고 싶으면 이 앵무새랑 놀렴.” 라이는 라이코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코야!” 라이코스는 라이를 향해 반갑게 날개를 흔들었다. “라이야!” 대체 어떻게 라이는 앵무새로 변장한 라이코스를 한번 알아 볼 수 있었던 거지? 이 것이 설마 사랑의 힘이라는 건가? 이런 삭막한 세상에 아직 그런 힘이 남아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 “우아앙! 이코야!” 라이는 이제는 앵무새가 된 라이코스를 와락 껴안았다. 라이의 커다란 눈에는 어느새 구슬 같은 눈물이 덩그렁 맺혔다. “그동안 어디 갔었어, 이코야? 라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어? 정말 너무해.” “미안해, 라이야. 그 여자의 위협 때문에 나 어쩔 수가 없었어. 흑흑, 그 여자 너무 무서워.” 라이코스도 그 동안의 설움이 복받쳤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라이와 라이코스는 한 동안 서로를 부둥켜 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은 메마른 나의 가슴에도 한줄기 비처럼 다가왔다.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해 온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엘프와 조류의 사랑과 우정은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 사람들의 동심을 일깨워 주리라. 하지만 일깨워 줄 때 일깨워 주더라도 지금 당장은……. “이 것들아, 왜 남의 방에서 생쇼야? 니들 방으로 가서 해.” 그렇다. 역시 나에게 동심(童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난 동심보다는 돈과 권력이 더 좋아. 동심이 밥 먹여 주냐? 내가 가라고 해도 갈 라이 패밀리가 아니다. 간만에 다시 뭉친 라이 패밀리는 현재 재회의 기쁨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난 진지하게 고민을 하였다. 이 것들을 당장 창밖으로 던져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말이다. 결국 난 창밖으로 던지기로 결정하고 라이 패밀리한테 다가갔는데 눈물을 그친 라이코스가 나에게 말했다. “아! 내가 깜빡 잊고 말 못 했는데 너 그거 알어?” “니가 말 하는 ‘그거’ 가 뭔지 알면 아는지 모르는지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훈족이 장성(長城)을 뚫고 아토리아의 본토로 진격해 들어갔어. 가루다 장군의 군대는 가루가 되서 패주했고. 아마 지금쯤 변방에는 난리가 났을 걸.” 그 말이 너를 살렸다. 난 라이 패미리가 계속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기로 하였다. 난 문을 박차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1층에는 아이리스의 훌륭하신 참모 사일런스 지니 백작님께서 어떻게 하면 아이리스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고 계셨다. 지니는 계단을 내려온 나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난 지니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훈족이 장성을 뚫고 아토리아의 본토로 진격해 들어갔답니다. 라이코스의 주둥이에서 나온 확실한 정보에요.” 지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분명 말하건데 지니에게 있어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는 것은 매우 놀랐다는 감정 표현이었다. * * * * 아토리아의 변방, 그것도 최전선인 장성(長城)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가루다 장군이었다. 가루다 장군의 나이는 55세.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지만 아직도 정정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루다 장군은 젊었을 때만해도 중앙의 군대를 지휘하는 잘나가는 장수였다. 하지만 강직한 성격 탓에 여러 귀족들과의 의견 충돌이 잦았고 결국 32세가 되던 해에 변방으로 좌천 되었다. 가루다 장군은 한 마디 의의 없이 귀족 회의의 의견을 충실히 따랐다. 그 이유는 본인은 좌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훈족들은 더 이상 변방을 침략해 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미개하고 흉폭한 민족이기에 언제든 아토리아를 향해 칼날을 겨눌 수가 있다. 멍청한 귀족들은 훈족이 영원히 침략해 오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훈족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잠 들어 있는 거다. 그 잠이 깨기만 하면 분명 이 곳을 공격할 것이다. 가루다 장군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온 힘을 기울여 장성의 수비를 굳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다행히 귀족들은 훈족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잊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 동안 숱한 약탈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피해를 입은 터라 훈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았다- 그렇기에 본토에서의 물자와 인력 수급은 원할이 이루어졌고, 가루다 장군은 성벽을 더 높게 쌓고,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자신이 뜻한 일을 전부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변방의 군대는 강해져만 갔다. 장성 수비는 7만의 군대가 1년을 주기로하여 이교대제로 운행 되었다. 즉, 7만을 3만 5천 씩 둘로 나누어 1년은 앞의 군대가 주둔을 하고 다음 년에는 뒤의 군대와 교대를 하는 식이었다. 이 방식은 상당히 효율적이었던 관계로 군사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게다가 둔전제를 택하여 본토에서 끌어오는 군량의 양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좌천을 시켜 놓았더니 그곳에서 적응하여 잘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일부 골빈 귀족들은 복장이 뒤집혔다. 복장이 뒤집힌 귀족들은 즉시 국왕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했다. ‘가루다 장군이 수상합니다. 수년간 한번도 접전이 없는 곳에서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대규모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 사료 됩니다.’ 간단히 말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 하다는 얘기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가루다 장군은 굉장히 분노하였다. 뭐 분노하여서 군대를 몰고 수도로 진격한 것은 아니고 단신으로 말을 몰고 수도로 진격했다. 그리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비장하게 말했다. ‘저의 가족들이 전부 수도에 있는데 제가 어찌 감히 반란을 일으키겠습니까? 부디 소신을 믿어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믿어 주기도 뭐한 국왕은 그냥 믿기로 한다. 그리고 어차피 변방에서 썩을 인간이기에 귀족들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왕의 신임을 얻은 가루다 장군은 더욱 열심히 장성 수비에 종사한다. 가루다 장군이 20년 이상 열과 성을 다해 매달린 장성은 그 견고함을 이루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언제 어느 곳에서나 남 잘 되는 꼴은 못 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대체 100년도 넘게 전쟁 한번 일어나지 않은 곳에 왜 그렇게 많은 군대가 주둔해 있어야 합니까? 차라리 그 군대를 남하시켜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그 군대를 남하시킬 때 지휘권은 자신의 직계 가족이 갖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이 것은 아리스트 공작의 의해 저지 되었다. ‘북쪽의 장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입니다. 그 곳에 군사들이 포진하고 있는한 훈족들은 절대 아토리아를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 곳이 뚫린다면 수십만의 군대로도 그들을 막기가 힘들 것입니다. 이는 물이 가득찬 댐에 나있는 작은 구멍을 돌맹이로 막고 있는 격입니다. 돌맹이로 막고 있는 한 댐의 물이 범람할 리는 없지만 만약 그 돌맹이를 빼버린다면 댐은 순식간에 무너저 내릴 것입니다.’ 구구절절이 옮은 말이다. 이리해서 가루다 공작은 아직까지 무사히 장성을 수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가루다 장군의 기분이 심히 언짢았다. 나이가 들면서 지병이 되어버린 치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하 중 하나가 아끼는 거울을 깨트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애인에게 온 편지를 읽으며 온갖 발광을 해대는 병사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얼마 전 이상하게 생긴 흰색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히로는 바보라네! 라이는 나의 친구라네!’ 라고 외치고 지나간 일은 조금 관련이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기분이 언짢은 이유는 얼마 전 들려온 소식 때문이었다. 테무진이라는 자가 훈족 7개 부족을 통합해 군사를 일으켜 국경 부근에 있는 진명의 요새를 공격하였다. 요새는 하루도 안 되 훈족들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훈족들은 요새에서 탈취한 엄청난 양의 군량과 무기를 가지고 지금 이 곳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 굉장히 잘 짜여진 각본이었다. 진명의 군사력은 대륙 전체가 알아줄 정도로 최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변방의 요새가 하루도 안 되 떨어지다니. 게다가 변방의 요새에 왜 3만의 군대가 3개월 이상 먹을 수 있는 군량과 3만의 군대가 장비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는가? 아토리아가 장성을 쌓은 후, 그리고 진명이 식량 원조를 해주기 시작한 후부터 훈족은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부족간의 다툼은 늘 있었지만, 지금처럼 7개 부족이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은 근 100년만에 일이었다. 훈족들은 진명을 아버지 나라로 섬기고 있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 진명의 국경을 침범하여 요새를 공격한 것인가? 아마도 진명과 훈족들 사이에는 모종의 계약이 있었을 것이다. 진명은 일부러 군량과 무기를 요새에 가져다 놓고 훈족들이 처들어 오자 저항 한번 해 보지 않고 요새를 내주었다.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 훈족들은 더 이상 진격해 들어가지 않고 물자들만 챙겨 아토리아로 방향을 틀었다. 완벽한 눈가리고 아웅하기였다. 이 일의 배후에는 진명이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진명이 훈족을 이용해 아토리아를 공격하는 것이다. 가루다 장군은 재빨리 진명에게 서신을 보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저 미천하고 미개한 훈족들이 군사를 일으켜 감히 폐하의 땅을 침범한 것으로 앎니다. 그런데 귀국(貴國)께서는 어찌하여서 그들을 토벌하지 아니하고 놓아두시는 지요? 부디 군사를 일으켜 저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훈족들을 토벌하시어 폐하의 위엄을 세우시옵소서.> 진명에서 답장이 왔다. <자국(自國)은 현재 내정이 불안하여 군사를 일으킬 입장이 되지 못 합니다. 훈족들이 감히 자국의 국경을 침범하고 유린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니, 추후 중신들의 의견을 모아 군사를 일으킬 생각입니다. 아토리아가 이렇게 진명 변방의 요새에까지 관심이 짙은 지 몰랐습니다. 귀국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국경이 침범 당한 걸 가지고 니들이 왜 난리냐는 내용이었다. 추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했지만 그 ‘추후’ 라는 때가 될 때쯤이면 아토리아의 장성은 쑥대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일을 꾸며 놓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 분명하였지만, 특별히 무슨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표면적으로는 훈족이 진명을 공격한 것이다. 피해를 입은 국가가 가만히 있는데 자신들이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조차 없었다. 기마부대의 진군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진명의 행동으로 봐서 군사적 원조는 꿈도 꿀 수 없다. 결국 3만 5천의 군대만으로 이 장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도로 서신을 띄웠지만 언제쯤 연락이 닿을 지는 알 수 없었다. 테무진이 자신의 부족을 포함해 모은 7개 부족의 군대 수는 3만 9천에 이르렀다. 그것도 전부 기마부대로 말이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은 뻔했다. 하지만 이 쪽은 높은 성벽에 의지하고 있었다. 우회로가 없기 때문에 훈족들은 어쩔 수 없이 공성을 해야만 할 것이다. 공성을 할 경우 말에 타고 있다는 사실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말에 익숙해진 그들이기에 더 불리할 수도 있다. 가루다 장군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하였다. 이번 기회에 훈족의 공격을 확실히 막아내기만 한다면 수도 내의 골빈 귀족들의 입을 한번에 꼬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장성의 수비는 완벽했다. 자신이 20년이나 몸을 바친 곳이다. 절대 미개한 훈족따위에게 무너질 곳이 아니다. “적이다!” 망루에서 정찰을 하던 병사가 소리쳤다. 그 외침은 곧 3만 5천 군대 전체에게 퍼져 나갔다. 가루다 장군은 나이가 들어 이제는 조금 비대해진 몸에 갑옷을 두르고 성벽으로 올라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는 기마병과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 기치들. 4만에 이르는 훈족의 기병대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언제 여기까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역시 경기병을 주축으로 하는 기마부대 다운 속도였다. 하지만 이 것은 상상을 초월하지 않은가? 가루다 장군은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어 당장 적이 공성을 하더라도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진열이 화려하게 짜여진 3만의 기마병을 보니 기가 질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적의 진영에서 깃발을 든 병사 하나가 말을 몰고 다가왔다. 병사는 화살이 미치는 범위 내까지 다가와 서툰 공용어로 소리쳤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 곳을 공격할 것이오! 죽기 싫으면 성문을 열고 항복 하시오!” 기가 막히는 얘기였다. 가루다 장군의 심복이 맞서서 소리쳤다. “니들은 어찌하여 군사를 몰고 우리를 공격하려 드느냐?” “우리가 필요한 것은 식량이오! 100만명이 겨울을 날 수 있을만큼의 밀을 바친다면 군대를 물리도록 하겠소!” 아까보다 더 기가 막히는 얘기였다. 옆에 있던 부관이 활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상대는 협상할 생각이 없으니 죽이려는 것이다. 화살을 오늬에 먹였을 때 가루다 장군이 손을 뻗어 제지하였다. “놈은 잔챙이일 뿐이다.” 부관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명령에 따라 활을 내렸다. 테무진은 입술을 굳게 닫고 끝이 없을 것처럼 쌓여진 장성을 바라 보았다. ‘저 곳을 넘는다.’ 원래 장성 너머 뮤헨 지역까지는 훈족들의 땅이었다. 그것을 저들이 빼앗은 것이다. 훈족은 수년간 아토리아의 변방을 약탈하면서도 단 한번의 죄책감도 느껴본 적 없었다. 예전의 자신들의 땅이었으므로 그곳에 있는 식량을 가지고 오는 것을 당연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은 장성을 쌓아 그것을 막기 시작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들의 손발을 묶은 것이다. 만약 진명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인구의 3할 정도가 죽었을 것이다. ‘대 진명(大 秦明)의 국왕 폐하께서는 우리에게 저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셨다.’ 테무진이 말 없이 오래도록 한 곳만 바라보고 있자 사마의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사마의는 본래 진명 태생으로 생김새부터가 훈족과는 완전히 틀렸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도 흠 잡을데 없는 유창한 훈족 언어였다. 테무진은 손가락으로 성을 가리켰다. “저 곳을 넘을 수 있겠나?” 무뚝뚝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훈족 언어. 사마의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친’ 께서 원하신다면 가능 합니다.” ‘친’ 이란 수장(首將)을 가리키는 훈족 언어였다. 테무진은 여전히 무뚝둑한 투로 말했다. “돌아가자.” 테무진의 명령은 순식간에 장수들에게 전달 되었고 장수를 통하여 병사에게 전달 되었다. 테무진의 군대는 질서 정연하게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루다 장군은 혀를 내둘렀다. ‘통솔력이 제법이군.’ 기마대가 물러서는 모습은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후미에 있던 부대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속도에 맞추어 다른 부대가 움직인다. ‘과연 7개 부족의 수장이 될만 하군.’ 훈족 기병은 약 2km 정도 군대를 물린 뒤, 그곳에 진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상하리만치 장성과 가까운 위치에 진채를 세운 것이다. 날이 저물 때쯤이 되서야 진채는 완성 되었다. 가루다 장군은 부관들과 함께 망루에 올라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렇게 성벽과 가까운 거리에 진채를 세우는 것은 병법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기습을 당할 위험이 있을뿐더러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채와 성벽의 높이를 비교하자면 당연 성벽이 높다 할 수 있다. 이 정도 거리면 망루 위에만 올라서도 진채의 모습을 어느 정도 파악 할 수 있었다. “역시 미개한 종족은 어쩔 수가 없군요. 병법의 기본조차 모르다니.” 부관은 조소까지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가루다 장군은 부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진채를 살피는데 주력하였다. 진채에는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어 대낮이나 다름 없었다. 병사들은 곳곳에 모여 서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통째로 굽는 말고기의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오는 듯 했다. 말들도 흥분을 했는지 수만 마리의 말들이 발굽으로 땅을 찍어 댔다. 왁자지껄한 술파티는 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몰랐다. 기운이 넘치는 훈족의 병사들은 발을 구르고 기괴한 훈족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등 거의 미쳐 날뛰다시피 했다. “아직 부족간의 결속이 완벽하지 않은 모양이군. 잔치를 벌여 군심을 끌어들이고 있어.” “지금 기습하는 것이 어떨까요?” 부관의 제안에 가루다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됐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음 놓고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면 분명 뭔가 대비를 해 놓았겠지.” “과연 저들이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썼을까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어.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출병하지 않는다. 성문을 굳게 닫고 오직 지키기만 한다.” “하지만…….” “성벽에 의지하고 있는 한 저들은 국경을 넘어 올 수 없어. 괜한 모험을 해서 군사를 잃어 이곳이 뚫리기라도 한다면 큰 일이네.” 부관은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가루다 장군의 말대로 유인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 * * * “적의 기습을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테무진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이제까지 진채 안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병사들은 그야말로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만약 이 상황에서 적이 기습이라도 한다면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깨질 것은 분명하였다. 사마의는 붓을 내려 놓았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가루다 장군의 성격은 대범하지 못합니다. 지키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공격하는 것에는 문외한(門外漢)이지요.” “어떻게 그것을 장담하나?” “저 장성은 가루다 장군이 20년 넘게 심혈을 기울여 방어한 장소입니다. 그는 장성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요. 만약 지금 기습을 한다면 장성이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는 그것이 억울해서라도 장성을 전장으로 삼으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언가에 의지하고 있는 자는 모험을 하기 싫어하는 법입니다.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마도 지금 가루다 장군은 망루에 서서 이 곳을 내려다보며 기습을 유도하려 술책을 부린다 생각할 겁니다.” 테무진은 사마의의 말에 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해는 되지 않았다. “그래도 대비를 해두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만약 기습을 당하면 끝장이다. 사마의는 절대 기습이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테무진은 계속 ‘만약’ 이 마음에 걸렸다. 사마의는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붓과 벼루를 한쪽으로 치우고 탁자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장군께서는 3만의 기병을 이끄는 훈족의 수장입니다. 장군께서 이리 불안한 모습을 보이시면 저 밑의 것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난 불안하지 않다.” “그럼 한잔 하시지요. 이 술은 진명에서도 구하기 힘든 술로 최상급 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마의가 술의 마개를 열자 향긋한 술냄새가 막사 안에 가득 퍼졌다. 테무진은 냄새만으로도 최상급 명주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테무진은 말 없이 사마의의 반대편에 앉았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마시고 싶은 것이다. 사마의는 업어져있던 청자기 술잔 두개를 자신과 테무진의 앞에 놓고 술을 따랐다. “이 술의 이름은 진로(眞露)라 합니다. 그 형과 맛이 아침 이슬을 모아 놓은 것 같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술은 진로라는 이름의 걸맞게 맑고 투명한 무색이었다. 특유의 향기만 없다면 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자 그럼 한잔 드시지요.” 사마의와 테무진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승리를 위해.” 사마의는 한 마디 붙인 다음 술잔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테무진 역시 잔을 기울였다. 순간, 정신이 아늑해지며 눈 앞이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 안을 테울 듯 아찔한 열기는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오한이 들만큼 싸늘하게 식었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은 바뀌었을 때만큼이나 순식간었다. 테무진은 입을 열어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열기와 차가운 냉기가 함께 섞여 입 밖으로 빠져 나갔다. 작은 잔으로 한 잔만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테무진이 술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테무진은 방금 전 병사들과 어울려 대접으로 곡주를 몇 사발이나 들이켰지만 조금의 취기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술이 셌다. “한 순간에 온 취기는 서서히 나갑니다.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말하는 사마의의 얼굴 역시 빨개져 있었다. 테무진은 대답 대신 술잔을 내밀었다. “장군께서 이 술을 마음에 들어하니 다행입니다.” 둘은 그렇게 밤 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 * * * * 다음날. 훈족 기병이 모습을 드러낸 때는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이미 망루에서 적들이 집결하는 모습을 지켜본 터라 아토리아의 군대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사마의는 성벽 위에 배치된 병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입니다. 성벽이 높고 단단한데다 군사들도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수성전의 대가인 가루다 장군이군요.” 말을 한 것은 사마의의 첫째 아들 사마사였다. 사마사의 옆에 있는 사마소가 형의 말을 받았다. “저 정도면 능히 10만의 군대를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사마사와 사마소. 이 둘은 사마의의 첫째, 둘째 아들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참모였다. 사마가(司馬家)는 문관 집안으로 대대로 많은 문관을 배출해 냈다. 하지만 이들 중 사마 삼부자는 특히 유명하였다. 진명에는 유명한 모사 가문이 둘 있는데 하나는 사마가이고 다른 하나는 제갈가(諸葛家)이다. 국가를 위한 책략이 모두 이 두 가문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가문이 있는 한 진명은 절대 망할 수가 없었다. 테무진의 명령에 따라 기병들이 일제히 성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훈족의 기병들은 멍청하게 성벽을 기어오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성벽을 횡(橫)으로 달리며 각궁을 꺼내 화살을 쏘았다. 생각지 못한 공격에 아토리아의 병사들은 당황하였지만, 이내 위협이 되지 못하는 공격이라는 것을 깨닫고 응사하기 시작했다. 이 날의 전투는 훈족이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않은 관계로 양쪽 모두 별 피해 없이 종결 되었다. 진채로 돌아 온 테무진은 사마의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냥 공격하는 것이 낫지 않나?” “공성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질게 뻔한 데다 설사 이긴다 하더라도 피해가 큽니다. 장군께서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들은 싸우기 위해 모였다. 병사들은 지금 불만에 쌓여있다.” “그거 큰일이군요. 병사들이 불만에 쌓이면 아무래도 통솔력이 약화되고 사기도 떨어질테니까요.” “어찌해야 좋은가?” “불만을 풀어 주어야지요. 잔치를 벌이십시오. 될 수 있는 한 화려하고 시끄럽게.” 테무진은 사마의의 말에 잘 따랐다. 보초도 세워두지 않고 낮부터 밤까지 질펀하게 술잔치를 벌인 것이다. 자연 병사들의 불만은 풀렸고 사기 또한 올라갔지만,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기만 해야하는 다른 병사들은 계속 불만이 쌓여갔다. “출병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적들은 지금 술에 취해 저항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놈들의 얕은 술책이야!” “멍청한 말자식들이 어찌 술책을 쓰겠습니까? 저들은 지금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자만에 빠진 겁니다.” “어찌되었든 출병은 절대 안 되네.” “장군님!” “그 입 다물라!” 부하들이 몇 번이나 건의를 했지만 가루다 장군의 대답은 무조건 ‘NO’ 였다. 자연 병사들과 부하들은 불만이 쌓이고 쌓였다. 심지어는 ‘가루다 장군이 무서워서 전쟁을 포기하였다’ 라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두 군대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다. 한쪽은 갑옷까지 풀어 헤치고 술을 마시며 소리를 질러댔지만, 반대쪽에서는 완전 무장을 한 채 보초를 서고 있었다. 밤마다 술잔치는 벌어지고 그때마다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아토리아의 병사들은 속으로 이를 갈아야만 했다. 성 밖에 진채를 세우고 죽치고 앉아 술잔치를 벌이길 정확히 열흘. 오후 4시쯤 테무진이 이끄는 훈족 기병대가 다시금 장성 앞에 집결하였다. 성벽에 서 있는 가루다 장군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예감했다. ‘총 공센가?’ 가루다 장군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들었다. 테무진이 칼을 들어 올리며 훈족어로 소리친 것이다. “돌격하라!” 훈족 기병대는 말에서 내려 성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응사하라!” 성벽에 포진해 있는 궁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훈족들은 용감하게 충차를 이끌고 성문으로 돌진하였다. 쿵-! 충차의 뾰족한 부분이 성문을 강타하였다. 가루다 장군은 목청을 높혀 소리쳤다. “반드시 놈들을 막아야 한다! 이 곳이 뚫리면 본토가 위험하다! 니들 가족들이 훈족에게 죽게 된단 말이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가루다 장군의 말에 병사들은 더욱 힘을 내어 적들을 공격하였다. 대부분 병사의 가족들은 장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다. 이 곳이 뚫리면 내 가족들이 죽는다는 생각에 아토리아의 병사들은 온힘을 다해 저항하였다. 돌을 떨어트리고 기름을 부었다. 밑에 있는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어떤 이는 돌이 머리에 맞아 뇌수를 쏟으며 죽었고 어떤 이는 1000도가 넘는 기름에 온 몸이 녹아 내렸다. 하지만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앞 사람이 죽어나가면 그 뒷 사람이 붙었고, 그 사람이 죽으면 또 다른 사람이 붙었다. 쿵- 쿵- 쿵- 충차는 계속해서 성문을 두르렸다. 하지만 성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이길 수 있다!’ 가루다 장군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적은 벌써 수천이 죽어나갔지만 아군의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다. 이 것이 수성을 하는 자와 공성을 하는 자의 차이였다. ‘멍청한 미개족들.’ 저들은 공성을 하면서 기껏 충차 한 대만 준비해왔다. 성문만 공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성전에는 사다리가 기본이다. 사다리는 침투 루트를 많이 만들어 줄 수 있고, 그만큼 공격 범위가 넓어진다. 이들의 공격은 성문에만 집중 되어있기에 방어 할 범위도 그만큼 줄어 들어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이 수 많은 적들을 죽일 수 있었다. 뒤쪽에 서있는 궁기병들이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지만 그리 위협이 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가루다 장군은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적들이 집요하리만치 성문만을 노리는 것이다. 공격이 한 지점에 못 박히게 되면 접전 부위가 줄어들게 된다. 자연…… “적의 피해도 줄어 든다.” 이제까지 수천의 적을 죽였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성문만 공격하는 만큼 적들이 한번에 많이 나서지 못한 것이다. ‘대체 왜 이런 무식한 전법을 펼치는 거지?’ 지금 훈족의 행동은 마치 이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 했다. 가루다 장군은 훈족의 전열을 바라보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적의 기병수가 2만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간격을 벌리고 기치를 많이 세워 전군을 끌고 온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죽어나간 숫자와 지금 성벽을 공격하는 숫자를 합치면 대략 5천. 그럼 나머지는……? 가루다 장군의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성문을 격파하던 병사들은 충차를 놓고 물러섰다. 뒤에 진열해 있던 기병들도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 순간 물러서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가루다 장군과 병사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어찌할지를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하던 가루다 장군은 부관의 외침에야 정신을 차렸다. 때마침 어딘가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만신창이가 된 병사 하나가 말을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병사는 굴러 떨어지듯 말에서 내렸다. 병사는 그 자리에서 절규하듯 외쳤다. “동쪽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적들이 지금 그 곳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가루다 장군은 기가 막혔다. 한 순간, 이 병사가 지금 농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멀쩡하던 성벽이 왜 무너진단 말이냐?” “땅굴입니다! 적들이 땅굴을 파서 지반(地盤)을 무너트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가루다 장군의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훈족은 공성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만 조금 싸우는 듯 하고 물러난 뒤 진채 내에서 하루 종일 술만 마셨다. 진채를 2km 떨어진 곳에 세운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사마 삼부자는 미리 장성 주변을 순찰해 지반이 약하고 감시가 적은 부분을 찾아냈다. 그리고 도발하 듯 성벽 가까이에 진채를 세운 것이다. 다른 병사들은 술을 퍼마시는 사이 수백의 병사들은 막사 안에서 땅굴을 팠다. 병사들이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고 난리를 친 덕에 땅굴을 팔 때 나오는 소리와 진동은 교묘하게 감추어졌다. 거리가 가까운 덕에 땅굴은 금방 성벽에 다달았다. 그리고 오늘 본대가 공성을 하는 사이 별동대는 땅굴 전체를 무너트려 성벽의 지반을 가라 앉게 하였다. 당연 지지대가 없어진 성벽은 하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별동대는 적들의 시선이 본대에 몰려있는 사이 재빨리 공격해 들어갔다. 땅굴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가루다 장군도 어찌된 상황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럼 가까운 곳에 진채를 세운 것과 술잔치를 벌인 것. 공성을 한 것 등이 모두 책략이었단 말인가?’ 개개인이 기마(騎馬)에 신들린 병사들이 것만 훈족의 군대는 약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두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통솔력이 약하다는 것. 이들은 부족 연합체다 보니 구심점이 완벽하지 않았다.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자기 부족을 이끌고 전장을 이탈하는 경우도 많았다. 두 번째로는 참모진이 없다는 것이다. 전쟁은 단순히 군사의 머릿수와 용맹함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략 참모와 전술 참모가 모두 있어 군에 나아갈 방향을 확실히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훈족들은 첫 번째 문제는 해결한 적이 있어도 두 번째 문제는 해결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런 책략을 짜냈단 말인가? 저 미개한 훈족들이 그런 생각을 했나? 놈들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이런 실책을 범하다니. “장군님!” 가루다 장군은 고개를 들었다. 부관이 황급히 말했다. “빨리 명령을.” “당장 군사를 몰고가 놈들을 막는다.” 어떻게든 본대와 별동대가 합류하기 전에 막아야 한다. 성벽을 무너뜨렸다 해도 그 범위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가루다 장군은 남아있는 군대를 거의 이끌고 동쪽 성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상대는 기껏 5천 정도에 불과하나 2만 정도의 군사만 보내 적들을 상대하고 무너진 성벽을 방어한다. 그리고 나머지 군사로는 성문을 지켜야 했다. 물러서던 본대는 순식간에 둘로 갈라섰다. 5천 정도의 군대만 병동대와 합류하러 가고 나머지 군대는 다시 우회한 것이다. 가루다 장군과는 달리 접전 지역이 한정되있는 이상 많은 군사를 보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 사마 삼부자의 생각이었다. 본대는 순식간에 성문 앞으로 돌아와 성벽을 향해 빗발치듯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병사들은 다시금 충차로 성문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단 2, 3천의 군사만 성벽 위에 남아 있었더라면 충분히 수만의 군대를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병사는 겨우 수백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나름대로 필사의 저항을 해보았지만 빗발치는 화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쿵-! 저항이 없는 적들 덕에 성문은 금방 박살났다. “진군(進軍)!” 테무진의 외침에 1만 5천 정도의 본대는 일제히 부서진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별동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던 가루다 장군은 성문쪽에 들려오는 굉음에 일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다. “적들이 성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부관의 외침이 허무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적들은 처음부터 별동대와 합류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군사들의 발을 이쪽에 묶어 놓고 자신들은 성문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장군님!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가루다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나를 믿고 이 곳을 맡기셨다. 그런데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 지금 내가 어찌 내 한 목숨 건지자고 도망갈 수 있겠나?” 부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상관과는 언제나 의견이 충돌하였다. 이제 곧 죽을 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말이다. “자네나 어서 몸을 피하게. 이제 다음달이면 자네 아기가 태어나지 않은가?” 상관이 아닌 아버지 같은 말투였다. 부관이 말했다. “저도 도망갈 생각은 없습니다. 웬 일로 장군님과 의견이 일치하는 군요.” “그래. 내 생각에도 처음인 것 같군.”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부관은 말을 몰고 적들에게 돌진하며 소리쳤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놈들을 막아라! 우리 등 뒤에는 가족들이 있다! 이 곳이 무너지면 그들의 목숨도 끝장이다!” 그 말은 즉효약이었다. 밀리던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다. 하지만 미친 듯이 날뛰는 기병들을 막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애수(哀愁)가 섞인 눈동자로 전장을 바라보던 가루다 장군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덩치가 다른 말보다 1.5배 정도 큰 말을 타고 있고 덩치가 남들보다 2배는 큰 남자였다. 남자는 손에 보검을 들고 몸에는 붉은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홍포(紅袍)는 오직 진명의 왕족만이 입을 수 있었다. 남자가 그 것을 걸쳤다는 것만으로 진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진명의 국왕이 하사했을 것이다. 무론 당사자는 그가 임의로 홍포를 걸쳤다고 주장하겠지만 말이다. 남자가 훈족어로 말했다. “그대가 가루다 장군인가?” 가루다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테무진이군.” 변방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가루다 장군도 어느 정도 훈족어를 할 수가 있었다. 테무진은 보검을 들어 올렸다. 가루다 장군은 보검을 뽑아 들었다. 일기투(一騎鬪)를 하기에는 몸이 너무 비대해져있었고 체력도 많이 저하 되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테무진이 먼저 움직였다. 가루다 장군은 말의 허리를 박차고 맞서 달려 나갔다. 1671년 10월 16일 갑작스런 훈족의 공격에 의해 아토리아의 장성은 무너지고 만다. 가루다 장군은 죽었지만 그의 부관인 가르시언은 겨우 살아남아 생존자들을 이끌고 퇴각한다. 생존자는 부상자를 합하여 대략 7000을 헤아렸지만, 대부분이 부상자인 것을 가만할 때 피해는 극심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가가 훈족의 참모진을 맡고 있다는 사실에 아토리아는 분개하였지만 진명은 태연하였다. <사마의와 그의 두 아들은 감히 반역을 일으키려 하였다.> 사마 삼부자가 역모를 하다 적발 되어 훈족의 땅으로 피신을 한 다음, 그들과 손을 잡고 진명을 공격하고 아토리아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것을 강조한 이 문서에 아토리아는 격분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기에 속으로 삭이는 수 밖에 없었다. 진명이 뒤를 봐주고 있는 훈족들의 힘은 쉽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1671년 10월 20일 국경을 넘어 온 훈족 기병들은 아토리아를 유린하기 시작한다. 훈족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당황한 아토리아는 아이리스를 공격하려던 예비병력 10만을 변방에 투입하기에 이른다. 발등에 붙은 불을 꺼야지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난 발걸음도 무겁게 레이트 백작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라이는 어제 밤 새도록 라이코스와 놀다가 지금 자는 중이다. 그래서 지금 내 기분이 그나마 낫다. 만약 라이까지 있었다면 내 기분은 최악이었을 것이다. 지니는 지금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왕궁에 가 있다. 난 그 동안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레이트 백작가로 가는 중이고. 달그락- 달그락- 흰 백마가 이끄는 사두마차가 길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마차의 모습으로 보건데 타고 있는 사람의 신분이 굉장히 높을 것이다. 아이언스 공작이 몸소 걸어가는데 어떤 싸가지 없는 자식이 감히 마차를 타고 다녀? 그래도 마차 주인이 그렇게 싸가지가 없지는 않은지 지나가는 사람 다 깔아 뭉게며 무지막지하게 달리지 않았다. 옆사람, 뒷사람, 앞사람 잘 보며 조심스럽게 안전 운행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달린다 하더라도 마차는 사람보다 속도가 빠르다. 마차는 어느새 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난 마부의 얼굴을 한번 째려봐 준 뒤 길 한쪽으로 비켰다. 저건 뭐야? 왜 근위병들이 마차의 뒤를 따라 오는 거지? 마차 안에 역적이라도 타고 있나? “아이언스 공작님 아니십니까?” 나의 예상과는 달리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역적이 아닌 왕자였다. 마차는 어느새 내 옆에 멈춰 있었다. 반데라스 왕자는 문을 열고 내렸다. 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왕자님이시군요.” 반데라스 왕자는 나를 향해 엄청난 적대감을 느끼고 있을테지만 겉으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레이트 백작가로 가는 길입니다. 잠깐 일이 좀 있어서요.” “저도 마침 레이트 백작가로 가는 길입니다. 목적지가 같으니 괜찮으시다면 제 마차에 오르시도록 하지요.” 공짜로 태워준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난 한번이 사양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 다시 마차는 움직였다. 마차의 내부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호화스러웠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금딱지들하며 보석들. 우리 둘은 잠시 아무 말 않고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 반데라스 왕자의 표정을 보니 심히 불편한 것 같다. 심히 불편한 정도가 아니가 그 정도를 조금 넘어섰다. ‘니가 레이트 백작가에는 왜 가는데? 세레나양을 만나러 가지? 그렇지? 니가 뭔데 세레나양을 만나? 니가 그렇게 잘났어? 별로 생기지도 않은 게 왜 그렇게 세레나양에게 찝적 거리는 거야? 너 내 손에 한번 죽어 볼래?’ 뭐부터 대답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지금 반데라스 왕자의 모습을 보건데 이 인간이 밤마다 내 이름을 붙여 놓은 인형에 못을 박지 않을까 상당히 의심 된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가슴이 아팠어. 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는 어쩐 일로 레이트 백작가를 찾으시는 지요?” “그, 그건…….” 순간, 말문이 막히는 왕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 얼굴 보러 간다고 알아 두마. 지니에게 들었는데 헤리오 국왕의 몸이 어느 정도 좋아져서 오늘은 일어날만 하덴다. 그래서 이미 협상을 끝마친 일을 문서로 작성하는 것은 직접 한다고 한다. 그래서 왕자가 이렇게 밖으로 산책을 나온 것이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레이트 백작가에 왜 가시는 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실례가 되. 난 장난기가 일었다. 어디 어떻게 반응하는지 좀 살펴 볼까? “저야 당연 세레나를 만나러 갑니다.” 파직-! 왕자의 인상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니가 뭔데 세레나양을 만나? 그리고 세레나가 뭐야? 니가 뭔데 존칭도 안 붙여? 괜히 세레나양한테 친한척 하지마.’ 친한척 하는 게 아니라 친한 거다. 왕자는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지만 이미 일그러질데로 일그러진 표정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얼마 전 아는 사람에게 들은 얘긴데…….” 내가 워낙 낮고 어둡고 조심스러운 투로 얘기했기에 반데라스 왕자는 바짝 긴장하였다. “반데라스 왕자님께서 세레나양을…….” “무, 무슨 소립니까! 아니, 그런 유언비어는 어디서 들으셨는 지요? 저, 전 아닙니다. 전 세레나양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제가 세레나양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절대 아닙니다.” 난 웃음을 지었다. “전 아직 아무 말 안 했는데요.” 반데라스 왕자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떠나간 열차라. 이렇게 쉽게 유도 심문에 걸려들다니. 이거 완전 바보 아니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레이트 백작가에 도착했다. 반데라스 왕자는 한껏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마차에서 내렸고, 뒤따르던 근위병들도 말에서 내렸다. 난 5명의 인원이 단체로 움직이는 모습에 혀를 차며 유유히 레이트 백작가로 걸어 들어갔다. 불안, 초조, 긴장. 물론 내가 이랬다는 것은 아니다. 난 위의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거든. 난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몸을 길게 뒤로 기대고 있었다. 이런 나와는 반대로 반데라스 왕자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두 손을 맞잡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세레나양이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솔직하게 보고 싶어서 왔다고 대답할까? 아니야. 그럼 한번 봤으니까 돌아가라고 할 수도 있다. 아악!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냥 심심해서 놀러왔다 그러면 되지. 뭘 저렇게 고민하고 앉아있냐? 반데라스 왕자의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세레나가 응접실로 내려 온 것이다. 오늘은 약간 연한 하늘색 드레스에 옅은 화장. 머리 스타일은 그냥 꼬아서 묶은 정도군. 세레나가 응접실로 들어오자 반데라스 왕자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안녕하십니까, 세레나양?”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자님도 안녕하세요?” “에 예.” “그런데 무슨 일로 이 곳에……?” 내가 저 질문 나올 줄 알았어. 드디어 반데라스 왕자의 최대 위기가 닥쳤구만. 땀이 삐질삐질, 주르륵 주르륵. 라이의 눈물만큼이나 많이 나오는 구나. “제, 제가 이, 이곳에 온 이……유는 그게…….”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오는 길에 만나서 내가 여기까지 태워 달라고 부탁 드렸어. 그렇지요, 왕자님?” 반데라스 왕자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 예. 아하하! 예. 그렇습니다. 그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불쌍해 보여서 한번 도와줬다. 세레나는 반데라스 왕자에게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싸늘한 눈빛과 딱딱한 말투. 너무하는 군. 이제 끝난 사이라 해도 이렇게 차갑게 대해도 되는 거야? “나야 당연 라이레얼 만나러 왔지. 라이레얼 위에 있지?” 세레나는 팔짱을 끼며 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 만나러 여기까지 왔어요? 안 됐네요. 그 여자 지금 집에 없거든요.” 대체 그 비웃는 듯한 말투는 뭐냐? “아! 그래. 그런데 라나는 왜 안 내려오냐?” “그걸 몰라서 물어요? “모르니까 묻지.” “당신 얼굴은 보고 싶지 않데요.” 으음, 충격이 컸나 보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어쩌겠냐?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니 나이 또래의 애를 만나서 좋은 가정을 꾸리길 바래. 7살이란 나이차를 어쩌겠니? 반데라스 왕자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상당히 기분 나빠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쯤이면 나도 세레나양과 저렇게 자연스럽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걸까? 아! 빨리 사이를 진전시켜야 하는데 미치겠다.’ 심히 나를 부러워하고 있군. 그래. 열심히 해 봐라. 나의 격려에 힘을 얻었는지 반데라스 왕자는 세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흠흠. 저, 저기…….” “저 이 남자와 할 얘기가 있으니 왕자님께서는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세요.” 반데라스 왕자가 말도 붙여보기 전에 냉기를 풀풀 풍기며 나온 세레나의 말. 반데라스 왕자는 놀란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어찌하여 세레나양이 이 남자와 둘만 있으려 하는 걸까? 설마 난 방해꾼이었단 말인가? 이럴 수가! 안 되요, 세라나양. 제발 저를 봐주세요.’ “빨리 좀 비켜주세요.” “……예.” 멀어지는 왕자의 뒷 모습이 초라해 보여 가슴 아프다. 잘 가요, 왕자님. 왕자가 나가자 세레나는 나를 팍 째려보았다. 난 그 눈빛에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래?” 잠시 후, 세레나는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요?” 아까와 같이 살벌한 목소리가 아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여자가 누군데?” “당신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아이리스의 공주요.” “루시아 말이구나. 물론 좋아하지.” 순간 세레나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보다 좋아해요?”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음악 소리.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러냐? 난 괜히 머리를 긁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거 비듬이 많아서 자꾸 가렵네. 일주일째 머리를 안 감았더니. 아하하!” 세레나는 반쯤 지그시 감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향기로운 향수 냄새가 그녀의 몸에서 흘러 나온다. 이봐. 그런 눈빛으로 날 보면 어떡해?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난 크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세레나가 나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또 한걸음. 세레나의 얼굴은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원래 예쁜 건 알았지만, 오늘은 조금 심각하게 예쁘다. 대체 세레나의 뒤에서 번쩍거리는 저 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것이 후광(後光) 효과? “야 야! 좀 떨어져.” 세레나는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끈적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제가 싫어요?” “누, 누가 싫데?” 세레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이것은 분명 키스 해 달라는 신호다. 분명 말하지만 나는 루시아를 사랑한다. 하지만 여자 쪽에서 이렇게 나오는데 피하는 것은 남자가 할 짓이 아니다. 아니, 남자가 할 짓이 아닌 게 아니라 안 하는 놈은 남자도 아니다. 생각해보라 여자 쪽에 이렇게까지 용기 있게 나섰는데 남자가 싫다고 고개를 획 돌리면 여자는 어떻게 되는가? 이럴 때는 여자쪽에서 무안하지 않게 요구에 응해주는 것이 마땅이 남자로서 해야 할 일이다. 이 세계에서는 그것을 기사도(騎士道)라 부른다. 난 세레나의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미안해요, 루시아.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키스 한번만 하고 끝낼게요. 이해해 줄 수 있지요? 예? 이해한다고요. 하하! 역시 그대는 이해심이 많군요. 돌아가서 그대에게도 해 줄게요. 키스는 거의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런데…… “이 파렴치한 자식! 이게 무슨 짓이냐!?” 퍼억-! 어디선가 반데라스 왕자가 튀어 나와 내 면상을 후려 갈겼다. 무방비 상태였던 나는 꼼짝 없이 나가 떨어졌다. “네 녀석이 감히 세레나양을 범하려 들다니! 내 이 곳에서 네놈과 결판을 내겠다.” 누군가가 지금 들어와 이 상황만 목격한다면, 내가 세레나를 강제로 범하려 했고, 그때 마침 반데라스 왕자가 나타나 세레나를 도와준 걸로 알 것이다. 물론 나는 억울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인마!” 아이언스 공작의 성격 더러운 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한 대 맞으니 정말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왕자든 뭐든 너 죽었어. 설사 이 일 때문에 동맹 파토나도 좋아. 내가 이번 기회에 내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 주지. “너 오늘 죽었어! 감히 날 건드렸다 이거지! 나 뚜껑 열리면 왕자고 뭐고 없어!” 반데라스 왕자는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이 파렴치한 자식이! 내가 세레나양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네 놈을 가만 두지 않으마!” “웃기고 있네! 스토커 같은 자식이!” 1 대 1이라. 해볼만 하겠군. “무슨 일입니까, 왕자님?” 우르르 몰려오는 근위병들. 1 대 5. 그냥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 지성인끼리 무슨 주먹다짐이냐? 난 그런 원시적이고 무식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아. 난 당장 저 놈을 쥐어 패고 싶은 것을 참으며 단지 노려보기만 했다. 반데라스 왕자는 세레나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며 내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레나양. 제가 저 파렴치한 놈에게 예의라는 것을 가르쳐 주도록 하겠습니다. 나 헤리오 반데라스는 네 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 결투라면 당연 1 대 1이겠지? 난 ‘좋다. 맞짱 한번 뜨자’ 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세레나가 말했다. “반데라스 왕자님.” “예. 세레나양.” 반데라스 왕자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혹시 결투를 시작하기에 앞서 손수건이나 양말, 혹은 속옷 등을 건네줄까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손수건이나 양말까지는 이해를 하는데 어떤 여자가 미쳤다고 속옷을 건네주냐? 꿈 깨, 인마. 세레나는 반데라스 왕자가 원하는 것들은 건네주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짜악-! 멋지게 뺨을 한대 올려붙였다. 순간, 얼어붙은 반데라스 왕자와 입을 쩍 벌리는 근위병들. ‘저 것도 왕족 폭행죄에 속하나? 체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뭘 그렇게 열심히 고민하니? “세, 세라나양.” 반데라스 왕자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세레나를 불렀다. 세레나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세레나는 잠시 울먹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 본 반데라스 왕자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그래. 사실 니가 맞을 짓을 좀 했어. 기껏 분위기 다 잡아 놨는데 거기서 초를 치면 어쩌니? 이런 호기를 놓칠 내가 아니다. 남의 슬픔은 나의 기쁨. 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일국의 왕자라는 분께서 레이디를 울리시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반데라스 왕자는 아무 말 없이 세레나가 떠난 자리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큰 정신적 충격에 정신이 나갔나 보다. 난 크게 소리쳤다. “왕자님께서 세레나를 울리신 겁니다! 누가 세레나를 울렸냐고요? 물론 왕자님께서 울리신 겁니다. 방금 뛰쳐나가는 세레나의 모습을 보셨지요? 세레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는 아시죠? 왕자님 때문입니다. 아아! 착한 세레나가 어째서 반데라스 왕자님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 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눈물은 천금보다도 값진 것인데.” 왕자는 여전히 아무 반응 없었다. 난 왕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왜 세레나를 울리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우하하! 재밌다! 니가 키스하는 거 파토 낼 때부터 알아 봤어! 내 키스씬을 방해했으니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지. 랄라랄라! 반데라스 왕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뺨을 맞았다네! 스토커 같이 난리를 치더만 결국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네! “으아악! 이게 아니야!” 반데라스 왕자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해진다. 위로는 못 해줄망정 불을 지르다니. 한 동안 왕자의 절규가 이어졌다. 근위병들은 무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난 황급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닙니다. 혼내려면 세레나를 혼내세요.” * * * * * * 반데라스 왕자의 절규가 멈춘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근위병들도 밖으로 나가고 해서 현재 응접실에 남아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난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러게 왜 괜히 끼어들어서 화를 자초하십니까?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반데라스 왕자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니가 세레나양을 범하려 했기 때문에!”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나보다. 공작한테 막말을 하다니. 말 놓는 건 나의 주특긴데 말이야. 난 코웃음을 쳤다. “웃기고 있네! 누가 누구를 범해? 그 때 세레나는 나를 꼬셔서 키스하려 했던 거야. 모르는 거야, 모른 척 하는 거야?” “거, 거짓말 하지 마!”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세레나한테 한번 물어 볼까?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완전히 초를 쳤으니 세레나가 화를 냈지, 안 그러면 뭐 하러 화를 내냐?” 반데라스 왕자는 ‘듣고 보니 그렇네’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튼 잘하는 짓이다. 여자한테 뺨 맞고, 여자를 울리고.” 난 손가락을 번쩍 들어 반데라스 왕자를 가리켜 말했다. “니가 세레나를 울렸어. 그 청순하고 가련한, 순진하고 순수한, 아름답고 청초한 세레나의 눈가에 눈물을 맺히게 했다고!” “으윽!” 반데라스 왕자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니가 울렸어! “윽! 제발 그만해.” 왕자는 괴로운 듯 신음을 내뱉으며 머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이쯤 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발광해 소리 지르면 근위병들이 다시 달려올 테니 말이다. 반데라스 왕자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세레나양과 니가 키스를 하려 한 거지?” “후후후! 그것을 몰라서 묻냐? 당연 세레나가 날 좋아하기 때문이지.” 일그러지는 반데라스 왕자의 얼굴. “아니, 좋아한다는 표현 정도로는 부족하군.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듯 하군.” “윽!” 표정 변화가 참으로 다양하다. “헛소리 하지 마!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자꾸 그렇게 진실을 왜곡하려 하면 곤란하지. 난 예전에 세레나가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있어줬던 사람이라고. 원래 사람은 위험하고 외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어 하지. 그때 세레나는 나의 멋진 모습에 완전히 반했어. 뭐, 어찌 보면 사귀었다고 할 수도 있지.” “사, 사귀었다고?” “아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금은 완전 끝난 사이라 할 수 있으니까. 세레나가 좋은 여자기는 하지만 나는 다른 여자가 생겼거든.” 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반데라스 왕자의 괴상한 표정은 바뀔 줄을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반데라스 왕자는 문득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너 왜 반말 써?” 그래. 드디어 그걸 깨달았구나. “니가 반말 쓰니까.” 거의 완벽에 가까운 대답이다. “내가 너보다 두 살이나 많아.” 만만치 않은 반격. 난 조소를 지었다. “남자가 그렇게 쪼잔 하게 구니 세레나가 싫어하지.” “뭐?” “아까 나와 세레나의 거리감 없는 대화를 못 들었냐? 상당히 부러워하는 것 같던데. 그렇게 몇 살 안 되는 나이차에 신경을 쓰고, 세레나에게 깍듯이 존대를 쓰니 세레나가 싫어하지.” 당황하는 반데라스 왕자. “그, 그건 최소한의 예의야.” “그래, 그래. 너는 예의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것이 세레나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군.” “윽!” 상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번 승부는 아무래도 나의 승리로 화려하게 막을 내릴 것 같군.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반데라스 왕자를 놔두고 응접실을 나갔다. 나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한 마디 했다. “아! 참고로 난 예전에 세레나와 키스를 한 기억도 있어. 뭐, 세레나한테는 첫키스였다고 할 수 있겠지.” 뒤로 넘어가는 반데라스 왕자. 나의 KO승. 퍼펙트Perfect가 아니었다는 것이 조금 아쉽군. 난 유유히 응접실을 빠져 나오며 서 있는 근위병들에게 말했다. “병원차 부르세요.” * * * * “괜히 시간만 허비했네.” 난 레이트 백작가를 나서 지부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골목 한쪽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와 내 몸에 부딪혔다. 나는 뒤로 넘어졌고, 그 누군가도 뒤로 넘어졌다. “아니,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의 자식이 앞도 안 보고 뛰어다녀? 야! 니가 여기 웬일이야?” 내 앞에 넘어져있는 사람은 라이였다. “오빠!” 라이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와락 껴안았다. 라이는 무서운 일이라도 당했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이빨을 따닥따닥 부딪치고 있었다. “너 왜 그래?” 공포에 질린 얼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모습이다. 난 라이를 다독여 주다가 바닥에 누워있는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저건 라이코스잖아. 라이코스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라이코스도 공포에 질려있는 듯 몸의 깃털이 빳빳하게 서있고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야! 어떻게 된 거야?” “그, 그게요…….” 라이는 이빨을 부딪치며 얘기를 시작했다. 라이 패밀리는 잠에서 깨어나 맛있는 것을 사 먹기 위해 시장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만난 둘은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군것질을 하였다. 그런데 하필 그 곳에서 라이레얼을 마주친 것이다. 라이코스는 잠시 당황하였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앵무새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라이 패밀리가 라이레얼의 옆을 지나가려는 순간 라이레얼이 라이를 불러 세웠다. “야! 거기 꼬마, 스톱.” “왜 그러세요?” 라이레얼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라이와 라이코스를 살펴보았다. “아니 왠지 저 새를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라이코스는 뜨끔 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있었다. “우리 이코를 어디서 봤다 그래요?” 다행히 라이는 라이코스의 이름을 이코로 줄여서 부르고 있었고, 라이레얼은 라이코스와 이코가 동일한 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라이레얼이 라이코스에게 물었다. “넌 뭐야?” 라이코스는 씩 웃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 앵무새입니다.” “어라? 새가 말을 하네.” “앵무새는 원래 말을 할 줄 압니다.” “그래?” 라이코스는 자신의 계략이 멋지게 먹혀 들어갔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라이코스를 바라보는 라이레얼의 눈빛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흐음. 어디선가 한번 본 듯한데 말이야.” 라이코스의 몸에서 땀이 삐질삐질 흐르기 시작했다. “하하! 절 언제 봤다고 그러세요? 전 댁 같이 아름다운 분은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하! 예. 물론이지요.” “하긴 내가 앵무새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하하! 그러시군요.” 라이코스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색한 웃음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히 라이레얼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너 그거 알아?” “예? 뭘요?” “앵무새는 정력에 좋다던데…….” 그 걸로 대화는 끝났다. 라이레얼은 순식간에 눈이 뒤집혀 라이 패밀리를 덮쳤고 라이 패밀리는 간신히 라이레얼의 손을 빠져나와 도주하였다. “결국 앵무새로 변장한 것도 다 소용 없는 짓이었구나.” 탄식이 절로 나온다. 라이코스는 라이의 품에 안겨있었다. “흑흑. 라이야, 나 무서워.” “걱정하지 마. 라이가 이코를 지켜 줄게.” 차라리 날 지켜줘라. 라이레얼 앞에 서면 나도 보호받아야하는 입장이다. 난 라이 패밀리와 함께 지부로 돌아왔다. 문을 들어서니 사일런스 지니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나요?” “물론 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아이리스로 돌아가는 건가요?” 지니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지금 시국(時局)이 불안하오니 빨리 돌아가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오늘 저녁때쯤에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럼 드디어 루시아를 만나게 되는 건가? 겨우 며칠 그녀와 헤어져 있었는데도 그녀가 너무도 보고 싶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아무래도 돌아가는 것은 저 혼자가 될 것 같습니다.” “예?” 아니, 무엇 때문에? 누구 마음대로? 누구 좋으라고? “그럼 저보고 여기 남으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외교 사절로 진명에 가셔야 합니다.” “예? 제가 진명에요?” “예.” 대체 내가 왜 그곳으로 가야 하는 거지? “진명과 대략적인 얘기가 오고 가긴 했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이 길로 진명에 가셔서 삼국 연합을 책임져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 중요한 일인가요?” “아이리스의 존망(存亡)이 걸린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인간이 드디어 미쳤나보다. 그런 중요한 일을 나보고 하라니. “사일런스 백작님은 같이 가지 않으시고요?” “예. 저는 아이리스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진짜 미쳤구나. 언제나 내 뒤를 든든히 봐주고 있던 니가 없으면 나는 어쩌라고? 나 혼자 뭘 할 수 있어? “어째서 사일런스 백작님은 아이리스로 돌아가야 하는 거죠?” “지금 상황을 보아 예측하건데 이제 얼마 후면 본격적인 전쟁이 터질 것 같습니다. 전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군을 지휘해야 합니다.” 그렇다. 사일런스 지니는 전략 참모 겸 전술 참모. 아이리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참모다. 이 인간 없이는 전쟁을 벌일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진명으로 가시면 안 될까요?” “그럼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군을 지휘하실 겁니까?” 그럴 수는 없다. 나라 말아먹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 미쳤다고 그런 짓을. 지니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전 아이언스 공작님만 믿고 아이리스로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 혼자 뭘 할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혼자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동행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이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덜 떨어진 사람들과 같이 가더라도 혼자 보다는 둘이 나은 법이다. “라이미안님께서 같이 가주실 겁니다.”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칼리님께서는 아무래도 상아탑의 일들을 처리해야하니 라이미안님만 같이 가실 겁니다.” “점점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네요.” “라이미안님은 진명에 몇 번 가보신 적도 있으시고 그쪽 분들과 안면도 있으시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헤리오 쪽에 사신도 동행할 예정입니다.” “누군가요?” “아무래도 반데라스 왕자님께서 가시게 될 것 같습니다.” “진짜 최악이네요.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질 수 없다는 것에 굉장히 마음이 놓일 정도로 말이에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무 심한 기대는 걸지 말아주세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테니.” 저녁이 될 때까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칼리와 지니는 떠나기로 하였다. 칼리는 상아탑으로 돌아가고 지니는 아이리스로 돌아간다. 하지만 중간에 상아탑을 거쳐서 돌아가야 하니 같이 출발하는 것이다. 마법사들은 이미 오래전 준비를 끝마친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 이 곳에 왔던 장소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으아앙! 칼리가면 라이는 어떡해?” “울지 마세요, 라이미안님.” “흑흑, 라이가 너무 귀찮아서 떠나는 거지? 그런 거지? 으아앙! 라이 이제부터 착한 엘프가 될게. 자다가 오줌 싸는 일도 없을 거야.” 역시 이별 장면은 슬픈 법이다. 난 라이와 칼리의 이별 장면에 눈을 돌려 나의 이별을 준비하였다. “이제 떠나시면 언제 다시 뵐지?” “금방 보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세요. 그리고 루시아한테 제가 그 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들과 앞으로 이룰 업적 등을 최대한 과장하고 포장해서 전해 주세요.”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 하지 마십시오. 루시아 공주님만이 아닌 저희 누님께도 잘 전해 드리겠습니다.” “댁의 누님한테는 전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아이언스 공작님의 손에 아이리스의 존망이 달렸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실…….” “설마 제가 아이리스를 말아 먹기라도 하겠습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 경우가 있긴 하지. 잠시 후, 마법진은 발동 되었고 칼리와 지니는 뿅- 하고 사라졌다. 칼리가 없어진 허무한 공간에 주저앉은 라이는 펑펑 울었다. “엉엉엉!” 내가 이런 것과 같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혹시 그 인간들 날 보모로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야! 울지 마. 매일 같이 잔소리하는 여자도 없어졌으니 얼마나 좋니? 그렇게 슬퍼할 것은 없잖아.” 라이는 우는 와중에도 획- 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내뱉는 말이…… “오빠는 여자의 마음을 너무 몰라!” 벌떡 일어서서 후다닥 뛰쳐나가는 라이. 그리고 그 뒤를 따라는 앵무새. 휘이잉-! 여자의 마음? 아이야! 단어 선택이 틀렸구나. 그럴 때는 ‘여자의 마음’ 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 이라 했어야지. 진짜 저것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할지 심히 걱정 된다. 분명 말하지만 아이리스 망하면 전부 라이 탓이야. 우리의 출발 일자는 내일 오전으로 예정 되어 있다. 난 피로도 회복할 겸 일찍 잠자리에 들려 하였다. 그런데 손님이 찾아왔다. “니가 이 곳에는 어쩐 일이니?” 우리의 앞에는 찻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지금은 어린 아이는 잘 시간인데 어째서 날 찾아 온 걸까? 라나는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라나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오빠 정말 그 공주님이 그렇게 좋아요?” 푸우-! 입 안에 머금었던 차가 분수처럼 입 밖으로 빠져 나왔다. 별로 어린 아이가 물어 볼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그건 말이지……” 난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어떻게 얘기를 해야 라나가 충격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이 상황에서는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보다 조금 충격을 받더라도 확실하게 얘기를 해주는 편이 좋다. 그것이 라나를 위하는 길이다. 난 담담하게 말했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너무너무 좋아해.” 라나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보다 좋아해요?” 순간, 세레나가 질문 목록을 작성해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쩜 이렇게 질문하는 게 똑같냐? “난 루시아를 더 좋아해.” 미안하다, 라나야. 하지만 이게 내 진심이니 어쩌겠니? 라나는 한 동안 아무 말 없었다. 라나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것이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난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만약 내가 눈물을 닦아주거나 위로해준다면 그것은 미련만 더 남기게 되는 짓이다. 가슴 아프지만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 한참을 흐느끼던 라나는 눈물도 닦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 오빠가 정말 그 공주님을 저 보다 좋아한다면…….” 라나는 울음을 삼키느라 한 호흡 쉬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기분이다. 어째서 나는 이런 어린 여자아이의 가슴에 못을 박아야만 했는가? 이 다음에 이어질 말은 뻔하다. ‘제가 포기할게요.’ 나의 사랑을 위해 자신이 눈물을 머금고 떠나겠다는 얘기다. 라이레얼과는 굉장히 상반된 모습이다. “저 보다 좋아한다면…… 그렇다면…….” 라나는 울음을 삼키며 외쳤다. “전 세컨드라도 좋아요!” 세컨드. 영어 스펠링은 Second. 의미는 두 번째라는 뜻. 지금 이 상황에서는 루시아를 더 좋아하니 루시아랑 퍼스트First로 사귀고 자기는 덜 좋아하니 세컨드로 사귀자는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난 속으로 절규해야 했다. 그게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올 말이냐? 세상에 세컨드가 뭐야? 너 지금 나랑 장난 하냐? 사람은 때론 포기할 줄도 알아야하는 법이야. 세상에 남자가 없어 나 같은 놈의 세컨드가 되겠다고? 대체 얘는 왜 이러는 거야? 가정교육을 대체 어떻게 받았기에 어린 아이가 이렇게 조숙해? 진짜 미치겠다. 이건 라이레얼보다도 강적이잖아. “하하하. 라나야, 이 오빠는 말이지 한 여자만을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 “저도 오빠만을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요.” “그,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사랑은 쌍방간의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어. 작용을 했는데 반작용이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야.” “짝사랑도 사랑이에요.” KO패! 더 이상 말로는 이 애를 당해낼 수가 없어. 차라리 사일런스 지니를 상대하고 말지. 나는 일단 라이를 잘 타일러 집으로 돌려보냈다. 라나는 헤어지면서 ‘저는 영원히 오빠를 사랑해요. 오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라고 말했다. 난 라나를 배웅한 후에 방으로 올라왔다. “아이씨!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린다. 난 벽을 긁으며 탄식했다. “세상에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아이씨!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거야? 세상에 세컨드라니. 그게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올 말이야?” 벽을 긁는 정도로는 지금 나의 기분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난 주먹으로 벽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쾅쾅쾅-! “누가 제발 이 상황 좀 해결해 봐! 나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진짜 죽고 싶은 심정이다. 다음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산뜻한 모습으로 출발하려했던 의도와는 반대로 난 하루 사이에 폐인이 되어 있었다. “잘 잤어요?” 산뜻하고 귀여운 모습의 라이.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넌 이게 잘 잔 걸로 보이냐?” “눈 밑이 까매요.” “넌 하dig구나.” 난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마법진은 이쪽에서 그리니 내가 왕궁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궁에서 사람이 오겠지. 나와 라이 패밀리는 일단 아침 식사를 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내가 다시 잠이 들려 할 때쯤 왕궁에서 손님들이 찾아왔다. 반데라스 왕자와 근위대 4명. 내가 저 인간과 같이 가야한다는 것에 정말 가슴이 아프다. 반데라스 왕자는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도발인가? 하지만 겨우 그 정도 도발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난 반데라스 왕자를 마주보며 웃음을 지었다. “세레나한테 뺨 맞은 주제에 뭐가 좋아서 실실 웃고 있는 거냐?” 파직-! “시, 시끄러! 그리고 너 무슨 말버릇이 그 따위야? 나 왕자야.” “난 공작이야.” “내가 나이가 더 많아.” “진짜 치사하게 구네.” 난 라이를 반데라스 왕자의 앞에 세웠다. “이 애를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반데라스 왕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탑의 주인.” “맞았어. 얘가 바로 그 유명한 탑의 주인 라이미안이지. 나이는 700살이 넘었지. 이 아이는 너보다 나이가 적게 잡아도 680살 이상은 많으니까 넌 이 애한테 존댓말을 써야 돼. 알았어?” “그, 그러는 너는 왜 반말 써?” “그야 나는 나이에 별로 신경을 안 쓰니까 그렇지. 넌 나이에 굉장히 신경을 쓰니까 존댓말을 써야 하고.” 차마 헬로우 귀티 때문이라고는 말을 못 하겠다. 난 라이의 귀에 대고 말했다. “쟤는 반데라스 왕자라고 아직 19살 밖에 안 됐어. 니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반말 써야 돼. 알았지, 라이야?” 라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자 그럼 어서 반말해 봐.” 라이는 반데라스 왕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야!” “예?” 순간적으로 존댓말을 내뱉은 반데라스 왕자. 넌 잘 못 걸렸다. 지금 한번 존댓말을 썼으니 앞으로도 영원히 써야 할 거다. 라이는 상대가 존대로 나오자 상당히 기뻐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라이는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라이야. 잘 지내보자.” “아 예. 저는 헤리오 반데라스로 헤리오의 왕세자입니다.” 반데라스 왕자는 계속 존댓말을 내뱉으면서도 굉장히 어색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의 외모가 한참이나 어린 아이로 보이니. “라이야, 우리 이빨이나 닦으러 가자.” “예, 오빠.” 라이는 그렇게 말하고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반데라스 왕자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반데라스 왕자의 표정은 ‘나는 저 놈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째서 나는 저 어린 아이한테 존댓말을 써야 하고 저 놈은 반말을 쓰는 거지? 그리고 탑의 주인은 왜 나한테는 반말을 하고 저 놈한테는 존댓말을 하는 거지?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니가 완전 당한 거지. 마법진의 준비는 금방 끝났다. 어차피 상아탑을 거쳐서 가야하니 굳이 마법진을 따로 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출발하려하는 순간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저희는 왕자님을 보호해야 합니다.” 마법진의 정원은 다섯 명이다. 그런데 반데라스 왕자를 호위하는 근위병 4명이 자신들도 따라가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결국 한 동안은 시비 끝에 근위병 중 2명만 같이 가기로 하였다. 난 반데라스 왕자와 뒤에 시립해 있는 두 명의 근위병을 보고 혀를 찼다. “남자가 되어가지고 쪽 팔리게 남의 보호나 받고 있냐?” 발끈하는 왕자. 하지만 애써 태연하게 말하였다. “아직 진명을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혼자 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난 피식 웃었다. “웃기고 있네.” 결국 왕자는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웃긴다 그랬다.” “뭐가 웃겨?”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진명의 수도야. 만약 진명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호위병이 필요 없고, 만약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겨우 두 명으로 상대할 수 있겠냐? 니 뒤에 서 있는 그 놈들이 무슨 100만 대군이라도 되는 줄 아냐?” 반데라스 왕자는 ‘듣고 보니 그러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뒤에 서 있는 근위병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거라.” “하지만 저희는 왕자님을 보호해야 합니다.” “내 한 몸은 내가 지켜!” “여자한테 뺨 맞지만 않으면 잘 지킬 수 있을 거야.” “넌 조용히 해!” 왕자 치고는 성격이 굉장히 다혈질이다. 나한테만. 세레나 앞에서는 입도 못 여는 주제에. 막자란 티가 난다. 이렇게 하여 라이 패밀리, 나, 반데라스 왕자만 가기로 하였다. 마법사들이 자기 위치에 서서 마법진을 발동 시켰다. 저절로 입에서 한숨이 흘러 나왔다. 빨리 여자관계를 수습해야 하는데 수십 하기는커녕 어떻게 더 꼬여 버렸냐? 이러면 안 되는데. 옆을 보니 반데라스 왕자는 눈을 감은 채 뭐라고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레나양 저는 이 곳을 떠납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세레나양과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습니다. 부디 제가 돌아 올 때까지…….” 이런 스토커한테 시달리는 세레나가 불쌍하다. 잠시 후, 마법진이 발동 하였다. 눈을 떠보니 상아탑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른 마법진으로 바꿔 타야했다. 반데라스 왕자는 신기한지 이 공간처럼 생긴 이 곳을 열심히 두리번 거렸다. 마법진을 갈아 타는 데는 준비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라이는 그 사이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저 잘하고 올게요. 모두들 라이를 응원해 줘요.” 칼리는 상아탑에 있지만 라이가 또 울까봐 걱정돼서인지 이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윽고, 마법진의 준비가 끝났고 우리는 그 곳에 올라섰다. 다시 마법진 발동. 이 것도 많이 하니까 지겹군. * * * * * * * 파란 하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기와지붕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건물.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하얀 돌바닥이 쫙 깔린 야외였다. 마법진 바깥쪽에 마법사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난 놀라서 커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복장과 머리 스타일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세가 앞쪽에 붙은 공용어였다. 난 그 남자의 모습을 보고 기가 질렸다. 무늬가 들어간 파란색 옷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진나라 시대의 옷과 명나라 시대의 옷을 섞어 놓은 듯한 이상한 옷이었지만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틀어 올려 관을 쓰고 있는 머리카락은 분명 갈색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나의 물음에 라이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진명이에요. 오랜만에 와보네.” 아까 말을 건 남자가 다시 말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반데라스 왕자는 기가 막히는지 입을 쩍 벌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복장이 마냥 신기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주위에 각자 움직이는 사람들은 우리들을 신기하다는 눈길로 보고 있었다. 대체 이 곳은 어떻게 된 곳이지?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진명 - 01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상황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둘의 경계는 참으로 애매하다. 나 몇 개월 전만 해도 사람이 손에서 불꽃이 날아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지금은 내 손에서 불꽃이 나간다. 기사와 마법사가 판치는 세상. 심지어는 엘프에 드래곤까지 나온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니면 밥 빌어먹고 살기 힘들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진리인데 절대군주제인 나라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난 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해야 했다. 이해하지 않으면 어쩔건데? 내가 기사랑 마법사 다 죽여 버리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튼 나는 이해를 하기 위해 ‘아! 이 곳은 다른 세계구나. 다른 세계니까 마법사가 있을 수도 있고 드래곤이 있을 수도 있지. 다른 세계가 그렇다는데 딴지 걸 수는 없잖아’ 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난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믿을 수 있는 상황으로 바꿔 놓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상황과 믿을 수 없는 상황. 이 둘은 결국 선입견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생각해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믿을 수 있는 상황,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 사람이 현대에 와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 그건 믿을 수 없고 현대의 사람이 비행기를 보면 믿을 수 있다. 이제까지 나는 많은 선입견을 버려야 했다. 이 곳은 모든 것이 달랐으니까. 라이레얼 같은 여자도 있고, 라이 같은 엘프도 있다. 말 하는 매도 있고 루시아 같이 아름다운 여인도 있다. 수능 보면 400점 만점을 가볍게 받을만한 사일런스 지니 같이 잘난 인간도 있고, 나만 보면 이를 갈아대는 노처녀도 있다. 내가 예전에 살던 곳에는 이런 사람들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떠한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어떠한 믿을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예를 들면 노처녀가 루시아를 꼬셔서 결혼한다 던가, 사일런스 지니와 라이레얼이 사귄다던가, 라이가 갑자기 철 들어 라이코스를 잡아먹는다던가 하는- 믿게 만들 수 있었다. 노처녀와 루시아가 결혼한다는 상황은 절대 믿지 못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기만 해봐. 결혼식장을 초토화시켜 버릴테니. 아무튼 그래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현재 내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데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곳에서 쉬고 계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여기 있는 시비에게 말하면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치렁치렁한 비단 옷을 입은 남자는 고개를 숙으고 뒷걸음질 쳐서 물러났다. 난 천천히 방안을 둘러 보았다. 비단 이불이 깔린 침대, 벽에 걸려있는 동양화, TV쇼 진품명품에 가지고 나가면 최소 몇 억원을 나올 것처럼 보이는 환상적인 청자. 그리고 시비라고 칭해지는 단아하고 아름다운 세 명의 아가씨. 솔직히 마지막 게 제일 마음에 든다. 난 침대 옆에 짐을 풀어 놓았다. 세 명의 시비들은 마치 인형 같이 방 한쪽에 서 있었다. “저기요.” “예. 시키실 일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시비가 말하였다. 그래봐야 스물도 안 되 보였지만. 난 침대에 걸린 비단 커튼을 만지작 거렸다. 잘 때는 이걸 치고 자는 건가? 비단에 때 탈까봐 잠도 제대로 못 자겠군. “여기가 어딘지 혹시 알고 계시나요?” 시비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스쳐지나갔다. 확실히 이렇게 물어본 다면 저 시비가 할 말이라고는 ‘여긴 진명의 수도 낙양 중심부에 위치한 왕궁의 별관입니다’ 정도. “이, 이 곳은 진명의 수도 낙양…….” “됐어요!” 난 손을 내 저었다. 정말로 그걸 다 읊으려고 하면 어떡하니?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 단체로 식사라도 하러가시는 게 어떠세요? 식비가 없으면 제가 보태드릴게요.” “아닙니다. 그럼 저흰 물러나 있겠습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세 명의 시비는 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게 된 나는 한 쪽 발을 침대 위에 올려 놓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혼자 생각하는데 굳이 이런 자세를 취한 이유는 혹시라도 지니가는 여인들이 볼까봐. 아! 문이 닫혀 있군. 난 지나가는 여인들이 볼 수 있도록 문을 살짝 열어 놓고 다시 자세를 취했다. 진명(秦明). 어째 이름부터 수상하다 했어. 진명이라면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세운 제국의 이름에서 진(秦)을 주원장에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제국의 이름에서 명(明)을 따온 것이 아닌가? 낙양(洛陽). 세상에! 수도 이름이 낙양이란다. 낙양이라면 수천년에 걸쳐 수도 없이 수도로 지정 되었던 중국의 중요 도시가 아닌가?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안(長安)이라는 도시가 있는 지 물어 보았다. 있다고 대답하더라. 아아!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이 곳에 중국 문명이 펼쳐질 수 있단 말인가? 이 청자는 뭐야? 여기에 왜 봉황이 그려져 있어? 그리고 저기에는 먹으로 난이 그려져 있는 이유는 뭔데? 생각에 잠긴 나에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의 절대 감각은 이런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군. 설마 복도를 지나가다 나의 멋진 모습에 반해 들어 온 여자는 아니겠지?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아니군. “라이랑 놀아요!” 옆 방에 있는 라이가 내가 심심할까봐 라이코스와 함께 놀아주러 왔다. 난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라이야. 우리 뭐하고 놀까?” 행복해 하는 라이의 표정. 난 인상을 찡그리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놀긴 뭘 놀아! 내가 니 친구로 보여?” 두려움으로 파랗게 질린 라이의 표정. 그래. 난 저 표정이 마음에 들어. 난 파리를 쫓듯 손을 휙휙 내저었다. “방으로 돌아가라. 지금 나의 심기가 심히 심각하다.” “왜요?” 저 호기심이 가득한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 아! 어린아이의 이런 호기심이 아이큐IQ와 이큐EQ를 동시에 발달시켜 줘 창의력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법이지. “니가 그건 알아서 뭐하게? 당장 니 방으로 돌아가!” “시, 싫어요!” 이젠 객기까지 부릴 줄 안다. 역시 옛말 틀린 것 없어. 옛말에 영물과 어린 엘프는 3일에 한번씩은 패줘야 한다 그랬지. 특히 매과의 영물과 어린 여자 엘프의 경우는 한 대 팰 거, 두 대 패라는 주의 사항까지 옆에 적혀 있었지. “니들 맞아야 말을 듣겠냐?”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라이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라이코스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니가 뭔데 우리를 패? 니가 뭔데!? 니가 그렇게 잘 났어? 라이야, 우리 물러서지 말자. 폭력에 굴하는 것은 진정 용기있는 영물과 엘프가 할 짓이 아니야.” “그, 그래, 이코야.” 라이코스의 말은 라이 패밀리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더 불어 매를 벌었다. 퍽-! “왜 쳐!? 니가 뭔데 쳐!? 니가 그렇게 주먹이 세! 또 쳐봐!” 퍽-! “으아앙! 이코야!” 라이는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라이코스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라이코스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야,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폭력에 굴하지 말고 끝까지 항전 해.” “더 이상 말하지마, 이코야.” “아니야, 나는 이미 틀렸어.” “으아앙! 그런 말 하지마, 이코야.” 이것들이 진짜 사람의 염장을 지르는 구나. 라이코스는 몇 마디 말을 더 하다가 눈을 뒤집어까고 고개를 떨구었다. 라이는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노려 보았다. “흑흑, 너무해요!” “그 레파토리 지겹지도 않냐?” 간만에 깊게 생각 좀 해보려 했거늘 이 마저도 여의치 않구나. 감정을 실어 한숨을 내쉬는데 문 밖에서 시비가 외쳤다. “식사를 들이겠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줄줄히 줄을 지어 등장하는 음식들과 식기들. 전부 뚜겅이 덮혀져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냄새만으로도 비싸고 맛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라이와 라이코스는 하던 쇼를 멈추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밥이다!” 순간, ‘니들은 굶어!’ 라고 외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순식간에 방 안에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졌다. 난 혹시 독이 들지 않았나 검사해 보려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듯 싶었다. 라이가 하나씩 다 집어먹었거든. 더럽게 손으로 집어 먹다니. 라이가 다 먹기 전에 자리에 앉아서 조금 먹어두려는데 반데라스 왕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니가 여기 왜 왔냐?” “식사는 여기서 하라 그러던데.” 어쩐지 양이 너무 많다했다. 단체 밥상이었단 말인가? 난 자리를 내 주었고 반데라스 왕자는 사양하지 않고 앉았다. “아! 아까 언뜻 들어보니까 식사 후에 승상을 뵐 수 있을 것 같다는데.” “승상(丞相)?” “어. 국왕 다음 가는 권력자라는데. 이름이 아마 제갈량이었지.” 커억-! 순간 고깃덩어리가 목에 걸렸다. “라, 라이야! 물!” “여기요! 앗! 업질렀다.” 너 일부러 업질렀지? 날 죽이려고. “물!” “이거라도 드세요.” 라이는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동치미를 쭉 내밀었고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닌 나는 그것을 들이켰다. “아! 살았다.” 사람이 이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 호흡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오자 난 옆에 앉아있는 반데라스 왕자를 노려 보았다. “너 때문에 죽을뻔 했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자식이 농담을 해도 좀 제대로 된 농담을 해야지. 제갈량이 뭐냐, 제갈량이?” “제갈량이 뭐긴 뭐야? 이 나라 승상이지.” “이게 끝까지 헛소리 하네.” 난 반데라스 왕자를 향해 주먹을 들어보였다. 반데라스 왕자는 두려움에 떨기는커녕 분노에 찬 표정으로 젓가락을 양 손에 쥐었다. 어쭈! 니가 지금 이도류를 쓰겠다는 거냐? “밥상 앞에 두고 싸우지 말아요. 복 달아나요.” “그래. 우리처럼 좀 진득하게 먹을 수 없냐?” 너무나도 정확한 지적. 라이는 진득하게 앉아서 열심히 먹고 있었다. 이제보니 젓가락질도 아주 잘한다. 100점 만점 중에 98점을 주고 싶어. 단점이 있다면 너무 오랜 시간 입에 넣고 쪽쪽 빤다는 것. 난 조용히 자리에 앉으려다 문득 생각난 의문에 참지 않고 물어 보았다. “야! 그런데 니가 제갈량을 어떻게 아냐?” “이 나라 승상 이름이니까.” 당연히 알 수도 있지 않냐는 듯 대답하는 반데라스 왕자. 난 고개를 돌려 라이에게 물어 보았다. “라이야, 너 제갈량이라고 아니?” 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 좀 처먹고 빨리 대답 못해!?” 라이는 입 안 가득히 넣은 음식을 오물오물 씹어 삼킨 다음, 물을 한 잔 마신 뒤 대답했다. “예. 저 제갈량 알아요. 진명의 승상이에요.” 정말 승상 이름이 제갈량인가? 하하! 그래. 뭐 이름이 우연히 같을 수도 있는 거지. 라이미안, 라이코스, 라이레얼. 이 이름들도 다 비슷비슷하잖아. 세상에 같은 이름 한 없으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아가나? “아마 자(字)가 공명(孔明)이었지요.” 이어진 라이의 말에 난 그대로 얼어 붙었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고민에 빠졌다. 식후 담배 한대는 천상의 극락과도 비교될만 하지만 지금 나의 기분은 한 마디로 뭣 같았다. “이름 제갈량(諸葛亮). 자(字)는 공명(孔明).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몇 년 전 양반집에서 태어남. 약관의 나이에 유비를 만나 그의 모사가 됨. 천하를 삼분하고 한실의 중흥을 위해 수차례 위(魏)나라를 공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사망함.” 나의 머리가 아직 녹슬지는 않았구나. 그런데 대체 지금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이건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분명 뭔가가 있어. 아주 커다란 무언가가……라고 생각하진 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에 불과하다. 확실한 뭔가가 있어야 숨어있는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난 일련의 상황들을 정리해 보았다. 진명이라는 나라. 제갈이라는 성을 쓰고 이름은 량이며 자는 공명, 직위는 승상인 사람. 으음, 자료가 부족하군.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이유만으로 난 나의 짐작을 어느 정도 맞아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 밖에 계신 세 명의 아가씨! 객관적으로 평가해 셋 중 가장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만 방 안으로 들어와요!” 문 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가장 예쁜가 회의 중인가 보다. 잠시 후, 객관적으로 평가해 셋 중 가장 예쁜 시비 하나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묶어서 틀어 올린 검은색 머리, 백옥 같이 흰 피부에 갸름하고 아름다운 얼굴. 걸음걸이나 자태 등 행동거지도 완벽. 100점 만점에 95점. 참고로 루시아는 100점 만점에 100점. “저기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거든요.” “예. 말씀하십시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톡톡 쏘아대는 누구와는 정말 다르다. “이 나라 승상 이름이 제갈량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혹시 형이 있지 않나요?” “친형은 없고 사촌형이 하나 계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촌형 이름이 제갈근 아닌가요?” “맞습니다.” 맞다고 한다. 제갈근. 제갈량의 친형. 오나라의 모사. 성은 제갈, 이름은 근, 자는 자유.얼굴이 길어 슬픈 모사로 이름을 떨쳤었지. 예전에 이런 일화가 하나 있었다. 잔칫날 사람이 다 모인 자리에서 손권이 <제갈자유>라는 팻말을 걸고 있는 노새 하나를 끌고왔다. 제갈근의 얼굴이 긴 것을 노새에 비유해 놀린 것이다. 모욕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닌 단순한 장난이기에 제갈근을 포함하여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갑자기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 분필을 들고 쪼르르 달려가 <제갈자유>라는 팻말 옆에 <지로>라는 두 글자를 적어 놓았다. 합치면 <제갈자유지로>. 해석하자면 제갈자유의 노새라는 뜻이다.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잘나가는 사람이 하면 괜히 대단해 보이는 법이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일을 한 걸 가지고 제갈각을 신동이니 어쩌니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손권은 정말로 그 노새를 제갈근에게 주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제갈자유>를 지우개로 지운 다음 <손권>이라고 써 놨다. “그 사람 얼굴 길지 않나요?” 시비는 대답하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봐서 얼굴이 길긴 긴가보다. 나도 노새나 한 마리 선물해 줄까? “그런데 혹시 다른 모사는 없나요? 설마 이 나라 모사가 제갈승상 한분만 계시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저기 그게…….” 대답하기 곤란스러워하는 시비.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하지 않으셔도 되진 않습니다. 빨리 대답 하세요.” “예전에 사마의라는 분이 계셨는데…….” 사마의? 사마의라면 사마중달? “자가 중달 맞지요?” “예.” 사마의. 성이 사마, 이름이 의, 자가 중달. 위나라의 모사로 제갈공명의 호적수. 연의에서는 공명의 한 수 밑으로 씌여져 있으나 실제로는 절대 꿇릴 것 없는 잘 나가는 모사. 아들로는 사마사와 사마소가 있음. 역시 둘 다 모사. 후에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쿠테타를 일으켜 진나라를 세움. “그 사람은 직책이 뭔가요?” “그게…….” 다시 대답하기 곤란스러워하는 시비. 잠시 뜸을 들이던 시비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그 자는 반역죄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함께 훈족들의 영토로 도망쳤습니다.” 반역? 시비가 대답하기 곤란스러워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반역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무래도 조심스럽겠지. “두 아들 이름이 설마 사마사와 사마소는 아니겠지요?” “맞습니다.” 맞다고 한다. 그런데 설마 벌써 쿠테타를 일으킨 건가? 그리고 실패할 건 또 뭐야? 필요한 정보를 전부 얻은 나는 시비를 내 보냈다. 그리고 다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진명은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완벽한 쇄국정책을 주장한 것은 3기 전란이 끝나던 시점이다. 시간적으로 따지자면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쯤. 국가가 생긴 것은 1413년이었던가? 아마 처음으로 가이아스 왕국에 반기를 든 국가였지. 그게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 겨우 그 시간 동안 문명이 다르게 발전했다는 건데. 혼자서 열심히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올리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상담자와 상담을 해야 하는데. 맞아. 라이라면 뭘 알지도 몰라. 생긴 거나 하는 짓은 그 모양이어도 700살이나 먹은 엘프니까. 라이는 회색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라이코스와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비단 이불에 오줌 싸면 빨기도 힘들텐데. 라이의 머리카락은 정말 아름답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윤기가 흐르고 굉장히 부드럽다. 게다가 회색이라는 굉장히 특이한 색상으로 되어 있다. 난 이런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몽땅 뽑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난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아야!” 라이는 아픈 듯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 쥐었다. 정말 눈물나게 아픈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엄살이 심하구나.” 겨우 한개 뽑은 걸 가지고 눈물까지 보이다니. 두 개 뽑았으면 기절했겠다. 난 팔짱을 끼고는 라이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라이야,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요?” “넌 나이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엘프지?” “예. 그런데요?” “그럼 말이야 너는 이 나라가 건국될 무렵에도 살아 있었지?” “물론이에요.” 라이의 나이를 700살로 친다면 진명이 건국될 때는 약 450살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때 일을 기억할까 몰라. “그럼 이 나라에 대해 설명해 볼래?” 나의 질문에 라이는 크게 뜬 눈을 껌벅껌벅 거렸다. 역시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고난이도의 질문이었나? “그러니까 질문의 요지는 말이야, 이 나라에 대해 뭔가 이상한 점을 못 느꼈냐는 거지.” 다시 눈을 껌벅거리는 라이. 세상에 물을 사람이 없어 라이에게 물어봐야만하는 나의 현실이 너무도 슬프구나.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야, 이 나라가 조금 이상하지 않냐는 거지!”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요.”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전혀 이상하지 않긴 뭐가 전혀 이상하지 않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이 모양이야? 전혀 이상없는 나라에 왜 제갈량이 있어?” “제갈량이 왜요?” 잠깐. 지금 내가 이렇게 흥분해봐야 전혀 도움이 안 돼. 진정하자. 진정하고 다시 제대로 물어 보자. 난 잠시 호흡을 고르며 질문할 사항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라이야, 제갈량을 만나 본적 있니?” “예.”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 난 칭찬하듯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그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아니?” “예.” 그래. 진작 이렇게 고분고분 대답했어야지. “그럼 뭐하는 사람인지 어서 말해보렴.” 라이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에요!”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봐!” “왜, 왜 그러세요?” 라이는 이불을 꼭 끌어안고는 두려움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불쌍해 보인다. 왜 맨날 나는 나쁜놈이 되야하는 거지? 난 라이의 옆에 앉아 라이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자상하게 말하였다. “라이야, 그렇게 떨 거 없어. 소리질러서 미안해.” 원래 나의 생각대로라면 라이는 방긋 웃으며 ‘괜찮아요, 오빠’ 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왠일인지 라이는 더욱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왜, 왜 그래요? 흑흑, 라이는 잘못한 거 없단 말이에요.” “아니, 누가 너 잘못했다고 그랬니? 난 그저…….” “흑흑, 라이를 때리지 마세요.” 역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달래준다고 나섰다가 괜히 애를 울려 놨군. 우리의 대화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라이코스는 날개를 불끈 쥐며 외쳤다. “니가 뭔데 내 친구 라이를 울리는 거야!?” “쓰읍!” 난 인상을 쓰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학습능력이 없고 지능지수가 한참은 떨어지는 라이코스는 아까 맞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바락바락 대들었다. “쳐 봐! 쳐봐!” 퍽-! “왜 때려!?” “니가 치라매.” “치란다고 진짜 치는 놈이 어딨어!” “으아앙, 이코 때리지 마세요.” 라이는 라이코스를 꼭 끌어 안았다. 또 내가 나쁜놈이 되었군. 진짜 이게 아닌데. 난 자꾸 내 의도와 결과가 빚나가는 현실에 대해 탄식하였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난 차분하게 질문하였다. “라이야, 이 오빠가 굉장히 궁금해서 그러는데 제갈량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데로 다 말해줄 수 있겠니?” “다요?” “그래.” “전부요?” “그래.” “모조리요?” “그래.” “몽땅요?” “그렇다니까!” 조그만게 사람 성질 긁고 있어. 라이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 보다보더니 한 순간, 획- 하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뭐야!? 그 제스쳐는?” “죄송하지만, 비밀이어서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비밀? 그렇다는 건 비밀스러운 점이 있다는 얘기. 그렇다면 정말로 그 제갈량이라는 사람이 이상한 놈이라는 얘기. 난 웃으며 말했다. “라이야, 이 오빠가 그 사실을 꼭 알아야 해요. 그러니까 말해주지 않으련?” 라이는 다시 고개를 획- 돌렸다. “비밀이에요.” 난 더욱 환하게 웃었다. “그러지 말고 말해보렴. 말해주기만 하면 이 오빠가 매일 매일 재미있게 놀아줄게.” “정말요?” 라이는 귀가 솔깃한지 뾰족한 귀를 쫑긋 세웠다. “물론이지. 이 오빠는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적이 없고, 단 한번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단다. 오죽 내가 약속을 잘 지켰으면 별명이 칸트겠냐?” 약속을 잘 지키긴 개뿔이 잘 지키나. 듣고나면 그걸로 끝이지.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담하건데 라이는 분명 ‘예. 다 말해드릴게요’ 라고 할 것이다. 이 몸이 몸소 같이 놀아주겠다는데 감히 입 다물리는 없겠지. “역시 안 되겠어요. 비밀은 비밀이에요. 절대 말해드릴 수 없어요.” 절대 말해줄 수 없다는 저 표정.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는 부릅뜬 눈. 굳게 다문 작은 입술과 통통한 볼. 확고한 의지의 파동이 나의 심장에까지 느껴진다. 니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군. 내 너를 불쌍히 여겨 회유를 하려 했으나 니가 듣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너의 책임이다.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마! 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입에는 담배를 문 채, 한쪽 다리는 건들거리며 인상을 썼다. “라이야, 이 오빠가 마지막으로 부탁하마. 제갈량에 대해 아는 거 다 말해.” “그럴 수는 없어요.” “하-! 그럴 수 없어?” 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라이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라이의 표정은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해볼테면 해 봐’ 라는 표정이었다. 정면 도전인가? 도전을 피할 내가 아니다. 성질 더럽기로 따지자면 노처녀 다음가는 아이언스 공작이 아니던가. 난 담배를 바닥에 뱉었다. 그리고 라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라이야, 맞고 말 할래 그냥 말 할래?” “안 맞고, 안 말 할래요.” 그 말 나올 줄 알았다.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직 젊어서 어린 엘프를 묻어본 적이 없는데 니가 오늘 그 기회를 주지 않겠니?” “왜, 왜 이러세요?” 라이는 이제야 겁이 나는지 이불을 꼭 끌어 안으며 몸을 덜덜 떨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뼛 속까지 시리게 만들어 주마. 아이언스 공작의 잔인함을 가루가 된 뼈에서도 느껴라. 난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재빨리 문서를 작성해 라이에게 넘겨 주었다. 라이는 문서를 거꾸로 들고 보며 물었다. “이게 뭐에요?” “별 거 아니야. 거기 밑에다가 서명해.” “뭔데요?” “별 건 아니고, 이제부터 고문을 시작할 생각인데 이번 일이 모두 너 때문에 야기 된 일이니 죽더라도 나에게 책임을 물지 않으며 고문에 필요한 경비 일체를 니가 모두 부담한다는 내용이야. 아! 덤으로 혹시 니가 잘못 되면 너의 전재산에 대해 내가 법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어. 뭐하니? 빨리 서명하지 않고. 서명하기 힘들면 지장 찍어도 돼.” “모, 못해요.” 못하긴 뭘 못해? 하라면 해야지. 난 라이의 엄지 손가락에 정성껏 잉크를 발라 주었다. “어서 찍어.” “싫어요.” 온 힘을 다해 내리 눌렀지만 라이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난 라이의 손을 내리는 대신 종이를 들어 올려 지장을 받아냈다. 난 문서를 옷 속에 잘 간직하고 청룡도를 빼들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물을 입에 머금고 청룡도에 골고루 뿌렸다. 푸우-! “난 정말 착하게 살고 싶었는데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구나. 오늘 엘프 하나 회 뜨게 생겼네.” “회를 뜨다니요?” 난 라이를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걱정하지마렴. 고통은 한 순간이야.” “으아앙!” 결국 라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안 돼, 라이야. 절대 말하면 안 돼. 난 어찌되어도 상관 없으니 반드시 비밀을 지켜.” 니가 아직 고문을 덜 받았구나. 자식이 입만 살아가지고 말이야. 난 다시 라이코스를 물 속에 쳐 넣었다. 내가 아무리 막 나가는 인간이라 하여도 어떻게 상아탑의 주인인 라이를 고문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까 라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침대에 오줌을 싸 놓은 바람에 고문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 귀여운 것을 울리다니. 내가 몹쓸 놈이야. 하지만 어쩌겠냐? 나도 알 건 알아야 하는데. “흑흑, 우리 이코 그만 괴롭혀요.” “시끄러. 누군 좋아서 이 짓하는 줄 알아? 이건 전부 너 때문이야. 빨리 불어. 모든 걸 말하면 너의 친구 이코는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 “흑흑, 말 할 수 없어요.” “니가 무슨 독립투사냐? 왜 비밀 같지도 않은 비밀을 가지고 버티고 있어? 당장 불지 못 해!” 난 물 속에 얼굴을 담그고 있는 라이코스를 다시 끄집어 냈다. 라이코스는 잠시 캑캑거리며 부리에서 물을 뱉어내더니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이 자식아, 그냥 죽여라! 라이야, 절대 말하지마. 난 어찌되어도 상관 없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말하면 안 돼.” 대체 그게 뭔지 알고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거냐? 이 자식이 괜히 비장한 척하고 있어. 난 라이코스를 다시 물 속에 담갔다가 끄집어 냈다. 라이코스는 축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야, 그냥 웬만하면 말해라. 이러다 나 죽겠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안 돼, 이코야. 난 말할 수 없어. 라이는 약속을 잘 지키는 착한 엘프란 말이야.” 넌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난 라이코스를 물 속에 넣고 외쳤다. “네가 정녕 라이코스의 피를 봐야 말을 듣겠구나!” 라이코스를 물 밖으로 끄집어 내자 라이코스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처량하게 말했다. “제발 말해, 라이야. 나 좀 살려줘. 부탁이야.” “흑흑.” 라이의 지금 저 표정. 분명 말 할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다. 이런 때일 수록 더욱 강하게 밀어 붙여야 한다.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지금까지는 장난에 불과했다. 이제부턴 라이코스의 깃털을 하나씩 뽑겠다.” 난 라이코스의 머리 위에 멋지게 솟아 있는 -마치 젤이라도 바른 듯- 세 개의 깃털 중 하나를 움켜 잡았다. “안 돼! 제발 그것만은! 그건 내 트레이드 마크야!” “빨리 선택해라. 친구를 버릴 건지 아니면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고 편해질 건지.” 그래도 말하지 않고 버티겠다는 거냐? 굉장히 끈질기군. 좋아. 그렇다면 끝을 내도록 하지. 난 깃털을 잡아 당겼다. 깃털이 뽑히려는 순간 라이가 외쳤다. “말 할게요!” 드디어 니가 입을 여는 구나. 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를 팍팍 내뿜으며 말했다. “어서 말해보렴.” 라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소리쳤다. “모르겠어요!” “뭬야?” 니가 지금 날 가지고 논 거냐? 난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다. “네가 정녕 단매에 죽고 싶은 게냐?” “그, 그게 아니라 정말 모른다니까요. 정말 몰라요. 그러니까 그게…… 모르는 거에요.” 라이의 말투가 어쩐지 이상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더듬더듬 말하는 것이 장난 치는 것 같지는 않고 상당히 진지했다. 난 라이의 말을 곰곰이 되 씹으며 침착하게 물었다. “정확히 뭘 모른다는 거지?”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답했다. “흑흑,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인간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단 말이에요. 그 사람은…… 어쨌든 전 아무 것도 몰라요.” 아무 것도 모른다. 인간인지 조차 모르겠다고? 그렇다는 건 그 제갈량이라는 사람이 이 상황을 풀 수 있는 열쇠라는 건가?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씨! 비밀 같지도 않은 걸 비밀이라고 버티는 바람에 괜히 힘만 뺐잖아!” 난 라이코스를 라이에게 집어 던졌다. 라이는 라이코스를 껴 안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이코야! 내가 미안해. 라이가 잘 못 했어. 많이 아팠지?” “흑흑, 나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난 찬물을 확 끼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방을 나왔다. 아무래도 제갈량을 만나 봐야 할 것 같다. 만나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제갈량 정말로 그게 가능한 일일까? 완전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고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절대 가능할 리 없잖아. 완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없을 경우에는 그 것을 믿는 수 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될 것도 없었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전부 이상했다.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다 비슷비슷하기 마련이다. 서로 단절된 상태에서 각자의 문명이 발생한다 하더라고 그 문명의 지역적 특성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비슷하게 성장한다. 예를 들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문화와 유럽의 서양 문명은 비슷하게 성장을 해왔다. 문자가 생기고, 국가가 성립 되고, 절대 왕정의 등장까지. 그렇게 각자의 문명이 성립되는 데에는 수천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두 문명이 만난지 수 백년이 흘렀어도 각자의 성격을 계속 존속하고 있다. 진명은 대략 250년 전에 건국 되었다. 지역적 특성을 가만한다 하더라도 250년 사이에 복장, 사회 체계, 건축 양식 등의 문화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것도 단절된 세계가 아닌 하나의 대륙 안에서 말이다. 남방 국가와 북방 국가의 차이 정도야 있겠지만 이렇게 문화가 완전 다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중국과 붙어있었기 때문에 상당 부분에서 중국과 흡사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진명만은 왜 문화가 이 모양인가? 더 신기한 것은 진명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개틴과 자바스 등의 국가가 진명쪽 문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쇄국 정책을 편다 하더라도 외교 사절이야 서로 왕래를 할테고 그에 따른 어느 정도의 무역도 있을 것이다. 그럼 서로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교류 되며 섞여야 할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이 곳의 왕을 만나 보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모든 열쇠는 그 제갈량이라는 사람이 쥐고 있다. 아마 그를 만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설사 내 추측이 맞아 든다면……. “빌어먹을!”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를, 아니, 정확히는 이 세계를 가지고 놀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신이라도 되는 건가? “젠장! 빌어먹을 개새끼!” 난 누군지 모를 자에게 욕을 퍼부었다. 상스러운 비속어를 아무리 내뱉어도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난 방 한쪽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청자를 들어 올렸다. 순간 이걸 깨부시면 얼마를 변상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주저 없어 그것을 벽에 내 던졌다. 와장창-! 벽에 부딪힌 청자는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깜짝 놀란 시비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난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나가 있어요.” “하지만…….” “꺼지라고 했잖아!” 내가 소리치자 시비들은 조용히 밖으로 물러났다. 난 침대에 걸터 앉아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흥분이 쉽게 가라 앉지는 않았다. 신(神). 정말로 신인가? 난 방 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설사 신이 아니더라도 절대자인 것은 확실하다. 그럼 그 절대자는 누구인가? 알 수 있을리 없지. 역시 안 돌아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봐야 나오는 것이 있을리 없다. 차라리 주사위를 굴려 찍는 것이 속 편하지. 난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지만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미치겠다. 으아! 누가 지금 나에게 정답을 말해 줘! 이렇게 절규를 한다해도 말해줄 사람이 있을리 없다. 일단 담배를 피며 진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지포 라이타를 꺼냈다. 한번 더 라이한테 물어 볼까? 아니야. 그 어린애한테 물어보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야. 역시 만나봐야 알 수 있다는 건가? 난 침대에 누워 지포 라이타를 들어 보았다. 지포 라이타는 은색으로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도박 만화에서 이 지포 라이타를 유용하게 사용했던 것이 생각난다. 지포 라이타 겉면에 물체가 비치는 것을 이용해 상대방의 패를 훔쳐보거나 불을 붙여주는 척하면서 화투장을 건내주는 등등. 누가 지포 라이타 아니랄까봐 밑면에 지포라고 영어로 생겨져 있다. 친절하기도 해라. ZIPPO라는 명칭은 내 기억으로는 미국의 누군가가 처음으로 지포 라이타를 발명한 뒤, 지퍼Zipper에서 따왔다. 자기 딴에는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지포 라이타는 불 붙이는 도구만이 아니다. 패션이자 수집품이다. 그 예로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폼이 나지 않는가? 난 지포 라이타를 가지고 불을 키고 끄는 등의 장난을 쳤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제갈량을 만날 때까지 마음 편하게 쉬기로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 뭔가 본질을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데 그게 뭐지? 만약 지금 내 옆에 잘 나가는 이 시대의 백작 사일런스 지니가 있었다면 어느 정도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텐데. 그가 내 옆에 없으니 정말 막막하구나. 그런데 이 지포 라이타 망가지면 어디서 수리하냐? 대충 보니까 미국 등지에서 생산한 것 같은데. 국내 AS가 되려나? 잠깐!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지포 라이타를 다시 살펴 보았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 하지만……. “이게 왜 영어로 씌여있어?” 그렇다. 지포 라이타 밑면에 씌여있는 라는 글자. 이 것이 어째서 영어로 씌여져 있는가? 이 곳은 다른 세상. 공용어가 알파벳과 비슷한 문자 형식이기는 하지만 영어와는 완전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영어가 씌여져 있는 거지? 난 빠져있던 고리들을 조금씩 연결할 수 있었다. 내가 그 동안 생각했던 것은 수박 겉핧기에 불과했다. 본질을 빼 놓고 밖으로 보이는 것에만 너무 집착한 것이다. 으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생각하면……. 콰앙-! 무언가 중요한 사실이 떠 오르려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세게. 그 증거로 문지방이 처절하게 뜯어져 나갔다. “넌 뭐야!?” 내가 소리를 빽 지르자 라이는 라이코스를 껴 안고 몸을 움츠렸다. “니가 아직 조직의 쓴 맛을 덜 봤구나! 네가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냐? 정말로 그런 게냐? 오냐! 그럼 내가 화끈하게 죽여주마!” “제갈량이 만나자 그래서 온 건데.” 라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쓸데 없는 이유로 들어온 것은 아니구나. 하지만 만약 내가 여기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면 라이 패밀리는 분명 나를 우습게 볼 것이다. 그러므로 난 더욱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그럼 내가 특별히 가주도록 하지. 앞장 서라.” 라이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뭐라 궁시렁거리며 앞서 걸어갔다. 난 라이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후려갈기고 싶은 것을 참으며 라이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씩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 이런 때는 틀린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다. 이들 중 진짜 짜증나는 부류가 하나 있으니, 그들은 바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빠득빠득 우기는 사람들이다. 난 그런 특이한 부류에는 속하지 않는다. 다만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 가서 궁시렁거릴 뿐이다. ‘아이씨, 이게 아닌데.’ 이렇게 말이다. 지금 내 눈 앞에는 제갈량이 있다. 원래 나의 예상 대로라면 단정하고 치렁치렁한 복장을 하고, 머리 위에는 관을 쓰고 있고, 손에는 학 깃털을 뽑아서 만든 부채를 들고 있으며, 세가닥의 수염을 예쁘게 깍은 나이 40줄의 근엄하고 훌륭하고 위대해 보이는…… 아무튼 위인틱한 모습이여야 한다. 그런데 나의 이런 예상은 제갈량의 모습을 본 순간 대대적으로 수정이 불가피하였다. 아니, 수정 정도로는 바꾸는 것이 불가능 했다. 그냥 갈아엎고 다시 그리는 것이 속편하지. 약 190정도의 키. 나이는 대략 20대 중반에서 후반. 허리까지 내려오는 녹색 생머리는 뒤로 넘겨 묶었고, 일부는 그냥 옆으로 흘러내리게 놔 두었다. 날카로와 보이는 눈. 뽀샤시한 피부. 검은색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 넥타이는 없고 와이셔츠 윗 단추 두 개가 풀려져 있다. 벌려진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는 금 목걸이. 보통 양복을 입을 때는 와이셔츠를 바지 안쪽으로 넣는 것이 정석이다. 가끔 빼놓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 것은 어디까지나 마의를 입지 않았을 경우에만 해당 된다. 그런데 눈 앞의 남자는 마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와이셔츠 밑자락을 밖으로 내서 입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귀까지 뚫었다. 왼쪽에 두개, 오른쪽에 하나. 왼쪽에는 새끼손가락 굵기만한 작은 금귀걸이가 두 개고, 오른쪽에는 팔찌 정도 크기의 백금 링귀걸이가 걸려있다.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말하는 입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는 슬림 형태의 담배가 끼워져 있다. 왼손 손목에는 번쩍번쩍거리는 금 손목시계가 매어져 있는데 시계판에 박혀 번쩍거리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물방울 다이아몬드 같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있다. 이것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난 라이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저 사람 누구니?” “제갈량이에요. 이 나라의 승상.” 저게 어딜 봐서 제갈량이냐? 생양아치지. “안녕하십니까?” 제갈량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거다. 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솔직히 별로 안녕 못하다. “일단 그곳에 앉으시죠.” 난 그가 시킨대로 원형의 탁자 옆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라이는 내 옆에 앉았다. 제갈량은 내 맞은 편에 앉더니 잠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가 꺼낸 것은 담배갑이었다. 그는 거기서 아까 피던 슬림 형태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책상으로 보이는 곳으로 가더니 그 위에 있는 자기 접시 하나를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 자기 접시 위에 수십개의 꽁초가 있는 걸로 봐서 이것은 재떨이가 틀림 없었다. 제갈량은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잠시 후, 원하는 것을 찾지못한 그는 나에게 말했다. “불 좀 붙여주시겠습니까?” 저 뻔뻔함. 저 양아스러운 말투. 아무리 봐도 생양아치다. 분명 이 놈은 낮에는 승상질, 밤에는 나이트 클럽 삐끼질을 할 것이다. 그리고 돈 많은 부잣집 아가씨를 사궈 용돈 받아 쓰는 제비짓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부러운 자식……이 아니라 밥 맛 없는 자식. 난 일단 지포 라이타로 불을 붙여 주었다. 제갈량은 권하는 말조차 없이 혼자서 담배를 피워댔다. 니가 권하지 않아도 나는 핀다. 난 담배를 두 개 꺼내 하나는 입에 물고 다른 하나는 라이의 입에 물려 주었다. “라이는 담배 안 피는 데요.” 그랬었나? 난 라이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아 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두 개비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열심히 피웠다. 니가 한 개비를 피면, 난 두 개비를 핀다. 이것이 바로 기선제압이라는 것이다. “댁이 제갈량입니까?” “예. 제가 제갈량입니다. 그러는 댁은 아이언스 히로인가요?” 이 자식 보게나. 댁? 니가 지금 나보고 댁이라 그랬냐? 제갈량의 눈빛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칼날 같이 빛나는 것이 마치 전구 같았다. 반짝반짝. 아! 눈부셔. “예. 제가 히로 맞습니다. 그런데 승상치고는 상당히 젊으시네요.” “저보다 더 젊으신 분께 그런 소릴 들으니 조금 이상하군요.” 이 자식 제법이다. 감히 아이언스 공작의 말을 되받아 치다니.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서른 일곱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나이를 묻기 전에 자신의 나이를 말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요?” “전 열 일곱입니다.” 37세면 외모에 비해 상당히 나이가 많다. 약 10살 정도. “결혼은 하셨나요?” “아직 안 했습니다만, 그런 질문을 실례가 되는 것 아닌가요?” “실례가 되면 대답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게 더 실례가 되니 대답을 한 것 입니다.” 파지직-! 우리의 눈빛이 공중에서 얽혀 스파크가 튀었다. 감히 아이언스 공작을 상대로 이 정도나 싸우다니. 이제까지 나와 맞설 자는 사일런스 지니와 노처녀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은거 양아치가 있었다니? 역시 세상은 넓다는 건가? “그 손목시계 어디서 샀습니까?” “주문제작 한 겁니다.” “그거 시계 바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법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난 옆 자리에서 졸고 있는 라이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다. “아야! 왜 그래요?” “숙소로 돌아가서 자라. 방해 된다.” 평소 같으면 ‘제가 왜요?’ 등등의 질문을 하며 깜찍하게 반항했을 라이는 많이 졸린지 눈을 비비며 방을 나갔다. “그런데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저를 만나고 싶어한 건 그 쪽이 아닌가요?” 맞아. 그랬었지. “그게 동맹건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뭐 까짓거 동맹 맺도록 하지요.” 국가끼리 동맹을 맺는 일을 마치 외판원에게 정수기 사는 것 같이 말한다. 보험설계사한테 보험드는 것도 그것보단 어렵게 결정하겠다. “그런데 승상께서 모든 일을 결정하셔도 되는 건가요? 적어도 왕의 재가는 받아야 하지 않나요?”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말투가 정말 싸가지 없다. 왕이 들었으면 당장 목이 달아나지 않을까? 이렇게 막나가는 고위 관리는 나 하나로 족한데. 어찌되었든 동맹 맺은 거 맞지? “그럼 이제부터 앞으로 귀국이 행동할 방향과 아이리스와의 연계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하지요.” “진명은 아이리스와 같이 행동할 겁니다. 그리고 연계라는 말은 원조를 뜻하시는 것 같군요. 진명은 동맹국 아이리스에 대해 물질적, 군사적, 외교적 원조를 비롯 기타 등등의 지원을 기꺼이 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진명이 중립국임을 포기하고 자바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얘기지요.” 자바스는 아이리스와 진명 사이에 끼어있다. 남쪽에서 아이리스가 공격하고, 북쪽에서 진명이 공격한다면 자바스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샌드위치가 되서 신나게 두들겨 맞을 것이다. 솔직히 아이리스가 바라는 것은 물질적 원조와 든든한 동맹국이다. 굳이 주먹을 휘두르지 않더라도 뒤에 떡대 좋은 근육질 남자가 서 있다면 남이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역시 사람이던 국가던 빽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다. 지금 제갈량의 말에 따르면 군사적 지원까지 해준단다. 이 것은 현재 코너에 몰려있는 아이리스로서는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거 협상도 잘 이끌어 낸 거 맞지? 아이리스로 돌아가 노처녀한테 깨질 일은 없겠네. 잠깐. 그런데 이 자식 뭘 그렇게 쉽게 해? 너무 쉬우니까 내가 활약할만한 장면이 없잖아. 보통 외교협상이라하면 사일런스 지니가 그랬듯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며 말빨과 외모빨로 밀어 붙어야하는 거 아닌가? “그 말 진심인가요?” “물론 진심입니다. 설마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그래. 못 믿는다 이 자식아! 생긴 건 으슥한 골목길에서 유치원 애들 삥이나 뜯게 생긴 생양아치 주제에 제갈량이랍시고 뻐기고 있어? 니가 제갈량이면 난 강자아나 장량이다. “솔직히 못 믿겠습니다.” “믿기 싫으시면 마십시오. 동맹 맺고 싶어하는 것은 그 쪽이지 이 쪽이 아니니까요.” 완전 배짱으로 나오고 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내가 살다살다 이런 놈은 처음 만나 본다. 이 놈 진짜 제갈량 맞아? “아니, 뭐 제가 꼭 못 믿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아무래도 워낙 중대사이다보니 확인 절차가 필요한 듯 해서…… 불쾌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이게 바로 역소국의 설움이라는 것이다. 아이리스가 강대국이었어 봐. 내가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나. “귀국의 도움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별로 심심한 것 같지는 않군요.” 그래. 나 안 심심하다. 나 안 심심한데 니가 보태준 거 있냐? 제갈량은 살짝 일그러진 나의 얼굴을 살펴 보며 두 손을 깍지 꼈다. 아무리 봐도 손목시계가 너무 비싸 보인다. 선물로 하나 달라 그럴까? “이 시계가 가지고 싶으신가요?” “하하, 무슨 말씀을.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그렇군요. 가지고 싶다면 드릴려 그랬는데 필요 없다니 관둬야겠군요.” 니가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거냐? 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실은 굉장히 가지고 싶습니다.” “그럼 가지십시오.” 제갈량은 손목 시계를 끌러 나에게 주었다. 난 손목 시계를 받아서 자세히 살펴 보았다. 오오! 시계판에 각 시간 마다 박혀있는 빛나는 물체는 역시 물방울 다이아몬드였다. 정확히 12개. 다른 곳에는 작은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12시 지점에는 주먹만한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다. 시계 바늘은 백금인지 흰색을 반짝거리며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다. 이건 진짜 비싼 거다. 한 1억원 하려나? 그런데 이런 걸 이렇게 막 줘도 되는 거야? 혹시 나중에 다시 뺏어가는 건 아니겠지? “집에 그런 거 수백개는 더 있습니다. 안심하고 가져가십시오.” 너 잘났다. “댁이 상당히 부유하신가 보죠?” “뭐 웬만큼 잘 삽니다.” “하하하. 부모님께서 유산을 팍팍 물려주셨나 보네요. 증여세 같은 것도 다 포탈하고.” “이런 자리에 앉아 있다보면 들어오는 게 많거든요. 제가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이거저거 다 받다 보니 어느새 재산이 수습이 안 되더군요.” 찔러 주는 뇌물을 다 받아 처먹었다는 얘기다. 이런 놈이 승상 자리에 앉아있으니 이 나라의 운명도 뻔하다. 제갈량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난 그게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해 본 후에야 불을 붙여달라는 신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니 부하냐? 난 궁시렁거리며 불을 붙여 주었다. 제갈량은 멋지게 연기를 한번 내뱉은 다음 말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무슨 본론? 그럼 이제까진 서론이었냐? “너와 나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자고.” 니가 언제부터 나 봤다고 반말이니? “내가 왜 제갈량인지 궁금하지?” 그래. 궁금하다, 임마. 제갈량은 멋진, 하지만 별로 싸가지는 없어보이는 양아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 “……?” 이 자식, 역시 알고 있었어. 바람은 선선히 불어오고, 곳곳에 피어있는 여러 종류의 꽃들은 그에 맞춰서 여기저기로 흔들린다. 잘생긴 남자 하나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담배를 피며 걸어간다.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던 시비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 본다. 남자는 여자들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대신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번 째려봐 준다. 그리고 물고 있던 담배를 빝어 구두굽으로 짓이긴다. 순간, 여자들의 눈에 떠오르는 하트 모양. 물론 이들의 눈에는 남자의 뒤를 따라 걷는 누군가는 별로 들어오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는 경우는 어쩌다가 이 누군가가 남자를 가리기라도 하는 때다. 이 때 여자들은 그 누군가에게 불 같이 화를 낸다. ‘못 생긴게 감히 누굴 가리고 있어?’ 이런 재수 없는 것들. 이 나라의 미의 기준을 알만하구나. 이런 생양아치나 좋아하다니. 어쩐지 내가 또 부록이 된 느낌이다. 제갈량이 잡지라면 나는 부록. 제갈량이 비싼 화장품이라면 난 그거 살 때 딸려오는 샘플. 지금 제갈량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반항기와 터프함이 넘치는 양아치로 보일 것이다. 오토바이 하나 있다면 진짜 잘 어울릴텐데. 제갈량은 걸으며 말했다. “혼란스럽나?” “……예.” 저 놈은 반말을 쓰는데 나는 왜 존대말을 써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존대말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 것은 아무래도 제갈량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저 양아스러운 분위기가 나로 하여금 ‘존대말을 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맞는다’ 라는 공포를 느끼게하는 것이다. 요즘 양아치들이 막 나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않은가? 아! 정말 양아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어디서부터 말 해줄까?” “예?”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저기…….” 난 제갈량의 눈치를 잠깐 살폈다. “물어보시면 다 대답해 주실 건가요?” “그건 내 맘이지.” 양아치 같은 새끼. 마음에 안 드는 새끼. 생각 같아선 받아버리고 싶다면 외교 문제로 번질까봐 내가 참는다. “참지마, 새꺄.” 이 자식 지금 나한테 욕한 거 맞지? 감히 지존이나 다름 없는 아이언스 공작님께 욕을 해? 황당하지만 참도록 하자. 지 잘났다고 설쳐대는 걸 내가 어쩌겠냐? 양아치랑 상대해 봐야 나만 손해지. “너 지금 날 양아치라고 생각했지?”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양아치 맞아.” “예?” 제갈량은 걸음을 멈춰 나를 쳐다 보았다. 키가 190정도 되다보니 20cm는 더 작은 나는 힘들게 올려다 봐야 했다. “니 생각엔 니가 지금 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냐?” “제 생각엔 제가 지금 대화를 하려고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량은 양아스러운 미소를 한번 지어보이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난 별로 농담할 기분이 아니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시간은 정확히 30분. 그 사이에 열심히 질문해. 지금 시각이 3시 47분일 꺼다. 4시 17분에 끝내자.” 손목 시계를 보니 그의 말대로 3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 이건 마치 무슨 쇼프로그램 같잖아. 난 일단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왕의 이름은 뭔가요?” “초(初).” 간단하군. 그럼 초왕이라는 건가? “성은 뭔가요?” “왕(王).” 더 간단하군. 그럼 왕초? “자는 뭔가요?” “거지(巨地).” 합해서 부르면 왕초 거지가 된다. 하지만 이름과 자를 같이 부르는 경우는 없으니, 왕초 아니면 왕거지라고 부르게 된다.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그냥 왕거지왕이라고 부르면 된다. 하지만 왕의 자를 부를 일도 거의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아주 신선한 이름이네요.” “뭣 같은 이름이지.” 좋아. 기본적으로 생각을 정리했으니 본격적으로 질문을 해볼까? “당신은 누군가요?” 제갈량은 웃음을 지었다. “나 말인가? 현재 진명의 승상이자 제갈가의 유망주지. 니가 알고 싶은 것을 말해줄 수도 있는 인간이기도 하고.” “그거 말고 좀 더 나아가서 구체적인 것을 말씀해주시면 좋겠는데요.” “거기까지만 알아둬. 많이 알면 다친다. 폭력 조직에라도 가입해 있나? “제가 어떻게 이 세계로 오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데요.” “좋아. 그건 말해주도록 하지.” 어느새 우리는 정원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있었다. 잠시 길을 따라가다보니 술상이 차려져 있는 장소가 나타났다. 제갈량은 그곳에 앉아 준비되어있던 술병을 나에게 건냈다. “한잔 따라.” 아이씨,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계속 기어오르네. “예.” 난 넙적한 술잔에 조심스럽게 술을 따랐다. “꽉꽉 눌러서 따라.” “예.” 아! 내 모습 진짜 비굴하다. 이런 모습을 루시아가 보면 뭐라고 말할까? 제갈량은 술을 멋지게 들이킨 다음, 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난 궁시렁거리며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니가 어떻게 이 세계로 건너왔나를 얘기하기 전에 니 주머니에 있는 지포 라이타의 출처부터 얘기를 해줘야겠군.” 난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얘기를 경청하였다. “라이타 꺼내 봐.” 난 라이타를 꺼냈다. “잘 살펴봐.” 뭘 살펴보라는 거지? 일단 제갈량이 시킨대로 살펴 보았다. 특이한 점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빛에 비쳐보자 옆면에 쓰여진 글자가 보였다. “To JN.” 역시 영어다. 글씨가 너무 작고 아래쪽에 있다보니 그 동안 발견 하지 못 한 것 같다. “그게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하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같으면 안 궁금하겠냐? 제갈량은 잠시 하늘을 쳐다 보았다. 회상을 하는 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예전에 한 남자가 이 세계로 건너왔었다. 그 지포 라이타는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지.” “……그 말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은 너 하나가 아니야. 오래 전에 한명이 왔었지.” 여기서 잠깐! 다른 사람이 건너왔다고? “그 사람은 어딨나요?” “죽었어.” 제길,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난 그저 내가 오게 된 경위와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인데. 대체 그 놈은 누구야? “그 사람도 소환된 건가요?” “아니. 그는 스스로 건너왔다.” “스스로 건너왔다면…… 그 사람은 마법산가요?” “아니. 그 세계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마법진을 발동시켰을 뿐이야.” 정말 알아들을 수가 없는 얘기들이다. 지구에 누군가가 마법진을 만들어 놓았다고? 그럼 그걸 만든 사람은 마법산가? 아니지. 마법사는 이 세계에만 있잖아. 그럼 이 세계 사람이 건너와서 마법진을 그렸다는 건데…… 그러려면 그 마법사가 건너오기 위해서 마법진이 있어야했다는 것이고……. 미치겠군. “그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었나요?” “고고학자.” 고고학자라면 말 그대로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이다. 고고학이란 유물과 유적 등을 통해 옛 인류의 생활이나 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일부 무식한 사람은 이들이 쓸데 없이 돈이나 낭비하며 무덤을 파해친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정말 무식하기 없는 생각이다.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고 미래가 다가오면 현재가 과거로 변하는데 과거를 알지 못하고 현재를 살고 미래가 현재가 되는 시점에서 현재를 버린다면 인류의 역사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지금 내가 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그럼 그 사람이 발동시켰다는 마법진은 누가 만들어 놓은 건가요?” “패스Pass.” 대답을 회피하는 건가? 웬지 의도적인 냄새가 풍기는 군. “10분 남았다.” 벌써 그렇게 지났나? 시계를 보니 4시 7분. 그의 말대로 정확히 10분 남았다. “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된 나라인가요?”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거지?” “어째서 이 곳만 다른 곳 하고 문명이 다른 거죠? 같은 대륙에서 국가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는데 이 나라만 문명이 이렇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이 나라가 중국식 문명을 카피해 놓은 것 같고 제갈량이니 사마의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나를 엿먹이려는 수작 같은 데요.” “그것에 또 복잡한 사정이 있긴 하지.” “그 복잡한 사정이라는 것이 뭔가요?” “대체 왜 그것을 궁금해하는 지 모르겠군.” “이런 이상한 일이 눈 앞에 닥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나요?” “세상에는 알아도 되는 일이 있는 반면 모르는 게 더 좋은 일이 있지.” “모르는 게 약이다, 라는 말씀을 하고 싶은 건가요?” “알면 다친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다.” 지금 나랑 말장난 하자는 건가? 더 이상 물어봐야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먼저 말하기로 하였다. “최초의 통일 왕국이 세워진 때는 지금으로부터 644년 전. 즉 1027년이 되던 해였지요. 그 해 11월 11일 가이아스 왕국이 전국을 통일하고 원년을 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런데 이상한 점은 겨우 644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이전의 문명에 대해서는 거의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더군요. 이 세계에는 고고학자도 없는 건지.” “이념 때문에 국가가 분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지.” “그럼 물질적인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정신적인 것은 어떻게 된 거지요? 왜 아무도 그 과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마치 그 때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을 하는 거죠?” “이 곳 사람들의 개성이라 받아 들여.” 기가 막히는 군. 완전 나를 가지고 놀고 있잖아. 처음에는 다 말해줄 것처럼 폼을 잡더니만 지금에 와서 빼는 것은 또 뭐야?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셨나? “자꾸 이러시면 제가 곤란하지요. 아까는 마음껏 질문하라고 하셨잖아요.” “마음껏 질문하라고 했지, 전부 답해준다고 한적은 없는 것 같은데.” 교묘한 언변으로 나를 물 먹이려 하고 있다. 상대가 일반인이었다면 그냥 받아버리겠는데 상대가 생양아치이니 그것도 힘들다. 일반적으로 양아치와 건달의 구분은 싸움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로 갈린다. 싸움 실력도 없는 놈이 겉멋만 들어서 폼만 잡고 다니면 양아치라 부르고, 폼을 잡고 다니되 싸움 실력이 있으면 건달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예전에 한번 골목길에서 양아치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양아치는 나에게 돈을 내 놓으라고 칼을 휘두르며 협박하였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피땀 흘려 번 돈……은 아니지만 내가 뭐하러 내 용돈을 양아치에게 준단 말인가? 난 돈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이 양아치가 열받아서 칼을 크게 휘둘렀는데 그게 우연히 내 팔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살이 갈라지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물론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칼을 휘두른 양아치는 더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서 칼을 떨어뜨리며 ‘나, 난 아니야!’ 하며 재빨리 도망쳤다. 이것이 바로 양아치다. 실력도 없고, 깡도 없고 겉멋만 있는 놈. 내가 보기에 눈 앞에 있는 이 놈은 생긴 것은 더할나위 없는 양아치다. 건달은 머리 저렇게 치렁치렁 기르고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폼을 보건데 양아치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있어 보인다. 사실 쥐뿔도 없으면서 폼만 잡는 것이 양아치의 특징이긴 한데 그래도 이 놈은 쥐뿔도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받아보면 알 수 있겠지. 그런데 만약 받았는데 이 놈이 굉장히 싸움을 잘하는 놈이면 어떡하지? 난 싸움이라고는 몇 번 해보지도 못한 착한 아이인 관계로 분명 잔인하게 얻어 터지겠지? 아아! 왜 많은 직업중에 하필이면 생양아치로 나왔을까? 정말 괴롭다. “빨리 질문에 대답을 해 주세요.” “시간 됐다.” 무슨 시간? 제갈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재빨리 일어서 그를 붙잡았다. “지금 어디 가세요?” “니가 그건 알아서 뭐하게?” “대답은 해주시고 가셔야지요.” “시계 봐라.” 난 그가 시킨대로 시계를 보았다. 4시 18분. “30분 초과했지? 그럼 나 간다.” 지금 나의 당혹스러움은 제갈량의 뻔뻔하고 얍삽한 얼굴과 맞물려 더욱 증폭되었다. 난 그의 뽀샤시한 빰을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소리쳤다. “이런 게 어딨어!” “어딨긴 어딨어? 여깄지. 길막지 말고 비켜라.” 제갈량은 내 어깨를 밀치고 아까 온 길을 되돌아갔다. 난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정원을 빠져나오는데 한 예쁘장하게 생긴 시비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이는 대략 15살 정도. 아니, 14살? 아니면, 13살? 아무튼 굉장히 어려 보인다. 분명 호적에 잉크가 마르지 않은 영계일 것이다. 민증 까보라고 하고 싶지만 13살짜리가 무슨 민증이 있겠냐? 우리가 다가오자 시비는 다소곳한 자세로 인사를 하였다. 제갈량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시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섬뜩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자 시비는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제갈량은 시비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시비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굴을 여기 저기로 돌려보며 말했다. “오늘 시간 있냐?” “예?” 시비가 놀란 듯 되물었다. 제갈량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이따 내 방으로 와라.” 그걸로 끝이었다.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발걸음을 돌렸다. 시비는 두려운 듯 몸을 떨고 있었다. 대체 ‘이따 내 방으로 와라’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방으로 오면 사탕이라도 주려나? 아니면, 업무를 조금 도와달라고? 그것 아니면……. 이런 개자식! 난 뒤를 쫓아가 제갈량의 어깨를 잡았다. “이 자식! 감히 권력을 이용하여 가녀린 미성년자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려 하다니! 니가 그러고도 이 나라의 승상이라 할 수 있느냐?” 제갈량은 피식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얼마나 재수 없는지 정말 한 대 패주고 싶다. “쾌락의 구렁텅이겠지.” “이 자식이 그래도!” 난 권력을 이용하여 여성을 강제로 범하려 하는 놈들을 증오한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용감하게 나서 아까 그 미성년자 시비를 도우려 하는 것이다. “착각하지마. 난 그 아이를 위해 봉사하려는 거라고.” “봉사는 무슨 봉사?” “아까 그 아이의 눈빛을 못 봤나? 나를 강렬하게 원하는 눈빛이었지. 아마 지금쯤 좋아서 죽고 있을 걸.” 뭐? 뭐 이런 웃기는 놈이 다 있어? 난 어이가 없어 대꾸를 하지도 못했다. 제갈량은 내 손을 탁 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난 멀어지는 제갈량을 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나라는 미성년자 보호법도 없나? * * * * * 사일런스 지니와 제갈량은 참으로 공통점이 많다. 일단 둘 다 굉장히 잘 생겼다. 그리고 싸움도 굉장히 잘 할 것 같다. 여자를 좋아한다. 자유 연애를 즐긴다. 그리고 높은 직위에 앉아있다. 이러한 공통점이 있는 반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점도 있다. 사일런스 지니는 타고난 외모와 현란한 언변,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로 여자를 꼬신다. 제갈량의 경우에는 타고난 외모만 동일하고 나머지는 완전히 다르다. 날카로운 눈빛, 협박조의 말투, 비웃는 듯한 미소를 무기로 여자를 꼬신다. 물론 힘 없는 여성들이 거절을 할리 만무하다. 아! 이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이런 불합리한 일이 조속히 해결되어야 더욱 좋은 사회가 될텐데. 나 혼자서라도 나서 여성인권 운동이라도 펼쳐 볼까? 제갈량.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이렇게 싸가지 없는 양아치는 처음 보았다. 대체 왜 이 놈은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 걸까? 이런 놈은 당장에 청문회를 열어 퇴출 시켜야 하는데. 이 놈을 생각하다 보면 예전에 나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한 아이가 생각난다. 그 아이는 전학생으로 굉장히 착하고 순진한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 옆에 앉은 애가 언제나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소위 말하는 불량학생이었다. 이 착한 전학생은 착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누가 그랬던가? 친구는 골라 사궈야 한다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착한 전학생은 불량한 짝이 영향을 받아 점점 나쁘게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님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 되었다. 당연 학부모들이 우루루 몰려와 뒤에 섰고 우리는 평소보다 잘해야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준비하였다. 사실 이런 참관 수업이 벌어지는 날은 짜고하는 수업이 대부분이다. 정말 얍삽하기 그지 없게. 어찌되었든 참관 수업이 시작 되었고 담임은 여러 질문을 던졌다. 미리 짜고 대기하던 학생들은 열심히 손을 들어 발표를 하였다. 그러던 중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라는 질문이 나왔다. 대기조 아이들은 재빨리 손을 들었다. ‘배워야 잘 산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 읊는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 ‘배워서 남주냐?’ ‘공부나 고스톱이나 못 먹어도 고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등등 별 듣도 보도 못한 속담과 얘기들이 난무하였다. 그런데 대기조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이 전학생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담임은 별 생각 없이 그 애 보고 말해보라 하였다. 설마 무슨 일이 터지겠냐고, 생각하며.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란 맞는 때가 있으면 빚나가는 때도 있는 법. 무슨 일이 터졌다. 전학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똑똑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당차게 말하였다. ‘지금 X나게 공부를 한다면 나중에 X만한 새끼가 되어 X 같이 후회는 일은 X도 없을 것이다.’ 난 이 말을 듣는 순간 감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잘 설명할 수 있다니. 어떠한 불량학생이라도 이 명언을 듣는다면 당장에라도 책상 위에 앉아 공부하고 싶으리. 물론 나 혼자만 이렇게 생각하였다. 담임을 비롯한 학부모, 학생들은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당연 담임 선생이었다. 순간,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하나 막막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갑자기 장내가 썰렁해지며 주위에서 아무런 말도 안 하자 이 전학생이 인상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야이, 씨발 개X 같은 새끼들아! 박수 안 치냐?’ 더욱더 싸늘해지는 장내. 이 전학생은 쑥스러운 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한 마디 하는 것은 물론 잊지 않았다. ‘아 씨바. X나게 무안하네.’ 이게 초등학교 1학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담임이 어떻게든 수업을 진행시켰지만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 없었다. 후에 이 수업은 ‘X 같은 수업’ 이라 불리며 학부모회의에서 이의가 제기 되었고 담임은 결국 징계를 먹기에 이르렀다. 이 날 담임이 얼마나 열받았는지 교실에 손에 야구 배트, 그것도 나무가 아닌 알리미늄 야구배트를 들고 왔다. 그리고 전학생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다음은 안 봐도 비디오. 전학생은 그날 언제나 입에 살고달던 말처럼 ‘X나게’ 맞았다. 난 그 때 담임의 절규를 아직도 기억한다. ‘이 X 같은 새끼야! 너 때문에 난 X 됐어!’ 여기서 얘기가 끝났냐고? 그건 아니다. 이 사건 이후로 욕설이 열풍적인 유행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1개월이 지나자 학교 전체가 입에 욕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여기서 1개월이 더 지나자 어휘의 70% 이상이 욕과 비속어였고 욕을 섞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이 일이 주변 주민들에게 알려지자 주민들은 이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을 꺼려하였다. 심지어는 교육부가 ‘X 같은 학교’ 로 선정하기에 이르렀고 내가 고등학교 들어가던 해에 폐쇄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전학생이 나일꺼라 착각을 한다. 하지만 그 전학생은 결코 내가 아니다. 내가 어딜 봐서 그런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난 다만 그 전학생 옆에 앉아있었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중요한 건 제갈량이다. 대체 이 놈이 뭐하는 놈이고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있는지. 어째서 제갈량이라는 이름을 쓰는지. 아무래도 다시 한번 찾아가봐야 겠다. 결심을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이 아이언스 공작의 장점. 난 주저 없이 방을 나와 제갈량의 방으로 향했다. 궁이 워낙 넓고, 구역별로 나뉘어 있고, 그곳이 그곳 같이 생긴 덕에 중간에 조금 헤메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제갈량의 방까지 오긴 왔다. 난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을 두드렸다. 쾅쾅-! “이봐요!” “무슨 일이야!?”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중에 해!” “저 바쁩니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온 제갈량의 모습은 한 마디로…… 섹시했다. 묶고 있던 머리는 완전히 풀어헤친 채 걸치고 있는 옷이라고는 검은색 바지 하나 뿐. 완전히 벗은 상체는 단단한 근육이 멋지게 자리 잡고 있었다. 몸매 죽인다. 3개월 속성으로 헬스하면 저런 몸매로 가꿀 수 있을까? “할 말 있다며. 바쁘니까 빨리 말하고 꺼져라.” 제갈량은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멋지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이 만약 내가 ‘그냥 한번 불러 봤어요’ 라고 말한다면 한 대 칠 기세다. “아까 다 말해줄 것처럼 폼만 잔뜩 잡고 중요한 것은 하나도 안 말해주셨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최소한 힌트라도 조금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제갈량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힌트? 좋아. 힌트 정도는 주도록 하지. 청색 산맥에 살고 있는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를 찾아가 봐. 그가 모든 것을 말해 줄 거다.” 블루 드래곤? 난 말을 마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제갈량을 황급히 붙잡았다. “잠깐만요. 갑자기 웬 드래곤이에요? 드래곤 보고 어쩌라고요?” 제갈량은 짜증난다는 듯 내 손을 탁 쳤다. “이제 다 말해줬으니까, 꺼져.” 그리고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난 문이 닫히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냈는지. 아까 13살 정도 되보이던 시비가 침대 위에서 이불을 꼭 끌어 안고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시간을 내가 방해했군. 아니지. 잠깐! 이건 범죄 아니야? 상대는 미성년자. 아무리 봐도 범죄인데. 내가 지금 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저 여인을 구해낸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제갈량은 공갈, 협박, 원조 교제,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 등등으로 체포 될 수 있을까? 그건 아닐거다. 제갈량은 승상이니까. 오히려 내가 불법 가택 침입죄 등으로 체포 될 것 같은데. 아아! 저 여인을 구해내고 싶은데 방법이 없구나. 대체 무슨 제갈량이 생양아치인 것도 모잘라 바람둥이인 거지? 이해할 수가 없군.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 그 드래곤을 만나서 어쩌라는 거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드래곤을 만나라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엘프는 딱 하나있다.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엘프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난 발걸음을 돌려 라이의 방으로 향했다. 아마도 라이는 자고 있을 것이다. 라이코스를 꼭 껴안고 침대에 몸을 파묻은 채 말이다. 그런데 라이의 방에 가보니 라이가 없었다. 시비에게 물어보니 놀러 갔다고 한다. 그래서 잠시 라이의 방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으음, 침대가 참 푹신하군. 잠깐 누워볼까? “뭐 하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빨리 패를 돌리시지요.” 사일런스 지니의 재촉에 난 어리둥절하였다. 하지만 일단 손에 든 화투를 섞어 담요 위에 뿌렸다. 한 사람 앞에 두 장씩. 대체 내가 왜 두 장씩 뿌렸을까? 고스톱이라면 7장을 뿌려야하는데. 그렇다면 섯다라는 건가? 각자 패를 들고 쪼아보기 시작했다. 나도 패를 들어 보았다. <2, 8> 이게 뭐야? 왜 28 멍통이야? 이 패가지고 뭐하라고? 어떤 놈이 패를 이딴 식으로 나눠 줬어? 패 바꿔줘! 난 나쁜 패를 잡았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봤다. 이럴 수가! 어째서 노처녀가 여기에? 그렇다. 날카로운 눈길로 패를 쪼아보고 있는 그녀는 바로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일명 노처녀. 아아!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 노처녀를 만나는 날은 언제나 재수가 없었는데. 난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2평 남짓한 골방이었다. 가운데는 군용 담요가 깔려져 있고 그 주위를 노처녀, 지니, 나, 라이 순으로 앉아 있었다. 어라? 라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라이는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두 개의 화투장을 쥐고 있었다. 표정이 뚱한 것으로 봐서 나처럼 멍통을 잡았나 보다. “배팅하죠.” 배팅은 무슨 배팅! 멍통 가지고 어떻게 배팅을 하냐? 아무리 배짱으로 나간다 해도 한 끗은 돼야 뭘 하던지 말든지 하지. 난 패를 덮었다. “다이Die.” 니들끼리 열심히 가라. 지니부터 배팅을 하기 시작했다. “받고 더.” 오오! 노처녀 세게 나오는데. “저도 더요.” 라이마저. “콜Call.” 지니 너는 왜 약한 모습이니? “받고 더.” “저도 더요.” 라이야. 너 너무 강하게 나가는 거 아니니. 몇 바퀴 돌지도 않았는데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쌓여갔다. 지니는 중간에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노처녀와 라이의 싸움. 둘은 한 동안 배팅을 계속했다. 군용 담요 위에는 어느새 1만 원짜리 지폐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한 5천만 원 되려나? “콜.” “콜.” 드디어 멈췄군. 노처녀가 먼저 패를 열었다. 국화 두장. 구땡이군. 그럼 노처녀가 딴 것이나 다름없잖아. 구땡보다 높은 패는 장땡과 광땡. 라이가 과연 그 둘 중 하나를 들고 있을까? “넌 뭐니? 어서 까보렴.” 라이는 눈을 껌벅거리며 패를 내려놓았다. <7, 3> 나와 같은 망통이다. 하지만…… “칠삼멍통. 땡잡이!” 그렇다. 7, 3 멍통이면 한 끗에도 지는 패지만 땡은 잡을 수 있다. 푸하하!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라이는 생긴 것도 귀여운데 어쩜 이렇게 화투도 잘 칠까? 라이야. 섯다는 어디서 배웠니?” “저 이거 어떻게 하는지 몰라요.” 그래. 모르니까 망통을 가지고 따라왔겠지. 노처녀는 땡잡이에게 땡이 잡힌 것에 화났는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저 주름살 좀 봐. 저래서 시집을 어떻게 가겠어? 그냥 아줌마들과 밤 새 고스톱이나 치시지. 이제 라이가 패를 섞기 시작했다. 카드와는 별 인연이 없는지 엉성한 손놀림으로 화투를 섞었다. 손 밑으로 패가 줄줄 흐르는 군. 겨우겨우 어찌어찌하여 패를 다 섞은 라이는 각자 두 장씩 나눠 주었다. 어디 한번 패를 볼까? 한 장을 쪼아 보니 솔광이었다. 왠지 예감이 좋은데. 다른 패가 이자면 알리(1, 2), 흑싸리면 독사(1, 4), 국화면 구삥(1, 9), 단풍이면 장삥(1, 10), 솔이면 삥땡(1, 1), 삼광이면 광땡(1광, 3광), 마지막으로 팔광이어도 역시 광땡(1광, 8광). 굳이 순서대로 정렬한다면 광땡, 삥땡, 알리, 독사, 구삥, 장삥. 이런 순이다. 삼광이나 팔광이 나와 일삼광땡이던 일팔광땡이던 둘 중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최악의 경우는 삼자가 나와 네끗이 되는 거겠지. 어디 한번 남은 한 장을 볼까? 난 두장 겹쳐 쥔 화투에서 앞에 있는 솔광을 밑으로 내렸다. 오옷! 삥땡이다. 나타난 화투는 솔. 결국은 삥땡으로 가게 되었다. 이 정도면 끝까지 가볼만 하군. “라이야.” “예.” “배팅해라.” 라이가 먼저 배팅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돈 놓고 돈 먹기가 시작 되었다. 나? 나야 물론 레이즈지. “받고 더!” “받고 더.” “받고 더.” 아아! 돈 굴러오는 소리가 들린다. 먼저 떨어져 나간 사람은 사일런스 지니 백작이었다. 자식이 끊기가 없어. 끝까지 따라 올 것이지. 어느새 돈은 억 단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지폐가 산을 이룬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겠지? 그런데 노처녀와 라이는 무슨 패를 들고 있을까? 라이는 입으로 엄지손가락을 쪽쪽 빠는 것이 자신도 무슨 패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고 노처녀는 집중해서 자신의 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이 살짝 찡그려져 있는데. 대체 무슨 패지? 설마 땡을 잡았나? 노처녀는 고개를 약간 들었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 어쩌면 잘못 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 장면을 포착하고야 말았다. 노처녀의 안경에 국화 두 장이 비치는 것을. 이럴 수가! 설마 또 구땡을 잡았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돼! 잘 못 본 거야. 분명히 잘 못 본거야. 어떻게 연속 두 번으로 구땡을 잡을 수 있어? 그런데 정말 구땡이면 어쩌지? 제길. 지금에 와서 발을 뺄 수도 없잖아. 아니야. 피해를 최소화 하려면 지금에라도 죽어야 돼. 괜히 오기부리다가 죽도 밥도 안 되는 수가 있어. 죽을 때를 알고 죽는 사람이 진정한 도박사. 억울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죽어야지. “담배나 한 대 피십시오.” 사일런스 지니가 말과 함께 담뱃갑을 나에게 건넸다. 나보고 빨리 죽고 담배나 피라는 거냐? 이제 보니 노처녀랑 지니랑 한편 아니야? 남매끼리 사기도박을 친다는 건가? 그럼 난 뭐야? 난 봉이야? 난 담배나 피자는 심정으로 지니가 건네준 담뱃갑을 받았다. 순간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담뱃갑에 겹쳐져 있는 팔광. 검은색 산 위로 떠오른 둥근 달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 뭐야? 대체 왜 팔광을 나에게 건네 준 거지? 만약 내가 이 팔광을 합친다면 삥땡이 일팔광땡으로 올라간다. 일팔광땡은 섯다에 있어서 최고의 패. -실제 가장 높은 패는 삼팔광땡(3광, 8광)이다. 하지만 삼팔광땡, 일팔광땡, 일삼광땡은 동급이라 할 수 있다. 이유는 이 중 하나가 나오면 다른 하나는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무적이 될 수 있어. 난 담배를 입에 무는 척하며 순식간에 팔광과 솔을 교환했다. 그리고 솔을 담뱃갑 밑에 끼워 자연스럽게 지니에게 건네주었다. 지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뱃갑은 주머니에 집어넣고 솔은 손에 쥐어 자신의 화투 패와 겹쳤다. 후후후. 이것으로 완전 범죄. 잘 했어, 사일런스 지니. 내가 이번에 따면 크게 한몫 떼어주지. 잠깐! 그런데 지니는 내가 솔광을 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설마? 난 손에 들고 있는 화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화투 가장 자리에 누군가가 손톱으로 긁은 듯한 표시가 나 있었다. 그렇다면 사일런스 지니와 노처녀가 한 패여서 일부러 나에게 삥땡을 쥐어주고 자신은 구땡을 잡았다는 건가? 그런데 사일런스 지니는 언제나 위대한 아이언스 공작님의 인품을 존경해 온 나머지 사기도박을 칠 수 없어 몰래 나에게 팔광을 건네준 거고. 아마 처음부터 죽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억 정도를 배팅한 이유는 판을 키우기 위해서겠지. 판 키워서 나눠 먹자고. 만약 광이 아닌 다른 패를 건네주었다면 그것도 작전 중에 하나 일 수 있다. 뭐 삥땡을 들고 있었으니 광이 아닌 다른 패는 건네줄 필요가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광땡은 최고의 패. 감히 어떠한 패로도 이길 수가 없다. 노처녀가 들고 있는 구땡이야 가볍게 박살난다. 그래. 남자라면 고. 못 먹어도 고. 끝까지 가보는 거야. “받고 더!” 난 계속해 ‘받고 얼마 더’ 를 외쳤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쌓인 돈은 7억. 난 전 재산 2억을 전부 밀어 넣었다. “1억 더.” 노처녀가 자신 있게 라면 박스 안에 들어있는 지폐를 바닥에 우수수 쏟았다. 몇 억이나 되는 돈이 1만 원권 지폐로 있다보니 담요 위에 놓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마치 돈지랄이라도 하듯 바닥에 돈을 쫙 깔아놓았다. 지금 내 발바닥에 차이는 지폐만 몇 천은 될 것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돈이 있어야 1억을 받을 거 아냐? 누군가 그랬다. 도박에 미치면 집도 걸고, 땅도 걸고, 아내도 걸고, 자식도 걸고, 자기 목숨까지 건다고. 하지만 나는 이 정도로 도박에 미치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때를 대비해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라이코스를 걸 뿐이다. “이 세상에 몇 마리 남지 않은 희귀종. 맛도 좋고 정력에도 좋은 그 이름도 유명한 청안백우조. 이 정도면 1억은 되겠죠?” “이게 뭐하는 짓이야!?” “보셨죠? 말도 할 줄 압니다.” “우리 이코한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이코를 놓아 주세요.” 놓긴 내가 뭐 하러 놔? 내 도박 밑천인데. “5천 쳐드리지요.” “뭐? 아니 라이코스가 5천 밖에 안 돼?” “5천도 많이 쳐드리는 겁니다. 싫으면 마세요.” 으윽, 노처녀.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다니. 하지만 치사하기로 따지면 아이언스 공작을 따라 올 자가 없다. 난 라이코스의 목을 대롱대롱 붙잡고 라이에게 말했다. “라이야. 라이코스를 구하고 싶지 않니?” 끄덕끄덕. “좋아. 그럼 내가 딱 1억에 라이코스를 너에게 넘겨줄게. 겨우 1억으로 넌 라이코스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 “좋아요.” 라이는 뒤에 있는 라면 박스에서 1억원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 걸. 이럴 줄 알았으면 한 2억 부를 거 그랬나? 난 라이에게 받은 1억을 던져 넣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라이가 문제였다. “1억 받고, 1억 더요.” 너까지 왜 이러니? 설마 나를 물 먹일 생각이니? 노처녀는 가볍게 1억을 던져 놓았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돈이 없었다. 라이코스 판매 금액까지 합친 3억을 몽땅 털어 넣었는데 더 이상 무슨 돈이 있겠는 가? 이렇게 된 이상 걸 건 하나 밖에 없군. “저를 걸겠습니다.” 광땡을 잡은 이상 난 나까지 걸 각오가 되어있다. 왜냐? 반드시 이기는 패니까. 노처녀는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천 쳐드리겠습니다.” “뭐? 내가 1천만 원 밖에 안 돼? 내 장기를 떼다가 팔아도 그거 보단 많이 나오겠다.” “1천만 원이 아니라 1천원입니다.” “1천원? 그럼 나라는 인간이 김밥 한 줄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겁니까?” “김밥은 먹을 수라도 있지 아이언스 공작님을 데려다가 어디다 씁니까? 1천원도 많이 쳐드리는 겁니다. 원래 시가로 계산하면 300원도 안 나옵니다.” 나보고 김밥 한 줄이라고 한 것도 모자라서 껌 한 통이란다. 내가 이걸 참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동귀어진하자고 달려들어야 하는 걸까?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이 차고 계신 시계 정도라면 9천 9백 9십 9만 9천원 쳐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결론은 나까지 포함해서 1억 걸라는 거다. “좋습니다. 기꺼이 걸지요.” 내 몸까지 걸고 나서야 배팅이 멈췄다. 걸린 돈 13억에 내 시계, 그리고 나. 만약 이번 판을 노처녀가 먹는다면 난 평생 노처녀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한다. 노처녀 성격이면 분명 매일 같이 나를 못살게 굴 것이다. 어쩌면 신발을 핥는 등의 변태적인 행위를 강요당할 지도 모른다. 라이가 판을 먹어도 마찬가지다. 라이는 분명 같이 놀자고 나를 괴롭힐 것이다. 난 노예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놀아줘야 하고 한달 정도만 유치하게 놀다보면 분명 정신 퇴행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쯤이면 유인원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왜냐? 나는 광땡을 잡았으니까. 노처녀가 먼저 패를 공개했다. <9, 9> “구땡입니다.” 노처녀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마치 ‘니가 감히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말하는 듯 했다. 노처녀의 손이 지폐 위에 닿았다. 난 노처녀의 손을 탁 쳤다. 일루니아는 안경 너머로 나를 찢어 죽을 듯 쳐다보았다. 후후후. 그런 눈빛으로 봐도 소용없어. 이번 판은 내가 먹는다. 난 당당하게 패를 노처녀 앞에 집어 던졌다. 순간 노처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팔광땡!” “그렇습니다. 일팔광땡입니다. 푸하하! 광땡이에요, 광땡! 어디서 감히 구땡을 가지고 깝쳐요? 우헤헤헤.” 노처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도 그렇겠지. 내가 삥땡을 들고 있는 줄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어쩌겠냐? 원망하려면 그대의 동생을 원망하시지요. “자, 그럼 이 돈들은 전부 제 차지군요.” 난 쌓여있는 지폐를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아! 행복해. 이 돈이면 루시아와의 결혼 자금으로 충분하겠지? “아직 라이미안님의 패를 보지 않았습니다.” “굳이 볼 필요가 있나요? 광땡인데.” “그래도 볼 건 봐야지요.” 노처녀의 주장에 난 라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뭘 잡았니, 라이야?” “으음, 잘 모르겠어요.” 하긴 니가 아는 게 뭐가 있겠니? “한번 펴 보렴.” 라이는 패를 내려놓았다. <10, 4> 단풍과 흑싸리. 일명 장사. 족보의 끝 쪽에 위치한 패다. 별 거 아니구만. “장사네요.” “장사군요.” 노처녀와 지니가 한 마디씩 했다. 라이는 손가락을 빨고 있을 뿐이었다. “장사 맞네요.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죠?” 지니가 안경알을 고쳐 쓰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라이미안님께서 이기신 게 되는 겁니다.” “예!?” 장사는 기껏해야 가보와 육사보다 높은 패지만 광땡을 잡을 수 있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상갓집에서 화투칠 때. 장사(10, 4)는 장사(葬事)와 발음이 같기에 상갓집에서는 최고의 패로 친다. 광땡이고 구땡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잡는다. “그렇다면 설마 여기가 상갓집이라는 것은 아니겠죠?” “왜 아니겠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상갓집 맞습니다.” “뭐!?” 이건 말도 안 돼. 분명 이 건 모함이야.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 하우스 아니었어요? 아니, 무슨 상갓집에서 수십억 대의 도박을 합니까?” “모이신 분들이 전부 다 한 재산 하시는 분들이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라이는 방긋 웃었다. “그럼 이게 다 라이 돈이에요?” “그렇습니다.” 라이는 지폐를 손으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노처녀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4억이나 잃었는데 웃는다는 것은…… 설마…… 나 사기 당한 거야? “이럴 순 없어!” 난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 * * * * 식은땀이 이불 위로 뚝뚝 떨어진다. 온 몸이 축축했다. 꿈인가? 그래. 꿈이군. 꿈이지. 꿈이 아니면 안 돼지. 으윽, 아무리 꿈이라 해도 내가 사기를 당하다니. 사기를 당해 오링(사실 이건 콩글리시다. 정확한 표기로는 올인All In이다. 해석은 전부 꼴아 박았다는 뜻이다) 당하다니.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그것도 노처녀 앞에서 라이한테. 아아! 죽고 싶다. 더 살아서 무엇을 하리. 라이한테도 깨진 몸. 이젠 삶의 낙이 없구나.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나 죽으면 루시아가 슬퍼할까? 노처녀는 기뻐하겠지. 사일런스 지니? 이 놈도 노처녀와 똑 같은 놈이야. 가재는 게 편이라고 지니는 노처녀 편. 사일런스 지니를 믿었던 내가 바보지.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 드르륵- 다시 닫는 소리. 아장아장- 라이의 발걸음 소리. 라이는 걸음도 가볍게 귀엽고 깜찍한 동작으로 나에게 걸어왔다. 손에는 라이코스를 꼭 쥔 채. 라이는 나를 발견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 곳에서 뭐하세요?” 저 맑고 순수한 표정. 하지만 저 것은 위선과 가식을 뿐이야. 분명 속에는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겠지. 가증스러운 것 같으니라고.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라이에게 다가갔다. 난 라이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라이의 뒤쪽으로 갔다. 그러자 라이는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시선은 정면에 위치한 침대를 향하도록.” 라이는 눈을 크게 뜨고 껌뻑거렸지만 일단은 내가 시킨 데로 따랐다. 내 시야에 라이의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잡힌다. 그 동안 얼마나 이 곳을 때리고 싶었는가? 그 동안 얼마나 참아왔던가? 이젠 참지 않으리. 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쫙 펴 45도 각도로 라이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빠악-! 이 경쾌한 소리. 이 얼마나 맑고 청아한 소리인가? 아! 온 몸의 세포가 찌릿찌릿 반응한다. 라이는 몸을 웅크린 채 두 손으로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기대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우에에엥!” “왜 때려? 니가 뭔데 때려? 니가 뭔데 우리 착한 라이를 때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라이코스의 발악도 함께 터져 나왔다. 난 라이코스를 옆으로 치우고 라이에게 외쳤다. “내 그 동안 너를 얼마나 귀여워 해줬는데 니가 감히 날 배신을 해? 감히 니가 노처녀와 짜고 나를 오링시켜?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니가 바로 그 격이구나. 넌 지금 내가 꼴아 박은 현금 2억 때문에 이러는 줄 알겠지만, 그건 아주 작은 이유에 불과해. 내가 열 받은 진짜 이유는 니가 노처녀와 짜고 나를 물 먹였다는 것 때문이야!” “흑흑, 라이는 물 먹인 적 없어요. 라이는 주스를 더 좋아하는 걸요.” “시끄러! 너 지금 나랑 말장난 해? 이게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2억이 어느 집 곗돈 이름인 줄 알아? 백날 라이코스 갖다 팔아봐야 2억은 꿈도 못 꿔. 물론 내가 2억이 아까워서 이러는 것은 절대 아니야. 하지만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있지. 어떻게 노처녀와 짜고 내 돈을 싹쓸이 할 수가 있니?” “흑흑, 라이는 엘프에요.” “이게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너 더 맞고 싶어? 내가 오늘 진단서 끊게 해줄까?” “우에에에엥!” 라이는 대답 대신 자리에 주저앉아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엔 가소롭게 비칠 뿐이었다. 내 돈을 다 따먹은 주제에 울음으로 해결하려 해?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서럽게 울고 있는 라이를 위로해 주는 것은 오직 라이코스 뿐이었다. 라이는 라이코스를 끌어안으며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아! 정말 너무 구슬퍼서 건물이 안 무너지나 싶다. 난 라이의 손에서 라이코스를 빼앗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으아앙, 이코를 놔줘요.” “시끄러! 그 동안 같이 놀게 해줬더니 니가 착각한 모양인데 이 앵무새는 내꺼야. 앞으로 같이 놀려면 이용 요금 내고 놀아!” “야! 내가 왜 니 꺼야?” “넌 입 다물고 있어.” 난 라이코스를 집어 던졌다. 그러자 라이는 쪼르르 달려가 기절한 라이코스를 끌어안았다. “흑흑, 너무 해요. 라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네가 아직도 네 잘못을 모르겠다 했느냐? 네 정녕 단매에 죽고 싶은 게냐?” “으아앙! 라이는 단매에 죽기 싫어요.”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난 결코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그깟 2억. 하! 그 정도는 그냥 불우 이웃 돕기 성금 낸 셈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난 돈 때문에 이러는 것이 결코 아니다. 펑펑 울고 있는 라이의 모습을 보니 참 가슴이 아프다. 인간으로 이럴 수 있는 걸까? 내가 대체 애 데리고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갑자기 죄책감이 물 밀 듯이 밀려온다. 하지만 라이한테 사기도박 당해 잃은 2억을 생각하니 다시 분노감이 솟아오른다. 감히 내 돈을 꿀꺽하려 하다니. 이 것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 정말 너무 화가 난다. 아니야. 어쩌면 라이도 노처녀한테 이용당했을 수도 있어. 권모술수에 능한 노처녀가 감언이설로 꾀는데 정신 연령이 낮고 순수한 라이가 무슨 수로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어. 하지만 그래도 용서가 안 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서가 안 돼. 그게 얼만데. 2억이면 집한 채 사서 루시아와 오붓하게 살 수 있는데. 그런데 나의 결혼 자금 2억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꿀꺽하다니. 그것도 모자라 라이코스와 내 시계, 나까지 꿀꺽하다니. 나 결혼 못하면 니가 책임질 거야? 울고 있는 라이를 보니 어느 정도 화가 가라 않는다. 저 어린 것을 때렸다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이번만은 용서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아. 알았어?” “흑흑.” “알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지.” 난 울고 있는 라이를 놓아 둔 채 방을 나섰다. 내 방으로 돌아와 분을 삭이는데 문득 뭔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무엇일까 자세히 생각해 보니 물어볼 얘기를 안 물어보고 왔다.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에 대해 물어봐야 하는 건데. 다시 찾아가 볼까? 아니야. 지금 실컷 울고 있을 텐데 찾아가면 미안하잖아. 딱 10분만 있다가자. 난 시계를 보고 정확히 10분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이의 방 앞에 서서 문에 귀를 대보니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드르륵-! 침대에 앉아있는 라이는 화들짝 놀라며 무언가를 이불 속에 숨겼다. 난 라이에게 다가갔다. “뭐하니, 라이야?”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 것도 안 해요.” 라이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눈이 퉁퉁 불어있고 볼가에는 아직도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고. 불쌍한 것. 어쩌다 노처녀의 꾐에 넘어가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그런데 뒤에 숨긴 것은 뭐니?” 라이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내가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 같지 않아요.” “라이야.” “예?” “맞고 보여줄래, 그냥 보여줄래?” “안 맞고, 안 보여줄래요.” 아! 다시 쥐어박고 싶다. 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라이는 재빨리 이불 속에 숨겼던 것을 꺼내 보였다. 라이가 꺼낸 것은 자그마한 단지였다. 요강 같이 옆이 뚱뚱하고 입이 넓은. 순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라이가 왜 그것을 숨겼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단지는 시가 몇 백억, 아니 몇 조원을 호가하는 국보급 보물일 것이다. 단지라고 해서 다 같은 단지가 아니다. 이건 척 보기에도 비싸게 생겼다. 단지 단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이 팍팍 온다. 그렇다면 라이는 이 것을 왜 숨겼을까? 아마 보여주면 비싼 거라는 걸 눈치 채고 빼앗아 갈까봐 그랬겠지. 그럼 나는 어찌해야 하는 가? 당연 라이의 기대에 부흥하여 빼앗아야겠지. 난 라이의 손에 들린 단지를 갈취하듯 빼앗았다. 비싼 단지다 보니 향기부터가 좋다. 마치 아카시아 벌꿀 냄새 같이 상큼해. 어라? 그러고 보니 단지 안에 뭔가 들어있네. 난 단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 끈적끈적한 느낌. 마치 걸쭉한 가래침처럼 내 손에 달라붙는 액체. “이건 벌꿀이잖아.” 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누가 줬니?” “밖에 있는 여자들이요.” 그렇다는 건 설마…… 어린 엘프가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다. 정말 너무 슬프게. 죽을힘을 다해서 운다. 최선을 다해서 운다. 열과 성을 다해서 운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은 저러다 애 하나 잡겠다, 라고 생각하여 하는 수 없이 라이를 달래기 시작한다. 하지만 라이가 쉽게 울음을 그칠 리 만무하다. 시비들은 유치하게도 먹을 걸 가지고 유혹한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라이는 우는 와중에도 귀가 솔깃하다. ‘흑흑, 라이는 벌꿀을 좋아해요.’ ‘그, 그러세요? 그냥 사탕으로 때우시면 안 될까요? 아시다시피 요즘 벌꿀 시세가 워낙 비싸잖아요. 국가 경제도 생각을 해주셔야지요.’ ‘으아앙! 라이는 벌꿀이 너무도 먹고 싶어요!’ 라이는 다시 목 놓아 울고 깜짝 놀란 시비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당장 주방에 가서 가져 올 게요.’ 라이는 방을 나서는 시비에게 외친다. ‘흑흑, 전 아카시아 벌꿀 아니면 안 먹어요.’ 어쩐지 라이가 10분 만에 울음을 그쳤다 했어. 이 단지가 국보급 보물이 아니라고 판명된 이상 더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내가 꿀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라이 먹으라고 주자. 난 라이에게 건네주기 전에 맛이라도 볼 생각으로 단지 안에 손가락을 깊숙이 넣었다. 푹-! 뭔가가 손가락에 걸린다. 난 두 개의 손가락을 집게처럼 사용하여 그 뭔가를 끄집어냈다. “넌 뭐냐?” “아! 꿀이 너무 맛있어서 맛이나 좀 보려고.” “그렇다고 꿀단지 안에서 목욕을 하냐?” “안 그래도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어.” “그냥 평생 거기 있어라. 단물이나 쪽쪽 빨아 먹으며.” 난 단지의 뚜껑을 닫고 라이에게 넘겨주었다. 라이는 기뻐하며 그것을 받았다. 난 손가락을 입에 넣고 꿀맛을 잠시 감상해 보았다. 으음, 맛있다. 라이코스가 헤엄을 치고 있는 게 조금 이해가 간다. 이 꿀의 맛은 일반적인 꿀의 맛과는 조금 틀렸다. 그 동안 내가 먹었던 일반적인 꿀보다 훨씬 끈적거린다. 그리고 벌꿀집 자체를 좀 갈았는지 간혹 부스러기 같은 것이 입 안에서 씹혔다. 아무튼 달고 상큼하다. 난 손가락에 묻은 꿀을 다 빨아먹은 후, 들고 온 계약서를 라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넌 참으로 호기심이 많구나. 뭔지 알 건 없고 일단 도장이나 찍으렴.” 라이는 꿀단지를 끌어안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빨리 찍어.” “하, 하지만 도장을 찍기 전에 무슨 내용인지 반드시 읽어 두라고 칼리가 말했어요.” “그 할머니는 왜 그렇게 쓸데없는 걸 가르치고 그러냐? 왜 이런 말도 있잖니. 일단 찍고 나서 생각하라는. 그러니까 군소리 말고 빨리 찍어.” “아, 알았어요.” 좀 더 버틸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쉽게 허락했다. 난 잉크를 건네주었고 라이는 종이에 꼭 눌러 지장을 찍었다. “그런데 무슨 내용이에요?” “아! 별 내용 아니야. 나중에 알려 줄게.” 사채업자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역시 사람은 여러 가지 경험을 해 봐야 해. 한 가지 일을 처리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다. 난 침대에 걸터앉아 열심히 꿀을 찍어 먹고 있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라이야, 혹시 블루 드래곤 에네스카스라고 아니?” 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드래곤은 잘 모르겠는 데요. 에스카네스라면 모를까.” “맞아. 에스카네스. 그게 에카스네스나 에네스카스나 그게 그거지.” “에스카네슨데요.” “그래. 어쨌든 그 블루 드래곤에 대해서 잘 안단 말이지?” “이름만 아는데요.” 하아- 역시 라이에게 기댄 내가 잘못이었다. 아무리 라이가 700년을 살았다 하더라도 드래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을 테니. 하긴, 드래곤이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잠깐. 그러고 보면 난 몇 번 만나봤잖아.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를. 어떻게 보면 꽤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도 있다. 최소한 누군가가 ‘니가 드래곤을 알아?’ 라고 물었을 때 ‘뭐 안면 트고 지내는 사이지’ 라고는 대답할 수 있을 정도다. 크로니스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 물어보기는 힘들 것 같다. “으음, 어디 사는 지 정도는 알아야 뭘 해먹던 말든 할 텐데.” 나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갑자기 라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 어디 사는지 알아요.” 아니, 뭐 그렇다고 손까지 번쩍 들 필요는 없는데. “에스카네스는 청색 산맥에 살아요. 상아탑도 청색 산맥에 있어서 제가 잘 알아요.” 블루 드래곤이 청색 산맥에 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어! 블루 드래곤이 청색 산맥에 살다니. 굉장한 우연이네. 지 몸 색깔과 산맥 색깔이 똑 같잖아.’ 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사람들 말처럼 청색 산맥에 청색 드래곤이 자리 잡고 살았다면 굉장한 우연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 반대다. 청색 산맥에 블루 드래곤이 자리 잡고 산 게 아니라, 블루 드래곤이 자리를 잡은 후부터 사람들이 청색 산맥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저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가 어디 사는 지 잘 알아요.” “정말 잘 알아?” “예. 에스카네스는 상아탑이 생기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는 걸요. 그리고 청색 산맥은 에스카네스의 영지이기 때문에 우리도 허락 받고 사는 거예요. 예전에 한번 만나본 적도 있어요.” “뭐? 정말? 정말 블루 드래곤을 만났단 말이야?” “예. 인사차 한번 만나 봤어요.” “그래? 어떻게 생겼는데?” 내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묻자 라이는 신이 나는지 함박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드래곤처럼 생겼어요.” 아, 한대 쥐어박고 싶다. “아무튼 드래곤이 어디 사는지 정확히 알고 있단 말이지?” 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라이가 비록 어린 아이처럼 생겼고 정신 연령도 많이 퇴화한 상태지만 상아탑의 주인이자 엘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라이는 유치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7클래스를 마스터했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천재 중의 천재. 한번 갔다 온 곳은 웬만해선 잊어먹지 않을 것이다. 결국 기댈 곳은 라이 밖에 없단 말인가? “라이야, 여기서 볼 일 끝나면 어디로 갈 거니?” “글쎄요. 아마 상아탑으로 돌아갈 걸요.” “상아탑에 돌아가면 뭐하니?” “아무 것도 안 해요.” 하긴 니가 할 일이 뭐가 있겠니? “그럼 잠시 이 오빠와 돌아다니지 않으련?” “어딜요?” “글쎄.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블루 드래곤이나 한번 만나보려고.” 라이는 잠시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좋아. 그럼 조만간 출발하도록 하자.” * * * * * “얘기는 어떻게 됐어?” “잘 됐어.” “잘 돼다니? 어떻게?” 반데라스 왕자는 눈을 빛내며 질문했다. “동맹 맺기로 했어.” “뭐? 정말? 중립국인 진명이 동맹을 맺겠다고? 그게 진짜야? 그렇다면 독자적인 노선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 편에 선 게 되니까 중립국임을 포기한 거야?”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넌 속고만 살았냐?” 난 귀찮다는 의미를 담아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반데라스 왕자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그쳤다.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했기에 동맹을 맺은 거야?” 이 나라 승상이 생양아치여서 나라가 망하던 말든 자기 좋을 대로 지껄여 댄 덕에 동맹을 맺었어……라고 말해야 진실이겠지만, 이렇게 말하면 아무래도 나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줄 수 없겠지? “다 나의 공이라 할 수 있지. 난 그 예전 강자아와 장량을 뛰어넘는 지략과 언변을 발휘해 오직 타고난 잔머리와 말빨로만 당대 최고의 모사이자 이 시대 최고의 생양아치인 제갈량을 설득시켰지. 이는 그 옛날 서희가 세 치 혀로 강동 6주를 거란족에게서 넘겨받았던 것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만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 반짝반짝, 초롱초롱 빛나는 반데라스 왕자의 눈동자. 아마 그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은 찬란한 후광과 함께 세상에 제일 위대한 위인으로 보이리라. 아니면, 말고. “그, 그게 정말이야?” “물론. 넌 속고만 살았냐? 한 나라의 왕자라는 놈이, 그것도 왕위 계승자인 놈이 그렇게 의심이 많냐? 설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너에게 거짓말을 하시겠냐?” 난 여기에 말을 덧붙였다. “이 정도에서 놀라면 곤란하지. 겨우 동맹 맺는 일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 그럼?” 반데라스 왕자는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이제까지 날 그저 그런 놈으로 봤었는데 지금에서야 내가 얼마나 잘난 인물인지를 깨달았으니 오죽이나 놀랐을까. 그 심정 심히 이해가 간다. “진명은 아이리스를 돕기 위해 천군만마를 일으켜 자바스의 후위를 치기로 하였다.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아, 아래로는 만백성의 염원을 받아 자바스를 멸망시키기로 하였다. 이는 강대국에 당한 약소국가의 설움을 회복하기 위함이요, 아이리스가 악과 깡이 있는 나라임을 보여줘 감히 다시는 개기지 못하도록 입에서 깨갱 소리 뱉고 알아서 꼬리를 말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결코 생양아치…… 아니, 제갈량의 개인적인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닌 진명 전체의 뜻이며 또한 아이언스 공작의 뜻이자 아이리스 전체의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세의 흐름을 따라 천기가 다한 자바스를 멸망시킬 것이며 천지의 정기를 받아 아이리스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하늘의 뜻이 그러하고 인간의 뜻이 그러한데 어찌 감히 이를 막을 수 있겠으며, 어찌 감히 이를 따르지 아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제 이 자리에 목소리 높여 소리친다. 나는 천과 지의 정기를 받아 기와 혼을 다해 이 자리에서 외친다. 그거 전부 다 나의 공이다!” 뻐끔뻐끔- 너 붕어냐? 왜 립싱크 가수들처럼 목소리는 안 내고 입만 뻥긋거리는 거지? 내 스스로 내 자랑을 한 것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정치인들은 원래 이렇게 때문에 나도 기꺼이 그렇게 한다. 난 정치인이니까. “난 우리 삼국 동맹을 위하여, 우리의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였는데 대체 넌 뭐했니? 아니, 뭐 하러 이 곳에 왔니? 설마 유람차 놀러 왔니? 한 나라의 왕자로서 부끄럽지도 않니? 세레나가 널 어떻게 생각하겠니?” 푹푹푹-! 나의 말에 뼈가 들어있으니[言中有骨] 그대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구려[有口無言]. 특히 마지막 말이 결정타인 것 같다. 아주 심장에 비수가 꽂혔구만. 숨은 어떻게 쉬나 몰라. “원래 여자는 능력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법이다. 세레나가 나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외모에 반했다고 할 수 있지만 문무를 겸비한 나의 능력에도 언제나 존경을 표시했지. 니가 세레나와 정식으로 교제를 하고 싶다면 너의 능력을 발휘해 봐. 반데라스 왕자님!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보고 싶어요!” 뭐 내가 이렇게 말해봐야 니가 보여줄 능력이나 있겠냐? 그냥 가만히 있어라. 방을 나오는데 뒤에서 반데라스 왕자의 처절한 절규가 들린다. “으윽, 세레나양…….” 어리석은 녀석. 능력 없고 용기 없는 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구나. 이런 놈에게 잘난 체를 한 내 자신이 우습다. 자랑을 하려면 아무래도……. To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이하 노처녀로 칭함) 안녕하세요.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지고 있는데 어떻게 지내시는 지요? 이제 골다공증도 걸리고 류머티즘 관절염도 걸릴 나이니만큼 몸 조리 잘 하십시오. 저는 별로 잘 지내지 못 합니다. 오직 아이리스를 위하는 마음으로 제 한 몸 신경 쓰지 않고 분골쇄신하여 열심히 일하느라 말이지요. 특별히 알려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이번에 진명과의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거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저 아니면 그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리스와 루시아 공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저의 목숨을 걸고 매달린 결과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전 진명의 승상이신 제갈량님께 출병을 약조 받았습니다. 지금 공식적인 문서로 작성하지는 아니 하였지만 확실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뭐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노처녀께서 오셨다면 분명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분명 이건 저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특히 노처녀는 불가능합니다. 고위관리 앞에서 히스테리부리면 그게 무슨 망신입니까? 아무튼 저는 이 편지를 저의 공적을 자랑하기 위함 아니라 오직 사실 전달만을 목적으로 썼으니 절대 저의 공적을 자랑하는 거라 생각지 마시고 아니꼬운 눈빛으로 째려보는 것도 그만둬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부디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가시길 기원합니다. ps. 루시아 공주님께 제 공적을 잘 말씀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절대 축소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전달해 주세요. 아! 뻥튀기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정도야 저도 눈감고 넘어가 드리지요. 편지를 다 쓰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 우체통이 있으려나? * * * * * * 아침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이불을 개고 가려운 머리를 긁는다. 벅벅- 며칠 머리를 안 감았더니 비듬이 우수수- 베개를 보니 흰색 눈이 내려있다. 탁탁 털어보니 한 말은 나올 듯 하다. 이걸 소금이라도 속여서 판다면 산다는 사람이 있으려나? 눈이 잘 안 떠진다. 눈곱을 긁어내니 그제야 떠진다. 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을 비볐다. 이러면 세수할 필요도 없고 손도 씻을 수 있고. 이런 걸 보고 일석이조(一石二鳥),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 하는 것이다. “깨어났나?” 익숙한 담배 냄새. 고개를 돌려보니 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는 청년의 모습이 보인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진 초록색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위로 세운 양복 깃이 살짝 흔들리고. 립스틱이라도 칠한 듯 붉고 짙은 입술. 그 입술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제갈량은 눈을 옆으로 돌려 나를 힐끔 보았다.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네 녀석이 비듬 털 때부터.” 타오른 담배의 길이를 보니 아마도 그때부터인 것 같다. 그런데 피고 있는 담배가 내가 가지고 다니는 담배와 굉장히 비슷해 보인다. “그 담배는 어디서 나셨어요?” “탁자 위에 놓여있더군.” 역시 내 거였어. 허락도 안 받고 남의 것을 슬쩍하다니. 법원에 고소하면 승소할 수 있을까? “어쩐 일로 오셨나요?” “할 얘기가 있다.” 얘기 좋지. 내가 또 토킹(Talking)에는 일가견이 있지. 스토킹(Stalking)에도 일가견이 있고. 아무튼 이건 내가 바라던 바다. “저 지금 배고픈데 식사하면서 하는 게 어떨까요?” 순간 제갈량의 표정이 변했다. 저거 화내는 거 맞지? 전체 요리로 나온 양송이 수프. 걸쭉한 회색 국물에 야채로 보이는 녹색 가루들이 뿌려져 있다. 한 입 먹어보니 달짝지근하면서도 느끼하다. 향신료가 부족했나? 난 후추를 좀 더 친 후 먹어보았다. 역시 느끼하다. 아무래도 내 취향이 아닌 것 같군. 그 다음에 나온 음식은 소고기 볶음. 얇게 잘라서 구운 소고기들이 야채와 함께 볶아져 있다. 끈적끈적하게 묻어있는 것은 아마도 꿀이겠지? 젓가락으로 집에 입에 넣으니 상큼한 꿀 냄새가 느껴지며 고기의 육즙이 배어 나온다. 맛있긴 하지만 너무 달다. 하지만 어디서 이런 음식 먹어보기 힘드니 난 열심히 먹었다. 다 먹고 나자 이번엔 해산물이 나온다. 껍질을 벗겨 훈제한 대하(大蝦 : 일명 왕새우)에 각종 소스를 뿌린 음식이다. 이건 간장을 찍어먹는 거라고 한다. 짠맛과 단맛이 적당히 혼합된 간장에 찍어 먹어보니 쫄깃하게 씹히는 게 정말 맛있다. 마치 입에서 톡톡 터지는 것 같아. 그 다음에 나온 바닷가제는……. “그만 좀 처먹어.” 보통 이런 대사가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라이에게 던진 말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아직 맛도 제대로 못 봤는데…….” 맛도 제대로 못 본 건 아니지만 아직까진 전체요리에 불과한 수준이다. 앞으로 나올 음식 가지 수만 열 개가 넘는데 여기서 끝내라니. 그건 말도 안 돼!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데. “이거 다 치워.” 제갈량의 명령 한 마디에 음식을 나르던 예쁜 아가씨들은 들고 오던 음식들을 도로 가지고 가고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순식간에 치웠다. 내 포크에 꽂혀있는 소고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내 입에 물린 새우까지 가져간다. 내 입 밑에 댄 이 그릇은 뭐지? 설마 입안에 있는 것까지 뱉으라는 건가? 시비들은 내 입안에 있는 음식까지 가지고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치워져있는 식탁을 바라보니 눈물이 흐른다. 제길, 너무해! “울지 마라. 추하다.” 그래. 겨우 음식 때문에 울다니. 아이언스 공작답지 않구나. 아이언스 공작이 이렇게 쪼잔 하면 안 되지. “할 얘기나 하지요. 말씀하세요.” 제갈량은 혀를 내밀더니 거기다가 담배를 지졌다. 치지직- 거리면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잠시 후, 불이 꺼진 담배를 바닥에 던지는데 그 모습이 정말 너무 멋있어 보인다. 그건 그렇고 이 놈 완전 싸이코다. 무식하게 혀로 담배를 끄다니. “앞으로 어쩔 거냐?” 네 놈을 받아버릴 거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예의에 어긋나니 참도록 하자. “당신이 말한 블루 드래곤 에카스에네스를 찾아가야지요.” “에스카네스다.” 그게 그거지. 제갈량은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귀고리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그가 어디 사는지는 아나?” “잘은 모르지만 안내자가 있습니다.” 분명 블루 드래곤을 ‘그’ 라 칭했다. 그렇다는 것은 드래곤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며 웬만큼 안면 트고 지낸다는 뜻이다. 드래곤이 이웃집 아저씨도 아니니 안면 트고 지낸다는 것은 제갈량도 그만큼 대단한 존재라는 거다. “당신도 드래곤인가요?” 제갈량은 웃음을 지었다. 한쪽 입 꼬리가 특히 올라간 것을 보니 비웃음이다. “그건 왜 묻지?” “궁금해서요.” “묻는 것은 자유지만 대답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대체 왜 여기 있는 건가요?”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마.” 제갈량은 짜증이 나는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민감한 질문이었나? 그나저나 드래곤이 양아치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드래곤이면 좀 멋있게 현자처럼 변해있으면 안 되나? 그런데 나는 왜 이 생양아치(生Yangachy)가 드래곤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거지? 하프 드래곤(Half Dragon)이나 고엘프(古Elf), 고마법사(古Magig User)일 수도 있잖아. “드래곤 맞죠?” “아가리 닥쳐. 찢어버리기 전에.” 역시 민감한 질문. 이제부터 좀 조심해야겠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귀고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혹시 저 귀고리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렸나? 예를 들면 변신 마법 같은 것. 드래곤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대다수의 마법사들은 변신 마법(Change Self)을 쓰지 않는다. 이는 변신 마법을 쓰고 있으면 다른 마법을 쓰는데 많은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나의 소비량도 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외모가 멋있으면 폼이 난다고는 하지만 마법사는 마법을 쓰기 때문에 그 존재 가치가 돋보이는 법. 폼에 목숨 거는 미친놈은 그리 흔하지 않다. 뭐 칼리야 변신 마법을 쓰고 다니지만 그야 워낙 고위 마법사인데다 상아탑 안에서 주로 행동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결론은 저 귀고리에 변신 마법의 매개체가 아닌가 싶다. 아니면, 말고. 언제 내 예감이 맞은 적 있었나? 제갈량은 예의 그 양아스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굉장히 불쌍하게 생겼군.” “예?” “능력 없고 소심한 남자의 전형이랄까? 말만 번지르르한 쓰레기 말이야.” 기분 나쁘다. 이런 말 듣고 기분 좋을 인간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그의 말이 사실인데다가 변명해봐야 나아 질 것은 없으니. “넌 운이 좋은 놈이야. 그것도 아주.” 이제까지 난 내가 상당히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해 왔다. 아니면, 이런 세계로 떨어져 노처녀한테 갈굼 받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넌 자신이 아주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군.” 당연하지. 그 예로 지금 너 같은 놈을 만나서 이렇게 곤욕을 치르고 있지. “이 세계로 떨어졌을 때, 이그리드가 너를 생체 해부했다면? 아무 능력을 받지 못하고 세상에 내던져 졌다면?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노예로 팔려갔다면?” “……글쎄요.” 그러고 보니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지금 내가 이 정도 살 수 있는 것은 전부 이그리드와 크로니스의 배려 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 세계 최강의 마법사라는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전인(傳人). 아이리스의 공작. 루시아 공주를 지켜볼 수 있는 위치. 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것들이다. 특히 나 같은 돌 머리로 5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가 된다는 것은 애당초 아예 불가능한 일이니까.(조금의 가능성조차 없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고 재수 없는 상황만 나열할 건 뭐야? “나에게 그렇게 버릇없이 굴고도 살아 있는 인간은 오직 너뿐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수틀리면 정말 죽여 버리겠다는 살기를 뿜어냈다. 목 주위가 시큰거리는 것이 마치 칼날이라도 닿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네 녀석은 흥미로운 존재니 특별히 살려두도록 하지. 아직 쓸만한 장난감은 부수지 않는 게 원칙이거든.” 아까까지만 해도 받아버리겠다 어쩌겠다 했는데 지금은 이 말조차 고맙게 느껴진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 싶을 만큼. 제갈량은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 밝고 환한 웃음이었지만 이가 드러나는 것이 조소(嘲笑)가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기분 나쁜 웃음이다. “생긴 거나 하는 짓이 하도 불쌍해 보여서 특별히 질문 하나를 들어주도록 하지.” 난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도 해주시는 건가요?” “물론이다.” “당신이 왜 제갈량인지 알고 싶은데요.” “내가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 “예? 아니, 아까는 분명…….” “질문은 하나라고 말했을 텐데. 넌 분명 대답도 해주냐고 물었고, 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걸로 끝이지.” “…….” 농담이라면 재미 없고, 진담이라면 짜증난다. 제갈량은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순간, 진 초록색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아름답게 휘날렸다. 정말 기념품으로 하나 뽑아가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머리카락이다. 비듬에 우수수 내려 흰색인지 검은색인지 구분도 안 가는 푸석푸석한 내 머리카락과 바꾸고 싶다. “좋아. 네 녀석이 하도 불쌍하게 생겼으니 한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지.” 나 생긴 게 어때서 그러시나? 난 이번엔 실수하지 않도록 신중히 물었다. “어째서 이 곳만 문명이 이 모양인가요?” 제갈량은 조소를 지었다. “정말 멍청한 인간이군. 머리가 돌아가는 인간이었으면 에스카네스의 위치를 물었을 거다. 그런데 그런 쓸데 없는 질문을 하다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잘한 것이 틀림 없다. 대답해 주기 싫으니까 괜히 튕기기는. “좋아. 그럼 대답 해주지. 그건 말해줄 수 없다.” “……?” 이 인간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제갈량은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다. 난 맹약에 묶여있는 몸이라서 말이야. 뭐 맹약을 깼다고 해서 특별히 불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속은 잘 지켜야지.” “…….” 진심으로 받아버리고 싶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지 방을 나서며 한 마디 한다. “생긴 게 하도 불쌍하고 추잡해 보여서 이대로는 못 가겠군. 조언이나 하나 해주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너무 믿지는 마. 네 녀석이 인지하는 세계와 타인이 인지하는 세계, 실제 존재하는 세계는 엄연히 틀린 법이거든.” 뭔 말이냐……라고 반문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를 만나봐야 이 의문을 풀 수 있을 것 같군. 1671년 10월 28일. 옛 말에 쇳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있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쇳뿔은 단김에 빼라는 뜻이다. 단시간이 아닌 장시간, 그것도 모자라 장기간에 걸쳐 뽑는다면 소가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점은 왜 소의 뿔을 뽑아야 했을까? 그냥 자르면 안 되나? 아마 이런 의문을 표하는 인간은 나 밖에 없으리라 생각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옛말이나 속담이라고 하면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보거든. “뭐 나야 워낙 신지식인이니까.” 이렇게 말을 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오늘 날씨를 보아하니 햇빛에 내리 쬐는 화창한 날씨다. 이런 날씨엔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어. 그래서 난 떠난다. 이미 외교 협상도 마쳤는데 내가 이 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지. 무엇보다도 궁금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한시라도 빨리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를 만나 대답을 듣지 못하면 속 터져 죽을 지도 모른다. 사실 얼마 전부터 떠나려고 했는데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았다. 짜증나게 바람이 너무 세게 불었다. 뭐 바람 분다고 해서 길을 못 떠날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기 싫어지니 계속 미룬 것이다. 난 청룡도, 실제 이름은 라이트닝 블레이드인 멋진 도를 허리에 차고 칼라이스의 망토를 둘러 맸다. 그리고 옆 방으로 돌격! “라이야! 해 떴다! 일어나라!” 라이는 침대 위에 돌돌 말려 있는 비단 이불 안에 쏙 들어가 있었다. 마치 김밥 같다. 비단 이불이 김이라면 라이는 단무지라고 해야하나? “졸려요.” 졸려도 어쩌겠냐? 이미 내가 준비를 끝마쳤는데. 난 시비들에게 세숫대야와 비누 등을 주문하였다. 이들은 대기하고 있었는지 순식간에 그것들을 방 안에 들여 놓았다. 난 이불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라이를 억지로 끌어내 세숫대야 앞에 앉혔다. 대야 안의 물을 만져보니 따뜻하다. 정신이 확~ 들만한 찬물을 원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난 물을 떠다가 라이의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 비누 거품을 내서 라이의 얼굴에 잘 바른 다음, 물로 깨끗이 씻혀 주었다. 거기에 이어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까지 닦아 주었다. 이건 완전히 보모잖아. 하지만 이제부터 라이의 안내를 받아야 할 입장이기에 큰 소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머리도 감길가 생각해 보았지만 냄새도 나지 않고 부드러운 것이 하루쯤은 안 감아도 될 것 같았다. 라이는 잠이 조금 깼는지 가늘게 뜬 실눈으로 나를 보았다. “뭐하려는 거에요?” “출발해야지.” “어디로요?”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가 있는 블루 마운틴즈로.” 이렇게 대답하자 라이의 잠옷 주머니 안에서 웬 새대가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벌써 가는 거야?” “생각을 바로 행동에 옮긴다는 것이 아이언스 공작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난 라이의 짐을 챙겨 방을 나왔다. 라이는 그 자리에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얘 옷 좀 갈아입혀 줘요. 따뜻한 걸로요.” 먼저 밖에 나와 기다리자 따뜻해 보이는 양털 외투를 입은 라이가 다가왔다. 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짐을 들었다. 등산용 배낭 정도 크기의 짐. 이 배낭 안에 든 것은 전부 라이의 겨울 옷이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에스카네스의 레어가 있는 지역에는 강풍과 강설이 몰아친다고 하니 어린 아이 감기 예방 차원에서 힘들게 준비한 것이다. 나야 칼라이스의 망토에 의해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상관 없지만. 식량은 후에 마련할 생각이다. 나의 계획은 이렇다. 일단은 상아탑으로 이동해서 그 곳에서 에스카네스의 레어로 간다. 같은 산맥에 있다해도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으니 이동 물품을 지원 받아야겠지. 난 라이의 손을 붙잡고 빠르게 걸었다. 쉴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막상 출발하려하니까 괜히 마음이 급해진다. 늦게 간다고 드래곤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닌데. “천천히 가요.” “어차피 게이트로 이동할 테니 지금 빨리 가야지.” 궁의 중앙 지역, 즉 우리가 처음 온 곳에는 다시금 텔레포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물론 내가 어젯밤부터 부탁을 해놓았던 거다. 상아탑에도 연락을 해 놓았지. 그 쪽에서 게이트를 열어 줘야 이동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난 왕궁만 주로 옮겨다닌다. 이런 곳에 왔으면 시내도 좀 돌아다녀보고 예쁜 아가씨들도 좀 만나보고 해야 하는데. -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왕궁 돌아보는데만 3박 4일 이상 걸린다. 왕궁의 소유로 되어있는 정원이 있는데 이건 정원이 아니라 숲이다. 여기서 길 잃어 죽은 사람도 한, 둘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예쁜 아가씨들은 왕궁에 전부 몰려있다. 난 이래서 왕이 좋아. 나도 크면 왕이나 해볼까? 루시아와 결혼하면 왕위 계승권을 얻을 수 있지 않나? 복도를 도는데 은발의 청년이 보였다. 반데라스 왕자는 옷을 두툼하게 차려 입은 우리들을 놀란 눈으로 쳐다 보았다. “니들 어디가냐?” “드래곤 만나러. 왜 같이 갈래?” “……?” 반데라스 왕자의 표정은 ‘이 것들이 듀엣으로 미쳤나?’ 정도. 평소 같았으면 즉시 받아버렸겠지만 이해해 주도록 하자. 복도를 거의 다 빠져나오는데 이번엔 초록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제갈량이다. 입에 물고있는 담배를 보니 내 게 확실하다. 저건 또 언제 빼갔지? “어디가나?” 건방지게 묻는 그의 태도에 난 퉁명스럽게 답했다. “알면서 뭘 물으십니까?” “상당히 추울텐데.” 난 등에 맨 배낭을 두드려 보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조소를 지었다. “그 미녀가 안내잔가?” 미녀? 미녀가 어딨어? 순간 난 눈이 돌아가 여기저기를 둘러 보았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설마 ……는 아니겠지? 난 은근슬쩍 라이를 보았다. 그러자 제갈량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난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라이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설마 이 놈은…… 미성년자를 건드렸을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 건데…… 성인 여성에게는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해…… 아직 호적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영계들만 건들고 다니는…… 로리타 콤플렉스…… 일명 로리콤…… 그대는 변태~! “헛소리 지껄이지 마. 대가릴 박살내버릴테니.” 난 생각만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손가락으로 담배를 우그리는 걸로 봐서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래서 성질 더러운 놈과 사귀면 인생이 피곤하다니까. “넌 언제봐도 불쌍하게 생겼구나. 진짜 널 보고 있으면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해 연민이 느껴진다.” “…….” 생긴 거 가지고 놀리는 거 정말 나쁜 짓이다. 당하는 사람의 기분은 생각도 하지 않는 비열하고도 저열한 짓. 난 절대 남 생긴 거 가지고 놀리지 않는다. -대신 마음에 안 들게 생겼으면 조용한데로 불러 패 버린다- “뭐 좋아. 불쌍하게 생긴 것도 불쌍한데 불쌍하다고 말해서 더 불쌍하게 만들면 좀 미안하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말이야.” “……결론은 도와주겠다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선 사업하는 셈 치고 그러도록 하지. 적당히 불쌍하게 생겼으면 몇 대 패서 얼굴을 뭉개버리려 했는데 너무 불쌍하게 생겨서 그런 마음도 들지 않으니까. 아예 이번 기회에 앵벌이로 한번 나서보지 그래?” “그만하시고 도와줄 거면 빨리 도와주세요. 떠나는 마당에까지 욕 먹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좋아.” 딸랑-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서 났나 살펴보니 제갈량의 왼쪽 귀고리였다. 그곳에 걸린 두 개의 귀고리는 서로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왼손을 밖으로 뺐다. 손가락에 박힌 반지가 빛을 발한다. 무슨 마법이라도 쓰려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텔레포트 스펠(Teleport Spell)이에요. 캐스트 스펠(Cast Spell)도 없이 바로 쓰려는 모양인데요.” 라이의 중얼거림에 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캐스팅(Casting) 없이 주문을 바로 쓴다고? 하긴, 드래곤 정도 되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겠지. “잘 가라, 꼬마야.” 순간, 중력이 늘어나면서 내 발을 삼켰다. 바닥에 꺼지는 느낌이다. 이건 이제까지 텔레포트와는 다른데. 몸이 찢어지는 것 같다. 수십 배로 늘어난 중력은 내 몸을 지하로 끌고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기압이 올라갔다. 1기압에 적응 된 내 몸은 증폭된 기압을 이기지 못하고 처참히 우그러 들었다. 제길, 무슨 텔레포트가 이 모양이야? - 개성이라고 해두지. 개성이라기 보단 악취미겠지. - 어느 쪽이던 상관 없잖아. 어차피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닌데. 인간은 가끔 색다른 경험도 해보는 것이 좋다고. 너나 실컷 해, 이 생양아치야! 이공간(異空間)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라이는 마치 미끄럼틀 타듯 즐기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저 행복하게 웃는 미소 좀 봐. 왜 나만 이 모양이야? - 불쌍해 보여서 도와줬더니 잔말이 많군. 그만 닥치는 게 어때? 빌어먹을! - 불쌍해 보여서 마지막으로 충고나 한 마디 해주지. 눈에 보이는 것을 너무 믿지 마. 본질은 언제나 숨겨져 있는 법이거든. 옆에 있는 미녀처럼 말이야. 크크크, 하하하하하! 제길, 다음에 만나면 진짜 앞 뒤 안 가리고 받아 버린다. 난 두개골 마저 형편 없이 우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정신을 잃었다. 아무리 잘난 나지만 뇌가 없으면 좀 그렇지. * * * * 눈을 뜨고 싶은데 눈이 안 떠진다. 몸의 체온이 점점 낮아지는 것 같다. 이젠 몸에 감각이 없어. 영하의 날씨 속에서 잠들면 얼어 죽는다는데 나도 그렇게 되겠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위대한 나의 시신을 영구 보존할 수 있다는 점이…… “일어나세요.” “깨울 필요 없어, 라이야.” “왜?” “안 일어나는 거 보니까 죽은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묻어주자.” 내 위로 눈이 덮인다. “무덤을 만들자~ 눈을 덮고~ 얼음으로 비석을 세우고~ 히로 오빠의 무덤을 만들자~.” 예쁘게 만들어 줘, 라이야. 부탁해 “아~ 손 시려.” “귀찮게 무덤 같은 거 만들지 말고 그냥 가자. 어차피 죽은 놈인데 알게 뭐야.” “그런가?” 잠시 몇마디 대화를 나눈 그들은 뽀드득거리는 발 소리와 함께 나에게서 멀어졌다. 아, 이 분노감! “이 것들아!” 내가 눈을 헤치고 벌떡 일어서자 라이와 라이코스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앗! 시체가 일어났다!” 일단 옷에 묻은 눈들을 털어내고 몸을 움직여 봤다. 체온이 낮아져서 그런지 삐걱거리고 둔했지만 이상이 있는 곳은 없는 듯 했다. 휘이이잉~ 싸늘한 눈보라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벌려진 옷깃 사이로 차가운 눈송이가 들어온다. 인간적으로 너무 춥다. 칼라이스의 망토는 착용자의 체온 조절이 가능해 이렇게 추울 리가 없을텐데. 그 망토를 걸치고 있으면 한 여름에도 덥지 않고, 한 겨울에도 춥지 않은데. 어째서 이렇게 추운 걸까? “…….” 어째서 나의 사랑스런 망토가 저기있는 걸까? 라이는 잠시 안절부절 못하는 듯 하더니 이내 밝은 웃음을 지었다. “너무 추워서요.” 너무 추워서 나를 살해한 후 암매장하려 했다는 건가? “……라이야.” “예.” “벗어라.” “추워서 싫은데요.” 내가 여기서 라이를 묻고 간다 하더라도 누가 나를 욕하리오. “아으으~ 추워.” 날씨가 춥긴 하다. 영하 10도는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온도가 아니라 강풍이 분다는 거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강풍을 맞으면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느낌이다. 제길, 대체 우리를 어디로 텔레포트 시킨거야? 난 망토의 죔새를 더욱 조이고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꼭 눌러썼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얼굴은 정면으로 바람을 받으니 피부가 상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 된다. “너무 추워요.” 라이는 내가 배낭에 매고 온 겨울 옷을 전부 껴입었다. 오리털과 닭털을 섞은 파카에 양털 외투, 개털 스웨터까지. 후드도 꼭 눌러쓰고 조여서 눈만 빼꼼히 내 놓은 상태다. 손에는 흰색 벙어리 장갑에 발에는 북극곰의 발을 잘라서 만든 것 같은 흰색 신발을 신고 있다. 정말로 곰발바닥이 컨셉인지 신발에서 발가락까지 튀어나와 있다. “그렇게 껴입었으면서 뭐가 추워?” “라이는 원래 추위를 잘 탄단 말이에요.” “그건 니 사정이지. 아무튼 빨리 와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앞에서 몰아치는 강풍과 무릎까지 박히는 눈 때문에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산악등반을 할 때는 리더가 앞에 서서 눈을 치우면서 걸어간다. 그리고 맴버는 그 뒤를 따라 체력을 아낀다. 그리고 리더가 지치면 맴버 중 하나가 리더와 교대한다. 이렇게하면 서로 체력을 아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라이와 나 단 둘. 앞에도 내가 서고 눈도 내가 치워야 한다. 라이가 하는 일은 뒤에서 투덜거리며 걷는 일. 옷을 얼마나 껴입었는지 행동이 둔해 걸음도 느리다. 라이코스도 추운지 라이의 옷 속에 쏙 들어가 고개 조차 내밀지 않는다. 결국 이래저래 고생하는 것은 나. 약 한 시간 정도 걷다 보니 몸에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을 느낀다. 이동 속도도 평소의 반 이하다. 이러다간 얼어죽거나 굶어 죽거나, 둘 중 하나겠군. 식량도 챙기지 않았는데 이런 곳에 떨트리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어디냐?” “저 쪽이요.” 사방이 눈으로 덮힌 곳에서 어찌 방향을 찾을 수 있겠냐만은 라이는 잘도 찾아낸다. 라이가 가리킨 대로 가기만 하면 마을이 나온다고 하는데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대체 이렇게 추운 곳에서 어떻게 인간이 살아간단 말인가? 설마 설인(雪人)? “저기에요. 저기!” 라이가 뭔가 발견했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라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얼음벽에 마치 동굴 같이 구멍이 뻥 뚫려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 뭐가 있는데?” “마을이요.” 저게 마을이면 10평짜리 원룸은 궁궐이겠다. 눈보라가 점점 거세지는 관계로 전진은커녕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저게 뭐가 되었든 간에 일단 저 곳에서 눈보라를 피하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힘들게 걸음을 내딛는데 뒤를 돌아보니 라이가 따라오지 않는다. “왜 안 와?” “못 걷겠어요.” 이건 엄살이 아니었다. 라이가 체구가 작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난 허리까지 잠겼지만 라이는 목만 겨우 내밀고 있었다. 내가 눈을 제대로 치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길. 눈신이라도 있었으면 좀 나을텐데. 난 라이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생각 같아서는 화(火)계 마법을 써서 눈을 몽땅 녹여 버리고 싶지만 그건 정말 미친 짓이다. 일단 지금과 같은 날씨면 눈을 녹여봐야 바로 얼음으로 변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눈사태를 부를 수 있다. 원래 화계열 마법이 폭파성이 강하거든. 어찌어찌해서 얼음벽에 도달하긴 했는데 구멍으로 올라가는 것이 걱정이다. 구멍은 약 20m 정도 위에 뚫려있었다. 눈사태가 나도 안으로 눈이 들어올리는 없겠군. 얼음벽을 두드려보니 상당히 단단하다. 어차피 밧줄이나 못도 없으니 상관 없긴 하지만. “여길 어떻게 올라가냐?” 라이는 온 몸을 오들오들 떨며 말했다. “비행 마법(FLy)으로 날아가요.” 물론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강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비행 마법을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다. 그렇다고 이 매끈한 벽을 타고 올라갈 수도 없으니…… 좋은 방법 없나? “이코가 먼저 올라가서 밧줄을 내려주면 될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런 수가 있었군! 하지만 문제는 밧줄이 없다는 거지. “저기 마을이 있는 거 확실하니?” 라이는 눈을 가늘게 찢으며 나를 째려보았다. “흥! 라이 말을 못 믿는 거에요?” “…….” 갑자기 자존심 세우기는. “흠흠, 그럼 라이코스가 올라가서 사람들을 불러오면 되겠다. 라이야, 주머니에 있는 라이코스를 꺼내 보렴.” “어느 주머니에 있는 지 모르겠어요.” 하긴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는데 알 리가 없지. 휘이이잉~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그래도 아까는 몸을 움직였는데 지금은 가만히 있으니 체온이 계속해서 낮아지는 것 같다. 빨리 하지 않으면 여기서 얼어 죽겠다. 라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빨을 부딪히며 말했다. “이코야~ 도와줘, 이코야~.” 그러자 라이코스가 라이의 옷에서 뛰쳐나와 멋지게 외쳤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진정한 친구 라이코스 등장!” 평소 같았으면 죽을 때까지 패줬을 텐데 지금은 왜 이렇게 멋있어 보일까? 오오! 라이코스의 몸에 휘양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 어두웠던 시대에 한줄기 광명이 되어 우리를 비춰주오! 그대는 진정한 영웅! 그대의 이름은 라이코스! “사랑하는 나의 친우 라이코스야.” “에엑! 난 남자는 싫어!” 이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보인다. 난 이러저러한 사정을 설명해 라이코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싫어! 내가 널 도와야하는 이유를 원고지 1000매로 서술해 봐.” “…….”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내가 여기서 라이코스를 받아 버리면 나와 라이는 꼼짝 없이 얼어 죽는다. 어떻게든 라이코스를 잘 구슬려 도움을 받아야 돼. “이코야~ 라이 너무 추워.” “알았어! 내가 사람을 불러 올게.” 내 말은 껌처럼 가볍게 씹던 라이코스는 라이의 말을 듣자마자 홰를 치며 날아 올랐다. 파닥파닥~ 믿을 놈이 저 놈 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가슴 아프다. “재수 없다.” “네 글자군. 좀 더 줄여.” “뭣 같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야. 좀 더.” “젠장!” “역시 상황과 부합하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야. 니 문장력도 상당하구나. 훌륭해, 라이코스. 누가 널 보고 매라고 생각하겠니? 넌 위대한 문장가가 될 소질을 지니고 있어. 그럼 마지막으로 한 글자.” “쒯!” “오오! 놀랍군!”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온다. 이젠 라이코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 같다. 라이코스가 이런 훌륭한 매라는 것을 진작 알아보지 못한 나의 심미안이 원망스럽다. 지금 우리가 처한 재수 없고도, 뭣 같고도, 젠장스런 상황을 ‘쒯’ 이라는 단 한 글자로 줄여서 표현하다니.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라이야?” “뭐가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 말이야.” “그래도 아까보단 덜 춥네요.” 그래. 확실히 얼어 죽는 것 보단 낫긴 하다. “훠리 우크 퍼퀸 꽈이.” “알았어, 임마.” “우크 우크!” “정중하게 부탁하지. 제발 좀 닥쳐주겠나?” “킬리크 루워 훠리!” 닥치기 싫다는 군. 난 그들이 원하는 데로 빨리 걸었다. 지금 우리는 굵은 밧줄에 줄줄이 소세지처럼 묶여 연행 되는 중이다. 일단 라이코스가 사람들을 불러워 우리가 구조된 것까지는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들은 라이코스가 불러서 온 게 아니라 라이코스를 쫓아 온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 이들은 우리를 소세지처럼 묶어서 연행하는 것일까?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방금 전 우리 목숨을 구해준 이 밧줄이 지금 우리 몸을 묶고 있다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밧줄을 가져온 것도 애당초 구조가 목적이 아니라 포박이 목적이었던 것 같다- 준법정신이 투철하여 법을 어기기는커녕 거짓말 한번 안 해본 나는 당연 나의 결백을 주장하려 하였다. 평소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놈은 법 없어도 살 놈이야’ 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사실 ‘저 놈은 법 없어야 살 놈이야’ 가 정확하다. 뭐 글자 한 자 차이니 넘어가자) 덤으로 내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알려주어 이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나를 우러러보게 하려 하였다. 그런데 말이 통해야 말이지. 지금 우리를 연행하는 사람 수는 2명.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가 왜 이들을 받아버리지 않고 순순히 잡혔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다 깊은 이유가 숨겨져 있었다. 받아버리면 이들이 아플까 봐? 진단서를 끊어와 위자료를 청구할까 봐? 천만의 말씀. 난 이런 거 별로 신경 안 쓴다. 일단 받아버리고 생각한다. 난 받아버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받아버리지 못한 것이다. 받아버리려다 받힐 것 같아서 말이다. 내가 예전에 알고 지내던 놈이 하나 있었는데 이 놈의 좌우명이 ‘무조건 받아버리자’ 였다. 이 놈의 집 가훈(家訓)이 ‘줄 건 주지말고 받을 건 다 받자’ 였다. 아무튼 이 놈이 어느날 학교를 가는데 소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냥 소를 비켜서 갔는데 비해 이 놈은 소를 받아버렸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두 말할 것도 없다. 괜히 잠자는 소를 건드려, 뿔에 받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 중이다. 역시 사람은 때와 장소와 상대를 가려서 받아야 한다. 지금 나는 이 세 가지가 전부 안 좋았다. 눈보라가 쳐서 체력이 저하되었으니 때가 좋지 않고, 이 곳은 놈들의 홈그라운드니 장소가 좋지 않다. 마지막으로 상대가 절대 만만하지 않게 생겼다. “훠리 워리 지쿠쿠 하토네.” 내 옆에서 이렇게 열심히 지껄여 대는 놈의 키는 대략 3m 정도. 3m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그렇다는 거다. 이렇게 큰 인간은 처음봐서 근사치를 잡기도 힘들다. 라이의 옆에 있는 놈은 이 놈보다 20cm 정도 큰 3m 20cm. 올려다보기에도 목이 아프다. 대체 이 동굴은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뭐 아스트랄계로 가는 차원의 문이라던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 안은 어두워서 한치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 놈들은 횃불 하나 없이 잘 걷는다. 야행성 시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길을 외우고 있는 듯 했다. 길의 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서 빛이 보였다. 드디어 이 길이 끝나는 거다. “라이, 다리 아파요.” “난 머리로 피가 몰리는 것 같아.” 우리야 묶여서 걸어가는 정도지만 라이코스는 거꾸로 묶여 대롱대롱 매달려 가고 있었다. 라이코스가 박쥐도 아닌데 어째서 거꾸로 매단 걸까? “우와! 예쁘다!” 라이가 감탄사를 내질렀다. 난 침묵하긴 했지만 생각면에서는 라이와 동일하다. 웬만한 성채 하나 정도의 부지에 쫙 깔린 빙판. 그 위에 세워진 얼음 건물들. 마치 하나의 조각품을 보는 듯 하다. 집 숫자는 대략 200호 정도. “훠리 우크!” 나 이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빨리 걸으라는 뜻이다. 으음, 역시 현지인과 직접 대화를 나누어 경험을 쌓으면 단기간 내에 학습 능력을 높일 수 있다. 라이는 주위를 둘러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긴 얼음 도시라니. 환상적이고 아름답긴 하다. 곳곳에 있는 얼음 입자들이 다이아몬드 가루처럼 부서져 내린다. 얼음집들은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마치 보석 같다. “그런데 넌 한번 와보지 않았니?” “그 땐 50가구 정도 밖에 없었는 걸요.” 하긴, 그 때가 언젠데. 시간이 흐르면 다 바뀌기 마련이지. 그들은 우리를 가장 큰 집 -관공서나 집회소로 보이는- 곳으로 데려 갔다. 큰홀의 중앙에 우리를 앉히자, 잠시 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살펴보니 전부 3m나 되는 키는 아니었다. 내 옆에 있는 놈들만 특히 큰 놈이고 대부분 2m 30에서 2m 80cm 사이였다. 피부는 매끄러운 흰색이고 눈은 검은색, 덩치가 큰 이유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피하지방이 많기 때문으로 생각 된다. 역시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면 사나 보다. 이건 나의 생각이지만 이 주위에 다른 마을은 없는 듯 하다. -이런 천연의 요새가 아무 곳에나 있지는 않을테니- 그렇다면 여기는 자급자족을 하는 공동체라는 얘기가 되는데. 수백개의 검은 눈동자가 우리를 훑어 보았다. -마을 사람들 다 모였나보다- 몸매 죽이는 여자가 간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갔는데 짐승 같은 남자들이 추잡한 시선을 받을 때의 기분.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런 기분이다. “헤헤~ 따뜻하다.” 라이의 말 대로 따뜻하긴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당히 서늘한 정도지만 이제까지 하도 추웠던 터라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진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체구가 왜소한 -어디까지나 이들에 비해. 그래도 풍체 좋아보이고 키도 2m는 넘는다- 할아버지 하나가 들어와 우리의 앞에 앉았다. 얼굴을 딱 보니 노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피부가 희고 깨끗했다. 사람들의 태도의 길게 기른 수염이 없었다면 노인이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뒤 쿼스 화트?” 노인이 우리를 노려보며 묻자 우리를 잡아 온 두명 중 키가 작은 쪽이 대답했다. “뒤 쿼스 이지스. 카마 벨제뷰트 콰이.”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안 좋은 말이 틀림 없다. 말 하는 놈의 눈빛이 고자질하는 놈의 눈빛과 똑 같았어. 해석해 보자면 ‘이 놈들 나쁜 놈들이에요. 할아버지가 혼내주세요’ 인 것 같다. 나의 재수없는 예감은 항상 들어 맞기 마련이지.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다. “벨제뷰트 콰이?” “우스! 뒤 쿼스 쿠륵 아니 우!” 난 라이를 돌아 보았다. “이 것들이 뭐라고 그러는 거냐?” 라이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라이는 여기 말 몰라요. 게다가…….” 이어질 말이 짐작이 간다. 딸랑 200가구 있는 부족 공동체. 라이가 이 곳에 들른 때는 약 500년 전. 다른 곳과 교류를 하지 않은만큼 언어가 자체적으로 진화하였을 것이다. “혹시 아는 사람 없니?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라거나.” “다 죽었을 걸요. 그리고 그 때 제 모습은 이러지 않았어요.” 아, 그렇지. 500년 전이었지. 그리고 그때 라이의 모습은 정상적인 엘프 모습. 지금과 같이 통통하고 귀여운 모습이 아닌 늘씬하고 섹시한…… ‘눈에 보이는 것을 너무 믿지 마. 본질은 언제나 숨겨져 있는 법이거든. 옆에 있는 미녀처럼 말이야.’ 맞아. 그 거 였어. 본질. 지금 라이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부작용에 의한 가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모습은 일반 엘프 여성. 즉, 키 크고, 예쁘고, 늘씬 한. 엘프의 피를 반만 이어 받은 라이레얼도 그 정도였는데, 순수 엘프의 피를 이어 받은 라이라면…… 아! 보고 싶다.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어느 정도 미인일까? 아무래도 어린 여자애 보다는 늘씬한 미녀와 함께 다니는 것이 남들 보기에도 좋겠지. “쥬크릴 꽈이!” 일단 여기서 살아나가면 말이야. 우리 주위를 둘러 싼 사람들은 일제히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지금 외치는 말에 대한 해석은 ‘개자식’ 정도가 아닐까? 아무튼 좋은 뜻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봐요! 이 것 좀 풀어줘요! 우리 대화로 모든 것을 해결합시다. 무식하게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물론 알아들을리 없다. 난 라이코스를 돌아 봤다. “야, 넌 여러 가지 말을 할 줄 안다며. 그런데 왜 아무 말도 못 해?” 그러자 라이코스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건 엘프어나 훈어, 공용어 등등 일반인이 쓰는 언어고. 이런 산골 마을에서만 쓰는 언어를 내가 알게 뭐야?” 그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뭐라고 얘기했다. 대충 짐작하건데 좋은 소리는 아닌 듯 했다. 잠시 혼자서 열심히 떠들어 대던 노인은 옆사람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옆사람이 다가오더니 라이의 후드를 벗겼다. 한겹, 두겹, 세겹…… 많이도 뒤집어 썼다. 후드를 다 벗기자 풍성한 회색 머리카락과 함께 뾰족한 두 개의 귀가 튀어나왔다. “에르프!”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노인이 지시를 내리자 그들은 라이를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 주었다. 역시 엘프는 어딜가나 사랑 받는 종족이라는 건가? 자유의 몸이 된 라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라이코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코도 풀어 주세요.” 굳이 말을 알아듣지 않아도 제스처로 알아 들었는지 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라이코스가 소리쳤다. “리아 에르프 션!” 이게 무슨 뜻일까? 그들은 라이를 보았다. 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코는 라이의 친구에요.” 그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다가 라이코스를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 주었다. 라이코스는 사뿐히 날아올라 라이의 품에 안겼다. 황당해진 나는 라이코스에게 소리쳤다. “너 말 못한다며!” “아! 자꾸 듣다보니까 고대 북부 지방의 방언과 비슷하더라. 이들은 거기 살다가 이 쪽으로 이주해온 것 같은데. 뭐 세월이 지나서 말이 많이 바뀌었지만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할 것 같아.” 고대어라면 나도 알고 있다. 왜냐면 마법은 고대에 만들어졌고, 고위 마법사는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고대어를 익혀야 했고,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고위 마법사였고, 나는 그의 지식을 전수 받았으므로.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준어. 방언을 알게 뭐냐? -서로 교류가 미미했던 시대이니만큼 말이 방언이지 다른 나라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퍼퀸 꽈이!” 나 이제 이 말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아마 Fucking Guy와 동일어거나 유사어일 것이다. “라이야, 나도 좀 풀어달라고 이 사람들에게 부탁해 주렴.” 라이는 라이코스와 얘기하기 바빴다. 표정이나 행동을 보아하니 못들은 척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으음, 그 동안 좀 잘해 줄 것 그랬나?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날 외면하다니. “흑흑, 저는 아무 힘 없는 착한 청년이랍니다. 부디 저를 어여삐여기셔서 이 밧줄을 풀어주세요.” 이들은 동정표는커녕 이 놈이 미쳤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역시 이 방법은 남자가 쓰기에는 무리다. 라이가 썼다면 잘 통했을텐데. “혼자 힘으로 풀어요.” 이게 지금 누굴 놀리나? 그게 가능 했으면 벌써…… 아, 생각해 보니 가능하구나. 떠오른 생각에 난 한숨을 내쉬었다. 포박(Hold Person)의 역마법 포박 해제(Free Person)가 있었지. 제길, 속성으로 마법을 배우니 이게 문제야. 상황에 걸맞는 마법을 재빨리 생각해 내지 못한다는 것. 아무리 마법이 강하면 뭐하냐? 용도에 맞게 사용하질 못하는데. “포박 해제(Free Person)!” 집중을 하고 마법을 쓰자 묶고 있던 밧줄이 느슨하게 풀리며 발 밑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 주위를 둘러쌌다. 내가 맹세코 말하는데 이들은 누군가를 묶어본 경험이 거의 없을 것이다. 묶기 전에 무장을 해제해야한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모르는 걸 보니 말이다. 난 순식간에 청룡도를 빼들었다. “다 덤벼!”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맞서 싸울 생각은 없다. 그저 이 모든 일이 오해로 비롯 되었음을 알리고 이 일련의 사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실마리를 찾고 싶을 뿐이다. 내가 미쳤다고 키가 3m 넘는 괴물 같은 인간 수백명을 상대로 싸우겠냐? “라팅 블레익!” 노인이 청룡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플루 드리콘!” “로드 에스카네스!” “마이스터 에스카네스 씨넨!” 아! 이 칼 블루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거였지. 옛날 얘기를 보면 공주를 구하기 위해 마녀나 드래곤 -아무튼 나쁜 놈- 과 싸우는 용사들이 많다. 이 용사들의 무기 목록을 열람해 보면, 꼭 빠지지 않는 것이 마법검이다. 사실 용사 능력이 별 볼일 없어도 마법검만 좋으면 인정 받는 게 이 사회의 현실이다. 내가 예전에 읽은 어느 동화책에서 나온 용사는 용모도 출중하고 실력도 있는 편이었는데 마법검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공주 구출 작전에 원서도 내밀지 못하였다. ‘전투 능력은 실력순이 아니잖아요’ 비싼 마법검을 가지고 있는 한 재벌 2세가 던진 말이다. 정말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난 언제나 서민들 편이기에 마법검만으로 능력을 평가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고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내가 마법검을 가지고 나니까 생각이 확 바뀌더라. 역시 사람은 좋은 아티팩트를 갖고 볼 일이야. 방금 전까지 적으로 취급 받던 나는 블루 드래곤의 증표인 라이트닝 블레이드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귀빈 대접을 받고 있다. 난 손짓, 발짓에 얼굴짓까지 해가며 에스카네스를 만나기 위해 이 곳에 왔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야, 너도 좀 도와.” “미안하지만 본인은 몸이 좀 안 좋아서.” 라이코스는 몸살을 핑계로 라이의 품속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정말로 몸살 때문에 그러는 것은 당연 아니고 추우니까 만사가 다 귀찮나 보다. “에스카네스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블루 드래곤 말이에요. 플루 드리콘 로드 에스카네스! Do you understand? Do you know Eskanes? Lord Eskanes is blue dragon? Blue dragon is 시퍼러딩딩? Body에 멍?” 간만에 영어 하려니까 혀가 제대로 안 돌아간다. 그래도 내가 영어 성적은 꽤 좋은 편이었는데. 100점 만점에 70점은 나왔다. 물론 배껴서. 이어지는 손짓, 발짓. 말이 안 통한다는 게 이렇게 사람을 미치고 환장하게 하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다행히 노인은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답으로 이상한 손짓, 발짓을 해보였다. 노인의 바디 랭귀지에 따르면 에스카네스는 이 산맥의 수호신이며 자신들은 에스카네스의 은총을 받아 이 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 건 순전히 나의 생각인데 이들의 체형이 기형적으로 큰 것도 에스카네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에스카네스의 레어는 이 곳 청색 산맥의 높은 곳에 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어딘지 모른다는 거다. 결국 라이의 기억에 의존하는 수 외에 다른 수가 없군. 노인은 그 후 몇 마디 더 했다.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중이니 며칠 기다려서 눈보라가 그치면 출발하라는 내용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추위를 뚫고 갈 자신은 없으니. * * * * * * 1671년 11월 1일 아까운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러가고 어느덧 눈보라가 잠잠해졌다. 난 기다리는 날들 동안 이 마을을 조사해 볼 수 있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추위를 별로 타지 않았다. 다들 얇은 옷만 입고다니는데도 얼어 죽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신기하다. 이들의 식량은 얼음 동굴 한쪽에서 기르고 있는 이상하게 생긴 짐승들과 자생하고 있는 이끼들이었다. 이끼를 먹는다는데 굉장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먹어보니 먹을만 하더라. “라이야, 눈보라가 그쳤으니 이제 그만 출발해야 할 것 같구나.” “추운데 내일 가면 어떨까요?” 두꺼운 털이불을 돌돌 말고 들어가 있는 라이는 그곳에서 도통 나올 줄을 몰랐다. “빨리 나와!” 난 억지로 라이를 끄집어 냈다. 그리고 옷들을 차곡차곡 입혀 주었다. “그런데 에스카네스를 왜 만나려는 거에요?” “어린이는 알 거 없다.” 이제 역사가 이루어지는 일만 남았다. 빠른 시일 내에 에스카네스를 만나 질문을 던지리라. 휘이잉~ 차가운 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산맥을 스치고 지나간다. 더불어 지면에 있던 눈도 조금씩 휘날린다. 어제까지 눈보라가 와서 그런지 발 밑은 그야 말로 늪이었다. 눈의 높이는 거의 허리까지 쌓인 정도. 정말 눈에 파묻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높이다. 그래도 우리가 꿋꿋이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이 따위 눈이 감히 나의 거대한 의지를 막지 못했기 때문……은 절대 아니고, 우리의 선두와 후미에 서 있는 덩치 큰 두 남자 덕이다. 이 둘은 촌장(족장이나 대장, 시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두머리)이 붙여 준 사람들로 처음 우리를 연행해 갔던 그 둘이다. 에스카네스의 뼈다귀 하나 덕에 이렇게 편할 줄은 몰랐다. 이 둘이 길을 뚫어줌은 물론이고 짐까지 다 매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육체가 정말 이런 곳에서 살기 편하게 발달 되어 있다. 저렇게 얇은 옷을 입고도 추위를 타지 않으니. 반면 라이는…… “아이, 추워라. 너무너무 추워요. 내 방에 가서 헬로우 귀티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어요.” 몸이 공처럼 될 때까지 옷을 껴입고도 춥다고 난리다. 정말로 추운 걸까? 아니면, 추운 척하는 걸까? “추워요. 정말 추워요. 굉장히 추워요.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아요.” 마치 무슨 최면을 거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세뇌시켜 정말 춥다고 느끼는 건가? 라이가 투정을 부린다고 해서 놓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라이 밖에 없는데다가 서로의 몸을 밧줄로 묶었으니까. 만약의 경우에도 서로를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 난 페부에 가득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담배 연기를 빨아 들였다. 정말 이럴 땐 극락이 따로 없다. 역시 담배는 인생을 소모하더라도 필만한 가치가 있어. 걷다 쉬고, 쉬다 걷고. 우리는 페이스를 조절하며 계속 전진해 나갔다. 일행 중에 굼뱅이 하나가 있어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지만. “그런데 저기가 확실한 거니?” 난 올려다보기에도 까마득한 눈산을 가리켰다. “흥! 라이는 거짓말 안 해요! 라이는 착한 엘프에요!” 성질 부리기는. 아무튼 라이의 말 대로라면 저 까마득히 높은 눈산의 정상에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의 레어가 있다는 것인데…… 솔직히 사양하고 싶다. 미쳤다고 저런 높은 곳까지 올라가냐? 딱 보아하니 산소도 별로 없게 생겼구만. 그렇다면 마법은 나중을 위해 아껴두는 것이 좋겠지? “발열(Heat).” “마법 쓰지 마!” 라이가 비록 7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라 해도 마나가 넘쳐날 리는 없다. 그런데 벌써부터 마법을 쓰려하다니. 앞으로의 일들이 심히 걱정 된다. 밤이 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밤이 되니 더 추워졌다. 이젠 공기가 사람을 얼려 죽일 지경이다. 폐가 얼어 붙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어두워서 행군이 불가능해지자 우리 -나와 라이 빼고- 는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라이코스는 라이의 주머니 어딘가에 특어 박혀 아예 고개조차 내밀지 않았다. 숨은 어떻게 쉬나 몰라. 답답하지도 않나? 뚝딱뚝딱-! 텐트를 펴고, 텐트 줄을 대못으로 땅에 박고, 그것도 모자라 여기저기에 줄을 연결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눈사태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잡은 터는 눈사태의 영향을 최대한 벗어나고, 설사 일어난다 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 시킬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낮에 행군이 힘들었는지 라이는 금방 잠이 들었다. 그 둘도 말 없이 -말이 안 통하니까- 누웠다. 난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에스카네스를 만나서 얘기를 듣고, 혹시라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그럼 돌아가야 하나? 그건 아니지. 아직 루시아와 결혼도 못 했는데. 하지만 노처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기도 하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뭐 어떻게든 되겠지.(무책임한 발언. 나 원래 이런 놈이다) * * * * 1671년 12월 3일 열심히 행군하던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쳐왔다. 라이가 크레바스(Crevasse)에 빠진 것이다. 죽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그 짧은 순간 비행 마법(Fly)으로 날아올라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솔직히 나 저런 거 보면 부럽다. 위기의 순간, 자신이 어떤 마법을 써야할지 확실히 알고 순식간에 캐스팅을 완료하는 저 모습. 누누이 말하지만 저런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이 정도 되는 고위 마법사니까 할 수 있는 거지. “저기요.” “왜 그러니, 라이야? 뭐든 물어보렴.” 라이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사실 후드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예상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의 꿈은 뭐에요?” 이럴 수가! 라이의 입에서 이런 고난이도의 질문이 나오다니. 지금 내가 대답을 잘 해줘야 라이의 자아정체성 확립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을 줄 수 있겠지. “나의 꿈은…… 누구처럼 315평짜리 빌라를 갖는 거야. 그리고 그 집에서 루시아와 아들, 딸 낳아 행복하게 사는 거지.” 아! 정말 소박한 꿈이 아닐 수 없다. 이 얼마나 서민적인 꿈이란 말인가? “315평이요?” “응. 105평짜리 3개 층으로 되어있으면 좋겠어. 그 곳에서 우리 가족이 단란하게 살고 싶어. 너무 좁은가?” 라이는 315평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짐작이 안 되는 듯 했다. 고개를 갸웃 갸웃. “그런데 니 꿈은 뭐니?” 설마 라이코스와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이 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 아니겠지? “라이의 꿈은…….” 라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엘프가 되는 거에요!” “…….” 어이가 없다. 설마 그 말이 진심인 건 아니겠지? 반짝반짝~ 아앗! 라이의 눈에서 광체가. 눈이 이렇게 아름답게 반짝이다니. 세상에 이런 순수한 눈망울이 있었다니. 난 이런 순수한 눈을 보면…… 당장 뽑아버리고 싶어! “그래서 이코랑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 쓸데없는 걸 물어봤다는 생각이 팍팍 든다. “설마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노력할 거에요!” 의지는 좋다만 세상 일이라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지. 난 고개를 꺽어 하늘을 쳐다 보았다. 해는 쨍쨍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덜 추워서 좋긴 하지만 이게 꼭 좋은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빛이 반사되어 눈이 따갑다. 고글이라도 하나 가지고 왔으면 좋으련만. 이 중 눈이 따가운 사람은 나 하나 밖에 없는 듯했다. 앞, 뒤에 있는 둘은 신체가 눈산에서 살기 좋게 발달이 되었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고, 라이야 엘프니까. 역시 엘프는 참 행복한 종족이다. 신체 능력도 좋은데다, 어딜가나 사랑 받으니. 나도 엘프로 태어났으면 정말 행복할 텐데. * * * * 1671년 12월 7일. 정말 열심히 행군하던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또 닥쳐왔다. 이번엔 정말 최악의 위기다. 갑자기 불기 시작한 눈보라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지금이 벌써 사흘째. 이대로라면 여기 고립되어 얼어 죽는 것도 생각해볼만 하다. 덩치 큰 둘은 자기들끼리 대화하고 있었다. 말은 못 알아 듣지만 보아하니 앞으로 일에 대해 얘기하는 듯 했다. 이 곳에서 눈보라가 그치길 기다려야 하는 지, 아니면 강행군을 해서라도 눈보라를 피할만한 장소를 찾아내야 하는 지. 어느 쪽이든 확실한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하필 재수 없게 이런 곳에서 발이 묶이다니. 난 옷 속에 들어있는 라이를 발로 건드렸다. “뭐 하니?” “라이는 자요.” “라이코스는?” “이코도 자요.” 라이코스는 현재 동면중이다. 날씨가 추워지니 체력 손실을 막아야 한다나. 정말 웃기는 매가 아닐 수 없다. 지가 곰이야, 뱀이야? 뭐 이렇게 물어보면 답은 뻔하다. ‘영물이니까.’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말 하는 것 -그것도 싸가지 없게- 밖에 못하는 주제에 영물로서의 자아정체성이 확실히 확립되어 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나 영물 맞아?’ 라고 한번쯤은 의심을 가져봐야하는 것 아닌가? 아무튼 라이코스는 현재 동면중. 그런데 웃긴 것은 라이도 라이코스 따라한다고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자고 있다는 것이다. ‘라이는 이코와 같이 겨울잠을 잘래~’ 등등의 헛소리를 지껄이며 말이다. 난 어린 엘프와 매가 같이 자는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영원히 재워주고 싶어~. * * * * 1671년 12월 8일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눈보라가 그치기는커녕 더욱 몰아친다. 이대로라면 텐트까지 파묻힐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히 자겠다고 눈을 감고 있는 라이를 보면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오른다. 덩치 큰 둘은 현재 대책 회의중…… 이라고 하지만 다 소용 없는 짓이다. 이동도 불가능한 상황인데 대체 무슨 대책이 있단 말인가? 하루하루가 의미 없이 지나고 있다. 솔직히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만화책이다. 한 곳에 계속 있으려니 심심하거든. 난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어요?” 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왜 일어났니?” “잠이 안 와요.” 그렇게 열심히 잤는데 또 잠이 올리 없지. 이제부턴 적당히 쉬어가면서 자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라이를 보니 또 다시 한숨이 흘러나온다. 어찌하여 난 이리 고민이 많은 것일까? 라이처럼 단순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이 상황을 타개할 좋은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저기요…….” “무슨 일이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불렀다면 어떻게 되는 지는 알고 있겠지?” “저한테 좋은 의견이 있어요.” 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라이를 째려보며 말했다. “말해보렴. 하지마 만약 쓸데없는 의견이라면 어떻게 되는 지는 알고 있겠지?” “……그냥 안 말 할래요.” 라이는 무서운지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괜히 쓸데없는 얘기해서 나의 심기를 불편케 한다면 살아남지 못 했을테니. “그런데 무슨 얘기하려고 했니?” 말하려다 안 하니까, 괜히 궁금해진다. 감히 교묘한 수법으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다니.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군. “저는 그냥 눈보라를 그치게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려 그랬어요. 잠이 안 와서 심심하거든요.” “장난하니? 넌 지금 우리가 심심해 이 곳에 짱 박혀 있는 줄 아니? 눈보라를 그치게 할 방법이 있어야 그치게 할 거 아니야!” “제 생각에 날씨 조절(Control weather) 마법이면 날씨를 조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 이 허망함. 이 분노감. 이 짜증남. 난 화를 삭이며 조용히 물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는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라이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가 마법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 할 말이 없다. 패 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준비 됐니?” “추워요.” “추워도 해!” 나와 라이는 텐트 밖으로 나와 눈보라를 온 몸으로 맞으며 서 있다. 이제 라이가 멋지게 마법을 쓰면 이 눈보라는 그치게 되는 것이다. 난 라이를 위해 마나 증폭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덜덜덜~ 그런데 자꾸만 손이 떨려 원이 찌그러진다. 배치가 제대로 되야 제 위력을 발휘하는데, 이러다가 흡수 마법진이 되어 마나를 몽땅 빨아들이지는 않을까, 걱정 된다. 어찌되었든 간신히 마법진을 다 그렸다. 라이는 몸을 떨며 그 위에 올라섰다. 라이는 현재 얇은 원피스 하나만 걸친 상태. 두꺼운 옷들은 내가 전부 벗겼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나를 좀 더 화끈하게 느끼기 위해……라고 말하고 싶지만, 진짜 이유는 몸이 추워야 눈보라를 그치게 할 생각이 좀 더 간절하게 들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만물을 구성하는 마나(Mana)님. 라이가 너무 추워서 그래요. 부디 라이를 위해 눈보라님을 그치게 해 주세요. 그래서 라이를 따뜻하게…….” 내 평생 이렇게 간절한 주문은 처음 들어 본다. 이래도 마법이 안 써진다면 그건 정말 누군가의 농간이다. 라이는 주문을 다 외우고 시동어를 외쳐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어?” “이거 왜 이래?” “글쎄요.” “너 아직 마법 안 썼지?” “라이는 아직 안 썼는데요.” 어이 없게도 마법을 쓰기 직전 눈보라가 그쳤다. 방금 전까지 휘날리던 눈발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고, 휘몰아치던 바람은 산들 바람이 되어 불어오고 있었다. 황당. 망연자실. 설마 이 눈산이 라이의 간절한 소망을 듣고 눈보라를 그치게 한 것은 아니겠지? 라이는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라이, 잘 했죠?” “…….” 칭찬해 줘야 하나? 이렇게하여 우리의 행군은 계속 되었다. 이틀 정도 걷다보니 강행군을 하다보니 점점 산소가 희박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리우크 라이쿤트.” 그 동안 우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던 덩치큰 둘은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이 위는 에스카네스의 성지이니 자신들은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무래도 핑계 같지만 어쩌겠냐? 자기 발로 자기가 돌아 간다는데 막을 수도 없고. “땡큐, 땡큐. 베리베리 땡큐. 땡큐 쏘 머치.” 난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그들은 몇 개의 짐을 내려 놓고 오던 길을 되집어 갔다.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그들이 남긴 짐을 보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이걸 다 내가 짊어져야하는 건가? 굶어 죽거나 얼어죽지 않으려면 어쩌겠냐? 들고 가야지. 푹~ 푹~ 누가 들으면 칼로 찌르는 소린 줄 알겠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발이 눈에 박히는 소리다. 이 놈의 눈 때문에 걷기가 너무 힘들다. 크레바스도 가려져 있어 발을 내딛기도 무섭다. “제길,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드래곤 한번 만나기 더럽게 힘드네.” 만약 이 죽을 고생을 해서 만났는데 ‘난 몰라. 딴 놈에게 물어봐~’ 이 따위로 말한다면 정말 앞뒤 재지 않고 받아버린다. 난 열 받으면 드래곤이 도마뱀으로 보이는 놈이다. 드래곤 슬레어이가 되던, 시체가 되던 둘 중 하나겠지. “걷기 너무 힘들어요.” 라이는 벌써 헥헥거리고 있다. 그나마 엘프여서 이만큼이나 따라온 거지, 일반 또래 아이였으면 벌써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뭐 그 전에 고산증으로 죽었겠지만. -라이는 엘프여서 고산증에 걸리지 않는다. 즉, 산소 부족을 느끼지 않는다. 엘프란 정말 편한 종족. 나도 엘프가 되고파- 난 아직까지 고산증 증세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산소 부족은 느끼지만. 하지만 이 것도 얼마나 갈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하루 안에 고산증에 걸릴 것 같다. 뭐, 그런 상황이 오면 마법을 써야지. 산소 제조 마법도 있으니까. 파닥파닥~ “힘내, 라이야. 너의 곁엔 항상 내가 있잖아.” 라이코스가 힘들게 걷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날아간다. 날개 달린 놈은 정말 행복하다. 저 놈의 날개를 분질러 이 눈밭을 기어가게 하고 싶은 욕망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은 왜 일까? “저기요…….” “왜?!” 짜증섞인 외침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저 날아가면 안 될까요?” “안 돼! 벌써부터 비행 소녀가 되려하다니! 절대 안 돼!” 나의 반대에 라이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은 바람도 별로 안 부는 선선한 날씨. 그런데도 내가 비행 마법을 반대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라이가 비행 소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오직 그것 때문이다. 결코 하늘을 나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라이는 날고 싶어요. 라이는 날 수 있어요. 라이는 날 수 있다는 걸 믿어요.” 아이 빌리브 아이 캔 플라이~ 아이 빌리브 아이 캔 터치 더 스카이~ 아예 노래를 부르지 그래. “라이는 파닥파닥 날고 싶어요. 라이코스와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비행하고 싶어요. 라이는…….” “그래! 날자! 날아!” 날아가는 것은 간단하다. 비행 마법 주문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 하지만 문제는 상당히 위태롭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 자기 몸 하나만 달랑 떠있다고. 마법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별 위험이 없겠지만 그래도 무섭다. 갑자기 마법이 풀려 바닥으로 추락하면 어쩌나, 하고. “비행!” 라이는 가뿐하게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상당 기간에 걸쳐 열심히 연습한 것 같다. 그에 비해 나는…… 안 돼. 내가 라이보다 못하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어. 나도 난다. 나도 날 수 있다. I believe I can fly! 라이보다 훨씬 예쁘게 날아주마. “플라이(Fly)!”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오오! 발이 떨어진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공을 연마해 공중부양하는 줄 알겠다. 라이코스는 라이의 머리 위에 둥지를 틀고 앉았다. 언제나 나와 함께하던 나의 비상식량 라이코스가 이젠 라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니, 솔직히 질투심이 생긴다. 없어봐야 아쉬운 줄 안다고 라이코스가 내 곁은 떠나있으니 라이코스가 정말 그립다. “라이야 우리 함께 저 곳까지 날아가자.” “그래, 이코야. 이코랑 같이 나니 라이는 너무 행복해.” 둘 다 추락시켜 버리고 싶다. “헥~ 헥~ 헥~.” 드디어 고산증이 나를 덮쳤다. 두개골이 수축하면서 뇌를 조이는 것 같다. 머리를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저 눈 속에 머리를 파 묻고 싶다. 머리를 차갑게 식히면 조금이라도 괜찮아질 것 같다. 뒤를 돌아보니 라이는 사뿐사뿐 잘 걷고 있다. 라이코스와 수다를 떨면서 걷는데도 조금도 지치지 않은 모습이다. 그래. 라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어. 난 라이의 모법이 되야할 오빠가 아니던가! 하지만 고산증을 어찌하리오. 고산증은 마법적인 치유도 불가능하다. 치유 방법은 오직 하나. 하산해서 쉬는 수 밖에. 하지만 지금 하산할 수는 없다. 결국 남은 방법은 산소 제조. 여기서 마법을 쓰는 수 밖에 없구나. 난 마법을 사용해 부족한 산소를 보충했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다. 아직까지 머리가 핑핑 돌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현기증이 사라지자 난 고개를 꺽어 정상을 보았다. 정상은 이제 코 앞이다. 그 동안의 행군이 결실을 맺을 순간이 멀지 않은 것이다. “라이야, 여기가 확실한 거지?” “그렇다니까요!” 이젠 신경질이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볼을 잔뜩 부풀린 모습이 ‘라이는 거짓말을 안 해요!’ 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그래. 너 잘났다.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기는. “그런데 정말 여기가 확실하니?” “맞아요! 설마 라이를 못 믿으시는 거에요? 라이는 착한 엘프라구요!” 솔직히 못 믿겠다.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화내는 모습이 어째 믿음직스러워 보이지가 않는다. 하지만 안 믿는다고 해서 딱히 방법이 없는터라 일단은 그냥 계속 올라갔다. 1시간, 2시간, 3시간……. “아자! 도착했다!” 드디어 산 정상에 도착했다. 라이는 기쁜지 라이코스와 함께 폴짝포짝 뛰고 있었다. “야호!” 난 방정맞게 몇 번 소리를 지른 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휘이이잉~ 까마득하군. 내가 저기를 걸어 올라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 것이 바로 인간 승리라는 것인가? 누가 나에게 왜 산에 오르냐고 묻는다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른다고 대답하리오. 누가 나에게 왜 루시아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흠흠, 그녀는 너무 고귀하고 아름다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대답하리오. 잠시 주위를 둘러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야, 드래곤 레어는 대체 어디에 있니?” 내 말을 들은 라이는 두리번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1시간, 2시간, 3시간……. 날이 저문다. 라이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진다. 어느새 그 표정은 울상으로 변했다. 갑자기 한 일화가 생각난다. 때는 옛날. 프랑스 군을 지휘하던 나폴레옹은 군대를 적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산을 올라갔다. 그런데 막상 올라와 보니 적은커녕 적이 남기고 간 양말 한짝 보이지 않더라.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나폴레옹은 칼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이 산이 아닌가 보다. 옆 산으로 가자.” 병사들은 황당했지만 장군이 그렇게 말하는데 어쩌겠나? 그냥 좇아 가야지. 병사들은 다시 산을 내려와 옆 산으로 올라갔다. 역시 이 곳에도 적은 없고 손장갑 한짝도 없더라. 그 순간 나폴레옹이 소리쳤다. “아까 그 산이다!” 내가 지금 이 고전 중의 고전을 왜 떠올리냐면, 라이가 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와 흡사한 상황이 연출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던 라이는 다리가 아픈지 쪼그려 앉았다. 난 라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웃으며 물었다. “드래곤 레어는 어디에 있니.”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흰 눈과도 같은 맑고 순수한 웃음을 지었다. “이 산이 아닌가봐요!” “…….” 신이시여!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흑흑!” “흑흑거리지 마라.” “엉엉!” “엉엉거리지도 마라.” “우에엥!” “자꾸 질질 짜면 또 굴린다!” “……뚝!” 난 어제 타오르는 분노감을 이기지 못해 정상에서 라이를 굴렸다. 통통해서 잘 굴러갈 것 같아 굴려봤는데 예상보다 훨씬 잘 굴러가더라. 한참을 구른 라이는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린 아이를 이렇게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냐고 묻는다면, 내 상황이 되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분명 착하게 살려 그랬다. 요즘은 담배도 줄이고 있고. 그런데 라이가 도와주질 않는다. 그나마 나의 이 기분을 달래주는 것은 담배 한 개비. “저기 맞지?” “예, 오빠.” 고분고분한 말투. 한번 굴렸더니 효과가 확실하군. 난 고개를 꺽어 어제 우리가 올라갔던 산 옆에 있는 산을 보았다. 라이 말로는 여기가 확실하다 그러는데 정말 믿어도 될 지……? 만약 힘들게 올라갔는데 ‘아까 그 산이에요!’ 이 딴 말을 지껄일 시에는 그 자그마한 입을 깔끔히 꼬매주마. “그런데 정말 저기 맞니?” “흐흑, 부디 라이의 말을 믿어주세요. 라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착한 엘프란 말이에요. 흐흐흑, 설마 라이를 못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제 패턴을 바꾸셨군. 난 눈물을 글썽이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이 세상.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해지겠니? 이 오빠는 우리 라이를 믿는단다.” 라이는 눈물을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오빠.” “대신 믿음을 배신하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 다시 산을 오른다. 누가 나에게 왜 산을 오르냐고 묻는다면, 누군 오르고 싶어서 오르냐고 신경질을 내고 싶다. 산 중턱쯤 올랐을 때, 평평한 지대가 나타났다. 우리는 잠시 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라이야, 걸을만 하니?” “예, 오빠.” 고분고분. 아, 마음에 든다. 난 이런 애가 좋아. 너무 귀여워.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라이는 힘이 나는지 아장아장 내 뒤를 잘도 따라왔다. 잠시 오르다보니 산 중턱쯤에 평평한 지대가 나타났다. 라이는 잠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기 어디였는데…….” 라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두리번거리다가 한 지점을 가리켰다. “앗! 저기에요!” “저기?” 라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그냥 평범한 얼음벽이었다. 암벽 등반이라도 하자는 건가? “이 쪽으로 가면 되요.” 라이는 그 쪽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그 위를 라이코스가 파닥파닥 좇아갔다. 그리고는 얼음벽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오오! 신기하다. “빨리 들어오세요.” 설마 저기가 입군가? 난 잠시 사방을 살펴 보았다. 얼음벽 안은 마치 유리처럼 투명했다. 이런 곳에 몸매 쫙 빠진 미녀가 갇혀 있으면 너무도 행복할 텐데. 만약 저 곳이 통로라면 산 안을 통째로 파내 레어를 만들었다는 건데……. 으음, 믿어도 될까? “오빠!” “그래. 간다.” 난 주저없이 얼음벽으로 달려들었다. 콰앙-! “쓰읍!” 여기가 아니라 조금 옆이었구나. “우와! 죽인다!” “너무 그렇게 둘러보지 마세요.” “맞아. 제발 부탁이니 촌티나게 행동하지 좀 마.” 좋던 기분 망가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얼음 동굴. -드래곤 레어로 이어지는 통로인 것 같다- 통로는 전체가 얼음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밖에서 볼 때처럼 투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 얼음들이 반짝반짝거리며 온갖 색의 빛을 발하고 있다. 난 내 몸을 통과하고 있는 수백가지색의 빛을 관찰했다. 너무 아름답다. 마치 빛의 세계에 와 있는 듯 해. 저벅저벅~ 조용한 동굴 안을 우리의 발걸음 소리가 가득 매운다. 정확히는 내 발걸음 소리다. 라이는 엘프다보니 사뿐사뿐 걷고, 라이코스는 날아가니. “드래곤은 왜 만나려는 건가요?” “좋은 질문이다.” “설마 드래곤과 싸우려는 것은 아니죠?” “내가 미쳤냐? 그냥 만나서 대화하려는 것뿐이야.” 드래곤 슬레이어 되보겠다고 설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결코 제정신인 인간이 할 짓이 아니지. 라이는 안심한 듯한 표정을 보였다. 잠시 걷다보니 길의 끝이 보인다. 저 모퉁이를 돌면 블루 드래곤이 있으려나? “크아아!” 이건 뭐야? “오크네요.” “그래. 오크 같이 생기긴 했다. 그런데 여기 오크가 왜 있는 거냐?” “글쎄요.” 넓은 크기의 얼음 공터에는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몰려 있었다. 투명한 얼음으로 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모습이 잔챙이 같이 보이진 않는다. 몸 색깔이 파란색에 가깝고 몸에 털이 보송보송 나있는 것이 다른 일반 오크들과 많은 차별점을 두고 있었다. 저 것도 개성인가? 저들이 무기를 들고 걸어온다. 쿵- 쿵- 아무리 봐도 친근해 보이지가 않는다. “어떡해요, 오빠? 라이는 너무 무서워요. 우엥~.” 어떡하긴? 그냥 받아버려 야지. 난 청룡도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오크들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속전속결(速戰速決). 선수필승(先手必勝). 난 지체 없이 돌격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발밑이 미끄러졌다. 바닥이 빙판인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콰당-! “헤헤.” “푸하하! 넘어지는 꼴 좀 보라지!” 라이 패밀리는 뭐가 그렇게 좋은 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 것들이 감히! 후한이 두렵지 않더냐?” 난 일어서려했다. 하지만 바닥이 너무 미끌거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 오크들이 언제 여기까지 왔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은 얼음 도끼를 휘둘렀다. 난 용감하게 청룡도로 그것을 막아……내진 못 하고 그냥 굴러서 피했다. “라이야! 아무 마법이나 좀 써 봐!” 나의 외침에 라이는 웃음을 멈추고 주문을 외웠다. “동글동글 불공(Fire Ball).”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의 화염구는 순식간에 날아가 오크들을 쓸어 버렸다. 과연 7클래스 마법사. 난 너무 놀라 박수를 칠뻔했다. 화염구는 얼음벽에 부딪혀 폭파했다. 난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얼음벽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난 너무 놀라 머리가 돌아버렸다. “튀어!” 라이 패밀리는 어느새 반대쪽 출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의리 없는 것들. 치사하게 지들끼리만 먼저 피신하다니. 난 스케이트를 타 듯 얼음판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광- 쾅- 얼마나 강력했으면 연쇄폭발까지 일어날까? 간신히 위험지대를 피해 안전지대까지 오니 라이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저 잘했죠?” “…….” 이걸 어떻게 혼내줄까? 오크 무리를 지나 우리는 계속 걸었다. 라이는 머리의 혹을 어루만지며 훌쩍이고 있었다. 라이코스는 기절해서 라이의 주머니에서 쉬고 있다. 아까 내가 넘어질 때 웃고 좋아했던 것에 대한 복수다. 난 은원 관계가 철저한 편이거든. “그런데 아까 그 오크들은 왜 그렇게 개성있게 생긴거지? 이유가 뭘까?” “아이스 오크(Ice Orc)에요.” “아이스 오크? 그런 종류가 있었나?” “없어요.” 너무도 당연하다는 대답. “그럼?” “아마도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가 개량한 종일 거에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그럼 그들을 교배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키메라라고 해야 하나? “크와아악!” 이건 또 뭐야? 몸이 푸르딩딩한 오우거들이 우리 앞을 가로 막았다. 산 넘어 산이고, 이 산이 아니라 옆 산이라더니 진짜 미치겠다.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난 라이에게 주문했다. “라이야, 마법.” 라이는 이미 준비 중이었다. “……세상는 흔들리고, 대지는 갈라지나니 얼음 역시 흔들리고 갈라지리라. 하늘은…….” 설마? “안 돼!” “지진(Earthquake).” 쩡- 쩡- 바닥이 쫙쫙 갈라진다. 벽도 갈라진다. 사방이 갈라진다. 동굴 전체가 무너진다. 라이 패밀리는 어느새 내 눈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위기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치는 것은 굉장히 빠르다. 얼음 덩어리가 떨어진다. 오우거들은 갑작스런 상황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같이 가, 얘들아!”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숨을 돌리는데 라이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저 태연한 표정. 저 태연한 눈빛. 마치 자기가 언제, 무슨 잘못을 했냐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크게 한탕 했군요.” “그걸 이제 알았냐!?” “왜 화를 내시죠?” “그걸 몰라서 물어!?” “예.” “…….” 라이가 아니네. 라이는 저 구석에 서 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인은 순백색의 미녀. 흰색 피부, 흰색 머리카락, 흰색 옷, 흰색 눈. 온통 흰색이다. 마치 얼음을 깍아 만든 것 같은 미녀다. 표정에서도 냉기가 풀풀 뿜어져 나온다. “누구세요?” “저 말인가요?” “여기 댁 말고 또 누가 있나요?” “전 에스카네스님의 가디언(Guardian)입니다.” 가디언? 이 아름다운 미녀가 가디언? 하긴 드래곤이니 가디언 하나 쯤은 있어야 명함을 내밀지. “그런데 여긴 왠 일이세요?” “그건 제가 물을 말인데요.” “아! 저흰 손님입니다.” “침입자가 아니고요?” “하하, 무슨 오해가 있으셨군요, 레이디. 저는 아이언스 공작으로 에스카네스님께 일이 있어서 이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레이디의 취미는 무엇인지?” 얼음 미녀는 고개를 획 돌렸다. “느끼해요.” “…….” 잠깐 실수했군. 너무 아름답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작업을. “그나저나 동굴을 전부 무너뜨려 놨으니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흠흠, 본좌는 당금의 사태를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오만, 당금의 사태를 야기한 자는 본좌가 아닌 저기 저 유아(乳兒)임을 밝히는 바요.”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다니. 생긴 것만큼이나 상당히 비겁하시군요.”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더니 아름다운 여인의 말에 뼈가 들어있구나. “아무튼 저흰 에스카네스님께 일이 있어서 온 손님입니다.” “손님인지, 침입자인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얼음 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라이 패밀리를 보았다. 라이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라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 애는 라이의 가장 친한 친구 이코에요.” 얼음 미녀도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상아탑의 주인 라이미안님.” 뭐야? 나를 대하던 태도와는 왜 이렇게 다른 거지? 역시 엘프는 어딜가나, 누굴만나나 사랑 받은 행복한 종족. 그에 비해 나는 어딜 가던 갈굼 당하는 불쌍한 인간. “그럼 어서 에스카네스님께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좀 힘들어서요.” “누가 당신을 안내해드린다 그랬나요?” “……예?” 얼음 미녀는 진짜 얼음 같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뭐랄까? 저런 무색에 가까운 흰색 눈을 보니 좀 무섭기도 하다. 마치 마음이 없는 것 같다고나 할까? “에스카네스님의 레어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분은 라이미안님 뿐입니다. 당신은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세요.”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너무 한 건 그 쪽입니다. 멋대로 쳐들어온 침입자 주제에 뻔뻔하기 그지 없군요.” 틀린 말은 아니다. 난 더 이상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 허리에 차고 있는 청룡도를 풀어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그녀는 청룡도를 받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라이트닝 블레이드군요.” “맞습니다.” 얼음 미녀는 칼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크로니스님과는 무슨 관계인가요?” 이 여자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적당히 안면 트고 지내는 사이라고 해두지요.” 얼음 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에스카네스님께 안내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난 내 손에 돌아온 청룡도를 허리에 다시 찼다. 얼음 미녀는 어느새 앞 서 걸어가고 있었다. 난 그 뒤를 좇아갔다. “그런데 결혼은 하셨나요?” “…….” 취미는? 즐겨 부르는 노래는? 잘 가는 음식점은? 좋아하는 색상은? 끌리는 타입은? 쓰리 사이즈는? 속옷은 주로 어느 회사 걸 즐겨 입는지? 머리는 어느 미용실에서 했는지? 핸드폰 번호는? 집 주소는? 연애 경험은? “좀 조용히 할 수 없나요?” 그녀는 그 무엇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누가 보면 내가 작업에 들어갔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난 이성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순수한 인간적인 관점에서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증대시키려는 것뿐이다. “그럼 연락처 하나만이라도…….” “그런 거 없습니다.” 쌀쌀맞군. 나의 순정을 몰라주다니. 너무 해! “좋습니다.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지요.” “이름 없습니다.” 만약 일반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면 그건 찝쩍거리는 남자가 귀찮아서이다. 하지만 이 여인의 말투를 보아하니 정말로 이름이 없는 듯 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냥 가디언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개성 없군. 그런데 이 여인은 영혼이 있는 존재일까, 아니면 그냥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일까? 잠시 걷다 보니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그 곳에는 일반 원형 탁자 정도 크기의 마법진이 있을 뿐이었다. 가디언은 말 없이 그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뿅~ 하고 사라졌다. 자동 이동 마법진인가? 라이는 마법진 위로 폴짝 뛰어 올랐다. 역시 뿅~ 하고 사라졌다. 으음, 신기하다. 재밌기도 하고. 난 잠시 마법진을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슬쩍 한 쪽 발을 올려 놓았다. 이러면 한 쪽 발만 텔레포트 되려나? 거대한 얼음성. 고딕건축 양식인지 뾰족한 지붕과 각이 확실한 성벽. 모든 것이 얼음으로 되어있는 이 곳은 에스카네스의 성지. 그런데 규모가 너무 크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정도 크기의 성이 산맥 안에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공간인가?” 혼잣말 비슷한 나의 물음에 라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여기 청색 산맥 맞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커?” 라이도 그것까진 모르겠는지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성이 큰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작아진 겁니다.” 앞에서 걷고있는 가디언이 대답해주었다. 친절도 하셔라. 아마도 아까 그 마법진에 축소 마법도 같이 걸려있었나 보다. 사람 크기를 줄여 놓으면 작은 공간도 크게 활용할 수 있으니. 얼음 복도 여기저기를 꺽어 돌아간 우리는 거대한 얼음문 앞에 도착했다. 가디언은 조심스럽게 문 중앙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런 순간에도 난 그녀의 손가락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 앞에 작은 마법진이 빛나더니 그 거대한 문이 너무도 부드럽고 조용하게 열렸다. “들어가세요.”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문은 자동적으로 닫혔다. 방은 일직선 형태였다. 가운데에는 푹신한 눈 카펫이 깔려 있고, 그 양쪽에는 정교한 솜씨로 조각된 얼음 조각상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카펫의 끝에는 화려한 빛을 발하는 얼음 의자가 있었다. 이 정도면 방이 아니라 예술이다. 언제 한번 루시아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다. 라이는 마치 살아있는 듯한 엘프 조각상이 신기한지 손으로 만지작 거렸다. 참으로 예의 없고, 몰상식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술품은 눈으로 감상하는 거지 손으로 만지는 것이 아니다. 저러다가 쓰러트리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는 지. 쿠웅~ 와장창~ 와장창~ 와장창~ 와장창~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활 쏘는 엘프 조각상이 쓰러졌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조각상을 쳤다. 그 조각상이 쓰러지면서 다시 옆에 있는 조각상을 쳤다. 일정 간격으로 빽빽이 서 있던 조각상이 일제히 쓰러졌다. 마치 도미노를 보는 것 같다. 얼음 조각상이니만큼 당연 전부 깨졌다. 밑에 흩어진 얼음 가루를 보니 본드로 붙이기도 힘들 것 같다. 옆에 가디언을 보니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이 여자에게도 감정이라는 것이 있었군. 아니, 굳이 감정이 없는 기계라도 이 모습을 보면 놀라 쓰러지겠다. 라이는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두 손을 게슴께로 모으고 베시시 웃었다. “헤헤, 죄송해요.” 그렇다고 해서 한 쪽에 늘어서 있던 수십 개의 예술품들을 박살낸 것을 용서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에, 에스카네스님께서 수백년에 걸쳐 만드셨던 조각상들이…….” 뭐하러 수백년에 걸쳐서 이런 걸 만들고 있냐? 그렇게 심심했나? 아무튼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디언 때문에 라이는 더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가디언은 나를 획 째려보았다. “에잇! 에스카네스님께 다 일러줄 테야!” “…….” 가디언은 억울하고 분한지 눈에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미인이 우는 모습을 보니 살짝 안아주고, 눈물도 닦아주고, 은근슬쩍 키스도 해보고 싶었지만 일단 할 말은 하자. “아니, 왜 저한테 그러세요? 누가 들으면 제가 부순 줄 알겠네요.” 가디언은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몰라, 몰라! 너도 한 패잖아! 이잉, 저 조각상 어쩔 거야?” “…….” 투정부리는 모습이 귀엽긴 한데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하던 미인이 갑자기 이렇게 변하니 조금 당혹스럽다. 난 가디언을 살짝 안아서 다독거려 주었다. “울지마세요, 아름다운 그대여. 그대의 눈물은 제 마음을 아프게 한답니다. 어찌하면 제가 그대의 위로가 될 수 있나요? 저는 그대의 노예. 부디 저를 뜻 대로 하소소.” 여인은 아예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내 말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나? “우에엥, 너무 느끼해요.” “…….”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연애 소설에서 읽은 대사를 그대로 써먹으려니 부작용이 만만치 않군.” “정말 연애 소설에서 읽은 거에요? 제가 읽은 연애 소설에는 그런 대사 없었는데.” 무슨 가디언이 연애 소설을 읽냐? 혹시 월급도 받고, 휴가도 있나? “흠흠, 사실은 야설에서…….” “꺄악! 변태!” 가디언은 갑자기 나를 밀쳤다. 그리고 눈 카펫을 지나 얼음 의자가 있는 곳까지 달려가 외쳤다. “에스카네스님! 빨리 나와 보세요! 이 남자가 절 성추행해요!” “…….” 사일런스 지니가 하면 로맨스, 내가 하면 성추행이냐? “꺄악! 에스카네스님!” 만약 키스까지 했으면 강간이라 그러겠다. 얼음 의자 위에 푸른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하나로 뭉쳐져 사람 형상을 띄더니 곧 중후하게 생긴 중년 남자로 변했다. “무슨 일이냐?” 가디언은 재빨리 중년 남자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흑흑, 저 침입자들이 건물을 때려부수고 저를 강간하려 그랬어요.” 결국 강간이 나오는 구나. ‘저 침입자들’ 이라고 칭해지긴 했지만 가디언이 가리킨 사람은 나뿐이었다. 중년 남자는 험악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난 조용히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으로 라이를 가리켰다. “뜨아! 내 예술품들이!” 중년 남자는 입을 쩍 벌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잡고 절규했다. 아무래도 첫 인상부터 너무 많이 망가진 느낌이다. “그래. 이드…… 아니, 제갈량의 소개를 받고 나를 찼아왔다는 건가?” “예, 아저씨. 아니, 에스카네스님.” 우리는 얼음 의자에 앉아 얼음 탁자를 두고 화기애애하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나이 50줄의 파란색 턱수염이 덥수룩한 인간 남자는 폴리모프한 드래곤. 본명 : 에스카네스(Eskanes) 필명 : 에스카네스(Eskanes) 가명 : 에스카네스(Eskanes) 예명 : 에스카네스(Eskanes) 별명 : 에스카네스(Eskanes) 쓸데 없는 짓은 여기까지 해두고 본격적인 데이터를 뽑아보자. 종족 : 블루 드래곤 직업 : 백수(白手) -자기 입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뻔하다. 수백년 동안 조각이나 하고 있는 드래곤을 백수라고 칭하지, 뭐라 칭하겠는가- 거주지 : 청색 산맥 취미 : 조각(인 것 같다) 친구 : 없어 보인다 애인 : 역시 없어 보인다 좋아하는 색상 : (아마도) 파란색 외모 : 주방장 or 옆집 아저씨 여기까지가 만난지 10초만에 작성한 데이터. 정확도 1%. 오차 ±99%.(웬만하면 믿지마라) 에스카네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라이는 앞에 놓인 차를 홀짝거렸다. 라이코스는 라이의 머리 위에 앉아 괜히 아무 곳이나 째려보고 있었다. 애완 동물은 주인의 성격을 많이 닮는다더니 저 놈도 내 성격을 많이 닮는 구나. 가디언은 자신이 마치 에스카네스의 첩이라도 되는 냥 그의 옆에 꼭 붙어 나를 노려보았다. 대체 왜 나를 노려보는 지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애써 가디언을 무시하며 에스카네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갈량도 드래곤 맞나요?” “몰랐나? 그는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지.” “어째 처음 듣는 것 같네요.” “당연 처음 듣겠지. 아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왜죠?” “그는 레어도 없는 드래곤이다. 평생 다른 존재로 살아야만하는 불쌍한 방랑자라 할 수 있지. 뭐 본인은 그 편을 즐기는 것 같지만 말이야.” 역시 드래곤. 엘프에 이어 드래곤도 행복한 종족. “아! 그런데 이 얘기 전에 일단 배상 문제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어떤가?” “예? 배상이라뇨?” “아니, 그럼 남의 예술품을 개박살 내놓고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이었단 말인가?” “…….” 에스카네스는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 보았다. 드래곤 주제에 은근히 쩨쩨하네. “흠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을 개박살 낸 것은 본좌, 아니 아무튼 제가 아닌 여기 이 엘프입니다. 그러니 배상 문제도 이 분과 해결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공동 책임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저 엘프는 외모와 정신 연령이 미성년자에 해당하니 배상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네. 당연 보호자인 자네가 책임을 저야하지 않겠나?” “……부당합니다.” 순간 에스카네스는 불 같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럼 내 예술품은 누가 배상해!? 네가 장인의 혼을 알어? 네 놈이 내가 그걸 만드는데 얼마나 큰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아냐고? 그건 나의 혼을 승화시킨 나의 분신이었어!” 그래서 어쩌라고? 상대가 드래곤이지만 절대 꿀리면 안 된다.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 “왜 저한테 그러세요!? 배 째요, 배 째!” 에스카네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디언!” “예, 주인님.” 가디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활활 불타는 검 -크기나 생김새를 보니 클레이모어 같다- 을 꺼내 에스카네스에게 건네 주었다. “한 방에 보내버려요, 주인님!” “그럴 생각이야!” 에스카네스의 눈이 검과 마찬가지로 활활 불타오른다. 저 눈빛 굉장히 위험한데. “잠깐!” 내 외침에 에스카네스는 잠시 멈칫했다. “왜 유언이라도 남기게?”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니가 아까 배 째라매!” “…….” 세상에 배 째란다고 진짜 째려는 드래곤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 지성인 답게 대화로 해결합시다.” 나의 제안에 에스카네스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검을 없애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잠시 흥분한 것 같군.”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나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 일을 야기시킨 원인 제공자를 째려보았다. 원인 제공자는 화살이 자신을 비껴간 것이 기쁜지 싱글벙글 웃으며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한 대 패주고 싶어진다. 그러고 보니 요즘 체벌이 약화되어 애가 많이 풀어진 것 같아. 가끔은 따끔한 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라이는 차를 다 마시고는 에스카네스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건 궁금해서 하는 질문인데요…….” 서두부터가 심상치 않다. “혹시 건국왕 가이아스 에카스와는 무슨 관계세요?” 가이아스 에카스. 마법사 넨 이드와 현자 잭 니켈의 도움을 받아 대륙 최초의 통일 왕국인 가이아스 왕국을 건국한 왕. ‘나를 따르면 살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논리를 사용해 군인은 물론이거나와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다녔다는 광전사. 수백이나 되는 아내를 거느리고도 하룻밤 사이에 전원을 만족시켜 주었다는 희대의 정력가(혹은 변강쇠). -솔직히 이 점이 제일 부럽다- 박카슨지 에카슨지 아무튼 유명하고 잘난 인물. 그런데 가이아스 에카스와 에스카네스가 무슨 관계기에 라이가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에스카네스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걔가 나야.” “…….” 걔 = 나 (걔 = 가이아스 에카스 나 = 에스카네스) 즉, 가이아스 에카스 = 에스카네스 (에스카네스 = 드래곤) 즉, 가이아스 에카스 = 드래곤 이거 맞는 공식인가? * * * * * * 에스카네스의 말론 자기가 가이아스 박카스, 아니 에카스란다. 즉, 자기가 최초의 통일 문명 왕국을 세운 건국왕이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이 에카스로 활약하던 당시의 모습이라고 한다, 에카스가 옆 집 아저씨처럼 생겼었다니. 놀랍기 그지 없는 사실이다. -수 많은 역사책이나 노래에는 엄청난 미남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얘기를 들은 라이는 방긋 웃었다. “역시 그렇네요. 설마 해서 물었는데.” 나는 귀를 후벼파며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뭐가?” “드래곤이 뭐하러 왕국을 세워요?” “그게 설명하자면 복잡하다네.” “설마 심심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 에스카네스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허! 지금 나를 어찌보고 그런 소릴 하는 가?” 어짜 보긴? 드래곤으로 보지. “아내가 수 백이였다면서요?” “그건 과장된 소문이지. 어찌 인간이 수백이나 되는 여인을 거느릴 수 있겠나? 실제론 한 백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네.” “…….” 백명도 충분히 많다는 생각이 드는데, 에스카네스는 눈을 옮겨 라이를 보았다. “그런데 그대야 그렇다치고 이 엘프는 어쩐 일인가?” “혼자 오기 심심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라이는 옷을 단정히 하고 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카네스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탑의 주인 라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깜찍하고 친절하게 인사하는군. 빨리도 한다. “으음, 그래. 그런데 탑의 주인은 라이미안이라는 미녀 엘프였던 것 같은데. 설마 그 사이에 바뀌었나?”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아이가 라이미안입니다.” “무어라!?” 얼마나 놀랐는지 눈이 튀어 나오려 그런다. 가디언도 아는 사실을 드래곤이 모르다니. 이 고 드래곤 맞아? 에스카네는 혀를 차고 있는 나를 인식하고는 재빨리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흠흠, 사실은 잘 알고 있었네만은 예의상 놀란척 해본 것 뿐이네.” “…….”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어찌하다 이렇게 되었는 고?” “실험 도중 실수로 그리되었다고 하옵니다.” “허허, 어찌 그런 일이!” “라이보다 고위 마법사만이 해지할 수 있다고 하는데…… 에스카네스님께서 솜씨 좀 발휘해 주시는 것이 어떻하신지요?” 내 말을 들은 에스카네스는 라이를 요모조모 찬찬히 훑어 보았다. “이 모습도 그다지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허억! 저 음흉한 웃음. 음탕한 눈빛. 먹이감을 앞에 둔 맹수와도 같구나. 중년 아저씨가 어린애를 보며 히죽이죽 웃고있는 모습은 결코 오래지켜볼 수 없는 불쾌한 모습이다. “해지 해 주실 건가요?” “그냥 생긴데로 살지.” “…….” 솔직히 라이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소망이다. 앞으로 한 동안 같이 다니게 될 것 같은데 아무렴 꼬마애보다는 늘씬한 미녀가 낫지. I want pretty woman! “웬만하면 해지 해 주세요.” “웬만하면 그냥 살지.” “그래도 해지 해 주세요.” “지금 모습이 훨씬 아름다운 것 같은데.” “…….” 저 눈빛. 아내를 백명이나 두었던 색마의 눈빛. 지금 그 눈빛으로 라이를 노려보고 있다. 난 황급히 라이를 끌어 안았다. “그 눈빛은 뭡니까?” “어허!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런 귀여운 어린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보다니! 그런 불결한!” “어허! 불결하다니! 내 아내 중엔 저 보다 훨씬 어린애도 있었어!” “…….” 훨씬 어린애? 라이의 나이가 대충 10살 정도로 보이니 훨씬 어린애면……? 설마 기저귀차고 있는 애를 말하는 건가? 에스카네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흠흠, 그 때는 조혼이 유행이었네.” 그렇다해도 기저귀 찬 어린애를 아내로 맞아들이다니. 그런 엽기적인. “……일 얘기나 하죠.” “장소를 옮길까?” “뭐 그러죠.” 에스카네스가 먼저 일어서고 내가 일어섰다. 그러자 가디언이 따라 일어서고 그 다음 라이가 일어섰다. “넌 앉아 있어.” 나는 라이에게, 에스카네스는 가디언에게 그렇게 말했다. 둘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고, 우리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다보니 우리는 창고 비스무리한 곳에 도착했다. 역시 사방이 얼음으로 되어 있는 곳이다. 에스카네스는 잠시 그곳을 뒤적거려 술병과 술잔 등을 찾아냈다, “한 잔 하겠나?” “그거 비싼 건가요?” “인간 세계에선 맛보기 힘든 거지.” 난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그가 술을 따라 주었다. 맑고 투명한 은색 액체였다. 마치 수은 같은 느낌이 나 마시기가 좀 그랬다. “건배.” 그가 먼저 마셨다. 하는 수 없어진 난 입에 들이부었다. 차갑다. 가장 먼저 그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은…… 머리 끝까지 올라온다, 그리고…… “이거 장난이 아닌데.” 난 한 쪽 머리를 부여잡았다. “술이 약하군.” “제가 약한 게 아니라 이게 센 겁니다.” 정말 화끈한 맛이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한 방에 가버릴 것 같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 얘기가 뭐지?” “글쎄요. 이 세계의 비밀에 대해서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요?” 생각에 잠긴 에스카네스. “이드에게 어디까지 들었지?” “아무 것도.” “잭 니켈에 대해서는?” “…….” 잭 니켈. 가이아스 왕국을 세울 때 공헌한 현자. 대륙 최고의 모사로 이름을 날림. 전략, 전술, 정치, 외교 등 국가 정책 전반을 책임졌다고 한다. 저술서로는 정치론, 외교론, 전략론, 전술론, 연애론(?) 등등이 있으나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책은 한 권도 없다. 아무튼 유명하고 잘난 인물. “걔가 왜요?” “잭의 얘기부터 시작해야지. 얘기를 하려면 말이야.” “그게 관련이 있나요?” “아주 관련이 있지. 그는 네가 가지고 있는 지포 라이터의 전주인이었으니까.” “…….” To. JN 그게 잭 니켈(Jack Nikell)의 이니셜이었나? “그럼 다른 세계에서 건너 온 다른 사람이란게……?” “맞아.”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한 남자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계에 오게 되었다. 이 남자가 떨어진 곳은 에스카네스의 레어 근처. 흥미를 느낀 에스카네스는 이 남자를 구해주었다. 남자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저는 잭 니켈이에요. 잭이 이름, 니켈이 성. 미국 켈리포니아 태생이며 집안 대대로 고고학을 전공해 왔고, 지금은 대학 교수의 조교로 있어요. 물론 고고학 교수지요. 제가 왜 이 곳에 오게 되었냐구요? 제길!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탐험을 하던 도중 모래늪에 빠졌어요. 정말 끔찍한 기억이에요. 갑자기 발 밑이 쑥 들어가나 싶더니 몸 전체가 끌려가더군요. 마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 같았어요. 눈을 떠보니 이상한 장소였어요. 처음엔 천당이나 지옥인 줄 알았지요. 전 빌어먹을 신 따위는 믿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신께 기도했어요. 이제까지 착하게 살아왔으니 제발 좋은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런데 배가 고프더군요. 그제야 전 제가 살아있다는 걸 알았죠.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차근차근 둘러봤어요. 곧 근처에 있던 사람 시체 몇 구와 낙타를 발견할 수 있었지요. 저 외에 몇 명 같이 빠졌었거든요. 그 빌어먹을 교수! 우리가 모래늪에서 허우적거리는데도 말려들까 두려워 구해주는 척도 안 했어요. 오히려 모래늪의 영향권에 들어갈까봐 재빨리 멀리 떨어졌지요. 내가 그 놈을 위해 몇 년을 봉사했는데 이따위 대접 밖에 안 해주다니. 아무튼 살아있는 사람은 저뿐이었어요. 낙타 두 마리도 살아있긴 했지만 다리가 부러져 죽은 거나 다름 없었죠. 처음엔 두려워서 눈물, 콧물 질질짜며 울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냉정해 지더군요. 그 때 든 생각은 오직 하나에요. 반드시 살아야겠다. 평소 삶에 대한 욕구가 그렇게 큰 줄 몰랐었는데 막상 위험한 상황이 닥치니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치게 되더군요. 일단 식량과 물을 챙겼어요. 다행히도 양이 제법 되더군요. 죽어가는 낙타를 토막내서 먹어야하나, 걱정했는데. 그 외에도 랜턴, 밧줄, 신호탄, 나침반 등 필요한 물건을 챙겼어요. 하지만 나침반은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어요. 그 나침반이 망가졌는지 아니면, 그 장소가 이상한건진 모르지만 제대로 작동을 안 했거든요. 전 차분히 그 곳을 둘러보았어요. 그 곳은 마치 거대한 미로 같았어요. 진짜 미로는 아니고 그 만큼 복잡하게 생겼다는 거죠. 자세히 조사해보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어요. 전 이제 살았구나 생각했죠. 떨어진 거리는 얼마 되지 않을테니 그 계단을 올라가면 다시 사막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사막에서 어떻게 살아남나는 다음 문제였어요. 뭐 신호탄이 있으니까 별 걱정은 안 했지만요. 하지만 어이없게도 계단 위에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어요. 전 다시 그곳을 조사했지요. 아래층과 비슷한 구조였어요. 좀 헤매다보니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당연 올라갔지요. 그 윗층도 마찬가지였어요. 비슷한 구조에 올라가는 계단. 분명 상당한 거리를 올라왔는데 지상은 보이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모래늪 밑에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는데 그땐 올라가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만이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아무튼 저에겐 선택권이 없었어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봐야 소용없으니 무조건 올라가는 수 밖에요. 한참을 그렇게 올라가다보니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한 층, 한 층마다 오각형 모양을 지니고 있고 위로 올라갈 수록 그 크기가 작아졌어요. 즉, 피라미드의 형태를 띄고 있었지요. 피라미드가 뭐냐구요? 으음,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왕들의 무덤이에요. 그 때 당시에 왕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어 많은 인원을 토목 공사에 동원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사람이 죽고나면 후에 환생한다고 믿었기에 자신의 무덤을 될 수 있는한 크고 멋지게 지으려 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사후를 대비해 엄청난 크기의 피라미드를 쌓지요. 모습은 거대한 사면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에요. 아무튼 저는 계단을 찾아 계속 올라갔어요. 최상층에 도착하면 어떻게든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고요. 식량은 점점 줄어들었어요. 그와 함께 제 마음도 초조해졌지요. 굶어 죽는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경험일 거에요. 만약 식량을 실은 낙타가 같이 빠져들지 않았다면 전 그렇게 됐겠지요. 식량이 거의 떨어졌을 때쯤 저는 최상층에 도착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이지요. 아마도 신의 가호였을 거에요. 아! 전 신을 안 믿는다 그랬죠? 제가 말한 신은 천주가 아니에요. 절대자를 말하는 거지요. 정말로 절대자라는 것이 있더군요 제 눈으로 봤으니 믿는 수 밖에요. 최상층은 오각형 형태의 방이었어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의 방이었지요. 그곳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전 잠시 배고픔을 잊고 그 아름다움에 심취했지요. 제 평생 그런 장소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크리스틴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크리스틴은 제 애인이에요. 정말 귀여운 여인이지요. 주근깨 때문에 미인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저도 잘 생긴 외모는 아니죠.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최상층에 도착한 것까지였죠. 그 곳의 중앙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어요. 마법진인지 어떻게 알았냐구요? 당연하지요. 이상한 도식들이 마구잡이로 적혀져 있고 그 곳에서 찬란한 금빛이 뿜어져 나오는데 마법진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요.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전 냉정했어요. 차분하게 주위를 조사해 보았죠. 기둥 주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어요. 다행히도 전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었지요. 내용은 절대자에 관한 것이었어요. 예전에 한 절대자가 나타나 짐승이나 다름 없이 생활하던 미개한 인간들에게 문명을 전해주었다고 하더군요. 별로 믿음이 가는 얘기는 아니었어요. 아무튼 전 그 글을 읽고 중앙에 있는 마법진이 다른 차원으로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전 일단 그 곳으로 올라가보기로 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거든요. 만약을 대비해서 마법진의 모습을 그려두긴 했어요. 솔직히 그 땐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다른 차원, 다른 별에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게다가 마법을 통해 그 세계로 갈 수 있다니. 아마 제가 지구로 돌아가 당신을 만났다는 얘기를 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절 미친놈 취급할 걸요. 그런데 정말로 다른 세계로 오게 되었네요. 빌어먹을! 전 지금 제가 미친놈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다른 차원이라니! 세상에 그게 말이 될 법한 얘긴가요?” 남자의 얘기를 다 들은 에스카네스는 그가 그렸다는 마법진을 건네 받았다. 도식은 제법 비슷하게 그려져 있지만 배치와 크기가 엉망이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잭 니켈은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차원 이동 마법은 9클래스에 속해있지 않은 마법이었기에 마법진이 엉망인 이상 방법이 없었다. 그는 이 곳에서 살아야만한다는 현실에 좌절하였다. 에스카네스는 이 흥미있는 인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한 것들은 전부 놀라운 얘기들이었다. 마법 대신 과학 문명의 기형적인 발달로 모든 것이 기계화된 세상.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잭 니켈은 좌절에서 벗어나 당돌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문명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명을 등장시킨다. 그렇게함으로써 창조자이자 절대자가 되는 것이다. 에스카네스는 이러한 제안에 흥미를 느꼈다. 흥미를 느낀 드래곤은 에스카네스만이 아니었다.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난 잊혀진 숲을 뛰쳐나와 그들과 함께 행동하기로 하였다. “그 미국놈의 의견을 따라 신세계 건설에 동참하였다는 건가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상당히 재밌는 제안이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그의 전공은 고대 이집트 문명이었지만 관심이 있었던 분야는 중세 유럽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중세 유럽풍으로 세계를 건설하기로 했지. 문명을 전부 없애고 그 위에 새로운 문명을 짓는다. 없었던 전설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그 주역이 됐지.” “그게 가능한가요?” 에스카네스의 입에서 웃음이 나타났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9클래스는 신의 경지. 불가능이란 없다. 대륙에 있는 미개한 인간들의 머릿속을 전부 뜯어 고쳤지. 그들은 이전의 문명을 잃고 새로운 문명을 얻었다.” “그럼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전부 당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셈이군요.” “생각하기 나름이지.” 에스카네스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상한 것은 나도 담담했다는 거다. 어쩌면 모두 예상하고 있었던 일인지도. 으음, 혹시 난 천재? “다음은 어떻게 되었나요?” “결국 왕국은 건설 되었고 그는 자신이 원한 것을 이루게 되었지. 하지만 인간이란 약한 존재. 얼마 지나지 않아 수명이 다해 죽음을 맞이했지. 그가 죽고나니 흥미가 사라지더군. 그래서 나도 다시 레어로 돌아왔지. 하지만 카이네이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몇 백년이 흐른 후 카이네이드는 정해진 수순에 따라 왕국을 분할시켰어. 그리고 가짜왕을 내새우고 진명을 세웠지. 잭이 말한 중국식 문명을 토대로 말이야.” “또 사람들의 머리를 뜯어 고쳤겠군요.” “물론. 갑작스런 문명의 변화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지기 않도록, 이상한 일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도록 완벽하게 컨트롤했지.” “그랬군요.” 목이 바짝 타오르는 것 같다. 난 에스카네스가 따라준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창조의 비밀. 거창한 것처럼 들리지만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정신병자 같은 미국놈과 드래곤 두 마리가 신세계를 건설했다는 것. 드래곤이야 인간과 다른 종족이니까 둘째 치더라도 이 미국놈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자신만의 이상향을 건설하고 싶은 욕심에 그걸 정말로 실행에 옮기다니. 드래곤들은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마음대로 조정했다. 그래서 같은 대륙에서, 갑작스럽게 서로 다른 문명이 나타났어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으음, 제갈량이 결국은 그거였군.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 그래서 제갈량이었던 건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 설마 또 다른 뭔가가 있다는 건? “지금까지의 얘긴 너와 별 관련이 없는 얘기였지. 하지만 이제부턴 관련이 있을 거야. 아주 많이.” “무슨 얘긴가요?” “크로니스를 아나?” “물론이지요.” “이그리드는?” “절 소환한 마법산데 모를 리가 없지요.” “그럼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 무슨 뜻이지? 에스카네스는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친구 아닌가요?” “그 보다 좀 더 가까운 사이지.” 더 가까운 사이? 설마…… “형제?” “……어떻게 그런 멍청한 대답이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하군.” “그럼 뭔가요?” “연인이라면 어떤가?” “에엑!” 에스카네스는 웃고 있었다. “지금 농담하신 거죠?” “아니.” “그럼 그 늙은이와 크로니스가 그렇고 그런 관계……?” “좀 복잡한 관계지.” 이런 황당하고 엽기적인 일이! 아니,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둘 다 남자잖아요!” “드래곤은 완전한 존재. 인간들처럼 암수가 나눠져 있진 않지. 그리고 이그리드는 9클래스를 마스터한 마법사. 이 자 역시 성별에 억매여있진 않아.”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둘의 외모를 비교해 보라. 이그리드는 추악한 늙은이인 것에 비해 크로니스는 싱싱한 청년. 외모도 수준급. 둘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원조 교제라 할 수 있다. 누가 누구를 원조해주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혹시 이그리드가 크로니스를 덮친 건가요? 그래서 모종의 약점 -예를 들면 몰카를 찍었다던가-을 잡고 협박해 강제로 추행을 했다던가……?” “어찌 넌 생각하는 게 그 모양이냐? 진짜 한심하군.” “뭐가 어때서요?” “사실 어찌보면 둘의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어.” “……?” 지금 나랑 장난하나? “아까는 연인이라면서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사실 그게 크로니스의 짝사랑이었을 뿐이거든.” “……그게 정말이에요?” “물론.” 1500년대 초반에 천재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의 이름은 이그리드. -태어 날 때부터 이 이름은 아니었다고 한다. 넨 이드의 ‘이드’ 라는 이름을 끼워 넣어 자신이 직접 지은거란다. 재주도 좋아- 이 인간은 인간이라고 하기엔 머리가 너무 좋은데다 체력도 좋았다. 이그리드는 10대 후반에 아이리스의 왕 키에티트를 만나 대륙 남부 -류이테르강 남쪽 지역- 을 차지하고 있던 아토리아를 몰아내고 아이리스를 당당히 패자의 자리에 올려 놓는다. 이 잘난 인물이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키에티트의 누님인 루미아드 공주. 둘은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지지고 볶고…… 아무튼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 여자가 정말 죽어버렸다. 상심한 이그리드는 삐쳐가지고 ‘열심히 싸운 당신 떠나라~!’ 등등의 헛소리를 지껄이며 정말로 떠나버렸다. 그래서 기어들어간 곳이 적색 산맥. 사랑하던 여인의 죽음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레어 근처의 몬스터를 몽땅 죽이고, 크로니스의 가디언마저 죽인다. 그래서 평소 성질 죽이고 살려고 노력하던 크로니스의 성질을 건드린다. 크로니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둘은 소위 말하는 ‘맞짱’ 을 떴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이그리드는 목숨을 내놓고 덤볐지만 8클래스가 9클래스를 이길 수 있을리 없었다. 승부는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이그리드를 죽여버릴 수도 있었지만 흥미를 느낀 크로니스가 살려둔 것이다. 그 후 이그리드는 크로니스의 레어 근처에 동굴 하나를 분양 받아 정착한다. 하지만 이그리드는 먼저 간 그녀 생각에 매일 같이 한숨과 눈물 뿐이었다. 보다 못한 크로니스는 그에게 그 누구도 해독하지 못했던 차원 이동 마법진 -잭 니켈이 엉망으로 그린- 을 줘 그것을 해독하게 했다. 처음엔 그냥 장난삼아 줬는데 이 인간이 천재여서 그걸 정말로 해독하고 있었다. 이그리드는 마법진을 발동하기 위해선 9클래스를 마스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금 마법 수련에 들어간다. 마나만 9클래스까지 쌓으면 되는 거지만 마나만 쌓기 심심했던 이그리드는 크로니스에게 마법도 배운다. 그리고 결국은 9클래스를 마스터한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데 이상하게 이그리드는 해냈다. 혹시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으로 출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크로니스는 이런 이그리드에게 마음이 끌려 계속해서 대쉬한다. 하지만 자신은 순정파여서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해야한다고 믿는 이그리드는 그 마음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계속해서 차인 크로니스는 결국 좋은 친구로 남기로 한다.(지가 뭐가 잘났다고 드래곤을 찼는지 모르겠다. 흥!) 어찌되었든 이그리드는 연구에 몰두했고, 마법진을 완벽히 해독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험. 새시대의 새로운 영웅, 박영웅을 이 세계로 소환해 낸다. 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수명이 다한 이그리드는 박영웅에게 자신의 마법 지식과 마나를 모두 넣어 주고 죽는다. 하지만 크로니스는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와 이그리드를 동일시 여긴다구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아니, 내가 그 늙은이와 어디가 닮았다고? 생긴 것도 내가 백배는 잘 생겼구만.” “말은 바로 해야지. 그저 그렇게 생긴 주제에.” 나 생긴게 어때서? 이 정도면 잘 생긴거지. “저와 이그리드를 동일시 여기는 이유가 뭔가요?” “네가 그의 지식을 전수 받았기 때문이지.” “겨우 그것 때문에요? 지식이라고 해봐야 마법과 언어에 관련된 것 뿐이잖아요.”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그럼요?” “지식에 대한 경계선을 확실히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여기까지는 마법에 대한 지식, 여기서부터는 음식에 대한 지식, 이 다음부터는 수학에 대한 지식…… 이렇게 말이야.” “……글쎄요.” “지식을 주입해 주는 과정에서 다른 지식들이 섞여 들어 갔을 수도 있지. 여러 가지 기억들이 말이야.” 사실 나도 그 생각을 하긴 했었다. 간간히 떠오르는 이상한 기억들. 그리고 꿈에서 나타난 미인. 어쩌면 내 성격이 이 모양인 것도 그와 심각한 관련이 있을 듯.(사실 성격은 원래 이 모양이다) “아무튼 크로니스는 너와 이그리드를 동일 인물로 여기고 있어.” 그래서 날 자주 도와줬던 거군.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아나?” “……?” 에스카네스는 손가락을 세워 관자놀이 근처에서 빙빙 돌렸다. “돌았다는 얘기지.” “돌아요? 크로니스가?” 누누이 말하지만 마법은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난이도의 마법을 익힌 자일수록 정신력이 뛰어나다 할 수 있다. 크로니스는 드래곤이자 9클래스 마스터. 미쳐버릴래야 미쳐버릴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에스카네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완전히 맛이 갔지. 완전 미쳤어. 감히 내 충고마저 무시했으니 말이야.” “그래서요?” 나의 물음에 에스카네스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요, 라니?”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사실 그렇잖아요. 크로니스가 미쳤던, 돌았던, 맛이 갔던 그게 저하고 무슨 관련이에요? 왜 저한테 그 얘길 하시는 거죠?” 크로니스의 험담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다. 그가 뭘 잘못했다고? 비록 이그리드 때문이긴하지만 나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기분 나쁜가 보군.” 에스카네스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난 인상을 찡그렸다. “솔직히 기분 나쁩니다.” “하지만 잘 들어둬. 니가 반드시 알아야할 사실이니까.” 그가 타이르듯 말했지만 나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대체 왜 그런식으로 말하는 거죠? 당신이 뭔데? 크로니스는 제 목숨을 구해줬어요. 그에 대한 험담 따윈 듣고 싶지 않아요!” 에스카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지?” “당신이 그를 욕했으니까요!” “그? 너와 크로니스가 대체 무슨 관계기에 ‘그’ 라고 칭하는 거지?” “그건…….” 잠깐.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지? 굳이 이렇게 흥분할 필요가 없잖아. 따지고 보면 크로니스와 나의 관계는 별 게 아닌데 말이야. 난 흥분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별 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냥 화가 났을 뿐이다. “좀 진정이 되나?” “죄송합니다.” 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얘기는 마저 들어야 했으니. 에스카네스는 별로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비록 비웃음이긴 했지만. “크로니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나?” “……?” 제발 좀 알만한 걸 물어봐라. 이런 나의 바람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이번엔 당연한 것을 물었다. “넌 아이리스의 공작이지?” “예.” “아이리스가 전쟁에서 이기길 바라나?” “물론이지요.” “그럼 그렇게 되겠지.” “그렇게 되다니요?” “예전에 역사를 바꾼 것은 잭이었지만 이젠 네가 역사를 바꾸고 있어.” “……무슨 말이에요?” “원래 데로라면 넌 여기 오면 안 돼. 진명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후, 아이리스로 가서 군대를 지휘했어야지. 네가 이끄는 군대는 백번 싸우면 백번 이길 것이다. 네가 어떻게 지휘를 하던, 어떤 책략을 세우던 전부 이길 것이다. 아이리스는 다시 남부의 패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네가 50세가 되면 루시아 공주는 죽고 넌 아이리스를 떠나겠지.” “…….” 저절로 눈이 크게 떠졌다. 에스카네스의 푸른색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이 것이 크로니스가 만든 시나리오다. 원래 데로라면 이대로 진행이 되었어야 했어. 카이네이드는 크로니스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마음을 바꿨더군. 이쪽이 훨씬 재밌게 느껴졌나?” “크로니스의 시나리오?” “누구의 일생과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넌 죽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영원히 크로니스의 곁에 있어야 겠지. 그가 원하는 데로.” “그럼 이제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다 그가 꾸민 거였나요? 루시아를 만난 것부터 시작해서 동맹을 맺겠답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게?” “우연도 자꾸 겹치면 필연. 지금까지 그걸 알아채지 못한 놈이 병신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크로니스의 손에서 놀아났다니. “애당초 제갈량이나 사마의 같은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았어. 그들은 널 위해 급조된 캐릭터들이지. 크로니스는 이미 네 머릿속을 들여다 봤거든.” 급조된 캐릭터? 설마…… “사일런스 지니!” “그 놈은 아니야. 크로니스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에 동참하고 있긴 하지만.” “빌어먹을!” 미칠 것 같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 세계는 미국놈과 드래곤이 힘을 합해 만들어 놓은 세상이며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머릿속이 컨트롤 되었다는 것도 모르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난 장기판의 말처럼 크로니스가 원한데로 움직이고 있다.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는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진실인가? “크로니스가 원하는 것은 너. 정확히는 이그리드의 기억을 물려받은 너.” “난 이그리드가 아니야!” “그건 나도 잘 알아. 미쳐버린 드래곤도 그 사실을 이해했으면 좋겠군.” “닥쳐!” 난 이죽거리고 있는 에스카네스에게 달려 들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그 말이 사실이야? 무슨 근거로 그 말을 믿어야 하지? 날 갖고 노는 것은 너 아니야? 제길! 모든 게 너 때문이야! “좀 진정하는 게 좋을 듯 하군.” 에스카네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지? “뒤다.” 퍼억-! 배가 아프다. 망치로 얻어 맞은 것 같다. “우웨엑!” 일어서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난 배를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이제 그만 자라.” 희미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정신이 몽롱해 진다. 고통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미칠 것 같다. 미쳐버렸으면 좋겠다. “왜 나를 살려둔 거지?” “무슨 소립니까?” 그가 되물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이해해주길 바라지도 않지만. “날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죽이지 못한 거라고 해두지요.” 붉은색 머리카락의 엘프 청년. 난 지금 그 청년의 방으로 짐작되는 곳에 누워있다. 온 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다. 정말 지랄 같이 얻어맞았군. 사실 나에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나와 싸운 상대의 상태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퍼렇게 멍이든 눈. 부어터진 입술. 찢어진 귀. 얼굴은 인체의 급소가 가장 밀집되어 있는 곳. 그래서 상대가 골고루 팰 동안 난 얼굴만 중점적으로 팼다. “인간치곤 제법이군요.” “인간 중에선.” “나이도 제법 있으신 것 같은데.” “아직 50밖에.” “일반적인 인간들은 그 정도 나이에 죽지 않나요?” “내가 일반적인 인간으로 보이나?” “적어도 제 정신이 박힌 인간으로 보이진 않는 군요.” 엘프 청년은 멍이든 눈을 문지르며 웃음을 지었다. 퉁퉁 부어오른 엘프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도 얻어터진 늙은이 보고 있긴 짜증나겠지. “세상에서 가장 성질 더러운 드래곤이라고 하던데, 소문은 거짓이었나?” “제 성질 더러운 건 맞습니다.” “그런데 왜 존댓말을 쓰지?”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건 당신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벌레에게 느끼는 최소한의 연민이니까요.” “벌레한테 얻어터진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 군.” “짖어대는 것은 그쯤 해두십시오. 짜증나니까요.” 그는 방을 나갔다. 텅 빈 방에 홀로 남게 된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역시 드래곤과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다. 분명 말해두지만 난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죽기 전에 9클래스와 한번 싸워보고 싶었을 뿐. 처음엔 화려한 마법 대결이었다. 8클래스 마법이 난무 했을 정도니 말 다했지. 먼저 쓰러진 쪽은 당연 나. 그 다음은 개싸움(Dog Fighting)이나 다름없었다. 달라붙은 상태에서 서로 미친 듯이 주먹을 내질렀으니. 누가 그 모습을 봤다면 과연 마법사와 드래곤의 대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졸립군.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잠이나 자자. “우에에엥!” 이 무슨 불났는데 소방차 출동하는 소리란 말인가? 눈을 떠보니 라이가 펑펑 우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누가 우리 라이를 울렸어?” 난 벌떡 일어났다. 라이는 울다말고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딸꾹! 딸꾹!” 차라리 뻐꾹~ 뻐꾹~이 낫겠다. “깨어났어요? 딸꾹! 우아앙, 라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딸꾹!” “…….” 나를 걱정해서? 얘가 지금 진심인 건가, 아니면 아부하는 건가? “이 오빠는 멀쩡하단다.” 사실 별로 멀쩡하지는 않다. 배가 욱신거려. 내가 누워있는 곳은 얼음 방, 얼음 침대 위. 전부 얼음인데 차갑기는커녕 따뜻하다. 아마도 무늬만 얼음이고 속성을 완전히 바꿔버렸나 보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수건을 코에다 갖다 댔다. 패앵~! 힘차게도 푸는 군. 아무튼 라이의 눈물, 콧물을 잘 닦아 주었다. 귀여운 것. 나를 걱정해 울기까지 하다니. 날 걱정해주는 사람이 너 밖에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쩌겠냐? 너라도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감히 에스카네스님께 대들다니. 배짱도 좋으시군요.” “언제 들어왔어요?” 내 앞에는 어느새 나타난 얼음 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고소하다는 듯 조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얻어맞고 쓰러진 게 너무도 기쁜가 보다. 으음, 예뻐서 봐준다. “에스카네스님께서 오라고 하시니 빨리 가보세요.” 왜 그렇게 틱틱 거리시나? “어디로 가면 되죠?” “이 곳을 나가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가디언은 안내해 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난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문을 여는 순간 난 가디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얼음 복도에 친절하게도 화살표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컨티뉴얼 라이트를 화살표 모양으로 써놓은 건 또 처음 보는군. 어찌되었든 나는 그 화살표를 따라갔다. “……이그리드.” 그 늙은이는 끝까지 나를 엿 먹이기로 작정을 했나 보다. 지식 전수는 애초부터 뭔가 잘못 되어 있었다. 에스카네스의 말 대로 마법과 언어 지식만이 넘어온 게 아니라 단편적인 기억들까지 세트로 넘어왔다. 그것들은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느껴진다. 그 기억이 가진 감정을 난 똑같이 느껴야 한다. 이러다가 기억의 중첩으로 미쳐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모르는 사이에 난 그의 습성과 행동 양식 등 상당 부분을 닮아가고 있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던 일이 갑자기 당연하지 않게 되자 이상한 점들이 속속 드러난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 사이 화살표가 끝나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에스카네스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좀 진정한 것 같군.” “덕분에요.” 그 정도로 맞았는데 진정 안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에스카네스는 술잔을 채워 나에게 건넸다. 난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기분도 이런데 술이라도 마셔야지.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난 지금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현재의 상황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앞으로 일을 생각할 수 있겠나? “후회되나?” “차라리 듣지 않는 게 좋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몰라도 될 사실을 알게 되면 오히려 안 좋아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네가 발광하는 바람에 한 가지 말 못한 게 있다.” “뭔가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좌표.” 에스카네스는 술을 병째 들이켰다. “좌표는 잭이 떨어진 장소. 그곳에서 시작해 그가 적어온 것과 동일한 좌표점을 입력시킨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마법진은 이그리드가 해독했으니까.” 돌아간다. 내가 살던 것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상하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 되었다. “정말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물론.” 돌아가야 하나? 원래 있던 자리로?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 해.” 에스카네스의 발언에 눈이 번쩍 떠졌다. “어째서죠?” “크로니스가 마법장으로 차원 게이트를 일그러뜨리고 있어. 그가 있는 한 차원 이동은 불가능 해.” “크로니스가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에스카네스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잡으려는 물고기가 그물을 빠져나가면 곤란하잖아.” 제길! 대체 뭣 때문이지? 뭣 때문에 크로니스는 나를……. 그의 생각만하면 가슴이 아프다. 내가 그에게 뭘 잘못한 거지? 왜 내가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져야 하는 거지? “네가 제대로 살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다. 크로니스가 제정신을 차리던가, 아니면…….” 에스카네스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크로니스를 죽이던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혈압이 오르는 것을 머리로 느낄 수 있었다. 난 왜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소리를 질렀다. “왜죠!? 대체 왜! 대체 왜 그가 죽어야 하는 거죠?” “진정해라.” 에스카네스의 몸에서 공기를 얼어붙게 할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조금의 공포도 주지 못했다. 충분히 위험하다고 머리로 느끼고 있었지만, 몸은 그것을 가볍게 무시했다. “왜 저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왜 저한테 크로니스를 죽이라고 하시는 거냐구요!”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너밖에 없고, 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붉은색 머리카락의 엘프. 호리호리한 몸매와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 나를 보며 웃어 주었다. 그 웃음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나? 나에게서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었나?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을. 빌어먹을!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목이 매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난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울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눈물이 멈추었다. 눈물을 닦아내던 나는 에스카네스와 눈이 마주쳤다. 스타일 구겼군. 눈이 쓰라린다. 아마도 부운 것 같다. 목도 아프다. 몸에 힘이 없다. 우는 것도 의외로 많은 체력을 소모하나 보다. 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아마 지금 내 얼굴은 말도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별로 안 생긴 얼굴, 떡이 되어있겠지. 난 남자가 우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 인간이다. 미소녀라면 모를까 남자가 어쩌자는 건가?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미관상 보기 안 좋잖아. 그나저나 이렇게 울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은데. “결심이 섰나?” “예.” 한 바탕 울고 났더니 기분이 후련하다. 남자라 하더라도 가끔은 울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괜히 가슴에 쌓아 놓고만 있으면 병만 되지. “크로니스를 죽일 건가?” 난 고개를 저었다. “막을 겁니다.” 에스카네스는 피식 웃었다. “잘도 헛소리를 지껄이는 군.” “진심입니다.” 진심이다. 막을 거라고 말한 것도 진심이고, 진심이라고 말한 것도 진심이다. 에스카네스는 웃음을 지었다. 비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이었다. 내 진심이 통했나?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의 균형. 미친 드래곤 때문에 세상이 망하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아.” “그래서 저에게 크로니스를 죽이라고 한 건가요?” “너 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지.” 나 밖에 할 수 없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 어째서? “9클래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그냥 최강이라는 것 정도.” “그럼 9클래스와 9클래스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나?” “그야 더 센 쪽이 이기는 거 아닌가요?” “천만에.” 에스카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9클래스 두 명과 9클래스 한 명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 것 같나?” “당연 9클래스 두 명이 이기지 않나요? 간단한 산수 계산이잖아요.” “그럼 다른 걸 물어보지. 무한대 둘과 무한대 하나 중에 어느 쪽이 더 크다고 생각하나?” “…….” 만약 내가 정말 무식한 놈이었다면 아주 당당하게 ‘무한대 둘이요! 하나보단 둘이 크잖아요!’ 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난 그 정도로까진 무식하진 않다. 무한대는 말 그대로 무한대. 무한대를 두 개를 합치던, 백 개를 합치던 무한대는 무한대인 것이다. 무한에 무한을 더한다고 해봐야 무한은 무한일 뿐. “9클래스가 무한대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9클래스는 신의 영역. 무한대라 해도 잘못된 표현은 아니다.” 그 정도로 강력한가? 에스카네스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했다. 무엇을 생각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그도 꽤나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봐야 나만 하겠냐만은. 대체 뭐가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어쩌면 내가 이 세계로 온 순간부터, 아니 그 미국놈이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모든 것이 잘못 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컨트롤 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인간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기만하는 존재. 두렵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거짓인 것 같아 두렵다. 누군가가 내 머릿속을 뜯어 고쳐, 있지도 않았던 일을 겪은 것으로 여기고, 직접 겪었던 일을 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아 두렵다. 혹시 지금 이것들은 전부 꿈이 아닐까?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완전히 미쳐서 다른 세계에 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짜 내 몸은 정신병원 한 곳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가 아니다. 내 기억들을 믿지 못한다. 내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거지? 무엇이 진실이지? 진실은 절대적인 건가? 거짓이 있어야 진실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만약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하나 남은 진실도 거짓으로 변하게 될까?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했던 말이다.(내가 알고 있을 정도면 정말 유명한 사람이다) 이 인간은 끝도 없이 모든 것을 의심했다. 분명 중국놈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의심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인간은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결국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의심을 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난 지금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 내가 이렇게 철학적인 인간이 되다니. 우리 부모님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뭐 철학적인 사고를 한다고 해서 수능 점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에스카네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엔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너 하나가 희생해 크로니스가 폭주하는 것을 막는다면 그 정돈 괜찮다고 생각했지. 인간의 역사에 간섭을 하는 것도 전체 균형에는 별 상관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왜 마음이 바뀌신 거죠?” “그의 상태가 불안정 해. 9클래스는 웬만해선 감정기복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그는 수시로 극단적인 성격으로 바뀌고 있어.” 누누이 말하지만 마법은 정신 수련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당연 높은 클래스로 올라갈수록 자기 절제 능력이 강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인간이 너무 화가 나는 일이 있어 세상이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치자. 이 인간이 평범한 인간이면 ‘세상은 날 사랑하지 않아! 난 세상이 싫어! 세상을 다 가져라~!’ 등의 미친 소리를 지껄이며 주위 사람들을 찔러 죽일 것이다. 잘해 봐야 10명에서 100명 죽이겠지. 하지만 이 인간이 9클래스 마스터라면 성 하나, 아니 정말로 세상을 다 날려버릴 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일수록 쉽게 감정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일으켜서도 안 된다……라는 것이 에스카네스의 설명이다. -물론 나도 대충은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크로니스는 이그리드의 죽음 때문에 충격 받아 미쳐버렸다. 미친놈들이 의례 그러하듯 그도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 그는 이그리드에게 쏟아 붓던 사랑을 너에게 쏟아 붓고 있어. 그런데 어느 날 네가 이그리드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세상을 다 날려버리겠지. 그럼 이 대륙은 멸망하고 아마겟돈이나 라그나로크가 시작되는 건가? “잘 알아들었으니 그만하세요.” 난 크로니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대체 얼마나 사랑했기에 9클래스가 미쳐버렸을까? 그리고 이그리드는 이런 크로니스를 정말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아까도 말했듯이 9클래스끼리의 대결은 무의미 해. 만약 대결을 한다면 승부가 가려지기 전에 먼저 세계가 멸망하겠지.” 그야말로 삽질이라는 건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야. 중요한 것은 네가 9클래스를 마스터해야 한다는 거지.” 9클래스라…… 가능한 얘긴가? 난 지금 5클래스 밖에 안 되는데. “얘기는 이쯤 해두지.” 에스카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무슨 시간 말인가요?” 에스카네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다른 질문을 던졌다. “크로니스가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건 별 상관없어. 어찌되었든 그는 널 죽이지 못 할 테니까.” “절 이그리드로 보기 때문에요?” “그렇지.” “그래서 그와 싸울 수 있는 자가 저 밖에 없다는 거군요.” “그래.” 입맛이 씁쓸하다. 남은 것은 허탈감. 차라리 모든 것이 꿈이라면…… 아니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당당하게 맞서야지. 그런데 정말 맞서기 싫다. 난 걸음을 돌렸다. 머리를 식히려면 좀 쉬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루시아라고 했나?” 뒤에서 들려온 에스카네스의 목소리. 난 순간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막고는 담담하게 물었다. “그녀가 왜요?” “그 여잔 널 사랑하지 않아.” 푸욱~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잔인하게 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별로 그렇게 놀라진 않았다. “알고 있어요.” 컨트롤 당했겠지. 날 좋아하도록. “저는 그녀를 좋아하나요?” 웃기는 질문이다. 내 마음을 남에게 묻다니. 하지만 지금 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답을 내려줄 자는 오직 눈앞의 남자뿐. “간단한 암시 효과지. 이그리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루미아드의 모습이 캡쳐되어 그녀를 볼 때마다 기억 속의 감정이 살아나는 거다.” 내가 둘을 동일시여기고 있다는 건가? “아! 저 엘프는 널 진심으로 따르고 있더군. 원래 어린애는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법이거든.” “…….”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나보고 평생 라이의 보모 역할이나 하라는 거냐? * * * * 결국 진실이란 위험한 것이다. 알아도 손해, 몰라도 손해. 난 마인드를 컨트롤 당한 인간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그들은 결코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면 열 받긴 하겠지만. 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애매하다. 그래도 굳이 한 명을 꼽자면 잭 니켈이라는 양키놈. 백인들은 자신보다 떨어진 문명을 보면 무조건 파괴하고 본다는데 이 놈도 별 다를 것은 없는 듯하다. 세상에 자기가 뭔데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겠답시고 설쳐 대륙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나? 아마 그 놈은 이 일을 그냥 조립식 장난감 하나 만드는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재밌긴 재밌었겠다. 자기가 원하는 데로 모든 것이 딱딱 만들어졌으니. 이 놈은 정말 이렇게까지 해서 자신이 신이 된 기분을 맛보고 싶었나? 어찌되었든 이 놈 때문에 차원 이동 마법진이 이 세계에 나타났고, 그 것을 이그리드가 해독해, 결국은 나를 이곳까지 불러냈다. 그리고 이그리드가 죽고, 크로니스가 미치고, 그 덕에 난 사상 최강이자 최악의 스토커한테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어제까지 나의 목적은 아이리스 재건이었다. 난 그 목적을 위해서 친절과 봉사 정신으로 무장을 하고 어떠한 일에도 굴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다.(다짐만 하였다. 별로 실천에 옮긴 것은 없다) 하지만 오늘 부로 목적이 바뀌었다. 원래 목적이란 바뀌라고 있는 거다. 사람은 처한 상황에 따라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달라지기 마련이거든. 현재 나의 목적은 크로니스를 막는 것. 첫째 이유는 당연 나를 위해서다. 남의 대타가 되어 사랑에 굶주린 드래곤의 장난감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 둘째 이유는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다. 혹시라도 크로니스가 폭주를 하여 9클래스 마법 -예를 들어 유성 낙하라던가, 대단위의 절대 즉사 마법이라던가- 을 난무하면 이 세계는 끝이다. 난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 세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사랑과 정의, 어둠을 뿌리고 다니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세계가 초토화 되는 것을 보고 싶진 않다. 마지막 이유는 크로니스를 위해서다. 그를 이대로 놓아 둘 수는 없다. 이그리드를 대신 해서라도 어떻게든 그를 막아야 한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보여준 성의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일 테니까. 언제나 편하게 적당 적당히 살려 그러는데 세상이 나를 가만 두지 않는 구나. 어쩌겠냐? 세상의 부름에 응해야지. 난 라이코스를 꼭 껴안은 채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든 라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넌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사니까. 나도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어. 난 자고 있는 라이를 토닥거려 준 뒤,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엘프니까 웬만해선 감기에 걸리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그나저나 자는 모습 하나는 정말 천사 같다. 이렇게 보고 있자니 괜히 머리 한번씩 쓰다듬어 주고 싶고, 볼에 뽀뽀해 주고 싶고, 토닥여 주고 싶고. 만약 나중에 커서 여자애를 낳는다면 라이 같은 애를 낳고 파~ 뭐 내가 낳는 것은 아니지만. 난 자고 있는 라이를 내버려두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얼음 성을 빠져나와 분수대가 있는 정원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거대한 분수대 중앙에서 드래곤의 모습을 한 얼음 조각상이 입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다. 위로 솟구친 물은 꿈과 같이 흩어지며 장관을 연출해 낸다. 흘러내리는 물은 마치 은빛 눈물과도 같다. 난 분수대에 손을 담갔다. 사실 이건 별로 좋지 못한 행동이다. 분수대의 물은 계속 재탕해서 쓰기 때문에 별로 깨끗하지가 않거든. 뭐 그렇다고 이 물이 깨끗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물이 차갑다. 얼음 성에 얼음 분수대니 차가운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너무 차갑다. 난 분수대 안으로 들어갔다. 물은 내 무릎까지 왔다. 아! 다리 시리다. 난 천천히 걸어 분수대 중앙으로 다가갔다.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물이 내 몸을 적신다. 진짜 춥다. 드래곤 조각상 앞에 멈춰선 나는 청룡도를 뽑아 들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 하~ 후~ 하~.” 옆집 임산부보니까 힘들 때 이런 식으로 숨을 쉬더라. 어찌되었든 마음은 많이 진정 되었다. 난 날카롭게 드래곤을 노려본 후, 그립을 꽉 움켜쥐고 드래곤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서걱-! 이거 제대로 베어진 건가? 손에 느낌이 별로 없다. 쏴아아~ 제대로 베어진 것 맞군. 잘려나간 드래곤의 머리가 물 속으로 퐁당 떨어졌다. 그리고 잘린 목에서는 마치 피와도 같은 물이 무자비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래서야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꼴이다. 난 분수대 밖으로 기어 나와 마법을 옷을 말렸다. 따닥- 따닥- 이게 마른 장작이 타는 소리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아쉽게도 내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다. 괜히 미친 짓 한 것 같다. 물 뿜는 드래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몸이 어느 정도 마르자 난 여유를 가지고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은 한 마디로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화려한 모습의 얼음 꽃이 피어있고, 그 위에 눈이 살짝 내려 앉아 있다. 곳곳에 얼음 나비들이 날아다니며 꿀을 채취하고 바람결에 따라 눈이 휘날리며 꽃이 흔들린다. 이것들도 다 인공 생명체들인가? 난 기습적으로 팔을 뻗어 꽃 위에 앉아있는 나비를 붙잡았다. 나비는 날개를 움직이며 내 손을 벗어나려 했다. 에스카네스의 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이군. 난 나비를 놓아 주었다. 9클래스. 신의 영역. 자신이 원하는 일은 뭐든 이루어 낼 수 있는 존재들. 9클래스가 되면 써클을 이루고 있던 마나들이 하나로 융합 된다. 그리고 핵을 중심으로 자연계의 마나를 정제 없이 무한대로 퍼다 쓸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더 이상 마나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이렇기 때문에 8클래스와 9클래스는 1계단 차이가 아니라 인간과 신의 차이다. 이 핵이 되는 것은 드래곤 하트다. -인간의 경우는 심장이 된다- 9클래스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핵이 되는 드래곤 하트를 파괴하면 된다. 하지만 이 것도 스스로가 죽기로 작정 -홧김이 아니라 정말로 스스로가 진실하게 죽음을 원할 때- 해야만 가능하다. 이그리드는 심장의 노화로 150세를 전후해 죽었다. 하지만 이 것은 스스로 죽음을 원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루미아드가 없는 세상에서 그의 목숨을 지탱시켜 주었던 것은 마법 연구에 대한 몰두였다. 어쨌건 그는 마법사니까. 하지만 나를 소환함으로써 실험은 성공했고, 그는 자신의 궁금점을 전부 채웠다. 더 이상 삶의 의욕이 사라졌기 때문에, 진실로 죽음을 원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크로니스가 주었던 사랑의 일부만이라도 보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그리드의 생각을 알 수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크로니스가 상처 받지 않길 바랐다. 자신은 언젠간 반드시 죽을 몸. 만약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크로니스는 남은 수천 년의 세월을 이별의 아픔에 괴로워하며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한 사람이 꽉 자리를 잡고 있어 그 누구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오직 그녀를 위해서……. 만약 이그리드가 크로니스를 사랑했었다면 크로니스는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더 심하게 미쳤을까? 이그리드는 자신이 죽고 나면 크로니스가 폭주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나한테 마법을 전수해 준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일이 터지면 어떻게든 막아 달라고. 그 동안 별 생각 없이 살아오다가 삶의 목적이 확실하게 생기니 굉장히 당혹스럽다. 그리고 목적이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정해진 거라면. 원래 데로라면 진명에서 바로 아이리스로 돌아갔어야 하는 건데. 그럼 아무 것도 모른 채 군대를 지휘했겠지. 싸울 때마다 이길 테고 그럼 난 그게 정말로 다 내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알고 실컷 떠벌리고 다녔겠지. 난 담배를 입에 물고 눈꽃들을 밟으며 정원을 거닐었다. 나의 전투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보자면 강한 축에 속한다. 5클래스 마스터가 약한 축에 속하면 일반인은 바람 불면 날아가고 길거리에서 껌 밟으면 못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객관적 평가가 아닌 주관적 평가다. 5클래스 마스터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봐야 9클래스에 비하면 발밑에서 기어 다니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다. 게다가 난 마법 운용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크로니스를 막기 위해선 그와 비등한 힘이 있어야 할 텐데. 옛날 이야기책을 읽어보면 드래곤과 맞서 싸우는 경우는 무조건적으로 파티를 조직해 싸우기 마련이다. 기사, 성직자, 마법사, 도둑, 드워프, 엘프 등등. 이들은 우르르 몰려가 드래곤을 다구리 놓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등등의 헛소리를 지껄인다. 세상에 정의의 용사라는 것들이 10 대 1, 20 대 1로 싸워서 이겨 놓고 한다는 소리가 정의가 승리한다니. 대체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선 다구리도 용납된단 말인가? 현재 나는 타인의 원조를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9클래스와의 대결에서 누가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 것일까? 이 것이 내가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숙명이라는 건가?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런 곳에서 뭣하고 있나요?” 어느새 다가온 가디언이 나에게 물었다. 미인의 질문의 친절히 대답을 해주는 것이 기사도의 첫째 임무라 할 수 있지만 지금 기분은 도저히 대답할 기분이 아니다. 난 그녀의 말을 가볍게 씹었다. 그 순간, 저 쪽에서 라이가 아장아장 걸어온다. “오빠!” “왜 그러니?” “라이 배고파요.” “…….” 너 배고픈데 어쩌라고? 내가 니 밥까지 챙겨줘야 하냐? “그래. 우리 라이가 배가 고프구나. 뭐 먹고 싶니?” “라이는 맛있는 케이크가 먹고 싶어요.” 너무도 당당하게 말한다. 마치 ‘제가 먹고 싶으니, 반드시 만들어 주셔야 해요’ 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 하다. 난 가디언을 보았다. “얘기 들으셨죠? 이 아이가 케이크가 먹고 싶답니다.” 가디언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거죠?” “얘가 먹고 싶다는데 당연히 만들어 주셔야하는 것 아닌가요?” “전 보모가 아니라 가디언입니다.” “…….” 나도 보모 아니야. 난 팔짱을 끼며 그녀를 마주 노려보았다. 우리 둘의 뜨거운 눈빛이 공중에서 어지럽게 얽혔다. 파지직~ 소리는 안 나지만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걸 보고 남들은 기 싸움이라고 부른다. 앗! 내가 밀린다. 여기서 밀리면 내가 케이크를 만들어야 하나? 나의 패색이 짙어지는 순간 다행히도 나를 구해줄 구원자가 등장했다. “그냥 네가 케이크 하나 만들어 와라.” “너무해요, 주인님!” 가디언은 에스카네스를 향해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에스카네스는 귀찮다는 듯 손을 한번 휘저었다. 가디언은 삐진 듯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바람과 같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아마도 주방으로 가는 거겠지? 라이는 삐져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가는 가디언을 향해 결정적 한 마디를 외쳤다. “라이는 딸기 케이크를 너무도 좋아해요!” 잘했다, 라이야. 이 오빠도 딸기 케이크 좋아한단다. “앗! 나비다!” 라이는 정원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보고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쫓아다녔다. 얼음 나비들을 잡으려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원피스를 입은 소녀. 나풀거리는 치맛자락과 흰눈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귀여워라. 저런 여동생 하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뭐 지금도 여동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니지, 여동생보단 딸에 가깝나? 에스카네스는 분수대와 정원의 일부를 돌아보고는 나에게 말했다. “아주 개박살을 내놨군. 내가 몇 백 년 동안 힘들게 가꾼 것들인데.” “어차피 별 상관없잖아요.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은 아니니.” 에스카네스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관상욕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지.” “지금 그런 거 따질 땐가요?” “이런 때일수록 여유를 잃지 말아야지.” “댁이나 실컷 여유로워하세요. 전 복잡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니.” 우리가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가디언이 무언가를 들고 오는 모습이 포착 됐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높이만도 라이 키 정도 되는 삼단 딸기 케이크. 그 사이에 저걸 다 만들었단 말인가? 라이가 좋아서 환장하겠군. “우와! 케이크다!” 라이는 너무 좋은 나머지 꽃밭 위를 구르고 있었다. 가디언은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케이크를 내려놓고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잘 먹겠습니다.” 라이는 손으로 케이크를 마구 집어먹기 시작했다. 잘 먹는 걸 보니 꽤나 맛있나 보다. 나도 좀 먹어볼까? 에스카네스는 얼음 칼로 케이크를 조각내 얼음 접시에 각자의 몫을 덜어 주었다. 난 교양 있게 포크로 그것들을 집어 먹었다. 하지만 라이는 마치 문명 이전의 원시인처럼 손으로 집어 먹는다.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가며. 혼자 삐쳐있던 가디언은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하는 수 없이 같이 먹기 시작했다. 으음, 꽤 맛있군. 먹을 만한데. 에스카네스는 입에 생크림을 가득 묻힌 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라이야 귀엽고, 가디언이야 미인이니 입에 생크림이 묻건, 진흙이 묻건 별 상관없지만 남자 입에 생크림이 묻은 건 심히 보고 있기 괴롭다. “제가 크로니스와 싸울 수 있을까요?” 에스카네스는 이죽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5클래스 주제에 9클래스를 상대하겠다고?” “누군 상대하고 싶어서 상대합니까?” “9클래스를 상대할 수 있는 건 9클래스뿐이야.” “하지만 전 9클래스가 아닌데요.” “그럼 9클래스가 돼야지.” “…….” 속성으로 9클래스 마스터 시켜 주는 과외 선생이라도 있나? 에스카네스는 입에서 케이크 파편을 현란하게 뱉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9클래스를 마스터했다고 해서 그를 이길 수는 없다. 다른 전투 능력도 키워야지.” “…….” 미치겠다. 마법 생각만 해도 미치겠는데 다른 전투 능력까지 키우라니. 이거 가능한 얘기긴 한 건가? “물론 네 능력으론 불가능한 일이야. 사실 처음부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 에스카네스는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먹던 케이크 조각을 내려놓고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 방법이라는 게 뭔가요?” “잊혀진 숲으로 가 봐라.” “예?” “잊혀진 엘프의 숲. 그곳으로 가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 여기 가면 저기로 가라 그러고, 저기로 가면 다시 다른 곳으로 가라 그러고. 이젠 잊혀진 엘프의 숲으로까지 가란다. 왠지 누군가가 나를 뺑뺑이 돌리는 느낌이다.(뺑뺑이 돌려서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겠냐? 니가 그 곳으로 안 가면 스토리 진행이 안 되는데) “그 곳에 뭐가 있나요?” “엘프.” “…….” 엘프의 숲에 엘프가 있지 그럼 드워프가 있냐? “카이네이드의 자식들이 있지.” “그린 드래곤의 자식이요?” “아무튼 가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식사가 끝났다. 방으로 돌아온 라이는 빵빵한 배를 쓰다듬으며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덜어온 케이크 조각을 자고 있는 라이코스의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친구의 몫까지 챙겨주는 착한 라이. 난 괜히 폼을 잡으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잊혀진 엘프의 숲. 크로니스의 영지인 적색 산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통행이 금지 되어있는 곳. 광범위한 마법장이 펼쳐져 있어 텔레포트도 불가능하다. 결국 크로니스의 영지를 통과해야한다는 건데…… 과연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해 보니 텔레포트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크로니스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면 당연 마법장도 불안정할 것이고, 누군가가 그 마법장을 중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 사이 텔레포트가 가능하다. “엘프의 숲이라…….” 내가 아는 엘프는 정확히 1.5명. 어떻게 이런 엽기적인 숫자가 나올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당히 대답하겠다. 라이(1) + 라이레얼(0.5 -주:하프엘프) = 1.5 이 얼마나 완벽한 공식이란 말인가? 문제는 내가 아는 엘프들이 모두 엘프와는 별 상관없어 보인다는 거지. 아, 갑자기 불안함이 나의 몸을 가득 엄습한다. * * * * * * * 1671년 11월 17일 지금 나는 또 다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출발! 어감은 정말 좋다. 비록 괜히 뺑뺑이 돌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지만. 나의 목적지는 잊혀진 엘프의 숲. 자의와는 관계없이 타의에 의해 그 곳으로 가야하는 나의 심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기쁘다. 그것도 굉장히. 너무도 행복해.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 듯 엘프는 전부 미남, 미녀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 작고 갸름한 얼굴. 이런 여자가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다스가 몰려있는 곳에 가는데 어떤 남자가 좋아하지 않겠나? 난 힐끔 라이를 보았다. 회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침을 흘리며 자는 라이를. “후우~.” 내 신세가 한심해서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저걸 엘프라고 데리고 다니며 그 동안 보모 짓이나 해왔다니. 이젠 그것도 끝이다. 이제부턴 늘씬한 미녀 엘프.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아름다운 엘프들과 만나는 것이다. 벌써 연락처 받아놓을 수첩까지 준비해 놓았다. 엘프~ 엘프~ 아름다운 미녀 엘프들~ 늘씬하고 예쁜 엘프들~ 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아. “아주 신이 났구만.” “신이 나다니요? 지금 제가 놀러가는 것도 아닌데 신 날 리가 있나요?” “히죽히죽 웃으며 그런 말 해봐야 별로 설득력 없어.” “…….” 너무 좋은 나머지 표정 관리가 제대로 안 되나 보다. “그래도 드워프 동굴보단 낫잖아요. 아무렴 난쟁이 똥자루 같은 드워프 보다야 늘씬하고 섹시한 엘프가…….” “그야 그렇지.” 에스카네스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그러자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며 팔찌 하나가 생겨났다. 그는 그것을 내 손목에 끼워주었다. 그러자 팔찌는 손목 크기에 맞게 알아서 줄어들었다. “이게 뭔가요?” “팔찌.” “…….” 누가 그걸 몰라서 묻냐? 내가 은근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에스카네스는 고개를 슬쩍 돌리며 부연 설명을 붙였다. “텔레포트 스펠이 적혀있는 팔찌다.” “이걸로 잊혀진 숲까지 한번에 가라는 건가요?”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잊혀진 숲까지 한번에 가는 것은 불가능 해. 크로니스의 마법장이 그것을 막고 있거든.” “그럼요?” “일단 적색 산맥 근처로 가 있어.” “그 다음은?” “내가 크로니스를 다른 곳으로 끌어낼 테니, 그 사이 그걸 이용해 잊혀진 숲으로 가라.” “가능한 얘긴가요?” 에스카네스는 이상하다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불가능한 얘기를 왜 하겠나?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 예~ 라고 대답하고 싶다. 백수 주제에. “준비해. 지금 당장 출발 해야 하니.” 아주 날 못 쫓아내서 안달이 나셨구만. 난 자고 있는 라이를 들쳐 업었다. “준비 끝났는데요.” 황당하다는 듯한 저 에스카네스의 표정. 에스카네스는 별 말 없이 손을 뻗었다. “잘 가라.” “예. 안녕히 계세요.” 이제쯤이면 발밑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반응 없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좀 뭐하지만 머리 위가 뜨거운 것 같다. 난 고개를 꺾어 보았다. 머리 위에서 마법진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번엔 마법진이 위에 그려져 있군. 휘이이익~ 몸이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치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듯 마법진이 나를 빨아들인다. 아! 그렇다고 내가 먼지라는 것은 절대 아니고. * * * * “우웅~ 라이는 더는 못 먹어요.” 뒤척뒤척~ 바위 위에서 정말 잘도 잔다. “라이야~” 난 라이의 몸을 흔들었다. 라이는 잠시 몸을 뒤척이더니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감았다. “일어나!” 감히 눈을 뜨고도 다시 자려하다니. 난 라이의 눈을 억지로 뜨게 하고 몸을 일으켜 주었다. 라이는 길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부비부비~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의태어가 나날이 화려해지는 것 같다. 굳이 이렇게 화려할 필요가 있나? 라이는 졸린 듯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앗! 여기는 어디에요?” “이제야 일어났구나. 여기는 바로…….” 여기가 어디지?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뭇잎 몇 장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앙상한 나무, 추수가 끝난 후의 황량한 논밭. 어느새 겨울로 접어들고 있구나. 어찌되었든 이 곳은 농경에 기반을 둔 마을이 틀림 없으렷다. “저 산은 뭐예요?” 라이는 앙증맞은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보기에도 아찔한 거봉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저녁노을과 어우러져 마치 핏빛처럼 보이는 저 곳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영지 적색 산맥. 누군가 그랬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온다고. 이 얘기가 지금 상황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결국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건가? “일어나라, 라이야. 해지기 전에 묵을 곳을 찾아야지.” 라이는 바위에서 내려와 원피스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 잠시 체조를 하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뒤적뒤적~ 라이는 한참을 뒤지고도 원하는 것을 못 찾았는지 표정이 표백제처럼 하얗게 질렸다. “왜 그러니?” “이코가 없어요!” “…….” 분명 말하지만 난 결코 라이코스를 그 곳에 두고 올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라이의 주머니 속에 있는 줄 알았는데. 뭐 잃어버렸으면 하는 수 없지. 하나 더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라이코스는 다른 곳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거야. 우리는 이만 우리 갈 길을 가도록 하자.” 라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흘러내린다. 주르륵 주르륵~ “우에엥! 라이는 이코 없으면 싫어요!” 그리고 어린 아이가 장난감 안 사주면 의례 하는 짓, 즉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이코를 두고 오면 어떡해요? 오빠가 책임져요.” “내가 그걸 어떻게 책임지니? 그리고 라이코스 관리는 니 관할이잖아.” “우에에엥! 이코야~!” 이걸 어쩐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서 라이코스를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 울어 라이야. 이미 없어진 라이코스를 어디 가서 찾겠니?” “우에에엥! 무조건 데려와요! 라이는 이코 없으면 못 살아요, 흑흑!” 미치겠네. 이걸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고. 파닥파닥~ 이게 무슨 소리? 저 멀리서 흰색 빛이 하늘을 가르며 뻗어 온다. 설마 저것은 라이코스? “얘들아, 같이 가!” 라이코스 맞구나. 라이코스는 순식간에 나의 앞에 와서 멈추었다. “헥헥! 간만에 날려니 힘들다!” 안 그래도 할 줄 아는 거 얼마 없는 주제에 날지도 못하면 어떡하니? “흑흑, 이코야!” 몇 분이나 헤어져 있었다고 그렇게 감동적으로 재회를 하는 거니? 뭐 이번엔 내 실수였으니 별로 할 말은 없다만. 이렇게 하여 라이는 울음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저 놈은 그 먼 거리를 그 짧은 시간에 날아왔다는 건가? 그래도 빨리 나는 재주 하나는 정말 탁월하다. 잠시 걸어 들어가니 논밭이 쫙 펼쳐져 있고 집들이 한 곳에 몰려 있다. 해는 어느새 적색 산맥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시골 마을이 의례 그러하듯 이 곳 역시 집집마다 불이 다 꺼져있어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잘 보이니, 라이야.” “그럭저럭 잘 보여요.” 하긴 엘프는 시력이 좋으니까.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 하나? 노숙하기는 싫은데. 결국 아무 문이나 두드려야 하나? 원래 시골 마을일 수록 인심이 좋은 법이다. 설마 문전박대 당하진 않겠지. 난 적당한 집 하나를 골라 문 앞에 섰다. 하룻밤 신세질 집을 고르는 데에도 요령이 있어야 한다. 괜히 멍청하게 단칸방 10인 가족 끼어 사는 곳의 문을 두드리면 욕만 먹고 쫓겨나기 십상이다. 지금 같은 경우는 반드시 적당히 잘 사는 집을 골라야 한다. 너무 잘 사는 집은 지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니까 쫓겨날 확률이 높거든. 쾅쾅쾅-! 그리고 문을 세게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모두 자고 있나 보다. 해가 떨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온 가족이 잠들다니. 난 더욱 세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기다리자 집 안에서 불이 켜지고 문이 열렸다. 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사람은 중년이라고 하기엔 조금 젊은 듯한 남자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다 깬 게 짜증났는지 약간은 퉁명스런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우리가 대단한 사람들일까 봐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나가는 과객이 하룻밤 묶어 갈 곳을 찾고 있습니다. 댁에게 조금의 인정이라도 있다면 부디 이 가련한 과객을 위해 숙식을 제공해 주십시오. 그럼 천년만년, 자자손손 복 받으며 행복하게 사실 수 있을 겁니다.” 남자는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고 옆에 있는 라이를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천년만년, 자자손손 복 받을 수 있을 지, 없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들어오시오.” 역시 시골답게 인심이 좋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난 라이를 앞 세워 집 앞으로 들어갔다. 시골집 치고는 꽤나 잘 사는 집이었다. 방도 몇 개 있고, 깨끗하기도 하고. “누구세요?” 안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그렇게 물었다. 난 허리를 숙이며 친절히 대답했다. “전 지나가는 과객입니다. 오늘 하룻밤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래. 밥은 먹었는가?” 이런 상황에선 예의상 ‘예, 먹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고 표정은 ‘저 지금 배고파 죽을 것 같아요’ 라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체면도 차리고, 실리도 챙기고. 일석이조라 할 수 있지. “예. 안 먹었어요. 라이는 너무너무 배고파요.” 이런 주책없는! 난 집주인의 날카로운 눈빛을 온 몸으로 받게 되자 그저 어색한 웃음만을 보여 주었다. 집주인은 표정은 그렇게 지었지만 별로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안주인에게 밥상을 차리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니까 말이야. 하지만 안주인은 굉장히 기분 나빠했다. 경멸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지면 거지답게 빌어먹을 것이지 왜 남의 집에 와서 구걸이야’ 등등의 말을 말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맹세하는데 크리마스날 저 아줌마가 구세군에 한 푼이라도 넣는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이 집 가족 구성원은 8인. 일단 가장과 그의 부인, 그리고 치매 걸린 시어머니와 자식 다섯. 셋은 남자고 둘은 여자다. 대부분 일 때문에 많이 피곤한지 잠깐 나와서 얼굴만 보고 들어갔지만 열 대, 여섯 정도 돼 보이는 여자는 괜히 내 앞에서 알짱거린다. 얼굴 가득 주근깨가 피어있는 모습이 그리 예쁘진 않지만 그래도 시골 처녀다운 활달함이 있었다. “도시에서 오셨나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여행자세요?”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혹시 수도에는 가보셨어요?” “아까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죠.” 순간, 여자는 나를 굉장히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집주인은 짜증을 내며 그녀에게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하였다. 하룻밤 묵어가는 여행자 때문에 딸이 바람나는 것을 막으려는 눈치였다. 원래 저 나이 또래 여자들이 말도 안 돼는 꿈을 꾸는 경우가 많으니. 예를 들면 백마 탄 왕자라던가, 아니면 자신이 원래 어느 나라의 높은 공주인데 갑자기 그 나라가 망해…… 생각을 하는 사이 식사가 나왔다. 식사는 한 마디로 개밥이었다! 며칠 전에 먹다 남은 것 같은 딱딱한 빵에 멀건 죽. 지금은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오기 직전. 결코 식량이 부족할 시기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개밥을 내왔다는 것은 안주인의 성격이 개 같다는 거겠지. 라이는 앞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어차피 신세 지는 처지에 심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조용히 사양하려 했다. 라이는 별 말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품에 안은 라이코스의 머리만을 쓰다듬었다. 집주인도 음식을 보고 놀란 듯 했다. 이내 그는 무서운 눈으로 안주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안주인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음식이 이 것 밖에 없어?” “예. 남은 음식이 그 것 밖에 없네요.” “저녁에 먹고 남은 빵들 있잖아.” “그건 내일 아침에 먹어야 해요.” “내일 아침엔 다시 구우면 되잖아. 빨리 그 것들 내 와. 손님들에게 이런 딱딱한 빵을 내오다니,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그럴 수 없어요.” “뭐야, 이 여편네가!” “왜 생판 모르는 남들에게 공짜로 음식을 줘요?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당신이 그 모양이니까 우리 집이 이 모양, 이 꼴로 밖에 못 사는 거라구요!” “이 여편네가 진짜!” 언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부부는 얼굴을 붉힌 채 서로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난 라이의 귀에 속삭였다.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라이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떠나갈 듯 외쳐대는 큰 소리에 깨어난 자식들은 깜짝 놀라 부부를 뜯어 말리기 시작했다.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금술 좋던 부부사이에 금이 갔으니 책임을 지고 이 자리에서 물러날까 합니다. 그럼 여러분, 좋은 하루 되십시오. 저는 이만.” “아니, 가긴 어딜 가나? 이 밤중에 어디서 잔다고? 잔말 말고 여기서 묵게.” “아니, 간다는 인간들을 왜 잡아요? 우리 집이 시궁창이에요? 왜 그렇게 거지들을 못 재워서 안달이에요?” 솔직히 저 아줌마 말 듣고 있기 정말 열 받는다. 만약 남자가 그랬으면 진짜 살인났다. 난 내가 거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낡은 -실제로 낡았다는 것은 아니고 여기저기 때가 많이 타 그렇게 보이는- 흰 망토를 벗어 안에 입고 있는 깨끗한 옷들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라이의 원피스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주고 머리도 깨끗이 만져 주었다. 어때? 이래도 우리가 거지로 보이냐? 순간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난 내가 너무 잘 생겨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허리에 차고 있는 칼 때문인 것 같다. 과객으로 가장한 살인마가 숙소를 핑계로 집에 들어온다. 그리고 여자는 강간하고, 남자는 모두 죽여 버린다. 다음 날 옆집 아줌마가 곗돈 걷으러 와서 본 것은 일가족이 몰살되어 있는 잔인한 광경. 설마 이런 것들을 상상하고 있는 건가? 난 결코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담아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 순간, 맏아들로 보이는 20대 후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영주 일가를 박살났다는 그 마법사님이신가요?” “예?” 영주 일가라니? 혹시 그 때의 일을 말하는 건가? “결혼식장에서 영주와 영주의 아들을…….” “예. 뭐 제가 맞긴 한데, 왜 그러시는 지요?” 싸늘한 침묵이 감돈다. 내가 뭘 잘못 말 했나? “아하하! 마법사님이셨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실례를.”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제가 감히 마법사님을 몰라 뵈고.” “괜찮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마법사님.” “예.” 이들이 내가 마법사인 줄 알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흰색 망토에 파란색 칼. 망토야 그렇다 치더라도 파란색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냐? 아무튼 난 그 동안 나라는 존재가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생각은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마법사란 즐거운 직업. 마법사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든다. 이들은 지금 나를 존경과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마법사를 무슨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사람을 개구리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 나와 라이를 거지 취급했던 안주인은 행여나 자신에게 보복을 하지 않을까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을 어찌 아냐고? 그야 식탁 위의 메뉴로 알 수 있지. 아깐 굳은 빵과 멀건 죽만 내왔는데 지금은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과 야채와 닭고기를 듬뿍 넣어 끓인 수프가 나왔다. 게다가 오리 한 마리가 통째로 상에 올려졌다. -소 잡겠다는 걸 내가 간신히 뜯어 말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난 것은 라이 패밀리였다. 라이는 라이코스와 함께 정신없이 상 위의 음식들을 집어 먹었다. 집주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매가 오리 다리를 입에 물고 있는 엽기적인 모습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뭘 봐? 영물이 밥 먹는 거 처음 봐?” 당연 처음 보겠지. “마, 말을 한다!” 상당히 놀라며 공포에 질렸다.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그들에게 다시 한번 주지시켜 주자 그들은 ‘아! 마법사니까 저런 엽기적인 생물도 데리고 다니는 거구나’ 라고 인식을 하였다. 식사를 하면서 집주인과 얘기를 해보니 이 곳은 내가 처음에 들렀던 마을, 즉 라나를 만났던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약 10km- 곳에 다른 마을이었다. 그래서 내가 영주 일가를 개박살 낸 소문을 들을 수 있었던 거고. “요 근래 적색 산맥에서 이상한 일 같은 건 없었나요?” 지나가는 말로 물었는데 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난 이 와중에도 꿋꿋이 먹고 있는 라이 패밀리에게 용기를 얻어 재차 물었다. 그러자 집주인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게 좀 이상하긴 합니다. 이런 말씀드리긴 뭐 하지만 마치 산 전체가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아요.” “좀 구체적으로.” “예. 그러니까 그게…….” 산맥 속의 몬스터들이 이상하게 움직인다. 마을 근처로 내려와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가 하면, 어떤 때는 그냥 마을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사라진다. 아무 일도 없는 수 만 마리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동물들의 행동도 이상하다. 이상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멀쩡한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며 천둥, 번개가 치질 않나, 그러다가 눈이 내리고 햇볕이 내리쬔다. 간단히 말해 적색 산맥 전체가 미쳤다. “그렇군요.” 얘기를 다 들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색 산맥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이유는 크로니스 때문일 것이다. 크로니스의 불안한 정신상태가 주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겠지. “별 피해는 없지만 그래도 하루하루가 불안합니다.” 집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마치 ‘넌 마법사니까 니가 어떻게 좀 해봐’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 사람들 마법사를 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식사를 다 마친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집주인 내외의 배려로 안방에서 자게 되었다. 조금 미안하긴 하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남의 안방을 장악하다니. 하지만 내가 호의는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니 뭐 어쩔 수 없지. 잠이 오지 않는다. 라이는 나를 꼭 껴안은 채 자고 있었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1671년 11월 18일 “베풀어 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마법사님. 저희야 말로 마법사님을 보시게 되어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굽실굽실. 내 평생 신세지고도 이렇게 당당한 경우는 정말 처음이다. 난 어깨를 쫙 펴고 그들을 둘러보았다. 집주인을 비롯한 일가족의 눈빛은 ‘이렇게 잘 모셨는데 뭐라도 해주시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요?’ 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라도 해달라고? 까짓것 해주마. “제가 특별히 해드릴 건 없고 이 집에 축복을 걸어드리겠습니다.” 내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 빛은 한 순간에 부서져 집 전체를 감싸 안고 내렸다. “오오!” 경이에 찬 저들의 표정. “그럼 전 이만.”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살펴 가십시오.” 직접 마법을 본 그들은 이제 아예 코를 땅에 박으며 절을 하고 있었다. 난 라이를 안고 재빨리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잠시 걷다보니 라이가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며 물었다. “축복이라니요? 그거 그냥 빛 마법 아니었어요?” 그래. 이런 걸 보고 사기 쳤다고 하는 거지. “그냥 빛 마법이 맞긴 해. 하지만 저들의 생각은 다를 걸. 이제 저들은 자신의 집이 축복에 걸려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을 거야. 그럼 당연 기분이 좋아질 테고, 기분이 좋아지면 화목해 질 테고, 남들을 돕기도 할 테고, 그러다보면 정말로 복 받을 테고. 어쨌든 축복 맞잖아?” 갸웃갸웃 아직 이해를 못하셨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어린 아이면 어린 아이답게 라이코스랑 소꿉놀이나 하렴.” 라이코스는 이제 라이의 머리 위와 주머니 속에 둥지를 튼 듯 하다. 이젠 나도 도저히 라이코스 없는 라이를 상상할 수조차 없구나. 둘은 영원히 한 세트. 그나저나 이제 어찌해야 하나? 난 고개를 꺾어 암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적색 산맥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니 크로니스의 마법장이 걷히지 않았음이 틀림없었다. 이러면 약속이 틀린데. 에스카네스는 분명 자신이 크로니스를 끌어내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어찌된 일이지?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맞아. 나도 그게 궁금했었어.” 라이와 라이코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난 말을 빙빙 돌릴 필요 없이 당당히 진실을 말했다. “지금 당장은 잊혀진 엘프의 숲으로 간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우기 위해서…….” “안녕히 계세요, 오빠. 그 동안 만나서 즐거웠어요. 그럼 전 이만.” “잘 있어. 우리 인연은 여기까진 가 봐.” 획~ 뒤로 돌아 아장아장 걸어가는 라이.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간다. 난 손을 뻗어 라이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왜 이러세요? 라이는 오래 살고 싶단 말이에요.” 700년 넘게 살았으면 오래 산거지. 더 이상 뭘 바라냐? “라이야,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지 않니?” “흑흑, 라이는 평화주의자에요. 라이는 모두가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원해요.” “…….” “나도 평화주의매야!” “…….” 이 것들이 단체로 반란을 일으키다니! “이것들아! 지금 내가 드래곤과 싸워야하는데 니들이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치사하게 도망을 가려 해? 니들이 그러고도 나의 동료냐?” 고개를 획 돌리는 라이 패밀리. “우리가 언제 동료였나?” 휘파람을 불며 이렇게 말하는 라이코스. 옆에 있는 라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비장의 수단을 꺼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겠군. 난 주머니를 뒤적거려 문서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 알아?” 도리도리. 난 문서를 쫙 펴서 라이에게 건넸다. 라이는 그것을 거꾸로 들고 보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네가 전에 사기 친 내 돈 2억에 대한 금융 관련 계약 문서다. 거기 써진 거 잘 보이지? 라이는 즉시 히로에게 사기 친 2억을 갚아야 한다. 그 밑에 하루 이자 1할이라고 써진 거 보이지?” “이, 이건 말도 안 돼요!” “말도 안 되긴! 내가 된다면 돼는 거야! 맨 마지막에 써진 글 보이지? 라이는 돈을 갚지 못할 경우 기꺼이 신체를 포기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신체 포기 각서라는 거다. 이제 넌 내 것이나 다름없어.” “우에에엥!” “지금 울어봐야 어쩌겠냐? 원래 사채업 하는 사람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법. 지금 당장 돈을 갚던가, 적힌 데로 신체를 포기하던가!” “으아아앙!” 난 울고 있는 라이를 업고 걷기 시작했다.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 라이야. 한 동안 어르고 달래니 그제야 라이는 훌쩍거리며 울음을 그쳤다. “걱정하지 마. 이 오빠가 너보고 같이 싸우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왜 드래곤과 싸우려는 거예요?” “누군 싸우고 싶어서 싸우냐? 나도 평화주의자지만 시대의 흐름이 그것을 원하니 하는 수 없이 싸우는 거야.” 아, 정말 멋진 말이다. 시대의 흐름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100년 후쯤이면 이 말이 역사책에 적혀있지 않을까? 우리는 턱을 괴고 앉아 적색 산맥의 암울한 기운이 걷히길 기다렸다. 하지만 턱도 없는 일이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불안했어. “안 되겠다, 라이야. 그냥 산을 타자.” 라이는 땅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이, 다리 아파요.” 못된 것 같으니라고. “빨리 못 일어나!?” 난 근처 농가에서 돈을 지불하고 건식량을 조금 사들였다. 그리고 적색 산맥으로 향했다. 라이 패밀리는 투덜거리면서도 잘 따라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엘프니까 체력 하나는 정말 좋다. 적색 산맥 진입로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난 알 수 있었다. 이 산이 완전히 맛이 갔구나! 산의 분위기는 정말 미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라이는 적응이 잘 안 되는지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너무 무서워요.” 동감이다. 누가 보더라도 활엽수와 침엽수가 같이 피어있는 모습을 보면 무서울 수밖에 없겠지. 우리는 길도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며 힘들게 걸어갔다. 라이는 길이 없는 것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했지만 인간인 나는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네가 앞장서라.” 레인저는 아니지만 엘프라면 최소한 나보단 낫겠지. 나의 예상대로 라이는 길을 잘 찾아 나를 인도하였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땀이 비 오듯 흘러 온 몸을 적셨다. 라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니?” “배고파요.” 그럴 만도 하지. 난 배낭에서 건식량을 꺼내 라이에게 주었다. 라이는 그것을 받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라이는 이런 거 안 먹어요.” “……그럼 뭐 먹고 싶니?” “라이는 맛있는 거 아니면 안 먹어요.” “…….” 그래. 너 원하는 데로 다 해주마.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깡충깡충~ 앗, 이것은 토끼가 뛰는 소리가 아닌가? “매직 미사일!” 푸욱~ 정확히 꽂혔군. 난 다가가서 죽은 토끼를 집어 들었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이 토끼는 정말 맛있게 생겼다. 난 토끼 귀를 잡고 라이 앞에서 흔들었다. “어때? 맛있게 생겼지?” “너무 해요! 귀여운 토끼를 어떻게 잔인하게 죽일 수가 있어요? 오빤 인간도 아니에요! 우에에엥!” “…….” 깜빡 잊고 있었다. 라이는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였지. 냠냠~ “맛있니, 라이야?” “예. 너무너무 맛있어요.” 귀여운 토끼 어쩌구하면서 울며불며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너무도 맛있게 먹고 있다. “입이나 닦고 좀 천천히 먹으렴.” 배시시 웃는 라이.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라이코스도 부리로 열심히 토끼를 쪼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매는 토끼 사냥도 할 수 있지 않나?” “물론 할 수 있지. 하지만 요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다음엔 라이코스를 이용해서 사냥을 한번 해봐야겠다. 생각해 봐라. 얼마나 멋있겠냐? 팔위에 흰색 매를 올려놓고 사냥감이 나타나면 손을 뻗는다. ‘잡아와, 라이코스!’ 그럼 라이코스가 날개를 쫙 펴고 날아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냥감을 죽인다. 난 사냥감의 간을 빼먹는 라이코스에게 다가 이렇게 말한다. ‘잘 했어, 라이코스.’ 정말 예술적인 광경이다. 토끼 한 마리를 셋이어 깨끗이 발라 먹고 나자, 라이는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빨며 일어섰다. 난 꺼지지 않은 불 위로 모래를 덮었다. 산 속에서 취사 행위를 했을 경우, 꼭 이렇게 뒤처리를 잘 해야 한다. 산불 방지를 위해서. “어!” 난 이상한 느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별로 춥지도 않은데 이렇게 눈이 내린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빨리 출발하자.” 산으로 올라 갈수록 마법장이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라이도 그것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자꾸 기분이 이상해요.” 라이는 두려운 듯 했다. 난 라이를 계속 달래며 산을 올라갔다. 1671년 11월 19일 노숙을 하고 난 다음 날은 허리가 특히 쑤신다. 우두둑~ 내 허리도 이제 갈 때까지 갔구나. 젊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나이를 좀 먹으니 몸이 말이 아니다. 난 자고 있는 라이를 등에 업었다. 크로니스의 레어가 멀지 않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그리드의 동굴도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좀 돌아서 가는 것이 되겠지만 그 곳으로 향했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그 곳. 어쩌면 그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할 텐데. 실컷 걷던 중 앞에서 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한 무리의 몬스터였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전투태세를 취하였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이 몬스터들은 우리를 그냥 지나쳤다. 적색 산맥의 몬스터들은 인간을 보는 즉시 죽여 버리도록 컨트롤 받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몬스터들도 미쳤다는 얘기가 된다. 열심히 걸은 덕인지 해가 지기 전에 이그리드의 동굴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부턴 길이 없으니 날아서 가야 한다. 난 라이를 안아 들고 비행 주문을 썼다. 벽 앞에 선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있었다. 난 감개가 무량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라이는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만 갸웃 거렸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라이는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라이도 눈앞의 결계를 눈치 챈 듯 했다. 9클래스 마법사가 펼쳐 둔 강력한 결계를. 7클래스 마스터 마법사니 당연한 건가? 난 손을 뻗어 결계 위에 놓았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 결계는 해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통과는 가능하지. “들어가자.” 난 라이를 안아 들고 결계 안으로 들어섰다. 벽이 내 몸을 통과하는가 싶더니 눈앞에는 어둠이 펼쳐졌다. “라이트!” 라이는 몇 개의 빛의 구를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여기가 어디에요?” “던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 “던전이요? 누가 판 건데요?” “유일무이한 9클래스 인간 마도사 아이언스 이그리드.” 라이의 회색 눈동자가 놀라움의 빛으로 물들었다. 난 탄식의 눈길로 동굴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라이의 과거 - 01 -------------------------------------------------------------------------------- Ip address : 218.49.121.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9클래스를 마스터한 인간 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리드. 한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 중의 천재. 그리고 나에게 마법을 전수해준 인간. 9클래스가 파 놓은 던전을 조사한다는 것은 마법사에게 있어선 다시 없는 영광이었다. 그 증거로 라이는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여기 어디에 마법서가 있는지 아세요?” 일반인이 던전에 들어와서 찾는 것은 보물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지식이다. 물론 나는 둘 다 챙긴다. 마법서도 나중에 팔아먹을 수가 있으니. “라이야, 마법서를 원하니?” “예.” 라이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악, 저 학구열에 불타는 눈빛이 나의 심장을 찌르는 구나. 이런 어린 아이가 이렇게 공부에 목을 매는데, 공부하기 싫다고 깽판 친 나의 과거가 부끄럽다. “그럼 들어가자.” “예.” 라이는 총총 걸음으로 앞장섰다. 잠시 걸어가던 라이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갑자기 벽에 붙더니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갑자기 왠 발작? 설마 간질병? 난 병이 옮을까봐 두려워 라이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니, 라이야?” 라이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입에 물고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 이상해요.” 난 ‘니가 더 이상해’ 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침착하게 물었다. “뭐가 이상한데?” “창이 안 튀어나와요.” “…….” 그렇다. 이런 것이 바로 고정 관념이라는 것이다. 던전이란 보통 마법사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파거나,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파는 것이 보통이다. 던전이 던전다워 질 수 있는 첫째 조건이라면 당연 보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얻는 것이 있어야 들어갈 맛이 나지. 하지만 보물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느새 던전이라면 무조건 위험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 심지어는 위험하지 않으면 던전이 아니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을 정도니, 말 다 했다고 할 수 있지. 그나저나 엘프인 라이까지 그런 고정 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니. 얘가 인간 사회에 너무 오래 살더니만 너무 인간틱 해진 것 같다. “라이야, 이 곳은 이그리드가 노후를 마법 실험이나하며 안락하게 보내자는 취지하에 설립된 곳이야. 그렇기에 입구의 결계를 빼면 위험한 것들은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하자 라이는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나도 보모 역할에 꽤나 적응했다. “가자.” 내가 한 동안 머물렀던 곳이지만 오랫동안 들르지 않았었기에 동굴의 구조가 가물가물했다. 난 라이의 작은 손을 붙잡고 활발하게 걸었다. 우리가 처음 찾아 들어간 곳은 식료품 창고였다. 라이는 안에 가득 차있는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우와! 굉장해요!” 여길 봐도 먹을 것, 저길 봐도 먹을 것. 사방천지가 먹을 것이다. 라이는 뭘 먼저 먹어야 할지 고민되는지 눈을 반짝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난 황급히 라이의 안아 들고 그곳을 나왔다. “왜 그래요?” 안 그래도 시간 없어 죽겠는데 니가 이 곳에서 죽치고 앉아 열심히 먹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라고 말 해주고 싶지만 안 들을 것이 뻔하다. “으응. 저 곳에 있는 음식들에는 전부 독이 들어있어.” “괜찮아요. 해독 마법으로 독을 제거하고 먹으면 되요.” “…….” 어째서 이런 순간에만 머리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는 거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말이 안 되면 힘이다. 난 안 가겠다는 라이를 질질 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다음에 우리가 찾아들어간 곳은 서재였다. 말이 좋아서 서재였지 규모는 거의 웬만한 도서관 크기 정도였고, 천장 곳곳에 형광등 정도의 밝기를 지는 영원의 빛이 떠 있어 내부는 환한 편이었다. “우와! 굉장해요!” 예의 그 감탄사를 내지른 라이는 발발거리며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난 책의 분류 형태를 살펴 보았다. 이 정도 규모의 책을 아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꽂아두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내 생각은 맞아 들었다. 책들은 일정 규칙을 가지고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오빠!” 나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라이의 목소리. 그래, 라이야. 오빠가 간다. 난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지나 책장에 마법이라고 써진 곳에서 라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는 까치 발을 들고 손을 뻗는 등, 굉장히 안쓰러운 자세로 낑낑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나의 물음에 라이는 울상을 지으며 답했다. “팔이 안 닿아요.” “…….” 너의 그 작은 키와 짧은 팔로 닿기를 바랬다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대체 왜 이런 상황에선 마법 쓸 생각을 못하는 거지? 얘 7클래스 마스터 맞아? 안타깝게도 라이가 보고 싶어하는 책은 내 손에도 안 닿는 곳에 있었다. 마법을 쓸까 생각하다가 난 근처에 사다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정석데로 책을 뽑아 라이에게 건네 주었다. 책의 제목은 <마법학 입문>, 저자는 <아이언스 이그리드>. 라이는 기뻐하며 책을 펴 보았다. 하지만 이내 울상을 지으며 책을 덮었다. “재미 없니?” “아이언스어로 써져 있어 못 읽겠어요.” 주르륵 주르륵~ 아니, 뭐 그런 일로 눈물까지 흘리고 그러니? 난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라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재를 조사하는데에 열중했다. 내가 서재를 조사한다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슨 중요한 책이라도 찾냐고 묻는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난 책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재에 집착하는 가? 이 곳이 도서관 같이 생기긴 했지만 엄연한 개인 서재다. 개인 서재의 용도는 언제든 필요한 책을 골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장소임과 동시에 개인적인 사무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공간이다. 즉,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죽기 전에 무언가를 남겨 두었다면 이 곳에 남겨 두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얘기다. 아니면 말구. “앗! 오빠, 이 곳에 비밀 통로가 있어요!” 비밀 통로? 역시 나의 예상이 맞아 들었다. 난 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짐작되는 곳으로 달려갔다. 수 많은 책장들을 지나 도착한 곳에는 손을 흔들고 있는 라이와 그 앞에 나무로 되어진 문이 나를 반겼다. “그런데 비밀 통로는 어딨니?” “여기요.” 라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나무문이었다. 순간 나는 허탈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찌 이게 비밀 통로가 될 수 있니? 이런 건 그냥 방이라고 불러야지.” 그래도 이런 걸 찾아 낸 게 정말 기특하다. 귀여운 것.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라이는 그것이 좋은지 몸을 잔뜩 움츠리며 베시시 웃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보모 일을 즐기는 것은 아닐까? 만약 라이가 정말로 흉측하게 생긴데다가 말도 안 듣는 나쁜 아이였다면, 적당한 곳에 버리고 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는 귀엽게 생긴데다 요즘은 말도 잘 듣는다. 게다가 데리고 다니면 지금처럼 가끔 도움이 되기도 하고. 이런 애를 키우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그냥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한다고 생각하자. 난 조심스럽게 나무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거대한 창이 튀어 나와 내 가슴을 푹 찌르고, 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라이가 그 옆에 우에에엥~ 우는 일 따위는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방이에요.” “나도 알아.” 안은 10평 정도 되어보이는 방이었다.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책상과 의자, 맞은 편에 있는 난로, 그리고 정면에 있는 침대. 마치 원룸 같다. 아마도 이 곳은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평소 생활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산뜻해서 마음에 든다. 라이는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가 폴짝 침대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치마가 말려 올라는 것에 아랑 곳하지 않고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다. 그 때문에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던 라이코스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속옷 보인다, 라이야. 난 라이 패밀리에게 신경을 끄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일반 책상을 두 개 정도 붙여 놓은 정도로 커다란 책상 위에는 책과 종이가 널려 있었다. 난 성심 성의껏 그 것들 뒤적거렸다. 대부분 마법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마법에 전념을 하다니. 과연 대단한 마법사다. 일말의 존경심이 자라난다. 한 분야에 최선을 다한 그대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그 이름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 보통 일반적인 소설이라면 이쯤에서 일기장 하나가 툭 튀어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일기장에는 그 동안 내가 의문을 품고 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나한테 설명해 주는 것처럼 위장하여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등장 인물부터 사건 진행까지 무엇하나 일반적인 것과는 관련 없는 이 소설은 역시 일반적인 소설의 패턴을 따라가지 않고 있었다. “자료가 없어…… 자료가…….” “뭐 찾으시는 데요?” 알면 니가 찾아 줄 거니? “여긴 별 볼 일 없는 것 같다. 그만 나가자, 라이야.” “우웅, 라이는 졸려요.” 뒹굴뒹굴~ 라이는 일어나기 싫다는 듯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그리고 누에가 고치를 만들 듯 온몸에 이불을 돌돌 감았다. “당장 나와!” “싫어요!” 난 이불 속에 있는 라이를 꺼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라이는 막무가내로 이불 속에서 버텼다. “라이는 나가기 싫어요. 라이는 푹신한 침대 위에서 자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과 같이 바쁜 시국에 그런 투정을 부리면 어떡하니? 빨리 일어나!” “우에에엥! 싫어요!” “헥헥~ 조그만게 힘도 세네.” 라이는 끝까지 이불을 놓지 않았다. 난 하는 수 없이 라이를 이불에서 꺼내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라이를 이대로 재울거냐고 물어본다면 당연 아니라도 답하겠다. 난 이불 채 라이를 들쳐 업었다. “으아앙! 이러지 마세요. 이러면 안 돼요!” 누가 들으면 내가 이 어린 아이에게 굉장히 낯뜨거운 행위를 강제로 하려는 줄 알겠다. 라이가 하도 버둥거리자 나도 더 이상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난 라이를 침대 위에 도로 내려 놓았다. “그래, 자라. 실컷 자라.” 그제야 라이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난 혼자라도 돌아다녀 볼까, 생각하다가 몸이 좀 피곤한 것 같아 그냥 쉬기로 했다. 난 발로 라이를 한 쪽으로 밀어내고 누웠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이 산더미 같았지만 당장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괜히 머리만 아프기 때문이다. 나도 이젠 라이처럼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리. 물론 그 전에 일이 전부 해결 되어야 하겠지만. “루시아…… 보고 싶다…….” 내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리움과 사랑은 다른 감정인가? 그녀의 진심은 어떤걸까? 잠에서 깨니 라이가 나를 꼭 끌어 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원래 정신 연령이 낮은 아이일 수록 손에 무언가를 쥐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평소 라이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라이코스를 꼭 끌어 안고 잔다. 내가 옆에 있을 경우엔 나를 꼭 끌어 안고 자고. 귀여운 것.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머리를 쓰다듬음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라이일까, 나일까? 객관적인 수치로 비교했을 때 누가 더 행복할까? “우웅, 오빠, 일어 났어요?” 라이는 기척을 느꼈는지 통통하고 작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비볐다. “이제 그만 일어나렴.” 난 이불을 걷고 라이를 일으켰다. 라이는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듯 멍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라이코스는 어딨니?” “주머니에요.” “…….” 사실 내가 굉장히 이해가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이 것이다. 라이는 잘 때 굉장히 뒹굴거리는 편이다. 그러면 주머니에 들어있는 라이코스는 자는 중에 압사 당해야 정상 아닌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설정이다. 설마 라이코스는 영물이어서 육질의 탄력이 좋아 충격을 받으면 고무공처럼 짜부라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는 그런 어이 없는 설정은 아니겠지? 난 라이를 업고 방을 나섰다. 세수를 해야 돼. 물도 마시고 싶어. 물을 찾아야 해. 난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동굴을 걸어갔다. 잠시 걷자 길이 끝나는가 싶더니 한 순간에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나의 머리도 그렇게 노화한 것은 아닌가 보다. 웅덩이라기 보단 거대한 연못에 가까운 그 곳에는 누군가가 빛의 구를 띄워 놓아 수면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반짝~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의태어일 뿐이다. 아무튼 아름다웠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것을 보는 순간 ‘헉~’ 하고 놀라, 입을 ‘쩍~’ 벌리고, ‘픽~’ 쓰러질지도 모르겠지만 모두가 잘 알다시피 내가 워낙 감수성과는 인연을 두지 않는 인간이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라이야, 내려와서 세수하렴.” 라이는 대답이 없었다. 뻔하다. 다시 자고 있겠지. 난 라이를 연못 속에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며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그리고 친히 라이의 얼굴을 씻겨 주었다. “앗! 차거!”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라이는 깜짝 놀라며 뒤로 넘어졌다. 난 라이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얼굴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겨 주었다. 그리고 나도 씻었다. “여기는 어디에요?” “여기는 연못이야.” 라이는 반짝이는 연못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뗄줄 몰랐다. 이 아름다운 연못이 라이의 순수한 마음을 더욱 순수하게 정화시켜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앗! 저 쪽에 화장실이! 하지만 일을 보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안 그래도 수분 섭취량이 적은데 빼낼 것이 뭐가 있다고. 난 두 손으로 연못에 물을 떠서 몇 모금 마신 다음, 한쪽에 있는 무덤으로 걸어갔다. 라이는 나의 뒤를 따라왔다. “이건 뭐에요?” “유일무이한 9클래스 인간 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무덤이란다.” 벽에 써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클래스9 마스터의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드리→이그리드) 150년의 (짧은→긴) 생을 마감하고 이 곳에 잠들다. -대마법사 아이언스 히로(박영웅)-> 아! 이 글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당시의 일이 주마등처럼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다시 보니 밑에 뭔가가 써져 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 이젠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길 바랄께. -너의 영원한 친구 크로니스-> “크로니스!” 그렇다는 건 크로니스도 여기 왔었다는 얘기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친구이자 애인이 죽었다는데 그 가까운 거리에서 조문 한번 안 왔다는 건 말이 안 되니. “그런데 어째서…….” 혹시나 이 것이 중요한 단서가 될 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고민에 퐁당 빠져 보았다. 일단 글의 내용을 분석해 보자. <나의 사랑하는 친구> 이 대목은 당연 둘의 관계를 암시적이 아닌 직접적으로 나타내 준다. 크로니스는 이그리드를 사랑했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유격으로 쓰이고 있는 ‘나의’ 라는 단어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뜨고 있다. ‘나의’가 ‘사랑하는 친구’ 앞에 붙어 ‘나’ 라는 선행 명사가 ‘사랑하는 친구’ 라는 후행 명사구를 소유하게 된다. ‘사랑하는 친구’ 가 이그리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때 크로니스는 이그리드를 자신의 소유한 것으로 나타냄으로써 그 심정을 드러내 보인다 할 수 있다. “이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저요!” 난 라이의 머리를 쥐어 박고 다음 구절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젠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길 바랄께> 여기서 지칭하는 ‘그녀’는 당연 루미아드 공주일 것이다. 이젠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길 바란다. 해석하자면 저승에서 둘이 잘 먹고 잘 살라는 얘기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간단한 얘길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목하는 구절은 ‘바랄께’. 바로 이 구절이다. 바란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얘기다. 정말로 크로니스가 그 것을 희망했을까? 아니면, 그냥 예의상 한번 해본 소릴까? 그것도 아니면, 반어법? 해석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너의 영원한 친구 크로니스> 이 대목이 또 심상치 않다. 언뜻보면 그냥 쓴 사람 이름을 남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일반인들의 생각이고 나 같은 범인이 보기엔 뭔가 있어 보인다. 아까도 말했 듯이 ‘의’ 는 선행 명사에 후행 명사가 소속된다. 다시 말하자면 선행 명사가 후행 명사를 포섭한다.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면 두 체언이 연접하여 한정사와 피한정사의 관계를 구성한다 말하겠다. 이해하지 못했으면 그냥 넘어가라. 사실 별로 중요한 얘기 아니다.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너’ 즉 이그리드는 ‘영원한 친구 크로니스’를 포섭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크로니스는 이그리드 것이라는 얘기다. 위의 문장에서 또 주목해서 봐야할 대목이 ‘영원한 친구’ 라는 대목이다. 영원. 한자로는 永遠. 영어로는 Forever. 아까 문장에서 나온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길……’에서의 ‘영원’과 지금의 ‘영원’은 분명히 큰 차이점이 있다. 물론 의미는 동일하다. 아까의 ‘영원’은 둘 다 죽었기 때문에 저승에서 둘이 지지고 볶고 잘 살라는 말을 수식하고 있다. 이럴 경우엔 ‘영원’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왜냐? 죽은 상태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 상태에서 더 이상 변화는 일어날 수 없으므로. 하지만 지금의 ‘영원’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쓰인 거다. 먼 미래에서 바라본다면 ‘영원’이란 찰나의 순간보다도 짧은 것. 어찌 영원을 남발한단 말인가? 이는 크로니스의 정신 상태가 불안하다는 것을 뜻한다.(사실 이런 억지스런 해석을 내리는 내 정신 상태가 더욱 불안해 보이긴 한다) 이상이 나의 해석이다. 솔직히 그냥 별 생각 없이 쓴 내용을 괜히 확대하고 분해해 해석한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쓸데 없는 짓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하고 싶다. 사실 지금 굉장히 쓸데 없는 짓을 한 것 같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에 쓸데 없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다. “제 생각엔 굉장히 쓸데 없는 짓이었던 것 같아요.” 난 라이의 귀를 쭈욱~ 잡아 당겼다. “아야! 아파요.” “아프라고 하는 거다.” 실컷 쓸데 없는 짓을 했으니까 여기엔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것 같다. 난 라이를 안아 들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런데 몇 발자국 떼는 찰나 갑자기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라고는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Dig a grave open.” 난 마법으로 흙을 파냈다. 그 순간 나는 내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체가 없다! “제길! 그럼 그렇지.” 미친 드래곤이 이그리드의 시체를 그냥 방치했을 리 없다. 분명 잘 챙겨 갔겠지. 그렇다면 일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 * * * * * 크로니스는 분명 이그리드의 무덤에 글을 세겼다. 내용은 저승에서 루미아드랑 잘 먹고, 잘 살라는 내용이었다. 저승에서 루미아드랑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당연 이그리드의 영혼일 것이다. 그렇다면 크로니스는 이그리드의 죽음을 인정했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 대체 뭐가 문제지? 죽은 것을 인정했다면 집착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집착을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그런데 시체는 왜 거둬 간 것일까? 내가 만든 무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상당히 가능성 있는 답변이다. 말이 무덤이지 관 하나 마련 못하고 그냥 묻었으니까. 그럼 양지바른 곳에 다시 묻어 주었을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다. 시체를 거둬 간 것은 아마 이그리드에 대한 미련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크로니스가 이그리드가 죽은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지. 인식했었을 수도 있다. 즉, 그때 당시에는 이그리드의 죽음을 인정하다가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 크로니스의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럼 그게 대체 무슨 일일까? 나를 이그리드로 여기고 광기어린 집착을 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 어찌 되었든 당장 답변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이 곳에 와서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가게 되는 군. 잊혀진 엘프의 숲으로 가면 이 사건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라이는 지금 이그리드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앞에 앉아 마법서를 정독하고 있었다. 눈빛과 표정, 행동 모두 진지하기 그지 없는 것이 학구열에 불타는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애 같아도 마법사는 마법사. 난 다가가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책 읽는데 방해하지 마세요.” “…….” 방해해서 미안하다.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긴 라이는 한 시간 여만에 한 권을 다 읽었다. “그래 공부는 많이 했니?” 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 아는 것들이에요. 그냥 복습하는 기분으로 한번 읽어본 거에요.” “…….” 재수 없어. 너 지금 공부 잘한다고 나한테 잘난체 하는 거니? 라이는 아장아장 걸어와 나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내 품에 안겨 이런 행복한 광경이 연출될 수 있다는 것은 라이가 나에게 사랑이라는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한다면 헛소리고, 이는 라이가 나를 완벽한 보호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사실 이런 행동은 예전에 칼리한테 많이 했던 짓이다. 그런데 이제 이 짓을 나한테 하고 있다는 것은 같이 다니는 동안 나를 자신의 보호자로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크로니스와의 싸움에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 분명 홀로 남은 라이는 울며불며 난리를 치겠지. 어쩌면 나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크로니스에게 돌격할 수도 있고. “불쌍한 것.” 난 지금 나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고 있는 라이를 꼭 끌어 안았다. 그리고 토닥여 주었다. 토닥토닥~ 라이는 어린 아이답게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과 등을 토닥여 주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웃는 라이를 보고 있자니 이 귀여운 아이를 두고 드래곤과 맞서 싸워야하는 나의 현실이 너무나도 슬프다. 난 조심스럽게 라이에게 물었다. “라이야,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이 오빠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예? 오빠가 죽어요? 우에에엥! 안 돼요! 오빠 죽으면 안 돼요!” 라이는 깜짝 놀라며 나를 끌어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 아이가 나를 보모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로 보고 있음을. “그래. 내가 너를 놔두고 어찌 죽겠니?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 라이야!” “우에에엥!” 어째 내가 점점 라이화(Rai化)되어 가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렴 어떠하리.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엘프가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동할 따름이다. 라이는 엘프. 그것도 700살이나 먹은 고엘프(古Elf). 문득 라이의 과거가 궁금해 진다. 예전에 한번 라이는 자신이 고아임을 밝힌 적이 있었다. 라이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고아로 자랐고, 7클래스 마스터가 되었으며 지금은 이런 어린 아이가 되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흑흑, 뭐가요? 뭐가 알고 싶어요?” 난 라이의 눈물을 닦아 주고 물었다. “라이야, 너의 과거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으련?” “제 과거요? 그건 알아서 뭐 하시게요?” “…….” 꼬박꼬박 말 대꾸 하지 말고, 시키면 시키는데로 행동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궁금해서 그런다.”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며 잠시 머뭇거렸다. “꼭 말해야 하나요?” “…….” 잘 나가다가 왜 이렇게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걸까? 난 인상을 쓰며 주먹을 들어 올렸고, 깜짝 놀란 라이는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건 아무한테도 말 안 해줬던 건데요…….” 라이는 길가에 내 놓으면 변태들이 접근할 확률이 가장 높은 아이 1위로 꼽힐만큼 살인적인 귀여움을 가진 천진난만한 아이다. 라이의 귀여움은 천하(天下)가 알고, 자타(自他)가 알고, 우리 모두(everybody)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렇게 귀여운 라이가 태어난 때는 대륙력으로 96X년.(본인도 정확한 년도는 잘 모른다고 한다) 당시 많은 엘프들이 모여 살던 흑색 숲 동쪽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여기서 잠깐 설명을 붙이자면 흑색 숲이란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의 영지를 말하는 것이다. 나무와 잎들이 전부 새까매서 흑색 숲이라고 부르는 것이 절대 아니다.(그 예로 청색 산맥은 파란색이 아니다) 아무튼 흑색 숲의 위치는 대륙 최남단으로 청색 산맥이 끝나는 지점부터 시작해 녹색 산맥과 맞닿아 있다. 과거 아이리스가 류이테르강 이남을 전부 지배할 때, 국가를 동과 서로 나누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지금은 자바스와 아토리아의 국경이지만. 라이네 마을은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숲 답게 흑색 숲은 울창한 우림 지역이었다. 이 곳에서 어느날 라이가 짠~ 하고 태어났다. 그 순간, 많은 엘프들이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이리 귀여울 수가!” 라이는 유년시절을 이 곳에서 천진난만하게 놀면서 보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라이의 어머니는 라이가 30살쯤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라이가 하는 짓을 보고 울화병이 터져 돌아가신 것은 아니고, 그냥 나이가 다 되서 돌아가신거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 그렇다. 라이는 늦둥이었다! 어쩐지 너무 귀엽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300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던 라이의 아버지는 굉장히 심심해져 100살 연하의 옆집 과부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다.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 같은 사랑을 태웠고, 애초 간통과 재혼이 불법이 아닌 엘프 사회의 법 제도로는 이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괜히 외톨이가 된 기분을 느낀 라이는 울면서 집을 뛰쳐 나온다. “우에에엥! 아빠 미워!” 이 때가 라이 나이 40살 정도 되던 해. 정처 없이 달리던 라이는 나무뿌리에 다리가 걸려 넘어진다. 살펴보니 무릎이 까졌다. 평소에도 열심히 울던 라이는 이 기회를 통해 최선을 다해 울기로 마음 먹는다. “우에에엥!”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라이에게 다가왔다. 검은 생머리를 나풀거리는 키 크고 잘 생긴 미청년이었다. 이 미청년은 손에 든 하프를 연주하며 말했다. “어찌하여 우는 건가요, 아름다운 아가씨? 무엇이 그대를 슬프게 하나요?” 라이는 훌쩍거리며 답했다. “흑흑, 무릎이 까졌어요. 라이는 너무 아파요.” 얘기를 다 들은 미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하프를 연주했다. “어찌 그런 슬픈 일이……. 아! 그대의 아픔이 제 아픔처럼 느껴지는 군요. 울지마세요, 아가씨. 미천한 솜씨지만 그대가 허락하기만한다면 그대를 위해 노래를 부르겠어요.” “허락해요.” 라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미청년은 갸날픈 미성으로 노래를 시작하였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 뜰과~ 뒷 동산에~ 새들도~ 아기양도~ 다들~ 자-는데~ 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보내는~ 이 한밤에~ 잘자라~ 우리 아가~ 잘- 자거라~.” “그래서 잠든 거야?” “예.”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 불쌍한 것. 그런 슬픈 과거가 있었다니. 사실 별로 슬플 것도 없지만 괜히 눈물이 나온다. “그런데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청년이 등장했다고?” “예.” “그 남자 어떻게 생겼니?”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렸을 때여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굉장히 잘 생겼어요.” 잘 생겼다고 한다. 그것도 굉장히. 난 이해했다는 제스처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이 생겼단 얘기구나.” “…….” 그 표정은 뭐니? “하던 얘기나 마저하렴.” “예.” 라이는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깨어나보니 낯선 곳이었다. 라이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라? 라이가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걸까?” 침대, 탁자, 의자, 벽난로의 장작불, 그 위에 올려진 가마솥 등등. 이 곳은 한 사람이 기거할만한 작은 집이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상황 파악을 한 라이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 올리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라이는 배가 고파서 잠에서 깼다. 라이는 착한 어린이답게 이불을 잘 개어놓고 밖으로 나갔다. 때는 화창한 아침이었다. 문 앞에는 전에 보았던 미청년이 앉아 있었다. 라이는 너무도 당연하게 말했다. “밥 주세요. 라이 배고파요.” 미청년은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식사 준비를 할테니 그대는 저 곳에서 세수를 하십시오.” 미청년은 밥을 하러 들어갔고, 라이는 정문에서 5m거리에 위치한 연못으로 세수를 하러 갔다. 그리고 세수를 했다. 아기자기하게 지어진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가니 어느새 미청년이 음식 준비를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라이는 사양 한번 하지 않고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 “더 주세요.” “그대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껏 배를 채운 라이는 침대에 걸터 앉아 디저트를 먹었다. “당신은 누군가요?” “저 말입니까? 전 마법사입니다.” “그럼 마법도 쓸줄 아나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혼자 사세요?” “그건…… 같이 살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우웅, 그렇구나.” 이젠 미청년이 물어볼 차례였다. “아가씨께서는 어찌하여 그 곳에서 울고 계셨던 건가요?” “그건 말이죠…….” 라이는 그 동안의 일을 전부 얘기해 주었다. 얘기를 다 들은 미청년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찌 그런 슬픈 일이!” “흑흑, 라이도 너무 슬퍼요. 라이는 이제 갈 곳이 없어요.” 라이는 울면서 침대 이불을 끌어 안고 누워 이 곳에 눌러 앉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내보였다. 미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 곳에서…….” “예. 저 이 곳에서 살래요.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 아무튼 이렇게 하여 라이는 미청년과 함께 살게 되었다. 미청년은 라이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었고, 라이는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마법을 배워나갔다. 미청년은 헌신적으로 라이를 가르쳤다. 열심히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엉덩이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가끔은 품에 안아 토닥여 주기도 했고, 볼에 뽀뽀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라이가 이불에 실례를 하면 빨아 주기도 했고, 몸도 씻겨 주었다. “정말 그 놈이 그랬어?” “예.” 라이의 대답에 나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엉덩이를 두드려 준 것까지는 좋은 의도로 생각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볼에 뽀뽀를 한다거나 몸을 씻겨 주었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역시 그 놈은 변태였어! 라이 같이 귀여운 여자 아이를 성추행하는 변태! 이럴 수가! 이 사회에 아직도 유아성추행을 일삼은 그런 반사회적인 인간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니! 이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자에 대해 무지하게 무지한 이들을 위해 풀어서 해석하자면 하늘과 인간이 같이 열 받았다는 얘기다. 감히 우리 라이를 성추행하다니! 내 이 놈을 세상 끝까지 쫓아가 손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말테다! “정말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구나.”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그래. 내가 니 맘 다 이해해.” 난 라이를 와락 껴안았다. 그딴 이상하게 생긴 놈한테 성추행을 당했다니. 이 어린 것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어렸을 때받은 상처는 트라우마(trauma)로 영원히 남는다던데. “그 오빠는 저에게 굉장히 잘 해줬어요. 밥 달라고 하면 밥 주고, 마법 가르쳐 달라고 하면 마법 가르쳐 줬어요. 정말 착한 오빠에요!” 라이는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이 웃음이 비수가 되어 나의 가슴을 찌른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으면 이렇게 기억을 미화시키기까지 할까? “정말 잘해줬다니까요.” “그래. 니 맘 다 알아. 이제 그만해.” 억지로 웃을 필요 없어, 라이야. 눈물이 앞을 가린다. 괜히 옛날 얘기를 꺼내게 해서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기 하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듣던 얘기는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 “얘기 계속 해, 라이야.” 미청년이 라이와 동거한지도 어언 50년. 라이는 어느새 90살이 되었고 이젠 ‘라이’라는 애칭이 어울리지 않을만한 어여쁜 숙녀가 되어있었다.(많은 사람들이 까먹었을까봐 부연 설명을 붙여주자면 라이에게는 ‘라이미안’이라는 본명이 있다. 라이는 어디까지나 애칭일 뿐이다) 미청년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닌 라이에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는지 어느 날 폭탄 선언을 한다. “제가 가르쳐 드릴 것은 다 가르쳐드렸습니다. 저는 이만 자유로운 방랑자가 되어 세상을 떠돌까 합니다.” “그럼 라이는 어떡해요?” “그 동안 배운 마법이 있으니 어디가서 굶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 그럼 안녕히 가세요.” 라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미청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 동안 같이 지낸 정이 있는데 예의상 한번쯤은 붙잡아 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오빠가 안 가시면 라이가 먼저 가려고 했어요.” “…….” 다음날. 미청년은 하프를 둘러매고 오랫 동안 살던 집을 떠났다. 라이는 그 곳에서 몇 년 더 마법 수련을 하다가 세상으로 나간다. 당시 세상은 가이아스 왕국이 성립된지 몇 해 안 되던 해. 치안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라이는 뛰어난 마법 실력으로 위험을 헤쳐나가며 대륙을 여행하였다. 참고로 이때 라이의 마법 실력은 6클래스. 대륙 내에서 내놓으라 하는 강한 마법사들과 맞붙어도 손색이 없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열심히 여행을 하던 라이는 어찌어찌하다가 상아탑으로 흘러들어갔고 또 어찌어찌하다가 탑의 수장(首長)으로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은 하염 없이 흘러 라이의 나이가 약 650살 정도 되었을 때. 이 때 라이는 일생일대의 크나큰 실수를 범하고 만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탑의 주인 라이미안은 평소 자신의 마법과 미모에 대해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 두 가지에 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모의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라이미안은 때마침 성공한 마법에 엄청나게 기분이 고양된 상태였다. “아! 실험이 성공하다니! 어찌 이런 마법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한 경사스러운 일이! 뭐, 내 자랑하려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을 실험이었어. 아아~ 정말 알 수가 없구나.” 라이미안의 제자이자 견습 마법사였던 칼리는 한쪽 발을 탁자에 올려 놓은 채 감격에 젖은 얼굴로 자기 자랑을 하는 상아탑의 주인이자 하늘 같은 스승인 그녀를 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뭐가 알 수가 없나요?” 라이미안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그야 당연 나의 천재성의 한계지. 타인은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미모를 갖춘 것도 모자라 마법 실력까지 이리도 뛰어나다니! 아~ 대체 나는 왜 이리 완벽하단 말인가? 여기에다 상아탑의 주인이라는 명함이 붙어 신분마저 모자람이 없으니 대체 나의 부족함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자화자찬하시면…….” “어머! 자화자찬이라니? 난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래도…….” “너 지금 질투하는 거니?” “…….” 어찌되었든 라이미안은 아름답고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진보적인 여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일만 없었어도 지금도 그럴 텐데. 평소 자신이 너무도 아름다워 귀여운 맛이 다소 부족하다고 생각한 라이미안은 어린 아이로 폴리모프하는 것을 즐겨했다. 이는 검은 머리 미청년에게서 마법을 배울 때의 모습이기도 했기에 가끔 향수에 잠기기도 했다. “라이는 이제부터 실험을 할래요.” “……예.” 외모가 변하면서 순식간에 변한 말투에 칼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라이미안은 아장아장 걸어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 실험을 시작했다. 그런데……. 실험 도중 시약을 마신 라이는 다시는 ‘라이미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영원히 라이의 모습으로 지내야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이제 라이는 어떡해?” 놀라서 뛰쳐온 칼리는 그녀를 달래기 시작한다. “울지 마세요, 라이미안님.” “우에에엥!” 라이는 칼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서 실컷 울었다. 칼리는 우는 어린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좋게 좋게 생각하세요. 예전엔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너무너무 귀여워요. 꼭 깨물어 주고 싶어요.” “흑흑, 정말? 라이 정말 귀여워?” “예.” “흑흑, 거짓말 아니지?” “……예.” 이렇게 하여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미녀 엘프 마법사 라이미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깜찍함과 발랄함으로 무장한 소녀 엘프 마법사 라이가 등장하였다. “어흐흐흑!” 얘기를 다 듣고나니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라이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더니 자기도 따라 울었다. “우에에엥! 오빠 울지 마세요. 오빠가 울면 라이도 슬퍼져요.” “어흐흐흑! 어찌 그런 슬픈 일이? 그 시약만 마시지 않았어도…….” 라이는 내 말을 듣더니 몸을 잠시 움찔 거렸다. 그리고는 나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으아앙! 라이는 오빠가 그렇게 라이를 걱정해주시는지 정말 몰랐어요. 라이 너무나 감동했어요.” “어흐흐흑.” 그 시약만 마시지 않았어도 사람 짜증나게 만드는 어린애 대신에 엄청난 미인 엘프와 같이 다닐 수 있었을 텐데. 난 라이의 얼굴을 보았다.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게 너무도 귀여웠다. 어른이 되면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 팍팍 오는 얼굴. “으어어엉!”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수가. 어째서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는 걸까? 나는 그저 어린애 보모짓 하는 대신 미인 엘프와 함께 여행을 다니고 싶은데. 내 비록 지금은 힘이 없다만 후에 9클래스를 마스터하게 된다면 반드시 라이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리! 잠시 시간이 흐르자 눈물이 멎었다. 애초 나에게 감수성이란 것이 별로 없기에 눈물도 금방 마른다. 반면 어린애는 감수성이 풍부하기에 라이는 아직까지 울고 있었다. 난 라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미청년이 50년 동안 너를 성추행…… 아니, 마법을 가르쳐 주고 어디론가 떠났다고?” “예.” “50년 동안 그 인간은 늙지도 않았니?” “예.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였어요.” “그 사람 마법 실력은?” “잘 모르겠지만 7클래스 이상인 것은 확실해요.” 뭔가 잡힐 듯이 다가온다. 검은 숲에 갑작스레 나타난 검은 머리 미청년. 인간 같이 생겼는데 늙지도 않고 마법 실력도 뛰어나다. 게다가 그 곳은 드래곤의 영지. 이쯤 되면 많은 사람들이 대충 눈치를 채기 마련이다. 그 사람은 은거 기인이었어! 각종 영약을 섭취, 환골탈태를 한 기인. 그렇다면 라이는 일명 기연이라는 것을 만난 셈이다. “역시 그렇군. 그 사람은 초야에 묻혀사는 기인이었어. 미청년이라고 했지만 나이는 상상도 못할만큼 많겠지. 그럼 늙은이란 얘긴데…… 그딴 변태 늙은이가 감히 우리 귀엽고 착한 라이를 성추행하다니. 내 비록 가진 힘은 미약하다만 이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그 놈의 싸대기를 후려 갈기겠다!” 라이는 둥그렇게 뜬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무안해진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 사람 이름이 뭐니?” “인디(Indie)에요.” “인디? 인디언도 아니고 그냥 인디?” “예.” “그 사람 노래는 잘 부르니?” “예. 굉장히 잘 불러요.” “그런데 가수가 안 되고 왜 마법사가 됐을까?” “글쎄요. 듣기로는 예전에 인디밴드(indieband)를 조직해 언드그라운드(undergraund)에서 잠깐 활동했었는데 인기가 별로 없어 메이저(majer)가 되지 못해 생계 유지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전향했데요.” “…….” 인디가 인디밴드를 조직해 활동을 했다고? 무슨 락그룹이냐? “그 사람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사인이라도 받으시게요?” “내가 그딴 놈 사인 받아서 어디다 쓰겠냐? 다만 다시는 우리 라이한테 손 대지 못하도록 잠시 손 봐주고 싶을 뿐이야.” 라이는 분노에 불타는 나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 오빠 다시 만나보고 싶어요.” “…….” 그 웃음은 뭐니? 설마 이 오빠보다 그 놈이 좋다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라이는 분명 나를 더 좋아하는 걸거야. 그런데 이 불안한 느낌은 뭐지? “라이야, 너는 이 오빠가 좋니, 아니면 그 놈이 좋니?” “으음, 저는…….” 난 인상을 쓰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라이는 움찔하더니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히로 오빠가 좋아요.” “파하하!” 그럼 그렇지. 내가 그 동안 라이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날 더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난 라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라이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렸다. “아이구, 귀여운 것. 뭐 먹고 싶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이 오빠가 다 사줄게.” 라이는 너무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이는 맛있는 것이 먹고 싶어요.” “그래. 우리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 난 라이를 등에 업었다. 라이는 두 손으로 내 목을 꼭 끌어 안았다. 무겁다. 정말 무겁다. 등에서 전해오는 하중에 허리가 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참고 걸음을 옮겼다. 히로 오빠가 좋다고 하잖아. 내가 라이를 데리고 간 곳은 식료품 창고. 난 그 곳에 라이를 내려 놓고 마치 내가 사주는 것처럼 말했다. “자 마음껏 골라 먹어.” “우와아! 고마워요, 오빠.” 라이는 발발 돌아다니며 마구 잡이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저러다가 배탈이라도 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 그런데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어린애와 노닥거리기나 하다니. 내가 미친 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한숨이 흘러 나온다. 쉼 없이 계속 흘러 나온다. 배가 고프다. “그래. 일단 먹고나서 생각하자. 내일 걱정은 내일 하는 게 건강에 좋겠지?” 라이는 과일을 양 손에 들고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말했다. “멀리 내다보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 근심이 있기 마련이래요.” “…….” 애가 어째서 이렇게 똑똑한 걸까?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엘프의 숲 - 01 -------------------------------------------------------------------------------- Ip address : 219.241.90.1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 * * * * * * 오늘이 며칠인지 알 수가 없다. 원래 동굴 안이라는 곳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에 부적절한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들어와보니 정말 날짜 감각이 없어진다. 물론 나에겐 제갈량 -정확히는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 에게서 받은 번쩍번쩍 빛나는 손목 시계가 있기에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지만, 시계바늘은 12시간마다 한바퀴씩 도는 법. 내가 여기 들어온지 12시간이 지났는지, 24시간이 지났는지, 36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난 이 곳에서 무엇을 했는가? “…….” 젠장.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게 없는 것 같다. 대체 내가 왜 이 곳에 왔는지 의문이 들 뿐이다. 이 곳은 내가 처음으로 발을 딛인 곳. 나의 한 발이 인류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아니지만 내 인생이 초토화 되는데에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할 수 있겠다. 그럼 내가 왜 이 곳에 왔는가? 나는 이 것을 모성회귀 본능에서 찾으려 한다. 어찌보면 이 곳은 내가 태어난 장소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이 곳으로 돌아와 옛향수를 느껴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 아! 나의 천재성은 나날이 빛을 발하는 구나. 이런 단편적인 현상에서 그런 복합적인 사실을 유추해 내다니. 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 그러자 지포 라이터로 장난을 치던 라이가 재빨리 불을 붙여 주었다. 난 연기를 한모금 길게 빨아들이며 라이의 얼굴에 내뱉었다. “콜록콜록! 너무 매워요.” 내가 이러는 것은 라이를 괴롭히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담배의 해악성을 알려주어 담배에 대한 거부감을 잠재 의식 속에 심어주려는 나의 교육적은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전부 라이를 위해서다. 더 이상 이 곳에서 얻을 것이 없다면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이유도 없겠지. “이만 가자, 라이야.” “라이는 가기 싫어요.” 떠나자는 말에 라이는 경기를 일으키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하지만 정말 가기 싫어서 저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왜 저러는 가? 이유야 간단하다. ‘라이를 업어 주세요.’ 라이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업혀라.” 내가 등을 내밀어 주자 라이는 방긋 웃으며 내 등으로 폴짝 뛰어 올랐다. 우드득~. 커억! 허리가……. 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라이가 날 우습게 보겠지? 난 허리에 전해져 오는 은은한 통증을 느끼며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이 동굴을 나가는 즉시 바닥에 내동댕이 쳐주마. “어딜 가십니까?” “어딜 가긴? 수 많은 미녀들이 포진해 있는 엘프의 숲으로…….” 잠깐. 지금 누가 나에게 말을 걸었지? 난 고개를 들었다. 어렴풋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갈만큼 매끈하게 빠진 몸매. 어둠 속이었지만 난 상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무료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의 엘프 청년.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오랜만이군요.” “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아니, 그는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나. 왜 그런 슬픈 눈빛을 날 보는 걸까? * * * 챕터 변환 * * *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보며 옅은 웃음을 지을뿐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난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안녕하세요.” “예.”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나의 마음을 풀어지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를 경계할 이유는 없었다. 괜히 혼자 과민 반응을 하고 있는 걸까? “저기…… 여기에는 어쩐 일이세요?” 크로니스는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그건 저도 묻고 싶군요.” “…….” 이런 식이라면 대답할 말이 없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다. 잠시 동안 우리는 말 없이 서로를 바라 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다리가 저린 것은 둘째 치더라도 마주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거북스러웠다. 게다가 등에서 전해오는 하중은 점점 나를 짖누른다. “아앗! 그때 그 나쁜 엘프다!” 나설 때, 안 나설 때 가리지 않고 나서서 언제나 매를 버는 라이.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라이는 내 등에서 버둥버둥거렸다. “가만히 좀 있어.” “우에에엥! 라이는 나쁜 엘프가 무서워요.” 크로니스는 라이의 발광을 보고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난 그에게 양해를 구하는 눈빛을 보이고는 라이를 달랬다. “야, 너 조용히 해. 조용히 안 해? 조용히 안 하면 때려준다.” “우에에엥! 라이는 너무너무 무서워요.” 너 무서운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니? 아! 허리 아퍼. 이 무거운 것을 업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휠 지경인데 바둥거리기까지 하니 정말 이러다 부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 갑자기 허리 부근이 따뜻해 진다. 그리고 축축해 진다. 무언가 굉장히 불쾌한 느낌. “라이야.” “예, 오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그게요…….” 이 냄새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째서?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 것인가? “……저 나쁜 엘프가 너무 무서워서요. 우에에엥, 라이는 무서워요.” 커헉! 혈관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아. 내 이걸 당장 땅에 묻어 버려? 난 업고 있던 라이를 내려 놓았다. 라이는 축축히 젖은 치마를 깔고 주저 앉아 징징 짜기 시작했다. 상의 전체에 묻은 따뜻한 액체의 느낌에 온 몸에 닭살이 돋는 것만 같았다. 난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크로니스를 보았다. 크로니스는 걸음을 내딛었다. “으아아앙! 나쁜 엘프가 이 쪽으로 와요. 라이를 때리지 말아요.” 라이는 갖은 발광을 다했지만 크로니스가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조용히 잠이 들었다. 크로니스는 조심스럽게 라이를 안아 들었다. “시끄러운 숙녀분이시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일단 몸을 좀 씻는 것이 좋을 듯 하군요.” “예.” 크로니스는 앞장 서 연못으로 향했다. 오줌에 축축하게 젖은 옷이 몸에 달라 붙자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았다. 난 이 것에 신경을 쓰기 위해 노력을 하며 크로니스의 뒤를 따라갔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째서 이 곳에 온 걸까? 내가 이 곳에 있는지 알고 온 걸까, 아니면 모르고 온 걸까? 내가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알고 있을까? 무엇 하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크로니스를 적인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예? 아, 아니 뭐 그냥 이러저런 생각들이요.” 크로니스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연못에 도착했다. 설마 이 차가운 물에 몸을 적셔야 하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법은 이런 때 써야 정상이지. 연못의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은 크로니스가 손을 한번 넣음으로서 뜨끈뜨근한 물로 변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니 마치 온천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크로니스는 잠든 라이를 그대로 물 속에 담갔다. 나도 옷을 입은 채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온도는 괜찮나요?” “예. 딱 좋아요.” 난 그 곳에서 헤엄을 쳤다. 으음,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다. 몸이 노곤해. 그러고보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궈본지 너무 오래 되었어. 풍덩-! 물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라이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크로니스는 어디 갔지? 그 순간, 내 바로 앞에서 크로니스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머리가 눌어 붙는 것이 귀찮은지 살짝 머리를 털었다. 물방울들이 허공으로 날린다. 환하게 펼쳐진 붉은색 햇살은 순식간에 빛을 감춘다. 크로니스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나를 보았다. 물을 뒤집어 써 촉촉하게 빛나는 그의 모습은 나의 숨을 멎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남자, 여자를 떠나 정말 순수하게 아름답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역시 생긴 놈은 뭘 해도 폼이 난다. 안 생긴 놈은 뭘 해도 폼이 안 나고. 그 예로 지금 내 모습은 물에 젖은 생쥐꼴. “…….” 안 생긴 게 죄지 내가 누굴 탓하겠냐? “어디로 가시나요?” 들려온 물음에 정신을 차린 나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엘프의 숲에…….” 이렇게 당당히 목적지를 밝혀도 되는 건가? 크로니스는 나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왜 엘프의 숲으로 가냐고 물었다면 어떻게 대답 해야 했을지 정말 난감했을 텐데, 아무 말 않고 그저 웃기만 하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왜 엘프의 숲으로 가시나요?” “……예?” 크로니스는 대답을 원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진실을 말해? ‘제가 엘프의 숲으로 가는 이유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맞짱을 뜨기 위해서에요. 거기서 힘을 키워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맞짱을 뜨고 싶어요.’ 내가 미쳤냐? 진실을 말하게. 그럼 거짓을 말해야 하나? ‘엘프의 숲에서는 미인들이 사방천지에 널렸다기에 관광차 가는 거예요. 그리고 라이의 고향이 그 곳이에요. 원래 사람이건, 엘프건 나이가 들면 고향을 찾는다고 하잖아요. 얘가 이 모양, 이 꼴로 생겼어도 나이가 700살이 넘거든요.’ 뭔가 어색하다. 다른 종족도 아닌 드래곤에게 이런 헛소리가 통할리 없다. 무엇보다 드래곤이 거짓말 하는 것을 눈치 못 챌리 없지. 하지만 별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일단 배짱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엘프의 숲에서는 미인들이 사방천지에 널렸다기에 관광차 가는 거예요. 그리고 라이의 고향이 그 곳이어서…….” “아, 그러셨군요.” “예?” 크로니스는 정신이 아찔할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는 내 말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변이라도 해주는 듯 했다. “아하하! 예. 그거에요. 이해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 “예. 잘 알겠습니다.” 크로니스는 정말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거짓말 한 게 조금 찔리긴 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말하는 것보단 낫겠지. 진실은 언제나 위험한 법이거든. 안도하고 있는 나에게 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의 고향은 흑색 숲이에요. 엘프의 숲이 아니에요.” “…….” 저 아이는 어째서 갑자기 깨어나 나를 궁지에 몰아 넣는 걸까? 혹시 나를 엿 먹일려고 작정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일부러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며 내 옆에 붙어있는 것은 아닐까? 난 크로니스를 보았다. 크로니스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다. 거짓임을 인정하는 것,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 끝까지 우기는 것. 물론 나는 끝까지 우긴다. “하하, 얘가 워낙 나이를 먹어서 가끔식 자기 고향도 까먹어요.” “아니에요. 라이의 고향은 분명 흑색 숲이에요. 라이의 가장 친한 친구 이코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하하하! 얘가 고집도 세서 이렇게 우기기도 잘 해요.” “씨잉,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난 라이의 입을 틀어 막았다. 라이는 억울한지 열심히 버둥버둥거렸다. 난 라이를 제압하고 크로니스를 보았다. “하하하…….” 저 눈빛의 의미는 무엇일까? 설마 들킨 건가? 하긴 이 정도로 어색하고 앞뒤가 안 맞는데 속을리 없지. 아, 정말 미치겠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이렇게 작은 일에서부터 테클을 거니 앞으로 일들이 심히 걱정됨과 동시에 지금 상황도 심히 걱정 된다. “저기, 그러니까 그게…….” “뭐, 꼬마 엘프분의 고향이 어디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예? 예. 예! 아하하! 예. 맞아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크로니스의 표정을 보니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십년 감수했네. 난 아직까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저기…….” “저기…….” 잠시 침묵. 미치겠군. 동시에 입을 열건 뭐람? “먼저 말씀하시지요.” “아, 저기 그러니까…….” 막상 입을 열고 나니까 할 말이 없다. 물어볼 것이야 많았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나를 이그리드로 생각하는 지, 이그리드의 시체는 어디로 갔는 지. 궁금함을 떠나 그의 입으로 직접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으로만 맴돌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두려웠다. 그가 진실을 말할까봐. 난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냥 먼저 말씀하세요.” 크로니스는 물 묻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엘프의 숲까지는 어떻게 가실 생각이신가요?” “산을 넘을 생각입니다.” “그럼 시간이 오래 걸릴텐데요.” 크로니스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자 지루해진 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순간, 크로니스가 말했다. “손목에 차고 있는 그 팔찌에는 텔레포트 스펠이 적혀있는 듯 하군요. 몰표 지점은 아마도 엘프의 숲이겠지요?” “…….” 에스카네스가 줬다는 것을 눈치 챈 건가? 난 가슴이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 제가 이 주위에 있는 마법장만 거둬들이면 간단하겠군요.” “…….” 무슨 뜻에서 하는 말이지? 크로니스는 연못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귀에 물이 들어갔는지 엘프 특유의 길고 뾰족한 귀를 손으로 치기도 했다. “이제 곧 마법장은 사라질 겁니다. 그 곳에 가서 뜻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하네요.” “……예?” “다음에 만날 땐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이만.” 크로니스는 몸을 돌렸다. 난 급히 연못을 빠져 나오려 하였다.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요!” 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난 그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뜻하는 바를 이루라고?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 거라고?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휴우~ 정말 다행이다. 라이는 나쁜 엘프가 무서웠는데. 그런데 나쁜 엘프는 어디로 사라진걸까?” 난 고개를 휙 돌려 물에 둥둥 떠다니는 라이를 노려 보았다. 아무래도 조금 손을 봐줘야 겠어. 도저히 용서가 안 돼. 감히 내 옷을 더럽히다니. 아직도 옷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렇게 나이를 먹어서도 똥, 오줌도 못 가리다니. 설마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 치매에 걸린 건가? 아무튼 용서가 안 돼. 이번 기회에 확실히 손봐줘서 다시는 옷에 실례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 줘야겠어.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네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게냐?” 라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손가락을 입에 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내 옷에 오줌을 싸놓고도 저렇게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다니. 난 연못에서 헤엄을 치며 행복하게 웃는 라이를 밖으로 끄집어 냈다. “니가 감히 내 옷에 오줌을 싸? 그러고도 태연하게 헤엄치며 놀아? 너 정말 나쁜 엘프구나.” 라이는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에요.” “아니야! 넌 나쁜 엘프야! 착한 엘프는 절대 치마에 오줌을 싸지 않아.” 나쁜 엘프, 착한 엘프를 떠나 거의 모든 엘프들이 아무 곳에서나 실례를 하진 않는다. “우에에엥!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에요. 라이는 착한 엘프에요. 우에에엥~.” 라이는 바닥에 주저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이 정도에서 적당히 넘어가 주었겠지만 오늘은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 동안 너무 봐줬어. 외국 속담에 ‘자식 제대로 키우려면 매를 들라’ 하였다. 그래. 난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이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라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이러는 것이다. “맞을 준비는 됐겠지?” 그런데 대체 어디를 어떻게 때리지? 아무리 살펴봐도 때릴만한 곳이 없다. 이 동글동글하고, 작고, 귀여운 아이를 어찌 때린단 말인가? 뺨을 때리자니 너무 잔인한 것 같고, 엉덩이를 때리자니 어째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쪽으로 생각을 할 것 같고. 그렇다면 남은 곳은 손바닥 뿐인데. “…….” 때리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 같다. 저항할 능력이 없는 아이를 구타한다는 것은 인권적인 측면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요즘 아동학대가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마당에 나까지 동참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그냥 벌 세우는 정도에서 끝내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으아아앙!” “내 당장 너를 형틀에 묶어 매우 쳐야하나, 이번만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의 아량으로 태형은 면하게 해주마! 그 대신 속죄의 뜻으로 한 시간 동안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어!” 라이는 여전히 울뿐 반응이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군. 난 손수 라이의 무릎을 꿇리고 손을 들게 하였다. 그리고 한 마디 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손 내리면 주~우~거.” “우에에엥!” 라이가 벌서는 동안 난 온천욕이나 즐겨야겠다. 라이의 손이 슬금슬금 내려온다. “손 올려!” “흑흑.” 라이는 눈물을 떨구며 손을 올렸다. 시계를 보니 아직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라이는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흑흑, 라이가 잘못했어요. 더 이상 라이를 괴롭히지 마세요. 라이는 착한 엘프가 될게요.” 아, 저 어린 것의 저렇게 힘들하는 모습을 보니 내 차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나. 뭐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 줘야지. “나 소싯적엔 하루 종일 한 적도 있었다. 손 위에 물동이까지 얹고 ‘한 방을 흘리면 한 대’ 라는 학주의 협박 때문에 감히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실수로 물을 엎질러 죽을 때까지 맞았었다. 그러니 니가 지금 불평을 늘어 놓아 봐야 애교로 밖에 보이지 않는 구나. 은근슬쩍 손 내리지 마!” “으아앙! 라이 정말 힘들단 말이에요.” 라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 이쯤에서 넓은 아량을 베풀어 용서해 주기로 하자. “손 내려도 좋아.” 라이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손을 내렸다. 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니가 뭘 잘못했는지 잘 알지?” 라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연못을 빠져나와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다음부턴 치마에 오줌 싸면 안 돼. 화장실 가고 싶으면 이 오빠한테 먼저 말하렴. 알겠지?” 끄덕끄덕. 열심히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안심이 된다. “좋아. 그럼 이만 가도록 하자.” 난 라이를 안아 들었다. 이제 이 팔찌를 이용해 엘프의 숲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미인이 나를 기다린다! “…….” 그런데 이 팔찌 사용법이 어떻게 되는 거지? 난 내 손목에 걸려있는 얇은 팔찌를 살펴 보았다. 음각으로 스펠이 새겨져 있어 마법 도구라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텔레포트!”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워프!” 역시. “이동! 순간 이동! 엘프의 숲으로 고(Go)! 못 먹어도 고! 쓰리고! 이동해라! 이동 안 해? 이런 젠장!” 난 팔찌를 노려보며 갖은 주문을 외워댔다. 하지만 꿈적도 안 하는 팔찌. 젠장. 작동 방식이 어려우면 사용 설명서 정도는 첨부해 줘야하는 것 아닌가? 혹시 불량품? 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생각엔 팔찌를 부숴야 작동하는 것 같아요.” “…….” 알고 있으면 진작 좀 말하지 그랬니? 난 헛기침을 했다. “흠흠, 나도 알고 있었어. 잠깐 장난 좀 처본 것 뿐이야.” 그리고 돌맹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날 꽉 붙들어, 라이야. 잘못하면 이 곳에 두고 갈 수도 있으니까.” “예.” 돌맹이를 팔찌에 내리치려는데 뭔가 빠진 것 같은 생각이든다.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 뭔가가. 대체 뭐가 빠진 걸까? “라이야, 라이코스는 챙겼니?” 라이는 깜짝 놀라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이코야~.” 이럴 줄 알았어. 자칫 잘못했으면 라이코스를 버리고 갈뻔 했군. 잠시 후, 라이는 라이코스를 데리고 나타났다. 라이코스는 현재 숙면 중. 라이는 라이코스를 주머니에 잘 챙겨 넣고 내 허리를 꼭 끌어 안았다. 라이도 있고, 라이코스도 있으니 이제 빠진 건 없겠지? 난 돌맹이로 팔찌를 내리쳤다. 그 순간……. “오빠!” 퍼억-! “으아아! 내 손! 내 손목이 부러졌다! 으아아! 나 죽는다!” 난 부어오른 손목을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이건 절대 엄살이 아니다. 진짜 아파 죽을 것 같다. “아이고 나 죽네! 아파 죽겠네! 어머니 저 좀 살려주세요!” “라이가 치료해 줄게요. 힐링!” 아픔이 가신다. 라이는 치료를 해준 뒤 입으로 호호 불어 주었다. 착한 것 같으니라고.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와락 끌어 안았다. “라이가 이리도 나를 생각해 주다니.” “숨막혀요.” 내가 너무 꽉 끌어 안았나? 난 라이를 풀어 주었다. 라이는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 문득 드는 생각인데 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라이 때문이잖아. 라이가 갑자기 소리치지 않았으면 다칠 이유가 없었고, 다치지 않았으면 치료 받지 않아도 됐잖아. 결국 병 주고 약 주고였단 말인가? “그런데 나를 부른 이유가 뭐니?” “이 곳은 결계 안이잖아요. 이동 마법을 제대로 발동시키려면 밖으로 나가서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 ‘심심해서 불러봤어요’ 등등의 헛소리를 지껄였다면 몇 대 패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흠흠, 나도 알고 있었어. 너도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예?” 난 라이와 함께 동굴 밖으로 나왔다. 때는 마침 대낮이었다. 밤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난 이번에야 말로 팔찌를 부수기 위해 돌맹이를 높이 들었다. 그런데 차마 내리칠 수가 없었다. 혹시 이번에도 잘못 찍으면 어쩌지? 아까도 무지 아팠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아플까? “왜 안 부숴요?” “그게…… 빗나가면 아플 것 같아서.” “그럼 라이가 해줄게요.” “그럴래?” 난 라이에게 돌맹이를 넘겨 주었다. “잘못 치면 죽는다. 한 방에 잘 쳐라.” “예.” 라이가 웃는 모습을 보니 왠지 불안하다. 라이는 눈을 이상하게 빛내며 돌맹이를 치켜 들었다. 난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퍼억-! 뭐야? 박살 난 거야? “어랏! 실수로 손등을 찍었다!” 무어라? 난 눈을 떴다. 돌맹이의 뾰족한 끝이 내 손등을 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뜨아아아!” “이번엔 실수하지 않을게요.” 퍼억-! “커억!” 빠악-! “으아아! 내 손가락!” 빠각-! “내 팔꿈치!” 뿌직-! “으아! 내 손목!”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제대로 찍을게요.” 라이는 두 손으로 돌맹이를 움켜잡았다. 잔인하게 번지는 미소와 번뜩이는 눈빛. 마치 광기에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그 순간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엘프가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에잇! 부서져라!” “안 돼! 라이야 멈춰!” * * * * * 나는 살아 있는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아직 움직이려나? 움직인다! 난 아직 살아 있는 거야! 난 확신을 가지고 온 몸에 조금씩 힘을 불어 넣었다. “오빠, 일어나요!”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든다. 난 힘겹게 눈을 치켜 떴다. “라이야…….” “오빠!” 더 심하게 흔든다. 매우 심하게 흔든다. 골이 좌우로 흔들린다. 멀미가 난다. “그만 좀 흔들어!” 난 벌떡 일어났다. 팔을 들어 보니 팔찌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팔에 상처 역시 없었다. 난 획 고개를 돌려 라이를 째려 보았다. “헤헤~.” 라이는 봐달라는 의미로 웃음을 지었지만 그것이 끓어 오르는 나의 분노를 삭힐 수는 없었다. 일부러 빗맞춰 내리찍은 것이 분명해. 안 그러면 그렇게 여러번 실패할 수가 없어. 덕분에 아주 팔병신이 될뻔 했군. 빠드득~ 저절로 이가 갈렸지만 난 꾹 참았다. 나중에 한번에 몰아서 패주리. 아동학대라고 욕해도 좋아. 내 이 원한은 반드시 갚는다. 은혜는 쉽게 잊고, 원한은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 아이언스 공작의 인간성이라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 아무튼 지금은 참자. 난 화를 가라 앉히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주위는 매우 적막했다. 끝을 모를 정도로 높은 활엽수들과 여기저기로 뻗은 가지들. 크게 자란 가지와 잎들은 햇빛을 가려 숲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키 작은 나무들이 없는 거겠지. “이 곳은…….” “잊혀진 엘프의 숲이에요!” 나도 알아. 주위를 열심히 둘러 보아도 딱히 길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전부 길인 것 같고, 다르게 보면 전부 길인 것 같고. 이럴 경우에는 전문가에 묻는 것이 상책, 손바닥에 침을 뱉어 그 침이 튀기는 쪽으로 가는 것이 중책, 그냥 아무 곳으로나 가는 것이 하책이다. 물론 나는 상책을 택한다. “라이야.” “예, 오빠. 저 쪽이에요.” 동굴에서 길을 찾을 때는 드워프에게 묻고, 숲에서 길을 찾을 때는 엘프에게 물어라. 설마 라이가 숲에서도 길을 못 찾는 일은 없겠지? 라이는 자신있게 어딘가로 아장아장 걸어갔고, 나는 라이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한가득 쌓인 낙엽들이 나의 걸음을 방해한다. 물론 라이는 전혀 지장이 없다. 숲의 종족인 엘프가 그런 것들에 방해를 받을리 없지. 그나저나 이 지역의 나무들은 왜이리 큰 걸까? 수종(樹種)이 무지하게 좋은 건가? 아니면 환경에 영향 때문에? “이런 젠장!” 썩은 낙엽들이 물컹거리는 것이 마치 똥을 밟은 것 같다. 아, 불쾌해. 난 투덜거리며 라이의 뒤를 따랐다. 라이는 여전히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어린 아이다 보니 보폭도 그리 크지 않아 걷는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 라이의 걸음이 점점 빨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난 거의 달라다시피 하고 있었다. “야! 멈춰!” 라이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난 헥헥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왜 그러세요?” “히, 힘들어 죽겠어. 너 왜 그렇게 빨리 걸어? 누구 맘대로 빨리 걸어? 나한테 불만 있니?” “무슨 소리세요? 라이는 천천히 걸었어요. 라이는 착한 엘프여서 천천히 걸어요.” “…….” 착한 엘프인 것과 천천히 걷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아무튼 라이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저 짧은 다리로 빠르게 걸어봐야 얼마나 빠르겠냐? 설마 숲에서는 엘프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건가? 가속(加速)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만약 그게 아니라면 설마 축지법(縮地法)? “아무튼 천천히 걸어. 알았어?” “예.” 지친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이는 다시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정말 천천히, 뒤 따라 가는 내가 짜증날만큼 천천히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 나에 대한 반항심으로. 저걸 이 곳에 묻고 묘비를 세워?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자연과 동화 되고 싶니? 내가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라이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같이 가!” 황급히 쫓아갔지만 라이는 다시 저만치 앞서 갔다. 난 이상함을 느끼며 전력으로 달렸다. “같이 가, 라이야! 날 버리지 마!” 하지만 라이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순간 나는 내 주위에 짙은 안개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멍청하면 주위에 안개가 깔리는 것도 모를 수가 있냐고? 내 장담하건데 이 안개는 아까까지 없었다. 지금 방금 생겨난 거다. 그리고 라이는 마치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내 앞에서 사라졌다. 이 일련의 사태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가? “…….” 좀 어렵다는 거 나도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식으로 준비했다. 1번, 내가 미쳤다. 2번, 숲이 미쳤다. 3번, 세상이 미쳤다. 4번, 내가 마법에 걸렸다. 5번, 숲이 마법에 걸렸다. 6번, 세상이 마법에 걸렸다. 내 생각엔 분명 5번이야. 이 숲이 마법에 걸린 것이 분명해. 잊혀진 엘프의 숲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럼 난 지금 마법 결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건가? 마법 결계를 빠져 나가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이 결계의 파해법을 알아 마법 영향력을 피하던가, 결계를 친 사람보다 마법 능력이 뛰어나 결계 자체를 없애던가. 방법이야 쉽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어렵다.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하는 가? “라이야! 라이야!” 애타게 라이의 이름을 외쳐보았지만 나의 목소리는 안개 속에 파묻혔다. 갑자기 두려움이 온 몸을 엄습해 온다. 분명 나는 이 결계 속을 헤매다가 지쳐 죽거나, 굶어 죽겠지. 내가 죽고 나면 누가 내 무덤에 꽃을 놓아 줄까? 아니, 그건 둘째 치고라도 무덤이나 있을까? 분명 저 낙엽들과 함께 거름이 되겠지. 그리고 나무는 뿌리로 나를 빨아들여 성장하겠지. 나의 영혼은 정화되지 못하고 영원히 이 곳을 머물려 외롭게 소리치겠지. ‘라이야~.’ 불쌍한 내 영혼. 부를 이름이 없어 라이의 이름을 부르다니. 잠깐, 그런데 라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설마 라이도 나 같이 되는 건? “안 돼! 절대 그럴 수 없어! 비록 내가 이 곳에 뼈를 묻는 일이 있더라도 라이만은 반드시 구해야 해!” 난 이를 악물고 라이가 사라졌다고 짐작되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하지만 눈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라이를 찾는 일이 쉬울리 없었다. “라이야! 대답 해, 라이야!” 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라이의 이름을 외쳤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넘어지고, 부딪히고, 엎어졌지만 절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라이야!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라이야! 어디있는 거니, 라이야! 제발 대답 해!” 나의 외침은 짙은 안개 속에 묻혀 버렸다. 한참을 소리 지르자 목이 쉬었다. 난 아픈 목을 부여 잡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흑흑. 미안해, 라이야. 내가 너를 지켜줬어야 하는 건데. 으아앙! 미안해, 라이야! 내가 힘이 없어서 널 이런 곳에서 죽게 만들었구나! 죄 많은 날 용서하렴!” 불쌍한 것. 날 따라오지 않고 그냥 상아탑에 있었다면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며 헬로우 귀티와 행복하게 놀고 있을 텐데. 괜히 날 따라와 이런 삭막한 장소에서 죽음을 맞게 되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라이를 잘 살펴주지는 못할망정 위험으로 끌고 간 내가 죽일 놈이야! “흐흐흑. 우리 라이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라이 아직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데.” “울지 마세요, 오빠. 오빠가 울면 라이도 슬퍼져요.” 어디서 라이의 목소리가? 설마 환청인가? 아니면, 텔레파시? 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짙은 안개 사이로 어렴풋한 실루엣이 보였다. 상대의 주의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상대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회색 머리카락, 동글동글하고 통통한 얼굴, 동그란 눈과 자그마한 입술. “라이야!” 난 내 앞에 나타난 라이를 와락 끌어 안았다. “으아앙! 이 오빠가 니가 없어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어디 갔었어? 흑흑, 라이 없으면 난 어쩌라고? 나한텐 너 밖에 없는 거 잘 알면서. 라이, 미워!” “그, 그럼 라이 걱정 때문에 운 거에요?”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난 두 손으로 라이의 뺨을 붙잡고 잘 살펴 보았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어딜 봐도 라이가 맞다. 라이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엥, 라이는 오빠가 라이를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지 몰랐어요. 라이 너무 감동했어요. 라이 이제부터 오빠 말 잘 듣는 착한 엘프가 될게요. 우에에엥! 고마워요, 오빠!” “그래. 우리 이제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 라이야!” 우리는 그렇게 한 동안 포옹을 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내 옷은 라이의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난 옷 소매로 라이의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니?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라이는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걷다보니 갑자기 오빠가 안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오빠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거에요. 그 곳에서 오빠는 주저 앉아 울고 있었구요.” 그랬었군. 나는 라이를 토닥여 주었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일이 걱정이다. 이 곳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우리는 지금 마법 결계 안에 들어와 있어. 이제 어쩌면 좋니?” 나의 걱정어린 질문에 라이는 방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결계는 다른 종족에게만 해당하는 거니 엘프인 저는 아무 상관 없어요.” “뭐? 그럼 넌 어디로 가야 하는 지 알고 있어?” “예. 저 쪽이에요.” 라이는 생긋생긋 웃으며 한 쪽을 가리켰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난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그 동안 쓸모 없고 귀찮게만 느껴지던 라이가 이렇게 나에게 필요한 존재였다니. 세상에 쓸모 없은 인간이나, 엘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맞았어. 라이와 내의 만남은 운명. 만약 내가 라이와 같이 다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마워, 라이야. 그 동안 구박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너한테 잘 할게. “내 등에 엎혀.” “정말 그래도 되요?” “물론이지.” 라이는 내 등으로 폴짝 뛰어 올랐다. 우드득-! 허리가 삐걱거리는 것 정도야 뭐가 어떠하리. 내 옷에 또 오줌을 싼다해도 그 역시 어떠하리. “어느 쪽이니?” “저 쪽이에요!” 난 라이가 말한 ‘저 쪽’ 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내 앞으로 라이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리라. 내 라이의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해 라이를 보호하리라. 필요하다면 라이의 발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 그런데 인간적으로 너무 무겁다. 다이어트 좀 시켜볼까? 아니야, 이 조그만 몸에서 뺄 게 뭐가 있다고. “오빠 등에 엎히니까 라이는 너무 행복해요.” “하하하, 그러니?” 난 죽을 맛이다. 시간은 하염 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나 역시 그만큼 지쳐간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찌되었든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이 분명하다. 아까까지 사랑스럽던 라이가 내동댕이 치고 싶은 애물단지로 변한 걸 보면 말이다. 아, 허리 아파. 그렇다고 라이를 내려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짙은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서 라이를 잃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저 쪽이에요.” “저 쪽 맞니?” “예. 확실해요.” 라이가 적당히 아무 곳이나 가리키며 나를 뺑뺑이 돌리고 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드는 것은 왜일까? “힘들어요, 오빠?” “헥헥, 아니. 별로 안 힘들어. 그냥 죽을만큼 힘들 뿐이야.” “그럼 빨리 걸어요. 빨리 가서 맛있는 거 먹어요.” 내가 죽을만큼 힘든데도 넌 맛있는 거 타령이니? 얼마나 걸었을까? 자꾸 묻지 마라. 짜증난다. ‘얼마나 걸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 쉬지도 못하고 다시 한참을 걷다보니 안개가 점점 엷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지우개로 안개를 지우는 것 같다. 아니면, 조명 담당이 조도를 밝게 조절했을 수도 있고. 나는 걸음을 빨리 했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안개는 분명 엷어졌다. 안개가 걷히면서 약간이긴 하지만 시야가 확보 되었다. 어렴풋하게 나무들이 보인다.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군. 역시 사람은 눈 앞이 보여야 안심이 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난 희망을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 개미처럼 열심히, 진짜 아주아주 열심히 계속 걸어가니 어느 순간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그 곳을 빠져나온 것을 축하라도 하듯 뜨겁고 밝은 햇살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이제 빠져 나온 거니?” “예.” 난 라이를 땅에 내려 주었다. 라이는 아쉬워하긴 했지만 순순히 내려 왔다. 난 아픈 허리를 주무르며 하늘을 보았다. 따사로운 이 햇살. 아, 행복해! 날씨가 너무 좋아서 히로는 너무나 행복해요! “…….” 어째 내 말투가 라이를 닯아가는 것 같아 몹시 괴롭다. 드디어 라이와 동화가 시작된 건가? 그런데 라이는 왜 날 닮지 않는 거지? 만약 라이가 날 닮는다면……. “안 돼! 난 순수한 라이의 모습이 좋아!” 난 라이를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라이야.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넌 절대 변하면 안 돼. 지금의 순수한 동심을 지켜야 돼. 알았지?” 라이는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을 입에 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못 알아 들은 것이 분명하다. 세상이 널 속일지라도 너의 순수함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를. 너의 순수함은 내가 지켜주마. “그건 그렇고 여기는 왜 이 모양이냐?” 발을 스치는 풀들과 높게 자란 활엽수. 활엽수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이 아니라 다행히 일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앗! 저 맛있게 생긴 것은 사슴?” 나무 사이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녹용을 달고다니는 짐승.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작은 녹용을 달고 다니는 짐승 두 마리. 그리고 저 쪽에 보이는 것은 염소. 음메에~. 누가 염소 아니라고 할까봐 무서웠는지 울기까지 한다. 난 내 코를 간질이는 향긋한 풀내음을 한껏 들이 마셨다. 그 것들은 마치 자연의 향기라도 되는 것처럼 나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었다. 난 그대로 풀밭에 누웠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고, 구름이 저 먼 동쪽으로 흘러가고, 자연이 나를 반겨주니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 가? 세속에 찌든 때를 이 곳에서 벗고 환골탈태하여 자연을 벗삼아 이 곳에서 살아가리. “아! 행복해!” 나른한 오후. 힘든 몸을 쉬게 할겸 잠이나 한 숨 잤으면 좋겠다. 난 사지를 편하게 뻗고 눈을 감았다. 나의 오른쪽 팔에 무언가가 얹어 진다. 살짝 실눈을 뜨고 보니 라이가 내팔을 베고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도 피곤했나 보군. 라이는 그대로 두 팔로 나의 가슴을 꼭 끌어 안고 잠이 들었다. 새근새근~. 아무리 봐도 잠자는 모습은 완전 천사다. 세상에 아기 천사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겠지. 이 일이 끝나면 라이와 헤어져야 하나? 라이와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이젠 헤어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라이와 헤어지면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지? 라이가 없는 내 인생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난 라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볼을 만지작 거렸다. 그래. 절대 라이와 헤어질 수 없어. 일이 끝나는 데로 라이를 입양할 방법을 찾아봐야 겠다. 그래서 정말 내 딸처럼 키우는 거야. 아! 갑자기 책임감이 해일처럼 나를 덮친다. 최고로 예쁘게 키워주마! 나만 믿어, 라이야. “…….” 그런데 아빠는 내가 한다 치고, 엄마는 누가 하는 게 좋을까? 애가 딸려있으면 결혼하기도 힘들 텐데. * * * * * 생명수라 불리는 거목을 중심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잘 재련된 목재로 지어진 집은 대부분 단층, 혹은 이층으로 되어 있고 주위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자연 친화적으로 생겼다. 이 곳이 엘프의 마을인가? 난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이 곳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미녀들이 있는 걸까? 인간들 사이에서 엘프는 예로부터 미의 종족이라고까지 일컬어진다. 특출난 미녀가 많아서 그러냐고? 물론 그 이유도 배재할 수는 없다. 인간 중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를 보면 ‘엘프처럼 아름답다’ 라고 표현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모든 여자가 미녀라는 데에 있다. 생각해 보라. 인구 유동이 많은 대도시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어도 발견할 수 있는 미녀는 손으로 꼽을만 -엘프의 미를 기준으로 해서- 하다. 그런데 엘프의 마을에선 사방 천지에 미녀들이 깔렸다. 기혼녀, 미혼녀, 할머니 할 것 없어 전부 8등신에 쭉쭉빠진 미녀들이다. 심지어는 엘프들 사이에서 못 생겼다고 왕따 받는 엘프마저 기준치를 훌쩍 뛰어넘는 미모를 갖추고 있다. 내가 이런 곳에 오게 되다니! 아,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리는 구나. 안 돼! 눈물이 앞을 가리면 미녀들을 못 보잖아. 내 평생 언제 다시 이 곳에 와보겠냐? 그러니 지금 실컷 미녀들을 구경하자. 두근두근. 가만히 좀 있어라, 심장아. 아직 미녀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자는 거냐? 난 잠시 멈춰서서 호흡을 고르고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잠깐! 그런데 미녀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그냥 구경만하면 억울하잖아. 최소한 말이라도 붙여봐야지.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이런 날에는 춤을 추고 싶어지는 군요. 거기 서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들. 저랑 부르스 한판 땡겨보지 않을래요?’ 여자들의 반응이 눈에 훤하다. ‘꺄악! 치한이야! 변태야!’ 역시 외모에 있어 약간 부족한 -사실은 많이 부족한- 내가 쓰기에 이 방법은 너무 무리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아름다운 시구를 읊어 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야. 난 재빨리 머릿속에 그 동안 배운 시들을 떠올려 보았다. “…….” 생각해 보니 배운 게 없구나. 수업 시간에 잠만 잤는데 무슨 시를 어떻게 배워? 젠장.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배워놓는 건데. 역시 배워서 남주는 게 아니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 밖에. “뭐, 남이 쓴 시를 읊을 필요는 없지. 내가 직접 창작하면 되니까.” 그래. 원래 진정한 킹카는 예술적 감상 또한 뛰어나야 한다. 즉석 시 하나 정도는 가볍게 외워야 여자들이 줄줄 따르기 마련. 이번 기회에 나의 예술적 감성을 아름다운 시구로 승화시켜 주마. 나는 사랑을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는 방랑자. 기나 긴 여정 속에 나의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가네. 아아~ 어찌하여 내 인생은 이 모양, 이 꼴인가? 진짜 뭣 같은 인생 살기가 싫어진다. 하지만, 그러나, But, However 나는 아직 살아있다. I still alive! 그대들이여 내게로 오라. 아직 살아있는 내게로 오라. 아아~ 절대 주춤거리고, 머뭇거리지 말지어다. 넓은 내 가슴에 라이코처럼 날아와 라이처럼 안겨라! “…….” 아이씨, 갑자기 나 자신에게 화가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내가 예술적 감각마저 이리도 뛰어나니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어찌하여 조물주는 나에게 이리도 많은 능력을 불어 넣어 주었을까? 세상 남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잘나서 죄송합니다. 모든 면에서 잘난데다 겸손하기까지 하니 금상첨화로다! 정말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나랑 결혼하는 여자는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내 눈길 한번 받아보거나, 내 손을 한번 잡아 본 여자가 횡재한 건데 나와 결혼을 한다면 그건 정말 일생에 다시 없는 행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여자들에게는 불행이겠지. 죄책감이 라이가 폴짝 뛰어 내 등에 엎히듯 내 몸을 덥친다. 어쩌면 난 평생 결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그래. 한 여자와 결혼해 세상 모든 여자들을 불행하게 하느니, 힘 닿는껏 주위에 모든 여자들을 사랑해 주자. 그 것이야 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선(善)에 해당하는 일이겠지. 그럼 일단 이제부터 만나게 될 엘프들부터 사랑해주도록 하자. 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천천히 집들 사이를 걸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어째서 아무도 없는 거지?” 거리에 아무도 없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유령 마을처럼. 몸을 엄습해오는 불길한 느낌에 난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오른쪽 단층집 창문에 어렴풋한 실루엣이 보였다. 분명 인형(人形)이었다. 난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창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귀가 뾰족한 것이 엘프가 분명했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들! 여기 잘생긴 히로가 구경하러 왔어요! 어서 나와서 저의 잘생긴 얼굴을 구경하세요!”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진다. 난 재빨리 복장을 점검했다. 그리고 침을 발라 머리를 뒤로 넘겼다. 사람은 첫인상이 깔끔해야하는 법이니. 와아아-! 엄청난 함성과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며 수십명의 여자 엘프들이 뛰쳐나왔다. 그 순간 난 놀라 뒤로 자빠질뻔 했다. 내 주위에 모인 요자 엘프들은 8등신의 미녀가 아닌 5등신의 통통하고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라이와 비슷하게 생긴 어린 엘프들. 수십 명의 아이들은 내 주위를 빼곡히 둘러 싸고, 내 옷이나 손, 머리 등을 잡아 당겼다. 그들은 동시에 합창을 하듯 외쳤다. “맛있는 거 사주세요!” 난 눈을 번쩍 떴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종달새 한 마리가 지저귀며 날아간다. 그리고 그 뒤를 좀 이상하게 생긴 매가 쫓아간다. “야! 너 거기 서! 거기 안 서? 이런 젠장! 니가 지금 감히 이 시대의 유명한 영물 라이코스님을 무시하는 거냐?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영물이야! 어쭈 그래도 안 서? 종달새 주제에 안 선다 이거지? 너 잡히면 죽을 줄 알아!” 파닥파닥~ 하얀 깃털 하나가 나풀나풀 떨어진다. 난 손을 뻗어 떨어지는 깃털을 받았다. 다시 하늘을 보니 라이코스가 낄낄 웃으며 선회 비행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종달새는 라이코스의 발톱에 잡혀 있었다. “파하하! 그럼 그렇지! 감히 라이코스님의 먹이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달아나더니만 결국은 죽음으로서 그 죄를 값게 되는 구나. 아아~ 갑자기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내가 사냥 실력마저 이리도 뛰어나니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어찌하여 조물주는 나에게 이리도 많은 능력을 불어 넣어 주었을까? 세상 모든 매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애완 동물은 주인 성격을 닮는다더니 저 놈이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을까? 책임을 통감하는 바이다. 라이코스는 어딘가로 사라지자 난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려하였다. “우엥~.” 낮게 들려온 잠꼬대 소리는 라이의 것. 난 내 팔을 베고 자고 있는 라이를 보았다. 라이는 입가에 침을 흘리며 행복한 얼굴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난 라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라이의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 주었다. 라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방금 꿨던 꿈이 떠오른다. 그 것인 악몽일까? 악몽이라고 하기엔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다. 올망졸망한 것들이 모여서 ‘맛있는 거 사주세요!’ 라고 합창을 했는데 어찌 귀엽지 않겠는가? 하지만…… “8등신 미녀들은 대체 어딜가고, 그런 아이들 밖에 없단 말인가?” 정말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 “우웅~.” 라이는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거렸다. 난 흘러내린 라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라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니?” 라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난 약간 저린 팔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계를 보니 대략 1시간 반 정도 잔 것 같다. 이 것도 노숙에 속하긴 하지만 푹신한 풀밭을 침대 삼고, 푸른 하늘을 이불 삼아 자서 그런지 기분은 상쾌했다. 라이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흰색 원피스를 탁탁 털었다. 난 라이가 옷을 터는 것을 도와주며 물었다. “낮잠 자니까 행복하지?” 라이는 아침햇살처럼 방긋 웃었다. “예. 라이는 낮잠을 자서 너무너무 행복해요.”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며 웃는 모습. 라이의 이런 모습은 세속에 찌든 인간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옷을 바르게 정돈하던 라이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라이는 급히 원피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지 알겠군. “라이코스는 잠깐 놀러갔어. 금방 돌아올 거야.” 라이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정말이죠? 우리 이코가 라이를 버리고 도망친 거 아니죠?” 난 라이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 리가 있겠니? 라이코스는 너의 친군데. 아! 저기 라이코스가 돌아온다.” 때마침 라이코스가 날아와 라이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그제야 라이는 안심한 듯 웃음을 지었다. “어디 갔었어, 이코야? 라이가 걱정했잖아.” “미안해. 잠깐 배가 고파서 사냥을 좀 하느라고.” 난 라이코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종달새는 맛있게 먹었냐?” 라이코스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물론이지. 자식이 나에게 먹히는 것을 너무도 영광스럽게 생각해 조금 쑥스럽기까지 하더라.” “……퍽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했겠다.” 그나저나 나도 배고프군. 언제나 라이가 말하 듯 맛있는 것이 먹고 싶다. 꼬르륵~. 아니, 누구의 배가 감히 이런 참을성 없는 소리를? “라이 배고파요.” 라이가 배가 많이 고픈가 보군. “그래. 이제 엘프의 숲이 코 앞이니까 빨리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도록 하자.” “예.” 난 라이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엘프들이 사는 곳은 얼마나 더 가야 나오는 것일까?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라이는 귀를 쫑긋 세우며 나에게 물었다. 난 라이를 따라 귀를 세워봤지만 들리는 소리는 바람에 풀이 스치우는 소리 뿐. “잘 못들은 거 아니니?” “아니에요.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려요.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아요. 저기서요.” 엘프는 청각이 좋으니까 라이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 거다. 난 라이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하지만 옹기종기 모여있는 나무들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았다. 적인가? 난 허리에 걸려있는 청룡도를 꽉 움켜 쥐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괜찮아. 여기라면 아무도 없어.” “하지만…….” 정말로 말소리가 들린다. 난 숨을 죽이고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라이는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키스는 어른들만이 하는 거잖아.” “아니야, 루비. 키스는 사랑하는 엘프들끼리라면 어른, 애할 것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하, 하지만 나 무섭단 말이야.” “나도 떨려. 원래 처음할 땐 다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마. 전에 켈리가 말해줬는데 키스를 하면 기분이 굉장히 좋데. 그러니까 너는 눈만 감고 있으면 돼. 나머진 다 나에게 맡겨. 내가 기분 좋게 해줄테니.” “하, 하지만…….” 이게 무슨 소린가? 거목의 그늘에는 두 엘프가 앉아 있었다. 라이 정도 되어보이는 어린 엘프들로 여자 아이는 두 손을 꼭 붙잡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있고, 남자 아이는 여자 아이의 뺨을 붙잡고 입술을 쭉 내밀고 있었다. “이 어린 것들이 감히!” 가만히 지켜볼 수만 없던 나는 그들 앞에 짠~ 하고 나타났다. 그러자 키스를 하려던 남자 아이는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고, 여자 아이는 질끈 감았던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아무리 이 시대의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르고, 호적에 잉크도 안 마른 것들이 부모 몰래 으슥한 곳으로 와 키스를 하려 하다니. 이런 발랑 까진 것들 같으니라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여자아이는 옆에 있던 남자 아이를 덥썩 껴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그 것은 남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앙!” 둘은 마치 부모상을 치르는 듯 서로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뒤 따라온 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얘들 왜 울어요?” 옛 말에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와 여자는 일곱 살이 되면 자리도 같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전통 윤리적 사상이 입각하여 상당히 경직된 사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요즘 애들 일곱 살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다. 그런데 어찌 일곱 살이라고 안심하고 남녀를 붙여 놓을 수 있겠는가? 역시 옛말 틀린 것 없다. 옛 것은 무조건 낡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하여 배울 것은 배우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손 똑바로 못 들어!” 으슥한 장소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르려 했던 두 아이는 지금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자연적으로 손이 슬금슬금 밑으로 내려왔고, 난 주먹을 들어 올려 ‘손 내리면 주우거!’ 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내 살다살다 이런 꼴은 또 처음본다. 아직 젖비린내도 채 가시지 않은 꼬마들이 이런 으슥한 장소에서 키스를 하려 하다니! 만약 내가 이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쩔뻔 했어?” 남자 아이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야…….” 쾅-! 난 남자 아이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말했다. “당연 키스를 했겠지. 이런 싸가지 없는 놈들! 네 놈들은 키스가 어른들만의 전유물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냐? 대체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 이 모양이야!” 남자 아이는 맞은 게 억울한지 울상을 지으며 나를 째려 보았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던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 이, 이럴 수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네가 지금 나에게 대든 것이냐? 난 분노감을 참지 못해 청룡도를 빼들었다. “이 놈이 어디서 그따위 말버릇을 배웠어!? 니네집에서 그렇게 가리쳤냐? 어른을 공경하지는 못할망정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다니! 너 정말 조직의 쓴맛을 보고 싶냐!?” 시퍼런 칼날이 모습을 드러내자 두 어린 엘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난 손에 침을 묻힌 다음 허공에 청룡도를 휘둘렀다. “아자! 청룡도법 제 3식 청룡승천! 청룡도법 제 1식 청룡강림! 청룡도법 제 17식 청룡광섬!” 난 있지도 않은 기술 이름을 외치며, 말도 안 되는 않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물론 어린 아이들이 이를 일아챌리 없다. 아마도 저 아이들 눈에는 내가 무공의 고수로 보이지 않을까? 짝짝짝~! “너무 멋있어요, 오빠! 라이는 너무너무 감동했어요!” 그늘 안에 앉아 라이코스와 놀고 있던 라이는 나의 환상적인 도법(?)을 보고 입을 벌리며 박수를 쳤다. 난 마치 당연하다는 듯 피식 웃어보이고는 청룡도를 집어 넣었다. 내가 두 어린 엘프를 슬쩍 째려보자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번쩍 들었다. 후후후, 이제야 내가 얼마나 강력한 고수인지를 깨달은 모양이군. 난 라이의 옆에 걸터 앉아 두 아이가 벌서는 것을 감시했다. 시간은 하염 없이 흐른다. 시간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 인생이란 덧 없이 짧은 것.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늙어버리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시간이 흐를 수록 벌을 서는 두 어린 엘프는 힘들어 했다. 손이 슬금슬금 내려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인상을 쓰는 것을 보고는 다시 손을 올렸다.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가학적인 취미가 있는 변태라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행위를 계속 해야만 한다. 탈선의 길로 접어든 어린 엘프들을 바로 잡는 것을 어찌 주저하겠는가? 오늘 확실히 교육을 시켜 다시는 그런 부정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해주마. 저 조그마한 입술을 꼬매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여자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었다. 등이 가렵나? 내가 의문을 떠올리는 사이 여자 아이는 몸을 더욱 심하게 비틀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러니? 등이 가려워? 다리가 저려?” 여자 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흑흑, 화장실이 가고 싶어요!” “…….” 저런.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왜 몸을 배배꼬면서까지 참고 있었니? 아무튼 화장실을 보내줘야 하긴 할텐데 보내주기 전에 예의상 한가지 질문을 던져줘야 한다. “큰 거니, 작은 거니?” “으아아앙!” 저 울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난 의문을 느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여자 앤데 불쌍하잖아. “좋아. 그럼 저 쪽 가서 일 보고 와. 물론 나는 네가 이 기회를 틈타 몰래 도망가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라이를 붙여주도록 하마.” 여자 아이는 살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달려가는 속도를 보니 꽤나 급했나 보다. 라이는 그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도 화장실 가고 싶은데요.” “큰 거니, 작은 거니?” “작은 거요.”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금씩 싸서 말려.” “…….” 남자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투덜거렸다. 난 느긋하게 노래를 부르며 두 여자 아이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큰 일이 아니었는지 두 여자 아이는 금방 돌아왔다. 라이는 내 옆에 털썩 주저 앉았고, 여자 아이는 남자 아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들었다. “지금 내가 기분이 약간 좋아져 둘 중 한명만 일어나게 해주려는데 누가 일어날래?” 내 말에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는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잠시 여자 아이와 눈빛을 교환하던 남자 아이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저 비장한 표정! 저건 분명히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기가 희생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남자 아이는 비장한 각오가 감도는 표정을 굳혔다. 만약 ‘사랑하는 여자 아이를 위해 제가 희생하겠어요. 저는 어떻게 되도 좋으니 제가 사랑하는 이 아이만큼은 힘든 일을 겪게 하고 싶지않아요’ 등등의 헛소리를 지껄일 시에는 니들 둘 다 엎드려 뻗쳐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지. 난 원래 신파극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거든. 남자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제가 일어날게요.” “…….” 너무도 당혹스럽다. 아까까지 갖은 감언이설로 여자 아이를 꼬드겨 키스를 하려했던 남자 아이가 위기의 순간에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다니. 여자 아이는 나보다 백배 정도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난 당혹스러운 기분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야! 왜 니가 일어나?” 남자 아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루비가 사랑하는 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일어섰습니다.” 여자 아이는 눈을 크게 치켜 떴다. “내,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아까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그럼 설마 나보고 벌을 계속 서라고 할 생각이었니? 너 정말 나쁜 아이구나!” 이런 걸보고 우리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을 쓴다. 마치 내 어렸을 적 모습을 보는 것만 같군. 내가 어렸을 때 딱 저랬는데.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파하하! 너 정말 크게 될 놈이구나. 우리 동네에서 너 같은 아이를 신동(神童)이라고 부르지. 귀여운 것. 넌 분명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거야. 왜냐면 내가 어렸을 때 그렇게 살았거든.” 이 곳에서 이런 장래가 총망한 아이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너무도 기분이 좋다. 난 여자 아이를 보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너는 계속 벌을 서야 하겠지만 이 아이가 현명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둘 다 용서해 주도록 하겠다. 이런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것은 너의 크나큰 복이로다. 어서 일어나거라.” 여자 아이는 치마를 고르며, 팔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독기가 오른 눈으로 남자 아이를 노려 보았다. 남자 아이는 태연하게 웃으며 그 눈빛을 받아 넘겼다. 난 두 아이를 편하게 앉게 하고 나도 편하게 앉았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난 두 아이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일단 두 아이 모두 라이 정도의 외모로 귀엽게 생긴 엘프였다. 둘 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고, 머리카락색은 둘 다 갈색빛이 감도는 붉은색. 입고 있는 옷은 평범했다. 남자 아이는 초록색 긴바지에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갈색 조끼. 여자 아이는 수수한 흰색 원피스. “니들 둘 굉장히 닮아보인다.” “예. 저희는 사촌이거든요.” “사촌? 사촌이면 촌수가 네가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건데. 즉 외가건, 친가건 반드시 둘 중 한쪽의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같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근친? 설마 니들 둘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하고 있는 거니?” 라이는 내 팔을 톡톡 건드렸다. “엘프들은 근친혼도 상관 없어요. 일촌끼리도 결혼하고 그러는 걸요.” 일촌이면 아버지와 딸이나 어머니와 아들? “무슨 법 제도가 그러냐? 그러면 기형아가 많이 나올텐데.”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엘프들은 근친혼을 해도 유전적으로 별 문제가 없거든요.” 역시 엘프는 행복한 종족. 유전자가 강력해서 기형아도 안 나온덴다. 아, 나도 엘프로 태어났으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행복했을텐데. “그래. 그럼 이제 우리 통성명을 하도록 하자. 나이와 이름을 정확히 불도록.” 여자 아이는 아직 나를 경계하는 지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자 남자 아이가 당당하게 나섰다. “얘 이름은 루비고 나이는 60살이에요. 제 이름은 루고 나이는 55살. 저희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에요.” 어린 것들이 장래의 약속은 개뿔이. 나도 아직 짝이 없는데. 그나저나 어린 것이 능력도 좋다. 5살이나 연상의 여인을 꼬드기다니. 이제 우리쪽 소개를 할 차례. “나는 아이언스 히로라고 지금 한창 잘나가는 공작이야. 그리고 여기 이 아이의 이름은 라이로 직업은 마법사. 이렇게 어려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나이가 700살이 넘어. 그리고 라이가 품에 안고 있는 저 이상하게 생긴 것은 라이코스. 뭔지 궁금해할까봐 미리 말해주자면 매라고 할 수 있지. 뭐 본인은 자신이 영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두 엘프는 내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니들 왜 그러니?” 그들은 동시에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치며 외쳤다. “아앗! 귀가 없다!” “…….” 내가 귀가 없긴 왜 없어? 여기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있구만. 물론 이들이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난 저들에 비해 굉장히 작은 내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자신의 이름을 ‘루’라고 밝힌 남자 아이가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설마 인간?” 그러자 자신의 이름을 ‘루비’라고 밝힌 여자 아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뭐어? 말도 안 돼!” “아니야. 그때 할머니가 그러셨잖아. 인간은 귀가 작고 못생겼다고.” “…….” 그 말의 뜻은 내가 못생겼다는 뜻? 쾅- 쾅-! 난 두 아이의 머리를 한 대씩 쥐어 박아 주었다. “이 것들이 뚫린 입이라고 마구 지껄여? 내가 어딜 봐서 못생겼어? 나만큼 잘 생긴 사람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두 아이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인간은 빨리 죽는다던데.” “맞아. 수명이 엘프의 10분의 1도 안 된데. 저 사람도 생긴 건 저렇게 삭아보여도 나이는 얼마 안 될걸.” “그럼 우리보다도 어리다는 건가?” “아마 그럴 걸.” 설마 이 것들이 나이 많은 것을 빌미삼아 나한테 말을 놓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두 아이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입을 모아 말했다.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 만약 내가 지금 17살이라고 말한다면 이 어린 것들이 나를 우습게 볼 것이 틀림 없다. 나이를 조금 뻥튀기 하는 것이 좋겠지? “오빠의 나이는 열일곱…….” 난 라이의 입을 틀어 막고 당당히 외쳤다. “내 나이는 1700살이다.” 두 어린 엘프는 깜짝 놀랐다. “에엑! 1700살이요?” “그렇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인간이 1700살이나 살아요?” 물론 이런 질문이 나오리라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숨겨진 비화가 있단다. 사실 니들이 보기엔 내가 보통 인간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나는 무림에서 검의 황제, 즉 검황이라 불리는 최고 고수 중 한명이었단다. 내가 칼을 한번 휘두르면 바다가 갈리고, 산이 무너졌지. 내가 약관 20세의 나이에 무림을 떠돌아다니던 중에 어떤 여인을 만났지. 그녀는 무림 오화 중 으뜸이라 불리던 미녀였어. 나와 그녀는 찐한 사랑에 빠졌지. 하지만 그때 마침 1천년 정파연합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혈교의 교주가 부활한거야.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무림계를 공격하기 시작했지. 구파일방은 급히 연합을 결성해 그와 맞섰지만 그의 강대한 힘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어. 당시 난 무림을 떠나 편하게 살려고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혈교 교주의 악행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 그래서 난 그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물론 내가 사랑하던 그녀는 나를 말렸다. 제발 가지 말라고. 하지만 난 가야만 했어. 내가 가지 않으면 무림은 끝이니까. 난 울면서 애원하는 그녀를 잔인하게 뿌리치고 검 한자루를 들고 혈교로 혈교의 살수들을 처단하기 시작했어. 내가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무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한 목숨 바치기로 결심한 정파인들이 나의 명성과 깃발 아래 다시 뭉쳤지. 나는 그들을 이끌고 혈교로 처들어갔어. 그 싸움은 정말 치열했지.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룰 정도였으니. 난 수 많은 시체를 밝고 피의 강을 건너 혈교의 교주와 마주섰어.” 난 주위의 분위기에 이상함을 이끌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세 아이, 즉 루, 루비, 라이는 내 주위에 몰려 앉아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세 엘프는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난 마치 회상을 하듯 하늘을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혈교의 교주. 그의 별호는 혈존무적. 그래. 그는 그 명성에 결맞는 자였어. 온 몸을 붉은색 도포로 감싸고, 붉은색 가면을 쓴 그는 마치 피보라 같은 자색 연기를 내뿜고 있었어. 그 자색 연기에서는 짙은 죽음의 향기가 느껴졌지. 난 나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었어. 당장이라도 검을 버리고 주저 앉고 싶었지. 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검을 꽉 쥐고 그에게 외쳤어. ‘그대는 어찌하여 평화로운 무림에 피를 불러오는 가?’ 그러자 혈존무적은 마치 철판을 긁는 것 같은 기괴한 웃음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크크크. 네 놈은 대체 누구길래 본좌의 중원통합을 방해하느냐?’ 난 당장이라도 출수를 할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며 말했어. ‘본인은 검성이라 하오. 오늘 나는 그대와 동귀어진할 각오로 싸울 것이오.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내 이 미천한 한 목숨 죽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오.’ 그러자 그가 광소를 터트렸지. ‘크하하하! 어린 것이 잔말이 많구나. 본좌는 이미 혈마권법의 12성의 경지에 이루었다. 네 놈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는 말과 함께 출수를 했어. 그는 권법과 수조법의 대가였어. 난 그의 공격을 막기만도 바빴지. 그는 정말 대단했어.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나는 다섯 곳에 상처를 입고 말았지. 내장에도 부상을 입었는지 입에선 피가 울컥 솟아 올랐어. 난 목구멍까지 올라온 핏덩이를 삼키며 검을 휘둘렀지. 하지마 난 도저히 그를 당해낼 수 없었어. 결국 검을 놓지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린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난 나의 얘기를 경청하는 세 어린 엘프를 보았다. 그 중 두 소녀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그런데 라이코스는 졸고 있었다. 네 놈이 감히 본좌의 얘기를 들으며 졸다니! 더 이상 살기가 싫은게냐? 라이레얼한테 보내줄까? 비록 라이코스가 졸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청중들을 위해 계속 얘기를 진행한다. 단 한 엘프라도 내 얘기를 들어주는 엘프가 있다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혈교의 교주는 내 목에 연검을 들어댔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본좌의 수하로 들어와라. 그럼 네 놈에게 천하의 반을 주겠다.’ 난 코웃음을 치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어. 나는 명예를 아는 정파인이었거든. 그러자 그가 예의 그 웃음을 터트리며 한 쪽을 가리키더 군. 그 순간 난 눈 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어. 그가 가리킨 곳엔 내가 사랑하던 여인이 혈교의 장로들에 의해 잡혀있었던 거야. 그녀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지. ‘저는 죽어도 상관 없으니 끝까지 당신의 신념을 지키세요.’ 나는 그리할 수 없었어. 그녀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나에게 중요했으니까. 난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어. 비록 그것이 혈존무적의 개가 되는 것이라도. 나의 이런 결심을 알았는지 그녀는 자신의 혀를 깨물었어. 자결한거지. 그녀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이렇게 말했어. ‘저는 행복하답니다. 죽는 순간까지 당신을 볼 수 있어서. 그러니 슬퍼하지 마세요.’ 난 그녀의 입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절규했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 슬픔은 분노로 변하고, 분노는 허탈로 변한다. 그녀가 없는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 그 순간 나는 깨달은 거지. 검의 오의를 말이야. 나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어. 그리고 혈존무적에게 달려 들었지.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나는 검을 휘둘렀어. 그 순간만큼은 난 검과 하나였어. 혈존무적이 밀리기 시작하자 혈교의 아홉명의 장로들이 일제히 그를 돕기 시작했어. 십 대 일의 불합리한 싸움이었지. 게다가 그들은 혈존무적을 중심으로 진세를 펼쳤어. 난 수 없이 변화하는 진 안에서 그들의 공격을 전부 받아내야 했지. 하지만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른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어. 반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진이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어. 난 한 순간의 빈틈을 노리고 진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지. 그리고 그 동안 아껴두었던 진짜 모든 것을 초월할만한 필살기, 일명 진초필살기를 썼지. 그 기술 이름은 경천동지. 그 것은 정말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만한 위대한 진초필살기였어. 그 한 방에 혈교의 장로들은 전부 뼈와 살이 분리 되었지. 그리고 혈교의 교주는 심각한 내상을 입고 쓰러졌어. 난 검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지. 그의 내상은 이미 살아남기 힘들 정도였어. 설사 천운을 입어 살아난다 해도 모든 내공을 잃겠지. 난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댔어. 그러자 그가 갑자기 광천대소를 하더군. 난 그에게 물었지. ‘왜 웃는 거지?’ 그러자 그가 대답하더군. ‘크크크, 본좌가 네 놈의 손에 죽을 줄이야. 본좌가 누군지 아느냐?’ 난 고개를 저었지. 혈존무적은 언제나 붉은 가면을 쓰고 다니기에 그의 정체는 아무도 몰랐거든. 그러자 그가 말하더군. ‘내가 니 애비다.’ 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어. 나의 아버지는 예전에 혈교 조사단에 파견 나갔다가 혈교 살수들에게 죽었거든. 난 그의 가면을 벗겼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나타난 얼굴은 분명 나의 아버지였어. 나중에 알아보니 아버지는 혈교의 행방을 추적하던 중 혈교 살수들의 공격을 받아 절벽 밑으로 떨어진거야. 언제나 그렇데 그 절벽 밑에는 이상한 무공이 적혀 있었어. 그 무공은 혈마권법. 그곳은 1천년 전 정파연합과 혈존무적이 싸운 곳이었어. 혈존무적은 그곳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중 벽에 자신의 무공을 기록해 놓고 내단을 토해냈던 거지. 후에 이 곳을 발견한 누군가가 이 무공을 익혀 자신의 복수를 대신 해주길 바라며. 무림인이었던 아버지는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그 금지된 무공을 익히고 말았어. 물론 내단도 먹었지. 그리고 이성을 잃고 제 2의 혈존무적이 되어 무림을 피바다로 물들인 거야. 나의 아버지는 마지막 힘을 짜내 다시 말했지. ‘내가 니 애비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 하셨지. 난 믿을 수가 없었어. 혈존무적이 내 아버지였다니. 그리고 내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였다니. 난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 못하고,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림을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갔어. 그 곳에서 나는 몇 년간 잔인한 운명을 저주하며 지냈지. 하지만 결국 그 또한 부질 없는 짓임을 깨달았어. 그 후로 난 모든 것을 잊고 무공수련에 정진했지. 그러자 내 몸에 변화가 생기더군. 그 것은 환골탈태. 난 수 많은 무림인들이 소망하는 환골탈태는 수 백, 수 천번이나 했지. 그러자 이렇게 젊어지더군. 환골탈태는 미용에도 좋거든. 아무튼 내가 1700살인데도 이렇게 어려 보이는 이유는 환골탈태를 해서 그렇단다. 이젠 이해하니?” 아무 대답이 없다. 난 아이들을 내려 보았다. “흑흑~.” 세 아이는 서로를 끌어 안고 울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얘기가 너무나도 리얼하고 슬펐나 보다. 그런데 내 눈에선 왜 눈물이 흐르는 걸까? 흑흑, 사랑하는 여인과 아버지를 잃은 내가 너무 불쌍해. 어쩌면 좋아? 혈존무적이 내 아버지였다니.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이런 잔인한 운명을 저에게 주셨습니까? 나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잠시 기다리자 라이가 훌쩍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야기에는 검성이라고 하셨는데 왜 청룡도법을 쓰시는 거예요?” “…….” 그런 소소한 부분까지 태클을 걸고 넘어지다니. 역시 독자의 비평은 무섭다는 건가? “흠흠, 그건 말이지 내가 후에 도법도 익혔거든. 검만 익히자니 너무 지루해서 말이야. 하하하~.” 뭐야, 그 불신이 가득한 표정은? 난 인상을 쓰며 청룡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외쳤다. “아자! 청룡도법 제 4식 청룡광천! 청룡도법 제 7식 청룡섬멸! 청룡도법 제 15식 청룡운무! 이래도 못 믿겠냐? 쓴맛을 봐야만 믿겠어? 네가 감히 혈존무적마저 물리친 본좌를 우습게 보는 거냐?” “아, 아니에요. 라이는 오빠 믿어요. 오빠도 라이가 오빠를 믿는다는 것을 믿어주실 거죠?” 훗~ 그럼 그렇지. 나의 화려한 도법을 보고 믿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난 청룡도를 집어 넣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아이에게 말했다. “니 이름이 루고, 니 이름이 루비라고?” “예.” “예.” 난 두 아이를 번걸아 가며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거 혹시 왕의 아내가 왕비인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니?” “…….” “…….” 없음 말구. 그럼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할 차례군. “니들 마을이 어딨니?” “저 쪽이요.” “얼마나 걸려?” “한 20분 정도 걸려요.” 멀리도 왔다. 겨우 키스하려고 여자애를 여기까지 데려온 거니? 너 혹시 진도를 좀 더 나가려고 했던 거 아니야? “그럼 마을로 가도록 하자.” “예? 아니 우리 마을에는 무슨 일로요?” 쾅-! 난 머리를 감싸쥐는 루에게 말했다. “조그만 게 자꾸 말대꾸야.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할 것이지.” “하지만 할머니가 인간은 위험하다고 했단 말이에요.” “너 진정한 위험이 뭔지 알고 싶니? 아자! 청룡도법 제 8식 청룡…….” “알았어요. 안내해 드리면 되잖아요.” 진작 그럴 것이지. 루와 루비는 앞장 서서 걸었다. 난 라이의 손을 잡고 두 아이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면 미녀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너무도 가볍다. 날아갈 것만 같아! 그런데…… “흑흑! 사랑하는 여인을 읽고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여야 했던 내가 너무 불쌍해. 검성이면 뭐해? 사랑하는 여인 하나 못 지키는데. 내 이제 다시는 무림으로 돌아가지 않으련다!” “맞아요, 오빠! 무림으로 돌아가지 마세요.” “아아! 하지만 세상은 나를 원하고 있으니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나의 절규는 허공을 쓸쓸하게 맴돌았다. 그 사이 루와 루비는 저만치 뛰어 가고 있었다. “얘들아 같이 가!” 인형 같이 귀여운 아이들이 발랄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루와 루비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걸었다. 비록 나의 방해로 인해 저들은 오늘 키스를 하지 못하였지만 하는 꼴을 보아하니 조만간 진하게 한번 할 것 같다. 물론 부모님 몰래 으슥한 곳에서. 조숙한 것들 같으니라고. 내가 저 나이 때만 해도…… 물론 내 나이는 현재 열일곱. 저 나이 되려면 한참 남았다. 으음. 나도 이들에 비하자면 영계 축에 속하는데 왜 이리 삭아 보이는 걸까? 젊어지고 싶어. 라이는 자꾸만 업어 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난 그 눈빛을 애써 무시했다. 업어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내가 허리가 좋지 않으니 어찌하겠는 가? “여기가 우리 마을이에요.” 루와 루비는 마을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척 보니 엘프들의 마을처럼 생겼다. 숲 한 가운데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집들 사이에 울창한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봐서 나무를 싹 밀어내고 집을 세운 것이 아니라 나무들 사이에 적당히 세운 것 같다. 그래도 어느 정도 자르긴 잘랐겠지. 집을 지은 목재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테니. 집들은 숲과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숲 안이 집이 세워진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난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마을의 모습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기 집값 비싸겠다.” 루와 루비는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내가 그 뒤를 따르는데 뭔가 허전하다. 뒤를 돌아보니 라이가 제자리에 서서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난 라이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니?” 라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저 안 들어가면 안 되나요?” 뜻 밖의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왜?” 라이는 발로 땅을 벅벅 긁었다. “그냥 조금 그래서요.” 난 라이의 태도를 통해 라이의 마음을 대충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라이는 엘프다. 하지만 라이는 어렸을 때 엘프의 마을을 뛰쳐 나와 인간 세상에서 너무나 오래살았다. 그렇기에 엘프의 마을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갖는 것 같다. 난 라이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라이코스를 들어 라이의 주머니에 집어 넣은 다음,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너의 곁에는 이 오빠가 있잖아. 오빠를 믿고 따라오렴.” “그래도…….” 아무래도 보통 설득으로는 힘들 것 같다. 난 라이를 살짝 안았다. 그리고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라이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우리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니?” 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요.” “독자들은 우리를 운명 공동체라 부른단다. 운명 공동체가 무슨 뜻인지는 아니?” 도리도리. “모르겠어요.” 라이는 왜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을까? “운명 공동체란…….”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거지? 말문이 막히자 라이는 더욱 궁금하다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난 어떻게든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말을 이었다. “공동 운명체를 말하는 거야.” 대답을 하고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강렬하게 든다. 예상대로 라이는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그럼 공동 운명체는 뭐예요?” “으음, 그러니까 그건 말이지…… 그냥 어른이 말하면 그런 줄 알아! 어디서 버릇없게 꼬치꼬치 캐묻고 있어!” 내가 갑작스럽게 화를 내자 라이는 겁을 먹은 듯 울상을 지었다. 난 괜히 큰소리 친 게 미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일로 나의 위신을 떨어트릴 수는 없지. “어찌되었든 우리는 같이 가야 해. 알겠어?” “……예.” 어찌되었던 억지로라도 라이가 납득한 것 같자 난 출발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라이가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독자는 뭐예요?” “…….” 자꾸 나한테 묻지 마라. 내가 책 밖의 일을 어찌 알겠니? “왜 안 오세요?” “간다!” 난 루에게 소리 치고는 라이와 함께 마을 안으로 달려갔다. * * * * * * * 루와 루비의 안내로 나와 라이는 마을에서 가장 큰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으로 안내를 끝마친 둘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 집은 마을의 우두머리, 즉 촌장이 사는 집이었다. 촌장 가족은 촌장, 아내, 딸, 또 딸, 그리고 딸 하나를 더 추가 해서 다섯 명이었다. 나와 라이는 그들이 마련해준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촌장과 그의 아내는 우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촌장의 딸들이 과일주를 내오자 촌장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로 인간이 이 곳에 들어온 건가?” 점잖은 물음이었지만 촌장의 표정에는 볼쾌함이 가득했다. 그는 마치 백인이 흑인을 대하듯, 우리 나라 -한국- 사람이 동남아시아 노동자를 대하듯 행동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깔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엘프가 인간보다 우월한 종족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사실 뭐 틀린 인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쁘다. 누군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인간으로 태어났냐? 기분 나쁘긴 하지만 어쩌겠냐? 아쉬운 내가 참아야지. “이렇게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을로 들어와 죄송합니다.” 촌장과 그의 부인. 말이 좋아서 촌장이지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꽃미남이었다. 그의 부인 역시 20대 중반 정도의 꽃미녀. ‘이 곳에서는 외모로 촌장을 뽑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구인가? 어찌하여 인간이 엘프의 자식을 데리고 있는 건가? 만약 납치를 했다거나, 노예로 사들였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이 곳에서 살아서 나갈 생각하는 하지 말게.” 난 인상을 찡그렸다. “절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제가 이런 어린 아이나 밝히는 변태로 보이십니까? 그리고 이 아이가 이렇게 어리게 보이지만 사실은 나이가 700살이 넘는 연륜 있는 엘프입니다.” 내 말을 들은 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인간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딴 거짓말을 지껄인단 말이냐?” 촌장의 호통에 나는 물론이고 세 딸과 아내 역시 깜짝 놀랐다. 놀라지 않은 엘프는 오직 라이 하나. 라이는 이 와중에도 과일주를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난 라이의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니 소개나 한번 해주렴.” “예.” 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정리했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라이에요. 진짜 이름은 라이미안인데 모두가 라이라고 불러요. 상아탑의 주인이고, 친구로는 이코와 귀티가 있어요. 이코는 라이코스고 귀티는 헬로우 귀티에요. 으음, 그리고…… 지금은 오빠를 따라 여행 중이에요. 오빠가 라이한테 잘해주셔서 라이는 너무나 행복해요.” 방긋방긋~. 저런 웃음은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웃음이다. 라이의 천진난만함과 순진무구함에 놀란 촌장 일당(?)들은 잠시 기가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 상아탑의 주인이라면 마법사 길드의 수장?” 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을 끝낸 라이는 앉았다. 의자가 아닌 내 무릎 위에. 귀여운 것 같으니라고. 나와의 친밀감을 저 엘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런 방법을 택한 거냐? 난 라이가 편하게 자세를 잡도록 무릎을 쭉 피고 라이의 몸을 끌어 안았다. 촌장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잠시 실례한 것 같군. 상아탑의 주인이 그렇게 따르는 것을 보면 나쁜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예, 맞아요. 전 착한 인간이에요. 나쁜 인간이라면 보통 사일런스 지니나 노처녀 같은 인가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저 같이 순진무구한 청년은 착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 초등학교 다닐때 선행상 받은 적도 있어요.” 분위기가 조금 훈훈해지자 난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경계를 완전히 푼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어딜가나 미움 받는 종족. 너무 억울해. 누군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나도 기왕이면 엘프로 태어나고 싶었어. “그런데 무슨 일로 이 곳에 온 건가? 아니, 어떻게 이 곳으로 왔는지부터 물어야 겠군. 설마 적색 산맥을 넘어 온 건가?” “예.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허락을 맞고 온 거니까. 제가 이 곳에 온 진짜 목적은…….” “잠깐.” 촌장은 말허리를 끊으며 손을 뻗었다. “오늘은 날이 너무 늦은 것 같으니 내일 계속 얘기하도록 하지. 일단 저녁이나 먹는 것이 좋겠군.”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라이는 박수를 쳤다. “와아~ 맛있는 거 먹는 거에요?” 세 번 사양은 예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주책 없이 굴다니. 하지만 나도 배가 고프기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촌장이 손짓을 하자 음식이 줄줄이 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끊겼다. 탁자 위에 올려진 것은 겨우 과일 몇 개. “이게 다는 아니겠죠?” “그게 다네.” “손님이 왔는데 이것 밖에 내오는 것이 없습니까?” “불청객일 경우에만 그렇지. 그리고 늦은 시간에 과식하는 것은 좋지 않네. 다음날 거울을 보고 후회할테니까.” “…….” 저런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식이요법을 하고 있었던 건가? 역시 아무리 엘프라고 해도 몸매 관리는 하는 구나. 내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라이는 과일을 열심히 씹어 먹고 있었다. 아삭아삭~. “오빠 이 과일 정말 맛있어요!” 난 소매로 라이의 입가에 흘러내린 과일즙을 닦아 주었다. 그래. 많이 먹어라. 많이 먹어야 쑥쑥 크지. 난 내 몫의 과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긴 맛있다. 이건 대체 무슨 과일일까? 누리끼리한 색상에 길쭉한 형태. 그리고 시큼하고 단 맛. 내가 다시 한입 먹으려는데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난 슬쩍 눈을 돌려 보았다. 라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아니, 정확히는 내 손에 들린 과일을 보고 있었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입만 주세요.’ 나도 먹고 싶은데. 하지만 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라이에게 건내 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맛있게 먹었다. 내가 먹는 것보다 라이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흐뭇해. 이런 게 부모의 마음일까? 우리는 순식간에 저녁 식사를 마쳤다. 라이는 양이 많이 모자른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내가 달래주자 곧 얌전해 졌다. “그럼 이제 그만 자도록 하지. 밤이 되면 자는 것이 자연의 섭리니 말이야.”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촌장의 아내는 라이를 데리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난 촌장에게 물었다. “전 어디서 자면 되나요?” “이 곳에 그대가 잘만한 곳은 없네. 같이 온 엘프는 우리가 보살피도록 할테니 그대는 밖에서 자게. 날이 밝으면 집으로 찾아오고.” “예!? 아니 그럼 저보고 노숙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잘 알아들었군.” 이럴 수가. 엘프가 이래도 되는 거야? 설마 내가 인간이어서 그런 거야? 내가 인간이어서 날 미워하는 거야? “이 추운날 저보고 어찌 밖에서 자라고…….” “그럴 줄 알고 모포까지 준비해 뒀네.” 촌장은 모포를 내 가슴에 안겨주고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나를 밀어냈다. 하지만 순순히 밖으로 나갈 내가 아니다. “이러는 경우가 세상에 어딨습니까? 멀쩡한 집을 놔두고 밖에서 자라니요? 웬만하시면 그냥 재워주시죠.”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네. 하지만 방이 없는데 어쩌겠나? 같이 온 엘프야 딸의 방에서 재운다 해도 그대는…….” 딸의 방? 딸이면 아까 그 미녀들? “저도 거기서 자면 됩니다!” “…….” 촌장은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 문밖으로 밀어냈다. 잠깐 방심한 사이 몸이 문밖으로 나가게 되자 촌장은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껐다. 가슴에 모포를 안은 나는 나를 스쳐가는 싸늘한 바람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젠장! 누구는 재워주고 누구는 쫓아내는 게 어딨어? 나도 댁의 딸들 방에서 재워줘. 이 추운 곳에서 어찌 모포 하나에 의지해 잠을 잔단 말인가? 어디 불 피울 많나 곳 없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입고 있는 망토가 체온을 조절해준다는 것. 적어도 얼어죽을 염려는 안 해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집 놔두고 길거리에서 자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난 모포를 꼭 끌어 안고 잘만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명당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들 눈에 잘 띄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거목의 그루터기. 난 그 곳에 모포를 잘 깔았다. 그리고 밸트에서 칼을 풀고 그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검은 하늘을 수 놓고 있는 별이 보인다. “흑흑.”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지금 나의 신세가 너무도 처량했다. 단순히 밖으로 쫓겨나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내가 이제까지 겪은 일, 그리고 앞으로 겪어야할 일들이 너무 파란만장하여 내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알 수 없는 미래. 그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어지는 결말. 나는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모든 일이 끝나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애초부터 나는 이 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인간이니까. 아~ 인생무상이로다. 나는 본래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을 운명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곳에 와서 생고생이란 말인가? 난 이를 악물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남자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되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부끄럽잖아. 그리고 결정적을 중요한 것은 나 같이 안 생긴 남자가 울어봐야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샤일런스 지니 같은 꽃미남이나 라이레얼, 세레나, 루시아 등등의 예쁜 여자, 혹은 라이 같으 귀여운 아이가 울면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하고 같이 슬퍼해 주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돌이나 안 던지면 그저 다행이지. 난 이 비참한 상황을 잊기 위해서라도 빨리 잠이 들고 싶었다. 그래서 몸을 편안하게 하고 눈을 감았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시간은 하염 없이 흐른다. 얼마나 흘렀을까? “양 구천구백구십구 마리, 양 일만 마리, 양 일만일 마리…….” 양이 무려 일만이 넘는 대군을 결성했을 때쯤 내 귀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무슨 일인가 싶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청룡도를 집어 들었다. “아이씨, 루비는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날씨도 추운데.” 나에게서 약 5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엘프는 루. 루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늦은 밤. 어린 아이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그런데 저 어린 아이는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나온 것일까? 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리자 또 다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에게 쪼르르 달려와 속삭이는 엘프는 아마도 루비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미안. 부모님 몰래 빠져나오느라고.” 루는 루비의 손을 꼭 붙잡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난 재빨리 나무 뒤로 숨었다. 다시 얼굴을 내밀어 보니 두 아이는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난 추적술의 일인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의 뒤를 캐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기에 들키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라 붙을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둘은 호숫가 지역에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두 아이의 뜨거운 숨소리가 나의 귀를 때렸다. “아까 이상한 인간 때문에 못한 거 마저하자.” “꼭 해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그 인간이 말하길 키스는 어른들만 하는 거랬잖아.” “어른들이 키스를 하는 게 아니라, 키스를 하면 어른이 되는 거야.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자, 어서 눈을 감아.” “아, 알았어.” 두 아이의 대화를 엿들은 나는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조상 중에 키스 못해서 환장한 귀신이라도 있었나? 이 추운 날씨에 잠도 못 자고 나와 키스를 하려하다니. 나 같으면 그냥 안 하고 만다. 그럼 나는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이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얘들을 응원해줘? 아니면, 당장 뜯어 말려? 나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루와 루비의 입술 사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에라, 모르겠다. “동작 그만!” 난 청룡도를 뽑으며 두 아이에게 달려 들었다. 원래 내가 남 잘되는 꼴은 못 보는 성격이기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덤으로 어린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 주기 위해서. 아직 젖살도 안 빠진 것들이 키스는 무슨 키스야? 집에 가서 엄마 젖이나 먹어야지. 루는 갑작스레 나타난 나를 보고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다. “여긴 또 어쩐 일이세요?” 내가 나타난 것이 굉장히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나 같아도 반갑지 않긴 하겠다만 그래도 니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 없지. “본좌가 아까 분명 경고를 했거늘 감히 또 이런 짓을 저지르려 하다니! 경을 쳐도 모자랄 놈 같으니라고! 내 오늘 하늘을 대신해 네 놈을 벌하겠다! 그리고 너!” 루비는 깜짝 놀라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예? 저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보기엔 너도 문제가 있어. 싫으면 싫다고 딱 부러지게 거절을 할 것이지 대체 그 수동적이면서도 은근히 요구하는 듯한 모습은 뭐야? 혹시 니가 유혹한 거 아니야?” 내 말에 루비는 깜짝 놀라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아니에요. 저는 그냥 루가 하자는 데로 했을 뿐이에요. 저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전부 루가 잘못한 거예요.” “야,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니가 어제부터 키스하면 무슨 기분인지 알고 싶다며 나를 꼬드겼잖아. 그런데 이렇게 나오는 게 어딨어?” “으아아앙! 전 아무 것도 몰라요!”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히 알 것 같다. 일단 여자 아이가 은근히 키스를 하자는 제스처를 내보였을 것이다. 평소부터 흑심을 품고 있던 남자 아이는 당연 눈이 뒤집혀 달려 들었을 테고. 그리고 지금과 같이 걸리니까 뒤로 내빼는 것이다. 여자는 인간, 엘프 할 것 없이 전부 여우. 그리고 남자는 인간, 엘프 할 것 없이 전부 늑대. 루비는 울면서 자꾸만 내 눈치를 보았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는 잘못이 없으니 벌을 주려거든 루한테만 주세요.’ 귀엽게 생긴 것이 이리도 영약할 줄이야. 난 루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 “여자의 실체를 본 느낌이 어때?” 루는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난 그런 루의 어깨를 힘차게 두들겼다. “걱정하지 마, 임마.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아. 잘 돌아다니다보면 착한 여자도 만날 수 있을 거야.” 난 한숨을 쉬고 있는 루와 울고 있는 루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감히 내 경고를 무시한 것에 대한 벌은 받아야겠지?” “키스. 서로 입을 맞추는 행위. 어찌보면 단순한 신체 접촉에 지나지 않지만 그 행위에 담긴 의미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지. 옛날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키스를 ‘마음을 빼앗는 가장 힘세고 위대한 도둑’ 이라 정의를 내린 바 있고, 플라톤은 ‘키스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의 경험’이라 정의 내렸었지. 그리고 이 시대의 위대한 마법사 아이언스 히로는 ‘끝내주는 기쁨’ 이란 간략하고 함축적인 문장으로 키스의 황홀함을 완벽히 묘사해 냈다는 찬사를 들었지. 대부분의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에서 황홀함을 느끼고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단다. 키스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입술에 하는 키스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당신을 깊이 사랑한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입술 키스는 종류만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 테크닉의 현람함은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 정도야. 대표적인 예로 프렌치 키스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면…….” 난 잠시 말을 멈추고 시계를 보았다. 20분 지났군. 루와 루비는 서로를 끌어 안은 채 열심히 입술을 부비고 있었다. 그 것이 내가 그들에게 내린 벌이었다. ‘지금부터 키스를 하되 내 허락 없이 입술 떼면 죽을 줄 알아!’ 남녀의 사랑이란 물 흐르는 것과 같은 것. 사람의 힘으로 어찌 그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키스를 하고 싶다는데 내가 뜯어 말려 봐야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서 난 둘의 입술 접촉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기왕 하는 거 화끈하게 하라고 감시 중이다. 두 아이는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그 눈은 아까부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떼면 안 돼요? 얘 입냄새가 너무 심해요!’ 입냄새가 심한 걸 내가 어쩌겠냐? 그냥 니들의 사랑으로 극복해야지. “좀 더 진하게 하렴, 얘들아.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키스를 하는데 좀 더 열심히 최선을 다 해야지. 입술이 부르트고, 앞 이빨이 쏙 빠질 때까지 계속해.” 다시 시간이 흐른다. 내가 ‘잠은 안 자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루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루비를 밀쳐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저 얘랑 더 이상 못하겠어요. 입냄새가 너무 심해요.” “뭐어? 너 여자한테 그게 무슨 실례되는 말이야?” 짜악-! 루비는 루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코웃음을 치고는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갔다. 아마도 집으로 돌아간 것 같다. 난 루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빠악-! “왜 때려요?”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첫 키스의 감상이 겨우 그 따위냐? 넌 맞아도 할 말 없어, 임마.” 루는 투덜거리며 뒤통수와 뺨을 문질렀다. 난 그런 루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어땠어? 루비랑 키스하니까 좋았어? 왜 말이 없어? 그렇게 기대하더니만.” “자꾸 말 시키지 마세요.” 이 녀석 정말 싸가지가 없다. 보면 볼 수록 내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이제 밤도 늦었고, 소원도 성취하였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렴. 그런데 집에 몇 식구나 사니?” “전 할머니랑 단 둘이 살아요.” “할머니랑? 부모님은 어디가셨는데?” “부모님은 두 분 다 다른 살림 차려서 집을 나갔어요.” “…….” 위로해 줘야 하나? 하지만 그러기엔 루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했다. 엘프는 긴 젊음을 누리는 종족. 그리고 강력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 기형아도 안 생긴다는 종족.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 어찌 죄가 되겠는가! “그럼 너희 집으로 가자. 내가 바래다 줄게.” 루비도 바래다 주지 않은 내가 왜 루를 바래다 주려하는 지 많은 독자들이 의문을 가질 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저 루가 집에 가는 길에 위험을 맞닥드리지 않도록 도움을 줄 생각이지 은근슬쩍 루의 집에 들어가 잠을 자려는 생각 따위는 절대 없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루는 맞은 부위를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뭐라고 궁시렁거렸다. 난 그런 루의 뒤통수를 다시 후려 갈겼다. 빠악-! “그만 좀 궁시렁거리고 걷는데 열중 하렴.” “아, 왜 자꾸 때려요? 제 머리가 동네 북인 줄 아십니까? 자꾸 때리시면 저도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이 조그마한 녀석이 제법 성깔이 있네. 빠악-! “니가 가만 있지 않으면 어쩔거냐?” “아이씨! 아무튼 때리지 좀 마세요. 당신도 뒤통수 맞으면 기분 나쁠 거 아닙니까?” 빠악-! “당신? 앞으로 형님이라고 불러라.” “아이씨…….” 내가 장담하건데 저 ‘씨’ 다음에 생략된 말은 분명 ‘발’ 일 거다. 합쳐서 ‘씨발’. 이런 쌍놈 새끼가 어디서 쌍소리를! 내가 다시 루의 뒤통수를 때리려는 찰나 루가 걸음을 멈추었다. “뭐야? 왜 걷다가 마냐?” “다 왔어요.” 아담하게 지어진 단층집. 루는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난 은근슬쩍 따라 들어갔다. “어디 갔다 왔니?” “호숫가에요.” 한 여인이 거실에 다소곳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등 뒤로 넘긴 아름다운 엘프 여인. 인간으로 따지면 20대 후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그녀는 낙엽을 책 사이에 끼워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는 약 175 정도로 늘쓴한 미녀. 입고 있는 옷은 빛이 바랜 회색 원피스. 난 루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미녀는 누구냐? 혹시 니네 누나?” “뭔 소릴 하시는 거예요? 이 분은 제 할머니에요.” “…….” 할머니란다. 저 미녀가 루의 아버지의 어머니란다. 루의 할머니는 나를 보았다. 난 그녀의 눈길을 느끼고 허리를 숙였다. “그 동안 기체 만수무강 하셨는지요. 본좌는…… 아니, 소인은 검성…… 아니, 그냥 히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간이군요.” “예. 전 인간입니다.” “일단 앉으시죠.” “예. 감사합니다.” 난 그녀가 권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이 곳에는 무슨 일인가요?” 제가 사실 노숙자여서 하룻밤 신세 좀 지려구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난 기꺼이 루를 팔아 넘기기로 했다. 난 루와 루비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키스를 하려 했던 일, 그리고 아까 전에 몰래 만나 키스를 했던 일 등등을 자세히 말했다. 루는 ‘난 이제 죽었다’ 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가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는 루에게 손짓했다. “이리오렴.” 루는 두려움에 떨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할머니. 저, 전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루비가 절 꼬드겼어요.” 왜 저렇게 벌벌 떠는 걸까? 그냥 꿀밤 몇 대 맞고 끝날 일인데. 빠악-! “으아악!” 이게 무슨 소리? 아까까지 멀쩡하게 발 붙이고 서 있던 루는 지금 이상한 포즈로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마치 개구리가 복상사 한 것 같은 포즈. 정말 추하기 그지 없다. “엄살부리지 말고 일어나렴.” 그녀의 다정한 말에 루는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전부터 누누이 얘기했지? 아이들은 순진해야 한다고. 그런데 뭐? 루비랑 키스를 하려고 낮에는 마을을 벗어나고, 밤에는 잠도 안 자고 밖으로 나가? 그래서야 순진한 아이가 될 수 있겠니?” 그녀의 말은 설득하고 타이르는 어조였다. 게다가 루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작 또한 차분하고 조용했다. 마치 유치원 선생이 유치원생들을 다르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 루의 반응이 굉장히 이상했다. 왜 저렇게 몸을 진동 하고 있는 걸까? “흑흑. 잘못했어요, 할머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신 그런 못된 짓 안 할게요.” 루는 이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 모아 싹싹 빌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저렇게 비굴할 수가! 나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난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4학년 두 명과 싸워 이겼다는 우리 반 아이와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소위 말하는 ‘짱’. 덩치도 웬만한 중학생과 비슷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 도장을 다닌 싸움의 배태랑이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 하지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건 사나이의 자존심의 건 승부였기 때문에. 방과 후 나는 그 애와 뒷산으로 올라갔다. 난 친구들에게 나의 가방을 맞기며 말했다. ‘난 오늘 저 녀석과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관 하나를 짜 두어라. 둘 중 하나는 그 곳에서 영원히 깨지 않는 잠을 자야할 테니.’ 그렇게 우리는 학교가 내려다 보이는 구릉에 올라섰다. 녀석은 나를 깔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곳이 네 놈이 죽을 장소군. 유언이나 해두시지.’ 그냥 싸우자니 승산이 없었다. 그래도 물러서거나 질 수는 없었다. 물러서면 왕따가 될 것이고, 패하면 녀석의 꼬봉이 될테니. 이 것은 전쟁이었다. 난 당시 신동 소리를 듣는 아이였기에 ‘전략론’, ‘전술론’, ‘손자병법’ 등등의 여러 전쟁 서적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뭐 굳이 이런 것들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전쟁이란 단순히 군사력, 즉 힘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전략이라 할 수 있다. 대전략은 군사, 행군, 병참, 외교, 전술 등의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한다. 설명은 길게 했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하다. 힘이 안 되면 머리를 쓰면 된다는 것. 인간이 원숭이도 아닌데 굳이 힘만 가지고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녀석이 솥뚜껑만한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려는 순간 난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넙죽 엎드려 빌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너한테 개기지 않을 게. 제발 나를 용서해 줘. 난 이제부터 너의 충실한 꼬봉이 될게. 매일 아침 너를 위해 가방을 나르고. 매 시간 니 옆자리에 부채질을 해줄 게. 그러니 제발 나를 때리지 말아줘.’ 녀석은 나의 비굴한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리고 거만을 떨며 나의 항복을 받아 들였다. 녀석은 나의 ‘거짓 항복 계책’ 에 완전히 걸려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난 바닥의 모래를 녀석의 눈에 뿌렸다. 그리고 녀석이 주춤하는 사이 근처의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팼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 정도에서 끝냈겠지만 난 아니었다. 전쟁이란 이겼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승전했다고 뻐기다가는 군사를 물리는 사이 뒤통수를 맞는 경우도 생길 수가 있다. 그렇기에 난 뒤처리도 확실하게 한다. 녀석의 옷을 벗긴 다음 미리 준비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난 기절한 녀석을 끌고 유유히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수 많은 아이들의 박수 갈채를 받으며 녀석을 관속에 눕혔다. 물론 녀석은 나중에 나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도전하였다. 하지만 내가 사진을 내밀며 ‘이거 여자애들한테 돌릴까?’ 라고 협박을 하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사진 안의 녀석은 알궁둥이를 드러낸 채 울고 있었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 전쟁에서 패하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강대국이 전쟁을 일으켜 약소국을 속국으로 삼듯, 나는 나에게 패한 그 녀석을 꼬봉으로 삼았다. 녀석은 그것이 수치스러웠는지 한 동안 눈물로 밤을 지새더니 결국 몇 개월 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고 말았다. 내가 그 것에 대한 보복으로 녀석의 사진을 학교 전체에 뿌리고 다닌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퍼억- 빠각- 파직-! 들려온 소리에 난 회상을 멈추고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지진 대피를 위해 그리했는데 다행히 지진은 아니었다. 다만 루가 먼지나게 얻어 맞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순진하라고 했지! 대체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왜 애가 애답지 못하게 순진하지 않은 거야?” 퍼억- 퍼억-! “케엑! 흑흑. 잘못했어요, 할머니. 제발 살려 주세요.” “닥쳐! 넌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애야! 요 며칠간 안 팼더니 아주 살판 났구나, 살판 났어!” “흑흑. 살려주세요, 할머니.” 루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루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잔혹한 구타는 멈출 줄 몰랐다. 겨우 애들끼리 키스한 것이 그리 큰 잘못이었단 말인가? 갑자기 루에게 굉장히 미안해 진다. 미안해. 내가 말만 안 했어도 이 정도까지 맞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건 니가 키스를 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 그러니 날 탓하지 말고 금단의 쾌락을 탐한 너 자신을 탓하렴. “옷에 콧물 묻히지 마!” 퍼억-!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털석’ 하는 소리와 함께 루의 몸이 힘 없이 무너져 내렸다. 루는 눈을 뒤집어 까고 누워 있었다. 탁자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나는 초점이 없는 루의 눈동자를 보고 공포에 떨어야했다. 루의 몸이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것이 그녀가 루를 방 안에 집어던지는 소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벅저벅. 음산하게 들리는 그녀의 발소리. “그 곳에서 뭐하시나요?” 그녀의 물음에 난 내 몸이 아직도 탁자 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하하! 탁자 밑에 동전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아서요.”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탁자 밑을 빠져나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루를 구타할 때의 폭력성은 온데간데 없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까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아직 못 들은 것 같군요.” “예? 무슨 물음 말씀이신가요?” “제가 아까 이 곳에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던 것 같은데요.” “아, 예. 그랬었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용감하게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할까? 아니야. 잘못하면 루처럼 흠씬 두들겨 맞을 지도 몰라. 적당히 말을 돌리자. “정말 대단한 미인이시네요. 엘프들 중에서도 그 쪽 같은 미인인 처음보는 것 같아요.”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푸훗!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사실 여기저기서 청혼이 많이 들어오고 있기는 한데 다 거절하는 중이에요. 당분간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거든요. 아,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제 이름은 루엔이라고 해요.” “아! 이름도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제 이름은 히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는 어떻게 되시나요?” “어머! 여자의 나이를 묻는 건 실례 아닌가요?” 엘프도 그런 개념이 있나? “죄송합니다.” 루엔은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었다. “괜찮아요. 당신께만 특별히 말씀드리지요. 전 430살이랍니다.” 430살? 이 미녀가? 루엔은 살짝 눈짓을 했다. 내 나이도 말하라는 제스처가 분명하다. 난 잠시 고민해야 했다. 1700살이라고 해야 하나, 17살이라고 해야 하나? 만약 1700살이라고 말하면 저 여자가 그걸 믿어 줄까? 당연 그럴 리 없지. 미쳤다고 그걸 믿겠냐? 어린 아이라면 모를까. “전 17살입니다.” 루엔은 눈을 크게 뜨는 등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웃으며 말했다. “인간은 빨리 늙는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군요.” “혹시 인간 처음 보셨나요?” “예. 사실 그래요. 아시다시피 이 곳은 인간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정말 닮았군요. 인간과 엘프가 닮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이 정도로까지 닮았을 줄은 몰랐거든요.” 으음, 그럼 내가 이 곳에 온 최초의 인간인 건가?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이만 잠자리에 들도록 하지요. 당신은 루의 방에서 같이 자도록 하세요.” “예.” 루엔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켜져 있던 불빛이 자동적을 꺼졌다. 난 잠자리가 생긴 것에 안도하며 루의 방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안에 놓인 작은 침대 위에는 한 어린 아이가 뻗어 있었다. 기절한 것인지, 자는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난 조심스럽게 루를 바닥으로 밀쳐 내고는 침대를 차지하고 누웠다. 라이 없이 혼자 자려니까 굉장히 외롭다. 그나저나 이 침대는 왜 이렇게 좁냐? 발을 쫙 펴기도 힘들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었다. 영어로는 ‘Gone with the wind'. 그 유명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 스칼렛(비비안 리)은 고개를 들며 이렇게 말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정말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말하는 이 모습이 난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설마 어제의 태양이 뜨겠냐? 아무튼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어제는 어제의 태양의 뜨듯,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떴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새우잠을 자서 그런지 목과 다리가 뻐근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바닥에서 잘 걸. 방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루는 먼저 일어나서 나갔나 보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향긋한 음식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엘프 여인. 어쩜 저렇게 가정적인 모습이 잘 어울리는 걸까? “일어나셨으면 밖에 가서 세수하고 오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여인이 미인이라면 그 이상의 행복이 무엇이 있겠는가? 난 그녀의 충고에 따라 집 밖으로 나가 미리 준비된 물로 세수를 했다. 깨끗하게 세수를 해야 나의 핸섬한 얼굴이 더욱 빛나 보이겠지? 루는 투덜거리며 장작을 나르고 있었다. 아무리 엘프라 해도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면 불을 피워야 하니. 엘프들의 음식. 사람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물론 나도 약간 두려움을 가지고 도전했다. 음식은 꽤나 먹을만 했다. 약간 싱겁다는 것만 빼면 맛도 제법 있고. 식사를 끝마친 나는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촌장의 집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이상한 것이 준비 중이었다. 일명 마을 회의. 마을 회의란 마을 성인 모두가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이다. 이 곳의 정치는 전원 참여자인가 보다. 정말 이상적인 정치의 형태라 할 수 있겠다. 인구수가 적으니 가능한 방법이긴 하지만. “에휴~ 내 신세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괜찮아요. 오빠는 잘 해내실 거예요. 라이는 굳게 믿고 있어요.” 너 지금 내가 뭘하는 건지 알고나 그런 말을 하는 거니? 난 라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마을 중심에 서 있는 거목 밑. 그 곳에는 이미 수 많은 엘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그루터기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고, 일부는 거목의 두꺼운 가지 위에 앉아 있거나 서 있었다. 귀엽고 깜찍하게 생긴 어린 엘프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엄마 손에 이끌려 온 것이겠지. 난 눈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도 미녀, 저기도 미녀. 사방 천지에 미녀들이다. 이 곳은 완전 꽃밭이야. 너무 행복해. 난 라이를 끌어 안고 눈물을 흘렸다. 저 쪽에 루엔과 루의 모습도 보이고, 루비와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미녀의 모습도 보인다. 전부 개성이 넘치는 미녀들. 물론 남자들도 있었지만 난 남자따위에겐 절대 신경 쓰지 않는다. 미녀 보기도 바쁜 시간을 어찌 남자에게 할애하겠는가? “오빠!” 현란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나는 라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난 촌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회의를 하는 건가요?” “이 곳에 있다보면 자연적으로 알게 될 걸세.” 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그러자 각자 잡담을 나누던 엘프들은 입을 다물고 주목했다. “어머, 그래서 어떻게 됐데요?” “호호, 뭐 그냥 조금 혼내고 말았지요. 좋다는데 어쩌겠어요?” 언제나 저런 무리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떠들 때, 조용히 할 때를 못가리고 계속 떠드는 무리들. 대화의 내용을 들어보니 아줌마가 대화하는 것 같은데 쳐다 보니 엄청난 미녀들이다. 10대 후반 정도의. 큰일이네. 이러다가 눈 높아지면 나만 손핸데. 잠시 후, 아줌마들마저 입을 다물자 촌장은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을 이 곳에 모이게 한 이유는 이 곳에 서 있는 이 인간 때문입니다.” 촌장의 그 말로 인해 분위기가 얼음장 같이 차가워졌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나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굳게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머리카락의 비듬을 한번 털어준 다음, 여러 여성 엘프들을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저게 인간이야?” “그런가 본데.” “엘프랑 정말 닮았다.” “왜 저렇게 못 생긴 걸까요?” “인간은 빨리 늙는다던데.” “어머, 너무 못 생겼다. 불쌍해.” “인간이 왜 엘프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거죠?” “저 아이 혹시 하프 엘픈가요?”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인간이야, 인간! 저게 인간이야! 진짜 너무 인간 같이 생겼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궁시렁거리는 소리. 난 손을 들어 그들의 환호에 답을 해주었다. “어머, 저 인간 왜 갑자기 손을 흔들며 웃는 걸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불쌍해.” “꼴갑이야, 정말. 생긴 것부터 하는 짓까지 전부 마음에 안 들어.” 어쩌구 저쩌구~ 궁시렁 궁시렁~ 내가 17년 짧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사방에서 욕 먹는 것은 처음이다. 왜 엘프들은 인간을 싫어하는 걸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언제부터 엘프들이 종족 우월 주위에 젖어 있었지? 엘프들이 파시스트(fascist)라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래서야 나치(Nazi)와 다를 바가 없잖아. 이 많은 생명체들 중 인간은 나 혼자. 나머지 전부는 엘프. 왠지 전국적인 왕따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괜찮아요. 오빠 곁에는 라이가 있잖아요.” 그래도 나를 방긋 웃으며 나를 위로해 주는 라이. 내가 정말 너 때문에 산다. “그래. 난 혼자가 아니야. 날 위해 웃어주는 라이가 항상 내 곁에 있잖아.” 난 절대 종족주의에 밀리지 않을 것을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촌장이 나서서 소란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근엄한 목소리로 있는 폼, 없는 폼 다잡으며 나에게 말했다. “이제 자기 소개와 이 곳에 온 이유와 목적 등을 조금의 거짓도 없이 상세히 밝히게.” 무슨 청문회하는 것 같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전부 나에게 집중 되고 있었다. 이 곳에서 나의 인지도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아이언스 히로라고 합니다. 제가 이 곳에 온 이유는…….” 잠깐. 내가 이 곳에 온 이유가 뭐지? 이럴 수가.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고 있잖아. 그냥 에스카네스가 가라니까 오긴 왔는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러 왔냐는 거지. 그냥 ‘에스카네스가 보내서 왔어요’ 라고 말해야 하나? 난 잠시 멈칫했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는 엘프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왜 말을 못하는 걸까?” “혹시 무슨 나쁜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사악한 종족이라던데.” “생긴 것만큼이나 마음도 추하다고 하던데.” 모두들 너무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삐지려는 찰나 라이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모두들 너무해요! 오빠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예요? 오빠는 착한 인간이란 말이에요. 오빠가 라이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요! 우에에엥! 모두 다 미워요!” 라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서글퍼 한 순간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난 재빨리 라이를 끌어 안아 눈물을 닦아주고 달래 주었다. “울지마, 라이야. 뚝!” “흑흑!” 엘프들은 잠시 침묵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라이가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치자 촌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우리들이 실수를 한 것 같군. 이해하게나. 그대는 처음나타난 이방인이자 인간일 세.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정하겠네. 부디 우리를 용서해 주게” 촌장은 정말로 미안한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난 기꺼이 그를 용서하기로 하였다. 사실 용서 안 해주면 내가 어쩌겠는가? 내가 아무리 막나가는 놈이라 하더라도 여기서 받아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애당초 제가 인간인 게 잘못이니 누굴 탓하겠습니까?” 촌장은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쓸어 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흑흑, 모두들 나쁜 엘프에요. 오빠가 얼마나 착한데 오빠를 막 못살게 굴고…… 흑흑, 라이는 너무 슬퍼요.” “그래. 그만 울어, 라이야. 저 엘프가 사과했잖아.” 토닥토닥~. 라이는 내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솔직히 정말 감동했다. 라이가 나를 이렇게 좋아하고 있었을 줄이야. 세상에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어린 엘프가 있다는 것에 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는 라이와 헤어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번 일이 끝나면 내 기필코 라이를 입양하겠다. 이제부터 날 오빠라 부르지 말고 아빠라 부르렴. “모두들 시간을 내어 이 자리에 모여 주셨는데 이대로 헤어지는 것은 너무 아쉽군요.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것 저 인간과 어린 엘프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잔치를 벌이겠습니다.” 와아아~ 짝짝짝~ 일동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 문득 드는 생각인데 엘프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종족들인 것 같다. 회의하기 위해 모였는데 갑작스럽게 잔치라니. 잔치. 그것은 정말 초스피드(超speed)로 이루어졌다. 마치 미리 준비를 해놓은 것처럼.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이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아리따운 여성들이 과일을 한 가득 다음 바구니를 들고 등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잘생긴 남성들이 두꺼운 술통으로 보이는 나무통을 어깨에 지고 날랐다. 라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한 입 가득 과일을 물고 행복하게 웃었다. 어느새 내 주위엔 수십명의 여자들이 몰려있었다. 그녀들은 희고 가는 손가락을 내밀어 내 여기저기를 만졌다. 머리카락이나, 얼굴, 귀, 옷 등을. “정말 귀가 작다. 귀가 이렇게 작으면 소리나 제대로 들릴까?” “어머, 그런 말 하지마. 실례잖아.” “머리카락이 정말 가늘다. 색깔도 까맣고.” “처음엔 못 생겼는 줄 알았는데 자꾸보니까 괜찮은 것 같다. 개성 있어 보여.”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나이는 몇 살일까? 설마 내 셋째 딸보다 어린 것은 아니겠지?” 수 많은 미녀들이 내 옷깃이라도 잡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내 평생 이런 행운이 또 올까? 그런데 머리카락 뽑아가는 것은 좀 자제해 줬으면 하네. “젠장!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선가 판을 깨는 듯한 공용어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라이의 주머니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라이코스는 억지로 눈을 치켜 뜨고는 푸른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엘프어로 말했다. “여긴 어디냐?” 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긴 엘프의 마을이야. 엘프들이 사는 마을이지. 그 증거로 나 빼곤 전부 엘프잖아. 라이코스는 살며시 날아올라 내 머리 위에 앉았다. 그 순간 엘프들이 일제히 외쳤다. “앗! 평화와 자유의 상징 청안백우조다!” “…….” 내가 잘못들은 건가?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라니? 라이코스는 힘차게 날개짓을 해 푸른 창공을 한바퀴 돌더니 거목 위에 내려 앉았다. 그러자 흥겹게 잔치를 벌이고 있던 엘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평화와 자유의 상징인 라이코스, 아니, 청안백우조가 수천년만에 이 곳을 찾았으니 영광과 축복이 가득할 거란 내용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가 저 놈과 같이 다니기 시작한 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파멸과 저주의 상징이라면 모를까,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라니? 어찌 그런 어이 없는 일이! 당황하는 나에게 촌장이 다가왔다. “어찌 평화와 자유의 상징인 청안백우조가 그대와 같이 다니는 겁니까?” “하하! 그게 그러니까 어쩌다보니…….” 촌장은 나에게 잔을 건네 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이 잔을 채워 주었다. 무색의 음료. 향기로운 과일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한다. 혹시 향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향긋하다. 촌장은 잔을 높이 치켜 들며 외쳤다. “이 인간은 청안백우조의 친굽니다!” 분명 말하지만 난 단 한번도 라이코스를 친구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청안백우조의 친구는 곧 엘프들의 친구.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이 인간을 맞이합시다!” 이럴 수가! 그 누가 위대한 대마법사 아이언스 히로가 날파리 같은 라이코스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이 것은 사실이다. 지금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나는 손을 쫙 내밀며 외쳤다. “라이코스!” 그러자 거목의 가지 위에 앉아있던 라이코스가 순식간에 날아와 내 팔에 안착했다. “저와 라이코스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를 베스트 프랜드(Best friend)라 부르지요. 하하하!” “야, 니가 언제부터 내 친구였다고 그런 소릴 해?” 다행히 라이코스는 공용어로 말을 했다. 난 라이코스의 주둥이를 틀어 막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헛소리 지껄이면 라이레얼 부른다.” 라이코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며 입을 꼭 다물었다. 난 손에 든 과일주를 쭈욱 들이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엘프 여인이 재빨리 잔을 채워 주었다. “어서 드세요.” “예. 감사합니다.” 난 은근슬쩍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싫지 않은 눈치였다. 난 밀려드는 행복감에 신음해야 했다. 흥겨운 음악이 계속 울려퍼진다. 한 손에는 향기로운 과일주가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아름다운 엘프 여인이 웃음 짓고 있다. “으하하하! 여기가 천국이로다!” 난 너무나 기분이 좋은 나머지 라이한테도 술을 권했다. 라이는 두 손 가득 잔을 움켜쥐고 홀짝홀짝 마셨다. “마셔, 마셔! 너도 마셔라, 라이코스!” 인생은 행복한 것. 정말 살만한 세상이다. 내가 만약 이제까지 살아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쾌락을 맛볼 수 있었겠는가? “오빠, 이거 너무 맛있어요.” “그래. 공짜니까 많이 먹어라.” 그렇게 엘프의 숲에서 시작된 잔치는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술에 취해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헤매는 나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아름다운 미녀 엘프들뿐이었다. * * * * * “일어나세요.” 누군가가 내 귀에 속삭인다. 아름다운 선율과도 같은 목소리. 난 애교라도 부리듯 이불을 끌어 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그녀는 내 몸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난 천천히 눈을 떴다. 금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엘프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난 잠시 그녀의 얼굴을 감상했다. “댁은 누구세요?”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저는 라미아라고 해요.” 난 침대에서 일어섰다. 으음, 어젯밤 술을 진창 퍼마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 기억났다! 수 십명의 미녀 엘프들! 난 그녀들에 둘러쌓여 술을 마셨었지. 아아, 정말 너무 행복한 술자리였어. 그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만큼. “이 곳은 어딘가요?” “저희 집이에요. 잔치를 벌이던 중 그냥 쓰러지시기에 가까운 저희 집으로 모신거에요.” 조금 부끄럽군. 주량도 모르고 마구 퍼마셔 쓰러지기까지 하다니. 잠시 반성하자. “아! 오빠 일어났어요?” 방문 너머에는 라이가 서 있었다. 라이는 달려와서 내 품에 안겼다. “촌장님 댁으로 가보세요. 촌장님께서 지금 기다리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난 라이와 함께 그녀의 집을 빠져 나왔다. 어제 마신 술이 굉장히 좋은 술이었는지 그 정도로 퍼마셨는데도 이상하게 숙취가 없었다. 당연 해장도 필요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는 건가? 법적으로 난 아직 미성년자인데. 마을이 워낙 작다보니 촌장의 집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하지만 집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찾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우리는 촌장의 집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촌장과 얘기를 나누었다. “어제 잔치를 벌이느라 깜빡했는데 그대가 이 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말이지요…….” 잠시 생각하던 중 에스카네스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난 급히 촌장에게 물었다. “혹시 카이네이드의 자식들이 누군지 아나요?” 촌장은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섰다. “카이네이드!” “아시나요? 그린 드래곤인데.” 촌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찌 그분을 모르겠나? 그럼 그대는 그 분을 만나러 온 건가?” “예. 뭐 꼭 그게 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걸 왜 지금에야 말한 건가?” “……글쎄요. 저도 그게 지금에서야 생각이 나서요.” 촌장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은 어디계시나요?” “그분은 이 마을에 계시지 않고 다른 곳에 계시네. 생명수가 있는 곳을 지키고 계시지. 하지만 그 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전 아무나가 아니니 상관 없습니다. 아무튼 그분을 만나뵈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촌장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화가 길어지자 라이는 지루한지 자꾸만 몸을 뒤척거렸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쓸어주던 중 라이의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음, 라이코스는 어딜 간거지? 내가 고민을 하는 사이 생각을 마친 촌장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작정을 하고 찾아온 것 같군.” “그렇습니다. 전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는 길을 가르쳐주긴 하겠네. 하지만 그분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진 못하네.” “상관 없습니다.”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래곤 소개로 찾아 온 건데 설마 안 만나주겠냐? “그럼 안내자를 붙여 주도록 하지.” “길게 끌 필요는 없으니 당장 출발하지요.”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그리하도록 하게.”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이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우리 또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응. 왜 싫으니?”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요. 라이는 오빠랑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이 오빠도 우리 라이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단다.” 잠시 기다리자 ‘안내자’ 라는 엘프가 도착하였다. 난 안내자가 여자 이기를, 그리고 미녀 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다행히 안내자는 그 두 가지 조건을 전부 만족시켜주는 엘프였다. “또 뵙게 되는 군요.” “예.” 안내자는 다름 아닌 루의 할머니 루엔이었다. 그녀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씽긋 웃었다. 웃을 때 한쪽 볼에 보조개가 움푹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잘부탁 드려요.” “저야 말로.” 출발 준비는 금방 끝났다. 거리도 얼마 멀지 않은데다가 험한 길도 아니었기에 별로 준비할 것도 없었다. 난 물기와 당분이 많은 과일이 가득 든 배낭을 짊어졌다. “그런데 루엔님께서 저와 같이 떠나시면 루는 어떻게 하죠?”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그냥 루엔이라고 부르세요. 루는 당분간 루비의 집에 맞겨 놓기로 했어요.” 둘을 붙여 놓는 것에 대해 왠지 불안감이 든다. 어린 것들이 발랑 까져 가지고는 할 짓, 못 할 짓 다할 것 같은데. 설마 갈 데까지 가는 것은 아니겠지? 이렇게하여 우리는 카이네이드의 자식이라 불리는 ‘그분’의 처소로 향하였다. 하지만 나의 앞날은 여전히 먹칠한 유리창처럼 깜깜하기 그지 없었다. 언제쯤 빛이 들려나? 수 많은 엘프들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한 우리는 금새 울창한 산림속으로 들어갔다. 난 어디가 어딘지 몰라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루엔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앞장서서 길을 만들며 걸어갔다. 보통 이런 곳에서는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주위 배경이 똑같으니 -전부 나무- 방향 감각을 쉽게 잃게 되기 때문이다. “오빠 빨리 와요!” “그래.” 라이는 폴짝폴짝 뛰어 다니고 있었다. 포장 도로도 아닌 비포장 도로에서 지치지도 않고 뛰어다니다니. 역시 엘프는 숲의 종족이라는 건가? 난 빠른 걸음으로 걸었지만 그들을 따라잡기도 힘들었다. 보다못한 루엔이 말했다. “짐은 저에게 주세요.” 만약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면 당장 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 어찌 미인에게 짐을 지게 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제가 이 짐을 짊어지고 가다 허리가 부러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며 말했지만 결론은 별 볼일 없었다. “좀 쉬어가지요.” “조금만 더 가다가 쉬지요.” “그러지 말고 조금만 쉬지요.” “안 됩니다. 조금만 더 가면 쉴만한 장소가 나오니 그때…….” “제발 쉬어가요. 저 이러다가 죽겠어요.”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루엔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체력이 약하시네요?” “아니, 뭐 그렇게 약한 편은 아닌데 오늘따라 힘이 드네요.” 우리들 중 지친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라이는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지금은 내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난 배낭에서 과일을 꺼내 라이의 입에 물려 주었다. 라이는 더욱 열심히 내 다리를 주물렀다. 루엔은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너무 딱 붙어서 내가 무안할 정도로. 혹시 이 여자가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로 그분을 만나 뵈려는 거죠?” “그게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일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루엔은 작게 웃었다. “말해주기 싫으신가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저도 잘 몰라서요. 그냥 카이네이드의 자식을 만나라는 얘기만 들었거든요.” “누구한테요?”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 “정말인가요?” 루엔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얼마 전 에스카네스를 만났는데 그가 이 곳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그럼 에스카네스는 무슨 일로 만난 건가요? 혹시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건…….” 아무리 미인의 질문이라 해도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가 살짝 맛이 가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나에게 크로니스를 막을 임무가 주어졌다……라고 말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나 자신조차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데. “그냥 비밀이라고 해두지요.” “으음,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네요. 하지만 비밀이라고 말하신 걸 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 같으니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할게요.” 우리는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루엔은 나를 생각해서인지 걸음을 조금 늦춰주었다. 그 덕에 난 아까보단 조금 편안하게 도보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인간 세상은 재밌나요?” 어째 이 질문이 안 나오나 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은 인간이건, 엘프건 똑 같겠지. “뭐 살아 볼만은 해요.” “이 곳과 비교하자면?” “글쎄요. 성질이 다르니까 비교 자체가 힘들어요. 개개인 마다 취향 차이도 있겠고. 하지만 제 생각엔 이 곳이 더 나은 것 같네요.” “왜죠?”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미녀들이 많잖아요.” 루엔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후로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인간 세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고, 루엔은 자신의 성장 과정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남자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고, 그 아이들이 쑥쑥 자라 다시 분가 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루와 루비인데 이 애들이 어느새 서로 사랑을 하게 되고. 아! 세월 참 빠르다. “재혼은 안 하세요?” “당장은 생각 없어요. 가끔 청혼이 들어오긴 하는데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네요.” 인간이나, 엘프나 괜찮은 남자 찾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 특히 나 같이 훌륭한 남자 찾는 것은 불가능. 마치 피크닉이라도 가는 듯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하며 걸었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면 과일을 꺼내 먹고 힘이 들면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던 중 날이 저물었다. 두 엘프는 날이 저물어도 길을 가는데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인간인 나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걷는 것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야영의 기본은 불을 피우는 것. 우리는 가연성이 있는 낙엽이나 잔가지등을 모으고, 그 주위를 깨끗하게 치웠다. 잘못하다가 숲을 홀라당 태워 먹으면 안 되니까. 내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환한 불빛이 일었다. 우리는 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불을 쬤다. “이제 얼마나 남았나요?” “오늘밤 푹 자고 일찍 출발한다면 내일 해가 기울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라이는 벌써 자리를 깔고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 자고 있었다. 난 망토를 벗어 라이의 몸을 덮어 주었다. 루엔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난 고개를 꺽어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나뭇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검은 하늘이 보였다. “인간 세상의 하늘도 이 곳과 똑같나요?” “하늘이야 어디든 똑 같지요.” 루엔은 감상에 잠기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난 그녀의 얼굴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미녀가 할머니라니. 그리고 430년이나 살았다니. 아직 17년 밖에 살지 않은 나로서는 430년의 삶이 어떤 것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어느새 성인이 되어 자식을 낳는다면 그 느낌은 어떨까? 430년이나 살았으면 할 거, 못 할 거 다 해봤을까? 그럼 지금은 무슨 재미로 살고 있는 걸까? 영원의 삶이라 해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채 100년도 안 되는 인간의 삶보다야 훨씬 낫겠지. “인간 세상에 가보고 싶어요.” 어느새 눈을 뜬 루엔은 나를 보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거기 별로 재미 없어요.” “전 재미있다고 들었는데요.” “누가 그래요?” 루엔은 나뭇가지로 불을 헤집으며 말했다. “친하게 지내는 엘프가 있어요. 그는 얼마 전에…… 아니, 얼마 전이라고 하기는 문제가 있겠네요.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니까. 그는 모험심이 강한 엘프였죠. 언제나 이 곳은 너무 갑갑하다고 불평을 늘어 놓았어요. 그리고 결국 활과 악기를 둘러 매고 적색 산맥을 너머 인간 세상으로 갔지요.” “그래서요?” 루엔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로 돌아왔어요. 슬픔에 가득 잠긴 채로.” “왜요? 무슨 나쁜 일이라도 당했데요?” “나쁜 일이라면, 나쁜 일일 수도 있겠지요. 그는 인간 세상에서 한 소녀를 사랑했어요. 그녀는 물론 인간이었지요. 하지만 인간의 수명은 굉장히 짧았어요. 그가 사랑하던 소녀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어느새 죽음을 맞이했지요. 눈을 한번 감았다 떠보니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나 할까요? 그것이 그가 슬픈 이유였어요.” 인간 세상으로 여행을 와서 인간 소녀를 사랑한 엘프라. 시간이 흘러 소녀는 여인이 되고 엘프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덧없이 짧은 것. 찰나의 시간에 여인은 죽고, 엘프는 눈물을 흘리며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는 지금 그녀와의 사랑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술에 절어 살고 있어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저도 청혼을 한번 했었는데 가볍게 거절하더군요.” 그 후 엘프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또 다른 사랑을 거부한 채. 이거 완전히 로맨스 소설이다. 슬프게 끝난 인간과 엘프의 사랑 이야기. 갑자기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무리 감수성 없는 나지만 이건 정말 감동의 극치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엘프 여인과 슬픈 사랑을 하고 싶어. 난 내 무릎을 배고 자고 있는 라이를 보았다. 라이도 엘프긴 엘프니까. 설마 라이랑? 하하하! 내가 변태도 아닌데 그런 말도 안되는……이라고는 하지만 나중에 마법이 풀려 미인이 되면 생각해 볼 문제지. 사랑은 나이차도 가뿐하게 뛰어 넘는 법. 뭐 700살쯤이야 가뿐하게 극복할 수 있지. 난 라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예쁘게 자라야 해, 라이야. * * * * 아직 어슴프레하게 안개가 깔려 있는 새벽. 우리는 안개에 개의치 않고 출발했다. 몇 시간 웅크리고 잔 것에 불과하지만 몸은 굉장히 가뿐했다. 라이는 어린 아이답게 새벽잠이 많았다. 그래서 아직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어서 지금 내 등에 업혀있다. 배낭은 나를 대신해 루엔이 맸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얼마 안 남았어요.” 우리는 한 동안 말 없이 걸었다. 얼굴에 붙는 물의 입자는 차가운 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난 라이가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한동안 걷다보니 안개가 걷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안개가 개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했다. 여름에 왔다면 이슬을 잔뜩 머금은 나뭇잎과 푸른 새싹들을 볼 수 있었겠지만 때가 때인지라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일 뿐이었다. -루엔의 말로는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아직도 여름 기후인 곳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기후가 따뜻한 이유도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마법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그냥 걷기만 하기에는 너무 지루하다. 난 앞서 가는 루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분은 대체 뭐하시는 분인가요?” 루엔은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뭐라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그 분은 잊혀진 숲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분은 꽃을 피게 하고, 낙엽을 떨어지게 해요. 숲의 주인이자 엘프들의 주인이지요.” “마법산가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요. 이 숲의 결계도 그분이 만드신 거예요. 타종족으로부터 엘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드신거죠. 그분은 위대한 마법사이자 창조주에요. 이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이 숲의 전체를 이루고 있지요.” “…….” 그래서 대체 뭐하는 놈이란 말인가? 이렇게 알아듣지 못할말만 해서 내가 어찌 알아듣겠는가? 어찌되었든 굉장하다고만 알아두면 되는 건가? 라이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고, 나와 루엔이 배고픔을 달랠겸 과일을 꺼내 먹을 때쯤 우리는 산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넓은 초록색 구릉이었다. 난 발에 채이는 꽃들과 풀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숲은 분명 앙상한 가지 뿐이었는데 이 곳은 어째서 풀과 꽃들이 만발한 걸까? “여긴 왜 이러나요?” “여기서부터는 그분의 영역이에요. 이 곳은 꽃이지지 않고 나무가 시들지 않는 곳이지요.” 난 무의식 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이 곳은 결계 안과 밖의 기후가 다르고, 마을 안과 밖의 기후가 다른 곳이니까. 내 등에서 내려온 라이는 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비를 쫓아 달려갔다. “나비야, 거기 서!” 푸르른 자연을 종횡무진하는 발랄한 엘프 소녀.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아! 사진기만 있었으면 저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필름 속에 가두어 놓을 텐데. 천진난만하게 달리던 라이는 다리가 꼬였는지, 아니면, 발에 무엇이 걸렸는지 앞으로 넘어졌다. “라이야!” 난 깜짝 놀라 라이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라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꽃밭을 침대 삼아 뒹굴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인 나머지 내가 그 옆에 드러누우려는 찰나 루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 길이 바쁩니다.” 으음, 라이의 모습이 너무 귀엽다보니 나도 모르게 주책을 부릴뻔 했다. 난 라이를 일으켜 세워 옷에 묻은 흙과 꽃가루를 털어 주었다. 그리고 라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야트막한 구릉의 정상에 올라서자 난 눈 앞에 펼처진 광경에 입을 쩍 벌리고 감탄했다. 졸졸졸 흐르는 냇물이 수로를 따라 휘어져서 흐른다. 폭이 좁은 곳에 징검다리가 있고, 그 너머엔 집이있다. 작고 아담하게 지어진 통나무 집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고, 그 앞에는 작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그 곳은 마치 하늘에 떠있는 작은 섬과 같았다. “굉장하네요.” 살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집은 정말 처음 본다. 저 집을 보고 있자니 이제까지 315평짜리 집을 지어 살겠다는 나의 소망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다. “저 곳이…….” “예. 저 곳이 그분이 계신 곳이에요.” 우리는 느린 걸음으로 구릉을 내려와 한 폭의 그림 같은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냇가의 징검다리에서 잠시 목을 축인 후 다리가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건넜다. 그리고 정원을 지나 통나무집 앞까지 다가갔다. 난 그 앞에서 잠시 고민해야 했다. 문을 두드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당당하게 열고 들어가야 하나? 결국 예의바르게 문을 두드리기로 결심하고 손을 드는데 문 안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필요로 하는 분만 들어오세요.” 난 루엔과 라이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러자 루엔이 말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된 이는 당신 밖에 없는 듯 하군요. 우리는 이 곳에서 기다릴테니 안으로 들어가세요.” 어째서 나 혼자 들어오라는 걸까? 그거야 집 주인 마음이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그 말에 따라야 했다. 난 라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통나무집은 밖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들과 그 곳에 꽂혀있는 책들. 타고있는 벽난로와 그 옆에 놓여진 장작. 그리고 덩굴이 엉켜있는 탁자와 그 앞에 앉아있는 엘프 여인. 그녀는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예.” 초록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 흰색 피부를 지닌 엘프 여인은 연녹색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 보았다. “자리에 앉으세요.” 난 그녀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과 부드러운 표정. 그리고 예의 바르른 말투와 바른 몸가짐. 분명 그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엘프 여인은 그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한 동안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보통 이런 경우 상대는 쑥쓰러워하며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등의 말을 먼저 꺼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엘프 여인은 상당히 끈질기다. 째깍째깍-! 내가 차고 있는 시계는 워낙 고급이어서 초침이 가는 소리도 예술이다. 그 소리가 600백번 날 때까지 그녀는 나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패배군.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지만 끝까지 버티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그냥 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 수 밖에. “카이네이드의 자식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요.” “제갈량과는 무슨 관계인가요?” 그녀는 우아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가 저이기도 하고, 제가 그이기도 하지요.”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안 되나요?” “그 말 그대로에요. 그와 저는 같은 존재임과 동시에 별개의 존재에요.” “…….” 위대한 존재와는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지금과 같이 알아 듣지 못할 말만 계속 지껄여대는 경우가 다반사니까. 솔직히 난 앞의 말들이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식한 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당히 알아들은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이라도 알아들은 것이 있어야 알아들은 척 하지.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그야 간단하다. 내 좋은 머리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석하는 수 밖에. 내가 다소곳하고, 예의 바르고, 청순한 이 엘프 여인을 처음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생각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불량과 건방의 대명사인 제갈량이었다. 인간과 엘프, 남자와 여자, 날카로운 눈빛과 부드러운 눈빛, 이죽거리는 웃음과 부드러운 미소, 싸가지 없는 말투와 예의 바른 말투. 이렇게 모든 것이 달랐지만 내 직감은 자꾸만 눈 앞이 여인과 제갈량을 연결 짓고 있었다. 카이네이드의 자식. 자식이라길레 난 처음에 정말 카이네이드의 후손인 줄로만 알았다. 즉, 제갈량의 2세.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제갈량과 같은 존재임과 동시에 별개의 존재.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무슨 기생충인가? 아니면, 공생 관계? 잠시 생각한 나는 그럴 듯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육체는 두 개인데 정신은 하나라는 건가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해요.” “…….” 이 것도 이 것이지만, 저 것도 저 것이다. 세상 만물이 종래에는 하나로 귀결되기 마련이니 어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리오. 나는 이런 류의 대화가 정말 싫다. 이 거면 이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대체 이 것도 저 것도 맞다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지금 나보고 엿이나 먹으라는 건가? 아니면,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난 찡그려지는 인상을 억지로 폈다. 하지만 볼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좀 진지하게 대화에 임해주시면 안 되나요? 전 지금 심각하단 말입니다. 잊혀진 숲으로 와서 카이네이드의 자식을 만나라는 충고 하나만 듣고 전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데 댁께서 이렇게 나오시면 제가 정말 곤란하지요.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지금 저를 우습게 보고 계신겁니까? 저를 우습게 보고 있지 않다면 제가 좀 알아 듣게 말해 주세요.” 나의 말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내가 알아듣 게 설명을 하던가, 아니면, 배를 째라는 얘기다. 설마 배를 째진 않겠지? 엘프 여인은 작은 한숨과 함께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카이네이드이면서도 카이네이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제갈량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카이네이드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카이네이드의 정신 전부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 말은 카이네이드의 일부라는 얘깁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갈량도?” “예. 그 역시 카이네이드의 일부에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카이네이드가 곧 제갈량이지 않나요? 즉, 제갈량이 그린 드래곤.” 그녀는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사람의 의식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요. 당신이 지금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이 그렇게 의식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당신의 머릿속에는 다른 의식들이 존재하고 있어요. 다만 그것들은 잘 나타나지 않을 뿐이지요.” “잠재의식?” “예. 평상시에 그런 의식들은 밖으로 표출이 되지 않지요. 하지만 특정 계기를 통해, 예를 들어 술을 마셨다거나, 심한 충격을 받았다거나 할 경우에 그런 의식들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지요.” 그럼 술 마시면 개가 되는 놈들은 뭐야? 그 놈의 잠재의식은 개였단 말인가?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저와 제갈량은 카이네이드 의식의 일부에요.” 의식의 일부? 그래서 같은 존재인 동시에 다른 존재라고 말 한 건가? “본체가 폴리모프한 게 아니라요?” “카이네이드의 본체는 이 숲 아래 잠들어 있어요.” “그럼 지금 당신의 몸은 뭔가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체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언제든 만들 수 있고, 언제든 없앨 수 있지요.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니까요.” 제갈량이 했던 말과 똑같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너무 믿지 말라는 말. 그럼 눈에 안 보이는 걸 믿으라는 건가? 아니면,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건가? 그녀는 두 개의 찻잔을 가지고 와 하나를 내 앞에 올려 놓았다. 난 그 찻잔을 만지막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과 제갈량은 카이네이드 의식의 일부고 육체는 창조한 육체라는 건가요?” “예. 맞아요.” 이제 좀 이해가 간다. 의식의 일부라……. 분명 말해두지만 본인은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특히 머리 아픈 것은. 그런데 어찌하여 본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가? 그래서 본인은 미치겠다. “…….” 미치지 말고 계속 생각해 보자. 이 엘프 여인과 제갈량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앞의 얘기들을 조합해보면 답이 나온다. 이 엘프 여인은 카이네이드의 의식 중 착한 쪽의 의식을 가지고 있고, 제갈량은 카이네이드의 의식 중 개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갈량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악을 집대성한 캐릭터라고나 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있다. 까르린느. 상아탑에서 나를 엿 먹이려고 자해 소동을 하다가 사일런스 지니의 추리력에 걸려서 자기가 다중인격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해 결국 죽음을 맞이한 여자애. 당시 나는 그 여자애의 생긴 걸 봐서라도 용서해 주려 하였다. 하지만 그 다중인격이라는 변명이 마음에 안 들어서 결국 끝을 보고야 말았다. 그런데 혹시 정말 다중인격이었으면 어쩌지? 지금 얘기하다보니 다중인격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으음, 죽이는 대신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 편이 좋았을 지도. “드래곤들은 별 걸 다 할 수 있네요. 자기 의식을 나누어 다른 인격을 가진 두 개의 생명체 살 수도 있다니.” “그건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9클래스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 그 놈의 9클래스 타령. 이래서 9클래스 아닌 마법사는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그러고 보면 나도 참 특이한 인간이다. 남들은 평생 먼발치에서 보기도 힘들다는 드래곤을 종류 별로 만나고 다니다니. 이런 걸 보고 주인공의 특권이라 그러는 건가? “에스카네스가 절 이 곳으로 보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지금 당신에겐 도움이 필요하고 저는 그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정말 너무도 지당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도움을 어떻게 주느냐, 겠지. “지금 당신이 해야할 일은 두 가지에요.” “그게 뭐죠?” “9클래스를 마스터하는 것. 그리고 크로니스와 싸우는 것.” 어느 것 한 쉬운 일이 없다.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런 걸까? 눈 앞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시간이 없다라…….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 안에 9클래스를 마스터해 크로니스와 싸워야한다는 건데. 안 그래도 힘든 일이 더욱 힘들어지는 군. “일단 중요한 일은 9클래스를 마스터하는 일이겠군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9클래스를 마스터한다 하더라도 당장 크로니스와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예. 그야 뭐 그렇겠죠. 아무래도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상당 기간 훈련을 거치는 편이…….”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그럼요?” “9클래스는 신의 영역. 그 끝은 곧 무한(無限)이에요. 9클래스끼리 싸운다면 승부를 가릴 수가 없어요. 설사 어느 한 쪽이 이겼다 하더라도 이 대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거에요.” 맞는 말이긴 하다. 유성 낙하 같은 마법을 난사한다면 대륙이 아니라 행성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잖아요. 차라리 싸움보다는 설득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득이 불가능 하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차원의 열쇠를 찾으세요.” 뜬금 없이 ‘차원의 열쇠’라는 얘기가 나왔다. 보통 이런 경우 ‘예? 차원의 열쇠요? 그게 뭔데요?’라고 되묻기 마련이다. 그럼 그제야 천천히 설명을 해주는 거고. 하지만 보통의 경우를 거부하는 나는 다르다. “알겠습니다. 언제 한번 시간 내서 찾아 보도록 하지요.” “…….” 엘프 여인은 눈을 크게 떴다. 임팩트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놀란 것이 분명했다. “차원의 열쇠가 뭔지는 알고 계신가요?” 알 리가 있겠냐? “물론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찾겠다는 거죠?” “글쎄요. 열심히 찾다보면 언젠가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 만약 상대가 제갈량이었다면 그는 주저 없이 나를 쥐어 팼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상대는 예의가 무엇인지 아는 엘프 여인.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차원의 열쇠란 이공간(異空間)을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을 말하는 거예요. 즉, 다른 차원을 창조한다는 거지요.” “…….” 이공간? 다른 차원 창조? “좀 알아듣게 설명을 해 주시지요.” “말 그대로에요. 만물을 구성하는 것은 마나(mana). 신의 영역인 9클래스라도 마나로 구성 되어 있고, 마나가 없으면 마법을 쓸 수 없어요. 차원의 열쇠로 인해 만들어진 차원은 무의 공간. 즉,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지 못한 태초의 우주에요.” 그녀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내 표정을 살폈다. 내가 이해했나, 이해 못 했나를 살피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해했다. 아니, 이해한 척 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태초의 우주는 의지가 없는 존재에요. 많은 시간이 흐르고 의지가 생기자 마나가 생겨났지요. 그리고 그 마나로 모든 것이 만들어졌어요. 9클래스는 마나의 지배자. 차원계에 산재해 있는 마나들을 생각만으로 지배할 수가 있지요. 그들은 우주의 의지를 가진 자들이에요.” 잠시 침묵. 생각 정리 중. 이윽고 생각 정리 완료. 난 아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차원의 열쇠로 다른 차원을 만들면 그 차원은 의지가 없고, 의지가 없기 때문에 마나가 없고, 그렇기에 9클래스가 지배할 마나도 없어서 그 곳에서라면 이 차원에 피해를 입히지 않고 승부도 가릴 수 있다는 얘깁니까?” “예.” “그럼 굳이 9클래스를 마스터할 필요가 있나요? 주위에 마나가 없다면 쓸 수 있는 마법은 육체에 가진 마나에 한정되어 있다는 얘긴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우주의 의지가 없는 곳에는 마나가 없어요. 그런데 그 곳에 마나를 가진 존재가 존재한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오직 9클래스만이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어요.” 나도 한 때는 9클래스를 마스터한 위대한 마법사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쁜 여자와 결혼하여 라이를 예쁘게 키우는 작은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단 말인가? “그럼 9클래스를 마스터해야겠군요.” “예.” “그런데 무슨 수로 마스터하나요? 설마 지금부터 열심히 수련을 하라는 것은 아닐텐데.” “물론 아니에요. 일단 먼저 차원의 열쇠를 찾으세요.” “그렇게 말을 하셔도 그게 어딨는지 알아야 찾을 것 아닙니까?” “갈리온드라는 엘프를 찾으세요. 차원의 열쇠에 대해서는 그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어딨는지 알아야 찾을 것 아닙니까?” “모르면 다른 엘프에게 물어 보세요.” “…….” 그냥 자기가 알려주면 어디 덧나나? 차원의 열쇠라는 것은 다른 차원을 창조할 수 있는 아이템. 그 것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설마 열쇠처럼 생긴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그 거 무지하게 비쌀텐데 그냥 알려 주려고 할까? 그리고 그 건 대체 누가 만든 걸까? 웬만한 능력으론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차원의 열쇠는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든 건가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다만 추측을 할 뿐이지요.” “그럼 그 추측이라도 말해 주세요.”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카이네이드 의식의 일부. 만약 화를 내기 시작하면 다른 의식이 나올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제갈량의 의식이라 던가……. “…….” 상대가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해서 내가 너무 싸가지 없게 군 것 같아 죄송하기 이를 데 없다. “손을 내밀어 보세요.” 난 ‘왜? 니가 손금이라도 봐주게?’ 등등의 건방진 말은 내뱉지 않았다. 첫째도 예의, 둘째도 예의. 잘못해서 제갈량 성격 나오면 안 되니까. 난 군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손바닥 위에 구슬 두 개를 올려 놓았다. 그 구슬은 사탕 정도의 크기로 아무 색깔 없이 투명했다. “이 건 뭔가요?” “구슬입니다.” “…….” 설마 싸가지 없게 군 것에 대한 복수 인가? “흠흠, 설마 제가 이 게 구슬인 것을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그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서 물은 것 아니었나요?” “…….”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우습게 보여? 내가 화를 내려는 찰나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생긋 웃었다. “허억-!” 그 순간 나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내 맹새코 이제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미소는 본적이 없었다. 마치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느낌. 대화에 정신이 팔려 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다니. 어찌 이런 멍청한 실수를! 흰 피부와 분홍빛 입술. 매력적으로 반짝이는 녹보석 같은 눈동자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진초록색 머리카락. 반짝반짝~! 밤하늘의 어둠을 몰아내는 별빛이라도 어찌 이 여인보다 아름다우리. 아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것 같다. 이런 여인을 앞에 두고 쓸데 없는 얘기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니. 대체 나는 왜 이리 무지하단 말인가?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아, 아닙니다.” 이제보니 목소리 또한 은쟁반에 옥 구르듯, 화투판에서 돈 굴러오듯 아름답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이 엘프 여인과 나의 만남은 운명이 아니었을까? 혹시 우리는 전생에 연인이 아니었을까? 난 탁자 위에 놓여진 그녀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리고 뜨거운 눈길을 그녀에게 보냈다. “마드모아젤.” “뭐 하시는 겁니까?” 난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촉감과 따뜻한 체온이 내 몸을 뜨겁게 달군다. 난 그녀의 손을 내 볼로 가져가 비볐다. “우리는 전생의 연인이었습니다. 당신은 공주, 나는 당신을 지키는 기사. 당신과 저는 서로 사랑했지만 미천한 신분이었던 저는 차마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저 쓸쓸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당신이 17살이 되던 해 제국의 왕자로부터 청혼이 들어왔지요. 그 왕자는 조물주의 실패작이라고까지 불리는 인간 쓰레기였어요. 하지만 약소국의 공주였던 당신은 그 청혼을 거절할 수가 없었지요. 날짜는 점점 흘러 당신이 제국으로 결혼하러 가는 날. 저는 그날 제 일생일대의 결심을 했습니다. 당신을 데리고 도망치기로. 우리는 몰래 왕성을 빠져 나와 국경을 넘었지요. 하지만 생긴 것도 치다만 떡 같이 생긴 제국의 왕자는 성격 역시 쓰리고 판 세 번 연속으로 맞은 놈처럼 더럽기 그지 없었어요. 그런 주제에 여자 얼굴은 드럽게 밝혔지요. 아무튼 그 놈은 당신을 차지하기 위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우리를 쫓아 왔어요.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지요. 모든 희망이 사라지려는 그 순간, 저는 당신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검을 뽑아 들었어요. 녀석은 이렇게 외쳤지요. ‘공주를 내놓는다면 네 놈의 목숨만은 살려주마.’ 당신은 저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그에게 가려고 했지요. 하지만 전 당신을 보낼 수 없었어요. 설사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하여 전쟁이 시작 되었지요. 1 대 1,000,000의 싸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만 전 당신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싸웠어요. 당신을 보호하며 사흘 밤낮을 싸운 결과 전 999,999명을 베어 넘겼지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왕자가 당신이 몸에 칼을 박아 넣었어요. 그 때 전 미칠 것 같은 분노를 느끼고는 번개 같이 달려들어 주저 없이 그 놈의 목을 베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어요. 전 당신을 부여잡고 오열을 터트렸지요. 당신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어요. ‘절 잊고 당신이라도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는 숨을 거두었어요. 전 싸늘하게 식은 당신의 시체를 끌어 안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어요.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 후, 저는 당신을 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아무도 없는 땅으로 갔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 당신을 묻고 죽는 그날까지 당신의 무덤을 지켰답니다.” 주르륵~ 지금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째서 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전부 죽는 걸까? 어째서 내 전부 비극이란 말인가! 그녀는 나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인가요?” 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표정이 벌레를 씹은 것처럼 바뀌는 것은 왜일까? 설마 한번 가지고는 부족해서 그러는 건가? 난 다시 그녀의 다른 손등에도 입을 맞추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아쉬워 할까봐 침까지 발라 주었다. “전생의 연인들이 이렇게 다시 만나긴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났으니 그 기념으로 화끈하게 뽀뽀나 한번 때리는 것이 어떨까요? 물론 그대가 갈 데까지 가기를 원한다면 전 기꺼이 그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 놀라는 듯한 저 표정. 분명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다. 그녀의 눈빛은 뜨겁고 강렬하게 타올랐다. ‘더 이상 절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말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지.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라이는 정원의 꽃밭에서 나비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루엔은 나무에 기대 앉아 라이를 바라 보고 있었다. “아! 오빠다!” 라이는 쪼르르 달려와 나의 품에 안겼다. 루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얘기를 한 건가요?” “그냥 이러저런 얘기들이요.” “뺨은 왜 그래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난 부어오른 뺨을 쓰다듬었다. 얼얼하면서 화끈거린다. 이빨까지 흔들리고 있다. 흑흑, 정말 너무해! 나 같이 연약한 남자를 그렇게 세게 때리다니.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해도 되잖아. 난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며 루엔에게 물었다. “혹시 갈리온드라고 아시나요?” “예? 어째서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는 군요.” “예. 꽤 유명한 엘프니 당연 알고 있지요.” “그를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요.” “왜죠?” 난 턱으로 통나무집을 가리켰다. 그러자 루엔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분의 말씀이시군요.” 그분? 그분 좋아하네. 이 곳에 사는 엘프들은 전부 그녀의 미모와 언변에 속고 있는 것이다. 전생의 연인의 따귀를 사정없이 후려갈긴 여자의 어딜봐서 ‘그분’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젠장, 얼굴만 예뻤다 뿐이지 성격은 제갈량과 똑같아. 속은 내가 바보지. “갈리온드라는 엘프를 만나봐야 하니 그가 사는 곳까지 안내 좀 해주세요.” “예.” 루엔이 앞장 서자 난 라이와 함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라이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내 복장을 뒤집는 대사를 내뱉었다. “뺨에 있는 손바닥 자국 굉장히 멋있어요!” “…….” 니 뺨에도 똑 같은 걸 하나 만들어 줄까? 잊혀진 엘프의 숲. 이 곳은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숲으로 그 동쪽에 있는 적색 산맥 때문에 인간이 갈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몇 가지 근거를 통해 적색 산맥 너머에는 엘프들이 살고 있는 숲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숲이라고는 하지만 잊혀진 엘프의 숲 전체가 숲은 아니다. 어떤 곳은 숲이고, 어떤 곳은 평야, 또 어떤 곳은 산. 하지만 숲이 차지하는 비율이 월등히 높은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크기가 크다보니 마을 역시 하나만 있을리 없다. 루엔이 말하길 잊혀진 숲 전체에 걸쳐 크고 작은 촌락이 백개 정도 산재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갈리온드라는 엘프가 사는 마을로 가는 중이고. 나는 평소 도보 여행을 즐겨하였다.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주위의 기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말이라도 세 번 이상 들으면 짜증나는 법. 내가 아무리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하더라고 계속 걷게 되니 좋을 리 없다. 게다가 동행하는 사람, 혹은 엘프가 나보다 훨씬 빠르게 걷는다면 말이다. “빨리 와요.” 두 엘프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렸다. 난 헥헥거리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루엔은 그렇다 치고 라이마저 왜 이럴까? 아직 어린 아이여서 다리도 짧을 텐데. 인간이 한 시간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대략 4km. 내 계산에 따르면 지금 내가 한 시간 동안 걸은 거리는 7km 정도 된다. 강행군을 한 것이다.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헥헥거리는 반면 라이는 지친 기색도 없이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사람…… 아니, 그 엘프가 사는 곳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이 속도로 계속 걷는다면 모레나 글피쯤 도착할 수 있을 거에요.” 이 속도로 걷는다면 도착하기 전에 죽어요. 난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말 대신에 그늘에 주저 앉았다. 그러자 라이는 뛰어와 내 옆에 주저 앉았고, 루엔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전부터 느꼈는데 지구력이 없으시군요.” “예전에는 조금 괜찮았는데 나이를 먹으니 좀 힘드네요.” “…….” 430살 먹은 할머니 앞에서 나이를 운운하는 것은 너무 주제 넘은 짓이었나? 우리가 향하는 곳은 남동쪽 방향이다. 나침반도 없는데 어떻게 방향을 아냐고? 그야 나의 천재적은 방향 감각…… 때문은 아니고 숲에서 길을 찾는데 뛰어난 엘프 종족의 말을 빌어서 알게 되었다. 내 뺨에 선명한 손자국을 남긴 엘프가 사는 그 곳은 잊혀진 숲의 중앙 부근. 그렇다면 처음에 우리가 떨어진 곳 역시 중앙 부근이라는 것이다. 그럼 그 곳에 결계는 왜 있는 것인가? 처음에 난 숲 바깥 쪽의 결계와 안쪽의 결계가 따로 있는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었다. 우리가 이 곳으로 온 것은 텔레포트 스펠이 걸린 팔찌 덕. 그 결계는 마법 결계였기 때문에 텔레포트 마법 역시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을 토대로 나는 그녀가 우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바깥쪽의 결계를 지웠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그럼 대체 우리 앞을 가로막았던 결계는 무엇인가? 그야 간단하다. 그 것은 나보고 엿이나 먹으라고 설치해 놓은 결계였던 것이다. “…….” 생각해 보니 열받는다.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 처음에는 제갈량으로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더니 엘프로 나타나서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구나. 내가 지금 해야하는 일은 차원의 열쇠를 찾는 일과 9클래스를 마스터하는 일. 그리고 덤으로 예쁜 여자와 결혼하는 일과 라이를 양육하는 일. 내가 이러한 일들을 왜 해야 하는 가? 그야 당연 세계 평화를 위해서다. 난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선택 받은 인간인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 나를 중심으로 용사와 마법사들이 이열종대로 줄을 서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나만 혼자 싸워야 하는 가? 그래. 싸우는 건 나 혼자 한다 치자. 그럼 싸움 준비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줘야하는 것 아닌가? 그녀만 해도 그렇다. 차원의 열쇠를 찾으라니. 자기가 찾아서 건네 주면 어디 덧나나? 세계 평화가 중요한 이 마당에 필요한 것을 전부 나보고 알아서 충당하라니. 진짜 세계를 지킬 마음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안 지킬 수는 없는 노릇. 어떠한 역경과 시련이 내 앞을 가로 막더라도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밀고나가는 수 밖에. 사실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헛소리 때문에 내가 이러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의무감이라고나 할까? 이그리드와 크로니스에 대한. 원치 않았던 인연이긴 했지만 이미 얽혀버렸으니 되돌릴 수는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숨겨진 진실이 대한 것. 에스카네스는 이그리드 때문에 크로니스가 미쳤다고 말했다. 이그리드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잊지 못해 미쳤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내 생각에 그렇게 단순한 문제 같지는 않다. 분명 크로니스는 이그리드의 죽음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그리드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미쳤다. 9클래스의 정신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치고 싶어도 미칠 수가 없는 존재들이 9클래스인 것이다. 그렇다면 미치게 된 계기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는 이그리드의 죽음을 인정하였다가 인정하지 않게 된 사건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 쉬었으면 이만 일어나지요.” 몸은 쉬었지만 머리는 녹초가 되었다. 원래 정신 노동이 육체 노동보다 힘든 법인데. 난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이 것 좀 봐요, 오빠.” 머리카락 사이에 하얀 꽃을 꽂은 라이는 칭찬이라도 한 마디 해달라는 듯 내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에 꽃을 꽂고 있는 라이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마치 천사가 하얀 깃털을 휘날리며 날아다는 것만 같았다……라고 말하는 놈은 변태가 틀림 없으니 조심하도록 하자. 실제 라이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 같으니. 어린 아이가 머리에 꽃을 꽂는다고 8등신 미녀가 되냐? “그 거 무슨 꽃이니?” “저도 몰라요. 저기 있기에 그냥 꺽어서 꽂았어요.” 그렇게 꽃을 마구 꺽어도 되는 건가? 라이는 칭찬 한 마디를 꼭 받아내야겠는지 계석해서 나를 향해 웃었다. 난 한숨을 내쉬며 라이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잘 어울린다.” 라이는 눈을 크게 뜨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요? 고마워요, 오빠.” 고맙긴, 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 건데. 이렇게 라이를 보고 있자니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으음, 대체 뭐가 빠진 걸까? 아! 그렇지. 라이코스가 없구나. 이 놈은 대체 뭘하고 있기에 아직까지 안 돌아 오는 거지? “라이야, 너의 친한 친구 라이코스는 어딜 갔니?” “이코는 주머니에 있어요.” 거기에 없을텐데. 그렇게 말한 라이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시간이 지나도 원하는 것이 손에 걸리지 않자 라이는 더욱 열심히 뒤적거렸다. 한참 후, 라이는 나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난 라이가 울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걱정마렴. 너의 친한 친구 라이코스는 잠시 야유회를 떠난 것뿐이니까. 야유회가 끝나면 곧 돌아올 거야.” “정말이요?” “물론이지. 나한테 말하고 갔는 걸.” 라이는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라이에게 있어서 라이코스는 영원을 함께 하는 마음의 친구라 할 수 있다. 빨강머리 앤과 다이애나의 우정처럼. 나도 마음의 친구가 있으면 좋을 텐데……. “…….” 잠깐. 난 마음의 친구는커녕 그냥 친구도 없잖아. 설마 내가 왕따였단 말인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난 그 동안 나의 인간 관계에 대해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친구 하나 없는 왕따였던 것이다. 왕따. 이 시대에 없어져야 할 그 이름 왕따. 조금만 서로를 이해해 주고, 한 걸음씩 서로에게 다가간다면 왕따 같은 것은 사라질텐데. 예전에 뉴스에서 본 보도가 떠오른다. 반 친구들의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중2 소년. 이 소년은 뛰어내리며 이렇게 외쳤다. ‘왕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소년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졌을까? 아아! 나도 정말 왕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거기서 뭐하시나요? 빨리 오세요” 루엔의 외침에 난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잠시 동안 말 없이 걸었다. 루엔은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이 거추장스러운지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었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니까 얼굴도 많이 달라 보인다. 엘프임을 증명하는 듯한 길고 뾰족한 귀. 새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그와 대비되는 붉고 도톰한 입술. 쿵- 쾅- 쿵- 쾅-! 어찌하여 내 마음이 이렇게 뛰는 걸까? 불 타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한 나는 루엔의 손을 덥썩 움켜 잡았다. “왜 이래요?” “우리…….”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상대는 할머니인데. 혹시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친구해요.” “예? 친구라니요?” “말 그대롭니다. 세계가 구역화 되어가며 개인 주의 사상이 만연한 이 시대에 공동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불교해서 말하길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렇게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이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연이 아닌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친구 하는 게 어떨까요? 그대는 엘프, 나는 인간. 그대는 여자, 나는 남자. 그대는 430살, 나는 17살. 친구 하기엔 너무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남자와 여자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일부 몰상식한 인간들의 발언이 우리의 사이가 친구 사이로 발전하는 것에 지대한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에 연인 사이로 발전 할 땐 발전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서로를 아끼고 생각해주는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엔은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뭐 저와 친구가 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우리 이제부터 더욱 친하게 지내 보죠. 하, 하, 하!” 아자! 친구 한 명 사귀었다. 그것도 미녀 엘프로. 난 괜히 친한척하며 그녀의 옆에 딱 붙어 대화를 나누었다. “갈리온드라는 엘프가 유명한가 보죠?” 루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제가 말한 인간 세상에 갔다온 엘프가 바로 그에요.” “그 인간을 사랑했다는 엘프 말인가요?” “예.” 인간을 사랑한 엘프라……. 요즘들어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 우연과 필연에 대한 것이다. 우연처럼 일어나는 일들도 실상을 따져보면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와 이그리드, 크로니스가 그러하다. 이그리드와 크로니스의 만남으로 인해 나와 이그리드가 만나게 되었고, 그럼으로 인해 나는 크로니스와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갈리온드. 인간을 사랑한 엘프. 내 예감인데 분명 이 엘프와 나의 만남은 단순하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그를 찾아가서 ‘차원의 열쇠 좀 주세요.’ 라고 말 하면, 그는 ‘예. 여기 있어요.’ 라고 친절하게 대답할 것 같지 않다는 얘기다. 안 준다고 버틸 수도 있고, 주기 싫다고 거절할 수도 있지. 세상 만사 쉬운 일이 어딨겠냐만은 가끔은 쉬운 일도 조금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인생을 살아갈 맛이 나지. “그 남자 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으음, 글쎄요. 아마 230살이나, 240살 정도일 거에요.” “생각보다 젊군요.” 내가 이 곳에 와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엘프들은 남의 나이는 물론이고 자신의 나이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긴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 10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젊음을 누리며 사는 종족들인데. 나는 100년도 인간.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오래 살아 봐야 100년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인간의 삶은 덧 없이 짧은 것. 아아, 나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구나. “…….” 생각해 보니 에스카네스와 그녀 모두 나에게 ‘시간이 없다’ 고 말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시간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크로니스가 폭주하지 전까지의 시간?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시간은 대체 어느 정도나 남았을까? 어찌되었든 서둘러서 나쁠 것은 없겠지. 엘프들의 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체력이 금방 떨어졌다. 하지만 난 말 없이 루엔의 뒤를 따라갔다. * * * * * * 쉬지 않고 열심히 걸은 덕인지 하룻밤이 지나고, 이틀밤이 지나고. 셋째밤이 다가올 쯤에 우리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곳 갈리온드라는 엘프가 살고 있나요?” “예.” 대략 3, 40가구가 모여 있는 작은 마을. 엘프들의 마을답게 그림 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신록은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엘프의 숲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자면 이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라이와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바깥 세상에는 완전히 신경을 끄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는 슬프다. 일이 전부 끝나고 나면 이 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난 옆에 있는 라이의 머리에 손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라이야, 우리 나중에 이 곳에서 같이 살래?” “싫어요.” 라이는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고개를 젓는 거지? 설마 나랑 같이 사는 것이 싫은 거야? 정말 그런 거니, 라이야? “전 숲보다는 도시가 좋아요. 오빠랑 같이 도시에서 살래요.” “도시? 도시에서 살고 싶어?” “예.” 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정말 다행이다. 난 또 라이가 나랑 같이 사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지. 뭐 라이가 도시가 좋다면 도시에서 살아야지. 늦은 시간이었기에 밖에 나와있는 엘프는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집이 불이 꺼져 있었다. 사위가 고요하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을 밟는 소리만이 크게 울려 퍼진다. 루엔은 집들을 대충 살피더니 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엔이 걸음을 멈춘 곳은 이 곳에 있는 집들 중 가장 부실해 보이는 집 앞이었다. 단칸의 판자집. 나무로 지어지긴 했지만 이러저리 엉성하게 덧대놓은 것이 빈민촌에나 있을 법한 무허가 주택을 연상시켰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오자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집이 좌우로 흔들렸다. “설마 이 집인가요?” “예. 맞아요.” “뭔가 좀 위험해 보이네요.” “전에 왔을 때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지금 보니 조금 심각하긴 하네요. 수리라도 조금 할 것이지.” 수리? 내가 보기엔 수리 가지고는 턱도 없어 보인다. 휘이이잉~ 자꾸 불지마렴, 바람아. 이러다가 집 무너지겠다. 흔들흔들. 무슨 흔들 바위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집이 좌우로 흔들리는 걸까? “여기에 정말 엘프가 사나요?” “불은 켜져 있네요.” 정말로 불은 켜져 있다. 하지만 그 불마저 집을 따라 흔들리고 있어 마치 유령집 같은 모습을 자아냈다. 이 집에 꼭 들어가야 하는 걸까? 솔직히 무섭다. 집이 폭삭 주저 앉을 까봐. 차라리 살얼음판에서 마라톤을 하고 말지 이 집에는 정말 들어가기 싫다. “안에 있는 엘프보고 밖으로 나오라고 하면 안 될까요?” “그냥 들어가죠. 보기엔 곧 무너질 것 같이 보여도 실제론 꽤 튼튼한 집이니까요.” 루엔은 덜컹거리는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콰당-! “으악!”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옆에 있는 라이를 끌어 안았다. “괜찮아요, 오빠. 문짝이 떨어져 나간 것 뿐이에요.” 안심시키는 듯한 라이의 말에 난 고개를 돌렸다. 안쪽으로 넘어간 나무문과 손잡이만 달랑 손에 쥐고 황당해 하는 루엔의 모습이 보였다. 보기엔 곧 무너질 것 같이 보여도 실제로는 당장 무너질 것 같다. 루엔은 들고 있는 손잡이를 버리며 웃었다. “괜찮을 거에요. 설마 무너지야 하겠어요.” “…….” 설마 무너질 것 같다. 루엔은 당당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삐걱삐걱~ 마룻바닥이 흔들리는 소리. 정말 너무 불안하다. 루엔이 집주인과 얘기를 하는지 말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쿵-! 이건 무슨 소리지? 그 소리가 들린 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불안한 마음이 증폭 되는 것을 느꼈다. “들어가요, 오빠.” 라이가 먼저 당당하게 들어가는데 내가 주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 라이를 따라 들어갔다. 밖에서 보았을 땐 마치 유령해 집처럼 음산해 보이던 집이 안으로 들어가니까 더욱 음산해 보인다. 집 안은 단촐하기 그지 없었다. 낡아서 구멍이 숭숭 뚫린 이불이 놓여진 침대,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작은 탁자와 의지 하나. “허억!” 걸음을 옮기던 중 난 발에 걸리는 무언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엔 해골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술병이었다. 하아~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난 술병을 저쪽으로 치우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탁자 위에 한 엘프가 엎어져 있었다. 엘프의 긴 머리카락은 피범벅이 된채 심하게 헝클어져 있고 피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왜 그러세요?” 루엔은 손에 술병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럴 듯한 추리를 내릴 수 있었다. 루엔이 집 안으로 들어간 직후 둘은 무슨 얘기를 나누었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대충 짐작이 간다. 루엔은 예전에 저 남자에게 청혼을 했다 거절을 당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얘기가 간단하게 풀린다. 둘은 잠시 말다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술에 취해 반쯤 맛이 간 저 엘프가 술김에 루엔의 자존심을 긁는 말 -루엔의 청혼과 관련이 있는- 을 하였을테고, 모욕적인 언사를 참지 못한 루엔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술병을 들어 엘프의 머리를 내리쳤을 것이다. 저 피 흐르는 것 좀 봐. 바닥에 피가 고이고 있어. 이럴 수가! 나의 친구가 살인을 하다니.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왜 그렇게 당황하시죠?” 루엔은 술병을 내려 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난 라이를 끌어 안고 생각에 잠겼다. 난 어떻게 해야 돼? 친구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은 친구의 도리. 친구의 살인을 덮어주는 것도 친구의 도리. 그럼 같이 암매장을 해야 하나? 아니야, 그렇게 했다간 공모죄로 나도 같이 쇠고랑을 찰 수가 있어. 아아~ 어찌해야 하는가? 1번, 경찰서에 신고한다. 2번, 못 본척 도망친다. 3번, 친구를 위해 암매장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래. 루엔을 전과자가 되게 할 수는 없어. 게다가 루엔이 잡혀가면 루는 어떡해? 할머니 없이 혼자 집에서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 하잖아. 흑흑, 소년 가장이라니 너무 불쌍해. 난 친구를 위해 암매장을 돕기로 결심하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전 친구를 신고하는 그런 나쁜 놈은 아닙니다. 전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놈입니다. 절 믿고 제 말을 따르세요. 일단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하군요.” 난 청룡도를 뽑아 들었다. 루엔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왜 칼을…….” “토막 내서 묻는 편이 편하잖아요.” 분명 말 해두지만 난 루엔이 미녀여서 이러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저 친구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이러는 것이다. 나는 대체 왜 이리 착한 걸까? “아니, 토막이라니요?”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난 청룡도를 꽉 움켜 쥐고 조심스럽게 시체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시체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뭐야? 설마 좀비가 되어 다시 일어 나는 거야? 설마 그럴 리가……. 난 그럴 리 없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며 다시 시체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 순간 시체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넌 뭐야?” “시, 시체가 말을 한다.” 죽었던 놈이 좀비로 되살아 났으니 이젠 어찌해야 하는가? 뭘 물어 보기까지 하시나? 그냥 무조건 도망쳐야지. “도망쳐, 라이야.” 난 청룡도를 버리고 라이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 집을 뛰쳐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 * * * * “하하하! 그냥 장난 한번 처 본 거에요.” 뒤 쫓아 온 루엔에게 설명을 들은 나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루엔이 말한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루엔은 술 취해 헤롱거리는 갈리온드에게 말을 걸었다. ‘야! 일어나 봐.’ 그러자 갈리온드는 멍한 눈으로 루엔을 바라 보았다. ‘넌 누구냐?’ 술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한 갈리온드는 탁자에 엎어졌다. 그때 그의 탁자 위에 있던 와인병이 엎어지며 그의 머리를 적시고 아래로 흘렀다. 루엔은 그걸 보고 깜짝 놀라 술병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내가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솔직히 이 걸 보고 살인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인간이 몇 명이나 있겠냐? 어찌 되었든 살인 사건이 될뻔했던 이 일은 적당히 얼버무려 졌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머리카락에서 와인이 뚝뚝 떨어지는 남자 엘프와 마주 보게 되었다. “댁이 갈라온드인가요?” 남자 엘프는 손에 든 술병을 입술에 대고 기울였다. 꿀꺽꿀꺽~ 흘러내린 와인이 그의 목을 타고 흐른다. 참으로 술을 더럽게 마시는 엘프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더럽다. 더 자세히 보니 옷도 더럽다. 덤으로 집도 더럽다. “그래. 내가 갈리온드다. 그런데 왜?” 말도 더럽 게 한다. 왠지 성격도 더러울 것 같다. “제가 댁을 찾아 온 이유는…….” 쿵-! 그가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난 도움을 구하는 눈길로 루엔을 보았다. “많이 취한 것 같네요.” 루엔은 그를 들쳐 업어 침대까지 옮겼다. “이젠 어쩌죠?” “내일 술이 깨면 얘기해야 겠죠.” “아니, 그게 아니라 잠 말이에요. 우리 어디서 자요?” 루엔과 나는 동시에 집 안을 둘러 보았다. 이 좁고 황량한 집에 네 명이 잤다가는 분명 폭삭 주저 앉을 것이다. 루엔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집에서 모두 자기는 무리일 것 같네요. 전 이 곳에 남아있을테니 당신과 저 아이는 잠잘 곳을 찾아 보세요.” “…….” 이 좁은 집에서 남녀가 무슨 짓을 하려고? 이렇게하여 우리는 그 집에서 쫓겨났다. 사실 쫓아내지 않아도 내 발로 나가려 했다. 집이 무너질까 무서워서 잠이나 제대로 자겠냐? “오빠 우리 어디가는 거에요?” “걱정마, 라이야. 나에게 다 생각이 있어.” 주위에 집들이 널려있는데 노숙할 수는 없는 법.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일단 큰집으로 찾아가 라이가 먼저 문을 두드린다. ‘라이는 너무 춥고 배고파요. 라이를 도와 주세요.’ 라이 같이 귀엽고 어린 엘프가 이렇게 부탁을 하는데 안 들어 줄 엘프가 있을리 없다. 그들은 라이를 들어오게 할테고 그러면 라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 오빠 하나 있는데 오빠도 같이 들어가도 되요?’ 그들은 분명 ‘뭐 오빠 하나 쯤이야’ 라고 생각을 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같이 들어오렴.’ 그럼 그때 내가 짠하고 라이의 뒤에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인간. 환영 받을 리 없다. 그들이 나를 못 들어 오게 하면 라이가 울면서 말한다. ‘우에에엥! 전 오빠 없으면 안 돼요. 오빠가 못 들어가면 라이도 안 들어갈래요.’ 만약 이래도 안 통한다면 라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손수건을 물어 뜯으며 흐느끼면 된다. ‘흑흑, 모두들 너무해요. 만약 라이가 밖에서 잔다면, 라이는 분명 얼어죽을 거에요.’ 그러면 나는 라이를 달래며 이렇게 말한다. ‘전 어찌되어도 상관 없으니 이 아이만은 들여 보내 주세요. 이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라이는 나를 껴안으며 울음을 터트린다. ‘우에에엥! 라이는 오빠 없인 아무데도 안 가요.’ 이렇게 문 앞에서 갖은 궁상을 다 떨면 들여보내주기 싫어도 들여보내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나는 왜 이렇게 머리가 좋은 걸까? 이런 고단수의 책략을 순식간에 생각해 내다니. 역시 나는 참모 체질이란 말인가? 난 라이에게 나의 ‘책략’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굉장해요, 오빠! 대단해요, 오빠! 훌륭해요, 오빠! 오빤 최고에요!” “그래. 나도 잘 알고 있어.” 난 존경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귀여운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보고 잔머리나 굴린다고 욕을 해대지만 그래도 너만은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 구나. 나와 라이는 간단한 리허설을 끝마치고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당한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킨대로 해야해, 라이야.” “예.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라이가 잘 할게요.” “너만 믿는다.” 난 집 근처 적당한 곳에 숨었고, 라이는 아장아장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잠시 기다리자 집 안에 불이켜지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민 엘프는 여자였다. 녹색 머리카락의 미녀. 새삼 집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미녀 엘프는 문 앞에 서 있는 라이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니?” 라이는 내가 가르쳐준대로 말하였다. “라이는 너무 춥고 배고파요. 라이를 도와 주세요.” “어머 그러니?” 미녀 엘프는 라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뒤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들어오렴.” 라이는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시간이 흐른다. 계속 흐른다. 30분이 지났다. 그래도 라이는 나오지 않았다. “…….” 이 당혹스러움. 이 배신감. 이 분노감. 뭐야? 지금 라이가 날 배신하고 따뜻한 잠자리를 향해 떠난 거야? 어떻게 라이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흑흑, 딸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 없는 짓이야. 난 숨어 있는 곳에서 나와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문이 열리며 아까의 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세요?” “전 아까 들어간 어린 엘프의 보호자입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나의 위아래를 훑어 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귀가…….” 사실 귀 때문에 이들이 나를 인간으로 알아보는 것이지, 만약 귀만 아니었으면 이들은 나를 엘프로 봤을 것이다. 왜? 그야 당연 내가 엘프만큼 생겼으니까. “전 인간입니다.” “인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나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집 안에 소리쳤다. “얘들아 나와 봐! 인간이야!” 그 순간 엘프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전부 여자 엘프. 그것도 미녀. “이게 인간이야?” “그런 것 같은데. 저것 봐 귀가 짧잖아.” “어머머! 정말 인간이야.” 난 그녀들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 안에 들어 간 엘프의 보호자…….” “어머, 그럼 어서 들어오세요.” 아니,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리다니. 난 그녀들의 환호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집 식탁에 앉아 수 많은 음식들을 입에 쑤셔 넣는 라이를 볼 수 있었다. “어! 오빠 왔어요?” “…….”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다. 그 동안 오냐오냐 기른 것이 잘못이었어. 진정 사랑하는 자식에겐 매를 들었어야 하는 건데. 난 다시금 먹는데 열중하는 라이를 보고 이를 갈았다. 이제부턴 잘못하면 가차 없이 매를 들리라! “어서 앉으세요.” 난 그녀들의 권유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들은 내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쌌다. “진짜 인간이에요?” “예. 그럼 가짜 인간이겠습니까?” “어머! 진짜 인간이야. 너무 신기해.” 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인간은 환영 받지 못하는 거 아닌가? “갈리온드가 말한 대로 귀가 정말 작다.” “그러게 말이야.” 대충 이해가 간다. 갈리온드는 인간 세상에서 인간 소녀를 사랑한 엘프. 당연 인간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웃들에게 인간에 대해 호의적으로 얘기를 했을테고, 그래서 이들은 경계심이 아닌 호기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미녀들에게 둘려 싸여 있으니 정말 좋다. “여기는 전부 여자들만 사나 보죠?” “예. 그래요.” 침착하게 숫자를 세어보니 다섯 명이나 된다. 미녀가 다섯 명 씩이나! “술 한잔 하시겠어요?” “예. 뭐 준다면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손에 술잔이 쥐어졌다. 그리고 술이 넘치도록 따라졌다. 내 왼편에 앉은 여인이 채근을 하듯 말했다. “인간 세상에 대해 말 좀 해봐요. 당신 직업은 뭐에요?” “예. 저는 공작…….” “어머, 공작이래!”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좋아하더니 다시금 나를 졸랐다. “계속 얘기해 봐요.” “예. 저는 아이리스의 공작으로…….” “어머, 아이리스의 공작이래!” 다시금 자기들끼리 잡담. 그리고 다시 채근. “저는 마법사로…….” “어머, 마법사래!” “…….” 무슨 말을 못하게 하는 군. 어찌되었든 미녀들에게 둘려 쌓여 있으니 기분은 좋다. 난 그녀들이 따라주는 대로 입 안에 들이 부으며 그녀들이 궁금해하는 것에대해 얘기를 해주었다. “아하하! 그래서 제가 노처녀한테 그랬지요. ‘아줌마! 그렇게 허구헌날 인상 쓰면서 땍땍거리니까 시집을 못 가는 거야!’ 그러니까 그 노처녀가 뭐라 그랬는 줄 아세요? 글쎄 자기가 시집 못 간게 제 탓이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 잘나고, 멋있어 나한테 반했다는 거죠. 저 때문에 눈이 높아져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그래서 책임지라는 겁니다. 하하하! 노처녀가 나한테 땍땍거렸던 이유는 자기를 좀 바라봐 달라는 애교였던 것이지요. 음하하하!” “어머, 너무 멋있어요!” “하하하하! 뭐 이 정도 가지고. 제가 또 다른 얘기 해드릴까요?” “예. 해주세요.” 난 양쪽에 미녀를 끼고, 앞에 미녀들을 놓고 마음껏 술을 마시며 마음껏 떠들어댔다. 엘프의 숲에 오길 정말 잘했어. 영원히 이 곳에서 살고 싶어.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여자들 정신 연령이 라이랑 똑 같군. 어떻게 내 얘기를 들으며 이렇게 좋아할 수 있는 거지? * * * * *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판자집. 그리고 삐걱거리는 탁자. 난 좌우, 앞뒤 할 것 없이 사방으로 흔들리는 탁자를 불안하게 생각하며 그 너머에 있는 엘프를 보았다. 갈리온드. 어젯밤 보았을 땐 유령이나 좀비처럼 보였는데 오늘 이렇게 밝은 곳에서 다시 보니 꽤나 잘생겼다. 선이 연하고 얇은 얼굴. 간단히 말해 기생오래비 같은 얼굴. 그리고 길게 흘러내린 레몬빛 머리카락과 촉촉하게 젖어있는 레몬빛 눈동자. 정말 여자 꽤나 울렸을 것 같이 생겼다. 나쁜 자식. 니가 잘생겼으면 다야? 니가 뭔데 여자를 울려? 하여튼 잘생긴 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니까. “…….” 내가 왜 이런 안 좋은 생각들을 하는 걸까? 분명 말해두지만 난 저 엘프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은 없다.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가지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다. 그런데 왜 자꾸 안 좋은 생각들만 나는 걸까? 그리고 어째서 자꾸 저 엘프의 레몬빛 머리카락과 레몬빛 눈동자가 신경 쓰이는 걸까? 지금 우리 둘의 공통점을 찾자면 하나를 찾을 수 있다. 그건 바로 어젯밤 멋도 모르고 퍼마신 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 숙취의 고통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을 꺼냈다. “차원의 열쇠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그 역시 손바닥으로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엉뚱한 질문을 꺼냈다. “인간 세상에서 왔다고?” 참으로 어이가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제가 뭘로 보이십니까?” 갈리온드는 바로 대답했다. “인간으로 보이지.” 기대했던 대답이었기에 난 내가 생각하고 있던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제가 인간인데 인간 세상에서 왔지, 그럼 엘프 세상에서 왔겠습니까?” 사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말 해봐야 믿지 않을 것이 뻔하고, 믿으면 설명하기가 귀찮으니 그 것에 대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갈리온드는 잠시 물끄러미 나를 쳐다 보았다. 저 촉촉하게 젖은 레몬빛 눈동자. 마치 누구의 눈동자를 보는 듯 하다. 그래서 그의 눈빛을 받고 있는 나는 굉장히 불안하다. “그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그가 말을 멈추자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불안감을 넘어 두려움이 나를 엄습한다. “혹시 라이레얼…….” “전 그런 여자 모릅니다!” 난 의자를 박차며 벌떡 일어섰다. 한 쪽에 서 있던 루엔과 라이는 나의 박력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고, 집도 놀랐는지 심하게 흔들렸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불안감의 정체가 이 것이었단 말인가? 인간 소녀를 사랑한 엘프.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갈리온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나에게 다가왔다. “라이레얼을 알고 있나?” 난 재빨리 표정을 굳히며 소리쳤다. “전 그런 여자 모른다니까요!” 갈리온드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었다. “난 여자라는 말은 한적이 없는데.” “…….” 설마 내가 유도심문에 걸려든 건가? 젠장,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 무조건 시치미 떼는 거다. “라이레얼을 만나 본적 있지? 그렇지? 만나 봤지?” “아! 정말 모른다니까요!” “만나 봤잖아!” “안 만났어요! 전 그런 여자 몰라요! 왜 자꾸 생사람을 잡으세요?” “거짓말 하지 마, 임마!” 난 내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외쳤다. “이렇게 무례하시다니! 제 평생 이런 모욕은 처음 입니다. 내 이 원한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아무튼 본좌는 그대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으니 이만 이 곳을 뜨도록 하겠소! 가자, 라이야!” “가긴 어딜가!? 내 딸 라이레얼에 대해 말해주고 가!” “아! 그런 여자 모른다니까요!” 난 라이를 데리고 재빨리 집을 나가려 하였다. 하지만 내가 나가기 직전 갈리온드의 팔이 내 옷을 붙잡았다. “라이레얼에 대해 말해주기 전엔 못 가!” “어허!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가? 그대는 예의라는 것을 모르는 가? 아이씨, 자꾸 당기지 좀 마. 바지 벗겨져!” 콰지직- 우지끈-! 이게 무슨 소리야? 나의 의문에 라이가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어라! 집이 무너져요, 오빠!” 라이의 말대로 정말 지붕이 내려 앉고 있었다. “피해!” 나는 라이를 껴안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정말 완벽하게도 무너졌군.” “그러게 말이에요.” “그 좁은 집에서 그 난리를 피웠으니 무너지는 게 정상이죠.” “이 집은 원래부터 부실했어요.” 우리는 폭삭 주저 앉은 집 앞에 서서 잔해들을 바라 보았다. 집이 무너지는 소리에 놀란 엘프들은 일제히 집에서 뛰처 나와 무너진 집을 구경하였다. 그런데 그 곳에 인간이 있어서 집구경을 하다 말고 인간 구경을 하였다. 졸지에 동물원 원숭이가 된 나는 엘프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 먹으며 재주를 넘었다. 아! 그나저나 무너진 집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 우리 사회의 폐단이라 할 수 있는 부실공사가 아직까지도 이렇게 자행되고 있다니. 어찌하여 순간의 이익에 휩쓸려 가까운 미래조차 내다보지는 못하는 가? 집을 지을 때는 ‘우리 가족이 살 집이다’ 라고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지어야지 이렇게 마구 잡이식으로 공사를 하면 대체 어쩌자는 건가? 부실 공사도 문제지만 안전 불감증도 큰 문제야. 어떻게 이런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었던 거지? “자리를 옮기죠.” “그러죠.” 우리는 주위를 빼곡히 둘러 싼 엘프들을 헤치고 나와 숲속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곳에 자리잡은 우리는 그 곳에서 얘기를 시작했다. 제일 처음 말을 꺼낸 엘프는 갈리온드였다. 그는 내 멱살을 쥐어잡을 듯한 고압적인 자세로 입을 열었다. “내 딸 라이레얼을 어쨌어!?” 누가 들으면 내가 잡아 먹기라도 했는 줄 알겠다. “전 그런 여자 모른다니까요. 아, 사람말을 그렇게 못 알아 들어요? 이 지역 엘프들은 다 이럽니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전 정말 모른다니까요.” 이 엘프 상당히 끈질기다. 갈리온드는 정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인지 계속해서 나를 다그쳤다. 물론 나는 계속 모른다고 잡아 땠다. “우리 그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차원의 열쇠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 보도록 하지요.” 갈리온드는 고개를 획 돌렸다. “난 차원의 열쇠 같은 거 몰라.” “예? 아니, 댁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아! 모른다니까!” “모르면 어떡해? 세계 평화는? 크로니스는?” “난 몰라. 니가 라이레얼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차원의 열쇠를 알겠나?”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알면서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치사한 엘프를 봤나!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치사한 일인 걸 모른단 말인가?(참고로 가장 치사한 일은 줬다가 도로 뺐는 거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잡아 먹을 듯이 노려 보았다. 그 짧은 시간에 난 쉴 새 없이 머리를 회전시켜야 했다. 휙휙휙~. 처리 용량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타 버릴 것 같아. 뇌가 엉키기기 시작했다. 세계 평화를 위해 라이레얼과의 관계를 인정해야 하는 가? 라이레얼과의 관계만 인정하면 세계 평화는 지켜지는 거야? 난 인정만하고 뒤로 빠지면 되는 거야?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저 엘프는 내가 인정을 하는 순간 라이레얼을 찾아 내라고 난리를 칠 것이 분명하다. 라이레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모를 지닌 하프엘프 여인. 그녀의 관능적인 미모에 홀린 남성들은 한 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미모에 빠진 남성들은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난 그 때의 만남 이후 라이레얼과 나의 인연이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도 라이레얼은 내 발목을 잡고 늪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아아, 결국 나는 라이레얼에게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 했단 말인가?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감춰졌던 진실을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세계 평화고 뭐고 진실을 은폐해야 하는 가? 으음, 세계 평화라는 대의명분 하에 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는 없는 법. 그냥 세계 평화고 뭐고 모른척 하자. “아! 생각 났어요! 그때 무도회장에서 만났던 그 하프엘프 말씀이시죠? 그 하프엘프 이름도 라이레얼이었어요. 그리고 그 하프엘프는 오빠랑 굉장히 친해요. 오빠랑 만나자마자 막 껴안고 그랬어요. 그리고 오빠는…….” 난 급히 라이의 입을 틀어 막았지만 이미 업질러진 물이었다. 왜 그랬니, 라이야? 어째서 넌 이 오빠를 벼랑 끝에 몰아 넣는 거니? 난 갈리온드의 눈치를 보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하였다. “분명 말하지만 전 그런 여자…….” “이 자식! 내 딸을 어쨌어!” 어쩌긴 뭘 어째? 분명 말하지만 본인은 결백하다. 제발 믿어 줘라. “아, 모른다니까요.” “좋아. 네 녀석이 끝까지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갈리온드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난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이내 코웃음을 쳤다. 그 짧은 칼로 뭘 하시려고? 니가 지금 그 짧은 칼로 본좌의 청룡도법을 상대하겠다는 거냐? “무, 무슨 짓이에요!?” 소리친 엘프는 루엔이었다. 갈리온드의 손에 들린 단검이 갈리온드의 목에 겨눠진 것이 보인다. “어차피 내 사랑하는 딸을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면 죽는 게 나아!” 내가 분명 장담하건데 저건 일종의 쇼라 할 수 있다. 만약 정말로 자기 목을 긋는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주르륵-! 저 가늘고 흰 목에서 흐르는 붉은색 액체는 뭐지? 저 것도 쇼의 일종인가? “안 돼!” “말리지 마! 내 딸 라이레얼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난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저 엘프 완전히 맛이 간 것이 틀림 없다. 정말로 죽으려는 건 아니겠지? 잠깐. 저 놈은 현재 미친 상태다. 미친 놈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 법. 난 갈리온드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갈리온드가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난 그 자리에 멈춰서서 말했다. “이, 이봐. 진정해. 당신의 그런 행동은 현 상황을 타개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해. 우리는 작금의 사태에서 좀 더 현명한 선택을 내릴 필요가 있어.” “난 죽을 거야!” 광기 어린 눈빛과 일그러진 얼굴. 그래. 자기가 자기 목숨 죽이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가 뭐가 있겠냐? 죽을 놈은 죽어야지. “이봐. 그럼 죽을 땐 죽더라도 차원의 열쇠에 대해선 말해주고 죽어.” “닥쳐! 내가 지금 내 딸 행방도 모르는 마당에 그딴 거 가르쳐 주게 생겼어?” “아니, 그딴 거라니? 지금 세계가 멸망하느냐, 마느냐가 그 거에 달렸는데. 세계가 멸망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닥쳐! 어차피 난 지금 죽을 건데 세계가 멸망하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이야?” 진짜 말 안 통하는 엘프다. 생각 같아서는 ‘그래. 그냥 죽어, 임마!’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누군가가 내 옷깃을 잡아 당기기에 고개를 돌려 보니 라이였다. “왜 그러니?” “그냥 말하세요.” 라이가 그냥 말하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그래. 내가 라이 부탁이니까 특별히 들어 준다. “잘 있어요, 루엔. 전 이만 이 세상을 하직하렵니다.” “안 돼요, 갈리온드!” 꼴값을 떨어라. 나이도 지긋한 엘프들이 뭐하는 짓이냐? 난 두 팔을 벌리며 목청껏 소리쳤다. “잠-까-안!” 세 엘프의 시선 집중. 요즘들어 자주 시선 집중을 받긴 한다만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난 갈리온드에게 다가갔다. “뭘 그런 일 가지고 목숨까지 끊으려 하시나?” “그럼 내 딸에 대해 말해줄 건가?” “분명 말 하지만 난 그런 여자…….” “그럼 난 이만 이 세상을…….” “어허! 잠깐 농담 좀 한 걸 가지고 왜 그러시나? 라이레얼에 대해 다 말해주면 되잖아!” “정말?” “어허!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이 엘프가 속고만 살았나?” 갈리온드는 무서운 눈빛으로 날 째려보더니 자신의 목에 대고 있던 칼을 내려 놓았다. 주르륵- 주르륵-! 정말 너무 많이 흘러내린다. 저러다가 죽는 거 아니야? 루엔이 재빨리 달려들어 자신의 옷으로 목에 흐른 피를 닦아 주었고, 라이는 마법으로 치료를 해주었다. 난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몬빛 머리카락과 레몬빛 눈동자. 유심히 보고 있자니 정말 라이레얼과 닮았다. 라이레얼은 머리카락, 눈동자 등의 외모를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유전자보단 엘프의 유전자가 우성이란 얘기가 된다. “자, 빨리 내 딸에 대해 말해 봐.” 말해 보라고 해도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 해야 하나? 만약 내가 라이레얼과 결혼을 했다면 이 엘프는 나의 장인이 된다. 하지만 난 이미 라이레얼 곁을 떠난 몸. 어찌하여 자꾸 나와 라이레얼을 연계시키려 하는 가? “그런데 차원의 열쇠에 대해선 알고 있나요?” 갈리온드는 잠시 나를 살펴 보았다. 난 나를 훑어보는 그의 눈빛을 통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못 믿을 놈이군. 이 놈한테 그걸 말해줘도 되는 걸까? 이미 알고 온 것 같긴 한데. 내가 보기에 이 놈은 자기 필요한 얘기 듣고나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뜰 놈이야. 그래. 일단 내 딸에 대한 얘기를 먼저 들어봐야 겠다.’ 아주 바보는 아니였군. 내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다니 말이야. 하지만 내가 지금 당장 듣고 싶은 얘기는 차원의 열쇠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난 내가 모르는 라이레얼에 대해 듣고 싶었다. 라이레얼의 과거에 대해. 원래 남의 과거 얘기 듣는 것이 재밌잖아. “당신이 라이레얼 아버진가요?” 갈리온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촉촉하게 젖은 그의 눈에서 이슬과도 같은 눈물이 흐른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키지도 않았은 얘기를 시작했다. “그녀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지. 그래. 그것은 분명 운명이었어. 아버지를 잃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 정말 귀여웠어.” “그때 그녀가 몇 살이었죠?” “열 살.” “…….” 난 라이를 내쪽으로 끌어 당겨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얘기를 계속 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라임. 난 라임과 산 속에서 단 둘이 행복하게 살았어. 내가 사냥을 해서 동물들을 잡아오면 라임은 그걸…….” “요리했군요.” “아니. 먹기만 했어. 라임은 요리를 할 줄 몰랐거든.” “…….” 스토리가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갔지.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흐르더군. 라임은 어느새 소녀에서 숙녀가 되어 있었어. 난 라임과 결혼을 했지. 그녀는 날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착한 여인이었어.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다며 많은 시간을 투자해 요리도 익혔어. 결혼을 했지만 우리 사이는 변한 것이 없었어. 내가 사냥을 해서 동물들을 잡아오면 라임은 그걸…….” “맛있게 요리했군요.” “아니. 맛있게 먹기만 했어. 그녀는 요리를 배우긴 했지만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거든. 오히려 가르친 내 실력이 더 좋아지더군.” “…….” “그렇게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 나는 계속 사냥을 다녔고 그녀는 언제나 나를 기다려 주었어. 가끔 근처 마을에 내려가 잡은 동물들을 물물교환하는 것을 빼면 조용한 삶이었어. 그러던 어느날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는 거야.” “임신을 했군요.” “아니. 음식이 맛 없어서 헛구역질을 한 거야. 그녀는 입맛이 까다로웠거든.” “…….” “난 그녀를 위해 더욱 열심히 요리를 익혔어. 그녀가 내 요리를 맛 있다고 해줄 때가 난 제일 행복했거든. 그렇게 다시 또 시간이 흘렀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는 거야.” “아기를 가졌군요.” “아니. 내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많이 먹다보니 살이 찐거야.” “…….” 이 엘프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하지만 갈리온드의 표정은 정말 진지했다. 그는 회상을 하듯 말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흘러내리는 한 줄기의 눈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라임은 임신을 했어. 그녀의 불러오는 배를 보고 있자니 난 정말 뿌듯했지. 몇 달이 흐르자 아기가 태어났지. 우리는 기뻐 어쩔 줄 몰랐어. 드디어 우리 사랑의 결실이 태어난 거니까. 난 우리 아기에게 라이레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어. 라이레얼은 아무 탈 없이 예쁘게 컸어. 정말 착하고 귀여운 아이였지.” “상상이 가지 않는 군요.” “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딸. 정말 행복한 나날들이었지. 난 그 시간이 언제나 계속 되리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나의 바람에 불과했어. 잔인한 시간은 나에게서 라임을 빼앗아 갔지. 어흐흐흑!” 갈리온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루엔은 그를 껴안고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토닥토닥~. 마치 내가 라이를 달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엘프와 인간의 로맨스라하여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듣고보니 좀 실망이다. 이래서야 로맨스 축에도 못 끼잖아. “흑흑, 너무 슬픈 얘기에요.” 라이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꼭 끌어 안았다. 난 라이를 토닥여 주었다. 한참 후, 나와 루엔의 옷이 흠뻑 젖었을 때쯤 라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갈리온드는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모든 것이 허망했지. 난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었어. 두려웠던 거지. 난 겁쟁이었던 거야. 그래서 난 나의 사랑하는 딸 라이레을 놔두고 도망친거야. 이 곳으로 말이야. 흑흑, 그땐 내가 미쳤었어. 라이레얼을 그 험한 세상에 두고 오다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것 혼자 그 살얼음판 같은 곳에서 어찌 살라고……. 흐흐흑, 내가 죄인이야. 내가 죽일 놈이야!” “별로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런데 그렇게 걱정이 되었으면 한번 나가서 찾아 보지 그러셨어요.” “그 생각도 몇 번이고 했었어. 하지만 난 그럴 용기가 없었어. 그 넓은 곳에서 라이레얼을 찾기도 불가능할 뿐더라, 설사 찾았다 하더라도 난 그 애를 만날 자격이 없는 놈이야.” 아무래도 직접 만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정말 다행이다. “난 매일 같이 술을 마셨어. 그녀를 잊기 위해서, 그리고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지.” “라이레얼이 걱정되서 그런 거군요. 딸 걱정 때문에 술로 밤을 지새운 거죠?” “아니. 술이 너무 맛있어서 그랬어. 마셔봤으면 알겠지만 이 곳 과일주는 끝내주거든.” “…….” 뭐 이런 웃기는 엘프가 다 있냐? 갈리온드는 눈물을 닦고 나를 보았다. “이젠 니가 말할 차례다. 넌 나의 사랑하는 딸 라이레얼을 알고 있지? 그 애와는 무슨 관계야?” 관계? 사실 관계를 걸고 넘어지자면 라이레얼과 나는 상당히 깊은 관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밝히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다. 한창 잘나가는 청년의 장래를 망칠 일 있냐? “전 라이레얼과 친구입니다.” “정말 친구야?” “물론 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는 법인데.” “그런 구시대적인 사고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겁니다. 요즘은 남자와 여자도 얼마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 내 딸에게 손 댄 것은 아니겠지?” “저를 어찌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라이레얼이 나한테 손 댄적은 있었어도, 내가 라이레얼한테 손 댄적은 없었다. 난 순진무구한 착한 청년. “라이레얼은 지금 어떻게 지내는 지 알고 있지? 그렇지?” 물론 알고 있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용병일을 하고 있습니다.” “용병? 어흐흐흑! 그 연약한 것이 어찌 그런 위험하고 힘든 일을!”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적성에 맞는 직업을 잘 선택한 것 같으니까요. 너무 적성에 맞아서 문제가 될 정도라니까요.” “예쁘게 잘 컸고?” “예. 너무 예쁘게 커서 문제가 있을 정도니까요.” “흐흐흑!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뭐 뻔하지요. 제가 장담하건데 분명 술집에서 술을 퍼마시고 있을 겁니다.” 갈리온드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흑흑! 미안하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지켜주었어야 하는 건데! 난 널 볼 면목이 없구나! 하지만 보고 싶다! 라이레얼! 사랑하는 나의 딸 라이레얼!” 미친 듯이 소리치던 갈리온드는 그 자리에 픽 쓰러졌다. 깜짝 놀란 루엔은 황급히 달려가 그를 부축하였다. “혼절했어요.” 얼마나 감정이 복받쳤으면 혼절까지 할까? 부성애가 뭔지를 정말 온 몸으로 보여주는 구나. “…….”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제쳐 두고 쓸데없는 얘기만 나누었군. 차원의 열쇠에 대한 얘기를 들었어야 하는 건데. 그런데 설마 저 엘프 깨어나서 ‘라이레얼을 만나러 인간 세상으로 떠나련다!’ 등의 말을 외치는 것은 아니겠지? “라이레얼을 만나러 인간 세상으로 떠나련다!” 이 것이 갈리온드가 깨어나서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정말 미치겠다. 어째서 나의 재수 없는 생각은 꼭 맞아드는 걸까? “가긴 어딜 간다 그러십니까? 그냥 집에서 술이나 마시세요.” “아까 집 무너졌잖아요, 오빠.” 맞아. 그랬었지. 갈리온드는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라이레얼을 찾는데 협조할 거지?” 난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그러자 갈리온드는 불 같이 화를 냈다. “왜?”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제 맘이에요. 그 것보다 차원의 열쇠에 대해서나 말해주세요. 전 세계 평화를 지켜야 한다니까요.” “라이레얼을 찾는데 협조하면 말해 주지.” “정말 그렇게 치사하게 나오실 겁니까?” “나 원래 치사한 엘프야.” “…….” 엘프의 유전자는 우성. 그렇다면 라이레얼의 성격도 아버지 쪽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엘프 성격도 만만치 않다. “분명 말 해두지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이러다가 세계가 멸망하면 댁이 책임질 거예요?” “그럼 넌 내가 라이레얼 못 만나면 책임질 거야?” “제가 그걸 왜 책임집니까? 그건 댁의 팔자소관인데.” “그럼 나도 책임 못 져!” 말싸움이 계속 되자 보다 못한 루엔과 라이가 우리를 말렸다.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난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갈리온드를 도와 라이레얼을 찾는다면 라이레얼을 만날 수밖에 없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이레얼을 찾는 것을 돕지 않는다면 차원의 열쇠는 물 건너가게 된다. 그럼 세계 평화는 끝장나는 것이다. 아!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 것일까? 일반적인 소설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운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무지하게 도와준다. 파티를 구성해 같이 싸워주기도 하고, 잘 싸우라고 기도해주기도 한다. 칼과 방패 지급은 기본이고 어떤 경우에는 명마나 페가수스 등을 기증하기도 한다. 난 이 정도 도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도움은 안 줘도 좋으니 제발 방해만하지 마라. 그런데 왜 자꾸 방해하는 거야! “제발 라이레얼을 찾아 줘. 난 반드시 그 애를 만나야 해.” 갈리온드는 내 손을 꼭 붙들고 간절한 어조로 말하였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까지 조용히 계시다가 갑자기 왜 라이레얼을 만나려 하시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찾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는 가?” “…….”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갈리온드의 말이 맞다. 부모가 자식을 찾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결국 나는 라이레얼을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나는 라이레얼의 늪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인가? 그래. 이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도록 하자. 운명이라는데 어쩌겠냐?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따르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정말?” “속고만 사셨습니까?” 갈리온드는 입이 찢어질 것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 바람에 그의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반짝반짝~. 얼마나 열심히 양치질을 했으면 이빨들이 저렇게 빛이 나는 걸까? 광나는 약이라도 발랐나? 그러고 보니 내가 양치질을 마지막으로 한 날이 언제였지? “고마워! 사랑해!” 갈리온드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난 남자하고 껴안는 취미는 없기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만 놓으시죠.” 갈리온드는 껴안은 손을 풀더니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진심어린 투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저기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절 보시면 제가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상대가 여자라면 모를까…….” 루엔은 나에게 다가와 살짝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 왜 루엔이 나한테 고마워하는 걸까? 으음, 이 상황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갈리온드와 루엔이 잘 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만약 둘이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루엔은 라이레얼의 엄마가 되고, 갈리온드는 루와 루비의 할아버지가 되는 건가? 복잡하게 엉킨 가계도. 엘프들에게 왜 성(姓)이 없는 지 알 것 같다. 이렇게 하여 라이레얼을 찾기로 결정한 우리는 일단 마을을 떠나기로 하였다. 갈리온드는 무너진 집의 잔해를 뒤져 대궁(大弓)을 하나 찾아내 어깨에 걸쳤다. 하지만 화살은 끝내 찾지 못해 옆집에서 빌려왔다. 잘 쓰고 꼭 반납하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과 함께. “우리 라이레얼을 만나야 하는 거예요?” 라이가 그냥 라이레얼이라고 부르니까 왠지 좀 이상하다. 뭐 라이의 나이가 한참 위니 별 상관은 없겠다만 그래도 나한테는 오빠라는 존칭을 붙이는데, 라이레얼한테는 존칭을 붙이지 않으니 어색한 느낌이 든다. 난 라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라이레얼 언니라고 부르렴. 알았지?” 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우리 정말 라이레얼 언니 만나야 하는 거예요?” 이제야 좀 어울려 보인다.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답게 행동해야 해.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아까 봐서 알겠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저 엘프의 간곡한 부탁으로 라이레얼을 만나러 가는 거야.” “꼭 만나야 되요?” “저 엘프가 꼭 만나겠다고 바득바득 우기니 힘없는 내가 어쩌겠니?” 라이는 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 표정에 의문을 느끼고는 라이에게 물었다. “왜 그러니?” 라이는 대답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계속 물어보자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저 라이레얼 언니 싫어요.” “싫다니? 왜? 라이레얼이 돈 꿔서 안 갚기라도 했니?”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요…….” “그럼 왜 라이레얼이 싫다는 거야?” 잠시 머뭇거리던 라이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대답했다. “이코가 라이레얼 언니를 무서워해요. 라이레얼 언니가 이코를 괴롭혀서 그런 거예요. 이코는 라이의 친구에요. 이코를 괴롭히는 것은 라이를 괴롭히는 것과 똑 같아요.” “…….” 으음, 그런 깊은 이유가 있었군. 하긴 라이레얼이 라이코스를 조금 괴롭히긴, 아니, 많이 괴롭히긴…… 생각해보니 ‘괴롭힌다’ 정도로는 정의가 안 될 것 같군. 청안백우조가 정력에 좋다는 허황된 소문만 믿고 몇 번이고 죽이려 했으니. 그 일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 시기를 ‘라이코스의 암흑기’ 라 부른다. 그리고 라이코스가 라이를 만난 시기를 가리켜 ‘라이코스의 황금기’ 라 부른다. 그런데 이제 다시 암흑기가 시작되는 구나. “…….” 생각해 보니 지금 라이코스는 우리 곁에 없잖아. 혹시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알아채고 미리 도주한 거 아니야? “라이레얼 언니가 또 이코 괴롭히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오빠가 라이레얼 언니가 이코 괴롭히지 못하게 말려주실 거죠? 그렇죠?” 아이야. 넌 지금 심한 착각을 하고 있구나. 이 세상에서 라이레얼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난 대답 대신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이의 머리는 동글동글하게 생겨서 쓰다듬기 정말 좋게 생겼다. 그와 동시에 때리기도 참 좋게 생겼다. 예전의 일이 떠오른다. 나와 라이는 꿈속에서 섯다를 했었다. 그런데 라이가 노처녀와 짜고 내 돈 2억원을 꿀꺽 집어 삼켰다. 난 그때 분노감과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라이의 뒤통수를 때렸었다. 그때의 희열이란……. 갑자기 손가락이 근질근질 거린다. 자제하자. 안 그래도 시무룩해있는 아이의 뒤통수를 때리면 어쩌자는 건가?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라이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신 다음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땅 꺼지겠다. 어린 것이 무슨 근심이 그리 많아서 한숨을 쉬고 그러냐? “이코가 보고 싶어요.” 라이는 나이는 700살인데 몸과 정신 연령은 어린 아이에 머물고 있는 특이한 엘프다. 당연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라이코스는 라이의 하나뿐인 친구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둘의 정신 연령이 똑같다- 그렇기에 라이코스가 며칠만 없어져도 라이는 이렇게 외로워하는 것이다. “곧 돌아오겠지. 며칠만 기다리면 다시 너의 주머니 속으로 돌아올 거야.” 난 라이를 격려해 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서는 갈리온드와 루엔이 화기애애하게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도 옆에 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오빠 곁엔 제가 있잖아요.” 너도 여자니?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그런데 걷는 도중 자꾸 뭔가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에 난 그 생각을 무시하며 계속 걸었다. 다시 또 한참을 걷는데 한 동안 시무룩한 상태로 말이 없던 라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 그렇다. 바로 이게 빠져있었다. 라이레얼을 찾기 위해 출발하긴 했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현재 우리의 목적은 라이레얼을 찾는 것. 그럼 라이레얼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이 넓은 대륙에서 사람 하나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다행인 것은 라이레얼은 외모의 특징이 분명하고 꽤나 유명한 존재라는 것.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엽고, 섹시한 라이레얼이 이끄는 무적의 용병단’은 헤리오에서 활동하고 있다. 용병치고는 라이레얼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헤리오의 수도에서 용병들을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 벌인다면 라이레얼을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헤리오의 수도까지 어떻게 가느냐, 이다. 적색 산맥을 넘어 수도까지 걸어가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럼 남은 방법은 공간 이동. 일명 텔레포트 마법이다. 난 주머니를 뒤적거려 ‘그분’ 에게서 받은 두 개의 구슬을 꺼냈다. “그게 뭐예요, 오빠?” 난 라이의 손에 구슬을 건네주었다. 라이는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이 신기한지 눈을 떼지 않았다. “이 건 텔레포트 마법이 걸린 구슬이야.” “어떻게 작동하는 거예요?” 대답하기가 조금 그렇다. 작동 방법이 워낙 특이하기 때문이다. 작동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사전에 목적지에 대해 토론을 하고 결정을 내린다. 2. 라이와 내가 구슬을 하나씩 움켜쥔다. 3. 서로의 손을 꼭 잡는다. 4. 목적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둘이 동시에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5. 합창을 하듯 ‘텔레포트’ 라고 외친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작동 방법이다. 내가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난 그녀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구슬을 그녀의 얼굴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꾹 참고 이 구슬을 챙긴 이유는 일회용이 아니라는 것 때문. -몇 번이나 쓸 수 있는지는 몰라도 다 쓰고 나면 구슬이 자동적으로 깨진다고 한다- 목적지는 헤리오의 수도로 잡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이레얼이 꼭 수도에 있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그 곳에서라면 행방을 추적할 수 있을 테니. 갈리온드는 시위를 당겨보며 조정하고 있었다. 루엔은 그의 옆에 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루엔도 같이 갈 생각인가? 난 루엔에게 다가갔다. 루엔은 갈리온드에게 신경을 쓰느라 내가 바로 옆까지 다가가도 몰랐다. “설마 같이 가실 건 아니죠?” “같이 갈 건데요.” “인간 세상까지요?” “예.”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공용어는 할 줄 아시나요?” “물론이에요.” 공용어를 할 줄 안다면 굳이 인간 세상에 나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 갈리온드야 인간 세상에 나간 적이 있었다니 당연 공용어를 할 줄 알테고. 그런데 이 둘은 공용어를 어디서 익힌 거지? “공용어는 어디서 익히셨나요?” “남쪽에 있는 몇몇 마을이 엘프어 대신 공용어를 쓰고 있어요. 그 곳에서 익힌 거예요.” 하긴 엘프라고 엘프어만 쓰라는 법은 없으니까. 일행은 넷, 목적지는 헤리오의 수도로 결정된 건가? 이대로 출발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런데 루엔이 이렇게 떠나면 루는 어떻게 해요?” “루비네 집에 맡겨야겠지요.” 루엔은 조금 걱정이 되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래도 가기 전에 집에 한번 들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갈리온드는 활의 시위를 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어서 가자. 한시라도 빨리 딸애를 만나야 해.” “그 몰골로 가길 어딜 간다고.” “내 몰골이 어때서?” 지금 갈리온드의 모습은 잘 생기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거지라고 오인할만한 모습이었다. 때가 찌든 옷과 지저분한 얼굴, 레몬빛 머리카락의 한쪽은 와인으로 인해 갈색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아, 더러워! 청결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당장 씻어요!” “왜? 별로 가렵지도 않은데.” 이런 위생 관념 없는 엘프를 봤나! 가려울 때만 목욕하면 목욕탕집 줄줄이 망했겠다. “만약 그런 모습으로 라이레얼이 얼마나 실망을 하겠어요? 라이레얼을 생각하세요.” “당장 목욕하도록 하지.” 아니, 뭐 그렇다고 지금 당장 옷을 훌렁훌렁 벗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일단 루엔의 마을로 가지요. 그 곳에서 루와 작별 인사도 하고,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죠.” 루엔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돌아가는 것 아닌가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분께 텔레포트 마법이 걸린 구슬을 받았거든요. 저와 라이가 가본 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난 라이가 가지고 놀고 있는 두 개의 구슬을 빼앗아 라이의 손에 하나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사용 방법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재밌을 것 같아요. 빨리 해보고 싶어요.” 라이는 기대가 되는지 눈을 빛냈다. “으음, 목적지는 마을 입구가 좋겠군. 어딘지 기억하지, 라이야?” “예, 오빠.” 우리는 한 손에는 구슬을 꼭 쥐고 다른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루엔과 갈리온드는 라이의 옆에 바짝 붙었다. “하나, 둘, 셋……하면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텔레포트'라고 외치는 거야. 알았지?” “예.” 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그리고 ‘셋’ 에 우리는 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텔레포트!” 이렇게 호흡이 잘 맞을 수가! 우리는 갑작스럽게 바뀐 배경에 잠시 놀랐다. 난 이 곳이 루와 루비가 사는 마을 입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하였다. “작동 방법이 이상하긴 해도 성능 하난 확실하군.” “너무너무 재밌어요! 우리 또 해요, 오빠!” 나도 그러고 싶다만 이건 사용 횟수가 한정되어 있단다. 난 라이의 손에 들린 구슬을 회수하여 주머니 속에 잘 넣어 두었다. 하늘을 보아하니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어서 빨리 라이레얼을 만나러 가지.” 의욕은 좋다만 나설 때, 안 나설 때를 구분하지 못하니 참 보고 있기가 안쓰럽다. 마을로 걸음을 옮기던 중 난 그가 매고 있는 활을 보고 넌지시 물었다. “그거 쏠 줄은 알아요?” 갈리온드는 피식 웃었다. “내 주특기지. 원 샷, 원 킬. 백발백중 등은 나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라 할 수 있지.” 자만심이 하늘을 찌른다. 큰 소리 치는 놈 치고 실력 좋은 놈을 못 봤는데. “활이라면 라이레얼도 잘 쏘는데. 당신이 가르쳐 준 거예요?” “맞아. 그 애는 활 쏘는데 소질이 있었지. 라이레얼은 금방 활 쏘는 법을 익혔지. 그리고 나와…… 흐흐흑. 미안하다, 라이레얼. 아빠가 되서 널 버리고 도망치다니. 흑흑,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제발 부탁이니 궁상 좀 그만 떨어라. 잠시 흐느끼던 갈리온드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튼 나의 솜씨는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라고 할 수 있지.” 끝까지 자기 자랑을 하다니. 난 푸른 하늘을 보았다. 만약 지금 라이코스가 창공을 날고 있었다면 ‘저 새 쏴 봐요!’ 라고 외쳤겠지만 안타깝게도 라이코스는 없었다. 그래도 새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먹지도 않을 동물을 죽인다는 것은 정말 몹쓸 짓이 아닐 수 없기에 난 그의 활솜씨를 볼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우리는 일단 루엔의 집으로 가서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로 했다. 이윽고 집 앞에 도착한 루엔은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난 기가 막혀서 말을 못하는 루엔을 대신해 말했다. “니들 진짜 끈질기다. 내 평생 니들처럼 끈기 있는 엘프는 처음 봐.” 빈 집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집 안에는 두 엘프가 있었다. 서로 입술을 붙이고 있는 어린 엘프들. 그 엘프들이 루와 루비임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니? 그냥 하던 거 계속 해.” 두 어린 엘프는 나의 친절한 권유를 무시하고 두려운 눈길로 우리들을 살폈다. “어떻게 된 거야, 루? 니가 분명 아무도 없을 거라 그랬잖아.” “나, 나도 몰라.”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난 어깨를 으쓱하며 루엔을 보았다. 루엔은 분노감에 이를 갈고 있었다. “하, 할머니. 죄송해요, 할머니.” “전 아무 잘못 없어요. 전부 루가 하자고 그런 거예요.” “무슨 말이야? 니가 먼저 하자고 했잖아.” 또 다시 구타가 시작 되는 건가? “내가 어린애는 어린애답게 굴어야 한다고 말했었지?” 두 아이는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재빨리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잘못했어요, 할머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흑흑, 잘못했어요. 전 분명 싫다고 했는데 루가 하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예요.” “시끄러!” 루엔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난 재빨리 그녀를 말렸다. “진정하세요. 애들이 얼마나 키스를 하고 싶었으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얘들을 가만히 놔둬야 한다는 건가요?” “이런 방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전에도 한번 루를 먼지 나게 팼지만 지금 또 이런 일이 일어났잖아요. 쟤는 맞아도 말을 안 듣는 애란 말입니다.” 루엔은 내 말에 공감했는지 손을 내렸다. 그러자 루와 루비는 더욱 비굴하게 빌며 나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내가 잘 해주기만 하면 안 맞고도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루엔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때려도 말을 안 듣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때려도 말을 안 듣는 애는…….” 저 두 아이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난다. 아마도 내가 ‘잘 타일러 주고 다독거려 줘야 해요. 폭력은 절대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마음으로 접근하세요’ 라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착한 청년이기에 그런 거짓말은 할 수 없다. 오직 진실만을 말할 뿐. “애들이 왜 맞아도 말을 안 듣는지 아십니까?” “모르겠는데요.” “그건 강도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아! 이 정도면 맞아도 버틸 만 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계속 잘못을 저지르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간단합니다. 죽을 때까지 패면 되는 겁니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죽을 때까지 패면 자연적으로 말을 듣게 됩니다. 옛말에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애들의 미래를 위해 죽기 직전까지 패세요.” “그러는 게 좋겠군요.” 루와 루비는 자신들의 미래를 예감했는지 서로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난 갈리온드와 루비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닫아 주었다. 와장창- 우지끈- 퍼억-! “으아앙! 잘못했어요, 할머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흑흑, 한번만 봐주세요. 앞으로 잘 할 게요.” 앞으로 잘하기 보다는 진작 잘했어야지.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난 갈리온드에게 말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요. 저 쪽에 호수가 있으니 그 곳으로 가서 몸이나 씻으시죠.” 갈리온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꼭 씻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적당히 물만 묻히면 안 되나?” “라이레얼.” “당장 씻도록 하지. 호수가 어디 붙어 있나?” 남자가 목욕하는데 여자아이를 데려갈 수는 없는 법. 난 라이보고 루엔네 집 앞에 있으라고 하고는 갈리온드와 호수로 갔다. 다행히 호수에는 아무도 없었다. 갈리온드는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호수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몸을 박박 문질렀다. 저 물 변색되는 것 좀 봐. 얼마나 안 씻었으면 저럴까? 너무 불결해. 그가 목욕을 하는 사이 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오빠.” “거기 있으라고 했는데 왜 왔어?” 라이는 손에 들른 옷가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루엔이 이거 가져다주래요.” 갈리온드가 입을 옷인가? 내 옷보다 좋아 보이네. 그러고 보니 내 옷은 여기저기 많이 해져 있었다. 더럽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조금 빨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목욕 다 하고 나와서 이거 입으세요.” 난 옷가지를 근처 나무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라이와 함께 나무 뒤로 걸어갔다. 남자 엘프 몸을 보는 것엔 취미가 없으니. 물론 우리 착한 라이도 그런 것엔 취미 없다. 귀여운 인형이라면 모를까. 잠시 기다리자 갈리온드가 새 옷을 입고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물에 젖은 레몬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이렇게 라이레얼과 닮았을 수가! 말하지 않아도 척 보는 순간, 라이레얼과 깊은 관계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역시 아버지라는 건가?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요.” 이렇게 몸을 깨끗이 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그리고 같이 다니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같아 다니면 비교 되잖아. 나도 내 딴에는 꽤나 잘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이 전부 이 모양이니 내 외모가 부각되질 않는 구나. 하여튼 잘생긴 놈들은 전부 없어져야 해! 아니. 잘생긴 놈, 못생긴 놈 할 것 없이 나를 제외한 모든 남자들은 없어져야 해. 그럼 좋든, 싫든 여자들은 나만 따라다녀야 하잖아. 루엔의 집으로 가보니 두 아이는 떡이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루야 그렇다 쳐도 여자 아이인 루비를 이렇게까지 구타하다니. 난 밀려드는 죄책감에 몸서리를 쳐야했다. 미안해, 얘들아.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더 이상 키스에 연연하지 말고 학업에 열중하렴. 니들 나이 땐 공부를 해야지. 공부 안 하면 나처럼 되. 먼지 나게 맞고 기절한 아이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내가 한 말을 후회하진 않는다.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아이가 있다. 첫째, 맞아야 말을 듣는 아이. 둘째, 맞아도 말을 안 듣는 아이. 이 두 종류를 구분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작업이다.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일단 패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 구분이 가기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루와 루비는 둘째 그룹에 속한다. 지금은 이렇게 맞고 기절해 있지만, 분명 내일이 되면 다시 키스를 하겠다고 설쳐댈 것이다. 참고로 나도 둘째 그룹에 속한다. 내가 요즘에는 많이 줄였지만 아직까지도 끊지 못하는 것이 담배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금연을 요구하지만 난 그 요구를 꿋꿋이 물리치고 계속 피는 중이다. 사실 나에겐 담배를 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때는 중 2. 난 그 날도 어김없이 점심을 먹은 후 친구들과 함께 화장실에서 담배를 폈다. 그런데 그날따라 재수 없게도 학생 주임에게 걸려 학생부실로 끌려가게 되었다. 학생부실에는 먼저 끌려온 여학생 세 명이 있었다. 우리들은 벌을 서며 담배의 해악성에 대해 실컷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맞을 차례가 돌아왔다. 그 순간 나는 목격하고야 말았다. 남녀 차별의 실태를. 난 남녀평등을 교육시켜야 하는 학교에서 그런 남녀 차별이 버젓이 행해지는 것을 보고 분노와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여자는 플라스틱 매로 손바닥 열 대, 남자는 대걸레 자루로 허벅지 열 대. 분명 우리는 같은 죄목으로 끌려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체벌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가? 난 이 일에 대해 학생 주임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우리는 분명 똑같이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체벌 강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겁니까?’ 학주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서 불만 있냐?’ 난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러자 학주가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니들은 양담배 피웠잖아! 쟤들은 국산담배 피웠고!’ 난 그 말에 적당한 반론을 찾지 못하였고 결국 맞게 되었다. 퍽- 퍽- 퍽-! 여자애들은 손바닥을 맞고 가볍고 발랄한 걸음으로 학생부실을 나설 때, 우리는 피멍이 든 허벅지를 붙잡고 기어서 학생부실을 나왔다. 어찌 이리 남녀를 차별한단 말인가? 같은 죄를 지었으면, 같은 벌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일부 몰상식한 인간들은 이렇게 대꾸한다. ‘여자들은 연약하잖아. 어떻게 연약한 여자를 남자와 똑 같이 때리라고 하니? 완전 야만인이야!’ 웃기고 있네. 맞으면 아픈 것은 남녀가 똑같다. 여자가 아프면, 남자도 아픈 거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손바닥을 맞건, 허벅지를 맞건 말 들을 놈은 듣고, 안 들을 놈은 안 듣는다는 것이다. 난 그날 이후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점심시간 후 같은 화장실에서 담배를 뻑뻑 피웠다. 물론 학주에게 걸렸다. 그리고 학생부실로 끌려가 또 맞았다. 난 부어오른 다리를 붙들고 다음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또 담배를 폈다. 당연 또 맞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담배를 피웠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나의 다리는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자 학주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미쳤어? 그렇게 맞고도 담배를 피울 생각이 나냐?’ ‘전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 임마!’ ‘전 부당한 남녀 차별에 대해 시위하는 심정으로 담배를 피우는 겁니다.’ ‘내가 언제 차별을 했어?’ ‘여자애들은 손바닥 때리고, 남자애들은 허벅지 때렸잖아요.’ ‘그거야 때리는 사람 마음이지.’ ‘그럼 계속 그렇게 때리십시오. 저는 제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계속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겠습니다.’ 학주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학주는 이를 갈며 말했다. ‘오늘은 널 안 패고 그냥 보내주겠다. 하지만 내일 다시 걸린다면 그땐 내가 교사직을 반납할 각오를 하고 죽을 때까지 패겠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면 내일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담배를 펴라.’ 난 그날 그렇게 학생부실을 나섰다. 다음 날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학생부실로 끌려갔다. 학주는 미리 준비해 놓은 야구 배트를 집어 들었다. ‘내 경고를 무시하다니. 죽을 각오는 되어있겠지?’ ‘물론입니다.’ 학주는 피식 웃었다. ‘좋아. 오늘 니가 죽나, 내가 죽나 어디 한번 해보자. 엎드려뻗쳐!’ 퍽- 퍽-! ‘학교에서 담배 필거야, 안 필거야?’ ‘필겁니다.’ 퍽- 퍽-! ‘필거야, 안 필거야?’ ‘필겁니다.’ 퍽- 퍽-! ‘필거야, 안 필거야?’ ‘필겁니다.’ 퍽- 퍽-! ‘안 피겠다고 말해!’ ‘필겁니다.’ 퍽- 퍽-! ‘너 이 자식! 다리가 부러지고 싶어?’ ‘다리가 부러진다면 기어서라도 가서 필겁니다.’ 퍽- 퍽-! ‘제발 안 피겠다고 말해. 이러다가 너 정말 죽어.’ ‘차라리 죽겠습니다.’ 몇 시간에 걸친 매질 끝에도 난 굴복하지 않았다. 하도 맞다보니까 오기가 생겨서 죽으면 죽었지, 절대 굴복하진 못하겠더라. 결국 학주가 먼저 쓰러졌다. 학주는 바닥에 쓰러져 헉헉거리며 말했다. ‘내가 교사 생활 30년 만에 너 같은 독종은 처음이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제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똑같은 죄를 지었으면 똑같은 벌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이제부턴 똑 같이 패면 되는 거지?’ ‘예. 남녀 가리지 말고 동일한 매로 동일한 부위를 동일한 강도로 패십시오. 일명 체벌의 일원화라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하여 나의 일인 시위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남녀 차별을 철폐하는 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지금 그 학생부실에 가보면 이런 팻말이 걸려있다. <똑같은 잘못을 하면, 똑같은 체벌을 받는다.> 이 것이 바로 내가 아직까지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다. 이제까지 맞은 게 억울해서 어떻게 담배를 끊는단 말인가? 내 평생 정말 그 정도로까지 맞아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댄 정말 죽을 각오로 맞았으니까. 그때 피웠던 담배는 정말 맛있었는데. 생사의 기로에서 피는 담배의 맛은 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뭐랄까? 연기가 목구멍에 척척 달라붙는다고나 할까? 옛날 일을 회상하다 보니 담배가 피고 싶어지는 군. 난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빼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루엔은 루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나에게 눈짓을 했다. 난 그 눈짓의 의미를 깨닫고 루비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루엔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두 아이를 루비네 집까지 옮겼다. “빨리 출발 하지.” “알았으니까 재촉 좀 하지 마세요.” 이젠 정말로 떠나야겠군. 난 구슬을 꺼내 하나는 내 손에 쥐고, 다른 하나는 라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목적지는 어디가 좋을까? 그래. 거기가 좋겠군. 라이야, 너 레이트 백작가 기억나지?” “예. 기억나요.” “그럼 우리 거기 정문으로 가도록 하자.” “예. 알았어요.” 루엔과 갈리온드가 라이의 옆에 붙은 것을 보고 난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내진 않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참 섭섭하다. 잘 있어라, 엘프의 숲아! 나와 라이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차게 외쳤다. “텔레포트!” 무슨 율동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쪽팔려. * * * * * ** “제대로 온 건가?” 한 순간 들이 마시는 공기의 느낌이 달라졌다. 향긋한 풀냄새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를 미세한 먼지들이 차지했다. “히익! 귀, 귀신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난 우리가 길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두려움 섞인 눈길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하긴 눈앞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난 눈앞에 있는 건물이 레이트 백작가라는 것을 확인하고 웃음을 지었다. 세레나와 라나는 잘 있으려나? “이 곳이 인간 세상인가요?” 루엔은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것은 갈리온드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누구지?” “저거 봐. 저 사람들 귀가 길어.” “설마 엘프?” “그런 것 같아.” “그럼 저 귀도 작고 생긴 것도 안 생긴 놈은 뭐야?” “글쎄. 아무래도 기형 엘프인 것 같은데.” 우리를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부담스럽다. 난 장소를 옮기려다가 주위에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경품 행사라도 벌이나? 난 정신없이 루엔을 바라보며 침을 흘리는 남자를 붙잡고 물었다. “여기 무슨 일 있나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요?” 사람만 많은 것이 아니다. 저기 늘어서 있는 마차들은 뭐지? 전부 귀족들의 마차인 것 같은데. 내게 붙잡힌 사람은 두려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 모르십니까?” “알면 제가 댁한테 물었겠습니까? 빨리 대답이나 하세요.”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반데라스 왕자님의 즉위식과 결혼식이 있는 날입니다.” 즉위식과 결혼식? 그럼 그 스토커 녀석이 왕이 된다는 거야? “선왕은 어쩌고?” “선왕은 서거하셨습니다.” 으음, 빌빌거리더니 결국은 죽었구나. 선왕이 죽었으면 왕세자인 반데라스가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절차겠지. “그런데 그게 이 집 앞이 시끄러운 것과 무슨 상관이야?” “저, 정말 모르십니까?” “모르니까 묻는 거 아니겠습니까?”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이번에 즉위 하시는 반데라스 국왕 폐하와 결혼하실 분이 레이트 백작의 영애십니다.” 레이트 백작의 영애? 그럼 세레나? 난 깜짝 놀라 외쳤다. “뭐야? 그럼 그 녀석과 세레나가 결혼을 한단 얘기야?” 남자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더니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난 그 자리에서 한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간만에 찾아온 도시에서 접한 뜻밖의 소식. 세레나가 결혼을 한다고? 아이리스 11권 결혼식(1) .. 세레나와의 인연은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곳은 참 말하기가 쑥쓰러운 은밀한 장소.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밝혀두지만 내가 그 곳으로 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방향 감각을 잃어서이지, 결코 그 곳을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다. 아무튼 난 그 곳에서 세레나를 만났고, 그녀와 같이 여행을 시작하였다. 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좋았었다. 그때가 라이레얼을 만나 내 인생이 망가지가 바로 직전이었으니, 그때가 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난 세레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착한 남자였다.(굳이 세레나가 아니더라도 예쁜 여자를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레나를 위험해서 구해내 다시 예전의 지위를 찾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는 좋게 나타났다. 그걸로 내 역할은 전부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잘생기고 능력있는 남자에게는 언제나 여자가 따르는 법. 세레나가 나에게 반하고 말았다. “…….” 자주 했던 말을 또 꺼내기가 정말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겠다. 난 왜 이렇게 잘났을까! 남들은 내가 이러는 모습을 보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래. 욕하고 싶으면 욕해라. 못 생긴 것들이 질투심에서 욕한다는데 내가 봐줘야지. 하지만 이들도 나의 실사정을 안다면 절대 욕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니들이 잘난 남자의 괴로움을 알아? 흥! 알 리가 없지. 내가 길을 가기만 하면 나를 본 여자들이 전부 나에게 반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추파를 던진다. 그리고 내 뒤를 졸졸 쫓아 온다. ‘아이언스 공작님, 사랑해요! 제발 제 사랑을 받아주세요!’ 그럼 난 예의상 뒤를 돌아 그들이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즉 45도 각도 지점에서 안개꽃 사이에 파묻힌 장미꽃 같은 화사한 미소를 보여준다. 그 다음은 볼 것도 없다. 그냥 여자들이 줄줄이 다 기절하지. 정말 잘생긴 게 죄라고 밖에 말 할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 미소 한번 제대로 짓지 못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 없구나.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던 중 이런 내 자랑에 빠져든 걸까? 아! 맞아. 세라나 생각을 하던 중이었지. 어찌되었든 세레나는 나의 매력에 퐁당 빠졌다. 하지만 난 너무 잘났기 때문에 결코 한 여자에게 얽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흐느끼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멋지게 떠났다. 그 장면,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예술이다. ‘가지마세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난 너무 잘난 남자야. 날 사랑하면 너만 고통 받게 될 거야. 왜냐? 그야 내가 너무 잘났으니까. 넌 분명 다른 여자들이 잘난 내 뒤를 따르는 것을 보며 혼자 괴로워할 거야. 그리고 나중에는 그게 의부증으로 변해 하루 종일 나를 감시하려 들테고, 결국에 가정은 파탄나고 말거야. 그럼 난 법정에 가서 이혼 서류를 꾸며야겠지. 그리고 너는 나에게 위자료를 듬뿍 줘야 할거야. 왜냐? 그야 가정이 파탄난 원인이 너한테 있으니까.’ ‘저 잘할 수 있어요. 제발 가지 마세요.’ ‘아니야.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야.’ ‘절 사랑하지 않나요?’ ‘사랑해. 그렇기 때문에 떠나는 거야.’ 그리고는 휙 돌려 걸어간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나와 그녀는 헤어졌다. 하지만 인연이란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나중에 헤리오 왕궁 무도회장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그녀는 몇 개월 사이에 정말 아름다워졌다. 솔직히 다시 보니 아까운 마음이 들긴 하더라. 하지만 난 헤어진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등에 행위는 하지 않았다. 난 너무 잘난 남자여서 추파를 던지지 않아도 여자들이 알아서 꼬이기 마련이니까. 나의 예상대로 그녀는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우리 다시 시작해 봐요~.’ 그렇게 그녀와 다시 잘 되나 싶었지만, 나에겐 이미 마음을 둔 여인이 있었고, 그래서 난 그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파란만장한 연애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려 한다. 그 것도 일반 정상인이 아닌 스토커 기질이 다분한 반데라스 왕자와. 내가 알기로 세레나는 그 놈을 상당히 싫어했다. 그런데 어째서 결혼을 하려는 걸까? 이런 의문에 답을 하자면 우린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파해쳐야 한다. 남자라는 존재의 특이성과 수직적 신분 계층에 불합리성에 대한 문제를. 반데라스 왕자는 세레나를 좋아한다. 그것도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좋아한다. 남자보단 여자가 사랑에 더 목을 맨다고는 하지만 남자가 한번 사랑에 목매기 시작하면 그건 정말 장난이 아니다. 반데라스 왕자는 세레나를 사랑하고, 그 마음을 세레나에게 알렸다. 하지만 세레나가 그 마음 거절했다면? 반데라스 왕자는 세레나를 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스토킹한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집착으로 변하고, 집착은 광기로 변한다. 그리하여 반데라스 왕자는 인간에서 한 마리 야수로 변하고 만다. 만약 반데라스 왕자가 별 볼일 없는 시정잡배에 불과했다면 밤길을 걷는 세레나를 덥친다거나 몇몇 패거리들을 동원하여 보쌈하는 방식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반데라스 왕자는 그 칭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자다. 게다가 지금은 국왕이 되기 일보직전의 상황이다. 즉, 이 나라에서 가장 잘난놈(어디까지나 신분적 위치에서만)이다. 그렇기에 그는 무조건 육탄돌격을 하는 저속하고, 비열한 방법 대신 강제 결혼이라는 더욱더 저속하고, 더욱더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세레나의 집안은 잘해봐야 백작 집안. 이제 왕이 될 놈이 ‘니 딸 내놔! 안 내놔? 그럼 작위를 반납하던가!’ 이 따위로 외치면 따를 수 밖에 없다. 갑자기 머릿속에 한편의 장엄한 스토리가 펼쳐진다. ‘우하하! 이제 오랜 스토킹 생활도 끝이다. 이제부터 넌 내 여자야!’ ‘흑흑, 소녀 부모님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이제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했어요.’ ‘안 된다! 내 딸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게냐?’ ‘어허! 그대는 지금 왕한테 반항하는 건가? 교수형 당하고 싶어? 딸이야 또 낳으면 그만 아니야?’ ‘흑흑, 그럼 소녀 이만 떠나겠사옵니다. 어머님, 아버님께서는 소녀 걱정일랑 마시고 부디 옥체 보중하소서.’ “저런 짐승 같은 놈을 봤나! 어찌 인간으로 태어나 그런 흉악한 짓을 벌인단 말인가? 네 놈은 부모도 없단 말이냐?” 난 타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세 엘프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라이, 루엔, 갈리온드. 날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이상했다. 난 재빨리 일그러진 얼굴을 바로 잡고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진정하자. 흥분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으아아! 진정은 개뿔이 진정! 이 자식이 왕이면 다야? 왜 멀쩡한 여자를 협박하고 지랄이야?” 길 가는 사람들이 ‘저거 미친놈 아니야?’ 등등의 말을 수군거렸지만 난 신경을 쓰지 않고 더욱 분노하였다. “진정하세요, 오빠. 오빠가 화내면 라이는 무서워요.” 그 말에 난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라이가 무섭다잖아. “좋아. 그럼 침착하게 일련의 상황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난 원래 입이 싼 놈이기 때문에 이 상황들을 차근차근 정리하여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라이는 “흑흑! 너무 슬퍼요!” 루엔은 “어떻게 그런 나쁜 인간이 왕이 된 거죠? 인간들은 원래 그러나요?” 갈리온드는 “그딴 놈이 무슨 일을 저지르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빨리 라이레얼이나 찾자.” 세상 삼라만상이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되기 마련이니 어찌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대관식과 결혼식이 몇 시에 열립니까?” 털복숭이라 해도 좋을만큼 덥수럭한 털로 온 몸을 무장한 남자는 험상??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그런 것 말해줄만큼 한가하게 보여? 당장 꺼져!” 이렇게 무례할 수가! 보통 때 같았어도 그냥 넘어가진 않았겠지만, 지금은 특별 상황이기에 더욱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난 나보다 20살은 많아보이는 남자의 멱살을 움켜 쥐고 소리쳤다. “말하라면 말해, 자식아! 죽고 싶어! 죽여 줄까?” 안 그래도 폭발 직전인 내 성질을 건들리다니. 너 오늘 나랑 한판 뜨자. 상대는 이런 내 행동에 많이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인상을 썼다. ‘너 오늘 죽었어’ 라는 제스처가 분명하다. 걸어 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 것이 아이언스 공작의 성격.(물론 승산이 없을 경우는 피한다)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놈이 더욱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당장 알려드릴테니 이 것 좀 놔주세요. 전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녀석은 정말 처참할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몸을 조금씩 떨고 있다. 상대는 연신 굽신거리며 죄송하단 말을 했다. 정말 덩치와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난 나의 천재적인 머리를 잠시 굴린 끝에 그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자는 착하고 순진한 일반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얼굴과 덩치를 보고 그가 포악하고 잔인한 흉악범으로 착각, 알아서 설설 기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태도도 그것을 따라 상당히 거칠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얼굴과 덩치만 믿고 나한테 말을 막했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반응을 보이자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난 최대한 표정을 풀고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봐요, 아저씨. 즉위식과 결혼식이 언제인지만 알려주시고 빨리 처자식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러자 그는 주저 없이 바로 대답했다. “지금입니다.” “예?” “지금 즉위식을 하는 중입니다. 결혼식은 즉위식 후에 열릴 거라 하더군요.” 뭐? 지금이라고? 난 흥분을 참지 못해 그의 멱살을 움켜 쥐었다. “뭐야!? 그 말이 사실이야? 아니, 지가 뭔데 지금해? 지가 왕이면 다야?” “죄, 죄송합니다.” “댁이 왜 죄송한데!? 댁이 결혼해?” “사, 살려주세요. 전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없긴 왜 없어? 왕이 그딴 짓을하면 백성이 말려야 할 것 아니야?” 내가 흥분하여 그의 몸을 흔들어대는 사이 루엔이 다가와 그것을 말렸다. 그러자 남자는 그 사이 재빨리 도망쳤다. 화풀이 상대가 없어진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내가 아무리 막나가는 놈이라도 루엔의 멱살을 쥐고 흔들 수는 없지 않은가? 루엔은 차분한 어조로 나를 타이르듯 말했다. “제발 진정하세요. 사정은 잘모르겠지만 그런 행동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맞아요, 오빠. 도움이 안 되요!” “빨리 내 딸을 찾으러 가자니까!” 이렇게 세 엘프의 설득에 힘입어 나는 진정할 수가 있었다. 상당히 안정을 되찾은(어디까지나 내 생각에만) 나는 길바닥에 주저 앉아 머리를 쥐어 잡고 고민하였다. 세레나가 강제 결혼을 한다. 세레나가 강제 결혼을 한다. 세레나가 강제 결혼을 한다. 어째서지? 어째서 세레나가 강제 결혼을 해야 하는 거지? 반데라스? 그래. 그 스토커가 문제야. 그 스토커가 이 일의 원흉이야. 그 놈을 없애야 해. 없애? 난 그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난 어디까지나 정의의 사도. 그런 내가 한때 썸씽이 있었던 여인의 위험을 못본척 지나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하지만 난 지금 망설이고 있다. 만약 내가 결혼식장에 난입해 그 놈을 없애고 세레나를 구했다 치자. 그 다음은 어쩔 건데? 세레나는 의지할 곳이 없을 테고, 당연 나에게 의지를 할 것이다. 구해줬으면 끝까지 책임져야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녀와 결혼이라도 해? 생각 같아선 그러고 싶다만 난 지금 세계 평화 유지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는 남자기에 세레나를 책임질 수가 없다. 게다가 난 워낙 잘나서 한 여자가 소유할 수 있을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문제는 이 것만이 아니다. 내가 비록 지금은 내팽게 치고 세계 평화 유지에 힘쓰고 있지만 난 한때 아이리스의 공작이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한 지금도 공작이다. 만약 내가 식장에 난입해 이제 왕이 된 그 스토커 놈을 때려 눕히고 세레나를 납치(?)해 간다면 외교적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그 스토커 녀석의 집착 정도로 보았을 때 군사를 일으켜 아이리스의 뒤통수를 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할 수 있겠다. 이래저래 세레나를 구해내는 것은 힘들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그냥 모르는척 지나치는 것. 어차피 나의 세레나는 이미 헤어진 사이. 그냥 각자 갈 길을 가는 거다. 스토커와의 강제 결혼이 운명이라면 그것에 따라야지 어쩌겠냐? 이래도 한 세상이요, 저래도 한 세상이라. 세상만사 좋고 나쁜 일이 어디있겠으며, 사랑과 증오가 어찌 함께하지 아니하겠는가? 자(自)와 타(他)를 구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나니 그대는 그대에게 다가온 운명을 거부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게나. “…….” 아! 안 돼. 남의 어려움을 보고도 못 본척 지나치는 것은 군자(君子)의 도리가 아니야. 젠장, 하필이면 왜 이 나라로 와 가지고 과거의 인연들로 하여금 나를 얽매게 하는가? “세레나.”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켠이 애려온다. 한 송이 백합 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녀가 어째서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아무리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선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녀를 구출하러 식장에 난입한다. 둘째, 그냥 모른척 지나친다. 난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했다. 이건 나에게 너무도 가혹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왜요? 설마 저한테 질투하시는 겁니까? 제가 너무 잘나서요? 물론 제가 잘난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원래 이렇게 잘난 걸 어쩌란 말씀이십니까?” 난 하늘을 향해 소리쳐 보이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나를 비추었다.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한 느낌. 이건 영웅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나도 영웅(?)이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본명은 영웅이다. 박영웅(朴英雄). 아무튼 난 그 빛을 본 순간 굳게 결심하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 결연한 표정으로 세 엘프를 보았다. “지금 당장 왕궁으로 가지요.” 갈리온드는 재빨리 나섰다. “왕궁에 내 딸이 있데?” “…….” 이 엘프 무슨 콤플렉스라도 있나? 왜 이렇게 입만 열었다하면 딸 얘기야? 딸 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댁의 딸 없습니다.” “그럼 왕궁에 왜 가는데?” “댁의 딸과 사이가 안 좋았던 여인을 구하러 갑니다.” “뭐!?” 순간, 발끈하는 갈리온드. 난 그를 가볍게 진정시켰다. “그 여자가 라이레얼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그러자 갈리온드는 팔을 걷어 부치며 말했다. “그럼 당장 구하러 가지.” 이렇게하여 우리는 세레나의 결혼식장에 무작정 돌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을 자아낼 것이다. 아직 세레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가 그딴 놈과 결혼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서? 아니면, 알량한 정의감 때문에? 그 것도 아니면, 나랑 한번 눈 맞은 여자는 절대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개인주의적 욕망 때문에? 물론 그런 것 때문은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 대답하기가 좀 쑥스럽군. “그런데 그 레이레얼 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그 여자를 왜 구하러 가는 거예요?” 라이가 ‘너무너무 궁금해요’ 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하니 차마 대답을 아니 할 수가 없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숨어있단다.” “그게 뭔데요?” “그야 당연 배 아파서지! 나도 아직 옆구리가 시린데 감히 지깟 것들이 결혼을 해? 난 죽어도 그 꼴은 못 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결혼을 파토 내고 말겠어! 난 원래 남 잘 되는 꼴은 못 보는 인간이야!” 세 엘프의 얼굴에는 놀란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흠흠, 실수로 내 인간성을 드러내고 말았군. 나름대로 착한 이미지를 유지하려 그랬는데. 아무튼 세 엘프를 이해시킨 나는 그들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갈 책략을 수립하였다. 혹시라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을 것 같아 다시 언급하자면 난 아이리스의 참모총장이다. 세 치 혀로 천하를 움직인다고, 내가 한번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면 백만 대군도 문제 없다. 그런 나이기에 왕궁으로 들어갈 책략을 수립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일단 제가 공작임을 내세워 왕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원래 이 바닥이 작위만 내세우면 다 되기 마련이거든요. 아이리스의 공작이 축하 사절로 왔다는데 설마 쫓아내기야 하겠습니까?” “그럼 우리는 어쩌죠?” “라이는 상아탑의 주인임을 내세워 들어가고, 댁들은 엘프임을 내세워 들어가면 됩니다. 상아탑의 주인과 엘프들이 축하 사절로 왔다는데 설마 쫓아내기야 하겠습니까?” “쫓아내면 어쩌죠?” “그건 그때 일이니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지요.” “…….” 거의 완벽한 책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왕궁 잠입 계획을 이런 단시간 내에 깔끔하면서도 완벽하게 정립하다니. “결혼식을 어떻게 막으실 생각인 가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요. 계획은 이미 저의 머릿속에 전부 수립되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결혼식이 시작되면 제가 멋지게 망토를 휘날리며 등장합니다. 그리고 칼을 뽑아 들며 당당하게 외치는 거죠. 이 결혼의 부당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럼 많은 사람들이 제 말에 공감을 할테고 그럼 일은 끝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저희는 뭘하면 되나요?” “제가 외칠 때 뒤에서 박수나 열심히 쳐주세요.” “…….” 레이트 백작가에서 왕궁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걸어 가기로 결정하였다. 생각 같아선 ‘그분’께 받은 구슬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사용 횟수가 한정되어 있고, 사용 방법이 워낙 쪽팔린지라 포기해야했다. 난 빨리 걸으라고 재촉했지만 정작 가장 느린 것은 나였다. 라이는 내 등 뒤에 업혀있기 때문에 나랑 속력이 똑 같고. 반데라스 왕자. 아마도 그 놈은 지금쯤 세레나와 결혼한다는 생각에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을 것이다. 후후후, 니가 웃을 수 있는 것0도 지금뿐. 잠시 후 니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나. 너의 가장 큰 실수는 아이언스 히로의 존재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난 남 잘 되는 꼴은 못 보는 인간이다. “음하하하!” 난 하늘을 보며 시원하게 웃어재꼈다. “오빠 그러니까 꼭 악당 같아요.” “훗, 걱정할 것 없단다, 라이야. 나 같이 멋진 남자는 조금 악당스럽게 행동을 해도 여자들이 따르기 마련이거든.” “……휴.” 그 한숨의 의미는 뭐니? * * * *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 엘프 군단(?)을 이끌고 왕궁으로 돌격(?)을 하는 사이 히로의 예상대로 반데라스 왕자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실실 웃고 있었다. “대관식 내내 실실 쪼개다니. 왕 되는 게 그렇게 좋나?” “그러게 말이야. 처음에는 왕위엔 관심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내 이럴 줄 알았어.” “이제보니 상당한 야심가였군.” 귀족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반데라스 왕자는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하지만 입꼬리는 계속 위로 올라갔다. 반데라스 왕자는 나름대로 자신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귀족들 눈엔 헤벌쭉 웃는 것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아주 왕위에 환장을 했구만.” “마치 권력의 화신을 보는 것 같아.” “저런 인간이 왕이라니…….” 귀족들이 차마 대놓고 욕하지는 못하고 뒤에서 열심히 궁시렁거리는 사이 대관식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머리에 왕관을 뒤집어 쓴 반데라스는 왕만 앉을 수 있다는 의자, 즉 왕좌에 앉아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체면 때문에 재빨리 입을 가리긴 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 소리는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큭큭큭!” 귀족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닐거라 생각하였다. “혹시 저 인간 미친게 아닐까?”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아.” 남들이 뭐라 해도 상관 없었다. 반데라스 왕자는 계속해서 웃었다. 대관식을 진행하던 진행자는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손에 든 A4용지를 넘겼다. “대관식이 전부 끝났으니 이제 반데라스 왕자님께서 헤리오의 국왕이 되셨습니다. 저희는 국왕 폐하께서 자국의 위명을 만방에 떨침과 동시에 안으로는 백성을 보살피고, 밖으로는 외세에 대항하는 훌륭한 국왕이 되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가끔 의심을 하는 빌어 ??어 처먹을 그런 치졸하고도 비열하고도 역겹기 그지 없는 인간들이 있긴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 인간들은 꼭 한 명씩 있었습니다. 나쁜 놈들! 대다수의 백성들과 귀족들이 국왕 폐하께서 자국의 위명을 만방에 떨침과 동시에 안으로는 백성을 보살피고, 밖으로는 외세에 대항하는 훌륭한 국왕이 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에서 의심을 하다니. 그건 반역이나 다름이 없는 행위입니다! 아! 참고로 저는 안기부에 소속된 고문관 막스텔 2세입니다. 만약 이 곳에 반역 행위를 꿈꾸시는 분이 계신다면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니면, 저를 대면하게 될 테니까요. 후후후. 그래도 혹시나 이 곳에 그런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질문을 하겠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자국의 위명을 만방에 떨침과 동시에 안으로는 백성을 보살피고, 밖으로는 외세에 대항하는 훌륭한 국왕이 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에서 의심을 하는 분이 계시다면 손 한번 들어주세요.” 다행히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기부 고문관 출신이자 현재 대관식 진행자를 맡고 있는 막스텔 2세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데라스 왕자님께서 헤리오의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셨음을 선포합니다. 모두들 박수를 크게 쳐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박수를 안 치거나, 작게 친다면 역모의 뜻을 품고 있다고 짐작하여 안기부 고문실이 어떤 곳인지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막스텔 2세의 협박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기뻐서 그러는 지는 모르겠지만 왕궁이 떠나갈 듯 우렁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짝짝짝! 반데라스는 높은 자리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박수 소리가 더욱 커졌다. 레이트 백작은 박수를 치는 척 하다가 손을 내리며 옆에 있는 하이스네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놈은 아까부터 왜 실실 웃고 있는 거냐?” “이제 사위가 될 사람이자, 충성을 바쳐야 할 왕한테 ‘저 놈’이란 호칭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 “시끄러. 왜 실실 웃는지나 말해 봐.” 하이스네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제가 어찌알겠습니까만 제 짐작으론 세레나와 결혼하는 것이 좋아서 그러는 것 같은데요.” “정말 그럴까?” “틀림 없을 겁니다. 결혼하는 총각들 마음이야 다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이스네의 지적은 정확했다. 반데라스는 이제 곧 이어질 결혼식 생각에 신체에서 다량의 엔돌핀이 분비 되고 있었다. ‘아! 세레나양! 나의 사랑 세레나양!’ * * * * 반데라스 왕자가 그토록 열심히 외치는 ‘세레나양’은 지금 심경이 심히 복잡했다. 그녀의 옆에는 두 여인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동생인 라나, 다른 한 명은 어머니인 셀리오네. 지금 세레나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있었다. “신부의 표정이 그게 뭐니? 좀 웃어보렴.” 셀리오네가 말했지만 세레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셀리오네는 세레나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움켜 잡았다. “니 마음 내가 다 알아. 지금은 좀 복잡할 거야.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두려워 하지 않아도 돼. 반데라스 왕자…… 아니, 반데라스 왕은 좋은 남자야. 충분히 너한테 잘해줄 거야.” “……어머니.” “그래.” 셀리오네는 세레나를 살짝 안아 주었다. 그러자 세레나의 눈에선 한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라나는 그 모습을 슬픈 눈길로 바라보았다. ‘언니, 불쌍해.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다니.’ 라나는 세레나가 반데라스를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레나가 불쌍해 보였다. 사랑 없는 결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말은 하지만 잘 찾아보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세레나가 반데라스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세레나가 왕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레이트 백작이 국왕의 장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레이트 백작가가 외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레이트 백작가의 세력이 한 순간에 강력해진 것이다. 보통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것을 정략 결혼이라 부른다. 왕의 아내. 간단히 줄여서 왕비. 왕비의 자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왕의 옆에 위치해있다.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만한 귀족 영애들은 그 자리에 앉는 것을 원했다. 반데라스가 마음에 들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여자 신세는 뒤웅박 신세라고, 결혼 한번에 귀부인이 되어 평생 놀고 먹을 수도 있고, 쪽빡 차고 동냥 나갈 수도 있다. 여성 권리 신장을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YWCA 아주머니들이 들으시면 분노로 인해 ‘테트리스는 끼고 박는 게임이니 음란물로 규정해야 한다!’ 라고 외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니 어쩌겠냐? 아무튼 여성의 권리가 바닥을 벅벅 긁고 있는 시대 현실에 비추어 봤을 때 왕의 아내라는 자리만큼 좋은 자리는 없다. 하지만 정작 세레나는 그 자리엔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데라스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은 그 남자를 잊기 위해서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주일 전. 선왕의 서거 소식을 들은 반데라스는 마법진을 통해 재빨리 헤리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해를 보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물론 라이처럼 ‘우에에엥!’ 등의 소리를 내며 울진 않았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을 뿐이다. 하지만 계속 슬퍼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왕세자의 몸. 아직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국왕이나 다름 없는 몸이었다. ‘이제부턴 내가 왕이야. 이렇게 울고만 있을 수는 없어.’ 반데라스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선왕의 장례식을 치르며 자신의 대관식 준비를 하였다. 이제 며칠 후면 그가 왕이 되는 것은 올챙이 개구리 되듯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철새들은 자리를 옮기는 법.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왕의 품에 둥지를 틀고 있던 철새들은 재빨리 반데라스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철새 도래지로 변해버린 반데라스는 철새들이 떠들어대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은 시작이 전부 같았다. “왕좌의 옆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서 빨리 결혼 하십시오.” 하지만 반데라스가 ‘누구랑 결혼해?’라고 묻자마자 동시다발적으로 여러가지 대답이 튀어 나왔다.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제 첫째딸이 국모로서의 자질이 충분합니다!” “제 둘째딸은 미모가 끝내줍니다. 엉덩이가 커서 2세도 문제 없어요!” “제 셋째딸은 미모는 기본이고 성격까지 좋습니다.” “제 넷째딸은 미모와 성격은 기본이고 옵션으로 춤과 노래도 할 줄 압니다.” “제 다섯째딸은 미모와 성격, 춤과 노래 등은 기본이고 옵션으로 나이가 어립니다. 아직 12살이에요. 왕세자님도 영계가 좋죠?” “어허! 반데라스 왕자님은 연상 취향이시네! 어디서 그런 로리스러운 발언을 꺼내는가? 그래서 말씀드리는데 제 여동생이 지금 20살입니다. 왕자님보다 2살 많으니 왕자님의 취향을 충분히 충족 시킬 수 있을 거라 사료되옵니다.” “제 여동생은 21살이에요! 미모 좋고, 성격 좋고, 춤 잘추지, 노래 잘 부르지, 그림 잘 그리지, 술 잘 마시지, 가슴도 크지…….” “댁의 여동생은 이미 시집 갔잖아!” “저번 달에 이혼했어! 여자의 과거는 얼마든지 용서 받을 수 있어! 그렇죠, 왕자님?” “이 자들의 말은 듣지 마십시오! 전 쩨쩨하게 딸 하나가지고 한 밑천 잡아보겠다는 그런 치사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일단 연상 취향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19살짜리 첫째딸을 기본으로 제공하고, 동갑 취향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18살짜리 둘째딸을 옵션으로 제공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덤으로 연하 취향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17살짜리 셋째딸과 16살짜리 넷째딸, 15살짜리 다섯째 딸을 끼워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자그마치 다섯입니다. 물론 다섯 모두 기준치 이상의 미모와 재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제 딸들과 결혼하시면 연상, 동갑, 연하를 골고루 즐기실 수 있습니다. 이거야 말로 남자이 로망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니 제 다섯딸들과 결혼을 하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이 놈이 미쳤나? 감히 역모를 꾀하다니!” “역모라니? 왕자님을 위해 다섯딸을 모두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나에게 역모라니!” “이 자는 왕자님을 복상사시키려는 무서운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자의 다섯딸을 전부 상대하다간 뼈도 안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생각하실 것 없이 제 아내를 왕비로 맞아들이십시오. 제가 몇 년 같이 살아봐서 아는데 제 아내만큼 좋은 여자 찾기 힘듭니다.” “전 그냥 제 아내와 첩 32명을 포함해 제 딸들 43명을 다 드릴게요. 여기에 하녀들 200명까지 드릴게요. 그리고 1년마다 100명씩 추가해 드리겠습니다. 까짓것 영지에 사는 백성들 족치면 그 정도는 문제 없습니다?” 권력에 환장한 철새들은 점점 여자 숫자를 늘려가며 반데라스를 유혹하였다. 심지어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다 드릴게요’ 라는 말까지 나오자 반데라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누굴 여자에 환장한 색마로 아나?’ 나라에 왕이 없으면 안 되듯, 왕비 역시 없어선 안 된다. 그렇기에 결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강제 사항이다. 하지만 누구와 결혼을 하느냐는 선택 사항이다. 선택 사항이라고는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반데라스는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을 떠올렸다. 긴 초록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다소곳하게 웃음 짓는 아름다운 여인. ‘세레나양!’ 그녀를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이런 게 사랑이란 감정일까? ‘그래.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당장 그녀의 집으로 달려가 그녀에게 고백해야지. 사랑한다고, 나와 결혼해 달라고.’ 결심을 한 반데라스 왕자는 간신배들 사이를 뚫고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길을 비켜줄리 만무하였다. “부디 제 딸을…….” 좋은 말도 한, 두 번 들으면 질리는 법이다. 반데라스는 열심히 자기 일가친척을 왕비로 간택하라는 그들의 요청을 듣다 못해 짜증스럽게 외쳤다. “아! 그거 참 더럽게 말 많네. 여기가 니들 안방이냐?” 평소 예의바른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히로스러운(?) 발언이었다. 반데라스는 놀라 입을 쩍벌리는 간신배들을 뒤로 한 채 한 걸음에 레이트 백작가로 달려갔다. 그는 셀리오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셀리오네는 반데라스가 자신의 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둘을 잘 엮어볼 생각이었기에 반데라스를 대하는 태도는 나긋나긋하기 그지 없었다. 그에 반데라스는 굉장히 감동하였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더니!’ 그 말을 열심히 되새기며 응접실로 들어간 반데라스는 장기를 두는 레이트 백작과 하이스네를 볼 수가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예.” 셀리오네는 딸을 부르러 2층으로 올라갔다. 반데라스는 세레나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정리하였다. 그 사이 응접실 안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일어났다. “한 수만 물러!”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내가 장기잖습니까?” “이 치사한 자식!” “원래 내기엔 치사고 뭐고 없는 법입니다. 형님께선 낙장불입(落張不入)이란 말도 모르십니까?” “잔말 말고 무르라면 물러! 형님으로서의 명령이다!” “그런걸 보고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못 무르겠다는 거냐?” “죽어도 못 무릅니다.” “이 자식이 진짜!” 셀리오네는 내려오기 싫다는 세레나를 억지로 끌고 응접실로 들어오다가 거의 기절할뻔하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 레이트 백작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반데라스가 힘겹게 일어서며 말했다. “저, 전 괜찮습니다.” 그 모습에 세레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 데요.” 반데라스 왕자는 세레나의 얼굴을 보자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세레나양. 그,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쏴아아! 순간 반데라스의 이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피를 뒤집어 쓴 셀리오네는 그대로 기절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괜찮습니까, 왕자님?” 레이트 백작의 물음에 반데라스 왕자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 괜찮습니다.” 장래 장인이 될지도 모르는 레이트 백작에게 잘 보이려는 반데라스의 노력은 처절했다. “이마에서 피가 나는데요.” “아, 뭐 이 정도 쯤이야…….” 하지만 이런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피는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는 어질어질, 다리는 흔들흔들. ‘세레나양 앞에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거의 치사량까지 피를 쏟아낸 반데라스는 결국 빈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뒤였다. 반데라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비친 사람은 세레나였다. “괜찮아요?” ‘세레나양이 내 안부를 물어봐 주시다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셀리오네의 물음에 레이트 백작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앗! 잘못하면 장인 어른께 누가 되겠군!’ 레이트 백작이 대답하기 곤란해한다는 것을 깨달은 반데라스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이에요?” “예. 정말입니다.” 셀리오네는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실수로 넘어졌는데 이마가 깨지다니. 어째 이상한 느낌이든다. 뒤에 거대한 음모가 숨어있는 듯한 느낌이. 반데라스가 함구한 덕에 위기를 모면한 레이트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스네도 차마 ‘제가 한수 물러주지 않자 열받은 형님께서 장기판을 번쩍들어 던지셨습니다. 저는 날아오는 장기판을 가볍게 피했고, 그 때문에 장기판은 뒤에 서 계시던 반데라스 왕자님의 이마에 꽂혔습니다. 그 다음은 잘 아시죠?’라고 말할 수가 없어 함구를 했기에 레이트 백작의 왕세자 살해 미수 사건은 영원한 비밀로 남게 되었다. 세레나의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던 반데라스는 불쌍하게도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 나가고나자 세레나는 반데라스에게 물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요?” “예? 그 남자라면……?” “아이언스 히로 공작말이에요.” “…….” 어째서 세레나양이 그런 놈의 안부를 묻는 걸까? 반데라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은 드래곤을 만나기 위해 청색 산맥으로 갔습니다.” “예? 드래곤이요?” 반데라스는 그 간의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히로가 왜 드래곤을 만나려하는지는 그도 몰랐기에 그 부분은 계속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어째서 드래곤을 만나러 갔을까? 드래곤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드래곤을 만나러 갔다는 것은 그가 아무나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가까이 있어도 너무 먼 당신. 세레나에게 있어서 히로는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바람과도 같은 남자였다. ‘나쁜 자식. 나 같이 예쁜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다니.’ 아마 그는 다시는 이 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에 세레나는 눈물보단 짜증이 났다. “이 곳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세레나의 물음에 반데라스는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의 행동 목적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 저기 세레나양…… 저, 저는 세, 세레나양을…… 그, 그러니까…… 저, 전…… 그, 그래서…….” 반데라스의 그런 태도는 안 그래도 짜증나 있는 세레나를 더욱 짜증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세레나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세레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엔 반데라스 왕자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으며 정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세레나도 놀랐지만, 반데라스는 더욱 놀랐다. “방금 전에 뭐라고 하신 거예요?” “예. 예…… 그, 그게 그러니까…….” 잠시 당황하던 반데라스 왕자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이젠 모 아니면 도야. 세레나양이 내 마음을 거절해도 할 수 없어. 그런데 그럼 어떡하지? 난 세레나양이 아닌 다른 여자와는 결혼할 수가 없는데. 그래. 만약 세레나양이 내 마음을 거절한다면 평생 독신으로 살며 세레나양의 행복을 빌어주자. 반데라스는 세레나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세레나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반데라스는 절망감에 빠져 들어??. ‘아아! 역시 난 안 돼. 세레나양의 발을 핥아줄 자격도 없는 내가 감히 청혼을 하니 차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야.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이렇게 된 것 그냥 접싯물에 코 박고 죽을까? 그러고보니 예전에 남자에게 차인 한 여인이 접싯물에 코 박고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술집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나도 그곳으로 가야 하나?’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줄줄이 늘어 놓으며 혼자서 열심히 궁상을 떨던 반데라스는 어렴풋이 들린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세레나는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들려주었다. “좋아요. 결혼해요.” “…….” 이 것이 꿈인가, 생신가? 반데라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청초하며 고귀한 세레나양이 자신의 청혼을 승낙하다니. 이 것은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맞아. 이 것은 꿈이 틀림 없어. 내가 세레나양을 너무 사랑한나머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반데라스가 이 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인식하는데는 굉장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사실임을 인식하자마자 침대 위에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간신히 지혈해 놓은 이마에선 다시금 피가 뿜어져 나왔다. 반데라스는 새하얀 이불보를 빨갛게 적시면서도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제, 제가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그 전에 이마에 난 구멍부터 막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잠시 과거를 회상한 세레나는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제 그 남자와 난 아무 사이도 아니야.’ 세레나는 히로를 잊고 반데라스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리라 굳게 마음 먹었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미화되기 마련. 비록 남들에게 안 생겼다고 손가락 받는 히로지만 지금 세레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히로의 모습은 사일런스 지니를 능가하고 있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 “들어오세요.” 셀리오네가 말하자 대, 여섯명의 하녀들이 줄을 지어 입장하였다. 그들의 손에는 웨딩드레스, 면사포 등을 비롯하여 수 많은 장신구들이 들려있었다. 하녀들은 말 없이 세레나의 옷을 갈아 입혀주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몸을 하녀들에게 맡긴 채 히로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내가 오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이나 알고 있을까?’ 결혼식(2) “세레나가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야 물론 잘 알고 있지요. 비록 나에게 청첩장이 오진 않았지만 말입니다.” “청첩장이나 신분증 없으면 못 들어갑니다.” “아, 이 사람 정말 융통성 없네. 이봐요, 아저씨. 문지기 한, 두 번 해봅니까? 척보면 딱이잖아요.” “문지기가 아니라 위병(衛兵)입니다. 그러고 척보면 뭐가 딱입니까?” “아, 나 진짜 미치겠네! 저 공작이라니까요.” 언제나 그렇듯 나의 계획은 초장부터 틀어졌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딴에는 그래도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틀어져 버리다니. 대관식과 결혼식이 연이여 열리기 때문에 이미 거의 모든 귀족들이 왕궁 안으로 들어간 상태다. 그렇기에 마차 두 대가 통과할 수 있을만한 커다란 문은 한산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 한산함이 나 때문에 깨졌으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 책임은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 앞을 막고 있는 위병들. 그래. 이 놈들이 문제였다. 난 내 뒤에 서 있는 엘프들에게 큰 소리를 쳐놓은 상태였기에 어떻게 해서든 이 문을 통과해야했다. 안 그럼 쪽팔리니까. 내가 다시 소리치려는 찰나 거지로 보이는 늙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위병들 앞에 멈춰서서 잠시 숨을 고르더니 품 속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사자가 한 손에는 칫솔을, 다른 손에는 머그컵을 들고 양치질을 하는 모습이 열쇠고리 형태로 제작된 물건이었다. 저건 무엇일까? 위병들은 그와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난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 거지는 왜 통과시키는 거예요?” “거지가 아니라 바스토뉴 자작님이십니다.” “저 몰골이 자작이라구요? 생긴 건 꼭 거지 같이 생겼던데.” “이 곳으로 오던 중 마차가 진창을 구르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늦은 건가? “자작은 통과 시켜주는데 공작은 왜 통과를 안 시켜줘요?” “신분증을 제시하십시오. 바스토뉴 자작님은 신분증을 제시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분증이란 주민등록증이 아닌 가문의 문장을 말한다. 귀족을 사칭하는 놈들이 한, 둘이 아니다보니 요즘은 옷만 잘 입어선 귀족으로 알아주지도 않는다. 무조건 문장을 제시해야만 믿어주는 것이다. 하아! 어찌하여 이 사회에 이런 불신이 가득 차게 되었을까? 난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귀족 가문의 문장에 어째서 양치질하는 사자가 그려져 있는 거죠?” “무슨 소립니까? 그건 개뼈다귀를 뜯어 먹는 사자의 모습인데.” “……?” 설마 그게 칫솔이 아니라 개뼈다귀였단 말인가? “그럼 그 물컵은 뭐에요?” “식사 중 체하지 않으려면 물컵은 필수 지참 품목이지요.” “…….” 사자도 식사 중에 물 마시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거다. “정말 저 몰라요? 아이리스의 잘나가는 공작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라 그러면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순간, 위병들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뭐라고 속삭였다. 난 길을 열어주려는 줄 알고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갑자기 열명 정도가 더 몰려와 경비를 강화하였다. 교대 병력을 부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들은 마치 결사의 항전이라도 하듯 문 앞에 진을 쳤다. 그들의 표정에서 개미 새끼 한 마리 통과시킬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나타났다. “왜 이러는 거예요? 아직도 제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정말 그대가 아이언스 공작인가?” 이 놈은 또 왜 반말이야? 작위라도 있나? 난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분명 아이언스 공작 맞습니다. 저 엘프들에게 물어보세요. 라이야, 나 아이언스 공작 맞지?” 그러자 멀찌감치 뒤에 서 있는 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가 공작이었어요?” “…….” 여기서 ‘예! 오빠는 공작이에요!’ 라고만 외쳐주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라이 미워! 상황이야 어찌되었는 난 공작다운 포즈와 공작다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은 인상을 쓰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내 멋진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비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곳에서 시간을 얼마나 지체했지? 내가 이 곳에 도착했을 때 대관식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었다.(대관식 도중 악성 치질 때문에 엎드려서 실려나온 한 귀족이 말해 주었다. 난 감사의 뜻으로 그에게 좌욕이나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약 1시간 정도가 지났으니…… 이런 젠장! “이봐! 왜 안 비키는 거야? 당장 비키지 못 해?” 위병 대장은 헬버드를 꼬나들며 외쳤다. “그대가 아이언스 공작이라면 더더욱 들여보내 줄수 없다.” “난 아이리스의 축하 사절로 온 거라니까. 설마 선물 안 가져왔다고 이러는 거야?” “결혼식이 끝날때까진 한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다!” “왜?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봐.” “훗, 그야 국왕 폐하의 명령…… 아니, 아무튼 안 된다!” 위병 대장은 재빨리 말을 고쳤지만 이미 중요한 단어는 다 내뱉은 후였다. 후후후, 멍청한 놈 같으니. 니가 감히 아이언스 공작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그나저나 반데라스 녀석, 준비 한번 철저히 했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날 못들어 오게 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내가 찾아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는 얘긴데…… 제법이군. 후후후~. “이런 싸가지 없는 자식! 한 여자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리려 하다니! 내 오늘 하늘을 대신해 네 놈을 벌하겠노라!” 난 청룡도를 뽑아 들었다. “감히 누가 본좌의 청룡도법을 상대하겠느냐?” 불같은 나의 기세에 위병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난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엘프들에게 외쳤다. “충성스런 나의 부하들이여! 돌겨어어어억!” 세 엘프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난 다시 외쳤다. “저 곳에 라이레얼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말에 갈리온드는 재빨리 반응하였다. “어떤 놈이 내 딸을 숨겼어?” 갈리온드는 순식간에 줄을 활에 걸더니 화살을 뽑아 들었다. 잠시 손가락을 쪽쪽빨아 먹던 라이는 나의 강압적인 눈빛에 못 이겨 마법을 쓸 준비를 하였다. 그 순간, 루엔이 앞으로 나섰다. “설마 서로 싸우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난 위병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비키지 않는한 저는 저들과 싸울 겁니다.” “그러면 사상자가 날텐데…….” “피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전 이 곳을 지나가야 합니다.” 루엔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말 고민하였다. 역시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엘프라는 건가? “대화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가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다니. 하지만 사태의 평화적 해결은 이미 물건너 간지 오래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해결 방안은 오직 하나. 전쟁뿐입니다.” 나의 의지는 단호하였다. 그리고 저들의 의지 역시 단호하였다. 루엔은 나와 위병들을 번갈아 보더니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나서는 수밖에.” “예? 아니, 뭘 어쩌시려고?”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루엔은 위병들에게로 걸어갔다. 난 루엔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루엔은 지금 저들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피를 보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전쟁만은 막아보려는 루엔의 저 따뜻한 마음. 아! 정말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예쁜 여자는 마음씨도 곱다는 건가? 퍼억-! 이게 무슨 소리야? 난 하던 감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루엔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위병들을 떡이 되도록 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위병들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루엔은 루와 루비를 구타할 때처럼 정성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위병들은 감히 그녀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한채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잠시 후, 수십이나 되는 위병들은 전부 떡이된 채 바닥에 널부러져있었다. 어쨌든 루엔은 자신이 말한대로 피를 보지 않고 끝냈다. 거 참, 피를 보지 않겠다는 말이 저런 뜻이었나? 난 떡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안 되는 위병들을 밟고 지나가며 말했다. “그러게 진작 비켜줬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원망하려면 너희들의 무지를 원망해라.” 루엔은 자신이 언제 주먹을 휘둘렀냐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산책하던 여인인줄 알겠다. 난 루엔에게 다가가 물었다. “주먹 쓰는 건 어디서 배웠나요?” 루엔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배우긴요. 그냥 루와 루비를 착한 아이로 기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익히게 된 거예요.” “…….” 불쌍한 루와 루비. 권법을 익힌 할머니에게 쥐어터지며 살아왔다니. 그 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결혼식이 어디서 열리고 있을까요?” 나의 물음에 세 엘프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일제히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요!” 귀가 밝으니 편리하군. 우리는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 순간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나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들을 저지하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식장 안에 들지 못하게 하라!” 아주 준비를 철저히 하셨구만. 이딴 얕은 수작으로 날 막을 수 있다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반데라스! 난 청룡도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전군 돌겨어어어억!” * * * * 꽃잎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반데라스는 다가오는 세레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를 입은 모습도 아름답지만, 웨딩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더욱더 아름답구나. 눈이부셔서 차마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야.’ 반데라스가 좀 오바하고 있긴 했지만 세레나의 모습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었다. 누가 옷이 날개라고 하였던가? 지금 세레나의 모습은 날개 달린 천사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레나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는 최고의 디자이너가 최고의 옷감으로 최고의 정성을 다해 만든 작품. 그는 자신이 만든 웨딩 드레스를 입은 세레나를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으음, 굉장히 엘레강스하고, 굉장히 뷰티풀하고, 굉장히 잘 어울려요. 이제까지 수 많은 드레스를 만들어 봤지만 오늘처럼 필링이 해피한 적은 처음이에요. 오우! 한 마디로 퍼펙트에요!’ 하늘하늘거리는 웨딩 드레스와 면사포 사이로 살짝 들어난 그녀의 외모에 많은 남성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지금이라도 반란을 일으켜, 왕을 제거하고 저 여인을 차지해?’ 반데라스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남자가 수백이나 된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정신 없이 세레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나마 입가에 침을 흘리지 않는 것은 초인적인 인내심의 결과였다. 이윽고, 어느새 다가온 레이트 백작은 쥐고 있던 세레나의 손을 반데라스에게 넘겨 주었다. 반데라스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찌릿! 순간, 반데라스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손만 잡아도 이렇게 흥분 되다니. 첫날밤은 어떻게 지내려고? 침대로 오르는 순간에 심장마비 걸리지는 않을까? 그 다음 순서는 뻔했다. 신랑은 신부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랑하고 어쩌고 저쩌고…… 신부 역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랑하고 어쩌고저쩌고……. 그 것이 끝나고 나자 기나긴 주례사가 시작되었다. 주례를 맡고 있는 사람은 헤이체르 공작. 그는 오늘을 위해 장장 원고지 수백매에 이르는 주례사를 준비해 왔다. 그 정도면 거의 소설책 한권 분량이었다. “그리하여 헤리오 발리셀 공작님께서는 영지를 가지고 독립을 하시였다. 그리고 수 많은 귀족들의 간청을 이기지 못하여 왕위에 오르시니 그 때가 헤리오 왕국의 시작이니라. 하지만 저 간악한 주변국들은 헤리오 왕국의 비옥한 영토를 탐내 침략을 일삼으니 평화를 사랑하시니는 헤리오 발레셀 국왕께선 몸소 검을 드시고 전쟁터로 나아가…….” 주례사는 헤리오의 건국 얘기로 시작을 하여 6국이 정립되는 시기인 1500년대 중반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원고지는 아직도 반 이상 남아있었다. 모든 하객들이 지루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빨리 끝내고 갈비탕이나 먹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염불보단 잿밤에 관심이 많은 레이트 백작은 아내가 부채로 옆구리를 찌르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지루한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주례사가 계속 될 수록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자면…….” ‘마지막’이란 단어가 나왔지만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마지막’은 수십번도 넘게 나왔지만 그 어느 것도 마지막이 아니었다. 이젠 하객들도 ‘마지막’이 문장 접속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화기애애하던 결혼식장 분위기는 어느새 아침 조회 시간으로 바뀌었다. 교장 선생님이 훈화 말씀을 하고 학생들은 하품을 하며 딴짓을 하는. 헤이체르 공작이 교장 선생이라면, 하객들은 운동장에 나와있는 초등학생이었다. 주례사가 시작된지 2시간이 넘었다. 모두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대관식과 결혼식이 연속으로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점심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머릿속엔 식사후 피로연에 있을 음식 생각이 가득했다. ‘갈비탕 먹고 싶어.’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원고지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헤이체르 공작이 드디어 마지막장을 넘겼다. 그 순간, 우뢰와도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하객들은 다시금 원고지 뭉치를 꺼내드는 헤이체르 공작을 보고 입을 쩍 벌려야 했다. “아까까지가 1부고 이제부터 2부 시작입니다. 참고로 주례사는 3부 완결입니다.”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붙인 헤이체르 공작은 다시 주례사를 시작하였다. 하객들도 미칠 지경이었지만, 반데라스는 진짜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 급한 문제는 오랜 시간 서 있다보니 다르가 후들거린다는 것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혹시라도 그 놈이 들이닥칠지 몰라. 드래곤을 만나러 간다고는 했지만 안심할 순 없어. 녀석은 초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놈이니까.’ 반데라스는 불안이 엄습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불안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저기 웬만하면 빨리 끝내죠.” “아직 멀었습니다, 폐하.” 지금 밖에서는 근위병 대 아이언스 히로 패거리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숫자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아이언스 히로 패거리가 적었지만 그들은 놀랄만한 전투력으로 그것을 커버하였다. 그러는 사이 헤이체르 공작은 주례사 2부 원고를 내려 놓고 3부 원고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도 3부는 상당히 얇았다. “이상으로 주례사 3부가 끝났습니다.” 3부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자 반데라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세레나양과 정식 부부가…….’ “이제부터 주례사의 외전입니다. 일명, 부록이라고 하지요. 혹은 보너스라고도 하고요. 참고로 외전은 전체 13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체 어떤놈이 헤이체르 공작한테 주례사를 맡긴 거야? 젠장!’ 마치 히로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기라도 하듯 느릿느릿 주례사 외전을 읽는 헤이체르 공작 때문에 반데라스와 하객들은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상당수 귀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시도까지 하였다. 안기부 고문관 출신 막스텔 2세의 제지가 없었더라면 식장 안은 텅텅 비었을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쉰목소리로 기침까지 해가며 3부와 외전 13편의 주례사를 모두 읽은 헤이체르 공작은 원고지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이상으로 헤리오의 국왕 반데라스 폐하와 레이트 백작의 영애 레이디 세레나의 결혼식이 거의 끝나갑니다.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니 자리에 앉아 주세요. 거기! 누구 맘대로 일어나?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머리를 긁적이던 귀족 청년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화장실 좀…….” “빨리 갔다 와!” “예, 예.” 헤이체르 공작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아직 결혼식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고 식당으로 가시면 결혼식장의 통속적인 매뉴인 갈비탕이 준비되어 있으니 그냥 가지 마시고 한 그릇씩 먹고 가십시오. 제 주례 경력이 무려 20하고도 3년입니다. 전 이 오랜 기간 동안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축의금도 안 낸 주제에 갈비탕만 꿀꺽하려는 더럽고 치사한 수작을 부리는 놈들이 있다는 것. 꼭 그런 놈들이 두 그릇씩 먹기 마련이지. 이미 축의금 명단 식당에 넘겼으니 축의금도 안 내고 갈비탕 먹으려고 이 시간까지 기다리셨던 분들은 당장 일어나서 식장에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듣고 피식 웃었다. 그들은 헤이체르 공작이 식장의 분위기를 환기시켜보자는 차원에서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수십이나 되었다. 그들은 갈비탕 한 그릇 얻어 먹어 보겠다고 몇 시간 동안이나 주례사를 들은 것이 억울했는지 눈물을 뽑으며 식장을 나섰다. ‘갈비탕 한 그릇에 얼마나 한다고…… 진짜 치사하다.’ 헤이체르 공작은 하객들을 둘러보고는 반데라스에게 물었다. “신랑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신부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는가?” “예!” “신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신랑을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는가?” “예.” 세레나가 대답을 하자 반데라스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정식으로 성립되었습니다……라고 말하기 직전에 여러분들께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혹시 이 결혼을 반대하시는 분 계십니까? 계시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괜히 나중에 테클 걸지 말고.” 감히 왕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리 없었다. 하객들이 아무 말 없자 헤이체르 공작은 마지막 멘트를 이었다. “그럼 이 결혼을 반대하시는 분은 없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 것으로 두 사람의 결혼은 정식으로 성립…….” 콰아앙-! “잠깐!”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하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물론 반데라스와 세레나의 시선 역시 문으로 향했다. 문을 발로 걷어차며 당당하기 등장한 사람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되는 아이언스 히로 공작.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한 눈에 보기에도 깜찍하고 발랄하고 천진난만한 귀여운 엘프 소녀 라이가 들어왔고, 라이의 뒤를 이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남녀 엘프가 들어왔다. 반데라스는 히로의 얼굴을 보고 깜짝놀랐다. ‘저 악마 같은 자식! 내가 세레나양과 결혼하려는 것을 방해하려는 건가? 그래서 내가 방어를 철저히 하라 일렀거늘.’ 근위대들이 떡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반데라스는 애꿎은 그들에게 화를 냈다. 히로는 히로와 반데라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세레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하지만 의심해 보나마나 그는 분명 히로였다. ‘이 곳엔 무슨 일로 온 걸까? 설마…….’ 평소 로맨스 소설을 즐겨 읽었던 세레나의 머릿속에 한편의 장엄한 스토리가 펼쳐졌다. 무정하게 떠나가 버린 남자. 그 남자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에게 집적대는 남자. 여자는 외로움을 참지 못해 집적대는 남자와 결혼을 약속한다. 결혼식 당일. 떠나간 남자는 자신이 그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온다. 때는 마침 결혼식 도중. ‘당신을 사랑하오.’ ‘안 돼요. 전 이미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되고 말았어요.’ ‘아직 결혼식은 끝나지 않았소.’ ‘절 잊으세요.’ ‘그럴 수 없소. 나에게는 오직 그대뿐이오. 오오! 난 그대와 헤어져 세상을 떠돌던 중 알게 되었소. 그대야 말로 나의 사랑임을. 사막을 헤메는 나에게 그대는 오아시스와도 같소. 그대가 없으면 난 죽고 말거요.’ ‘흑흑!’ ‘같이 갑시다. 내 가진 것은 없지만 반드시 그대를 행복하게 해주겠소.’ ‘절 정말 사랑하나요?’ ‘물론이오. 난 저 하늘의 태양만큼이나 뜨겁게,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만큼이나 강렬하게 그대를 사랑하오. 자, 어서 내 손을 잡으시오.’ ‘낭군님 뜻 대로 하소서.’ 남자는 결혼식 도중의 웨딩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안고 도망친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신랑은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한다. 아마 히로가 상상했다면 하객들이 축의금 돌려달라고 난리치는 장면까지 상상했겠지만 세레나는 아직 꿈 많은 10대 소녀인지라 세상 풍파 다 겪은 히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세레나는 한 순간 극심하게 갈등하였다. 그는 아마도 같이 떠날 것을 권유할 것이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 * * * 수 많은 하객들과 으리으리한 결혼식장, 그리고 아름다운 신부. 이거야말로 남자들이 꿈에 그리던 결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 축의금도 무지하게 들어왔을 것이다. 난 반데라스를 향해 인상을 써보인 뒤 웨딩 드레스를 입은 세레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허억!” 순간, 너무 놀라 호흡이 멎을 뻔했다. 원래 안 생긴 여자들도 웨딩 드레스를 입으면 괜히 예쁘게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세레나 같은 절세가인이 화려하고 풍성하기 그지 없는 순백의 웨딩 드레스를 입었으니 그 아름다움은 가히 나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하였다. 너무 아름다워. 난 잠시 동안 정신 없이 세레나를 바라 보았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나는 반데라스를 찢어 죽일듯한 눈으로 노려 보았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이런 미녀와 결혼을 하려 하다니. 그것도 내 옆구리가 썰렁한 상황에서. 이런 쳐 죽일 놈 같으니라고! “오빠!” 갑자기 들려온 ‘오빠’ 소리. 난 뒤를 돌아 보았다. “왜 불렀니?” “라이가 아니에요.”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 쪽을 보니 라나가 서 있었다. 라나는 감동 받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라나의 옆에는 세레나의 아버지 레이트 백작과 세레나의 어머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난 재빨리 주위를 둘러 보았다. 혹시 라이레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정말 다행스럽게도, 하지만 갈리온드에겐 정말 불행스럽게도 라이레얼은 이 자리에 없었다. “너, 너, 너……!” 반데라스는 눈을 시뻘겋게 부릅뜬 채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이 놈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걸까? 잘 한 것도 하나 없는 주제에. “여기엔 왜 왔어!?” 그 것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그 절규를 들었기 때문일까? 순간, 수십이나 되는 근위대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의 주위를 포위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루엔에게 얻어 맞은 상처 때문인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저게 떡이야, 사람이야?” “글쎄. 내가 보기엔 떡인 것 같은데.” 하객들은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들은 인간이라기 보단 떡으로 보였다. 저렇게 맞았는데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코 주위는 피해서 때렸나? “그렇게 맞고도 또 오다니. 네 놈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피를 보지 않는 정도에서 끝내도록 하지요, 루엔.” “알았어요.” 루엔이 앞으로 나서자 근위병들은 공포에 떨었다. “마, 마녀!” 마녀건, 아니건 예쁘기만 하면 남자들은 환장을 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하객들은 루엔을 보고 침을 질질 흘려댔다. 퍼억-! 주먹이 앞으로 나감과 동시에 붉은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그와 동시에 떡이 되었던 근위병들은 거의 찰흙 수준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괴기스럽기까지 한 광경. 하지만 루엔이 예쁘니 모든 것이 용서된다. 추풍낙엽(秋風落葉). 이 고사성어만큼 지금의 상황을 잘 묘사하는 말이 또 있을까? 루엔이 가을 바람이라면 근위병들은 떨어져 흩날리는 낙엽이었다. “으아악! 내 얼굴!” 루엔이 근위병들을 처리하는 사이 난 반데라스에게 다가섰다. 반데라스는 두려움과 분노가 섞인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감히 나에게 청첩장도 보내지 않고 결혼을 하려 하다니. 그게 그리 쉬울 거라 생각했나?” “니, 니가 어딨는 줄 알고 청첩장을 보내?” 맞는 말이다. 아이언스 공작은 바람과도 같은 남자여서 그를 찾기는 하늘에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 난 세레나를 보았다. 웨딩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그녀의 뜨거운 눈빛이 나의 심금을 울린다. “걱정마, 세레나. 내가 구해줄게!” 난 그녀를 안심시켜준 뒤 반데라스를 향해 외쳤다. “네 놈! 왕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하여 죄 없는 아녀자를 강제로 취하려 하다니! 하늘이 네 죄를 용서해도 사랑과 정의의 화신 이 아이언스 히로가 용서치 않으리!” 갑자기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강제로 취하려했데.” “어쩜 그럴 수가. 빨리 집에 돌아가 내 딸 숨겨야겠다.” “저런 놈이 왕이라니 나라 말아 먹는 것은 시간 문제 겠구만.” 주위의 웅성거림 때문인지 아니면, 정곡을 찌른 내 말 때문인지 반데라스는 여느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심하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무, 무슨 소리야? 강제로 취하다니? 이건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합법 같은 소리하네! 이미 내가 다 알아보고 왔어! 네 놈이 권력을 이용해 세레나를 협박했지? 그렇지?” “아니야! 난 정식으로 청혼을 해서…….” “오호! 정식으로 청혼? 권력을 앞세워서 청혼하는 것도 정식으로 청혼은 청혼이지. 내가 말해볼까? 넌 분명 세레나에게 청혼을 하며 이렇게 말했을 거야. 결혼하지 않으면 멸문지화를 시켜버리겠다고 말이야.” 반데라스의 표정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시끄럽다!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 없어! 문답무용(問答無用)!” 주위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세상에, 멸문지화래.” “저거 왕 맞아?” “왕이 되기도 전에 그렇게 권력을 남용했는데 이젠 왕이 되었으니 무슨 짓을 저지를까?” “칼만 안 들었지 완전 날강도잖아.” 반데라스 왕자는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범죄 행위가 들통나 당황하는 것이 틀림 없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세레나가 천천히 면사포를 걷어 올렸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아아! 차마 말로 설명이 안 된다. 역시 여자는 화장발과 조명발이란 말인가? 원판이 예쁜데다 화장발과 조명발까지 겹치니 그 아름다움은 가히 라이레얼 뺨을 후려갈길 기세다. 세레나의 아름다운 얼굴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분노가 활활 타오른다. 세상에 모든 여자들은 다 내 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쁜 여자가 저런 스토커 놈의 마수에 빠져 결혼을 한다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남자가 어디있겠는가? 세레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협박 같은 것은 하지 않았어요.” 난 세레나의 눈을 보고 세레나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협박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니. 난 반데라스의 멱살을 잡았다. “이런 악마 같은 자식! 협박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아, 아니야! 난 결백해!” “결백은 무슨 결백? 난 네 놈이 스토킹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 이 스토커야!” 주위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 “어쩜 좋아? 왕이 스토커래.” 반데라스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제 쪽팔려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지 걱정되나 보다. 그러게 이런 짓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난 니가 한 스토킹 짓을 전부 알고 있어! 하녀를 매수해 세레나의 분홍색 속옷을 훔쳐오라 시킨 것도 니가 한 짓이지?” “그, 그걸 어떻게…… 허억!” “……!” 반데라스 왕자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하지만 이미 들을 사람은 다 들은 후였다. 난 잡고 있던 멱살을 슬며시 내려 놓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와 함께 근위병들도 그의 주위에서 물러났다. 하객들도 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태 자식! 반데라스는 자신의 주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보고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냥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게 진짜였을 줄은…… 역시 이 놈은 스토커에 변태였어. 일명 변태 스토커. “이런 변태 자식! 인간으로서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다니! 대체 그 속옷을 훔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아니 난 그냥…….” 사람들은 각자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걸까? 세레나는 들고 있던 부케를 내던지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 거죠?” “오, 오해 마세요, 세레나양. 전 다만 세레나양의 사이즈를 알아보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사이즈라뇨? 제 속옷 사이즈는 알아서 뭘하시게요?” “저 그, 그게…… 선물을…… 아, 아무튼 전 결코 나쁜 뜻으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듣기 싫어요!” 짜악-! 세레나는 멋지게 반데라스의 뺨을 올려 붙였다. 반데라스는 눈물을 글썽였다. “세, 세레나양…….” 샘통이다. 아! 기분 좋아. 세레나는 울고 있는 반데라스를 놓아둔 채 이번엔 나를 째려 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하녀를 매수해 내 속옷을 훔친 사실을 당신이 어떻게 아는 거에요?” “…….” 찍었다고 말하면 믿어주려나? 짜악-! “난 왜 때리는 거야?” “시끄러워요! 당신도 똑같아요!”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내가 어딜봐서 저런 변태 스토커 놈과 똑같아?” 결혼식장은 이미 난장판이 된지 오래. 하객들은 슬금슬금 일어나 식장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후후후, 이 것으로 결혼식 파토났군. 반데라스는 세레나에게 뺨을 맞은 충격 때문인지 주저 앉아 울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 그러게 왜 속옷을 훔쳤니? 난 세레나에게 얻어 맞은 뺨을 붙잡고는 웃음을 지었다.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롭고 히스테리컬한 음성은 설마……. 난 불안감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난 기절하는 줄 알았다. 푸석푸석한 금발 머리카락, 이마에 굳건이 박힌 주름살, 딱딱해 보이는 검은 뿔테 안경. 저 여자가 왜 여기있는 걸까? 모든 동물에게는 천적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내 능력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는 강적. 그대의 이름은…… “노처녀!” 오늘따라 그녀의 이마에 박힌 주름살의 깊이가 더욱 깊어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혼식(3) ..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이라는 것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란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나오려는데 휴지가 없다 던가, 애인과 키스를 하려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던가 하는 경우를 뜻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결코 만날리 없다고 생각한 장소에서 나의 천적을 만나게 된 경우. 아! 대체 이런 경우는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노처녀는 나를 육시(戮屍)할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레이저 광선처럼 내 몸을 꿰뚫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왕궁의 귀빈실. 동맹국 아이리스에서 헤리오의 왕세자 반데라스의 대관식과 결혼식의 축하사절로 온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이 곳에 머물고 계신다. 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 “전 아이리스의 축하사절로 이 곳에 왔습니다.” 아이리스도 이제 갈 데까지 갔군. 어떻게 노처녀를 축하 사절로 보낼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헤리오 국왕의 결혼식에 홰방을 놓다니요! 대체 아이리스의 공작이라는 자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이게 외교적 문제로 번졌을 땐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제가 뭘 잘못했다고 책임을…….” “그럼 잘못한게 없단 말씀이십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무섭단 말이에요.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어째서 샤이 사일런스 백작이 이 곳에 와 있단 말인가? 아, 죽고 싶어라. “어서 가서 헤리오 국왕 폐하께 사죄 하십시오.” “아니, 제가 뭘 잘못했다고 사죄를 합니까? 애초 반데라스 그 놈이 죄없는 아녀자를 강제로 취하려 했기 때문에…….” “당장 사죄하세요!” “……예. 사죄할게요. 사죄하면 되잖아요. 그러니 화 내지 마세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은 사죄하고 오라고 엉덩이를 걷어찼다. 난 눈물을 흘리며 방을 나왔다. 노처녀 미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엘프는 울고 있는 날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갈리온드는 그 와중에도 집요하게 물었다. “내 딸은 어딨데?” “아! 댁의 딸이 어딨는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뭐? 처음에 한 말이랑 틀리잖아.” 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걸 믿었냐?” “뭐?” “속은 놈이 바보지.” “…….” 이런 게 인간 세상이다. 난 세레나를 먼저 만날까, 반데라스를 먼저 만날까 고민하였다. 그때 저쪽에서 한 소녀가 발랄한 걸음으로 뛰어왔다. “오빠~!” 라나였다. 라나는 내 앞에서 서서 숨을 고르더니 반짝이는 눈동자로 날 보았다.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이래서 인기있는 남자는 괴롭다니까. “나야 물론 잘 지냈지. 넌 어떻게 지냈니?” “전 매일 오빠 생각하며 지냈어요.” “…….” 몸을 배배꼬며 말하는 라나의 태도에 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라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컨드 어쩌구 하던 말. 인기가 많다는 것이 꼭 좋은 현상만은 아니다. 라나 같은 어린 소녀까지 좋다고 따라다니니. 한 5년 정도 지나면 신부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라나는 그저 동생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 그야 당연 난 정상인이니까. 설마 내가 어린아이나 밝히는 그런 변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훗! 이래뵈도 이 몸은 사실 연상 취향이라고! “세레나는 지금 뭐하고 있어?”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혼자 신부 대기실에 있어요.” 으음, 신부 대기실이라……. “좋아. 그곳으로 안내 해.” 난 라나의 뒤를 따라 신부 대기실로 갔다. 막다른 길을 돌던 중 저쪽에서 한 무리의 귀족들이 우글우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는 레이트 백작과 그의 부인도 껴있었다. “너, 너……!” 세레나의 어머니는 날 보더니 눈을 독사처럼 치켜뜨며 말을 더듬었다. 저 아줌마가 어째서 날 보고 혈압을 올리는 걸까? “너 때문에 내 딸이…… 악!” 세레나의 어머니는 결국 솟아오르는 혈압을 이기지 못해 뒤로 넘어갔다. 그걸 뒤에 있던 하이스네가 재빨리 받쳐 주었다. 레이트 백작은 굳은 얼굴에 무서운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이 곳엔 어쩐 일인가, 아이언스 공작?” 상당히 터프하게 생기신 레이트 백작님의 터프한 질문에 난 몸둘바를 몰랐지만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일이 좀 있어서 왔습니다.” “결혼식장에선 꽤나 멋있더군.” “칭찬 감사합니다.” 딸의 결혼식이 파토 났음에도 불구하고 레이트 백작은 조금도 불쾌한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적어도 옆의 아줌마처럼 혈압 올라 쓰러지지는 않았으니. “그런데 말이야…….” “예.” “반데라스 국왕 폐하께서 세레나의 분홍색 속옷을 훔쳐갔다는 사실을 니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예?” 산적 두목처럼 생긴 레이트 백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이 자식이 감히 내 딸을……!” “진정하십시오, 형님.” 하이스네가 뜯어 말리자 길길이 날뛰던 레이트 백작은 동작을 멈추었다. “배가 고파서 아무 짓도 못하겠군. 갈비탕 먹은 뒤에 보자.” “…….” 저 많은 귀족들이 전부 갈비탕 먹으려고 줄 서 있는 것이였단 말인가? 식은 파토 났어도 갈비탕은 지급 되는군. 축의금은 돌려주려나? “가요, 오빠.” “그래.”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자자! 줄들 서세요! 갈비탕은 충분합니다!” “이봐! 내건 고기가 없잖아! 지금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이게 갈비탕이냐? 무국이지. 당장 고기 안 퍼?” “거 빨리빨리 좀 합시다. 뒤에 줄 선 거 안 보여요? 우리도 배고파 죽겠시다.” 늦게 가도 남아있으려나? 난 뜨거운 갈비탕을 세레나와 함께 먹는 상상을 하였다. 세레나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설마 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여기에요.” 난 문앞에 멈춰서서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슬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웨딩 드레스를 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 여인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세레나였다. “안녕! 그 동안 잘 있었어?” 난 최대한 깜찍 발랄한 모습으로 세레나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날 보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냈다. “뭐야? 울고 있었던 거야?”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레나. 그리고는…… 와락! 이게 무슨 짓? 세레나가 갑자기 날 껴안자 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런 것이 바로 차마 어찌 할수 없는 상황이다. 누가 보고 있기라도하면 어쩌자고 이런 대담한 짓을? “이, 이러면 안 돼. 이 건 옳지 못한 짓이야.” 라고 말은 하지만 절세의 미녀가 내 품으로 안겨드는데 어떤 미친놈이 싫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그 놈은 정말 미친놈이거나 동성연애자일 것이다. “뭐하세요?” “뭘하다니?” “도망 안 쳐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도망을 쳐?” 세레나의 눈이 커졌다. “절 데리고 도망치려고 찾아오신 것 아니에요?” “…….” 거 참,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래서 TV 드라마와 로맨스 소설을 많이 보면 안 된다니까. “내가 널 데리고 어디로 도망치라고? 그리고 난 언제나 당당한 남자야. 내 인생에 도망이란 없어.” 세레나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어찌보면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보면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여긴 왜 왔어요?” “그야 그 스토커 자식이 너와 결혼을 한다기에 남 잘 되는 꼴은 못보…… 아니, 그냥 널 구하러 왔어.” “정말요?” “물론이지.” “기뻐요.” 세레나는 보기에도 아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더욱 꼭 끌어 안았다. 갑자기 그녀를 안고 석양을 향해 뛰어가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는 것은 왜일까? 난 그 욕망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TV 드라마와 영화, 로맨스 소설 등에서 재탕, 삼탕, 사탕, 죽탕을 해먹은 진부한 설정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진 않아. 난 소신있게 내 갈 길을 갈테야. “저, 저기 이 것 좀 놓고 얘기하자. 남들보면 어떡하니?” “상관 없어요.” “넌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난 상관있어.” 안 그래도 요즘 나의 대외 인지도가 하락하고 있는 추센데 결혼식이 파토난 신부와 신부 대기실에서 낯뜨거운 애정 행각을 펼쳤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분명 난 매장 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좋다고 달려드는 미녀를 뿌리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인간에겐 이성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미인을 보면 환장을 하는 동물적인 감성이 있다하더라도 난 엄연히 이성을 가진 인간이다. “이러지 마. 이런 신체 접촉을 하기엔 우린 너무 어려.” “가만히 좀 있어요!” “……예.” 세레나가 나에게서 떨어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솔직히 좋았다는 것을 부인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와 함께 극심한 불안감이 들었다. 혹시 이러다 발목 잡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잠깐 기다리세요.” 세레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여자들은 화장 때문에 굉장히 불편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칠하느라 고생. 지우느라 고생. 뭐, 예뻐진다면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만은 그래도 매일 같이 하긴 힘들지 않나? 워낙 꼼꼼한 화장이었는지라 화장을 지우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화장을 다 지운 세레나는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왜 다시 나타난 거예요?” 내가 온 게 반갑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약간은 원망이 섞인 말투. 지금이야 말로 멋진 대사를 한 방 날려줘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함축적이면서도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멋지고도 간략한 대사. 정말 환상적이다. 그 증거로 지금 세레나는 상당히 감동 받은 모습이었다. “절 사랑해서 온 게 아니었나요?” 난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잖아. 난 그냥 좋은 친구로서 널 찾아온 것 뿐이야. 얘는 농담도 잘해요. 사랑이라니?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그럼 사랑하지도 않고, 저와 같이 도망갈 생각도 없으면서 결혼식장에 뛰어 들었단 말이에요?”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 하고 있는 건가? 짜악-! 방안을 가득 울리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내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뺨이 화끈거린다. 아까 맞은데 또 맞으니 정말 아프다. “왜 때려!?” 짜악! 짜악! 짜악! 세레나는 두 손을 마치 부채처럼 휘둘러 내 양쪽뺨을 후려쳤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나는 입안의 피가 고일때쯤에서야 현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재빨리 두 손으로 뺨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자기 왜 이래?” “이 나쁜 자식! 죽여 버리겠어!” 죽여? 누구를? 반데라스? 세레나는 화장대에 놓여 있는 화장품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졌다. “죽어! 죽어!” 와장창! 와장창! 난 날아오는 화장품을 피해 허리를 숙였다. “진정해, 세레나! 이런 짓을 하기엔 니 얼굴이 너무 예뻐!” 난 예쁜 여자는 마음씨도 곱다는 외모지상주의적 속담을 생각하며 외쳤다. “닥쳐! 이 나쁜 자식아!” 와장창! 이번에 부서진 것은 향수병. 향긋하면서도 강렬한 냄새가 내 코를 덥쳐왔다. 저거 한 병에 얼마나 할까? 냄새가 끝내주는 것을 보니 굉장히 비싼 것 같은데. 와장창! 이번에 깨진 것은 분통. 분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콜록콜록! 이러면 안 돼! 제발 이러지 마세요!” 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세레나의 사격(?)은 계속 되었다. “나쁜 자식! 날 가지고 놀아? 죽여 버리겠어!”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방금 전까지 나 좋다던 여인이 날 살해하려드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빠악-! “아아악!” 딴 생각하다 한 대 맞았다. 이건 뭐야? 아이쉐도우? 빠악-! 이건 립스틱. 빠악-! 이건 스킨 로션! 빠악-! 이건…….“ “그만 좀 던져! 내 머리가 동네북이냐?” “닥쳐!” “아니, 예쁜 입에서 어떻게 그런 쌍소리를……. 야,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의자는 뭐하려고?” 세레나가 머리 위로 의자를 들어 올리자 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서, 설마 그걸 던질 생각은 아니겠지?” “죽어!” “으아아악!” 신부 대기실을 뛰쳐나오는 순간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난 라나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난 살기 위해 이 곳을 벗어나련다. 너도 살고 싶으면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도록 해.” 난 세레나가 쫓아올까 무서워 전력을 다해 복도를 가로질렀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안전지대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난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후우~ 하마터면 죽을뻔했다. 청초하고 순수함의 대명사인 세레나가 이면에 그런 난폭함을 숨기고 있었다니. 역시 사람은 얼굴만 보곤 모르는 거다. 흑흑, 예쁜 여자는 다 착하다는 환상이 깨진지는 오래지만 믿었던 세레나까지 저럴 줄이야. 그런데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걸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변태 스토커와 결혼하려는 걸 간신히 구해줬더니만 고마워하진 못할망정 은인을 죽이려 하다니. 이거야 말로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놨더니 봇따리 내놓으라는 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 여기서 뭘하시고 계신거죠?” “허억!” 내 뒤엔 어느새 샤이 사일런스 백작이 서 있었다. “헤리오 반데라스 국왕 폐하께 용서를 빌었나요?” “아니요, 아직…….” “당장 가세요!” “……예.” 난 투덜거리며 하녀의 안내를 받아 반데라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자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정말 무던이도 많이 치였다. 내 주위에 만만한 여자라고는 오직 라이 하나뿐. 어쩌면 그래서 내가 착하고 순수한 라이를 괴롭히는 지도 모른다. 세상 여자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사실 이건 굉장히 안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당한 사람에게 복수를 해야지, 엉뚱하게 다른 사람에게 복수를 하면 어쩌자는 건가? 이거야 말로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 하는 짓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난 노처녀에게 복수를 할 권리가 있다. 으음, 어떤 복수를 하는 것이 좋을까? 아침에 출근할 때 노처녀라고 놀려대? 아니야. 그건 너무 비열해. 아무리 막나가는 나지만 그런 비열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아. 반데라스의 방은 햇볕이 잘드는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금으로된 손잡이와 금박이 박힌 문 앞에는 떡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사람 둘이 서 있었다. 만약 그들이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난 주저없이 그들을 떡으로 분류했을 것이다. 난 시건방진 자세로 그들에게 거수 경례를 붙였다. “어이구, 수고들 하십니다. 오늘 저녁에 일 끝나고 한잔 어때요?” 두 근위병은 창을 앞 세운 채 나를 노려보았다. 이런 게 바로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 한다는 것이다. 때린 사람은 루엔인데 왜 나한테 적개심을 드러내는 걸까? 루엔이 미녀 엘프여서? 그렇다고 내가 루엔이 저지른 일까지 책임져야 하나? 그건 너무하잖아. 그들은 내가 안으로 들어가지 몸을 내전져 막았다. 하지만 난 그들을 가볍게 물리쳤다. 이미 떡이 된 놈들이 무슨 힘을 쓸 수 있겠는가? “흑흑…… 세레나양…… 흑흑…… 사랑하는 세레나양…….” 저기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이불을 끌어 안고 우는 인간은 반데라스임이 틀림없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확실하다. 내기를 해도 좋아. 난 살금살금 다가가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울지마. 사내 놈이 추하게 뭔 짓이냐? 쪽팔린 줄 알아라.” 고개를 들던 반데라스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그를 향해 백만불짜리 미소를 지어 주었다. 씨익! “이런 죽일 놈! 여긴 뭐하러 나타났어?” 난 그가 휘두르는 주먹을 피해 침대에서 일어섰다. 내가 이 방에 들어온 목적은 상심하고 있을 반데라스를 위로해주고, 결혼식을 개박살낸 것에 대한 사죄를 하기 위함이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다. 진실은 언제나 숨겨져 있는 법. 내가 이 방에 들어온 진짜 목적은 반데라스의 염장을 지르기 위하여. 지금 난 노처녀한테 깨지고 세레나한테 얻어 맞은 덕에 기분이 상당히 안 좋다. 그래서 지금 화풀이할 상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 아주 화끈하게 염장을 질러주마! “흑흑, 너 때문에 세레나양과의 결혼이…… 흑흑…… 이제 내 인생은 끝이야.” “당연 끝이지. 하녀를 매수해서 속옷을 훔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야.” “시끄러!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러게 평소 착하게 살았어야지.” “어흐흐흑!” 반데라스는 이불을 끌어 안고 오열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변태 스토커만 아니라면 정말 괜찮은 녀석인데. 솔직히 얼굴도 저 정도면 잘생겼고, 헤리오의 국왕이면 직업도 좋고, 모르긴 몰라도 재산도 상당할 거다. “울지마! 넌 울 자격도 없어! 감히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순진한 아녀자를 강제로 취하려 하다니! 니가 세레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치사하고 비열한 방법을 쓰다니.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야!” “뭔 소리야? 권력을 이용해서 강제로 취하려 하다니? 난 정식으로 그녀에게 청혼을 했고, 그녀는 그것을 받아 들였어!” “변명은 듣기 싫어!” “정말이야! 난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천년만년이고 그녀의 옆에서 기다릴 자신이 있어.” “그런걸 바로 스토킹이라 그러는 거지.” “아니야! 난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스토킹을 했다는 건가?” “스토킹이 아니라니까!” “그럼 분홍색 속옷은 왜 훔쳤어.” “그, 그건…….” 머뭇거리며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반데라스.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역시 네놈은 변태 스토커였어!” “아니야!” “아니라면 어서 진실을 말해!” 머뭇머뭇, 주춤주춤거리던 반데라스는 이윽고 진실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그의 얘기는 이러했다. 반데라스는 창가에 앉아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안위와 국가의 번영에 대한 고민은 물론 아니었다. ‘오늘은 어떤 방식으로 세레나양을 스토킹할까?’ 마치 흥신소 직원처럼 세레나의 주위를 집여하게 맴도는 그는 언제나 세레나에 대한 생각만 가득할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여인이 반데라스를 찾아왔다. “전 레이트 백작의 영애이신 레이디 세레나님의 직속 하녀 로나이시라고 합니다.” “예. 그런데 무슨 일로……?” 여인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흑흑, 소녀의 아버지는 3년 전 절친한 친구의 사업을 돕기위해 보증을 선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은 결국 망하고 말았고, 그 친구 분은 야반도주를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친구 분을 찾기 위하여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습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아버지께선 하루하루를 술로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어제…… 흑흑,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몰려와 집안 여기저기에 빨간 딱지를 붙였습니다. 전 어떻게해서든 빚을 값아보려했지만 액수가 액수인지라 하녀 봉급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왕자님. 절 좀 도와주세요. 왕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 가족은 길바닥으로 쫓겨는 수 밖에…… 흑흑…….” 얘기를 다 들은 반데라스는 심히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가슴이 아픈 것과 돕는 것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일이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바쁜데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남을 돕겠는가? “상황은 딱하지만 저도 어찌할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등을 돌리는 반데라스에게 세레나의 직속 하녀 로나이시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이건 레이디 세레나님이 어제 입으셨던 속옷입니다. 이걸 받고 저희 집을 도와주세요.”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반데라스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세레나의 직속 하녀 로나이시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아직 세탁도 하지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이렇게 된 거야!” 으음, 그런 깊은 사연이 있었군. “그러니까 결론은 니가 세레나의 세탁 전의 속옷을 돈 주고 샀다는 거 아냐? 이 변태 자식아!” 반데라스는 빨갛게 부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변태라고? 니가 그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 꿈에 그리던 여인의 속옷이, 그것도 아직 세탁 전의 속옷이 눈앞에 있는데 너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어? 그게 잘못된 짓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난 그걸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었어. 왜냐? 난 남자니까!” “…….” 너무나 공감이 가는 얘기에 난 말문이 막혔다. 특히 마지막 말이 감동이다. ‘왜냐? 난 남자니까!’ 그렇다. 남자란 원래 그런 족속들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난 잠시 반데라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꿈에 그리던 여인의 속옷이 봄바람을 타고 내 앞에 나풀거릴 때. 그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뭘 새삼스럽게 물어보고 그러시나? 당연 남들이 보지 않는 사이 얼른 주머니에 넣어야지. 패티시즘(fetichism)이란 정신 의학적으로 성욕 도착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성욕 도착이란 이성의 몸의 일부나 옷조각 등으로 성족 만족을 얻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변태나 정신이상자로 여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겐 패티시즘이 존재한다. 가령 예를 들어 미팅에서 상대 여자의 특정 부위를 눈여겨 보는 놈들이 꼭 있다. 보통의 경우가 얼굴, 가슴, 허리, 엉덩이 등이고, 일부는 손이나 귀, 어깨 등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상대가 특정 옷을 입었을 때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제복, 교복, 메이드복 등등. 가끔 아주 특이한 경우도 있다. 내 친구 중 어떤 놈은 정말 특이하게도 군복 입은 여자들만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고 한다.(거 취향 참 독특한 놈일세) 그럼 이쯤에서 내 주장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예전에 사촌형이 나에게 해줬던 말을 증거로 내세우겠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땐 몰랐는데 말이야, 졸업하고나면 교복 입은 여고생들이 그렇게 삼삼해 보일 수가 없어. 난 요즘 교복 입은 여고생 보는 낙에 산다니까.’ 참고로 우리 사촌형 백수 생활 5년째다. 등하교 하는 여고생 다리 쳐다볼 시간에 취업 공부했으면 지금쯤 대기업에 입사하고도 남았다. 아무튼 결론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성욕 도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도의 차이일뿐이다. 이 정도가 심하면 그건 일종의 정신병이라 할 수 있다. 주위에 그런 놈들 있으면 빨리 정신병원으로 보내줘라. 그거 고치지 않으면 사회 생활하는데 문제있다. 그렇다면 꿈에 그리던 여인의 속옷(세탁 전 상태)이 눈앞에서 나풀거릴 때,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행위는 성욕 도착증으로 봐야할까? 난 아니라는 데에 기꺼이 한표를 던지겠다. 왜냐? 난 남자니까! 남자들 데려다가 실험해 봐라. 십중팔구는 주머니 속에 넣는다. 왜냐? 남자들이란 다 똑같은 족속이니까! “변태라고 했던 말 취소하마. 용서해다오.” 난 진심을 담아 반데라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런데 그 속옷은 어떻게 했냐?” “그게 말이지…….” 반데라스의 말에 따르자면 그 속옷을 사계절에 피는 네 종류 꽃의 꽃잎과 함께 고이 접어 베겟속에 넣었다고 한다. “왜 그런 짓을 했는데?” “그렇게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책에 쓰여있었어.” “제 정신이 아니군. 그런 웃기지도 않은 책을 보고 따라하다니.” “웃기지도 않다니! 효과는 확실했어! 네 놈만 아니었어도…… 흑흑…… 너만 아니었어도…… 어흐흐흑!” 징징 짜는 반데라스를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다시 한번 역지사지. 난 잠깐 동안 반데라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 이렇게 억울할 수가! 이건 말도 안 돼! “하지만 이건 강제 결혼이었잖아.” “강제가 아니었다니까! 난 정식으로 내 마음을 담아 청혼을 했고, 세레나양은 그것을 받아들였을뿐이야! 그 어디에도 강제적인 행동은 없었어!” “협박하지 않았어? 청혼을 거절하면 가문을 없애버리겠다든지…….” “헛소리 하지마! 이게 누굴 폭군으로 아나?” “정말 없었어?” “그렇다니까!” 반데라스는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거짓은 없어 보였다. 강제 결혼이 아닌 쌍방간의 합의가 이루어진 정식 결혼이었단 말인가? 설마 내가 잘못 짚은 거란 말인가? “으음, 그랬었군. 역시 진실은 언제나 숨겨져 있다는 건가?” “뭔 소리야?” 뱁새 주제에 감히 대붕의 뜻을 알 리가 없지. 난 얼굴에 한껏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인데 미안하게 됐다.” 나의 사과에 반데라스는 발끈하였다. “이게 사과한다고 될 일이야?” “뭐, 결혼식이야 언제든지 다시 하면 되지. 축의금도 두 배로 받으니까 좋잖아. 하객들은 갈비탕 두 번 먹어서 좋고. 너도 장가 두 번 가니까 좋고. 축하해.” “시끄러! 내가 오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쳤어……. 흑흑…… 세레나양…… 어흐흐흑!” “거 사내 자식이 질질 짜기는. 다 큰 남자가 우니까 추하기 그지 없군.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둬라.”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끝났어!” “하하하! 괜찮아. 우린 아직 젊잖아.” “웃지마!” “음하하하하!” 난 남자다운 포즈로 호탕하게 웃어재낀 뒤 조심스게 물었다. “그거 나 주면 안 되겠냐? “그거라니?” “세레나 속옷말이야.”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반데라스. 이어서 양손을 교차하며 소리친다. “절대 안 돼! 그건 내 보물 1호야!” 뭐 그런 걸 보물 1호로 삼고 그러니? 하여간 남자들이란……. 결혼식(4) 반데라스를 잘 다독거려준 나는 갈비탕이나 얻어 먹을겸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라이가 주방 아주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갈비를 뜯어 먹고 있었다. 세상에! 저건 갈비탕에 갈비가 들어있다는 표현보단 갈비 주위에 국물이 조금 있다는 표현이 걸맞겠다.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니 전부 무국이다. 저게 어딜봐서 갈비탕이냐? 모두들 주방 아주머니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갈비를 뜯고 있는 라이를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난 라이에게 다가갔다. 마침 라이의 옆자리는 왠 재수없게 생긴 귀족놈 하나가 꿰어차고 있었다. 난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야, 좀 일어나봐.” “어떤 자식이 감히 나 기네즈아 남작가의 둘째 아들 가네즈아 미가엘에게 일어서 보래?”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자기 소개를 하다니. 거 참 성격 이상한 놈일세. 난 녀석의 재수 없는 상판대기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 놈이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라는 것이 아닌가? “어버버버버.” 이제보니 정신지체아였군. “너너너너너넌……?” 말더듬이? “넌 그때 그 놈!” “우리 언제 만난적 있었던가?” 난 녀석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 보았다. 확실히 어디선가 본 것 같긴 하다. 사실 이런 재수 없는 얼굴은 그리 흔한게 아니거든. 그럼 내가 이 놈을 어디서 봤을까? 잠시 생각하자 답이 나왔다. 난 나의 천재성에 감탄을 하고는 반색을 표명했다. “아! 너였구나! 너 이 자식 여긴 어쩐 일이냐?” 녀석은 친한척하는 날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난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큰소리로 말했다. “너 예전에 길거리에서 돈 흔들며 세레나와 하룻밤 자게 해달라고 애원했었잖아. 내가 다 기억 해, 임마. 그런데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사병을 동원해 강제로 일을 추진하였지. 그 자리에 내가 없었다면 세레나는 어찌 되었을지…… 아! 아마도 한 소녀의 순결이 무참히 짓밟혔겠지. 하하하! 아무튼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다.” 내 목소리가 식당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녀석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너 이제 어쩌냐? 세레나가 왕비가 되면 넌 귀족 사회에서 완전 매장될텐데. 혹시 누가 아니? 밤에 근위대들이 집에 찾아와, 일가족을 산속에 생매장 해버릴지?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비록 악연이긴했지만 간만에 아는 사람을 만나니 반가움을 감출 길이 없다. “무, 무슨 소리냐? 난 그런 짓 한적이…….” 난 변명하는 녀석에게 피식 웃어 주었다. “그래. 살아남으려면 거짓말이라도 해야지. 열심히 변명해 봐.” “그, 그런 일은 없었다. 나, 난 니가 누군지도 모른다. 이, 이건 모함이야!” “내가 니 맘 다 알아, 임마. 그러고보면 너도 무지하게 재수 없는 놈이야. 그때 만났던 남녀 중에 남자는 공작이 되어 있고, 여자는 왕비가 되게 생겼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벌떡 일어선 남자는 레이트 백작. 즉, 세레나의 아버지. 그의 주위에는 갈비탕 그릇과 뼈들이 널려있었다. 결혼식장에 와보면 저런 인간들이 꼭 한, 두명씩 있다. 갈비탕으로 축의금 뽑으려는 인간들. 나 결혼식할 땐 입구에서 식권을 발급하여 저런 인간들을 원천봉쇄할 거다. 한 사람 앞에 한 그릇씩. 갈비탕이 땅 파면 나오는 줄 아나? 레이트 백작은 갈비 뼈다귀 한웅큼을 쥐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자세히 설명해 봐.” 난 레이트 백작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간신배처럼 목을 길게 늘어 뜨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예전에 있었던 일을 전부 떠벌렸다. “……이래서요…… 저래서요…… 그랬는데요…… 이렇게 되었어요…… 아무튼 저 놈이 나쁜 놈이니까 혼내주세요.” 난 쉬는 시간에 군것질한 짝을 담임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초등학생처럼 열심히 쫑알거렸다. 얘기를 다 들은 레이트 백작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입 벌려.” “예?” “입 벌리라고.” 레이트 백작에 협박에 녀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 왜 입을 벌리라고 하는 걸까? 이럴 땐 보통 입 꽉 다물라고 해야하는 것 아닌가? 잠시 후, 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입을 벌리자마자 레이트 백작이 갈비 뼈다귀 한웅큼을 녀석의 입안에 쑤셔 넣은 것이다. “어버버버!” 그 다음은 불쌍해서 차마 바라 볼 수가 없었다. 퍽- 퍽- 퍽- 퍽-!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니 날 원망하지 말지어다. 난 이젠 비어버린 라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런 소란 중에도 라이는 갈비를 뜯어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라이야, 오빠도 한 입 주지 않으련?” “예, 오빠.” 라이는 생긋 웃으며 갈비 한 대를 건네 주었다. “우리 착한 라이.”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갈비를 입에 물었다. 그 순간, 식당 문이 쾅하고 열리며 갈리온드가 뛰쳐 들어왔다. “지금 내 딸이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갈비탕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무슨 일을 당하다니요? 라이레얼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언정 결코 당할 여자가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댁도 저기 줄서서 갈비탕이나 한그릇 드세요.” 갈리온드는 잠시 동안 날 째려보더니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식판을 들고 줄을 섰다. 난 라이의 갈비를 뺏어 먹으며 생각의 늪에 몸을 던졌다. 강제 결혼이 아니었다라……. 그럼 난 여기 왜 온 거지?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 타인의 고통은 나의 행복이니. 하지만 이 곳에서 노처녀를 만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아이리스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사일런스 지니는 잘 있으려나? 그리고 그녀도……. 루시아. 내가 사랑하는 여인. 하지만 그녀와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 하아~ 정말 그녀와 난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그녀의 미소를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날 사랑하나요? 대답해 주세요. “…….” 갑자기 분위기가 왜이러냐? 마치 내가 순정 만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고통받는 미소년(?).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여인. 그리고 그녀를 스토킹 하는 남자. 아! 괴롭다. 어찌하다가 나에게 세계 평화 수호라는 중요한 임무가 맡겨졌을까? 나보고 어쩌라고? 난 라이의 머리를 쓸어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라이와 함께 어딘가로 숨어 버릴까? 라이가 그릇에 담긴 갈비를 전부 뜯어 먹었을 때쯤 루엔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아름다운 미녀 엘프의 등장에 식당 안이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다. 그녀는 갈리온드와 잠시 속삭이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라는 여자가 당신을 찾고 있어요.” “…….” 노처녀가 무슨 일로 날 찾는 걸까?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난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린애가 같이 있으면 소리지르기도 좀 그럴테니 라이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지? “일어나려무나.” “왜요?” “노처녀 언니를 만나러 가야지.” “꼭 만나야 해요?” 라이는 이 곳에 있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취해보였다. 난 라이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이 오빠가 지금 위기에 처했거든. 그래서 라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이 오빠를 돕고 싶지 않니?” “돕고 싶어요!” 역시 라이밖에 없구나. 난 옆에 앉은 놈 뒤통수를 때려 손수건을 빼앗은 뒤, 그것으로 라이의 입가를 깨끗이 닦아 주었다. “그럼 가자.” “예.” 라이는 기름기가 있는 손가락을 쪽쪽 빨며 내 뒤를 따라 노처녀가 있는 귀빈실로 향했다. 그나저나 정말 의문이다. 노처녀가 축하사절로 올 줄이야. 만약 온다면 사일런스 지니가 올 줄 알았는데. 혹시 요즘 바쁜가? 설마 이 놈이 나 없는 사이 루시아에게 작업 들어간 것은 아니겠지? 똑똑-! “들어오세요.” 난 라이를 앞세워 들어갔다. 의자에 몸을 기대 서류를 읽고 있던 샤이 사일런스 백작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날 보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반데라스 폐하께 사죄는 하셨나요?” “물론입니다.”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라이가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라이의 뒤에서 몸을 움츠렸다. “오랫만에 뵙겠습니다, 상아탑의 주인 라이미안님.” 샤이 사일런스 백작께서는 라이에게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하였다. 나한테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 “예. 오랜만이에요.” 라이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노처녀는 잠시 라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헛기침을하며 고개를 돌렸다. 으음, 상상을 초월하는 라이의 귀여움은 노처녀한테까지 통한단 말인가?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노처녀가 만약 제때 시집을 갔다면 지금쯤 라이만한 딸이 있을 것이다. 대체 그 나이 먹도록 뭐했는지 몰라. 설마 자신은 독신주의자라고 우기려는 것은 아니겠지? 노처녀는 우리 둘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면서 불안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잔소리를 하려고 이러는 걸까? 노처녀는 말을 꺼내기에 앞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안경 너머로 날 째려보며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 아이리스가 자바스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지요. 전쟁이야 예전부터 하고 있었잖아요.” “지금은 전면전입니다.” 전면전이라면,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했다는 건가? “이기고 있나요?” “…….” 나의 간략하고도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노처녀는 날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럼 지고 있길 바라셨습니까?” “……그저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수심과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현재까진 아이리스가 국지전에선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병력의 밀도가 높으니까요. 하지만 전쟁이 전면전으로 번지면서 자바스에선 강제 징병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전선 확장은 시간 문제입니다.” “전선이 확장 되면 안 좋나요?” 한 순간 노처녀는 인상을 팔 찡그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이리스가 자바스에 비해서 병력이 많이 부족한데 만약 여기서 전선이 더 확장된다면 그 부족한 병력을 또 나눠야 합니다!” “아니, 왜 저한테 화를 내시는지요?” “그 외에 문제점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또 무슨 문제가 있나요?” 노처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짐작하건데 저 한숨은 ‘이 멍청한 놈한테 설명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도로 해석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노처녀는 지금 나를 핫바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아이리스가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동맹국들과 많은 협력이 필요합니다. 만약 동맹이 깨진다면 가장 위태로운 국가는 아이리스입니다. 최악의 경우는 전쟁에서 패해 몰락하게 될겁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도 헤리오와 아이리스의 동맹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외교적 안보라는 건가? 확실히 동맹국이 뒤통수를 치면 아이리스가 위험하긴 하지. 특히 헤리오가 뒤통수를 친다면 그 정도는 극히 심각할 것이다. 지금 아이리스는 자바스와의 전쟁 중, 모든 군대를 최전방에 배치하였다. 그러니 지금 헤리오가 아이리스를 친다는 것은 거의 빈집털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망쳐 놓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화를 낸다던가 하는 감정적 행위는 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차분하고 침착하게 말하였다. 그 때문에 난 두려움에 온 몸을 떨어야 했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마음이 편할텐데, 이런 식으로 나오니 굉장히 불안하다. “죄, 죄송합니다.” 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그러자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고개를 가로저으셨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끝나는 걸까? 설마 나보고 죽으라는 것은 아니겠지? “목숨으로 사죄하세요.” 죽으라는 거군. “하하하!” 난 고개를 들어 목청껏 웃어재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한참 동안 혼자서 열심히 웃던 나는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농담하신 거 아니였나요?” “지금 제 말이 농담처럼 들리십니까?” 지금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태도는 여자 기숙사 사감 선생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교과서에서 보았던 근대 소설의 선구자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B사감과 러브레터’라는 단편 소설이 떠오른다. 평소 교과서를 열심히 보지 않았거나, 교과서를 본지가 오래 되어 기억이 안 나거나, 교과서에서 이 소설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도록 하겠다. 어느 여자 기숙사에는 A사감도 C사감도 아닌 B사감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나이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로 안 생기고, 성격 더럽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다름 아닌 러브 레터였다. 그녀는 러브 레터만 보면 질겁을 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왜? 집안에 러브 레터 읽다가 심장 마비로 사망한 사람이 있어서? 편지 알레르기가 있어서? 모두 아니다. 그녀는 단 한번도 러브레터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러브 레터만 보면 이를 가는 것이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상당히 열 받을만 하다. 자신에겐 러브 레터는커녕 편지 한통 안 오는데 기숙사에 있는 여학생들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남정네들의 러브 레터가 날아드니 노처녀로서는 열 받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기숙사 안으로 쏟아 들어져 오는 러브 레터를 원천 봉쇄하기 시작한다. ‘내가 러브 레터를 받지 못하니, 니들도 러브 레터를 받아서는 안 돼.’ 죽어도 남잘 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이런 더러운 성질머리.(어찌보면 나하고 비슷한 면도 있다) 그녀가 영원한 노처녀로만 남을 수 없는 이유는 얼굴을 떠나 이런 더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안 생긴 여자와는 살아도 성격 더러운 여자와는 못 사는 법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닌 성격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기숙사 안에서 요상스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와 달콤한 속삼임. 그 요상스런 소리의 주인공은 A사감도 아니고 C사감도 아니고 D사감도 아니고…… O사감도 아니고 P사감도 아니고…… Y사감도 아니고 Z사감도 아닌 앞서 언급했던 B사감이었다. 그녀는 침대 주위에 기숙사 여학생들에게 온 러브레터를 잔뜩 늘어 놓은 채 혼자서 생쇼를 하고 있었다. ‘오! 잘생기고 훌륭하신 아이언스 공작님.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오오! 내 어찌 아름다운 그대를 버리겠소?’ ‘사랑해요, 아이언스 공작님!’ ‘흥! 우리 사인 이제 끝이에요.’ ‘제발 그러지 마. 난 널 사랑해.’ ‘사랑이란 틀로 절 구속하려 하지 마세요.’ ‘키스해 주세요.’ ‘제 입술은 당신 거에요.’ B사감은 일인 이역도 모자라 삼역, 사역, 오역까지 하며 밤새도록 지랄발광을 해댄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한 학생은 그녀를 불쌍히 여긴다. 이 소설의 결론은 무엇일까? 작가는 본능과 권위 의식이라는 대립 구조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이 소설은 기숙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소재로 하여 인간의 이중적 심리 상태를 사실감 있게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B사감의 이중성을 조롱함과 동시에 인간형을 해부함으로써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는 그 위선이 결국은 비애라는 아이러니함까지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의 결말부에는 한 처녀가 그녀의 기괴한 행동을 동정하고 이해한다. 이는 억눌린 본성에 대한 인간적 아픔이라 할 수 있다……라고 교과서에 쓰여있다. 물론 이 해석은 맞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빼먹었다. 그건 바로 노처녀 히스테리는 위험하다는 것. 아! 사랑받지 못한 노처녀의 말로란 저리도 비참한 것이다. 아마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님께서도 10년 후엔 저러지 않을까 심히 걱정 된다. 예를 들어 하녀들에게 온 러브 레터를 빼앗는 다던가……. 사실 10년 후까지 갈 것도 없다. 지금만 해도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성격은 B사감 못지 않으니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나니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조금 껄끄럽다. 난 그녀의 눈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일전에 진명과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신 것은 정말 감탄할만한 성과였습니다.” “예? 예. 뭐 그 정도야 기본이죠…… 하하하…….” 뭐야? 지금 노처녀가 날 칭찬한 거 맞지? “특히 중립 국가였던 진명으로부터 출병까지 하게 한 것에 대해서 저는 아이언스 공작님께 아주 약간의 존경심을 품게되었습니다.” “…….” 이럴 수가! 노처녀가 나한테 존경심을 품고 있데.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그게 어디냐? “지금 진명은 뭘하고 있나요?” “승상인 제갈량이 대군을 일으켜 북쪽에서 아토리아와 자바스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국지전 양상을 띠고 있지만, 국경 부근에 병력이 증강 되는 것으로 봐서 확전은 불가피하다 생각됩니다.” “누가 이길까요?” 정말 멍청한 질문이었나 보다. 노처녀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진명은 대륙 최고의 군사 강국입니다. 두 나라와 전쟁을 한다고 해서 진명이 절대 패할 리는 없습니다.” “그럼 이기겠네요?” 아까보다 더 멍청한 질문이었나 보다. 노처녀가 짜증을 내니. “진명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립국이었습니다. 중립국이 특징이 뭔지 모르십니까? 중립국은 자국이 먼저 공격을 받지 않는한 타국을 침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내륙 깊이까지는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국경 부근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 무력시위를 할뿐이지요.” “어쨌든 진명이 이긴다는 얘기네요. 뭘 그렇게 빙빙 돌려서 말하세요?” “…….” 노처녀는 한 손으로 주름이 깊게 패인 이마를 집더니 바닥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구제 불능이군.” 보통 이런 말은 작게 하거나, 속으로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크게 말한 이유는 나 들으라는 거겠지? 역시 노처녀는 성격이 나빠. 사일런스 지니처럼 날 존경할 줄도 모르고. 사일런스 지니는 내가 모르는 것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내가 멍청한 말을 하더라도 언제나 웃으며 박수를 쳐줬는데. 남매가 어째서 이렇게 다른 걸까? 그러고보니 사일런스 지니 본지도 꽤 오래 됐네. 지금쯤 뭐하고 있으려나? 루시아는? 설마 루시아도 전장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난 노처녀에게 물었다. “댁의 동생은 잘 계시나요?” “지니 말씀이신가요?” “예.” 댁의 동생이 지니 말고 또 있겠습니까? “그는 참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지금 최전방에서 자바스 군대를 맞아 싸우고 있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확실히 사일런스 지니라면 저의 공백을 매워줄만한 출중한 인물이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처음부터 전력이 되지 않았기에 공백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 좋더군요.” 그게 비록 사실이긴 하지만 그걸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나? “루시아 공주님은……?” 난 노처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그 동안 잊고 있긴 했지만 한때 그녀는 루시아를 사이에 둔 연적이었다. 감히 여자 주제에 루시아를 노리다니. 난 동성애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고 좋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사람 좋다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는가? 비록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건 개인적인 측면에서 봤을 경우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인 측면과 생태계적인 측면에서 볼때 동성애는 용납될 수가 없다. 사회는 순환 시스템으로 이루어졌다. 아이들이 자라 가정을 이루고 그들이 죽을 때쯤 그들의 자식들이 가정을 이룬다. 그리고 그들이 죽을 때쯤 되면 역시 그들의 자식들이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동성애가 성행한다면 이런 순환 시스템이 망가지게 된다. 여자끼리, 혹은 남자끼리 자식을 낳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생태계적인 측면에서 봐도 역시 동성애는 용납 될 수 없다. 지금 이 곳에 있는 나는 우리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탄생된 존재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아주 먼 조상부터 지금까지 남녀의 결합으로 인간은 대를 이어왔다. 남자와 여자가 결합을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종족 본능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자면 동성애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뭐 자기들이 좋다는데 어쩌겠냐? 좋으면 같이 살아야지.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래. 니들 실컷 사랑해라. 남자끼리면 어떻고, 여자끼리면 어떻냐? 요즘은 개인주의 사회인데 자기 좋을 대로 해야지. ……라고 하지만 난 루시아가 동성연애자가 되는 것에 대해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대다. 생각해 보라. 안 그래도 요즘 미소녀가 희귀한 판국인데 그나마 있는 미소녀마저 여자와 연애를 하면 나 같은 남자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루시아 공주님은 잘 지내시고 계십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노처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제가 그걸 말해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아무리 연적이라지만 정보까지 차단해 버리다니. “설마 전쟁터에 있는 것은 아니겠죠?” “전쟁터에 있는 것 맞습니다.” “…….”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난 당연 루시아가 안전한 후방에서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전방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설마 그녀가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싸울리는 없을 테니…… 그럼 간호 장교? “루시아 공주님께서 왜 전쟁터에 있는 거죠? 전쟁터에 있으면 위험하잖아요.” “후방에 있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예?” “혹시라도 동맹국이 다른 뜻을 품고 공격해 들어온다면 후방에 남겨진 루시아 공주님이 인질이 될 것은 자명합니다. 차라리 전쟁터에 있으면 수 만의 군대가 지킬 수 있으니 후방에 남겨진 것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그래도…….” “쓸데 없는 일에 신경쓰지 마십시오.” “쓸데 없는 일이라니…….” 노처녀는 한번만 더 물어보면 재미 없을 거라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 보았다. 그 박력에 굴복한 나는 차마 더 이상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이제부턴 제가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질문에 숨김 없이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처녀는 숨김 없이 대답하지 않으면 재미 없을 줄 알아……라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박력에 굴복한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든 질문하세요.” 내 대답이 끝나자 노처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겁니까?” “예? 무슨 일이라뇨?” 순간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그녀의 안경에 반사되어 반짝 빛이 났다. 오옷! 눈 부셔! 그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진명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도 아이리스로 돌아오지 않으셨더군요.” “예. 뭐 그야…….” 도저히 돌아갈 수 없을만한 사정이 생겼지. “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아이리스로 돌아와 간신히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한 것 가지고 실컷 떠벌리고 다닐 줄 알았습니다.” “…….”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그걸 그렇게 입 밖으로 내서 말하다니. “그런데 진명쪽에서 사신이 와도 아이언스 공작님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편지 한 통 못 보내드렸습니다. 걱정 많이 하셨나요?” “제가 뭐하러 걱정을 합니까?” “…….” 거 참 사람 무안하게 만드네. “그래서 전 아이언스 공작님의 소식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습니다.” “왜요?” “걱정되서입니다.” 걱정? 노처녀가 내 걱정을? “아깐 걱정 안 한다 그랬잖아요.” “아이언스 공작님이 어디 가서 사고 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습니다.” “…….” 내가 애냐? “하지만 아무런 소식도 얻을 수가 없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진명의 승상이신 제갈량님께 서신이 왔습니다. 그 곳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를 만나러 청색 산맥으로 갔다고 적혀있더군요. 라이미안님과 함께 말입니다.” “예. 뭐 그랬지요.” “그래서 드래곤은 만나고 오셨습니까?” “…….” 어떻게 대답을 하는게 좋을까? 여기서 선택을 잘해야 한다. 그냥 드래곤을 만났다고 말해?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왜 드래곤을 만나러 갔냐고 물을 것이다. 아니지. 못 만났다고 말해도 그건 물어볼 거 아냐? 미치겠군. “예! 맞아요! 오빠와 라이는 드래곤을 만나고 왔어요! 드래곤은 너무너무 멋지게 생겼어요! 드래곤이 이러저런 얘기도 많이 해줬어요!” 이제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라이는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노처녀는 그 깜찍한 모습을 잠시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런 딸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오옷! 이럴 수가! 노처녀한테도 모성애라는 것이 존재했단 말인가? “정말 드래곤을 만났나요?” 이미 라이가 다 떠벌린 통에 내가 발을 뺄 곳은 없었다. “예. 만나긴 만났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이 이어졌다. “무슨 일로 드래곤을 만나신 건가요?” “…….”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한다. 무슨 일로 만났을까? 결국은 내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처녀에게 내가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기…… 그러니까…… 아이리스를 위한…… 조언을 들으려고…….”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노처녀는 일언지하에 잘라 말했다. “거짓말이라뇨? 전 사실을 말한 건데…….” “그럼 무슨 조언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그건…….”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냥 열심히 싸우라던데요!” “…….” 노처녀의 짜증 섞인 표정. 저거 화내는 거 맞지? “지금 저랑 농담 따먹기 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농담도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하는 건데.” “제 수준이 높다는 걸로 생각하겠습니다.” “…….” 착각은 자유. 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노처녀는 안경을 고쳐썼다. “무슨 일로 드래곤을 만났는지 말씀하시죠.” 이젠 아예 명령조다. 날 핫바지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젠장, 억울하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하다니. 생각 같아선 한번 뒤엎고 싶지만 그게 생각으로만 끝나니 슬프기 그지없다. “왜 그것에 대해 그렇게 궁금해 하는 지 모르겠군요.” “사실 얼마전 동생에게서 아이언스 공작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동생이면…… 사일런스 백작님이요?” “제 동생이 사일런스 백작말고 또 있습니까?” “…….”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는.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가 그러더군요. 아이언스 공작님은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셔서 당분간은 아이리스로 돌아오기 힘들거라고.” “아주 중요한 일이라면……?” “그건 아이언스 이그리드님과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관련된 일이라고? 그걸 사일런스 지니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혹시 제갈량이 말해줬나? 제갈량은 드래곤이잖아. 드래곤이 뭐하러 인간한테 그런 걸 알려준 거지? “그 말이 사실입니까?” “예? 예. 뭐 사실이긴 한데…….” “무슨 일인지 제가 알 수 있을까요?” “…….” 이걸 말해줘야 하나? 당연 말해줄 수 없다. 노처녀가 무슨 예쁜 짓을 했다고 그런 중요한 얘기를 해주겠는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죠?” 노처녀의 표정은 상당히 무서웠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좋은 말로 할때 부는 게 좋을 텐데’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제가 알아선 안 되는 건 가요?” “그렇다기 보단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지금 아이리스의 참모총장이십니다. 그럼 개인적인 일을 위해 자신의 직무를 내팽개 치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 개인적인 일이 사실은 공공의 이익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서요.” 내가 크로니스를 막지 않으면 세상이 끝장나게 생겼는데 어찌 그걸 개인적인 일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노처녀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내 속마음이 들길컷만 같아 난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정말로 말해줄 수 없나요?” “라이가 말해 줄게요! 오빠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난 재빨리 라이의 입을 틀어 막았다. 이번엔 그래도 타이밍이 좋았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야, 그런 건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 게 아니야. 그건 오빠와 라이만의 비밀이야. 알았니?” “그게 비밀이었어요?” “응.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지?” “예. 라이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난 라이와 새끼 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콕 찍었다. 그러자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인상의 일그러졌다. ‘아깝다. 잘하며 들을 수 있었는데.’ 속보인다, 노처녀. 왜 그렇게 남의 일을 알고 싶으하는 거냐? 혹시…….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노처녀가 어째서 내 일을 이렇게 궁금해하는 걸까? 궁금해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얘기. 관심이 있다는 것은…… 사랑…… 일 리가 없지.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님께서는 나름대로 일정 수준의 미모와 지성을 갖추고 있는 인텔리전트한 여성이긴 하지만 노처녀이다. 참고로 난 이제까지 노처녀와 좋은 인연을 유지한 적이 태어나서 단 한번도 없었다. 어렸을 때 작은 이모, 고등학교 때 우리 담임, 그리고 샤이 사일런스 백작까지. 하나 같이 전부 악연이다. 그럼 노처녀가 이번 일을 알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의 일을 궁금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아이리스에 미칠 영향 때문입니다.” 역시 노처녀는 진정한 애국자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나 같은 놈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그러면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이 하시는 일이 아이리스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 같습니까?” “……그, 글쎄요. 그건…….” 언제나 눈 앞에 닥친 문제의 해결에만 급급했던 내가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봤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난 지금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내가 하는 일이란 결국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우는 일이다. 만약 내가 이 싸움에서 패한다면 세계가 위험해질 것이다. 드래곤들은 크로니스와 싸우기 위해선 9클래스를 마스터해야한다고 하였다. 내가 정말로 9클래스를 마스터하게 된다면 100만도 문제 없다. 9클래스는 신의 영역이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토리아나 자바스 따위는 핫바지나 다름 없다. 하지만 이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9클래스를 마스터했다고 가정했을 경우다. 실제로는 그런 일은 상당히 힘들다. 9클래스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노처녀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것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하지요.” 그 말은 좀더 집요하게 물고늘어질 줄 알았던 나에겐 충격이었다. 어쨌든 더 묻지 않는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럼 이젠 다른 걸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젠장, 그럼 그렇지. 어쩐지 질문이 너무 일찍 끝난다 했어. “뭐든 물어보세요. 대답해 드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대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헤리오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설마 처음부터 결혼식을 망칠 뜻을 품고 오신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다만 충동적인 일일 뿐이었습니다.” “역시 사일런스 백작이 말한 대로 군요.” “무슨 뜻이죠?” “제 동생은 이미 이 곳에 아이언스 공작님이 나타나실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떻게요? 그 사람이 예언가라도 된답니까?” “제 동생이 그러더군요. 아이언스 공작님은 남 잘되는 꼴은 절대 못보는 성격이기에 반드시 결혼식장에 나타나 식장을 뒤집어 버릴거라고.” “…….” 과연 사일런스 지니라고 해야 하나? 내 성격을 그렇게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니. “뭐 결혼식이야 또하면 되는 거죠. 하하하!” “아이언스 공작님의 결혼식에서 그런 일이 생겨도 그렇게 웃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 없지. 만약 그런 일이 생기기만 해봐. 내 그 놈의 목을 비틀어 버릴테니. “굳이 결혼식을 망치려는 뜻을 품고 오지 않았다면 이 곳엔 대체 무슨 일로 오신겁니까?” 내가 이곳에 무슨 일로 왔더라? 아! 그렇지. “사실은 한 여자를 찾는 중이거든요.” “여자요?” 노처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여기서 묘하게 변했다는 것은 안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거다. “솔직히 좀 놀랍네요.” “뭐가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별로 생기지도 않은 아이언스 공작님의 여자 관계가 의외로 복잡한 것 때문이라고 어찌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 이거 지금 나 욕한 거 맞지? 젠장, 남자였으면 한 방 먹여줬을 텐데 여자여서 때리지도 못하고…… 잠깐, 생각해보니 이거 남녀차별 아닌가? 때릴려면 똑같이 때려야지 여자라고 봐주는 게 어딨어? 이건 명백한 남녀차별이잖아. YWCA 아줌마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난 YWCA 아줌마들에게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처녀를 한대 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차피 난 갈 데까지 간 몸이다. 이제와서 여자를 때린다 해도 무엇이 달라지리? 라이의 뒤통수를 때렸던 이 손으로 노처녀의 뺨을…….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예? 아, 아니 그냥 라이 머리나 쓰다듬어 주려고…….” 그렇게 말한 나는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젠장, 아무래도 노처녀를 때리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다. “그런데 그 여자가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말씀해 주시지요.” “예. 사실은 그 여자를 만나려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전 다만 의뢰를 받았을 뿐이지요.” “의뢰라니요? 누구의 의뢰죠?” “아까 저랑 같이 온 엘프를 보셨나요?” “빨간 머리 여자 엘프와 금발 머리 남자 엘프 말인가요?” “예. 정확히는 레몬빛 머리카락이지만 별 상관 없지요. 그런데 그 남자 엘프 어때요? 꽤 잘생겼죠? 처음 볼때 무슨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제가 소개시켜 드릴까요?” “……필요 없습니다.” 아깝다. 만약 노처녀가 필요 있다고 했으면 난 코웃음을 치며 ‘흥! 그 엘프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에요!’라고 말하려 그랬는데. “그런데 그 두 엘프와 아이언스 공작님은 무슨 관계입니까?” “별 관계 없습니다. 그냥 아는 사이일뿐이에요.” 한 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라이는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랑 전 엘프의 숲에 갔었어요! 그 엘프들은 엘프의 숲에서 만난 엘프들이에요. 그런데 엘프의 숲에서 이코가 사라졌어요. 오빠는 이코가 잠깐 휴가 갔다고 그랬는데 이코는 저한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어요. 이코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을까요? 라이는 너무너무 걱정 되요. 흑흑, 라이는 이코가 보고 싶어요. 흑흑, 이코야! 우에에엥! 이코를 찾아 주세요! 우에에엥!” 어째서 한 동안 라이코스 얘기가 안 나오나 했다. 라이코스 이 놈은 왜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 우리 착한 라이를 울리는 거야? 나쁜 자식. 돌아기만 해봐라. 아주 혼쭐을 내주겠어. “울지마, 라이야. 이코는 잠시 휴가를 떠난 것 뿐이니까 휴가가 끝나는 즉시 돌아올 거야.” “흑흑, 그게 언젠데요?” 그게 언젠지 내가 어떻게 아니? 그거야 라이코스 마음이지. “아무튼 조만간 돌아올거야. 이 오빠 말 믿어. 라이는 오빠 말 믿지?” “라이가 뭘 보고 오빠를 믿어요?” “…….” 이걸 버릇 없다고 해야 하나, 똑똑 하다고 해야 하나? “그냥 무조건 믿으렴.” “훌쩍~ 알았어요.” 난 라이를 안고 익숙한 솜씨로 달래주기 시작했다. 이 짓도 많이 하다보니 이젠 많이 숙달 되었다. 라이는 어느새 울음을 멈추었다. 노처녀는 이런 감동적인 광경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한번 안아 봤으면.’ 후후후, 라이는 아무나 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적어도 나 정도의 외모와 인품은 겸비하고 있어야만 라이를 안을 수 있다네. “엘프의 숲에 갔었나요?” “예.” 노처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프의 숲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평범한 인간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지요.” 난 은근히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하긴,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아이언스 공작님이 굉장히 특이하긴 하죠.” “…….” 그 ‘어떤 의미’란 것이 대체 어떤 의미기에 날 깔보는듯한 웃음을 짓는 거지? “엘프의 숲엔 무슨 일로 가셨나요? 그 두 엘프를 만나기 위해 간 건가요?” “아닙니다. 그 두 엘프는 어쩌다가 보니 만나게 된 부록에 불과합니다. 일명 떨거지라고도 하지요. 제가 만날 용무가 있었던 엘프는 ‘그분’입니다.” “그분은 누구신가요?” “그분은 그분입니다. 저도 거기까지 밖엔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다만 한가지 더 말씀드리자만 그분은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와 관련이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노처녀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아마도 이제까지 들은 얘기를 조합해서 이 일의 전말을 유추해보려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알려준 정보가 워낙 미약한데다가 일 자체가 워낙 스케일이 크고 복잡한지라 알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설사 알아낸다 하더라도 빙산의 일각이겠지. 나의 예상대로 노처녀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설마 다 알아내고도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겠지? “그럼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는 만나 보셨습니까?” “예.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만나봤지요.” “무슨 일로……?” “비밀입니다.” 다행히 노처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얘기가 빗나갔군요. 누구를 찾고 있는 거죠?” “예. 그게 그러니까 아까 저랑 같이 왔던 두 엘프 중 남자 엘프의 이름이 갈리온드거든요. 제가 그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는데 그가 도와주기 전에 자신의 딸을 찾아달라고 하더군요. 왜 자신의 딸을 찾아달라고 하냐고 묻는다면 그게 또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 사실 그는 예전에 적색 산맥을 넘어 인간 세상에 나온 적이 있는데…….” “누구인지만 말씀하십시오.” 노처녀는 내 말을 날카롭게 끊었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던 내 기분이 한 순간에 팍 상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난 ‘그러니까 시집을 못 가지’ 등등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인간이 아닌 하프엘프인데 이름이 라이레얼이라고…….” “예!?” 노처녀는 거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 마치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것 같은 모습. 노처녀는 순식간의 표정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얼굴색이 제 색깔을 찾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어째서 노처녀가 이런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혹시 어머니 이름이 라이레얼이여서? 예전에 사귀었던 여인의 이름이 라이레얼이여서?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이름이 라이레얼이여서?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노처녀의 반응이 너무 심각했다. 이런 반응을 보일만한 이유는 오직 하나. 라이레얼을 만나봤다는 것. “라이레얼을 아시나요? “…….” 노처녀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인상을 찡그리며 이를 빠드득 갈뿐이었다. 라이레얼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뭐 때문에 그 여자를 찾는 거죠?” “제가 찾는게 아니라니까요. 저랑 같이 온 두 엘프 중 남자 엘프인 갈리온드가 찾고 있어요.” “그 엘프가 왜 그 여자를 찾는 거죠?” “아까 말했잖아요. 그 엘프가 라이레얼의 아버지라구요.” 노처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인지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언제나 냉청하고 날카로운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기꺼이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처녀는 내 눈을 똑바로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 여자와 아이언스 공작님이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는게 사실인가요?” “예!? 그걸 어떻게…… 허걱!” 난 놀라 입을 틀어 막았고, 노처녀는 더욱 심하게 인상을 구겼다. 결혼식(5) 라이레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것이 지금 우리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정보였다. 라이레얼을 찾아야 갈리온드와 부녀 상봉을 시켜줄테고, 그래야 갈리온드는 차원의 열쇠의 위치를 나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래야 세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 만약 라이레얼을 못 찾으면 차원의 열쇠도 못 찾는 거고, 그럼 이 세계는 끝장 나는 거다. 물론 이 세계가 끝장 나기 전에 내가 먼저 끝장나겠지만. 내가 진명으로 떠나기 전까지 라이레얼은 헤리오의 수도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렇기에 난 헤리오에 오면 라이레얼의 소식을 알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들었다. 그 소식이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좀 의외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 딸이 지금 어디있다는 거야?” 갈리온드는 새하얀 얼굴을 잔뜩 붉히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식 사랑의 발로라기 보단 집착과 광기에 가까웠다. “제가 지금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릴테니 진정하세요.” “맞아요. 좀 진정하세요.” 루엔은 갈리온드의 팔을 끌어 당겼다. 루엔의 그런 모습은 나로하여금 심히 부러움을 느끼게 하였다. 대체 저 얼굴이 어딜 봐서 할머니냐? 역시 엘프는 미의 종족. 아, 모든 일이 끝나고나면 엘프의 숲에서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싶다. 난 루엔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지금 내 주위엔 저런 미녀가 없는 걸까? 생각 같아선 루엔에게 고백을 하고 싶지만 루엔과 나는 친구 사이다. 괜히 고백을 해서 좋은 친구 사이를 깰 필요는 없겠지? 게다가 루엔은 갈리온드를 좋아하고 말이야. “자, 어서 말해봐! 내 딸을 어디에 숨겼어?” “거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숨기긴 뭘 숨겨요?” “역시 네 놈이 범인이었어! 라이레얼을 어떻게 한 거야? 설마…… 이 나쁜 자식! 죽여 버리겠어!” 점점 미쳐가는 갈리온드. 난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엘프가 어쩌다가 저 모양이 되었을까? 어찌보면 이건 전부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그러게 낳았으면 끝까지 책임을 졌어야지 미혼모가 애 버리고 도망간 것 마냥 그러면 어떡하니? “자꾸 그런식으로 나오면 안 알려주는 수도 있습니다. 후후후~.” 이렇게 말했으니 갈리온드로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차원의 열쇠고 뭐고 국물도 없어!” 내 예상이 틀렸군. 역시 갈리온드는 막 나가는 엘프였어. “당장 말해! 내 딸을 어디에 숨겼어?” “아, 말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자꾸 숨겼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러지 좀 마세요. 누가 듣고 오해하면 어쩝니까?” 내가 계속 시간을 끌자 갈리온드는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 라이레얼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야 그 곳까지 가려면 한참이나 걸리는데 왜 이렇게 발광을 하는 지 정말 모르겠다. “지금 라이레얼은 아이리스에 있습니다.” “아이리스? 거기가 어딘데?” 엘프인 갈리온드가 인간 세상의 국가 이름 따위를 외워둘리 없다. “아이리스란 국가 지명입니다. 참고로 전 아이리스의 공작으로 현재 참모총장, 외교부 장관 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수십여개의 직책을 받은 긍지 높은 귀족입니다. 저의 업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러니까 아이리스가 어디냐고?” “여기서 동쪽으로 쭉 가면 있습니다.” “얼마나 가야 하는데?” “글쎄요. 제가 지도 제작자도 아닌데 껄 알 리가 없죠.”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누가 그걸 아는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라이레얼이 어째서 그 곳에 있는 건데?” 나도 그것이 궁금했다. 헤리오에서 용병일을 하던 라이레얼이 어째서 그 곳에 있는 걸까? 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용병이니까! “…….” 그렇다! 라이레얼은 현재 아이리스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있다. 물론 라이레얼만 고용된 것은 아니고 라이레얼이 이끄는 용병단 전체가 고용되어 있다. 그들은 아이리스의 자주 독립을 위해 용감무쌍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돈 벌려고 열심히 싸우고 있다. 아이리스는 모자란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용병을 모집했다고 한다. 용병을 모집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용병이란 돈에 죽고 사는 존재들. 돈이 있어야 이들을 고용할 것이 아닌가? 아이리스는 한번 개박살 났던 국가다. 당연 돈이 있을리 없었다. 수도마저 털린 마당에 돈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전문 용어로 ‘개털’이라고 한다. 그럼 ‘개털’ 상태인 아이리스는 무슨 돈이 있어서 용병들을 모집했을까? 갑자기 어디선가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도 터졌나?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광산이라는 것도 돈이 있어야 팔 수가 있는 거다. 아이리스가 무슨 돈이 있어서 광산을 뚫겠는가? 그렇다면 답은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누군가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 대체 누구의 지원을 받았을까? 자바스와는 현재 전쟁중이니 제외, 아토리아는 앞으로 전쟁할 국가니 제외, 개틴 역시 적대 세력이니 제외. 남은 곳은 헤리오와 진명. 하지만 헤리오도 현재 개틴과 전쟁을 일으키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기에 아이리스를 도와줄만한 여력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국가는 진명 하나뿐. 그렇다. 직접적으로 군대를 보낼 수 없었던 진명은 거의 한 국가를 세울 수 있을만한 엄청난 금액을 아이리스에 무조건적으로 퍼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발을 빼던 용병들도 그 얘기를 듣자마자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심지어는 계약이 만료된 자바스의 용병들도 아이리스로 몰리고 있었다.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명이 아이리스에게 무조건적으로 돈을 퍼주고, 북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은 아이리스를 돕겠다는 얘기다.(너무 당연한가?) 진명이 우방국이라면 전쟁의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 돈도 중요하기만 일단은 목숨부터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아이리스에겐 현재 돈과 승산이 있기에 용병들은 자바스 대신 아이리스를 선택한 것이다. “현재 라이레얼 직업이 뭔 줄 아시죠?” “용병이라며.” 갈리온드는 너무도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심히 부담스럽다. 저 레몬빛 머리카락만 보면 자꾸만 라이레얼이 떠오른다. 그와 함께 과거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손에 쥐어쥔다면 벅벅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때의 기분이란…… 솔직히 좋았다. 그래서 문제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 한가지를 얻을 수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한 순간의 실수가 지금처럼 내 발목을 붙잡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흑흑, 정말 억울하다. 난 순진하고 순결(?)한 청년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지금 아이리스와 자바스가 전쟁 중인 건 아시죠?” “아니. 모르는데.” “지금이라도 아셨으니 된 겁니다. 아이리스와 자바스가 전쟁중이고 라이레얼이 용병이니 라이레얼이 아이리스에 있는 이유를 아시겠죠?” 난 라이레얼이 전쟁에 참가하느라 아이리스에 있다고 말하면 갈리온드가 충격을 받을까봐 일부러 빙빙 돌려서 말했다. “아니. 모르겠는데. 왜 라이레얼이 아이리스에 있는 거야?” “…….” 하지만 얘기를 듣는 상대가 멍청할 경우엔 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딸이 전쟁터에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어느 아버지가 좋아할까? 난 차마 잔뜩 기대하고 있는 갈리온드에게 그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빨리 말해.” “뭘까요? 한번 알아 맞춰 보세요.” “이 자식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갈리온드는 당장 나에게 뛰어들 태세였다. 루엔이 빨리 말렸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갈리온드와 한판 붙을 뻔했다. 갈리온도의 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이길 것이다. 갈리온드가 아무리 강하다한들 본좌의 청룡도법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 딸이 왜 아이리스에 있는지 빨리 말해! 안 말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동귀어진이라……. 후후후~. 난 속으로 웃었지만 갈리온드는 정말로 동귀어진할 태세였다. 그 얘기를 정말 내 입으로 해야하는 걸까? 내가 고민하는 찰나 라이가 입을 열었다. “라이레얼 언니는 아이리스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싸우고 있어요.” “싸워? 서, 설마 지금 라이레얼이 전쟁터에……?” 라이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라이레얼 언니는 지금 전쟁터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어요.” “…….” 순간, 갈리온드는 할말을 잃은 듯 보였다. 그리고 마치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실제로 몸이 이미 뒤로 넘어 가고 있었다. 루엔은 재빨리 그의 몸을 받쳐 주었다. “아아~ 그 연약한 것이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곳에…….” “용병들은 언제나 위험한 곳에 있기 마련이죠. 그리고 별로 연약하진 않습니다. 제가 만나본 여자들 중 어떤 의미에선 최강이었으니까요.” “흑흑, 이게 전부 내 탓이야. 나 때문에 라이레얼이 그런 위험한 곳에 있는 거야. 어흐흐흑! 내가 죽일 놈이야.” 또 시작이다. 일명 궁상 모드. 엘프도 인간 못지 않게 궁상을 떨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입증하는 순간. “흑흑, 미안하다 내 딸아! 난 아버지의 자격이 없는 놈이야. 흑흑, 나 같은 놈은 죽어야 해! 죽어라! 죽어!” 갈리온드는 광기 어린 표정으로 바닥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거 쓸데없는 짓 좀 그만하십시오.” 바닥에는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었기에 갈리온드가 지금 하는 짓은 말 그대로 맨땅에 해딩하는 짓이었다. 하지만 갈리온드는 머리를 박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난 그를 위해 충고해 주었다. “거기 박아봐야 소용 없이니 벽에 박으세요.” 난 이렇게 말하면 당연 갈리온드가 그만둘 줄 알았다. 하지만 갈리온드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무섭게 벽에 달려들었다. 콰앙- 콰앙-! “나 같은 놈은 죽어야 해!” 당황한 나는 재빨리 그를 말렸다. “그만 두세요. 댁의 머리야 어떻게 되던 상관 없지만 벽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그만 하세요!” 루엔은 갈리온드를 뒤에서 껴안고 뜯어 말렸다. 잠시 후 갈리온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루엔은 독기어린 눈길로 나를 노려 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말리지는 못할망정 벽에 박으라니. 인간들은 전부 그러나요?” “아니, 저기…… 그게…….” “어흐흐흑!” 내 변명은 다시 시작된 갈리온드의 궁상에 파묻히고 말았다. 루엔은 그런 그를 껴안고 달래주었다. 눈물을 닦아 주고, 등을 두드려 주고, 머리를 쓸어 주고. 이 자리에 나와 라이가 없었다면 키스라도 할 기세다. 젠장, 너무 부러워! 내가 울어도 저렇게 해주려나? 잠시후 한바탕 울어재낀 갈리온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장 아이리스로 가도록하지!” 어째서 그 얘기가 안 나오나 했다. “그 안건에 대해선 진지하게 고려해보도록 하지요.” “고려하고 말게 어딨어? 무조건 가야지.” “가긴 갑니다. 누가 안 간답니까?” 난 지금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지금 내가 아이리스로 가기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용병으로 있는 라이레얼이 ‘그 날의 사건’을 전부 떠벌리고 다닌 것이다. 이건 날 생매장시키려고 작정을 했다고 밖엔 볼 수가 없다. 나보고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라고? 흑흑, 너무해요, 라이레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자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난 비록 아이리스의 공작이자 참모총장이긴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직무를 내팽개쳐둔 상태다. 그렇기에 다시 돌아간다면 얼마나 욕을 먹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루시아의 얼굴은 어찌 본단 말인가? 루시아. 아이리스의 공주. 내가 사랑하는 여인. 어째서 라이레얼은 아이리스로 가서 날 이리 슬프게 만드는 걸까? 아무튼 라이레얼이 아이리스에 있다면 우리는 그 곳으로 가야만 한다. 갈리온드가 라이레얼을 만나길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밖으로 나가죠.” 나의 말에 갈리온드는 즉각 찬성을 표명했다. 라이는 밥 많이 주고, 침대 푹신한 이 곳이 마음에 드는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업어주어야 했다. 차갑고 맑은 공기가 내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 덕분인지 머리가 좀 정리되는 느낌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당당하게 부딪혀 보는 수 밖에. 아이리스로 가는 것은 간단하다. 텔레포트 구슬이 있으니. 하지만 나와 라이가 기억하는 곳은 아이리스의 왕궁뿐이다. 그렇다면 일단은 왕궁으로 이동한 다음 그 곳에서 전방까지 가야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텔레포트 하는 것이 좋을까? 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두 여인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달려오는 그들은 세레나와 라나 자매였다. 배웅하러 왔나보군. 둘은 내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무슨 일이야?” “어딜 가는 거예요?” “아이리스로.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세레나와 라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버, 벌써 떠나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차피 여기 있어봐야 할 일도 없으니까 빨리 떠나야지.” “그래도…….” “맞아요! 조금 더 있다가요. 언니가 오빠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라나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애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보니 못본 사이 이 애도 많이 컸다. 어린아이는 며칠 사이에도 쑥쑥 자라나는 법이다. 이젠 머리 쓰다듬는 것도 못하겠군. 라이도 라나처럼 쑥쑥 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 세레나는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정원의 구석진 곳으로 가 나무를 등지고 선 우리는 그 곳에서 서로를 바라 보았다. “그 애는…….” 세레나가 내 등에 업힌 라이를 가리키자 난 웃음을 지었다. “이 애는 괜찮아. 없는 셈 치고 말 해.” 세레나는 라이가 마음에 걸리는 듯 자꾸만 라이에게 눈길을 줬지만 라이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잠으로써 세레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정말 이대로 떠날 건가요?” “응.” “정말요?” “응.” 나의 결심은 단호해 보였다. 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아니었다. 난 정말 아이리스로 가기 싫었다. 그 곳에서 다시 라이레얼의 얼굴과 루시아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왜? 쪽 팔리니까. 하지만 사람에겐 언제나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과 하기 싫어도 해야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지금은 당연 후자의 경우였다. 그래. 세계 평화를 위해 내가 희생하자. 내가 라이레얼을 만남으로써 세계 평화가 유지된다면 나 하나 희생하는 수 밖에. “제가 붙잡아도 갈 건가요?” “응.” 솔직히 정말 가슴 아프다. 세레나 같은 여자가 날 붙잡아 주겠다는데도 떠날 수 밖에 없다니. 하지만 이 것이 현실이다. 설사 특별한 일이 없다 하더라도 난 세레나 곁을 떠날 것이다. 왜? 나와 함께 있으면 세레나는 행복해질 수 없으니까. 난 언제나 세레나가 행복하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나의 미래는 현재 불투명한 상태다. 어쩌면 크로니스와 싸워야할 수도 있고, 어쩌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할지도 모른다. 난 세레나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 솔직히 세레나 같은 여자를 어떤 남자가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난 마다하겠다. 그녀를 위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 어찌보면 참 지랄 같은 얘기지만 지금 이것이 내 마음이다. 책임질 수 없다면 일을 벌이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난 세레나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으므로 세레나를 포기한다. “설마 그 여자 때문인가요?” “그 여자라면……?” “아이리스의 공주 말이에요.” 아아, 루시아. 그러고보니 예전에 루시아 얘기를 세레나에게 한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이유 때문이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루시아는 아무 상관 없어.” “그럼 왜죠?” 궁금한 것도 많다. “이유라도 말해줄 수 있나요?” 난 잠시 고민하였다. 말해줄까, 말까? 원칙대로라면 말하지 말아야 한다. 노처녀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니. 하지만 세레나에게만은 말해주고 싶었다. “사실 나에겐 주어진 사명이 있어. 이제 얼마 후면 난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운명의 결전을 벌어야 해. 지금은 그와 싸울 준비를 하는 중이야. 어쩌면 난 그 싸움에서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 싸움을 피할 수 없어. 그것이 나의 운명이니까.” 세레나의 크고 맑은 눈이 커다랗게 흔들거렸다. 난 그녀에게 나의 모든 것을 밝혔다. 그녀가 날 이해해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 진실을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느정도 홀가분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세레나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저리 치워요!” 세레나는 내 손을 쳐냈다. 난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잠시 동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던 세레나는 독기어린 눈으로 날 노려 보았다. “나쁜 자식!” 그래. 차라리 마음껏 욕해라. 그 편이 차라리 마음 편하겠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그것이 지금 내 마음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이었다. 결혼식장에 뛰어 드는게 아니었었는데. 괜히 나타나서 그녀의 마음만 흔들어 놓다니. 정말 내가 죽일 놈이다.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그딴 거짓말을 하다니.” “…….” 거짓말? 세레나는 허공에 눈물을 흩뿌리며 외쳤다. “드래곤과 싸운다고!? 차라리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하지?” 그 모습에 난 심각하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정말이야. 나 정말 드래곤과 싸워.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너도 잘 알지? 적색 산맥에 있는 드래곤 말이야. 아! 그리고 나 외계인 맞아. 사실 그 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난 이 세계 사람이 아닌 다른 세계 사람이야. 아이언스 이그리드 그 늙은이가 날 소환해 냈어. 그러니까 말이야…….” “닥쳐! 더 이상 듣기 싫어!” 세레나의 얼굴은 이제 아예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세레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째서 내 말을 믿지 않는 걸까? 세레나라면 믿어줄 줄 알았는데. “정말이야, 세레나. 날 믿어.” 난 강제로 세레나의 손을 치운 다음 세레나의 고개를 들게 하였다. 울고 있는 세레나를 보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난 더 이상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는 걸까? “이거 놔요! 지금 저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정말이라니까! 내 눈을 똑바로 봐!” 난 피하려는 그녀의 고개를 억지로 돌려 눈을 마주치게 하였다. 잠시 동안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저기…….” “저기…….”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고, 그 때문에 동시에 입을 닫아야 했다. 어느쪽도 먼저 말을 꺼내기 힘든 상황. 부스럭. 이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들린 인기척에 난 고개를 돌렸다. 내 뒤편에는 나무인척 보이려 애쓰고 있지만 전혀 나무처럼 보이지 않는 반데라스가 서 있었다. 저 놈은 정말 스토킹에 소질이 있다. 우리가 여??는 건 어떻게 알고 왔을까? 난 반데라스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세레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세레나는 훌쩍 거리며 말했다. “정말 드래곤과 싸우려는 거예요?” 그 질문에 난 깜짝 놀랐다. “미, 믿어주는 거야?” “당신이 믿으라고 했잖아요.” “…….” 순간, 내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와 내 목구멍을 가득 매웠다. 이럴 수가! 정말로 내 말을 믿어주다니. 아직 내 신용도가 완전히 하락한 것은 아니었단 말인가? “왜 드래곤과 싸우려는지 얘기해 줄수 있나요?” 내가 그 얘기를 하자면 크로니스의 개인적인 치부를 전부 드러내야 한다. 그건 크로니스를 친구처럼 여기고 있는 나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 세레나한테는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크로니스를 욕하는 것은 내키지가 않았다. “그건 개인적인 일이어서 말해 줄 수가 없어. 미안해.”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다행히 세레나는 나를 이해해주었다. “설마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려는 것은 아니겠죠?” 드래곤 슬레이어. 모든 기사나 마법사들이 꿈꾸는 그 이름.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드래곤은 이미 신의 경지에 이른 자들. 그들을 누가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인간은 불가능을 알면서도 언제나 도전을 한다. 그렇기에 아직까지도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인간들이 있다. “그런 건 아니야. 피할 수 없는 싸움이기에 응하려는 거지.” “당신이 외계인이라는 것은 거짓말이죠?” 세레나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그것은 믿기 힘든가 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긍정을하면 분명 믿을 것이다. “사실이야. 외계인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긴 한데 난 다른 세계에서 왔어.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날 소환했지. 그리고 그의 마법을 물려 받았어.” 세레나는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당신의 행동이 너무 이상하다 했어요. 그 세계 사람들은 다 그러나 보죠?” “꼭 그런 것은 아니야. 내가 좀 특이하다고 해두지.” 세라나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난 내 뒤에서 아직까지도 나무인척하는 반데라스를 불렀다. “야! 이리 좀 와봐.” 반데라스는 자신이 정말 나무라고 착각을 하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말에 그제야 반데라스를 발견한 세레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남아있는 눈물을 닦아냈다. “야! 너 나무 아닌거 다 알아!” 내가 다시 한번 외치자 반데라스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무 모드(?)를 해제하였다. “어, 어떻게 알았지?” “…….” 설마 안 걸리길 바랬던 거냐? 반데라스는 아까 나와 세레나의 끈적끈적한 이별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인지 굉장히 불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난 반데라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결혼식 망쳐 놓은 거 정말 미안하다.” “아, 아니. 괜찮아.” 괜찮긴 개뿔이. 아까만 해도 날 죽이려 했으면서. 난 세레나와 반데라스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텐데. 조금 미안하군. 난 세레나에게 말했다. “이 녀석이 변태에다가 스토커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놈이야.” “누, 누가 변태 스토커야!” 반데라스는 황급히 반박했지만 그건 이미 입증된 사실이었기에 그의 반박은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널 사랑하는 마음만은 확실한 것 같아.” 아으! 닭살 돋아! 참 내가 말하면서도 느끼하군. 난 반데라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니가 세레나한테 잘해줄거라 믿는다.” “무, 물론.” “하지만 너의 그 스토커 기질 때문에 나중에 의처증이라도 걸리진 않을까 심히 걱정 된다.” “뭐, 뭐야?” “하지만 난 널 믿는다.” “그, 그래. 고마워.” 뭘 고마울 것 까지야. 난 세레나와 반데라스의 얼굴을 찬찬히 비교해 보았다. 이제보니 꽤나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결혼해서도 잘 살 것 같아. “둘이 잘 먹고 잘 살길 바란다. 그리고 이건 축의금 대신이라 생각해라.” 난 주머니에 있는 잔돈을 전부 끄집어 내 반데라스의 손에 올려 주었다. 최소한 아까 먹은 갈비탕 값은 치르고 싶은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할 말을 마친 나는 멋지게 몸을 돌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절대 고개를 돌려선 안 된다. 그러면 멋진 모습이 반감 되거든. 하지만 자꾸만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자, 잠깐만요!” 세레나의 외침. 절대 고개를 돌려선 안 된다. 하지만 누군가 불렀을 때는 예외다. “왜?” 난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어째서 허구많은 질문 중 그 질문을 하는 걸까? 정말 가슴 아프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마 다시 만나긴 힘들거야.” 크로니스와의 싸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설사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이 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이 세레나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말 없이 떠나려 했던 건데. 난 놀라는 그들에게 다시 웃음을 지어주고는 아까보다 백배는 멋지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쥔채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뒤에서 세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은 멋있게 끝내고 싶다. 웃는 모습으로 기억 되고 싶어. 난 눈을 질끈 감은채 달음박질을 쳤다. 이제 저들의 머릿속엔 멋지게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자식을 낳게 되면 그들에게 내 얘기를 해주겠지. ‘아이언스 히로 공작은 아주 멋지고 잘생긴 사람이었어. 우리는 그 사람을 알고 지냈다는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껴.’ 분명 그럴 것이다. 내가 앞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뛰어 가느라 나무에 머리를 박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콰앙-! 난 그 자리에 이마를 부여 잡고 쓰러졌다. 지금 나에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젠장, 스타일 구겼다! “괜찮아요?” 나를 향해 달려오는 세레나와 반데라스. “니들 눈엔 이게 괜찮아 보이냐?” 둘은 어이없다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그게 뭐야?” 이 것들이 지금 웃음이 나와? 남은 아파 죽겠는데. 아무래도 이들의 기억 속에 난 영원히 개그 캐릭터로 남을 것 같다. 아이씨, 왜 이렇게 내 인생은 되는게 없냐? 마지막이라도 멋지게 끝내고 싶었는데. “어디 봐요.” 웃음을 멈춘 세레나는 내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이마가 깨지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냥 자그마한 혹이 났을 뿐이다. 난 상처를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다시 만날 수 없나요?” “그래. 다시 만나긴 힘들거야.” 세레나는 조금 쓸쓸한 표정이었다. 반면 반데라스는 굉장히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아주 좋아서 죽겠는지 이상한 퍼포먼스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저 놈 때문에 열받아서라도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고 싶다. “그래도…….” “살아 남는다면 한번 생각해 볼께.” 난 몸에 묻은 흙을 털었다. 세레나는 매우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 그녀를 향해 생긋 웃어 주었다. “걱정마. 설마 죽기야 하겠냐?” 살 가능성 보단 죽을 가능성이 훨씬 크지. “야, 임마!” “왜, 왜?” 난 아직까지 주먹을 내지르고 사방으로 방방 뛰어다는 퍼포먼스를 하는 반데라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악-! “왜 때려?” “그냥 심심해서 쳐봤어.” 그렇게 말한 나는 둘에게 정말로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나 간다.” 멋진 멘트를 날린 나는 몸을 휙 돌렸다. 둘은 더 이상 날 잡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쯤은 더 잡아 줄줄 알았는데. 나쁜 것들 같으니라고. “오빠 왜 우는 거예요?” 내가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때 라이가 한 말이었다. 라이의 말대로 난 울고 있었다. 난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 “흑흑흑.” 라이는 깜짝 놀라 내 곁에 다가와 나를 껴안았다. “우에엥, 오빠 울지 마세요. 오빠가 울면 라이는 너무너무 슬퍼요.” 그리고 내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오직 라이뿐. 난 라이를 끌어 안고 한 동안 눈물을 흘렸다. 멋지게 세레나를 보내주긴 했지만 사실은 그녀를 보내기 싫었다. 이대로 한 명의 미소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어흐흐흑, 세상 모든 미소녀를 전부 내 아내로 삼고 싶었는데……. 흑흑.” “괜찮아요, 오빠. 라이가 있잖아요.” 니가 어딜 봐서 미소녀니? 오늘로써 한명의 미소녀가 사라졌다. 이 대륙 안에 미소녀는 얼마나 남았을까? 흑흑, 숫자만 많으면 뭐 해? 세레나만큼 예쁜 여자는 찾기도 힘든데.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 그래. 떠난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너무 슬프다. 어떤 면에서 보면 억울하기까지 하다. 나한테 주어진 이 빌어먹을 사명만 없었어도……. “이봐! 그만 울고 일어나. 어서 내 딸을 찾으러 가야지!” 갈리온드는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난 그의 뺨을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난 이별인데 갈리온드는 만남이군. 난 슬픈데 갈리온드는 기쁘군. 젠장! 같이 좀 슬퍼해주면 어디 덧나나? 애초 출발을 지체할 생각이 없던 나는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구슬을 꺼내 라이에게 건네주었다. “이, 이 건…….” 라이는 유리처럼 속에 투명하고 맑은 구슬을 보더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빨리 해요, 오빠! 라이는 이거 너무너무 좋아해요!” 넌 좋을지 몰라도 난 괴롭다. 이 나이 먹어서 이런 쪽팔린 짓이나 해야 하다니. “라이야.” “예.” “너 예전에 오빠 방 기억하니?” 라이는 기억을 더듬어보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기억나요, 오빠.” “그럼 그곳으로 가도록하자.” “예.” 난 라이와 손을 마주 잡았다. “어떻게 하는지는 알지?” “예.” 작동 방법을 익히 알고 있던 루엔과 갈리온드는 우리의 옆에 바짝 붙었다. 나와 라이는 동시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힘차게 외쳤다. “텔레…….” “잠깐만요!” 아이씨. 또 어떤 놈이 방해를. 난 짜증섞인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그 얼굴은 이내 웃는 얼굴로 변해야만 했다다. “아니,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이 곳에 어인 일로 행차를 하셨나이까?” 얼굴 가득 비굴한 웃음을 띠고 간신배처럼 머리를 조아리는 나를 본 노처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금 뭘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텔레포트를 할 생각이었는데……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노처녀는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텔레포트 마법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말은 정중했지만 내 귀에는 ‘너 따위가 어떻게 그런 고난이도 마법을 쓸 수 있겠냐?’라고 밖엔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런 의미였고.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예. 물론 할수 있습니다.” 내 말에 노처녀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화를 낸다기 보단 놀라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설마 그 사이 마법 실력이 늘기라도 하셨나요?” “아니요. 꼭 마법 실력이 늘어야만 텔레포트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훌륭한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는 경우에도 자신의 능력치를 상회하는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요.” “그 말씀은 고급 아티팩트라도 얻었단 얘긴가요?” “물론입니다.” 난 라이와 내 손에 들린 구슬 두개를 보여 주었다. 노처녀가 보고도 못 믿는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난 부연 설명을 붙여주었다.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에게서 받은 겁니다.” 모든 상품은 메이커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는 법이다. 똑 같은 신발이라도 나이키(NICE-일명 짭퉁. 다른 말로는 길거리표) 상표가 붙은 것과 나이키(NIKE) 상표가 붙은 것은 엄연한 가격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건 마법 아티팩트에도 그대로 적용 되었다. 돌팔이 마법사가 만든 아티팩트와 드래곤이 만든 아티팩트는 설사 그 성능이 같다고 해도 다른 가치가 매겨지기 마련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돌팔이 마법사 보단 드래곤이 만든 것이 믿음이 가잖아. “텔레포트라면 목적지는 어딘가요?” “아이리스의 궁입니다.” “국경으로 곧장 갈 수는 없나요?” 역시 아무리 잘난 샤이 사일런스 백작이라 하더라도 마법에 대해선 나보다 무지할 수 밖에 없다. 그 사실은 나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난 한껏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텔레포트 마법은 좌표를 정확히 알고 있거나, 한번 가봤던 곳에만 갈 수 있는 법입니다.” “한번에 이동할 수 있는 인원은 얼마나 되죠?” “왜요? 설마 꼽사리 끼시게요?” 나의 상스러운 말이 기분 나빴나 보다. 노처녀는 히스테리컬한 눈길로 날 째려 보았다. “전 지금 한시라도 빨리 아이리스로 돌아가봐야 합니다.” “뭐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타세요.” 마치 스포츠카를 탄 양아치처럼 말한 나는 다시금 라이와 텔레포트 준비를 하였다. 라이는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하나, 둘, 셋…….” 내가 셋까지 셈과 동시에 라이와 나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텔레포트~!”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쪽팔린 마법이다. 다음에 내가 아티팩트를 만든다면 결코 이런 쪽팔린 동작 방법을 첨부하지는 않으리. 생각을 하는 사이 눈 앞에 보이던 왕궁 본전 건물과 정원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회색벽이 나타났다. 잘 된 건가? 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이는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19세 미만 관람 불가 장면. 두 명의 여인이 속옷만 입은채 우리들의 앞에 서있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침대에 널려 있는 것은 메이드복.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후훗, 옷 갈아 입는 중이었나 보네. 두 여인은 완전히 얼어 붙었는지 날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거 계속하세요.” 이 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정말 뻔하다. 분명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내 뺨을 후려 갈기겠지. 하도 많이 당해봐서 이젠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몇 대 맞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보도록 하자. 이 생각은 갈리온드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갈리온드는 관심 없는 척 딴청 피우면서 볼건 다 보고 있었다. 남자란 원래 이런 족속들이다. 내가 한참 동안 끈적한 눈길로 그들의 몸매를 훑어보는 데도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마네킹인가? 이런 생각이 들때쯤 샤이 사일런스 백작이 앞으로 나서 그들의 몸을 만져 보았다. 난 괜히 상황을 비약시켜가며 생각하며 실실 웃음을 지었다. 잠깐 동안 둘의 몸을 실컷 더듬은 노처녀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기절했군요.” “…….” 그랬었군. 어쩐지 소리를 안 지른다 했어. 우리는 기절한 두 하녀를 침대 위에 눕혀 놓고 방을 나왔다. 하지만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갈리온드와 나는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려 하였다. “놓고 온 물건이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문 앞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루엔이 갈리온드를, 노처녀가 나를 끌고 간 것이다. 안타깝도다. 뺨 맞을 걱정 없이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오랜만에 돌아온 궁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왕이 없는 궁이란 언제나 썰렁한 법이다. 키레아 왕은 현재 전장에 나가 있기에 궁은 비어 있었다. 어찌보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무쌍한 행위라 할 수도 있으나 왕이 궁을 떠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국가가 기울었다는 반증이다. 뭐, 지금은 기울었던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중이지만. 갈리온드는 언제나처럼 ‘당장 내 딸을 찾아야 해!’ 라고 외치며 바로 출발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에 내일 날이 밝으면 출발하기로 하였다. 날이 저물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난 궁 안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해서. 뭐, 이 곳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리 없……진 않구나. 난 달 밝은 밤 정원을 산책하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그에게 뛰어갔다. 그 할아버지는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인기척을 느꼈는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대가 이 곳에 어쩐 일인가?” “그러는 ……님이야 말로.” 너무 오랜만에 만나다보니 이 할아버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뭐였더라? 난 그가 나에게 신경을 쓰건 말건 잠시 동안 고민에 빠졌다. 디아케…… 뭐더라? “아! 디아케 발리스! 다아케 발리스 후작님! 맞지요?” 나의 외침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난 그의 얼굴과 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나이가 7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할아버지는 무서울 정도로 정정했다. 저 근육 좀 봐. 세상에! 보디빌더가 울고 가겠다. “디아케 후작님이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이 할아버지는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엄연한 장군이었다. 군을 지휘해야할 인물이 어째서 이 곳에 있는 걸까? “하하하, 그게 말이야…….” 디아케 후작은 부끄러워하는 듯하며 얘기를 꺼냈다. 사실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전쟁터에서 활 맞아 후방에서 요양중인 게 그렇게 부끄러운가? 디아케 후작은 붕대를 감고 있는 왼쪽 어깨를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대는 어쩐 일인가?” 대답하기가 참 부끄럽다. 난 아름다운 하프엘프 라이레얼을 찾는다고 말하였다. 내가 찾는 건 아니고 그의 아버지가 찾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오해하면 안 되니까. “아아, 그 여자 말이군.” “라, 라이레얼을 아세요?” 디아케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암. 알지. 그것도 아주 잘 알지. 그녀와 자네가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는 사실은 전장에 있는 아군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을 걸.” “…….” “심지어는 자바스군도 전부 알고 있더군.” “…….” 대체 얼마나 떠벌리고 다녔기에. 날 매장시키려고 작정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어?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인가?”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디아케 후작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흐음, 증언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던데.” “그들의 말은 믿지 마십시오.” “그들의 말보다 자네의 말이 더 안 믿기는데.” “…….” 이건 거의 세뇌 교육 수준이다. 설사 거짓말이라 해도 하루가 멀다하고 옆에서 떠들어 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믿게 되기 마련이다. “전 결백하고 순결합니다.” 내가 굳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하자 디아케 후작은 내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괜찮네. 젊었을 땐 뭐 다들 그런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지.” “…….” 아니라니까, 이 양반 사람말 진짜 안 믿네. “그나저나 보기보단 힘이 좋은가 보군. 그 여자의 말에 따르면 완벽하게 만족시켜줬다고 하는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난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화재를 돌렸다. “현재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요?” “아직은 불리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만한 상황은 아니네. 사일런스 백작이 있는 이상 아군의 패배란 없으니까.” 마치 철석 같이 지니를 믿고 있는듯한 디아케 후작의 말에 난 감탄사를 내뱉었다. “헤에~ 그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물론이지. 그는 최고의 참모야. 내 이제까지 수십년을 전쟁터에서 살아왔지만 사일런스 백작만큼 신출귀몰한 군사는 처음일세. 아마 수 백년이 지나도 그를 능가할많한 자는 나오기 힘들거네.” “…….” 이제보니 나 의외로 대단한 사람과 붙어다녔었구나. 디아케 후작은 한껏 사일런스 백작의 칭찬을 늘어 놓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모를 일이야.” “뭐가요?” “난 평소 사일런스 백작의 인품과 재능을 존경하고 있네. 사실 그 정도의 재능을 지닌 자가 그렇게 겸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야 그렇지요.” 지니는 나와 함께 지낼 때도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나를 높혀 주었다. 그 때문에 쑥쓰러웠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 “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존경하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궁금했네. 그래서 그에게 물어봤지. 그러자 뜻밖에 대답을 하더군.” “무슨 대답이었는데요? 설마 자기 자신을 존경한다고 대답했나요?” 디아케 후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자네일세.” “예? 정말요?” “그렇다더군. 그는 평소 자네의 훌륭한 인품을 존경하여 언제나 그것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지.” “…….” 그 동안 사일런스 지니는 입버릇처럼 나를 존경한다고 말해왔었다. 하지만 난 그걸 단순한 농담이나 아부로만 취급해 왔었다. 그런데 이럴 줄이야! 사일런스 지니는 정말로 나의 인품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감동적이어라.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담임이 가장 먼저 하는 질문 ‘여러분은 누굴 가장 존경하나요?’ 그러면 대답이야 뻔하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안중근 의사, 안창호 선생 등등. 가끔 특이한 놈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우리집 강아지가 아플때 고쳐주는 수의사 선생님이요.’ ‘제가 응가하고 휴지가 없어서 곤란할 때 옆 칸에서 휴지를 건네주는 친구요.’ 더 특이한 놈들은 이렇게 말한다. ‘전 매국노 이완용을 가장 존경해요. 저도 매국하고 싶어요.’ ‘전 이토 히로부미를 가장 존경해요. 전 장래에 조선반도를 침략하고 말거에요.’ ‘전 모든 일본 우익 꼴통들을 존경해요. 누가 뭐래도 독도는 일본땅이에요.’ ‘저도 일본 보수 우익 꼴통들을 존경해요. 동해(East sea)라는 표기는 잘못 되었으니 일본해(sea of Japan)라 고쳐야 마땅해요. 천황 폐하 만세!’ ‘저도 일본 골수 우익 꼴통들을 존경해요. 사실 저희집이 조상 대대로 친일파거든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동아공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해요. 그것만이 아시아가 살수 있는 길이에요. 그것을 위해서 우리 나라는 일본에 협력을 해야만 해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황국신민서사시를 한번 읽어 보이겠습니다.’ 물론 이 놈들은 국가의 안전을 위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 되었다. 다음날 학교에 와보니 절반 정도의 학생이 급사했더라. 지금도 이들이 왜 죽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국가 안보를 위한 비밀 결사 단체에서 암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이 놈들이 급사하지만 않았어도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어떻게 한 반 학생 중 반 이상이 친일파일 수가 있는 거냐? 내가 다닌 초등학교지만 정말 이상한 학교다. 뭐, 지금은 폐교 됐지만. 아무튼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는 질문은 나에게도 주어졌다. 난 당당하게 대답했다. ‘전 킬러를 가장 존경합니다.’ 담임은 놀라며 물었다. ‘왜지?’ 난 아까 일본 우익 꼴통들을 존경한다고 말한 놈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놈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으니까요.’ 내 말을 들은 담임과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친일파들 빼고) 이 일화를 봤으면 알겠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이 같이 투철한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에 존경할 인간이 없어서 일본 우익 꼴통들을 존경하다니. 차라리 히틀러를 존경해라. 아무튼 사일런스 지니가 정말로 날 존경하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체 내 어디가 잘났기에 날 존경하는 걸까? 후후후~ 사실 내가 잘나긴 잘났지. 혹시 10년 후쯤이면 내 위인전이 나오진 않을까? 잠시 동안 실실 웃으며 상상에 빠져있던 나는 디아케 후작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럼 자네도 전쟁터로 가야겠군.” “그래야겠지요.” “언제 떠날 건가?” “날이 밝으면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난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디아케 후작의 왼쪽 어깨를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는 디아케 후작님께선 언제 떠나실 겁니까?”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데 몸이 이 모양이니…… 젠장, 옛날에는 칼에 몇 번 찔려도 다음날이면 벌떡 일어났는데 이젠 한번 상처가 나면 쉽게 아물질 않아. 나도 나이를 먹은 건가?” 70살이 넘었으니 먹을만큼 먹었죠.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왜? 아아, 그대는 마법사였지. 이미 마법으로는 치료를 한 상태니 더 볼 것은 없네. 자연 회복하길 기다려야지.” 마법이라 해도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상이라면 쉽게 치료할 수 있지만 속의 근육 조직들이 파괴될 정도의 큰 상처라면 근육 조직이 자연 적으로 회복하길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계자 아이언스 히로가 아니던가? 난 예전에 테커의 잘린 팔을 붙여준 경력까지 있는 몸이다. “화살촉에 독이 묻어 있었어.” “…….” 하지만 지금처럼 독이 묻어 있었다면 그건 얘기가 틀려진다. 해독을 한다 하더라고 이미 독과 접촉한 부분은 상했을테니 치유 마법으로 한계가 있다. 안타깝군. 독만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텐데. “그래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어디 보통 마법삽니까?” 난 거의 우기다시피해서 디아케 후작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외상은 깨끗이 나아버린터라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잠시 상처를 이러저리 살펴본 나는 치유 마법을 몇 번 걸었다. 하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이거 어쩌지? 큰소리 탕탕 쳤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으면 욕 먹을텐데. 아무래도 나보다 더 강력한 마법사가 필요한 것 같았다. 나보다 더 강력한 마법사라면…… 드디어 라이가 등장할 차례인가 보군. 난 디아케 후작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라이가 자고 있는 곳으로 뛰어 갔다. 라이는 루엔의 품에 안겨 잠을 자는 중이었다. 미녀 엘프가 귀여운 어린 엘프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 감동 중에도 난 왠지 모를 분노를 느꼈다. 라이를 안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인데. 루엔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떴다. “무슨 일이에요?” “아, 저기 그게…… 라이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요.” 난 라이의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 라이야.” 하지만 라이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난 라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귀를 잡아당기는 등 별 방법을 다 써봤다. 한 동안 그렇게 라이를 괴롭히자 라이는 억지로 눈을 치켜 떴다. “우웅, 무슨 일이에요, 오빠?” “잠깐 일어나보렴.” “우웅, 라이는 졸려요.” 라이는 정말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면욕은 식욕과 성욕보다도 우선하는 법. 심지어는 죽음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수면욕은 막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커풀이란 얘기가 있을까? 하지만 난 졸려 죽을 것 같은 라이를 억지로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라이는 퉁퉁부운 얼굴을 한 채 울상을 지었다. “우엥, 너무해요. 라이는 졸립단 말이에요.” “잠깐만 시간을 내줘.” 내가 라이를 데리고 오자 디아케 후작은 깜짝 놀랐다. “그 아이는…….” 역시 상아탑의 주인은 못알보는 사람이 없구나. “딸인가?” “…….” 어디서 총각의 혼삿길을 망치려고. “입양할 생각이 있긴 하지만 딸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비록 아이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은 상아탑의 수장 라이미안입니다.” 내 말을 들은 디아케 후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들은 풍문이 있는지 의심하진 않았다. 다이케 후작은 재빨리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전 디아케 발리스 후작입니다. 상아탑의 수장 라이미안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라이는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어떤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싸가지 없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70세가 넘는 할아보지가 깍듯이 예의를 차려 인사하는데 어린 꼬마아이가 반말을 하며 손을 흔들다니. 하지만 라이는 700세가 넘는 엘프다. 디아케 후작보다 나이가 10배나 더 많으니 반말을 써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상하게 보이는 걸까? 내가 디아케 후작의 상처를 살펴보라고 하자 라이는 안 떠지는 눈을 비비며 내 말에 따랐다. 잠시 동안 상처를 살핀 라이는 몇 가지 마법을 걸었다. “무슨 마법이니?” “회복 계열 마법이에요.” “내가 써봤는데 별 소용 없는 것 같은데.” “이건 상처를 고치기 보단 신체 회복 능력을 높여 회복 속도를 빠르게 하는 거예요.” “…….” 그래. 너 잘났다. 잘났으면 꼭 그렇게 잘난체를 해야 하니? 흥! 재수 없어! 디아케 후작은 라이에게 감사를 표명하고 옷을 걸쳐 입었다. 라이가 몽유병 환자처럼 눈을 감은채 비틀거리며 잠자리로 돌아가고 나자 디아케 후작은 팔을 흔들어 보였다. “으음, 훨씬 괜찮은 것 같군.” “그래도 쉬시는게 좋을 거예요.” 난 밤이 깊도록 디아케 후작과 대화를 나눈 후에 방으로 돌아왔다. 방안에는 갈리온드가 침대를 차지한채 자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얇은 이불을 덮은 그의 모습이 창으로 들러온 달빛에 의해 어렴풋이 보인다. 오오! 실루엣 죽이는데! 이불 위로 드러난 그의 몸매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게다가 얼굴을 배게에 파묻고 자는 터라 레몬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흘러내려 마치 여자처럼 보였다. 아마 모르는 남자가 봤다면 주저없이 침대 위로 뛰어 들겄이다. 하지만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 나는 그냥 침대 밑에 이불을 깔고 조심스럽게 누웠다. 이렇게 누워서 자려니 갑자기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래. 그날도 그랬었지. 그날도 라이레얼은 침대 위에서 자고 난 밑에서 잤었지. 그러다가……. “흑흑, 그런 일을 당할 줄이야…….”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고 내 혼삿길은 영원히 막히게 되었다. 그날 내가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도. “어흐흐흑.” 난 그렇게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인디카즈네(1) 다음날. 하늘은 우리의 출발을 축복이라도 하듯 비를 쏟아 부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동이 상당히 힘들다. 비 좀 맞으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기온이 너무 낮다. 이 정도 기온에 비까지 맞는다면 잘 되면 감기, 안 되면 폐렴이다. 그래서 우리는 방 안에 쪼그리고 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었다. 현재 이 좁은 방안에는 정원을 초과하는 사람들이 앉아 있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나, 갈리온드, 루엔, 라이, 샤이 사일런스 백작. 우리는 일정과 진행 방향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그 논의라는 것이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말씀하시면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도였지만. “아마 전장까지 가려면 대략 일주일 정도는 말을 달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밤낮 없이 달린다고 가정한다면 사흘에서 나흘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그렇게 강행군을 할 필요가 있나요?”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노처녀에게서가 아닌 갈리온드에게서 나왔다. “물론이지! 내 딸을 찾기 위해서라면…….” 난 그의 입에 베게를 물려주고 노처녀를 보았다. 그녀는 자꾸만 흘러내린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 짜증나는지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겼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빨리 돌아가서 나쁠 것도 없겠지요.”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닐텐데요. 그런 강행군을 한다면 말도 지치고 사람도 지칠텐데.” “방법은 있습니다. 일단 다른 분들은 엘프이니 말타는 것이 그리 힘이 들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저와 아이언스 공작님인데 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만…….” 노처녀는 슬쩍 내 얼굴을 보았다. 마치 ‘니까짓게 버틸 수 있겠냐?’ 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후후후~ 내가 그런 얕은 도발에 넘어가리라고 생각했나? 우습기 그지없군. 노처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선 불길이 솟아 올랐다. 감히 날 무시해! “당연 저도 버틸 수 있습니다! 여자가 버틴다는데 남자인 제가 못 버티겠습니까?” 내가 벌떡 일어서며 외치자 노처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 저거 비웃는 거 맞지? 난 눈물을 흘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노처녀의 우습지도 않은 도발에 넘어가다니. 아이언스 공작의 뛰어난 머리도 이젠 완전히 맛이 갔구나. 노처녀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여행 일정을 설명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비가 그치면 죽을 때까지 북쪽으로 달리다가 도착하면 멈추는 거예요.’ 그 말에 난 머리카락이 쭈삣쭈삣 서는 느낌이었다. 혹시 이거 노처녀가 날 과로사 시키려고 꾸민 계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남자 체면에 이제와서 뒤로 발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비가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처량하게 혼자서 궁상을 떨고 있는데 라이가 아장아장 걸어왔다. 내가 두 팔을 벌리자 라이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내 품에 쏘옷 안겼다. 귀여운 것. 난 라이를 내 무릎 위에 안히고 머리를 쓸어 주었다. “오빠.” “왜 그러니?” 라이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는 세상에서 누가 가장 좋아요?” “…….” 라이가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지? 뜻 밖의 물음. 어찌보면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질문. 하지만 난 생각을 달리 하였다. 라이의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주고 싶었다. 나는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 걸까? 난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한참 동안 생각을하자 여러 얼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라나, 세레나, 라이레얼, 루시아, 지니, 라이, 노처녀, 크로니스, 이그리드 등등. 난 떠오른 얼굴들을 하나 하나씩 지워나갔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예부터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마음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기에 더욱 알 수 없는지도 모른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 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가장 좋아하는 엘프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다. 어차피 내가 친하게 지내는 엘프는 단 세 명 뿐이니. 난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이 오빠는 세상에서 라이가 가장 좋단다.” 순간 라이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라이는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싸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정말요? 정말 세상에서 라이가 가장 좋아요?” “물론이지.” 괜시리 몸을 비비꼬며 베시시 웃는 것이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좋은가? 아, 인간적으로 너무 귀엽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을까? 라이의 이런 모습은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난 지금 순수한 의미로 흥분하고 있었다. 뭐랄까?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듯한 충실감이라고나 할까? “라이는 세상에서 누가 가장 좋니?” 난 은근히 기대하며 물었다. 라이의 대답은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충분하였다. “라이는 오빠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요!” “…….”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럼 그렇지. 라이가 나 말고 누굴 더 좋아하겠어? “그럼 라이는 이 오빠랑 계속 같이 있고 싶니?” “예! 라이는 오빠랑 헤어지기 싫어요.” 나랑 헤어지기 싫단다. 계속 같이 있고 싶단다. 역시 나에겐 오직 라이뿐이다. 라이만이 나의 동료고 나의 친구다. 하지만 난 아직 완벽하게 라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라이가 날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걸까? 혹시 나보다 더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그럼 라이는 이코가 좋아, 오빠가 좋아?” “우웅, 그건…….” 라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우물거릴뿐. “빨리 대답해 봐.” “그건…….” 여전히 머뭇거리는 라이. 난 계속 채근을 하였다. 그러자 라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모르겠어요!” “…….”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멀쩡한 애를 울리다니. 난 재빨리 라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울지마, 라이야. 이 오빠가 잘못했어. 다시는 그런 거 안 물어 볼게.” 사실 아까 내 질문은 유치원생에게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 라고 물어보는 것과 똑같은 짓이었다. 사실 이렇게 물어본다면 대답을 하고 싶어도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건 라이도 마찬가지였다. 라이가 어찌 나와 라이코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으음,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 된다. 혹시 라이가 나보다 라이코스를 더 좋아하면 어쩌지? 아니야! 절대 그럴리 없어. 난 라이가 나보다 라이코스를 더 좋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라이의 눈물이 멎을 때쯤 내리던 비도 멎었다. 난 맑게 개인 하늘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비가 그쳤다고 해서 바로 출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길이 전부 진흙탕일텐데 말을 달릴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 땅이 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준비하세요!” 노처녀의 말에 난 휴지로 라이의 얼굴을 닦아주며 물었다. “무슨 준비를 해요?” “비가 그쳤으니 출발해야지요.” “…….” 설마 진흙탕에서 강행군을 펼치겠다는 건가? “진심인가요?” “왜요? 무섭나보죠?” “무슨 소리! 진정한 사나이가 겨우 진흙탕 강행군 따위를 무서워할 것 같습니까? 당장 출발하지요!” “그리 생각하니 다행입니다.” 노처녀는 피식 웃었다. 저거 상당히 중의적인 웃음이다. 조소와 냉소와 경멸이 섞인. 으윽, 어째서 나만 보면 저런 웃음을 짓는 거지? 우리가 타고 갈 말은 이미 준비 되어 있었다. 별 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갈색 말들. 난 그 중에서 가장 온순해 보이는 말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제법 훌륭한 말이군요.” 내가 마치 말에 대해 잘아는 것처럼 말하자 노처녀는 바로 무안을 주었다. “그 말이 여기 있는 말들 중 가장 안 좋은 말입니다.” “…….” 진짜 무슨 말을 못하게 한다. 노처녀의 지금 복장은 상당히 심플하면서도 캐주얼했다. 쫙 달라붙는 검은 가죽 바지에 흰색 블라우스, 카키색 제킷. 긴 금발머리카락은 위로 틀어올려 포니테일 스타일로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으음,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의외다. 색다른 매력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저 검을 뿔테 안경만 없다면 정말 좋을텐데. 저 뿔테 안경이 너무 이미지를 제한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제 기회가 되면 콘텍트 렌즈라도 하나 선물해주던지 해야지.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내가 계속 쳐다보는 것이 부담되었는지 노처녀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보기 보단 나이스 바디(Nice Body - 의역하자면 끝내주는 몸매)네요.” 순진한 여자였다면 얼굴을 붉혔을 테고, 화끈한 여자였다면 더욱 자신의 몸매를 과시했을 것이다. 이 것도 저 것도 아니라면 그냥 웃으며 넘겼을 테고. 하지만 노처녀는 달랐다. 별 미친 놈을 다보겠네, 라는 눈길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 아니 저기 그러니까 외외로 매력이 있다는 얘기를 하려고…….” “헛소리 그만하시고 채비나 하세요.” “……예.” 쳇! 잠깐이나마 노처녀에게 좋은 감정을 품었던 내가 바보 같다. 역시 노처녀는 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천적이다. 노처녀는 승마 교본에 나와있는 것 같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말에 올라탔다. 갈리온드와 루엔은 엘프답게 날렵한 동작으로 말에 올라탔다. 나는 나답게 그냥 적당히 말에 올라탔다. 라이는 따로 말에 태우기가 힘들었기에 내가 안고 타기로 하였다. “이랴!” 노처녀가 선두에서 서서 달리기 시작하자 진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 재빨리 말을 달렸다. “조심해야 돼, 라이야. 장난치다 떨어지면 큰 일나.” “알았어요, 오빠. 라이는 조심할게요.” 내가 도착할 곳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난 심장이 뛰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제 곧 닥쳐올 불안한 미래. 나는 과연 그 미래에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승리를 일구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 역시 영웅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말을 타면서까지 세계의 평화를 생각해야 하다니. 그래도 그게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이봐! 그런데 그곳에 가면 내 딸을 찾을 수 있는게 확실해?” “…….” 거 분위기 깨는 소리 하기는. “그 곳에서 댁의 딸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뭐야? 아까랑 얘기가 틀리잖아.” 난 갈리온드의 옆에서 떨어지며 중얼거렸다. “그걸 또 믿었냐? 바보 아니야?” 난 그가 당연 내 말을 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프는 의외로 귀가 밝은 법. “너 이 자식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차원의 열쇠고 뭐고 없어.” 우리는 말싸움을 하며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노처녀의 생각은 상당히 합리적이면서도 황당했다. 노처녀가 세운 강행군 일정 밑바탕에는 나의 엄청난 마법 실력에 대한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다 할 수 있겠다. 진흙탕을 달린 말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비틀거릴 때, 우리는 말을 교체하기로 하였다. 이 허허벌판에서 말을 교체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1. 라이와 내가 말과 함께 왕궁으로 텔레포트한다. 2. 왕궁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을 넘겨 받는다. 3. 새로운 말과 함께 아까의 지점으로 다시 텔레포트한다. 4. 새로운 말이 지쳤을 경우 앞의 1,2,3번을 반복한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머리도 좋아. 아무튼 나와 라이는 노처녀가 시키는 데로 말을 새 말로 바꿔 왔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갈리온드와 루엔은 엘프이니 당연 말을 잘 탔다. 굳이 말하자면 말과 교감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노처녀의 실력도 제법이었다. 언제나 책상 앞에만 앉아 있어 엉덩이가 무거울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상당히 날렵하게 잘 탄다. 그리고 나야 당연 실력이 개판이다. “라이야, 어떻게 좀 해봐?” “뭘 어떻게 해요, 오빠?” “말 보고 진정하라고 해.” “알았어요.” 라이는 부드럽게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말이 요동 치던 것을 멈추고 금방 진정하였다. 하아~ 어떻게 생각하면 참 한심하다. 고삐는 내가 잡고 있는데 실제론 라이가 조종하고 있다니. 이래서야 오빠로서의 체면이 서질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흙탕의 사정은 점차 나아졌다. 하지만 내 사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자세를 잘못잡아서 그런가? 왜 이렇게 엉덩이가 아프지? 다그닥 다그닥-! 달리면 달릴 수록 말은 지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람도 지친다. 물론 엘프는 안 지친다. 선택 받은 종족이니까. 난 라이가 웃으며 ‘오빠, 달려요!’를 외치는 사이 혀를 길게 빼물고 헥헥거렸다. 슬쩍 노처녀를 보니 그녀도 굉장히 많이 지쳐 보였다. 얼굴에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아무리 노처녀가 잘났다고 해도 남자인 나보다 체력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나저나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다니. 그 오기 하난 대단하군. 비록 약간이긴 했지만 난 나도 모르는 사이 노처녀에게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다. 저런 오기와 끈기라니. 악과 깡으로 천하를 제패할 여걸이로다! 하지만 그런 오기와 끈기도 육체적인 한계 앞에선 소용 없는 법이다. 결국 지친 강행군을 견디지 못한 노처녀는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곳에서 잠시 쉬어가지요.” 난 나도 지쳐 죽을 지경이었지만 호흡을 고르며 큰소리를 쳤다. “아닙니다! 쉬긴 뭐하러 쉽니까? 이대로 세상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 나의 단호함에 노처녀는 이를 갈았다. 후후후~ 바로 저 표정이야. 더욱더 분노하고 짜증을 내라. 그 동안 하도 많은 갈굼을 당해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노처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이번 기회에 끝을 보지요.” “…….”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노처녀는 주저없이 말에 올라타 말허리를 걷어찼다. 난 멀어져가는 노처녀의 뒷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라이야, 니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실수한 것 같지?” “예. 맞아요, 오빠. 저 여자 오빠를 너무 싫어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오빠가 화나게 했으니 이제 오빠 큰일이에요!” 라이의 말대로 ‘난 이제 죽었다’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다시 달렸다. 달리는 도중 은근슬쩍 노처녀의 표정을 살피니 그 표정이 심히 무서웠다. 독기오른 눈과 악 다문 입. 그녀의 몸 주위에선 요상한 사기(邪氣)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악과 깡, 오기 등으로 뭉친 분노의 여신이 강림한 듯 하였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나는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지쳐갔다. 이젠 고삐를 잡은 손과 흔들거리는 엉덩이에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이러한데 노처녀의 사정은 어떨까? 난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뭐야? 그럼 나 때문에 죽은 거야? 나는 살인자~. 노처녀가 이 자리에서 죽게 된다면 나는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한다. 분명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수군거릴 것이다. ‘아이언스 공작이 평소 자신을 갈구던 여자를 죽였데.’ ‘상처는 없다던데.’ ‘그러니까 증거가 남지 않도록 암살을 한거지.’ ‘정말 굉장하군.’ 어쩌면 질이 나쁜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 ‘아이언스 공작이 샤이 사일런스 백작을 강제로 덮치려하자 샤이 사일런스 백작이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자결을 했데.’ ‘아니, 그런 쌍놈의 새끼가 있나?’ ‘그런 새끼는 남자의 수치야. 당장 없애 버려야 해!’ 아니, 어찌 당사자의 말은 듣지도 않고 그런 오판을! 난 결백해! 난 반쯤 실신한 노처녀에게 외쳤다. “좀 쉬었다 가지요!” “……됐습니다.” 정말 굉장하다. 거의 죽어가고 있으면서 오기를 부리다니. “그러지 말고 좀 쉬지요. 어차피 시간도 널럴한데.” “……필요 없습니다.” 난 그제야 노처녀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노처녀는 죽으면 죽었지 멈출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너 같은 놈에게 무시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 이 것이 바로 노처녀의 생각이었다. 이럴 수가! 겨우 한번 쪽팔림 당한 걸 가지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다니. 정말 무서운 여자다. 난 여기서 그녀를 말리지 않는다면 무서운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공포였다. “저, 저기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이제 그만 휴식을 취하는 것이…….” “됐어요!” 그녀의 태도는 강경했다.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애원을 했고, 그제야 그녀는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니 잠깐만 쉬기로 하지요.” “…….” 쳇! 자기도 힘들어 죽겠으면서. 우리는 말을 묶어 놓고 자리에 주저 앉았다. 세 엘프는 팔팔했지만 두 인간은 그렇지 못했다. 노처녀는 죽을 것 같은지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라이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라는 것을 알았는지 아장아장 걸어가 물통을 들고왔다. 난 입구에 입을 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무 빨리 마시면 몸에 안 좋아요. 천천히 마셔요, 오빠.” 어느 정도 목을 축인 나는 물통을 노처녀에게 건네주었다. 노처녀는 사양 않고 물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가 했던 것처럼 입을 대고 물을 들이켰다. “…….” 혹시 이것은 간접 키스? 난 괜히 이상한 생각을하며 실실 웃었다. 라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아니. 좋은 일은 무슨…….” 충분하진 않지만 적당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출발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리링~ 그대 나를 두고 떠나가지 마세요. 저는 오직 그대의 것이랍니다. 저의 마음과 입술은 이미 그대에게 빼앗긴지 오래. 그대가 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신다면, 전 슬픔 속에서 울고 말 거예요. 그러니 그대 제발 제 마음을 받아 주세요. 언제나 그대 곁에 있을게요. 언제나 그대 곁에 머물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사랑을 노래할게요. 아아~ 사랑하는 그대여. 아아~ 아름다운 그대여. 내 분명 말하는데 이 노래 부르는 놈은 제정신이 아닌게 분명하다. 제정신으로는 결코 이런 낯뜨거운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 아으, 닭살 돋아. 마치 버터가 내 머리 위로 흘러내리는 느낌이다. 가사 내용만 뺀다면 노래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음율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미친 놈이 아니고서야 이런 좋은 노래를 버터 처바른 가사로 망칠 리가 없을텐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저 놈은 미친놈이란 결론이 나온다. 190 정도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입고 있는 옷은 나풀거리는 흰색 치마와 마찬가지로 나풀거리는 흰색 블라우스. 자그마한 얼굴에 반짝거리며 빛을 발하는 새까만 눈동자. 그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 허허벌판에 서서 손에 든 하프의 현을 튕기며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지상의 강림한 선녀와도 같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여자처럼 생겼다. 하지만 그는 남자였다. 어떻게 아냐고? 그야 목소리가 남자 목소리잖아. 우리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2절까지 부른 후, 후렴구까지 한번 더 부르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우리에게 걸어왔다. 휘이잉~ 때마침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 때문에 그가 입고 있는 순백의 옷과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심하게 흔들렸다. 오오!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인간에겐 미적 감각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예쁜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는 나지만 예쁜 남자를 보면 순수하게 감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아쉬움을 느낀다. 기왕이면 여자로 태어나지. 어찌되었든 마치 지상에 강림한 선녀와도 같은 그 남자는 우리를 향해 계속 다가왔다. 그런데 저 놈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여기는 도시와 도시를 잊는 통행로가 되는 길목이었다. 하지만 그 도시들이 전쟁으로 초토화가 된 관계로 허허벌판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라. 그것도 엄청난 미모를 지닌 남자. 그는 말이나 짐도 없었다. 말이 없으면 이동을 할 수가 없고, 짐이 없으면 식량도 없다는 얘긴데. 정말 특이한 경우다. 게다가 저 자는 엄청난 미모를 갖추었다. 지금 상황에서 저런 미모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쁜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데 혹시 여자는 아닐까? 여자인데도 목소리가 허스키한 것일 수도 있잖아. 맞아. 그러고보니 치마를 입고 있잖아. 남자면 뭐하러 치마를 입겠어? 변태가 아닌 이상. 어느새 난 그가 여자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의문의 남자(혹은 여자). 그 자는 우리를 보더니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정면으로 받은 나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 미인계다. 이건 미인계야.’ 미인계의 가장 큰 특성은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기가 굳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조차도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이런 상황이니 다른 이들은 볼 것도 없었다. 특히 우리들 중 정신 연령이 가장 낮은 라이는 마치 주술에 걸린 것 같은 몽롱한 눈으로 검은 머리의 미인을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야, 정신차려! 저런 거에 넘어가면 안 돼!” 내가 소리쳤지만 라이는 듣지 못한 듯 했다. 난 라이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오빠.” “그래. 말해.” 라이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더니 갑자기 검은 머리 미인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오빠~!” 총총걸음으로 달려간 라이는 미인의 품에 쏘옥 안겼다. 그 자는 입가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미소를 지으며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이군요. 아름다운 아가씨.” “…….” 이게 무슨 소린가? 우리 앞에 나타난 의문의 미인.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이 곳에는 왜 나타났을까? 자칫 미궁으로 빠질 수 있는 이 사건은 나의 천재적인 두뇌와 주변의 조언을 통해 한가닥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말은 거창했지만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남자에요?” 내가 묻자 상대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남잡니다.” 난 그 말을 듣자마자 그의 품에 안긴 라이를 뺏아왔다. 어디서 감히 남자 주제에 나의 귀여운 라이에게 손을 대! “오빠~!” 라이는 내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미청년에게 가고 싶어하는 몸짓. 그 모습을 본 나는 질투심으로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라이가 자꾸 이 놈의 품에 안기려 하는 거지? 혹시 이 놈의 미인계에 말려든 건가? “속으면 안 돼, 라이야!” “무슨 말이에요, 오빠? 저 오빠는 예전에 저를 길러주신 분이에요.” 라이는 쪼르르 달려가 다시 미청년의 품에 안겼다. 미청년은 쪼그리고 앉아 라이의 등을 두드려 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 남자가 예전에 라이를 길러 주었다고? 그렇다면 저 놈이……. “은거 기인!” 내가 외치자 모두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은거 기인이라니요?” 노처녀가 물었다. 난 예전에 라이에게 들었던 얘기를 노처녀에게 그대로 읊어 주었다.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의 영지인 흑색 숲에 살며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이를 먹지 않은 검은 머리의 미청년. 이름은 인디. 내 얘기를 들은 노처녀는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내 맹세코 노처녀의 이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왜 이렇게 오바하면서 놀라는 걸까? 하긴 은거 기인이 수백년만에 나타났다는데 안 놀랄 리가 없지. “그, 그러니까 블랙 드래곤 영지에 살고, 이름은 인디고, 수백년 동안 나이를 먹지 않았다구요?” “예. 그렇습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은거 기인이라는 거죠. 아무나 은거 기인이 될 수 있는줄 아십니까?” 노처녀는 이젠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제 말은 어떻게 저 자의 정체를 모를 수가 있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거 기인이라니까요. 정체를 모르니까 은거 기인이지 아무나 은거 기인인 줄 아십니까? 솔직히 막말로 정체가 다 까발려졌다면 그게 은거 기인입니까? 그냥 기인이지.” 우리가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미청년과 라이는 서로를 보듬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라이는 오랜만의 재회가 기쁜지 미청년의 목에 팔을 두르고 볼을 비비는 등 나에게도 잘 안 하던 귀여움을 떨고 있었다. 수백년만에 만났으니 기쁜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라이를 껴안다니! 내 마음 속 한구석에 질투심과 배신감이 불타올랐다. 분노한 나는 눈을 부릅뜨고 미청년에게 다가갔다. “이봐! 너!” 내가 외치자 미청년은 고개를 들었다. 정말 아무리봐도 여자 같다. “저 말씀이신가요?” 목소리는 분명 남자다. 허스키하고 굵은 목소리. 하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임은 분명하다. 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니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 전 인디라고 합니다.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쭈! 감히 내 말을 끊어? “니가 누군지는 내 알바 아니야! 그나저나 니가 뭔데 라이를 안고 있는 거지? 당장 그 손 못 놔?” “시, 심기를 어지럽혀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미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츠렸다. 뭐야?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내가 뭐라고 하면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라고 맞받아쳐야 할텐데. 대체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거지? 괜히 나만 나쁜놈 됐잖아! “아, 아니 뭐 그러니까 내 말은 너무 꽉 껴안지 말라…… 그런 뜻이었습니다. 애가 숨 막혀 할 수도 있으니.” “그러셨군요.” 미청년은 아찔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라이를 조금 느슨하게 안아 주었다. “…….” 이게 아닌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난 미청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 커다랗고 맑은 검은색 눈동자, 그리고 반짝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 정말 완벽하다. 이 사람 정말 남자일까? 아무리 봐도 여자인 것 같은데. 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이런 완벽한 미인을 남자로 태어나게 했을까? 여자처럼 생긴 남자라. 옷 벗겨 보면 상당히 끔찍할 것 같다. 아아! 내가 무슨 생각을? 이러면 안 돼. 난 정신을 차리고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아! 맞아! 나 지금 질문 중이었지. 뭐부터 물어 볼까? 그래. 일단 이 곳에 왜 나타났는지에 대해 물어봐야 겠다. “이봐 너…….” “오빠가 여기 어쩐 일이에요?” 이럴 수가! 라이가 내 말을 끊다니. 미청년은 라이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대를 보기 위해서 이 곳에 왔답니다. 그리고…….”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난 그의 손에서 라이를 뺏아왔다. 그리고 소매로 라이의 볼을 벅벅 문질렀다. “이 나쁜 자식! 감히 이런 어린 아이를 성희롱 하다니!” “저, 전 그냥…….” “닥쳐!” 내가 눈에 불똥을 튀기며 외치자 그는 고개를 눈물을 흘리며 떨어뜨렸다. 갑자기 왜 우는 거지? 이러니까 괜히 내가 나쁜놈 같잖아. “그만 두십시오! 그게 무슨 무례한 행위입니까?” 노처녀는 신경질을 부리며 앞으로 나섰다. 난 미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 놈이 감히 나의 라이의 볼에 뽀뽀를…….” “지금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아니, 그러니까…….” “입 다물어요!” “……예.” 잘못은 저 놈이 먼저 했는데. 노처녀는 맨날 나보고 뭐라 그래. 노처녀 미워! 노처녀는 재빨리 미청년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주었다.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미청년은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저 쪽에 앉아서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아름다우신 여인께서 부탁을 하시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뜻이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왜 저렇게 노처녀의 태도가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걸까? 설마 미청년에게 반했나? 하지만 내가 알기로 샤이 사일런스 백작은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럼 왜지? 우리는 둥글게 둘러 앉았다. 내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미청년을 노려보는데 그 사이 라이가 쪼르르 미청년의 품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만나니 기뻐요, 오빠.” “저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그대여.” “오빠는 라이 많이 보고 싶었어요? 라이는 오빠 많이 보고 싶었는데.” “제가 어찌 아름다운 그대를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매일 밤 그대를 생각하며 노래를 불렀답니다.” “정말요? 라이는 너무너무 기뻐요!” 그 놈한테 왜 저렇게 붙임성 있게 구는 걸까? 그러면 안 돼, 라이야. 그 놈은 나쁜놈이야! 난 감히 나의 라이와 찰싹 달라 붙어 있는 미청년을 찢어 죽일듯한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만약 살기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저 놈은 죽어도 수백번은 죽었을 것이다. 네 놈이 라이의 입양권을 노린다 이거지? 어림 없는 소리! 누가 뭐래도 내가 라이의 보호자야! 그 어떤 놈도 나에게서 라이를 빼앗아 갈 수 없어! 내가 이렇게 분노를 뿜어내는 사이 노처녀는 미청년에게 질문하였다. “혹시 당신이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님인가요?” “…….” 이 무슨 드래곤 코 후비는 소리란 말인가? “하하하! 노처녀…… 아니,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착각하신 모양인데 이 남자는 은거 기인이라니까요. 은거 기인 모르세요?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않고 집 안에만 틀어 박혀 있는 기인.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은거 기인이라고 부르지요.” “시끄럽게 굴지 마시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조용히 입 다물고 계십시오.” “……예.” 내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자 노처녀는 미청년에게 다시 질문하였다.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님이 맞나요?” 아니라니까 그러네. 미청년은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 제가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입니다.” “…….” 은거 기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인티카즈네 (2) 거주지 :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의 영지 흑색숲 이름 : 인디 외형 :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굉장한 미인. 그러나 남자임. 특징 : 수백년이 지나도록 나이를 먹지 않는다. 노래를 잘 부르고, 마법을 잘 쓴다. 그러고 보니 정말 특이하다.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내가 그 동안 왜 몰랐던 거지? 다시 생각해보니 블랙 드래곤일 수밖에 없었다. 위의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자는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 밖에 없으므로. 그런데 난 왜 은거 기인이라고 생각했을까? 무협지를 너무 많이 본 부작용인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청년, 즉 인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인상을 팍 쓰며 물었다. “야! 니가 정말 드래곤이야?” “예. 그렇습니다.” 인디는 두려움 가득 섞인 눈길로 나를 보며 조금씩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난 코웃음을 쳤다. “야! 왜 그렇게 떨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데?” “아, 아니오.” “누가 보면 내가 너 핍박하는 줄 알겠다.” “죄, 죄송합니다.” 인디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사죄하였다. 난 다시 코웃음을 쳤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니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는데? 드래곤이면 다야? 드래곤이면 아무 잘못 안 했는데 사과해도 되는 거야? 어? 말해봐, 임마!” 인디는 몸을 움츠리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는 개뿔이 용서! 니가 지금 드래곤이라는 거 믿고 잘못도 안 했는데 사과를 하나 본데. 내가 세상에서 어떤 부류의 놈들을 가장 싫어하는 줄 알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놈들이 바로 잘못도 안 했는데 사과하는 놈들이야! 그런데 니가 감히 내 앞에서 잘못도 안 했는데 사과를 해? 너 지금 나 열 받게 하려고 작정했냐?” “흑흑, 죄송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 제가 감히 결례를 범했으니. 흑흑, 부디 용서 해주세요.” “용서는 무슨 놈의 용서! 내 사전에 용서란 단어는 없다!” 난 지금 상당히 분노한 상태였다. 그 첫째 이유는 당연 라이가 이 놈한테 너무 찰싹 달라 붙어 있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이 놈이 남자치고는 너무 예쁘다는 것이었다. 니가 뭔데 그렇게 예뻐? 난 예쁜 여자는 좋아해도 예쁜 남자는 증오해. 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는 인디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파괴 본능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충분했다. 지금 인디의 눈은 마치 ‘저를 더욱 괴롭혀 주세요’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래. 괴롭혀 달라니 괴롭혀 주자. “너 이 자식…….” “그만 두지 못 하겠습니까?” 어느새 나선 노처녀는 인디를 감싸며 불같은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인디카즈네님께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고개 숙여 사과 하십시오.” “아니, 제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럼 그 무례가 잘못이 아니란 말입니까?” “저 놈이 먼저 잘못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사과를 하잖아요.”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사과를 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란 말입니까?”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사과를 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오오! 내가 드디어 노처녀의 말을 맞받아쳤다. 드디어 노처녀 공포증을 극복한 것인가? 좋아. 이 기세를 놓치지 말고 곧 바로 밀고 나가야지. 노처녀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 반경 일장에 자색 기운이 뒤덮였다. 뭐야 이건? 난 급작스럽게 변한 공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이런 경우는 오직 하나. 자하신공! 이 정도로 짙은 자색 기운이라니. 이 것은 자하신공을 극성으로 연마하지 않은 이상 결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렇다는 건 노처녀가 무림 고수란 얘기? 그런데 어째서 그 동안 무공을 쓰지 않은 거지? 설마 암살을 주로 했던 건……. “흑흑, 저 때문에 싸우는 것은 그만 두세요. 제발 싸우지들 마세요. 이렇게 무릎 꿇고 부탁드려요.” 들려온 소리에 난 정신을 차렸다. 그와 동시에 노처녀의 주변을 덮고 있던 짙은 자색 기운도 사라졌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착시 현상이었단 말인가? 그랬다. 그것은 분명 착시 현상이었다. 노처녀에 대한 공포감이 스스로 환상을 만들어 내게 한 것이다. 아아~ 난 평생 노처녀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수 없단 말인가? 라이는 재빨리 울고 있는 인디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우엥, 오빠 울지 마세요.” 인디는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를 달래는데 노처녀까지 가세했다. 갈리온드와 루엔은 이 와중에도 둘이서 소곤소곤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분명 사랑을 속삭이고 있으리. 왠지 왕따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난 인디에게 다가가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이제 울음을 그치고 말하시지. 여기 온 이유는 대체 뭐야?” 내 질문에 인디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아이언스 히로님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노처녀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난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을 줄 건데?” “그건 잠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던 노처녀는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아 어디론가 끌고 갔다. “저랑 잠깐 얘기 좀 해요.” “아니,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과 저 사이에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난 노처녀의 손에 이끌렸다.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곳에 멈춰선 노처녀는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인가요?” “예? 뭐가요?” “어째서 드래곤이 아이언스 공작님을 찾아온 거죠?” “그게…… 비밀입니다.” 난 단호하게 말하였고, 예상대로 노처녀의 인상은 일그러졌다. 하지만 난 진실을 노처녀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웬만하면 말씀해 주세요.” “웬만하지 않으니까 말씀을 못 드리는 겁니다.” 노처녀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알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진실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나중에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노처녀도 더 이상은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려 좀 더 실용적이고 건설적인 얘기를 꺼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인디카즈네님과 무슨 관계십니까?” “방금 봤으면 알겠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 당연 관계라고 할만한 것도 없지요.” “혹시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긴다면 인디카즈네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 노처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 그녀는 지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드래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만 대군이라 하더라도 드래곤이 브레스 한번 뿜으면 그걸로 끝장이니. 하지만 드래곤들은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본체를 놔두고 정신체만 분열해서 돌아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설사 가능하다하더라도 나는 반대였다. 원래 인간의 일은 인간이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대체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다시 국가를 세운다면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으음, 내가 한 생각 치고는 상당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다. 이 것은 내 현재 처지가 아이리스에서 많이 벗어난 상태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만약 예전처럼 참모총장 자리에 앉아 군을 지휘했었더라면 드래곤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었겠지.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생각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일이니 인간끼리 해결해야만 합니다. 상황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드래곤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노처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이리스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말입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노처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예상 외로 일찍 포기를 한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가? 노처녀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인디와 단 둘이 대화하기로 하였다. 비밀 유지를 위해 전음밀법 같은 것을 쓰고 싶었지만 내공이 딸려서 안 되겠고, 그냥 자리를 옮겼다. 메시지 마법을 쓸 수도 있지만 그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마법을 쓰는데 집중을 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대화를 놓치게 되거든. “여기 나타난 이유가 날 돕기 위해서라고?” 인디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정은 에스카네스님께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돕겠다는 거지?” “9클래스를 마스터하게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대충 짐작은 했었다. 사실상 내가 받을 도움이란 그것밖엔 없으니. “어떻게 9클래스를 마스터하게 해줄 건데? 설마 지금부터 열심히 수련하라는 것을 아닐 테고.” “그 방법에 대해선 추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인디의 얼굴을 보니 무슨 방법이 있긴 있는 듯 했다. 하긴 전에 에스카네스도 뭔가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말했으니. “그나저나 니가 예전에 라이를 길러 주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인디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난 눈으로 살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라이를 성희롱 했다지?” “예? 서, 성희롱이라니요?” 인디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라이한테 다 들었어! 니가 볼에 뽀뽀도 자주 했고, 목욕도 시켜줬다며! 설마 그런 일 없다고 발뺌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 그런 일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순수한 마음에서.” “하! 순수한 마음? 어린아이를 성희롱 하는 놈들이 꼭 그런 변명을 하기 마련이지. 라이가 그때 받은 상처로 지금까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니가 알기나 해?” 인디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가득 물들었다. “저, 정말인가요?” “그래!” 까만 눈동자는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흑흑, 죄송해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그래. 아니까 다행이다. “그럼 이제부턴 라이한테 접근하지 마. 알았어?” “그, 그건…….” “시끄러! 접근하지 말라면 접근하지 마!” “흑흑…….” 인디는 말없이 고개 숙여 울기만 했다. 미인이 우는 모습은 언제나 가슴 아프다. 하지만 상대가 남자일 경우엔 그래도 그 아픔이 반감 된다. 난 울고 있는 인디를 그 자리에 놓아 둔 채 혼자 일행에게 돌아왔다. 라이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는 인디를 보고는 ‘오빠~’를 외치며 뛰어가려 하였다. 난 그런 라이를 붙잡았다. “잠깐만 기다려, 라이야.” “왜요, 오빠?” 막상 말을 꺼내려니 굉장히 망설여진다. 두근두근~ 만약 라이의 대답이 기대와 어긋나면 어떡하지? 하지만 난 라이의 진솔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라이는 전에 세상에서 이 오빠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었지?” “예. 라이는 그렇게 말했어요.” “그럼 말이야…… 저기 질질 짜고 있는 저 놈과 이 오빠 중에서 누가 더 좋아?”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민에 빠졌다. 고개가 갸웃갸웃, 머리가 흔들흔들. 난 초조하게 라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발 내가 더 좋다고 말해줘. 난 라이밖엔 없단 말이야. 잠시 후, 라이는 입을 열었다. “전 오빠가 가장 좋아요.” “무슨 오빠? 저 오빠? 이 오빠?” 라이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히로 오빠요!” “…….” 아! 갑자기 가슴 속이 뭉클해지며 뜨거운 기운이 솟아 올라온다. 그래. 역시 라이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라이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쪽! 귀여운 것. 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남아 라이를 입양하고 말테다! 라이는 어느새 울고 있는 인디를 향해 뛰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의 질투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야 라이가 세상에서 날 가장 좋아하고 있으니까. 라이가 아무리 저 놈을 좋아한다고 해봐야 저 놈은 2등에 불과하다. 후후후, 1등은 이 몸이시다. 갑작스런 인디의 등장으로 휴식은 예상보다 몇 배나 길어졌고 우리는 슬슬 출발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인디는 어디 타는 것이 좋을까? 현재 말은 네 마리가 있다. 한 마리 더 데리고 올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현재 있는 범위 내에서 해결하고 싶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잠시 회의를 하였다. 난 인디가 갈리온드와 함께 타고나 루엔과 함께 탈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가 의외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루엔이 라이와 함께 말을 타고 내가 인디와 함께 말을 타는 걸로. 나를 제외한 전원이 찬성하였다. 그래서 난 하는 수 없이 인디와 함께 말을 타기로 하였다. 인디는 내 뒷자리에 앉아 내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상대가 남자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흥분이 되는 이유는 뭘까? 설마 내가 인디에게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건가? “저, 저기…….” “고개 좀 돌리고 말해. 자꾸 귓가에 바람 불어 넣지 말고.” “죄, 죄송합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노처녀가 먼저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우리가 따랐다. 다그닥 다그닥-! 말은 다시 힘차게 질주하였다. 인원이 한 명 더 늘긴 했지만 속력은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느낌이다.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 흑색숲의 주인. 그가 인간 세상에 나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시 시간이 임박했다는 건가? 크로니스의 일은 생각보다 커진 듯 했다. 수많은 드래곤들이 개입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내 임무도 중요해졌겠군. 난 생각을 하던 중 우연히 노처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직감이건데 아마도 갑작스럽게 나타난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와 깊은 관련이 있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설마 정말로 드래곤의 힘을 빌릴 생각은 아니겠지? 말의 속력이 빨라질수록 인디는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무서워하고 있는 건가? 정말 웃기는 드래곤이 아닐 수 없다. 허구 많은 인격체 중 이런 이상한 인격체를 끄집어내다니. “왜 성격이 그 모양이야?” 인디는 바람결에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올리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 뭐 죄송할 것까지야. 인디가 합류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수월하게 강행군을 펼칠 수가 있었다. 역시 마법사란 이래서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9클래스 마법사인 인디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그 덕에 우리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고, 그래서 쉬지도 않고 계속 말을 달렸다. 게다가 밤에는 눈에까지 마법을 걸어줘서 낮처럼 환하게 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밤낮 없이 강행군을 펼친 결과 우리는 나흘 만에 전장 부근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전장인지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내 앞쪽에 있는 한 무리의 군대를 가리키겠다. “저거 뭐하는 놈들인가요?” 나의 물음에 노처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자바스군이군요.” “그런데 왜 쥐새끼처럼 소리 없이 살금살금 걸어가는 거죠?” “그야 야습일테니까요.” 자습도 아닌 야습? 자습은 자율 학습이라는 훌륭한 뜻지만 야습은 야간 습격이라는 참으로 비열하고도 얍삽한 뜻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빨리 가서 알려줘야하는 것 아니에요?” 노처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알려준다 하더라도 준비를 하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하지만…….” “사일런스 백작이 이미 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 그렇군. 지니라면 대비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냥 우리측에서 쓸어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난 그렇게 말하며 인디를 보았다. 그러자 인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능해요. 하, 하지만…….” “하지만 뭐?” 내가 인상을 쓰자 인디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츠렸다. “저는 어디까지나 아이언스 히로님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난 더욱 인상을 썼다. “그래서?” 인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래서 저, 저는……. 흑흑, 죄송해요.” 인디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자 노처녀가 앞에 나섰다. 그리고 인디의 등을 두드려 주며 타이르듯 말했다. “지금 여기서 저들을 무찌른다면 그것이 아이언스 공작님을 돕는 겁니다. 만약 저들에 의해 아군이 큰 피해를 입는다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상심이 크실테고 그렇게 된다면 후에 일을 하는데 많은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노처녀의 설득이 먹혀들었는지 인디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반짝거리는 눈길로 노처녀를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오오! 마치 작은별 같아. 그런데 대체 인디가 왜 노처녀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무엇 때문에? “고, 고마워요.” “아닙니다, 인디카즈네님.” 노처녀는 인디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블랙 드래곤에게 잘 보여 어떻게든 도움을 이끌어 내려는 얍삽한 속마음이 다 드러나 보인다.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적의 군대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빨리 처리해.” “알았어요.” 내가 말하자 인디는 손을 들어 올렸다. “슬립Sleep!” 인디가 쓴 마법은 1클래스의 아주 간단하고 우스운 마법. 하지만 9클래스가 쓰니 역시 그 위력이 틀렸다. 못 되도 수천은 되보이는 적들이 전부 자빠져 자는 것이 아닌가? “우와! 굉장해요, 오빠!” 라이의 탄성에 내 이마가 일그러졌다. “굉장하긴 뭐 굉장해!? 저 정도 마법은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거야? 너 임마!” “……예?” “니가 그렇게 잘났어? 니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기에 저런 유치한 마법을 써놓고 잘난체야?” “저, 저는 잘난체 한적이 없는데.” “어쭈! 이제는 말대꾸까지?” “흑흑, 죄송해요.” 어려운 상황을 울음으로써 무마하려고 하다니. 상당히 야비하면서도 훌륭한 책략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언스 공작에게 통할리는 없다. 내가 다시 큰 소리를 칠려는 찰나 라이가 외쳤다. “그러지 마세요, 오빠! 오빠 울잖아요!” 노처녀도 소리쳤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당장 그만 두지 못하겠습니까?” 이 것들이 세트로 인디의 편을 든다. 난 뭐야? 졸지에 공적으로 몰린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노처녀야 그렇다치고 라이가 저 놈의 편을 들다니. 인디는 노처녀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매장 당할 수도 있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 수면 마법으로 저 놈들을 제운 것까진 좋은데 그 다음은 어떻게 하냐는 겁니다.” 내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제운 것까진 좋았는데 깨어나면 어쩔 것인가? “강력하게 걸었기 때문에 제가 마법을 풀기 전엔 깨어날 수 없어요.” “…….” 그래. 너 잘났다. 9클래스면 다냐? “그래서 어쩔거냐고? 그럼 저 놈들을 이대로 자게 냅둘거야?” “그, 그건…….” 역시 대답을 못하는 군.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겠지. 난 지금이야 말로 몰아 쳐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몰아 치려하는데 그 순간 노처녀가 나섰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럼 설마 저들을 전부 죽일 생각입니까?” 저 놈들을 전부 죽여?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상대가 반항할 능력도 없는데. “그럼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인질로 삼아야지요.” “인질?” “어차피 이들은 인디카즈네님이 마법을 풀지 않는한 깨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 없으니 굳이 목을 벨 필요가 없고, 아직 죽진 않았으니 인질로 써먹을 수가 있지요.” “…….” 그래. 너 잘났다. 아주 둘이 손발이 잘 맞는 구만. 흥! 재수 없어! 잠든 적군 병사들에 대한 뒤처리 문제에 대한 논의가 끝나나 우리는 가야할 방향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였다. 노처녀의 말 대로라면 진지는 지금 텅 비어있거나 쑥대밭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전쟁터에는 접근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괜히 적으로 오인 받아 화살 맞고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에겐 인디가 있다. 9클래스 마법사. 그 까짓 화살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지. 그러나 이런 한밤중에 찾아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한창 잘 싸우고 있는데 굳이 우리가 나타나 방해할 필요는 없잖아. 결국 우리는 이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날이 밝으면 멋진 모습으로 등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럼 그 동안 뭘 하는 게 좋을까?” “다 같이 놀아요!” “기다리긴 뭘 기다려? 당장 내 딸을 찾으러 가자!” “그냥 앉아서 쉬지요.” 이렇게 의견이 분분해서야 되겠나? 난 그들의 의견을 간단히 묵살하며 말했다. “이럴 땐 보통 리더의 의견을 따르는 법입니다.” “리더가 뭐에요, 오빠?” 라이의 물음에 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리더란 나 같이 멋지고 잘난 사람을 말하는 거란다.” “정말요?” “그래.” “그럼 저 오빠가 리더가 되야하는 것 아니에요?” “……." 라이의 손은 인디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사악한 드래곤이 언제 라이를 매수했을까? 나쁜 자식! 제거해 버리겠어! 난 살기어린 날카로운 눈으로 인디를 노려보았다. “니가 리더할래? 아니면, 조용히 꼬리를 내리고 나한테 양보할래?” 인디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말했다. “야, 양보할게요.” 그럴 줄 알았다. “탁월한 선택이군. 후후후~ 만약 양보를 하지 않았을 시에는 네 놈과 죽기 살기로 싸울 생각이었다. 둘 중 한명이 죽을 때까지 말이야. 음하하하!” 인디의 얼굴에 새파랗게 질렸다. 인디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노처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 그런데 저 놈이 왜 저렇게 노처녀한테 의지하는 걸까?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 노처녀는 인디에게 간이라도 빼줄 듯한 모습으로 어르고 달래 주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와 인디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생각해보니 진짜 열받네. 같은 마법산데 왜 저렇게 차별해? 난 5클래스고 저 놈은 9클래스여서? 정말 그런 거야? 노처녀 너무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너 나랑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좀 하자.” “예? 얘, 얘기라니요?” 난 인디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러자 노처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당장 그 손 놓으세요!” 난 코웃음을 쳤다. “이것은 마법사끼리의 일입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상관 마세요.” “하지만 이 분은 손님입니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아쳤다. “날 찾아 온 손님입니다!” “…….” 노처녀는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이겼다는 뜻? 나의 승리? 정말? 내가 노처녀한테 이긴거야? 난 펄쩍펄쩍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노처녀의 모습이 작아 보인다. 객관적으로만 비교해 보면 내 키가 노처녀보단 크다. 덩치도 내가 크다. 하지만 내 눈엔 언제나 노처녀가 훨씬 커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심리적인 공포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어째서일까?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갈굼을 당해왔는데 어째서 샤이 사일런스 백작에게만 심리적 공포감을 느끼는 걸까? 그것은 나의 과거의 일에 기인한다. 어렸을 때부터 노처녀에게 당했던 그 수 많은 기억들. 그래서 나는 노처녀라하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무서워하였다. 그것은 본능적인 공포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드디어 그 심리적 공포를 극복하고 노처녀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이제 자유야! 어렸을적 공포를 극복하고 이제 세상 앞에 당당히 나선다. 이 또한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난 다시 한번 노처녀를 보았다. 노처녀는 찢어서 삶아 튀겨 먹을 듯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 이렇게 기쁠 수가! 난 이 기념비적인 순간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에게 있어서 평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담배. 그리고 이젠 이 담배에 자유의 의미마저 깃들게 되었다. 담배를 피워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난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는데 그 순간 인디가 말했다. “저기, 그 라이타는 혹시…….” 아! 인디도 드래곤이니 알아볼 수 있겠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량한테 받은 거야.” 인디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난 인디의 손을 이끌고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다. 노처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당장 그 손 놓으시지요, 아이언스 공작님.” 어쭈! 명령조냐? “그렇게 못하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러시다면 제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 그, 그렇게까지 인디를 위해주는 거냐? 나한테는 항상 싸늘한 눈빛만을 보내더니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인디를……. “저, 저는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인디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노처녀는 길을 비켜주었다. 그 순간 난 노처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노처녀는 처음부터 우리를 막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괜히 인디를 위해주는 척 해서 인디의 환심을 살 속셈이었던 것이다. 정말 얍삽한 술책이 아닐 수 없다. 난 으슥한 곳으로 인디를 데리고 갔다. 주위가 어둑어둑하고 인기척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으슥한 장소. 인디는 하프를 끌어 안은 채 두려운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 보았다. “야! 너!” “예? 저 말씀이신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인디는 순진하게도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 없는데요.” “…….”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흠흠, 그래. 없다. 아무튼 말이야 너!” “예?” 난 마치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인디의 까만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혹시 노처녀, 아니, 샤이 사일런스 백작……?” “아, 아니에요. 저, 전 그 분께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결코 좋아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에요. 죄, 죄송해요.” “…….” 얼굴을 붉히고 두 팔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인디의 모습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이런 반응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돼?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거구나.” “예? 아, 아니 저는…… 흑흑…… 죄송해요.” 인디는 갑자기 자리에 주저 앉아 울기 시작했다. 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일련의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 인디의 태도는 노처녀를 좋아하고 있다고 밖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니, 사랑한다는 표현이 적절하겠군. 어쩐지 그 동안 노처녀를 보던 눈빛이 이상하다 했어. 하지만 소심한 성격 때문에 차마 입 밖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겠지. 후후후~ 고통스럽나? 불쌍한 녀석. 그런데 이 놈이 정말로 노처녀를 좋아하는 건가? 난 인디의 얼굴에 연기를 팍팍 내뿜으며 물었다. “야! 너 정말 노처녀 좋아해?” “아, 아니에요. 저, 저는 그냥…….” “그냥 뭐? 그냥 좋아한다고?” “……흑흑.” 인디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난 고개를 꺽어 하늘을 보있다. 시리도록 어두운 밤하늘. 그리고 구름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환한 달. 난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니가 미쳤구나. 세상에 좋아할 사람이 없어서 노처녀를 좋아하다니. 그것은 미쳤다는 말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어찌 제정신으로 노처녀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노처녀의 어디가 좋아? 외모? 그래. 외모는 좀 예쁘고 지적으로 생겼다치자. 하지만 내가 그 동안 누누이 말했다시피 여자는 외모가 전부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격이다. 못 생긴 여자랑은 평생을 같이 살아도 성격 더러운 여자와는 하루도 못 사는 법이다. 정말 엄청 예쁘고 성격 더러우면 어쩌냐고? 흠흠, 그럴 땐 뭐 얼굴봐서 참고 살아야지. 아무튼 노처녀는 성격이 정말 안 좋다. 이런 여자와 같이 살게 된다면 난 정말 하루도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냥 짐 싸서 밖으로 나가고 만다. 그런데 어째서 이 놈은 그런 노처녀를 좋아하는 거지? 무엇 때문에? 난 인디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대체 왜? 노처녀의 어디가 좋아서? 말해 봐! 말해 보란 말이야!” “그, 그냥…….” “그냥 뭐?” “아름다우셔서…….” 인디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말하자 열받은 나는 녀석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이런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니가 감히 여자를 얼굴만 보고 평가해? 외모지상주의적 사회가 얼마나 많은 남녀들에게 고통을 주는지 알기나 해? 하긴 너 같이 생긴 놈이 안 생긴 남자들의 슬픔을 알 리가 없지!” “저, 저는…….” 인디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으음, 내가 너무 흥분했군. 아무리 화가 나도 이래선 안 되는 건데 말이야. 난 슬며시 인디의 멱살을 놓았다. 인디는 다시금 쪼그려 앉아 눈물을 흘렸다. “흑흑.” 흥! 하나도 안 귀여워. 여자가 운다면 모를까 남자가 울어봐야 조금의 감흥도 없다. 아니, 오히려 짜증난다고나 할까? 왜 남자가 울어? 남자가 뭔데 울어? 운다고 해서 세상 일이 해결 돼? 너에게 울음 따윈 필요 없어! “저, 저는 그 분의 모든 것이 좋아요.” “…….” 이걸 미쳤다고 해야하나, 콩깍지가 씌였다고 해야 하나? “넌 지금 속고 있는 거야? 노처녀는 니가 좋아할만한 그런 여자가 아니야? 솔직히 니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여자를 좋아해? 너 정도의 외모면 수 많은 미인들을 꼬실 수 있어. 세상을 좀 다르게 보는게 어때? 정신을 차리란 말이야!” “하, 하지만 저, 전…….” “시끄러! 아무튼 더 이상 노처녀를 좋아하지 마!” “흑흑~.” “울긴 왜 울어?” 인디는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울먹이며 말했다. “전 이미 그분께 마음을 빼앗겼답니다.” “…….” 저 포즈, 저 말투! 정말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다. 난 기가 막히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이게 말이나 돼? 대체 어떻게 꼬셨길래 애가 이렇게 맛이 갔냔 말이야? “너, 너…… 그래서 이제 어쩔건데?” “흑흑, 저도 모르겠어요.” 한참 징징 짜던 인디는 갑자기 내 다리를 붙들었다. 그리고 눈물 때문에 반짝이는 눈길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인디가 여자였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왜 일까? 만약 이 놈이 여자였으면 내 당장 끌어 안아 입을 맞춰 주었겠으나 남자인 관계로…… 아아, 정말 아깝다. “저 좀 도와주세요.” “…….” 뭘 도와줘야하는지 굳이 물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너무 뻔하기 때문에. 노처녀와 잘 되게 도와달라는 것이겠지. 난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인디의 손을 뿌리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지금 내 연애 사업도 못하고 있는 마당에 남 연애 사업을 도와주게 생겼냐? 게다가 내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고 있어? 지금 세계가 멸망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블랙 드래곤이라는 넌 겨우 여자 하나에 매달리겠다는 거냐? 너 정신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인디는 다시금 눈물을 펑펑 흘렸다. “흑흑,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 그래. 사랑이 뜻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겠니?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슬플 따름이지. 그나저나 왜 하필 이런 인격체인 걸까? 차라리싸가지가 없는 제갈량이 낫다. 난 이런 소심하고 유치한 성격에 쉽게 짜증을 낸단 말이다! 난 인디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은 다음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노처녀가 좋아?” 인디는 눈물을 닦은 다음 얼굴을 붉히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아으, 닭살 돋아! “만약 노처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쩔거야?” “…….” 순간 인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인디는 몸을 부르르 떨며 이빨을 부딪혔다. 충격이 큰 모양이다. 불쌍한 것 같으니라고. 어쩌다가 노처녀 같은 여자한테 마음을 빼앗겼니? 가슴이 좀 아프긴 하지만 지금 이 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다. 어떻게든 인디의 눈에 씌인 콩깍지를 벗겨줘야했다. “그, 그렇다면 전…….” 인디는 눈물을 흩뿌리며 소리쳤다. “그 분의 시종이라도 되겠어요!” “…….” 아주 지랄, 염병, 꼴값을 떠는 구만. 맛이 가도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맛이 갔을까? 아무래도 이 놈을 정신 차리게 해줄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군. “노처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인디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인디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건 바로 나야! 사실 노처녀는 날 사랑하고 있었어!” 인디는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예? 그, 그럴리가…….” “물론 믿기 힘들겠지. 하지만 사실이야. 노처녀는 날 사랑해. 그러니까 넌 그만 포기하고 날 돕는 일에만 신경 써. 내가 9클래스를 마스터하는 걸 돕는 다 그랬지? 자 그럼 어서 내가 9클래스 마법을 쓸 수 있게 해봐. 당장.” “흑흑흑~.” 충격 때문에 한 동안 멍하니 있던 인디는 이내 눈물을 쏟으며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난 미소를 지었다. 아싸! 이걸로 한 커플 깨졌다! 난 어째서 이렇게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걸까? 설마 이것이 내 본성인가? 뭐 본성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냥 이대로 사는 수 밖에. 후후후~. 내가 승리의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그 순간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맑고 청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느끼한 미성(美聲). 내가 알기로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단 한명 밖에 없다. 그 이름도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는 팔방미인. 너무나도 잘나서 더 이상 잘나질 수가 없는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나를 가장 존경한다는 기특한 놈. “사일런스 지니!” 난 고개를 휙 돌렸다. 내 눈에 비친 사람은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작고 새하얀 얼굴에 외눈 안경을 끼고, 윤기가 흐르는 금발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묶은 남자였다. 그는 나를 보며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하였다. “오랫만에 뵙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새하얀 달빛이 그의 등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몽환적인 느낌의 미청년. 마치 신의 강림을 보는 것 같다. 후에 오늘의 일이 책에 쓰여진다면 지니가 주인공, 난 조연으로 등장할 것이다. <위대한 사일런스 지니 백작님께선 산책을 하시던 도중 위대하고도 훌륭한 청력으로 어느 한 구석에서 들리는 말소리를 감지해 내셨다. 그분은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미천하기 그지 없는 아이언스 히로가 약자를 핍박하고 있었다. 월광을 등에 업은 사일런스 지니 백작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자 미천하기 그지 없는 아이언스 히로는 차마 그 모습을 바라 보지 못하고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 위대함에 경배하였다. (…후략…)> 어떻게 그런 일이! 아니야. 그건 거짓말이야! 주인공은 나란 말이야! 그런데 지금 사일런스 지니의 모습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위대해 보이고 멋있어 보였다. 정말 나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젠장, 잘난 놈은 뭘 해도 잘나보인다고 잘 생긴 놈이 등장하니 세상이 환해진다.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다시 뵙게 되니 제 기쁨을 말할 길이 없습니다.” “사일런스 백작님.” 난 지니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지니의 얼굴은 기쁨과 영광으로 찬란하게 물들었다. 그것은 진심에서만 나올 수 있는 표정이리라. “아이언스 공작님!” 지니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나를 껴안으려 달려들었다. 난 가히 표범과도 같은 순발력으로 그의 포옹을 피했다. “제가 누누이 말했지만 전 남자에겐 취미 없습니다.” “전 다만 재회의 기쁨을 나눌 생각이었을뿐, 결코 이상한 의미가 담겨있진 않습니다.” “의도가 좋아도 행위 자체가 나쁘면 어찌 그것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말에 지니는 대단히 감명 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또 다시 아이언스 공작님께 훌륭한 가르침을 받게되었군요. 그 은혜 하해와도 되갚을 길이 막막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제 스승이나 다름 없습니다.” “…….” 입에 발린 소리하기는. 내가 분명히 말하건데 사일런스 지니는 참모가 아닌 간신배를 했으면 더욱 대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놈이 정말로 날 존경하고 있는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믿기지가 않는다. 이렇게 잘난 놈이 뭐가 아쉬워 정말로 날 존경하겠는가? 게다가 이 놈은……. “저 분은 누구십니까?” 지니가 가리킨 사람은 상당히 매혹적인 포즈로 주저 앉아 이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인디였다. 저 놈은 왜 아직까지 울고 있는 거지? “저 놈은…….” 문득 사일런스 지니가 저 놈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저 멋있으면서도 어쩐지 재수 없는 웃음. 여자들이 보면 환장을하며 달려들겠지만 내가 보면 짜증 밖엔 나지 않는다. 왜냐? 그야 나는 저런 미소를 지을 수가 없으니까. 원래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것에 질투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인디는 이제야 지니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디라고 합니다.” 방금 전까진 울고 있는 미소녀(?)였는데 허스키 보이스가 나오니 흥을 다 깬다. 난 지니가 조금이라도 놀라지 않을까, 해서 지니의 표정을 살폈지만 지니는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상대방의 인사가 끝나자 지니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사일런스 지니라고 합니다.” 인사가 완전히 끝나고나자 우리는 각자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나와 지니는 다시 얘기를 나누었고, 인디는 다시 주저 앉아 흐느꼈다. “그런데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이 곳엔 어쩐 일이신가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 곳엔 어쩐 일이신지요?”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부디 용서해 주시길 간절히…….” “용서했으니 본론이나 말해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니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적들은 밤을 틈타 양동 작전을 벌이려 하였다. 정면에서 치고 들어와 싸우는 사이 후면에서 뒤통수를 치는. 하지만 이러한 작전은 이미 잘난 사일런스 지니에 의해 간파 당했다. 지니는 가볍게 정면에서 오는 적들을 물리치고 후방의 기습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기습조가 오지 않는 것이다. 사일런스 지니는 워낙 잘났기 때문에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적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거란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지니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혼자 정찰을 나왔다가 우리를 만난 것이다. “그럼 이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라이레얼을 만나기 위해…….” 지니는 놀랍다는 태도로 말했다. “예? 라이레얼양을 말씀이십니까? 아니, 어째서 라이레얼양을 만나시려 하십니까?” 어째서 이렇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걸가? “제가 라이레얼을 만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지금 라이레얼양이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글쎄요.” “그녀는 자신과 아이언스 공작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과장, 날조하여 사방에 퍼트리고 다니고 있습니다. 전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위명에 누가 될까 두려워 소문을 진화해 보려 애썼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 곳으로 돌아오셔서 그 여자분을 만나신다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재고하여 주십시오.” “…….”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이 없다. 대체 어떤 식으로 소문을 퍼트렸기에…… 어흐흐흑! 내 인생은 끝이야. 이제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아? 정말 너무 해요, 라이레얼. 전 이제 어찌 살라고. 난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눈물을 지우고 지니를 보았다. “그렇다면 설마…….” 지니는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루시아 공주님께선 그 소문을 접한지 오래입니다.”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사실로 확인되니 놀랍기 그지 없다. 하지만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라. 내가 한 순간에 실수로 일을 저질렀으니 누구를 원망하리오. 하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아니, 살다보면 그런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매장시켜도 되는 거야? 과거 있는 남자들은 전부 죽으라는 거야, 뭐야? 난 허탈함에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저 앉으려는 순간 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해요, 오빠?” 고개를 돌려 보니 노처녀와 라이가 함께 걸어 오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이 오랫 동안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 되었나 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노처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짜증을 내더니 인디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인디를 꼭 끌어 안으며 달래 주었다. 토닥토닥~ 정말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라이야 이쪽으로 오렴.” 라이가 아장아장 걸어와 내 품에 안기자 나도 라이를 토닥거려 주었다. 이렇게 라이의 등을 토닥이고 있으면 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느낀다. 난 슬쩍 지니를 보았다. 후후후~ 부럽지? 노처녀는 계속해서 인디를 달래주며 쥐도 새도 모르게 등장한 사일런스 지니에게 물었다. “니가 이 곳엔 어쩐 일이야?” 지니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랫만입니다, 누님. 하셨던 일은 잘 되셨는지요?” “아니. 누구 때문에 완전히 망쳤어.” 노처녀는 나를 째려 보았다. 그 싸늘한 눈빛에 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지니는 노처녀의 그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제가 이 곳에 온 이유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뵙기 위해서 입니다.” 그 대답에 난 기가 막혔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상대가 믿을만한 거짓말을 해야지. “제가 이 곳에 있는지 사일런스 백작님께선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질문에 지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둠 속에 있어도 달은 환하게 빛나는 법이고, 끝이 뾰족한 송곳은 주머니 속에 있어도 밖으로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니 제 어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지척에 와 계신데 모를리 있겠습니까?” 입에 발린 소리 하기는. 하지만 입 발린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어쩔 수가 없다. 후후후~ 사실 내가 잘나긴 좀 잘났지.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입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저 쪽에 엘프 두 명이 더 있습니다.” 지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분들과 함께 진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예? 굳이 늦은 시간에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다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한 겁니다.” 지니의 말에 난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한 거라니? “아니, 왜요?” 지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라이레얼양에 의해 그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기왕이면 깨있는 사람이 적은 시간에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그건 그렇군. 쪽팔림은 적게 당하는 쪽이 좋으니. “그럼 당장 가지요.” “예.” 난 라이를 시켜 두 엘프와 말을 끌고 오도록 했다. 인디는 노처녀가 토닥여준 덕분인지 울음을 그친 상태였다. 지니는 말 없이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왠지 마음에 안 든다. “왜 자꾸 실실 쪼개요?”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감개가 무량해 그렇습니다.” 정말 그럴까? 난 지니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어 주었다. 야간 전투는 오래 전에 끝나 있었다. 밤이면 잠을 자야 하는 시간. 그렇기에 뒷정리를 하고 있는 병사들을 빼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고 있었다. 지니의 얼굴을 본 병사들은 별 다른 제지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난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인채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혹시 날 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 때마침 저쪽에서 불침번을 서는 두 명의 병사가 걸어왔다. 지니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수고 하십니다.” “아! 사일런스 백작님이시군요.”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끝나자 서로 갈길을 가려 하는데 한 병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분 혹시 아이언스 공작님 아니야?” 그러자 다른 병사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그런 것 같은데 그때 그 라이레얼이라는 용병한테 들은 인상착의랑 똑같은 것 같아. 저거 봐. 파란색 칼에 하얀 망토.” “오옷! 정말 그렇네.” 저것들이 날 언제 봤다고 알아보고 그래? 이런 젠장! 난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한 병사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아이언스 공작님 아니십니까?”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잘못 보셨군요. 전 아이언스 공작이 아닐뿐더러 그런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이걸로 무사히 넘어가는 건가? 하지만 내 인생에 그런 행운이 있을리 없다. “오빠는 아이언스 공작 맞아요! 오빠는 아이리스의 공작인 아이언스 히로에요! 오빠, 왜 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요? 거짓말은 나쁜 거예요! 라이는 거짓말을 싫어하는 착한 엘프에요!” “…….” 라이야, 넌 왜 이리 오빠를 곤란하게 만드니. 이 오빠가 그렇게 싫으니? 어린애의 헛소리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병사들은 라이를 믿는듯한 눈치였다. 이제 날이 밝으면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라이레얼과 그렇고 그런 사이에 있는 아이언스 공작이 이 곳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틀렸다. 날이 밝으면 소문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 날이 밝기도 전에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두 명의 병사는 손으로 나팔 모양을 만든 채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이 오셨다!” “모두들 일어나 봐! 라이레얼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 곳에 오셨어! 나와서 얼굴이라도 구경해 봐!” 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지니와 노처녀에게 그들을 말리라는 눈짓을 보냈다. 둘은 말리고 싶은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는 듯 했다. 특히 노처녀는 샘통이라는 듯 웃고 있었다. 저런 사악한! 어두운 밤하늘에 두 병사의 목소리가 울펴 퍼졌다. 두 명사는 목이 쉴 때까지 한참 동안을 소리쳤다. 하지만 막사 안에서 나오는 병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전투의 피로 때문에 전부 잠 들었나 보군. 정말 다행이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와아아-! 땅이 진동하는 듯한 이 대단한 함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함성과 동시에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정말 라이레얼과 그렇고 그런 행위를 벌인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곳에 오셨어?”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다. 대체 아이언스 공작이 누구길래 라이레얼과 그렇고 그런 짓을 했을까?” “정말 그렇고 그런 짓을 했을까?” “그렇다잖아. 그 리얼한 묘사를 생각해 봐.” “그런데 대체 누가 라이레얼과 그렇고 그런 행위를 벌였다는 아이언스 공작이야?” “혹시 저 사람 아니야?” “맞아! 저 사람이다!” 병사들에게 둘러 쌓인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땅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누가 날 묻어줘! 인디카즈네 (3) 수 만의 군사가 있는 이 곳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달랑 몇 명 뿐이었다. 키레아 왕, 사일런스 지니, 스웰리어 스윈, 그리고 루시아. 다른 사람들은 어디갔을까? 지니의 말에 따르면 군대가 여러 갈래로 갈라졌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 나는 작전 회의 때나 쓰일 법한 탁자 앞에 죄수처럼 앉아있었다. 그리고 다른 자리에는 나와 같이 온 엘프들과 내가 아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이렇게 주늑 들어야 하는 걸까? 그야 업무를 내팽개 치고 땡땡이 치다 왔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 평화 때문이다. 결코 놀러다닌 게 아니란 말이다. “오랫만입니다, 폐하.” 키레아 왕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피니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깨끗하고 밝은색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으로 변했고, 눈빛도 많이 달라졌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워진 것 같다. 뭐 전장에서 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난 고개를 돌리다가 루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발발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를 보는 것 같은 눈빛. 싸늘한 그녀의 눈빛에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난 바퀴벌레가 아닌데. 루시아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경멸해요.’ 날 경멸한다니? 어째서? 내가 뭘 잘못했기에? “…….” 서, 설마 라이레얼 사건 때문에? 그렇구나. 잘못했구나. 죽을 죄를 지었구나. 흑흑, 어째서 남자의 과거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거지? “그런데 무슨 일로 왔나?” 스웰리어 백작은 덩치에 어울리게 커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사방에 다 들리도록. 이 인간과 작전 회의하면 진짜 짜증날 것 같다. 군사 기밀을 전부 큰소리로 떠벌릴 것이 분명하니. “아, 예. 그게 말입니다.” 곤란해하는 나를 대신해 노처녀가 말했다. “라이레얼이라는 용병을 만나러 왔다는군요.” 순간, 장내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실제로 온도가 내려간 것 같은 느낌이다. 식어도 너무 식었군. 한기가 느껴질 정도야. 루시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럼 그 소문이…….”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노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라고 합니다.” “…….” 내 인생은 이제 끝났구나. 삶을 포기하고 나니 새로운 용기가 샘솟았다. 그것은 객기인가, 만용인가?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지금 내 상황이 그러했다. 난 그게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끝까지 한번 가보자. 어차피 버린 몸. 더 이상 무엇이 두려우리? 잠시 동안 멀뚱멀뚱 내 얼굴을 바라보던 스웰리어 백작은 감탄하며 말했다. “보기 보단 힘이 좋은가 보군.” “그 정도야 기본이죠. 하하하~.” 난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야 말로 내가 미쳐 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소문이라는 게 대체 뭐야?” 갈리온드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나에게 물었다. 갈리온드는 라이레얼의 아버지. 그것도 팔불출 아버지. 사실을 알게 되면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대 놓고 얘기하기가 민망했는지 루엔은 갈리온드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소곤소곤~. 잠시 동안의 밀담이 끊나자 갈리온드는 눈에 불을 켜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나에게 외쳤다. “너 이 자식! 네 놈이 내 딸 라이레얼한테 그렇고 그런 짓을!”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남녀 사이에 그렇고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요.” 갈리온드는 내 멱살을 붙잡았다. “뭐야? 내 딸한테 그렇고 그런 짓을 해 놓고 그딴 소릴 지껄여?” “제가 그렇고 그런 일을 한 게 아니라 그렇고 그런 일을 당한 거예요.” “이게 어디서 그렇고 그런 소리를!” 이 엘프 보기 보다 정말 다혈질이다. 불씨면 당기면 바로 활활 타오를 것 같은. 이런 엘프와 같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지금 피곤하다. 우리가 이렇게 소란을 떠는 사이 바깥쪽에서도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켜! 이 못 생긴 것들아! 나의 히로가 이 안에 있다잖아!” 내 맹세하건데 저 바깥에 있는 존재는 라이레얼이 틀림 없다. 목숨을 걸어도 좋아. 난 갈리온드를 밀치고 라이의 손을 붙잡았다. “라이야, 우리 함께 텔레포트를…….” 콰앙-! 그 순간, 가건물의 문짝을 부수며 한 여자가 뛰어 들어왔다. “어딨어, 히로?” 비록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매무새가 엉망이긴 했지만 본연의 아름다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 그녀의 이름은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레몬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라이레얼의 시선은 나와 갈리온드에게서 멈추었다. 순간, 갈리온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딸을 만난 기쁨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정말 얼마나 기쁠까? 오래전에 헤어졌던 딸을 이제야 만나게 되다니. 난 박수라도 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갈리온드가 물었다. “저 여잔 누구냐?” “…….” 못 알아 보는 건가? 아무리 어렸을 때 헤어졌다 해도 자기 딸을 못 알아보다니. 그러고도 아빠냐? “딸도 못 알아 보십니까?”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갈리온드는 입을 쩍 벌렸다. 어느새 라이레얼은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갈리온드는 재빨리 팔을 벌렸다. 부녀 상봉의 기쁨을 포옹으로 승화시키려는 건가? 하지만 나의 이런 예상은 틀렸다. 라이레얼이 갈리온드를 지나친 것이다. 황당해 하는 갈리온드와 역시 황당해 하는 나. 난 껴안은 채 볼을 비벼대는 라이레얼의 행동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랫만이야, 히로.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난 재빨리 주위를 둘러 보았다. 부럽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남자들, 그리고 얼음장 같이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루시아. “이, 이거 좀 놓고 얘기하지요.” “아잉, 무슨 소리야? 간만에 만났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내가 라이레얼과 포옹을 하는 것을 본 갈리온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버버버!” 갑자기 왠 정신지체아 흉내? 결국 서운함을 참지 못한 갈리온드는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딸 자식 키워봐야 다 헛 일이라더니…….” 그러자 루엔이 다가와 위로해 주었다. 어째 점점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 난 일단 라이레얼과 갈리온드가 부녀 상봉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했다. “라이레얼 저 엘프 좀 봐요.” “응? 저 엘프가 왜?” 라이레얼은 고개를 돌려 울고 있는 갈리온드를 보았다. “저 엘프 누군지 알지요?” “글쎄. 그런데 우리 아빠랑 굉장히 닮았다. 우리 아빠도 저렇게 생겼는데.” “…….” 바로 그 엘프가 이 엘픕니다. 갈리온드는 허공에 눈물을 흩뿌리며 절규하듯 외쳤다. “내가 니 아빠야!” 마치 스타워즈에서 다스베이다가 아나킨에게 했던 대사 같군. I am your father. 일명 내가 니 애비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나킨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은 라이레얼도 마찬가지였다. “저, 정말 아빠야?” “응.” 갈리온드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갈리온드의 모습을 살피던 라이레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아빠!” 그리곤 곧장 갈리온드에게로 뛰어갔다. 그 순간, 사방에 꽃잎이 휘날리며 온 세상이 축복으로 물들었다. 라이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반짝이는 종잇조각을 주머니에서 꺼내 허공에 뿌렸다. “아빠!” “라이레얼!” 갈리온도와 라이레얼은 힘차게 포옹을 하였다. 서로를 껴안은 채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 흑흑, 내 평생 이런 감동은 처음이야. 난 라이레얼이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해 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훌쩍, 너무 강동적이에요!” 짝짝짝-! 라이는 눈물을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걸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렇게 사람들의 환호 속에 감동적인 부녀 상봉을 마친 라이레얼은 포옹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그 동안 뭐 했어, 아빠? 나 보고 싶지도 않았어?” “흑흑, 미안해!” “아빠 없이 나 혼자 살아가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흑흑, 내가 죽일 놈이야.” 아, 저 궁상 또 시작했네. 이젠 진짜 짜증 난다. 무슨 엘프가 자꾸만 궁상을 떨고 그러냐? 아무튼 갈리온드와 라이레얼이 다시 만났으니 정말 잘 됐다. 이젠 차원의 열쇠를 받는 일만 남았나? 아니, 그 전에 9클래스를 마스터 해야 할텐데. 오랜만에 만난 부녀는 할 얘기가 많은 듯 했다. 그래서 우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직도 어두운 밤. 날이 밝으면 한참의 시간이 남았다. 난 지니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거닐었다. 난 지니에게 할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지니가 말했다. “저도 한 개비만 주십시오.” “…….” 이 자식이 지금까지 나한테 얻어핀 담배만 합쳐도 한 보루는 족히 된다. 나쁜 자식. 자기 돈으로 살 것이지. 난 담배 한 개비 가지고 쩨쩨하게 굴기 싫어 군말 없이 건네 주었다. 지니는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고 손짓을 했다. 불까지 붙여달라는 거다. 난 이를 박박 갈며 불을 붙여 주었다. “후우~.” 잘생긴 남자가 고뇌어린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피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멋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액션을 지니가 취하니 그 모습은 가히 행위 예술이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아! 대체 나는 왜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내가 지니의 반만 되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어도 지금쯤 온 세상 여자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텐데. 난 매서운 눈으로 지니를 노려 보았다. 비열한 자식. 그 동안 그 외모를 이용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유혹했을까? 손가락으로 세기도 힘들겠지. 아이씨, 솔직히 정말 부럽다. 행복하게 자유 연애를 즐기다니. 아마도 이 놈은 평생 결혼하기 힘들 거다. 왜냐면 바람둥이니까. 아니, 혹시라도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난다면 또 모르는 일이지. “…….” 아차! 지금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군. “우리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사일런스 백작님.” “얼마든지 하십시오.” 지니는 지금부터 내가 할 얘기를 대충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기에 난 주저 없이 바로 본론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크로니스를 아십니까?” 지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를 모를 리가 없지요.”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내 물음에 지니는 웃음을 지웠다. “그 질문이 의도하는 바를 잘 모르겠군요.” 난 담배를 땅에 뱉으며 인상을 썼다. “댁이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우리는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지니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하하하, 이거 전부 들통난 것 같군요.” “…….” 인정하는 건가? “누구한테 들었나요? 카이네이드? 에스카네스? 인디카즈네? 제 생각엔 아마도 에스카네스일 것 같군요. “…….” “좋습니다. 그럼 전부 얘기해 드리도록 하지요.” 지니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예전과 같이 부드럽고 느끼한 미소가 아닌 씁쓸하고 자조적인 듯한 냉소였다. “하지만 그 전에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요?”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존경하는 것은 저의 진실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 이 놈이 정말 날 존경하는 걸까? 미치지 않고서야 날 존경할 리가 없는데. “그리고 제가 한 일은 어디까지나 아이리스의 부흥을 위해서일뿐 결코 저의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재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 그러니까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재미 때문에 그랬다는 거군. 지니는 금발 머리를 멋지게 쓸어 넘기며 쓸쓸해 보이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였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를 돕고 있었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그의 시나리오 대로 아이언스 공작님을 이끌어 가는 것이었지요.” 지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난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문 채 계속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내가 묻자 지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요, 라니요?” “설마 그게 끝입니까?” “예.” “…….” 이 인간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그래서 뭘 받았나요?” “예? 받다니요?” “설마 공짜로 해주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요.” “그럼 뭘 받았는지나 말하요.” “받은 것은 없습니다. 전 맹세코 담배 한 보루 받지 않았습니다.” “…….” 저거 비리에 연류된 국회 의원들이 꼭 하는 말이다. 사과 박스 수십개를 받아 놓고도 한 다는 소리는 담배 한 보루 받지 않았다는 소리. 생각해 보니 이 놈도 정치인이다. “그럼 뭣 때문에 도왔나요? 날 엿 먹이기 위해서? 아니면,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전부 아이리스를 위해서였습니다.” “…….” “크로니스의 시나리오 중에는 아이리스가 자바스와 아토리아를 멸망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를 돕는 것이 곧 아이리스를 위하는 길이었습니다.” “…….” 그렇군. 역시 진정한 애국자. “그러니까 결론은 아이리스를 위해 절 이용해 먹었다는 거군요.” 내 말에 지니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용해 먹었다니요? 제가 어찌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이제까지 댁한테 속았다는 생각을하니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네요. 생각 같아선 남자답게 일 대 일로 맞짱을 뜨자고 하고 싶지만 제가 질게 뻔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분노에 찬 내 얼굴을 본 사일런스 지니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실망이 크셨나 보군요.” “큰 정도가 아닙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아니까 다행이네요.” “용서해 주실수는 없겠습니까?” “댁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아이언스 공작님 뜻 대로 하십시오.” “……?” 그 말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지? 설마 자신의 몸을 가지고 그렇고 그런 짓을 하라는 동성애스런 발언은 아니겠지? “아이언스 공작님의 기분이 풀리실 때까지 절 때리십시오.” 그런 뜻이었군. 지니는 각오를 한듯한 모습이었다. 두 팔을 늘어 뜨린 방어를 포기한 자세. 난 확인하듯 물어 보았다. “정말로 그래도 되나요?” 지니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절 용서해주시기만 한다면 이 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혹시 한 대 치면 열 받아서 절 죽이려 달려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몸에 손을 대겠습니까?” “진짜요? 진짜 때려도 돼요?” “마음껏 치십시오.” “…….” 이 인간 혹시 메이저키스트? 하던 일도 멍석 깔아놓으면 못 한다고, 보통 ‘마음껏 때리세요’라고 하면 더욱 때리기가 힘든 법이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언제나 상식과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창조적이고 반적적인 청년이 아니던가?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지니를 보며 적개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너 얼굴이 왜 그렇게 잘 생겼어? 뭘 믿고 그렇게 잘 생겼어? 니가 잘 생겼으면 다야? 못 생긴 놈들은 전부 죽으라는 거야, 뭐야? 게다가 얼굴 잘 생겼으면 됐지 왜 공부까지 잘해? 그리고 공부까지 잘하면 됐지 왜 운동까지 잘해? 너 예술적 감각도 풍부하다며? 이런 더럽고 비열한 자식! 너 같은 놈 때문에 다른 남자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는지 알기나 해? 니가 미소녀들을 전부 싹슬한 덕에 세상에 미소녀들이 남아나질 않아. 넌 이 세상 남자들의 적이야! 너 같은 놈은 없어져야 해! 생각하다보니 정말 열 받는다. 난 주먹을 들기에 앞서 한번 더 다짐을 받아냈다. “맞아도 후회 안 할거죠?” “물론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뜻 대로 하십시오.” 지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난 주먹을 날렸다. 퍼억-! 아싸, 소리 좋고! 턱을 정통으로 맞은 지니는 심하게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자세를 잡았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어쭈! 괜찮다 이거지? 난 다시 주먹을 날렸다. 퍼억-! 내 왼주먹이 지니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다. 하지만 지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오히려 내 손이 부서질 듯 아프다. “으윽!” 다년간 트레이닝을 통해 훈련된 근육이라는 건가? 역시 근육이 없는 부분을 노려야 해. “이제 끝났나요?” “아직 멀었습니다.” 지니는 날 보며 밝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내 염장을 지르기에 충분하였다. 이 자식! 내 주먹이 우습다 이거냐? “죽어!” 순간, 난 눈이 뒤집혀 지니에게 달려 들었다. 퍽- 퍽- 퍽- 퍽-! 그래. 내 오늘 이 자리에서 널 묻고 세상 모든 미소녀들을 차지하겠다. “다 끝나셨습니까?” “헥헥! 끝나긴 뭘 끝나?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 “시끄러, 임마! 니가 신경쓸 일 아니잖아. 넌 맞는데만 집중해.”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수고하십시오.” 난 계속해서 사일런스 지니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힘이 빠진터라 강인하던 나의 주먹은 솜방망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맞는 지니보다 때리는 내가 더 지치는 걸까? 그 것은 둘의 체력 차이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꾸준한 PT체조로 신체를 강인하게 단련한 지니와는 달리 나는 매일 같이 놀고 먹었다. 오늘 같은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하는 건데. 더 이상 버틸 체력이 없는 관계로 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헉헉, 제가 특별히 사일런스 백작님을 생각해…… 헉헉, 이쯤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하해와도 같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난 잠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숨을 골랐다. 젠장,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난 내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망토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러다가 잠들면 어쩌지? 난 정말로 잠들가 두려워 눈을 떴다. 그 순간 지니가 물었다. “이젠 어쩌실 겁니까?” “예? 뭘요?” “크로니스 말입니다.” “…….” 그런 민간함 사항에 대해 질문을 하다니. 난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싸울 겁니다.” “예?” “싸운다고요!” “크로니스와…… 말입니까?” “물론.” “크로니스는 레드 드래곤입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그럼 어떻게 싸우실 생각입니까?” “…….” 정말 어떻게 싸워야 하나? 열심히? 잘? 사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일단 크로니스와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차원의 열쇠, 그리고 둘째는 내가 9클래스 마스터가 되는 것. 하지만 내가 9클래스를 마스터한다고 해서 크로니스를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9클래스 끼리의 힘은 동등할테니 승패는 얼마나 적재적소에 마법을 잘 쓰느냐에 결정날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선 크로니스가 나보다 월등히 우월함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건 비밀입니다. 제발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다칩니다.” 난 적당히 둘러댔다. 지니는 내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을 끝마친 나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시아 공주님은 만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이 놈은 왜 뜬금 없이 루시아의 얘기를 꺼내 아픈 곳을 찌르는 걸까? “라이레얼이 소문을 그 모양으로 퍼트려 놨는데 어떻게 만납니까?” “정말로 그 이유 때문입니까?” “…….” 지니의 물음에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말로 라이레얼 때문일까? 사실은 더 큰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건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다. 난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진심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고, 그녀를 만나게 되면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지. “루시아 공주님을 만나십시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멋진 멘트를 날린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멋지게 몸을 돌렸다. 이제 아까 거기로 돌아가 라이와 함께 잠들면 되겠군. 저벅저벅. 왠지 무겁고 암울하게 들리는 발소리. 오늘은 라이를 꼭 껴안고 잠들고 싶다. 라이에게 자장가도 불러 주고 싶고, 이마에 뽀뽀도 해주고 싶다. 가끔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난 라이를 떠올린다.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라이의 얼굴을 떠올리면 어느새 외로움이 잊혀진다. 인디는 나를 9클래스 마스터로 만들어 준다고 하였다. 만약 내가 9클래스를 마스터하게 된다면 대체 어찌해야 하는 걸까? 예전에 난 9클래스를 마스터하면 반드시 라이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 놓겠다고 마음 먹었다. 미녀 엘프라니.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하지만 지금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만약 라이가 미녀 엘프가 되면, 귀여운 소녀 엘프는 어디로 가는 거지? 아아! 섹시하고 관능적인 미녀 엘프냐, 귀엽고 깜찍한 소녀 엘프냐? 라이는 나에게 있어서 딸이나 여동생과도 같은 존재. 어느날 갑자기 라이코스가 없어져서 라이가 슬퍼하듯, 라이가 없어지면 내가 슬플 것이다. 하지만 미녀 엘프가 나타난다면? 남자로서 어찌 미녀를 싫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예전의 라이는 정말 발군의 미모를 자랑했었다는데. 아! 라이냐, 라이미안이냐? “…….”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직 9클래스를 마스터한 것도 아닌데. 이런 걸 보고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하는 건가? “아이언스 공작님.” 들려온 짜증스런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노처녀가 서 있었다. 노처녀 옆에는 하프를 둘러맨 인디도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표정을 보아하니 마치 저에게 따질 것이 있는 듯한데.” 노처녀는 인디를 데리고 나의 앞에 다가섰다. “한 가지 물어볼테니 솔직하게 답해 주십시오.” “뭐든 물어보세요.” “정말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헛소리를 인디카즈네님께 하셨습니까?” “…….” 노처녀의 말을 들은 순간 난 찢어죽일 듯한 눈빛으로 인디를 보았다. 저 치사한 놈이 감히 고자질을 하다니! 인디는 나의 눈빛이 무서웠는지 몸을 움츠리며 재빨리 노처녀 뒤로 숨었다.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전 그런 말을 한적이 결코 없습니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는지 황당하기 그지없군요.” “인디카즈네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난 다시 한번 강렬한 눈빛을 인디에게 보냈다. 인디는 얼굴을 잔뜩 붉힌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놈이 거짓말을 했군요. 저 놈 말 믿지 마십시오.” 노처녀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인디카즈네님은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그런 망언을 하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전 모르는 일이라니까요. 야! 임마! 너 왜 그런 거짓말을 하고 그래? 너 죽고 싶어? 당장 이 자리에서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어서 빨리 진실을 밝혀!” 내가 윽박지르자 결국 인디는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흑흑, 죄송합니다.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난 손을 탁탁 털며 노처녀에게 말했다. “들으셨죠. 저 놈이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이제 저의 결백은 밝혀진 셈이니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노처녀에게 말을 마친 나는 울고 있는 인디에게 말했다. “넌 잠깐 나 좀 보자.” 인디는 잠깐 나를 보기가 싫은지 노처녀의 팔을 꽉 움켜 잡았다. 그리고 구원을 원하는 눈빛으로 노쳐녀를 보았다. 그 눈빛이 노처녀의 심금을 울렸는지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눈에 불을 키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마치 아이를 감싸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겠군.난 잠시 동안 노처녀를 노려보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뛰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 작전상 후퇴라고 부른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정확히 아는 자야 말로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있겠지. 한참 정신 없이 달리다보니 모든 것이 잊혀지는 느낌이다. 좋았어. 속도를 좀 올려볼까? 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세상 끝까지 달려가면 진짜 멋있을 텐데. “야! 오랜만이다!” 갑자기 들려온 친한척하는 목소리. 저 놈은 누구기에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께 반말을 하는 걸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 곳에는 어딘지 모르게 얼빵해 보이는 녀석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 “어, 너…….” 그는 다름 아닌 카웨였다. 라이레얼 패거리에 소속되어 있는. 그의 뒤에는 역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저 놈은 테커, 저 놈은 럴크, 저 놈은 카젠. 베네트 빼곤 라이레얼 군단이 전부 모인 셈이다. 강력한 놈들.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다. 난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카웨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어땠어? 아까 라이레얼과 만난 것 같은데 둘이 무슨 짓 했어?” 빠악-! 난 내밀던 손으로 녀석의 턱주가리를 가볍게 날렸다. “왜 때려?” “찌그러져라.” 난 발악을 하는 카웨를 가볍게 무시하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누구 찾아?” “베네트는 어디 갔어?” 내 물음에 라이레얼 패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 보았다. 뭐야? 베네트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혹시 죽은 건 아니겠지?”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카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게 말이야…….” “됐어! 내가 말할게.” 럴크는 카웨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그리고 얼굴을 잔뜩 붉히며 말을 꺼냈다. 럴크의 말을 다 들은 나는 놀라움음 금할 수가 없었다. “뭐? 베네트가 임신을?” 내가 큰소리로 외치자 럴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덩치는 산 만한 놈이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아까 먹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올 것 같다. 난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젠 애 아빠가 되겠군. 축하한다.” “아, 아니 뭐 축하까지야.” “얼마 후면 아기도 태어날텐데 무조건 살아남아야 겠군.” “당연하지! 난 반드시 살아 남을 거야.” “…….”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놈들이 제일 먼저 죽기 마련이다. 뭐, 그것이 자기 팔자라면 어쩔 수 없겠지. “그런데 라이레얼의 아버지가 왔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거 진짜야?” “맞아.” 카웨는 놀라며 다시 물었다. “그, 그 아버지라는 사람 정말 엘프야?” “그럼 엘프지 인간이겠냐?” “저, 정말?” “그래.” “진짜?” “그래.” “진짜 정말?” “그렇다니까! 너 귀가 맛이 갔냐? 왜 자꾸 물어?” 내가 소리치자 카웨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정말 엘프였다니. 라이레얼한테 정말 엘프의 피가 섞여 있구나.” “귀를 보면 알 수 있잖아.” “그거야 돌연변이일 수도 있는 거지. 라이레얼한테 정말로 엘프의 피가 섞여 있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는데.” “뭐가?” “생각해 봐. 엘프의 피가 섞였다면 어떻게 그런 특이한 성격이 나올 수가 있겠어?” “…….” 그건 그렇다. 라이레얼이 하프엘프긴 하지만 성격면으로 본다면 하프엘프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아니, 많다. “그렇지만 예쁘잖아.” 내 말에 모두가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남자들은 얼굴 예쁜 여자만 보면 환장을 하는 법. 라이레얼은 외모 하나로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아아~ 라이레얼의 성격이 외모의 반만 따랐어도 정말 좋았을 텐데. 만약 그렇다면 라이레얼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을텐데. 뭐,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크로니스와의 싸움이 끝난 다음 일테지만. “라이레얼은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어?” 테커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니? 아마도 오랜만에 상봉한 아버지랑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겠지. 간만에 만난 부녀니 할 말도 많을 테니.” “그런데 라이레얼 아빠는 어떻게 생겼어?” “엘프처럼 생겼어.” “잘 생겼어?” “뭐 잘 생겼다고 할 수도 있겠지. 라이레얼이 남자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면 돼.” 테커는 굉장히 감명 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이 놈이 왜 갈리온드의 생김새에 대해 궁금해하는 걸까? “아무튼 너희 같이 못 생긴 것들과는 격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지!” 내 말에 라이레얼 패거리들은 발끈하였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저렇게 발끈하다니. 못 생긴 것들이 성격도 안 좋군. 내가 못 생긴 것들과 놀고 있는데 저 쪽에서 예쁜 것이 걸어 오고 있었다. 하프를 꼭 끌어 안은 채 주춤주춤 걸어 오는 그의 이름은 인디. “미, 미녀다!” 인디를 발견한 카웨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다른 놈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너무 좋아하는 라이레얼 패거리 일동. 난 그들의 환호에 찬물을 끼얹었다. “저 놈 남자야.” “뭐?” “저 놈 저렇게 생겼지만 남자야, 자세히 봐봐. 가슴이 없잖아.” 잠시 동안 인디를 자세히 살핀 그들은 일제히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 카웨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남자여도 상관 없어!” 빠악-! 난 이런 놈들이 정말 싫다. 예쁜 남자따윈 필요 없어! 좀 안 생겼더라도 여자가 좋아. 인디는 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무슨 일이야?” “드릴 말씀이있습니다.” “무슨 말?” “그게…….” 인디는 사람들 있는 곳에서 말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난 그 표정을 금방 이해했다. 원래 내가 눈치 하나는 끝내주게 빠르잖아. 난 인디의 어깨를 감싸 안고 으슥한 곳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우리를 본다면 나를 굉장히 나쁜 놈으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순진한 여자를 꼬셔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는 악당. 후후후~ “…….” 누구야? 어떤 놈이 그딴 생각을 해? 그딴 생각을 하는 놈들은 전부 없애 버리겠어! 난 혹시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나, 해서 슬쩍 뒤를 돌아 보았다. 그 순간 보이는 저 많은 눈들. 저 놈들을 잠도 안 자고 뭐하는 걸까? 그들의 눈은 전부 인디의 어깨에 두른 내 손에 향해 있었다.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난 보란 듯이 인디를 내쪽으로 끌어 안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 숨어있던 눈동자들이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잠이나 자 못생긴 것들아.” 그렇게 말한 나는 인디와 함께 으슥한 장소로 걸어갔다. 두 명이서 한 조를 이룬 불침번들이 계속 돌아다니는 터라 사람이 없는 곳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적당한 곳에서 멈춰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디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어쭈! 감히 노처녀한테 고자질을 했다 이거지?” “고자질이라니요?”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순진한 눈빛. 마치 라이의 눈을 보는 것 같다. “이런 치사한 자식! 잘못을 해 놓고도 발뺌하겠다는 거냐?” “자, 잘못이라니요?” “노처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처녀에게 말했잖아.” 인디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을 크게 떴다. “말 하면 안 되는 것이었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째서죠?” “남녀 간의 애정이란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복잡하므로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여자는 어쩔 줄을 몰라하는 법이지. 상대 여자가 마음의 정리를 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야말로 기사도의 본분. 아무튼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사실을 밝혀선 안 된다는 거야. 그런데 왜 밝혀? 니가 뭔데 밝혀?” 인디는 하프를 꼭 끌어 안으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죄, 죄송해요.” 뭐 사과를 했으니 용서해 줘야겠지. “그런데 노처녀가 뭐라 그랬냐?” “전부 헛소리라 그러던데요. 그리고…….” “그리고?” “그런 헛소리를 한 입을 찢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역시 노처녀는 찔러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는 냉혈녀였어.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아이, 무서워~ “그거 다 거짓말이야. 여자들은 원래 자기 마음을 밝히기 싫어해. 그래서 노처녀는 날 사랑하고 있으면서고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하, 하지만 그 분께선 분명 아이언스 히로님을 가장 싫어하신다고…….” “그래? 얼만큼 싫어한데?” “바퀴벌레 같은 해충보다도 싫다던데요.” “…….” 그 동안 날 벌레로 보고 있었던 거냐? 정말 그런 거냐, 노처녀? “니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나타내기 마련이지. 잘 생각해 봐. 노처녀가 날 벌레 보다 싫어할 이유가 어딨어? 혼기가 꽉찬 처녀가 나 같이 핸섬하고 잘난 남자를 벌레 보다 싫어할린 없잖아. 그렇다면 노처녀는 어째서 내가 벌레 보다 싫다고 말했을까?” “그, 글쎄요.” “그건 노처녀가 날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지. 날 사랑하는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니 심술을 부리는 거야. 너도 알지? 왜 초등학생들은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장난을 많이 치잖아. 치마를 들추거나, 고무줄 놀이 하는데 고무줄을 끊거나.” 인디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잠시 후 인디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그래. 정말이야. 노처녀는 분명 날 사랑하고 있어. 그것은 바뀔 수 없는 사실이야.” 인디는 다리가 풀린 듯 자리에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다. “흑흑, 그럼 전 어떡해요?” “어쩌긴 뭘 어쩌겠냐? 그냥 포기해. 노처녀는 니가 좋아할만한 여자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다른 여자를 물색해 봐.” “흑흑, 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그 분을 향하고 있어요.” “그럼 돌려.” “흑흑, 돌릴 수가 없어요. 이젠 가만히 있어도 계속 그 분의 얼굴이 떠올라요. 그 분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쁘고, 그 분의 숨결만 닿아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흑흑흑.”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펑펑 우는 인디. 그 애처로운 모습에 난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참 난감하였다. 하지만 우는 사람은 달래주는 것이 인지상정.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너처럼 특이한 여자 취향을 가진 남자는 없었어. 세상에 반할 여자가 없어 노처녀한테 반하냐? 길거리 나가봐. 깔린게 여자야. 니가 잘 모르나 본데 세상에 반은 여자다. 여기도 여자, 저기도 여자. 게다가 요즘은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간 관계로 남자 보다 여자가 훨씬 많데. 정 니가 노처녀를 잊지 못하겠다면 내가 소개팅 한번 주선해 줄게. 세레나한테 말해 놓으면 귀족 영애들 섭외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야.” “흑흑, 다 필요 없어요. 저한테는 오직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님뿐이에요.” “…….” 우리는 이런 것을 보고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고 한다. 혹은 미쳤다고도 한다. 진짜 이젠 짜증이 난다. 드래곤이면 제발 드래곤 답게 행동해라. 싸가지가 없어도 좋으니 좀 당당하란 말이다! 제갈량처럼 행동해도 좋아. 제발 라이처럼만은 행동하지마! “니가 이러는 것은 한 순간의 객기일뿐이야. 사랑은 고스톱과 비슷해. 고스톱을 치다가 오링 당하면 정말 슬프지. 심지어는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어. 하지만 그 것을 극복하고 계속 치는 자만이 돈을 딸 수 있는 거야. 즉, 쓰리고 판 한번 터트리고 나면 오링 당한 판은 깔끔이 잊을 수 있다는 거지. 사랑도 마찬가지야. 지금 당장은 슬프고 아프겠지. 하지만 다른 사랑을 하다보면 그 슬픔은 잊어지기 마련이야. 자 그러니까 노처녀는 잊고 다른 사랑을 시작해.” “어흐흐흑!” 난 오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드래곤도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궁상을 떨 수 있다는 것. “그래. 계속 울어라. 너 좋다는데 내가 어쩌겠냐? 그럼 난 이만.” 더 이상 귀찮은 일에 말려들기 싫었던 나는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손. “왜 이래? 이거 놔.” “흑흑, 저 좀 도와 주세요.” “도와달라고?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 “흑흑…….” 사실 물을 것도 없다. 분명 노처녀와 잘 되게 도와달라는 것이겠지. 난 인디의 손을 매정하게 밀쳐냈다. “시끄러! 헛소리 그만하고 니 일이나 열심히 해. 날 9클래스 마스터로 만든다며? 그럼 빨리 만들어 줘!” “흐흐흑, 절 도와주시지 않으면 9클래스고 뭐고 없어요.” “…….” 난 기가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이 정도면 궁상이 아니라 땡깡이다. 어째 엘프나 드래곤이나 전부 이 모양이냐? “야, 임마! 너 왜 그래? 내가 지금 날 위해서 크로니스와 싸우냐? 난 지금 세계 평화를 위해 크로니스와 싸우려는데 넌 기껏한다는 소리가 여자와 잘 좀 ??어 달라고? 너 지금 제 정신이야?” 인디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흑흑, 몰라요. 아무튼 절 도와줘요. 도와주지 않으면 저도 안 도와드릴 거예요.” “…….” 이 것들이 세계 평화를 말아 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대체 나 같은 놈한테 뭘 그리 바라는 게 많냐? 하여튼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전부 마음에 안 든다니까. 인디카즈네(4) 하늘엔 달이 붉은 광채를 내 뿜고 땅에선 화톳불이 말없이 타오른다. 오늘 같은 날은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마련이다. 난 그 뒤숭숭한 마음을 다잡으며 노처녀가 있는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물어물어 노처녀의 거처로 가자 그 앞에 있는 위병들이 가로 막았다. 특이하게도 위병들은 여자였다. 뭐, 여자가 있는 곳이니 당연한가? “무슨 일이십니까?” “노처녀…… 아니,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위병은 내 얼굴을 잘 알고 있는지 별 말 않고 길을 비켜 주었다. 난 움직이지 않으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뜻 밖에도 노처녀 외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뭐야? 어째서 루시아가 이 곳에…… 설마 둘이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건가? 막사 안에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둘이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얘기? 그렇다는 것은 노처녀가 루시아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이런 빌어 처먹을 경우가 있나? “무슨 일이신가요?” 아무래도 어떻게든 인디와 노처녀를 붙여 줘야할 것 같다. 그래야 노처녀가 루시아에게 손을 뻗지 않지. “긴히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난 노처녀에게 말을 하면서 시선은 루시아에게로 향했다. 녹보석처럼 빛나는 맑은 눈동자와 별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백금발의 머리카락. 정말 너무 아름답다. 못 본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아. 아아~ 루시아 공주님~. 휙! 이건 루시아의 고개가 돌아가는 소리다. 나와는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남자의 과거는 정녕 용서 받을 수 없단 말인가? 한 순간의 실수는 평생의 업보로 남게 된단 말인가? 난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무슨 얘긴지 말씀이나 하세요.” 노처녀의 재촉에 난 얘기를 시작했다. 워낙 스케일이 큰 얘기였기에 얘기는 한참 동안 지속 되었다. 뭐가 스케일이 크냐고 묻지 마라. 인간과 드래곤의 사랑인데 그만큼 큰 스케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얘기가 끝나고 나자 노처녀와 루시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입을 벌릴 뿐이었다. “그, 그러니까 그 인디라는 남자가 언니를 좋아한다고? 그 사람이 남자였어?” 언니? 어째서 공주인 루시아가 노처녀를 언니라고 부르는 거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노처녀와 가까운 사이라는 건가? 언니, 동생 할 정도로. 난 루시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바로 대답해 주었다. “예. 그 놈이 생긴 것은 그렇게 생겼어도 분명한 남자에요.” 노처녀는 인디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얘기에 충격을 심하게 받은 듯 했다. 아니면, 저렇게 주름살까지 펴며 놀랄 필요는 없겠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노처녀는 다시금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헛소리 하실 거면 돌아가서 잠이나 자십시오.” “…….” 역시 노처녀가 그 얘기를 믿어줄리 없었다. 하긴 지금 나도 믿기지 않는데 노처녀야 오죽 할라고. “지금 제 말이 헛소리처럼 들립니까? 제 눈을 보고 말씀해 주십시오.” 노처녀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헛소리로 들리는데요.” “…….” 젠장, 세상 속고만 살았냐? “정말이라니까요!” “잠깐만요. 그런데 그 인디라는 남자는 뭘 하는 사람인가요?” 앗! 루시아 공주님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주시다니. 설마 그 사이에 화가 풀리신 건가? 난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그 놈이 그러니까 자기 말로는 가수래요. 아! 마법도 쓸 줄 알아요. 일명 마법 가수. 그리고 그 놈이 겉보기엔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 “아이언스 공작님!” 순간, 노처녀가 소리쳤다. 나와 루시아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요? 설마 비밀이었나요?” 노처녀는 말없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루시아는 재빨리 나에게 물었다. “드래곤이라니요?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가 어쨌다는 거죠?” 예쁜 여자에게 감히 무엇을 숨기리. 게다가 그 대상이 루시아라면. 지금 루시아는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확히닌 내 얘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지만 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어쩌면 이것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 동안의 오해를 말끔하게 씻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라이레얼로 인해 실추되었던 내 명예를 복구할 수 있는 기회. “그러니까 그 놈이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고,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가 그 놈이에요. 그래서 어쩌고저쩌고…….” 한번 말을 하기 시작하니 끝이 없다. 난 아는 것, 모르는 것 가리지 않고 모조리 다 루시아에게 말해 주었다. 얘기를 다 들은 루시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가 이 곳엔 무슨 일로 온 거죠?” “그건…….” 내가 아무리 입이 가벼운 놈이지만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법이다. 슬쩍 눈을 돌려보니 노처녀도 그 것이 궁금한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안 돼.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건 말할 수 없어. 난 그 짧은 시간 동안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나의 잔머리는 위기의 상황일수록 더욱 잘 돌아가는 법이지. “하하하! 사실 그 놈이 제 친구 입니다. 제가 원래 발이 넓거든요. 하하…… 그런데 왜 그런 눈빛들로 보시는지?” 두 여인의 싸늘한 눈빛. 노처녀야 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루시아는 거짓말이라고 느낀 것 같았다. “아무튼 인디가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죽을 것 같데요. 그러니까 웬만하면 한번 만나보세요.” “…….” “어째서 또 그런 눈빛으로 절 보시는 지……?” “…….” 노처녀는 말없이 날 밖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졸지에 밖으로 쫓겨나게 된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 진짜라니까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이다. 그런데 지금 나의 신용도는 한 마디로 개판. 진짜 사람 말을 이렇게 안 믿어 주다니. “저기…… 어떻게 되었나요?” “어! 너 여기 있었냐?” 어느새 나타난 인디는 하프를 꼭 끌어안은 채 내 대답을 기다렸다. 긴장, 초조, 불안. 인디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인디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내 대답을 기다렸다. 저런 얼굴을 보고 있으면 왜 자꾸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까? “올드 메이드 일루니아님께서는 너를…….” 꿀꺽! 인디의 목젖이 크게 울렸다. 이러다가 애 잡겠다. 빨리 말해주자. “굉장히 싫어하신데. 심지어는 나보다도 싫어한다던데.” “…….” 인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인디는 충격 때문인지 실신하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 난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심심해서 농담 한번 해본거야.” “…….” 내 말에 인디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인디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깜짝 놀랐잖아요. 전 정말 그런 줄 알고…… 흑흑.” 지금 예습을 해뒀으니 나중에 정말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충격을 덜 받겠지? 나는 자상한 남자. “역시 사랑 고백은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남한테 의지하면 될 일도 안 되거든.” “예?” “어서 일어나서 노처녀에게 가. 그리고 너의 마음을 너의 입으로 직접 고백하는 거야. 왜 이런 말도 있잖아.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자, 어서 용기를 내!” “하, 하지만…….” “시끄러! 남자는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법이야.” 난 인디를 일으켜 세워 억지로 노처녀가 있는 막사로 끌고 갔다. “저, 저기 같이 있어주세요.” “왜? 나보고 니 들러리나 서라고?” “혼자는 무섭단 말이에요.” “…….” 진짜 대책이 안 서는 드래곤이다. 대체 인생을 왜 그렇게 사니? 난 나 같은 놈에게 애원하는 인디가 너무 불쌍해 보여 같이 가주기로 하였다. 내가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노처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내 뒤에 있는 인디를 보고는 찡그린 인상을 활짝 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까 제가 한 말이 진실임을 밝히러 왔습니다. 왜냐? 그야 진실은 언젠간 밝혀지기 마련이니까요.”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쭈삣쭈삣거리는 인디를 불렀다. “아…….” 인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계속 몸을 뒤로 뺐다. “여자들은 우유부단한 남자를 싫어해. 자, 그러니까 어서 남자답게 말해.” 난 인디를 억지로 노처녀 앞에 세웠다. 노처녀와 루시아의 시선이 인디에게 향했다. 인디는 두 여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몸을 잔뜩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난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어서. 넌 할 수 있어. 남자답게 용기를 내. 빨리.” 하지만 나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인디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붉어지다 못해 새빨개진 얼굴, 오한이라도 걸린 듯 덜덜 떨고 있는 몸, 꼭 깨문 아랫입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노처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 에라, 이 자식아! 그냥 나가 죽어라! 내가 포기하고 고개를 절래 절래 내젓는 그 순간, 인디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막사가 떠 나갈듯한 커다란 외침. 그 외침이 사그라지고 나자 잠시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두 여인은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는지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흑흑…… 으아아앙!” 인디는 고백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는 인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했어, 임마! 넌 진정한 남자야! “엉엉엉!” 이 좋은 날 왜 울고 그러니? 뚝 그쳐! 노처녀는 인디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황급히 인디를 달래기 시작했다. “울지 마세요.” “흑흑.” 노처녀가 꼭 끌어안고 달래주자 인디는 조금씩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노처녀는 손수 소매로 인디의 눈물까지 닦아 주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시나요?” 노처녀의 다정한 물음에 인디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노처녀는 인디를 향해 생긋 웃음을 지었다. 이럴 수가! 순간, 당혹스러움이 나를 덮쳤다. 저토록 아름다운 웃음이라니? 언제나 조소와 냉소로 일관하던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님께서 저토록 아름다운 웃음을 지을 줄이야.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딱딱해 보이던 검은 뿔테 안경은 그녀의 지적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였으며 푸석푸석한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은 라이레얼의 레몬빛 머리카락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이마의 주름살은 연륜과 관록을 나타냈고, 날카로운 얼굴선은 도도함을 나타냈다. 뭐야? 눈의 착시 현상인가? 어째서 갑자기 노처녀가 저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거지? 노처녀…… 아니, 일루니아양. “나가서 얘기해요.” 노처녀는 인디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깝다는 생각이 팍팍 든다. 이제 보니 노처녀도 스타일이 꽤 괜찮잖아. 그 동안 왜 몰랐던 거지? 안에 남은 나와 루시아는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노처녀와 인디는 밖에서 무슨 얘기를 하려나? 남녀의 연애 사업만큼 재밌는 일도 없는 법. “갈까요?” 내 물음에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재빨리 막사 안을 나서 노처녀와 인디의 뒤를 따랐다. 저벅저벅-!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발소리만이 크게 울려 퍼진다. 저만치 걸어가는 노처녀와 인디. 난 그들의 모습을 살핀 다음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루시아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달밤에 아름다운 그녀와 미행이라. 후후~ 왠지 낭만적이군. “발 밑 조심하세요.” “알았어요.” 고양이처럼 걷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언제나 청초하고 차분한 모습인 그녀가 이렇게 귀여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라이보다 더 귀여운 것 같아. 미행은 그리 길지 않았다. 노처녀와 인디는 적당한 곳에 멈춰 서서 얘기를 시작했다. “들리나요?” “아니요. 잘 안 들리는데요. 좀 더 가까이 가야할 것 같아요.” “들키진 않을까요?” “절 믿으세요.” 난 은근슬쩍 루시아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난 그 손을 잡아 이끌었다. 주위의 지형물을 엄폐물 삼아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심인가요?” “……예. 저, 전 일루니아님이 정말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저 녀석 제법이다.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군. 노처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디카즈네님은 드래곤이지요?” “예.” “그런데 드래곤이 인간인 저를 사랑한다고요?” 인디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저,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흑흑.” 노처녀는 인디를 살며시 안아주며 토닥거려 주었다. “뭐라고 그러는 거예요?” 거리가 너무 먼 관계로 루시아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난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잘 되고 있는 것 같군요.” “허억!” 갑작스레 등장한 인물 때문에 우리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놀라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정말 깜찍하다…… 이게 아니잖아! “이봐. 댁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제 누님의 일인데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이 놈 혹시 스파이 아냐? 어떻게 그렇게 정보를 빨리 입수한 거지? 지니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자신의 누나와 인디를 살펴보았다. 이 빌어먹을 놈이 루시아와 단 둘의 미행을 방해하다니. “알았으면 그만 가봐.” “그나저나 정말 안타깝군요. 저는 제 누님이 아이언스 공작님과…….”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 임마! 한대 더 맞을래?” 내가 으름장을 놓자 지니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 테니 두 분께선 좋은 시간 보내시길.” 지니가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우리는 다시 노처녀와 인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디는 그 사이에 울음을 그쳤는지 반짝이는 눈으로 노처녀를 보며 말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아니, 결혼해 주세요!” 오오! 벌써 청혼까지. 저 녀석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루시아는 인디의 외침을 들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날 보았다. 이거 긴장되는 순간인데. 과연 노처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두근두근. 심장이 힘껏 펌프질을 하는 가운데 천천히 노처녀의 입이 열렸다. “전 결혼 같은 것에 대해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콰과광! 결혼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다니? 설마 거절인가? “언니는 대체 왜 저러는 거지? 그냥 받아들이면 좋을 텐데.” 루시아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흥분하고 있었다. 난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노처녀와 인디를 주시하였다. 인디는 하프를 꼭 끌어안은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제가 싫으신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흑흑, 몰라요! 결혼해주시지 않으면 전 그냥 콱 죽어버릴 거예요!” 저거 모든 청혼 중에서도 가장 안 좋은 방법이다. 저렇게 투정을 부리듯 청혼을 하면 세상 어떤 여자가 좋아할까? “좋습니다.” 앗! 노처녀는 좋다고 하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무슨 조건? 설마 결혼 지참금으로 100억원을 가져오라는 그런 얍삽한 조건은 아니겠지? “저는 아이리스의 귀족으로서 이제까지 오직 아이리스를 위해 힘써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도 미루어왔던 겁니다.”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결혼이 제 목표에 걸림돌이 되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인디카즈네님께서는 제가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도와줘? 도와준다면…… 잠깐! 인디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할게요. 저 뭐든 시키는 대로 잘할 자신 있어요.” “고맙습니다.” 이걸로 둘의 결혼이 기정사실화 된 건가? 인디는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키스해 달라는 제스처. 노처녀는 한 손으로 인디의 목을 감싸 쥐고 입술을 맞췄다. 쪽~ “어머!” 두 입술이 겹쳐지는 순간 루시아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달빛 아래 키스하는 연인. 아, 재수 없어! 잠이나 잘 것이지 왜 키스 같은 걸 하고 난리야? 그렇게 할 일이 없냐? 키스는 그리 길지 않았다. 둘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왠지 머쓱한 분위기. 난 지금이야말로 내가 나서야 할 때라고 판단하였다. “뭐하시려는 거예요?” 난 루시아에게 대답을 해주는 대신 그들에게 걸어갔다. 둘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듯 했다. 노처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 곳엔 어쩐 일이 십니까?”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오늘에서야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이 여자 정말 무서운 여자다. 노처녀의 생각이야 뻔하다. 인디는 9클래스 마법사. 만약 합류한다면 군의 전력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렇다. 노처녀는 지금 결혼을 미끼로 인디를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결혼을 미끼삼아, 사람을…… 아니, 드래곤을 이용해 먹으려고 하다니.” 노처녀에게 따지는데 인디가 내 옷을 붙잡았다. “전 상관없어요. 일루니아님께서 그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전 일루니아님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어요.” “…….” 인간적으로 너무 짜증난다. 생각 같아선 전부 없애 버리고 싶어. 어째서 이 세상엔 사랑이란 감정이 존재하는 거지? 그딴 세상은 개나 줘버려! “넌 드래곤이잖아! 드래곤이 인간 세상에 끼어들어도 되는 거야?”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일루니아님을 향한 제 마음이에요!” “그래서 9클래스 마법을 난무하겠다는 거야, 뭐야?” “일루니아님께서 그걸 원하시면 그렇게 할 거예요!” “…….” 너 잘났다. 만약 다른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 놈 탓이다. 아니, 노처녀 탓이다. 세상에 치맛바람으로 드래곤을 조종한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그래. 니들 좋을 대로 해라. 니들이 좋다는데 내가 어쩌겠냐? 난 고개를 내 저으며 등을 돌렸다. 이젠 포기. 둘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나중에 노처녀한테 속았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려도 그때 가서 날 원망하지 말도록. 루시아는 내 뒤를 따라왔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뭔데요?” “절 사랑하나요?” “…….” 참고로 말하자면 난 이런 종류의 질문이 가장 싫다. 왜냐? 그야 대답하기가 곤란하니까. “왜 대답을 안 해요?” 루시아는 걸음을 멈추고 추궁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마주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시선을 먼 곳으로 향했다. “그건 지금 말해드릴 수가 없네요.” “왜죠?” “제가 요즘 사정이 복잡하거든요.”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사정이냐고 묻는 듯한 모습. “여자관계도 복잡하시던데.” “…….” 하하~ 아픈 곳을 찌르시다니. 너무하는 군. “분명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제가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흐음, 그래요?”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눈빛. 사실 믿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시는 건가요?” “…….” 라이레얼한테 간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겠지? 그런데 라이레얼은 어디 있으려나? “이만 들어가 보세요.”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 “알았어요. 전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루시아는 몸을 휙 돌렸다. 숙소까지 바래다주지 않아도 괜찮으려나?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남은 일은 갈리온드에게서 차원의 열쇠를 받고, 인디에게 도움을 받는 것. 난 휘파람을 불며 걸음을 옮겼다. 예전에 라이레얼이 나에게 말했었다. 자신은 엄마보다도 아빠가 더 좋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라이레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파더 콤플렉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흑흑. 미안하다, 내 딸아.” “괜찮아, 아빠. 울지 마.” 토닥토닥~ 궁상맞은 엘프와 그 궁상에 장단을 맞춰주는 하프엘프. 하지만 주인공들이 워낙 미남, 미녀다 보니 그런 궁상마저도 아름다워 보인다. “아! 히로!” 라이레얼은 갈리온드를 내동댕이치고 나를 반겼다. 라이레얼은 내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히로? 역시 나보고 싶어서 온 거지?”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우웅, 우리 히로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 뭐, 미칠 것까지야. 난 울고 있는 갈리온드에게 말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딸과 재회하니 기분이 어때요?” “흑흑, 너무 기뻐.” 난 껴안은 채 몸을 비비는 라이레얼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줄 건 주셔야죠.” “흑흑, 뭘?” “차원의 열쇠요.” 내 말에 라이레얼은 의문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차원의 열쇠라니? 그게 뭐야?” “저도 잘 몰라요.” 라이레얼은 고개를 돌려 갈리온드를 보았다. “아빠, 차원의 열쇠가 뭐야?” “그건 말이지…….” 갈리온드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자 나와 라이레얼은 귀를 기울였다. “사실은 나도 잘은 몰라.” “…….” 그걸 지금 대답이라고 하는 거냐? 난 갈리온드의 멱살을 잡으려다 옆에 라이레얼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점잖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이건 처음과 얘기가 틀리잖아요.” 갈리온드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속은 놈이 바보지.” “…….” 이 엘프 인간 세상에 나와 많이 타락했구나. 하긴 나 같은 놈과 같이 다녔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이봐요! 댁이 저한테 그러시면 안 되죠. 누가 댁을 이곳까지 데려왔는데! 그리고 그것에 세계의 평화가 걸려있다니까!” “무슨 소리야, 히로? 세계 평화라니?” 아차! 옆에 라이레얼이 있었구나. “그러니까 그게…… 그런 거예요. 하하하~.” 라이레얼은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귓가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이 누나한텐 아무 것도 숨길 필요가 없어. 어서 말해 봐.” 라이레얼한테 말한다는 것은 텔레비전에 광고를 내보내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너 이 자식 지금 뭐하는 거야? 왜 남의 딸을 껴안아? 당장 그 손 못 놔?” 으음, 갈리온드의 시력이 상당히 나쁜가 보다. 이게 어디 내가 라이레얼을 껴안고 있는 걸로 보이나? 라이레얼이 나를 껴안고 있는 걸로 보이지. “아무튼 차원의 열쇠의 행방이나 알려 주세요.” “그 손놔! 감히 그런 더러운 손으로 내 딸의 몸을 만지다니.” “괜찮아, 아빠. 히로는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그, 그럼 넌 이 아빠가 좋니, 그 놈이 좋니?” “나? 나야 당연 히로가 더 좋지.” “흑흑, 내가 딸자식을 잘못 키웠어.” “언제 댁이 라이레얼을 키웠습니까? 어린 딸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어흐흐흑, 그래. 내가 죽일 놈이야. 나 같은 엘프는 죽어야 돼!” “죽기 전에 차원의 열쇠에 대한 행방이나 가르쳐 주세요.” “빨리 말해, 히로. 차원의 열쇠는 뭐고, 세계 평화는 뭐야?”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두 부녀 사이에 끼어서 뭐하라는 거야? 누가 날 좀 구해줘! 내가 속으로 절규를 하는데 그 순간 정말 날 구해줄 사람이 등장했다. 노처녀와 인디. 내 평생 노처녀의 얼굴을 보고 반가워하는 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히로님.” 인디가 나에게 다가오자 라이레얼은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뭐야, 이 계집애는? 너 당장 우리 히로 앞에서 꺼지지 못해!” “저, 저는…….” “시끄러! 닥쳐!” “흑흑, 죄송해요.”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인디카즈네님께 그 무슨 실례되는 말씀을. 당장 사과하세요.” “아줌마는 뭔데 끼어들어요?” “그러는 당신은 뭔가요? 용병이면 용병답게 싸움이나 열심히 하십시오.” “당신 내 딸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흑흑, 일루니아님께 화내지 마세요.” 아까보다 더 난장판이 되었군. 난 다만 차원의 열쇠를 찾고 마법 레벨을 업(up)하고 싶을 뿐인데 세상이 도와주질 않는 구나. 세상에 나처럼 불쌍한 영웅이 또 있을까? 제발, 도움은 안 줘도 좋으니, 방해만은 하지 말아다오. 싸움은 결국 인디가 주저앉아 펑펑 울고, 갈리온드가 삐져서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을 끝이 났다. “그런데 여기엔 무슨 일이야?” 내가 묻자 인디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히로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말해봐.” “제 레어에 같이 가주셨으면 해요.” “니 레어에? 왜?” “9클래스를 마스터하기 위해서요.” “…….”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건가? “지금 가자고?” “예.” 난 아직도 삐진 채 툴툴거리고 있는 갈리온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 좋아. 그런데 차원의 열쇠는 어쩌지?” 갈리온드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꾸했다. “걱정 마. 내가 책임지고 찾아 줄 테니.” 뭐 그렇다면야. “좋아. 그럼 니 레어로 가자.” “예.”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별 장면은 빼놓을 수가 없지. “훌쩍,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떠나는 거야, 히로?” “예. 그게 그렇게 됐네요. 미안해요, 라이레얼.” “아니야. 난 다 이해해.” “고마워요.” “그럼 우리 헤어지는 기념으로 찐하게 키스나 한번 하자.” “……사양하겠어요.” 난 라이레얼의 입술 공세를 막아내며 시선을 인디에게로 돌렸다. “흑흑, 일루니아님.” “울지 마세요.” “죄송해요. 언제나 일루니아님 곁에 있고 싶었는데.” “전 괜찮습니다.” “흑흑, 죄송해요. 절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아, 난 저런 광경을 보면 정말 세상 연인들을 전부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이 든다. 그래서 오직 악과 증오로만 점철된 세상을 만드는 거야. 사랑 따위는 없는. “그런데 그곳까진 어떻게 가지? 흑색숲이면 꽤 멀잖아.” “제가 텔레포트 마법을 쓸게요.” “그래.” 인디는 아직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노처녀를 향해 생긋 웃었다. 마지막은 웃으면서 끝내는 군. 재수 없긴 하지만 궁상떠는 것보단 낫네. “그럼 시작할게요.” 인디는 희고 가는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손은 서서히 검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선이 점차 빨려 들어간다. 마치 블랙홀을 보는 듯한 느낌. “텔레…….” “잠깐만요!” 왠지 저번과 같은 상황. 저번엔 노처녀가 뛰어 왔었지. 이번엔 누굴까? 뛰어 들어온 엘프는 나의 귀엽고 깜찍한 라이. “조심해!” 철퍼덕-! 내가 외쳤지만 한발 늦었다. 땅에 넘어진 라이는 까진 다리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아, 간만에 이 울음 소리를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우리 라이는 어쩜 이렇게 귀엽게 울까? “울지 마세요, 아름다운 그대여. 제가 노래를 불러 줄게요.” “노래는 무슨 노래? 그딴 거 필요 없어.” 난 하프를 키려는 인디를 밀치고 라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우리 라이 착한 엘프지? 착한 엘프는 울지 않아요. 그러니 뚝!” “훌쩍, 뚝!” 우리 라이는 어쩜 이렇게도 내 말을 잘 들을까? “그런데 무슨 일이니?” 내 물음에 라이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엥, 오빠 정말 너무해요. 어떻게 라이를 두고 가려고 해요? 이젠 라이가 싫어진 거죠? 으아아앙!” “아니, 싫어지긴.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 오빠는 오직 라이뿐이야.” “흑흑, 정말요?” “물론이지.” “그럼 라이도 데려갈 거예요?” “응. 세상 끝까지 같이 가자, 라이야.” 내 말에 라이는 눈물을 닦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내 목을 꼭 끌어안으며 외쳤다. “우엥, 라이는 감동했어요.” 뭐 감동까지야. 이렇게 해서 라이가 합류한 가운데 인디는 다시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 하였다. “텔레…… 흑흑, 안녕히 계세요, 일루니아님. 전 비록 몸은 떠나지만…….” “시끄러, 이 자식아! 마법이나 써!” “으아아앙! 전 일루니아님과 헤어지기 싫어요.” “…….” 이걸 드래곤이라고 믿고 있는 내가 바보 같다. 인디는 노처녀가 다독거려준 뒤에야 간신히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힘을 내서 다시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 하였다. “텔레포트.” 울먹거리는 인디의 목소리와 함께 희미해지는 주위 배경. 작동 방법이 편해서 마음에 든다. 젠장, 나처럼 구슬 들고 외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을까? * * * * * * 블랙 드래곤의 레어.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드래곤의 레어라면 모든 모험가들이 꿈꾸는 장소다. 그 곳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과 트랩이 있을까? 그 동안 내가 가본 드래곤 레어는 두 곳. 크로니스의 레어와 에스카네스의 레어. 그 두 곳 모두 드래곤 레어에 대한 내 환상을 만족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의 레어는 아니었다. “어흐흐흑. 보고 싶어요, 일루니아님. 저 그냥 다시 돌아갈래요.” “시끄러, 임마! 닥치지 못 해?” “흑흑.” “그런데 여기가 정말 레어야?” “예.” “혹시 여기는 별장이고 진짜 레어는 따로 있는 거 아니야?” “아닌데요.” 지금 내 앞에 있는 레어는 동화책에 나올법한 통나무집. “이 곳엔 예전에 라이와 오빠가 살았던 곳이에요. 이 곳에 다시 오게 되니 라이는 너무너무 행복해요.” 라이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난 다시금 울고 있는 인디에게 물었다. “정말 여기가 레어야?” “예.” 무슨 드래곤 레어가 숲 속의 통나무집이냐? 이게 말이 돼? “그럼 본체는 어디 있는 거야?” “예? 본체라니요?” “드래곤 몸 말이야. 원래 모습.” 인디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 제가 드래곤인데…… 저 지금 폴리모프 한 상태에요.” “……뭐?” 만들어진 육체가 아니라는 건가? 잠깐, 그렇다는 것은 설마……. “그럼 그 성격은 뭐야? 일부 인격체를 끄집어 낸 것이 아니야?” “저, 전 원래 성격이 이런데요.” 그랬구나. 원래 성격이 이 모양이었구나. “…….” 젠장! 말도 안 돼! 드래곤의 성격이 이 모양이라니! 이 놈 혹시 가짜 드래곤 아니야? 아아,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들어가자.” 난 인디를 일으켜 세워 통나무집으로 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라이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차 마시겠어요?” “그래.” 인디는 능숙한 솜씨로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럼 난 간만에 라이랑 좀 놀아볼까? “이리와, 라이야.” 난 침대에 걸터앉아 라이를 무릎 위에 앉혔다. “헤헤, 이 곳에 오니 어렸을 때 생각이 나요.” 지금도 충분히 어린데. 난 라이의 머리를 쓸어 주며 물었다. “어렸을 땐 어땠는데?” “라이가 마법을 처음 배울 때는 오빠가 참 많이 도와줬어요. 그리고 새로운 마법을 익힐 때마다 상으로 볼에 뽀뽀도 해주고 사탕도 줬어요.” “…….” 무어라? 저 놈이 그런 유아 성희롱을? 인디는 차를 다 준비했는지 쟁반에 찻잔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집이 마음에 드시나요?” “뭐 그럭저럭. 그런데 드래곤치곤 참 빈티 나게 사는 구나. 이런 곳이 레어라니.” “마, 마음에 안 드시나요?” “됐어. 일 얘기나 하자. 날 어떻게 9클래스 마스터로 만들어 줄 건지 말해봐.” “예. 그건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 난 인디의 생각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가 지금 하려는 것은 굉장히 간단하면서도 위험한 방법이었다. 왜 무협지를 보다보면 후반부에 주인공이 힘겨워할 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은거 기인이 나타나 ‘무림의 평화를 위해 싸워다오’ 등등의 말을 하며 자신의 내공을 넣어주지 않나? “…….” 그렇다. 지금 인디가 하려는 방법은 내공 주입과 비슷한 마법 주입.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지만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 빨리 너의 마법을 주입시켜 줘.” “……예?” “주화입마 같은 것 걱정하지 마. 난 널 믿어. 그나저나 정말 훌륭한 생각이 아닐 수 없군. 자신의 마법을 전부 나에게 넣어주겠다니 말이야. 뭐, 그것이 세계 평화를 위하는 일인데 어쩌겠어? 아무튼 난 니가 주는 내공…… 아니, 마법을 흡입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빨리 시행하도록 해.” 인디는 눈을 커다랗게 깜빡이며 물었다.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왜 그래? 내 몸 속에 니 마법을 넣어주려는 것 아니었어?” 인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요.” “…….” 아니었나? 무협지에선 보통 그렇게 하던데. “왜? 니 마법이 아까워서 그래?” 인디는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히로님께서는 이미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마법을 전부 전수 받았어요.” 아, 맞다. 그랬었지.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은 9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 하지만 지금 히로님께서는 5클래스까지의 마법밖에는 쓰지 못 하세요.” “그건 그렇지. 그럼 이제부터 열심히 수련을 하라는 거야?” “아마 수련을 한다면 단기간 내에 7, 8클래스까지는 돌파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9클래스는 힘들어요.” “그럼 어떡해?” “단기간 내에 9클래스를 마스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에요.” “그게 뭔데?” “그것은……." 아이리스::박성호 TITLE ▶1 :: 9클래스 - 01 sharpshooter(psungho) 03-04-17 :: :: 19148 달 밝은 밤. 사일런스 지니는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았다. 그는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세계 평화를 위해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우려 하시는데 대체 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지니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서든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도와드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 아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루니아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잘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내 동생이 어찌하여 그딴 인간을 존경하는 걸까?’ 일루니아는 아이언스 공작을 떠올렸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속 편한 인간. 그런 놈이 아이리스의 공작이라니…… 내가 아직 백작인데……. 이건 계급 체계에 문제가 있는 거다. 그런 낙하산 인사는 당장 중지시켜야만 한다. 그런 놈한텐 평민도 아까워! 그런 놈은 노예로 부려 먹어야 해! “빠드득-!” 일루니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를 벅벅 갈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일루니아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째서 그 인간만 생각하면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그 인간이 재수 없게 생겨서? 하긴 재수 없게 생기긴 했지. 그런 인간이 크로니스와 싸우겠다니…… 지나가던 하루살이가 ‘오래 살다보니 별꼴을 다 보네’ 라고 중얼거리겠다.” 한참 동안 하늘을 보며 분위기를 잡던 지니는 몸을 휙 돌려 자신의 누이를 보았다. 그리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존재는 아이리스에 크나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앙이 아니라?” “누님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난 그 인간 얼굴만 봐도 재수가 없어.” “아니, 아이언스 공작님의 얼굴이 어떻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당당한 풍체와 출중한 외모로 이미 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난 그게 정말 이해가 안 돼. 그렇게 안 생긴 놈한테 왜 그렇게 여자들이 달라 붙는지.” 아이언스 히로가 이 글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안 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미녀들이 달라 붙는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일루니아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부터 이 세계 여자들의 눈이 그렇게 낮아졌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이언스 공작님의 외모를 보지 마시고, 내면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진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일루니아는 짜증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내면은 더 개판이야.” 아무리 누이라지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계속해서 무시하니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지니는 짐짓 표정을 굳혔다. “누님께서 아무리 그러셔도 저 같은 것은 감히 아이언스 공작님의 발끝조차 따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까마귀라면 그분은 청안백우조입니다.” 청안백우조? 라이코스? 히로가 들었다면 상당히 열받았을만한 발언이었다. 일루니아는 기가 막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긴, 아이언스 공작 하는 짓이 그 매 하는 짓과 똑같지. 둘 다 바보 멍청이야.”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께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재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 일루니아는 그런 것이 있을리 없다고 생각하였다. 아이언스 공작이라면 무능력, 무책임, 무신경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그런 인간한테 재주는 무슨 재주. “그것은 바로 언변(言辯)입니다.” “……!” 순간, 일루니아는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언변이라? 그렇다!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아무 능력 없어 보이는 히로에게도 언변이라는 엄청난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 인간이 말빨 하나는 끝내주지…… 헉!” 말을 하던 도중 일루니아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그 인간을 인정한 것이다. 일루니아가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사이 지니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드디어 누님께서도 아이언스 공작님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하셨군요.”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일루니아는 열심히 부인했지만 지니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결국 제풀에 지친 일루니아는 짜증을 내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디는 잊고 아이언스 공작과 잘 해보라는 식의 말을 했다간 죽을 줄 알아!” 지니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어찌 제가 할 말을 그리도 정확하게 아셨는지요?” 그러자 일루니아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니가 할말이라는 게 뻔하지.” “아무튼 제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보시는 것이…….” “불가(不可).”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설마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님을 사랑하고 계신 겁니까?” 일루니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랑이라니? 그런 웃기지도 않은 감정 따위에 내가 얽매일리 없잖아! “내가 뭐하러 그런 계집애 같은 드래곤을 좋아해?” “…….” “뭐, 귀여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 일루니아는 인디의 모습을 떠올렸다. 계집아이처럼 예쁘게 생기고 수줍음을 잘 타는 드래곤. 드래곤 성격이 그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노처녀의 칙칙한 인생에도 봄이 오는 것인가? 사랑은 뒷전이고 언제나 일에만 매달리셨던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드디어 사랑에 빠졌단 말인가? 일루니아는 자신의 설레이는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 같이 합리적이고 지적인 여인은 사랑이라는 헛된 망상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지니는 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누님과 아이언스 공작님이 서로 만나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길 바랬 것만 누님의 뜻이 그러하니 더 이상 강요를 할 수가 없구나! 아무래도 두 사람은 인연이 아닌 것 같으니.’ 아마 이 얘기를 히로가 들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걸 이제 알았냐?’ 하지만 지니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었는지 탄식 섞인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일루니아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헛생각 그만하고 부대 편성이나 다시 해!” “알겠습니다, 누님.” 지금은 전시(戰時)였다. 이렇게 한가하게 장난이나 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둘은 언제 그랬냐는 바로 업무 전선에 복귀하였다. 참모들에게 올라온 서류의 양은 장난이 아니었다. 일루니아는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고, 자신의 능력을 벗어났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은 전부 지니에게 떠넘겼다. 귀찮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분업을 하는 편이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모든 서류가 어렵게 보였다. 어째서일까? 일루니아는 그것이 아이언스 공작 때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씨익 웃고 있는 아이언스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재수 없어! 어쩜 그렇게 인간이 재수 없게 생길 수가 있을까? 아아~ 정말 너무 마음에 안 들어. 만약 눈 앞에 있다면 트집을 잡아서 한 대 패줄텐데.’ * * * * “에취!” 갑자기 왜 재채기가 나오는 걸까? 보통 이런 경우 누군가가 내 욕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원래 사람들의 특징이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라면 왕까지 욕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도 나 없는 곳에서 욕하는 것은 눈 감고 넘어……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감히 내 욕을 해? 당장 튀어 나와! 없애버리겠어! 으음, 감히 훌륭하신 아이언스 공작님을 뒤에서 욕하다니. 대체 그 놈의 정신 상태는 어떻게 되 먹은 거지? 이건 반역이야! “왜 그러시나요?” 인디는 나의 박력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보았다. 겁 먹은 토끼 마냥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인디를 보고 있자니 정말 귀엽다는 생각이든다. 게다가 인디가 좀 예쁘게 생겼나? 언뜻 보기에도 미녀로 보이고, 자세히 뜯어 보면 절세미녀로 보인다. 외모로만 따지면 라이레얼 뺨 칠 정도가 아닌가? 나도 남자인지라 이런 외모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이며 가슴이 심하게 설레이는 것을 느낀다. 원래 남자들의 본성이란게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디는 어디까지나 남자다. 남자. 이 얼마나 칙칙한 단어인가? 아아~ 남자라니. 저 외모를 가지고 남자라니. 이건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 놈을 병원으로 데려가서 성전환 수술을 시켜? “…….” 그냥 폴리모프 하는게 빠르겠군. “왜, 왜 그러세요?” 내가 자신을 계속해서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부담되나 보다. 인디는 정말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 부담스러워 하는 걸까? 만약 내가 아니라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여사께서 빤히 쳐다보았어도 저리 부담스러워 했을까? “하던 얘기나 마저하자.” “예.” 그런데 아까까지 무슨 얘기를 했더라? 맞아. 9클래스 마스터에 대한 얘기를 했었지. “…….” 9클래스 마스터. 그것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신의 경지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디는 지금 내가 그 경지에 올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강해지는 것에 대한 열망.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특히 남자라면. 강한 것은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면 한 대 맞게 생겼는데 누가 아름답지 않다고 말을 하겠는가? 그럼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나는 9클래스 마스터가 된다. 그러면 강해진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고로 나는 아름다워진다. 으음, 굉장하군.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구미가 당긴다. 강해짐과 동시에 아름다워질 수 있다니. 역시 9클래스 마스터란 좋은 것이여. “자, 빨리 말 해! 어떻게 하면 내가 9클래스 마스터가 될 수 있어?” “그것은…….” 인디는 말을 잇지 않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난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가 말을 하길 기다렸다. 라이도 9클래스 마스터란 말에 흥미가 생겼는지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게 나와 라이는 인디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인디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말을 안 하는 거지? 설마 그것이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걸까? 만약 그것이 비밀이라면 난 더욱더 그 얘기를 들어야 했다. 원래 전혀 쓸모 없는 얘기라 하더라도 비밀이라고 하면 괜히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것이 정말 중요한 얘기라면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인디는 다시 뜸을 들였다. 마치 내 복장을 뒤집어 놓기로 작정을 한듯. 이 거 지금 나한테 개기는 거 맞지? 난 당장이라도 인디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상대가 드래곤인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할 것 아닌가? 그래. 일단 타일러 보자. “크로니스와 싸울 사람이 누구지?” “그야 아이언스 히로님이시지요.” “그래. 그런데 크로니스와 싸우려면 능력이 어떻게 되야지?” “9클래스 마스터가 되어야지요.” “그래. 그럼 누가 9클래스 마스터가 되야 하지?” “그야 아이언스 히로님이시지요.” “그래. 그럼 어서 말해봐.” “예? 뭘……?” “이 자식이!”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벌떡 일어나 인디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인디에게 외쳤다. “당장 말해, 임마! 맞고 불래? 죽을 때까지 맞고 불래? 그냥 불래?” “흑흑, 저한테 왜 이러시는 지요?” “우에에엥! 오빠들 싸우지 마세요!” 라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싸우지 말라고 애원한다. 다른 엘프도 아니고 나의 귀여운 꼬마 엘프 라이가. 난 라이의 말이라면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줄 준비가 되어 있다.(물론 실제로 빼달라고 하면 당장 뒤통수를 후려칠테지만) 하지만 이 놈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아? 드래곤이면 다야? 드래곤이면 인간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흑흑, 말할게요. 전부 말할게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제야 난 인디의 멱살을 놓아 주었다. 인디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내가 쥐고 흔들었기 때문인지 머리는 심하게 헝클어져 있고, 옷은 한쪽 어깨로 흘러내렸다. 하얗게 드러난 인디의 속살을 보니 심히 마음이 동요 된다. “흑흑흑.” 열심히 흐느끼는 저 포즈. 그야 말로 청순가련형의 대명사가 아니겠는가? 루시아가 저러면 굉장히 어울릴 것 같은데. 보통 이런 경우 선택 법은 두 가지다. 흘러내린 옷을 끌어 올려주며 달래주거나, 그냥 덥치는 것. 덥쳐? 남자가 뭐하러 남자를 덥쳐? 난 인디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그리고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어이, 좋은 말로 할때 불지?” “흑흑.” “더 심한 꼴 당하고 싶어? 니가 아직 조직의 쓴맛을 덜 봤구나. 라이야, 연장 챙겨라.” “우에에엥, 그만하세요. 오빠 무서워요!” 라이는 방 한구석에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사방에서 신파극이 벌어지고 있으니 정말 짜증을 금할 길이 없다. 생각 같아서는 ‘눈물 한 방울만 더 나오면 죽어!’라고 소리치고 싶다만 잘난 내가 참자. 그나저나 어째서 인디는 그것에 대해 언급을 기피하는 걸까? 어째서 다 말할 것 같다가 입을 다문 걸까? 무엇 때문에? “우에에엥~!” 일단은 우는 아이나 달래줘야겠군. 난 라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헤헤 웃었다. 단순한 것 같으니라고. 그 사이 인디는 눈물을 그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옷고름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크로니스를 막기 위해선 아이언스 히로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 합니다. 9클래스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9클래스뿐이기에 히로님께서는 9클래스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 그런데 뭐가 문제야?” “문제는 히로님께서 그 힘을 제어할 수 있느냐, 입니다. 히로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마법은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마법의 성장은 곧 정신의 성숙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지요. 저희 드래곤들은 인간처럼 마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법을 타고 납니다. 하지만 드래곤이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마법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자라면서 천천히 스스로 습득을 하지요. 마치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요.(인간은 누군가가 가르쳐줘야만 배울 수 있지만 드래곤들은 혼자서 배웁니다. 그것은 차라리 본능에 가깝겠네요) 정신적인 성숙이 완료된 시점에 이르면 9클래스를 마스터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헤츨링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완전체가 됩니다.” 오호, 그랬었군. 본능이라? 역시 드래곤은 편한 종족이었어.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익힌다니. 나도 다음 생애에는 드래곤으로 태어나고파~. “드래곤에게 마법은 본능이지만, 인간에게 마법은 도구입니다. 이 차이점을 아시나요?” “당연 모르지.” “…….” “설마 내가 알거라고 생각하고 물은 거니?” “…….” “하던 얘기나 계속 해.” 인디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간단히 말씀드리지면 인간이 9클래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뭐?” 내가 지금 잘못들은 건가? 불가능이라니.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는데, 불가능이라니? “그럼 이그리드는 뭐야?” “그 인간은 좀 특별한…… 아니, 굉장히 특별한 경우입니다. 아니, 사실은 말도 안 되는 경우입니다.” “어째서? 드래곤만 9클래스 마스터 되고, 인간은 9클래스 마스터 되지 말란 법이라도 있어? 니들이 그렇게 잘났어? 드래곤이면 다야? 왜 인간을 무시하고 그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인간은 드래곤보다 열등한 종족이다. 각 종족은 모두 평등하다고 외치고 싶지만 어쩌겠냐? 사실이 그런 것을. 각 종족에게서는 서로 무시할 수 없을만한 종족적 특성이 있다. 드래곤은 완벽한 존재고, 엘프는 자연 친화적이고, 드워프는 손재주가 있고, 인간은 다양성이 있다. 이러한 특성은 비교하기가 힘든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드래곤을 동급에 놓고 볼 수는 없다. 호랑이와 고양이를 동급에 놓고 볼 수 없듯이 말이다. 드래곤은 신에 가장 근접한 존재. 그리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적인 존재다. 하지만 인간은 무엇인가? 이 드넓은 대륙에서 땅따먹기나 하는 존재가 아닌가? 드래곤 브레스 한방이면 전부 먼지가 되어 날아갈 놈들이 땅따먹기라니. 하지만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의 이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세우고 전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옮던 그르던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삶이다. 드넓은 우주를 놓고 본다면 작은 별의 작은 대륙에서 더 작은 인간들끼리 땅따먹기 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겠냐만은 그래도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크나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 그것이 전체적으로는 아무 일도 아니더라도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은 드래곤의 발끝도 못따라가는 존재다. 하지만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이나 드래곤이나 하나의 생명체일뿐이다. 그 둘은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의지에 의해 행동한다. 둘은 대등한 관계인 것이다. 아아~ 복잡한 문제로다. 이 복잡한 문제에서 내가 내리는 결론은 간단하다. 내 삶은 내 것이다. 드래곤따위한테 휘둘릴만큼 내 삶이 만만하진 않단 말이다. 그렇기에 난 9클래스를 마스터 해서 크로니스와 싸워야 한다. 내 삶을 되찾기 위해, 그리고 내가 이그리드 보다 못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9클래스는 정신적 완성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경지입니다.” “하지만 이그리드는 해냈잖아!” “그건 그 인간이 특별한 경우라니까요!” 내가 언성을 높이자 자연 인디도 언성을 높혔다. 말싸움은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다가 서로 치고 받고 싸우기 마련이다. 인디는 소리 친 것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히로님께서는 9클래스를 마스터하시는 것이 힘들뿐더러 마스터 했다 하더라도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합니다.” “…….” 그것은 하나의 선고나 다름 없었다. 마치 ‘넌 안 돼!’ 라고 윽박지르는 듯한. 난 머리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 마디로 스팀 받았다. 하아~. 한번 끓어오른 열은 쉽게 식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이 놈을 한 대 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이 놈을 친다 하더라도 무엇이 바뀌겠나? “그래서 결론이 뭐야? 능력이 안 되니 포기하라는 거야?” “방법은 있습니다.” “……!” 방법이 있어? 그럼 이제까지 왜 질질 끈 거야? 쓸데 없는 얘기만 하며. 사람 복장만 긁으며. “대체 무슨 방법인데? 아까처럼 뜸 들이면 진짜 죽을 줄 알아.” “그것은…….” 또 다시 뜸을 들이는 인디. 그 순간 나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놈이 날 열 받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아까도 말했다시피 인간 중에선 오직 이그리드만이 9클래스를 마스터 하였고, 그만이 9클래스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참을 머뭇거리던 인디는 드디어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나와 라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얘기를 경청하였다. 상당히 충격적인 얘기였다. 결국 난 내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놈이었나? 말을 마친 인디는 입을 다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나한테 미안하다는 듯이. 그리고 라이는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보았다. 마치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듯이. ‘오늘부터 열심히 수련하세요. 잠도 자지 말고 24시간 꼬박 수련하면 언젠간 9클래스 마법을 쓸 날도 오겠죠’ 라는 말을 들었어도 이렇게 화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그리드라고? 너도 크로니스와 똑같은 놈이야. 쳇, 결국 나는 그 늙은이의 대용품에 불과했던 것인가?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올게.”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어두운 밤 하늘에 달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덤으로 별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반짝반짝~! 저 반짝이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더욱더 비참한 기분이 든다. 이 세계에서 나란 존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그리드의 전인이라는 것이 나의 전부일까? 달빛을 받은 시냇물이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난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손을 넣어보니 얼음장처럼 차갑다. 온수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차다. 그래. 이 정도면 내 머리를 식힐 수 있겠군. 난 숨을 크게 들이마쉰 다음 머리를 물속에 집어 넣었다. 차갑다. 머릿속까지 얼어버릴 것만 같다. 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쯤이 되어서야 난 고개를 들었다. “푸하-! 헥헥~.” 아, 요즘 담배를 많이 줄였는데도 폐활량이 예전 같지 않다. 옛날엔 물속에 머리 박고도 한달은 너끈히 버텼는데. 으음. 믿거나 말거나. 좀 과격한 방법이긴 했지만 머리는 확실하게 식었다. 이젠 모든 것을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너무 춥다. 덜덜덜~ 폼 잡은 것까지는 정말 좋았다. 그런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천천히 옷을 적신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온다. 휘이잉~ 다른 것은 하나도 안 건드리고 내 몸만 훑고 지나간다. 내가 미쳤지. 달밤에 냉수마찰을 하다니. 수건이라도 하나 가지고 나올 거 그랬나? “이걸로 닦으세요, 오빠.” 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나온 라이가 서 있었다. 라이의 두 손에는 두툼하고 따뜻해 보이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라이야.” “제가 닦아드릴 게요.”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러자 라이는 수건을 펴 조심스럽게 내 머리와 얼굴을 닦아 주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꼼꼼히 닦는 모습을 보니 정말 귀엽다. 라이는 내 머리와 얼굴을 다 닦자 내 옆에 수건을 깔고 그 위에 앉았다. 난 한 손을 라이의 어깨에 둘렀다. 그러자 라이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몸을 기댔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이는 잘 모르겠어요.” 기분이 우울하다. 라이도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날씨가 좀 춥다. 난 라이의 볼에 손을 대보았다. 내 예상대로 라이의 볼은 차가웠다. 난 라이가 춥지 않도록 라이의 몸을 보듬어주었다. “별이 참 밝아요.” “그래.” “너무너무 예쁜 것 같아요.” “응.” “아! 오빠 우리 별 세요.” 라이는 내 기분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활달하게 말했다. 난 웃음을 지었다. 으이구, 귀여운 것! 정말 너밖에 없다. “별 하나, 라이 하나, 별 둘, 라이 둘, 별 셋, 라이 셋…….” 우리는 그렇게 별을 셌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런 때 사진 한방 찍어야 하는데. 라이와 나의 추억을 영원히 남기도록. 뭐 상관 없으려나? 추억은 가슴 속에 남으니.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유치하게 뭐하는 짓이냐? 아이리스::박성호 TITLE ▶2 :: <아이리스 12권> 9클래스 - 02 sharpshooter(psungho) 03-04-19 :: :: 22060 내가 아이언스 이그리드를 만난 것이 언제였더라? 꽤 오래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쉽게 잊을 수 있는 성질의 얼굴은 아니니. 그와의 만남은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어찌보면 찰나일 수도 있는. 하지만 그는 내 인생에서 크나큰 비중을 차지한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한 남자가 이 세상에 건너와 드래곤을 만났고, 그 드래곤이 마법진을 크로니스에게 보여 주었고, 크리니스는 그것을 이그리드에게 보여주었고, 이그리드는 그 마법을 해독했고, 금화를 그 세계로 보냈고, 길을 걷던 내가 그 금화를 줏었고, 이 세계로 소환 되었다. 우연에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냉정하게 계산을 해보면 이거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모르긴 몰라도 로또 복권 1등 당첨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 당첨 되었다. 이걸 재수 없다고 해야할지, 재수 있다고 해야 할지? 나는 그에게 언어와 마법을 물려 받았고, 그 과정에서 그의 기억의 일부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즉,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일정 부분 그를 닮아가게 된 것이다. 크로니스는 이그리드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이그리드와 닮았다.(정확히 어떤면이 닮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크로니스는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관심이 지나쳐 스토커 수준이라는 데에 있다. 스토커(stalker). 사전적인 의미는 비행을 목적으로 하는 미행자이다. 결코 좋은 의도를 가지고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스토커를 만나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냥 따라다니건, 말건 신경쓰지 말고 내버려둬? 천만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으슥한 밤길을 갈 때 뒤에서 덥치면 어쩌려고? 스토커는 반드시 처리를 해야 한다. 타일러서 돌려 보내건, 감방에 집어 넣건, 칼을 입에 물려 주건. 선생님이 ‘넌 누구야?’ 라고 물으면 ‘난 나야!’라고 대답하는 놈들이 아주 가끔 있다.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해봐라. 그러면 딱 죽기 직전까지 맞고 부모님 모셔와야 한다. ‘난 나야.’ 이건 사실 어법에 어긋난 말이다. 이게 ‘A는 A이다’ 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정의(定義)란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규정함을 뜻한다. 정의를 내릴 때는 동음어 반복을 피해야 한다. ‘사람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으면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입니다 라는 식으로 대답을 해야지 ‘사람은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같은 맥락으로 ‘사람은 어떻게 생겼나요?’ 라고 물으면 ‘몸통에 사지(四肢)와 머리가 붙어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해야지 ‘사람 같이 생겼어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결론은 ‘난 나야’라는 말은 어법에 어긋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외치고 싶다. “난 나야!” 그렇다. 어법이고 뭐고를 떠나 나는 나다. 나는 나로 정의됨으로써 나는 나의 존재를 정의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내가 될 수 없으며 나 역시 그 누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주위에선 내가 이그리드가 되길 바라고 있다. 그들은 나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그리드를 원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이그리드의 대용품에 불과하다. 젠장! 인디가 말한 9클래스 마스터 방법은 간단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이그리드를 끄집어 내는 것이다. 9클래스를 마스터할 수 인간은 이그리드뿐이고, 9클래스 마법을 쓸 수 있는 인간은 이그리드뿐이니 내 기억 속에(정확히는 잠재 의식 속에) 있는 이그리드의 인격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내 인격이 잠재 의식 속으로 숨어버리고 그 자리를 이그리드의 인격이 차지할 수도 있고, 내 인격과 이그리드의 인격이 융합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그리드의 인격과 내 인격이 충돌하여 이중인격자나 백치가 될 수도 있겠지. 어떻게 되는 내가 나로서 있을 확률은 상당히 낮다. 선택권은 결국 나한테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힘을 얻느냐, 아니면 안전을 위해 힘을 포기 하느냐? 기왕이면 안전하면서도 힘을 얻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나의 욕심일 뿐이다. 나는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한채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이그리드와 크로니스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크로니스는 빨간 긴머리의 엘프, 즉 처음 본 그 모습 그대로였고, 이그리드는 쭈글쭈글한 늙은이가 아닌 잘 생기고 멋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나만큼 잘 생겼군.(실제로는 지니만큼 잘 생겼다) 둘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난 그 대화를 듣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나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니. 대화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계속 되었다. 그들은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다정한 친구처럼 서로를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 보았다. 난 그들의 대화를 열심히 새겨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눈을 뜨는 순간 머릿속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으니. 내가 눈을 떴을 때, 향긋한 음식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이곳은 예전에 인디와 라이가 동거를 했던 곳이다. 동거……. 으음, 왠지 모르게 불순한 분위기를 풍기는 단어다. 아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감히 나의 귀여운 라이와 동거를 하다니.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그래도 드래곤과 동거를 했으니 7클래스 마스터가 됐지, 나 같은 놈과 동거했으면 지금쯤 시내 어느 술집에서 고스톱이나 치고 있을 것이다. 라이는 인디의 다정한 보살핌 덕분에 이렇게 예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그럼 인디에게 고마워 해야 하나? 라이를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으음, 내가 라이를 입양해도 정말 잘 키울 수 있을까? 심히 걱정 된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군.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인생 살기 정말 힘들다. 난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 옆에는 어린이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크기를 보니 라이가 누우면 딱 알맞을 것 같다. 그 침대 위에는 예쁘게 갠 이불이 놓여져 있었다. 라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도 잘 개는 착한 어린이였던 것이다. 인디가 교육 하난 정말 잘 시켰어. 하지만 난 그런 착한 어린이가 아니기에 굳이 이불을 개지 않았다. 이 집은 예전에 라이와 인디 둘만이 살았다. 그렇기에 침대도 두 개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침대 하나를 차지 했으니 인디는 잠을 자지 않았거나 바닥에 누워 잤을 것이다.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는 인디와 라이가 웃고 떠들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라이는 샌드위치 너무너무 좋아해요! 오빠가 해준 샌드위치는 너무너무 맛있어요!” “고맙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해주니 저도 기쁘네요. 거기 양상추 좀 집어 주시겠어요?” “예. 여기 있어요, 오빠.” “고맙습니다.” 흑단 같은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미인이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고, 그 주위를 회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어린 엘프가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난 그 모습을 해치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어! 오빠, 일어나셨어요?” 라이는 문 앞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날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 이렇게 예의 바를 수가! 가정 교육이 잘된 참한 아이로다! 난 감탄을 하며 라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잘잤니, 라이야?” “예, 오빠.” 라이의 인사가 끝나자 인디는 요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잠자리는 편안 하셨는지요?” “그래. 배고프다. 아침은 언제 나오냐?”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거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인디는 빠른 손놀림으로 샌드위치를 자르고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렸다. 그리고 국통에서 수프를 뜨고 우유를 컵에 따랐다. 아침 식사로 샌드위치라? 요즘들어 식단이 점점 서구화되는 것 같아 한국의 음식이 참 그립다. 특히 김치. 한국 사람의 입맛은 자극적인 음식에 길들여져 있다. 짜고 매운 것들. 짜고 매운 음식하면 김치가 대표 아니겠는가? 불고기도 먹고 싶다. 비빔밥도. 비빔냉면도. 닭갈비도. “왜 안 드세요, 오빠?” 라이는 어느새 수프를 후르륵~ 마셔버리고,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입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 그러다 체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누가 뺏어 먹지도 않으니까 천천히 먹으렴. 내 예상대로 라이는 목이 막히는지 급히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옷에 우유를 흘리며 먹는 라이를 보니 다른 건 다 좋은데 식탁 예절은 꽝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체 어떤 놈이 교육을 시켰기에 이 모양이야!? 인디는 재빨리 냅킨으로 라이의 옷과 입가를 닦아 주었다. 후우~ 어제 저녁도 안 먹고 잤더니 배가 고프군. 난 앞에 놓인 샌드위치를 보았다. 빵, 샐러드, 베이컨, 다시 빵, 다시 샐러드, 다시 베어컨, 또 빵. 높이도 쌓아 놨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양새는 정말 예쁘다. 한, 두 번 만들어 본 솜씨가 아닌데. “어서 드세요.” 인디는 초롱초롱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 어서 먹고 맛있다고 말해주길 기다리는 것 같다. 정말 귀여운 구석이 있는 드래곤이다. 어제는 패 버리고 싶었지만. 일단 허한 뱃속을 채우고 위해 수프를 떠먹었다. 맛있다. 그러고보면 크로니스고 요리를 잘 했다. 요새 드래곤들은 취미와 특기가 요린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을 살다보니 못하는 것이 없을뿐이겠지. “맛있네.” 그 한마디에 인디는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인디는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이~ 나중에 일루니아님과 피크닉 가서 먹어야지. 아! 일루니아님 샌드위치 좋아하시나요” “…….” 정말 재수 없는 구석이 있는 드래곤이다. 지금 없애 버리고 싶어. 난 일루니아 여사를 생각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인디의 모습에 기분이 팍 상했다. 남을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해놓고 자기는 연애질이라니. 빌어먹을! 저절로 이빨이 갈린다. 난 식사를 대충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요, 오빠?” “산책하러 간다.” “그럼 같이 가요.” 인디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일어섰고, 라이는 내 뒤를 졸졸 따라나왔다. 난 마치 피크닉을 가듯 라이의 손을 꼭 붙잡고 숲속을 걸었다. 정말 목 좋고, 경치 좋은 곳이다. 마치 엘프의 숲에 들어온 것 같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런 곳에 집 한 채 지어 놓고 라이와 단 둘이 살텐데.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도 안 해.” 내가 대꾸하자 라이는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거짓말.” “…….” “오빠 지금 거짓말 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해두자.” “무슨 생각하는지 라이한테 말해줘요.” 라이는 눈을 똑바로 치켜 뜨고 날 보았다. 그 눈은 도저히 아이의 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차분하고 진지했다. 으음, 라이에게 진지함이라…… 왠지 안 어울리는 느낌이다. 난 근처 적당한 곳에 걸터 앉았다. 그러자 라이는 치마를 추스르며 다소곳히 내 무릎 위에 앉았다. “니 생각엔 이 오빠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난 어제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라이는 말 없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남들이 보면 다정한 아빠와 딸로 보일까? 아니면, 사탕으로 어린아이를 꼬드겨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는 변태로 보일까? 난 라이를 꼭 껴안았다. 그러자 라이의 따뜻한 체온이 내 몸에 전해져왔다. 분명 말하지만 나의 이런 행위에는 결코 사심이 없다. 라이는 나의 동료이자, 친구이자, 동생이자, 딸이다. 그런 아이에게 어찌 사심을 품겠는가?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난 연상 취향이다. 이런 어린아이 보단 누나가 좋아~. “오빠.” “응?” “라이는 오빠가 어떤 결정을 내리던 반대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그 결정 때문에 오빠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크로니스라는 거대하고 강한 적과의 싸움이 눈 앞에 닥친 지금 나는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현재 5클래스 마법사에 아이리스의 공작이지만, 어디까지나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짐은 내가 감당할만한 무게가 아니다. 후회 없는 결정이라? 하지만 어떤 선택을 내리던 간에 나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그렇게 해요, 오빠.” 라이는 귀엽게 웃으며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아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왜일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내 곁에는 언제나 라이가 있었다. 그래. 난 혼자가 아니다. 라이가 옆에 있는 한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울한 기분이 싹 가셨다. 라이는 나에게 있어서 삶의 활력소 같은 존재였다. 지켜야 할 사람(혹은 엘프)이 있다는 것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 난 이를 악물었다. 라이를 위해서라도 이 상황을 이겨내야만 했다. 내 힘으로. 앞은 보이지 않았다. 빛은 희미했다. 하지만 돌파구는 있을 것이다. 갖은 수모에도 불구하고 악과 깡으로 이제까지 버텨온 나다. 겨우 이런 시련 따위에 무너질 수는 없지. 난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라이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르리라!” “앗! 안 돼요, 오빠!” 분신 자살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니, 안심하렴, 라이야. * * * * * 에스카네스는 잠시 고민했다. ‘둘 중 누구를 만나는 게 좋을까?’ 상대는 둘이자 하나인 존재. 둘 중 누구를 만나던 얘기를 하는 것에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둘의 성격인 판이하게 다르다. 그 둘 중 어느쪽과 대화하는 게 편할까? 결정을 내린 에스카네스는 그의 존재가 느껴지는 곳으로 텔레포트를 하였다. 우와아아-! 시끄러운 함성이 넓은 평야를 가득 매웠다. 인간들은 광기에 젖어 달리고 있었다. 저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면 충돌할 때의 데미지가 장난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두 무리의 인간들이 충돌하였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피가 공중으로 튀었다. 두두두두- 말이 달린다. 경기병들은 오와 열을 맞춘 채 꼬챙이 같이 생긴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에스카네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한 인간들.’ 가위바위보로 땅따먹기를 한다면 몰라도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땅따먹기를 하다니. 정말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제갈량은 그것을 전투가 한눈에 보이는 높은 지대에 서서 폼나게 담배를 물며 관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할 말이 좀 있어서.” 제갈량은 초록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웃음을 지었다. “뭔데? 그 놈에 관한 건가?” “맞아.” 전투는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자바스 군이 심하게 밀리고 있었다. 진명 군은 기공법 대신 교본에 나와있을만한 철저한 정공법으로 밀어 붙이고 있었다. 병력 수가 많으니 쓸데 없는 잔재주를 부리는 대신 정직한 방법을 쓰는 것이다. “우리도 슬슬 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하러?” “녀석이 실패할 가능성도 염두해 둬야지.” “글쎄.” “녀석을 믿고 있는 건가?” “내가 미쳤냐? 그딴 놈을 믿게?” 제갈량은 아이언스 히로를 떠올렸다. 멍청하고 바보 같은 인간. 하지만 나름대로 재밌는 인간이었다. 아니, 웃기는 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군. 그 놈이 과연 크로니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 드래곤을? 애초에 인간이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옛날에는 드래곤을 잡아 용사가 되겠다는 미친놈들도 많았 것만 요즘에는 이런 놈들 만나기도 힘들었다. 이런 놈들의 특징 중 하나는 무조건 패거리로 몰려다닌다는 것이다. 검사, 마법사, 성직자, 도둑 등등. 심할 때는 한 100명이서 몰려다니는 경우도 있다. 이 놈들이 하는 대사는 뻔하다. ‘정의를 위해 사악한 드래곤을 해치우러 왔다!’ ‘이 땅에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는한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겐 민족적 사명과 종족적 바람이 깃들어 있다!’ ‘이 땅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 땅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이 땅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내 처자식을 지키기 위해!’ ‘우리집 똥개 발발이를 지키기 위해!’ ‘우리집 똥개 발발이 등에 붙어 사는 벼룩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계속 들어주다보면 끝이 없다. 한 사람에 한 줄씩 대사하는 것까진 봐주겠는데 가끔 장편소설 쓰는 놈들도 있다. 어떤 놈은 선언문까지 가져와서 읽더라.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勇士(용사)의 布團(포단)과 全勇士(전용사)들의 蹶起(궐기)를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Dragon抹殺(드래곤말살)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全世界(전세계)에 誥(고)하야 勇士guild(용사길드)의 政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千年(천년)의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후략)’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드래곤 복장 터트려 죽일일 있냐? 브레스 한방이면 꼬리를 말고 달아날 녀석들이 하는 짓 하고는. 아무튼 이렇게 많은 용사들이 그렇게 열심히 떠들어 대며 덤볐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드래곤이 살해 당했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럼 그 인간은 어찌 될 것인가? 정말로 혼자서 크로니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 도움을 줄 수 조차 없다. 반드시 혼자 해야하는 일이다. 그 놈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이그리드를 끌어낸다면 가능하겠지.”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가 이그리드의 인격을 끄집어 내기만 한다면 9클래스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크로니스는 그를 상대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비록 일부긴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자의 인격을 지닌 인간을 어찌 공격할 수 있겠는가? 뭐, 미친 드래곤이라면 공격할지도 모르지. “그 인간이 거부하면 어쩌지?” “하게 만들어야지.” 그 인간에게 선택권이란 없었다. 반드시 해야 했다. 안 한다고 버티면? 그러면 당연 그 인간과 관련이 있는 인간들을 싸그리 납치해 협박해야지. 그러면 제가 안 하고 배겨? 전투는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진명의 승리였다. 제갈량은 필터까지 타오른 담배를 바닥에 던지며 등을 돌렸다. 에스카네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인간이 정말 크로니스를 막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크로니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번 일은 그리 쉽게 풀리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에스카네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그 동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라이와 놀러다녔고, 인디는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하였고, 결국 참다못한 인디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드디어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인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그리드의 인격을 끄집어 내 크로니스를 상대하느냐, 아니면 그냥 내 힘만으로 크로니스를 상대하느냐?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냥 날 원래 세계로 보내줘.” 그렇다! 제 3의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야 어찌되던 말던 신경 쓰지 않고 원래 세계로 도망치는 것. 사실 이 세계야 어찌되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겠냐? 그저 내 한 목숨 살면 되는 거지. 그리고 라이의 목숨도. 라이를 데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 내 호적에 입적시키면 나는 라이의 아빠, 라이는 내 딸이 되어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정말 완벽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나 좋고, 라이 좋고, 이 세계 사람들은 별로 안 좋겠지만 그건 걔들 사정이니 내 알바 아니고. “저, 저기…….” “저기는 무슨 저기야? 당장 내 말에 따라 날 원래 세계로 보내!” 나그네는 돌아갈 곳이 있기에 떠돈다고 했던가? 내 언제까지 타향을 떠돌 곳인가? 내 고향땅에 뼈를 묻으리오! 드래곤들은 9클래스 마법을 쓸 수 있고, 마법진은 내가 알고 있고, 좌표점은 에스카네스를 비롯한 몇몇 드래곤들이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광팬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연예인처럼 나도 드래곤을 피해 원래 세계로 도망치리! “하, 하지만 도망이라니.” “넌 36계 줄행랑이라는 말도 못들어 봤니? 병법에선 도망치는 것도 상책으로 쳐. 지금 상황에선 내가 무대포 정신으로 크로니스와 맞서는 것이 하책(下策), 이그리드의 인격을 끄집어 나란 존재가 박살나는 위험을 감수하며 9클래스 마법을 배우는 것은 중책(中策), 원래 세계로 튀는 게 상책(上策)이야!” “그, 그런…….” 인디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내가 이런 대답을 할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하지만 어쩌겠니? 내가 원래 이런 놈인 것을. 다음부터는 사람을 잘 보렴. 나의 인간성이라는 게 도덕 교과서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으니 이건 전부 교육부 탓이다. 난 제대로 된 인성 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단 말이다! 후후후~. 내가 그렇게 웃음을 흘리는데 인디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흑~.” “아니, 왜 울고 그러니?” “히로님께서 원래 세계로 도망쳐 버리시면 이 땅에 남아 계신 일루니아님은 어찌 합니까?” “일루니아 여사야 어찌 되건 그야 당연 내가 알바가 아니지. 그리고 정 일루니아 여사가 걱정되면 일루니아 여사도 그 세계로 보내면 되잖아.” “흑흑, 일루니아님은 결코 이 세계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건 그렇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엄청난 애국자이시다. 결코 나처럼 위험하다고 다른 세계로 날아가는 그런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으음, 듣고보니 그렇군.” “흑흑, 그리고 저나 다른 드래곤들은 히로님을 원래 세계로 보내드릴 의향이 ‘전혀’ 없습니다.” “뭐? 전혀?” “예. 누구 좋으라고 히로님을 원래 세계로 보내드리겠습니까?” “그야 나 좋으라고…….” 생각해 보니 그렇다. 드래곤들이 뭐하러 날 원래 세계로 돌려 보내주겠냐? 나 없으면 세계가 끝장 날 판인데. 난 울고 있는 인디의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그러는 게 어디 있어? 니들 지금 나보고 싸우라고 강요하는 거야? 난 평화주의자란 말이야!”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강요하는 게 아니면 뭐야?” “됐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어! 당장 낼 원래 세계로 보내! 이건 명령이야!” “그, 그런…….” 인디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드래곤들은 날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모종의 협약을 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가 누군가? 줏대 없기로 소문 난 드래곤이 아닌가? 이 놈을 어떻게 족 쳐보면 살 길이 생길지도 모른다. 난 인상을 팍팍 쓰며 손가락으로 인디의 몸을 쿡쿡 찔렀다. 그러자 그때마다 인디는 몸을 움찔거리며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야, 빨리 말해. 나 보내줄 거야, 말 거야?” “흑흑, 세계 평화를 위해 다시 한번 재고(再考)해 주심이…….” “이게 어디서 재고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맞고 할래, 그냥 할래?” 인디는 한참을 흐느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히로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원래 세계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자식!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하지만 크로니스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때 히로님을 따라 그 세계까지 쫓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 크로니스도 9클래스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다. 굳이 따라올려고 마음을 먹으면 못 따라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을 날아다니는 드래곤이라. 멋지지 않은가! “…….” 지금 농담 하냐? 서울 시내 한복판에 드래곤은 무슨 드래곤! 난 그렇게 될 경우 일어날 일들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시뻘건 몸뚱아리를 가진 거대한 드래곤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은 처음에 영화 찍는 줄 알고 실실 웃으며 구경하다가, 영화 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칠 것이다. 순식간에 지구 방위군이 결성 되어 드래곤을 향해 미사일을 슝슝 쏘아 댄다. 하지만 드래곤은 그것들을 맞고도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러자 열받은 지구 방위군은 핵 미사일을 발사한다. 그러면 드래곤은 핵 미사일을 텔레포트 시켜 쏜 곳으로 돌려 보낸다. 쾅- 쾅-! 미국이 맞았다. 러시아도 맞았다. 중국도 맞았다. 이번 기회에 자위대를 일반 군대로 재편하고 싶은 일본은 괜히 끼어든다. 크로니스는 유성 낙하(meteor swarm) 마법을 사용한다. 원래 화산섬이던 일본은 서서히 바다 밑으로 가라 앉는다.(그러게 왜 끼어드니?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각 국가들은 드래곤이 한국이 만들어낸 대량살상무기가 아닌지 의심한다. 그리고 일단 포격하고 본다. 아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핵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좀 비약적이긴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보장도 없다. “히로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다행이에요. 크로니스가 그 세계로 가면 일루니아님은 무사하실테니.” “……이 자식이!”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사내 대장부로써 어찌 싸움을 피하리오! 이 한 목숨 다 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면 내 기꺼이 드래곤과 맞서겠노라!” 나의 외침에 한 순간 방안이 환하게 밝아지며 서광이 비추는 듯 했다. 인디는 황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박수를 쳤다. “그럼 이그리드의 인격을 끄집어 내는 것에 동의하시는 거지요?” “글쎄. 그건 좀…….” “흑흑, 세계 평화…… 흑흑, 일루니아님…….” 아이씨, 짜증나게 또 궁상 떨고 있어. “그래. 알았다. 그것이 대세의 흐름이라면 그에 따라야 하겠지.” 난 이를 악물고 굳게 결심하였다. 니들이 강요하지 않아도 크로니스와 싸울 각오는 되어 있었다.(각오가 약해서 문제였지) 나를 위해, 라이를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그리고…… 크로니스를 위해 나는 크로니스와 싸우겠다. “이길 자신은 있으세요?” “…….” 당연 없지. 너 같으면 있겠냐? 아이리스::박성호 TITLE ▶3 :: <아이리스 12권> 9클래스 - 03 sharpshooter(psungho) 03-04-21 :: :: 34870 “우웅~ 히로~.” 라이레얼은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고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침상 위에서 뒤척거리는 미녀의 모습은 요염하고 관능적이었다. 남자들이 보면 환장을 할 정도로. 특히 히로가 봤다면 발정난 개처럼 헥헥거렸을 정도로. 갈리온드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라이레얼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간만에 만난 딸 아이는 너무도 아름답게 자라 있었다. 갈리온드는 그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 어린 것이 이 험난한 세상을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세상이 라이레얼 때문에 힘들지언정, 라이레얼이 세상 때문에 힘든 적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갈리온드의 입장에서 보기엔 라이레얼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전부 내 잘못이야. 이제와서 내가 이 아이의 아빠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을까? 흑흑, 난 딸을 버리고 도망친 죄인일뿐이야!’ “어흐흐흑!” 감정에 복받친 갈리온드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라이레어의 뺨을 적셨다. “으음~ 가지마~.” 라이레얼이 잠꼬대 하며 들어올린 발에 울고 있는 갈리온드가 맞았다. 퍼억-! 갈리온드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였다. 그리곤 더 크게 울었다. “어흐흑,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잠꼬대를 이리도 심하게 할까? 불쌍한 것 같으니라고. 흑흑. 역시 내가 죄인이야!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갈리온드가 외치는 순간 얼굴에 무언가가 날아왔다. 배게였다. 갈리온드는 그것을 얻어 맞고 다시 쓰러졌다. “궁상 떨려면 나가서 떨어!” 라이레얼은 벌떡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외치고는 다시 몸을 뉘었다. 갈리온드는 야속한 마음이 들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이번엔 라이레얼이 깨지 않도록 입을 막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흑흑흑~.” 귀곡성처럼 울려퍼지는 울음 소리는 결코 들을만한 것이 못 됐다. 라이레얼은 짜증이 팍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귀를 막았지만 하프엘프의 청력이 좀 좋은가? 엘프보단 떨어지지만 인간보단 훨씬 좋다. 그렇기에 귀곡성 같은 울음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참다 못한 라이레얼은 잠 자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빠 대체 왜 울어?” “흑흑, 아무 것도 아니니 계속 자렴. 흑흑~.” 한 눈에 보기에도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가 않다. 라이레얼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갈리온드에게 다가갔다. 토닥토닥~.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갈리온드의 등을 한동안 두드려주자 갈리온드의 울음이 점차 잦아 들었다. “아빠, 뚝!” “흑~ 뚝!” 참 말 잘 듣는 아빠다. 갈리온드는 주섬주섬 눈물을 닦으며 라이레얼을 보았다. 자신의 딸이 눈 앞에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자신의 딸이. 갈리온드는 이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라이레얼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닮았다. 이거야 말로 붕어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왔다. 갈리온드는 라이레얼을 덥썩 껴안았다. “어흐흐흑, 사랑하는 내 딸 라이레얼!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했구나! 날 용서해다오!” “…….” 라이레얼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 짓도 한두번이지 하루에도 너댓번씩 해대니 이젠 짜증 밖에 나지 않았다. “그만해, 아빠.” “흑흑흑, 날 용서해다오.” “아이씨! 그만하란 말이야! 자꾸 징징 짜지 말라니까!” “흑흑, 그래. 전부 내 잘못이야. 날 치렴. 난 맞아도 싸.” “…….” 궁상 엘프. 궁상을 떨어도 정말 너무 심하게, 너무 자주 떤다. 라이레얼은 당장이라도 갈리온드를 쫓아내고 싶었지만 간만에 만난 아빠에게 그건 너무 심한 처사인 것 같았다. 때마침 루엔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울고 있는 갈리온드를 달래 주었다. 라이레얼은 빨간 머리 엘프를 보았다. 듣기로는 손자, 손녀까지 있는 할머니라고 하는데 정말 아름답게 생겼다. 저 탱탱한 피부 좀 봐. 20대라 해도 믿겠다. 하지만 피부 탱탱하기로 따지면 라이레얼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미모하면 라이레얼 아닌가? 이제까지 라이레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유독 한 남자만이 그녀의 유혹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더욱 그 남자에게 집착하는 지도 모른다. ‘나의 히로는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라이레얼은 언제나 밝게(혹은 재수 없게) 웃는 히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잘 믿기지가 않았지만 히로는 나름대로 위대한 마법사였다. 그리고 공작이었다. 능력과 직책 모두 훌륭하다.(외모는 좀 딸리지만) 이런 남자랑 결혼하면 평생이 행복할 것이다. ‘아아~ 내가 히로랑 결혼하면 나는 공작 부인이 되는 거야. 그럼 용병질 때려치우고 평생 하녀나 부리며 살텐데.’ 이 얼마나 행복한 상상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히로가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성립되는 것이다. 만약 히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이 것은 말짱 도로묵이다. 라이레얼은 갈리온드에게 히로가 크로니스와 싸우려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히로는 어째서 드래곤과 싸우려 하는 걸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크로니스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고는 하지만 어째서, 어떻게 위협한다는 건가? 그녀의 주변엔 진실을 아는 자가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아는 것만이라도 들어야 했다. 진심으로 히로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아빠.” 라이레얼은 갈리온드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라이레얼이 부르자 갈리온드는 벌떡 일어나 라이레얼에게 다가왔다. 그는 라이레얼의 부탁이라면 간이라도 빼줄 자세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니, 내 딸아?” “차원의 열쇠가 뭐야?” “…….” 라이레얼의 질문에 갈리온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차원의 열쇠라면 히로가 라이레얼을 찾아주는 대가로 찾아주기로 했던 물건이 아닌가? 사실 갈리온드는 그 동안 잊고 있었다. 아니, 잊고 있었다기 보단 애써 잊으려 하였다. 이미 라이레얼과 재회를 하였는데 뭐하러 힘들게 그것을 찾아다녀야겠는가? 필요하면 제가 알아서 찾겠지. 차원의 열쇠에 대한 얘기는 타인에게의 누설이 금지 되는 비밀이었다. 그것은 다른 차원을 열 수 있는 물건이다. 잘못 사용하면 커다란 위험을 불러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여야 했다. 실제로 지금 알고 있는 자는 갈리온드와 몇몇 드래곤들 뿐이었다. 갈리온드는 나름대로 입이 무거운 남자였다.(실제로는 히로만큼이나 입이 싸다) 그렇기에 비밀을 목숨처럼 생각했다.(생각만 한다.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이 그것을 알고 싶다는데 어찌하겠는가? 당연 말해줘야지.(사실 오래 전부터 누군가한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차원의 열쇠라는 것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잘 몰라. 다만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온 신물(神物)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야. 그것을 사용하면 아공간을 창조해 낼 수 있어. 그곳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지. 차원의 열쇠의 위치를 아는 자는 특정 엘프 하나일뿐이야. 그게 바로 나지. 만약 내가 죽으면 차원의 열쇠는 사라져. 아니, 정확히는 그 위치가 바뀌어. 그리고 그 위치는 누군지 모를 한 엘프가 알고 있겠지.” “어째서 그런게 엘프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거야?” “그건 나도 잘 모르지. 다만 예전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그럼 히로는 그 차원의 열쇠를 가지고 뭘할 생각이야?”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지.” “그 게 히로한테 꼭 필요해?”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 그러니 그렇게 목을 매는 거겠지.” 갈리온드는 라이레얼이 또 뭔가를 궁금해할까 싶어 친절하고 자세한 부연 설명까지 덧붙여 주었다. 루엔은 부녀간의 오봇한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지 둘이 얘기하는 사이 조용히 막사를 빠져 나갔다. 라이레얼은 아빠에게 들은 얘기를 정리하며 생각에 골몰하였다. ‘으음, 아무튼 결론은 히로가 차원의 열쇠를 꼭 필요로 한다 이거지?’ 좋은 계획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라이레얼은 그 계획안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았다. “호호호~.” “하하하~.” 라이레얼은 스스로가 세운 계획안이 마음에 드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갈리온드는 영문도 모르면서 딸이 웃으니 자신도 따라 웃었다. 한참을 여왕처럼 웃어재끼던 라이레얼은 갈리온드에게 물었다. “차원의 열쇠는 지금 어디에 있어, 아빠?” 그건 정말로 결코 말해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하지만 딸에게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딸이 듣고 싶다는데 전부 말해줘야지. “으응. 그건 지금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가 가지고 있어.” “정말?” “응.” 역시 귀중한 물건이다 보니 아무나 보관하는 게 아닌가 보다. 그렇다 해도 드래곤이라니. 상대가 너무 강하다.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라……. “그럼 아빠 이제 어떻게 할거야? 차원의 열쇠 찾으러 갈거야?” “아니.” 갈리온드는 너무도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히로한테 찾아다 준다고 약속했잖아.” “그건 그때 얘기지. 널 찾은 이상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 놈한테 차원의 열쇠를 찾아다 주겠니?” “…….” 엘프라고 해서 다 착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히로 같은 엘프도 있기 마련이다. 약속을 개코로 아는 엘프. 이거야 말로 라이가 두려워하던 나쁜 엘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이레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황한 갈리온드가 물었다. “어디 가니?” “차원의 열쇠를 찾으러!” “아니, 왜?” “난 히로를 사랑하니까!” 그렇다. 라이레얼은 지금 한발 앞서 차원의 열쇠를 손에 넣어 그것을 미끼 삼아 히로를 살살 꼬드겨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갈리온드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화이트 드래곤이 얼마나 위험한데…… 가면 안 돼.”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아빠. 어떠한 역경이 닥쳐도 사랑의 힘으로 헤쳐나가면 돼.” “하, 하지만…….” 라이레얼은 말리는 아빠를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른 막사로 쳐들어 갔다. 그곳은 테커, 카웨, 럴크, 카젠 등이 사용하는 용병 전용 막사였다. “야! 다들 일어나!” 라이레얼의 외침에 남자들은 신경질적으로 눈을 떴다. 대체 어떤 뭣 같은 놈이 용병들 곤하게 자는데 잠을 깨운단 말인가? 당장 그 놈을…… 이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보았다. “허억!” 그녀의 이름은 라이레얼~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여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 순식간에 눈이 번쩍 떠졌다. 용병들은 재빨리 이불을 개고 일어나 일렬로 정렬했다. “무, 무슨 일이야? 기습이라도 시작 된 거야?” 테커가 묻자 라이레얼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꺼냈다.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지금 아주 위험한 일을 하기 위해 어딘가로 떠날 생각이야.” “떠나? 계약은 어쩌고? 계약 기일이 8개월 넘게 남았는데…….” “그딴게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니? 계약 파기하면 위약금 물어야 되는 것도 몰라? 그리고 신용도 하락은 어쩌고?” “아무튼 나는 가야 돼!” 용병대 대장은 라이레얼이었지만 총무는 테커였다. 그렇기에 예산이나 계약 문제를 담당하는 테커로선 이런 상황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돈을 받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워야 하는게 용병이 아닌가? 그런데 전쟁 중에 빠져나가겠다니. 이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돼는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선 안 돼, 라이레얼. 만약 소문이 퍼져봐. 누가 우리랑 계약을 하겠어?” 테커는 열과 성을 다해 라이레얼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설득이 라이레얼에게 먹혀들리 없었다. 히로가 설득한다면 모를까……. “됐어. 더 이상 말하지마. 그건 내 알바 아니야.” “…….” 니가 대장인데 니가 모르면 누가 아니? 라이레얼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테커가 알기로 라이레얼이 이렇게 나올 때는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 말하다간 얻어 맞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테커는 얻어 맞을 각오를 하고 설득에 나섰다. “잘 생각해 봐, 라이레얼. 지금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온통 히로 생각뿐이야.” “…….” 씨알도 안 먹힌다. 그래. 괜히 쓸데 없이 시간과 노동력을 투입하지 말자. 라이레얼이 한번 결심했는데 그걸 누가 말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대체 어딜 가려는 건데?” “아주아주 위험한 곳.” “그 아주아주 위험한 곳이 어딘데?” “그건 알 거 없고, 나랑 같이 갈거야, 말거야? 나 바쁘니까 빨리 결정해.” 위험한 곳이라니? 대체 얼마나 위험한 곳일까? 라이레얼이 위험하다고 말할 정도면 정말 위험한 곳임이 분명하다. 전쟁터는 명함도 못내밀 정도로. 하지만 라이레얼이 간다는데 어찌 가만 있을 수 있겠는가? 위험한 곳에 저런 미녀를 혼자 보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런 때일수록 졸졸 쫓아가 라이레얼을 보호해줘야 한다. 용병들은 라이레얼한테 잘보이기 위해 재빨리 짐을 챙겼다. 라이레얼이 같아 간다는데 위험이 뭐 대수겠냐? “그런데 대체 어디 가는 거야?” “그냥 화이트 드래곤이나 한번 만나볼까 해서.” “……!” 화이트 드래곤? 그 말을 듣는 순간 용병들은 일제히 짐을 풀기 시작했다. “아! 허리를 삐끗 했어. 난 아무래도 같이 못 가겠다. 미안해.” “난 발목을…… 미안.” “난 머리가…… 아! 두통이~.” 순식간에 막사 안은 병동이 되어 다들 고통에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라이레얼은 기가 찼다. 이런 것들이 남자라니. “이 것들이 전부 죽고 싶나? 당장 안 일어나!?” 라이레얼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쳤다고 화이트 드래곤을 만나러 가냐?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그건 사양하고 싶었다. 일단 목숨이 붙어있어야 돈도 필요가 있지. 라이레얼은 고운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니들 다 죽을래!?”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장검을 뽑아 들었다. “좋아. 가기 싫은 놈은 한쪽 다리를 내놔!” “…….” 한쪽 다리라니? 누굴 토막 살인할 일있나? 라이레얼의 위협에 용병들은 하는 수 없이 짐을 챙겨 일어섰다.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막사 가득 울려 퍼졌다. 용병들이 준비를 끝마치자 라이레얼은 당장 참모 막사로 처들어 갔다. 당연 위병들이 가로 막았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라이레얼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곳에는 장교들과 장성들과 참모들의 회의가 한창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한창 작전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던 일루니아는 갑작스레 나타난 라이레얼을 보고 짜증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할 일이 있어서 우리 나가봐야 겠거든. 그러니 그런 줄 알아.” “뭐요?” 계약을 한데다가 선금까지 받아 챙긴 주제에 가긴 어딜가? “지금 탈영을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탈영은 무슨 탈영? 그냥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거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이 아줌마가 말 되게 못 알아듣네.” “…….” 아줌마? 노처녀란 말도 듣기 싫지만 아줌마라는 말은 더더욱 듣기 싫다. 그런데 아줌마라니? 내가 어딜봐서 아줌마야? 일루니아 여사의 주름살이 더욱 일그러졌다. “절대 못 보내드립니다. 만약 계약을 파기하시고 그냥 가신다면 탈영병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이 아줌마가 진짜 왜 이래?” 라이레얼은 화를 냈지만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용병들은 쾌재를 불렀다. ‘제발 보내주지 마. 우리도 여기 계속 있고 싶어.’ 막나가는 여자의 대명사 라이레얼은 자신을 보내 달라고 끝까지 바락바락 우겼다. 하지만 일루니아는 결코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라이레얼이 마음에 안 들기도 했지만, 라이레얼의 존재 가치가 컸기 때문이다. 용병계에 꽃과도 같은 존재였다. 라이레얼 하나 때문에 용병들의 사기는 바닥을 기다가도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라이레얼이 전장을 빠져나간다면 남은 용병들은 어찌 되겠는가? “이게 다 나의 히로를 위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아이언스 공작 말입니까?” “그래. 나랑 히로가 무슨 사이인지는 아줌마도 잘 알지?”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당장 막사로 돌아가십시오.” “아줌마!” “누가 아줌마야!? 이 싼티 나는 계집애야!” 성격 나온다, 성격 나와. 일루니아는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고, 라이레얼은 심한 충격에 휩싸였다. 싼티 나는 계집애라니? 이제 공작 부인이 될 고귀하고 우와한 나에게 싼티 나는 계집애라니? 두 여인의 눈에서 레이저 빔이 뿜어져 나았다. 그 레이저 빔은 공중에서 충돌해 스파크를 튕겼다. 그 누가 전쟁이 무섭다고 했는가? 그렇다. 이 건 전쟁이었다. 이제 머리끄덩이 잡아 당기며 ‘이 년, 저 년’ 하는 것만 남았다. 여자끼리의 싸움이라. 사실 이 것만큼 박력 넘치는 게 없다. 모두들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두 여인을 보았다. 싸움이 벌어지려는 찰나 한 남자가 중재에 나섰다. “진정하십시오, 라이레얼양. 진정하십시오, 누님.” 수려한 외모를 지닌 지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이 여인들이 보통 여인들이었다면 지니가 나서는 순간 당장 꼬리를 말고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일들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들이 어디 보통 여인들인가? “일단은 사정을 들어보는 게 순서일 것 같군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요.” “됐어! 난 이런 싼티 나는 계집애랑 할 얘기 없어!” “나도 댁 같은 노티 나는 아줌마하고는 할 얘기 없어!” 지니는 두 여인을 달래 장소를 옮겼다. 회의가 중단 됐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지니의 물음에 라이레얼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화이트 드래곤을 만나러.” “어째서 화이트 드래곤을 만나시려는 겁니까?” “그야 당연 우리 히로를 위해 서지.” 라이레얼은 차원의 열쇠에 관한 얘기를 열심히 떠벌렸다. 지니와 일루니아는 그것을 관심 있게 귀담아 들었다. 사실 어찌보면 자바스와의 전쟁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것일 지도 몰랐다. 자바스와의 전쟁은 한 국가가 사느냐 죽느냐지만, 크로니스와의 싸움은 세계가 사느냐 죽느냐다. 세계가 죽고 나면 국가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가 차원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의 위치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저 남해 어느 섬에 있다는 사실만이 떠돌고 있을 뿐. “괜찮아. 드래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빠가 잘 알고 있을테니.”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지니는 보내주기로 마음을 굳힌듯한 모습이었다. 일루니아는 괜히 짜증이 났다. 동생이면 누나 편을 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여자가 좀 싼티 나 보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중요한 존잰데 그냥 보내주려 하다니. “난 절대 반대야!” 일루니아가 그렇게 못 박자 라이레얼은 코웃음을 쳤다. “아줌마는 빠져!” “…….” 기가 막힌다. 참모이자 백작한테 아줌마라니. 꼭 이렇게 못 배운 티를 내야 되나?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인디가 보고 싶어 진다. 인디라도 곁에 있었다면 좀 위로가 됐을 텐데.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통행증을 끊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니는 일루니아가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이 재빨리 통행증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어 건네 주었다. 라이레얼은 그것을 받자마자 휭~ 하고 사라졌다. 이로써 차원의 열쇠를 찾으려는 모험가 집단이 결성 되었다. 라이레얼, 그녀의 아버지 갈리온드, 그의 연인 루엔, 그리고 그 외에 굳이 이름을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몇몇 떨거지들. 지니는 떠나가는 그들을 보며 폼나게 담배를 피웠다. 일루니아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어째서 그 여자를 보내준 거야? 다른 놈들이야 가던 말던 상관 없지만 그 여자는 도움이 많이 되잖아.” “후후~ 라이레얼양께서 차원의 열쇠를 찾겠다고 하시지만 제 생각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때가 되면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가 알아서 건네줄테니까요.” “…….” 듣고 보니 그렇다. “그럼 왜 보내준 거야?” 지니는 다시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 재밌잖습니까?” “…….” 그렇다. 차원의 열쇠가 라이레얼의 손에 들어갈 경우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히로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정말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니는 계속해서 웃음을 흘렸고, 일루니아는 놀란 눈으로 동생을 보며 생각했다. ‘사악한 녀석 같으니라고.’ 갑자기 아이언스 공작이 불쌍해지는 것은 왜일까? * * * * * * * 나는 걸정을 내렸다. 세계 평화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하기로. 세상이 그것을 원하는데 나 혼자의 힘으로 어찌 운명을 거역하겠는가? 하지만 정말 하기 싫다. “흑흑, 일루니아님~.” 저 놈 보기 싫어라도 하기 싫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안전만 생각하지 말고 조금은 내 안전도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인디는 나에게 이그리드의 인격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었다. 그 방법이란 것은 매우 간단했다. 최면을 걸어 내 의식을 잠재 의식 속에 집어 넣는다. 그곳을 열심히 뒤져 이그리드의 인격을 찾아 낸다. 그리고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그거 위험하지는 않나?” “물론…….” 인디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굉장히 위험 합니다.” “…….” 그런데도 나보고 하라는 거냐? “대체 얼마나 위험한데?” “뇌사 상태에 빠질 확률도 높고, 백치가 될 확률도 높고, 인격이 사라질 확률은 더 높고…….” “그만.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아.”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요.” “그래.” 인디는 미리 준비해 둔 것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삼발대 위에 올려진 점성의 액체, 향, 그리고 정체 모를 음료 등등. “이것들은 뭐냐?” “의식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의식?” 무슨 종교 집회도 아니고. 인디는 정체 모를 음료를 나에게 건네 주었다. 무색 무취의 음료. 아마 맛도 없을 것 같다. 인디는 그것을 마시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혹시 독약은 아니겠지? 독약은 아니더라도 독약보다 더 위험한 것임에는 틀림 없다. 두려움이 몸을 엄습한다. 음료를 마시려는 순간 라이와 눈이 마주쳤다. 라이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날 보고 있었다. “오빠…….” 걱정이 가득한 눈빛.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난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라이를 놔두고 돌아올 기약 없는 길을 가야 하다니. 나 없으면 우리 라이는 어떻게 살라고? 난 억지 웃음을 지으며 라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라이는 내 품으로 뛰어 들며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오빠~.” 왜 울고 그러니? 니가 울면 오빠 마음도 약해지잖아. 난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라이는 나를 꼭 껴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라이의 눈에서 눈물을 보이게 하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울지마, 라이야.” 난 라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라이는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엥엥, 오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라이는 어떡해요? 으아앙!” “난 괜찮아, 라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우엥, 하지 마세요, 오빠.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냥 라이 옆에 있어줘요.” 아아~ 귀여운 나의 라이. 라이가 이렇게 날 생각해 주고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새삼 놀랍군. 난 손가락으로 라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라이의 코 밑에 들이댔다. 패앵~! 아이구, 귀여운 것. 말도 잘 듣지. 난 라이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라이야. 이 오빠한테는 아무 일 없을 테니.” “훌쩍, 정말요?” “물론이지.” “라이는 오빠 못 믿어?”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웃으며 라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럼 믿고 기다려 줄래?” “……예.” 라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분명 라이는 동심에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어린 아이의 동심에 상처를 입히다니. 그것은 범죄다! 내 라이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살아 돌아오리! 난 굳게 마음 먹었다. “훌쩍, 오빠 꼭 돌아와야 해요. 오빠 안 돌아오면 라이는…… 흑흑, 우에에엥~.” 더 듣고 있다간 정말 마음 약해져서 도망칠 것 같다. 이제 신파극은 여기까지 하자. 난 손에든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내 예상대로 맛은 없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정신이 몽롱해 진다. 몸이 편해지며 기분이 좋아 진다. 이거 혹시 마약인가? 몸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마치 히로뽕이라 투여한 것처럼. 히로뽕이라…… 히로가 뽕을 투여하면 그게 히로뽕인가? 아! 이제는 말도 안 돼는 개그가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맛이 가고 있다. “자,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충분히 편해, 임마. 연기가 피어 오른다. 은은항 향내가 몸을 감싼다. 이거 설마 아로마(aroma) 요법인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 앉히세요. 그리고…….” 인디는 계속해서 뭐라고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내 귓가에서 점점 잦아 들었다. 졸립다.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잠이 들면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깨어 났을 때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을까? 난 잠시 저항했다. 하지만 유혹은 강했다. 그것은 나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지 뭐~. 난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나를 잠식해 가는 그것에 몸을 맞겼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자는……. 똑-! 떨어진 물방울이 내 뺨에 부딪혀 알알이 흩어졌다. 난 눈을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은 맑고, 몸은 이상이 없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건가? 난 살아 있음을 확신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일단 생존을 확신하게 되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은 어디지? 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방에 나무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이 숲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어째 숲이 좀 이상하게 생겼다. 저건 뭐야? 어째서 침엽수와 활엽수가 이렇게 나란히 자라 있는 거지? 주위 풍경은 엘프의 숲과 비슷한 했다. 그렇기에 난 낯익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가 내 잠재 의식 속인가?” 확신할 순 없었지만 대체로 맞는 것 같았다. 후후~ 잠재 의식이라? 자신의 잠재 의식 속에 들어온 인간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가 최초일 것이다. “이제 여기서 이그리드를 찾아야 한다는 거군. 그런데 어떻게 찾지?”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생각한다고 무슨 답이 나오겠는가? 이럴 땐 일단 움직이는 게 최선이다. 몸을 먼저 움직이고, 생각은 나중에. 난 하나의 방향을 잡아 걸음을 재촉했다. 원래 이럴 때는 괜히 헤매는 것 보단 일정 방향을 정해 그쪽으로만 가는 것이 현명하다. 어차피 인생 모 아니면 도 아니겠는가? 난 무장을 점검했다. 혹시라도 짐승을 만날 경우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하여. 칼라이스의 망토는 걸치고 있고, 청룡도도 허리에 잘 매져 있고, 담배와 라이타도 있고……. 이 것들은 실제일까? 당연 내 의식이 만들어낸 가짜겠지. 그나저나 숲 속에서 담배 펴도 되나? 불나면 어쩌지? 이러저런 생각들을 하며 걷는데 앞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깜짝 놀라 그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짐승이면 잡아 먹고, 사람이면 길을 물어 봐야지. “누구냐?” “꺄악-!” 그곳에 있는 건 짐승도 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금발의 엘프. 내 앞에는 한 엘프가 엎어져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스커트는 말려 올라가 있었고, 팔과 어깨를 다 드러낸 시원한 나시티는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눈물을 지었다. “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봐요, 아가씨.” “흑흑, 제가 아는 것은 전부 말해드릴테니 제발…….” 늘씬하고 쫙 빠진 미녀 엘프가 상당히 불건전해 보이는 옷을 입고, 상당히 불건전한 대사를 내뱉고 있다. 이럴 때 보통 남자 같았으면 어찌했을까? 앞뒤 가리지 않고 덮쳐? 아니면,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 그것도 아니면, 으음…… 안 돼. 그런 짓은…… 어떻게 여자한테 그런 일을 할 수가…… 으음, 하지만…….(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나쁜 사람이 아니랍니다. 부디 무슨 일인지 저한테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그녀는 조금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날 보았다. “저,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닌 가요?” “물론입니다.” “저, 정말요?” “예.” “진짜요?” “예.” “진짜 정말로?” “예.” “진짜 진짜 정말로?” “……이런 썅! 믿기 싫으면 관둬!” “으아앙, 살려 주세요!” 엘프 여인은 몸을 웅크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난 인상을 찡그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게 지금 나랑 장난 하나? 사람이 말을 했으면 믿어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냐? 하여튼 요즘 세상은 문제가 있다니까. 엘프 여인은 마치 내가 잡아 먹기라도 할 듯 몸을 덜덜 떨며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냈다. 분명 말하지만 난 그녀를 잡아 먹을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내가 무슨 식인귀도 아니고. 난 담배를 뻑뻑 피며 그녀가 눈물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바람결에 나뭇잎끼리 스치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소리가 좀 이상했다. 누군가가 오고 있는 건가? 난 혹시 몰라 청룡도를 움켜 잡았다. 그 순간 내 앞에 한 남자가 튀어 나왔다. 그의 모습은 마치……. “오크다!” 상대는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난 인간이야!” 그 말에 난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주의 깊게 뜯어 보니 오크처럼 생기긴 했어도 어딘가 인간과 닮은 구석도 있는 것 같다. “하프 오크였군.” “난 인간이라니까!” 아무래도 지능이 너무 낮아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불쌍한 오크 같으니라고. 난 인상을 쓰며 말했다. “오크가 여긴 웬 일이냐?” “난 인간이라니까!” “닥쳐라! 성형 한번 수술하려면 국제통화기금(IMF)에선 돈을 꿔야 할 정도로 안 생긴 주제에 인간이라고 우기다니!” “정말이야!”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국가 보다 더 구제 불능인 얼굴을 가진 주제에 말이 많구나!” “이 자식이…….” 그 오크는 화를 내다가 내 발밑에 엎어져 있는 엘프를 보고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 “흐흐, 거기에 있었군.” 엘프 여인은 황급히 치마를 추스르며 내 뒤쪽에 숨었다. 그러자 그 오크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크하하! 그 년을 내놔라! 그럼 아까의 무례는 용서해 주지.” “…….” 이 순간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강제로 취하려는 못 생긴 악당. 그리고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잘생긴 용사. 이 다음 스토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당연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저 놈은 내 칼을 맞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리따운 여인은……. ‘감사합니다, 은공이시여. 소녀 드릴 건 없사오나 필요로 하신다면 이 한 몸 은공께 바치겠사옵니다.’ 몸을 바치겠다니! 그런 탁월한 선택을! 웃음이 내 입을 비집고 터져나온다. “크크크~.” 웃음 소리만 들어보면 왠지 내가 악당 같다. “이봐, 오크! 어째서 이 여인을 필요로 하는 거지?” “오크가 아니라니까! 난 이 지방 영주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 년은 이제부터 내 아내가 될 것이다. 음하하하!” “…….” 뭐? 이 지방 영주의 아들? 그랬군. 어쩐지 많이 본 얼굴이다 했어. 이 놈은 바로 라나의 언니 니나와 결혼을 하려다가 나한테 뒤지게 얻어 맞은 그 놈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놈 아직 살아 있었나? 아! 여긴 내 잠재 의식 속이지. 난 청룡도를 뽑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오크를 잡는데 어찌 명검을 쓰겠는가? 저런 놈은 내 두 손만으로도 충분하다. “난 우연히 이 길을 지나가던 정의의 사도다! 내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형이상학적으로 생긴 놈이 아름다운 엘프 여인을 핍박하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내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리오! 오오~ 내가 정의로써 불의를 물리치겠노라! 지금 이 순간 사그라들던 정의의 불꽃에 불씨를 다시 크게 불태우리! 아니, 아예 캠프 파이어를 벌이리! 자아, 덤벼라, 오크!” 나의 대사에 감동 받았는지 엘프 여인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오크는 되는대로 인상을 구기며 코로 불을 뿜어냈다. “그 년만 놔주고 도망친다면 용서해 주려 했는데…… 넌 오늘 죽었어!” “별 비중도 없는 엑스트라 주제에 대사를 너무 많이 하는 구나. 그만 떠벌리고 덤비기나 해.” “크아아아!” 역시 녀석은 전형적인 엑스트라였다. 조금의 개성도 없는. 소리를 지르며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모습부터 엑스트라 티가 팍팍 나지 않은가? 난 가볍게 왼손으로 잽을 날렸다. 퍽- 퍽-!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오른손 어퍼컷! 빠악-! OK! 소리 좋고! 이어지는 나의 필살기. 이름하여 떡 치기!(여기서 떡 치기란 상대방을 떡이 될 때까지 팬다는 뜻이지 결코 이상한 의미를 담은 말이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퍽- 퍽- 퍽- 퍽-! “으아악! 살려줘!” “시끄러, 임마! 대사도 많이 했으면 맞는 것도 많이 맞아야 할 거 아니야?” 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정말 무자비하게 팼다. 열심히 팼다. 계속 팼다. 떡이 될 때까지 팼다. 드디어 떡이 됐다. 난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헉헉! 자식이 괜히 등장해서 맞고 지랄이야?” 이제 악역도 해치웠겠다. 남은 것은…… 후후후~ 엘프 여인과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는 것 뿐이군. 난 엘프 여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괜찮으십니까, 마드모아젤?” “예, 예. 전 괜찮아요.” 여인은 치마를 추스르며 일어서려했다. 그러다 다리가 풀렸는지 몸을 비틀거렸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저, 저기…….” 자세히 보니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는다. 인간으로 치면 약 20세? 아아~ 이 얼마나 사랑스런 소녀란 말인가? “우리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예?” “그대의 마음은 제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부하지 마십시오.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난 그녀의 옷에 손을 걸었다. 단추가 어디 있나? 아! 여기 있구나. 단추의 위치를 찾은 나는 단추를 하나, 둘씩 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을 하시려고?” “어허! 다 알면서 왜 그래?” “이, 이러지 마세요. 제발…….” 한번 사양은 예의라고 하던가? 난 그녀의 부탁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단추를 끌렀다. 그 순간 내 손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똑-! 그것은 눈물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을 감은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순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강렬하게 든다. 누군가가 이 모습을 봤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앗! 저 안 생긴 놈이 아리따운 엘프 소녀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난 재빨리 끌렀던 단추를 다시 잠궈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난 또 너무 고마운 나머지 몸을 바치려는 줄 알았지. 아니면, 아니라고 진작 얘기를 하던가.” “흑흑.” 젠장, 이렇게 소득 없는 일이 뛰어 들다니. 내가 미쳤지! 울고 있는 여인 달래줘봐여 별로 남는 것도 없을 것 같았기에 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등을 돌렸다. “잠깐만요!” 그녀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 어째서지? 어째서 날 부른 거지? 설마 드디어 할 마음이 들었나? 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요?” “저기…… 감사합니다.” 엘프 여인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됐습니다. 어차피 감사 인사 받으려고 한 일도 아닌데.” 대신 다른 걸 바라고 했지. “저, 저는 이제 갈 데가 없는 몸이에요. 흑흑흑.” “…….” 세상에! 갈 데가 없단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그러니 절 데려가 주세요.” “……!” 진부한 전개다. 악당에게서 구해낸 소녀가 들러 붙는다. 이거 이 소설, 저 소설에서 많이 나왔던 내용인데. 내 잠재 의식이라는 곳은 혹시 진부함이 가득한 세상이 아닐까? 하지만 진부해도 좋다. 미녀 엘프가 데려가 달라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냐? 난 그녀를 데려가기로 결정을 내리고 물었다. “댁의 이름은 뭔가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라이레얼이에요.” “……?” 어째서 이런 일이! 해가 저물었다. 낮이 끝나고 밤이 시작 되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숲을 헤매고 있었다. 난 그녀를 위해 작은 모닥불을 피워 주었다. 그녀는 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몸울 웅크리고 앉았다. 그녀의 이름은 라이레얼. 금발이라고 생각했던 머리카락은 옅은 레몬빛이 돌았고, 처음 봤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보니 라이레얼과 상당히 닮았다. 그렇다! 그녀는 라이레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라이레얼이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걸까? 난 대충이나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라이레얼의 모습은 내 의식 속에 있는 환상에 불과했다. 난 항상 라이레얼의 성격이 청순가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내 의식 속에 라이레얼은 이런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아아~ 그나저나 정말 마음에 든다. “추운데 이 쪽으로 좀 오세요.” “괘, 괜찮습니다.” 괜찮긴 무슨…… 추운 거 다 아는데. 난 슬슬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러자 그녀는 슬슬 내게서 멀어졌다. 만약 이 여인이 진짜 라이레얼이었다면 ‘춥지, 히로? 이 누나가 따뜻하게 해줄게’ 라고 외치며 나를 끌어 안았을 것이다. “잠도 자야하니 사양말고 이 쪽으로 오세요.” “하, 하지만…….” 한 동안 나의 접근을 거부하던 라이레얼은 나의 채근에 하는 수 없이 나와 몸을 붙였다. 덜덜덜덜~. 이 무슨 스포츠카 비포장 도로 질주하는 소리란 말인가? 그녀는 정말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아마도 추워서 떠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떠는 것이겠지.(대체 그 그렇고 그런 짓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 거냐?) 난 하늘에 맹세코 이 여인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없다. 내가 무슨 여자에 미친 놈도 아닌데 싫다는 여자 데리고 그렇고 그런 짓을 할리 없지 않은가? 난 떨고 있는 그녀에게 칼라이스의 망토를 덮어주었다. “이제 따뜻할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조금이나마 나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내가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이 곳은 어디며, 마을은 어디에 있고, 어딜 가야 이그리드를 만날 수 있는지. 하지만 그녀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난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는 것을 포기했다. 이 곳은 내 의식 속이니 아무렇게나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 당장은 그렇게 믿는 수 밖에 없었다.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라이레얼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귀여워라~. 색다른 모습의 라이레얼을 보는 것은 나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나저나 이그리드를 어디 가서 찾아? 정말로 그가 이 곳에 있을까? 고민은 많은데 밤이 깊어 간다. * * * * * * * 히로는 마치 죽은 듯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래도 숨은 쉬는 듯 가슴이 위,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라이는 히로의 손을 꼭 움켜 잡았다. “꼭 일어나야 돼, 오빠.” 라이는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았다. ‘오빠가 없어도 라이는 울지 않을 테야!’ 라이는 굳게 결심하였다. 히로가 일어날 때까지 울지 않고 그 곁을 지키기로. “좀 쉬세요.” “전 괜찮아요, 오빠.” 어느새 다가온 인디는 라이의 옆에 앉았다. 라이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빠는 괜찮을까요?” “아마도 괜찮을 겁니다.” 인디는 다정한 말로 라이를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라이는 안심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만약 오빠가 일어났을 때…… 오빠가 아니면 라이는 어떡해요?” “…….” 인디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히로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는 분명 변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라이는 울상을 지었다. 그 순간 히로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앗! 오빠가 웃고 있어요!” 라이의 말대로 히로는 히죽이죽 웃고 있었다. 아주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라이는 울먹거리며 중얼거렸다. “라이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오빠가 웃는 게 분명해요. 훌쩍~ 어떠한 일이 있어도 라이는 울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라이 곁엔 항상 오빠가 있으니까요!” 인디는 그 말을 듣고 굉장히 감명을 받았다. ‘맞아. 내 곁에는 항상 일루니아님이 있어! 그러니 나도 울지 않을 테야!’ 만약 지금 둘이 하는 짓을 히로가 봤다면 ‘꼴값 떨고 있네’라고 말하며 혀를 찼을 것이다. “이거 야참인데 드시겠어요?” “야참이요? 뭔데요?” “계란 말이와 주먹밥이랍니다.” “정말요? 라이는 계란 말이와 주먹밥 너무너무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제가 성심성의껏 만들었으니 맛있게 드세요.” “네!” 라이는 힘차게 외치며 인디가 건네준 주먹밥을 입안이 미어터지도록 우겨 넣었다. 그리고 한손으론 계란 말이를 집어 먹으며 다른 손으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우와! 맛있어요! 오빠도 하나 드세요.” “예. 그럴게요.” 라이는 주먹밥을 베어 물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라이의 머릿속에 더 이상 히로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아이리스::박성호 TITLE ▶4 :: <아이리스 12권> 9클래스 - 04 sharpshooter(psungho) 03-04-23 :: :: 32057 잠에서 깬 나와 라이레얼은 계속해서 숲속을 이동하였다. 아아~ 라이레얼. 한 때는 저주스럽기까지했던 그 이름이 이제 내겐 행복한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뉴(new) 라이레얼. 그녀의 외모는 라이레얼과 흡사했지만 성격은 청순가련 그 자체였다. 척 보기에도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팍팍 든다. 참고로 예전 라이레얼은 보호 받고 싶은 마음이 팍팍 들었다. 난 그녀의 여린 손을 꼭 움켜 잡았다. 결코 사심이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헤어질까봐.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는 가? 그건 나도 모르지. 내가 아는 건 다만 이 곳은 내 의식 속이라는 것. 나에게는 아이언스 이그리드를 찾아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있다. 그렇기에 내가 어디로 가던 나는 반드시 이그리드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한참을 걷던 중 나는 숲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달그닥- 달그닥-! 이 것은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가 아닌가? 우연히 마주친 마차라. 이럴 경우엔 보통 히치 하이킹을 하기 마련이다. 난 마차가 지니가는 진로를 가라 막고 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마차는 천천히 멈추었다. 마부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후후~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면 말해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우리는 바로 그 유명한 노상 강도……가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다리가 좀 아파서 그러니 태워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이렇게 묻자 마부는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꺼져! 이 곳에는 귀족 자제분이 타고 계시다!” 귀족 자제? 그럴 줄 알았어. 하여간 귀족들 하는 꼴 하고는……이라고는 하지만 나도 귀족이다. 누가 뭐래도 잘나가는 이 시대의 공작하면 아이언스 공작이 아닌가? “네 놈! 당장 비키지 못할까?” 마부는 채찍을 휘둘렀다. 난 몸을 가볍게 옆으로 비키며 날아오는 채찍을 움켜잡았다. 나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몸 동작에 깜짝 놀란 마부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뭐, 뭐하는 짓이냐? 당장 그 손 놔!” 내가 미쳤냐? 이걸 놓게? 놓으면 다시 휘두를 거면서. 난 마부를 보며 인상을 팍 썼다. 난 이런 놈들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겨우 귀족집 마차 모는 주제에 자신이 귀족인냥 착각하는 놈들. 이거야 말로 호가호위(狐假虎威)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이, 형씨! 우리 깨끗하게 한판 붙어 볼까?” 난 순식간에 채찍을 내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러자 반대편을 잡고 있던 마부는 마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난 녹이 쓸지는 않았을까 걱정될만큼 오랫동안 뽑지 않았던 청룡도를 뽑아 들었다. 촤앙-! 햇빛을 받아 청룡도가 시퍼렇게 빛난다. 오오~ 이거야 말로 천하의 명기(名器)로다! 도(刀) 전체에 영웅의 기게가 어려있구나! 이제부턴 이걸 아예 영웅도(英雄刀)라고 불러? “히이익! 살려 주십시오!” 마부는 그제야 내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았는지(혹은 내 손에 들린 청룡도가 무서웠는지)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결국엔 이렇게 될 것을 왜 개겼을까?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안에는 귀족 자제가 타고 있다고 했지? 대체 어떤 놈인지 정체를 밝혀라?” “예, 예. 저기 안에 타고 계신 분은 레이트 백작님의 영애입니다. 아이구, 제발 목숨만은…….” “……!” 레이트 백작의 영애라면? “넌 뭐야, 새꺄?” 그 순간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마차에서 내린 여인이 도끼눈을 뜬채 날 째려보고 있었다. 저 초록색 머리카락의 여인은 분명 세레나였다. 오옷! 세레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나머지 반데라스라는 별 이상한 스토커에 시달리기까지 했던 그녀의 이름은 세레나.. “아저씨, 이 새끼는 뭐예요?” “…….” 저것이 지금 저 아름다운 여인의 입에서 나온 대사란 말인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 고귀하며 청순하던 그녀가 어쩌다 저런 칠공주파의 맏언니 같은 대사를 내뱉을 수 있겠는가? 이건 현실이 아니야! “야, 새꺄! 니 이름 뭐냐?” “…….” 그래. 이건 현실이 아니야. 나의 잠재 의식일뿐이야. “어쭈! 대꾸를 안 해? 너 아가리에 빵구 났냐? 그리고 저 년은 뭐야? 니 깔이야?” 하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다. 어떻게 나의 세레나가 이럴 수 있어? 그녀와의 첫만남이 기억난다. 그녀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큰 위험에 빠져 눈물을 흘리던 가녀린 작은 새였다. 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고, 그래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나는 바람따라 흘러가는 나그네. 내가 그녀를 떠나려는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난 그녀의 만류를 뿌리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이런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내가 대체 어찌해야 하나? “저기…… 저희가 지금 마을로 가야 되는데 다리가 좀 아파서…….” “그래서?” “그래서 마차에 좀 태워주셨으면 하고…….” 세레나는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리며 우리를 살펴 보았다. 난 최대한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썼다. “좋아.” 세레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라이레얼과 함께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다그닥- 다그닥-! 다시 마차가 출발했다. 세레나는 우리를 보며 씨익 웃었다. 라이레얼은 세레나가 무서운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고, 나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야, 니들 이름 뭐야?” 세레나가 건방진 말투로 묻자 라이레얼은 공손히 대답했다. “저, 전 라이레얼이라고 합니다.” 난 그 황당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그 누가 이런 장면을 상상이나 했을까? 아! 내가 상상했구나. 아무튼 이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아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제 이름은 히로입니다.” 난 라이레얼과 마찬가지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세레나는 고개를 갸웃 했다. “히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당연하지. 너랑 내가 어떤 사이였는데. 비록 지금의 너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겠지만. “…….” 아아~ 그 생각하니 갑자기 열이 뻗친다. 세레나 같은 미소녀가 반데라스 같은 변태 스토커와 결혼을 하다니. 정말 여자가 아깝다. “내 이름 세레나야.” 니가 말 안 해도 이미 다 알고 있다. 청순가련한 라이레얼, 싸가지 없는 세레나. 이젠 뭐가 튀어 나올까? 아~ 정말 기대 된다. 이런 나의 기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차는 쉼 없이 달렸다. 세레나는 내가 핫바지로 보이는지 욕설이 섞인 반말을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야, 이 새꺄!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쌩까지 말고 똑 바로 들어. 알았어!?” 다른 건 다 좋은데 그 ‘새끼’ 라는 말은 어떻게 좀 안 되나? 계속 듣자니 정말 기분 나쁘네. 진짜 세레나만 아니었지만 확 받아버리는 건데. 아, 나도 성질 진짜 많이 죽었다. “오늘 일진 더럽게 사납네. 야! 너 담배 한 까치 있냐?” “…….” 너 담배도 피니? 하긴, 내 의식 속인데 뭘 못하겠니? 더 이상 신경 썼다간 내 머리가 몽땅 뽑힐 것 같다. 난 한숨을 내쉬며 세레나에게 담배를 건네 주었다. 세레나는 담배를 입에 물더니 손짓을 했다. 난 그 동작의 의미를 몰라 물었다. “왜……?” “아이씨! 담배를 줬으면 불도 붙여줘야 할 거 아니야? 넌 담배를 씹어 먹냐?” “…….” 그래. 너 잘났다. 난 지포라이타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세레나는 아주 양아스런 동작으로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이더니 후욱~ 연기를 내뱉었다. 오옷! 아름다운 여인은 담배를 피는 모습 또한 아름답구나! 지금 나는 굉장히 감동 받았다. 여자가 담배를 피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들도 있지만 좋아하는 남자들도 있다. 참고로 난 후자에 속한다. 한 때는 담배 피는 여자와 사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돛대를 서로 번갈아 물며 피는 끈끈한 정. 그거야 말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돛대 - 담배갑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개비의 담배를 이르는 은어. 참고로 흡연가들 사이에선 돛대는 아버지께도 드리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돛대를 중시한다. 이런 돛대를 나눠 핀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에 대한 정이 깊다는 증거이다) 갑자기 내 이상형이 뉴(new) 세레나로 바뀌고 있다. 세레나~ 내 그대를 위해서라면 돛대마저 양보하리라. 우리 함께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돛대를 빨아 보는 것은 어떠할지요? “뭘 꼴아봐? 담배 빠는 거 처음 보냐?” “아니, 저…… 그게…… 너무 아름다우셔서…….” 여자는 칭찬에 약하다고 했던가? 내 예상대로 세레나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코로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썅! 입에 발린 소리 하기는!” “…….” 내가 말을 말자. 싸가지 없는 세레나 데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난 짜증이 나서 담배를 입에 물려 담배갑을 꺼냈다. 그런데…… 담배가 없다! 설마…… 설마…… 내가 방금 세레나에게 준 게 돛대였단 말인가? “…….” 난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내가 미쳤지! 돛대를 남에게 주다니! 으윽, 이제 난 어떡해? 내 돛대 돌리도! 남 몰래 눈물을 쏟아내는데 마차는 어느새 성에 도착했다. 나는 원래 이 곳을 돌아다니며 이그리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볼 생각이었지만 세레나가 하도 간곡히 부탁을 하기에 레이트 백작의 저택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내가 척 보니 니들 돈도 없는 거지 새끼들인 것 같은데…… 좋아. 뭐 갈데 없으면 내 집에서 재워줄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을 하는데 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 저택은 진짜 레이트 백작의 저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세레나가 물었다. “니들 그렇고 그런 사이지?” “……?” 그렇고 그런 사이? 대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뭘 의미하는 거지? 라이레얼은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내저었다. “우,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썅, 내숭 까지마! 갈 데까지 다 가 놓구선 내숭 까긴! 방 하나 줄테니까 거기서 니들끼리 콩을 까던, 떡을 치던 알아서 해.” “…….” 방을 하나만 준다고? 정말? 너무 좋은 나머지 입이 쭉 찢어진다. 어쩜 그리도 내 마음을 잘 알까? 난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자제하며 라이레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흠흠, 방은 어디야?” “새끼가 밝히기는…….” 세레나는 혀를 차며 방을 안내해 주었다. 나와 라이레얼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라이레얼은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 앉았고, 나는 재빨리 방문을 걸어 잠궜다. 철컥-! 방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자 라이레얼은 몸을 움찔했다. 후후~ 뭘 그리 두려워 하시나? 난 라이레얼의 옆에 걸터 앉았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몸을 조금 옆으로 이동시켰다. 나도 몸을 조금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또 조금 옆으로 이동시키려 하였다. 그 순간 난 그녀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왜, 왜 이러세요?” 그 누가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건 예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다. 옛날엔 내가 라이레얼에게 당했었지. 지금은 그걸 되갚아줄 차롄가? 난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손만 잡고 잘게.” “저, 저 그냥 방 옮길게요.” 라이레얼은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황급히 방을 나갔다. 정말 너무 한다. 그렇게 날 못 믿나? 손만 잡고 잔다니까! 조금 지나자 날이 저물었다. 날이 저물면 술집은 붐비기 마련이다. 정보를 얻는 데는 술집이 최고지! 나는 몰래 세레나의 집을 빠져나와 술집으로 향했다. 성 안에는 깔린게 술집이었기에 술집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난 괜찮은 술집 하나를 택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술집 안은 거의 난장판이었다. “죽여! 죽여!” “그 새끼 묻어 버려!” 술에 만취한 두 남자가 홀 중앙에서 소위 말하는 맞짱을 뜨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소리치며 응원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정겨운 우리네 삶인가? 두 남자는 정말 처절하게 싸웠다. 입에 맥주 거품을 물고 이단 옆차기를 하는 옆집 아저씨를 보았는가? 눈 감고도 피할 그 공격에 나가 떨어지는 뒷집 아저씨를 보았는가? “에라 씨발, 빅장(Big掌)이다!” 옆집 아저씨는 그렇게 외치며 손바닥을 마구 휘둘렀다. 그러자 뒷집 아저씨는 뒤로 심하게 밀리며 외쳤다. “허억! 이건 뼛속까지 시리다!”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마!” 밀리던 뒷집 아저씨는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의 공격 패턴을 알아냈다. 그것은 바로 강약약 강강약약 강중약이다!” 그러자 옆집 아저씨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그걸 어떻게……?” “하하하~ 이제 나의 필살기 40단 컴보를 보여주지.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아싸! 좋구나!” “으악! 이건 아까의 타격과는 다르다.” “이제부턴 나의 공격을 막는 데 애로 사항이 꽃필 것이다.” “으허헉! 이대로 당할 순 없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회전 스크류!” “일렬종대(一列縱隊)!” “우린 아직 순수해!” 난 차마 더 이상은 보지 못하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 잠재 의식이라는 것이 이렇게 유치한 것이었나? 어찌되었든 옆집 아저씨와 뒷집 아저씨는 온갖 유치하면서 알아듣지 못할 대사를 내뱉으며 서로를 공격했다. 잘하는 짓이다~. 난 그들의 싸움에 신경을 끄고 바에 앉았다. 그리고 목청이 터질 것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뒷집 아저씨를 응원하는 주인장을 불러다 세워 술을 주문했다. 그러는 사이 싸움이 끝났다. 승리의 영광은 빅장이라는 특이한 기술을 쓰는 옆집 아저씨에게로 돌아갔다. “크하하! 나의 빅장은 무적이다!” “크흑! 분하다. 나의 40단 컴보가 무너지다니.” 염병…… 그렇게 할 짓이 없냐?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옆집 아저씨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어이! 거기 꼬마! 넌 뭐야?” 조각 같은 내 외모가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어찌되었든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 맞지? 상대가 시비를 걸면 맞서 싸워주는게 인지상정. 난 마시던 술잔을 내려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히 겁도 없이 아이언스 공작님께 시비를 걸다니. 그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나의 빅장을 보여주마!” “훗! 빅장 따위로 본좌의 청룡도법을 상대하려하다니! 어리석구나!” 그렇다! 옆집 아저씨에게 빅장이 있다면 나에겐 청룡도법이 있다. 난 인상을 쓰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놀라며 뒤로 넘어가는 인간들. 이런 장검은 아무나 가지고 다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놀라는 것은 당연하겠지. 옆집 아저씨는 전투 의욕을 상실했는지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난 탁자 위에 올라가 소리쳤다. “본좌는 혈교의 교주 혈존무적을 물리친 검성 아이언스 히로라 하오! 그대들 중 나와 비무를 하고 싶은 자가 있소?” 당연 있을 리가 없다. 난 이쯤에서 꼴값은 그만 떨고 본론을 얘기하기로 했다. “본좌는 본좌의 스승이신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을 찾고 있소.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술값은 본좌가 전부 계산해 줄 것임을 약속드리겠소.” 순간 장내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던 중 좀 어벙하게 생긴 남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외상값도 갚아 주나요?” “…….” 후후, 외상값이라?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군. 내 의식 속이지만 정말 특이한 놈들이 많다. “좋소! 본좌가 외상값까지 갚아드리겠소!”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곳곳에서 난리가 났다. “제가 알아요!” “시끄러, 임마! 내가 말할 거야!” “나야, 나!” “저요! 여기 좀 봐줘요!” “다들 입 안 다물어! 니들 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옆집 아저씨는 입을 여는 주위 사람들을 전부 때려 눕혔다. 그리곤 손을 번쩍 들었다. 대체 외상값이 얼마나 밀렸기에……. 난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말해보시오.” “예.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은 아이리스의 공작이시니 아이리스 왕궁에 계십니다. 틀림 없습니다.” “……!?” 뭐? 이그리드가 아이리스의 공작? 아이리스의 공작은 난데. 설마…… 과거? 마법과 언어를 전수하는 과정에서 내 머릿속에는 이그리드의 기억 일부분이 같이 흘러 들어왔다. 그 기억은 내 잠재 의식 속에 곱게 묻혀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현재 이 곳은 그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융화된 곳인가? 여긴 헤리오의 수도일테니 아이리스라면 동쪽으로 가야겠군. 난 청룡도를 집어 넣고 술집을 나가려 하였다. 그러자 옆집 아저씨가 나를 붙잡았다. “저기…….” “뭡니까?” “외상값은…….”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댁이 열심히 일해서 갚아야지.” “예? 하지만 아까는…….” “그걸 믿었냐?” “…….”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턴 그렇게 쉽게 남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어차피 인생은 혼자 가는 길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나는 휑~ 하고 술집을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세레나의 집으로 돌아가? 아니면, 그냥 출발해? 미녀와 같이 다니는 것이야 말로 여행의 로망이다. 하지만 라이레얼을 데리고 다닌다면 속력이 늦어질 것은 불보듯 뻔하다. 어쩔 수 없이 그냥 혼자 가야겠군. 그나저나 거기까지 어떻게 간다냐? 걸어가면 한달도 넘게 걸릴테고, 말을 타고 가도 보름은 넘게 걸릴텐데. 뭐 괜찮은 이동 수단 없나? 그 순간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정말 놀랍게도 그것은 오토바이였다. 영어로는 모터사이클(motorcycle). 참 별 게 다 있다는 생각이든다. 난 주위를 슬쩍 둘러 보았다. 아무도 없다. 오토바이 주인은 어디 갔나 보다. 이 오토바이는 마치 날 위해 준비되어 있는 듯 키(key)까지 예쁘게 꽂혀 있었다. 후후~ 이대로 타고 가면 되나? 누군가 나에게 면허증이 있냐고 묻는다면 난 당당히 없다고 대답하겠다. 하지만 면허증이 있어야만 오토바이 타나? 밟고 당기면 가는 게 오토바이 아닌가? 면허증 따위는 없어도 운전하는데 아무 지장 없다.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클러치를 잡고 액셀을 당기면……. 부르르릉-! 좋았어! 스타트! 부아아앙-! 오토바이는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질주하였다.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야, 이 개새끼야~! 내 오토바이 내놔~!” 고개를 돌려 보니 양아치로 보이는 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인간의 발로 오토바이를 쫓아 올 수 있으리. “잠깐만 빌릴게!” 잠깐이 평생이 될 수도 있는 거니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게나. 난 동쪽이라 생각 되는 곳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내 의식 속이다보니 정말 별게 다 있다. 혹시 잘 찾아보면 비행기도 있지 않을까? * * * * * 청안백우조 라이코스는 라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히로의 별로 충성스럽지 않은 부하 1호였다. 이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라이코스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째서 라이코스는 아무 말도 없이 라이의 곁을 떠난 걸까? 히로가 침대에 꼼짝 없이 누워있자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라이는 굉장히 심심했다. 지금 라이에게 필요한 것은 같이 놀 친구였다. 같이 놀 친구하면 떠오르는 친구는 라이코스가 아니겠는가? 라이는 너무너무 심심해서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어디 갔어, 이코야~.’ 라이가 이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라이코스는 과연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말 없이 라이의 주머니에서 빠져 나온 라이코스는 하늘로 날아 올랐다.일반 매와는 달리 상당히 부산스럽고 주책 맞게 날아오른 라이코스는 빠르게 날개짓을 하였다. 파닥파닥~. 라이코스가 누군던가? 하루에 만리를 난다는 영물이 아니던가? 라이코스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하늘을 비행하였다. 대륙 남쪽에는 버들랜드(Bird+Island ?)라 불리는 작은 섬이 있었다. 이 곳은 중앙에 숲이 우거진 바위섬으로 철새 도래지이자 가장 많은 숫자의 청안백우조가 분포해 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라이코스의 고향이기도 했다. 이 곳에 도착한 라이코스는 나무 위에 걸터 앉아 감회에 젖었다. 고향을 떠는지 몇 해 던가?(실제로는 몇 개월이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결국은 고향의 품에 안기는 구나. 아아~ 나의 정겨운 고향이여! 라이코스가 그렇게 감회에 젖어 혼자서 꼴값을 떨고 있는데 몇 마리 매가 근처로 날아왔다. “너 오랜만이다. 그 동안 어디에 있었어?” 그들은 라이코스의 친구들이었다. “하하~ 그 동안 세상을 좀 여행했었지.” “이야, 아무튼 오랜만이다.” “아! 나 이름 바뀌었어. 라이코스로.” “라이코스? 멋진데!”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음하하!” 싫다고 할 땐 언제고……. “그나저나 니들은 그 동안 잘 지냈니?” 라이코스의 질문에 엠파스라는 매가 대꾸했다. “물론 잘 지냈지. 그런데 너무 심심했어. 여기선 할 일이 별로 없잖아. 나도 여행이나 떠나볼까?” “집 떠나면 고생이야. 그냥 집에서 자식 낳아 기르는게 편해.” “그래도 여행은 재밌잖아.” “재밌긴 쥐뿔이! 나처럼 이상한 인간이랑 같이 다녀봐. 고생만 죽도록 해. 그리고 대륙에는 청안백우조만 잡아 먹는 무서운 하프엘프가 있어. 나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니까.” “정말?” “그래. 그 여자 이름이 라이레얼이니까 니들도 만나면 조심해야 돼. 알았어?” “응.” 라이코스의 경고에 매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 가장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네이버라는 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돌아온 거야?” “그게 보고 드릴 사항이 좀 있어서.” “칼라이스님께?” “응. 칼라이스님은 어디 계셔?” “내가 안내해 줄게.” 안내해주겠다고 나선 네이트라는 매가 먼저 날아올랐다. 그러자 라이코스는 그 매의 뒤를 따랐다. 버들랜드는 이름 그대로 새들의 섬이었다. 그리고 섬 전체는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의 레어나 다름이 없었다. 칼라이스는 새들 중 청안백우조를 가장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순백의 몸이 화이트 드래곤인 자신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드래곤들의 관심사는 한 인간이었다. 그 인간이 아이언스 히로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크로니스의 정신 붕괴가 시작된 시점은 이그리드가 죽은 직후였다. 그렇기에 드래곤들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오래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아이언스 히로뿐. 드래곤들은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야 했다. 하지만 일일이 쫓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멀티아이(multi-eye)를 이용해 감시할 수도 있지만 그 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드래곤들은 첩자를 붙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첩자는 바로 라이코스였다. 그것이 그 동안 라이코스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였다. 라이코스가 친구 네이트와 함께 도착한 곳에선 한 마리의 봉황(鳳凰)이 우와하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기린의 상체에 사슴의 하체, 뱀의 목과 물고기의 꼴, 등은 거북이의 그것을 닮았으며 턱은 제비와 흡사했고, 부리는 닭과 같았다. 깃털에 물든 오색 무늬는 보석가루를 뿌려놓은 듯 화려하게 빛났다. 그 모습은 한 마디로 완벽이었다. 세상에 어떤 새가 이토록 위엄 있고, 아름다울까? 봉황은 라이코스를 보더니 근처 바위에 내려 앉았다. 봉황의 부리가 열리며 중후하면서도 맑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라이코스는 봉황의 앞으로 나서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업무 보고하러 왔습니다.” “해라.” “그러니까요. 그 인간이 어쩌구저쩌구…… 엘프의 숲에 갔는데요…… 차원의 열쇠가 어쩌구저쩌구……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 그러므로…… 이렇게 되었어요.” 라이코스는 두서 없이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였지만 봉황은 전부 알아 들었다. 역시 괜히 봉황이 아니었다. 아무나 봉황하나? 봉황은 머리도 좋아야 하는 거다. 라이코스는 빨리 말하느라 지쳤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동안 크게 심호흡을 한 라이코스는 갑자기 씨익 웃음을 지었다. ‘과연 그 놈은 내가 첩자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후후~ 역시 나는 보통 매가 아니었어. 나는 스파이에 소질이 있었던 거야!’ 라이코스는 자신은 참 다재다능한 매라고 생각하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꼴값이 아닐 수 없다. 지랄 염병……이라는 대사가 저절로 튀어 나온다. 이 놈 진짜 나쁜 놈이다. 히로가 얼마나 저한테 잘해줬는데 보답은 못할망정 간첩질이나 하다니. 에라이~ 간첩 같은 놈아! 스파이질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면 그 시간에 스파이더맨 놀이(괜히 벽에 붙어서 기어다니는 놀이)나 해라! 한참 시간이 지나도 봉황이 말이 없자 라이코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기요, 칼라이스님.” “왜 그러냐?” “저 업무 전선에 다시 복귀할까요?” 봉황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차피 이제 곧 일은 벌어질 것. 굳이 네가 갈 필요는 없다.” 그 말에 라이코스는 쾌재를 불렀다. ‘아자! 더 이상 그 놈 안 만나도 된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이코스는 힘차게 날아 올랐다. 라이코스는 드디어 업무에서 해방, 즉 퇴직을 한 것이다. 아니, 그 보다는 제대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군. 그 정도로 라이코스의 기쁨은 컸다. 사실 그 동안 부끄러워서 얘기를 못했을뿐이지 라이코스에게는 참한 여자친구도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드림위즈. 라이코스는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힘찬 날개짓을 하였다. 자신이 없는 동안 다른 놈팽이를 만났으면 어쩌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았다. 그곳에서 라이코스는 여자 친구 드림위즈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정말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함숨 짓는 날이 늘어 났다. 어느날은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바라보기도 했다. 그것은 그리움 때문이었다. 라이코스는 절친한 친구였던 라이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여자 친구와의 행복한 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대륙으로 날아가? 다시 기약 없는 모험을 시작해? 라이코스는 라이를 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럴 수록 방긋 웃는 라이의 얼굴은 커져만 갔다. “흑흑, 라이야~ 보고 싶어~.” 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라이코스는 다시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짐을 쌌다.(매가 쌀 짐이 어디 있냐?) 여자 친구 드림위즈는 라이코스를 말렸다. “가지 마.” “미안. 난 가야만 해. 나의 친구 라이가 날 기다리고 있어.” “넌 간첩이야! 간첩에게 친구는 없어!” “그래. 맞아. 난 간첩이었어. 하지만 난 더 이상 간첩이 아니야. 이젠 간첩질도 그만 뒀어.” “아니야! 한번 간첩은 영원한 간첩이야!” “……간첩이 무슨 해병대니?” 라이코스는 드림위즈의 만류를 뿌리치고 파다닥~ 날아올랐다. “조금만 기다려, 라이야. 내가 갈게.” 라이코스는 버들랜드를 뒤로한 채 대륙으로 날아갔다. 그리운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 아! 정말 감동적이다! * * * * * * 히로가 의식 속에서 이그리드를 찾아 헤매는 사이 라이레얼은 갈리온드와 루엔, 그리도 굳이 이름을 밝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떨거지 몇 명을 데리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수 마리 말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힘차게 질주한다. “빨리 달려!” 라이레얼은 말을 채찍질 했다. 늦게 간다고 차원의 열쇠를 누가 채 갈 것도 아닌데 라이레얼은 상당히 조급한 모습이었다. ‘나의 히로를 위해 차원의 열쇠를 찾아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그리 순수한 의미만은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라이레얼이 차원의 열쇠를 히로에게 그냥 건네줄리는 없지 않은가? 며칠의 질주 끝에 그들은 작은 항구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이레얼은 그곳에서 짐을 풀자마자 정보 수집에 나섰다. 그런데 그 방법이 굉장히 과격했다. 일단 주점에 들어간다. 그 주점에서 힘 꽤나 쓴다는 사람들을 때려 눕힌다. 그리고 묻는다.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가 어디에 있어?” 대답은 여러 가지가 튀어 나왔다. 이 섬에 있네, 저 섬에 있네, 알고보니 우리 집에 있네, 이미 지구를 떠났네 등등. 정확한 정보는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라이레얼 패거리(이 중에는 갈리온드와 루엔도 끼어 있다. 새로 가입한 맴버라고나 할까?)들은 온갖 장소를 돌아다니며 갖은 정보를 모아 봤지만 전부 쓸데 없는 얘기들 뿐이었다. “이제 어쩌지?” 정말 난감한 상황이다. 라이레얼은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괜히 아빠에게 신경질을 냈다. “아빠는 차원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알잖아!” 라이레얼의 말대로 갈리온드는 선택 받은 엘프였기에 차원의 열쇠의 위치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야 알기야 알지. 하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는 방향 밖에 알 수 없어. 근처에 가봐야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지.” 라이레얼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 모습에 놀란 갈리온드는 고개를 푹 숙이며 궁상을 떨기 시작했다. “흑흑, 미안하다, 내 딸아. 아빠가 되서 도움도 못 주고…… 흑흑, 나 같은 엘프는 죽어야 돼!” 정말로 죽을 마음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라이레얼은 짜증이 나서 달래줄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러자 루엔이 한숨을 쉬며 갈리온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이씨! 빨리 차원의 열쇠를 찾아야 우리 히로를 도울 수 있을텐데.’ 라이레얼은 손톱을 물어 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잘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라이레얼이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하는데 강제 징집되어 끌려온 용병들은 라이레얼이 어떠한 방법도 생각해 내지 못하길 간절히 바랐다. “혹시라도 라이레얼이 방법을 생각해 내면 우린 끝장이야.” “맞아. 화이트 드래곤이라니. 라이레얼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언제는 제정신이었냐?” “하긴. 그나저나 우리는 이게 무슨 꼴이냐?” “난 벌써 전쟁터가 그리워.” 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화이트 드래곤을 만나야 하는가? 만약 드래곤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큰일이다. 라이레얼 성격상 상대가 드래곤이라 해도 숙이고 들어갈리 없다. 아마도…… ‘어이! 형씨가 드래곤이야? 차원의 열쇠라고 알지? 뭐? 모른다고? 공갈 치지 마. 내가 다 알아보고 왔어! 10초 줄테니까 좋은 말로 할때 차원의 열쇠 뱉어내!’ 이렇게 말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면 드래곤이 순순히 차원의 열쇠를 뱉어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회의적이었다. 십중팔구는 브레스에 맞아 사망하겠지. “좋아! 결정했어!” 한참을 고민하던 라이레얼은 손뼉을 부딪히며 소리쳤다. 그 때문에 용병들은 놀라 뒤로 넘어갈뻔 했다. 결정했다고? 뭘 결정해? 설마 방법을 찾은 건가? 그러면 안 되는데. “일단 배를 타고 나가는 거야. 그 다음 마구 돌아다니다보면 아빠한테 감이 올 거야. 그럼 그쪽으로 가는 거지.” “…….” 참으로 라이레얼다운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었다. 테커가 말했다. “그 감이라는 게 안 오면 어쩌지?” 그러자 라이레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럼 감이 올 때까지 돌아다녀야지.” “…….” 맹점을 무식한 저돌력으로 극복하겠다는 저 의지! 정말 라이레얼답다고 밖에 표현 할 수가 없다. 만약 이 방법이 그대로 실행될 경우 드래곤을 만나 죽을 확률보다 바다에 빠져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간단히 말해 거의 미친짓이라 할 수 있었다. “조, 좀 더 정보를 수집하는 게 어떨까? 호, 혹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마, 맞아. 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우리가 좀 더 열심히 할게.” “그래. 우리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하자.” 용병들은 라이레얼 설득에 나섰다. 그들이 한참을 열과 성을 다해 설득하자 라이레얼은 조금 구미가 당기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럼 하루만 더 하지.” “고,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걸까? 목숨이 하루 연장된 것이? 이제부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용병들은 잠도 안 자고 처절하리만큼 열심히 돌아다녔다. 정보 수집!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드래곤을 만나 죽으면 그래도 덜 억울하지. 바다에 빠져 불귀의 객이 되면 얼마나 억울하겠냐? 하지만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의 행방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이 놈의 드래곤이 대체 어디에 짱 박혀 있는 걸까? 그러는 사이 밤이 가고 날이 밝았다.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아니, 삽질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 맨 땅에 헤딩했다는 표현도 괜찮지. “하루만 더 시간을 줘. 우리 진짜 잘 할 수 있어.” “맞아. 정말 잘할게.” 라이레얼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어.” 라이레얼은 당당한 걸음으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돛단배를 빌려 출항할 생각이었다. 용병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라이레얼의 뒤를 따랐다. 거의 선착장에 다달았을 무렵, 라이레얼은 낯익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를 부리로 물어 뜯고 있는 흰색 매. 그것의 이름은……. “앗! 라이코스다!” “앗! 라이레얼이다!” 둘의 외침은 거의 동시에 터져나왔다. 라이레얼은 아직까지도 청안백우조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 정력과 미용에 좋다면 날뱀도 씹어 먹는 하프엘프가 라이레얼 아니던가? “잡아!” 라이코스는 먹던 물고기를 뱉어내고 날아올랐다. 살기 위해. 하지만 라이레얼이 조금 빨랐다. 라이레얼은 간만에 만난 보약(?)을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번개 같이 날랜 몸동작으로 날아오르는 라이코스의 발을 붙잡았다. 라이코스는 온 힘을 다해 날개를 파닥거렸지만 라이레얼의 손에서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젠 용병들까지 가세했다. 테커는 어느새 가져온 그물을 라이코스의 머리 위에 덮었다. 아아~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던데, 선착장에서 라이레얼을 만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안 돼~!” 선착장 한 구석 골목길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진다. 우리의 불쌍한 라이코스는 긴 막대기로 대롱대롱 묶여 있었다. 그 밑에는 물이 팔팔 끓는다. 카웨는 방금 시장에서 구입한 싱싱한 야채들을 깍둑썰기로 예쁘게 썰었다. “준비 끝났어.” “좋아. 일단 털부터 뽑자.” “흑흑, 제발 살려줘~. 부탁이야. 이제부턴 간첩질 안 하고 착하게 살게.” 라이코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처절하게 빌었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시끄러! 음식 주제에 되게 말 많네.” 사악사악- 식칼에 숫돌에 갈리는 소리. 라이코스는 온 몸의 털이 빳빳하게 서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라이코스는 자신의 생을 회상해 보았다. 이 땅에 영물로 태어나 한번 폼나게 살아보고 싶었다. 여자 친구 드림위즈와 자식도 낳아 잘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칼라이스님의 눈에 잘못 들어 아이언스 히로라는 인간 옆에 붙어 간첩질을 해야했다. 그러던 중 한 엘프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라이. 라이는 내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려했지만 난 그 친구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라이를 만나러 다시 날아가던 중이었는데 라이레얼을 만나고 말았다. “어흐흐흑, 제발 살려주세요. 전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털을 뽑은 다음 죽이려 했는데, 먼저 죽이고 나서 털을 뽑아야겠다.” 라이레얼은 식칼을 들어보였다. 그런 그녀의 눈은 식탐에 얼룩진 광기로 젖어 있었다. 이 순간 라이코스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다. 그러자 가장 소중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라이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라이코스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이거 빨리 잡아 먹고 드래곤 만나러 가자.” 라이레얼이 말하자 소스를 준비하던 카웨가 궁시렁거렸다. “젠장, 화이트 드래곤이 어디 있는 줄 알고 만나러 가?” “…….” 드래곤을 만나? 화이트 드래곤을? 모든 것을 포기하던 라이코스의 눈에 한줄기 서광이 비췄다. 라이레얼은 식칼을 들어 올렸다. 죽음은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라이코스는 재빨리 부리를 열며 소리쳤다. “저 알아요! 저 화이트 드래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그 순간, 힘차게 내리찍히던 식칼이 라이코스의 목을 살짝 비켜갔다. “정말이야?” 라이레얼이 묻자 라이코스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저, 정말이에요. 정말 저 알아요. 아주 잘 알아요.” 정말 처절하다. 하긴, 목숨이 걸린 일인데 처절하지 않을리 있겠냐? 라이레얼은 흐음~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놈의 말이 정말일까, 아니면, 살기 위해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걸까?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님은 버들랜드에 살고 계세요. 거기가 제 고향이에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절 믿어주세요!” 발버둥을 치며 외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별로 믿음이 안 간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달리 믿을만한 놈이 없기에 한번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좋아.”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는지 라이코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만약 니가 지금 살기 위해 공갈을 치고 있다…… 이럴 경우엔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예. 잘 알아요. 절 믿어주세요.” 이로써 라이코스는 질긴 목숨을 또 다시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용병들은 정력과 미용에 좋다는 청안백우조 고기를 먹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안내자를 찾은 것에 만족하였다. 그들은 선착장에서 작은 범선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근해를 항해한다면 모를까, 그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거의 미친짓이었다. 하지만 라이레얼이 누군가? 라이레얼 성격에 그런 것을 신경쓸리나 있겠냐? 다행히 선장과 항해사, 선원 몇 명도 구할 수 있었다. 그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간다는 것이 미친짓임을 알고도 자원한 이들이었다. 그 이유는 라이레얼 때문이었다. 그들은 라이레얼이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부탁하자 돈도 한푼 안 받고 배에 올라탔다. 원래 여자가 예쁘기만 하면 물불 안 가리는게 남자의 본성이다.(여자가 배에 타면 재수 없지 않냐고? 이 세계엔 그런 미신 없다. 워낙 특이한 세계니 그냥 그러려니하고 넘어가라.) 라이레얼 패거리들이 배 위에 몸을 실자 배는 돛을 펼치고 항해를 시작했다. 순풍을 받은 배는 버들랜드를 향해 쭉쭉 나아갔다. 아이리스::박성호 TITLE ▶5 :: <아이리스 12권> 9클래스 - 05 sharpshooter(psungho) 03-04-26 :: :: 46038 부아아앙-! 오토바이가 비포장 도로를 우아하게 질주한다. 그리고 그 오토바이에 올라탄 나는 더욱 우아하게 웃음을 짓는다. 오토바이 여행을 시작한지도 어느새 이틀이나 지났다. 이 오토바이 생긴 건 400cc처럼 생겼는데 실제로는 125cc다. 어쩐지 출력이 별로다 했어. 125cc 오토바이를 사서 카울과 연료통, 바퀴 등을 전부 교체했나 보다. 왜 이렇게 했을까? 그야 당연 폼나게 보이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겉모습만 폼나면 뭐하나? 출력이 별론데. 비록 출력이 별로라고 열심히 궁시렁거리고 있긴 하지만 잘 나가긴 매우 잘 나간다. 전주인이 관리를 잘했나 보다. “…….” 으음, 미안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비록 내 의식 속이긴 하지만 남의 오토바이를 훔치다니. 예전에 기아 21단 자전거를 처음 샀을 때가 떠오른다. 난 그 자전거를 목숨처럼 아꼈었다. 매일 같이 닦고 조이고 기름쳤다. 그래서 내 자전거는 언제나 삐까뻔쩍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던 어느날 난 그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갔다. 물론 공부하러 간 것은 아니다. 여자 만나러 갔지. 아무튼 난 여자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서관을 나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 기아 21단 자전거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난 머리를 부여잡고 외쳤다. ‘어떤 개~ 쌍놈의 새끼가~ 내 자전거를 뽀려 갔어~!?’ 난 아직도 그 사건을 잊지 못한다. 그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의 분노는 가라 앉지 않았다. 이 놈 잡히기만 하면 내 손에 죽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한 내가 남의 오토바이를 훔치게 되다니. 이거야 말로 얄궃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다다다다당-! 오토바이 소리가 왠지 이상하다. 출력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거 왜 이러지? 속력이 점점 떨어지던 오토바이는 결국 길에서 멈춰 서고야 말았다. 난 내려서 오토바이를 살펴 보았다. 내가 살펴본다고 해서 뭘 알겠냐만은 그래도 혹시 아나? 고장 원인을 밝혀낼지.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어디가 망가졌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젠장!” 난 신경질을 내며 오토바이를 걷어찼다. 내 발만 아플뿐 오토바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야속한 것 같으니라고. 난 주머니를 뒤저 담배갑을 꺼냈다. 하지만 이내 돛대를 세레나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담배갑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젠 어쩐다냐? 한숨이 입을 비집고 나오고 고민이 머리를 잠식한다. 오토바이를 버리고 걸어갈까? 아니면 되던 안되던 간에 오토바이를 분해해 볼까? 부아아앙-! 저 멀리서 오토바이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온다. 난 길을 가로 막고 서서 소리쳤다. “스토옵!” 그러자 오토바이가 멈춰섰다. 운전자는 나를 스윽 쳐다보더니 헬멧을 벗었다. 붉은색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짝 달라붙는 가죽 바지와 가죽 점퍼 위로 드러난 그녀의 몸매는 거의 환상이었다. 오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나의 이상형은 이런 여자다. 오토바이를 거칠게 모는 스타일리쉬하고 아름다운 여인. 게다가 연상이기까지 하다. 마치 하늘이 나를 위해 내려준 여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의 취향에 정확히 부합한다.(이 놈은 예쁜 여자면 보면 전부 자기 이상형이라고 우기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어째 많이 본 얼굴이다. 설마 이 여자…… 루엔? 자세히 볼 것도 없이 대충만 훑어 봐도 루엔이 맞다. 이 곳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갑다. 알 사람은 다 알고 모를 사람은 전혀 모르지만 루엔은 내 친구다. 어려울 때 돕는 친구야 말로 진정한 친구라는데 루엔은 나를 도와 주려나? “무슨 일인가요?” “예. 제 오토바이가 망가졌거든요. 좀 봐주시겠어요?” 루엔은 생긋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역시 루엔은 나의 진정한 친구였다. 이렇게 흔쾌히 돕겠다고 나설 줄이야. 역시 내가 친구 하난 정말 잘 사귀었어. 후후, 이제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만 남은 건가? 루엔은 천천히 내 오토바이를 살펴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망가졌나요?” 루엔은 고개를 저었다. “망가진 곳은 없습니다.” “그럼?” “기름이 다 떨어졌네요.” “……예?” 그렇다. 주유소 한번 안 들르고 이틀 동안 달렸는데 기름이 안 떨어졌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그런데 난 왜 그 생각은 못했지?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나요?” “그야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어야지요.” “…….” 주유소? 참 별 게 다 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오토바이가 있는데 주유소가 없을리 없지. 그나저나 이런 곳이 내 의식 속이라니. 기가 막혀서 한숨 밖에 안 나온다. “주유소는 어디에 있나요?” “여기서 좀 더 가야 하는데…….” 루엔은 양손을 팔짱 껴 가슴 밑으로 집어 넣곤 생각에 잠겼다. 거기까지 오토바이를 끌고 가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후우~ 어쩔 수 없군요. 일단 제 오토바이에 타시겠어요? 오토바이는 나중에 사람을 보내 수거하기로 하지요.” 뒤에 타라고? 그런 훌륭한 방법이 있었다니! 루엔이 먼저 오토바이에 올라타자 난 그녀의 뒤에 올라탔다. 난 팔 사이에 손을 집어 넣고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꼭 껴안았다. 루엔의 붉은 머리카락이 내 코를 간지럽힌다. 킁킁~. 아! 좋은 냄새! 향수라도 뿌렸나? 왜 이렇게 향긋하지? “꽉 잡아요.” 말씀 안 하셔도 이미 꽉 잡고 있습니다. 그녀의 허리를 두른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그녀와 몸을 밀착시켰다. 부르르릉- 부아아앙-! 루엔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마자 급출발을 하였다. 순간, 난 몸이 뒤로 튕겨나갈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찬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난 루엔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아아~ 행복해~. 루엔은 작은 마을에 도착해서야 오토바이를 멈추었다. 난 오토바이에서 내려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루엔이 아니었으면 큰일날뻔 했어요.” 루엔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 이름이 루엔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 그야 친구니까. 나는 루엔을 잘 알지만 루엔은 날 전혀 모른다. 어떡하지?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 이상하게 여길텐데. “소문을 들었나 보군요.” “예? 예, 맞아요. 소문을 들었어요.” 1200cc 오토바이를 몰고다니는 붉은 머리카락의 미녀 엘프.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유명할 것이다. “날이 저물었는데 갈 곳은 있나요?” “아, 아니요. 없는데요.” “흐음, 어쩔 수 없군요. 절 따라오세요.” “예.” 눈치를 보건데 루엔은 자신의 집에서 날 재워줄 생각인 것 같다. 재워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 난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나를 자신의 집에서 재우려는 걸까? 그녀에게 있어서 난 처음 본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데. 설마…… 혼자서 외롭게 밤을 보내기가 싫어서? 그, 그럼 나와 함께 그렇고 그런…… 아아, 안돼.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어. 아앙, 이러시면 안 돼요~. 이상한 생각만 골라서 하며 걷는데 루엔의 뒤를 따라 걷는데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집은 마을 어귀에 위치한 아담한 2층 양옥이었다. 루엔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그 순간 나와 루엔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남녀가 벌이는 뜨거운 열락의 향연! 난 손으로 이마를 집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니들은 왜 허구헌날 이 짓거리니? 지겹지도 않니? “너희들…….” “어, 엄마.” 꼭 껴안은 채 맞추고 있던 루와 루비는 너무 놀란나머지 떨어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엄마라니? 여기서는 루엔이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로 나오나? 엄마던 할머니던 그게 무슨 관련이 있겠냐?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텐데. 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차마 지켜볼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애면 애답게 굴어!” “잘못했어요, 엄마! 살려주세요!” “으아앙!” 퍼억- 빠악- 투샤- 빠각- 뽀각-! 비록 내 의식 속이긴 하나 정말 불쌍한 놈들이다. 키스를 할 거면 걸리질 말던가, 할 것이지 꼭 걸려서 얻어 맞냐?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가고 정적이 찾아왔다. 난 그제야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떡이된 루와 루비에게 애도를 표하고, 그 다음 루엔에게 말을 걸었다. “조그만 것들이 참 순진하지 못하고 발랑 까졌네요.” 루엔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애 아빠가 교육을 잘못 시켜놨어요.” “…….” 애 아빠? 내가 의문을 제시하는데 그 순간 한 남자가 방에서 나왔다. 그는 루엔을 보더니 “여보~” 라고 외치며 달려 들어 그녀를 껴안았다. “어디 갔었어, 자기야~. 자기 없어서 나 심심했단 말이야.” “우웅, 그랬어, 자기야? 미안해~.” “흥! 만날 미안하다고만 하고. 우리 사이에 미안한 게 어디 있어?” “미안.” “아이, 또 미안이래. 자기 자꾸 그러면 나 삐질 거야.” “아잉, 삐지지 마, 자기야~.” 이 무슨 라이브 쇼란 말인가? 지금 루엔과 껴안은 채 볼을 비비고 키스를 하는 등 온갖 불건전한 행위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남자는 바로 갈리온드였다. 갈리온드. 라이레얼의 아버지이자 일명 궁상 엘프로 불릴만큼 궁상에 일가견이 있는 궁상가이(窮狀Guy). 그는 내 의식 속에서 루엔과 결혼해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딸 라이레얼을 내 팽개친 채. “나 자기를 위해서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 놨어. 먹어 줄 거지, 자기야~.” “그럼. 자기가 날 위해 만들어준 요린데 당연히 먹어야지.” “그런데 나 걱정이 한 가지 있어.” “무슨 걱정인데?” “만약 내가 만든 음식이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어떡하지?” “아앙,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 자기야~. 난 자기가 만든 음식이면 뭐든 맛있어.” “정말?” “그러엄.” 루와 루비가 왜 저렇게 발랑 까졌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집안에서 애들 눈치도 보지 않고 이런 농도 짙은 애정행각을 벌이니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냐? “사랑해, 자기야~.” “나두 사랑해~.”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지? 누굴 느끼함으로 말려 죽일 일 있나? 아~ 재수 없어. 건전한 남녀 교제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짓은 법으로 금지해야 돼. 잘 때도 손만 잡고 자. 키스는 하루에 한 번만 하고. “…….” 솔직히 너무 부럽다. 나는 언제쯤 좋은 여자를 만나 저런 짓을 해볼까? 아~ 부러워. 솔로의 가슴에 아주 염장을 지르는 구나. 갈리온드와 루엔은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애정행각을 펼치고 있었다. 이렇게 기다리다간 끝도 없을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야겠군. “흠흠, 우리 밥이나 먹지요.” 내 권유에 그들은 포옹을 풀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난 기절한 루와 루비를 깨워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에는 길리온드가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자기야, 아~.” “아잉, 자기야. 부끄럽단 말이야.” 난 갈리온드와 루엔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음식을 입에 우겨 넣었다. 내 오늘 이 집에서 자고 가려 했지만 저것들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져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지금이 야심한 시각이긴 하지만 그냥 길을 떠나리. 난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그 의사를 루엔에게 밝혔다. 그러자 루엔은 나를 집 뒤에 있는 헛간으로 데리고 갔다. 놀랍게도 그곳은 차고였다. “하나 골라 보세요.” 루엔은 수십 대의 차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오옷! 전부 고급차야. 고급차가 수십대나 있다니. 루엔이 이렇게 부자였단 말인가? 난 빨간 스포츠카 앞에 멈춰섰다. 여자 꼬시기에 빨간 스포츠카 이상으로 좋은 게 어디 있겠냐? “페라리 F50. 좋은 차를 골랐네요.” 루엔은 내 손에 무언가를 건네 주었다. 그것이 차열쇠임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걸 왜…….” “가지세요. 선물이에요.” “…….” 선물? 이, 이런 고급차를 내게 선물로 준다고? “기름은 가득 채워져 있으니 마음껏 밟으세요.” “하, 하지만…….” 난 운전면허증도 없는데. 뭐 괜찮으려나? 어차피 내 의식 속이니. 그리고 차 운전이 뭐 대순가? 무조건 밟으면 되는 거지. “그럼 사양않고 받겠습니다.” 이런 걸 거절하기엔 내가 너무 가난하다. 나 같은 가난한 서민은 주는 건 넙죽넙죽 받아 먿는 버릇이 있단 말이다! 난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운전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의 범퍼카 수준이라고나 할까? 난 능숙한 솜씨로 주차된 차를 차고 밖으로 빼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아이리스의 수도로 갈 생각입니다.” “길은 아시나요?” “아니요.” “일단은 이 길을 쭉 따라가세요. 한 30분 정도 가다보면 인터체인지가 나오거든요. 거기서 8번 국도를 타고 올라 가세요. 쭈욱 올라 가시다가 나중에 동부 고속도로를 타시면 국경이 나타날 거예요.” “…….” 내 의식 속이지만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세상이다. 오토바이에, 스포츠카에, 이젠 국도와 고속도로냐? 다음번엔 뭐가 나타날지 정말 궁금해 진다. 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나 조차도 내 속을 모르겠구나! 난 루엔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조금 가다보니 비포장 도로가 끝나고 아스팔트 도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장 도로 위에 스포츠카라? 후후, 이제부터 스피드의 향연이 시작된다. 난 힘껏 액셀을 밟았다. 속도계의 눈금이 서서히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스포츠카를 타고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질주하자니 정말 기분 좋다. 하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든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이런 생각들을 하는데 그 순간 뒤에서 시끄러운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들려오는 확성기 목소리. “앞에 빨간 스포츠카 서세요! 속도 위반입니다. 갓길에 차 대주세요!” “……겨, 경찰?” 어느새 내 뒤에는 두 대의 경찰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진짜 별게 다 있다. 아이씨,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나저나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당연 더 밟아야지!” 경찰차 주제에 스포츠카를 따라올 수 있는지 어디 한번 해보자. “빨간 스포츠카 서세요! 속도 위반입니다!” “시끄러, 임마!” 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소리 치곤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후후~ 따라 올테면 따라와 봐! * * * * 히로가 자신의 의식 속에서 경찰차와 한창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라이레얼이 타고 있는 범선은 버들랜드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 쪽으로 가는 게 맞아?” “예. 무, 물론입니다.” “거짓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무, 물론 잘 압니다. 흑흑,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전 여자 친구도 있는 몸이에요.” 라이코스의 목에 닿아 있는 단검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라이레얼이 손만 움직이면 당장이라도 라이코스의 목이 떨어져 나갈 판이었다. 라이코스는 지금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있었다. 라이레얼은 그런 라이코스의 반응이 재밌는지 자꾸만 인상을 쓰며 손을 살짝 살짝 움직여 보였다. 그때마다 라이코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은 두말할 필요 조차 없었다.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거야?” “아, 아마도 이, 삼일 정도면…….” “아마도?” “화, 확실합니다.” “정말?” “예, 그렇습니다!” “확신해?” “예, 확신합니다!” “좋아. 그럼 삼일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니 목을 그어도 상관 없겠지?” “그, 그건…….” 라이코스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 나왔다. 어찌하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그저 라이를 만나고 싶었을 뿐인데. ‘흑흑, 라이야. 살아서 널 만나고 싶어.’ 현 상황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큰 소망이었다. 배는 라이코스가 말한 방향을 따라 계속 나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배 주위를 덮었다. 선원들은 당황해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나침반도 이상이 생겼다. 원래대로라면 북쪽을 가리켜야 할 바늘이 사정 없이 돌고 있었다.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포에 휩싸인 카웨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이건 드래곤의 저주야! 드래곤이 자신의 레어를 침범하려는 침입자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거라고!” 상당히 일리있는 발언이었다. 그 발언 덕분인지 공포는 더욱 확산 되었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라이레얼과 두 엘프만은 태연했다. “아빠는 어느 쪽인지 알지?” 갈리온드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차원의 열쇠가 있는 방향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안개가 모든 것을 가로 막고 있었다. “잘 모르겠는 걸.” 라이레얼의 표정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혹시라도 이 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곳 죽음이었다. 라이레얼은 이 곳에서 죽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라이코스의 목을 쥐며 물었다. “넌 어느 쪽인지 알지?” “그, 글쎄요. 저도 잘…….” 라이레얼의 눈빛이 번뜩였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라이코스는 재빨리 소리쳤다. “아, 알 것 같아요. 저쪽이에요!” 배는 라이코스가 기리킨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가도 가도 안개는 계속 되었다. 그렇게 한 이틀 정도 지났을까? 한 순간에 안개가 걷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앞에는 새들의 낙원이자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의 레어인 버들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긴가?” 갈리온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저 섬에서 차원의 열쇠의 기운이 느껴져.” 라이코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에 칼라이스님이 계셔.” 용병들은 경악했다. ‘젠장, 정말로 찾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도망치는 건데.’ 서로의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배는 버들랜드의 도착했다. 배를 정박할만한 선착장이 없었기에 라이레얼 패거리들은 하는 수 없이 보트를 내렸다. 선원들은 그냥 배 위에 남아있기로 했다. 라이레얼이 섬 위에 발을 딛이자 라이코스는 조심스럽게 부리를 열었다. “저기…… 이제 풀어 주실 건가요?” “응? 내가 왜?” “…….” 정말 왜 그래야하는지 모르겠다는듯한 라이레얼의 표정과 대사에 라이코스는 할 말을 잃었다. “안내해주면 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내가 그랬던가?” “…….” 약속을 안 지키는 라이레얼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이건 오직 그 말을 믿은 라이코스의 잘못이었다. 세상 지성체는 두 부류로 나뉜다. 속는 자와 속이는 자. 라이레얼과 히로는 전자이고 라이코스와 라이는 후자이다. 불쌍한 것들. “자 그럼 드래곤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 “안내하면 풀어 주실 건가요?” “물론이지.” 라이레얼은 확신에 차서 대답했고, 라이코스는 멍청하게도 그 말을 또 믿었다. 믿지 말라니까! * * * * 루엔의 말대로 동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니 어느새 아이리스의 국경에 도착했다. “통행증 좀 봅시다.” “…….” 통행증? 그건 뭐야?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검문소를 지키고 있던 병사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통행증이 없으면 국경 통과는 불가합니다.” “저는 통행증이 필요한지도 몰랐는데.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어떻게 좀 안 됩니다. 돌아가셔서 통행증을 받아 오십시오.” 어느 세월에 돌아가서 통행증을 받아 오냐? “정말 어떻게 안 될까요?” “정말 어떻게 안 됩니다.” 이 인간 정말 뻣뻣하다. 피부가 하얗고 몸이 빼빼 마른 것이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오게 생겼다. “제가 좀 급하거든요.” “급해도 안 됩니다. 규칙에 따르면 통행증이 없으면 설사 국왕이라 하더라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모든 규칙엔 예외가 있기 마련이지요.” “한번 예외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규칙이 무너지는 법입니다.” “법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겁니다.” “인간은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법 역시 불완전합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법을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하게 강제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정해진 규칙을 지킴으로써 보다 완전에 가깝게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완전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인간이 완전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간만에 만난 강적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어떻게 나의 화려한 말빨을 그대로 맞받아 칠 수가 있는 거지? 이제까지 나의 말을 맞받아친 사람은 한 손으로 셀 수 있을만큼 적은 숫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학식과 교양을 쌓은 나름대로 엘리트 부류였다.(예를 들어 사일런스 지니) 그런데 이 놈은 대체 뭔가? 어떻게 일개 병사 주제에 내 말을 맞받아칠 수가 있는 거지?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웅변의 달인 아이언스 히로 공작님이 지금 이 순간 자존심(혹은 자만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아이언스 히로가 아니다! “법이란 무엇인가? 그대는 지금 나에게 법가 사상을 주장하려 하는가?” “법이란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되는 규범입니다. 법을 지킴으로써 사회는 유지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법도 법인가?” “그렇습니다.” “법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악법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대는 악법도 법이라고 주장을 하는가?” “법은 지키라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악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법인 이상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너무 위정자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시는 군. 악법이라는 것은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법을 이른다. 그러므로 그런 법을 지키라는 것은 사회 지배층들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대체 그 악법이라는 기준이 뭡니까? 자신에게 불리하면 악법입니까? 그러면 그 누가 법을 지키겠습니까? 같은 법을 두고도 시대에 따라 악법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법의 기준은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과 피지배계층과 지배계층의 인식을 종합하여…….” 정말 열받는다. 그래. 좋다. 누가 이길지 어디 한번 해보자. 나도 한다면 하는 놈이다.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우리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계속해서 법에 대해 토론을 했다. “넌 지금 완전한 법가를 주장하고 있는데 융통성 없는 법은 자칫하면 국가를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몰고 갈 위험이 있어. 법을 위해 인간이 희생된다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융통성의 기준이라는 것이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융통성이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닙니까? 만약 그런식으로 융통성을 발휘했다간 법에 걸릴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법에 유통성이 필요하다면 그 융통성의 기준을 법으로 제정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법이 없음으로 저는 당신을 통과시켜 드릴 수가 없습니다.” “법에도 자비라는 게 있는 법이야.” “그 자비라는 것의 기준은 뭡니까?” 내 평생 처음 만나보는 강적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내 말빨에 이 정도까지 대항하는 인간이 있을리 없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이 곳에 내 의식 속이고 이 놈 역시 내 의식이 만들어낸 생명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이 놈은 내 말빨과 잔머리를 집대성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상대로 말싸움을 벌이는데 내가 이길 수 있을리 없지. 하지만 나는 반드시 이 놈을 이겨야 한다. 그래야 국경을 통과해 이그리드를 만나러 가지. “그냥 통과 시켜 주지?” “안 됩니다.” “적당히 통과 시켜 주지?” “안 됩니다.” “웬만하면 통과 시켜 주지? “안 됩니다.” “사정 봐서 통과 시켜 주지?” “안 됩니다.” 정말 열 받는다. 생각 같아서는 이 놈을 패버리고 싶어. 이 놈을 떡이 될 때까지 팬 다음에 몰래 국경을 통과하고 싶어. “…….”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이 놈을 팬 다음에 몰래 국경을 통과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검문소를 지키고 있는 병사는 이 놈 하나뿐이었다. 그 말은 즉 이 놈만 제거하면 난 문제 없이 국경을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훌륭한 계책을 놔두고 내가 이제까지 무슨 쓸데 없는 짓을 한 건가? “잠깐 귀 좀 이 쪽으로…….” 내 말에 따라 그는 내쪽으로 얼굴을 들이 밀었다. 그 순간 나는 가차 없이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무슨 짓입니까?” “시끄러, 임마! 니가 그렇게 잘났어?” “폭력으로 타인을 해하는 것은 법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닥쳐! 이게 어디서 법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내가 오늘 너에게 법 보단 주먹이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마!” 분노에 찬 나의 주먹을 받아라! 에라이, 빅장이다! 난 옆집 아저씨의 필살기 빅장을 사용, 놈을 두드려 팼다. 한참 동안 그렇게 손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난 지쳐서 헥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놈은 떡이 되어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한번 더 걷어 차주고 나의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스포츠카는 순식간에 국경을 넘어 아이리스의 수도로 달려갔다. 주먹을 쓰면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걸 왜 그 동안 말로 했는지 몰라. 모두들 기억하라. 법보단 주먹이 가깝고, 매 앞에선 장사 없다는 것을. 국경을 무사히 통과한 나는 쉬지 않고 아이리스의 수도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길은 막히고, 배는 고프고, 졸음은 밀려오고, 기름도 떨어져 가기에 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난 휴게소 앞에 차를 주차하고 주점을 찾아 들어갔다. 이곳에서 맥주로 목을 축이며 식사를 할 생각이다. “아저씨! 여기 흑맥주 한 잔과 밥 아무거나 빨리 되는 걸로!” “알겠슴다! 잠시만 기다리셈!” 주인 아저씨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주점 안을 정신 없이 뛰어 다녔다. 사람은 많은데 손이 딸리니 어지간히 바쁜가 보다. 주문이 많이 밀려있었는지 내가 주문한 음식은 상당히 늦게 나왔다. 난 일단 맥주를 한잔 들이키고 스테이크를 입에 밀어 넣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는데 스카프를 뒤집어 쓰고, 꾀죄죄한 옷을 입고, 한 손에 바구니를 든 소녀가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한 동안 쭈삣쭈삣 서 있더니 이내 용기를 내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냥 사세요.” 내가 얼어 붙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옷! 이젠 성냥팔이 소녀마저 등장했다. 콩쥐 팥쥐, 톰과 제리는 등장 안 하나?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점 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성냥을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왔다. “성냥 하나만 사주세요.”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지포라이타를 꺼내 들어 멋지게 불을 켰다. “난 라이타 쓴다. 요즘 세상에 누가 성냥을 쓰냐?” “그, 그래도 하나만 사주세요.” “담배도 없는데 내가 성냥 사서 뭐하냐? 됐으니까 가봐.” 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성냥팔이 소녀는 조심스럽게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냥 사세요. 제발 사주세요. 부탁드려요.” 아~ 처절하다. 왜 아무도 안 사주는 거지? 소녀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필요가 없더라도 하나 사주는 게 예의 아니야? 이 놈들은 양심도 없나? 나쁜 놈들. 하여간 요즘 인간들은 전부 양심이 썩었다니까.(자기도 안 사주는 주제에 말은 잘해요. 너부터 하나 사는 게 어때?) “이봐, 아가씨. 성냥 하나에 얼마지?” 얼굴이 험상궃게 생긴 덩치 큰 남자가 물었다. 그러자 성냥팔이 소녀는 재빨리 그의 앞에 다가갔다. “하, 하나에 1실버에요.” “1실버? 쳇! 성냥 하나에 더럽게 비싸군!” 남자는 바닥에 침을 퉤- 뱉더니 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음흉한 눈길로 성냥팔이 소녀의 몸을 훑어 보았다. “얼마야?” “예?” “네 몸은 얼마야?” “예? 무, 무슨 말씀이신지…….” “크흐흐, 다 알면서 뭘 그래?” 세상에! 크흐흐, 라니? 정말 너무나도 악역스러운 웃음이다. 이 웃음 하나로 자신이 악역 캐릭터임을 PR하는 저 엑스트라. 정말 너무나도 악역스럽게 생겼다. “성냥 같은 거 백날 팔아봐야 소용 없으니 몸을 팔아보는 건 어때?” “이, 이러지 마세요.” 남자는 성냥팔이 소녀를 껴안고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시작했다. “꺄악! 도와주세요!” 성냥팔이 소녀가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저런 가녀린 소녀가 성추행을 당하는데 한명도 나서지 않다니. 자신의 일이 아니니 상관 없다는 거야? 자신만 안전하면 장땡이라는 거야? 나쁜 놈들! 전부 양심이 썩어 문드러졌어!(자기도 안 나서는 주제에 말은 잘해요) “꺄아아악-!” 남자의 손이 어느새 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성냥팔이 소녀는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남자의 힘에 억눌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 부디 다음 생에는 돈 있고 빽 있는 집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아라. 식사를 끝마친 나는 계산을 치르고 주점을 나서려 했다. 응? 성냥팔이 소녀는 어쪄냐구? 그야 내가 알바가 아니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어차피 여긴 내 의식 속인데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겠냐? 그리고 내가 저 성냥팔이 소녀를 구해줬다 치자. 그럼 어떻게 되겠냐? ‘감사의 의미로 제 몸을 은공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둘 중 어느쪽이 더 가능성이 높겠냐? 당연 인사만하고 갈 확률이 높다. 이게 뭐야? 어떤 미친놈이 그깟 인사들으려고 구해주나? 구해줬으면 대가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무슨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꺄악! 제발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크흐흐. 앙탈부리는 것도 귀여운 걸.” 이런 불의를 보고도 내가 참아야 하나? 그래. 참자. 대가 없는 일엔 뛰어 들지 말자. 난 그렇게 나 자신을 절제하였다. 성냥팔이 소녀가 바닥에 쓰러지며 그녀가 두르고 있던 스카프가 벗겨졌다. 그 순간, 난 심한 충격에 휩싸였다. “…….” 백금색의 단발 머리, 새하얀 피부, 에메랄드 같은 녹색 눈동자. 그녀의 이름은 루시아. 성냥팔이 소녀의 정체는 루시아였다. 그럼 성냥팔이 루시아가 되는 건가? 그런데 공주인 그녀가 어째서 성냥 판매 영업 사원이 된 거지? 아름답고 고귀한 그녀가 성녕팔이라니! 이런 언벨러스한 경우가! “꺄아악!”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성냥팔이 루시아는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난 머리 끝까지 열이 뻗치는 것을 느끼며 그 놈에게 다가갔다. “야, 너!” “넌 뭐야, 임마?” “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스타일리쉬한 성격과 핸섬한 외모를 가진 아이언스 히로라고 한다. 네 놈! 감히 어줍잖은 무력을 사용해 아녀자를 핍박하다니! 하늘이 용서해도 나 아이언스 히로가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자 곳곳에서 웃음과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저 놈은 아까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지랄이래?” 남자는 루시아를 희롱하던 손을 멈추고 벌떡 일어섰다. “너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니가 누군지 내가 알아서 뭐하냐? 잔말 말고 덤비기나 해!” “에잇! 죽어라!” “너나 죽어, 임마!” 난 옆집 아저씨의 필살기와 뒷집 아저씨의 필살기를 결합한 일명 ‘빅장 40단 컴보’를 시전 하였다. 물론 대사를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이제 너의 뼈와 살은 분리 된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아싸! 좋구나! 구, 십, 십일, 십이, 십삼, 십사, 십오, 십육…… 아싸! 좋구나! 십칠, 십팔, 십구, 이십…….” “으어억!” 상대는 게거품을 물며 나가 떨어졌다. 안타깝군. 빅장 40단 컴보를 전부 시전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겨우 20단 컴보에 나가 떨어지다니. 자식이 근성이 없구만. 나는 루시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괜찮으신가요?” 루시아는 웃을 추스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루시아는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워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에 난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내 스포츠카 옆 자리에 태웠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설마 내 핸섬한 외모와 빨간 스포츠카에 주늑이 든 건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뭐 감사의 인사를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닙니다.” 좀 더 실질적인 이득을 바라고 했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드릴 건 없지만 원하신다면…….” 뭐라고? 원하신다면 몸이라도 바치겠다고? 아니,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그대의 결심이 그러하다면야……. “성냥이라도 하나 드릴게요.” “…….” 나 라이타 있다니까! 하지만 건네주는 성냥을 거절하기도 뭐해 일단 받긴 했다. “저, 저기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냥을 팔아야 해서요.” 난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오늘은 그만 두세요. 또 방금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쩝니까?” “하, 하지만 전 이 성냥을 팔지 않으면…….” 그녀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난 깜짝 놀라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왜, 왜 그러세요?” “흑흑, 전 반드시 이 성냥을 다 팔아야 해요.” “예? 어째서……?” “그, 그건…… 흑흑, 아무튼 성냥을 다 팔아야 해요. 죄송해요. 전 이만 가볼게요.” 루시아는 나의 손을 뿌리치고 차 밖으로 나갔다. 난 황급히 차에서 내려 그녀를 쫓아갔다. 치마 입은 여자의 걸음이 어찌 남자보다 빠르겠는가? 난 그녀를 붙잡았고, 루시아는 내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바구니가 엎어지며 성냥이 쏟아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쪼그려 앉아 성냥을 주었다. 눈물을 훔치며 성냥을 줍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애처럽고 불쌍했다. 난 나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끌어 안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잠시만요. 잠시만 이대로 있어줘요.” “…….”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그녀의 몸에선 땀냄새가 느껴졌다. 공주인 그녀가 어째서 성냥팔이라는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걸까? 설마 국가가 망해서?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성냥팔이야?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다. 그녀가 이런 지저분한 곳에서 험악하게 생긴 남자들에게 희롱 당하며 성냥을 팔고 있는 사이 나란 놈은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했다니. “저, 전…….” 난 그녀를 안은 팔을 풀었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다시금 그녀를 끌어 안고 싶은 충동이 엄습해 온다. 난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성냥 제가 몽땅 다 사도록 하지요. 대신 저에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반짝거리는 금화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금화를 주머니에 집어 넣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그나저나 이 성냥을 어떻게 한다냐? 기왕이면 담배를 팔지. 루시아와 나는 좁은 차 안에 단 둘이 앉아 있었다. 성냥은 트렁크 안에 곱게 넣어놨다. 언젠간 쓸 일이 있을 지도 모르지. “이름이……?” 내가 묻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루시아에요.” “…….” 그럴 줄 알았다. “제 이름은 히로라고 합니다.” “예.” “그쪽이 보시기에 제가 뭐하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예? 그, 그건…….” “혹시 부모 잘 만나서 스포츠카 끌고 다니는 생양아치로 보이는 것은 아니겠죠?” “…….” 생각해보니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군. “저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사실 전 마법사입니다.” “마법사요?” “그렇습니다. 마법사도 보통 마법사가 아니라 정의의 마법사입니다.” “정의로운 마법사요?” “그렇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의 마법사. 그것이 바로 저의 정체입니다.” 루시아는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아까 저를 구해주신 거군요.” “예.” 한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난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몸을 움찔 했지만 내가 싫지는 않은지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옛날에 보았던 만화책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한 소녀의 성공담이었다. 제목도 기억난다. <광(光)팔이 소녀의 재림> 특별히 못본 독자들을 위해 내용을 설명해 주도록 하겠다. 양박이란 40대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이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굉장히 서민적인 삶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삶에 만족을 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우연한 기회에 하우스(전문적으로 도박판을 벌이는 집을 이르는 은어)를 구경하게 되었다. 마흔 여덞장의 동양화가 허공을 수 놓고, 새파란 배춧잎이 바닥을 수 놓았다. 온갖 열락과 향연, 절망과 쾌락이 교차하는 공간. 나름대로 고스톱 좀 친다고 자부했던 그는 순식간에 그 곳에 빠져 들었다. 그때부터 그와 그의 가족들의 삶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점차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으며, 술을 마시는 날이 늘어갔다. 저축해 놓았던 돈은 점점 줄어 들었고, 집까지 저당잡혔다. 그것도 모자라 은행 대출에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 회사에서 그런 그를 가만히 둘리 없었다. 그는 정리해고 당했다. 하지만 그래도 정신을 못차리는 그는 퇴직금마저 하우스로 들고 갔다. 그는 한 방을 꿈꿨다. 한 방이면 이제까지 잃은 돈을 전부 딸 수 있다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망상일 뿐이었다. 그는 따기는커녕 이름 그대로 양박(피박+광박)만 썼다. 어느날 그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울고 있는 처자식들과 엄청난 빚더미뿐이었다. 그는 모든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래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큰딸인 양푼이는 대학교 1학년, 작은딸인 양순이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그의 아내와 두 딸은 싸늘하게 식은 그의 주검 앞에서 오열했다. 하지만 정작 슬퍼할 일은 따로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아버지가 남겨 놓은 엄청난 빚더미. 사채 업자들은 매일 같이 그녀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일어러 나갔고, 양푼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어머니와 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본 양순이는 도저히 자신 혼자만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학생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가 자주 들르던 하우스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는 고스톱을 잘 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광을 파는 것이다. 일단 선이 될 것 같은 사람을 물색하여 그의 왼쪽 자리에 앉아 판에 끼고, 선이 바뀔 것 같으면 재빨리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는 등 양순이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광을 팔았다.(가끔은 판에 껴야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알아서 잘 빠져나왔다) 백날 광 팔아봐여 얼마나 나오겠냐? 라며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양순이는 3년만에 아버지의 빚을 전부 갚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2년 더 광을 팔아 작은 집을 한 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양순이네 가족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이게 ‘광팔이 소녀의 재림’ 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광값만 잘 받아도 웬만한 큰판 하나 터트리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생각이 왜 나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루시아 때문일 것이다. 지금 루시아의 모습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과 다를바가 없었기에 연상작용에 의해 ‘광팔이 소녀의 재림’이 떠오른 것이다. 그나저나 대체 어째서 왜 루시아가 광도 아닌 성냥을 팔고 있는 걸까? 공주인 그녀가 무엇이 부족해서? 설마 누군가의 강요 때문에? “절 믿으시나요?” “예?” 루시아는 놀란 토끼마냥 눈을 크게 떴다. 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나요? 누군가가 시킨 거죠?” 루시아는 놀란 토끼마냥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니에요. 이건 다만 제가 좋아서…….” 난 그녀의 양 어깨를 감싸 쥐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절 믿으세요. 제가 당신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 하지만…….” “제 눈을 똑바로 보세요.” 녹보석 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 저는…….” 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 아름다운 여인이 그동안 얼마나 고통 받았을까? 남몰래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흑흑~.” “마음껏 우세요.” “으아앙~.”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난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제 제가 그대의 곁에 있으니 그대 더 이상 슬퍼 마세요. 한참 후,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귀족집 딸이었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를 굉장히 아껴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열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슬퍼 하시던 아버지는 어느날 한 여자를 집에 데려오셨어요. 그리고 며칠 후 그 여자와 결혼을 하셨어요. 저는 아버지가 행복하실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기에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흑흑…….” 루시아는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난 그녀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왜? 그야 사정을 모르니까. 일단 끝까지 들어야 알거 아니냐? 루시아는 눈물을 삼키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새어머니는 좋으신 분이었어요. 저를 친딸처럼 아껴주셨으니까요. 하지만 결혼하신지 1년 뒤 우연한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그때부터 새어머니는 저를 구박하기 시작해…… 흑흑……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가 남겨 놓으신 유산은 전부 새어머니 명의로 돌아갔어요. 저는 법적 대응을 했지만 새어머니의 동생분이 변호사여서…… 흑흑…….” 스토리가 정리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본성을 드러낸 계모. 그녀는 어린 루시아의 몫으로 돌아갈 유산을 전부 가로채고, 루시아를 구박한다. 루시아는 법적 대응을 했지만 패하고 만다. “그런데 왜 성냥팔이를?” “흑흑, 새어머니께서 자기 먹을 건 자기가 알아서 벌어오라고…… 일 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흑흑.” 이런 천인공노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른 분노가 내 머리를 새하얗게 태운다. 인간으로써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루시아가 무슨 죄가 있기에 성냥을 팔아야 해? 정의의 마법사 아이언스 히로님이 불의를 보고 그냥 넘어가실리 없다. 루시아를 돕기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바치리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절 믿어주십시오. 제가 그 나쁜 인간들을 물리치고 당신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하, 하지만…….” 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당장 루시아의 집으로 출발이다! 루시아를 괴롭히는 것들은 전부 다 없애 버리겠어! 아! 그 전에 기름이나 넣어야겠다. 1만원어치 주유하면 휴지는 주려나? 루시아의 집은 3층짜리 호화 빌라였다. 이런 집에서 사는 여인을 성냥팔이 같은 3D업종에 종사시키다니. 그 계모라는 여자가 제정신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만약 루시아가 자기 딸이었어도 이런 일을 시켰을까? “집에서는 새어머니와 삼촌이 계세요.” 그 삼촌이란 놈의 직업은 변호사. 그는 법의 허점을 이용,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이를 물 먹은 악덕 변호사다. 하여튼 이 사회는 소위 엘리트라는 것들이 문제야. 난 이런 놈들 상대하는 건 자신있다. 몇 대 패주면 그만이니까. 혹시라도 고소할지 모르니까 복면은 쓰고 갈까? 난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루시아의 도움을 받아 집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평수와 화려한 장식이 루시아네 집안이 얼마나 부자인지 말해주는 듯 했다. 역시 그녀는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었어!(돈 많으면 고귀한 거냐?) “새어머니는 어디 있습니까?” 루시아는 대답 대신 눈을 크게 뜨며 내 등너머를 바라보았다. 난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벌써 들어 온 거지?” 짜증 섞인 날카로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었던 그런 종류의 목소리다. 내 어찌 이 목소리를 잊을 수 있으리?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분명 일루니아 여사님이었다. 그 증거로 그녀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자리잡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루시아를 노려보던 그녀는 이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안 생긴 남자는 뭐야?” “…….” 안 생겼다니? 누가? 난 심한 충격에 휩싸였다. 어떻게 핸섬한 내 얼굴을 안 생겼다고 표현할 수가 있는 거지? 못 생겼다도 아니고, 안 생겼다니? 그 말인 즉슨 내 얼굴이 생기다 말았다는 뜻인가? 솟아오른 분노가 머릿속을 휘젓는다. 내가 노처녀에게 따지려는데 그녀는 루시아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성냥은 다 팔았어? 설마 다 팔지도 않고 집에 돌아온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오늘 저녁은 없는 줄 알아!” “아, 아니에요, 어머니. 다 팔았어요.” “그래? 그럼 돈 줘봐.” 루시아는 아까 내가 성냥값으로 치른 금화를 일루니아 여사님께 내밀었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금화를 보더니 인상을 팍 썼다. 그리곤 그 금화를 얼른 자신의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집에 왔으면 어서 청소나 시작 해! 먹는만큼 일은 해야 할 거 아니야?” “…….” 가, 감히 나의 루시아에게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난 청소를 하려고 빗자루를 찾는 루시아의 손을 붙들었다. 그녀의 눈은 두려움에 가득 차있었다. 빠드득-! 저절로 이가 갈린다. 역시 노처녀는 악당이었어. 나의 루시아를 괴롭히는 악당.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봐요, 아줌마!” 내가 소리치자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나를 째려보셨다. “넌 뭐야?” 이젠 아예 반말이다. 뭐 내가 먼저 시작한 건가? 좋아. 상관 없겠지. 어차피 노처녀와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노처녀와 나의 사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삼광땡과 일팔광땡이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양립할 수 없는 관계다.(일삼광땡과 일팔광땡은 어떠한 경우에도 동시에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광(一光)은 하나뿐이니까)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고나 할까? 후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존재.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싸우자. “어째서 루시아를 이렇게 못 살게 구는 거지?” “넌 뭔데 끼어드는데?” “난 아이언스 히로다. 마법사지.” “마법사건 무법자건 간에 끼어들지 마시지? 어차피 너랑은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상관이 없다니? 백금발의 미소녀가 성냥이나 팔러다니는데 상관이 없다니? 원래 미소녀가 고통 받는 것을 보면 언제나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기 마련이야!” “흥! 안 생긴 주제에!” “아줌마! 말씀이 심하시군!” “어쭈? 잘하면 한 대 치겠다.” “그러는 아줌마야 말로 한 대 칠 것 같은 기센데.” 한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싸움. 이건 기의 싸움이다. 한번 밀리면 끝이다. 나와 노처녀의 눈빛이 허공에서 무시무시하게 격돌하였다. 진검 승부. 결코 질수 없다. 루시아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한창 싸움이 무르익어 가는 시점에서 누군가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그 누군가를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자는 내편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네 놈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루니아 여사님의 남동생이라면 뻔할 뻔자 아니겠냐? 사일런스 지니. 여기서마저 그대를 보게 될 줄은……. 지니는 날 보더니 외눈안경을 치켜올려썼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사일런스 지니라고 합니다.” “저는 아이언스 히로라고 합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고 지니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요?” “기꺼이 그러지요.” 우리는 지니의 권유에 따라 응접실로 이동했다. 일루니아 여사님과 지니가 나란히 앉았고, 나와 루시아가 나란히 앉았다. 솔직히 매우 걱정된다. 난 한 언변 한다고 자부하긴 하지만 사일런스 남매를 상대로 이길 자신은 눈꼽만큼도 없다. 노처녀도 노처녀지만 정작 큰 문제는 지니다. 저 인간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야 상대를 하건 말건 하지. “무슨 일 때문에 저희 집을 방문하셨습니까?” 지니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공손히 물어왔다. 난 팔짱을 끼며 건방잔 자세로 대꾸했다. “저희 집이라니요? 이 곳은 루시아의 집이 아닌가요?”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저희 누님의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갈취하셨군요.” “아닙니다.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받아 얻은 것입니다.” “법의 맹점을 이용하셨나 보군요.” “그걸 이용하는 거야 말로 진정한 변호사가 할 일이지요.” 부인하지 않고 긍정하다니. 과연 사일런스 지니……라는 생각보다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너 잘났다. 니가 변호사면 다냐? 원래 나의 계획은 변호사를 때려 눕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변호사가 지니일 경우엔 얘기가 틀려진다. 내가 어떻게 지니를 상대로 주먹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질게 뻔한데. “좋습니다. 재산을 가로챈거야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에서 루시아에게 성냥 판매를 시킨 겁니까?” “저희는 공장에서 직접 물건을 받아다 루시아양에게 위탁 판매를 시킨 것뿐입니다. 중간 유통 마진이 없으니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성냥을 고객들에게 공급할 수 있지요.” “…….” 할 말이 없다. 난 눈을 치켜 뜨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지니는 여전히 웃고 있을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으음, 지니가 악역이라니. 지니를 좋아했던 수 많은 소녀팬들이 전부 떨어져 나가겠군. 지니는 내가 적으로 돌리기 싫은 베스트5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지금 내 앞에 적으로 나타났다. “왜 하필 성냥입니까? 기왕이면 빵이나 이런 거면 판매하기도 편하잖아요. 그런데도 굳이 성냥을 택했다는 것은 루시아를 엿 먹이기 위해서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이 세계에는 성냥이 보편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담배를 피려는데 불씨가 꺼졌다면 상당히 곤란하겠지요. 사실 루시아양께서 하시는 성냥 방문 판매는 많은 성냥을 판매하는 것보다는 성냥 판촉에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왜 루시아가 하는 건데요?” “홀로서기를 위한 일환으로 생각해주십시오.” “댁들이 재산 다 가로채 놓고 무슨 홀로서기야!?”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지니는 내가 목청을 높이건 말건 미소를 머금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서운 놈. 저 면상을 한 대 치고 싶어. 어차피 더 이상 얘기를 해봐야 손해다. 이쯤에서 끝을 내자. “나의 요구 조건은 간단하다. 첫째, 루시아 몫의 재산을 돌려줄 것. 둘째, 성냥 외판을 즉시 중단시킬 것. 셋째, 담배 좀 있으면 한 보루 줄 것. 이 요구가 즉시 관철되지 않을 시에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투쟁하겠다.” “으음.” 지니는 고민을 하는지 눈을 감고 외눈안경을 만지작거렸다. 노처녀야 당연히 한번 재고해볼만한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한참 후에 지니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 뭐? 좋아? 이렇게 쉽게? “무슨 말이야?” 일루니아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지니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비록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저는 아이언스 히로님의 인품과 능력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언스 히로님의 말씀을 차마 안 들어드릴 수가 없군요.” “…….” 황당하다. 허구헌날 존경한데. 정말로 날 존경하는 걸까?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집의 명의는 다시 루시아에게 돌아갔으며 성냥 판매는 시급 2실버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기로 했고 지니는 나에게 담배 한 보루를 건네주었다. “아이언스 히로님을 위해 특별히 양담배를 준비했습니다.” 난 사양 않고 담배를 받아 들었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누구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루시아는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흰드레스를 입고 내 앞에 서 있었다. 정말 너무도 아름답다. 이제야 공주님다워 보이는군. 역시 루시아는 이런 모습이 어울려. 루시아는 나에게 다가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뭐 인사를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닙니다.” 인사보다는 좀 더 실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바란다니까. 루시아는 천천히 눈을 내리 깔았다. 물기에 젖은 그녀의 속눈썹이 투명하게 빛난다. 이것은 키스해 달라는 제스처가 아닌가? 그래. 이렇게 도와줬는데 입술 정도는 주는게 예의지. 탁월한 선택이야. 난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서서히 입술을 가져다 대는데…… “뭐하시는 겁니까?” 키스 하기 직전에 나타나 산통을 깨는 사일런스 지니. 루시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후다닥 자기방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봐! 아가씨!” 내가 불렀지만 그녀는 이미 저 멀리 떠났다. 난 허탈감에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이 자식이!” 난 지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걸 지금 몰라서 묻냐?” “저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너 때문에 키스할 기회를 놓쳤잖아!” “죄송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저한테 키스하셔도 좋습니다.” “…….”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난 멱살을 놓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그 동안 이 놈이 날 바라보던 시선이 좀 이상했어. 그렇다 하더라도 설마 나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을 줄은……. 아아~ 그나저나 정말 열 받는다. 간만에 루시아와 분위기 잡았었는데. 이렇게 그녀와 헤어져야 하나?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이그리드님을 만나러 갈 생각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이 곳에 계속 있어봐야 별 볼일 없을 것 같다. 루시아와의 키스도 물 건너 갔으니 그저 눈물을 훔치며 이 곳을 뜨는 수 밖에. 난 지니의 뺨을 한 대 후려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집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출발을 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루시아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지니였다. “왜 타요?” 내가 묻자 지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저에게 큰 가르침을 내려주신 존경하는 아이언스 히로님께 보답하고 싶으나 그 은혜 망망대해와 같이 크니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천한 힘이나마 아이언스 히로님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 지니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안전벨트까지 매어 놓았다. 정말 웃기는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지니와 같이 다니면 여러모로 편한 점이 많다. 사일런스 지니는 못 하는 게 없고, 안 하는 게 없는 다재다능한 인간이 아니던가? “제가 운전할까요?” 이거 봐. 운전도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세상에 니가 못하는게 어디 있겠니? 아이리스::박성호 TITLE ▶6 :: <아이리스 12권> 9클래스 - 06 sharpshooter(psungho) 03-04-27 :: :: 31920 버들랜드. 철새 도래지이자 8할 이상의 청안백우조가 모여서 사는 곳. 이름하여 새들의 고향이자 성지(聖地)라 할 수 있다. 그런 이 곳에 인간들이 침입했다. 어찌 이런 일이? 인간을 결코 이 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왜냐? 섬 전체가 마법으로 보호 받고 있기 때문이지. 그럼 이 인간들은 어떻게 들어왔을까? 그야 배신자 때문이지. 간첩질도 모자라 배신까지 하다니. 정말 라이코스답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엠파스(empas)와 엠팔(empal)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다시 말해 연인 사이였다. 이들은 섬 외곽으로 데이트를 나갔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하프엘프를 중심으로 한 엘프와 인간 무리였다. 그들은 들고 위풍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엠파스는 여자 친구 엠팔과 함께 그들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기로 했다. 하강 비행을 하던 그들은 줄로 꽁꽁 묶여 있는 청안백우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매는 바로 우리의 친구 라이코스가 아닌가? 맨 앞에 서 있는 하프엘프는 라이코스를 장난감 다루듯 하고 있고, 라이코스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눈물을 주르륵 쏟아내고 있었다. 하프엘프라고 하니 예전에 라이코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륙에는 청안백우조만 잡아 먹는 무서운 하프엘프가 있어.’ 그들은 척보는 순간 저 하프엘프가 그 하프엘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저 하프엘프는 라이코스를 보며 침이 줄줄 흘려댔다.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엠파스와 엠팔은 지금이 비상 사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 되겠다. 장로님께 알리자.” 엠파스와 엠팔은 당장 장로님께 달려갔다. 그리곤 방금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일러 바쳤다. 그 말을 들은 야후(yahoo) 장로는 주저 없이 데프콘(DEFCON - Defense Readiness Condition)) 1단계를 발령하고 비상계엄(非常戒嚴)을 선포하였다. 한가하고 평화롭던 버들랜드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사방에서 새들이 날아 올랐고, 그 때문에 하늘은 까맣게 뒤덮혔다. 야후 장로는 급히 내각 회의를 소집하였다. 중론은 두 가지로 갈렸다. 그들과 맞서 싸워 자신들의 섬을 지키자는 것과, 일단 자리를 피한 다음 훗날을 도모하자는 것. “현 상황에서는 피하는 것이 최선이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곳은 저희의 영토이고 반드시 저희가 수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싸워서는 승산이 없소. 게다가 저들에게는 눈에 뵈는 것 없는 라이코스마저 공포에 떨게 만든 하프엘프가 있잖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맞서 싸위 우리의 영토를 수호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친구 라이코스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대의 욕심일 뿐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난 지금 이 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오. 그저 훗날을 도모…….”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그 훗날이라는 것이 대체 언제입니까? 우리가 한번 물러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렇게 온건파와 강경파의 싸움은 치열하게 벌어졌다. 강경파에 서 있는 이들은 대부분 라이코스의 친구들이었다. 특히 라이코스의 여자 친구 드림위즈(dreamwiz)와 네이버(naver), 네이트(nate) 형제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온건쪽으로 기울었다. 청안백우조는 평화의 상징인 새가 아니던가? 그런 새가 어찌 싸움을 하리오. 아무 말 없이 회의 과정을 지켜보기만하던 야후 장로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될 수 있는한 싸움은 피해야겠지만 우리의 친구 라이코스를 모른체 할 수는 없소. 그러므로 일단은 그 인간들과 대화를 해서 요구 조건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장로의 제안인지라 모두들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누가 가지요?” “…….” 누가 가야하나? 상대는 청안백우조를 못 먹어서 환장을 한 하프엘프다. 그런 그녀의 앞에 나서고 싶은 청안백우조가 있을까? 다행히도 한 청안백우조가 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네이버였다. 네이버는 친구를 위해 사지로 뛰어들려 하는 것이다. 네이버는 곧장 인간들의 무리로 날아갔다. 버들랜드에 발을 들여 놓은 라이레얼 일행은 굳이 라이코스의 안내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갈리온드가 차원의 열쇠와 공명 하고 있기에 그 위치를 알아내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안백우조의 고향이라는데 왜 청안백우조들이 안 보이지?” 라이레얼은 이곳에 오기 전에 잠자리채까지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몇 마리 잡아다가 하나는 내가 먹고 나머지는 전부 우리 히로 줘야지~. 라이레얼이 이런 생각을 하며 군침을 질질 흘려대는데 어떤 청안백우조가 미쳤다고 그들 앞에 나타나겠는가? 그런데 그 순간 한 마리의 청안백우조가 그들 앞에 다가왔다. 라이레얼은 재빨리 잠자리채를 들어 올렸다. “보약이다!” 하지만 보약(?)은 그런 라이레얼의 행동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허공에서 활강을 할뿐이었다.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평화로운 이곳에 파란을 일으키는 가? 그대들은 당장 우리의 친구 라이코스를 풀어주고 그대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네이버가 외치자 라이코스는 반가움에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나 좀 구해줘~. 난 죽기 싫어~.” 끝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우리의 라이코스. 그 심정 이해가 간다. 라이레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시끄러, 보약! 할 말 있으면 내려와서 말 해!” 하지만 네이버는 바보가 아니었다. 미쳤다고 아래로 내려갈까? “요구 조건이 있으면 말해라. 참고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를 만나러 왔을 뿐이야!” ‘덤으로 보약도 몇 재 얻어가면 좋고.’ 라이레얼은 턱밑까지 흘러내린 침을 닦아냈다. 저거 한 마리 잡아다가 푹 끓여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무슨 일로 칼라이스님을 뵈려 하는 거지?” “흥! 그거야 니가 알바가 아니지.” 네이버는 라이코스를 구할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생각 같아선 날쌔게 돌진해 라이코스를 낚아 채고 싶었지만 저 여자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욕망과 탐욕으로 번뜩거리는 레몬빛 눈동자. 대체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칼라이스님이라면 어떻게 해결해 주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러길 바라는 수밖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가는 길을 막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네이버는 그들을 떠나 칼라이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칼라이스는 자신의 레어 근처에서 봉황의 모습을 한 채 근엄하게 연못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네이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칼라이스에게 전부 일러 바쳤다. 칼라이스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왔는지도. 때마침 라이레얼 패거리들이 레어로 다가왔다. 그들은 연못이 반쯤 몸을 파묻은 봉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봉황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네이버는 괜히 인상을 썼다. 어째서 이곳에 봉황이 있는 걸까? 그리고 저 매는 왜 봉황 옆에 붙어서 유세를 떠는 걸까? 이 때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봉황의 정체를 짐작하기 마련이다. ‘저 이상하게 생긴 새가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슨가 보군.’ 라이레얼은 저벅저벅 걸어 봉황의 앞에 섰다. 라이레얼 패거리들은 라이레얼이 언행을 조심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였을까? “어이! 형씨가 드래곤이야?” 라이레얼은 건방진 말투로 말하며 건방진 자세로 봉황을 째려보았다. 용병 일동은 일제히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린 이제 죽었구나.’ 어쩌다가 라이레얼과 붙어다녀 이런 결말을 맞게 되다니. 살려달라고 빌면 살려줄까? 당당하기 그지없는 라이레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갈리온드와 루엔, 공포에 떨고 있는 기타 등등. 봉황은 그들을 매섭게 노려 보았다.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는 자연과 새를 사랑하는 평화로운 드래곤이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봉황의 모습으로 버들랜드를 지키고 있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평화롭고 지루한 일상. 그런데 그것이 지금 이 순간 깨졌다. 한 무리의 인간들이 버들랜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간만에 찾아온 손님을 박대할만큼 난 모질지 못하거든.’ 사실 그는 그 동안 매우 많이 심심했었다. 그렇다고 대륙으로 날아가자니 그건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자신의 레어에서 심심함을 달래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 같아선 폭죽이라도 터트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칼라이스는 자신의 앞에선 일행들을 살펴 보았다. 레몬빛 머리카락을 가진 하프엘프 여인과, 남녀 엘프, 그리고 기타 등등. ‘잠깐, 저 여자는…….’ 칼라이스는 레몬빛 머리카락의 하프엘프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신을 처음보겠지만 자신은 그녀를 본적이 있었다. 라이코스의 머릿속에서. 라이코스는 보고를 하러 올때마다 징징짜며 이렇게 말했다. ‘흑흑, 그 하프엘프가 무서워요. 저를 바라보던 그 무서운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칼라이스님이 혼내주세요.’ 대체 어떤 여인인가 싶어 라이코스의 기억을 들여다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굉장히 터프하고 스타일리쉬한 미녀였다. 칼라이스는 언젠가 꼭 한번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앞에 서있다. 라이레얼은 봉황이 말 없이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자 화가 났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니가 드래곤 맞아? 왜 대답을 안 해? 한 대 맞을래?” 드래곤을 상대하는 하프엘프치고 정말 겁도 없고 싸가지도 없다. 하지만 칼라이스는 그런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머, 멋지다!’ 세상에 어떤 여자도 라이레얼만큼 막나가는 여자는 없었다. 혹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해도 이렇게 막나올까? 궁금해진 칼라이스는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기로 결심했다. 한 순간, 봉황의 몸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오나 싶더니 봉황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났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흰색 몸체, 길게 뻗은 두 장의 날개, 머리에 나 있는 여덟 개의 뿔과 번뜩거리는 흰색 눈동자. “화, 화이트 드래곤.” 드래곤의 모습을 본 용병 일동은 차마 서 있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갈리온드와 루엔는 주저 앉지는 않았지만 위압감 때문에 계속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라이레얼만은 아까의 그 포즈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당당함 그 자체였다. “드래곤 맞군.” 라이레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드래곤을 향해 소리쳤다. “야! 드래곤! 나랑 얘기 좀 하자!” 이 정도면 막나간다는 표현보단 미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사실 제정신으로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래곤은 라이레얼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당함과 터프함, 스타일리쉬가 몸에 배어 있는 미녀. 그것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어쩜 저렇게 멋있을 수가!’ 라이레얼은 드래곤이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만 있자 기분이 팍 상했다. 그래서 소리쳤다. “눈 깔아!” 세상에. 눈 깔란다. 용병 일동을 서로를 껴안은 채 흐느꼈다. “흑흑, 예금해 놓은 돈 아직 다 쓰지도 못 했는데…… 흑흑, 이래서 라이레얼 옆에 붙어있지 말았어야 했는데…….” 용병들은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상상해 보았다. 1. 화이트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는다. 자신들은 죽는다. 2. 화이트 드래곤이 마법을 쓴다. 자신들은 죽는다. 3. 화이트 드래곤이 육탄돌격을 한다. 자신들은 죽는다. 4. 화이트 드래곤이 소리를 지른다. 자신들은 죽는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던 결론은 전부 죽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짧은 생을 돌이켜 보았다. 카웨는 그 와중에도 유서를 써보겠다고 주머니에서 종이와 팬을 꺼내 휘갈겼다. 나 카웨는 미쳤다고 라이레얼을 따라와 드래곤에게 죽게 생겼다. 내가 미쳤지. 라이레얼이 어떤 여자인지 뻔히 알면서 따라가다니. 하지만 어쩌겠냐? 라이레얼이 너무 예쁘게 생긴 걸. 아! 죽기 전에 소원이 하나 있다. 라이레얼과 키스 한번 해봤으면……. 죽어가는 마당에 이따위 유서나 쓰고 있다니. 대체 이 놈은 저능아란 말인가? 하지만 어이없게도 카웨가 유서를 거의 다 써 갈때까지 자신들은 살아 있었다. 설마……. ‘유서 다 쓸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용병들은 일제히 종이와 팬을 꺼내들었다. 정말 단순한 놈들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라이레얼과 드래곤의 눈 싸움은 계속 되었다. 라이레얼은 드래곤이 자신을 째려본다고 생각했지만, 드래곤은 그저 라이레얼에게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레얼은 인상을 찡그리며 드래곤에게 외쳤다. “눈 깔랬지! 안 깔아? 너 죽을래?” 이렇게 터프하고 과격한 여인이 있을 줄이야! 그녀의 박력에 감탄한 드래곤은 다시 자신의 몸을 변화시켰다. 한 순간에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라이레얼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 새끼 어디로 튀었어?” 그 말을 들은 용병 일동은 그제야 드래곤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 동시에 꽁무니를 뺐다. 후다닥~. 도망치는 그들 뒤로 흙먼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우리의 라이코스도 그 틈을 타 부리로 줄을 끊고 재빨리 날아 올랐다. 라이레얼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보고싶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난 이제 자유야!’ 라이코스는 혹시 라이레얼이 쫓아올까 싶어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열심히 날개짓을 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라이레얼과 갈리온드, 루엔뿐이었다. 라이레얼은 드래곤이 도망쳤다고 생각을 하고 이를 갈던 중 연못 근처에 누워있는 한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 이상야릇한 포즈로 누워있는 그녀는 놀랍게도 알몸이었다. 오옷~ 이렇게 선정적일 수가! 갈리온드는 표정을 굳히며 재빨리 그녀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루엔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무슨 짓이죠?” “아니, 나는 추울까봐 옷이라도 덮어주려고.” 아아~ 이렇게 속 보이는 변명이라니. 갈리온드도 알고보면 히로와 별 다를 바 없는 신체건장한 남자이니 어찌 그를 탓하리오!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갈리온드는 눈으로라도 열심히 소녀를 훑어 보았다. 열 대여섯살 정도 되어보이는 소녀는 새하얀 흰색 피부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색 머리카락을 지닌 가녀린 미소녀였다. 꿀꺽-! 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큰 소리가 나는 걸까? 보다 못한 루엔은 갈리온드의 눈을 가렸다. 그러는 사이 라이레얼은 쓰러져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백옥 같이 하얀 피부가 물기에 젖어 반짝반짝 빛난다. ‘으음, 예쁘네.’ 라이레얼은 순수한 의미로 감탄하였다. 때마침 소녀가 몸을 살짝 뒤척였다. 라이레얼은 소녀에게 다가가 발끝으로 소녀의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아마 히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 인공호흡(키스?)이니 음양교합(그렇고 그런 짓?)이니 한답시고 난리를 첬을 것이다. 라이레얼이 그렇게 몇 번 건드리고나자 소녀는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그 순간 라이레얼은 깜짝 놀랐다. 소녀의 눈은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은색이었다. 라이레얼은 이제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는 본적이 없었다. 소녀는 한동안 라이레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와락 끌어 안았다. 알몸의 미소녀에게 포옹 기습을 당한 라이레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거 뭐하자는 거야?’ “야! 이거 못 놔?” 라이레얼은 신경질을 내며 소녀를 떼어내려 하였다. 하지만 소녀는 라이레얼을 끌어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 조이며 몸을 비벼대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야? 위험한 거니? 기다려라, 내 딸아! 아빠가 구해주마!”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갈리온드는 저 혼자 위험한 상황이라고 왜곡시키며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으윽, 알몸의 미소녀가 눈 앞에 있는데……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봐야 해…….’ 에라이, 히로 같은 놈아! 이런 남자를 좋아하는 루엔이 불쌍하다. 한참 후 소녀는 라이레얼을 껴안은 손을 풀었다. 소녀는 라이레얼을 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쪽~! 라이레얼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라이레얼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소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아닌가? “넌 뭐야?” 라이레얼이 톤이 높은 목소리로 묻자 소녀는 부끄러운지 몸을 웅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이, 몰라요오~!” 그렇게 말한 소녀는 살포시 라이레얼의 품에 안겨왔다. 이거 어째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라이레얼과 그의 아빠, 그리고 예비 새엄마는 드래곤 레어로 텔레포트 되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알몸으로 등장해 선정적인 분위기를 팍팍 뿌려댔던 소녀는 어느새 새하얗고 얇은 드레스를 입고 그들 앞에 등장했다. 이쯤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녀의 정체를 눈치채기 마련이다. “화이트 드래곤이 폴리모프 한 건가?” 루엔의 중얼거림에 소녀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레얼은 눈을 크게 뜨더니 한 손으로 소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빠, 쟤가 드래곤이야?” “글쎄. 그런 것 같은데.” 갈리온드마저 긍정을 표명하자 라이레얼은 당장 소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니가 드래곤이야?” 소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 맞아요.” 맑고 청아한 목소리. 얼굴이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목소리마저 맑고 청아하니 금상첨화(錦上添花)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라이레얼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럼 니가 차원의 열쇠 가지고 있어?” “차원의 열쇠라면…… 아! 그거 제가 가지고 있어요.”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니군. 라이레얼은 쾌재를 불렀다. 이제 차원의 열쇠를 이 애게서 빼앗아 가지고 돌아가면 되는 건가? 그리고 그걸로 히로를 유혹해서…… 으음, 좋았어! 라이레얼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때 차원의 열쇠 뱉어내시지.” “안 그래도 드리려 그랬어요.” “……응?” 히로가 크로니스와 싸우기 위해선 차원의 열쇠는 필수였다. 칼라이스가 그걸 가지고 있어봐야 뭐하겠냐? 엿 바꿔 먹을 것도 아닌데. 그래서 다른 드래곤을 통해 히로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라이레얼이 먼저 찾아왔으니 그녀에게 주는 것이 예의겠지?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마지막에 히로 손에 들어가기만하면 그 과정이야 어찌되건 무슨 상관이겠냐? “저기요, 그런데 말이죠…….” “응? 뭔데?” “호, 혹시…….” “혹시 뭐?” “아, 아니에요.” 뭔가 중요한 말을 꺼낼 것 같았던 소녀는 손을 내저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는 모습이 정말 너무 귀엽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언니라도 불러도 될까요?” “언니?” 라이레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드래곤 맞아? 혹시 가짜 아니야? 뭐 상관 없으려나? 어찌되었건 차원의 열쇠만 받아가면 되니. “좋을대로 불러.” 라이레얼이 허락하자 소녀는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정말요? 정말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래. 좋을대로 부르라니까” “꺄악!” 소녀는 너무 좋은지 만세를 부르며 폴짝폴짝 뛰었다. “저, 저기요, 언니.” “왜?” “저는 카르라고 불러 주세요. 카르요.” “카르?” “예. 꼭 그렇게 불러 주세요.” “알았어.” “저, 정말요?” “알았다니까!” 라이레얼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쓸데 없는 얘기로 시간을 끄는 거지? 그냥 주고 끝내면 좋잖아. 혹시 없는 거 아니야? “빨리 차원의 열쇠나 내 놔!” 라이레얼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하자 카르는 애교스런 웃음을 지으며 라이레얼의 팔에 매달렸다. “헤헤~ 가요, 언니. 제가 차원의 열쇠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왜 이렇게 살갑게 구는 걸까? 무엇 때문에? “두 분은 이 곳에 계세요.” 카르는 자연스럽게 라이레얼과 팔짱을 꼈다. “어서 가요, 언니. 빨리요~.” 애교가 철철 넘쳐흐르는 목소리. 아~ 어쩜 이리 귀여울까? “언니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저 요리 잘하는데. 언제 한번 제 요리 먹어 보시겠어요? 저 언니를 위해 요리 하고 싶어요.” “됐어.” “그럼 술은 뭘 좋아하세요? 이 곳에 수백년 묵은 술도 많은데…… 아! 포도주 좋아하세요? 한 200년 전에 담근 포도주도 있는데…….” “으음, 포도주? 포도주야 좋아하지.” “정말요? 와아, 다행이다. 그럼 이따 저랑 같이 마실래요?” “그럴까?” “아잉~ 같이 마셔요오~.” 카르는 필요 이상으로 라이레얼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마치 자석처럼 결코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라이레얼은 옆에 붙은 카르가 계속해서 쫑알거리는게 시끄럽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게다가 200년 묵은 포도주라니. 으음, 저절로 침이 고이는 군. 둘은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하지만 길은 계속 되었다. 카르가 말했던 차원의 열쇠가 있다던 창고는 그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이쯤되면 나름대로 단순하다고 자부하던 라이레얼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기 마련이다. “어째 같은 장소를 뱅뱅 돌고 있는 느낌이…….” “그, 그럴리가요? 헤헤~.” 카르는 웃음으로 무마할 생각인지 귀엽게 웃어 보였다. 웃을 때마다 양쪽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것이 정말 귀엽고 깜찍하다. 하지만 라이레얼에게는 아무 감흥을 주지 못했다. “뭐 아님 말구.”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카르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시 쫑알거리기 시작했고, 라이레얼은 적당 적당히 대꾸해 주었다. 하지만 받아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대답하기 귀찮으니까 그만 좀 물어!” 라이레얼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카르는 주늑든 표정을 짓기는커녕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멋있어! 너무 멋있어!’ 마치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느낌. 라이레얼이야 말로 그녀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이상형의 여인이었다. ‘터프하고 박력있고 스타일리쉬 해. 멋져요, 언니~.’ 한마디로 말해 카르는 라이레얼에게 반했다. 지금 카르의 모습은 인디가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를 만났을 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어째서 드래곤들은 이렇게 특이한 여인들을 좋아하는 걸까? “…….” 그야 뭐 개인 취향이겠지. 따지지마라. 카르는 짜증을 내는 라이레얼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 보았다. ‘강하고, 아름다워.’ 한 순간, 충동을 참지 못한 카르는 라이레얼의 품에 덥썩 안겼다. “어, 언니!” “왜?” 카르는 미칠 듯이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라이레얼은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레얼에게는 이미 히로가 있지 않은가? 히로를 놔두고 어찌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필 수 있겠는가? “언니 혹시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카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없기를 바라며. 아니, 없어야 했다. 하지만……. “응. 나에게는 히로가 있는 걸. 히로와 나는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야.” “…….” 이럴 수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어째 이런 일이! 카르는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충격에서 벗어난 카르는 남 몰래 이를 갈았다. ‘감히 나의 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 이거지? 용서 할 수 없어! 언니는 내꺼야!’ 아아~ 이 얼마나 어긋난 사랑이란 말인가? 드래곤이면 이래도 되는 거냐? “그런데 차원의 열쇠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가면 되요.” “그 조금만이 대체 얼마인데? 아! 생각해보니 그냥 텔레포트 마법으로 가면 되겠구나. 안 그래?” “그, 그렇네요.” 그런 단순한 방법을 화이트 드래곤인 그녀가 모를리 없었다. 그런데도 힘들게 걸어 왔다는 것은…… 으음, 둘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함인가? 카르는 하는 수 없이 라이레얼과 함께 보물 창고로 텔레포트를 하였다.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는 그리 여행을 많이 하지도 않은데다 보물에 욕심이 없는지라 다른 드래곤에 비해 보물 창고가 참으로 검소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드래곤에 비해서이다. 사방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금덩이들은 라이레얼의 눈을 의심케하기 충분했다. “마음에 드시는 거 있으세요?” “몽땅 다 마음에 들어.” “정말요? 그럼 전부 가져가세요.” “…….” 이 드래곤이 지금 제정신인가? 평생 동안 모은 보물을 전부 남에게 주겠다니. 아무리 사랑에 미쳤다지만 이래도 되는 거야? “으음, 그럼 전부 가져가야 겠다. 그래서 우리 히로랑 행복하게 살아야지.” “……앗!” 여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돈을 선물로 줬더니 여자는 그 돈을 가지고 다른 남자와 행복하게 산다. 이거야 말로 죽 쒀서 개 주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냥 직설적으로 죽 쒀서 히로 준다고 하자. 아무튼 그 말을 들은 카르의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카르는 더욱 히로를 향해 질투를 불태웠다. ‘언니를 빼앗길 순 없어!’ 동성끼리의 사랑이 꼭 비정상적인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정상적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어째서 칼라이스는 남자로 폴리모프하지 않고 여자로 폴리모프 했을까? 무엇 때문에? 설마…… 이 것도 개인 취향? 그렇다는 것은 칼라이스의 취향이 레즈? 으음, 남의 취향 가지고 뭐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이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으음, 레즈라…… 야오이 보단 건전하지 않나? “차원의 열쇠나 빨리 줘.” “네, 언니!” 카르는 총총 걸음으로 보물 창고 안쪽으로 뛰어갔다. 라이레얼이 따라 들어가보니 그곳은 온갖 희귀한 보물들이 골고루 있었다. “이거 언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카르는 몇가지 장신구들을 들어 보였다. 라이레얼은 당장 주머니가 터지도록 긁어 담고 싶었지만 애써 자제하였다. ‘나중에 와서 전부 쓸어 가야겠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막다른 길에서 마법진이 느리게 돌며 화려한 빛을 뿜어 내는 것이 보였다. “이, 이건…….” “잠깐 이곳에 계세요, 언니.” 카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법진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마법진은 카르의 몸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는 듯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 진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카르는 그곳에서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빛무리가 점점 엉키기 시작하더니 허공에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카르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자 마법진이 내뿜는 빛도 점점 옅어졌다. 그리곤 이내 마법진이 자취를 감추자 그 자리엔 카르만이 서 있었다. 라이레얼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원의 열쇠는?” 카르는 꼭 움켜쥐고 있던 자신의 두 손을 펼쳐 보았다. 흰 손바닥 위에는 흙으로 빚어 구운 듯한 작은 열쇠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이게 차원의 열쇠?” 라이레얼이 묻자 카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카르는 생긋 웃더니 차원의 열쇠를 든 손을 뒤로 돌렸다. 뭐하자는 거지? 라이레얼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내놔!” “아이, 언니도 차암~ 이걸 그냥 드릴 수는 없지요~.” “…….” 어쩐지 일이 너무 쉽다 했어.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니? “좋아. 얼마면 되니? 얼마면 되겠어?” “흐음, 글쎄요~.” 왜 이렇게 애교를 열심히 떠는 거지? 카르는 생글생글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돈은 필요 없는데~.” “그럼 뭐가 필요해?” 라이레얼이 물음에 카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말했다. “제가 필요한 건요~.” “필요한 건?” “언니의 사랑이에요오~.” 그렇게 말을 하며 살포시 품에 안겨오는 카르. 라이레얼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이내 사그라들고 그 공간은 우월감이 채웠다. ‘아아~ 나는 왜 이렇게 예쁘게 생긴 걸까? 정말 예뻐서 피곤하다.’ 라이레얼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카르는 라이레얼에게 달라붙어서 흥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사랑해요~.” 이거 분명 문제 있는 거다. 사실 이래서는 절대 안 된다. 아무리 라이레얼이 미녀라고 하지만 이건 옳지 못한 일이야! 미녀 두 명이 사랑한다고 붙어버리면 이 세상 남자들은 어쩌라고? 라이레얼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귀엽고 깜찍한 미소녀가 자신이 좋다고 달라 붙는다. 그리고 그 미소녀의 정체는 화이트 드래곤. 그렇다면…… “정말 날 사랑해?” “예. 저 언니 정말 사랑해요. 언니야말로 제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에요.” “후후~ 그렇단 말이지?” 라이레얼은 카르를 벽에 밀어 붙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라이레얼의 레몬빛 눈동자와 카르의 은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카르는 황홀한 표정으로 라이레얼을 정신 없이 바라 보았다. ‘너무 아름다워. 게다가 강하기까지 하고. 아! 언니~ 전 이제 언니꺼에요~.’ 라이레얼은 한 손으로 천천히 카르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 얼마나 외설적인 행위란 말인가? 카르는 빠르게 숨을 헐떡였다. 라이레얼은 그녀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앗!” 갑작스런 기습 공격(?)에 카르는 몸을 움찔했다. 그 순간 라이레얼이 계속 바람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그럼 내 말 잘 들을 거지?” 이쯤에서 우리는 라이레얼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라이레얼은 지금 화이트 드래곤을 부하(비속어로는 꼬붕)로 삼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히로와 결혼했을 때 하녀로 쓸 생각이었다. 드래곤이니 빨래랑 청소도 잘 하겠지? 이런 라이레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르는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쾌락에 가득찬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니 말이라면 뭐든지…….” “후후~ 그럼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할 거지?” “예. 언니가 시키면 뭐든 할 게요.” 그것은 악마의 속삭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유혹. 카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라이레얼의 마수에 완전히 걸려든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 어서 차원의 열쇠 내놔.” “여, 여기요.” 카르는 순순히 라이레얼에게 차원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라이레얼은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카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착하지.” “헤헤~.” “이제부터 언니 말 잘 들어야 돼.” “예.” “후후~ 그래야 착한 아이지.” 라이레얼은 카르의 목덜미에 살짝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카르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어, 언니…… 저는…….” 라이레얼은 카르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아!” 카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라이레얼의 품에 안겨왔다. 라이레얼은 그런 카르를 살짝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차원의 열쇠를 손에 넣은 라이레얼은 유유히 갈리온드와 루엔이 있는 장소로 돌아왔다. 이미 사랑 고백까지 끝마친 카르는 라이레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라이레얼도 그런 카르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차원의 열쇠는 찾았니?” “응. 여기.” 라이레얼은 차원의 열쇠를 꺼내 보였고 갈리온드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카르가 갈리온드의 앞을 가로 막았다. “나의 언니한테 접근하지 마세요!” “…….” 이런 집착이라니. 사실 이 정도면 스토커로 봐도 별 무리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도 카르는 스토커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괜찮아. 저 남자는 내 아빠야.” 라이레얼의 말에 카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빠? 자세히 보니 굉장히 닮았다. 카르는 재빨리 갈리온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저는 라이레얼 언니의 동생 카르라고 해요.” “으응.” “라이레얼 언니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카르는 다시 라이레얼의 옆에 바짝 붙었다. 무슨 기생 동물도 아니고 저렇게 계속 붙어 있을 필요가 있을까? 갈리온드는 차원의 열쇠가 맞다는 걸 확인해 주었고 카르는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했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완전히 새판이구만!” 라이레얼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말 사방이 새였다. 족히 수만 마리는 될 것 같은 보약(?)들이 라이레얼들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결국 내각 회의에서 침입자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론이 났다. 이런 결론이 나온 이유는 용병 일동이 도주해 상대의 숫자가 셋으로 줄었기 때문이었다. 저 하프엘프 여인이 좀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대가 셋뿐이라면 한번 해볼만 했다. “침입자는 결코 용사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 힘을 내 저 자들을 무찌르자!” “와아아-!” 청안백우조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날아 올랐다. 그 순간,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니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날아 오르던 새들은 그 목소리에 일제히 추락하였다. 그것은 근원적인 공포 때문이었다. 드래곤 피어(Dragon fear). 청안백우조들은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버들랜드의 주인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장 꺼지지 못 해? 나의 언니 앞에서 사라져!” 카르가 소리치자 청안백우조들은 각자 알아서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위는 깨끗이 정리되었다. 그 모습을 보던 라이레얼은 혀를 찼다. ‘아깝다. 저것들 잡아다가 보약 지어야 하는데.’ 라이레얼 일행은 배가 있는 해안으로 걸어갔다. 다행히도 배는 떠나지 않고 해안 근처에 정박해 있었다. 해안가에는 보트가 하나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용병 일동이 타고 가고 이것은 자신들을 위해 남겨둔 것 같았다. 그들은 보트에 올라타 배까지 노를 저었다. 배 근처에 도착하자 갑판 위를 돌아다니던 테커가 그들을 발견하고 줄을 내려 주었다.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라이레얼이 살아서 돌아왔다. 매우 기쁘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슬펐다. 위험한 순간에 라이레얼을 버리고 자기들끼리만 도망을 쳤으니 라이레얼에게 무슨 일을 당할까? “와, 왔어? 하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캥기는게 있는 용병 일동은 라이레얼의 앞에서 벌벌 떨었다. 라이레얼은 그들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리 박어.” 용병 일동은 한 마리 군소리 없이 일제히 대가리를 박았다. 이 것은 본격적인 열차려의 서막에 불과했다. “뒤로 굴러, 앞으로 굴러, 똑바로 못하나? 다시 처음부터 한다. 왼손 들어, 오른손 들어, 왼다리 들어, 오른손 내려, 왼손 내리지 마. 왼손 내리지 말라니까! 이것들이 정신이 썪었어? 당장 바다로 뛰어 들어! 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선착순 한 명. 실시!” 풍덩~! 한마디 개김성 짙은 발언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잘못한 게 있으니 어쩌겠냐? 그냥 시키는 대로 열심히 구르는 수 밖에. 라이레얼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을 굴려 댔다. 그렇게 한, 두 시간 굴리고나자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리는 오징어 다리처럼 흐물흐물해졌고 입에서는 신내가 난다. 정신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한계가 온 것이다. “니들이 감히 날 버리고 도망쳐?” “아, 아니야, 라이레얼. 그건 오해야.” “마, 맞아. 우리는 지원군을 부르러 간 거였어.” “나, 나는 후방에서 기습을 하려고.” 가지각색의 변명들. 정말 비굴하고 불쌍해 보인다. 라이레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 놈들에게 뭘 기대하겠냐?’ 역시 라이레얼은 현실적인 여인이다. 덩치는 산만한 남자들이 갑판에 쓰러져 헥헥 대는 모습이 마치 비루먹은 개새끼(강아지로 순화 가능)를 보는 것 같다. 라이레얼은 카르에게 말했다. “저 놈들 회복시켜.” 완전 명령조다. 하지만 카르는 이미 라이레얼의 부하나 다름 없었다. 미모로 드래곤마저 사로잡다니. 이 정도면 하프엘프라기보단 마족이 어울릴 것이다. ‘언니가 나에게 명령을 하다니…… 아! 행복해~.’ 카르는 최선을 다해 라이레얼의 명령을 이행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재빨리 회복 마법을 썼다. 그리고 다시금 라이레얼의 팔에 매달렸다.(코알라냐?) 온몸을 쑤시는 통증과 호흡 곤란 때문에 반쯤 죽어가던 용병 일동은 카르의 마법 한 방에 여자 만난 히로처럼(혹은 물 만난 고기처럼)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솟는 힘에 놀란 용병 일동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는 새하얀 피부와 머리카락을 가진 미소녀가 서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용병 일동은 눈이 머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엄청난 미모를 지닌 라이레얼과 항상 같이 지냈기에 여자 보는 눈이 상당히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충격을 줄수 있다니. 그것은 바꿔 말하면 소녀의 외모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가 된다. “이, 이 아가씨는…….” 용병 일동이 묻자 라이레얼이 서로를 소개 시켜 주었다. “이 쪽은 내 부하들. 그리고 이 쪽은…… 으음, 그냥 내 동생이라고 생각해. 이름은 카르.” 동생? 라이레얼에게 저렇게 예쁜 동생이 있었던가? 카르의 미모에 반한 용병 일동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이 카르는 입을 샐쭉 내밀며 말했다. “아무리 언니의 부하라 해도 언니한테 접근하면 가만 있지 않을거에요.” “…….” 한 차례의 소란이 끝나고 나서야 배는 출항하였다. 올 때와는 다르게 안개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어느새 새들의 낙원 버들랜드는 그들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들을 배웅이라도 하듯 버들랜드에서는 음악 소리와 함께 새들이 날아 올랐다.(청안백우조들은 지금 자신들의 용맹스런 모습에 침입자들이 놀라 도망갔다고 착각을 하며 축제를 벌이는 중이었다) 라이레얼은 마스트 꼭대기에 걸터 앉아 멀어지는 버들랜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한 마리 잡아올 거 그랬나?’ 그리고 카르는 그런 라이레얼을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바라 보았다. ‘어쩜! 너무 멋있어~.’ 이렇게 하여 라이레얼은 차원의 열쇠와 함께 드래곤의 힘을 손에 넣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이 그런 위험한 물건과 위험한 힘을 손에 넣다니. 아아~ 과연 우리의 주인공 히로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아이리스::박성호 TITLE ▶7 :: <아이리스 12권> 9클래스 - 07 sharpshooter(psungho) 03-04-29 :: :: 26381 비록 내 의식 속이지만 사일런스 지니를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점이 하나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느 정도 바뀌어서 나오는데 어째서 지니만큼은 현실 세계의 모습과 똑같은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 것은 아마도 지니가 워낙 잘났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잘났으면 내 잠재 의식마저 이 인간을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존경하는 아이언스 히로님과 같이 드라이브를 하니 정말 행복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남자랑 같이 드라이브 하는데 왠 행복? 이놈 진짜 나한테 흑심을 품고 있는 거 아냐? 혹시 나 자는 사이에 이 놈이 강제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으음, 두렵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지만 제 관심사는 오직 여자뿐입니다. 남자와는 손조차 잡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염두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피로하시지는 않으신지요? 교대 할까요?” “그러죠.” 나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지니와 자리를 바꾸었다. 우리는 요 며칠 간 이렇게 교대로 운전을 하였다. 한 사람이 운전하는 사이 다른 사람이 쉴 수 있기에 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지니는 매끄러운 솜씨로 차를 몰았다. 차가 뻥뚫린 도로를 바람처럼 질주하자 난 시트에 몸을 길게 기댄 채 음악을 켰다. “아이리스 수도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글쎄요. 이 속력으로 계속 달린다면 아마도 이, 삼일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며칠 동안을 계속 달리는 찻속에서 지내니 머리가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면도 못 했기에 지금 내 모습은 거지꼴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지니야 뭐 워낙 잘난 인간이니까 며칠 씻지 못했어도 화려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난 일반적인 사람이기에 며칠만 안 씻어도 몸과 입에서 냄새가 풀풀 난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몸에 가려운 곳을 벅벅 긁는데 표지판 하나가 눈에 보였다. <중부 고속도로 제3 휴게소 10km> 아무래도 저곳에서 쉬어 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난 내 생각을 지니에게 말했고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게소가 모습을 드러내자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제대로 된 밥 좀 먹을 수 있겠군.” 그 동안 우리는 매 끼니를 컵라면, 육포, 땅콩, 삼각 김밥 등으로 때웠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아! 마침 저기 음식점이 있네요.” 난 지니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닭요리 전문 체인점. 으음, 닭고기 맛있지. 좋아. 오늘 저녁은 닭고기다. “가지요.” “예.” 우리는 음식점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 때가 지난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음식점 안은 한산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 보았다. “뭐 시킬까요?” “댁이 살 겁니까?” “존경하는 아이언스 히로님의 식비를 내는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마음껏 시키십시오.” 오옷! 역시 사일런스 지니. 변호사 생활하면서 돈 좀 모았나 보구나. 아무튼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시키라고 하니 부담 갖지 말고 마음껏 시키는게 예의겠지? “깐풍기랑 닭날개튀김이랑 닭다리튀김이랑 닭안심살 감자 조림이랑 닭야채복음밥 주세요.” 내가 거의 한 밑천 뽑자는 심정으로 주문을 하자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더 시킬 것은 없으신가요?” “일단 먹어보고 더 시킬 거 있으면 시키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부담갖지 말고 언제든 시키십시오.” 돈도 많덴다. 잘 생긴 놈이 돈까지 많으면 어쩌자는 거지? 아아~ 마음에 안 든다. 얼굴 잘 생기고, 머리 똑똑하고, 싸움 잘하고, 돈만 많으면 다냐? “…….” 생각해보니 다군. 세상 어떤 여자가 사일런스 지니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런 놈과 붙어 다니면 나만 손해다. 사실 나도 나름대로 잘 생겼다고 자부하는 외모다. 막말로 나만큼 생긴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저요! 저요! 아이씨! 어떤 놈이 손을 들어? 당장 손 안 내려? 흠흠, 아무튼지간에 난 잘생겼는데 나보다 아주 조금 더 잘생긴 지니와 붙어 다니다보면 비교가 되어 안 생긴 놈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얼마나 열받는 일인가? 내가 지니 보다 못한게 뭐있어? 이렇게 생각하며 지니를 향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사이 주문했던 음식들이 나왔다. “이런 음식들로 제 마음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저는 물질에 지배되지 않는 순수한 인간입니다.” “물론입니다, 아이언스 히로님. 이것은 다만 저의 작은 성의일뿐이니 부담 갖지 말아주십시오.” 역시 지니는 간신배 체질이다. 어쩜 저렇게 부드럽게 웃으며 어쩜 이렇게 아부성 짙은 대사를 남발할까? 아! 그대가 만약 간신배의 길을 걸었다면 후대에 두고두고 욕 먹는 훌륭한 간신배가 되었을 텐데. “어서 드십시오.” “댁이 말 안해도 먹을 생각입니다.” 난 포크를 들어 식탁 위에 놓여진 음식들을 마구 집어 먹었다. 맛있군. 게다가 양도 많고. 우걱우걱~! 내가 한참 복스럽게 먹고있는데 음식점 문이 끼익 열리더니 흰 원피스에 흰 고깔모자를 푹 눌러 쓴 한 소녀가 들어왔다. 특이한 복장과 손에 자기 키만한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는 걸로 봐선 왠지 마법사 같아 보인다. 소녀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고깔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밥 한끼 얻어 먹을 수 있을까요?” “……!” 저 목소리! 저 동글동글하고 통통한 얼굴! 저 소녀는 나의 라이가 아닌가? “라이야~!” 난 반가움에 들고 있던 포크를 집어 던지고 라이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라이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시죠?” “…….” 이, 이럴 수가! 나의 라이가 나를 몰라보다니. “나, 나야. 히로 오빠. 히로 오빠 몰라?” 라이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제 이름은 라이가 아니라 라이미안이에요.” 라이는 회색 눈동자를 나를 보며 또박또박 대답하였다. 난 심한 충격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라이는 예전의 라이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라이는 이렇지 않았다. 어째서 라이가 이렇게 딱딱한 태도로 나를 대하는 거지? “라, 라이야.” “사람을 잘못 보셨나 보네요. 저는 라이미안이에요.” 하아~ 이 곳은 내 의식 속이니 라이마저 이상한 모습으로 나오는 구나. 비록 좀 이상하게 나오긴 해도 라이는 라이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니?” “배가 고파서 들렀어요. 밥 한끼 얻어 먹을 수 있나 해서요.” “돈 없니?” “예. 저는 지금 무전여행(無錢旅行) 중이거든요.” “그, 그럼 우리랑 합석할래? 이 오빠가 밥 사줄게.” “칼리가 모르는 사람이 밥 사준다고 하면 거절하라 그랬어요.” “…….” 역시 나의 라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나의 라이는 밥 사준다고 하면 설사 상대가 드래곤이라 해도 따라갈 아이인데. “내 이름은 히로라고 해. 이제부턴 히로 오빠라고 불러.” “히로 오빠요?” “응.” “제 이름은 아까도 말했듯이 라이미안이에요.” 라이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난 라이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제 우린 아는 사이지? 같이 밥 먹을래?” “좋아요.” 이렇게 해서 라이는 우리와 합석을 하게 되었다. 자리에 앉은 라이는 예의바르게 지니에게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나서야 라이는 식사를 시작했다. 예전 라이의 식사 방식은 눈 앞에 있는 음식을 두 손으로 집은 다음 입안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뉴(new) 라이는 굉장히 예절바르게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여 야금야금 먹었다. 으음, 라이의 식탁 예절이 이렇게 좋아지다니. 한편으론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슬프다. 라이는 복스럽게 먹을 때가 귀여웠는데. “무전여행 중이라고 했지?” “예.” “어린 나이에 참 대견하구나.” “저는 어리지 않아요. 700살도 넘었는 걸요.” “그, 그야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 이런 어린아이가 혼자 여행할만큼 이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엔 이런 어린아이만을 납치해다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하는 변태들이 존재하기에 라이의 무전여행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 어디로 갈 생각이니?” “아이리스의 수도로 갈 생각에요.” “아이리스의 수도? 잘 됐네. 우리도 거기로 갈 생각이었는데. 우리랑 같이 갈래?” “좋아요.” 다행이다. 라이가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아아~ 라이야. 넌 이 오빠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모를 거야. 이 오빠는 이제 라이 없이는 못 살아. 귀여운 것. 난 식사를 하는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 라이 같았으면 헤헤 웃으며 깜찍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지금 라이는 별 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이 라이던 저 라이던 간에 전부 나의 라이임은 틀림 없으니. 식사를 끝마친 우리는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려는데 지니가 입을 열었다. “아이언스 히로님.” “왜요?”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젠데요?” “이 차는 2인승입니다.” “…….” 그렇군. 이 스포츠카는 2인승이었어. 으음, 이런 문제가 있었을 줄은……. “댁이 내리면 안 될까요?” “아이언스 히로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 하겠지만 제가 알기로 아이언스 히로님의 수중에는 돈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약 제가 내린다면 여행 경비 문제로 난항을 겪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 역시 돈 있는 놈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시 당하지 않는다. 생각 같아선 지니를 당장 내치고 싶다만 저 놈이 없으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어찌하리오! 굶는 건 둘째쳐도 기름을 넣어야 자동차가 굴러갈 것이 아닌가? 이 스포츠카는 태양열 자동차가 아니란 말이다! “자리가 없으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요. 히치하이킹을 하면 되니까요. 전 이만 가볼게요. 밥 사주셔서 감사했어요.” 라이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나에게서 멀어졌다. 저런 귀여운 소녀가 히치하이킹을 하려 하다니. 그러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자꾸만 안 좋은쪽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라이는 괴한들에게 차로 납치를 당한다. 그래서 끌려간 곳에는 라이 또래로 보이는 여자 아이들 몇 명이 어두운 창고 안에 가두어져 있었다. 괴한들은 라이를 그 곳으로 밀어 넣고……. “안 돼!” 난 라이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가자.” “하지만 자리가 없잖아요.” “괜찮아. 내 무릎 위에 앉으면 돼.” “…….” 난 라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라이를 차에 태웠다. 지니는 어느새 운전석에 앉아 시동까지 다 걸어 놓은 상태였다. 난 조수석에 앉아 라이를 무릎 위에 앉혔다. “출발!” “알겠습니다.” 지니는 악셀레이터를 밟았고 난 혹시나 라이가 튕겨나갈까 싶어 라이의 허리를 꼭 끌어 안았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하하, 무리라니. 당치도 않은 말을.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마. 원래 서로서로 돕고 사는게 인생사는 재미 아니겠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의 라이를 위해서라면야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런데 무겁긴 정말 무겁다. 이 조그만 게 왜 이렇게 무게가 나가는 걸까? 아~ 다리 아파~. “괜찮으십니까?” 넌 이게 괜찮아 보이니? 역시 내 체력으로 라이를 몇 시간 동안이나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는 것은 무리였다. 으윽, 이젠 다리에 감각이 없다. “교대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 교대? 나야 물론 교대를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교대를 한다면 지니가 조수석에 앉게 될텐데 그렇다는 것은…… 안 돼! 라이를 무릎 위에 앉힐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뿐이야. 절대 지니의 무릎 위에 라이를 앉힐 수 없어. “휴계소는 아직 멀었나요?” “멀었습니다.” “얼마나?” “굉장히.” 젠장! 욕이 저절로 나온다. 라이는 이런 나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새벽이라 해도 좋은 시간이니 어린 아이는 잘 시간. 잘 자렴 라이야~.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이그리드님을 만나려 하시는 겁니까?” “그걸 댁이 알아서 뭐하시게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자꾸 쓸데 없는 거에 신경쓰지 마시고 운전이나 열심히 하세요.” “알겠습니다.” 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 한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도착하기 전에 내 다리가 부러질 것이다. 역시 저 놈을 내쳐야 하나? 아니야. 저 인간이 없으면 밥은 누가 사? 으음, 정녕 방법이 없단 말인가? 잘 생각해보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방법이…… 있다! “차를 바꾸죠!” “예?” “다음 휴게소에서 4인승짜리로 바꿉시다.” “꼭 그래야만 하나요? “왜요? 그럴 수 없는 이유라도 있나요?” “으음, 전 이 차가 상당히 맘에 들거든요.” “…….” 그거야 댁 사정이지. 나의 주장에 의해 우리는 다음 휴게소에서 차를 바꾸기로 하였다. 아침이 될 때쯤에서 다음 휴게소에 도착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곳 중고차 매매소로 가서 흥정을 벌였다. 흥정을 하는 과정에서 난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차가 내 생각보다 무지하게 비쌌다는 것. 내 스포츠카를 4인승짜리 오픈카로 바꾸자 내 수중에는 상당한 돈이 남게 되었다. 이 정도면 아이리스 수도까지 가는데는 모자람이 없으리라. 4인승 오픈카는 좋은 점이 많다. 차 안이 넓고, 위가 뚫려 있어서 시원하고. 결정적으로 좋은 점은 뒷자리에 나와 라이가 다정히 앉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야~.” “제 이름은 라이미안이에요.” “그래도 라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 그 편이 훨씬 귀엽잖아. 응? 그렇게 하게 해줘. 이 오빠의 부탁이야.” “알았어요. 좋으실 대로 부르세요.” “응. 고마워, 라이야.” 아아~ 나의 라이는 어째서 이렇게 귀여운 걸까? 똘망똘망하게 빛나는 회색 눈동자. 그 눈동자만으로도 라이가 얼마나 총명한 아이인지를 알 수 있었다. 라이는 둘도 없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다. 라이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요, 라이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다. 어서 크로니스와의 싸움이 끝나야 라이를 입양할텐데. 크로니스 생각을 하니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각해보면 그 동안 낙천적으로 지낸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난 지금 큰 위험을 목전에 두고있다. 내가 과연 크로니스를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을까? “…….” 내가 알리 없지. 쓸데 없는 생각은 그만 두자. 내일 걱정은 내일 해야지. “그런데 라이는 무슨 이유로 여행을 하는 거야?” 내가 묻자 라이는 눈을 밝게 빛내며 말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에요. 직접 세상을 돌아보며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싶거든요.” “어쩜! 라이는 어린 나이에 비해 생각이 참 훌륭하구나.”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생각 같아서는 볼에 뽀뽀도 해주고 싶은데 혹시나 라이가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싶어 일단 자제하였다. 대신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아~ 통통해. 살결도 부드럽고. 갑자기 차가 멈췄다. 난 지니에게 물었다. “왜 멈춰요?” “사올 게 좀 있어서요.” 지니는 차에서 내려 길 옆에 세워진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무언가를 사가지고 차로 돌아왔다. 이게 뭐야? 삼각 김밥, 샌드위치, 캔맥주……. 지니는 자연스럽게 캔뚜껑 따고는 맥주를 입에 들이 부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아! 히로님께서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지니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캔맥주 하나를 건네주었다. 으음, 차갑군. 난 차가운 캔맥주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고 한 모금 들이켰다. “캬아-! 죽인다!” 꿀꺽꿀꺽- 한 모금 마시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다. 한 모금이 두 모금 되고, 두 모금이 세 모금 되고, 그러다가 한 캔, 두 캔, 세 캔…… 에라, 모르겠다. 마시다 죽자! “라이야, 너도 한잔 마실래?” “이게 뭐에요?” “맛있는 거.” “정말요?” 내가 계속 권하자 라이는 구미가 당기는지 홀짝홀짝 마셨다. 그러더니 이내…… 꿀꺽꿀꺽! 그렇게 셋이서 한참을 마시다보니 어느새 술이 다 떨어졌다. “좀 더 사올까요?” “그래. 기왕이면 양주로.” “알겠습니다.” 지니는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더니 술병을 한 아름 들고 나왔다. “라이야, 우리 러브샷 할까?” 라이는 통통하고 새하얀 뺨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눈빛은 이미 반쯤 풀어졌다. 으음, 이제야 나의 라이 같군. 아이구, 귀여워라! “러브샷이 뭐에요?” “으응. 러브샷이란 이렇게 팔을 교차하고 마시는 거란다.” “우와! 정말요? 재밌을 것 같아요. 우리 빨리 해요.” 라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좋았어. 러브샷! 아아~ 행복해. 라이와 러브샷을 하게 되다니. “이번엔 포옹샷 할래?” “그건 뭐에요?” “으응, 그건 말이지…… 이렇게 껴안고 손을 돌려 마시는 거란다.” “우와! 정말요? 우리 그것도 해요!” 나와 라이는 꼭 껴안고 포옹샷을 했다. 혹시 내가 어린애에게 술을 먹여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중지하길 바란다. 누누이 말하지만 라이는 내 딸과 같은 존재다. 결코 흑심을 가지고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자꾸 술을 먹이는 가? 그야…… 귀엽잖아! 라이는 예전의 라이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헤헤 웃고 있었다. 난 그런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땅이 심하게 흔들렸다. “뭐, 뭐야? 지진인가?” 다행히 지진은 아니었다. 지니가 차를 출발시켰을 뿐이었다. “…….” 뭐? 차를 출발 시켜? 이 인간이 미쳤나?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안 세워?” “왜 이러시는 지요? 갈 길이 바쁘잖습니까.” “야!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떻게 음주 운전을…….” 음주운전은 일종의 죄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혼자 술먹고 혼자 담벼락 들이 받아 혼자 죽으면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다. 문제는 술 처먹은 놈이 운전대를 잡아 다른 사람을 들이 받는다는 것이다. 죽을려면 저 혼자 곱게 죽을 것이지 왜 남을 끌어들여? 하여튼 음주운전 하는 놈들은 전부 개새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 처먹었으면 잠이나 자란 말이다! 괜히 차 몰고 지랄하지 말고!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지니가 술을 퍼 마시고 차를 몬다. 그것도 무지하게 밟아댄다. 어머나! 벌써 100km/h가 넘었네. 이대로 사람 들이 받기라도 하면 그 사람은 공중 분해 되겠군. 오픈카인만큼 이 정도 속도로 달리면 맞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앞유리가 막아준다고 해도 한계는 있는 법이니. “야! 멈춰, 임마!” “진정하십시오.” “음주운전은 절대 안 돼! 교통 안전 법규를 지키란 말이다!” “음주 운전이라니요? 어째서 이게 음주 운전입니까?” “너 아까 술 마셨잖아! 술 마시고 운전하면 그게 음주 운전이 아니고 뭐야?” “제가 마신 것은 맥주뿐입니다. 맥주를 어찌 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지니의 말에 난 할 말이 없어졌다. 갑자기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수입니다.’ 그렇다. 맥주는 술이 아닌 음료수. 난 지니를 살펴 보았다. 운전대를 잡고 악셀레이터를 힘껏 밟는 지니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적어도 술 먹고 꼬장(술주정으로 순화 가능) 부리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너는 밟아라. 나는 라이와 술을 마시마. 난 지니가 밟건 말건 신경 끄고 라이와 안주를 집어 먹으며 오순도순 얘기를 했다. “자 이거 먹으렴.” 난 육포를 찢어 라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라이는 그것을 오물오물 씹더니 방긋 웃음을 지었다. “이거 너무 맛있어요. 오빠도 좀 드세요.” “그래. 알았어.” 너무나도 귀여운 나의 라이. 라이의 귀여움은 거의 살인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귀여움이 거의 극(極)에 이르렀다. 세상에 그 무엇도 라이보다 귀여울 순 없었다. 라이가 옆에 있어줘서 히로는 너무너무 행복해요~. 내가 술에 취해 라이에게 애교를 부리는 등 제정신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짓들을 골라서 하고 있는데 갑자기 라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에에엥~! “앗! 라이야. 무엇 때문에 우는 거니?” “예? 라이는 안 우는데요.” “뭐? 그럼 이 소리는…… 설마…….” 불길한 예감이 몸을 엄습한다. 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내 예상대로 싸이렌을 켜고 달려오는 경찰차. 한, 두 대가 아니다. 족히 십여 대는 될 듯 하다. “거기, 오픈카 서세요! 속도 위반입니다.” 속도 위반. 그 까짓 것은 딱지 끊고 벌금 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음주 운전은 면허 취소에 잘못하면 구류형까지 당할 수도 있단 말이다! 하지만 사고는 안 냈으니 적당 선에서 끝날지도……. 난 지니에게 물었다. “음주 운전이면 벌금이 얼만가요?” 지니의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음주 운전은 혈중 알코올 농도에 관계 없이 무조건 사형입니다.” “……뭐?” 사형? 그깟 음주 운전 좀 했다고 사형이라니?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살다보면 음주 운전 할 수도 있는 거지. “거기, 오픈카! 멈춰서지 않으면 발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경고 합니다. 멈춰서지 않으면 발포합니다.” 발포? 총을 쏘겠다고? “이봐! 멈춰!” “멈추면 사형입니다.” “그건 운전대를 잡은 댁 얘기니 내가 알바 아니지.” 그렇다. 지금 음주 운전을 하는 사람은 지니일뿐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뭐 지니야 죽건 말건……. “음주 운전은 동승자도 같이 처벌 받는다는 것 모르십니까?” 이러면 얘기가 틀려진다. “뭐해? 더 밟아! 죽을 때까지 밟아!” “알겠습니다.” 차는 어두운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는 여전히 경찰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안 서? 안 서면 쏜다! 진짜 쏠 거야! 썅! 나들 경찰이 핫바지로 보이냐?” 성격 나온다. 공무원 말 버릇이 저게 뭐냐? 저래서 민중의 지팡이라 할 수 있겠어? 탕- 탕-! “어! 진짜 쐈어!” “이 나라 경찰들은 좀 과격합니다.” “고개 숙여, 라이야!” 난 술에 취해 헤롱헤롱 거리는 라이를 시트에 눕혔다. 이러면 총을 맞는 일은 없겠지? 그리고 난 재빨리 조수석으로 이동했다. “이제 어쩌죠?” 사일런스 지니라면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모사니까. 젠장, 당대 최고의 모사라는 놈이 음주 운전이나 하고 자빠져 있으니…… 아무튼 이 사회는 엘리트들이 문제다. 엘리트면 엘리트답게 모범을 보여! “어쩔 수 없군요. 일단은 이걸 받으십시오.” 지니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 나에게 건네 주었다. “앗! 이것은 글록 17이 아닌가?”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당연 잘 알지. 내가 옛날에 조립한 적도 있었는데. 그런데 이걸 가지고 뭘 어쩌라고?” “그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응사(應射)하십시오.” 탕- 탕-! 날아온 총알이 나와 지니의 사이를 지나 앞유리창을 뚫고 지나간다. 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뻔하지 뭐. 저 경찰들이 우리를 체포하는 대신 아주 잡아서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달리 뭘 의미하겠니? “투항하라! 투항하면 자비를 베풀도록 하겠다!” “젠장할 놈들!” 감히 아이언스 히로님을 우습게 봤다 이거지? 용서 할 수 없어! 난 내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뒤를 보았다.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경찰차의 숫자는 정확히 아홉 대. 좋았어! 이제부터 아이언스 히로님의 사격 솜씨를 보여주도록 하지. 사실 그 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 한 사격 한다. 비록 BB탄 총이긴 했지만 진짜총이나 장난감총이나 쏘는 방법은 똑같으니 무슨 상관이 있으랴? “잠깐. 그런데 이거 허가 받았어요?” “물론 불법 무기입니다.” “걸리면 불법 무기 소지죄까지 추가 되겠군요.” “어차피 사형인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군요.” 지니의 운전 솜씨는 정말 기가 막혔다. 중앙선은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마주 오는 차를 피해 달리는 곡예 운전. 이 인간은 카레이싱에도 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못하는 게 없는 인간이다. 탕- 탕-! “작작 좀 쏴라!” 이쯤 되면 성격 좋고, 참을성 많기로 소문난 아이언스 히로님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난 몸을 돌려 응사했다. 탕-! 한 발의 총성과 함께 가장 앞쪽에서 달려오던 경찰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타이어에 맞은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계속 총을 발사 했다. 탕- 탕- 탕-! 앞쪽에 있던 경찰차들은 전부 끼익-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고, 그 때문에 뒤에서 달려오던 경찰차와 충돌했다. 내 의식 속이지만 정말 제정신이 아닌 세계다. 사실 이 정도면 웨스턴 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난데 없이 경찰차와 총격전이라니. 아니, 웨스턴 물보다는 갱스터 무비가 더 어울리겠군. 홍콩 느와르도 나쁘진 않지. 나의 신기에 가까운 사격으로 인해 추격전은 끝을 맺었다. 경찰차가 더 이상 쫓아오지 않고 한숨 돌릴 때쯤이 되서야 지니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제야 난 기다렸다는 듯이 지니에게 소리쳤다. “너 때문에 죽을뻔 했잖아!” “죄송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러브샷이나 한번 할까요?” “…….” “포옹샷은 어떻습니까?” “…….” 말을 말자. 내가 이 인간과 무슨 말을 하겠냐? 라이는 술이 깼는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으음, 여기는 어디죠?” “괜찮니?” “머리가 아파요.” 라이는 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 잡으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으음, 숙취의 고통. 저 고통 내가 잘 알지. “그럼 해장술이나 먹으러 갈까요?” 태연하게 말하는 지니의 모습에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댁이나 처먹어!” * * * 히로는 여전히 죽은 듯 자고 있었다. 언제 깰지 모르는 기나긴 꿈. 그것은 기약 없는 기다림이나 다름 없었다. 히로의 팔에는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고, 그 주사 바늘을 통해 포도당이 주입 되었다. 라이는 그런 히로의 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 보았다. “빨리 일어나요, 오빠. 빨리 일어나서 라이랑 놀아줘요.” 히로가 라이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하는만큼 라이 역시 히로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렇기에 히로가 잠든 지금 라이는 굉장히 슬펐다. 처음에는 며칠이면 깨어날 줄 알았는데 한달이 넘도록 히로 오빠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어째서 일까? 대체 의식 속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혹시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라이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라이에겐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심심했다.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같이 놀아주는 사람이 없는 고통. 그것은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 라이는 인디를 찾아갔다. 인디는 집근처 풀밭에 앉아 하프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일루니아님. 제 노래를 들어주세요. 이 노래는 그대를 위한 거예요. 일루니아님을 처음 본 그 순간 전 일루니아님의 노예가 되고 말았답니다. 제 발에 족쇄를 채워주세요. 영원히 그대를 위해 봉사할테니. 제 마음에 사랑을 채워주세요. 영원히 그대만을 사랑할테니. 일루니아님 향한 내 사랑은 시작과 끝이 없는 것처럼 자꾸만 커가요. 제 몸과 마음은 전부 그대 것이 랍니다. 그러니 저를 마음대로 하셔도 좋아요. 다만 그대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높은 톤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음률을 타고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노래가 끝나고나자 인디는 눈을 살짝 감으며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랐다. ‘아! 일루니아님.’ 그 순간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어느새 인디의 옆에는 라이가 서 있었다. 박수까지 치고 있는 걸로 봐선 노래를 다 들었음이 틀림 없었다. 인디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전부 들으셨나요?” “예. 너무 아름다운 노래였어요, 오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인디가 하프를 옆에 내려 놓자 라이는 자연스럽게 인디의 무릎 위에 앉았다. 인디는 라이를 살짝 껴안고 몸을 보듬어 주었다. “오빠는 언제쯤 일어날까요?” “글쎄요.” “라이는 히로 오빠가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예전처럼 라이랑 같이 놀아줬으면 좋겠어요.” “후후, 저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라이는 자신의 기다란 귀를 만지작거리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라이한테는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게 누군가요?” “이코에요. 하지만 이코는 한마디 말도 없이 어느 날인가 라이 곁을 떠나고 말았어요. 이젠 라이가 싫어졌나봐요. 흑흑~.” 라이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놀란 인디는 재빨리 라이를 달래 주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겠죠.” “흑흑, 아니에요. 이코는 이제 라이가 싫어진게 틀림 없어요. 그래서 라이한테 말도 안 하고 라이 곁을 떠난 거예요. 흑흑, 라이는 이코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코는…… 흑흑…… 우에에엥~!” 라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울지 마세요. 제가 그대를 위해 노래를 불러 줄 게요.” “우에에엥, 다 필요 없어요!” 라이는 인디의 품을 뛰쳐나와 어디론가 달려갔다. 인디는 굳이 라이를 쫓아가서 잡지 않았다. 지금은 혼자 있도록 놓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빨리 일루니아님께 바칠 아름다운 노래를 생각해야 돼. 아아, 하지만 그 어떤 노래도 일루니아님보단 아름답지 않은데 어떡하지?’ 라이는 눈물을 흩뿌리며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계속 달렸다. 그러던 중 돌맹이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라이는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이코 미워!” 말 없이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친구. 그것은 어린 라이에게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항상 같이 놀아주던 히로마저 자고 있으니 라이의 슬픔은 더욱 컸다. 그렇게 한창 목청이 터져라 울고 있는데 저 멀리서 쏜살 같이 날아오는 한 마리 새가 있었다. “라이야~!” 라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목소리는 라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이코의 목소리가 아니던가? “이, 이코?” 라이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라이의 머리 위에서 흰색 매 한 마리가 선회비행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믿을 수 없게도 그 매는 이코였다. 라이는 그 매를 향해 소리쳤다. “이코야!” “라이야!” 라이코스는 재빨리 내려와 라이의 앞에 섰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라, 라이야.” 너무나도 보고 싶던 친구가 지금 눈 앞에 있었다. 라이는 라이코스에게 손을 뻗었다. 따뜻한 깃털의 촉감이 느껴졌다. “이, 이코야. 이코 맞지? 분명 라이의 친구 이코인 거지?” 라이코스는 차마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이코 맞아.” 라이는 라이코스를 품에 꼭 껴안았다. 그와 동시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우에에엥, 이코야~.” “흑흑, 라이야~.” 둘은 그렇게 서로를 껴안은 채 펑펑 울었다. 아! 이 얼마나 순수한 동심이란 말인가? 좀 배고 배워라. “흑흑, 살아서 널 만나고 싶었어.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훌쩍, 이코 나빠! 라이가 얼마나 이코를 기다렸는데.” “흑흑, 미안해, 라이야. 미안해.” 이렇게 해서 라이코스는 살아서 라이와 재회를 하였고, 라이는 그토록 보고 싶던 친구를 만났다. 그 때문에 라이의 머릿속에선 히로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긴 히로야 어찌되건 그게 라이와 무슨 상관이 있겠냐? 아이리스::박성호 TITLE ▶8 :: <아이리스 12권> 9클래스 - 08 sharpshooter(psungho) 03-04-30 :: :: 43675 추격전이 끝난 다음날 우리는 아이리스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을 통과하자 라이는 차에서 내려 고개를 꾸벅 숙였다. “태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디로 갈 생각이니?” “일단 이곳의 관광 명소를 전부 돌아본 다음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에요.” “그래.”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니. 흑흑,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 어린 것이 어떻게 혼자 여행을 하겠다고 그러는지…… 대견하기도 하지. 난 떠난다는 라이를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만남이 있기에 헤어짐이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던 추억만은 영원히 간직하겠지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요~. “이, 이 거라도 가져가렴.” 난 주머니에서 금화를 한 움큼 꺼내 라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에요.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부탁이야, 라이야. 제발 받아줘. 니가 이대로 가면 내가 너무 슬플 것 같아.” 내가 애원하자 라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러시다면 몇 개면 받을게요.” 라이는 정확히 금화 세 개만을 받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꼭 챙겨 먹어야 돼. 모르는 사람이 밥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흑흑, 몸 건강하고.” “예.” “흑흑, 어디 아프면 안 돼.” “예.” “우에에엥~ 가지마, 라이야. 히로를 버리지 마~.” “오, 오빠.” “흑흑, 히로는 라이 없으면 못 산단 말이야~.” 하지만 라이는 가야만 했다. 관광 명소는 둘러봐야 할 것 아닌가? 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멀어지는 라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내 앞에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난 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괜찮으신가요?” “댁은 이게 괜찮아 보입니까?”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하네요.” “너 말 다했어!?” “하하, 가벼운 조크(joke)였습니다.” 시내에선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불법이었기에 우리는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 다니기로 했다. 이제 아이리스의 왕궁으로 향해야 하나? 그 전에……. “목욕이나 하지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중목욕탕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때를 박박 밀고 몸에 비누칠을 좀 하니 꾀죄죄한 모습이 가시고 원래의 핸섬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목욕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와 우리는 옷가게로 걸어갔다. 며칠 동안 빨지도 않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을 수는 없으니. “어서오세요. 뭘 찾으시는지요?” 옷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우리를 맞았다. 난 지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기 왠지 비싸 보이는데요.” 그러자 지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싸 보이는 것만 아니라 실제로도 비쌉니다.” “당연 댁이 사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존경하는 아이언스 히로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옷을 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야 사양 않고 고로도록 하지요.” 여종업원은 지니에게 반했는지 지니의 옆에 딱 붙어서 옷을 설명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연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왜냐? 그야 난 부록이니까. 좀 안 좋은 말로하면 떨거지라고나 할까? 젠장! 저 여자 마음에 안 든다. 다른 가게로 갈까? “아! 아이언스 히로님. 이 옷은 어떠십니까?” 지니는 멋지게 생긴 검은색 양복을 가리켰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럼 이걸로 하도록 하지요.” 지니는 즉석에서 현금으로 계산을 치렀다. 난 탈의실로 들어가서 양복을 입어 보았다. 몸에 착 달라붙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든다. 솔직히 말해 양복을 입어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난 거울에 내 몸을 비춰 보았다. “…….” 오옷! 이렇게 멋있을 수가! 이건 농담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놀랄 정도로 멋있었다. 역시 난 정장 체질이었어! 이제 누가 날 부록이라 부르리오! 난 그렇게 자화자찬하며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짝짝짝-!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아이언스 히로님.” “…….” 갑자기 좌절감이 몸을 엄습한다. 정장을 쫙 빼입고 내 앞에 서 있는 지니의 모습은 나보다 백배, 천배는 멋있었다. 그 증거로 여종업원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실신하고 있었다. 아아~ 사일런스 지니. 그대야말로 천하의 제비로다! 난 그렇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무튼 정장을 멋지게 차려 입은 우리는 엘레강스하고 뷰티풀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여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 된다. 정확히는 지니에게 집중 된다. 가끔 눈이 안 좋은 몇몇 여자들은 나에게 시선을 주기도 한다. 뭐, 아무렴 어떠랴? “이렇게 히로님과 같은 복장으로 길을 걸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죠?” “별 뜻 없습니다.” 으음, 같은 복장이라…… 설마 커플티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제 왕궁으로 찾아가면 되나요?” “글쎄요. 일단 밥이나 먹으면서 생각해 보지요.” “그럽시다.” 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고급 레스토랑인지 인테리어가 장난 아니게 화려했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나 귀족가 영애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마음껏 시키십시오.” “이것도 댁이 사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이언스 히로님께 밥을 사는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마음껏 시켜야지.” 난 그렇게 마음먹고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많이 시킬 생각은 없었다. 라이도 없는데 많이 시켜서 뭐하겠냐? 이것저것 고르고 있는데 아까 왔던 웨이트리스가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기요…….” 예뻐서 정말 마음에 든다. 난 친절하게 대꾸했다. “무슨 일인가요?” “저쪽 여자분들께서 합석을 원하시는데…… 어떠신지?” 난 웨이트리스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분홍색 드레스와 연녹색 드레스를 입은 아리따운 아가씨 두 명이 우리를 보며 살포시 웃음 짓고 있었다. 설마 이것이 말로만 듣던 부킹? 들어오는 부킹을 거절하는 것은 남자가 할 짓이 아니다. 특히 상대가 아리따운 여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언스 히로님?” “으음, 제 생각엔 거절하면 저 여인들이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을 지도 모르니 일단은 만나서 커뮤니케이션을 좀 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역시 아이언스 히로님께서는 언제나 타인을 배려하시는 군요. 그렇다면 전 아이언스 히로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일어나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본 두 여인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머리와 옷을 정돈했다. “아, 안녕하세요.” 여인들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난 마주 고개를 숙였다. “예. 안녕하세요.” 지니는 인사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여인들의 눈은 하트로 변했다. 훗! 역시 나보단 지니한테 더 관심을 갖는군. 하지만 상관없다. 내 화려한 언변으로 그녀들을 유혹해주지. “하하, 이런 곳에서 뷰티풀(beautiful)한 걸(girl)들을 만나게 되다니. 오늘은 참 럭키(lucky)하군요. 하하하~.” 하지만 여자들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끈적끈적한 눈길로 지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언변으로 유혹하려 해도 일단 말이 통해야 할 것 아닌가? 두 여인은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어떻게든 지니에게 말을 붙여보려 난리도 아니었다. 이 순간, 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난 폭탄이었다! 그래. 지니는 킹카고 난 폭탄이야! 흑흑, 어떻게 이럴 수 있어? 2 대 2 부킹인데 지니 혼자 두 명을 독식하다니. 에잇! 자폭해 버릴 테다! 난 여자들과 노는 것을 포기하고 지니가 두 여자를 상대하는 사이 식사를 주문해 먹었다. 스테이크를 입안에 우적우적 밀어 넣는 동안에도 여인들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럴 경우 나는 내가 투명인간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혹시 모르지. 정말로 저 여자들 눈에는 내가 안 보일지도. 내가 식사를 끝마칠 때쯤이 되자 한 여자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걸어 들어오는 그녀는…… 세레나? “……!” 세레나가 이 곳엔 어쩐 일이지? 그녀는 드레스 대신 캐주얼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꽉 끼는 청바지에 몸에 짝 달라붙는 나시티. 오옷! 죽인다! 언니, 멋져! 역시 원판이 예쁘다보니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린다. 아아, 섹시해 보여. 이렇게 보니 세레나 몸매도 장난이 아니네. 으음, 수영복을 입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데. 기왕이면 비키니로. 너무 속 보이는 희망 사항인가? 단지 옷만 바뀐 게 아니다. 보라색의 아이쉐도우와 붉은 립스틱. 저런 짙은 화장이라니. 게다가 목과 귀에 걸린 저 금딱지들. 진짜 환상적이다. 드디어 청초한 이미지를 벗고 날라리로 나서기로 작정을 했구나. 날라리면 어떠리! 예쁘기만 하면 장땡이지. 세레나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며 손가락을 튕겼다. 웨이트리스가 재빨리 다가서자 세레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아이스티.” 난 내 앞에 놓인 접시와 포크 등을 들고 그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이네요” 내가 입에 물고 있던 스테이크를 삼키며 말하자,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너구나.” 스타일리쉬한 세레나가 날 기억해주다니! 아,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난 원래 사소한 것에 큰 감동을 느끼는 세심한 남자다. 난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내 앞에 척 내밀었다. 난 고개를 갸웃했다. “응?” “담배 말이야!” “아!” 난 재빨리 담배를 꺼내 그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불!” 난 불도 붙여 주었다. 옛날 세레나도 좋지만 날라리 세레나도 마음에 든다. 으음, 루시아도 이런 모습으로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스타일리쉬한 루시아라…… 왠지 굉장히 매력 있을 것 같다. “여긴 무슨 일로 왔나요?” “아! 나 가출했어.” “…….” 이젠 완전 비행 소녀가 됐구나. “나 오늘 잘데 없는데 니가 좀 재워주면 안 돼?” “…….” 내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자 세레나는 요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아직 경험 없는데…… 얼마나 줄 수 있어? 100골드 어때? 나 정도 미녀가 100골드면 무지 싼 건데.” “…….” 앗! 이건 설마 원조 교제? 안 돼, 세레나! 이런 건 옳지 못한 일이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조 교제는 안 돼! “흠흠, 뭐 100골드쯤이야 기꺼이…….” 앗! 내가 무슨 말을? 가출 청소년은 반드시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나쁜 길로 빠지기 전에. “그런데 무슨 이유로 가출 했어요?” “꼰대가 자꾸 성적 가지고 뭐라 그러잖아.” “…….” 역시 성적 문제였군. 하여튼 이 나라 교육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성적 가지고 줄 세우기를 하니 개인의 창의성은 무시되고 전부 획일화 되어 사회의 유지를 위한 부품으로 전락하지. “대체 몇 등을 했기에……?” “전국 432,357명 중에 417,261등 했어.” “…….” 뭐라고 할만 하군. 그래도 뭐 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그나저나 왠지 동병상련(同病相憐)이 느껴지는 군. 내 성적과 비슷해서 그런가? “그, 그래서 집에는 안 들어갈 거예요?” “썅! 집에 뭐 하러 들어가? 기왕 가출 했는데 좀 놀다 들어가야지!” “…….” 이거 정말 안 좋은 현상이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가출해서 놀 생각을 하다니. 아아, 세레나. 너 장래에 뭐가 되려고 그러니? 잠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때 세레나를 만난 후 난 거의 미친 듯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이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세레나는 어떻게 나와 거의 동시에 이 곳에 올 수 있었던 거지? “여기까지 뭐타고 왔어요?” “비행기.” “…….” 왜 그게 없나 했다. 젠장, 나도 비행기 타고 올 걸. “그런데 정말 집에 안 들어갈 거예요?” “아이씨! 나중에 알아서 들어 갈 거야. 그런데 니가 뭔 상관이야? 니가 내 꼰대라도 돼?” “아,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닥쳐! 괜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알았어?” “……예.” 대화를 하는 사이 웨이트리스가 주문한 아이스티를 들고 왔다. 세레나는 속에서 열불이 나는지 웨이트리스가 내려놓자마자 한번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돈은 있어요?” “걱정 마. 엄마 카드 뽀려왔으니까.” “…….” 막나가는 비행 청소년 세레나. 그녀의 비행은 어디까지 될 것인가? 아아~ 이런 여자랑 결혼하면 정말 평생이 힘들 것 같다. “그나저나 너 꽤 마음에 든다. 너 나랑 한번 사귀어 볼래?” “……응?” “한번 사귀자고. 왜? 싫어?” “…….” 지금 이 순간, 난 감동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세레나만은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 구나! 역시 난 지니의 부록 따위가 아니었어. “고, 고마워!” 난 세레나의 손을 꼭 움켜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왜, 왜 이래? 너 미쳤냐?” “정말 고마워.” 내가 이렇게 세레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 지니가 다가왔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아니, 벌써요?” 이제야 세레나와 진솔한 얘기를 시작하려하는데 이 놈은 갑자기 왜 끼어들어? 넌 저 여자들과 놀아! “앗! 킹카다! 오빠 이름 뭐야?” “…….” 세레나는 지니를 보더니 굉장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오빠 나랑 사귀자!” “……그, 그런.” 방금 전까지 나랑 사귀자고 해 놓구선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야, 폭탄! 옆으로 비켜!” “응? 폭탄이라니? 폭탄이 어디 있어?” “너 말이야 너. 빨랑 안 비켜?” 세레나는 나를 밀치더니 그 자리에 지니를 앉혔다. “오빠 이름 뭐야? 여자 친구는 있어? 오빠 키 되게 크다. 몇이야? 직업은? 혹시 백수?” “전 변호사입니다.” “변호사? 우와! 오빠 공부 대빵 잘하나 보다.” “그리고 제 이름은 사일런스 지니이고 여자 친구는 없습니다.” “정말? 그럼 지니 오빠라고 부르면 되겠네.” “그렇게 하십시오.” “꺄아! 오빠 핸드폰 번호 좀 알려줄래? 내가 자주 전화 줄게.”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난 바닥에 쓰러져 있고 지니와 세레나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난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딛고 있는 차가운 바닥이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 어흐흐흑! 역시 난 지니의 부록에 불과한 인간이었어. 그럼 그렇지. 지니를 앞에 두고 그 어떤 여자가 날 좋아하겠어? 제정신 박힌 여자라면 날 좋아할 리 없지.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어떻게 세레나 마저…… 흑흑…… 너무해! 내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레나와 지니는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모두들 너무해! 미워할 거야!” 난 그렇게 외치고는 레스토랑 밖으로 뛰어 나갔다. 눈물이 쉼 없이 흐른다. 믿었던 세레나마저 지니에게 넘어 가다니…… 이 배신감은 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더 너무한 건 내가 이렇게 뛰쳐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쫓아오는 사람 하나 없다. 갈 테면 가라는 거다. 나쁜 것들! 못된 것들! “우에에엥~ 보고 싶어, 라이야~!” 난 눈물을 흩뿌리며 무조건 달렸다. 미친 듯이 달리다보면 슬픔이 잊혀질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날 붙잡았다. “무단횡단 하셨습니다. 범칙금 2골드 50실버 내셔야겠습니다.” 경찰이었다. 제복을 차려 입은 경찰은 딱지를 끊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건널목이 하나 있었다. 무단횡단한 거 맞다. 그래도 그렇지 슬퍼 울고 있는 사람에게 벌금을 내라니. 우리나라 경찰 해도 너무 한다. “…….” 잠깐. 경찰이라고? 나는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세레나와 지니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세레나는 은근한 눈빛으로 지니를 보았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오늘 한가해요, 오빠.’ 그러자 지니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레이디.’ 이것들이 놀고 있구만! 아주 잘하는 짓이다! 미성년자와 제비가 뭐하는 짓이냐? 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세레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가 레이트 세레나에요. 얼마 전에 가출했데요. 어서 잡아가세요.” “무, 무슨…….” 나와 같이 온 경찰 두 명은 재빨리 세레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세레나는 자신을 잡은 것이 경찰이라는 것을 깨닫고 도망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어린 소녀가 건장한 경찰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썅! 이거 놔! 짭새 주제에 감히 어디에 손을 대? 니들 내가 누군지 알아?” “집에서 현재 가출 신고가 들어와 있습니다. 서까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뭐, 뭐야? 누가 가출 했다 그래? 난 그냥 잠깐 놀러 나온 거야! 놔, 새끼들아! 짭새면 이래도 되는 거야?” 세레나는 눈을 치켜뜨고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등 갖은 반항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벗어날 길은 없어 보였다. 세레나는 더 이상 경찰들에게 소리 지리는 것을 포기했는지 독기 어린 눈으로 날 보았다. “이 개새끼! 너지? 니가 짭새한테 꼰지른 거지?” 난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러자 세레나의 눈에서 핏발이 섰다. “너 이 새끼!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나쁜 새끼! 너 나중에 나 만나면 죽었어!” 난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그리고 다시는 가출하지 마.” 세레나는 복장이 뒤집어지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이 개새끼야~!” 경찰들은 재빨리 그녀를 끌어내 경찰차에 태웠다.(시내에서 차를 모는 것은 불법이지만 경찰차와 소방차, 앰뷸런스만은 예외다) 그리고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아마도 그곳에서 그녀의 신원은 완전히 파악이 될 테고, 그녀는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아~ 간만에 좋은 일했다. 역시 가출 청소년은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야 해.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겠니? 왜 이렇게 가슴이 뿌듯하고 기분이 좋은 거지? 후후~ 좋은 일을 하니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야. 짝짝짝-! “대단하십니다. 가출 청소년을 도와주는 아이언스 히로님의 그 따뜻한 마음씨. 정말 감동을 금할 길이 없군요.” 지니는 태연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난 그런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가증스러운 놈! 말로는 존경한다 어쩐다 하면서 감히 내 여자를 뺏어? 이 놈 혹시 이중인격자 아니야? “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그리드나 만나러 가지요.” “이그리드님은 현재 왕궁에 있습니다.” “그럼 왕궁으로 가야겠네요.” “하지만 이그리드님께서 만나주실까요?” “……응?” 그러고 보니 이그리드를 만나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어떻게 만날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군. 으음, 이거 난감한 걸. 아이언스 이그리드. 그는 현재 아이리스의 공작이다. 이 정도 직위에 있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을 리 없다. 생각 같아선 예전에 헤리오 왕궁을 침투 했을 때처럼 무대포로 밀고 들어가고 싶지만 지금은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나와 지니 둘만으로는 무리였다. 게다가 내가 이그리드를 만날 동안 지니가 나머지 숫자를 전부 막아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천하의 사일런스 지니라 해도 그건 무리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요. 그건 일단 찜질방에 가서 뜨거운 온돌에 몸을 지지며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제가 잘 아는 찜질방이 하나 있는데.” “…….” 이 인간은 뭐 그렇게 가고 싶은 곳이 많아? 어차피 당장 찾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어디로 증발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난 지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찜질방 여자들은 많이 오나요?” “물론입니다. 일설에는 선착순이 아니라 몸매순으로 여자들을 입장 시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게다가 10대에서 20대 여성의 비율이 80% 이상입니다.” “뭐라구요? 그런 훌륭한 찜질방이 있었으면 진작 가르쳐 줬어야지요!”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됐습니다! 더 이상의 변명은 듣기 싫습니다. 당장 그 찜질방으로 출발합시다.” “예. 제가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지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내가 찜질방을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피로를 풀려하는 것이지, 결코 여자들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진짜다. 좀 믿어라. 속고만 살았냐? 우리는 찜질방 안으로 들어가 가벼운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 곳에는 이미 많은 여인들이 와서 몸을 지지고 있었다. 지니의 말대로 10대에서 20대의 아리따운 여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으음, 정말 물 좋다. 난 지니와 나란히 누워 여자들을 훔쳐보며 몸을 지졌다. 등이 따뜻하니 몸이 나른해 지고 잠이 솔솔 온다. 하암~.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잔지가 언제더냐? 만날 차안에서 쪼그려 앉아 새우잠만 잤었지. 난 수건을 돌돌 말아 베개처럼 만들어 머리 밑에 넣었다. 그리고 몇 장의 수건을 이불처럼 덮었다. Good Night, Baby~!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난 수건으로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는 땀을 닦아 내고 몸을 일으켰다. 지니는 어디 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지니를 찾는데 저쪽에서 지니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니는 손에 들고 있는 차가운 음료수캔 하나를 건네주었다. “지금 몇 시죠?” “밤 12시 10분전입니다.” 11시 50분이란 얘기군. 난 뚜껑을 따서 음료수를 마셨다. 차가운 음료수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자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이제 슬슬 나가 볼까요?” “예? 어디로요?” “따라와 보시면 압니다.” 온몸이 땀투성이였기에 우리는 일단 샤워장에 가서 샤워를 하고 다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검은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핸섬한 두 남자라…… 후후~ 왠지 암흑가에 몸을 담고 있는 냉혹한 킬러가 연상 되는군. 지니는 가로등도 없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갈수록 길은 구불구불해지고 복잡해졌다. 계획 없이 무질서하게 지어진 집들과 미로처럼 엉킨 길. 마치 할렘가를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지니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말없이 지니의 뒤를 따르던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도둑 길드입니다.” “…….” 도둑 길드라면…… 말 그대로 도둑들이 있는 곳? 뭐 하러 도둑들이 있는 곳에 가려하는 거지? 설마 거기도 10대에서 20대 여성의 비율이 80% 이상인가? “뭐 때문에 도둑 길드에 가나요?” “정보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정보라면……?” “아이리스의 왕궁으로 잠입할 수 있는 정보 말입니다.” “……!”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그리드를 만나기 힘드니 왕궁으로 잠입을 하겠다고? 오옷! 정말 괜찮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초토화 작전보다야 백배는 낫지. 어두운 골목길을 한참을 걸은 끝에 우리는 작은 도박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지니가 말했다. “일단 안에 들어가시면 자연스럽게 도박에 끼십시오. 그 다음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댁만 믿겠습니다.” 우리는 도박장 안으로 들어갔다. 담배 연기와 술 냄새가 가득 풍기는 도박장 안은 그야말로 폐인들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거의 골방이나 다름없는 이런 곳에 틀어박혀서 도박을 하는 인간들을 어찌 제정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난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할만한 게임이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있었다.(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못하는 도박은 거의 없었다) 블랙잭도 괜찮고, 포커도 괜찮고, 다이스도 괜찮고…… 으음, 뭐가 좋을까나? “좋았어. 앗싸! 쓰리고!” 패가 부딪히는 소리가 내 귀를 가득 메운다. 이 정겨운 소리는 고스톱 치는 소리가 아닌가? 내가 이제까지 수많은 도박을 경험해 왔지만 나한테 가장 잘 맞는 도박은 역시 고스톱이다. 후후~ 감히 내 앞에서 고스톱을 치다니. 수학여행의 전설을 재연할 때가 온 것 같군. “젠장! 내가 더러워서 너 같은 새끼와는 안 친다!” 때마침 한 남자가 화투장을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렇게 흥분하면 몸에 안 좋을 텐데. 불쌍한 놈. 왜 졌는지 알 것 같다. “어이! 형씨들. 한판 껴도 될까?” 내가 태연하게 다가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담배를 물고 패를 섞던 털보는 찢어진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잠시 탐색 중…… 그러더니 이내 내가 봉으로 보였는지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판돈은 있나?” “물론 있지.” 난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그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흐흐, 봉이 하나 굴러왔군.’ 후후, 누가 봉인지는 쳐보면 알겠지. “한 명이 바뀌었으니 선을 다시 정해야 하나?” “됐어. 그냥 패 돌려.” “그러지. 아! 이거 빅게임인 거 알지?” “얼만데?” “점 당 1골드다.” “리미트는?” “없어.” “좋군.” 점 당 1골드에 리미트가 없다라…… 후후, 오늘 돈 좀 벌겠는 걸. 나는 내가 돈을 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놈들이 속임수를 쓰지 않는 한 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왜냐? 그야 난 화투에 관해서라면 입신(立身)의 경지에 올랐거든. 트럼프로 하는 게임이었다면 승률은 반반 정도였겠지만 화투로 하는 게임이라면 승률은 거의 9할에 육박한다. 이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날 만나게 된 것을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 오늘 이들에게 도박의 위험성을 알려줘 이들이 도박의 ‘도’ 자만 들어도 이를 갈도록 만들어 주리. 초반 패는 별로였다. 난 크게 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몇 판을 내리 졌다. 그러던 중 괜찮은 패가 들어왔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원고, 투고, 쓰리고! 쓰리고 판이었지만 그리 큰 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판은 시작에 불과했다. 후후~ 이제부터 나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나를 바라보는 털보와 그 옆에 앉은 뚱보의 눈빛이 묘하게 변한다. 슬슬 긴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니들이 긴장해봤자 고스톱 입신의 경지에 다다른 나를 어찌 이길 수 있으리! 광팔이 소녀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말했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양순이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그런 양순이에게 다가온 누군가가 광을 팔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사실은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내가 양순이에게 광값을 받아 챙기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따뜻한 마음씨와 극강의 실력을 지녔다. 그렇기에 니들은 나의 상대가 될 수 없어!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자 난 거의 신기에 가깝게 고스톱을 쳤다. 털보가 싼다. 뚱보가 싼다. 난 패 하나로 털보가 싼 것을 먹음과 동시에 뒤집어 나온 패로 뚱보가 싼 것을 먹었다. 각자 피 두 장씩 헌납하도록. 청, 홍, 초단을 전부 깨간다. 그리고 고도리를 한다. 광을 쓸어 간다. 피를 빼앗아 온다. 그럼이 맞춰진다. 띠가 늘어선다. 피로 탑을 쌓는다. 다섯 개의 광이 번쩍인다. 게임은 끝났다. 난 점수 계산을 시작했다. “피박 두 배, 광박 두 배, 멍따 두 배, 포고 네 배…… 그러니까 32배 군. 점수는 어떻게 되나? 일단 오광이 15점, 고도리 5점에 그림이 3점, 띠가 7장이니까 역시 3점에 어이구 초단이 또 3점. 그리고 피가…….” “이, 이건 말도 안 돼!” 털보가 소리쳤다. 많이 흥분했는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난 담배를 입에 물며 웃음을 지었다. “말이 안 되긴 뭐가 말이 안 되나? 딸 때가 있으면 잃는 때도 있는 법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어, 어린놈의 새끼가…….” “어허! 졌으면 곱게 물러날 것이지 갑자기 웬 행패야? 설마 돈 주기 싫어서 그러나?” “닥쳐! 난 한 푼도 낼 수 없어! 이건 속임수를 쓴 게 분명해. 속임수가 아니면 이런 판이 나올 수가 없어. 맞아! 너 탄을 쓴 거지?” 이런 인간 정말 짜증난다. 자기가 딸 때는 가만히 있다고 잃으면 속임수네 어쩌네 난리 치는 인간들. 난 코로 연기를 내뿜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탄 쓰는 거 니가 봤어? 증거 있어? 증거 있으면 대 봐! 새끼가 돈 주기 싫으니까 별 지랄을 다 하는 군.” “닥쳐! 속임수를 쓴 주제에!” “속임수라니?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말을 막하네. 헛소리 그만 하고 돈이나 내놔!” 소란이 커지자 사람들이 우리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담요 위에 펼쳐진 내 환상적인 패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똑같이 양박(피박+광박)을 쓴 털보와 뚱보는 어느새 한편이 되어 내가 속임수를 썼다고 몰아 붙였다. 이렇게 비열할 수가 있나? 돈 내기 싫으면 오링 당하고 끝날 것이지. 이래도 되는 거야? 그때 마침 하우스의 주인으로 보이는 험상궂은 남자가 등장했다. “무슨 일이야?” 그 남자의 물음에 털보와 뚱보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글쎄 저 어린놈의 새끼가 속임수를 쓰지 뭡니까?” “내가 언제 속임수를 썼어? 증거 대봐!” 남자는 우리의 사이를 가로 막더니 중재에 나섰다. “그러니까 한 쪽은 사기를 쳤다고 말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군. 이봐, 너!” 남자는 털보와 뚱보를 가리키며 물었다. “너 정말 저 놈이 속임수 썼다고 장담할 수 있어?” “무, 물론입니다. 사기를 치지 않는 한 이런 판이 나올 수가 없지요.” 남자는 이번엔 날 보았다. “너 정말 속임수를 쓰지 않았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냥 쳐도 딸 수 있는 거 뭐 하러 속임수를 쓰겠나?” “흐음, 좋아. 그렇다면 해결 방안은 하나뿐이군.” 남자는 손뼉을 쳤다. 그러자 한쪽에서 깍두기 머리를 한 세 남자가 뛰어 나와 우리의 뒤에 섰다. “이제부터 정확히 한 시간 동안 맞고를 친다. 이 놈이 따면 이 놈의 말이 맞는 걸로 간주하고, 니들이 따면 니들의 말이 맞는 걸로 간주하겠다. 어떤 놈이 칠지는 둘이 알아서 결정해. 이의 없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털보와 뚱보도 불만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상대는 털보로 결정되었다.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뚱보보단 털보의 실력이 뛰어났다. 물론 나 보다는 한참 밑이지만. 후후후~. 선은 나로 결정되었다. 난 능숙한 솜씨로 화투장을 섞어 패를 나눠주었다. 우리 등 뒤에는 조직 폭력배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고, 그 외에도 구경꾼들이 빼곡히 차 있다. 부정의 여지가 개입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만약 있다면 내 뒤에 서 있는 구경꾼이 내 패를 보고 털보에게 눈짓을 해주는 것 정도겠지. 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하우스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단검을 던졌다 받았다하며 미리 경고했으니까. “혹시 눈짓이나 손짓 같은 거 하면 해당 부위를 도려낸다. 알았지?” 첫판은 내가 졌다. 선은 털보에게로 넘어갔다. 그렇게 몇 판을 내리지고 있는데 주인장의 말이 들려왔다. “한 놈이 사기를 쳤거나, 한 놈이 거짓말을 한 것이니…… 니가 지면 손목을 자르고, 니가 지면 혀를 자르는 게 원칙에 맞겠지?” “…….” 이 동네 이제 보니 굉장히 살벌한 동네였구먼. 이제부턴 좀 정신 차리고 쳐야겠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쳐도 패가 나쁘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난 계속해서 졌다. 털보 앞에 금화가 점점 쌓여갔다. 이대로 가면 나의 패배는 불 보듯 뻔하군. 사실 아무리 고스톱을 잘 친다 하더라도 한정된 시간 안에 반드시 돈을 따라는 것은 무리다. 도박이란 결국 확률과 운의 승부이기 때문에 운이 나쁘면 말짱 인 법이다. 하지만 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첫째 이유는 이 승부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진다하더라도 나의 청룡도법으로 이 상황을 쉽게 타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패가 돌았다. 그러던 중 드디어 흐름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현재 나가리 판. 판돈은 2배. 넌 끝났어, 임마! 다시 신기에 가까운 나의 솜씨가 펼쳐졌다. 원고, 투고, 쓰리고, 포고, 파이브고……. 맞고의 특징은 두 명이서만 치기 때문에 견제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한쪽이 패를 거의 다 독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금 상황이 그러 했다. 난 점수를 계산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털보는 반쯤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털보의 앞에 쌓여있던 금화는 전부 내 쪽으로 옮겨오고 털보의 주머니마저 탈탈 털렸다. 털보는 오링 됐다. 다른 말로 개털 됐다. 아직 시간은 10분 정도 남아있었지만 털보는 더 이상 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링 당한 놈이 어떻게 판에 낄 수 있겠는가? 하우스 주인은 시가를 피며 손뼉을 쳤다. 짝짝짝-! “이거 오늘 우리 하우스에 대단한 손님 한분이 들어오셨군.”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훗,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해두지.” “그 정도 실력이면 타짜라고 해도 무리는 없겠는 걸.” “그렇게 말해주니 영광이군.” 난 금화를 주머니에 쓸어 담았다. 수학여행 때의 전설은 아직 살아 있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음하하하! 하우스 주인장은 깍두기 머리 남자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은 털보와 뚱보를 덥석 붙잡았다. “이, 이거 왜 이래?” 털보와 뚱보는 발악을 했지만 깍두기 머리 남자들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조용히 어딘가로 끌려갔다. 난 멀어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 그나저나 지니는 뭘 하고 있나? 지니는 한쪽에서 딜러와 블랙잭을 하고 있었다. 지니가 무지하게 따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딜러가 여성이었던 것이다! 아아~ 저 딜러는 카드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직 지니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니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한심하군. 난 지니의 옆에 앉았다. “언제까지 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따고 있는데 조금만 더 하면 안 될까요?” “…….” 이 인간이 진짜! “농담이었습니다. 그럼 슬슬 시작하지요.” 지니는 카드를 나눠주는 딜러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자 딜러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 왜 이러세요?” 결코 싫어서 저러는 것이 아니다. 너무 좋아서 저러는 것이다. 지니는 그녀의 손을 천천히 느끼하게 어루만졌다. “이, 이러시면…… 안 되는데…….” 아주 좋아 죽는구만. 지니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말했다. “레이디께 부탁이 있습니다.” “무, 무슨 부탁인가요?” “마스터를 만나고 싶은데.” 순간 딜러의 표정이 확 변한다. “마, 마스터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지니는 딜러의 손에 입을 맞췄다. “부탁드립니다, 레이디.” “하아~ 이, 이러시면…… 되는데…….” “설마 제 부탁을 거절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 그건.”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아아~ 사일런스 지니. 역시 여자 후리는 데는 그대만한 재주를 가진 자가 없구려. 그대야 말로 당대 최고의 카사노바. 딜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넣었다. 아마도 테이블 아래에 무슨 장치가 있는 것 같다. 잠시 후 평범하게 보이는 남자 하나가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게임을 했다. 지니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게임에 참여했다. 그리고 나도. 한참 동안 우리는 말없이 게임을 했다. 그렇게 몇 판을 하고나자 남자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마스터를 만나고 싶습니다.” 대화를 하는 내내 게임은 계속 되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그저 게임을 하며 잡담을 나누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오게.” 그 자는 카드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지니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그는 도박장을 나서더니 사람 하나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비좁은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걸은 그는 허름한 상가의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철문을 열었다. 철문이 열리자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을 다 내려가자 또 다른 문이 하나 나왔다. 그는 그곳을 두드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비풍초.” 그러자 반대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똥팔삼.” 암호 한번 죽인다. 비풍초 똥팔삼은 고스톱을 칠 때 쓰는 전문 용어이다. 비풍초는 버리고 똥팔삼은 취하라는 그런 뜻이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에는 열 걸음마다 은은한 조명이 하나씩 박혀 있어 내부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키던 한 남자가 턱으로 우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우리를 안내해온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마스터를 만나러 온 자들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남자를 따라 갔다. 좁은 복도는 마치 미로처럼 설계가 되어 있었다. 처음 와본 사람은 상당히 헛갈리겠군. 누군가가 침입해 오더라도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함으로 보인다. 나름대로 신경 썼다고 해야 하나? 잠시 후, 우리의 앞에는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이 곳이 마스터가 있는 방인가 보군.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니가 발로 방문을 걷어찼다. 콰앙-!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지니의 발차기 한방에 어이없이 박살나고 말았다. 지니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에서는 포커 게임이 한창이었다. 뒤쪽에 서 있는 남자들은 재빨리 우리에서 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지니는 태연한 표정을 한 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마스터가 누굽니까?” 아, 저 여유! 잘생긴 놈이 이렇게 터프하게 나오니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다. 나도 지니를 따라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이렇게 하면 나도 멋있어 보이려나? “그 동안 많은 손님이 왔었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군.” 마스터로 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난 그 마스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놀라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는 바로…… 테커? 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럴크, 카젠, 카웨…… 앗! 이들은 라이레얼 패거리 소속의 용병들이 아니던가? 이 놈들이 언제 도둑 길드를 차렸지? “무슨 일이냐?” 지니가 대꾸했다. “아이리스 왕궁으로 잠입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테커는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뭐? 아이리스 왕궁으로 잠입하겠다고? 너 혹시 미친 거 아냐? 거기 경비가 얼마나 살벌한데.” “그건 상관없습니다. 방법이나 알려 주십시오.” “됐어. 방법이고 뭐고 없으니까 돌아가.” 난 앞으로 나서며 반갑게 외쳤다. “야! 테커!” 그러자 테커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훗! 내가 모르는 건 이 세상에 없다.” 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놈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넌 럴크, 넌 카젠, 넌 카웨.” “허억! 간부들의 이름까지 전부 알고 있다니! 설마 우리 조직에 스파이를 심어 놓은 건가?” “…….” 그렇게 오해해주면 고맙지. “후후, 난 그 외에도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아이리스 왕궁 잠입 루트를 말하시지. 돈은 충분히 지불할 테니.” “으음, 어쩔 수 없군.” 테커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리모콘으로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별로 덥지도 않은데 왜 에어컨을 작동시키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내 의문을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테커가 설명해 주었다. “이 방의 온도가 15도까지 낮아지면 비밀의 문이 열리게 되어 있다.” “…….” 아주 쇼를 하시는구만. 방 안의 온도는 서서히 내려갔다. 그리고 15도가 되자 벽장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옷! 저곳에서 마징가 제트가 튀어 나오는 건가?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금고문 비슷하게 생긴 철문이 나타났을 뿐이다. 테커는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몸으로 가리고는 철문에 비밀번호를 입력하였다.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와.” 테커가 먼저 들어가자 나와 지니는 따라 들어갔다. 그곳은 가운데에 테이블이 있고 사방에 여러 가지 문서가 꽂혀져 있었다. 테커는 문을 닫더니 문서 하나를 뽑아서 들고 왔다. 그것은 왕궁의 내부도였다. “대체 무슨 일로 왕궁에 잠입하려는 거지?” “이그리드를 만나려고.” “설마 그를 암살이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 그냥 토킹(talking)만 할 거야.” “으음, 아이언스 공작을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테커는 내부도에 선을 죽죽 그어가며 잠입 루트를 설명해 주었다. 나와 지니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잘 새겨들었다. 얘기가 다 끝나자 테커는 우리를 보며 물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각오를 알았는지 테커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럼 행운을 빌도록 하지.” “좋은 정보였어. 고마워. 돈은 얼마나 되면 되지?” “아, 정보의 가치와 아까 박살낸 문짝 값을 합해 700골드만 내.” “…….” 무지하게 비싸다. 난 궁시렁거리며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지니와 함께 도둑 길드를 나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할까요?”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내일 밤 실행하도록 하지요.” “뭐, 그럽시다.” 우리는 여관으로 가려다가 나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찜질방에서 자기로 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밝히지만 난 피로를 풀러 찜질방에 가는 거지 결코 여자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 제발 믿어라. 그래도 아까처럼 쫙 빠진 미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으음……. 우리는 찜질방에서 몸을 지지며 하루를 보냈다. 그 사이에도 지니는 잠입 계획서를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나야 당연 지니가 없는 곳에서(지니가 있으면 여자들이 전부 지니한테만 관심을 보이니까) 많은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저 재벌 2세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한 재산하시지요.” 이젠 돈으로 밀기로 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 돈만 많으면 장땡 아니겠는가? 난 도박판에서 딴 금화와 차를 바꾸면서 얻은 금화를 여자들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아~ 돈이 많아서 미치겠어요. 돈은 이렇게 많은데 어째서 쓸데가 없는 걸까? 아! 정말 돈 쓰고 싶어라~.”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자 여자들이 내 주위에 빼곡히 앉았다. “저 오늘 한가해요.” “저도 한가해요.” “전 백수에요.” 아아~ 아리따운 여인들이 이토록 나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다. 역시 돈 많은 게 장땡이야. 난 이그리드를 만나면 이 세계와도 안녕이다. 그러니 굳이 돈을 아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 의식 속이니. 난 가지고 있는 금화를 아가씨들에게 뿌렸다. “음하하! 난 가진 건 돈 밖에 없는 놈이야!” 사실 이거 전부터 한번 꼭 해보고 싶었던 거다. 돈이 많아서 주체를 못해 돈지랄을 하는 남자. 아아~ 그래. 나 같이 안 생긴 놈이 돈이라도 많아라 여자들 인기를 끌지. 욕하려면 욕해! 나 원래 이런 놈이야! 난 열심히 사방으로 돈을 뿌렸다. 그렇게 한참 열심히 돈지랄을 하고 있는데 지니가 다가왔다. “시간 됐습니다. 이만 가지요.” “예? 저 아직 돈 다 못 뿌렸는데.” “그럼 같이 뿌리기로 할까요?” “…….” 니가 뭔데 내 돈을 같이 뿌려? 난 그 후로 열심히 돈을 뿌려 드디어 내 수중엔 한 푼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에 찔질방은 완전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에서 금화가 굴러다니고 사람들은 그 금화를 쫓아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닌다. 그리고 내가 주웠네, 니가 주웠네 하며 싸우기도 했다. 난 지니와 함께 찜질방을 빠져나와 왕궁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문은 닫혀 있었고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우리는 이 곳을 돌파해야만 한다. 나와 지니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순찰을 돌던 병사가 지나가자마자 지니는 품에서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꺼내 던졌다. 갈고리는 담벼락 위에 정확히 걸렸다. “먼저 가십시오.” 난 밧줄을 타고 순식간에 벽을 기어 올라갔다. 잠시 후, 지니도 올라왔다. 우리는 내부의 동정을 살핀 뒤 뛰어 내렸다. 일단 안까지 들어오는 데는 성공이군. “다음 루트는 어딘가요?” “으음, 개구멍이 있다는 군요.” “개구멍이요?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 개구멍입니다. 개들이 지나다니는 구멍.” “…….” “본궁까지 가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난 지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이제까지 지니의 말을 들어서 손해본적은 없으니. 그래도 개구멍이 뭐냐? 해도 너무하네. 우리는 몸을 개처럼 숙이고 발발거리며 기어갔다.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어쩔 수 없지요.” 정장 입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벽을 따라 기어가다보니 정말로 개구멍이 나왔다. 우리는 그곳을 통과해 계속 기었다. “앗! 거기 누구냐?” 헉! 설마 발견 된 건가? 이런 때야 말로 나의 기지가 빛을 발할 때다. 난 재빨리 몸을 웅크리고 뒷다리로 귀를 긁으며 소리쳤다. “멍! 멍!” 그러자 이쪽을 노려보던 병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개새끼였군.” 그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우리는 안심하고 다시 기어갔다. 지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언스 히로님께서는 개소리에도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칭찬인 것 같긴 한데 어째 어감이 별로네요.” 한참을 기어 우리는 본궁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난 몸에 묻은 흙을 털며 물었다. “다음은 뭡니까? 이젠 고양이 흉내라도 낼까요?” “이제부턴 양동 작전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양동 작전이라니요?” “제가 저쪽으로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겠습니다. 그 사이에 아이언스 히로님께서는 본궁으로 들어가셔서 이그리드님을 만나십시오.” “알겠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포옹을 하였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저야 말로 아이언스 히로님께 도움이 되서 기뻤습니다.” 드디어 지니와도 헤어질 때가 왔군. 언제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를 도와주었던 지니. 이 순간 나는 지니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게 고마우시면 답례로 키스라도 한번 해주심이…….” 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당장 꺼져!” “후후,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도록 하지요. 전 이만.” 지니는 벌떡 일어서더니 정원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침입자다!” 지가 침입자인 주제에 침입자라니? 머리도 좋군. 갑작스런 소란에 병사들은 일제히 그쪽으로 뛰어갔다. “뭐? 침입자?” 난 그 틈을 타 궁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그런데 이그리드가 어디에 있지? “…….” 큰일이다. 이그리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안 물었어. 설마 이 넓은 곳을 다 뒤져야 하는 건가? “꺄악! 누구……?” 복도에서 마주 오던 하녀는 날 보더니 소리를 질러댔다.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다. 혹시 이거 이러다가 국왕 암살범으로 몰리는 거 아니야? “야! 너 조용히 못 해?” “꺄아아-! 살려 주세요!” 니 목소리 때문에 내가 먼저 죽겠다. 난 하녀를 지나쳐 무작정 달렸다.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층에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난 계단이 나올 때마다 뛰어 올라갔다. 그러다가 마주오던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했다. 콰당-! “아이씨! 어떤 놈이…… 헉!” 난 상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백금발의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녹보석 눈동자를 크게 뜨며 나를 보았다. “누, 누구……?” “루시아?” “루시아는 누구죠? 저는 루미아드에요.” “…….” 루미아드라면…… 이그리드 애인? 이렇게 보고 있자니 정말 루시아와 닮았다. 거의 자매라고 해도 믿을 정돈데. 하긴 뭐 핏줄이 같으니. “저기에요, 저기!” “저 놈 잡아라!” 젠장. 그 새 쫓아왔군. 난 루미아드를 일으켰다. “걸을 수 있겠어요?” “예? 예.” 내가 손을 잡아끌자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나와 같이 뛰었다. 하지만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제대로 달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난 그녀를 두 손으로 안아 들었다. 그러자 뒤에서는 난리가 났다. “저 놈이 공주님을 납치했다!” “저런 쌍놈의 새끼가 어디서 감히 공주님의 몸에 손을 대!” “저 새끼 묻어!” 이건 뭔가 잘못된 거다. 난 이그리드를 만나러 왔을 뿐이란 말이다! 난 내 품에 안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그리드 깔 맞지요?”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깔이 뭐죠?” “깔은 여자 친구를 뜻하는 전문 용어랍니다.” “아! 그렇군요.” “아무튼 이그리드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그걸 왜 묻는 거죠?” “그야 필요하니까 묻는 거죠. 빨리 대답이나 하세요. 힘들어 죽겠어요.” “아이언스 공작님의 집무실은 저쪽이에요.” “저쪽이 구체적으로 어딘데요?” “이쪽으로 쭉 가시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서 다섯 걸음 간 다음 왼쪽으로 꺾고 거기서 두 거음 뒤로 가서…….” “…….” 무슨 퀴즈 프로그램 하는 것도 아니고. 설마 그걸 듣고 찾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냥 안내해주세요.” “예. 그럴게요.” 루미아드 공주님께서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또한 루시아와 똑같다. 으음, 지금 내가 아리따운 여인을 품에 안고 달리는 중인 건가? 어찌 보면 참으로 낭만적이군. “저 놈을 잡아서 조져!”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만 없다면 말이다. 난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를 쫓아서 열심히 달리는 근위병들에게 말했다. “날 잡는 데는 애로사항이 꽃 필 것이다!” “으아아! 저 새끼가 사람 성질 돋운다!” 나의 도발 때문인지 근위병들은 눈에 불똥을 튀기며 더욱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도망치는데 이골이 난 나를 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요.” 난 그녀의 말에 따라 이동했다. 지니는 안 붙잡히고 잘 도망 갔으려나? 설마 천하의 사일런스 지니가 붙잡히진 않았겠지? 그나저나 저 놈들 무지하게 쫓아온다. 보아하니 월급도 그리 많이 받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그렇게 열심히 쫓아오는 걸까? 혹시 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멈춰요!” 루미아드 공주님의 말에 따라 난 멈춰 섰다. 그녀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아이언스 공작님의 집무실이에요.”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혹시 화나신 건 아니죠?” 난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손으로 드레스의 매무새를 정리하더니 날 보며 생긋 웃었다. “아니에요. 덕분에 즐거웠어요.” 특이한 성격의 공주님이다. 귀엽다고 해야 하나?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멈춰, 임마!” 이미 멈춰 서 있다. 느린 것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느려서 어디 월급 받아먹겠니? “어서 들어가 보세요.” 루미아드 공주님께서는 손수 문을 열어주셨다. 난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하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은 어두웠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남자가 창밖을 보며 서 있었다. “거기 좀 앉지.” “…….” 저 남자가 말한 건가? 나한테? 난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당신이 아이언스 이그리드인가요?”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날카롭게 빛나는 흑갈색 눈동자.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이그리드라는 것을. 그나저나 꽤나 잘 생겼군. 저 정도면 사일런스 지니 뺨치겠는 걸.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전체적으로 강인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다. 그 때문인지 그의 모습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오래 걸렸군.” “예?” 그는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언스 히로. 아니, 박영웅이라고 해야 하나?” “…….” 난 차가운 그의 눈빛 앞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 날 이 세계로 소환한 마법사. 그리고 크로니스가 사랑하는 인간. 아이리스::박성호 TITLE ▶9 :: <아이리스 외전> 그 엘프 이야기 - 01 sharpshooter(psungho) 03-05-06 :: :: 16149 내 이름은 갈리온드. 장래가 유명한 잘나가는 엘프 청년이다. “덥군.” 난 작열하는 태양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엘프들은 인간에 비해 기온 변화에 잘 적응한다. 왜냐하면 자연에 가장 가까운 존재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더운 건 더운 거다. 참고로 난 추운 건 참아도 더운 건 못참는다. “젠장, 쪄 죽겠네!” 난 애꿎은 돌맹이를 걷어 찼다. 가끔 엘프들은 성격이 전부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엘프 나름이다. 나 같은 엘프는 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남들 앞에선 착한척 한다. 대외적인 이미지는 좋아야 사회 생활하는데 지장 없으니. 나는 잊혀진 숲에 사는 엘프다. 원래대로라면 난 그곳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예쁜 여자(엘프 중에 못 생긴 여자는 없다) 만나서 애 낳고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험가로서의 피가 끓어올랐기 때문이지.” 그렇다. 난 그 좁아터진 숲속에서 일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엘프 수명이 몇 년인데 거기서만 틀어박혀 있냐? 그래서 난 그곳을 뛰쳐 나왔다. 내가 떠날 때 많은 엘프들이 날 만류하였다. 엘프의 숲에는 인간과 사랑을 나눈 엘프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은 한결 같이 후회하고 있었다. 인간은 수명이 너무 짧았다. 길게 살아봐야 엘프 수명의 1/10도 살지 못한다. 게다가 늙기는 왜 그렇게 빨리 늙는지……. 그래서 난 인간을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모험을 하러 왔으면 모험만 해야지 왜 사랑을 한단 말인가? 이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래서는 안 된다. “난 모험만 할테야!” 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나저나 너무 덥다. 아주 푹푹 찌는 구만. 난 헤어밴드를 풀고 땀을 닦아냈다. 그러자 엘프 특유의 길고 뾰족한 귀가 튀어나왔다. 이 헤어밴드는 그 귀를 감추기 위해 착용하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자연스레 귀를 내놓고 다녔는데 그때마다 곤란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무슨 희귀 동물 구경하듯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어떤 놈들은 감히 날 납치하려고도 했다. 으음, 역시 인간들이란……. 난 허리에 찬 레이피어와 등에 맨 활을 살펴 보았다. 이 것들은 내 목숨을 지탱해주는 생명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그 동안 위험한 일 많았었다. 만약 틈틈이 검술과 궁술을 익히지 않았었다면 지금쯤 죽었을 지도 모른다. 하아~ 역시 인간 세상에서 산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닌가 보다. 한참을 걷자 해가 질 때쯤 난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야할 길은 먼데 하루는 너무 짧구나. 내일부터는 좀 더 열심히 걸어야겠군. 난 그렇게 생각하며 마을에 단 하나뿐인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은 단층인데다가 허름하기 짝이 없는게 아마도 가정집을 개조해 영업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맞아준 사람은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어린 소녀였다. “어서오세요. 뭘…….” 소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저 소녀가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야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내 핸섬한 외모 때문일 것이다. 하긴, 이런 촌구석에서 어찌 나 같은 잘 생긴 남자를 만날 수 있으랴. 길게 늘어뜨린 레몬빛 머리카락, 매혹적인 레몬빛 눈동자, 새하얀 피부와 호리호리한 몸매.아~ 정말 미청년이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은 외모다. 그런 나에게 인간 여자들이 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으음, 잘생겨서 피곤하다. 아직까지도 소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러다가 녹아내리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난 부드럽게 웃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지금 식사 됩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소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훗! 나한테 좀 심하게 반했나 보군.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차피 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날 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소녀의 가슴 속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 놓다니. 아~ 나는 나쁜 남자인가봐. 이런 촌구석 식당에서 진수 성찬이 나올리 없다. 나온 음식이라고는 멀건 야채 수프와 빵 몇 조각, 그리고 베이컨. 하지만 난 그것들을 맛있게 먹었다. 반찬 투정 같은 것은 어린애나 하는 짓이다. 소녀는 내일 사용하기 위함인지 다른 테이블에서 밀가루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손은 밀가루를 주무르고 눈은 나를 바라본다. 으음, 저 처자의 눈빛이 참으로 부담스럽다. 왜 멀쩡한 주방을 놔두고 테이블에서 밀가루 반죽을 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식사를 끝마친 나는 값을 지불하고 하룻밤 묵기로 하였다. 내일도 계속 걸어야하니 숙면을 취해 체력 보충을 해야 한다. 그나저나 이대로 자도 되는 걸까? 혹시 저 처자가 밤에 날 덥치면 어쩌지? “…….” 아무튼 잘 생긴게 죄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난 문단속을 철저히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난 아침 일찍부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에 저 산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뭐 못 넘으면 야숙을 하면 되지만 그건 사양하고 싶다. 찬 이슬을 맞으면 피부 미용에 별로 안 좋거든. 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소녀가 내민 도사락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꽤 묵직한 것을 보니 소녀가 새벽부터 일어나 고생 고생해서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하더라도 이렇게 바리바리 싸주다니. 이 소녀 나한테 심하게 반했구나! “저기…….” 소녀는 우물쭈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볼 것도 없이 사랑 고백일 것이다. 난 천생이 도둑인 것 같다. 순진한 소녀의 마음을 훔쳐 달아나는 나쁜~ 도둑~. 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시락은 2골드에요.” “…….” 왜 소녀가 그렇게 망설였는지 알 것 같다. 도시락 하나에 무슨 2골드 씩이나!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관을 나섰다. 이제부턴 산행길이다. 부지런히 걸어서 오늘도 멋진 모험을 해야겠다. 해는 높이 떠서 나를 찌른다. 푹푹~. 난 그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찌 한낱 엘프의 힘으로 태양의 공격을 막아내겠는가? 흘러내린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목에 늘러 붙는다. 난 두 손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모아 포니테일 스타일로 질끈 묶었다. 해는 어느덧 중천에 떴다. 그렇다는 것은…… 점심 시간이다! 난 근처 나무에 주저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여행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점심 시간에 도시락 까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앗! 특제 햄 샌드위치군. 양상치도 듬뿍 들었어! 난 소녀가 정성껏 쌌을 것으로 짐작되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아! 맛있다! 그래도 2골드의 값어치는 하는구나. 안을 잘 살펴보니 마개를 잘 막아 놓은 우유도 있다. “다 먹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나는 배가 꺼질 때까지 나무 밑에서 빈둥빈둥거렸다. 나무 그늘은 시원해서 좋아~. “응!?” 난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해는 어느새 한참 기울어 있었다. 점심을 너무 맛있게 먹은 나머지 포만감에 잠이 든 것이다. 아~ 어쩐다냐? 이거 큰 일일세. 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급하다한들 먹은 자리를 치우지도 않고 어찌 그냥 갈 수 있으랴? 난 쓰레기를 정리하고 바로 출발했다. 해지기 전까지 산을 넘을 수 있을까? “…….” 상황은 회의적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야숙을 해야할 듯. “끼아악, 살려주세요~.” 이게 무슨 소린가? 살려달라니? 날카로운 소녀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변해 계속 울려퍼졌다. 누군가가 위험한가 보군. 위험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모험가의 도리.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빨리 가봐야겠다. 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행히 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약, 3분 정도를 전력 질주하자 내 눈 앞에는 낯설은 광경이 펼쳐졌다. 바닥에 비참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어린 소녀와 그 앞에서 소녀를 잡아먹을 듯이 서 있는 오우거. 저 소녀를 도와야 하나, 오우거를 도와야 하나? “…….” 당연 소녀를 도와야지! 난 오우거를 향해 뛰어 들려다가 멈칫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내가 뛰어들기도 전에 소녀는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등에 맨 활을 양손으로 잡았다. 엘프의 대궁이다. 네 놈이 이것을 피할 수 있을까? 난 화살을 걸고 오우거의 눈을 겨냥했다. 쉬익-! 빛줄기처럼 날아간 화살은 오우거의 눈을 정확히 꿰뚫었다. “크아아악!” 난 놈이 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웃음을 흘렸다. 훗! 나의 활솜씨는 여전하군. 그야 말로 예술이야. 일명 아트(art). 부디 나를 아티스트(artist)라 불러다오. “쿠에에엑!” 앗! 저 놈이 난리를 친다. 한 방 가지고는 안 돼겠군. 에잇! 연사다. 슝슝슝슝-! 푹푹푹푹-! 거대한 오우거의 덩치가 뒤로 넘어가며 게임 오버(game over)라는 자막이 뜬다. 훗! 내가 이겼군! 뭐, 당연한 결과니 굳이 기뻐할 필요는 없으려나? 난 활을 다시 등에 매고 조심스럽게 오우거에게 다가갔다. “죽었니?” 오우거는 대답이 없다. 하긴, 별로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레이피어를 뽑아 들어 오우거의 목을 찔렀다. 그리고 확인 차원에서 목을 잘랐다. 오우거의 목이 산비탈로 또르르 굴러가는 것을 보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어린 소녀는 그때까지도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었다. 얼굴에 지저분하게 검뎅이가 묻은 소녀는 대략 10살 정도로 보였다. 애가 좀 투박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니 귀엽기도 하다. 난 소녀에게 다가갔다. “괜찮니?” 내가 다가서자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소녀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됐다. ♬빠바바밤♬빠바바밤♬빠바~ (베토벤의 운명) 이건 무슨 음악인가? 갑자기 왜 환청이 들리는 거지? 난 새하얀 손으로 소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생긋 웃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니?” 그러자 소녀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말했다. “흐윽, 흑, 흐윽…… 우리 아빠…… 흐윽…… 아빠…… 하러…… 흐윽…… 안 돌아와…… 그래서…… 내가…… 흐윽…… 우에에에엥~.” “…….”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아빠가 안 돌아와? 뭘 하다가 안 돌아와? 그리고 니가 어쨌다고? “울음을 그치렴.” 난 소녀를 안아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내 목을 와락 끌어 안더니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울음 소리가 참 우렁차군. 난 소녀를 달래며 계속 물었고, 소녀는 눈물 콧물 질질 쏟아내며 더듬더듬 얘기했다. 난 그 말을 조합해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소녀는 일찍히 어머니를 여희고 사냥꾼인 아버지와 단 둘이 이 산속에서 살고 있었다. 주위의 몬스터들 때문에 위험한 곳이었지만 사냥감이 제법 풍부한 곳인지라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동물을 사냥해 그것을 먹기도 하고 근처 마을에서 생필품으로 바꾸기도 하는 등 둘이 오순도순 잘 살았다. 그런데 며칠 전 소녀의 아버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던 소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밖으로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아버지~ 라고 외치며 몇 시간 동안 산속을 헤메다 보니 길을 잃어버렸다. 소녀는 길을 찾으려 했지만 해가 저물고 있는데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몬스터가 길을 가로 막았다. 몬스터는 탐욕스러운 눈길로 소녀를 바라보았고 소녀는 이제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 때 내가 짠~! 하고 멋지게 나타나 소녀를 구해준 것이다. 나는야 정의의 사도~. 아니, 백마 탄 왕자가 더 어울리겠군.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산속의 밤은 춥고 음산하다. 소녀는 내 목을 끌어 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난 소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그대의 옆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어째서 말투가 바뀌었는지는 묻지 마라. 아무리 소녀가 어리다 해도 백마 탄 왕자가 반말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 “그런데 그대의 집은 어딥니까?” “훌쩍~ 훌쩍~ 잘 모르겠어요.” “…….” 니가 모르면 누가 아니? 밤길이 아무리 어둡다 한들 엘프의 좋은 시력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특히나 그 장소가 산이나 숲 같은 자연이라면. 난 어두운 길을 헤치고 소녀가 걸어왔음으로 짐작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난 길 찾는데도 일가견이있다. 한때는 레인저로 나가볼까 생각도 했었다. 나의 천재적인 추적술은 어김 없이 발휘되었고 난 얼마지나지 않아 소녀의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담하게 생긴 통나무 집. 난 그곳으로 들어가 어느새 내 품에서 잠든 소녀를 눕혔다. 그리고 난 소녀의 아버지 것으로 보이는 침대에 누웠다. 어찌되었든 이것으로 야숙은 면했군. 내일은 꼭 이 산을 넘어야겠다. 다음날. “우에에엥~ 아빠~.” 난 소녀의 시끄러운 울음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무슨 애 울음 소리가 이렇게 우렁차다냐? 시끄러워도 정말 너무 시끄럽다. 난 하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소녀를 달랬다. “울지 마세요.” “우엥~ 아빠…… 찾아…… 흑흑…….” 소녀는 간절하고 애절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굉장히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은 눈빛. 소녀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빠를 찾아 주세요.’ 나 역시 눈빛으로 말했다. ‘전 갈 길이 바쁩니다.’ 그러자 소녀가 대답했다. “우에에엥~. 아빠를 찾아 줘요!” “…….” 내가 흥신소 직원도 아닌데 너네 아빠를 어떻게 찾아 주니? “우에에에엥~ 아빠 안 찾아주면 삐질 거야~!” “……아, 알겠습니다. 찾아 오겠습니다.” “훌쩍, 정말? “……예.” 소녀는 그래도 날 못 믿겠는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도장 쿡! 난 활과 화살을 매고 집 밖으로 나갔다. 자신 있게 나서긴 했지만 참으로 난감하다. 얘네 아버지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하는 수 없군. 또 다시 나의 천재적인 추적술을 발휘하는 수 밖에. 사냥꾼들은 일반적으로 족적을 잘 남기지 않는다. 특히 능숙한 사냥꾼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산짐승들에게 경계심을 줄수도 있고, 잘못하면 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며칠 전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희미해진 흔적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난 힘들게 그 흔적들을 따라갔다. 휴우~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냐? 갈 길이 바쁜데 이런 쓸데 없는 짓이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고통 받는 소녀를 도와주는 일을 어찌 모른체 할 수 있겠는가? 본인은 엘프의 하나로서 결코 그럴 수 없다. 빨리 찾아주고 내 갈 길을 가야겠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앞쪽에서 내 후각을 자극하는 이상한 냄새가 퍼졌다. 난 활줄에 화살을 걸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반쯤 파먹힌 인간의 시체였다. 정말 잔인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시체의 상태를 보아하니 몬스터가 아닌 맹수에게 습격을 당한 것 같았다. 정말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천으로 시체를 동여맨 뒤 등에 업었다. 많이 찝찝하긴 하지만 운반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 외에는 없었다. 내가 그 시체를 들고 소녀의 집으로 돌아가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우에에엥~ 아빠~ 흑흑, 우리 아빠 살려네! 아빠 살려네!” “…….” 난 말 없이 우는 소녀를 달래 주었다. 어린 소녀가 참으로 안 됐군. 하나뿐인 혈육을 잃다니 말이야. 내 비록 갈 길이 바쁘긴 하지만 장례를 치루는 것은 도와줘야겠다. 인간들의 장례에 대해선 별로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대충은 안다. 일단은 집 근처 양지바른 곳에 땅을 파고 시체를 그곳에 뉘었다. 그리고 흙을 덮고 작은 봉분을 만들었다. 이걸로 무덤은 해결. 다음은 음식을 차리고 슬퍼하기만 하면 된다. 난 내가 가진 식량과 소녀의 집에 있는 식량을 합쳐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만들어 냈다. 소녀는 두 팔을 벌려 봉분을 끌어 앉고 펑펑 울었다. 차마 울고 있는 이런 소녀를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관계로 난 장례식 내내 소녀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날 바라 보았다. 마치 굉장히 무언가를 원하는 듯한 눈빛. 대체 나한테 더 이상 무엇을 원한단 말인가? 으음, 아무래도 내 착각이겠지? 약식이나마 간단하게 삼일장을 치르고나자 난 떠나야할 때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난 삼일 동안 펑펑 울어 더 이상 울 기력도 없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갈길이 바빠서 이만.” 그러자 소녀의 눈에선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흑흑, 어디 가세요?” 불쌍하다. 어린 것이 이런 산속에서 어떻게 살려고. 뭐 인간의 생존능력은 타종족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니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저야 여행중이니, 이제 다른 곳으로 가보려 합니다.” 소녀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흐느꼈다. “흑흑, 이 험한 산속에서 연약한 소녀 혼자 어찌 살라고…….” “…….” 이 처자 갑자기 왜 이런다냐? 떠나려는 남정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다니. 불길한 느낌이 강렬하게 밀려오는 것은 왜 일까? 안 돼겠다. 어서 빨리 떠나야지. “이것 좀 놓으십시오. 전 가야 합니다.” 난 다를 흔들어 보았지만 소녀는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꽉 붙드는 것이 아닌가? “흑흑, 못놔요. 살려놨으면, 책임도 지셔야죠.” “…….” 이런 걸 보고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놓자 보따리 건져달라고 하는 건가? 그나저나 책임이라니? 무슨 책임? “어, 어떻게 책임을 지라는 겁니까?” 내가 묻자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 뛰어 올라 내 품에 안겼다. “저 데리고 사세요.” “……예!?” 소녀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내 목을 끌어 안은 손에 힘을 주고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 시켰다. 으윽, 숨이 막힌다. 이렇게 강력한 헤드락이라니. “켁켁, 이 것 좀…….” “저랑 결혼해요. 저 오빠 사랑해요.” “……그, 그런.” 내가 아무리 잘났다지만 이런 어린 소녀까지 나한테 반하다니. 으음, 대체 나의 잘남은 어디까지가 한계란 말인가? 아, 그래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로리는 죄악이야! 게다가 난 모함가야! 난 모험을 하기 위해 인간 세상에 나온 거야. 절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인간 여자와 눈이 맞아 짝짜꿍 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산중에 어린 소녀를 혼자 남겨 놓는 것은 좀 잔인한 것 같다. 아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쿨쿨~.” 소녀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난 잠이 들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1번, 소녀를 내버려 두고 야반도주한다. 2번, 소녀가 혼자 살아갈 수 있을때까지 이 곳에 남아 도와준다. 생각 같아서는 소녀야 어찌되건 말건 내 갈 길을 가고 싶다. 하지만 그건 엘프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이 소녀가 몬스터나 맹수들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산속에서 길을 잃어 얼어 죽기라도 한다면…… 아, 그래서는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난 결국 그날 밤 길을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에 전환점이었다. 아이리스 13권 아이리스::박성호 TITLE ▶10 :: <아이리스 13권> 9클래스 - 09 sharpshooter(psungho) 03-05-08 :: :: 19906 그 날도 인디는 어김 없이 마법으로 히로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링겔을 교체했다. 많은 시일이 흘렀지만 히로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하지만 인디는 그런 생각을 애써 지웠다. ‘당신이라면 분명 잘 해낼거예요.’ 인디는 히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보았다. 그러자 평범하기 그지 없는 얼굴이 드러났다. 정말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너무 평범하게 생겼다. 아니, 평범에서 좀 미달인일 수도……. 어째서 이런 인간에게 크로니스가 집착을 보이는 걸까?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디는 한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히로의 입장에서 보면 어째서 인디가 일루니아에게 집착을 하는지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아아~ 보고 싶어요, 사랑하는 일루니아님.” 인디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일루니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인디의 상상 속에 나타난 일루니아의 모습은 가히 여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디는 그렇게 한참 동안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매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이런 그리움이야 늘상 있던 것이었지만 오늘은 좀 특별했다. 뼈에 사무치도록 그녀가 그리웠다.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미칠 정도로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히로의 곁을 지켜야 했다. 이러니 히로가 미워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인디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인디에게 있어서 크나큰 고통이었다. ‘잠깐만 자리를 비우면 어떨까?’ 인디는 고개를 좌우로 걸었다. 그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만약 자리를 비운 사이 히로에게서 문제가 생기거나 크로니스가 이 곳으로 온다면 어찌 되겠는가? 자신은 블랙 드래곤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만 한다. 하지만…… 너무너무 보고 싶은 걸 어떡해? 하긴 생각해 보면 히로야 어찌되건 말건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자신은 오직 일루니아님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결심을 한 인디는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휘갈겨 썼다. 저는 잠시 일루니아님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니 깨어나셨을 때 제가 없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편지에 입을 맞춰 주세요. 그러면 제가 바로 달려 오겠습니다. 그럼 9클래스가 되시길 간절히 바라며 이제 그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인디 올림- 할 말을 다 쓴 인디는 종이를 곱게 접어 히로의 머리맡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다시 합류한 라이 패밀리가 행복하게 뛰어 놀고 있었다. 인디는 풀밭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라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는 잠시 가볼 곳이 있습니다.” “예? 어딜 가는데요?” 라이가 멈춰서자 라이코스는 자연스럽게 라이의 머리 위에 올라 앉았다. 이제 간첩질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라이코스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아아~ 비록 자수해서 광명 찾은 것은 아니지만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고 새 삶을 살아간다는 정신만은 높이 사줄만 하다. 인디는 라이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이상하게 생긴 매를 힐끔 보고는 다시 라이에게 말했다. “저는 일루니아님께 갈 생각이니 제가 없는 동안 히로님을 잘 보살펴 주시길 부탁드려요.” 그러자 라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오빠. 히로 오빠는 라이가 잘 보살필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꼭 부탁드려요.” “예. 라이만 믿으세요.” 라이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예.” 라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인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디 오빠가 라이한테 히로 오빠를 부탁했어. 그러니 라이는 히로 오빠를 잘 보살필테야!’ 아아~ 정말 굳은 결심이 아닐 수 없다. 어린 라이의 눈에선 결연의 빛이 흘러나왔다. 훌륭하다, 라이. 장하다, 라이! 그대야 말로 천하의 착한 엘프로다! “라이야, 우리 숨바꼭질 놀이 하자.” “숨바꼭질 놀이? 그래. 라이는 숨바꼭질 놀이 너무너무 좋아해.” “그럼 내가 숨을테니 한번 찾아봐.” “응응. 라이가 열을 셀테니까 그때까지 이코는 잘 숨어야 돼.” 라이코스는 어딘가로 날아 갔고, 라이는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일, 이, 삼, 사, 오…… 십. 찾는다~.” 눈을 뜬 라이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라이코스가 숨었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코야~!”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걱정이 된다. 정말 히로를 잘 보살필 수 있을까? 정말? 진짜? * * * * * 지니는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이유는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지금 대사를 목전에 두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다니. “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난 어째서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께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인가?” 만약 히로가 이 말을 들었다면 ‘댁은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야’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히로는 없었고,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지니도 아니다. 지니는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 없군.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야지.” 지니는 한 손으로 턱을 부여잡고 자리를 오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가 누군가? 당대 최고의 모사 사일런스 지니가 아니던가? “그렇군. 내가 도울 수 없다면 다른 분들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현명한 일이지.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서라면 내 무슨 일인들 못하리.” 지니는 자리에 앉더니 종이 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을 내려 썼다. 대체 무엇을 쓰고 있는 걸까? 잠시 후 펜을 내려 놓은 지니는 만족한 듯 자신이 써놓은 글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병사들은 오늘도 열심히 순찰을 돌고 있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하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적이 쳐들어 온다면 초소 위에 있는 경비병이 먼저 알려줄텐데 무슨 걱정이 있겠나? 게다가 지금은 소강 상태였다. 아마도 한 동안은 전쟁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순찰을 도는 병사들은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마을을 떠날 때 나한테 달라 붙은 여자만도 수십명이었어.” “에이, 설마…….” “어허! 설마라니? 지금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그럼 그 말을 믿냐? 너 거울 안 보니? 너 생긴 걸 좀 봐라. 뭘 보고 여자들이 너한테 달라 붙냐?” “우리집이 돈이 좀 많았어.” “돈 많은 놈이 여기 왜 있냐?” “그야 당연 투철한 애국심 때문에…….” “염병!” 그렇게 단란한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그들 앞의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미인이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프를 가슴에 끌어 안은 미인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 허공에서 나타난 절세 미인.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현실이라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귀신에 홀린 걸까?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미인은 귀신? 순찰을 돌던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영문을 모르는 미인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일루니아님…….” “으아악! 귀신이다!” 병사들은 손에 든 무기를 집어 던지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대는 귀신이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귀신…… 아니, 귀신으로 착각된 인디는 도망치는 병사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사랑하는 그녀를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빨리 일루니아님을 보고 싶어. 그런데 일루니아님을 뵈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혹시 갑자기 찾아왔다고 화내는 건 아닐까? 아니야. 분명 좋아하실 거야. 아~ 사랑해요, 일루니아님.’ 인디는 자신이 가진 모든 마법 역량을 동원해 일루니아를 찾기로 했다. “디텍트 마이 러브 일루니아님!” 그러자 갑자기 인디의 발 밑에 화살표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핑크빛 화살표는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인디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화살표는 계속 떠올랐다. 이 화살표의 끝에는 분명 일루니아님이 계실 것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일루니아님이. 제 눈에 안경이라고 정말 꼴값이 아닐 수 없다. 핑크빛 화살표는 계속해서 떠올랐다. 막사 안에서 한창 업무에 매달리고 있던 일루니아는 막사 안에 나타나는 화살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화살표는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렇게 의문을 갖는데 갑자기 막사의 문이 열리더니 바람도 불지 않는데 흑발을 휘날리고 있는 미인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일루니아는 한눈에 그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저 드래곤이 갑자기 왜…….’ 인디는 얼굴 가득 홍조를 띤채 주춤주춤 일루니아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자신을 보고 있는 일루니아의 시선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인디가 나타난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일루니아는 굉장히 기뻤다. 하지만 그 감정을 걷으로 내보이지 않고 사무적으로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딱딱하고 날카로운 목소리였고, 그 때문에 인디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 저는…….” 이런 인디의 반응에 일루니아는 당황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일루니아는 일단 인디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인디는 한발짝 뒤로 물러 서는 것이 아닌가? “죄, 죄송해요, 일루니아님. 저, 저는 다만…… 흑흑…… 죄송해요.” “…….” 뭐가 죄송하다는 걸까? 일루니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인디에게 다가가 매끄럽고 부드러운 흑발을 쓸어 넘겨 주었다. ‘무슨 드래곤이 이렇게 귀여울까?’ 아아~ 드디어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에도 콩깍지가 뒤덮이기 시작했다.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한번 콩깍지가 씌이면 벗어나기 힘들텐데. “흑흑~.” 눈물을 흘리던 인디는 일루니아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디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새빨개졌다. 흰 피부가 빨갛게 물들며 몸 전체가 화끈화끈 거리는 것이 무슨 시한폭탄 같다. 잠시 후면 폭발하지는 않을까, 정말 걱정 된다. “이, 일루니아님.” 인디는 반쯤 녹아내린 표정으로 일루니아를 보았다. 허공에서 마주친 둘의 눈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지금 이 순간 일루니아도 굉장히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인디는 일루니아의 품안으로 달려 들었다. 키가 큰 인디가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일루니아에게 안긴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습게 보였다. 하지만 어쩌겠냐? 자기들이 좋다는데. 둘은 그렇게 껴안고 부비며 서로의 애정을 확인했다. 뜨겁기도 해라. 왜 한쪽에 빨간색으로 19세 표시가 안 뜨는지 이상할 정도다. “하아~ 하아~.” 외설적인 호흡 소리. 그 소리는 인디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일루니아님. 저, 전…….”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으랴? 지금까지는 전희에 불과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일루니아는 인디를 간이 침대에 자빠트렸다. 갑작스런 공격에 인디는 저항하지 못하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콩닥콩닥~! 심박수가 두 배는 빨라진 것 같다. 이러다가 심장 마비 걸리면 큰일인데. 침대보 위에 사방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외설적인 포즈. 마치 자신을 덥쳐달라고 몸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일루니아는 주저 없이 그런 인디를 덥쳤다. “하아~ 이, 이러시면…….” “됐어요.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어요.” “하, 하지만 이, 이건 옳지 못한 일이에요.” 인디는 지금 상황을 벗어나려는 듯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 동작에는 조금의 힘도 들어있질 않았다. 마치 일루니아가 그대로 진행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일루니아는 그 의도를 잘 알았는지 두 손으로 가녀린 인디의 어깨를 짓눌렀다. 더 이상 반항할 수 없게된 인디는 눈을 내리깔며 체념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뜻 대로 하세요.” “…….”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런 대사를 내뱉다니. 사실 이런 놈들이 더 나쁜 놈이다. 이럴거면 처음부터 좋다고 하던가. 왜 그렇게 뺐니? 막사 안은 열기로 후끈 달아 올랐다. 아, 뜨거워라. 가까이 있다가 화상을 입지는 않을까 걱정 된다. 일루니아는 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새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 점점 표현 한도 수위를 넘어 가고 있다. 이러다가 19금 딱지 붙는 것은 아닐까 정말 걱정 된다. 일루니아의 손이 인디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인디의 옷은 마치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준비라도 한 듯 상당히 벗기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다. 지금 이 순간 히로와 라이레얼의 첫날 밤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아아~ 어찌보면 굉장히 흡사하다. 첫날밤 주도권을 여자에게 빼앗기다니. 인디가 앞으로 일루니아 여사에게 잡혀 살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안 봐도 DVD라고나 할까? “하아~ 빠, 빨리…….” 빨리 뭘 해달라는 걸까? 설마 빨리 비켜달라는 것은 아닐테고. 둘은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인디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였던가? 이런 중요한 행사를 치를 때는 언제나 방해꾼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런 짓을 할때는 꼭 방문을 잠그고 할 것을 권장하는 바이다. 그래야 수습할 시간이라도 있지. 벌컥-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리는 문. 순간, 일루니아와 인디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여사님의 동생인 사일런스 지니였다. 평소 예절바르게 노크도 잘하던 인간이 오늘은 왜 그냥 들어 온 걸까? 지니는 침대 위에 놓여있는 자신의 누이와 인디의 모습을 보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흠흠.” 그 말에 인디는 황급히 옷을 추스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흑~.” 외간 남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면 일루니아는 태연했다. 일루니아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정리하더니 지니를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지니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 알긴 아는 구나. “무슨 일로 왔는지나 말해.” “바깥의 병사들에게 인디님께서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뵈러 왔습니다.” 지니는 고개를 들며 인디를 보았다. 인디는 두 손으로 가슴 근처를 가리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덜덜~. 누가 잡아 먹니? 일루니아는 인디를 안심시켜 주기라도 하듯 인디의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다. 그러자 인디는 조용히 일루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전 지금 행복해요~. “…….” 행복은 개뿔이 행복. 아직까지 의식도 회복하지 못하는 히로를 두고 사랑하는 여자 만나 품에 안기면 그게 행복한 거냐? 하여튼 요즘 드래곤들 왜 이러냐? “인디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잠깐만요.” 인디는 일단 옷을 제대로 고쳐 입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수습했다. 생각해보니 지니는 인디에서 있어서 처남이 아닌가? ‘일루니아님의 동생분이니 잘 보여야겠다.’ 인디는 침대에서 일어나 일단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묻고 싶은 것이 뭔가요?” ‘뭐든 친절하게 답해서 점수를 따야지~.’ 지니가 물었다. “저의 우상이시자 영웅이시자 가장 존경하는 분이신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지금 어떻게 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냥 히로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면 될 것을 그렇게 길게 늘여서 말하다니. 인디는 지니에게 잘보여야겠다는 생각에 아는 사실을 줄줄 읊었다. 얘기를 다 들은 지니와 일루니아는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의식 세계를 헤메고 계시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잘 됐네! 아예 평생 안 깨어났으면 좋겠다.” 일루니아가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하자 지니는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세계 평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계신데 누님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딴 인간이 무슨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해? 여자 꼬시려고 노력한다면 모를까.” 어떻게 알았을까? 히로가 의식 세계 속에서 세계 평화는 뒷전이고 여자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다는 걸. 하지만 지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분명 의식 속에서 이그리드님을 만나 9클래스를 마스터 하실 겁니다. 전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아~ 만약 의식 속만 아니었다면 당장 달려가 미천한 힘이나마 도움을 트렸을 텐데…….” 참고로 지니는 의식 세계 속에서도 히로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지니야 말로 진정한 히로의 협조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많은 역경을 헤치고 버들랜드에 가서 차원의 열쇠와 화이트 드래곤의 힘을 얻은 라이레얼은 위풍당당하게 처음 출발지로 돌아왔다. 전부 죽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전부 살아온 라이레얼 패거리들의 모습에 많은 용병들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역시 라이레얼이다!’ 드래곤이 아무리 무섭다 한들 라이레얼 보다야 무서울까? 역시 라이레얼은 드래곤도 찜 쪄 먹을 여자였다. 라이레얼은 도착하자마자 일루니아를 찾았다. ‘그 아줌마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지.’ 라이레얼은 일루니아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감히 아름답고 고귀한 자신을 싼티 나는 계집애라 칭하다니. 이것은 명백한 모욕적 행위였다. 라이레얼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말로 싸우다가 안 되면 카르한테 도와달라 그래야겠다.’ 옆에 화이트 드래곤까지 있으니 라이레얼은 정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라이레얼은 일루니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막사의 문을 벌컥 열었다. “어이, 아줌마!” 안에는 일루니아와 지니, 그리고 인디가 한창 히로 얘기로 화기애애한 대화의 장을 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 라이레얼은 다른 사람들은 신경쓰지도 않고 일루니아에게 다가갔다. 일루니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이미에 있던 세줄의 주름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싼티 나는 계집애가 언제 돌아왔지?’ 일루니아는 지금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다. 하긴 인디와 거사(?)를 치루려다가 못 치뤘는데 기분이 좋을리 없지. 그런데 그 안 좋은 기분은 라이레얼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극을 향해 달려갔다. ‘말도 안 통하는 무식한 계집애! 안 돼겠다. 상황봐서 인디한테 쫓아내라 그래야지.’ 저 여자가 아무리 막나간다고 해도 감히 블랙 드래곤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인디는 자신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 충성스런 드래곤이 아니던가? “살아 돌아왔네.” 이젠 아예 대놓고 반말이다. 예의는 상대를 봐서 갖춘다는 것이 일루니아의 지론이었다. 라이레얼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흥! 아줌마는 내가 죽기라도 바랬나 보지?” 일루니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 같은 하프엘프 계집애가 죽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이야?” “후후~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했다간 후회할텐데.” “너야 말로 후회할 텐데. 어디서 싼티 나는 계집애가 반말이야, 반말이?” “노티 나는 아줌마야 말로 왜 반말인데?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파지직-! 허공에서 스파크가 튄다. 지니는 멀찌감치 서서 차를 마시며 두 여인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좀 위험하긴 했지만 이런 재밌는 구경을 놓칠 수야 없는 노릇이지. 애들 싸움 심각해지면 부모들까지 껴서 단체전이 되기 마련이다. ‘감히 라이레얼 언니를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감히 일루니아님을 모역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인디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앞으로 나섰고, 그와 동시에 카르가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앞으로 나섰다. “당신 나의 언니한테 감히 그딴 식으로 말했다 이거지? 당장 사과하지 못해!”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일루니아님께 사과 하세요.” 그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인디와 카르는 서로의 정체를 알아 차렸다. 그러자 둘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니, 니가 여기 어떻게…….” “서, 설마…….” 하지만 사정을 알리 없는 라이레얼과 일루니아는 소리쳤다. “주저 하지 말고 저 아줌마를 혼내줘!” “저 싼티 나는 계집애를 없애 버려!” 두 여인의 싸움은 이제 드래곤들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화이트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타이틀 매치. 9클래스끼리의 싸움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히로가 세계 평화다 뭐다 불철주야 노력할 필요도 없어질 테고, 지긋지긋 한 전쟁도 끝이 날 것이다. 아아~ 두 여인의 감정 싸움 때문에 이 세계는 이제 끝장날 위험에 봉착했다. 다행히도 먼저 이성을 회복한 일루니아가 인디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인가요?” “예. 조금…….” 카르는 평소처럼 라이레얼의 팔에 매달려 얼음장처럼 싸늘한 눈길로 일루니아와 인디는 노려 보았다. 드래곤들의 설명을 들은 라이레얼과 일루니아는 상대의 옆에 있는 존재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저, 저 계집애가 드래곤이야?” “어머, 쟤 남자에요 언니. 웃기죠? 폴리모프를 해도 뭐 저딴식으로 폴리모프를 한담. 하여튼 이래서 블랙은 안 돼.” “쟤는 레즈에요, 일루니아님. 전 이래서 화이트가 싫어요.” 이제는 색깔 논쟁까지 일고 있다. 같은 드래곤끼리 색깔 가지고 싸우다니. 이거 사회 통합을 위해서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 “네 분들께서는 잠시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상황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자 보다못한 사일런스 지니가 나섰다. 지니는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라이레얼양께 묻도록 하겠습니다. 차원의 열쇠는 찾으셨습니까?” “찾았어.” 라이레얼은 주머니에 있는 차원의 열쇠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지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행입니다. 이로써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의 싸움에만 열중할 수 있겠군요.” “뭐, 그렇겠지.”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아마 이 곳에 이렇게 모이신 이유는 아이언스 공작님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 차나 한잔 마시면서 서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떨까요?” 지니의 말에 카르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맞다! 그 인간은 니가 관리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야? 그 인간은 어쩌고?” “그, 그건…….” 어찌 일루니아님이 보고 싶어 히로야 어떻게 되건 말건 내팽게 치고 이 곳으로 달려왔다고 말할 수 있으리. “너 설마 그 인간 내비두고 이 곳에 놀러 온 것은 아니겠지?”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냐? 하여간 드래곤들이 이렇게 책임 의식이 없어서야. 나쁜 드래곤들 같으니라고! “그보다 잠시 이것을 좀 봐주십시오.” 지니는 품안에서 둘둘 말린 종이를 한 장 꺼내 보였다. 아까 자신이 집무실 안에서 쓴 글이었다. “이게 뭐야?” 두 여인과 두 드래곤은 그 것을 돌려가며 읽어 보았다. “제가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돕기 위해 생각해 낸 겁니다.” 글을 다 읽어본 두 여인과 두 드래곤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떤 글이기에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으음, 궁금하다. 아이리스::박성호 TITLE ▶11 :: <아이리스 13권> 9클래스 - 10 sharpshooter(psungho) 03-05-10 :: :: 24423 지금 내 앞에는 훤칠한 미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흑갈색 눈동자로 나를 날카롭게 훑어 보았다. 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것이 이그리드의 젊었을 때 모습인가? 제법 잘 생겼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쭈글쭈글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으음, 역시 세월의 흐름 때문이라는 건가? 혹시 모르지. 나도 늙으면 저렇게 될지. 내 목표는 벽에 똥 칠할 때까지 사는 거다. 아마도 이 자는 이그리드가 남긴 기억일 것이다. 조각조각난 기억들은 내가 듣고 본 이그리드와 합쳐저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동안 잘 지냈나?” “제가 잘 지냈을 거라 생각 합니까?”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이그리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크큭, 그렇군.”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곳은 외부와는 격리된 그와 나만의 공간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지?” “잘 아실텐데요.” “크로니스 때문인가?” “예.” 이그리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크로니스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막아야지요.” 내 대답에 이그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막을 수 없다 해도 막아야지요. 전 당신의 대용품이 아니니.” “그 녀석도 알고보면 불쌍한 놈이야.” “그에 휘둘리는 저는 더 불쌍한 놈이구요.” “날 찾아온 이유는?” “9클래스 마법 때문이죠.”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아니, 드래곤이 아닌 종족으로서는 유일하게 9클래스를 마스터한 자. 그가 바로 이그리드였다. 드래곤과 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힘을 얻어야 했다. “절 9클래스로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글쎄. 그건 네 선택에 달렸지.” “선택이요?” “그래.” “무슨 선택이요?” “너 자신을 위한 선택이지.” “…….”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 그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 “꼭 싸워야만 하는 걸까요?” “그래야겠지.” “어째서죠?” “싸움이 아닌 이상 녀석을 막긴 글렀어.” “…….”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건가? 솔직히 크로니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의 잘못이라고는 이그리드를 사랑했다는 것 밖에는 없다. 그 때문에 세계 평화라는 명목으로 드래곤들이 공동 전선을 구축하여 크로니스를 핍박한다. 그리고 어찌보면 나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옳은 일이건 아니건 나는 반드시 해야만 했다. 내 인생을 남이 휘두르게 놔둘 수는 없으니.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이그리드는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크로니스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좋은 친구지.” “정말 그렇게 밖에 생각 안 해요?” “그럼 어떻게 생각할까?” “사랑했을 수도 있잖아요.” “사랑?” 이그리드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 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후회, 눈물, 기쁨, 슬픔 등등. 그는 어째서 웃는 걸까? 무엇 때문에? 잠시 후, 이그리드는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난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 내가 가진 사랑은 한 여인에게 전부 주었으니까.” “…….” 난 이런 인간들 보면 짜증난다. 퍼도 퍼도 끝이 없는게 사랑 아닌가? 바닷물이 마르는 거 봤냐? 아무튼 이거 문제 있는 거다. 너무 하는 거 오바 아니야? “과거의 여자 때문에 너무 매정한 거 아니에요?” “후후~ 글쎄.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나에게 현재였거든.” “…….”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다는 건가? 하긴 내가 이그리드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크로니스를 막아라.” “예?” “그 녀석 제정신 차리게 만들어.” “어떻게요?” “몇 대 패 줘.” “…….” 문제는 그 몇 대를 어떻게 패 주는 가, 이다. 내가 손을 휘두르면 크로니스가 머리를 들이밀리는 없지 않은가? “그럴려면 9클래스를 마스터 해야 하는데요.” “그럼 그렇게 해야지.” “구체적인 방법 아는 거 있어요?” “물론.” 이그리드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난 그 웃음이 뭘 의미하는 지 알 수 있었다. “합체요?” “합체라…… 그 표현도 그리 나쁘지는 않군.” “우리가 합체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글쎄.” 이그리드는 얼버리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난 알아야 했다. 알건 모르건 간에 결정은 똑같을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 내리는 결정과 모르면서 내리는 결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보가 곧 무기가 되는 정보화 사회에 살면서 정보를 무시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제가 저로 남아있을 확률은 얼마나 되나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될 거야.” “…….” “하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 “너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다면 넌 너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너 자신의 기억에 먹히겠지.” 여기서 자신의 기억이란 이그리드를 말하는 것일 거다. 내 눈 앞에 있는 이그리드는 실제가 아니다. 다만 내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그리고 내 머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기억이 만들어 낸 가상의 존재일뿐이다. “어떻게 할 건가?” “뭐가요?” “세 가지 중 선택해.” “세 가지라면…….” “첫째, 그냥 평생 크로니스의 장난에 놀아난다. 둘째, 크로니스를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도망 다닌다. 셋짜, 나의 의식과 융합하여, 크로니스와 싸운다.” 개인적으로 도망 다니는 것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리 없다. 내가 도망가면 크로니스는 아마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올 것이다.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지만 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크로니스와 싸우죠.” “각오는 되어 있나?” “각오라고 할만한 게 뭐 있겠습니까? 무조건 부딪히는 수 밖에.” “속 편하군.” 지금 와서 문득 드는 생각인데 이거 혹시 이그리드가 미리 들어 놓은 보험 아닌가? 즉 크로니스가 폭주할 것을 예상해 나로 하여금 그것을 막게 하는 것.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그리드의 시나리오에 놀아나고 있다는 건데…… 으음…… 이래저래 나는 손해 보는 입장이군. 이그리드는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나의 손을 마주 잡았다. 마치 엄숙한 의식을 행하 듯. 하지만 이 순간에도 난 남자와 손을 잡는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의 몸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치 3D 입체 영상처럼 빛이 그의 몸을 투과했다. 우리는 지금 합체 중이었다. 나는 손을 높이 치켜들며 ‘합체!’ 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런 짓을 하면 이그리드가 화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은 왜일까? 그의 기억이 밀려 들어 온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나와 융화 된다. 아름다운 정원.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그곳에서 이그리드와 루미아드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 크로니스가 서 있었다. 이그리드는 크로니스를 사랑했을까? * * * * * * 희미하게 대들보가 보인다. 대들보를 중심으로 서까래가 가지런히 뻗어 있었다. 이 곳은…… 맞아.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의 레어였지. 머리가 아프다. 난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순간, 그 동안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이상한 음료를 마시고 잠든 일, 의식 속에서 라이레얼과 세레나, 라이 등을 만난 일, 그리고……. “이그리드는?” 내 의식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그리드의 기억은 수면 밖으로 솟아 올랐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대로 나였다. 이럴 경우 한 가지 의심을 해보기 마련이다. 혹시 진짜 나는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 뭔 말이야? 아무튼 나는 나였다. 다른 내가 아닌. “다행이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무언가 걸리적거리는게 있었다. “이건 뭐야?” 내 팔에 주사 바늘이 꽂혀 있다. 그리고 그 바늘은 링겔에 연결되어 있다. 으음, 내가 자는 사이에 몰래 주사 바늘을 꽂다니. 내가 주사 바늘 싫어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난 조심스럽게 주사 바늘을 뽑았다. 다행히 피는 안 나온다. 침대에서 일어서려는데 순간 다리가 풀렸다. 난 휘청거리다가 급히 중심을 잡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난 걸까? 설마 깨어보니 몇 년이 지났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아, 배고프다. 밥 먹고 싶어. 냠냠~. 이 앙증맞은 소리는 무엇일까? 난 고픈 배를 부여잡고 부엌으로 나가 보았다. 식탁에 앉아 무서운 속도로 빵을 헤치우고 있는 엘프는 바로…… 바로…… 귀엽고 깜찍한 나의 라이였다. 그리고 라이의 옆에서는 흰색 매 한 마리가 열심히 빵을 쪼아 먹고 있었다. 앗! 저것은 라이코스가 아닌가? 언제 돌아왔지? 라이와 라이코스가 나란히 식사를 하는 모습이 참으로 다정해 보인다. 드디어 라이 패밀리 재결성인가? 축하해, 라이야~. 라이는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난 천천히 라이에게 다가갔다. 라이 패밀리는 먹는데 열중하느라 나를 보지 못했다. 난 살그머니 뒤로 돌아가 손으로 라이의 눈을 덮었다. “누구게~.” “어! 넌…….” 라이코스는 날 보고 뭐라 소리치려 했다. 난 라이코스에게 말하지 말라는 제스처, 즉 ‘말하면 죽어!’ 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고 다시 라이에게 물었다. “누구게~.” 라이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 거렸다. “으음, 글쎄요…… 라이는 잘 모르겠어요.” 모른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설마 그 새 히로 오빠를 잊은 거니? 난 단 한 순간도 우리 라이를 잊은적이 없는데. “혹시…… 히로 오빠?” “…….” 순간, 나는 감동의 물결에 파묻혔다. 역시 라이는 날 잊지 않았어. 날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히로 오빠 맞죠?” “……응.” 난 천천히 라이의 눈을 가린 손을 치웠다. 그러자 라이는 뒤를 돌아 보았다. 라이와 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라이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라이는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라, 라이야…….” 내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오, 오빠…….” 라이의 목소리도 심하게 떨렸다. “라이야!” “오빠!”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렸고 라이는 주저없이 내 품으로 뛰어 들었다. “우에에엥~ 오빠~.” 라이는 내를 꼭 끌어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난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끼며 라이의 등을 쓸어 주었다. “훌쩍, 오빠 맞지? 진짜 오빠지? “그래. 진짜 오빠 맞아.” “우에에엥~ 라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라이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흘러내린 눈물이 내 뺨을 적신다. 아아~ 내가 또 라이를 울리고 말았구나. 역시 난 나쁜 놈인가봐. “미안해, 라이야.” “훌쩍, 앞으로는 라이 떠나지마. 오빠가 라이 떠나면 라이 삐질 거야.” “그래. 다시는 라이 곁을 떠나지 않을게.” 토닥토닥~. 간만에 라이의 등을 토닥이니 감회가 새롭다. 난 라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헤헤~.” 라이는 나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오직 라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귀엽고 깜찍한 웃음을. “오빠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어?” “너무너무 심심했어요. 그래도 이코가 돌아와서 라이랑 같이 놀아줘서 덜 심심했어요.” 난 힐끔 라이코스를 보았다. 빵을 먹던 라이코스는 내 눈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 저 놈이 왜 저러는 걸까?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나? 으음, 그러고보니 예전부터 수상했어. 저 놈 혹시…….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말투. “너…….” “왜, 왜? 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저 놈은……. “너 영물 아니지?” “……응?” “진실을 밝혀! 넌 영물이 아니야!” “…….” 라이코스는 대답 대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어라, 저 놈이 왠 일이지? 드디어 자기가 영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라도 했나? 난 의자에 앉아 라이를 무릎 위에 앉혔다. “오빠, 이거 드세요.” 라이는 자기가 먹던 빵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먹는 거에 목숨 거는 라이가 자기가 먹던 것을 나에게 건네 준다는 것은 나를 굉장히 사랑한다는 뜻이다. 난 고맙게 그 빵을 받아 먹었다. “여기 우유도 있어요.” 체하지 않으라고 우유까지 챙겨주는 라이의 따뜻한 마음씨. 아아~ 정말 감동이다. 히로한테는 오직 라이뿐이야! 나와 라이는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그 놈이 안 보인다.” “예? 그 놈이라니요?” “인디.” “아, 인디 오빠요?” “그래. 그 놈은 어디 갔니?” “인디 오빠는 일루니아님께 간다고 하고 갔는데요. 라이에게 오빠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어요!” “…….” 무어라? 일루니아 여사를 만나러 가? 나를 라이에게 맞기고?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분노가 머리를 감싸 안는다. 나쁜 자식! 드래곤이면 다야? 드래곤이면 그래도 되는 거야? 감히 날 내버려 두고 여자나 만나러 싸돌아 다녔다 이거지? “방에 인디 오빠가 남겨둔 메모가 있어요.” “그래?” 난 방으로 돌아갔다. 베게를 들춰보니 편지 하나가 있다. 깔끔하고 가지런한 글씨체. 드래곤 주제에 필체도 좋다. 난 그것을 읽어 보았다. “저는 잠시 일루니아님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니 깨어나셨을 때 제가 없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편지에 입을 맞춰 주세요. 그러면 제가 바로 달려 오겠습니다. 그럼 9클래스가 되시길 간절히 바라며 이제 그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인디 올림…… 이런 썅!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편지를 북북 찢었다. “화, 화 내지 말아요, 오빠.” 라이가 무섭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이, 이런! 내가 라이 앞에서 화를 내다니! 난 라이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미안, 라이야. 오빠 화 안 낼게.” 난 라이를 데리고 방을 나왔다. 라이가 있기에 대 놓고 화를 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말 열 받는다. 위험한 일은 나한테 다 맡겨 놓고 정작 저는 사랑하는 여자와 만나서 짝짜꿍 하다니. 진짜 요즘 드래곤들 왜 이러냐? “…….” 잠깐. 그러고보니 내가 만난 드래곤들 중 정말 제대로 된 드래곤은 하나도 없잖아! 그 동안 내가 만난 드래곤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 이렇게 넷이다. 크로니스는 스토커, 카이네이드는 싸가지와 내숭, 에스카네스는 얼음상 조각이나 하는 백수, 인디카즈네는 계집애 같은 사내. 이럴 수가!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인디가 말했듯이 마법은 정신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는 것은 9클래스는 정신력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신력이 완성 되었다는 드래곤들이 어째서 다 이 모양인 거지? “…….” 설마 각자의 개성인가? 하긴 색깔부터 개성이 있으니.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오빠.” “왜 그러니, 라이야?” “9클래스는 마스터 했어요?” “……응?” 그러고보니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내 의식 세계 속을 미친 듯이 헤맸는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여자들을 내비두고 이그리드를 만나러 가야 했나? 그야 당연 9클래스를 마스터하기 위함이다. 그럼 나는 9클래스를 마스터 했는가? “…….” 했나? 정말? 이미 나는 9클래스까지의 모든 주문과 마나 사용법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마나만 활성화된다면 나는 9클래스 마스터가 되는 것이다. “잠깐만.” “예.”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8클래스까지는 마나가 써클의 모양을 그리고 있다. 그러다가 9클래스가 되면 써클들이 하나로 융합되어 형태가 없어진다. 그렇기에 자연계의 천연 마나들을 정제하지 않고 무제한으로 끌어다 쓸수 있는 거고. 마나를 체크하던 내 얼굴이 점점 창백해진다. 난 혹시나 잘못 되었나싶어 다시 마나를 체크해 보았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맺힌 땀은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옆에 있던 라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요, 오빠? 뭐가 잘못 됐어요?” “…….” 뭐가 잘못 됐다. 잘못 돼도 크게 잘못 됐다. “어, 어떡하니, 라이야?” “응? 왜 그래요, 오빠?” “어, 어떡해?” “왜, 왜요?”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해?” 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거실 안을 마구잡이로 돌아다녔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맞아. 인디. 일단 인디를 만나 봐야겠다. 그런데 인디는 여기 없잖아!” “인디 오빠는 일루니아를 만나러 갔데요!” “나도 알아!” 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라이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순간, 라이의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라이의 통통한 볼이 움찔움찔 거린다. 이건 라이가 울기 전에 하는 제스쳐다! “우에…….” “미안해, 라이야. 오빠가 잘못했어.” 난 라이가 울지 못하도록 라이의 입을 틀어 막으며 재빨리 안아서 달래 주었다. 아아~ 내가 미쳤지. 아무리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한들 나의 라이에게 화풀이를 하다니. “미안해, 라이야~. 오빠가 다시는 안 그럴게.” “훌쩍~.” 다행히 라이의 눈물은 금방 멎었다. 난 계속해서 라이의 등을 토닥여 주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단 인디를 만나야 해. 그 놈을 만나서 앞으로 대책을 논의해 봐야겠다. 문제는 이 놈을 어떻게 만나냐는 건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편지에 입을 맞춰 주세요. 그러면 제가 바로 달려 오겠습니다. 맞아. 편지에 그렇게 씌여 있었지. 잠깐, 그 편지는 이미 공중 분해 됐잖아. 난 라이를 안은 상태에서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바닥에 작은 종잇조각 수십여개가 흩어져 있다. 찢어도 정말 많이 찢어 놨다. 설마 이 조각들 다 맞춰야 하는 건가? 으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순간, 반짝이는 아이디어! 가끔 내가 천재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라니! “라이야, 우리 재밌는 놀이 할까?” “무슨 놀인데요?” “으응. 퍼즐 맞추기.” “퍼즐 맞추기요?” “그래.” “무슨 퍼즐이요?” “지금부터 오빠가 여기 흩어진 종잇조각들을 모을 테니 라이는 그걸 하나하나 맞추는 거야. 다 맞추면 오빠가 라이한테 상 줄게.” “와아, 정말요? 빨리 해요, 오빠! 라이 잘 할 수 있어요!” “…….” 어쩜 이리도 단순할까? 난 라이를 내려 놓고 바닥에 흩어진 종잇조각을 모아 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그것들을 일일이 늘어 놓으며 조각 맞추기에 골몰하였다. “뭐하냐?” 방안으로 들어온 라이코스가 라이가 조각 맞추기를 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그러더니……. “같이 하자.” 라고 말하며 라이의 옆에서 부리로 종잇조각을 쪼아서 맞춘다. 라이 패밀리 = 단순 패밀리 이런 공식이 당연하다고 생각 되는 것은 왜일까? 어찌되었든 라이 패밀리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 많던 조각을 순식간에 다 맞춘 것이다. 이럴 때보면 정말 머리가 잘 돌아간다. “다 맞췄어요, 오빠!” “잘했어.”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헤헤~.” 라이는 웃으며 나에게 손을 쭉 내밀었다. “왜 그러니?” “상 주세요.” “응? 무슨 상?” “아까 다 맞추면 라이한테 상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랬던가? 이거 요즘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정말이에요. 다 맞추면 라이한테 상 주신다고 오빠가 말했어요. 정말 그랬어요.” “…….” 내가 그런 말을 했던 이유는 조각을 다 맞출 때쯤이면 라이가 그 약속을 잊어버릴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으음…… 뭘 주면 라이가 좋아할까? “그럼 오빠가 상으로 비행기 태워줄게.” “예? 비행기요? 비행기가 뭐에요?” “으응. 이런 거야.” 난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라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았다. 원심력이 생기며 라이의 다리가 바깥쪽으로 들린다. “꺄아아~!” 라이가 비명을 지른다. 무서워서 지르는 비명이 결코 아니다. 너무 좋아서 지르는 비명이다. 난 한참을 돌린 후 라이를 내려 놓았다. 머리가 어지럽다. 천장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바닥이 올록볼록 튀어 나온다. 아~ 너무 무리했나 봐. 난 비틀거리며 침대에 주저 앉았다. “너무 재밌었어요, 오빠. 한번 더 해주세요!” “…….” 미안하다, 라이야. 한번 더 했다간 이 오빠 죽을 지도 몰라. 난 라이가 맞춰 놓은 편지를 보았다. 의외로 이런 조각 맞추기에 소질이 있는지 하나도 틀리지 않고 꼼꼼하게 맞춰 놨다. 여기에 입을 맞추라고?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 놨나 보지? 작동 방법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전에 받은 텔레포트 구슬도 그렇고 드래곤들이 만든 건 왜 다 작동 방법이 이 따위냐? 난 그렇게 궁시렁거리며 편지에 입을 맞췄다. 쪽~! 그러자 편지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침대 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누군가가 인디임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모습인 거지? 풀어 헤친 상의, 헝클어진 머리, 살포시 감고 있는 눈, 빨갛게 달아오는 얼굴과 살짝 열려진 입술. “하아~ 아아~ 일루니아님 거긴…….” 아주 애로 영화를 찍어라, 찍어. 난 손으로 라이의 눈을 살짝 가렸다. 어린 나이에 이런 걸 보면 나중에 커서 성 정체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런 건 나중에 커서 봐야 하는 거야!(나야 물론 어릴 때부터 열심히 돌려 봤다. 하지만 라이는 절대 안 돼!) “거기 뭐? 거기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 거냐?” “앗!” 내 물음에 인디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더니……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이불로 자신의 몸을 덮었다. 이쯤되면 이 놈이 대체 일루니아 여사님을 만나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으음, 무슨 짓을 했을까? 건전하게 손만 잡았을리는 없을 테고. “무, 무슨 일이에요?” “…….” 그건 내가 묻고 싶다. 난 침대로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대체 거기 가서 사일런스 백작과 무슨 짓을 한 거니?” 내 질문에 인디는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저 반응만으로도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저, 전…… 아,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오호, 그러셔?” “저, 정말이에요.” “정말 했다고?” “……예? 하, 하다니요?” 인디는 이불을 끌어 올려 가슴께를 가리며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가증스럽다. 후후후~. 니가 감히 그랬다 이거지? “이 자식이!” 난 인디에게 달려 들었다. 오늘 이 놈을 땅에 묻고 개값을 치루리. “왜, 왜 이러세요?” “왜 이러는 지 몰라서 물어?” “흑흑, 저는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답니다.” “잘못한 게 없기는! 야, 임마! 날 죽을지 살지 모르는 의식 세계 속에 처 박아 놓고 넌 일루니아 여사님과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거지? 이 자식이! 니가 그러고도 드래곤이야? 너 지금 내 염장 지르려고 작정을 했냐?” 난 지금 이 순간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에게 심각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같은 남자로서 배신감과 실망감이 크다. 이 놈이 감히 일루니아 여사님과 그렇고 그런 짓을……. “너 임마, 똑바로 말해!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흑흑,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무 짓도 안 하긴!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놈이 옷 벗고 신음 소리 내고 있냐? 똑바로 말해, 임마!” “흑흑, 정말이에요.” 내 머릿속에 그림이 떠오른다. 좁은 방안에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과 인디, 단 둘만이 있다. 둘은 어색함에 어쩔줄 몰라한다. 무거운 공기가 둘 사이를 맴돈다. 인디는 조심스럽게 일루니아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일루니아는 몸을 움찔한다. 인디는 몸을 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일루니아의 귀에 속삭인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일루니아는 인디의 손을 뿌리치려 한다. 그러자 인디는 다시 속삭인다. “후후, 저는 드래곤이랍니다. 만약 당신이 저를 거부한다면 지도상에서 아이리스란 국가는 사라지게 될 거에요.” “……!” 투철한 애국심으로 중무장한 일루니아는 그 한마디에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인디는 더 이상 반항할 기력이 없는 그녀를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 타서……. “이런 빌어먹을! 드래곤이라는 종족적 위치를 이용하여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 강제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다니!” “흑흑, 아니에요. 전 일루니아님께 그렇고 그런 짓을 한적이 없답니다.” “시끄러, 임마! 정황이 확실한데 자꾸 발뺌할래?” “흑흑, 정말로 저는 일루니아님께 그렇고 그런 짓을 한적이 없어요. 다만…….” “다만?” “일루니아님께서 저한테 그렇고 그런 짓을…… 흐윽.” 부끄러움 때문인지 인디는 이불을 끌어 안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어흐흐흑!” 그렇게 된 거였단 말인가? 하긴 인디 성격에 어떻게 일루니아 여사님께 먼저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했다면 일루니아 여사님이 했겠지. 다시 또 그림이 떠오른다. 좁은 방안에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백작과 인디, 단 둘만이 있다. 둘은 어색함에 어쩔줄 몰라한다. 무거운 공기가 둘 사이를 맴돈다. 일루니아는 조심스럽게 인디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인디는 몸을 움찔한다. 일루니아는 몸을 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인디의 귀에 속삭인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인디는 손을 뿌리치려는 동작을 취한다. 하지만 그 동작에는 힘이 들어있지 않다. 좋으면서 괜히 한번 빼는 거다. “저, 저는…… 후웁!”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으리? 둘의 입술이 겹쳐지면서 자연스럽게 인디의 몸이 침대 위에 엎어진다. 그 위에 올라탄 일루니아가 인디의 몸을 떡 주무르듯 주무른다. 별로 경험이 없는 순진한 인디는 얼굴을 붉히며 괜히 저항한다. “아~ 아~ 안 돼요~.” 그 ‘안 돼요~’ 라는 말이 ‘돼요~’ 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가만히 계세요.” 일루니아는 저항하는 인디를 힘으로 제압하고 하던 일을 계속 진행한다. 인디는 좋으면서 괜히 또 뺀다. “하아~ 아아~ 일루니아님 거긴…….” 딱 그 순간에 이 놈이 여기로 텔레포트 된 것이다. 불쌍한 놈. 내가 편지에 입을 맞추지만 않았더라도 하던 거 계속할 수 있었을 텐데……. 난 핍박하던 것을 멈추고 살포시 침대에 걸터 앉았다. “라이야, 잠깐 나가서 놀고 있으렴.” 우리가 싸울까봐 조마조마하던 라이는 우리가 화해 모드로 돌아서자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장아장 걸어 나갔다. 난 인디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땠어?” “……예?” “빼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난 너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무, 무슨 말씀이신지?” “어허! 같은 남자끼리 왜 이래?” “……?” “일루니아 여사님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한 소감을 말해봐.” “그렇고 그런 짓 안 했는데요.” “어허! 또 뺀다. 우리 사이에 자꾸 그럴 거야?”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요?” “…….”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어지지. “아무튼 솔직하게 말해봐.” “그렇고 그런 짓 정말 안 했어요.” “어허! 안 하긴! 내가 다 봤는데.” “하려고 했는데 히로님께서 부르셨잖아요…… 흑흑!” “…….” 아차! 그랬던가? “어흐흐흑…… 으아앙!” 얼마나 억울했으면 이렇게 서럽게 울까? 그 심정 내가 십분 이해한다. 거사를 치루려는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다니. 아마 지금 인디의 심정은 결혼식이 파토났을 때 반데라스의 심정에 비해 더 억울하면 더 억울했지, 덜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나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 피해 보는 구나. “미, 미안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흑흑, 이럴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잖아. 자꾸 징징 짜지 말고 그만 그쳐. 뚝!” “흑흑, 뚝!” 말 잘 듣는 착한 드래곤. 인디는 이불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절 부르신 건가요? “어쩐 일로 부르긴. 그냥 심심해서 불렀지.” “……!” “농담이야. 그렇게 정색하지 마.” “잠깐 뒤돌아 계시겠어요?” “왜?” “옷 좀…….” 같은 남자끼린데 왜 이리 부끄러워하는 건지. 하여튼 웃기는 드래곤이라니까. 내가 뒤돌아서 있는 사이 인디는 옷을 제대로 입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머리카락까지 말끔하게 정리한 인디는 상당히 차분한 모습이었다. “의식 세계의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뭐, 나쁘진 않았어.” “이그리드님은 만나셨어요?” “물론 만났지.” “그럼 당신은……?” “나? 난 히로야. 니가 알던 히로.” 내가 대답하자 인디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그럼 이그리드의 의식을 끌어 내는 것이 실패하셨나요?” “아니. 성공했어.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어.” “문제라면?”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좀 복잡하게 됐는데…….” 말하기가 참 난감하다. 아이리스::박성호 TITLE ▶12 :: <아이리스 외전> 그 엘프 이야기 - 02 sharpshooter(psungho) 03-05-13 :: :: 19131 다음 날. 소녀는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더니 눈이 잘 안 떠지는지 이내 침을 묻혀 눈꼽을 떼어냈다. 아아~ 지저분 해~. 이런 생각을하며 소녀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뜨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베시시 웃음을 지었다. “잘 잤어요?” “아, 예…….” 사실은 한잠도 못잤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잠들 수 있겠는가? 소녀는 폴짝 뛰어 내 품에 안겼다. 어라, 이 처자 지금 뭐하는 거야? 난 당황해서 소녀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소녀는 더욱 달라붙으며 볼을 부비부비 했다. “헤헤~.” “…….” 웃지 마라. 정든다. “에헤헤~.” 바보처럼 웃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시리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순수해보이는 산골 소녀. 왠지 여동생 같은 느낌이 든다. 나에게도 귀여운 이복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엘프의 숲에서 좋은 엘프를 만나 잘먹고 잘살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 애를 좋아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랑했었다. 그녀는 나의 두 번째 사랑이었다.(참고로 첫사랑은 내 이모였다) 난 나중에 크면 그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다. 그래서 난 애에게 고백했다. “널 사랑해, 라임.” “나도 오빠 사랑해.” “아니, 내가 말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라…….” “그럼 무슨 사랑인데?” “난 너를 여자로 보고 있어.” “나 여자 맞아.” “그러니까 내 말은 남자로서 여자인 널 사랑한다는…….” “나도 여자로서 남자인 오빠를 사랑해. 난 여자고 오빠는 남자니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인 즉슨…… 우리 결혼하자. 결혼해서 아들, 딸 낳아서 잘 먹고, 잘 살자.” “아! 그런 얘기였어?” “응. 결혼해 줄 거지?” “아니.” “왜!?” “난 이미 사랑하는 엘프가 있어.” 그렇다. 그녀는 사랑하는 엘프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이는 여동생과 오빠에서 더 이상 진전이 되지 못했다. 난 그녀가 다른 엘프에게 떠나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래도 난 남자답게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난 그녀가 자신의 애인이라며 소개 시켜주는 엘프를 보는 순간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그 엘프는 나의 첫사랑 이모였던 것이다. “…….” 난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마도 영원히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내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이 팔짱을 끼고 나타났을 때…… 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내 여동생과 이모가 레즈였다는 게 첫 번째 충격이었고, 그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는게 두 번째 충격이었다. 이연타를 맞은 나는 그대로 녹아웃 됐다. 지금도 그 둘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너무너무 행복하게……. 나는 차마 그 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었던 인간 세상으로 뛰쳐 나왔다. 일종의 실연 여행이라고나 할까? 흑흑, 그런데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억울하다. 내 여동생을 여자에게 빼앗기다니. 그리고 그 여자가 내 첫사랑이었던 이모라니. 나처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엘프가 세상에 또 있을까? “무슨 생각해요?” “……그, 글쎄.” 여동생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반말이 튀어나온다. 그래. 이제부터 반말 써야겠다. 나이도 내가 훨씬 많은데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겠지. “배고파요.” “그,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소녀의 뱃속에서는 정말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일단 내 짐에 있는 건식량을 꺼내 주었다. 우걱우걱-! 소녀는 입안이 미어터져라 음식을 우겨 넣었다. 그 동안 정말 많이 배고팠나 보다. 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 후, 내 3일치 식량을 몽땅 먹어치운 소녀는 끄억~ 트름을 하며 배를 두드렸다. 이젠 뭘하는 게 좋을까? 소녀의 얼굴을 보니 뭘 해야하는지가 떠올랐다. 이렇게 지저분하다니! 얼굴 여기저기에는 검뎅이가 묻어 있고, 머리카락은 엉겨붙어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대체 목욕을 언제 한 거야? “여기 근처에 씻을 만한 곳 없니?” “저 쪽으로 가면 옹당샘이 있어요.” 난 소녀를 데리고 옹달샘으로 갔다. 집과 옹달샘 간의 길을 살펴보니 깊게 남아있는 발자국을 볼 수 있었다. 별로 안정적이지 못한 걸음. 무거운 짐을 지고 이동했음이 분명하다. 그 무거운 짐은 아마도 물통일 것이다. 가까운 곳에 샘이 이곳뿐이라면 식수와 생활수로 여기 물을 퍼다 썼겠지. 옹달샘은 말 그대로 작고 얕은 샘이었다. 물의 근원지는 바위틈이었다. 아마도 근처 하천의 물이 여기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다. 손을 넣어보니 차가웠다. 하지만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너 목욕 언제 했니?” “우웅…… 잘 모르겠어요.” 자기가 언제 목욕했는지도 모를 정도면 이거 상당히 문제 있는 거다. “그럼 지금 목욕 하렴.” “싫은데…….” 목욕하기 싫어하는 것은 애들의 본성. 하지만 이렇게 더러운 상태로 놔둘 수는 없다. 난 손수 소녀의 옷을 벗겨 주었다. 절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지어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어린 아이에게 성욕을 느끼겠는가? 난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 소녀를 목욕시켜주려는 것뿐이다. 소녀는 차가운 물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이내 그 좁은 샘에서 헤엄을 치고 물장구를 치는 등 생기발랄하게 놀았다. 소녀가 몸을 씻는 사이 난 집으로 돌아가 소녀의 옷을 가져왔다. 소매가 긴 일자 형태의 원피스. 정말 개성 없고 투박한 옷이다. 목욕을 마친 소녀는 꽤나 귀여웠다. 난 소녀의 몸을 닦아 주고 옷을 입혀 주었다. 깨끗하고 뽀송뽀송해진 소녀는 나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 볼을 꼬집기도 하고, 내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기도 하고, 내 헤어밴드에까지 손을 댔다. 헤어밴드가 벗겨지자 엘프 특유의 길고 뾰족한 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와! 귀가 이상하다.” 소녀는 신기하다는 듯 내 귀를 잡아 당기며 장난을 쳤다. 난 소녀를 억지로 떼어냈다. 하지만 소녀는 내 귀를 계속 만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소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이름이 뭐니?” “이름이요? 이름이 뭐에요?” “…….” 이름이 뭔지도 모른단 말인가? “아빠가 널 뭐라고 불렀니?” “우리 공주님이라고 불렀어요!” “…….” 공주는 아무나 하나? “그 외에 다르게 부른적은 없어?” “으음, 우리 애기라고도 불렀어요. 귀염둥이라고도 불렀고. 그리고…….” 난 한참 동안 소녀와 얘기를 나눈 끝에 소녀에겐 이름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름을 하나 지어줘야겠지? 어떤 이름이 좋을까?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의 이름. “라임.” “예?” “이제부터 네 이름이야. 마음에 들어?” 소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생긋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오빠 이름은 뭐에요?” “내 이름은 갈리온드야.” 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라임과 나의 동거 생활이 시작 되었다. * * * * 내가 라임과 행복한 동거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선 필요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시급한 것은 식량 마련이었다. 이 산은 몬스터들로 인해 사냥감이 제법 풍부한 편이었다. 그래서 라임의 아버지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이곳에서 사냥을 했던 것이고. 난 생계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사냥꾼으로 전직해야 했다. 세간에는 엘프들이 활솜씨가 좋다고 알려져 있고, 그것은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는 얘기다. 활이라는 것은 직사가 아닌 곡사다. 표적이 가까이 있으면 모를까,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맞추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결국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피나는 연습 밖엔 없다. 하지만 엘프들은 상당히 눈썰미가 좋아 한, 두 번만 해도 감으로 다 때려잡는다. 게다가 키도 크고 시력도 좋고 근력도 좋아서 활 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은 이 산에 있는 짐승과 몬스터들은 전부 내 밥이라는 거다. 그 누가 감히 갈리온드님의 화살을 피할 수 있겠는가? 난 같이 놀자는 라임의 투정을 물리치고 사냥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 어떤 놈이 좋을까? 아무래도 근수가 많이 나가는 놈이 좋겠지? 이런 생각들을 하며 걷는데 풀 사이에 발자국이 나 있는 것이 보인다. 발자국의 모양으로봐선 사슴이 틀림 없었다. 오호, 사슴이라…… 사슴 맛있지. 난 예전에 엘프의 숲에서 사슴을 잡아 구워 먹었던 일을 떠올렸다. 물론 채식주의자 엘프들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고 어떤 여자 엘프는 나에게 ‘야만인’ 이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분명 말하지만 난 야만인이 아니다. 야만엘프라면 모를까. 한참 동안 족적을 추적하다보니 저 멀리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사슴의 모습이 보인다. 어린 사슴과 큰 사슴이 같이 있다. 엄마와 아이임이 분명하다. “…….” 으음, 잡아 먹고는 싶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활줄을 당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냥감을 찾는 수 밖에. 반나절 정도를 돌아다는 끝에 나는 산토끼 두 마리를 잡고 오크 부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크들은 어느 정도 발달된 지능을 가지고 있기에 군집을 만들어서 생활한다. 오크들은 날 발견하더니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난 그들에게 족장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내가 엘프여서 일까? 족장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족장은 다른 오크들에 비해 덩치가 크고 날렵하게 생겼다. 나이는 한 40 정도. 으음, 죽을 날이 머지 않아 보인다. 50만 되도 근력은 많이 떨어질테고 그러면 젊은 도전자에게 족장의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이다. 족장이었던 자가 족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전 족장이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족장에게 권력이 완벽하게 이전되는 것이다.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나?” 오크들은 입이 좌우로 길게 찢어져 있어 말을 할때 바람 새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족장은 말을 많이 해서 그런건지, 연습을 해서 그런건지 바람 새는 소리 없이 정확한 발음을 하였다. 난 그에게 이 산에 나와 라임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를 공격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대가는?” 이들은 당장이라도 날 잡아 먹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나와 협상을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이들에게 도움되는 방향으로 얘기를 끌고 가야한다. 난 그에게 매달 일정량의 사냥감을 상납하겠다고 약조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 조건을 수락하고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오크들이 전투적인 이유는 그들에게 생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생산 능력이 없을뿐 아니라 생산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애초에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크 에게 농사를 지으라는 것은 호랑이에게 풀을 뜯어먹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똑같았다. 오크들이 이 산속에서 군집을 이루어 살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사냥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사냥감이 풍부했기에 오크들이 몰렸고, 오크들이 몰렸기에 인간들은 산에 접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냥감은 더욱 풍부해졌다. 아무튼 족장이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짐승 가죽을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품으로 바꾸어오라는 것이었다. 사냥감을 잡아 먹고 나면 가죽이 남는다. 오크들은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거나 갑옷을 만드는 것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죽은 남아 돌고, 그래서 그 처분을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인간에게도 할 수 있지만 오크들은 인간을 잘 믿지 않는다. 엘프야 물론 믿는다. 난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 중간에 얼마 띠어 먹을 생각으로. 이건 절대 삥땅이 아니다. 알선 수수료라고나 할까? 이제 나와 라임은 오크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몬스터의 공격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내 조사에 의하면 이 산속에는 오크를 제외한 몬스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오우거는 번식 능력이 떨어지니 내가 마음 잡고 사냥하면 금방 자취를 감출테고. 이러저런 일을 하는 사이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아! 라임이 걱정하겠군. 난 한 손에 산토끼 두 마리를 대롱대롱 들고 집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문 앞에서 어린 소녀가 쪼그려 앉아 우는 것이 보였다. 라임이었다. “흑흑~.” 참 처량해 보인다. “왜 우니?” 내가 묻자 라임은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그러더니 울음을 터트리며 나에게 달려 들었다. “흑흑~ 오빠가 안 들어와서…… 훌쩍~ 아빠처럼…… 우에에엥~.” “…….” 내가 해가 저물도록 안 들어오니 아빠처럼 죽었을까봐 걱정했다는 건가?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본 인간들은 닳고 닳아 썪어 문드러졌다. 하지만 이 소녀는 순수했다. 자연을 닮은 순수함. 갑자기 소녀의 얼굴이 너무너무 예뻐보인다. 난 라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배 고프지? 오빠가 맛있는 거 해줄게.” 라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라임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생활은 단조롭기 그지 없었다. 나는 나가서 사냥을 했고, 라임은 집에서 내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가끔 생필품을 사거나 오크들이 부탁한 가죽을 처리하기 위해 근처 마을로 가기도 했다. 근처 마을이라고 해봐야 꼬박 사흘은 걸리지만. 라임은 요리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언제나 요리는 내 몫이었다. 참고로 난 상당한 요리 솜씨를 갖추고 있다. 라임은 한마디 불평 없이 내 요리를 먹었다. “오빠, 이거 너무 맛있어요!” 그 말은 나에게 행복이었다. 처음에는 라임이 몇 년만 라임을 도와준 뒤 이 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여행이고 모험이고 하는 것들은 전부 남의 일로 치부되었다. 응? 인간 여자와 사랑은 하지 않고 모험만 하겠다는 결심은 어찌되었냐고? 훗! 결심이란 원래 꺾이라고 있는 거다. 시대의 흐름에 순응해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 엘프가 지향해야할 길이 아니겠는가? 어느덧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갔다. 세월은 정처 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무심하기도 해라. 천년을 사는 엘프에게 몇 년은 한순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산속의 단조로운 생활속에 내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전부 라임 때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라임은 쑥쑥 컸다. 예전의 라임의 키를 재고 기둥에 그어 놓았던 금은 이젠 라임의 허리께 밖에 오지 않았다. 라임은 어느덧 숙녀가 된 것이다! 아직 소녀티를 완전히 벗지 않았지만 그래도 클만큼 다 컸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 어쩌긴 뭘 어째? 죽 쒀서 개줄 일 있냐? 가끔 라임과 같이 마을로 내려가면 마을 청년, 처녀들이 열광한다. 처녀들이야 당연 날 보고 열광하는 거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엘프들 중에서 탁월한 외모를 가진 내가 인간들 눈에는 어찌 보이겠는가? 당연 백마 탄 왕자로 보일 것이다. 걔중에는 노골적으로 잠자리를 요구하는 여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언제나 정중히 거절했다. 사실 그 요구 다 받아들였다가는 나 지금쯤 뼈도 안 남았다. 아무튼 처녀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청년들은 왜 열광하는 가? 그 놈들이 전부 호모여서? 게이여서? 동성애자여서? 뭐 그런 놈들이 일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 왜 열광하는 가? 누구를 보고 열광하는 가? 그야 당연 라임을 보고 열광하는 것이다. “…….” 이런 잡것들이 누굴 보고 열광해? 그렇게 할 일이 없냐? 고립된 마을일 수록 결혼 시기가 빨리지기 마련이다. 선택 폭이 좁은데다가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결혼해 많은 자식을 나아야 하기 때문이다. 라임은 지금 결혼적령기라 해도 좋을 나이였다. 그렇기에 마을 청년들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들 중 하나가 라임과 결혼하기를. 하지만 나는 라임의 보호자로서 저것들에게 라임을 넘겨주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죽 쒀서 개줄 일 있냐? 차라리 그 죽을 내가 마시고 만다! “…….” 내가 마셔? 지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굳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 하지만 정작 시간은 내 생각만큼 그리 많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우리집에 찾아온 것이다. 찾아온 사람은 16세의 건장한 남성으로 근처 마을 촌장의 아들이었다. 이름은 론. 힘도 제법 세고, 나름대로 공부도 해서 글도 읽을 줄 안다. 얼굴도 저만하면 잘생겼고. 아무튼 산골 마을에서 봤을 땐 특출난 인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놈이다. 마을 처녀들의 신랑감 1순위로 꼽히는 놈이기도 하고. 소문에 의하면 마을 처녀들의 수 많은 청혼을 전부 물리쳤다고 한다. 난 그 얘기를 듣고 이 놈이 호모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날 만나기 위해 우리집에 찾아왔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놈은 라임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왜 라임을 만나러 왔을까? “…….” 다 큰 청년이 다 큰 처녀를 만난다는데 이유야 뻔한 것 아니겠나? 이 놈이 나에게 대뜸하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라임을 제게 주십시오! 제가 꼭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 어째서 이 놈을 한대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아니, 한대 치기 보단 눕혀 놓고 밟아 버리고 싶다. 라임이 문을 열고 나오자 이 놈은 라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전 그 아름다운 자태에 눈이 멀었고, 그대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귀가 멀었고, 그대의 가미로운 향기에 흠뻑 취했습니다. 그대야 말로 저의 태양입니다. 그대의 사랑으로 저를 감싸 주소서. 그러면 저는 해를 바라보며 사는 해바리기처럼 언제나 그대를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글 좀 읽을 줄 안다더니 하이틴 로맨스 물만 신물 나도록 봤나 보다. 한 귀로 듣기에도 외운티가 풀풀 난다. 하긴 니 주제에 어찌 저런 말을 지어낼 수 있겠니? 나라면 모를까. 난 라임의 얼굴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 어째서 얼굴이 붉어진 거지? 그 웃음은 뭐야? 서, 설마 저딴 놈이 좋다는 것은 아니겠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라임의 말에 녀석의 얼굴이 환한 기쁨으로 빛났다. 마치 결혼 승락이라도 받은 듯 말이다. 이봐, 난 아직 허락 안 했어! 라임도 허락 안 했고! 녀석은 기쁜 마음을 간직한채 집으로 돌아갔다. 녀석이 웃는 모습을 보니 괜히 배알이 뒤틀린다. 쫓아가서 제거할까? 아아~ 없애 버리고 싶어~. 그날 라임은 하루 종일 싱글벙글이었다. 그리고 난 하루 종일 이를 벅벅 갈았다. 난 사냥을 나간다고 말하고 활과 화살을 챙겨 집을 나왔다. 계속 집에 있다가는 복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사냥감이 보이는 족족 화살을 날렸다. 사냥감을 그놈이라 생각하고 쏘니 백발백중이다. 난 한달 동안 사냥할 사냥을 오늘 하루만에 끝냈다. 집에 돌아오니 언제나처럼 라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밥 주세요!” 밥이라…… 나는 어쩌면 단순한 식모일지도 모른다. 밥 해주고 빨래 해주는 식모. 그래! 나는 식모야! 식모라구! 흑흑. 우리는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뭘?” “론의 청혼이요.” “…….” “좋은 남자 같아요. 그쵸?” “글쎄.” “청혼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너 좋을 대로 해. 좋으면 결혼하며 싫으면 마는 거지.”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내 속마음은 결코 이렇지 않았다. 그놈이랑 결혼하지마! 제발! 난 그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라임만 좋다면 보내줘야겠지. 인간은 인간과 결혼해서 사는게 행복할 테니까. 흑흑, 역시 엘프랑 인간은 이루어질 수 없는 거야~! 그날 밤, 난 짐을 챙겼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싸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던지……. 얼마 후에 그 놈이 또 찾아왔다. 옷을 쫙 빼 입고, 머리에는 개기름을 바른 채. 저 꽃다발은 뭐야? 설마 라임에게 주려는 건가? 예상대로 그 놈은 꽃다발을 라임에게 내밀었다. 라임은 환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받았다. 저 꽃다발의 꽃들을 전부 씹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반드시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결혼 전의 남자들은 언제나 저런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 얘기를 믿는 것은 바보 짓이다. 행복이라고? 너 같은 놈과 결혼해서 애 낳고 살면 그게 행복인 거냐? “죄송해요. 저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뭐라? 라임의 말에 그 놈과 나는 경악했다. 그놈은 너무 놀라서, 나는 너무 좋아서. “어, 어째서입니까?” 녀석은 절규하듯 외쳤다. 라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라임은 집안으로 들어갔고, 녀석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아아~ 그런데 내 기분이 왜이리 좋은 걸까? 난 히죽 웃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뭐 살다보면 여자할테 차일 수도 있는 거지. 너무 상심하지 마.”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게나. 음하하하! 아차, 라임 배고프겠다. 밥해줘야지~. 내가 요리를하는 사이 라임은 녀석에게 선물 받은 꽃을 식탁 위에 예쁘게 꽃아 놓았다. 음식이 완성되자 우리는 오봇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왜 청혼을 거절한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 챙그랑-! 난 너무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트렸다.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니? 대체 어떤 놈에게 마음을 빼앗긴 거지? 내 그놈을 당장……. “아니, 사랑하는 엘프라고 해야하나?” 뭐? 사랑하는 엘프? 라임이 나말고 다른 엘프를 알고 있나? 당연 모른다. 인간 세상에서 엘프 만나기가 쉬운줄 아나? “오빠 아직 대답 안 해주셨잖아요.” “으응? 무슨 대답?” “예전에 기억 안 나세요. 제가 오빠 처음 만났을 때 오빠한테 청혼했잖아요.” “……응?” 기억 난다. 내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으리. 그때 라임은 내 품에 안겨 이렇게 말했었다. <저랑 결혼해요. 저 오빠 사랑해요.> 그래. 그랬었다.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니. 라임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대답 해주실래요?”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이젠 아름다운 숙녀였다. 가슴이 왜이리 두근거리는 걸까? 그제야 난 확실하게 알수 있었다. 난 세상 그 누구보다 라임을 사랑하고 있었다.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 모두 실패한 나에게 새로운 사랑이 다가온 것이다. “대답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있으리. 난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영원히 널 놓지 않을게~. 다음 날, 우리는 그녀의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 이제부터 대학은 축제 기간입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드렁큰 타이거가 온다고 하는군요. 으음... 비록 휴학생이지만 술취한 호랑이들 보러 학교 가야지~ TITLE ▶13 :: <아이리스 13권> 9클래스 - 11 sharpshooter(psungho) 03-05-14 :: :: 22520 바람이 불어온다. 한 장의 휴지가 바람을 따라 나풀나풀 날아올랐다. 누군가가 버린 것으로 추정 되는 휴지. 바람이 물었다. ‘휴지야 너는 왜 휴지로 태어났니?’ 휴지는 대답이라도 하듯 몸을 흔들었다. ‘글쎄. 아마도 운명이 아닐까?’ 바람이 다시 물었다. ‘휴지로 태어나서 행복하니?’ 휴지가 대답했다. ‘응. 난 휴지로 태어났고 휴지로서의 사명을 다했어. 그래서 행복해.’ 바람이 또 물었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없니?’ 휴지가 또 대답했다.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음 생에는 뽀송뽀송한 엠보싱 휴지로 태어나고 싶어.’ 바람과 휴지의 대화는 거기서 그쳤다. 바람은 휴지를 놓아주었고, 휴지는 길바닥에 떨어졌다. 한 소녀가 그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몰상식한 놈이 쓰레기를 아무데다 버린 거야?’ 윤기가 흐르는 녹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그녀는 세레나였다. 새하얀 드레스를 수수하게 차려 입은 그녀의 모습에서 히로의 의식 속에서 가출을 일삼았던 비행 청소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는 지금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중이었다. 그 생각은 다름 아닌 히로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 남자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언제나 자신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반데라스를 두고 다른 남자 생각이라니. 세레나도 정말 너무한다. 아아~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우유부단해서야…… 이러면 타인에게 상처만 줄뿐이다. 제발 한명만 정해라. 반데라스는 오늘도 멋지게 옷을 차려 입고 손에 한다발 꽃을 들고 세레나네 집을 찾았다. 이 놈도 참 주책이 아닐 수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여자의 집에 들르다니. 이거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나? 레이트 백작가의 집사는 정문으로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반데라스를 보고 출결표에 도장을 찍었다. 출결표에는 도장이 빼곡히 찍혀 있었다. 그것만봐도 반데라스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세레나네 집을 드나들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국왕이란 놈이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냐? 이 나라의 앞날이 심하게 걱정된다. 반데라스는 자연스럽게 세레나의 방으로 올라갔다. 똑똑-! 노크를 하자 세레나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그 행동에 반데라스는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아! 세레나양께서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다니!’ 원래 이 놈은 사소한 것에도 큰 감동을 받은 순정파다. 반데라스는 세레나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자주 들어와본 곳이었지만 반데라스의 행동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하긴 여자의 방에 들어가는데 어찌 조심스럽지 아니 하리오. 둘의 1차 결혼식은 히로의 난입으로 인해 개판이 되었다. 그 후 반데라스는 조속히 2차 결혼식을 진행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하지만 세레나는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되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둘은 간략한 약혼식으로 서로의 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그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어제 봐 놓구선……. “잘 지냈어요.” 돌아온 세레나의 싸늘한 대답. 당연한 걸 물었으니 당연한 대답일지도. 하지만 소심한 반데라스는 그 대답에 큰 상처를 받았다. ‘세레나양은 내가 반갑지 않은 건가? 혹시 나 세레나양에게 미움 받고 있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반데라스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세레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반데라스가 울건 말건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반데라스는 눈물을 꾹 삼키며 말했다. “시, 식사는 하셨습니까?” “했어요.” “어, 어젯밤 잠은 잘 주무셨는지요?” “잘 잤어요.” “그, 그러면…….”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원래 대화라는 것은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닌가? 간단히 말해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쪽이 받아칠 의지가 없으니 대화의 맥이 끊길 수 밖에. “지, 지금 뭐하세요?” “보면 몰라요? 창밖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세레나는 창가에 앉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점점 무안해지는 반데라스. ‘어째서 세레나양은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이건 세레나의 잘못이라기보다 전적으로 반데라스의 잘못이다. 연애란 밀고 당기는 재미에서 하는 건데 스토커처럼 매달려대니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어찌보면 반데라스는 인기 없는 남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넓고 아름다웠다. 언젠가는 다시 저곳으로 나가고 싶었다. 아마 왕비가 된다면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세레나는 결혼을 미루었다. 결혼하기 전에 세상을 좀 더 경험해 보고 싶었다. ‘여행이나 한번 떠나볼까?’ 오늘 같이 화창한 봄날이면 언제나 드는 생각이다. 비록 한번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여행을 한다고 하면 부모님께선 뭐라고 말씀하실까?’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펄쩍 뛰며 반대하실 거다. 어쩌면 밧줄로 꽁꽁 묶고 방안에 던져 넣은 뒤 방문에 못질을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가출을 할까?’ 상당히 괜찮은 생각이다. 하지만 실효성은 적었다. 귀족집 딸이 가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출은 아무나 하나? 아마 수도도 벗어나지 못해 도로 잡혀갈 것이다. 세레나가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반데라스는 뒤에 서서 그녀를 바라 보았다. 길게 흘러내린 진초록색 머리카락과 꿈을 꾸는 듯 반짝거리는 진초록색 눈동자. 가녀린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쿵쿵- 쿵쿵-! ‘너무 아름다워.’ 그렇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반데라스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만져보면 어떤 느낌일까? 순간, 예전에 무도회장에서 히로가 세레나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것이 기억났다. ‘그, 그딴 놈이 감히 세레나양의 손을 만지다니…… 그래도 그 이상은 가지 않았겠지? 설마 키스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예전에 둘이 키스하려던 것도 기억났다. 만약 그때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했을까? 말았을까? 반데라스는 워낙 소심한 놈이어서 여자의 과거에 신경을 쓰면서도 차마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알고보면 이 놈도 상당히 나쁜 놈이다. 세레나 같은 미소녀와 약혼까지 했으면 감사는 못할망정 과거에나 신경 쓰다니! 지 주제를 알아야지!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손이 부르르 떨린다. 하긴 이게 남자들의 공통점 아니겠는가? 자기 과거야 개판이건 말건 여자 과거는 깨끗하길 바라는 마음. 상당히 속물적인 근성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심정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아까 불던 바람이 다시 불어 온다. 그 바람은 이번에 전단지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전단지야, 너는 왜 전단지로 태어났니?’ 전단지가 대꾸했다. ‘그러는 너야 말로 왜 바람으로 태어났냐?’ 바람이 대답했다. ‘그게 자연 진리거든. 그런데 너는 전단지로 태어나서 행복하니?’ 전단지가 대꾸했다. ‘그러는 너야 말로 바람으로 태어나서 행복하니?’ 바람이 대답했다. ‘글쎄. 난 행복이 뭔지 모르겠어.’ 전단지가 대꾸했다. ‘저도 모르는 주제에 묻기는…….’ 대화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싸가지 없는 전단지다. 그도 그럴 것이 전단지에 적힌 내용 자체가 워낙 특이하다. 전단지는 바람을 타고 둥실둥실 날아올라 한 소녀의 앞에 떨어졌다. 그 소녀가 세레나임은 두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세레나는 바람에 날려 온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무슨 내용일까? 이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왠지 흥미가 생긴다. “이게 뭐야?” 세레나는 순간 눈이 튀어나오는줄 알았다. 그만큼 전단지에 적힌 내용은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반데라스는 세레나의 어깨너머로 전단지를 보았다. “허억! 어떻게 이런…….” 반데라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상식선에서 생각해봐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설마 그놈이 무슨 술수를 부린건 아닐까? 그래. 분명 무슨 술수를 부린 걸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대체 그 놈은 나랑 무슨 원수가 졌길레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힌단 말인가?’ 세레나의 눈은 여전히 전단지를 향해 있었다. 그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것이 전단지가 뚫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그나저나 무슨 내용이기에 이들이 이렇게 놀라는 걸까? * * * * 일루니아는 요즘들어 골치가 아팠다. 문제는 드래곤 때문이었다. 이 전쟁은 애초에 아이리스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그 불리함은 상당 부분 개선되어 이젠 별로 불리함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한다면 아이리스는 다시 흥할 수 있을까? 국가를 재건하는 것과 국가가 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설사 아이리스가 전쟁에서 승리해 예전의 영토를 되찾는다 하더라도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무리다. 전쟁 억제력이 없는 나라는 타국의 먹이가 될뿐이다. 그 어떤 국가가 미쳤다고 아이리스가 안정되어 국력을 키우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아마 전쟁이 끝난다해도 자바스와 아토리아는 끊임없이 아이리스를 괴롭힐 것이다. 군사적 행동이든 정치적 행동이든 말이다. 그런데 변수가 등장했다. 그 변수는 바로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였다. 역사상 드래곤이 인간의 전쟁에 개입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는 적극적인 개입을 약속했다. <전 일루니아님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어요!> 말하는 걸로 봐선 시키면 뭐든 할 것 같다. 뭐 아이리스를 돕는 것이 아니라 한 여인을 돕는 거지만 일루니아 입장에서 보면 그게 그거 아니겠나? 아무튼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의 협조를 약속 받음으로써 아이리스는 천군만마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드래곤이 또 나타났다는 것이다.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여자 모습을 한 그 드래곤은 라이레얼이라는 하프엘프 여인의 팔에 매달려 이렇게 외쳤다. <전 라이레얼 언니를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어요!> 만약 라이레얼이 다른 국가로 돌아선다면 아이리스는 끝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루니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라이레얼이 아이리스를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아야 했다. 그것이 애국이기에. “아줌마! 식사가 이게 뭐야? 설마 나보고 이런 빵조각 몇 개 처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맞아요! 우리 언니가 이딴 거 먹을 것 같아요?” 남이 식사 시간마저 아끼기 위해 빵 먹으면서 일 하는데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이들은 다름 아닌 라이레얼과 카르였다. 라이레얼은 건들거리며 일루니아가 업무를 보는 탁자 위에 턱- 하니 발을 올려 놓았다. “어이, 아줌마. 나가서 밥상 차려와.” “맞아요. 나랑 언니 먹게 밥상 차려와요.” 일루니아는 이를 악물고 이들의 말을 못들은척 했다. 생각 같아서는 진짜 없애버리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아줌마, 뭐해? 내 말 안 들려?” 인내심에는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일루니아는 지금 그 한계에 다달았다. 아무리 조국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더 이상 참았다가는 복장이 터져서 죽을지도 모른다. “이 싼티 나는 계집애가 정말!” 일루니아가 소리를 치며 벌떡 일어서자 라이레얼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그녀는 강력한 지원군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줌마? 라이레얼 언니한테 싼티 나는 계집애라뇨? 당장 그말 취소하지 못 해요!” “넌 닥치고 있어!” 원래 여자가 히스테리 한번 부리기 시작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지금 일루니아가 꼭 그러했다. 상대가 드래곤이면 어떠하리? 카르는 일루니아의 강도 높은 모욕에 한동안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했다. 하지만 이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아줌마 말 다 했어요?” “그래. 말 다 했다!” 일루니아가 독기를 품은 눈을 치켜 뜨며 소리치자 카르는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나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라이레얼 언니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갑자기 주변 공기의 온도가 팍 내려갔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카르의 흰색 머리카락과 흰색 원피스가 요동을 치듯 흔들렸다. 카르의 새하얀 손에는 주먹만한 얼음 결정들이 모여있었다. 이쯤되자 일루니아와 라이레얼은 상황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소녀처럼 보여도 카르는 화이트 드래곤이었다. 손 한번 휘두르는 걸로 수천명을 얼려죽일 수도 있었다. “그만해!” 라이레얼이 짜증스럽게 외치자 카르의 손에 모여든 얼음 결정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어, 언니.” 라이레얼이 화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카르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훌쩍~ 화내지 말아요, 언니. 무섭단 말이에요.” “알았어. 화 안 났으니까 이리와.” 라이레얼이 웃으며 손짓하자 카르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소매로 닦고 라이레얼의 팔에 매달렸다. “헤헤~ 언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일루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드래곤들이 전부 싸이코야.’ 정확한 지적이었다. 저 모습을 보고 누가 드래곤이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일루니아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라이레얼은 자꾸만 들러붙는 카르를 떼어내며 대꾸했다. “우리 히로 언제와?” 역시 괜히 찾아와서 시비 건 것은 아니었다. 뭔가 목적이 있으니까 찾아왔겠지. 그리고 목적은 결국 그놈이었다. “그 인간이 언제오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줌마가 모르면 누가 알아?” “니 옆에 있는 계집애한테나 물어봐! 자꾸 업무 방해하지 말고!” 미운정 때문일까? 둘은 어느새 친근하게 반말을 주고 받는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하긴 몇 살 나이차가 뭐 그리 중요하겠냐? 서로 마음만 잘 맞으면 되는 거지. ‘이 계집애 계속 상대하다간 내 교양만 떨어지겠다.’ 일루니아는 더 이상 라이레얼을 상대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하고 업무 전선에 복귀했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막사를 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일루니아를 괴롭혔다. “아아~ 우리 히로 보고 싶다. 우리 히로는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라이레얼은 입만 열면 히로 얘기였고, 그때마다 카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히로 자신은 모르고 있겠지만 히로와 카르는 이제 연적(戀敵)이었다. 라이레얼이 히로를 포기 하지 않는한 타협이란 없었다. ‘감히 나의 라이레얼 언니의 마음을 훔쳐가다니! 용서할 수 없어!’ 히로와 카르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 했다. 둘중 하나가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크로니스와의 싸움에서 죽어버리면 정말 좋을텐데.’ 그게 최선이었다. 그러면 언니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를 죽일 기회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9클래스일테니까. ‘이제부터 죽으라고 기도라도 해야 하나? 아니야. 그건 둘째 문제고 일단은 라이레얼 언니의 마음을 사로잡는게 중요해. 난 절대 인간따위에게 지지 않아!’ 그렇다. 이것은 하프엘프를 사이에 둔 드래곤과 인간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물론 히로야 ‘그냥 너랑 라이레얼이랑 행복하게 살아’ 라고 말하겠지만. 카르가 히로를 떠올리며 적개심을 불태우는 사이 인디가 슬며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인디가 들어서자마자 일루니아는 벌떡 일어나 반갑게 인디를 맞아 주었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저, 저는…….” 일루니아의 다정다감한 환대에 인디는 어쩔 줄 몰라했다. ‘아~ 일루니아님. 일루니아님도 날 그리워했나봐. 어쩜 좋아~.’ 사실 일루니아는 아까 전부터 인디가 곁에 있어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이유는 당연 라이레얼과 카르 때문이었다. 두 계집애가 아주 콤비로 놀고 있는 꼴을 보고만 있자니 복장이 뒤집혔는데 든든한 아군이 등장한 것이다. 일루니아는 당황하는 인디를 꼬옥 껴안았다. “잘 오셨어요.” “이, 이러시면…… 돼요…….” 이러시면 되긴 뭘 돼? 웃기는 군. “다 늙어서 저게 뭐하는 짓이람.” “그러게 말이에요, 언니. 뭐 어쩌겠어요? 블랙은 다 저 모양 저 꼴인데.” 남들이 뭐라고 하건 말건 일루니아와 인디는 신경쓰지 않았다. 자기들이 좋다는데 어쩌겠냐?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일루니아는 굳이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이 드래곤이 여기 온 이유야 뻔한 거 아닌가? ‘당연 날 보고 싶어서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화장이라도 좀 할 거 그랬나?’ 요즘들어 부쩍이나 외모에 신경을 쓰는 일루니아였다. 하지만 인디는 일루니아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카르를 만나러 왔어요.” “…….” ‘날 만나러 온 게 아니었단 말이야?’ 일루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루니아는 잠시 싸늘한 눈을 인디를 노려보더니 이내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왜, 왜 그러세요, 일루니아님?” “됐어요! 저 계집애 만나러 왔으면 괜히 저랑 쓸데없는 대화 나누지 말고 저 계집애랑 말해요.” 아아~ 알수 없는게 여심이라더니. 일루니아가 이렇게 쉽게 삐질 줄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어째서 일루니아님께서 화를 내시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맞아. 내가 뭘 잘못한 게 틀림 없어.’ 인디는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사죄의 말을 하려 했지만 일루니아의 주위에는 싸늘한 공기가 흐르고 있어 말을 거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는 수없이 다음에 용서를 구하기로 했다.하지만 이건 잘못 된 선택이었다. 여자들은 이럴 때야 말로 더욱 말을 걸어주길 원한다.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나한테 계속해서 용서를 구해’ 라는 제스처의 일종이다. 그런데 멍청하게 그냥 등을 돌려버리다니. 나중에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뒷감당이야 어찌되었든 인디는 카르에게 다가갔다. 라이레얼의 팔에 코알라처럼 매달려 있던 카르는 다가오는 인디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하, 할 말이 있어서.” “할 말이 있으면 떨어져서 해. 나의 라이레얼 언니한테 접근하지 말고.” “저, 저기 그게 중요한 일이야.” “중요한 일? 무슨 일인데 그래?”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 인디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무슨 일이야? 궁금증을 참지 못한 라이레얼이 물었다. 그 순간, 양복을 입은 키 큰 남자 하나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녹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는 놀랍게도 진명의 승상인 제갈량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일루니아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직접 만난적은 없지만 일루니아는 제갈량에 대해 숱한 소문을 들어왔었다. 초록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 피어싱 한 귀와 몸에 걸치고 있는 금딱지들. 그리고 검은색 양복과 검은색 구두. 게다가 건방진 표정과 건방진 행동.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는 분명 진명의 승상인 제갈량이었다. 그런데 진명의 승상인 그가 이곳엔 왠 일이란 말인가? 설마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젠장.” 욕지꺼리를 내뱉은 제갈량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일루니아는 그런 그에게 다가갔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제갈 승상님 맞으시죠?” 순간, 제갈량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넌 뭐야?” 싸가지 없는 말투는 여전하다. 하지만 일루니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중요 인사를 대할 때는 언제나 예의바르게 대해야 한다. “전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라고 합니다.” 예의바른 일루니아의 말에 제갈량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샤이 사일런스 백작이셨군. 인디카즈네가 반했다는 인간.” 그 말에 일루니아는 깜짝 놀랐다. 제갈량과 인디가 아는 사이였단 말인가? 일루니아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인디를 보았다. 인디의 표정은 ‘저 남자와 저 잘 아는 사이에요’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아~ 머리 어지러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 순간, 또 한명의 남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파란색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 남자였다. “어이, 오랜만에 얼굴들 보는 군.” 남자의 말에 제갈량은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얼마전에 본 것 같은데.” 그러자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랬었나?” 일루니아는 이제 기절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 남자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어째서 업무를 처리해야할 내 막사에 하프엘프 하나, 드래곤 둘, 남자 둘이 와 있는 거지? 이거 뭐하자는 거야? 설마 나랑 해보자는 건가? 일루니아는 인디의 옆구를 살짝 찔렀다.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어요?” 일루니아가 먼저 말을 걸자 인디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인디는 주저없이 나긋나긋하게 대답해 주었다. “저 둘도 드래곤이에요. 저쪽은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구요, 저쪽은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 “……드래곤이요?” “예. 저랑 카르도 드래곤이구요.” 아아~ 충격적이다. ‘그, 그럼 이 막사 안에 드래곤들이 넷이나…….’ 이것은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일이었고, 일루니아는 그런 충격을 견뎌낼만큼 강인하지 않았다. “아아~.” 일루니아는 한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간다. “꺄악! 일루니아님!” 인디는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일루니아는 이미 실신한 뒤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갈량이 중얼거렸다. “잘 됐네. 일 하나 덜었군.” 일 하나를 덜었다는 얘기는 일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일은 라이레얼이었다. 제갈량은 라이레얼에게 다가가 라이레얼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수면 가스라도 마신 것처럼 바로 픽 쓰러졌다. 이제 이 막사는 드래곤들의 차지가 되었다. 넷은 각자 편한 위치에 편한 자세를 취했다. “이제 말해봐, 뭐가 문제야?” 인디가 이곳으로 드래곤들을 불러모았다. 친목도모를 위해 고스톱이나 한판 치자고 부른 것은 물론 아니다. 큰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인디는 그 큰 문제를 다른 드래곤들에게 얘기했다. 그 내용은 제갈량이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게 사실이야? 확인해 봤어?” “예. 확실해요.” 드래곤들은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되면 계획을 처음부터 수정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 않았다. 아니, 예상을 했더라도 정말 현실로 일어난 지금 상황에선 당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제갈량은 돛대를 입에 물고 담뱃갑을 구기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이런게 된 거지? 분명 계획은 완벽했어.” 에스카네스가 말했다. “그 인간이 변수였다는 거겠지.” 카르가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인디는 대답 대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로니스는 폭주 중이었고 그것을 막을 자는 오직 아이언스 히로뿐이었다. 하지만 이 인간은 너무나 약했다. 콧김 한방이면 나가 떨어질 정도로. 이 인간은 레벌을 좀 업(up)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했다. 녀석의 머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머리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그리드의 기억을 녀석의 의식과 융화시켜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려 했다. 하지만……. “역시 그 놈은 병신이었어.” 기억을 융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의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래도 그나마 했기에 어느 정도 마나를 활성화 시키는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어째서 8클래스까지 밖에 안 되는 거냐고?” “그 새끼가 병신이어서 그렇다니까.” 그렇다. 원래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이그리드의 기억을 융화시키는 순간 9클래스 마법을 쓸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드래곤들은 히로 역시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 히로는 9클래스를 마스터하지 못했다. 마나가 활성화 되어 8클래스 마법까지는 쓸 수 있겠지만 9클래스 마법은 무리였다. 8클래스와 9클래스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그 이상이었다. 드래곤들의 입장에서 보기엔 8클래스나 5클래스나 그게 그거였다. 간단히 말해 히로는 지금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드래곤들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히로는 크로니스와 싸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했다. “으음, 역시 그 방법 밖엔 없겠군.” 싸우지 않고 크로니스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했던 방법인데 지금은 그 방법밖엔 없었다. 인디의 얼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런…….” 하지만 다른 드래곤들은 태연했다.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제갈량이 말한 그 방법이란 상당히 치사하고 비열한 방법이었다. 일단 차원의 열쇠로 새로운 차원계를 열고 히로로 하여금 그곳으로 크로니스를 유인하게 한다. 그리고 그 차원계를 닫아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문제는 차원 이동 마법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걱정할 필요는 별로 없었다. 자연계에서 마나를 끌어다 쓰지 않는한 그 마법을 발동할 수는 없을 테니. 드래곤들은 각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제갈량은 이렇게 생각했다. ‘뭐 그딴 놈 하나 없어지건 말건 별 상관 없겠지.’ 에스카네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인간이 죽는 것은 안 됐지만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그렇게 해야겠다. 인디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아~ 안 돼. 죄 없는 히로님을 아공간에 가둘 수는 없어.’ 카르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인간을 아공간에 가둬버린다고? 그럼 라이레얼 언니는 자연스럽게 나한테 오겠네.’ 먼저 입을 연 드래곤은 카르였다. “난 대찬성이야. 애초에 9클래스끼리의 싸움이란 게 말이 안 됐어. 그러니 아공간에 사이좋게 가둬 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인디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을…….” “블랙 주제에 시끄러! 입 다물고 있어!” “너, 너야 말로 화이트 주제에!” 카르는 인디를 노려보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 그럼 다수결로 결정하자.” 다수결. 민주주의 사회에서나 사용할 법한 선진적인 결정 방법을 어찌 반대할 수 있으리. 결과는 당연 3 대 1로 인디의 패배였다. “그럼 결정된 거군.” 얘기가 끝나자 드래곤들은 각자 흩어졌다. 이제 막사 안에 남아있는 이들은 기절한 일루니아와 라이레얼, 카르, 인디 뿐이었다. 카르는 인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건 세계 전체의 문제야.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아줬으면 해.” 인디는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카르의 말이 맞았다. 필요하다면 해야만 했다. 인간의 목숨 하나와 세계의 안정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죄송해요, 히로님.” 인디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요즘 들어 슬럼프네요. 이러다가 우울증이나 걸리지 않을까 걱정... 그리고 내일 <아이리스 12권>이 출간 됩니다. 자정을 기해 12권 분량 일괄 삭제합니다. <샷 오브 데스티니 4권>은 다음주 중에 출간 됩니다. 그럼 이만~ TITLE ▶14 :: <아이리스 13권> 9클래스 - 12 sharpshooter(psungho) 03-05-16 :: :: 16788 난 고르게 숨을 내뱉었다. 규칙적인 호흡은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효과를 낸다. 그래서 내 마음은 진정 됐는가? 진정 됐다. “후읍!” 숨을 크게 들이 마쉰 다음 호흡을 멈춘다. 그리고 숨을 내쉼과 동시에 함성을 내지른다. “빅장 40단 컴보!” 쉬이익-!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내 손들이 뻗어 나간다. 남들의 눈에는 손이 수백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앗싸, 좋구나!” 거의 신기에 가까운 나의 기술에 라이 패밀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40단까지 전부 시전한 나는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잘 보았느냐?” “예, 오빠! 너무 멋있어요!” 짝짝짝짝~! 라이는 정말 감동했다는 표정이었다. 난 나의 유일한 팬인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지금 내가 펼친 기술은 알 사람은 다 알고, 모를 사람은 전혀 모르는 옆집 아저씨의 필살기와 뒷집 아저씨의 필살기를 개량해 만든 아이언스 히로의 필살기 ‘빅장 40단 컴보’였다. 이건 내가 의식 세계에서 얻어온 최고의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내가 이래뵈도 명색이 주인공인데 그 동안 필살기 하나 없었다. “…….” 이거 문제가 있는 거다. 아니, 다른 주인공들 보면 필살기도 있고, 초필살기도 있고, 심지어는 진초필살기까지 있는데 왜 난 아무 것도 없나? 그 때문에 그 동안 싸울 때마다 힘들었다. 좌절도 많이 했고. 하지만 드디어 이제 나에게도 필살기가 생긴 것이다. 흑흑, 너무 기뻐. 앞으로 더욱 갈고 닦아 훌륭한 필살기로 거듭나게 해야지. 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라이야, 이리 와봐.” 라이는 폴짝폴짝 뛰어 나에게 왔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라이는 지금 몇 클래스?” “라이는 7클래스 마스터에요! 8클래스 마법도 몇 개 쓸 수 있어요!” “후후~ 그러니?” 오늘따라 왠지 라이가 가소롭게 보인다. 훗, 겨우 7클래스라니. 요즘 7클래스 가지고도 밥 빌어 먹고 살 수 있나? 아~ 7클래스라니. 너무 쪽 팔려. 7클래스는 마법사도 아니야. 내가 왜 이리 건방을 떠는가? 원래 인간은 별 다른 고생을 하지 않고 커다란 대가를 손에 넣으면 거만해지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 아니겠나? 놀랍게도 난 지금 8클래스다. 비록 기대했던 되로 9클래스는 되지 못했지만 8클래스가 어딘가? 아무나 8클래스 하나? 아마 드래곤들을 제외한다면 난 지금 대륙 최강의 마법사일 것이다. 아~ 난 너무 강해. “라이야, 이 오빠가 몇 클래슨지 아니?” “오빠 5클래스잖아요!” 후후후~ 5클래스라. 그 동안 날 그렇게 우습게 봤단 말이야? “라이야, 사실 그 동안 이 오빠는 본연의 힘을 숨기고 있었단다.” “예? 정말요?” “그래.” “왜요?” “후후~ 왜냐고? 그야 당연 이 오빠가 졸라 짱 쎈 게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내 힘을 두려워한 이들이 날 제거하러 올테니까.” “정말이에요?” 라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날 보았다. 존경의 눈빛. 경외의 눈빛. 사랑의 눈빛. 아~ 난 이런 눈빛을 대하면 너무 기분이 좋아진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당하고 살아왔던가?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동안 나의 설움을 서술하자면 책 한권 분량이 모자랄 정도다. 그래. 나의 암흑기는 아직까지도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것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이제 나는 8클래스니까! “음하하하!” 참으로 영웅스러운 호탕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럼 오빠 몇 클래스에요?” 라이의 질문에 나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라이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이 오빠는…….” 꿀꺽-! 뭘 그리 긴장하고 있니? 콩닥콩닥-! 라이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내게 느껴진다. 아아~ 내가 8클래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라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잘 생긴 것도 모자라 마법 능력까지 이렇게 뛰어나다니! 사실 그 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가 라이에 비해 마법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에 많은 자격지심(自激之心)을 가지고 있었다. 질투심 때문이 아니다. 라이의 보호자로서 라이보다 더 강해야한다는 유아보호심 때문이다. 라이야, 이 오빠가 널 지켜 줄게~. “이 오빠는 8클래스 마스터란다.” “……예?” 라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라이는 너무 놀랐는지 입만 뻥긋거릴뿐 말을 하지 못했다. 후후~ 놀라는 게 당연하지. 이 세상 그 누가 8클래스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겠는가? 그 경지에 오른 인간은 이제까지 딱 두 명. 아이언스 이그리드와 나. 난 인간 중에서 두 번째로 강한 마법사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물론이지. 오빠는 라이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 거짓말은 나쁜 인간들이나 하는 거야. 오빠가 착한 인간인 건 라이도 잘 알지?” “맞아요. 오빠는 착한 인간이에요!” 내가 착한 인간이라…… 훗!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군.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몰라도 라이한테는 착한 인간으로 보여야 해. 애 교육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라이는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오빠 정말 8클래스에요?” 라이가 자꾸만 묻자 난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설마 이 오빠를 못 믿는 거니?” 그러자 라이는 두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에요. 라이는 오빠 믿어요. 오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착한 인간인 걸요.” 후후~ 그래야지. 이 오빠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야지. 그래야 착한 어린이지. “오빠가 8클래스 마스터라니…… 라이는 오빠가 너무너무 존경스러워요!” “정말?” “예! 정말 너무너무 존경스러워요! 라이가 오빠 존경해도 돼나요?” “아이~ 쑥스럽게 뭘 그런 것까지 묻고 그러니. 당연 존경해도 돼. 마음껏 존경하렴.” 나는 라이의 모범이 되고 싶다. 라이가 본받을만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난 라이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살결이 너무너무 부드럽다. 아~ 라이야~. 자랑을 끝마치고나니 할 게 없다. 아무것도 할게 없으니 상당히 심심하다. 그러고보면 의식 세계 헤맬 때가 재밌었는데. 웃기는 놈들도 많이 나왔고. 웃기는 놈이라…… 웃기는 놈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사일런스 지니. 이 인간은 의식 세계에서도 날 존경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일조차 내팽개치고 날 도와줬었지. 무슨 이유에서 날 존경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불안하다. 혹시 날 도와준답시고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 인간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건데 말이야. 이러저런 생각들을 하며 라이와 놀고 있는데 인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난 라이를 번쩍 들어 품에 안은 채 인디에게 다가갔다. “드래곤들이 뭐래?” 이 놈은 며칠 전 드래곤과 회의를 한답시고 사라졌던 놈이다. 회의. 참고로 난 회의 무지하게 싫어한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 동안 있던 회의에서 나 무지하게 왕따 당했다. 남들 다 열심히 말하는데 혼자서 한마디도 안 하고 자리에 앉아있는 게 얼마나 쪽 팔린지 알기나 하냐? 그땐 진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이후로 난 회의라면 이가 갈린다. 인디의 표정이 어두워 보인다.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내가 너무 민감한 건가? 블랙 드래곤이 어두워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수상한데. “구, 굳이 9클래스를 마스터 하지는 않아도 크로니스를 상대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없다고 결정이 났습니다. 그, 그래서…….” “그래서?” “그, 그냥 싸우시면 돼요.” 수상하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놈이 대체 뭘 숨기고 있을까? “왜, 왜 그런 눈으로 보시나요?” 인디는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왜 말을 더듬으시나요?” “제, 제가 어, 언제 더듬었다 그러세요?” 더 수상하다. 정말 수상하다. 너무너무 수상하다. 혹시 이놈 나쁜 드래곤 아니야? “너 솔직히 말해.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인디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 없어요!” “정말?” “저, 정말 없어요!” “진짜?” “진짜 없다니까요! 왜 자꾸 묻고 그러세요!?” 어라? 이 놈이 이젠 화를 내내. 인디는 소리를 지른 것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그냥 간단하게 이놈을 조져? 아니야. 일단 회유를 해보자. 난 인디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어, 없는데요.” “어허! 왜 이러시나? 없긴 뭐가 없어? 빨리 말해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사줄게.” “저, 정말 없는데요.” “그럼 현금으로 줄까?” “혀, 현금이라뇨?” “…….” 이 녀석 의외로 제법이다. 드래곤 주제에 뇌물은 안 키운다는 건가? 흥! 재수 없어! 요즘 같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감히 뇌물을 거부하다니. 이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짓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놈들 때문에 국가 경제가 발전이 안 되는 것이다. 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얼마면 되니? 얼마면 되겠어?” “얼마나 주실 수 있는데요?” “…….” 이럴 줄 알았어. 그럼 그렇지, 세상에 돈 싫다는 사람이 있을리 있냐? 역시 이 세상은 돈이 전부였어. 이런 더러운 세상 같으니! 드래곤마저 뇌물을 밝히는 이 시대에 어찌 나의 라이가 그 본연의 순수함을 지키며 살수 있겠는가? 이런 놈들 때문에 국가 경제가 발전을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 덧 붙이자면 난 한푼도 줄수 없다. 돈이 있어야 주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닌가? “이 시점에서 우리가 꼭 돈 얘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먼저 꺼낸 건 히로님이잖아요.” “…….” 내가 그랬었나? “흠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 가요?” “…….” 글쎄. 뭐가 중요할까? 한번 알아맞춰 보렴. “중요한 건 니가 지금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거야!” “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정말 숨기는 게 없어?” “무, 물론이에요.” “그럼 거짓말을 했니?”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 얼굴에 다 쓰여져 있는데! 너 자꾸 이런식으로 나올래?” “저, 정말 아니라니까요!” “이 자식이 진짜! 너 단매에 죽고 싶은 게로구나!” “흑흑, 정말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인디는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소매로 눈가를 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긴머리카락을 바닥에 사정 없이 흐트린채 울고 있는 인디의 모습은 그야말로 슬픔 그 자체였다. 어흐흐흑! 갑자기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진다. 난 감수성이 너무 예민해서 이런 걸 보면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난 울면서 인디의 멱살을 붙잡았다. “너 우는 놈한테 울면서 한번 맞아 볼래?” “흑흑,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동반 자살하자.” “흑흑, 저한테는 일루니아님이 있답니다.” “…….” 정말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다. 착하기로 소문난 내가 이 정도까지 막나가고 있으면 진실을 밝혀야 할 것 아닌가? “니가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도 어쩔 수 없군. 나의 비장의 무기를 꺼내는 수 밖에.” 나의 비장의 무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름하여 땡깡이다. 땡깡은 일종의 비속어로 굳이 해석을 하자면 투정 정도로 해석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난 땡깡을 부리기로 마음 먹었다. “나 안 싸울란다.” “예?” “히로는 싸움이 싫어요~. 히로는 싸움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에요~. 라이가 평화주의엘프이고, 이코가 평화주의매인 것처럼요~. 우리 모두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요~. 아이~ 좋아~.” 난 주먹쥔 두 손을 턱근처에 붙이고 생긋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최대한 귀엽게 보이도록.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 좋아~. 라이도 좋아요~.” 라이가 나를 따라하는 것이 아닌가? 좋았어! 그럼 좀 더 고난이도로 하자. 손으로 어깨를 짚고 어깨를 으쓱으쓱! 역시 잘 따라하는 라이. 아이구, 귀여워~. 우리는 그렇게 세트로 율동을 선 보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따라하다니! 역시 라이는 내편이야! 고마워, 라이야. 이 오빠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인디는 어이가 없는지 눈물을 뚝 그치며 우리의 율동을 보았다. 저 굉장히 좌절하는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하지만 난 진실을 알아낼 때까지 이 율동을 멈출 수 없다. 이 일에는 음모가 숨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드래곤들이 회의랍시고 만나서 작당을 꾸몄을 것이다. 생각하니 열받는다. 내가 드래곤들 장난감도 아니고. 이것들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열받아 죽겠는데 이젠 나를 물 먹이려고 작당을 했다니.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못 믿을 건 드래곤도 마찬가진가 보다. 나쁜 드래곤들 같으니라고! 착한 라이를 좀 본 받아라! 인디는 이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 보았다. 물기에 젖은 인디의 눈빛이 아련히 반짝거린다. 혹시 저놈도 같이 하고 싶은게 아닐까? 워낙 유치하고 소심한 놈이니 같이 하고 싶은데 차마 같이 할 엄두가 나지 않을지도……. 빨랑 결정해라. 이거 보기엔 이래보여도 의외로 힘들다. 내 마음이 통하기라도 했는디 인디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치마를 탁탁 털며 말했다. “말씀드릴게요.” 진작 그럴 것이지! 난 그 즉시 율동을 멈추었다. 사실 이거 제정신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짓을 한 것은 이 곳에 오직 인디와 라이 패밀리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루시아나 세레나, 라이레얼 등이 나의 이런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면 난 당장 대들보에 목을 맬 것이다. 그나저나 라이야, 너는 왜 계속 하고 있니? 발을 콩콩 구르고, 폴짝 뛰고, 어깨를 으쓱으쓱, 얼굴은 생긋생긋. 정말 너무너무 귀엽다. 어쩜 율동을 저렇게도 잘할까? 지금 내 손에 비디오 카메라가 있다면 이 장면을 찍어 영구 소장하고 싶다. 그리고 당장 복사본 하나를 떠서 유아 전용 프로그램 <뽀뽀뽀>나 에 팔고 싶다. 아니, 아예 라이를 거기에 고정 출연 시키는 거야. 그리고 난 출연료를 받아 룸살롱이나 들락거리는 거지. “…….” 그런 훌륭한 계획이 있었다니! 이거야 말로 재주는 라이가 넘고 돈은 히로가 챙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아~ 정말 좋은 계획이다. 난 천재인가 봐~. 후후, 이로써 라이를 입양 해야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거 유아 노동력 착취 아닌가? 뭐, 아님 말구. “라이야, 방으로 들어가서 라이코스와 놀고 있으렴.” “예.” 라이는 한마디도 토를 달지 않고 라이코스를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라이가 사라지고 나자 난 인디에게 말했다. “자, 이제 말해봐. 대체 뭘 숨기고 있는 지를.” 인디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이런 놈들 꼭 있다. 다 말해줄 것처럼 하다가 아무 것도 안 말해주는 놈들. 우리는 이런 놈들을 일컬어서 나쁜 놈들이라 칭한다. “왜!?” 내가 외치자 인디는 역시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그 말을 히로님께 하지 않기로 다른 드래곤들과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뭔 헛소리니?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야.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어서 말하렴.”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뭐라고? 너 지금 나랑 농담하니? 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약속 지키켜서 제대로 된 사람 한 명도 못 봤어. 요즘 같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시대에 혼자만 약속을 잘 지키고, 혼자만 정직하게 살아봐야 아무 소용 없단 말이다! 제발 현실을 직시해!” “히로님께서 뭐라고 하셔도 전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 난 이런 놈들이 정말 싫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야 할 것 아닌가? 자기 혼자만 고상하게 살면 뭐해? 세상은 알아주지도 않는데. “그래서 결론이 뭐해? 말 못 하겠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런 씨…….” 이 놈이 지금 내 인내심을 테스트 하는 구나.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아~ 정말 피가 끓는다. “하지만…….” “하지만 뭐?” “말씀드리지 않는 대신…….” “대신 뭐?” “글로 써드리겠습니다.” “응? 뭐라고? “글로 써드리겠다고 했습니다.” “…….” 놀랍구나. 그런 비열하고도 얍삽한 방법이 있었다니! 이거야말로 인생 사는 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훌륭하도다! 정말 훌륭하도다! 이 녀석 정말 마음에 든다. 난 이렇게 인생을 얍삽하고 우회적으로 사는 놈들을 정말 좋아한다. 괜히 착한척 하는 것보다야 백배는 낫지 않은가? “그럼 어서 글로 써봐.” “잠깐만 기다리세요.” 인디는 탁자에 앉아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일필휘지~. 간단히 말해 휘갈겨 썼다. “전 분명 히로님께 아무 말씀도 안 했습니다.” “그래. 너 아무 말 안 했어.” 난 종이를 집어 들어 천천히 읽어 보았다. <히로님께서 이 글을 보시면 상당한 충격을 받을 거라 사료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히로님께 진실을 알려드리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히로님께서도 알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9클래스를 마스터하지 못한 이상 히로님께서 크로니스를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히로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크로니스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드래곤들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차원의 열쇠로 아공간을 열어 히로님으로 하여금 크로니스를 그곳으로 끌어들이기로.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 드래곤들은 바로 차원계를 닫아 히로님과 크로니스를 그곳에 가둘 것입니다.> 글을 다 읽은 나는 크나큰 충격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와 크로니스를 아공간에 가두려 한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인디는 이 모든게 자기 책임이라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충격이 가시자 분노가 몰려왔다. 드래곤들은 전부 나를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자신들의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난 분노를 가라 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난 이 일을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크로니스를 힘으로 누르고 설득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보다 더욱 심각한 것 같았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서 크로니스를 없애야 하는 걸까? 크로니스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존재란 말인가? 이그리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크로니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크로니스에게 죄가 있다고 한다면 인간을 사랑한 죄 밖에 없었다. 그는 다만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난 종이를 탁자 위에 내려 놓으며 인디에게 물었다. “넌 왜 이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거지?” 인디가 대답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히로님도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유는…….” 인디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말을 이었다.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상황이 변하지 않다니? 내가 니들이 시키는 대로 따를 것 같아?” 인디는 나를 보았다. 흑진주처럼 검게 빛나는 눈동자. 그 눈동자는 분명 드래곤의 그것이었다. 아무리 나약하고 소심한 것처럼 위장을 해도 이 녀석 역시 드래곤이었다. 인간을 뛰어 넘는 절대적인 존재. 난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 슬럼프가 점점 심각해지네요. 글도 제대로 안 써지고... 괜히 기분만 우울해지고... 아아~ 우울해~ TITLE ▶16 :: <아이리스 13권> 9클래스 - 13 sharpshooter(psungho) 03-05-24 :: :: 24641 크로니스는 일종의 사회 암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나에겐 그 암을 퇴치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난 그 임무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정의감 때문이냐고? 물론 아니다. 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목숨 보다 내 목숨 하나를 소중히 여길 정도로 정의감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다. 그럼 왜? 그것은 당연 누군가의 압력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드래곤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드래곤들은 세계 평화를 지켜야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한 인간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고 있다. 하긴,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는데 한 인간의 죽음이 대수겠는가? 적어도 세계가 멸망하는 것 보단 낫잖아. 그러나 그 ‘한 인간’이 나일 경우엔 얘기가 틀려진다. 세계가 아무리 평화로우면 뭐하나? 나 죽고나면 다 끝인데. 난 세상이 멸망해도 나 하나만은 살아남아야겠다는 바퀴벌레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아~ 우리 라이도 살아남아야지. 아무튼 난 세상이 멸망해도 나와 라이만 살아남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현실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드래곤들은 나에게 죽으라고 강요를 한다. 처음에 드래곤들은 나를 이용해 크로니스를 막아보려하였다. 하지만 나는 9클래스를 마스터하는데 실패하였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 왜 실패했을까? 누구도 나에게 그것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에 난 혼자서 열심히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얼마후 그럴듯한 결론을 내놓을 수 있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마법은 정신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래서 9클래스 마스터는 정신의 완성을 의미한다. 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9클래스가 될 수 없었기에 이그리드의 기억과 내 의식을 융합하여 뉴(new) 히로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거치려 하였다. 하지만 난 나이고 싶었다. 그래서 이그리드의 기억을 내 의식과 융합하는 대신 기억을 기억으로만 받아 들였다. 그 결과 마법 응용력이 높아지고 마나가 활성화 되어 8클래스까지 마스터했다. 다시 말해 9클래스는 물 건너 갔다. 인디의 말에 의하면 이제 내가 9클래스를 마스터할 확률은 제로라고 한다. 내가 그래도 9클래스를 마스터하고 싶다고 우기자 인디가 말하기를……. ‘그냥 생긴 대로 사세요.’ 그래.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으니 내가 뭘 어쩌겠냐? 계속 생긴대로 살아야지.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은 빈 손으로 태어나 빈 손으로 간다고. 빈 손으로 태어나 8클래스까지 마스터했으면 됐지 그 이상 뭘 바라나?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그냥 8클래스에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자. “…….” 그런데 지금 그게 불가능하다. 내가 9클래스를 마스터했다면 크로니스와 대등한 힘을 갖추는 셈이니 어느 정도는 살아날 확률이 있었다. 그렇기에 난 이 일을 맡기로 한 거고. 하지만 9클래스를 마스터하지 못한 지금 내가 크로니스와 맞붙어서 살아남을 확률은 희박하다.(그래도 크로니스는 날 이그리드로 보고 있으니 설마 죽이진 않겠지?) 하지만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크로니스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크로니스가 폭주하는 것을 지켜봐야만할 것이다. 그래서 드래곤들은 선택했다. 나를 이용해 크로니스를 아공간으로 유인 해서 둘 다 가둬 버리기로. 그리고 그곳에서 둘이 주먹질을 하건 뽀뽀를 하건 좋을 대로 하라는 거다. 자신들은 신경쓰지 않을테니. 이걸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그냥 죽으세요.’ 라는 게 된다. 이런 게 어디 있어? 그냥 죽으라니? 내가 누군데 그냥 죽어? 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살거야. 천년이고 만년이고 살아서 계속 연금 타 먹을 거야. 난 당연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죽어도 싫어!’ ‘그래도 하셔야만 합니다.’ ‘누구 좋으라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세계 평화고 뭐고 나 죽고나면 다 소용 없어.’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 됐어! 다 필요 없어! 내 한 목숨 살아남는 게 장땡이야!’ ‘하지만 히로님께서는 반드시 하시게 될겁니다.’ ‘흥! 웃기는 소리! 니들 드래곤들의 장단에 내가 놀아날 것 같아? 내 친구의 친구가 사귀던 누나의 아버지의 친구의 할아버지가 독립투사셨어.’ ‘히로님의 친구의 친구가 사귀던 누나의 아버지의 친구의 할아버지가 독립투사인 게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아무튼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어. 난 어떠한 협박과 고문도 전부 이겨낼 테니까.’ ‘드래곤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나도 바보가 아니야.’ ‘드래곤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드래곤들은 히로님께서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경우 강제적으로 하게 만들 겁니다.’ ‘어떻게? 니들이 폭력을 쓴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따를 것 같아?’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쓰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뭐?’ ‘히로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누군가가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인디의 눈은 창밖을 향해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라이코스와 함께 폴짝거리며 뛰어노는 나의 귀여운 라이가 있었다. 난 분노로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자식! 감히 나의 귀여운 라이를 인질로 삼아 날 협박할 속셈이냐?’ ‘어차피 크로니스를 막지 못한다면 히로님께서 사랑하시는 라이도 무사할 수는 없어요.’ ‘…….’ 내가 아무리 막나가는 놈이라지만 이놈들은 나보다 더 막나간다. 저 귀엽고 깜찍한 아이를 인질로 삼을 생각을 하다니. 드래곤이면 이래도 되는 거야? 난 결국 막나가는 드래곤들의 협박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크로니스와 아공간에 갖히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래야만 한다는데 어쩌겠냐? “후우~.” 난 한숨을 길게 내쉬고 인디를 보았다. 인디는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불쌍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이 놈 때문에 당한 것을 생각해 봐라. 그것도 모자라 이젠 죽게 생겼다. 그것도 크로니스와 같이. 이거야 말로 무협지에서 흔히 말하던 동귀어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말 살고 싶다. 너무나도 살고 싶다. 난 이기적인 인간이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 내 한 목숨은 건지고 싶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라이였다. 난 라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다. 그것이 진정으로 라이를 위하는 것이라면. 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라이는 굉장히 슬퍼할 것이다. ‘우에에엥~ 오빠~ 라이를 두고 가지 마세요~.’ 안 봐도 눈에 선하다. 라이가 이렇게 할 것은 확실하다. 못 믿으면 내기 해도 좋다. 흑흑, 미안하다, 라이야. 이 오빠는 널 두고 먼저 갈 수 밖에 없구나. 하지만 이 오빠가 정말로 널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알아 주렴. 사랑해, 라이야~! “그럼 난 이제 뭘 해야 돼?” “크로니스가 움직일 때까지 쉬시면 됩니다.” 쉬라고? 후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는 휴식인가? “알았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내 남은 시간을 라이와 행복하게 보내리.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라이에게 잘해주리. 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라이야~ 노올자~.” “앗! 오빠!” 라이는 라이코스를 품에 안고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하고 있었어?” “이코랑 술래잡기하고 있었어요.” 라이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내 이 어린 것을 두고 사지(死地)로 향해하만 하다니. 나 죽으면 라이는 누가 돌봐주나? “흑~.” 주책 없이 눈물이 흐른다. 난 라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급히 눈물을 닦았다. 다행히 라이는 내 눈물을 보지 못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같이 놀아요, 오빠.” “그래. 우리 뭐하고 놀까?” “라이는 재밌는 놀이하고 싶어요!” 후후~ 재밌는 놀이라. 나도 재밌는 놀이하고 싶다. 이제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재밌게 놀아야지. “그래, 라이야. 우리 재밌는 놀이 하자.” * * * * 크로니스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몸마저 어둠에 파먹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크로니스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 곳은 그 자신이 만든 공간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 크로니스는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곳에 남아 있는 걸까? “이그리드…….” 크로니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조소(嘲笑)였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스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자신은 미쳤다. 크로니스는 그것을 너무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소년을 이그리드로 착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그리드는 죽었다. 그가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시체를 햇볕이 잘드는 곳으로 옮겨 묻었다. 시체까지 직접 눈으로 봤는데도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이 공간을 찢으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언제나처럼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맞아. 난 그가 올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기약 없는 기다림.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건 바보짓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크로니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한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그에 따라 정신이 점점 흩어지고 있었다. 자신은 마치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신의 둑은 허물어질테고 이성은 사라질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가 없는 세상. 그것만으로 이 세상은 존재할 가치가 없었다. 그가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그였다. 크로니스는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 * * * * 어느 집단에나 변종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변종은 특별히 잘난 놈일 수도 있고 특별히 떨어지는 놈일 수도 있고 특별히 이상한 놈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니는 변종에 속했다. 지니는 인간 중에서는 거의 극강에 다다른 잘남을 자랑하였다. 지니만큼 다방면에서 잘난 인간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해도 좋았다. 그 정도로 지니는 잘났다. 그리고 그 잘남은 히로와 비교되어서 더욱 훌륭해보였다. “…….” 그렇다. 지니가 그 동안 괜히 히로랑 같이 다녔던 것이 아니었다. 상대성 비교라는 게 있지 않은가? 지니는 평범 그 자체인 히로와 같이 다님으로써 자신의 잘남을 마음껏 뽐낼 수가 있었다. 아아~ 히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니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히로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좌절할까? 어찌되었든 지니는 인간으로서는 보기드물 정도로 잘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드래곤들의 의도를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드래곤들은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이용해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를 아공간에 가둘 생각이구나.” 이 정도면 대충이 아니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추측을 뿐이었지만 지니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철저한 분석에 의해 도출된 추측은 대체적으로 사실에 근접하는 경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지니는 지금 기분이 굉장히 안 좋은 상태였다.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이 드래곤들의 도구로 이용되다니! 이것은 있어서는 안 돼는 일이었다. “아이언스 공작님을 대신해 이 한 목숨 바칠수만 있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그렇게 하겠 것만 그것이 안 되니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구나.” 지니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왔다. 존경하는 이의 죽음을 바라만봐야 하다니. 하지만 현실이 그러한 것을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찌 인간이 드래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지니는 자신이 힘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반면 일루니아는 담담했다. “그 인간이야 죽건 말건 신경쓰지 말고 넌 니 할 일이나 열심히 해.” 지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누님. 아이언스 공작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 일루니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놀란 지니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그냥 일하겠습니다, 누님.” 하지만 지니는 앉아서도 계속해서 걱정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아이언스 공작님에 대한 걱정만이 자신의 삶의 이유인냥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걱정하였다. “일이나 해!” 보다못한 일루니아는 서류뭉치를 집어 던졌다. 하지만 운동 신경마저 잘난 지니는 그것을 가볍게 피했다. 너무 가볍게 피해서 얄미울 정도다. 하지만 지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서류뭉치를 다시 일루니아의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아까하던 걱정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일이 그렇게 될까?’ 드래곤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예감이었다. 변수가 작용할 것 같은 예감. “하긴 훌륭하신 아이언스 공작님의 인품과 능력으로 미루어봐서 무슨 방법을 찾아내실 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지니는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다. * * * * 라이레얼은 막사 안에서 뒹굴거리며 손에 든 열쇠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비록 생긴 것은 투박해서 폐가의 열쇠처럼 보이지만 이 열쇠는 다른 차원을 생성할 수 있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아티팩트였다. ‘이걸 가져다 팔면 얼마나 나올까?’ 라이레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산을 시작했다.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가 아니겠는가? 라이레얼은 일찌감치 돈의 위력을 알고 자산 모으기에 나선 진일보적인 여성이라 할 수 있었다. 얼굴 예쁘지, 돈 많지…… 이 두가지만 놓고 본다면 최고의 신부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우리 히로 보고 싶다~.” 몇 개월 동안 못 봤으니 보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 하지만 라이레얼은 그것이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 히로 만나면 내가 당장 뽀뽀해 주고, 안아 줄텐데.” 라이레얼이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누군가는 사정 없이 불타올랐다. 그 누군가가 카르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안 돼! 언니가 그 인간과 키스를 하다니! 용서 할 수 없어!’ 하지만 라이레얼의 머릿속은 온통 히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카르에 대한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아아~ 드래곤의 짝사랑이라. 왠지 처량해 보인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 불리는 드래곤이 대체 뭐하는 짓이냐? 좀 더 건설적인 사업에 투자하면 어디 덧나냐? 카르는 슬픈 눈으로 라이레얼을 바라보았다. ‘난 이렇게 언니를 사랑하는데 언니는…… 흑흑…….’ 갑자기 처량한 기분이 들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카르는 구석에서 혼자 쪼그려 앉아 훌쩍거렸다. “흑흑~.” 눈물을 흘리는 미소녀라. 사실 이것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여자는 울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카르는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최상급에 속하는 미녀였다. 히로가 봤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 정도로. 갈리온드는 막사 안으로 들어오다가 울고 있는 카르를 보았다. ‘앗! 미소녀가 울고 있다!’ 이럴 경우 달래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갈리온드는 주저없이 카르에게 다가가 손을 어깨 위에 얹었다. “저기…….” 그러자 카르는 깜짝 놀라 갈리온드의 손을 쳐냈다. “꺄아! 무슨 짓이에요!” “아, 아니 난 그냥…….” “전 언니 거니까 접근하지 마세요.” 부릅 뜬 눈동자, 표독스러운 표정, 분노로 인해 붉어진 얼굴. 어째서 카르는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기껏해야 어깨에 손을 올렸을 뿐인데. 갈리온드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고 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설마……?’ 놀랍게도 갈리온드는 한번에 정확히 짚었다. 카르는 남자혐오증이었다. “…….” 오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카르 같은 초절정 미소녀가 남자혐오증이면 이 세계에 사는 남자들은 어쩌라고? 무슨 드래곤이 남자혐오증이야? 이거 문제가 있는 거다. 드래곤이 이래도 되는 거야? 레즈인 것도 모자라 남자혐오증이라니. 카르는 갈리온드에게서 떨어져 라이레얼의 품에 안겼다. 라이레얼은 그런 카르를 살짝 안아 주었다. 카르는 라이레얼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눈을 감았다. ‘아~ 행복해~.’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그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어찌 행복하지 아니하겠는가?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 되었으면 좋겠어.’ 부비부비~. 갈리온드는 여자 둘이 껴안고 몸을 부비는 이 외설적인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그 두 여자 중 하나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내 딸을 레즈가 되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무슨 수로 둘을 떼어 놓을 것인가? 저렇게 철썩 같이 붙어있는데. 게다가 미관상 보기가 굉장히 좋다. ‘음음, 생각해보니 꼭 나쁜 거라고만은 할 수 없겠군. 개인의 취향은 다양하니 말이야.’ 갈리온드는 레즈에 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굉장히 안 좋은 기억이. 지금은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려 보니 눈물이 흘러나온다. ‘흑~ 그 둘은 지금도 잘 살고 있겠지?’ 라이레얼은 갈리온드가 우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우리 아빠 또 궁상 떠네.’ 갈리온드의 궁상은 이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 누가 감히 갈리온드의 궁상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우리 히로 보고 싶다. 아~ 지금쯤이면 우리 히로는 뭘하고 있을까?” “…….” 틈만 나면 그 인간 얘기였다. 카르는 울상을 지었다. 카르는 여자의 과거에 신경 쓰지 않는 착한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현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역시 그 인간을 없애야 돼.’ 만약 계획이 크로니스와 싸우는 쪽으로 흘러갔다면 자신의 손으로라도 그 인간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바뀌었고 그 인간과 크로니스는 같이 죽는다. 카르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 ‘그 인간이 죽으면 언니는 슬퍼할테고, 그때 내가 나서서 언니를 위로해주는 거야. 그럼 언니는 분명 나한테 넘어 오겠지?’ 카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라이레얼을 꼭 끌어 안았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아까 카르가 쪼그려 앉아 울던 곳에서 카르와 같은 포즈로 쪼그려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흑~.” 하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자꾸 달래주다보면 계속 운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그치기 마련이다. 예상대로 한참을 울어도 주위에서 반응이 없자 갈리온드는 슬며시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그 순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수백명이 떠들어대는 소리. 대체 무슨 일이기에 밖이 이렇게 소란스러운 걸까? 라이레얼과 카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 * * * * “음음~.” 라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하긴 고민할만도 하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테니. 잠시 후 라이는 카드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일종의 카드 게임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순수한 의미의 카드 게임일뿐 결코 내기나 도박이 아니다. 나의 착한 라이가 내기나 도박 같은 것을 해서야 쓰겠나? 라이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런 짓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라이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번번히 지기만 했다. 그것은 내가 너무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라이가 너무 순진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기에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 이렇게 순진하고 착해서야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고 그러는 지……. “…….” 이제 홀로 남을 라이를 생각 하니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난 애써 웃음을 지으며 라이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카드 게임을 즐겼다. 라이는 카드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볼이 조금 부어있는 것을 보니 내리 진 것이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왜 그러니?” “이거 재미 없어요. 우리 다른 거 하며 놀아요.” 다른 거 하며 놀자고? 음음, 다른 거라. 다른 거 뭐가 좋을까? 라이는 손뼉을 부딪히며 말했다. “라이 비행기 태워 줘요!” “……헉!”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신음성을 내뱉었다. 비행기라니? 설마 번쩍 들어 빙글빙글 돌리는 그걸 말하는 건가? 라이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라이는 비행기가 너무너무 타고 싶어요~.’ 얘가 한번 하더니 이젠 아주 맛들였구나. 비행기를 타는 너는 좋을지 모르겠다면 그걸 운전하는 나는 죽을 맛이란다. 그러니 이 오빠의 심정을 눈꼽만큼이라도 이해한다면 다시는 비행기 소리 꺼내지도 말렴.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헉!” 그 노래는 어떻게 알았니? 가르쳐 준적도 없는데. 라이는 마치 시위라도 하듯 한껏 목청을 높혀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되면 안 태워줄 수가 없잖아. “그, 그럼 조금만…….” “와아! 정말요? 라이는 너무너무 기뻐요!” “…….” 그렇게 기뻐하니 무섭다. 난 라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순간 우드득~ 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팔이 빠진 건 아니겠지? 흑~ 무슨 애가 이렇게 무거워? 다이어트를 시키던지 해야지. 아니야. 우리 라이한테 뺄 살이 어디 있다고? 난 라이를 꼭 붙잡고 몸을 돌렸다. 온 세상이 정신 없이 빙글빙글 돈다. 내가 도는 것인가, 세상이 도는 것인가? “꺄하하~.” 들려오는 라이의 행복한 웃음. 그래. 난 이 웃음을 위해 살고 있는 거야. 라이의 웃음이야 말로 나의 삶의 이유야. 팔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다. 아, 안 돼. 조금 더 버텨야 하는데. 라이의 즐거움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난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아무리 버텨봐야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나는 라이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쓰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재밌었니?” 라이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빠.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다행이네. 라이가 재밌다고 하니 이 오빠는 너무너무 기쁘단다.” 내가 손짓하자 라이는 아장아장 나에게 다가왔다. 난 라이를 꼭 끌어 안았다. “우리 귀여운 라이.” 라이는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내 목에 둘렀다. 그리고 통통한 볼을 내 볼에 부비부비 비볐다. 그동안 있었던 라이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라이가 처음 내 앞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나는 라이가 단역 캐릭터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라이는 잠깐 등장했다가 들어가는 단역 캐릭터가 아닌 고정 출연 캐릭터였다. 처음 만났을 때 라이는 굉장히 싸가지가 없는 그런 나쁜 엘프였다. 이것은 가정교육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헬로우 귀티를 인질로 삼아 라이를 따끔하게 혼냈다. 그러자 라이는 금새 본래의 착한 엘프로 바뀌었다. 착한 엘프로 재탄생한 라이는 그때부터 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난 라이의 순수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라이를 때리고 괴롭히고 윽박질렀다. 그때마다 그 어린 것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내가 나쁜놈이지. 하지만 이제 난 라이의 순수함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라이야 말로 하늘이 내게 내려주신 축복이었다. 그런데……. “흑~ 이 어린 것을 두고 가야 하다니.” “……예?” 난 손을 푸르고 라이의 얼굴을 보았다. 라이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빠? 라이를 두고 가다니요?” “미안하다, 라이야. 이 오빠가 없어도 라이는 행복하게 살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엘프가 되겠다는 꿈도 절대 버리지 말고. 꿈을 쫓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엘프가 될 수 있을 거야.” “오, 오빠가 없다니요? 오빠 설마…….” “……흑.” 맞아. 그 설마야. 주책없이 눈물이 흐른다. 내가 가지 않으면 드래곤들은 라이를 괴롭힐 것이 뻔하다. 그래서 난 죽을 것을 알면서도 간다. 라이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우에에엥~ 안 돼요, 오빠~. 라이는 오빠 없으면 못 살아요~.” “미안하다. 이 못난 오빠를 용서하렴.” “우에에엥~ 싫어요~. 라이를 두고 가지 마세요~.” 라이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러다가 몸의 수분이 전부 빠져나가지는 않을까 걱정 된다. 난 손수건을 꺼내 라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만 울렴. 라이가 울면 이 오빠도 슬프단다.” “흑흑~.” 난 라이를 꼭 끌어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라이는 입을 꼭 다물고 흐느꼈다. 내 옷이 라이의 눈물로 촉촉이 젖어든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난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인디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히로님.” “무슨 일이야?” 난 라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물었다. 인디는 울고 있는 라이를 보더니 굉장히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표정만 그렇게 지었을 뿐 할 말은 다 했다. “이제 곧 크로니스가 움직일 것 같습니다.” 크로니스가 움직인다라…… 그럼 이제 내가 죽을 시간이 다 됐다는 건가? “그래서?” “차원의 열쇠를 얻어야지요.” “그렇군.” 차원의 열쇠가 있어야 아공간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은 크로니스와 싸우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아티팩트였다. 이게 없으면 싸움이고 뭐고 없다. “그런데 차원의 열쇠는 어디서 얻어?” “이미 얻었습니다.” “응? 뭔 소리야?” “차원의 열쇠는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가 가지고 있었는데…….” “뭐?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그런 말도 안 돼는! 설마 나보고 차원의 열쇠를 얻기 위해 드래곤과 싸우라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지, 진정하세요, 히로님.” “시끄러, 임마!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난 인디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그러자 인디는 한쪽으로 고개를 떨구며 흐느꼈다. “흑흑, 이러지 마세요.” “우에에엥~ 오빠들 싸우지 마요.” 흠흠, 내가 잠시 흥분한 모양이군. 난 멱살을 잡은 손을 풀었다. 한숨 돌린 인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히로님께서 직접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를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차원의 열쇠는 지금 라이레얼양의 손에 있습니다.” “……뭐?” 난 너무나도 큰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차원의 열쇠가 라이레얼 손에 있다니. 어째서 그런 일이. “어, 어떻게 그게 라이레얼의 손에 있는 거지?” “그건…….” 인디는 그간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난 라이레얼이 나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버들랜드까지 가서 화이트 드래곤을 만나 차원의 열쇠를 얻었다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릴뻔했다. 너무 감동 받아서. 흑~ 고마워요, 라이레얼. 그렇게까지 절 생각해 주시다니. 하지만 한편으론 두려움이 느껴진다. 라이레얼이 정말로 오직 날 위해 차원의 열쇠를 찾은 걸까? 정말 그런 걸까? 내 생각엔 무언가 꿍꿍이가 숨어있는 것 같은데……. 음음, 내가 너무 과민 반응 하는 건가? “그럼 라이레얼을 만나러 가야 하는 거야?” “예.” 내가 의식 세계를 헤메는 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라이레얼은 많이 변했을까? 아니면, 예전 그대로 일까? 이렇게 생각하니 라이레얼이 매우 보고 싶다. 사실 미모하면 라이레얼 아닌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출발하지.” “예.” 난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발걸음이 안 움직인다. 라이가 어느새 내 발을 꼭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니?” “같이 가요, 오빠.” 라이는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라이야,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란다.” 라이는 내 발을 더욱 꼭 붙잡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라이는 오빠랑 헤어지기 싫어요.” “하지만 이 오빠는 이제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우러…….” “상관 없어요! 라이는 무조건 오빠랑 같이 갈래요.” “라이야…….” 위험한 걸 뻔히 알면서도 날 따라오겠다니.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하지만 난 라이를 데려갈 수 없다. 위험하니까. “라이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면 안 돼. 이 오빠는 라이를 위험한 곳에 데려갈 수 없단다.” “만약 오빠가 이대로 라이를 두고 간다면 라이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이코랑 놀지도 않을 거에요!” “…….” 무어라? 먹지도 않고 놀지도 않겠다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라이에게서 먹는 것과 노는 것을 빼면 뭐가 남겠는가? 당연 아무 것도 안 남는다. 먹는 것과 노는 것은 라이의 인생에 있어서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없는 라이의 삶은 죽음 그 자체였다. 라이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흑흑~ 오빠가 전에 말했잖아요.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구요. 라이는 오빠랑 세상 끝까지 함께 갈 거에요.” “…….” 감동~ 감동~ 대체 이 감동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한단 말인가? 나를 따라오겠다는 라이를 어찌 막을 수 있으리. 난 라이를 꼭 끌어 안았다. 그리고 번쩍 안아 들었다. “그래, 라이야.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 “우엥~ 오빠~.” 말은 이렇게 했지만 라이를 위험하게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정작 크로니스와 싸우게 될 때에는 라이를 떼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진정으로 라이를 위하는 길이니. ----------------- 아직도 갈 길이 멀군요. 그럼 이만~ ps. 오늘부터 타수 놀이 금지입니다. 리플이 길어져 창 뜨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항의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부탁이오니 <타수 놀이>는 자제해 주시길... TITLE ▶17 :: <아이리스 13권> 9클래스 - 14 sharpshooter(psungho) 03-05-28 :: :: 33459 <공지문> 타수 놀이 절대 금지. P군 - 타수 놀이로 인해 늘어난 리플 때문에 게시판을 열면 자꾸만 컴퓨터가 다운 돼요. 정말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L양 - 우에에엥~ 타수 놀이하는 사람들 미워요~. H군 - 아이씨! 타수 놀이 하지 말라니까! 타수 경쟁 없는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모두 같이 노력합시다. * * * * * * * * * 라이레얼은 예전에 만났던 그 곳에 있다고 했다. 그 지역은 현재 아이리스군과 자바스군이 대치하는 전선이었다. 하지만 서로 함부로 나설 수 없는지라 전선은 고착화 되었다. 그렇기에 양쪽 병사들은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전투가 벌어지길 바라는 것은 아닐테지만. 웅성웅성~!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대체 어디서 이렇게 웅성거리는 거지? 무엇 때문에 웅성거리는 거지? 텔레포트로 도착한 이곳은 사방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동시에 수 백, 수 천명이 떠들어 대는 소리. 굉장히 시끄럽다. 혹시 전투라도 터졌나? “우엥~ 너무 시끄러워요.” 라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꼭 막았다. 청력이 좋은 엘프다 보니 시끄러운 소리에 민감한가 보다. 그래서 내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몸을 잔뜩 움츠렸던 건가? 난 피식 웃으며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이레얼은 어느쪽에 있니?” 내가 묻자 인디는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 쪽이에요.” 우리는 인디가 가리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수록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근원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글우글 모여있는 수천명의 사람들. 난 처음에 그들이 용병인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 결과 용병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용병이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대부분이지만 여자도 상당 수 있다. 청년이 대부분이지만 노인과 소년도 상당 수 있다. 인간이 대부분이지만 엘프나 하프엘프 등의 유사인종들도 있다. 전사가 대부분이지만 마법사나, 레인저, 도둑들도 있다. 대체 이 각양각색의 존재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난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 있는 걸까? 설마 할 일 없어서 유람 온 것은 아닐테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들이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들 중 한 남자가 일어서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 아닌가? “저기…… 혹시 아이언스 히로 공작님 아니십니까?” 어라? 이 사람 날 알고 있었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그러자 남자는 흥분한 기색을 띄며 다급히 물었다. “저, 정말로 아이언스 공작님이십니까? 정말?” 이것은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 했기 때문에 되묻는 것이 아니라 확인 차원에서 되묻는 것이다. 난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가득 찬 자세를 취했다. “예. 정말로 제가 아이언스 히로 공작 맞습니다.” 그래도 남자가 약간 못미더워하는 표정을 짓는데 그 순간 라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맞아요! 히로 오빠는 공작이에요!” 허억, 이럴 수가! 라이가 이런 중요한 상황에 적절한 대사를 하다니. 이건 그 동안의 라이의 행적으로 밀어봤을 때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라이가 나와 같이 다니는 동안 IQ와 EQ가 발달한 건가? 오옷! 이렇게 기쁜 일이! 난 라이를 안아 들며 라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아이구, 우리 라이는 똑똑하기도 하지.” “헤헤~.” 웃는 모습은 또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남자는 내 품에 안긴 라이를 보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이 분이 상아탑의 주인인 라이미안님?” 앗! 우리 라이도 알아 보다니! 난 라이의 머리를 쓸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그렇군요.” 남자는 굉장히 감명 받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엇 때문에 감명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난 다시 걸음을 옮기려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 빼곡히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 남자가 목청껏 소리쳤다. “이분이 바로 우리들의 영웅 아이언스 히로님이십니다!” 뭐라? 우리들의 영웅? 내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사방에서 천지를 진동시킬만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아-!” 내 주위를 둘러 싼 사람들은 일제히 손을 하늘 위로 치켜 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은 마치 광신도 같기도 했고, 열렬한 팬클럽 같기도 했다. 설마 이 것들이 다 내 팬들이란 말인가? 내가 그렇게 유명했던가? 아무튼 이럴 경우 환호에 대한 답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난 손을 들어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이렇게 절 환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동시에 말소리가 터져나왔다. 대충 들어보니 광팬들이나 할만한 그런 말들이었다. 뭐 말 한마디에 영웅적인 기개가 서려서 어쩌고 저쩌고……. 후후~ 설마 드디어 사람들이 나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한 건가? 사실 저 사람들 말은 조금도 틀린 게 없었다. 그 동안 말을 잘 안 해서 그렇지 세상에 나만한 영웅이 어디 있겠나? 사족이겠지만 그래도 부연 설명을 하자면 내 이름 영웅(英雄)이다. 박영웅(朴英雄). 히로(hiro)라는 이름도 히어로(hero)의 변형이다.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요?” 내가 묻자 그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저희도 히로님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예?” 이게 뭔 소리다냐? 나와 함께 싸우겠다니? “히로님께서 세계 평화를 위해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운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 아니, 그걸 어떻게…….” 내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누군가가 종이 한장을 불쑥 내밀었다. 대략 A4 용지 크기의 종이에는 큼직큼직하게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난 그것을 읽어 보았다. “세기의 대결 아이언스 히로 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아이리스의 공작이신 아이언스 히로님께서는 세계 평화를 위해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우려 하신다.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아이언스 히로 공작님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닐 수 없다. 뜻이 있는 자들은 모두 일어나 동참하라. 희대의 영웅이신 아이언스 히로 공작님을 도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를 무찌르자.” 잠시 침묵. “대체…….” 전단지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당장이라도 이 전단지를 북북 찢어버리고 싶지만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전단지를 이빨로 뜯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어떤 놈이 이딴 걸 뿌렸어!”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다. 남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서 지옥으로 가나, 천당으로 가나 가늠하고 있는데, 세기의 대결이라니……. 무슨 타이틀 매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대체 이 선동적인 문구는 뭐란 말인가? 대체 누가 희대의 영웅이야? “그럼 당신들은…….”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이들은 이 전단지를 보고 드래곤과 싸우자고 모인 사람들이다. 세상에 용사병에 걸린 놈들과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어하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감에 가득 차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 기세만으로도 드래곤을 쳐죽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기세만 그렇다는 얘기다. 솔직히 지금 내 심정은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이들은 9클래스의 능력은 짐작도 못할 것이고, 말해줘 봐야 믿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크로니스가 마법 한번만 쓰면 이들은 전부 죽어서 나가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겠다고 설쳐대고 있으니 황당하고 기가 막힐 수 밖에. “저희들은 히로님의 영웅적인 희생 정신에 감동하였습니다. 부디 미약하나마 저희의 힘도 보탤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히로님!”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제자이시자 엄청나게 강한 마법사인 히로님을 위해서라면 저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만세삼창에 난 몸둘 바를 몰랐다. 전설의 용사라니? 그리고 만세는 무슨 만세야? “오빠가 전설의 용사였어요?” “아…… 하하~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내가 적당히 얼버무리자 라이는 눈을 크게 뜨며 감탄하듯 말했다. “우와! 굉장해요, 오빠!” 내 품에서 내려온 라이는 이내 용사병 환자들과 함께 만세를 외쳐댔다. 진짜 미치겠군. 그나저나 이게 대체 몇 명이야? 대략 2천명에서 3천명 정도 되어 보인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이봐요, 진정들 하세요!” “히로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경청합시다!”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만큼. 부탁이니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주세요. 부담 된단 말입니다! “아, 저기…… 그러니까…….” 삽질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가 발닦고 잠이나 자, 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날 돕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인데. 젠장!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전단지를 뿌린 거야? “…….” 잠깐!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이 전단지를 뿌렸을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 난 옆에 있는 남자를 붙잡고 물어 보았다. “이 전단지 누가 쓴 건가요?” “아! 제가 듣기로는 사일런스 백작님이라고…….” “…….”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 인간이 아니고서는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없지. 이 인간 어디 있어? 당장 나와! 그 순간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둘로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지니가 서 있었다. 지니는 얼굴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띄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저 좀 봅시다.” “지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 없는 곳에서 좀 보자구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원하시니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난 지니를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데려갔다. 걷는 내내 난 속으로 분노를 삭여야 했다. 그리고 걸음이 멈추는 순간 더 이상 참지 않고 지니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너 이 자식! 너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래?” 지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원한이라니요? 제가 어찌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께 감히 원한을 품겠습니까?” 가증스러운 것! 겉으로는 날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뒤에서 이런 공작을 꾸며?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한테 원한이 없다면 지금 이건 뭐야? 니가 전단지 뿌렸다며!” “전 오직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하는 마음에서…….” “시끄러, 임마! 뭐가 날 위해서야? 너 진짜 왜 이래?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로하면 되지 이게 무슨 짓이야?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닥쳐! 진정하긴 뭘 진정해? 그래. 니가 날 물 먹이려고 작정을 했다 이거지? 좋아. 오늘 아주 끝을 보자. 너 죽고 나 살자!” “잠깐만 진정하시고 저들을 보십시오.” 난 지니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바퀴벌레처럼 우글우글거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전사, 마법사, 레인저, 도둑…… 저 은빛 찬란한 갑옷을 입은 놈은 뭐야? 저놈은 기사잖아. 지금은 각국이 전란에 휩싸여 있는 전국 시대. 기사는 당연 왕의 명령을 받들어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런 기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용사병 때문에 국가고 국왕이고 다 내팽개치고 이곳으로 달려왔다는 거군. 정말 세상에 미친놈들 많다. 그렇게 할 일이 없나? 한심하군. “그런데 왜 보라고 했니? 저놈들 볼 게 뭐가 있다고?” “자세히 보십시오.” “자세히 봐봐야 그 얼굴이 그 얼굴이지…….” “저들은 모두 아이언스 공작님을 돕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나도 알아.” “그리고 저들 중 대략 3할 정도가 여자입니다.” “……응?” “그리고 그 3할 중 대략 반 수 정도가 미녀입니다.” “……!” 난 놀라서 다시 그들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지니의 말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모인 사람들 중 3 분의 1 정도가 여자였고 그들 중 대다수는 미녀쪽에 속했다. 모인 사람들이 대략 3천명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그들 중 1천명이 여자고 그 반인 5백명이 미녀…… 헉! 이렇게 좋을 수가! 내가 그렇게 열심히 계산을 하는 사이 지니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아이언스 공작님의 심기를 상하게 해드렸군요. 부디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아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난 슬그머니 지니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지니의 옷깃을 바로해주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하하~ 용서라니요?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어찌 저를 위해주는 사일런스 백작님의 마음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잠시 장난을 좀 친 걸 가지고 그렇게 정색을 하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하하~.” “아! 장난이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또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절 싫어하시는 줄 알고…….” “음하하하! 그 무슨 섭한 말씀을! 제가 사일런스 백작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우리는 어느새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지니의 의도를 오해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역시 지니는 날 진심으로 위하고 있었던 거야. 기특한 녀석. 난 지니의 손을 꼭 움켜 잡았다. “절 위해 언제나 노력하시는 사일런스 백작님의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지니 역시 내 손을 꼭 움켜 잡았다. “하하,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다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신 것만으로 족합니다.” 이 것이야 말로 남자들의 끈끈한 우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아, 예…… 그러니까…… 그게…….” “라이레얼양을 만나러 오셨군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이심전심(以心傳心) 아니겠습니까?” “…….” 이심전심 같은 소리 하네. 난 남자끼리 이런 말 쓰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여자라면 또 모를까. “그나저나 라이레얼은 어디에 있나요?” “라이레얼양은…… 아! 저쪽에 계시는 군요.” “……예?” 난 지니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히로오~!” 내가 알기로 내 이름을 이렇게 낯뜨겁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명뿐이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라이레얼.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달려온 라이레얼이 나를 덥썩 껴안았다. “우웅~ 히로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라이레얼…….” 앗! 라이가 손가락을 빨며 날 보고 있다. 난 당황해서 라이레얼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라이레얼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이런 외설적인 장면을 보고 어린 라이가 무엇을 배우겠는가? 안 돼, 라이야! 보지마! 이런 걸 보면 정서 발달에 악영향을 끼친단 말이야! “제, 제발 좀 떨어지세요.” “싫어~.” “하지만 애들 교육상…….” “됐어. 더 이상 말하지 마. 사랑해.” “…….” 내가 라이레얼한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차라리 라이한테 구구단을 가르쳐 주고 말지. “라이레얼. 우리 얘기 좀 해요.” “응? 무슨 얘기? 사랑한다고? 아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나도 사랑해~.” “…….” 그게 아닌데. 나는 라이레얼을 열심히 설득한 끝에 막사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지니와 라이, 인디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난 지니를 위아래로 훑어 보며 말했다. “아니, 댁은 왜 따라오십니까?” “전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하는 마음에서…….” “저 위해주는 것은 거기까지로 충분하니 이제 업무에 충실하세요. 그게 절 돕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그럼 전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예. 추가 수당 안 줘도 일 좀 열심히 하시구요.” “염려 놓으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이와 인디와 나는 라이레얼의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막사의 문이 열린 순간 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허억!” 막사 안에는 한 소녀가 팔짱을 낀 채 날 노려보고 있었다. 대략 열다섯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엄청난 미녀였다. 길게 흘러내린 흰색 머리카락과 표독스러워보이는 은빛 눈동자.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원피스. 가느다란 팔과 다리. 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건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이었다. 정말 외모 자체가 예술이다. 갑자기 피그말리온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아! 여기서 피그말리온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략한 설명을 해주도록 하겠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피그말리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인간은 굉장히 별 볼일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집에 틀어박혀 조각만 했다. 으음, 갑자기 누군가가 생각난다. 내가 아는 드래곤 중에 하는 일 없이 수백년 동안 얼음 조각만 한 드래곤이 있었다. 그 드래곤이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라고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 아무튼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조각을 하던 피그말리온은 어느날 여자를 조각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기왕 조각할 거 옷 입고 있는 모습보단 옷 벗고 있는 모습이 좋을 거라는 생각에 인터넷 음란 사이트를 뒤지고 여러 도색잡지를 참고 하여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했다. 뚝딱뚝딱-!(조각하는 소리) 조각이 끝나고 난 후 컵라면을 먹으며 자신의 조각상을 바라보던 그는 깜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면발이 코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너무 아름다워!’ 여인 조각상은 예술 그 자체였다. 자신이 조각했지만 너무나 완벽했다. 이 조각상은 모든 미의 집결체였다. 세상 어떤 여자도 이 조각상에 비하면 추녀에 불과했다. 피그말리온은 그날부터 조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매일매일 조각상을 정신 없이 바라보고, 얘기를 들려 주고, 말을 걸었다. 조각 팔아서 번 돈으로 옷을 사서 조각상에게 입혀 주고, 심심하면 다시 벗기고, 손도 만지고, 가슴도 만지고, 괜히 쓰다듬고…… 아무튼 별 이상한 짓을 다 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이게 조금씩 심해지더니 나중엔 아예 조각상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조각상은 묵묵부답.(조각상이 말하는 거 본 사람?) ‘아! 이 조각상이 살아 있는 여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한 피그말리온은 간절히 빌었다. ‘우리 제발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 소원이 하늘에 닿았을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이 하는 짓이 진짜 우습고 기가 막혔지만 너무 불쌍하고 처량해 보여서 적선하는 셈 치고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날도 피그말리온은 컵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이번엔 면발이 코가 아니라 귀에서 흘러 나왔다. 조각상이 자신을 향해 생긋 웃음을 지은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몸을 움직이기까지 했다. 피그말리온은 컵라면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여인을 끌어 안았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구라성이 짙은 얘기다. 조각상이 살아서 움직였다니. 하긴, 뭐 신화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냐? 이 이야기의 주제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그런 주제를 담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용어가 남아 있다. 피그말리온 효과란 일종의 자기암시이자 자성예언이다. 스스로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식의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못할 것 같은 일도 할 수 있고, 자꾸만 ‘나는 할 수 없어’ 라는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할 수 있는 일도 못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피그말리온 효과는 군대에서 자주 써먹는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대한민국 군대는 군인에게 뭐든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좋은 곳이다. 아무튼 내가 이런 구라성 짙은 얘기를 구구절절히 늘어 놓은 이유는 내 앞에 서 있는 이 소녀가 피그말리온 이야기에 나오는 그 조각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정말 너무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어.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다. 대체 왜 날 노려보는 거지?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설마…… 나한테 반한 건가? 뭐? 나한테 반해? 정말? “…….” 아~ 이놈의 인기는 도대체 식을 줄 모른다니까. 어떻게 처음 보는 여자까지 나한테 반하냐? 이거 성형수술을 해서 좀 못생긴 얼굴로 만들든지 해야지 어디 불편해서 살겠나? 아~ 진짜 잘생겨서 인생 살기 피곤하다. 그나저나 계속 노려보고 있으니 참 부담스럽다. 좋으면 좋다고 말로 하지,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려보니? 하긴, 고백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내가 워낙 잘 생기고 잘 났으니. 좋아. 일단 내가 먼저 말을 걸어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아, 안녕하세요.” 난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해서 친근감을 다지자는 의미로 내민 거지 결코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저 가녀리고 새하얀 손을 잡아서 뭘 하겠는가? 음음, 그래도 이런 미소녀와 손을 잡는다니 기대된다. 두근두근~. 하지만 그녀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계속해서 싸늘한 눈빛으로 날 노려볼 뿐이었다. “니가 히로야?”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예쁘다. 예쁘니까 좀 건방진 것도 다 용서가 돼. 아~ 나는 여자의 미모에 약한 순진한 남자. “내, 내가 히로 맞아.” “나쁜 자식!” “…….” 이게 무슨 소린가? 전후좌우 설명 없이 다짜고짜 나쁜 자식이라니? 이 여자 언제 나 만난적 있나? 그런데 내가 왜 나쁜 자식이야? 뭐 때문에 내가 나쁜 자식이야? 당황하는 나를 제치고 라이레얼이 앞으로 나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카르?” “하지만 언니…….” “히로는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그런 말 하면 안 돼.” “어, 언니.” 소녀는 라이레얼의 품에 살포시 안겼다. 그런데 언니라니? 설마 라이레얼의 숨겨둔 동생인가? 잠깐. 그럼 아빠는 누구지? 설마 갈리온드? “정말 동생이에요?” “아니. 그냥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야. 이름은 카르.” “……예?” 난 황당해서 되물었다. 좋다고 따라다닌다니? 무슨 뜻이지? 그 순간 카르가 입을 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언니는 내꺼야!” “…….” 너무 혼란스럽다. 누가 나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줘. 대체 저 여자애의 정체는 뭐야?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 한 듯 인디가 나서서 내 귀에 속삭였다. “쟤는 레즈에요.” “…….” 레, 레즈라니? 그럼 이 여자애와 라이레얼이 그렇고 그런 사이? 카르는 라이레얼의 목을 끌어 안고 얼굴을 부비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마치 나 보란 듯이. 라이레얼은 별로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라, 라이레얼.” 내가 라이레얼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자 카르는 눈을 번쩍 뜨며 내 앞을 막아 섰다. “나의 언니한테 접근 하지 마. 비록 옛날에 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해도 이제 언니는 내꺼야!” “…….”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그러는 사이 라이레얼이 카르를 껴안으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나랑 히로는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걸.” “어, 언니…… 흑…… 너무 해요!” 울음을 터트리며 라이레얼의 가슴에 얼굴이 묻는 카르. 이어지는 라이레얼의 토닥거리는 손길. 그제야 난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카르라는 소녀는 라이레얼을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라이레얼과 그렇고 그런 관계다. 그래서 카르는 나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연적(戀敵)이 생긴 것이다. “…….” 연적이라니?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다른 여자와 연적이 되다니. 어찌 이런 판타지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거지? 내가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모를까. 믿을 수 없어! “흑흑, 언니 저 사랑하는 거 맞죠?” “응.” “흑~ 저는 언니만 있으면 돼요. 전 언니꺼에요.” “그래. 니 맘 내가 다 알아.” “아아~ 언니~.” 토닥토닥~! 두 미녀가 꼭 껴안고 몸을 비비는 장면. 마치 그렇고 그런 비디오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다. 그걸 보는 내 기분은…… 솔직히 너무 좋다. 원래 여자들은 야오이를 좋아하고, 남자들은 레즈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거 너무 외설적인 거 아닌가? 이러면 안 돼는데. 이런 건 옳지 못한 일인데. 혹시라도 어린애들이 보면 정서발달에 악영향을 미칠텐데. “…….” 허억! 어린애? 난 재빨리 라이의 눈을 가렸다. “응? 왜 그래요, 오빠?” “안 돼, 라이야. 넌 저런 걸 봐서는 안 돼.” “왜요?” “저런 장면은 너의 동심을 해칠 우려가 있단다. 오빠는 라이가 영원히 순진하고 착한 오빠만의 라이로 남길 바래. 오빠 마음 알지?” 고개를 갸웃갸웃. “모르겠는데요.” “…….” 사실 이러면 할 말 없다. 라이야, 이럴 경우엔 예의상 ‘예’ 라고 대답하는 거란다. 자꾸 오빠 곤란하게 하면 오빠 섭하다. 그러는 사이 카르는 울음을 그치고 눈꽃 같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라이레얼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음음, 저 모습을 보니 코알라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매달린 모습이 정말 코알라스럽다. 그러고보니 둘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 요염하고 쫙 빠진 늘씬한 미녀와 아직 소녀티가 물씬 풍기는 귀엽고 아름다운 소녀. 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그런데 무슨 일로 온 거야, 히로?” “아, 그게…….” “나보고 싶어서 온 거지? 그렇지?” “예.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긴 한데…….” “정말? 너무 기뻐!” 라이레얼은 카르를 내팽개치고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이 와중에도 인디에게 외쳤다. “라이 못 보게 해!” 너무 껴안지 마세요, 라이레얼. 숨 쉬기 힘들답니다. “이 자식! 내 딸한테 무슨 짓이야! 당장 떨어지지 못 해?”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막사 안으로 들어온 갈리온드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손 내 딸의 몸에서 당장 떼! 니가 뭔데 내 딸을 껴안아?” “…….” 분명 말하지만 난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건 라이레얼이 날 껴 안은 거지, 대체 어딜 봐서 내가 라이레얼을 껴안은 거야? 댁은 눈도 없습니까? 엘프 시력 좋다고 하던데 나 뻥이었나 보군. “언니 몸에서 손 떼!” 쟤는 또 왜 저러냐? 뒤에서는 갈리온드가 난리를 치고 있고, 앞에서는 카르가 난리를 치고 있구나. 둘 다 나를 찢어 죽일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어서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만약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공중분해 되었을 것이다. 제발 그만하세요, 라이레얼. 이러다가 저 정말 죽겠습니다. 라이레얼이 포옹을 푼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갈리온드와 카르는 날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내가 라이레얼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저 둘이 나를 협공할 것 같다. 갈리온드가 내 팔을 붙잡고 카르가 내 거기(?)를 걷어 찬다. 그리고 갈리온드는 내 목을 잡아서 비틀고 카르는 내 잘 생긴 얼굴에 주먹질을…… 안 돼! 다른 곳은 다 돼도 거기와 얼굴만은 안 돼! “라이레얼!” 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라이레얼을 껴안았다. “응? 왜 그래, 히로?” “저 라이레얼과 떨어지기 싫어요.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좋아? 아~ 나 감동했어.” 라이레얼은 다시 나를 와락 껴안았고, 난 저항하지 않고 살포시 품에 안겼다. 그런 눈으로 노려보지들 마세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난 라이레얼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알아. 날 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진짜 중요한 이유는…….” “알아. 날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거지?”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진짜 매우 중요한 이유는…….” “알아. 날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온 거지? 난 히로 마음 다 알아.” “……그게 아니라 차원의 열쇠 때문에 온 건데요.” “아! 그거!” 라이레얼은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걸터 앉았다. 난 라이레얼의 왼쪽에 딱 붙어서 앉았다. 그러자 카르는 라이레얼의 오른쪽에 딱 붙어서 앉았다. 인디는 주춤거리며 다가와 내 옆에 앉았고, 라이는 자연스럽게 내 무릎 위에 앉았다. 그리고 갈리온드는…… 루엔에게 뒷덜미를 잡혀 막사 밖으로 끌려갔다. 으음, 정말 다행이다. 고마워요, 루엔. “차원의 열쇠가 필요해?” “예. 굉장히 필요해요.” 그게 없으면 모든 계획이 풀거품이 되니. “내가 그걸 얻기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히로는 알아?” “예. 뭐…….”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 차원의 열쇠를 얻기 위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버들랜드까지 갔어. 그리고 거기서 수 많은 청안백우조들을 물리치고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를 만났지. 그때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히로는 모를 거야. 하지만 난 물러설 수 없었어. 왠지 알아?” “그, 글쎄요.” “그건 내가 히로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야.” “……예?” 갑자기 얘기가 왜 그런쪽으로 빠지나? “난 히로가 차원의 열쇠를 꼭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로를 위해 그 열쇠를 찾아오려 했던거구. 화아트 드래곤이 너무 무섭긴 했지만 히로를 너무 사랑했기에 난 버텼어. 설사 죽게 된다하더라도 나 히로를 너무 사랑하니까…… 흑…….” 라이레얼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라, 라이레얼.” 아아~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라이레얼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고 있었을 줄이야. 날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다니. 흑~ 너무 기뻐~. “히로.” 우리는 서로를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눈빛에도 온도가 있다면 우리는 자연발화했을 것이다. “안 돼요, 언니! 남자 따위한테 넘어가지 마세요!” “…….” 남자 따위라니? 그런 남성비하적인 발언을. 어찌되었든 난 카르의 외침 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또 라이레얼의 페이스에 끌려갈 뻔했군. 역시 난 예쁜 여자한테는 약해. 난 마음을 다 잡고 내가 여기온 목적을 떠올렸다. “그럼 차원의 열쇠는 지금 라이레얼한테 있겠네요?” “응.” 라이레얼은 고개만 끄덕일뿐 줄 생각은 별로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난 달라고 말하기로 하였다. “저 그거 필요한데.” “나도 알아.” “그, 그럼 주실 수 있으세요?” “흐음…….” 저 한숨 소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라이레얼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입을 다물고 간절한 표정으로 라이레얼을 바라 보았다. 제발 주세요, 라이레얼. “으음, 공짜로?” “……예?” 이게 무슨 소린가? 어째서 저런 질문을 한 거지? 저 질문의 의미는 뭐지? 공짜로, 라니? 그럼 나한테 뭔가를 바라고 있단 말인가? 대체 나 같은 놈한테 바랄게 뭐가 있다고? 라이레얼은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히로.” “예. 말씀하세요.” “히로도 잘 알다시피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 “뭐 그야 그렇지만…….” 라이레얼의 눈빛은 굉장히 무언가를 갈구(渴求)하고 있었다. 갈구는 간절히 바라며 구한다는 뜻이다. 대체 라이레얼은 뭘 간절히 바라며 구하고 있을까? “호,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예의상 물었는데 라이레얼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날 사랑해서 죽음을 불사하고 찾아왔다 어쩐다 해놓구선 이제와서 대가를 요구하다니. 흑~ 하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 “도, 돈이 필요하신가요? 금화나 보석이라면 얼마든지…….” 나한테 금화나 보석이 있을리 없다. 하지만 내 옆에 앉은 이 계집애 같은 남자애가 누군가?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가 아닌가? 라이레얼이 원한다면 이 놈의 레어를 몽땅 털어서라도 지불해야지. “나 돈 같은 건 필요 없어.” “헉!” 신음성이 절로 나온다. 돈이 필요 없다니?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 했으면 기뻐했겠지만 라이레얼이 이렇게 말 하니 불안감이 몸을 엄습한다. 라이레얼이 누군가? 돈 밝히는 하프엘프 아닌가? 그런 라이레얼이 돈을 싫다고 하다니. 대체 뭘 원하기에……. “그, 그럼 뭐가 좋을까요? 혹시 필요한 거라도……?” “응. 필요한 게 하나 있어.” “그게 뭔데요?” 라이레얼은 내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며 나를 자기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히로의 사랑이야.” “…….” 드디어 터졌다. 폭탄 선언. 난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나의 사랑이 필요하다니. 라이레얼이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고 있었을 줄이야. 너무너무 감동적이다. 난 살포시 라이레얼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꼬옥 안아 주었다. “사랑해, 히로.” “저도…….” 내가 ‘저도 사랑해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카르가 벌떡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카르는 그 예쁜 눈을 무섭게 치켜 뜨고 동그란 은빛 눈동자를 차갑게 빛냈다. “이 나쁜 자식! 내가 그렇게 경고 했는데도 언니한테 꼬리를 쳐? 없애 버리겠어!” 꼬리를 치다니? 누가? 그리고 없애 버려? 누구를? 카르의 말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난 카르가 나에게 달려들어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식으로 내 머리카락을 쥐어 뜯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외쳤을뿐이다. “파워 워드 킬(power word kill)!” 파워 워드 킬이라니? 나 이제 죽는 건가? 그 순간 인디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디스펠 매직(dispell magic)!”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다가오는 마나의 흐름. 그 흐름은 나를 덮치기 직전에 주변으로 분산되었다. 이, 이런 놀라운 마법이라니.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마나의 흐름을 느낄 줄 아는 라이도 깜짝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무, 무서워요, 오빠. 우엥~.” 나도 무섭다, 라이야. 뭘 모르면 무서움도 못 느끼겠지만 나와 라이는 마법사다. 이런 강력한 마나의 흐름 앞에선 덜덜 떨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예로 라이는 지금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몸을 조금씩 떨고 있었다. 놀랍고 무서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지만 라이가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니 오히려 차분해진다. 난 라이를 꼭 껴안고 달래주었다. “괜찮아, 라이야. 오빠가 곁에 있잖아.” 토닥토닥~. 그나저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지금 죽었다 살아난 것과 다름 없다. 만약 인디가 때를 맞춰 마법을 써주지 않았다면 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파워 워드 킬은 절대 죽음 마법이었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상대방 클래스보다 동급이거나 높아야 한다. 아니면, 드래곤처럼 생명력이 강해야 한다. 난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한다. “…….” 생각해 보니 파워 워드 킬은 9클래스 마법이잖아. 그럼 저 소녀가 9클래스 마법사란 얘기? 말도 안 돼! 어떻게 저 가녀리고 아름답게 생긴 소녀가 9클래스 마법사일 수 있는 거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저 소녀가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 폴리모프한 드래곤? 서, 설마……. 난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돌려 카르를 보았다. 그녀와 인디는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넌 왜 끼어 들어?” “니가 히로님을 죽이려 했잖아.” “저 인간이 자꾸 나의 라이레얼 언니한테 꼬리를 치잖아!” “그래도 죽이는 것은 안 돼!” “저 인간이 죽건 말건 니가 뭔 상관인데?” “상관 있어!” “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무, 무섭다. 인디도 화내니까 무섭구나. 난 혹시나 불똥이 나에게로 튈 것을 염려해 라이레얼의 옆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저 여자애 정체가 뭐에요?” “으응. 카르는 드래곤이야.” “……예?”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 그랬었군. 어쩐지 하얗게 생겼다 했어. 화이트 드래곤이어서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깔이 저렇게 하얀색이었군. 마치 석고상처럼 말이야. 카르의 정체가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라면 아까 9클래스 마법을 쓴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까했던 말은 대체 뭐야? 그리고 왜 날 죽이려 했던 거지? “설명해주시겠어요, 라이레얼?” “응. 그러니까 카르는 화이트 드래곤인데 말이야…….” 라이레얼의 설명을 다 들은 나는 경악했다. 화이트 드래곤이 라이레얼한테 반해서 이곳까지 쫓아왔다고?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믿어야 했다. 그것만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날 죽이려 하다니. 요즘 드래곤들 왜 이러냐?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즉 카르가 날 노려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너 한번만 더 나의 라이레얼 언니한테 꼬리치면 그땐 진짜 죽여 버릴 거야!” “…….” 죽인덴다. 그리고 그 말은 협박성 멘트가 아닌 진심이었다. 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라이레얼한테서 떨어졌다. 화이트 드래곤이라더니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군. 흑~ 무서워~. 그럼 차원의 열쇠는 어쩌지? 차원의 열쇠를 꼭 받아야 하는데. “라, 라이레얼 차원의 열쇠…….” 말 걸기가 무섭다. 난 덜덜 떨며 라이를 꼭 끌어 안았다. 라이야, 이 오빠에게 힘을 주렴. “아! 차원의 열쇠! 갖고 싶어?” “예.” 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이레얼은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리더니 투박하고 조잡하게 생긴 열쇠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게 차원의 열쇠에요?” “응.” “그, 그럼 그거 저 주시면 안 될까요?” 난 말하는 틈틈이 카르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말하는 도중 날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건 아니겠지? “좋아. 줄게.” “예? 정말요?” 라이레얼이 너무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난 당황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단 조건이 하나 있어.” 음음, 그럼 그렇지. 조건이 없을리 없지. “뭐, 뭔데요?” “나랑 결혼해.” “…….” 난 잘못 들은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노, 농담이시죠?” “아니.” “그, 그럼…….” “난 진심이야, 히로.” “저, 전…….” “사랑해~.” “라, 라이레얼.” 라이레얼은 두 손으로 내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 접근했다. 이것은 키스하려는 제스쳐? 아, 안 돼는데. 난 저항하려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원래 예쁜 여자의 접근에 대해선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게 남자의 예의 아니겠나? “너 내가 꼬리 치지 말라고 경고 했는데…….” “아, 아니야. 나는 결백해!” 이게 어딜봐서 내가 꼬리를 치는 건가? 라이레얼이 날 유혹하는 거지. 만약 이대로 키스라도 한다면 카르가 날 죽일 것이다. 안 돼! 난 살아 남아야 해. 살아서 우리 라이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는 것까지 봐야 해. “죽어!” “슬립(sleep)!” 카르가 마법을 쓰려는 순간 인디가 먼저 마법을 썼다. 라이레얼은 풀썩 쓰러져 내 품에 안겼다. “너 나의 언니한테 무슨 짓이야?” “어쨌든 히로님과 키스하는 것은 막았잖아.” “그, 그야 그렇지만…….” 난 라이레얼을 침대에 눕히고 재빨리 차원의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라이레얼한테는 미안하지만 기회가 지금 밖에는 없었다. 만약 지금 차원의 열쇠를 얻지 못한다면 라이레얼의 요구를 들어주는 상황이 오게 될지도 몰랐다. 결혼이라니. 결혼해서 한 여자에게 얽매여 살기엔 내가 너무 젊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미안해요, 라이레얼. “가자, 라이야.” 볼 일을 마친 나는 라이를 안고 막사를 나갔다. 혹시라도 라이레얼이 벌떡 일어나 나를 붙잡을까 두려워서. 그나저나 화이트 드래곤이라니. 라이레얼의 미모가 화이트 드래곤마저 반할 정도였나? 하긴, 라이레얼이 예쁘긴 예쁘지. 그런데 드래곤들의 미의 기준도 인간과 똑 같나? 아니면 저 드래곤의 정신 상태가 조금 이상해서? “…….”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이제까지 만나왔던 드래곤들이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으음, 어째서 이 세계 드래곤들은 전부 이 모양인 걸까? 한번쯤은 제정신이 박힌 드래곤을 만나고 싶어. TITLE ▶18 :: <아이리스 13권> 9클래스 - 15 sharpshooter(psungho) 03-05-31 :: :: 35218 -타수 놀이 금지- 밖으로 나온 나는 차원의 열쇠를 꺼내 보았다. 이 낡고 투박하게 생긴 열쇠가 정말로 아공간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잘 믿기지가 않는다. 차원의 열쇠라고 하면 금빛 휘양찬란하고 몸체에 다이아몬드와 루비, 에메랄드 등의 보석들이 마구마구 박혀있어야하는 거 아닌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아티팩트라는데 참 별 볼일 없게 생겼군. 혹시 이거 가짜 아니야? 일명 짭퉁. “그거 진짜 맞아요.” “허억!” 내 뒤엔 인디가 서 있었다. 대체 언제 다가온 거지? “왜 그렇게 놀라세요?” “몰라서 묻냐? 인기척이라도 내면서 다가와야지 그러게 슬그머니 다가오는데 내가 안 놀라게 생겼어?” “죄, 죄송해요.” 그렇게 말한 인디는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듯한 몸짓.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뻔할 뻔자다. 너무나 뻔해서 말할 가치조차 못 느낀다. “가 봐.” “예?” “괜히 그렇게 두리번거리지 말고 가 보라고.” “저, 정말 그래도 될까요?” “응. 그래도 돼. 부담 갖지 말고 가.” “감사합니다.” 뭐 감사까지야. 그냥 고마워만 해라. 인디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어딘가로 뛰어갔다. “일루니아님~.” 아주 좋아 죽는구만.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옆에는 블랙 드래곤, 라이레얼의 옆에는 화이트 드래곤. 아아~ 안 그래도 최강인 여인들 옆에 정말 최강인 존재가 붙었구나. 이 세계가 어찌되려고 이러는지. “하아~.” 난 세계의 안위를 걱정하는 용사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상황이 이러하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웬만하면 남 일에 신경쓰지 않는 드래곤들이 왜 이렇게 떼거지로 인간 세상에 나와서 설쳐대는 걸까? 게다가 애인까지 만들고 말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라이가 곁에 있잖아요.” “그래.”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이는 원래부터 극강의 귀여움을 자랑했지만 요즘들어 더욱 귀여워지고 있었다. 설마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겠지? “앗! 그런데 라이의 친한 친구 이코는 어디 갔니? 아까부터 이코가 안 보이네. 인디네 집에 놓고 왔니?” “아니에요. 이코는 언제나 라이와 함께 있는 걸요.” 라이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라이코스를 꺼내 보였다. 라이코스는 마치 뇌사 상태에 빠진 듯 숨소리도 안 내고 자고 있었다. 설마 수면기? 청안백우조한테도 수면기가 있나? 아니면 귀식대법? 졸려서 자는지 억지로 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이 잠든 것은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아까 라이레얼을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음음, 지금쯤 아마 청안백우조탕이 되어 있지 않을까? 나는 라이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 드넓은 세상에 설마 내가 갈 곳이 없겠는가? 하지만 갈 곳은 많아도 반겨줄 곳은 없으니…… 아! 한군데 있다. 난 라이를 데리고 용사병에 걸린 환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그 근처에 가기만 했는데도 반응은 열렬했다. “오오! 전설의 용사 히로님께서 오셨다!” 짝짝짝짝-! 모두들 하던 짓을 멈추고 기립 박수를 친다. 난 쑥쓰러움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하하~ 거 참 쑥스럽게 왜들 그러시는 지…….” 그래도 좋다. 내가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보겠는가? 여기 모인 이들은 전부 나의 팬클럽이나 다름 없었다. 그것도 일반 팬이 아닌 광팬. 아아~ 너무 기쁘다. 역시 사람은 잘나고 볼 일이야. “흠흠!” 내가 헛기침을 하며 말 할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자 사람들은 알아서 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장내가 조용해지는 것은 이렇게 순식간이었다. “일단 줄을 좀 맞춰서 서주십시오! 진정한 용사는 질서 의식 또한 뛰어난 법입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은 줄을 서겠다고 난리를 쳤다.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줄이 망가졌다. “저를 중심으로 육열종대로 서세요. 제 오른쪽으로 여자 두 줄, 왼쪽으로 남자 네 줄. 실시!” “실시!” 시키지도 않았는데 복창을 하다니. 아아~ 기분 너무 좋다. 용사병 환자들은 열심히 사방팔방 움직이며 줄을 섰다. 난 손을 들어가며 일일이 그들을 지휘하였다. “줄 삐뚤어졌습니다. 잘 좀 서세요. 거긴 왜 다섯명입니까? 한명 모자르잖아요. 뒤에 있는 사람 하나가 앞으로 나와요. 이봐요, 아저씨! 육열종대라니까! 횡대가 아니라, 종대! 뒤로 서야지!” 줄 세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체육 시간에 체육 선생이 왜 그렇게 난리를 쳐댔는지 알 것 같군. 목청 터져라 줄서라고 외쳐대는데 뒤에서 서서 놀고 있으면 정말 한대 패버리고 싶다. “거기 줄 안 서? 내 말이 껌이냐? 씹게? 너 내가 핫바지로 보여? 너 이름 뭐야, 임마? 줄 안 설 거면 집으로 가!” 이런 나의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줄이 만들어졌다. 휴우~ 3천명 줄세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구나. 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찼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지만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기 위해 환장한 놈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정말 몰랐다. 드래곤을 직접 만나보고도 과연 그런 말이 나올지는 의심스럽지만. “자, 이제부터 인원 파악에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줄부터 앉으면서 번호 시작!” 사람들은 앉으면서 번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한번에 될리 만무하다. 50명 줄 세워 놔도 한번에 안 되는 게 3천명을 줄 세워 놓고 하니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은 당연할지도. “그러니까 내가 줄 똑바로 맞춰서 서라고 했잖아! 자꾸 이러면 재미 없어! 다시 첫 줄부터 시작!” 이거 하느라 날 새겠군. 결국 난 인원수 파악을 포기하였다. 안 되는 거 계속 붙잡고 있어봐야 마음만 상할 뿐이니. 그래도 대충 줄은 세웠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내가 줄을 세운 데는 다 깊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남자와 여자를 따로 줄 세운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괜히 따로 줄 세웠겠는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거다. 난 남자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여자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니의 말대로 제법 예쁘게 생긴 여자들이 반 수 이상이었다. 흐흐~ 이 여자들이 다 내 팬들이란 말이지? 아, 정말 살아있길 잘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고, 역시 오래 살다보면 인생 필 날 있다. 앗! 저 여자 예쁘다. 말이라도 좀 걸어볼까? 오옷! 저 여자도 예쁘네. 아이~ 어쩜 좋아~. 눈을 둘 곳이 없네. 자세히 살펴보니 엘프도 있다. 엘프답게 당연 미녀다. 쫙 빠진 8등신 미녀. 너무너무 예쁘다. 내 마음에 쏙 들어. 난 서른번째 줄을 지나치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기 때문있었다. 노란색에 가까운 금색 단발 머리. 동그랗고 커다란 검은색 뿔테 안경. 그리고 뺨에 가득한 주근깨. “너, 넌…….” 난 이 여자애의 이름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워낙 머리가 좋아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기 때문은 아니고, 이 여자애가 워낙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1학년 FH반 18번 뮤리아!” 확실히 기억난다. 까르린느라는 싸가지 없는 룸메이트 때문에 한때 하녀처럼 생활하기도 했던 비운의 여자아이.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의 엄청난 활약으로 까르린느는 다중인격 어쩌고 지랄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뮤리아는 하녀 생활에서 해방 되었다. 그 후에 멋도 모르고 사일런스 지니를 사랑하다가 슬픈 이별을 해야 했지. 그런 뮤리아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아, 안녕.” 뮤리아는 날 알아봤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음음, 못 본 사이에 꽤 많이 변했다. 빨강머리 앤처럼 양갈래로 땋아서 묶고 다녔던 머리카락을 단발로 짜른 것하며 주근깨도 많이 없어졌고, 결정적으로 예전에 어벙했던 표정이 아닌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옛날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그렇게 예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당당한 미인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니가 왜 여기 있는 거니? 너도 드래곤과 싸우게?” “아, 아니.” “드래곤과 싸울 것도 아닌데 여긴 왜 왔어?” “보고 싶어서.” “…….” 이게 뭔 말이다냐? 보고 싶어서라니? 드래곤을 보고 싶어서? 하긴, 드래곤은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드래곤 한번 보려고 학교도 때려치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지금은 방학 중이야. 그리고 나 드래곤에는 별로 관심 없어.” “그럼?” “그, 그게…….” 뮤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이 제스쳐는 뭐지? 대체 무엇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거지? 물어 볼 필요성을 못 느낀다. 보고 싶다고 한 건 드래곤이 아니라 사일런스 지니였군. 설마 아직까지 지니를 사랑하고 있었을 줄은……. 하아~ 얼마나 사일런스 지니가 보고 싶었으면 여기까지 달려 왔을까? 순진한 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다니. 사일런스 지니…… 그대야 말로 천하의 유일무이한 바람둥이구려. “그래서 보긴 봤어?” 내 물음에 뮤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먼발치에서 잠깐.” 차마 다가가서 말을 걸지는 못 했다는 거군. “내가 나중에 사일런스 백작한테 말해둘게. 둘만 만날 수 있도록 말이야.” “저, 정말? 그, 그럴 필요는 없는데…….” 얼굴에 ‘그렇게 되면 저는 좋아 죽을 지도 몰라요’ 라고 써놓구선 그럴 필요가 없다니. 좋으면서 빼기는. “알았어. 뭐 그럴 필요가 없다면 나도 굳이 말하지는 않을게.” 이렇게 말하자 뮤리아는 내 손을 덥썩 붙잡으며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야! 꼭 좀 부탁할게.” 진작에 이럴 것이지. 왜 튕기니? 흥! 웃기지도 않아. 난 뮤리아에게 꼭 둘만의 만남을 주선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다시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숫자가 숫자이다보니 대충 둘러보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다 둘러보고 나자 한 남자가 일어나 물었다. “어째서 여자들을 그렇게 주의 깊게 둘러 보신 겁니까?” “거기에는 다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깊은 이유라니…… 무슨 이유가 있기에 그러신 건가요?” 예쁜 여자 탐색해 보았다고 말했다간 욕 먹을 것이 뻔하다. 그렇기에 이럴 경우 본의 아니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한다. 당연 나는 그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흠흠, 사실 저에겐 알려지지 않은 능력이 있습니다.” “예? 알려지지 않은 능력이라니요?” “그것은 바로 심안(心眼)입니다.” “심안이라면……?” “일명 마음의 눈이라고도 하지요. 전 이 눈을 가지고 사람들의 능력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허억! 그런 훌륭한 능력이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실 겁니다. 저도 저한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달은 지는 알마 안 되었으니까요.” “과연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님이시군요!” 전설의 용사라니. 전설이 될 용사라면 모를까. 참고로 전설이란 옛날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존재인 나와는 별 상관 없는 얘기지. 어찌되었든 사람들은 굉장히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아아~ 선망에 가득 찬 저 초롱초롱한 눈빛들. 정말 기분 좋다. 이래서 사람들은 유명해 지기를 바라는 거구나. 이제부터 싸인 연습이라도 해둘까? “드래곤과 싸울 때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은 금방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전체의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지금 그 사람들을 추려낼 생각입니다. 저도 가슴이 아프지만 이건 모두를 위한 선택입니다.” 난 비통한 어조로 말했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명분은 만들어진 셈이다. 후후~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심안(心眼). 일명 마음의 눈. 나한테 이런 고급스런 능력이 있을리 없다. 그럼 아까 사람들에게 했던 얘기는 무엇인가? 당연 뻥이다. 그럼 왜 그런 웃기지도 않은 뻥을 쳤는가? 그것은 아주 중요한 작업을 위해서다. 그 작업은 이름하여 폭탄 제거. “…….” 음음, 이건 사실 꼭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폭탄의 기준이란 단순히 얼굴만 아니다. 얼굴과 능력을 종합적으로 따져 정말로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사람을 추려내는 것이다. 어디 보자. 누구를 빼야 하나? “거기 세 번째 줄에 있는 사람들 나오세요. 간신히 턱걸이로 1클래스 마스터해 놓구선 여기와 있으면 어쩝니까?” “저, 저흰 2클래슨데…….” “어디서 2클래스 같은 소리를! 제가 장님으로 보이십니까?” “저, 정말이에요.” “그럼 2클래스 마법 한번 써보세요.” “그, 그건…….” “됐어요! 변명하지 마세요.” “하, 하지만…….” “그리고 2클래스여도 어차피 뺄 겁니다. 2클래스 가지고 어떻게 드래곤 앞에 명함을 내밉니까? 잔말 말고 빠지세요!” 난 그렇게 하나하나씩 추려내기 시작했다. 내가 8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다 보니 마법사들 추려내는 것은 간단했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직업을 가진 자들을 추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얼굴 보고 추려냈다. 음음,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두가 이해해 주길 바라는 건 무리겠지? 이렇게 추려내고 나자 대략 400명 정도의 미녀들만이 자리에 남았다. 후후~ 폭탄 제거 대성공! 그나저나 이젠 남자들을 추려낼 차례군. 용사병에 걸려서 같이 싸우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어느정도 능력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쥐뿔도 없는 주제에 드래곤과 싸우겠다고 하는 것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표현가지고도 부족하다. 1클래스 마법사, 간신히 검만 들 줄 아는 기사, 멋도 모르고 근육만 자랑하는 전사, 그럴듯하게 활만 매고 있는 궁사, 두 건만 쓰고 있는 도둑, 나침반만 들고 있는 레인저. 전부 퇴출 대상이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일이 골라낸다는 것은 나 혼자 힘으론 불가능했다. 그래서 난 각 분야의 노련한 사람들을 몇 명씩 골라 그들로 하여금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골라내게 하였다. 그렇게 하니 일이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전 세계 평화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죽어도 상관 없으니 세계 평화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개기는 자들이 문제였다. 소영웅 심리에 흠뻑 젖은 이들은 내가 어떠한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저는 세계 평화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은 나도 잘 이해한다. 하지만 굳이 목숨을 바칠 필요가 없는데 왜 자꾸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니? 그렇게 죽고 싶으면 그냥 목을 매면 되잖아. “제발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들은 당당하게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맞서 싸우겠습니다.” 이 사람들 말 참 안 듣는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 우겨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것들을 전부 패버릴 수도 없고. “세계 평화는 제가 맡기시고 당신들은 인생에 투자하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우는 것이 제 인생입니다.” 정말 말 안 통한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이럴 때는 무턱대고 쫓아내는 것보다 잘 구슬리는 편이 좋다. 사람은 머리를 쓰는 동물 아니겠나? “이리 모여 보세요.” 난 떨어졌는데도 집에 안 간다고 버티는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의 각오는 잘 알았습니다. 사실 제가 여러분들을 뺀 것은 여러분들께 중요한 임무를 맡겨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임무라니요? 무슨 임무 말입니까?” “사실 저를 비롯한 강한 용사들이 드래곤과 싸우러 간다고 해도 드래곤을 쓰러트릴 확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패할 경우 이 세상은 어찌되겠습니까?” “…….” 사람들은 얘기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주의를 기울여 내 얘기를 경청했다. 이 정도면 이미 반쯤은 넘어왔다고 할 수 있다. 내 주특기는 거짓말~ 나는야 구라쟁이~ 뻥 까는 재미에 인생을 산다네~. 난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말의 걱정은 떨쳐버릴 수가 없더군요. 그 걱정이 무엇인지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겁니다.” “…….” “전 이 세상을 지키고 싶습니다. 인간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후방을 맡아 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힘을 길러 내일을 기약하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전 드래곤 브레스에 맞아 뼈가루조차 안 남게 된다 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그 죽음을 맡이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난 말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내 예상대로 사람들은 굉장히 감동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아아~ 진짜 내가 말하고도 내가 감동적이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동할 수 밖에 없다니. 난 타고난 구라쟁이인가봐. 어찌되었든 나의 감동적인 연설로 끝까지 남겠다고 개기는 사람들을 전부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실력 떨어지는 사람을 추려내는 작업이 끝나고나자 남아있는 사람들은 대략 1천명 정도였다. 여자가 400명, 남자가 600명. 하지만 작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무슨 군대도 아닌데 1천명씩이나 있을 필요는 없다. 이들 중에서 또 추려 내야지. “여자들은 제가 추려낼테니 남자들은 옆사람과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은 남고 진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세요.” 이 작업을 통해 여자들은 100명 줄었고, 남자들은 300명 줄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600명. 그 많던 사람들 중에 5 분의 1만이 남은 것이다. 난 남은 사람들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그런데 내가 이 짓을 왜 한 거지? 무엇 때문에? 음음, 괜히 쓸데 없는데 시간만 낭비했군. 내가 얘들 데리고 정말 크로니스와 맞짱 뜨자고 설칠 것도 아닌데. 흑~ 내가 미쳤지~. 여자들만 빼고 나머니 놈들은 전부 집으로 돌려 보낼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장이 벌떡 일어섰다. 지팡이를 든 것과 로브를 입은 것을 보니 마법사가 분명하다. “내가 듣기로 아이언스 공작께서는 5클래스 마스터라고 알고 있소. 그런데 5클래스 마스터 주제에 어떻게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를 상대한단 말이오?” 노인은 불신의 눈초리로 날 쳐다보았다. 음음,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대놓고 저렇게 말하니 내 기분이 좋을리 없다. “그러는 노인장께서는 몇 클래스십니까?” “본인은 6클래스요.” 역시 클래스가 높으니 큰소리를 쳤던 거군. 노인은 단지 그 말만으로는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에 대해 떠벌리기 시작했다. “본인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한 기질을 타고나 4살 때 말을 했으며 5살 때 문자를 익혔소. 그리고 6살 때부터 대마법사이시자 상아탑의 원로이셨던 란셀님의 도제(徒弟)로 들어가 수년간 마법을 배웠소. 본인은 란셀님의 수하에 있던 여러 도제들 중에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러 사형들을 제치고…….”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 잘났어’ 라는 얘기다. 허허, 이거 참…… 마법사들이 프라이드로 먹고 사는 직업이라지만 저렇게 잘난척을 하다니. 저 노인은 낯뜨겁지도 않나? “흠흠, 노인장께서 훌륭하신 마법사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람들은 노인의 말에 대충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5클래스는 조금 문제가 있긴 하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5클래스일 경우다. “제 스승님이 누군지 아실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아니,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실겁니다.” 난 혹시나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다시 둘러 보았는데 다행히 그런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여러분들께서 잘 알다시피 제 스승님은 최고의 마법사라 해도 구라가 아니고 최강의 마법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이십니다. 용장 밑에 약졸 없고, 범의 자식이 개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제 나이를 생각해볼 때 5클래스 마스터라는 경지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저는 해냈습니다. 왜냐? 그건 제가 선택받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선택 받은 존재라니. 사실 난 선택 받은 존재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 그 누구도 나를 선택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들은 나를 선택했다. 내가 세계 평화를 지켜줄 구세주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믿음에 보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약간의 구라도 용납되기 마련이고. “많은 분들께서는 제가 아직도 5클래스 마스터일 거라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일뿐입니다. 저는 변했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만 서 있기에는 저란 존재가 너무도 대단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 동안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수련에 정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저는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습니다.” “그럼 대체 몇 클래스란 말이오?” 난 두 팔을 쫙 펼치며 고개를 빳빳히 세웠다. 그리고 영웅의 기개를 가득 담아 자신있게 외쳤다. “본인은 8클래스 마스터입니다!” 순간,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정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경악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라도 좋으니 제발 말 좀 해라. 이렇게 팔 벌리고 있는 거 쉬운 일 아니다. 아~ 팔 저려. 다행히 노인장께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8클래스 마스터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정말?” “물론입니다.” “진짜?” “속고만 사셨습니까?” 하지만 노인장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건지, 믿기 싫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난 믿을 수 없소.” 노인장 고집하고는…… 뭐, 믿을 수 없다면 믿게 해줘야겠지. “라이야! 라이 어디 있니?” “라이 여기 있어요!” 저쪽에서 혼자 흙장난을 치던 라이는 내가 부르자 쪼르르 달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 “라이야, 오빠가 질문 하나 할테니 잘 대답해야 한다. 맞으면 오빠가 비행기 태워줄게.” “우와! 정말요?” “응. 물론이지. 오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착한 인간이잖아.” “맞아요. 오빠는 착한 인간이에요!” 착하긴 개뿔이…… 내가 착하다니. 정말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라이에게만은 착한 인간으로 남고 싶은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 오빠가 질문 할게. 오빠는 몇 클래스일까요?” “음음…….” 손가락을 입에 물며 고민하는 라이. 뭘 그렇게 열심히 고민하고 그러니? 다 알고 있으면서. 한참을 고민하던 라이는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오빠는 8클래스에요!” “맞았어! 아이구, 우리 라이는 똑똑하기도 하지.”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노인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분명 들으셨지요? 상아탑의 주인이자 7클래스 마스터인 라이미안이 제가 8클래스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래도 못 믿으시겠습니까?” 노인장은 입을 꼭 다물었다. 하지만 아직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자 노인장을 대신해 그 옆에 젊은 마법사가 일어나 말했다. “하지만 8클래스 마스터라면 아이언스 이그리드님께서도 말년에야 간신히 이룰 수 있었던 경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아직 20세도 안 된 아이언스 히로님께서 8클래스 마스터라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이봐. 아이언스 이그리드는 9클래스까지 마스터했어. 뭐, 댁이 모르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옛말에 청출어람 청어람이라 하였습니다.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무한한 마법의 세계를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하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넓습니다.” “그, 그렇지만…….” 아이씨! 믿지 못할 거면 집에 가던가. 왜 남아서 테클 걸고 있어? 사람 짜증나게. 생각 같아서는 ‘어허! 그대는 본좌의 말을 믿지 못하는 가? 혈존무적마저 물리친 본좌의 청룡도법을 봐야만 정신을 차리겠는가?’ 라고 말하고 싶다만 속아 넘어 갈 것 같지 않아 참는다.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저를 못 믿으시겠다니 하는 수 없군요. 제가 직접 8클래스 마법을 시전해 보이겠습니다. 거기 두 분 앞으로 나와주세요.” 그들은 내 말을 반신반의하며 앞으로 나왔다. 노인과 젊은이. 아마도 저 둘은 스승과 제자 같다. “제가 가벼운 공격 마법을 쓸테니 두 분께서는 가장 강력한 방어 마법을 쓰십시오.” 내 말에 노인은 조금 기분이 상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자존심이 좀 상하나 보다. 그래서인지 혼신의 힘을 다해 방어 마법을 펼쳤다. “실드! 배리어! 디펜스 매직! 프로텍트 프롬 매직!” 열심히도 쓰는 구만. 정말 안 쓰러울 정도다. 방어 마법은 젊은이 혼자 펼치고, 노인은 다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척 보니 디스펠 매직 주문이다. 내가 마법을 쓰면 바로 디스펠 매직을 써서 내 마법을 무효화 시킬 생각이다. 뭐 생각만 그렇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는 미지수지. 우리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 만약 여기서 내 마법이 막힌다면 얼마나 쪽 팔릴까? 하지만 그럴리는 없다. 내가 누군가? 그 이름도 유명한 아이언스 공작이 아닌가?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8클래스 마스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이것들이 감히 날 의심해? 오늘 죽었어! “Bigby's Clenched Fist!” 내가 주문을 영창함과 동시에 허공에서 반투명하고 거대한 주먹이 나타났다. “흐흐흐! 공격!” 내가 마법사 사제를 가리키자 그 주먹은 힘껏 아래로 움직였다. 그 순간 노인이 팔을 뻗으며 소리쳤다. “디스펠 매직!” 6클래스 간신히 턱 걸이하는 마법사가 8클래스 마법을 디스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쯧쯧, 내 능력을 우습게 보셨군. 내 생각대로 반투명 주먹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노인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제자가 만든 실드와 배리어 위에 또 다른 실드와 배리어를 만들었다. 쿠웅-! “으윽!” 하지만 그것은 덧없는 짓이었다. 주먹 한방에 실드와 배리어는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난 팔짱을 끼며 웃음을 지었다. “크크크크…… 어리석은 것들…….” 앗! 뭐냐, 이 웃음과 대사는? 이래서는 내가 악당 같잖아. 난 정의의 용산데. “흠흠! 아무튼 이제 제 실력을 잘 알았을 겁니다.” 사람들은 굉장히 감동 받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아아~ 저 존경에 가득 찬 눈빛. 난 저런 눈빛이 너무나 좋아. 이제 내 이름이 위인전에 등장할 날도 머지 않았군. 하지만 모두가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 봄에도 불구하고 유독 그 사제만은 상당히 불만스러운 눈빛이었다. 대체 뭐가 부족한 건가? 내가 이 정도로까지 능력을 보여줬으면 ‘너무 대단해요, 아이언스 공작님! 싸인 해 주세요!’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난 결과에 승복할 수 없소! 왜냐하면 난 공격 전용 마법사기 때문이오.” 그럼 하기 전에 말을 하던가 하지 왜 지고 나서 말을 합니까? 설득력이 떨어지잖아요. “좋습니다. 그럼 이번엔 두분께서 공격을 하십시오. 제가 막도록 하겠습니다.” “좋소.” 2라운드 시작이군. 이번엔 완벽하게 꺾어 주지. 두 마법사는 주저 없이 바로 마법을 캐스팅하였다. 난 그들이 무슨 마법을 쓸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두 손을 늘어뜨린 채 기다렸다. “어째서 방어막을 펼치지 않는 거요?” “때가 되면 제가 알아서 펼치겠으니 두 분께서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고 마법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으윽!” 사제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분명 말하지만 난 저들을 무시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무 잘났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어느 정도 상대가 되야 싸울 맛이 날 거 아닌가? 난 8클래스 마스터인데다가 빅장 40단 컴보라는 필살기까지 있다. 아마도 인간 중에서 나보다 강한 존재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아아~ 정말 잘나서 피곤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은 마법을 날렸다. “체인 라이트닝!” “파이어 볼!” 하아~ 개성 없이 겨우 저런 마법들이라니. 저걸 막아야만 하는 내가 한심할 정도다. “프라즈매틱 월(Prismatic Wall).” 일명 무지개 벽. 무지개처럼 일곱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이 벽은 못 막아내는 마법이 없었다. “아이스 스톰!” “라이트닝 볼트!” “클라우드 킬!” “플래쉬 투 스톤!” 백날 마법 써봐라. 한대라도 맞나. 난 편한 마음으로 그들이 마법을 다 쓰기를 기다렸다. 한참 동안 마법을 낭비한 그들은 결국 헉헉거리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훗~ 결국은 이렇게 될 거면서. 난 웃으며 무지개 벽을 해지하였다. 짝짝짝~ 라이가 먼저 감동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따라서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전부 나를 찬양하고 있었다. 나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던 사제는 이제 존경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긴 지금 내 마법 실력은 저들이 평생을 노력해도 닿기 힘든 경지에 올라 있다. 그러니 존경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최고에요, 오빠. 오빠 너무너무 멋있는 것 같아요. 라이는 오빠 굉장히 존경해요.” 라이가 아무리 어리다해도 라이는 분명한 마법사였다. 그러니 마법사의 눈으로 보기에 내가 얼마나 대단해 보이겠는가?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자는 존경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니 질투하지 말고 시기하지 말고 날 존경할지어다. “아직도 제 능력을 의심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있을리 없다. 만약 있으면 없애 버리겠어. “과연 아이언스 히로님이시군요!” “전설의 용사라 불릴만 합니다!” “히로님과 함께라면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희는 기꺼이 이 한 목숨 바칠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전설의 용사 히로님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아주 쇼를 해라, 쇼를 해. 이런 쓸데 없는 짓들을 하는 사이 어느새 해는 지고 어둠이 몰려 왔다. 곳곳에 화톳불이 켜지고 넓은 공터 중앙에는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녁 식사와 술 마시기. 마치 MT 온 것 같다. 아! 여기서 말하는 MT란 맴버쉽 트레이닝(membership training)의 약자가 아닌 먹고 토하고(muggo tohago ?)의 약자다. 문득 이들이 먹는 고기와 술이 어디서 났는지 궁금하다. 설마 짊어지고 온 건 아니겠지? 난 라이를 데리고 돌아다녔다. 고기 얻어 먹으려고. “앗! 전설의 용사 히로님. 여기 앉으십시오.” 아예 화로를 만들어 통돼지구이를 해먹던 이들은 내가 다가서자 자리를 내주었다. 기름이 자글자글 흐르는 고기에서 향긋하고 유혹적인 냄새가 뿜어져 나온다. 난 못 이기는척하며 그들이 내준 자리에 앉았다. 내 무릎 위에 앉은 라이는 벌써부터 침을 질질 흘려대고 있었다. 라이야, 그게 무슨 추태니? 누구 보면 내가 너 며칠 굶긴 줄 알겠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갑옷을 벗고 있었지만 난 한눈에 그들이 기사라는 것을 알아 챌 수 있었다. “전부 기사 분들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섯이었다. 커다란 덩치와 잘 발달된 근육을 보아하니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아, 예. 그 전단지를 보고 히로님과 함께 싸우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국가에서 그냥 보내주던가요?” “아니요. 안 보내주던 걸요.” “그럼 어떻게……?” “탈영했습니다.” “…….” 탈영이라. 기가 막히는 군. 용사병에 걸리면 약도 없다고는 하지만 명예에 목숨을 거는 기사가 국가마저 버리다니. “그나저나 용케 여기까지 왔네요. 탈영을 했으면 여기까지 오는 거 힘들었을 텐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여기까지 하루 밖에 안 걸리는데…….” “…….” 응? 하루 밖에 안 걸린다고? 잠깐. 그렇다는 건 설마……. “서, 설마 저 건너편에서 아이리스군과 대치하고 있는 자바스군에서 탈영한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습니까?” “…….” 맞다고 한다. 아, 기막혀라. 나의 황당함을 어디에 호소하면 좋을까? 지금 아이리스와 자바스는 전쟁 중. 그런데도 자바스의 기사라는 이놈들은 자기 나라 버리고 적군의 막사에 와있는 것이다. 오직 드래곤을 무찌르고 용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세상에 미친놈들 정말 많구나. “아무리 드래곤과 싸우려는 용사가 좋다지만 그래도 기사가 다섯명씩이나 탈영을 한다는 건 좀…….” “탈영은 열 명이 했습니다.” “예? 그럼 나머지 다섯명은 어디에?” “아까 가위바위보에 져서 돌아갔는데요.” “…….” 그랬었군. “오빠, 라이 고기 먹고 싶어요.” 라이가 하도 보채자 그들 중 하나가 대검으로 익은 부위를 잘라 접시에 덜어주었다. “많이 먹으렴.” “예!” 힘차게 대답한 라이는 커다란 고기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허억! 씹지도 않고 삼키면 어쩌니? 꼭꼭 씹어 먹어야 소화가 잘 되지. 난 라이가 먹는 것을 보며 나도 먹었다. 아까부터 아무 것도 안 먹어서 배가 많이 고팠거든. 그렇게 한창 분위기 좋게 식사를 하는데 내 옆에 앉은 기사 하나가 말을 건넸다. “신기에 가까운 아이언스 히로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하,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라니…… 대체 무슨 얘기를 들으셨기에?” “청룡도법으로 혈교의 교주였던 혈존무적을 물리치셨다죠?” “…….” 그건 어디서 주워 들었니? 그 얘기는 내가 라이와 루, 루비 커플에게만 해준 건데. “저희에게 청룡도법을 견식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허억!” “아니,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 그럼 내가 안 놀라게 생겼니? 청룡도법이라는 게 있어야 보여주던지 말던지 할 거 아냐? 그런 엉터리 초식이 순진한 엘프들은 속일 수 있지만 숙련된 기사들을 속일 수 있을리 만무하다. 이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속을리 없겠지. 그럼 어찌해야 하는 가? “후후~ 인생이란 덧 없는 것. 어찌 한낱 칼질에 의미를 부여하겠습니까? 저는 제 마음의 검을 버린지 오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말이 술술 나오는 내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하지만 제발 저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정말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 나쁜 놈이 될 것이다. 하아~ 어쩔 수 없군. 내 실력을 보여주는 수 밖에. 난 허리에 차고 있던 청룡도를 끌러 바닥에 내려 놓았다. “아니, 어째서…….” “저는 제 마음의 검을 버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미 검에 관해서는 궁극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지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하하, 뭐 무슨 뜻이라고 할만한 게 있겠습니까? 검의 오의를 깨달았기에 이젠 굳이 검을 쓰지 않고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하기 마련이니까요.” “오오!” 저 감탄사. 이젠 지겹기까지 하다. “그럼 실력을 한번 보여주시겠습니까?” “여러분들께서 원하시니 그리 하도록 하지요.” 지금 나의 전투 능력은 궁극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체술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그건 문제도 아니다. 헤이스트와 스트랭스를 걸어 육체적 능력을 높이면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나한테 필살기가 있다는 것이다. 빅장 40단 컴보. 이 필살기가 있는 한 나에게 패배란 없다. 기사들은 한창 누가 대련자로 나설까 논쟁 중이었다. 서로 나서겠다고 난리다. 한 수 배우고 싶다고. 난 그런 그들의 논쟁을 가볍게 해결해주었다. “그냥 다섯 분이서 한번에 덤비세요.” 내 말에 기사들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정색을하며 대꾸했다. “저희는 기사입니다.” 탈영한 주제에 말은 잘 해요. 웃기는 것들 같으니라고. “전 드래곤을 상대할 용사입니다. 다섯 분이서 덤비셔도 문제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들은 상당히 기분이 상한 모습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그들의 결의가 느껴진다. 하긴 5대 1로 싸워서 지면 그게 무슨 쪽이냐? 하지만 이들은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결과나 다름 없다. 난 주인공이고 이 것들은 이름도 안 나오는데 엑스트란데 설마 주인공이 엑스트라한테 패하기야 하겠나? “…….” 뭐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긴다. 반드시 이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긴다. 기사들은 식사 중에 벗어 놓았던 갑옷을 전부 갖춰 입었다. 하지만 난 나의 유일한 방어구라 할 수 있는 칼라이스의 망토 마저 벗어 놓았다. 다수를 상대로 싸울 때 이런 건 거치적거릴 뿐이니까. 우리가 싸울 준비를 하자 사람들은 어느새 우리 주위에 뺑 둘러 앉았다. 아마도 이들은 나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보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사들은 롱소드를 뽑아들고 내 주위를 삥 둘러 쌌다. 적수공권으로 다섯명에게 둘러 쌓이다니. 정말 죽기 딱 좋은 상황이다. 하지만 큰소리까지 뻥뻥 쳐 놓은 상황에서 뒤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훗~ 꺽어질지언정 휘어지지는 않겠다! “그럼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기사들은 조금도 서둘지 않고 숙련된 동작으로 움직였다. 사방에서 검이 찔러 들어 온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마법을 쓰지 않고 사방에서 움직이는 다섯 개의 검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난 뒤로 달려 들었다. 이럴 경우 앞으로 달려드는 것이 보통이라 그 반대로 한 것이다. 롱소드의 움직임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난 롱소드가 내 몸에 닿기 직전 마법을 썼다. “블링크!” 내 뒤에 있던 기사들은 어느새 내 앞에 놓이게 되었다. 난 두 기사를 먼저 해치우기로 마음 먹고 아껴왔던 필살기를 구사했다. “빅장 5단 컴보! 일, 이, 삼, 사 오! 앗싸, 좋구나!” 퍽- 퍽- 퍽- 퍽- 퍽-! 내 손바닥은 기사들의 단단한 갑옷 위를 가격했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는 갑옷의 성능을 믿었는지 별 다른 방어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큰 실수였다. 빅장의 위력은 발경이나 통배권과 비슷하다. 갑옷 위를 가격한다 하더라도 그 위력은 갑옷을 뚫고 살과 근육을 뚫고 뼛속까지 미친다. “빅장의 위력 뼛속까지 느껴라!” “허억! 이건 뼛속까지 시리다.” 두 기사는 뼈와 살이 분리되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지 소리를 지르며 무기를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저, 저런 필살기라니.” “맨손으로 갑옷 입은 기사를 때려눕히다니.” “빅장이라고 했나? 정말 무서운 필살기다.” “저 정도 위력의 필살기라면 드래곤도 문제 없겠군.” 현실 세계에서 인간을 상대로 빅장을 써보긴 지금이 처음이다. 하지만 그 위력은 내가 의식 세계 있을 때에 비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 세계는 나의 빅장 앞에 무릎을 꿇을 날이 온 것이다. 세 기사는 빅장의 위력에 놀랐는지 바싹 긴장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두 명까지는 어떻게 상대했지만 세 명을 한번에 쓰러트리긴 무리다. 손은 두개 뿐이니까. 하지만 한번에 세 명을 쓰러트려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격을 당할테니. 마법을 쓰면 간단한 일이지만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오직 내 본연의 힘으로만 이들을 상대하고 싶었다. “간다!” 난 팽팽한 힘의 균형을 깨고 그들에게 달려 들었다. 그리고 손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더블 빅장!” 그냥 빅장도 아니고 더블 빅장이다. 아아~ 드디어 필살기가 초필살기로 진화하는 순간이다. 이 어찌 감동적이지 아니하리오. 원래 두 개였던 내 손은 네 개로 늘어났다. 정말로 늘어났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손을 빨리 움직여 여러 개로 보였다는 뜻이다. “허억! 손이 안 보여!” “너무 빠르다!” 참 엑스트라스런 대사를 외친 그들은 가슴에 빅장을 맞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모두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나는 숨을 고르며 손을 멈추었다. “내 그대들을 생각해 손속에 사정을 두었으니 금방 일어날 수 있을거요.” 하지만 기사들은 금방 일어나지 못했다. 빅장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내가 다섯명의 기사들은 손쉽게 상대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마법을 안 쓰고도 다섯이나 되는 기사를 저렇게 손쉽게 이기시다니!”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님이 있는 이상 레드 드래곤 따위는 문제 없어!” “히로님 만세!” 이거 참 쑥스럽구려. 자꾸 들으니 적응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낯 뜨겁군.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내가 이들에게 구라를 치고 있다는 거다. 내가 크로니스와 싸우려 한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다. 적당한 표현을 찾자면 자폭한다 정도가 어울리겠군. 그렇다. 난 크로니스와 같이 죽으려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는 게 아니라 죽기 위해 싸운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그런 싸움에 이것들을 전부 끌고 가 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것들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 아니, 들러리도 아닌 그저 내 뒤를 받쳐주는 병풍에 불과하다. 휴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것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이유는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나는 비록 죽지만 내 이름만은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져서 역사책에도 나오고 위인전도 편찬되고 하면 정말 좋겠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이 필요치 않겠는가? 난 그것을 위해 이것들은 안 쫓아내고 남겨둔 것이다. 하아~ 그런데 후대에 이름이 전해지면 뭐하나? 난 이제 곧 죽는데. 흑~ 난 정말 죽기 싫어. 오래오래 살고 싶어. 히로의 소원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엘프인 라이와 영원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다. 라이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기를 집어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도 모를 것이라 생각 된다. 그래. 많이 먹어라. 먹고 죽은 엘프가 땟깔도 좋다더라. 난 바닥에 내려 놓은 청룡도를 집어 들고 망토를 걸쳐 입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해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밤은 왠지 혼자 있고 싶다. TITLE ▶19 :: <아이리스 외전> 그 엘프 이야기 - 03 sharpshooter(psungho) 03-06-02 :: :: 29441 <- 타수 놀이 금지 -> 결혼 후에도 우리 생활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마을의 많은 처녀, 청년들이 상심해서 앓아 누운 것을 빼면 말이다. “이제 결혼했으니 밥과 빨래는 제가 할게요.” 어찌 그녀의 손에 물을 뭍힐 수 있으리! 난 한사코 거절했지만 라임은 막무가내였다. 나에게 자기가 손수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정말 감동적이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열심히 요리를 익혔다. “어때요? 맛있어요?” “…….” 이것이 과연 엘프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란 말인가? 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요리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그냥 내가 할게.” 3년 후. 어느 날인가부터 라임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난 내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많이 먹다보니 살이 찐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으음, 몇 달만 지나면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뚱뚱해지겠군. “…….” 그건 안 돼!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라임을 뚱보가 되게 놔둘 수는 없어! 식사 시간. 라임은 정신 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휘두르며 평소 먹는 양의 배는 먹어 치웠다. 그리고나서 한다는 말이……. “더 주세요!” 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내 그릇에 담긴 고기를 라임의 그릇에 몽땅 덜어주었다. 그러자 라이는 그것마저 깨끗이 해치우고 혀로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 먹었다.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니?” 그러자 라임은 혀를 내밀어 입가에 묻은 양념을 핥아 먹으며 대꾸했다. “그런가요? 아직 배 고픈데.” “…….” 그렇게 먹고도 배가 고프다니! 이건 문제가 있는 거다. “이제 그만 좀 먹지.” “싫어요!” “…….” 그래. 많이 먹으렴. 먹겠다고 우기는데 내가 어쩌겠니? 결국 라임은 혼자서 3인분이나 해치우고 나서야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수저를 내려 놓았다. 설거지를 마친 나는 그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우리 운동하러 갈까?” “예? 운동을 뭐하러 해요?” “운동을 뭐하러 하다니? 건강해지려면 운동을 해야지.” “전 건강한데요.” “…….” 지금 상태로 보아하건데 라임이 뚱보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아아~ 나의 사랑하는 라임이 뚱보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엘프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나 늘씬한 몸매를 유지한다. 인간들은 이런 엘프의 몸매를 보고 타고 난 미의 종족이라 감탄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엘프들이 그런 몸매를 유지하는 것은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에는 먹지 않고 언제나 운동을 열심히 하고 칼로리가 많은 고기 종류는 피한다. 이 외에도 수 천, 수 만 가지의 다이어트 비법이 있다. 아마 이걸 모아 책으로 펴내면 족히 수 백권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라임은 조금도 살을 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렇게 날짜는 계속 흘러 갔다. 라임의 식성은 점점 까다로워지면서 식사량은 점점 늘어만 갔다. 난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먹고 싶어하는 게 있으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가 구해왔고, 그녀가 먹고 싶어하는 요리가 있으면 밤을 새서라도 그 요리를 만들었다. 아아~ 힘들다. 또 다시 식사 시간이 돌아왔다. 이 시간만 되면 난 왠지 무섭다. 오늘은 라임이 또 얼마나 먹을까? 먹는 양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라임의 입맛이다. 라임의 입맛이 안 맞으면 어쩌지? 라임은 수저로 수프를 떠 먹었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지 잘 먹는다. 그런데 그 순간……. “우욱-!” 앗! 라임이 구토를! 난 깜짝놀라 라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수프가 엎어져서 옷에 묻고 얼굴에 묻고 난리도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뜨겁지 않아 다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우웩-!” 라임은 여전히 구토 중이었다. 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라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라임이 구토를 한 걸까? 혹시 수프가 맛이 없나? 난 수프를 떠서 먹어 보았다. 내가 정성을 다해서 끓였기에 굉장히 맛있었다. 그럼 어째서 구토를…… 앗! 설마? 난 라임의 배를 보았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 그렇다는 것은……. “이, 임신?” 내 물음에 라임은 홍조를 띄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에 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임신이라니. 그렇다면 라임이 아기를 가졌다는 얘기? “그, 그게 정말이야?” “예.” “그 동안 왜 말 안 했어?” “헤헤~ 얼마 후면 우리 결혼 기념일이잖아요. 그때 말해서 깜짝 놀래 주려 그랬는데.” “…….” 그랬구나. 난 그런 것도 모르고. “흑흑~.” “앗! 왜 우세요?” “흑, 너무 기뻐서.” 어느새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라임을 껴안았다. 내 아이라니. 아아~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난 라임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저두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겠는가? 이대로 영원히 껴안고 있었으면……. “저 배고파요.” “…….” 아! 밥 먹던 중이었지. * * * * * “아아악!” 마치 돼지 멱 따는 소리 같다. 하지만 이 소리는 돼지 멱 따는 소리가 결코 아니다. 난 초조한 마음으로 문 앞으로 왔다갔다 거렸다. 그녀는 지금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아프기에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걸까? 흑~ 내가 죽일 놈이야. 사랑하는 그녀를 저렇게 아프게 하다니. 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나의 라임 좀 그만 괴롭혀! 사랑하는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으아아악!” 고통에 가득 찬 이 비명 소리. 으윽, 미칠 것 같아. 난 귀를 틀어 막았다. 하지만 비명 소리는 집요하게 내 귀를 파고 들었다. 이럴 때 난 내가 엘프인 것이 정말 싫다. 엘프의 좋은 청력 때문에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야만 하다니. 제발 날 가만히 놔둬! “으아아앙!” 앗! 이건 무슨 소리? 난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방안에선 우렁 찬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온몸이 땀에 절은 산파가 나왔다. 난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산파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해요.” “하아~.”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애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안 말했네.” “…….” 앗! 나도 잊고 있었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뭐든 상관 없지만…… 그래도 라임을 닮은 예쁜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아아~ 제발 딸이기를~. “아주 예쁜 딸이에요.” “예? 정말요?” 산파의 말에 난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호호, 감사는 산모한테나 하세요. 그럼 전 부엌으로 가서 죽을 가지고 올 게요.” “저기…… 들어 가도 되나요?” “물론이에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산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난 방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라임이 누워 있고 그 옆에는 아기가 누워 있었다. 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수고했어.” 라임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아기를 가리켰다. “우리의 아이에요.” “응응.” 난 아기를 자세히 보았다. 피가 묻어있는 쭈글쭈글한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아! 귀가 뾰족하네.” 하프엘프는 외형상으론 일반 엘프와 별 차이점이 없다고 한다. 으음, 하프엘프라…… 그러고보니 우리 가족은 다종족으로 구성되어 있군. 아빠는 엘프, 엄마는 인간, 딸은 하프엘프. 뭐 다종족이면 어떻고, 다인종이면 어떤가? 우리만 행복하면 그만이지. 난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 정말 너무 귀엽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진짜 내 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극히 일반적이고 지극히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기에도 너무너무 귀엽다. “그만 봐요. 애 놀라겠어요.” “응? 그, 그런가?” 난 안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뭘로 할 거예요?” “응?” “애 이름 말이에요. 애 이름을 지어야지요.” “아! 그렇지.” 음음, 무슨 이름이 좋을까? 예쁜 이름으로 지어야 할텐데. 어떤 이름을 지어야 어울릴까? 이렇게 귀엽게 생겼으니 이름도 예쁘고 귀엽게 지어야 할텐데. “라이레얼…….” 난 아기를 보았다. 아기는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살짝 눈을 떴다. 레몬빛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아아~ 세상에 이만큼 사랑스런 아기가 또 있을까? 난 아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라이레얼이란다.” “예쁜 이름이네요.” 라임은 마음에 드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기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라이레얼. 귀여운 나의 딸. 지금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 * * * * 5년 후. “아빠! 아빠 어디 있어? 빨리 안 나와?” 앗! 이 소리는 설마 나의 사랑하는 딸 라이레얼이 나를 애타게 찾는 소리? 무슨 일로 나의 사랑하는 딸 라이레얼이 나를 찾는 걸까? 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귀엽게 생긴 소녀가 서 있었다. 찰랑이는 레몬빛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레몬빛 눈동자. 그리고 엘프 특유의 길고 뾰족한 귀. 정말 틀림 없는 내 딸이다. “헉헉! 무슨 일이니?” “아빠 왜케 늦어? 딸이 부르면 빨리빨리 와야지.” 라이레얼은 팔짱을 끼며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 보았다. 앗! 화났나 보다. “미, 미안. 부르는 소리가 잘 안 들렸거든.” “흥! 그렇게 뻔한 변명이라니. 실망이야. 아빠 이젠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거구나.” “아, 아니야. 내가 우리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흥! 거짓말! 딸이 애타게 불렀는데도 이렇게 늦게와서 뻔한 변명만 늘어 놓다니. 아빠는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게 틀림 없어.” 어린애가 또박또박 말도 잘 한다. 내 딸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라이레얼은 정말 똑똑한 아이다. 이 어린 나이에 말도 잘 하고 글도 쓸 줄 안다. 날 닮아서 똑똑한 가봐. “흑~ 이 아빠는 라이레얼을 정말 사랑한단다. 정말이야. 믿어줘.” “좋아요. 하지만 다음부턴 늦으면 안 돼요.” “응응.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은 거니?” “같이 놀아달라구요.” “…….” 그런 이유 때문에 나를 애타게 부른 거였니? 뭐,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긴 하다만 그래도 그런 일 때문에 아빠를 오라가라 하는 것은 좀……. “그 표정은 뭐야, 아빠? 나랑 놀아주는 게 싫은 거야?” “하하, 그럴 리가 있니? 사실은 나도 라이레얼과 놀고 싶었어.” 난 내 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뭐하고 놀까?” “싸움 놀이.” “응? 그게 무슨 놀인데?” “내가 막대기를 휘두르면 아빠는 그걸 맞는 놀이야.” “…….” 그게 어떻게 해서 싸움 놀이니? 복날에 개잡기 놀이라면 몰라도. “뭐야? 아빠 나랑 놀기 싫은 거야?” “아, 아니. 너무 재미 있을 것 같아서.” 정말 재미 있을까? 진짜? * * * * * 10년 후. 라임과 내가 결혼한지 어느덧 18년이나 흘렀다. 라임은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었고, 나의 사랑하는 딸 라이레얼은 무럭무럭 자라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큰 키와 늘씬한 몸매. 새하얀 피부와 피처럼 붉디 붉은 입술. 찰랑거리는 레몬빛 머리카락과 우수에 젖은 듯한 레몬빛 눈동자. 그리고 엘프의 피를 타고 났다는 증거인 길고 뾰족한 귀. 아아~ 어쩜 이렇게 예쁠까? “아빠 뭘 그렇게 봐?” “으응. 아무 것도 아니야.” 난 라이레얼에게서 눈을 돌렸다. 딸이 예쁘니 아빠 된 입장에서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하지만 그만큼 걱정도 컸다. 벌써부터 내 딸에게 눈독들인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만약 이들을 한줄로 세운다면 대륙을 한바퀴 돌고도 남을 것이다. 가끔 꽃들고 찾아오는 놈들도 있다. ‘댁의 따님을 제가 주십시오!’ 그러면 난 이 놈들을 산속 깊은 곳으로 끌고가 그 자리에 묻어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기 마련이다. ‘들어갈 때는 분명 둘이었는데 나올 때는 어째서 하나인 걸까?’ 묻지 마라. 자꾸 알려고 하면 다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혼을 하러 오는 남자들의 숫자는 늘어만 가고 있었다. 그거 거절하기 정말 귀찮다. 아니, 귀찮다 못해 힘들다. 음음,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솟기 마련이지. 어디서 감히 내 딸을 달래? 내가 라이레얼을 어떻게 키웠는데. 아무도 못 줘! 나랑 라임이 영원히 데리고 살 거야! “사냥 가자, 아빠.” “그래.” 라이레얼은 날 닮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활솜씨와 칼솜씨가 굉장히 뛰어났다. 난 라이레얼이 어렸을 때부터 칼 쓰는 법과 활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이제 라이레얼은 상당히 능숙한 사냥꾼이 되었다. 아마 혹자는 ‘여자가 그런 걸 배워서 뭐해?’ 라고 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한 몰지각한 생각일뿐이다. 요즘은 여자도 배워야 산다. 배우지 않으면 도태될 뿐이다. 어쨌든 난 라이레얼과 함께 산을 탔다. 저녁 찬거리라도 마련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냥은 내가 할테니까 아빠는 나물이나 뜯어.” “응.” 난 준비해간 호미로 보이는 족족 나물을 캤다. 랄라라~ 오늘 저녁에는 라임한테 맛있는 요리를 해줘야지~. “앗! 저녁 식사다!” 라이레얼은 때마침 등장한 멧돼지를 보고 소리쳤다. 음음, 저 멧돼지 맛있게 생겼다. 멧돼지는 저녁 식사라는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우리가 있는 쪽으로 돌진해왔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발굽소리.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인가 보군.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뭘 믿고 저렇게 열심히 달려든다냐? 뭐 덕분에 우리야 편하긴 하지만. 라이레얼은 멧돼지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나도 나물 캐던 동작을 멈추고 활을 들었다. 멧돼지는 가죽이 두꺼워 화살이 튕겨나가거나 제대로 박히지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의 지척의 거리에 이르러서야 라이레얼은 시위를 놓았다. 쉬이익-! 날아간 화살은 멧돼지의 눈을 꿰뚫었다. “쿠에에엑-!” 멧돼지는 정말로 돼지 멱 따는 것 같은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말 대단한 솜씨가 아닐 수 없다. 화살 하나로 멧돼지를 잡다니. 아무튼 오늘 저녁은 풍성하겠군. 난 활을 내려 놓고 캐던 나물을 마저 캤다. “아빠, 이거 살이 통통하게 오른 걸 보니 맛 있을 것 같은데.” “응.” 난 캔 나물을 라이레얼에게 건네 주고 맷돼지를 짊어졌다. 으윽, 조금 무겁긴 하군. 아마 보통 인간이었으면 제대로 들지도 못 했을 것이다. 사냥을 마친 나는 라이레얼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방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있던 라임은 핏기 없는 얼굴을 한 채 날 보았다. “다녀왔어요?” “으응.” 라임은 하루가 다르게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살이 빠지고 생기가 없어지고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근처 의사들을 모조리 불러봤지만 그들은 그저 고개를 내저을뿐이었다. 난 침대에 걸터 앉아 라임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라임의 눈가에는 어느덧 주름이 져 있었다. 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라임은 벌써부터 늙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밥 먹을래?” 라임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 없어요.” “생각 없어도 먹어야지. 흑…….” 난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자 라임은 자신의 가녀린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울지 마세요.” “흑흑.” 그 모습이 어찌나 안 쓰러워 보이는지 난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대체 왜 아픈 거니? 니가 아프면 나는 어쩌라고? 부탁이니 아프지 마. “라이레얼을 생각해서라도 일어 나야지.” “그래야지요.” 라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 한숨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저 졸려요.” 라임은 눈을 감았다. 난 라임이 잠든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라임의 옆을 지켰다. 요즘들어 라임의 식사량이 더욱 줄어 들었다. 하루에 한끼도 한 먹을 정도니. 아무래도 내일은 의사를 불러 와야겠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뜬지 오래 것만 라임은 아직까지도 자고 있었다. 음음,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군. 난 라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가 방안을 나가기 직전 라임은 살짝 눈을 떴다. “어디 가는 거예요?” “으응. 잠깐 나갔다 오려구.” 의사를 부르러 간다고 하면 쓸데 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할게 뻔하기에 난 대충 얼버무렸다. 라임은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일찍 돌아와요.” “알았어.” 집을 나서자 칼 연습을 하고 있는 라이레얼이 보였다. “앗! 어디가, 아빠?” “의사 부르러. 아빠 돌아올 때까지 엄마 좀 잘 봐주렴.” “응. 알았으니까 걱정 말고 갔다와.” 난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아무래도 이 근방 의사들은 실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니 무슨 병인지조차 파악 못하지. 그래서 난 도시까지 갈 생각이었다. 도시에서 실력있는 의사를 데려와 라임의 병을 치료해야겠다.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일 밤낮이 지난 후에야 난 간신히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의 밤은 무겁고 음습하다. 난 헤어밴드로 귀를 가렸다. 당당하게 엘프임을 드러내 구경거리가 될 생각은 없으니. 난 일단 여관으로 향했다. 지금 이 시간에 의사가 영업할 리는 없으니. 난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샜다. 아침 일찍 방을 나선 나는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여기 병원이 어딘가요?” “가는 길이 좀 복잡할텐데…….” 여관 주인은 자신의 딸을 불러 안내를 맡겼다. 대략 15, 16세로 보이는 딸은 자꾸만 나를 힐끔힐끔 쳐다 보았다. 그 시선이 참으로 부담스럽다. 이 처자도 나에게 마음이 있나 보군. 하지만 난 이미 결혼한 몸이랍니다. 내 딸이 지금 15살인데. 병원으로 가는 길은 복잡했지만 그리 멀지는 않았다. 난 그곳에서 실력이 뛰어나다는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제 아내가 아픕니다.” 난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였고 그는 동행을 흔쾌히 허락하였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난 그 대가로 엄청난 금화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난 의사를 데리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집으로 향했다. 올 때는 삼일이 걸렸지만 갈 때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동행자가 있다보니. 시간이 늦을 수록 내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결국 나는 의사를 업고 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기 위해.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설마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집에 도착한 시각은 늦은 밤이었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난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거실에는 나의 딸 라이레얼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라이레얼은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딸 아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무슨 일이니?” 라이레얼은 대답 대신 눈물을 흘렸다. 난 재빨리 다가가 딸 아이의 어깨를 붙들었다. “무슨 일이야? 말해 봐!” “어, 엄마가…….” “엄마가 왜?” “…….” 라이레얼은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다그쳐도 묵묵부답이었다. 난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방문을 열고 뛰어들다시피 방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라임이 잠을 자듯 누워있었다. 난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라임?” 라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그녀가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거라고. 난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핏기 없는 피부와 생기 없는 표정. 그녀의 몸이 차가웠다. “라, 라임…….” 난 황급히 그녀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죽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난 그녀의 몸을 붙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 순간 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마지막까지 아빠를 보고 싶어 했어. 그리고 정말 사랑했다고…….” “거, 거짓말…….” 난 라이레얼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라임이 눈을 뜨고 내 입술에 입을 맞출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싸늘하게 식은 시체일뿐이었다. “제, 제발 일어나 라임. 의사를 데려왔어. 이젠 아프지 않을 거야.” “그만해, 아빠! 엄마는 죽었어!” “시끄러!” 난 처음으로 라이레얼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라이레얼은 방안을 뛰쳐 나갔다. 그리고 난 싸늘하게 식은 그녀의 시신을 안고 절규했다. * * * * * 대다수의 엘프들은 인간 세상을 여행하다가 인간과 사랑에 빠진다. 난 여행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어떻게든 인간과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결국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비참했다. 어이 없게도 인간들은 너무 빨리 늙었다. 어린 소녀는 몇 년만 지나면 숙녀가 되고, 그 숙녀는 몇 년만 지나면 아줌마가 된다. 그리고는 늙어서 죽는 것이다. 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라임도 늙어 죽을 것이란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라임과 결혼했다. 그 이유는 라임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그녀와 헤어지게 되더라도 그때까지 사랑하고 싶었다. 라임이 늙어 죽는 그 순간까지. 하지만 이별의 순간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그녀는 겨우 33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 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 같이 있어주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그녀의 아버지 옆자리에 파묻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라임이 죽고나자 집이 마치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를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됐는데. 내가 계속 같이 있어줘야 하는데. 정말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눈을 뜰 때나 감을 때나 언제나 그녀가 아른거렸다. “아빠 또 엄마 생각 해?” “…….” “대체 뭐하자는 거야? 엄마가 죽은지 언젠데 아직까지 그러고 있어? 아빠가 그러고 있으면 엄마가 기뻐할 것 같아?” “…….” “아빠!” 딸 아이의 외침이 귓가에 울려퍼졌다. 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없는 세상. 계속 살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역시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은 인간끼리, 엘프는 엘프끼리 사랑해야 한다. 다른 종족끼리의 사랑이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흑흑…….” “그만 좀 울어! 지겹지도 않아?” 울기 싫어도 눈물이 계속 흐르는데 어떻게 하니? 라이레얼은 내 옆에 앉아 나를 꼭 껴안았다. “제발 이러지 마, 아빠. 아빠가 이러면 하늘에 있는 엄마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이런 때 일수록 아빠가 기운을 차려야지.” “흑~.” “아이씨! 그래. 울던 말던 아빠 마음대로 해! 나도 이젠 몰라!” 라이레얼은 벌떡 일어나 방안을 나갔다. 야, 그냥 나가면 어떡해? 나 아직 슬프단 말이야. 달래줄 거면 끝까지 달래 줘야지. 흑~. 난 침대보를 움켜쥐고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대체 얼마나 울었을까? 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 울었다. 하지만 울면 울수록 슬픔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흑~ 돌아와, 라임~. 난 너 없으면 못 살아~ 어흐흐흑~.” 그녀를 데려간 하늘이 원망스럽다. 저 하늘을 박살내고 싶어. 그러면 그녀가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난 그렇게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웠다. 그러던 어느날 꿈속에서 라임이 나타났다. 라임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라, 라임. 정말 라임이야?” “오랜만이에요.” 난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반가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라임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난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푸른 하늘과 녹음이 짙은 숲. 이 넓은 자연 속에 우리 둘뿐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깨지 않기를……. 하지만 꿈이란 깨라고 있는 것이다. 눈을 떠보니 그녀는 내 곁에 없었다. 나는 극심한 좌절감에 한동안 신음해야했다. “흑흑~ 라임~.” 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된 걸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에 신음해야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 그래. 이 모든 건 내가 인간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생긴 일이야. 인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나의 고향이 떠올랐다. 잊혀진 엘프의 숲. 짙은 녹음과 아름다운 나무. 그 대자연 속에서 우리 엘프들은 근심, 걱정 없이 살아왔다. 그리움이 밀려왔다.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곳으로 가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까? 그날부터 난 매일 같이 엘프의 숲을 생각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 챘을까? 어느 날 라이레얼이 말했다. “가고 싶으면 가.” “응?” “아빠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거 다 알아.” “…….” “그러니까 가.” 난 라이레얼의 어깨를 붙잡았다. “같이 가자. 넌 내 딸이잖아.” 하지만 라이레얼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 “응? 왜?” “난 하프엘프잖아. 하프엘프가 엘프의 숲에 가서 뭐해? 그리고 난 여기가 좋아. 엘프의 숲 같은데는 가고 싶지 않아.” “…….” 내 딸이 나와 같이 가고 싶어하지 않다니. 난 고향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사랑하는 딸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난 계속해서 라이레얼을 설득했다. 몇 시간에 걸친 설득 끝에 라이레얼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출발할 거야?” “응.” 나와 라이레얼은 잠자리에 누웠다. 아아~ 드디어 하룻밤만 지나면 그리운 고향으로 가는 구나. 이모와 여동생은 아직도 사귀고 있을까? 그리고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난 아름다운 숲을 떠올리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내가 눈을 떴을 때 라이레얼은 내 옆에 없었다. 잠깐 나갔나? 난 짐을 싸놓고 라이레얼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라이레얼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난 황급히 집안을 뒤졌다. 라이레얼의 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라이레얼은 어딜 간거지? 난 집안을 뒤지던 중 쪽지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빠. 나 엘프의 숲에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아빠는 엘프의 숲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그곳에서 엄마 잊고 다른 엘프랑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한가지 부탁이 있어. 나 찾지 마. 뭐 찾으려 해봐야 찾을 수도 없을 테지만 말이야.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라이레얼이 날 버리고 가출을 하다니! 난 재빨리 집을 나가 라이레얼의 흔적을 찾아 보았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노련한 레인저처럼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난 한달이 넘게 집 주위와 근처 마을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라이레얼의 행방을 찾을 수는 없었다. “흑~ 대체 어딜 간 거니?” 엘프의 숲에 가기 싫으면 가기 싫다고 말을 하지. 이렇게 가출을 하면 어쩌자는 거니? 라이레얼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아마 그 애는 나한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집을 나간 걸 것이다. 난 오랜 시간 동안 집에서 라이레얼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계절이 바뀔 때까지 라이레얼은 나타나지 않았다. 난 인간 세상에 와서 얻은 모든 것을 잃었다. 아내도 자식도 마음도. 이제 내가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난 짐을 둘러 매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 * * * * 인간 세상을 여행한다고 떠난지 35년만에 난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모두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이모와 여동생은 아직도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흑~ 그 모습을 보니 다시 열받더라. 난 인간 세상에 있었던 일은 전부 잊고 그곳에 정착해 살려고 마음 먹었다. 새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나아야지. “…….”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엔 온통 라임과의 추억과 라이레얼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난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살았다. 이런 나를 달래주는 것은 오직 술뿐이었다. 그렇게 난 술에 절여 살았다. 그러던 중 나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엔. 루엔은 자주 찾아와 슬픔에 잠겨있는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몇 년 후 나는 라임에 대한 슬픔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딸 라이레얼은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 어린 것이 세상에 나가 고생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흑흑…… 넌 지금 어디에 있는 거니? * * * * 그날도 난 슬픔에 젖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흑~ 내 딸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데 살아서 뭐해? 그냥 이대로 술 마시다 죽을래! 그런 나에게 어느날 한 인간이 찾아왔다. 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라이레얼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놀랍게도 그는 라이레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를 다그쳐 라이레얼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길 라이레얼은 용병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흑흑~ 용병이라니. 그 여린 것이 어찌 그런 위험하고 힘든 일을! “흑흑! 미안하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지켜주었어야 하는 건데! 난 널 볼 면목이 없구나! 하지만 보고 싶다! 라이레얼! 사랑하는 나의 딸아!” 라이레얼을 만나러 다시 인간 세상으로 떠나련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라이레얼을 찾아 영원히 헤어지지 말아야지. 그 인간과 다시 인간 세상으로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딸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난 한눈에 그녀가 내 딸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많이 예뻐졌구나! 딸 아이는 레몬빛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와 딸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쿵쾅쿵쾅-!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다. 저 여인이 정말로 라이레얼이라니. 오랜만에 만난 딸 아이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거지? 난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옆에 있는 인간에게 물었다. “저 여잔 누구냐?” 그러자 그 인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딸도 못 알아보십니까?” 다 알아봤어. 다만 믿기지 않아서 물어봤을 뿐이야. 어느새 라이레얼은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 가득 반가운 표정을 한 채. 난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팔을 벌렸다. 어서 내 품으로 뛰어들렴. “…….” 하지만 라이레얼은 나를 지나쳐 내 옆에 있는 인간을 껴안았다. “오랜만이야, 히로.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어, 어째서 이런 일이? 난 ‘당장 내 딸의 몸에서 손 떼!’ 라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버버버!” 그러는 사이 라이레얼과 그 인간과의 포옹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눈에선 피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흑흑, 딸자식 키워봐야 다 헛일이라더니…….” 내가 서럽게 흐느끼자 그 인간과 라이레얼이 날 보았다. “라이레얼 저 엘프 좀 봐요.” “응? 저 엘프가 왜?” “저 엘프 누군지 알지요?” “글쎄. 그런데 우리 아빠랑 굉장히 닮았다. 우리 아빠도 저렇게 생겼는데.” “…….” 역시 날 잊지 않았구나. 내가 바로 니 아빠야. 나는 허공에 눈물을 흩뿌리며 절규하듯 외쳤다. “내가 니 아빠야!” 그러자 라이레얼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저, 정말 아빠야?” “응.”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레얼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훑어 보았다. 그러더니 달려들어 나를 껴안았다. “아, 아빠!” 사방에 꽃잎이 휘날리며 온 세상이 축복으로 물들었다. 누가 뿌렸을지 모를 반짝이는 종잇조각이 허공에 흩날렸다. “아빠!” “라이레얼!” 나와 라이레얼은 힘차게 포옹을 하였다. 흑흑~ 내가 살아서 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짝짝짝-!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소리. 마치 우리의 재회를 축복해 주는 듯 하다. 라이레얼은 포옹을 풀고 날 보았다. “그 동안 뭐 했어, 아빠? 나 보고 싶지도 않았어?” “흑흑, 미안해!” “아빠 없이 나 혼자 살아가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흑흑, 내가 죽일 놈이야.” 그래.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진작 너를 찾았어야 했는데. 날 용서하지 마렴. 날 미워해도 좋으니 앞으론 내 곁을 떠나지 마. 이젠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 * * * * *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딸 라이레얼과 재회를 하였다. 난 내 옆에서 잠든 라이레얼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우웅~ 히로~.” “음냐~ 언니~.” 라이레얼의 품에는 흰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귀여운 소녀가 안겨있었다. 이 소녀의 정체는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버들랜드에서 놀고 있다가 라이레얼한테 반해서 좋다고 따라다니는 웃기는 드래곤이다. “…….” 내 딸이 드래곤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줄은. 게다가 왜 하필 여자란 말인가? 난 내 딸이 정상적인 연애를 하길 바랐는데. “흑~ 너는 이런 아빠 마음을 아니, 모르니?” “우웅~ 사랑해, 히로~.” 모르는 구나. 흑~ 너무해. 난 막사 안을 뛰쳐 나갔다. 어두운 밤하늘과 짙은 땅거미가 나를 반겼다. 하루라도 빨리 라이레얼을 데리고 엘프의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난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또 가출하면 어떡해? 흑~ 만약 라이레얼이 내 곁을 떠나간다면 난 그냥 콱 죽어버릴 테야~. “아니, 이 늦은 시간 잠도 안 자고 어쩐 일이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그 인간이 서 있었다. 라이레얼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인간. 흑~ 내 예쁜 딸이 저런 별 볼일 없는 인간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객관적인 입장으로 봐도 내 딸이 아깝다. “그냥 잠도 안 오고 해서 한번 나와 봤어.” “정말요?” “응.” 이 인간은 내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내 옆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는 담배를 입에 무는 것이 아닌가? 난 내키지 않았지만 그 인간에게 물었다. “내 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쿨럭쿨럭! 예? 뭐라구요?” “내 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아, 예…… 그게 그러니까…….”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걸까? 이 인간은 한참을 더듬거리더니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저, 저는 라이레얼과 친구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에…… 하하……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라이레얼은 좋은 친구입니다.” “정말이야?” “무, 물론이죠.” “설마 내 딸 아이한테 흑심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하하, 흑심이라니요? 전 연필이 아닌데요.” “…….” 이런 유치한 개그라니. 큭큭, 그래도 재밌긴 하군.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그는 일어나 엉덩이를 털더니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난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저 먼 곳에서 별들이 반짝인다. 난 그 별들을 바라보며 한 여인을 떠올렸다. “라임…….” 인간 세상에 와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기쁜 일, 슬픈 일, 행복했던 일, 불행했던 일. 내 기억엔 기뻤던 날보단 슬펐던 날이, 행복했던 날보단 불행했던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인간 세상을 여행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예쁜 딸을 얻지는 못했을 테니. “아빠! 어빠 어디 있어?” 앗! 이것은 라이레얼이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 “기다려라, 내 딸아! 아빠가 간다!”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막사안으로 달려갔다. TITLE ▶20 :: <아이리스 13권> 9클래스 - 16 sharpshooter(psungho) 03-06-04 :: :: 14945 히로가 용사병 환자들을 데리고 별 난리를 치는 사이 인디는 사랑하는 여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루니아님.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괜찮아요.” “그, 그럼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게요.” “괜찮아요.” “제, 제발 부탁이에요. 저 어깨 잘 주무를 자신 있어요. 제발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이렇게 간절한 부탁이라니. 이러면 차마 거절할 수가 없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조금만 주물러 주세요.” “가, 감사합니다. 저 잘 할게요.” 감사는 무슨 놈의 감사.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인디는 일루니아의 뒤에 서서 두 손을 일루니아의 어깨에 얹었다. 그 순간 찌릿- 하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으음, 스파크가 좀 심하게 튀는 군. 인디는 정성껏 일루니아의 어깨를 주물렀다. 매일 같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일루니아는 어깨 근육이 심하게 뭉쳐 있었기에 인디의 다정한 손길에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안마 솜씨가 제법인 걸.’ 어깨부터 시작해 머리끝까지 기분 좋은 짜릿함이 느껴졌다. 일루니아는 잠시 업무에 손을 놓은 채 인디의 손에 몸을 맡겼다. 한참 동안 일루니아의 어깨를 주무르던 인디는 조심스럽게 아까부터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저기…….” “응? 왜 그러세요?” “저…….” “부담 갖지 말고 말씀하세요.” “괜찮으시다면 전신 마사지를 해드리고 싶은데…….” “…….” 전신 마사지라니? 왠지 음란한 냄새가 풍기는 말이다.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상당히 불순한 발언이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일루니아는 별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인디는 반색을 표명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대체 뭐가 감사하단 말인가? 일루니아는 간이침대에 누웠고 인디는 조심스럽게 일루니아의 등을 지압하기 시작했다. 인디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등을 꾹꾹 누를 때마다 일루니아는 탄성을 내뱉었다. 안마에 소질이 있는 드래곤이라. 정말 기가 막힌다. “시원하신가요?” “예. 정말 시원하네요.” “그, 그럼 앞으로 제가 매일 안마 해드려도 되나요?” “그럼 힘드실 텐데…….” “아니에요. 전 괜찮은 걸요.” “그래도…….” “제발 부탁드려요.”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감사합니다. 저 열심히 할게요.” 아아~ 분위기 정말 화기애애하다. 누구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극심한 공포감과 갈등을 느끼고 있는데 누구는 사랑하는 여자의 몸이나 주물럭거리고 있다니. 이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 * * * * * 난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말 간만에 피는 담배다. 의식 세계에서 많이 피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의식 속에서 있었던 일일뿐 현실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 담배는 몇 달 만에 피우는 담배라 할 수 있다. 연기가 목구멍 깊숙이 빨려 들어온다. 난 한동안 그 느낌을 음미하였다. 비흡연자들은 흡연자들의 심정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고기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고기 맛이 어떤지 백날 설명해줘 봐야 그걸 이해할 수는 없다. 그걸 이해하기 위해선 직접 먹어봐야만 한다. 담배도 이와 마찬가지다. 아마도 비흡연자들은 흡연자들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왜 자기 돈 내고 독한 연기를 들이마셔서 몸을 망치는 걸까?’ 흡연자들이 비흡연자들에게 담배의 맛에 대해 백날 설명해줘 봐야 비흡연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면 직접 피워봐야만 한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비흡연자들에게 담배를 피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난 언제든 담배를 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끊지 않는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이 뭣 같은 세상 담배마저 끊으면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 사실 예전에 끊을 생각을 몇 번 해보긴 했다. 우리 라이를 위해서. 내가 계속 라이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 라이가 뭘 보고 배우겠나? 그래. 난 라이를 위해 금연을 하려했다. 하지만 포기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금연해서 뭐하겠냐? 난 죽는 그 순간까지 흡연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당당하게 담배를 피겠노라. 후우~. 그나저나 담배맛 죽이는 군. 간만에 피는 담배여서 그런가? 아, 행복해~. 죽기 전에 실컷 피워둬야지. 그런데 그러다가 크로니스와 싸우기 전에 폐암으로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담배를 세 개비째 태우고 있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난 라이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았다. 하지만 나타난 사람은 라이가 아니었다. “……아!” 난 깜짝 놀라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뱉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쩐 일이세요?” “왜요? 전 여기에 오면 안 되나요?” “아, 아니, 뭐 그런 뜻은 아니지만…….” 내가 왜 이렇게 당황하는 걸까? 예상치 못한 만남이어서? 루시아는 백금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를 보았다. 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왠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기가 껄끄럽다. “이, 일단 앉으시죠.” 난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그러자 그녀는 치마를 추스르고 차분하게 그 위에 앉았다. 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얘기 들었어요. 이제 곧 드래곤과 싸우신다면서요.” “예.” “자신은 있으세요?” “예. 뭐…… 나름대로…….” 자신이 있으면 뭐하나? 실력이 없는데. 루시아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이 참 아름답네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밤하늘보다 루시아가 더 아름답다. 이런 깊은 밤에 이런 으슥한 곳에서 이런 미녀와 함께라니. 으음, 왠지 불순한 상상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무슨 생각해요?” “예? 별 생각 안 하는데요.” “정말요?” “…….” 왜 이렇게 집요하게 물어보는 걸까? 내 생각은 알아서 뭐하려고? “그,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예. 잘 지냈어요.” 척 보기에도 잘 지낸 것처럼 보인다. 전보다 더 아름다워 진 것 같아. 루시아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치 오랜 친구 같은, 오랜 연인 같은 느낌. 난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소, 손이 참 곱고 부드럽네요.” “다른 손도 만져 보실래요?” “…….” 루시아는 반대쪽 손도 나에게 내밀었다. 난 그 손도 만져 보았다. 역시나 부드럽고 고운 손. 이대로 영원히 마주 잡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루시아를 마주 보고 있으니 내 의식 속에서 그녀를 만난 일이 떠오른다. 그때 그녀는 스카프를 뒤집어쓰고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든 성냥팔이 소녀였지.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 하다. 난 그녀를 돕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녀에게 치근덕거리던 놈을 개박살 내고 그녀의 성냥을 몽땅 사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괴롭히던 계모를 물리치기 위해 집안으로 쳐들어갔다. 놀랍게도 계모는 샤이 사일런스 일루니아 여사였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 악덕 변호사는 사일런스 지니. 남매가 짜고 루시아를 물 먹인 것이다. 난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니의 얼굴을 봐서 그냥 적당한 선에서 끝내 주었다. “…….” 감히 루시아를 구박하다니! 적당한 선에서 끝낼 수는 없다. 받아라! 빅장 40단 컴보! 아아~ 생각하면 참 좋은 추억이야. “왜 그렇게 실없이 웃어요?” “……예?” 앗, 생각이 너무 길었나 보군. “아, 아니요. 그냥 이거저거 생각하느라.” 루시아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흐음, 뭐 이상한 생각한 건 아니죠?” “…….” 그 이상한 생각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인 걸까? 음음, 이상한 생각이라니…… 설마 내가 그렇고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렇고 그런 생각이라. 옛날에는 사실 이런 생각 많이 했었다. 그때는 사춘기 시절이었으니. 하지만 이제 나이가 좀 들다보니 그렇고 그런 생각 보단 저렇고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늙었다. 아~ 옛날이 그리워. 잠깐. 그런데 내가 지금 몇 살이지? 내가 의식 세계를 헤매는 사이에 해가 바뀌었으니…… 으음, 만으로 18세군. 참으로 꽃다운 나이일세! 내가 18세면 루시아는 20세다. 요즘 연상 연하 커플이 유행이라던데 나도 시류에 한번 편승해 볼까? “저, 저기…….” 일단 입을 열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잘 모르겠다. “바, 밥은 먹었어요?” 이게 뭔가? 내가 말하고도 황당하다. “먹었어요.” “마, 맛있었나요?” “맛있었어요.” “하하, 그것 참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라는 거죠?” “…….” 글쎄요. 뭐가 다행일까요? 한번 알아 맞혀 보세요. 후우~ 나 오늘 왜 이러냐? 평소 현란한 말빨은 간데없고 남은 것은 말 더듬는 것뿐이구나. 정말 한심하다. “저랑 같이 있는 게 싫은가 봐요.” “……예?” “지금 안절부절 못하고 있잖아요.”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어, 어떡하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분명 말하지만 난 루시아랑 있는 게 너무 좋다. “제가 싫으세요?” “아, 아닙니다!” 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정말 쪽 팔린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없던 점수 오늘 다 깎여 나가는 군. 흑~ 루시아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 루시아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사실 이러면 굉장히 난감하다. 눈을 마주치자니 쑥스럽고, 그렇다고 피하자니 이상하고.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벗어날 수가 없다. 이대로 텔레포트 마법을 써서 뿅~ 하고 사라지면 좋을 텐데. “그 하프엘프와는 요즘 어때요?” “…….” 어째서 여기서 라이레얼 얘기가 나오는 거지? 나와 라이레얼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은 이미 예전에 밝혀진바 있다. 그 때문에 난 무덤을 파고 드러누울 생각까지 했었지. 아아~ 너무해요, 라이레얼. “저, 전 라이레얼과 이미 끝난 사이에요.” “정말요?” “예. 진짜 완벽하게 끝난 사이입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무슨 오해를 한다 그러는 거죠?” “그, 그게 그러니까…… 아, 아무튼 끝난 사이에요. 그리고 라이레얼 옆에는 이제 카르가 있잖아요.” “카르…… 그 화이트 드래곤 말하는 건가요?” “예.” 루시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끝난 사이인 건가요?” “예.” 세레나와도 끝나고, 라이레얼과도 끝나고…… 흑~ 이제 내 옆에 남아있는 여자는 오직 라이뿐이구나. 라이야, 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오빠를 버리면 안 돼. 라이가 오빠 버리면 오빠는 삐질 거야! “아! 그런데 상아탑의 주인 라이미안과는 무슨 관계인가요? 상아탑에서 아이언스 공작님께 볼 일은 끝난 것 같은데 왜 계속 붙어다는 거죠?” 불신감 가득한 눈초리.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혹시 어린애한테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건 아니겠죠?’ 요즘 세상이 어찌되려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어린애 데리고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놈들을 변태라고 부르거나 로리타 콤플렉스, 줄여서 로리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난 사실 애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징징 짜지, 만날 뭐 사달라고 졸라대지, 틈만 나면 사고 치지, 가끔은 바지에 오줌을 싸기도 하지. 아무튼 같이 있으면 정말 짜증나는 존재가 애들이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예외는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라이다. 라이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난 라이가 굉장히 못마땅했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괴롭히고 울렸다. 흑~ 내가 나쁜 놈이지. 우리 라이가 뭘 잘못했다고.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난 라이를 아끼고 사랑한다. 라이는 이제 나의 여동생이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난 라이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다. “라이는 저한테 있어서는 딸이나 다름없어요. 라이도 절 보호자로 생각하고 있구요.” “으음, 그런가요?” “예.” 지금 문득 드는 생각인데, 루시아랑 결혼해서 라이를 입양해 기르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뭐 이건 내 욕심일 뿐이지만. “살아 돌아오실 건가요?” “……아니요.”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크로니스와 맞붙어 살아 돌아올 확률은 로또 복권 당첨 확률보다도 낮았다. 아니, 그래도 로또 복권은 몇 백만 분의 일이긴 하지만 당첨 확률이 있긴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 돌아올 확률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 인생을 정말 불쌍하고 처량해지면서 홀로 남겨지게 될 라이가 생각났다. 난 루시아에게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가요?” “혹시라도 제가 못 돌아오면 라이한테 말 좀 전해주세요. 오빠가 없어도 밥 맛있게 먹고 이코랑 즐겁게 놀라고.” “직접 하시지 그래요?” “직접 하면 울게 뻔하거든요.” 루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되게 챙기네요.” “제 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저도 그런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 허억! 그런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니?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라이는 현재 내 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루시아가 라이를 딸로 삼고 싶다면 그 방법은 오직 하나. 나와 결혼하는 것. 서, 설마 이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 아니, 이런 뜻으로 한 말 맞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놀래요?”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순간 루시아가 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내 쪽으로 내밀며 눈을 살포시 감았다. 이 것은 분명 키스하자는 제스처가 틀림없다. 두근두근-! 키스라니. 그러고 보니 키스한지도 상당히 오래 됐다. 음음, 상당히 오래 된 정도가 아니라 무지하게 오래 됐지. 여자 쪽에서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하는 것은 남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제 곧 나는 죽을 것이다. 죽기 전에 루시아랑 찐한 키스는 해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죽더라도 좀 덜 억울할 것 같다. 난 손으로 그녀의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가져갔다.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때 꼭 방해꾼이 나타났었는데. 역시나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저벅저벅- 경쾌한 발걸음 소리. 그래도 난 그 소리에 신경 끄고 하던 키스마저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루시아가 나를 밀쳤다. 흑~ 방해꾼, 미워~. 저 방해꾼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의 예상에 의하면 사일런스 지니나 라이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걸음 소리로 봐서는 지니일 것 같았다. 라이의 걸음 소리는 아장아장이니. 짙은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의 얼굴 윤곽이 천천히 드러났다. 난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크로니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엘프. 분명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났다. “누, 누구에요?” 루시아는 조금은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난 그녀를 뒤로 밀치며 말했다. “이대로 막사까지 뛰어 가세요.” “예?”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요!” 크로니스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게다가 나에게 엄청난 집착을 하고 있다. 잘못하면 루시아한테 화가 미칠 수도 있다! 크로니스의 붉은 눈동자가 우리를 향했다. 루시아는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도망쳐요!” 내가 소리를 지르며 밀치자 루시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슬픈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전 괜찮아요!” 내 외침에 루시아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막사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난 고개를 돌려 크로니스를 보았다. 젠장,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난 주머니 속에 든 차원의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이걸로 아공간을 열어서 내가 먼저 들어간다. 그러면 크로니스는 따라 들어올 것이다. 그 다음에 외부에서 그 공간으로 향하는 문을 닫아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그렇게하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나는 걸까?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크로니스는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난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가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지금 그를 죽이려 하고 있다. 내 목숨을 구해준 그를……. 젠장,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크로니스와 같이 죽어야 하는 건가? “도망치세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외침. 크로니스의 눈에 놀란빛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한 걸까?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움직였다. “드래곤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당신과 날 아공간 속에 가둘 생각이에요. 그곳에서 우리 둘 다 죽일 속셈이라구요!” “…….” 크로니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동요도 하지 않았다. 설마 내 말을 믿지 않는 건가? 그 순간 크로니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난 주위에 흐르는 마나의 느낌으로 텔레포트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 웃음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난 그 자리에 털썩 누웠다. 내 입으로 군사 기밀을 불어 버리다니. 이걸로 이제 크로니스를 제거할 방법은 완전히 사라졌다. 영웅이 되기 위한 조건은 간단하다. 새까만 가슴과 두꺼운 얼굴. 이 두 가지만 갖추었으면 이미 영웅이 된 거나 다름없다.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배신할 정도의 비열함과 비장함. 그리고 누가 뭐라고 욕을 해도 언제나 당당할 수 있는 뻔뻔함. 나는 영웅이 아니다. --------------------------- 이걸로 13권 끝입니다. 결국은 14권까지 가게 되는 군요. 아이리스는 14권 완결로 끝납니다. 보름 정도 쉬다가 마지막권 연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3권은 다음주 말이나 다다음주 초에 출간 됩니다. 메일은... psungho83@hanmail.net 으로... <아이리스 Iris> - 14권 - 크로니스는 자신의 레어 안에서 방금 전의 만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곳에는 둘이나 되는 드래곤이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곳에 찾아갔다. 왜 그랬을까?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한 여인과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이그 리드를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이그리드. 그리고 루미아드……. 크로니스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떤게 진실 일까? 확실한 건 자신이 미쳐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자신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만약 그 인간과 싸운 다면 결론은 어떻게 날까? 그 인간이 자신의 손에 죽을까? 아니면, 자신이 그 인간의 손에 죽을까? 크로니스는 후자가 되길 바라고 있었다. 이젠 쉬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 그 인간은 자신보고 도망치라 말했다. 어째서 일까? 그는 날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만 죽고 싶은 데 그는 내가 살기를 원하고 있다. 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이 멸망해도 좋은가? 자신이 죽어도 좋은가?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크로니스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떠오르는 것은 오직 그 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아이언스 히로……." * * * * * * 난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막사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나의 라이가 라이코스와 놀고 있었다. "아! 오빠다!" 라이는 쪼르르 달려오더니 내 품에 안겼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리 라이 재밌게 놀았니?" "예. 라이는 이코랑 너무너무 재밌게 놀았어요."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라이. 이렇게 라이를 보고 있으면 껴안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뭐 그 래봐야 라이를 껴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밖에 없다. 다른 어떤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라이를 안을 순 없어! 난 침대에 걸터 앉은 다음 라이를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라이는 앙증 맞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꼭 껴안더 니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 비볐다. "우리 라이 밥은 맛있게 먹었어?" 라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까 거기서 맛있는 고기 많이 먹었어요." "후후~ 그래. 우리 라이가 맛있는 고기 많이 먹었다니 다행이네." 난 라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러고보면 라이는 어린애치고는 머리카락에 매우 길다. 그리고 관리 를 잘해서인지 굉장히 부드럽다. 음음, 마치 비단결을 쓰다듬는 것 같아. "오빠." "응? 왜 그러니?" "라이 비행기 태워주세요." "……응?" 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비행기라니? 갑자기 왠 비행기? 참고로 난 비행기가 제일 무섭다. 요즘은 비행 기 비슷한 단어만 들어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왜 그래요, 오빠?" "응? 내가 뭘?" "혹시 라이 비행기 태워주기 싫으세요?" "……." 헉! 어떻게 알았을까? 라이는 순진무구한 회색 눈동자를 커다랗게 뜨고 날 보고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흥! 실망이에요! 오빠, 미워!' 라이의 실망어린 눈동자가 내 가슴을 푹푹 찌른다. 히로는 라이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다. 라이의 사 랑이 없으면 히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어! 그러니 히로에게 라이의 사랑을 듬뿍 줘~. "왜 대답을 못 하세요? 오빠 정말 라이 비행기 태워주는 거 싫으세요?" "그, 그, 그, 그럴리가. 이 오빠는 다만 라이가 멀미할까 봐……."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며 방긋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이는 멀미 안 해요." "그, 그래도……." "정말 멀미 안 해요." "혹, 혹시나……." "우웅~ 라이는 비행기 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단 말이에요. 비행기 태워주세요." "하, 하지만……." "오빠가 아까 전에 비행기 태워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응? 내가 언제?" "아까 그랬어요. 아까 오빠가 몇 클래스냐고 물어보면서 맞추면 비행기 태워주신다 그랬어요. 정말 그랬어 요. 진짜에요." "……."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거니? 난 어떻게 빠져나갈 구멍이 없나 잘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비행기 를 태워줘야한단 말인가? 솔직히 무섭다. 공포가 내 어깨를 짓누른다. 이제야 파일럿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라이의 저 초롱초롱한 눈망울. '라이는 비행기가 너무너무 타고 싶어요. 라이는 오빠가 태워주는 비행기가 세상에서 가장 재밌어요.' 난 저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누누히 말하지만 라이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가루가 되어도 상관 없다. 그래. 라이를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 그런데 비행기만은 정말 사양하고 싶다. 난 두 손을 라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넣었다. 그리고 번쩍 들어올렸다. "헤헤~." 라이는 벌써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라이코스는 어느새 라이의 머리 위에 올라섰다. 무임승차할 속셈인 것이 다. 난 라이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라이는 두 팔을 흔들며 좋아했다. "꺄아아~." 아! 저 행복에 겨운 비명 소리. 괜히 내 기분이 좋아진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힘들다 한들 우리 라이만 기뻐 한다면야 무엇을 못해주겠는가? 우드드득-! 어째 척추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불안하다. 난 한참 동안 빙글빙글 돌린 후에 라이를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 라이는 해맑게 웃으며 침대 위를 뒹굴거렸 다. 난 탈진 상태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헥헥~." 한 5분 정도 돌렸을 뿐인데 온몸이 말이 아니다. 마치 진정한 탈진 상태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 다. 비행기 열 번만 태워줬다가는 아무래도 허리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오빠. 라이는 오빠가 너무너무 좋아요!" "저, 정말?" "예!" 라이의 힘찬 대답에 몸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난 너무나도 큰 기쁨에 라이를 꼬옥 껴안았 다. "아이구, 귀여운 우리 라이. 오빠도 라이가 너무너무 좋아." "헤헤~." 라이는 내 목에 팔을 두르며 내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들려온 목소리에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막사의 입구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눈꽃처럼 아름다운 그 녀의 이름은 루시아. 루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시아는 손가락으로 라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 설마 그 아이와 그렇고 그런……." "헉!" 지금 나는 침대에 누워 라이를 껴안고 있었다. 건전한 시선으로 본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불순한 시선으로 본 다면 굉장히 불순하다고 할 수 있다. 난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 오해에요!" 하지만 루시아의 눈은 이미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저 눈빛. 아아~ 마치 날 유아성추행이 나 하는 변태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냥 아빠가 딸을 안고 있는 걸로 봐주면 안 되려나? 난 라이를 침대 위에 눕혀 놓고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여, 여긴 어쩐 일이세요?"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 별로 말하고 싶지 않네요." "……." 헉! 어, 어째서? "이, 일단 앉으세요." 난 어떻게든 그녀의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어색 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차라도 한 잔 내왔으면 좋겠는데 차가 없네요." "됐어요." "……." 찬바람이 싸늘하게 우리의 주위를 스쳐지나간다. 아아~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난 다만 라이와 건전하 게 놀고 있었을 뿐인데. 아무래도 오해를 풀어야겠군. "라이야, 이리 와보렴." 내가 손짓하자 침대에서 베게를 가지고 장난치던 라이는 라이코스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아장아장 걸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 이 천진난만한 얼굴.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다시 봐도 감동을 금할 수가 없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난 루시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쪽은 루시아 공주님이야. 알고 있지?" "예. 전에 만난적 있어요." "그래. 그럼 인사하렴." 라이는 루시아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으응. 아, 안녕…… 하…… 세요." 루시아는 당황하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생긴 것은 어린 아이인데 나이는 많고, 게다가 상아탑의 주인이 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헤깔리나보다. 난 라이의 귀에 속삭였다. "공주님께 다가가서 언니~ 라고 부르며 꼭 껴안아 봐. 그럼 이 오빠가 나중에 또 비행기 태워줄게." 비행기를 태워준다는 말에 라이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아장아장 걸어가 루시아의 품에 포옥 ~ 안겼다. 그리고는 얼굴을 부비부비 비볐다. "어머!" 루시아는 깜짝 놀랐지만 그리 싫지는 않은 표정이엇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 같이 귀엽고 깜직한 아이 를 그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안아봐도 돼요?" 루시아는 내가 보호자라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물어보았다. 난 당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으니 안아 보세요." 내가 허락하자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라이를 껴안았다. 루시아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루시아는 라이의 머 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너무 귀여운 아이네요." "그렇죠? 우리 라이가 좀 귀엽긴 하죠. 아하하……." 라이가 귀엽다는데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좋아지는 걸까? 아! 내가 칭찬들었을 때보다 더 기분 좋다. 루시아는 계속해서 라이의 귀나 머리카락 등을 만지작거렸다.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채. 후후~ 완전히 흠뻑 빠졌군. 하긴 노처녀한테도 통한 라이의 귀여움이 루시아한테 안 통할리 있나? 그런데 라이가 저렇게 계속해서 루시아의 품에 안겨 있으니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혹시나 나 의 라이가…… '저는 히로 오빠보다 루시아 언니가 더 좋아요!' 라고 말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안 되는데. 라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여야 하는데. 그나저나 둘이 너무 오 래 붙어있다. 라이는 루시아의 품이 좋은지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루시아 역시 라이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라이야, 이리와." 내가 말하자 라이는 즉시 루시아에게서 떨어져 나에게로 왔다. 루시아의 얼굴에는 섭섭함이 가득했다. 마 치 '조금만 더 안아봤으면……' 하고 말하는 듯 했다. 난 라이의 귀에 속삭였다. "아까 시킨 대로 루시아 공주님께 '루시아 언니~' 라고 말해봐." 라이는 내가 시킨대로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루시아 언니~." "……." 루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굉장히 감동 받은 표정. 잘하면 눈물까지 흘릴 것 같다. 루시아는 무언가에 홀 린 듯 중얼거렸다. "너, 너무 귀여워." "……." 저 심정 내가 충분히 이해한다. 만약 귀여움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라이는 대인살상용 무기로 분류 되었을 것이다. 좀 과장 섞인 비유긴 하지만 그만큼 라이의 귀여움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오해는 북서풍에 먼지 날아가듯 멀리멀리 날아갔다. 남은 것은 가족 같은 화기애애함뿐. 내가 아빠고, 루시아는 엄마. 그리고 라이는 우리 딸. 아아~ 이렇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럼 난 정말 행복할 텐데. 너무너무 행복해서 담배도 끊고 착하게 살 텐데. "이리 오렴." 루시아가 손짓하자 라이는 다시 루시아의 품에 안겼다. 루시아는 촉감이 좋은지 자꾸만 라이의 볼을 쓰다듬 었다. 그리고는 살짝 꼬집었다. 저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라이의 볼을 쓰다듬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자꾸 꼬집었으 니. 그런데 루시아와 라이가 계속 저러고 있으니 왠지 모를 소외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내가 묻자 루시아는 그제야 라이에게 치던 장난을 멈추고 날 보았다. "그게……." "……." 무슨 일로 온지 까먹었나 보군. 루시아는 한참 동안 고민한 뒤에야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아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예? 어떻게 되었다니요?" "아까 그 엘프는 대체 누구였죠? 그리고 왜 저보고 도망치라고 한 거예요?" "……." 그 엘프가 크로니스라고 대답한다면 루시아가 믿을까?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크로니스임을 밝힐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그녀는 모를테니까. "그, 그냥 엘프에요." "그냥 엘프라니요? 아는 사이 아니었어요?" "예. 아는 사이긴 한데……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니어서요." "좋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그러니까 나쁜 관계라는 뜻이지요." "……." 루시아는 말을 멈추고 보석처럼 빛나는 녹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마치 진실을 말하라고 무언의 압력 을 가하는 듯 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진실을 그대로 말할 내가 아니 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루시아 가 저런 눈으로 보면 난 거짓을 말할 수가 없다. "사실 그 엘프는……." "그 엘프는 나쁜 엘프에요!" 내가 그 엘프의 정체를 말하려는 순간 라이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난 라이에게 물었다. "나쁜 엘프라니? 라이가 그 엘프가 나쁜 엘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니?" "라이가 아까 봤어요! 그 빨간 머리 엘프는 나쁜 엘프에요!" "……." 설마 나와 루시아의 심야 데이트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거니? 그때 키스했으면 큰일 날뻔 했군. 라이의 정 서에 나쁜 영향을 미칠 뻔 했어. "흑흑…… 우에에엥…… 라이는 나쁜 엘프가 무서워요! 라이는 착한 엘프란 말이에요!" 라이는 생각만 해도 무서운지 울음을 터트렸다. 하긴 그 때는 오줌까지 쌌었지. "……."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치마에 쌌지만, 두번째에는 내 등에다가 쌌었지. 라이에겐 좀 미안한 얘 기지만 솔직히 아직까지 찝찝하다. 아무래도 오늘 밤 샤워를 한번 해야겠어. "이리오렴." 어느새 루시아는 라이를 품에 안아 토닥거리고 있었다. "그만 울어. 예쁜 아이가 울면 안 돼지." "우에에엥, 하지만 라이는 나쁜 엘프는 무섭단 말이에요." "괜찮아. 언니가 옆에서 지켜줄게." "흑흑, 정말요?" "응. 약속할게." "훌쩍~." 토닥토닥~. 참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청순가련형의 미녀가 통통하고 귀여운 소녀를 안고 있다니! 내 손에 사진 기가 있었다면 주저 없어 이 모습을 필름에 담았을 텐데. 울음을 그친 뒤에도 라이와 루시아는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나저나 크로니스에 대한 생각 때문에 기분 이 우울해졌다. 난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 쥐었다. "혼자 있고 싶어요." "예?" 정말 혼자 있고 싶다. 난 자리를 비켜달라는 의미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애는 제가 데려가도 돼죠?" "……." 루시아의 눈빛은 라이를 원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원하고 있었다. '오늘밤 제가 꼭 껴안고 잘게요.' 음음, 이러다가 나의 라이를 루시아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닌지 걱정 된다. 그래도 루시아라면 안심하게 맞 길 수 있을 것 같다. "라이 잘 보살펴 주세요. 잠자리에 오줌 싸도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시구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왠지 불안하다. 우리 라이 이 오빠가 곁에 없다고 잠자리 설치면 어떡하지? 그래도 루시아가 저렇 게 데려가고 싶어하는데……. "그, 그럼…… 오, 오늘밤만 부탁드릴게요." "예. 제가 책임지고 잘 보살필게요." 루시아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난 안심하고 라이에게 말했다. "오늘은 루시아 언니와 같이 자렴." "왜요? 라이는 오빠랑 같이 자고 싶어요." "……." 잠시 감동 중. 흑~ 잠시나마 라이의 마음을 의심한 내가 싫어진다. "그래도 오늘은 루시아 언니와 같이 자렴. 오빠가 오늘은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내가 잘 타이르자 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오빠 나중에 꼭 라이 비행기 태워주셔야 돼요." "……." 흑~ 그 놈의 비행기가 뭔지. 사실 그것만큼 힘든 일도 없는데. 난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는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루시아의 손을 잡고 막사를 나갔다. 루시아와 라이. 둘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 역시 아이한테는 엄마가 있어야 돼. 아무래도 내가 빨리 결혼해야겠군. "……."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냐? 난 잠시 반성하고 다시 생각을 시작했다. 크로니스에 대한 생각을. 크로니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걸까? 이 곳에는 드래곤이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 씩이나 있 다. 크로니스가 이 곳에 나타나기 위해선 상당한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앞 에 나타났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둘째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군사 기밀을 크로니스에게 전부 말해주었다 는 것에 있다. 그것을 말해줌으로써 이제 크로니스를 막을 방법은 사라졌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잘못놀 린 입 때문에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 "내가 미쳤지."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 시간을 되돌린다해도 난 그렇게 말할 것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다만 또 그런 상황이 와도 또 그렇게 말할 것 이다. 그렇다는 것은……. "난 크로니스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건가?" 어찌되었든 난 모두의 기대를 배반한 셈이 되었다. 드래곤들이 나를 처죽인다 해도 난 할 말이 없다. 난 이그리드를 떠올렸다. 만약 이그리드였다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진짜 죽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일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난 탄식에 탄식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진 않았다. 내가 크로니스와 함 께 아공간 갇히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 혹시 다른 선택은 있지 않았을까? 별로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래 도 난 다른 선택에 기대고 싶었다. 날 위해서. 그리고 크로니스를 위해서. "젠장. 다른 선택이 있어야 기대던 말던 하지." 난 신경질을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단은 인디와 얘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적어도 계획 이 파토났다는 것은 알리는 것이 좋을 테니. 루시아는 자신의 막사로 라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라이와 루시아는 예전에도 몇 번 만난적이 있었다. 하지 만 둘은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이다. 제대로 얘기해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라 할 수 있으니. 루시아는 오늘 라이를 볼 때만 해도 그냥 그저 그런 귀엽게 생긴 어린 엘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귀엽 게 웃는 모습과 아장아장거리는 행동거지를 보고 있으니 가슴에 뭉클거리는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 누가 이런 귀여운 아이를 보고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이언스 공작이 왜 이 아이와 만날 붙어 다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시아는 지금 라이에게 모성애를 느끼는 중이었다. '이런 동생 하나 있었으면…….' '이런 딸 하나 있었으면…….' 루시아는 라이의 볼살을 만지작거렸다. 벌써 몇 십분째 만지고 있는데도 라이는 싫지 않은지 계속 해서 웃음 을 지었다. 사실 라이는 이런식으로 귀여움 받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엘프였다. "언니." 순간, 즐겁던 루시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더니 이내……. "어머! 너무 귀여워!" 호들갑을 떨며 라이를 꼬옥 껴안았다. 언니라니. 그 한마디 말은 동생이 없는 루시아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 겨주기 충분했다. 루시아는 라이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쪽~! 그리고 자기에게도 해달라는 의미로 뺨을 내밀었다. 평소 히로와 이런 짓을 많이했봤던 라이는 주저 없이 루 시아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쪽~! '아! 행복해.' 루시아는 라이를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왜 이러지? 미쳤나?'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차마 라이에게서 손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애가 너 무 귀여워서 도저히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라이야." "왜요, 언니?" "……." 헉!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귀엽고 깜찍하게 묻는다. 이런 깜찍함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엘프라는 소문 이 틀리지 않았나 보다. "으응…… 라이 혹시 먹고 싶은 거 없니?" "먹을 거요? 라이 먹을 거 좋아해요!" "그럼 과자 먹을래?" "과자요? 라이는 과자 너무너무 좋아해요." 라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아까 저녁을 배터지게 먹었지만 돌아서면 배고픈 게 아이들 아닌가? 루시아는 몸매 관리 때문에 자제하던 과자를 라이의 앞에 내 놓았다. 그러자 라이는……. "잘 먹겠습니다!" ……라고 외치더니 두 손으로 과자를 한웅큼씩 집어 입에 마구 쑤셔 넣었다. 우걱우걱~! 다른 예절은 다 좋아도 식사 예절만은 개판인게 라이의 특징이다. 라이는 그런 특징을 특별히 부각시키기라 도 하듯 정말 너무 열심히 옷에 부스러기를 다 흘리며 과자를 먹어 치웠다. 하지만 루시아가 보기엔 그런 모 습마저 너무나도 귀여워 보였다. 원래 한번 콩깍지가 씌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지는 법이니. "천천히 먹으렴. 체하면 안 되잖니." 말이 씨가 된 걸까? 라이는 결국 체하고 말았다. 루시아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컵을 건네 주었다. 꿀꺽꿀꺽-! 컵에 든 물을 몽땅 마신 라이는 체한 게 내려 갔는지 다시 과자를 집어 먹었다. 라이는 루시아가 꺼내 놓 은 과자를 전부 먹고 나서야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라이는 루시아의 침대가 마치 자기 침대인냥 베게를 배고 자연스럽게 누웠다. 먹을 거 다 먹었으니 이제 그 만 자려는 것이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지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뒹굴뒹굴~! "라이야." "예? 왜요?" 루시아가 부르자 라이는 재빨리 일어나서 루시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라이는 말 잘 듣는 착한 엘프니까. "라이는 왜 아이언스 공작과 같이 다니는 거야?" "히로 오빠요?" "응." 라이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라이는 히로 오빠가 너무너무 좋거든요. 그리고 오빠도 라이를 너무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라이는 오빠 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게 좋겠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렇게 아이언스 공작…… 아니, 히로 오빠가 좋아?" "예. 라이는 히로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제일?" "예!" 라이의 힘찬 대답. 아마 히로가 들었으면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루시아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 며 물었다. "히로 오빠의 어디가 좋아?" "음음…… 그건……."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말 히로 오빠의 어디가 좋은 걸까? 이 글을 쓰는 본인 도 굉장히 궁금하다. "히로 오빠는 라이한테 굉장히 잘해줘요. 그리고 히로 오빠는…… 음음……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제자잖 아요." "……응?" 루시아는 라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아이언스 공작이 이그리드의 제자라는 것과 라이가 아이언스 공작 을 좋아하는 것에 무슨 상관관계가 잇단 말인가? "히로 오빠는 마법을 많이 알고 있어요. 라이는 지금 7클래스 마스터인데, 이제 곧 8클래스가 될 거에요. 그 런데 8클래스 마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빠 밖에 없어요." "……." 그렇다. 드디어 라이가 히로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이유가 밝혀졌다. 역시 진실은 숨어있었던 것이다. 아아~ 솔직히 본인은 라이가 히로를 쫓아다닌 이유가 단순히 '좋아서' 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데 그 뒤편에 이런 계산이 숨어있었다니. 히로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흑~ 라이한테 실망이야. 라이 미워! 우에에엥~.' ……라고 말할 것 같다. 루시아는 잠시 충격에 빠져들었다. 이런 순수하고 순진하고 맑고 깨끗하게 생긴 아이가 그런 철저한 계산 을 하고 있었다니. "그, 그럼 그것 때문에 아이언스…… 히로 오빠를 따라다니는 거야?" 루시아의 물음에 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라이는 마법 때문에 히로 오빠를 따라다니는 게 아니에요." "그럼?" "히로 오빠는 착한 인간이에요. 전 그런 히로 오빠가 너무너무 좋아요. 그리고 히로 오빠 옆에는 이코도 있 는 걸요." "……." 히로 오빠가 착한 인간이라니? 지나가던 라이코스가 '우헤헤헤~ 염병~' 하고 웃겠다. 하지만 라이는 진심 이었다. 라이의 눈에는 히로가 착한 인간으로 비쳤다. "그럼 만약 아이언스 공작이 마법을 못 쓰게 된다 하더라도 따라다닐 거야?" 라이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에요." "……." 루시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착한 아이구나.' 하지만 루시아는 한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히로가 설사 마법을 못 쓰게 된다 하더라도 마법 지식은 고스 란히 머릿속에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라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 마법 지식이다. 아아~ 대체 라이의 진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루시아가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라이는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음음, 어째 라이는 7클래스를 마스터 한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먹고 자고 노는 모습만 보여주는 걸까? 가끔은 마법도 좀 쓰고 그러지……. '자는 모습도 너무 귀여운 것 같아.' 루시아는 한동안 라이가 자는 모습을 정신 없이 바라보더니 라이를 꼭 껴안고 자신도 잠이 들었다. * * * * * 난 막사를 나와 느린 걸음을 옮겼다. 발이 잘 안 떨어진다. 내 얘기를 들은 인디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절 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다. 혹시 날 죽이려 드는 것은 아니겠지? "……." 왠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잘못을 했으니 죽음으로 갚으세요.' 이렇게 말하면 난 뭐라고 대꾸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야. 그래도 아직 이용가치가 많이 남아 있으니 날 죽이 려 하진 않을 거야. 난 애써 그렇게 생각하였다. 용사병 환자들이 벌이는 파티는 늦은 시간까지도 계속 되었다. 타오르는 장작불만큼이나 이들의 열기도 불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언스 히로님과 함께라면 드래곤도 문제 없어!" "아하하, 맞아. 드래곤이 별 건가? 레드 드래곤 따위야 이 주먹 한방으로 끝장을 내버리지." "아무튼 우리에겐 아이언스 히로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맞아. 히로님이야 말로 우리의 희망이야." 이들이 호기롭게 외치는 소리가 내 가슴을 찌른다. 난 이 모든 사람들의 의지를 배신한 셈이었다. 적을 잡 아 죽이기는 커녕, 적에게 우리편의 기밀을 불어 버리다니.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난 발이 더욱 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는 수 없이 발을 질질 끌며 이동했다. 인디가 있을 장소란 뻔했다. 일루니아 여사님이 계신 곳에 있겠지. 인디는 지금 일루니아 여사님과 뭘하고 있을까? 설마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 나의 예상에 의하면 둘이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있을 확률은 상당히 높았다. 아니, 거의 100%에 가까웠다. 음음, 그들은 불순한 존재였다. 어떻게 남녀가 한 방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순진한 나로서 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 솔직히 다 이해가 간다. 내가 이해 못하면 누가 이해하겠는가? 뭐 애들도 아니고 다 큰 성인들인데 고스톱 을 치든 떡을 치든 별 문제 없겠지. 그래도 웬만하면 알아서 자제해 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누구 염장지를 일 있냐? 일루니아 여사님의 막사 앞에 거의 다 왔을 때쯤 난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한 손은 주 머니에 찔러 넣은 채 달을 보고 있는 미남자. 무슨 걱정이 있는지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한 그늘이 져있 었다. "하아~." 그는 탄식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정체가 사일런스 지니임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난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그가 달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의 뒤를 살금살금 걸어갔다. 기척을 지우고 걷 는 것쯤은 무공의 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후후~ 내가 누군가? 혈존무적마저 물리친 검성이 아 닌가? 그런 내가 걸릴리 없지. "앗! 아이언스 공작님이 아니십니까?" "……." 헉! 저 놈이 어떻게 알았을까? 설마 사일런스 지니가 나보다 더 뛰어난 고수라는 건가? 난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지었다. "흠흠, 이 달 밝은 밤에 사일런스 지니 백작님께서는 주무시지 않고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요?" "뭐 별 일 아닙니다. 다만 아이언스 공작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나와봤을 뿐입니다." "……." 내 걱정 때문에? 왜 니가 내 걱정을 하는데? "그런데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이 야심한 시각에 나오신 겁니까?" "그, 그냥 한번 나와봤습니다." "걸어 온 방향과 가시는 방향을 보아하니 저희 누님의 막사로 향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 누님께 특별 히 볼일이 없다고 가정을 한다면, 저희 누님과 함께 있는 인디카즈네님을 만나려 하시는 거군요." "……." 족집게다. 너 진짜 잘났다. 아예 돗자리 깔지 그러냐? "그럼 가던 길 계속 가십시오." "예. 사일런스 백작님도 보던 달 계속 보세요." 괜히 기분이 안 좋아져 애꿎은 사일런스 지니에게 심하게 쏘아 붙인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막사에 다가 갈 수록 걸음 걸이가 느려지는 것은 왜일까? 하아~ 인디에게는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아무래도 난 진짜 미친놈인 것 같다. 군사 기밀을 적에 게 말하다니. 그래! 난 미쳤어! 난 미친놈이야! "……." 이러니 진짜 미친놈이 된 것 같다. 아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난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누 가 나를 좀 도와줘! "제가 도와드릴까요?" "허억!"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 때문에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다시 한번 놀라야했다. "헉! 니가 왜 여기있어?" "후후~ 글쎄요." 내 뒤에서 마치 유령처럼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일런스 지니였다. 방금 전에 등장하고 또 등장하다 니. 어째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이 놈이 주인공인 것 같다. "……." 객관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사실 나보단 사일런스 지니가 주인공에 더 어울리긴 한다. 큰 키와 잘생 긴 얼굴, 똑똑한 머리, 좋은 매너, 기타 등등……. 흑~ 너무 비교 돼.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다. 지니는 어디까지나 조연에 불과하고. 그리고 여주인공-일명 히로인- 은 당연 루시아. "지금 인디카즈네님을 만나시러 가는데 혼자서 만나실 엄두가 나지 않으시죠?" "……!" 정말 이놈은 족집게였단 말인가? "그,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요?" "사실은 아까 아이언스 공작님과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님의 만남을 목격하였습니다." "……." 그렇다는 것은……? "어떻게 목격하게 되었나요?" "그건……." "설마 우연히 지나가다가 목격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죠?" "물론…… 그렇게 말하려 했습니다." "……." 난 싸늘한 눈길로 지니를 노려 보았다. 지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빤히 눈에 보인다. "우리 진실 게임이나 한판 때릴까요?" "예? 진실 게임이라뇨?" "제 생각에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조금 진실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지요?" "……." 몰라서 묻냐? "정말 우연히 지나가다가 목격했습니까? 아니면, 나와 루시아가 만난 걸 보고 둘이 혹시 무슨 일이라도 벌이 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훔쳐보고 있었습니까?" "그야 당연……."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솔직하게! 진실하게!" 내가 유난히 솔직과 진실을 강조하자 사일런스 지니는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우연히 지나가다가 목격했습니다." "……." 이 인간이 진짜! 내가 화를 내려는 찰나 지니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아이언스 공작님과 루시아 공주님의 만남을 보고 둘이 혹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않 을까 하는 마음에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 그럼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나저나 이거 진짜 웃기는 놈일세. 나랑 루시아가 그곳에서 무슨 짓을 하 던 그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라고 계속 지켜봐? 혹시 이 놈…… 스토커?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엄습한다. 하지만 나의 불길한 예감은 이제까지 백발백중이었다. 아아~ 아무리 그 래도 스토킹이라니. 이건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토킹은 현대 사회에 결코 있어선 안 될 극악무도한 범죄이다. 그래서 나는 스토킹을 하는 것도 스토킹 을 당하는 것도 싫다.(참고로 난 지금 크로니스에게 스토킹을 당하는 중이다. 그래서 스토킹에 이렇게 과 민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스토킹은 경찰 당국에서 나서서 반드시 박멸해야 한다. 그러나 스토킹 박멸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토킹의 기준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의 집 앞에 한 남자가 꽃을 들고 서있다. 그 남자는 밤이 되어도 가지 않고 날 이 샐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그 짓을 일주일 내내 했다. 그럼 이것은 스토킹일까? 결론을 내리기가 상당히 애매하다. 그 남자가 지지리도 궁상맞게 생겼으면 스토킹이고, 남자가 꽃미남이 면 스토킹이 아니다. 즉, 다시 말해서 못 생긴 남자가 집 앞에 서 있으면 범죄고, 잘 생긴 남자가 집 앞에 서 서 있으면 로맨스라는 것이다. 즉, 또 다시 말해서 내가 서 있으면 범죄고, 사일런스 지니가 서 있으면 로 맨스다. "……." 젠장! 난 이래서 꽃미남이 싫어. 꽃미남 따위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돼. 빨리 9클래스가 돼서 전세계에 존 재하는 꽃미남들을 전부 쓸어버려야겠다. 음음, 그 전에 꽃미남을 지지하는 여성 세력들에게 맞아 죽겠군.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지니가 날 스토킹하고 있다는 거다. "왜 날 스토킹 하는 거야?" "……예?" "내가 아무리 잘 생기고 잘나도 그렇지 어떻게 스토킹을…… 안 그래도 지금 드래곤한테까지 스토킹을 당 해 미칠 지경인데…… 믿었던 댁마저……." "지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심각한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전 결코 스토커가 아닙니다." "흑~ 다 필요 없어! 이제부터 댁을 미워할테야!" 난 사일런스 지니가 내민 손을 치우고 눈물을 흩뿌리며 뛰어갔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는 하지만 지 니가 스토커였을 줄은 정말 몰랐다. 여자나 스토킹 할 것이지 왜 날 스토킹 했을까? 아무튼 웃기는 놈이야. 흑~ 이제부턴 우리 라이 빼고는 아무도 안 믿을 테야. 그렇게 뛰다보니 어느새 막사 앞에 도착했다. 난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 가 찐~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자. 쪼오오오오옥~! "……." 아우~ 재수 없어. 저게 뭐하는 짓이레? 진짜 어이가 없다. 키스는 뭔 키스야? 그렇게 입술 부빈다고 밥이 나 와, 떡이 나와? 진짜 염병 꼴값이다. 아아~ 마음에 안 들어. "흠흠!" 내가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크게 헛기침을하자 인디는 깜짝 놀라며 일루니아의 옆에서 떨어졌다. 하지 만 일루니아 여사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싸늘한 눈으로 날 노려 보았다. 그 눈빛의 차가움이 가히 무서 울 정도다. "왜,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는지……?" "몰라서 묻나요?" "예. 몰라서 묻는데요." "……."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자꾸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좋은 시간 방해해서 죄송해요. 인디는 그 사이 재빨리 옷과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 옷과 머리카락이 심하게 어지럽혀진 걸로 봐서 벌 써 한바탕 뛰고(?) 지금은 잠시 휴식기인 것 같다. 인디는 내 눈치를 열심히 삼키며 옷의 단추를 잠궜다. 하지만 손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단추가 구멍에 들어 가질 않았다. 난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한마디 해주었다. "천천히 하렴. 어차피 이미 볼 거 다 봤는데." 그러자 인디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흑~ 흑흑~." "……." 뭐 그렇다고 울 것까지야. 그런데 이거 내가 울린 건가? 일루니아 여사님의 싸늘한 눈빛이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변했다. '널 육시(戮屍) 해 버리겠어!' 헉! 육시라니? 그런 잔인한 말을! 너무 무섭다. 난 일루니아 여사님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안쓰러운 마음을 담아 인디에게 말을 건넸다. "옷만 정리하면 뭐하니? 목과 얼굴에 생긴 그 키스 마크와 뒤집어진 침대 시트는 어쩌고?" "어흐흐흑~."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리는 인디. 왠지 불쌍해 보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야, 야…… 그만 울어." 일루니아는 인디가 우는 것이 마치 내 잘못이라도 된다는 듯이 인디를 껴안고 달래주며 나를 향해 인상을 썼 다. "……." 허허, 이거 참. 둘이서 세트 플레이를 펼치다니. 너무하는 구려. 내 옆에 라이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둘의 세 트 플레이를 막아냈겠지만 나 혼자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냉기를 폴폴 풍기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쓸데 없는 일로 왔으면 죽을 줄 알아.' 다행히 나는 쓸데 없는 일로 온 게 아니다. 아주 중요한 일로 왔다. 문제는 그 중요한 일이 뭔지 일루니아 여 사님께 말씀드릴 수 없다는 거지만. "인디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요." "할 말이라니요? 무슨 할 말?" "그건 인디에게 직접 말해야 하는데……."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예."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화를 낼거라고 생각했던 일루니아 여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공과 사 는 확실하게 구분한다는 건가? 난 인디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고 인디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날 따라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말이야…… 나쁜 소식인데……." "뭔데요?" "그러니까 사실 대로 말하자면…… 아! 일단 화 안 내겠다는 약속부터 해줄래?" "무슨 얘기기에……?" "일단 약속부터 해." "아, 알았어요." 난 인디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재차 받아낸 뒤에 아까의 일을 말해 주었다. 인디의 눈동자가 점 점 커진다. "어, 어떻게 그런……." 인디는 기가 막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난 미안한 마음에 괜히 딴청을 피우며 다른 곳을 보았다. "아아~ 달 밝다." 그 순간, 한무리의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달을 가렸다. 하늘마저 나를 엿 먹이기로 작정을 했구나. 달빛마저 사라지자 인디의 어두운 얼굴이 더욱 어둡게 보였다. 화 안 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설마 화내지는 않 겠지? 인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 동안 말 없이 서 있었다. 만날 수줍은 표정을 하던 놈이 저렇게 정색을 하고 폼 을 잡으니 괜히 무서워 보인다. 난 조용히 녀석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나요?" "……응?" "전 히로님을 믿고 그 사실을 말씀드린 건데…… 어떻게 제 믿음을 배신하고……." "이, 이봐…… 배신이라니? 난 그럴 의도는 별로……." "흑~ 몰라요. 이젠 다 틀렸어요. 이젠 모든 것이 끝났어요!" 인디는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드래곤이 툭하면 질질 짜고 그러니? "그, 그만 울렴." "흑흑~ 이제 어떡해요? 이젠 다 죽을 거예요." "아니, 그렇게 꼭 단정 지을 필요는……." "흑흑~ 다 죽을 거라구요!" "……." 인디의 말이 맞았다. 나 때문에 모두가 죽겠지. 크로니스를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다 죽을 수도 있는 거지. 아하하~ 드디어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군. 휴거가 시작 됐어. 몇 명이나 천국가 려나? 아하하하!" "……." 농담을 했는데도 반응이 없다. 설마 나의 조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인디는 눈물을 닦으며 외쳤다. "히로님께서 사랑하시는 라이님과 루시아님도 전부 죽을 거라구요!" "……뭐?" 난 깜짝 놀라서 인디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게 뭔 소리야, 임마? 우리 라이랑 루시아가 죽긴 왜 죽어?" 인디는 눈물 젖은 눈으로 날 노려보며 말했다. "흑흑, 다 히로님 때문이에요!" "……." 나 때문이라고? 나 때문에 라이랑 루시아가 죽는다고? 순간, 인디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그와 동시에 다리가 풀려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제야 난 알 수 있었다.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인디는 절망적인 표정을 한채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없어요." "……." 방법이 없다니? 없으면 만들어야 할 거 아니야? "흑흑, 일루니아님~." "……." 이런 와중에서도 일루니아 여사님을 찾다니. 대단한 사랑이군. 세상 사람들이 다 죽는다 해도 라이랑 루시아만은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 그 둘은 내가 가장 사랑하 는 사람들이니까. 날 이기적이라 욕해도 좋다. 하지만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 아니겠는가? "안 돼! 어떠한 일이 있어도 라이랑 루시아만은 살려야 돼!" 난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금 인디의 멱살을 움켜 쥐었다. "방법을 찾아봐!" "흑흑, 방법은 없어요. 그게 최선이었단 말이에요." "닥쳐! 방법이 없으면 찾아야 할 거 아니야? 넌 그럼 일루니아 여사님이 이대로 죽건 말건 내버려 둘 거야?" "그, 그럴 순 없어요!" "나도 그럴 순 없어!" "그러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봐!" 절대 크로니스를 막아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반드시 막아 낸다. ------------------------------- 요즘 이모티콘 소설이 유행입니다. 얼마전 저와는 사촌 관계에 있는 여자애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 이모티콘 소설 쓰는데 좀 도와주라~' 순간 식은땀이 흐르더군요. 내 주위에서마저 이모티콘 소설을 쓰겠다고 나서다니. 그것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도 아닌 대학생이나 된 애가...(그런 거 할 시간 있으면 공부나 한 자 더할 것이 지)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요. 아무튼 애교반 협박반으로 일단 도와주겠다는 약속은 했는데... 뭘 어떻게 도와달라 는 건지...???(본인 말로는 그냥 한번 읽어보고 평가만 해달랍니다... 참고로 전 이모티콘 소설 읽을 자신 이 없습니다. 머리 어지러워서) 내 전공은 이모티콘 연애 소설이 아니라 판타지란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크로니스는 얼마나 이그리드를 사랑했기에 미쳐버린 걸까? 드래곤은 9클래스고, 9클래스의 정신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존재가 미쳤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충격 을 받았다는 건데……. 아마도 그 충격은 이그리드의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 드래곤들은 이제 까지 단 한번도 인간을 사랑해본 적이 없을까? 드래곤이 드래곤과 사랑을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그 어떤 존재와 사랑을 하던 간에 그 존재는 반드시 자신 보다 일찍 죽는다. 그렇다면 드래곤들은 이제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많이 목격했을 것이다. 지금 일루니 아 여사님과 인디가 서로 죽고 못살지만 수십년만 지나면 일루니아 여사님은 죽을 것이다. 그럼 인디도 미칠 까? "……." 흥! 지가 미쳐 봤자지. 아무튼 사랑 때문에 미친 인간은 많이 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미친 드래곤은 크로니스 하나뿐이다. 어째서일까? 무엇 때문에 다른 드래곤들은 멀쩡한데 크로니스만 미친 걸까?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가장 확률이 높은 한가지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9클래스라는 것. 뭐?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9클래스인 것과 크로니스가 미친 것이 무슨 관련이 있냐고? 지금부터 그걸 설명 할 생각이다. 인간이 아무리 잘났다고 한들 드래곤의 입장에서 보면 우습기 그지 없다. 인간과 드래곤이 사랑을 한다고 해 도 그것은 정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서로 레벨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거다. 드래곤과 인간은 당연 레벨이 맞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 은 인간끼리의 사랑, 혹은 드래곤끼리의 사랑과 다른 모습의 사랑이 될 수 밖에 없다. 인간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이런 말이 가능한 이유는 둘의 수명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 다. 드래곤 수명을 1만년이라 치고, 인간 수명을 70년이라 치 100배 이상이 차이가 난다. 만약 드래곤이 오 직 한 인간만을 사랑한다면 남은 9930년 동안 혼자서 허벅지나 찌르고 있어야 한다. "……." 헉! 잔인해라. 아무튼 드래곤은 한 존재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랑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 존재을 떠나보낼 준비 를 한다. 그 존재가 뭐든지 간에 자신보다 일찍 죽을테니까. 원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크로니스는 이그리드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 것은 이그리드가 9클래스이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 다. 처음에 이그리드는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9클래스를 마스터함으로써 그는 드래곤들과 같 은 존재가 되었다. 즉, 크로니스와 이그리드의 사랑은 드래곤과 인간의 사랑이 아닌 드래곤과 드래곤의 사랑으로 봐야한다 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그리드가 죽었을 때 크로니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여기까지가 나의 생각이다. 이게 꼭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나저나 인디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떠난 뒤에 왜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거지? 설마 방법을 못 찾은 건가? 난 걱정스런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약 방법이 없다고 하면 어떡하지? 이대로 세계가 멸망하는 것 을 지켜봐야만 하는 건가? "……."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가 없다. 나 같은 놈의 어깨에 세계 평화가 달렸다니. 보통 세계의 운명을 짊어 질 영웅이라면 좀 더 영웅스럽게 생겨야 하는 거 아닌가? 아아~ 영희네 옆집에 사는 철수처럼 생긴 내 외모가 원망스럽다. 내가 사일런스 지니처럼 생겼다면 얼마 나 좋을까? 잘 생기고 싶어지는 것. 그것은 어찌보면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난 그리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편은 아니지만 그 래도 가끔은 사일런스 지니처럼 생겼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기왕이면 잘 생긴게 좋잖아. 내가 루시아에 비해 많이 꿀리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외모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래도 난 루시아를 포기 할 수 없다. 원래 외모보다도 능력과 열정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녀를 향한 나의 불타는 사랑으로 그녀와의 핸디캡을 극복해 내리. 난 굳게 다짐하였다. "……." 그런데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냐? 지금 세계가 멸망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에서 사랑 타령이라 니. 세계가 멸망하면 사랑이고 뭐고 다 끝장나는 건데. 역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인디의 일은 인디한테 맡기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 을 다해야겠다. 현재 나의 전투 기술은 8클래스까지의 마법, 그리고 필살기인 빅장 40단 컴보와 초필살기인 더블 빅장 40 단 컴보. 이런 기술들 만으로도 난 이미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랐다. 그 동안 내가 우습게 보여서 그렇지 사실 전투력 으로만 따진다면 인간들 중에서는 최고라 할 수 있다. 아마 드래곤들 다음이 아닐까, 생각 된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 크로니스를 상대하기는 무리다. 상대는 드래곤이니까. 역시 초필살기를 넘어서는 진초 필살기의 개발이 필요해.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봐 부연 설명을 붙여주자면…… 필살기(必殺技) = 필살(必殺)의 기술 초필살기(超必殺技) = 필살기를 초월(超越)하는 필살기. 간단히 말해 필살기보다 더 강한 필살기. 진초필살기(眞必殺技) = 진짜 초필살기. 간단히 말해 초필살기보다 더 강한 필살기. 대충 이 정도로 분류가 가능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몇 가지가 더 필요한 경우도 있다. 슈퍼 진초필살기(Supaer 眞超必殺技) = 진짜 초필살기를 초월한 필살기. 울트라 슈퍼 진초필살기(Ultra supaer 眞超必殺技) = 진짜 초필살기를 굉장히 초월한 필살기. 울트라 슈퍼 메가톤 파워 진초필살기(Ultra super megaton power 眞超必殺技) = 진짜 초필살기를 굉장 히 초월한 백만톤의 위력을 지닌 필살기. 울트라 하이퍼 메가톤 파워 진초필살기(Ultra hyper megaton power 眞超必殺技) = 진짜 초필살기를 과도하 게 초월한 백만톤의 위력을 지닌 필살기. 이 외도 수백, 수천가지의 분류가 더 있지만 이 정도까지만 해도 이미 한계에 한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 다. 아무튼 나는 지금 초필살기까지 밖에 익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옥훈련이라도 해서 진초필살기 를 개발해야만 한다. 내가 진초필살기를 개발한다고 해서 이게 크로니스에게 통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난 지금 상황에서 최 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일테니. 나의 필살기는 빅장 40단 컴보, 초필살기는 더블 빅장 40단 컴보다. 그렇다면 진초필살기는 어떤 모습이 되 는 걸까? 트리플 빅장? 아니면, 빅장 무한 컴보? 어찌되었든 지금보단 강해질 것이 분명하다. 음음, 한시라도 빨리 수련을 해야겠군. 그래서 더욱 강해져야 지. * * * * * 히로의 군사 기밀 누설로 인해 인디는 다시 드래곤들을 불러 모았다. 칼라이스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에 있으니 상관 없지만 에스카네스와 카이네이드는 상당히 먼거리에 있어 그들과 연락하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인디의 연락을 받자마자 이 곳으로 달려오기로 했다. 모임 장소는 일루니아의 막 사였다. "죄, 죄송해요, 일루니아님. 멋대로 드래곤들을 불러서……." "괜찮아요." 일루니아는 드래곤들에게 -그 중에서 특히 지명의 승상인 제갈량에게- 잘보이기 위해 손수 다과를 준비하 는 정성을 보였다. 그리고 인디는 굉장히 송구스럽다는 눈길로 일루니아를 보았다. 잠시 후, 드래곤들이 입실을 시작했다. 간만에 모인 드래곤들은 귀찮다는 눈길로 인디를 보았다. "왜 부른 거야?" 인디는 그들에게 사정 설명을 하였다. 자신들의 계획을 크로니스가 알게 되었다는 것을. 순간, 칼라이스 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뭐라고? 뭐 그런 웃기는 인간이 다 있어?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그런 계획을 세웠는데…… 은혜도 모르 고 배신을 하다니." 누구를 위해서 그런 계획을 세우긴? 그야 자기들 좋으라고 세운 거지. 이 계획은 처음부터 잘못 되어 있었 다. 한 사람을 희생해서 세계 평화를 도모하자는 계획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그 한 사람이 히로였다 는 것에 있다. 설마 히로가 순순히 죽어줄 거라 예상한 건가? "그럼 이제 어떡하지?" 에스카네스의 물음에 카이네이드는 초록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꾸했다. "뭘 그렇게 복잡해 생각해? 계획은 그대로 진행한다." "하지만 다 알려졌잖아." "알려지든 말든 상관 없어. 크로니스는 자기가 죽을 걸 알면서도 그놈이 있는 곳으라면 어디라도 쫓아올 거 야. 어쩌면 내심 그놈과 같이 죽는 것을 바랄 수도 있지." "……."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크로니스는 현재 제정신이 아닌 상태. 어쩌면 그는 죽을 자리를 찾고 있을 지 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글쎄.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끝장 나는 거겠지. 일단 중요한 건 크로니스를 아공간으로 끌어 들이는 일이야. 설사 아공간 입구를 닫지 못한다 해도 그곳에서 난리 치는 건 별 상관 없지. 적어도 이 세계 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게 가능할까?" "가능하겠지. 어쨌든 반드시 아공간으로 끌어들여야 해." 막사 안에는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일루니아는 차를 준비하는 척하면서 그들의 얘기를 열심히 새겨들었 다. '아공간이라고? 그것 때문에 차원의 열쇠를 찾은 건가? 크로니스를 거기로 끌여들여 싸운다고? 그러면 어떻 게 되는 거지?' 일루니아는 열심히 생각해 보았지만 배경 지식이 부족해 드래곤들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중요 한 사실은 아이언스 공작과 크로니스가 싸운다는 것이다. '정말 드래곤과 싸우려는 건가?' 생각하면 할 수록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이언스 공작이 드래곤과 싸운다니. 비웃음 이 절로 나온다. '지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에 무슨 드래곤과 싸우겠다고 설쳐대고 난리야?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야.' 사람이 인생을 살다보면 괜히 싫은 놈을 한명쯤 만나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 사람이 사람을 싫어할 때에 는 무슨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놈은 정말 괜히 싫다. 이유는 없다. 그저 싫을 뿐이다. 얼굴만 봐 도 재수가 없고,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 이유 없이 무조건적으로 싫은 사람. 일루니아에게 있어서 히로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 그냥 없어져 버렸으 면 좋겠다. 일루니아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번 싸움에서 히로가 이 세계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아니, 이 세계에서 사라 지진 않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눈 앞에선 사라지길 바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언스 공작은 반드시 살아 남아 자신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 명이 질긴 법이니. 일루니아는 히로를 생각하며 이를 빠드득 갈다가 다시금 드래곤들의 대화에 집중하였다. "크로니스를 아공간으로 끌어들인다 하더라도 입구를 닫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잖아. 우리의 계획을 몰랐다 면 모를까 안 이상 입구를 닫게 그냥 두지는 않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하지?" "입구를 닫을 동안만 누군가가 시간을 끌어 주면 돼." "누군가가?" "그래. 방법은 두 가지야. 그 인간으로 하여금 크로니스를 상대하게 하던가, 아니면 우리 중에 한 명이 아공 간 안으로 들어가 크로니스를 상대하는 거지." "……." 우리 중에 한 명이라? 드래곤들은 서로를 돌아 보았다. 당연하게도 아공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드래곤은 아무도 없었다. 드래곤 들이 미쳤다고 아공간 안에서 크로니스와 같이 소멸하고 싶겠는가? "그럼 결정 난 거군. 어떻게 해서든 그 인간으로 하여금 크로니스를 상대하게 해야 돼." "하지만 그게 가능 할까? 그 인간은 8클래스잖아. 8클래스 주제에 어떻게 9클래스를 상대한다는 거지?" "어차피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한 순간이면 충분해. 단 한 순간만이라도 크로니스를 묶어 둘 수 있다면 아 공간의 입구를 닫는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 보다 쉬운 일이지. 이 쪽은 9클래스가 넷이나 되니까 말이야." 에스카네스의 조리 있는 설명에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현상태로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세 계만 온전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이야 어찌되던 무슨 상관이겠는가? 겨우 인간 하나쯤이야……. "이제 정말로 시간이 없어. 기껏해야 일주일에서 열흘이야." "일주일에서 열흘 후면 세계의 운명이 결정난다는 건가?" "크로니스도 이젠 한계에 다달았어." "그 동안 버틴 게 신기할 정도지." "그런데 그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 싸우게 할 생각이지? 그 꼬마 엘프를 잡아다가 협박이라도 해야 하나?" "협박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야. 오히려 반감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차라리 격려를 해주는 편이 좋을 거야." "격려?" "그래. 그놈은 단순하니까 '네 어깨에 이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다' '최선을 다해라'. 이런식으로 격려를 하 면 분명 정의감에 불타올라 열심히 싸울 거야." "맞아. 정말 단순한 인간이지." 드래곤들은 정말 너무나도 완벽하게 히로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일루니아가 자신도 모르 게 고개를 끄덕일 정도 였으니……. '맞아. 내가 이때까지 살면서 그 인간만큼 단순한 인간은 못 봤어.' 할 말은 다 했으니 회의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 없었다. 에스카네스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또 할 말 있어?" "……." "좋아. 그럼 추후에 다시 모이기로 하지. 그럼 이만." 회의가 끝나자 드래곤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세 드래곤이 각자 갈길을 찾아 나서자 막사 안에 남아 있는 드 래곤은 인디뿐이었다. 인디의 표정은 아까부터 어두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인디는 라이가 좋아하는 착한 드래 곤이었다. 비록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히로를 사지로 몰아 놓고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미안해요……." 인디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일루니아는 그런 인디의 모습을 보고 씁쓸한 웃음 을 지었다. 그리고는 인디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두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아이언스 공작이야 죽건 말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러니 그런 인간한테 신경 써서 괜히 마음 아파하 지 마세요." 그 다정하고 따뜻한 말에 인디는 굉장히 감동을 받았다. '맞아. 히로님이야 죽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일루니아님과 행복하게만 살면 되는데.' 아아~ 일루니아의 꼬임에 넘어가 착한 드래곤이었던 인디가 나쁜 드래곤이 되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 데. 그나마 히로 편이었던 드래곤마저 일루니아 때문에 등을 돌리니 이제 히로는 어디에 기대야 하나? "사랑해요, 일루니아님." "저도 사랑해요." 붉게 물드는 인디의 볼. 둘은 이내 침대 위에 쓰러진다. 그 다음 순서에 대해선 굳이 서술할 필요성을 못 느 낀다. 알아서 상상들 하시라. * * * * * 난 팔자 걸음으로 느릿느릿 주위를 거닐었다. 나의 걸음걸이는 고수들의 걸음 그 자체였다. 모르는 사람 이 보면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나의 걸음걸이에서 영웅적인 풍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뭐, 못 느끼면 말구. 해가 중천에 떠있는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은 루시아의 막사였다. 난 아침부터 루시아가 라이를 데리고 오기 를 기다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루시아는 감감 무소식. 이쯤 되자 나는 극심한 불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라이가 누군가? 깜찍, 발랄, 귀여움에 대명사 가 아니던가? 그 귀여움에 흠뻑 젖은 자는 결코 라이에게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냉정과 카리스마 의 대명사인 나마저 라이에게 푹 빠졌겠는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라이가 내 곁에 없었다. 난 한동안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리 라이 가 내 곁에 없다니. 우리 라이가 어딜 갔을까? 돌아와, 라이야! 이 오빠가 비행기 태워 줄게! 난 어젯밤 루시아가 라이를 데려간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가? 재워주겠다고 데 리고 갔으면, 날이 밝는 즉시 데려와야 할 것 아닌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 혹시 루시아가 나의 라이를 납치? 루시아는 납치와는 굉장히 거리가 먼 아름답고 청초한 여인이다. 하지만 라이의 귀여움은 그런 여인마저 납 치범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아아~ 수련해야 하는데. 난 걱정스런 마음을 억누른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루시아의 막사에 도착하자 안에 꺄르르~ 거리는 웃 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분명 나의 라이의 웃음 소리였다. 난 주저 없이 막사 안으로 몸을 날렸다. "라이야~!" "……." 순간, 좌중에 감도는 침묵. 이어지는 루시아의 앙칼진 목소리. "고개 돌려요!" 루시아는 라이의 옷을 갈아 입히던 중이었다.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애가 볼게 뭐가 있다고……." 루시아가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면 모를까 라이가 옷을 갈아 입는데 내가 흥미를 느낄리 없다. 내 취향은 연상이라니까. "이제 됐어요." 루시아의 말에 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라이가 나를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 었다. "……." 헉! 저렇게 귀여울 수가! 칙칙한 회색 로브를 입고 다닐 때도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는데 지금처럼 새하얀 원피스를 입으니 그 귀여 움이 더욱 업그레이드 된 것 같다. "잘 어울리죠?" 루시아가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물어봤다. 어째서 라이가 귀여운데 루시아가 자랑스러운 걸까? 설마 나의 라 이를 자기 꺼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무리 상대가 루시아라 하더라도 라이를 양보할 수는 없다. 라이는 내 꺼니까. 하지만…… 나 같은 놈과 같 이 있는 것 보다 루시아와 같이 있는 모습이 더욱 좋아보이는 것은 왜일까? 질투심이 무럭무럭 솟아 오른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하더니 저 둘이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가까 워 졌을 줄은……. 설마 이러다가 라이를 루시아한테 뺏기는 거 아니야? 난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라이야, 이리와." "……." 하지만 라이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저 루시아의 품에서 헤헤~ 웃을 뿐이었다. 저렇게 행복한 웃음이라 니. 난 충격에 잠시 비틀거렸다. 혹시나 내 말을 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라이야, 이리오렴." "……." 여전히 응답이 없는 라이. 내 쪽으로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는다. 하룻밤 사이에 날 버리고 루시아에게 붙다 니. 아~ 이 배신감. 정 주고 마음까지 줬더니 이제 날 버리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라이야, 대답해 보렴. 정말 이젠 이 오빠 가 싫어진 거야? 얼마나 억울하고 섭섭한지 눈물까지 나오려고 한다. 난 흐르는 눈물을 꾹 참았다. 이런 이유로 울면 쪽 팔리 잖아. 루시아는 승리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대로 나는 무너지고 마는가? "……." 그럴 순 없어! 난 마지막 카드를 꺼내기로 마음 먹었다. 이 카드만이 루시아의 품에 있는 라이를 되찾아오는 유일한 방법 이 될 것이다. "라이야, 오빠가 비행기 태워줄게." 드디어 나왔다. 비행기. 아아~ 내 다시는 비행기는 안 태워준다고 다짐을 했것만 결국은 이렇게 되고야 마 는 구나. 이제까지 나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라이는 비행기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루시아의 품에서 빠져 나와 내 품으로 아장아장 걸어왔다. "정말요?" "물론이지." "와아! 라이는 비행기 너무너무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며 내 품에 포옥~ 안기는 라이. 후후~ 나의 승리군. 루시아는 섭섭하고 아쉬운 표정이었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루시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옷은 어디서 난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입던 옷이에요." "……." 루시아가 입었던 옷? 루시아도 이런 어린 시절이 있었구나. 어렸을 때 루시아는 얼마나 귀여웠을까? 설마 라 이 보다 귀여웠던 건 아니겠지? "오빠, 오빠! 비행기 태워줘요!" "……." 난 일부러 라이의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루시아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엔 어쩐 일인가요?" 저 말을 해석하자면……. '왜 벌써부터 라이를 데려가려고 하시는 거죠?' 음음, 정말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 "사실은 제가 이제부터 수련을 좀 할 생각이거든요." "그래서요?" "수련을 하자면 아무래도 라이를 돌보는데 소홀할 것 같아서……."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라이는 제게 맡기시고 아이언스 공작님은 수련에 투자하세요." "……." 마치 내가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루시아는 어느새 라이를 껴안고 얼굴을 부비부비 비비고 있었다. 그 모습히 심히 심란해 보인다. 아니, 내 머 릿속에 심란한 건가? 솔직히 라이가 루시아와 같이 있으면 질투심이 난다. 하지만 난 루시아의 손에서 라이를 데려올 자신이 없었 다. "……." 어차피 난 죽을 지도 모르는 몸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지. 내가 진정으로 라이를 사랑한다면 이쯤에 서 라이를 놔주는 게 현명한 선택일 지도 모른다. 라이의 미래를 위해서. 흑흑~.(아주 혼자서 영화를 찍어라)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앗! 라이 비행기 태워 주세요!" "……." 너 의외로 끈질긴 면이 있구나. 가끔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착한 아이지. 결국은 또 비행기를 태워주고 말았다. 아아~ 나는 왜 이렇게 라이한테 약한 걸까? 조금 더 모진 모습을 보여 야 하는데. 라이가 날 나쁜 인간이라고 인식을 하게 된다면 내가 죽더라도 라이의 슬픔이 좀 덜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 어찌 라이에게 모진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 라이 생각은 그만하고 수련이나 하자. 널찍한 공터가 눈 앞에 펼쳐졌다. 난 걸음을 멈추고 온몸의 기를 모았다. 어디 나의 능력을 한번 펼쳐 볼까? 난 힘차게 두 손을 내지르며 외쳤다. "빅장 40단 컴보!" 휙휙휙휙-!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손. 상대가 설사 드래곤이라 해도 이런 타격을 견뎌내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닐 것이다. "간다, 초필살기! 더블 빅장 40단 컴보!" 슉슉슉슉-! 손이 네 개로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빠른 속력. 아이언스 공작의 초필살기로 쓰기에 부족함 이 없는 기술이다. 필살기와 초필살기를 유감 없이 시전한 나는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역시 필살의 기술이다보 니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다. 이거 빗맞으면 내가 먼저 죽겠군. 난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났다. 체력은 국력이라는데 이렇게 체력이 부족해서야……. 역시 드래곤과 싸우 는 것은 무리란 말인가? "휴우~." 역시 부족해. 지금 내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필살기와 초필살기만으로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 야. 적어도 진초필살기는 돼야지. 그리고 필살기는 말 그대로 필살의 기술. 결정적인 순간에 써야 하는 거다. 다른 기술이 필요해. 예를 들면……. "그래. 맞아. 보법(步法)!" 보법이란 걷는 방법을 말한다. 다들 알다시피 무공의 고수들은 그냥 걷지 않는다. 그들만의 특이한 걸음걸이 가 있다. 그리고 보법은 모든 무공의 기초가 된다. "……." 그런데 왜 나한텐 보법이 없었을까? 나 주인공 맞아? 난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이제까지 내가 주인공이라 믿어왔던 신념이 서서히 깨지고 있었다. 혹시 난 주인공을 가장한 조연이 아닐까? 설마 위기의 순간에 사일런스 지니가 짠~ 하고 등장해서 크로니스 를 무찌르면 어떡하지? 그럼 난 뭐가 되는 거야?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기술들을 개발해서 내가 주인공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줘야겠군. 난 그 자리에 누워 고민을 시작했다. 원래 나 정도 고수가 되면 단순한 육체 훈련 보다는 이런 명상이 필요 한 법이다. "……." 믿거나 말거나. 웬만하면 믿어라.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보법이라는 특이한 기술이 한 순간에 생각날 리 없다. 왜 무협지를 보더라도 주 인공이 무공 비급에서 무공을 얻지 지 혼자 지지고 볶고 해서 만들어 내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 아아~ 하늘에서 무공 비급 하나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럼 내가 절세고수로 거듭날 수 있을 텐데. "이기어검술이랑 허공답보만 익히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아니야. 드래곤과 싸우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야. 그런데 이렇게 명상만 해 서 어느 세월에 무공을 만들어 내지? 기왕이면 스승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야! 원래 나 같은 천재는 스승이 없이 혼자 크는 법이야! 난 반드시 해낸다. 라이와 루시아를 위해서!"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포기를 하면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는한 희망 은 남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근성이다. 악과 깡으로 버 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 지향해야할 길이다. 난 다시 명상에 빠져 들었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명상의 특징은 길게 하다보면 졸립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어젯밤 잠을 설쳤지. 난 밀려오는 잠을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라이레얼의 팔에 코알라처럼 매달려 다니는 흰색 머리카락의 소녀 카르. 그 소녀의 정체가 화이트 드래곤 칼 라이스라는 것은 알 사람은 다 알고, 모를 사람은 다 모른다. 카르는 지금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발걸음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랄라라~." 얼마나 기분이 좋은기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다. 인디는 날아갈 것 같은(혹은 방정맞은) 걸음으로 라이레 얼의 막사로 뛰어갔다. "언니~!" 막사 안에 서 있는 라이레얼을 발견한 카르는 주저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 라이레얼은 진드기처럼 달라붙 는 카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상대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떠올리곤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쩐 일이야?" "어찐 일이냐니요? 제가 언니 찾아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 이걸 대체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드래곤이니 억지로 떼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데리고 다니자니 너 무 귀찮고. "언니, 우리 나가서 산책 해요." 뭔 산책? 전쟁터에서 시체 볼 일이라도 있냐? 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라이레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레얼이 허락하자 카르는 기뻐서 어쩔 줄 을 몰랐다. '역시 언니도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좋아하지 않았다면 같이 산책을 할 리가 없지.' 좋았던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카르는 정말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인간이야 얼마 후면 죽을테고…… 그러면 언니가 나한테 오는 건 시간 문제야!' "빨리 산책 가요, 언니." 카르는 재빨리 라이레얼의 팔에 매달렸다. "그래." 둘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막사를 빠져나왔다. 산책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무작정 걷는 것 외에 다른 의미 는 없었다. 무엇보다 짜증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다. 팔짱을 끼고 걷는 두 미녀. 여자 구경하기 힘든 전쟁터에서 이런 미녀들이 나란히 걷는데 정상적인 남자라면 시선이 안 돌아갈리 없 다. 시선이 안 돌아가는 놈들도 몇 명 있긴 한데 그런 놈들은 둘 중 하나다. 동성애자, 혹은 장님. 예쁜 여자가 지나갈 때 눈이 돌아가는 것은 남자의 본능이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다. 레몬을 먹으면 신 맛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입안에 침이 고인다. 예쁜 여자가 지나갈 때 눈이 돌아가는 것 도 이와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래도 시선을 받는 여자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가끔 그 시선을 즐기는 여인들도 있긴 하지 만 라이레얼은 하도 그런 시선을 많이 접했는지라 귀찮을 따름이었다. 그 시선이 마음에 안 들기는 카르도 마 찬가지였다. '지저분한 놈들이 감히 내 언니를 넘봐? 용서할 수 없어!' 카르는 주위의 남자들을 전부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눈이라도 뽑아 버리고 싶 었다. "……."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다고 생각 된다. 눈을 뽑아 버리겠 다니? 세상에! 드래곤이면 이래도 되는 거야? 그리고 저 많은 눈알을 언제 다 뽑으려고? 하지만 카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드래곤들 중에서는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 다음으로 성질이 더럽지 만 라이레얼 앞에서만은 착하고 귀여운 아이로 남고 싶었다. '아! 저 추잡한 시선들. 정말 라이레얼 언니만 아니었어도 저것들을 그냥 안 뒀을 텐데.' 병사들은 지금 자신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두 미녀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여자가 용병계의 꽃이라 불리는 라이레얼이군." "진짜 끝내주게 생겼는데." "듣기로는 잠자리에서도 끝내준데." "정말?" "킥킥, 역시 생긴 값하는 구만." "크크크,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옆에 있는 계집애는 뭐야?" "글쎄. 얼마 전부터 라이레얼 좋다고 따라다는 것 같던데." "저 년 레즈비언이야." "큭큭, 둘이 밤에 끝내주겠는 걸." "오늘 밤 막사에 한번 쳐들어가 볼까? 혹시 알아? 나도 껴줄지?" "크흐흐흐." 역시 미녀들을 보면 빠지지 않는 게 몸매 품평과 음담 패설이다. 자기들 딴에는 귓속말이라고 생각하고 하 고 있는데 드래곤인 카르와 하프엘프인 라이레얼 귀에는 다 들렸다. 라이레얼은 안 그래도 별로였던 기분 이 땅 끝까지 추락하는 것을 느꼈고, 카르는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더러운 남자들이 감히 언니를 욕하다니!' 일반적으로 자신이 욕을 먹는 것보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욕 먹는 것이 더욱 열 받 기 마련이다. 그래서 카르는 지금 새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다 죽여버리겠어!" 드디어 성격 나왔다. 아아~ 감히 성질 더럽기로 둘째 가라면 정확히 둘째 가는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를 건들다니. 저들은 이제 관 짜는 것만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무덤을 팠으니 누구를 탓하리오. 그 저 자신의 무지를 원망해야지. "허허, 고 계집애 성질 내니까 더 귀여워 보이네." "그러게 말이야."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하는 병사 몇몇은 시시덕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그들이 첫타가 됨은 두 말할 필요조 차 없었다. 라이레얼은 저런 말 듣는 것도 익숙하고 해서 자신이 적당히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카르가 분노하는 모습 을 보고 일단은 지켜 보기로 했다. 그 동안 드래곤이라는 것만 알았지 실제로 그 능력을 제대로 본 일이 없으 니 이번 기회에 한번 잘 봐두려는 것이다. "언니를 모욕한 놈들은 다 죽어야 돼! 아이스 스피어!" * * * * * * 내 앞에는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20대 중반 정도의 미청년. 키는 훤칠하게 크고 얼굴은 사일런스 지니 와 맞짱 뜰 정도로 잘 생겼다. 그의 모습을 본 순간 난 신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그가 웃으며 말했다. "별로 반갑지 않은가 보군." "……." 반가울 리가 없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미청년의 정체는 아이언스 이그리드였다. 크로니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이자 나 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범죄자. 오래 전에 죽은 그가 지금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꿈이군." 내가 중얼거리자 이그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까 수련한답시기 난리치다가 잠들었던 게 기억난다. 그나저나 이 늙은이는 죽었으면 무덤에서 편히 쉴 것 이지 왜 심심하면 내 꿈에 나타나는 걸까? "나도 무덤에서 편히 쉬고 싶다." "……." 내 생각을 읽은 건가? 뭐 꿈속이니 무슨 짓을 못 하겠어. "그럼 쉬시지 그러셨어요." "날 부른 게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 댁을 누가 불렀는데? 난 댁을 부른 적이 없는데. "니가 불렀다." "예? 전 부른적이 없는 뎁쇼." "너야 그렇게 말을 하겠지. 하지만 니가 날 부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곳에 있을 수가 없지." "……." 듣고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이건 내 꿈이니까. 내 꿈에 이그리드가 나왔다는 것은 결국 내가 꿈속에 서 이그리드의 형상을 만들어냈다는 게 되니까…… 즉, 이그리드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은 내가 불렀다는 것 이 되는 군. 그런데 정말 그럴까?? 혹시 이 인간이 내 의식 속에 갖혀 있기 심심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뭐 그렇 다 해도 그 의식이 어차피 내 의식이니 그 의식 속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은 곧 내 의식 속에서 빠져나왔다 는 것이 되니, 결국은 내가 빼냈단 얘기군. 뭔 말이냐? "나한테 뭐 질문할 건 없나?" "……." 질문? 무슨 질문? 이게 무슨 퀴즈 프로그램도 아닌데 꼭 질문이 필요한가? 그래도 저렇게 말하는 걸보면 질 문을 해주길 굉장히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질문을 해주는 게 예의일까? 음음, 무슨 질문을 해야 좋아할까? "빵이 다섯 개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빵을 세 개 먹었데요. 그러면 몇 개가 남았을 까요?" "세 개."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먹는 게 남는 거니까." "……." 강적이다. 일반인들은 거의 다 두 개라고 대답하는데. 답을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누군가가 사전에 유출 시 켰나? "한 남자가 아이리스로 가던 중 한 부인을 마주쳤는데 그 부인의 주머니가 일곱개이고, 그 주머니 안에는 고 양이가 일곱 마리씩 들어 있고, 그 고양이에게는 새끼가 일곱 마리씩 있어요. 그럼 아이리스로 가는 인간 과 고양이를 합하면 모두 몇일까요?" "하나." "……." 진짜 강적이다. 후후~ 제법인 걸. 어디 다른 문제도 한번 내볼까? "어떤 남자가 미팅을 나갔는데 폭탄을 만났어요. 그래서 폭탄을 데리고 삼겹살집에 가서 삼겹살을 꿔 먹었 죠. 그런데 남자는 이상하게 불판 위에 삼겹살은 안 올리고 마늘만 계속 올리는 거예요. 그러자 이상하게 여 긴 이 여자가 물었지요. '왜 아까부터 자꾸 마늘만 올리는 거예요?' 남자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후후~ 아무리 똑똑하다한들 이건 못 맞출 거다. 설마 주관식까지 맞추는 것은 아니겠지? "먹고 인간 돼라고." "……." 헉! 맞췄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그리드는 인상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쓸데 없는 짓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쓸데 없는 짓이라니요?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 이그리드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쯤 되면 좀 위험한 상태다. 즉, 조금만 수틀리면 나를 잡아 먹을 수 도 있다는 거지. 이런 경우 알아서 기는 게 신상에 유리하다. "그럼 이제 그쪽이 문제 내세요. 제가 맞춰볼게요." "……." 분노에 가득 찬 표정. 이쯤 되면 매우 위험하다. 대체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내가 뭘 잘못 했다 고? 혹시 문제가 너무 쉬워서 그런 건가? "넌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예?" 뭘 하고 있다니요? 그야 퀴즈 내고 있었지. "그래서 크로니스를 상대할 수 있겠나?" "……." 뭔가 잊고 있는 것 같더니만 그걸 잊고 있었군. "그, 그야…… 그러기 위해서 잠들기 전까지 새로운 무공 창시를 위해서 명상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 저 한심하다는 표정. 정말 굉장히 불쾌하다. 내가 그렇게 한심한 놈으로 보이나? 나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노 력 했다구! "노력한다는 놈이 자빠져 자고 있냐?" "……." 그렇게 말하니 할 말 없다. 하지만 할 말이 없으면 우기기라도 해야 밀리지 않는 법이다. "자빠져 자는 게 아니라 명상 중이었다니까요." "명상 같은 소리 하네." "진짜에요." "진짜 자뼈져 잤다고?" "진짜 명상했다니까요." "진짜 명상했다는 놈이 진짜 자빠져 잤다는 건가?" "……." 강적이다. 역시 우기기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이 안 돼. "아이씨! 제가 잤던 안 잤던 댁이 무슨 상관이예요?" "상관있지." "무슨 상관?" "네가 크로니스를 막아야 하니까." "……." 크로니스를 막아야 한다고? 그럼 그것 때문에 내 꿈 속에 나타난 건가? "크로니스를 막아야 한다는 건 저도 잘 알아요." "문제는 어떻게 막느냐지." "……." 그렇다. 그게 문제다. 막긴 막아야겠는데 어떻게 막아야 하나? 내가 막고 싶다고 해서 막아질 것 같으면 지 금 내가 이 지랄을 할 필요는 없겠지. 하아~ 미치겠군. "그래서 도와주러 온 거예요?" "글쎄." "아니,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 뭐 때문에 멋대로 남의 꿈에 등장을 해요?" "다시 말하지만 내가 등장한 게 아니라, 네가 등장 시킨 거다." "……." 그게 그거지. "그럼 제가 댁을 왜 등장시켰을까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글쎄요. 어쩌라는 걸까요? 한번 알아 맞춰 보세요." "……."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이그리드의 얼굴. 오오~ 저 잘생긴 얼굴이 저렇게 살벌하게 변하다니. 놀라운 변신일 세! 화난 것 같아 조금 무섭긴 한데 자기가 화내봐야 어쩌겠냐? 설마 날 칠 것도 아니고. 어라? 주먹이 부들부 들 떨리고 있네. 마치 날 때리려는 것을 참는 듯 보인다. 크크, 그래봐야 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난 이그리드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치고 싶으면 한대 치세요." 당연하게도 이그리드는 날 치지 못했다. 푸후후~ 하긴 어떻게 감히 내 옥체에 손을 대겠어? 어차피 여기 는 내 꿈 속이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쳐보라고 한들 이그리드는 날 치지 못할 것이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얼굴을 쭉 내밀며 소리쳤다. "쳐 봐! 쳐 봐! 못 치지? 푸헤헤~." 퍼억-! 뭐야? 내가 지금 맞은 거야? 난 얼굴 전체에 느껴지는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느린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오 는 이그리드. 이그리드는 주먹을 우두득- 거리고 있었다. "왜, 왜 이러세요?" "쳐 보라며." "……." "넌 좀 맞아야겠다." 뭔가 잘못 됐다는 느낌이 팍팍 든다. 치란다고 정말 칠 줄이야. 우두득- 우드득-! 무섭다. 근원적인 공포가 나의 몸을 휘감는다. 왠지 저 주먹에 또 맞았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만 같다.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무릎을 꿇고 손을 비볐다.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개기지 않을게요." "이미 늦었다!" "흑흑,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 제발요~." "변명은 필요 없다." "어흐흐흑, 집에 딸아이가 목을 길게 빼고 절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딸아이는 당연 라이다. 라이가 과연 목을 길게 빼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남자답게 맞아라." 그 말을 끝으로 이그리드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도로 주먹을 휘둘렀다. 나 의 면상에 정확히 꽂히는 주먹. 난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으아아아!" 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만져보니 다행히 멀쩡하다. 하아~ 다행이다. 내 핸섬한 얼굴에 흉터라도 생 겼으면 나의 여성팬들이 얼마나 실망했을까? 내 얼굴은 나 하나만의 것이 아니니 잘 간수해야지. 그나저나 꿈 치고는 너무 생생한 꿈이다. 난 혹시나 이그리드가 정말 나타났나싶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 지만 이곳엔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탁 트인 공간이니 어딘가에 숨어 있지도 않을 것이다. 설마 땅을 파 서 그 속에 숨어있다면 모를까. "그런데 이게 뭔 꿈이다냐?" 꿈속에서 이그리드가 나타났다. 난 이그리드를 처음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아아~ 이 인간이 크로니스와의 싸움에서 이길 필살의 기술을 알려주기 위해 내 꿈속에 나타났구나. 그런데 필살의 기술은 개뿔이. 질문을 하나 하라고 하더니 세 개나 했더만 다 맞추고 그 다음에 날 쥐어 팼 다. 대체 이 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두 말할 필요 없이 개꿈이다. 우리는 이런 걸 보고 개꿈이라 부른다. 으음, 그래도 이 꿈이 무언가를 의미하 고 있지는 않을까? 이그리드가 괜히 심심해서 내 꿈에 나타났을 리는 없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 메시지를 주기 위해 나타났 을 텐데. 그렇다면 그 메시지가 무슨 메시지일까? 이그리드가 하고픈 말은 무엇이었을까? "……!" 설마? 맞아. 그거야. 그거였어. 그게 아니라면 이그리드가 굳이 내 앞에 나타날 필요는 없었겠지. "크크크, 그랬군. 역시 그랬어. 푸하하하~ 이제 난 부자야!" 이그리드가 전해주려 했던 메시지. 그건 매우 간단했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간단하게 생각하는 게 더 욱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법이지. 아무튼 이그리드가 나에게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바로…… "랄라라~ 복권 사러 가야지~." 그렇다. 바로 복권이었다. 꿈속에서 지인을 만났으니 오늘 운수가 대길(大吉)하리라. 이런 때 복권을 안 사 면 언제 복권을 사겠는가 그나저나 무슨 복권을 사는 게 좋을까? 주택 복권? 또또 복권? 아니면…… 로또 복 권? 그래. 한번 사보자. 혹시 아나? 정말로 당철 될지? 그런데 복권 판매처가 어디지? 이렇게 쓸데 없는 생각을하며 웃음을 짓는데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 발 밑에 피어있는 개나 리였다. 이 꽃이 왜 이 곳에 피어있는 걸까? 으음, 전쟁터에서 피어난 한떨기 꽃이라? 왠지 감동적이다. 그러고보 니 어느새 봄이 되었군. 이 화창한 본날 남들 다 애인과 놀러다니는데 난 홀로 목숨을 내건 싸움을 해야 하다 니. 아아~ 정말 불공평 해도 너무 불공평하다. 아무리 내가 선택 받은 인간이라지만 나에게 이런 시련이 주 어지다니. 혹시 나는 전 차원계를 통틀어 가장 재수 없는 놈이 아닐까? 그나저나 무엇 때문인지 난 개나리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 온다. 개나리는 바람에 맞서지 않고 힘 없이 흔들린다. 흔들흔들. 지가 흔들바위도 아닌데 계속 해서 흔들린다. 개나리가 흔들리는 모습이 내 눈에 각인 된다. 저 움직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어째 서 난 저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까?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다. 태초에 우주 만물은 하나였다. 그러 던 중 커다란 폭발로 인해 우주가 생겨 났고, 그 우주에서는 단백질 덩어리들이 모여 생명체라는 것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우주의 시작이다. 난 지금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중이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득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모든 것은 하나다. 위와 아래를 구분하지 말고, 너와 나를 구분하지 말지어다. 물은 아래로 흐른 다. 물은 모든 것을 정화시켜 주고 낮은 곳에 있기를 좋아한다. 물이야 말로 모든 만물의 근원이라 할 수 있 다. 아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현실의 물질적 존재는 모두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 로서 불변하는 고유의 존재성이 없다. 본성인 공(空)이 바로 색(色), 즉 만물(萬物)이니라. 만물의 본성인 공 이 연속적인 인연에 의하여 임시로 다양한 만물로서 존재하니 이것이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사람들이 보면 나를 미쳤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난 정말로 지금 도(道)를 깨우치는 중이었다. 어느날 문득 잠에서 깨어났더니 개나리가 눈 앞에 보이더라. 난 그것을 보는 순간 그 안에 담긴 우주의 진리 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걸까? 설마 드디어 나도 절대 고수의 반열에 들려는 건가? 일반적 인 고수들은 이런 현상을 거치고 나면 절대 고수가 되던데. 난 그렇게 계속해서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쩌면 눈 깜짝할 시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억겁의 시간일 수도 있다. 난 천천히 눈을 떴다. 내 앞에는 여전 히 흔들리고 있는 개나리가 보였다. "……." 으음, 내가 대체 뭘한 거지?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련한답시고 설쳐댔지만 결국 수련은 제대로 하지도 못 했군. "하아~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군." 한숨을 길게 내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살려줘~!" 무슨 일이지? 설마 적이 습격한 건가? 난 주저 없이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조금만 기다려라. 정의의 용사 아이 언스 히로가 달려간다. 한참을 달리자 병사들이 모여있는 막사가 보였다. 비명 소리는 계속 울려퍼지고 있었 다. 이제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져 사람 얼굴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난 낯익은 여인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앗! 라이레얼이다!" "앗! 히로다!" 난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달렸다. 상대가 라이레얼이라면 무조건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하지 만 나보단 라이레얼이 빨랐다. 어느새 달려온 라이레얼은 내 뒷덜미를 움켜 잡았다. "어디가, 히로?" "아, 저기…… 화장실이 좀 급해서." "괜찮아. 그냥 여기서 싸." "……." 역시 내가 라이레얼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싸라니. 사람들 시선은 어쩌고? "으아악!" 들려온 비명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다급히 라이레얼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에요?" "아! 맞아. 지금 큰 일 났어." "예? 무슨 일인데요?" "카르가 폭주했어." "……예?" 카르라면 라이레얼의 팔에 코알라처럼 매달려 다니던 귀여운 흰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아니던가? 상당히 마 음에 드는 소녀지. 딱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흠흠, 내 스타일은 루시아가 딱이지. "그런데 폭주라니요?" "으응. 그게 말이야…… 아무튼 지금 열 받아서 사람 죽이고 난리야." "예? 사람을 죽여요?" "응. 말리려고 해봤는데 애가 말을 안 들어." "말을 안 들어요?" "응." 귀엽게만 보이는 어린 소녀 카르의 정체는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다. 이런 드래곤이 폭주를 했다면 그건 보 통 큰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쩜 좋아, 히로? 히로가 어떻게 좀 해봐." "아니, 제가 뭘…… 어떻게……." 호기롭게 달려오긴 했지만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듣는 순간 어깨가 축 늘어지고 다리가 슬금슬금 뒤 로 움직인다. 오래 살고파~. 난 라이레얼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바닥에는 몇몇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그 시체 는 냉기를 폴폴 풍길 정도로 차가웠으며 가슴 정중앙에는 길다란 얼음창이 박혀 있고 상처 부위는 꽁꽁 얼 어 있었다. 진짜 무서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라이레얼은 시체를 보던지 나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아잉, 무서워. 히로가 나 지켜줄거지?" "……라이레얼이 절 지켜줘야 할 것 같은데요." 그때 마침 카르가 내 앞에 나타났다. 갑자기 주위 온도가 내려간 느낌이다.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으 윽, 이건 뼛속까지 시리다. 카르는 평소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흰색 머리카락은 뻗친 듯이 위로 올라가 있 고, 은색 눈동자는 무시무시한 안광을 폭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핏기 없는 새하얀 얼 굴이다. 마치 공포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섬뜩한 얼굴.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카르는 나와 라이레얼을 보더니 눈을 번쩍 떴다. "너……." "응?" "당장 내 언니에게서 떨어지지 못 해!" "……?" "아잉, 무서워." 라이레얼은 나를 더욱더 세게 끌어 안았다. 그래서 우리 둘은 말 그래도 한치의 틈도 없이 붙어 있게 되었 다. 그러자 카르의 표정이 더욱 살벌해졌다. 무섭게 일그러진 창백한 얼굴. 귀엽게 생긴 소녀가 저런 표정 을 지으니 뭔가 언벨러스하면서도 더욱 무서워 보인다. "감히 나의 언니를…… 죽여버리겠어!" "자, 잠깐만요! 이건 오해에요!" "아앙, 히로~." 이러다 나 진짜 죽는 거 아닌가? 난 살아남기 위해 황급히 라이레얼을 밀쳤다. 허리뼈가 으스러져라 꼭 껴안고 있던 라이레얼이었지만 내 가 온힘을 다해 밀치자 그래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다행이다. 이제 라이레얼과 떨어졌으니 설마 날 죽이지는 않겠지? "너……." "응?" "감히 언니를 밀치다니!" "……응?" 카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든다. "죽어!" 카르는 엄청난 속도로 나에게 돌진해왔다. 원피스를 입은 미소녀가 나에게 달려든다니. 좀 더 낭만적인 상황 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나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난 지금 죽느 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카르는 어느새 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피해야 한다. 피해야 한다. 피해야 한다. 이 생각만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순간이었다. 카르가 나를 비껴 지나갔다. 아니, 내 몸이 옆으로 움 직였다.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 내가 서 있던 곳의 공기는 얼어 붙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카르. "어, 어떻게……?" 뭐야? 내가 지금 피한 건가? 카르는 다시 나를 쏘아 보았다. "흥! 운이 좋았군. 하지만 이번에는 안 될걸. 오늘에야 말로 널 죽이고 언니를 차지하겠어." "……." 저건 뭔 소리다냐? 즉, 나는 자기와 라이레얼 사이에 낀 방해물에 불과하니 죽여 없애겠다는 건가? "죽어!" 헉! 아직 앞날이 창창한 나에게 죽으라니? 어찌 그런 말을. 카르는 나에게 달려 들었고 난 이번에도 카르의 공격을 피해냈다. 어떻게 피했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 았다. 다만 카르가 움직인 순간 내 몸이 반응 했을 뿐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드래곤의 공격을 두 번씩이나 피하다니. "이 자식이……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 공격을 피해?" "……." 그럼 그걸 피하지. 설마 내가 그대로 맞아 죽기를 바라고 있었던 거냐? "이번엔 진짜 죽여버리겠어. 아이스 스피어!" 아이스 스피어라면 얼음 창이군. 화이트 드래곤이니 빙(氷)계열의 마법을 주로 사용한다는 건가? 카르의 앞에는 족히 수십 개는 되는 얼음 창이 생겨났다. 저 중 하나라도 맞으면 죽는 건가? "죽어!" 카르가 소리쳤고 그 순간 수십 개의 얼음 창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난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휙휙휙-! 난 현란한 스텝으로 날아온 얼음 창을 피했다. 하나 피하고, 두개 피하고, 세 개 피하고…… 아무튼 전 부 다 피했다. "……." "……."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던진 사람도 피한 사람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다. 오오! 신이시여! 제가 정말 저것들 을 다 피했단 말입니까? "어쭈! 다 피했다 이거지? 좋아. 어디 이것까지 피하나 보자. 다이아몬드 더스트!" 주위의 공기가 얼어 붙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 마저 힘들어졌다. "호호호! 경고하는데 숨 쉬지 않는 게 좋을 걸. 얼음 알갱이가 식도와 폐속을 갈갈이 찢어 놓을 테니까." "……." 이런 썩을! 난 일단 죽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에 카르의 경고대로 숨을 멈췄다. 하지만 이제 어쩌란 말인가? 숨 을 쉬기 위해 입을 열면 죽는다. 계속 숨을 참고 있어도 죽는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멈춰!" 순간, 내 앞을 누군가가 가로 막았다. 찰랑이는 레몬빛 머리카락. 라이레얼이었다. 카르는 라이레얼을 보더 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언니." "당장 그만 둬." "하, 하지만……." 그러고보니 라이레얼은 얼음 알갱이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나만 공격한다는 얘 기? 무슨 히로 제거용 마법도 아니고……. "당장 그만 두라고 했지!" "아, 알았어요, 언니. 흑~." 카르는 눈물을 흘리며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나를 향해 휘몰아치던 얼음 입자들이 활동을 멈추었다. 그제 야 난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라이레얼은 화난 표정을 지으며 카르에게 다가갔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어, 언니……." "나랑 히로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걸 알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걸까?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흑~ 대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뭘 의미하 는 거야? "흑흑, 언니…… 전 다만 언니를 위해서……." "됐어. 당장 히로한테 사과 해." "예?" "당장 사과 해." "하, 하지만……." "사과 안 하면 난 니 얼굴 다시는 안 볼 거야." 라이레얼이 그렇게 쐐기를 박자 카르는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흑~." 아아~ 미소녀가 우는 모습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안아서 달래주고 싶어. 하지만 라이레얼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다. 카르는 훌쩍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말을 건넸다. "훌쩍~ 미안해." "아, 아니…… 괜찮아." 아까 그녀가 날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잊은지 오래였다. 미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데 그깟 것쯤은 잊 어줘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내가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카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데 그 순간 카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 다. 얼음 같이 차가운 눈동자. 그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진짜 죽여버리겠어!' "……." 왜지?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 거지? 내가 뭘 잘못 했기에 미소녀한테 미움을 받아야 돼? 내가 라이레얼과 그 렇고 그런 관계여서?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해서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게 아니잖아. "잘했어." 어느새 곁에 다가온 라이레얼이 카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러자 카르는 눈물을 흩뿌리며 라이레얼의 품 에 안겼다. "흑흑, 언니." 나한테 사과한 게 굉장히 자존심 상했나 보다. 하긴 드래곤이 인간한테 고개를 숙인 셈이니. 그래도 순순 히 사과한 것을 보면 정말로 라이레얼을 사랑하는가 보다. 에휴~ 그 놈의 사랑이 뭔지. 그나저나 라이레얼 덕에 살았군. 라이레얼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뻔 했어. "히로는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다음부터는 이러면 안 돼. 알았지?" "……예, 언니." 대답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다음에 만났을 땐 정말 날 죽일 것 같다. "전 언니가 원하는 거는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저 애 아무래도 라이레얼한테 심하게 빠진 것 같다. 인디가 일루니아 여사님께 빠진 것처럼. 정말 종족을 초 월하고 성별까지 초월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부럽다. 쪽~! 라이레얼이 카르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자 카르는 울음을 멈추고 헤헤 웃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역시 미 녀 둘이 있으니 그림이 사는 구나.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 난 진심으로 그렇게 기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응? 어디가, 히로?" "아, 저기 좀 바쁜 일이 있어서요." "으음, 그럼 어쩔 수 없지." 라이레얼은 아쉬운 눈으로, 카르는 빨리 가라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난 그들에게 인사를 한 후 그 자리를 벗 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난 걷는 내내 아까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카르의 공격을 어떻게 피한 거지? 평소 같았으면 절 대 피할 수 없었을 텐데. 카르가 공격을 한 순간 무의식 중에 몸을 움직였다. 마치 물 흐르는 것 같은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난 그 순 간을 자세히 떠올렸다. "혹시……." 내가 보법을 익힌 건가? 난 빠르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몸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 같다. 난 가상의 적이 있다고 생각하 고 공격을 피하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움직임이 빠를뿐더러 체력 소모도 훨씬 적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어떻게 보법을 익힌 거지?" 난 명상을 한답시고 잠 들었던 일을 떠올렸다. 꿈 속에서 이그리드를 만났었지. 괜히 깝죽거리다가 이그리드 에게 한 대 맞았고. 그 다음에 잠에서 깨서는 공터에 피어있는 개나리를 보았고……. "맞아! 개나리!" 난 그 개나리를 보며 진리를 얻었다. 그리고 그 진리로 하여 보법을 익힐 수 있었다. 보법이라니! 드디어 나 도 보법을 익혔구나! 내가 해냈어! 내가 해냈다구! "아싸!" 난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이제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난 진리를 깨우쳤고 도를 얻었다. 그리고 보 법을 익혔다. 으음, 역시 나 같은 고수에게는 명상이 중요했던 거야. 나의 수련 방법은 틀리지 않았어. 후후~ 이로 써 난 하나의 무공을 창시해 낸 셈이다. 무공을 창시했으니 이젠 이름을 붙일 차례군. 그런데 이름을 뭐라고 짓지? "박영웅보법? 박가보법? 영웅보법? 히로보법?" 뭔가 부족해 보인다. 그런 이름들로 이 보법에 담긴 무한한 진리와 삼라만상의 오묘함을 표현해 내기는 부족 하다. 아! 나의 이 엄청난 무공에 걸맞는 이름은 정녕 없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탄식을 하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보법은 공터에 피 어 있는 개나리에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보법의 이름은 당연……. "개나리 스텝!" 오오! 이 얼마나 영웅의 기개가 넘쳐흐르는 이름인가? 개나리 스텝이라니. 그 다섯 글자에 모든 진리와 삼라 만상의 오묘함이 깃들어있구나. 이리하여 내가 창시한 보법의 이름은 개나리 스텝으로 결정 되었다. 보법까지 익혔겠다 이제 남은 것은 진초 필살기를 익히는 것 뿐이군. 초필살기 정도로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일테니까 말이야. 아무튼 이로써 나는 크로니스에게 한발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루시아와 라이를 위해서 반드시 막아 보이겠어!" 오오! 이 얼마나 영웅스런 대사인가? 용사병 환자들은 이것을 보고 잘 따라할 지어다. 그나저나 아무리 보법 을 익히고 싶다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익히게 되다니. 참 어이가 없군. 어떻게 해서든 이번 권에서 끝을 내려 는 작가의 속셈이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개나리 스텝을 배울리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자식이 갑자기 예리해 지는 군.) 아무튼 보법을 익혔으니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어 봐야겠다. 실전에서 갈고 닦은 기술만이 실전에서 위력 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실전 상대라면 누가 좋으려나? 또 다시 드래곤과 싸웠다가는 뼈도 안 남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상대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얘긴데…… 인 간 중에서도 꽤 고레벨에 속한 인간이어야 나와 승부를 벌일 수 있다. 적어도 사일런스 지니 정도는 돼야지. 그래. 맞아. 그들과 싸우면 되겠군. 용사병 환자들. 이 놈들은 전부 내 팬클럽 회원이나 다름 없으니까 내 가 부탁하기만 하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도와줄 거야. 난 용사병 환자들이 주둔하고 있는 병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용사병 환자들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기 위해 서는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이라고 생각하는지 열심히 운동 중이었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푸샵하 는 놈, 아예 물구나무 서서 푸샵하는 놈, 팔을 교차 시켜 푸샵하는 놈, 허리에 타이어 비스무레한 걸 매고 달 리는 놈, 통나무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놈, 맨손으로 땅에 말뚝 박는 놈 등등. 마치 차력쇼를 보는 것만 같다. 남자들이 운동하는 것은 별로 볼 게 없었지만 여자들이 운동하는 것은 볼 게 굉장히 많았다. 가벼운 옷차림 으로 공터를 뛰어다니는 여성들. 아아~ 열심히 골라낸 보람이 있는지 전부 미녀들이다. 건강미가 철철 넘치 는 저 미녀들. 옆에 다가가서 음료수를 건네며 그녀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고 싶다. "앗! 아이언스 히로님이다!" 날 발견한 누군가가 소리쳤고 용사병 환자들의 시선은 전부 나를 향했다. 난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 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그 동안 잘들 지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저희들은 지금 아이언스 히로님을 도와 크로니스와 싸우기 위해 최고의 체력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저희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들은 어디서 솟아오르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것들을 믿고 드래곤과 싸워야하나 는 현실이 슬플뿐이다. 뭐, 그래도 미녀들이 300명이나 되니까. 이따가 시간 나는 대로 이 여자들 중 미모 가 출중한 여자 100명을 뽑아서 내 친위대를 구성해야겠다. 흐흐흐, 미녀 친위대라…… 생각만 해도 입에 군 침이 도는 군. 크흐흐흐. 아차! 표정 관리! 난 황급히 표정을 추스르며 용사병 환자들에게 말했다. "이제 결전의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의 고생은 잘 알고 있으나 세계 평화를 위해 조금만 더 참고 노 력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의 말에 그들은 대단히 감명 받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세계 평화'라는 대목에서는 눈물까지 흘리는 놈 도 있었다. 쯧쯧, 누가 용사병 환자 아니랄까봐. 난 이쯤에서 더욱 감동적인 말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서. 나의 위대함을 이들에 게 각인시켜 주기 위해서. "저는 앉으나 서나, 잘 때나 깰 때나, 심지어는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일을 볼 때도 언제나 크로니스에 대 한 생각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인 내가 드래곤인 크로니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의 손에서 이 세계를 지켜 낼까? 저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크로니스를 막기 위해서라 믿고 있습니다. 전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살 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사실 저는 아까까지만 해도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저의 마음속에는 절 망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뒤덥혀 있었고, 희망이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보는 순간 전 마치 어둠속에서 뻗어나오는 한줄기 빛을 보는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야 말로 이 세계의 마지막 남은 희망입니다. 그 희망이야 말로 이 세계 를 뒤덥고 있는 절망이란 어둠을 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 힘을 모아 세계 평화를 위해 싸웁시다!" "와아아아아!!!" 내 연설이 끝나는 순간 용사병 환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 정도면 거의 광팬 (비속어로 빠순이, 빠돌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으음, 역시 인기인은 힘들어. 어떻게 된 게 이 놈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라. 난 두 손을 들어 그들의 환호성을 자제시킨 다음 말을 이었다. "제 능력으로 크로니스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새로운 무공을 창시해 내기 위해 수련 과 명상을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새로운 무공을 창시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 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정성이 하늘에 닿아서 일까요? 어느날 꿈속에서 제 스승이신 아이언스 이그리드님 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아이언스 이그리드님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제 앞에는 개나리 한송이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전 그것을 보고 커다란 깨달음 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보법을 창시하기에 이르렀지요. 전 그 보법을 개나리 스텝이라 명하기로 했습니다!" "오오! 개나리 스텝!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대단한 기술인 것 같군!" "아이언스 히로님께서 창시한 보법인데 어련 하겠는가?" "아이언스 히로님,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또 다시 시작된 만세 삼창. 아아~ 잘난 것도 죄다. 그냥 천세 정도로만 하지 뭘 만세까지야. 아하하~ 그래 도 기분은 좋구만. "전 지금 개나리 스텝의 위력을 시험해 보려 합니다. 그래서 저와 맞짱을 뜰…… 아니, 저의 상대역을 해주 실 다섯분을 모집합니다. 혹시 생각 있으신 분들은 제자리에서 손을 번쩍 들어 주세요." "……." 잠시 침묵. 설마 아무도 없나? 빅장의 위력에 모두 몸을 사리는 건가? 하긴 빅장에다가 개나리 스텝까지 쓰는 나와 누 가 싸우려 하겠냐? 난 실망을 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저요!" "저요!" "저요!" 내신 성적에 포함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용사병 환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올리며 '저요!'를 외쳐댔 다. 이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설마 내가 만만해 보이나?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님과 비무를 할 기회야." "다들 손 내려! 아이언스 히로님의 상대는 나란 말이야!" "아니야! 나야!" 진정해라, 환자들아. 그러다가 싸움 나겠다. 난 두 손을 들며 진정하라는 제스쳐를 취해보였지만 용사병 환자들은 진정이란 단어가 뭔지 모르는 듯 계속 해서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소리쳤다. "제발 저를 선택해 주세요!" "아니에요! 저에요!" "아이씨! 내가 한다니까!" "손 안 내리는 놈들은 전부 이 칼로 베어버리겠어!" "뭬야? 네가 지금 나랑 한판 해보자는 게냐?" "닥쳐라!" "너나 닥쳐!" "실력도 없는 주제에!" "내가 실력이 왜 없어? 실력이 없는 건 너잖아!" "모두 나가 있어!" 이미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서운 놈들. 연애인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만하다. 세상에서 제 일 무서운 게 광신도라고 하더만, 그 말 틀린 거 없다. "모두 그만!!!" 내가 사자후와도 같은 우렁찬 함성을 내뱉자 모두가 동작을 멈추었다. 난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일단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제가 다섯 분을 손수 뽑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모두들 침묵하고 저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용사병 환자들은 일제히 정자세를 하고 나를 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 같았다. '제발 저를 뽑아 주세요.' 아아~ 저렇게 불쌍하고 측은한 표정이라니. 차마 저들 중 다섯 명을 뽑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못 뽑힌 사람 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하지만 반드시 뽑아야 했다. 나 혼자서 저들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난 남자들은 제쳐두고 여자들만 살펴보았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상대가 미인이면 훨씬 좋지 않겠나? 난 한참을 살핀 끝에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미녀 다섯명을 골라냈다. 으음, 좀 속보이는 것 같아 미안하군. "이의 있습니다!" 그냥 적당히 넘어가면 좋으련만 꼭 저렇게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아아~ 마음에 안 들어. "무슨 이의입니까?" "어째서 여자들만 뽑으셨는지 저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희 남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아이씨! 기회는 뭔 기회? 남자로 태어난 자신을 원망해라. 불만이 있는 것은 이 남자 혼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대다수의 남자들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화사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들께 선보이려 하는 기술은 개나리 스텝입니다. 그렇기 에 체력과 내구력이 좋은 남자들보단 스피드와 순발력이 뛰어난 여성들을 뽑은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히로님. 저희는 그런 히로님의 그런 깊은 뜻도 모르고……." "아하하!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전 괜찮으니까 이번 일은 마음에 두실 필요 없으십니다." 넌 찍혔어, 임마! 넌 내 팬클럽에서 무조건 탈퇴야. 집에 돌아갈 준비나 해라. 난 이의를 제기한 녀석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해 둔 다음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경갑옷을 차려 입은 미녀 다 섯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표정은 굉장히 황송해 보였다. 개 중에는 선망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 는 여자들도 있었다. 후후후~ 마음에 드는 걸(girl). "그럼 싸우기에 앞서 먼저 자기 소개를 해보도록 할까요? 전 다들 알다시피 아이언스 히로라고 합니다." 내가 먼저 소개를 하자 오른쪽에 있는 여인부터 차례차례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긴 금발머리가 특징인 늘씬 한 여인의 이름은 제시카. 직업은 격투가. 특기는 체술. 그 다음 녹색 단발머리의 귀엽고 깜찍하게 생긴 여인 의 이름은 줄리. 직업은 도적. 특기는 소매치기와 자물쇠 따기.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이름 은 소피아. 직업은 용병. 특기는 롱보우. 본인 말로는 백발구십중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열개 쏘면 아홉 개 는 제대로 맞는다고 한다. 웨이브 진 옅은 파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이름은 사라. 직업은 기사 보조(종 자라고도 한다). 특기는 빠른 몸놀림과 빠른 칼놀림. 마지막으로 검은색이라 하기에는 연하고 회색이라고 하 기에는 짙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이름은 레베카. 직업은 도적이고 특기는 단검 던지기라고 한다. 이 다섯의 특징은 하나 같이 미녀라는 점이다. 후후~ 역시 내가 여자 보는 눈 하나는 뛰어나단 말이 야. 이 다섯은 무조건 내 팬클럽 수석 회원에 임명이다. 필요하다면 활동비까지 지원해줄 용의가 있다. "자, 그럼 시작 하도록 하지요. 다들 인정사정 봐주시지 말고 덤비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위험할 텐데요." 날 염려해주는 듯한 소피아의 말. 다섯 중 유일하게 나보다 어려보이는 여자다. 난 자신 있는 미소를 지어보 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전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를 상대할 용사입니다. 절대 이런 곳에서 당하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사양 않고 공격하겠습니다." 다섯 미녀들은 일제히 대형을 갖추더니 나를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절도 있어 보이는 것 이 절대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 같지 않았다. 하긴 내가 그렇게 추려 냈는데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 면 쉬운 상대가 아닌 것은 당연하다. 흥! 그렇다고 해도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님께서 일반인들에게 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절대 강자로서 의 자부심이 있으니까 말이야. 가장 먼저 덤벼는 여인은 사라였다. 숏소드를 든 사라는 빠른 몸놀림으로 다가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숏소드 를 휘둘렀다. 아무래도 날 걱정해서 일부러 거리를 둔 것 같았다. 훗! 쓸데 없는 걱정을! 난 그녀의 팔 바깥쪽으로 재빨리 몸을 움직여 그녀의 손을 제압했다. "아야!" 내가 팔을 비틀자 그녀는 고통에 찬 신음성을 내며 숏소드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난 그녀의 손을 놔주며 뒤 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섯 여인들에게 부담 갖지 말고 덤비라는 제스쳐를 취해 보였다. 그러자 여인들은 정 말 부담 갖지 않고 덤벼들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제시카. 체술이 특기라고 했던가? 난 현란하기 그지 없는 개나리 스텝으로 그녀의 공격 을 가볍게 피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뒤쪽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난 그것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피하 면 제시카가 맞을 게 뻔했다. 난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쓰기로 했다. "프로텍트 프롬 노멀 미사일!" 그러자 날아오던 화살과 단검은 전부 나를 비껴갔다. 정말 날 죽일 속셈이었냐? 난 일단 제시카를 먼저 제압하기로 마음 먹었다. "현란함의 극치를 달리는 보법. 개나리 스텝 발동!" 순간, 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스피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제시카의 공격을 모두 피한 다음 그녀 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자니까 손속에 사정을 뒤야겠지? "빅장 2단 콤보! 일, 이!" 퍽- 퍽-! 단지 두 방이었을 뿐이지만 제시카는 뒤로 나가 떨어졌다. 역시 빅장의 위력은 최강이군. 제시카가 쓰러지자 마자 난 곧 바로 소피아와 레베카에게 달려들었다. 미사일 방어 마법을 건 이상 이들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 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니 잘 가라~. 난 개나리 스텝으로 그들의 시선을 교란 시킨 뒤 역시 빅장을 사용 해 그들을 쓰러트렸다. 이제 서 있는 사람 은 줄리와 사라 둘뿐. 하지만 둘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이 없어 보였다. 난 정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하도록 하지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이로써 1승이 추가 되었군. 나를 상대할만한 능력을 지닌 인간은 정녕 없 단 말인가? 난 손수 쓰러진 여인들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이번 기회에 은근슬쩍 손을 잡아보겠다는 속셈이 결코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역시 아이언스 히로님이네요." 여자들은 존경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난 이런 눈빛을 받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마치 내가 대단 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아. "오오! 아까 봤어? 발놀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 "저것이 개나리 스텝인가? 정말 굉장하군." "과연 전설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님이다." "개나리 스텝과 빅장 40단 컴보만 있으면 레드 드래곤 따위는 문제 없어!" 사방에서 터지는 감탄사들. 하하~ 이거 좀 쑥스러운 걸. 난 그냥 가볍게 싸웠을뿐인데 이렇게 날 띄워주다 니. 아하하~ 그래도 기분은 좋다. 아이~ 좋아~. 난 왜 이렇게 잘났을까? 아무튼 이로써 개나리 스텝이 실전에서도 뛰어난 효용성을 자랑한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진 초필살기의 개발뿐인가? 드래곤들 중에서 유일하게 히로에게 호의적인 드래곤은 누구일까? 그야 당연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이다. 라이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착하고 수줍음 잘 타는 드래곤. 사실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라이가 지금처럼 착 하고 귀여운 엘프가 된 것은 인디의 영향 때문이었다. 만약 히로 밑에서 자랐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분명 라 이는 지금쯤 담배를 뻑뻑 피며 욕을 찍찍 내뱉는 불량 엘프가 되었을 것이다. "……." 라이가 불량 엘프라니! 이건 있을 수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라이의 최대 무기는 7클래스 마법 이 아닌 귀엽고 깜찍한 외모와 착한 성격이다. 라이는 이 것으로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던 히로마저 교화 시키 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히로는 라이 없으면 못 사는 신세가 되었으니 라이의 귀엽고 깜직함이 얼마나 큰 이점 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인디는 드래곤 치고는 상당히 착한 드래곤이었다. 그래서 다른 드래곤이 히로를 하나의 도구로 취급 할 때도 인디만은 히로를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다. 그런 착한 마음씨를 지닌 인디이기에 히로에겐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 은 미안한 마음이고 일은 일이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인디가 해야할 일은 동기 부여이다. 히로는 현재 크로니스와 싸울 마음이 별로 없었다. 아마도 기회 만 된다면 당장 싸움을 내팽개치고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세계 평화에 도움 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드래곤들은 히로에게 동기 부여를 해주기로 만장일치로 합의를 봤다. 동기 부여는 의 욕 충전으로 이어지고, 의욕 충전은 곧 효율성 향상으로 이어진다. 말 몇 마디로 효율성이 향상된다면야 못 할 게 뭐있겠나? 밑져야 본전인데. "어떤 말을 해주면 히로님께서 좋아할까요?" 일루니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해 주었다. "그 인간은 단순하니까 조금만 띄워주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거예요." 정확한 지적이었다. 역시 이 시대 최고의 참모……는 아니고 이 시대 최고의 참모의 누나인 일루니아 여사다 웠다. 인디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이용해 먹기 위해서 띄워준다니.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무엇보다도 중요 한 건 세계 평화가 아니겠는가? '맞아. 일루니아님이 사는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너무나도 위선적인 생각. 결국 피보는 건 오직 히로일뿐이었다. 인디는 히로를 찾아 나섰다. 히로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히로는 드래곤을 잡겠다고 몰려든 용사 들 사이에서 한껏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다. "아하하~ 뭐 전설의 용사인 저에게 이 정도야 기본이지요. 아직 저는 제 실력의 반의 반도 안 드러냈습니 다. 진짜 힘은 최후의 결전을 위해 아껴두고 있지요." "오오! 역시 굉장하십니다." "으하하하~ 겨우 이 정도를 가지고 굉장하다고 말씀하시니 쑥스럽기 그지없군요." 정말 지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다. 인디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동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미안할 정도다. "저, 저기 히로님……." "어라? 니가 여기 왠 일이냐?" "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드릴 말씀? 뭔데? 해 봐." 인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친 듯이 지랄 발광을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용사병 환자들. 인디는 가볍게 한숨 을 내쉬고 말했다. "여,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좀……." "뭐야? 비밀 얘기야?" "비밀은 아니지만……." "아아~ 알았어. 조용한 곳으로 가면 되는 거지?" "……예." "그럼 가자." * * * * * 난 인디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창 분위기 좋을 때 나타나 할 말이 있다니. 쓸데 없는 말이기만 해 봐! 당 장 머리를 날려 버리겠어! "대체 할 말이라는 게 뭔데?" "저, 저기 그게요……." 또 시작했다. 인디의 주특기. 일명 수줍음 타며 말더듬기. 난 이렇게 행동하는 거 굉장히 싫어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거 보는 것도 굉장히 싫어한다. 이놈 정말 마음 에 안 든다. 여자가 수줍게 행동하면 봐주기라도 하지 남자가 수줍게 행동해서 어쩌자는 건가? 설마 이따 위 짓거리로 여자들의 환심을 살 속셈인가? 흥! 재수 없어! "할 말 있으면 빨랑 해라. 나 바쁘다." "예. 그,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시 또 더듬더듬. 진짜 너무 열심히 더듬거린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난 인내심을 가지고 인디가 말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인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붉히고 혼자서만 궁 시렁거릴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씨! 말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하, 할게요!" "그럼 빨랑 해! 나 조금 후에 개나리 스텝 연습하러 가야한단 말이야!" "개, 개나리 스텝이요? 그건 뭔가요?" "……." 헉! 아직도 개나리 스텝이 뭔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희대의 영웅 아이언스 히로님이 창시하신 보법에 관 한 소문을 아직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어리석은 지고! 어찌이리 우매하단 말인가? 정보화 시대에선 정보 가 하나의 밑천이거늘 이리 정보가 느려서야……. "개나리 스텝이 아직 뭔지 모른다는 거지?" "예. 개나리는 아는데 개나리 스텝은……." "후후~ 그래. 뭐 모를 수도 있지. 아니, 이제까지는 몰랐겠지. 하지만 오늘부로 개나리스텝이 뭔지 머릿속 에 확실히 새겨두는 게 좋을 거야." "……예." "개나리 스텝은 바로 이 몸이 창시한 보법이시다!" "……." 순간, 인디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저 표정 왠지 마음에 안 든다. 설마 내 말을 못 믿는 건가? "훗! 좋아. 그렇다면 내가 직접 보여주도록 하지. 잘 봐라! 개나리 스텝!" 난 개나리 스텝을 발동 시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땅에 붙어 있는 내 발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아오 른다. 그리고는 이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내 몸도 눈 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현란하게 움직인다. 무협지에서 흔히들 말하는 이형환이와 비교해도 손색 이 없을 것이다. 후후~ 개나리 스텝이 있는 한 그 어떤 고수도 내 앞에서는 맥을 못 추지. 난 이미 최강 고수의 반열에 올랐어! 난 개나리 스텝을 멈추고 인디를 보았다. 언제나 다소곳하게 아래로 내리 깔고 있던 인디의 눈은 더 이상 커 질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개나리 스텝의 위대함에 놀란 것이다. 하긴 놀라는 게 당연하지. 지가 어디 서 이런 훌륭한 보법을 봤겠어? "이, 이게 개나리 스텝인가요?" "그래. 이게 바로 대 크로니스 용으로 개발된 나의 신기술 개나리 스텝이다!" 빠바바밤~! 아! 폼난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보법을 창시해 낼 줄. 하지만 난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해내고야 말았 다.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어있더라……라는 경우는 많이 들어봤지만, 자고 일어났더니 새로운 무공을 얻었 더라……라는 경우는 내가 최초가 아닐까? 인디는 한 걸음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뭔가 이상 한 분위기. 뒤에 꽃잎만 휘날리면 정말 순정 만화의 주인공이 따로 없겠다. "히로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뭐?" 인디는 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더니 내 손을 움켜잡았다. "그런 훌륭한 보법은 히로님이 아니시라면 그 누구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 그런가?" 갑작스런 인디의 칭찬에 난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역시 믿을 사람은 히로님 밖에 없어요. 오직 히로님만이 크로니스를 막을 수 있을 거예요. 현재 이 세계 는 위험에 처해있어요. 어쩌면 이 세계는 사라질 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히로님께서 사랑하시는 라이미안 님과 루시아님도…… 흑…… 그리고 일루니아님도…… 흑흑……." "……." "그들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히로님뿐이세요. 히로님의 손에 그들의 목숨이 달렸어요. 히로님께서 크로 니스를 막지 못한다면 그들은 분명 나쁜 일을 당할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부탁 드릴게요. 부디 크로니스 를 막아 이 세계를 지켜 주세요. 그러면 라이미안님과 루시아님, 일루니아님을 비롯한 이 세계 모든 존재들 이 아이언스 히로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게 될 거예요." "……."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 세계 모든 존재들 이 아이언스 히로님의 위대함을 찬양한다고? 아이언스 히로님의 위대함을 찬양…… 위대함을 찬양…… 찬양 ……. 세상에 이토록 듣기 좋은 말이 있었다니! 무언가 뜨거운 것이 내 가슴속을 헤집고 올라온다. 그것의 정체는 자부심이었다. 나를 찬양하라! 나를 경배하라! 난 위대하다! 세계 평화는 내 손에 달렸다! 드래곤인 인디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말을 하다니. 만약 내가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말은 하 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위대하다는 증거겠지? 난 인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임마! 지구의 평화는 독수리 오형제가, 세계의 평화는 아이언스 히로가 지킨다. 넌 나만 믿으 면 돼." "예. 히로님만 믿을게요." "푸하하하~." 정말 너무 기분 좋다. 의욕이 마구마구 샘 솟는다. 이제부터 더욱 열심히 수련에 매진해야겠다. 최선을 다해 야지~. "그,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래. 잘 가. 가는 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살펴 가~." "예. 감사합니다." 인디는 꾸벅 인사를 하고 멀어졌다. 녀석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난 손을 허리에 올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음하하하하~." 아~ 기분 좋다. 아까 인디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존경의 눈빛. 난 그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아~ 라이에게 만 간간히 존경 받던 내가 언제 이렇게 드래곤한테까지 존경 받게 되었나? 만약 내가 크로니스를 막아내기 만 한다면 모두가 날 찬영하고 경배하겠지? 뿌듯~ 뿌듯~. "좋았어! 이제부터 다시 지옥 수련의 시작이다! 난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다고! 푸하하하~." * * * * * 멀찌감치 떨어져서 히로를 지켜보던 인디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쩜 저렇게 단순할까?' 조금 띄워줬더니 저렇게 좋아하는 꼴이라니. 정말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온다. 히로는 자신은 잔머리에 능하 고 라이 패밀리가 굉장히 단순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 자신도 똑 같은 부류에 속해 있었다. 히로+라이+라이코스 = 원조 단순 패밀리 아아~ 처음엔 권모술수에 능하고 JQ(잔머리 지수)가 180이 넘는 잔머리의 황제였던 히로가 언제 이렇게 타 락했단 말인가? 역시 사람은 환경이 중요하다. 단순의 극을 달리는 라이와 라이코스를 상대하는 동안 히로 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과 동화 되고 있었다. "아무튼 잘 됐어. 히로님께서 힘내서 크로니스를 막기만 한다면 이 세계는 안전할 거야. 그러면 일루니아님 도…… 꺄아~." 혼자서 중얼거리고 혼자서 소리지르고 혼자서 얼굴 붉히고…… 아무튼 혼자서 토크쇼와 버라이어티 쇼와 생 쇼까지 벌인 인디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일루니아 여사님의 막사로 향했다. * * * *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존재이며,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 그리고……. 난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가? 크로니스는 지금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무너뜨릴 정도로 극심한 혼란이었다. 기억의 편린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그것들은 하나로 연결이 되지 않는 조각일 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겪 은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현실과 환상이 뒤엉키고 있었다. 의식의 결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 구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의 구분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느끼는 것이 곧 현실이었다. 어떤 것이든 실제 로 고통을 느낀다면 환상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로니스는 객관적인 시선을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완전히 미친 드래곤. 마치 금이 가 있는 댐과도 같았 다. 조그만 충격에도 무너져버릴……. 하지만 어째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크로니스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자신이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이 미친 것일까? 돌아버릴 것만 같 은 이 기분을 어떻게 달래야하는 걸까? 그 인간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도망치세요! 도망치라니? 대체 어디로? 내가 왜 도망을 가야 하는 거지?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도망치라니? 준비 된 결말 말 고 다른 결말이 있다는 얘긴가? 이그리드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 그래서 그 인간을 세상에 내보낸 건가? 나를 막기 위해, 혹은 다 른 결말을 얻기 위해……. 그렇다면 이그리드는 어떤 결말을 예상하고 있는 걸까? * * * * * 휙휙휙휙-! 바람을 가르는 경쾌한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퍼진다. 난 지금 이름하여 지옥 수련을 하는 중이다. 크로니스 를 막아 내기 위해. "간다! 빅장 40단 콤보!" 난 기술 이름을 힘차게 외치며 손을 내질렀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째서 필살기를 쓸 때 는 꼭 그 기술 이름을 외쳐야만 하는 걸까? 안 외치고 그냥 쓰면 안 되나? 물론 안 된다! 필살기를 쓸 때 기술 이름을 외치는 것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필 살기를 쓸 것을 미리 예고함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그에 대한 대비를 할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 로는 폼 때문이다. 아무래도 기술 이름을 외치면서 기술을 쓰면 기술 이름을 안 외치면서 기술을 쓸 때보 다 폼 나잖아.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마! 간다! 초필살기 더블 빅장 40단 콤보! 이제 너의 뼈와 살은 분리 된 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앗싸, 좋구나!" "헉! 이건 뼛속까지 시리다!" "우하하! 어떠냐? 저승에 가서 아버지랑 판타지 소설책이나 봐라!" "하앗!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이대로 당할 수 없으면 어쩔 테냐?" "너의 공격 패턴을 알아냈다. 그것은 강약약 강중약약 강강약이다." "헉! 그것을 어떻게……? 네 놈! 영약하구나!" "받아라! 전국구 칼침이다!" "훗! 그딴 것쯤은 개나리 스텝으로 피해주마. 아자! 개나리 스텝 발동!" "개나리 이 씨박새끼!" 난 일인이역을 하며, 대사까지 열심히 날리며 혼자서 방방 뛰어다녔다. 그렇게 한 30분쯤 뛰어다니다보니 목 도 쉬고 다리도 아프고…… 아무튼 죽을 것 같았다. 역시 지옥 수련이라는 이름답게 수련의 강도가 상당 히 빡 세군. 난 조교의 권한으로 나 자신에게 10분 훈련을 주었다. 난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듯 주저 앉아 두 팔을 뻗 고 눈을 감았다. 너무 격렬하게 수련을 해서일까?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 내가 언제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녔던가? 생각 같아 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다. 하지만 내 어깨에 세계 평화라는 무거운 짐이 지어져있다는 것을 상기 하면 절대로 지금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내가 없으면 세계 평화는 누가 지키겠는가? 독수리 오형제도, 후레쉬 맨도, 바이오맨도 방영이 전부 끝난 지금 세계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아이언스 히로뿐이었다. "……." 독수리 오형제? 후레쉬맨? 바이오맨? 그러고보니 얘들은 전부 다섯명씩이다. 즉, 다시 말해 적이 나타나면 다섯명이 우르르 몰려가 적을 다구 리 놨다는 것 아닌가? 특히나 얘들이 많이 했던 게 합체다. 꼭 다섯명이서 덤벼도 두드려 맞다가 위기의 순간 에 다섯이서 합체를 한다. 그리고 더욱 강력해진 힘으로 적을 다구리 놓는다. "……." 뭐야? 이게 뭐야? 얘들 왜 이래? 순간, 나는 심각한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어렸을적 영웅으로 생각했던 존재들이 집단 폭행이나 일삼 는 조직 폭력배였다니. 그러고보니 최후의 보스는 언제나 하나였다. 그런데도 나의 영웅들은 절대 일대일로 붙지 않았다. 언제나 다 섯 명이서(그것도 합체를 해서) 한꺼번에 덤벼들어 최후의 보스를 바닥에 눕혀 놓고 무참히 짓밟았다. 그러 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 다른 것도 기억 난다. 얘들은 자기들 중에 한명이 죽으면 아주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 방정을 떨어댄 다. 그래도 죽었을 때 이러면 좀 봐줄만하다. 그런데 팔, 다리만 불어져도 복수니 어쩌니 하며 염병을 쳐댄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러려니, 하면서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하다. 얘들이 죽인 적의 숫자 가 몇 명이던가? 거의 셀 수가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계산조차 불가능하다. 그렇게 엄청난 적들을 죽 여 놓고 자기편 한명 다쳤다고 설쳐대는 꼴이라니…… 얘들에겐 오직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고, 우리편이 아닌 적들은 몇 명을 죽여 도 상관 없다는 생명 경시 풍조가 강박관념처럼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얘들은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자신들에게 반하는 세력은 무조건 적으 로 규정하고 때려부시는 것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논리 중 하나가 흑백논리로 친구 아니면 적이라 고 우기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아닌 놈은 바닥에 눕혀 놓고 팬다. 그 다음 다른 놈들에게 묻는다. '너 나랑 친구할래? 적할래?' 더 황당한 것은 본인들은 이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사기를 당한 느낌이 들었다. 적이라하면 신분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죽여버리고, 언제나 다섯 명이서 몰려다니며 적을 다구리 놓으며 정의를 외치는 놈들을 영웅이라고 좋아했었다니. 제길…… 어렸을 때의 꿈이 이렇게 하나, 둘씩 사라져 가는 구나. 난 걔네들에 비하면 굉장히 떳떳하다 할 수 있다. 난 적어도 일 대 일로 싸우잖아. 그러고보면 나야말로 진정 한 영웅이군. 이 시대 최고의 히어로. 푸훗~ 기분 좋다. 다시 힘내서 수련해야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 저기서 아장아장 걸어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난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헉! 저것은 나의 귀여운 라이가 아니던가? "라이야~." "오빠~." 라이는 그 먼거리를 나름대로 빠르게 뛰어오더니 폴짝 뛰어 내 품에 포옥 안겼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라이의 머리를 쓸어주며 그렇게 묻자 라이는 생긋 웃으며 손을 쭈욱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라이가 내민 것은 물통이었다. 내가 목 마른 걸 어찌 알고 물통을 가지고 오다니. 귀여운 우리 라이…… 착하 기도 하지…….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 물통의 물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자 좀 살 것 같다. "그런데 라이가 여기는 무슨 일로 온거야?" "오빠 보고 싶어서요." "……." 헉! 그런 귀엽고 깜찍한 말을! 난 라이를 꼬옥 껴안아 주었다. "오빠도 라이 보고 싶었어." "정말요?" "응. 오빠가 우리 라이 보고 싶지 않으면 누굴 보고 싶었겠니? 이 오빠한테는 오직 라이뿐이란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쓸어주다가 이상한 점 한가지를 발견했다. 어째서 나의 라이의 볼이 빨갛게 부어있는 거 지? "……." 어떤 놈이야! 어떤 개놈의 새끼가 라이의 뺨을 때렸어? 난 억지로 흥분을 가라 앉혔다. 하지만 한번 일어난 흥분이 쉽게 가라 앉을리 없었다. 내가 맞는 것은 참 을 수 있어도 라이가 맞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참을 수 없다. "누가 그랬니?" "예?" "누가 라이의 뺨을 그렇게 만든 거야?" "예?" "숨기려 하지마!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잖아.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우리 라이의 뺨을 그렇게 만들었어?" 난 주먹을 쥐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아아~ 이거요? 이거 루시아 언니가 그랬어요." "……." 뭐? 루시아?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는 기분이었다. 루시아가 나의 라이의 뺨을 때리다니. 무엇 때문에? 어째 서? 왜?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루시아가…….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루시아에게 따져야 하는 건가? 아니야. 루시아가 그럴 리 없어! 루시아가 그럴 리 없다고! 만약 루시아가 그랬다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 을 거야. 라이가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아무리 맞을 짓을 해도 그렇지! 이 귀여운 것의 뺨을 때리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건 분명한 아동 학대야! 적어도 때리기 전에 보호자와 상의를 했어야 할 거 아니야? "루시아 언니가 자꾸 귀엽다면서 볼을 꼬집고 만지작거려서 이렇게 됐어요. 히잉~ 아파요~." "……." 그런 거였나? 그러니까 때린 게 아니라 귀엽다고 볼을 꼬집고 만지작거린 거였나? 그럼 그렇지. 루시아가 라 이를 때릴 리 없지. 아아~ 다행이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루시아가 라이를 때린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무튼 정말 다행이 다. 만약 루시아가 라이를 때렸다면 아무리 루시아라 해도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라이야, 볼 많이 아파?" 끄덕. "그럼 오빠가 호~ 해줄게." 난 라이의 볼에 입김을 불었다. 그렇게 몇 번 불어주고 볼을 쓰다듬어 주자 라이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안 아파요!" "정말?" "예. 오빠가 불어주니까 하나도 안 아파요!" "……." 어쩜 말을 해도 이렇게 귀여운 말만 골라서 할까? 내가 이래서 우리 라이를 사랑한다니까. 난 다시 라이를 꼭 껴안았다. 라이는 하늘이 내게 주신 축복이다. 난 라이 때문에 이 세계로 건너 오 게 된 걸 후회하지 않는다. "오빠." "왜?" "오빠 정말로 크로니스와 싸울 거예요?" "……." 어째서 그런걸 묻는 걸까? 어째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크로니스와 싸우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이나 다름 없다. 피할 수도 없을뿐더러 피 하고 싶지도 않다. 내 두 어깨에 세계 평화가 걸려 있다잖아. "응. 난 크로니스와 싸울 거야." 순간, 라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더니 그 눈물이 라이의 통통한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흑흑…… 우에에엥~." 뭐야? 어째서 라이가 우는 거지? "울지마, 라이야. 뚝!" "우에에엥~ 오빠 드래곤과 싸우지 말아요. 싸우지 말아요." 라이는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마도 목을 놓아 운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난 황급히 라이의 등 을 두드려 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만 울어, 라이야. 갑자기 왜 우는 거야?" "흑흑, 라이는 오빠가 드래곤이랑 싸우는 거 싫어요. 오빠 다치면 라이는 어떡해요?" "라, 라이야……." 라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오빠가 다치긴 왜 다쳐? 오빠는 멀쩡할 거야." "흑흑~ 하지만 위험하잖아요. 드래곤은 너무 강하니까…… 우엥~." "괜찮아. 오빠는 멀쩡할 거야." "흑, 거짓말 하지 마세요. 라이도 다 알아요." "……." 어떻게 알았을까? 사실 죽을 가능성이 99.99% 이상이다. 내가 살아남을 확률은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 보다 낮다고 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얘기다. 으음, 엄청난 기적이라? 나 같이 재수 없는 놈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날리 없다. 고로 나는 죽는다. "……." 뭔 결론이 이 모양이냐? 아무튼 나는 일단 라이를 안심시켜줘야 한다. "라이야. 이 오빠는 멀쩡할 거야. 그러니 라이는 믿고 기다리렴."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빠가 진짜로 드래곤과 싸우겠다면……." "싸우겠다면?" "라이도도 함께 싸울래요!" "……." 휘이이잉~. 싸늘한 바람이 우리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디서 날아온지 모를 먼지가 내 입으로 들어왔다. 난 그 먼지 를 내뱉으며 말했다. "라이야~." "예." "너 제정신이니?" "예." 휘이이잉~! 다시금 싸늘한 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나와 같이 싸우겠다니. 이게 정말 라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란 말인가? 믿기지가 않는다. 라이가 아무리 날 좋아한다고 해도 같이 싸우겠다니? 라이는 자타가 공인하 는 평화주의엘프인데. "라이야, 니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옳지 못한 짓이야." "아니에요. 라이도 오빠랑 같이 싸울 거예요." "안 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치고 말았다. 라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라이를 보는 게 가슴 아프긴 했지 만 지금은 좀 세게 나가야 한다. 라이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라이가 뭐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자꾸 그런 소리하면 오빠 화낸다!" "오, 오빠…… 흑…… 우에에엥……." 역시나 울음을 터트리는 라이. 울지 마렴, 라이야. 니가 울면 이 오빠의 가슴은 찢어진단다. "라, 라이는 오빠가 걱정 돼서…… 흑흑…… 그런 건데…… 흑…… 우에에엥…… 오, 오빠는…… 라이의 마 음도…… 흑…… 몰라주고…… 엉엉." 오빠가 왜 라이의 마음을 모르겠니? 라이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이러는 거란다. 난 라이를 꼭 안아 주었다. "라이야, 드래곤과 싸움은 이 오빠에게 맞기고 라이는 라이코스와 노는데 투자하렴." "흑~ 그럴 순 없어요!" "……." 의외로 끈질기다. 난 그런 라이의 모습에서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라이가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줘 서 기뻤고, 날 위해 사지로 걸어가겠다고 우겨서 슬펐다. 하지만 이럴 때야 말로 내가 태도를 확실하게 해 야 한다. 어중간하고 두루뭉술한 태도를 취했다간 정말 라이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아무튼 안 돼!" "왜 안 돼요?" 라이는 어린아이답게 호기심이 많아서 내가 뭐라고 말을 하면 언제나 '왜요?' 라고 묻는다. 제발 어른이 말하 면 그냥 그런 줄 알아라.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그렇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다.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라이는 오빠랑 같이 싸울 거예요!" 아아~ 이 굳은 의지. 라이가 먹는 것도 아닌 다른 일에 이런 의지를 보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너 자꾸 그러면 오빠가 혼 낸다!" "혼 내도 라이는 오빠랑 같이 싸울 거예요!" 그만하렴, 라이야. 니가 이럴 수록 이 오빠는 더욱 힘들어진단다. 오빠의 심정도 이해를 해주렴. "니가 도와준다고 해봐야 뭘 도와줄 수 있는데? 겨우 7클래스 마법가지고 드래곤의 상대가 될 것 같아? 어디 서 7클래스 가지고 설쳐? 흥! 웃기지도 않아. 7클래스 마법사는 필요 없어! 니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면 오히 려 방해만 될뿐이야." "오, 오빠……." "자꾸 수련 방해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서 놀아. 왜 자꾸 나한테 달라 붙어? 내가 니 친구니? 당장 다른 곳 으로 가지 못 해!" 내가 화를 내며 소리치자 라이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에에엥~." 펑펑 울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라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천갈래 만갈 래 찢어지는 것 같다. 그래. 차라리 날 원망하렴. 하지만 언젠가는 라이도 내 진심을 알게 될 것이다. 라이가 울면서 사라지고 나자 난 다시금 수련에 열중하려 하였다. 하지만 자꾸만 펑펑 우는 라이의 모습 이 떠올랐다. 아무리 라이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어린 것에게 그런 심한 말을 하다니. 어쩌면 나는 라이의 보호자가 되 기에 부적합한 존재일 지도 모른다. "미안해, 라이야." 난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며칠이 흘렀다. 난 그 동안 죽어라 수련에만 매진하였다. 이렇게 수련한다고 해서 실전에서 효과가 나타난다 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다. 현재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 것 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 동안 라이는 한번도 날 찾아오지 않았다. 나 역시 라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겨우 며칠이긴 했지만 라이 를 안 보니 미칠 것만 같았다. 미치도록 라이가 보고 싶었다. 그 동안 잘 지냈을까? 밥은 잘 먹고 식후에 이빨 은 잘 닦을까? 라이코스랑은 재미있게 놀고 있을까? 혹시 그 사이에 키가 큰 건 아니겠지? 보고 싶다~. 이런 게 그리움인가? 무언가가 없어져봐야 그것의 중요함을 알 수 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라이는 내게 너무도 소중 한 존재였다. 라이가 없으면 나는 존재의 의미 자체가 없었다. 라이야 말로 나의 전부였다. 그런 라이한테 그 런 심한 말을 했다니. 흑~ 역시 내가 죽일 놈이야. 나 같은 놈은 라이의 보호자가 될 자격이 없어! 하지만 전부 라이를 위해서였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라이는 끝까지 나와 함께 크로니스에게 맞서겟 다고 우겼을 테고, 그렇게 되면 라이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내 한 목숨이야 죽던 말던 상관 없지만 라 이는 절대 안 된다. 라이는 끝까지 살아남아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엘프가 되겠다는 소망도 이루고 라이코스 랑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도 라이의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은 왜일까?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다. 아아~ 이 심각한 딜레마를 어찌 극복하면 좋단 말인가? 그냥 라이를 만나러 가? 먼 발치에서 잠깐만 보 고 올까? 정말 그럴까? "……." 그래! 뭐 먼발치에서 잠깐 보는 것쯤이야 괜찮겠지? 게다가 걸린다 하더라도 개나리 스텝을 이용해서 그 자 리를 피하면 될테니까. 난 심각한 갈등 끝에 결국 먼발치에서 잠깐만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결정을 내렸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 는 것이야 말로 내가 지향하는 바이다. 생각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나의 장점이 아니던가? 난 라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나와 라이의 전용 막사로 가보니 라이는 없 었다. 아마도 루시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으음, 설마 그 사이에 루시아에게 넘어 간 걸까? 나에게서 떠난 마음이 루시아에게 달라 붙었나? 그럼 안 되는데. 라이는 나만 좋아해야하는데. 이건 너무 큰 욕심인가? 하긴 그 심한 소리를 해 놓고서 나만 좋아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래도……. 난 일단 루시아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개나리 스텝 덕분인지 이동 속도가 배로 빨라진 느낌이다. 역 시 그 동안의 수련이 효과가 없진 않았군. 저 멀리서 루시아의 막사가 보인다. 라이는 아마도 저곳에 있을 것이다. 막사가 가까워 질수록 난 은신에 주 력했다. 라이한테 걸리면 안 되니까. 나의 은신이 완벽해서일까? 다행히 나는 아무한테도 걸리지 않고 막사 근처로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정도면 부업으로 어쎄씬을 해 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그 누가 나의 은신술이 이 정도일거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의 움직임은 가히 바 람과도 같아서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로 완벽하다면 은신술은 굳 이 따로 연습할 필요가……. "히로님. 루시아 공주님을 뵈러 가시는 건가요?" "아…… 으응." 헉! 나의 은신술을 눈치 채다니. 과연 드래곤 답군. 평소에 좀 얼빵해보이긴 하지만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 야. 하긴 드래곤이니까 나의 완벽한 은신술을 눈치 챘겠지. 인간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 난 다시 은신술을 발동하였다. 그런데…… "아!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루시아의 직속 하녀로 보이는 여인이 나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난 얼떨결에 마주 인사를 하고 다시 은 신술을 발동하였다. 거 참 이상하군. 하녀가 어떻게 나의 은신술을 눈치 챘을까? 뭐, 보나마나 운이 좋았던 거겠지. 일반인이 나 의 은신술을 눈치 채는 것은 불가능할테니. "아이언스 히로님! 저 기억나시죠? 저 아이언스 히로님께서 연설하실 때 47번째 줄에 앉아있었습니다. 저 개 인적으로 아이언스 히로님 팬이에요. 여기 싸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난 일단 내가 연설할 때 47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던 여인한테 싸인을 해주고 악수까지 해주었다. 좋아서 어 쩔 줄 모르며 멀어져 가는 여인. 순간, 등뒤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이게 아닌데. 한 명이라면 우연이려니 하겠지만 두 명한테 걸리다니. 나의 완벽한 은신술이…….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은신술을 발동하였다. 그러자…… "안녕하세요, 히로님." "안녕하세요." "방가~ 방가~." "Hello~." "Hi! Hiro. How are you?" 사람들이 전부 나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어째 은신술을 안 쓸 때보다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 젠장! 그럼 이게 무슨 은신술이야? 난 은신술을 당장 때려치고 그냥 살금살금 루시아의 막사로 다가갔다. 마침 식사 중이었는지 음식 냄새가 풀 풀 풍겨온다. 난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 보았다. "자, 아~." "아~." 냠냠~! "잘 먹네. 자, 또 입 벌려 봐. 언니가 먹여줄게." "아~." "맛있니?" "예. 너무너무 맛있어요, 언니." "어머, 귀여워라~." 너무도 다정한 분위기. 루시아가 빵을 찢어 수프에 적시면 라이는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받아 먹는다. 그러 면 루시아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라이는 행복하게 웃는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야 말았군. 어깨가 힘 없이 축늘어졌다.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라이는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구나……. 루시아는 마치 친언니처럼 라이를 잘 보살펴주고 있었다. 루시아가 있는 한 라이에 대한 걱정은 안 해 도 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내 가슴이 무거운 걸까? 라이가 저렇게 잘 지내고 있으면 기뻐야 하 는 것 아닌가? 어째서 이렇게 울적한 기분이 드는 걸까? 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걸음을 옮겼다. 라이가 잘 지내고 있으면 기뻐해야 하는데. 몇몇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난 그들의 인사를 받아줄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현재 기분은 그야말 로 최악. 우울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라이는 정말로 내 진심을 몰라주는 걸까? 나는 이렇게 라이를 생각하고 있는데…… 라이 때문에 아무 것 도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라이는……. 라이가 날 잊었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그게 막상 현실이 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뭐랄까? 마치 딸을 빼앗 긴 느낌이라고나 할까? 당장 막사로 쳐들어 가서…… '라이는 내 꺼야!' 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난 슬프다.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라이한테 버 림 받은 몸. 흑~ 더 이상 살아서 뭐해? 근처에 강이 있다면 그냥 콱 뛰어 들어 죽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근처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리 죽고 싶다고 한들 맨땅에 헤딩해서 죽을 수는 없 지 않은가?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으니. 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날씨는 좋은데 내 마음은 심난하구나. 이 심난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한숨만 내쉬네. 내 마음은 아직 라이 곁을 맴 돌고 있거늘, 라이의 마음은 이미 내 곁을 떠났네. 엇갈린 두 마음을 어찌해야 하는가? 아~ 다시 올 거야. 라이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 히로 품으로 다시 돌아올 거야. 난 울적한 나의 심기를 달랠 길이 없어 시 한수를 읊었다. 하지만 백날 읊어봐야 뭐하냐? 들어줄 라이는 이곳 에 없는데. "흑……."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고 하는데 난 왜 이리 눈물이 많은가? 아마 도 내 감수성이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아무도 보고 있지 않기에 다행이다. 전설의 용사한테 눈물 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왜 우시는 거죠?" "슬퍼서요…… 헉!" 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 뒤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백금발이 너무도 아름다운 그 여인의 이름 은 루시아. 난 황급히 눈물 자욱을 지우고 루시아를 보았다. "제가 울긴 언제 울었다 그러시나요?"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잖아요." "아~ 눈에 뭐가 좀 들어가서요." "정말요?" "무, 물론이에요." 루시아는 의미 심장한 눈으로 날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 옆에 털썩~ 주저 앉으려 했다. 그 순 간 난 외쳤다. "잠깐!" "예? 왜요?" 어리둥절해서 묻는 루시아. 난 대답 대신 망토를 벗어 루시아가 앉을 자리에 깔아 주었다. 여자에게 이 정 도 서비스는 기본이지. "고마워요." "뭐 이 정도 가지고……." 앗싸! 점수 땄다! 이런 사소한 배려가 나를 킹카로 거듭나게 해준다. 남자들이여 잘 기억해 둘지어다. 여자들은 사소한 것 에 잘 감동한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아, 예. 뭐 그럭저럭……." 안 좋기야, 안 좋지. 그것도 굉장히. 나의 라이를 루시아한테 빼앗긴 셈인데. 이런 생각을 하니 루시아가 조 금은 미워진다. "라이 때문에 그래요?" "……예?" 그걸 루시아가 어떻게 알았을까? "라이랑 무슨 일 있었지요?" "……예? 일이라니요?" "시치미 때지 말아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 다 알고 있다니. 정말 다 알고 있단 말인가? "며칠전 라이가 절 찾아와서 펑펑 울었어요." "……." 며칠전이라면 아마도 내가 라이에게 심한 말을 했을 때일 것이다. 이곳에서 라이가 기댈 사람은 나와 인 디, 루시아 밖에 없는데,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중일테니 루시아한테 찾아갔겠지. "얼마나 울었나요?" "많이요." "얼마나 많이?" "아주 많아. 밤새도록." "……." 그렇게 열심히 울었단 말인가? 밤새도록 울었으면 눈도 붓고 목도 쉬었을 텐데. 흑~ 우리 라이한테 미안해서 어떡해? "그,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요? 울다 지쳐서 제 품에서 잠들었어요." 라이 눈에서 눈물이 흐르면 내 눈에선 피눈물이 흐른다. 난 그만큼 라이를 사랑하고 아낀다. 엎어지면 코 닿 을 거리에 라이가 있것만 우리의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구나. 미안하다, 라이야. 이 오빠를 용서해라. 이 오빠는 너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구나. "라이가 굉장히 보고 싶어하는데…….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먼저 만나러 가주시면 안 될까요?" 난 고개를 저었다. "전 라이를 만날 자격이 없어요." "으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은 만날 수가 없어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루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네요. 강요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런데 왜 라이를 안 만나려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유를 듣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난 루시아에게 말해줄 수가 없다. 전 이제 죽을 지도 모르니 라이 를 잘 부탁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다만 라이도 언젠가는 제 진심을 알아주길 바랄뿐이에요. 루시아 공주님 께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뭔가요?" "라이를 잘 부탁드려요. 라이도 루시아 공주님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동생처럼 잘 보살펴주길 바래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루시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안심 할 수 있었다. 나 없어도 씩씩하게 크렴, 라이야. 전에 오빠가 했 던 말은 진심이 아니란다. 다만 이 오빠는 라이가 몸 건강히 잘 지내길 바랄 뿐이야.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루시아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거요." "이게 뭔가요?" "편지에요." "……헉!" 그렇다면 이것이 말로만 듣던 러브레터? 헉! 헉! 헉! 난 충격과 공포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 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러브레터라니? 세상에 정말 러브레터라는 것이 존재했단 말인가? 말로는 많이 들어보고 영화에서도 많이 보았지만 내가 실제로 받아 보는 것은 처음……은 아니고 두번째 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상아탑에 있을 때 루시아한테 한번 받아봤었군. 하지만 그때는 업무와도 약간 관련 이 있는 내용이 있었으니 엄밀한 의미의 러브레터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흠흠, 아무튼 첫 번째든 두 번째든 좋은 건 좋은 거다. "천천히 읽어보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아, 예. 안녕히 가세요." 루시아는 옅은 미소를 날리며 나에게서 멀어졌다. 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본 다음 그녀 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러브레터~ 러브레터~ 러브러브~ 러브레터~. 아! 진짜 감동이다. 내가 러브레터를 받게 될 날이 올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난 받고 말았 다. 그것도 엄청난 미녀에게. 아~ 행복해. 햇님은 찬란한 빛으로 만물을 축복하고 푸른 하늘은 맑은 공기로 세상을 축복하는 구나. We are the world! 세상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다워. 루시아는 아름다워. 루시아가 꽃보다 아름다워. 난 천천히 편지봉투를 튿었다. 봉투가 살며시 열리며 안에 작고 알록달록한 편지지가 보였다. 두근두근~. 난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편지를 꺼내 펼쳐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삐뚤빼뚤한 글씨였다. 마치 초 등학교 2학년 생이 쓴 것 같은 글씨. 이게 글씨인지 지렁이가 기어간 자국인지 헤깔린다. 아마 이 글씨도 자신 이 글씨인지 지렁이가 기어간 자국인지 많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난 일단 이것을 글씨라 가정하고 그것을 해독하는데 주력했다. 오빠에게 꾸벅~. 이건 라이가 오빠에게 쓰는 첫 번째 편지에요. 오빠가 라이를 위해서 그랬다는 거 라이는 다 아라요. 라이 는 오빠 맘 다 아라요. 라이한테는 오직 오빠뿌니니까요. 다치지 마세요, 오빠. 오빠 다치며는 라이는 슬퍼요. 라이 슬프게 하지 마세여. 사랑해요, 오빠. 이제보니 루시아가 쓴 편지가 아니라 라이가 쓴 편지였군. 그럼 그렇지. 루시아가 글을 이렇게 엉망으 로 쓸 리가 없지. 글씨도 엉망이고, 맞춤법도 엉망이고, 내용도 엉망이다. 하지만 난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라이도 오빠 마음 다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날 위해서 일부러 모른척 한 거 구나. "어흐흐흑~ 그래, 라이야. 오빠 안 다칠게. 라이를 위해서라도 안 다칠게." 난 굳게 결심하였다. 크로니스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살아남기로. 죽을 확률이 99.99%라면 남은 0.01%에 나 의 모든 것을 걸겠다. 그래서 반드시 살아남겠다. 나를 사랑해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아! 내가 말하고도 정말 감동적이다. 앞으로도 이런 감동적인 대사를 남발할 기회가 많이 생겼으면 정말 좋 겠다. * * * * * 때는 바야흐르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는 시기. 지금 세계는 한 가지 이슈로 소란스러웠다. 그리 고 그 소란의 정점에는 히로가 서 있었다. 이건 누구의 말마따나 세기의 대결이었다.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악룡(라이의 말로는 나쁜 드래곤)과 그런 악룡에게서 세계를 지키려는 아이언스 히 로 공작(라이의 말로는 착한 인간). 이 얼마나 뚜렷한 선과 악의 대립인가?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 얘기를 떠들어댔다. 이제 세계의 운명은 아이언스 히로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이런 커다란 이슈가 터진 덕분에 술집 장사가 호황을 누리고 호황을 노릴 수 없다는 듯 명예 퇴직한 직장인 들 사이에서 창업 붐이 일고 있었다. 주류 판매량이 급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없어서 못 판 단 얘기까지 나올까? "누가 이길까?" "당연 아이언스 공작이 이겨야지." "하지만 상대는 드래곤이잖아."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아이언스 공작의 상대가 될리 없어. 분명 아이언스 공작이 이길거야." "자네 마음도 이해를 하지만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가 누군가? 인간의 힘으로 드래곤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 아?" "뭐야? 그럼 넌 드래곤이 이기길 바라는 거야?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내가 언제 드래곤이 이기길 바란다 그랬어? 다만 아이언스 공작이 질지도 모른다 그랬지."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이런 드래곤 앞잡이 같은 자식!" "뭐야?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도 못하는 소리가 없네." "덤벼! 이 드래곤 앞잡이야!" "에라, 이 자식이!" "죽어! 죽어!" 술집에서는 얘기가 끊일 날이 없고, 싸움이 끊을 날이 없었다. 하지만 세계 대종말 직전에 늘상 찾아오던 대 혼란은 아직까진 없었다. 대결 날짜가 정확히 언제인지 발표가 안 된데다가 소문의 신빙성이 떨어졌기 때문 이다. 각 국에서는 그 소문이 아이리스의 선전이라 못 박았다. 그들은 아이언스 공작을 드래곤과 동급으로 놓음으 로써 자국의 위명을 과시한다고 주장하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사일런스 지니가 이 일을 소 문 낸 것은 그런 계산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니까. 아무튼 각 국가에서는 그렇게 말을 하며 아이언스 공작이 드래곤과 맞짱을 뜨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 담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 역시 쉽사리 믿지 않았다. 첫째 이유는 아이언스 히로가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후예 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단한 존재가 드래곤과 맞짱을 뜬다고 하니 조금 신빙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 고 둘째 이유는 전단지를 쓴 사람이 사일런스 지니라는 데에 있다. 사일런스 지니가 누구인가? 아마 전세 계 여자들을 상대로 인기 투표를 하면 90% 이상의 득표율로 당당히 1등을 차지할 꽃미남이자 당대 최고의 모 사였다. 그런 자가 허위 사실을 유포했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전무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사람들은 현재 반신반의하는 중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믿을 놈은 믿고, 안 믿을 놈 은 안 믿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문은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언스 공작이 용사 집단을 구성했데." "그 숫자가 100만에 이른다지?" "그런데 그 100만이 다 덤벼도 아이언스 공작 하나를 이기지 못 했데." "아이언스 공작이 8클래스를 마스터했다던데."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9클래스 마스터인데 일부러 8클래스 마스터인척 하는 거래." "왜 그런데?" "그야 당연 본연의 힘을 숨기고 있는 거지. 드래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아아! 그렇구나. 역시 대단하다, 아이언스 공작." "그러게 말이야." "그 얘기 들었어? 아이언스 공작의 필살기가 장난이 아니래." "아아~ 나도 알아. 빅장이라고 하던가?" "정확히는 빅장 40단 콤보야. 아이언스 공작은 이 필살기로 기사들 1만명을 때려 눕혔데." "허허, 만부부당지용(萬夫不當之勇)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군." "빅장 40단 콤보는 필살기에 불과한 기술이야. 이건 내가 아까 들은 얘긴데 초필살기까지 개발 됐데." "정말? 그게 뭔데?" "이름하여 더블 빅장 40단 콤보지. 소문에 의하면 진초필살기를 개발 중에 있다는데." "오옷! 그 정도면 드래곤을 때려 잡는 것도 문제 없겠군." "게다가 아이언스 공작의 보법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고 현란하다던데. 그걸 뭐라 그러더라?" "개나리 스텝?" "맞아! 개나리 스텝." "소문에 의하면 개나리 스텝의 진보형인 진달래 스텝을 개발 중이라던데." "오오! 진달래 스텝!" "설마 그 다음 또 코스모스 스텝 같은 걸 또 개발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 알아? 해바라기 스텝까지 개발할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소문은 점점 부풀어 올랐다. 심지어는 아이언스 공작이 울트라 하이퍼 메가톤 파 워 진초필살기 트리플 빅장 무한 콤보를 개발해 냈다는 소문과 개나리 스텝의 완성판인 백장미 스텝까지 개 발해 냈다는 소문이 시중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히로는 자신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대스타가 된 것이다. 지금 히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는 표현이 부 족할 정도였다. 히로가 이 사실을 알고나면 얼마나 좋아할까? 전세계 점쟁이들을 모아 점을 친 결과 7 대 3으로 아이언스 공작이 이길 확률이 높다고 나왔다. 어째서 히로 의 승률이 높냐고 물으니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점괘가 그렇게 나왔어요.' 참 할 말 없게 만드는 대답이다. 하긴, 점쟁이가 점괘가 그렇게 나왔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억 울하면 자기가 점쟁이 하던가. 세레나는 산책을 겸해 집밖으로 나왔다. 정말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집에서 안 내보내 주려는 것을 바득바 득 우기고 꾀병까지 부려서 간신히 빠져나온 거다. 해가 저물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뭐 어떤가? 그 때까지 실컷 놀면 되지. '어디부터 가는 게 좋을까?'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히로와 함께 머물렀던 그 여관. 세레나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차 를 타고 가도 되지만 오늘 같이 상쾌한 날씨에는 왠지 걷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 치 누군가가 자신을 느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몸에 소름이 돋는다. 세레나는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저 먼발치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보였다. 여행자로 보이는 그 는 세라나가 돌아보자 몸을 움찔하더니 딴청을 피웠다. 그것 외에는 별 다른 수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기에 세 레나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설마 이 대낮에 이런 대로에서 납치 사건이 일어나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을 해보았지만 왠지 불안하다. 요즘들어 막나가는 놈들이 많다보니. 게다가 저 남자 굉장히 수 상해보인다. 분명 인신매매범일거야. 세레나는 두려운 마음에 걸음을 빨리 재촉하였다. 그러자 이게 왠 일인가? 뒤 따라 오던 남자의 걸음도 빨라 지는 것이 아닌가? '뭐야? 설마 정말로 날 따라오고 있는 거야?' 세레나는 이젠 거의 뛰다시피 했다. 그리고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로브를 뒤 집어 쓴 남자는 집요하게 세레나의 뒤를 쫓아왔다. 이쯤되면 두려움을 넘어서 공포가 느껴질만 하다. '나 어떡해? 이러다가 진짜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야?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만약 저 자가 마음 먹고 덤벼든다면 자신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은 연약한 미소녀가 아닌가? 세레나는 너무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그 다음 일이 두 려워서다. 세레나는 이제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백작가 영애가 언제 이렇게 열심히 뛰어봤겠 는가? 세레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제발 그 남자가 따라오지 않기를…….' 하지만 세레나의 이런 기대는 무참히 무너져내렸다.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세 레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세레나는 그 소리가 너무나도 끔찍해 귀를 꼭 막았다. 그러느라 스텝이 엉키고 세레나는 볼품 없이 넘어졌 다. 세레나는 절망에 빠졌다. '이제 난 끝이야.' 남자는 이제 됐다 싶었는지 뛰는 것을 멈추고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노리 는 맹수와도 같았다. 저 남자는 늑대, 자신은 다리 부러진 연약한 사슴. 누가 이 사슴을 구원해 주실 분 없나요? 다행히 주위에 사람들이 많았다. 세레나는 힘껏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저 남자가 절 강간하려 그래요!" 아아~ 강간이라니. 그 얼마나 잔혹무도한 범죄란 말인가? 세레나의 외침에 근처 남자들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미소녀가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자신들의 도움 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럴 경우 어찌해야 하는가? "……." 어찌하긴 뭘 어찌해? 당장 앞으로 나서서 점수를 따야지. 순식간의 수십명의 남자들이 세레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번뜩이는 눈으로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를 노 려보았다. 그들의 박력에 남자는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 자식! 죽어라!" "자, 잠깐만요! 오해입니다!" "오해라니? 너 같은 놈들은 무조건 죽어야 돼!" "제 설명을 들어 보세요!" "문답무용(問答無用)!" "즉결심판(卽決審判)!" "치한척살(癡漢刺殺)!" 평생 여자 손 한번 못 잡아 본 남자들의 분노가 지금 이 순간 폭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분노를 로브를 뒤 집어 쓴 남자에게 쏟아 부었다. 퍽퍽퍽퍽-! "으악! 살려주세요!" "우리에게 자비를 구하지 마라!" "저 국왕이에요!" "웃기고 있네! 니가 국왕이면 난 하나님이겠다." 세레나는 국왕이라는 말에 놀라 남자를 살펴 보았다. 얻어 맞는 도중 후드가 벗겨져 있어 남자의 얼굴이 확 실히 들어났다. 좀 떡져 있긴 했지만 그는 분명 반데라스였다. 세레나는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물었다. "다, 당신이 어떻게……." 반데라스는 얻어 맞는 와중에도 밝게 웃으며 세레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아! 안녕하세요, 세레나양. 오, 오랜만이에요." "이 자식! 지금 웃음이 나와? 우리가 우습게 보이냐?"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퍽퍽퍽퍽-! 늘씬 두드려 맞는 반데라스. 세레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들 지금 자신들이 반역 행 위를 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세레나는 한시라도 빨리 지금 상황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잠깐만요. 아는 사람이에요." "예? 아는 사람이요?" 세레나가 반데라스를 두둔하고 나서자 반데라스를 늘씬 두드려 패던 남자들은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세 레나는 떡이 되기 일보 직전인 반데라스를 부축하였다. "괜찮아요?" "괘, 괜찮습니다!" 실상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얼굴이 붓고 온몸이 욱신 거린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온몸에 시퍼런 문신이 새 겨져 있을 것이다. 코에서는 한줄기 코피마저 흐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데라스는 행복했다. '아! 세레나양이 손수 나를 부축해주시다니.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아무리 여자에 미치면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이 놈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지금 이 상황에 서 겨우 부축해준 걸 가지고 감동하냐? 세레나는 반데라스를 부축해서 근처 여관으로 들어갔다. 히로와 함께 묵었던 그 여관이었다. "방 하나 주세요." "어? 아가씨는……?" 여관 주인장은 한눈에 세레나를 알아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레나만한 미녀가 어디 흔한가? 여관 주인은 세레나와 세레나가 부축한 반데라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바뀌었군. 전에는 이 남자가 아니라 다른 남자였잖아. 왜 그 검은 머리카락에 흰 망토를 두른……." "……!" 반데라스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여관 주인의 말은 똑똑히 알아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 자? 그렇다면 세레나양이 다른 남자와 이 여관에 왔었단 말인가? 어째서지? 어째서 세레나양이 다른 남자 와 여관에 온 거지? 둘이 여관에서 무슨 짓을 했기에……. "으윽!" 반데라스는 고통에 찬 신음성을 내뱉었다. 정신적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세레나는 그것이 아까 얻 어 맞은 육체적 고통 때문이라 생각을 하고 더욱 다급하게 외쳤다. "빨리 방 하나 주세요. 그리고 뜨거운 물과 물수건, 연고도 준비해 주세요." "아, 예……." 여관 주인은 1년 사이에 남자가 바뀐 것에 대해 신기함을 느끼면서도 일단 방을 내주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 과 물수건, 연고도 준비해 주었다. 그때까지도 반데라스는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세레나양이 여관에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왔었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제발 누군가 나에 게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줘!' 여자의 과거에 굉장히 신경을 쓰지만 소심해서 그것에 대해 묻지는 못하는 반데라스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 었다. 세레나는 반데라스의 그런 기분까지 아까 억울하게 얻어 맞았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치료해주기로 마 음 먹었다. 자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 자기가 책임을 지려는 것이다. 왜 속담도 있지 않은가? 병 주고 약 준다고……. "얼굴 이리 줘봐요." 반데라스는 순순히 얼굴을 내밀었다. 세레나는 물수건을 적셔 상처난 부위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아앗!" "좀 참아봐요. 남자가 그런 것도 못 참아요?" 나왔다. 남녀차별성 발언. 남자가 그런 것도 못 참냐니? 남자면 아프지도 말아야 하고, 아파도 소리 지르 면 안 된다는 건가? 이런 선입견은 남성들을 위해서도, 여성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자에게도 아플 때는 소리지를 권리를 달라! 반데라스는 이런 말을 하는 대신에 이를 꼭 악물었다. 남자답게 보이기 위해서 아파도 꾹 참으려는 것이다. 아아~ 남자답게 보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상처 부위를 깨끗하게 닦은 세레나는 덧나지 않도록 손수 연고까지 발라주었다. 이런 극진한 간호라니! 이 런 간호를 받기 위해서라면 만날 몸이 부러지고 박살나도 좋아. 반데라스는 감동하고 감격했다. '세레나양께서 손수 간호를 해주시다니. 아아~ 약 바르는 손이 이렇게 부드러울 줄이야. 백의의 천사가 따 로없군. 내일도 간호 받고 싶고, 모래도 간호 받고 싶어. 영원히 세레나양한테 간호 받고 싶어. 나 국왕 때려 치고 세레나양 환자할래.' 이런 생각도 잠시. 다시금 아까 여관 주인이 한 말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정말 세레나양이 다른 남자와 이곳에 왔을까? 혹시 여관 주인이 착각한 건 아닐까? 하지만 세레나양은 부정 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는 것은 같이 왔다는 얘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난 세레나양을 믿어야 돼. 사랑은 믿음이 중요한 거야. 하지만 정말 신경 쓰인다. 이 제 난 어쩌면 좋지?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자, 이제 다 끝났어요. 덧 나지는 않을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반데라스는 지금 심각한 갈등 중이었다. 한번 물어볼까, 아니면 그냥 모른척할까? 그냥 넘어가자니 도저 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냥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 지나가는 말로 살짝 물어보자. 슬쩍 물어보면 괜찮겠지?' 그렇게 결심한 반데라스는 조심스럽게 세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아까 여관 주인이 검은 머리라고 했는데…… 혹시 누군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왜요?" "아, 아니, 그냥 순수한 호기심에서." 순수한 호기심? 웃기고 있네. 불순한 호기심이겠지. "아이언스 공작이에요." "예?" "아까 여관 주인이 말한 검은 머리 남자가 아이언스 공작이에요." "그, 그럼 아이언스 공작과 이 여관에 왔었단 말입니까?" "예." 세레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반데라스는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 일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이언스 공작과 세레나양이 함께 여관에 왔었다니! '각방 썼겠지? 각방 썼을 거야. 분명히 각방 썼을 거야. 어떻게 결혼도 안한 남녀가 같은 방을 쓸 수 있겠어?' 반데라스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레나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이 방은 예전에 아이언스 공작과 같이 썼던 방이네요." "……!"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쯤 되면 할 말 다하고 볼장 다 봤다. 반데라스는 더 이상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듯 침대 위에 쓰러졌다. 세레나는 깜짝 놀라 반데라스 의 몸을 흔들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세, 세레나양……." 반데라스는 지금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역시 그놈이 문제였어. 아이언스 히로! 그 자식 때문에 난 되는 일이 없어. 감히 세레나양에게 마수를 뻗치 다니…… 이런 비열한 자식! 평화 협상이고 뭐고 이제 끝이야! 아이리스랑은 전쟁이다!' 자기 기분이 좀 안 좋다고 해서 전쟁을 일으키려 하다니. 이런 놈이 국왕이라는 게 참으로 한심하다. 헤리오 의 백성들이 불쌍해지는 것은 왜일까? 반데라스는 흥분해서 자신이 소심하다는 것도 잊고 세레나에게 물었다. "아이언스 공작과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예?"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요?" "무, 무슨 일이라니……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그러니까 그렇고 그런 일이요." "예?" "그렇고 그런……." 세레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세레나는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절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왜요? 제가 아이언스 공작과 자기라도 했을까봐요? 제가 그 런 여자로 밖에 안 보여요?" "……." 앙칼진 세레나의 외침에 반데라스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세레나는 지금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어떻 게 여자한테 그런 걸 물을 수가 있는 거지? 반데라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래도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니 다행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세레나양.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됐어요!" 세레나는 코웃음을 치며 세차게 몸을 돌렸다. 하긴, 그런 말을 듣고 어떤 여자가 안 열 받겠냐? 이번 일은 명 백한 반데라스의 잘못이다. 여자의 과거를 그런식으로 들추어내려 하다니. 나쁜 자식! 너 같은 놈은 세레나한 테 차여도 할 말 없어! "세, 세레나양……." 반데라스는 자신의 크나큰 실수를 후회하며 세레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세레나는 여전히 냉기를 폴폴 풍 길뿐이었다. '어, 어떡하지? 세레나양 많이 화나신 것 같은데. 아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찌해야 세레나양의 용서 를 구할 수 있는 거지?' "저, 저는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저, 저는 다만……." "됐어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하, 하지만……." "그나저나 반데라스 국왕 폐하께서 왜 그곳에 계셨던 건지나 설명해주시겠어요?" "그, 그건…… 우, 우연이었습니다!" "……." "하하~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우연히 마주치다니!" "우연이요?" "예. 우연입니다." "그러니까 폐하의 말씀은 우연히 궁을 나와서 우연히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쓰고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가 우 연히 제 뒤를 밟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이거지요?" "아, 예. 제 말이 그 말이에요. 하하하~." "……." 그냥 스토킹 했다 그럴 것이지. 이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다니. 아무튼 반데라스는 오늘 점수 깎일 짓 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세, 세레나양." "뭐죠?" "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다니는 게 어떨까요?" "예?" "그, 그러니까…… 날씨도 좋은데…… 같이……." "데이트요?" "예. 그거요. 데이트. 데이트 어때요?" "흐음……." 반데라스는 초조하게 세레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엇 때문에 업무도 다 내팽개 치고 민중시찰이라는 명목 으로 이곳까지 나왔겠는가? 이게 다 세레나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세레나양의 손을 잡고 저 거리를 걸을 수만 있다면…….' 세레나는 너무나도 불쌍한 반데라스의 표정을 보고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걸까? 반데라스는 화색을 표명하며 열심히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이러니 진짜 불쌍해보인다. 아무리 봐도 이 놈 은 인기 없는 남자의 전형이다. 생긴 것은 멀쩡하고 지위도 좋은 놈이 대체 인생을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세레나와 반데라스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둘은 느린 걸음으로 한산한 거리를 걸었다. 은발 머리의 미청년 과 진녹색 머리의 미소녀가 함께 걸으니 어느 정도 그림이 산다. 반데라스의 얼굴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그 도 그럴 것이 그는 지금 엄청난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세레나양의 손을 잡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혹시 화내지는 않을까? 손을 잡으려면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물 어보고 잡아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잡아야 하나? 잡을 때는 살짝 잡아야 하나, 꼭 움켜쥐어야 하나? 아아~ 정 말 너무 잡고 싶다. 세레나양의 손을 잡고 싶어. 나는 세레나 양의 손을 잡기를 원해.' 세레나는 아까부터 '손을 잡고 싶어. 손을 잡고 싶어.' 라고 중얼거리는 반데라스를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았 다. 손을 잡고 싶으면 잡으면 될 것 아닌가? 남자가 이렇게 소심해서 어따 써먹어? 짜증이 난 세레나는 자기가 먼저 반데라스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순간, 빨갛게 달아오르는 반데라스의 얼 굴. '여, 역시 세레나양도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야.' 그래. 니 좋을대로 해석해라. 둘은 그렇게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아아~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바랄 걸 바래라. 다음 모퉁이 돌고나면 막다른 길이다. 세레나는 주위를 살피며 걷던 중 유난히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곳 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쯤되면 호기심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세레나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파의 중심에는 사과 상자 위에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여러분! 잠시만 저에게 주목해 주십시오." 어째 말하는 폼에 예사롭지 않다. '뭐야? 불법 약 판매상인가?' 이런 노상에서 사람들 모아 놓고 할만한 짓은 약 판매 밖에 없었다. 그것도 식품의약 안정청의 검사를 거치 지 않은 불법 약품. 참고로 노상에서 판매하는 약 종류는 딱 두가지다. 첫째가 만명통치약, 둘째가 정력제. '으음, 정력제라? 후일을 대비해 하나 구매해 놓을까?' 반데라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과 상자 위에서 소리치는 남자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요즘 시장 바닥에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서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아이리스의 아이언스 공작님 께서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운다는 소문. 여러분들께서도 분명 한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사실 요 즘 그 소문 모르면 간첩이죠." 뜬금없이 아이언스 공작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발걸음을 돌리려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열심히 듣 고 있던 사람들은 더욱 귀를 기울였다. "정확한 시일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대결은 이 세계의 운명을 판가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 는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아이언스 공작을 응원해야 합니다. 진실된 응원의 목소리는 세계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아 이언스 공작에게 힘을 실어줄 것입니다. 집 한구석에 틀어 박혀서 마누라 잔소리만 듣고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진실된 목소리로 아이언스 공작님 을 응원할 것입니까? 선택은 여러분들께 달려있습니다. 응원은 엄청난 체력을 소모합니다. 기초 체력이 부실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응원을 하다보면 다음날 직장 에 나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기초 체력을 증진시키고 잔병을 낫게하고 정력 까지 왕성하게 만드는 이름하여 <아이언스 공작 드링크>! 그렇다면 이런 훌륭한 드링크의 가격이 얼마냐?" 남자는 손가락 열개를 쫙 펴보이며 외쳤다. "100골드……." 순간, 사람들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드링크 하나가 100골드씩이나! 물론 드링크 하나에 100골드씩이나 할리는 없다. 남자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만, 오늘 이 자리에선 특별히 특가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단 돈 1골드! 뜻이 있으신 분들은 이 드링 크를 마시고 아이언스 공작을 응원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응원이 아이언스 공작에게 힘을 실어줄 것입니 다! 단 돈 1골드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십시오!" 남자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주위에선 난리가 일어났다. "내가 먼저 줄 섰어!" "새치기 하지마!" "나야, 나!" "아이씨! 어떤 놈이 자꾸 새치기 하고 있어?" "여기! 열 개 줘요!" "여러분들 진정해 주세요! 물량은 충분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레나와 반데라스는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한참 후 드링크가 다 팔리 고 약장수가 철수하자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세레나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참, 어이가 없네요." 반데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둘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음식점으로 향했다. 수중에 돈이 충분히 있었기에 둘은 상당히 비싸보이는 레스 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제복을 입은 웨이트리스가 다가왔다.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이 집에서 가장 잘나가는 게 뭐죠?" "요즘은 아이언스 공작 스폐셜이 인기 상품입니다." "……예?" 황당해진 둘은 메뉴판을 펼쳐보았다. 놀랍게도 메뉴판에 그런 음식이 존재하였다. <아이언스 히로 공작 스폐셜 코스 요리> 둘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가격도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은 일단 그 것을 시키기로 합의를 봤다. "아이언스 히로 공작 스폐셜 코스 요리 이인분이요." "예, 알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 드링크에 아이언스 히로 공작 스폐셜 코스 요리. 다음은 무엇이 나올지 정말 궁금하다. 둘은 아이언스 히로 공작 스폐셜 코스 요리를 맛있게 먹고 차 한잔 하기 위해 카폐를 찾았다. 그런 그들에 게 한 카폐가 눈에 띄었다. <아이언스 히로 공작 노천 카폐> 둘은 그곳으로 들어가 <아이언스 공작 주스>를 시켜 먹었다. 밥도 먹고 차도 마셨으니 이젠 문화 생활을 즐 길 때다. 마침 근처에서 연극을 상영하고 있었다. 연극 제목은 <아이언스 히로 VS 크로니스>. 관객들은 대부 분 어린애들이었다. 아이언스 히로 역할을 맡은 배우가 뭐라고 할때마다 어린애들은 좋아서 소리를 질러댔 다. 그런데 그 대사라는 것이 또 엽기다. "사악한 마룡! 정의를 수호하는 나 아이언스 공작이 용서치 않는다! 받아라! 빅장이다!" "크크크,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네가 감히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는한 나는 절대 패하지 않는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네놈을 심판 하겠노라! 초필살기! 더블 빅장!" "크윽! 내가 인간따위에게 패하다니.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네 놈만이라도 반드시 죽이고 죽겠다." 참 감동적인 스토리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가 이 세계를 위협하니 아이언스 히로가 바람처럼 나타나 레 드 드래곤 크로니스를 무찌르고 자신도 장렬히 전사하다니. 연극을 다 본 둘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어린애들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드래곤이 더 쎄." "웃기지 마! 아이언스 공작이 더 쎄!" "드래곤이 더 쎄다니까." "아이언스 공작은 훤씬 더 쎄." "쳇! 그럼 드래곤은 짱 짱 쎄다." "드래곤이 짱 짱 쎄면 아이언스 공작은 졸라 짱 짱 쎄! 드래곤은 아이언스 공작에게 한방감도 안 돼! 아이언 스 공작이 최강이야!" 정말 어디를 가도 전부 아이언스 히로에 대한 얘기 뿐이었다. 바야흐르 지금 전세계는 아이언스 히로 신드롬 이 이는 중이었다. 기업들은 아이언스 히로의 이름을 도용해 마케팅을 펼치고, 소비자들은 한끼 식사를 하더 라도 아이언스 히로와 관련된 것을 먹었다.(아이언스 공작이 공작새 요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 작새 요리 판매량이 급증하였다) 사람들은 둘 이상이 모였다하면 아이언스 히로에 대해 떠들어댔고 어린아이 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급부상하였다. 실상을 확인한 세레나와 반데라스는 기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 남자가 보기보다 대단한 사람이네요." "그, 그러게 말이에요." 히로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생각할까? 보나마나 초상권 침해라고 난리칠테지.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굉장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 들. 대체 이것들은 뭐란 말인가?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꿀꺽~! 긴장했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난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일단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방이 고요하다. 모두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내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말을 하 려니 참으로 난감하다. 차라리 웃고 떠들어 주면 좋을텐데. "여러분들의 뜻은 잘 알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셔서 생업에 종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웅성웅성~! 장내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입을 열어대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끝까지 아이언스 공작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난 댁들과 함께 할 마음 없어. 그러니 제발 돌아가. "저희는 이미 세계 평화를 위해 이 한 목숨 초개와도 같이 버릴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세계 평화는 댁들의 목숨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러니 제발 돌아가. 사람들은 그 외에도 수 많은 감동적인 대사들을 내뱉었지만 별로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까지 지겹도 록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귀에 딱지가 앉을만큼 들었다. 제발 누가 저 용사병 환자들 좀 몰아내! "제발 저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니들에게 기회는 없어. 아주 죽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 구만. 진짜 한심하다. 저것들 다 땅에 묻어버렸으면 정말 좋겠다. "그만 돌아가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으면 집으로 돌아갈 것도 각오하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난 몇 시간에 걸쳐 설득한 끝에 그들 중 대다수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아예 드러누 운 수백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까? 때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 처음에는 적이 쳐들 어 온 줄 알고 난리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적의 침공은 아니었다. 다만 세계 각지에서 소문을 들은 사람들 이 몰려온 것이다. 이름하여 용사병 환자들. 이게 다 사일런스 지니가 뿌린 선전문 때문이다. 나쁜 놈! 전생에 나랑 무슨 원수가 졌기에 날 이렇게 괴롭히 는 걸까? 선발대로 몰려든 3천명을 간신해 정리했더니 후발대가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후발대는 숫자에서 부터 장난이 아니다. 하루에 거의 5천명씩 몰려들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돌려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 는 숫자가 1만에 이른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어서 환장한 놈들이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이 곳에 드래곤이 두 마리나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분명 놀라 기절하겠지.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과 열렬한 사랑을 불 태우고 있고, 카르는 여전히 라이레얼의 팔에 코알라처럼 매달 려있다. 개인적으로는 카르와 라이레얼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라이레얼도 더 이상 나를 괴롭히 지 않겠지? 아무튼 드래곤 잡는 것에 환장한 용사병 환자들 때문에 난 지금 환장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언스 공작님. 저희에게 개나리 스텝을 보여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아이언스 공작님의 능력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내 어쩌겠는가? 아마 남자들만 부탁했으면 거들떠도 안 봤을 것이다. 하지만 여 자들까지 부탁하였기에 난 어쩔 수 없이 개나리 스텝을 보여줘야 했다. 개나리 스텝을 보여주고 나면 그들 은 경악하였다. "오옷! 이런 대단한 무공이라니!" "발놀림이 안 보일 정도야!" "훌륭하십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아이언스 공작님, 만세!"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개나리 스텝도 보여주셨으니 빅장을 보여주세요." "빅장을 보고 싶어요." "당신의 빅장을 보여주세요." 난 서커스 단원도 아니고,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보여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 다. "제발 보여주세요."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안 보여주면 '전설의 용사라고 재는 거야 뭐야? 흥! 재수 없어!' 등등의 욕을 먹을 것 이 뻔하다. 난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빅장까지 다 보여주었다. 원래 필살기는 중요한 순간에만 쓰라고 있 는 건데……. 아무튼 이렇게 개나리 스텝에 빅장까지 다 보여주고나면 어느새 해가 저문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다 시 엄청난 숫자의 용사병 환자들이 몰려와 있고 난 그들에게 연설을 해야한다. 이것이 나의 하루 일과였다. 이래서 수련은 언제 하나?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살아 남는다고 큰 소리를 쳤 것만 이래가지고는 반드시 죽는다. 게다 가 더 이상 지원자를 받을 수도 없다. 현재 모집된 인원은 대략 1만 2천. 더 이상 수용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반기는 눈치였다. 이들 용사 집단은 유사시에 군대로 활용할 수도 있으 니. 어제 날 찾아와서 말씀하시더라. "이분들은 아이언스 공작님을 믿고 이곳까지 찾아오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이들 의 기대에 부흥해 주시길 바랍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을 내편으로 만들라는 얘기다. 무서운 여자. 일루니아 여사님은 정말 철저하게 파시즘 으로 무장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흑~ 인디야. 그런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니가 불쌍하구나. 제발 이제라도 정신 차리렴. 결전의 때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두려웠는데 지금은 별로 두렵지도 않다. 차라리 빨리 끝났으 면 좋겠다는 느낌이 강했다. 결전의 날아, 빨리와라. 아이언스 히로가 기다린다.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며 간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막사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인기가 많은 것도 정말 힘들다. 쉴 틈도 없으니. 그런데 누굴까? 설마 나의 라이? 라이가 날 찾아온 건가? "들어오세요." 내가 말하자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나의 라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모 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니가 여긴 어쩐 일이니?" "으응. 그게……." 저 단순하고 어벙하게 생긴 여인의 이름은 뮤리아. 사일런스 지니를 사랑하는 철 없는 소녀다. "예전에 사일런스 백작님과 만나게 해준다고 했었던 말 기억나?" "……." 내가 그랬었나? 잘 기억이 안 날 경우에는 무조건 잡아 때는 것이 상책이다. "난 잘 모르겠는데." "아, 아니야. 정말 그랬어. 진짜야." "……." 아니라면 아닌 줄 알 것이지. 왜 그렇게 흥분하니? 난 뮤리아에게 말했다. "좋아.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야?" "그, 그러니까……." 우물쭈물거리는 뮤리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에 빤히 보인다. "사일런스 백작님과……." "백작님과?" "만남을……." "만남을?" "주선해 줬으면……." "줬으면?" "해." "해?" 인간아~ 제발 주제를 알아라. 사일런스 지니가 어떤 인간인데 넘보고 있니? 사일런스 지니가 얼마나 잘났는 지 내가 꼭 얘기를 해줘야겠니? 뮤리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얘기해줘도 소용 없을 것 같다. 왜? 사랑하니까! 뭐 그래도 얘기는 해줘야지. "잠깐 이쪽에 앉아봐." "응? 왜?" "잔말 말고 앉으라면 앉아." 난 뮤리아를 의자에 앉히고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뮤리아에게 현실을 가르쳐줄 때가 왔다. 뮤리아 의 지금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꿈꾸는 소녀'다. 어릴 때 소녀들은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자신을 데려가길 꿈꾼다. 여자들의 콤플렉스 중에 가장 심각 한 것이 신데렐라 콤플렉스다. 그렇다면 신데렐라 콤플렉스란 무엇이냐?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말 그대로 신데렐라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다. 신데렐라는 왕자를 만나서 부엌때기에 서 하루 아침에 왕비가 되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신분상승인가? 진짜 부러워할만도 하다. 그래서 여자들은 신데렐라가 되기를 꿈꾼다. 자신은 별 볼일 없지만 잘난 왕자를 하나 잡아서 공주처럼 살 고 싶은 거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고, 나쁘게 보면 도둑놈 심보라고도 볼 수 있다.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구두 를 원한다면 자기가 벌어서 살 생각을 해야지 남자 잘 잡아서 한방에 해결하려 하다니. 아무튼 많은 여자들은 자신이 제 2의 신데렐라가 되기를 꿈꾼다. 여자 신세 뒤웅박 신세라고 남자를 어떻 게 만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다. 아니, 꼭 그렇게 믿지는 않더라도 기왕이면 평 범한 남자보단 잘난 남자 만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대부분 커가면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현실을 겪다보면 환상이란 깨지 기 마련이니까.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돈 많고 잘 생기고 학벌까지 좋은 남자가 뭐하러 별 볼일 없는 부 엌때기랑 결혼을 하겠는가? 그리고 신데렐라는 단순히 별 볼일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재산도 학벌도 별로였 지만 외모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얼마나 예뻤으면 왕자가 한눈에 반했겠는가? 신데렐라 정도의 외모가 있다면 모를까, 일반 보통 여자들이 백마 탄 왕자와 결혼의 골인할 확률은 제로 에 가까웠다. 그래도 신분 상승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여자들을 위해 조언을 하자면 왕자님 기다릴 시간에 로 또 복권이나 사라. 혹시 아나? 복권에 당첨되서 떵떵거리며 살게 될지? 한마디 덧붙이자면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여자만이 아니다. 남자들도 돈 많고 예쁜 여자를 만나 신 분 상승 하는 것을 꿈꾼다. 참고로 모든 남자들이 꿈꾸는 이상형은 다음과 같다. '얼굴 예쁘고, 돈 많고, 명 짧은 여자.' 오오! 이 얼마나 환상적인 조건이란 말인가? 얼굴 예쁘고 돈 많은데다가 명까지 짧으니 정말 금상첨화(錦上 添花)로다! 아! 뭐 그렇다고 내가 루시아가 일찍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혹시나 오해하는 독자들이 있을까봐 이 자리 에서 분명히 밝히는데 내가 루시아를 좋아하는 것은 결코 신분 상승의 꿈 때문이 아니다. 루시아의 지위를 노 리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노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뿐이다. 진짜다. 좀 믿어라. 속고만 살았냐?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냐? 내 사랑은 순수하다니까! "흠흠, 아무튼 그래서 사일런스 백작을 만나고 싶다 이거지?" "으응." 난 뮤리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예쁘지도 못 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 예의상으로는 예쁘다고 말 해줄 수 있겠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정말 그저 그런 얼굴이다. "왜 사일런스 백작을 만나려 하는 거야?" "그, 그건……." 무슨 대답이 나올지 너무 뻔히 보인다. 분명 '사랑하니까' 라고 대답할게 뻔하다. '사랑하니까'에 100골드 건 다. "……사랑하니까." "앗싸! 100골드!" "응?" "아무 것도 아니야." 흠흠, 기쁜 나머지 실수했군. "좋아. 아무튼 사랑한다 이거지?" "으응." 뮤리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대답을 했다. 아이구, 아이구. 아주 좋아 죽으시는 구만. 좋아 죽네, 죽어.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상아탑의 마법 학교의 학생 뮤리아가 아이리스의 백작 사일런스 지니를 좋아한 다 이거지?" "으응."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뮤리아. 정말 완벽한 콩깍지가 씌였구 나. 아무래도 이건 뮤리아의 잘못이라기 보단 사일런스 지니의 잘못이 아닌가 싶다. 룸메이트에게 구박 받던 한 가녀린 왕따 소녀. 그녀의 꿈은 언젠간 멋진 왕자님이 나타나 자신을 데려가주 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왕자님을 발견하고 말았다. 큰 키와 잘생긴 얼굴. 긴 금발머리카락과 지 적 센스를 더해주는 외눈 안경까지. 정말 너무나 완벽했다. 생긴 것만 잘 생긴 것이 아니다. 능력과 직위마 저 뛰어나다. 당대 최고의 모사에 아이리스의 백작. 아아~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소녀는 그에 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는 성격 또한 좋았다. 별 볼일 없는 자신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소 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자신이 꿈에서나 그리던 왕자님이었으니……. 하지만 어느날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녀는 처음에 그를 잊어보기 위해 노력하였다. 잊고 싶 다고 쉽게 잊어지면 그게 어디 사랑인가? 어떻게 만난 꽃미남인데 그렇게 쉽게 잊어? 당연 잊혀질리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하루하루 오직 그만을 생각했다. 그러던 도중 아이언스 히로와 함께 싸울 용사 집단을 모집한 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녀는 처음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언스 히로가 있는 곳에 그 도 같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용사 집단에 지원서를 내밀었다. 그리하여 학교 도 때려치고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한 소녀의 마음을 무참히 흔들어 놓고 그냥 등을 돌리고 떠난 사일런스 지니. 아아~ 세상에 이렇게 나쁜 남 자가 있었다니! 니가 잘 생겼으면 다야? 니가 뭔데 순진한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놔? 나쁜 자식! 여자 의 적! 남자의 적! 공공의 적! 너 같은 놈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돼!(사일런스 지니가 나보다 잘 생겨서 질투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밝혀두는 바이다. 진짜다. 믿어라.) "좋아. 그럼 우리 정리를 해보도록 하자. 니가 사일런스 백작을 사랑하고 있다면 니가 이 곳에 온 이유도 그 것 때문이겠네?" "으응." "날 도와 드래곤과 싸울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고 오직 사일런스 백작을 만날 생각만 하는 거야?" "으응." "……." 뭐가 '으응'이야? 뭐 이런 게 다 있어? 용사 집단에 꼈으면 날 도와 드래곤과 싸워야 할 거 아니야? 싸 울 게 아니면 용사 집단에 들어오질 말던가. 생각해보니 진짜 기분 나쁘네. 이거 완전 날 이용해 먹은 거잖 아. 날 도와 드래곤과 싸우겠다는 명분으로 은근슬쩍 이곳에 들어와 자기 잇속만 챙기려하다니. 니가 아주 간 뎅이가 부었구나. 흥! 웃기지도 않아! 난 화가 났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눈에 콩깍지가 씌인 애에게 말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냐? "니가 사일런스 백작을 얼마나 생각하는지는 잘 알았어. 하지만 우리 좀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생각해보 는 게 어떨까?" "응?" "그러니까 내 말은 좀 더 현실을 직시하자는 거지." "……응?" 뮤리아는 여전히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듯 했다. 아이씨! 이 정도까지 말 했으면 이해해야 할 거 아니 야? 너 바보냐? 아! 얘 바보 맞구나. 얼마전까지만 해도 클래스 메이트한테 꼼짝 없이 당하기만 하던 바보였지? 좀 잔인하긴 하지만 얘한테 현실을 일깨워줘야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계속해서 착각 속에서 사는 것보다 야 낫겟지. "일단 사일런스 백작을 만나기에 앞서 너와 사일런스 백작을 비교, 토론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응?" 왜 그런 걸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나를 보는 뮤리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정 든다. "사일런스 백작의 외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힌다.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 "으응." 내가 재차 묻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럼 니 외모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 "그냥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으응." "사일런스 백작의 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출중하다고 생각하지?" "으응." "그럼 니 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그저 그렇다고 생각하지?" "으응." "사일런스 백작의 작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백작이라는 거 알고 있지?" "으응." "그럼 니 작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아, 참! 넌 작위가 없는 평민이구나. 맞지?" "으응." "사일런스 백작의 재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백작이니까 돈도 많을 것 같지?" "으응." "그럼 니 재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집안에 돈은 좀 있니? 별로 없지?" "으응." 더 비교하자면 끝도 없지만 난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이미 충분히 알아 들었을테니 계속하면 마음만 아플 뿐이지. 난 뮤리아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자기 처지에 대해 충 분히 알아차린 것 같긴 했다. 여자애한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게 다 뮤리아를 위해 서다. 사일런스 지니가 어떤 인간인데, 그런 인간을 좋아한단 말인가? 사일런스 지니한테 첫눈에 반한 여자 는 전 세계에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그 여자들 중 아리따운 고위 귀족들도 상당수다. 사일런스 지니가 미쳤 다고 그런 여자들을 놔두고 뮤리아를 선택하겠는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사일런스 지니는 바람 둥이다. 일명 카사노바. 언제나 이 여자 저 여자 찝적거리고 다닌다. 문제는 사일런스 지니가 찝적거리 면 안 넘어 오는 여자가 없다는 것이다. 사일런스 지니가 내민 손을 거절할 여자는 둘 중 하나다. 장님이거 나 레즈비언이거나.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일런스 지니는 얼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잘난 인간이다. 그런 인 간이 머리 좋고, 싸움 잘하고, 돈까지 많으니……. 아이씨! 생각할 수록 열 받는다. 아아~ 이래서 세상은 불 공평 해. "이제 사일런스 지니와 너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잘 알았겠지? 그래서 충고하는데 이만 짐 싸서 집에 돌아가 렴. 니가 아무리 사일런스 백작을 사랑한다 해도 사일런스 백작의 입장에서 보면 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자 1일뿐이야. 아니, 생각해보니 여자100은 되겠군. 아무튼 너는 사일런스 백작의 기억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 을 확률이 높은 여자니까 이만 잊고 다른 남자를 찾아보길 바래." 내가 친절하게 충고를 해주자 뮤리아는 눈을 치켜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사일런스 백작님은 분명 날 기억해 주실 거야!" "……." 순간,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게 어디서 큰소리야! 여기가 니네 집 안방이냐? 난 뮤리아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벌떡 일어나서 아까 뮤리아가 했던 것보다 더 크게 외쳤다. "웃기는 소리 좀 그만 해! 넌 영화 볼때 지나가는 엑스트라까지 다 기억하면서 보냐? 지나가는 여자1, 전화가 는 남자1 같은 거 다 기억하냐고? 사일런스 지니가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널 기억이나 할 것 같 아? 넌 엑스트라야! 넌 지니의 인생에서 스쳐지나가는 엑스트라라고! 니가 아무리 지니를 사랑한다고 해봐 야 사일런스 지니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너의 모습은 지나가는 여자1일뿐이야! 그것도 그냥 지나가는 여자1 이 아니라, 지나가는 별로 안 생긴 여자1!" "아니야! 절대 아니야! 절대 아니라구!"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제발 현실을 직시해! 정신 차려! 넌 니가 신데렐라라도 되는 줄 아나본데 넌 그냥 그 저 그런 애일뿐이야! 사일런스 지니는 백마 탄 왕자고. 백마 탄 왕자가 미쳤다고 다른 많은 공주들 놔두 고 널 뒤에 태우겠니?" "아니야!!!" 뮤리아는 막사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귀를 틀어 막았다. 더 이상 내 말을 듣기 싫다는 의사 표시 의 일환이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엉!" "……." 내가 울린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뮤리아는 그야말로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하긴 내가 좀 심하긴 심했지. 굳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필요 는 없었는데 말이야. "이, 이봐……." "엉엉엉!" "그, 그만 좀 울지." "엉엉엉!"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내가 뮤리아를 울리다니. 원래 이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째서 이런 일 이! "야, 그만 좀 울어." "엉엉엉!" 울음 소리가 정말 우렁차다. 뮤리아는 지금 그야말로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초상이라 도 난줄 알겠다. 내가 지금 한가지 두려운 것이 있다면 누군가가 이 울음 소리를 듣고 달려와 뮤리아가 우 는 것을 보고 저 남자가 뮤리아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 했기 때문에 애가 울고 있구나, 라고 오해하는 것 이다. 뭐,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앗! 무슨 일이십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순간, 막사 안으로 뛰쳐들어오는 상당수의 인간들. 이 인간들은 나와 뮤리아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꾸 벅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던 일 계속 하십시오." "……." 저 말이 대체 뭔 뜻이냐? 그들은 의미심장한 대사를 남긴 채 바람과도 같이 사라졌다. 설마 오해한 건 아니겠 지? "엉엉엉!" "아이씨! 그만 울라니까! 한 대 맞을래?" 난 인상을 팍 쓰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제야 뮤리아는 조금 울음을 멈추었다. 아아~ 이게 대체 뭔 꼴이 냐?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세계 평화를 책임져야 할 내가 여자애나 울리고 달래줘야 하는 신세가 되다 니. 용사병 환자들이 이 모습을 보면 날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겠나? "울지 말고 일어나~. 빰빠밤. 피리를 불어라~. 빰빠밤. 릴리리 개굴개굴 릴리리~ 릴리리 개굴개굴 릴리리 ~ 무지개 연못에 웃음꽃 핀다~." 난 울음을 그치라는 의미로 손수 '개구리 소년 왕눈이' 주제가까지 불러 주었다. 나의 이런 노력이 효과가 있 었을까? 뮤리아는 울음을 뚝 그쳤다. "자자, 일단 앉아." 난 뮤리아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다시 진지하게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 아. 이번엔 좀 부드럽고 우회적으로 말해 줘야지. "니가 사일런스 지니를 좋아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야. 사일런스 지니는 남자인 내가 봐도 반할만 큼 잘 생겼으니까." 반할만큼 잘 생기긴 뭘 잘 생겨? 기생 오래비처럼 생겨가지고는 여자들한테 실실 웃기나 하고. 아~ 마음 에 안 들어. "하지만 왜 이런 속담도 있지 않니? 얼굴 값 한다고. 이런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야. 원래 속담이라는 것 은 선조들의 지혜가 축적된 것이거든. 아무튼 사일런스 지니만큼 얼굴 값 하는 남자도 없을 거야. 사실 알고 보면 사일런스 지니는 굉장한 바람둥이거든. 그 인간이 이제까지 울린 여자만도 수천명은 족히 될 거야. 너 도 사일런스 지니가 아무 여자한테나 실실 웃어 대는 거 봤지? 사일런스 지니는 그런 인간이야." "……." "그리고 사일런스 지니가 작위는 백작이지만 집에 돈은 별로 없데. 왜냐하면 그 인간이 좀 청렴결백한 편이 거든. 일루니아 여사님도 그렇고. 그리고 그 인간이 무임금 노동도 꽤 즐기는 편이야. 야근 수당 없이도 야근 하고 그런다니까. 아! 생각해보니 지금은 월급도 안 받고 있는 것 같아. 쯧쯧, 그래서 생활은 어찌하려 그러는 지. 아무튼 한심하다니까." 난 굉장히 열심히,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사일런스 지니의 나쁜 점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 었다. 사일런스 지니는 워낙 잘난 인물이기 때문에 단점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라 원래 내가 남의 험담 을 즐겨하는 편이 아니기에…….(흠흠, 진짜다) 내 얘기를 다 듣고난 뮤리아가 한마디했다. "그래도 상관 없어." "……." 순간,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그렇게 열심히 단점을 설명했는데도 상관 없다니. 혹시 잘 생겼으면 장땡이라 는 거냐? "아무리 뭐라 그래도 난 사일런스 백작님을 사랑해. 그러니 그분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듣고 싶지 않아." "……." 진짜 심각하게 빠졌구나. 이러다가 나중에 사일런스 지니한테 차이면 자살하겠다고 난리치는 거 아니야? 내가 말 없이 한숨만 푹푹 내쉬자 뮤리아는 내 손을 붙들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부탁이야.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사일런스 백작님을 만나게 해줘." "그게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사일런스 백작이 요즘 워낙 바빠서……." "딱 한번만 부탁할게. 제발~ 제발~ 제발~." 아! 이 얼마나 간곡한 부탁이란 말인가? 내 능력이라면 충분히 뮤리아와 사일런스 지니를 만나게 해줄 수 있 다. 하지만 난 둘의 만남을 주선해줄 의사가 없었다. 이게 다 뮤리아를 위해서다. 오를 수 없는 나무라면 쳐다 보지도 몰라고 했으니. 보면 볼 수록 자신만 상처 받을 뿐이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내 평생의 소원이야. 사일런스 백작님을 만나지 못하면 난…… 흑흑…… 이렇게 무릎까지 꿇고 부탁할게." "야!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뮤리아는 정말 무릎을 털썩 꿇더니 내 옷을 붙잡았다. "제발. 단 한번만. 아니, 단 1초라도 좋아. 그분을 만나 뵐수만 있다면……." "안 된다면 안 돼는 줄 알아!" 난 내 옷을 잡은 뮤리아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미안하다, 뮤리아.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너도 언젠가 는 내 진심을 알아줄 날이 오겠지.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좋은 남자 만나렴.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나가본다. 잘 있어라. 앞으로 찾아오지 말고." 바쁜 일은 전혀 없었다. 나 찾는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바쁠 일이 있을리 있나?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전부 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함이다. 차마 더 이상 슬퍼하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볼 자 신이 없다. 난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막사를 나가려는 순간 뮤리아가 외쳤다. "잠깐!" "또 뭔데…… 헉!"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뮤리아가 자신의 목에 무언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것은 주머니칼이었다. 뮤리아는 지금 자해를 하려는 것이다. "사, 사일런스 백작님을 만나게 해줘." "……." "아, 안 그러면 그을 거야!" "……." 뮤리아는 보기가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자기 목을 그을 용기는 없 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저건 단순한 협박용이라는 얘기다.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인질극까지 벌이다니. 그렇 게 사일런스 지니가 좋으냐? "훗! 웃기는 군. 그을 수 있으면 그어봐." "……." 냉정한 나의 태도에 당황하는 뮤리아. 그러더니…… "사일런스 백작님을 만나 뵐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아!" 정말로 자신의 목을 긋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란 와중에도 재빨리 개나리 스텝을 발동하였다. 그래서 칼이 뮤리아의 목을 스치기 직전 뮤리아의 손 에서 칼을 빼앗을 수 있었다. 뮤리아는 어이벙벙한 표정이었다. 그 거리를 단숨에 좁혀들어와 칼을 빼앗다니! 하긴 이거 아무나 할 수 있 는 일 아니다. 난 뮤리아를 밀치며 소리쳤다. "너 미쳤어? 진짜 죽을 생각인 거야?" "흑흑, 그래. 나 미쳤어. 난 사일런스 백작님한테 미쳤다구!" "……." 그런 낯뜨거운 말을 얼굴 한번 안 붉히고 해내는 니가 참 위대해 보인다. 나 같으면 돈 주고 하라고 해 도 못 할 것 같다. "너 진짜 왜 그러니?" "흑흑,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어. 하지만 사일런스 백작님을 못보면 정말 죽을 것 같은데 나보고 어 떡하라고? 흑흑." 아아~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죽을만큼 사랑한다는데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차라리 날 좋아하는 게 어때?" "어흐흐흑!" 내가 진지한 태도로 묻자 뮤리아는 슬쩍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좋았던 기분이 갑 자기 팍 상한다. 대체 저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지? "좋아. 니가 그렇게까지 원하니 내가 사일런스 백작을 만나게 해줄게. 단 나중에 차이고 나서 죽네 사네 난리 치면 그땐 나한테 진짜 죽는다. 알았지?" "흑흑, 정말? 정말 사일런스 백작님을 뵙게 해줄거야?" "속고만 살았니?" "응." "……." 저렇게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어지지. "아이씨! 아무튼 만나게 해준다니까. 싫으면 마!" "아, 아니야. 좋아. 너무 좋아." "……." 그런 정신으로 공부를 해라. 그럼 전교 1등은 따놓은 당상일테니. 난 뮤리아를 데리고 사일런스 지니의 막사로 갔다. 지니는 예전에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막사에서 근무 를 하였다. 그곳에서 같이 업무를 처리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했었지. 하지만 인디가 온 후로 사일런 스 지니는 다른 곳으로 쫓겨나야 했다. 둘이서 지지고 볶고 난리도 아니니 어찌 그곳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사일런스 지니는 지금 자기 막사에 있을 것이다. 요즘은 개떼처럼 몰려온 용사병 환자들 때문에 상 당히 바쁘시다. 내가 막사에서 지니의 막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지니의 막사 근처로 가니 저 멀리서 지니가 서 있는 것 이 보인다. 지니는 두손을 힘 없이 늘어 뜨린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과 어우러진 그 모습이 왠지 위 대해 보인다. "저기 사일런스 백작 있네. 가서 말이라도 걸어 보렴." "……." 뮤리아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빗으로 황급히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한테 물었다. "나, 나 어때?" "……." 어떻긴? 그저 그렇지. 머리 빗는다고 호박이 수박 되니? 뱁새가 황새 되니?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 되니? 머리를 다 빗었음에도 불구하고 뮤리아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 다. "응? 너 왜 그러니? 만나기 싫어?" "아, 아니. 떠, 떨려서……." "……." 그래. 위대하신 사일런스 지니 백작님을 뵙는데 안 떨릴 리가 없지. 제 눈의 안경이라고 정말 꼴값이 야! 쳇! 쳇!(질투하는 거 절대 아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 "뭐야? 왜 남의 옷을 잡어? 이거 안 놔?" "떠, 떨려서……." "니가 떨린 것과 내 옷을 잡는 것에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데?" "가, 같이 가줘." "……." 아이씨! 내가 니 시다바리냐? 정말 열불 뻗친다. 내 평생 이만큼 분노한적이 또 있었을까? 상대가 아무리 잘 생겨도 떨려서 앞에 못 나선다 니! 내가 진자 열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여자들이 나를 사일런스 지니에게 가기 위한 관문으로 생 각한다는 것. 그리고보니 예전에 헤리오의 왕궁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한 여인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었 지. '옆에 계신 분께 한곡 같이 추고 싶은데 괜찮으시냐고 물어봐 주시겠어요?' 참고로 그때 내 옆에 사일런스 지니가 서 있었다. 으음, 다시 생각하니 진짜 열 받는다. 아~ 더워. 그래도 난 한 소녀의 간절한 청원을 무시하지 못했다. 이게 바로 내 문제점이다. 냉정하게 거절을 잘 못한다 는 것. 이렇게 착해선 인생 살기 힘든데. 난 뮤리아를 질질 끌고 사일런스 지니에게 다가갔다. 지니는 무공이 뛰어난 인물이기에 금방 나의 접근을 눈 치 채고 고개를 돌렸다. "아!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저야 언제나 아이언스 공작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요즘 고충이 많 으시겠군요." "하하, 뭐 인생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벌써부터 인생의 진리를 깨달으시다니. 저는 언제나 아이언스 공작님을 뵐 때마다 그 높은 인품과 학식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이시야 말로 아이리스의 크나큰 복이십 니다." "아하하하~ 뭐 그런 말씀을…… 역시 새삼 느끼는 거지만 사일런스 백작님의 눈은 정확하십니다. 제 가 좀 잘나긴 했지요. 아하하~." "좀 잘나신게 아니라 많이 잘나셨습니다." "푸하하하~ 그렇게까지 사실을 부각시키시다니. 뭐, 잘난 것으로 따지자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도 한 잘 남 하시지요." "아닙니다. 저 같은 것은 아이언스 공작님의 발끝도 못 따라갑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발끝도 못 따라가다니요? 뭐 사일런스 백작님 정도면 제 발목까지는 따라오셨 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절 과대 평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칭찬하였다. 아아~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정말 마음 에 든다. 세상은 넓지만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 것은 사일런스 지니뿐이로구나! 난 지금이야말로 뮤리아를 지니에게 소개시켜줄 적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내 뒤에 웅크리고 있는 뮤리 아를 억지로 앞에 내세웠다.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이 여자분이 누구신지 당연 모를 거라 생각됩니다. 얘는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상아 탑에 계셨을 때 잠시 스쳐지나간……." "아! 뮤리아양이시군요." "……!" "……!" 지니의 말에 나와 뮤리아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럴 수가! 이런 말도 안 돼는! 사일런스 지니가 뮤 리아를 알아 보다니! 설마 아직까지 상아탑에서의 만남을 잊지 않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는 것은 지니가 뮤 리아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훗! 그럴 리 없지. 만난 여자의 이름을 확실히 기억해 두는 것은 바람둥이의 본성이다. 혹시라도 다른 여 자 만날 때 헤깔릴 수가 있으니. "상아탑에서 있어야할 뮤리아양께서 어째서 이곳에 계신겁니까?" "아, 저기 그게……." 너무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 뮤리아. 뮤리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채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 었다. 덜덜덜~. 마치 스포츠카가 비포장도로를 굴러가는 것 같다. "저, 저, 저, 저는…… 그, 그, 그, 그러니까……." 아주 점수 깍일 짓만 골라서 하고 있다. 니가 말더듬이니? 왜 그렇게 말을 더듬어? 생긴 게 어벙하면 말이라 도 또박또박해야할 것 아니야? 우리 라이는 말도 또박또박 잘하는데. 진짜 우리 라이만도 못 해! 흥! "진정하십시오, 뮤리아양." 사일런스 지니가 안심하라는 의미로 손수 손까지 잡아 주었다. 그러자 뮤리아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 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사일런스 지니는 뮤리아의 허리를 잡고 부축해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예. 제, 제가 빈혈기가 좀 있어서……." "……." 염병! 몸 하나는 튼튼하게 생겨 놓구선 무슨 빈혈기야? "그런데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저, 저 그게……." 그냥 솔직하게 말 해! 보고 싶어서 왔다고. "드래곤과 싸우기 위해서……." "……."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했다. 니가 싸우긴 개뿔이 싸워? 너 싸울 마음이 눈꼽만큼이라도 있 긴 한거니? "아! 그러셨군요. 아이언스 공작님을 도와 드래곤과 싸우려 하다니, 정말 훌륭하십니다." "예, 예." "……." 아주 좋아서 죽네, 죽어. 하여튼 여자들이란 잘 생긴 남자만 보면 사족을 못써요. 에휴~ 언제 이런 외모지상 주의적 풍토가 사라지려는지. 한숨 밖에 안 나오는 군. "일단 제 막사로 들어가서 차나 한잔 하는 게 어떠신지요?" "조, 좋아요." 아무 여자에게나 친절한 게 바람둥이의 특징이라지만 아무리 봐도 정말 너무한다. 저러다가 순진한 소녀 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아닌지. "아!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도 같이 하시는 것이……." "아, 예…… 아니, 됐습니다." 지니의 제안에 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뮤리아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둘만 있기를 저렇게 간절 히 원하는데 어찌 그 사이에 낄 수 있겠는가? "그냥 두분이서 오봇하게 마시세요." "알겠습니다." 둘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난 등을 돌렸다. 아아~ 진정한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미남 미녀들 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어찌 살아가야 하는가? 솔직히 사일런스 지니가 부럽다. 흑~ 내가 지니 반만큼만 생겼으면 좋을텐데……. "아니야! 이건 옳지 못한 생각이야!" 잘 생긴 사람이 있으면 안 생긴 사람도 있는 법. 외모 때문에 기죽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자신의 얼굴 이 못 생겼다고 불평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차라리 좀 안 생겼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 게 사는 것이 훨씬 보기 좋다. 각자의 얼굴은 각자의 개성 아니겠는가? "아자! 자신감을 갖자!" ……라고 큰 소리로 외쳐보지만 그래도 지니가 부러운 것은 왜일까? 아아~ 잘 생긴 놈들이 세상에서 모 두 없어져서 내가 제일 잘 생긴 놈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요즘 라이가 활약하는 장면이 하도 안 나와서 라이가 단순히 귀여운 엘프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아지 고 있다. 라이가 귀여운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귀엽기만한 엘프는 아니었다. 라이는 마법사 협회 인 상아탑의 수장이다. 그렇다면 상아탑의 수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라이가 어째서 별 볼일 없는 히로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가? 그 건 의외로 히로가 별 볼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로에게는 무슨 볼일이 있는가? 그야 당연 8, 9클래스의 마법이다. 어차피 9클래스까지 익힌 사람은 이그리드를 제하곤 아무도 없으니 9클래 스 마법은 필요 없다쳐도 8클래스 마법은 반드시 필요했다. 한 손으로 꼽을만한 숫자지만 8클래스 마법사들 도 있긴 있기 때문이다. 상아탑은 마법사 협회로서 반드시 8클래스 마법을 손에 넣어야했다. 그래야 후학을 양성하고 숨겨진 마법 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은 오직 아이언스 히로의 손에 달렸다. 아이언스 히로만이 그 일을 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칼리는 라이가 반년이 넘도록 히로의 뒤를 졸졸 쫓아다녀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다 상아탑을 위 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하지만 요즘 들어온 보고서를 읽어보니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게 대체 일을 하자는 건지, 놀자는 건지……." 아무리 컨셉이 어린아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유아적으로 놀고 있다. 만날 하는 일이 먹고 노는 거라니? 아무 리 어린애라고 해도 너무하잖아! 가끔씩은 공부도 좀 해줘야지! 칼리는 걱정이 태산과도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아탑의 주인인 라이미안이 결정한 일. 누구도 그것 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기에 한가지 걱정이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변수로 등장한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아이언스 히로와 레 드 드래곤 크로니스가 한판 붙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이언스 히로가 죽으면 안 돼는데…….' 물론 칼리가 히로를 걱정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히로가 죽으면 마법서를 번역해줄 사람 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걸 안 하고 죽으려 하다니. 그리고 문제는 또 있었다. '이번 일에 라이미안님께서 말려들면 어떡하지?' 라이는 히로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렇기에 히로에게 위험이 생기면 라이도 위험에 처할 확률이 높았 다. 라이는…… '걱정하지 마, 칼리. 내가 다 알아서 할 게.' ……라고 말했지만 걱정이 안 될리 없었다. 생긴 건 유괴 대상 1순위처럼 생겨서 안 그래도 걱정이 되는 판국 인데. '라이미안님은 상아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분이야. 어떻게든 무사히 돌아오셔야 할 텐데.' 칼리는 라이가 아무런 상처 없이 밝은 모습으로 상아탑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 * * * * 나는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일루니아 여사님께 볼 일이 있냐고? 흥! 웃기지도 않아! 내가 그 아줌마한테 뭔 볼 일이 있겠어? 내가 볼 일이 있는 사람은 일루니아 여사님이 아 닌 인디다. 아무래도 크로니스와 싸우기 전에 조언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해석하자면 적을 알고 나를 알 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적을 파악하려 한다. 나에 대해서야 질릴만큼 알고 있으니 이제 그만 적을 조사하려는 것 이다. 색깔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인디도 엄연한 드래곤이다. 그렇기에 난 인디를 통해서 드래곤의 전투 능력 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그리고 후에 크로니스와의 싸움에서 그 대책을 써먹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위대한 책략인가? 나는 상대랑 일단 붙어보는 짓은 안 한다. 그건 무식한 짓이다. 적을 철저 히 조사한 후에 붙는다. 승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일루니아 여사님의 막사 앞에 도착했다. 난 노크를 할까 하다가 그냥 몰래 들어 가 보기로 했다. 설마 둘이 안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난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오늘도 업무 처리에 열심히 매달리시는 훌륭한 애국자 일루니 아 여사님. 여사님께서는 정신 없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인디가 서 있었다. 그냥 서 있 는 것이 아니었다. 두 손을 이용해서 일루니아 여사님의 어깨를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아아~ 저런 솜씨라니. 보고 있는 내가 다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저 정도로 숙달이 되려면 아마도 몇 년 동안 은 안마만 연습해야 할 것이다. 난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녀석이 프로라는 것을. 손놀림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무엇보다도 저 손끝에 담긴 정신. 그 정신은 사랑이었다. 손에 사랑을 가 득 담아 정성껏 주무르는데 어찌 시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시나 일루니아 여사님도 인간인지라 그런 안마를 받고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마치 극락에 와있 는 듯한 저 표정. 저것은 가식이 아닌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복한 표정이다. 얼마나 시원하면 저런 표 정을 지을 수 있을까? "일루니아님. 혹시 목이 마르지는 않으시나요? 제가 차라도 한잔 가져올 가요?" "괜찮아요." "혹시 뭐 시키실 일 있으시면 언제든 저한테 말씀하세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일루니아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러니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정 그러시다면 전신 안마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물론이에요." 전신 안마라니! 그런 블건전한 행위를! 여기서 우리는 전신 안마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성이 있었다. 전신 안마란 말 그대로 온몸을 안마하는 거 다. 다시 말해 인디가 일루니아 여사님의 온몸을 떡주무르듯 주무르게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아직 결혼도 안 한 남녀가 그런 불건전한 행위를 하려 하다니! 이건 천륜에 어 긋나는 일이야! "……."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어째서 난 이렇게 전신 안마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음음, 진 짜 이상하군. 그런데 전신 안마, 라고 하면 왠지 퇴폐적인 냄새가 풍기지 않나? 갸웃갸웃~. 그러는 사이 전신 안마가 시작 되었다. 침대에 길게 누워있는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는 그 위에서 두 손으 로 일루니아 여사님의 몸을 주물렀다. "아! 아!" 일루니아 여사님은 기분이 좋은 건지, 아픈 건지 모를 신음성을 간간히 내뱉었다. 으음, 진짜 퇴폐적으로 보 인다. 이 비좁은 막사 안에서 둘이 이런 행위를 하고 있을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난 인디가 안마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일루니아 여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싸늘하 게 변하는 여사님의 눈빛. 사람은 나아가야할 때와 물러나야할 때가 있다. 난 지금이 물러나야 할때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일루니아 여 사님의 싸늘한 눈빛이 얼었는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무, 무섭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한다. 왜 무서운지 는 알 수 없다. 그냥 무서운 것이다. 존재 자체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라고 해야 하나? 일루니아 여사님의 모습에서 누군가가 엿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인디는 황급히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 리고는 날 보며 말했다. "히로님이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 이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하는 걸까? 그냥 간단하게 '전 히로가 아닌데요' 라고 대답하면 저것들 이 믿어줄까? 이러저런 생각들을 하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문에 기대고 있던 나는 볼품 없이 안으로 굴러야했다. 데굴데굴~. "하하, 오랜만이네요."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난 일루니아 여사님은 냉혹한 킬러와도 같은 눈빛으로 나를 쏘아 보았다. "무슨 일로 쥐.새.끼.처럼 안을 엿보고 있었죠?" "……." 쥐새끼라니? 쥐새끼라면 '톰과 제리'에 나왔던 제리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디즈니의 유명 캐릭터 미키 마우 스를 말하는 건가? "그, 그게 그러니까…… 원래 그냥 들어오려고 했는데 두 분 분위기가 너무 다정해 보이셔서……. 하하, 그나 저나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께서는 오늘 참 아름다우시네요. 요즘 인생살이가 괜찮은가 봐요." "인생살이가 괜찮으냐구요? 누구 때문에 굉장히 힘들지요." "……." 그 누구가 누구일까? 설마 나는 아니겠지? "하하, 어떤 놈이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의 인생살이를 힘들게 하는 지는 몰라도 만나기만하면 제가 그냥 콱 -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놓겠습니다." "잘 됐네요. 그럼 어서 부러뜨리세요." "……예?" "다리 부러뜨리세요." "……." "제가 부러뜨려 드릴까요?" "……."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런 살벌한 말을 마구 내뱉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보 면 볼 수록 무서운 여자다. 난 세상이 무너져도 저런 여자랑 같이 살 자신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인디 는 참으로 대단한 드래곤이다. "흠흠, 아무튼 각설하고 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인디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물어 봤나요?" "……." 이렇게 무안을 주다니! 생각 같아선 여자가 뭐고를 떠나 한 대 치고 싶은데 드래곤이 애인으로 버티고 있으 니, 그러지도 못하고. 으휴~ 참자, 참어.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건가요?" "아, 그게 말이야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뭔가요?" "이곳에서는 말하기 좀 그런데……." 일루니아 여사님이 옆에서 노려보고 있어서 무서워. "알았어요.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일루니아님." "예. 그러세요." 저 다정한 모습. 마치 일 나가는 남편을 배웅해주는 주부 같다. 일루니아 여사님께 저런 면이 있었다니! 나한 테는 저런 모습 보여준적 한번도 없으면서!(그런 모습을 너한테 왜 보여주겠니?) 난 인디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난 인디를 내 막사로 데려갔다. "그냥 밖에서 얘기하시지." "안이 오봇하고 좋잖아." 원래는 나도 밖에서 얘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인디를 내 막사로 데려가는 데에는 커다란 이유가 있 다. 난 막사에 들어가자마자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그리고 멀뚱멀뚱 서 있는 인디에게 말했다. "일로와." "예?" "일로 오라고." "……." 순간 빨개지는 인디의 얼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얼굴색이 저렇게 변한 걸까? 설마 내가 자기를 침대 위 로 끌어 들여 그렇고 그런 짓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 자식이 누굴 호모로 보나! 내가 관심있는 건 오직 여자뿐이야! 그것도 연상! "잔말 말고 이리와!" 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치자 인디는 주춤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예쁘 다. 뭔 사내 녀석이 이렇게 예쁜 걸까? 이렇게 척 보기에도 여자 같이 생겼는데 꾸며 놓으면 얼마나 환상적일 까?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응? 그런 눈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음탕한 눈으로 훑어본줄 알겠다." "흑흑, 저는 임자가 있는 몸이랍니다." "나도 임자가 있는 몸이야!" "흑흑, 그러니 제발……." "제발 뭐?" "다른 건 다 드릴테니 제발 제 몸만은……." "니 몸이 어쨌다고?" "흑흑, 히로님께서 제 몸을 노리는 것 다 알아요." "……." "하지만 전 그런쪽에 취미가 없을뿐더러 저한테는 이미 일루니아님이 있기에……." "……." "흑흑, 그러니 히로님께 몸을 허락할 수 없답니다." "……." 이런 미친! 이게 지금 나랑 장난하나? "야, 이 자식아! 누가 니 몸이 필요하데? 안마나 하라고 불렀더니 이게 안마는 안하고 왠 헛소리만 떠들어대 고 있어? 너 갑자기 왜 안 하던 삽질을 하는데? 진짜 삽으로 한번 맞아 볼래?" 내가 외치자 인디는 눈물을 닦으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 안마요?" "그래. 안마! 마사지! 요즘 몸이 좀 뻐근해서 안마나 한번 받아보려고! 삽질 그만하고 당장 올라와서 안마 해! " "……." 잠시 벙찐 표정을 짓는 인디. 그러더니 이내 눈물 자욱을 전부 닦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흥! 진작에 이럴 것이지! "어디를 해드릴까요?" "그냥 전체적으로 다 해. 요즘 몸 상태가 좀 안 좋아. 드래곤과 싸우려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하니까 말 이야." "예." 다소곳하게 대답한 인디는 가늘고 흰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허! 시원하다!" 정말 손맛이 장난 아니다. 묵은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아.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이 놈에게 이 런 훌륭한 재주가 숨어 있었을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후후~ 이제부터 이놈을 내 전용 안마사로 써야지~. "어! 어! 거기 좋다! 거기 꽉꽉 좀 눌러 봐! 어이! 좋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마치 날아가는 느낌이다. 아! 정말 극락이 따로 없구나. 이런 좋은 게 있었다 는 걸 왜 난 몰랐지? "그런데 하실 말씀이란 게 무엇인가요?" "아! 그게 말이야…… 너도 잘 알다시피 내가 지금 싸우려는 상대가 드래곤이잖아." "그렇지요." "그런데 나는 정작 드래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단 말이지." "그래서요?" "그래서 드래곤에 대해 조사를 좀 해서 승률을 높이자는 거지." "그래서요?" "아이씨! 그래서 지금 조사를 하려고 하잖아!" "그, 그런가요?" "그래, 임마!" 아, 이 자식 말귀 드럽게 못 알아 먹네. 이 자식 드래곤 맞아? 어떻게 된 이해력이 우리 라이만도 못 해. "혹시 드래곤한테는 약점 같은 거 없니?" "약점이요?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진짜 없어?" "그런 것 같아요." "좀 확실하게 좀 말해 봐.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없습니다." "뭐?" "없어요." "아니, 드래곤도 생명체인데 약점이 없다구?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어떻게 이기라고?" "드래곤도 생명체긴 한데 일반 생명체와는 좀 틀려요." "틀리다니? 어떻게?" "일반 생명체는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라잖아요." "그런데?" "드래곤은 그 자체가 자연이라 할 수 있어요." "응?" 이게 뭔 말이다냐? 드래곤이 자연이라니? 안마를 마친 인디는 내 위에서 내려왔고 우리는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으음, 뭐라고 설명을 하는 게 좋을까요? 히로님도 아시다시피 드래곤은 극강의 생명체잖아요. 다른 생명체 가 감히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드래곤들은 이 힘을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지니고 있 지요." "그렇지. 그래서 난 한때 드래곤이 되고 싶었었지." "지금 상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드래곤 하나가 폭주를 하면 세계가 위험할 정도에요. 반면 다른 생명체들 은 아무리 폭주를 해봐야 그 피해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면 드래곤들은 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강한 걸까요? "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니? 그걸 니가 알지, 내가 아니?" "드래곤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은 그들이 세계의 균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죠. 히로님의 세계는 어떨 지 몰라도 이 세계는 다섯 마리 드래곤들로 인해 세계가 유지되고 있어요." "드래곤들이 세계를 유지시킨다고? 니들이 뭘 했는데?" "저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다만 저희가 존재함으로써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지요." "너희가 없어지면? 그럼 세계의 균형도 무너지는 거야?" "그렇지는 않아요." "왜?" "저희는 없어질 수가 없으니까요." "그건 또 뭔 소리야?" "말 그대로에요. 저희는 없어질 수가 없는 존재에요." "그, 그 말은 누구도 너희를 죽일 수 없다는 뜻이야?" "맞아요. 심지어는 그 자신도 자신을 죽일 수가 없어요. 다만 세계의 법칙에 소멸할 뿐이지요. 소멸할 때 가 되면 그를 대신할 다른 존재가 탄상하니 균형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아요." "……." 자살도 불가능하다는 건가? 드래곤이기 때문에? "자, 잠깐. 니들은 지금 크로니스를 죽이려 하잖아. 그를 어떻게 죽인다는 거지? 그리고 그가 죽으면 세계 의 균형은?" "우리가 죽이려는 것은 크로니스의 의식일뿐이에요. 본체만 소멸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균형에는 아무런 문 제가 없어요." "의식을 죽인다고?" "히로님께서 보고 계신 제 모습은 본체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의식일뿐이지요. 그건 크로니스 역시 마찬 가지에요. 아마 평소의 그라면 의식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 할 거에요. 하지만 지금 그는 미쳐있어요. 그래 서 틈이 있는 거지요." 인디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인간은 내가 최초…… 아 니, 두 번째일 것이다. 첫 번째는 아마도 이그리드겠지. "이런 중요한 사실을 왜 그 동안 안 말해 준거지?" "굳이 알려드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난 인디의 얘기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았다. 존재 자체로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드래곤들. 그런 드래곤 은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없다. "드래곤은 세계의 법칙에 의해 소멸될 때까지 죽지도 못한다 이거지?" "예." "그럼 그 세계의 법칙이라는 건 언제 없어지는데?" "세계가 소멸할 때 없어지지요." "……." 그렇다면 설마……. 난 크로니스를 떠올렸다. 가끔 그가 보여주었던 쓸쓸한 눈빛.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 그제야 난 알 수 있었 다. 크로니스가 왜 이 세계를 파괴하려 하는 지. * * * * * 크로니스는 오랫 동안 꿈속을 헤맸다.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분명한 것은 아 무 것도 없었으니. 자신이 인식하는 것이 곧 현실이었다. 크로니스는 그렇게 믿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그리드 또한 실체일 것이다. 평소와 다름 없는 공간, 평소와 다름 없는 분위기. 크로니스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이군." 먼저 입을 연 것은 이그리드였다. 크로니스는 자신이 놀랄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사라진 존재가 자신에 게 말을 걸고 있으니.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크로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둘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쭈글쭈글한 얼굴과 사방으로 흘러내린 흰색 머리카락. 그토록 그리던 이그 리드의 모습이 분명했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그를 만나면 할말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떠한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의 만 남이다. 하지만 마치 어제도 만났었던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일단 앉지." 이그리드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크로니스는 평소처럼 그의 맞은편에 걸터 앉았다. 크로니스가 물었다. "뭐 마실래?" 이그리드가 대답햇다. "평소 마시던 거." 평소 마시던 거라면 간단했다. 크로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난로 위에 올려져 있던 주전자를 집어 들었 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컵에 따라 찻잎을 우려냈다. 간단한 마법으로 가능한 일이지만 크로니스는 손수 존비 하였다. 그것은 그의 일종의 취미 생활이었다. 차 준비가 끝나자 크로니스는 뜨거운 찻물이 담긴 잔을 이그리드에게 건넸다. 둘은 말 없이 차를 홀짝홀 짝 마셨다. 크로니스는 차를 마시며 계속해서 이그리드를 바라 보았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이그리드 가 입을 열었다. "왜 자꾸 쳐다보는데?" "그냥." 크로니스의 대답에 이그리드는 피식 웃었다. 크로니스 역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이렇게 니 얼굴만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 녀석이 그만 좀 바라봤으면 좋겠다." "친구 사이에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친구 사이니까 그런 거야." 왠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도 그는 예전 그대로였다.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좋은 뜻이다. 그것은 곧 영원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 는 것은 없고,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영원히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영원이 나 다름 없는 시간을 사는 나에게 그는 유일한 동반자였다. 그런 그가 날 떠남으로 해서 난 혼자가 되었다. 그 와 함께한 시간은 겨우 100년에 불과했다. 그 시간이야 말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수천년의 시간과 앞으 로 살아갈 수천년의 시간과도 맞바꿀수 없는 귀장한 보물이었다. 화가 치밀었다. 크로니스는 살기어린 눈으로 이그리드를 노려보았다. "넌 어째서 죽은 거지?" "……." "어째서 날 버리고 간 거야?" "……." "대답해!" 크로니스가 소리치자 이그리드는 그제서야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 놓고 크로니스를 보았다. "내가 널 버렸다고 생각하나?" "그럼 아니야!? 넌 날 두고 혼자 가버렸어. 죽을 수도 없는 고통 속에서 날 홀로 내버려 뒀어!" "난 너의 친구야." 이그리드의 한마디에 크로니스는 입을 다물었다. 친구라…….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단어다. 자신에 게 이런 단어를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그리드뿐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더욱 소중했다. 그는 처음으로 만 난 친구였고, 사랑이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는 중요 치 않았다. 그에게 바란 것은 다만…….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랬어." "……." "영원히……." "영원이란 없어." "나도 잘 알아!" "그런데?" "넌 죽었어! 날 배신했다구! 난 끝까지 널 믿었어!" "난 널 배신하지 않았어." "아니야! 배신했어! 넌 날 혼자 남겨두고 죽었잖아! 이제 난 혼자야!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난 앞 으로 수천년의 시간을 혼자 살아가야 돼!" "……." "……." 침묵이 흘렀다. 이런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걸까? 한참 후 이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다는 말 따위는 필요 없었다. 크로니스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눈물샘에 고여있는 눈물은 끝내 흘러내렸다. 이그 리드는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너무 지쳤어.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지. 그래서 소멸을 택했어." "……." "너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해. 널 홀로 남겨두었으니까." "……." "세상에 영원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아. 난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할 수 없어." "영원까지는 바라지 않았어. 단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어." "난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있어." "……." "지금 내가 니 앞에 서 있는 것이 그 증거지." "증거?" "그래. 나는 지금 니 앞에 존재하고 있어. 만약 내가 사라졌다면 지금 너에게 얘기하고 있는 존재는 무엇이 지? 난 사라졌지만 너는 아직 날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난 니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거지."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너는 내 기억이란 말이야?" "맞아." "그렇다면 이건 환상이란 말이군." "후후~ 글쎄. 정말 그럴까?" "무슨 뜻이지?" "네가 인식하는 것이 곳 현실이야. 지금 이것이 환상인지 아닌지는 니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서 틀려지겠지. 나는 소멸했지만 나의 존재는 너의 기억 속에 살아있어. 그것을 통해서 난 너와 함께 하는 거 지." "하지만 그건 니가 아니야. 그건 단지 내 기억일뿐이야." "니 기억이 곧 나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크로니스는 이그리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환상일뿐이야!' 그렇게 생각해도 환상은 현실처럼 다가왔다. 이곳은 어디인 걸까? 주위 풍경은 어느덧 바뀌어 있었다. 황량 한 벌판. 그곳에 이그리드와 자신 둘만이 서 있었다. 이것은 나의 의식 속. 나는 지금 내 기억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떠한 마법도 최면도 없이 어떻게 의식 속으 로 들어온 걸까? 나는 미쳐있었다. 그가 없는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의 법칙에 묶여 있는 나는 스 스로 소멸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해서 생각해 낸 것이 파괴였다. 세계가 파고되면 법칙 또한 파괴된다. 그 러면 소멸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미 나의 의식은 폭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대체 누가……? "이그리드." 크로니스는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그리드.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으로 자신은 그의 존재 를 칭한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실제 존재하고 있는 그. 그 두가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 실제 존재하는 그의 모습이다. 내 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그의 단편적인 모습일뿐. 그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이 세상은 아직 살만 해." "니가 없는 세상따윈 필요 없어." "넌 혼자가 아니야." "난 혼자야."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너 또한 소멸할 생각인가?" "맞아." "그들은 널 막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알고 있어. 그들의 계획쯤이야. 그렇게 해서 내가 소멸할 수만 있다면 더 잘 된 일이지." "그렇게 되면 슬프겠군." "내 죽음으로 슬퍼할 존재는 아무도 없어." "아니, 적어도 한명은 슬퍼할거야." "누구……? 아!" 생각났다. 자신에게 도망치라고 외쳤던 그 소년. 이그리드의 전인. 크로니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그리드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니가 살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 크로니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그리드는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왜 그 녀석에게 마법을 물려줬는지 아나?" "아이리스를 위해서." "반은 맞췄군." "……." "내가 녀석에게 마법을 물려준 것은 녀석이 그 힘으로 아이리스를 재건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만이 전부는 아니야." "그럼?" "후후~ 글쎄. 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서였다고나 할까?" "……." "세상은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아이리스와 상아탑에서는 영웅으로 모셔져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것만 으로는 뭔가 부족했어. 그래서 증거를 남기고 싶었지. 내가 이 세계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를." 말을 마친 이그리드는 고개를 꺽어 하늘을 보았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피처럼 물든 하늘은 기괴한 느 낌을 자아냈다. "이제 시간이 다 됐어." 이그리드는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간이 다 되었다고? 무슨 의미지? 크로니스는 놀라 이그리드를 붙잡았다. "가려는 거야?" "……." "또 날 버리고 가겠다고?" "……." "내 마음을 알면서…… 이대로 떠나겠다고?"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그리드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너무 지쳤어. 너와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거야. 이제 그만 날 놓아줘." "그럴 순 없어." 크로니스는 이그리드의 팔을 더욱 꽉 움켜 잡았다. 절대로 이것만은 놓을 수 없었다. 다시 그를 내 곁에서 떠 나보낼 수 없었다. 환상이라도 좋았고 꿈이라도 좋았다. 영원히 깨지만 않는다면……. 이그리드는 주름 잡힌 손으로 크로니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순간 크로니스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 다. 그는 인간이었다. 드래곤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욕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 는 그것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다. 이제는 그를 놓아줘야 할 때다. 크로니스는 이그리드의 팔을 놓아 주었다. 이그리드는 크로니스를 살짝 껴안으며 말했다. "니가 날 기억한다면 난 너와 함께하는 거야. 그러니 가끔은 날 기억해줘." "그래. 넌 나의……." "……친구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그리드는 천천히 멀어져갔다. 잠시 후, 이그리드의 모습은 사라지고 황량한 벌판 위에 는 자신만이 서 있었다. 크로니스는 자신이 또 다시 혼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외로움은 느껴지지 않 았다. 크로니스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해를 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크로니스는 잠에서 깬 듯 번쩍 눈을 떴다. 짙은 어둠속에서 긴 꿈을 꾸었다. 크로니스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 며 그 어둠속을 뚫고 나왔다. 이제는 움직일 때다. > 문학/예술 > 판타지/SF 이태훈님 꿈나무 My 메일 카페 검색 뉴스 전체보기 로그아웃 fantasystory (cafe.daum.net/fanstoryso) 이태훈 게시판 자료실 소모임 회비모금함 사고팔고 내가 등록한 카페 목록 아이리스 연재 연재임돠 . 글쓰기 답글 최신목록 목록 윗글 아랫글 14권-09 번호:33 글쓴이: 어둥의후예 조회:537 날짜:2003/07/13 02:28 .. “때가 되었습니다.” 마치 사형 선고를 하는 것처럼 떨어진 인디의 말. 드디어 때가 되었단다. 무슨 때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조 차 없다. 크로니스와 싸야워할 때. 다시 말해 내가 죽어야할 때. 드래곤들은 전부 내가 죽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심지어는 인디까지도. 하지만 나는 아직 내 목숨을 포기 하지 않았다. 아직 결혼도 못 했는데 죽을 순 없어. 손자, 손녀…… 아니, 증손녀볼때까지 살 거다. 늙어서 벽 에 똥칠 할 때까지 살 거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우리 라이 다 커 서 시집 보낼 때까지는 안 죽어. 아니, 못 죽어! 난 자신 있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난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돼냐?” “적색 산맥입니다.” “적색 산맥이라면 크로니스의 레어가 있는 곳?” “예.” “…….” 모든 것이 시작된 그곳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군.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 하였던가? 후후~ 왠지 가슴이 두근 거리는 군.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지 않았다. 적당한 긴장은 집중력 강화에 도움이 되기 마련이지. 현재 기술이라 고 할만한 것들은…… 1. 청룡도법 2. 개나리 스텝 3. 빅장 40단 콤보 4. 더블 빅장 40단 콤보 5. 8클래스의 마법 이 다섯 가지다. 난 이 다섯 개를 적절히 이용하여 싸움에 임해야 한다. 나는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로 역사 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아자! 아이언스 히로, 파이팅! 내가 이렇게 나 스스로를 응원하는데 세 남녀가 나타났다. 오른쪽부터 제갈량, 에스카네스, 카르. 아이씨! 저 인간은 왜 또 담배를 꼬나 물고 있어? 구멍을 송송 뚫어 놓은 귀와 그 귀에 메달린 치렁치렁한 귀 걸이들. 쫙 빼입은 양복과 그 양복 위로 정신 없이 흘러내린 진녹색 머리카락. 마치 이마에 ‘나 양아치’ 라 고 써붙여 놓는 것 같다. 그래도 멋있기는 끝내주게 멋있게 생겼다. 역시 얼굴이 잘 생기면 아무리 양아스럽 게 하고 다녀도 폼이 나는 구나. 제갈량의 옆에는 에스카네스가 서 있었다.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 남자. 아무리 봐도 옆집 아저씨 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깜찍, 발랄, 청순함의 대명사처럼 보이는 미소녀 카르. 진짜 너무 예쁘다. 딱 내 동생 삼았으면 좋겠구만. 라이랑 둘이 자매하면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난 그렇게 드래곤들을 일일이 평가하였다. 그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아장아장~! 앗! 이 걸음 소리는 설마……? “라이야!” “오빠!”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는 라이. 이내 나의 품으로 뛰어든다. 난 그런 라이를 꼭 껴안았다. 이게 얼마만이니, 라이야? 이 오빠가 널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기나 하니? 왜 그 동안 오빠를 안 찾 아 온 거야? “우엥~ 오빠, 오빠!” 라이는 감격스러운지 계속해서 ‘오빠’를 외쳤다. 으음, 마치 오빠 부대를 보는 것 같군. 우리의 감격스런 재회가 끝나자 기다리고 있던 인디가 입을 열었다. “크로니스와 싸우기에 앞서 히로님께 무기를 지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기? 무슨 무기?” “말 그대로 무기입니다.” “난 청룡도 있는데.”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크로니스를 상대하기 무리일 것이라고 판단되기에 새로운 무기를 지급 할 생각입니다.” “공짜야?” “물론입니다.” 나는 이미 청룡도라는 훌륭한 무기가 있는데다가 나의 필살기와 초필살기는 맨손을 무기로 사용한다. 하지 만 공짜라면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겠지. 나중에 갖다 팔아도 되니까. “좋아. 어서 줘.” “제가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럼?” “좋은 무기는 사용자가 직접 골라야 합니다.” “나보고 직접 고르라고?” “예. 히로님께서 알맞다고 생각하시는 적절한 무기를 고르세요.” “뭘 보여줘야 고르던지 말던지 할 거 아니야?” “지금부터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한 인디는 바닥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렸다. “이 위에 올라서세요.” 난 라이를 안고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잠시 후, 마법진이 빛나더니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헉! 이곳은…….” 놀라는 나에게 인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저희 드래곤들이 수만년 전부터 무기를 모아 놓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히로님께 맞는 무기를 찾으 시길 바래요.> 그랬군. 좋았어! 여기 있는 무기들을 싹쓸이 해가야지! <하지만 반드시 한가지 무기만을 고르셔야 합니다. 그게 이곳의 규칙이거든요. 무기를 고르시면 다시 마법 진 위에 올라서세요. 그럼 전 이만.> 으음, 한가지만이라. 드래곤들이 참 쪼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렇게 많으니 몇 개씩 집어가도 티 도 안 나겠군. 하지만 규칙이라니 뭐 어쩔 수 없지. 난 일단 이곳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길게 이어진 좁은 통로 좌우에는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비 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산더미 같다. 좀 정리라도 해 놓을 것이지. 라이는 이 신기한 광경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렸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재밌니?” “예!” 재밌긴 뭐가 재밌어? 라이는 내 주위를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며 나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와아, 오빠! 저것 좀 보세요.” “앗! 저것은!” 라이가 가르킨 곳에는 흰색 막대기 끝에 커다란 하트가 달려 있고, 그 주위에 보석이 숭숭 박힌 봉이 있었 다. 팔뚝 정도 길이의 그 봉은 분홍색과 흰색이 잘 조화된 휘양찬란하고 유치찬란한 모습으로 마치 미소녀 변 신물에서나 쓰일 법한 요술봉 같은 그런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난 그것을 이러저리 돌려보고 여기저기 만져본 결과 그것이 마법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사용자 의 마법력을 2배 가까이나 높혀주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마법봉. 게다가 옵션으로 광(光)계열의 스펠들은 주 문 없이 시동어만 외쳐도 쓸 수 있게 되어있다. 한마디로 거의 완벽의 가까운 아티팩트라 할 수 있다. 상당히 탐나는 물건이다. 생긴 게 이 모양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집어 갈 텐데. 난 입맛을 다시며 등을 돌렸 다. 그런데……. “라이야, 너 거기서 뭐하니?” 라이는 그 봉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라이가 저런 요술봉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귀엽다. 하 긴 세일러문이나 요술공주 밍키 따위는 우리 라이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들이지. 미소녀 전사라면 적어 도 우리 라이 정도는 되야하는 것 아니겠어? 뿌듯뿌듯~. 아! 역시 잘 키운 딸, 열 아들 안 부럽다니까. 난 벅차오르는 감정을 자제하며 라이에게 말했다. “너 왜 자꾸 거기서 그러고 있니? 이리로 오렴.” 도리도리~. 응? 도리도리라니? 왜 고개를 젓는 거지? “왜 그래, 라이야?” 내가 묻자 라이는 요술봉을 품에 꼭 끌어 안으며 말했다. “라이 이거 갖고 싶어요.” “…….” 응? 갖고 싶다니? “라이 이거 사주세요.” “…….” 응? 사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라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게 마음에 들어?” 끄덕끄덕~. “정말? 얼마나 마음에 드는데?” “아주 많이요.” “아주 많이? 얼만큼이나 많이? 오빠보다 더 마음에 들어?” “그만큼은 아니지만…….” 후후~ 역시 라이는 나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군. “그래도 라이는 이거 갖고 싶어요.” 난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안 돼, 라이야. 지금은 그걸 가지고 갈 수 없단다.” “왜요?” “아까 인디 오빠가 한 말 들었지? 이곳에선 단 하나의 무기만 가지고 나갈 수 있단다. 그런데 라이가 그것 을 가지고 나가면 이 오빠가 가지고 나갈 게 없어지잖아. 그러니 어서 내려 놓으렴.” “싫어요!” “뭐?” “라이는 이게 갖고 싶단 말이에요!” 눈을 흘기며 크게 소리치는 라이. 마치 해머로 머리를 내리치는 듯한 커다란 충격에 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 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설마 내가 잘못들은 거겠지? 난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라이에게 말했다. “라이야, 어서 그거 내려 놓으렴. 오빠 빨리 다른 무기 찾아야 하니까.” “싫어요!” “…….” 헉! 어떻게 이런 일이! 그 순종적이고 착한 라이가 어째서 이렇게 반항을 하는 거지? 이거 라이 맞아? 혹 시 무늬만 라이 아니야? “라, 라이야. 너 방금 뭐라 그랬니? 다시 한번 말해봐.” “싫다고 했어요. 라이는 이거 가질 거예요.” “뭐, 뭐?” “이거 가질 거란 말이에요!” “……아!” 난 그 자리에서 이마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누가 엠뷸런스 좀 불러줘.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 의 라이가…… 나의 라이가…… 눈을 흘겨 뜨며 반항을 하다니……. 내가 딸자식을 잘못 키웠어! 다 내 탓이 야! 그 동안 너무 오냐오냐 했던 것이 문제였다. 평소엔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잘못을 했을 때는 주저 없 이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하는건데. 이건 전부 내 잘못이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이에게 다가갔다. 라이는 요술봉을 꼬옥 껴안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 다. 난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당장 그거 내려 놔.” “시, 싫어요.” “내려 놔.” “시, 싫어요.” “내려 놔!”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우에에엥~.” 내가 소리를 치자 바로 울음을 터트리는 라이. 평소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안아서 달래주었겠지만 오늘은 사 정이 좀 틀리다. 이렇게 투정 부려봐야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줘야 한다. 그래야 다음번 엔 투정을 안 부리지. 난 라이의 품에 있는 요술봉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라이는 몸을 웅크리며 안 뺏기려고 안간힘 을 썼다. “우에에엥~. 이거 사줘요. 라이 이거 갖고 싶단 말이에요.”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우에에엥~.” “너 왜 이렇게 오빠 말을 안 듣니? 자꾸 그러면 집에 가서 혼내줄 테야.” “우에에엥~ 제발요, 오빠. 라이는 이거 너무너무 갖고 싶어요. 이거만 사주면 다시는 아무 것도 사달라 는 말 안 할 게요.” “너 니가 그렇게 투정을 부리면 내가 못 이기는 척 사줄 거라 생각하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 한번 안 되 는 건 안 되는 거야.” 낑낑~. 난 요술봉을 뺏기 위해 안감힘을 썼지만 라이가 목숨을 걸고 사수하는 바람에 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 다. 조그만 게 힘은 쎄 가지고. “라이, 너 정말 이럴 거야? 누가 이러라고 가르쳤어? 오빠가 너 이러라고 가르쳤니? 어른이 말을 하면 들어 야 할 것 아니야.” “우에에엥~.” “울어도 소용 없어!” “우에에엥~.” “이게 그래도 끝까지 울어? 너 혼 좀 나 볼래? “우에에엥~ 라이는 혼 나는 거 싫어요.” “그럼 어서 그거 내려 놔!” “이거 내려 놓는 건 더 싫어요!” “…….” 어린 게 정말 고집이 쎄다. 이런 고집 어렸을 때 꺽어 놓지 못하면 나중에 기르기 더 힘들어진다. “라이의 꿈이 착한 엘프라고 했지? 그런데 지금 그 행동은 뭐야? 그게 착한 엘프가 할 짓이야?” “흑흑.” 울면서도 요술봉은 죽어도 못 놓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 건 나쁜 엘프나 하는 짓이야.” “흑흑,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에요!” “그럼 그 행동은 뭐야? 착한 엘프는 그런 짓 안 해! 이 오빠가 그렇게 그러치던?” “그래도 라이는 이게 갖고 싶단 말이에요!” “…….” 아아~ 충격이 점점 심해진다. 순진하게만 보였던 라이가 이렇게 한 땡깡 부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 말 로 해서는 안 되겠어. 매를 대는 수 밖에. 잔인하다고 욕하지 마라.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자 식 매 한 대 더 때리는 법이다. 외국 속담에도 자식을 망치기 싫으면 매를 아끼지 말라고 하였다. 애가 잘못했 을 때는 따끔하게 혼내는 것이 부모가 할 도리다. 난 우리 라이를 버릇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아. “너 셋 셀 동안 그거 내려 놔. 만약 오빠가 셋 셀 때까지도 그거 안 내려 놓으면 오빠가 혼내줄 거야.” 난 때리기에 앞서 미리 경고를 해주었다. “일.” 라이는 무서워하면서도 요술봉을 놓지 않았다. “이.” 라이는 다리까지 덜덜 떨면서도 요술봉을 놓지 않았다. “삼.” 놓기는커녕 더욱 꽉 움켜쥔다. 아~ 이 배신감. 정말 간만에 느껴보는 심적 고통이다. 라이가 내 경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땡깡을 부릴 줄 은 정말 몰랐다. 난 그래도 셋까지 세면 라이가 못 이긴척 내려 놓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희망사항 일뿐이었다. 난 라이의 허리를 붙잡고 내 무릎 위에 눕혔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서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찰싹- 찰싹-! 절대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지 말지어다. 나도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께 이렇게 맞았다. “으아아앙! 아파요~.” 라이의 울음소리에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이 괴로웠다. 맞는 라이는 엉덩이 좀 아프고 말겠지만 때리 는 나는 정말 미칠 것 같이 마음이 아프다. 이게 다 널 위한거란다, 라이야. 널 때려야만 하는 이 오빠의 심정을 이해하렴. “우에에엥~.” 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때렸다. 이번 기회에 애 버릇을 확실하게 고쳐 놔야겠어. “울지마! 뭘 잘했다고 울어? 라이는 오빠 말도 안 듣는 나쁜 엘프야.” “우에에엥~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에요. 라이는 착한 엘프란 말이에요.” “시끄러! 착한 엘프가 이렇게 오빠한테 대들어? 이렇게 말 안 듣는 착한 엘프도 있어?” 찰싹- 찰싹-! “으아아앙~.” 라이는 내 품안에서 열심히 버둥거렸지만 난 손을 멈추지 않았다. 라이는 오기가 생기는지 요술봉을 더 욱 꽉 움켜 잡았다. 마치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수하겠다는 저 비장한 눈빛. 오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는 건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라이가 내 말을 안 듣고 끝까지 이렇게 땡깡을 부린다 이거지? 어디 니가 이기 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난 때리는 척 하다가 라이가 방심한 틈을 타 요술봉을 빼앗았다. “우엥~ 우엥~ 돌려줘요~.” 난 라이의 애원을 무시하고 재빨리 요술봉을 저멀리 던졌다. “으아아앙~.” 벌떡 일어나 요술봉을 찾으러 가려는 라이. 난 라이의 허리를 덥썩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우엥~ 우엥~ 라이의 요술봉~ 우에에엥~.” 애가 갖고 싶어한다고 다 사줘 버릇하면 애 망치기 십상이다. 애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애가 좋아하는 것 을 포기할 줄도 알게 가르쳐야 한다. 게다가 만약에 라이한테 저것을 사준다 치자.(정확히 말하자면 사주 는 건 아니지만) 그럼 난 어쩌라고? 난 뭐들고 싸워? 내가 이 나이에 요술봉 휘두르며 싸울 수는 없잖아.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를 용서치 않겠다! 구라와 공갈의 요정 세일러 히로!’ 역시 뭔가 이상하다. 이런 짓 했다가는 삼대가 욕 먹기 십상이다. 아마 역사책에 씌여져서 두고두고 씹힐 거 야. 그러니 절대 저 요술봉을 가지고 갈 수는 없다. “흑흑…….” 마치 세상이 다 끝장났다는 듯 구슬프게 흐느끼는 라이. 그래도 저 요술봉을 사줄 수는 없다. 나는야 엄격한 아빠~. 가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네~. 그러는 나에게 어디선가 갑자기 인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제가 실수를 했네요. 반드시 한가지만 고르라고 했는데…… 그거 한사람 앞에 하나씩이에요. 잘못 알 려드려서 죄송해요.> 순간, 흐르는 침묵. “…….” “…….” 아이씨! 저 자식은 알려줄 거면 빨리 알려주고 아닐거면 차라리 알려주질 말던가! 왜 지금와서 지랄이야? 난 아직까지도 울고 있는 라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라이야. 저게 그렇게도 갖고 싶니?” 끄덕끄덕. “그럼 오빠가 저거 사줄테니까 다시는 뭐 사달라고 하면 안 돼. 알았지?” 역시 끄덕끄덕. “또 뭐 사달라고 하면 그땐 더 심하게 혼내 줄거야? 원래는 이번에도 안 되는 건데 라이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니 이번엔 오빠가 특별히 사주는 거야. 망가뜨리지 말고 아껴서 오래오래 써야 돼.” “예. 라이 안 망가뜨리고 조심해서 쓸게요.” 그제야 라이는 눈물을 뚝 그치며 밝게 웃었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가 아까 집어던진 요술봉을 찾아 라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헤헤~.” 저 밝은 웃음. 그렇게나 좋을까?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사줄 걸. 나는야 착한 아빠~. 라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준다네~. “고마워요, 오빠. 라이 이거 아껴서 오래오래 쓸게요.” 그렇게 말하며 내 볼에 뽀뽀를 하는 라이. 쪽~. 정말 너무 좋아한다. 진작 사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정도로. 난 기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라이에게 말했다. “어서 가자. 오빠 것도 하나 골라야하니.” “예.” 내가 앞장 서서 걸어가자 라이는 재빨리 아장아장 나의 뒤를 따라왔다. 요술봉을 품에 꼭 안은 채. 저러다 가 나중에 잃어버리면 울고불고 난리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 라이 것은 골랐겠다, 내 것만 고르면 끝이다. 그런데 뭘 골라야할지 모르겠다. 너무 많아 서. 내 주위에 널리고 널린 것이 전설의 병기들이었다. 지금 내가 밝고 있는 검만 해도 별 볼일 없어 보이지 만 바깥 세상에 가지고 나가기만 해도 명검 소리를 듣기 충분하다. 아아~ 좋은 무기는 생명과도 같은 것. 실제로 좋은 검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전재산을 바치는 경우도 있다. 싸움터를 전전하는 사람이라면 무기 는 곧 생명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난 이번 싸움이 끝나고나면 내가 가진 무기들을 전부 팔아버릴 생각이다. 비싼 돈을 받고 팔 아서 그 돈으로 작은 집을 사서 라이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이야 말로 나의 가장 큰 꿈이다. 누구도 그 꿈을 깰 수는 없어! 설사 크로니스라 하더라도! 그렇기에 난 싸움을 택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당당하게 크로니스와 맞서겠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끝까지 도착했다. 으음, 생각을 하느라 무기는 하나도 안 봤군. 난 방향을 바꾸 어 다시 걸었다. 이렇다 할만큼 마음에 드는 무기가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내가 무기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그냥 주면 주 는 대로, 잡히면 잡히는 대로 휘두르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사일런스 지니라도 데리고 올 거 그랬 나? 그 인간은 못 하는 게 없으니 무기도 잘 고를 것 같은데. “앗, 오빠! 저것 좀 봐요!” “……헉!” 라이가 가르킨 곳에는 녹슨 철검 하나가 꽂혀 있었다. 이럴 수가! 녹슨 철검이라니! 내가 왜 이렇게 놀라는 건가? 굳이 이렇게 놀랄 필요가 있나? 하지만 이건 정말로 놀라웠다. 이곳은 온갖 전설의 병기란 전설의 병기는 몽땅 모인 곳이다. 이런 곳에 어째 서 녹슨 철검 따위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를 뒤져보았다. 역시 보이는 것들은 전부 휘양찬란하게 빛나는 전설의 병기 들뿐이었다. 생긴 것부터가 마치 ‘나 전설의 병기요. 가짜 아님.’ 이라고 써놓은 것처럼 삐까뻔쩍한 전설의 병 기들 사이에 있는 녹슨 철검. 대체 저 철검에는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인가? 난 조심스럽게 검 주위로 다가갔다. 그리고 더욱 조심스럽게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다행히 이상 작용 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보면 볼수록 녹슨 철검처럼 보인다. 색다른 기운이나 예리함 등은 느껴지지 않 는다. 하지마 나는 그 검에 주목했다. 전설의 병기가 널리고 널린 곳에 존재하는 녹슨 철검이라……. 확실 히 뭔가 있어 보인다. 아마 이것도 전설의 병기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전설의 병기가 왜 이런 모습으로 존재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검이 특별한 것은 사실이다. 이 검에는 분명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을 테 고, 그 비밀이 풀리는 순간 어떠한 명검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닌 절대 명검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부르르~. 검을 잡은 손이 떨려왔다. 역시 나의 안목은 탁월해! 이게 절대 명검임은 내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몰랐을 것 이다. 하긴 휘양찬란 삐까뻔쩍한 칼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누가 이런 녹슨 철검에 관심이나 가졌겠는가? 하지 만 난 겉모습에 구애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심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심안을 통해서 난 이 검 의 본질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것을 절대 명검이라 자신을 하는 가? 난 그 이유를 이렇게 판단해 본다. 드래곤들이 창고 대방출……이라는 명목으로 정말로 창고를 대방출 하였 다. 하지만 드래곤들도 조금 아까운 마음이 있을 것이다. 절세 병기를 공짜로 주려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좋 은 것을 뽑아가면 어쩔 것인가? 나중에 다시 달라고 하기도 뭐하지 않은가? 그래서 드래곤들은 가장 좋은 검 을 골라 일부러 안 좋은 검처럼 위장을 해 놓은 것이다. 내가 뽑아가지 못하도록. 그게 바로 이 녹슨 검이다. 후후~ 드래곤들은 여기서 한가지를 잊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의 탁월한 안목.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녹 슨 검 따위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심안을 가지고 있는 자. 사물의 본질을 파악한다. “좋았어! 난 이 검을 택하겠다!” 난 녹슨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순간, 서광이 내 머리 위를 비추는 듯 했다. 짝짝짝~. 감동했는지 열심히 박수를 치는 라이. “멋져요, 오빠!” “…….” 너무 당연한 얘기는 자제하렴. 무기를 손에 넣은 나는 라이와 함께 마법진에 올라섰다. 그러자 마법진이 빛나며 다시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 다. 주위를 둘러보니 원래 그 장소다. 인디는 우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기는 잘 골랐나요?” “예!” 라이는 힘차게 대답을 하였다. “어디 좀 볼 수 있을까요?” “이거요.” 라이는 자기가 고른 요술봉을 인디에게 쭉 내밀었다. 살짝 놀라는듯한 인디의 표정. 인디는 라이의 머리 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은 것을 골랐네요. 라이님께 잘 맞는 완드(wand)에요.” “헤헤~.” 인디는 이번에는 나에게 물었다. “히로님께서는 뭘 고르셨나요?” “후후~ 놀라지 마시라. 바로 이거다.” 난 녹슨 철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인디는 매우 깜짝 놀랐다. “……헉!” 신음소리까지 낼 정도로 놀라다니. 역시 이것은 절세 명검이 틀림 없어. 크크, 이 귀중한 물건이 내 손에 들 어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하지만 이미 늦었어. 인디는 녹슨 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이건…….” “아아, 말 안해도 다 알아. 절세 명검 맞지?” “……예? 절세 명검이라니요?” “후후, 다 알면서 왜 그래? 이제와서 모른척하면 내가 넘어갈 것 같아? 니가 뭐라 그래도 난 이 검을 포기 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 줄 알아.” “뭔가 착각하셨나 본데, 그건 절세 명검이 아니에요.” “……!” 인디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게 절세 명검이 아니라? 그렇다면 절세 명검 따위는 비교도 안 될만큼 좋 은 검이란 말인가? 오오! 이 검이 좋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정말 놀랍구나! 난 새삼 나의 안목에 감탄하였다. 그 순간, 인디가 말했다. “그건 그냥 녹슨 철검일뿐이에요.” “……!” 뭐? 그냥 녹슨 철검이라고? 난 처음에 인디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디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 이게 녹슨 철검일뿐이라니? 이거 절세 명검 아니었어?” 내가 묻자 인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어딜 봐서 절세 명검이에요? 녹이 묻고 날도 무딘 것이 무 하나 못 자르게 생겼는데.” “물론 생긴 거야 그렇게 생겼지만 그래도 뭔가 특별한 기능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스치기만 해도 적 을 무력화 시킨다는…….” “글쎄요. 확실히 그 정도로 녹이 슬었으면 스치기만 해도 파상풍이 생기긴 하겠네요. 하지만 드래곤이 파상 풍으로 죽길 바라는 것은 무리 아닐까요?” “…….” 정말로 내가 쓸데 없는 것을 주워온 건가? 난 그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분명 무슨 능력이 숨어있을 거라 생각해서 들고 나왔는데 스치면 파 상풍이라는 어이 없는 능력 밖에 없다니. “이, 이건 말이 안 돼.” “예? 뭐가요?” “아니, 생각해 봐. 그곳은 절세 병기들만 모여있는 드래곤들의 무기고였잖아. 그런 곳에 어떻게 별 볼일 없 는 녹슨 철검이 있을 수 있는 거지?”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아마도 누가 실수로 넣어 놓은 것이 아닐까요? 드래곤들도 가끔 실수는 하니까.” “…….” 그제야 난 내가 잘못 골라도 심하게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난 굉장한 쪽팔림을 느끼며 주위 드 래곤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제갈량의 눈. ‘병신.’ 그 다음 에스카네스의 눈. ‘진짜 재수 없는 놈이군. 발에 채이는 게 절세 병기인 곳에서 골라도 저딴 걸 골라오냐? 인간이 얼마나 재수 가 없으면…… 쯧쯧.’ 마지막으로 카르의 눈. ‘쌤통이다. 빨리 가서 크로니스한테 죽기나 해.’ 난 고개를 숙이며 나의 무지함에 대해 잠시 반성하였다. 역시 모든 것은 본질 보단 겉모습이 중요하다. 먹 기 좋은 떡이 보기도 좋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본질은 뭔 본질이야? 겉모습만 멋있으면 장땡이지! 집 에 돈 한푼 없어도 아르마니 구두에 구찌 선글라스 쓰고 빨간색 페라리 몰고 다니면 얼마나 폼 나는데! 난 녹슨 검을 인디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인디가 물었다. “왜 이걸 저한테?” “바꿔줘.” “……예?” “구입한지 아직 1시간도 안 지났으니까 바꿔줘.” “저, 저기 그게…….” “빨리 바꿔줘.” “죄, 죄송하지만 한번 고른 무기는 두 번 다시 고를 수 없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아이씨! 누가 공짜로 하나 더 갖는데? 바꿔 달라는 거잖아. 이거 너 갖고 나한텐 다른 거 하나 골라줘.” “안 돼는데요.” “왜?” “원칙이…….” “원칙은 뭔 원칙이야? 산지 1시간도 안 된 물품이 교환도 안 되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자꾸 이러 면 나 소비자보호센터에 고소한다!” “그건 히로님께서 사신 게 아니라 저희가 공짜로 드린 건데…….” 나쁜 자식! 우물쭈물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사실 말이야 인디 말이 맞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물러날 수 는 없다. “그래서? 못 바꿔주겠다는 거야?” 난 소비자의 주권을 찾기 위해 끝까지 투쟁을 벌일 생각이었다. 만약 안 바꿔주면 바닥에 돗자리 깔고 드러 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디의 다음말에 난 모든 것을 포기해야했다. “사은품은 교환이 안 됩니다.” “…….” 사은품은 교환이 안 된단다. 맞아. 사은품은 교환이 안 됐었지. 백화점에서도 사은품은 교환 안 해줬어. 흑~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좋은 무기 고르려다가 완전히 쪽박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겉모습에 현혹되 서 고를 걸. 난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어 녹슨 검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아이씨! 골라도 하필 이런 불량품을 고르다니!” “그래도 스치면 파상풍인데…….” 이 자식이 지금 누구 염장지르나? “시끄러!” “……예.” 내가 소리치자 인디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좋아. 어차피 무기 따위는 필요 없어. 진정한 용사는 무기의 능력 에 의존하기 보단 자신의 능력에 의존한다. 게다가 나에게는 필살의 기술 빅장과 바람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 이는 개나리 스텝이 있지 않은가? 전설의 무기가 없어도 드래곤 따위는 문제 없어! “헤헤~.” 누구는 녹슨 철검 주워와서 열 받아하고 있는데 누구는 요술봉을 끌어 안고 행복하게 웃고 있으니 참 기분 이 이상하다. 이걸 보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그러는 건가? “이제 출발 하도록 하지요.” “그래.” 인디를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은 먼저 텔레포트 마법을 써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다. 난 인디의 손을 잡 고 이동하려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말했다. “아! 잠깐. 아직 시간 좀 있지?” “예.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할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인데요?” “대국민 연설.” “……예?” 난 일단 용사병 환자들을 전부 공터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긴급히 마련된 단상 위에 올라가 대국민 연설 을 시작하였다.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내 말에 바싹 긴장하는 용사병 환자들. 난 말을 이었다. “크로니스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웅성웅성~. 그 말이 불러온 파장은 너무나도 컸다. 순식간에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난 그들의 흥분을 진정시키며 말했 다. “놀랄 것 없습니다. 이미 일은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지금 저는 크로니스와 싸우러 갑니다.” 다시 웅성웅성~. 난 그 웅성거림을 무시하며 외쳤다. “어쩌면 저는 이번 싸움에서 죽을 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저는 두렵습니다. 하지만 전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 다. 왜냐하면 저의 이 두 어깨에 이 세계의 운명이 걸려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계를 지키기 위 해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두 팔이 잘리면 다리로, 다리마저 없어지면 이빨로라도 싸우겠습니다. 설사 제 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크로니스를 물리치고 이 세계를 지켜내겠습니다!” 와아아아-! 일제히 터지는 함성 소리. 아~ 너무 기분 좋다. 이런 맛에 정치인들이 심심할 때마다 연설회를 하는 거구 나. 역시 난 정치인 체질인가봐. “전설의 용사 히로님의 각오는 잘 알았습니다.” “우리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모두 일어나라!” “무기를 들어라!” “히로님과 함께 싸우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 1만 2천 명에 달하는 용사병 환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얼어서 무기를 머리 위로 들었다. 와아아아-! 그들이 내뿜는 함성이 천하를 진동시킨다. 정말 굉장한 사기가 아닐 수 없다. 얘들 데리고 전쟁하면 100만 군 대도 쓸어버릴 수 있겠다. 아마 사기로만 따진다면 그 어떤 군대도 얘네들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얘네들은 자발적으로 뭉친데다 가 목표 의식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다. 좋 게 보자면 성취욕이 강하고 나쁘게 보자면 광신도나 다름 없다. “이 일은 세계의 운명을 결정 지을만큼 커다랗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상대 는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입니다. 싸움이 시작된다면 여러분들의 생사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들 중 상당수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 됩니다. 상대는 드래곤이니까요. 여러분들께 마지막으로 선택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았거나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 다면 지금 돌아가십시오. 목숨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특히 자신의 목숨이라면 말입니다. 부디 헛되이 목 숨을 버리지 마시고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난 말을 마치고 기다렸다. 돌아갈 사람들은 돌아가기를. 하지만 1만명이 넘는 사람들 중 돌아가는 사람 은 단 한명도 없었다. 진짜 단 한 명도. 저 중에서 분명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도 몇 명쯤 있을 것이다. 그런 데 아무도 돌아가지 않으니까 자신만 돌아가기 쪽팔려서 그냥 발 붙이고 서 있는 것이겠지. 체면 차리다가 목 숨 잃는 경우도 있으니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 텐데. “저희는 세계 평화를 위해 이미 한 목숨 바쳤습니다!” “끝까지 아이언스 히로님을 따라 드래곤과 싸우겠습니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습니다!” 와아아아-! 심심하면 소리를 질러대는 용사병 환자들. 하아~ 댁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굉장히 두렵다. 하지만 나 아니면 세계 평화를 지킬 사람 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싸우련다. 난 옆에 있는 인디에게 말했다. “저것들 다 데리고 텔레포트 할 수 있겠냐?” “예? 저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시게요?” “응.” “저 사람들은 싸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나도 잘 알아.” “그럼 왜?” “어차피 나도 쟤들 데리고 싸울 생각은 없어. 쟤들은 다만 병풍일 뿐이야.” “병풍이라니요? 무슨 뜻인지…….”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 아무튼 저것들 다 데리고 가자.” “예. 히로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 “뭘요. 당연한 일인 걸요.” 말 잘 듣는 착한 드래곤 인디. 나중에 <착한 드래곤상>이라도 하나 주고 싶다. 아무튼 이걸로 출발 준비 는 전부 끝났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된다. 간만에 크로니스를 만나려니…… 그것도 적으로 만나려니 벌써부 터 가슴이 떨린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로구나~. 이래서 영웅은 힘들어. 언제나 배신과 모략을 견뎌내야 하니. 어쩌면 난 살아서 이곳에 돌아올 수 없을 지 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지며 모든 것이 색다르게 보였다. 지금 보고 있는 하늘을 내일 은 못 볼지도 모른다니. 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낯익은 여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언니~.” 라이가 이렇게 소리를 치는 것을 보니 상대는 루시아였다. 루시아는 내 앞으로 다가와 나의 두 손을 꼭 붙잡 았다. “꼭 가셔야만 하나요?” “예.” “그렇다면 잡지 않을 게요. 단…….” 루시아는 웃음을 지었다. “꼭 이기고 돌아오세요.” “…….” 헉! 이런 감동적인 장면 연출이라니! 난 내가 참으로 감동스러운 장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놀라며 루시아의 손을 움켜잡았다. 생각 같아서 는 껴안고도 싶지만 주위 눈이 있어서 참는다. “제가 돌아오면…….” “……?” “함께 라이를 기를까요?” “…….” 오옷! 내 입에서 이런 대담한 말이 나오다니! 말한 나도 놀랐고, 듣는 루시아도 놀랐다. 잠시 동안 놀란 표정 을 짓고 있던 루시아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헉! 그건 무슨 의미지? 단순히 라이를 같이 기르자는 건가? 아니면, 자기가 엄마할테니 나보고 아빠하라 는 건가? 으음, 제발 후자였으면 좋겠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기다리고 있을 게요.” 난 루시아를 스쳐 지나갔다. 내 뒤를 라이가 졸졸 쫓아왔다. 난 인디에게 말했다. “볼 일 다 끝났으니까 가자.” “예. 그럼.” 인디는 텔레포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인원 수가 너무 많다보니 조금 힘든가 보다. 하긴, 한번에 1만 2천 명을 텔레포트 시킨다는 것은 드래곤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기암괴석들이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흉물스러운 산맥. 예전에 봤을 땐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위용있고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흉물스런 모습만 남아있을 뿐이었 다. 마치 자연 파괴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적색 산맥. 크로니스의 레어가 있는 곳. 최후의 전장으로는 잘 어울리는 곳이군. 크로니스와 나, 둘 중 하나는 이곳에 뼈를 묻어야겠지. 어쩌 면 둘 다 묻어야할 수도 있고. “이동하지.” “예.” 나와 라이, 그리고 인디. 이렇게 셋뿐이라면 이동도 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뒤에는 무려 1만 2천에 달 하는 용사병 환자들이 있다. 이들을 다 데리고 이동을 해야하니. 휴우~ 아무래도 괜히 데려왔나보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이윽고 1만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만한 공터가 나타나자 우리 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잠깐 휴식!” 내가 외치자 산 타느라 지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일제히 보따리를 풀러 도시락을 나 눠 먹고 담소를 나누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니들 지금 소풍 왔냐? 순간, 저것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뒤통수를 한대씩 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도 옛말에 먹을 땐 개 도 안 건드린다는 속담이 있기에 난 그들이 도시락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남들 먹는 것만 보려니까 심심하다. 왠지 배도 좀 고픈 것 같고. 싸움을 하려면 뱃속이 든든해야 하는 데. “오빠, 오빠.” “응? 왜 그러니, 라이야?” “이거요.” 라이가 내민 것은 두툼한 삼단 도시락이었다. “앗! 이걸 어떻게?” “어제 인디 오빠랑 제가 만든 거예요.” “정말이야?” “예. 어서 먹어요, 오빠.” 라이는 바닥에 돗자리까지 깔기 시작했다. 나와 라이, 인디는 그 위에 앉아 도시락을 열어보았다. 헉! 이것은 김밥이 아닌가? 난 예쁜 자태를 뽐내는 김밥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걸 정말 라이가 만들었단 말인가? “라, 라이야. 이거 정말 니가 만든 거야?” “예. 제가 밤 새 인디 오빠랑 만들었어요.” “밤 새? 아니, 왜?” “오빠 주려구요.” “…….” 감동감동~. 감동의 물결~. 감동의 파도~. 감동의 격류~. 난 라이를 꼬옥 안아 주었다. “고마워, 라이야.” “헤헤~. 어서 먹어요, 오빠.” “으응.” 라이는 김밥을 하나 집더니 나한테 내밀었다. 음식만 보면 언제나 입안에 우겨 넣던 라이가 나한테 먼저 권 하기까지 하다니! 드디어 아이언스 히로식 엄격한 가정 교육의 성과가 나타나는 건가? 난 라이가 내민 김밥을 받아 먹었다. 오물오물~. “맛있네.” “정말요?” “응. 맛있어. 라이도 한번 먹어봐.” 이번엔 내가 집어서 라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라이는 김밥을 덥썩 물어 맛있게 먹었다. “와아! 맛있어요! 인디 오빠도 드세요.” “예.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두분께서도 많이 드세요.” 인디는 어디선가 보온병과 종이컵을 꺼내더니 거기에 차를 따라서 우리에게 건네 주었다. 으음~ 대자연 속 에서 김밥을 먹으며 차를 마시다니. 왠지 굉장히 낭만적이다. 정말 소풍 온 기분이야. 난 예전에 학교에서 소풍 간 기억을 떠올렸다. 수건 돌리기, 보물 찾기, 구석에 짱 박혀서 담배 피기, 선생한 테 걸리지 않고 몰래 집에 돌아가기, 술 마시고 다른 학교놈들과 패싸움 하기 등등. 생각해보면 참 좋은 추억이다. 아! 그러고보니 기억에 남는 소풍이 하나 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아마 고 1 때였을 거다. 시간도 좀 남았으니 그때의 얘기를 들려주도록 하겠다. 난 당시 꿈 많던 청소년이었다. 언젠가는 국회 의원에 출마해서 담뱃값에 붙은 세금을 100원으로 인하 한다 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국회 의원은 얼굴이 두껍고(위기 상황에서도 포커 페이스 유지) 목소 리 크고(국회에서 말싸움 대비) 심지어는 무공도 뛰어나야(국회에서 다른 당 의원과 싸움 대비) 한다는 사실 을 깨닫고 포기하였다. 아무튼 난 내가 국회 의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였다. 그래서 그 날 화장실 구 석탱이에 짱 박혀서 담배 한 개비로 내 마음을 달랬다. 종례 시간에 어슬렁거리며 반으로 돌아가니 담임 선생 님께서 종례 중이셨다. “내일은 소풍이다.” 그 말을 들은 반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소풍을 간다는 사실에 기쁜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수업 을 안 한다는 사실에 기쁜 것이다. 사실 난 소풍보단 수업이 더 편하다. 수업 시간에는 자면 그만인데 소풍은 그럴 수가 없잖아. 다음 날 아침. 난 소풍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집을 나섰다. 뒷주머니에 담배 두갑 찔러 넣고 상의 주머니엔 일회용 라이타 를 찔러 넣었다. 도시락이야 애들 거 얻어 먹으면 되니 굳이 힘들게 들고 갈 필요는 없지. 우리 반이 간 곳은 이상한 왕릉이었다. 정확히 어디 왕릉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왕릉을 중심으 로 건설 된 수목원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직후 우리 반은 오락부장의 지휘하에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의 이름 은 그 유명한 수건 돌리기. 나는 차마 이런 유치한 게임에 참가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이 안 보 는 사이 은근슬쩍 빠져나와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수목들이 내뿜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담배를 뻑 뻑 피워대니 나의 썩은 폣속까지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어느덧 기다렸던 점심 시간이 되었다. 소풍의 묘미는 도시락 까먹기가 아니겠 는가? 뭐 난 도시락 까먹기가 아니라 도시락 얻어 먹기지만. 아무튼 애들이 돗자리를 피고 옹기종기 앉아 김밥을 먹자 난 어슬렁거리며 기어 나왔다. 애들 김밥 얻어 먹 으려고. 난 친한 친구들에게 다가가 김밥을 구걸하였다. 하지만 이놈들이 왠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난 하 는 수 없이 담배를 애들에게 나눠 주고 그 대가로 김밥을 얻어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담배가 피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 난 애들을 데리고 수목원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근처에 서 피다가 걸리면 안 되니. 우리는 그곳에서 사이 좋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며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었 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밥도 먹었겠다, 담배도 피웠겠다. 날씨는 좋겠다. 자연 몸이 풀리며 졸음이 밀려왔다. 우리는 담배를 끄고 낙 엽을 이불 삼아 누웠다. 대자연 속에 이렇게 누워있으니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애들 이 다 자는 가운데 난 나 자신을 성찰하며 반성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더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난 힘겹 게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난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우리 뒤쪽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낙엽들이 활활 타오르고 탁한 연기가 우리쪽으로 몰려왔 다. 난 재빨리 애들을 깨웠다. “일어나! 야!” 하지만 한번 잠든 애들은 일어날 줄을 몰랐다. 난 하는 수 없이 발로 애들을 걷어 찼다. 그러자 애들은 짜증 을 내며 일어났다. “아이씨! 어떤 새끼야?” “나다, 이 새끼야!” “왜 깨웠어?” “니 뒤를 보렴.” 애들은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길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썅! 갑자기 불이 왜 난 거야?” “어떤 놈이 불도 안 끈 꽁초를 그냥 버렸어?” 난 주위 애들을 돌아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애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아니라고 발뺌하였다. 당연 한 일이었다. 범인은 나니까. “어떤 새끼야? 솔직히 불어!” 난 애들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불길을 잡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로써 나는 혐의를 벗게 되었군. 이런 걸 보 고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하는 거다. 아무튼 우리는 불길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주위에 널린 게 장작인데 한번 일어난 불 길이 쉽게 잡힐리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도구라고는 발 밖에 없지 않은가? 불을 끈 답시고 설쳐댄 우리의 행 동은 오히려 불을 주위로 퍼트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더 이상 수습이 불가능할 지경이 되자 우리는 심각하 게 퇴각을 고려해야했다. 연기는 점점 심하게 퍼지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조만간 모든 사람들이 불 난 것을 알 아 챌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위에 있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아! 저 놈들이 불을 냈구나!’ ……라고 생각하겠지. “안 되겠다. 튀어!” 우리는 들어온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안전지대까지 도망친 우리는 대책 마련을 생각해 보았다. 만약 담배 피 다가 불낸 것이 알려지면 아마도 담임한테 맞아 죽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모두의 시선은 나에게 쏠렸다. 내 잔머리가 이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난 현 상황을 정리 해 보았다. 수목원에서 불이 났다. 불이난 근원지에 우리반 아이들이 가장 가까이 있으니 혐의는 우리반 애들에게 쏠 릴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에게 쏠릴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는 학생 들 중에서 현장에 없었던 학생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이 유력한 용의자들이 다. 최악의 상황이군. “야, 그냥 도망치자.” “그, 그래.” 멍청한 놈들! 지금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런 때 일수록 침착해 야 돼.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JQ 180인 내 머리를 믿어야 한다. 지금 믿을 것은 오직 내 잔머리뿐이야! 약 30초간 생각한 끝에 난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런 때 중요한 것이 알리바이야!” “뭐? 알리바바?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걔 말이야?” “…….” 무식한 것들! 난 이놈들에게 내 아이디어를 설명해 주었다. 내 설명을 들은 놈들은 ‘과연 박영웅!’ 이라고 소리치며 감탄 을 자아냈다. “자, 시간이 없어. 즉시 실행하자.” 놈들은 나의 지시에 따라 우리반 학생들이 자리를 깔고 있는 근처 화장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화장실 안에 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 다음 할 일은…… “야, 너랑 너랑 편 먹고, 넌 내 옆으로 붙어.” 인원을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이니 2 대 2로 싸우면 딱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이것 뿐이다.” “알았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할퀴고, 발로 차고 물어 뜯고…… 심지어는 도구까지 사 용했다. 그래서 결론은 어찌되었냐 하면……. 불은 번지고 번져 수목원 안의 사람들이 모두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고, 소방차가 온 후에야 간신히 불길 이 잡혔다. 우리는 화장실에서 점심 식사 후 담배를 피다가 사소한 시비 끝에 패싸움을 벌여 화장실 기물 을 파손하고 심지어는 관리인이 달려와 만류하는 사태를 일으켜서 다음날 학생부실로 끌려가 두드려 맞고 반 성문을 썼다. 그로인해 다행히 방화 혐의는 벗을 수 있었다. 불이 일어난 때에 우리는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 웠다는 알리바이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 것은 싸움을 말리러 온 관리인이 증언해 주었다.(화장실 바닥에 담 배 꽁초가 널려 있고, 우리의 상태로 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착각한 것이 다) 아무튼 내 고1 때 소풍은 그렇게 화려하게 끝이났다. 으음,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사람은 추억이 있어야 돼. 고2 소풍 때는 술 마 시고 화투 치다가 다른 학교 애들과 패싸움 했는데. 그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다. 김밥을 다 먹은 우리는 차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이 모습을 보고 그 누가 우리를 드래곤을 잡으 로 온 용사 집단이라 생각하겠는가? 난 인디에게 물었다. “그런데 크로니스는 언제 오냐? 난 지금 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정체성의 혼란이라니요?” “내가 드래곤을 잡으러 온 용사인지 소풍 나온 백수인지 헤깔린다고.” “거, 걱정하지 마세요. 크로니스 금방 올 거예요.” “응. 그래. 믿고 기다릴게.” 만약 안 오기만 해봐라. 넌 내 손에 죽는다. “아! 히로님. 그거 가지고 계시죠?” “응? 그거라니?” “차원의 열쇠 말이에요.” “차원의 열쇠?” 난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았다. 다행히 가지고 왔다. 너무나도 투박하게 생겨 열쇠인지 잡동사니인지 구분 도 안 되는, 그러나 열쇠임이 분명한 열쇠. “크로니스와의 싸움이 시작되면 그걸로 차원의 문을 여세요.” “응? 어떻게?” “그 열쇠를 부러뜨리세요.” “부러뜨리라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그러면 크로니와 함께 아공간으로 빨려들어갈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결계를 키고 있을테니까요.” “그래. 알았어.” 난 차원의 열쇠를 꼭 쥐었다. “그런데 말이야…….” “예.” “아공간에서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돼?” “예? 왜 그런 걸 물으시는 거죠?” “내가 크로니스를 이길 수도 있잖아.” “그, 그건…….” 말도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인디의 표정. 그래. 말 안되는 거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난 아직 내 목숨을 포기 한 게 아니다. 난 아직도 반드시 이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때는 저희가 외부에서 문을 열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런데 인디의 표정의 심상치 않아 보인다. 무엇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크로니스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잠 자려고 하는데 그 순간 드래곤 일당(에스카네스, 카 르, 제갈량)이 나타났다.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온 에스카네스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크로니스가 온다.” 드디어 시작 된 건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용사병 환자들도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재빨리 돗자리를 개고 도시 락통을 챙기는 등, 뒷정리에 열심히였다. 난 그들에게 외쳤다. “쓰레기는 아무데다 버리지 말고 꼭 수거하도록!” 산속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자연 상태계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쓰레기 수거를 생활화하 자. 위기감을 느낀 용사병 환자들은 뒷정리를 마치고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저들이 저 무기를 휘두룰 기회 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난 고개를 꺽어 하늘을 보았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하늘. 적색 산맥이라는 이름 에 걸맞게 산맥 색깔도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진짜 분위기 죽인다. 세계의 운명을 걸고 싸우기에 장소도 시간도 나쁘지 않다.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마나들은 한 공간에 모여들며 육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내 앞에 는 한 엘프가 서 있었다. 긴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미청년. 그가 크로니스임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 을 것이다. 크로니스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긴장하고 있는 건가? 난 침을 꿀꺽 삼켰다. 드래곤들은 어느새 뒤로 물러섰다. 용사병 환자들은 아직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저들 은 눈 앞에 엘프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테니. “오, 오빠. 우엥~ 나쁜 엘프에요.” 라이는 예전에 크로니스에게 당한 기억 때문에 크로니스를 굉장히 무서워한다. 난 그런 라이의 마음을 알기 에 라이를 내 뒤로 숨겼다. 난 크로니스를 보았다. “난…….”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용사병 환자들일 일제히 떠들어 대는 것이다. 저것들은 정말 도 움이 안 된다. 아무래도 괜히 데려온 것 같다. “저게 크로니스야?” “저게 크로니스래.” “진짜?” “진짜 크로니스래.” “레드 드래곤이 왜 엘프 모습이지?” “나도 몰라.” “폴리모프 했나보지.” “그런가?” 용사병 환자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며 적당히 거리를 벌려 나와 크로니스의 주위를 애워쌌다. 전혀 도움 이 안 되는 행동. 난 인디를 불렀다. “싸움 끝날 때까지 라이 맡아 둬. 그리고 저것들 접근 못하게 막고.” “예.” “싫어요! 라이는 오빠랑 같이 있을 거예요! 우에에엥~ 오빠, 오빠!” 인디는 발버둥을 치는 라이를 안고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 주위를 애워싸고 있던 용사 병 환자들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드래곤들이 방어막을 친 것이다. 그 결과 싸움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 한 공간이 확보 되었다. 이제는 싸우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난 손을 주머니에 넣어 차원의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이것을 부러뜨리 면 아공간이 열린다는 건가? 난 반드시 살아 남는다!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한 나는 크로니스를 노려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크로니스의 얼굴. 무슨 생각을 하 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크로니스는 예전에 내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적으로 서 마주하게 되는 군. 생명의 은인을 죽여야만 하는 지금 내 상황. 잘 생각해보면 나도 비극의 주인공이다. 조 연이 아닌 주인공. 그런데 왜 이렇게 폼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국 이런식으로 만나게 되는 군요.”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 르겠다. 정말 이대로 크로니스와 싸워야 하나? 다른 선택은 없는 걸까? 약하지면 안 돼. 난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다. 크로니스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보았다. 그리고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뜬 그의 눈은…… 웃 고 있었다. ------------------------------------------------------- 그 동안 운전면허증을 따느라 글을 못 올렸습니다. But... 오늘 드디어 면허증을 땄습니다... 1종 보통 면허(작은 트럭, 봉고차까지 몰 수 있는 거)... 도로 주행 을 합격하니 바로 면허증이 나오더군요... 이제 드디어 저의 애마를 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오토바이도 한 대 샀습니다. 125cc 중에선 최고라 불리는 <엑시브>. 카울은 K1 은검색 카울이고... 애칭은 <라이> 입니다. 나중에 사진 찍어서 한번 올리지요... 뒤에 타시고 싶은 분들은 손 한번 들어주세요...(여자 대환영^^) 라이야, 힘껏 달려 보렴~. 오빠가 비행기 태워 줄게~. (참고로 전 폭주와는 거리가 멉니다. 헬멧 꼭 쓰고 안전운행하는 초보 운전자...) <아이리스 Iris> - 15권 - 생각해보면 긴 시간이었다. 어쩌면 지금 상황은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딛였을 때부텨 예견 되어 있던 것 일 지도 모른다. 난 어떻게든 싸움을 피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이미 정해진 운명을 어찌할 수 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크로니스를 마주보며 서 있다. 크로니스는 세계를 파괴하려 하고, 나는 세계를 지키려 한다. 우리의 의지는 충돌하였고 이제 둘 중 하나 는 죽어야만 한다. 나와 크로니스 사이에는 무거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느릿느릿 천천히 흐르던 그 기류는 어느 순간 세 찬 격류로 변했다. 난 격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땅에 발을 굳게 딛였다. 기 싸움에서 밀리면 이미 이 싸움 은 패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한다. 난 꼿꼿히 서서 크로니스를 바라 보았다. 크로니스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즐겁다는 듯이. 비웃음인가? 기분이 상하며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크로니스 입장에서 보면 아마도 내가 우습게 보일 것이다. 저것 은 승자의 미소였다. 끝도 없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여유. 문제는 그 자신감에 걸맞는 실력이 뒷받침 되어 있 다는 것이다. 인간과 드래곤의 싸움. 8클래스와 9클래스의 싸움.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따로 없다. 그러니 크로니스의 눈 에 내가 우습게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비웃음이라니! 이건 정말 너무한다. 크로니스한테 실망 했어! 난 주위를 빼곡히 애워싸고 있는 용사병 환자들을 의식하였다. 내가 이들을 왜 이곳까지 데리고 왔을까? 쓸 모도 없는 놈들인데. 거기에는 아주 깊은 사연이 숨어있다. 이 세계에는 딱히 매스컴이라고 할만한 것이 부족한 상황이다. 즉, 내 가 크로니스와 싸워서 이겨 세계 평화를 지켜냈다고 해도 사람들이 모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 요한 것이 홍보요원이다. ‘아이언스 히로가 크로니스를 이겼데’ 라고 말해줄 홍보요원. 지금 주위를 애워싼 용 사병 환자들은 홍보용으로 이곳에 온것이다. 나의 위대함과 영웅적인 행위를 사방팔방에 퍼트리고 다닐 홍보 요원. 물론 그건 내가 이겼을 경우에만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데리고 온 것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나 의 굳은 의지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모두들 똑똑히 지켜봐라. 그리고 전해라. 내가 영웅이라는 것을. 가슴 속에 차오르는 충만함. 난 모두에게 들릴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제가 도망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 자리에 나오셨군요.” 크로니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기분 상당히 나쁘다. 설마 나를 봉으로 보고 있는 건가? “도망칠 기회를 버린 것은 다름 아닌 당신! 저에게 자비를 구하지 마십시오!” 아아~ 진짜 멋있다. 언젠가는 꼭 한번 이런 대사를 해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 눈엔 분명 내가 영웅스러 워 보이겠지? 난 싸우기에 앞서 감동적인 대사를 팍팍 날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사실 이때를 대비해 그 동 안 많은 연습을 해왔다. 대사집까지 만들어서 암기 과목 공부하듯 공부도 했다. “원래 평화를 사랑하는 나지만 당신의 악행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당신 아니 면 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난 대사를 하는 도중 눈알을 재빨리 이리저리 굴려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 보았다. 반응은 열광적이라고 할만 큼 좋았다. 용사병 환자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우러러 보았다. ‘너무 멋있어요!’ ‘너무나도 용사스러워요!’ ‘좀 더 멋진 대사를 날려 주세요!’ 저들의 요구에 부흥해야겠다는 생각이 팍팍 든다. 난 좀더 호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재빨리 다음 대사를 날렸다. “당신의 악행에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 들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악은 결코 정의를 이길 수 없는 법. 비록 미약한 힘이지만 최선을 다해 당신을 막아 보이겠습니다!” 더욱더 뜨거워지는 호응. 그런데 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왠지 굉장히 불길한 느낌. 뭔가가 잘 못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엘프가 레드 드래곤이야?” “어머, 너무 잘 생겼다.” “어쩜 저렇게 잘 생겼을까?” “완전 꽃미남이야.” “딱 내 이상형이네.” 뭐야 이건? 난 크로니스를 바라보았다. 큰 크에 작고 갸름한 얼굴. 붉은색 긴 생머리. 어찌보면 여자처럼 생겼고 어찌보 면 남자처럼 생겼다. 외모로만 따지면 꽃미남이 확실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난 다시금 눈알을 굴려 보았다. 대력 2천명 정도의 여자 용사병 환자들이 눈을 하트 모양으로 빛내고 있었 다. 그 눈이 나를 향하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전부 크로니스를 향하고 있었다. 외모에 현혹 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거늘! 단지 크로니스가 잘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한 큐에 반해 버리다니! 난 더욱 목소리를 높혀서 외쳤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당신의 악행은 여기서 끝이다! 나 정의의 용사 아이언스 히로가 이 땅에 사는 모 든 존재를 대신해 그대를 응징하겠노라!” 함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까보단 반응이 약해진 느낌이었다. 위기의식이 점점 내 목을 죄어 온다. 내가 데리고 온 용사병 환자들은 1만 2천명. 그들 중 반 이상이 여자들이다. 아무래도 남자가 응원해주는 것 보단 여자가 응원해주는 것이 폼날 것 같아 일부러 여자들 수를 더 많이 채웠다. 그런데 이런 변수가 생기다 니! “어머, 정말 보면 볼 수록 잘 생겼다.” “그러게 말이야.” “아~ 나 아무래도 반한 것 같아.” “그런데 정말 저 엘프가 세계를 파괴하려는 걸까?” “그렇기에는 너무 잘 생겼는데.” “맞아. 잘 생긴 엘프가 그런 일을 할리 없어.” “잘 생긴 남자는 마음도 착한 법이니까.” 진짜 할 말이 없다. 악당이어도 잘 생기면 그만이라는 건가? 아까까지 크로니스를 해치우자 어쩌자 해놓구 선 얼굴 보는 순간 마음이 싹 바뀌다니.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렇게 외모 만능 주의 사회가 되었는가? 잘 생 기면 세계를 파괴해도 용서가 된다는 건가? 안 돼! 외모에 현혹 되지 마! 내가 속으로 그렇게 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악화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크로니스를 편드 는 여자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저런 꽃미남을 죽게 놔둘 수는 없어.” “그래. 맞아.” “저런 꽃미남이 세계를 파괴하려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 맞아.” 어째 상황이 좀 뒤바뀐 것 같아. 원래 저들은 크로니스를 욕하면서 나를 응원해야 하는데. 이래서는 내가 악 당 같잖아! “이 일에는 뭔가 음모가 숨어 있어!” “그래. 맞아.” “그러고보니 크로니스가 이 세계에 피해를 준적은 없잖아. 앞으로 할 거라는 얘기만 있었지.” “그래. 맞아.” “혹시 누군가가 정보를 조작한 것이 아닐까?” 여자들의 차가운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상황이 심각하게 꼬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날 전설의 용 사라 부르며 응원하던 여인들이 어째서……. 여자들은 크로니스쪽으로 전향한 반면 남자들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니, 그들은 적개심이 불타는 눈 으로 크로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꽃미남은 전부 죽어야 돼!’ ‘나보다 잘 생긴 놈들은 용서할 수 없어!’ 역시 가제는 개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남자들만은 내편이다. 잘 생긴 남자 싫어하는 것은 못 생긴 남 자들의 공통점 아니겠는가? “전설의 용사 히로님! 크로니스를 물리치십시오!” “히로님! 이겨라!” 와아아아-! 일동 박수와 함께 함성. 그래도 니들 밖에 없다. 난 그들의 함성에 용기를 얻어 어깨를 쫙 폈다. 그런데…….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님! 힘내세요!” “크로니스님 이겨라!” 이게 뭐야? 어느덧 여자들은 크로니스를 응원하고 있었다. 세계가 멸망하건 말건 꽃미남은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 각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 이런 썩을! 이러니까 성형수술이 성행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느라 전 국민이 저녁을 굶고 있는 것이다! 성형 수술은 야매들이 판을 치고 다이어트 때문에 쌀, 밀 소비량이 격감, 농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린다. 외모지상주의야 말로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사회악인 것이다! “히로, 이겨라! 히로, 이겨라!” “크로니스, 이겨라! 크로니스, 이겨라!” 응원은 어느새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1만 2천명의 용사병 환자들 중 7천명이 여성이다. 이들 중 5천명 정도 가 크로니스에게로 전향을 하고 2천명만이 내편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들도 크로니스의 외모에 심하게 흔 들리는 중이었다. 남자 환자드은 크로니스의 외모에 격분하여 목이 터져라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현재 스코어 7천 대 5천. 아직은 내편이 더 많다. 내편 목소리가 더 크다. 난 그나마 그것을 위안으로 삼고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5천명의 배신은 상당한 타격이었다. 문제는 그 5천 명 전원이 여자라는 것이다. 난 남자 팬들은 필요 없는데. 여자 팬들이 좋은데. 응원의 열기가 더 해가는 가운데 긴장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크로니스쪽 목소리가 좀 더 커 진 것 같은 느낌이다. 난 주위를 둘러보다고 깜짝 놀랐다. 혹시나가 역시나라더니! 결국 그나마 남아있던 나의 여성팬 2천명이 크 로니스쪽으로 전향하고 말았다. 좌절 중. 난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듯한 응원 소리. “히로, 이겨라! 히로, 이겨라!” “크로니스, 이겨라! 크로니스, 이겨라!” 초등학교 운동회에서나 울려퍼질 것 같은 단조롭고 직설적인 응원 소리. 내 이름을 외치는 것들은 전부 칙칙 한 남자들뿐인 반면 크로니스의 이름을 외치는 것들은 아리따운 여성들이었다. 참고로 난 남자 5천명의 응원보다 여자 1명의 응원을 원한다. 그편이 훨씬 힘이 난다. 칙칙한 남자 놈들이 백 날 응원해 봐야 기운만 빠질뿐이다. 난 이 모양인데 무려 7천명이나 되는 여성들의 응원을 받는 크로니스는 어떨까? 분명 온 몸에 기운이 펄 펄 솟아 나겠지. 젠장! 크로니스는 지금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고 있었다. 적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이 아니다. 그것도 여자들만 골라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 도 다른 수단 없이 외모 하나만 가지고 7천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진짜 정말 아무나 할 수 있 는 일이 아니다. 참고로 나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크로니스는 아주 가볍게 해냈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의 사기를 꺽다니. 이래서 본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지나 모르겠다. 아~ 진짜 싸울 맛 안 나네. 이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세계를 지킬 전설의 용사라고 해서 띄워줄 때 는 언제고 지금와서 배신을 때리다니! 돈 때문에 그랬으면 내가 충분히 이해를 한다. 물질만능 주의 사회에 선 돈이야 말로 최고의 가치니까. 하지만 이들은 돈이 아닌 외모 때문에 그러는 거다. 외모야 어차피 시간 이 지나면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영원한 것은 오직 돈 뿐이다! 외모는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드는 반면 돈 은 시간이 지나면 이자가 붙잖아. 그것도 복리로. 사기는 꺽인 반면 분노는 불타올랐다. 나보다 잘 생긴 것들은 무조건 죽어야 돼! 잘 생기면 다야? 잘 생기 면 내 팬들을 빼앗아 가도 되는 거야? 기생오래비 같은 외모로 나의 여성팬들을 꼬시다니! 그나마 남아있던 크로니스를 위하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순수한 분노뿐이었다. 내 팬클 럽을 해체 시킨 장본인. 그리고 세계를 파괴하려는 악당. 그래. 크로니스는 악당일 뿐이야. 그리고 난 그 악당을 없애려는 용사고. 내가 크로니스와 싸우는 것은 정의 이다. 그리고 크로니스의 지금 행위는 불의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의 이름으로 크로니스를 처단하겠노라. 내가 크로니스를 처단하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그 외에 다른 사심은 없다. 결 코 크로니스가 잘 생겨서, 내 여성팬들을 빼앗아 가서 처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짜다. 믿어라. 난 출수할 준비를 하였다. 처음부터 필살기를 쓰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이 한방의 나의 모 든 것을 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좀 그러니 1/3 정도만 걸도록 하겠다. 난 개나리 스텝을 사용해 순식간에 크로니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필살기. “빅장 40단 콤보!” 필살기를 쓸 때는 어째서 기 기술명을 외쳐야만 하는가? 그것은 내가 지금 쓰는 것이 필살기임을 알게 하 기 위함이다. 내 딴에는 필살기라고 썼는데 다른 사람들이 안 알아주면 서운하잖아. 번개 같이 움직인 손은 크로니스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손이 닿는 순간 느낌이 없었다. 설마……? 크로니스는 어느새 뒤로 이동해 있었다. 난 재빨리 달라 붙어 두 번째 공격을 하였다. 40단 콤보 중 하나 만 가격 되어도 치명적이지. 하지만 크로니스는 또 피했다. 정말 잘 피하는 군. 제법인데. 과연 내 적수가 될 자격이 있어! 난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진정한 영웅은 적을 칭찬할 줄도 아는 법이지. 그러나 칭찬을 했다고 해서 봐줄 생 각은 조금도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마음 놓고 싸운다. 최선을 다해야할 상대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나의 빅장을 전부 피해낸 것이다. 개나 리 스텝까지 같이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부 피해내다니. 과연 크로니스! 결국 초필살기를 선보일 수 밖에 없는 건가? 여기서 내가 타격을 주지 못한다면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전 무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차원의 열쇠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마법 대결이 펼쳐 진다면 주위가 초토화 될 것은 불보듯 뻔하니까. 드디어 초필살기다. 이 한방의 남은 나의 모든 것을 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좀 그 러니 1/3만 걸도록 하겠다. “더블 빅장 40단 컴보.” 슈슈슈슉-!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는 나의 손. 게다가 개나리 스텝으로 발 역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 도로 움직인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엔 내 손과 발이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무리 크로니스라 하더라도 이것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크로니스는 가만히 당하지 만은 않았다. 개니라 스텝과 맞먹을 정도의 현란한 스텝으로 나의 공격을 무산시킨 것이다. 하지만 나의 초필 살기를 전부 피할 수는 없는 법. 퇴로가 막히자 크로니스는 하는 수 없이 방어에 나섰다. 마법 방어막과 나 의 빅장이 충돌하며 엄청난 불꽃이 튀었다. 오오! 이것이야 말로 피 튀기는 혈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블 빅장 40단 컴보는 초필살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위력을 지녔다. 그렇기에 크로니스의 마법 방어 막으로도 쉽게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증거로 지금 크로니스는 뒤로 밀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내가 20단쯤 시전했을 때 크로니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나머지 20단을 질풍과도 같이 몰 아쳤다. “할 말이 있습니다.” “저의 초필살기 더블 빅장 40단 콤보에 자비란 없습니다! 이십일! 이십이! 이십삼…… 삼십팔! 삼십구! 사십!” 더블 빅장 40단 콤보를 전부 시전한 나는 극심한 체력 소모를 느꼈다. 난 지친 기색을 감추고 뒤로 물러섰 다. 하지만 다리와 팔이 후들거리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지친 반면 크로니스는 멀쩡 한 모습이었다. 결국 초필살기마저 통하지 않았다는 건가? 필살기에 1/3을 걸고 초필살기의 1/3을 걸었으니 이제 내가 남 은 것은 1/3뿐이다. 다음 공격에 나머지 1/3도 걸어야 하는 건가? 그런데 이제 어쩌지? 더 이상 쓸 기술이 남아 있지 않다. 개나리 스텝, 빅장 40단 콤보, 더블 빅장 40단 콤보 까지 모두 썼는데 더 이상 뭘 쓰란 말인가? 훗! 이것만은 안 쓰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난 드디어 청룡도법을 써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만약 청룡도법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어 쩔 수 없이 차원의 열쇠를 써야한다. 청룡도법에 나의 마지막 남은 1/3을 건다. “간다, 청룡도법!” 난 청룡도를 뽑아 들고 크로니스를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크로니스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지? 난 너무 놀라 손을 멈추었다. 청룡도의 날은 크로니스의 목에 닿아 있었고 조금 베였는지 크로니스의 목에서 는 조금씩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흰 목에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이 왠지 선정적이다. 관중들(=용사병 환자들) 사이에서는 ‘어머! 어머!’ 하는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전부 여자들 목소리다. 난 손에 힘을 주고 크로니스를 노려 보았다. “왜 안 피하신 거죠?” 크로니스는 웃으며 말했다. “전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 싸울 생각이 없다니? 설마 나 따위는 자신의 상대 조차 안 된다는 건가? 그래서 싸우기 싫은 건가? 분노로 인해 손이 떨린다. 그 때문에 크로니스의 목에서는 더욱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대로 내리치기 만 하면 나의 승리인가? 정말 크로니스가 죽는 건가? 목에 칼이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로니스의 표정은 태연했다. 죽어도 상관 없다는 듯한 태도. 대체 목 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저런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난 심한 갈등을 해야했다. 이대로 크로니스를 죽여야 하나? 아마 이런 기회는 오기 힘들 것이다. 이거야 말 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난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세계 평화를 지키고 내 한 목숨 살기 위해선 지금 크로니스를 죽여야 하는데……. “다시 말 하지만 전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과 싸워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무엇인가요?” “당신이 세상을 파괴하려 하니까요. 그리고 전 그것을 막고 싶으니까요.” 크로니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세계를 파괴할 생각이 없습니다.” “……예?” 크로니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반문을 하고 말았다. 세계를 파괴할 생각이 없다니? 세계를 파괴할 생각이 아 니라 멸망 시킨다는 생각이라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크로니스가 그런 유치한 말장난을……. “세, 세계를 파괴할 생각이 없다니요? 무슨 뜻이지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는다. 냉정을 되찾아야 하는데. “말 그대로입니다. 전 당신과 싸울 생각도, 세계를 파괴할 생각도 없습니다.” “…….” 대체 내가 크로니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 걸까? 설마 이렇게 말해서 나를 방심하게 한 다음 뒤통수 를 치려는 건가? 아니야. 크로니스가 그런 얍삽한 짓을 할리 없어. 나라면 모를까. 그럼 대체 뭐지? 설마 사실 인가? 하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이건 분명 크로니스의 속임수야. 크로니스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대다수의 악당들이 상대의 말에 놀아나다가 무참히 당한 전례 를 살펴볼 때 나의 이런 행동은 칭찬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행동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 나 있었다. 그 문제로 인해 질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아니, 아마도 나는 패할 것이다. 적의 목에 칼을 겨누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는 놈 치고 결과가 좋은 놈 하나도 못 봤다. 이건 다음 기회 가 오면 언제든 절 죽여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이다. 기회가 왔을 때 속전속결로 해치우 는 것이야 말로 승리의 기본이다. 하지만 한번 말을 하기 시작했으면 멈출 수 없는 것이 또 사람 심리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죽이기 전 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말을 들어 놓으려는 것이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러하다. “당신은 세계를 파괴할 생각이 아니었나요?” 크로니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째서……?”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라니…… 무슨 뜻이죠? 당신의 목표는 세계를 파괴하려는 거잖아요.” “…….” 난 심각한 혼란을 느꼈다. 크로니스의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설마 나를 혼란에 빠트려서 전투력을 약 화시키려는 건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난 충분히 약한데.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사실 나만큼 머리를 빨리 굴리는 사람도 드물다. 그만큼 잔머리가 발달 되어 있다 는 거겠지. 크로니스는 미쳐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금 거짓을 말 하는지 진실을 말 하는지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이 다. 좀 더 나아가서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으음, 그렇군. 그냥 미친 사람의 말로 취급하면 간단한 거였어. 괜히 복잡하게 생각했네.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 헉! 내 생각을 어찌 알고? 점점 크로니스가 무서워진다. 이젠 독심술까지 쓴다는 건가?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그 미치지 않았다는 말을 제가 어떻게 믿지요?” “글쎄요. 어떻게하면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말은 당신은 미치지 않았고 따라서 세계를 파괴할 마음도 없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훗! 제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잡설은 그만하고 어서 덤비기나 하시지요!” 난 크로니스의 목을 겨누고 있던 청룡도를 회수하였다. 정당하게 싸워서 승리를 쟁취하리라. 하지만 크로니 스는 손을 늘어 뜨린 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됐으니까 어서 덤비기나 해요!” 크로니스가 가만히 있으니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다. 특히 신경 쓰이는 것은 주위 관중들의 웅성웅성거리 는 소리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글쎄.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는 싸울 생각 없는 것 같은데.” “세계를 파괴한다고 했잖아.” “그러게 말이야.” “이거 뭔가 이상한데.” 젠장! 이래서는 내가 착한 크로니스를 괜히 핍박하는 나쁜 놈처럼 보이잖아! 원래 계획과는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다. <나의 원래 계획> 1. 크로니스가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미친 듯이 날 뛴다. 2. 내가 그것을 멋지게 막아낸다. 3. 사람들이 감동 받아서 박수를 친다. 그리고 여성팬들의 구애가 빗발친다. 4. 루시아랑 함께 라이를 기르며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 이렇게 되야 하는 건데……. 크로니스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저는 미쳐있었고 세계를 파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 고 그가 없는 세상 따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당신을 그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위 안을 얻으려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부질 없었습니다. 저는 그 때문에 죽으려 했지만 그는 제 가 끝까지 살기를 바라고 있으니까요.” 크로니스의 목소리는 점점 젖어들고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청룡도를 든 팔을 아래로 내렸다. 크로니스는 말을 이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겨우 백년 정도였지만 그 시간은 다른 수천년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소중한 시간이었 습니다. 그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 되어 있고, 저 역시 그를 기억하고 있지요. 누군가 그랬습 니다. 사람은 추억으로 살아간다고. 아마 저도 그렇게 되겠지요. 남은 시간 동안 그가 남겨둔 추억을 영원 히 되새기며 살아가겠지요. 그래도 제가 기억하는 한 그는 제 마음 속에 살아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크로니스는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짙은 슬픔이 배여있었다. 순간, 나는 울고 싶은 기분에 휩 싸였다. 크로니스가 이렇게까지 이그리드를 사랑하고 있었다니! 저런 사랑을 하는 존재와 저런 사랑을 받는 존재는 정말 행복할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눈물과 함께 한다. 하 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눈물보다 소중하기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한다. 슬픔 없는 사랑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그것이 짝사랑이건 불륜이건 간에. 그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만을 바라본 크로니스. 그의 사랑은 짝사랑이었고 그것은 지독한 슬픔이었다. 하 지만 그는 지금도 이그리드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하니까.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얘긴가? 내가 그렇게 감탄을 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아마도 안 싸울 것 같은데.” “뭐라고? 안 싸워? 그럼 세계 평화는 어쩌고?” “애초에 세계가 멸망한다 어쩐다 한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뭐?” 큰일이다! 이게 아닌데……. 그 순간 드래곤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옆집 아저씨 슬리퍼 끄는 걸음으로 걸어 온 에스카네스는 크로니 스에게 말을 걸었다. “제 정신을 차렸나?” 크로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두지.” 에스카네스는 입을 크게 벌리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잘 됐군.” 그리고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갔다. 제갈량은 날카로운 눈으로 크로니스를 재수 없게 째려보더니 한마 디 말을 남긴 채 역시 몸을 돌렸다. “쓸데 없는 짓을 했군.” 카르는 불만어린 표정으로 크로니스의 여기저기를 훑어 보았다. 난 내 옆에 다가온 인디를 붙잡고 물었다.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크로니스가 제정신을 차린 것 같은데요.” “……뭐?” 난 황당해서 되물었다. 그러자 인디는 황송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아요.”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아, 아마도…….” “아마도?” “싸울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응? 뭐라고?” “싸울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아니, 잘못 들은 건 아니다. 난 분명 제대로 들었다. 그것도 확실하게. 인디의 입 이 잘못 되었을지언정 내 귀가 잘못 되었을 리는 없다. 좋아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싫어해야 하는 건가? 난 당황해서 어떠한 사고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머리 정리 중. 일단 크로니스가 제정신을 차렸다는 것은 좋 은 일이다. 그리고 세계 평화에도 문제 없고 내 목숨에도 문제 없다면. 으음, 그럼 좋아하는 게 좋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좋아하려고 했다. 그 순간, 들려오는 관중들의 목소리. “뭐야? 설마 안 싸우는 건 아니겠지?” “그런 것 같은데.” “이래도 되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9권 때부터 싸울 것 같이 폼이란 폼은 다 잡아 놓고 지금와서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안 싸울 거면 우리는 대체 왜 불러 모은 거야?” “젠장!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나?” 순식간에 터져나오는 불만섞인 함성들. 그제야 난 무언가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애초 나의 계획은 크로니스와 싸움을 한다는 것이 전제 되어야 성립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크로니스 가 제정신을 차렸다니! “이,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중얼거리자 내 마음을 알리 없는 인디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려요, 히로님. 싸우지 않아도 되니 정말 다행이에요.” 이 자식이 지금 누구 염장지르나? 난 인디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외쳤다. “시끄러, 임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드래곤이면 이래도 되는 거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난 인디를 밀치고 크로니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들어 크로니스를 가리키며 외쳤다. “변명은 필요 없어요! 무조건 한판 붙어요!” 반드시 싸워야 한다. 안 싸우면 내 인생은 끝이다. 아이언스 히로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가 세계의 운명 을 놓고 한판 붙는다고 대대적인 선전까지 했는데 만약 안 싸워 봐라. 결국 나만 욕을 바가지로 먹게 되는 것 이다. 차라리 싸우다가 패한다면 모를까 싸워보지도 않고 끝내는 것은 절대 안 될 말이다. “하지만 싸울 이유는 이제…….” “이유 따윈 필요 없어요! 무조건 싸우는 거예요. 문답무용! 그 쪽에서 오지 않는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청룡 도법!” 난 청룡도를 들고 돌진했다. 피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크로니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 다. 난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일부러 옆으로 비껴 찌른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덤벼! 덤비란 말이야!” 제갈량은 나를 한심하다는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미친 거 아니야?” “그래! 나 미쳤다! 나 미쳤어! 니들이 날 미치게 만들었어!” “이 자식이 누구한테 대드는 거야?” 퍼억-! 제갈량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날 후려쳤다. 그 무지막지한 주먹에 맞은 나는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제갈 량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양복을 바로 하였다. 난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다음 일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외쳤 다. “왜 때려? 왜 때려? 니가 뭔데 때려?” “하! 살다보니 별 미친 인간을 다 만나보네. 야, 임마. 너 죽고 싶냐?” 제갈량은 나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또 칠 생각인가 보다. 싸가지 없기 로 따지자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드래곤이라더니 성깔 한번 진짜 더럽다. 난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눈 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눈을 떠서 어찌된 상황인 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다. 하지만 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왠지 눈을 뜨는 순간 제갈량의 주먹 이 날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하지만 계속 기다려도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 고 난 하는 수 없이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제갈량의 다른 손은 크로니스에 의해 잡혀 있었다. “그만 해.” 낮게 가라 앉은 크로니스의 목소리. 굉장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설마 크로니스랑 제갈량이랑 한판 붙으려 는 건가?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갈량이 주먹을 거두고 나를 놔준 것이다.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 웃기고 있네! 흥! 제갈량은 양복 옷깃을 휘날리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인디는 황급히 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요.” 그 말에 난 역정을 냈다.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 난 크로니스랑 한판 붙어야 한다니까!” 그렇다. 억울해서라도 이대로는 못 돌아간다. 싸울 것처럼 분위기 다 잡아 놓고 이렇게 어이 없게 끝낸다 는 게 말이나 돼? 게다가 나를 보러온 저 많은 관중들은 다 어쩌고? 안 싸우고 이렇게 흐지부지 끝내면 결 국 욕 먹는 것은 나란 말이야! 드래곤들이 하나, 둘씩 돌아가자 관중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심해졌다. “진짜 안 싸우나 본데.” “그러게.” “에이씨! 시간만 버렸잖아.” “전설의 용사는 무슨 전설의 용사야? 저거 완전 사기꾼이잖아.” “그러게.” “내 이럴 줄 알았어. 애당초 인간이 드래곤과 싸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지.” “그렇다고 싸운다고 사기를 치다니. 그것도 세계 평화 어쩌구 하면서 말이야. 사기꾼 중에서도 아주 악질 사 기꾼이야.” “나쁜 자식! 사기 칠 게 따로있지 세계 평화를 두고 사기를 치다니!” 용사병 환자들은 한참을 그렇게 욕을 쏟아내더니 하나, 둘식 발걸음을 돌렸다. 판이 깨졌으니 집에 돌아가려 는 것이다. 난 재빨리 쫓아가 그들의 앞을 가로 막았다. “자, 잠깐만요! 아직 안 끝났거든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좀 있다가 싸울 거에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밀치고 갈 길을 갈뿐이었다. 무정한 사람들. 나 좋다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지금와 서 이렇게 등을 돌리다니. 모두들 미워할 거야! 미워할 거라구! 1만 2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자 넓은 공터에는 몇몇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아니, 남아 있는 사 람은 나 하나뿐. 남아있는 드래곤은 크로니스와 인디. 남아있는 엘프는 라이. 저 뒤쪽에서 웅크려 앉아 있는 라이는 나를 보며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을 높이 들고 흔들었 다. 난 나도 모르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다가 다시 좌절하기 시작했다. 사기꾼이라니? 사기꾼이라니? 내가 어딜 봐서 사기꾼이야? 이렇게 잘 생긴 사기꾼 봤어? 물론 내가 공갈 을 좀 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의의 공갈이었지 결코 사람들을 기만하려는 행위가 아니었 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 눈보라를 뚫고 블루 드래곤을 만나러 가고…… 엘프의 숲에 가고…… 블 랙 드래곤도 만나고…… 화이트 드래곤도 만나고…… 9클래스를 마스터 해야 한다기에 의식 세계 돌아다니고 …… 그것도 모자라서 빅장 40단 콤보와 더블 빅장 40단 콤보, 개나리 스텝까지 익혔는데…… 이제와서 이러 는 게 어디 있어?” 눈물이 내 두 볼을 타고 흐른다. 인디는 내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히로님.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래도 날 위로해주는 놈은 인디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몹시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한 상태다. 그래 서 나는 지금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다. 만만한 게 인디라고 지금 내가 화풀만한 상대는 인디 밖에 없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자식아!” “왜, 왜 이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뭘 잘못 했다고? 그럼 니가 잘못한 게 없단 말이야?” “흑흑, 전 억울하답니다.” “억울은 무슨! 억울하기로 따지면 내가 더 억울하지!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생고생을 했는데!?” 나의 이런 심정을 하늘이 알았을까? 멀쩡하던 하늘에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두방울 떨어지 던 비는 금새 소나기로 변했다. 쏴아아-! 내린다기 보다는 퍼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비. 난 그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더 이상 인생 살기 싫다. 이렇게 재수 없는 인생. 살아서 뭐하나? 어제까지는 영웅이었지만 오늘부로 사기꾼 이 되었구나. 이제 쪽 팔려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아갈까? 차라리 죽으련다. 라이야, 안녕. 오빠는 이만 가련다. 더 이상 삶의 미련을 갖지 않으련다. 난 느릿느릿 절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잠깐만요, 히로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거 놔! 이제 다 끝났어! 말려도 소용 없어!” “이러지 마세요! 이건 옳지 못한 선택이에요!” “놔! 난 죽을 거야! 어차피 내 인생은 끝났어! 다 끝장났다구!” “이러시면 안 돼요. 히로님이 죽으시면 많은 사람들이 슬퍼할 거예요.” “내가 죽는다고 해서 슬퍼 할 놈들 따위는 없어!” “아니에요! 루시아 공주님과 라이님은 슬퍼할 거예요.” “…….” 루시아와 라이? 내가 죽으면 그 둘은 슬퍼할 것이다. 루시아는 잘 모르지만 라이는 분명 울고불고 난리칠 것이다. 그때 저 곳에 있던 라이가 나에게로 걸어왔다. 아장아장~. 라이가 걷는 모습은 정말 귀엽기 그지 없다. 내 앞으로 다가온 라이는 내 옷깃을 붙들며 말했다. “가지 마세요, 오빠.” “응?” “오빠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내리면?” “라이도 같이 뛰어 내릴 거예요!” “……!” “라이는 오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 내가 죽으면 따라 죽겠다는 건가? 이 어린 것이? 난 라이를 부둥켜 안았다. “어흐흐흑.” “우엥~ 울지 마세요, 오빠.” 라이는 기특하게도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역시 나한테는 라이 밖 에 없어. 내가 진짜 라이 때문에 산다. “라이야~!” “오빠아~!” 나는 그렇게 라이를 끌어 안고 펑펑 울었다. * * * * * * * 전설의 용사라 일컬어지던 아이언스 히로가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와 싸우려다가 말았다는 소문이 대륙 전체 에 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인기라는 것은 얻기는 힘들지만 잃기는 쉬운 법이다. 그 인기가 쉽게 얻은 것이라면 잃기는 더욱 쉬워진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아이언스 히로의 인기는 하루 아침에 땅바닥으로 추락하였다. 경제 대공항 때의 주 가 폭락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정도로 인기 급락이었다. 아이언스 히로의 이름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불티나게 팔리던 상품들은 매출이 격감하였으며 아이언스 히 로 티셔츠, 아이언스 히로 구두 등 여러 팬시 상품 회사들은 넘쳐나는 재고와 반품을 견디지 못해 파산 지경 에 이르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설의 영웅으로 불러던 아이언스 히로는 이제 희대의 사기꾼으로 불리고 있었다. 세계 평화를 두고 사기를 치다니!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자신들이 영웅이라 생각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 할까? 싸워보고 패했으면 어느 정도 용서할 여지가 있지만 싸우지도 않았으니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일이 끝나고 난 뒤 아이언스 히로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잠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의 분노는 더 했다. 물론 변명을 한다고 해서 받아줄리도 없겠지만. “그래서 아이언스 공작은 지금 어디 있는 건가요?” “예. 지금 크로니스의 레어에 있어요. 벌써 며칠째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고 있어요.” “흥! 그럼 그렇지. 앞으로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일루니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만족으로 물들어 있었다. 남의 불행은 곳 나 의 행복이라……. 아이언스 공작이 잘못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뿐인데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좋은걸까? 사실 국가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이언스 공작이 크로니스를 무찔러서 드래곤 슬레이어로 등극하는 편이 국 위선양이나 이러저런 측면에서 봐도 좋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걸 떠나서 기분이 좋았다. 얼마나 기분 이 좋은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드래곤을 이겼다면 얼마나 난리를 치며 자랑을 하고 다녔을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정말 배알이 꼴려서 앓 아 누웠을 지도 모른다. ‘죽어도 아이언스 공작이 잘 되는 꼴은 못 봐.’ 아아~ 과연 일루니아 여사님은 아이언스 히로의 천적이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천적. 이 둘 이 한 나라에 붙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다. 이런 일루니아와는 달리 아이언스 히로의 든든한 아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일런스 지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지니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병법에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싸우지도 않고 세계 평화 를 지켜 냈으니 병법가로서는 최상의 능력을 지녔다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적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 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말 몇 마디로 크로니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 니 병법가로서는 이미 신의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위대함이야 익히 알고 있었으 나 새삼 감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진심인 건지 비아냥 거리는 건지……. 뭐 본인이 존경한다고 하는데 어쩌겠냐? 그냥 그러려니 생각해야지. 아무튼 아이언스 히로의 능력이건 아니건 간에 세계는 구원을 받았고 평화는 계속 유지 되었다. 엄밀히 말하 자면 히로가 세상을 구원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사일런스 지니 하나뿐이었 다. 그 외에 사람들은 전부 욕만 해댈 뿐이었다. 옛날에는 식사 후에 자일리톨(무설탕껌)을 씹었는데 요즘은 식사 후에 아이언스 히로를 씹는다는 얘기가 있 을 정도니…… 거의 세계의 공적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욕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는데,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히로는 천년 만년 장수할 것이다. 불쌍한 히로. 지니는 여론이 히로를 몰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은 히로에게 있어서 크나큰 복이었다. 정작 히로 자신은 인식을 못하는 것 같지만. 히로가 국제적으로 욕을 먹는 가운데 아이리스도 같이 욕을 먹고 있었다. 이번 일을 계획한 것이 아이리스라 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제기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알 사람들은 다 알지만 아이리스는 그런적 없다. 히로 혼 자 설쳤을 뿐이다. 히로 하나 때문에 아이리스 전체가 욕을 먹다니. 이래서 집단에 소속 되어 있는 사람은 알아서 잘 해야 하 는 것이다. 일루니아는 히로를 아이리스의 귀족에서 제명 시키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지만 그 주장은 지니에 의해 무 산 되었다.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서 그냥 넘어 가지는 것이다. 그러자 일루니아가 물었다. “아이언스 공작의 공로가 뭔데?” “그건…….” 사실 히로가 한 게 뭐가 있나? 전부 지니가 혼자서 한 거지. 명확하게 따져보자면 공로라고는 눈꼽만큼도 없 다. 하지만 지니는 존경하는 히로를 절대 내칠 수가 없었다. “공로는 둘째 치더라도 아이언스 공작님의 세력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진명의 승 상 제갈량님과도 친분이 두터우시고 상아탑의 주인이신 라이미안님과의 친분도 두텁습니다. 게다가 이젠 레 드 드래곤 크로니스와의 연대도 맺었으니 그 세력은 가히 일개 국가와 맞먹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이 언스 공작님을 내친다는 것은 아이리스로서도 좋은 일이 아닐 겁니다.” “그 인간 하나 때문에 아이리스 전체가 욕 먹는 것은 어쩌고?” “지금은 무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아이언스 공작님을 욕하고 있지만 진실이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기 마 련입니다. 언젠가는 그들도 세계 평화를 위한 아이언스 공작님의 노고를 깨닫고 칭송을 할 것입니다. 만약 지 금 아이언스 공작님을 내친다면 그때 가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전부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누님께서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능력과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계십니다.” “넌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잖아.” “아닙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할뿐입니다.” 아이언스 히로에 대한 지니의 믿음은 마치 광신도와도 같았다. 대체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이 어디서 생겨 났 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지니의 결사 반대로 히로의 퇴출은 일단 보류 되었다. 지니는 히로의 안부를 걱정하였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지금 아파서 누워 계세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아프다니?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충격이 너무 컸나 봐요.” “으음, 직접 아이언스 공작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저는 자리를 비 울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인디카즈네님께서 부디 저를 대신하여 아이언스 공작님을 잘 돌봐주십시오.” “예. 그건 걱정 마세요.” 지니와의 대화를 마친 인디는 밖으로 나왔다. 누가 그랬던가? 영웅은 고독한 법이라고. 세계 평화를 위해 자 기 의식 세계를 여행한 것도 모자라 빅장과 개나리 스텝이라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기술까지 익혀 크로니 스와 싸우려고 했던 히로. 하지만 역사는 그를 사기꾼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불쌍한 히로님.’ 인디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한숨을 내뱉었다. 히로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다만 재수가 없었을 뿐이 다. 확실히 안 되는 놈은 뭘 해도 안 되는 법이다. ---------------------------------- 아이리스가 결국 원고지 1600~1700매에서 완결이 났습니다. 출판사에서는 나누어서 내기로 결정을 내렸 고 14권이 이미 출간 되었네요... 이전 분량 전부 삭제합니다. 원래는 한번에 올릴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서... 하루에 한편씩 나누어서 올리겠습 니다. 그러면 대략 일주일 안에 전부 다 올릴 수 있겠네요. 다음편은 내일 올려드리겠습니다. 사방이 흰색인 방 안. 그리고 역시 흰색인 침대. 난 그곳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이 곳은 크로니스의 레 어. 내가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일이 끝난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난 그 동안 심각한 고뇌에 휩싸여야 했다. 나는 대체 무엇 때문 에 이 세상에 왔고 어째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나는 내가 크로니스에게 이겨서 전설의 영웅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처지는 전설 의 영웅이 아니라 전설의 사기꾼이었다.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고 원성이 자자하다고 한다. 얼마전 실시 한 설문 조사에서는 99.8% 득표율로 돌로 쳐죽이고 싶은 인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아마 내가 고개를 들 고 세상에 나가기만 하면 수천명에 이르는 암살자들이 일제히 달려들 것이다. “흑흑~ 내 인생은 이제 끝났어.” 난 베개를 끌어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벌써 몇날 며칠 째 눈물만 흘려댔것만 이 놈의 눈물은 마를 줄을 모른 다. 눈물이 마르면 피눈물이 난다고 하던데……. “우엥~ 그만 우세요, 오빠.” 라이는 침대 위에 올라와 손수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난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저리 가라고 손짓을 하였 다. 하지만 가라고 갈 라이가 아니다. 라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오빠가 울면 라이도 슬퍼진단 말이에요.” 울먹 거리는 라이의 말에 난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에서 쉰소리가 난다. “라이야.” “예, 오빠.” “이 오빠는 이제 끝났단다. 그러니 라이도 이제 그만 상아탑으로 돌아가렴. 그 동안 오빠 따라다니느라 수 고 했어.” “우엥~ 아니에요, 오빠. 라이는 영원히 오빠랑 함께 할 거예요. 세상 끝까지 함께 가기로 우리 약속했잖아 요.” “이제 다 끝났어.” “아니에요. 아직 안 끝났어요.” “모든 게 다 끝났어요.” “아니에요. 오빠 곁에는 아직 라이가 있잖아요.” “흑흑~.” 더 이상 라이가 곁에 있다는 것도 위로가 되지 못 한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시라 도 빨리 이 세계를 뜨고 싶다. 그것만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야. “식사하세요, 오빠. 며칠 동안 아무 것도 안 먹었잖아요.” “난 됐어. 라이나 많이 먹으렴.” “우엥~ 오빠가 안 먹으면 라이도 안 먹을 거예요.” “…….” 라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라이를 봐서라도 먹고 싶다. 하지만 라이의 저 말은 진실이 아니다. 저렇게 말 해 놓고선 먹을 거 다 먹는다. 서러워서 펑펑 울 때도 양손에 빵 하나씩만 쥐어주면 울음을 뚝 그치는 게 라 이 아니던가? 그런 라이가 내가 안 먹는다고 자신도 안 먹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라이 말로는 내가 밥 을 안 먹은 며칠 동안 자신도 안 먹었다고 하는데 나도 처음에 그 얘기를 듣고 굉장히 가슴이 아팠다. 하지 만 여전히 땡땡한 볼과 개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얼굴을 보니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굶은 애 가 이렇게 통통할 수는 없는 법이지. 아마도 방을 나가서 실컷 먹었을 것이다. 그래도 날 생각해서 저렇게 말 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다. 흑~ 하지만 난 더 이상 라이를 기를 자격이 없어. 나 같이 재수 없는 놈 밑에서 자라느니 다른 보호자를 만 나는 것이 라이한테도 훨씬 좋을 거야. “오빠, 라이랑 같이 먹어요. 라이는 오빠랑 같이 먹고 싶어요.” “라이 혼자 먹으렴. 이 오빠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단다.” “먹지 않으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그냥 죽어야지.” “우엥~ 그런 소리 마세요.” 지금 심정 같아서는 진짜 죽고 싶다. 더 이상 살아야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 어. 그냥 크로니스랑 싸우다가 죽을 걸. “흑~.” 또 다시 눈물이 흐른다. 배게가 축축하군. 이것도 이젠 바꿀 때가 된 건가? 난 베고 있던 베개를 침대 밖으 로 밀어 내고 밑에 있는 다른 베개를 침대 안으로 반입하였다. 이렇게 갈아 치운 베개가 벌써 수십개를 넘었 다. 며칠이나 꼼짝 않고 침대 위에 누워있었던 탓인지 지금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피골 이 상접한 몸, 누렇게 뜬 얼굴. 배가 고프다. 하지만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마치 몸 소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데 라이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난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 러자 나 먹으라고 가져온 죽을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고 있는 라이가 보였다. 그러던 중 라이와 나의 눈이 마 주쳤다. “…….” “…….” 잠시 침묵. 라이는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 놓더니 소매로 입가를 싹 닦고 죽그릇을 나에게 내밀었다. “오빠 드세요.” “…….” 할 말이 없다. 뭐? 오빠가 안 먹으면 라이도 안 먹어? 그 말을 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나 먹을 죽을 허겁지 겁 먹는 꼴이라니. 라이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게다가 입을 싹 닦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그 릇을 내미는 태도라니. 흥! 라이한테 정말 실망이야! 난 다시 고개를 획 돌렸다. 이젠 라이마저도 꼴 보기도 싫다. 라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어차피 인생은 혼자 서 걸어가는 가시밭 길이야.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어. 나한테 필요한 것은 오직 나 자신뿐. “왜 그래요, 오빠? 라이가 먹어서 화 났어요?” “…….” “우엥~ 하지만 라이는 너무 배가 고팠단 말이에요.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라이도 모르게 먹은 거예요. 라이 는 정말 안 먹으려 그랬는데…… 흑흑…….” 라이는 죽그릇을 떨어트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난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그래도 끝 까지 내 곁에 남아 준 엘프는 라이뿐인데. 남들은 다 나를 욕하며 떠나갔지만 라이만은 내 곁을 지켜주었 다. 잘 나갈 때 밀어주고 안 나갈 때는 등을 돌리는 것이 사람의 습성이지만 라이만은 초지일관 나를 믿어주 었다. 그런 라이를 겨우 죽 한 그릇 먹었다고 뭐라고 하다니. 나에게는 그럴 자격도 없다. “오빠 화 안 났어.” “흑흑, 정말요?” “응.” 난 손짓을 해서 라이를 불렀다. 그러자 라이는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난 손을 억지로 움직여 라이의 머 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라이는 금방 헤헤~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기분 전환이 빠르다니. 대체 머릿속 구조가 얼마나 단순하기에 이러는 걸까? 계속해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지만 손에 힘이 없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안 먹으니 밀려오는 것 은 졸음 밖에 없다. 어떻게든 열량 소비를 줄일 생각으로 몸이 수면을 택하는 것 같았다. 설마 이대로 잠들 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화창한 날씨. 이런 날에는 마음도 뒤숭숭해지고 하니 피크닉을 가는 게 제일이다. 난 도시락을 싸들고 라이와 함께 피크 닉 길에 나섰다. 우리가 피크닉 장소로 선택한 곳은 근처 놀이공원이었다. 라이가 하도 바이킹을 타고 싶다 고 조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놀이공원을 선택하였지. 으음, 사실 난 놀이공원 체질은 아닌데 말이야……. 뭐, 그래도 이왕 온 거니 재미있게 놀아야지. “라이야, 뭐 타고 싶니?” “바이킹이요! 라이는 바이킹이 너무너무 타고 싶어요!” “그래. 그럼 우리 바이킹을 타자꾸나.” “예, 오빠.” 나와 라이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이나 연인들이 상당 히 많았다. 난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 보았다. 쟤들은 저렇게 행복한데 난 이게 뭐 냐? 애 아빠도 아닌데 여자 대신 애나 끼고 있어야 하다니. 아니야,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몰라. 이번 기회에 헌 팅에 한번 나서 봐야겠다. 헌팅 소품은 라이.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강하다. 라 이의 귀여움이야 굳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니 라이를 잘만 활용한다면 여자들에게 쉽게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라이는 쓸모도 많아~. 라이를 훌륭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깨달은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내 뒤쪽으로 유치원생으로 보 이는 아이들이 쫘르륵 줄을 섰다. 스머프 같이 생긴 것들이 올망졸망 걸어다는 꼴을 보아하니 귀엽다는 생각 을 떨칠 수가 없다. 뭐 지들이 아무리 귀여워 봤자 우리 라이 발끝이라도 따라오겠냐만은……. 유치원생들 중 가장 귀엽게 생긴 여자애 하나가 고개를 꺽고 멀뚱멀뚱 나를 보았다. 난 고개를 갸웃했다. 쟤가 왜 저렇게 열심히 날 보는 거지? 훗! 뭐 이유야 뻔한 것 아니겠나? 내가 너무 잘 생겼기 때문에 계속 쳐다보는 거 겠지. 어린 것이 보는 눈 은 있어가지고……. 미안하다, 아이야. 난 라이 하나 기르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다른 아이를 입양할 생각은 눈꼽만큼 도 없단다. 그러니 그만 좀 바라보렴. 부담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여자애를 보고 있는데 그 얘가 입을 열었다. “오빠가 아이언스 공작님이세요?” “…….” 헉! 그걸 어떻게? 설마 나의 위명이 이런 어린 아이에게까지 알려졌단 말인가? 으음, 너무 잘난 것도 불편하 군. 가는 곳마다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보니 피곤해 죽겠어. “그렇단다, 아이야.” 내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며 말하자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햇다. “그런데 왜 드래곤과 안 싸웠어요?” “…….” “혹시 질까봐 일부러 안 싸운 건 아니에요?” “…….” “그렇죠? 질까봐 안 싸운 거죠?” “…….” 순진무구하게 생긴 어린 아이가 이런 잔인한 질문이라니. 극심한 심적 타격에 난 가슴을 움켜 쥐며 비틀거렸 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난 최선을 다 했어. “꼬, 꼬마야. 난 내 할 도리를 다 했단다.” 그러자 여자 아이는 팔짱을 끼며 동글동글한 눈으로 나를 째려 보았다. “할 도리를 다 했다고 하고서는 왜 안 싸웠어요?” “그, 그건…….” “흥! 질까봐 안 싸워 놓고선 변명하는 꼴이라니. 정말 실망이에요!” “…….” 어, 어떻게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이렇게 잔인한 말을. 아니,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더욱 잔인한 걸 지도 모른다. 아이 때는 선과 악에 대한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처럼 잔인한 말 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나란히 줄을 서 있던 유치원생들이 일제히 나에게 소리친 것은. “거짓말쟁이!!!” “……헉!” 거짓말쟁이라니? 내가 얼마나 진실한 남자인데. “사기꾼!!!” “……으윽!” 애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날 찌른다. 대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난 다만 라이와 바이 킹을 타고 싶을 뿐이라고.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마. 부탁이야. 난 아무 잘못이 없어. 다만 재수가 없었을 뿐이 야. 난 애들의 싸늘한 시선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난 울음을 터트리며 줄을 뛰쳐나왔다. “흑흑~ 모두들 너무해~.” “오빠! 바이킹 안 타요?” “…….” 너나 타렴, 라이야. 이런 상황에서도 바이킹을 찾는 니가 정말 원망스럽구나. 흑흑, 아무튼 이건 내 잘못 이 아니야. 나도 피해자란 말이야. 난 억울해! “와아! 사기꾼이 도망간다! 잡아라!” 뒤에서 터져나온 꼬마들의 목소리. 뒤를 살짝 돌아보니 아이들이 도시락이나 가방 등을 던지며 나를 쫓아오 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젠 아이들한테마저 쫓기는 신세라니. 비록 아이들이긴 하지만 동그랗게 뜬 눈에서 살기를 띄고 쫓아오니 왠만한 군대보다 더 무섭다. 게다가 속도 도 장난이 아니다. 왠만한 기마대는 저리가라 할 정도다. 대체 뭘 먹고 자랐기에 저렇게 빠른 거야? 난 이를 악물고 뛰었지만 금새 애들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애들은 내 주위를 빼곡히 둘러 싸고 소리를 지 르기 시작했다. “얼레리꼴레리~ 히로는~ 구라쟁이래~ 구라쟁이래~ 사기꾼이래~ 사기꾼이래~ 얼레리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아이들의 비웃음과 조롱은 나를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난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했다. “살려줘~!” “헉!” 외마디 신음과 함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사방이 흰색인 방안. 그리고 내 옆에는 귀여움 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잔혹한 살인마가 되었을 귀엽고 깜찍한 나의 라이가 누워 있었다. 라이 는 요 며칠 나를 간호한답시고 난리친 바람에 많이 피곤한지 쿨쿨~ 잘도 자고 있었다. 난 몇 번이나 방안을 둘러본 뒤에야 방금 전의 일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아~ 다행이다.” 정말 재수 없는 꿈이었다. 아이들한테 다구리 당하는 꿈이라니.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이다. 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재수 없는 꿈까지 꿔야하는 걸까? 설마 이것 이 소위 말하는 원죄(原罪, sin)란 말인가? 원죄란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이후부터 인간이 본디부터 지니고 태어나게 되었다는 죄이 다. 즉, 본인의 잘못에 의해 죄가 지어진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짊어져야 하는 죄를 뜻한다. 아아~ 잘못도 없이 죄를 짊어지다니. 정말 너무한다. 혹시 전생의 내가 매우 나쁜 짓을 한 게 아니었을 까? 그래서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우웅~.” 그때 마침 라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라이는 옆에 있는 나를 확인하더니 내 품에 안겼다. “오빠.” “왜 그러니?” “라이 이상한 꿈 꿨어요.” “응? 무슨 꿈인데?” “굉장히 이상한 꿈이에요. 이상하게 생긴 배가 하늘에서 막 흔들거리는데 오빠랑 라이가 그 앞에 서 있었거 든요. 그런데 갑자기 애들이 막 나타나서 오빠한테 막 뭐라 그랬어요.” “…….” 헉! 어떻게 나랑 똑 같은 꿈을? 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심전심이라더니 꿈까지 똑 같이 꿀 줄이야. 역시 라이와 나의 마음은 통한 다는 건가? 잠깐. 그렇다는 것은 내가 애들에게 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다 봤다는 건가? 구라쟁이, 사기꾼이라고 놀림 받 는 것까지 전부? 으윽, 라이에게만은 그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라이에게만은 좋게 기억 되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 미 늦었다. 안 좋은 모습 다 보여줬는데 좋게 기억 되기는 개뿔이……. 그럼 나는 끝까지 이런 모습으로 라이의 기억 속에 남아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라이에게만은 이미지 회복을 시켜야 한다. 이미지를 회복하고 당당 한 인간으로 다시 서는 그날까지 난 결코 포기 하지 않는다. 오직 라이를 위해서. 그래서 언젠가는 라이가 나 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 이대로 주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이대로 포기하면 아이언스 히로가 아니야. 난 아무리 밟아도 죽 지 않는 잡초처럼 다시 일어설 테야. 난 굳게 다짐을 하였다. 무슨 일이든 동기 부여가 중요하다고 하던가? 동기가 부여 되자 정말로 무언가를 하 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살아났다. 일단 결심은 섰으니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꼬르륵~. 밥부터 먹어야겠군. 난 비틀거리며 침대 위에서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없는 관계로 두 발로 땅을 딛고 선다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 가요, 오빠?” “배 고파서 밥 먹으러 간다.” “같이 가요, 오빠.” “…….” 내 죽까지 뺏어 먹고도 아직 배가 고프니? 라이는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 내 옷을 붙잡았다. 그런데 라이의 모습을 보니 뭔가 허전했다. 마치 있어 야 할 것이 없는 듯한 느낌. 사실 이런 느낌을 받는 경우는 오늘만이 아니다. 가끔식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 다. 난 깊게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이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있었다. “라이의 절친한 친구 이코는 어디 갔니?” “……예?”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되묻는 라이. 라이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갸웃갸웃 거렸다. 분명 본인도 어디 갔는 지 잘 모르는 것이다. 라이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이코가 어디 갔을까요?” “…….”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라는 거니? “이상하다. 이코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이랑 같이 있었는데…….” 라이는 손가락까지 입에 물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정말로 라이코스는 어 디 갔을까? 이 놈이 워낙 존재감이 없다보니 잘 등장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 문제는 사라졌을 때 그 걸 바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한참 지난 뒤에 알게 된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존재감이 없기에 매 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한참이 지나도 라이코스를 찾지 못하자 라이는 울상이 되었다. “오빠, 어떡해요? 이코가 없어졌어요.” “주머니는 뒤져 봤어?” 라이코스가 있을 곳이라곤 라이의 주머니 밖에 더 있겠냐? 내 말을 들은 라이는 재빨리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렸다. 하지만 왠일인지 라이코스는 그곳에 없었 다. 더욱 울상을 짓는 라이. 라이는 커다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우엥~ 없어요. 이코가 없어요. 흑흑.” “진정해, 라이야. 그딴 놈 없어도 너한텐 이 오빠가 있잖아.” “우에에엥~.” 라이는 커다랗게 울음을 터트렸다. 몸에 힘이 없어서 달래줄 기운도 없다. 난 라이를 달래주는 대신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라이의 머리카락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온 것은. “응? 무슨 일이야? 라이가 왜 울어?” “……헉!” 머리카락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놀랍게도 라이코스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순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뭐야? 니가 라이를 울렸어? 니가 뭔데 라이를 울려? 어디 나도 한번 울려봐!” 싸가지 없는 폼을 보아하니 라이코스가 확실하다. 라이는 갑작스런 라이코스의 출연에 황급히 울음을 멈추 고 밝게 웃었다. “헤헤~ 이코야~.” “라이야~.” “그 동안 어디에 있었어? 라이가 많이 걱정했잖아.” 걱정은 개뿔. 없어진지도 몰라 놓구선. “이코는 언제나 라이와 함께 있었어. 정말이야.” 함께 있긴 개뿔. 척 보아하니 실컷 자뼈져 놀다가 돌아온 것 같은데. 아무튼 이로써 라이 패밀리가 재결성 되었다. 심심하면 해체하고 다시 결성하다니. 지들이 무슨 댄스 그룹 도 아니고. “이코야, 그 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 “나두.” 배가 고픈데 라이 패밀리가 저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복장이 뒤집어 진다. 빨리 밥을 먹어야 하는데. 난 안 움직이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문까지 걸어갔다. 이러다가 부엌까지 가기도 전에 굶어 죽는 것은 아 닌가 모르겠다. 잠깐. 그런데 부엌이 어디에 있지? “…….” 잠시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좌절. 난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졌다. 저절로 감기는 내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행복하게 웃는 라이 패밀리 의 모습이었다. 그만 좀 웃어라, 라이야. 오빠 복장 다 뒤집어 진다. 진짜 배 고파서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죽기엔 내가 너무 억울했다. 난 죽그릇이 있는 곳까지 기어갔 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는 죽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라이가 너무 많이 먹어 남아있는 죽은 얼마 있지도 않 았다. 나 먹을 건 좀 남겨두지 그랬니? 그래도 그거라도 먹으니 좀 살 것 같다. 하지만 음식물이 한번 들어가기 시작하자 배는 밥을 달라고 더욱 요 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굶다가 갑자기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 하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 똑똑-! 문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누구지? 이곳에서 날 찾아올 사람이 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라이가 외쳤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며 붉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엘프가 들어왔다. 그 엘프의 이름은 크로니 스. 한때 나와 세계 평화를 두고 자웅을 겨루……지는 못했지만 겨룰뻔 했던 드래곤이다. 크로니스는 날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어나셨네요.” “…….” 헉! 저런 아름다운 미소라니? 게다가 부드러운 목소리.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입가에 묻는 죽을 소매로 닦고 일어섰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없는 관계로 몸이 휘청거렸다. 크로니스 는 재빨리 다가와 나를 부축해 주었다. “괜찮으신가요?” “……예. 괜찮아요.” 크로니스는 더 이상 나의 적이 아니었다. 크로니스와 싸우겠답시고 지옥 수련을 했던 일이 마치 옛날처럼 느 껴졌다.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조차 희미할 정도다. 꼬르륵~. 결정적인 순간에 내 배에서 나는 소리. 이런 경우 진짜 쪽 팔리기 마련이다. “배가 많이 고프신가요?” “예. 뭐 조금…….” “식탁에 식사를 차려 뒀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시지요.” “예.” 물론 가야지. 배 고파 죽겠는데 이거저거 따지게 생겼나? “와아! 라이도 같이 갈래요!” 라이는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아까 내 죽을 뺏어 먹고도 또 배가 고픈가 보다. 돌아서면 배고픈 게 어린 아이라지만 진짜 너무하는 것 같다. 저렇게 먹고도 살이 안 찌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식탁으로 이동하였다. 내가 배 고파 죽기 일보직전인 관계로 걷는 것이 불가능하여 텔레포트를 하였 다. 식탁에는 수 많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내 위장을 생각해서인지 대부분이 유동식이었다. 크로니스는 내가 음식에 손을 대기 전에 물약 하나를 건네 주었다. “이게 뭔가요?” “속을 안정시켜 줄 겁니다. 갑작스레 음식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난 크로니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물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바로 식탁에 앉아 음식을 싹 쓸어 입에 쑤 셔 넣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생긴 것만큼이나 전부 맛이 훌륭하였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이 식탁에서 한번 먹어본 적이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은 잘 안나지만 그때도 크로 니스는 날 위해 음식을 차려주었다. “냠냠~ 맛있다~.” 라이는 며칠을 굶은 나보다도 더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유동식을 먹었다. 진짜 누가 보면 애 며칠 굶긴 줄 알 겠다. 그러고 보니 라이는 더 이상 크로니스를 무서워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크로니스만 보면 ‘나쁜 엘프에요 ~. 라이는 나쁜 엘프가 무서워요~.’ 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트렸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니 혹시 크로니스가 라이한테 밥을 줘서 그런 건가? 라이의 먹성으로 보건데 크로니스가 라이한테 밥을 주는 순간 라이의 머릿속에 있던 나쁜 엘프의 이미지 는 사라지고 착한 엘프의 이미지가 그 자리를 채웠을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그런데 밥 주 면 착한 엘프라니. 착한 엘프의 기준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천천히 드세요.” 크로니스는 혹시나 내가 체할까 싶어 다정하게 말을 건네 주었다. 내 걱정을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그저 고 마울 따름이었다. 좀 보고 배우렴, 라이야. 이렇게 다정한 크로니스가 한때는 미쳐서 세상을 파괴하려 했었다니.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는다. 3일치 식사를 한번에 끝마친 나는 크로니스와 티타임을 갖기로 하였다. 라이는 소화도 시킬겸 라이코스와 함 께 나가서 놀고 있었다. 티타임은 곧 대화의 시간이다. 나와 크로니스는 차를 마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지성인다운 대화 를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네요.” 크로니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난 크로니스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밝고 화사한 표정. 확실히 예전의 무겁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 는 크로니스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였다. 그것도 보통 피해를 입은 게 아니라 엄청난 피해를 입었 지. 전 세계의 공적이 되었을 정도니까. 그래도 왠지 크로니스가 밉지는 않다. 한때는 크로니스를 죽이겠다 고 이를 악물었었는데……. 일이 이렇게 끝나서 정말 아쉽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도 무사하고, 나도 무사 하고, 크로니스도 무사하니.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났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비록 욕은 바가지로 얻어 먹 겠지만. “이제 좀 괜찮으세요?” 난 크로니스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냐는 의미로 물었다. 그러자 크로니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 괜찮습니다.” 나는 홀짝홀짝 차를 마셨다. 피처럼 붉은 홍차는 씁쓸한 맛을 입안에 남기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이렇 게 단 둘이서 앉아 차를 마시게 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운명은 나를 이 자리로 인도하였 다. 지금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이렇게 된 것이 전부 이그리드의 계획이 아니었나 싶다. 이그리드는 일이 이렇게 끝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지금 이그리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마도 웃고 있겠지. 크로니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난 차를 다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나요?” “글쎄요…….” 크로니스는 생각을 하듯 눈을 살짝 내리 깔았다. “저도 잘은 모르겠네요. 다만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뭐 그렇지. 인생은 한번쯤 살아볼만한 가치는 있으니까. 이렇게 크로니스와 다시 친구가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 “이제부터는 어쩌실 건가요?” “글쎄요.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당장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뭐 그렇지요.” “당신은 어쩔 생각입니까?” “저요? 저야 뭐…….” 그거에 대해선 나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무엇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언제까지나 크로니스의 레어에서 신세 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런데 크로니스와의 싸움마저 끝난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라이를 기르는 것 외에 달리 할 일 은 없는 것 같다. 아이리스를 위해서 싸워? 지금 내가 아이리스로 갔다가는 돌 맞아 죽기 딱 좋을 것이다. 사람들의 그 많은 원망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 인가? 아이리스에도 별로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게 뻔하고. 일단은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숨어서 사는 게 제 일이다. 소란이 좀 잠잠해지면 사람들 앞에 슬그머니 나타나야지. 왜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이 다 그렇게 하 잖아. 사고 치고나면 잠시 근신한답시고 놀러다니다가 잠잠해지면 텔레비전에 다시 얼굴 들이 밀고. 그러 고 보면 나도 참 정치인 체질이란 말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은 있으신가요?” “……예?” 나는 너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원래 세계라니? 원래 세계라면 설마 내가 살던 세계를 말하는 건가? 내가 살던 세계라……. 그 동안 이 세계에 너무 적응이 되서인지 가끔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이 라는 사실을 깜빡 잊곤 한다. 하지만 나는 분명 외계인이었다. 어째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외계인 맞다. 해외 여행을 떠나면 조국이 그립 듯이 다른 세계에 오면 원래 세계가 그립다. 사실 내가 감정 표현을 많 이 안 해서 그렇지 원래 세계가 매우 그리웠다. 동물에게는 귀소 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인간도 동물 인만큼 약간이긴 하지만 분명 귀소 본능을 가지고 있다. 왜 죽기 전에는 한번쯤 고향에 가보고 싶어 하지 않 는가? 나도 고향이 그립다. 학교에도 다시 가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다. 친구라고 해봐야 몇 명 없긴 하지만. 부 모님도 보고 싶다. 매연 가득한 거리를 거닐며 비만의 주범이라고 일컬어지는 햄버거도 먹고 싶고, 기름으 로 범벅이 된 치킨도 먹고 싶다. 내가 없는 사이 그 곳은 얼마나 변했을까? 시차가 많이 나서 거긴 며칠 지나지도 않았겠지만. “가고 싶은 모양이군요.” “예.” 난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크로니스는 말했다. “가고 싶으면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예?” 크로니스는 다시 말했다. “가고 싶으면 보내드리겠습니다.” “…….” 난 너무 놀라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가고 싶으면 보내주겠다니? 나를 그 세계로 다시 돌려보내 주겠다 고? 예전에 종종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본적이 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 가? 처음에는 당연 주저 없이 이 세계를 떠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 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적을 두고 있었다. 정들면 고향이라고 하였던가? 이 세계는 내 게 있어서 제 2의 고향이나 다름 없다. 그런 곳을 쉽게 떠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원래 세계에도 돌아가 고 싶었다. 그곳이야 말로 나의 진짜 고향이니까. 아~ 이 딜레마를 어찌 극복하면 좋단 말인가?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당신이 원하는 때에 당신의 세계로 돌려보 내드리겠습니다.” “…….” 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할 시간을 벌어서 정말 다행이다. 대화가 끝나자 크로니스는 조금 피곤하 다고 말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라이를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라이는 붉은색 흙이 가득 찬 공터에 서 랑디코스와 함께 뛰어 놀고 있었다. 신나게 뛰어 노는 라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난 그 자리에 앉아 라이가 뛰어 노는 모 습을 구경하였다. 한참을 방정을 떨며 뛰어다니던 라이는 날 발견하고는 나에게 쪼르르 달려 왔다. “오빠~.” 얼마나 뛰어 놀았는지 라이의 원피스에는 흙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난 그 흙을 털어주며 말했다. “라이야.” “예, 오빠.” “너는 좋겠다.” “예? 왜요?” “아무 생각 없이 사니까.” “……?” 후우~ 나도 라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피곤한 일인 가? 그 동안 나는 너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살았다. 머리를 많이 쓰는 것이 치매 예방에는 도움이 된다고 는 하지만 정말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도 가끔은 라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실컷 뛰어 다니고 싶어. “오빠, 라이 비행기 태워 줘요.” “…….” 또 비행기니? 넌 질리지도 않니? 지금 내 표정을 보고도 비행기란 말이 나와? 완전히 맛 들였다지만 너무 한 거 아니야? 난 비행기를 태워주는 대신 라이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라이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라이는 고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고향이요?” “응. 고향. 라이의 고향은 흑색 숲이라고 했잖아.” “으음, 라이는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 고향집이나 고향 사람들 보고 싶지 않아?” 라이는 고개를 갸웃갸웃 거렸다. 라이가 이러는 것은 생각을 깊게 할 때뿐이다. “라이는 잘 기억이 안 나는 걸요.” “기억이 안 나다니?” “고향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어렸을 적 일이라 기억도 안 나구요. 라이는 그냥 오빠랑 같 이 있는 게 좋아요.” “…….” 라이에게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한 내가 잘못이다. 라이의 아이큐 수준에 맞춰서 질문을 했어야 했는데. “라이는 고향 가보고 싶지도 않아?” “예. 라이는 고향 가는 거 별로 재미 없어요.” “…….” 넌 고향을 재미로 가니? “정말 고향 가보고 싶은 생각 없어?” “예. 없어요.” “…….” 넌 정말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사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라이는 이 오빠 고향이 어딘지 아니?” “아니요.”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 오빠의 고향은 아주 멀리있단다.” “멀리요?” “응.” “얼마나 먼데요?” “아주 멀어.”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 데요?” “글쎄. 백일 밤낮을 걸어도 못 갈 거야.” “우와! 그렇게 멀어요?” “응.” 백일 밤낮이 뭐냐? 아예 다른 차원계에 있는 곳인데. 그곳에 가기 위한 방법은 오직 텔레포트 마법뿐이다. 일반적인 텔레포트 마법진은 원 형태의 2차원 마법진이다. 하지만 차원계를 넘나들기 위해서는 여기에 시간 을 나타내는 z축이 붙어서 3차원 마법진이 필요하다.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마법진, 9클래스 마법, 그리고 좌표. 마법진은 내가 알고, 9클 래스 마법은 크로니스가 쓸 수 있다. 그리고 좌표는 에스카네스가 알고 있다. 잭이라는 남자가 이곳으로 왔 을 때 썼던 좌표를 역으로 이용한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나에 게 있겠지. 하아~ 차라리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될 텐데.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싫은 가장 큰 이유는 라이 때문이다. 라이를 이곳에 놓고 어떻게 나 혼자 돌아 갈 수 있겠나? 라이를 데려 간다면 모를까……. 잠깐! 라이를 데려 간다고? 라이를 원래 세계로 데려가? 난 라이를 보았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얼굴. 그 얼굴은 나를 향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젠 하루만 라이 를 안 봐도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다. 난 라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히로 곁에는 언제나 라이 가 있어줘야 해. 난 라이를 바로 앉히고 얼굴을 마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라이야. 오빠가 고향에 같이 가자고 하면 같이 갈 거야?” “오빠 고향이요? 오빠 고향은 저 멀리 있잖아요.” “그러니까 오빠가 나중에 고향에 돌아갈 생각인데 그때 라이도 같이 갈래?” “정말요? 라이도 데려가 주시는 거예요?” “응. 라이만 좋다면.” “와아! 그럼 라이도 같이 갈래요. 라이도 오빠 고향 가보고 싶어요.” “정말? 그럼 오빠랑 같이 갈래?” “예!”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라이. 난 나도 모르게 라이를 꼭 끌어 안았다. 라이도 내 고향을 가보고 싶다니. 그 래. 우리 같이 가자, 라이야. 하지만 라이는 내 고향이 다른 세계라는 것을 모른 채 대답을 한 것이다.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분 명 대답은 달라지겠지. 아니야, 혹시 모르지. 그래도 날 따라오겠다고 할지도……. 결국 그것은 라이가 판단할 문제다. 내가 그것에 대해 뭐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 고향은 도시이다. 그것도 인구 천만명 이상이 사는 대도시. 공기 중에는 매연과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하 늘은 회색빛이다. 그런 곳에서 자연 친화적 종족인 엘프가 살아갈 수 있을까? 라이는 예전에 도시가 좋다 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도시도 도시 나름이지 서울은 정말 살기 힘들 텐데. 혹시라도 우리 라이 천식이라 도 걸리면 어떡해? 그것 외에도 걱정은 또 있다. 라이의 장례 희망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엘프가 되는 것이다. 착한 엘프가 되 기 위해서는 지금의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서울은 어떠한가? 순수? 흥! 순수가 밥 먹여 주 냐? 그곳에 순수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비열함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환경에서 라이를 키운다 면 애가 어떻게 되겠는가? 남방에 있던 귤나무를 북방에다 가져다 심으면 귤 대신 탱자가 열리는 것처럼(실 제로 귤 대신 탱자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에서 나온 비유일 뿐이 다) 이쪽 세계에선 착하고 순진한 라이지만 서울로 데려가면 비행 소녀가 될지도 모른다. 혹시 아나? 그곳에 서 한 1년 정도 기르면 머리를 노랗게 염색 하고, 귀에는 귀걸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입으로는 담배를 뻑뻑 피 워댈지? “…….” 안 돼!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귀걸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라이라니? 그런 건 결코 용 납할 수 없어! 역시 라이는 이곳에서 살아야 해. 라이는 그쪽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아이야. 그런 생각을 하니 더욱 우울해졌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더니 그 말이 정답이다. 결국 은 나도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구나. 에휴~ 슬픈 인생이다. 할 일이 없다 보니 지루하고, 지루하다 보니 잡생각만 늘어난다. 그 잡생각들은 내 머릿속을 괴롭히고 그것 은 두통을 유발시킨다. 이러다가 우울증이라도 걸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사람에게는 목표 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목표 의식이란 무언가 한가지 목표를 세워 놓고 거기 도달하기 위 해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그 목표는 세계 정복처럼 커다란 것일 수도 있고,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로 먹겠다 는 작고 소박한 것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한때 세계 평화 수호라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 력하였다. 8클래스도 마스터하였고, 빅장도 익혔고, 개나리 스텝이라는 보법까지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 것 들은 전부 부질 없는 짓이었고 나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 없이 세계 평화는 지켜졌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쫓 던 목표는 내가 뭘 해보기도 전에 사라진 것이다. 지금 나는 이렇다 할만한 목표가 없는 상태다. 목표가 없는 삶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조각배와도 같다.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러했다. 목표가 사라진다 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목표가 없는 삶은 무의미 해. 빨리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다시 매진해야 할 텐 데. “라이야.” “예.” “이 오빠가 지금 할일이 없어서 그러는데 라이는 오빠가 뭘 했으면 좋겠니?” 내가 묻자 라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라이랑 같이 놀아요!” “…….” 어째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다. 넌 하루 종일 노는 것 밖에 생각 안 하니? 왠지 라이에게 물은 내가 바보 같이 느껴진다. 에휴~ 할 일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말이야지. 사실 그 동 안 너무 열심히 수련에만 매달렸어. 이제는 좀 쉴 때도 되었지. 휴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쉬자. 그런데 정말로 내가 할 일이 없을까? 왠지 자꾸만 뭔가 할 일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라이가 외쳤다. “오빠. 우리 상아탑으로 가요.” “응? 상아탑?” “예.” “왜? 이제 그만 상아탑으로 돌아가고 싶어?”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뒀으니 칼리가 많이 걱정할 것 같아서요. 귀티도 보고 싶 고.” “…….” 귀티라면 헬로우 귀티를 말하는 건가? 키티의 짝퉁 귀티. 라이코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라이의 가 장 친한 친구였었지. “상아탑이라…….” 라이는 상아탑의 수장이다. 그러고 보면 나를 따라다닌답시고 너무 오랫 동안 자리를 비워 두었다. 확실 히 한번쯤은 돌아가서 얼굴을 비치는 것이 쿠테타 예방 차원에서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아탑에 가 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혹시나 라이가 그곳에 눌러 앉으면 나는 어떻게 해? 라이가 눌러 앉지는 않더라 도 주위에서 못 가게 막으면? 아무튼 그렇게 되면 나는 라이와 헤어져야할 것이다. 안 그래도 나중에 내가 원래 세계로 떠나게 된다면 라 이와 헤어지게 될 텐데 벌써부터 헤어지다니. 그럴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이 세계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라이 와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 “꼭 상아탑에 가고 싶어?” “꼭 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고 싶어요. 그리고…….” “그리고?” “거기서 오빠가 할 일도 있잖아요.” “……응?” 내가 할 일이라니?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어? 난 상아탑에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특별히 기억 나는 것은 없었다. 으음, 대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지? “라이야. 힌트라도 좀 주지 않으련?” “번역이요.” “응?” “번역이요. 책 번역.” “……헉!” 그제야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책 번역. 아이언스 이그리드가 저술 한 8, 9클래스 마법에 관한 책을 번역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너무 오래 전에 한 약속이라 깜박 잊고 있 었다. 그리고 내가 원래 약속은 잘 기억하는 체질이 아닌 관계로…….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평균 기억력 3초를 자랑하는 라이가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었을까? 혹 시 라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약속만 기억하는 그런 아이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비행기 태워준다는 약속은 유 독 잘 기억했어. 그 외에 것은 3초가 지나기 전에 다 잊어 버리고. 으음, 수상하다. 정말 수상하다. 설마 라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 “…….” 앗! 내가 무슨 생각을? 우리 순수하고 순진한 라이를 의심하다니. 내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설마 우리 라이 가 겉으로는 순진한 아이인 것처럼 행세를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냉철하게 계산을 하는 그런 나쁜 엘프일 리 가 없잖아. 하아~ 우리 라이를 한 순간이나마 의심하다니. 라이의 보호자로서의 자격 미달이야. 부모의 첫째 조건은 아 이들을 믿어주는 거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번역이라니.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귀찮기도 하고. 생각 같아서는 그냥 모른체 하고 싶다. 하지 만 상아탑은 라이가 수장으로 있는 곳이다. 그런 곳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차피 지금 당 장 할 일도 없으니 예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까짓거 번역 해주자.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어찌보면 바닥에 떨어진 내 명성을 어느 정 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실전 되었던 8, 9클래스 마법을 세상에 내놓는 일. 이것은 마법 역사에 길 이 남을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위대한 일을 내가 했다고 하면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이 되어 고개를 들 고 살 수 있겠지. 그리고 8, 9클래스 마법 번역은 후학 양성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럼 상아탑으로 가자, 라이야.” “와아! 정말요?” “그래.” “정말 상아탑으로 가는 거예요?” “응.” 나는 라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라이의 무게에 휘청거렸을 테지만 크로니스를 상대하겠다 고 지옥 수련을 한 보람이 있는지 이제는 가뿐했다. 그래도 지옥 수련한 보람은 있군. 라이를 안아 드는 게 이 렇게 쉽다니 말이야. 으음, 이 정도면 비행기 태워주는 것도 문제 없겠군. 난 시범 삼아 라이를 공중에 던졌다가 받았다. “꺄아~.” 굉장히 좋아하는 라이. 난 다시 라이를 던졌다가 받았다. “꺄르르~.” 더 좋아하는 라이. 난 또 다시 라이를 던졌다가…… 못 받았다. 철퍼덕-! “우에에엥~.” 역시 아직은 무리인 건가? 갑자기 손에 힘이 빠질 줄 누가 알았겠니? “우엥~ 우엥~ 오빠, 미워~.” “미안해, 라이야. 오빠가 실수했어. 미안해.” 난 재빨리 라이를 안아 들어 토닥여 주었다. 라이는 나한테 배신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정말 서럽게 울고 있 었다.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앞으로는 라이를 데리고 이런 위험한 장난을 치지 말아야겠다. 난 반성하며 라이를 데리고 크로니스의 레어로 돌아갔다. 몸을 씻고 짐을 챙기는데 크로니스가 방안으로 들 어왔다. “가시는 건가요?” “예.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일단 상아탑으로 가려구요. 그곳에서 절 필요로 하는 것 같거든요.” “상아탑이라면 마법사 길드를 말하시는 건가요?” “예. 그래서 말인데…….” 난 크로니스의 눈치를 살핀 다음 말을 이었다. “그곳까지 보내주실 수 있나요?” 크로니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하긴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면 되니까 크로니스한테는 쉬운 일이겠지. “……?” 잠깐. 그러고 보니 나도 사용할 수 있잖아. 난 지금 8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 상아탑까지는 좀 멀긴 하지 만 한번에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크로니스한테 부탁했지? 설마 나 자신이 마법사라 는 사실도 잊은 건가? 으음, 아무래도 충격이 컸나 보군.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도 잊다니. 이러다가 진짜 알고 있는 마법까지 다 잊 어 버리는 거 아니야? 마법은 계속 공부를 해야 하고, 자꾸 써봐야 잊어 먹지 않는 법이다. 모든 학문이 다 그러하듯이 말이다. 지 금 나처럼 이렇게 빈둥거리다가는 어느 순간 마법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 하아~ 반성 좀 해야겠다. “그럼 지금 상아탑으로 보내드릴까요?” 크로니스의 물음에 난 잠시 고민해야겠다. 이대로 상아탑으로 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다른 곳에 잠시 들 렸다 갈까?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기 때문에 지금 당장 세상에 나설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파악 해야 하고, 만나 고 싶은 사람도 있기 때문에 난 세상에 나가야 한다. 물론 그냥 나갈 수는 없으니까 마스크라도 하나 쓰고 가 야 한다. “일단은 아이리스로 보내주세요. 아! 인디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시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라이도 준비를 마쳤는지 내 옆에 바짝 붙었다. 뭐 준비라고 해봐야 요술봉 하나 밖에 없지만. 저 요술봉을 보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다. 누구는 녹슨 철검 고르고, 누구는 요술봉 고르고. 흑~ 세상은 불공평 해! 솔직히 라이의 손에 들린 저 요술봉 갖고 싶다. 생긴 건 저 모양이지만 성능이 성능인만큼 비싸게 팔릴 게 뻔 하다. 나중에 기회 봐서 빼앗아야지~. 그런데 라이코스는 또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라이의 주머니 속에 숨은 건가, 머리카락 속에 숨은 건 가? 설마 또 다른 곳에 간 건 아니겠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예.” 난 혹시나 라이를 잊어 버릴까 싶어 라이의 손을 꼭 움켜 잡았다. 그러자 크로니스는 바로 마법을 시전하였 다. “텔레포트.” 크로니스의 낮은 목소리가 들린 순간 주위의 풍경은 바뀌었다. 나와 라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은 막사가 운집해 있는 아이리스의 진지. 아마 저 건너편에는 자바스 의 진지가 있을 것이다. 두 군이 대치한지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싸울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러 고 있을려는 지. 뭐 조만간 승패는 날 것이다. 나의 예상에 의하면 군사적인 전력으로만 봤을 때 자바스가 좀 더 강하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글쎄……. 아 무래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아이리스는 후방이 취약하다. 그리고 후방이 취약한 것은 자바스도 마찬 가지다. 북방에서 진명과 훈족이 매일 같이 국경을 두드려 대니 미치고 팔짝 뛰겠지. 아무튼 이렇게 치자면 전체 전력은 비스무레 한데 아이리스에는 예상치 못 했던 복병이 있었다. 가히 천군만 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만한 그 복병은 그 유명한 아이언스 히로 공작……은 아니고 아이언스 히로 공작 과 안면이 있는 드래곤들이다.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 이 두 드래곤이 있는 이상 아이리스는 무적이나 다름 없다. 그 누가 감히 드래곤과 맞서 싸울 수 있겠는 가? 한때 찬란한 명성을 자랑했던 아이언스 히로 공작이 드래곤과 맞서 싸우려 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 고 말았다. 아이언스 히로 공작마저 드래곤과 맞서 싸우는데 실패했는데 감히 어떤 놈이 맞설 수 있겠는 가? 아마 백만명이 달려 들어도 어림도 없을 것이다. 훗! 그래도 나니까 그만큼이나 했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짜 어림도 없다. 난 그래도 대단한 거라니까. 아무튼 블랙 드래곤과 화이트 드래곤이 아이리스에 있는 이상 아이리스는 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데 왜 이 두 드래곤들을 이용해 먹지 않는 건가? 난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싸움이다. 전쟁이란 결국은 국가들 간의 땅따먹 기 아니겠는가? 그런 땅따먹기에 드래곤을 이용해 먹는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일 은 결국 인간이 해결 해야 한다. 게다가 드래곤을 사용 했을 시에 여론이 나쁘게 형성 될 것은 당연지사다. 다 른 나라들의 압력도 만만치 않을 테고. 드래곤은 현대 무기로 치자면 핵무기라 할 수 있다. 가지고 있으면 전쟁 억제력은 있지만 쓰기는 힘든 무기.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드래곤들을 외교 협상에 카드로 이용할 생각인 것 같은데 별로 소용은 없을 것이다. ‘우리 측에는 드래곤이 두 마리나 있습니다. 그러니 다치기 싫으면 그 쪽에서 조용히 물러나시지요.’ ‘아, 그래요? 우리 측에도 사실 드래곤이 두 마리가 있는데. 시간 나면 언제 단체 미팅이라도 한번 시켜 주죠. ’ ‘진짜 드래곤 있다니까요.’ ‘지나가던 드래곤이 웃을 일이네요.’ 이렇게 될 게 뻔하니까. 사실 나 같아도 안 믿겠다.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이래저래 고민이 많으시겠군. 난 힘들어 하실 일루니아 여사님을 생각하며 잠시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라이와 함께 일루니아 여사님 의 막사로 이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되니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에게 걸렸다가 잘 못하면 돌 맞을 수도 있으니. 나는 굉장히 살금살금 걷는 반면 라이는 평소처럼 아장아장 걸었다. 난 작은 목소리로 라이에게 말했다. “라이야.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렴.” 라이는 금새 되물었다. “왜요?” “말 소리도 크게 내면 안 돼.” 내가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그렇게 말하자 라이는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요?” “…….”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까? 어차피 설명해줘 봐야 못 알아들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난 가장 간단하고 간략한 대답을 하기로 하였다. “그냥.” 아아~ 이 얼마나 훌륭한 대답인가? 라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이동할 수 있었다. 앗!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 온다. 난 황급히 라이를 안아 들고 몸을 숙였다. 다행히 사람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듯 그냥 지나쳤다. 난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큰일 날뻔 했군. 마치 무슨 첩보 영화를 찍는 것 같다. 라이는 지금 상황이 재밌는지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이걸 일종의 놀이 로 생각하나 보다. “다리 아파요, 오빠.” 갑작스런 라이의 엄살. 난 하는 수 없이 라이를 안아 들었다. 아쉬운 내가 참아야지 뭐. 다시 걸음을 옮기는 데 또 사람이 걸어 온다. 피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어쩌지? 어쩌지? 난 심히 당황스러웠지만 황급히 대처 방법을 생각해 냈다. 개나리 스텝 발동! 번개처럼 움직이는 나의 두 발. 나는 어느새 그들을 스쳐 지나 막사 뒤로 숨었다. “거 참 이상하다.” “왜?” “뭔가가 지나간 것 같은데.” “어, 그래?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그런데 대체 뭐가 지나간 거지?” “글쎄.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두 남자의 대화.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다. 그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개나리 스텝을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역시 배워서 남주는 거 없다니까. 여러번의 위기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난 무사히 일루니아 여사님의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 저 안 에 인디도 있을 것이다. 난 막사로 향하는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간다면 당연 일루니아 여사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루니아 여사님은 나에 게 욕과 조롱을 퍼부을 것이 뻔하다. 그럼 난 좌절하며 일루니아 여사님 앞에 무릎을 꿇겠지. 어쩌면 눈물까 지 흘릴지도 몰라. 그러면 일루니아 여사님은 코웃음을 치며 발로 나를 걷어 차겠지. 너무 잔인한 상상이다. 아~ 역시 난 안 돼. 일루니아 여사님을 만날 용기가 나질 않아. 난 그 비웃음을 견딜 자신이 없어. 하 는 수 없이 라이를 투입해야겠군. “라이야. 저 안으로 들어가 인디 오빠를 불러 오렴. 할 수 있겠지?” “예, 오빠.” 라이는 막사를 향해 아장아장 걸음을 옮겼다. 난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 보았다. 막사 안 으로 들어 간 라이는 잠시 후에 인디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인디는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난 몸을 조 금 일으키고 손짓을 했다. “여기야, 여기.” 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인디는 나를 발견하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인디와 라이를 데리고 사람이 없 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였다. 한숨 돌릴 상황이 되자 인디는 내게 고개 숙여 인사 하였다. “오랜만이에요, 히로님.” “그래.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만난 인디는 조금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아! 조금 변한 게 있긴 했다. 전보다 더 행복한 표정을 짓 고 있다는 것. 요즘 일루니아 여사님과 깨가 쏟아지나 보다. 아주 좋아 죽네, 죽어. 괜히 배알이 꼴린다. 지금 누구는 돌 맞아 죽게 생겼는데 누구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어? 이거 이래도 되 는 거야?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한 거니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세상이 공평하면 부자랑 거지는 왜 있고, 잘 생 긴 놈과 못 생긴 놈이 왜 있겠냐? 아무튼 현재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난 지금 인디에게 정보를 얻어야 한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말해 봐.” “예? 상황이라니요?” “현재 나에 대한 여론이 어떻게 조성 되어 있어? 정확하게 수치별로 비교해서 말해 봐.”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는데요. 설문 조사를 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럼 대충이라도 얘기해 봐.” “예. 그러니까 히로님에 대한 여론은 현재 매우…….” 의도적으로 말 끝을 흐리는 인디. 난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매우…….” “매우 뭐?” “굉장히…….” “굉장히 뭐?” “안 좋아요.” “…….” 아이씨, 그럴 줄 알았어. 난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솟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진짜 미치겠군.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됐을까? 매우 굉장히 안 좋단다. 대체 얼마나 안 좋기에 매우 굉장히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대체 얼마나 안 좋은데?” “역사는 물론 선사까지 뒤져봐도 이제까지 히로님만큼 많은 욕을 먹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데요. 어떻게 이 렇게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한 사람에게 쏠릴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라는데요.” “…….”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을 뻔했다. 괜히 들어서 가슴만 아프군. “그럼 아이리스쪽은 어때? 그래도 내가 공작으로 있는 나라인데 욕을 하긴 해도 좀 덜 하겠지?” 인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던데요. 특히…….” “특히?” “일루니아님께서는 히로님을 만나기만 하면…….” “만나기만 하면?” “이빨을 몽창 뽑아다가 입속에 쳐 넣겠다고 벼르고 계세요.” “……헉!” 난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며 입가를 가렸다. 여자의 몸으로 그런 잔인한 말을 서슴치 않고 하다니. 정말 너 무 무서운 여자다. 난 단 하루도 그런 여자와는 못 살아. 그런 여자 좋다고 쫓아다니는 인디가 존경스러울 뿐 이다. “그런데 진짜 이빨을 몽창 뽑아다가 입속에 쳐 넣는데? 설마 홧김에 한 소리겠지? 아니면 비유라던가?” “아닌데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샤이 사일런스 백작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잖아.”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일루니아님께서는 뺀치까지 준비해 놓으셨는데…….” “뭐? 뺀치?” 뺀치라면 설마 내 이빨을 뽑기 위해서? 준비성까지 이렇게 철저하다니. 만약 멋 모르고 저 막사에 고개를 내밀었다간 평생 빨대 물고 다녔겠군.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욕해도 한분만은 끝까지 히로님의 편을 들어주었어요.” “응? 정말?” “예.” “그게 누군데?” “일루니아님의 남동생이신 사일런스 지니님이세요.” “…….” 그래도 끝까지 날 믿고 받쳐주는 사람은 라이랑 지니 밖에 없구나. 고맙기도 해라. 난 굉장히 안도하였다. 만약 사일런스 지니마저 날 배신했다면 난 심한 좌절에 빠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 만 사일런스 지니는 끝까지 날 믿어 주었다. 사일런스 지니는 잘 나갈 때 밀어주고 안 나갈 때는 등을 돌리 는 그런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 어느 순간에는 의리와 신념을 지키는 진정한 남자였다. 사일런스 지니는 일반 평민이 아닌 귀족. 그것도 꽃미남 귀족이었다. 정계와 재계는 물론 평민들 사이에서 도 칭송이 자자하고 그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존재. 한 때는 아이언스 공작에게 밀려 잠시 인기가 추락한 적 이 있으니 아이언스 공작이 쪽박을 찬 지금 그의 인기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존재가 날 밀어 준다고 하니 나한테도 아직 희망은 있는 셈이다. “혹시 사일런스 백작이 나서서 나를 변호하고 그러지는 않았니?”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정말 그 인간이 나서서 날 변호했단 말이야?” “예. 지니님께서는 몸소 나서셔서 히로님을 변호했어요.” 인디의 말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난 인디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니가 왜 자랑스러워 하 는 건데? 설마 지니가 일루니아 여사님 동생이어서? 이제는 시동생이라고 챙겨 주는 거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여론이 좀 좋아졌어?” “아니요. 지니님께서 열렬히 히로님의 입장을 변호했지만 여론은 좋아지지 않았어요.” “아니, 왜? 사일런스 백작이 몸소 나섰다면 당연 여론이 좋아져야 하는 것 아니야? 그 인간 팬클럽이 몇 명인 데.”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전부 지니님께서 히로님에 대한 의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라 생각하고 있던데요. 그 래서 지니님의 지지도는 더욱 올라갔어요.” “…….” 사일런스 지니마저도 여론을 막을 수는 없었다는 건가?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정말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난 어깨를 늘어 뜨리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난 라이의 손을 잡고 등을 돌렸다. 우리 함께 상아탑으로 가자 라이야. 당분간 난 상아탑에서 은거하고 있어 야겠다. 돌 맞아 죽기는 싫으니까. 내가 라이와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데 뒤에서 인디가 날 불렀다. “히로님.” “왜?” 내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인디가 말했다. “루시아 공주님은 안 보고 가실 건가요?” “…….” 뭐? 루시아? 생각해 보니 루시아도 이곳에 있겠군.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히로님을 많이 뵙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 루시아가 날 보고 싶어한다고? 난 루시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살아서 돌아오면 같이 라이를 기르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은 아직 도 유효한 걸까? 루시아와 함께 라이를 기르는 것. 그 것이야 말로 내 생애 최대의 목표라 할 수 있다. 그것만 충족이 된다 면 난 세상을 다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상관 없다. 그래 도 난 행복할테니. 하지만 지금 나는 루시아를 만날 수 없다. 내가 지금 루시아를 만난다면 어쩌면 루시아까지 같이 손가락 질 받을 지도 모른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루시아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다. 그래. 참자. 사랑하는 여인을 곤경에 처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나중에 세상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 게 되었을 때 그녀의 앞에 나서자. 그때는 그녀에게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한테 엄마가 필요한 것 같아요. 라이의 엄마가 되주세요.’ 이렇게 말이다. 요즘 애 딸린 남자는 인기가 없다지만 라이 같은 애가 딸려있을 경우엔 얘기가 틀리다. 아 마 라이 때문에라도 나한테 시집오려 할 것이다. 데리고 다니면 은근히 도움이 많이 되는 라이. 내가 정말 라이 때문에 산다. “난 지금 루시아를 만날 자격이 없어. 훗날 내가 예전의 명성을 되찾으면 그때 루시아 앞에 당당하게 나서겠 어.” “하지만 루시아 공주님은…….” “됐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마. 자꾸 말하면 마음 흔들린다.” 내가 확고 부동한 태도로 말하자 인디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히로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그래. 나 만났다는 얘기는 누구한테도 하지 말고. 알았지?” “예.”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너도 어서 일루니아 여사님께 돌아가렴.” “예.” “안녕히 가세요, 오빠.” 인디는 등을 돌리고 아쉬운 듯 느린 걸음을 옮겼다. 인디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난 막대기를 하나 집어 들 고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라이는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내가 그리는 그림을 보다가 손벽을 치며 소리쳤다. “아! 텔레포트 마법진이네요.” “응. 텔레포트 마법진이야.” 역시 7클래스 마법사답게 마법진이 다 그려지지도 않았는데 한 눈에 알아본다. 나는 상아탑의 텔레포트 마법 진과 연결 되는 마법진을 그려 상아탑으로 이동하려고 한다.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8클래스 마스터 마법사 인 나에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약 20여 분에 걸쳐 마법진을 다 그린 나는 라이를 그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마법을 쓰려는데……. “잠깐만요!” 갑작스레 들린 라이의 외침. 그 외침에 난 쓰려던 마법을 멈추고 라이를 보았다. “왜 그러니? 뭐 놓고 온 거라도 있니?” 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럼 왜?” “이 마법은 라이가 쓸게요.” “……응?” 난 놀라서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리고는 이내 라이가 마법사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라이 가 아직 7클래스라는 사실도 깨닫고 끄덕이려는 고개를 멈추었다. “상아탑과는 거리가 꽤 될 텐데. 아무리 텔레포트 마법진을 연결해 놓았다 해도 7클래스로는 좀 무리가 아닐 까? 그냥 8클래스인 오빠가 알아서 할 게.” “괜찮아요, 오빠.” “난 안 괜찮아.” 혹시라도 니가 실수를 해서 이상한 곳으로 떨이지면 어쩌니? 잘못해서 몸이 분자 단위로 분해 되어 버리 면? 그럼 누가 책임져? “정말 괜찮아요, 오빠. 라이에게는 이게 있잖아요.” 라이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것을 번쩍 들어 보였다. 휘향찬란하게 빛나는 저것은 설마……. “요술봉!” 흰 막대기에 분홍색 하트가 달리고 원색의 보석들이 유치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 드래곤들이 창고 방 출을 할때 라이가 땡깡을 써서 가지고 나온 요술봉이었다. 마법력을 무려 2배나 올려주는 엄청난 아티팩 트. 그 아티팩트가 지금 라이의 손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리 라이의 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찬란함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라이에게 이런 카 리스마가 있었을 줄이야. 놀랍다. “헤헤~.” 라이는 웃음을 짓더니 요술봉을 휘두르며 외쳤다. “텔레포트!” 헉! 귀여워라! 요술공주 밍키 저리 가라다. ---------------------------------------------- 3,4편만 더 올리면 끝날 것 같네요. 크로니스와의 싸움이 무효로 돌아가고 전세계인의 욕을 얻어 먹게 된 히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1위 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돌로 쳐 죽이고 싶은 사람 1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히로의 불행을 기뻐하는 사람이 하나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반데라스. 현 헤리오의 국왕인 그는 히로 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푸하하~ 그럼 그렇지. 지깟 놈이 무슨 드래곤과 싸우겠다고…… 우헤헤헤~.” 도저히 한 나라의 국왕이라고는 볼 수 없는 방정 맞은 웃음 소리. 히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 달려들 어 밟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히로는 없었고 있는 것은 하인들뿐이었다. 반데라스는 주변의 하인들을 둘러 보고는 자신의 국왕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닫 고 근엄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오려는 웃음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크흐흐흐.” 생각 할 수록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눈꼴시게 설쳐 되더니 결국은 쪽박을 차게 되는 군.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너무 좋은 나머지 창문으로 뛰어내릴뻔 했다. 주위 사람들이 안 말렸으면 지금 쯤 병원에 실려갔을 것이다. 반데라스가 히로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승화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거야 당연 히로를 잠정적인 연 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나타나서 세레나를 채갈지 모른다. 이런 공포감이 반데라스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마도 반데라스가 두 발 편히 뻗고 잘 날은 히로가 이 세계에 서 사라지는 날일 것이다. 그래서 내심 히로가 크로니스와 싸우다가 죽기를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 게 된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 히로는 죽은 것만 못한 것이 되어 버렸으니. “푸하하하~ 너무 잘 됐어~.” 반데라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침대 위를 구르며 오두방정을 떠는데 마침 문이 열리며 세레나가 들어왔 다. 세레나는 거의 지랄 발광을 하고 있는 반데라스를 보고는 혹시나 병이 옮을까 싶어 멀찌감치 떨어져서 물 었다. “무슨 일이시죠?” 세레나를 본 하인들은 둘만의 좋은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고 반데라스는 황급 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세, 세레나양.” 좋은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지랄 발광하는 모습이나 보이다니. 계속 이런 식으로 하다간 약혼이 파 기 될 날도 얼마 머지 않았다. 반데라스도 그걸 알았는지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아~ 세레나양에게 그런 주책 맞은 모습을 보이다니. 부끄럽구나.’ 세레나는 반데라스가 좀 정상적으로 보이자 그제야 안심하고 옆으로 다가섰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죠?” 요즘 세레나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이유야 당연 히로 때문이었다. 드래곤과 싸우겠답시고 자신까지 버리 고 간 주제에 드래곤과 싸우지도 못하고 돌아오다니. 정말 기가 막히고 통탄할 노릇이었다. 히로가 드래곤과 싸워서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 어느 경우라도 첫사랑은 낭만적으로 끝을 맺었을 것이 다. 하지만 히로가 드래곤과 싸우지도 않음으로써 첫사랑의 낭만은 개풀 뜯어 먹는 소리가 되고 말았다. 역 시 이런 시대에 낭만을 찾는 것은 무리다. 특히 상대가 히로라면 말이다. 그래도 순진한 소녀의 첫사랑인데. 잘하면 낭만으로 남을 수도 있었는데. 이 경우는 세레나도 재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뭐 이것도 다 운명이라면 운명이니 순응해야겠지. 반데라스는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나요?” “…….” 물론 들었다. 그 소식 모르는 사람이 요즘 어디 있겠는가?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반데라스는 말을 이었다. “참 사람이란 알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아이언스 공작이 사기꾼이었을지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다. 한때나 마 아이언스 공작을 좋게 본 제가 부끄러워지는 군요.” 드디어 반데라스가 세레나를 부른 이유가 밝혀졌다. 반데라스는 치사하게도 히로의 험담, 일명 뒷다마를 까 기 위해 세레나를 부른 것이다. 사실 남의 뒷다마 까는 것만큼 재밌는 것이 또 어디있겠는가? “아이언스 공작도 어찌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전세계인을 상대로 사기를 친 셈이니. 하하~ 이제까 지 아이언스 공작만큼 커다란 사기를 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던데요. 하긴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아이 언스 공작이 좀 사기꾼처럼 생기긴 했지요. 전 진작에 그놈이 사기꾼인 것을 짐작했어요. 말할 때부터 사기 꾼 냄새를 팍팍 풍기던데요. 세레나양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아~ 그딴 사기꾼이 세라나양과 알고 지 냈다니. 세레나양의 명성에 누가 되지는 않았을까 걱정 되네요. 세레나양도 많이 불쾌하시죠?” “…….” 세레나는 불쾌했다. 그것도 매우 많이. 하지만 그것은 히로를 알고 지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데라스를 알 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남을 험담을 하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는 자신의 험담을 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히로가 지금은 사기꾼으로 불리기는 하지 만 세레나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에 대한 험담을 세레나가 기분 좋게 들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세레나의 이런 기분을 모르는 반데라스는 히로를 씹는 것에 도취되어 마치 껌을 씹 듯이 더욱 열렬하 게 히로를 씹었다. 원래 험담의 특징 중 하나가 계속 하다보면 점점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 서 말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 모독이 치중하기 마련이다. 반데라스의 험담은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딴 쓰레기 같은 자식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해요. 그날 왕궁에 왔을 때 정원에다가 묻어버릴 걸 그랬어 요. 제가 그때 당당하게 결투를 신청해서 그놈을 죽였어야 하는 건데. 정말 아쉽네요. 세레나양도 그렇게 생 각하시죠? 아무튼 그 쓰레기가 세레나양의 손을 잡은 것만 생각하면…… 아~ 그때 그 놈의 손목을 잘랐어 야 했는데.” 참다 못한 세레나는 고개를 획 돌려 반데라스를 노려 보았다. 반데라스는 그 눈빛에 움찔했다. ‘어째서 세레나양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내가 뭘 잘못 하기로 했나?’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아직도 모르는 반데라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뭐 불쾌하신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세레나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휘둘렀다. 짜악-! 반데라스의 뺨을 후려친 세레나는 송곳 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반데라스의 마음을 헤집은 다음 다시 고개 를 획 돌렸다. “나쁜 자식!” 세레나는 이를 갈며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방을 빠져 나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반데라스는 황급히 세레나 의 뒤를 쫓아가려 했지만 이미 방문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닫힌 뒤였다. 반데라스는 얼얼한 뺨을 붙잡으며 황당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맞은 거지?’ 아직까지 상황 파악을 못하는 반데라스. 지금 반데라스의 행동은 약혼 파기를 위해 일보전진을 한 거나 다름 이 없다. 반데라스는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하였다. “아아~ 세레나양. 세레나양은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어째서 날 미워하는 걸까?” 그걸 모르기 때문에 영원히 세레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이러다가 진짜 약 혼 파기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레나가 너무 아깝다. * * * * * 상아탑으로 오게 된 라이와 나. 우리가 맨 처음에 만난 사람은 텔레포트 마법진을 관리하고 있는 노마법사였 고, 그 다음에 만난 사람은 칼리를 비롯한 상아탑의 원로들이었다. 칼리는 라이를 보더니 재빨리 달려와서 꼬옥 껴안았다. “오랜만에 돌아오셨네요, 라이미안님.” 라이도 간만에 칼리를 만난 것이 반가운지 칼리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 “응응. 라이 돌아왔어. 라이가 칼리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물론 알지요.” “정말?” “예.” “그럼 칼리도 라이가 보고 싶었어?” “예. 물론이에요.” 칼리는 라이를 안아서 토닥여 주었다. 라이가 굉장히 좋아하였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역시 칼리는 오랜 시 간 라이와 함께 생활해서 그런지 라이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안다. 라이의 유모로는 적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 다. 현재 나는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욕을 얻어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아탑의 원로들은 나를 반 갑게 맞아 주었다. 진짜로 내가 반가워서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지는 않고 내가 마법서를 번역해주길 간절 히 바라는 것 같았다. 뭐, 까짓 거 해주지. 내가 못 해줄 게 뭐 있겠냐? 라이와의 감동적인 재회를 마친 칼리는 나를 도서관으로 안내하였다. “이곳에는 현존하는 모든 마법책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이 사본이지만 상당수 원본도 소장하고 있지 요. 이곳은 오직 상아탑의 고위 마법사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난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다. 힘겹게 이곳까지 왔는데 밥 한 끼 대접도 안 하고 일부터 시키냐? 정말 너무 하네. 도서관은 그 안에 있는 책들이 귀중한만큼 보안이 철저하게 되어 있었다. 사람이 서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 고 여기저기에 마법 트랩이 설치 되어 있다. 멋 모르고 발을 딛여 놓았다가는 죽기 딱 좋을 것이다. 여러 검문 절차를 거쳐 옻칠한 나무로 된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자 상아탑의 보물 창고라는 도서관이 그 모습 을 드러냈다. 내 키의 세배는 될 것 같은 책장들이 끝도 없이 뻗어 있다. 그리고 그 책장에는 서적들이 빼곡히 자리 잡 고 있었다. 책 크기도 장난이 아니다. 마법서답게 엄청난 크기와 백과사전을 능가할만한 두께를 자랑하고 있 었다. 난 놀라 혀를 내둘렀다. 이런 장관이라니. 여기있는 책을 다 읽으려면 몇 백년은 족히 필요할 것이다. “와아! 도서관이다!” 라이는 두 팔을 벌리고 자신이 마치 비행기라도 되는냥 도서관 안을 방방거리며 뛰어다녔다. 다른 사람들 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있었으면 애 교육 똑 바로 시키라고 혼 났을게 분명하다.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마법서는 어디 있나요?” “저쪽입니다.” 칼리는 가장 끝쪽에 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난 그 책장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대 략 1천권도 넘은 책이 꽂혀 있었는데 전부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살아 생전 이렇게 많은 책을 썼다니.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칼리는 그 엄청난 분량의 책들을 보며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넨 이드님께서는 마법의 기반을 세우셨고,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은 그 기반을 탄탄히 다져 놓았습니다. 만 약 이 두 분께서 안 계셨다면 지금쯤 인간은 마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 두 분이 계셨 기에 이 상아탑도 세워질 수가 있었고, 후학도 양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판 면식도 없는 사람 소개하는데 왜 감격스러워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참고로 나는 그 둘과 전부 안면 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이그리드야 나를 이 세계로 불러온 마법사니 두 말 할 것도 없겠고, 넨 이드 역 시 만나봤다. 넨 이드의 정체는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 아닌가? 즉 현재의 제갈량. 아~ 마법의 역사를 이룩하신 두 분과 안면을 트고 지내다니. 갑자기 내가 대단해 보이는 것은 왜 일까? 역 시 유명 인사는 많이 알고 지낼 수록 좋은 법이야. “그런데 제가 해야할 일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난 좀 자세히 말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물었는데 예상 외로 대답은 간단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님께서 저술하신 8, 9클래스 마법서를 번역해 주시면 됩니다.” “번역은 어디서 하지요? 작업실이라도 하나 내주시는 건가요?” “이곳에서 하시면 됩니다. 모든 숙식과 경비 일체를 저희 상아탑 측에서 제공해드릴테니 아이언스 히로님께 서는 마법서를 번역해 주시는데면 열중해 주십시오. 그 외에도 저희 측에서 최대한의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 다.” 칼리의 태도는 친절하고 깍듯하기 그지 없었다. 하긴 번역해 줄 사람이 나 밖에 없는데 오죽 하겠냐? 그런데 저쪽에서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나오니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든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 올 때 다르다던데. 혹시 번역 다 해주고나면 찬밥 신세 되는 거 아니야? “아이언스 히로님께서 번역 하신 마법서는 이 도서관에 소장될 예정입니다. 아이언스 히로님의 저서는 마 법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 후세에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 정말 그럴까? 요즘 욕만 바가지로 얻어 먹고 있는데 후세에는 칭송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데 몇 권이나 번역을 해야 하나요?” “얼마 안 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리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안심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들은 기억으론 대충 300권 정도라고 들 었던 것 같은데. “전체 365권입니다. 8클래스 마법서가 180권. 9클래스 마법서가 185권.” “……예?” 나는 칼리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아니, 농담이기를 바랬다. 365권이라니? 세상에! “뭘 그렇게 놀라시죠? 제가 예전에 말씀 드린적이 있는 것 같은데.” 칼리는 이상하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물론 나도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렇게 들 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틀리다. 일단 나는 책이 저렇게 두꺼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 다. 그리고 가로, 세로 길이는 또 왜 저렇게 긴 거야? 저거 한권 배껴 쓰는데만도 보름은 족히 걸리겠 다.(뭐 번역이나 배껴 쓰는 거나 나한테는 별 차이 없지만) “오빠, 빨리 번역 시작해요! 라이가 옆에서 도와줄게요!”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라이는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별로 기운이 나질 않았다. 한, 두권이 어야 의욕을 가지고 번역을 하던지 말던지 하지. 365권이나 되니까 아예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내가 살아 생 전에 저걸 다 번역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일단 한권을 번역하는데 보름이 걸린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럼 한달에 두권을 번역할 수 있고, 1년에 24권 을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대충 15년 정도가 걸린다는 얘기군. 10일에 한권씩 번역을 해도 10년은 걸 리고. 어찌 되었든 내 청춘 전부를 이런 책 냄새 나는 도서관에서 보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도 눈알 빠지도록 활 자만 쳐다보면서. 내가 무슨 번역하는 기계도 아니고……. “종이와 펜은 이곳에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그럼 저는 이 만.” “잘 가, 칼리.” 칼리가 도서관을 나서자 라이는 열심히 손을 흔들어 배웅을 하였다. 하지만 난 도저히 손을 흔들어 줄 기운 이 나질 않았다. “빨리 번역해요, 오빠.” 내가 번역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라이. 내가 책을 번역했을 경우 가장 큰 수해자는 누구일까? 그야 당연 예전 에 7클래스를 마스터했고 이젠 8클래스로 접어드는 라이일 것이다. 그렇기에 라이가 이렇게 날 재촉하는 거 고. 난 일단 자리에 앉았다. 번역을 하러 왔으니 번역을 해줘야겠지. 자료를 정리거나 책을 읽는 장소로 사용되 는 도서관 책상 위에는 팬과 잉크, 종이 등이 풍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라이는 사다리를 놓고 낑낑거리 며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마법서를 책장에서 꺼냈다. 그걸 품에 가득 안고 비틀거리며 걸어오는데 어찌 불안 해 보인다. 비틀비틀~. 저러다가 넘어지면 어쩌지? 쿵-! 앗! 넘어졌다. 하지만 라이는 울지 않고 벌떡 일어나 다시 마법서를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나를 향해 다가왔다. “여기요, 오빠. 이것부터 번역하세요.” “…….” 그렇게까지 내가 번역하길 원하니? 라이가 넘어졌는데 울지도 않고 운반해온 마법서. 난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래. 라이가 이렇게 까지 원하는데 번역 해야겠지. 설마 내 청춘을 여기에 전부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난 마법서를 펴고 팬을 잡아 들었다. 책의 제목은 <8클래스 마법 입문서>이다. 깨알 같은 글씨들을 보니 한 숨 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난 좌절하지 않고 번역을 시작했다. “8클래스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여덟 번째의 마나가 필요하다. 8클래스의 마법은 7클래스에 비해 그 시동 방 식이 몇 배는 더 복잡하며 마나의 운용 방법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러므로…….” * * * * * * 히로가 과거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마법서 번역에 열중한다는 얘기는 전세계에 널리널리 퍼졌다. 그것 을 앞장 서서 퍼트린 사람은 아이리스의 잘난 백작 사일런스 지니였다. 지니는 나름대로의 선을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열심히 떠벌리고 다녔다. “아이언스 히로님께서 지금 마법서 번역에 한창이시다. 이것은 마법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훌륭한 일이 아 닐 수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 아이언스 히로님을 욕하는 것을 그만두고 칭송을 하도록 하자.” 마법서 번역이 마법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훌륭한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 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칭송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얘기를 전해 들은 루시아는 황당하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을 피해 상아탑으로 숨다니. 루시아는 진실을 아 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히로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 을 피해 숨어야 하는 히로가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다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좋은 일하고 욕 먹는 걸 까? 뭐 그것이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그래도 불쌍하다. “한번 만나볼까?” 루시아는 상아탑으로 찾아가서 히로를 만나보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니가 그것을 말렸다. “지금 루시아 공주님께서 가시는 것은 아이언스 공작님께 전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마법서를 번역하는 것 에 방해가 될뿐더러 루시아 공주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아이언스 공작님은 더욱 궁지 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궁지에 몰린다는 거죠?” “원래 미모의 공주랑 사귀는 남자를 남자들이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리가 없지요. 게다가 그 남자가 사기꾼 으로 불리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지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당당하게 돌아올 그날까지 루시아 공주님께서 는 백일을 하루 같이 기다려 주십시오. 그것이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하는 길입니다.” 지니의 조리있는 설명을 들은 루시아는 히로를 찾아 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사실 지니의 설명은 정확했 다. 세상 어떤 남자가 초라한 모습으로 사랑하는 여자 앞에 나서고 싶겠는가? 아무리 자존심을 갖다 버린 히로라도 그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 한다. 그 마음을 알기에 루시아는 참고 기다리고 했다. 히로가 당당하게 자신의 앞으로 나설 그날까지. 그런데 그 런 날이 정말 오기는 할까? * * * * * * 나는 일에 치여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육체적으로가 아닌 정신적으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일은 끝이 보이 질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자는 시간까지 아끼고 식사하는 시간까지 아꼈다. 깨어 있 는 시간 동안 라이랑 장난 한번 안 치고 일만했다. 라이도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시끄러운 소리 도 내지 않았고 놀아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옆에서 날 지켜볼뿐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라이는 가 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라이가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 지 않았다. 10일 동안 꼬박 번역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권도 끝내지 못했다. 남아 있는 분량을 보아하니 대충 15 일 정도면 한권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열심히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15일씩이나 걸리다니. 좀 맘 편 하게 주 5일 하루 8시간을 일한다고 하면 한권 번역하는데 한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아~ 아무래도 내 청춘뿐만 아니라 내 남은 인생 전부를 마법서 번역에 바쳐야겠구나. 난 그렇게 생각하며 한탄을 하였다. 그러자 내 옆에서 빵을 야금야금 먹고 있던 라이가 말했다. “앗, 오빠! 손이 멈췄어요. 빨리 아까처럼 다시 움직이세요. 라이가 옆에서 응원할게요.” “…….” 이 오빠가 어떻게 되건 말건, 너한테는 마법서 번역만이 중요하니? 정말 그런 거야? 문득 라이의 저의가 궁 금해진다. 혹시 라이가 그 동안 날 따라다닌 것은 마법서 번역을 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라이는 상아탑의 수장인 동시에 마법서 번역의 가장 큰 수혜자니까. 그렇다면… …? 상아탑 측에서는 아이언스 히로가 순순히 마법서 번역에 응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를 거듭 한 끝에 결국은 상아탑의 수장인 라이미안이 직접 나서기로 하였다. 라이미안은 진짜 어린 아이인 것처럼 귀 엽게 행동하며 아이언스 히로에게 접근 한다. 그리고 신임을 얻기 위해 열심히 그의 뒤를 쫓아 다닌다. 결 국 아이언스 히로가 라이미안의 귀여움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자 그를 꼬셔서 상아탑으로 데리 고 와 번역을 시킨다. 설마 이런 건 아니겠지? 그럼 번역이 다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라이가 날 버리는 거 아냐? ‘흥! 오빠한테는 이제 볼 일 없어요. 앞으로 만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설마 라이가 이러지는 않겠지? 아니야.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잖아. 어쩌면 라이가 의도적으로 나한테 접근한 것일지 도……. 그런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진다. 중요한 사실은 이게 가능성이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라이의 나이는 700살이 넘는다. 아무리 외형에 따라 행동이 변한다 하더라도 너무 유아적으로 행동한다. 사 실 라이는 또래 애들(외형적으로 비슷한 나이의 애들)에 비해서도 정신 연령이 낮은 것 같다. 잘 생각해보면 라이가 날 따라다는 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라이가 왜 날 따라다닌단 말인가? 내 가 얼굴이 잘 생겼어, 돈이 많아? 아니면 마음씨가 착해? 내가 내세울 거라고는 8클래스의 마법 실력과 아이 언스어를 알고 있다는 것뿐이다. 라이가 날 따라다녔을 당시에 나는 5클래스였으니 결국 내세울 건 아이언스 어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헉! 그렇다는 것은 라이가 정말 의도적으로 나한테 접근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한테 보여주었던 그 많 은 행동들이 전부 연기? 난 라이를 보았다. 라이는 빵을 야금야금 뜯어 먹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얼굴 가득 귀여운 표정을 한 채. 저렇게 귀엽고 착한 라이가 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 그럴 리 없어. 라이는 절대 그럴 리 없어. “응? 왜 그렇게 쳐다봐요, 오빠?” 라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우리 라이가 너무 귀여워서.” “정말요?” “응.” “헤헤~.” 라이는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고, 그 모습에 난 라이에 대한 의심을 머릿속에서 싹 지웠다. 하긴 라이 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나한테 접근했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설사 라이가 정말 마법서 번역을 위 해 날 이용해 먹는 거라 하더라도 닌 기꺼이 번역을 하겠다. 라이가 원하는 일이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난 라이를 번쩍 들어다가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라이는 좋아하며 내 품에 안겼다. 난 라이를 꼬옥 껴안으 며 말했다. “이 오빠는 라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단다.” “정말요?” “물론이지.” “라이도 오빠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정말?” “예. 정말이에요. 라이는 착한 엘프여서 거짓말 안 해요.” 라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이런 귀여운 미소라니. 난 나도 모르게 라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이 통통하 고 부드러운 살결. 평생 라이의 볼만 만지고 있어도 행복할 것 같다. 난 라이를 다시 옆에 앉히고 번역에 열중하였다. 열심히 번역해서 라이를 기쁘게 해줘야지~. 이곳은 외부와는 격리된 나와 라이만의 공간. 이곳에 있으면 바깥 세상에 대해선 신경 쓸 것이 없다. 세상 사 람들이 욕을 하건 말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어차피 난 듣지도 못하는데. 어쩌면 이곳에서 번역을 하면서 라이와 함께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만 내 곁 에 있어준다면야……. 하지만 라이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평생을 딸 하나만 바라보고 살 수 는 없지 않은가? 아내도 있어야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아내가 루시아였으면 더 좋겠다. 그럼 루시아를 이곳으로 불러? “…….” 그럴 수야 없다. 지금 내가 무슨 면목으로 루시아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적어도 번역 일은 끝마쳐야 루시 아의 얼굴을 볼 면목이 서지. 하지만 어느 세월에 이걸 다 번역해? 이걸 다 번역하고 나면 난 환갑을 맞을지 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루시아는 기다림에 지쳐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결국 결론 은 어떻게 해서든 번역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번역을 빨리 끝낼 수 있을까? 나 혼자 백날 열심히 해봐야 택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타인의 도움을 받 는 수 밖에. 그렇지만 대체 누가 날 도와준단 말인가? 세상에 아이언스어를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다 고……. “…….” 아! 딱 한명있다. 나 말고도 아이언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는 아이언스어를 할줄한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크로니스는 아이언스어를 알고 있다. 그리고 크로니스라면 나를 도와줄지도 모른다. 난 그제야 한줄기 희망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좋아. 빨리 크로니스에게 연락을 해야겠군. 그런데 무슨 방법으로 크로니스에게 연락을 하지? 그 방법에 대해선 잠시 고민해야 했다. 내가 또 적색 산맥까지 가야 하나? 상아탑의 마법진을 이용하 면 안 될 것도 없지만 오가는데 시간도 걸리고 이거저거 문제가 많다. 이런 때 핸드폰이 있었으면 당장 전화 했을 텐데. 아니면 유선 전화라도. 역시 기술 발전이 중요한데 말이 야. 이래서 이공계를 양성해야 돼. 과학자들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기둥이야. 마법사를 양성하는 것처럼 과학 자들을 양성해야 돼. 그때 문득 드는 생각. 핸드폰이 없다면 전보를 치면 되지 않는가? 그 전보를 전해줄 사람도 내 주위에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하지 만 요즘들어 별로 비중이 없는 조연으로 전락한 라이코스. 내 이번 기회에 너에게 특별히 활약할 기회를 부여 하도록 하겠노라. “라이야. 라이코스 어디 있니?” 내가 묻자 라이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라이코스를 꺼냈다. “여기요, 오빠.” “…….” 무슨 물건 꺼내는 것 같다. 라이코스는 감겨 있는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축하한다, 라이코스. 너에게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 “응? 할 일이라니?” “너 잠깐 적색 산맥이 좀 갔다 와라.” “내가 왜?” “거기서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를 만나서 얘기 좀 전해라.” 내가 명령하자 라이코스는 내 얼굴을 잠시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획 돌렸다. “싫어.” “…….” 뭐야, 저 싸가지 없는 태도는? 이 자식이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건가? 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라이코스를 한 대 후려 갈기기 위해서. 하지만 옆에 라이가 있다 는 사실을 상기하고 슬며시 손을 내렸다. 자꾸 나쁜 모습만 보여주면 라이도 어느새 폭력적인 아이가 될지 도 모른다. 애들 앞에선 찬물도 제대로 못 마신다는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라이코스야. 중요한 일이어서 그러니 적색 산맥에 좀 갔다 오렴. 어차피 너한텐 얼마 걸리지도 않잖아.” 내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코스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 “거기까지 날아가기 귀찮아.” “…….” 새가 나는 게 귀찮으면 어쩌란 말이냐? “그러지 말고 좀 다녀와. 진짜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싫어, 싫어, 싫다니까. 난 여기서 우리 라이랑 계속 있을 테야.” 퍽-! 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자식이 오냐오냐 하니까 계속 기어오르네. 이게 사람을 호구로 보고 있어. “야!” 내가 인상을 팍 쓰고 째려보자 라이코스도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는지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왜, 왜 화를 내고 그래?” “좋을 말로 할 때 해라.” 내가 협박조로 그렇게 말하자 라이코스는 오기가 생기는지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난 바로 받아쳤다. “니 죽고 싶나?” 다시 목이 쑥 들어가는 라이코스. 그러더니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그냥 할게.” 훗! 진작 그럴 것이지. 어디서 감히 이 몸한테 개기고 있어? “그럼 당장 크로니스에게 가서 전해라. 마법서를 번역하는 게 너무 힘이 들어 그러니 좀 도와줄 수 없냐고 물 어봐. 그리고 도와줄 수 있으면 상아탑으로 좀 와달라고 해. 알았지?” “알았어.” 나름대로 믿음직스럽게 대답한 라이코스는 열려진 창문을 통해 파닥파닥 날개짓을 하여 날아갔다. 그런데 크로니스가 날 도와줄까? 아마도 도와 주겠지? 미안해서라도 말이야. 난 다시 번역을 시작하며 크로니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라이코스가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도서관 바닥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바닥에서 솟아오르듯 붉은 머 리카락의 엘프가 나타났다. 그 엘프의 옆에는 파리처럼 날개짓을 하는 흰색 매 라이코스가 있었다. “크로니스!” 내가 소리치자 크로니스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는 안 물어 봐도 될 것 같네요.” 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크로니스를 껴안았다. 날 위해 이렇게 달려와 주다니. 난 진심으로 감격하였 다. 이 고마움을 대체 어떻게 표시하면 좋을까? 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구나. “도와주실 수 있으시죠?” 크로니스는 내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기꺼이 돕도록 하겠습니다.” 감동~ 감동~. 내가 그렇게 크로니스와의 감동의 재회를 하는 사이 라이코스는 라이의 주머니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그리 고 라이는 멀뚱멀뚱 나와 크로니스를 보았다. 이렇게 해서 나 혼자 하던 일을 크로니스와 함께 하게 되어 일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크로니스는 나 의 몇 배는 되는 속도로, 거의 속기하다시피 마법서를 번역을 하였다. 하지만 하나가 둘로 늘어나고 그 둘 이 아무리 빨리 일을 한다해도 그 속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난 한계에 부딛혀 좌절하였다. 아무래도 둘만 가지고는 역시 무리야. 몇 명 더 필요해. 하지만 아이언스어 를 아는 사람은 나와 크로니스 둘뿐인데……. “…….” 잠깐. 내가 어떻게 아이언스어를 알고 있는 거지? 그야 당연 이그리드가 내 머릿속에 언어 지식을 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그리드는 9클래스 마스터여서 그것 이 가능했다. 그렇다는 것은 크로니스도 가능하다는 얘기? 그럼 라이의 머릿속에 아이언스어를 넣어 주면 어떨까? “…….” 번역 일을 하는데 라이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라이는 어린 아이. 라이에게 이 일 을 시킨다는 것은 유아 노동력 착취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지원자를 찾아야 하는데…… 이 런 3D 업종에 종사할 지원자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무보수인데. 내 팬클럽이 해체된 지금 지원자 찾기 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꼭 없는 것만도 아니다. 사일런스 지니라면 당장 하던 일 때려치고 날 도와주러 올 것이 다. 하지만 그 인간이 하던 일 때려치면 아이리스는 큰 일 난다. 사일런스 지니가 워낙 잘난 인물이다 보 니 그 인간이 일선에서 물러서는 순간 모든 업무가 마비 될 지도 모른다. 그럼 사일런스 지니를 제외하고 날 도와줄 사람은……. 다행히 생각 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내가 유일하게 만만하게 보는 드래곤. 바로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 네. 인디라면 분명 날 도와줄 것이다. 아니, 인디가 날 도와주려하는 것은 확실한다. 그것을 분명 일루니아 여 사님께서 막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루니아 여사님 몰래 인디에게 접선을 해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야 한다. 아~ 역시 아직 나의 잔머리는 살아 있구나. 난 마치 기름 친 바퀴 굴러가듯 잘 굴러가는 내 머리에 감탄하였다. 그리고는 이 좋은 생각을 바로 실행에 옮 기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라이코스의 도움이 한번 더 필요하겠군. * * * * * 인디는 요즘 인생 사는 것이 굉장히 행복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인 적이 있던가? 요즘 인디의 눈 에 보이는 세상은 전부 꽃밭이었다. 크로니스가 제정신을 차리면서 세계 평화도 무사하게 되었고 덩달아 일 루니아의 안전도 지켜지게 되었다. 이제 둘의 사랑을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둘의 앞에는 행복한 나 날만이 펼쳐져 있었다. 인디는 신혼 생활의 재미를 한창 만끽하는 중이었다. ‘아~ 사랑하는 일루니아님. 저는 영원히 일루니아님 곁을 지키고 싶어요.’ 그때 라이코스가 인디의 앞에 나타났다. 라이코스는 히로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고 안 그래도 히로에게 미안 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인디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있는 것은 가슴 아팠지만 말이 다. 인디는 이렇게 의리있는 드래곤이었다. 인디는 일루니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이별을 고했다. 요즘 신혼 재미가 한창인 것은 일루니아도 마찬가지 였기에 일루니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꼭 가셔야만 하나요?” “예. 아무래도 히로님께 빚을 갚아야 할 것 같아서요. 안 그러면 평생 가슴 속에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 야 할 지도 몰라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이 보내드려야겠네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돌아와 주세요. 그리고 아이언 스 공작은 혼자서도 잘 알아서 하니까 굳이 너무 열심히 도와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조금만 도와주고 바 로 돌아오세요.” “예. 일루니아님을 보기 위해서 일이 끝나는 대로 빨리 돌아올게요. 사랑해요, 일루니아님.” “저두요.” 쪽~. 눈물 겨운 이별을 한 인디는 상아탑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해 서 가는데 저쪽에서 걸어오는 카르와 마주쳤다. 카르는 인디를 보더니 팔짱을 끼며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뭐야? 어디 가?” 인디는 카르를 보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둘 사이는 별로 안 좋았던 것이다. 사이가 안 좋은 이유는 딱 히 없다. 그냥 서로가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아무래도 피부색일 가능성이 높다.(지들 이 체스판의 말도 아닌데 왜 피부색 가지고 싸우는 건지 모르겠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질문이니 어느 정도 대답할 의무는 있었다. “상아탑에.” “상아탑에는 무슨 일로 가는데?” 카르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인디는 니가 그걸 알아서 뭐하냐고 쏘아 붙여 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대답하였 다. “히로님께서 도움을 원하셔.” “무슨 도움인데?” “마법서 번역하는 일이야.” “그걸 니가 왜 도와주는데?” “내 맘이야.” “너 그 인간한테 뭐 약점 잡힌 거라도 있어?” “그런 거 없어.” “그럼 왜 도와줘?” “좀 미안하잖아.” “미안하다니? 뭐가?” “크로니스와의 싸움에서 히로님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게.” “뭐 그런 걸 가지고 미안해 하냐?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좀 들더라도 그냥 넘어가면 되잖아. 어차피 도와줘 봐야 돌아오는 것도 없는데.” “넌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난 그럴 수 없어.” “흥! 드래곤이 인간 따위를 돕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아. 아주 드래곤 망신은 혼자서 다 시키네.” “너나 잘 해. 너한테 그럴 말 들을 이유는 없어.” 인디는 카르가 인간을 우습게 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도 인간이니까. 하지 만 카르는 인간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가 인간이니까. ‘역시 그 놈은 크로니스와 싸우다가 죽었어야 했는데.’ 아쉬움에 땅을 쳤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지나간 일 가지고 백날 아쉬워 해봐야 남는 것은 아무 것 도 없다. ‘어떻게든 그 놈을 라이레얼 언니 옆에서 띄어 놓을 방법이 없을까?’ 라이레얼의 옆에 진드기처럼 달라 붙어 있는 히로를 영구적으로 떼어 내는 일. 그것이야 말로 카르의 최 대 과제였다. ‘미안한 마음에 도와주려 한다고? 미안한 마음에…….’ 인디의 말을 떠올리던 카르는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나도 같이 가자.” “뭐?” “나도 같이 가자고.” “니가 무슨 일 때문에 히로님을 만나려는 건데?” “무슨 일이긴. 그 인간 도와주려 그러지.” “니가 히로님을?” “왜? 나라고 뭐 돕지 못하라는 법 있냐?” 카르는 당당하게 말했다. 인디는 미심쩍은 눈으로 카르를 훑어 보았다. 카르가 제정신이라면 절대 히로를 도 와줄리 없다. 이래뵈도 연적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가 히로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에는 분명 무 슨 계산이 숨어 있을 것이다. 아니면,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가 미쳤거나. “너 제정신이야?” “뭔 소리 하는 거야? 빨리 그 인간한테 가자니까.” “으응.” 인디는 미심쩍은 마음을 떨치지 못 했지만 계속 되는 카르의 재촉에 일단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거기까지 걸어갈 거야?” 당연 아니다. 그곳까지 어느 세월에 걸어가겠는가? 당연 마법을 이용해야지. * * * * * 난 내 앞에 선 한쌍의 남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인디야 내가 불러서 온 것이니 상관 없는데 카르는 여 기 왜 왔단 말인가? 혹시 날 죽이려고? 이제 크로니스와의 싸움까지 끝났으니 나의 이용 가치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하였 던가?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를 잡아 먹는 것은 당연한 이치. 난 옆에 있는 크로니스를 슬쩍 보았다. 그래도 내가 위험에 처하면 크로니스가 도와 주겠지? 비록 위험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미인이 등장하니 도서관 분위기가 확 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리석 같은 피부와 은색 눈동자. 햇빛에 얼음 조각이 반사되어 부서지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흰색 머리카 락.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긴 하지만 그게 또 매력으로 보인다. 저런 귀엽고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니! 정말 한걸음에 다가가 꼭 껴안고 싶다. 순수한 의미로. 카르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여자로서 사귈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난 연하에게는 관심이 없는데 다가 나에게는 루시아가 있으니까. 의남매 맺자고 한번 해볼까? 그러는 사이 인디는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히로님.” “만난지 며칠이나 됐다고 오랜만은. 아무튼 나 도와줄 거지?” “물론이에요. 히로님을 위해서 기꺼이 돕도록 할게요.” “짜식!” 난 감동 받아서 인디를 와락 껴안았다. 이제보니 제법 의리있는 놈이었군. 이용 가치가 없어진 날 도우겠다 고 나서다니. “이, 이러지 마세요.” 여전히 나의 스킨쉽을 싫어하는 인디. 그래. 나도 남자랑 오래 붙어있을 생각은 없다. 이민 떨어지자. 난 인디를 놓아 주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인디. 누가보면 나를 변태로 생각하겠다. 인디와 떨어진 나는 카르를 보았다. 카르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소녀에 게 미움을 받는 신세라니. 갑자기 살기 싫어진다. 난 미소녀의 사랑을 먹으며 살아가는 존재란 말이야. 대체 언제쯤이면 카르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정말 걱정스럽다. “어, 어쩐 일이야?” 아무래도 내가 나이가 많아보이니 반말을 써도 되겠지? 설마 반말 썼다고 죽이려 드는 것은 아니겠지?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여전히 차가운 카르의 목소리. 누가 화이트 드래곤 아니랄까봐 냉기가 팍팍 풍긴다. “할 얘기가 뭔데?” “잠깐 이 쪽으로 와봐.” 카르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난 미소녀가 내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잠시 감격하고 으슥한 곳까지 끌려 가 면 카르가 날 죽이려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공포에 떨었다. “왜, 왜 이래? 여기서 말 해.” “단 둘이 할 얘기야.” “하, 하지만…….” 난 애절한 눈빛으로 크로니스와 인디를 보았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날 위해 나서지 않았다. 이러다가 진 짜 나 죽는 거 아니야? 도서관 끝쪽에서 반대편 끝쪽까지 나를 끌고 온 카르는 걸음을 멈추고 얘기라는 것을 시작했다. “너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지?” “……응?” “도움 말이야, 도움.” “으응. 필요하긴 하지.” 할 일은 많은데 일손이 턱 없이 부족하니까 말이야. “좋아. 그럼 내가 도와줄게.” “……응?” “내가 도와 준다고.” “…….”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카르가 날 도와주겠다니? 무엇 때문에? 정말 너무나도 당혹스럽다. 혹시 뭔가 꿍 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맞아.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날 도와준다고 할 리가 없지. “대신 조건이 있어.” 그럴 줄 알았다. “무슨 조건?” “앞으로 라이레얼 언니한테 찝적거리지 마.” “…….” 내가 언제 찝적거렸다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라이레얼 언니는 내 꺼야.” 카르의 눈은 엄청난 집념과 집착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보니 얘도 스토커였군. 레즈 스터커. “싫다면?”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카르는 인상을 팍 쓰며 대꾸했다. “이 자리에서 죽이는 수 밖에.” “…….” 인상 쓰는 폼을 보아하니 진짜 죽이고도 남을 것 같다. 뭐 이런 살벌한 애가 다 있어? 아무튼 나는 죽고 싶 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난 라이레얼한테 관심 없어. 당연 찝적거릴 생각도 없고.” “좋아.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해 놓고 라이레얼 언니한테 또 찍적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 어떻게 되는데? 궁금하긴 했지만 난 멍청하게 그걸 물어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크로니스에 이어 인디, 카르까지 도 와준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다. 이젠 열심히 번역하는 것만 남았다. 크로니스는 마법으로 인디와 카르의 머릿속에 아이언스어를 넣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작업 인원은 네명으 로 늘었고 우리는 열심히 번역을 하였다. 게다가 드래곤들은 속도도 빠르다. 난 열흘에 한권 번역하기도 힘든 데 이들은 하루에 몇권씩을 번역한다. 이대로 가면 한달 안에 모두 끝낼 수 있겠군. 아~ 갑자기 하늘에서 한줄기 서광이 비추는 듯 하다. 역시 사람은 인맥이 중요해. 드래곤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본 나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드래곤 발톱의 때만도 못하다는 사실 을 깨닫고 일손을 놓았다. 일은 드래곤들한테 맡기고 나는 라이랑 노는데 투자해야지. 난 라이와 놀고 싶었지만 라이는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라이는 평소 모습과는 정말 다르게 집중해 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라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다니. 혹시 우리 라이는 영재가 아닐까? 그런데 어렸을 때 총명하다는 소리 들 은 애들은 커서 별 볼일 없어진다고 하던데. “라이야, 공부도 좋지만 좀 쉬었다 하렴.” “괜찮아요, 오빠. 다 라이가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훗! 공부를 좋아하다니! 기특하기도 해라. 앞으로 공부해라 잔소리 할 일은 없겠군. 라이와 노는 것이 불가능해 지자 난 재빨리 감독관으로 변신하였다. 옛날 동대문 평화 시장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 주면서 미성년자들을 하루 18시간씩 굴리는 그런 개 같은 감독관은 물론 아니다. 지금이 7, 80년 대 도 아닌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자자, 10분 휴식하고 바로 다시 작업에 들어 갑니다.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하는만큼 일이 빨리 끝나니 모 두 분발해 주세요.” 나는 이렇게 휴식 시간까지 주는 착한 감독관이다. 이들이 일을 열심히 하면 포상 휴가는 물론이고 연말 보 너스까지 줄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이렇게까지 착하게 행동하는데 만약 이들이 노조를 결성해서 파업을 하 는 등의 배신 행위를 할 경우에는 진짜 끝장이다. 당장 전경과 의경들을 투입해 진압할 생각이다. “…….” 앗! 내가 무슨 생각을! 오랫동안 귀족 명찰(일명 금뺏지)을 달고 있었더니 생각마저 바뀌었나 보다. 노동자들 을 탄압할 생각을 하다니. 역시 정치인은 할만한 게 못 돼. 다행스럽게도 드래곤들은 노조를 결성해 파업을 강행한다던가 하는 짓은 하지 않았고, 나도 전경과 의경 을 투입해 그들을 진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근데 전경과 의경 수백만이 몰려온다고 해서 과연 드래 곤 셋을 막을 수 있을까? 브레스 한방에 끝장날 것 같은데. 그러고 보면 이들은 지상 최강의 노조인가? 진 짜 이런 노조 있으면 그 사업체는 끝장 나겠다. 아무튼 빨리 번역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 그럼 어느 정도 루시아를 만나러 갈 체면이 서겠지? 이건 마법 역사 에 길이 남을만한 업적이니까 말이야. 난 일을 끝내고 루시아를 만나러 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 * * * * * 아이리스군과 자바스군이 대치하고 있는 국경 지역. 한때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교 전이 없었기에 그 긴장감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대체 언제 붙을 건지 정말 의문스럽다. 모두가 자는 시간. 달마저 기울어 가는 이 때에 한 남자가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별자리 를 보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있었다.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고 있는 그의 이름은 사일런스 지니. 아 이리스의 백작이자 아이리스군의 최고 참모다. “바람이 불길하니 오늘 밤에는 적의 습격이 있을 것 같구나.” 지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참고로 지니는 길가에 돗자리 하나만 깔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만큼 예언 력 또한 풍부하였다. 아아~ 이미 잘나기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일런스 지니가 예언력 또한 풍부하다니. 이 인간의 잘남 의 끝이 어딘지 정말 궁금해진다. 오죽하면 히로는 사일런스 지니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못 하는 게 없고, 안 하는 게 없는 인간.’ 히로의 인물평 치고는 정확하다 못해 완벽했다. 이 말보다 사일런스 지니를 잘 평가한 말이 세상에 또 있을 까? 그나저나 오늘밤 적의 습격이 있을 거라니? 그렇다면 드디어 본격적으로 한판 붙는단 말인가?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지니는 적의 습격을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마 치 당하길 기다리는 것 같은 태도였다. 설마 ‘오늘 야습이 있데요’ 라고 해서 병사들 다 깨워 놓고 준비 시켰는데 야습이 없으면 욕 먹을까봐 그러 는 건가? 하지만 만약 야습이 있을 경우엔 더 욕 먹을 것이 뻔했다. 그럼 어째서 야습에 대비를 하지 않는 걸까? 대 체 사일런스 지니의 생각은 무엇일까? 설마 배신을……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일런스 지니는 배신을 할만한 그런 인물이 아니다. 누나가 그 렇게까지 아이리스에 충성을 하고 있는데 지니가 어찌 아이리스를 배신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이리스에 는 지니가 가장 존경하는 아이언스 히로가 공작의 자리에 앉아 있다. “원래 계획 대로라면 크게 패하는 것이 옳으나 무고하게 죽어갈 병사들을 생각하니 차마 그리할 수가 없구 나.” 지니는 크게 탄식하였다. 사실 저 병사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왕정과 봉건제 사회에서 국가는 왕과 귀 족들에게만 의미가 있을뿐이다. 불이익만 받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어느 군주 밑에서 살아가든 하등 관계 가 없다. 병사들이란 그저 집권층들 사이의 싸움의 희생양일뿐이었다. 지니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싸움이란 원형 경기장 안에서 왕족과 귀족들을 불러 놓고 집단 패싸움을 하 게 하는 것이다. “죄 없는 생명을 죽게 할 수는 없으니 최소한 준비는 갖춰 놓는 것이 좋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지니는 병사 몇을 불러다가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밤의 어둠을 틈타 자바스의 군대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아이리스군의 야영지. 단체 미팅하 러 가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후후, 놈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겠지?” 무려 8만이나 되는 자바스군을 이끄는 사령관 알카이드 백작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기 딴에는 그래 도 자신이 있는 것이다. 사일런스 지니가 미리 다 알고 있다고 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이번 기습에는 남부 총병력을 동원하였다. 한번에 쓸어버려서 후한을 남기지 않을 생각이다. 어차피 인생 은 한방 아니던가? 이번 한번만 잘 되면 아이리스는 다시 자바스를 향해 이빨을 들이 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 승진도 보장 되고 말이야. 푸하하~.” 자신감이 있는 것도 좋지만 너무 오바하는 것 같이 걱정이다. 이기기도 전에 좋아하는 꼴이라니. 이런 놈 치 고 뒤끝이 좋은 경우가 별로 없는데. 저 멀리 불이 꺼진 아이리스군의 야영지가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데 조용히 오느라 정말 힘들었다. 알카이 드 백작은 더 이상 조용히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공격!” 그의 명령은 일반 병사들에게 빠르게 전달 되었다. 병사들은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아이리스군의 야영지 로 돌격했다. “반역자의 우두머리를 잡아라! 사일런스 지니의 목을 쳐라!” 알카이드 백작은 아이리스의 국왕을 잡거나 사일런스 지니를 죽이는 자는 작위와 함께 엄청난 포상을 하겠 다고 출전 전에 선언을 하였다. 국왕이 총사령관이니 그를 잡으면 아이리스군이 지리멸멸할 것이니 그를 잡 으면 포상을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 다른 백작들도 많은데 유독 사일런스 지니의 목을 치 라는 걸까? 사일런스 지니가 너무나도 뛰어난 참모여서? 뛰어난 참모 하나는 몇 십만의 군대를 능가한다. 사실 아이리스군이 유지되는 것도 전부 지니 덕이 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지니가 없었다면 정규 군대가 아닌 급조한 군대를 이렇게까지 잘 유지시킬 수는 없엇 을 것이다. 하지만 알카이드 백작이 사일런스 지니를 잡아 죽이라고 강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실 알 카이드 백작은 보기 드문 추남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물론이거나와 주관적으로 봐도 도무지 좋게 봐 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사각턱과 따로따로 붙어있는 눈, 코, 입. 피부는 피부염에 걸린 듯 울퉁불퉁했고 머리카락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었다. 그랬기에 어렸을 적부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그런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그녀 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는 자신의 외모가 추하지만 자신이 진실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도 자신의 마 음을 받아 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그녀는 결국 그를 차고 다른 남자 와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 남자는 자신에 비해 모든 것이 미달이었지만 유독 외모만은 잘 생겼다. 결국 사랑 하는 여인은 그토록 사랑하는 자신을 외모 때문에 찬 것이다. 그는 그때 이후로 잘생긴 남자를 증오하기 시작 했다. 사일런스 지니하면 곧 잘생긴 남자의 대명사다. 모든 여자들의 이상형 아닌가? 알카이드 백작은 사일런스 지 니를 증오했다. 잘 생기기만 했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정상참작을 해주겠는데 얼굴만 잘 생긴 것이 아니라 머 리도 좋고 싸움도 잘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이다. 그래서 알카이드 백작은 사일런스 지니를 용서 할 수 없었다. 국가에서는 사일런스 지니를 사로 잡을 수 있으면 사로 잡으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알카이 드 백작은 그 말을 따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사일런스 지니에 대한 증오는 무서 울 정도였다. 그는 증오의 화신이나 다름 없었다. ‘네놈의 얼굴 가죽을 벗겨주지. 어디 그래도 여자가 따르나 보자.’ 잘 생긴 남자에 대한 못 생긴 남자의 증오. 알카이드 백작은 그것이 정의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못 생겼으면 마음이라도 곱게 써야 하는 법인데. 이렇 게 행동하면 어디 여자들이 따르겠니? 참고로 알카이드 백작은 아직 미혼이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미혼일 것이다. “사일런스 백작을 쳐 죽여라! 지니를 죽여!” 알카이드 백작은 혈안이 되어 소리쳤다. 자바스 군의 승리를 위해 온 게 아니라 사일런스 지니 하나를 잡으 러 온 것 같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잡고 싶어하던 지니는 어느새 말에 올라타 퇴각을 지휘하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지만 우 연찮게도 밤중에 식량창고에 작은 불이 나서 대다수의 병사들이 깨어 있었다.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습격 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무장을 갖추고 도망칠 여유는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벌써 상당수의 병사들이 죽었다. 아이리스군의 야영지는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그나마 지 니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퇴로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지 그가 아니었다면 정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 다. 요즘 들어 거의 출연을 안 했던 루시아의 오빠이자 현재 아이리스의 국왕인 키에라는 말을 몰고 사일런스 지 니의 옆으로 다가왔다. 키에라는 지금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기에 ‘이게 어찌된 일이냐?’ 따위의 질문 은 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지니는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퇴각하는 병사들을 지휘하십시오. 제가 일단 퇴로를 막아 보겠습니다.” “가능하겠나?” 왕의 물음에 지니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저는 불가능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뒤는 사일런스 백작에게 맡기겠네. 그대는 백만 대군보다 더 중요한 존재이니 반드시 살아돌아오게.” 말을 마친 국왕은 말을 몰아 달려갔다. 지니는 말에 올라 타 간만에 검을 뽑아 들었다. 사상자를 적게 내 기 위해선 추격하려는 적의 발목을 붙잡아야 한다. 지니는 우왕자왕하는 병사들을 모아 적에게 대항하기 시 작했다. 지니의 대항은 민첩하고도 정확했다. 지니는 얼마 안 되는 급조된 군대를 이끌고 아이리스군의 뒤를 쫓으려 는 자바스군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알카이드 백작은 멀리서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지니를 보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하였던가? 알카이 드 백작은 지니의 외모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과장되었을 거라며 코웃음을 쳤 다. 그만큼 사람들은 지니의 외모를 극찬하였다. 하지만 막상 직접 보니 오히려 소문이 부족할 정도였다. 너 무나도 눈부신 외모. 세상에 저런 꽃미남이 존재할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떠한 미사여구를 붙여 놔도 무색해질만큼 화사한 지니의 외모에 알카이드 백작은 더욱 분노하였다. ‘잘 생긴 놈들은 전부 죽어야 돼!’ 히로와 똑 같은 생각을 한 알카이드 백작은 검을 뽑아 들고 지니에게 달려 들었다. “난 알카이드 엘런 백작이다. 네 놈의 목을 베러 왔다.” 알카이드 백작의 외침을 들은 지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눈이 더러워지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귀 가 더러워지니까요.” 지니의 말은 알카이드 백작을 열 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안 그래도 외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 던 알카이드 백작은 성급하게 검을 휘두르며 돌격했다. 달려드는 적을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지니는 침착 하게 알카이드 백작의 검을 받아냈다. ------------------------ 이제 앞으로 두편 정도.... 에필로그 포함해서 세편 되겠군요.... 드디어 8클래스 마법서 번역이 끝났다. 이게 다 드래곤들과 내가 열심히 한 덕분이다. 8클래스 마법서를 번 역했다는 것은 일을 반은 끝냈다는 얘기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우리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자축 파티를 가졌다. 라이는 공용어로 번역된 180권의 8클래스 마법서들을 보 고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너무 훌륭해요, 오빠.” 반짝거리는 라이의 눈빛.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번역해 줄 거 그랬다. 진짜 너무 좋아하네. 좋아하는 것은 라이만이 아니었다. 내가 8클래스 마법서 번역이 끝났다고 얘기하자마자 칼리를 비롯한 상아 탑의 고위 마법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난리를 쳤다. 그들은 번역된 마법서를 보더니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오! 이렇게 훌륭할 수가!” “과연 아이언스 이그리드님의 저서군요.” “드디어 베일에 가려져 있던 8클래스 마법의 비밀이 벗겨지다니.” “이건 마법 역사에 길이남을만한 일 입니다.” “번역을 하느라 노고를 아끼지 않은 아이언스 히로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아이언스 히로님의 이름은 상아탑에서 길이길이 찬양될 것입니다.” “당장 역사 교과서에 아이언스 히로님의 이름을 넣도록하겠습니다.” “이제 9클래스 마법서 번역만 끝나면 모든 마법의 베일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부디 계속 노력하여 주십시오. ” 후후~ 드디어 나의 진가를 알아주기 시작하는 군. 사실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많은 마법사들이 나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흥! 크로니스와 싸운다고 떠벌리더니 욕만 들입다 처먹고 결국 이곳으로 대피하는군. 아마 마법서를 번역 할 수 있다는 것도 거짓말일 거야. 사기꾼 같은 자식!’ 오죽하면 칼리가 나를 도서관에다가 격리시켜 놓았겠나?] 하지만 난 도서관에 있으면서도 상아탑 안에 떠도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날 욕하 고 있었다. 난 그들의 욕에 마음 속 깊이 상처를 받았지만 참고 또 참았다. 언젠가는 그들이 날 찬양하 게 될 날을 기다리며. 오늘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그들은 8클래스 마법서를 번역한 나를 찬양하고 있었다.(드래곤 세 마리가 같 이 작업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라이 밖에 없다) 아~ 정말 기쁘다. 며칠 쉰 우리들은 9클래스 마법서 번역을 위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열심히 일해서 나머지 번역도 빨리 끝내 야지.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루시아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거야. 다시 일을 시작하려는 순간 나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알리러 온 엘프는 다름 아닌 갈리 온드와 루엔이었다. 난 간만에 만난 갈리온드와 루엔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이~. 모두들 잘 지내셨어요?” 갈리온드는 내 인사를 무시하더니 한 걸음에 내 앞으로 다가와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가 소리치자 갈리온드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내 딸이 지금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마당에 이런 곳에서 자뼈져 놀고 있다니. 네 놈을 당당… … 어흐흐흑.” 결국 감정에 복받쳐 울음을 터트리는 갈리온드. 루엔은 재빨리 갈리온드의 옆으로 다가와 등을 두드려주 며 위로해 주었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딸이라면…… 라이레얼이 어떻게 됐는데요?” “그게…….” 루엔이 갈리온드를 대신해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카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두 엘프에게 다가섰다. “뭐? 라이레얼 언니가 어떻게 됐다고?” 루엔은 당황하는 우리들을 진정시키고 차근차근 얘기를 시작했다. 루엔이 말한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 면 다음과 같았다. 지난 밤에 자바스군이 아이리스군의 야영지를 급습하였다. 대비를 못한 아이리스군은 크게 패하여 도망쳤 고 그 와중에서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그리고 라이레얼을 비롯한 상당수는 적군에게 사로잡혔다. 얘기를 다 들은 나는 충격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자바스군이 야습을 하다니. 그리고 아이리스는 그대로 당했다니. 대체 사일런스 지니는 뭘하고 있었기에… …. 설마 지니가 야습을 눈치 채지 못한 건가?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장 알고 싶은 것은 루시아는 어떻게 되었냐는 것이다. 난 루엔을 붙들며 말했다. “루시아는 어떻게 됐는지 아시나요?” “루시아가 누구죠?” “아이리스의 공주 말이에요.” “공주라면 잡혀간 걸로 아는데…….” “…….” 순간, 다리가 풀리며 나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공주가 잡혀갔다고? 루시아 공주가? 적군에게 잡혀가?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맞아. 내가 잘못 들은 것이 틀림 없어. 분명 잘못 들은 거야. 그때 인디가 나서며 물었다. “그, 그럼 일루니아님은 어찌 되었나요?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말이에요.” “그건 누구죠?”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 모르세요? 굉장히 아름다우신 분인데.” “모르겠는데요.” 루엔의 말에 인디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차라리 사로잡혔다고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아예 행 방도 모르다니. 충격 받는 게 당연하지. “어, 어떡해…… 일루니아님…… 흑흑.” 인디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카르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감히 라이레얼 언니를 잡아 가다니! 용서할 수 없어!” 그래. 용서할 수 없다. 감히 루시아를 잡아가다니. 니들은 다 죽었어!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당장 구출하러 가자.” “맞아! 구출하러 가자!” 카르는 힘차게 소리쳤지만 인디는 아직까지 바닥에 주저 앉아 질질 짜고 있었다. 난 울고 있는 인디를 억지 로 일으켜 세웠다. “너도 일어나.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도 분명 적들에게 잡혀갔을 거야. 우리 힘을 모아 그들을 구출해 내자.” “흑흑,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 “하지만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은 쉽게 죽으실 분이 아니야.” 난 자신 있게 소리쳤다. 그리고 나름대로 근거를 갖다 붙였다. “악녀는 원래 쉽게 죽지 않는 법이야!” 샤이 사일런스 백작님을 보라. 척 보기에도 쉽게 죽지 않을 것처럼 생기지 않았는가? 게다가 샤이 사일런 스 백작님은 귀족이다. 그것도 고위 귀족. 자바스군측에서도 쉽게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흑흑, 하지만…….” “하지만은 뭔 하지만이야? 너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래?” 내가 어떻게든 인디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는데 그 순간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저희 누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순간 우리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음을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도서관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한 남 자. 그의 이름은 사일런스 지니.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위급한 상황이지만 지니는 예의를 차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니는 급히 달려왔는지 좀 지저분한 모습이었 다. 하지만 옷이 아무리 지저분하고 얼굴에 검뎅이가 묻었다 한들 지니의 화사한 외모는 조금도 침범할 수 가 없었다. 나는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하며 지니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니의 멱살을 움켜 잡으며 말했다. “너 이 자식!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야습을 당했다는 게 사실이야?”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지니. 그것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행동이었다. 난 다시가 풀리 는 것을 느끼며 더욱 세게 지니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이 자식아. 그 동안 넌 뭘한 거야? 뭘 했기에 루시아가 잡혀가게 놔뒀어?” “고정하십시오.” “닥쳐!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어?” “흥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합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아이언스 공작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려 이렇 게 찾아온 것입니다.” 침착한 지니의 말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난 슬며시 지니의 멱살을 놓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지 니를 덥썩 붙잡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인디다. 인디는 지니의 옷깃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말로 일루니아님께서는 무사하신 건가요?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누님께서는 자바스군에게 사로잡히긴 했으나 무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디카즈 네님께서는 진정하십시오.” “흑흑, 정말 다행이에요. 만약 일루니아님이 어떻게 되었으면…… 전…….”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께서 무슨 일이 생겼으면 뭐가 어쨌는데? 그 아줌마가 어떻 게 되던 무슨 상관이야? 난 오직 루시아만 구하면 돼! “라이레얼 언니도 무사하지?” 카르가 물음에 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라이레얼님 역시 무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카르. 일이 비록 이렇게 되긴 했지만 모두들 무사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어! 당장 구하러 가자!” 카르가 소리쳤고, 인디와 나는 그 말에 동조하였다. 하지만 지니의 생각은 달랐다. “흥분을 가라 앉히십시오. 이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자 카르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뭐야? 그럼 라이레얼 언니를 구하지 말자는 거야?” 언제나 끼어 들기 좋아하는 갈리온드도 나서서 한 소리 했다. “맞아! 내 딸을 구한다는데 니가 뭔 참견이야?” 하지만 지니는 그들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말하였다. “만약 무턱대고 나섰다가는 인질이 위험해 질 수 있습니다.” “내 능력이라면 그딴 건 상관 없어.” 하긴 드래곤의 능력이라면 인질이 위험해질 능력 따위는 없겠지. 정 급하면 시간 정지 마법 같은 걸 걸어 도 될 테니까. 하지만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 있습니다.” “뭐야? 너 지금 인간 주제에 내 능력을 무시하는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제 어찌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님의 능력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보다 나은 계 획 수립을 한 뒤 인질 구출에 나설 생각입니다.” “시끄러! 그 딴 건 필요 없어. 난 당장 언니를 구하러 갈거야.” “저도 일루니아님을 구하러 갈래요.” “나도 루시아를 구하러 갈래.” 우리가 그렇게 외치자 지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러분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그리고 아이언스 공작님께 드릴 말씀 이 있으니 잠깐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지니는 걸음을 옮겨 문을 나섰다. 난 지니의 뒤를 따라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간밤에 야습이 있었다. 생각지 못한 습격이었기에 모두가 당황하였다. 난리가 난 와중에도 자신은 급히 군대 를 지휘하여 아군이 질서정연한 퇴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던 중 적장과 일 대 일로 붙게 되었고 적장 의 목을 벨 수 있었다. 지휘관이 없어진 적들은 더 이상 아이리스군을 추격하지 못하고 되돌아 갔다. 하지 만 루시아와 샤이 사일런스 백작, 라이레얼 등은 이미 포로가 된 뒤였다. 이것이 지니가 말한 사건의 전모였다. 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니가 거짓말을 하 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게 다는 아니지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지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감히 숨길 수가 없군요. 사실 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적이 야습 을 해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뭐?” 난 놀라서 되물었다. 야습을 해올 것을 알고 있었다니?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무 엇 때문에? “한가지 더 말씀드리지만 루시아 공주님과 저희 누님이 잡혀 갈 때 전 구할 수 있으면서도 구하지 않았습니 다.” “뭐!?” 난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쳤다.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이 잡혀 갈 때 일부러 구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그 럴 수가! “이 개자식!” 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 주먹에 맞고 나가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 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내 주먹을 자신의 손으로 가볍게 막았다. “일단 제 말을 끝까지 들어 보십시오.” 어쭈? 막았다 이거지? 어디 이것도 막나 보자. “빅장 40단 콤보!” 난 두 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지니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전부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닥쳐라! 문답무용!” 지니가 아무리 강하다한들 빅장 40단 콤보를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니는 이미 상당한 타격 을 입었다.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지니는 숨을 고르며 그렇게 외쳤고 나도 흥분이 어느 정도 풀렸기에 손을 멈추었다. 내가 한때는 전투력에 서 지니에게 말렸지만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 지옥 수련을 하면서 엄청나게 강해졌다. 이제 지니는 내 상대 가 되지 못한다. “좋아. 할 말 있으면 해 봐.” “감사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지니는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제가 적의 야습을 눈치 채고도 당한 것은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산은 무슨 계산?”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여튼 말은 잘 해요. 누가 참모 출신 아니랄까봐. 지니는 말을 이었다. “제가 그렇게 함으로써 노리는 효과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드래곤들을 개입시킴으로써 이번 전쟁을 최대 한 빨리 끝내는 것.” “……헉!” 난 그제야 지니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놀랍구나, 사일런스 지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라이레얼과 일루니아 여사님이 잡혀간다면 인디와 카르가 움직일 것은 확실하다. 이 둘이 움직인다면 자바 스는 끝장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이것은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다. 자기들끼리 자발적으로 움직 이는 것이다. 국가 간의 분쟁에 드래곤을 개입시켰다는 욕을 먹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자바 스는 완전 무덤을 파고 드러누운 거나 다름 없다. “그런데 둘째는 뭐야?” “둘째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명예 회복입니다.” “내 명예 회복이랑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주 깊은 상관이 있습니다. 제가 루시아 공주님이 잡혀 갈 때 그냥 있었던 것은 오직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 함입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해 봐.” “일단 별동대를 조직하여 인질 구출과 적군 공격에 나설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별동대의 지휘권은 당연 아 이언스 공작님께 드릴 생각입니다.” “뭐?” “드래곤이 둘이나 있는 이상 별동대의 전력은 최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 드래곤 하나만 있어도 최강인데.” “이번 구출 작전은 절대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적진 한 가운데 진입해서 인질을 구출하고 적군을 공격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실 거 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 측은 아이언스 공작님과 두 드래곤이 있음으로써 그 불가능에 가 까운 일을 완벽한 성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지요. 이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일입니다. 이 구출 작전으 로 인해 자바스는 아이리스에게 패하고 아이리스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중심에 는 아이언스 공작님이 서 계신겁니다.” “오오!” 지니의 얘기를 다 들은 나는 감탄사를 내뿜었다. 적진 깊숙이 잠입하여 인질을 구출하고 적진을 초토화 시킨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전쟁은 아이리스의 승리 로 끝난다. 이 보다 더 완벽한 시나리오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해낼 사람이 아이언스 공작, 바 로 나다. 내가 이 엄청난 일을 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세인들은 입을 모아 아이언스 공작님의 업적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때 그 일을 문제 삼 지 못할 것이며, 그 누구도 아이언스 공작님에 대해 함부로 말하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이언스 공작님 께서 몸소 루시아 공주님을 구출해 내신다면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크게 감동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 헉! 루시아가 크게 감동을? 하긴, 자신을 구하러 적진 깊숙이까지 들어왔는데 어느 여자가 감동을 받지 아니하겠는가? 과연 사일런스 지니! 당대 최고의 모사라는 수식어가 부족할 지경이다. 패배에도 그런 계산이 숨어있었 을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아마 지금쯤 자바스군은 좋아서 난리를 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일 들은 생각도 못한 채. 내가 무엇보다 감동 받은 것은 나를 향한 지니의 마음이다. 자신은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도 모든 공 은 나에게 돌리겠다니. 이번 작전은 지니가 날 위해 세워준 거나 다름 없었다. 오직 나를 위해서……. “사일런스 백작님.” 난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지니를 끌어 안았다. “저에게는 오직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하는 마음뿐입니다. 저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감 수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언스 공작님이 다시 명예를 되찾으시고 루시아 공주님 과 좋은 인연을 맺는 것뿐입니다.” 지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심금을 울린다. 내가 지니의 이런 큰 뜻을 모르고 지니에게 빅장을 썼다니. “흑흑, 사일런스 백작님.” 난 지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울지 마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지니는 다정하게 나를 안아 달래 주었다. 그러자 난 황급히 지니에게 떨어졌다. 혹시나 지니가던 사람이 우 리를 보고 동성연애자라고 생각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런 장면 하나가 안 좋은 소문을 불러일으킬 수 도 있는 것이다. 많은 여성팬 확보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조심해야지. “그럼 지금 당장 별동대를 조직해 적진에 침투하지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하루 쉬었다가 내일 가도록 하지요.” 그러고 보니 지금 지니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하긴 그 난리를 겪고 바로 이곳까지 뛰어왔는데다가 나한 테 빅장까지 맞았으니 괜찮을 리가 없지.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지금 굉장히 휴식을 취하고 싶을 것이다. “사람들한테 말 해 놓을테니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시고 좀 편히 쉬세요.” “감사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이리하여 지니는 목욕을 하러 갔고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인디와 카르는 급히 나에게 달려 들었 다. “지니님께서 뭐라고 말씀 하셨나요?” “그 놈이 뭐래?” 난 그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별동대를 조직해서 구하러 가기로 했어. 내일 갈 거니까 준비들 해 놔.” “아니, 갈 거면 지금 당장 가지 뭐하러 내일까지 기다려?” “맞아요. 지금 당장 가요.” “어허! 뭐가 그리들 급해서 그래? 어차피 인질들의 안전이야 이미 확인 되지 않았나? 오늘 편히 쉬고 내일 가 자.” “싫어!” “싫어요!” 말을 안 들어 먹는 두 드래곤. 하는 수 없이 내가 또 설득에 나서야겠군. “지금 라이레얼과 일루니아 여사님은 잡혀간지 얼마 안 되었어. 아마도 감옥에 갖혀있겠지. 감옥에 갖혀 있 으면 기분이 어떨까? 물론 처음에야 좀 괜찮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닥의 차디찬 냉기와 쥐가 찍찍거 리며 돌아다니는 감옥 풍경에 무서워지겠지. 게다가 여기에 앞날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치고 말이야. 그렇 게 서서히 절망에 빠져 드는 거지.” “그래. 그러니까 당장 구하러 가자는 거 아니야?” “맞아요!”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 지금 우리가 이들을 구하러 갔다치자. 아직 이들은 감옥의 쓴맛을 보지 못한 상태 야. 그때 우리가 구해주면 어떻게 될까? 물론 고마워야 하겠지. 하지만 그걸로 끝이야. 그런데 이들이 감옥에 서 절망에 빠져있을 때 구해줬다 치자. 그럼 어떻게 될까?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가 도와 주면 사람은 그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법이야. 왜 이런 말도 있잖아. 시련이 있을 수록 사랑은 강해진 다. 이건 하나의 시련이야. 이 시련을 극복하면 사랑은 더욱 강해지는 거고.” 인디와 카르는 내 말에 대충 공감하는 듯 했다. 이제 한번만 더 몰아 붙이면 나의 의견을 따르게 하는 것 은 문제 없을 것 같다. 난 카르에게 말했다. “라이레얼은 아직 너한테 마음이 없어. 그렇지?” “그야 그렇지만…….” “그럼 이번 기회에 점수를 왕창 따는 거야. 라이레얼이 감옥에서 절망에 빠져 울고 있을 때 니가 짠~ 하 고 나타나서 라이레얼을 구해주는 거지. 그럼 라이레얼은 감격해서 널 끌어 안고 뽀뽀라도 할 걸. 그리고 앞 으로는 너를 더욱 좋아할 거야.” “저, 정말 그럴까?” “물론이지.” 난 고개를 돌려 인디를 보았다. “요즘 너랑 일루니아 여사님 사이가 좋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하기엔 아직 일러. 너 도 알다시피 일루니아 여사님은 인텔리전트한 커리어 우먼이야. 절대 집에서 살림만 붙잡고 있을 그런 여자 가 아니지. 만약 일루니아 여사님에게 일과 너 둘 중에 하날 택하라고 하면 뭘 택할 것 같아? 당연 일을 택 할 거야. 일루니아 여사님은 남자 없이는 살아도 일 없이는 못 사는 일중독증 환자거든. 원래 그런 인텔리전 트한 여성일 수록 남자에게 그리 비중을 두지 않는 편이지. 지금은 일루니아 여사님이 너에게 호감을 느끼 고 있겠지만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과연 그럴까? 내가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한테는 남자다운 매력이라 는 게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생긴 것 계집애처럼 생긴데다가 소심하기 그지 없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니까,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남자다운 모습을 보이란 말이야. 차디찬 바닥에 앉아 절망에 빠져 울 고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니가 구해내는 거야. 이 얼마나 남자다워 보이냐? 안 그래?” “그, 그런가요?” “그래, 임마. 넌 내 말만 믿으면 돼.” 난 그렇게 두 드래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나의 머리에 나 자신이 두려울 정도 다. 드디어 전성기 때의 나의 두뇌를 회복한 건가? “이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고개를 젓는 두 드래곤. 난 바로 설명을 해 주었다. “니 둘은 드래곤이야. 사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즉시 날아가 자바스 전체를 초토화 시키고 라이레얼이나 일 루니아 여사님을 구출해 낼 수 있지. 하지만 이러면 별로 효과가 없어.” “효과?” “그래. 효과. 극적인 효과. 왜 소설책 같은 거 보면 나오잖아. 왕자가 악당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출할 때 어떻 게 구출하니? 수 많은 난관을 뚫고 악당의 부하들을 무찌른 다음 죽을 각오를 하고 악당과 일전을 벌인 후 에 간신히 이기고 나서 공주를 구출하잖아. 만약 왕자가 졸라 짱 쎄서 한방에 악당을 없애고 공주를 구출했 다 치자. 아까와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공주에게 잘 보이겠니?” “그야…….” “공주가 원하는 왕자는 한방에 악당을 없애는 왕자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모든 시련 을 극복해 내는 왕자야. 그거야 말로 진정한 사랑의 증거라 할 수 있으니까. 알겠니?” 끄덕끄덕.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인을 구출을 하되 너무 쉽게 구출하면 안 돼.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나서 구출을 해야지. 그리고 여자에게 말하는 거야. ‘전 당신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아~ 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인가? 안 그래?” “그런 것 같아.”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좋아. 그럼 내 말대로 우리는 너무 쉽게 구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나서 구출을 하 는 거야. 여자들에게 최대한 멋있고 감동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잘 알았지?” “응.” “예.” “그런 의미에서 별동대의 지휘는 내가 맡도록 할게. 니들은 나만 믿고 따라와. 알겠지?” “응.” “예.” 나에게 완전히 설득 당한 두 드래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후후~ 이젠 루시아를 구출해 내 고 예전의 명예를 다시 되찾는 것만 남았군. 내가 어렵게 구출하자고 주장한 데에는 깊은 이유가 있다. 만약 드래곤들이 날아가서 브레스를 쏘고 마법 을 쓰는 등 깽판을 친다고 하자. 그럼 인질 구출이야 패 보고 화투 치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렇 게 되면 내가 활약할 것이 없어진다. 이번 구출 작전의 목적은 루시아에게 점수를 따는 것, 그리고 내 명예 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한번에 얻기 위해서는 나의 활약이 필수적이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적으 로 드래곤들의 활약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좋았어. 지옥 수련을 해서 힘을 길렀는데 크로니스와 싸우지 못 해서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이번 기회 에 지옥 수련의 성과를 확실히 보여주지. 내가 요즘 라이랑만 노느라고 나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나의 전투력은 세계 랭킹 6위에 당당 하게 자리 잡고 있다. 참고로 다섯 마리 드래곤들이 공동 1위다. 특별히 대회를 열어서 이 랭킹을 정한 것 은 아니지만 난 이 랭킹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음을 확실한다. 8클래스 마법 쓸 줄 아는 사람 손들어 봐. 빅장 쓸 줄 아는 사람 손들어 봐. 개나리 스텝 익힌 사람 손들어 봐. 아무도 없다. 그것은 곧 내가 세계 랭킹 6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얘 기다. 내가 그런 생각을하며 몸을 푼다고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데 라이가 아장거리며 다가왔다. “오빠 내일 어디가요?” “응. 이 오빠는 내일 사랑하는 여인을 구출하기 위해 떠난단다.” “그럼 라이도 같이 갈래요.” “응? 뭐라고?” “라이도 같이 간다구요.” “니가 따라와서 뭐하게?” “라이는 오빠랑 떨어지기 싫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감동적인 대사를 남발하는 라이.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 아이를 놓고 갈 수는 없다. 어차 피 위험하지도 않은 일이니 라이도 데려가자. 루시아도 라이를 보면 기뻐 할 테니. “그래. 같이 가자, 라이야.” “정말요? 라이 잘할 자신 있어요. 라이가 도와줄게요.” 드래곤이 둘이나 있는데 설마 니 도움 받을 일이 있겠니? 말이라도 고맙다.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 다. 그때 크로니스가 말했다. “저도 돋겠습니다.” “예?” “그 동안 많은 신세를 졌으니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빚을 갚고 싶습니다.” 내 기억에 크로니스가 나에게 신세를 진 것은 없었다. 아마도 선의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리라. 도와주겠다 는 크로니스의 청을 굳이 물리칠 필요는 없었다. 넷 보다야 다섯이 나을 테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렇게하여 드래곤이 세 마리나 낀 지상 최강의 구출 부대가 탄생하였다. 기다려요, 루시아. 제가 곧 구하 러 갈게요. * * * * * 히로를 비롯한 드래곤들의 생각과는 달리 루시아와 일루니아, 라이레얼은 습하고 차가운 감옥 안에 갖혀 있 지 않았다. 물론 갖혀 있기야 갖혀 있지만 그들이 갖혀 있는 곳은 최고급으로 치장 된 귀빈실이었다. 밖으 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만 빼면 아무 것도 불편할 것이 없었다. 음식도 잘 나오고 시녀들까지 딸려 있었으 니. 시녀들은 시중을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감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지 하나 같이 표정 이 없고 말이 없었다. 루시아, 일루니아, 라이레얼. 이 세 여인은 자바스가 이번 기습에서 올린 가장 큰 성과였다. 자바스의 기습은 성공적이라 평가 받았다. 어 찌되었든 아이리스군을 무찌른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의외로 얻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기습 을 할 때만 해도 아이리스군을 전멸시키거나 적어도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까지 피해를 입혔어야 했다. 하지 만 아이리스군은 3만 5천 중 고작 7천만 죽었을 뿐이다. 부상자까지 합하더라도 1만을 넘기지 못할 것이 다. 완벽한 기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전부 사일런스 지니 때문이었다. 지니가 지휘관 의 목을 베어 버리는 바람에 도망치는 아이리스군을 추격해 더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키에 라 국왕이나 사일런스 지니 모두 무사히 도망치고 말았다. 이 둘이 있는 이상 아이리스는 아직도 건재하였 다. 그 증거로 키에라 국왕은 흩어진 군대를 다시 규합하여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남부 전선의 사령관이었던 알카이드 백작의 죽음은 자바스에게 커다란 타격이었다. 그는 외모에 콤플렉스 가 있어서 잘생긴 남자들을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조금도 흠잡을 데 없는 장군이었다. 그가 죽 음으로써 지휘권에 공백이 생겼고, 그 자리를 그의 부관이자 아들인 알카이드 자작이 대신하긴 했지만 과 연 알카이드 백작만큼의 능력을 발휘해줄지는 의문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이리스 제 1공주인 루시아와 제 2참모인 샤이 사일런스 백작, 그리고 용병계의 꽃(뱀)이 라 불리는 라이레얼을 포로로 삼은 것은 크나큰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들 모두는 인질로서 아주 풍부 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일루니아는 팔짱을 끼고 방 안을 정신 없이 왔다 갔다 거렸다. 사실 일루니아는 몸을 피하려했으면 충분 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루시아를 구하려하다가 같이 잡힌 것이다. 일부러 잡힌 것은 라이레 얼도 마찬가지였다. 라이레얼은 테커, 카웨 등을 구하려고 끝까지 남아서 항전하다가 결국 포로로 잡혔다. 라이레얼은 귀족도 아니고 지휘관도 아니다. 그저 일개 용병인 것이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포로로 사로집 힌 것은 오직 미모 하나 때문이다. 라이레얼의 아리따운 외모를 본 자바스 병사들은 차마 그녀에게 칼을 겨 눌 수 없었고 그래서 죽이는 대신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아빠는 괜찮을까?’ 라이레얼은 잠시 갈리온드를 떠올렸다. 갈리온드는 그래도 아빠랍시고 딸을 돕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라이레 얼은 하는 수 없이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킨 다음 루엔에게 맡겼다. 루엔은 엘프이고, 엘프는 발이 빠르고 길 을 잘 찾으니 아마도 갈리온드를 데리고 무사히 피신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라이레얼은 마음을 놓고 침대 위에 털썩 드러 누웠다. “아~ 좋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집 하나 장만해야 하는데.” 앞 일이 어떻게 되던 라이레얼은 태평하기 그지 없었다. 라이레얼은 먼지 투성이인 블라우스를 벗어 던지 고 벽장 속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 입었다. 다시 침대에 드러누운 라이레얼은 그때까지도 방안을 종횡무 진 돌아다니는 일루니아를 보고 한마디했다. “가만히 좀 있어, 아줌마. 정신 사납잖아.” 일루니아는 라이레얼을 보더니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태평하다니. 대체 이 여 자의 정신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일루니아가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남자를 꼽아보자면 당연 히로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여자를 꼽아 본다면…… 그야 당연 지금 눈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라이레얼이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 일루니아는 라이레얼의 말에 뚜껑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닥쳐, 이 년아!” “뭐? 아줌마 말 다 했어?” “그래. 다 했다!” “이 아줌마가 진짜! 누굴 보고 감히 이 년이야 이 년이? “네 년 보고 그랬지 누굴 보고 그래?” “뭐야? 아줌마 진짜 이딴식으로 나올 거야? 나잇살 처먹으면 주둥아리를 곱게 놀려야지, 어따 대고 욕질이 야? 나이만 많으면 다야?” “그러는 넌 가슴만 크면 다냐?” “내가 가슴 큰데 아줌마가 뭐 보태준 거 있어?” “흥! 가슴만 크면 뭐 해? 머리통이 텅텅 비었는데.” “그러는 아줌마는 머리통이 꽉 차서 가슴이 그렇게 작아?” “내 가슴이 뭐가 어떻다 그래?” “솔직히 좀 작잖아.” “안 작아!” “객관적인 시선을 봐서 작다니까!”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서 안 작아! 내 가슴이 딱 표준 사이즈야.” “흣, 그래? 내 꺼 반도 안 될 것 같은데.” “너 옷 속에 뽕 넣은 거 다 알아! 뽕 넣은 건 빼고 계산해야지.” “뽕 없어! 이건 진짜야.” “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어디 한번 벗어 볼까?” “그래! 벗어 봐!” 라이레얼과 일루니아는 서로를 향해 폭언을 뿜어내며 삿대질을 해댔다. 이런 상황에서도 싸움이라니. 정 말 대단한 여인들이 아닐 수 없다. 불 위에 기름을 끼얹은 듯 억양이 점점 상승세를 타면서 실력 행사로 나서 려 할 때쯤 듣다 못한 루시아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만 좀 해!” 루시아의 외침에 두 여인의 싸움은 진정 되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모습 을 바라보고 있는 시녀들은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포로가 되어서도 저렇게 당당하다니! 셋 중에 유일하게 위기 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루시아 하나 뿐이었다. 적국의 포로가 된 공주라면 그 끝이 좋 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루시아를 공포 속으로 몰아 넣었다. 하짐나 동병상련 (同病相憐)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싸우기에 급급했다. 루시아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지금 이 순간만큼 루시아가 공주다워 보인적이 또 있었을까? 그 모습이 방안의 분위기는 한순간 숙연해졌 다. 일루니아는 루시아에게 다가가 살짝 껴안고 달래 주었다. “괜찮을 거야. 아무리 포로라지만 자바스군도 우리를 함부로 하지는 못 할테니까. 그리고…….” 일루니아는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루시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내가 잡혀간 것을 알면 분명 인디가 구하러 올 거야.” 그 말에 루시아는 순간 울음을 멈추었다. 왜 그 생각을 못한 걸까? 일루니아의 애인은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 네다. 둘은 정식으로 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깨가 쏫아지는 신혼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둘의 과도한 애정행 각을 보고 있자면 옆에서 보고 있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일루니아가 잡혀갔다면 인디가 구출하 러 오지 않을 리가 없다. 블랙 드래곤이라……. 아마도 브레스 한 방이면 자바스 전체가 쑥대 밭이 될 것이 다. 구출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겠지. 게다가 생각해 보니 라이레얼의 애인은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다. 라이레얼까지 같이 잡혀 있으니 분명 칼 리이스도 구출을 하러 올 것이다. 드래곤만 둘인데 더 이상 무슨 걱정이 필요 있으랴? 루시아는 남아있는 눈물을 닦아 내고 차분하게 의자에 앉았다. 라이레얼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시녀 들에게 발을 주므르라고 명령하였다. 시녀들은 포로 주제에 명령하는 것이 굉장히 아니꼬왔지만 그래도 시녀 란 직업 자체가 원래 친절과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직업인지라 군말 없이 따랐다. 주물주물~.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라이레얼의 발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피워 올랐다. 발냄새라는 것이 원래 구수하면서 도 코끝을 찌르는 무언가가 있다. 시녀들은 그 구정물 냄새 비슷한 향기를 계속 맡으며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 을 느꼈다. “야! 좀 팍팍 좀 주물러 봐. 아직 알이 덜 풀렸단 말이야.” 결국 시녀들은 비누를 푼 물로 라이레얼의 발을 깨끗이 닦아 주고, 발가락 사이 사이에 향수까지 한통 뿌려 주고 난 뒤에야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아~ 편하다. 계속 이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라이레얼은 행복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일루니아가 소리를 질렀다. “너 혼자 살아!” “아줌마는 왜 내가 하는 말마다 태클이야?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이곳에 계속 있고 싶긴 하지만 우리 히로 가 날 구하러 올 테니까.” 라이레얼의 말에 루시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어째서 히로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 자신하는 거 지? 날 구하러 온다면 모를까. 아무튼 누구라도 좋으니 빨리 구하러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루시아의 바람이었다. * * * * * 자바스의 왕궁에서는 포로 처리 문제를 놓고 회의가 한창이었다. 아이리스는 현재 반역 단체로 규정되어 있 었다. 원래 대로라면 포로들은 반역자로서 공개 처형을 당해야 할 것이다. 반역자의 최후란 이렇다는 것을 만 천하에 확실하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자바스의 지금 사정은 그렇게 좋은편이 아니었다. 남쪽에서는 아이리 스가 버티고 있고, 북쪽에서는 진명이 난리를 쳐대니 군사력이란 군사력은 전부 국경으로 돌렸고 그 군사 를 위지하느라 국고는 구멍이 뚫린 듯 점점 줄어 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아 공주를 처형하면 어떻게 될까? 아이리스군은 분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올 것이 뻔하다. 남부 사령관마저 죽은 마당에 그 공격을 버텨 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이건 샤이 사일런스 백작도 마찬가지다. 사일런스 백작의 친누나인 그녀를 처형한 다면 뒤끝이 좋지 못한 것은 확실했다. 그럼 라이레얼이라도 죽여? 현재로선 그것도 불가능했다. 라이레얼은 용병계의 꽃이나 다름 없었다. 이미 자바스에 고용된 용병들은 집 단 항의를 하고 있었다. ‘라이레얼에게 손을 댄다면 결코 가만 있지 않겠다.’ ‘당장 라이레얼을 석방하라.’ 만약 라이레얼을 처형한다면 전세계 용병들이 자바스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어렵게 잡은 포 로를 쉽게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풀어지지 않는다면 용병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대체 어찌하는 것이 좋단 말인가? 최선의 선택이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최악의 선택을 피해가는 것만 이 남았을 뿐. 그들의 최악의 선택을 피해가는 길은 당장 포로 셋을 석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어렵게 잡은 인질들 을, 그것도 인질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인질들을 석방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미 별동대는 조직이 되었고 히로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출동 시간을 기다리며 칼날을 갈 고 있었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거리는 자바스의 운명. 자바스는 이제 어찌될 것인가?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다. 사실 그 동안 참느라 많이 힘들었다. 기다림의 시간만큼 지루한 것은 없었다. 내 가 이러는 동안 고통 받고 있을 루시아를 생각하면…… 으윽……. 이런 심정은 인디나 카르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둘은 한숨도 못잔 채 손톱을 물어 뜯는 등 불안한 정신 상 태를 보였다. 일부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이상한 상상을 하는. 그들의 심정 내가 백분 이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보다 몇 백 배는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현재 시각은 자정. 밤 깊은 이 시간에 우리는 침투를 하기 로 결정을 내렸다. “장소는?” “자바스의 왕궁입니다.” “뭐? 아니, 어느새 왕궁까지 옮겼데?” “워낙 중요한 인질들이다보니 마법진을 통해 옮긴 것 같습니다.” “으음.” 왕궁이라면 경계가 철저할 테고 침투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한다. 차 라리 잘 됐다. 최대한 어렵게 구해내야 그만큼 폼이날 테니까. 후후~ 아무래도 하늘은 내 편인 것 같군. “자, 가자!” 난 라이를 안아 들고 힘차게 외쳤다. 그러자 지니가 내 옆에 찰싹 달라 붙었다. 난 지니를 훑어보며 말했다. “왜 제 옆에 붙으시는지……?” “아이언스 공작님을 따르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팀은 최강이어서 사일런스 백작님의 도움이 굳이 필요할 거라 생각되는 않는데요.” “그래도 전 아이언스 공작님을 돕고 싶습니다. 전 이미 아이언스 공작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으 니 어떤 명령이라도 따르겠습니다.” “설마 말은 그렇게 해놓고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 치려는 건 아니겠죠?” “하하,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농담에도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진담인데요.” “…….” 아무튼 사일런스 지니는 나를 따라 가기로 하였다. 이렇게까지 따라오고 싶어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좀 그러 니. 게다가 지니가 나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별동대의 인원은 여섯명. 총지휘관 - 아이언스 히로 부지휘관1 - 라이 부지휘관2 - 사일런스 지니 일반 대원1 - 인디 일반 대원2 - 카르 일반 대원3 - 크로니스 사상 최강의 팀 구성이다. 이 보다 더 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내가 지휘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난 남의 명령을 듣기 보단 명령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즉, 지휘관 타입이라는 거지. 사실 그 동 안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내가 또 한 지휘 한다. 나만큼 지휘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사일런스 지 니? 훗! 지니쯤이야 내 발끝에도 못 미친다. 그 증거로 지금 지니는 부관일 뿐이다. 그것도 제 1부관이 아 닌 제 2부관. 원래 제 1부관은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난 믿음직한 라이에 게 그 직책을 맡겼다. 이런 내 인사 배치에 대해 불만을 가진 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들이 불만을 가지면 어쩔 것인 가? 억울하면 자기가 지휘관 하던가. “우리는 인질 구출을 최우선 목표로 합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적에게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지 요. 모두들 잠입 액션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시고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이세요. 만약 적에게 발각 된다면 적 을 즉시 무력화 시켜서 소란을 피해야 합니다. 그럼 모두들 아셨을 거라 생각하니 출발하도록 하지요. 목적지 는 자바스의 왕궁입니다. 사람 눈에 뜨이지 않는 곳으로 텔레포트 하는 것 잊지 마세요. 그럼 출발!” 내가 지휘관답게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 출발을 지시하자 크로니스가 텔레포트 마법을 썼다. 장소는 바뀌어 이곳은 자바스 왕궁. 우리가 서 있는 곳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긴 어디냐?” “왕궁 동쪽 정원인 것 같은데요.” 우리는 높게 자라난 덩굴들 밑으로 몸을 숨겼다. 역시 왕궁이어서 그런지 정원도 관리가 잘 되어 있고 이 름 모를 비싼 꽃들로 가득했다. 꽃향기가 짜증날 정도로 진하다. 난 향기가 진한 꽃들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루시아는 어디 갖혀 있데?” “글쎄요. 아마도 지하 감옥이 아닐까요?” “맞아. 귀중한 포로들인만큼 감시가 심한 지하 감옥에 가두었을 거야.” 우리는 엄페물에 등을 기대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적에게 들키면 인질들이 위험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 다. 인질의 우선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번 임무에서는 첫 번째도 조심, 두 번째도 조심이다. “쳇! 마법 한번만 쓰면 간단하게 구해낼 수 있는데.” 카르의 투덜거림. 그 마음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다. 손 한번만 휘두르면 간단히 해결 될 일을 해결하기 위 해 이런 짓까지 하고 있다니. 드래곤으로서 자존심이 상할만도 하지. 하지만……. “그렇게 쉽게 구해내면 의미가 없잖아. 마법 한번 써서 구해내면 라이레얼이 좋아할 것 같아? 최대한 많 은 시련을 겪고 간신히 구해내야 구출 받는 입장에서도 기쁘지.” “그래도 이런 방식은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그럼 너 혼자 날아가서 라이레얼만 구해 가든가. 나와 인디는 어렵게 어렵게 구해낼 테니.” “쳇!” 카르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긴 했지만 더 이상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걸 음을 옮겼다. 라이는 지금 상황이 재밌는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잘 따라왔다. 난 정원 바깥쪽으로 슬며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도 없어.” 난 그렇게 말하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대원들은 신속하게 내 뒤를 따라 움직였다. 사실 예전부터 이 런 거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이 얼마나 재미있고 스릴있나? 내가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듯한 느낌이 다. 그 때였다. 갑자기 병사 하나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쩍 벌린 채 그 자리에서 굳 었다. 젠장, 내 실수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 건데. 난 병사가 그냥 못본척 스쳐지나가길 바랬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바람이었다.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그냥 못 본척 스쳐지나갈 리가 없지. 아마 얼씨구나 좋다고 소리를 질러댈 것이다. ‘동네 사람들 다 나와 보소! 여기 침입자가 있어부려!’ 어쩔 수 없군. 이 놈이 외치기 전에 제거하는 수 밖에. 살생은 삼가려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어찌할 수 가 없다. 난 청룡도를 뽑으려 하였다. 발도술로 한번에 목을 날려 주마. 하지만 그때 크로니스가 내 손을 잡았다. 내 가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크로니스를 보자 크로니스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 순간 그 병사는 내 곁을 스 쳐 지나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렇다는 것은 저 병사의 눈에는 내가 안 보인다는 얘기? 난 놀란 눈으로 크로니스를 보았다. 그러자 크로니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투명화 마법입니다.” “…….” 난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투명화 마법이었다. 언제부터 투명화 마법이 걸려있 던 거지? 마법이 걸린 줄도 몰랐다니. 으음…… 과연 9클래스라는 건가? 하지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 병사가 그냥 지나갔다는 것은 크로니스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 이다. 즉, 크로니스도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는 얘기. 그런데 지금 내 눈엔 크로니스가 보인다. 그렇다면 설 마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고 내 눈에만 보이게 마법을 이중으로 걸었단 말인가? 역시 드래곤이군. 굉장해. 난 새삼 9클래스의 위력에 감탄하였다. 아무튼 이제 투명화 마법까지 걸었겠다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우리 는 소리가 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당당하게 걸어 왕궁 안으로 침투하였다. “그런데 지하 감옥은 어디에 있을까?” “아무도 지하에 있지 않을까요?” “……” 누가 그걸 몰라서 묻냐? 결국 난 인질을 잡아다가 묻기로 하였다. 그래서 벽에 등을 붙이고 있다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시녀 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입을 막았다. 시녀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더욱 세 게 입을 틀어 막았다. “목숨이 아깝거든 조용히 있어.” 내가 그녀의 귀에 속삭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묻도록 하겠다. 쓰리 사이즈랑 연락처를 말 해.” “…….” 순간 주위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시선. 심지어는 라이마저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들을 향해 씨익 웃 어보이며 말했다. “농담이야.” 그때 시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36-24-34 구요, 연락처는…….” 오옷! 이런 완벽한 몸매라니. 내 짐작으로 보건데 쓰리 사이즈는 대충 맞는 것 같다. 난 그녀가 말한 연락처를 당장이라도 받아 적고 싶 은 충동을 자제하며 말했다. “그건 됐으니까 지하 감옥 입구가 어딘지 말 해.”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난 속으로 그녀의 연락처를 열심히 외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편지나 한통 써야겠 다. 물론 펜팔이 목적일 뿐이지 결코 다른 목적은 없다. 나한테는 오직 루시아뿐이니까. “지하 감옥 입구는 저쪽이에요.” 시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난 그녀의 목뒤를 쳤다. 기절시키려는 것이다. “억!” 하지만 시녀는 신음만 내뱉을뿐 기절하진 않았다. “왜 때려요?” “…….” 잘못 쳤나보군. “아, 미안해. 나의 미스테이크(mistake)야.” “미스테이크가 뭐죠?” “실수라는 뜻이지. 너도 영어에 약하구나.” 이제 어떻게하면 좋지? 쳐서 기절시키는 것이 실패했으니 다시 쳐야 하나? “여긴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루시아 공주님을 구해주십시오. 덤으로 저 희 누님까지 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댁의 누님이야 제가 알바 아니니 루시아 공주님을 구하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루니아님은 제가 구할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괜히 끼어들어서 한마디 하는 인디. 지니는 그런 인디가 믿음직스러운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지니에게 시녀를 넘겨 주었다. “어머!” 마치 무섭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는 시녀. 하지만 얼굴 가득 홍조를 띤 것을 보아하니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지니는 시녀를 살짝 안아 들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미안하지만 잠시 저와 같이 있어 주셔야겠습니다.” 시녀는 눈빛으로 지니의 말을 받았다. ‘기꺼이 그리 하겠어요.’ 죽어도 좋다는 듯한 시녀의 표정. 진짜 맛이 가도 한참 맛이 갔다. 역시 잘생기면 인질 다루기도 편하다는 건 가? 그래. 넌 여기서 시녀랑 놀고 있어라. 지니가 옆에 있으면 내가 폼이 안 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난 지니를 이곳에 버리고 가기로 결심하였다. 지니가 시녀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지하 감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 감옥 입구에 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난 개나리 스텝을 이용해 그들에게 접근했다. “앗…….” 나를 눈치챈 병사들은 소리를 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난 두 손을 힘껏 내질렀다. 빅장을 얻어 맞은 병사들 은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을 느끼며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병사들을 모두 쓰러트린 나는 그들의 품에 서 열쇠를 빼앗아 아래로 내려갔다. “루시아 공주님! 아이언스 히로가 구하러 왔습니다!” “루시아 언니! 라이도 왔어요!” “일루니아님! 저도 구하러 왔어요!” “라이레얼 언니!” 우리가 그렇게 외치자 감옥 안에 죽치고 앉아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철창에 달라 붙어 난리를 치기 시작했 다. 게다가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것이 아닌가? “오우! 언니 죽이는데!” “언니 자세 좀 취해 봐!” “옷 좀 벗어봐! 얼마나 섹시한가 구경 좀 하게!” 이들의 시선은 세 드래곤에게 집중 되어 있었다. 인디, 카르, 크로니스. 이렇게 셋. 이 셋 중 실제 여자는 카 르뿐이지만 나머지 둘도 보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여자로 볼 수 있으니. 크로니스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인디와 카르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카르는 얼음장 같은 얼굴 에 인상을 쓰더니 손을 뻗었다. “다 죽여버리겠어!” “…….” 쟤는 뻑하면 죽인다고 난리야.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르를 뜯어 말렸다. “야, 진정해. 우리는 지금 잠입해 온 거야. 니가 여기서 난리를 치면 우리 입장이 뭐가 되니?” “하지만 저것들이 자꾸 개기잖아.” “그래도 참어.” “난 그럴 수 없어.” “그럼 조용히 잠재워.” 내가 말하자마자 카르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주문을 외웠다. 너무 작아서 무슨 주문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 다. 아마도 슬립(sleep) 주문일 것이다. 죄수들이 잠을 자듯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진 것을 보니. “무슨 마법을 쓴 거야?” “파워 워드 킬.” “…….” 파워 워드 킬이면 즉사 마법이다. 생명력이 낮은 놈들을 한방에 즉사 시킬 수 있는 마법. 그렇게 잔인한 마법 을 그렇게 잔인하게 쓰다니. 진짜 잔인하다. 앞으로는 카르의 성질을 긁지 않도록 많이 조심해야겠다. 그 순 간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난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잠깐. 그럼 루시아는……?” “괜찮아. 내가 주문을 걸 때 라이레얼 언니랑 기타 등등은 피해를 안 주게 했거든.” “…….” 어째서 루시아가 기타 등등에 속하는 거지? 라이레얼이 기타 등등에 속한다며 모를까. “그럼 여기서 살아있는 사람만 찾으면 되는 거야?” “응.”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를 치며 돌아다녀도 응답이 없었다. 그 얘기 는 즉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 그렇다는 것은 전부 죽었다는 얘기. 헉! 설마……. “전부 죽은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너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 솔직히 못 믿겠다. “뭐야, 그 눈빛은? 난 드래곤이라구! 내가 마법을 얼마나 잘 쓰는데. 결코 실수하지 않아!” “…….” 소리지르니까 더 수상해 보인다. 그때 크로니스가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우리는 귀를 쫑긋 기울였다. “중요한 인질인데다가 전부 여자인만큼 귀빈실 같은 곳에 가두어 놓은 것이 아닐까요?” “……헉!” 나와 두 드래곤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어째서 우린 그 생각을 못한 거지? 사실 크로니스의 말이 맞았 다. 그런 중요한 인질을 -안에 공주도 하나 껴 있는데- 지하 감옥 같은 곳에 처박아 놓을리 없지. 아~ 역시 머리가 딸리니 몸이 고생이구나. 우리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위로 올라갔다. 난 계단을 오르기 직전 고개를 돌려 감옥 안에서 죽은 사람들 을 바라 보았다. 불쌍한 것들. 우리가 이곳에 오지만 않았더라도 감옥에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 텐데. 저승에 가서 나 를 원망하지 말지어다. 난 그냥 잠재우라고만 했는데 영원히 잠재울 줄 누가 알았겠니? 그러니 날 원망하 지 마. 정 원망하려거든 카르를 원망 해. 아니면, 그냥 재수 없었다고 생각하던가. 아무튼 미안. 난 그렇게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걸음을 옮겼다. 생각 같아서는 좀 더 빌어주고 싶지만 시간이 별로 없 다. 최단시간에 인질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잠입 액션의 목표니까. 하지만 의외의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질 구출을 하기 위해 잠입했는데 인질이 스스로의 힘으 로 빠져나오는 경우. 이럴 경우 구출하러 온 사람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설마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진 않겠지만. 으음, 그래도 왠지 불안하다. 내가 워낙 재수 없는 놈이다 보니. 난 불안한 마음을 떨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귀빈실은 또 어디야? * * * * * * 히로 일행이 루시아 일행을 구하기 위해 잠입한 그 시각. 루시아 일행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시각 루시아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일루니아는 지금 상황을 타개할 최 선의 방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라이레얼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한참 잘 자고 있던 라이레얼은 갑자기 눈을 뜨고 일어났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 그 동안 쌓였던 피로가 다 풀 리고 몸도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몸 상태가 이 정도면 행동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라이레얼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라이레얼에게 그동안 시달림을 당해서 익숙해진 시녀들은 재빨 리 라이레얼에게 다가왔다. 라이레얼은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이레얼 수준에 서 가볍게 휘두른 것일뿐 맞은 시녀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시녀들은 맞은 부위를 감싸 쥐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루시아와 일루니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긴. 안에만 있기 지루해서 밖으로 나가보려는 거지.” 라이레얼은 탈출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라이레얼 실력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 라이레얼의 솜씨 를 직접 본 일루니아는 탈출이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방에서 나가면 어 쩔 것인가? 이 방에서 나간다고 해서 과연 이 왕궁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이곳 에 그냥 앉아있는다고 해서 뾰족한 수는 없지 않은가? 되든 안 되든 한번 부딪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일루니아는 라이레얼을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루시아도 혼자 남아있어 봐야 뾰족한 수 가 없으니 라이레얼을 따라가기로 하였다. 중요한 인질인만큼 문 밖에는 당연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는 둘 밖에 안 되었다. 이 것은 라이레얼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라이레얼의 실력을 직접 봤다면 적어도 일개 소대 정 도는 감시자로 붙어야 했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멍청하게도 라이레얼이 미모의 여자인 것만 보고 라이레얼 의 실력은 외면하고 말았다. 감히 라이레얼을 상대로 병사 둘 밖에 세워 놓지 않다니. 라이레얼은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병사 둘의 시선이 라이레얼에게 쏠린 것은 당연했다. 라이레얼은 딱딱 하게 굳은 병사들을 향해 매혹적인 웃음을 날렸다. “수고들 많으시네요.” 문 앞에 서있는 것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계절은 여름. 이런 날씨에 갑옷을 전부 갖춰입 고 정자세로 서 있으니 땀이 뻘뻘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라이레얼의 미소는 청량제와 도 다름 없는 것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미소라니!’ 하프엘프의 미소는 두 병사를 녹아내리게 하기 충분했다. 라이레얼은 더욱 교태스런 웃음을 지으며 코가 막 힌 듯 흥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잠깐 부탁드릴 게 좀 있는데…….” 병사들은 맛이 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아직 한가닥 남아있는 이성의 끈을 붙들고 딱딱하게 물었다. “뭐, 뭔데?” “왜 있잖아요. 여자한테 꼭 필요한 거…….” 여자한테 꼭 필요한 거라니? 그게 대체 뭘까? 평소 여자에게 인기가 없어서 여자에 쥐뿔만큼도 알지 못하는 병사들은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여자에게 꼭 필요한 게 뭔데?” 아~ 이래서 평소 열심히 공부를 해야하는 것이다. 여자에게 꼭 필요한 게 뭔지도 모르다니.(그런데 여자에 게 꼭 필요한 게 대체 뭘까? 정말 궁금하다) “아잉~ 그걸 어떻게 제 입으로 말해요?” 라이레얼은 말하기 힘들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병사들은 호기심이 일었다. 라이레얼은 다른 사람에 게 들릴까봐 겁난다는 듯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순진한 병사들은 가까이 다가가 귀를 바짝 들이 댔다. “그건 말이죠…….” 라이레얼은 작은 목소리로 말하다가 갑자기 한 병사의 목을 잡더니 그대로 비틀었다. 그리고 그제야 라이레 얼의 생각을 눈치챈 다른 병사가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그 병사의 입을 털어 막고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제대로 얻어 맞았는지 병사는 쓰러진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라이레얼은 병사가 기절했다는 것을 확인하 고 병사의 허리에 매져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하나는 자신이 들고 다른 하나는 일루니아에게 건네주 었다. “이걸 어쩌라고?” “들고 있어.” 물론 일루니아는 검을 쓸 줄 몰랐다. 하지만 들고 있으면 적에게 위협이 될 것 같아 들고 있으려 하였다. 하 지만 검이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결국 버리기로 하였다. 라이레얼은 그런 일루니아를 보고 혀를 찼다. 일루니아는 항변하였다. “난 누구처럼 무식하게 몸 쓰는 직업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직업이야.” 앗! 자신이 화이트 칼라라고 해서 블루 칼라를 모욕하는 말을 하다니.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데 어찌 이런 말 을 한단 말인가! 사회 통합을 위해서 이런 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성시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론 이런 말을 듣는 다고 해서 자존심 상해할 라이레얼이 아니다. 라이레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래서 머리카락이 그렇게 많이 빠졌어?” “누가 빠졌다 그래? 내 머리숱 아직도 많아.” “많긴 뭐가 많아? 머리 군데군데에 땜빵이 있구만.” “헛소리 마!” “당황하는 걸보니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아줌마가 아무리 그래봐야 내 찰랑찰랑한 머릿결에 비하면 어림 없지. 내 머리카락이 모피라면 아줌마 머리 카락은 개털이야. 알았어? 개털!” “……윽.” 일루니아는 뭐라고 한마디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찰랑거리는 레몬빛 머리카락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라이레얼의 머리카락은 마치 ‘나 엘라스틴 했어요~’ 라고 말하는 듯 했다.(엘라스틴 = 고급 샴푸 의 일종. 머릿결을 좋게 해주는 아이템으로 상당히 비싸다) 일루니아는 라이레얼의 머릿결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나도 돌아가면 엘라스틴 해야지.’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은 모든 여자들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일루니아는 그 동안 너무 일에 매달리느라 외모 에 신경을 못 쓴 것을 후회하였다. 외모는 평소에 열심히 가꾸어야 하는 법인데. 루시아는 두 여인의 싸움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싸울 시간이 어디 있어요?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지요.” 그렇다. 도망치는 인질들이 서로 싸울 시간이 어디 있겠나? “일단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라이레얼이 앞장 서자 두 여인은 그 뒤를 따랐다. 일단 왕궁만 빠져나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든 될 것이 다. 하지만 그 바람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인질들이 탈출 했다!” “잡아라!” 이렇게 빨리 걸리다니. “어떡하죠?” “무조건 뛰어.” 라이레얼은 빼앗은 검을 꼭 붙잡고 계단을 뛰어내렸다. 라이레얼이야 실력이 뛰어난 용병이니 체력적인 면 에서 조금도 부담이 없었지만 루시아와 일루니아는 얘기가 틀렸다. 둘은 조금 달린 것만으로도 금방 가뿐 숨 을 내뱉었다. 이래서 평소에 운동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달리기. 달리기는 유산소 운동으로 살 빼는데도 많은 효과 가 있다. “빨리 뛰어!” 라이레얼은 재촉했지만 루시아와 일루니아는 더 이상 뛸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아~ 하아~.” 체력의 한계에 다달한 둘은 결국 그 자리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그 뒤로 왕궁 근위병들이 쏜살 같이 달려오 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라이레얼은 둘을 자신의 뒤에 세우고 검을 들어 올렸 다. 이십명은 될 것 같은 근위병들은 라이레얼의 주변을 빈틈 없이 애워쌌다. 괜히 덤벼들어 쓸데 없이 사상 자를 내느니 좀 치사하더라도 포위망을 구축해서 압박할 생각인 것이다. 라이레얼은 이마에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놈들은 프로였다. 역시 왕궁에서 근무를 하니 달라도 뭐 가 다른가 보다. ‘이럴 때 우리 히로가 나타나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얼마나 부질 없는 바람이란 말인가?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 그 순간 라이레얼의 레몬빛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라이레얼은 기쁜 마음에 소리쳤 다. “히로~!” * * * * * 귀빈실로 향해야한다는 것은 잘 알았는데 귀빈실이 어딘지 내가 어떻게 아냐? 결국 방법은 딱 하나. 누군가 에게 물어보는 수 밖에 없다.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것인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한 나는 아까처 럼 시녀 한명을 붙잡아 물어보기로 하였다. 쓰리 사이즈와 연락처는 덤으로 물어볼 생각이다. 마치 나를 도와주기라도 하듯 저쪽에서 한 시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내가 그녀를 덥치려 -어째 어감 이 좀 이상하다- 하는 순간 위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3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시녀를 덥치는 것을 그만두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라이는 다리가 짧아 빠르게 계단 을 뛰어갈 수 없기에 내가 안고 뛰었다. 드래곤 셋은 내 뒤를 잘 따라왔다. 계단을 다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것 은 떼거지로 몰려있는 근위병들. 그들은 빈틈 없이 누군가를 포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근위병과 마주쳤으니 큰일이다. 이놈들을 다 제거해야 하는 건가? 생각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근위병들은 전부 칼을 뽑아 들고 있었으니까. 난 하는 수 없이 출수할 준비 를 하였다. 굳이 청룡도를 뽑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빅장으로 한방에 날려주지. 그때였다. 포위망 안에서 레몬빛 머리카락이 살짝 보인 것은. “히로~!” 커다란 라이레얼의 외침.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카르는 라이레얼을 보더니 반갑게 소리쳤 다. “라이레얼 언니! 제가 구하러 왔어요!” 대체 어째서 라이레얼이 이곳에 있는 거지? 갖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앗! 일루니아님!” 일루니아 여사님까지. “어! 루시아 언니다!” 루시아까지. 어째서 우리가 구하러 온 여인들이 전부 밖에 나와있는 거지? 설마 자력으로 탈출한 건가? 이러면 안 되는 데. 원래대로라면 갖혀 있는 여인들을 우리가 멋지게 구해내야하는 건데. 일단은 저 근위병들을 엎애는 것이 먼저였다. 난 근의병들이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공격에 들어갔다. “빅장 40단 콤보!” 근위병은 이십명이나 되지만 빅장이 있는 이상 근위병 따위는 껌에 불과했다. 대(對) 드래곤용으로 만들어 진 필살기를 어찌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역시나 내 예상대로 근위병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나가 떨어졌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을 느끼며. 빅장의 위력 뼛속까지 느껴라. 빅장 시전이 끝나자 발을 딛고 서 있는 근위병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난 손을 거두며 호흡을 가다듬었 다. 필살기다 보니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하는 것이 탈이다. 휴우~ 힘들다. 그 순간 반대편에 있던 라이레얼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난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라이레얼 의 움직임이 개나리 스텝보다도 빨랐던 것이다. 순식간에 라이레얼은 나를 덥썩 껴안았다. “히로오~.” “라, 라이레얼.” 난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나를 꼭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벼댔다. “날 구하러 온 거지? 그런 거지?” “아니, 그게…….” “됐어.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 히로 맘 내가 다 알아.” “아니, 그게 아니라…….” “흑~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하지만 난 히로가 날 구하러 올지 알고 있었어. 왜냐면 히로는 날 사랑 하니까. 히로는 나의 진정한 사랑이니까.” “진짜 그게 아닌데…….” “사랑해, 히로. 나한테는 히로 밖에 없어. 날 구하러 와줘서 고마워.” “전 라이레얼을 구하러…….” 이 다음 말은 ‘……온 게 아니라 루시아를 구하러 왔는데요’ 이다. 하지만 난 그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라 이레얼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어버린 것이다. 난 마치 얼어버린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러 는 와중에서도 눈알은 열심히 돌아갔다. 인디는 일루니아를 껴안고 울음을 터트렸고,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문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르는 눈 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고, 루시아는 무서울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원래 나의 계획에 의하면 여기에서 루시아와 포옹을 하고 루시아가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 데 그걸 라이레얼이 전부 해버리다니. 이러면 계획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것이다. “라이야, 일로 와.” 루시아가 손짓하자 라이는 루시아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갔다. 루시아는 라이의 작은 손을 꼭 움켜잡더니 몸 을 휙 돌렸다. “가자, 라이야.” 마치 나 따위는 신경도 쓰기 싫다는 태도. 안 돼! 그냥 가버리면 난 어쩌라고? 사랑해요, 루시아! 제 곁으로 돌아와요! 그러는 와중에서 라이레얼은 나를 리드하며 능숙하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지니가 내게 한 말 이 떠오른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몸소 루시아 공주님을 구출해 내신다면 루시아 공주님께서는 크게 감동하실 것이 분 명합니다.’ 이러면 앞으로 루시아와 나의 관계가 좋은 쪽으로 진척될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최악으로 향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루시아에게 차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라이레얼을 밀치고 루시아에게 사태를 해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라이레얼은 강력한 힘 으로 나를 껴안고 키스를 하고 있어서 난 도저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이건 제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전 지금 성추행 당하고 있는 거예요! 나의 외침은 내 안에서만 울려퍼질 뿐 아무도 듣지 못하였다. 그때였다. 카르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 이 아닌가? 카르의 표정은 마치 얼음처럼 딱딱해 보였고, 은빛 눈동자는 햇빛을 반사하는 얼음처럼 무서운 빛을 뿜어냈 다. 그리고 카르의 전신에서는 절대 영도에 가까울 정도의 냉기가 폴폴 뿜어져 나왔다. 진짜 인간 에어콘이 따로 없다. 카르만 옆에 있으면 더운 여름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너 라이레얼 언니한테 찝적거리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놓고선 감히 나의 언니한테 강제로 키스까지 해?” 나는 직감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많이. 그래서 난 온힘을 다해 라이레얼을 밀 치고 변명을 하였다. “아, 아니야! 이, 이건 라이레얼이 나한테 억지로 한 거야. 난 진짜 아무 감정 없어.” 그 순간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라이레얼이 다시 나를 끌어 안고 내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음 란한 행위. 거기까지가 카르의 인내심의 한계였나 보다. “나쁜 자식! 죽여버리겠어!” 카르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난 카르가 무 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폭주해 버린 카르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인디와 크로니스는 재빨리 우리 주 위에 보호막을 쳤다. 그날. 자바스 왕궁에는 갑자기 화이트 드래곤이 나타나 브레스를 쏘고 꼬리를 휘두르는 등 왕궁을 쑥대밭으로 만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유성 낙하 마법까지 써서 아예 왕궁 전체를 날려 버렸다. 그 여파로 인해 자바스의 국 왕을 비롯한 왕족들이 사망하였으며 왕궁 안에 있던 귀족 백여 명도 같이 몰살 당했다. -------------------------- 대체 어떤식으로 잘라올려야할지 모르겠네요. 이대로라면 2편 정도 더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자바스 왕궁이 지도상에서 사라진지 며칠이 흘렀다. 자바스 수도는 지금 난리가 났다. 일단은 아직까지도 국 왕이 없는 상태다. 그 사고로 인해 국왕을 비롯한 왕위 계승자 전원이 죽어서 현재 왕관이 누구의 머리 위 에 있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와중에서 몇몇 놈들은 자기가 왕의 먼 친척이라고 족보를 들고다 니며 일일이 설명하며 왕관이 자기 머리 위에 쓰여야 한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왕관을 쓰면 뭐하 나? 왕궁도 없어진 마당에. 카르가 자바스 왕궁에서 폭주를 한 바람에 자바스는 끝장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인간들은 이번 기회를 통 해 드래곤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하였다. 지금 자바스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문의 내용은 즉 자바 스가 화이트 드래곤의 저주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화이트 드래곤의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은 자바스가 아니라 바로 나, 일명 아이언스 히로다. 라이레얼 때문에 난 완전 망했다. 루시아가 크게 감동하기는커녕 크게 화를 냈고, 카르가 폭주하는 바람 에 적진에 침투하여 인질을 무사히 구출해낸 사실은 땅 속에 파묻혔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원래 대로라면 내가 루시아를 무사히 구출해 내서 루시아한테 점수도 따고 실추된 나의 명예를 회복시키 는 건데. 아아~ 정말 되는 일이 없다. 나를 둘러 싼 여론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에 난 9클래스 마법을 번역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 고 상아탑 도서관으로 숨었다. 크로니스는 날 돕기 위해 같이 왔지만 인디는 ‘이제부터 영원히 일루니아님 곁 을 지킬게요. 전 일루니아님의 수호천사에요’ 등등의 말을 지껄이더니 결국 일루니아 여사님의 곁에 남기 로 하였다. 카르야 당연 라이레얼 옆에 있겠지. 만약 따라온다고 했으면 내가 극구 뜯어 말렸을 것이다. 같 이 있으면 기회를 봐서 날 죽이려 들게 뻔하니까. 그나저나 루시아를 만나서 해명을 해야하는데 도저히 루시아를 만날 용기가 나질 않는다. 날 경멸어린 시선 으로 바라볼 것이 뻔한데. 그리고 과연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들어주기나 할까? 흑~ 진심은 통한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야. 난 이제 끝났어.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흑흑, 라이야. 이제 이 오빠는 어쩌니? 우리 라이한테 엄마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괜찮아요, 오빠. 라이는 오빠만 있으면 돼요.” “그래. 고맙다, 라이야. 이 오빠도 라이만 있으면 돼. 엄마 없어도 라이랑 오빠랑 행복하게 살자. 알았지?” “예, 오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라이는 엄마가 없는 결손 가정에서 자라게 되는 셈이다. 라이의 귀여움을 시기한 아이들 은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가지고 라이를 놀릴 테고 그럼 착하고 순진한 라이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울음 을 터트릴 것이다. 불쌍한 우리 라이. 역시 라이를 결손 가정에서 자라나게 할 수는 없어. 내가 좀 더 힘내서 루시아한테 대쉬해야겠다. 그래서 라 이한테 엄마를 만들어 줘야지. 분명 말하지만 나의 이런 결심은 오직 라이를 위해서이다. 오직 라이를 위해서 이 한몸 희생하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에휴~ 하지만 이미 그런 모습까지 다 보였는데 루시아가 날 좋아할리 없지.” 나의 마음은 이렇게 애절한데 루시아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이러다가 루시아와 끝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모 르겠다. 지금 상황으로 보자면 루시아와 헤어질 확률이 90% 이상. 내가 일방적으로 차이는 것이다. 지금도 두렵기 그지 없다. 혹시나 우편으로 루시아에게서 헤어지자는 편지가 오지는 않을까? 만약 그러 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루시아와 헤어진다는 것은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쯤 생각해 두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 좋 을 것 같았다. 그래야 막상 상황이 닥쳐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도서관에 찾아올 사람이라면 칼리뿐이다. 내가 뭐라고 하기 도 전에 라이는 쪼르르 달려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안으도 들어온 사람은 놀랍게도 사일런스 지니였 다. 난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너, 너…… 니가 어떻게?” 자바스 왕궁이 카르로 인해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라이레얼 때문이지만- 개박살 났다는 것은 아까 말해 서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나와 라이, 루시아 등은 크로니스와 인디, 즉 드래곤들의 도움으로 간신 히 살아남았다. 아마 드래곤이 방어막을 쳐주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왕궁에서 살아 남은 것은 우리뿐이었다. 그때 당시 지니는 우리와 같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난 지니가 죽거나 혹은 무슨 일 을 당했을 거라 생각했다. 지니가 아무리 천재적인 모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도리가 없었을 테니. 하지만 지 니는 멀쩡한 모습으로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다친 곳 하나 없다. “혹시 유령?” 내가 말하고도 참 멍청한 질문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 세상에 유령이라니. 그리고 설사 지니가 유령이 되었 다 한들 왜 날 찾아오겠는가? 여자 유령들 꼬시러다니지.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사실이다. 난 라이의 뒤에 숨어서 뒷걸음질 쳤다. “여, 여기는 어쩐 일이야?” “그야 당연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나, 난 댁이 죽은 줄 알았는데…….”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오직 존경하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에 이렇게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 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 없습니다.” 저렇게 사람 얼굴에 금칠하는 얘기를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하는 걸 보니 지니가 틀림 없다. 난 조심스럽게 지 니에게 다가가 지니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체온이 느껴지는 걸 보니 사람 맞군.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예요?” “사실 저는…….” 지니가 입을 열자 난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정말 궁금하다. “일이 그렇게 될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언스 공작님과 헤어진 다음 시녀와 함께 재빨리 밖으 로 피신하였던 것입니다.” “……뭐?” 카르가 라이레얼 때문에 열받아 왕궁을 파괴할 줄 알고 있었다고? 과연 사일런스 지니로다! 잠깐, 이게 아니지.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면서 왜 저한테는 안 알려주신 겁니까?” “그건…….” 지니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지니가 만약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었다면 나는 라이 레얼과의 키스를 피할 수 있었을 테고 그러면 카르가 폭주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미래를 알 게 됨으로써 그 미래를 피해간다고나 할까? “아하하, 사일런스 백작님의 생각 다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과 저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군요.” “하하…… 이심전심은 뭔 이심전심? 너 임마,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한테 말 을 안 했단 말이야?” 어느새 내 손은 지니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가증스러운 놈 같으니라고! 그런식으로 나를 이용해 먹 었다 이거지? 내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잠깐 진정해 주십시오.” “시끄러!” “제가 누구와 같이 왔는지 아신다면 아이언스 공작님의 분노도 조금은 풀릴 것입니다.” “니가 누구랑 같이 왔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지금 루시아 공주님께서 와 계십니다.” “…….” 뭐? 루시아가? 난 황급히 지니의 멱살을 놓고 옷을 바로 하였다. 폭력적인 남자는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법. 젠틀한 모습 을 보여줘야지. “라이야, 오빠 머리 괜찮니?” “예. 멋있어요!” 멋있다니 다행이다. 내가 옷 매무새를 다 정리하고 최대한 단정한 모습이 되었을 때쯤 도서관 문이 천천히 열렸다. 사뿐사뿐 걸 어들어오는 저 여인은…… 헉! 루시아다! 루시아는 나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루시아의 걸음이 빨라진다. 루시아는 얼 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아~ 드디어 오해가 풀어졌나 보군. 내 품에 안겨요, 루시아. 루시아는 나를 지나쳐 내 뒤에 있는 라이를 덥썩 껴안았다. “그 동안 잘 지냈니?” “예, 언니.” 무안해진 나는 활짝 벌린 두 팔을 내리고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하. 하. 하.” 어색하게 웃어보았지만 루시아는 나에게 눈치 한번 주지 않는다. “밥 먹었니?” “예. 오빠랑 같이 먹었어요.” “뭐 먹었는데?” “빵이요. 라이는 빵 이만큼 먹었어요.” “맛있었니?” “예. 굉장히 맛있었어요.” “아이, 귀여워.” 라이는 라이를 품에 안고 볼을 살짝 꼬집었다. 저 화기애애한 분위기. 마치 엄마와 딸을 보는 것 같다. 그런 데 아빠인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난 저들의 틈에 끼어들 수 없단 말인가? 날 봐줘요, 루시아. 루시아는 내 마음 속의 외침을 외면하고 라이와 노는 것에만 열중하였다. 휘이잉~! 싸늘한 바람이 내 가슴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대로 한줄기 바람이 되어 사라지고 싶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곁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 니가 곁에 있는데 어쩌라고? 넌 없어도 상관 없어, 임마. 루시아의 품에 안겨있는 라이는 얼마나 좋을까? 아~ 이젠 라이한테마저 부러움을 느껴야 하다니. 내 신세 가 정말 너무 비참하다. 결국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도서관을 뛰쳐 나갔다. 흑~ 모두들 미워~. 이럴 때 보통 향수병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로 와서 제대로 된 일이 아무 것도 없 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기는커녕 사기꾼이 되었고, 루시아한테는 경멸의 시선만 받고 있을 뿐이야. 게다 가 카르는 날 죽이려 하고. 진짜 떠나고 싶다. 아주 멀리멀리. 그냥 원래 세계로 돌아갈까? 요즘들어 정말 심각한 고민을 하는 중이다. 이 세계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는 곳 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야 불필요한 존재~. 불필요한 존재라는 말을 하니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진다. 담배를 피려면 불이 필요하지. “…….” 아아~ 이런 유치한 말장난이나 하고 있다니. 내 지적 수준이 심히 의심스럽다. 하지만 원래 세계로 돌아가 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할 것 같다. “설마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는 것에 대해 생각하시는 겁니까?” “……헉!” 갑작스레 튀어나와 정곡을 찌르는 사일런스 지니. 정말 놀랍다. 어쩜 이렇게 독심술을 쓰듯 사람 마음을 읽 어낼까? 너 그냥 돗자리 깔아라. “…….” 잠깐. 그런데 원래 세계라니? 사일런스 지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보자 지니는 웃으며 해명했다. “전 아이언스 공작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헉!” 다시 한번 놀라는 나.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런 의미심장한 대사라니.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 다고? 난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개인적으로 지니가 마음에 들긴 하지만 지니가 날 이런식으로 생각하고 있 다면 지니와의 관계를 끊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난 동성애자가 아니니까. “그런데 정말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십니까?” 진지하게 묻는 지니. 그러면 나도 진지하게 대답해줘야 겠지? “지금 생각 중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인가요?” “만약 원래 세계로 돌아가신다면…….” 지니는 한호흡 쉰 다음 말을 이었다. “저도 데려가 주셨으면 합니다.” “……헉!” 오늘 정말 자주 놀란다. 사일런스 지니가 지금 제정신으로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난 지니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다행히 정상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데려가 달라구요?” “예.” “어디로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사시는 세계로.” “지금 제정신이에요?” “전 언제나 제정신입니다.” “…….” 지니의 결심은 그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강해보였다. 적어도 단순히 기분에 의해 그런 말을 한 것으로는 보이 지 않았다. “아니,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가면 아이리스는 어쩌라고?” 지니는 아이리스를 지탱하는 축이나 다름 없었다. 지니가 사라지면 아이리스가 망하지……는 않겠지만 그래 도 많이 힘들 것이 틀림 없다. 특히나 지금은 전쟁 중. 똑똑한 한명의 참모는 몇 만의 대군을 능가한다. 지니 가 없어지면 가뜩이나 어려운 아이리스로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괜찮습니다. 아이리스에는 두 마리 드래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아이리스에는 두 마리 드래곤이 있고, 오락실에는 두 마리 용이 있다. 일인용과 이인용. “…….” 80년대 개그 한번 해봤다. 심심해서. “이미 자바스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저희 누님께서는 지금 인디님을 앞세워 정전 협정을 하는 중입 니다. 아마도 잃어버렸던 땅을 비롯하여 전비와 그 동안 자행되었던 만행에 대한 피해 보상까지 다 받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드래곤의 위력을 직접 눈 앞에서 보았으니까요.” 그거야 그렇다. 드래곤이 날아가서 브레스를 쏘아대면 백만 대군이 있다한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 으니까. 내가 알기로 그린 드래곤 카이네이드는 본체가 아닌 정신체로 돌아다닌다. 엘프의 숲에서 만난 ‘그분’과 진명 의 제갈량. 이렇게 둘로 나뉘어서. 드래곤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 크로니스도 정신체라고 한다. 인디나 카르 가 정신체인지 본체인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내 생각엔 아마도 정신체인 것 같다. 그럼 카르가 드래곤으 로 변해서 난리를 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거야 간단하다. 폴리모프 마법을 쓰면 되니까. 9클래스가 어떤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못 하겠는가? 나도 9 클래스라면 드래곤으로 변신할 자신이 있다. “자바스는 그렇다 치고 아토리아와는 전쟁 안 해요?” “지금 아토리아는 북방의 훈족들로 인해 아이리스와 전쟁을 할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군대를 북 쪽 경계선을 지키는데 쏟고 있으니까요. 아마 아이리스가 정전 협정에 나서면 아무리 불리한 조건이라도 승 낙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전쟁이 끝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순간, 나는 기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였다. 아무튼 전쟁은 좋지 못한 일이니 기뻐해주는 것이 옳 은 듯 하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전쟁이 끝난다고 참모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전쟁 때보다 더욱 바빠 질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원래 전후처리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전쟁이 끝나도 사일런스 백작님이 할 일은 많으실 텐데요.”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 누님이라면 제 자리를 충분히 매꿀 수 있을 테니까요.” “으음…….” 난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조국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데도 조국을 내팽개치고 나를 따라오겠다니. 이 인간 정 말 스토커 아니야? 난 남자 스토커는 절대 사절이다. 참고로 여자 스토커는 환영. 그 스토커가 예쁘다면 더 환영. 그 예쁜 스토 커가 루시아라면 대환영. “따라오려는 이유나 한번 들어봅시다.” “제가 아이언스 공작님을 따라가려는 이유는…….” “이유는?” “아이언스 공작님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 어디서 입에 발린 소리를! 지니는 여전히 실실 웃고 있었다. 난 지니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찌보면 참 불공평하다. 지니 는 내 생각을 다 읽고 있는데 난 지니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니. 나도 돗자리 한번 깔아 봤으면 좋겠다. “그럼 전 누님을 돕기 위해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아 공주님과 좋은 시간 보내시길…….” “…….” 좋은 시간은 이미 물 건너 간지 오래다. 아무튼 지니는 떠나갔고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슬그머니 문을 열어보니 열심히 번역을 하 고 있는 크로니스와 라이를 데리고 놀고 있는 루시아가 보였다. 난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 루시아는 나를 슬쩍 보았다.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가 내 가슴을 찌른다. “나가서 놀자, 라이야.” “예, 언니.” 루시아는 라이를 데리고 도서관을 나갔다. 쾅-! 난 굳게 닫힌 문을 보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좌절하였다.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 흑흑, 정말 너무해. 하지만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했다. 지금 오해를 풀지 못한다면 영원히 루시아와 끝날 수도 있으니. 난 황급히 루시아를 쫓아갔다. 라이의 걸음이 느린 탓인지 난 금새 루시아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저기요.” 루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왜 그러시죠?” 사무적인 목소리. 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듯한 태도이다. 그 태도에 난 심하게 상처 받았다. “아, 아니에요.” 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루시아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같이 산책 가실래요?” “…….” 뭐라고?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잘못 듣지 않았다. 설마 내가 루시아 목소리를 잘못들을리 있겠냐? 하지만 루시아는 나를 싫어할텐데 왜 나 한테 산책을 가자고 하는 거지? “맞아요, 오빠! 우리 산책 가요!” 확신을 주는 듯한 라이의 외침. “그, 그럴까?” 난 은근슬쩍 루시아의 옆에 붙었다. 루시아는 나를 본체 만체하며 라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가자, 라이야.” 다정하게 걷는 루시아와 라이. 난 그들의 일행으로 보일 수 있도록 최대한 옆으로 붙었다. 루시아가 나를 용서해줄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리. 우리가 산책 코스로 삼은 곳은 예전에 내가 크로니스와 맞붙었던 공터였다. 상아탑 안에 있는 넓은 공터. 그 러고 보면 이곳은 나름대로 추억의 장소다. 까르린느가 이곳에서 지니의 칼에 맞아 죽었었지. 그 생각만 하면 아직까지도 끔직하다. 그 계집애 때문에 난 하지도 않은 강간죄를 뒤집어 쓰고 형장의 이슬 로 사라질뻔했다. 하지만 사일런스 지니의 도움으로 나의 결백은 밝혀졌고 결국 나를 대신해 까르린느가 이 슬로 사라졌다. 범죄 사실이 들켰으면 솔직하게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것이지 다중인격이라는 어처구니 없 는 변명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다니. 진짜 죽어도 싼 계집애였다.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니 왜이리 기분이 이상해지는 걸까? 난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때 이후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핏자국 이 아직 남아 있을 리 없지. 그래도 이곳에서 누군가가 죽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끔찍한 생각이 든다. 루시 아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라이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니, 라이야?” 루시아가 다정하게 묻자 라이는 계속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여기 예전에 와본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예. 그런데 기억이 잘 안 나요.” “…….” 기억이 잘 안 난다니? 니가 여기서 치마에 오줌까지 쌌는데 정말 기억이 안 나? 그때 크로니스 만나서 나 쁜 엘프다 뭐다 하면서 울었잖아. 라이가 다른 아이와의 다른 점을 굳이 뽑으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혼자서도 잘 논다는 것이다. 보통 애들 은 장난감이 있거나 같이 놀아줄 사람이 있어야 즐겁게 노는 반면 라이는 혼자서도 굉장히 재미있게 잘 논 다. 여기에 라이코스 하나만 있어주면 그 이상 재미있게 놀 수 없을 정도로 잘 놀지. 라이가 혼자 노는 덕분에 나는 루시아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둘만 있게 된 것이 좋긴한데 무슨 얘 기를 꺼내는 것이 좋을까? 루시아는 팔짱을 낀채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태도를 좀 확실히 하는 게 어때요?” “예? 태도라니…….” “그 여자에요, 나에요?” “예? 그 여자라니…….” “그 하프엘프 말이에요!” “아! 라이레얼이요?” “그래요! 그 여자!” 루시아는 라이레얼에 대해 굉장히 불만히 많은 듯 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루시아 앞에서 그런 모습까 지 보였으니. 라이레얼과 루시아.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난 당연히 루시아다. 나한테는 오직 루시아뿐이다. 한때 라이레 얼과 그렇고 그런 사이이긴 했지만 난 예전에 모든 것을 정리했다. 라이레얼은 아직 정리가 안 된 것 같지만. “저야 당연 루시아 공주님이지요.” “정말요?” “물론입니다.” 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하지만 루시아는 못 믿겠다는 눈이었다. 아아~ 대체 어떻게하면 그녀 에 대한 나의 마음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속을 뒤집어 까보일 수도 없고. 난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왜 이래요? 이거 놔요!” 루시아는 나의 손을 뿌리치려 하였지만 난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 에 내 마음을 확실하게 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 아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함께…….” 용기를 내라. 용기를 내. “라이를 기르죠.” “……예?” “말 그대로입니다. 함께 라이를 길러요.” 루시아는 조금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라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닌데 기른다는 표현은 좀…….” “그럼 양육한다고 할까요?” “…….”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제 마음은 진심이에요. 부디 라이의 엄마가 되어 주세요.” “……예!?” 더욱 당황하는 루시아. 하지만 싫지는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때야 말로 더욱더 밀어 붙어야 하는 법. “저 혼자 라이를 기르는 것은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라이가 엄마 없는 결손 가정에서 자란다고 생각해 보세 요. 어쩌면 라이는 자라면서 비행의 길로 빠져들지도 몰라요. 매일 같이 술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오고, 나 쁜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를 뻑뻑 피는…….” “안 돼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는 루시아. 아마도 라이가 술에 취해 담배 피는 모습을 상상했나 보다. 하긴 충격 적이긴 하겠지. “그러니 라이에게는 엄마가 꼭 필요해요. 그리고 그 엄마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루시아 공주님뿐이 에요. 루시아 공주님은 라이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난 청혼의 도구로 라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평소 라이에 대한 루시아의 태도라면 차마 거절하지 못 할 것이다. 루시아가 라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애 딸린 남자는 인기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예외다. 라이 같 은 아이가 딸려있다면 어떤 여자가 나를 싫다고 하겠는가? “저, 저는…….” 루시아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지금 심적으로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음이 분명했다. 때마침 라이 가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빠 지금 뭐하는 거예요?” 지금 라이에게 엄마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 중이란다. 난 라이를 루시아 앞에 내밀며 말했다. “설마 라이가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것을 바라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물론 아니에요!” “그럼 라이의 엄마가 되어 주세요. 정상적인 가정에서 우리 함께 라이를 양육하는 거예요.” 루시아는 라이의 얼굴을 보더니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라이는 나에게 말했다. “엄마라니요? 루시아 언니가 라이의 엄마가 되는 거예요?” “왜? 싫으니?” 내가 묻자 라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좋아요. 라이는 루시아 언니가 너무너무 좋은 걸요.” 방긋 웃으며 좋다고 말하는 라이를 본 순간 루시아의 이성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좋아요!” “예?” “좋아요. 제가 라이의 엄마가 될게요.” “…….” 헉! 그 말은 내 아내가 된다는 얘기? 즉 나의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얘기? 난 너무 좋아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루시아가 나의 청혼을 받아들이다니. 난 자제하지 못하고 루시아를 덥썩 껴안았다. “무, 무슨 짓이에요?” “사랑해요.” “……예?” 난 당황하는 그녀를 무작정 품에 안고 소리쳤다. “우리 함께 라이를 예쁘게 길러요. 라이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엘프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 그런가요?” “정말 훌륭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라이는 이제 정상적인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흑흑.” “그런데 왜 우시는 건가요?” “흑흑, 라이에게 엄마가 생긴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요.” 사실은 루시아가 내 곁에 있어준다는 것이 더 기쁘다. 오늘만큼 기쁜 날이 또 있겠는가? 내가 포옹을 풀자 루시아는 라이를 껴안았다. “라이야, 이 언니가 엄마 되는 게 좋아?” “예. 라이는 루시아 언니가 라이의 엄마가 되는 게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 이 언니도 루시아의 엄마가 되는 게 너무너무 좋단다.” 라이는 방긋방긋 웃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입에 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웅, 그런데…….” “응? 그런데라니?” “그런데 아빠는 누군가요?” “아빠?” “예. 엄마가 있는데 아빠가 없으면 이상하잖아요.” 지금이야 말로 내가 나설 차례군. 난 라이의 앞에 당당하게 나섰다. 그리고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이 오빠가 라이의 아빠란다.” “우와! 정말요?” “응. 정말로 이 오빠가 라이의 아빠야.” “와아!” 기뻐하는 라이. 나와 루시아는 그런 라이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아~ 행복해. 부디 이런 행복이 오래오래 지속 되기를. * * * * * 루시아가 내 마음을 받아들기로 결정한 순간 난 루시아에게 사실을 말해야만 했다. 그 동안 숨겨왔던 사실들 을 전부. 내가 숨기고 싶어서 숨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사랑이란 믿음이 전제 가 되어야 하는 법. 난 기꺼이 사실을 루시아에게 밝히겠노라. “사실 전 외계인이에요.” “……예?” 루시아는 눈을 휘둥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놀란 것은 옆에서 듣고 있던 라이도 마찬가지였다. “오빠 외계인이었어요?” “그렇단다, 라이야. 그 동안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난 내가 이 세계로 건너오게 된 일. 이그리드에게 마법을 물려 받은 일. 그리고 루시아를 만나기 전까지의 과 정과 어째서 크로니스와 숙명적으로 맞부딛쳐야 했는지를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내 얘기는 3시간 가까이 계속 되었지만 루시아와 라이는 침 삼키는 소리도 내지 않은채 내 얘기에 열중하였 다. 얘기를 전부 마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 동안 누군가에게 내 신세 한탄을 좀 해보 고 싶었다. 이번 기회에라도 하게 되니 정말 다행이다. 고해 성사를 한 기분이 이러할까? 난 고개를 숙인채 조심스럽게 루시아와 라이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 라이 “오빠 외계인이었어요? 흥! 실망이에요. 라이는 외계인이 너무너무 싫어요. 라이는 이제 오빠 안 볼래요.” - 루시아 “외계인이란 얘기는 한적이 없잖아요. 저도 실망이에요. 앞으로 마주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가자, 라이야. ” 이러는 건 아니겠지? 이러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난 초조한 마음으로 아무나 좋으니 빨리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라이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가 싶더니 라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그 눈물은 이내 폭포수로 변했다. “우에에엥~.” 대체 라이가 왜 우는 거지? 무엇 때문에? 설마 나한테 실망해서? 루시아는 깜짝 놀라 라이를 달래주었다. “왜 우는 거야, 라이야?” “흑흑, 오빠가 너무 불쌍해요. 그런 고생을 했다니…… 흑흑, 라이는 그런 것도 모르고 매일 오빠한테 투정 만 부리고. 우에에엥~ 미안해요, 오빠.” 다행이다. 실망해서 우는 게 아니었구나. 난 라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라이는 내 품에 안겼다. “우에에엥~ 앞으로 라이 잘 할게요. 이제부터 라이 오빠한테 정말 잘 할게요.” “그래, 그래. 라이 마음 오빠가 다 아니까 이제 그만 울어.” 이 오빠를 생각해서 그렇게 울어주다니. 잘 해야하는 것은 라이가 아니야. 이제부터 오빠가 라이한테 더 욱 잘 해줄게. 사랑해, 라이야. 역시 진심은 통한다는 건가? 다행스럽게도 라이에게 나의 진심이 통했다. 하지만 루시아에게 통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난 나의 진심이 루 시아에게도 통했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어째서 그런 사실을 이때까지 숨기고 있었던 거죠?” 이럴 때면 늘하는 대답이 있다. “물어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 상대가 물어보지 않았기에 난 대답을 하지 않은 것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너 외계인이지? ’ 라고 물었다면 난 당당하게 ‘응. 나 외계인이야.’ 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물어보 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말 전부 사실인가요?” “예.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짜 사실입니다.” “솔직히 믿기가 좀 힘들군요.”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믿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저 말을 그대로 해줬다면 난 ‘너 지 금 나랑 장난하냐?’ 라고 말하며 한 대 패줬을 것이다. 그 정도로 내가 한 얘기는 신빙성이 없는 얘기였다. 그 걸 그대로 믿은 라이가 정말 신기하다. 라이의 아이큐는 대체 몇일까? “하지만 믿겠어요.” “…….” 헉! 믿겠다니. 그 말을 믿어주겠다니. 나에 대한 루시아의 믿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생각인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인가요?” “…….” 루시아의 질문에 난 침묵해야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라……. 사실 아니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어 찌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특히나 요즘은 향수병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루시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좋아요. 그 문제는 다음에 함께 얘기하도록 해요.” “예.” 정말 다행이다. 그나저나 나도 이제 내 거취를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이 곳에 계속 남아있을지, 아니면 원 래 세계로 돌아갈지.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남는다고 해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은 끝 난 거나 다름 없고 난 사기꾼으로 몰렸는데. * * * * * * 비록 나와 크로니스 단 둘뿐이긴 했지만 9클래스 마법서 번역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데 이걸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번역했다고 해서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9클래스 마법의 개수가 몇 개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엄청난 분량인 것은 그만큼 마법 수식이 어렵 다는 얘기다. 이제 겨우 구구단 하는 아이에게 미적분을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듯 7, 8클래스 마법사들이 9 클래스 마법 수식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는 엄청난 천재가 나타 나 내가 번역한 마법서를 보고 9클래스의 경지에 오르게 될지.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훌륭한 일이었다. 다음 학기부터 출시되는 마법 역사 교과서에 는 내 이름이 들어간다고 한다. 아~ 정말 기쁘다. 내가 일을 하는 사이 루시아는 라이를 데리고 놀았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뭘 해야할지 정말 걱정이다. 아 직 이 세계에 내가 할 일이 남아있다면 좋을 텐데. 일은 계속 진척 되어 가고 있었다. 상아탑에서는 나에게 굉장히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하긴 돈도 안 받 고 이 힘든 일을 공짜로 해주는데. 상아탑에서는 어떻게든 나에게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하지만 난 그것을 모 조리 거절했다. 우리 라이를 위한 일인데 내 어찌 보수를 받을 수 있으리. 누누이 말 하지만 난 우리 라이 를 위해서라면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 줄 수 있다. 물론 진짜로 따 달라고 한다면 화를 내겠지만. 나는 잠시 머리라도 식힐겸 식당으로 향했다. 배가 고프니 일도 잘 안 풀린다. 일단 배 좀 채운 뒤에 다 시 일 해야지.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식당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난 식판을 들고 식당 아주머니께 갔다. “배 많이 고프니까 꽉꽉 눌러서 담아 주세요.” 식당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슬쩍 보더니 정말로 꽉꽉 눌러 담아 주었다. 하지만 메인 반찬이라 할 수 있는 돼 지고기 볶음은 쥐꼬리만큼만 담아 주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분명하다. 난 신경쓰지 않고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며 루시아와 라이가 들어왔다. “뛰어노니까 배 고프지, 라이야?” “예. 라이 배 많이 고파요.” 라이가 식판을 들고 다가가자 아주머니는 함박 웃음을 짓더니 고기를 잔뜩 퍼서 주었다. 난 내 식판에 담 긴 고기라고 하기엔 너무 작아 차마 고기라고 부르기가 민망한 고기와 라이의 식판에 가득 담긴 고기라고 하 기엔 너무 커서 차마 고기라고 부르기가 미안한 고기를 비교해 보았다. 저 식당 아줌마 정말 너무하는 군. 라이만 예뻐하는 게 어디 있어? “어! 오빠다!” 라이는 쪼르르 달려와 내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난 라이의 식판 위에 수북하게 쌓인 고기를 보며 그것을 빼 앗아 먹는 것에 열중하였다. 루시아는 라이의 옆자리에 앉아 우리 셋은 단란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나요?” “한 100권 정도 남았어요. 크로니스의 번역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네요. 조만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끝나고 나면 뭘 할 건가요?” “글쎄요…….”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건가요?” “그건…….” 루시아가 왜 자꾸 그런 걸 묻는 거지? 설마 그 세계로 돌아갈지 아니면 이 세계에 남을지 양단 간의 결정 을 내리라는 건가? 아아~ 정말 잔인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난 이곳도 마음에 들지만 원래 세계를 포기할 수는 없다. 결국 이 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상황. “만약 원래 세계로 돌아가신다면…….” 돌가신다면? 우리 사이는 끝이라고 말하려는 건가?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 이어진 루시아의 말에 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같이 가고 싶다니? 그때였다. 고기를 열심히 씹어 먹던 라이가 입을 연 것은. “라이도 같이 가고 싶어요!” “…….” 뭐? 라이까지? 루시아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까 얘기를 해봤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나중에 같이 한번 가 봤으면 좋겠어요.” “…….” 이 감동. 대체 뭐라 설명해야 좋은 걸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나와 같이 가 주겠다니. “흑흑.” 난 너무 감동한 나머지 숟가락을 입에 물고 울음을 터트렸다. “앗! 오빠 왜 울어요?” “흑흑, 너무 감동 받아서.” 그래. 번역 일이 끝내는 대로 함께 떠나자. 인구 천만명 이상의 대도시인 대한민국 서울로. 식사를 끝마친 나는 다시금 번역 일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내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사실 하나가 있었으 니 그것은 바로 시차에 따른 문제이다. 나도 방금 전에야 기억이 난 건데 그쪽 세계와 이쪽 세계는 시간의 차이가 엄청나게 난다. 내가 이그리드에 게 들은 바로는 이쪽 세계의 1년이 그쪽 세계의 6시간에 불과하다. 내가 이곳에서 대략 1년을 살았는데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6시간 밖에는 지나있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까 지는 정말 좋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내가 그쪽 세계로 돌아가면서 시작 된다. 그쪽 세계에서 하루를 산다 고 가정을 하면 이쪽 세계는 4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다. 그쪽 세계에서 한달을 살면 이쪽 세계는 120년이 흐 른다. 간단히 말해 한번 그쪽 세계로 가면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루시아와 라이는 그쪽 세계 로 가는 것을 무슨 소풍 떠나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데 만약 다시는 이쪽 세계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도 나와 함께 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아보이시는 군요.” 내가 계속 한숨만 내쉬고 있는 것이 안 되어 보였는지 크로니스가 말을 걸어왔다. 크로니스라면 왠지 믿음 이 간다. 그래서 난 내가 가진 고민을 크로니스에게 털어 놓기로 결심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긴 한데 그렇게 되면 다시는 이 세계로 돌아오지 못 하잖아요. 돌아올 수 있다고 해 도 이 세계는 많은 시간이 지나 있을 테고.” “두 세계 모두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겁니까?” “예.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내가 너무 욕심이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참고로 일부 가방끈이 짧 은 독자들을 위해 설명을 덧 붙이자면 기회비용이란 어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포기해야만 하 는 다른 선택을 뜻한다. 내가 이쪽 세계를 선택한다면 저쪽 세계를 포기해야 하고, 저쪽 세계를 선택한다면 이쪽 세계를 포기해야 한 다. 솔직히 지금 내 심정 같아서는 루시아와 라이가 나를 따라와 준다면 미련 없이 저쪽 세계를 택하고 싶다. 물 론 루시아와 라이가 나를 믿고 그냥 따라와 줄리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을 설득 해야만 한다. 하지 만 그 둘을 설득해서 그 세계로 간다고 해도 그들이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내가 그 세계로 가고 싶은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편 안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루시아와 라이가 날 따라온다면 그 둘은 나 때문에 고향을 버리는 셈이다. 가 장 큰 문제는 나중에 그들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더라도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달만 살아도 1세기 이 상이 지나는데…….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내가 루시아와 라이를 원래 세계로 데리고 가는 것은 이기심이 아닐 수 없다. 결 국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내가 이 세계에 남는 것이다.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겠지. 운명에 순응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 뭐? 방법이 있어? 진짜? 난 귀가 솔깃해서 물었다. “무슨 방법인가요?” “시차를 조절하는 겁니다.” “……예?” 시차를 조절한다니? 세계 간의 시간 차이를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 가능합니다.” “…….” 헉! 그게 가능하다니.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그리고 원하신다면……?” “원한다면?” “두 세계를 마법진으로 연결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난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법진으로 두 세계를 연결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필 요할 때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난 크로니스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크로니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요.” 아아~ 모든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 드디어 나에게도 행운이라는 것이 다가오는 건가? 너무 기뻐서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그때 마침 루시아와 라이가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통통한 라이의 얼굴 이 빨갛게 상기 된 것을 보니 너무 열심히 뛰어 놀았나 보다. 어릴 때는 열심히 뛰어 노는 것도 중요하지. 난 공부만 강요하는 그런 아빠가 되지는 않을 테야. 우리 라이의 창의성 개발을 위해서 마음껏 뛰어 놀게 해 줘야지. “오다가 소식을 하나 들었는데.” “뭔가요?” “헤리오의 국왕이 드디어 결혼을 한다고 하던데요.” “……예?” 헤리오의 국왕이면 반데라스가 아니던가? 하녀를 매수해서 여자 속옷이나 가지고 다니는 스토커. 그 놈이 결 혼할 상대라면 뻔하다. 세레나. 초록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인. 반데라스따위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을 법한 여인. 그런데 그 둘이 결혼을 하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세레나가 반데라스따위와……. 아~ 갑자기 배가 아파온다. 원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인생의 진리가 아니던가? 나도 아직 결혼 을 못 했는데 남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배가 아프다 못해 아주 복장이 뒤집히려고 한다. 다시 가서 엎어 놓을까? 아니야. 그러면 반데라스가 너무 불쌍해. 내가 만약 그러면 그 놈은 진짜 자살할 지도 몰라. 그냥 기쁜 마음 으로 축하해 주도록 하자. “…….” 잠깐. 그런데 결혼이란 중대사에는 원래 하객들이 많이 초청 되야 하는 거 아니야? 설마 국왕이라는 놈이 하 객 없이 결혼을 하지는 않을 테고…… 그런데 어째서 나한테는 청첩장 한 장 안 온거지? 설마 실수로 빼먹 은 건가? 안 그러면 나 같은 중요 인사에게 청첩장을 안 보낼 이유가 없을 텐데. 설마……. 그래. 바로 그 설마다. 반데라스가 농간을 부려서 나에게 청첩장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왜 안 보냈을까? 나쁜 자식! 감히 나에게 청첩장을 안 보내? 니가 이런식으로 나왔다 이거지? 나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내가 만 약 둘의 결혼식에 가지 않는다면 반데라스는 좋아서 날 뛸 것이다. 그 꼴은 죽어도 못 본다. 후후, 니가 청첩장을 안 보내도 나는 간다. 그런 중요한 행사에 내가 어찌 빠질 수 있겠냐? “자, 우리 모두 떠나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러자 라이가 물었다. “예? 어디로 떠나요, 오빠?” 라이는 굉장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하긴 휴가 한번 못 가봤으니 어디든 가보고 싶겠지. 라이는 벌떡 일어서 며 말했다. “라이는 바다가 좋아요! 오빠 우리 바다가요!” “…….” 너 지금 내가 휴가 떠나는 줄 아니? 휴가철 지난지가 언젠데 휴가를 떠나? 꿈 깨렴. “헤리오의 왕궁으로 간다.” “그곳에는 왜 가려는 거죠?” 루시아의 물음에 난 이렇게 대답하였다. “푸하하, 그야 당연 헤리오 국왕의 결혼을 축복해주기 위함이지요.” “와아! 좋아요, 오빠!” 라이는 박수를 치며 좋아하였다. 바다가 아니어서 실망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좋아하다니. 무엇 때문에 이렇 게까지 좋아하는 걸까? “라이 갈비탕 먹고 싶어요!” “…….” 넌 자나깨나 먹는 거 생각이니? 하긴 거기 갈비탕이 좀 맛있긴 했지. “결혼식은 언제인가요?” “내일 오후라고 하던데요.” 내일 오후라. 그럼 얼마 안 남았군. 난 짙은 웃음을 지었다.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한방에 풀게 생겼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기다려라, 반데라스. 내가 간다. -------------------------------- 현재 에필로그 수정 중입니다. 결혼식이 초읽기에 들어간 지금 반데라스는 좋아서 죽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싱글벙글거리고 있었 다. 세레나는 반데라스의 청혼을 흔쾌히 받아 들였고 반데라스는 이번에야말로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 였다. 그의 결혼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을 뽑아보자면 누가 있을까? 그야 두 말할 것도 없이 히로 일 것이다. 히로는 반데라스에게 있어선 악몽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마도 반데라스가 마음 편 히 잘 수 있는 날은 히로가 이 세계를 떠나는 날일 것이다. “후후, 그놈은 결코 결혼식에 올 수 없어.” 반데라스는 그렇게 자신하였다. 그가 그렇게 자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결혼식 준비를 최대한으로 서둘렀다. 둘째, 히로는 현재 상아탑에 틀어박혀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당연 소식에 느릴 것이다. 셋째, 히로는 현재 공공의 적으로 몰려있다. 쉽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인해 히로는 자신의 결혼식에 결코 참석할 수 없었다. 반데라스는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 고 싶었다. ‘아무튼 이번엔 반드시 그놈을 못 들어오게 해야 돼.’ 혹시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곳곳에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아예 입구에서부터 원천 봉 쇄를 하려는 것이다. 이번에는 결코 방해할 수 없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시간이 되자 하객들이 속속 입장을 시작했다. 왕궁 안으로 들어오는 하객들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젠장, 축의금을 두 번이나 내야 하다니. 한번만 결혼식 더 했다가는 집안 살림 다 거덜나겠다.’ 그렇다. 그들은 이미 한번 축의금을 납부한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또 나야 하다니. 그나마 대충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왕의 결혼식이다보니 있는 살림 없는 살림 다 팔아다가 축의금을 내야 한다. 적어 도 남들 하는만큼은 해야할 것 아닌가? 진짜 결혼식 한번 파토 났을 때 눈물이 솟구쳤다. 한번 낸 축의금을 돌 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음번에 안 낼 수도 없고. 생각하다 보니 괜히 열받는다. 결혼식이 아무리 인륜지대사라지만 대체 하객들이 왜 축의금을 내야 하는 가? 축하해야 하니까? 마음으로 축하해주면 안 되나? 꼭 돈으로 표시를 해야 하나? 아아~ 어쩌면 이것도 우리 사회의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한달 월급 받으면 그중 대부분이 경조사비 로 나간다. 특히 결혼식과 장례식이 많이 껴있는 달은 진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객들이 그렇게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가운데 유난히 표정이 안 좋은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헤이체르 공작이었다. 첫 번째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았던 그는 주례사 3편에 외전 13편이라는 경 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그 때문에 결혼식은 실패하였다. 이번 결혼식에서 반데라스는 전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당연 헤이체르 공작에게 주례 를 맡기지 않았다. 저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이번엔 초고로속으로 결혼식을 진행하기 위해 이 미 다른 사람을 섭외해 놓았다. 그래서 헤이체르 공작은 불만이 가득했다. 오늘을 위해 또 다른 주례사를 원고지 5천매로 써왔는데. 참으 로 안타깝도다. 하객들이 속속 입장하자 엄청난 크기의 식장은 금새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이제 올 사람은 거의 다 온 것 같 다. 반데라스는 손수 나서서 말했다. “이제 그만 문 닫고 시작하지.” 그러자 이번 결혼식을 총관리하는 시종장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예?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반데라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반데라스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 를 수가 없었다. ‘그놈이 오기 전에 다 끝내야 돼.’ 그렇게 생각한 반데라스는 다시 시종장을 재촉하였다. “그냥 빨리하자.” 참고로 이 시종장은 시간 잘 지키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거의 병적으로 시간을 잘 지킨다. 시간을 지키 지 않으면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기에 반데라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결혼식은 정각에 시작 됩니다.” 이쯤 되면 반데라스도 열 받을 수 밖에 없다. “시끄러! 하라면 해!” 하지만 시종장도 만만치 않았다. “절대 안 됩니다.” 권력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다니. 이 시종장 엑스트라 치고는 무지하게 훌륭한 사람이었다. 모두 들 본받을지어다. 하지만 어디 지조 있는 사람치고 오래 가는 사람 봤냐? 사람은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쓸 데 없는 일에 고지식하게 굴다가는 짤리기 십상이다. 반데라스는 결국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넌 해고야!” “…….” 해고라니. 해고 되면 집에 있는 아내와 애들은 어떻게 먹여 살리라고? 시종장은 재빨리 반데라스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며 말했다. “지금 당장 시작할게요. 그러니 짜르지만은 말아 주세요. 제가 짤리면 우리 애들 다 굶어 죽어요, 흑흑.” “그럼 어서 문부터 잠궈.” “예. 그럴 게요.” 이게 현실이다. 지조는 무슨 지조? 직장에서 오래버티려면 지조 같은 건 일찌감치 버려야지. 시종장은 문을 잠그라고 시종들에게 명령하였다. 시종들이 문을 잠그려는 그 순간, 한줄시 싸늘한 바람이 문 틈으로 몰아쳤다. 휘이이잉~! 반데라스는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그의 눈에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으니……. “아이언스 히로!” 순간 정신이 멍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반데라스는 재빨리 지휘를 하 기 시작했다. “어서 문 잠궈. 비상 사태다! 근위대 출동!” 순식간에 출입문이 잠기고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가 문 앞을 빼곡히 막았다. * * * * 솔직히 굉장히 당황스럽다. 나를 환영하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로까지일 줄이야. 난 굳에 닫힌 출입문을 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건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겠다는 뜻 아닌가? 먼 곳에 서 힘들게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박정하게 대하다니. 정말 너무하는 군. 쾅쾅-! 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야, 문 열어! 나 축하해 주러 왔어.” 그러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기는 소리 하지마! 내가 한번 속지 두 번 속냐?” 반데라스 녀석 굉장히 나를 적대시하는군. 그 심정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진짜 하늘의 맹세 코 결혼식을 훼방 놓으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반데라스와 세레나가 결혼하는 것을 훼방 놔봐야 무슨 이득 이 있겠는가? 물론 반데라스가 잘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결혼식을 파토낼 생각은 없다. 그럼 하객 들이 너무 불쌍하잖아. 축의금을 세 번이나 내야하는 셈인데. “야, 진짜야.” “웃기지 마!”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니? 너 속고만 살았니?” “닥쳐!” “…….” 닥치라니? 이 놈이 이젠 쌍소리까지. “빨랑 꺼져!” “…….” 아무리 상대가 국왕이라 해도 이런 모욕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고 해서 사람을 무 시하는 태도라니. 루시아와 라이의 앞에서 이런 모욕을 줬다 이거지? “네 놈! 용서할 수 없다!” 난 힘을 주어 주먹을 휘둘렀다. 제법 두꺼운 문이었지만 나의 주먹을 견딜 수는 없는 법이다. 문은 산산조각 이 났고 흩어지는 잔재 사이로 당황한 반데라스의 얼굴이 보였다. 반데라스는 근위병들에게 소리쳤다. “막아라! 저 녀석을 막아! 여기 못 들어오게 해!” 그런 그의 모습은 최후의 발악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난 달려드는 근위병들을 보며 미동도 하 지 않았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전투력을 지닌 나에게 덤벼들다니. 그저 우스워 보일 뿐이다. “빅장 40단 콤보!” 구차하게 경과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반데라스는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근위병들을 보 며 심하게 당황하였다. “어, 어떻게……?” “감히 근위병 따위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크하하하!” 앗! 어째 웃음이 악역스럽다. 난 웃음을 멈추고 반데라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반데라스에게 일행을 소개시켜 주 었다. “여기는 라이. 잘 알지? 그리고 여기는 루시아 공주님. 알지? 아이리스의 제 1왕녀.” 반데라스는 울상이었다. “대,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설마 또 내 결혼을 방해하려고? 안 돼!” 반데라스는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애원을 하기 시 작했다. “흑흑, 제발 부탁이야. 난 세레나양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러니까 그냥 가줘.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 비참하군. 하긴 사랑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난 맹세코 둘의 결혼을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냥 청첩장도 보내지 않은 것이 괘씸하여 잠깐 놀려주려 고 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반데라스의 처절한 모습을 보니 그런 마음도 사라진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마치 영화CF에나 나올 법한 대사가 내 심금을 울린다. 나도 루시아와 그냥 사랑하고 싶다. 하지만 주위에서 는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라이레얼이다) 그렇기에 난 지금 반데라스와 동질감 을 느끼고 있었다. 난 손수 반데라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래. 너희 그냥 사랑하게 해주마. 둘이 실컷 사랑해. 너의 둘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니가 있잖아.” “아니야. 난 너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동했어. 그러니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 게. 세레나와 행복하게 살아.” 내가 진심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반데라스는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 한구석에는 아 직도 의심이 남아 있었다. ‘이 자식을 믿어도 되는 걸까?’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아무래도 확신을 주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난 루시아를 앞으로 내세우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아이리스의 공주님이셔. 그리고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지.” 순간 반데라스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그 표정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하하, 그랬구나.” 저 녀석이 왜 저리 좋아하는 걸까? 그야 뻔하다. 저 녀석은 루시아와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그러면 더 이상 세레나에게 접 근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난 결혼식장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도 되지?” “무, 물론.” “급히 오느라 축의금은 깜빡 했다. 돈 많은 니가 좀 양해해라.” “괘, 괜찮아.” 난 루시아와 함께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라이가 내 옷을 잡아 당겼다. “응? 왜 그러니?” “오빠, 아까 루시아 언니가 오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그거 정말이에요?” “응. 정말이야. 왜 그러는 거야? 뭔가 잘못 됐니” “옛날에 오빠는 라이가 가장 소중했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왜 루시아 언니가 가장 소중하다 그래 요?” “…….” 라이의 말에 난 할말을 잃었다. 예리하게 정곡을 찌르다니. 라이의 볼은 살짝 부어 있었다. 뭔가 마음 에 안 든다는 표정. 라이의 눈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라이가 소중해요, 루시아 언니가 소중해요?’ 설마 질투를 하고 있는 건가? 진짜 난감한 상황이다. 게다가 문제는 루시아 역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라이 가 더 소중하다고 말한다면 루시아가 삐질 테고, 루시아가 더 좋다고 하면 라이가 삐질 테고. 내 살아 생전 이런 위기가 닥칠 줄이야.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까 말했듯이 루시아 공주님는 오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다.” 그러자 라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라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표정을하며 물었다. “그, 그럼 라이는요?” 난 라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라이는 오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엘프야.” 그렇다. 루시아는 가장 소중한 사람. 그리고 라이는 가장 소중한 엘프. 둘 중 누가 더 소중하냐고 묻는다 면 난 그 대답을 할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말장난으로 지금 상황을 넘어가려는 것이다. 다행히 라이는 더 이상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고 웃음을 지었다. “헤헤~.” 상황을 좋게 해결한 나는 라이를 안고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하객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헉! 아이언스 공작이다!” 그 외침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나와 라이, 루시아에게 쏠렸다. 난 루시아의 손을 꼭 붙잡고 빈자리 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빈자리는 없었다. 하는 수 없어진 나는 앞쪽으로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 는 젊은 귀족에게 말했다. “야, 비켜.” 당연 그 귀족은 ‘니가 뭔데 나보고 비키라 마라냐’ 라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난 인상을 팍 쓰며 말했 다. “너 내가 누군지 알지?” 그 귀족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누구랑 싸우려고 했는지 알지?” “…….” 그놈의 표정은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자리를 비켜주었다. 옆자리에 있는 놈은 제법 눈치 가 있는지 역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순식간에 자리 두 개가 생기자 난 루시아를 먼저 앉게 한 후 나도 앉았 다. 라이는 당연 내 무릎 위에 앉혔다.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상하게 식이 시작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거렸다. 그때 누군 가가 앞에 나서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주례를 맡기로한 분께서 오다가 사고가 났다고 하는 군요. 그래서 그분을 대신하여 다년간의 주례 경험으 로 많은 커플을 맺어주신 헤이체르 공작님께서 주례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순간 하객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난 의아했지만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신랑, 신 부 입장이 끝나고 주례사가 시작되었는데……. “……그리하여 두 남녀가 맺어지게 되었으니…… 그리고 진짜 맺어지니…… 그래서 지난 과거일랑 다 잊 고 하나로 맺어지니…… 그러나 하찮은 싸움으로 맺어진 인연이 풀릴 수도 있으닌…… 하지만 사랑의 힘이 란 풀린 인연이 다시 맺어지니…….” 벌써 2시간 째다. 교장의 능력이 아침 조회 때의 연설을 얼마나 짧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 되듯이, 주례자 의 능력은 주례사가 얼마나 짧으냐에 따라 결정 되는 법이다. 그런데 이런 길고 지루한 주례사라니. 진 짜 속 터진다. 하객들 중 반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그대로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었다. 참고로 나 와 루시아는 하품을 하고 있었고, 라이는 내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깨에 무게가 실려 다. 루시아가 나에게 머리를 기댄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숨을 내뱉고 있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 고 자는 군. 주례사는 1시간 정도가 더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 순간 하객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자 던 하객들은 그 소리에 놀라 깨어나더니 주위에서 박수를 치는 거을 보고 따라서 박수를 쳤다. 나 역시 박수 를 쳤다. 주례사가 끝난 것이 이렇게 기쁠 줄이야. 그제야 힘겹게 서 있는 반데라스와 세레나는 서로 반지를 교환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등 나머지 순서 를 진행하였고 결혼식은 무사히 막을 내렸다. 결국 또 한 명의 미소녀가 이렇게 사라지는 군. 난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반데라스는 분명 세레나에 게 잘 해줄 테고 세레나는 진심으로 행복할 것이다. 난 방금 결혼식을 마친 두 남녀에게 다가갔다. 세레나는 날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죠?” “아까부터.” “청첩장도 안 보냈는데…….” 말끝을 흐리던 세레나의 눈길이 루시아에게 머물렀다. “이 분은 누구죠?” 난 루시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세레나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아무튼 결혼 축하해.”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정스럽게 반데라스와 팔짱을 꼈다. 반데라스의 표정은…… 으음, 차 마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행복하길 바랄게.” “물론이에요.” 다른 하객들이 축하 인사를 계속 건네는 바람에 난 그 자리를 빠져 나와야했다. 결혼이라……. 그러고 보면 결혼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내 나이가 결혼할 나이도 아니 니. 난 좀 더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하지만 일찍 결혼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상대가 루시아라 면. 난 루시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왜 그래요?” 루시아가 묻자 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냥…….” 그 순간 루시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난 내가 실수를 했나 싶어 급히 손을 뺐다. 루시아는 정색을 하며 말 했다. “라이 어디 갔지요?” “…….” 헉! 그러고 보니 라이가 없다. 설마 우리가 분위기 잡는 것을 보고 자리를 비켜 줬을 리는 없을 테고. 그 순간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루시아를 붙잡았 다. 그리고 사이 좋게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그곳에서 라이는 갈비탕의 갈비를 맛있 게 뜯고 있었다. 축의금 한푼 안 내고 저렇게 당당하게 갈비탕을 먹다니. 정말 존경스럽다. * * * * 다시 상아탑으로 돌아온 나는 열심히 일에 매달렸고 결국 마법서 번역을 전부 끝낼 수 있었다. 물론 크로니 스의 도움이 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쯤 아이리스와 자바스는 정전 협정을 맺고 빼앗겼던 영토를 전부 되찾았다. 사일런스 남매는 갖은 외교 적 수단을 발휘하여 엄청난 액수의 보상금을 뜯어냈다. 자바스가 그거 다 갚으려면 향후 10년 간은 허리띠 졸 라 매고 죽어라 적금 부어야 할 것이다. 이제 번역도 끝났겠다, 전쟁도 끝났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남았군. 루시아와 라이는 날 따라오는 것 으로 합의를 봤고, 마법은 크로니스가 써주면 될 테고, 시차 문제도 크로니스가 해결해준다고 했고. 크로니스의 말에 따르면 시간의 개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각 세계마 다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고. 9클래스의 마력으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똑같 이 흘러가게 한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크로니스가 살아있는 동안만 가능할 것이다. 크로니스로서도 엄청 난 마력을 퍼부어야 하니. 이래저래 크로니스의 신세만 지는 군. 아무튼 이제 모든 일이 좋게 해결 되었으니 돌아가는 것만 남았다. 난 천천히 귀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라 이도 다른 세계로 간다며 기뻐하며 짐을 챙겼다. “으음, 이건 라이가 좋아하는 거니까. 그리고 이것도.” 텐트는 왜 챙기는 거니? 누가 보면 피서 가는 줄 알겠다. 아아~ 서울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세계는 얼마나 많이 변 했을까? “…….” 생각해보니 6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겠군. 어찌되었든 빨리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짐 다 챙겼어요, 오빠.” 라이는 팽귄 모양으로 생긴 작은 가방을 등에 매고 두 팔로는 헬로우 귀티 인형을 꼭 끌어 안고 있었다. 오오! 간만의 등장이다, 헬로우 귀티. “그래. 가자, 라이야.” 루시아 역시 준비를 끝마쳤고 우리는 크로니스가 만든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마법진 주위에 는 수 많은 마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오! 3차원 형태의 이동 마법진이라니.’ ‘저런 수식들이라니!’ ‘저것이 차원 이동 마법진이란 말인가?’ 그들은 하나 같이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드래곤들 조차 해독하지 못했을만큼 엄청 난 마법진이 아니던가? 난 루시아와 라이를 데리고 마법진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와 라이를 덥썩 껴 안았다. 칼리였다. 칼리는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말했다. “그곳에 가서도 잘 지내야 해요. 자기 전에 이빨 닦는 거 잊지 마시고.” “응응. 걱정마, 칼리. 라이 잘 지낼게. 자기 전에 이빨도 꼭 닦고. 그리고 심심하면 놀러올 게.” “흑흑, 라이미안님…….” 결국 칼리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오기 전까지 칼리는 라이의 보호자나 다름 없었다. 그 렇기에 라이가 떠나는 것을 이렇게 슬퍼하는 것이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간다. 왠지 라이를 빼앗아 가는 것 같아 미안하군.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라이와 함께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에 한 남자가 마법진 위로 올라왔다. 사 일런스 지니였다. 난 태연하게 마법진 위에 서 있는 지니에게 물었다. “댁이 여기 왜 올라와요?”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편이고, 끼리끼리 노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니 아이언스 공작님 가시는 곳에 제 가 어찌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뭔 말이냐? 솔직히 라이와 루시아 외에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니라 면 얘기가 좀 틀려진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지만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 것은 오직 사일런스 지니뿐이 다. 게다가 지니에게는 타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비범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부이다. 아부라 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지니는 아부를 잘한다. 웬만한 간신배는 저리가라다. 원래 위대한 사람 옆에는 언제나 그의 인기에 빌붙어 사려는 아부꾼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아부꾼 이 붙어 있으면 그 사람은 웬만큼 잘났다는 얘기다. 그래서 난 지니가 내 옆에 붙어 있는 것이 별로 불만은 없 다. 그런데 그 순간 인파 틈에서 한 여자가 뛰쳐 나왔다. 평범하게 생긴 그 여자애의 이름은 뮤리아. “사일런스 백작님!” 뮤리아는 지니에게 다가와 울며 말했다. “흑흑, 이대로 가시는 건가요?” 지니는 뮤리아를 살짝 안아 주었다. “죄송합니다.” 뮤리아는 지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하염 없이 울기만 했다. 보고 있자니 괜히 짜증 난다. 자기 가 무슨 비극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고 착각하는 군. 흥! 웃기지도 않아! 뮤리아가 조금 불쌍하지만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뭐, 그래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 테니 다행이라 고 할 수도 있겠군. 솔직히 뮤리아가 언제 지니 같은 남자랑 사귀어 보겠는가? 가슴 아픈(?) 이별 장면이 끝나고나자 이제 진짜 떠나는 것만 남았다. 물론 떠난다고 해서 이 세계와 완전 히 단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별이란 언제나 슬프기 마련이다. “…….” 잠깐. 그런데 내가 그 세계로 돌아간다고 하면 어떻게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지? 나는 아직 8클래스다. 즉 9클래스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차원 이동 마법은 9클래스 마법이 다. 지금이야 크로니스가 써준다고 하지만 그 세계에서 이 세계로 돌아올 땐 어떻게? 난 크로니스를 보았다. 그러자 크로니스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같이 갈 테니.” “……예?” 크로니스도 같이 간다고? 크로니스가? 처음에는 루시아와 라이랑만 같이 가려고 했는데 은근슬쩍 지니가 끼어 들었다. 그리고 이젠 크로니스까 지 같이 간다고 한다. 뭐, 어쩔 수 없겠지. 그런데 크로니스는 어째서 그 세계로 가려는 걸까? “이 세계에 더 이상 미련이 없으니까요.” “…….” 이그리드가 없기 때문에? 그럼 그쪽 세계로 가려는 이유는 뭐지? 설마 나 때문에? 뭐 이유야 무슨 상관이 있겠나? 크로니스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지.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내가 말하자 크로니스는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저야 말로.” 크로니스는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진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 빛들 은 우리의 몸을 감싸 안았다. 드디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건가? 이곳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평생 동안 겪을 일을 이곳에 있던 1년 동안 전부 겪은 느낌이었다. 억지로 끌려와서 이그리드를 만났고, 여행을 하던 중 세레나를 만났다. 세레나와 헤어진 후 라이레얼을 만났 고 그 후에 루시아와 라이를 만났다. 드래곤의 표적이 되었다는 말에 목숨을 걸고 수련을 하였지만 정작 드래 곤과는 싸우지도 못 했고 사람들에게 욕만 바가지로 얻어 먹었다. 생각해보면 별로 좋은 기억들은 아니다. 하지만 원래 시간이 지나면 안 좋았던 일들도 적당히 예쁘게 포 장 되기 마련이다. 지금은 내가 이 세계를 떠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난 두 세계 중 어느쪽도 버릴 수 없으니까. 나를 믿고 나를 따라주는 사람들. 정말 너무 고맙다. 난 라이와 루시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제 손도 좀 붙잡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난 지니를 노려보며 말했다. “전 남자 손은 붙잡지 않는 주의입니다.” “…….” 그러는 사이 마법진의 빛은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 이제 에필로그만 올리면 정말 끝입니다. 그 외에 귀환 에피소드로... <라이 납치 사건> <히로 나이트 사건 > 등을 써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만 올리게 될지는 의문이군요. 뒷부분을 조금 수정하면서 마음이 괜히 싱숭생숭합니다. 그래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 는 거겠죠. 소설들을 보다보면 허무하게 끝나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아이리스도 그런축에 속하게 될지 모르겠습니 다. 아직 많은 일이 미결인 상태에서 끝을 내는 셈이니까요. 방금 결혼한 세레나와 반데라스는? 일루니아와 인디는? 라이레얼과 카르는? 다른 드래곤들은? 그리고 히로와 루시아, 라이는? 에필로그는 이번주 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좋은 모습으로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히로 일행 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독자분들도 웃으며 책을 덮었으면 좋겠네요. -에필로그-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온지도 어느덧 1년이 넘었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음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언어 문제야 크로니스의 마법으로 간단하게 해결했지만 루시아와 라이는 도시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시간 이 걸렸다. 생활 환경이 바뀐 것은 둘째 치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둘은 언 제 어느 장소에 있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한국은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무슨 자랑이라도 되 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머리색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 배타적이었다. 난 루시아와 라이를 위해 학교도 때려치고 집도 나왔다. 가출한 것은 아니고 독립을 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방 3개 24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라이와 루시아가 한 방을 쓰고, 지니와 크로니스 가 한 방을 쓴다. 그리고 나 혼자 독방을 쓴다. 내가 독립하는데는 크로니스의 도움이 컸다. 사실 평범한 소시 민인 나에게 무슨 돈이 있겠는가? 그래서 크로니스가 도와줬다. 드래곤들은 돈이 남아 도니까. 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이불은 헝클어져 있었고 넓은 침대 위에는 나 혼자만이 있었다. 으음,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온다. 루시아와 같이 쓰게 될 줄 알고 더블 침대로 구입했는데. 흑~ 라이가 루시아를 빼앗아갔어. 참고로 라이는 루시아와 같은 침대에서 잔다. 솔직히 정말 부럽다. 난 언제나 루시아와 같은 침대를 쓸 수 있 을런지. “저와 같은 침대를 쓰시는 건 어떻습니까?” “……헉!” 어느새 나타난 지니는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1년이나 지났지만 지니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저 잘생 긴 얼굴하며 부드러운 미소. 으윽, 느끼해. “소리 좀 내고 다녀!” 내가 소리치자 지니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누가 공작이야?” 난 공작이란 직함을 때려친지 오래다. 얘기를 듣기론 그쪽 세계에선 아직 내가 아이리스의 명예 공작으로 남 아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민주주의 사회인 이곳에서 공작이라고 귀족 대접해주 는 것도 아닌데. “제게 있어서 아이언스 공작님은 언제나 공작님이십니다.” “…….” 말을 말자. 내가 널 데리고 무슨 얘기를 하겠니? 방을 나와 세수를 하고 부엌으로 가자 나의 가족들이 식탁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오늘 아침 당번 은 크로니스였나 보다. 크로니스는 앞치마를 벗어 옆에다 걸어 놓고 자리에 앉았다 냠냠~! 감히 가장인 내가 자리에 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식들을 마구 입에 밀어 넣는 불손한 행위를 하고 있 는 존재가 있다니! 그 존재가 라이임은 두 말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라이는 1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모습 그대 로였다. 키도 자라지 않았고, 통통한 젖살도 빠지지 않았다. 단 한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귀가 보통 인간의 귀 처럼 둥글둥글해졌다는 것이다. 엘프가 나타났다……라고 하면 당장 납치 당해서 이상한 연구소로 끌려가 해부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에 라이가 엘프라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겨야했다. 그래서 길고 뾰족한 엘프의 귀를 보통 인간 귀처럼 바꿔 놓 은 것이다. 으음, 엘프인 라이도 귀엽지만 인간 모습인 라이도 귀엽다. 귀 모양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본연의 귀여움 이 어디 갈리는 없으니. “많이 먹어, 라이야.” 루시아는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루시아는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단발머리가 이젠 어깨까 지 닿을만큼 길어진 것이다. 머리카락이 길어지니 그녀의 청순한 매력이 더욱 빛을 발한다. 사실 루시아가 밖으로 나가면 찝적대는 놈들 한 둘이 아니다. 그 놈들에게서 루시아를 지키느라 난 언제 나 고군분투해야 했다. 가장 짜증나는 것은 루시아가 지니의 애인인 걸로 착각하는 놈들이 많다는 것이다. ‘저런 예쁜 여자랑 사귀는 남자는 분명 엄청나게 잘생겼을 거야.’ ‘그러고 보니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와 같이 살고 있던데.’ ‘빨간머리 남자와 금발머리 남자 중에 어느쪽이 애인일까?’ ‘금발머리와 다정해보이는 것을 보니 그 남자와 애인인 것이 분명 해.’ 난 그 얘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폭파하는 줄 알았다. 루시아는 내 애인이란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외쳐봐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그 심정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누 가 나를 루시아의 애인으로 생각하겠는가? 하인이라면 모를까. 난 크로니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로니스 역시 라이처럼 귀 모양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것 은 전부 그대로였다. 여자처럼 보이는 외모와 큰 키, 허리까지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까지. 그러고 보니 이 집 사람들은 전부 꽃미남 꽃미녀다. 나만 빼고. 자존심 높은 여자들이 봐도 눈 돌아가게 생긴 지니와 크로니스. 찝적거리는 남자들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 운다면 그 중 반수 이상이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할 정도의 미모를 지닌 루시아. 그리고 극강의 귀여움으로 무 장한 라이. 누가 보면 나는 주어 온 사람처럼 보이겠군. 흑~ 사실은 내가 이 집 가장인데.(참고로 이 집은 내 명의로 되 어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은 일요일. 일주일 중 가장 바쁜 날이다. 빨리 먹고 가야겠 군. 조금이라도 더 일찍 나가야 한푼이라도 더 많이 벌 수 있으니. 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쯤 모두들 나갈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난 급히 머리를 감 고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방금 이빨을 닦은 라이는 어느새 입에 사탕 하나를 물고 있었다. 색깔을 보아하니 츄파춥스 레몬맛이었 다. 라이는 맛있다는 듯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사탕을 쪽쪽 빨았다. 난 라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 “그런 거 많이 먹으면 이빨 썩어.” 그러자 옆에 있던 루시아가 한마디 했다. “애 사탕 먹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 귀엽기만 하구만.” “이빨에 안 좋단 말이야.” “사탕 하나 정도는 괜찮아.” 루시아는 내 품에서 라이를 빼앗아 갔다. 에휴~ 루시아는 라이에게 너무 물러서 탈이야. 자꾸 어리광 받아주면 애한테 안 좋은데. 같이 지내다보 니 나와 루시아는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반말을 쓰게 되었다. 루시아가 나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그런 것 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온 우리는 시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길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 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한국인이 아닌데다가 선남선녀들이니. ‘어머, 저 남자 좀 봐.’ ‘저 꼬마애 너무 귀엽다.’ ‘저 여자 죽이는데.’ 으음, 저런 시선들이 참으로 부담스럽다. 하던 일 계속할 것이지 왜 우리를 쳐다보며 수군거리니? 한 대 맞 고 싶니? 우리가 이런 시선을 무릅쓰고 시내에 나온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가게 때문이다. “…….” 그렇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취업도 잘 안 되는 법. 그래서 난 취업을 일찌감치 때려치고 창업의 길로 들어섰 다. 자금은 물론 돈 많은 크로니스가 다 대줬다. 처음 창업을 할때만 해도 무슨 업종을 선택할까 상당히 고민하였다. 고민 끝에 선택한 업종은 바로 인형 판 매점. 인형 판매점을 선택한 데에는 라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우에에엥~ 라이는 인형의 집이 좋단 말이에요!’ 라이가 울면서 애원하자 보다 못한 루시아가 라이의 편을 들어 주었고 나야 당연 루시아 편이니 인형 판매점 으로 낙찰 된 것이다. 막상 창업을 하고보니 업종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팍팍 든다. 하루 매출이 수백만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 대로 가면 재벌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아마 이해가 좀 안 갈 것이다. 어떻게 한 매장에서 하루 매출이 수백만원이나 되는지. 그것도 보석상도 아 닌 인형 판매점에서. 자리가 좋아서? 홍보를 잘 해서? 사업 수완이 좋아서? 전부 아니다. 자리는 그냥 시내 모퉁이에 있는 가게일 뿐이고 홍보는 전단지 한번 돌린적 없다. 내가 이전 에 장사를 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사업 수완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매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우글우글거렸다. 그 이유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 다. 붉은색 머리카락의 미청년 크로니스. 잘생긴 외모와 현란한 언변으로 여자들을 유혹하는 지니. 청순가련한 매력이 돋보이는 루시아. 설명이 필요 없는 귀여움을 지닌 라이. 이 넷이 가게를 본다. 그 외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가게 앞에 도착했다. 상가 건물 1층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인형 판매점 위에 는 유치찬란한 색의 간판이 붙어있었다. <라이의 집> 인형의 집도 아니고 라이의 집이다. 내가 생각해도 가게 이름 하나는 잘 지은 것 같다. 참고로 저 이름 내 가 지었다. 사실 인형이 아무리 예쁘고 귀엽다 한들 우리 라이만 하겠나?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만 해도 20평 정도로 작게 시작했다. 하지만 장사가 너무 잘 되서 지금은 200평이 넘는 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가게가 10배로 뻥 튀기 된 것이다. 아직 셔터도 올라가지 않았는데 가게 앞에는 엄청난 줄이 늘어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기서 명 품 가방 세일이라도 하는 줄 알 것이다.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나이 대는 제각각이었지만 거의가 여자들이었다. 하긴 인형 판매점에 남자가 줄 서 있 을 리는 없지. 내가 줄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셔터를 여는데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어머!” 여고생으로 보이는 여자애들은 지니와 크로니스를 보며 차마 뭐라고 말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러댔다. 그리 고 직장인으로 보이는 여자들은 라이를 보고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라이는 그런 그들에게 결정타를 날렸 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라이에요.” “…….” 순간 좌중이 침묵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꺄아! 너무 귀여워.” “어쩜 좋아?” “얼굴이 동글동글 한 게 귀여워 죽겠어.” “어머, 인형 같아.” 라이는 저 귀여운 외모 때문에 인생 살기 상당히 피곤할 것이다. 역시 사람은 평범한 게 제일이야. 난 셔터를 올리고 가게 문을 열었다. 루시아와 라이 등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자 줄서 있는 사람들 은 우르르 가게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비켜, 이 년아.” “내가 먼저 줄섰어.” “난 어제 새벽부터 기다렸어.” 저렇게 질서가 없어서야 어찌 선진국민이라고 할 수 있겠나? 난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자자, 줄들 서세요. 배운 사람들이 이러면 안 돼죠.” 하지만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자, 잠깐만!”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나를 밟고 그대로 지나갔다. 난 계속 밀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경악했다. “살려줘~.” 얼굴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나는 온 몸이 쑤시는 것을 느끼며 가게 벽에다가 <정숙>이란 두 글자 를 써 붙였다. 여자들이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오늘 시간 있으세요?” “공짜표가 생겼는데.” “바다 보러 가실래요?” “뮤지컬은 어때요?” “저랑 하루만 놀아주면 해달라는 거 다 해드릴게요.” 대체 인형을 사러 온 거냐, 작업을 하러 온 거냐? 지니와 크로니스는 여자들에게 둘러 쌓여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나도 가끔 저런 상황을 꿈꾸긴 하지만 막 상 보니 너무 잔인하다. 역시 난 루시아 하나로 족해. 난 카운터에 있는 루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헉! 그런데……. “뭘 찾으시나요?” “여동생 줄 인형을 하나 사고 싶습니다.” “그럼 천천히 골라 보세요.” “하지만 인형 보다는 아가씨의 마음을 사고 싶군요.” “제 마음은 안 파는데요.” “하하하, 판다고 해도 살 수 없겠지요. 아가씨의 마음은 억만금보다도 비쌀 테니.” “아시면 인형이나 고르세요.”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아니요. 됐어요.” “후후, 궁금하시면서 튕기기는. 사실 전 재벌2세 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돈 좀 있지요.” “그래서요?” “밖에 제 페라리가 있는데 조용한 곳으로 드라이브나 하지요.” “사양하겠어요.” 루시아가 계속 싫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느끼한 남자는 계속해서 작업을 하고 있 었다. 부모 잘 만나서 페라리 끌고 다니는 게 자랑이냐? “…….” 생각해 보니 자랑이군. 아무튼 감히 루시아에게 작업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난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 손을 루시아의 어깨에 둘렀다. 그러자 그놈은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넌 뭐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진짜 넌 뭐냐? 내가 대꾸를 하려는 찰나 라이가 나서서 말했다. “넌 뭐야?” 잘 했어, 라이야. 그놈은 심하게 당황했는지 표정 관리를 못하고 있었다. 라이는 루시아의 품에 안겼다. 귀여운 것. 나와 루시 아는 동시에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애는……?” 그놈의 물음에 나와 루시아는 동시에 대꾸했다. “딸이에요.” “딸이에요.” 이젠 거의 경악으로 치닫고 있는 놈의 표정. 후후, 이걸로 또 한명 퇴치하는데 성공했다. 우리 사이에 딸까 지 있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그, 그럼 애 엄마에요?” 루시아는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예. 뭐가 잘못 됐나요?” “…….” 놈은 충격으로 인해 반쯤 맛이 갔다. 난 그놈을 문밖에다 버리고 왔다. 이제부터 문 앞에다가 ‘남자 출입 금 지’ 라고 써 붙이던지 해야겠다. 인형 사러왔으면 인형만 살 것이지 왜 가게 안주인을 꼬시고 있어? 썪을 것 들! 지니와 크로니스는 여자 손님들에게 매장을 소개시켜 주며 구매를 유도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 가게 매상 은 저 둘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예로 문을 열기 전만 해도 빼곡히 들어차 있던 인형들이 많 이 줄어 있었다. 창고에 가서 인형 꺼내와야겠군. 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남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내 눈에는 남녀로 보 이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여자 둘로 보일 것이다. 그들의 정체는……. “아, 히로님.” 날 발견하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 하는 인디. 그리고 날 발견하자마자 무섭게 노려보는 일루니아 여사님. 저 둘이 어떻게 여기를……? 루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일루니아 여사님께 안겼다. “언니!”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 여기에 지니까지 합세했다. “누님께서 여기 어쩐 일이신가요?” “휴가 받아서 놀러왔어.” “…….” 그렇다면 차원 이동 마법을 쓴 것은 인디겠군. 난 인디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반가워.” “저도 그래요, 히로님.” “일루니아 여사님과의 사이는 어때? 요즘도 뜨거워?” “그, 그게…….” 부끄러워서 차마 말은 못하고 얼굴만 붉히는 인디. 인디는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 덕분 에 난 인디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설마 결혼 반지?” 더욱더 빨개지는 인디의 얼굴. 인디는 수줍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긴 아직까지 결혼 안 했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아~ 부럽다. 나도 결혼하고 싶어. “인디 오빠~.” 어느새 달려온 라이는 인디의 품에 안겼다. 서로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보기 좋다. “아! 저기 다른 분들과 같이 왔는데…….” “응? 둘만 온 거 아니었어?” 인디는 대답 대신 손가락 네 개를 펴보였다. 네 명이 왔단 뜻인가? 그럼 나머지 둘은 누구지? 그것에 대해 내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 둘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사방을 정신 없이 둘러보는 은색 머리카락의 남자와 그 옆에 서 있는 초록색 머리카락의 청초한 여인. 반데라스와 세레나다. 난 그들에게 다가갔다. “니들은 또 여기 왜 왔어?” 반데라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휴가 받았거든.” 요즘 휴가철인가? 일루니아 여사님도 휴가 받고, 반데라스도 휴가 받고. 잠깐. 저 놈은 헤리오의 국왕이잖 아. 누가 국왕한테 휴가를 준 거지? 설마 자기가 자기한테 준 건가? “야, 임마. 휴가를 갈 거면 피서지로 가지 왜 여기로 왔어?” “여, 여기가 재밌을 것 같아서.” “난 재미 없어, 임마! 당장 내 가게에서 나가!” “소, 손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시끄러!” 내가 소리를 치던 말던 반데라스와 세레나는 서로 팔짱을 낀채 매장을 둘러 보았다. 가게 안에 손님들은 갑 작스레 등장한 외국인(혹은 외계인)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 같이 선남선녀들이 니. “이야! 이거 오랜만인데!” 그때 갑자기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오는 두 남자. 깎지 않은 턱수염, 봉두난발한 파란색 머리카락을 지 닌 남자와 양복을 쫙 빼입은 양아스럽게 생긴 남자. 에스카네스와 카이네이드(제갈량)다. 저것들은 또 여기 왜 온 거야!? “심심해서 와 봤다. 왜? 꼽냐?” 여전히 싸가지 없는 제갈량의 말투. 아~ 정말 한대 치고 싶다. 내가 9클래스 마스터하기만 하면 저놈부터 제 거할 생각이다. 그나저나 오늘이 무슨 날인가? 무슨 단체 지구 투어 관광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인간과 드래곤들이 몰려 온 거 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가 본데?” “예. 여기 맞아요, 언니.” “여기 우리 히로가 있는 게 확실해?” “확실해요. 맞으면 키스해 주신다는 약속 어기면 안 돼요.” “응.” 헉! 저 목소리, 저 대화 내용은 설마……? 난 아직도 잊혀지지 않은 그날 밤의 일을 생각하며 절규했다. 그리고 개나리 스텝을 이용하여 번개와도 같 이 움직였다. 문을 잠그려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라이레얼이 한발 빨랐다. “어! 히로다!” 라이레얼은 채 못 잠근 문을 밀치고 들어오더니 나를 덥썩 껴안았다. “라, 라이레얼…… 어, 어떻게 여길……?” 내 온 몸에 라이레얼의 따뜻한 촉감이 느껴지고 내 뺨에 촉촉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설마 이것은 눈물? “흑~ 내가 히로를 찾아 얼마나 헤맸는지 알아? 어떻게 히로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날 버리고 이런 곳으 로 오다니? 히로 미워~.” “라, 라이레얼 저는…….” 내가 뭔가 말을 하려는데 라이레얼이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괜찮아, 히로. 말하지 않아도 히로 맘 다 알아. 그러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마. 사랑해, 히로. 정말 사랑 해.” “…….” 더 이상 말할 기운도 나지 않는다. 난 절망적인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카르의 시선과 루시아의 시선이 내 몸 을 난도질 하건 말건. 설마 저번처럼 폭주해서 인형 가게 다 날리는 건 아니겠지? 안 돼! 이게 어떻게 차린 가게인데! “여기 처음와 봤는데 되게 살기 좋은 동네다. 나도 앞으로 이 동네에서 살아야겠다. 집에 방 남은 거 있 지? 뭐? 있다고? 정말? 다행이다. 그럼 나랑 카르 거기서 살아도 돼지? 뭐? 무조건 된다고? 고마워, 히로! 사 랑해!” 내가 굳이 이 세계로 오기를 원했던 가장 큰 이유는 라이레얼 때문이었다. 이곳에 오면 라이레얼을 피해 루 시아와 아름다운 사랑을 가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라이레얼은 차원까지 넘어 나를 쫓아왔다. 아 아~ 라이레얼은 정녕 스토커란 말인가? 절망이란 먹구름이 내 머리 위로 몰려와 비를 퍼부었다. 흑~ 내 인생은 이제 끝이야! “너 이 자식! 내 딸한테서 손 못 떼?” “…….” 뭐야? 저 엘프들은 여기 왜 왔어? 가게 안으로 들어온 엘프는 갈리온드와 루엔. 그리고 그 뒤를 루와 루비가 따라들어오고 있었다. 나의 친구 인 루엔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관광 왔어요.” “…….” 가족 투어 관광인가? 정말 어이가 없다.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반데라스, 세레나, 에스카네스, 제갈량, 라이레얼, 카르, 갈리온드, 루엔, 루, 루비. 3(인간)+4(드래곤)+1(하프엘프)+4(엘프) = 12(다종족) 무려 12명이나 되는 외계인들이 휴가철을 맞이해 우리 가게로 투어 관광을 왔다. 화성 여행이나 우주 관광 과 비슷한 개념인가? “너…….” 응? 너라니? 카르의 은색 눈동자는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저것은 화재 경보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면 된다. 즉, 지 금 상황이 굉장이 위험하다는 거지. “죽여버리겠어!” “잠깐! 오해야!” “닥쳐!” 카르의 몸에서는 흰 빛이 뿜어져 나왔고, 크로니스와 인디는 각각 붉은빛과 검은빛을 내며 앞뒤로 카르를 포 위했다. 드래곤으로의 폴리모프를 막고 있는 것이다. 굳이 카르가 나서지 않아도 가게 안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라이는 정신연령이 같은 루, 루비와 함 께 판매용 인형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제갈량은 벽에 붙은 금연 마크가 보이지 않는지 담배를 뻑뻑 펴대 고 있었으며 에스카네스는 그런 제갈량에게 담배를 얻어서 피고 있었다. 반데라스는 또 무슨 잘못을 했는 지 세레나에게 뺨을 얻어 맞고는 무릎 꿇고 빌고 있었으며 갈리온드와 루엔은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 고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루시아 옆에 찰싹 달라붙어 내 욕을 하고 있었 고 루시아는 얼음장 같이 싸늘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획 돌린 다. 표정 보니 진짜 화난 것 같다. 화난 것 다 풀려면 한달 내내 무릎 꿇고 빌어야 할 것이다. 흑~ 어쩌다가 이런 일이……. 여기 온 후로는 모든 일이 잘 풀리기에 이제 드디어 나에게도 행운의 별이 비추나 생각했는데 1년만에 이 꼴 이 나다니. 역시 난 뭘 해도 안 되는 재수 없는 놈이야. 난 내 목을 휘감고 있는 라이레얼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가게를 빠져 나왔다. “너 이 자식! 거기 안 서?” “어! 오빠 어디 가는 거예요?” “어디가, 히로? 사랑해!” “…….” 다 필요 없어! 이 세계를 떠나고 말테야!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나 혼자 살 거야! 난 울음을 터트리며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아이언스 공작님?” 뒤를 돌아보니 지니가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야? 댁이 왜 따라와?” 전력 질주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니는 숨이 차지도 않는지 또박또박 대답했다. “저는 이 세상 끝까지 아이언스 공작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끄러, 임마! 다 필요 없어! 특히 너는 필요 없어!” “저한테는 아이언스 공작님이 꼭 필요 합니다!” “으아아! 너 안 꺼져?” 아직 나의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아이리스 완결- -------------------------------------------------------------- 드디어 아이리스가 끝났습니다. 계산해보니 대략 2년 정도 걸렸군요. 그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왠지 좀 서운하군요.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죠. 글을 쓰면서 많은 독자분들의 얘기를 들었고 많은 작가분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저한테는 정말 좋은 경험이 었습니다. 아이리스는 완결 되었지만 아직도 저는 할 일이 많이 남았네요. <샷 오브 데스티니> 5권도 써야하고 새로 운 글도 써야하니까요. 새로운 글의 제목은 <판듀라스>이고 9월달이나 10월달쯤에 ‘드림워커’ 에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아이리스 15권은 이번달 20일쯤 출간 될 예정입니다. 후에 삭제 공지와 함께 후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 아이리스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리스> Prologe 언제부턴가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전부터 내린 이 비는 전 대륙을 차갑게 적셨고, 분냄새와 정액 냄새 가 진동하는 이 곳, 한 사창가 지역에서도 그 비를 맞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내린다기 보다 쏟아진다는 표현이 적당할 듯한 비는 한 소녀의 방 창문에 부딪히면서, 슬픈 소리를 자아냈다. 방안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한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름은 니메라아. 13살 때, 이곳에 팔려와 19살이 된 지금까지 수 백명의 남자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왔다. 이 소녀는 지금 자기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공포스러운 눈으로 남자와 여자를 바라 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한순간에 자신의 방에 나타났다. 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방안에서 나타난 것이다. 소녀는 저 여자가 자신의 침대 밑에 숨어있다가 나타난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저 여 자가 나타난 것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로는 여자를 설명할 수 없었 다. 소녀는 아는게 적어서 뭐라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의 모 든 미사여구를 갖다 붙힌다 해도 저 여자의 미모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나이. 여자로써는 조금 큰 키와 갸냘프면서도 도발적인 몸매. 위로 올려서 묶었는데도, 발목까지 내려 오는 붉은 머리카락. 초생달 같은 붉은 눈썹에, 커다랗게 뜬 붉은색 눈동 자. 오똑하게 선 코와 그 밑에 붉디 붉은 작은 입술. 그리고 그 입술을 더 욱 붉게 보이게 하는 새하얀 피부. 마치 몸 전체가 백옥으로 만들어진 조 각품 같았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거지?' 가게에서 제일 잘나가고, 하룻밤 화대만도 100골드가 넘는다는 리누아제 린도 지금 눈 앞에 있는 저 여자에 비하면 추녀나 다름없었다. 소녀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오른팔이 없는 외팔이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깊게 파인 흉터가 두 개나 나 있었다. 바로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남자는 밖에서 비를 맞으 며 서 있었다. 소녀는 슬프게 내리는 비때문에 감상에 젖어 창밖을 내다 보았는데, 그 때 온 몸에 피칠을 한 남자를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자신의 방으로 남자를 데려왔다. 남자의 얼굴은 도 저히 잘생겼다고 봐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멋있게 생겼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른쪽 눈썹 위부터 왼쪽 뺨 끝까지 그어져 있는 칼자국이 무섭 게 보였고, 그것보다도 칼자국이 너무 깊게 파여 그 칼자국을 중심으로 얼 굴이 약간 일그러져 있어 흉칙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남자는 실성했는지, 풀린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알아 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내뱉었다. 소녀는 일단 수건으로 남자의 몸을 닦아 준 다음, 오른팔이 떨어져나간 자리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팔이 잘린 뒤, 치료도 제대로 안했는지 핏덩이 가 엉켜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자신이 의술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에 대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의사였다면, 좀 더 잘 치료해줬을텐데…….' 지금이라도 간단한 치료방법 정도는 익혀볼까 생각하던 소녀는 곧, 자신 이 멍청하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있었던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데,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소녀는 정말로 멍청했다. 동료들이나 손님들이 바보라고 놀려도, 그냥 웃 기만 했다. 자기 자신이 진짜로 멍청한 것을 알기 때문에, 바보라는 말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소녀는 멍청한 만큼 착했다. 처음보 는 남자를, 그것도 흉칙한 칼자국이 나 있는 외팔이를 방안으로 데려와 치 료해줄 만큼 착했다. 소녀는 저 남자를 데려온 것이 이런 결과를 부를 지는 몰랐다. 죽은 것 같이 누워있던 저 남자는 벌떡일어나, 저딴 병신을 왜 데리고 왔냐며 자신 을 구타하던 주인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성이 안차는지 하나 밖에 없는 손으로 주인의 배를 갈라 그 속을 헤집고 있었다. 자신의 순결을 빼앗아가고, 6년동안이나 자신을 구타하며 몸팔기를 강요 해오던 주인은, 지금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그의 주위에는 그의 뱃속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여러 가지 장기 들이 핏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이 모습을 똑똑히 보면서, 기절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원망해야만 했다.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는 갑자기 싱긋 웃었다. 소녀는 그 미 소를 보고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자신이 기절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했다. 여자의 미소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 미소는 너무 아름다워 마치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저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상관 없을 꺼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옅은 미소가 지어진 여자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어디 계셨나 했는데, 여기 계셨군요." 여자는 목소리마저 아름다웠다. 천상의 음률이라는 것이 이런걸까? 하지만 이어진 목소리는 여자의 아름다운 목소리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으 르렁거리는 쉰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남자는 시체 뱃속을 헤집는 작업을 멈추고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을 데리러 왔습니다." "닥쳐!"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일어났다. 그리고 분노로 인해 붉게 변해버린 눈으로 여자를 노려 보다 달려가 하나밖에 없는 주먹을 여자를 향해 내질 렀다. 퍼억-! 여자는 피하려면 피할수 있었겠으나, 날아오는 남자의 주먹을 그냥 얼굴 로 받아냈다. 상황이 이렇게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여 자가 피할 줄 알고 주먹을 내지른 것이다. 남자는 한손으로 여자의 멱살을 움켜 잡은 다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 다. "전부 너 때문이야. 전부 네 년 때문이라고, 이 빌어먹을 도마뱀아! 너, 넌 충분히 루시아를 구할 수 있었어. 구할 수 있었다고! 그런데…… 그런데 왜 보고만 있었지? 왜 그녀가 죽도록 내버려 둔거야! 왜 그녀가 죽도록…… 왜…… 왜……." 여자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 남자는 여자 앞에 주저앉아, 흐느 끼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왜 그녀를 살려야 하는거죠? 저에게 있어서는 모든 일들은 유희에 불과합니다. 전 로스입니다. 전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가 아닌, 아이리스의 후작 아리스 로스일 뿐 입니다. 저에게 더 이상 무엇을 바라시는겁니까? 전 당신을 도와주기만 했을 뿐, 당신에게 해가되는 일은 한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도와드린 걸로는 부족한가요?"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머리를 묶고 있던 리본을 풀렀다. 풍성한 머리 카락을 속박하고 있던, 금제가 풀리자, 머리카락들은 자유롭게 흩날리며 여 자의 발목을 지나, 바닥을 덮었다. 소녀는 그 모습을 보고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풀음으로 해서 약간 남아있던 소녀 같은 이미지가 사라 지고, 완벽히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붉은 생머리를 길게 늘 어뜨린 여자의 모습은 청초하면서 도발적이었다. 남자로 하여금 보호본능 을 자극하는 동시에 성욕을 느끼게 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러나, 소녀는 왜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붉은색의 머리카락에서 핏빛이 연상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자는 머리를 한번 흔들어 머리카락들을 정리한 다음, 말을 이었다. "그녀를 지켜야하는건 당신이 아니였습니까? 왜, 그녀의 죽음을 다른 사 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겁니까?" 남자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말이었다. 남자는 그 말을 듣고 더 크게 흐 느꼈다. 여자의 말이 맞다. 자신이 그녀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며,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 루시아의 죽음을 타인에게 돌림으로써 안도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왜 죽은거야?…… 대체 왜…… 빌어먹을…… 살아만 있어 줬다면…… 살아 있어만 준다면…… 젠장, 아직 도 못한 말이 많은데…… 아직 다 사랑해주지도 못했는데…… 벌써 죽으면 어쩌자는 거야?…… 난 어떻게 해야돼?…… 난 어떻게 해야돼?…… 어떻 게……." 여자는 남자를 내려다 보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후둑, 후둑, 후두둑- 비는 남자의 슬픔을 공감이라도 하는지 더욱 슬프게 내렸다. 한동안 그렇 게 시간이 흘렀다.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남자의 슬픔도 조금씩 멈추었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응시했다. "이젠 어떻게 하실껍니까?" 남자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수." "복수요?" "루시아를 윤간하고 죽인자들 모두." 여자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복수라……? 하지만 이미 그들은 전부 죽지 않았습니까?" 남자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겨우 그정도 죽은 걸로 끝나지 않아." "그럼 어떻게……?" "그들의 핏줄. 그들의 친구들. 그들과 관련된 모든것들." 여자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 거렸다. "모든 것들이라…… 모든 것들…… 모든 것들…… 후훗…… 훗…… 아하 하하하!" 여자는 알아듣지 못 할 말들을 중얼거리다 갑자기 배를 잡고 웃어댔다. 여자는 한참을 그렇게 미친 듯이 웃어데다, 조금 진정이 됐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들과 관계된 자들이라면 족히 몇만은 될껍니다. 그들을 전부 죽이시겠 다는 말씀이십니까?" 남자의 대답은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왔다. "물론이다." 여자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전 대륙이 피로 물들텐데요?" "상관없다. 기괴스럽기까지한 남자의 모습을 벌벌떨며 지켜 보던 소녀는 자신이 기절 해야 할 타이밍을 또 놓쳤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이 제발 기절할 수 있도 록 도와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활짝 웃으며 두팔을 벌렸다. 사탕을 받은 어린아이처 럼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그 사랑이 끝나자 복수에 미쳐버리는 인 간……. 하하, 역시 당신은 재밌는 인간이군요. 당신을 따라다닌 보람이 있 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당신이 말하는 그 복수라는 것을 도와드리도록 하 지요." "크하하하, 크하하하하하……." 이번에는 남자가 웃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며 웃어대는 남자의 모습은 더 할나위 없이 슬퍼보였다. 소녀는 남자의 모습에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고 신에게 기도했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활짝 웃으며 두팔을 벌렸다. 사탕을 받은 어린아이처 럼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그 사랑이 끝나자 복수에 미쳐버리는 인 간……. 하하, 역시 당신은 재밌는 인간이군요. 당신을 따라다닌 보람이 있 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당신이 말하는 그 복수라는 것을 도와드리도록 하 지요." "크하하하, 크하하하하하……." 이번에는 남자가 웃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며 웃어대는 남자의 모습은 더 할나위 없이 슬퍼보였다. 소녀는 남자의 모습에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닦아 내지는 않았다. 소녀는 저 남자를 위로해주고 싶 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더 슬퍼졌다. 남자는 순식간에 웃음을 멈추고,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눈의 실 핏줄이 터졌는지 눈동자는 붉게 물들고, 눈가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와 동시에 얼굴에 나있는 두 개의 흉터에서도 피가 뿜어져 나왔다. 흉터에 서 흘러내린 피는 남자의 얼굴 전체를 피로 물들였다. 피로적셔진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잔인한 미소였다. 남자는 으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륙 전체를 피로 물들여서라도 루시아의 목숨값을 받아내겠다!" 남자의 기괴한 목소리0는 방 전체에 낮게 울려퍼졌다. 마치 하늘에서 울 려퍼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악마의 울음소리같기도한 기괴한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녀는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저 남자는 미쳤어.' 남자의 모습은 완전히 광인(狂人)의 모습이었다. 복수에 미쳐버린……. 여자는 남자에게 물었다. "지금…… 시작하실껀가요?" "……." 남자는 말하는 대신 혀를 내밀어 입가에 흐르는 피를 았다. "알겠습니다." 그 순간, 바닥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빛무리는 남자와 여자를 감싸 안았고, 그 둘은 방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소녀는 이번에도 자신이 잘못본거라고 열심히 우기기 시작했다. 남녀가 사라지고 난 한참 뒤, 소녀는 방안에 시체와 함께 혼자 남아있다 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소녀는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시체에서 최대한 멀 리 떨어졌다. 소녀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아까 그 사람은 대체 누구지? 주인이 죽기전에 남자를 아이언스 공작이 라고 불렀고, 남자는 루시아라는 이름을 외쳤지. 음∼ 그리고 여자는 로스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들인데…… 어디서 들 어봤지?'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소녀는 두려움도 잠시 잊고 생각속으로 빠져들었 다. "아! 생각났다." 소녀는 생각해낸 것이 대견스러운지, 손뼉을 한번 부딪혔다. 소녀는 13살 때, 이곳에 팔려온 이후로, 이 구역을 벗어나 본적이 없다. 하지만, 사창가라는 장소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소녀는 그들에게 들었던 얘기를 토대로, 아까 사라진 남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 었다. '음∼ 맞아. 아이언스 공작이라면, 아이리스의 마법사 잖아. 본명은 아이언 스 히로였던가? 그리고 그 여자는 혈화(血花)라는 아이리스의 후작, 아리스 로스고. 그럼 남자가 말했던 루시아는 아이리스의 공주를 말한건가?' 소녀는 잠시 중얼거렸다. "아이언스 공작…… 아리스 장군…… 루시아 공주……." 소녀의 눈동자가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콰당-! 소녀가 쓰러지는 소리다. 소녀는 그토록이나 원했던, 기절이란 것을 한 것이다. '대륙 전체를 피로 물들여서라도 루시아의 목숨값을 받아내겠다.' 라는 아 이언스 히로의 맹세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이언스 히로는 아리스 로스와 함께 루시아를 윤간한 자들의 핏줄을 찾아다니며, 전부 죽이기 시작했다. 에니웨카 백작 딸의 배를 갈라 8개월된 태아를 끄집어 내는 걸로 시작된 살육은 아토리의 왕, 아토리아 훼제마인의 뇌속에 손가락을 쑤셔넣는 것으 로 끝을 맺었다. 정확히 100일의 걸쳐 이루어진 이 전무후무한 살육에 대륙 전체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루시아 공주를 윤간한 자들과 관련된 자들은 살아남기 위 해 저항해보기도 하고, 도피해 보기도하였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음을 맞이 하였다. 안식의 땅에 누워있는 자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아이언스 히로는 그들과 관련된 자들이라면 무덤까지 파해쳐 시체를 가루로 만들었던 것이 다. 무덤의 시체부터 갓난아기에 이르기까지, 아이언스 히로는 아예 가문의 씨를 말려버렸다. 아이언스 히로는 살육을 하는 10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는 음식 대신 자신이 죽인 시체에 살과 뼈를 뜯어먹고, 뇌수와 피를 마셨다. ----------------------------------------------------------- 전부터 올리려고 생각했던 프롤로그입니다. 이건 한참 후, 그러니까 약 7∼ 8년 후가 되겠군요. ------------------------------------------------------------ [국가에 대한 설명] 현재 자이네레스 대륙에는 5+1의 나라가 있습니다. 1은 망한 나라. 즉 아이리스입니다. 5는 헤리오, 개틴, 체자레, 자바스, 아토리아입니다 이 중 아이리스가 동맹을 맺는 나라는 헤리오와 체자레이고 적대관계에 나라는 자바스와 아토리아 입니다. 개틴과는 직접적 전쟁은 안하지만, 친구 의 적은 나의 적(헤리오와 개틴은 사이가 엄청 나쁩니다. 오나라와 월나라 라고 생각해주세요)이라는 속담 때문에 적대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 제로 나중에 전쟁을 몇번 하긴 합니다. 위의 6국 중에서 제일 강한 나라는 체자레입니다. 군사력은 강한데 300년 동안 한번도 전쟁을 치루지 않은 나라입니다. 당연 다른 나라들이야 잠자 는 사자를 건드리기 싫어, 전란 시기에도 체자레는 건들지 않았고, 그 때문 에 체자레는 엄청난 군사력을 키웠습니다. 거기다가 북부지역 초원에 있는 훈족들을 포용해, 엄청난 수의 가마부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헤리오 왕국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나라기 때문에, 반드시 동맹을 맺어야 만 했습니다. 결국 주인공이 외교사절로 파견되 동맹을 성사시키지요. 일단은 자바스와의 전쟁을 3∼5년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아토리아는 약 1년 정도.(주인공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아토리아의 귀족들이 싸그리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6국의 성립 과정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주인공이 소환된 644년에서 130여년 전인, 약 510년 경에 성립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아이언스 이그리드(당시 나이 15세)와 아이리스 키에티트(역시 15세)는 군사력 80배, 땅덩이 90배 정도되는 아토리아에 전쟁(당시 아이리스는 아 토리아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토리아는 최강국입니다.)을 일으킵니 다. 이그리드와 키에티트는 빠른 속력으로 주변 소국들을 설득, 정복하고 아토리아와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합니다. 아토리아는 북동쪽에 자리잡은 훈족과의 싸움 때문에, 모든 군사력을 아이리스와의 싸움에 쏟을 수 없었 고, 그 틈을 이용해 이그리드와 키에티트, 아이리스의 4장군(디아케 가, 스 웰리어스 가, 로케스터 가, 라이언 가)가 함께 대륙을 종횡무진 합니다. 아 이리스와 훈족과의 싸움 때문에 아토리아가 약해진 틈을 타, 대륙 가운데 위치해 맨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바람에 기를 펴지 못했던 자바스는 잽싸게 아토리를 공격 상당수의 땅을 차지해 6국 중 하나로 패권을 잡습니 다. 체자레는 북쪽의 훈족을 통합, 그 기세를 몰아 주변 소국 들을 정벌, 대륙 정북쪽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체자레가 남하하는 바람에, 개틴의 국력 이 약화되고 그 틈을 이용해 헤리오는 개틴을 공격합니다. 이 때, 헤리오는 개틴의 왕을 죽이는데 성공하고, 후에 헤리오 왕은 개틴 왕의 측근에게 암 살당합니다. 이 일로 인해 헤리와 개틴의 사이는 급속도로 악화됩니다. 이렇게 해서 기나긴 전국시대의 6국이 탄생된 것입니다. 아이리스는 동남쪽의 패권을 장악. 헤리오는 서남쪽의 패권을 장악. 자바스는 중앙의 패권을 장악. 아토리아는 훈족을 정벌해 북동쪽의 패권을 장악 개틴은 서쪽의 패권을 장악. [세계관 설명] 자이네레스 대륙에는 신이 없습니다. 당근 신관도 없습니다. 이 세계에서 는 신성마법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존재했섰습니다. 그런데 가이아스 왕국(대륙 최초의 통일 왕국. 0년 에 건국)이 성립될 당시에, 에카스 왕이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손으로 이룩한다. 감히 신 따위가 이것에 개입할 수는 없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에카스의 진짜 모습으로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말입 니다) 이 말로 인해 에카스 왕은 모든 신전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는데, 넨 이드와 젝 니켈(이 두 놈도 무지하게 수상한 놈들입니다. 정체는 나중에 밝혀 드리지요. 조금만 말씀드리자면, 이 두 놈은 주인공이 원래 세계로 돌 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는건 아닙니다.)과 함께 차례 차례 신전을 깨부셔, 가이아스 왕국이 건국될 때에는 신이란 존 재가 사라졌습니다.(이때 당시 신전에 행포도 이루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 습니다. 그러니까 신전을 몽땅 박살낼 수 있었죠.) [전투 능력] 이름 : 아이언스 이그리드 무력 : 100 (일기투에서 저본적이 없슴. 장군급들을 상대로 6대 1까지도 가뿐하게 커버 가능. 여포 급이라고 생각하시길) 마법력 : 100 지력 : 100 (책략의 천재. 제갈량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매력(외모 및 기타 등등) : 100 정령술 : 100 (정령왕은 소환 못하지만 상급 정령 5개 까지 소환. 대륙 내에서 상대할 자가 없음 [드래곤 제외]) 지휘력(군대 지휘 능력) : 100 외교술 : 100 이름 : 아이언스 히로(박영웅) 무력 : 95 마법력 : 85 (현재 클래스 5마스터, 5년후 클래스7까지 마스터함) 지력 : 100 (상대방이 생각도 못한 전술을 사용.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 손자병법 등에서 나오는 책략들을 짬뽕해서 사용) 매력(외모 및 기타 등등) : 70 정령술 : 0 지휘력(군대 지휘 능력) : 90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제자라는 카리스마 때문에) 외교술 : 90 참고 : <000-ZERO> ~ <100-MAX> 대륙에는 마검사(마법과 검을 같이 쓰는 사람)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마법을 잘 쓰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합니다. 뒤집어 생각하시면 체력이 좋은 사람은 마법을 못씁니다. 그런데 1000년이 넘게 지속되어온 이 관념을 깨트린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아이언스 이그리드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마법사들은 능력이 매우 제한됩니다. 예를 들어 짧은 거리의 워프 마법을 쓰더라도 마법진을 꼭 그려야 하고, 그 이동거리도 매우 짧습니다. 또한 무마나 지대(자연적으로 마나 배치가 엉망이어서 마법을 쓸 수 없는 지역)도 존재하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마법들이 제약적입니다. 마나를 다룰줄 아는 자면은 클래스가 낮은 마법사여도 주변의 마나를 감지할 수 있고, 이 때문에 몰래 마법을 쓰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전쟁에 참여했을 때는, 거리가 너무 멀면, 마법이 약화되고, 그렇다고 거리가 가까우면 죽임을 당하고 하기 때문에 어중간한 지역에 마법사가 배치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법사가 죽을 확률이 높아지고, 그렇기 때문에 마검사라는 존재가 매우 필요하게 됩니다. 위의 모든 제약들은 클래스9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클래스 9마스터는 인간의 경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 하는 순간, 드래곤과 맞먹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아이리스 사단 내역표 - 근위 보병 여단 제 1 근위보병연대 - "(그로스)아이리스" * 1669년 이전 호칭 - '그로스아이리스' 그러나, 1669년 패배이후, '그로스'란 호칭이 공식적으로 '삭제' 되었음. 제 2 근위보병연대 - "블루아이호크"(청안백우조) 초기 아이리스 사단편성 - 1671년 (각 병과여단당 1개 연대 편성) 제 1 보병사단 제 1 보병사단 사령부 - 본부, 연락소대, 헌병소대, 사단참모본부 제 1 경보병여단 제 1 경보병연대 제 1 대대 - 본부중대(본부, 연락소대, 공병소대) 1중대 - 경보병 2중대 - 경보병 3중대 - 경보병 4중대 - 중보병 대대경지원부대 - 보급 제 2 대대 - 본부중대(본부, 연락소대, 공병소대) 5중대 - 경보병 6중대 - 경보병 7중대 - 경보병 8중대 - 중보병 대대경지원부대 - 보급 제 3 대대 - 본부중대(본부, 연락소대, 공병소대) 9중대 - 공병 10중대 - 공병 11중대 - 공병 12중대 - 공병 대대경지원부대 - 보급, 장비지원 연대지원중대 - 보급 제 1저격병연대 제 1저격병대대(궁수부대) 1중대 - 궁병(활) 2중대 - 궁병(활) 3중대 - 궁병(석궁) 4중대 - 경보병(엄호) 대대경지원부대 - 보급 제 2저격병대대(궁수부대) 1중대 - 궁병(활) 2중대 - 궁병(활) 3중대 - 궁병(석궁) 4중대 - 경보병(엄호) 대대경지원부대 - 보급. 연대지원중대 - 보급 제 1독립기병전투연대 제 1기병대대 - 본부중대 1중대 - 경기병 2중대 - 경기병 3중대 - 경기병 4중대 - 중기병 제 2기병대대 - 본부중대 1중대 - 경기병 2중대 - 경기병 3중대 - 경기병 4중대 - 중기병 연대지원대대 - 보급 총사단 인원수 - 9984명 ( 보병여단(9120명) + 기병연대(864명) ) 제 2 중보병사단 제 2 중보병여단 제 2중보병연대 제 2저격병연대 제 2 독립기병연대 제 3 경보병사단 제 3 경보병여단 제 3경보병연대 제 3저격병연대 제 3 독립기병연대 제 4 보병사단 제 4 보병여단 제 4경보병연대 제 5중보병연대 제 4 저격병연대 제 5 독립여단 제 5 저격병연대 제 6 중보병연대 * 보병여단은 1개 보병연대 + 1개 저격병(궁병)연대의 조합으로 구성됨 보병분대 - 15 소대 - 60 중대 - 240 대대 - 1440 연대 - 4560 (3개대대 + 1중대) 여단 - 9120 (2개연대) 사단 - 9120 + a 1개 기병분대 - 8 기병소대 - 12 기병중대 - 48 기병대대 - 288 기병연대 - 864 <아이리스 Iris> 외전1. 드래곤과 마법사[친구] 짙은 어둠이 깔려있는 동굴. 그 어둠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는 천천히 눈 을 떳다. 최상급 루비같은 붉은색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섬뜩한 빛을 발 했다. 이 존재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덩치는 왠만한 작은 성 하나와 맞먹 었고, 두장의 날개를 쫙펴면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지금 붉게 빛나는 이 눈동자의 크기만 하더라도 성인 남자 대, 여섯을 합쳐 놓은 것 보다 더 컸 다. 인간들은 이 존재를 가리켜 드래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이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는 드래곤은 적색 산맥의 주인인,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였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 이 드래곤은 인간을 싫어하기로 유명했다. 연륜이 쌓인 노인이건, 젊은 청 년이건, 순결을 간직한 처녀건, 이 드래곤의 영지에 들어온 자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인간의 힘으로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몇번의 희생을 거치고 난 후, 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영지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이 건드리지 않은 지역에는 자연히 몬스터들이 몰렸고,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는 각종 몬스터들이 산맥 곳곳에 자리잡기 이르렀다. 다만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 드래곤은 자신의 영지에 들어온 자만을 죽 이지, 자신은 절대 영지를 벗어나지 않는 다는 것이고, 몬스터들 역시 절대 산맥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크로니스 는 인간을 벌레와 같이 생각했기 때문에, 밟아 죽일 가치조자 없다고 여겼 고, 이 생각은 몬스터들에게도 전해져, 인간이라는 것을 아예 상대할 필요 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크로니스는 엘프들에게는 관대했다. 엘프는 그나마 존재할 가치는 있는 생물로 여겼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설 비슷하게 남아있지만, 이 적색산맥을 중심 으로 동쪽에는 인간들이 사는 대륙이 펼쳐저있고, 서쪽에는 엘프와 기타 이종족들이 사는 잊혀진 숲이 펼쳐저 있다. 하지만 적색산맥을 차지하고 앉은 크로니스 때문에 서로의 교류가 중단된 것이다. 물론 이 교류는 단지 인간들만이 중단된 것이다. 엘프들이나 다른 이종족들은 적색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과의 교류를 별로 원치 않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 나오지 않을 뿐이다.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는 어둠속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듯 계속해서 눈을 번뜩거렸다. [인간.] 벌레 같은 존재들. 약하기 그지 없는 주제에 사회라는 것을 만들고, 그 속 에서 자신들이 강하다고 믿는 족속들. 그 강함을 믿고 온갓 더러운 짓과 추악한 짓을 하는 쓰레기들. 밟아 죽일 가치조차 없어. 크로니스는 3000년 전에 한번 인간 세상을 구경한 후, 다시는 인간 세상 에 내려가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이 동굴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휴식을 취하는게 편했다. 그게 심심하면, 오크와 트롤, 오우거와 미노타우르스로 편을 갈라 패싸움시키는 것도 재미있었다. 가고일이나 와어번을 끼면 더 좋고. 이해할 수 없어. 에스카네스. 넌 무슨 재미로 인간 세상에서 사는거지? 드래곤 로드인 블루 드래곤 에스카네스는 성년이 된 이후 바로 인간 세상 에 내려가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아마 지금은 어느 나라의 왕일 것이다. 실제로 같은 드래곤이라 하여도 인간처럼 성격은 천차 만별이었다. 예를 들어 에스카네스 같은 경우에는 인간을 좋아해서, 잠깐의 휴식기를 제외하 고는 거의 인간 세상에서 살다 시피하고, 카이네이드는 엘프를 좋아해서, 수천년 전부터, 잊혀진 숲에서 살았다. 화이트 드래곤 칼라이스는 새를 좋 아해 새로 변해서 날아 다니는 것을 즐겼고, 블랙 드래곤 인디카즈네는 말 을 좋아해, 자신의 영지에 수십만 마리의 말을 사육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외에도 특이한 성격을 가진 드래곤들이 많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 을 지경이었다. 참고로 자신은 요리를 좋아해, 수천, 수만가지의 요리 중 못하는게 없었다. [이그리드인가?] 자신의 영지 어느 한곳에서 인위적인 마나의 흐름이 감지되었다. 아마도 이그리드가 워프 마법을 쓴 것일거다. 이그리드. 안그래도 인간을 싫어하는 나에게 더욱 인간을 싫어하도록 가르쳐준 인 간. 100년 쯤 전에 만난 후로, 나의 심기를 박박 긁어놓는 인간. 드래곤 피 어를 개짖는 소리로 착각하고 있는 인간. 주제에 감히 클래스 9를 마스터 해, 나와 맞먹으려드는 인간. 그리고 실제로 나와 맞먹는 능력을 지닌 인 간. 마지막으로 나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의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 인간. 드래곤은 머리를 치켜 들었다. 덩치에 비하면 작은 머리였지만, 워낙에 덩 치가 덩치인지라, 조금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동굴이 조금씩 흔들거렸다. 그 순간, 그 거대한 레드 드래곤 앞에 한 인간이 모습을 들어냈다. 검은 로브를 입고, 흰 수염을 발끝까지 드리운, 늙은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드래 곤을 모습을 한번 처다보더니, 두려움 없이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드래곤은 마법사를 노려보며 드래곤 피어를 발산했다. [크르르, 더러운 인간 주제에 감히 어딜 기어들어 오느냐?] 동굴 전체가 울릴 정도의 큰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뉘집 개가 짖냐는 듯한 말투였다. 드래곤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는지, 커다란 고개를 치켜 들며, 다시 한 번 드래곤 피어를 발산했다. [크아아아, 벌레 같은 인간 주제에 감히 나의 레어에 들어오다니!] 쿠르르르르-!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동굴 전체가 진동하며, 돌가루들이 떨어지기 시작 했다. 보통 인간이었으면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기절하거나, 머리가 터져서 죽 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이 상황에서도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드래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닥치고 그 도마뱀 껍데기나 벗어. 올려다 보면서 말하니까 목아프다." 드래곤은 이제 두 날개까지 쫙 펴고 포효했다. [크아아아! 빌어먹을 인간놈아!] 쿠르르르르-! 동굴이 무너질 듯이 흔들거렸다. 진동이 어찌나 큰지, 몸의 균형을 잡기가 힘들 정도였다. 마법사는 힘들게 두 다리로 균형을 잡으며 소리를 빽 질렀 다. "셋 셀 동안, 폴리모프를 하지 않으면 박살을 내주겠다." 드래곤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법사를 내려다 보았다. 루비처럼 빛을 발하는 드래곤의 눈동자가 위, 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드래곤은 목 을 길게 뻗어 얼굴을 마법사 바로 앞에 갔다 댔다. 그리고 마법사들 잡아 먹을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대로 입만 다물면, 마법사의 상체가 뜯겨 나갈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빠르게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드래곤은 잠깐 흠칫하더니, 공기를 진동시켜 시동어를 말했다. [프로모프 셀프] 시동어을 말하는 순간, 휘양찬란한 붉은 빛이 나타나 거대한 드래곤의 몸 을 휘감았다. 그 빛은 드래곤을 휘감은 채 점점 조여들었고, 드래곤의 모습 은 천천히 줄어 들었다. 잠시후, 마법사와 키가 또 같은 아름다운 남자 엘프가 마법사 앞에 모습 을 들어냈다. 엘프는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달려가 마법사를 껴안았 다. 그리고는 마법사의 주름이 가득한 볼과, 자신의 매끄러운 볼을 부벼댔 다. "이그리드∼. 사랑하는 나의 친구∼." 마법사는 기분 나쁘다는 투로 말했다. "놔라, 도마뱀." 엘프는 깜짝 놀란 듯 말했다. "왜 그래, 이그리드? 설마 내가 싫어진거야?" "닥쳐. 그건 그렇고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본체로 현신해 있던거냐?" "으응, 그거? 그냥, 너 올때까지 기다리기가 심심해서. 너 요즘 나랑 잘 놀아주지도 않았잖아. 그 이계에서 온 소년 조사한다 뭐한다해서." 마법사는 쓴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할 얘기가 있다, 크로니스." "할 얘기? 좋아. 그럼 우리 차 마시면서 얘기하자. 니가 좋아하는 레드 티 (Red Tea) 어때?" 마법사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엘프는 기쁘다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차는 내가 준비할게. 워프." 갑자기 허공에서 붉은색 빛 줄기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줄기들은 엘프 의 몸을 감싼 뒤,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그 빛이 사라지자 엘프의 모습 도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흥, 크로니스. 겉멋만 늘었군." 실제 웜급 드래곤 정도의 능력이면 단거리 워프마법 정도는 시동어 없이 도 사용이 가능하다. 크로니스에게 있어서는 시동어를 외친다던가 빛이 몸 을 휘감는다던가 하는 짓은 전부 폼에 불과하다. 마법사는 손가락을 튕겼다. 1초도 되지않아 마법사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 도 찾아 볼수가 없었다. 두 존재가 사라진 후, 커다란 동굴 안에는 오직 정적만이 가득했다. "나는 내일 죽는다." "그래? 요근래 들었던 소식 중 제일 기쁜 소식이군. 뭐, 다른건 없나?" 마법사는 찻잔에 담긴 붉은 액체를 보며, 천천히 한모금씩 들이켰다. "너에게 부탁할게 있다." 엘프는 긴 붉은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부탁? 뭔대?" "그 소년의 육체를 만들어다오." 엘프는 찻잔을 내려 놓고 반문했다. "뭐?" "난 그 소년에게 나의 모든 것을 줄 생각이다. 하지만 그 소년의 육체는 너무 부실하거든. 기껏해야 클래스 5의 마나를 담아 놓을 정도?" 순간, 엘프는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더 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대로 해석해." 엘프는 한손으로 머리를 집었다. "그러니까…… 너의 모든 것이라면……?" 마법사는 입안에 있는 차를 음미하다,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마법. 그리고……." "절대 감각." 뒤의 말을 받은 것은 엘프였다. 엘프는 미간 사이를 살짝 찡그리며 중얼 거렸다. "너의 마법과 절대 감각. 그 두가지 능력이면, 드래곤도 때려 잡을 수 있 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마법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크크크, 걱정하지마, 크로니스. 어차피 보통 인간의 몸으로는 그 힘을 전 부 감당하지 못해. 내가 능력을 전해줘 봤자, 그 녀석은 능력의 반의 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물론 그 능력만으로도 인간 중에는 상대할 자가 없 겠지만 말이야." "미친거냐, 이그리드?" "크큭, 미쳤다고? 내가? 천만에. 난 아주 멀쩡해." "설마 그 소년으로 제 2의 너를 만들어 아이리스를 재건이라도 할 생각이 냐?" 마법사의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이 사그라 들었다. 마법사는 과거의 일을 회상이라도 하듯,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이리스의 재건이라……? 그것도 괜찮을 것 같군. 대륙 최초의 마검사 인 아이언스 이그리드의 마법을 물려 받은 자와, 대륙 최고의 장수라 불리 는 아이리스 키에티트의 피를 이어 받은 자의 만남. 크크크, 잘하면 아이리 스 재건국이란게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말이야……, 난 꼭 그런걸 원하는건 아니야. 물론 그 녀석이 아이리스 재건국이다 뭐다해서 설처댄다 면 나야 좋겠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 별거 아니야. 그냥 나 때문에 이런 이상한 곳으로 끌려온 불쌍한 놈 인데, 뭐라도 조금 해주고 싶어서. 생긴 모습은 우리랑 똑 같지만 문화 차 이가 엄청나게 나는 곳에서 살다 온 놈이거든. 그런 놈이 이 대륙에 제대 로 적응이라도하려면 작은 것 하나 정도는 할줄 알아야 하잖아." 엘프는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흥, 작은 것? 넌 니 마법과 절대 감각이 작은거라고 생각하냐?" 마법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계속 대화를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는지, 차는 이미 식어있었다. 마법사는 마나를 이용해 열을 방출시켜, 다시 차를 데웠다. 차가 어느정도 뜨거워져 김이 모락모락 솟아 오르자, 마법사는 그 제서야 마법을 멈추었다. "크로니스. 웜급의 레드 드래곤. 넌 신이 있다고 생각하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엘프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신은 존재한다." "그래? 그럼 운명은?" "글세.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마법사는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운명이라……? 난 운명을 믿지 않는다. 이 세상이 신이란 작자가 정해놓 은 룰에 따라 흘러간다면, 그건 너무 재미 없거든." 엘프는 조금 남아있는 붉은 액체를 찻잔을 기울여 전부 입안에 집어 넣었 다. 씁쓸하군. 찻잎을 너무 많이 넣었나? "그래서?" "별거 아니야. 그냥 이 대륙에 신이 만든 룰이 정해져 있다면, 그 룰에 구 애 받지 않는 녀석이 설쳐대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힘을 계승한 자가 대륙의 역사를 바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그녀 때문이냐?" "뭐?" "루미아드……." 루미아드. 마법사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찡그렸다. "그 이름은 꺼내지마." 하지만 엘프는 상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가 죽은 후, 넌 도망치듯이 아이리스를 떠나왔어. 그리고 내가 사는 이곳으로 기어들어 왔지. 그것에 대한 사죄냐? 그녀의 나라를 버리고 떠나 온 것에 대한 사죄. 그래서 그 소년을 대신 내보내 아이리스를 되살리려는 거냐?" "닥쳐라, 크로니스." 마법사는 두눈을 부릎뜬 채, 엘프를 노려 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보는 엘 프는 표정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보던 가운데, 갑자기 엘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큭……, 크큭……, 푸하하하." 엘프는 그렇게 한참동안을 배를 부여 잡은 채 미친 듯이 웃어 재꼈다. 그 리고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크큭, 이봐 이그리드. 정말 재밌는 농담이었어. 그래, 갑자기 죽는다니? 크하하, 니가 죽는다고? 니가? 크하하하, 웜급 드래곤도 상대할만한 능력을 가진 니가 죽는다고? 하하하……, 이그리드. 농담을 하려면 좀 더 그럴듯한 농담을 해야지.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닌 니가 죽는 다는 농담을 하면, 누 가 그걸 믿냐? 하하하. 아무튼 재밌었어. 너도 가끔은 재밌는 농담을 할 때 가 있구나." 마법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나라도 다가오는 죽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거겠지." 엘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엘프는 눈에서 붉은 색의 빛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죽는다고? 죽는다고!? 죽는다고!!?" 마법사는 남아있는 차를 전부 입안에 털어 넣고, 찻잔을 내려 놓았다. "인간은 100년 밖에 살 수 없는 존재." 마법사는 고개를 돌려 엘프를 마주보았다. 마법사의 눈에 쓸쓸한 빛이 스 치고 지나갔다. 그 눈빛을 마주대하는 엘프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슬픔을 느꼈다. 엘프는 그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어째서……." "난 너무 많은 시간을 살아왔어. 이젠 쉴 때도 됐잖아." 엘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하, 농담이지? 농담이지, 이그리드? 니가 죽는다니, 그건 말도 안돼잖 아. 넌 강한 존재잖아. 농담이지? 내가 그녀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지금 화 가나서 그러는거지? 미안해, 이그리드. 정말 미안해, 다시는 그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죽는다는 말은 하지마. 제발 그런 농담은 하지마." 마법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크로니스." "어째서야!? 어째서야!? 어째서 죽으려하는 거야? 어째서 날 두고 떠나려 하는거야!?" 마법사의 말에 엘프는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마법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엘프는 마법사에게 다가가 와락 그를 껴안았다. 엘프의 눈에서 투 명한 보석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보석들은 천천히 흘러내려 마법사의 어깨를 적셨다. "날 버리지마……. 날 버리지마, 이그리드……. 난 니가 없으면 견딜 수 없어." 마법사 역시 손을 들어 엘프를 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법사는 잠시 그의 모든 것을 느끼기 위해 눈을 감았다. 친구. 나의 친구. 나의 사랑하는 친구. 마법사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넌 지상 최강의 생명체다. 내가 없어도……." "닥쳐! 그딴건 필요없어. 니가 없으면 최강이고 뭐고 아무것도 필요없다 고. 나한테 필요한건…… 내가 원하는건…… 오직…… 너 뿐이야……." "미안하다, 크로니스." 엘프는 더욱 세게 마법사를 끌어 안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미안하단 말은 듣고 싶지않아. 나 한테…… 약속했잖아……. 영원히…… 친구로…… 지내기로……. 영원히…… 친한…… 친구로…… 지내기로…… 약속했잖아. 그런데…… 겨우 100년만에…… 겨우 100년 만에…… 날…… 떠나려는거야……? 난…… 난…… 그럴 수 없어…… 난…… 난……." 목이 매여오는지 엘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마법사의 어깨 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는 천천히 엘프의 등을 어루 만졌다. 미안하다, 크로니스. 미안하다. 미안하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엘프의 울음이 잦아들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마법사는 엘프의 여린 어깨 를 움켜 잡고, 천천히 떼어냈다. 마법사는 엘프의 얼굴을 마주보고 미소를 지었다.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 지는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엘프를 미소짓게 만 들기에는 충분했다. 엘프는 그 미소를 마주대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크로니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끝났어." 엘프는 울부짖었다. "리치! 리치가 되면 되잖아! 리치가 되면…… 그렇게 하면…… 영원 히…… 나와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마법사는 주름이 가득한 손을 뻗어 엘프의 눈가에 묻어있는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싫어……!" 엘프는 마법사의 품안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마법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제발……, 제발……." 더 이상 어떠한 말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 마법사는 그저 엘프를 안은 채, 미안하다는 말만을 계속 중얼거렸다. "없에 버리겠어……. 없에 버린다구……. 니가 없는 세상은 필요 없어 ……. 전부 없에 버릴꺼야……!" 엘프는 고개를 치켜들고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마법사는 한 손으로 엘프 의 얇은 허리를 움켜잡고 끌어 당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엘프의 턱을 잡고 치켜들었다. 마법사는 미친 듯이 계속 뭔가를 말하고 있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주름진 입술을 맞추었다. "읍……, 읍……." 엘프는 벗어나려는 듯 두손으로 마법사의 가슴을 쳤다. 그러자 마법사는 더욱 강한 힘으로 엘프를 끌어 안았다. 저항이 잣아들고…… 엘프는 두손 으로 그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입술에 닿는 따뜻한 감촉과, 입안 구석구석 을 탐닉하는 그의 혀를 느꼈다. 긴 키스가 끝나고, 마법사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법사는 엘프의 몸을 감고 있는 팔을 풀렀다. 그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 섰다. 크로니스……. 마법사는 느리게 눈동자를 움직여 엘프의 모습을 위, 아래로 훝어 보았다. 그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마법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마법사의 눈가에 반짝이는 보석이 맺혔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이그리드……." 엘프는 오열이 터져 나오려는 듯, 두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만은 그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다. 너와 사귀게 된건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고 생각 한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터져 나오려는 울음 때문에, 어떠한 말 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죽은 후에도, 나는 영원한 너의 친구다." 마법사는 엘프에게 다가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잘 있어라, 크로니스." 마법사의 몸이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엘프는 깜짝 놀라, 막고 있던 손을 풀고 소리를 질렀다. "안돼! 가지마, 이그리드!" "……나의 친구." 마법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엘프의 귓가 에 맴돌았다. 친구. 다리가 풀렸는지, 엘프는 무너지듯이 주저 앉았다. 가지마. 가지마, 이그리드. 제발 날 버리고 가지마. 날 혼자 두고 가지마. 넌 나의 친구잖아. 더 이상 무의미한 삶을 사는건 싫어. 너와 함께 있었던, 100년만이 나에겐 의미 있는 시간이야. 그런데 다시 나에게 무의미한 삶을 살라고 하는거야? 이젠 싫어. 나한텐 니가 필요해. 날 버리지마, 이그리드. 우린…… 친구잖아. 엘프는 홀로 남은 공간 속에서 얼굴을 무릎사이에 묻은 채, 소리없는 오 열을 토해냈다. "자, 이제 시작하지. adsfsfdsfsfdfs……." 마법사는 랭귀지 마법을 해지했다. 그리고 능력전이를 위한 주문을 외웠 다. 마법사가 주문을 외움에 따라 바닥에는 지름이 100m 정도에 달하는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법사는 소년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소년이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자, 마법사는 본격적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 했다. "시작한거냐, 이그리드?" 엘프는 탁자에 걸터 앉아, 조용히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엘프의 머릿 속에 수십가지의 기억들이 한번에 스쳐가기 시작했다. [감히, 나의 영지에 들어오다니…….] "흥, 누구 마음대로 이곳을 너의 영지라고 칭하는거지?" [나의 영지에 들어와 나의 몬스터들을 죽인 대가는 크다.] "크큭, 그래서, 날 죽이기라도 할꺼냐?" [죽이겠다.] "크하하하. 겨우 웜급 도마뱀 주제에 날죽이겠다고? 할 수 있으면 해보시 지." [미친 인간이군.] "내가 미쳤다고? 천만에. 너무 멀쩡해서 탈이지." "이건 뭐냐?" "다른 차원계로 가는 워프 마법진." "뭐?" "선이나 도식들은 제법 그대로 그려져 있지만, 위치나 비율이 엉망이야. 드래곤 다섯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도 해석을 포기한 거지. 그걸 한번 해석 해봐. 맨날 죽을상 짓고 있는 것 보다는 재미있을 테니까." "놀자." "나 바쁘다." "아앙∼ 그딴거 하지 말고, 나랑 같이 놀자∼. 나 심심해∼." "심심하면, 딴 놈과 놀아. 오우거, 오크, 트롤, 가고일 등등 밖에 니 친구 들 많잖아." "뭐? 나같이 고귀한 몸에게 그런 하찮은 것들과 같이 놀라고?" "이 몸도 너무나 고귀한 몸이여서 너같이 하찮은 불도마뱀과는 놀고 싶지 않다." "뭐라구? 씨잉∼ 으아아앙!" "나가서 울어!" "9써클 마나 그리는 것을 도와다오." "우웅∼ 왜?" "그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면 9써클의 마나가 필요하다." "9써클의 마나라……. 그럼 내가 주문도 알려줄게." "주문따윈 필요없다. 마나만 있으면 되." "싫어." "뭐?" "싫어. 마나를 그리고 싶으면, 먼저 주문부터 배워. 주문 안 배우면, 나 안 도와 줄꺼야." "끄응…… 알았다." "이그리드, 뭘 그렇게 인상을 쓰고 그래? 인간 중에서는 최초로 클래스 9 의 마법을 배우는건데. 조금은 기쁜 표정을 지어봐. 아! 그리고 수업료를 지불해야지." "뭐냐?" "하루에 다섯 번씩 해주기. 나 요즘 욕구불만이거든. 아아∼ 부끄러워." "크아아아! 이 빌어먹을 도마뱀이!" "이그리드. 우리 애 만들자." "싫다." "왜? 그녀 때문에 그래?" "……." "이그리드……. 영원히 나와 함께 있어줄 수는 없어?" "난 인간이다." "리치." "뭐?" "리치가 되면 되잖아. 그럼……."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 "왜?" "모든 생명체는 영혼과 육체로 나뉘어져 있다. 죽는다는 것은 육체가 소 멸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래서?" "그럼 영혼은 어디로갈까?" "……." "리치가 된다는 것은 이미 한번 죽는다는 것이지. 육체를 죽이고, 영혼을 봉인시키는 의식. 리치의 죽음은 영혼의 소멸을 의미한다." "……." "난……, 영혼의 소멸을 원하지 않아. 그렇게 된다면……, 죽어서도 그녀 를 만날 수 없을테니까." "흥, 대단한 순정이로군." "너한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전부를 의미한 다." "이런 밤에 날 찾아온 이유는 뭐야?" "실험이 성공했다." "이야∼, 백년 동안이나 연구하더니, 결국은 성공했네. 축하해. 그런데 남 자야 여자야? 나보다 예뻐? 설마 나보다 가슴 큰건 아니겠지? 너 글래머 좋아하잖아." "……남자다." "남자? 정말? 몇살이래? 얼굴은 잘생겼어? 키는? 좋아하는 여자상은? 연 상 취향이야, 연하 취향이야? 애인은 있데?" "애인은 없다." "정말?" "확실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직접 물어봤어?" "아니. 생긴거 보니까 없게 생겼어." "……." "나는 내일 죽는다." 그와의 첫만남. 그는 나의 영지에 들어왔고, 난 그를 죽이기 위해 몬스터 들로 공격했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난 그를 죽이기 위해 몸소 밖으 로 나와야 했다. 그의 첫인상이란……, 한마디로 죽으려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무리 사랑 하는 여자가 죽었다하더라고 삶을 포기할 놈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난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와 정확히 7일 밤낮을 싸웠다. 그는 특이한 인 간이었다. 마법사면서도 육박전은 나를 능가하고, 어떻게된건지 드래곤 피 어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온몸에 힘이 빠 져나가는게 정상인데……. 결국 그 싸움은 무승부로 끝났다. 난 그를 죽일수 있었지만, 그렇게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왜 그를 죽이지 못했을까? 그는 삶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그는 죽으려고 찾아온 자신을 살려둔 것 에 대해,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난 그가 좋아졌다. 그것은 3000년만에 느껴보는 감정이 었다. 그 감정이 사랑이었나? 100년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난 그의 애인이 되고 싶었다. 그와 사랑을 하고 그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난 자신이 있었다. 어떤 모습, 어떤 성격으로도 변할 수 있기에, 그의 마 음을 잡을 수 있을꺼라 확신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있었다. 그래서 나를 거부했다. 난 그 여인을 죽 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 그는 언제나 그 여인을 그리워했다. 난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난 그 여 인의 모습과 성격을 알아내, 그녀로서 그의 앞에 섰다. 처음이었다. 그가 그렇게 화를 낸 것은. 그는 그녀를 모독하는 짓은 하지말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고, 그녀의 모습으로 변하는 짓 따위는 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도 그녈 대신할 수는 없었다. 난 그날 울면서 그의 방을 뛰쳐나온걸로 기억한다. 다음날, 난 그와 친구가 되었다. 애인으로서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친구로서 그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난 그에게 차원 이동 마법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언제나 우울해보였기에 어떻게해서든지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성공이었다. 그는 마법사답게 그 마법진 해석에 푹빠져버렸다. 하지만 저 것을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드래곤 다섯 마리가 머리를 포기한 건데, 어떻게 인간이……. 그는 천재였다. 그는 정확히 6년만에 그 마법진을 해독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계에 대해 알기를 원했다. 마법진 해석이 끝난 지금, 그에게는 무 엇이든 관심사가 필요했다. 난 그에게 9클래스의 마법을 전수해주었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보기 힘든 골격과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기에 그는 9써클의 마나를 몸에 그릴 수 있었고, 그 마나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계로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좌표점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난 좌표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르쳐주 지 않았다. 아니 가르쳐줄 수 없었다. 난 그를 보낼 수 없었다……. 그는 이계의 존재를 만나보길 원했다. 그는 수백번의 소환 의식을 행했다. 그의 나이는 어느새 120세가 넘어갔다. 흑발이던 머리는 백발로 변했고, 깨끗하던 피부는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주름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나는 그대로인데, 그는 점점 늙가고 있 었다. 언제든 그가 나를 버리고 떠나갈것만 같았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난 어떻게해야 하는거지? 난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죽는다는 생각을하면 미칠것만 같았다. 난 그에게 리치가 되기를 권유했다. 그는 거절했다. 죽어서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나의 영혼은 그녀와 함께해야 한다고. 그가 153세가 되던 해에, 결국 그는 실험에 성공했다. 이계의 존재를 소환 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는……. 엘프는 고개를 떨구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와인잔 안으로 떨어졌다. 마법사의 눈에 광활한 대륙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는 흑마를 타고 끝없는 평원을 달렸다. 그의 앞에 백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인이 서있었다. 그녀의 입 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느새 그의 모습은 잘생 긴 20대의 청년으로 변해있었다. 마법사의 주문 외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여인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여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의 그의 모습 이 비쳤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흑발과 여인의 백금발이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여인은 손을 뻗 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여인의 손을 움켜쥐었다.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 여인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 넘쳤다. 마법진이 강렬하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여인은 그의 품에 안겨왔다. 그는 여인을 감싸 안았다. "이젠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게." 여인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이 폭파하듯이 빛을 내뿜었다. 마법사의 몸에서 마나가 빠져 나가 기 시작했다. 사랑해, 루미아드. 영원히……. 마법사의 몸에서 감각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녀를……. 마법사의 머리에서 지식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들……. 점점 선명해지는 그녀의 모습……. 마법사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마법사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난다면 반드시……. 마법사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그의 희미해져가는 눈동자에 여러 사 람의 모습이 비쳤다. 나와 함께 광활한 대륙을 종횡무진했던 키에티트. 100년 동안이나 나의 친구로 있어준 크로니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여인. 루미아드……. 이젠 널 만날 수 있어.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해맑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챙그랑- 깨진 유리잔 틈새로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 액체는 천천히 흰 대리 석 바닥을 적셨고, 바닥은 핏빛으로 변했다. 엘프는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눈물이 흘렀다. 끝난거냐? 이제 끝난거냐, 이그리드? 이렇게 날 버리고 떠나는거냐? 이제 다시는 널 볼 수 없는거냐? 그는 죽었다. 그의 존재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엘프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소년은 갑자기 나타난 적에 당황하고 있었다. 소년은 애써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오우거가 공격해왔다. 소년은 마법을 썼지만, 마법이 나가지 않았다. 깜짝 놀란 소년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들어 오우거의 도끼를 막아냈다. 엘프는 약 5km정도 위에 위치한 산중턱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흥, 완전히 쓰레기군. 상황을 보아하니 절대 감각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건가? 그렇다해도 이그리드의 마법을 가지고서 오우거 따위도 상대하지 못하다니……." 바람이 불어왔다. 엘프의 얼굴에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바람은 길게 풀어 해친 엘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엘프는 바람이 흩날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소년은 고통과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였다. 척추는 이미 부러져있었고,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소년은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의지만이 소년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엘프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설마 벌써 죽으려는건 아니겠지?" 소년은 아직 죽지 않았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마법을 사용했고, 그 마법은 오우거를 물리쳤다. 그제서야 소년은 안심하고 기절했다. 의식을 잃은 소년에게 7마리의 오우거가 다가갔다. 소년이 의식을 잃기 직전 필사적으로 사용했던 매직 미사일은 오우거들의 두꺼운 피부를 뚫기에 너무 약했다. 급소를 맞은 3마리만 죽었을 뿐, 나머지 7마리는 별다른 상처조차 없었다. "흥, 정말로 죽게 생겼군. 저런 병신같은 놈이 이그리드의 힘을 계승했단 말인가?" 엘프는 팔을 뻗었다. "그래도 일단 살리긴 해야겠지. 그의 부탁이니까……. 윈드 스톰Wind Storm." 오우거들 사이로 이상한 기류가 생겨났다. 그 기류는 빠르게 회전을 했고, 각각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가기 시작했다. 우두둑- 뚜둑- 끼긱- "크아아악!" "쿠엑!"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에 오우거들의 몸이 하나, 둘 찢겨나갔다. 잠시 후, 비명이 잦아들고 오우거들은 선혈이 낭자한 채 사지가 찢겨져 있었다. 엘프는 손을 뻗었다. "워프." 소년의 몸이 사라졌다. 사라진 소년의 몸은 엘프의 눈 앞에 나타났다. 엘프는 소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별 특징없는 평범한 얼굴. 엘프는 소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그리드……." 엘프는 소년을 침대에 눕혔다. 소년은 악몽을 꾸는지 계속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엘프는 조심스럽게 소년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슬립Sieep." 소년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엘프는 손을 뻗어 소년의 몸 구석구석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심장 근처에 손을 댄 다음, 눈을 감았다. 9개의 원. 응축되어있는 마나. 잠시 후, 엘프는 손을 뗐다. "마나를 써클로 만들어 놓은건가? 하긴, 안 그랬으면 육체가 터져나갔겠지. 다른 써클들을 깨우려면, 뭔가 계기가 필요하겠군. 각성을 할 계기가……. 그건 그렇고 절대 감각은 왜 깨어나지 않은거지? 이것 역시 뭔가 계기가 필요한가?" "으으윽∼." 소년은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다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엘프는 소년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잠시 더듬더니, 어느 한부분을 세게 눌렀다. 신경을 차단해 놓은 것이다. "너에게 최고의 육체를 선물해주지. 이그리드의 힘을 계승한 인간아." 엘프의 손이 소년의 온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두둑- 투둑- 투둑- 관절이 빠지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매웠다.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엘프는 이 끔찍한 소리에도 상관없이 소년의 몸을 만지는데만 열중했다. 휘어진 척추가 바로 세워졌다. 부리진 뼈가 서로 붙었다. 굵은 뼈들이 가늘어 졌다. 가는 뼈들이 굵어졌다. 긴 뼈들이 짧아졌다. 짧은 뼈들이 길어졌다. 소년의 골격이 바뀌었다. 소년은 계속 잠을 잤다. 엘프가 강력한 마법으로 잠을 재워 놓은 것이었다. 소년은 무의식중에 바뀐 자신의 몸에 천천히 적응해가고 있었다. 방문이 열렸다. 엘프가 들어왔다. 엘프는 정령을 이용해, 소년의 배설물들을 처리했다. 엘프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처다보았다. 이것이 엘프의 일과였다. 소년의 몸에서 나오는 땀을 닦아주고, 배설물을 처리해주고, 음식과 물을 먹여주고, 소년을 바라보는것이……. 한달의 시간이 흘렀다. 엘프는 천천히 소년의 몸을 더듬었다. 인위적으로 모습이 뒤바뀐 뼈들은 어느새 거의 굳어있었다. "이 정도면 7써클의 마나까지는 견뎌 낼 수 있겠군. 하지만 그 이상의 힘을 견딘다는건 불가능해. 뭐, 그 힘은 깨우지도 못할테니 별 상관은 없겠군." 엘프는 소년의 옷을 입혀주었다. "이제 깨워야 겠군. 나이트메어." 잠시 후, 소년이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엘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으으으, 아아!" 소년은 괴로운 듯 비명을 질러댔지만, 엘프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하게 걸었으니까, 잠시 후면 스스로 깨어나겠지." 엘프는 소년의 베낭에서 꺼낸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소년은 엘프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엘프는 웃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재밌는 소년이군. 이그리드의 힘을 계승한 인간. 이그리드와 같은 기운이 느껴져. 인간……. 추악한 족속들. 벌레같은 족속들. 밟아 죽일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들. 이그리드. 친구. 나의 친구. 나의 사랑하는 친구. 이그리드도 인간이 아니였던가? 이그리드는 인간이다. 그럼 난 인간을 좋아한건가? 아니야. 난 인간이 아니라, 이그리드를 좋아한거야. 이그리드는 인간과는 달라. 뭐가 다르지? 그는…… 나의 친구야. 그럼 저 소년은 뭐지? 인간. 이그리드의 냄새가 느껴지는 인간. 난 저 소년을 좋아할 수 있을까? 난 다시 인간을 좋아할 수 있을까? "레드 드래곤!?" 엘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후훗…… 눈치가 빠르시군요." 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너무 큰 충격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제 소개를 하지요. 전 레드 드래곤 크로니스라고 합니다. 당신은 박영웅인가요?" 소년은 떨면서 말했다. "예, 예. 전 박영웅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웃음이 나왔다. 엘프는 웃음을 지었다. 이그리드. 나 다시 인간을 좋아할 수 있을까? "입맛에 맞으시나요?" 소년은 입안에 있는 음식을 꿀꺽 삼킨 다음 말했다. "아, 예. 아주 맛있습니다. 이거 직접 만드신 건가요?" "예. 제 취미가 요리거든요. 맛있게 드십시오." "아, 예,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엘프는 미소를 지었다. 빈말은 아닌 것 같군. 그럼 이그리드는 왜 맨날 맛없다고 투덜거린거지? 이그리드……. 엘프는 그저 소년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허리를 숙였다.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평생이라……? 과연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엘프는 웃으며 답했다. "하하, 뭘요? 은혜라고 할 것도 없지요. 당신이 가는 길에 언제나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그럼 이만." 엘프는 모습을 감추었다. 대충 만든 듯한 작은 무덤이 보였다. 엘프는 그 무덤에 몸을 기댔다. "이그리드……." 엘프는 느린 손길로 무덤을 어루만졌다. "나, 그 소년을 만났어. 재밌는 인간이더라. 니가 왜 그 소년에게 힘을 계승하게 했는지 알 것 같아. 인간은 자식을 만듬으로써 영원히 산다고 했지? 넌 그 소년을 통해서 숨쉬고 있는거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너의 육체는 이 차가운 땅 속에 묻혀있어. 너의 영혼은 그녀와 함께 있는 거니? 영원한 안식 속에서 영원한 평온 속에서 그녀와 함께 하는거니? 그래서…… 넌 행복한거니?" 엘프의 눈에서 차가운 눈물이 떨어져 무덤을 적셨다. [난 어렸을 때부터, 힘들게 살아왔어. 가끔씩 나란 존재는 대체 왜 이 세상에 태어난건가, 의문을 던지곤 했지. 난 15살 때부터, 전쟁터를 돌아다녔어. 누구보다 강한척했지만, 난 누구보다도 약했어. 난 다만 죽지 않기 위해서 전쟁을 한거야. 난 그녀를 만났어.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그녀를……. 난 그녀를 사랑했어. 내가 미친 듯이 전쟁을 한것도, 아이리스가 패권을 잡게 한것도, 전부 그녀를 위해서야. 난 힘이 필요했어. 그녀를 지킬 힘이……. 전쟁이 끝났어. 이제 그녀 곁에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그녀는 얼마 못가 내 곁을 떠났어. 그제서야 난 깨달았어. 그녀는 자신의 나라가 강해지길 바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단지 내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을 바랬다는 사실을. 그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어. 사랑한다고. 자신의 몫까지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야.] "그래, 이그리드." [그녀를 만나고 싶어…….] "걱정하지마. 내가 다시 만나게 해줄게. 그녀를 만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해줄게." 엘프는 눈물을 닦아 냈다. 벽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클래스 9 마스터의 대마법사 아이언스 이그드리(x) 150여년의 짧은(x) 생을 마감하고 이 곳에 잠들다. 이그리드 긴 -대마법사 아이언스 히로(박영웅)- 엘프는 웃음을 지었다. 엘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엘프는 손을 뻗어 벽을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다시 무덤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 다시 인간 세상에 나가보려해. 그 소년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어. 다시 인간을 만나고, 다시 인간을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널 좋아했던 것 처럼 말이야……." 엘프는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후두둑- 벽에 돌가루들이 흩어 졌다. 그리고 소년이 새겨넣은 글 밑에 새로운 글귀가 새겨 졌다. 나의 친구 이그리드. 영원히 널 사랑해. -너의 사랑하는 친구 크로니스- 엘프는 허리를 숙여 무덤에 입을 맞추었다. 붉은 빛이 엘프의 몸을 휘감았다. 잠시 후, 엘프의 모습은 사라지고 영원한 안식의 땅에 누운자는 조용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외전2. 라이레얼과 세 난장이 제목 : 라이레얼 공주와 세 난장이 주요 등장인물. 공주 : 라이레얼 왕자 : 히로 왕 : 히로 (인건비 사정상 1인 2역을 맞게되었습니다.) 마녀, 왕비 : 라나 요술 거울 : 히로 (그래도 인건비가 모자란 관계로 1인 3역을 맞게되었습니다.) 시녀1 : 세레나 시녀2 : 로나이시 사냥꾼 : 다즈 난쟁이1 : 테커 난쟁이2 : 카웨 난쟁이3 : 럴크 (역시 인건비 사정상 난쟁이 수를 대폭 줄였습니다.) 암살자 : 라이코스 지나가는 고양이1 : 야옹이 지나가는 고양이2 : 냐옹이 지나가는 고양이3 : 먀옹이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작고 아름다운 나라에 라이레얼 공주님이 살았습니다. 공주님은 정말 너무너무 예뻤습니다. 커다란 레몬 및 눈동자와, 오똑한 코, 빠알간 입술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레몬빛 생머리. 하지만 공주님은 얼굴만 예쁜게 아니였어요. 마음씨도 비단결 같이 고왔답니다. 제 1 장. 왕궁 안의 공주의 방. 배경 설명 : 아름다운 드레스 수십 벌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두 하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공주(라이레얼) : 뭐야!? 옷이 왜 이딴 것들 밖에 없어? 당장 다른 옷 내놓지 못해! 시녀A(세레나) : (당황하며) 여기있는 옷들이 전부 입니다, 공주님. 공주(라이레얼) : (화를 내며) 뭐야! 니가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거야? 이게 그래도 왕년에 백작 집 딸이었다고 반항을 하네! 지금은 시녀인 주제에……. 시녀B(로나이시) : 제발 진정하세요, 공주님. 공주(라이레얼) : 어쭈, 이제보니 이 년들이 작당을 하고 날 갈궈! 니들 오늘 죽어볼래! 효과음 : 투샤투샤! 퍽퍽퍽! 빠각뽀각! 시녀AB(세레나, 로나이시) : 끼아악! 살려주세요, 공주님! 3분 후. 배경 설명 : 시녀AB, 군데군데 옷이 찢기고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있다. 머르끄뎅이를 잡혔었는지 머리는 심하게 엉클어져 있고, 입가에는 한줄기에 피를 흘리고 있다. 공주는 연속기를 쓰는데 체력을 많이 소모했는지 숨을 고르고 있다. 공주의 손에는 초록색과 갈색의 머리카락이 한웅큼 들려있다. 시녀AB(세레나, 로나이시) : 흑흑흑 공주(라이레얼) : (손을 탁탁턴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어디서 감히 말대꾸야. 야! 니들 당장가서 다른 옷 가지고와! 마음에 안들면 알지? 시녀AB(세레나, 로나이시) : (흐느끼며) 흑흑, 알겠습니다, 공주님. 공주(라이레얼) : 야! 질질 짜지마. 남들이 보면 내가 때린 줄 알잖아. 시녀AB(세레나, 로나이시) : 흑흑.(독백 : 니가 때렸잖아.) 공주(라이레얼) : 야! 니들 어디가서 나한테 맞았다고 말하지마라. 알았지? 시녀AB(세레나, 로나이시) : 흑흑. 예, 공주님. 해설 :시녀AB(세레나, 로나이시) 퇴장한다. 공주님은 이정도로 착했습니다. 물론 그런 공주님을 낳은 왕비님도 매우 착하고 아름다웠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라이레얼 공주님을 질투라도 하듯, 왕비님을 일찍 하늘나라로 부르셨어요. 이에 왕과 공주님은 매우 슬퍼했답니다. 제 2 장. 왕궁 안의 왕의 방. 왕(히로) : (고개를 갸웃거리며) 왕비가 있었던가? 공주(라이레얼) : 글쎄? 내 기억엔 없었던 것 같은데……. 결국 왕은 적적함을 이기지 못하고,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3 장. 왕궁의 복도. 공주(라이레얼) : 야! 너 새장가 간데매. 왕(히로) : 예…….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이웃 나라에는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마녀는 아주 사악한 마녀였습니다. 마녀는 이웃 나라의 왕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자신이 왕비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제 4 장. 마녀의 실험실. 마녀(라나) : (손가락을 빨며) 우웅, 라나는 안 사악한데. 정말 너무 사악한 마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녀는 이상한 약품들과 사악한 마법들을 사용해, 왕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마녀의 사악한 주술에 걸린 왕은 마녀를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제 5 장. 왕궁의 정원. 배경 설명 : 갖가지 꽃이 만발한 가운데, 왕과 마녀가 마주보고 서있다. 마녀는 꽃 냄새를 맡고 나비를 쫓는 등, 어린 소녀의 행동을 함으로써 왕을 현혹시키고 있다. 마녀(라나) :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오, 오빠. 나 오빠한테 할말이 있어……. 왕(히로) : 뭔데? 말해봐. 마녀(라나) :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저, 저기 오빠. 왕(히로) : 응? 마녀(라나) : 저기……, 오빠, 라나랑 ……하면 안될까? 왕(히로) : 응? 뭐라고? 잘 안들리는데. 마녀(라나) : (두 손을 가슴 앞에 꼭 움켜쥐며, 소리친다.) 라, 라나랑 결혼하자! 왕(히로) :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러자. 마녀(라나) :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말? 정말 라나랑 결혼할꺼야? 왕(히로) : (웃으며) 응, 마녀(라나) : 고마워, 오빠. 라나는 오빠가 거절하면 어쩌나 하고……, 훌쩍.(눈물을 글썽인다.) 왕(히로) : 왜, 울고 그래? 웃어봐. 라나는 웃을 때가 예뻐. 마녀(라나) : (활짝 웃으며) 응. 라나는 이제부터 웃을게. 왕(히로) : 사랑해, 라나야. 마녀(라나) : (왕에게 안기며) 나두. 해설 : 러브♡ 러브♡ 새 왕비는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왕비는 요술 거울을 하나 가지고 있었답니다. 이 요술 거울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말하는 거울이었어요. 제 6 장. 왕궁 안의 왕비의 방. 요술 거울(히로) : 쓰읍, 내가 왜 거울 역까지 해야되는 거지? 왕비는 거울에게 물었어요. 제 7 장. 역시 왕비의 방. 왕비(라나) : 오빠! 오빠!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뻐? 요술 거울(히로) : 으음, 글쎄? 그야 당연 우리 라나겠지? 왕비(라나) : (얼굴을 붉히며) 아이, 오빠도 차암∼, 부끄럽게 시리. 그런데 오빠는 누가 제일 무서워? 요술 거울(히로) : 그야 당연 라이레얼이지. 왕비(라나) : (손가락을 빨며) 우웅, 왜? 요술 거울(히로) : 하아, 내가 라이레얼에게 당한 걸 말하자면 끝이 없단다.(독백 : 내가 진짜 순결을 잃은 걸 생각하면) 왕비(라나) : 괜찮아, 오빠. 이젠 라나가 있잖아. 요술 거울(히로) : (감동하며) 그래,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왕비(라나) : (거울을 끌어 안으며) 나두. 해설 : 러브♡ 러브♡ 거울을 통해 라이레얼 공주님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된 왕비는 매우 화가났어요. 왕비는 자신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할 수 없었답니다. 그 때부터 왕비는 매일 같이 라이레얼 공주님을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제 8 장. 왕궁 안의 복도. 배경 설명 : 긴 복도 한쪽에서는 왕비가 총총 걸음으로 걸어오고, 반대 편에서는 라이레얼 공주가 걸어온다. 공주(라이레얼) :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야, 거기 꼬마! 너 잠깐 일루 와봐! 왕비(라나) : (빠르게 공주에게 다가간다) 무슨 일이에요? 공주(라이레얼) :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며) 어쭈? 이게 오라면 올 것이지, 뭐가 그렇게 잔말이 많아! 왕비(라나) : (오들오들 떨며) 왜, 왜 이러세요? 공주(라이레얼) : (왕비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야! 너 내가 누군지나 알어? 나 공주야. 라이레얼 공주. 왕비(라나) : (뒤로 물러나며) 저, 전 왕빈데요. 공주(라이레얼) : (기가 차다는 듯이) 하! 열살밖에 안먹은 꼬마가 어디서 감히 히로를 꼬셔. 히로는 내 돈줄이야. 니가 알기나 알어? 너 때문에 요새 돈벌이가 안되고 있잖아! 너 당장 짐싸서 니네 집으로 내려가. 왕비(라나) : (발끈하며) 싫어요! 전 오빠랑 결혼까지 했다구요! 공주(라이레얼) :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왕비의 오른 손으로 왕비의 뒤통수를 때린다.) 효과음 : 퍽-! 왕비(라나) : (바닥에 주저 앉아서 운다.) 으아아앙! 공주(라이레얼) : (손을 탁탁털며) 빨리 짐싸서 내려가는게 신상에 좋을꺼다. 그리고 어디가서 내가 때렸다는 말 하지마. 알았지? 왕비(라나) : 으아아앙! 사악한 왕비는 이렇게 심하게 공주님을 괴롭혔지만, 라이레얼 공주님은 꾹 참고 견뎌냈어요. 왕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기 싫어서 그랬답니다. 정말 너무 착한 공주님이 아닐 수 없어요. 세월이 흐를수록 라이레얼 공주님은 더욱 예뻐졌답니다. 사악한 왕비는 샘이 나서 견딜 수거 없었어요. 그래서 왕비는 라이레얼 공주님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9 장. 왕궁 안의 공주의 방. 배경 설명 : 공주는 침대에 누워서 술을 마시고 있다. 시녀AB는 그 앞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공주 : 꼬마 계집애 주제에 감히 히로를 꼬셔. 쓰읍, 이걸 어떻게 혼내주지? 패도 말을 안듣고 말이야. 야! 니들 그 계집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시녀A : (방긋 웃으며) 아주 귀여운 아이에요. 정말 제 동생 삼았으면 딱 좋겠어요. 시녀B : (역시 웃으며) 가끔씩 코딱지 파서 침대 시트에 묻혀 놓지만 않으면 다 괜찮은 아이에요. 귀엽기도 하구. 공주 : (화를 내며) 어? 이제보니 이것들이……. 야! 니들 그 계집애랑 한패지? 시녀A : (당혹스러워 하며) 예? 시녀B : (벌벌 떨며) 아, 아니에요 공주님. 공주 : 시끄러! 니들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어! 효과음 : 퍽퍽퍽- 투샤투샤- 빠각뽀각- 쿵쿵-! 공주 : (손을 탁탁 털며) 이것들이 어디서 감히. 그 계집애는 아주 나쁜년이야. 알아? 몰라!? 시녀AB : (비참한 포즈로 눈물을 흘리며) 흑흑. 예, 공주님. 공주 : (한 손으로 턱을 괴며) 흐음∼, 어떻게든 그 계집애를 쫓아낼 방법이 없을까? 야! 니들 뭐 산뜻한 아이디어 없냐? 시녀A : 어떻게 그 귀여운 아이를 쫓아낼 수가……. 시녀B : 맞아요, 공주님. 공주 : 아니, 이것들이 또……! 효과음 : 빡- 뻑- 시녀A : 끼아악!(비명과 함께 처첨한 모습으로 바닥에 엎어진다. 머리에서는 한 줄기의 피가 흐른다.) 시녀B : 꺄아악!(시녀A와 동일하다.) 해설 : 공주는 시녀AB를 발로 툭툭 건드려 본다. 공주 : 어라? 이것들이 죽었나? 해설 : 시녀AB는 사망했습니다. 사악한 왕비는 사냥꾼을 불러 착한 라이레얼 공주님을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사냥꾼은 라이레얼 공주님을 성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으로 끌고 갔어요. 사냥꾼은 공주님을 죽이려고 칼을 높히 치켜들었답니다. 하지만 공주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니 도저히 죽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냥꾼은 공주님에게 다시는 성 안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공주님을 살려주었습니다. 제 10 장.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 배경 설명 : 공주는 시녀AB의 다리를 잡고 숲 속으로 질질 끌고 들어간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눞혀 놓은 다음, 주머니에서 모종삽을 꺼내 열심히 땅을 판다. 땅을 다 파자 그 곳에 시녀AB를 던저 놓고, 다시 흙을 덮는다. 공주 : (손을 탁탁 털며) 휴우∼, 겨우 다 묻었군. 미안하다, 얘들아. 살인은 무기징역 아니면 사형인 관계로……. 나같이 예쁜 여자가 청춘을 감방에서 보낼 순 없는거 아니겠냐? 니들 어디가서 나한테 죽었다고 말하지마. 알았지? 해설 : 이 때 사냥꾼 등장한다. 사냥꾼(히로) : 어! 라이레얼 지금 뭐 하시는거에요? 공주(라이레얼) : (화들짝 놀라며) 어머, 히로. 여긴 왠 일이야? 사냥꾼 : 아, 아니 그냥 산책이나 좀 하다가. 공주 : 호호호, 히로.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사냥꾼 : 아까부터……. 공주 : (눈에서 불을 뿜으며, 활을 치켜든다.) 호호, 그럼 다 봤겠네. 사냥꾼 : (뒷걸음 치며) 예. 뭐, 보기야 다 보기는 했지만……. 공주 : (한 걸음씩 다가가며) 호호,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알겠네. 사냥꾼 : 왜, 왜이러세요, 라이레얼.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공주 : 증인인멸!(활을 들고 쏘기 시작한다.) 사냥꾼 : (달음박질 치며) 으아! 살려줘요, 라이레얼! 해설 : 사냥꾼 퇴장한다. 공주 : 쳇, 발이 꽤 빠르네. 빨리 성으로 돌아가야 겠다. (잠시 식은땀이 흐른다.) 앗! 돌아가는 길을 까먹었다. 사냥꾼은 왕궁으로 돌아와 왕비에게 라이레얼 공주님을 죽였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사악한 왕비는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왕비는 사냥꾼에게 공주를 죽였다는 증거로 공주의 간을 꺼내오라고 했습니다. 이에 사냥꾼은 어쩔 수 없이, 거위의 간을 꺼내 왕비에게 바쳤습니다. 왕비는 잔인하게도 그 간을 먹었답니다. 아름답고 젊은 여인의 생간을 먹으면 피부가 고와진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너무 사악한 왕비입니다. 제 11 장. 왕궁 안의 식당. 배경 설명 : 왕비는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목에는 냅킨을 두르고 식탁에 앉아있다. 이 때, 사냥꾼이 요리를 들고 등장한다. 사냥꾼(히로) : 많이 기다렸지, 라나야. 여기 요리. 왕비(라나) : 응. 라나 많이 배고팠어. 그런데 이거 무슨 요리야? 사냥꾼 : (요리를 왕비의 앞에다 놓으며) 푸아그라라고 거위 간 요리야. 내가 우리 예쁜 라나 주려고 힘들게 구한거야. 자, 한번 먹어봐. 왕비 : (나이프로 썰어서 한입 먹는다. 잠시 오물오물 거린 다음,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우와, 맛있다! 사냥꾼 : 그치? 맛있지? 많이 먹어, 라나야. 왕비 : 응. 오빠도 같이 먹자. 사냥꾼 : 그럴까? 왕비 : 응 자∼. (포크에 찍어서 사냥꾼의 입 앞에 가져다 댄다.) 사냥꾼 : (덥썩 입안에 넣으며) 으음, 맛있네. 라나가 먹여줘서 더 맛있는 것 같아. 왕비 : (얼굴을 붉히며) 아이∼, 오빠도 차암∼. 이제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게된 라이레얼 공주님은 숲속을 헤맸어요. 숲속에는 위험한 동물들이 많았지만, 라이레얼 공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감히 헤치지 못했습니다. 제 12 장. 숲속. 배경 설명 : 공주는 숲속을 헤매고 있다. 공주(라이레얼) : (배를 문지르며) 아∼, 배고프다. 해설 : 이 때 호랑이 등장. 공주 : 앗! 호랑이다! 호랑이 : 어흥!(앗! 라이레얼이다!) 공주 : 호호호, 예쁜 호랑이구나. 이리 좀 와보렴. 호랑이 : (이상한 살기에 뒷걸음질 친다) 어흥?(왜 이러세요?) 공주 : 어딜 도망가! (날아 올라 호랑이를 공격한다.) 효과음 : 퍽퍽퍽-! 빠각뽀각-! 해설 : 호랑이 사망하다. 공주 : 좋아, 오늘은 호랑이 고기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어요. 라이레얼 공주님은 너무나도 무서웠답니다. 공주님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어요. 한참을 걷던 중, 어디선가 불빛이 보였습니다. 라이레얼 공주님은 불빛이 나오는 곳으로 뛰어갔어요. 그 곳에는 작은 집이 한채 있었답니다. 라이레얼 공주님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세간살이가 모두 작았지만, 아주 깨끗했어요. 식탁에는 작은 빵을 담은 작은 접시가 세 개. 물이 담긴 작은 컵도 세 개. 작은 침대는 두 개. 벽에 나란히 있었어요. 라이레얼 공주님은 너무너무 배가 고파서 세 개의 빵에서 조금씩, 정말 아주 조금씩 떼어 먹었어요. 물도 세 개의 컵에서 아주 조금씩 마셨어요. 그리고는 두 개의 침대 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걸 골라 잠을 잤어요. 제 13 장. 난쟁이들의 집. 배경 설명 : 공주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 온다. 공주 : 어! 이런 숲속에 왠 집이지? 으음, 전부 짧군. 숏다리들이 모여서 사는덴가? (식탁 위의 빵과 물을 발견한다.) 앗! 먹을꺼다. (두 손으로 빵을 집어든다.) 누구껀지 알게 뭐냐? 먹는자가 임자지.(식탁 위의 빵과 물을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몽땅 먹는다.) 음, 침대도 있네. 으음, 이 중에 내 키에 맞는게……? (한참을 살펴 본 뒤) 없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두 개의 침대를 붙인다. 그리고 그 위에 털썩 눕는다.) 자자. 해설 : 공주는 잠이 든다. 첫 번째 이야기. 이 것은 내가 유치원 다닐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그 이름도 유명한 새 나라의 새 어린이만 다닐 수 있다던 XX유치원에 재학 중이었다. 난 착한 학생이었기에 언제나 열심히 유치원을 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유치원을 나가기가 싫어졌다. 이유는 유치원 선생님 때문. 원래 우리 반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옆 반으로 옮겨가고 다른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생님이 무서울 정도로 못 생겼다는 데에 있다. 어렸을 때의 정서가 성장한 후에도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지 아는가? 모르면 지금 알아둬라.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조기 교육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렸을 때는 보고 듣는 것을 삼가야 한다. 나는 그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 이대로 있다간 나의 순수한 마음마저 악해지게 될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유치원을 몰래 빠졌다. 어린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빠졌는데 그게 그렇게 큰 사건을 불러 올 줄은 정말 몰랐다. 난 적당히 아무 곳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상황은 이러했다. 유치원 선생 : 영웅이가 오늘 유치원에 안 나왔는데 어디 아픈가요? 어머니 : 예? 아니 분명히 갔는데. 유치원 선생 : 예? 안 왔는데요. 어머니 : 어머나! 이 일을 어째? 그 다음 마음 약한 어머니는 내가 납치당한 줄 알고 경찰에 납치 사건으로 신고하였다. 경찰들이 즉시 출동하여 탐문 수사를 시작하고, 집을 조사하는 등 생난리를 벌이고 있는 사이 내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난 어린 마음에 너무도 두려웠다. 하지만 냉정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여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난 어린 아이의 최강 무기인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 정도로 큰 사태가 겨우 몇 번 운 걸로 해결될 리 없다. 난 살아남기 위해 남을 팔아야만 했다. “그게요…… 우리 선생님이 내 얼굴이 재수 없게 생겨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해서…… 그래서 유치원을 빠진 거예요…… 우에에엥…… 죄송해요!” 결론은 좋게 좋게 끝났다. 초상화를 그리면 형이상학적인 모양의 추상화가 나올 것 같은 선생님은 이 일에 책임을 물어 유치원에서 잘렸고, 다른 예쁜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맞게 되었다. 난 그날부터 다시 열심히 유치원을 다녔고, 무사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 이 것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다닐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나는 꿈 많았던 착한 소년. 옆 자리에 좀 안 생긴 여자애가 앉은 게 불만이긴 했지만 그래도 참고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이 여자애가 검지로 자기 콧구멍을 막 후비는 것이 아닌가? 불결함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수업 시간에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저는 자신의 콧구멍을 무자비하게 파는 이런 잔인한 애와는 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자애는 부끄러운지 코를 후비던 손가락을 입에 물고 울음을 터트렸고, 난 혼자 앉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우리 반에도 전학생이라는 신종 캐릭터가 등장을 하였다. 당연 그 아이는 내 옆에 앉게 되었다. “안녕. 내는 덕수라고 한다. 니 이름은 뭐꼬?” “…….” 어찌 멀쩡한 표준어를 놔두고 사투리를 쓴단 말인가? 난 갑작스런 문화적 충격에 잠시 혼란을 겪었지만, 이내 이 전학생에게 표준어를 가르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잘 알다시피 이 사회는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거든. 만약 이 전학생이 계속 사투리를 쓴다면 왕따를 당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럼 이 순진한 애는 버텨내지 못하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겠지. 그래. 난 오직 한 생명을 구해야겠다는 순수한 일념으로 덕수에게 표준어를 가르쳐 주었다. 이게 문제가 될 줄은 난 정말 몰랐다. 아! 이 생각을 다시 하니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 자리를 빌려 당시 우리 담임 선생님이셨던 ‘나담임’ 선생님과 XX초등학교 관계자 여러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차마 이 사건을 내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겠으니 결과만 얘기해 주겠다. 담임선생님은 잘리셨고, 후에 학교는 폐교 되었다. 그리고 전학생 덕수는 왕따 대신 짱이 되어 전 중고교를 평정하였다. 세 번째 이야기. 이 것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에겐 정말 친한 친구가 있었다. 애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좋은 놈이었다. 생긴 것도 그저 그렇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성격이 좋았거든. 녀석의 입버릇이 하나 있었다. “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놈이야!” 녀석은 언제나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언제나 이 것을 실천으로 옮겼다. 어려운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고, 부탁 받은 일은 거절하지 않고 해주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픈 친구를 위해 하급생들 삥을 뜯어 병원비를 내주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놈이었다. 그런데 이 놈의 진면목을 알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때는 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우리는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차갑게 얼은 손을 난로 근처에서 녹이며 수입을 받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얘기지만 불장난은 어려서 해도 재밌고, 커서 해도 재밌다. 나와 별로 친하지 않던 ‘박장난’ 이라는 놈이 있었는데 이름 그대로 장난이 취미였다. 이 놈은 불장난도 한번 해보고 싶었는지 자신의 공책 한 장을 쭉 찢어 난로 안에 집어넣었다. 당연 잘 탔다. 재미를 붙인 이 놈은 계속해서 그 짓을 반복했다. 간만에 보는 불장난이었기에 우리도 말리지 않고 박수를 치며 구경했다. 그런데 이 놈은 그냥 불만 붙이는 것이 심심했는지 불붙은 종이를 창 밖으로 던졌다. 이게 문제였다. 그 종이 한 장 때문에 학교 정원이 홀라당 타버린 것이다. 순간 화재 대피니 어쩌니 난리가 났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담임선생님은 우리에게 소리쳤다. “어떤 놈이 그랬어? 빨리 말 안하면 니들 다 맞을 줄 알아!” 박장난은 무서웠는지 차마 나서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애들은 싸늘한 눈빛으로 박장난을 보았지만 박장난은 그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였다. 결국 1번부터 맞기 시작했다. 엎드려 뻗힌 후에 엉덩이 10대. 퍽- 퍽- 퍽- 교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암묵적인 계산이 성립되기 마련이다. 이르면 일본놈! 꼰지르면 담탱 시다바리! 모두들 고자질쟁이로 찍힐 것이 두려워 이를 악물고 매를 맞았다. 어느새 점점 내 차례에 가까워졌다. 난 내 뒤 쪽에 서 있는 박장난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지만, 이 놈은 나설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사실 상황이 이 정도로 커졌으니 나설 수도 없었다. 담임은 범인이 나타나지 않자 열 받았는지 최선을 다해 매질을 하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난 벽을 짚고 섰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엄청난 고민을 해야 했다. 저 놈을 팔고,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하는가? 당연 살고 봐야지. 저 놈이 뭐가 예쁘다고 내가 감싸주냐? 결심을 한 나는 입을 열려하였다. 그 순간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나의 친구 ‘박의리’ 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당시 우리가 서 있던 순서는 나, 박의리, 박장난…… 이런 순서였다. 난 처음에 이 놈이 당당하게 ‘선생님, 제가 그랬습니다!’ 라고 외칠 줄 알았다. 친구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 이 얼마나 의리 있는 남자의 모습인가? 아마도 대다수의 반 애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쟤가 그랬어요!” 박의리의 손가락은 정확히 박장난을 가리키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 이 놈은 기꺼이 친구를 배신한 것이다. 훌륭한 자식. 네가 인생이 뭔지를 좀 아는 구나. 결국 그날 박장난은 먼지 나게 얻어맞았고, 난 녀석 덕분에 안 맞을 수 있었다. 맞은 놈만 억울하지. 난 이날 인생의 진리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네 번째 이야기. 이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 반에는 정말 싸가지 없는 여자애가 있었다. 집이 좀 잘 살고 얼굴도 그럭저럭 예쁜 애였는데 싸가지가 없어도 정말 너무 없었다. 소위 말하는 왕따였지만 본인은 자신이 왕따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여자애는 자기 혼자서 반 전체를 왕따 시키고 있다 생각했을 것이다. 참다못한 몇몇 애들은 이 여자애를 좀 골려 주기로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중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사실 내가 선동했다-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1. 학생1이 여자애의 가방을 빼앗아 학생2에게 던진다. 2. 학생2는 가방을 문 앞에 서 있는 학생3에게 던진다. 3. 학생3은 가방을 들고 도망친다. 4. 싸가지 없는 여자애는 화가 나서 우리를 좇아온다. 5. 이 때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발을 건다. 6. 여자애가 넘어진다. 7. 학생3이 앞문으로 들어가 학생1에게 가방을 던진다. 8. 학생1은 가방을 여자애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9.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부를 한다. 상당히 부실한 작전이지만 당시 우리는 완벽한 작전이라 극찬을 하였다. 오죽하면 작전명까지 정했을 정도니. <가방 탈취 완전 범죄 계획> 우리는 자습 시간에 범죄를 실행에 옮겼다. 여자애가 교실로 들어오자 학생1이 여자애의 가방을 빼앗았다. 그리고 학생2에게 던지고 학생2는 학생3에게 던졌다. 깜짝 놀란 여자애는 소리를 지르며 학생3을 좇아왔다. 학생3이 뒷문을 나선 후 몇 초 지나지 않아 여자애가 뛰쳐나왔다. 난 그 순간 슬며시 발을 걸었다. 콰당-! 당연 여자애는 넘어졌다. 덕분에 교복 치마가 들어올려지며 흰색 속옷이 슬쩍 드러났다. 아싸! 좋은 구경했다. 외간 남자에게 속옷을 보인 여자애는 황급히 치마를 끌어 내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나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나랑 결혼해야지. 네가 비록 싸가지가 없지만 얼굴 봐서 내가 특별히 희생하마. 어찌되었든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교무실로 끌려가게 되었다. 여자애는 펑펑 울며 우리의 죄상을 낫낫이 고했다. “흑흑, 쟤가 제 가방을 빼앗았고요, 그 다음 쟤한테 던졌고요, 그 다음…… 그리고 쟤가 발을 걸었어요.” 담임은 알리미늄 야구배트를 손에 든 채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의 전율이란. 웬만하면 그냥 맞아주려 그랬는데 저걸 보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들은 다들 숙연한 분위기였다. 이미 각오를 한 것이다. “할 말 있나?” 다들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선생님, 저는 억울합니다. 전 그냥 들어가다가 부딪혔을 뿐, 고의로 다리를 거는 그런 행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계획에 동참하지도 않았고요.” 순간, 친구들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 얍삽한 자식! 치사하게 혼자서만 살겠다는 거냐?’ 난 태연하게 그 눈빛을 받아 넘겼다. ‘나 혼자라도 살아야, 너희들의 무용담을 세상에 알려줄 것 아니냐?’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기에 담임은 하는 수 없이 나를 무죄 방면해 주었다. 교무실을 나올 때 들리던 구타 소리와 친구들의 비명소리가 나의 귀를 울렸지만, 어쩌겠냐? 원래 이런 놈인 것을. 다섯 번째 이야기. 이 것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우리 반의 담임 이름은 황임숙. 선 백전백패의 신화 창조! 안 생기고, 성격 더러운 여자의 대명사. 나이는 국가 공식 노처녀 나이인 30. 실제 나이는 32이지만 본인은 항상 만30살이라고 열심히 우긴다. “박영웅! 너 또 숙제 안 해왔어? 넌 대체 뭐가 되려 그러니? 엎드려뻗쳐!” 빠악~빠악~빠악~ 황임숙은 자신이 결혼을 못한 것을 세상 남자의 잘못으로 돌렸다. 그리고 남자들을 향해 엄청난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것은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권이라는 강력한 권력과 체벌이라는 공식된 구타 행위를 이용, 남자들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나는 희생자 중에 한명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무지하게 얻어맞았지. “박영웅! 숙제 해오랬지!” “감히 담배를 펴!” “어제 걸리고 또 펴!” “떠들지 마!” “성적이 이게 뭐야!” “지각을 하다니!” “그 눈빛은 뭐야!” “싸움을 왜 해!”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열 받는다. 그때가 나의 암흑기였다. 아무튼 이렇게 학생들을 구타하는 재미에 학교에 다니던 황임숙은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추한 얼굴의 성격마저 더러운 노처녀. 이대로라면 평생 혼자 살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깜짝 놀란 황임숙은 재빨리 자기 개발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 자기 개발이라는 게 다름 아닌 방학을 맞아 그 동안 모아둔 돈을 가지고 병원에 찾아가는 것이다. 성형외과에 코도 높이고, 눈도 찢고, 턱도 깎고, 전신에 보톡스 주사도 맞았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을 때 난 담임이 바뀐 줄 알았다. 대체 현대 의학의 기술이란 어디까지가 한계란 말인가? 대충 견적을 뽑아보니 1억 이상. 정말 많이도 고쳤다. 어느 날인가 난 컵라면이 너무도 먹고 싶어 편의점을 찾았다.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익기를 기다리는데 한 남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담임과 이름 모를 남자. 남자의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외모나 여러 가지로 볼 때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저런 괜찮은 남자가 왜 담임과 함께 있는 거지? 설마 담임의 마수에 빠진 건? 난 담임에게 들키지 않도록 컵라면을 들고 재빨리 탁자 밑으로 숨었다. 담임과 그 남자는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더니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난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컵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잠시 걷던 그들은 공원 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면발을 다 먹고 국물을 마실 때쯤 그들의 분위기가 수상해졌다. 난 남아있는 국물을 전부 마신 후 그들을 주시했다. 둘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꼭 말해야 할 것 같군요. 저 임숙씨를 좋아합니다.” “어머!” 놀라며 입을 가리는 담임. 순간 내 손에 있던 나무젓가락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저런 가증스러운! “임숙씨!” 남자는 담임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 왜 이러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담임은 놀란 듯한 표정을 가장하고 손을 빼려는 노력을 하는 척 했다. 우웨엑! 면발이 다시 넘어올 것 같다. “전 임숙씨를 처음 본 순간 느꼈습니다. 임숙씨야 말로 평생을 같이할 동반자라는 것을!” “어머, 몰라요.” 아이씨! 대체 저 표정과 저 웃음은 뭐란 말이냐? 본성을 드러내라, 황임숙! 그 동안 나를 팰 때마다 지었던 그 흉측한 괴물의 얼굴을 보여! “임숙씨!” 남자는 담임의 이름을 부르며 담임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키스를 하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담임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다소곳이 눈을 감았다. 만약 이때 내가 그냥 침묵을 지켰다면 담임은 결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혼녀가 되어 있겠지. 하지만 난 한 남자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지켜 볼 수가 없었다. 솔직히 약간의 복수심도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진 않겠다. 난 들고 있던 컵라면 용기를 버리고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키스를 하려던 둘은 깜짝 놀라 떨어졌다. “어, 그래. 영웅이구나.” 담임은 애써 태연한척하며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눈썹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상당히 화가 난 듯 했다. “황선생님이 가르치는 학생인가요?” “예, 저희 반 아이에요.” 난 남자를 가리켰다. “이 분은 누구신가요?” “이 분은…….” 대답이 궁하겠지. 난 단도직입적으로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담임선생님 성형 수술하신 것은 잘 알고 계시죠? 코, 턱, 눈 등등 안 고친 곳이 없을 정도랍니다. 교사 생활해서 번 돈 전부다 수술비로 날렸데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말을 마친 나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나무 뒤에 숨어 둘의 상황을 관찰했다. 남자는 언성을 높이며 담임에게 말했다. “아니, 어떻게 저를 속이실 수가 있습니까?” “죄송해요, 철규씨. 전 그럴 생각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실망했습니다, 임숙씨.” “철규씨, 잠깐만요. 잠깐만 제 얘기를 들어 주세요.” “전 더 이상 할 얘기 없습니다.” 남자는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주저 없이 달려갔다. 마치 도망치듯. 어두운 공원에 홀로 남은 황임숙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들더니 소리쳤다. “박영웅! 죽었어!” 체벌을 빙자한 구타로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다음 날. 담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학교에 나왔다. 그리고…… “박영웅, 교복에 왜 먼지가 묻어 있지?” “그야 교실에 먼지가 있으니까요.” “이런 더러운 교복을 입고 다니다니! 학생으로 자세가 안 돼있어! 당장 나가서 엎드려뻗쳐!”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마치 마녀 사냥 같군. 난 칠판을 짚고 섰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부당한 폭력에 희생될 거라 생각지 마라. 담임이 매를 내리치려는 순간 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형 수술로 얼굴을 다 뜯어 고친 한 여인이 그 사실을 속이고 남자를 만났다가, 사실이 알려져 심하게 차였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요?” 담임은 순간 움찔했다. 일그러진 얼굴 표면에서 경련이 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차마 나를 때리진 못했다. 후후후~ 나의 승리군. 수업이 전부 끝난 후, 담임은 나를 상담실로 불렀다. 담임은 성형수술로 쫙 편 얼굴을 심하게 구기며 말했다.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싶으면 입단속 잘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 교사가 학생을 협박하다니. 아무리 요즘 학교 파괴가 심각하다 해도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난 친밀감을 주기 위해 씩 웃으며 말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군요. 지금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입장이 아니실 텐데요, 후후후.” “박영웅!”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비밀을 지킬 지, 안 지킬 지는 선생님 하는 거 봐서 생각해 볼 테니.” 난 당당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임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지만 나에게 뭐라 말을 하진 못했다. 이렇게 해서 난 편안한 학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다른 애들 다 맞을 때도 나한테는 언제나 면책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조금 양심에 찔리긴 하더라. 감히 선생님을 협박하다니. 이 시대의 교권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지금 이 자리를 빌려 황임숙 선생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리는 바이다. 1. 적막함이 흐르는 산 길에 왠 매 한 마리가 나타났다. “헥헥, 힘들어 죽겠다. 날아다니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 어디서 마차라도 하나 잡아 타면 좋을 텐데.” 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날개짓을 멈추고 바위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 매는 일반 매와 굉장히 차별성을 두고 있었다. 일반 매에 비해 크기가 훨씬 작아 비둘기 정도의 덩치를 지니고 있고, 부리부터 발 끝까지 온 몸이 흰색이다. 길게 찢어진 눈은 사피이어를 연상시키는 푸른 보석안으로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고, 머리 위에는 세 개의 깃털을 닭벼슬처럼 빳빳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매는 매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냐는 물음에 대해 언제나 단 한 마디로 요약하여 대답하였다. “난 영물이니까.” 그렇다. 이 매는 일반 매가 아닌 영특한 동물이라는 뜻을 지닌 영물이었던 것이다. 종류는 청안백우조. 지금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헤리오 왕국에서 발행하는 <조류 형태의 영물 도감> -1665년 개정판 발행. 27종류의 영물 추가. 일반판 가격 60실버, 한정판 양장본 가격 1골드- 432페이지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엄연한 영물이었다. 매의 이름은 라이코스. 이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 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영물들만이 사는 마을을 떠난 모험심 강한 청안백우조였다. 라이코스는 배고 고팠는지 길가에 난 잡초를 질겅지걸 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이코스는 엄연한 육식 주의자였다. 식단의 육류 비율이 80% 이상이여야 포크를 집어드는 그런 영물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라이코스는 잡초를 먹으며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여기서 집으로 돌아갈 라이코스가 아니었다. ‘어떠한 시련이 닥쳐도 절대 굴하지 않으리!’ 라이코스는 새삼 결심을 다지고 힘차게 비상했다. 파닥파닥~ 2. “우에에엥!” 바람처럼 빠르게 날아가던 라이코스는 어디선가 들려온 울음 소리에 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곳에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 아이가 주저 앉아 울고 있었다. 회색 눈에 회색 머리카락, 귀엽고 통통한 얼굴.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고 머리에는 챙이 넓은 흰색 고깔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나무 지팡이는 마법사임을 짐작케 해 주었다. 귀 끝이 뾰족한 것을 보니 엘프임이 분명했다. 라이코스는 엘프 소녀 앞에 서서 물었다. “귀엽게 생긴 엘프야, 무엇 때문에 우는 거니?” 엘프 소녀는 라이코스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우에에엥! 라이는 너무나 배가 고파.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라이코스는 자신의 이름을 라이라고 밝힌 이 소녀를 위해 뭔가를 해주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올랐다. 세계의 평화는 개개인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것. 여기서 이 소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곳 세계 평화의 이바지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 라이코스는 번개 같이 날아 올라 수십 종류의 새들을 잡아 들였다. “맛있니, 라이야?” “응. 너무너무 맛있어. 라이는 행복해.” 둘은 잡아온 새들을 불에 맛있게 구워 먹었다. 실컷 먹고나자 엘프 소녀 라이는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매야.”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런데 넌 무슨 일로 산을 내려가고 있는 거니?” “으응. 라이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엘프가 되는 거야. 그래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가려는 거야.” “아니, 그렇게 훌륭한 뜻을 품고 있다니!” 라이코스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산을 내려오기도 전에 자신과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다니. 이 것은 페이지가 모자라 스토리를 빨리 진행 시키려는 누군가의 의도가 아니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같이 가자, 라이야. 우리 함께 세계 평화에 이바지해 보자.” “그래.” 이렇게 하여 둘은 파티(Party)를 이루어 같이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인간 세상으로 들어가 자신들이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3. 와장창-! “저 놈들 잡아라! 무전 취식한 놈들이다!” 라이는 입에 음식물을 잔뜩 우겨 넣고, 양 손엔 접시를 든 채 재빨리 가게 문을 뛰쳐 나왔다. 라이코스 역시 닭다리 하나를 입에 문 채 홰를 치며 날아 올랐다. “거기 안 서!” “너 같으면 서겠냐?” 둘은 평소 숙달된 솜씨로 가게 주인을 따돌리고 재빨리 담벼락 사이로 숨었다. 날아서 주위를 살피던 라이코스는 추적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라이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간 것 같아.” “다행이다.” 라이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훔쳐온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은 음식들을 전부 먹은 라이는 아직 배가 고프다는 듯 울상을 짓고 있었다. “라이는 너무너무 배가 고파.” “나도 그래.” “후우~.” 둘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인간 세상에서는 돈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법.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이다. 하지만 둘은 현재 땡전 한푼 없는 거지 신세다. 그렇기에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는커녕 국가의 치안을 망가뜨리는 무전 취식이란 극악한 범죄나 저지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라이는 너무 불쌍해.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우에에엥!” 라이는 라이코스를 가슴에 껴 안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그 순간 지나가던 사람이 10실버짜리 동전 하나를 둘 앞에 떨어트렸다. 라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상당히 푸짐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라이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어린 것이 불쌍하게도. 용기를 잃지 말고 살아가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끝마친 아주머니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둘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또 다른 누군가가 동전을 둘 앞에 던졌다. ‘바로 이거야!’ 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라이는 진흙을 새하얀 원피스 여기저기에 묻혔다. 그리고 패션쇼를 하듯 두 팔을 벌리고 한 바퀴 돌아 보았다. “이 정도면 될까?” 라이코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시 관찰해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어. 얼굴이 너무 깨끗해.” “우웅, 그런가?” 라이는 길가에 뿌려진 재를 주어 얼굴에 묻혔다. “완벽해!” 둘은 번화가로 나와 본격적인 영업을 개시하였다.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에 거적떼기 하나를 펼쳐 놓고 라이코스를 끌어 안은 라이가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고 앞에 이가 빠진 사발 하나를 놓아 두었다. “우에에엥! 라이는 배가 너무도 고파요.” 길을 가던 사람들은 귀엽게 생긴 소녀가 비참한 몰골로 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대체 무슨 일로 우는 거니?” 라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흑흑, 배가 너무 고파요.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라이의 통통한 볼에서는 개기름이 좌르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주위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다니! 어찌 그런 비참한 일이!” 라이의 사정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가슴이 옥죄어 오는 것을 느꼈다. 일부 감수성 풍부한 여인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기도 했다. 가장 앞 쪽에 서 있는 남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품 속에서 금화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 건 우리 아들 대학 보내려고 소 판 돈인데 이걸로 식사라도 해결하렴.” “흑흑, 고마워요. 라이 감동했어요!” “이 건 내가 세레나와 결혼하려고 한 푼, 두 푼 모은 결혼 자금인데 이 걸로 옷이라도 사 입으렴.” 은발의 청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금화 주머니를 건네 주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돈을 적선하였다. 잠깐 사이에 부자가 된 -일명 졸부라고 한다- 둘은 행복한 웃음을 한껏 머금었다. 이 외에도 각지에서 보낸 성금이 줄을 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엽고, 섹시한 라이레얼이 이끄는 무적의 용병단에서 라이레얼을 제외한 용병 단원들이 모은 성금 500골드> <마법사 길드 상아탑에서 뮤리아를 비롯한 1학년 FH반 학생들이 모은 성금 18골드 30실버> <레이트 백작가에서 세레나와 하녀 일동 220골드> 앵벌이 활동을 성곡적으로 마친 둘은 그 돈으로 식도락 기행을 떠났다. 닭날개찜으로 시작해 돈까스, 비빔밥, 고추볶음밥, 해물복음밥, 자장면, 탕수육, 깐풍기, 팔보채, 짬뽕, 울면, 쫄면, 냉면, 만두 라면, 카레 라면, 김치 라면, 해물 라면, 오징어 라면, 소고기 라면, 오뎅 라면, 야채 라면, 김치 김밥, 참치 김밥, 소고기 김밥, 야채 김밥, 삼각 김밥 등등 각국의 중국집과 분식점 등을 휩쓸고 다녔다. 후에 둘은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 <라이 패밀리의 식도락 기행> -1671년 발행. 현재 판매량 7500부- 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명작을 저술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앵벌이, 이렇게 하면 확실히 성공할 수 있다> -1671년 발행. 현재 판매량 3만부. 출판사 협회의 올 해의 베스트 셀러로 선정- 를 출간해 출판 업계와 앵벌이 업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 동안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할 생각은 안 하고 앵벌이 짓과 식도락 기행만 하고 다녔던 둘은 전 대륙의 안 가본 음식점이 없을만큼 배를 빵빵하게 채운 후에야 세계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코야, 우리 이제 뭐하지?” “글쎄.” 뒹굴뒹굴~ 여관방에서 한참을 뒹굴거리던 둘은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 갔다. 그 순간 갑자기 한 병사가 달려 들어오더니 벽에 무언가를 붙이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궁금증이 생긴 라이 패밀리는 쪼르르 달려가 그것을 읽어 보았다. <공지 대마왕 아이언스 히로가 루시아 공주님을 납치해 도망갔다. 대마왕 히로는 인간으로 차마 할 수 없는 수 많은 범죄를 몸소 실천한 극악 무도한 악당이다. 우리 모두 대마왕 히로를 잡아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도록 하자. 추신. 상품도 있다. 상품 - 맛있는 거> 그 동안 말로만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고 떠들고 다녔던 라이 패밀리는 이번 기회에 정말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로 결심을 하고 대마왕 히로를 물리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 라이 패밀리는 도중에 숱한 역경 -예를 들면 도중에 식량이 떨어졌다는 등- 을 맞닥뜨렸지만 결코 굴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4. 라이 패밀리는 드디어 마왕성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둘은 쳐들어 가기 전 잠시 작전 회의를 열었다. “그냥 무조건 돌격하는 거야. 알았지?” “응. 알았어, 이코야.” 자기들 딴에는 완벽한 작전을 짰다고 생각한 둘은 마왕성으로 돌격했다. 원래 일반적은 소설이라면 마왕성을 수호하는 수 많은 몬스터들이 스크럼을 짜고 덤벼들어야 했지만 페이지 부족 때문 인지, 빠른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 인지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열심히 걸어간 라이는 이윽고 마왕성 앞에 도착하였다. “우엥, 너무 높다.” “과연 마왕답군.” 마왕성은 경사가 가파른 산 정상에 위치해 있었다. 말이 좋아서 ‘성’ 이지 실제로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었다. 바람이 불면 집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돈을 좀 써서라도 보수 공사 한번쯤은 하는 것이 좋을 듯 보였다. 하지만 집주인은 별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루시아와 함께라면 단칸방이라도 행복해’ 라는 것이 대마왕 히로의 생각이었다. 라이는 아장아장~ 마왕성을 향해 산을 올라갔다. 그 곳에는 대마왕 히로가 온갖 폼을 잡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앗! 우리의 기습을 눈치 채다니!” 대마왕 히로는 인상을 쓰며 라이 패밀리를 노려 보았다. “니들은 뭐냐?” 라이는 그 살기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당당히 대답했다. “우, 우리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라이 패밀리에요.” “그래서 세계 평화에 이바지는 했니?”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라이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요. 아직…….” “그럼 세계 평화에 이바지는 언제 할 건데?” “노, 노력할 거에요!” “그래. 좋은 자세다. 앞으로도 매사에 그런 자세로 임하도록.”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듣는 격려의 말에 감동한 라이는 웃음을 머금고 인사했다. 말을 마친 히로는 초가집 안으로 들어갔다. “앗! 이게 아닌데.” “미안해, 이코야.” “아니야, 라이는 아무 잘못 없어. 이게 다 저 대마왕 히로 때문이야.” 뭐가 대마왕 히로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라이는 초가집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무슨 일이야!?” “저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히로는 문 밖으로 얼굴만 내밀었다. “난 지금 루시아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 빨리 말 해.” “저기요…… 그게…….” 라이가 하도 우물쭈물거리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라이코스가 대신 소리쳤다. “우리는 대마왕 히로를 처단하기 위해서 온 정의의 사자다!” “마, 맞아요.” 히로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둘을 훑어 보았다. “정의의 사자치고는 뭔가 좀 빈약해 보이는데.” “아, 아니에요. 우리 정의의 사자 맞아요.” “정말이야?” “예, 정말이에요. 흑흑, 설마 라이의 말을 못 믿어 주시는 거에요? 너무해요. 우에에엥!” 라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히로는 문 밖으로 나와 라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알았어. 믿어 줄게. 믿어 줄테니까 그만 울어.” “흑흑, 정말 믿어 주시는 거에요?” “그래.” 라이가 우는 모습을 본 라이코스는 분노 해서 소리쳤다. “감히 우리 라이를 울리다니! 니가 뭔데 라이를 울려? 니가 뭔데 내 친구 라이를 울려? 니가 대마왕이면 다야? 어디 나도 울려 봐!” 퍼억-! “왜 때려! 왜 때려! 니가 뭔데 때려! 어쭈 잘하면 한 대 더 치겠다. 쳐 봐. 쳐 봐!” 퍼억-! “으아아앙! 우리 이코 때리지 마세요.” 라이는 쪼르르 달려가 쓰러진 라이코스를 껴안았다. “흑흑, 우리 이코에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너도 잘한 거 없어.” 히로는 라이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동글동글하고 통통하게 생긴 라이는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히로는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이로써 감히 나에게 도전했던 라이 패밀리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구나.” 비탈길을 굴러갈 때의 충격으로 깨어난 라이코스는 라이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헝클허진 머리카락과, 흙이 묻은 옷, 그리고 눈물 자국 등. “흑흑, 난 이미 틀렸어, 이코야.” “안 돼, 라이야!” 둘의 생쇼를 본 히로는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웬만하면 포기해라. 니들 지금 뭐하는 짓이냐? 왜 루시아랑 행복하게 사려는 나에게 태클을 거는 거지? 니들에 뭔데?” “절대 포기할 수 없어! 루시아 공주를 납치한 대마왕 히로를 물리칠 때까지 나 라이코스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 감동적인 대사를 외친 라이코스는 멋지게 날아 올랐다. 라이코스 머리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빛을 발하고 있어 이 승부의 당위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라이 패밀리의 승리로 끝날 것임을 은근히 암시해 주었다. 일반적인 소설이선 이런 것을 보통 ‘복선’ 이라 부른다. 아님 말구. 퍼억-! 하지만 레벨의 격차란 엄연히 존재하는 법. 히로의 발차기 한 방에 라이코스는 나가 떨어졌다. 지금 상황만 두고 보자면 대마왕 히로가 이기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러하지 못하다. 원래 스토리 진행상 정의의 편에 서서 악과 싸우는 사람들은 초반에 무조건적으로 밀리게 되어 있다. 왜? 좋은 질문이다. 그 이유는 초반부터 다 이겨버리면 페이지 때우기도 좀 그렇고, 괜히 재미 없는 것 같이 느껴지니까 질질 끌다 이기는 것이다. “과연 대마왕 히로. 너무 강해.” “으아앙! 라이는 너무 아파. 히로 오빠, 미워!” 둘은 부상이 너무 심해 더 이상 싸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 이대로 물러나느냐? 물론 그건 아니다. 이 소설은 어린이용이기 때문에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주제를 후반에서 반드시 부각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어린아이들이 보고 감동 받아 착하게 살지. 물론 몇 년만 지나면 ‘아! 내가 속았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겠지만 어쩌겠냐? 속은 놈이 잘 못이지. ‘포기하지 마세요. 모든 사람들이 대마왕 히로가 사라지길 염원하고 있답니다. 당신들은 정의의 사도에요. 정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도록 하세요. 상품아 맛있는 음식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시구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온화한 목소리. “으윽! 이렇게 강력한 힘이라니.” “앗! 몸이 낫는다!” “정말 몸이 낫네.” 그 목소리는 대마왕 히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히고 라이 패밀리의 상처를 말끔하게 치유해 주었다. 대체 어디서 목소리가 들려왔는지, 그리고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물론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도와줄 거면 진작 도와줄 것이지 왜 한번 쥐어 터지고 나면 도와주는 지, 그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설마 도와주는 사람 마음인가? 새로운 힘을 얻은 둘은 다시금 산비탈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둘이 그 곳에서 본 것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대마왕 히로였다. 고통스러워하고만 있을뿐 쓰러지지는 않았다. 정석대로 피니쉬(Finish)는 주인공들이 끝내야 함으로. “에잇! 총공격이다!” “죄송해요, 오빠.” 둘은 히로에게 달려들어 여기저기를 물어 뜯고 쪼았다. “허억! 내가 여기서 패하다니. 우째 이런 일이…….” 마치 패할 줄 몰랐다는 듯 말한 히로는 바닥에 쓰러졌다. 둘은 헥헥거리면서도 기뻐서 서로를 부둥켜 않고 웃었다. “정의는 승리한다!” “맞아. 이젠 상품으로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어.” 정의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상품을 위해 싸운 사실을 자기 입으로 실토하는 순간이다. 2 대 1로 그것도 남의 도움을 빌어 싸운 주제에 정의 어쩌구 저쩌구 떠들어 대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둘은 기뻐했다. 하지만 기뻐하기는 아직 일렀다. 원래 악을 처단하기 위해선 숨통을 끊어 놔야 하는 법. 어설픈 뒤처리는 후한을 남기기 마련이다. 아무튼 대마왕 히로는 아직 죽지 않았다. 히로는 온 힘을 다해 꿈틀거리며 말했다. “내가 라이 패밀리한테 지다니…… 우째 이런 말도 안 되는 스토리가…… 이 책 판매 부수 안 떨어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악당답게 끝까지 재수 없는 소리를 골라서 한 히로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는 것이 좀 억울했는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후후후, 내가 이대로 물러날 줄 아니? 물론 그럴 순 없지. 기왕 악당으로 설정된 것, 끝까지 치사하게 싸워주마.” 히로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둘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이게 바로 핸드폰이라는 거다. 저번 달에 무려 4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산 거지. 요즘 단말기 값이 많이 올랐더군. 그래서 할부로 샀다. 루시아 것도 같이 사서, 커플 요금제로 등록했다. 루시아와는 러브러브 100분 통화가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오랜 시간 루시아와 사랑을 속삭일 수 있지. 음하하하!” 이동 통신 업체 외판 직원처럼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다 늘어놓은 히로는 핸드폰의 플립을 열었다. “내가 지금 누구에게 전화 거는지 알아?” 도리도리~ “후후후. 바로 라이레얼이다!” “그, 그런!” 라이 패밀리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라이레얼이라니. 설마 그 공포의 초대마왕을 말하는 건가?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거기 라이레얼 핸드폰이죠? 예? 아니라구요? 그럼 댁은 누구세요? 뭐? 세레나? 아하하, 오랜만이야.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어? 나야 뭐 잘 지내지. 그래. 그래. 그럼 잘 지내고 다음에 보자. 그래. 잘 있어. 바이바이~.” 히로는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고 한 동안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실패는 있어도 좌절은 없다……라고 생각한 히로는 다시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딸깍! “여보세요.” - 누구야? “저 히로에요, 라이레얼.” - 뭐? 히로? 너 정말 히로야? “예, 라이레얼. 흑흑, 제가 지금 이상한 놈들에게 맞았거든요.” - 뭐!? 언 놈이 감히 우리 귀여운 히로를 때렸어? “으아앙! 라이레얼이 혼내 줘요.” - 알았어, 히로. 나만 믿어. 거기 주소 불러 봐. “예. 그러니까 여기 주소가…….” 잠시 머뭇거리던 히로는 고개를 들어 라이 패밀리에게 물었다.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되냐?” “여긴 적색 산맥 끝자락이에요.” 라이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예. 여기 적색 산맥 끝자락이래요. 35번 국도를 타고 오시다보면 중간에 갈림길이 하나 있거든요. 거기서 왼쪽으로 꺽어 계속 오시다보면 팻말이 하나 보일 거에요.” - 무슨 팻말? “마왕성이라고 깨끗한 글쓰로 써진 나무 팻말이요. 거기서 조금만 더 직진하시면 경사진 비탈길에 초가집 한 채가 서 있는 것이 보이거든요. 거기로 올라오세요.” - 응. 알았어, 히로. “못 찾겠으면 연락 주세요.” - 그래.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예. 그럼 이따 뵈요.” 통화를 마친 히로는 핸드폰을 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이제 곧 라이레얼이 올 거다. 조직의 쓴 맛을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도망치는 것이 좋을 거다.” “어, 어떡해, 라이야! 라이레얼이 온데.” 라이코스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부르르릉~ 엔진 굉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닌자 ZX-12R을 탄 라이레얼이 산 비탈길을 올라왔다. ‘어떻게 전화하자마자 바로 도착 할 수 있는 거지? 정말 아무리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가 안 되는 설정이다.’ 어찌되었든 놀란 라이 패밀리는 재빨리 초가집 뒤로 숨었다. “라이레얼, 와 주었군요!” “당연하지. 우리 히로가 위험하다는데.” 라이레얼은 재빨리 쓰러진 히로를 부축하였다. 그리고 오타바이 뒤에 태우고 자신도 올라탔다. 히로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라이 패밀리를 무찔러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걱정마, 히로. 내가 나중에 잘 무찔러 줄게.” 라이레얼은 대답을 하며 시동을 걸었다. “지금 어디가는 거에요?” “으응. 결혼식장에. 내가 예식장이랑 드레스까지 다 맞춰났어. 하객들도 전부 불렀고. 히로는 몸만 가면 돼.” “하지만 저는 루시아와 행복한 가정을…….” “그딴 여자는 잊어. 내가 행복하게 해줄 게.” 부아아앙~ 히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라이레얼이 먼저 차를 출발 시켰다. 둘이 떠난 자리엔 자욱한 먼지와 한 남자의 처절한 비명만이 남았다. “안 돼! 나는 반드시 돌아 온다~.” 이렇게 하여 속편을 암시하는 듯한 대사를 남긴 대마왕 히로는 자취를 감추었고, 이 세상은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라이 패밀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래.” 라이는 라이코스를 안고 아장아장 걸어서 비탈길을 내려왔다. 악을 물리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둘의 등 뒤에는 붉은 석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렇게하여 라이와 라이코스는 맛있는 것을 먹으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아님 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