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레이 1권 바람의 시작 1 소환 처음에는 몽롱한 상태에서 그저 느껴지기만 했었다. 감은 눈에 느껴지는 그 무엇. 온 몸을 휘돌아 감싸안는 시원한 느낌. ‘시원하다.’ 온 몸에 감겨들었던 부드러운 느낌이 조금씩 옅어져간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 내리는 듯한 가는 움직임. 아쉬운 듯 손가락을 내밀면 그 끝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가 떨어져간다. 그 따스한 느낌이 사라지면 이번에는 싸아하게 느껴지는 차가움이 몸을 감싼다. 차갑지만 부드럽고, 그리고 아주 익숙한 감각. 그래서 이번엔 휘몰아치는 가운데에서 웅크린다. 자연 스럽게, 눈을 감고서. “경하야~!!!!” “…으응.” “경하야아아!!! 일어낫!!! 일요일이라고 늦잠자는 꼴은 못 봐준다. 일어나!!” “으으으. 응. 엄마.” “안 일어나면 경원이 들여보낸다!” “우우웅.” 경하는 폭신하게 몸에 감겨드는 이불속에 있었지만 갑자기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를 느꼈다. “박경원!!! 어디 있니? 경하방에 들어가서 애 좀 깨워라. 해가 중천에 떴는데. 응? 어디있 냐?” “네~ 여기요. 잠시만요.” 멀리서 들려오는 괴물같은 형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경하는 감겨있던 눈을 번쩍 떴다. 쿵쾅 쿵쾅- 어디 지붕에라도 올라가 있었는지 머리 위에서 아득한 소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시간은 약 20초 정도. “경하 안 일어나니~~~~~?” “일어나요 일어나! 그러니까 형 부르지 마!!!” “안 일어나니까 부르지.” “형이 어떻게 하는지 엄마는 몰라서 그래!!!!” 그랬다. 형이 어떻게 하는지 엄마가 알게 뭐람. 경하는 공시랑 거리면서 최대한의 스피드로 옷을 껴입었다. 조금의 시간이라도 낭비했다가는 오늘은 아침부터 낭패를 보는거다. “제기랄. 형을 왜 부르는 거야. 빌어먹을….” “경하야~~~~~~~~~~~” 멀리서 경원이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제길!~ 일어났으니까 들어오지맛!!!” -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바람처럼 휘몰아쳐 들어오는 것은 검은색의 덩어리. 검은 덩어리는 그 대로 직진해서 침대가에 서있던 경하를 덥쳤다 “우키야약~~!!!” “경하야~~♡♡♡” “우아아아악!!!” “우리 이쁜 경하~~” 비명을 지르다 말고 경하는 황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명을 너무 오 래 질렀는지 그만 실패! -쪼오오오오오옥♡ “으아악!” 요란한 소리에 재차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경하를 누르고 있는 검은 덩어리는 그대로 침대 위에 경하를 눌러서 꼼짝도 못하게 했다 한참동안 입안을 맴돌던 것이 사라지자 경하는 새파랗게 바랜 얼굴로 눈앞에서 빙글 거리는 면상을 향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이 빌어먹을 변태야!!!!! 저리 안비켜어어어어어!!!” “역시. 귀여워. 내 동생이 최고다.” “비키라니깐!! 내가 니 애인이냐!” “애인 할래♡? 기꺼히 봉사해주지.” “으아아아아아악” 매일 아침까지는 아니었지만, 경하는 여느날 처럼 푹 처진 어깨를 가까스로 추스리고는 아 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침부터 괴물한테 당해서 깨다니 정말 기분나빠!! “이제 일어났니? 그러니까 일요일도 좀 일찍 일어나라고 했잖아. 니 형은 너 깨우는게 세 상의 즐거움이라고 하지만…” “난. 싫.으.니.까. 제.발 엄.마.가 깨.우.러 와.요.” 인상을 바악~ 쓰면서 경하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참 신기하기도 하지. 내가 깨우면 안 일어나면서 경원이가 깨우면 1분만에 일어난다니까. 라고 말하며 경하를 향해 방긋 웃었 다. 늦은 아침을 먹으며 경하는 하품을 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온라인 체팅을 하고 잔터라 온몸에 피곤이 잔뜩 남아있었다. 정말이지, 한밤중까지 노는 버릇은 이제 버려야겠군. “어이. 사랑스러운 내 동생. 이제 깼냐?” “그래 깼다. 어쩔래?” “이 자식이 형님을 향해 한다는 소리가!!” “거기서 한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오면 이 국그릇을 형 머리에 뒤집어 엎어버릴테니까. 알아서 해.” 바로 한 살 위의 형을 마구 노려보면서 경하가 말했다. 2남 3녀의 엄청나게 거대한 집안. 경하는 집안의 막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경하는 막내 대접을 그렇게 받고 자라지를 못했다. 형과 누나들이 위로 1년차로 다닥 다닥 붙어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참견이나 보 살핌 같은 것을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막내 일어났냐?” “네. 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식사하고 나면 좀 나와라.” 인상좋게 생긴 경하의 아빠는 달걀 후라이를 입안에 마구 우겨넣고 있는 두 형제를 보면서 말했다. “왜요?” “왜요는 무슨 왜요냐? 간만의 휴일이니 너희들 데리고 산이나 갈까 해서 그러지.” “가시면 약수나 좀 떠오세요.” 설거지를 하고 있던 엄마도 그 위에 한술 더 떴다. “에엑!! 일요일인데 무슨 등산. 나는 안 갈래요!” “형은 가지마. 나랑 아버지랑 둘이 갈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밥 다먹었으니까.” “약수 떠오려면 둘도 모자라. 경원이 너도 가렴.” 엄마가 옆에서 말했다. “에이~ 저 약속있단 말이예요. 경하나 데리고 가세요.” “무슨 애가. 정말.” “됐다. 됐어. 산이라는 데는 가고 싶은 마음만 있는 사람이 가는게 좋아. 얼른 옷 갈아입고 와라. 경하야.” “예!!” 경하는 산을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등산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실제 산을 좋아했다. 도시한복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시원하고 맑고 깨끗한 공기를 좋아했고, 한적한 산길을 힘들여 걸어올라간 후 그 산꼭대기에서 느껴지는 상쾌한 느낌을 좋아했다. 덕택에 경하는 아버지가 산행을 갈 때마다 꼭꼭 따라가고는 했다. 오늘의 산행은 관악산. 어릴 때부터 수십번이나 올라온 산이었지만 경하는 그것이 산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꼭대기 까지 갈까?” “그럼 중간에 내려오시려고 그랬어요?” 경하가 아버지를 향해 반쯤은 야유가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흐음. 나는 기왕이면 말이다. 네가 관악산에 매일 매일 같이 다녔으면 좋겠다.” “에엑!! 또 그 소리!!” 아버지는 경하를 데리고 관악산에 올 때마다 항상 같은 소리를 하는 버릇이 있다. 기왕이면 S대에 들어가서 매일 매일 관악산자락을 올랐으면 좋겠다는 소리였다. 어릴 때야 멋모르고 나중에 자라면 꼭 그러겠다고 했었지만 사실 그게 될 말인가? 중상정도의 성적에 간당간당 매달려있는 성적으로는 사실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 드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네 녀석은 시작이 반이라는 소리도 못들었냐?” “시작이 반은 무슨 반!!! 에이!! 빨리 올라가세요!!” 한참을 걸어 올라가 관악산의 끝자락에 올라선 경하는 탁트인 전경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 이 마셨다. 팔을 뻗어 흘러오는 바람을 느낀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바람. “좋~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바람을 맞는 것은 항상 좋은 기분이다. 그것이 지금처럼 산 위든, 또는 작은 골목을 지나가며 맞는 바람이든 여하튼 바람이라는 사 실에는 변함이 없다. 인기척이 없을 때 바람은 더욱더 세밀하게 느껴진다. 빈틈없이 꽉 짜여진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어도 그 실 오라기 하나하나의 사이로 스며 들 어오는 바람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 느껴진다. 한참동안 흘러오던 바람을 느끼고 있던 경하는 순간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바람이 바뀌네. 저녁때가 다 되어서 그런가?” “경하야!! 이만 내려가자!!” “네!!!” 슬슬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따끈한 바위 위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순간. 부드럽게 몰려오던 바람이 거세게 바뀌어 한꺼번에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분명 단단하게 발바닥에서 느껴져야 할 바위의 감촉은 사라지고 그대로 한없이 아래로 떨어 져가는 느낌. “우. 우아아아아악!!” 세찬 바람이 온몸에 감겨 들었다. 평소 바람을 맞으며 느꼈던 부드러움과는 전혀 틀린 느낌. “우악!! 사람살려!!!!” 경하는 목청껏 소리쳤다. “경하야~ 이 녀석 어디에 있냐!!!” 멀리서 경하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소리는 멀어져가는 기차소리 처럼, 바람과 함께 자꾸만 멀어져 갔다. “경하야~” “아빠!!!!!” 제기랄!! 도대체!!! 저절로 입에서 비명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온몸에 감겨 들은 바람 때문에 경하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물거리며 사라지는 의식. 그 의식의 끝에서 경하는 온몸에 죄어드는 바람과 함께 미친 듯 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 “으. 으윽.” 온 몸 구석구석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가만히 누워 있자니 지독하던 통증이 사라지면서 하나둘씩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감각이 살아 돌아온 팔을 위로 뻗으면서 경하는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푸른빛이 도는 흰색의 천이 가득,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몇 겹이나 드리워진 휘장, 그 휘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침대에 경하 혼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 에엑!! 여긴 도대체!!” 경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자신이 거의 반라에 가까운 상태에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우악!! 뭐야!! 이건!!” 후다닥 있는 대로 시트를 그러모아서 자신의 몸을 가린 경하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 작했다. ‘그러니까 분명 나는 아버지랑 관악산을 오르다가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리고….’ 그리고 분명 눈을 뜰 수조차 없는 돌풍에 휘말렸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한없이 어디론가 그 바람에 실려서 미친 듯이 떨어져 내리던 것까지도. 한없이 떨어져 내리면서 느꼈던 그 감각이 다시 되살아나자 경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길.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 “.????????. (깨어났군)” “우. 우악!!” 갑작스럽게 휘장을 걷고 나타난 허연 수염의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경하는 깜 짝 놀랐다. “?????? ?????????? ???????? ??????? ??????????! (엘의 영향은 그다지 없는 것 같군. 로 운!)” “??.(예.)”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다시 누군가가 불쑥 허연 수염의 할아버지 옆에 나타났다. 그 바람에 놀란 경하는 그만 뒤로 주춤거리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우아아아악!!” 온통 연한 푸른색의 휘장에 감겨 굴러 떨어진 경하는 천에 돌돌 말린 누에고치가 되어 그 속에서 꿈틀거렸다. “으윽. 아파라~.” “.?????????? ?????????? ????? ????????(일단은 말을 통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 겠군. 문 서 대로라면 걱정 없겠지만)” “제기랄!! 도대체 뭐라고 시부렁 대는 거야. 이 바보 할아버지야!!” 꿈틀 꿈틀. 경하가 고치에 말린 채 소리를 질렀지만 그 문제의 바보 할아버지는 들은척도 안한 채 그대로 몸을 돌려버렸다. “이봐!!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으악!” 제길 말이 통해야 뭘 해먹지!! 이게 왠 외계언어냐구!! 경하는 옴짝 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 그만 절망을 느끼고 말았다. 설마. 나 정말로 외계인한테 납치가 된거 아냐? 하. 하지만. “이. 이봐!! 거기 아저씨. 이것 좀 풀어줄래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는 항상 익숙하게 보던 검은색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짙은 회색빛의 눈동자. 마치 무슨 인형의 눈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저기요~ 아저씨?” 하지만 놀람도 잠깐. 일단은 경하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자 상대방도 피식-하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을 보며 경하는 그래도 약간의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경하의 말을 듣자 마자 척척 침대의 반대쪽으로 걸어왔다. 이제야 간신히 풀려나는가 했던 경하는 다음 순간 그 씨익 웃었던 남자가 아무말 없이 자신 을 고치째로 들어 올리자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이봐!! 이거 풀어 달라니까!!!” 얼마나 힘이 좋은지 그래도 꽤 큰축에 속한다고 생각한 자신을 그대로 번쩍 들어올린 남자 의 어깨위에서 경하는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이거 내려 놔!” 경하의 발이 그나마 땅이라고 하는 것에 닿은 것은 그 이름 모를 아저씨의 어깨에서 한참을 버둥거린 후였다. 경하가 있던 방에서 걸어나와서 한참 계단을 내려간 후 지금 경하가 서 있는 곳은 으슬 으 슬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뭔가 고요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아니 방이라고 하기에는 좀 크기가 큰, 돔으로 이루어져 안이 확 트여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그 방의 한 가운데에서 경하는 그나마 몸을 가리고 있던 이런 저런 천쪼가리도 없이 거의 반라의 몸으로 뎅그러니 서 있었다. 경하가 서있는 방은 지하는 아닌 것 같은데도 전체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등이나 횃불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또 하나. 방 어디에도 창 문이 없는 것 같은데 방 전체에 은은한 산들바람 같은 것이 맴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은 지금 홀라당 벗고 있는 경하의 주위에서 하늘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기하군. 어디서 이렇게 바람이 들어오는 거지?’ 잠시 멍청하게 서 있던 경하 앞에 아까의 그 긴 수염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그 할아버지는 경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 ??????? ????? ?????(로운. 조금 물러서 있게.)” “??.(네)” 조금과는 조금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경하는 숨을 꼴딱 삼켰다. 어떻게 된 자초지종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사실 너무나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난 동을 피워 봤자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일단은 시키는데로 가만히 있는 쪽이 훨씬 득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 ???????? ?? ???????? ??????????? .????? ??….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의 풍옥(風玉)에게 명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긴 수염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길고 긴 술들이 잔뜩 달려있는 옷자락이 사르륵 움직이면서 할아버지의 팔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는 마치 주문과도 같이 흘러나왔다. -쏴아아아아. 마치 주문 소리에 감응하는 것처럼 경하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바람들이 조금씩 거세져 갔 다. ‘뭐. 뭐야. 이건.’ 할아버지의 팔이 서서히 올라가면서 경하의 귀에 싸아하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발 조금 앞에 있던 이상한 문양 위로 방안 전체에서 맴돌고 있던 바람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점점 더 거세어지는 바람 때문에 앞을 잘 볼 수는 없었지만 마치 욕조에서 빠져나가는 물의 모양처럼 바람이 소용돌이치면서 한곳으로 뭉쳐지는 것이 경하의 눈에 비쳤다. ‘바람?’ “??????????? ??????????? ????????? ?????? ??????????(풍옥에게 명하니 정당한 율법에 따라 미메이라의 계승자에게….” -쏴아아아아. 바람 소리가 경하의 귀를 때렸다.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경하의 눈앞에 환한 백색의 광채와 함께 둥근 모양의 그것이 점점 실체화되어 나타났다. ‘이. 이건!!’ 쐐액하는 파공성과 함께 그 구슬 모양으로 뭉쳐진 그것이 순식간에 경하의 눈앞으로 달려들 었다. “우. 우아아악!!!” 얼굴로 달려드는 그 바람의 구슬의 기세에 눌려 경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을 팔로 감쌌 다. 화악-하고 바람이 달려드는 느낌에 경하는 자신의 몸이 부웅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 제길!! 바람에 휩쓸리는 것은 이제 죽어도 싫단 말이야!!!!’ 칼날 같은 바람이 경하의 몸으로 파고 들어왔다. 살갗으로 파고드는 칼날 같은 바람. 핏기가 가시는 듯한 그 고통에 경하는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아아아악!!!” “정신이 드나?” 누군가가 경하의 뺨을 찰싹 찰싹 때리고 있었다. 부웅-하고 어디엔가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이. 정신이 들었으면 좀 일어나 봐. 널부러져 있지 말고 꼬마야.” “어디가 내가 꼬마냐!” 순간 들려오는 꼬마라는 단어에 경하는 불끈해서 대답했다. “정신은 들었군. 그럼 빨리 일어나 그렇게 납작 엎어져 있을 시간이 없어.” “웃기지마!!” 소리치면서 경하는 자신의 빰을 때리고 있던 손을 밀어내쳤다. “누가!! 제길 엎어져 있게 한게 누군데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어라?” 경하는 눈을 깜빡 깜빡 거렸다. ‘방금. 이 인간이 한 말이 들린 것 맞지?’ “에. 지. 지금.” “말 더듬지마. 내가 하는 말이 다 들린 것을 보니 일단은 다행이군.” “자. 잠깐!!! 지금!!” “왜? 내 말 이해가 안가나?” 씨익-하고 웃으며 다시 눈앞에 있는 사람이 말을 했다. “너!! 왜 다짜고짜 반말이야! 그리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너가 아니라 로운이다.” “로운이고 자시고 내가 알봐가 아니잖아!” 경하가 화를 버럭 내려고 하는 순간 그 사이에 예의 긴 수염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일단 경황은 없지만 차차 설명해 줄테니 지금은 일단 일어서게. 로운. 쓸데없는 말은 삼가 고, 먼저 자리를 좀 옮기는 편이 좋겠군. 그렇지. 저 소년에게 입을 옷도 갖추어 주게.” “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조금 전까지는 절대 이해할 수 없던 외계언어가 갑작스럽게 자신이 알고 있는 말이 되어 들 려오자 경하는 패닉에 빠졌다. 사실 패닉에 빠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아까부터 자신을 향해 씨익 씨익 웃어 보이면서 반말 을 찍찍 지껄이고 있는 그 로운이라는 남자한테 화가 나 있다는 것이 정답. “자. 잠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아니야. 임마. 대신관님이지.” “로운!!” “아. 네. 알겠습니다.” 장난기 섞인 로운의 행동에 대신관이며 수석장로인 카류는 일갈하여 그를 환기 시켰다. “자. 일단. 이거부터 걸치고.” 로운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있던 망토를 떼어 경하의 몸에 덮어주었다. “먼저 자리부터 옮기자구. 지금부터 그렇게 열을 내면 곤란해. 앞으로 할 일도 많은데.”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거냐니까!! 이 바보 아저씨!!” “아저씨가 아니라니까!!! 이 꼬맹이!!” “꼬맹이가 아니라 박경하다. 바보 아저씨!!” “………….”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로운이 자신을 바라보자 경하는 순간 찔끔했다. 조금전까지 장난기 있게 그를 바라보던 로운의 눈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자신 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연한 푸른색의 눈동자를 보면서 경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경황이 없는 것은 알겠지만 잠시 후에 다 설명해줄테니까 좀 입닥치고 있어!!” “………….” ‘제기라~알!!! 그걸 누가 모르냐 이 바보 멍청이 파란 눈탱가리야!!!’ 욕을 바가지로 하고 싶었지만 경하는 차마 그말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 마구 날뛰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를 곳에 떨어져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무슨 일을 당한것 인지도 알 수가 없는 경하에게는 그저 불안감이 들 뿐이다. 하지만 자신을 깔보는 듯한, 그리고 그 위에 무엇인가 또 다른 감정을 담고 있는 로운의 표 정을 보고 있노라면 가만히 있고 싶지 않을 뿐이다. “좋아. 조용해졌군. 경하라고 했지? 일단 일어서.” “알았어.” 고개를 돌려서 로운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주춤 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경하는 로운이 어깨에 둘러준 망토를 부여 잡고 그 뒤를 따랐 다. 조금 전 그렇게나 불어대던 바람은 이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타박 타박 맨발로 로운의 뒤를 따라가면서 경하는 생각에 잠겼다. 적어도 이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위험 인물들로 보이지는 않는가는 것이 경 하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이었다. 로운을 따라가던 경하는 문득 스쳐 지나가는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았다. 저녁때가 지난 듯 거의 캄캄해진 창밖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 떠 있는 하늘만이 비치고 있었다. ‘하아. 정말.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나. 이상한 사차원의 세계에 빠져든 것은 아냐?’ 그렇게 경하가 어딘지 모를 이상한 곳에 온 하룻밤이 지나려 하고 있었다. ◇◆◇ 언제나 끊임없이 일년 내내 시원한 북풍이 부는 곳 미메이라. 그 미메이라의 중심부 인 수장궁이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 옆으로는 백색으로 빛나는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의 중앙 심장부 대 신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흰색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이 달고 있는 장신구들은 조금씩 틀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장신구를 달고 있는 사람은 대신관이면서 장로회의 수석장로로도 활 약하고 있는 카류와 전 수장이었던 레이죠 장로였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양 옆으로 길게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경하는 그들의 끄트머리에 앉아서 조금은 안절 부절 하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사실 지금 경하는 자신이 어디에 와 앉아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제 이 이상한 나라, 미메이라라는 곳에 와서 하룻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이 되자마자 로운의 닥달을 받고 아침도 못먹은 채 할아버지들이 가득한 이 장소에 끌려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신관이라고 간단하게 소개한 로운에게서 들은 것은 자신이 있는 곳이 미메이라의 신 전이며 아까의 그 할아버지는 대 신관 카류라는 사람이라는 것 뿐이었다. ‘말이야. 이런 경우라면 적어도 소설이나 만화 같은 곳에서는 적어도 왜 내가 이런데 앉아 있는 것인지 장도는 설명해주는게 당연한거라구.’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경하는 차마 그렇게 말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유인즉슨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았고 그나마 자신과 제일 말을 많이 했다 고 생각하고 있는 로운 역시 자신의 옆에 앉아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라 도 묻기 위해서 입을 열만하면 로운이 자신을 향해서 날카롭고도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에 모여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일단 지난 모임에서 여러분 께 말씀드렸던과 같이 오늘 이 모임에 관한 것과 현재 새롭게 계승자가 되신 ‘시안’님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해주섰으면합니다.” 앉아있었던 사람들 중 어제 보았던 그 카류라는 할아버지가 일어나서 말을 했다. 그가 일어 나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소리와 함께 수근 거림 이 일어났다. 계중에는 카류가 말하기도 전부터 경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여러분께 새롭게 미메이라의 계승자가 되신 ‘시안’님을 소개 하겠습니다.” ‘시안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그리고 왜 나는 여기에 불려 와 있는 건지. 정말.’ 카류의 말을 들으면서 경하는 홀로 투덜 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카류의 말이 끝나자 마자 그가 자신의 자리에서 걸어나와 경하의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경하는 점점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에. 자. 잠깐. 이게….’ 카류는 천천히 경하의 앞까지 걸어오더니 경하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십시오. 시안님.” “에?” 조금전까지 자신에게 우락 부락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로운이 갑자기 자신에게 경어를 잔뜩 쓰며 말을 하자 경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안이라는 사람이 그럼 나였단 말야? 하지만. 이게 도대체.’ 뭐가 뭔지 몰라 깜짝 놀란 경하가 로운이 시키는데로 엉거주춤 일어서자 카류가 경하의 손 을 붙들고 가운데로 끌어내렸다. 앉아있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경하에게 집중되었다. “오오!!” “정말이군.” “믿을 수 없지만 정말 가능한 일이었군요.”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을 향해 경하를 세워 놓고 카류는 경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계승의식은 사실 여러분들의 입회하에 이루어져야 했습니다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어제 제 주관으로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순간 사람들의 소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놀라서 그저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던 경하의 눈에 한사람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일 어나자 다른 사람들도 한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고,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있던 레이죠 장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잠시 경하를 바라보면 레이죠 장로가 입을 열었다. “진정한 미메이라의 계승자 시안님께 인사드립니다.” 찰랑이는 옷자락이 내려 앉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경하가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뒤에 서있던 대신관 카류와 로운까지도 레이죠 장로와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 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레이죠 장로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진정한 미메이라의 계승자 시안님께 인사드립니다.” ◇◆◇ -파앙!! 경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그러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리고 여기는 어딘지 말부터 해달라구요!!” 경하가 탁자를 치는 바람에 탁자 위에 놓여있던 물잔 하나가 쓰러졌다. “진정하게.” “지금 진정하게 됐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다가 대뜸. 계승자가 어쨌다느니, 시안이 어쨌다느니….” “그러니까 설명을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미적거리지 말고 빨리 하란 말이예요!!” “좀. 입닥치고 있어!! 제길. 정말 소란스럽군!!” 화를 바락 바락 내고 있는 경하에게 로운이 한마디 했다. “당신이야 말로 좀 입닥치고 있어!!!” “흥.” “로운. 좀 적당히 하게.” 속에서 부글 부글 울분이 끓어오르는 경하와는 달리 로운은 여유자적한 태도로 밥을 먹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있는 중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끌려나가서 뭔가 대단히 엄숙하고 처연한 분위기에 몰렸던 부작용 때문인지 경하는 그 반작용으로 엄청나게 열을 내고 있었다. 가만히만 앉아있어도 머리에서 열이 끌어 오르고 있던 경하는 담담하게 앉아있는 로운을 행 해 마구 말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하는 중이다. “그만 하라고 했지!!” “시끄러워!!” “자꾸 떠들면 말 안해줄꺼야. 꼬맹이.” “어디가 꼬맹이냐!! 꼬맹이는 이래뵈도 2학년이나 되었단 말야!!” “2학년? 그게 뭔데?” “흐으응. 그것도 모르면서 자꾸 나불거리지 맛!!” 아무리 말려도 떠들고 있는 두사람을 보면서 카류는 머리를 짚었다. “자자. 그만하라니까. 일단 경하님. 사정을 말씀 드릴터이니 진정하십시오.” “엑?” 문득 들려오는 경어체에 경하는 움찔했다. 자신에게 반말을 팍팍하는 로운에게는 사실 마구 대들기가 쉬웠지만 무슨 판타지 만화에 나 오는 인물처럼 생긴 대신관 카류앞에서는 아무래도 조금 움츠려 드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시면 처음부터 하나씩 설명해 드리지요. 그러니 이만.”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결국 경하는 포기하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아침식사를 했다. 식탁 위에는 처음 보는 음식들이 쌓여있었다. 일단 식빵과 비슷해보이는 덩어리를 하나 집 어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 들어온 덩어리가 사르르 녹았다. “엄청 달군. 이거 뭐예요?” “빵이지.” “빵?” 이름은 같군, 이라고 경하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그럼 이건?” 흰색의, 그러니까 딱잘라서 말한다면 우유처럼 생긴 것을 가르키며 물어보자 로운이 대답했 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자꾸 덤비지마.” “이. 이봐!!!” “이봐가. 아니라. 로운이다.” “그만 좀 하라니까! 로운! 그리고 그건 루유라고 하는 겁니다. 경하님.” “루유? 우유인줄 알았는데 우웅.” 경하는 컵을 들어서 한 모금 마셔보았다. “우엑 이거 맛 간거 아니예요? 시큼해.” “뭐가? 새콤한 맛이 끝내주는 최고의 루유인데.” 경하는 시큼털털한 루유잔을 내려 놓고 옆에 있던 비스켓 같은 것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것 역시 입에 들어가자 마자 살살 녹아 내렸다. 조금전의 빵보다 훨씬 훨씬 단맛이었다. “으윽. 이것도 달아. 완전 설탕 덩어리네. 제길. 좀 안 단거 없어요?” “달지 않으면 무슨 맛으로 먹어?” “에엑?” 투덜 투덜 데면서 식사를 하는 경하에게 카류가 말했다. “식사를 다하시고 나서 로운과 함께 오십시오. 원하시는 것은 모두 알려드리지요. 그럼 로 운 부탁하네.” “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에? 밥 먹으면 말해준다더니?” “그러니까 식사를 마치시고 오시라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매사에 신경질적이 되는 것이 사람이지요.” 그말을 마치고 카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가 고프기는 매 한가지였지만 계속 투닥거리면 서 싸우는 두사람을 보고 있자니 먹고 싶던 생각이 그만 싸악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자. 그럼 전 이만.” “아. 있다 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아니다. 대신관님이라고 해.” “싫어.” “이 녀석이!!!” “흥! 메~에롱이다!!” 경하는 있는데로 인상을 찌푸려 보이면서 로운을 향해 삐죽 혀를 내밀었다. ◇◆◇ “자. 들어가.” “말 안해도 그쯤은 알아.” “조그만게 자꾸 말대답하기는.” “흥. 덩치만 커다란 멀대 바보.” 끼이익-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환하게 밝혀져 있는 둥근 천장과 함께 넓은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우와- 멋지다.” “감사합니다. 경하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대신관님이라니까. 그런것도 한번에 기억 못하냐?” “그래. 기억 못한다. 어쩔래? “정말 이 꼬맹이가!!” “그만 하게!! 로운 자네는 잠시 밖에 있다가 들어오게. 그리고 경하님은 이쪽으로.”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던 로운은 잠시 경하를 바라보다가 순순히 대답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흐흐흐흐.” 경하는 음흉하게 로운에게 웃어 보이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그렇게 까지 로운하고 싸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뭐랄까?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 때문이랄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조용하게 앉아있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불안했다. 그 때문에 더더욱,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스스로 조금 반성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에 한마디 한마디 꼬맹이라고 부르 면서 빈정거리고 있는 로운의 말을 듣다보면은 참자, 참자.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더라 하고 다짐을 하고 있다가도 그만 발끈해 버리는 것이었다. “자. 이쪽에 앉으십시오.” 자신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가며 말하는 이 카류라는 사람이 오히려 저 밖에서 서성대고 있을 로운이라는 사람보다 대하기가 껄끄러운 것은 역시 사실이다. 속으로 투덜 투덜 하면서 경하는 카류의 안내대로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카류는 경하가 의자에 앉는 것을 보더니 천천히 걸어가서 벽에 있는 긴 손잡이를 잡아당겼 다. 그러자 길게 드리워져 있던 연 푸른 색의 휘장이 가운데서부터 양쪽으로 갈라졌다. “…헤에.” 휘장 뒤편에서 나타난 것은 거대한 대륙의 지도와 같은 것이었다. 커다란 대륙이 하나. 그리고 그 오른쪽 아래에 위의 대륙의 5분의 1 크기만한 섬(?)같은 것 이 있었다. 그 위에 쓰여져 있는 글자는 이상한 모양의 글자 였는데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경하가 그 글자들이 무엇이라고 쓰여있는지 읽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슈레이?” “네. 이것이 우리의 대륙. 아슈레이입니다. 역시 읽으실 수 있군요.” ‘아슈레이? 무슨 아수라 백작도 아닌 것이 무슨 이름이 저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읽히기는 하네요.” 역시 판타지 세계는 판타지 세계인가 하고 경하는 생각했다. “다행입니다. 말은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글까지 읽게 되실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런데 도대체 여긴 어디예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카류에게 경하는 대뜸 질문을 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제일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슈레이 대륙입니다. 그리고 경하님이 계신 이곳은 바로 여기.” 어느새 손에 들었는지 카류는 얇고 긴 막대기를 들어서 한곳을 가리켰다. “바람의 나라, 미메이라입니다.” 멍한 머리로 경하는 카류가 하나하나 짚어가는 나라들을 보고 있었다. 장방형의 거대한 대륙 위의 중심부에 있는 것이 대륙의 이름과 같은 아슈레이라는 곳, 그리 고 그 사방으로 거의 같은 크기로 4개의 나라가 있었다. 바람의 나라 미메이라, 불의 나라 호로스, 물의 나라 나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땅의 나라인 바라스. “자. 잠깐요!! 좀 천천히 해요. 이게 무슨 지리 시간도 아니고 웬…. 으. 골 복잡해.” “처음만 그러실겁니다. 앞으로도 이야기는 많이 남았습니다만. 일단은 대륙에 대한 것은 이 정도로 해두죠. 시간은 많으니까요.” 머리를 쥐어뜯는 경하를 보면서 카류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일단. 우리 미메이라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해드리지요. 이 아슈레이 대륙에는 아까 말씀 드린 신국이 4개 있습니다. 이 세계를 이루는 4개의 물질을 대표로 하는 곳이지요. 그 때문 에 신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만 아무래도 이쪽 아래에 있는 가이칸 제국과 비교 한다면 나 라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각기 가지고 있는 능력과 또 그 힘을 생각하신다면 신국이라는 단어가 절대 부끄럽지 않지요.” 그리고 이어진 카류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아슈레이의 대륙에는 많은 나라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바람과 물과 기타 4개의 신국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이른바 신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신의 힘을 통칭 엘(EL)이라고 한다. 바람의 나라에서 태어난다고 해서 100% 바람술사만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물이나 불, 땅의 힘을 가진 특이한 술사가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능력을 가진자와 그렇지 못 한 자의 출생 비율은 거의 9:1의 비율. 중요한 것은 이 4개의 신국이 아슈레이 대륙 전체에 흐르고 있는 4원소의 힘을 유지하는 역 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그런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듣구요. 그럼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도대체 뭐예 요?” 길고 긴 설명을 듣고 있자니 경하는 점점 더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실제 공부를 싫어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이렇게 본의 아니게 듣고 있는 경우라면 약간 사정이 틀린 것이다. “그게 제일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당연하죠!!” 불끈하는 경하를 보면서 카류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는 쪽 이 좀더 다루기 쉽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미메이라에 대해서 알려드려야 겠군요. 우리 미메이라는 아니 우리 뿐만 아니라 나머지 4개의 신국이 다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제일 큰 과제는 아 무래도 아슈레이 대륙에 흐르고 있는 4원소의 힘을 원활하게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대표인 수장은 대대로 핏줄을 따른 다기보다는 동시대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를 선출하 여 수장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흐응.” 제일 잘난 인간이 왕이 되는 실력주의란 이야기다. 나름대로는 편리한 제도라고 생각하며 경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타고 나는 엘의 능력은 유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전 대 수장의 아들이나 딸이 다음의 수장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제 일을 기억하시 는지요?” “어제요?” “네. 저희가 풍옥의 방으로 모셔가서 계승 의식을 치룬 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풍옥?” “풍옥은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바람의 힘이 실체화 된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미메이라의 수장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전승이자 수장의 증거와도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 다.” “그런데요?” 카류의 설명을 듣고 있다보지 경하는 조금씩 불안해져 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뜸을 들이는 것을 보니 뭔가 자신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훨씬 더 많이 남아있 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풍옥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수장의 능력의 기반이 됩니다. 그 때문에 엘이 약한 사람 은 그 풍옥을 볼 수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드릴 수도 없지요.” ‘그렇다는 것은….’ 카류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경하는 자신의 짐작이 조금씩 맞아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그럼 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뭐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 지 들고 있는 경하. “선대 수장이셨던 레이죠 님께서 가지고 있던 풍옥은 레이죠 장로님께서 나이가 들어가시 면서 힘이 약해져 자연스럽게 장로님의 몸에서 분리되어 어제의 그 장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제 다음대의 수장을 추대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것이 벌 써 두달 전의 일입니다.” “두달이요? 그게 얼마나 되는 건데요?” “보통 해가 지고 뜨는 것을 기준 하루라고 계산을 합니다. 그리고 하루가 30번이 모이면 그것을 한 달이라고 하지요.” “흐응. 제가 있던 곳과 다른 것은 없네요.” “그렇습니까?” 날짜나 시간 같은 것이 경하가 있던 현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경하는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상한데 끌려 온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일단은 자신이 알고 있던, 익숙한 것들이 조금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하튼간에 두달전에 그 일이 생긴후 저희들은 관례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레이죠 수장님의 따님. 그러니까 시안님께서 그 힘을 물려받고 다음대의 수장이 되는 것이 거의 기정 사실이었습니다만….” “그게 아니었다는 이야긴가요?” “잘 아시는 군요. 이해가 빠르시니 다행입니다.” ‘누굴 바보로 아나. 쳇. 그정도 설명이라면 대충 알아 듣는다구!!’ “레이죠 장로님께서 물러나신 후 저희들은 곧 법도에 따라 계승의식을 마련했습니다. 하지 만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시안님의 엘이 풍옥을 받아들이기에는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요.” “물론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경하님께서도 느끼실 수 있겠지만 엘을 가지고 있 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보다 더 강한 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시안님보다 더 강한 엘을 가지고 계신 분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 다.” 그 말을 듣고 경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 했다. ‘힘을 느낀다구?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못 느끼는데?’ “시안님의 여동생이신 시유님도 물망에 올랐지만 시안님보다는 약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고 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두달의 시간이 흘렀지요.” 카류의 목소리가 점점 엄숙해져 갔다. “두달이 지나자 우리는 미메이라에 퍼져있는 엘의 균형이 무너져 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 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 바람의 방향이었는데 보통 미메이라의 바람 은 이런식으로.” 카류가 다시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 미메이라의 중심부에 있는 이 수장궁에서부터 사방으로 소용돌이 모양으로 바람이 부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지만 한달 전 정도부터 이 바람이 모두 북풍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러니까 이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 나오는 것이지요. 미메이라의 수장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 는 현상입니다.” 그러면서 카류가 가리킨 곳은 미메이라의 위쪽, 아슈레이라는 글자만 달랑 써진 작은 동심 원의 땅이었다. “그래서 저희들은 더 이상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수장이 될 분을 이계(異 界)로부터 소환을 하기로 했습니다.” “소환이요? 어째서?” “선대의 대신관으로부터 구전되어 오는 일종의 비전입니다. 미메이라의 사람들중 계승자를 찾을 수 없을 때, 이계의 힘으로부터 미메이라를 계승하라라는 구전이지요.” 잠잠히 듣고 있던 경하는 가슴속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어제부터 설마 설마 하고 있었지만 방금 전의 카류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생각이 그대로 맞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짜로 자신은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알 수 없는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저는 장로회를 소집하여 이계로부터의 소환을 통해 이 미메이라를 계승할 사람을 찾자는 안을 통과 시켰습니다. 그래서 지금 경하님께서 이렇게 이곳에 계시는 것이지요.” 표정이 사라진 경하의 얼굴을 보면서 카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그 비전대로 이계 소환술을 통해 이곳에 오신 경하님은 아주 가볍게 계승의 의식 을 통과 하셨고 그 증거로 어제부터 다시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대로 말 입니다.” “잠깐!! 잠깐 멈춰봐요!!” “네?” “그러니까. 지금. 여기는 현실세계가 아니라. 아슈레이라는 곳이고 저는 소환되어온 사람이 고 그리고 지금 제가 이 미메이라는 나라의 수장이 되었다는 소린가요?” “아직 의식이 더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런게 어디었어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경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까지 그냥 이상한 곳에 떨어졌나 보다 라고 단순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경하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문제가 심각했다. “도대체 그런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그게 왜 난데요? 그럴 이유가 어디 있냐구요!!” 공부하는게 좀 귀찮고 괴물 같은 형이 귀찮고 학교에 다니는 것도 조금은 귀찮았지만 경하 에게 있어서 그것은 현실이었다. 특별하게 현실에 어떤 불만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아무렇지 도 않게 생활하고 있던 경하에게 있어서 카류가 해준 말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아니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가 오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사람을 불러서 어딘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곳 에서 왕 노릇을 하라고 한다면 호락 호락 네! 알았습니다. 하지요. 와. 기뻐라. 신난다!! 라고 할 것 같아요?!!” “…저. 경하님.” “웃기는 소리하지 마세요!! 당장 돌려보내줘요!!” ‘왕 노릇을 하라구? 웃기지마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어!!!’ “진정 하십시오.” “현실이 지긋 지긋해서 어디론가 휙 4차원의 공간에 빠져들고 싶은 사람이면 몰라도 나는 별로 그럴 생각없어요. 저도 제가 사는 현실 세계를 100% 맘에 들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 기는 내가 속한 세계고 그래서 충분히 좋고 만족한다구요.” “…………….” 경하가 패닉에 빠져 소리를 질러대자 카류는 입을 다물었다. 흥분하고 있는 경하에게 지금 어떤 소리를 해도 먹혀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 보다 훨씬 강한 반발에 카류는 적지않게 놀라고 있었다. 강하게 호기심을 들어내고, 식사도 주는 데로 먹고, 그리고 지금까지는 시키는데로 얌전히 따라하고 있던 경하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소리치던 경하는 제풀에 지쳐서 입을 다물더니 오도카니 의자에 앉아서 카류를 노려 보기 시작했다. “돌려보내줘요.” “경하님.” “돌려보내 달란 말야!! 바람의 힘이니 뭐니 내가 알게 뭐야!! 엘을 느낀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마!! 엘이고 뭐고 내가 느끼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당장 돌려보내줘!!” “………….” “데리고 왔으면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도 있잖아요. 빨리 돌려보내주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 을 찾아 보라구요.” 순간 카류는 밀려오는 바람에 잠시 뒷걸음을 쳤다. 당황하던 그는 순간 밀려오는 바람을 맞고 다시 제정신을 차렸다. “엘을 못느끼신다고 하지만 이미 엘을 자연스럽게 쓰고 계시군요.” 조금 전 밀려온 바람은 경하가 자신도 모르게 쓴 바람의 힘, 즉 엘(EL)이었다. 너무도 화가 나자 경하의 의지가 몸에서 바람의 형태로 엘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게 내가 알게 뭐야!! 빨리 돌려보내줘요. 제길!! 난 시큼 털털한 우유랑 설탕덩이를 먹 고는 못산단 말이야!!” 그 말에 카류의 얼굴에 약간 주름이 생겼다. 순간 경하는 아차! 싶었다. 말을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조금전에 먹었던 설탕 덩어리로 가 득한 식탁이 떠올랐던 것이다. ‘제길. 실수야 실수. 빌어먹을 어째서 거기서 먹는 이야기가 나오는거냐!! 요놈의 주둥이 가!!!’ 잠시 시간을 두고 표정을 굳히고 있던 카류는 의외로 경하의 말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지 담 담하게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뭐라구?’ 딱 잘라 말하는 카류의 말을 듣고 경하는 아연해졌다. 불러왔다면 도로 돌려보낼 수도 있을 텐데 그것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세요!!” “잠시 진정하시고 제말을 다시 들어주십시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현재는 불가능합니다.” “네?” “경하님께서 저희가 말씀드리는데로 따라주시고, 그리고 의식을 성공적으로 마쳐주신다면 그때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다른 사람을 찾으라니까요.”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이계 소환술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만큼 가볍게 쓸 수 없는 강력 한 주문입니다. 이미 제가 한번 사용을 한 이상 앞으로 다시 소환술을 쓸수 있을때까지 엘 이 회복되는 기다리데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우우우~ 그런게 어디있어!!’ “그럼 다른 사람이 하면 되잖아요.” “현재 미메이라에서 이계소환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저 혼자 뿐입니다.” 카류는 딱 잘라서 말했다. 사실 방금 말한 것에는 약간의 거짓말이 섞여 있었다. 물론 현재로써는 그 자신밖에 없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하려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엘이 모자른다면 다른 사람의 엘을 빌어오면 그만이다. “그리고 조금 전 아무나.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만은 이계소환술에 의해 불려오는 사람이 아무나 마구 불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쪽에서 소환술을 쓸 때 엘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이 아슈레이의 땅으로 불려오는 사람은 이 곳에 가장 잘 맞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선택되는 것 입니다.” 카류는 눈앞에 앉아있는 소년을 내려다 보았다. 실제 자신도 이 소년이 눈앞에 나타나서 그렇게 간단하게 풍옥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상 당히 놀란차였다. 아무리 소환한 이계의 사람이고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불려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나도 간단하게 경하는 풍옥을 흡수했던 것이다. 선대의 수장만해도 이 계승 의식을 치 르는데 삼일이나 고생을 했던 것을 카류는 기억하고 있었다. 본인은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지금 경하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엘의 파장은 아무리 풍옥 의 힘에 의해 증폭되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정말 강력한 파장이었 다. 카류는 경이로운 힘을 가진 경하라는 소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로서도 경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보내드리고 싶긴 합니다만. 시간이 필요한 것 이고 이렇게 이곳에 오시게 된 이상 이것은 모두 바람의 신 미메이라님의 의지라고 전 생각 합니다.” 경하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카류를 바라보며 절망에 빠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시큼한 우유와 설탕덩어리 빵을 한참이나 먹어야 한다는 소리다. 왜 먹을 것부터 생각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의식주다. 입는 것은 예전부터 보았던 판타지 만화나 소설에서 보았던 것과 거의 같았기 때문에 그리 거부감이 없고, 집이라는 것은 말을 들어보니 이 신전이나 수장궁이라고 하는게 집인 모양 이지만 음식만은 문제가 있었다. ‘돌아가면 제일 먼저 치과부터 가야할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경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일단 돌아갈 수는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기브 엔 테이크라는 소리죠?” “네?” “아니요. 그냥 하는 소리예요.” 판타지 세계에 있는 사람이 영어를 이해할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경하는 입을 다물었 다. 하지만 역시 지금 본의아니게 이렇게 앉아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면 제가 해야할 일이 뭐죠? 그 의식인지 뭔지가 도대체 뭔지 설명해주세요.” “좋습니다.” 카류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난 가장 커다란, 경이로울 정도의 엘을 가진 소년. 경하를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카류는 마음이 놓였다. 카류는 다시 가는 막대를 손에 쥐었다. “그럼 지금부터 경하님께 다른 여러 가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2. 로운 디 로크레슈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는 걸까요?” “과거 종종 행해져왔던 전적도 있으니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시안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짙은 녹색의 휘장 안에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갈색의 로브로 몸을 감싼 남자는 그 가운데에 서서 종종 건네져 오는 질문들에 대해 대답을 했다. “레이죠 장로님께서 시안님을 설득해주셔야겠습니다.” 수석 장로인 카류의 말에 둥글게 둘러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 했다. 금색과 흰색의 보석으로 연한 푸른색의 로브를 장식하고 앉아있던 그 사람은 제 131대 미메 이라의 수장이었던 남자였다. 이제는 원로회로 물러나 그의 딸인 시안에게 그 자리를 넘겨 주는가 했지만 상황은 그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푸른색의 로브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손가락을 하나씩 당겨 굳게 주먹을 쥐었다. 식은땀이 그의 등을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능력에 따라 수장의 지위가 결정되는 그의 나라에서 100대를 이어 내려온 이른바 왕족이라 는 경이롭고도 위대한 전통이 그의 대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뭐니 뭐니해도 우리 일족의 생사와 국운이 걸린 문제입니다. 사사로운 인간적인 감정은 배제될 수 밖에 없겠죠. 시안의 설득은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작게 한숨을 쉬어 내었다. 그 속에 안심의 느낌이 섞여있다는 것을 레이죠 장로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반대하더라도 장로회는 그들이 정한 대로 일을 해나갈 것이다. 그럴바에는 순순히 장로회의 뜻에 따르는 쪽이 자신에게도 또한 자신의 딸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 다. “그럼 날짜는….” “일단 시안님을 설득하는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반 준비 사항은 신전에 일임하도 록 할 예정이니 이곳에 계신 장로님들께서는 오늘 결정된 모든 사항에 대해 함구해 주시길 바랍니다.” 수석 장로 카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는 것을 모두 느끼시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람의 방 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두 알고 계시겠지요.” 카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흔들림이 섞여있었다. 작은 안도의 한숨과 불안, 흔들리는 인간들의 마음이 공기 속에 섞여 들어간다. “더이상 지체하기도 힘든 일.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오늘 모여 주신 분들께 수석 장로로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카류는 한 손을 들었다. 그의 옷에 달려있는 투명한 보석들이 흔들렸다. “그럼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 세찬 바람이 소용돌이처럼 하늘을 질러 올라갔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햇살이 가득한 신전의 가장 꼭대기 위. 그 꼭대기 위의 넓은 공간에 동심원이 몇 개나 겹쳐져 그려져 있는 소환진이 있었다. 천천히 사라지는 바람을 느끼면서, 수석장로이며 미메이라의 대신관인 카류는 그 소환진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사라지면서 그 안에 나타난 소년. 청색의 바지와 연한 녹색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 그 안에 쓰려져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했군. 나름대로는 거의 도박이나 다름 없었지만…. “저 소년입니까?” 카류의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봅니다.” “그렇다면 시안은….” 뒤쪽에서 말을 걸어온 사람은 이미 시안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서 수장의 자리에서 물러 난 레이죠 장로였다. 레이죠 장로는 쓰라린 가슴을 간신히 다 잡으면서 그 소환진 안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바닥으로 하고 쓰러져 있는 까닭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쓰러져 있는 그 소년이 어렴풋이나마 자신의 딸인 시안을 닮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승이 꼭 거짓만은 아니었던 같군요.” “거짓이라면 저 소년이 이곳에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되도록 시안님의 육체나마 남 아있기를 기원했지만….” “………….” “인간이 바라는데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지금 이 소년이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지 않 겠습니까.” 카류는 말을 이으며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앞에서 굳게 입술을 다물고 있던 시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시안은 방금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닐 것 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의 능력이 역대 미메이라의 수장이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직 접 그것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게 되자 생각보다는 훨씬 충격이었다. “원로회의에서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미메이라에 불어오는 바람 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는 이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단다.” 따스하면서도 고통에 가득찬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시안님. 하지만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기에.” “조금. 조금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시안은 황급하게 말을 끊으며 실례를 고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더 이상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기에는 온 몸에 몰아치는 절망과 또한 자괴감이 너무 나도 거세게 밀려왔기 때문이다. 실력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람의 술을 쓸수 있는 신력 그 자체로 수장의 자격이 결정되 는 나라 미메이라. 자신은 그 미메이라에서도 최고의 혈통을 자랑하고 있는 이른바 왕족의, 수장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다음대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 그녀는 피나는 훈련과 수업을 계속해왔다. 그것이 지금 한순간에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시안은 수장궁의 가장 꼭대기.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항상 바람이 가득 몰려오는 수정의 방 에서 생각에 빠져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가 받아왔던 것은 도대체 다 뭐였을까? 무엇이 부족하기에, 미메이라의 바람이 바뀌어 가는 이 시점에서 자신은 이렇게 무력하게 앉아만 있어야 할까? “정말 말도 안 돼.” 어두웠던 방이 이제 서서히 저 멀리 평지에서 떠오르고 있는 태양 빛으로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그 빛이 가득, 그 방을 메웠을 때, 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환술을 써야한다고 들었습니다. 소환술 정도의 큰 술을 시행하려면 대신관님 한분의 힘 으로는 어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지금까지 소환술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엘이 필요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환술을 도울 사람이 필요하시겠지요? 제가 하겠습니다. 적어도 그것이 계승자로써 교육을 받아왔고 또한 그 의무를 지고 있던 제 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흔들림 없이 말하던 시안의 눈빛을 기억해내면서 카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그가 쓴 소환술은 이계(異界)에서 생명을 가진 한 사람을 소환해오는 이른바 미메 이라의 신전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일종의 비전이었다. 소환술이라는 것은 보통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등을 원하는 곳으로 불러내는 것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환술이었지만 그 대상이 이계에 있는 것이라면 사정이 틀려진다. 이계로부터의 소환술을 쓰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소환술을 위해 사용되는 엘의 수십배가 필 요했던 것이다. 이계로부터 현계로, 그것도 물건이 아닌 사람을 소환한다는 것은 거의 자신이 가진 모든 엘 을 소비해야한다. 때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계 소환술. 소환시 사용되는 피 소환자의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소환되어 오는 사람의 능력도 그 비례로 커진다. 엘은 엘을 부른다는 가장 단순하고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소환술에도 그대 로 정확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풍옥을 흡수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은 안되지만 시안은 현존하는 가장 최고의 능력자. 그런 시안의 목숨을 대가로 하여 소환되어 온 소년. 실제 과거에 있었던 이계 소환술을 시행하면서 많은 능력자들이 목숨을 잃었었다. 하지만 카류는 시안의 육체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것에 적지않게 동요하고 있었다. 적어도 시안 정도의 능력자라면 육체는 남아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되돌이 킬 수 없는 고개를 넘어선 것이다. 더 이상은 포기도 할수 없고 두려워 할수도 없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소년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카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소년을 어서 옮기게. 로운. 곧 의식을 행해야 할테니. 그리고 장로님……” “…………….” 한없이 환진 위에 누워있던 소년을 바라보던 레이죠 장로는 카류의 말에 간신히 고개를 돌 렸다. 이제 그 소년은 로운의 팔에 안겨 사라지고 없다. “레이죠 장로님?” “카류.” “예.” 몇십년 동안이나 흔들림없이 자신을 눈을 바라보던 레이죠 장로.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레이죠 장로는 그 소환술의 순간에 갑작스럽게 수십년의 나이를 먹어버린 사람처럼 그렇게 멍하게 앉아있었다. “카류. 이것이 옳은 일인가?” “…………” “시안이 희생하여 불러온 소년이 정말로 이 미메이라의 구원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가?” “누구보다 강한 엘의 소유자 이셨던 시안님이 불러온 소년입니다.” “그렇겠지.” “누구보다 강하고 바른 심성의 소유자 이셨으니 시안님께서 이끌어온 저 소년도 시안님의 빈자리를 충분히 채우실겁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카류는 고개를 숙인채 일어 날줄 모르는 레이죠 장로의 옆에 서서 한없이 하늘을 바라보았 다. ‘저의 의무입니다. 아버님을 설득해주십시오. 누구보다 강한. 미메이라를 위한 사람을 불러 들일겁니다. 바로 저.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가 그렇게 할것입니다.’ 시안의 마지막 목소리가 다시 그의 귓가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시안님이….” “자네 마음이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네. 하지만 이것은 시안님 본인이 원하신 것이 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한참 일을 하다 말고 대신관 카류에게 불려가서 로운이 들은 말은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 다. “이미 결정된 일이네. 시안님께서도 많은 생각을 하신 모양이니까. 자네는….” 꼭 쥐고 있던 주먹이 떨려왔다. 시안이 계승의식에서 실패를 한 후 실의에 빠져있다는 소리는 익히 전해들었던 사실이었다. 지금은 이미 자신이 신관으로써 살고 있지만 한때 자신의 약혼녀였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 다. 가느다란 선으로 이루어진 단아한 얼굴, 허리까지 내려오는 환한 플라티나 블론드가 그의 기억 속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어릴 때부터 그녀가 미메이라의 계승자로써 피나는 훈련을 해왔던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 다. 고집스럽게 입술을 악다물고 힘든 수행을 말없이 견디어냈던 사람이 바로 시안이었다. 약혼자의 자리를 내놓고 대뜸 신관이 된 것은 사실 시안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수장 의 남편감으로 만들어 놓고 권력의 중심부에 서려고 했던 그의 아버지가 싫었기 때문이었 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당하고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를 떠올리 면서 로운은 이계소환술 직전에 만났던 그녀를 떠올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네요. 로운.” “시안님.” “이미 결정한 일이예요.” 그녀는 딱 잘라서 말한 후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로운.” “네 시안님.” “로운은 내게 뭐라고 할 자격 같은거 없어요. 알고 있죠?” 로운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하려던 단어를 목구멍으로 삼켜 버렸다. 약혼자였던 관계라고 해 도 그 사이에는 애정의 느낌보다는 오누이 같은 감정이 더 많았던 사이였다. 때문인지 그가 약혼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채 신관이 되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단 한마디의 말밖에 하지 않았었다. ‘로운이 결정한 일입니다. 제가 왈가 불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라고 말이다. “난 로운 같은 고집쟁이는 아니예요. 단지 내가 나서는 것은 미메이라를 위해서라는 대의 명분도 있지만 그 보다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해도 나는 수장 계승자였어요.” 흔들리는 입술.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이 로운의 시야에 들어왔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그리고 나보다 더 이 일에 걸맞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 의무이고, 제 바램이예요. 수장 계승자였던 저 시안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 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같은 것은 필요없습니다. 어차피 이계의 사람을 불러온다면 아마도 저는 몸을 숨 겨야 할겁니다. 그리고 제가 안한다고 하면 어차피 다른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겠죠? 제 목숨하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희생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제 뜻에 따라주세요. 로운.” 끊어질 듯 들리지만 확고한 의지로 가득차 있는 시안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떠 올리다 말 고 로운은 문득 현실로 돌아와 고개를 돌렸다. “제길. 좀 설탕 좀 덜 넣은 빵 없어요? 이런걸 도대체 어떻게 매일 먹어?” 투덜 투덜 말할 때마다 입에 넣은 빵조각이 튀어나온다. 그 시안이 자신을 희생에서 불러온 녀석이 저런 놈이라니!! 로운은 벌컥 벌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내리눌렀다. “주방장이 최고의 솜씨를 발휘해서 만든 빵이다. 어차피 마구 처먹고 있으면서 그렇게 투 덜거리지 말란 말이야!!” “제길. 최고고 뭐고 내가 알게 뭐야!! 내 입에 안 맞으면 그걸로 땡이지. 제길.” 말끝마다 제길 제길 하는 욕설을 꼭꼭 붙여가며 말하는 밉살스러운 소년. 물론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소년도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갑작스럽게 이계로부터 소환되어와서 뜬금없이 미메이라의 계승자가 되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당 황스러울지는 짐작가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언제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던 시안에 비하면 이것은 땅과 하늘 차이. 로운은 마음속으로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 -벌컥 벌컥 벌컥. 눈 앞의 소년은 물을 마구 들이키고 있다. 최고급의 루유는 절대로 마시지 못하겠다고 버티 는 바람에 루유잔은 치워지고 대신 들어선 것이 물잔. 경하가 마실 수 있는 것은 물과 과일을 갈아 만든 과유-주스-뿐이다. “제길. 이렇게 단 거를 먹고 댁들은 이빨도 안 썩어?” “꼬마. 듣자 듣자하니까 자꾸 반말을 하는데 좀 입 좀 다물 수 없나?” 로운의 말에 마구 빵사이에 야채를 잔뜩 끼워서 우물 거리고 있던 경하가 고개를 들었다. “밥 먹지 말라는 소리야? 입을 다물라니.” “그것도 그래!! 먹으려면 그냥 먹지 왜!!! 빵 사이에 그딴걸 잔뜩 끼워서 먹는거야!!!” 보기만해도 방금 먹은 빵이 마구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다. “아? 이거? 뭐 햄버거는 아니지만 이게 어때서? 게다가 이렇게 달디 단 설탕 덩어리를 나 더러 그냥 먹으라는 것은 3일 내로 포동 포동 찌워서 구워 삶아먹겠다는 의지로 밖에 안보 여.” 이계에서 온 소년은 먹는 것도 정말 이계스럽게 먹고 있다. 그것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로운에게 경하가 한마디 했다. “뭘 그렇게 먹는 걸 쳐다봐. 세상에서 제일 추잡한게 먹는거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거라는 거 몰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안과는 전혀 들린 소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의 얼굴에서 시안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로운. 로운의 인내심은 극에 극으로 치달아 오르고 있다. “으으윽. 제길 이 따위 녀석이.” “응?” 한입 가득 빵을 물고 있던 경하가 로운을 쳐다보았다. “아니야. 먹어. 팍팍 먹으라고. 빵에 야채를 끼워먹든 고기를 끼워 먹든. 잔뜩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먹으라구.” “물론 당근이지 아저씨.” “어째서 내가 아저씨냐!!” “이봐요. 아저씨. 내가 살던 세계에는 그런 소리가 있어. 아저씨. 라고 불리는 것을 두려워 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 그때가 바로 진짜 아저씨가 되어 있다는 거야.” “뭐라굿!!! 너 오늘 나한테 좀 맞아 볼래!!” “우우아악!! 사람 살려!! 아저씨 얼굴이 사람 잡아요!!” “조용히 하지 못해!!” 경하가 후다닥 일어나 도망가자 그뒤를 로운이 주먹을 쥔채 쫓아갔다. 결국은 머릿속에서 간당 간당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인내심의 줄이 툭, 끊어져 버리고 만 로운이였다. ◇◆◇ “지금부터 로운이 경하님께 가벼운 변환술을 걸을 겁니다.” “변환술이요?” “네. 어려운 것도 아니고 몸에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니 그냥 가만히 서 계시면 됩니다. 자 연스럽게.” 뚜벅 뚜벅, 경하는 대신관 카류가 시키는 데로 빈공간에 걸어가서 우뚝 섰다. 스스로도 이렇게 시키는데로 그대로 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집으 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현재로써는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는 노릇. 기왕 이렇게 된 것 일단은 따라주고 볼일이라는 것이 경하의 생각이었다. 이런 묘하게 강한 적응력에 경하 스스로도 상당히 놀라고 있기는 했다. “이쯤이면 되요?” “네. 경하님. 자. 그럼 로운 시작하게.” 경하의 앞에 로운이 척척 걸어와 섰다. 쫘악 - 하고 자신을 로운이 자신을 노려보자 경하는 대뜸 카류에게 말했다. “저. 할아버지. 저 아저씨 얼굴 말고 할아버지가 하면 안돼요?”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얼굴이 아니라고 했지!!” 카류는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던 로운이 경하가 한마디 하자마자 바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로운.” “아. 대신관님 죄송합니다. 저 꼬마가 자꾸….” “자꾸 나더러 저 아저씨 얼굴이 자꾸 꼬마라고 하잖아요!! ” 뚱한 표정으로 말하는 경하를 보고 카류는 그제서야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자. 경하님. 경하님께서 로운이라고 부르시면 로운도 꼬마라는 소리는 안할겁니다. 자.이 제 그만하고 중요한 것은 호칭이 아닙니다. 로운!!” “네. 대신관님.” 카류의 말에 순간 평정을 찾은 로운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경하와 티격 태격을 한 것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 지만 간만에 좀 경건한 마음으로 변환술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경하가 거기에 자 꾸 초를 치는 소리를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평소의 그는 언제나 약간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 기사의 자리에서 물러나 신관이 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감정을 자제해왔던 그였다. 하지만 그 강한 자제심이 저 꼬마를 보기만 하면 울컥 울컥하면서 슬며시 사라진다. “자. 경하님.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라는 느낌으로 서계시면 됩니다. 모든 것은 여기 있는 로운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로운은 두 손을 앞으로 가져와 가볍게 주먹을 주었다. “로운 디 로크레슈.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흐르기 시작한 바람과 함께 섞여들어가기 시작했다. 로운의 손이 펼쳐지자 그 손에서부터 바람의 형태가 가시화 되어 위이잉 소리를 내면서 사 방으로 흘러나갔다. 쐐엑하는 가벼운 파공성과 함께 로운의 손에서 일어난 동그란 바람이 로운의 손을 떠나 경 하에게로 몰아쳐갔다. “우. 우웃!!”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경하는 그만 눈을 감았다. 눈도 뜰 사이 없이 몰려오는 바람. 부웅 하고 경하의 몸이 떴다. 날카롭게 몰려오던 바람이 가닥 가닥 나뉘어 경하의 몸을 감 싸 안았다. 부드러운 바람들이 실날처럼 나뉘어 경하의 몸 속으로 파고들자 경하는 그 이상스러운 감각 에 비명을 질렀다. “으. 아아악!!!” 세포 구석 구석으로 파고드는 바람. 경하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마구 욕을 퍼부었다. ‘어디가!!! 어디가!! 가만히 서 있으면 되느냐구!! 이런거면 미리 말을 하지!!’ -풀썩!! 경하가 속으로 욕을 퍼붓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공중에 떠 있던 경하는 힘을 잃고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윽!! 으윽. 엉덩이야. 좀. 미리 미리 이런건 말을 해주면 안돼요? 왜 자꾸 떨어뜨리는 거 얏!! 아우. 엉덩이 아파.” 굼실 굼실 부딪힌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경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공이로군. 수고했네 로운. 역시 최고의 술사야. 자네는.” “아니. 과찬이십니다.” 로운은 카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이번에 맡은 임무중에서 제일 하고 싶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로운은 앞에서 잔뜩 얼굴을 찌푸린채 일어서는 경하를 바라보았다. “우씨…. 어라?” 경하는 잠시 우뚝 일어서다 말고 몸을 굳혔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이상한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이게 뭐야!!” 고개를 숙이자 하늘 하늘 하는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졌다. 고등학생 답게 스포츠 형의 머 리를 하고 있던 경하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손가락에 잡힌 머리카락은 검은 색이 아니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투명한 백색에 연한 푸른 색이 감도는 플라티나 블론드. “이. 이게 무슨 짓이야!!!” 퍼득이는 경하의 눈빛이 로운에게 쏟아졌다. 로운은 꿀꺽 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머리카락하나 가지고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경하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거의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사라락 하면서 경하의 변해 버린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경하가 자신도 모르게 발 휘한 바람의 힘 때문이었다. “이봐요!! 할아버지 도대체 이게… 우 우아아아아악!!” 경하는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목을 감싸쥐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변성기가 지나서 낮게 울리던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분 나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하이톤으로 바뀐 목소리가 경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경하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금 잡은 자신의 목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바로 아담스 애플. 경하는 부들 거리는 손을 천천히 자신의 가슴쪽으로 옮겼다. 판판하게 내려가는 것이 당연해야 할 경하의 손이 무엇인가 보드라운 굴곡이 시작되는 곳에 멈추었다. 경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얇은 옷이 봉긋하게 솟아 올라와 있었다. 물컹 하는 감촉이 경하의 손가락에서부터 신경을 타고 올라와 경하의 뇌리를 강타했다. 덜덜덜 경하의 몸이 떨렸다. 느릿 느릿한 손으로 경하는 허리를 묵고 있던 허리띠를 풀렀다. 고요한 가운데에서 대신관 카류도, 로운도 아무말 하지 않고 경하가 하는 양을 그대로 지켜 보고 있었다. 경하는 살짝 바지를 들었다. 마치 무슨 징그러운 것이라도 보는 듯한 경하의 몸짓.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슬로우 모션 같았던 경하의 몸짓은 거기서 끝났다. “으아아악!!!!” 경하는 바지를 놓고 그대로 로운에게 달려갔다. 온몸으로 로운의 몸을 가격하자 미치 피하 지 못했던 로운은 그자리에서 넘어졌다. 경하는 그 위에 올라타서 로운의 멱살을 잡고 고함 을 질렀다. “빨리!! 당장!! 원래대로 돌려놔!! 이 변태 아저씨야!!” “………….” “이 꼬라지가 뭐야!!!!” 경하의 빨갛게 핏발이 선 눈동자가 로운의 얼굴 앞에서 흔들렸다. 로운은 잠시 경하의 얼굴을, 아니 이제는 시안의 얼굴로 변해버린 경하의 손목을 자신의 커 다란 손으로 붙들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안님. 그만하십시오.” “뭐가 어쩌고 어째!!!!” “…옷이 벗겨지셨는데요.” 경하는 어딘가 얼빵한 얼굴로 스윽.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흐트러진 옷가지 사이로 하 얀 언덕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잘록한 허리를 지나서… “우. 우아아아악!!!!!!” ◇◆◇ 경하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에는 항상 보던 자신의 얼굴이 아닌 전혀 다른 타인의 얼굴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채 자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그 자체 만을 보자면 그렇게 크게 충격을 먹지는 않을 정도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얼굴과 거의 흡사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피부색이 조금 밝아지 고 눈동자의 빛깔이 상당히 옅어지고 기본색이 푸른색으로 변해있기는 했지만 본래의 얼굴 에서 그렇게 커다란 변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딱 봐서 남자로 보였던 얼굴이 선이 전 체적으로 가늘어져서 여자의 얼굴로 보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얼굴 이외를 생각하면 경하는 머리가 띵해졌다. 일단 머리카락 부터가 완전히 변해 있었다. 허리를 넘어가는 치렁 치렁한 백 금발. 거기에다 괴기스럽게도 연한 푸른 빛이 감도는 것이다. 자꾸만 얼굴로 쏟아져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견딜수 없어 손에 잡히는데로 일단 묶어버렸다. 머리까지는 그래도 봐줄 수가 있었다. 허리를 넘어드는 머리카락이야 뒤로 묶어버리면 그만 이고 정 귀찮으면 잘라버리면 되지만 아무래도 용서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몸!!!! 얼굴이 끝나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바닥까지. 몽땅!! 여자로 바뀌어 있었다. 나긋나긋한 어깨선이 시선을 흐르게 한다. 그 시선은 봉긋하게 텐트를 치고 있는 가슴을 지 나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선에서 일단 멈춘다. 그리고 그 아래 쭉쭉 바진 힙선과 다리선. 경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 제길 건강한 고교 2년생을 뭘로 보는 거야!” 경하는 물끄러미 자신의 몸을 바라보다가 그만 음흉한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옷으로 몸을 감싸버렸다. 자신의 몸에 흥분하고 있다는 자체가 너무너무나 변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길. 두 번다시 거울 따위 보나봐라.” 마구 흥분해서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소치를 쳤지만 그것은 정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자신이 마구 날뛴 탓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 대신관이나 아저씨 얼굴의 로운이나 경하가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해도 마치 소귀에 경이라도 읽은 것처럼 들은 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택에 경하는 원래 자기가 머물던 방으로 돌아와서 혼자서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곧바로 현실세계로 보내준다고 했었다. 말만하면 마구 쏘아붙이는 로운도 참을 수 있었고 빙그레 웃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 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대신관 할아버지도 참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되는 것만큼은 못 참아 주겠단 말야!!!!!’ 경하는 푹신한 침대 한 가운데 오도카니 앉아 마구 홀로 이불에다가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으윽. 도대체 이 꼬라지로 뭘 하라는 거야. 제길.”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고 경하는 투털 투덜 거렸다. 그때였다. “시안님?” “누구야!!!” 경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카류입니다.” 스윽- 바닥에 옷자락을 끌면서 대신관 카류가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이게 괜찮아 보여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면 반대하실 것이 분명하기에….” 당연했다. 대뜸, 댁을 여자로 만들겠소~라고 말한다면 세상에 누가 ‘어머나~정말이요? 어 서어서 바꾸어 주세요.’라고 말할 남자가 어디있겠는가. 건강한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아니 이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참. 변태들은 듣자마자 OK!! 할지도 모르지.’ “아시고 계시면 원래대로 바꾸어 주세요.” “안 된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시안님.” “시안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쫘악 하고 대신관 카류를 쪼려보았지만 웃는 것인지 무표정인 것인지 구분도 안가는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는 묵묵하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필시 ‘그것은 안되는데요’라고 말하 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비밀입니다. 이 신전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은 대신관인 저와 로 운 그리고 원로회의 장로들 뿐입니다.” 경하의 귀가 솔깃해졌다. 모름지기 비밀이라고 하는 것에는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사실. 현재 경하님의 모습은 원래의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였던 시안님의 모습 그대로입 니다.” “그게 도대체 뭐가 비밀이라는 겁니까?” “원래대로라면 시안님이 수장이 되셨을 겁니다. 문제가 없었다면 말입니다.” “무슨 문제요?” 경하는 약간 짜증이 났다. 뭐든지 말해주는 것 같은 카류였지만 결국 카류는 사실 일이 벌 어지고 난 뒤에야 찔끔 찔끔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게 때문이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다이렉트로 이야기 해요. 저 지금 기분이 별로니까.”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기밀이라서.” 카류는 앞에서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는 시안-경하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다. “시안님께서는 현재의 미메이라에서는 가장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장이 되시기에는 능력이 모자랐지요. 그래서 수장 계승의식에서 실패를 하시고 실의에 빠져 계셨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계 소환술을 쓰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들으신 후 자 진해서 그 소환술에 응하기로 결정을 하신거지요.” “………….” 지금 이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경하는 약간 의심을 했다. 그냥 여자로 바뀐 이유만 설명을 해주면 될텐데 쓸데없이 말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계 소환술은 이곳 아슈레이내에서의 소환과는 달라서 굉장히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 “그. 엘 뭐시기 하는거요?” “그렇습니다. 이계에서 누군가를 소환하는 것은 한사람의 힘으로는 턱도 없이 힘든 일이지 요. 때문에 보통 보조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요?” “시안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미메이라의 다음 수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분이지요.” 경하는 뜸을 들이는 카류의 말을 들으면서 조금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계소환술을 자진해서 돕겠다고 말씀을 하셨죠.” “그런데 왜 제가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 카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대놓고 당신을 불러오느라고 죽었습니다라고 말하기엔 앞에 앉아있는 소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시안님께서는 경하님을 불러오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힘들 소진하셨습니다. 그래서….” 순간 어두워지는 카류의 표정을 경하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 계시지 못하시는 거지요.” 열심히 설명을 하는 카류를 보면서 경하는 순간 한기를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불러오기 위해서 그 시안이라고 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인가 요?”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틀리지는 않습니다.” 카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시안님께서는 계승자로써 수행해온 자신의 힘이 모자르다는 것을 아시고 계셨기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신 겁니다. 그것을 시안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실 수 있는 최대의 의무라고 생 각을 하신 것이지요. 그 덕택에 저희는 최고의 힘을 가진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올수 있었습 니다. 피 소환자의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불려오는 피소환자의 능력도 그 비례로 커 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말하자면….” “그 정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소린지 알아요.” 간단하게 정리하면 현재 가장 큰 힘을 가졌던 시안이라는 여자가 자신을 희생함으로 현실세 계에서도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을 소환했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경하는 나름대로 조금 어깨가 우쭐했다. 자초지종은 잘 모르겠고 왜 그 런 것인지도 알리 없지만 자신의 능력이 최고라고 해주는데 기분 나쁠 사람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자신을 불러오기 위해서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죽었다는 것은 역시 속이 뒤집 힐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아니 죽었다는 사실 보다는 그 무게에 짓눌려야 하는 그 상황 자 체가 너무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 시안이라는 여자가 될 필요가 꼭 있는거예요? 어차피 소환 한건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원로회의 장로님들께서야 알고 계시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놓고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시안이라는 여자가 힘이 모자라서 어쩔수 없이 나를 불러왔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요?” 경하의 말처럼 만사가 간단하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고 카류는 생각했다. 카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대답했다. “그게 불가능합니다. 이계 소환술이라는 것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비전입니다. 미메이라 의 계승자를 이계로부터 소환해왔다는 것을 미메이라의 국민들이나 기타 다른 나라에서 알 게된다면 말하자면 혼란이….” “혼란이라고 해봤자 이런 저런 소리 떠드는 것 뿐이잖아요. 어차피 여기 미메이라나 뭐라 고 했더라 물인지 땅인지 하는 나라나 다 비슷하다면서요. 게다가 이런 상황이라면 그 신안 이라는 사람은 뭐가 되는 거냐구요. 그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해서 그랬는데….” “그래도 정통성이나 기타 알력에 문제가 생깁니다.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시안님 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수장이 되었다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안해 하고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때문에 되도록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 안님께서 희생하신 것을 물거품이 되게 만드는 짓이지요. 경하님께서는 그것을 알아주셨으 면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제가 이곳에 있는 한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입니 까?” “그렇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카류의 말을 듣자 경하는 가슴이 쿠궁하며 내려앉았다. 설마 설마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하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완전 흑빛이 되어 버린 경하를 보면서 카류는 한마디를 더 했다. “지금 모습이 변하기는 하셨습니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환술일뿐입니다. 진짜로 변한 것 은 아닙니다. 시안님께서 원래의 시안님보다 능력이 뛰어나시니 곧 이런 변환술정도는 금방 배우실 수 있게 되고 일단 이곳을 떠나서 아슈레이의 중간지대로 들어서시면 변환술을 푸시 고 원래의 모습으로 다니실 수도 있습니다.” “네?” “일단 힘 그 자체에 있어서는 미메이라의 어느 누구도 경하님의 엘을 따라갈 사람이 없습 니다. 남은 것은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라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거. 제 힘으로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당연합니다. 변환술 자체는 로운의 엘에 의한 것입니다만 그것을 지금 현재까지 강력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시안님 본래의 엘입니다.” 순간 경하는 띵- 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다른 어 느 누구의 힘도 아닌 자신의 힘이라는 소리다. “현재로써는 시안님의 힘이 더 크기 때문에 변환술을 걸은 로운의 힘으로도 원래의 모습으 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간단한 원리입니다. 힘이 작은 자는 힘이 더 센자의 술을 풀 수가 없습니다. 시작한 것은 로운이지만 그것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은 시안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까작 까작 자신을 괴롭히는 로운보다 힘이 세다는 소리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하지만 역시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이 모습을 바꿀 수 없다는 소리는 역시나 듣기 싫은 소리일 뿐이다. “잠깐요!! 그럼 말이 안되잖아요. 제가 로운보다 힘이 세다면 환술에 걸릴 수도 없는 거 아 닙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때 시안님의 경우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계셨지요. 그런 경우에는 로운의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경하님께서 이미 변환술 을 완벽하게 받아들이신 상태이니….” “쳇. 말도 안 돼.” 자신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기 보다는 말하자면 아무것도 몰랐을 뿐이다. 교묘하게 자신을 좌지우지하는 대신관 카류에게 경하는 화가 났다. “여하튼 앞으로는 시안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저나 로운이나 다른 사람도요. 경하님께서 도 지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는 경하라는 이름을 잊어주십시오.” “그건 싫은데요.” 경하는 말을 마치자 마자 풀썩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누워 버렸다. “시안님.” “더 할말 없으니까 가보세요.” 경하는 팩 하고 돌아 누웠다. 왠지 찔끔하고 눈물이 나왔다. 카류는 잠시 그 옆에 서서 동그랗게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경하, 아니 시안의 모습을 보았다. 커다란 침대가 그의 몸 전체를 감싸안고 있었다. 카류는 그에게 손을 내밀다가 멈칫하고는 그대로 손을 내려버렸다. 위로해 줄 수는 없었다. 시안에게 못할 지을 하고 있다는 것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강제로 소환되어 와서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알고 있는 사실도 하나 없고 오로지 혼자 서있는 소년.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 가끔씩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 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메이라를 위해서 그리고 아슈레이를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채찍질 했 다. 원래의 시안이 자진해서 나서지 않겠다고 했어도 자신은 시안을 강제로라도 이계 소환 술에 응하도록 했을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악역을 자초한 것이다. “그럼 쉬십시오. 시안님. 내일 부터는 힘든 나날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로운이 조금 시안 님께 불손하게 굴더라도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카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말해버린 것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주는 쪽이 앞으로 도 좋을 것이다. “시안님께서는 이전에 로운이 신관이 되기 이전까지는 약혼자였던 분입니다. 설사 신관이 되어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고 하더라도 로운의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입니다. 부디 이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카류는 돌아보지도 않는 상대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탁. 들어왔을 때와 다름 없이 조용하게 카류가 방을 나가는 소리가 경하의 귀에 들렸다. 짧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조금전까지는 박경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자신을 시안이라는 인물로 바꾸어 버리는 선고소리 같이 들려왔다. 찔끔거리며 흘러나오던 눈물이 이제는 주르륵 흘러내렸다. 꼭 끌어안은 팔에 몽클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감촉에 경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시안이라구?” 조금 전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인물을 떠올렸다. 계승자로써 교육을 받다가 자신이 기대에 미치치 못하는 인물임을 깨달았을 시안이라는 사 람을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경하를 불러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사람. 시안을 생각하자 욱해있던 경하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래도 자신은 이곳에서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고 돌보아 주고 투덜거리면 그 신경질을 받아줄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해 야할 일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경하를 불러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시안 보다는 훨씬, 좋은 팔자인 것이다. “제길. 멋모르는 사람을 불러 놓고 너를 불르느라 우리 공주님이 희생되었으니 너는 그 희 생을 생각해서 잘 해야한다라고 말하면 다 인줄 아나?” 경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빌어먹을 누가 나 부르기 위해서 죽으라고 시켰냐구.” 자신의 머리 위에 다른 사람의 목숨이 얹어있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무거워서 고개도 들지 못할 만큼 무거운 그 무엇인가가 자신을 짖누르는 느낌마져 든다. “정말. 이거 나한테 그 여자 영혼이라도 씌어있는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등골로 차가운 기가 싸악- 하고 지나갔다. “우씨.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새우처럼 몸을 작게 구부리고 있는 경하의 팔과 다리에 폭신한 살결이 와 닿는다. 순간 경하의 입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장실 갈 일이 걱정이네….” 수분섭취를 최한도로 줄인다면 화장실 가는 일을 조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경하는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과는 천지 차이. 무슨 일에나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해버리면 곧 마음가짐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 경하의 성격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고민해 보았자 그것은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폭신한 침대에 푹 빠져있던 경하의 눈이 조금씩 감겨갔다. 남자에서 여자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돌아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그냥 해주면 되는 것이다. 자기를 불러오기 위해서 누가 희생을 했든 안했든 자신은 그냥 주어진 일을 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곧 돌아갈 수 있 는 것이다. 그리고 하라는데로 해준다면 자신이게 이미 사라져 버린 사람에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하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숨소리가 잦아들면서 경하는 그대로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3. 기엘 디 하라스다인 “크. 크악!!” “멍청한 녀석!! 그게 그렇게 간단히 되는 건 줄 아나!!” “넵!!”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는 상사의 화난 듯한 목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시 검을 잡고 제자리에 서라!!” “네. 알겠습니다.” 연한 푸른색이 나는 은색의 검, 일명 라이트라고 불리는 검은 미메리아의 로열 나이트들에 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검이다. 다른 검과는 달리 순수한 엘의 특수한 파장을 사용하여 만들 어진 라이트는 일반적인 검보다 훨씬 가볍고 튼튼한데다가 만들어질 때부터의 엘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다. 그리고 로열 나이트에게 주어지는 라이트는 최고의 솜씨 를 가진 기술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엘을 불어넣어 만들기 때문에 여타 다른 검들 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라이트의 손잡이를 가볍게 잡고 휘두르는 남자는 궁정 기사단 소속의 로열 나이트 기엘 디 하라스다인. 미메이라의 귀족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의 푸른 빛이 도는 플라티나 블론드가 강렬 한 태양빛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면서 수련생들을 독려했다. “루크. 마란. 다시 대련. 루크,” “넵!!” “허리쪽에 항상 약점이 생긴다.” “알겠습니다!!” “하앗!!” 기합 소리와 함께 두사람의 검이 다시 격돌했다. 검과 검이 마주쳐 백색의 불꽃이 발생되었 다. 챙강 챙강하고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기엘은 라이트를 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을 살짝 풀었다. “자 시간이 없다. 내일이면 시안님께서 계승 의식을 마치시고 돌아오신다.” 우와-하는 함성소리가 훈련장에 가득 찼다. 로열 나이트 중에서도 기엘이 맡고 있는 일은 로열 나이트를 지망하는 수련생들을 지도, 감 독, 훈련 시키는 일이었다. 약관 24세의 로열 나이트에게 맡겨지기엔 조금은 과한 임무였지 만 타고난 검술가인 기엘에게는 나름대로는 만족할 만한 임무였다. 수장 계승 의식을 마치고 신전에서 돌아오는 계승자를 수행하는 것은 로열 나이트들에게 있 어서는 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대 행사다. 수장이 바뀐다는 것은 왕권의 이양이기에 어떻게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력 지상주의인 미메이라에서는 수장의 계승식 자체가 정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사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본래의 의미의상의 커다란 의의도 가지고 있는 것 이다. 그것은 수석 기사단 로열 나이트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일년에 한번 있는 정규적인 로열 나 이트 선발대회이외 또 한번 기사가 될 수 있는 특별선발 대회가 열리게 된다. 때문에 수행 식이라는 행사는 수련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기엘과 현재 수련생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 들에게는 다른 어떤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 수련생들을 바라보고 있는 기엘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하라스다인님.” 기엘에게 흰색의 봉투들 들고 찾아온 사람은 기엘의 비서관 이었다. “아. 로엔. 무슨 일인가.” “수석 기사단장님의 서신입니다.” “서신? 명령서가 아니고?” 기엘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보통은 명령에 명령이 꼬리를 이어갈 뿐이다. “고맙네.” 기엘은 로엔으로부터 흰색의 봉투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펼쳐보았다. 서신은 수석 기사단장인 모데스 디 크로운의 자필로 되어 있었다. 서신의 내용을 읽어가던 기엘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가 다음 순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 만 로엔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로엔. 긴급명령을 하달하겠네.” “네.” “시안님의 수장 계승 수행식이 이틀 뒤로 연기 되었네 그리고 나는 지금 급히 대신전으로 가야하니 자네가 기타 임무를 대리하여 처리하도록.” “네? 어째서?” “나도 이유는 모르니까 묻지 말고. 그럼 부탁하겠네.” 기엘은 날이 파릇하게 세워져 있는 라이트를 검집에 밀어 넣었다. “당장 시행하게.” “네. 알겠습니다.” 기엘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기사단장으로부터 온 서신에는 단 두 줄 만이 써 있었다. 하나는 수행식이 이틀 뒤로 연기 되었다는 것 또 하나는 서신을 받는 즉시 대신전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정도라면 일반 명 령서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기사단장의 친필로 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있 다는 소리였다. 기엘은 궁금증이 마구 치밀어 올랐지만 일단은 명령아닌 명령에 승복하고 그대로 따랐다. 대신전은 수도에서 말을 타고 약 한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훈련을 하다 말고 그대로 출발했기 때문에 기엘의 복장은 정규복장이 아닌 조금은 가벼운 복장. 대신전에 그대로 들어가기에는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즉시 출발하라는 명령이 기에 그에 따랐다. 기엘의 애마는 기엘의 바램을 저버리지 않고 한시간도 안되어서 대신전에 다다랐다. “워어어어.” 대신전이 눈앞에 보이자 기엘은 말을 멈추고 일단 내려왔다. 미메이라에서는 수장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말이나 기타 운송수단에 탄 채 대신전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로열 나이트 기엘 디 하라스다인 명령을 받고 대신전에 도착했습니다.” 굳게 닫쳐있는 대신전의 문 앞에서 기엘은 커다란 목소리로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커다란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어서와. 기엘.” “에? 로운님?” 신전의 문이 열리고 나온 사람은 의외로 뜻밖의 인물이었다. 물론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 었다. 지금은 신관으로 봉사하고 있지만 그를 맞이한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로열 나이트 154기 동기생인 로운 디 로크레슈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째서 로운님께서 직접….” “뭐 조금 놀랐겠지만 그래도 영광으로 알라고 신관 후보생이 아닌 내가 직접 마중을 나왔 는데 말이야. 그리고 닭살스러운 존대는 집어 치워.” 원래대로라면 기엘이 로운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신국인 미메이라에서는 기사보 다 더 존중을 받는 것이 신관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지금부터 할 일은 일반적인 명령과는 무관한 것이니까.” 기엘은 피식 거리며 웃고 있는 로운의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나 참. 애들 훈련시키다가 그대로 뛰어 왔군. 복장이 그게 뭐야?” “아. 급히 가라는 명령이라서.” “그래도 그렇지. 여기서 앞으로 이틀은 머물텐데… 하는 수 없지. 일단은 들어와.” “아. 예.” “존대말 지꺼리는 집어 치우라니까!!” 로운은 기엘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들어서자 몇 명의 신관 후보생이 다가와 기엘 로부터 말과 경갑옷과 라이트를 건내 받았다. 로운은 안내로 신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기엘은 슬쩍 로운의 얼굴을 살폈다. 로운은 특이한 존재였다. 미메이라의 귀족 최고위를 차지하고 있는 로크레슈 집안의 장남에 다가 로열 나이트,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차기 수장 계승자인 시안의 약혼자라는 위치를 한 순간에 내 던지고 그가 신관이 되겠다고 했을 때의 소동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전대 미문의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가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만 있었다면 지금쯤에는 수석 기사단장 까지는 아니더라도 출세 에 출세를 거듭할 수 있었던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미메이라 대신전의 일게 신관일 뿐이다. “오랜만이군. 기엘 너랑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렇군요. 가끔 수련원에 와주셨었으면 좋았을텐데. 수련생들에게도 도움이 되구요.”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노릇은 아니니까.” “그건 그렇겠습니다만.” 뚜벅 뚜벅 소리와 함께 기엘의 장화에 달려있는 작은 금속 장식이 대리석과 부딪히면서 맑 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반말을 하라고 강요를 해도 굳건하게 버티는 기엘. 어릴적 죽마고우라고 해도 역시 가볍게 말을 놓는 것은 역시 거부감이 일었다. 뭐니뭐니해 도 기엘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궁정기사였기 때문이다. “여긴 여전히 조용하군요….” “뭐. 나름대로 비상시라서. 견습생들은 주(主)신전 출입이 금지 되었거든.” “그건 그렇고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차피 알게 될텐데 별로 안달할 것 없어. 기엘. 일단 옷을 갈아 입고 잠깐 숨을 돌리라 구. 그리고 부탁이니까 제발 나랑 둘이 있을때는 그러지마.” 이제부터 사실을 알게 되면 저 단순해 보이는 기엘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를 상상하며 로 운이 말했다. 로운보다는 훨씬 더, 머릿속부터 발끝까지 기사 그 자체인 기엘은 로운의 말에 의문을 가지 면서도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라고.” ◇◆◇ “네? 지금 그 말씀은….” 기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혹시 잠시 잠깐이라도 뭔가 잘 못들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 구심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대신관 카류나 그 옆에서 묵묵하게 얼굴을 굳히고 앉아있는 로운의 얼굴을 볼 때 그것은 절대로 환청도, 거짓도 아닌 진실임을 말해주 고 있었다. “시안님께서 계승의식에 실패하시다니.” 기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파급이 클까봐 기밀로 유지되고 있었네.” “………….” 기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만큼 기엘에게 있어서 시안이 계승의식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커 다란 충격이었다. 사실 기엘 스스로도 약간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벌써 한달 전에 신전으로 갔던 시안이었 다. 보통 빠르면 하루 늦어도 한달이내에 수행식이 열리는 것이 관례이며 그 기한이 지나있 다는 것도 기엘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더 걸리는 것뿐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수행식이 열린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그였던 것이다. “며칠 전부터 바람이 원래대로 불기에 저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너무 놀라지마. 지금부터 이야기 할 것은 그보다 몇배는 놀라운 사실이니까.” “에?” 기엘이 고개를 돌려 로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운은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 다. “대신관님.” “놀라는 것이 당연하네. 하지만 자네를 이렇게 은밀히 부른 이유는 다른데 있네.” “………….” “이계 소환술에 대해 들어 본일 있나?” 순간 기엘은 다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로열 나이트가 된 후 그 기록을 접해 본 일은 있습니다만 정확하게는….” 기엘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기엘의 기억 속에 있는 이계 소환술은 그냥 교본에 있던 기본적인 지식 뿐이었다. 실제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소환술이었기 때문이다. 카류는 그런 생각에 빠진 기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안님께서 계승의식에 실패하신 직후부터 장로회가 소집이 되었었네 그리고 우리는 이 사태를 타계하기 위해 비밀리에 이계 소환술을 시행했네.” “………!!!” “계승자가 의식에 실패할 경우, 그리고 어느 누구도 풍옥을 계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계로부터 최고의 능력을 가진 자를 소환하여 수장의 위를 이어나가는 것이지.” “그런….” 메마른 목소리로 담담히 말하는 카류의 얼굴을 보면서 기엘은 순간 얼어 붙었다. 시안이 계 승의식에 실패 했다는 것도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그것이외에 기엘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경악스러움이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계소환술에….” 미메이라에서 이계소환술을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신관 카류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던가 수준급이상의 바람술사들만이 그 존재를 알수 있는 것이다. 설사 다른 사람이 이계 소환술에 대한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술사들에게는 소용없는 최고의 술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소환술과는 달리 이계 소환술은 소환술사 이외에도 또 한명의 보 조자가 필요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가네. 하지만 입밖에는 내지 말게나. 중요한 것은 어디 까지나 우리 미메이라를 위해 최선책을 택했다는 것 뿐일세. 덕택에 우리는 최고의 엘을 가 진 소년을 이곳으로 불러 올 수가 있었지.” “엘만을 따진다면 최고지. 다른 것은 아니지만.” 카류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운이 불쑥 말했다. “로운.” “아. 아닙니다. 대신관님.” 기엘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들은 말은 국가 최고 기밀 사항인 동시에 정말로 충격 그 자체였기에 기엘은 제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많이 놀랐겠지만.” 그런 기엘의 모습을 보면서 카류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었네. 이런 사실이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특히 다른 신국이나 기타 국가들에게 알려지게 된다면 그 이후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판단을 했지.” 사실이 그랬다. 방금 전 이야기를 들은 기엘 마져도 이런데 이런 사실이 다른 이들에게 알 려지게 된다면 그 영향은 정말 무시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기엘의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 “그렇다면 저를 이렇게 부르신 이유는 무엇이신지?” “소환되어 온 소년은 이제 곧 만나게 되겠지만 이곳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바가 없네. 그 소년의 엘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어느 누구도 따라올수 없을 정도로 최고 수준이지만 아직 그 엘의 운용법도 모르고 있네. 계승식이 이루어질 이틀 후까지 적어도 간단하게나마 궁정 예의나 기타 의전에 관해 자네가 좀 힘을 써주야 하겠기에 이렇게 부른 것이지.” “자. 이야기는 끝났으니까. 이만 꼬마를 만나러 가자구.” “자. 잠깐. 대 신관님. 그런 일이라면 차라리 궁정 의례관을 부르는 쪽이 좋았을텐데요.” “이 사항은 모든 것이 최고 기밀일세. 아는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지. 어차피 자네는 계승의식에 참가하여 계승로(繼承路)에 동참하게 될테니 처음부터 자네가 맡는 쪽이 무리가 없지.” “예에--? 어째서 제가.” 계승자가 풍옥을 계승한 후 마지막으로 치루어야 할 계승로에 동참하는 자는 일반적으로는 로열 나이트에서 선발된다. 하지만 자신이 그 대상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로운이 추천을 했지. 자네가 적격이라고 말이야. 입도 무겁고 나이트로써의 능력도 최고라 고.” 기엘은 반 원망스러운 눈으로 옆에 유유자적하게 앉아있는 로운을 바라보았다. “로운!!” “미안.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게 너 밖에 없어서 말이야.” “그래도.” “여하튼 간에 현재로써는 최고의 나이트는 너잖아. 그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인걸. 안그 래?” 한꺼번에 밀어 닥친 난관에 기엘은 순간 휘청했다. 물론 자신이 계승로에 동참할 기사가 되지 않을까 라고 어렴풋이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원래 최고의 능력을 가진 기사가 계승로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수련지 도관 이라는 위치 역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나이트가 담당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수련 지도관이 된 나이트보다는 그 다음의 나이트가 계승로에 동참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아니면 그 반대의 상황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 설마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야. 자자. 꼬마를 만나면 또 한번 놀라게 될테니까. 심장 단단히 잡고 있으라구.” “하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시안님을….” “그쪽은 나중에 이야기를 해줄테니까.” 기엘은 로운이 시키는데로 휘청 휘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기엘에게 로운이 선고하듯 말했다. “참. 미리 말해두겠는데 그 꼬마를 부를때는 꼭꼭, 반드시, 절대로 그리고 아무리 싫다고 해도 시안이라고 불러. 대신관님 명령이야.” ◇◆◇ “아. 할아버지 오셨어요? 식사중인데 드실래요?” 시안은 빵을 반으로 갈라서 버터-버터라고 하기에는 좀 달지만-을 좌악 바르면서 밝게 말 했다. 시안의 앞에는 음식들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또 먹는 거냐? 허락한다면 배라도 갈라보고 싶은 심정이군. 도대체 하루에 4끼나 먹어치 우다니.” “이봐. 아저씨 얼굴. 자꾸 따지지 마요. 건강한 대한민국 고등학생한테 4끼는 기본이란 말 이야.” “괴물.” “괴물을 무슨 괴물이야. 막상 먹을 때는 나보다 훨씬 더 먹는 주제에. 어? 그런데 그 뒤의 그 형은 누구?” 시안이 말하는 순간 로운의 이마에 불끈 핏줄이 솟아올랐다. “이봐!! 저 녀석은 나랑 한 살 차이 밖에 안나는데 어째서 저 녀석은 형이고 나는 아저씨 야!!” “아저씨 얼굴이니까 아저씨 얼굴이라고 한다고 그랬지!! 자꾸 따질래?” 언성이 높아가는 와중에 기엘은 문가에 멍하게 정신을 잃고 서 있었다. 조금 전 받은 충격도 일생동안 받을 모든 충격을 한번에 몰아서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기엘은 거의 혼이 빠진 상태로 하얗게 되버린 머리를 간신히 목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들었던 내용은 다 뭐야.’ 비장감이 가득찬 어조로 긴박감에 휩싸여 말을 하던 대신관 카류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지만 지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분명 시안은 이계 소환술에 동참했음이 틀림이 없다. 함구령을 받은 것도 방금 전. 하지만 지금 그 시안은 자신의 눈앞에서 마구 큰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로운과 싸우고 있다. 그뿐만 이 아니었다. 언제나 과묵하고 조금 장난기는 있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의 친구 로운이 언성을 마구 높이면서 시안과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저씨가 싫으면 그 뒤로 홀라당 넘긴 머리부터 좀 처리하고 와!!” “내가 왜!!” “그럼 싫다는 소리도 하지 말란 말야!! 이 똥고집!!” “이 XXXX!! 너나 고집피우지 말란 말야!! 내이름은 로운이다!!” 헉헉하고 로운이 숨을 몰아 내쉬었다. “흥. 결국 내가 로운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는 거지? 아저씨 얼굴?” 시안이 히죽-하고 웃어 보였다. 순식간에 벌어졌다가 끝맺어진 설전의 승리는 결국 시안에게 돌아갔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로운은 악마같이 웃고 있는 시안을 마구 노려보았다. “흥. 입가에서 떨어지는 빵조각이나 주어 먹고 말해. 꼬마.” 하지만 로운도 그대로 패배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흥. 죽었다 깨어나봐라. 내가 로운이라고 하나.” “너어---!!” “그만 하게 로운. 자네도 참.” 그때까지 가만히 상황만 지켜보고 있던 카류가 간신히 사이로 끼어 들었다. “시안님 소개 하겠습니다. 시안님께 바람술과 검술을 가르쳐 드릴 분입니다.” 스윽하고 카류가 물러 서면서 문가에 서 있던 기엘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정신을 놓고 있던 기엘은 뻣뻣하게 걸어와서 시안의 앞에 섰다. “로열 나이트 기엘 디 하라스다인. 시안님께 인사 드립니다.” 정신은 빠져있는 상태였지만 기엘은 몸에 배어있는 격식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시안에게 경의를 표했다.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안이 빵을 오물 오물거리며 먹다가 대답했다. “아아. 난 가짜 시안이니까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 저기 아저씨 얼굴처럼 반말 팍 팍해도 되니까. 그리고 시안이라고 부르지 말고 경하라고 불러요. 쳇.” “하. 하지만.” 가짜 시안이라는 말에 기엘은 순간 정신을 차렸다. 분명 진짜 시안이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 실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시안, 가짜 시안은 얼굴도 똑같고 목소리도 똑같았다. 하지 만 진짜 시안이라면 저렇게 로운에게 마구 반말을 지껄이면서 설전을 할리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우연치 않게라도 궁에서 마주치게 되면 살짝 목례를 하면서 살포시 웃어 보였던 본래의 시안과는 천지 차이. 그 강력한 갭 사이에서 기엘은 방황했다. “밥 안먹을래요? 아참. 이거는 내 입에 맞춘 거라 좀 안 맞을려나?” “시안님.” “……….” 시안이라고 불러도 대답없는 상대에게 카류는 한숨을 한번 내 쉰 다음에 천천히 말을 이었 다. “시안님. 앞으로는 시안님을 경하라고 부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시안님께서 아무 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것에 따를 사람도 따를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도 명심하십시 오.” 상황과 관계없이 열심히 먹는 행위에 치중하고 있는 시안에게 카류가 말했다. “그리고 식사를 하시고 나면 여기 있는 기엘에 말에 따라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시안은 먹을 것을 먹다말고 손을 멈춘다. “경하라는 이름은 당분간은 적어도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은 잊어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외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해드릴 수 있지만 그것만큼은 안됩니다.” 딱딱해지는 분위기. 그 사이를 시베리아 바람 같은 것이 지나갔다. 경하는, 아니 이제부터 시안이라고 불릴, 소녀 아닌 소녀인 시안은 입을 한자나 내밀고 있 다. 카류의 말을 들은 그 순간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빵조각이 딱-하고 중간에 걸려서 넘어 가지 않는다. 눈을 들어서 카류와 기엘 그리고 아저씨 얼굴의 안색을 살피지만 아무리 해도 자신의 주장 은 씨알도 안 먹힐 사람들. 시안은 목구멍에 걸린 빵을 간신히 삼키고 대답했다.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말 안해도 알아요. 시키는대로 다 하죠. 젠장할.”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는다. “알았다고 했잖아요. 시안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맘대로 불러요.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했 잖아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소리 몰라요?” “……….” “아아 내가 살던 곳의 속담이예요. 에이 무슨 말을 못한다니까.” “하하하.” 카류는 어색한 분위기를 덮어버리려는 듯 억지 웃음을 자아냈다. “여하튼 식사를 마치시는게 좋겠습니다. 시안님.” “…제길. 알았다고 했잖아!!” “그리고 되도록 원래 사시던 이계의 독특한 단어같은 것은 되도록 사용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시안은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파악하고 상위에 던져 버렸다. “쳇. 정말이지.” 투덜 투덜거리면서 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갔다. 기엘은 아무말도 못하고 그런 시안을 계속 바라보았다. “뭐해요? 아 그러니까. 기엘이라고 했나? 그냥 기엘이라고 부르면 되요?” “아. 네. 그렇습니다. 시안님.” “대충 시안이라고 불러요. 님은 무슨 님이야. 닭살돋게.” 탈탈거리며 걸어가나는 시안의 뒤로 어정쩡하게 기엘이 따라 나갔다. ‘하아. 정말 이게. 저 시안님은….’ 눈앞이 깜깜한 기엘이었다. ◇◆◇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시각. 기엘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착찹한 기분 때문인지 그의 몸 안의 힘, 즉 엘도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아.”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신전 뒤쪽으로 넓게 조성되어 있는 풀숲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있는 나무들 사이에 서서 그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앞으로 팔을 뻗 었다. 한팔을 앞으로 뻗고 손가락을 살짝 벌리고 그는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엘을 발동 시켰다. “엘-루하.” 엘의 운용법을 수행하는 가장 기초적인 연습방법중의 하나로 손가락을 벌리고 팔에서부터 옅은 공기의 흐름을 만들어내서 손가락 사이로 흐르게 하는 방법이다. 말로는 가볍게 설명 되지만 그 흐름을 깔끔하게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마구 불규칙적인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자신의 의사대로 컨트롤 하는 일. 이 기본적인 엘의 운영에서 수많은 바람술이 시작된다. 한차례의 바람이 가닥가닥으로 나뉘어 우거진 잎사귀들을 흔들며 사라지는 순간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러왔다. “언제봐도 네 녀석의 엘-루하는 정교하군.” “로운?” “연습생 시절 때도 마찬 가지였지. 순수한 엘은 내가 더 뛰어났다고 해도 나는 너처럼 정 교하게 바람을 다루지는 못했었지.” “그런 소리 하지마. 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따라갈 수 없었던 상대라구.” “하하하. 그럼 서로에게 조금씩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나는 네녀석의 무신경 할 정도로 대범한 정신력만큼은 정말 부럽다고 생각했었거든.” 엘의 운용은 각각의 바랍술사의 성격에 따라서 여러 갈래로 나뉜다. 단순하게 육체적인 완 력으로 변환 시키는 것에부터 시작해서 복잡하고 기교까지 필요할 정도의 고난도의 운용까 지. “피곤하지 않아?” “피곤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 “하기사. 그 꼬마녀석하고 있다보면 아무리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이마에서 혈관이 뚝뚝 끊어지는 기분이지. 그래도 나보다는 네녀석이 훨씬 사정이 좋은거라구. 기엘. 처음에는 더 심했었어.” “…………” 심술궂은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말하는 로운의 얼굴을 보면서 기엘에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쯤. 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 “…………” “변환술은 네가 걸었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와진 것 아니야? 보통의 너라 면 그런 단순한 말장난이나 입씨름 따위는 하지 않았잖아.” “신경쓰지마.” 로운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기엘은 순간 로운의 얼굴에서 어떤 표정을 보았다. “시안님 얼굴을 보는게 힘든거지?” “…………” “아무리 네가 원하지 않았던 관계라고 해도 시안님은….” “입닥쳐!!!!” 로운이 고합을 쳤다. “그녀석의 얼굴만 보면 벌컥 벌컥 화가 치밀어 올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아무리 설 명을 하려고 해도 그 녀석은 모른단 말이야. 빌어먹을!!” 로운은 옆에 있던 나무를 주먹으로 치면서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심정을 알기나 해?!!! 그 얼굴을 보면 단 한마디라도 쏘아 주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다 구!!”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로운의 목소리. 기엘은 그런 그의 뒤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역시 사랑한 거야?” “세상에는….” 고개를 숙인 로운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랑 말고도 얼마든지 많은 감정이 있어.” 쏴아-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두사람의 사이로 지나갔다. 그 바람은 두사람중 어느 누구도 일으킨 바람이 아닌 순수한 미메이라의 바람. 그 바람을 맞으면서 두 사람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로운이 보통때와 별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되돌아와 기엘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기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로운의 옆에 앉았다. 먼 하늘 구석이 조금씩 밝아져오고 있다. “계승로에 너와 내가 가게 된다구?” “그래.” “너는 그렇다 치고 난 왜 끌어 들였어.” “글세? 먼길이 될지도 모르는데 아무나 끌고 갈 수는 없잖아. 마음도 맞아야 하고. 그래서 머리를 돌려봤더니 나오는 결론이 너였다.” “무슨 생각으로 승낙한거야? 난 네가 계승로만큼은 절대로 따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설마 시안님께서 유언이라도 남기신 건가?” 기엘의 말에 로운은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사실 유언이라고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도 유언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골치덩이 문제덩이 유언. “지금 그 꼬마의 존재 자체가 시안의 유언이라면 유언이겠지. 뭐. 오래된 기억의 반로라고 이름 붙이기도 그렇고 추억을 되새기며 과거의 약혼녀를 위해…라고 이름 붙이기도 거창하 지만 시안이 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마도 살아서 무사히 계승식을 마쳤다면 아마 도 너와 내게 같이 가달라고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하기사 시안님께서 함께, 라고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것은 우리들 뿐이었으니까. 어렸 을 때 뿐이라고는 해도.” “명령 불복종 같은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어. 수장 계승에 관한한 모든 권위는 신전이 제 일 순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덩치큰 아기들이 득실거리는 수련원에서 널 빼내는 것쯤 은 일도 아니라구.” “반론의 여지도 없군.” 기엘은 지례 포기해 버렸다. 로운이 결정한 것이라면 아마도 절대로 틀림없이, 그대로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로운은 단지 ‘기사따위 그만 두고 신관이 되겠어.’라고 말한 다음 다음날 모든 것을 때려 치우고 진짜로 신관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가야한다면, 그리고 네가 가자고 하니까 가지. 뭐 죽기야 하겠어?” “어? 몰랐어? 기록상 수행 기사의 사망률은 수행 신관 사망률의 배를 웃돈다구.” “너어---!!!!” 장난처럼 내 질러지는 주먹을 막으면서 로운은 하늘이 울릴 것만 같은 소리로 웃어버렸다. 기엘도 로운 못지 않게 하늘의 별이 떨어질 만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적막. 풀포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깔린 곳에서 기엘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시안님. 장례식은 어떻게?” “살아있잖아. 장례식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런가?” “…그래.” 사라져 가는 어둠과 함께 두사람의 격한 감정도 조금씩 가라 앉았다. 떠오르는 새벽의 해를 보면서 두사람은 소근 소근, 때로는 침묵으로 아주 오래간만에 맛보 는 새벽의 고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 “기엘. 멀었어요?” “아니 이제 곧 입니다.” 마차의 휘장을 살짝 걷고 시안이 기엘에게 말했다. 기엘은 말을 타고 마차 옆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은 마차 안에서 꼼짝않고 앉아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역시 처음으로 밖이라는 곳 에 나온 시안은 떠나기 전에 목이 아프게 카류로부터 들었던 주의 사항은 모조리 한 귀로 흘러 들었는지 연신 휘장을 걷어내고 바깥의 경치를 보며 감탄성을 지어내고 있었다. “우와. 죽인다.” “마음에 드십니까?” 어린아이 같은 시안의 태도를 보면서 기엘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뭐 꼭 들판 전체에 과산화 수소를 마구 들이 부어서 탈색시킨 것 같지만 뭐 그럭 저럭 괜 찮은데요?” “과산화 수소요? 그건 뭡니까?” “아아. 내가 살던 세계는 뭐랄까. 여기보다 색이 좀더 진해요. 하늘색도 조금 더 짙고 풀색 도 좀더 파란색이고, 나무도 그렇고.” “재미있군요. 마치 바라스나 가이칸 제국을 가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바라스? 그 뭐시기 땅의 나라인지 뭔지하는 곳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거기 가본 일이 있나봐요. 기엘은.” “어릴 때 한번 가본 일이 있었지요. 시안님의 말씀대로 짙은 색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 다.” 기엘은 시안의 말에 열심히 대꾸를 해주었다. 기엘은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처음 시안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찔해진다. 로운과 마구 소리 를 지르며 싸움을 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난 이틀 동안 잠도 못자고 고생했던 것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사실 시안이 가지고 있는 힘은 기엘이 옆에만 서 있어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 다. 전대 수장인 레이죠 장로에게서 느꼈던 것보다도 훨씬 강력한 엘이 시안에게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 게 운용하여 어떤 힘을 쓰느냐가 관건. 이틀동안 기엘이 고생 고생하면서 시안에게 열심히 가르쳤지만 시안은 좀처럼 기엘의 기대 에 부응하지 못했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지만.’ 기엘은 이틀동안의 고난을 다시 떠올렸다. “수행식은 어렵지 않습니다. 주위에서 그냥 시키는데로만 하시면 되고 마지막 의식 때 그 냥 힘을 자연스럽게 개방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뭘 개방해요?” “엘을 개방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엘이 뭐냐구요.” “……….” “기엘. 초보중의 초보도 아니고 아예 문외한을 가르친다고 생각해.” 기엘은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사실 시안도 고민은 고민이었다. 엘을 가졌다느니 그 파장이 너무너무 세다느니 하 는 소리는 듣고 있지만 기실 시안이 느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화가 버 럭 버럭 나서 마구 난리를 칠 때 뭔가 바람이 부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메이라의 엘은 기본적으로 바람 그 자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공기와 그 공기의 흐 름. 그것을 지탱하는 에너지 그리고 그 에너지의 근원을 느끼는 거지요. 그냥 정신을 맑게 하고 아무것도 듣지도 느끼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힘에 몸을 담근다고 생각하시면 됩니 다.” “기 수련 같은 건가.” 벅벅벅 머리를 긁으면서 시안이 말했다. “에잇!! 이놈의 머리 확!! 잘라버리고 싶어!!” 뒤로 묶어놓은 머리카락을 마구 당기면서 시안이 신경질을 부렸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로운도 기엘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자 한번 해보십시오. 수행식은 시안님께서 힘을 개방하셔서 만인에게 풍옥을 전수 받았다 는 사실만 인지시키시면 됩니다.” “끄으응.” 시안은 편한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았다. 아무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기에 멍하게 머리를 비웠다. 고요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으음.’ 간질 간질. 콧잔등이 간지러웠다. 시안은 얼른 손을 들어서 코를 살짝 긁고는 다시 본 자세로 돌아갔다. ‘으으응.’ 이번에는 등이 간지러웠다. 살짝 어깨를 당겨보았지만 등의 간질거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이걸 긁지?’ 시안은 살그머니 몸을 뒤로 젖혔다. 딱딱한 의자가 등에 닿았다. 시안은 곰실 곰실 그 딱딱한 의자에 등을 문질렀다. “시안님!! 정신을 집중 하시라니까요!!” 기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안이 살짝 눈을 뜨자 몸을 둘로 접고 큭큭 거리고 있는 로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웃지마!! 정말 등이 간지러웠단 말이야!!” “크, 큭큭!!” “시안님 로운은 신경쓰시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느낌을 얻는 일입니다.” “아. 알았어요. 기엘.” 쳇. 하고 혀를 차면서 시안이 다시 눈을 감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면 귀에 들러오는 것은 규칙적인 자신의 숨소리. 그 숨소리에 시안은 귀를 기울었다. ‘하아. 이거 명상하는 것도 아니고.’ 시안은 그렇게 조용하게 앉아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지 살짝 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기엘은 움직이는 공기를 느끼면서 반가운 마음에 시안을 쳐다보았다. 시안을 중심으로 해서 미약하기는 하지만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흐름은 조금씩 세져서 산들 바람이 되어 서 기엘과 로운 두사람쪽으로 흘러나왔다. “약하기는 하지만 성공은 성공이군 생각보다 빠른데?” “그러게요. 더 힘들 줄 알았는데.” 조용히 기엘과 로운이 기다렸지만 시안에게서 흘러나오는 바람은 그이상 세지지가 않았다. “으음. 시안님?” “……….” “이봐 꼬마. 눈떠봐.” 로운이 시안을 불렀지만 시안은 눈을 뜨지 않았다. “어. 설마.” 기엘이 불안한 마음으로 시안에게 다가갔다. 드물지만 힘을 개방하다가 말고 자신이 발생시 키는 엘의 파장 안에 그대로 갇혀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련생에게 가 끔 벌어지는 일종의 사고 같은 것이다. “시안님?” 기엘에 살짝 시안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시안에게서 불어나오던 바람이 순간 불규칙하게 흘러갔다. ---새액. 색. 색. 규칙적인 숨소리가 기엘의 귀에 들려왔다. 시안은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으윽.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군.’ 이틀 동안 시안에게 기엘이 가르쳐준 것은 결국 힘을 개방하는 법 단 한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도 정말 우여 곡절 끝에 성공한 것이었다. 절대 의식적으로는 힘을 개방하지 못하는 시안에게 통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먼저 마구마구 화를 돋구워서 일단 정신을 잃게 만들어 자신도 모르게 몸 안에 담겨져 있는 엘을 밖으로 표출하도록 한다. 그리고 시안의 엘이 퍼져 나오기 시작하면 옆에서 로운이 흘 러나오기 시작한 시안의 힘을 로운의 엘을 매개체로 하여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시안이 종 종 무의식 중에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방법을 바꾼 것이다. 주로 화를 내게 만드는 역할은 역시 로운이 맡았다. 실제 수행식을 할 때 신관이 옆에서 보조를 하게 되는데, 덕택에 자연스럽게 수행식의 보조 신관은 로운으로 정해졌다. 로운은 말을 타고 일행의 뒤편에 떨어져서 오고 있었다. 현재의 시안은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서 잔뜩 치장을 한 상태. 허리아래까지 드리워지는 머리카락은 모조리 위로 틀어 올려서 장식을 했다. 옷 역시 수장 계승식에 사용되는 흰색의 길고 화려한 드레스에 미메이라의 특산물중 하나인 투명하게 반 짝이는 보석 하이시로 만들어진 장식이 가득 달려있었다. “화아. 저게 수도인가?” “그렇습니다. 시안님. 미메이라의 수도 키리엔입니다. 이제 도착했으니 그만 휘장을 내리시 지요. 수장궁 키리엔을 보시고 싶으시겠지만….” “아아. 그런가. 으윽.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것은 질색인데. 이게 무슨 팔자야. 그런데 수도도 키리엔이고 궁도 키리엔이예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하앗!!” 기엘은 말을 달려서 수행단의 맨 앞으로 달려갔다. 시원한 바람이 기엘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고생은 했지만 그 고생의 작은 언덕을 이제 넘어서려고 했었다. 연 녹색의 숲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인조림이다. 기엘은 깨끗한 공기를 가득 들이 마시면서 힘차게 말을 달렸다. ‘좋아. 이제 수행식이다.’ 4. 수행식 수행일행이 수도 가까이에 접근하자 수도 주위의 마을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다가 환호 성을 질렀다. “만세!!! 시안님!! 만세!!” 시끄러운 바깥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시안은 꾹 눌러 참았다. 손가락이 근질 근질했다. 아니 그보다는 사실 머릿속이 간질 간질했다. 난생 처음으로 허리까지 닿는 머리카락을 가지게 된 시안이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스포츠 머리를 고수하고 있던 시안으로써는 사실 정말 대 단한 일일지도 몰랐다. 평생을 가봐야 이런 머리길이를 해 볼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럭 저럭 참아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내리고 있는 것 과 이렇게 장식을 잔뜩 해서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까부터 목이 뻣뻣해 지는 것을 시안은 자주자주 목덜미를 툭툭 쳐가면서 참고 있었다. 사 정만 허락하면 드러눕고 싶었지만 머리에 워낙 장식을 많이 올리고 있으니 누우면 끝장이 다. 그걸 무시하고 누웠다가 머리를 망쳐 버리면 그 잔소리꾼 로운이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장식이 가득 달린 옷도 골치가 아팠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짤랑짤랑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 다. 엄청나게 비싼 것이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들은 터라 더욱더 신경이 쓰였다. 시안은 반짝이는 보석을 하나 집어들었다. 하이시는 꼭 다이아몬드처럼 생겼는데 투명한 주 제에 반짝이는 빛은 연한 푸른 빛이다. “나중에 돌아갈 때 이거나 기념으로 몇 개 가지고 갈까?” 시안은 혼자 중얼 거렸다. “아아. 덥다.” 시안은 살짝 눈을 감았다. 일단 자신이 쓸 수 있는 바람의 술은 그것 뿐이다. 산들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것. 살짝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자 사라락하고 얇은 옷자락이 하늘 거렸다. 이틀동안 로운 과 기엘에게 마구 괴롭힘을 당한 후 얻은 성과였다. “시원하구만. 여름이 되도 에어콘이 필요 없겠어. 그나저나 뭘 이렇게 오래 가는거지?” 수도의 주변에 도착해서 휘장을 내리고도 벌써 한 십여분 이상이나 들어왔는데도 아직도 마 차는 어디론가 굴러가고 있는 중이다. 수행식을 위해서 이틀동안 기엘과 로운에게 들들 볶이느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시안은 아 직 미메이라에 대해서는 제대로 들은 바가 없었다. “우에. 지겨워.” “시안님. 도착했습니다.” “어라. 다 온 건가?” 사라락 소리와 함께 휘장이 걷히고 로운이 불쑥 머리를 들이 밀었다. “뭐야. 아저씨.” “시안님 손을.” 약간 불안한 마음에 시안은 억지로 실룩거리면서 시비를 걸었지만 로운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에.” 로운이 내민 손을 잡는 것은 딱 질색이지만 방법이 없었다. “자! 놓치면 죽어!!” “조심하십시오.” 끙차 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한발자국을 디뎠다. 시안이 마차 밖으로 나오자 수장궁의 넓은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 했다. 반짝이는 빛에 눈이 부셔 시안은 일순 발을 헛디뎠다. “아. 우악!!” “조심하십시오. 시안님.” 로운이 시안을 부축했다. “자. 이쪽으로.” 시안이 천천히 로운의 인도에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얄팍한 신발 아래로 두텁고 하얀 양 탄자가 느껴졌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거야?” 소곤소곤하는 목소리로 시안이 물었다. “다음대의 수장을 맞이하는 의식입니다. 수장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서 모인 것이 지요.” “에헤.” 그렇게나 수장이라는 위치가 중요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장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자주 안 드러내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수장 계승식을 보는 것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행사 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즐거워 할 수밖에요. 게다가 수장궁이 개방되는 것은 일년에 한두 번 뿐이기에 일종의 축제처럼 치루어 집니다.” 이틀 동안 이것 저것 시안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카류나 기엘의 계획이 틀어진 것은 어쩔수 없었다. 힘 하나를 개방하는데도 그렇게 고생을 했으니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은 정말 어려 운 일이었다. 때문에 제반사항이나 미메이라 자체에 대한 시안의 지식은 여기 처음 올 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온통 하얗네.” “미메이라의 신색(神色)이 흰색이기 때문이죠. 이쪽으로 올라가십시오.” 로운이 시안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어? 나 혼자?” “아니 제가 뒤를 따라 올라갑니다.” “흐응.” 시안은 치맛자락을 손에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광장 한가운데에 높은 단이 설치되어 있었 다. ‘정말 골 때리는 군.’ 미친 듯이 열광하는 관중사이로 시안은 걸음을 옮겼다. 단위로 올라서니 흰수염의 할아버지 대신관 카류가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단위에 올 라온 시안을 보자 카류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시끄럽게 환호하던 사람들이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이 자리에 모이신 미메이라의 신민 여러분.” 엄숙한 목소리로 카류가 말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시안은 홀로 움찔 거리면서 약간 뒤로 물러섰다. 턱하고 몸이 로운의 몸에 부딧혔다. “왜? 겁나나 꼬마?” “겁나기는!!” 시안이 발끈하여 말했다. “글세. 내 눈에는 벌벌벌 떨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웃기는 소리 하지마.” 조금 전까지는 엄청나게 엄숙하게 분위기를 잡고 있던 로운이 뒤에 빈정 빈정 거리자 시안 의 이마에도 핏대가 솟아 올랐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미메이라의 계승자를 선포합니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자. 앞으로 나가서 이전에 가르쳐준대로 인사해.” “말 안해도 알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안은 어질 어질 했다. 높이 솟아 있는 단은 거의 5-6층 이상의 높이. 아파트 고층에도 올라가 보고 63빌딩에도 올 라가 본 적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이 잔뜩 몰려있는 탁트인 공간 중간에 서보기는 처음이다. 시안은 부들 거리는 몸을 간신히 유지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길 이러다가 단 아래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자 시안은 몸을 숙였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 팔을 가슴에 댄다. 미메이라에서는 최고의 경의를 표 할 때만 하는 의전 의례형식에 따른 인사법이었다. 찰랑거리는 보석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시안은 고개를 숙였다. 시안이 몸을 숙이자 그때까지 고요하던 광장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우와아아아!!” “시안님께 미메이라의 영신을!!” “미메이라의 축복을!!!!” 들려오는 소리에 시안의 고막을 터질 지경이었다. “이제 일어서. 언제까지 그렇게 꾸물 거리고 있을거야!” “제길!! 입닥치고 좀 있어!!” 어느사이 다가왔는지 로운이 팔을 내밀어 시안을 부축하고 있었다.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의 영광. 그 바람의 시작과 끝. 미메이라의 정당한 계승자에 게 축복이 있으니.” 뒤에서 카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실패하면 완전히 쪽팔리는 거다 꼬마.” “웃기지맛!!!” “바람의 신 미메이라의 이름하에 그의 대지와 그의 힘과 그의 의지를 계승하는 자에게 영 신이 있으라.” 시안은 로운이 시키는데로 두 팔을 하늘로 올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흥. 네 녀석이 성공 할 수 있겠어?” ‘말끝마다 자꾸 무시하는데!! 제기랄!!!’ “눈감아 이 바보 멍청이 꼬마.” 시안은 신경질 적으로 눈을 꽈악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 파악-하는 감촉이 등뒤에서 밀려 왔다. 로운이 아무도 모르게 시안의 등을 파악 친 것이다. ‘제. 제길 떨어지겠다!!!!’ “빨리 해.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누가 몰라!!!’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한채 시안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속으로 퍼부었다. 그 순간 화악- 하고 시안의 긴 옷자락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로운이 뒤에서 자신의 엘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힘이 촉매가 되어서 안에 고여서 부글 부글 타오르던 시안의 엘이 순식간에 개 방되었다. -쏴아아아아. 온 몸에서 끝을 할 수 없는 힘이 밖으로 방출되었다. ‘젠장할!! 이따위 의식 빨리 끝나버리란 말야!!!’ 시안이 질끈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절규하자 쏟아져 나오던 바람의 힘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얽혀 들어가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순간적으로 힘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자 시안은 그 엘이 일으킨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소용돌이다!!!” “시안님!!!” “오오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한가운데 있는 시안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감탄사가 광장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강한 소용돌이 바람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그 바람의 기둥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감격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수행식의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이 엘의 개방은 모든 이에게 다음대의 수장 계승자가 가진 능력을 나타냄으로써 정당한 계승자로써 모두에게 인증을 받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지금 시안이 일으키고 있는 바람의 역대 어느 계승자도 보여주지 못했던 강한 소용 돌이. 그 바람은 지금 하늘로 치솟아 오르면서 궁 구석 구석으로 퍼지면서 궁 전체를 강한 바람 안에 휩싸이게 하고 있었다. ‘성공이군.’ 단 아래에서 강한 바람을 견디며 굳건히 서 있던 기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차 저차해서 시안이 힘을 불어일으키지 못하는 경우 로운이 그것을 대처 할 수도 있도록 미리 단단히 안배를 해 놓기는 했었다. 시안의 힘을 개방하기 위해서 로운의 엘을 이용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반칙이었지만 로운 과 기엘이 둘이서 밤새도록 머리를 짜서 생각해 낸 최고의 방법이었다. 일단 시안이 가지고 있는 엘은 그끝을 알수 없을정도로 무한에 가까운 강한 힘이기 때문에 그것이 개방되는 통 로만 열어준다면 생각보다 쉽게 엘을 개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로운의 생각이었고 지금 그것은 그대로 맞아떨어져 강력한 바람이 온 궁을 휩쓸고 있었다. ‘생각보다 로운 녀석. 시안님 걱정을 많이 하는 군.’ 강하게 몰아치던 바람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어떤 바람술사도 그렇게 오래도록 자신의 엘을 개방할 수는 없다. 바람의 한가운데에서 무아지경에 빠져있던 시안은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당기는 것을 느꼈 다. “야. 이 바보 그만해. 그러다가 수장궁이 날아가겠다.” 퍼뜩 정신이 들자 자연스럽게 소용돌이 치던 바람도 순식간에 잦아들기 시작했다. “수장궁이 부서지면 네 녀석이 다시 지을 것도 아니잖아.” “누가!!” 파악!! 하고 소리를 지르자. 거짓말처럼 시안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엘의 흐름이 뚝 하고 끊 어졌다. 광장은 조금 전 시안이 올라왔을 때와 다름없이 조용해졌다. 단지 달라진 것은 자신이 걸치고 있던 옷들이 모조리 뒤집혀져서 엉망이 되어 있다는 것과 단정하게 올백으로 넘겼던 로운의 머리카락들이 전부 내려와서 헝크러져있는 것 뿐이었다. “어라. 그러니까. 훨씬 좋네. 원래 나이대로 보이잖아. 아저씨.” “아저씨가 아니랬지.” “흐응. 이제 좀 그만할 때도 되었는데 지치지도 않아? 아저씨?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다 니 어린애 같아.” “웃기지마!! 너나 그만둬!!” 작은 소리로 티격 태격하고 있는 두사람. 그 뒤에서 카류는 나름대로 감격에 잠겨 있었다. 작은 시안의 몸 속에 있는 엘이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눈 으로 그것을 보는 것은 정말 남다른 경험이었다. ‘성공이군. 시안님 기뻐하십시오.’ 카류는 눈을 돌려서 단 아래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던 레이죠 장로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 역시 감격에 잠긴 얼굴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 일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행식이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의 눈에 로운이 부축해서 단을 내려가는 시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은 것은 시련의 계승로를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겠지.’ 시안은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엘의 방출이 극한 도에 다다랐던지 시안의 몸에는 실 한오라기를 들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절대로 이런데서 쓰러져서 로운의 놀림거리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가 시안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로운은 창백해진 시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정말 놀랍군. 이 정도일 줄이야.’ 로운의 시선이 기엘과 부딪쳤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기엘의 얼굴을 보면서 로운도 마주 웃어 주었다. 두 사람 속의 기억에 남아있는 시안의 모습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녀 역시 이런 모습 을 보았다면 그래도 기뻐해주었을 것이라고 서로의 마음을 다독거렸다. ‘어때? 성공이지?’ ‘물론. 수고했어 로운.’ 기엘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를 향해서 로운 역시 밝게 웃었다. 5.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시안님. 일어나셨습니까? “우웅.” 폭신한 이불에 둘러쌓여서 시안은 눈을 감고 꼼질 꼼질 거렸다. 제일 먼저 발가락이, 그다음 에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꼼질거리면서 시안은 잠을 깨기 직전의 가장 감미로운 시간을 온몸 으로 느끼고 있었다. 눈을 뜨는 것은 죽을 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잠을 깨기직전의 이 시간만큼은 너무나 기분 좋 은 시간이다. “시안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으응. 엄마. 10분만요. 형은 안 돼.” 시안은 몸을 뒤집어서 푹신한 쿠션를 끌어 안았다. 아니 끌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안의 뺨에 느껴지는 것은 뽀송한 쿠션 커버가 아닌 길고 긴 실타래. 바로 시안의 머리카락이었다. “우욱- 제길.” 조금 전까지 꿈속에서 바둥거리고 있던 시안은 그제서야 잠이 깼다. 현실세계에서 이 황당 한 미메이라라는 곳에 온 후부터 언제나 바뀌지 않는 기분 나쁜 아침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의 머리카락.” 시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안님. 이제 일어나실 시간 입니다.” “일어났어!! 일어났다구요!” 시안의 대답이 들리기가 무섭게 여관들이 우르르 시안의 방으로 몰려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똑같은 말이 여러번 들려왔다. ‘정말 무슨 참새 부대 같아.’ 처음 이곳 수장궁에 와서 제일 곤란했던 것이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저 여관들이었다. 가 끔 시안이 현실세계에 있을 때 사극을 보면 왕의 뒤에 환관들과 상궁들과 무수리들이 줄줄 줄 따라다니는 것을 봤었다. 이곳도 그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일어날 때부터 잠들 때까지 뒤에서 여자들과 남자들이 줄줄줄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나마 시안이 인원수를 최소한도로 줄여달라고 몇 번이나 말한 끝에 20여명을 넘 던 수행인원이 한 10명 정도로 줄어들기는 했다. 오른쪽으로 가도 줄줄줄, 왼쪽으로 가도 줄줄줄. 팔을 들으면 네~, 고개를 돌려도 네~. 아마 시안이 물 속으로 뛰어들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도 줄줄이 따라서 뛰어들 것만 같은 분위기다. ‘오. 그럼 집단 동반 자살 쯤 되는 건가? 무슨 사이비 교주라도 된 기분이구만. 쳇.’ “대신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아-.” 시안은 입을 잔뜩 벌리고 하품을 했다. “으아아-.” 두팔을 올리고 온몸을 펴고 스트레치를 하면서 하품을 하다 말고 시안은 문득 그 자리에 얼 어붙었다. 방에 들어온 여관 4명이 전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하하하하하.” 시안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안은 입을 잔뜩 벌리고 웃다말고 입을 오므리 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오호호호홋. 아. 아직 계승식의 피로가 남아서 오호호호호.”. ‘제기랄 정말 변태 같군. 오호홋이 뭐야. 오호홋이.’ 시안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시안님 이쪽으로.” 그중에서 그나마 제일 나이들어보이는 여관이 옷을 들고서 시안에게 말했다.\ “아아. 혼자 씻을 께요.” “알고 있습니다.” 수장궁에 온지 삼일째. 시안의 기행은 이미 궁 여기저기 여관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퍼져이 었다. 여관장인 라헬은 계승식을 마치고 두달만에 돌아온 시안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 첫 번째 사람이었다. 먼저 시안은 아침에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서 먼저 자신들을 불렀었다. 하지만 계승식을 마 치고 돌아온 시안은 아침에 반드시 깨워야만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몸을 씻 을 때 혼자 들어가겠다고 마구 난리를 피웠고, 옷도 혼자 입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하지만 시안으로써도 그 부분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된지 며칠 지나지 않은 탓 에 자신의 몸이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거울을 보고 있으면 변태 같은 느낌이 무럭 무럭 솟아올라온다. 하물며 목욕을 하는데 옆에 다른 사람이 거들어 준다는 것 은 절대 사양. 자신의 몸을 보는 것은 정말 혼자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여러 사람 변태 만들 일 있냐구. 젠장. 변태는 나 혼자로 족해.’ 투덜 투덜. 시안은 홀로 욕실로 들어섰다. 시안이 욕실에서 나오자 여관들이 일제히 하나같이 손에 장신구와 옷을 가득 들고 서 있었 다. “뭐예요?” “대신관님과 만나시는 자리니 성장을 차리셔야 하기 때문에.” “필요 없어요. 무슨 성장은 성장.” 역시, 몸에 배지 않은 이런 상류층 생활은 불편하다. “아직 정식으로 수장이 된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 없으니까 치우세요.” 왠지 심술이 나는 시안이었다. 무슨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랬다. 말을 들어보니 시안은 상 당히 조용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상당히 검소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 때문에 시안이 장신구를 거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것 만큼은 어떻게도 숨길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안님.”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요!! 내가!!” 장신구를 들고 있었던 제일 어린 여관이 시안의 완강한 반응에 뒤로 움찔했다. 울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시안은 아차 싶었다. ‘너무 심했나? 하지만 그래도.’ “시안님 그래도 기본적인 장신구 만큼은 필요 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라헬이 재빨리 중재를 했다. 울먹거리고 있는 여관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시안은 한숨을 내 쉬었다. 막내였다고는 하지만 위로 누나가 3명이나 있었 던 탓에 기본적으로는 페미니스트인 시안에게 있어 아무래도 여자들이라는 존재에게는 약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알아서 해요. 하이고 내 팔자야.” 자리에 곱게 앉은 시안의 주위에 여관들이 몰려왔다. 머리를 빗고 윗 부분의 머리카락들을 모아서 하나로 묶은 후 몇 개의 장신구들이 그 위에 고정되었다. ‘하기사 이런 경험 어디가서 하겠어. 제길. 남자라면 완전히 하렘을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 을텐데,’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완벽한 미소녀. 반짝이는 장신구가 무색할 만큼 빛나는 백금발의 머리카 락이 그 주위에 살포시 내려 앉아있다. “역시….” “네 시안님?” “아. 아니예요.” ‘역시 마음에 안드는 군. 이놈의 얼굴. 그리고 머리카락.’ 시안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여관들이 시안의 머리카락을 다 매만지고는 옷가지를 내밀었 다. “일어나십시오. 시안님. 대신관님께서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시안은 시키는데로 겉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었다. 그리고 한번 더 심호흡을 한 후 라헬을 바라보았다. “뭐. 필요하신 것이라도?” “에. 그러니까.”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의 표정. “으. 으음. 그러니까 말이죠.” “네. 시안님.” “저기 아침밥은 언제 먹죠?” 꼬르륵. 비어있는 위장 속에서 빨리 밥을 달라고 난리를 치고 있는 시안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할아버… 대신관님.” 황급히 호칭을 고치면서 시안은 배시시 웃어보였다. 아침식사인듯한 음식들이 가득 차려진 식당에 들어서저 대신관 카류 그리고 시안의 아버지 인 레이죠 장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 안하셨죠?” 시안은 나름대로는 상당히 붙임성 있게 행동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 옆에 서 나머지 두 사람이 앉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안님?” 아무리 기다려도 대신관 카류도, 그리고 레이죠 장로도 앉지를 않았다. 뭔가 썰렁한 분위기에 돌입하기 직전 카류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정식으로 수장 계승자가 되셨으니 먼저 앉으셔야죠.” ‘아! 그렇구나. 나이는 어려도 내쪽이 위가 되는 거군!!!’ 시안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시안이 자리에 앉자 기다렸 다는 듯 카류와 레이죠 장로가 자리에 앉았다. “잘 주무셨는지요.” “아. 예. 뭐 그냥.” 살짝 카류가 눈짓을 하자 시안의 뒤에 줄줄이 따라 붙었던 여관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마지 막 여관이 사라지자 마자 시안은 그때까지 파악 긴장하고 있던 신경을 풀어 해졌다. “으아. 숨막혀서 죽는 줄 알았네. 뭐예요. 할아버지. 계승식 끝나고 나면 바로 밖으로 내보 내준다더니.” 앞에 놓인 물을 벌컥 벌컥 들이 마시면서 시안은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동안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름데로는 이런 저런 사정 을 들어 왔었다. 얌전히 계승식을 마치면 곧 계승로인지 뭔지에 나가게 돼서 궁을 떠나서 몸도 남자로 돌아 오고 기타 등등, 약속 아닌 약속을 받았던 터다. 그러나 지금 시안은 3일째 궁에 틀어 박혀서 아무것도 못하고 시키는데로 옷을 입고 시키는 데로 밥을 먹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방에서 소일거리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말을 했으면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시키는데로 다 했잖아요.” “시안님.” 카류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많이 심심하셨던 모양이군요.” “심심한 정도예요? 그게? 할아버지도 하루종일 침대에 앉아서 천장하고 벽만 바라보라구 아요. 제길. 여기 PC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컴이 있어서 채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여기저기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고. 이게 감옥이 아니고 뭐냐구요!!” 씩씩대는 시안을 보면서 카류는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또 약간의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벌써부터 여관들의 입에서 입으로 계승의식을 끝내고 돌아온 시안님이 뭔가 지난 번과는 많이 다르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터였다. 그런 상태에서 시안 을 마음대로 나 돌아 다니게 했다가는 지금 현재 어느 누가 그것을 알아챌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시안님. 하지만 오늘 부터는 조금씩 바빠지실 겁니다. 그러니까….” “그딴 것은 다 필요 없고 언제 여기를 나갈 수 있는 지만 알려주세요.” 우걱 우걱. 보기에는 여릿한 소녀의 모습이지만 먹는 모습은 건장한 남자애 그 자체. 그 모습을 보면서 레이죠 장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시안과. 원래의 시안은. “일단 계승로에 오르시게 되는 것은 약 한 달 후로 내정 되어 있습니다.” “에. 에에엑!!! 한달이나!!!” “시안님께서 지금 이곳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또한 계승식은 마쳤다고 해 도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것들이 대충 처리되고 그리고 적어도 시안 님이 계승로에 오르시기 전까지 배워야 할 것 들도 많이 있습니다.” “뭘 더 배워요!! 그냥 나가면 그만이지!! 나는 이 모습이 싫다구요!!!” 말을 내뱉는 사이 사이로 빵조각이 튄다. “에잇. 젠장할. 꼭 이런 이야기를 밥먹을 때 해야되요? 난 식사예절은 그래도 열심히 배운 녀석이라구요. 꼭 밥먹을 때마다 사람 신경을 긁어.” 시안은 자신이 말하다가 식탁 위에 뿌리고 만 빵조각을 보면서 투덜 거렸다. 엄마가 봤으면 어찌 그리 칠칠 맞게 밥을 먹느냐고 마구 야단을 쳤을 만한 광경이다. “에이. 기분 더러워.” 혼자서 화를 내고 혼자서 다시 침울해지는 시안을 보는 레이죠 장로의 마음도 사실 그렇게 좋지 많은 않았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딸을 생각하느라 벌써 며칠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카류가 찾아온 것이 어제. 카류는 레이죠 장로에게 시안의 전반적인 교육을 부탁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레이죠 장로에 게 있어 현재의 시안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레이죠 장로에게도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판단하에 카류는 굳게 마음을 먹고 시안 의 교육 문제를 밀어 붙였다. 그 결과 아침부터 이렇게 투덜거리는 시안의 앞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다. “시안님. 아무리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시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밖으로 나가시면 문제가 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기본적인 상황을 아시고 계셔야 돌발상황에서도 문제없이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따라간다면서요. 그럼 된거지 굳이 내가 이것 저것 귀찮게 배울 필 요가 어디 있어요.” “지금 그 상태면 어렵게 시안님을 이곳에 불러온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되는 꼴입니다. 특히 원래의 시안….” -콰앙!! 시안은 주먹으로 식탁을 쳤다. “이봐요. 할아버지.” 화가 치밀어 오르자 앞에 쌓여있는 진수 성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말끝마다. 시안. 시 안. 시안. 시안. 시안!!!! 시안이 도대체 뭐라구!!!!! “좋아요. 시키는데로 하죠. 단. 한달은 죽어도 안되요. 15일. 15일 이후에는 누가 말려도 난 여기서 나갈 거예요. 알았어요?” “그것은 시안님이 얼마나 잘 따라주시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로님?” 레이죠 장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흥. 말이면 무슨 말을 못합니까? 그래서 그 배우고 뭐고 빨리 시작하죠. 그럼.” “시원스러워서 좋군요.” “쳇.”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순간 스르륵 흘러내린다. “에잇!! 젠장할. 이 놈의 머리!!!” 자신의 머리를 붙들고 화르륵 하는 시안을 보면서 카류는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갈 길이 멀군.’ “아슈레이의 4개의 신국은 일반적인 국가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슈레이에는 많은 나라가 있지만 그 어느 국가와도 틀립니다. 자. 여기 지도를 보실 겠습니까?” ‘으윽. 왠 때아닌 지리 수업이냐.’ 시안은 푹신한 의자 위에서 허리를 비비 꼬아가면서 하품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다. 앞에서 설명하는 사람은 다른이가 아닌 레이죠 장로. 레이죠 장로는 책 하나를 손에 들고 벽에 걸린 장대한 아슈레이 대륙의 지도를 놓고 설명중 이다. “여기 중간 지대가 바로 시안님이 계승로에 올라 목표로 하실 곳입니다. 이전의 제 경험담 과 역대 수장들의 기록들을 기본으로 해서 중간지대에 대해서 말씀 드린다면….” 몰려오는 졸음은 모조리 눈꺼풀에 가 있는 듯, 시안의 눈이 자꾸만 감긴다. 그것은 마치 지 루한 수업 같은 이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마치 개미라고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 의 레이죠 장로 때문이기도 했다. 느릿느릿한 속도에다가 소리까지 기어 들어간다. 금상첨화로 내용까지 재미없는…. 스르륵. 시안의 눈이 감겼다. “중간지대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바로 이곳. 미메이라와 호로스의 국경 지대롤 통해서 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중간 지대를 둘러싼 험준한 산맥이….” -도로로로롱. “산맥이 있기 때문에…….” -푸. 푸. 푸. “시안님!!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에에.” 도로롱 도로롱. 누가 들으면 어린아이라도 자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책상 위에 퍼져버렸던 오전 공부 시간. 결국 시안은 공부를 하다말고 책상 위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화가난 레이죠 장로는 시안을 깨우기는커녕 그대로 사택으로 돌아가 버렸고 시안은 점심시 간을 알리기 위해서 찾아온 여관에게 자고 있던 것이 발각되어 지금은 카류의 잔소리를 듣 고 있는 중이다. “시간도 많이 않은 이때에 그런식으로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15일이라구요? 이런 식이라면 두달이 넘어도 불가능 합니다.”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는 표정으로 카류는 잔소리를 늘어놓 고 있었다. 시안은 이런 카류보다는 차라리 화르륵하면서 같이 화를 낼 수 있는 로운이 천만배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윽. 잠깐. 누가 누구 보다 나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순간 충격을 받은 시안은 비칠 비칠 손을 들며 스톱을 걸었다. “잠깐. 잠깐만요.” “…………?” 카류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화를 내시고 싶은 심정은 이해 하겠는데요. 언제까지 들어야 되요?” “……………” 카류는 지금 저 시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예요. 에…이걸 어떻게 설명하나. 아. 그렇지!!” 시안은 손가락을 딱! 울리며 설명했다. “내가 뭐든지 배워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어느 정도는 카리스마가 있어야하는거 아니냐구요. 그 할아버지 꼭 벼룩이라도 잡아서 한바가지는 먹은 듯한 목소리 로 말하는데 안 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차라리 그것보다는 저한테 그냥 알아서 공부하라고 해주는 쪽이 좋다구요. 뭐랄까, 계획표 같은거 없어요? 뭐를 가르칠 것인지 계획 을 잡고 있을 거 아닙니까. 궁중 예의인지 뭔지 지리면 지리. 역사면 역사. 이런식으로요,” 반짝 반짝 빛나는 시안의 눈을 보면서 카류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니까. 시안님이 배우셔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아슈레이 대륙에 대한 지식. 그리고 지 금부터 가셔야 할 중간 지대에 관한 것. 남아있는 계승의식에 대한 것. 그리고 수장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실 지식들입니다. 이외 시간이 남는 다면 엘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 와 기본적인 바람술 정도입니다. 엘의 수련까지 하시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계승로 에 오르신 후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로운 신관이나 로열 나이트 하라스다인에게 서 배우시게 될 것입니다.” 화를 내다 말고 조리있게 설명하는 듯한 시안의 분위기에 넘어간 카류가 얼결에 설명을 했 다. “흐으응….” 카류가 부르는 목록을 끼적 끼적 받아 적으면서 시안은 머리를 굴렸다.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더니 이제는 공부까지 시키려고 드는 것이다. 시안으로써는 정말 짜 증이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판타지 세계 비스무리한 곳에 왔다면 용을 처치한다 던가 또는 공주를 구하러 가든가 아니면 사악한 마왕의 음모를 파해치던가 하는 것이 정석 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기껏해야 공부라니!! “아. 그러면요. 그걸 하나하나 설명하시는 것도 힘들잖아요. 그 레이죠 장로님인가 하시는 분은 특히 더하신 것 같은데.” 공부하다가 조는 학생을 깨우기는커녕 그냥 방치하고 도망간 레이죠 장로에게 시안은 조금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자신의 딸 대신 와서 자기 꼴 보기가 싫은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 해를 해 주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후계를 교육시키는 것은 선대 수장의 의무이기도 하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걸 저한테 일일이 설명해가며 하면 이거 그 시간에 안 끝날 것 같은데 요. 게다가.” “……?” 시안은 잠시 우물 거렸다. 과연 그런 말까지 해도 되는 걸까 싶어서다. “그. 레이죠 장로님이라는 분. 나를 싫어하는 것 같던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냥 그분은 시안님을 보시기가 조금… 힘드신 것 뿐이지요.” 카류는 시안에게 대답하면서 순간 움찔했다. 아무생각도 안하고 단지 돌아갈 생각에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지 하고 있는 시안이 꽤나 둔하다고 생각했는데 레이죠 장로의 미묘한 심경변 화를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 뿐입니다. 시안님이 걱정하실 것이 아니지요. 여하튼 오늘 오전은 이미 낭비했 으니 오후부터는 조금더 주의를 기울여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한달 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카류는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가르쳐야 할것들이 산더미인데 그가 보기에 지금 그 의 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소년은 자꾸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제말은. 그보다는 빨리 끝날 수 있다는 거예요. 아까 말씀하신 것들 전부 책이 있는거 죠?” “물론입니다만?” 카류는 저 시안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책을 전부 가져다 주세요. 괜시리 이런 저런 설명이 많은 거 말고 딱딱! 요점정리해서 써머리를 한것으로요.” “써머리?” “에에. 실수다. 쳇.” 대한민국의 입시 시스템이 역시 위대한 것이구만 이라고 시안은 생각하는 중이다. 입시 요 강이 발표되기 무섭게 각 출판사에서는 국, 영, 수를 중심으로해서 해법이니 일격 필살이니 최강 써머리니 하는 책들이 무섭게 쏟아져 나온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대입 입시!! 우캬캬캬캬캬캬. “아. 그러니까. 여하튼 책이나 가져다 주세요. 나 혼자 할테니까. 느릿한 장로 할아버지 설 명을 듣다가 그걸 언제 한달내로 다 끝내요? 나 혼자하면 일주일이면 될 것 같은데.” ‘일주일은 조금 뻥이긴 하겠군. 으음.’ 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생글 생글 카류를 향해서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거고 이거고 자꾸 따지지 말고 빨리 가져다 주세요.” “으윽. 더럽게 많다.” 시안은 책상에 쌓여있는 책들을 보고 있다. 두둥- 하고 마치 무슨 벽돌이라도 쌓아올린 듯한 책 더미. 정말 무슨 만화에서나 보았음직한 커다란 책들이 산더미처럼 시안의 앞에 쌓여있었다. “우욱. 아무리 다 가져다 달라고 했지만 이 사람들이 정말 누구를 호구로 아나.” 지금 시안이 있는 곳은 백색궁의 지하 서고다. 책이 잔뜩 있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고 조용한, 그리고 책들로 둘러 쌓인 곳을 요구한 시안에게 주어진 공간이 바로 그곳이었다. “정말 무슨 남산 도서관 뺨치네.” 시안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책상위에 쌓여있는 수십권에 달하는 책에 또 서너권을 추가하면서 카류가 말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 그럭 저럭요. 조금 음산한 느낌이 안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제가 읽어야 할 책들 은 이게 전부인가요?” “전부는 아닙니다만 일단 필요한 것들만 추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 까?” 카류가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로 시안에게 물었다. “괜찮다니까요. 못 믿겠으면 내가 이걸 전부 공부할 테니까 나중에 물어보세요. 아니면 아 예 시험을 치르던지. 그건 그렇고.” “예?” “이거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거 이거.” “뭐. 말씀이십니까?” “이거 말이예요. 주위를 돌고 있는 이 투명한 실같은 거. 바람 같기는 한데 뭔지는 모르겠 고, 아까부터 눈앞에서 자꾸 왔다가 갔다가 하는데….” 시안은 눈앞에 흘러가는 투명하게 반짝이는 실의 끝자락을 잡아당겨 손가락에 돌돌 감았다. “보이시는 겁니까?” “뭐가요? 이거요?” 시안은 손가락에 돌돌 감긴 투명한 실을 들어보이면서 말했다. “역시.” “………??” 시안은 뭘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카류는 나름대로 놀라고 있었다. 시안이 방금 전에 한 행동은 바람술사중에서도 수위에 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행위. 그것을 아직 바 람술이라고는 손톱 만큼도 모르는 시안이 자연스럽게 해낸 것이다. “그것은 엘에 의해서 만들어진 바람입니다.” “엘에 의해 만들어진 바람?” “이곳은 지하라서 특별히 통풍을 할 수 있는 창이 없습니다. 때문에 영구한 바람술을 걸어 서 통풍을 하는 것이지요. 엘에 의해서 만들어진 바람은 그런 형태를 띄게됩니다.” “헤에….” 휘리릭하고 손가락을 돌리자 투명한 바람의 실이 손가락에서 풀려서 다시 도서관 어디론가 흘러간다. “하지만 지난번에 그 뭐더라? 수행식인지 뭔지하는 때 제가 일으킨 바람은 이렇지 않았는 데요?” “그동안 시안님께서 조금은 엘에 익숙해진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술사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엘-세지의 단계에 이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엘에 의해 만들어진 바람을 그런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수련은 하지 않았지만 시안님께서 가지신 엘은 기본적으로는 엘-세지의 단 계보다 훨씬 위에 있어서 아마도 보실 수 있는 듯 하군요. 좋은 현상입니다.” “재미있네요. 이거.” “참고로 말씀드리면 엘-세지의 단계에 이르면 바람술 이외에도 불이나 물. 대지의 술까지 어느 정도는 익히실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렇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엘. 로. 조하 아슈레이……….”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카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안은 카류가 무엇을 하나 싶어서 그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쏴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책한권이 그 투명한 바람에 실려서 둥실 거리며 날아왔다. “카류. 세인. 디 가나히사.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그 이름으로 명하니….” 순간 흐르던 바람이 뚝-하고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촤라라라락 그 소리와 함께 꼭 닫혀있던 그 책의 장들이 바람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촤라락 펼쳐졌다. 카류는 펼쳐진 책을 받아서 시안에게 내밀었다. “바람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른 책들을 보시고 혹시나 여력 이 되신다면 이 책도 한번 읽어두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슨 책인데요?” 두터운, 마치 사전처럼 생긴 책을 받아 들고 시안이 물었다. “바람술에 대한 기초를 다룬 입문서입니다. 뒤편에는 기초적인 바람술의 주문들이 적혀있 기도 하지요.” “흐응.” 차락 차락하고 페이지를 넘겨보는 시안을 보면서 카류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말은 그렇 게 했지만 사실 저 책은 엘-세지의 단계에 이른 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바람 술서다. 아직 그 운용의 미묘한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엘의 의해 만들어진 바람 을 구별해내고 더 더욱이 그것은 손가락으로 잡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안이 라면 모르는 사이 주문들을 익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시안에게 그 책을 건 낸 것이다. “쳇. 읽을 책이 산더미인데 괜한 소리를 했나.” “시안님이 원하신대로 준비해 드렸으니 그럼. 저녁 시간이 되면 여관들이 올 것입니다. 필 요한 것이 있으면 그쪽의 손잡이를 당기면 되고요. 그럼 저는 이만.” “아아. 알았어요. 잘 가보세요.” 인사를 하는 카류를 쳐다보는 둥 말둥 하면서 시안은 방금전에 카류가 건내준 책에 코를 박 았다. 사실. 아슈레이 대륙은 어떻고, 무슨 무슨 산맥이 어떻고 하는 책보다는 바람술인지 뭔지하 는 쪽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술의 단계. 엘-다인. 엘-유린. 엘-사인. 엘-라사, 그리고 엘-세지. 전부해서 5단계인건 가?” 커다란 책의 맨 앞장에는 각 단계별에 따른 목차가 적혀져 있다. “우웅. 하지만 이것은 일단 두 번째지. 이거 할 시간이 없잖아.” 일단은 눈앞에 산처럼(?) 쌓여있는, 참고서보다도 두꺼운 저 책들이 먼저다. 시안은 자신이 주문한대로 몇 묶음으로 나뉘어져 있는 종이들과 중세시대 영화에서 봤던 깃 털 펜이 놓여있는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역시 뭔가를 외우는데는 쓰면서 외우는 것이 짱! “좋아.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빽빽이 실력을 보여주지. 벼락치기가 뭐 대수라구. 두고보라구 요. 할아버지!!” 시안은 첫 번째 책을 꺼내서 펼쳤다. “백색궁 키리엔 궁례부 편찬 이라구? 이게 무슨 조선시대 예조쯤 되는 건가? 움하하하. 이 런 것을 외우고 있다니 나도 머리가 나쁜게 아니라니까.” 사각 사각하는 소리가 곧이어 나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123볼펜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면 짱이겠지만 깃털펜을 잉크에 적셔서 쓰는 것도 나름대로는 운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시안은 간만에 빽빽이 채우기로 빠져 들었다. ◇◆◇ “시안님이 혼자서 공부를 하신다구요? 원래 장로님이 맡아서 하시기로 했던 것 아닙니 까?” “그러게나 말일세. 하지만 혼자 하시는 쪽이 훨씬 빠르다고 하시니 뭐. 시안님을 말릴 수가 있겠나. 못 믿겠으면 나중에 시험을 치루어도 좋다고 말씀을 하셨으니 믿을 수 밖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꼬마가 어떻게 혼자서 그 많은 책들을….” 카류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로운을 보면서 주의를 주었다. “말 조심하게 로운. 자네 심정은 이해 하지만.” “죄송합니다.” “신기하군. 로운. 자네가 그렇게 반응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일세.” “아. 저. 단지….” 조금 난처한 빛을 보이고 있는 로운에게 카류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아니.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좋네. 왠지 그것이 자네 본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 까지 드는군.” “………….” “자네가 처음 신관이 되겠다고 찾아왔을 때 나는 이루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었지. 자 네 아버님이나 기타 다른 것은 제쳐 두고라도 자네가 신관이 되어서 제대로 해 나갈 수 있 을지 많이 걱정이 되기도 했으니까. 말일세.” 대답없는 로운의 앞에서 카류는 나름대로 착찹했던 과거의 감정을 늘어 놓는다. “하지만 그것도 다 기우였던게야. 보게나. 이번 일에 자네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걸세. 자네가 신관이 된 것도 모두 미메이라의 가호로 미리 안배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네.” 카류가 한 손을 올리고 얕은 바람을 일으킨다. 신께 경배를 올리는 미메이라인 만의 독특한 의식이다. 손바닥 위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가 주먹을 쥐는 동작을 피해 위로 사라진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시안님이 준비하시는 동안 자네에게도 전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든든하군.” 카류는 천천히 일어나 로운에게 따라오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책이 가득한 책장앞에 서서 카류는 준비해두었던 몇권을 책을 골라내어 로운에게 건냈다. “뭔가 시안님과 발을 맞추는 듯한 기분이군.” “이것은?” “시안님과의 여행도중 시안님께 도움이 될만한 바람술들을 위한 책일세. 이미 자네정도의 바람술사라면 모두 마스터 하고 있겠지만 혹시나 모르니까. 그렇군! 그 말을 해줘야겠어.” 카류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로운에게 싱긋 웃어본인다. “오늘 대단한 것을 발견했네. 키리엔의 지하 서고에는 30년 전에 내가 이중으로 걸어둔 영 구 바람술이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안님께서 그곳에 가시자 마자 내가 일으킨 바람의 가락을 잡아 내시더 군.” “예?” “아마도 무의식중에 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대단하지 않나. 아직 기초적인 엘의 운용도 모르시는 분이 내가 지하 서고에 걸어둔 영구 바람술의 가락을 집어내서 마음 대로 움직이시다니 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가.” 로운은 깜짝 놀라서 카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놀랍지만 실제였어. 내가 보았으니까 말일세.” “하아.” “그러니까 그렇게 가망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소리지. 이대로 미메이라에 대해서 알아나가 시고 그리고 계승의식의 마지막 단계까지 무사히 마치신다면.” “……………” 로운은 생각에 잠겨가는 카류의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번 일의 원흉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저 대신관 카류였다. 그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마도 바람의 신 미메이라께서만 아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로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대신관님께서는.’ 로운은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렇게 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 “그건 그렇고 로운. 로열 나이트 하라스다인에게 이 서신을 좀 전했으면 하는데.” 카류는 푸른색의 양초로 봉해진 서신을 로운에게 내밀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되니 자네가 직접 전해주었으면 하네.” “네. 알겠습니다.” 두손으로 카류가 내미는 서신을 받아들고 로운은 카류에게 무릎을 꿇고 그가 내민 손등에 키스를 했다. “미메이라의 가호를.” “잘 다녀오게.” “네.” “전원 기립!!” 우렁찬 목소리로 호령하자 넓은 훈련원에서 저마다 훈련에 열중하고 있던 훈련생들이 순식 간에 부동자세로 굳었다. “다음주에는 특별 선발시험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몸을 경건 하고 깨끗하게 유지해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선발시험에 응해야한다는 것을 잊지말도록. 이 상. 훈련을 마친다. 전원 해산!” 반짝이는 지휘봉의 끝이 하늘을 향했다 내려오자 여기저기 흩어져 기립해 있던 훈련생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그들을 향해서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대답을 한 기엘은 잔뜩 긴장시켰던 신경의 자락을 슬그머니 놓았다. “후우….” 언제나 훈련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몇 년전에 저 땡볕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하던 때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하디 엄한 교관이나 지금 자신의 위치에 있었던 현 수석 기사단장 크로운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자신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가고 신경이 긴장되기 시작한다. 출신성분이 평민이든, 귀족이든간에 일단 로열 나이트가 되기 위해서 훈련생으로 입단하는 순간부터는 모두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훈련생에게는 귀족에게 주어지는 ‘디’의 칭호도, 미메이라 최고위를 다투는 하라스다인 가문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 가진 엘의 능력뿐이다. “쿠로라는 이름이었나? 저기. 저 붉은 머리 친구.” “예?” 기엘은 지휘봉을 어깨를 탁탁치면서 자신의 비서관인 로엔에게 말을 걸었다. “네. 그렇습니다. 쿠로 토모즈라고 합니다.” “…뒤틀려 있어.” “예?” “엘의 파장이 뒤틀려 있어. 분명 무리를 한 것 같은데. 저런 파장 계속 바람술을 사용한다 면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겠어. 신관처에 연락해서 치료를 받도록 조치하게 저 상태로는 선 발전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기는 힘들거야.” “아. 그렇습니까?” 로엔은 기엘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에 새삼 존경심을 느끼면서 조용하게 물었다. 엘을 가진 사람은 어느 누구나 그들만의 독특한 파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적정수준이상 의 실력자라면 다른 사람의 파장도 자연스럽게 느낄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지금 기 엘은 한 두명도 아닌 수십명 가운데, 그것도 거리가 12렌(1렌은 1m 50cm정도)도 넘는 거리 에 있는 사람의 파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그 파장의 흐름까지 어렵지 않게 잡아내는 기엘의 실력에 로엔은 적지 않게 감탄하고 있었다. 얼굴 가득 경이롭다는 빛을 띄고 있는 로엔을 보면서 기엘은 가볍게 말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자네도 조금만 집중을 하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 낼 수 있 을거야. 어렵다고만 생각하니까 안되는 거지.” “하하. 하지만 저는 흐름까지 파악하기에는 실력이 모자란 듯 싶습니다.” “그것은 자네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지. 아. 어서 연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저런 상태로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아.” “네. 곧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엔이 잠시 자리를 비운동안 기엘은 넓은 훈련장을 바라보면서 나름대로의 감상에 빠졌다. 벌써 2년 가까이 수련생들과 씨름해온 곳이다. 로열 나이트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 이 수련지도관으로 임명을 받자 주위에서는 우려의 소리도 많았다. 그 이유는 훈련생의 대 부분이 14-17세의 소년들이지만 계중에는 늦게 엘의 능력을 자각하고 로열 나이트에 지원 한 20세 이상의 훈련생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실력있는 로열 나이트 라고 해도 약관 22세의 ‘어린’ 기엘이 수련지도관이 되었을 때 과연 수련원을 올바르게 유지해 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우려의 소리나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우려의 소리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고 오히려 기엘의 뛰어난 지휘 능력에 찬사 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기엘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한 것은 더 이상 말할 거리가 없었고, 개인적인 능력이외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기엘의 종합적인 지휘, 관리 능력은 훈련감 독으로 부임하면서 빛을 발했다. “기엘님.” “아. 자네도 그만 가서 쉬도록 하지? 이번주는 바쁜 한 주가 될테니까.” “행사준비에 대한 보고는….” “그런 것은 자네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준비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나?” 환하게 웃어 보이는 기엘의 얼굴에 로엔은 잔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기엘님.” “아. 뭔가?” “이번 선발식을 마치시면 수련지도관의 자리에서 물러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기엘의 비서관인 로엔은 기엘보다 한 살 아래의 로열 나이트다. “이런. 벌써 소문이 도는 건가?” “로열 나이트쪽에서는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기엘님께서 계승로에 참여하신다는 소문까지….” “어. 어라.” 기엘은 뭔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거취가 이미 결정나있는 듯한 기분에 머리를 긁 적였다. “아직 정식으로 결정난 것도 아닌데 이거….” “그. 그러면 사실입니까?” 로엔이 기엘이 혼자말처럼 내뱉은 말에 놀라 되물었다. “어어.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고. 나도 아직은 확실히 결정내리지 못했어. 설사 명령을 받는 다고 해도 일단은 거부권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어떻게 그럴수가 있습니까. 수련감독으로 제직하고 있는 기사가 계승로에 동참했다는 이 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니까 아직이라고 하잖아. 아직이라고. 나 말고도 후보들이 많으니까 정확하게 결정날 때까지는 아무말 말고 있어주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기엘님 로크레슈 신관님은 이미 내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어. 거기까지 소문이 퍼진건가? 이거 곤란한데.” 빠른 입소문의 위력에 기엘은 나름대로 놀라고 있었다. 자신에 관한 것이라면야 일단 자신 이 로열 나이트인데다가 일단은 현재 계승로에 동참할 정도의 적정나이와 기타 조건에 대충 들어 맞기 때문에 얼마든지 소문이 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연히 나이트 라인과 분리 되어있는 신관에 대한 사항까지 소문이 났다고 하면 조금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우리들이 아래서 왈가 불가 한다고 해서 이미 정해진 것이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아. 그러 니까. 자네도 당분간은 입조심을 하고.” 기엘은 손에 들었던 지휘봉을 로엔에게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 오늘은 간만에 집으로 돌아가야겠군. 그럼 로엔. 힘들겠지만 뒷수습을 부탁 해. 로엔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비서관이니까 말이야.” “기엘님.” 감격에 찬듯한 로엔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면서 기엘은 몸을 돌렸다. 사실 기엘은 이미 자신이 계승로에 동참할 기사로써 내정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미 카류로부터 들어 확인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뭔가. 기분이 좀 묘하군.’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면 또 다른 느낌을 받게 되기 마 련이다. “후우. 꽤 더운데.” 기엘은 목덜미를 덮기 시작한 머리카락에 송글 송글 맺힌 땀을 털어내면서 수련원 한쪽 옆 으로 길게 뻗어있는 숙사로 향했다. “꽤 더운 여름이 될 것 같군.” 조금씩 해가 져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한 흰색의 궁 키리엔이 뒤편에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수련원은 키리엔의 오른쪽 옆부분에서부터 뒤쪽까지 키리엔을 둘러싸는 듯한 형식으 로 지어져 있다. 말이 수련생들이지 실제로는 키리엔의 경호대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유사시에는 수련생들 전원이 키리엔 경호단으로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어있 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서 기엘이 자신의 숙사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앞을 막아 섰다. “기엘 수련지도관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수련관 숙사 담당관이다. “손님?” “일단 수련지도관님의 개인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반적으로는 누가 방문했다까지 보고 하게 되어 있는데도 담당관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 다. 그 말은 무엇인가 공식적이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인물이 방문했다는 이야기다. “뭐야. 이거 오늘은 간만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기엘은 발걸음을 빨리 하여 자신의 개인실로 뛰어갔다. “기엘.” “아. 로운 신관님.” 급하게 뛰어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추스를새도 없이 기엘은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혔 다. “괜찮아. 아무도 없잖아.”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부르셨으면 제가….” “격식 같은 것은 둘이 있을 때는 제발 집어 치우라고. 너는 무슨 녀석이 매사에 그렇게 딱 딱한거야. 본래 성격은 안 그런 주제에.” 로운의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에 기엘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하고 만다. “하지만 이건 몸에 밴 거라구. 너도 알잖아.” “아아. 알고 있지. 알고 말고. 자. 이거나 받아.” 털썩하며 다시 의자에 주저앉으며 로운은 가슴속에서 푸른 양초로 봉인된 서신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기엘의 눈이 커졌다. “대신관님?” “물론. 대신관님이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 시각에 여기까지 나올 수 있었겠어? 야. 일단 좀 씻고 와라. 땀 냄새가 여기까지 풍긴다. 요즘도 어린애들이랑 칼부림 같은 거 하는 거 야?” “이봐. 칼부림이라니. 검술지도라는 좋은 명칭을 두고.” 바닥에 털썩 털썩 경갑옷을 집어 던지며 기엘이 불평을 했다. 그러자 그 갑옷을 로운이 와 서 매듭을 풀으며 정리했다. 겉으로 보면 두사람은 나름대로 상당히 대조가 되는 사람들이다. 로운은 역대 수장보좌위를 거듭해온 로크레슈가의 장남. 그리고 기엘은 수석기사단장과 신국방위사로써 대대로 이어내 려온 전통있는 가문의 차남이다. 하지만 그들이 외모는 그 반대. 로운은 키가 기엘보다도 훨씬 큰데다가 오랜 훈련으로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하고 있다. 하 지만 기엘은 타고난 검술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단련해도 로운같은 근육이 생겨나지를 않았다. 물론 나름대로는 근육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부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겉에 서 보기에는 두사람의 역할이 반대가 아닌가 하는 정도로 보이는 것이다. 성격도 마찬가지다. 기엘은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기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의외로 자잘하게 생활전반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 모자라는 스타일. 그에 반해서 로운 은 겉으로 보기에는 반항심에 가득차 있고 언제나 불평 불만에 뭐든지 주먹으로 해결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성격은 의외로 꼼꼼한 것이다. 자신의 경갑옷을 꼼꼼하게 닦아내고 있는 로운을 보면서 기엘이 한마디 했다. “네가 거기서 그러고 있으니까. 수련생 시절 생각이 나는데?” “그런가? 하기사 너야말로 경갑옷이 썩어나가도 네 손으로 한번 닦는 꼴을 못봤으니까. 이 것도 보나마나 네 부하들이 번갈아가면서 닦아주고 있었을 텐데 뭘.” “하! 그러는 너는 맨날 사고 치고 다녀서 내가 선배들한테 얼마나 당했는지 모를거다. 기 왕 닦는 거 이것도 손질해 줘.” 기엘은 문가에 세워 두었던 자신의 라이트를 잡아서 로운에게 던졌다. “우앗!! 임마 조심해!!!” “아하하하하. 부탁해. 로운.” 부스럭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색의 양초가 떨어져나간다. 기엘은 로운이 가지고 온 서신을 읽는 중이다. 서신을 읽어내려가던 기엘의 눈이 순식간에 커지자 그것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로운이 물었 다. “왜 그래?” “조금 난감하군.” “대신관님께서 내게 직접 너에게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실 뭘까 궁금했거든.” “별거 아니야. 너를 통해서 보내신 것을 보니 너에게까지는 허용된다는 뜻이겠지. 자 읽어 봐.” 기엘이 로운을 바라보았다. 로운의 눈빛은 마치 어린아이의 호기심에 가득한 듯한 눈빛. 기 엘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로운에게 대신관으로부터 받은 서신을 건냈다. “그게 정말이야? 시안님께서 엘의 바람을 보실 수 있다는 것이.” “글세. 나도 들은 소리라서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어.” “게다가 그것에 마음대로 손을 대실 수 있다니. 이건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기 어렵지. …어?” 로운은 눈으로 스윽 서신을 훠어 내리다가 한 대목에서 멈추었다. 아마도 기엘의 눈이 커진 부분과 같을 것이다. “이건 뭐야.” “나도 모르겠어. 왜 아버님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내용은 도대체.” 서신의 초반은 정말 일반적인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시안이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실과 시안이 엘의 바람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도 잡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계승로에 동참할 기사로 기엘이 정식으로 곧 봉해질 것이라는 것등. 하지만 그 아래있는 내용은 기엘이 봐도, 그리고 로운이 읽어봐도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들이 있었다. 첫 번째로는 장로중의 한사람이며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신국방위사로 일하고 있는 기엘의 아버지 하라스다인 장로를 주의할 것. 두 번째로는 같은 이유로 계승로 직전까지는 개인적 으로 하라스다인 장로를 면담하는 것은 피하라는 권면이다. 세 번째로는 하라스다인과 로크 레슈 두 집안의 움직임을 면밀히 있는 힘껏 관찰하라는 지시였다. “아버님이 또 뭔가를 꾸미시는 건가?” “로운.” “억측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아버님은 너무 음험하다구. 그건 나도 익히 알고 있고. 하지만 하라스다인 장로님까지 등장하니까 좀 그런데? 너희 아버님은 원래 우리 아버님과는 별로 관계도 안 좋잖아.” “앙숙이시지.” “역시 기분이 나빠. 젠장할. 이럴 바에는 신전이 아니라 아예 다른데로 튈 것을 그랬나봐. 신관이 되면 이런 일들에서는 완전히 손을 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마음으로 신관이 되기로 한 거야?” “알면서 묻지마.” “하지만 조금전의 말은 로열 나이트인 나로써는 간과 할 수 없는 대사였어. 그런 반국가적 인….” “기엘.” 로운의 목소리가 조금 화가 난 듯, 한 톤 높아진 소리가 되어 기엘의 귀를 때린다. “알았어. 알았어. 입 다물지. 어차피 네가 신관이 되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못한 내탓이라 고 해두자고. 그러나 저러나. 시안님은 지금 뭘 하실까?” “뭘 하긴. 그 꼬마야 지금쯤 머리 싸매고 공부하고 있겠지.” 금세 투덜 거리는 목소리로 돌아온 로운을 보면서 기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로써는 정말 네 성격으로 정식 신관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구.” “꼬마 이야기 하다가 왜 또 딴 길로 빠져.” “미안하다니까. 정말로. 여하튼. 정말 갈 길이 멀다.” “그래.” 고요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백색궁 키리엔. 어둠이 덥히면 키리엔은 불의 영구마법이 자연스럽게 발동하여 어둠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 기 시작한다. 여관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수련생들은 숙사로 돌아가 내일의 준비를 하면서 잠에 빠져든 다. 그러나… 이 밤에도 잠 못 이루는 사람이 하나있었으니. “빌어먹을!!! 뭐가 이렇게 많아!!!” 시안은 빽빽하게 글자를 써서 새카맣게 변한 종이를 다시 바닥으로 던지면서 절규하고 있는 중이다. 옆에는 여관장이 밤참으로 먹으라고 준비해준 과일과 루유와 빵이 가득하지만 먹을 것은 이 미 시안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책! 또 책! 그리고 또 책!!!! 발 밑에는 요점정리를 마친 책들이 그럭저럭 한두권씩 쌓여가고 있지만 책상 위의 책들은 줄어 들 줄을 모른다. “빌어먹을 내가 어째서!!! 이놈의 궁내부 관할령 같은 것을 외워야 하냐구!!!! 하나같이 고 리타분 해가지고는 무슨 조선시대냐 여기는….” 입으로는 마구 욕을 퍼부으면서도 시안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지금 써내려가고 있는 것은 키리엔에서 주관하는 일년 행사 일람표. 자질구레한 것들은 대충 눈으로 읽어내 리고 꼭 외워야 할 것 같은 것만 골라서 마구 적고 있다. “제기랄. 이렇게 공부하면 진짜 서울대도 문제 없겠다. 바보 같으니라구.” 밤이 깊어가는 백색궁 키리엔의 지하에서 뭔가 짐승이 울부짓는 듯한 소리가 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시안이 공부를 시작한지 첫날밤 부터였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이다. ◇◆◇ “이대로 계승로에 오르게 할 셈입니까?” “하지만 현재로써는 딱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나 참. 다른 장로들 역시 움직임이 없으니….” “도대체 대신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대신관 뿐입니까? 전 수장이셨던 레이죠님께서도 아무말 없이 거의 은거 하시다 시피 하 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별조차 뜨지 않은 흐린 어둠의 시간. 초 하나만이 근근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는 밀실에서 두사람의 목소리가 오가고 있다. 한사람은 현재 수장의 위가 비어있는 상태에서 미메이라를 좌지 우지 하고 있는 수장보좌위 메일 디 로크레슈. 또 한사람은 그와 미메이라의 권력을 둘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 는 신국방위사 다란 디 하라디스다인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공식적인 석상이외에는 밀담같은 것을 나눌만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시안 의 일이 있은 뒤로 두 사람은 수시로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대신관 카류의 손으로 가짜 시안이 정말로 수장위에 오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아무리 가짜 시안님의 능력이 뛰어나다 하 더라도 자신의 딸을 잃은 전 수장 레이죠 님께서 이대로 수수 방관을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 다.” “하지만….” “일단 한달 뒤에 프리스트 로운과 나이트 기엘이 가짜 시안을 호위해서 계승로에 오르게 될 것은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그것은 장로회의 소관이 아니니 더 이상 왈가불가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미메이라는 정확한 제정 분리의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정일치의 사회도 아니다. 물론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미메이라라고 하는 거대한 신의 위력이 미메이라를 감 싸고 있는 한 신전의 영향력이 작아 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전이 모든 대소사를 무 조건 관할하지도 않는다. 수장의 위를 계승시키고 그 후보자를 심사 관리 임명하는데까지는 거의 모든 절차가 신전에 일임되지만 일단 수장이 선출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어디까지나 수장이 신의 대리인이 되 어 미메이라를 유지시켜나가는 것이다. “일단 계승로에 오르고 나면 대신관 카류도 더 이상 손을 쓸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쳐 어둠속에서 빛나고 있는 촛불보다도 더욱 환하게 빛난다. “조만간 프리스트 로운을 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떨 까요?” “………….” 속삭이는 듯한 하라스다인의 목소리에 로크레슈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여하튼 오늘은 밤이 늦었군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전갈을 주시면 언제든.” “하아. 이럴 때 레이죠님께서 좀 나서 주시면 좋으련만.” 로크레슈의 말에 하라스다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작은 방을 비추고 있던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다가 이내 꺼져버린다. “그럼. 다음기회에.” “다음 기회에.” 속삭이는 듯한 인사말이 어둠속으로 살며시 녹아들었다. ◇◆◇ “그게 정말이야? 어제의 로열 나이트 선발전에 시안님이 참여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야. 계승의식을 마치시고 몸에 무리가 많이 가셔서 현재 요양중이라고 하시더군.” “그래도 그렇지.” “하기사 나는 엘에 의해서 일어난 바람이 소용돌이까지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 어.” “맞아.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은 아마도 수장 계승자 이외에는 절대 없을걸?” 수련원의 앞에 수련생들 몇 명이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이는 지나가는 듯이 어떤 이는 불만에 가득찬 듯이 삼삼오오 모여서 어제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 는 것이다. 어제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수련원은 나름대로 소란스러웠다. 기엘은 아침 훈련을 위해서 걸어나오다가 말고 수다를 떨고 있는 수련생들을 향해서 한마디 했다. “선발식이 끝났는데 아직도 선발식 분위기인가? 각 조의 조장들은 다 어디갔나?” “앗. 기엘님.” “이. 이봐. 기엘님이야.” “에엑~!! 진짜!! 가서 빨리 리플리 깨워!!!” “야. 올라가는 김에 우리방 녀석도 좀 깨워주라.” 기엘이 수련장에 한발을 내디는 순간 수련생 전원이 마치 스위치라도 들어 간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1시간 후까지 수련생 이하 전원, 식사를 마치고 대기시키도록.” 뒤늦게 허겁지겁 나타난 로엔에게 기엘은 짧게 명령을 하달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다들 피곤한 모양이니까. 로엔이라고 다를 바 없을 텐데. 나도 만만치 않게 피 곤함을 느끼고 있으니까.” 기엘은 밝게 웃어보이면서 수련원의 넓은 훈련장을 둘러보았다.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깔끔 하게 정리되어 나직한 잔디까지 깔려 연 푸른색으로 빛나던 훈련장이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 어있다. 어제 오전의 검술, 대련 시합 때까지야 아무 문제 없었지만 오후에 들어서 바람술 심사에 들어가면서부터 훈련장은 아직은 미숙한 바람술사들의 공격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이런. 나는 생명술쪽으로는 별로 재능이 없는데. 정말 엉망이잖아.”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기엘님이 그런 소리를 하시면 수련생들 모두 손목을 꺾고 좌절 해야한다구요,” “어어. 이봐. 날 그렇게 과대 평가하면 안된다구.”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엘-세지의 바람술사이면서도 모든 종류의 엘을 다룰 수 있는 나 이트가 부지기수로 계신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 나만해도 생명술이나 치유술쪽으로는 별로 소질이 없는 편이지. 뭐 바람술사 의 숙명같은 것이지만.” “하지만 그래도….” 기엘은 몸을 돌려서 거의 황폐화 되어 있는 훈련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소질이 있었다면 이정도는 단번에 끝을 낼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환하게 웃어보이는 기엘을 보면서 로엔은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때였다. “기엘님!!” 멀리서 누군가가 기엘의 이름을 부르면서 헐레벌떡 뛰어 왔다. 하지만 기엘은 그 소리가 들 리지 않는지 로엔을 상대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흐응. 그럼 훈련생들 중에서 감응력이 좋은 친구들을 모아서 한번에 싸악 해치우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기엘님!!!!” “기엘님!!!”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오는 사람은 기다란 치맛자락을 마구 날리면서 거친 훈련생들 사이를 요령좋게 요리 조리 피해서 곧장 기엘에게로 달려왔다. “기엘님!!” “어. 궁내부의 여관이 어째서….” “여관? 여관이 수련원에 무슨 일이지?” “기엘님.” 숨을 몰아내쉬면서 기엘의 앞에 선 여관은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시안님의…….” “시안님의 뭐?” “아니. 그것보다 어서 궁으로 가주세요. 기엘님. 무슨 일이 있으면 기엘님이나 신전의 로운 님을 부르라고 하셨지만 신전은 너무 멀어서….”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두서없이 당황하며 말하는 여관에게 로엔이 한마디 했다. “시안님께서, 시안님께서….” 여관은 말을 하다가 말고 울먹 울먹거린다. “시안님께서 글쎄… 으흐흑.” 결국 여관은 제대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면서 그만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저기 울지 말고 말씀을 하셔야 어떻게든….” “아니 됐어. 로엔. 키리엔에 들어가보면 알게 되겠지. 이거 아침부터 무슨 소란인지.” “으흑. 시안님이….” “자자. 울지 말고 일어나세요. 같이 갈테니까.” 기엘은 입고 있는 경갑옷을 벗어서 옆의 로엔에게 건내주며 말했다. “수련생들을 모아서 훈련장을 정리하고 있게. 나는 잠시 다녀올테니까. 아마도 점심시간까 지는 돌아올테니까 그때까지만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기엘님.” 기엘이 그렇게 엉엉 울고 있는 여관을 팔을 부축해가며 돌아오고 있던 바로 그때 키리엔은 그야말로 난리법석 이상의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난리 소란 법석이 일어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시안이 여자의 몸으로 변한 뒤부 터 아침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그 치렁 치렁한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일의 발단은 새벽녘이었다. 밤새도록 중얼 중얼 눈앞에 잔뜩 쌓여있던 책들을 하나 둘씩 헤 치우던 시안은 날이 밝아올 무렵 책상 위에 그냥 엎어져 선잠이 들었다 “우욱. 어깨야. 허리야. 다리야.” 선잠이 들었던 시안이 문득 눈을 뜬 것은 아침시간이 거의 다 돼서였다. “으으. 안 아픈데가 없네. 이게 왠 고생이야 정말.” 으드득-하고 온몸에서 소리가 나도록 기지개를 켜는 순간 배속에서 꼬르르륵 소리가 났다. “아. 그렇군. 배고파서 깬 건가?” 손가륵을 폈다가 쥐었다가 하면서 시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일단은 화장실부터 들렀…으윽. 또 생각났다. 제길 어제 물을 그렇게 마시는 것이 아니었 는데.”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시안은 되도록 물이나 과유를 먹는 것은 조금 자제하고 있었다. 공 부를 하다말고 화장실에 자꾸 들락 날락하는 것이 귀찮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화장실 자체에 가는 것이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몸이 된지 근 2주째에 접어 들고 있지만 역시 화장실 만큼은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하아. 정말이지, 여자라는 것은 불편하군.” 끼이이익- 의자를 미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지하 서고 구석 구석으로 퍼져나간다. “에잇.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고.” 시안은 화장실로 가기 위해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한발을 내딛는 순간. -우당탕탕. “우아아악!!” 조금전 의자를 미는 소리 따위와는 비교 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소리가 시안의 비명 소리와 함께 쏟아져나왔다. “으으윽. 아파라. 도대체 왜.” 의자와 함께 완벽하게 나동그라진 시안은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무 이유도 없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넘어질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휴- 무릎이야. 도대체 뭐에 걸려서 넘어진거야?” 시안의 시선이 몸을 따라서 다리쪽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시안은 자신을 의자와 함께 넘어뜨린 범인을 찾아내었다. “이. 이. 이….” 어슴푸레한 가운데에서도 투명하게 반짝이는 실들이 온통 자신의 다리와 의자의 다리에 잔 뜩 엉겨붙어 있다. “이. 이놈의 재수없는 귀신 머리카락!!!!” 허리를 넘어 바닥까지 끌릴듯한 머리카락이 아마도 공부를 하는 동안 이리저리 흩어져있다 가 자는 동안에 시안이 꼼지락 거리는 동안 여기저기 감겨든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머리카락. 이 놈의 머리카락 잘라 버리고 말겠어!!!” 시안은 화르륵 화를 내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악!! 따가워!! 제길!!!!” 여기저기 흩어져 잔뜩 감겨있는 머리카락은 시안을 의자 위에 속박해두는 수갑처럼 엉클어 져 있었다. 근 30분이 넘게 머리카락을 뽑아낸(?) 시안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서 손에 쥐고는, 숙면 을 취하지 못해 빨갛게 토끼눈이 된 채로, 버럭 버럭 화를 내면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오늘에야 말로 반드시!! 반드시 잘라주겠어!!!” 시안은 씩씩거리면서 온 방을 뒤집으면 가위를 찾았다. 침대 옆의 꽤나 큰 화장대부터 시작, 내실에 딸려 있는 옷방까지 모조리 뒤졌다. 하지만 내실에 가위 같은 것이 있을리 만무. “가위가 없으면 칼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냐!!! 에잇! 이놈의….” “키야아아악!! 시안님!!” 아침이 되어 버릇처럼 시안의 내실을 정리하러 들어왔던 여관이 난장판이 된 시안의 내실을 보고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따라 들어온 여관들 역시 마치 날도둑이라도 들어 모조리 뒤집어버린 듯한 내실을 보고 거의 기절 상태가 되어 버렸다. “소리 지르지 마!!! 입다물고 아무 소리도 하지마! 귀 찢어져!!” 시안도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자신의 목소리도 그 여관 못지않게 하이 소프라노 상 태가 되어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가위 내놔!! 가위!!” 뒤늦게 연락을 받고 뛰어올라온 여관장을 향해서 시안은 소리를 쳤다. “가위 줘요! 가위. 가위가 없으면 잘드는 컷터칼이라도 내놓으라구요!!” “시안님 진정하세요! 도대체 이게 무슨.” “가. 위. 줘요. 가위!!” “무슨 일이신지 차근 차근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시안님. 그리고 레아. 미리를 데리고 어서 치료실로 가고. 당신들은 어서 내실을 정리 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여관장은 시안이 언제나 밥을 먹기 전, 즉 아침에 바로 일어났을 때는 언제나 상당히 날카 로와져 있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서 아침을 준비하도록. 시안님이 원하시는데로.” “네. 알겠습니다. 여관장님.” 여관장 라헬은 아직까지도 빨간 토끼눈을 뜨고 미친 듯이 서랍을 뒤지고 있는 시안에게 다 가갔다. “식사를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일단은 식사를 하시고 말씀해주세요. 시안님.” “식사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칼부터 주세요. 아니면 가위를 주던지.” “그러니까 그 가위나 칼이 어째서 필요하신지 말씀을 해주셔야 찾아드리지 않겠습니까?” “이놈의 머리!!” “예?” “이놈의 치렁 치렁한 머리를 견딜수가 없다구요!!! 아침마다 이놈의 머리를 발견하면 얼마 나 짜증이 나는 줄 알아요?” “시, 시안님?” “귀신같잖아요! 검은색도 아니고 이게 무슨 투명한 실도 아니고. 어깨까지만 와도 내가 말 을 안 해!!!! 허리에 칭칭 감기고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에 거미줄처럼 감겨가지고 옴싹 달 싹도 못해! 얼마나 끔찍한 줄 알아요?” 숨도 쉬지 않고 시안이 지껄여 댔다. “꿈을 꾸면 이놈의 머리카락이 거미줄이 돼서 목을 조른다구요!! 머리카락에 목 졸려서 죽 다가 깨는 경험 해봤어요?!” “시안님 진정하세요. 일단 식사를 먼저 하시고.” 라헬은 숨도 안 쉬고 쏘아대는 시안의 말을 가로 막으며 손짓을 해서 다른 여관을 불렀다. “그러니까!! 이놈의 머리 잘라 버리겠어! 고3보다 더 미친 듯이 공부하고 말도 안되는 궁내 규약 같은 것도 외워 주겠고 이따위 물렁한 몸도 참아 주겠다 이거야!!!” 화르륵 타오르는 시안에게서 잠시 물러나서 라헬은 손짓을 부른 여관에게 소근 거리며 말했 다. “어서 신관과 수련원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수련원에 가서 수련지도관이신 나이트 하라스 다인님을 어서 모셔오고. 신전으로도 연락을 해서 대신관님이나 프리스트 로크레슈님을 어 서 오시도록 청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여관장님.” 황급히 사람들이 물러갔다. 화르륵 불타오르다 못해서 이제는 불뿜는 드래곤이 되어버린 시안은 불을 뿜는 대신 이성을 잃었을 때면 가끔 발동되는 엘의 힘으로 불규칙한 바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가위 줘요!! 가위!!!! 라헬!! 가위 안주면 이놈의 머리카락 뿌리채 뽑아 낼꺼야!!” “시안님!! 참으세요!!” 라헬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이거놔!!!! 이거 놓으란 말야!! 이 쭈그렁탱이 할망구!!” “시안님!” “이놈의 머리카락!!! 잘라버리고 말겠어!!” “시안님 그러시면 안됩니다.” “기엘님께는 아직 소식이 가지 않았나? 그리고 신전으로 사람은 보냈고?” “네. 이미 사람은 보냈습니다만.” “어서 모시고 오도록 해.” “제길!! 아저씨 얼굴 따위 부른다고 내가 그만 둘 것 같아!!! 이거 놔!!!” 되도록 얌전히 있으라는 레이죠 장로나 카류의 당부 따위는 이미 시안의 머릿속에서 날라가 버린지 오래다. “알겠습니다. 시안님. 일단. 아침식사부터 하세요. 아침식사를 하시고 나면 가위를 찾아 드 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진정하시고 먼저 식사부터 해주세요.” 순간 화악-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백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라헬에게 쏟아져 들어온다. “정말이죠?” “물론입니다. 제가 언제 시안님께 거짓을 아뢴적이 있나요.” “……….” 거짓을 말할 만한 거리가 있었던가 하고 라헬은 홀로 생각한다. “진짜죠?” “네. 진짜입니다.” “좋아요. 그럼.” 화라락하고 쏟아지던 머리카락들이 한올 한올 제자리로 돌아간다. “자. 일단은 머리가 걸리적 거리지 않도록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이리 앉으세요.” “…쳇.” “어서, 앉으세요. 시안님.” “알았어요. 대신. 만일 거짓말을 한 거면 정말 그때는.” 무시무시한 시안의 눈빛이 라헬의 가슴을 강타한다. “저를 믿어주세요.” 라헬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시안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는 믿으셔도 되지만 기엘님과 대신관님과 로운님이 오시면 제 의견은 묵살 될 것입니 다. 저는 얼마든지 믿으셔도 좋아요.’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거울 치워!!” 시안은 화가 난김에 평소에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내 뱉었다. “르네. 어서 거울을 치우도록.” “네. 알겠습니다. 여관장님.” 라헬은 온통 주절 주절 떠들어가면서 불만을 내뿜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애써 한곳으로 모은다. ‘제발 부탁이니 나이트 기엘님이든 프리스트 로운님이든 어서 와주세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기원을 하고 또 기원을 했다. “뭐야!! 이거!! 달잖아!!” “시안님. 시안님이 원하시는데로 만들었습니다만.” “누가 빵에다가 설탕을 들이 부으라고 했어!! 난 식빵이 좋단 말야 식빵!!” 시안은 아침상이라고 주어진 식탁에 앉아서 빵을 한입 베어물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이 달디 단 빵 맛 만틈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식빵이 무엇인지?” 시안의 식사를 담당하고 있는 요리관장이 옆에 서 있다가 물었다. “설탕 안 들어간 빵! 네모난 모양으로 넙떡하게 구운 빵도 몰라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으윽. 제길. 아메리칸 스타일 아침 따위.” 시안이 신전에서 돌아온 날부터 요리관장 산슈는 골머리를 썩고 있는 중이다. 신전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시안은 돌아온 그날 저녁식사부터 매번 불평 불 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단 빵이 싫다. 시큼한 로유가 싫다. 단 맛을 빼달라 신맛을 제거해달라등등 시안의 요구는 나름대로는 미메이라 최고의 요리사라고 자부하고 있던 산슈의 자존심을 박살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미메이라의 요리라는 것은 최고로 달고 최고로 새콤하게라는 것을 모토로 만들 어진다. 때문에 시안이 먹을 음식을 만들면서 몇 번이나 설탕과 꿀이든 단지에 손을 대었다 가 말다가 하는 산슈의 심정은 정말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럼 어떤 요리를 원하시나요 시안님? 원하신다면 남쪽 지방의 토속요리라도 해드리겠습 니다.” 화는 나지만 상대는 이제 미메이라의 수장위를 계승할 정식 계승자다. 요리관장으로서의 자 존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먹는 사람의 구미에 맞추어 가장 기쁘게, 맛있게 먹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요리사의 기쁨이자 보람. “남쪽 지방?” “네. 남쪽지방에서는 더운 날씨 때문에 음식을 조금 짜게하거나 담백하게 만들어서 먹는다 고 하더군요.” “그럼 생선 찌개같은 것도 끓이는 건가요?” “생선…찌개요?” “네. 시원한 무랑 콩나물을 넣고 매운 고춧가루를 잔뜩 푸려서 보글 보글 끓이는 거요.” “흐응. 고춧가루라 남쪽 지방에 그런 조미료가 있었나….” “맵께! 얼큰하게 끓이는 매운탕!” “생선을 넣은 남방식 스튜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일단은 힘써보겠습니다.” 산슈는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뒤에 남은 시안은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진수 성찬으로 차려진 식탁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엄마가 만들어주는 아침밥상이 그립게 될 줄은 정말 몰랐군.” 식탁 때문에 엄마가 떠오르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가족생각이 줄줄이 이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아빠가 엄청 걱정하고 있을텐데. 그렇게 사라졌으니.” 달고 달은 꿀빵을 먹는 것을 포기하고 시안은 과일에 손을 대었다. “하기사 바보 형하고 누나들은 내가 없어져서 골탕을 좀 먹겠군. 설것이랑 쓰레기 분리 수 거도 자기들이 해야하잖아?” 가족들 생각이 나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친구들의 얼굴까지 떠올랐다. 하지만 시안은 머 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떨쳐 내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물렁한 복숭아 비슷한 과일-이름은 모른다- 그리고 꼭 바나나처럼 생긴 과일을 한번씩 집 어들었다가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꼭 사과처럼 생긴 과일을 집어들었다. “사과는 역시 부사가 짱인데. 이거 맛이 있을랑가 몰라.” 사과를 들고 시안은 잠시 노려보다가 옷깃에 슥슥 닦았다. ‘여하튼 이놈의 골 때리는 나라에서 할 일을 빨리 빨리 모조리 해치우고 어서 돌아가야지. 이런거 먹다가 정말 위장 다 버릴 거야.’ 시안은 입을 크게 벌리려다 말고 그윽한 눈빛으로 붉은 빛의 과일을 내려다본다. “흐응. 여기 여기 나 좀 봅시다.” “네. 시안님. 뭐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식사 시중을 드는 여관이 다가와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과일 껍질 벗기게 칼 좀 가져다 주시겠어요?” “아. 예.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으니까 칼이나 가져다 줘요.” “예.” “기왕이면 날이 잘 서서 자알 드는 것으로.” 시안은 있는 힘껏 입꼬리를 올려가면서 환하게 웃어보였다. 물론 웃고 있는 그 마음속은 웃 는 얼굴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말이다. 잠시 후 자리를 비웠던 여관이 들어와 시안에게 작은 칼을 내밀었다. “흐음.” 일단 시안은 과일을 깍았다. 과일 깎는 것 정도는, 동생을 발로 차는 정도는 예사로 생각하는 무식한 누나들과, 동생이라 는 존재는 잔심부름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고 있는 형의 구박덕에 프로페셔널한 솜씨로 깎을 수 있다. “좋아. 과일 껍질은 괜찮고.” 시안은 슬쩍 눈을 들어서 여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시안을 향해 뭐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가요?의 눈빛으로 화답한다. ‘흐음. 그럼.’ 시안은 칼을 살짝 내려 치렁 치렁하게 늘어져 있는 옷깃에 대고 살짝 닦는 시늉을 하면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칼은 과도 치고는 정말 날이 잘 서있어서 순식간에 샤악 소리도 없이 천의 한 귀퉁이가 잘 려져 나갔다. ‘으흐흐흐흐. 완벽하군. 좋아! 이정도면.’ 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다 하셨습니까.” “아아.” 시안은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까 전에 라헬이 곱게 모아서 세가닥으로 땋 아준 머리카락을 잡았다. “저어. 시, 시안님?” “거미줄 머리야. 안녕~.” 날카로운 칼날이 은빛의 선을 그리면서 시안의 머리카락을 싹뚝 잘라냈다. 사라락하며 시안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숨을 헐떡이면서 라헬과 함께 막 방안으로 기엘이 뛰어들어왔다. “꺄아아아아악!!” 마치 은빛의 뱀이라도 되는 것처럼 길에 바닥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라헬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혼절하는 것을 기엘이 얼결에 받아들었다. 기엘이 라헬의 몸을 부축하면서 본 시안의 표정은 더할 나위없이 상쾌한 얼굴이었다. “시안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내 머리 내가 잘랐는데 그게 뭐….” “어떻게 19년을 기른 머리를 그렇게 단 한순간에.” “어차피 진짜도 아니잖아. 그거 가지고 그렇게 거품물지 말라구요. 기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러실수 있습니까!!” “아아. 정말이지 귀찮아서 해 먹겠나 이거.” “시안님!!” 기엘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헐레벌떡 불려온 것도 조금은 불만이었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비상사태(?)라고 치 고 그냥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식당에 들어서자 마자 마치 나 잘했지? 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시안의 얼굴을 봤을 때는 정말 기가막혀서 말이 안나올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자신을 안내하여 들어간 여관은 비명을 지르며 기절해 버렸고, 시안의 무식하게 칼로 잘라내서 마치 꽁지빠진 제비 꼬리같은 머리카락을 보는 여관들마다 전부다 목이 터져 라 비명을 지르면서 삼분의 일은 기절, 삼분의 일은 혼절, 나머지 삼분의 일은 정신을 잃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 시안이라는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하서고로 내려왔던 것이다. “상황을 보면서 하셨어야죠. 그렇게 머리를 자르고 싶으셨다면 계승로에 오른 뒤라도 늦지 않지 않습니까.” “………….” “아침부터 난리를 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죽하면 여관이 제가 있는 수련원까지 달려왔겠 습니까. 이런 일을 하시고 싶으시면 미리 저나 로운님께 연락을 하실 수도 있었을텐데.” “연락했으면 자르게 해줬을 거 같아요?” “그. 그건….” “거 봐요. 대답 못하지. 그리고 덧붙여서 말을 해두지만 그건 내 머리카락이었다구요. 내 머리카락!!” 시안은 로운이 얌전하게 들고와서 자신의 앞에 늘어놓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면서 말했다. “내 머리 내가 좀 자르겠다는데 왜 그렇게 말이 많습니까?” “하지만 그 머리카락은 시안님께서 19년을 길으셨던 머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답답한 인간아!!” 콰앙-하고 시안이 참다 못해서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여자가 19년을 길었다고 해도 어차피 내 머리는 진짜도 아니잖아!! 공부에 방해되니까 이제 좀 꺼져!!” “시안님!!!” “그러게 난 그 진짜 시안이 아니라구!! 19년은 무슨 19년. 이 머리카락은 아저씨 얼굴이 2 주전에 만들어놓은 거잖아!! 자꾸 내가 그 여자 생각하게 하지 말란 말야!!” “그만하게 나이트 기엘.” 기엘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과 기엘 모두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이죠 장로님.” “아. 안녕하세요. 가짜 아빠.” 시안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대신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부에 무지무지 방해가 되니까. 저 인간 좀 끌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안님.” “저. 장로님. 지금….” “아니 됐네. 이쪽은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나이트 기엘은 이제 돌아가도 좋네.” “하, 하지만.” “때로는 원하는 만큼의 현실이 되지 않을 때도 있는 걸세. 그것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 지.” 흥분한 기엘을 레이죠 장로가 조금 다독거리고 있는데 멀리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 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고함소리도 들려온다. “자네 짝꿍이 온 모양이군.” “예?”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오리바람처럼 로운이 등장했다. “이 멍청한 꼬마가 이번엔 도대체 무슨 소란을 일으킨 거야!!” 지하서고로 뛰어든 로운은 기엘이 눈에 들어오자 마자 소리를 쳤다. “기엘!! 네가 옆에 있으면서도 이런… 앗. 레. 레이죠 장로님.” 로운은 소리를 지르다가 말고 기엘의 뒤쪽에 서있는 레이죠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한쪽 무 릎을 세웠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네. 그리고 나이트 기엘에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리 흥분할 것 없어. 오 래 살다보니 자네가 흥분하는 것도 보게 되는 군.” “화. 황송합니다.” “시끄러운데 좀 다들 나가 주실 수 없어요?” 그때까지 가만히 공부하는 척을 하고 있던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공부하라고 해서 얌전히 공부하고 있는데 웬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너는 가만히 좀 있어!!” 로운이 발끈하여 소리를 쳤다. “자자. 그렇게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니 너무 흥분하지 말게. 시안의 변환술은 자네 솜씨라 고 들었네만.” “아. 예. 그렇습니다.” 레이죠 장로는 책상쪽으로 걸아가서 기엘이 가져다 놓은 시안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려진 머리카락 정도는 어떻게 다시 붙여 놓을 수 있겠지. 안 그런 가?” “그렇습니다.” “그럼. 더 시간 끌 것도 없겠군. 당장 시행하게.” “네.” “잠깐!!” 시안은 레이죠 장로가 나타나서 어떻게 사태가 원만하게 수습되는가 싶었다가 레이죠 장로 가 꺼낸 말에 다시 발끈했다. “힘들여 잘라 놓은 것을 왜 다시 붙여!! 그리고 그건 내 머리라구요!! 나는 내 머리 자를 자유도 없는 겁니까?” 스윽- 그때까지 얌전하고 조용하게 말을 하던 레이죠 장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안을 바 라보았다. 마음껏 성질을 부리고 있던 시안은 레이죠의 날카로운 눈빛에 흠칫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이해 하겠네만.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네. 자네 마음을 모르는 것 은 아니지만 일단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지켜줘야 우리도 자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 줄 수 있을테니 말일세.” “하, 하지만 난 그 머리카락이 정말 싫다구요!” 순간 동시에 6개의 눈동자에서 쏘아진 빛이 시안에게 향한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눈빛이 자신에게 쏘아지자 시안은 조금 움츠려 들었다. “그. 그래도.” “로운. 시간이 없네. 더 이상 소문이 퍼져나가기 전에.” “네. 알겠습니다.” 로운은 레이죠로부터 머리카락을 받아들고 시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지 않아도 수행식을 마치고 돌아온 시안님이 전과는 다르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가고 있는데 이런 일까지 생기면 곤란하네. 어디까지나 자네가 내 딸 시안을 대신하고 있 는 것은 극비사항이니까.” “극비는 극비고 나는 나라구요.” 자신을 향해서 무시무시한 눈빛을 뿌리며 다가오는 로운을 보며 시안은 슬슬 뒷걸음을 쳤 다. ‘젠장할. 간신히 잘랐는데 그 머리카락을 또 달겠단 말야? 절대로 싫엇!!!’ “저렇게 싫어하니 다 살릴 필요는 없고 겉에서 보기에 무리가 없는 정도가 좋겠지. 한 허 리정도까지만 오도록 수습을 해보지.” “예. 알겠습니다.” “하. 하지맛!!!” 오싹-하는 전율이 시안의 등골을 지나간다. 무시무시한 로운의 눈빛도 겁이 났지만 무엇보다도 그 로운이 바람술인지 뭔지를 자신에게 걸었을 때의 감각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다. 마치 바람이 칼날이 돼서 온몸을 찌르는 듯한 감촉. ‘제기랄!! 절대로 싫엇!!!’ 시안은 파다닥하고 온몸을 돌려 로운의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시안의 시 도는 어느사이엔가 다가와 있던 기엘의 팔에 잡혀 저지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시안님.” “젠장할 머리카락 같은게 무슨 소용이라고 그러냐구!!” “입닥쳐 꼬마!!” ‘으윽--.’ 시안은 마음속으로 공자님 맹자님 부처님 지저스크라이스트를 외우며 눈을 질끈 감았다. 로 운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차가운 기운이 시안의 드러난 목덜미에 느껴졌다. 순간 시안의 머릿속에는 지난번에 카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원한다-라고 받아들인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로운의 변환술이 성공할수 있었던 거지 요.’ “…그. 그렇다면.” 혼자서 중얼거리는 시안에게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좋아.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싫다. 절대 싫다. 난 아저씨 얼굴이 싫다. 저 찐따같은 기엘도 싫다. 아저씨 얼굴이 쓰는 바람따위 절대로 싫다. 절대로 안 받아들인다. 목에 칼이 들어와 도 못 받아 들인다. 죽어도 싫다. 목을 졸려도 싫다. 단빵 보다 더 싫다. 긴 머리도 싫다.’ “아. 이런….” “왜 그러십니까. 프리스트 로운.” “뭔가 이상한데? 잠깐. 다시 한번.” 화악-하고 차가운 바람 같은 것이 다시 시안의 목덜미로 밀려온다. 시안은 눈을 질끈감고 다시 아까처럼 마치 주문을 외우듯 싫다 싫다 싫다를 반복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주문이 효과라도 있었는지 로운은 전혀 변하지 않는 시안의 머리카락을 들 고 눈을 깜박였다. “이거 설마….” 변환술의 주문을 외우다 말고 로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시안이 그 사이에 엘의 운영 을 배워서 쉴드를 쓸 수 있게 되었나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히힛. 안 돼지롱~.” 시안은 자신의 생각대로 로운의 변환술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자 몸을 뒤틀어서 기엘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우하하하하하핫. 역시 그 긴 수염 할아버지 말대로네. 이봐 아저씨 얼굴. 댁보다는 내가 더 힘이 세다며? 그래서 내가 싫다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하던데 푸하하하하핫. 그러니까 포 기 하라구.” “이. 이녀석이.” “로운!” “젠장할.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기엘. 바인딩 쉴드(binding shield, 주문을 걸 으려는 상대의 엘을 속박하는 주문).” “아. 알았어.” “어. 이. 이봐!! 아저씨 얼굴!!” “그렇다고 해도 아직 너한테는 지지 않는다구. 힘만 쎄면 단 줄아냐? 어떻게 쓰느냐가 중 요한거야 이 바보 꼬마.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쓸줄 모르면 자신보다 더 바람술을 잘 쓰 는 사람에게 꿀릴 수 밖에 없는거야.” “너!!!” “기엘 디 하라스다인.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젠장할!! 하지마!!!” “바인딩 쉴드.” 기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주문이 시안에게로 흘러들어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마전부터 엘의 바람을 볼 수 있게된 시안의 눈에는 자신에게 몰려오는 기엘의 엘이 마치 투명한 뱀들이 꿈틀대면서 몰려오는 것처럼 비추어졌다. “우. 우악!!!! 이거 치워!!!!!” “로운 디 하라스다인.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 엘-메타모르포시스 (el-metamorphosis).” “우. 우아아아아악!!” 부웅-하고 로운의 손끝에서 시작된 바람이 기엘의 엘에 옴싹 달싹 못하고 있는 시안의 머 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로운의 손에 들려있던 머리카락들이 한 올 한 올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 시안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하게 보였다. “그만 하란 말이얏!!!!!” 그리고. 같은 시작 막 혼절했다가 깨어난 라헬이 궁 지하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기절할 것만 같은 고 함소리를 듣고 다시 한번 혼절해 버렸다…라고 누군가가 전해주었다. ◇◆◇ “그래? 시안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단 말이지.” “네. 대신관님께서 그 꼬마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시는 바람에 애를 좀 먹… 아. 죄송합니 다.” 현재 로운은 신전으로 돌아와 그날 키리엔에서 있었던 일을 대신관 카류에게 보고하는 중이 었다. 카류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로운의 말을 듣다가 로운이 지레 사과를 하자 너털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도 바인딩 쉴드까지 사용을 했으니 시안님이 좀 충격을 받으셨긴 하겠군, 그 래. 레이죠 장로님은 아무 말 안 하시던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머리카락을 원상복구 시킨 후에 시안님과 긴히 할말이 있으시 다면서 저희들을 내보내셨기 때문에….” “그래. 그런가.” “제 의견입니다만. 시간을 너무 끄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시안님이 언제 가짜라는 것이 밝혀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지 않습니까?” “그렇기도 하겠지. 그래서 레이죠 장로님께 미리 손을 써달라고 했었는데 생각보다는 많이 어렵군. 하기사 보통 다른것도 아니고 이계의 사람. 그것도 여자도 아닌 남자이니 말이야.” 카류는 손에든 깃털 펜을 까닥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건 그렇고. 로운.” “네. 대신관님.” “혹. 로크레슈 장로로부터는 아무 전갈이 없나?” “아. 아버님이시라면 근간에 한번 집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신 관은 마음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해서 일단 거절을 했습니다.” “흐응. 생각대로군.” “대신관님?” 카류는 로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 생각하는 듯이 깃털펜을 들고 잠시 침묵했다. “허가를 내 주겠네.” “예?” “어차피 먼길을 떠날터인데 부모 자식간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좋을 거야.” “하지만 대신관님께서….” “물론 나이트 기엘에게는 되도록 부모님과는 접촉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이유는 자네도 알거야. 기엘은 부모님의 말을 거역할 성격이 못되지.” “…………” 실제로 그랬다. 모든 직위를 버리고 신관이 된 로운과는 달리 기엘은 타고난 성격뿐만 아니 라 자라온 교육방법 때문인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같은 것에 항명할 타입이 되지 못한다. “나이트 기엘은 신경쓰지 말고 다녀오도록 하게. 어차피 로운 자네도 지난번 수행식때 잠 시 인사를 한 것 이외에는 개인적으로 다인 장로를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까.” “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다인 장로가 지금 자네가 한 말을 들으면 놀랄게야.” “예?” “매사에 아니오를 연발하는 자네가 내말에 이리도 고분 고분한 것을 보면 말일세. 하하하 하.” 로운은 조금 낭패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물론 로운의 성격은 카류가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상당히 냉소적인데다가 비관적이고 게다 가 반항심도 꽤 많은 성격이었다. 그런 로운이 이렇게 카류의 말에 고분 고분 따르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카류가 가지고 있는 인품때문이기도 했지만 일단 신관이 되기로 마음 먹었 으니 쫓겨나지 않게 잘 행동을 해야겠다는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이 더해져있었기 때문이라 는 것은 아마도 카류도 몰랐을 것이다. 모든 공적인 임무에서, 그리고 사적인 의무를 벗어던진 로운이 신전에서마져 불합격 판정을 받는다면 그 이후로는 정말 떠돌이 생활밖에 남지 않는다. “가서. 잘 듣고 오게. 자네 아버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 말씀은.” “아니. 나에게 보고까지 할 필요는 없네. 내가 자네에게 시안님 문제를 일임한 이상 이후에 벌어지는 것은 자네가 직접 보고 그리고 판단한 일이지.” “대신관님.” “자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그리고 움직이게. 자네 같은 사람이 다른 사 람의 명령에 불복종하는데는 나름데로의 이유가 있는 법이지.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지 못하 면 절대로 그대로 움직이지를 않는게야.” “…………”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세. 혹자는 그것을 개인주의니 독선이니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지. 하지만 자신의 주관 위에 우리의 미메이라께서 어떻게 생각하 실지, 그것을 더한다면 그런 말도 사라질게야.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 으니까.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대신관님.” 로운의 마음속으로 카류의 마음이 바람처럼 스며든다. 로운이 처음 신관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단순하게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것 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던 것이 신관으 로서 수업을 받으면서 가슴속에 맺혀있던 여러 가지 감정을 정화하고 생활해나가면서 조금 씩 바뀐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자신이 신관을 길을 선택한 것이 순간의 이기에서 나온 실수가 아닌가 고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직접 로운을 선택하여 교육을 담당했던 카류도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카류의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듯한 말을 듣고 있으면 신관을 선택한 것이 정 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밤이 깊었군. 이만 가서 쉬게나. 내일 아침을 준비해야하지 않겠나.” “예. 대신관님.” 로운은 카류에게 예를 올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고분 고분하게 누군가의 의견에 따르는 것도 때로는 즐겁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6. 사상최대의 기술, 막판 벼락치기? “정말. 이놈의 바람의 나라인지 미메이라인지 거기 사는 지렁이든지 두고보자.” 이빨을 가는 소리가 으드드득하고 악다물은 잇사이에서 흘러나온다. 시안은 이제 책 상위에 단 2권의 책을 남기고 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사람을 어떻게 보는거야?” 막 한권의 요약정리를 마친 시안은 자신의 머리통의 두배쯤 되는 책을 집어들어 있는 힘껏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좋아. 이제 남은 것은 두권이군. 흥!!!” 의자 주위로는 지금까지 시안이 초인적인 인내와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 아니면 할 수 없을 초강력 벼락치기를 근 2주일 넘게 내내 실시한 끝에 초토화 되어있는 책들이 가득했다. 책상 위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안이 끄적인 빽빽이 들이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시안의 허리 높이로 몇무더기나 쌓여있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공부하면 진짜로 서울대 가겠다. 으으윽.” 마지막으로 남은 책 2권을 보면서 시안은 한숨을 내 쉬었다. “잘하면 내일이면 끝이 나기는 나겠네. 그럼 대충, 15일쯤 되는 건가? 아니면 16일쯤 되는 건가? 쳇. 여기는 달력이 잘 없어서 날짜가는 것을 알기도 힘들고. 요일 개념이 없지는 않던 데. 에에 어디 있더라. 책력을 요약해둔게….” 공부를 하다말고 지친 시안은 꼼지락 거리면서 산더미처럼 싸놓은 종이 더미를 뒤적거렸다. 집이라면 달력이 방에 두세개는 될 정도로 쌓여있을텐데 말이다. “앗. 여기있다. 아슈레이력이라. 역시 외우기는 외웠지만 벼락치기라서 좀 무리가 있기는 있구만. 이런 거 물어보면 안 되는데….”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시안은 대략의 날짜를 어림짐작해보았다. 그동안 그럭저럭 주워 들은 것은 있어서 자신이 이 키리엔에 왔던 날짜가 여름이 시작되는 날에서 4일인가 5일 후였다는 것이 기억났다. “흐음. 여름이 시작되는 달이면, 에쉬(불을 의미)의 달인가.” 시안이 요약해 놓은 종이에는 발음하기도 귀찮은 달의 이름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늘어져 있 다. 그것은 현재 미메이라에서 쓰는 말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고어로 만들어 져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모든 달에는 이름이 붙어있고 그 이름에는 그 고유의 뜻이 있었 다. “여름이니까 불이라. 뭐 말되네. 여기도 우리나라처럼 후덥덥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명색이 바람의 나라니까.” 시안은 기지개를 펴고 나서 책상 위에 남아있는 두 권의 책에 눈길을 돌렸다. 남아있는 책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책보다 훨씬 두꺼운 책이다. 그중 한 권은 이곳에 처 음 공부라는 것을 하러 왔을 때 카류가 내민 그 문제의 바람술인지 뭔지하는 것이 적혀있는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지난번에 레이죠 장로로부터 머리를 잘랐다는 이유로 온갖 잔소리를 듣다가 마지막에 받은 책으로 역시 카류가 준 책과 비슷한 바람술을 다룬 책이었다. 뜻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바람술서만 두권이 남은 것이다. 그 두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안의 머릿속에서는 레이죠 장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자네 마음은 십분 이해하네.” “이해를 했으면 머리는 그냥 둬야 할 것 아니예요. 아저씨 때문에 도대체가.” 시안은 바람의 술에 의해 꽁꽁 묶여 있는 동안 도로 복귀가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후려치면서 대답했다. “이것 좀 보라구요. 이거.” “자네 마음은 이해하네만. 그만큼 내 마음도 이해해줬으면 하네. 말로 해서 못알아 들을 상 대라면 이렇게 붙들고 말할 필요도 없을테니까 말이네.” “………….” 겉으로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시안은 속으로는 내가 왜? 라고 생각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나로써는 자네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지.” ‘그럼 안 보러 오면 될 거 아냐? 왜 보러와 가지고서는’ 이라고 생각하는 시안. 하지만 시안이 무슨 생각을 하든 레이죠 장로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자네를 보면 시안이 생각나네. 정말 한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미메이라의 수장이 될 것 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 나도 의심치 않았고 심지어는 카류도 의심치 않았어.” “그래서요?” “하지만 결과는 이렇게 되었네. 나는 19년 동안이나 그애를 고생시켜놓고 결국은 그애의 결심을 말리지도 못했네.” “말리지 못한 순간에 끝난 거 아닌가요?” “…………” 차갑게 말하는 시안의 얼굴을 보면서 레이죠 장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딸과 똑같은 얼굴을 가졌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딸과는 전혀 다른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같은 얼굴을 가지고 다른 말을 하는 사람. 그래서 더욱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이 레이 죠 장로의 심장을 흔들었다. “그래. 그런거겠지.”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우울해져 있는 레이죠 장로를 향해 시안은 조금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라는 말이 있어요.” “…………” “아무리 자기가 키운 자식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그 애들이 원하는데로 부모가 따른다는 거 죠. 옛날 어른들 말은 하나도 안 틀리는 것이라고 저희 엄마랑 아빠도 말씀하시더라구요. 무 슨 소리인지 저는 감이 잘 안 오기는 하지만 말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속상해 하실 필요 없 어요. 여하튼 그 시안이라는 사람이 원한데로 제가 이곳에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거면 됐잖 아요. 만일, 정말 만일이지만 그 이계 소환술인지 뭔지가 실패라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럼 말짱 헛거에 도루묵이었을텐데, 대신관 할아버지 말로는 더할 나위 없는 확실한 성공이 었다던데요?” “그랬지.” “그럼. 이제 그만 궁상 떠시고 가서 아저씨 일 보세요. 나는 이거 마저 외워야 하니까.” “그래. 그러니 자네도 좀 더 열심히 해 주었으면 하는거네. 머리카락 같은 것으로 우리를 너무 놀리거나 괴롭히지 말고 말이야.” “일은 일이고 머리카락을 머리카락이예요. 여자가 된 것도 짜증나 죽을 지경인데.”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고생이네.” “…………”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레이죠 장로에게 시안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봐요. 아저씨. 말 안 해도 알아요. 그 시안인지 뭔지 하는 여자 생각하는 것도 알겠고. 그래서 나더러 좀 더 조심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나도 나름데로 생각이 있고, 저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좀 아셨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좀더….” “이봐요 아저씨.” 시안은 속으로 하나, 둘, 셋하면서 수를 세었다. 화가 난 상태에서 그냥 말을 하다가는 무슨 소리를 지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른한테는 버릇없는 녀석으로는 보 이고 싶지 않다는 방어기제가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참고 있다고 이야기 했죠. 내 뜻도 아닌데 이런데로 불려 온 것도 참고 있고 여자가 된 것도 참고 있고 대입이랑은 아무상관도 없는 이놈의 궁내규약이니 미메이라의 일년 계획 이니 같은 것도 외우고 있다구요. 저한테 아무리 그 시안이라는 여자가 이랬고 저랬고 그랬 으니 너도 좀 그래봐라 라고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요.” 잠시 숨을 쉬고 시안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시안이라는 여자가 날 불러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렸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꾸 그걸 상기시켜보았자 제 화만 돋구는 일이니까 이제 그만 하시라구요. 아시겠어요?” “…………” 차갑게 떨어지는 시안의 말 뒤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레이죠 장로는 조용하게 일어났다. 시안은 레이죠 장로가 화가 나서 가나부다 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죠 장로는 잠시 후 지하 서고 한곳을 뒤져 책을 한권 가져왔다. “뭐예요 그건?” “도움이 될 만한 책일세.” “두고 가세요.” “꼭. 반드시 읽어두게. 이곳에 있는 한은 이 책에 적힌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게 될테니 까.” 그렇게 두고 간 책이 바로 지금 시안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바람술서다. 무슨 책인가 싶어서 궁금해 하기는 했지만 그 책은 카류가 골라주고 간 책과 비슷한 두께에 비슷한 크기의 책. “화는 나겠지만 내가 실패하면 그 아저씨도 입장이 서지 않겠지. 에잇. 박경하가 인간이 되 어 가는 구나, 아니 지금은 시안인지 뭔지 하는 계집애 나부랑이지만.” 남은 책들을 오늘 할까 잠을 좀 자고 내일 할까하고 시안은 잠시 고민했다. “으음. 일단은 그래도 빨리 끝내는 것이 좋을 테니까.” 시안은 굳게 결심을 하고 먼저 카류가 놓고 간 책을 집어 들었다. 기초부터 나온다고 했으 니 그쪽이 좀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웅. 1장. 엘의 운용. 엘-루하….” 끄적 끄적- 깃털펜이 움직인다. “엘-루하. 흐르는 공기에 엘을 흘려보낸다. 흐르는 공기는 술사의 엘을 받아들이면 투명하 면서도 반짝이는 선으로 살아난다. 그 선에 정신을 집중하여 온 몸을 돌아 나가도록 조정하 는 것이 엘의 기본 운영법이며 엘-루하라 일컫는다. 그럼 이것도 엘-루하로 만들어진 건 가?” 종이 위에 엘-루하라는 글자를 적어 넣고서 눈앞을 지나가는 바람의 한 자락을 잡아들었다. 손가락에 잡힌 바람을 시안은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손가락에 잡혔던 바람의 가닥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다가 살짝 방향을 뒤틀어 손가락 을 감쌌다. “되기는 되는데? 흐흐흐흐. 쉽잖아.” 손가락을 감쌌던 바람을 끌어올려 팔을 타고 기어 올라가게 한다. 혼자서 음침하게 후후훗 하면서 엘의 바람을 움직이는 시안. 하지만 시안은 방금전에 자신 이 한 것은 기본적인 엘-루하가 아니라 엘-세지의 단계에 들어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엘-루하스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엘이 이미 실려있는 바람을 움직이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엘-루하를 기본으로 모든 바람술이 시작된다. 뭐 기본이 되니까 다른 것도 되겠지 뭐. 그 럼. 주문이나 정리해 볼까나.” 시안은 자신의 목에 감겨있던 엘의 바람을 집어들어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주문의 시작. 엘 조하 아슈레이는 엘의 기원을 부르는 의미. 주로 엘-세지의 단계에서 사 용되는 주문들은 아슈레이에 기원하여 바람의 신 미메이라의 힘을 빌어 사용하는 것이며 자 신의 임으로 시작하는 주문은 자신의 엘을 기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끼적이는 소리와 함께 빽빽이가 한 장 두장씩 늘어가기 시작한다. 시안은 근 2주에 걸친 초 강력 벼락치기의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 “그렇다면 레이죠 장로님께서도 대신관님의 의중을 모르시겠다는 것입니까?” 침묵의 와중에 한사람이 입을 열었다. 어두운 내실. 연하게 반짝이는 빛의 구(球)가 반짝이고 있다. “나이트 기엘이 계승로에 참여한다고 하던데.” “이대로라면 그 가짜 시안님께서 그대로 수장위에 오르시게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불가 항력의 일이라고 아무리 생각한다고 해도 전통있는 미메이라의 수장위을 그런 정체도 모를 이계인에게 맡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아닙니까.” “맞습니다. 일단 어쩔수 없이 모든 장로들의 만장일치로 결정된 일이라고 해도 그분을 그 대로 수장위에 오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곳은 키리엔의 외곽에 세워져 있는 일종의 관사였다. 사리스라고 불리 는 이곳은 궁의 전반적인 일을 맡아하는 장로들이 사용하는 관사의 맨 위층. 이른바 로열 스테이지라고 불리는 그곳은 신국방위사장인 하라스다인 장로의 내실이다. 그 내실에는 지금 5명의 장로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중심에 있는 것이 이 내실 의 주인인 하라스다인 장로 그리고 그 옆에는 전 수장이었던 레이죠 장로가 입을 꾹 다문체 앉아있었다. “일단 계승로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6개월은 걸릴 여정입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 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직 엘의 운용에 손톱만한 조예도 없는 수장계승자입니다.” “하지만 나이트 기엘과 프리스트 로운이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까. 수장계승자격에는 미달 한다 하더라도 두사람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기엘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던 하라스다인이 기엘의 이야기가 나오자 손을 들고 의견을 표했다. “일단 로크레슈의 장남에게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제 아들은 최고의 로열 나이트 입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일을 마치고 나서 그 대리인이 가졌던 모든 힘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하여 수장으로 추대했 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무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라스다인의 말에 모두들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수장결정권은 신전에 있습니다만 아무리 대신관이 힘을 쓴다고 해도 그것은 이 키리엔이나 미메이라의 안에서 만입니다. 일단 가이칸이나 호로스의 영토로 접어들면 그 정도는 손쉽게 처리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손을 쓰기 시작했으니 여러분들께서는 그저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계시면 됩니다.” “정말 카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둘러 앉아있던 사람중 하나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관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한사람의 의견보다는 여러사람의 의견이 더 더욱 중요한 법입니다. 그것이 진리이든, 진리가 아니든.” 어두운 사리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아마도 에테르의 달이 되기 전에 계승로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레이죠 장로가 말을 꺼내자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사람들 의 시선이 순식간에 레이죠에게 모아졌다. “아니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적어도 한달이상 걸릴 것이라고들 말해왔지 않습니까? 교육 이 그렇게 쉽게 끝날 일입니까? 이게 도대체.” “생각하시는 것처럼 시안님은 그리 호락 호락한 상대가 아닙니다.” “레이죠 장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안님을 교육하는 역할을 제가 담당하기로 했었던 것 기억하십니까?” 레이죠의 어두운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시안님은 홀로 모든 것을 습득하시고 계신 상태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세상에는 모를 일들이 얼마든지 생깁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법이지요. 그 리고 아마도 며칠내로 소식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소식이라뇨? 어떤?” “어떤 소식이든간에 말입니다.” 확정하듯 말하는 레이죠 장로의 얼굴. 그 얼굴을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면서 바라보았다. “자!! 맘대로 물어봐요.” “…………” “뭘 그렇게 멍청하게 쳐다봐요.” “정말 그걸 다 외운 거냐? 너?” 로운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시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주루룩 쌓여져 있는 책들 쪽 으로 눈을 돌렸다. 미메이라에 대한 모든 것.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관한 책들이 로운의 눈에 들어왔다. 기가 막혀하고 있는 것은 로운 뿐만이 아니었다. 또 한 명의 관계자라고 할 수 있는 기엘역 시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시안이 며칠 밤낮을 새며 쌓아올린 일명 빽빽이를 읽 고 있었다. “정말 다 적으셨네요.” “외울 때는 빽빽이가 짱이라니까요. 그러면 다시 한번 볼 때도 문제가 없고. 그러니까 내가 대한민국 고등학생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 그래도 그렇지….” “그래서 준비는 되셨습니까? 시안님?” “아. 물론. 준비 빵빵 OK. 언제든지. 움하하하핫.” 시안의 의기 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웃어버렸다.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와중에 오직 한사람, 시안만이 여유로운 표정 을 하고 있다. “그럼. 레이죠 장로님 먼저 시작하시죠.” “예. 알겠습니다. 아. 그전에 먼저. 시안님?” “네?” “제가 드린 책도 모두 보셨습니까?” “아아. 그거는 그냥 참고로 보라면서요. 보니까. 바람술서에 대한건데 그런것도 오늘의 테 스트 범위가 되는 건가요? 그건 나중에 볼려고 보다 말았는데.” “무슨 다른 책을 시안님께 드렸습니까?” 그때까지 아무말 않고 있었던 카류가 레이죠에게 물었다. “아니. 호기심이 있으신 것 같아서 바람술서를 하나 드렸을 뿐입니다.” “아. 레이죠 장로님께서도 시안님의 자질을 파악 하셨나 보군요. 저도 시안님께 하킨의 책 을 드렸지요.” “예에--??” “설마. 대신관님 그 하킨의 책이라면.” “하킨의 책이라니.” 모두들 경악하는 눈빛으로 카류를 바라보았다. 지금 카류가 언급한 책은 엘-세지의 단계 이 상의 경지에 오른 술사들도 어렵게 여기는 책이다. 물론 거기에 서 있는 로운이나 기엘은 이미 하킨의 책을 본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서는 안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기초의 기초도 모르는 문외한인 시안이라면 특히나 그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킨의 책은 전설의 대 바람술사라고 불리웠던 약 300년 전의 미메이라의 수장이 남긴 최고 의 바람술서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 책이 최고중의 최고가 되지 못한 것은 그 바람술서가 엘-세지의 단계에 이른 바람술사가 아니라면 시전조차 할 수 없는 주문들이 가득하기 때문 이다. 엘-세지의 경지가 아닌 자가 그 책을 보다가 잘 못 주문을 시전하는 날에는 술사 자신에게 막대한 피드백이 가해져서 잘못하면 영영 두 번다시 엘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본다고 해서 그것을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참고로 하시라고 드린 것 뿐이니 그런 얼굴 하지들 말게나.” “어어~. 나를 뭘로 보는 겁니까 이거!!!” 모두들 경악해서 카류를 바라보자 시안은 순간 발끈했다. 자신이 저 책을 모두 봤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분위기는 그럭 저럭 이해해줄수 있었다. 왜냐면 시안 자신도 그 얼마 안 되는 동안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저 책들을 모조리 읽어 치 웠다는 사실에 적잖게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다본 거는 아니지만 앞부분은 봤고 그리고 쓸 줄 하는 바람술도 있다구욧!!” “그래? 뭔데? 흥. 기껏해야 산들바람밖에 못 일으키는 주제에.” 로운의 빈정거림에 시안이 콧바람을 흥하고 일으키더니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뭐가!! 나도 엘-루하 정도는 할 수 있단 말이야!! 이 아저씨 얼굴!!” “흥. 엘-루하는 하는 것으로 중요한게 아니야. 얼마나 정교하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는 군. 애송이 녀석.” “시끄럿!! 눈이 있으면 똑바로 뜨고 보란 말야!!” 그리고 시안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두가 경악할 만한 행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눈앞을 흘러가는 엘의 가락을 잡아서 자신의 팔에 올려놓는 일이었다. “………!!!” 앉아있는 모든 사람의 눈. 그중에서도 카류와 로운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져서 시안의 행 동을 지켜보았다. 엘의 가락을 팔에 올려놓은 시안은 조용한 목소리로 주문 아닌 주문을 외웠다. “엘-루하.” 사르륵하고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시안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시안의 팔 위에 얌전하게 놓여있던 엘의 가락이 꿈틀거리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 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는 와중에 시안의 팔 위에서 엘의 가락이 바람이 되어 손가락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단 한 가닥의 엘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시안의 손목을 타고 손가락으로 흘러갔다가 엄지 손가락을 반지처럼 감았다. 그리고 감았던 것이 풀리더니 그 다음으로 다음 손가락을 감았 다가 그 다음 손가락에서도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새끼손가락까지 흘러갔던 엘의 가락은 다시 팔을 타고 소용돌이 같은 움직임으로 올라와 시 안의 목을 감고 그 머리 위까지 가서야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머리카락 위에서 하늘거리는 엘의 가락을 시안이 손가락으로 잡아내서 다시 공기사이로 돌 려놓을 때까지 모여있는 사람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시안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 다. “봐요. 되죠?” 씨익-하고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시안이 말하는 순간 좌중에서 경악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 다. “세상에. 저런.” “허어. 너. 꼬마, 진짜 지금 한게 엘-루하가 맞냐?” “어? 트, 틀렸나?” 시안은 분위기가 이상하자 배시시 웃으면서 카류를 돌아보았다. “저기 할아버지 저 뭔가 잘못했나요?” 시안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묻자 그때까지 숨을 참고 있던 카류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 아하하하핫.” “대신관님.” “어어. 분명히 맞게 한 것 같은데, 이상하다. 우우우웅.” 시안은 잘난 척을 하려고 했다가 뭔가 조금 이상한 분위기가 되자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 어가고 싶어졌다. 왜. 하필이면 자신은 저 아저씨 얼굴이 있는 곳에서 그런 쓸모 없는 잘난 척을 한걸까? ‘으윽. 이제 삼일 밤낮으로 빈정 댈 거야. 저 인간. 틀림없이.’ 모두들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기엘이 한발 앞으로 나와서 시안에게 다가왔다. “그게 그러니까. 지금 시안님이 하신 것은 엘-루하가 아니라 엘-루하스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 그래요? 하지만 나는 시키는 데로 했는데.”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시안이 대답하자 기엘이 마치 어린 동생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 책에 뭐라고 쓰여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뭔 책이요?” “엘-루하에 대해서 쓰여져 있는 책이요.” “아아. 뭐 별말 없던데 몸 안의 힘을 모아서 공기로 보내면 엘의 바람이 된다. 그것을 움직 여라? 정도?” “잘 기억하시는 군요. 하지만 지금 시안님이 하신 것은 본인이 만들어낸 엘의 가락을 움직 이신게 아닙니다. 이렇게.” 기엘은 바로 시안의 눈앞을 지나가는 바람의 가락을 잡아서 자신의 손등 위에 놓았다. 흐름 을 저지당한 가락은 벌레처럼 기엘의 손등위에서 꿈틀거렸다. “이것은 시안님의 힘으로 된 엘의 바람이 아닙니다. 본래 엘-루하는 자신이 만들어낸 바람 으로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바람을 잡아내는 것은 엘-루하스라고 하는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헤에. 하지만 나는 그 엘-루하스라고 하는게 엘-루하보다 쉬워서 그렇게 했을 뿐인데 꼭 엘-루하로 연습해야하는 건가요?” “엘-루하스가 쉽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시안의 말에 기엘을 비롯 그때까지도 시안의 경이로운 발전에 넋을 잃고 있던 사람들이 다 시 한번 놀라움에 휩싸였다. 숙련된 바람술사도 엘-루하스는 자주 실패를 하고는 한다. 기본적으로는 어려운 것이 아니 지만 단 한 가닥의 가락을 잡아서 그것도 자신의 힘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 의 힘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많은 정신 능력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저 시안은 지금 엘-루하보다 엘-루하스가 쉽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루하스가 쉽죠. 당근. 왜냐면 말이죠….” 시안은 배시시- 웃어보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간 부우웅-하는 공기의 떨림과 함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깜짝놀랄만큼 투명하고 반짝 이는 엘의 바람 수백가닥이 시안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엘-루하를 하려고 바람을 만들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동시다발로 무 지막지하게 밖에 안되거든요. 푸하하하하핫.” “하. 하하하하핫. 맞습니다. 그렇게 많은 가닥을 모두 움직이려면 힘들지요. 그렇고 말구 요.” “정말 단번에 엘-루하스를 해내다니….” “자. 이제는 제가 바람술을 쓸 수있다는 것도 증명했으니까. 빨리 물어봐요. 시간없다면서 요. 그리고 나도 빨리 여기를 나가고 싶으니까.” 시안은 자신을 보고있는 가지가지 표정을 보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어 굴들은 모조리 제각각이다. 레이죠는 굳은 표정으로, 대신관은 놀랍다는 듯한 화통한 웃음과 함께, 로운과 기엘은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지난번에 신전에서 인사를 받았을 때 몇 번 보았던 다른 몇 명의 장로들은 눈이 숟가락보다도 더 커져있다. “그럼. 좋습니다. 시안님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저희가 가늠해보도록하지요. 먼저 미메이 라력을 말씀해보시겠습니까? “엣?” 시안은 처음 받은 질문이 하필이면 얼마전에 잘 안외워진다고 투덜 거렸던 책력이라는 것에 순간 얼빵해졌다. “왜. 외우지 못하시는 건가요?” “아, 아니예요. 못 외우긴. 단지 혀가 깨물릴 것 같아서 그럴 뿐이랄까. 으음 그러니까 첫 번째가 아데 빈나(지혜로운자)의 달, 두 번재가 페실림(돌)의 달, 하르(식물)의 달, 미슈파트 (바람)의 달, 에또 다섯 번째가 세샨(백합)의 달….” 시안은 머릿속에 꾹꾹 넣어놓았던 지식들을 천천히 읊었다. 사실 다른 것 보다도 시안은 저런 뜻도모를 단어들을 외우는 것이 가장 싫었다. 학교를 다 닐 때 세계사 시간에도 마찬가지. 동양권의 나라 이름들은 길어야 일본이름이 4자고 중국사 는 세자 이름만 마스터 하면 어느정도까지 된다. 하지만 그리스쪽으로 넘어가면 사정이 틀 려진다. 정말 말하다가 혀를 깨물어 버릴 것만 같은 이름들, 예를 들어서 프롤레마이오스라 던가 페리클레스니 무슨 무슨 ~스로 끝나는 이름들이 가장 싫었다. 왜냐구? 아무리 외워도 당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니까. “라맘(빛의 장소)의 달, 에쉬(불)의 달, 에테르(풍부함)의 달….” 시안의 맑은 목소리가 울리고 있는 도중에 레이죠장로가 손을 들어서 시안을 멈추게 했다. “미메이라 력은 그정도로 좋습니다. 기본이니까요. 그럼 다음으로는 키리엔의 기사단 제도 에 대한 것을 말씀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레이죠 장로가 시안에게 요구하는 것은 수장으로써 가지고 있어야 할 정말 기초적인 지식이었다. 물론 카류가 건네준 책들에는 미메이라의 오랜 역사에 관한 책들도 있었고, 각종 사회 경제 문화에 관한 전반적이고 전문적인 책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안이 가 짜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다. “키리엔의 궁정기사단이라. 으음. 그러니까 로열 나이트들로 구성된 수장직속의 사르트 루 하가 있고 사르트 루하는 수장이 결정된후 수장이 직접 구성하는 것으로 10명이내, 최고의 로열나이트로 구성되죠. 음 그리고 나머지 로열 나이트는 궁정기사단 세아트에 소속이 되는 데 기본적으로 궁정기사단장은 사르트 루하중 한명이 맡게 되있습니다.” 시안이 말을 하다가 말고 맞는가 싶어서 레이죠 장로의 얼굴을 살피자 레이죠 장로가 또 한 가지 질문을 추가했다. “그럼 현재 궁정기사단장은?” “사르트 루하 크로운.” “좋습니다. 계속하십시오.” “에에. 그러니까…. 로열 나이트 밑으로는 로열 나이트 선발전에서는 떨어졌지만 수준급이 상의 실력을 가진 자로 구성되는 나이트 사아르가 있는데 이들이 그러니까 일종의 직업군 인. 그 아래로 문제가 생기면 군대가 조직된다…가 맞는 건가?” “맞습니다.” “그럼 현재 기엘이 맡고 있는 직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 기엘요?”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기엘이 긴장했다. “기엘은 현재는 수련지도관이고 궁정기사단 세아트 소속.” “정확합니다.” 기엘이 대답했다. “그럼 다음으로는 프리스트들에 대한 것을 말씀해 보시죠.” 시안이 기사들에 대한 것을 대충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카류가 끼어들었다. “미메이라의 신관들은 모두 키리엔에서 떨어져있는 대 신전에서 교육되고 그 등급은 프리 스트외에 견습프리스트로만 분류되죠. 할아버지가 대 신관이고 대신전의 모든 일을 관장하 지만 국정에는 간섭 할 수 없음. 단 수장계승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고 있습니다. 저기 아저 씨 얼굴이 거기서 하고 있는 일은 대신관 보좌역. 뭐 이쯤이면 된 건가요?” 시안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훗. 수탐이나 언어쪽은 젬병이지만 사탐 과탐은 나를 따라올자가 없지 우하하하하핫.’ “좋습니다. 너무 자세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요. 저는 이정도로 족합니다. 다른 장 로님들께서 확인하시고 싶은 사항이 있으시면 물어 보십시오.” 줄줄이 질문들이 이어졌다. 오히려 제일 걱정했던 레이죠 장로나 카류의 질문같은 것은 쉬운 축에 속했다. 그 둘보다는 입을 떡-벌리고 넋을 놓고 앉아있던 다른 장로들의 질문이 훨씬 어려웠고 난해했기 때문이 다. 하지만 시안은 그 어려운 질문들을 하나하나 가끔은 조금 고전을 할 때도 있었지만 무사히 클리어 해 나갔다. 질문에 대답을 하는 시안은 자신이 난해한 질문의 대답을 무사히 마칠 때마다 놀라는 표정 을 지어 보이는 장로들의 표정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외우면서도 과연 이런 것은 어째서 외워야하는 걸까? 하고 고민을 했던 것을 꼭 찝어서 물 어본 약간 심술 맞게 생긴 장로의 질문에 대답했을 때는 등골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황홀한 쾌감이 끓어오를 정도였다. ‘대단하군요.’ 또는 ‘대단하십니다.’ 그것도 아니면 ‘아니 이런 것까지 그 짧은 시간 에!!’라고 장로들이 말 할 때마다 시안은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대단하다고 하지마세요~. 댁들은 벼락치기도 모르는 감? 벼락치기는 효과는 짱이지 만 대신 대답하는 순간부터 잊어버리는 것이라구요. 머릿속에 억지로 밀어 넣은 것이라서 대답을 하면 마구마구 빠져나가거든. 움하하하하핫.’ 혹시나 오늘 말고 한 이삼일 지나서 물어보면 좀 곤란한데…라고 생각하면서 시안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자아. 좋습니다. 이만하면 시안님께서 수장계승자로써 첫 번째로 배워야할 모든 기본지식 을 습득하신 것으로 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모여있던 25명의 장로들을 향해 대신관 카류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을 했다. 말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카류 역시 속으로는 대단히 놀라고 또 경이로워 하고 있었다. 아 무리 시안이 그렇게 말했지만 정말로 2주야만에 그 많은 지식을 습득하리라고는 믿지 않았 었던 그였다. 그로써는 그 레이죠 장로와 자신이 했던 첫 번째 질문정도만 무난히 대답해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안은 총 7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백색궁 키리엔의 최상층에 위치한 알현의 방 중간에 서서 이제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끝난 것이다. 지하서고에서 연필로 허벅지를 찍어가면서 대입에 임하는 고3 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를 했 던 결과가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대입 시험도 이렇게만 공부하면 짱일텐데 말이야.’ 사람은 급하면 뭐든지 하는 법이다. 시안은 팔짱을 끼고 건들 건들거리면서 이런 저런 의견을 나누고 있는 장로들을 돌아다보았 다. 뭔가 무게감이 잔뜩 느껴지는 위치지만 이것도 이제 한 두번만 하면 끝이 날것이라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 할 수도 없는 일. 따라서 시안님께 서 계승로에 오르는 날짜는 오는 에테르의 달이 시작되는 날로 결정을 짓고자 합니다. 여러 장로님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 카류가 하는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던 시안은 입술을 삐죽 삐죽 거리면서 속으로 약간의 불 만을 토로했다. 시험만 통과하면 금방이라도 내보내 줄줄 알았는데 금방이 아니라 다음달이 라고 했기 때문이다. 시안은 슬금 슬금 뒷걸음을 쳐서 장로들이 앉아있는 곳을 벗어나 끝쪽에 앉아있는 기엘과 로운에게 다가갔다. “저기.” “예? 시안님?” 시안이 다가와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근 소근 기엘에게 물었다. “그 에테르의 달이 시작되는 날이 며칠 남은 거예요?” “아아. 앞으로 8일이 남았습니다.” “조금 더 앞당길 수 없어요?” “보통 달이 지나가는 날에는 출발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모든 행사는 달의 시작하는 날에 이루어지죠.” “왜요?” “달이 차오르는 것은 시작의 의미를 가지고 달이 지나가는 것은 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 다. 이미 아시겠지만 모든 키리엔의 행사는 달이 시작되는 날에 이루어지죠. 그 때문입니 다.”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이봐 기엘. 꼬마랑 소곤거리지 말아. 너희 아버님이 보시고 계신다.」 시안과 소곤거리고 있던 기엘의 귀에 로운이 보내는 코로(소리의 강약을 조절하는 바람술) 을 이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필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알고 있어. 하지만 시안님이 궁금해하시는데 어쩔 수 없잖아.」 기엘 역시 눈에 띄지않게 대답하면서 시안을 바라보았다. “일단 제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8일이라고 하지만 정말 얼마 남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마도 저 시안님은 어마무지하게 이 키리엔이 싫은 모양이라고 기엘은 생각했다. 하기사 며칠전에 일어났던 그 머리카락 사건을 만을 보아도 궁에 갇혀있는 것이 싫어 질만도 했다. ‘하지만 계승로에서 돌아오시면 평생을 이곳에서 보내셔야 할텐데, 걱정이군.’ 그 사실을 지금 거지에서 삐딱한 걸음걸이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시안이 알고 있을지 아니면 모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럼. 만장일치로 에테르의 달 첫일에 시안님이 계승로에 오르시게 됨을 선언합니다.” 시안이 기엘과 속삭이는 동안 아마도 장로들의 논의는 끝이 난 모양이다. “이 사실을 모든 신민들에게 선포함과 동시에 에테르의 달 첫 날을 임시 휴일로 지정할 것 을 선포합니다.” 대신관 카류의 말에 모든 장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들리는 천소리들과 함께 그들이 옷에 달고 있는 장신구들이 부딧히는 소리가 넓은 알현실 에 가득찬다. “이것으로 오늘의 장로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모든 장로들과 대신관을 따라왔던 몇 몇 신관들까지 모두 동시에 중앙에 서있는 시안에게 허리를 굽혔다. 시안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맞절을 하는 것처럼 인사를 해야하는 것인지 어디어디에선 가 본 무슨 수퍼스타처럼 손이라도 흔들어 주어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으으. 정말 이거 몸이 꼬여서 서 있을 수 있나. 젠장할 의자라도 좀 주지.’ 시안은 중앙에서 몸둘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시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 “시안님께서는 저와 레이죠 장로님을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프리스트 로운과 나 이트 기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나고 나거 지친 걸음걸이로 자신의 내실로 돌아가려던 시안을 카류 가 저지했다. “에엑!!! 또 뭘하려구요!! 다 끝났잖아요. 테스트도 완벽하게 끝났는데!!” 시안이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말이 테스트지 이것은 할아버지들이 가득 앉아있는 가운데에게 뎅그 라니 세워놓고 꼭 심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혹사를 시켜놓고 쉴 시간도 주지 않는 행위다. “시험을 봤는데 오늘 하루쯤은 잠이라도 자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예요? 젠장 사람을 그렇 게 혹사 시켜놓고 도대체 또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런겁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편히 쉬시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말씀을 드리려는 것 아닙니까. 오랜 시 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니 부디….” 대신관 카류가 간곡하게 말했다. 그런 카류를 보면서 시안은 ‘도대체 이 할아버지는 뭐든 미리 알려주는 법이 없어!!!’ 라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으이그. 알았어요. 알았어. 대신 빨리!! 최대한 빨리 끝을 내주세요. 아!” “예?” “기왕이면 밥먹으면서 하는 것은 어때요? 나 배고픈데.” 그와 동시에 그런 시안의 의견을 지원하는 듯 시안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골고루 하는 군.” 뒤쪽에서 말없이 따라오던 로운이 빈정거렸다. 시안은 그말에 발끈해서 되로 팩! 돌아서 로운에게 따발총처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이봐!! 아저씨 얼굴!!! 댁도 아침부터 일어나서 외운 거 잊어먹지 않으려고 밥도 안 먹고 대기해봐. 배가 고픈가 안 고픈가. 그리고 어떤 인간이든지 저런 심문을 받고 나면 배가 고 픈 것이 진리라구 진리!! 댁은 밥도 안 먹어?” “시안님. 알겠습니다. 식사를 준비시키도록 하지요. 대신관님 시안님의 의견을 따라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정말 힘이 드시는 것 같은데….” 기엘이 끼어들었다. 이런데서 로운이나 시안이 또 싸움을 벌여보았자 그것이야말로 정말 시 간을 지체하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 “좋도록 하게. 기엘. 일단 레이죠 장로님의 내실로 갈 것이니 곧 따라오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하실 말이 뭔 데요?” 시안은 대뜸 레이죠 장로의 내실에 들어서자 마자 대뜸 자리를 잡고 대뜸 주저앉았다. “레이죠 장로님.” “아아.” 레이죠 장로는 활달해 보이는 시안을 한번 쳐다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달 첫 일에 출발하시게 될 계승로에 관한 일입니다.” 레이죠장로가 입을 열자마자 옆에서 카류가 나섰다. “계승로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경험자인 레이죠 장로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에 이리로 모신 것입니다. 일단. 로운 그쪽에 준비해온 것을 펼쳐주게.” “예.” 로운은 옆으로 밀쳐져 있던 탁자를 당겨 가운데로 가져와 그 위에 갈색의 종이 한장을 받듯 하게 폈다. 그게 뭔가 해서 슬쩍 고개를 들고 쳐다본 시안은 그것이 아슈레이의 전도라는 것을 알고 이 내 흥미를 잃었다. 무슨 특이한 것이라도 보여주는 줄 알았건만…. “지도잖아요. 뭐.” “그렇죠. 지도입니다.” “일단 계승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전에 이곳에 오 시자 마자 풍옥(風玉)이라는 것을 몸 속에 받아 들이셨죠?” “풍옥?” “오시자 마자 제가 풍옥의 방에 모시고 가서 바로 풍옥을 시안님의 몸속으로 흡수를 시켜 드린 것을 기억하시죠? 풍옥을 흡수하시자마자 말이 통하게 되었구요.” “아. 그거!!”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서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시안은 그때 그 풍옥을 받아들일 때의 감 각을 되살리면서 몸을 부르르르 떨었다. “맞아. 그게 몸 속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받아들일 때 기분이 어땠는줄 알아 요? 정말이지 몸이 막 찢어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예. 그것입니다. 일단 풍옥은 계승자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 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는 미메이라의 계승자가 될 수는 없죠. 그래서 이제 시안님께서는 아슈레이의 중간지대. 즉 이곳.”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죠는 네 개의 신국으로 둘러싸인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 그러고보니 지도에도 그곳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던데요? 그 많은 책에….” 레이죠 장로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제 일반 신민들이나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아보았자 소용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 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죠.” “뭐. 거기 지키는 사람들이라도 있는거예요? 아니면?.” 이번에는 카류가 말을 받았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일정수준의 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들어 갈 수 없기 때문 입니다. 말하자면 이 둘레 네 개의 신국의 백성이라고 해도 힘이 약한 사람이 들어가면 이 곳 전체에 감돌고 있는 강력한 엘의 파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흐으응.” “일단 계승로는 일종의 세상경험을 쌓는 과정까지 포함됩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보는 것은 틀리지요.” “암암. 백문이불여일견이죠.” “예?” “아아. 그냥 하는 소리니까 넘어가세요 넘어가.” 그리고 이어진 레이죠 장로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일단 진짜 수장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아슈레이의 중간지대로 가서 몸 안에 들어있는 풍 옥이 인도하는대로 가면 그곳에서 신의 힘이라고 일컬어지는 풍환(風環)을 받아와야한다. 풍 환은 바람의 힘 원형 그대로 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대대로 수장계승자로써 풍옥을 받아들 인 사람들에게만 전해지는 것이다. “뭐 그럼 간단하네요. 어디보자. 그럼 여기 미메이라의 서쪽에 있는 이 산맥을 넘어가기는 그렇고 이쪽의 바라스와 미메이라 사이를 흐르는 이 강줄기를 따라서 들어가면 되는 거죠? 가깝네. 뭐.”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왜요?” 시안은 지도를 따라 손으로 일직선을 쭉- 그어보이다가 손을 멈추었다. “계승로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라면 그냥 단순하게 계승의 식정로로 불리겠죠. 계승로로 가는 길은 그 길이 아니라 바로 이곳.” 레이죠는 손가락으로 미메이라의 아래쪽 즉 가이칸 제국과 셰비 통산 연합국을 포함한 원을 그려보였다. “미메이라와 불의 나라인 호로스는 아시다시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먼저 호로스에 가셔서 호로스의 수장에게 미메이라의 수장이 바뀔 것을 알린후에….” 그러니까 다시 설명하면 일단 호로스에 가서 미메이라의 수장이 내가 될거야! 라고 알려준 후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가이칸 제국을 거의 반을 가로 질러서 아슈레이 중간지대에서 부터 시작되는 대하인 나하르를 따라서 다시 북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계승로가 가지는 진짜 의미인 것이다. 넓은 세상과 많은 사람들을 직접 보고 느낌으로써 수장으로써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또한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저기요.” “예?” “어차피 저는 가짜인데 그냥 여기로 들어가서 풍환인지 뭔지하는 것만 받아오면 안될까 요?” “안 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카류와 레이죠가 동시에 말했다. 시안은 두 사람을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어차피 진짜도 아닌데 제가 대왕학이니 제왕학에나 나올 시야를 넓히고 어쩌고를 배울 필 요가 어디 있습니까? 안 그래요?” 뒤에서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운은 나름대로 속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버 릇없는 녀석과 오래 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사실 손톱만큼도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도 저렇게나 싫어하는데 그냥 얼른 얼른 아슈레이의 중간지대로 들어가서 풍환을 받아오는 쪽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풍환을 받아들이는 것은.” 레이죠 장로는 아까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세세히 설명을 하지 않으면 이 앞에 앉아있는 소년-시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일단 소년은 소년이다-은 제대 로 들어주지도, 그리고 이해해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풍환은 의식을 가진 힘입니다.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그리고 역대 수장들의 기록 을 봤을 때 아무리 거대한 엘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자라고 해도 아슈레이의 최고신, 빛의 히오르와 어둠의 아타라세스로부터 기원하는 바람의 힘의 결정체 풍환의 힘은 호락 호락하 게 넘어오지 않습니다. 많은 시련을 거치고, 중간지대에서 일어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모든 현상과 상황을 넘어서야 비로서 풍환이 원하는 최고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장이 되어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레이죠의 말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숙연해 진다. 하지만 단 한사람 만큼은 숙연해 지기는 커녕 불끈 주먹을 쥐고 탁자를 치면서 일어났다. “이봐요!! 말이 틀리잖아요. 말이!!!” 시안은 방금 들은 사실 때문에 패닉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말이 틀리잖아요. 처음에 내가 이곳에 왔을 때는 그냥 풍옥을 받아들였으니까 그 아슈레 인지 뭔지하는 데 가서 풍환을 받아오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 그 힘을 이양하고나서 돌려보 내준다고 해놓고 지금 무슨 소리하시는 겁니까!!!” 왕이 되라고? 지도자의 자격? 그런 것이 도대체 자기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자신은 그저 이 익숙하지 않은 세상에서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물론 이 곳에서 지금 나름대로 수장이니 계승자니 하는 위치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짜라 고는 해도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뭐든 해준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있던 곳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시안은 그 렇게 생각하고 있다. 별로 잘난것도 아니고, 보통의 평범한 고등학교 학생이지만 그것을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다 고 말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지 몰라도 자신은 현실의 사람이고 현실의 사람은 현실에서 아등바등하면서 살아나가는 쪽이 진리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지금 시안님께 미메이라의 수장이 되셔서 이곳에서 살아달라는 뜻은 아니니까요.” 카류가 흥분한 시안의 팔을 붙잡고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레이죠 장로님의 말씀은 그정도의 인품과 경험을 쌓지 않고는 풍환의 힘을 받아들이실수 없다는 소리를 하셨을 뿐입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이런 경험은 시안님이 설사 현실 로 돌아셨다고 해도 시안님께 충분이 도움이 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이계에서는 겪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해 보시고 또 이런 기회가 어디있겠습니까? 특별히 어려운 일을 하라는 것 은 아닙니다. 그저 여행을 하시면서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시고 구경도 하시고 그저 여러 가 지를 보시고 느끼시라는 것 뿐입니다.” “…………” 시안은 카류의 말을 듣고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뭔가 자신의 생각과는 자꾸만 틀어져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굉장히 나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뚱하게 앉아있던 시안은 툭하고 레이죠 장로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계승론지 뭔지하는게 얼마나 걸리는 건가요?” “때에 따라서 다릅니다. 저는 꼬박 1년이 걸렸지요.” “일년?!!!” 시안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여기에 일년이나 있겠다고 했어요? 지금?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삼개월!!” 시안은 마음속으로 정해두었던 기간을 내새운다. “삼개월이예요. 앞으로 삼개월.” 시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행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으니까 초 단시간내에 그 계승론지 뭔지를 주파해줄테니까. 나머지는 나 따라올 떨거지들한테나 설명하라구요. 알았어요? 삼개월이에요. 삼개월!!!” 시안은 손가락 세 개를 세워 보이면서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선언했다. “삼개월 후에는 나는 돌아갈거예요. 반드시!! 틀림없이!!” 시안은 화를 버럭 내면서 문으로 바람처럼 달려가서 닫혀있는 문을 벌컥 열었다. “우. 우악!!” “꺄악!!” 순간 시안의 머리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우. 우우우욱. 머리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안님.” “아욱. 대갈통 빠게지겠네. 우씽.” 시안은 머리를 부여잡고 잡시 머-엉하게 울리는 머리를 수습했다. 눈을 살짝 떠보니 앞에서 여관 서너명이서 바닥에 흩어져있는 그릇들과 음식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바로 전에 시안과 부딧힌 여관은 식사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리려다가 불벼락을 맞은 것이었 다. “우욱. 이거 뭐에 부딪힌거야.” 시안은 아픈 머리를 연신 문지르면서 투덜 댔다. “죄송합니다. 시안님. 식사를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시안은 앞에서 자신과 같은 부위를 붙들고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는 여관을 보고 한숨을 푸 욱 내쉬었다. “나는 안 먹을 거니까. 저 안에 앉아있는 꼰대들이나 먹으라고 해요.” “하. 하지만 이 음식들은 전부 시안님의 입에 맞춘 것인데….” “열 받아서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져 버렸어요. 난 잠이나 잘테니까. 아침에 깨우러 오지 말라고 라헬한테 말해둬요.” “예? 그. 그렇지만.” “라헬이 만약 아침에 날 깨우러오면 고지라가 돼서 키리엔을 모조리 부셔버리고 머리도 쏭 당 쏭당 잘라 버릴 것이라고 단단히 일러두라구요. 단단히.” 시안은 자신을 멍청하게 바라보는 여관들을 뒤로하고 여자라고 보기에는 절대로 불가능한 저벅 저벅하는 걸음걸이로 자신의 내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길. 암튼 되는 일이 없다니까. 난.” 여전히 그의 입에서는 불만 불평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7. 마웨트 어슴푸레하게 빛나던 키리엔이 밝은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 우리의 주인공 시안은 침대에서 대굴 대굴 거리면서 주문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정리한 주문들은 엘-다인. 엘-유린. 엘-사인. 엘-라사의 단계까지. 그리고 이제 시 안은 마지막 단계인 엘-세지의 주문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 주문이 많구만. 역시 판타지 세계면 이런게 나와야지. 이히힛.” 주루룩-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기가 무섭게 저절로 휘리릭 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흐흐흣. 역시 재미있군. 머리카락 정리도 되고.” 주문의 공부를 하면서 시안은 가벼운 주문들을 그럭 저럭 습득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 일 재미있는 것이 바로 작은 바람을 일으켜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들을 뒤로 손을 안대고 넘기는 것이었다. 시안은 침대에서 대굴 거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탁자 가득하게 쌓여있는 음식물들중에서 단 단하게 구워진 빵하나를 꺼냈다. 바게트 빵보다는 못하지만 여하튼 시안의 요구대로 설탕을 거의 뺀 후 구워진 요리관장 특제 빵이다. 빵을 우물거리면서 다시 침대에 뛰어든 시안은 적어두었던 바람술의 주문들을 훑어보았다. 삼개월 선언을 하고서 잠이나 자겠다고 내실에 틀어 박혔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밥도 안 먹겠다고 선언했건만 내실에 들어가는 순간 다시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시안은 자신의 방으로 있는데로 먹을 것을 쌓아놓으라고 명령을 해놓고 지하 서고로 달려가서 읽다가 만 책 두권을 들고 내실로 돌아왔던 것이다. 실제 시안이 쓸 수 있는 주문들은 거의 없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역시 판타지라고 하면 마 법! 이라는 생각이 들으니 주문들을 외우는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거창한 바람술은 불 가능하지만 자잘한 바람들을 일으키고 있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방안에 틀어 박힌 것이 오늘로 삼일째. 물론 시안이 내실에 틀어 박혀있다고 사람들이 가만히 둘리는 없었다. 중간 중간 끊임없이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고 오늘은 누구를 만나고 저녁은 누구와 함 께하세요하는 주문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앞으로 5일이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단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 기 때문에 짜증나는 면담같은 것도 그럭 저럭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바람술사라고 하면서 하는 짓은 꼭 마법사 같구만.” 두꺼운 책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시안은 나름대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바람술의 이미지는 ‘날아라 바람아. 불어라 폭풍아~.’ 같은 단순하게 바람을 일으키 고 폭풍을 일으키는 정도다. 하지만 이곳 아슈레이에서 말하는 바람술이라는 것은 시안이 가지고 있는 그런 기본적인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리는 것이었다. “이래봐야 말이 바람술사지 거의 마법사구만. 도대체 뭐가 틀린 건지 모르겠네.” 카류와 레이죠 장로가 준 책들에는 수만 가지 바람술의 주문과 함께 그 설명이나 원리 같은 것이 적혀있었다. 꼭 그 책에 적혀있는 것 말고로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오는데 사용되었던 이계 소환술이라던 가 로운이 자신의 모습을 현재의 시안의 몸으로 만들었던 변환술. 그리고 자신이 머리를 잘 랐을 때 다시 그 머리를 이어 붙이던 마법같은 것을 생각보면 정말 바람술이라는 것은 다양 하게 개발되어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시안의 호기심을 제일 자극 하는 것은 그 바람술사 최고의 단계라고 하는 엘- 세지의 단계, 그것도 엘-세지의 바람술사중에서도 특출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일 컷는 엘-사르트라는 단어였다. 엘-사르트의 단계까지 오른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 바람의 신에게서 기원하든, 물의 신에게서 기원하든간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주문을 구사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람술의 제일 기초적인 힘의 근원인 엘(EL)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아슈레이의 신들인 빛의 신 히오 르와 어둠의 신 아타라세스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엘-사르트의 단계에 다다른 사람은 지금까지의 온 아슈레이의 역사를 통해 단 세사람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르트 루하라는게 기본적으로는 엘-사르트랑 통하는 건가 그럼.” 책장을 넘기면서 시안이 중얼 거렸다. “앞으로 남은 것이 5일이니까 대충 주문들을 정리하는데는 충분하겠구만.” 미메이라의 역사나 아슈레이의 역사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시안이었지만 이 바람술서만큼은 시안의 마음에 꼭 들었다. “그럼 일단 암기장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우웅….” 지금 자신이 서울에 있다면 책상 서랍에 잔뜩 쌓아둔 암기용 수첩들중 하나를 꺼내서 쓰면 간단하지만 지금 이곳은 서울이 아니다. “할 수 없지 뭐. 만드는 수 밖에.” 시안은 침대가 옆에 있는 푸른 색의 줄을 잡아당겼다. 밖에서 대기 하고 있는 여관들이 필요 할때는 이렇게 부르면 간단. 나름대로 이 키리엔이라는 곳도 편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안은 라헬이 오기를 기다렸다. “부르셨습니까. 시안님. 뭐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아. 저기 종이랑 펜이랑 가위나 칼 같은 것 좀 가져다 주세요.” “가위나 칼이요?” 라헬은 뜬금 없는 시안의 주문을 듣다가 가위와 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화들짝 놀라서 되 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키리엔에 있는 동안은 머리 자르겠다고 더 이상 난리치지는 않을 테니 까.” “…………” 하지만 라헬은 못 믿겠다는 듯한 얼굴로 시안을 바라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시안의 머리카락이 허리가에서 찰랑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며칠 전에 목격했던 그 끔찍한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죠 장로의 단단한 주의 덕에 입밖으로는 못 내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위나 칼은….” “에이씨. 거참 사람 말 되게 못 믿네. 그렇게 믿기 싫으면 내가 시키는데로 종이나 잘라와 요. 그럼 되죠?” “아. 예. 시안님.” 시안은 짜증이 났지만 한 발자국 양보하기로 했다. 사실 시안은 자신이 머리를 자르는 것으 로 라헬이 기절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었다. 그 일 이후로 라헬의 얼굴이 반쪽 되어버린 것 은 아무래도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에 조금 캥겨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손바닥 안에 딱- 들어갈 만한 크기로 잘라다주세요. 네모 반듯하게 한 100장 정 도.” “예. 그런데 무엇에 쓰시려고 그러시는지요.” “그런 것은 귀찮으니까 묻지 마요. 설마 그런 것 하나하나까지 물어봐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죠?” “무. 물론입니다.” 라헬은 시안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실제 여관이라고 하는 것은 시키는 일을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발언은 쓸데없는 참견에 월권행위나 다름이 없 다. “그럼 가서 잘라다 주세요. 되도록 빨리.” “달리 필요한 것은 없으신지요.” “아. 없어요.” 그리고 시안은 빨리 나가라는 듯이 손으로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라헬은 시안이 보든 말든 인사를 올리고 조용히 내실에서 물러났다. “에잇. 이러니까 범죄자가 갱생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또 어쩔수 없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 는 거라구. 쳇. 또 머리카락 자르고 싶어졌잖아.” 이제는 투덜 투덜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린 시안. 시안은 혼자서 공시랑 공시랑 연신 투덜 대면서 남아있는 바람술서의 페이지에 눈을 돌렸 다. ◇◆◇ “자. 이정도면 대충 된건가.” 기엘 디 하라스다인. 궁정기사단 세아트 소속 로열 나이트. 그리고 궁정기사단 후보생 수련 지도관. 기엘은 머릿속으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방안을 둘러보았다. 지도관이기는 하지만 훈련생들과 별다를 바 없이 비슷한 공간에서 자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잠드는 생활을 벌써 몇 년이나 해 왔었다. 이제는 키리엔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저택에 있는 사실보다도 이 작은 수련원의 숙소 에 더 더욱 애착이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뭔가 기분이 좀 삼삼하군.” “저는 굉장히 섭섭합니다. 기엘님.” “아. 로엔.” “정말 불공평합니다. 이건. 이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수련원은 어떻게 하라고.” 로엔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기엘에게 말했다. “로엔.” 기엘은 정색을 하고 로엔을 불렀다. 그런 기엘을 보자 로엔 역시 조금전과는 전혀 다른 표 정으로 기엘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뭐랄까. 사람이 자리를 만들어가는 법도 있지만 때로는 자리가 사 람을 만든다고 말이야.” 기엘은 조용 조용하게 로엔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 처음 부임했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뭐. 수련 지도 관이 뭐가 어려울까. 그냥 애들에게 기사도를 가르치고 검술을 가르치고 바람술을 가르치면 되지 뭐. 라고 말이야.” 기엘은 정리되어있는 침대에 앉으면서 로엔에게도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거 뭐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말하면 좋을 분위기군.” “아. 그럼 제가….” 기엘의 말에 자리에 앉으려던 로엔이 벌떡 일어서려는 것을 기엘이 말렸다.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냥 앉아.” “…………”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이야. 와보니 그게 아니더라구. 나는 나름대로는 검술에는 꽤나 자신 만만했거든? 그런데 그게 배우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 아. 혹시 나이트 가데스 기억나나?” “나이트 가데스라면 사아르 나이트 가데스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그 친구. 지금은 어였한 사아르 나이트지만 당시에는 정말 미칠 것 같았어. 아무리 가 르쳐도 당췌 늘어야 말이지. 나는 검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워 왔어. 검을 들고 하루나 이틀쯤 마구 휘둘러대는 것 정도는 대수로 여기면서 자랐지. 그리고 내가 훈련 생으로 있을 때는 알고 있겠지만 우리 기수 때는 이상하게 검술에 뛰어난 녀석들이 많았거 든.” “그랬었지요. 나이트 로크레슈님도 계셨고.” “맞아. 우리 기수 대부분이 로열 나이트가 되었으니까. 아무튼 내 생각에는 적어도 훈련원 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다들 검을 다룰 수 있다고 좀 착각을 하고 있었단 말 이야. 하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로엔은 애써 그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자신의 상관인 이 나이트 기엘은 가끔 좀… 뭐랄까? 일반사람들과는 틀린 가치 기준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을 종종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턱-하고 일단 수련 지도관이 된 것 까지는 좋은데 말이야. 들어와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구. 이건 무슨 검은 곡괭이로 알고 휘두르는 놈부터 시작해서 검만 들었다하면 무조건 바람 술을 쓰면서 무슨 대단한 검술사인양 날뛰는 사람도 있었고.” 기엘은 과거를 되살리면서 피식 웃어버렸다. 당시의 자신이 얼마나 얼띤 상관이었는지 상상 이 갔기 때문이다. “배우는 것보다 배로 어려운 것이 가르치는 것이라는 것을 정말 절실히 깨달았지. 나이트 가데스에게 검은 곡괭이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는 데만도 한달이 넘게 걸렸어. 덕택에 가 데스가 수련원을 졸업하고 나이트 사아르가 되던 날에는 정말 감동의 눈물이 흐르더라구.” 창가로부터 들어오던 저녁햇살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기엘이 손을 들어 라이트 주문을 외워 작은 빛의 구를 만들어 올렸다. “나이트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들은 모두 여기 수련원에서 배웠어. 훈련생일때는 검술 과 바람술을, 그리고 지도관이 되어서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법, 그들을 통솔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엘은 로엔을 바라보았다. “자네같은 좋은 부관을 만났지.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야.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서 그들과 관계를 엮어나가는 것이랄까?” 어슴푸레하게 작은 방을 비추고 있는 라이트. 그 빛에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잔뜩 어지 러져 있는 방안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역시 방 정리하는 것은 못 배우신 모양입니다. 제가 처음 부임했을때와 전혀 달라 진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하하하. 그건 다 로운 때문이야. 그녀석이 나랑 한방을 쓰면서 나를 이렇게 길들였거든. 원래도 정리하는데는 소질이 없지만 로운은 나랑 전혀 달랐거든. 수건 하나 떨어져 있는 것 을 본적이 없으니까.” 기엘은 거기까지 이야기 하다가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어차피 다시 로운과 한팀이 될 것 같으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자 자네도 이만 나가보라구. 여기 정리야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안되시면 돌풍이라도 불게해서 모조리 날려버리실 요량이시죠?” “어? 어떻게 알았어? 하하하핫.” “뭐 그정도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수련장 청소를 하라고 하시고는 귀 찮다면서 모조리 날려버린 것. 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푸하하하. 그런 것은 잊어버리라구. 제발.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얼마나 깨졌는데.” 로운은 이 반듯하면서도 어딘가 엉뚱한 면이 있는 상관의 얼굴을 똑똑히 머릿속에 담았다. 아마도 로운이 계승로에서 돌아오면 틀림없이 사르트 루하가 되어 두 번 다시 이 수련원에 는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르트 루하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로엔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가십니까?” “응. 일단 그래야지. 어머님도 오래 보지 못했고. 형님이야 가끔 뵙지만. 일단은 떠나기 전 에 며칠이라도 어머님께 효도를 해야하지 않겠어?”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됐어.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날 집도 못찾아 가는 바보로 아는 거야?”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분명 혼자 가시면 가시다가 말고 귀찮다고 길가 에 짐을 던져버리고 가실겁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어. 어이 이봐. 자네 상관을 뭘로 보는 거야?” “뭐. 기엘님이야. 기엘님이죠. 뭐 다른 것이라도 있습니까?” “하이고. 여하튼 말로는 못 당한다니까.” “감사합니다.” 로엔은 기엘이 울퉁불퉁하게 꾸려논 짐을 집어들었다. 속마음이야 이 울퉁불퉁한 짐을 풀어 서 제대로 꾸려주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하는 로운이었다. “그럼 가실까요?” “어. 그거 무거워. 내가 들건데?” “아니 괜찮습니다. 이정도는 제가 들어드려야죠.” 로엔이 너털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상관을 바라다본다. “그래. 가자구. 가. 날 빨리 보내지 못해서 안달인 모양이니.” “하하하하.” 기엘은 남아있는 짐을 들고 자신이 이곳에 온 순간부터 써온 방안을 한번 돌아다보았다. 언 제나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해서 어수선 했던 방. 하지만 많은 추억이 있는 방이다. ‘뭐. 언젠가 다시 한번….’ 기엘의 떠오르는 생각의 자락을 애써 지워버린다. “라이트 오프(light off).” 피식 소리를 내면서 떠올라있던 빛의 구체가 순식간에 꺼졌다. 그렇게 기엘은 자신이 몇 년동안 지내왔던 이 수련원을 떠나갔다. “짐은 이것 뿐입니까? 프리스트 로운?” “아. 뭐. 그 정도면 되지 뭐.” 사실 신관에게는 특별한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신관은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똑같은 스케쥴로 하루를 보낸다. 기본적으로 개인시간 을 가질 수 있는 신관은 거의 없다. 특히 로운의 경우 신전에 들어올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거의 홀홀 단신으로 입고 있던 옷 한 벌만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특별히 자기것이라고 할 만한 물건도 이렇다하게 없는 편이 었다. 사실 미메이라의 미메이라 신전은 다른 다른 신전과는 달라서 어느정도는 개인 사물을 지참 하고 신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신관이 되더라도 특별히 본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도록 강 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로운의 경우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며 들어왔기 때문에 다 른 신관들과는 상당히 경우가 달랐다. 특히 로운이 다른 신관과는 다른점은 일반적으로 견습신관들이 약관 10세정도의 나이로 신 전에 들어오는 것과는 달리 이미 로열 나이트서 봉직하다가 신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견습신관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신의 사랑을 받고 태어난 자. 즉 일정이상의 엘 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바람의 땅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술이외 에 생명술이나 기타 다른 능력, 즉 수(水)계나 지(地)계 화(火)계등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주로 신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이유는 바람의 신을 섬기는 신관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신학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하여 섬긴다라는 것이기 때 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곧 자신들의 신인 미메이라의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로운이 로열 나이트였으면서 만일 바람술만을 쓸 수 있던 사람이었다면 설사 그가 강력하게 신관이 되기를 바랬다고 해도 신관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로열 나이트 중에서도 차 대 사르트 루하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례로 입관이 허락되었던 것이 었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잖아? 옷가지 몇 개 챙겨가는 것 뿐이니까.” 로운의 사실을 정리해주기 위해서 들어온 견습신관에게 로운은 조금은 삐딱한 듯한 목소리 로 말했다. “나머지 필요한 것은 키리엔에서 따로 준비를 해 줄테니까.” “자택으로는 돌아가시지 않으십니까? 그래도 먼길을 떠나는 것인데….” “뭐 별로 그런 것을 신경쓸 사람도 없어. 떠나는 사람은 조용하게 떠나는게 제일 좋은 법 이지.” 사실 로운은 딱히 계승로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은 특별히 없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세속과는 관계를 끊은 신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설사 지금은 깨끗하게 정리했다고 해도 자신의 약혼녀였던 시안과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자신이 공식행사 때문에 키리엔에 가기만 하면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환속하 라고 압력을 넣기도 했던 까닥도 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뜻이 어쨌든 간에 그는 시안과-가짜지만- 함께 여행을 떠나야 하는 운 명에 처해버린 것이다. 그것에는 다분히 아버지의 압력을 받은 카류의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도 안 드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자신이 신관이 되었다고는 해도 그가 가진 배경은 그가 평 범한 신관으로 머물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견습신관의 신분이었을 때 이례적으로 대신관 카류가 자신의 교육 담당이 되었을 때부터 그것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로운이 잠시 감상에 빠져있던 그때 견습신관하나가 로운의 사실로 급하게 뛰어왔다. “로운 신관님. 대신관님께서 부르십니다. 여장을 꾸려서 급히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응? 도대체 이 밤중에 무슨 일이지?” 헐떡이며 뛰어온 견습 신관을 볼 때 분명 엄청나게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지금 여장을 꾸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아무리 머리를 돌려봐도 도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 는지 알수가 없었다. ‘설마 이 꼬마녀석 날짜도 얼마 안 남았는데 또 머리라도 자르겠다고 설치는 거 아니야?’ “서둘러 주십시오.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뭐?” 로운은 자신이 농담처럼 생각했던 일이 설마 현실로 일어난 것인가 싶어서 깜짝 놀랐다. “대신관님은 어디 계시지?” “이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로운은 급하게 외투를 걸치고 간단하게 꾸려놓은 짐을 집어 들었다. “나참. 이 밤중에 또 무슨 소란이람.” “이쪽입니다.” 로운은 견습신관의 뒤를 따라서 황급하게 뛰어갔다. ◇◆◇ “화염계 주문이라. 바람술서에 왠 화염계 주문이람. 정말 웃기는 책이야.” 시안은 손을 앞으로 내밀고 검지와 중지를 꼬았다. 화염께 주문 중 제일 간단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라이트(LIGHT)라는 것으로 어둠을 밝히 는데 사용되는 주문이다. “될까 모르겠네.” 시안은 입맛을 다시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숙련된 바람술사라면 간단한 시동어정도로 라이 트를 쓸 수 있지만 시안의 경우는 그 기본이라는 것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쓰여있는 그 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에잇. 이름도 더럽게 기네…. 그리고 에또…. 호로스의 불길이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라이트.” 주문을 마치며 시안은 꼬았던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그 손가락에는 라이트는커녕 불꽃조차 튀지 않는다. “엑. 안 되네. 이상하다. 아! 그렇지 주문을 외우면서는 딴 소리하면 안 되지.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호로스의 불길이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라이트!!” 시안이 멋지게 손가락을 튀겼다. 그 손끝에서 화악-하고 불길이 일어났다가 다시 사그라 들 더니 그 손가락 끝에 야구공만한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오호 되는 군. 으흐흐흐 역시 난 멋지다니까.” 하지만 그 빛의 구체는 지금 시안의 방 천정 한구석에서 빛나고 있는 라이트에 비하면 농구 공과 탁구공의 차이다. “으음 다시!!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호로스의 불길이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 라. 라이트!!” 서너차례 주문이 반복되고 그때마다 빛의 구체가 생겨났다. 이제 시안의 방은 서치라이트라 도 비춘 것처럼 환해졌다. 하지만 역시 시안이 만들어낸 라이트는 아직도 야구공 만한 수준. “쉽지 않은데 이거. 우웅. 또 이건 어떻게 끄는 건가.” 시안은 책을 보았다. 시동어는 꽤 길지만 끄는 것은 간단. “호오. 이건 쉽군. 좋아 간다. 박경하표 라이트 끄기. 라이트 오프(light off)” 순간 피리릭 소리를 내면서 일제히 빛의 구가 사라졌다. 주위가 캄캄해졌다. “어. 어라?” 시안의 라이트 오프 주문이 시안의 방을 밝히고 있던 제일 큰 라이트 까지 꺼버린 것이다. “으윽. 제기랄 이 바보 라이트. 너까지 꺼지면 어떻게 하냐?” 시안이 투덜 거리면서 다시 주문을 외우려고 하는 순간 시안의 머릿속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 박경하표 운운하며 했던 라이트 끄기 권법(?)에서 착안한 것이다. “흐음. 내 이름으로도 될려나? 이거 원래 자신의 힘으로 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뭔가 재미있어 진다는 생각에 시안은 방금 생각난 것로 시도했다. “박경하. 호로스의 불길이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라이트!!”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안의 앞에 화르륵하는 불꽃이 치솟았다. “우. 우악!! 이. 이게 뭐얏!!” 시안은 놀라서 후다다닥 창가로 도망을 갔다. 화르륵하고 천장까지 닿을 것처럼 솟아오른 불꽃은 이내 사그라 들고 그 자리에는 아까 천 장에 떠 있던 것의 두배에 가까운 빛의 구체가 둥실거리고 있었다. “어, 어라. 이거 너무 크잖아.” 시도까지는 좋았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나 이걸….” 시안은 다시 아까 전처럼 시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라이트를 만들어 보았다. 하지만 그쪽 은 역시 야구공 수준. 결국 시안은 포기하고 아직까지도 중간에 둥실 둥실 떠있는 라이트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역시 나는 되는 일이 없다니까. 참나.” 조금 전에 암기용 종이를 가져다준 라헬이 한소리 했었다. 내실에서 바람술을 쓰지 말라고 말이다. 그 이유는 시안이 이것 저것 작은 주문들을 연습하다가 그만 내실을 완벽하게 한바 탕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둥실 둥실한 거대한 라이트를 발견하면 분명 침대에 서는 불장난하지 말라고 하셨죠!! 라고 엄마처럼 잔소리를 할 것이 틀림이 없다. “이봐. 라이트양반. 너 좀 작아 질 수 없어? 이대로라면 들킨단말야.” 의기소침해진 시안은 둥실 거리고 있는 라이트를 향해 말을 걸어본다. “………….” 하지만 커다란 달덩이처럼 빛나고 있는 라이트는 그저 제자리를 지킬 뿐. 결국 시안은 그 달덩이에게 위로 올라가 버렸! 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다시 침대로 기어 올 라갔다. “에이. 주문이나 정리하자. 정리해.” 위로 올라가 버렸!이라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명령을 들은 구체는 명령을 내린 시안은 거들 떠 보지도 않는 가운데 슬금 슬금 떠올라서 천장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구체는 조금 전에 시안이 애원하듯 부탁한대로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해서 원래의 라이트만한 크기 가 되더니 수축을 멈추었다. 물론. 시안은 주문을 정리 하느라 눈치도 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시안님. 잠자리에 들으실 시간입니다.” “아.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된 건가?” 몇 명의 여관들이 들어와서 시안이 어질러 놓은, 음식물이 가득 쌓아올려져 있는 식탁을 치 우기 시작했다. “거기. 과일이랑 물병은 좀 놓고 가요. 밤에 배고프면 먹게.” 그 말을 들은 여관들이 자신을 힐끔 쳐다보든지 말든지 시안은 종이 쪽지에 주문을 옮겨 적 느라 여념이 없다. 여관들은 시안님이 좀 살찌신 것 같지 않아? 라던가 이상하게 많이 드시는 것 같아 등등을 소근 소근 떠들면서 남은 음식물들을 들고 나갔다. “우웅. 그럼 이 주문은….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 바람의 시작과 끝. 아타라세스와 암 흑의… 어. 뭔가 좀 이상하네?” 시안은 주문을 받아 적던 손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옮겨 적었던 주문들은 반드시라고 할만큼 로. 조하 아슈레이라는 단어 가 들어갔다. 미메이라 바람의 시작과 끝이라는 단어도 80%정도의 비율로 등장. 하지만 아 타라세스라는 어둠의 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주문은 처음이었다. 이름하여 정화술이라는 이름이 붙은 주문. 그 주문은 보통 주문의 배가 넘는 길이로 길게 적혀져 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적어두면 도움이 되겠지.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 바람의 시작과 끝. 아타라세스와 암흑의 힘. 그 심연의 어둠으로부터 시작하여 끝까지 다다르니 아타라세스 에게서 파라이네시스의… 제길 졸나 기네, 파라아네시스의 영광을 따르라. 마웨트.” 마지막 시동어를 적는 시안에게 라헬에 물었다. “시안님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니. 별거 아닌데요. 그냥 주문을 좀 정리하고 있는 중인데 무슨 일… 어?” 순간 시안의 손에 들려있던 깃털펜이 잉크방울을 흩날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안님?” 시안은 시야가 뿌옇게 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손가락에서부터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 라. 라헬 나 좀 뭔가 이상 하….” “시. 시안님!!!” 스르륵 하고 침대가에 길게 누워있던 시안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꺄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내실을 가로 질렀다. “시안님!!! 시안님!!!” “시안님!!!” 음식을 내가던 여관들이 쟁반을 떨어뜨리고 시안에게 달려왔다. 쓰러진 시안의 몸에서 식은땀이 송송 배어 나왔다. 라헬은 기절하듯 쓰러진 시안의 몸을 부둥켜안고 그녀를 깨우기 위해 온갖 힘을 다했다. “시안님. 제발!! 시안님 눈을 뜨세요. 시안님!” 시안의 플로티나 블론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장면이었지만, 정말 머리 카락이 흩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순간 라헬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뭔가, 무엇인가가 틀려.’ “시안님. 시안님 정신 차리세요.” 다른 여관이 다가와서 시안의 몸에 손을 댔다. “조용. 조용히 해!!!!” “여, 여관장님.” “다들 입다물고 조용히 해!!” 서슬이 퍼런 라헬의 말에 옆쪽에 앉아있던 여관이 급하게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이어 그 녀에게서는 딸꾹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숨을 멈춰.” 라헬은 손을 들어 모두 미동도 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라헬에게는 그리 커다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여관장이 될 만큼의 능력이 있을 뿐. 하지만 그 능력은 시안의 몸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오랜 시간동안 여관일을 해오며 발달된 미묘한 감각이 지금 눈을 뜬 것이었 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없어.” “예?” “흐름이 멈추었어. 파장도. 아무것도 없어.”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라헬은 라헬은 그제서야 시안이 침대에서 굴러떨어 졌던 그 순간부터 느꼈던 그 묘한 이질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언제나 시안의 내실로 들어서면 방안 가득하게 그녀의 파장이 차있었다. 때문에 시안은 느 끼지 못했지만 약간이라도 엘의 파장을 느낄 수 있는 여관들은 조금은 부담스럽게 그녀의 내실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시안이 수행식에서 돌아온 날부터, 어느 정도의 엘을 가지지 못 한 여관은 아예 시안의 내실에 발도 디디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금 전 그 쓰러지 던 시점을 기점으로 깨끗하게 사라진 것이다. “라헬님. 도대체 뭐가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느끼고도 몰라? 넌 언제나 시안님의 내실에 들어오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었잖아. 봐! 지금은 어떤가.” “어. 정말. 뭔가….” 라헬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나 방안 가득히 아니 궁 저 멀리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엘을 가지고 있 던 사람이 이런 상태라면 절대로 무사할 리가 없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 바람의 시작에서 끝. 메 하니다(정결 케하는 바람)” 부웅-하고 라헬의 손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여관장들이 필수 불가결 하게 익히는 생명의 술 중 한가지. 하지만 시안은 라헬의 생명의 술도 소용없이 점점 체온을 잃어가고 있었다. “안 돼. 내 힘으로는. 가서 어서 의관들과 대신관님을 청해. 생명의 정화술을 쓰실 수 있는 분은 그분밖에 없어. ” “시안님.” “빨리!!” “예. 알겠습니다.” 라헬은 심장이 두근 거리면서 커다란 북소리가 되어 울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일초 일초가 너무나도 긴 시간.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시안은 지금 주문에 의했든 아니면 불의의 사고이든간에 온 몸을 중심으로 흐르던 엘의 흐름이 완전히 막혀 있는 상태다. 그리고 흐름 뿐 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라면 당연히 내야할 엘의 파장까지 완벽하게 끊어져 있는 상태. “시안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제발.” 라헬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안의 몸을 감싸안았다. 대신관 카류가 로운과 함께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시안을 담당하는 여관들이 사색이 되어 시안의 내실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카류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서는 서너명의 의관들이 시안의 옆에 붙어 앉아있다가 황급하게 일어섰다. “그게 글쎄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의관들은 모두 신관에서 교육받은 자들이기에 카류와 로운이 들어서자 자리를 비켰다. “여관장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주문을 정리 하시다가 갑자기….” “아니 됐네.” 카류는 의관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시안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라헬과 마찬가지로 시안의 내실로 들어오는 순간 시안의 변화를 이미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주문 정리를 하시다가…라면.” 로운이 재빨리 옆에 흩어져 있는 바람술서를 집어 들었다. 펼쳐져 있는 페이지에는 바람의 정화술들이 적혀 있는 페이지.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시안이 혼수상태에 빠질 만큼 문제가 되는 주문은 없었다. 흐르는 엘의 파장을 끊어 파장까지 봉쇄해버리는 주문이 적혀있을 만한 페이지가 아니었다. “여관장….” “네. 프리스트 로운.” “실신하시기 전에 뭔가 들은 것이나 본 것은?” “그제 저녁부터 내내 바람술서들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바람술을 시험해보셨 던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제게 종이를 잘라달라고 하시고는 그 종이에 계속 주문을 옮겨 적으셨을 뿐입니다. 그것 이 다입니다.” 카류는 이제는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거의 혈색을 잃고 있는 시안의 얼굴 위에 손을 대었 다. 손가락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시안의 숨이 느껴진다. 카류가 눈을 감고 시안에게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 로운은 바닥과 침대 여기저기에 흩어져있 던 종이 조각들을 모았다. 종이 조각들에는 여러 가지 주문이 차례대로 적혀있었고 어떤 주문인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 이 적혀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주문은 아직은 시안이 쓰기에는 무리인 주문들이었다. “모두 물러나게. 로운은 남고.” 한참동안 시안의 상태를 살피던 카류가 말하자 마치 물이라도 빠지는 것처럼 의관들과 여관 들이 자리를 떴다. 로운은 사람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카류에게 말했다. “상태는요?” “누군가 손을 쓴 거야.” “예?” “뭐 찾은 것은 없나?” 카류는 로운이 들고 있는 종이쪽지로 시선을 옮겼다. “여러가지 있습니다만 이런 주문들을 잘못 시전한 경우와는 틀립니다. 이런 주문들이 잘못 시전되는 경우엔 엘의 파장이 뒤틀려 버릴수는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완벽하게 흐름을 차단 할 정도의 주문은 없습니다.” 말을 마친 로운이 남아있는 몇 개의 종이 조각들을 살펴보다가 순간 숨을 들이 마셨다. “이, 이건.” “뭔가.” 로운은 황급히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조각을 카류에게 건냈다. 그 종이 쪽지를 본 카류의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자동 발동 주문?” 종이쪽지를 들은 카류의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어떻게 마웨트계의 주문이….” 마웨트계의 주문은 말하자면 일종의 실전용의 주문으로 구분된다. 물론 실전용이 아닌 주문 은 없겠지만 특히 이 마웨트계의 주문들은 기본적으로 인명살상용의 이미에서 실전용 주문 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다. 마웨트는 아슈레이의 고대어로 의미는 ‘죽음’. 그래서 마웨트로 끝나는 주문들은 대부분 죽음으로 이어지는 주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종이 쪽지에 적혀있는 주문은 특별한 주문이다. “이런 주문을 어떻게 시안님께서….” 일반적으로 주문이라는 것은 그것을 시전하는 자가 있고 그리고 그것을 받는 피 시전자가 있다. 하지만 문제의 그 주문은 시전하는 자를 고의로 노리고 만들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주 문을 모르는 자가 이 주문을 소리내어 읽게 되면 자동으로 주문이 발동되면서 시전자의 생 명을 앗아가는 일종의 암살용 주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주문 때문이라면 벌써 이전에 숨이 끊어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이 주문은 신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발동하도록 조작되어 있는 겁니다.” “돌아가시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야. 그것이 모두 미메이라의 뜻일 수도 있는 것이고. 일단 이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어.” 카류는 차가워진 시안의 손을 잡았다.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자. 즉 신력인 엘을 가진 자가 엘을 잃게 되면 머지않아 죽음에 이르게 된다. 설사 지금 살아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보통 사람은 받지 않은 특별한 신의 축복의 단 하나뿐인 대가인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나중일일세. 신전으로 연락해서 생명의 술에 능한 신관들을 골라서 보 내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로운은 카류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굳게 닫혀있던 시안의 내실 창문을 열었다. “로운 디 로크레슈.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 시작에서 끝. 아샨.” 로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흐르던 공기가 한자리로 모여들어 희미한 모양으로 뭉쳐지기 시작한다. 모여진 공기는 어느새 한 마리의 새 모양으로 화하여 로운의 앞에서 작게 날개짓 을 시작했다. “프리스트 로운의 명령이다. 생명의 술에 능한 신관들을 속히 키리엔으로.” 전할 말을 마친 로운은 손가락을 들어 새의 머리를 가볍게 치면서 시동어를 외웠다. “오로프.(연락의 새)” 작은 몸짓이 순간 커다란 날개짓으로 변하더니 이내 그 바람의 새는 로운의 앞에서 사라졌 다. “곧 답신이 올 것입니다. 대신관님.” 몸을 돌리며 말을 하다가 말고 로운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강력한 엘의 파장이 자신의 얼굴 바로 앞까지 가시화 되어 있었다. ‘헉- 이. 이런.’ 마치 번개가 미친 듯이 치고 있는 구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카류는 자신의 엘을 순수 한 형태로 가시화 시켰다. 웅웅거리는 바람소리가 카류의 귀를 마비시키는 것만 같았다. 방사형으로 흩어진 엘은 서서히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갈정도 로 수축했을 때 카류는 그 강력한 힘의 구체를 시안의 심장께에 올리고 소리쳤다. “엘-마케트!!!” 슈욱하는 소리를 내면서 구체는 시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마치 전기 충격이 라도 받은 것처럼 시안의 신체가 요동하기 시작했다. 방금 카류가 쓴 주문은 죽음에 다달은 자에게 자신의 엘을 주입하여 생명을 연장하게 하는 주문. 하지만 그 주문은 카류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소용이 없었다. 잠시 요동치던 시안의 신체는 조금전과 다를 바 없이 차갑게 식은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어 내야해.” “하지만 그런 주문은….” “시안님께 해가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웨트의 주문에 걸린 사람 을 실제로 본 기억도 까마득할 정도야.” 살상용의 주문들은 사실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거의 쓰일 수가 없다. 가끔 변방 에서 아슈레이의 중간지대로부터 흘러나온 듯한 마물이 나타났을 때나 쓰일까 말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어떻게 여기까지 시안님을 이끌어 왔는데.” 단 한번의 시전만으로도 카류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만큼 엘-마케트는 시전자에게 도 무리가 가는 주문이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로운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기억을 되살려 필사적으로 주문을 찾았다. 흐름이 막혀있는 엘을 다시 발동시킬 수 있을 만한 주문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엘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신의 축복을 가진 자의 몸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 이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 바로 엘. ‘막힌 흐름을 다시 흐르게 한다라….’ 로운은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 여기서 포기 한다면 지금까지 해온 그 모든 수고가 헛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미 세상을 떠난 시안도 바라지 않는 일일 것이다. ‘혹시 그것이라면 통하지 않을까?’ “잠시 물러나 계십시오.” 마음을 굳게 먹은 로운이 카류에게 말했다. 카류는 잠시 로운을 바라보다가 선선히 로운에 게 자리를 내 주었다. “막혀있는 것이라면 외부에서 강력하게 흐름을 유도한다면 그 흐름에 따라 갈지도 모릅니 다. 기본적으로 엘은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로운이 생각한 방법은 단순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는 법은 외부에서 힘을 가해서 그것을 억지로라도 움직이게 하는 것 뿐. “하아.” 가볍게 심호흡을 한 로운은 두 팔을 올렸다. 가장 순수한 힘. 그것은 바로 엘의 흐름이 가져오는 힘이다.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의 영광. 그 바람의 시작과 끝.” 모든 주문을 시작하는 기본적인 주문. 그것은 시전자의 엘을 몸 속에서 끌어내는 주문이다. 파라락-소리가 나면서 로운의 옷깃이 바람에 흔들렸다. 이어 쒜에엑하는 파공성과 함께 로 운의 몸에서 그가 가진 모든 엘의 힘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생명의 흐름. 신의 축복. 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의 생명. 신의 힘. 미슈파트. 투명한 백색의 흐름이 로운의 몸에서 흘러나와 시안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마치 생명을 가 진 것처럼 로운이 개방한 엘의 파장안에서 미친 듯이 요동친다. 거센 바람이 벽쪽으로 물러나있는 카류에게 밀려왔다. 카류는 그 거센 바람을 견디며 로운 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로운이 개방한 그 순수한 엘의 바람속에 있는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로운의 생명이 시안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방안에 있던 물건들이 로운의 만들어낸 바람의 힘에 마치 소용돌이처럼 휩쓸려 공중을 떠돌 기 시작했다. -콰직. 바람에 휩쓸려 떠돌던 의자가 문에 부딪히면서 박살이 났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 문이 날아가 버리고 로운이 열어 놓았던 창문도 바람에 휩 쓸려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기를 얼마가 지났을까? 강력하게 불어닥치던 바람에 질끈 눈을 감고 있던 카류가 문득 바람이 멈춘 것을 깨닫고 눈 을 떴다. “로운?” 조용한 방안 한가운데, 시안의 침대가 놓여있는 바로 그 옆에 로운이 고개를 떨군채 서있었 다. 그의 옷은 자신이 일으킨 바람덕에 갈기 갈기 찢어져 거의 누더기가 되어있었다. 그것은 시안의 침대에 달려있던 휘장도 마찬가지 였다. 카류는 가까이 다가가서 로운을 다시 불렀다. “괜찮은가? 로운?” 주문을 써서 엘을 쓰는 것보다 조금전처럼 자신의 힘을 그대로 개방하는 쪽이 몇배나 힘이 든다. 카류가 로운에게 다가가는 와중에 몇몇 신관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저희들 도착했습니다. 대신관님.” 순간 꼿꼿하게 서 있던 로운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로운 신관님!!!” 문가에 달려왔던 몇몇 의관들이 방안으로 난장판이 되어있는 시안의 내실로 뛰어 들어 쓰러 진 로운을 부축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간신히 눈을 뜬 로운은 자신을 부축하는 손을 거부하고 천천히 일어섰다. “시안님은?” 모두의 시선이 침대에 누워 있는 시안에게 향했다. 의관하나가 황급하게 달려가 시안을 살폈다. “괜찮습니다. 많이 좋아지셨어요.” 순수한 엘의 힘을 받은 시안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차갑게 식어가던 손발이 다시 따스해지고 얼굴에도 혈색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로운이 힘을 개방했네.” “예?” “순수한 엘의 힘을 그대로 사용한 거지. 수고했네 로운.” “아닙니다.” 대답을 마친 로운은 눈앞이 흐릿해 지는 것을 느꼈다. “탈진 상태일 거야. 쉬도록 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전에서 사람들이 도착하면 모두 이리로 데려오고 그리고 라콧.” “예.” “이쪽으로 와보게.” 쓰러진 로운이 사람들에 의해 실려 나가고 여관들은 흐트러진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니. 다 치우지는 말고 흩어진 물건들만 골라서 들고 나가게 앞으로 얼마동안은 치워야 소용이 없을테니까.” “예? 아. 아니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카류는 한숨을 파악 내 쉬고는 다시 시안에게로 돌아왔다. 고르게 숨을 내 쉬고 있는 시안의 안색은 혈색이 많이 돌아왔다고는 해도 아직까지는 파리 해 보인다. 시안의 목숨을 노릴 만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지금, 그것도 계승로의 날짜를 5일밖에 남겨 놓지 않은 이 시점에서 시안이 죽었을 때 이익 을 얻을 수 있는 사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카류의 머릿속에서는 정당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안이 신의 축 복을 받아 풍환을 받아온 상태라면 이야기는 틀리다. 그때라면 어느 누구든 시안의 목숨을 노릴 수 가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시안의 힘을 노릴수 있다. 하지만 지금 시안이 죽어보았자. 그것도 엘을 완벽하게 봉인당한채 죽는다고 했을때는 어느 누구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시안이 지금 저 상태로 그대로 죽어버린 다면 미메이라는 더할 나위없는 혼란에 빠져버린다. “이 책은.” 카류는 생각을 멈추고 시안의 옆에 떨어진, 그 엘의 폭풍에도 끄덕없이 말짱한 상태를 유지 하고 있는 두권의 바람술서를 집어 들었다. 하나는 자신이 준 것이고 또 하나는……. ‘설마 레이죠 장로님께서?’ 자동 발동 주문은 한번 사용되고 나면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소리내어 읽는 것으로 글 자의 형태로 남아있던 주문은 공기중의 엘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남아있는 증거라고는 시안이 남긴 종이 쪽지 뿐. ‘카류는 자신이 시안에게 건냈던 책을 펼쳤다. 페이지를 넘기던 그는 중간정도에서 멈추었 다. 그곳에는 자신이 적어둔 주문이 있었다. ‘때로는 같은 생각을 다른 방법으로도 할 수 있는 법이겠지.’ 카류는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워 페이지 위에 덧씌웠던 주문을 지워 버렸다. 검은 색의 글 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원래의 주문들이 적혀있는 페이지가 드러났다. 카류가 조금전 지운 주문은 마웨트계의 주문은 아니지만 일단 발동하면 오랜 시간을 거쳐 피 시술자의 육체를 갉아 먹도록 하는 강력한 주문중의 하나였다. 시안이 그것을 읽든 읽지 않든 그것은 모두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적어둔 주문이었다. ‘때가 되면 또 다른 방법으로, 또 다른 상황이 벌어질 수 있겠지. 그럼 그때는 그에 맞는 방법이 생겨날 것이야. 그것이 또한 신의 뜻이려니….’ 그리고. 시안이 깨어난 것은 에테르의 달이 시작되기 하루 전. 에쉬의 달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8. 예언의 현자 마샤 “뭐? 지금 뭐라고 했나.” “마샤님께서 환송식에 나오시겠다고 연락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샤님께서?” “예.” 카류는 방금 들은 소식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예언의 현자 마샤. 그는 대 신전에 머무는 신관의 한 사람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신관은 아니다. 몇 백년에 한 번, 예언의 신 미제모르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는 아이가 있다. 미제모르의 축 복을 받고 태어나는 아이는 선천적으로 신체의 축복은 받지 못한 채 태어난다. 미제모르의 아이들은 태어나 그 능력이 밝혀지면 모두 신전으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그들은 평생을 신과 대화하면서 명상에 잠겨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다른 그 무엇인가를 보는 신의 눈. 그 눈을 뜰 때 그들은 신의 영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예언의 현자 마샤는 미메이라에서 4백년만에 발견된 예언의 현자로 지금까지 그 모습을 대 중 앞에 드러낸 것은 겨우 수차례에 지나지 않은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시안의 일행이 떠 나기 하루 전, 그들은 만나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의 현자가 말하는 것은 언제 어느 시대에서나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군. 마샤님께서도 때를 받은 것인가….” 카류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소식을 알리려 온 견습신관에게 말했다. “마샤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두 따르고 부족한 것이 없도록 잘 모시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마샤가 환송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아마도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 틀림 이 없다.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예언의 현자는 신의 축복 속에서 신과 함께 살아나가는 절대적인 존재. 그의 모습을 일생에 단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신의 축복을 나누어 가실 수 있다고 생 각하는 것이 미메이라의 사람들이다. “내일은 대단한 하루가 되겠군.” ◇◆◇ “아. 여기 과유랑 산슈의 특제 빵하고 과일하고 또… 으음, 여하튼 알아서 더 가져와요.” “네. 시안님.” 시안은 배가 고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신에게 뭔가 일이 일어나서 근 나흘을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었 다. 신나게 잤다고 생각하고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라헬과 함께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둘러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일어나서 라헬의 이름을 불렀을 때 라헬은 그 큰 눈에서 눈물을 주룩 주룩 흘려가면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자신이 일어나자 마자 앉아있던 사람들이 쾌재를 부르며 모 조리 몽땅 사라지는 바람에 시안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식사와 함께 로운과 기엘이 들어오자 시안은 반색을 하면서 그들을 반겼다. 며칠만에 일어난 시안을 위해 준비된 회복식을 단번에 해치우고 나서 시안은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요청했다. 정말 이상하리 만치 배가 고팠다. “고만 좀 먹을 수 없냐?” “배고픈데 어떻게 하라구. 나는 배고플 때는 먹어야해.” 많이 먹는다고 타박을 하는 로운을 향해 혀를 쭉- 내밀어 보이고는 시안은 기엘에게로 시 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제는 대답해 주는 거예요?” “너는 어째서 여전히 나한테는 반말이고 기엘에게는 존대를 하는 거야?” “…………” “웅?”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쳇.” “이게!!” “로운 그만. 시안님은 몸이 안 좋으신 상태니까 적당히 하는게 좋아.” “아. 나 몸 괜찮아요. 멀쩡해. 한 삼박 사일은 자고 난 기분인걸.” 기껏 기엘이 중재를 했건만 시안은 눈치도 없이(?) 대꾸해 버린다. “실제 그렇게 잤지. 네가 그렇게 퍼질러지게 자는 동안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한 줄아 냐?” “몰라. 그러니까 물어보잖아. 도대체 무슨 일인지. 왜 라헬이 저렇게 고분 고분해졌는지 이 유를 물었더니 밥 먹고 대답해준다며. 빨랑 대답해.” 로운은 건방진 시안의 말 대답에 발끈하려다가 말고 관두었다. 화를 내 보았자 왠지 자신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로운이 제일 큰 수고를 했었습니다. 시안님. 너무 로운은 그렇게 나무라지 마십시오.” “에? 정말?” “예. 시안님께서 나흘전에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셨습니다. 아마도 주문을 외우시다가 몸 에 무리가 오신 듯 했습니다.” “에에. 그런가?” 실상은 조금 틀렸지만 시안에게는 그렇게만 이야기 해두라고 카류가 일러두었던 것이다. “앗!! 그렇다!! 내 암기장!!” “암기장이요?” “주문을 주루룩 적어 둔 종이 쪽지.” 배가 부르고, 그리고 자신이 잠들었던-실제는 혼수 상태였지만-이유를 듣고 나자 생각난 것 이 암기장이었다.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어나 보니 자신의 방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싹-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총 6명의 신관과 2명의 의관과 로운까지 가세해서 시안을 고치느라 일으킨 바람 때문에 방은 초토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안이 잠들어 있는 동안 준비한 다른 방으로 시안의 내실을 옮겼다. “저기 있습니다. 시안님의 책과 함께요.” 기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이른바 시안의 화장대. 그 위에는 바람 때문에 좀 손상이 가기는 했지만 로운이 나름대로 모아둔 종이조각들과 하 킨의 책. 그리고 또 하나의 바람술서가 얌전하게 놓여있었다. “아. 다행이다. 라헬이 챙겨두었나 보군요.” “아니. 로운이 정리해두었습니다.” 방긋-하고 기엘에 웃어보였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늘 티격 태격하는 두사람이 이번 기회로 조금 친해지지(?) 않을 까 하는 기엘의 마음. “고맙다고 하셔도 됩니다. 시안님. 로운이 그 아수라장속에서도 고이고이 정리해 둔 것인걸 요.” 기엘은 머뭇 머뭇하고 있는 시안을 향해 쐬기를 박듯이 말했다. “……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시안은 자신을 향해 배실 배실 웃고 있는 기엘의 얼굴이 왠지 상당히 밉살스러워 보였다. 사람 좋게 생겼지만 사실은 저 항상 무표정의 인간인 아저씨 얼굴보다 더 못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시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마워.” 툭하고 내팽기치듯이 시안이 말했다. “고마워 해줘서 이쪽이 고맙군. 하지만 그전에 약속을 해줘야 겠어.” “뭘?” 시안은 입에다가 마지막 남은 빵조각을 던져넣으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혼자서 바람술을 시험해 보지 말 것. 뭐든 연습을 하고 싶으면 나나 기 엘이 보는 앞에서 할 것.” “…………” 시안은 뚱-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나름대로 혼자서 연습을 해서 로운을 골탕먹일 생각을 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번에 시안이 머리를 자르는 소동을 벌였을 때 로운으로부터 무지막지 하게 당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안이 대답을 하지 않자 기엘이 먼저 설명을 했다. “바람술이라는 것이 쉽게 생각되실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물 론 숙달 되고 나시면 간단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훈련을 거쳤을 때의 일입니다. 간단한 술이라고 해도 실패를 하면 언제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내가 그렇게 심했어요? 지금은 멀쩡한데.” “그것은 충분 할 정도로 치료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시안님을 고치느라고 여기 로운은 힘을 쓴 뒤 꼬박 하루를 고생해야 했었거든요.” “이봐. 기엘. 쓸데없는 말 하지마.” 기엘의 말에 시안은 뜻밖이라는 듯이 로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헤에. 저 아저씨 얼굴이 나를?’ 하지만 이내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로운이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시안의 얼굴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면서도 다른 사람일 뿐이다. “시안님께서 가진 엘은 보통의 술법사를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연습하시면 누구 보다도 강한 바람술을 사용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까딱 실수를 하면 다른 어느 누구보다 강 한 피드백을 받으시게 되지요. 명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아. 알았어요.” “약속하시는 겁니다.” “약속한다니까요. 됐죠?” “예. 좋습니다.” 어느새 기엘은 궁정기사단 수련원에서 초보 훈련생을 가르치는 듯한 어조가 되어있었다. 꼭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항상 수련원에서는 비슷한 사고가 일어나곤 했다. 자신의 능력 에 걸맞지 않는 거창한 바람술들을 쓰고 싶어하는 훈련생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기엘과 로운이 시안에게 바람술을 혼자 연습하는 것을 금지한 것은 다른 이유 에서였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군가 시안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이번 사건을 통해 명 백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마웨트의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키리엔에 상주하고 있 는 장로들, 그리고 나이트 사르트 루하. 그리고 로열 나이트 중에서도 몇 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주문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혐의자를 모두 모아서 조사하기에는 그들의 능력과 지 위와 권력이라는 방패막이 너무나 크기에 불가능했다. 결국 이 사건은 로운과 기엘, 그리고 카류 세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언제 또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기엘과 로운은 시안이 혼자서 바람술 을 연습하는 것을 금지 시킨 것이다. 적어도 기엘이나 로운이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면 사전 에 미연의 사고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아참.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시안님.” “좋은 소식?” “예. 내일 환송식 때 예언의 현자님께서 나오신다는 군요.” “…………” 기쁘게 말하는 기엘의 표정과는 달리 시안은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 라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은 예언의 현자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겠지만 시안은 예언의 현자의 ‘현’자도 들어 본 일이 없기 때문.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애처로운(?) 표정의 시안에게 기엘이 웃으면서 대답을 해주었다. “예언의 현자님은 글자 그대로 예언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마샤님께서 하시는 예언은 신의 축복이라고도 하지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신데 내일 시안님께서 계승로에 오르신다고 하니까 아마도 시안님께 예언의 말씀을 해주실 예정이신 것 같습니다.” “예언을 받으면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겨요?” “글쎄요. 사실 저도 마샤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아본 일이 없으니 뭐라고 말씀 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드문 일이고 시안님께는 분명히 좋은 일일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입 니다.” “헤에.” “이봐. 이녀석은 마샤님이 어떤 존재인지 알 리가 없잖아. 그정도로 해둬.” “뭐 덤으로 저희까지 예언을 받을 수 있다면 저희로써는 영광이지요.” 기엘이 그렇다면 그런거겠지라고 시안은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은 그냥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내일 떠날 때 전 수장이 나오든 대신관이 나오든 온 미메이라의 신민들이 나와서 환송을 하든 시안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것이 저 예언의 현자 마샤인지 마부인지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왜 라헬은 먹을 거를 더 안 가져다 주는 거지?” “아. 사람을 부를 까요?” “아니. 뭐 때되면 알아서 해주겠지. 그리고 뭐 더 할 말 있어요?” 뭔가 기엘이나 로운에게는 시안의 이런 반응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고 해서 내일 이러저러하고 요러저러하니 좀 기뻐해봐!!! 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 그런 것은 이미 애 저녁에 포기해야 할 사항인지도 모른다. “내일은 아침부터 일찍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드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뭐 꼭 가져가고 싶은 것이라도 있나?” 어울리지 않게 꼼꼼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로운은 역시 그답게 시안을 챙긴다. 시안은 로운의 말을 듣고 이것 저것 곰곰이 생각하고서 대답했다. 어차피 필요한 것은 알아 서 챙길텐데라는 생각도 있지만 역시 그것만큼은 꼭 가져가고 싶었다. “주문을 적어둔 내 암기장. 그리고….” 시안의 시선이 화장대로 향한다. 그러자 로운과 기엘의 시선도 시안의 시선을 따라갔다. “역시 저건 무릴까요? 저것도 가져가고 싶은데.” “바람술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기엘이 대답했다. “네. 아직 다 적지도 못했는데.” 일단 가져가고는 싶지만 시안에게도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먼길(?)을 가는 건데 옷도 아니 고 생필품도 아닌 책을 들고 가겠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관님 하고 그 레이죠 장로님이 주신 책인데 아직 반도 못 봤거든요. 아까워서….” 기엘은 로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로운은 왜 날 쳐다봐? 라는 얼굴로 답을 대신한다. 가뜩 이나 짐도 많은데 애써 책을 가져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시선을 포함해서 말이다. “글세. 둘 중 하나정도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일단 대신관님이나 레이죠 장 로님께 여쭈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하킨의 책 같은 경우는 뭐 기밀까지는 아니지만 아직 궁 밖으로 유출 된 적은 없는 책이거든요.” “뭐 안 된다면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다면 저 두 권 모두 가져가고 싶은데요.” 시안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아쉬운 듯이 말했다. 아직 저 책들에 쓰여져 있는 바람술들을 제대로 쓸 줄은 모르지만 저 책이 뭔가 대단한 책이라는 것은 조금은 느끼고 있다. 뭐. 거기 써있는 주문들이 대단하다라기 보다는 왠지 그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그 들의 반응 때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뭔가 비밀스러운 것, 또는 아무나 손을 못 대는 것에 호기심을 같 게 되기 마련이다. 기회라는 것은 쉽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것이 역 시 제격. 말하자면 기회는 빤스다!!!라는 것이 시안의 생각이었다. “자. 그럼 오늘은 편히 쉬세요. 시안님. 내일부터는 아마도 꽤나 험한 일정이 시작될테니까 요.” “알았어요. 알았어. 밥만 먹고 잘테니까 일들 있으면 가봐요. 아참!!” 시안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일어서는 두 사람을 다시 붙들어 세웠다. “예?” “왜 불러?” 하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극과 극. “정말 기엘님하고 아저씨 얼굴하고만 떠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당연.” “…으음.” “정해진 규칙이다. 계승로에 오르는 수장 계승자는 본인이 선택한 신관 한명, 기사 한명과 함께 떠나는 거야.”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그럼 네가 나와 기엘말고 아는 다른 신관이나 기사가 있어?” “…………” 시안은 밉살스럽게 말하는 로운의 얼굴을 있는대로 째려보았다. 하기사 자신이 아는 기사라고 해봐야 저 기엘뿐이고 신관 역시 대신관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일일이 꼬투리를 잡아서 따지고 드는 저 아저씨 얼굴밖에 없다. “알았어. 알았다구. 제길 무슨 말을 못해.” “하하하. 시안님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기엘은 토라진 시안이 생각보다는 귀엽다(?)라고 생각했다. 기엘과 로운은 시안의 내실에서 나와서 각자에게 배정된 숙소로 돌아갔다. 그 돌아가는 도중에 기엘은 로운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혹시 느꼈어?” “뭘?” “시안님. 아직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정상은 아니지.” 기운을 차리고 혼수상태에서 벗어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자그만치 사흘이다. 혼수상태의 사람이고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받은 극약처방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엘을 직접 몸으로 받아낸 시안은 기운을 차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말짱했지만 그녀(?)가 내 뿜고 있는 엘의 파장은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저런 상태시라면 조금 떠나는 날을 연장해도 좋지 않을까?” “글세. 문제가 발생할 만하겠다 싶었으면 대신관님께서 이미 손을 쓰셨을거야. 조금… 파장 이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몸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잖아.” 로운 역시 말은 조금이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걱정이 많이 되었다. 로운이 느끼고 있는 시안의 파장은 원래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t 시안이 아슈레이로 소환되어 곧바로 풍옥을 계승했을 때의 파장은 뭔가 막혀있는 듯하지만 그 안에 강력한 엘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수 있을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안은 뭐랄까. 시안의 엘인 것은 분명한데 왠지 두사람의 파장이 섞여서 흘 러나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마치 겉으로는 하나로 보이지만 두 개의 선이 포개 져 하나를 이룬듯한 파장으로 정말로 섬세한 신경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면 알아채지도 못 할 만큼 교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일단은 원래 이쪽 사람이 아니라 이계의 사람이니까 기본적으로는 차이가 있을 꺼야. 너 무 걱정하지마.” “그래. “뭐. 나보다는 네쪽이 훨씬 그쪽으로는 민감하니까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 지.” 기엘은 툭툭, 로운의 어깨를 쳤다. 자신보다는 머리 반정도가 큰 키의 로운. 거기다가 체격도 다르다. 예전에 훈련생 시절에는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면 형과 동생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 도 있다. “잘 해보자구. 로운 디 로크레슈.” “물론. 로열 나이트 기엘 디 하라스다인.” 주먹을 쥔 두 사람의 손이 공기 위에서 부딪힌다. 환송식의 전 날밤. 이제 내일부터는 이 키리엔을 떠나서 여행을 하게 된다. “으음. 그냥 자기는 좀 그렇고.” “그렇지?” 왠지 서로 느낌이 통하는 것 같다. “어디 나가서 간만에 술이라도 할까?” “그게 신관의 입에서 나올 소리야?” “뭐 이 제복만 벗어버리면 누가 날 신관으로 보겠어?” “푸하핫. 그건 그래. 그럼 나도.” 기엘은 어깨를 덥고 있던 겉옷을 벗어 허리에 차고 있던 길고 긴 라이트를 감싸서 적당히 등에 메었다. “나. 어때?” “…어디서 굴러 먹다온 떠돌이 검사 흉내를 내려다 실패한 로열 나이트 같다. 임마.” “하하. 그 정도라도 되면 성공이지 뭐. 본판이 어디 가겠어? 어디보자. 어디로 갈까? 혹시 거기 기억나? 우리 훈련생 시절에 매일 같이 쥐구멍으로 빠져나가던 그 선술집.” “물론 기억나지. 베티아줌마 아직 건제하실까?” “하하. 당연히 건제하시겠지. 그 아주머니는 아마도 100살이 넘어도 선술집을 운영하고 있 을 거라고.” 두 사람은 나란히 발을 맞추어 걸어가면서 새록 새록 두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기억을 되살 려 가기 시작했다. “하기사 그 아줌마. 훈련생들이라면 이를 갈았었지. 매일 같이 와서 외상만 잔뜩 늘어 놓고 간다구.” “그래. 그리고 우리들은 그놈의 로열 나이트~~ 로열 나이트를 내세우면서 끝까지 외상으로 먹었잖아.” “혹시 나 이전에 잊어먹고 안 갚은 외상값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는데?” 이어지는 말의 꼬리들. 그 말의 꼬리들은 키리엔에 불어나가는 시원한 바람에 휩쓸러 밤하늘로 사라져 갔다. ◇◆◇ 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마치 귓가에 누군가가 부드러운 숨결을 불어 넣는 듯한 느낌. 포근히 잠들어 있을 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길. 하지만 그 부드러운 느낌은 이네 이유를 알수 없는 짜증스러운 고통으로 변한다. ‘으으. 제길 잠 좀 자자. 잠 좀.’ 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투정을 했다. “시안님.” “………” “시안님? 다 끝났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다. ‘좀 자자니까. 넌 잠도 안자냐.’ “시안님?” 툭-하고 누군가가 어깨를 쳤다. “으. 으응?” 퍼득 눈을 떠보니 거울에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는, 눈이 돌아 갈 정도의 미녀가 한 명 앉아 있다. ‘오오. 간만에 꿈을 꾸니 이런 꿈도 꾸는 구만.’ 그는 눈을 번쩍 뜨고 앞에 앉아 있는 미녀의 얼굴을 샅샅히 뜯어본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연한 색의 눈동자. 아니 다시 보면 뭔가 회색빛이 감도는 것 같기도 하 다. ‘앗. 눈을 깜빡이네. 오예~.’ 인형 같은 얼굴로 앉아있던 미녀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모나리자를 능가하는 천 상의 미소. 그녀의 머리카락은 지금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그것은 한올 한올 살아 숨쉬고 있어 그녀 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보석 장식보다도 훨씬 아름답게 하늘 거리고 있었다. ‘죽여주게 미인이네. 게다가 칼라꿈이야. 이건.’ 온 몸을 순수한 백색으로 감싸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아름다운 미녀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그 는 제발 꿈이라면 깨지 말고 앞으로 3시간만 버티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시안님. 이제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아. 으으응. 알았… 에엥??”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눈앞의 미녀가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우. 우윽….” “시안님 어디 불편하신데라도 있으신가요?” ‘그. 그럼 이게 꿈이아니라.’ 시안은 레이스로 뒤덮힌 손을 들어서 자신의 뺨을 철썩-하고 때려보았다. 순간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물론 눈앞의 미녀 역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자신을 바라본다. “누. 누가 여기다 거울을 가져다 놓으라고 했어!!” “예? 이 거울을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습니다만?” 시중을 들어 주고 있던 라헬에 어리둥절해서 대답했다. 그러자 조금 전에 자신을 불렀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한껏 빈정대는 목소리로 바뀌어 시안의 신경을 긁는다. “이제는 앉아서 까지 조냐?” “누, 누가!!!!” 시안은 너무나 쪽이 팔려 얼굴을 붉히고 그 빈정댄 사내에게 대들었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쪽팔리지만 달리 방법도 없다. 말하자면 시안은 머리 치장을 하고 화장을 하기 위해서 앉아있다가 그 자세로 그만 졸아 버 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잠에서 덜 깨어서 눈앞에 있는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어휴. 저놈의 거울을 부셔버려 말어? 으으. 주먹이 운다 울어.’ 꼭두새벽부터 잠에서 깨어나 여관장들이 시키는대로 목욕을 하고 옷을 입고 몸치장을 하고 하는 등의 법석을 떠는 바람에 상당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사람이라는 것은 머리카락을 만져주면 왠지 잠이 사르르 오는 법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 람도 있겠지만…. “모두 시안님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나가셔야죠.” “그런데 말이야. 라헬.” “예. 시안님.” “어째서 여행을 떠나는데 이렇게 치렁 치렁 장식을 해야하는 거야?” “글쎄요. 하지만 저로써는 오랜만에 이렇게 치장을 하신 시안님을 뵈니 감개무량한걸요. 그 것으로 안 될까요?” 한없는 존경과 경외의 눈빛이 담겨있는 라헬의 눈이 시안을 향해 반짝이고 있다. 시안은 그런 라헬에게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잠시후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아도 될 사람인데 괜한 소리를 해서 신경을 긁어놓을 필요는 없다. “아니. 됐어. 라헬에 좋다는데 뭐.”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이 라헬이라는 여자에게는 어느 정도 친근한 마음이 생겨있는 중 이다. 물론 시안을 담당해서 매일 수십번씩 얼굴을 마주대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어떤 여관들보다 친근하게 시안을 대해준 것은 사실이다. 실제 시안이 키리엔에 돌아왔(?) 을 때 어딘가 모르게 과거의 시안과는 틀린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를 왠지 어려워 하며 대했 던 여관들이 많았던 탓도 있다. “나이트 기엘님이 오셨습니다. 이제 베일을 쓰시죠.” 눈앞으로 투명한 천이 흘러 내린다. “아. 그래? 어디?” “이쪽으로….” 시안은 라헬이 이끄는데로 긴 치맛자락을 한 손에 들고 나름대로는 꽤나 사뿐 사뿐한 걸음 걸이로 걸어갔다. 그녀의 앞에 시안 못지않게 꽤나 차려입은 기엘의 모습이 보였다. “헤에.” 기엘은 평소와는 달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로열 나이트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 었다. 시안의 눈에 긴 장검, 라이트가 반짝였다. “오늘은 꽤나 힘쓰셨네요?” “오늘은 특별히 아름다우시군요.” 기엘이 한손을 내밀면서 칭찬의 말을 하는 순간 시안은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하고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우욱. 제길. 앞으로 삼박 사일은 떠오르겠군.’ 조금 전 비몽사몽간에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얼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다. 아니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입밖으로 낼 생각이 없다. ‘어째서 왕이니 왕자니 공주니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미인에 미남이어야 하냐구. 때로는 못생긴 왕자에 못생긴 공주도 좀 있어야 하는 것 아냐?’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쯤에 누나들의 협박으로 억지로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들, 즉 왕자나 공주들은 언제나 미남 아니면 미녀였다. 주인공은 미남 미녀여야 한다는 진리 아 닌 진리는 나이 들어서 접하게 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이나 게임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 었다. 악당들은 언제나 흉측하게 생기고 주인공은 언제나 잘 났다. 특이할 점이라면 악당중 에서도 좀 잘난 녀석, 즉 주인공의 철천지 원수 또는 최고 보스는 주인공 뺨치는 미모(?)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 ‘하기사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구 주인공이 미남 미녀면 눈길은 좀 더 끌을 수 있겠지.’ 기엘이 이끄는대로 걸어가면서 시안은 멍하게 딴 생각을 했다. “시안님 계단을 조심하십시오.” “아. 으응.” 계단을 따라 내려가서 시안은 이제 탁트인 키리엔의 넓은 정원으로 들어섰다. 시안이 정원에 한 발자국 디디는 순간 모여있던 기사들이 라이트를 높이 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모여있는 사람들도 함께 환호성을 질러댔다. 귀가 막힐 것 만 같이 우렁차게 울려오는 그 환호성 소리는 시안과 대신관이외 몇 명이 높 이 마련되어있는 연단에 올라가서야 간신히 멈추었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키리엔을 배경으로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흰색의 물결이 넘실거린 다. 아찔하게 높은 연단 맨 꼭대기에 서서 시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사람이나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아.’ 길고 긴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키리엔의 성문까지 흰색의 천으로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그리고 예복을 차려입은 전 수장 레이죠 장로와 대신관이 차례대로 축하의 연설을 하는 것 도 마치 입체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뿐이다. 시안이 한 손을 들면 마치 스위치라도 누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다. 그리고 손을 내리면 스위치 오프.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문득 시안의 머릿속에 이것은 현실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현실이 아니라면, 내가 단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좋겠어.’ 사람들의 환호 위로 시안의 아니 경하의 식구들 얼굴이 흘러간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누나들. ‘죽을 때 되면 주마등처럼 사람들 얼굴이 스쳐간다는데. 하기사 나 일주일이상 그 괴물딱 지 형하고 떨어져 본 일이 없었구나….’ 옆에 전 수장인 레이죠 장로, 다시 말해서 이 세계에서 시안의 아버지인 사람이 다가와 그 녀의 손을 잡는다. 따스한 온기가 얇은 옷감을 너머 전해져 왔다. 순간 울컥하면서 목구멍으로 무엇인가가 솟아 올랐다. 레이죠 장로는 시안의 얼굴을 덮고 있던 베일을 걷어 올렸다. 시안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저 멀리 길게 늘어져 있는 백색의 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 고 있었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은 돌아가실 때 감격의 눈물로 족할겁니다. 시안님.” 자신의 손을 꼬옥 잡고 레이죠 장로가 말했다. 시안은 그제서야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길. 고등학생이 돼서는 단 한번도 울은 적이 없었는데….’ “어려운 일이지만, 무사히 마쳐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당신에게도 부모와 형제가 있 을 텐데 그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했군요.” 메마른 듯한, 하지만 어딘가 아픔이 서려있는 목소리. 시안은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반드시. 돌아가겠어. 반드시. 절대로. 이따위 계승론지 뭔지 정도 가볍게 통과해 주겠다 고.’ “그래도 당신에게는 미메이라의 축복에 더해서 미제모르의 축복까지 더해지는 군요. 내딸 시안은 마샤님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래봤자 그 축복은 내가 아니라 원래 아저씨 딸한테 내려지는 것 아닌가요?” 시안의 말에 레이죠가 놀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죽은 사람에게 이러니 저러니 하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있지만 아저씨가 그렇게 자꾸 그 여자 이름을 부르면 마음편하게 저 세상에 못 간다구요. 저희 할머님이 언제나 하시던 소리 죠.”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점차 가라앉고 있다. 그리고 시안은 그 속에서 조금 목소리를 울려 말하고 있다. “떠난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만 하면 되는거예요. 아주 좋았던 기억만 남겨서 그것만 간직하는 거죠.” “…시안님.” “딸한테 님자 붙여서 말하면 사람들이 눈치채요. 날 그렇게 고생 시켜놓고 이제와서 왕창 파토낼 심사는 아니죠? 조금 있다가 떠날 때는 그럴싸 하게 절 안고 이마에 키스라도 해주 세요. 그 순간만큼은 가짜 시안이 아니라 진짜 시안이 되줄테니까. 아저씨 딸은 아직 진짜로 죽은게 아니예요. 내가 여기 있는 한은.” 레이죠 장로는 할 말을 잃었다. 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촉촉하게 물기가 묻어있는 시안의 말에 지금까지 딸을 잃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의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 “그렇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이죠 장로는 한 손을 들어 눈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한 눈을 가렸다. 그의 딸은 죽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지금 그의 옆에. 레이죠 장로는 꼭 붙들고 있던 시안이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진정한 미메이라의 계승자. 시안,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그대에게 미메이라의 축복을….” “축복을!!!” “축복을!!” 그의 선창에 따라 모여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시안에게 축복을 말을 외쳤다. “나의 딸. 사랑스런 내 딸 시안에게 축복을.” 그리고 레이죠 장로는 마음속으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또한 영원한 미메이라의 안식을….’ ◇◆◇ 길고 긴 베일. 그리고 치맛자락. “마샤님의 앞에 가시면 가볍게 목례정도만 하시면 됩니다. 예언의 현자라고 하지만 기본적 으로 마샤님 역시 신관이시니까 목례를 하시고나면 마샤님께서 시안님께 예를 올릴겁니다. 그 후로는 마샤님의 예언의 축복을 받으시면 되구요.” 장시간 길고 긴 옷과 묵직한 머리장식에 시달린 시안은 이제 기진 맥진해 가고 있었다. ‘역시 여기 와서 맨날 먹고 자고 공부만해서 체력이 떨어진거야. 이전에는 이틀 내내 산을 오르락 내리락해도 멀쩡했었는데. 으윽. 무거워.’ “그거면 되는 거예요?” “예. 예언의 축복을 받을 때는 다른 사람이 옆에서 시안님의 시중을 들지 못하게 되어 있 습니다. 예언의 축복은 단 한사람에게만 주어 지는 것이니까요. 일단 기엘님과 로운님께서 먼저 받으시고 내려 오시고 나서 잠시 기다리셨다가 올라가시면 됩니다.” 키리엔의 대 정원에서 이루어지는 환송식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길고 긴 대신관의 축사와 자질구레한 행사들이 모두 막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3년만에 모습 을 드러내는 예언의 현자 마샤의 축복을 받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시안은 로운과 기엘의 인도에 따라 연단에서 내려와 정원 한쪽에 마련된 이상하게 생긴 정 자같은 곳 앞에 서 있는 중이다. “자. 로운님께서 먼저.” 로운은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럼 먼저….” 일단 시안에게 예를 올렸다. 바람의 신 미메이라의 신관인 로운이 예언의 신의 축복을 받는 다는 것은 이상할지 모르지 만 그것은 이 미메이라에서는 일종의 신들의 축복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미메이라의 신관 로운 디 로크레슈입니다.” 로운은 무릎을 세우고 한 손을 가슴에 대고 예를 올렸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최고의 예. 로운이 미메이라의 신관이기에 그는 마샤에게 최고의 예까지는 올리지 않는다. 「미메이라의 축복을 받은 자.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머릿속에서부터 나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로운은 일어나서 정좌를 하고 앉아있는 예언의 현자는 그 단아한 얼굴을 들어 마치 눈이라 도 보이는 사람처럼 로운의 얼굴쪽을 향했다. 「손을…」 로운 역시 마샤와는 직접 만나본 적은 있지만 그가 예언을 하는 장면은 본적이 없었다. 로운이 손을 내밀자 가느다란 선으로 이루어진 흰 손이 그의 손위에 얹어졌다. 따스한 온기가 마샤의 손에서부터 로운에게로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대는 원하는 것이 없군요.」 순간 로운은 손을 움찔했다. 「하지만 동시에 원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가장 원하는 것. 단 하나만을 바라십시오. 원 하는 것이 하나가 될 때, 당신이 바라는 그 시간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로운의 손에 올려진 마샤의 손이 다시 옷깃 사이로 사라졌다. 다시한번 마샤에게 예를 올리고 로운이 뒤를 돌아 나가려는 순간 다시 그의 머릿속에 마샤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에게는 언제나 미메이라가 함께 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의존하지는 마십시오. 그 러나 그렇다고해서 자신만을 믿어서도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예언의 현자 마샤님.” 로운은 얇게 드리워진 휘장을 지나 다시 밖으로 나왔다. 눈이 부셨다. “다음은 나이트 기엘님.” 기엘은 로운에게 살짝 눈짓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로열 나이트 기엘 디 하라스다인입니다.” 그리고 기엘이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마샤의 손이 올라갔다. 「아니 예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이트 기엘.」 “아. 저….” 「그대는 기사입니다. 기사는 자신의 군주에게만 예를 표하시면 됩니다. 이리로 오세요.」 기엘 역시 로운과 마참가지로 가까이 다가가 마샤가 시키는데로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의 손을 잡고 있던 마샤는 곧 손을 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싶어 기엘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나이트 기엘. 당신의 군주는 누구입니까?」 “예? 무. 물론 시안님이십니다.” 왠 뜬금없는 질문인가 싶어서 기엘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예언의 현자께서 하시는 말씀이 니 허술한 질문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예언대신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마샤 에게 그는 의문을 품었다. 「당신의 주인은 누구죠? 로열 나이트 기엘 디 하라스다인?」 예언의 현자가 다시 질문을 했다. 기엘은 순간 이 예언의 현자가 자신에게 단순하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머리를 들고 잠시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 했다. 시안이라고 대답했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정확한 답변이 아니다. 물론 자신은 기사이고 기사는 국가에 충성을 하고 또한 그들이 군주, 즉 수장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하지만 지금 예언의 현자는 자신에게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군주라는 말 대 신에 주인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대의 목숨을 걸고, 명예를 걸고 모든 생의 시간을 바쳐 지켜야 할 그대의 주인은 누구 입니까?」 “아직. 저는 저의 주인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기엘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대답을 하지면 수장계승자인 시안님이라고 대답을 하는 것 이 당연하지만 지금의 시안은 원래의 시안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시안이 원래의 시안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에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기사는 주인의 것입니다. 그대가 그대의 명예를, 신에게 받은 모든 축복을, 그리고 목숨을 바쳐 지킬 주인을 찾을 때 그대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열 나이트라는 이름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로열 나이트는 로열 나이트 일뿐. 그대는 로 열 나이트이기 전에 기사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그리고 기사이기이전에 한사람의 인간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기엘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엘은 뭔가 홀가분한 기분과 함께 휘장을 지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정확하게 마 샤의 말, 예언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뭔가 그는 개운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시안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가 밖으로 나오자 마자 쪼르르 걸어와서 소근 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그래요? 그 예언자 아저씨가?” “글쎄요?” “에에. 아저씨 얼굴하고 똑같은 대답을 하네.” “예언의 축복을 받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왜요?” “다른이에게 말하는 순간, 그것은 예언의 힘을 잃기 때문이죠.” “정말요?” “그렇다고 합니다.” “흐응.” 기엘은 자신의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드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시안을 바라본다. 시안이면서도 시안이 아닌, 이계의 소년. ‘시안님의 원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 기엘은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을 향해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이번에는 시안님의 차례입니다. 올라가세요.”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이거 무슨 수정 구슬 놓고 미래예언 점집 어서옵쇼~같은 분위기 는 아니지만 뭐.” 시안은 씩씩하게 휘장을 향해 걸어갔다. 어차피 현실하고는 전혀 틀린 마치 옛날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이상한 일들이 가득한 곳이 다. 예언의 현자라고 해봤자 어차피 자신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사람. ‘좋아. 좋아 가볍게 들어주지 뭐. 시시껄렁한 것만 이야기 해봐라. 확- 다 불어 버릴테니 까.’ 「그건 곤란한데요. 그러면 누가 예언의 말을 들으러 오겠습니까?」 혼자서 궁시렁 거리면서 휘장안으로 막 들어가던 시안의 머릿속에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 우앗!!!” 순간 시안은 자신의 긴 옷자락을 밟고 앞으로 철푸덕-하고 넘어져 버렸다. “으. 으윽. 노. 놀랬다.” 시안은 흘러내린 베일을 걷고 눈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았다. “어라? 예언의 현자라고 해서 파파 할아버지 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어서 실망하셨습니까?」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좀 의외는 의외네요. 그런데 이거 텔레파시?” 「텔레파시가 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눈을 감고 있던 사람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웃고 있는 것이다. “아아. 말해봤자 모를테니까 그만 두죠.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만을 대화하는 법 정도로 ….” 「비슷하군요.」 “앗. 그렇다 들어오면 인사부터 하라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이계에서 오신 분. 그대는 타닌의 후예 세나케인의 생명을 받은 자. 제게 예 를 표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말과 동시에 마샤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안에게 예를 올렸다. 멍청하게 주저 앉은채로 그 인사를 받으면서 시안은 조금전에 마샤가 한 말을 곰곰이 되 씹 어 보았다. ‘이계 소환술에 의해서 이곳에 온 사실은 비밀이라고 해놓고. 영판 모르는 인간까지 알고 있는 것은 또 무슨….’ “그런데 세나케인이라는 것은 누구?”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거 예언이예요?” 「그렇다고 해두지요. 하하」 시안은 다른 사람이 보고 있었다면 놀라 기절 초풍할 듯한 건방진 태도로 마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샤도 마찬가지로 그는 나름대로 이 이계에서 온 소년과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거 말고는 없어요? 예언의 축복인지 뭔지를 해준다던데….” 마샤는 시안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이리 가까이 오셔서 그대의 손을 주십시오.」 “아. 손을 잡아야 하는 건가요? 여기.” 시안은 그때까지 철퍼덕 주저 앉아있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서 마샤에게 다가가 불쑥 주먹을 내밀었다. 마샤는 그 손을 잡고 잠시 있다가 그때까지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그의 눈을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세계. 하지만 그는 그 저편의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어. 그 눈 보이는 거예요? 라헬의 말로는 예언의 현자는 아무것도….” 「당신이 보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이가 보지 못하는 다른 것을 보지 요.」 “흐응.” 「당신은 다른 이의 생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아. 그. 시안이라는 여자?” 「아니. 시안님은 도 그렇습니다만 그분뿐만이 아닙니다.」 “그럼?” 「앞으로 그대에게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내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마샤의 말을 듣는 순간 시안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그때까지 그저 단순하게 점집 정도로 생각하면서 껄렁 껄렁 대고 있었던 시안은 섬칫한 차 가움이 마샤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재수 똥 튀기는 소리가 하고 싶은 거면 여기서 그만두죠. 나 때문에 누가 죽었다느니 하 는 소리는 한번이면 족하니까.” 장난스러웠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시안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정말이지 다른 것은 뭐든지, 심지어는 이 치렁치렁한 머리까지 참아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누구의 희생 운운하는 소리는 절대로 듣고 싶지 않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를 해야할 정도라면 아예 입도 뻥긋하지 마셨으면 좋겠네요. 다 끝났 나요?” 불쾌함이 마샤가 잡고 있는 손 끝에 모두 몰려가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그 손을 내팽기치고 뛰어 나가고 싶을 만큼. 「제가 말을 잘 못 고른 것 같군요. 이계에서 오신 분.」 어딘지 모르게 쓴 웃음이라도 짓고 있는 듯한 목소리. 텔레파시 같은 정신적인 대화이다 보 니까 상대방의 감정가지도 그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마치 살갗이라도 대고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으로 전해져온다. 「생명은 모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몸에 가득 차 있는 엘(EL)도,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시간도 모두 생명이지요. 당신의 앞길에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목숨일 수도 있고, 그들의 노력일 수도 있고, 그들의 재치일수도 있고, 그리고 그들의 명예일 수도 있습 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으로 당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또 인도해 나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살아 나가는 것이지요.」 잠자코 마샤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던 시안은 결국 그 소리인가 하는 생각에 한숨을 파악 내 쉬었다. “이봐요. 예언의 현자인지 현인인지 모르겠지만. 그딴 소리는 안해도 무슨 소리인줄 안다구 요. 그리고 좀 착각을 하고 있는데 나는 내가 여기 오겠다고 해서 온 게 아니예요. 어디까지 나 댁들이 날 불러서 끌려온 거라구요. 힘들여 끌어온 인간. 당신들이 알아서 챙겨서 먹이고 보호해서 안전하게 약속대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 역시 댁들이 원하는 것을 그 래도 해주고 있으니까.” 시안은 자신의 손위에 있던 마샤의 손을 탁하고 쳐내버렸다. 들어 올 때의 기분과는 정반대의 기분. “더 할말 없는 거죠?” 이 이상 마샤의 말을 듣다가는 왠지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짜증도 나고 힘도 드는데 마샤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폭발 스위치를 눌러 버릴 것만 같았다. 「로운과 기엘. 그 두 사람을 잘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려봤자 내가 그녀석들한테 도움 받는 쪽이라 내가 그쪽들 봐줄 사이 없어요. 그럼 잘 있으슈. 젠장. 돈주고 본 점이면 돈 빼앗아 나오고 싶은 심정이야.” 시안은 잔뜩 불쾌해진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휘장쪽으로 걸어갔다. 인 사는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는 시안의 뒤에서 마샤는 마지막 예언의 축복을 전했다. 「기억하세요. 주인은 당신입니다. 나이트와 프리스트 그리고 타닌의 후예 세나케인 역시.」 ◇◆◇ “이제 그냥 가면 되는 거죠?” “예?” “그리고 묻겠는데. 이놈의 치렁 치렁한 옷하고 이 머리장식은 언제 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대신관은 뭔가 기분이 잔뜩 상해 있는 듯한 시안의 얼굴색을 살핀다. “이대로 수도를 가이칸 제국과의 국경 정도 까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대로? 그게 며칠이나 걸리는데요?” “앞으로 이틀 정도의 여정입니다.” “이틀이나요? 그냥 여기서 대충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살짝 나가면 안 돼겠어요? 어차피 여행을 하는 것이라면 미메이라도 좀 둘러보고 싶은데.” “미메이라를 둘러 보시고 싶으시다면 돌아 오는 길에 천천히 둘러 보셔도 됩니다.” 시안은 조금 전에 마샤로부터 들은 예언아닌 예언 때문에 상당히 기분이 나빠져 있었다. 아 니 기분이 나빠졌다기 보다는 지금까지 조금은 장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 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이 가라 앉고 있었다. “마차가 준비 되었습니다. 시안님.” “국경근처 까지 가실 때까지 가시는 여정에 있는 모든 마을에서 시안님을 환송하는 무리가 줄을 이을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미메이라의 계승자로써 위엄을 지키셔야 합니다.” ‘쳇. 무슨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도 아니고, 아니 요즘은 금메달 리스트도 카퍼레이드는 안 해주는데 말이야.’ 시안이 떠날 시간. 준비된 마차 주변에는 지난 한달 동안 얼굴을 마주 대고 지내왔던 모든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시안은 그쪽으로 걸어 가다가 레이죠 장로를 발견하고 그의 앞에 섰다. 대신관 이하. 그와 함께 떠날 기엘과 로운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기분이 가라앉자 지금까지 단순하게 구경만 하고 있던 기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흐릿하던 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리 되는 듯한 느낌. 시안은 조용하게 레이죠 장로의 앞에 서서 그의 짙은 회색빛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시안이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적어도, 이곳, 이 현실 속에서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리고 수행식인지 뭔지를 할 때만해도 시안에게는 이 미메이라라는 곳이 단순한 판타지, 그리고 환상의 세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치장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 다시 서게되자 지금까지 현실로 생각 하지 않았던 그 모든 것들이 머리 위에 얹힌 무거운 장식들 만큼이나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 했다. 고요한 가운데 레이죠 장로가 입을 열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부디 무사하게 미메이라의 축복을, 풍환을 얻어 돌아오시길 기원합니다. 그대의 긴 여정에 미메이라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길.” 천천히 그의 몸이 숙여진다. 그와 동시에 시안을 마중나온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아직까지 궁안뜰앞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몸을 숙인다. 조용하고 고요한 시간. 오직 흐르는 공기만이, 미메이라의 바람만이 그들의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 “…시안님.” 무릎을 꿇었던 레이죠 장로가 자신의 앞에 묵묵하게 서 있는 시안의 몸을 끌어 당겨 그의 품에 안았다. 레이죠 장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시안은 레이죠 장로의 귀에 속삭인다. “나는 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혹여, 원하시는데로 뜻을 이루지 못할지도 몰라요. 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 아저씨의 딸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은 해 드릴께요.” ‘그 이상의 희생따위 절대 필요 없게.’ “시안.” 까칠한 입술이 시안의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시안은 레이죠 장로의 품에서 벗어나자 마자 그대로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열려져 있는 마 차에 올라탔다.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시안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엘과 로운은 뒤늦 게 묘하게 가라 앉아있는 시안의 파장을 느끼고 서로의 얼굴을 돌아 보았다. 둘은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를 향해 싱긋하고 웃어보였다. “생각보다는 진지한 것 같지?” “그런 것 같아.” “다행이라고 해줘야 하나 이거.” “적어도 나쁜 족은 아닐까 생각해. 저런 마음 가짐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면.” “그렇겠지. 그럼 우리도 갈까?” 기엘과 로운은 각기 길게 늘어서 있는 장로들에게 차례로 예를 올리고 마차 옆에 준비 되어 있는 각자의 말에 올랐다. 기엘과 로운이 앞장을 서고 시안의 마차가 그 뒤를 이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름같이 몰려있던 사람들이 시안의 마차가 따라갈 백색의 길 양 옆으로 두 무리로 갈라져 그들의 여행을 축복하며 환송의 함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이틀이라구? 웃기고 있네. 이틀씩이나 이런 꼴로 앉아있는 것은 절대 질색이야.’ 시안은 마차 안에 앉아서 양 옆에서 굴러 들어오는 꽃송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아깝게시리 왜 꽃 같은 것을 던지 몰라. 암튼 여기나 내가 살던곳이나 사람들이 너무 생 각이 없단 말이야.’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시안은 그들을 환송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 서 천천히 궁을 벗어났다. 수도에 들어 올 때는 밖으로 얼굴도 못 내밀게 해서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수도의 정경이 마차의 창문을 통해 보였다. 온통 흰색 일색의 건물들과 흰색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틀이라고 해도 분명히 일박정도는 생각하고 잡은 일정일테니까.’ 시안은 계산을 해보았다. 이틀이라고 들었을때는 상당히 오래 걸린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중 간에 식사를 하는 시간과 잠을 자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이 미에이라라는 나라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결론. 그렇다면 먹는 것도 마차에서, 자는 것도 마차에서 해결하면 하루 정도면 국경까지 다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은 고개를 내밀어 조금 전 자신이 떠나온 성. 키리엔을 바라보았다. “좋아. 일단 수도만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내 세상이다!” 그때부터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서 빨리 빨리 가지고 하면 그만이다. 그 생각을 하자 지금까지 착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시안은 얼굴만면에 미소를 가득 띄우고 환송인파에게 화려한 미소를 뿌린다. “그래. 수도만 벗어나면 그것으로 쫑- 빠이빠이. 끝이라구.” 하지만 시안은 그 수도만 벗어나면 그것으로 쫑- 빠이 빠이가 얼마나 힘든 일이 될지는 전 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 “기엘~. 기에~~엘.” 시안은 달리는 마차의 창문으로 윗몸을 쭈욱- 빼고 앞서 달려가고 있는 기엘을 불렀다. 새까만 하늘에는 실같은 달이 정말 간신히 떠 있다. 쉬지도 않고 마차를 달린 그들은 1개의 소도시와 몇 개인지 모를 마을을 지나 이제 이름 모 를 작은 잡목림을 지나고 있었다. “어이~ 기엘!!” 앞뒤로, 때로는 양 옆으로 끊임없이, 쉴새없이 흔들리는 마차.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있는 시안의 머리카락위에 얹어진 머리장식들도 그 흔들림에 맞추어 끊 임없이 짤랑 짤랑 소리를 내고 있다. “아직도 멀었어요?” “피곤하신가요? 역시 쉬는 쪽이 좋을 것습니다만.” “아. 아니. 피곤하긴. 여긴 푹신 푹신한 쿠션들이 있어서 그럭 저럭 견딜만 한걸요. 그건 그 렇고 도대체 왜 가도 가도 끝이 안 나는 겁니까?” 기엘은 말로는 피곤하지 않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얼굴 전체에 ‘나 힘들어.’ ‘나 피곤 해.’라는 증거가 가득 드러나 있는 시안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사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일단 오늘밤은 저녁 시간이 되기 조금 전에 통과한 소도시 카얀 에서 하룻밤을 머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지금 저기서 ‘정말 죽을 것 같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시안의 방해로 완벽하게 틀어져 있었다. 시안의 방해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딱 하나. ‘최대한 빨리. 밥도 마차에서 먹고, 잠도 마차에서 잘 테니 최대한의 속도로 마차를 달려서 이틀로 내정되어 있는 미메이라의 여행예정을 하루로 줄일 것’ 이었다. 초반에 이런 시안의 말도 안 되는 요구는 당연히 로운에 의해서 ‘안 돼.’라는 한마디로 어떻게 수습되는 것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그런 한 마디로 참아 버릴 시안이 아니었다. 시안은 천천히 달리고 있는 마차에서 ‘그럼 나 혼자 갈 거야!!’ 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대 로 뛰어 내리는 엄청난 ‘만행!!’을 저지른 다음 긴 치맛자락을 들고 두다다다-하고 마차 와 말을 앞서 달려가는 엉뚱한 사고를 저질러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기가 막혀서 말을 달려 시안을 쫓아가 그녀를 안아 올린 로운은 ‘뭐 이런 녀석이 다 있 어.’ 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시안의 요구를 들어 주고 말았다. 덕택에 그들 일행은 원래의 계획과 일정을 초과 달성하고 있었다. “응? 얼마나 남은 거예요. 정말.” “아마도 새벽 녁에는 가이칸 제국과의 경계선이 되는 하마란 강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이 힘으시면 주무십시오. 아니면 다음으로 도착하는 마을에서 하룻밤….” “절대!! 절대!! 싫어!!” “예?” “절대로 쉬지 말고 가라구요. 절대로!! 마구 마차가 뭉게질때까지 달려도 좋으니까 일분이 라도 빨리 가줘요.” “알겠습니다. 시안님. 그럼.” 기엘은 알게 모르게 안타까운 얼굴을 잠시 했다가 곧 시안에게서 떠나 일행의 선두쪽으로 말을 몰았다. 따각 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엘이 다가오자 로운이 그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고는 물었다. “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냥 쉬지 말고 가라고.” “그런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인 거야?” “응? 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기엘은 손을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툭툭 쳐봤다. 두꺼운 가죽 장갑을 끼고 있어서인지 피부를 느낄 수는 없지만 일단은 이상은 없어 보인다. “표정 말이야. 표정.” “아. 아아아~.” 기엘은 그제서야 이해 했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시안님의 심정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좀 섭섭해서 말이야. 저분께는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곳이겠지만 나나 너한테는 그렇지 않잖아. 적어도 앞으로 몇 개 월은 못보게 될텐데 조금쯤은 천천히 좀 바보 같은 감상에라도 빠져줄 정도의 여유를 가질 수는 없는 건가 해서.” “못 보던 사이에 너 많이 애들 같이 졌구나.” “아. 하하하하. 뭐.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두지.” 기엘의 심정은 로운도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단지 로운은 조금 생각하는 방식이 틀릴 뿐이다. 섭섭하기는 마찬가지. 그다지 많은 애착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어쨌든 간에 자신이 태 어난 나라이고 언제이든 간에 돌아올 곳,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애국심과는 조금 다른, 그런 감정. “아무튼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저녀석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 참나. 마차랑 머리장식이랑 옷이 싫다고 우리 모두 밤을 꼬박 새게 할 줄 누가 알 았겠어.” “글세.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그러고보니 시안님 말야.” “응” “원래 남자애 였다고 했었지?” “그렇지.” “어떻게 생긴 얼굴이야? 원래의 얼굴은?” 기엘의 물음에 로운은 과연 지금 기엘이 한 질문의 의도는 무엇일지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 이 고민을 하며 대답을 미적거리고 있는 동안 기엘은 음험함이라고는 손톱 만큼도 없는 순 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건 왜?” “글세? 막상 계승로를 떠나오니, 궁금해져서 말이야.” “뭐. 이상하게 생겼어. 마치 저 가이칸 제국의 시골에서 갓 데려온 것 같았지. 까만 머리에 까만 눈동자에다가 약간 노란 피부.” “흐응….” 기엘이 머릿속으로 시안의 원래 얼굴을 그려보려는 순간 뒤쪽에서 다시 기엘을 목놓아 부르 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번에는 또 무슨 일 인 거야?” “역시 피곤해서 쉬시겠다고 하시는 걸 거야. 얼굴이 많이 피곤하신 듯 했어 아까.” “뭐? 정말이야?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야!!!! 하앗!!!” 로운은 기엘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머리를 돌려서 뒤쪽으로 뛰어 갔다. “하하. 저런 소리에는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말이야.” 여전히 천천히 앞쪽에 남아(?)있던 기엘은 그런 로운의 뒷 모습을 보면서 즐겁게 웃었다. 하지만 역시, 앞으로는 시안이 원하는 것을 모조리 다 들어주지는 말아야겠다고, 그는 그렇 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엘.” “예?” “기엘, 아직도 멀었어?” 기진 맥진한 목소리가 기엘의 이름을 불러온다. 기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도 애써 그 말에 대답한다. “이 조금 남았습니다. 괜찮으세요?” “안…괜찮아.” 시안은 미친 듯이 아래 위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야를 주체하지 못하고 기엘의 팔에 매달 려서 파들 파들 떨고 있다. 밤새도록 마차를 달려온 시안의 일행이 미메이라와 가이칸을 양분하는 거대한 대하 하마란 과 그 주위에 형성된 소도시 하란에 도착한 것은 바로 조금전의 일이 었다. 그곳에서 시안은 비로소 마차에서 내려와 그 길고 긴 치마와 장식들을 벗어던지고 편한 여 행자용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옷을 갈아 입은 시안은 쉬다가 떠나지 않겠냐는 로운과 기엘의 권유는 싹 무시하고 어제부 터 말해왔던 데로 바로 강을 건너자고 생떼를 썼다. 시안의 생떼에 결국 말려든 두 사람은 최소한도로 꾸려진 짐과 세 마리의 말과 함께 하마란 을 건너는 정기 연락선에 승선했다. 그리고 무사히 대하를 건너서 가이칸 제국의 영토에 발을 디딜 때 까지도 아무런 문제가 발 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시안이 미친 듯이 기엘의 이름을 불러대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기엘. 아직도 멀었어?” “이제 대충 괜찮아 질 때가 된 것 같기도 한데. 로운? 어때?” 기엘의 말에 로운이 힐끔 뒤를 돌아다 보았다. 뒤로는 하마란의 강줄기가 거의 실같이 되어 아주 약간 반짝일 뿐이다. 아직도 멀었어? 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적어도 그들을 환송한 사람들이 돌아갈때까지는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로운의 말 때문에 나온 소리다. “글세.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내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니 돌아갔던지 아니면 어디 엔가 들어가서 어제 못 잔 잠이라도 자는게 아닐까. 싶은데?” “정…말이지?” 로운의 말에 기엘의 팔에 매달려 있던 시안이 말꼬리를 잡아 대답했다. “그런데 도대체 그건 왜 자꾸 물어 보는 거야? 넌 눈이 없어? 네가 확인 하면 되잖아.” “기엘.” 로운의 비꼬는 듯한 말에도 시안은 반응하지 않았다. “예?” “손 놔.” “예??” 기엘이 물음표를 두 개나 찍어가며 말을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지금 시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배에서 내린 세사람은 원래는 각기 한 명씩 말에 탈 예정이었지만 시안이 말을 타지 못했기 때문에-당연한 것이 아닌가!! 시안은 말이라고는 영화나 tv에서 밖에 본일이 없는 대한민국 기본 코리아 스탠더드 KS마크의 일반 고등학생이었다-기엘과 한 말에 함께 올라탈 수 밖에 없었다. 말을 못타는 것은 둘째. 근 하루가 넘는 강행군 덕에 안색까지 파리해진 시안은 기엘이 지 금처럼 꽉- 잡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말에서 떨어져 버릴 정도인 것이다. 그런데 손을 놓으라니? “놔. 빨랑.” “저어. 시안님?” “놓으라면 빨랑 놓으란 말야!!!!” 버럭하고 시안이 화를 내는 순간 그녀가 화를 낼때면 의례히 그러듯이 거섹 바람이 슈욱 소 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불어 나왔다. 그 바람에 기엘은 깜짝 놀라 시안을 잡고 있던 손을 얼결에 놓아 버렸다. -우당탕탕탕탕 “시. 시안님!!!!” “이봐. 꼬마!!!!” 두 남자가 동시에 한 사람을 부른다. 하지만 불린 사람은 대답이 없이 그냥 바닥에 찰싹 개구리처럼 붙어 아무 말이 없다. “시안님 괜찮으십니까?” “거기서 손을 놓으면 어떻게 해 기엘!!” “시안님.” 두 사람은 황급히 말에서 뛰어 내려서 땅바닥에 화려한 소리와 함께 곤두박질친 시안에게 달려간다. “시안님?” “……파.” “예?” “뭐라구?” 철퍼덕 하고 떨어진 바람에 납작하게 퍼져있는 시안을 로운이 마치 부침개 뒤집듯이 뒤집었 다. “아파.” “어. 어디 다치셨습니까?” 기엘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아파. 무지. 굉장히. 머리 아프고, 목 아프고, 어깨 아프고, 팔 아프고, 손 아프고, 허리 아 프고 다리 아프고 엉덩이 살이 아파.” 숨도 쉬지 않고 대답을 하는 시안. 그런 시안을 두 사람은 멍-하게 바라본다. “…………” “…………”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겔겔 거리던 시안은 땅바닥에 퍼억-하고 떨어지자 마자 갑자기 기 가 살아서 나불 거리기 시작했다. 장시간의 마차여행과 겨우 몇분간의 승마에 시안은 넌덜머리가 났다. 마차여행도 만만치 않지만 말은 더욱 심했다. 아래위로 흔들리기 때문에 멀미는 기본. 거기 다가 허리랑 목이랑 머리랑 다리가 너무 아팠다. 특히. 다른데도 아니고 엉덩이가 아프다. “더럽게 아프단 말야!! 난 말 같은 것은 절대로 안타!! 죽어도 안타!! 하지만 마차는 더 안 타!! 내가 두 번다시 마차를 타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그리고 내가 두 번다시 말을 타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구!!” “하지만 시안님 말도 마차도 타시지 않겠다고 하지면….” “여하튼 안타!! 죽어도 안타!!! 그거 타면 나 여행 안 해!! 으아아아아아아아악!!!!!” “…………” “…………” “절대로!! 절대로 말이나 마차 두 번다시 타나 봐라!!!” “죽겠다고 하면서 입을 살았군 그래. 말도 안타고 마차도 안타면. 걸어서 갈 거냐?” 빈정대는 로운. 시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띠잉- 해졌다. 말도 안타고, 마차도 타지 않는 다면 남은 것은…. “여행 내내 걸어서 가겠다고? 삼개월이라고 한게 누구였더라.” “로. 로운.” 기엘은 두 사람사이에서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지금은 여자이긴 하지만 남아 일언 중천금 이 있다면 여아일언 억만금이라는 소리도 성립 가능, 이것은 이전에 큰 누나가 했던 말이다. 그러니 했던 말은 다시 취소 할수 없는 노릇!! “그. 그래도 말은 안타!!!!” “시안님.” “그래. 그래. 타지마라 타지마. 어차피 말이나 다른 운송수단을 이용 할수 있는 길 보다는 걸어서 가야 할길이 더 많으니. 뭐”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두 사람의 눈이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있는 시안에게로 향한다. “그래도 안 탄다니까!!!! 차라리 죽여!!!!” 시안의 고함소리에 길을 가던 사람들이 힐끗 힐끗 그들을 쳐다보며 지나간다. 로운은 말에서 내려서 시안에게로 다가가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지금은 죽어도 안 탈테니 어쩔 수 없지. 삼개월이 되든 일년이 되든. 어차피 떠난 길 아냐?” “그렇긴 하지.” 로운의 말에 기엘이 피식 웃으며 역시 말에서 내려왔다. 탄탄하게 펼쳐져 있는 대로. 그 대로 한 가운데에 시안은 퍼질러 앉아있다. 천천히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 올라 그들이 가야할 길을 비추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은 삼 개월만에 모든 소망을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진짜, 정말로 신만이 알 수 있겠지만 틀림없는 것은 그들이 보고 있는 넓은 길이 다름 아닌 고생길이라는 사실이다. (2권에서 계속) 아슈레이 2권 바람의 세나케인 Prologue 빛의 히오르와 어둠의 아타라세스간의 전쟁은 그 시작도 그 끝도 명확하게 구분되어지지 않 았다. 단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빛의 신 히오르와 어둠의 신 아타라세스간의 전쟁이 끝나고 세상에 빛과 어둠이 공존하기 시작한 이후에야 인간들의 세상이 왔다는 것 뿐이었 다. 신들의 전쟁이 끝나고 빛과 어둠이 공존하기 시작한 세상은 다시 새로운 신들의 시대로 접 어들었다. 아슈레이 대륙을 지탱해나가는 것은 바람과 불과 물과 땅의 4가지 원소의 힘. 새롭게 나타난 신들은 빛과 어둠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신 들로 아슈레이의 어둠과 빛에게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바람의 신 미메이라와 불의 신 호로스, 물의 나유 그리고 땅의 바라스는 빛과 어둠에서 태 어나 온 세상에 그들의 힘을 넓게 펼쳐나갔다. 새로운 신들의 세상은 싸움도 없었고 전쟁도 없는 평화의 시대. 그러나 이 평화의 시대가 계속 되고 또 계속되자 신들은 그만 그들이 다스리고 있던 인간 세상에 대한 애착을 잃어가 기 시작했다. 결국 4신들은 신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로움 속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인간들에게 세상을 넘겨주려 했다. 그러나 신들이 서서히 그들의 힘을 평화로운 아슈레이 대륙에서 거두어 들 이기 시작하자 아슈레이 대륙 곳곳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존해야만 하는 4개의 힘 중 제일 먼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물의 신 나유의 축복. 땅은 메말라가고 인간들은 아직 나유의 축복이 남아있는 거친 중간지대로 몰려들어 그곳을 차기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어지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4명의 주신을 섬기는 신관들. 그 들은 인간세상 즉, 아슈레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신이시여. 당신의 힘이 떠난 아슈레이 대륙은 더 이상 평화로운 땅이 되지 못합니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물의 신 나유의 신관, 그는 나유에게 그의 힘을 인간들을 위해 남겨달 라고 간곡히 청원하였다. 원망과 갈망과 희망이 뒤섞인 인간의 감정. 청원은 이어지고… 또 이어져 결국 바람과 불과 물과 땅의 신들은 인간들의 간곡한 청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신들의 시대는 끝이 났으나 그대들을 축복하리니 그대들 중 가장 뛰어난 자가 신의 은총 을 받으리라」 4 신들의 신탁을 받은 신관들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신탁을 따라 가장 능력이 뛰어난 네 사 람을 골라 신에게 바쳤다. 신들이 힘을 개방하자 그 강대한 힘은 실체를 가지고 또한 의자를 가진 자가 되었다. 신들 은 선택된 자들에게 의지를 가진 자들을 내리고 그들에게 마지막 신탁을 내렸다. 「의지를 가진 힘을 다스리는 것은 일족 중 가장 뛰어난 자에게만 허락될 것이니 그대들은 그 힘을 지속하고 유지시키되 그 힘에 귀속되지 말지니라.」 “그리고 신탁을 마친 신들은 모두 아슈레이의 중간지대에 잠들었다고 하지요.” “헤에….”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서 아슈레이의 신들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고 한 시안에게 기엘은 전승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를 설명해 주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때 의지를 가진 힘을 받은 자들이 바로 4개의 신국을 이룬 선조들이 되시는 겁 니다.” “그럼 그게 그 풍환인지 뭔지하는 그걸 말하는 건가요?” “예. 수장에게만 전해지는 그리고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에게만 전해지는 신의 힘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엘이 하는 이야기를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빛과 어둠의 신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슈레이의 창세신화가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기 시작한 평화로운 세상. 시안이 원래 살던 세상에도 비슷한 느낌의 신 화는 얼마든지 있다. 간단하게 기독교만 봐도 그렇다.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빛과 어둠을 창조하고 그리고 땅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궁금한 것이 하나 시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빛과 어둠의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 4신들이 만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라고 하 는데 그렇다면 빛과 어둠의 신들이 4신들보다 훨씬 윗줄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 시안 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빛의 신하고 어둠의 신의 신전은 없는 거죠? 그 신화 대로라면 바람이나 물이 나 불이나 땅의 신들보다 그 신들의 힘이 더 위라고 생각되는데.” “히오르와 아타라세스는 이미 뭐랄까…, 그러니까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신이나 마찬가 지 인 것입니다. 그들은 신의 권세를 버리고 본연의 모습 그대로 빛과 어둠이 되어 버린 것 이니까요.” “그럼 빛이나 어둠의 신관도 없는 건가?” “정확하게는 그렇습니다. 단. 빛과 어둠의 힘을 숭상하는 자들은 남아있지요. 히오르와 아 타라세스의 전승을 따라 그들을 숭상하고 그들의 힘을 빌어 EL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과는 조금 다르지만요. 그들은 통칭 마법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시안은 뚱하게 기엘의 말을 듣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법!! 마법이라고? 그럼 여기에도 마법이 존재한다는 건가?’ 판타지라고 하면 역시 마법에다가 마나에다가 용이 나와야 한다는 시안의 선입관은 사실 지 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럼 나도 그 마법이라는 거 익힐 수 있는 건가요?” 기엘은 설명을 듣다말고 시안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되물었다. “마법사가 되시고 싶으십니까?” “물론 가능하다면.” “불가능해.” 그때까지 아무말없이 옆에서 저녁거리를 준비하고 있던 로운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 어째서!!” “넌 미메이라의 축복을 받아 EL을 쓰는 바람술사다. 근본적으로 같을지는 몰라도 바람술 사가 쓰는 EL과 마법사들이 쓰는 EL은 틀려. 마법사는 바람술을 익힐 수가 없고 바람술사 는 마법을 익힐 수가 없지. 근본은 같아도 그것은 다른 힘이니까.” “에엑-.” 시안은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그럭 저럭 마법 비스무리한 바람술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사실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법사라는 단어가 주는 판타스틱한 매력을 포기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법사에 대한 것은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응? 그거야 내가 살던 데서.” ‘단지 이렇게 까지 의미가 다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시안은 속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마법사들이 쓰는 힘은 EL과 비슷한 속성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많이 다릅니다. 가이 칸으로 가시면 혹시 마법을 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실지도 모르죠. 그때 그들에게 물어보 세요. 궁금하시면.” “쓸데없는거 가르치지마 기엘.” 로운은 저녁식사를 차린 식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시위를 했다. “마법타령은 그 정도로 하고 이제 밥이나 먹지 그래? 넌 밥 안 주면 바람 뿜는 괴수가 되 잖아.” “너 말 다했어!!” “그래. 다했다. 먹보.” “에잇!! 빌어먹을 바보 신관!!” 또다시 말싸움으로 돌입하는 두 사람을 두고 기엘은 혼자 유유자적하게 로운이 차려놓은 저 녁식사 식탁 앞에 앉았다. “네녀석이 내가 바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 “척하면 삼천리다!!” “너 자꾸 이상한 말 쓸래?” “어차피 여긴 너하고 기엘밖에 없잖아. 어때!!”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싸움. 기엘은 그들을 보면서 그래도 둘은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는 말이다. 1. 자유도시 레카 아슈레이 대륙 동쪽의 기름진 평야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제국 가이칸. 가이칸은 초대 황제인 가이칸 아드리안 로체스 1세 때부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슈 레이 대륙의 여러나라 중에서도 400년동안 초 강대국으로써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나라다. 현 황제인 라이너드 7세는 평화를 사랑하고 문화 지향적인 정책을 펼쳤던 그의 아버지 라이 너드 6세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어 지금까지도 평화로운 시대를 계속 유지 시켜 나가고 있었 다. 그러나 라이너드 7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4명의 아들들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황자로 알려져 있던 로렌 황자가 얼마전 정식으로 황태자의 지위에 봉 해지면서부터는 평화스러웠던 가이칸 제국에 조금씩 전란을 예고하는 소문들이 돌기 시작하 고 있었다. 가이칸 제국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자유도시 레카는 기본적으로는 가이칸 제국령에 속 해 있기는 하지만 미메이라와 호로스, 그리고 셰비 통산 연합국의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 기 때문에 그다지 가이칸 제국의 색채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레카는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그 어느 중소도시보다도 정치적인 소문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레카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가지 각색이다. 자유도시라는 이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짐수레에 짐을 가득 실어서 운반하고 있는 상인들과 그 상인들의 경호원 역을 하고 있는 고용 용병들이 있고, 남루한 옷을 차려입은 여행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화려한 마차에 몸을 싣고 관광이라도 하러 온 듯한 귀족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소리를 바락 바락 지르고 있는 화려한 차림의 미소녀와 그의 일행이 바로 그 주 인공이었다. 주위에 걷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검은색이나 갈색등 어두운 머리색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 미소녀와 그녀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두명의 남자는 강한 햇빛을 그대로 반사시키며 화 려하게 반짝이는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이 부실 것 같은 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녀가 사실은 신국의 하나인 미메이라의 계승자 이며 그녀를 수행하고 있는 두 사람이 미메이라의 신관과 로열 나이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 면 아마도 더더욱 시선을 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그런 소문이 돌든 말든 상관이 없어서인지 레카 로 들어가는 커다란 대로에 접어 들고 있는 세 사람은 앞 서거니 뒷 서거니 하면서 걸어 가 고 있었다. “빨리 바꿔 줘.” “안 돼.” “바꿔달란 말야!! 약속했잖아!!” “안 돼.” “왜!!!”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약속지키란 말이야!!!” 시안은 주먹을 불끈 쥐고 로운에게 달려들었다. 로운이 그것을 가볍게 피하자 시안은 주먹 을 쥔채로 중심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 순간 기엘이 달려 들어 앞으로 쓰려지려는 시안을 부축했다. “조심하십시오. 시안님.” “놔!!!” 시안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전의 자신이라면 이정도의 공격이 빗나갔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지 는 않았다. 완력에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균 정도는 되는 운동 신경을 가 지고 있던 시안으로써는 자신의 지금 상태가 너무나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몸이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니라 그냥 겉모양이 바뀐 것 뿐이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 었지만 이상하게도 바뀐 몸은 시안의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기엘!!” “예. 시안님.” “기엘이 바꿔 줘요!” 가이칸 제국으로 접어든지 이제 이틀째, 시안은 국경을 건너와서 조금 정신을 차리기 시작 한 순간부터 ‘바꿔 줘’라는 단어를 벌써 수십번이나 한 차였다. 화려하고 묵직한 장식들은 그의 소원대로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것만으로 시안의 성에 찰 리 가 없었다. 시안이 원하는 것은 원래의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 미메이라만 벗어나면 원래의 경하의 몸으로 돌려주겠다고 했었기에 믿고 따라 나왔건만 그 당사자인 로운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코방귀를 뀔 뿐, 절대 시안을 경하로 돌려놓아 주지 않았다. “저는 불가능합니다. 시안님.” “어째서!!” 기엘은 안타까운 표정을 하며 시안을 바라보았다. “기본적으로 바람의 술이라는 것은 시술자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변환술을 걸은 것 이 로운이니 로운밖에는 원상태로 돌려 놓을 사람이 없지요.” “하지만 저 녀석은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잖아!! 미메이라에서 나왔는데 왜 안 된다는 거 야!!” 바락 바락 악을 쓰는 시안. 로운은 시안이 악을 쓰든 말든 들은 척도 안하고 저 멀리 앞장서서 걸어가는 중이다. “너무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시안님. 일단은 호로스에 먼저 들러야 하는데 만 일 지금 변환술을 풀게되면 다시 호로스에 들어가서 또 변환술로 몸을 바꾸셔야하지 않습니 까? 나름데로 그것도 번거롭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안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전에 처음 로운의 변 환술에 의해 몸이 변했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역시 한번 몸으로 체험한 고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싫은 것은 싫은 거야!!” 시안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탓에 열심히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대꾸를 해주고 있던 기엘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아무래도 몸이 여자다 보니까 반응도 조금쯤은 여성틱해진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 이다. “조잘 조잘 시끄럽게 떠들지마. 원래대로라면 벌써 레카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네 녀석 때문에 늦어지고 있다구.” “너무 그러지마. 로운.” 팽팽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로운과 시안의 저차원적인 신경전 사이에서 기엘 은 난처해 하고 있었다. 일단 미메이라를 벗어나면 그렇게나 빨리 여행을 가고 싶어 했던 시안이 조금쯤은 얌전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과녁을 벗어 나 저 멀리 산등성 넘어 사라져 오래다. 국경을 넘은 후부터 시안은 얌전해 지기는커녕 완전히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이 마구 거칠 게 굴었던 것이다. 말을 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 정도는 정말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이다. 기엘은 입을 한발이나 내밀고 투덜거리면서 걸어 가고 있는 시안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은 레카에서 하룻밤을 묵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여장을 꾸려서 호로 스로 출발하는 상인단에 어울려서 호로스로 가게 되니까 조금만 참으시면 될 것 같습니 다.” “상인단? 거기는 왜요?” “아무래도 상인단에는 경호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상인들에게 약간의 양해를 구하고 경 호원들인 용병들에게 수고료를 조금 지불하면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아! 알았다. 알았어. 그러고보니 옛날에 읽었던 소설에 그런 비슷한 것이 있었던 기억이 나는 군.” “소설에 말씀입니까? 재미있군요.” “뭐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거니까 뭐.” “거기.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빨리 따라와. 벌써 저녁때가 다 되어가는데 언제까지 늦장을 부릴 거야?” 로운을 끌고 가던 두 마리의 말고삐를 고쳐 쥐면서 뒤를 돌아다 보았다. “더 늦으면 레카에 들어가기 힘들어.” “그건 또 왜? “당연한 소리를 왜 자꾸 묻는 거냐? 그럼 너라면 정체도 모르는 여행자를 아무생각 없이 마구 통과시킬 것 같아? 귀찮으니까 앞으로는 입 좀 닥치고 있어.” 로운은 아주 귀찮다는 듯이 시안을 향해 말했다. 순간 시안의 머릿속에서 툭-하고 인내심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물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귀찮게 굴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 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묻는 것이 그렇게나 나 쁜 일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다. “모르니까 묻잖아!! 아저씨 얼굴! 너 정말 이렇게 나올래!!!” “뭘?” “왜 사사건건 트집을 잡냐구.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지 설마 내가 아저씨 얼굴을 물 먹이려 고 모른다고 하겠어? 웃기지마!” “모르면 입이나 다물고 있어. 그럼 알아서 할테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시안이 다시 불끈해서 주먹을 드는 순간, 기엘이 끼어들었다. 기엘은 시안의 손목을 한 손으로 잡고서 로운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로운. 이번에는 네가 잘 못한 거야. 시안님께 사과 드려.” “………….” 기엘은 로운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기엘이나 로운이나 두사람 모두 미메이라를 떠나 여행을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자기의 나라를 떠나서 다른 신국도 아닌 가이칸 제국에, 그것도 언제까지가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온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이것은 그냥 여기저기를 유람하여 다니는 여행도 아 니다. 미메이라의 존속이 걸려있는 중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여행인 것이다. 신경이 곤두서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쪽이 이상한 것이다. “로운.” 로운은 입을 꾹 다물고 기엘을 노려보고 있다. 사실 로운도 스스로 좀 말이 지나쳤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시안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단순하게 궁금해 하면서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주위 에 사람이 많은데다가 덤으로 그냥 얌전히 서 있어도 눈길을 모으는 시안이 자꾸 이것 저것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질문을 한다면 더더욱 의심스러운 일행으로 보일 것이라는 것이 로운의 생각이었다. “…미안하다.” 잠시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로운이 툭하고 사과의 말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곱게 들어도 사과처럼 들리지 않는 로운의 말에 시안이 다시 발끈하려는 순 간 기엘이 시안에게 말했다. “조금 궁금하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는 조금 삼가해주십 오. 궁금하신 것이나 알고 싶은 것이 생기시면 잘 기억해 두셨다가 나중에 저희끼리 있을 때 질문해 주세요. 그러면 로운도 잘 설명해 드릴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엘이 말하자 시안은 ‘그건 또 왜요?’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안님께서 여행을 하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 시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해 되십니까?” “알았어요.” 왠지 서슬이 퍼래 보이는 기엘의 얼굴을 보면서 시안은 조금 쪼그라 들었다. 항상 자신과 로운이 싸우면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말리느라고 전전긍긍했던 기엘이 이번에는 정색을 하 고 있는 것이다. 원래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서운 법. “그럼 조금 서둘도록 하지요. 로운이 말한 것처럼 더 늦으면 괜찮은 여관을 잡기 힘들 겁 니다.” 기엘은 말을 마치고 자신이 끌고 오던 말에 시안을 번쩍 들어 올려 태웠다. 그리고는 자신 도 훌쩍 말에 뛰어 올랐다. “로운.” 기엘의 하는 양을 보고 있던 로운 역시 자신이 끌고 가던 말 중 한필에 올라탔다. “제가 단단하게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조금 참으시구요. 멀 지 않은 거리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일행의 앞 멀리 자유도시 레카의 성문이 보인다. 날이 저물어져가면서 주위의 사람들도 발걸음을 서둘고 있었다. “그럼 출발합니다.” ◇◆◇ “우와. 진짜로 사람 많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는 처음 와보시죠?” ‘처음은 무슨 처음. 대학로나 명동에 비할바가 아니지. 이정도는.’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시안은 일단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뭐라고 말하던 간에 자신이 살던 곳의 이야기만 나오면 로운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미메이라보다는 많은 것 같네요.” “당연하죠. 아마도 미메이라 전 신민들을 합친 숫자만큼은 못되도 거의 버금가는 사람들이 지금 이 레카에서 북적이고 있는 것이니까요.” “헤에….” 시안은 커다란 뿔이 달린 소 두 마리가 끌고가는 커다란 짐마차를 보면서 신기해 했다. 그 짐마차가 그냥 평범한 짐마차라면 쳐다보지 않았겠지만 그 짐마차에는 난생 처음 보는 새들이 들어있는 새장이 가득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가시면 레카의 중심지로 가시게 됩니다. 일단 그 근처에 여관들이 많이 있다고 하니까 힘드시더라도 조금더 참아주세요.” “아아. 안 힘들어.”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자유도시 레카. 그 북적이는 가운데에서도 언제나 쉴새 없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은 역시 술을 파는 가게 일 것이다. 물론 술집이라고 해서 정말로 술 하나만을 파는 곳은 드물다. 특히 이 레카의 술집들은 대부분이 여관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식당이자 술집이자 또한 여 관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자유도시이기 때문에 다른 영주지와는 달리 약간의 세금만이 부과 된다. 그렇기에 무역이 성행하는 탓에 레카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아닌 상인들과 용병들과 여행자인 것이다. 숙박업이 번성할 수 밖에 없 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도 방이 없다고 하면 어쩌죠?” “글쎄요. 되도록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비록 서두르기는 했지만 로운의 예상처럼 뒤늦게 레카의 성문을 통과한 일행은 현재 여기저 기 오늘 하룻밤을 쉴 수 있는 여관을 찾기 위해서 시가지를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조금 전에 사람들이 정말 발도 디딜틈이 없이 들어 서있는 시장을 직통해온 시안은 거의 넌 더리를 내고 있었다. “정말 사람들 하나는 죽여 주게 많네. 명동 저리가라야. 젠장.”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어서 쉴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로운?” “적당한 여관을 찾다가는 잠도 못 잘 것 같군. 이거 어째야 할지….” “그래도 찾으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로운?” “어디든 좋으니까 빨리 좀 들어가자구. 이대로 한걸음만 더 걸으면 완전히 기절해 버릴거 야. 으윽.” 로운은 새파랗게 안색이 변해가는 시안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확실히 로운의 눈으로 봐도 시안이 지쳐있는 것이 보였다. 계속 걸어와서 피곤한테다가 아 주 잠깐이었지만 말까지 탄 후유증까지 겹쳐있는 상태. “저녀석만 괜찮다면 뭐 아무데라도 들어 갈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뭘!! 어디든 누워서 발뻗고 잘 수 만 있다면 나는 어디든 상관없어.” 부득 부득 우겨대는 시안을 보면서 기엘도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로운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까지도 로운과 기엘 두 사람 만이라면 아무생각 없이 들어 갈 수 있는 숙소는 많았다. 하지만 시안을 생각하면 경우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시안은 고개를 들고 여기 저기를 휘휘 둘러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 시안의 눈이 구석진 곳에 서 있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는 터빈같은 것으로 머리를 꽁꽁 감싸고 있었는데 시안과 마주친 그 눈동자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짙은 푸른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남자가 자신을 향해서 갑자기 씨익- 웃어 보이자 시안도 얼결에 씨익하고 웃음을 되돌 려 주었다. ‘우웃. 젠장. 얼결에 웃어 버렸잖아!!’ 시안은 황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으악!!” “조심해!!! 아가씨!! 죽고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으로 큰 짐을 든 남자가 스쳐지나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런. 위험하잖나. 이런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뒷걸음치던 시안의 등에 딱딱한 그 무엇인가가 터억하고 부딪혔다. 머리 위 하고도 한참 위에서 느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을 들고 가던 남자는 느끼한 목소리를 내는 남자쪽을 돌아보고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말고 움찔하더니 주춤거리면서 달려가 버렸다. “괜찮으신가요? 아름다운 아가씨?” 순간 두두둑-하고 닭살이 돋아 올랐다. 어깨를 커다란 손이 감싸고 있었다. “아. 그. 괜찮으니까 이 손 좀 놓아주시겠습니까?” “오오. 실례. 실례. 아름다운 아가씨.” 시안은 조금전 돋아 올랐던 소름이 전혀 꺼지지 않고 다시 맹렬하게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젠장 이 느끼한 인간은 뭐냐. 도대체.’ 그는 시안의 어깨를 놓고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시안이 몸을 돌려 확인한 남자는 조금전 자신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던 남자였다. “조심 하셔야지요. 레카에는 위험한 남자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느끼하기 그지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디 찾으시는 곳이라도 있으신지? 아니면 그냥 시간을 때우러 나오신 겁니까? 괜찮으시 다면 제가 좋은 곳을 안내하지요. 레카의 밤거리는 아주 훌륭하답니다.” 시안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떠벌 떠벌 지껄여 대었다. “이건 정말 아름다운 은발이군요.” 단단한 보호구로 감싸진 손이 쓰윽 다가와 시안의 머리카락을 집어올렸다. 순간 건강한 네게의 팔이 머리 뒤에서 쑤욱 내밀어져 시안의 몸을 거세게 당겼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아가씨에게 볼일이라도?” 기엘과 로운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시안님?” “오오.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건장한 체구의 로운이 시안의 앞을 가로막고 시안에게 수작을 걸던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거 뭔가 기분이 되게 묘하구만. 무슨 암행 공주라도 된 기분이야. 아. 맞다! 나 암행 공 주였지.’ 시안은 스스로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상당히 예쁜 미소녀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거기다가 더해서 멋진(?) 기사들이 보디가드를 해주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이제보니 굉장한 나이트를 거느린 아가씨셨군요. 실례했습니다.” 로운이 살벌한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앞에 있는 남자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유들유들 한 웃음을 웃어보이면서 허리에 손을 대고 인사를 해보였다. 남자가 사라지자 당연한 결과겠지만 로운이 그 살벌한 눈빛을 시안에게로 돌려 소리를 질렀 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거야!! 저따위 놈한테 걸려서!!!!” “한눈을 파시면 안됩니다. 시안님.” “눈 똑바로 뜨고 따라다녀야 할 것 아니야!!” “항상 주위를 살피시면서 경계를 하십시오. 이곳에는 위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엘과 로운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번갈아 시안에게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 잔소리를 잠시 들어주던 시안은 속에서 부글 부글 성질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 꼈다. ‘이. 잔소리꾼들이 정말….’ 원래부터 막내라서 잔소리를 잔뜩 듣고 자라기는 했지만, 반대로 막내기 때문에 잔소리 듣 는 것이 질색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또 하나. 앞에 있는 인간들은 하극상이 절대 통하지 않는 누나들이나 형도 아니다. “잠깐!!!” 시안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두 남자는 시안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나만 혼내고 있는데 말이야. 사실 당신들 하는 일이 뭔데!! 저런 개기름 줄줄 흐 르는 인간들내지는 위험한 인간들에게서 날 보호하는게 당신들 일 아냐!! 어디서 임무태만 을 해 놓고 되려 화를 내. 화를!! 일은 똑바로 해야할 것 아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자 이번에는 기엘과 로운 두 사람이 벙해졌다. “왜? 내 말이 틀렸어?” “…………” “…………” “당신들이 딴짓 안하고 내 옆에 잘 붙어 있었으면 저런 개같은 인간이 들러붙지도 않았을 거 아냐!! 일이나 똑바로 해!! 맨날 나한테 잔소리만 하지 말고!!” 시안은 오른손을 들어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두 남자에게 들어보이고는 팩하고 몸을 돌렸 다. 몸을 돌리자 마자 저 멀리에 ‘꽃사슴집’이라고 쓰여진 간판이 눈이 들어왔다. 틀림없이 여관으로 보이는 간판이였다. 시안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젠장. 화딱지나 죽겠네.’ 척척척, 뒤도 안 돌아 보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시안을 기엘과 로운 두 사람은 한방 얻어맞 았다는 표정으로 하고 바라보었다. 조금전, 눈을 똑바로 뜨고 일이나 똑바로해!!라고 시안이 소리친 것은 정말이지 두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실제 시안이 애꿎은 난봉꾼한테 걸린 것은 두 사람이 알맞은 숙소를 찾는답시고 시안에게는 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을 때 벌어진 사건이었다. 뭔가 머쓱해진 기분에 로운은 기엘에게 말했다. “한방 얻어맞았군.” “그러게나 말이야. 아무생각없는 분인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무생각 없는 것은 맞아. 아참. 집으로 돌아갈 궁리는 하고 있기는 있지만.” 로운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어디에선가는 지금까지 조금은 장난스럽게, 아니 조금쯤은 가볍게 시안 을 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은 내게 주어진 일을 똑바로 해야하겠지.’ “그건 그렇고, 시안님 원하시는대로 원래의 모습으로 잠깐만이라도 돌려놓으면 어떨까?” “그건 왜?” “뭐. 특별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 모습대로라면 역시 위험이 더 많겠다 싶어서.” 그러면서 기엘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시안의 뒷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리 보아도 무방비 상태라구. 거기다가 금상첨화로 외모까지 지나치게 화려해. 보라구. 지나가던 남자들이 전부 한번씩은 돌아보잖아.” 그말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실제 시안이 화려한 백금발을 휘날리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은 어두워지고 있는 레카의 거리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아아.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얼른 시안님을 따라가자구. 또 한발 늦었다가는 같은 소리를 듣게 될거야.” 기엘은 손에 쥐고 있는 말 고삐를 당겨 잡았다. 길고 긴 하루가 끝나려 하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꽃사슴집’의 1층 식당에서는 지금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 반짝이는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하늘거리며 아름답게 생긴 소녀가 뛰어 들어왔들 때, 이미 이 이름도 휘양찬란(?)한 꽃사슴집에서는 한바탕의 난리가 치루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식당 안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과, 여기저기 흩 어져 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세 사람이 둘러서 저녁을 먹고 있는 테이블만 뚫 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스튜라고 했지?” “예. 시안님.” “여기~ 아줌마. 스튜 한 그릇 더!!” “네. 곧 갑니다~.” “으흐. 역시 이 맛이군. 크흐. 좋~다.” 시안은 커다란 그릇 가득 담겨 있던 매운 맛의 스튜를 열심히 먹어치우고 바닥에 남아있던 마지막 국물을 떠서 입안으로 넣는 중이었다. 온통 달디 단맛으로 점철 되어있던 미메이라의 궁정 음식과는 달리 이곳의 음식은 약간의 단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럭 저럭 시안의 입맛에 맞을 정도로 간이 잘 맞아 있었다. 게다가 빵이나 야채같은 것이 주요리였던 미메이라와는 달리 이곳은 딱 잘라 말해서 돼지고 기 통구이, 송아지 통구이, 오리 통구이등등등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돌 것만 같은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재까지 시안이 먹어치운 음식은 로운과 기엘이 먹은 것의 1.5배쯤. 가느다란 시안의 팔 옆에는 지금까지 시안이 먹어 치운 음식의 빈 그릇과 굵직 굵직한 뼈다 귀가 잔뜩 쌓아 올려져 있었다. “저. 여기 스튜 한 그릇 더 시키신분?” “저요!! 저요 아줌마.” 달칵하고 식탁에 놓여진 먹음직스러운 붉은 색의 돼지고기 스튜. “~으흐. 맛있다. 역시 이맛이야.” 마치 3일이라도 굶은 사람처럼 아구아구 먹어대는 시안을 보면서 기엘과 로운은 차마 말리 지도 못한채 그냥 시안이 벌컥 벌컥 맥주를 들이키면서 앞에 놓인 음식들을 처치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기. 기엘. 나 모듬 훈제고기 한 접시 더 먹으면 안돼요?” “그러고도 더 먹겠다구?” “말리지마. 개도 먹을 때는 안 건드리는 법이야. 응? 기~엘.” 시안은 지금 자신이 애교를 떨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엘을 향해서 예쁘게 미소 를 지어보였다. 순간 기엘 뿐만이 아니라 식당안에서 맴돌고 있던 소음들이 순식간에 뚝-하고 끊어졌다. 시안이 뿜어내는 그 엄청난 귀여움과 애교와 기타등등에 모두 얼어 붙어 버린 것이다. “응? 응? 기에~엘.” “……………” 로운은 할말을 잃은 기엘을 대신해서 손을 들어서 사람을 불렀다. “여기….” “네?” “훈제고기 모듬 한 접시 더 부탁드립니다.” “우왓! 아저씨 얼굴 맘에 들었어!!” 시안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다시 스튜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일단은 먹이고 봐야겠지. 잔뜩 먹으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을 테니.’ 로운은 아득해지는 머리를 감싸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드시고도?” “뭐 어때? 내가 원래 있었던 곳에서는 친구들하고 둘러 앉아서 뒷산에서 돼지고기 삼겹살 을 3명이서 10근은 거뜬하게 먹어 치웠다구. 아. 여기서는 한근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네. 삼겹살을 먹는지 안 먹는지도 모르겠고.” “그런가요?” “뭐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는 것은 나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적당히 먹어둬. 괜시리 탈이 라도 나면 고생하는 거는 너니까.” “걱정하지마. 내 위는 튼튼한데다가 정확해서 더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땡! 하고 신호 가 오거든.”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시안은 열심히 먹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출발해야할테니까. 식사를 마치면 곧장 위로 올라가서 쉬 어.” “알아. 아까. 기엘한테 들었으니까. 잔소리 좀 하지 말라고. 무슨 남자가 그렇게 꼬치 꼬치 잔소리가 많……어?” 시안은 즐겁게 스튜를 퍼먹다 말고 우뚝 움직이던 수저를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시안님?” 두 사람과 마주 앉아있는 시안의 눈에 장신의 남자 하나가 자신을 쳐다고 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시안이 꼼짝도 하지 않자 기엘과 로운도 천천히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들의 뒤에는 기사로 보이는 남자 하나와 군인처럼 보이는 몇사람이 주루룩 서 있었다. “이 사람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오늘 오후에 성문을 통과했습니다.” “흐음….” 로운은 그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시안 일행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레카의 수비대장과 그 대원들이 꽃사슴집으로 들어와 시안일행에 다가가는 것을 보고 숨을 죽였다. 잠시 시안 일행들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남자는 대뜸 로운에게 물었다. “당신들 모두 엘러(ELLER)인가?” 기사의 말에 갑작스럽게 식당안이 술렁 거렸다. 기엘이 일어서려고 하자 로운은 팔을 내밀어 그를 저지했다. 그리고 똑바로 눈을 뜨고 상대 방을 쳐다보았다. “실례지만 질문을 하시기 전에 당신이 누구신지부터 밝혀주시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생각 합니다만?” 로운의 딱딱한 대답에 그 기사는 흥-하는 콧방귀를 끼더니 팔장을 끼고 건들거리며 대답했 다. “레카의 수비대 백인대장 쟝 로스다. 그리고 이쪽은 내 부하들.” “무슨 일이신지요? 저희는 단순한 여행자 입니다만?” “머리색을 보아하니 미메이라 출신인 것 같은데 말이야.”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사람을 보면서 시안은 일단 목구멍을 넘어가던 국물을 꿀꺽 삼키 고는 소근 거리며 기엘에게 물었다. “기엘. 왜 저러는 거죠?” “글쎄요. 저도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자유도시라고 하면서 수비대 같은 것도 있는 건가?” “일단은 자유도시라고 해도 이곳은 가이칸 제국령이니까요.” 로스는 소근 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대로 말을 이었다. “단순한 여행자라…. 뭐 그렇다고 해두지. 하지만 세 사람 다 일단은 짐을 꾸려서 나를 따 라 오도록.” “무슨 이유에서 저희들을 오라가라 하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이유는 다른 곳에 가서 들으면 되는 법. 라콘. 메이. 세사람을 연행하도록.” 그리고 로스는 그대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잠깐! 여기는 자유도시 아닙니까? 이유도 없이 여행자들을 연행하려고 하다니, 이런 불합 리한 일에는 절대…….” “아아. 좋아. 좋아.” 로운이 정색을 하고 말을 하자 뒤돌아 서려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일단 자네.” 그는 손가락으로 로운을 가르켜보였다. “다시 한번 묻지. 자네는 엘러인가?” “엘러라는 단어가 내가 아는 대로라면 그렇소.” “좋아. 그럼 일단 자네만 따라오도록. 기왕이면 당신 일행들을 모두 데려가야 하겠지만 일 단은 자네로 족하니까.” “로운!” “좋습니다. 일단은 이유를 알아야 할테니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대신 제 일행에게는 아무 위해가 없을 것을 보장해 주셔야겠습니다.” “그 정도는 기본이지. 단. 이쪽이 이곳에서 한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당신 목숨은 보장할 수 없어.” “로운. 잠깐….” 기엘은 로운을 불러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 “글세? 이전에 이곳에 한번 왔을때는 아무일 없었는데. 나도 영문을 모르겠어. 뭐 일단 좀 강제적이긴 하지만 크게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어. 너는 저 녀석하고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조심하고 있고. 나는 되도록 이면 빨리 돌아올테니까.” 로운의 말에 기엘은 살짝 로스의 얼굴을 살피면서 말했다. “대뜸 엘러냐고 묻는 것이 제일 수상해. 혹시 모르니까….” “물론. 숨기는 것은 신관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니까 걱정하지마.” “그래. 그럼 조심하고.” “알았어.” 로운은 말을 마치고 나서 의자에 걸쳐 놓았던 자신의 장검을 집어 들었다. 그가 검을 집어 드는 것을 보자 로스가 피식거리면서 말했다. “이봐. 시장관사에서는 개인 무기 소지는 금지라구.” -철컹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전 단지 친구에게 맡기려는 것 뿐이니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 니다.” 로운은 집어 들었던 검을 기엘에게 맡기면서 다시 한번 소리 죽여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이곳을 떠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기다리지.” 기엘의 말에 로운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이내 싱긋 웃어보였다. “그럼 다녀오지. 꼬마.” “어? 밥은?” “네 녀석이 다 먹어도 좋아.” “오옷!! 왠일이야.” 와아-하면서 자신이 남긴 그릇으로 뛰어드는 시안을 보면서 로운은 뭐라 할 수 없는 한숨 을 내쉬고는 그대로 로스의 뒤를 따랐다. 로스와 로운이 사라지자 잠시 긴장감이 감돌았던 식당 안은 곧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묵묵하게 로운이 남긴 음식을 헤치우던 시안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기 엘에게 물었다. “기엘. 엘러가 뭐예요? 로운보고 그렇게 묻던데.” “……………” “기엘?” “…예? 아. 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는지.” “엘러가 뭐냐니까요.” 시안은 수저를 입에 물고 기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기엘은 그런 시안을 보고 잠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음 로운이 건내준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은 위로 올라가도록 하죠. 시안님. 올라가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시안도 입에 물었던 수저를 아쉽다는 듯이 내려 놓았다. “모든 것은 나중에 물어라…라는 건가? 여하튼 까다롭다니까.” ◇◆◇ “어디 출신인가?” “보시는 데롭니다.” 로운은 대뜸 반말지껄이로 나오는 남자를 쳐다보면서 불쾌한 심정을 숨기지도 않은채 대답 했다. “아니아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좋아.” ‘정체도 밝히지 않은 채 사람을 오라가라하는 인간을 어떻게 경계하지 않을 수가 있겠 어?’ 아무리 다른 나라와 담을 쌓고 있는 신국이라고 해도 적어도 정보를 수집하는데까지 박할정 도의 쇄국정책을 강행하는 것은 아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미메이라의 스파이-스파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들이 수집한 정보들은 언제나 일정하게 궁으로 정리되어 보고된다. 특히 수장이 교체되는 시기가 되면 궁내 정보부는 더더욱 활발하게 움직인다. 적어도 수장 계승자가 여행을 해야하는 곳에 대한 정보만큼은 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수집되어 정리되 는 법. 로운은 지금 머릿속에서 얼마 전에 검토해 두었던 자유도시 레카에 대한 서류를 떠올리고 있었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안전하지도 않은 곳이 바로 자유도리 레카다. 현재 자신의 앞에서 삐딱한 태도로 알짱거리고 있는 남자가 보고서에 있는 자유도시의 시장 이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기억해낼 수 있었다. 원래 레카의 시장은 올해 나이 70이 넘는 초로의 남자. 하지만 앞에 있는 남자는 이제 40이 되었을까 말까한 남자다. “미메이라 인들은 상당히 드문데… 재미있는 일이군.”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만 일행에게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아니. 나는 좀더 댁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어떤가?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는 것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식사까지 하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로운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런 로운의 반응에 남자는 작게 혀를 차더니 태도를 약간 바꾸었다. “이런 실례를 했군요. 저는 메로스라고 합니다. 일단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정도군 요. 다른 것은 차차 말씀을 드리기로 하지요. 거기 밖에 누가 있나.” 메로스는 사람을 불러서 저녁 식사를 하겠다는 명령을 내리고는 다시 로운을 쳐다보았다.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상당히 기분 나쁜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로운을 보면서 그는 속으로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완전히 ‘나는 미메이라 인입니다.’하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 생각보다 억양이 그리 특이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앞에 있는 남자 에게서 이런 저런 정보를 캐낼까 고심했다. 메로스는 나름대로 자신이 부임지를 잘 선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음 명령이 떨어졌을 때는 상당히 당황을 했었다. 수도에서 근무를 하다가 수도를 떠나게 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좌천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 하지만 그가 받은 임무는 비록 모양새는 좌천일지는 몰라도 기밀중의 기밀에 속했기 때문에 기꺼이 명령에 따랐던 그였다. 그가 받은 임무는 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엘러를 찾는 일이다. 그는 수도를 떠나오기 전에 만났던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흥미로운 것이 생겼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지배자라는 풍미가 풍겨 나오는 인물. 그는 얼마 전에 정통 계승자였던 일황자를 젖히고 황태자로 봉해진 로렌황자였다. 로렌 황자는 자신을 따르는 몇몇 젊은 기사들을 모아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 고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전하께서는 여러 가지에 흥미를 가지고 계시니 저희로써는 어떤 것을 지칭하시는 것인 지….” 앉아있던 남자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로레 왕자는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재미있는 인물이라고 하는 쪽이 더 맞 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황태자로 봉해지기 전부터 주위의 세력들을 포섭해왔다. 황제 라이너드 7세의 평화주의에 질려 있던 몇몇 신흥 귀족들은 자진해서 로렌 황자의 휘하 로 들어섰고, 로렌황자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결과는 삼황자였던 로렌황자가 위의 정통 계승자를 젖히고 황태자로 봉해지는 것으 로 나타났다. 위의 황자들과는 나이차이가 좀 많이 나는 로렌황자는 그 젊음과 패기로 궁정기사단의 전격 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실제 지금 사석에 모여 앉아있는 남자들은 대부분 궁정 기사단 소 속의 젊은 기사들이었다. “뭐 궁에도 몇 명 있기는 하지만 엘러…라고 들어 봤나?” “신국인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꼭 신국인들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일단 신국인들은 모두 타고난 엘러라고 하니 틀린 말 은 아니겠지.”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엘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지요. 제국에는 엘러들보다 뛰어 난 마법사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물론 마법사들은 많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엘러보다는 훨씬 수가 적다고. 생각해보 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제국내에도 엘러로서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이 된다고 하더군. 하물며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엘러인 신국을 생각해보게. 앞 뒤로 재지 않아도 4신국의 전력은 우리 생각보다는 훨씬 뛰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로렌 황태자는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우연히 알게된 엘러라는 존재는 그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 하고도 남았다. 궁에 소속되어 있는 엘러들을 비밀리에 만나본 그는 엘러라는 존재가 그가 꼭 필요로 하고 있는 능력을 가 지고 있다고 결론지은지 오래였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엘러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네.” “예?” “지금은 내가 황태자가 되었다고 해도 위의 두 형님들이나 아래 동생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거야. 아버님, 아니 폐하도 마찬가지지. 기력이 쇠해지셨다고는 해도 아직 제국의 주인 은 아버님이니까.” 로렌은 그동안 자신이 생각해 왔던 바를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대가 필요해. 겉으로 봐서는 그냥 조용조용해 보이고 얌전해 보 일지 몰라도 한명 한명이 일당 백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엘러인들로 구성된 부대. 어때? 괜 찮지 않나.” 눈을 빛내며 말하고 있는 황태자를 바라보는 눈들은 그런 황태자의 태도가 달갑지 만은 않 았다. 물론 그의 의도를 곡해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중의 태반이 궁정기사단 소속인 만 큼 또다른 황태자 직속의 부대가 필요하다는 발언은 조금쯤은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없는 의 견이었다. “아니. 자네들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닐세. 기사에게는 기사에게 알맞은 지위와 능력과 임무가 있는 것처럼, 그림자 부대에는 또 그에 알맞은 능력과 임무가 부여 되는거지.” 로렌 황태자는 그때까지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제국 어딘가에 있을 엘러들을 모아줬으면 좋겠네. 자네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거야. 제국내에서 여행하고 있는 신국인들도 상관없어. 자질만 있다면 그리고 출세하고 싶 은 신국인들이 있다면 그들도 적극 수용하고 싶네.” 메로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던 로렌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앞에 앉아있는 로운 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엘러라고 하는 존재는 대단히 특이한 존재다. 원래 신국인들은 좀처럼 타국으로 여행을 떠나지도, 그렇다고 해서 타국으로 이주도 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미메이라는 호로스처럼 극단적인 쇄국 정책을 펼치는 나라는 아니지만 이상하 리만큼 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민족이다. 다른 3개의 신국인들은 드물기는 하지만 때때로 제 국내 여기 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미메이라 인이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물론, 어떤 남자인지도 모르는, 실제로 그저 펑범한 미메이라 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눈앞 의 남자는 자신의 눈으로 판단해도 순수한 미메이라인 그것도 꽤나 좋은 혈통을 타고난 남 자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며칠 전에 놓친 그 놈보다도 훨씬 괜찮아.’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메로스님.” 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저와 함께 느긋하게 식사나 하실까요?” “그러니까 엘러가 바람술사가 화염술사같은 사람들을 총칭하는 제국어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시안님.” 시안은 곰곰이 머릿속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보다는 훨씬 바람술사라는 존재가 조금쯤은 더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던 시안은 갑작스럽게 머리를 스치는 의문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전부터 그 뭐더라? 아슈레이의 신화를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 는데요.” “뭐가 또 궁금하십니까?” “그러니까 그 제 몸에 풍옥이라는 것이 들어와있잖아요?” “그렇지요.” “그리고 내가 수장 계승자가 되자마자 미메이라의 바람이 다시 원래대로 불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건 내가 풍옥을 받아 들여서 아슈레이 대륙에 흐르고 있는 그 바람의 신의 힘이 균형을 되찾았기 때문이라는 소리가 되죠?” “물론입니다. 시안님이 안 계셨다라면 큰일이 났었겠죠.” 시안은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는 기엘을 보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했다. “그럼 내 몸이 그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매개체가 되어 있다는 건데, 내가 이렇게 미메 이라를 떠나서 아무데다 나돌아 다녀도 되는건가요? 그거 문제 있는거 아니예요?” 사실이 그랬다. 시안 본인의 몸이 매개체고 자신이 존재함으로 인해서 힘의 균형이 이루어 진 것이라면 자신은 궁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시안의 생각이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엘은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시안에게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시안의 몸이 힘의 균형을 위한 매개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안이, 그리고 역대 수장들이 궁에서 단 한발자국도 못 움직였던 것은 아니 다. 꼭 물리학적으로 설명 할 필요도 없이 기엘은 간단하게 결론지어 말했다. “수장계승자, 또는 수장은 신에게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시안님의 몸 속에 들어 있는 풍옥 은 미메이라의 의지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증표 같은 것이지요. 신의 약속이 아직도 이행되 고 있다라고 하는….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시안님께서 이렇게 제국을 여행하실 수도 있는 것이구요.” “흐응.” 나름대로는 꽤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간단하게 설명되자 시안은 그만 김이 빠져 버렸다. “그런데 로운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글쎄요. 저도 걱정이 되는 군요.” 로운이 식사를 하다말고 그 정체 불명의 남자와 함께 사라진 것이 벌써 한참이다. 식사를 할 때 만해도 어둑어둑했던 창밖은 이제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합니다만.” 말을 그렇게 했지만 기엘은 내심 속으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과거 미메이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도 자신의 은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수근 거리던 사람들이 있었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당신들 엘러인가?’라고 묻 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기엘의 마음속에는 일찍이 느낄 수 없었던 불안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미안. 늦었어.” “로운!” “앗! 아저씨 얼굴!!” 찌릿- 불같은 로운의 눈빛이 시안에게 쏘아졌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푸하하하핫.” “이상한 소리는 좀 하지 말라고 했지. 남은 고생하고 돌아오는데 그런 소리 지껄이지 말 아.” 로운은 터덜 터덜 걸어와서 침대위에 벌렁 들어누워 버렸다. 그러자 기엘이 다가와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되고 자시고. 짐싸. 내일 새벽이 아니라 오늘 밤에 출발 해야 할 것 같아.” “응?” 기엘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쉿---.” 로운은 대답을 하려다 말고 오른손 검지를 들어서 조용하라는 신호를 했다. “로운 디 로크레슈. 쉴드, 바헬.” 낮은 목소리로 로운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헬 주문?” “미행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단 이렇게 해두면 소리는 못 듣겠지.” 로운은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한숨을 쉬었다. 저 멀리에서 짜증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장관사라는데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그게 당췌 넘어가야지. 바늘 방석에 앉아있다 온 기분이야. 피곤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 기엘의 궁금하다 못해서 안달이 난 표정을 보더니 로운이 설명을 했다. 메로스라고 단순하게 이름만을 밝힌 남자는 식사하는 내내 로운에게 이런 저런 것들을 돌려 가며 질문했다. 처음에는 왠 바람 빠지는 질문만을 하는가 의심했던 로운은 메로스라고 하는 남자가 교묘하 게 말을 돌려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금세 깨닫고는 대 뜸 대답을 했었다. 자신은 단순하게 세상구경을 하고 싶어하는 아가씨(?)를 모시고 여행하는 수행원일 뿐이라 고 말이다. 그리고 곧 미메이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메로스의 표정이 눈에 띄지 않게 굳었다가 순식간에 풀리는 것을 보면서 로운은 몸을 사렸던 것이다. “그것 뿐?” “일단은.” 상대방이 속을 내보이지 않는 이상, 그리고 로운이 독심술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은 더 이상의 정보를 캐내기는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말 뭐라고 말하기 그렇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랑 나 그리고 저기 저 꼬마까지 더불어서 이곳에 눌러 앉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 “뭐라고?” 빙빙 돌려서 이야기를 하는 메로스에게서 로운이 건진 것이라고는 단 하나. 그가 말은 빙빙 돌려서 하고 있지만 어쩐지 그에게서는 어떤 음모의 냄새가 났던 것이다. “내가 아가씨를 모시고 여행하고 있다고 하니까 은그슬쩍 저녀석의 신분을 궁금해하더라 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스러워.” “그래서 대답했어? 아저씨 얼굴?” “누굴 바보로 아냐? 이 꼬마. 멍청이 앉아있지 말고 짐이나 싸.” “그래!! 임마 바보로 안다!!” 시안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침대 위에 던져 놓았던 짐을 집어 들었다. “젠장. 좀 쉬나 했더니 사고 치고 들어와서는 야반도주나 하자고 하고. 쳇!!” 투덜거리는 시안의 소리를 듣고 불끈하려는 로운을 기엘이 얼른 다가가서 말렸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일단 자신들이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대뜸 며칠 이곳에서 쉬면서 삼일 후에 열리는 시장 생일 파티 에 참가하라는 소리까지 하더라고.” “뭐. 그곳에는 얼굴 내밀 이유는 없잖아?” “맞아. 짐 다 쌌어?” “쌀 것 도 없어. 풀지도 않았으니까.” 기엘 역시 자신의 짐을 챙겨 들고는 로운에게 그의 검을 던져 주었다. “말을 했으면 시간을 아껴야지. 출발하자. 쉴드 풀어.” “알았어.” “잠깐!! 잠깐 기다려 보라구요. 그러니까 도대체 왜 도망을 치느냐구. 물론, 우리들한테 딴 지를 걸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대로 무작정 도망치면 더 의심을 품을 것 같은데….” 시안의 생각은 실제로 그랬다. 아직 뭐라고 정말 특별하게 말한 것 같지도 않은데, 지레 짐 작으로 줄행랑을 치려고 하는 두 사람이 시안의 마음에는 탐탁지 않았다. 실제 아무리 생각해도 시안은 구류를 당할정도로 잘못한 것도 없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없으면 당당하게 행동 할 것, 그것이 시안의 생각이었다. “이봐. 꼬마. 한번만 말할테니 잘 들어. 너는 자각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적어도 넌, 당분간은 미메이라의 하나밖에 없는 수장 계승자다. 지금 네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이 대륙 전체가 위험할 수도 있어. 조금이라도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무조건 피할거다. 설사. 그것이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말이야. 알아들었어?” 강렬한 로운의 눈빛에 시안은 그만 쫄아 들고 말았다. 로운은 시안이 대답을 하던 말든 상 관하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로운이 낮은 목소리로 주문 해제를 하자마자 멈추어 있던 공기의 흐름이 다시 자연스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기엘-.” 로운이 낮은 목소리로 기엘의 이름을 부르자 기엘은 그대로 눈을 감고 신경을 집중했다. 특별하게 어떤 것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지 않아도 로운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기엘은 신경을 집중한 후 자신의 엘을 실날처럼 가늘게 해서 주위로 퍼뜨렸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흘러가던 엘의 가닥 중 몇 개가 장애물에 부딪혀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뒷문에는 사람이 있고. 차라리 창문으로 나가는 쪽이 좋을 것 같아. 경비병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오고 있는데 잠시후면 도착할 꺼야.” “그럼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줄행랑을 쳐야겠군.” 로운은 벌떡 일어나 허리에 자신의 검-라이트를 단단하게 고정시킨후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들이 빌린 숙소는 3층이다. 잠시 허리를 내밀고 밖을 살피던 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엘이 먼저 창틀 위로 올라갔다. “시안님 이쪽으로….” “에엑!! 정말 여기서 뛰어 내리는 거야?” 시안은 깜짝 놀라서 움찔 거렸다. 창문으로 나간다고 하기는 했지만 준비조차 없이 뛰어 내 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적어도 침대 시트라도 찢어서 밧줄을 만들 줄 알았다고 해야할까? “물론. 뛰어 내리는 겁니다.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시안이 머뭇거리자 로운이 저벅 저벅 걸어와 시안을 뻔쩍 안아 올렸다. “젠장. 바람술이라도 좀 가르쳐 둘걸. 귀찮아.” “시끄러!! 네가 언제 가르쳐 주기나 했어?” “입다 물어!” 윽박지르는 로운의 표정이 못내 심각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고 시안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 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여하튼 문제가 있다는 것 만큼은 자신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운에게 시안을 받아든 기엘은 시안을 단단히 안고서 속삭였다. “꼭 붙드십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안은 자신의 몸이 공중에 부웅 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안의 눈에는 언젠가 시안이 잔뜩 만들어 보였던 엘의 힘을 받은 바람의 투명한 가락이 한 가득 들어 왔다. 투명하고 하늘 하늘한 그것은 시안과 시안을 안고 있는 기엘의 몸을 감싸서 그들이 3층 높 이에서 급속도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공기가 흐르는 것처럼 시안의 눈에 들어오는 전경은 천천히 아래서 위로 흘러갔다. 잠시 후 시안은 안전하게 땅에 발을 디뎠다. 고개를 돌리자 시안의 눈에는 로운이 마치 슬 로우 모션으로 활강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바람과 함께 땅에 착지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거. 생각보다 쓸모가 많네.” “예?” “아. 그 바람술 말이예요.” 시안이 멍하게 로운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 기엘이 시안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이쪽입니다.” 로운이 한 발 먼저 앞장서면 기엘이 시안을 앞세우고는 뒤를 돌아다보며 따라왔다. 꽤 늦은 시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사람들이 넘치는 레카의 거리에는 여기저기 술 주정뱅이 들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 사이를 세명의 일행은 조용하게 빠져나갔다. “뭐라고?” “창문으로 도주한 듯 싶습니다. 경비대장의 말에 의하면 이미 도착 전에….” “그게 무슨 소리야?” “인원 보충이 되기 직전에 도주한 것 같습니다.” “젠장할. 미행하던 녀석은 뭐했고, 잠복하던 녀석들은 다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죄송합니다. 설마 3층이나 되는 창문으로 도주 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그만.” “그걸 말이라고 하나!! 발 달리고 눈 달리고 팔 달린 사람들인데 3층이라고 도주를 못 해?” “하지만 그 창문에는 밧줄 같은 것도 없고….” “그 따위야 내려온 다음에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 거잖나!! 성문이나 봉쇄하고 사람들 풀어!!”“ “이미 경비대장이 손을 썼습니다.” 메로스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 팽기치면서 화를 냈다. 그렇게나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했었다. 연행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여 관에 발을 묵어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눈치를 채고 도주를 하나!!” “그게 저희로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뭐 훤하게 궤뚫어 보기 전에는 불가능 한 것인 데….” “젠장. 엘러들한테 그런 능력까지 있을 줄이야. 오산이야. 오산.” 메로스는 혀를 찼다. 훈련된 사람들이라면 주위에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눈치 챌 수도 있다. 자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로운이라는 남자는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조금쯤은 어긋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범인들은 모두 머리카락 색이 특이하다. 모두 은발이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일행들은 무 조건 검문해. 이건 칙명이다.” 메로스의 마지막 말에 방안에 들어와 있던 두 남자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한명은 메로스에게 보고를 하고 있던 경비대원이었고 한 사람은 원래는 메로스보다 상석에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왠지 구석에 처박혀 아무말도 못하고 있던 남자, 바로 이 자 유 도시 레카의 시장이었다 “로운.” 커다란 건물 오른쪽, 어두운 곳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기엘이 로운을 작은 소리로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로운은 기엘이 외 부르는 지 알겠다는 손짓을 해보이면서 고개를 빼꼼하게 내 미려는 시안의 머리를 내리 눌렀다. “성문은 이미 봉쇄 된 것 같은데? 알아차린거 아냐?” “경비병이 늘었어. 생각보다는 그 골 때리는 녀석의 반응이 빠른 것 같아.” “그럼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 건데요?” 시안은 머리를 내리 누르고 있는 로운을 팔을 꾹꾹 밀어 버리고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안으로써는 뭔가 심장이 두근 두근 거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런 기 분 상태를 로운이나 기엘에게 이야기 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상상도 안되지만 시안의 입장에서는 정말 간만에 뭔가 활극, 내지는 음모등에 쫓겨 도망을 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야 말로 바라마지 않던 모험!! 그리고 자신은 그 일행의 리더!이자 제일 중요한 인물! “성벽이 낮은 곳을 찾아서 휘릭하고 넘으면 안될까요? 아까보니까 어느정도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는 정도는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은데….” 시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에 기엘과 로운은 둘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았다. “그것도 안되면 으음…. 여기 어디 비밀 통로 같은 것은 없으려나? 왜. 수로 같은데를 따라 서 잠수를 해서 빠져나가는 방법이라던가….” “그런 방법도 있군요.” “그건 안 돼. 시간이 너무 걸려. 지금 어디가서 수로 지도 따위를 구하느냐구. 발상은 좋았 지만 지금으로써는 불가능한 방법이야. 시안은 자신이 아무생각없이 흘린 말에 기엘과 로운이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어라? 내 말을 설마 믿은 거야?’ “이럴 때 물의 술사라도 있으면 딱 좋았을 텐데. 로운 네가 어떻게 안될까?” 기엘은 시안이 내놓은 해결안이 그저 지가나는 중얼거림에서 나왔든 그것이 아니든간에 상 관이 없었다. 지금으로써는 이 레카에서 무사하게 도망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 다. “알잖아. 내가 수(水)계의 주문을 쓸 줄 안다고 해도 그것은 치유술 쪽이라는 거.” “…잠깐. 쉿.” 말을 듣던 로운이 갑작스럽게 기엘의 입을 막았다. 그는 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엘의 능력을 가진자가 가까이 있다.’ 속삭이던 와중에 로운은 엘의 능력을 가진자가 자신들 쪽으로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낀 것이 다. ‘설마. 흐름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 건가? 반응이 빨랐던 것이…. 아니야. 기엘도 나도 완벽하게 감추고 있었는데.’ 그 순간 시안이 ‘왜’하는 눈빛을 해보였다. ‘아. 이런. 젠장. 이녀석…인가? 충분히 감추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흐름은 약하기는 하지만 분명 '엘러‘라고 부를 만큼의 엘을 가진 능력자 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기엘 역시 그 기척을 눈치채고 눈에 띄게 긴장하기 시 작했다. 기엘은 살며시 허리춤에 묶어 두었던 라이트에 손을 댔다. ‘설마 이런 곳에서 라이트를 쓰게 될 줄이야.’ 두 사람이 팽팽하게 신경을 잡아당기고 있는 동안 그 기척은 점점 가까워 지기만 했다. 자박 자박하는, 장화의 굽이 돌에 부딧히는 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한 사람.’ 기엘과 로운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기엘이 라이트를 살짝 겁집에서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어라? 이쪽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좁은 골목에 울렸다. “저기. 여기 누구 없습니까아~. 적은 아니니까 좀 나와보시지?” 들리는 목소리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으음. 역시 이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하기사 나라도 겁먹겠군. 암 그렇고 말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척척 걸어서 달빛이 그대로 내리쬐는 길 한가운데에 멈추어 섰다. 구석 어두운곳에 있는 두 남자는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그 남자의 행동 하나하 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훤칠한 키의 그 남자는 달 빛이 환한 곳에 멈추어서더니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훌러덩 벗어 버렸다. 환한 달빛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환하게 반짝였다. ‘…짙은 푸른색?’ 그는 머리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풀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은 다름 아닌 시안 일행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 “거기 있죠? 뭐 무진장 의심스럽긴 하겠지만 절대 해치진 않을테니 좀 나와보슈.” 시안은 자신들이 숨어 있는 곳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시안은 그 푸른 머리의 남자가 아까 자신에게 찝쩍대면서 수작을 걸던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 저, 저사람은….” 움찔거리며 반응하려고 하는 시안의 입을 기엘이 가로 막았다. 기엘역시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아까 시안에게 수작을 걸던 건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의 머리카락, 달빛에 비친 짙푸른 머리색은…. 머리색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저런 머리색은 물의 나라 나유인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머리색.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들의 편이라고는 할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미약하게 엘의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 만났을 때는 전혀 알아 차릴 수 없었는데 말이다. 기엘은 검 집에서 라이트를 꺼내면서 속삭였다. “일이 생기면 그대로 시안님을 모시고 성벽을 넘어.” “알았어.” 기엘은 숨어 있던 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능력으로 판단해 보건대 지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자신과는 다른 성향의 엘러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남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묶어두기는 했지만 반짝이는 기엘의 은발 머리가 달빛을 받아 더더욱 반짝였다. “아. 역시. 댁들이었군. 어쩐지 공기의 흐름이 이쪽만 활발해서 설마하고 생각했는데.” 그는 거리낌없이 기엘쪽으로 다가왔다. “또 만났군요.” “그렇군요.” “아아.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헤치고 싶은 마음은 추 호에도 없으니까.” “우리가 당신을 믿을 만한 근거는?” 은색의 달빛에 은색의 라이트가 반짝였다. 그러자 상대는 양손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나 역시 쫓기는 중이라고 말씀드리면 될까요?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나라도 이 런 상황에서는 의심부터 하고 볼테니까. 원하신다면 지금 절 가늠해 보셔도 좋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자 마자 마치 둑에 갇혀있던 물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처럼 강한 엘의 흐 름이 기엘이 서 있는 쪽으로 밀려왔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은 엘러들에게만, 다시 말해서 엘의 능력자들에게만 가능한 방법 으로 자신의 엘의 흐름을 상대방에게 그대로 노출을 시키는 것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자신의 흐름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드러낸다는 것은 적의를 가진 자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방법이다. 그 이유는 당사자가 아주 작은 살기라도 품고 있는 경우 그가 내뿜는 엘에 그대로 영향을 미쳐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잠시 그 물과 같지만 강력한 엘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던 기엘은 순순히 들고 있던 라이 트를 검 집에 다시 밀어 넣었다. 그의 엘은 막힘없이 흘러나왔고 어떤 적의도 없었다. 기엘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아니. 이해합니다.” “로운. 시안님. 괜찮습니다.” 기엘의 말에 로운이 시안을 부축하면서 일어섰다. 시안이 달빛쪽으로 나오자 마자 남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야… 아가씨 밤에 보니 더더욱 미인이로구만. 응?” “쳇.” 시안은 좀 심술이 났다. 아까전에는 그저 단순하게 말을 했을 뿐인데 그렇게 나무라 놓고 지금은 오히려 기엘과 로운이 그 남자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어린애 같다고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화가나는 감정. “이런. 이런. 뭐. 상황은 별로 안 좋지만 너무 그런 기분 나쁜 표정은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같이 쫓기는 입장인데 말이야.” 남자는 유들 유들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시안의 쪽으로 다가오려고 했지만 시안은 슬쩍 기엘 의 뒤로 숨어 버렸다. “수줍음이 많은 아가씨로군요. 뭐.” “나머지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일단은 여기서 도망치는게 제일 급선무니까요.” “물론.” “좋습니다.” “지나오면서 경비가 허술한 쪽을 봤던 것 같은데 그쪽으로 가는건 어떻습니까?” “수로쪽은 안될까요? 당신이….” 기엘이 남자에게 말했다. “수로쪽은 안 되요. 그 기분나쁜 녀석은 내 능력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수로쪽은 이미 3일전에 완전 봉쇄 되버렸거든요.”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가지 뿐이죠. 낮은 성벽을 골라서 그냥 무작정 뛰어 넘는 겁니다. 설마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쓸 줄은 모를테니까. 댁들 능력이라면 나 하나 정도 쉽게 넘겨줄수 있을테고.” “젠장. 그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넘어 버리는건데.” “쉿.” 로운이 뒤를 돌아다보며 신호를 하자 일행모두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너희들은 오른쪽, 나머지는 내 뒤를 따라와.” 남자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뒤에 따라온 경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일제히 경비 병들이 흩어졌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그 명령을 내린 남자의 뒤를 따라서 왼쪽 골목으로 사라졌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푸른머리의 남자가 대뜸 말했다. “좋아. 갑시다.” “저, 저기 정말 저걸 그냥 넘는 거야? 정말 다른 방법은 없어?” “네. 시안님.” “그, 좀 더 낮은 데는?” 시안은 지금 이 무지막지한 탈출 계획-계획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에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뭔가 롤플레잉 게임이라도 하고 있는 기분은 조금 전 경비병들이 우르르 나타났다가 사라지 면서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정말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 뿐. 그런 상황에서 계획이라고 세운 것이 무작정 성벽을 넘는 것이라고 하니 정말 눈앞이 캄캄 해져 오는 것이다. “조금 더 가면 경비병이 정말 산책만 하는 곳이 있습니다. 기회를 노려서 뛰어 넘을 수 있 을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예요. 만일의 일이 생긴다면 내가 재주를 좀 부려줄 수도 있고.” “좋습니다.” 기엘과 로운은 시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들은 채도 안하고 방금전에 나타난 이상한 조력 자, 또는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되는 남자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젠장할 내 말은 개똥으로 알잖아 이 인간들!!’ “시안님 이쪽으로.” 기엘이 시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재촉했다. 시안은 주위의 공기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일단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화를 내든 신경질을 부리든 일단은 도망치고 볼일이다. 앞장 선 남자가 손짓을 하자 모두들 어두운 그들을 따라서 몸을 움직였다. 그들이 커다란 짐 뒤쪽에 몸을 숨기자 오른쪽에서 경비병이 두명 나타났다. “왜 이렇게 난리야 오늘은?” “글세? 수도에서 온 특별 감찰 뭐라고 하는 사람이 온 뒤로는 매번 비상이니 뭐니하면서 난리도 아니잖아.” “그러게나 말야. 난 삼일째 순찰이다. 젠장.” “삼일? 나는 일주일째 마누라 얼굴도 못보고 이러고 있어. 자리 비우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윗대가리들이 난리를 떨으니.” “정말 이러다가 전쟁나는 거 아니야?” “글세? 뭐 설마 전쟁이 난다고 해도 여기는 자유도시라구. 큰일은 안 날 거야.” “그러면 다행이지만.” 경비병들은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안 일행이 숨어 있는 곳을 지나서 사라졌다. “지금이다.” 타다다닥-- 소리를 한껏 줄인 발걸음소리와 함께 4명의 인영이 성벽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기엘. 나는 이 친구와 함께 넘을 테니까 너 먼저 가.” “알았어. 시안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 으으응.” 순간 밝은 달빛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주위가 새까만 어둠에 휩싸였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피. 하이로트.” 기엘의 단단한 팔이 시안의 몸을 감쌌다. 휘리릭하는 이상한 소리가 그들이 몸 주위에서 흘러나왔다. “이건 비행주문?” “말하자면 그런겁니다. 조금 틀리긴 합니다만.” 귓가에 기엘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순간 시안의 몸이 붕-하고 떴다. 기엘이 시안의 몸을 안 은 채 뛰어 오른 것이다.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뛰어 오른 기엘은 성벽의 조금 튀어나온 부분을 밟고 다시 한번 뛰어 올랐다. ‘우왔!! 완전이 이건 인간 로케트잖아!’ 시안의 눈에 탁트인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어둠으로 덮힌 성밖의 전경은 마치 어릴적 가지고 놀던 레고들이 주루룩 늘어서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남감 같은 전경을 즐길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을리 만무. “…기, 기엘!!”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던 기엘의 몸과 시안이 다음순간 아래쪽으로 곤두박칠 치기 시작했다. ‘꾸엑--. 롤러 코스터다!’ 불안한 자세로 있던 시안이 자기도 모르게 기엘의 팔을 붙들었다. 기엘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어지는 와중에 성벽 위쪽의 틈을 발견하고는 그 부분으로 방향 을 틀어서 바로 그 틈사이 옆에 다시 한발을 디뎌 위로 뛰어 올랐다. 차가운 공기가 시안과 기엘의 몸을 감싸안았다. ‘로, 롤러 코스터보다 더하잖아!!’ 순식간에 위 아래로 시야가 오락 가락하자 시안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롤러 코스터 따위는 질색이던 시안이었다. ‘우욱---’ 허공에 떠올랐을 때마다 그 순간의 찰나를 이용해 주위를 살피고 있던 기엘은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한 부분에 가볍게 착지했다. “괜찮으십니까? 시안님?” “으윽-.” 시안은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욕지기로 대답을 대신했다. 뒤를 이어서 바로 가까운 곳에 로운과 예의 그 소년이 내려앉았다. “기엘 뭐야!! 왜 그렇게 방향을 마구 틀어!! 따라오느라고 힘들었단말야.” “시안님 괜찮으세요?” 하지만 기엘은 로운의 투덜 거림은 들은 척도 않고 웩웩거리고 있는 시안의 등을 톡톡 쳐주 고 있을 뿐이었다. “환영술을 가볍게 걸어서 문제는 없겠지만 만의 하나 성벽을 넘는 것을 누가 봤을지도 모 르니 빨리 이동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물론이지.”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미메이라로 가시는 건가요?” 남자의 물음에 잠시 로운은 기엘과 눈빛을 교환했다. “난 일단은 가이칸 제국을 벗어나려고 하거든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가이칸 제국에는 얼씬 도 안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아서. 아. 이유는 천천히 말씀드리죠.” 기엘과 로운이 자신을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납자는 적당히 둘러대 면서도 자신 역시 쫓기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좋습니다. 일단은 국경근처까지 가도록 하죠. 이봐 기엘. 시안님은 괜찮아?” “응. 그럭 저럭.” 간만에 미친 듯이, 그것도 잘 먹은 저녁을 모조리 눈으로 확인하고만 시안은 얼굴이 노랗게 변해 버렸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눈 앞도 노랗게 변해 버리고 말은 것이다. “으윽-. 죽겠다.” 겔겔거리고 있는 시안에게 남자가 다가왔다. 기엘은 이리야가 시안의 쪽으로 다가오자 기엘이 살짝 그 앞을 가로 막았다. 무의식중에 나 온 행동이었다.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러는데,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치유술을….” “괜찮아.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기엘과 이리야가 대치하고 있는 사이 로운이 시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고개 들어.” “시끄러 아저씨 얼굴. 쳇.” “그 정도로 이렇게 되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흥.” 맑은 기운과 함께 로운의 몸에서 불어 나온 바람이 부드럽게 시안을 감쌌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기엘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뭐. 이런 상황이라서요.” “그렇군요.” 투닥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기엘이 먼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엘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리야라고 합니다.”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작은 짐 보퉁이들을 들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서는 조금전과는 달리 팔팔하게 살아난 시안이 아구아구 거리면서 로운에게 대들고 있었다. 조금전의 그 약간 화기애애해 보이던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래. 머쓱해진 기엘은 이리야를 바라보면서 변명하듯 말했다. “사이가 좀 나빠 보이기는 하죠?” “아니요. 제눈에는 좋아 보이기만 하는 걸요.” 2. 이리야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리야라는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와 함께 시안 일행은 지금 가이칸 제국과 하나스 왕국의 국경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강 폴리카르 위를 운행하는 선상 한구석에 옹기종이 모여 있었 다. 자유도시 레카에서 밤새도록 도망쳐서 국경부근에 다달은 일행은 지금 마악 제국령을 벗어 나려 하고 있었다. 하나스 왕국과 가이칸 제국은 불의 나라인 호로스와 미메이라의 국경선에서부터 시작되는 폴리카르와 낮지만 험준한 산맥인 페이요트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한때 폴리가르의 중반부까지 제국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하나스 왕국은 셰비 통산 연합국에 서도 두 번째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국가로 200년에 걸친 가이칸 제국과의 분쟁 속에 서 페이요트의 서쪽 자락을 거의 잠식해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현재 일행의 목적지는 폴리카르를 끼고 발달한 도시 이오카로 과거 가이칸 제국이 폴리카르 의 동부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했을 때 만들어 졌던 자유시로 현재의 레카와 같은 위치에 있 었던 도시다. “이대로 이오카까지 가는데는 별 일 없을 것 같은데 로운?” “그렇군.” “레카에서 좀 한숨 돌리고 천천히 여행이나 해볼까 했는데 참 뜻대로 되지 않는 다니까.” “원하는 데로만 뭐든지 이루어 진다면 노력이라는 것도 필요 없는 것이겠지.” 로운은 힐끗 옆에 로운의 망토를 둘둘 뒤집어 쓴 채 잠들어 있는 시안을 바라보았다. 시안은 야반도주의 끝에 완전히 나가 떨어져서 지금은 거의 탈진한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 런 시안을 보면서 로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고 멀다. 그런데 그 여행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시안은 초장부터 자꾸만 삐걱거리고 있다. “아득하군. 정말.” “로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뭘?” 기엘은 잠시 자신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이리야라는 남자를 바라 본다음 목소리를 죽여서 이야기 했다. “지금 불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호로스에 들려 일을 마친후에 시안님을 원래 모습으로 돌 아오도록 하면 안될까?” “…또 그 이야기야?” 당사자인 시안이 원래의 모습으로 바꾸어 달라고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터 다. 하지만 기엘이나 로운은 대제사장으로부터 되도록 현재의 모습을 유지한채 여행을 하도 록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엘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로운은 조금 이상하다 고 생각했다. “글세. 역시 여자보다는 남자인쪽이 여행하는데 위험도 없잖아. 그리고 또 하나는….” 기엘은 말을 하다 말고 잠들어 있는 시안의 몸 위로 손을 뻗었다. 그 손에서 투명한 엘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이 로운의 눈에 보였다. 기엘의 손에서 흘러나온 엘의 가락은 시안쪽으로 흘러가다 말고 무슨 투명한 벽에라도 부딧 힌 것처럼 도로 튕겨 나왔다. “기본적으로 어느 누구나 이 정도로 반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않아?” 기엘이 말을 하는데 갑자기 로운이 기엘의 팔을 잡아 당겼다. “응?” “잠깐. 기다려.” 로운이 자신의 행동을 가로 막자 기엘이 이상하다는 듯 로운을 쳐다보다가 이내 그가 왜 그 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 차리고는 손을 거두었다. 이리야가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이오카에 도착할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털썩-하고 이리야가 자리에 주저 앉았다. “생각보다 굉장히 조용하신 분들이군요.” 이리야가 빙긋 웃으면서 말을 하자 기엘과 로운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 궁금해 했다. “사실 나는 배에 타자마자 댁들이 날 붙들고 이것 저것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아.” “뭐 그런 것은….” “하기사 저도 아직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니까 넘어가죠 뭐.” 사실 기엘이나 로운도 앞에 있는 이 이리야라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했었다. 물론 이리야가 자신들에게 적대감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묻지는 않은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일단은 그쪽이나 우리나 레카에서는 도망나와야 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라는 것만으로 충분하긴 했죠.” “그렇기는 합니다만.” “하지만 나는 그래도 궁금해.” 순간 들려온 다른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몰려갔다. 거기엔 조금 전까지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던 시안이 부스스 일어나서 눈을 비비면서 앉아있 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사람 일어나는 거 처음 봤어?” “괜찮으십니까? 시안님?” “안 괜찮으면 버리고 가려구?” 퉁명스럽게 시안이 대답하자 이리야가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귀한집 아가씨라고 하기에는 말이 험하구만. 아름다운 아가씨는 그런 말을 쓰면 안 되 지.” “…웃겨. 누가 아름다운 아가씨냐?” 이리야의 발언에 대뜸 시안이 반응했다. “자꾸 그런 잡소리 하면 확 뒤집어 버린… 우앗!!” 순간 배가 기우뚱하면서 차가운 강물이 뱃전으로 튀어 올라왔다. 당연히 물을 뒤집어 쓸 줄 알고 몸을 움츠렸던 시안은 얼굴 가까이까지 튀어 왔던 물방울들 이 허공을 맴도는 것을 보고 눈이 휘등그래해졌다. “헤에--.” 투명한 물방울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히야-. 당신 물의 술사? 죽이는군.” “죽여? 뭘?” 이리야가 들었던 손을 살짝 옆으로 치우자 허공을 맴돌던 물방울들은 다시 강물로 돌아 갔 다. “아. 그냥 굉장하다 정도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가끔 시안님께서는 특이한 표현을 쓰시니까 그다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안님 여기. 이거 드세요.” “아. 고마워요. 기엘.” 시안은 기엘이 건내준 음료수가 담긴 병을 들고 꿀꺽 꿀꺽 마셨다. “물의 힘을 쓰시는 것을 보니 나유인이신 것 같은데?” “아니요.” 가볍게 떨어지는 이리야의 대답에 기엘과 로운이 멈칫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수한 제국인입니다. 제국을 등진 사람으로써 할말은 아닙니다만.” “왜? 무슨 큰 죄라도 저질렀어요? 이거 염색한거 아니죠?” 시안은 이리야의 짙 푸른 머리카락 색이 신기한 듯 그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사실 자신의 현재 머리색인 은색도 특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은색 머리카락은 외국 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에게서 몇 번 보아왔던 터라 신기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른바 플라티나 블론드라고 하는 머리카락이 바로 시안의 머리카락 색. 하지만 역시 이런 짙푸른 색은 염색을 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안이었다. “설마. 타고난 머리카락이라고 이건.” “그럼 이리야씨의 부모님도?” “아니요. 저만 그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색이었죠.” “진짜 파랗기는 하네.” 신기한 듯 말하는 시안을 로운과 기엘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 머리색 때문에 무슨 왕따라도 당한 건가요? 우리는 그렇다고 치고 댁은 왜?” “틀린 말은 아니지. 아니 실제 이 머리색 때문일 수도 있고. 제국에서는 지금 엘러들을 찾 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거든. 그래서 도망치고 있는거야.” “그래서 그런거였나? 그 메로슨지 베로슨지 하는 녀석이 자꾸 날 떠보던 이유는?” “이유도 모르고 감으로 느낀건가? 그녀석의 재수없음을?” “뭐 나는 그런 이상한 놈하고 어울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로운에게 이리야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리야가 볼 때 눈앞에 있는 일행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정말 이유도 모른채 단순하게 감으로 ‘아니다’라고 생각하고는 정말 줄행 랑을쳐버린 것이다. 이리야는 언 듯 스쳐봐도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일행들을 다시 한번 눈여 겨 보았다. 이 선상에 올라타기 전부터 눈여겨 봐왔던 일행은 척 보면 정말 귀한집 아가씨를 모시고 세 상구경을 시키고 있는 그저 그런 일행으로 보이지만 실제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시안을 데리고 다니는(?) 두남자부터 수상했다. 둘다 기사 수업을 받은 듯한, 빈틈없는 몸가짐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기사로 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또한 두 사람이 시안을 대하는 태도도 뭔가 묘했다. 기엘이라고 하는 남자는 아주 정중하게 무슨 공주라도 대하듯 꼬박 꼬박 자신보다도 한참 어리게 보이는 시안에게 존대말을 하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반면, 로운이라는 남자는 시안을 꼬마라고 불렀다가 다음순간에는 또 시안님이라고 부르는 등 그 녀를 호칭하는 말을 수시로 바꾸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말 살짝이나마 시안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대뜸 눈에 힘을 주고 는 무언의 협박을 해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미 두 남자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 한술 더뜨는 것이 저 하늘 하늘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절세의 미녀, 아니 아직 이리야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미소녀로 보이는, 두사람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 시안이다. 처음, 레카의 중앙 광장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리야는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맑고도 강한 파장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 파장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 면 기울일수록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이상한 느낌을 그는 시안에게서 받고 있었다. 물론 그 때문에 더더욱 시안에게 찝쩍거리고 있기도 한 이리야였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이리야가 잠시 자신의 생각속에 빠져있는데 시안이 대뜸, 이리야를 노려보면서 말을 했다. “너무 이상해.” “뭐가요? 시안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잖아. 그 이상하게 생긴 아저씨 따라 갔다가 와서는 대뜸 도망치자 고 한 주제에 이 느끼한 아저씨는 서로 멀뚱 멀뚱 얼굴만 확인하고는 지금까지 동행하고 있 잖아. 의심도 안해?” “하하. 내가 그렇게 의심스러워 보이나?” “당연히 의심스럽지. 안 의심스러워?” 자꾸 자신을 향해 느글 느글한 표정으로 반말을 하고 있는 이리야라는 남자에게 시안은 같 이 반말로 대꾸를 해주었다. “어디 사람인가. 뭐하는 인간인가. 안궁금하면 그게 사람이야? 쳇.” 시안이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하자 기엘이 웃으면서 시안에게 말했다. “그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시안님. 잠깐. 이렇게 해보시겠어요?” “응?” 기엘은 시안을 편안하게 앉게 한 다음 이리야에게 손짓을 했다. “미안하지만 시안님께….” 기엘의 말에 이리야는 기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알아 차렸다. 아마도 이 곱게만 보이는 아가씨는 세상 물정을, 아니 세상물정보다도 기본적인 무엇인가에 상당히 무지한 모양이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닌 걸. 그런데 정말 해도 되나?” 이리야는 슬쩍 로운의 눈치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기엘보다는 로운이 더 신경쓰였다. 로운은 못마땅한 표정을 하기는 했지만 팔짱을 끼고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손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아름다운 아가씨?” “두번 다시 그따위 호칭으로 안 부른다면 생각해보지.” “호오.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시안이라고 부르면 되.” “아름다운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이리야는 불쑥 시안이 내민 손을 아주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처음 이들 일행을 만났을 때 와 똑같이 행동했다. 불쑥- 굳이 표현을 한다면 아마 그렇게 밖에 표현이 안될 것이다. 이리야가 잡은 손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밀려왔다. 이리야는 혀를 찼다. “빌어먹을 운이 없으려면 죽어라~없다더니 내 꼴이 딱 그 꼴이구만.” 그는 길거리의 돌멩이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그 돌은 핑-하고 날아가서 앞서 걸어가던 사람의 종아리에 맞았다. 순간 남자는 벌컥 화를 내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당신 뭐야!!! 앙!!” “어이어이. 돌하나 걷어찬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그리 인상을 쓰슈?” “이 인간이~.” 이리야는 씩씩거리며 덤벼드는 남자에게 잠시 대항을 할까 하다가 관두어 버렸다. 지금 여 기서 사건을 일으키면 곤란한 쪽은 자신이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근 시일내로 레카에서 벗어나야하는데 지금 문제를 일으킨다면…. “아아. 형씨. 미안하우. 좀 꼴리는게 있어서 말이야. 괜찮으면 내가 사과의 의미로 한잔 사 고 싶은데? 응?” 남자는 술 한잔을 사겠다며 사과를 하는 이리야를 보고는 치켜올렸던 주먹을 내려놓았다. “호오. 뭘 좀 아는 구만. 당연. 내가 이래뵈도 말이야….” 남자와 그의 일행은 왁자지껄 떠들면서 이리야를 자신의 일행속으로 구겨 넣었다. 이리야는 그런 행동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언뜻 옆쪽으로 지나가는 수비대 대원들을 보면 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맘에 안 들어서 죽겠구만.’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피해서 흘러 흘러 들어온 곳이 이 자유도시 레카였다. 어느 도시보다 도 이방인들이 많고, 그래서 이방인이라는게 특별해 보이지 않는 곳. 내내 쫓기는 생활을 했던 이리야에게 있어서 이곳 보다 마음 편한 곳은 없었다. 적당한 곳 에 숙소를 잡고, 떠돌이 용병인척하면서 어디선가 지나가며 들었던 용병단 출신인 것처럼 꾸며서 잡일을 하면서 지내온 그에게 있어서 얼마 전 확인한 한 남자의 얼굴은 정말 청천병 력과 다름 없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그놈이 올 줄이야. 아니, 오려면 좀더 있다가 오던지. 쳇. 역시 난 운도 더럽게 없군.’ 이리야는 낮술을 거나하게 퍼 먹고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술값을 내고 레카의 중앙 광장에서 서성였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그는 취하지 않는다. 그 남자가 이곳에 도착한 것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레카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욱씬---.’ 순간 어깨부근이 쑤셔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빌어먹을.’ 이리야는 쑤셔오는 어깨부근을 손을 문지르면서 투덜 거렸다. 평소에는 거의 의식을 하지 못하다가도 신경이 쓰이는 순간, 그 부분이 아파오는 것이다. ‘하아…. 젠장. 조금만 더 일찍 눈치를 챘으면 그냥 줄행랑을 쳤을 텐데. 어째서 몰랐지?’ 그 남자, 자신에게 노예의 인장을 찍은 문제의 남자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보기에는 반듯한 기사로 보이지만 상당히 비열한 인물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비열하다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인 것이 다. ‘수비대도 보강되었고, 전에 봤던 얼굴이 한둘 눈에 띄는 것으로 봐서 정식으로 성문을 통 과하기는 이미 글른 것이고…. 그렇군, 수로도 이미 완전히 봉쇄되어 버렸을테니, 정말 난감 하구만. 정말 월장(越牆)이라도 해야하나. 젠장. 성벽을 넘어간다는건 쉬운 일이 아닌데.’ 멍하게 한구석에 주저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영을 바라보면서 그는 생각을 했다. 두 번다시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날씨 좋구…어?” 멍하게 앉아있었던 탓일까? 이리야는 갑자기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는 그 무엇인가가 자신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 을 느꼈다. ‘설마… 날 찾아내기 위해서 엘러들을 데리고 온 건가? 아니야. 확실히 감추고 있었는데 벌써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어. 게다가 숙련된 추적자들이라면 이렇게…’ 그는 살짝 몸을 움츠리고 앞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없이 지나가는 사람들, 그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의 한 자락이 그의 빰을 살짝 간지르는 순간, 그의 눈에 은색의 나부낌이 포착되었다. 두리번 두리번, 신가하다는 표정을 숨지지도 않은 한 미소녀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플라티나 블론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소녀 였다. ‘설마…?’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순간 그의 눈이 문제의 소녀와 마주쳤다. 그는 얼결에 빙긋-하고 웃어 버렸다. 그러자 소녀는 눈이 커지기가 무섭게 화사한 미소를 그에게 돌려주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미쳐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지도 못하고 이리야는 마치 그 은색의 나부낌에 취해 버린 듯 자 신도 모르게 그 소녀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는 귀찮은 인간한테 걸려든 모양. 이리야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뒤로 다가가서 말을 했다. “이런. 위험하잖나. 이런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주고 그는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위협적인 그의 시선에 상대방은 뭐라 고 더 말을 하려다가 말고 주춤 주춤 사라졌다. 그제서야 이리냐는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앞에 있는 예쁜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신가요? 아름다운 아가씨?” “아. 그. 괜찮으니까 이 손 좀 놓아주시겠습니까?” “오오. 실례. 실례. 아름다운 아가씨.” 감싸안은 어깨는 놀라우리 만치 작고 부드러웠다. “조심 하셔야지요. 레카에는 위험한 남자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는 시안의 어깨를 놓고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 는 순간 느껴진 이상한 파장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 찾으시는 곳이라도 있으신지? 아니면 그냥 시간을 때우러 나오신 겁니까? 괜찮으시 다면 제가 좋은 곳을 안내하지요. 레카의 밤거리는 아주 훌륭하답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앞으로 나간다. “이건 정말 아름다운 은발이군요.” 손에 닿는 머리카락은 마치 은실처럼 사라락 거리면서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하지만 그가 그 머리카락의 감촉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바람같이 두사람의 남자가 달려들 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아가씨에게 볼일이라도?” “괜찮으십니까? 시안님?”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아마도 그는 그 자리에서 그 남자들의 눈빛에 찔려 죽 어버렸을 것이다. 그는 조금 전 그가 소녀의 어깨를 잡았을 때 느낀 묘한 위화감이 무엇인지 되씹어 보기도 전에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제보니 굉장한 나이트를 거느린 아가씨셨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는 그를 향해 살벌한 눈빛을 번득이고 있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러났다. 그들은 그 소녀를 애지중지 챙겨서 휭-하고 사라졌다. 뒤에 남은 이리야는 아직도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청량한 공기속에서 멍하게 그들의 뒷모 습을 바라보았다. “…헤에.” 이리야는 감았던 눈을 떴다. 눈 앞에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자신을 말똥 말똥 바라보는 환상적인 미소 녀가 앉아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꿀꺽하고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물 속에 잠겨있는 거 같으셨죠?” “정말 그러네….” 기엘은 웃음을 지으면서 슬쩍, 아직도 이리야가 꼭 잡고 있는 시안의 팔을 끌어 당겼다. 이리야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 시안의 손을 놓아주었다. “어떠셨어요?” “뭐가?” 기껏 시안에게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느껴보라고 노력했던 이리야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시안의 반응에 휘청했다. ‘뭐, 뭐냐. 이 반응은.’ “뭔가 이상한 느낌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 끄덕이면서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표정을 해보였다. 이리야가 멍청하게 시안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기엘은 시안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리야는 정말 재미있는 일행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기엘의 설명을 듣던 시안은 아하!하고 탁- 손바닥을 쳤다. “그런거구나. 호오- 이거 무슨 완전 아슈레이식 신원 조회구만. 쓸만한데.” 이리야는 피식 웃으면서 기엘에게 말했다. “댁도 고생이 심하시겠수.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모시느라.” “뭐. 제 일이라서요.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대로라면 곧 하나스령으로 들어가게 되는 데 이리야씨는 앞으로 어느쪽으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글세. 나야, 뭐 물 흐르는데로 따라가는 사람이니까. 될대로 되겠지.” 이리야는 크게 기지개를 켠 뒤 목 뒤로 팔짱을 끼고는 옆에 잔뜩 쌓여있는 커다란 나무통에 몸을 기댔다. 어차피 특별한 목적지도 없는 그였다. “그런데 왜 쫓기는 겁니까? 우리야 그렇다고 치고, 댁은 왜?” 대뜸 시안이 이리야에게 물었다. 기엘이 막을 사이도 없이. 순간 6개의 눈동자가 한번에 이리야에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 아아아. 이제야 제대로 묻는 사람이 나왔군. 아름다운 아가씨, 아니 시안님. 아! 그냥 시안이라고 불러도 되나?” “상관없죠. 당연히.” 로운이나 기엘이 잔소리를 할 사이도 없이 시안이 먼저 대답을 하자 기엘이 한숨을 내쉬었 다. 그런 그에게 눈길을 슬쩍 돌렸다가 이리야는 대뜸 위에 걸치고 있는 망토를 한쪽으로 걷어 내고는 셔츠를 훌러덩 벗어버렸다. “에엑-- 누가 누드쇼하라고 했어요?” “누드쇼는 또 뭐야?” 이리야는 커다란 셔츠를 벗어버리고는 어깨가 드러나는 짧은 속옷과 가슴을 보호하고 있는 보호대는 그대로 두고 왼쪽 어깨를 가르켜보였다. “이거 보이지?” 톡톡, 하면서 근육이 불끈 솟아올라와 있는 어깨춤에는 검푸른 무늬와 몇 개의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게 뭔데요?” “노예의 인장이야.” “에- 에엑---!!” “쉴드. 바헬.” 순간 로운이 주문을 외웠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로운이 대답했다. “그냥. 남이 들으면 좀 그럴 내용이 나올 것 같아서.” “호오- 재미있군. 그 주문.” “그래서요? 아저씨 도망 노예같은 거? 이거 곤란한 거 아닌가요? 기엘?” “글쎄요.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죠.” 세 사람의 반응에 이리야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보통 이런 노예 인장을 보여주면 열의 열명은 대부분 대뜸 그를 대하는 태도가 틀려진다. 하지만 이들은 정말 일반적인 반응을 보 여주기는커녕 한명은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게 쉴드를 치고, 한명은 이야기를 들 어보자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한사람은 아무생각이 없는 느낌. 그 는 왠지 자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해도 이들이 크게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보기에는 그 나유인지 뭔지하는 신국인을 보이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제국인이지. 그리 고 이런 노예의 인장이 찍인 것은 내가 제국인이면서도 신국인들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 기 때문이야. 내가 도망치는 신세가 된 것도 다 그 이유지.” “그게 왜요? 제국에서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설마 모두 노예 취급당하는 건가 요?” “그런건 물론 아니야.” 이리야는 다시 옷을 주워 입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간단하게 정리해서 세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평범한 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이상하게도 나유인 같은 외 모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런 외모와 상관없이 그냥 평범하게 부모님과 같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가 살고 있던 부근의 성주에게 한 장의 공문이 날라오면서 부터 그의 인생은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그 공문의 내용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어느날 이유없이 징집이 되어서 그대 로 제국의 수도인 카드미엘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노예의 인장이 찍힌채 강제적으로 물의 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럼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거예요?”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안이 희안하다는 듯 묻자 이리야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 다. “이봐. 나는 지금은 이렇지만 이래뵈도 평범한 농사꾼이었다고, 물론 어느정도는 물을 가지 고 놀면서 자랐지만 그때는 그냥 단순하게 내가 뭔가 물과 친근하다고 느꼈을 뿐이야. 여기 저기서 들었기 때문에 신국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평범한 사람들인 데 누가 나한테 너는 엘러다 하고 물을 술을 가르쳐 주었을 것 같아?” “그건 또 그러네.” “암튼 지금 제국은 난리도 아니라구.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엘러들을 색출해내고 있는 실정이지. 그때 그 남자 만났다고 했죠? 눈이 이렇게~ 찢어진 재수없는 녀석.” 이리야가 자신의 눈을 찍-하고 찢어 보이며 로운을 향해 말하자 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석이 그 총 책임자중의 하나인데 아주 비열한 놈이라구. 그녀석, 내가 좀 반항하니까 날 질질 끌고 가서 대뜸 이걸 찍게 만들었어. 젠장. 그때 내가 물의 술을 좀 쓸 수만 있었으 면 그 자식을 묵사발을 내버리는 건데, 난 아직 그때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어 쩔 수 없이 당하고 말았지.” 그가 혀를 내두르면서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잠자코 있던 기엘이 불쑥 끼어들었다. “엘러들을 색출해낸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정확하게는 나도 몰라. 암튼. 불의 술사. 바람술사. 물의 술사, 또 하나는 뭐더라? 여하튼 간에 엘러들을 모아서 뭔가 하려는 것은 틀림이 없어. 암튼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 난 죽어 도 노예취급 받을 생각은 없으니까 이렇게 도망을 다니는 거야. 이것으로 끝.” “흐응….” “자아. 내가 몽땅 털어 놓았으니까 그쪽도 좀 털어 놓는게 어때? 사실 엄청 굼긍하거든.” “뭐가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별거 없소. 그냥 세상물정 모르는 우리 아가씨를 모시고 적당히 세상구경하고 오라고 하 셔서 여행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 “…으음. 불공평해. 불공평.” “정말입니다. 시안님께서는 사실 한번도 미메이라 밖으로 나오신적이 없으시거든요. 그래 서….” “아니야. 아니야. 자네들이야 일단 호위 기사라고 칠수 있다지만 그걸로는 저친구의 태도가 난 이해가 안간다구. 주인집 아가씨를 향해서 대하는 태도가 아니야. 말도 오락 가락하고.” “쉴드. 바헬. 오프.” 로운은 이리야가 하는 말은 들은척도 안하고 그때까지 쳐두었던 쉴드를 풀었다. 순간 거센 파도 소리가 뱃전에 부딧히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하하. 로운은 그러니까… 그게.” 기엘은 아차 싶어서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로운에게 시안을 대하는 태도에 대 해서 몇마디 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찾기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이번에야 말로 꼭 로운 에게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속으로 마음먹었다. “워낙. 시안님과 가까이 지내는 처지라….” “오호. 뭐 약혼자쯤 되시나?” 이리야의 농담처럼 하는 말에 로운은 속이 뜨끔했다. 하지만 로운이 그 농담에 반응하기도 전에 시안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봐!! 당신 듣자 듣자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어디가 이 아저씨 얼굴이 내 약혼자로 보이냐!! 앙!!!” “어어. 이거 진짜인가본…….” 하지만 이리야는 그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철썩. 쏴아아아아아--!! “우. 우아아악!!” “시안님!!” 파도가 거세게 밀려오면서 배가 옆으로 크게 요동쳤다. 벌떡 일어났던 시안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팔을 허부적 대면서 넘어졌다. 기엘이 달려들어 시안의 몸을 받는 순간 로운이 허리 춤에서 라이트를 뽑았다. “기엘!!!” 촤악하는 소리가 나면서 세찬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다. 그 사이에서 검은 색의 복면으로 온 통 얼굴을 가진 남자들이 몇 사람이나 함께 튀어 올랐다. “우악!! 이게 도대체 뭐야!!” -챙강! 물방울 사이로 검과 검이 마주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심하게 요동치는 배 위에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로운!! 뒤!!” “하앗!!” 로운은 앞쪽에서 달려드는 한 사람을 전광석화처럼 찌르고 그대로 라이트를 커다란 호를 그 리면서 갈랐다. “우억----!” “기엘 디 하라스다인. 헤레프!!” 로운의 라이트가 바람을 가르는 순간 큰 소리로 기엘이 주문을 외치는 소리가 났다. 쐐엑-하는 파공성이 바닷 바람을 가르고 쏜살같이 새롭게 물 속에서 뛰어오르는 남자에게 쏘아져 갔다. “크억!!” “이. 이게 도대체 뭐야!! 젠장할. 카라스!!” 이리야는 로운의 공격을 받고 넘어졌던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드는 것을 보자마자 악을 쓰면 서 주문을 외쳤다. 그의 손이 공기를 가르자 공기중에 흩어져있던 물방울들이 순식간에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 다. 철퍼덕--. 물의 장벽이 남자를 덥쳤다. 그는 뒤로 한참을 굴러가다 말고 옆에 떨어뜨렸던 검을 들고 다시 덤벼들었다. “우아아----!” 하늘 높이 치켜든 검에 물의 장벽이 남긴 물기가 바람처럼 흘러내렸다. 이리야는 그것을 노 치지 않고 다음 주문을 외웠다. “젠장. 어디서 물위에서 나한테 수작을 걸어! 이리야 노런. 케샤!!” 짧은 호선을 그리면서 얇게 흩어지던 물이 이리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단하게 변하면 서 남자의 칼에 들러붙었다.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그 남자를 덥쳤다. “기엘 피해!!!” 로운은 자신을 향해 달려들다 말고 기엘쪽으로 몸을 날리는 남자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 다. 챙강!! 불빛이 번쩍였다. 기엘이 라이트를 꺼내 달려드는 남자의 검을 막아냈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달려든 남자의 검은 묵직하게 기엘을 압박해왔다. “시안님. 제 뒤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이야---압!!” 있는 힘을 다해서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검의 무게를 밀쳐버리고 기엘은 기합을 넣으면서 상대방에게 달려들었다. 시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쩍벌리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소리만 질렀다. “우아아아악!!!” 시안이 이성을 잃고 머리를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순간 거센 바람이 시안의 몸에서부 터 불어 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불어 나오기 시작한 바람은 시안의 계승식 때를 능가하는 회오리 바람이 되어 난장판이 되 어가는 주위를 덥쳤다. “시안님!!!!” 로운은 앞에서 쉴세없이 덤벼드는 남자의 칼을 밀쳐내다 말고 뒤에서 강하게 덥쳐오는 시안 의 힘에 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길 저 바보가!!” 시안이 일으킨 바람에 밀려 뱃전까지 굴러갔던 로운은 자신도 힘을 개방하여 시안의 힘에 맞섰다. ‘젠장. 이대로라면 이 배까지 날아갈텐데.’ 문득 고개를 들은 로운의 시야에 바람에 날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보였 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리야였다. ‘제, 젠장. 이게 뭐야!!’ 이리야는 자신을 덥쳐오는 거대한 엘의 회오리바람을 견대기 위해 갑판에 납작 업드려서 주 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터운 물의 장벽이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게 가능하단 말이야.’ 흐린 그의 시야에 미친 듯이 고함을 치고 있는 시안이 보였다. 그녀는 몸을 조그맣게 옹크 리고서 이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 한가운데에 앉아있었다. ‘젠장. 어떻게든 해보라구!!’ 그의 시선이 로운과 마주치자 그는 속으로 악을 썼다. 하지만 로운 역시 시안의 바람을 막 아내는데 급급한 듯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쐐에에에엑- 귀에 들리는 것은 오로지 바람이 미친 듯이 하늘로 돌아 올라가는 광경뿐. 그 사이사이로 갑판에 쌓여있던 커다란 나무통들과 짐들이 바람에 휘말려 하늘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 순간 이리야와 로운, 그리고 기엘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저. 저건….’ 미친 듯이 불어대고 있는 회오리 바람의 한 가운데 희미하지만 무엇인가 분명 정확한 형태 를 가지고 있는 것이 시안의 몸에서부터 시작되어 미동조차 하지 않고 공중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길고 긴 형태를 하고 있었고 은백색으로 빛나는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저건 뭐지?’ 힘겹게 눈을 뜨고 기엘은 그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시안이 만들어낸 회오리 바람은 쌩쌩 소리를 내면서 그 은백색으로 빛나는 무언인가를 중심으로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기엘!! 시안님을 어떻게든 진정시켜봐!!” 로운이 소리를 질렀지만 기엘 역시 구석탱이에 쳐박혀서 그냥 그 기이한 광경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로운이 소리를 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기엘 역시 고전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라이트를 단단하게 잡고는 있었지만 시안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인 상태에 쳐 해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그의 눈에도 점점 형태를 뚜렷하게 해가는 그 미지의 형태가 눈에 들어 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그리고 저건….’ 바로 그때. 휘양찬란하게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두 개의 동공이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분명 눈이었다. 길게 양쪽으로 찢어져있는 그것이 내뿜는 빛은 온 몸을 얼려버릴 것 처럼 기엘을 덥쳐왔다. 그 은백색의 눈 아래에 약간 회색으로 길게 늘어져있는 입이 있었다. 순간 기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눈이 실처럼 가늘어지면서 그것은 분명 웃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씨익-하고 기엘을 향해 웃어보인 얼굴은 다시 아래쪽에 웅크리고 있던 시안을 힐끔 바라보 고는 다음 순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다른 어떠한 단어로도 표현할 수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고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회오 리 바람은 갑작스럽게 그 위세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기엘은 너무 놀라서 로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운 역시 같은 것을 본 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시안이 일으킨 거센 돌풍은 이제 서서히 조용하게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꼬마는 어때?” 한차례의 회오리 돌풍이 가라앉고 다시 고요함을 찾은 새벽의 갑판. 그 위에는 탈진한 듯한 몇사람과 이미 시체가 되어 있는 몇 개의 물체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기엘은 탈진한 채 정신을 잃은 시안의 몸을 감싸안고 필사적으로 시안이 기 력을 차리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나도 몰라.” “잠깐 비켜봐.” 로운은 지친 몸을 이끌고 시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 조용하게 단어가 흘러나왔다. 정화의 주문이었다. “로운 디 로크레슈. 메 하니다.” 싸아하는 바람소리에 흠칫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리야는 다시 바람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거 괜찮은거야?” “일종의 치유술입니다. 아까 그런 바람과는 틀리죠.” 기엘이 변명을 했다. 기엘이 보기에도 갑판은 정말 난장판이었다. 수부들이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사건을 수습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방금전에 일어난 일이 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단지 갑작스런 날씨탓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리야는 그들이 시안에게 달라붙어 있는 동안 네구의 시체를 끙끙대면서 한구석에 살며시 옮겨놓고는 굴러 다기는 짐을 몇 개 모아서 그 시체를 감추어 두었다. 돌풍 때문에 난리가 난 선상에 더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젠장할 어쩐지 뭔가 수상하더라니. 사람을 잘 못 골랐나.’ 약간 후회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왠 난리야? 당신들. 이거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이리야가 시비를 걸었지만 기엘이나 로운 둘다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들은척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귀에는 이리야의 투덜거림도, 사람들의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란 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에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은 새파랗게 질려서 쌕쌕거리는 숨소리만을 내고 있는 시안이 었다. “그거 봤어?” “응.” “다른 사람들도 보았을까?” “글세.” 로운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실 자신도 아까 자신이 보았던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로운은 이리야가 낑낑대면서 감추어둔 시체옆으로 다가가서 검은색의 두건을 벗겨보았 다. 시체에 손을 대고 잠시 힘을 불어 넣어보았지만 그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엘의 양은 엘러라 고는 볼 수 없는, 단순하게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일 뿐이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엘러는 아니라는 소리다. “분명히 우리를 노리고 덤벼들었어.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꼬마를 향해서였지.” 기엘은 로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품에는 아직도 기절해있는 시안이 안겨 있 었다. “암살자인가?” “그렇겠지.” “하지만 미메이라 인은 아닌 것 같은데.” “…………….” 로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이들의 정체는 뭘까? 자신들을 노린 것을 보면 절대로 이들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체의 몸을 뒤져보아도 그들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이 미메이라인이 아니더라도 사주한 사람은…….” “그것보다는 시체를 처리해야할텐데. 사람들이 다시 갑판위로 올라오고 있어.” 기엘이 속삭였다. 로운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것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않게 처리 해야하는지 고심했다. 그대로 물에 던져버리면 분명 풍덩하는 소리가 날 것이다. 그렇게 로운이 고민을 하는 사이 이리야가 다시 로운의 쪽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구만. 이게 도대체 무슨 소동인지 이유나 좀 압시다. 젠장 저 말괄량이 아가씨 때문에 목이 댕겅하고 잘리는 줄 알았다구.” 로운은 앞에서 껄렁 껄렁 거리고 있는 이리야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입장으로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처 지가 아니다. “시체처리가 문제겠지? 어때? 이것들 모두 내가 처리를 해줄테니까 적당히 나한테도 사정 을 좀 이야기 해달라고. 나라는 인간은 이유없이 당하는 것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거지?” 이리야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로운을 보며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이래뵈도 속성이긴 하지만 난 어엿한 물의 술사라고. 이정도 처리도 못할 줄 알아? 자. 어 쩔꺼야? 기사양반.” 이리야가 마지막에 붙인 말에 로운은 움찔했다. “좋소. 거래를 하지. 당신이 이걸 소리없이 처리해준다면 적당한 선까지는….” “아아 좋아. 좋아. 그러면….” 로운은 이리야가 소근 거리며 말해주는데로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하나씩 하나씩 시체들을 들어서 배 밖으로 던질 기회를 찾았다. 사람들이 갈기 갈기 찢어진 돛에 우르르 몰려있는 동안 로운은 한구의 시체를 바다 속으로 던져넣었다. 그것을 꼼꼼하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리야는 로운이 시체를 던져버리는 순간에 맞추어 서 배 주위에 큰 파도를 밀려오게 하는 척하면서 길고 긴 물의 줄기가 순식간에 시체를 감 싸 강물 속으로 소리없이 잠기도록 했다. 물의 술사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네구의 시체를 한참의 시간을 들여 처리하자, 로운은 안도의 한숨을, 이리야는 피곤 한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다른쪽에 시선을 끌게 하려니까 이것도 되게 피곤하군. 당신들 운이 좋은 줄 알아. 이런 건 대하인 나하르나 이 폴리카르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구. 이 정도로 큰 강이 아니면 저런 물살이 자꾸 밀려오는 것도 이상하단 말이야.” “고맙소.” 로운은 간단한 단어로 이리야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지친 이리야는 로운이 그러거나 말거나 들은척도 안하고 축축하게 젖어있는 갑판에 벌렁 드 러누웠다. “이유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이젠 좀 쉽시다. 댁도 얼굴이 말이 아니우.” “……….” 하지만 로운은 이리야의 옆에 드러눕는 대신 시안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로운. 이제 어느 정도 진정되신 것 같아.” “그런 것 같군.” “그리고….” 기엘은 가까이 다가온 로운은 손가락을 움직여 더더욱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했다. “다 좋은데. 시안님을 부르는 호칭만큼은 좀 어떻게 해봐. 저사람이이야. 어쩔수 없다지만 앞으로는 문제가 될 수도 있어.” “………” “대답은?” “아아. 알았어. 알았다구.” “좋아.” 기엘이 씨익 웃어보이면서 로운의 어깨를 쳤다. “그건 그렇고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거야. 이놈의 폴리카르는?” “글세? 배에 탈 때 들은 말로는 반나절 정도라고 했으니까. 이제 곧….” 그 말을 누군가 듣기라고 한 것처럼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선장인 것 같았다. “주 돗대에 손상이 많이 가서 앞으로 몇 시간은 더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승객 여러분들 께서는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좀더 걸린다는 군.” “들었어.” 기엘이 대답하자 로운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시안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정말. 이거 문제 많은 녀석이라니까. 젠장. 어떻게 사건 수습은 되었지만.” 하지만 기엘은 불평을 말하는 대신 약간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그보다는 난 아까 그게 뭔지가 더 궁금해. 로운 너도 봤지?” “…응.” “분명히 나랑 눈이 마주쳤어. 은백색으로 빛나는….” “나도 봤어. 그거.” “그렇지?” 하지만 두사람이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그 사건의 와중에 보았던 은백색의 눈을 가진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기엘과 로운 두사람은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날이 밝는 것을 지켜보았다. ◇◆◇ “아으…잘잤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시안님?” 시안은 뿌드드한 몸을 쭈욱 펴면서 기지개를 켜다말고 저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오르는 느끼 함에 화들짝 놀랐다. “에-에엑?”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정중하게 시안에게 물어오고 있지만 시안은 그에 대답하는 대신에 파랗게 질려서 손가락으 로 문제의 남자를 가르키면서 벌벌 떨었다. “기엘…, 기엘!!!!” 시안이 숨이 막히게 기엘의 이름을 부르자 멀리서 얼마 안되는 짐을 정리하고 있던 기엘에 쏜살 같이 달려왔다. “무슨일이십니까? 시안님.” “기, 기엘. 아…아저씨 얼굴이, 얼굴이….”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으, 으아악!! 이 인간 어디 다쳤나봐!!” “…풋.” 시안은 완전한 패닉 상태에 빠져서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로운을 바라보 고 있었다. ‘나, 나한테 존대말을 했어…. 아무도 없는데.’ “푸. 푸하하하하하핫.” 기엘은 파안대소를 하면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웃었다. “푸하하하핫. 하하하하핫.” “뭐야!! 기엘도 어디 이상한거 아니예요? 도대체 내가 자는 동안 무슨일이 있었… 앗!!!” 시안은 그제서야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푸하하하핫.” “그만 웃어. 기엘. 이러라고 한건 너였잖아.” “푸. 푸하하핫. 하, 하지만 너무 웃기잖아. 푸. 푸하하하핫.” 로운은 못마땅한 눈길로 기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이리야가 끼어들었다. “이거 아침부터 왠 웃음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무슨일이슈? 나도 좀 같이 웃읍시다.” “푸. 푸핫.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하하하하.” 시안은 자꾸만 웃고 있는 기엘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말 이 인간도 허파에 바람 든거 아냐?’ 설명을 해주길 바랬지만 로운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고 기엘은 웃느라고 정신이 없는 상태다. 결국 시안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리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요. 아저씨. 제정신인 것은 아저씨 뿐인 듯 하니까 도대체 여기가 어디고 그 배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설명 좀 해주실수 있겠어요?” “어어. 아저씨라니. 난 아직 결혼도 안했고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도 아니야. 고생하느라고 좀 늙어보일지는 몰라도 아직 25살 밖에 안되었다구.” “으윽!! 거짓말!!” “뭐가 거짓말이야!! 사람이 말하면 좀 믿어라. 믿어!” “그래도 거짓말이야. 25살이라니….” “시안님 일단 식사부터 하시지요. 오후에 출발하게 되니까 지금 든든하게 먹어주셔야 합니 다.” 기엘은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시안에게 말했다. “배고프시죠? 꼬박 이틀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셨으니.” “이틀?” 기엘의 말을 듣고 시안이 고개를 파악- 돌렸다. “이틀이나 잤다구요? 내가?” “네. 배에서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그때 시안님께서 무의식중에 힘을 쓰시는 바람에 아마 도 탈진하신 듯 싶습니다.” “아. 맞아. 맞아. 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예요? 도대체 왜.” “해적입니다.” 로운이 뒤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해적?” “네. 해적. 사실 바다가 아니라 해적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폴리카르 같은 강은 워낙에 큰 강이라서 바다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이 종종 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큰일은 아니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로운이 얌전하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역시 시안은 그런 로운의 태도가 너무나 껄끄러웠다. “…이봐요 아저씨 얼굴.” “………….” 로운은 지금까지는 기엘이 한말에 따라서 얌전히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시안이 대뜸 아저씨 얼굴이라고 부르자 꿈틀, 하고 신경이 곤두섰다. 평소 자신의 성격같았으면, 그리고 이런 입장이 아니라면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심 정이었다. “뭐 잘 못먹었어요? 왜 말투가 그래?” “별로, 그냥 잠시간 제 임무와 위치를 잊고 있었던 것 같아서 반성을 했을 뿐입니다.” 로운은 끓어오르는 화를 내리누르며 대답했다. “저어, 나 이거 더 먹어도 되요?” “네. 여기 오리구이 하나 더 주십시오.” 식사시간은 조용했다. 아니 적어도 겉으로는 조용하게 보였다. 하지만 시안은 불안한 마음을 누르지 못한 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살살 눈치를 살펴보지만 어느 누구도 대답해줄만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과연,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길래 로운 이 자신을 향해서 시안님 시안님, 하면서 꼬박 꼬박 존대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전혀 알수가 없었다. “일단 아침 식사를 하시고 나면 기엘이 시안님께 바람술을 가르쳐 드릴 것입니다. 먼저번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금씩 연습을 하셔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 시안은 입에 한껏 오리고기를 쳐넣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 다. “일단 오후에 호로스로 가는 상인 일행에 합류할 것입니다. 레카에서 바로 들어 갔으면 좋 았을테지만 이런 저런 사정도 있었고….” 밥을 먹으면서 시안이 들은 것은 이곳은 폴리카르에 인접한 이오카라는 도시라는 것이었다. 시안이 잠들어 있는 동안 일행은 배에서 내려서 일단 이오카에 숙소를 정하고 시안이 몸을 회복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물론 설명을 듣는 내내 로운과 기엘이 번갈아 가면서 자신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변함이 없 었다. 시안은 온 몸이 간질거렸다. 기엘이 존대말을 해온 것이야 처음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특별하게 이상한 것이 없었다. 하 지만 로운은 그게 아니다. 연일 이어져오던 반말 지껄이와 구박(?)이 한순간에 사라지니 불 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저…저어.” “뭐가 더 필요 하십니까? 시안님?” 대뜸 로운이 대답하자 시안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푹 숙였다. “스…스프 한 그릇 더 먹으면 안될까요?” “안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드십시오.” ‘젠장할…. 너무 이상해!!!!’ 시안은 속으로 절규 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구!!!!’ ◇◆◇ “여기부터가 호로스입니다.” 시안은 탁트인 넓은 평야의 앞에 서 있었다. 군데 군데 나무들이 서있는 그 평야는 짙게 녹음이 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럭 저럭 푸른색 의 평야라고 봐 줄수 있는 그런 광경이었다. “헤에- 생각외네. 여긴.”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불의 나라라고 하니까 사실 난 온통 사막이 아닐까 생각했거든.” 시안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제 호로스에 처음 발을 디디는 사람들 누구나가 한번쯤은 이런 호로스의 풍경에 놀라 넋 을 잃고는 하기 때문이다. “읽으신 책중에 호로스에 대한 책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군요. 분명 호로스는 불의 나라가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통 불바다로 이루어져 있는 나라는 아닙니다. 물론 사막지 대가 있기는 하지만 만일 온통 나라가 사막이라면 사람들이 살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만.” “일단 오늘은 이곳에서 좀 쉬도록 하지요. 호로스에는 이미 연락이 취해져 있는 상태니까 얼마안가서 사절이 올것입니다.” “사절?” “일단은 국빈이신걸요. 시안님께서는.” “그. 그런가?” 시안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자. 시안님. 어제 알려드린 것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호로스의 국경 옆의 작은 마을. 그 작은 마을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여관 2층에서 시안은 끙 끙대고 있는 중이다. 이유라면 다른 것이 아닌 바람술의 연습. 겉으로는 살살 웃고 있는 기엘이지만 일단 ‘선생’이 되어버리면 상당히 엄하다는 것을 시 안은 몸소 깨닫고 있는 중이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쉴드. 바헬.” 부웅하고 가볍게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시안이 온몸에서 내뿜은 기운은 주위의 공 기를 밀어 붙이면서 자연스럽게 공기로 이루어진 쉴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이리야는 재미있다는 듯이 중얼 거렸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저 아가씨 대단한걸?” “…………….” 로운은 특별히 이리야의 말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사실 뭐라고 말하기도 그랬다. 어쩔수 없는 상황 때문에 살짝 시안의 신분을 적당하게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가 대뜸 자신 들을 따라오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에에. 정말?” “정말입니다.” “호오… 이거 뜻밖인데?” 이리야는 넋을 잃고 잠들어 있는 침대위의 시안을 힐끔훔쳐보았다. “진짜 저 아가씨가 미메이라의 귀족 아가씨란 말이야?” “그렇습니다.” “세상구경을 시킨다는 말이 이해가 가기는 가는 군.” 로운과 기엘이 의논을 한 결과 이리야에게는 시안이 어느 정도는 신분이 있는 집안의 막내 딸이라고 말한 것이다. “저런 아가씨를 사절로 내보내다니. 거기다가 수행원을 둘뿐이라고 한다면, 저 아가씨 아버 지도 강심장이로구만.” 이리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약간의 의구심이 일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나라에 사절을 보내면서 수행원이 둘 뿐이라는 것은 역시 뭔가 수상한 점이 있었다. “그럼 자네들은?” “기엘은 기사입니다. 그리고 저는 수행 신관이죠.” 로운은 간단하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하지만 이리야의 반응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뭐라구? 당신이 신관이라구? 말도 안돼!!!” “왜. 제가 신관이라니 믿어지시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맹세코 나는 신관이 그렇게 검을 잘쓰는 것은 처음 봤다구. 말도 안돼. 기사라 면 몰라도.” 로운은 싱긋 웃었다. “미메이라에서는 신관이라고 해도 어느정도까지는 검술을 배우게 되어있습니다. 적어도 자 신의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그런 몸 놀림은….” “신관이라고 해서 언제나 비실 비실하게 주문만을 외우고 기도만 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 합니다.” “세상에…, 정말 믿을 수가 없구만. 이거.” 이리야는 이마를 짚어가면서 놀라움을 표시했지만 로운은 그저 싱긋 거리며 웃기만 했다. “허허. 참나. 나도 나지만 정말 참….” 이리야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기사와 신관이 대동하는 귀족집안의 아가씨. 그중에서도 그 문제의 아가씨는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본 어느 엘러보다도 더욱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밝힌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분명 저 은발의 소녀는 좀더 높은 신분의 사람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말하는거나 하는 태도로 봐서는 영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이리야에게는 뭐라고 해야할까? 아주 어릴때부터, 그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보 통 사람과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일종의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궁금증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더 큰, 호기심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징병아닌 징병으로 카드미엘에 끌려가 물의 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더더욱 커 져갔었다. 과연 엘러라는 존재라는 것은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그들이 가진 엘이라는 것은 왜 보통 사람들과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일까? 또한 자신은 어째서 엘러로 태어났을까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궁금증이었다. 그때문일까? 그는 이 일행을 보면서 왠지 이들이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마음속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고나서 고개를 들었다. “결정했어. 나도 댁들을 따라 가겠어.” “…………?” “예?”‘ “일이 이렇게 되었고 내 내력도 밝혔고, 그리고 당신들 내력도 알게 되었잖아? 게다가 나 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물의 술을 배웠고, 실제 지난 번 일에서 내 능력도 꽤나 쓸 모가 있다는 것도 증명했고. 그러니까 난 당신들을 따라가겠어.” “그, 그건 좀 곤란 합니다만.” “이봐. 이봐.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라구. 어차피 당신들 목적은 저 시안이라는 아가씨를 무사하게 보호하는데 있잖아? 바람술을 쓸 수 있다고 해도 당신들 능력으로 안되는 일도 있 을 거야. 뭐 오래도록 따라다니겠다는 것은 아니야. 적당한 때가 되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날 테니까.” “그렇지만….” “안 됩니다.” 기엘이 그의 말을 듣고 난감해 하고 있는데 옆에서 로운이 딱잘라서 거절을 해버렸다. “물론 이리야씨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었 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희들은 시안님을 보호하는데 전력을 다 해야하는 판입니다. 당신 까지 신경쓸 여력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소리가 그거 아니야. 나를 옆에 두면 적어도 물의 술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는 커버해 줄 수 있지 않겠나는 거지. 안그래?” 절대로 안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로운, 물론 기엘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리야는 방글 방글 웃는 얼굴로 계속 말을 했다.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정말이야. 어차피 나도 떠돌아 다니는 입장이고 사실 솔직히 밝히자면 난 신국인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있어. 난 제국인이고 평범한 농부의 아들인데 당신들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잖아? 왜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인지 사실 궁금 하다구.” “저희들은 그런 것을 가르쳐 드릴 만한 지식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상관없어. 난 그냥 궁금할 뿐이니까. 단지 그냥 옆에 있다가 뭔가 한두가지 깨닫게 되는 정도로 난 족해. 응? 어때? 진짜로 귀찮게 하거나 걸리적 거리지는 않을테니까.” 태도나 말투는 껄렁 껄렁해도 그의 진심은 충분히 로운과 기엘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그가 말하는 것 보다 훨씬 간절하게, 그리고 진심울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곤란한데….” 기엘은 계속 난감함을 표시하고 있었고 로운은 아무말 없이 시안이 누워 있는 침대만을 바 라보았다. “그런데 왜 저 아저씨가 우릴 따라오는 거죠?” “그냥. 여행을 좀 하시고 싶다고 하시는 군요. 이리야씨는.” “그럼 자기 혼자 다니면 되잖아요. 그래도 되는 건가?” “일단 현재로써는 저사람이 따라온다고 해서 안될 이유도 특별히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물의 술을 좀 알고 있으니 시안님께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당분간만 동행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사실 로운과 기엘이 의논 끝에 이리야를 동행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은 역시 그의 능력을 높 이 샀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 지난번 배에서의 습격 때 증명되었다. 시 안에게는 그저 해적이었다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분명 배후를 모르는 어떤 존재가 그들, 특 히 시안을 노리고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이라도 아군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더 있는 쪽이 유리하 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 이리야씨 이야기로 딴생각하지 마시고 어서 해보십시오. 다음에는 정화의 주문입니다. 역시 어제 가르쳐 드렸죠?” “에이. 정말이지.” 시안은 투덜 투덜 대면서 다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사실 농땡이를 피우고 싶은 마음도 없 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시 바람술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시안으로써는 기엘이 하나 씩 하나씩 가르쳐 주는 주문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꼭 주문을 외우실 때 앞에 이름을 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좀더 정 신을 집중하는 동시에 일종의 증폭력을 위한 것이니까요. 기본적인 주문만으로도 충분히 연 습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왠 잔말이 그렇게 많아. 쳇. 아저씨 얼굴만 잔소리를 하는 줄 알았더니 기엘이 더하잖아.” “하하하.” 시안은 눈을 감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아직 그는 로운이나 기엘처럼 자유자재로 바람술을 쓸만한 실력은 안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주문을 외울때면 하나하나 신경을 집중해서 자신이 만들어내는 엘을 컨트롤 해야했다. “메. 하니다.” 가슴 앞에 모은 손바닥 사이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시안의 엘이 만들어낸 바람의 가락은 살아 움직이면서 손바닥 사이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우웃. 간지러워.” “정신을 집중하세요. 금방 흐트러지지 않습니까?” 기엘의 잔소리에 시안은 뚱-하게 입술을 내밀고는 손바닥사이의 느낌을 온몸으로 퍼져나가 도록 했다. 기본적으로 시안은 바람의 술을 쓰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문제는 자신이 만들어 낸 힘을 어떤 작용을 하게 하느냐는 것. 나지막한 기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시안은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그 신기한 감각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엘을 사용하기 시작했을때만 해도 마치 수만마리나 되는 벌레가 꿈틀거리면서 자신의 몸속을 파고 드는 것이 아닐까 할정도로 불쾌하게 느껴졌던 그 감각은 이제 시안의 감각과 하나가 되면서 사뭇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실같은 바람이 손바닥에서 시작되어 피부를 뚫고 신경을 거슬러 올라갔다. 손가락끝에서부 터 발끝까지 온몸이 시원한 바람을 맞는 기분이들었다. ‘신기해. 마치 몸 속에서 바람이 부는 것 같아.’ 정화의 바람은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일종의 치유술이다. 특히 바람에 속한 엘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메. 하니다의 주문은 거의 모든 상처 와 병을 치료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주문. 그것은 피곤한 몸을 다시 활발하게 돌려주는 역할까지 해낸다. 온몸의 신경을 따라 엘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시안의 몸 구석 구석이 그에 반응하여 깨어나 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액체의 소리까지 시안의 귀속으로, 정확하 게 말하면 시안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한참을 그런 상태에 있던 시안은 무엇인가 자신의 몸속에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것이 있다 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이건…뭐지.’ 그것은 꼭 몸 어디에 있다고 말하기도 힘든 이상한 감각이었다. 강하면서도 따스하고, 그러면서도 예리한 느낌. 시안의 엘은 그에 접근하기는 했지만 그 안으로 파고 들지는 못했다. “기엘. 시안님은?” “아아. 마아세의 상태로 접어드신 것 같아. 뭐 이런 상태로 있는 것은 감각을 익히는데 상 당한 도움이 되니까 잠시 이대로 두려고.” “마아세? 그건 뭡니까?” “아. 이리야씨.” 아까부터 시안과 기엘이 하는 꼴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이리야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기엘은 로운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리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뭐랄까. 단어는 조금 틀리겠습니다만 아마도 물의 술에도 이런 것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 다. 시술자가 엘의 운용법을 배울 때, 가끔 이런 현상이 생기지요. 자신이 만들어낸 힘을 다 시 몸 속으로 받아들여서 있는 그대로의 힘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까요? 시안님께서는 조금 전에 정화술을 연습하셨는데 아마도 그 정화술을 만들어낸 엘 그자체에 빠져드시게 된 것 같습니다.” “흐응. 나도 될까?” “아마도 가능하겠죠. 정화술을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것은 배우지 못했어. 내가 배운 것은 주로 공격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치유술 을 조금 배우긴 했지만 제대로 배우기 전에 튀쳐나왔기 때문에.” “흐응.” 기엘은 고개를 조금 갸우뚱 했다. 물의 술사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힘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치유술이라는 것은 신 국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불과 바람술사들은 파괴적인 공력능력을, 물의 술사는 치유력을, 마지막으로 땅의 술사는 방 어력을 쓸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엘은 가장 활발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미메이라에서 신관을 선발할 때 바람의 엘이외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를 선호하고, 그 때문에 복합적인 능력을 가진자만을 선택한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괜찮으시다면 정화술이나 치유술을 조금 가르쳐 드릴까요?” “예?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당신들은 바람술사인데?” “기본적으로 바람이든 물이든. 가지고 있는 엘은 신력이라고 하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지 요. 저는 조금 부족합니다만 로운의 경우에는 신관이기 때문에 물의 술도 어느정도 알고 있 습니다. 어떠신지?” 이리야는 놀랍다는 표정을 하면서 로운을 바라보았다. 로운은 내키지는 않는 다는 표정이었 지만 결곡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일행이 되었으면 좀더 쓸모있게 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물의 술은 사실 치유술에 국한 된 것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배우시 겠다면 가르쳐드리죠.” “나야 그러면 고맙죠. 이야. 세상에 바람술사에게서 물의 술을 배울 수 있을줄이야. 역시 내가 선택은 잘 했군.” “그렇게 생각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오오. 좋죠~.” 로운이 이리야에게 몇가지 치유술의 주문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에도 시안은 계속 마아세라 고 부르는 상태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마아세와는 조금 달랐다. 기엘이나 로운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바로 곁에서 이리야가 자신의 엘을 쓰고 있었 기 때문이다. 기엘이 조금만 더 시안의 상태를 민감하게 관찰했다면 지금 시안의 몸에서 시안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힘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엘이 미미하게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젠장 다른데는 다 되는데 왜 이거만 안되는거지?’ 시안은 조금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온몸을 시원스럽게 관통하던 의식이 딱 한 부분에서만 멈추어서 도무지 노력을 해봐도 움직이질 못했다. 한참을 씨름하고 있는데 시안은 그 문제의 부분, 또는 ‘그것’에서 어떤 움직임이 시작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동그랗게 뭉쳐있는 그것에서 살그머니 어떤 형태가 고개를 들더니 마치 사과에서 벌레한마 리가 꼬물거리며 기어나오는 것처럼 빠져나왔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그머니 빠져나와서 마치 어항속을 헤엄쳐 다니는 금붕어처럼 시안의 몸속, 정확하게는 시안의 엘이 만들어낸 공간에서 여기저기 탐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상하게도 시안은 전혀 거부감 없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시 안의 엘과 하나가 되어 있는 던 것처럼 시안의 의식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와 하나이면서 또 다른 것?’ 문득 시안의 머리속에 자신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받아들었던 풍옥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이건 그 풍옥이라는 건가? 설마?’ 그 생각이 들자마자 시안의 의식속을 헤엄쳐 다니던 그것이 반응했다. 마치 자신을 알아봐 주어서 기쁘다는 듯 움직이더니 순간 파악--하고 부풀어 올랐다. 쏴아아아아----. 시안의 몸에서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시안님?” 기엘이 옆에서 정화술을 배우고 있던 이리야를 보다말고 놀라서 시안에게로 다가갔다. 맑고 청량한 공기가 시안의 몸 속에서 퍼져나왔다. 그것은 주위 모두를 정화시키는 것처럼 기엘의 몸 속에도, 로운과 이리야의 몸속에까지도 파고 들었다. 바람과 함께 시안의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면서 주위로 퍼져나갔다. 은빛으로 반짝 이는 머리카락은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한 노을 빛을 받아서 붉으스름한 은빛으로 화하여 온 방안을 반짝임으로 가득채웠다. 기엘은 자신의 눈에 비치고 있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일었다. 쏴아아아아---- 그 청량한 기운은 처음 시작되었을때와 마찬가지로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차차 가라앉았다. 그것이 가라 앉자마자 시안이 반짝하고 눈을 떴다. 하지만 시안이 눈을 뜨자 마자 한 말은 기엘의 감동을 여지없이 산산조각을 내버리는 거친 말이었다. “젠장할!!! 머리가 이게 뭐야!!!! 빌어먹을!!” 바람에 흩날렸던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미친 듯이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시안이 대뜸 화 를 내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에잇!! 젠장 가위줘 가위!!! 으아아아악!!” “시안님~.” 기엘은 감격이 깨진 것을 아쉬워 할새도 없이 시안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시안님 조금만 더 참으세요. 제발.” “싫어!!! 가위 내놔!!! 안내노면 이 놈의 머리카락 전부 뽑아 버릴거야!!” “시안니~임.” 난리 법석이 벌어지기 일보직전. 누군가 그들이 머물고 있는 방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기엘. 시안님 좀 진정 시켜!!” 멍청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로운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십니까?” 문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전에 로운은 이미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문 밖에 서 있었지만 그들이 내뿜 고 있는 엘의 기운이 그들이 누구인지 이미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로스의 카와라고 합니다.” 로운은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문을 열고 그들을 맞았다. 불꽃같이 타오르는 듯한 머리색을 지난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짙고 검 붉은 눈동자의 그들은 한눈에 보아도 그들이 호로스인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와 쇼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메이라의 프리스트, 로운 디 로크레슈입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남자에게 로운 역시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로운이 살짝 몸을 비틀어 그들은 안으로 인도하자 제일 앞장 섰던 남자가 차고 있던 검을 옆으로 치우면서 시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로운이 살짝 몸을 비틀어 그들은 안으로 인도하자 제일 앞장 섰던 남자는 침대위에 은백색 의 찬란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앉아있던 시안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뚜벅 뚜벅 걸어 갔다. 기엘이 한쪽 옆으로 물러섰다. “호로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안은 소리를 지르다 말고 멍청하게 그 붉고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들이 하나둘씩 자 신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3. 호로스 “이전에 가르쳐 드린데로만 하시면 됩니다. 시안님.” “알았어요. 알았다구. 젠장. 뭐가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시안은 귓가를 간지르는 장신구가 자꾸 신경을 거스르는 것을 느끼면서 투덜 거렸다. 두번 다시 입고 싶지 않았던 예복이건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는 터라 더이 상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시안이 지금 걷고 있는 곳은 호로스의 수도 나카리안의 한가운데 세워진 수장궁의 접견실로 이어지는 붉은 양탄자 위였다. 발걸음 소리를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붉은 양탄자의 위를 시안은 최대한 얌전한 걸음걸이로 걸으면서 혹시라도 머리에서 장신구가 떨어져 나가지는 않을까, 또는 혹시나 잘못 걸어서 치맛자락을 밟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제법 얌전히 위엄있게 걷고는 있지만 아무리 봐서 위태위태한 걸음걸이를 지켜보고 있는 기 엘과 로운의 마음속 역시 위태위태하기 짝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호로스의 사람들이 시안이 머물고 있는 여관에 들이 닥치는 바람에 너무 놀라서 아직도 심장을 두근거리고 있는 이리야는 현재 수장궁의 건너편에 위치한 소궁에 머물로 있 었다. 그리고 시안과 나머지 두 사람은 이렇게 부랴부랴(?) 호로수의 수장을 접견하기 위해 지금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저어. 시안님.” “………….” “어디 불편하신데라도 있으십니까?” 기엘은 얌전(?)하게 시키는데로는 하고 있지만 훨씬 이전부터 약간 불규칙적인 엘의 파장을 만들어 내고 있는 시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거 없는데요?” 시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물론 시안은 불편한 곳이 있었다. 그것은 기엘이 상상하는 것처럼 육체적인 것은 아 니다. 시안이 불편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른바 ‘심기’라고 말하는 것, 즉 기분이 나빴다 고 하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시안은 나름대로 미메이라의 키리엔에서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정도의 환영인파내지는 그에 준하는 환영 행사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터였다. 물론 그런 자리는 몸이 뒤틀릴 정도로 답답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 화끈해지는 자리긴 하지만 역시 사람마음 이라는 것이 간사해서 그런지 은근히 그런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호로스에 도착해서 나카리안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나카리안에 도착해서 지금 이 렇게 수장을 만나러 가는 그들의 일행은 환영을 받기는 커녕 무슨 밀사라도 되는 양 취급받 고 있었다. 그런 것을 알리 없는 기엘은 단지 연약(?)해 보이는 시안의 몸 어딘가에 또 다른 이상이 있 는 것이 아닌가 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시안이 속으로 꽤나 궁시렁 거리면서 걸어가는 동안 어느새 그들은 목적지에 다달아 있었 다. 그들이 굳게 잠겨져 있는 석조문 앞에 다다르자 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탁 트인 공간. 그 앞으로 어두운 붉은 색의 양탄자가 넓게 깔려 있는 바닥이 보였다. 시안은 안내에 따라 그 안으로 할 발자국을 디디려다가 말고 움찔했다. 무엇인가 강한 반발력이 있는 무형의 힘이 그를 향해 뻗쳐오고 있었다. “…웃.” 시안이 느끼고 있는 그 감각을 기엘이나 로운도 비슷하게 느낀 듯 뒤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났다. 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팔을 내밀어 두 사람의 앞쪽에 내밀었다. 강한 열기를 한몸에 받고 있던 두 사람은 시안이 한쪽팔을 내미는 순간 숨쉬기가 조금 편해 진 것을 느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자신들을 향해 밀려오던 그 무형의 힘이 무엇인지 눈 치를 챘다. 그 힘은 이 나카리안의 주인, 호로스의 수장이 온 몸에서 내 뿜고 있는 강한 엘이 주는 파 장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호로스의 수장이 역대 어떤 수장보다도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 라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호로스의 수장이 수장 계승자이던 시절, 지금의 시안과 마찬가지로 미메이라의 키리엔을 방 문했던 것은 벌써 20여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 멀리서 단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니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두사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후훗-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강한 엘의 파장을 타고 세사람에게 전해져 왔다. 시안은 왠지 자신도 모르게 엄숙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서 두 사 람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예?” “더 가까이 가면 왠지 안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시안이 하는 말에 기엘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특별한 위험이 느껴지는 기미는 아무것도 없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만 류하는 것이다. “그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으음.” “………….” “뭐라고 해야하나 그러니까…, 여하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아마도 무슨 말씀이신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두분께서는 잠시 밖에서 기다리시지요.” 멀리에서 다시 단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엘과 로운은 그 말을 듣자마자 살짝 예를 올리고는 황급하게 문 밖으로 물러났다. “반갑습니다.” “에에. 저두요.” 기엘과 로운이 문 밖으로 사라지고나자 마자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았는데 붉은 색의 드 레스로 온 몸을 감싼 여성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서 인사를 했다. 시안은 좀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나름데로는 여유있게, 하지만 상당히 예의에는 어긋난 인사 를 하고 말았다. “아. 이. 이게 아닌데. 우우… 어떻게 하더라.” “후훗. 괜찮습니다. 이미 사정은 알고 있으니까.” “예? 설마… 아줌마도 알고, 앗! 틀렸다. 폐하…도 아니고. 뭐라고 부르면 되더라. 젠장.” 혼자서 궁시렁 궁시렁 거리는 시안에게 호로스의 수장, 레나텐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레나텐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저는 시안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예? 무, 물론이죠.” 시안의 머릿속이 새하예졌다. 이곳에 들어오기전 기엘과 로운이 번갈아 가면서 밤새도록 외 우게 했던 공식적인(?) 인사말이며 기타등등 의례적인 단어들은 이미 어디론가 홀라당 사라 지고 없었다. ‘으으. 도대체 뭔 말을 하면 되는 거냐. 젠장.’ “대접이 소홀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원래, 수장 계승자의 방문은 공식적이면서도 또한 비 공식적인 것이라…, 부디 마음 상하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 시안은 손바닥을 타악-하고 쳤다. 그제서야 자신들이 이곳에서 무척이나 정중한 대접을 받 고는 있지만 마치 밀사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젠장. 이런 거는 좀 미리미리 말을 해주면 안되나.’ “쉬운 일이 아니실 텐데, 정말 훌륭하시군요. 아참. 이쪽으로 오세요. 이렇게 서서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천천히 다과라도 드시면서 이야기 하시죠.” 시안은 그녀의 말에 식은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면서 뒤를 따랐다. 분명 처음에 시안이 들었던 것과는 뭔가 약간 틀린 느낌이다. 그놈의 흰 수염을 잔뜩 길은 대제사장 양반에게 들었을 때는 그냥 가서 시안이 새롭게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가 되었다 고 알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말이다. ‘다과만 하면 되는 건가.’ ◇◆◇ “어? 왜 당신들만 오는 거야? 아가씨는 어떻게 하고?” “아아. 누구를 좀 만나시느라구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서 일단 저희들만 먼저 돌아왔습 니다.” 로운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벌렁 긴 의자 위에 드러누웠다. 그것은 기엘도 크게 틀리지 않아서 로운 처럼은 하지 않았지만 역시 푹신한 의자에 털썩하 고 주저 앉아서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힘들군.” “그러게나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지? 아참 저기 신관 양반, 나 좀 봅시다. 지난 번에 가르쳐준 주문들이 좀 잘 안 되서 말이야.” 이리야는 탈진한 듯한 두 사람이 왜 그런것인지 좀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물어보았자 그들이 별로 대답을 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내 호기심을 지워 버렸다. “분명히 안되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안 된다구.”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이리야가 끙끙 거리고 있자 로운이 코웃음을 치면서 중얼 거렸다. “굉장히 예민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둔하군.” “어이 이봐. 그게 무슨 소리야.” “하기가 그렇기는 해. 이리야씨. 혹시 몸에 이상 없으신지?” 기엘도 로운의 말에 동의를 표하면서 이리야를 향해 물었다. 이리야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는 주문 연습을 하려다 말고 뚜벅 뚜벅 걸어와서 허리에 손을 얹고는 조금은 따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뭐. 별로 이상이 없으시다면 괜찮겠습니다만.” “이봐. 이봐. 매사에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지 말라구. 인간들이 말이야 좀….” 한잠 잠이라도 청하고 싶은데 자꾸만 이리야가 껄렁거리면서 말을 걸자 로운은 슬슬 신경질 이 났다. “정말이지. 입을 다물라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좋소. 딱 한번말 말할테니까 잘 들어둬 요.” “그 소리 정말 잘하는군. 입버릇인가?” 빠직소리가 나는 것처럼 착각이 들정도로 로운이 살벌한 눈빛으로 이리야를 노려보았다. “어어,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라구. 자아 자아. 선생님 부족한 제자는 아무래도 모르겠사오 니 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이리야는 장난기를 섞어가며 말한후 로운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참나. 나던 화도 사라지는 군. 에이 귀찮아. 기엘. 네가 설명해줘.” “이봐. 이리야씨를 가르치는 것은 너잖아. 시안님을 가르치는 것을 나한테 다 떠밀때는 언 제고.” 기엘이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로운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여기는 호로스, 불의 땅이지. 말하지 않아도 그정도는 알테고, 불의 땅에는 다른 어떤 것 보다 불의 신 호로스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 때문에 다른 성격의 엘은 그만큼 제제를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죠.” “흐응. 그건 이해가 가.” 사실 이리야도 호로스의 대지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뭔가 조금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 다. 단지 그것이 불편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진짜 주문을 외우려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연습정도의 주문은 아무래도 발동되기가 힘들다고 해야할까? 암튼 그런겁니다. 게다가 우리들은 바람의 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다지 문제가 없지만 이리야씨의 엘은 물, 즉 불과는 상극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거라서 아 무래도 힘이 좀 드실 겁니다.” 로운의 설명에 이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주문을 배우면서 신국들에 대한 정보를 접 해보지 않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몸으로 체험해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배우고 있다는 생각에 이리야는 약간의 감동마져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그분은 대단했던 것 같아.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 였으니.” 기엘은 조금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말을 했다.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숨이 막히도록 강하게 느껴지던 강한 불의 엘. 그것을 떠올리다가 기엘은 문득 시안이 그때 손을 들어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가해지는 힘 을 차단시켜 주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기엘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로운. 그거 자각을 하시고 한 행동이었을까?” “뭐?” 설명을 마치고 이제야말로 한숨 자보려고 했던 로운은 한쪽눈을 빼꼼하게 뜨고는 건너편의 기엘을 바라보았다. “아까 말이야. 문이 열리자 마자 시안님이 팔을 들어서….” “아. 그거. 글쎄? 자각을 한 거라고 하기는 그렇겠지 아무래도.” “그럴까?” 로운은 조금전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무의식적으로 했을지는 몰라도 분명 시안은 자신들의 앞에서서 팔을 들어 그들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로운의 가슴 한 구석이 지끈하고 아파져 왔다. ‘쳇. 그런 꼬마녀석.’ 보호를 하는 것은 자신들이지 시안이 아니다. 로운은 자신의 가슴속 한구석이 지끈거리는 것이 단순하게 자존심이 상해서라고 그렇게 결 정을 지었다. ‘쳇. 그 정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데….’ 한편 시안은 어쩔수 없는 당혹감과 함께 호로스의 수장인 레나텐과 함께 다과 아닌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즐긴다는 표현은 레나텐의 입장에서만 가능한 것이긴 하다. “어떠신가요? 이곳에서의 생활은? 아니 정확하게 하지요. 이곳 아슈레이는 마음에 드십니 까?” “예? 아. 아하하하하.” 시안은 뭐라고 대답할 수도 없어서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역시 이 여자는 자신의 정체(?)을 눈치 채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시안 의 등에는 식은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타오르는 불꽃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레나텐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 고 있다. 언 듯 보아서는 정확한 나이를 판별하기 힘들정도로 레나텐의 외모는 굉장히 젊게 보였다. 하지만 왠지 시안은 그녀가 꽤나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저희 호로스에서도 시안님과 같은 분이 계셨었지요.” “아. 그런가요?” 문득 그저 맞장구를 치던 시안은 다음 순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라구요---오!!” “오래전이긴 하지만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사실이겠죠. 왜 놀라우십니까? 시안님께서 그 당사자이시면서.” “예? 그, 그렇기는 하지만.” 레나텐의 말에 대답을 하다 말고 시안은 입을 막았다. ‘아뿔싸! 유도 심문(?)에 넘어 갔다.’ “그렇게 놀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수장정도 되고 보면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것을 한두개쯤은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법이지요. 실제 시안님께서 저를 처음 만나실 때 제 힘으로부터 그 기사분들을 보호하시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시안은 레나텐에 지금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눈을 껌벅였다. “후훗. 의식적으로 하신 행동은 아니셨나 보군요.”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만 하고 있다고 시안은 생각했다. “보통은 아무 이상이 없겠지만 아무리도 로열 나이트에 신관이다 보니 그 두분은 제 힘을 강하게 느끼시는 것 같더군요. 그래, 시안님은 어떠신지?” “예? 뭐. 그냥. 뭐랄까 뭐 안 느껴진다고 하기에도 뭐하고….” 시안은 머리를 긁적이려다 말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왠지 실례되는 행동이 아닐까하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 시안의 행동을 지켜보던 레나텐을 살짝 말을 돌렸다. “같이 오신 분은 물의 술사 이신 것 같더군요.” “아아. 이리야씨요? 맞아요. 물의 술사죠. 나유사람은 아니라고 하지만.” “흥미있는 분이로군요.” 방글 방글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면서 말을 하는 레나텐을 보면서 시안은 점점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가 바늘 방석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여자와 이렇게 말을 나누고 있어 야 하는 걸까? “피곤하시죠?” “예? 벼, 별로….” 엉겹결에 대답을 하다 말고 시안은 아차 싶었다. 이럴때는 네! 피곤합니다. 그러니 이제 가 서 좀 쉬었으면 하는데요. 라고 말을 해야했었을텐데 워낙 긴장하고 있던 터라 그만 대답이 엉뚱하게 나와 버린 것이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아마도 여독이 많이 쌓이셨을 겁니다. 며칠 푹 쉬시도록 하세요.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모든 편의를 보아드리겠습니다.” “네? 아. 예. 감사합니다.” “아마 아슈레이의 중간지대로 접어들면 그렇게 쉽기만 한 여행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리 미리 쉴 수 있을 때 쉬어 두는 것이 좋으실 거예요.” 조용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얌전히 듣고 있다가 시안은 문득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중간지대? 방금 저 사람이 중간지대라고 말했지? 분명히?’ “아. 저. 죄송합니다만….” “뭔가 물어 보실 것이 있으신가요?” “저어 괜찮으시다면, 그러니까. 레나텐님이 그 중간지대로 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조금 해주 시면 안될까요?” 시안은 쭈볐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시안의 이런 질문은 아주 가벼운 웃음과 함께 완벽하게 거부 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저도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그곳에 도착하시면 모든 것이 자 연스럽게 이루어 질거라고 밖에는요.” “그것 뿐?” “네. 그것 뿐입니다.”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레나텐이었지만 시안은 그런 레나텐의 얼굴에 마음 같아서 는 주먹을 있는 힘껏 쥐고 한 대 후려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젠장할 사람이 진지하게 물어 보면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어야 할거 아냐!! 이 아줌마나 전의 그 전수장이라는 아저씨나. 왜 하나같이 수장이라고 하는 인간들은 모조리 이모양이구 우!’ “실비아.” “네 부르셨습니다. 레나텐님.” 레나텐의 부름에 금방 시녀 한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안님을 정중하게 모시도록 하세요. 많이 피곤하실테니 잘 보살펴드라고 전하고….” “예.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저를 따라오시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시안님, 또 언젠가 당신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실비아라고 불린 시녀는 부지런히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그바 람에 시안은 뭔가 좀더 물어 볼 수 있을 만한 기회를 놓친채 헐레벌떡 레나텐에게 인사를 하고 그 방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 쿵-하는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러왔다. 순간, 시안은 자신이 조금전에 들었던 이야기중에서 자신이 가장 궁금해 하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헉!! 자, 잠깐. 못 물어 본게 있잖아!!’ “저. 저어….” “예.” 시안은 말을 꺼내려다 말고 지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인사말을 하던 그 레나텐의 표정이나 분위기로 보아 아마도 이제 이곳을 떠날때까지 그녀를 만날 기회는 없어 보였다. ‘젠장.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있었더 라면 좋았을텐데.’ 시안은 레나텐이 자신과 마찬가지의 경우로 이 아슈레이에 온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 었다. 그때는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라 그냥 넘기고 말았지만 레나텐에게 제대로 물었으면 자신이 이곳 아슈레이에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들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치 파도와 같은 후휘가 시안의 등뒤로 덮쳐왔다. ‘제길. 운이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으윽. 나라는 녀석, 정말 바보였어!!’ 시안은 후회에 또 후회를 거듭하면서 비참한 걸음걸이로 시녀의 뒤를 따라갔다. ◇◆◇ “후우- 확실히 호로스가 다른 곳보다 덥기는 더웠던 것 같군.” “아무래도 그렇지요? 나카리안을 벗어나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원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시안님 마차는 괜찮으신가요?” 기엘은 말고삐를 조금 늦추어 속도를 낮춘 다음에 마차안에서 얌전히 앉아있는 시안쪽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싫어.” 대뜸 시안은 투덜 거렸다. 하지만 그런 투덜 거림에도 이젠 이골이 난 듯 기엘은 조금만 더 참으시면 된다는 말을 해 준후에 다시 마차 앞쪽으로 차고 나왔다. “기엘. 넌 매번 그런 똑같은 말만 할 거면서 뭐하러 반복하는거야?” “하하. 심심하실 것 같아서.” “하이고~.”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 오는 방향쪽으로 열심히 말을 몰고 가던 로운은 기엘이 수시로 시안 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보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워서 시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엘의 파장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오늘 아침 일찍, 여장을 꾸리던 기엘과 로운 두사람을 갑 작스럽게 호로스의 수장인 레나텐이 찾아왔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격실을 차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잠깐, 한두마디 꼭 해두어야 할 말이 있어서 왔을 뿐이니까.” 레나텐이 손짓을 하자 그녀 뒤에 줄줄이 늘어서 있던 일행들이 모조리 자리를 피하고 그 자 리에는 레나텐과 나머지 두 사람만이 오도카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신지.”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한다고 그리 놀라지는 않았으면 하지만, 혹시 당신들….” 레나텐은 말을 하려다 말고 뭔가 조금 난감한 듯 하던 말을 끊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무엇 인가 단어를 고르는 듯한 느낌이다. “아니 그럴 수는 없는 것이고, 혹시 시안님에게서 이상한 것을 느끼시지 않았나요?” “예?” “뭐랄까, 나쁜 기운은 아니지만, 그래요. 확실이 이상하다고밖에는 표현이 안되는 군요. 아 무튼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 기엘과 로운 두사람 모두 입을 다물로 레나텐의 말에 귀를 기울었다. “그녀의 엘이 조금 이상한 느낌을 주더군요. 나로서도 뭐라고 정확하게 판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고 해야하나?” 레나텐의 얼굴은 어느새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상한 것이라.’ 로운은 레나텐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 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얼마전에 보았던 그 정체 불명의 은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것’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이 이상하기는 하지. 하지만….’ 기엘과 로운이 번갈아서 시안의 상태를 충분하리 만치 열심히 살펴보고 있기는 했다. 하지 만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뿐. 그것은 바로 시안의 엘이 일반적인 사람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과 그 강함이 뭔가 비 정상적 으로 표출 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시안은 멀쩡하게 잘 걸어 다니고 멀쩡하게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보통의 경우 엘러라고 불릴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엘에 조금의 이상이라도 생기면 곧장 그것이 몸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안님께는 현재로써는 이상이 없으니 정말 뭐라고 말하기도 힘들군.’ “저기. 기엘.” “어이 기엘. 부르신다.” “아! 이런….” 기엘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시안이 부르는 소리를 미쳐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게 있다가 로운의 언질을 듣고 서야 마차쪽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저기 이제는 어디로 가죠?” “네. 시안님. 일단 다시 이오카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거기서 일단은 조금 남하를 했다가 다시 폴리카르를 건너야 합니다. 레카쪽은 좀 피할 생각이지만….” “그정도로 해둬. 기엘. 시안님?” “아. 아앗! 넵!!” 문득 돌아오는 로운의 존대말에 시안은 화들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해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은 엎지러진 물. 로운 역시 이맛살을 약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안에게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일단 말을 했다. “나머지는 일단 이오카로 돌아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빠르면 오늘 밤 늦게 이오카에 도착 할 수 있을 겁니다.” “아. 알았어요.” 시안은 괜시리 뻘쭘해져서 꼬물 꼬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하아. 시시해. 호로스에 오면 뭔가 불 쇼같은 것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 까 했었는데. 이 게 뭐람.” 거기다가 한술 더떠서 뭔가 중요한 것을 들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 기회가 너무나 흐르는 강물처럼 훌러덩 사라져 버린것까지 포함하여 시안은 호로스에 대해서 나름대로는 꽤나 실망하고 있는 처지였다. 하지만 시안이 실망을 하던 말던, 이미 때는 지나간지 오래다. 시안 일행은 그렇게 짧디 짧은 호로스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부지런히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고 있었다. 4. 추적자 “역시. 아무래도….” “응?” “아무래도 자 꼬마녀석을 원래 대로 돌려 놓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르겠어.” 호로스와 하나스의 국경선을 넘어 이오카에 도착하여 호로스의 사람들을 돌려보내자 마자 로운이 불쑥 말을 꺼냈다. 로운은 슬쩍 뒤를 돌아다 보았다. 뒤에서는 시안이 이리야와 말다툼이라도 하는지 꽤나 시끌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리야는 호로스를 벗어나자 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시 그가 언제나 머리에 쓰고 다니 는 두건을 다시 칭칭 돌려맨 상태였다. 하지만 시안은 원래 그랬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반짝이는 플라니타 블론드를 휘양찬란하게 날리면서 걸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아도 역시 시안은 너무나 눈에 띄었다. 로운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꽤 뒤떨어져서 걸어 오고 있던 시안이 갑자기 두 다다다다 달려서 기엘과 로운을 따라 잡았다. “잠깐!! 기다려!!” 로운과 기엘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헐레벌떡 뛰어온 시안은 로운과 기엘앞에 우뚝 하고 멈추어 서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면서 말했다. “전부터 생각해온건데 둘다. 나한테 왜그래요?” “예?” “아저씨 얼굴은 갑작스럽게 사람 태도가 확 바뀌었잖아. 뭐 잘못 먹었어요? 게다가 기엘은 로운이 왜 그러는지 설명도 안해주고.” “예? 아. 아아. 그 때문에 그러십니까?” “말이야 말이야. 사람이 그러는게 아니라구요. 왜 그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해.” 기엘은 갑자기 시안이 왜 그러는가 싶어서 머리를 굴렸다. 뭐가 시안을 불편하게 만들은 것 일까? “전부터 생각해오던 건데 말이죠. 기엘. 몇 살이죠?” “저야, 스물 두 살입니다만 그것은 왜.” “아저씨 얼굴은?” 자신에 대한 여전한 호칭에 로운은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기엘의 얼굴을 봐서 꾹꾹 눌러 참 으면서 대답했다. “스물 셋.” “봐!! 둘다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이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꼭 나한테 그렇게 꼭꼭 존대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구요. 저 이리야씨도 마찬가지야. 나한테 절 대로 존대말 하라고 두 사람이 협박 했다면서!! 도대체 왜 그래요!!” “그거야. 당연 저희는 시안님을 모시는 사람들이지까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진짜로 시안이라면 그렇죠. 하지만 아니잖---웁!!” 버럭 화를 내면서 시안이 말을 하자 기엘이 깜짝 놀라서 시안의 입을 틀어 먹았다. “시안님 여기는 좀…. 로운.” 도와 달라는 듯이 기엘이 로운을 불렀다. “젠장 하는 수 없지. 일단.” “시안님. 부탁이니까 나머지 이야기는 숙소를 잡고 들어가서 하도록 하지요. 네?” “우우-우우부부부우웁!! (놓고 이야기 해!!)” “앗. 죄송합니다.” 시안이 버둥 거리자 기엘이 황급하게 손을 놓았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이리야가 다가왔다. “뭔 일이야?” “별 것 아닙니다. 이리야씨.” “흐응…?” ◇◆◇ “그러니까 내가 절대적으로 어리다구. 알아들어요?” “물론 그렇습니다.” “장유유서(長幼有序)! 나는 동방 예의 지국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뭐 상황에 따라서 내가 기엘이나 아저씨 얼굴한테 반말을 좀 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간에 내가 태어난 곳에 서는 나이가 든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는 말을 놓는 법이예요. 무슨 말 인지 알아들 어요?” 시안은 마치 설교라고 하는 사람인양 기엘과 로운, 그리고 이리야를 나란히 앉혀놓고 손가 락을 들어가면서 설득을 하는 중이다. 호로스에서야 워낙 다른 사람들의 눈도 많고, 공식적인 자리가 되면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경어체를 쓰던 로운을 봤었기 때문에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 문제의 공식적인 일을 해야할 곳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안은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팔팔하게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을 열심히 해도 이리야를 제외한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다.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시안님.” “맞아.” 로운은 턱을 괴고 앉아서 따분하다는 듯이 하품을 했다. “맞기는 뭐가 맞아!!!! 이게 말이나 되!!” 시안은 헉헉거리면서 화를 냈다. 사실, 기엘이 그러는 것은 왠지 처음부터 그래왔기 때문인지 이해를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납득이 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원래 모습까지 알고 있는 로운이 저렇게 강경하게 나 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하자구요. 적어도 여행하는 동안 만큼은.” “안 됩니다.” “으아아아악!! 벽창호!!” 열심히 열을 내도 씨알 하나 먹히지 않는다. 시안은 요지부동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기엘에게 이제는 답답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시안이 이렇게 난리를 치는 것은 조금쯤은 시안의 마음 속 어디선가에서 동경하고 있는 일반적인 판타지에 나올만한 그런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멤버가 서로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친근하게 지내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시안은 문득 시큰둥한 얼굴로 앉아있는 로운을 보면서 아무리 생각해봐 도 로운과는 그렇게까지 친근한 관계가 되기에는 좀 문제가 있기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역시 껄그러운 것은 껄그러운 것이다. “이제 다 말씀하신 것이라면 저는 좀 쉬고 싶습니다만?” “안 끊났어!!” 시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해야 이 사람들을 설득해서 그놈의 듣기만 해도 근질 근질 해져오 는 존대말을 집어 치우게 만들 수 있을까? 시안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고 또 굴렸다. 돌돌 돌이 굴러가는 소리가 날 지경이다.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미친 듯이 굴리던 시안은 순간 기가막힌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니 생각해 냈다기 보다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우하하하하핫. 역시 난 천재야!!!” 언젠가 만화책에서 보았던 주인공이 하는 대사. 그 대사를 멋지게 손가락으로 V자까지 그 려보이면서 해보인 시안은 의기 양양하게 말을 했다. “이봐. 아저씨 얼굴.” “네. 시안님.” 반사적으로 로운이 대답했다. “나 말이지. 원래대로 돌려놔 줘.” “아아.” 멍하게 그저 때리니까 반응한다는 식으로 말을 듣고 있던 로운은 다음 순간 자리에서 박치 고 일어 날만큼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뭐, 뭐라구---?!” “반응이 느려도 한참 느리구만. 약속했잖아. 호로스만 다녀오면 원래대로 돌려놓아 준다 고.” 시안은 속으로 이겼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음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움하하하하하. 이겼다!! 이겼어!’ “그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캬아. 사람은 역시 머리를 써야 한다니까. 그렇지 않아 요 기엘?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간단한거라구요. 어차피 앞으로 갈길도 먼데 이놈의 머리카락은 치렁 치렁 귀찮기만 하고, 그러니까 나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여행하는데도 좋 고, 원래대로 돌아가면 굳이 나한테 경어체를 쓸 필요도 없고, 일석 이조라니까.” “로, 로운….” 기엘은 자기가 시안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했었기는 했지만 막상 시안이 저렇게 나오자 당황스러워서 로운을 쳐다보았다. 이리야는 지금 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눈말 말똥 말 똥 뜨고 있는 차였다. “저기. 이봐. 아가씨.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좀 말해 줄 수 있겠어?” “아아. 별거 아니예요. 사실 나 이거 내 진짜 얼굴이 아니거든요. 사정이 있어서 이러고 있 을 뿐이지.” “시안님!!” 시안이 자신도 모르게 비밀(?)을 술술 불려고 하자 기엘이 황급하게 그를 만류했다. “뭘. 어차피 이 사람한테는 다 알려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이와 이렇게 된 거 그냥 확- 까발리는게 편할 것 같은데.” “그래도 안됩니다.” “뭐가!!” 기엘에 맞서서 시안도 지지않고 소리를 질렀다. 번쩍이는 눈빛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맞 부딪쳐서 빠지지직하고 타올랐다. 하지만 기엘 도 시안도 두사람 다 단 한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은채 서로 노려보기만 하고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설사 로운이 허락한다고 해도 적어도 이리야씨가 있는 동안 은 절대로 허락 할 수 없습니다.” “웃기지마!! 제대로 따지고 들면 내가 기엘의 상관이야!! 시키는데로 해!!” “그것만은 절대로 안됩니다!!” “시끄러!! 명령이야!!” “못합니다.” ‘어휴. 골이야. 도대체가 이 난장판은 정말이지.’ “저기 말이지.” 기엘과 시안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자 그때까지 조용하게 아무말 없던 이리야가 주춤 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아무래도 내가 있어서 좀 그런 것 같은데 자리를 피해 줄까?” “당신은 입닥치고 앉아있어!!” 시안은 엉거주춤 일어나려고 하는 이리야에게 명령을 내리듯 소리를 쳐 그를 다시 주저 앉 게 했다. “당신은 여기서 발언권 같은 것은 없어. 그러니까 입닥치고 가만히 앉아있기나 하란말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아. 예예. 가만히 앉아있읍죠. 네네.” 이리야는 두 손을 들고 항복의 포즈를 취하면서 의자 깊숙하게 다시 엉덩이를 들이 밀었다. 그러면서 그는 옆에서 뚱하게 앉아있는 로운에게 속삭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네 아가씨. 만만치 않은데?” “뭐. 그렇지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시안은 로운을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보냈다. “결정을 내려. 저 인간은 죽어도 말이 안먹힐 것 같으니. 아저씨 얼굴하고 말하는 쪽이 좋 을 것 같으니까.” “시안님!!” 시안이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기엘이 열이 올라 달려들었다. “기엘!!” “시안님!” “당신은 거기 얌전히 앉아있어.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가만 두지 않겠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시안이 협박을 했다. 기엘이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무시무시한(?) 눈빛 때문인지 기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역시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시안은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로운의 앞에 섰다. “매번 말 했었지만 난 이 머리카락도 참아줬고, 이 물렁한 몸도 지금까지 참아 왔고, 또 말 도 안되는 이곳에 끌려와서도 고분 고분하게 모든 조건을 들어 줬어.” 로운은 그런 시안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중얼 거렸다. ‘고분 고분 좋아하시네.’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나랑 한 약속을 지키란 말이야. 당신들 말대로 여행이 일년이 되든 한달이 되든간에 어차피 여행은 해야하지 않아? 그리고 난 이미 다 해주겠다고 했어. 그러 니까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는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해.” 고요한 침묵만이 4사람이 머물고 있는 방안에 맴돌기 시작했다. 시안은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말을 마치고나서 팔짱을 터억 끼고는 입 을 꾸욱 다물었다. 기엘은 옆에 앉아있는 로운의 눈치를 살폈다. 애초에 시안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자고 했을 때, 로운은 항상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는 했 었다. 지금도 자신의 마음은 바뀌지 않기는 했다. 다만, 적어도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좋습니다.” 기엘의 기대와는 달리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로운의 입에서나온 말은 기엘의 기대를 한순간에 져버리는 말이었다. “로운!! 어떻게….” “어차피 너도 원했던 일이잖아. 그렇게 따지고 들지 마. 단. 시안님.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시안은 로운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입이 귀밑까지 찢어질 지경이었지만 지금까지 무게를 잡 아왔던 것에 초를 칠까 싶어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면서 대답했다. “일단 이곳은 너무 사람들의 눈이 많습니다. 먼저 이오카를 벗어나서 원래대로 돌려놓아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다시 가이칸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지난 번 일도 있고 하니 겸사 겸사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하나 더!” “네?” 시안은 자신의 뜻대로 술술 일이 풀려간다는 것을 알고나자 더욱 의기 양양해졌다. “두번다시 나한테 존대말 쓰지마. 기엘도 마찬가지고. 아저씨는 처음부터 논외야.” “그건 뭐 어럽지 않지만….” “뭐가 어렵지 않지만이야. 뭐가!! 로운!!” “기에~엘.” 간드러진 목소리가 주먹을 불끈쥐며 일어서려고 하는 기엘의 귀에 들렸다. “기에~엘.” “예? 시. 시안님?” “내 부탁 들어줄거죠?” 커다란 은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기엘은 움찔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식은 땀만 철철철 흘렸다. “들어줄거죠?” “시, 시안님.” “기엘이라면 들어줄거라고 생각해요. 난 기엘을 믿으니까.” ‘으윽. 입이 썩는 것 같아.’ 시안은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퍼부으면서도 기엘의 앞에서 열심히 애교를 떨었다. 내일의 평온을 위해서라면 지금, 잠시 잠깐의 괴로움은 얼마든지 당해낼 수 있다.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막내 누나, 그리고 어지간하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변태형까지 이 간 드러진 애교 공격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시. 시안님 이러시면….” “이히히히. 들어 주기로 한거죠? 움하하하하하!” 시안은 기쁨을 만끽하며 마음껏 웃었다. “좋았어. 이걸로 이 몸하고는 쫑이다. 쫑이라구. 푸하하하하” ◇◆◇ “젠장할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이리야 노운. 카라스!” 주문의 마지막 단어가 공기 중에 흩어지는 순간 꽃과 풀들이 만개해 있는 넓은 평온 위로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높이 솟아올랐다. “우악!! 이게 뭐야!!” “젠장할 겁먹을 것 없다. 이런 것은 다 허상이다! 앞으로 나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이리야는 삐죽거리면서 투덜 거렸다. “웃기고 있네 그게 니들 눈에는 환상으로 보이냐? 빌어먹을!! 앞에 가는 녀석들!! 왜 공격 을 안 하는 거야!” “헉헉.” “시안님 손을….” “우악!!” “시안님!!” “머리카락이 걸렸어!!” 옆으로 삐죽하게 나와 있던 가지에 시안의 은백색 머리카락이 끼어버렸다. 이리야가 급하게 그 머리카락을 떼어내려는 순간 철컹소리가 나더니 다음 순간 파스스하고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로운!” “머리카락 따위에 신경쓸 시간같은 것은 없어. 이리야씨는?” 로운은 라이트를 꺼내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래쪽에. 방어벽을 만든 것 같아.” “이리야! 이리야씨!!!! 어디 있습니까!!” “여기야 여기.” 다급하게 부르는 로운의 목소리에 멀리서 이리야가 손을 들어서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렸다. “지난 번에 성벽을 넘었던 그 주문은 안 되요?” “나무가 너무 우거져서 제대로 착지할 곳을 찾기가 힘듭니다. 오히려 더욱 위험에 빠질수 도 있구요. 시안님 이쪽입니다.” “젠장할. 이번에는 아무 일 없이 강을 건너서 기뻐하고 있었는데 이건 또 왠 날벼락이야!! 정말 재수 똥 튀기는 구만!!” 시안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붙들어서 대충 옷 사이로 마구 꾸겨 넣었다. 몸을 원래대로 돌리는 것이 소원중의 소원이었것만 한가한 곳을 찾기도 전에 쫓기는 몸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시안은 아직까지도 그대로 여자의 몸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다음번에 시간이 생기기만 하면 그냥 파악--!!” 이오카를 출발해 오늘까지 근 일주일의 여정동안 기가막힐 정도로 일행은 순탄한 여행을 해 왔다. 지난번에 배를 탔을 때 일이 벌어졌었기 때문에 기엘과 로운, 이리야가 배를 타고 있는 내 내 신경을 곤두세우며 불침번까지 했지만 다행히도 일행은 아무일 없이 넓은 폴리카르를 건 널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조금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그들이 머물렀던 여관이 난데 없이 폭염에 휩싸이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줄행랑을 치기 시작한 것이 어제 밤. 지난 번과 똑같은 정체불명의 복면 사나이들이 우르르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시안을 위시한 일행들은 결국 대로를 포기하고 가까운 숲으로 뛰어들어서 필살의 탈출을 감 행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는지 조사를 해보려고 해도 밑도 끝도 없 이 닥쳐오는 암살자들-대낮에 와서 칼을 휘두르는 인간들이 과연 암살자인지 의심스럽지만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도망치는 것 뿐 “도대체 몇놈이나 몰려들은 거지? 이거야. 평생 뛸 거를 오늘 하루에 다 뛰고 있는 기분이 야.”” 시안이 힐끗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멀리서 파스스스하는 소리가 나면서 무엇인가가 무너지 는 소리가 났다. 그때 불쑥 시커먼 인영이 시안의 앞으로 뛰어 들었다. “우악!!!” “시안님!!” “결국 무너졌군. 완전 인원수로 밀어 붙이는 모양이야. 어느 정도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이리야씨였군요.” “괜찮아요?” “물론.” 이리야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자신이 조금전에 만들어낸 물 의 장벽은 자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것이 파괴되는 순간 미약하 지만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이 그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정말이지. 몇 번을 생각해봐도 내가 너희들을 선택한 것은 실수 같아.” “이리야씨!! 머리 위!!” “우아앗!!” 이리야는 몸을 옆으로 날렸다. 슈칵-- “크헉!!” 기엘이 던진 단검이 남자의 어깨에 깊숙하게 박혔다. “시안님 어서!!” 시안은 남자의 어깨에 박혀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는 단검의 손잡이에서 눈을 뗄수 없었 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모두 앞을 보고 달려.” “로운?” 이리야와 시안, 기엘이 로운의 말을 따라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들이 앞으로 충분히 나간 것을 확인하자 로운은 들고 있던 라이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지간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기엘에게 이끌려 마구 달려가던 시안은 로운의 모습이 머리끝만 보이게 되자 기엘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뭐하는 거야? 로운을 놓고 오면 어떻게 해.” 그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안은 섬뜩한 바람 한줄기가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시안은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앞으로 그대에게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내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미메이라를 떠나기 직전 예언의 현자라고 하던 사람의 말이 불현 듯 시안의 머릿속에 떠올 랐다. “젠장. 죽으면 용서 안 해. 아저씨 얼굴.” “시안님!! 가시면 안됩니다.” 시안은 몸을 돌려 오던 길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니 용납할 수 조 차 없다. 벌떼처럼 몰려오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 ‘그런 놈들 한테 죽으면 가만 두지 않을 꺼야!!! 젠장 여기는 그렇게 심각한 전쟁터도 아니 라구!!’ 시안이 숨을 헐떡이면서 로운을 막 따라잡으려던 순간, 낮게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 다. “로운 디 로크레슈. 라이트 온 케라브 포트, 루하(철퇴의 바람)----!” 시끄럽게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부딧히는 소리가 로운이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점점 크 게 퍼져 나갔다. “으읏!!” 로운이 불러 일으킨 바람은 시안이 서 있는 곳 까지 강하게 밀려왔다. 시안은 두 팔로 얼굴 을 감쌌다. 촤아아아----. 싸늘한, 칼날 같은 바람이 시안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렬한 폭풍과 같이 바람이 로운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앞으로 미친 듯이 몰아쳐갔다. ‘젠장 태풍의 한가운데라도 있는 느낌이군….’ 얼굴을 가리고 있는 팔 사이로 희미하게 로운의 모습이 보였다. 로운은 정말로 태풍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머리카락 하나 흩트리지 않은 정갈한 모습 으로 단정하게 서 있었다. 그는 조금전 대인용 주문으로는 가장 큰 파괴력을 가진 주문을 하나 시전한 후 곧 이어 또 다른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를 시안은 마치 약에 취하기라도 한 사 람처럼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오도카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실날 같은….’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대로의 이미지 대로 로운은 라이트를 들고 주문을 외웠다. ‘실전에서 써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로운 디 로크레슈.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실날 처럼 반짝이는 바람이 그의 주위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햐트!!” 로운은 커다랗게 주문을 외우는 동시에 하늘 높이 치켜 올렸던 라이트를 사선으로 바람과 같은 빠르기로 내리쳤다. 그 검날을 따라서 로운의 몸 주위에 형성되었던 은빛 실같은 바람이 말려들어 갔다가 은빛 칼날로 화하여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파바바바박------ 강하게 부는 바람을 받아 더욱 힘을 받은 은색의 칼날은 무성히 쌓여있는 풀들과 가지들과 아름드리 나무까지 가차없이 베어나갔다. “크어---억!!” “으악!!” 붉은 색의 안개가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앞으로 그대에게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내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아니야….’ “크으으---윽.” ‘아니야…. 이런게 아니야.” 「그것을 이겨내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머리 속에서 예언의 현자 마샤의 목소리가 자꾸만 울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도망을 치면서 사람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지난번 선상에서 있었던 일은 기절하는 바람에 하나도 목격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줄행랑을 치면서 로운이나 기엘이 라이트를 휘두르는 것을 보기는 했지 만 도망치느라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아니야!!! 아니라구!!!!’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의 현장. 실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빨갛게 흐트러지는 붉은 안개가 그들이 말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죽음이라는 두개의 글자가 생생하게 시안의 신경 속으로 파고 들고 있었다. 시안은 자신이 너무나도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이라는 것은 꼭 자신이 아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아니야!!!” 앞쪽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하나하나 확인해가던 로운은 갑작스럽게 바로 뒤쪽 에서 들려오는 시안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설마. 이 꼬마가….”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거미줄 처럼 이어져 있던 엘의 흐름이 후두둑 하고 흩어져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시안님!!!” 바람이 가라앉자마자 기엘이 황급하게 뛰어왔다. “시안님!! 괜찮으신겁니까?” “기엘 어떻게 된 거야. 먼저 가라고 했잖아. 야!! 너 꼬마!!” “아니야!!! 이런게 아니야!!!” “시안님!!!” 정신없이 소리치는 시안의 모습을 보고 로운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세어보았던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보아 조금전 자신의 주문으로 처치한 사람들은 모 두 15명. 그중 혹 부상자가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아직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쫓 고 있다. “아니라구!!! 내가 생각한 것은 이런게 아니야!!!” -찰싹!!! “정신차려!!” “로운!!” 기엘이 놀라서 시안의 뺨을 힘껏 쳐버린 로운의 팔을 붙들었다. “감상 따위에 빠질 시간 같은 것은 없어. 저녀석들을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어!” “……….” 기엘이 잡고 있는 로운의 팔은 지금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따지고 싶으면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서 따져. 무슨 말인지 알았어?” 로운은 기엘이 잡고 있던 팔을 뿌리쳐 버렸다. “기엘. 꼬마를 책임지고 끌고 와.” “아. 으응.” 로운은 그 말을 마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리야는 그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다가 다시 뒤쪽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나기 시작하는 것 을 느끼고 로운의 뒤를 따랐다. 기엘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고 시안의 팔을 잡았다. “시안님. 어서!!!” 「앞으로 그대에게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내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기엘의 손에 잡혀 미친듯이 달리고 있는 시안의 머리속에는 한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 다. 그저 희희낙낙하게 여행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것을 보고, 모르는 곳을 여행하고,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다가 그냥 시킨 일만 그대로 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설마 그들이 가는 길이 이렇게나 험난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샤가 하던 말 도 그저 그런 걱정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단순하게…. 그것은 이 추격전이 숨돌릴 틈새도 없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시안님. 숲이 끝나갑니다.” 기엘은 로운이 선행하면서 길게 삐죽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를 제거한 길을 따라서 시안을 무작정 끌고 가다가 말고 말을 했다. 기엘의 말에 시안 역시 눈을 들자 멀지 않은 곳에 빛이 환하게 내리쬐고 있는 평온이 보였 다. 환하디 환한 평원. 그 평온이 눈에 들어오자 마자 문득 시안의 머리 속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왜 그런 것이 떠올랐는지는 시안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원하는 것은 지금이 이 일들이 어째서, 왜 일어나는지 그 이유뿐이다. “기엘.” “예?” “가서 한 사람 잡아와.” “예--?” “절대 죽이지 말고, 그리고 기엘도 절대 죽지 말고 가서 한 놈만 잡아와.” “시안님!!” “토달지 말아!!” 시안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뒤 따라 갈 수 있으니까 가서 한 놈만 잡아와. 평온으로 나가면 그때 그 성벽을 넘었을 때….” 후욱-하고 숨이 차왔다. “그때 그 주문 쓸 수 있지? 그럼 도망치기 쉽잖아. 가서 한 놈 잡아와!! 어서!!!” 뭔가 단단하게 결심이라도 한 듯한 얼굴.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좀 알아야 겠어. 로운한테는 내가 말할테니까 가서 한 놈만 잡아와 알았어? 절대로 다치거나 하면 용서하지 않을거야!!!! 기엘은 내 기사니까 !!” 조금전에 충격을 받아서 그저 기엘이 끌고 가는데로 따라오던 그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 을 보고 기엘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엘이 단단하게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 손이 떨어져 나가자 그 부분에서부터 오한같은 것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 다. ‘괜찮아. 무섭지 않아. 이런 일 따위. 절대로.’ 시안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앞쪽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로운과 이리야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할 수 있어. 분명히!!’ 시안은 주먹을 꼭 쥐고 로운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힘차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로운은 눈 앞에 펼쳐진 평온을 보고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숲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던듯 싶었다. “꼬마!!” 로운은 시안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말고 그가 혼자 오는 것 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기엘은?” “헉--헉헉.” 가쁜 숨을 내쉬는 시안을 보면서 로운이 다그쳤다. “어떻게 할거야. 아직 잔당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기엘은 어떻게 한 거야!! 설마.” “아니야. 내가 명령을 내렸어. 그러니까 입닥치고 있어!!” 로운은 시안이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힘겹게 숨을 내쉬는 시안은 그렇게 말해놓고 스스로 불안한지 자신들이 방금 빠져나온 그 숲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안의 시선을 따라 나머지 두 사람도 숲의 자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주 잠깐의 기다림. 하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 숨에 푹 젖어버릴 정도로 숨막히는 시 간이었다. 기엘은 숨을 골랐다. ‘절대로 다치거나 하면 용서하지 않을거야!!!! 기엘은 내 기사니까!!’ 머릿속에서는 시안이 했던 말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고요함이 그의 몸을 감쌌다. ‘내 기사라구?’ 필사적인, 의지가 가득 들어차 있던 시안의 얼굴. 기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하게 정리를 내려주시는 군.’ 기엘은 들고 있던 라이트의 손잡이를 굳게 쥐었다. “좋아.” 결심을 하는 순간 옆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났다. ‘오른쪽--.’ 기엘은 자세를 낮추었다.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팔에 힘을 주고 그는 주문을 외웠다. 무엇을 해야겠다고 정확하게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 주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물과 같은 창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투명한 엘로 짜여진 그물과 같은 것. 그는 그 이미지 그대로 만들어진 주문이 소리 없이 퍼져나갔다. “--헤렘.” 작은 시동어가 발동되는 순간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굳어있던 나뭇잎들이 한 방향으로 일제 히 기울어졌다. 공기 중에 흩어져 있던 기엘의 투명한 엘이 살아 움직이면서 주위의 공기 그 자체가 실한오 라기도 지나갈 수 없는 무형의 그물이 되었다. 길게 뻗은 라이트의 끝이 살짝 움직였다. ‘지금이다!!’ 파르르하게 떨리는 라이트의 끝이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면서 번쩍였다. 다음 순간 숨이 끊 어질 것 만 같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신음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무형의 그물이 되어 넓게 펴져있던 기엘의 엘이 한 남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쉬웠…!’ 챙강--!! 기엘은 라이트를 휘둘러 나아오는 암기를 막았다. 뒤를 이어 두 사람의 남자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기엘은 날렵한 몸 놀림으로 그들의 기 습을 피하면서 빠르기로 소문난 그의 라이트를 휘둘렀다. 급박한 와중에서도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라켄의 검술은 안 돼. 그렇다면….’ 상대는 정체를 모르는 추적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한눈에 정체가 들어날지도 모를 미메이라의 로열 나이트들이 쓰는 검술을 쓸 수는 없다. 기엘은 빠른 스피드를 앞세워서 그에게 공격을 해오는 두 사람을 몰아쳐 갔다. “하앗-!” “크헉!!” 기엘은 단칼에 상대의 목을 날려 버렸다. 붉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는 방금 베어버린 남자를 거세게 걷어찬 후 남은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분수처럼 튀어 오르는 붉은 색의 분수가 그의 시야를 가렸다. ‘인기척이 늘어나고 있다. 시간을 끌면 위험해.’ 기엘이 잠시 간격을 재는 동안 상대는 그것을 허점으로 판단하고 일직선으로 파고 들었다. 기엘은 그것을 비스듬히 피하면서 날카로운 라이트에 자신의 엘을 불어 넣었다. “쿠어억!” 스쳐지나가듯 두 사람의 인영이 맛부딪쳤다가 떨어졌다. 남자는 기엘의 라이트에서 뿜어나오는 엘의 한 자락에 옆구리를 베인 듯 허리를 앉고 쓰러 졌다. ‘서둘러야해.’ 기엘은 핏방울리라고는 하나도 튀지않은 라이트를 검집에 꽂고 기절에 있는 남자의 허리깨 를 들어 올렸다. 손 끝에 남아있는 생명의 감촉. 지금까지 로열 나이트로 지내오면서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혀본적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상대 의 생명을 단칼에 잘라버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 감촉을 기엘은 애써 무시하면서 늘어진 남자의 몸을 어깨에 매었다. 감상 같은 것은 나 중에 할 일이다. ‘시안님께서 기다리실텐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애써 지워 버리면서 기엘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 낮은 탄성소리가 이리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눈에도 기엘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라?”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탄성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한 단어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시안 못지않게 숨을 헐떡이고 있는 기엘의 한 쪽 어깨에 축 늘어져 있는 흑의의 남자 때문이었다. “로운! 지난 번에 그 주문을 써.” “무슨?” “성벽을 넘을 때 쓰던 그 비행 주문같은 거. 그걸 써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는 거야. 목표는 저 앞에 보이는 저 산.” 핏방울이 여기저기 튀어 있기는 하지만 무사해 보이는 기엘의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시안이 손가락을 뻗어서 그들의 앞쪽을 가리켰다. 아득한 산자락이 그 손가락 끝에 걸려있었다. “뭐라구?” “방법 없잖아. 그리고 이래뵈도 산 하나는 잘타. 걱정하지 말고 저리로 가자구. 이대로라면 어딜 가나 저 인간들이 쫓아올 것 아냐. 보아하니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죽치고 있는 것 같 은데 일단 이유나 알아야 그 대책 방법을 세울 거 아냐?” “로운. 일단은 시안님 말대로 해.” 한숨 돌린 기엘이 축 늘어진 남자의 몸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로운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시안의 몸을 당겼다. “한번에 둘은 무리니까 너도 해봐. 어려운 주문도 아니니까 충분히 할 수 있을거야. 처음엔 내가 인도할 테니까.” 한번 결정하고 나자 로운은 재빨리 시안에게 말했다. “주문은 간단해. 피. 하이로트. 비상주문의 일종으로 주위의 공기를 이용하는 거다. 한번 해 보면 금방 따라 할 수 있어.” “해보지.” 비상사태다. 이런 때 나는 그런 거 못해.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시안은 일단 하고 보자고 생각했다. 로운의 커다란 손이 시안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다른 팔로는 이리야의 몸을 감싼 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부웅-하고 주위의 공기가 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다음 순간. 시안의 몸은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 “야영을 하는 건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내 팽기치고 라센왕국 같은 곳으로 튀는 건데. 쳇.” “기엘. 이 남자 좀 깨워봐요.” 이리야가 뒤에서 야영준비를 하면서 투덜 거리고 있었지만 시안은 그것은 거들떠도 보지 않 은 채 기절해 있는 흑의의 남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했지만 머리는 말짱했다. 아니 말짱하기 보다는 텅비어 버렸다는 쪽이 훨 씬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이. 이봐. 이걸 나 혼자 하라구?” “젠장!!! 아저씨!! 지껄일 기운이 있으면 가서 먹을 거라도 좀 구해 와봐요. 배고파서 쓰러 질 것 같아.” “허이구. 공주님 이제 절 주방장으로 부려 먹으실려구요?” “싫으면 말구!!” 시안이 빽 소리를 질렸다. 이리야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챗-하고 땅바닥을 걷어찼다. “젠장.” 역시 선택을 잘못했어~라며 중얼거리던 그는 곁에 내려놓았던 몇가지 도구를 챙겨 들더니 훌쩍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동안 기엘은 기절해 있는 남자의 뺨을 몇대 쳐서 그를 깨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찰싹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안은 움찔 움찔 거리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쪼그 리고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으윽.” “앗. 깨어났다.” 기엘이 또 한대의 따귀를 막 내리치려는 순간 흑의의 남자가 번쩍하고 눈을 떴다. “기엘 자해 못하게 해….” 시안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기엘이 낮게 주문을 외우자 꿈틀대던 남자의 몸이 우직하고 굳어버렸다. “오케이. 좋아요. 좋아.” 시안의 왠지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로운은 한구석에서 조금은 기가막혀 하고 있 었다. 저 꼬마가 조금 전 자신이 추적자들을 주문으로 살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그 꼬마 인가 하고 말이다.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군.’ “흐음. 뭐 자백시키는 주문 같은 것은 없나.” 시안은 주섬 주섬, 흑색의 복면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남자의 옷을 뒤졌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시안은 단단하게 묶여있는 매듭을 풀고 남자가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는 복면을 벗 기려고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시안님.” “아아. 응. 고마워요.” 기엘이 작은 나이프를 들고 복면을 벗겨내었다. 빡빡- 머리를 밀어 민둥산이 되어 있는 남자의 머리가 드러났다. “누가 추적자 아니랠까봐. 젠장. 창의성이 떨어져.” 시안은 남자의 앞에 철퍼덕 주저 앉아 버렸다. “이봐요 아저씨. 도대체 누가 시켜서 이렇게 난리를 떠는 거유?” 어느새 이리야의 말투를 배웠는지 꽤나 껄렁 껄렁 한 말투로 시안이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기엘은 순간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명색이 범인(?)을 심 문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남자는 기엘의 주문에 입마져 굳어 버렸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기엘. 이거 입까지 완전히 굳어 버린거 아니예요?” “그, 그런가요? 이런….” 어떻게 해야하나하고 고민을 하는데 사라진지 얼마 안된 이리야가 어디선가 갑자기 툭하고 튀어 나왔다. “쳇. 뭔가 좀 얻을 것이 있는가 해서 따라 다녔더니만.” “이봐!! 아저씨!! 먹을 것 구해오라고 했잖아!!” 시안이 화가 나서 이리야를 쳐다보는데 순간 그의 머리 위로 후두둑하고 무엇인가가 떨어졌 다. “우앗!!!” “잡아왔어. 먹을 거.” “으. 으악!! 이게 뭐야!!” 시안은 비명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놀라 일어섰다. 꿈틀꿈틀대는 뱀이 두마리. 아직도 파르르 떨고 있는 새가 하나. 그리고 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토끼가 한마리. 그것이 이리야가 시안의 머리 위에서 떨어뜨린 먹을 것의 정체였다. “구해왔잖아. 먹을 거. 하지만 난 요리는 안해.” 심드렁하게 이리야가 말을 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여긴 꽤 먹을게 많던데? 걸어만 가도 이런 거는 수두룩하게 발이 차이던걸.” 이리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사실 산을 타면서 이런 것을 잡아 연명하는 것은 이미 도가 튼 터였다. “말이 도망자가 아니라구. 내가. 이런쪽은 내가 한 수 위지.” “헤에…” 시안과 기엘이 신기하다는 듯이 이리야를 바라보자 이리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예? 아. 이 남자에게 뭔가 물어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해서.” “주문을 풀면 위험해. 이 사람들 잡히면 바로 자살을 하는 것 같았어. 하지만 그전에 입이 열린다고 해도 그냥 대답할 위인들은 아니지.” 쓰윽하고 로운이 다가와서 말했다. 그때까지 기엘과 시안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사실 그에게도 딱하게 어떻게 해야하 는지는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사로 잡히면 바로 자해를 한다라. 흐음. 좋아….” 세 사람이 꽤나 난감해 하고 있는데 이리야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술을 실룩거리면서 말 을 했다. “이런 거는 또 내가 전문이지.” 자신만만해 하는 이리야의 말에 세사람의 눈이 휘등그래졌다. “댁은 기사라면서 이런 것도 안 배웠수?” 룰룰 거리면서 이리야가 아직도 몸이 굳어 뻣뻣하게 누워있는 남자의 옆에 주저 앉았다. 그 를 따라서 기엘과 로운, 그리고 시안도 옆에 옹기종기 앉기 시작했다. “내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면 바로 이 사람한테 건 주문을 풀어 줘.” “알겠습니다.” “혹시 물병 가진 거 있어?” “환상을 이용하는 겁니까?” 기엘이 그 도망치는 와중에도 꼭꼭 챙겨왔던 작은 보퉁이에서 물통을 꺼내 내밀면서 물었 다. “당연하지. 내가 할 줄 아는게 그런 거 밖에 더 있겠어? 뭐 조금 의미는 틀리지만.” 물의 술사가 할 수 있는 주문은 여러가지다. 물론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이리야가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공격주문이 있고, 물을 이용한 방어며, 기타등등 다양. 물론 그들의 능력 대부분이 치유술쪽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주문보다 다양한 주문이 있는 것이 바로 물의 술이다. 이리야는 기엘이 내민 물통의 마개을 열어서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에 주루룩 하고 부었다. “이걸로 준비 끝. 어이 기사 양반!” “예. 준비 되었습니다.” “좋아. 이리야 노운. 물의 근원 나유르. 그 근원에서부터….” “라. 마이케시스. 오프.” 이리야의 주문이 시작되자 마자 기엘이 간단한 오프 주문으로 남자의 몸에 걸려있던 포박술 을 풀었다. 꿈틀하고 남자의 몸이 움직이자 로운이 허리에 있는 라이트의 손잡이에 얼른 손을 가져갔 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필요 없었던 듯, 이리야의 주문이 끝나자 마자 그의 얼굴에 부어 졌 던 물이 얇고 넓은 피막으로 변하여 남자의 온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이 남자는 내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을 수 있어.” 넓은 피막 처럼 온 몸에 퍼졌던 물은 어느 사이 그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버린듯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사이-레너프.” 이리야의 손이 남자의 얼굴을 덮었다. 남자의 몸이 순간 요동을 쳤다. “…크흑.” 스며들은 물은 남자의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의 신경 하나하나에까지 스며들었다. 얼굴 을 덮은 손가락 끝에서 차가운 기가 뻗어나와 남자의 머리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라이크 온.”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이리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남자의 얼굴을 덮고 있는 손바닥에서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신기한 광경을 시안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해잖아. 이 아저씨. 언제나 헤헤 거리고 있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줄 알았는데….’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공기중으로 사라지자 이리야는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손을 떼었다.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나도 목숨 부지는 하고 싶으니 용서하라구.” 이리야는 이미 눈이 풀려버린 듯한 남자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자신의 목숨과 심각한 관계가 없는 말 정 도는 얼마든지 대답할테니까. 뭐 죽어도 어쩔 수 없기는 하지.” “어떻게 한 거예요?” 시안이 궁금하다는듯이 묻자 이리야는 기분나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정확하게는 나도 잘 몰라. 단지 이 주문에 걸린 인간이 시키는대로 뭐든 대답하는 것을 봤을 뿐이니까.” ‘정말 자백 약물 같은 것을 쓴 그런 효과가 나는 걸까?’ 시안은 오래전에 보았던 옛날 영화의 한장면을 떠올렸다. 주사바늘이 피부를 뚫고 약이 주입되자 범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줄줄 기밀을 털어 놓 는 그런 장면이었다. 시안은 고개를 탈탈 털어서 상념을 떨쳐 버렸다. 어쨋든 간에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해줄지다. “이름은?” “97호” “뭐?” “97호.” 감정이 섞이지 않는 목소리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97호?” “97호.” “소속은?” “검은 암살단. 하셰카. 하나스 북부지원.” “뭐라구?” 이리야는 남자가 지껄인 단어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검은 암살단 하셰카, 하나스 북부지원 이오카 소속.” “하세카라구? 맙소사!!!” 이리야가 입을 쩌억 벌렸다. 이리야가 놀라서 말을 잃고 있자 로운이 그 뒤를 이었다. “무슨 명령을 받았지?”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세사람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그 시체를 확보할 것. 특히 여자의 시체는 반드시.” 시안이 자기도 모르게 길게 늘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동원된 인원은?” “하나스 북부지원 이오카 소속 암살단 전체.” “말도 안 돼….” “하나스 남부지원 캬라스 소속 암살단 전체.”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침묵이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가이칸 서부지원 레카 소속 암살단 전체.” “그만!!” 이리야가 소리를 쳤다. 그러자 남자의 입이 언제 열렸나 싶게 다시 굳게 다물렸다. “왜 그래요?” 시안이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이리야에게 소리를 질렀다. “더 들을 것도 없잖아. 젠장!!!” 시안이 무슨 말인가 해서 이리야의 얼굴을 바라보자 이리야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 다. 이 인간들은 지금 자신들이 들은것이 얼마나 대단한, 아니 얼마나 심각한 소린지도 모르 는 모양이다. “검은 암살단이라고 했잖아. 하셰카라구!!!!” “그게 뭐예요?” “글자 그대로야. 암살단!! 아슈레이 최고, 최대의 암살단이야. 그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그 수법이 얼마나 악랄하고 다양한지 아무도 모르는 지상 최대의 암살단이라구. 하 셰카는 청부살인집단이야. 계약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달성하는 무시무시한 암살 단이라구. 젠장!! 일이 꼬인다고 생각했더니!!” 이리야는 벌떡 일어나서 머리에 썼던 두건을 벗어서 땅에 내리쳤다. “빌어먹을. 기껏 잘 도망 쳤다고 생각했는데 이따위….” 이리야가 발광(?)을 하고 있는 동안 로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암살자에게 물었다. “의뢰인은?” “모른다.” “그런 것을 말단 암살원이 알리가 없잖아!! 좀 되는 거를 물어보라구!!! 이 멍청이들아!!” “그외. 그 암살 대상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뭐지?” “23세 가량의 신체 건장한 남자. 22세의 신체 건장한 남자. 17세 가량의 소녀.” “초상화를 가지고 있나?” “있다.” “또 다른 것은?” “최근. 물의 술을 쓸 수 있는 남자가 합류. 주의를 요할 것.” “뭐라구---?!” 화를 버럭 버럭 내면서 하늘을 향해 포효를 하던 이리야가 우뚝 멈추어 서더니 터벅 터벅 남자의 쪽으로 걸어왔다. “다시 한번 말해봐.” “최근. 물의 술을 쓸 수 있는 남자가 합류. 주의를 요할 것.” “젠장할!!!!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잖아!!! 니들 책임져!!” 이리야는 꼼짝도 안하고 누워 있는 남자를 걷어쳤다. 기가막혔다. “에. 그러니까 이리야씨.” 시안은 이제 포효정도가 아니라 펄펄 뛰고 있는 이리야에게 다가갔다. “저기…그러니까 특별히 이리야씨까지 노리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놈들은 노린 대상을 방해하는 놈들까지 모조리 말살해 버린다구. 목격자도 살려두지 않아. 설사 그게 어린애라도!!” 살벌한 이리야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난감했다. “젠장할. 정말 도대체 누구야!!!!” 시안은 난감하다 못해서 화가 났다. 이유라도 알고 맞아야 그나마 나은 것이다. 이유도 모른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한다 는 것은 아주 질색인 것이다. -스르르릉. 시안이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기엘이 라이트를 빼어드는 소리가 났다. “어라? 지금 뭐하는 거야!!” 기엘이 라이트를 쳐드는 순간 시안이 재빨리 그의 앞에 끼어 들었다. 기엘이 꼼짝도 못하고 있는 남자를 내리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뭐하는 짓이야!” “암살단원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저항도 못하는 사람을 죽여도 되는 거야?” “그럼. 살려둘까요? 어차피 이사람은 이대로 돌아가도 죽게 될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값싼 동정심 같은 것이 통할 때가 아닙니다.” “그건 그녀석 말이 맞아. 저 암살자를 죽이고 살리는게 중요한게 아니야. 지금 중요한 것은 나를 비롯해서 기엘. 그리고 너까지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거지.” 기엘의 말에 시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사실 그쯤은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자신이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보기가 싫을 뿐이다. 어린애 같은 치기라고 해도 좋다. “값싼 동정심이라도 좋아. 지금 죽이진 말란 말야!! 여기다 이렇게 놔두면 어차피 우릴 따 라오는 사람들이 발견할텐데. 굳이 지금 꼭 죽여야 해?” “…………….” 기엘은 시안의 말에 꼭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거 커다란 눈에 곧 눈물이라도 흘 릴 것처럼 눈물을 그렁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됐어. 어차피 이대로 두면 다른 놈들이 알아서 처리 할거야.” “로운!!” 시안이 차갑게 말하는 로운을 노려보았다. 로운은 아무생각없이 말하다가 문득 굳어서 시안을 바라보았다. 시안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시안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알았어. 알았다구. 하지만 정말이야. 이대로 두면….” 시안이 화가 나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데도 로운은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도 자신이 오늘 죽인 남자들의 수를 하나 둘 세어보며 쓴물이 넘어오는 것 같은 기분 을 되새기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사이엔가 사라져 버렸다. “살릴 방법없어?” “없어.” “젠장--!!” 시안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몸을 돌렸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시안님!” “냅 둬!!” 시안은 저벅 저벅 그냥 발길이 가는데로 걸어 갔다. 아무래도 좋았다. 시안이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기엘이 그 뒤를 따르려하자 이 리야가 그를 말렸다. “알거는 아는 나이니까 그냥 둬. 저러다 제 풀에 지쳐서 돌아올거야.” “하지만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아직 추적자들은 가까이 오지도 못했을거아냐. 댁들이 그렇게 빨리 이런 곳까지 왔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테니까. 아아. 그렇지 아까 굉장히 놀랐어.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거든.” 이리야는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듯 말귀를 돌리려 했지만 로운도 기엘도 그에 응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결국 이리야는 투덜 대면서 아까 사냥해온 뱀들과 토끼와 새를 주워서 주섬주 섬 챙겼다. ‘젠장. 정말 어쩌다가 이런 패거리에 끼게 된 거지?’ 돌을 모으고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그는 불을 지폈다. ‘아. 잊은 것이 있었군.’ 이리야는 고개를 들고 아직도 멍하게 서 있는 로운을 불렀다. “어이 신관양반 저기 오른쪽으로 한참 가다보면 개울이 하나 있을 거야. 가서 물좀 떠오라 구.” “뭐?” “물.” “그런건 당신이 대충 처리 할 수 있잖아.” “이봐!!” 이리야는 손질을 하던 새를 땅바닥에 패대기 쳤다. “내가 이런 일에까지 꼭 물의 술을 써야겠어? 응!!” “…………” 로운은 묵묵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고 휘익 하고 몸을 돌렸다. “야!! 내말이 말같이 않아?” “그러니까 지금 가고 있지 않습니까!!” 기분이 꿀꿀한 것은 로운이나 이리야나 마찬가지 였다. “쳇. 기왕가는 거 좀 살살 거리면서 가면 안 되나.” 그런 꿀꿀함을 날려버리려는 듯 이리야는 계속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시안은 발걸음이 가는데로 마냥 걸었다. 걷고 또 걷고 옷자락이 걸려서 넘어지면 일어나서 다시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시안은 아무 생각없이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하나 시안의 눈에 들어왔다. 시안은 그 옆쪽에 조금 마른 곳을 찾아서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어쩔 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젠장. 정말 별 일 다당하는 구나.” 시안은 혼자 중얼 거렸다. 눈을 감고 손을 깍지끼어 목뒤로 돌리고는 시안은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앞날이 깜깜하다 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암살단은 암살단이람. 게다가 암살단 주제에 왜 그렇게 설치는 건 지. 참나.” 보통 암살단이라고 하면 자고 있는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와서 칼로 목을 딴다거나 그러 는게 보통이라고 생각했던 시안에게 있어서 오늘의 추격전은, 사실은 도망전이지만 여하튼 간에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현실 세계에 있을때는 그런것은 어디까지나 책이나 영화속에서만 등장하는 했던 것들이다. 책속이나 등장해야 마땅한 상황들이 지금 시안의 주위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하기사 판타지 세계였지 여기는….” 가만히 누워서 너무나 푸른 하늘을 보고 있자니 문득 현실감이라는 것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이순간이 정말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푸른 하늘이 지금 시안이 있는 곳이 환상세계임을 증명해주는 기분이었다. “환상이라고 해도 너무 리얼해.” 실제 그랬다. 기엘이나 로운, 또는 이리야가 엘을 이용하여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면 여기는 왠지 현실감 이 없다가도 오늘 처럼 정말 그 주문에 의해서 죽어버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환상세계 라는 칭호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여기도 현실이야. 현실.” 시안은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파란 하늘 때문이 눈이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시안, 아니 박경하라는 이름이 이제는 생소하게 느껴졌다. 불과 얼마 안되는 시간임에도 불 구하고 왠지 자신의 이름은 멀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그 사실이 시안의 기분을 더욱더 우울하게 했다. “박경하….” 시안은 소리를 내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 이름은 마치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계의 생물을 부르는 듯한 기분. 씁쓸함이 시안의 몸을 감쌌다. “생명으로 점철된 여행길이라. 정말 이런것을 계속해도 좋은걸까?” 시안은 잠시 자신이 왜 이런 웃기지도 않은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 해도 이유는 하나뿐이다. 바로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는 것. 하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는 또 하나의 현실 세계다. 돌아가야할 현실 세계와 돌아가기 위해서 버티어 나아가야 하는 현실 세계. 두개의 현실 사이에서 시안은 괴로워 했다. 하지만 시안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모두 그에게는 현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과 누나들이 있는 세계도 현실. 그리고 기엘과 로운과 이리야씨가 있 고 알지 못하는 신들이 가득한 이 세계도 그에게는 엄연한 현실이다. 중요한 것,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은 딱 하나뿐이다. 언젠가는 그가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는 것. “환상이라는 생각은 버리겠어. 이번에야 말로.” 시안은 목소리를 높여서 말을 했다. 말을 하면 왠지 그것이 기정 사실이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을 감고 있으면 비명소리와 함께 붉은 안개가 되어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기엘과 로운이 차례대로 떠올 랐다. ‘돌아가야 할 때가 오면, 그리고 돌아가면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시안은 처음으로 ‘그때’에 대한 것을 생각해봤다. 앞으로 남은 여정은 로운의 말마따나 길고 길다. 그 길고 긴 여정속에서 밉던 좋던 정이 쌓 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기껏 밝게 생각하자고 하고 있던 시안의 마음속에 다시 구름이 끼기 시작 했다. “에잇. 모르겠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되지!!” 소리를 높여서 다시 말을 한다. 그러면 그것은 사실이 되어서 시안의 머리속으로 피드백 된 다. “그래. 그때 생각하면 되는거지. 누가 알아. 돌아가면 좋은 인생 경험 했다고 생각할지. 내 가 또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런 경험은 못할 거라구.” 시안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어디 쯤에 있는 거지? 도대체가. 동쪽이라고 해서 무작정 걸어 왔는데.” 로운은 투덜 거리고 있었다. 동쪽에 가서 물을 떠오라고 하는 이리야의 말을 따라서 열심히 걸어 왔지만 물기라고는 전 혀 찾아 볼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갈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도 어차피 물은 필요 한것이라는 생각에 로운은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어? 저긴가?” 다행히 포기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던 로운의 귀에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젠장 정말 멀군.” 로운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후우. 앞으로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산으로 들어와 버리다니. 나 라는 녀석도 정말 계획성이 없군.” 그렇게 중얼 거리던 로운은 순간 고개를 갸우뚱 했다. 말로 해놓고 보니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아니지. 이렇게 된거는 모조리 그 꼬마녀석 때문이지. 나 때문이 아니잖아?’ 상황이 어찌되었던 간에 이 산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모조리 시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꼭 시안의 탓이라고 하기에는 외부적인 상황이 너무나 나빴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책 임은 그것을 결정한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꼬마녀석. 생각보다는….” 쓸만해라고 말을 하려다가 말고 로운은 입을 다물었다. 왠지 말을 해버리면 정말 그런 것같 이 생각되기 마련이다. “쳇.” 어느사이 로운의 발걸음은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는 시냇가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일단은 물을 떠서 식사를 하고, 꼬마녀석은 밥을 안주면 상당히 심각해지니까. 그리고 나 머지는 다음에 생각을 하자구.’ 로운은 가지고 온 가죽 물통의 마개를 열어서 시리도록 차가운 시냇물에 푹하고 담구었다. 시냇물치고는 꽤나 빠른 물살 때문인지 커다란 물통이 단숨에 불룩해졌다. 그것을 갈무리 해서 어깨에 짊어진 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물통을 내려놓고 차가운 시냇물에 손을 담구었다. 뼛속가지 저려올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다. 그 차가운 물을 수차례 떠서 얼굴을 씻고난 로운 은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아----.” 마음의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사실 무엇을 정리 해야 할지는 자신도 몰랐지만 여하튼 그 런 기분이 드는 것은 고마웠다. 나름대로는 예정데로 이상없이 이루어지던 여행이 갑자기 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금은 안달하는 마음이 생긴것도 사실이다. 난데없는 사고들과 끈질기게 그들을 추격하는 추적자들. 그리고 암살단. “암살단이라는 녀석들이 어째 하나같이 벌떼같은지.” 로운의 입에서도 역시 불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래주는 덕에 이렇게 도망을 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암살단이 원래 그들이 하는 양으로 암습을 했다면 어쩌면 지금쯤은 자신도 기엘도 그리고 제일 중요한 시안도 이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로운은 몸을 떨었다. “물론 암습하게 두지는 않았겠지만.” 생각을 해보면 그들이 암습을 하지 못했던 것도 어느정도는 이해가 갔다. 시안을 수행하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로운이나 기엘이나 둘다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 지 않을까 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애초에 암습같은 것은 불가능 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자아. 돌아가볼까. 꼬마가 바람 뿜는 괴수가 되기전에…어?” 기지개를 켜고 다시 물통을 들려고 하는 순간 로운의 눈에 꽤나 익숙한 색의 천조각이 보였 다. “뭐야 저건. 설마?” 설마라는 것은 언제나 사실이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로운이 설마 설마하면서 시냇가를 조금 따라 올라가 발견한것은 축축한 시냇가 옆 땅바닥에 서 팔을 위로 높이 뻗어 올려 세상모르고 잠든 시안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언제 여기까지 와서 퍼져 자고 있는거지? 이녀석은?” 파랗게 돋아난 풀들위로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광경은 로운이 보아도 뭔가 묘한 기분이 드는 광경이었다. “정말이지. 언제나 챙기지 않으면 이모양이군.” 로운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어쩔까 잠시 고민을 했다.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로운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서 세상 모르게 잠든 시안의 몸을 감싸 안아 올렸다. “역시…바꾸어 두는 것이 좋겠군.” 로운이 안아올려도 시안은 꽤나 고단했는지 잠꼬대 하나 하지 않는다. “누구는 열나게 고생하는데 누구는 이런데서 뻗어자고. 정말이지 불공평 하다니까.” 5. 두 개의 생각. 하나의 마음 “어? 이으 머아으 어에어(어? 지금 뭐하는 거예요?)” 시안은 입안 가득하게 토끼 고기를 우물 거리면서 말을 했다. 기엘은 그런 시안에게 주의를 주면서 설명했다. “이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실때 말씀을 하시려면 입안에 있는 것은 모두 삼키고 말씀을 하세요.” 우물 거리던 고기가 목구멍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다. 시안은 시도 때도 없는 기엘의 잔소리에 입안에서 맴도는 맛있는 토끼고기를 한숨에 꿀꺽 삼켜버렸다. “콜록- 콜록 콜록.” “천천히 드십시요.” “기엘이 잔소리를 하니까 그렇잖아요!! 그리고 그 존대말 좀 집어치우라니까!!” 로운이 반말로 돌아온 한편 기엘은 시안이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대를 쓰는 것을 보고 시안이 신경질을 부렸다. “……….” “기엘!!” “로운이 시안님께 말을 놓는 것은 로운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제가 시안님께 말을 높이는 것은 제 자유구요.” 왠지 고지식한 아저씨같은 기엘의 말에 시안은 기운이 쭉 빠졌다. ‘젠장. 앞 뒤 꽉 막힌 꼰대 같으니라구.’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기엘이 자신을 꽤나 챙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시안으로써는 더이상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에잇--. 알았어요. 맘대로 해요. 맘대로 해!” “감사합니다. 시안님.” “쳇.” 둘이 하는 꼴을 보고 있던 이리야는 역시나 기엘이 기사는 기사인가 싶어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저 양반은 왜 저러고 서 있는답니까?” 이리야는 아까부터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기엘에게 물었다. “바람입니다.” “뭐?” “바람이요. 미메이라인은 바람하나면 뭐든 가능하죠.” 기엘이 씨익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아슈레이 대륙에 부는 모든 바람은 미메이라에서 시작되죠. 그 가락을 잡아내는 겁니다. 이런 훈련은 기사라면 모두 받는 훈련이죠. 처음에는 쉽지 않지만 능숙해지면 어디에 있든 간에 금방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아. 다 끝났나 보군요.” 기엘은 로운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서있던 장소에서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때 로운?” “기가막히게 찾아들어왔어. 참나. 저 꼬마 선견지명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싶어.” “꼬마 꼬마 하지마. 시안이라는 이름이 있잖아.” 시안은 잔뜩 뿔이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하지만 로운은 그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 서 허벅지에 매달려 있는 작은 주머니에서 꼬깃 꼬깃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건 뭐유?” 이리야가 신기하다는 듯이 로운의 옆으로 다가갔다. 로운은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 뭉치들을 뒤적이더니 그중에서 한장을 골라내서 일행의 옆쪽 에 넓게 폈다. 그러자 나머니 사람들도 그 지도 옆에 옹기 종이 모여 앉았다. “지금 우리들이 있는 곳은 이곳이야.” 로운의 손가락이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곳은 험준하기로 소문난 페이오트 산맥의 한 자락 바로 앞이었다. “정확하게는 이부근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상세한 지도를 구해보는 건데….” 그렇게 말은 하지만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차피 추적자들을 피해서 달아나야 하니까 나쁘지는 않겠지. 다행히도 계곡이 가까운곳 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최단시간내에 이 계곡을 따라서 페이오트 산맥을 관통하는 거야. 그 래서 여기. 가이칸 제국령으로 바로 들어가는 거지.” “에엑---- 이봐 이봐!! 난 가이칸 제국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이라구. 꼭 거기로 가야 해?”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희는 원래부터 호로스에 들린 이후에는 바로 다시 가이 칸 제국으로 간다구요.” “아, 아니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누가 이렇게 될줄 알았냐구.” “죄송합니다. 이리야씨.” 시안을 대신하여 기엘이 이리야에게 사과의 말을 했다. 사실 이리야는 일행이 가이칸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함께하기로 암묵적으로 말을 해둔 상 태였다. 그랬던 것이 난데없는 암살자들때문에 어쩌다 보니까 여기까지 함께 같이 흘러왔던 것이다. “젠장할. 나 혼자 돌아 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라고 해야할까? 이리야는 난감해 하면서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기엘도 로운도 사실 이렇게 일이 돌아갈 줄은 몰랐기 때문에 더이상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이고오--.” “뭐 어차피 이렇게 되었는데 같이 가죠. 네?” 뭔가 심각한 분위기에 있는데 갑자기 시안이 방글 거리면서 말을 했다. “혹시나 아저씨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저 아저씨 얼굴한테는 비장의 변환술이 라는 것이 있으니까 여차하면 얼굴을 바꾸어 버리면 되잖아요.” “-----?!” “그렇지? 아저씨 얼----앗!! 잠깐!! 그렇다!!” 시안은 말을 하다 말고 문득 생각이 난듯 자신의 다리를 타악 치면서 얼빠진 얼굴을 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지금까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잘 됫다. 어차피 일도 이렇게 되었고, 저기 누워 있는 암살자씨가 말하길 우리 얼굴을 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 으흐흐흐흐흐--.” 음흉한 웃음소리가 앉아있는 세 남자를 뻘쭘하게 했다. 기가막힐 정도로 예쁜 소녀의 웃음소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아저씨 같았기 때문이다. “잘 된거잖아. 이거. 자 상황이 이러니까. 기엘도 머리색같은 것좀 바꾸고, 아저씨 얼굴도 좀 더 젊은 얼굴로 바꾸고, 그리고 저 이리야씨 얼굴도 바꾸는 거야. 전부 바꾸는 거지. 그 리고….” 시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도 원. 래. 대. 로 돌려놔줘.” 한마디 한마디에 악센트를 넣어서 시안이 말을 했다. “좋아.” 로운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어라?” “좋다고. 원래대로 돌려놓아주지.” “지, 진짜?” 물론 얼마전에 자신이 항변하는 통에 로운이 원래대로 바꾸어 주겠다는 소리를 하기는 했지 만 저렇게 간단하게 동의 해줄것이라고는 절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던 시안은 너무나 놀 라서 얼이 빠져 버렸다. “진짜. 기엘. 네 도움이 조금 필요 할것 같아.” “아아. 알았어.” 이리야는 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서 멀뚱하게 세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 다. “놀라실 것 같으니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사정이 있어서 시안님께서는 지금 모습 을 조금 바꾸어서 여행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젠 제일 큰 볼일중 하나를 마치기도 했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허어….” 너무나 간단하게 설명을 들어 버리자 이번에는 이리야가 멍청해져 버렸다. 도대체 이 일행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다시 이리야의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 했다. 이리야가 다시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로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마음 먹었으니 빠르면 빠를 수록 좋겠지.” “오옷!! 초 스피드!! 죽여주는데. 좋아. 좋아.” 시안은 혹시나 로운이 금방이라도 마음을 빠꾸어 먹을까 싶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인 것이다. 이리야가 멍청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동안 시안을 위시한 두 남자는 야영아닌 야영판을 벌인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말해두지만 일단은 네 엘을 봉쇄할거다. 확실히 지난 번의 경험도 있 고, 너도 최대한 협조해야해.” “물론이지.” 시안의 가슴이 두근 두근 거렸다. 막상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하니 뭔가 조금 두렵게 생각되었지만 그대로 기분이 째지는 것만 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이곳에 와서 여자의 몸으로 바뀐뒤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순간이다. “기엘 시작해.” “알았어.” “기엘 디 하라스다인, 바람의 이름 미메리아의 시작에서 끝. 바인딩 쉴드.” 천천히 그러나 사력을 다한 기엘의 주문이 발동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시안의 눈에도 그 주문은 그대로 보였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기엘에게서 시작된 투명한 엘의 가락이 시안의 몸쪽으로 모여들어서 온 몸을 감싸들었다. 온 몸이 억죄이기 시작하는 감각에 시안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다음에 시전될 주문이 어떤 감각을 주는지 새삼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로운 디 로크레슈.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엘-메타모르포시스.” 하늘 높이 쳐들었던 로운의 팔이 천천히 시안의 쪽으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이전에도 목 격했던 무수한 엘의 가락이 바람처럼 시안의 몸쪽으로 쏟아져왔다. “우…우웃!!” 시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받아들인다고 생각해야해. 무조건, 무조건 받아들인다고….’ 이전에 경험했던 그 몸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을 생각하고 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원래의 모 습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 고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안은 아무것도 느낄수 없었다. 잠시 더 기다려보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 시안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눈을 떴 다. 그의 눈에 눈이 화등잔만해진 로운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이? 아저씨 얼굴?” “설마. 로운 디 로크레슈.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엘-메타모르포시스!!.” 다시한번 높은 로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야 말로…라고 생각하고 시안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역시나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이런…,” 당황해하는 기엘의 목소리에 시안은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건가 싶어서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시안의 눈앞으로 뭔가 은백색으로 빛나는 투명하고 긴 줄이 스윽하고 지나 쳤다. “으악!! 이게 뭐야!!” 시안이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로운 역시 너무나 놀라서 입을 쩌억 벌렸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목격되고 있었다. 그것은 기엘도 마찬가지 였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길고 긴 뱀같은 형상이 시안의 몸을 가운데 두고 마치 그를 보호라도 하 고 있는 양 시안의 몸 주위를 뱅뱅 돌고 있었다. “기, 기엘 이게 뭐예요?”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시안님.” “로운!!” 다급해진 시안의 로운의 이름을 불렀지만 로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엘이 걸은 바인딩 쉴드의 주문은 피 시술자의 엘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주문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지금 기엘과 로운의 눈에는 시안의 몸 주위 가득하게 그의 엘이 팔팔하게 살아 서 숨쉬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 시안이 잘난척을 하면서 잔뜩 만들어 보였던 엘-루하스 때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봐요!! 이거!! 기분나빠!!!” 그 말에 길고 긴 뱀과 같은 형상이 꿈틀 대었다. 마치 자신도 기분이 나쁘다는 모양이다. 기엘과 로운이 놀라고 있는 것은 그때문만이 아니었다. 분명, 한사람에게 느껴지는 엘의 파장은 맹세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만고의 진리. 하지만 지금 시안에게서 느껴지는 엘의 파장은 두개 였다. 절대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두개의 엘의 파장. 그것은 지금 그들이 목격하고 있는 은백색의 뱀같은 형상이 내뿜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기엘은 자신의 눈과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얼마전부터 시안이 엘을 사용할 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보통의 미메이라인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던 그 엘의 반탄력, 그리고 너무나도 강한 시안 의 힘. 그때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기엘과 로운의 머리속에 일제히 떠오르고 있었 다. “젠장 그렇게 멍청한 얼굴만 하고 있지 말고 어떻게든 해보라니까!!!” 시안의 절규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한 로운이 소리를 쳤다. “입다물고 있어!!!” 시안은 파랗게 질린 로운의 얼굴을 보고 지금 자신의 몸을 돌고 있는 그것이 뭔가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로운.” “시안님. 진정하시고 제말을 따라서 해보십시오.” 먼저 제정신을 차린것은 기엘이었다. 기엘은 시안에게 천천히 말을 걸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시고 저를 따라서 주문을 외우십시요. 나하르-엘-크리어.” “나, 나하르-엘-크리어….” 움찔하고 시안의 몸을 맴돌고 있던 은백색의 형상이 움직였다. “다시 한번 해보세요.‘ “나하르-엘-크리어.” 시안은 이제 울것 같은 목소리로 기엘이 가르쳐준 주문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도대체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다시 한번!” “나하르-엘-크리어.” 슈욱-----. 흐르던 바람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그리고, 시안의 몸 둘레 가득하게 차있던 엘의 가락이 순식간에 시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시안의 목 둘레를 맴돌던 은백색의 형체가 소리도 없이 시안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시안도 기엘도, 그리고 로운도 아무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어찌 할 수 없는 침묵을 깬 것은 당사자인 시안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왜 안바뀌는거야!!!” 시안은 당황하고 있었다. 당연하게 로운의 주문으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있다고 생각하 고 있던 시안에게 있어서 방금전의 현상은 두려움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엘. 바인딩 쉴드를 다시 해봐.” “알았어. 기엘 디 하라스다인, 바람의 이름 미메리아의 시작에서 끝. 바인딩 쉴드.” 쏴아하고 공기와 같은 엘이 다시 시안의 몸으로 몰려갔다. 그것은 잠시 시안의 몸을 감싸는 듯 했지만 곧 이어서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르르 소리를 내면서 사라져 버렸다. “로운 디 로크레슈.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엘-메타모르포시스!!.” 로운이 다시 주문을 외웠지만 그것 역시 바인딩 쉴드와 마찬가지였다. 기껏 로운의 엘이 시안의 몸을 감싸는듯 싶더니 다음 순간 바인딩 쉴드 때와 마찬가지로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어떻게 된거냐니까!!!” 시안이 아무리 화를 내면서 로운과 기엘을 추궁해도 두 사람 모두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시안님의 힘이 세진 것 입이다. 저희 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 넘을 정도로요.” 한참을 지나서 시안이 들은 설명은 달랑 그것 뿐이었다. 그 이외에는 로운이나 기엘도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시안님이 바람술을 사용하실 수 있게 되면서 부터 더욱 활성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 각합니다. 점점 시안님이 바람술에 익숙해 지시고 계시다는 증거지요. 더이상은 저희들의 힘 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졌다고 해야할까요?” “그럼!! 그럼 이대로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죄송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소리를 지르고 시안은 넓게 펴놓았던 망토를 두르고 팩하고 돌아 누워 버렸다. 뭐라고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변환술이 실패한 이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로운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이유라고 들려주는 것도 믿기가 어려웠지만 결국 믿을 수 밖에 없는 것. 기엘이 열심히 위로를 하기는 했지만 시안은 그것조차 듣기 싫었다. 결과는 단 하나뿐이다. 실패했다는 사실. 한껏 즐거움에 부풀어 있던 만큼 시안의 실망은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시안이 더이상 아무 말 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주문이 듣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았던 그것. 은백색으로 반짝이던 그것이 시안을 괴롭혔다. 기엘이 시안에게 외우게 했던 주문은 폭주하는 엘의 힘을 원래대로 돌리는 일종의 정화 주 문이었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간신히 가라앉힌 시안의 엘. 그리고 그 정체 불명의 형상. 그것이 시안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광경을 시안도 똑똑하게 목격했던 것이다. 그런 이상한 것이 자신의 몸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자 시안의 등골이 오싹해져왔다. ‘도대체 그건 뭐야!!’ 시안은 마음속으로 미친듯이 그것에 대한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시안은 자신이 며칠전에 정화주문을 익히면서 자신의 몸 속에서 발견했던 풍옥의 존 재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 역시 눈치재지 못했다. 시안의 마음속을 지배하 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 미지의 은백색의 형체가 주는 두려움 뿐이었던 것이다. “로운.” 시안과 이리야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기엘은 살며시 로운의 이름을 불렀다. “로운….”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네가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건지 알아.”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던 로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느껴져?” “응.” “말은 안하지만 이리야씨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그래. 분명히 희미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아주 확실하게 생생하게 느껴지니까.” 로운은 쌕쌕거리며 잠든 시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지 알겠어?” “알면 이러고 있지도 않아. 하아---.” 로운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사주를 받아 목숨을 노리고 있는 놈들에다가 이제는 뭔지 모를 두 개나 되는 파장이라니. 정말 미치겠군.” 로운의 말에 기엘의 표정 역시 심각해져갔다. “두개의 파장은 어찌 할 수 없다고 치고, 도대체 누가 사주한 것인지 짐작가?” “글쎄. 역시 아버님일까?” 로운은 잠시 기억을 되살려 떠나오기 직전 그들이 함께 보았던 편지를 생각해냈다. 그 편지 에는 로운의 아버지인 로크레슈 장로를 조심하라는 내용이 써 있었다. “설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모를 일이지.” “무책임한 대답이로군.” “그러는 너는 떠오르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로운은 여행을 떠나기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분명 권력욕에 있 어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그를 위해서 자신과 시 안과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기엘의 목숨까지 노릴 만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단순하게 시안만을 노렸다면 혹시나 의심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로운이 파계를 해서 다시 로크레슈 집안을 이어가길 바라고 있는 사람이다. 그 런 사람이 암살단 전체를 동원해서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들리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엘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오리무중이군.” “방법이 없어. 지금으로써는….” 로운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마음속이 혼란했다. 해가 떨어지자 산속의 공기는 금세 차가워져버렸다. 그것은 밤이 되자 더더욱 심해져서 이 제는 기엘과 로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공기가 하얗게 변해버릴 정도다. “으응….” 잠자리가 불편한 듯 잠들어 있던 시안이 꿈틀거렸다. 기엘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그의 망토를 시안의 위에 덮어주었 다. “두개이긴 하지만 한쪽은 아주 약해. 확실히 느껴지긴 하지만 이건 아주 묘하게….” 잠시 시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엘의 파장을 가늠해본 기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그 말 을 로운이 받았다. “묘하게 원래의 파장과 어울려 있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절대로 알아 볼 수 없도록 말이 야.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렇게나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일단 뭔지는 모르지만 시안님 몸 자체에 위해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이상이 있었다면 벌써 일어났겠지. 저건 완전히 저녀석의 몸 자체를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다행은 정체를 알 수가 없는데.” 로운이 짜증을 내면서 말을 했다. 알 수 없는 존재만큼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존재는 없다. 그것도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위험은 좀 줄어든 거나 마찬가지잖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시안님이 직접적 으로 피해를 입을 가망성은 줄어든 거니까.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기엘은 애써 로운을 위로했다. 그것이 위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로운은 그런 기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캄캄한 숲의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팔을 들었다. “엘-루하.” 고요하게 주위의 공기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로운의 팔에서는 투명한 엘의 덩어리가 흘러나오 조용하게 그의 손가락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기엘도 로운의 옆에서 나란히 같은 주문을 외웠다. “엘-루하.” 훈련생 시절에 힘든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이렇게 둘이서 나란히 앉아서 엘-루하를 연습하 고는 했다. 이러고 있다보면 왠지 마음이 가뿐해지고 조용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 로 그 효과는 지금도 여전한지 조금은 불안정했던 두사람의 엘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 다. 조용하게 엘-루하를 마친 로운이 기엘에게 말했다. “어쨌든 간에 지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일단은 두고봐야 할 것 같 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날이 불투명하다면 일단은 닥친 일부터 해치워야 한다고 봐. 그렇 지?” 로운의 말이 기엘이 동의 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하고 차가운 공기가 두사람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맑은 하늘에 보이는 것은 흰색으로 반짝이는 달과 수도 없이 뿌려져 있는 별들. “먼저 자. 기엘.” “넌?” “내가 잘 때는 널 반드시 깨워 줄테니까.” 불침번을 서겠다는 소리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위험은 추적자들이다. “그건 그렇고, 낮에 그녀석이 무슨 소리를 했길래 저 남자를 잡아온 거야?” “글세. 나도 잘 모르겠어. 대뜸 한 놈을 잡아오라고 하시더라구. 그래서 그대로 따른 것 뿐 이야. 위험이 따른 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간결하게 떨어지는 기엘의 말에 로운은 기엘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렇게 말하는 기엘의 얼굴에는 한줌의 의심도, 흔들림도 없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사실은 나도 정 말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어. 저분이 진짜 시안님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기엘이 무슨 뜻으로 말을 하는지 로운도 적지 않게 이해가 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심정이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처음 당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시안이 보여준 행동은 단순한 혼란만으로 점철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잠시 잠깐의 혼란은 정말 한순간 뿐. 정신을 차린 뒤에 시안이 보여준 행동은 지금까지 보 아왔던 어딘가 나사 빠진 듯한 멍청한 시안이 보여준 행동이 아니었다. “기분이 이상해. 로운.” “그래….” 나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로운은 왠지 모를 감정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라. 딱 3시간 후에는 두들겨 깨울 거니까.” “그래.” 로운은 자신의 망토를 기엘에게 던져주었다. 기엘은 피식하고 웃으면서 그것을 받아들고는 로운의 옆쪽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친구다. “잘자라.” “응.” 기엘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숙면을 방해할 만한 사건은 얼마든지 있었다. 기사가 된 뒤 로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실전이라는 것을 넘치도록 경험한 하루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앞으로 남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에 얼마든지 더 일어 날수 있는 일들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또다시 추적자들을 피해서 미친듯이 도망을 쳐야하는 신세인 것이다. 눈을 빼꼼하게 뜨자 그의 앞에 그가 지켜야 할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기분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그 얼굴은 있는대로 인상을 쓰고 있다.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시안님….’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기엘의 의식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날아가기 시작했다. ◇◆◇ 예로부터 페이요트 산맥은 상당히 험준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는 메디아나 동토인 나칸의 땅에 있는 어떤 산맥보다 도 더 험준하다고 소문이 난 산맥이 바로 페이요트다. 사실 이 소문에는 어느 정도는 과장이 섞여 있었다. 아슈레이의 대륙 대부분의 산맥들은 이상하리 만치 북동쪽에 몰려 있다. 그 산맥들은 땅의 신국인 바라스로부터 시작되는 험준한 산맥들이 대부분인데 페이요트 산맥은 다른 산맥들과 는 전혀 상관없이 아슈레이 대륙 중반을 동서로 나누는 지표가 되어 있으면서 홀로 외로이 떨어져 있는 산맥이었던 것이다. 페이요트 산맥의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끊임없이 넓고 평탄한 대지가 펼쳐져 있 는 가이칸 제국이나 세비 연합국에 혹해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로써는 페이요트 산맥이 세상에 둘도 없는 험준한 산맥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 페이요트 산맥의 북쪽 끝자락의 이름 모를 고개가 로운이 선택한 탈출로(?)였다. “계곡으로 간다며.” “이쪽이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되서 말입니다.” 기엘은 이리야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부드럽게 말했다. 사실 이 일행중에서 가장 억울하다면 억울할지도 모르는 남자가 바로 이리야였다. 가뜩이나 도망노예(?)의 신세라서 쫓기는 터인데 거기에 엎치고 덮치는 격으로 검은 암살단 하셰카의 추격까지 받게 되버린 것이다. 우리는 원래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이미 이리야가 처치해 버린 암살단원의 수 가 만만치 않았던 것도 문제. 자신들의 목적을 방해하는 사람까지 철저하게 말살하기로 유 명한 하세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리야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시안의 일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기엘은 더더욱 이리야에게 미안해 하고 있었다. “참나. 그 이상한 놈만 아니었으면 그냥 레카에서 희희낙락하면서 살수도 있었는데 왜 이 런 고생을 사서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봐요 아저씨!!” 이리야가 계속 투덜 거리자 앞쪽에서 묵묵하게 산을 오르고 있던 시안이 팩-하고 뒤를 돌 아다보면서 말을 했다. “자꾸 그렇게 투덜 거리지 말라구요. 그렇게 말하면 제일 억울한 건 나란 말야. 누가 좋아 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요? 나도 이런곳에 오지만 않았으면 지금쯤….” “꼬마.” 시안이 줄줄 말을 하려고 하는데 로운이 그것을 저지했다. 이미 어느 정도 사정은 다 알게된 이리야기는 하지만 그 뒤에 시안이 내뱉을 지도 모르는 말은 정말 정말 기밀에 속하는 것들 뿐이다. 시안은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듯 로운을 한번 쏘아보고는 다시 제 갈길을 가기 시작했 다. 사실 로운이 꽤나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디로 보아도 이 일행중에 제일 연약 (?)해 보이는 것이 바로 시안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시안은 어느 누구보 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척척 앞서서 가고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산을 좋아해서 산을 즐겨 오르던 시안의 원래 모습, 즉 경하의 취미때문이 었지만 그것을 알리 없는 나머지 세사람은 나름대로 참을성과 끈기를 보여주고 있는 시안에 게 어느 정도는 감동 아닌 감동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사실 갸느다란 팔다리를 하고 있는 절세의 미소녀가 찍소리도 하지 않고 묵묵하게 험한 산 자락을 올라가고 있는 것이 어찌 감동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리야는 그런 시안의 뒤를 따르면서 조금은 아쉬움의 입맛을 다지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뭔고 하니 바로 앞장서서 가고 있는 시안의 뒷모습 때문이었는데 그 뒷모습은 어 제와는 달리 그 반짝이고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꼭 꽁지빠진 제비 뒤 무니 같은 조그만 자루만이 아래위로 오락 가락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그 문제의 변환술이 실패하고 난 후, 시안은 두 번다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어떠한 단 어도 언급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시안이 요구한 것은 길게 늘어져 치렁 치렁하는 거미줄 같은 머리카락을 잘라달라는 것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차마 기엘도 이번에는 말리지 못했다. 시안의 길고 긴 머리는 로운이 손수 싹둑!!하고 잘라주었고 지금 시안은 뒷통수에 남은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거리였던 시안의 머리카락이 그런 꼴이 되자 제일 펄펄 뛴 것은 역시 이 리야였지만 시안은 그런 이리야를 아주 티껍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쏘아보았을 뿐, 아무도 이리야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저기 이쪽 맞기는 맞는 거야? 어째 가도 가도 끝은 안보이고 계속 험해지기만 하는 거 지?” “방향은 맞아.” “맞아도 그렇지. 고개를 넘어간다고 해서 그런가 했는데 아무래도 이거 산등성을 타고 올 라가는 기분이라구.” 시안은 각도가 한 35도쯤은 되는 바위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서는 이상하다는 듯이 로운에 게 물었다. “산을 우습게 보면 곤란해. 좀더 자세한 지도는 없어? 아. 없었지….” “역시 계곡을 따라 가는 쪽이 좋았다니까. 이런데서 식수는 또 어떻게 구하려구.” “하지만 그대로 방향이 맞다고 하니까 일단 그대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시안님.” 제각기 모두 말이 달랐다. 로운은 옆에 비스듬하게 뻗어 나온 나무에 잠시 기대어 쉬면서 난감한 이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조금 더 상세한 지도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지금으로써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을텐데?” “그렇긴 하지만 이러다가 불쑥 이 산에 사는 맹수같은 것이라도 튀어나오면 곤란하다구. 아버지가 언제나 말씀 하셨지만 험난하고 인적이 드문 산에는 아직도 산짐승들이….” “크르르르르르….” 시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맹수의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등골이 서늘해 올 정도로 나지막하면서도 위험스럽게 들리는 소리. “어라? 정말 나왔나봐….” “시안님 몸을 피하십시오!!” 기엘이 라이트를 뽑았다. “이렇게 교과서적으로 진행되면 곤란한데….” 시안은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해서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겸연쩍어하며 움찔 움찔거리면서 바위에 기댔던 몸을 슬슬 움직였다. 왠지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황. 그것은 한참이나 추적자들에게 쫓겨왔던 때문인지도 몰랐다. “꿰엑!! 저건 라칸드라잖아!!” 이리야가 괴성을 질렀다. “크와아아앙!” 훌쩍-! 검은 표범과 비슷하게 생긴 시커먼 괴물이 뛰어올랐다. 굳이 표범과 다른 곳을 찾는다면 언젠가 시안이 백과사전에서 보았던 샤벨 타이거처럼 생긴 길고 긴 송곳니와 도무지 뭔 종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날개일 것이다. “우와악!! 내쪽으로 온다!!” “머리 숙여!!” 시커먼 라칸드라는 일행중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것이 시안이라는 것을 눈치 챈 듯 다른 일 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시안쪽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미안하지만 여기는 바람이 불어도 너무 잘 부는 곳이라구.” “시안님 쉴드를 치십시오!!” 머리를 숙이고 바위 옆에 찰싹 달라 붙어있던 시안에게 기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렇지!!’ 태어났을 때부터 바람술을 쓸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취해야 할 행동도 시안에게는 의식적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시안은 재빨리 주문을 외우고는 주위에 잔뜩 엘의 바람을 만들어내서 몸을 보호했다. 기엘과 로운은 라이트의 손잡이를 굳게 잡고서 괴물이 잠시 허점을 만들기를 기다렸다. “크르르르르.” 라칸드라가 이를 세우면서 으르렁 거리면서 시안에게 그 큰입을 쩌억-하고 벌리려는 순간 그제서야 공포라는 감정에 휩싸인 시안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아아악!!!” 끔찍한 썩은 냄새가 라칸드라의 입속에서 풍겨나오려던 그때, 그것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이 루어진 일이었다. 주위를 가득 메울 정도로 시안의 몸 주위에 떠다니던 투명한 엘의 자락 하나가 한순간에 은 백색의 뱀으로 화하더니 기가 막힌 속도로 라칸드라의 심장이 있는 부분을 관통하고 지나갔 다. “쿠오오오!” 심장을 관통당한 라칸드라는 단발의 괴성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털썩하고 쓰러져 버렸다. 어찌할 수도 없는 침묵이 그 위를 맴돌았다. “어, 얼레?” 시안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지만 모두들 멍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죽인 거야?” 심장을 관통당한 라칸드라의 몸에는 이상하게도 상처하나 없었다. 시안은 도대체 어떻게 이 괴물이 죽었는지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멀뚱 멀뚱 서 있는데 이리 야가 간신이 입을 열었다. “완, 완벽한 보호막이로구만. 그거.” “예?” “그거 말이야. 그거.” 이리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 즉 자신의 어깨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시안은 소름이 짝 끼쳐 올랐다. 예의 그 은백색의 투명한 뱀처럼 생긴 것이 하늘 하늘 거리면서 자신의 어깨위쪽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게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안의 괴성에 그 은백색의 뱀이 실례라는 듯이 꼬리(라고 생각된다) 를 한번 흔들더니 이내 시안의 몸 속으로 스윽-하고 스며들었다. “우악~ 기엘, 로운~ 또 나타났어!! 또!!” 시안은 제자리에서 펄펄 뛰면서 난리를 떨었다. 손으로 그 형체가 스며들어간 어깨를 미친 듯이 털면서 시안은 울상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그러나 기엘도 로운도 뭐라고 해줄 말이 없는 바람에 시안은 혼자서 호들갑을 떨 수 밖 에 없었다. “그 라칸드라를 잡은 사람은 누구요.” 시안의 어깨가 뻐근하게 될 정도로 두들겨 맞고 있는 와중에 어디선가 굵직한, 마치 금속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세 남자는 방어자세를 취했다. “누가 잡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놈은 내가 삼개월이나 노리고 있던 놈이요. 원한다면 거 래를 해도 좋으니 나에게 넘겨 주었으면 하는데….” 털썩- 피묻은 날개를 한 새가 남자의 발 아래 떨어졌다. 온통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시커멓고 덥수룩한 구렛나루를 그대 로 드러낸 채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 “도대체 어떻게 이 사나운 라칸드라를 상처 하나 없이 잡았는지 모르겠군.” 길게 늘어진 라칸드라의 배를 솜씨있게 가르고 내장을 꺼낸 후 남자는 재빠른 솜씨로 가죽 을 벗겨내고 있었다. “그게 말입니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기엘이 우물거리는데 대뜸 시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내 앞으로 뛰어오더니 그냥 픽하고 쓰러졌어요 아저씨. 심장마비가 온 것 같기도 하 고….” 시안 스스로도 말이 좀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이외에는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 사실에서 아주 약간의 부분만을 제외하고 그대로 털어 놓은 것이다. 실제 거짓말은 아니니까. “꼬마 아가씨가 귀여운 소리를 하는 군.” 그는 마치 자네들이 알아서 했겠지 하는 눈으로 앞에 멀뚱하게 서 있는 로운들을 바라보았 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곳은 산 중턱 작은 평지에 위태 위태한 모습으로 서 있는 통나무 집 앞이었다. 그저 평범한 사냥꾼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남자(사실 라칸드라를 사냥할 정도면 평범하 지는 않다)는 시안 일행에게 오늘 하루 잘 곳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라칸드라를 양도 받았 다. “여하튼간에 잘 곳을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이지만 오늘 하루는 시안을 노숙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엘은 진심을 담아서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막상 그 침대 비스무리한 형체에서 드러누워 자야할 대상인 시안은 왠지 한번만 누 우면 벼룩과 빈대에 무진장 뜯길 것 같은 침대를 아주 시큰둥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기는 잔다고 치고, 이거 안 쓰러져요? 아저씨?” “라이.” “예?” “아저씨가 아니라. 라이라고 해.” “아앙~. 라이 아저씨.” 연상에게는 말끝마다 꼭꼭 아저씨를 붙이는 것은 아마도 시안의 입버릇인 것 같았다. 이리 야는 왠지 라이라는 남자가 가죽을 벗기다 말고 손을 움찔하는 심정이 이해가 갔다. 이런 산골(?)에 살다가 난데 없이 선녀를 능가하는 미소녀를 만났는데 대뜸 아저씨 아저씨 라고 불리니 기분이 상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그 심정은 이리야도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이봐. 꼬마아가씨. 아니 시안 양. 기왕이면 그냥 이름을 불러 달라구. 나나 이 사람이나 아 직 여편네도 없는데 아저씨라는 소리를 들으면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이리야의 항변에 시안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아저씨라는 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사람은 전부 진짜 아저씨라는 거 몰라요? 모름지기 아 저씨가 아닌 남자는 아저씨 소리를 들어도 꿈적도 안하는 법이라구요. 아저씨인 사람일수록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을 끔찍이 싫어한다고 하던데….” 시안은 이전에 누나들이 번갈아가면서 아저씨와 오빠의 차이에 대해서 벌였던 열띤 토론의 결론을 기억해내면서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안의 말을 듣자마자 모두 한 구석에 서 있는 로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갑작스럽게 사람들-그래보았자 이리야와 기엘과 라이뿐이지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 자 드물게도 로운이 당황을 했다. “왜, 왜 나를 보는데? 내가 뭘!!” 로운은 자신이야 말로 항상 시안이 자신을 아저씨 얼굴이라고 부르는 것을 신경쓰고 있던 터라 무언의 항의가 섞인 일행의 시선을 거부했다. “그렇군!! 왜 몰랐지?” “…………….” “로운, 그래서 화를 냈던거야?” 각기 다른 반응들에 시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하핫! 역시 엄청 재미있다니까. 이 사람들. 푸하하하하.” 배를 접고 자지러지게 웃고 있는 시안을 바라보며 일행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저씨라고 불리고 있는 당자자들은 그 위에 하나 더, 용서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 다. “시안님 잠이 안 오십니까? 힘드시지 않으세요?” 기엘은 불침번을 서기 위해서 망토를 걸쳐입다가 문득 뻥 뚫린 창가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시안을 발견했다. “아. 기엘.” “혹, 너무 피곤하셔서 수면을 취하시기 힘든 것이시라면….” “여전하네요. 그 존대말.” “글세요. 타고 나서 그런 것일지도요. 많이 신경 쓰이십니까?” “아니 별로. 기엘은 처음부터 그래와서 그런지 꼭 그런거는 아니고, 으음, 뭐라고 해야하 나….” 뭔가 대답할 말을 찾기 위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시안을 보면서 기엘은 흐뭇한 마 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에잇. 모르겠다. 그냥 맘대로 해요. 뭐라고 해도 안통하는 걸.” “감사합니다.” 사실 기엘은 자신이 이 소녀, 정확하게는 이 이계에서 온 소년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연스럽게 존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은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버릇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왜 존대말을 쓰냐고 묻는다면,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마샤님께서 말씀하신 내 주인이 이 시안님일 수도 있을 지도 몰라.’ “피곤해서 잠이 안오는게 아니라 조금 꿀꿀해져서 잠이 안와요.” “꿀꿀이요?” 기엘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가끔 시안님이 쓰는 그 이상한 단어들은 기엘의 어휘력 의 범위를 넘어설 때가 많다. “그냥 실감하고 있다고 해야하나? 뭐 그런거예요. 사실 이해가 안가서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시안은 말을 하다 말고 기엘의 맑은 청회색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 기엘이라고 하는 기사는 정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까? 실제 이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벌써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왔다. 그 사실은 저 기 누워 있는 밉살스런 로운이나 만난지 얼마 안되서 아직도 조금은 서먹 서먹한 사이인 이 리야도 마찬가지 이다. 사람이 죽는 다는 것. 시안이 경하이던 시절-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는 사실도 꿀꿀한 기분에 박차를 가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가끔 집의 어른들께 전해지는 부고(訃告)정도 였을 뿐이다. 신경쓰지 말자고, 신경을 꺼버리자도 몇 번이나 다짐해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시안 도 어쩔 수 없었다. 로운이나 기엘에 말에 따르면 아직 자신들을 죽이려 드는 하세가의 의뢰인이 누군지도 모른 다고 한다. 결국 앞으로 얼마동안, 그리고 얼마만큼의 죽음이라는 현실과 맞부딪혀야 하는지 시안은 알 길이 없었다. “기엘은….” “예?” 기엘은 사람을 죽이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나요? 라고 물으려던 시안은 그만 입을 다물어 버 렸다. 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특히 적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의 이 유 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역시 자신,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의 겉모습과 시안이라고 하는, 그리고 수장계승 자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잘게요.” “예. 시안님. 어서 주무십시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시안은 왠지 더 기분이 나빠졌다. 죽었다고 하는 시안이라는 여자에게 왠지 질투심 비슷한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결국 아무 리 이들이 충성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이 뒤집어 쓰고 있는 껍질에 향해지는 것이다. ‘정말이지, 복이 터졌어. 이 시안이라는 여자는….’ 6. 바람의 세나케인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뜻밖의 순간에 찾아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으로 그것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가장 최악의 감정을 맛보게 된다. “저 산등성이 보이나?” “저기 저거 말입니까?” 로운은 라이라고 하는 사냥꾼에게서 받은 조잡하기는 하지만 그럭 저럭 꽤나 훌륭한 지도한 장을 들고 있었다. “저 산등성이랑 비슷한 것을 4개정도 넘으면 저거보다 딱 두배되는 산이 하나 더 있을거 야.” ‘꽤액--- 죽이는군.’ 시안은 옆에서 로운이 들고 있던 지도를 보고 있다가 라이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비명을 질 렀다. 아무리 산행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지금 라이가 가르켜 보이는 산등성이는 그냥 보아도 만 만치 않다. 그런데 그런 것을 4개나 넘고 그 다음에는 그거보다 두배는 더 큰 산을 넘어야 한다고 하니 비명이 나올 수 밖에. “그 산은 워낙 험해서 이쪽으로 이렇게 우회를 하는게 좋을 거야. 좀 험하긴 해도 직접 산 을 타는 것 보다야 훨씬 좋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라이의 손가락이 가르킨 지도에는 ‘하라스 계곡’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내가 아는 한은 없소.” 절대적이라고 할 정도로 단호한 말투였다. 로운은 그나마 지도라도 한 장 더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의 사정으로는 이정도도 대단한 수확인 것이다. “이 계곡을 통과하는 가장 좋은 길은 대충 여기쯤 인데 절벽이긴 하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 면 충분히 사람이 통과할 만한 길이 된다고 하더군.” “충분히요?” 뭔가 단어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은 로운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저럴 때의 충분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간신히 통과 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라는 의미로 밖 에는 들리지 않는 법이다. “충분히라….” “어디가 충분하다는 거야-----!” 시안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는커녕 있는 힘 없는 힘을 모조리 긁어모아 바 락 바락 악을 썼다. “젠장 할! 저걸 어떻게 가냐!! 말도 안 돼!! 안가!! 못가!!” 평소 같으면 누군가 한명이 이렇게 방방 날뛰고 있는 시안을 막을 만도 하건만 아무도 시안 이 날뛰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모두들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그 무엇’에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 바라보며 넋이 빠져있는 곳은 이름하야 ‘하라스 계곡’의 입구. “이게 무슨 계곡이냐? 협곡이지. 젠장 이 동네 지도 제작자들은 모조리 반성해야해!!” 시안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빌어먹을. 오늘은 더 못가. 안가!! 아이구 죽겠다.” 널따란 바위 위에 벌러덩 누워서 시안은 앓는 소리를 했다. 입안이 까칠 까칠 했다. 시안은 지난 9일간의 험난한 여행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부르르르 떨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버지 말대로 산이라는 것은 만만히 보아서는 안될 상대라는 생각이 정말 뼈가 져리 게 경험한 9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면 안된다는 사실도, 그리고 체력은 있어도 산을 오르는 기술이 별로 없는 인간들과 일행이 되어 있으면 힘이 배로 든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으윽. 다리야. 허리야. 어깨야.” 시안이 뒹굴거리고 있자 하나둘씩 일행들도 시안의 옆에 털썩거리며 주저앉았다. 풀썩 풀썩 먼지가 피어올랐다. 9일 동안 연달아 산등성이를 따라 강행군을 해온 일행은 현재 몸도 마음도 너덜 너덜 해져 있었다. 지도도 있었고, 천연(?) 나침반도 있어서 헤매지는 않았지만 길도 없는 산행은 생각보다 훨 씬 힘들어서 시안이 일주일이면 된다고 한 길이 이틀이나 더 지채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4개의 험준한 산을 넘어서 마지막으로 남은 계곡앞에 다다르기 직전 시안일행은 묘 한 흥분에 사로 잡혀 있었었다. 이제 ‘계곡’만 지나면 평평하고 안전한 ‘대로’를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대로는 둘 째치고 따스한 물에 몸을 씻고 이리야나 기엘이 적당히 구워댄 토끼대신에 맛있게 요리한 훈제 고기나 스튜같은 것을 먹을 수 있게 된다라고 생각해왔던 일행에게 있어서 지금 눈앞 에 까마득하게 펼쳐진 ‘하라스 계곡’은 정말이지 있던 힘도 모조리 쭉- 빠져버릴 것 만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저것도 길이라고 있는거냐. 에이. 젠장할.” 몸이 힘들어지자 시안의 입도 그만큼 험해졌다. 사실 그전까지는 주위 눈을 의식해서 겉보기 등급에 맞추어 얌전을 떨어 왔을 뿐이다. 때문 에 극한 상황이 닥치자 시안의 입은 원래의 18살 거친 고교생의 말버릇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암담하군.” “그러게나 말이야.” “차라리 아래로 뛰어 내려서 계곡 물을 타고 둥둥 떠내려 가면 안될까?” 이리야가 엉뚱한 소리를 했지만 아무도 처다보지 않았다. 그들에 머릿속에 둥둥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바닥도 안 보이는 계곡 저 아래뿐. 잠시간의 침묵이 네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한참을 그렇게 넋놓고 앉아있는데 시안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몽땅 다 일어나 빨리!!” “시안님?” “………….” “왜?” “가자.” 시안은 너불 너불 헤어지기 시작한 망토를 벗어서 둘둘 말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런 시 안의 행동을 멀뚱하게 세 남자가 쳐다만 보고 있자 시안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 말을 했 다. “저걸 넘어가야 할거 아냐 저걸!!” 시안이 가르키는 것은 한사람이 겨우 갈 수 있을 까 말까할정도로 좁디 좁은 벼랑길. “아직 해도 중천이잖아. 여기서 널부러져 있다가는 오늘 밤 그냥 꼴딱새고 금방 내일이 된 다구.” “하지만 시안님 지금은….” 기엘이 나서서 시안을 말리려고 했지만 시안은 막무가내 였다. “시끄러워!! 가자면 가는 거야. 그 털복숭이 아저씨 말로는 잘하면 여기는 몇시간 만에 지 날 수 있는 곳이라고 했잖아. 힘든거는 제일 먼저 해치우는게 좋아.” 시안은 갑자기 어디서 없던 기운이라도 생긴 듯 팔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가자!! 고지는 저기다!!” 마치 나폴레옹이라도 된 것처럼 시안이 일행을 재촉했다. 벌써 일주일도 넘게 제대로 씻지 않았건만 시안의 플라티나 블론드는 햇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였다. “…………기운도 좋군.” 이리야는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좋아. 좋다구. 나도 얼른 이놈의 산행을 끝내고 싶으니까.” 결국 일행은 안달을 하는 시안의 뒤를 따라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간신히 자신의 목적을 이룬 시안은 그제서야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야. 가기전에….” “……………??” 일행은 시안이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일제히 시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밥, 먹고 가면 안될까?” “조심해!!” -타닥. 탁. 탁. 탁탁. 시안이 방금 발을 디딘 부분이 부서져 돌이 계곡 아래로 아래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안은 등골을 따라 흐르는 식은땀이 더욱 더 차가위 지는 것을 느끼면서 간신히 다음 지점 에 발을 디뎠다. ‘으윽. 이럴 줄 알았으면 자고 지나가자고 할 껄.’ 뼈에 사무칠 정도로 후회가 밀려왔다. 역시 아버지의 말씀에는 틀리는 것이 없다. 아버지는 언제나 힘이 달릴때는 충분한 휴식후에 움직이라도 했었다. 괜시리 힘이 남아있다 고 해서 강행을 하다보면 중간에 힘이 달려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던 것이 시안의 머릿속에 떠올랐고 시안은 그 말을 정말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절벽에 마치 천년된 아름드리 나무에 붙여 있는 매미꼴로 매달려 있는 시안은 등뒤로 휘잉 거리며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저기 기엘….”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시안은 기엘을 불렀다. 하지만 기엘을 부르고 보니 그는 자기보다 훨씬 뒤 이리야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게 생 각이 났다. “으윽. 젠장. 로…운.”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안은 제일 앞장 서가는 남자를 불렀다. “로운~.” 순간 바람이 휘잉-하고 불어 왔다. “로운---!!!” 시안은 소리를 높여서 로운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그제서야 시안의 목소리가 들린 듯 로운 이 힐끔 뒤를 돌아 보았다. “왜!!” “할 수 있으면 이놈의 바람 좀 어떻게 안 돼? 바람에 밀려서 떨어질 것 같다구!!!” “……………” “바람 술사잖아!!! 어떻게 좀 해봐!!!” “…………” “내말 안들려?” “넌 눈뜨고도 안보이냐? 바람 술정도는 이미 쓰고 있어. 이 절벽에 이정도 바람이 가당키 나 한 줄 알아? 그나마 바람술로 최대한 가로막고 있는거라구!! 너야 말로 눈좀 크게뜨고 봐라!!” 완전 스트레스성의 발언이 로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에?” 로운이 말을 마치자 마자 시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자의도 타의도 아닌 그냥 자연스 러운 현상이었다. 마치 개안(開眼) 수술이라도 받은 환자처럼, 로운의 말에 자극 받은 시안의 몸이 저절로 반 응을 한 것이다. 시안의 눈에 순간적으로 로운이 만들어 내고 있는 강한 쉴드가 비쳤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방패처럼 시안 일행 전부를 덮고 있었다. 마치 투명하고 거대한 방패같 았다. 결국 시안은 찍 소리도 하지 못하고 벼랑에 들러 붙어서 얌전하게 로운의 뒤를 따를 수 밖 에 없었다. “으윽. 다왔다.” “하아---.” “아이고오오 죽겠다.” “괜찮으십니까 시안님?” 차례대로 널부러지는 일행들. 그들은 방금 전에 통과한 ‘하라스 계곡’의 출구에 나란히 엎어져 있었다. “젠장. 역시 쉬고 올걸.” “그러게 고집은 왜 피운 거야?” “누가 피우고 싶어서 피웠어? 어쨌든 나왔으면 된 거잖아!!! 따지지 마!” “둘 다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물지?” “시안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질문은 기엘이 하고 확인은 로운이 했다. 로운은 아무말없이 시안의 몸 여기 저기를 마구 주물러보더니 기엘을 향해 ‘이상무’라고 보고를 했다. 시안은 자신을 마치 무슨 짐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물거리는 로운에게 화를 낼 기운도 없 어서 엎어진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졸음이 마구 몰려왔다. “최단거리라고 하더니 그말이 맞기는 맞나보군.” “그러게나 말이야. 이제는 여길 천천히 내려가는 일만 남았으니 뭐 나쁘지만은 않지만.” 로운이 지도조각을 확인하면서 말을 하자 이리야가 맞장구를 쳤다. “어떻게 할건가? 여기서 좀 쉬다 갈 건가? 아니면?” “이곳은 위험하기도 하고 하니 좀더 내려가서 쉴 곳을 찾아보는 쪽이 좋을 듯 싶습니다 만.” 기엘이 손을 내밀자 로운은 들고 있던 지도를 넘겨 주었다. “여하튼 생각보다 빨리 온 것 같아. 그렇지?” “그래.” 로운은 피곤함이 눈으로 몰리는 듯 손을 들어서 눈과 관자놀이 부근을 몇 번씩 자극했다. 계속되는 강행군과 단 한순간도 신경을 놓지 않고 있다가 일단 제일 험한 길은 빠져나왔다 는 생각에 안도를 하자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 버린 듯 싶었다. ‘뭔가 좀 신경에 거슬리는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기엘. 기운이 있으면 네가 대신관님께 오로프를 날려보내줘.” “아. 알았어.” “보고는 해야하니까. 아마도 걱정하시고 계실텐데.” “그렇지.” 기엘 역시 못지 않게 힘이 들었지만 흔쾌히 승낙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서 있으면 몸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부는 벼랑 끝 부분이라서 바람의 술을 쓰는데 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기엘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커다란 바위하나를 발견하고 그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그는 그새 엎어진 그 자세로 그대로 잠들어 버린 시안을 잠시 바라보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 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 시작에서 끝. 아샨.” 주문에 실린 엘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한자리로 모여들면서 희미한 모양의 새의 형태를 갖추어 나타났다. “나이트 기엘의 명령이다. 페이오트 산맥을 통과 했음. 전원 무사.” 전할 말을 마친 기엘은 손가락을 들어 새의 머리를 가볍게 치면서 시동어를 외웠다. “오로프.” 풍부한 바람 덕인지 기엘이 만들어낸 새는 그 꽤나 형태가 뚜렷한 날개를 몇 번이나 퍼덕이 더니 곧장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세상모르고 깜빡 잠들어 있던 시안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소리를 질렀다. “위험해---!!!” ------퍼억. 새빨간 피밧울이 거센 바람에 섞여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크헉--!” “기엘!!!” 로운의 비명소리가 바람을 찢었다. “젠장!!! 놈들이다!!” “어떻게 여기에!!” 시안은 자신이 방금 소리를 쳐놓고도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박 였다. “쿨럭, 쿨럭, 크--흑.” 시안의 눈에 어깨에 화살이 깊숙하게 박힌 기엘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기엘!!” 그제서야 시안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살기를 느끼고 반응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쪽이지?’ 시안은 온 몸이 아프도록 몰려오는 살기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멍청아!! 머리 들지 말고 있어!!” 몸을 은폐시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벼랑끝. 로운은 기엘에게로 간신히 기어가서 쓰러지기 직전에 처한 기엘의 몸을 끌어당겼다. 기엘은 주문을 쓰기 위해서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로운이 기엘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빗발치듯이 화살이 떨어져내렸다. “쉴드!!” 로운의 고함소리와 함께 빗발치던 화살들 중의 반이 공중에서 벽에 부딧친 것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이리야씨!!” “걱정말고 그 친구나 끌어내!!” 이리야는 몸을 던져서 시안의 몸을 끌어안고 납작 바닥에 엎드렸다. ‘제길. 조금만 더가면 바위 뒤에 몸을 숨길 수 있는데.’ 시안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너! 저녀석처럼 쉴드를 만들 수 있지? 해봐. 저기 까지는 가야해.” “아--.” "빨리!!“ “알았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시안은 몸이 달아서 몇 번이나 주문을 외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젠장!! 꼭 필요할 때는…. 아!!”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시간. 시안은 간신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어차피 이론은 비슷한 것 같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그리고 시안은 있는 힘껏 자신이 가진 힘을 그대로 내뿜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대로 엘의 힘을 가진 바람의 가닥이 되어 마치 거대한 이파리를 가진 수초처럼 시안과 이리야의 주위 를 감쌌다. “젠장. 바리어는 아니지만 대충 비슷한 거니까….” “좋아 간다!!” -파바바박. 화살이 바위 위에 꽂히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왔다. 이리야는 최대한 시안의 몸을 감싸고는 바위 뒤로 몸을 날렸다. “쿠억!!” “으윽---!” “기엘!! 괜찮아?” “괜찮아. 이거 뽑을 거니까. 내 어째 좀….” 로운이 쳐둔 바리어 덕에 비교적 안전하게 있던 기엘은 자신의 어깨를 관통하여 앞으로 삐 죽 튀어나온 화살 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카치르.” 투둑-하고 화살쪽이 화살에서 떨어져 나왔다. 날카롭게 변한 바람이 칼보다 더한 예리함으로 화살촉을 잘라낸 것이다. 로운은 그런 기엘 의 상태를 잠시 확인한 후 같은 주문으로 뒤쪽의 화살대를 제거했다. “준비 됐어?” “그래.” 강한 손이 기엘의 어깨를 붙들었다. 기엘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숫자를 셀테니까.” “괜찮아. 내가 뺄게.” 기엘은 자유로운 왼손으로 앞으로 삐죽 튀어 나와 있는 부분을 꼭 잡았다. 즈끈거리는 통증이 온 몸을 달렸다. “하나. 둘. 셋---!” “-----!!” 묘하게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기엘의 왼손이 남은 화살대를 한번에 뽑아내었다.순 간 기엘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기엘!!” “괜찮아.” “금방 치유 주문을….” “내가 할 수 있어. 넌 시안님을….” 붉게 물들은 시야에 바위뒤에 웅크리고 있는 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화살이 통하지 않게 되자 이제 검을 들고 직접 몸으로 부딪히려 오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의 모습도 로 운과 기엘의 눈에 들어왔다. “…빨리!!” “알았어.” 로운은 기엘의 몸을 놓고 라이트를 빼어들고 숨어 있던 바위 뒤에서 뛰쳐나갔다. 기엘의 눈에 비친 로운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흐려졌다. ‘이 정도로 그러지는 않을텐데, 설마….’ “괘, 괜찮은 걸까요?” 시안은 이리야의 팔에 매달려 로운이 기엘의 화살을 빼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리 야 역시 같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괜찮을 거야. 어깨에 박힌 정도로는 죽지 않으니까. 화살촉에 독이라도 묻어있지 않는 이 상은….” 괜찮을 거라고 대답하려던 이리야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세카가 쓰는 화살은 언제나 치명적인 독이 발려져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아 는 사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마 이리야는 시안에게 그 말을 해줄 수 가 없었다. ‘젠장. 내가 가야하는데….’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은 줄어 들었지만 대신 그에 눈에는 살기 등등하게 검이며 각종 무기 를 들고 다가오는 남자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와 동시에 건너편에서 로운이 라이트를 들고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좋아. 저 친구가 나간다면….” 이리야는 그때까지 그의 허리춤에 대롱 대롱 매달려 있던 레이피어를 꺼냈다. 사실 그같은 체격에는 바스타드 소드쪽이 어울리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레이피어는 경량화의 술을 걸어 나무막대기보다 가볍게 만들어진 물건으로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야하는 그가 나름대로는 여 러 가지 이유에 맞추어 구입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레이피어는 어지간한 일이 생기지 않 는 이상은 절대 쓰지 않는 무기다. “제길 난 검술을 배우기 직전에 도망을 쳐서 사실은 곡갱이 휘두를 줄 밖에 모르는데.” “이리야씨!!” “아가씨는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말고 있으라구. 절대로 꼼짝하면 안 돼.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저 인간들한테 곤죽이 될 때 까지 맞아 죽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 절대로 여기 서 숨어 있어!! 알아 들어?” “아, 알았어요.” 서슬 퍼런 이리야의 발언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무엇인가 하고는 싶지만 아직 까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젠장 할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면….” 마음은 초초 했지만 아직 그가 쓸 수 있는 바람을 술은 너무 미미하다. 그가 최대한의 성의 로 그들을 돕는 방법은 얌전히 숨어서 그들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지 않는 방법 뿐. 그런 사실이 더더욱 시안의 마음을 압박해온다. “하앗---!!” 정말 곡괭이라도 휘두르는 엉거주춤한 폼으로 레이피어를 휘두르는 이리야. 그의 옆에서 로운은 숙련된 몸가짐으로 그의 라이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오른쪽--!!” 로운은 자신에 앞으로 날카롭게 다가오는 검을 피하면서 이리야에게 소리를 쳤다. -스윽--! 날리는 머리카락이 스쳐지나가는 검에 잘리워 파스스하고 흩어졌다. “젠장!!! 덤비지 말란 말야!!” 검을 날리다 멈칫한 남의 옆구리에 쿠욱-하고 로운의 검이 박혔다. 로운의 어깨에 피를 토 하며 쓰러지는 남자를 발로 차버리고 로운은 또다시 달려드는 남자의 팔을 날렸다. “크흑--!!” 날아가는 팔이 잡고 있던 검끝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흐르는 피가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려 찝찔한 피맛이 느껴졌다. 장시간 벼랑에 매달려 있던 로운은 희미하게 검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으로 들어가 눈 앞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기엘은….’ 달려드는 남자들의 검을 물리치며 로운은 힐끗 뒤를 돌아다보았다. 기엘이 검을 빼어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괜찮은 건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듯하지만 기엘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로운의 손에 힘이 더 해졌다. ‘기엘이 합류한다면 승산이 있어. 앞으로 남은 건 4사람.’ 주위에는 이리야와 로운이 처리한 시체가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하앗!!”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결과도 못 보고 죽을 수는 없어!!!’ 어깨높이로 롱 소드가 날아들자 낮게 몸을 숙였다가 일직선으로 라이트를 찔러 넣었다. 검 끝이 사람의 몸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났다. 로운은 있는 힘을 다해 라이트를 빼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앗차--!’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로운의 다리가 뒤로 꺽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검 끝이 로운의 얼굴로 달려들었다. ‘안 돼….’ 슈칵- 굳게 감은 눈가로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갔다. “괜찮아?” “아… 기엘!” 기엘은 로운의 목을 노리고 덤벼들던 남자를 등 뒤에서 찔러 처리하고 로운의 무사를 살폈 다. 목까지 가득 숨이 차올랐지만 기엘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가볍게 말했다. “하나 남았어. 이리야씨가 하나 처리했고.” “좋아.” “어이!! 거기 한 놈!!” 로운이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동안 그럭 저럭 자신의 몫은 한듯한 이리야가 남 아 있던 남자 하나를 향해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걸었다. “덤빌거냐? 1대 3이면 쉽지는 않을텐데….” 그의 말에 암살자(?)의 눈빛이 짙게 변했다. “크아아악!!” 짐승과 같이 울부짖으며 남자가 검을 높이 처들었다. 어차피 여기서 살아간다고 해도 동료 들이 모두 죽은 이 상태로는 자신역시 죽임을 당 할 것이 틀림이 없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챙강! 두터운 검이 이리야의 레이피어와 격돌했다. 검과 검이 마주쳐 금색의 불꽃이 몇차례나 피어올랐다. 실력이라면 검은 옷의 남자가 위였겠지만 이제 승산이 있겠다 싶은지 마지막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이리야를 쉽게 이길 수는 없었다. “젠장!!! 뭘 그렇게 널부러져 있는거야!!!” 이리야는 힘이 달려 소리를 질렀다. “으라차차차!!!” 이리야의 레이피어가 아래에서 위쪽으로 넓은 호를 그리면서 치켜올려졌다. 그 끝에 검이 들린 손목하나가 피어 올랐다. 남자가 잘려신 자신의 손목에서 나오는 피에 멈칫 하는 순간 이리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의 옆구리에 레이피어를 찔러 넣었다.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는 남자를 향해 이리야는 거들먹 거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레이피어나 휘두른다고 만만하게 보지 말라구.” 그는 자신의 레이피어에서 흐르는 피를 스윽 닦아낸 후 검집에 꽂았다. “에이… 다음부터는 좀 예고나 하고 와라.” 그는 말도 되지 않는 바램을 아무소리도 듣지 못하는 시체를 향해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어이. 기사 양반 좀 살만하슈?” 힘겹게 라이트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기엘을 향해 이리야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괜찮…습니다.” “기엘!! 로운!!!!” 그때까지 쥐죽은 듯이 바위 뒤에 웅크리고 있던 시안이 뛰어 나오면서 기엘과 로운의 이름 을 불렀다. “어이 아가씨. 왜 난 빼먹는 거야?” “아저씨는 다친데 없잖아요!!” 시안은 씨근덕 거리면서 다리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 그만 주저 앉아버린 로운을 향해 뛰어 갔다. “괜찮은…거예요?” “난 괜찮아.” 로운이 눈가로 스며들어간 피를 거칠게 쓱쓱 닦으면서 대답했다. 팔이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못견딜 정도는 아니다. 이정도의 상처라면 체력을 조금 회복한후에 회복술을 걸으면 쉽게 치료가 될 것이다. “기엘!!” “괜찮습니다. 시안…님….” “어떻게 치료는 된건가? 하셰카의 화살에는 독이….” 이리야가 막 말을 마치기도 전, 라이트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나 싶던 기엘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기엘!!!” 시안은 넘어지는 기엘에게 달려들었다. “으윽--!” 자신보다도 훨씬 무거운 장신의 남자를 받치기에 시안의 힘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몸 을 날린 보람은 있어 기엘의 머리가 그대로 땅에 부딧히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기, 기엘!!” “…으흑.” 짧고 거친 숨을 내쉬는 기엘, 시안은 그의 머리를 받치고서 미친듯이 이리야를 불렀다. “이리야!!! 이리야씨!!!!!” “젠장. 이럴 줄 알았어. 틀림없이 무리해서 움직인거야.” 간신히 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기엘이 쓰러지자 로운도 안색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그의 팔도 이미 피에 흠뻑 젖어있는 상태다. “칼!! 칼 없어? 날카로운 걸로!!” 기엘이 쓰러진 곳에 간신히 다가온 로운은 이리야를 말을 듣자마자 대뜸 기엘의 상처위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웠다. 지금은 칼을 찾고 있을 시간 조차 아까웠다. “엘- 카치르….” 그 주문은 기엘이 화살촉을 잘라낼때 사용했던 주문과 똑 같았다. 단지 다른 것은 기엘은 화살촉을 잘라내는 데 사용했고 로운은 기엘의 옷자락을 잘라내는 데 사용했다는 것 뿐이 다. 퍼억-소리가 나면서 기엘의 상처가 벌어 졌다. “무슨 짓을 하는거야!!!” 시안이 울먹이는 소리로 로운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로운은 눈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리야씨.” “좋아. 이리야 노운 코나타, 네이 라인….” 이리야는 대뜸 흉하게 벌어져 있는 기엘의 어깨에 손을 대고는 주문을 외웠다. 싸아하는 소리와 함께 벌어져 있던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붉은 빛의 안개가 되어 피어 올랐다. “좋아. 조금만 더….” 이리야가 외운 주문은 몸에서 부정결한 것을 없앨 때 사용하는 주문이다. 다시 말해서 독극물을 뽑아내는 주문.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주문은 네이 라인이라고 하는 증폭주문과 같이 사용하지는 않는다. 보통의 경우는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하지는 않지만 상대는 독화살에 관통당한데다가 바로 치료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무리하게 몸까지 움직인 상태다. “…크흑!!” 기엘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 피가 꾀죄죄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흰색으로 보이는 시안의 옷에 스며들었다. 시안은 붉은 피가 튀어 오르는 장면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보면서도 절대로 기엘의 머리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시안은 불안해 하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 그 감각이 시안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언제나 곁에 있어서 몰랐던 것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항상 맑고 정결한 엘의 파장이 시안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그 엘의 소유자인 기엘과 로 운 그리고 이리야의 파장. 하지만 지금, 그 정결하던 세개의 파장중에 하나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것은 색으로 표현한다면 짙고 짙은 차가운 어둠의 색. 한기가 들정도로 차가운 감각이 로운의 몸에서 시안의 몸속으로 파고 들고 있었다. “위험해….” 시안의 손이 로운의 머리를 감쌌다. “…메, 하니다.” 시안의 잎에서 자신도 모르게 정화술의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자신의 몸으로 파고 드 는 그 차가운 한기에 반응해 시안이 무의식중에 행한 행동이었다. 이리야는 기엘의 상처에서 독을 빨아 올리다 말고 갑자기 그 옆에서 밀려오는 강한 엘의 파 장에 멈칫했다. 한 가닥, 한 가닥씩 시안의 머리카락이 그가 일으킨 엘의 힘으로 하늘거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반짝이는 은백색의 힘. 시안의 몸에서 시작된 그 바람은 천천히 기엘의 몸위를 덮었다가 살며시 기엘의 몸으로 스 며들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온 몸으로 스며들은 시안의 힘은 기엘의 몸을 관통하여 심장을 지나 온 몸으로 퍼져나가던 독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쿨럭. 크헉---!” 기엘의 몸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검붉은 피가 쿨럭이며 흘러 내렸다. ‘안 돼. 몸이 버티지 못한다.’ 로운은 옆에서 시안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시안이 끊임없이 기엘의 몸속으로 퍼붇고 있는 엘이 기엘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해 꼬마!!!” 하지만 이미 무아지경에 빠져버린 시안의 귀에는 로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일으킨 엘의 바람이 들려주는 부드럽지만 강력한, 그 리고 날카로우면서도 또한 한없이 가느다란 바람소리뿐이었다. “그만하라니까!!!! 기엘을 죽일 셈이야!!” -쫘악!! 로운은 이를 악물고 시안의 얼굴을 힘껏 때렸다. “…아.” “아는 뭐가 아야!!! 정신 차려!!” “…예?” “젠장할!!” 자각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뭐라고 말을 더 해줄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하는 현실에 로운은 짜증이 났다. “기엘…?” 시안은 얼얼 거리는 뺨을 만지려다가 아직도 자신의 손이 기엘의 머리를 붙들고 있는 것을 알아 차렸다. “나. 뭐한거예요?” 시안에게는 조금전 로운이 뺨을 때리기 직전의 기억이 없었다. “뭘하긴, 방법은 나보다 더 과격했지만 기사양반을 살렸지.” 이리야가 기엘의 가슴에 난 상처를 주문으로 회복시키면서 중얼 거렸다. “제가요?” “그래. 봐. 얼굴 색이 훨씬 좋아졌지. 아무튼 기사 양반은 너무 맹목적이라 탈이라니까. 거 기다 무식하기 짝이 없어.” 시안은 좀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여하튼 자신이 기엘을 고쳤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하지만 그런 시안에게 로운은 못 마땅하다는 듯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주문을 쓸때는 제발 부탁인데 제정신으로 해. 그러다가 사람 잡겠다.” “내가 뭘!!” “뭐가는 뭐가 뭐야!! 정화술을 쓰려면 기엘에게 써야지 네 자신에게 쓰면 어떻게 하냐!! 네 엘은 보통사람하고 틀리다고 몇번 말해야 알아 듣지? 네녀석이 내뿜는 엘이 강해서 기엘의 몸에 스며든 독을 밀어낸것까지는 좋았지만 조금 더 했으면 위험할 뻔했어.” “고쳤으면 되었잖아!!” “고치면 다 인줄 알아? 사람이 적당이라는 것을 알아야지 조금만 더 했으면 로운의 몸 자 체를 완전히 날려 버릴 뻔 했다구!!!” “에?” “앞으로 바람 술을 쓸때는 항상 생각하라구. 네 힘은 다른 사람의 몇배는 가볍게 넘어선다 는 걸.” “………” 로운은 자신의 말에 뭐라고 변변찮게 변명도 하지 못하는 시안에게 몇마디 더 훈계아닌 훈 계를 했다. 그는 기엘의 머리에서 시안의 손을 떼어내고는 그 아래 돌돌 말은 옷조각을 끼 워 넣었다. “어디로 좀 옮겼으면 좋겠는데….”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이리야 아저씨.” “왜?” “제가 한게 그렇게 문제가 있었나요?‘ 기껏 기엘을 구했다고 좋아하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시안은 우물 쭈물 거리면서 이리야에게 물었다. “글쎄. 사실 나도 처음 보는 거라서 뭐라고 자세하게는 말은 못하겠고. 아까 네가 정화술을 썼을때 신관양반 말대로 네 몸에 주문을 펼쳤잖아? 그러니까 그걸 뭐라고 해야하나…, 암튼 네 힘이 워낙 세서 옆에 있는 사람까지 정화를 시키기는 시켰는데 그게 너무 강하다보니 무 리를 주었다고 보면 대충 설명이 될거야. 왜 그런거 있잖아? 좋은 약도 과하면 곤란하다구. 아무리 정화를 시킨다고 하지만 너무 하면 몸에 좋을리는 없지.” 시안은 이리야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틀린것 같기도 한 설명을 들으면서 적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난 왜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하는거냐. 바보 같으니라구.’ 입으로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시안은 기엘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는 로운의 뒷퉁수를 쫘악 째려보다가 문득 시뻘겋게 변해 있는 로운의 팔을 발견했다. “으아아악!!!! 로운!!” “왜?” 기엘의 상태를 살피던 로운은 갑자기 시안이 비명을 지르자 또 무슨일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서 벌떡 일어났다. “팔!!!” “팔?” “피…피 범벅이잖아!!”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이정도는.” “그래도 안 돼! 지혈!! 지혈!!” 시안은 호들갑아닌 호들갑을 떨면서 허리에 두르고 있었던 허리띠 하나를 풀었다. 옷이 흠 뻑 젖을 정도로 피를 흘렸는데 별것이 아니라고 하다니 저 녀석은 틀림없이 괴물이 틀림없 어라고 중얼 거리면서 시안은 로운에게 달려들어서 그의 어깨에 낑낑대면서 허리띠를 꽉꽉 당겨 묶었다. “으이그. 미련곰탱이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시끄러워 입다물어!!” 시안은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서 꾹꾹 참았다. 대한민국의 건강한 고등학교 남자씩이나 되어서 다른 녀석들한테 눈물을 보일 수는 없다. 비록 하고 있는 꼬라지는 영락없는 여자긴 해도 몸 속(?)이나 마음은 KS마크의 남자가 틀 림없는 것이다. 시안은 로운의 어깨를 묶어두고 간신히 찾아낸 작은 가위를 들고 너덜한 로운의 옷자락을 잘라내었다. 피에 흠뻑젖은 천에 손을 때면 빨갛게 피가 그대로 묻어나온다. 그 피를 보면서 시안은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내려가면 나도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어….’ 빚을 지고 그대로 나몰라라 할정도의 성격은 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은 물건도 아니고 이 렇게 몇번이나 위험에서 무사하게 살아나올 정도의, 일종의 목숨빚인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솔직히 생각해서 지금 상황에는 절대 안맞는 속담이 이상하게도 시안의 머리속에 떠올랐다. 도움을 받았으니 그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들은, 저기 아직 창백한 얼굴을 하고 누워 있는 기엘과 지금 이렇게 붉은 피가 아직도 뚝 뚝 팔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로운, 마지막으로 아무런 은원도 없이 자신들을 위해 힘을 빌려 주고 있는 이리야까지 모두 이유가 어찌되었던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어차피 총괄적으로 따져보면 결국 나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야.’ 자신 때문에 누군가 다치는 것도, 그리고 저기 널부러져 있는 시체들처럼 죽는 것도 싫었다. 그것은 처음에 이곳, 아슈레이에 처음 왔을 때부터 느껴왔던 것이다. ‘두번 다시… 나를 보호하려다 다치는 사람도, 나를 노리다가 죽는 사람도 보고 싶지 않 아.’ “너무 동여매면 오히려 안 좋아. 팔이 괘사할 정도로 다친 것도 아니잖아. 좀 보자구.” 시안이 꼭꼭 동여 매어 놓은 매듭을 이리야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풀어 내기 시작했다. “왜요!! 피가 자꾸 흐르잖아요.” “저 정도 상처는 회복 주문 몇 마디면 대충 수습이 되. 걱정하지말라구.” 이리야의 말에 로운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하지 말라구.” 시안은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자신이 한 행동을 씹어대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웃, 웃기지마!!!! 나는 배운대로 했을 뿐이야!!” “푸하하하.” “그래 그래. 잘했다. 잘했어.” 그제서야 살았다는 안도감이 그들을 감쌌다. 여유로운 말 한마디가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남자는 자꾸만 감기는 눈동자를 뜨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의 몸에 있는 피라는 피는 모조리 빠져나간 듯, 온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감각이 사라져간다….’ 손가락은 손과 함께 날아간지 오래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듯한 기분이 잘려진 팔에서 기어올라와 뻣뻣하게 굳어가기 시작하는 척추를 타고 그의 머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죽으면 안 돼… 난 죽으면 안….’ 가물가물하게 그의 의식이 검은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덥썩-- 차갑고 마른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놓, 놓아주십시오!!” 하지만 그의 손을 잡은 고목과도 같은 손가락은 웬 힘이 그렇게 센지 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목을 잡은 백발의 남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면서 칼을 들어 그의 손목을 찔렀 다. 새빨간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새어나왔다. “안 돼!!!” 바닥으로 떨어지려던 핏방울이 백발 남자의 주문을 흡수하더니 새카맣게 변해서 떠올랐다. 그는 그 새까맣게 된 핏방울에 무엇인지 모를 약물 같은 것을 뿌렸다. 그것은 금새 검은 색의 안개로 변하더니 아직도 피가 스며나오는 그의 손목 쪽으로 다가왔 다. “안 돼-----!!”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그의 손목에서 시작되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지옥 같은 통증이 멈추고 나자 그의 손목에는 검은 색으로 된 고리 같은 모양이 떠올랐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전에 그런 문신을 가지고 있던 동료 하나가 죽을 때 멀리서 그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끔찍한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안 돼… 난, 난 죽을 수 없….’ 가족도, 집도, 친한 친구조차 없는 메마른 삶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셰카에 들어왔 을 뿐이지만 그래도 그는 하셰카의 단원이 된 뒤로는 즐겁게 살았다. 목적이 있는 삶, 설사 그것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가며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죽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그의 눈앞으로 힘겹게 훈련을 받을 때 곁에서 묵묵하게 같이 훈련을 견디어 내던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다정한 말 한마디 못해본 사이었지만 그래도 함께 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는….’ 언젠가 하셰카의 단원으로써 삶을 마치면 조용하게 어디엔가 은둔해서 살아가리라고 마음먹 었었다. ‘죽어서는 …안….’ 그의 머리 속으로 파고들었던 검은색의 암흑이 그의 생각을 삼켜버렸다. 그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간신히 잡고 있던 의식의 끊을 놓아버렸다. “…시, 시안님….” 로운과 이리야가 번갈아 가면서 시안을 놀려먹고 있는데 끊어질 듯한 기엘의 목소리가 시안 의 귀에 들려왔다. 시안은 반색을 하면서 누워 있는 기엘쪽으로 뛰어 갔다. “어? 정신이 들어요?” “…시안님?” 기엘은 아직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치켜 떴다. 땟국물이 조금 묻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은발의 머리카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네. 죄송합니다.” “뭐가요?” 시안은 대뜸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기엘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이리야가 혀를 차면서 일어섰다. “암튼 저 기사양반은 끔찍하게도 저 아가씨를 생각해주는 구만.” “그런 녀석이니까요.” “그러는 댁은?” “뭐…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죠. 친구라는 것은 비슷한 법이니까요.” “흐응….” 애매한 표현이긴 해도 웬일인지 간단하게 인정해 버리는 로운을 보면서 이리야는 역시 사람 이 힘든 고비를 몇 번 넘기면 변한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하면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으으. 자자 일어나자구. 일단 정신을 차렸으니 이런 바람부는 벼랑 끝에 있을 것이 아니라 자릴 옮기는게 좋을 듯 싶은데? 그게 저 친구한테도 좋아.” “그렇겠죠.” 이리야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한두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툭- “응?” 그는 발에 무엇인가가 걸리자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어라?” 그의 발에 걸린 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죽인 남자의 시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단순한 시체가 아니었다. “자, 잠깐!! 이것 좀 봐!!” 이리야는 지금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았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그것’을 보고 새된 목소리로 로운을 불렀다. 로운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이리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이리야가 괴성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섰다. “으악!!! 이게 뭐야!!” 분명히 그것은 시체였다. 아니 시체여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평범한 시체가 아니었다. 시체에 입혀져 있는 검은 옷이 여기저기 울룩 불룩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로운이 놀라 검을 빼어드는 그 순간에도 맹렬한 속도로 부풀어올라 여기저기 피가 묻은 검은 옷을 찢고 점점 크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뭐야. 이건….” 처음 보는 괴이한 현상에 이리야는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위험합니다!!” 로운이 소리를 지르는 순간 그것은 그르륵 소리를 내면서 둥근 원형으로 부풀어 올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기엘!!! 꼬마!!!” 그것이 노리고 있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시안이었다. 무엇인지도 모를 그 검은 물체는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리는 것처럼 곧장 시안쪽으로 굴러가 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 이리야가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을 마악 치고 가려는 물체를 피해 옆으로 굴렀다. 로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안쪽으로 달려갔다. “로운!!” 시안 역시 그것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일직선으로 구르는 줄 알았던 그것은 로운이 기엘을 끌어당기면서 함께 시안의 손목을 잡아 당기자 굴러오는 궤도를 수정해 다시 시안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룩 구룩, 구루루룩. 굴러오는 그것은 그르르륵 소리를 내가면서 점점 더 커져갔다. 시안은 새까맣게 시야를 덮으며 다가오는 그 검은 물체를 한번 쳐다보고 자신의 손목을 잡 고 미친 듯이 절벽을 벗어나려는 로운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에는 아직도 축 늘어 져 있는 기엘이 있었다. ‘안 돼…. 나 때문에 더 이상 두 사람을 다치게 할 수는 없어….’ 문득 그런 생각이 시안의 머리에 떠올랐다. ‘나라면 어떻게든….’ 자신은 없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기엘도 로운도, 심지어도 이리야씨도 그가 가 진 힘은 남과는 전혀 다르게 강하다고 했었다.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돼.’ -파앗!! 시안은 로운이 굳게 잡고 있던 손을 뿌리쳤다. “꼬마!!!” “괜찮아 내가 처리 할 수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하지만 시안은 로운의 말 따위는 무시하고 절벽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굴러오는 것이라면 자신을 향해 굴러오도록 유인해서 마지막 순간에 몸을 피해버리 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골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두고 보자!!’ 시안은 이를 드드득 갈면서 뛰었다. 로운은 어깨에 매었던 기엘을 내려놓고 시안을 향해서 뛰어 갔다. “제기랄 바보녀석!! 돌아와!!!!!” 평소에는 그렇게나 굼뜨다고 생각했던 시안은 벌써 저 앞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예의 그 검은색의 물체는 더욱 더 그 크기를 자랑하면서 맹렬한 속도로 시안을 따라가고 있 었다. 그의 눈에 거의 절벽 끝에 멈추어 선 시안의 모습이 비쳤다. “안 돼!!!” 로운의 절규가 시안에게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색의 물체가 커다란 소리를 내리면서 마지막 으로 꿈틀 거렸다. 쿠르르르르르르---. “피해!!!” 시안은 굴러오는 물체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기회를 노렸다. 자칫 잘못해서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황천행이다. 하라스의 계곡엔 돌이 떨어져도 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다는 것을 그는 몸소 체험 해서 알고 있었다. ‘끝까지, 끝까지 보는 거야.’ 시안을 향해 맹렬하게 굴러오던 그것은 이제 바로 시안의 눈앞직전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그 마지막의 순간에 옆으로 몸을 날리려던 시안은 다음 순간 커다란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 는 것을 보았다. “우아아악-----!!” 로운의 눈에 흑암과도 같은 폭풍이 시안의 몸을 덮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시아----안!!!” 굉음을 내며 폭발한 그것은 검은 암흑이 되어 시안을 덮쳐왔다. “우아악!!” 미처 옆으로 피하지도 못한 시안은 폭발에 휘말려 발을 헛디뎠다. “크-흑.” 발꿈치 부분이 허전했다. ‘아, 안 돼!!’ 그리고 밀려오는 폭풍. 기댈 곳이 없는 시안의 몸은 그대로 검은 물체가 폭발하며 만들어낸 수많은 파편들에 밀려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우아아아아-------!!” ‘주문, 주문을 외워야…,’ 등뒤에서 거센 바람이 휘이잉 소리를 내며 불어왔지만 시안의 몸은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주문을 외우려 해도 수백 미터도 더 되는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집중을 하 려고 하는 시안의 사고를 방해했다. 아니 시안의 머릿속은 아래쪽으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새하얗게 비어갔다. 휘이이이------잉 ‘바람…소리?’ 밑도 끝도 없는 계곡으로 떨어지는 시안의 귀에 익숙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여기 처음 왔을 때 같다….’ 그때도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바람에 감싸여 떨어져 내렸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혹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시안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이대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그건 당연히 안 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 시안은 문득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다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차려. 네 녀석이 여기서 이대로 떨어져 죽으면 나는 어쩌란 말이야!!」 ‘에? 에엑----!!’ 문득 정신을 차려 실처럼 뜬 눈에는 예의 은백색의 뱀처럼 생긴 얼굴이 보였다. 그것을 얼 굴이라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은색으로 차갑게 빛나는 두 개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 기 때문이다. 멀리 절벽이 휙휙 지나가는 와중에도 시안은 그 차가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나왔다!!! 또 나왔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안의 머리에는 지금 자신이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파라락하고 옷이 날리는 소리조차 언제나 바람을 맞을 때 들리던 소리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몇 백년만에 간신히 좀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즐거워했더니만…, 주인이 이렇게 한 심한 녀석이라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꼬장꼬장한 목소리. 시안은 그것이 지금 자신의 목에 둘둘 몸을-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감고 있는 예의 ‘그 이상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무슨 그것이야! 예의 없게 시리.」 ‘그럼?’ 절벽에서 떨어져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시안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도 만들어 버린 지 오래다. 그 때문에 시안은 그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하는 말에 자신 도 모르게 대꾸를 할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세나케인이다.」 자신만만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나…케인?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후후훗 하는 낮은 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바람의 세나케인,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아아앗!! 그렇다!!! 그 예언의 현자인지 뭐시기 하는 사람이 말했었는데. 내가 타닌의 후예 세나케인의 주인이라고….’ 「버릇이 없군.」 ‘아. 미, 미안해요.’ 「너말고 그 현자. 감히 나를 타닌의 후예라고 말을 하다니.」 ‘에? 그러면요?’ 「타닌은 내 옛날 이름일 뿐이야. 내가 자유롭던 시절의….」 ‘자유?’ 「그런 때도 있었지. 자아. 이제 그만하고 이제는 널 살릴 궁리를 해봐야겠군.」 ‘어…?’ 순간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던 시안의 몸이 부웅하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실제 떠오른 것 은 아니었지만 미친 듯이 추락하던 감각이 시안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날 인정할 수 있나?」 ‘뭐, 뭘?’ 밑도 끝도 없이 물어오는 세나케인의 물음에 시안은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움칠거렸 다. 공중에 멈추어 아래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몸에 맞는 순간 시안은 자신이 천길 낭떠러 지 한 복판에 둥둥 떠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우, 우아아악!!” 「비명 지를 시간이 없다!! 네 허락이 없는 이상 나는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어!!」 “으, 으윽.” 고소공포증 따위는 없었지만 지탱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은 정말 소름끼치는 감각이었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시안은 다급해져서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대고 대꾸를 했다. 「나를 알고, 나를 인정하고, 그리고 내게 명령을 내리면 된다.」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니까!!!!’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다시 단단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에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 만 그것은 시안의 바램일 뿐.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해야하느냐구!!!’ 「멍청하기는. 떠올려라. 넌 이미 내 존재를 느끼고 있었어. 어서!!」 순간 시안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를 지탱하고 있던 힘이 점점 약해져 간다는 것을 시안은 느낄 수 있었다. ‘느끼고 있었다구?’ 순간 시안의 몸 밖에서 머물고 있던 은백색의 형태가 사라락 하고 사라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느껴라. 내가 무엇인지, 그리고 네가 어떤 존재인지….」 ‘젠장. 난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자신은 그저 평범했던 고등학생이었을 뿐이다. 이런 경험따위 단 한번도 겪어 본 일이 없다. 흔한 귀신조차 한번 보지 못했던 정말 평범한 인간. 그런데도 그의 머릿속에 있는 존재는 자신을 느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느껴? 뭘? 그리고….’ 혼란에 빠진 시안이 눈을 감는 순간 거센 바람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이건 바람?’ 급박한 와중에도 그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은 똑똑하게 느껴졌다. ‘느낀…다구? 그래 바람을, 바람을 느끼면….’ 그때 시안의 거의 마비되어 있던 감각이 하나 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청량한 바람, 즉 공 기가 시안의 코로 들어와 무한의 감각을 느끼게 했다. 스치는 강풍이 옷깃을 뚫고 들어와 시안의 피부를 핥고 지나갔다. 움츠리고 있던 시안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몸은 마치 바람의 한 자락이 된 듯, 바람은 그의 몸을 통과해 쉴새없이 하늘로 하늘로 치솟았다. ‘머리카락, 눈, 코, 입, 그리고 내 몸….’ 그 모든 것이 바람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몸 속에서도 몸으로 느껴지 는 그 모든 감각과 똑같은 느낌을 주는 무엇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래… 그 풍옥(風玉)…이게 실체인 건가?’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어. 그것은 매개체일 뿐이니까. 나는 단지 바람의 세나케인일 뿐이 다.」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은 마치 환청처럼 그의 머릿속에 울려퍼질 뿐이었다. 시안의 온 몸을 감싸고, 몸 속까지 가득 찬 바람이 시안의 몸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침투하 고 있었다. 시안은 마치 자신의 몸 마저 바람으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람의 힘, 있는 그대로의 바람. 그래. 이것이….’ 「그래. 그것이 바로 나. 바람의 힘이며 의지, 바람의 세나케인이다.」 마치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묻어 나오는 듯한 느낌. 그 순간 시안의 몸 속에 들어있는 그 어떤 것이 그대로 폭발했다. “꼬…꼬마.” 로운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절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폭발한 검은색의 구체가 남긴 파편들은 치지직 소리를 내면서 단단한 바위를 녹 여버리고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것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바람에 금방 휩쓸려 사라졌다. ‘하라스 계곡’의 출구에는 오직 바람만이 불어오고 있었다. “로운… 시안님은?” 기엘이 정신을 차려 주위를 돌아보는데 멀리 로운이 털썩하고 무릎을 꿇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이리야씨?” 이리야 역시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뚫어지게 벼랑 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 은 그 검은 색의 구체가 폭발했던 바로 그 자리로 다른 곳보다 눈에 띄게 바위들이 녹아 있 었다. 기엘은 바람결에 묻어오는 고약한 향내에 섞여 있는 이상한 엘의 파장을 느꼈다. ‘이건 마법…인가?’ 한눈에 보아도 처참하게 변해버린 현장. 검은 색의 물컹이는 파편은 사방에 흩어져 있던 시체마저 녹여 어떤 시체는 앙상하게 드러 나던 뼈까지 녹아 내리고 있었다. “시안님?” 기엘은 아직도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시안님!!!” 기엘의 언성이 높아졌다. “로운!! 시안님은!!!” 기엘은 대답이 없는 로운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로운!!! 대답해!” 휘잉하는 바람소리만이 그에게 되돌아 왔다. 기엘은 벼랑끝만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리야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 갔다. “이리야씨….” 이리야는 멍한 얼굴로 감정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떨어졌어.” “…………….” “떨어졌어. 밀려서 떨어졌어….” 기엘은 이리야를 밀치고 벼랑끝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아직도 부글거리며 녹고 있는 바위 뿐. 시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 다. “시안…님.” 간신히 그의 몸을 유지하던 힘이 썰물이 빠져나가듯 그의 몸에서 사라졌다. 그의 무릎에 차가운 바위가 부딪혔다. 시야가 캄캄해져 왔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폐 속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를 내 뱉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 다. “어떻게….” 그의 손이 얼굴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듣고 싶지도 않고,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로운도 마찬가지였다. 시원하게 뚫려있어 장엄한 광경을 이루고 있는 기암괴석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목적을 잃은 것이다. 그의 귀에는 오직 거센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바람 소리…?’ 문득 바람의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바람 소리라구….’ 분명 그의 귀에는 줄기차게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당연한 사실에 아주 약간 무엇인가 신경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반적이라면,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렇게 들리지 않아.’ 그는 그가 듣고 있던 바람소리가 일반적으로 바람이 부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내었 다. 바람 술사의 귀에 들리는 바람 소리는 일반적인 소리와는 전혀 틀린 것. 그들이 이른바 듣는다라고 말하는 바람 소리는 그저 그런 공기의 흐름이 아니다. 바람 술사가 진정으로 듣는 것은 그 바람에 실린 대자연의 힘, 바람의 신 미메이라의 권능 이 섞여 있는 엘의 흐름이다. ‘틀려. 분명히 틀려!!!!’ 로운은 망연자실하게 주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엘!! 그렇게 앉아있지만 말고 들어봐!!” “…………?” “바람 소리를 들어 보라구.” 그는 바위가 녹아 있어 위태 위태한 벼랑 끝으로 기어갔다. 화악-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기엘은 로운이 무슨 행동을 하는가 싶어 바라보다가 문득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바람 소리를 들으라구? 설마!!’ 기엘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깎아지른 벼랑 끝에 매달렸다. ‘살아 있어. 살아 있다구!’ 그가 벼랑 끝에 얼굴을 내민 순간, 기엘과 로운은 죽을 때까지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거센 바람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그냥 계곡에서 불어 나오는 바람과는 틀리 게 회오리바람의 모습으로 확실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빛이 아니었다. 그 회오리바람은 찬연한 은백색의 광체와 함께 단숨에 벼랑 끝까지 치솟아 올라간 후 한 자리에 뭉쳐들기 시작했다. 이세상 모든 바람을 다 끌어당기는 듯한 강한 흐름이 그 둥그런 구체를 향하고 있었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그 은백색의 구체는 점점 부풀어오르더니 마치 거대한 은색의 태양처럼 빛을 발하면서 한순간에 흩어졌다. “시안님!!!” 기엘은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틀림없이 그 은백색의 빛을 발하고 있는 구체의 중심에 있던 존재는 그가 바라마지 않던 상 대였다. 피부 전체가 마치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시안의 몸은 희미하게 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돌풍과도 같이 몰아치던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바람이 시안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안의 몸은 흐르는 바람을 흡수하면서 점점 진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거센 바람을 남김없이 빨아드린 시안의 신체는 천천히 공기의 흐름을 바꾸어 기엘과 로운쪽 으로 흘러왔다. “시안!!!!” “시안님!!” 기엘과 로운은 시안이 흘러내려 오는 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멈칫 제자리에 얼어붙었 다. 그들의 눈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흘러내려 오던 시안의 신체 주위에 다시 바람이 몰려들더니 희미한 사람의 형체를 띄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시안이 몸이 변화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듯한 그 형체는 시안이 몸이 땅에 가까워 지자 점점 뚜fut한 사람의 모습이 되어 떨어지는 시안의 몸을 가볍게 안고 부드럽게 땅에 착지했다. 귀를 때리던 바람소리가 잦아들고 주위에는 암흑과도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내 주인의 보호자인가?” 투명한 은백색의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만큼이나 투명한 얼굴, 그는 마치 바람의 신 미메 리아의 현신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뚜벅 뚜벅 기엘과 로운 쪽으로 걸어왔다. “같은 신세군 우리는….” 그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아직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기엘에게 시안을 내밀었 다. 기엘은 엉겁결에 시안의 몸을 받아 들었다. “다, 당신은….” “세나케인이라고 하지.” 그 말과 함께 남자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멍한 상태에 있던 기엘과 로운은 문득 그들의 뺨을 스치는 바람에 정신을 퍼뜩 차렸 다. “시, 시안님!!” “우, 우웅.” 기엘의 팔 안에 있던 소년이 살며시 눈을 떴다. 속눈썹 전부가 투명하게 반짝이는 은백색의 실과도 같았다. “어? 살았네.” 배시시, 시안이 웃었다. 그 웃음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다고 기엘은 생각했다. “괜찮나?” 로운이 황급하게 시안의 머리에 손을 집었다. 그의 머리에 손을 대는 순간 로운은 손이 닿 아있는 그 부분에서 청량한 바람이 자신의 몸 속으로 불어오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그 섬 찝하고도 차가운 감감이었지만 로운은 안심을 할수 있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다. “괜…찮은 것 같은데….” “어… 너, 너어….” 뭔가 상당히 감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그것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이리야였다. 그는 지금까지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멍청하게 구경만 하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시안에게 다가온 터였다. 하지만 거기 있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아름다운 미소녀가 아니었다. “너…, 너 남자였냐?” “어라?” 시안은 이리야의 황당하다 못해 절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다가 말고 손바닥으로 자신 의 가슴부근을 더듬었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더듬는 손길이 빨라진다. 몇 번이나 자신의 판판한 가슴을 더듬던 시안이 펄쩍하고 기엘의 팔에서 뛰어 내려오더니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가져간다. “…으, 으흐흐흐흐흐흣.” 음흉한(?) 웃음소리가 시안의 벌어진 입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으흐흐흣. 돌아왔다!! 남자로 돌아왔다!!! 우하하하하하!!” 시안은 펄쩍 펄쩍 뛰어면서 기뻐했다. “야호!! 나이스~. 울트라 캡숑!!! 죽인다!! 아자!!” 미친사람처럼 기엘과 로운의 주위를 마꾸 뒤어다니면서 기쁨을 표출하는 시안. 그런 시안을 유심히 쳐다보던 로운은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겼다. 그도 시안이 원래의 남자로 돌아온 것이 신기하기는 했다. 하지만 시안은 원래 남자가 맞기 는 맞았고, 어차피 그를 원래로 돌려 놓으려고 했었기 때문에 그렇기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바라보고 있는 소년(?)은 원래의 그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잠깐. 꼬마. 너 남자로 돌아온 것 까지는 좋은데 말이야.” “으윽-. 설마 그 미소녀가 이런 판판한 가슴은 남자일줄이야. 젠장 눈이 썩었나 나는….” 이리야의 한탄 소리가 들려왔지만 시안은 아랑곳 하지않고 무사하게 자신의 원래 성별로 돌 아온 것에 기뻐하기만 했다. “좀 가만히 있어봐!! 정신 사납게 뛰어 다니지 말고!!!” 로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시안은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에 멈칫 멈칫 하면 서 기엘과 로운에게 돌아왔다. “왜? 뭐 이상한 거 있어?” “시안님….” “기엘. 나 어딘가 이상해요?” 말똥 말똥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남자의 얼굴이 다. 하지만 기엘은 지금 이 상태를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서 그저 멍하게 시안의 얼굴을 바 라볼 수 밖에 없었다. “로운 이거….” “꼬마. 잘 봐봐. 네 머리카락.” “내 머리카락? 그게 뭐.” 어라? 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는 시안. 그 뒤에 곧장 로운의 예상 그대로 귀지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뒤따랐다. “으악!! 이 거미줄 머리는 왜 또 자란거야!!!” “그것 뿐만이 아니야. 원래 네 얼굴의 원형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시안님. 원래 머리색이 무슨 색이었지 로운?” “검은 색. 궁정에서 기르는 호한(공작새와 비슷한 관상용 새)의 날개처럼 새카만 색이야. 피부색은 마치 라센인 같은 노란 빛깔이 도는 색이었는데.” 눈앞의 시안은 원래의 시안, 즉 경하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로운이 변환술을 써서 시안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모습도 아니었다. 지금 시안은 자신의 원래 얼굴에다가 시안의 머리색과 피부색에 더해서 아주 일반적인 미메 이라인의 특징까지 더해진 새로운 얼굴이었다. 시안은 원래의 자기 얼굴을 알고 있는 로운에게 매달렸다. “이, 이상해?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고 하기는 그렇고.” 시안은 자신이 머리를 자르기 전 이상으로 길게 늘어져 거의 무릎 선을 넘어가는 머리카락 을 줄줄 끌어 당겼다. 자신이 보아도 너덜 너덜한 옷깃 사이로 드러나 있는 피부는 원래 자신의 피부색이 아니다. “젠장!! 거울도 없고. 거기다가 이놈의 머리!!” 기껏 남자의 몸으로 돌아왔다고 기뻐했건만 로운이나 기엘의 얼굴을 보아하니 뭔가 이상하 긴 이상한 모양이었다. 물론 황당하다 못해서 이제 얼이 빠져가는 이리야는 논외다. “그렇지.” 머리카락 더미를 들고 어찌할 줄을 몰라서 당황해 하던 시안의 머릿속에 묘안이 떠올랐다. “그래!! 모를 때는 물어 보면 되는 거야. 아. 그런데 어떻게 부르지?” 묘안을 떠올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그걸 행하려고 보니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 다. “뭔가 검이라도 들고 하늘에 던지면서 나타나서 너의 주인을 지켜라~정도를 해줘야 하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시안의 행동에 기엘은 어리둥절할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뭔가 불러 내는 다른 주문이 있는 건가, 젠장할.” 「누가 그렇게 유치하게 부른다고 나타나냐?」 과연 어떻게 세나케인을 불러야 할까 고민을 하는데 문득 머릿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앗!!!! 듣고 있었으면 퍼뜩 퍼뜩 대답을 하란 말야!!!!” 혼자서 중얼 거리다 말고 공중에 대고 고함까지 지르는 시안을 이리야는 이제 거의 미친 사 람을 보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원한다면….」 그와 동시에 시안의 몸에서 쏴아아하고 바람이 몰려 나오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 그의 앞에 훤칠한 미남 한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이제는 별짓 다하는 군.” 하도 놀라서 더 이상은 놀라지도 못하는 이리야가 중얼 거렸다. “필요하면 그냥 부르면 되지. 주문은 무슨 시시껄렁한 주문.” 남자는 생긴 것 과는 다르게 상당히 말투가 거칠다. “나 어떻게 된 거죠?? 남자로 돌아오기는 한 것 같은데.” 다짜고짜 시안이 묻는 말에 세나케인은 한심한 말투로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네가 힘을 흡수 했기 때문이지. 그런 것도 모르면서 네가 무슨 바람의 계승자냐?” “………뭐?” “너희들이 풍옥이라고 부르는 바람의 엘이 집결되어 있는 그것을 흡수 했기 때문에 그 힘 이 그대로 몸에 반영된 거다. 바람의 엘을 수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네 원천적인 모습이 되었다고 보면 되지.” “이게?” “그래.” “내 원래 모습은 이게 아닌데?” “여기서는 그게 네 원래 얼굴이야.” “그런가?” 왠지 묘하게 수긍이 가는 대답이었다. 어차피 현실과는 다른 가치관에 다른 판단 기준이 있는 세계다. 시안은 자세한 것은 잘은 모르겠지만 여하튼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모습이 되어 있다는 소 리에 안도를 했다. 뭔가 기분이 안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슴이 달린 치렁 치렁한 여자애 얼 굴을 하고 있는 것 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어, 시안님. 이 사람은….” 뒤늦게 기엘이 정신을 차리고 시안에게 물었다. “아! 소개하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 녀석은 사람이 아냐. 세나케인이라고 한데.” “바람의 세나케인이다.” 세나케인이 자신의 이름을 정정했다. “긴건 귀찮잖아. 세나케인이면 되었지 뭘 그 앞에 자꾸 주저리 주저리 붙여? 암튼 인사해 요 기엘. 그리고 로운. 아참 이리야씨도.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한테 붙어 있 어야 하는 것 같으니까.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는게 좋겠지.” “붙기는 뭐가 붙어!! 네 몸은 매개체일 뿐이다!” “내가 없으면 자유롭게 활동 못한다며. 그럼 그게 그거지. 그래서 날 살려냈잖아.” 시안이 지지않고 대답했다. 기엘은 기가 막혀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로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설마…. 그때 그….” 로운이 혹시나 하면서 말을 꺼내려하는데 대뜸 세나케인이 로운을 향해 한쪽눈을 깜박여 가 며 인사를 했다. “신세를 졌었지. 그때만 해도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상황이 안되었거든.” 세나케인의 대답을 듣자 기엘은 그가 이전에 폴리카르를 건널 때 시안의 몸 위에 나타났던 바로 그 ‘형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깨닫고 보니 그-세나케인이 풍기고 있는 엘의 파장이 이전에 자신이 시안에게서 느꼈던 그 묘한 두 개의 파장이 이해가 갔다. “그렇구나. 흐음. 역시 죽음의 위기에 처하니까. 나란 녀석도 뭔가 하기는 하는 군. 좋아. 뭐 죽었다가 살아난 샘 치면 되니까. 얼굴이 좀 바뀌었다고 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묘하게 적응력이 뛰어난 시안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생 각하니 마음도 가뿐해졌다. 어차피 이곳에 온 뒤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몸 이 변 한게 싫다고 발악을 해봤자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도 모르지 않는가. “그래서 용건은 끝났나?” “아. 끝나기는 했는데.” “그럼 난 이만.” “어? 그냥 가는 건가요?” “가기는. 넌 날 불러내면 피곤하다는 것도 못 느끼냐?” “에?” “이번 주인은 정말 멍청하기 이를 때 없군. 당신들도 참 피곤하겠어. 자아. 나는 그럼 이 만.” “아!! 자, 잠깐.” 흐릿하게 사라지던 인영이 멈칫했다. 「뭔가 다른 일이라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걱정마라. 나는 너와 동화 되어 있으니까. 둘이지만 하나라고 봐도 좋아.」 그말과 함께 세나케인이 다시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역시 파장이 하나로 합쳐 졌어.” 세나케인이 사라지자 마자 로운이 불쑥 말했다. “그게 뭔데?” 기엘이 쓴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이전에 시안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변하기 전에는 시안님의 몸에서 퍼져나오는 엘의 파장 이 둘이었습니다. 뭐 이런 결과가 될 줄은 몰랐지만 지금은 하나로 합쳐진 상태지요.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둘로 나뉘긴 하지만.” “헤에.” 기엘은 조금은 마음이 씁슬했다. 왠지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안이 갑자기 화악 변해 버린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있는 힘껏 돌보고 있는데 갑작스 럽게 불쑥 커버려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커버린 기분인 것이다. “여하튼. 목숨을 건졌으면 된 거지. 앞으로도 도움이 될테고.” “그건 그렇지만.” “아, 아얏!! 뭐하는 거야!!” 로운이 묵묵하게 길고 긴 시안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자 시안이 눈물을 찔끔흘리면서 반항 했다. “머리 어떻게 할거냐?” “어떻게 하긴. 싹뚝 잘라야지. 아. 잘라도 괜찮을까?” “잘라보면 알겠지.” “에헤~.” 로운은 길게 자란 시안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정리하면서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 을 내 쉬었다. 한꺼번에 모두 받아 들이기에는 잠깐의 순간동안 일어난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오늘 하루 일어났던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냥 그런일이 일어났나보다고 그렇게 기억만 해두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킬 목적 을 다시 되찾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로운은 감사하고 있었다. “자. 그럼 자른다.” “응.” 파샥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시안의 길고 긴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나머지는 산을 내려가서 조금 다듬어 주면 되겠지.” “시안님 여기 새옷입니다.” “아 고마워. 기엘.” 묘하게 당당해진 시안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기엘에게 말을 놓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 다. 그런 시안을 바라보면서 로운과 기엘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랬든 저랬든 간에 시안이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왔다. 시안이 절벽 아래로 사라졌을 때 그들이 겪었던 절망은 보았던 감정은 두 번다시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감정. “자. 그럼 출발하자구.” “아!! 그전에 여기 어떻게 처리 안될까?” 그때까지 아무말이 없던 이리야가 난장판이 되어 있던 주위를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로운과 기엘이 아무말이 없으니 자신이 뭐라고 할 입장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던 그였다. “그렇군요. 이대로 두고 간다는 것도….” “그리고 가기전에 저게 뭔지 좀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마법입니다. 그것도 아타라세스의….” “마법?” “마법이 아니고는 이런 일은 불가능 합니다. 그리고 마법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아 낼 수 없도록 충분히 안배해놓은 흔적이 역력하구요. 일단 이것도 산을 내려가서 알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마법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어서요.” “그렇기는 하군. 그러면 이대로….” “제가 하지요. 로운. 시안님을 모시고 먼저 가.” “그래.” 로운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시안을 재촉 했다. “알았으니까 자꾸 잔소리 하지 말란 말이야. 이 잔소리꾼!!” “기엘 디 하라스다인.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가이-히 나한. 샤?마?힘.” 청아한 기엘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어지럽혀진 벼랑끝에서 계곡 끝까지 울려 퍼졌다. 그 뒤를 이어 부드럽지만 강한 바람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시체들과 아직도 검은 기포들을 뒤덥었다. “타?호?라(정결)” 시안은 멀리서 기엘이 일으킨 바람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무슨 주문?” “정결의 바람이다.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기도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 미메이라에서 죽은 자들을 바람으로 돌려 보낼 때 사용하는 주문이야. 기엘 녀석이 보기보다는 마음이 여린 편 이니까.” “그런건가….” 로운의 설명을 듣고 있던 시안은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그중에서도 결과적으로 자신 때문에 일어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용납할 수 없었던 마음속의 앙금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 다. 물론 아직도 자신 때문에 죽여버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는 엄청난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사고’를 수습하고 있는 저런 기엘의 모습을 보고 있다보니 그동안 기엘이 나 로운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질렀던 살생이 아주 약간 용서가 되는 기 분이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이 죽는 것은 싫다라고 시안은 생각했다. “수고 했어. 기엘.” “아니 별로.” 로운이 툭툭하고 기엘의 어깨를 두들겼다. “기엘. 그리고 로운.” 시안이 두 사람을 불렀다. “아참 그리고 이리야 아저씨도.” “난 왜?” “부탁이 있어요.” 갑자기 정색을 한 시안을 보고 세사람 모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시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시안은 조금 쑥쓰러워서 콜록 기침을 했다. 사실을 밝히자면 원래의 세계에서의 자신은 초등학교때 반장 한번 해 본적이 없다. 단지 세 사람 뿐이지만 이렇게 집중적으로 시선을 받아 보는 것을 처음이다. 물론 가족을 제외한다 면 말이다. “앞으로. 절대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누가 날 노리든지간에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아주었으면 좋겠어요.” “………….” 묘한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약속해 주지 않는 다면 난 산을 내려가는 즉시 혼자 도망쳐 버릴 겁니다. 나도 이제는 여 차하면 세나케인을 부를 수도 있고, 주문도 사실 별로 잘 쓸 수 없지만 어떻게든 갈 수 있 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시안님.” “약속해줘. 로운. 그리고 기엘. 그리고 이리야씨도.” “그 씨자만 빼면 약속해주지. 나도 사람 목숨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는 것은 질색이니까. 아참. 거기서 한가지만, 난 이친구들하고는 달라서 내 목숨이 위험해지는 경우에는 꼭 지금 의 약속을 지키겠다고는 장담못해.” “이리야씨!! 무슨 말씀을!!” “시끄러!! 이녀석 말이 틀린 것은 아니잖아.” “좋아요. 그런 상황에서까지 고집 피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 최대한도로 억제해주 세요.” “알았어.” 로운과 기엘보다 먼저 간단하게 약속을 해주는 이리야에게 시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밝게 웃어보었다. “기엘과 로운은?” 팔짱을 터억 끼고 시안이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을 바라본다. “너. 변하더니 묘하게 뻔뻔스러워졌다?” “뭐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 변한다고들 하니까.” 시안역시 자신이 이렇게 뭔가 명령조로 말을 하고 있는 자체가 신기하기는 했다. 하지만 왠 지 그렇게 해도 이 사람들은 꼭 받아 들여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들이 보호하는 존 재가 원래의 자신이 아니라 단순하게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라고 해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온 몸을 내던져 자신을 보호했던 사람들이다. 적어도 이곳에 시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는 않았다. 그리고 필요없는 살생을 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스르릉-- 기엘이 라이트를 뽑았다. “어? 검은 왜 또 빼요? 설마 또 이상한 녀석들이?” -콰악!! 시안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는 동안 기엘은 인정사정없이 그의 라이트를 바위에 있는 힘껏 박고 그 옆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무릎을 꿇었다. “로열 나이트 기엘 디 하라스다인. 시안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서약합니다. 기사 의 증표인 이 라이트와 하라스다인의 이름과 생명과, 미메이라의 이름을 걸고.” 엄숙한 목소리로 기엘이 맹세했다. 그런 기엘의 행동을 아무말 없이 바라보고 있던 로운이 쳇-하고 혀를 차더니 ‘기사의 맹세씩이나.’ 라고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 파계를 하게 될 줄은 몰랐군.” 로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기엘이 얼마 전부터 시안을 단순한 대리인으로만 보지 않고 있다 는 사실은 눈치를 챘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마음에는 별로 안드는 명령이지만 원한다면 들어주지.” 시안은 로운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로운은 옷깃을 젖히고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거칠게 잡아뜯었다. 그것은 미메이라의 신 관임을 증명하는 물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다. “로운?” 기엘이 놀라서 벌떡 일어서자 로운은 잡아 뜯은 목걸이를 기엘의 손에 넘겨 주었다. 끊어진 줄에서 반짝이는 하이시가 굴러 떨어 졌다. “네가 바라고 바라던 일이잖아. 나를 다시 기사로 만드는 거.” “로운!! “신관에게는 수장이 가장 우선시 될 수는 없으니까. 저녀석의 소원을 들어줄 방법은 이것 뿐이지.” 로운은 들고 있던 라이트를 기엘과 마찬가지로 단단한 바위에 있는 힘껏 꽂아넣었다. “로열 나이트 로운 디 로크레슈. 시안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서약합니다. 기사의 증표인 이 라이트와 로크레슈의 이름과 생명과, 미메이라의 이름을 걸고.”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로운의 모습을 시안은 경악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봐.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내가 로열 나이트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하는 기사의 맹세 야. 물론 이전에도 한적은 없지만. 고맙게 생각해.” 단 한번도 자신을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시안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로운이 자신을 향해 맹세를 하는 모습에 얼떨떨해 있던 시안은 이어지는 로운의 말을 듣자 마자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젠장 놀랬잖아!!!” 아직도 심장이 벌렁 벌렁한 시안은 가슴을 내리 누르면서 어색함을 감추려고 노렸했다. 굳 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지금 기엘과 로운 두 사람이 한 행동이 상당히 대단한 의미를 가지 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이 방금 전에 한 맹세로 자신이 좀더 이들에게 인정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자아. 그럼 이제 산이나 내려가자구. 이제 몸상태도 좋고, 나보다 뒤 처지는 사람이 있으 면 용서 안 할 거야!!” 시안이 신나게 말하고는 방방 뛰는 걸음걸이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기다려!!! 젠장할!! 도대체가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거짓말 인거야!! 로열 나이트에 수장이라구? 설마 너희들!!” 이리야가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로운은 그때까지 이리야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순간 아차! 했다. “젠장할 죽여주게 이쁘던 녀석이 남자에다가 미메이라의 수장이라구? 거기다가 로열 나이 트? 어디가 귀한집 아가씨냐!!” “아가씨는 거짓말 이었지만 귀한집이라는 단어까지는 진실이지.” “그래도 그렇지!! 빌어먹을 생각보다 더 엄한 놈들이었잖아!” “뭐 나쁘지는 않지 않습니까?” 기엘 역시 뭐라고 변명하기는 그렇지만 적당하게 대꾸를 했다.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할 것 아냐!! 으으윽-.” “뭐 악의로 한 것 도 아니잖아요. 이리야씨?” 시안이 실실 거리면서 이리야를 달랬(?)다. “그 씨자는 빼!!!!” “알았어요. 알았어. 이리야. 이럼 되죠?” “그래!!” “으윽. 젠장할 너무 거물이잖아.” “거물은 무슨 거물. 그만 흥분하세요.” “웃지기 마!! 그럼 내 눈앞에 지금 미메이라의 수장이 있다는데 흥분 안하게 생겼어!!” 이리야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로운이나 기엘이 적당히 달래려고 했지만 이리야는 말도 안된다면서 더욱 난리를 쳤다. 시안은 그런 이리야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마디 했다. “잠깐. 이리야씨. 아참. 그냥 이리야라고 부르라고 했었지. 여하튼 그래서 내가 미메이라의 수장이고 기엘이랑 로운이 로열 나이트라고 해서 뭐 변한 거 있어요?” “…뭐?” “없죠?” 뚫어지게 이리야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은회색의 눈동자. 그 눈동자는 자신이 처음 시안을 발견했을 때 마주쳤던 그 눈동자와 똑같았다. “뭐 신나는 경험도 좀 하고 고생도 하고 기타등등 하기는 했지만 내가 수장이라는 걸 알았 다고 해서 변하는 거 없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 박력있게 밀어 붙이는 시안의 말에 이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수긍해 버렸다. “그럼 된거잖아요. 내가 수장이라고 해서 이리야씨… 아니다, 이리야에게 어라? 이것도 좀 이상한데. 여하튼 댁한테 수장 대접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가 불만이예요?” “………….” 말문이 막힌 이리야의 얼굴을 보고 시안은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불만 없죠? 히히. 그럼 갈길이나 가자구요. 로운. 기엘!! 빨랑 내려가서 밥먹었으면 좋겠는 데. 괜찮지?” “물론입니다.” 시안은 얼이 빠져 있는 이리야를 던져두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뒤를 로운과 기엘이 따랐다.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에 날개가 돋힌 것 같다. 뒤에 남겨진 이리야는 뭔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상황 때문에 잠시 공 황상태에 빠져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니야!! 불만 있어!!!!” 앞서가선 세사람이 이리야의 불만 있음 발언에 뒤를 돌아다 보았다. “내 관상용 미녀!!!! 관상용 미녀가 사라졌잖아!!!” 이리야의 말도 안 되는 억지 소리에 시안이 발끈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 관상용 미녀를 돌려줘!!!” “웃기는 소리 하지마!!” “기껏 찾아낸 이상형이었는데.” 이리야의 발언에 기엘이 쿡쿡 거리면서 시안에게 말했다. “그렇다는데요. 시안님.” “어이 꼬마. 도로 여자로 변하는 것은 어때?” “절대 싫어!!! 그리고 꼬마라고도 부르지 마!! 시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으시답니다. 이리야씨. 어쩌죠?” “으으윽!! 너희들!!” 이리야가 벌떡 일어나서 두다다다 세 사람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니들 나한테 한번 죽어 볼래!!” “누가!!!” 달려오는 이리야는 깨끗하게 무시하고서 셋은 나란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보니 아까 그 세나케인에 대해서 이전에 어느 책에선가 기록을 본 일이 있 어.” 앞장서가는 시안을 뒤를 따라 가면서 로운이 가볍게 말을 꺼냈다. “에? 정말?” “그러고 보니 저도 고문서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본 일이 있군요.” “빨리!! 빨리 말해봐!! 뜸들이지 말고!!” “그게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말입니다….” “더이상 숨기는 게 있으면 이번에는 가만히 있지 않을꺼야!!” “오래전에 뭐?” “바람의 신 미메이라의 힘을 받은 인간. 즉 수장에게….” 기엘의 말을 듣기 위해서 귀를 쫑긋세운 시안. 그런 시안에게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설명 하는 기엘과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로운. 마지막으로 여전히 시끄럽게 떠 들면서 뒤를 따라오는 이리야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뒤로 페 이요트 산맥을 훤히 비추던 태양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휘이잉 하는 바람 소리가 계속에서 올라와 그들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네 사람은 일도 많고 탈도 많았던 페이요트 산맥의 자락을 시원한 바람과 함께 흘러 내려갔다. 3권에서 계속. 안녕하세요. UIN입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홈에 퍼가도 되냐는 문의 메일을 종종 받고 있습니다만. 죄송하게도.. 현재로써는 다른 홈에 올리는 것은 좀 피하고 싶습니다. 이곳에만 연재를 하는 것은 직접 연재란을 만들어주신 라니안님께 대한 성의라고 본인은 생각(^^;;) 중입니다. (저기. 운영자님. 저 아래. 하이텔 환동 리스트에 넣어주셔도 되요.) 그리고 부탁드립니다만. 제발 ^^; 메일링은 하지 말아 주십시요. 이곳에 글을 올리는데도 계속 메일링 관련 이야기가 오간다면 연재를 중단하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정말 감사할 따름이지만 아주 약간의 에티켓만 지켜주시면 더더욱 감사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1. 흐르는 바람. 세나케인 시원한 바람이 산길을 내려가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스치고 미세한 머리카락사이를 빠져나가 흔들리고 있는 풀잎 사이로 흘러갔다. 거대한 아슈레이 대륙의 남단을 양분하는 페이요트 산맥은 동토라고 불리워지는 나칸의 땅의 그 험준한 산맥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 로 가이칸인들에게는 험난하기로 소문난 산맥이다. 페이요트의 끝자락에서부터 펼쳐지는 넓고 넓은 평야의 대부분은 아슈 레이 대륙의 최강국이라 일컬어지는 가이칸 제국의 영토였다. 그리고 그 산맥의 끝자락. 어디로 보나 인기척이라는 없는 쪽이 마땅한 그곳에서 오늘따라 이상 하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악!! 이 머리색이 뭐야!!! 나도 검은 색으로 해줘!!!" 버럭-하고 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소년을 바라보는 세 사람 중 둘은 어디서 돼지 한 마리가 꽥꽥 소리를 지르며 바둥 거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소년에게 반응하는 것은 단 한 사람. 소년과 마찬가지로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한 남자뿐이다. "시안님 진정하세요." "진정 할 때야? 지금이. 기껏 바꾼다고 해서 좋아했더니. 이게 뭐야!! 금색으로 하늘 하늘거리기만 하잖아! 이래봐야 먼저의 그 후줄근한 백 금발 머리와 뭐가 달라!! 이게 어디가 변장이냐!!" "시끄러워. 너한테는 그 색이 맞아." "그러는 로운이나 이리야씨는 검은색이잖아. 왜 나는 금발이냐구!!" 소리를 버럭 버럭 지르고 있는 소년은 세 건장한 남자들보다는 상당히 왜소한 체격 덕에 자칫 잘못하면 여자라고 착각을 받을 수 있을 정도 의 소년이었지만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 하나 만큼은 확실히 남자라고 봐 줄 만한 목소리의 소유자. 그는 다름 아닌 시안 리에 하로이옌 디 미메이라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다. 시안은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진심으로 말이다. 찌익-하고 머리카락을 당겨 색깔을 재차 확인하자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하늘거리는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번쩍이는 금발의 차이가 도대 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젠장!! 난 금발 싫어!! 새까만 머리로 바꿔줘!!!" 맑은 하늘에 시안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후우- 당분간은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거 다시 가이 칸으로 들어 왔잖아. 참나, 뭐하러 그 고생을 하고 거기까지 도망갔었 나 몰라." 이리야가 투덜 거렸다. 생각해보면 참 웃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국 수도 카드미엘 부근에서 도망을 쳐서 레카까지 도주해 그곳 에 잠시나마나 정착한 시간까지 더한다면 근 1년에 가까운 시간이었 다. 그런데 지금 그는 단 며칠 사이에 제국 변방이라고는 해도 여하튼 다 시 제국의 영토안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이다. "미안하게 되었군." "아니 아니. 뭐 당신이 미안할 것 까지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거 가지고 추궁할 생각은 별로 없어." 이리야는 귓가에 조금 흘러내린 그의 두건 자락을 귀찮은 듯이 손으로 툭-하고 쳤다. 순간 느슨해진 두건이 풀러져 내려서 그때까지 천 아래 가려져 있던 그의 짙푸른 머리카락이 사르륵 거리며 떨어졌다. "에이 풀렸군. 아! 그렇지!" "예?" 이리야는 흘러 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다시 추스르다말고 그는 시선 을 돌렸다. 앞장서서 걸어 가고 있는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과 그 소년과 똑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걸어 가고 있는 남자 한명이 이리야와 로 운의 눈에 들어왔다.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당신들, 너무 눈에 띄어. 뭐 나부터도 문 제지만 그래도 난 가리고라도 다니지." 오랜시간 천 아래에 꼭꼭 동여매져 있던 머리카락을 부스스 하게 만들 면서 이리야가 말했다. "뭐…." 로운은 이리야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리야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페이요트 산맥을 내려오는데 걸린 시간은 꼬박 하루. 그동안 산중턱에서 몇 명인가 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그 얼마되지 않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산자락을 내려와야 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의 화려한(?) 외모 때문이었다. 옷차림은 비 록 흐트러져 있지만 순간 순간 불어 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은색의 머 리카락만큼은 그들이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특별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실. 뭐.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정도야 어디서나 볼 수 있으 니까 걱정 없지만 당신들은 나처럼 머리를 감추고 다니는 것도 아니 고, 너무 생각이 없어." "뭐. 바꾸면 되지." "응?' 이리야가 로운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말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 다. "뭘 바꿔?" "일단 이 머리색 정도만 바꾸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그전까 지는 뭐, 나도 조금은 간과한 부분이 있었지만 일단 우리들을 노리고 있는 자들의 누군지도 알았으니까." 생각에 잠긴 듯한 로운의 얼굴을 보면서 이리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야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보았을 때 그들을 노리고 있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전문가들이었다. 검은 암살단 하셰카를 무시할 수 있는 자 들은 자신의 기준에서는 절대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문제는 자신 역시 그들의 목표물로 이미 정해져 버렸다는 것. "어휴- 정말 생각만해도 골치가 아프군. 그럼 내려가면 일단 머리카락 을 염색하는 약이라고 구해보아야 하나? 젠장. 이런 시골에 그런게 있 으려나." "그런 거 필요 없어. 어이. 기엘!!" 로운의 부름에 시안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가던 기엘이 고개를 돌렸다. "이리 좀 와봐." 이리야는 도대체 로운이 뭘 하려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입 을 다물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들이 가진 능력을 다 알지는 못한 상태.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에게 놀란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그대로 지켜보는 것뿐. "무슨 일이야?" "적당하게 변장을 해야겠어. 아무래도 우리 인상착의는 대충 알려진 것 같은데 이대로 마을로 들어서거나 혹 성으로 들어서게되면 좀 곤란 하잖아." "그렇군." 기엘은 정말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얼굴을 했다. 이리야는 그런 기엘의 얼굴을 보면서 이 강직해 보이고 섬세해 보이는 이 기사양반이, 어딘가 모르게 꽤나 과격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생각이 깊은 로운과는 달리 의외로 단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건데?" "변환술을 좀 응용해 볼까 하는데…." "그런 것도 가능한가? 바람술이?" "바람술보다는 아마 당신 같은 물의 술사들이 더 손쉽게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일단 당신은 모르는 것 같으니 바람술로 할 수 밖에. 꼬 마!! 이리와봐." 로운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이리야를 보면서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 사람은 자신들에게 뭔가 이득이 있기 때문에 붙어있는 것이라 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자신들에게 나름대로는 도움을 주었고 현재는 비슷한 운명 으로 암살자들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 위험을 아무런 이유없이 감수 해줄리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리야의 능력은 확실하게 그들에게 도움 이 되고 있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로운은 이 이리야라는 남자를 참아줄 수 있었다. 동기는 틀리더라도 결과적으로 시안을 보호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얼마 든지 용납하고 그를 동료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안님!!" 기엘과 로운이 멀리 떨어져서 3사람이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쳐다 보고 있던 시안을 불렀다. 부르자마자 시안이 조르르 달려왔다. "왜?" "이리서봐." 무뚝뚝하게 로운이 시안을 자신의 앞쪽으로 손짓해서 불렀다. 시안은 잠시 기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에잇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로운의 앞에 섰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제발 부탁이니까 설명 좀 해줘." 볼멘소리로 시안이 물었다. 하기사 항상 그게 불만이었다. 위험하다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뭔가를 시키기는 하는데 매번 로운은 결과가 다 난 다음에야 알려주는 것이 다. "변장을 시키려는 거야. 가만히 있어." "변장?" "너는 머리도 안 돌아가? 뻔히 우리를 노리는 놈들이 있는데 이대로는 아무대도 못가." "그럼 그렇게 설명하면 되지 왜 사람을 무작정 오라가라 하는데. 쳇." 머리도 안 돌아가느냐는 소리에 시안은 조금 화가 났다. 그리고 그 생각을 미쳐 못했던 자신이 왠지 상당히 멍청한 놈인 것 같 아서 더욱 기분이 상했다. '빌어먹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꼭 그렇게 말을 할 필요가 있어?' "쳇. 마음대로 해봐. 무슨 색이 되든 지금 보다야 나아 지겠지." "…흐응." 뭔가 생각하는 듯한 로운의 얼굴을 시안은 말똥 말똥한 눈으로 쳐다 보았다. "빨리 해. 괜시리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알았다. 알았어. 가만히 있어. 아. 그리고…." 로운이 조금 말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안은 로운이 무슨 생각 을 하는지 깨달았다. 이번에야 말로 반응이 빠르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싶 어서 시안은 얼른 말을 꺼냈다. "걱정하지마. 거부 같은 것은 안 할테니까." "그건 고맙군." 씨익--하고 로운이 웃었다. 순간, 시안은 왠지 모를 불안에 몸을 떨었다. ================================================계속. 아슈레이 제 3장 바람의 세나케인 (2) ◇◆◇ '그러니까 그러니까아---!! 말을 해줬어야지!!' 시안은 울컥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열심히 내리 눌렀다. 반짝 반짝 살아 숨쉬는 금색의 실같이 빛을 반사하는 금발의 머 리카락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얼굴을 마구 휘감고 있었다. 그 때마다 간신히 내리 눌렀던 성질이 울컥하고 다시 튀어 올랐지만 이미 화를 있는 대로 버럭 버럭 낸 뒤라, 남자 체면에 더 이상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시안은 속만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새까만 머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원래 머리색으로 돌려달 라구!!' 시안은 도끼눈을 뜨고 저 멀리서 굼실 굼실 저녁 식사를 준비하 고 있는 두 남자를 노려 보았다. 그들은 이전과는 달리 윤기가 흐를 정도로 새카만 머리카락을 하 고 있었다. '악취미야. 악취미. 아주 날 가지고 놀려는 악취미라구!!' 시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섰다. "어디 가십니까? 시안님?" 한눈을 팔고 있는 줄 알았던 기엘이 시안이 움직이자 마자 대뜸 물었다. 시안은 그에게 손을 내저으면서 대답했다. "아아. 잠깐 바람 좀 쐬려구 그러니까 따라오지마." 기엘은 귀찮은 듯이 손을 내젖는 시안을 보면서 어떻게 할까 잠 시 망설였다. 비록 이제 머리카락 색은 바뀌어서 적당하게-로운의 주장에 의하 면- 변장은 했지만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조심하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시면…." "알았어. 알았다구. 미친 듯이 불러 제껴 줄테니까 바람처럼 튀 어 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안은 툭-하고 튀어 나온 작은 언덕에서 풀 쩍 뛰어 내렸다. "우-우앗!!" 작은 비명소리가 입에서 튀어 나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뭔가 부 웅-하는 공기의 저항감 같은 것이 느껴지더니 시안의 몸이 살며 시 바닥에 닿았다. "우와- 놀랐다." 두근 두근 하는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마땅히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라? 없네?" 시안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역시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닌 가?'라고 하면서 중얼 거렸다. 그 순간 마치 그 말에 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없다는 거냐?」 "어---." 「어는 뭐가 어? 야? 계속 지켜봤지만 내 주인중에서 너처럼 한 심한 인간은 처음이다.」 "한심하기는 뭐가 한심해!! 머릿속에서 징징 울지 말고 당장 나 와!" 시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로운에게 조금은 바보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서 화딱지가 나는데 몸속에 들어있는(?) 녀석에게까지 바보취급 을 받으려니 그나마 제정신으로 유지하려던 신경이 툭-하고 끊어 져 버렸다. 「그것부터가 문제야. 날 불러내는 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텐데 말이야.」 "어렵기는 또 뭐가 어려운데!!" 멀리서 보면 아마도 혼자서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정말 있는데로 진심으로 화를 내면서 세나케인을 불러댔다. "나와!! 난 얼굴 안보고 이야기하는 것 따위 정말 싫어!! 나오라 면 나오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 웬지 모를 한숨소리. "나오라니까!!" 「…성질하고는.」 슈욱-소리와 함께 시안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왔다. 다음 순간 시안의 앞에는 훤칠한 키의 미남자 하나가 미간을 찌푸린채 로 서 있었다. "성질이 뭐가 어째?" "…나쁘다고 말해줘야 알아 듣냐?" "……………." 부글 부글 부글 시안의 속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나 바보다! 못 알아 듣는다. 어쩔래!! 그러니까 누가 이 런데 불러오래!! 내가 알게 뭐야! 모르는게 당연하잖아. 넌 내가 살던 곳에 대해서 뭐 아는거 있어? 모르잖아!" 헉헉헉 하고 시안이 숨을 몰아 내쉬었다. '뻗쳐!! 뻗친다구 하나같이!! 모조리 열뻗쳐!!' 세나케인은 붉어진 시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툭-하고 말을 꺼냈 다. "그 색은 안 어울려 바람에 속한 인간은 바람의 머리를 해야지. 그런 황금의 머리카락 따위, 옛날 기억만 나고…." 쓰윽-하고 세나케인의 손이 시안의 머리위로 지나갔다. 손이 지나가는 순간 뼈속까지 저릴 듯한 차가움이 시안의 머리카 락을 감싸 올렸다가 사락 사락하며 흘러내렸다. "역시. 이쪽이 좋군. 두 번다시 바꾸지마." "……………." 시안은 멍청하게 세나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전에 화를 내던 것도 다 잊어먹은 시안은 문득 얼굴에 감겨 오는 머리카락의 색이 다시 원래대로 투명하게 빛나는 백금발로 변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안은 맥이 탁 풀려버렸다. "젠장할!!!!" 몇 번이나 발을 구르다가 시안은 그 자리에 털퍼덕 드러누워버렸 다. "아무려면 어때. 쳇. 희멀건 색이나 너절한 금색이나." 조용한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한참을 묵묵하게 누워 있던 시안이 문득 고개를 들자 아직도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세나케인이 시선에 들어왔다. "가만히 있지말고 아무거나 이야기 좀 해봐." "뭘?" "그냥 아무거나." "흐응." 세나케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인간이라는 것은 특이한 존재다. 할말이 없는데도 말을 하 라니,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인간은 그 인간들 중에서도 더욱 특이한 이계인. 세나케인은 조금 생각을 하다 말고 시안이 손짓을 하는데로 그의 옆에 앉았다. "너 진짜 특이해." "어디가?" "이계인이라서 그런건가? 바람의 주인중에서 너같은 인간은 없었 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세나케인은 지나가는 바람의 한자락을 잡아서 불쑥 시 안의 앞으로 내밀었다. 시안은 도대체 뭘 어쩌려나 싶어서 그가 하는 행동을 그냥 바라 보고만 있었다. "너는 바람을 흘려버려." "…………."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시안은 설명을 해달라는 표정으 로 세나케인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바람술사들은 바람의 힘을 빌어서 힘을 쓰지. 그리고 그것이 옳은 것이고. 물론 태어났을 때부터 그들은 기본적으로 바람에 속한 인간이기 때문에 바람술을 쓰는 자체가 자신의 힘을 쓰는 것과 다름이 없지만 힘이 모자를 때는 결국 지나가는 바람 의 힘을 빌어 쓰는 거야. 바람술을 쓰지 않을때도 무의식적으로 하는 거지." "그런데?" "하지만 넌 그렇지가 않아. 흘려버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대로 바람의 힘을 받고 있어." "…???" 시안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멍한 표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왠 바람의 '철학'이란 말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지금까지 나를 이렇게 할 일 없이 오래도록 실 체화 시키고도 멀쩡한 인간은 너 하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야." 그말을 끝으로 세나케인은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표정으로 시안을 향해 방긋 웃었다. "그게 다야?" "물론." "무슨 설명이 그 모양이냐? 넌 과외선생하기는 글러 먹었어. 하 나도 못 알아 듣겠는걸." "훗." 세나케인이 웃자 그가 들고 있던 바람의 자락이 함께 움직였다. 마치 시안을 향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네 자신이 바람의 힘, 바람의 실체 그 자체라는 소리지. 사실은 나도 잘 몰라. 나는 느낄 뿐이니까. 인간의 단어로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어." "쳇." 좀 들어보면 뭔가 배울거리라던가 알아두면 써먹기 좋은 거라고 나오지 않을까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시안은 좀 실망을 해버렸 다. 결국 그 소리가 그 소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역시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역시 머리가 나빠." 시안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읽은 것처럼 세나케인이 말했 다. "시끄러!!" "뭐. 그대로도 좋아. 바람은 움직이는 거니까. 하하하." 가만히 두면 무슨 바람교라는 사이비종교 교주라도 될 수 있을것 이라고 시안은 생각했다. 사이비종교의 교주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럴 듯하게 말하는 재 능이 있는 법이라고 언제나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난 좀 잘꺼니까 기엘이나 로운이 부르면 깨워줘." "흐응? 이제는 잔심부름도 시키는 건가?" "입닥쳐. 시끄러우니까." 꼬물 꼬물,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면서 시안은 자리를 잡았다. 머리가 복잡할 때 제일 좋은 것은 역시 잠! 세나케인이라는 든든한 보디가드(?)도 있겠다.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이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그대로 복창하면서 따라줄 사람들 도 있겠다. 모자르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아. 바닥이 좀 딱딱하긴 하군.' 그리고 시안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계속. (찔끔 찔끔 올려서 죄송합니다. -_-;; 오타 수정을 한다고 하지만 역시 많고 또 많습니다. --;; 오타수정 아르바이트 같은 것은 아무래도 죽어도 못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랄까요? 읽으시면서 자동 수정하시면서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격려메일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_-;; 1권 2권 지웠다고 욕멜을 보내시는 것은..좀... 1권 2권은 이미 출판이 된 것이라서 공개적으로는 올릴 수가 없습니다. 출판권이 이미 출판사로 넘어간것을 --;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3권이 책으로 나오게 되면 올린 것도 지워야 하는데 어쩌겠습니까?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3) "저렇게 화를 내시는데 웬만하면 검은 머리로 해드리지 그랬어?" 기엘은 뭔지 모를 짐승 한 마리를 잡아서 솜씨 좋게 손질하고 있는 로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할 수 있으면 했어." "뭐?" "녀석한테 바람술을 쓰는게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어. 너도 한번 해봐. 반탄력이 장난이 아니야. 그나마 한게 저 정돈데 말 다했지 뭐." 로운은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실제 그렇기도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힘으로는 시안의 머리 카락에 더 이상의 변화를 줄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그렇게 되나?" "응. 아무래도 은형술 같은 것을 좀더 가르쳐야 할 것 같아. 아무 리 숨기려고해도 어지간한 엘러들이라면 바로 알아내고 말걸? 저 정도면?" "그건 나도 동감." 이리야가 보글 보글 끓고 있는 스튜의 맛을 보면서 로운의 말에 동 감을 표했다. 말이 필요 없다라는 것이 딱 들어 맞을 정도로 시안의 몸에서 느껴 지는 엘의 파장은 강력하고, 또한 깨끗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정도다. "어?" 손질을 하다 말고 기엘이 휘익- 시안이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두사람도 기엘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렸다. "나타난 것 같은데?" "응." 하나의 파장으로 전해오던 시안의 느낌이 어느사이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세나케인이 실체화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뭐. 안전하겠군." "그렇긴 하지만." 기엘은 한숨을 내쉬면서 로운의 옆에 주저 앉았다. 한숨을 내쉬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어제까지 손안에서 돌봐야 했던 존재가 갑자기 훌쩍 자라버려 혼자서 독립을 외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심정이랄까?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그래도 역시 섭섭함은 감출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 세나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말했던 것말 인데." 로운이 엄숙하게(?) 스튜를 저으면서 말했다. "응? 아아. 그 전설속에 나오는 미메이라의 수호신이라는 소리?" 처음, 세나케인과 조우한 이후 로운은 생각이 날 때마다 그 세나케 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응. 하지만 조금 전에 기억이 났는데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아." "뭐… 그 세나케인 본인의 말도 그렇기는 하지." "생각보다 뭔가 더 엄청난 존재일 것이라는 기분이 들어." "엄청난 존재?" 이리야가 손가락으로 스튜의 맛을 보려하자 툭-하고 로운의 국자가 방해한다. "에이. 좀 맛 좀 보자는데, 쪼잔하게 시리." "기다려." 보글 보글 스튜는 이제 맛있는 향기를 내면서 끓어오르고 있다. 세 남자는 궁상맞은 포즈로 스튜 그릇 주위에 둘러 앉아있는 중이 다. "혹시 더 기억나는 거라도 있는거야? 로운?" "글세. 자세한 것은 직접 물어 보는 쪽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 이야 현재로는. 그의 존재가 어떤 존재든간에 쉽게 쉽게 대할 만한 존재는 아닌 건 확실해." "그건 그렇지. 사실 그건 누구든, 아 누구든은 아닌가? 여하튼 엘 러들이라면 절대 무시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아. 참 신기한게 하 나 있는데 대답 해줄수 있을까?" 이리야는 곰곰이 전부터, 정확하게는 처음 세나케인이라는 존재를 만났던 그 때부터 느껴오던 것을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사실 매번 궁금증이 들 때마다 묻는 것이 조금 자존심이 상해서 어 지간한 것은 대충 넘어가고 있던 그였다. 아무리 잘 모른다지만, 그래서 결국 이들을 따라오기로 마음 먹었 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금만 궁금하면 토끼처럼 눈을 뜨고 발발거리 며 묻는 시안의 전철을 밟아 시안2가 되는 것은 조금 꺼려졌던 것 도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로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 "처음부터 궁금했던 건데. 왜 있잖아. 호로스에 갔었을 때 내 엘이 영향을 받았던 것." "그랬었죠." "불의 나라라는 곳에 가는 것으로 그런 현상이 일어 났다면 바람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바람의 세나케인이라는 존재가 저런 식 으로 주위에 있으면 비슷한 영향을 받는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달라서 이유를 모르겠다는 뜻인가?" "바로 그거야." 로운은 잠시 스튜를 젖던 손을 멈추었다. "글세?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로운은 뒷말을 이어서 하라는 듯 기엘을 바라보았다. 기엘은 로운의 말을 이어갔다. "일단은 그가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 다. 마치 한 사람의 인간처럼, 굉장히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맞추어 진 형태로 나타났으니까요. 실제 그가 나타났을 때 저나 로운역시 어떤 압박감도 느낄수 없었으니까요. 일단 그의 말을 미루어 보았 을 때, 시안님의 몸을 매개체로 해서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결국 시안님의 영향권 안이라면 문제가 없다 뭐 이런 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써는 그렇게 밖에 생각 할 수 없었다. "뭐. 바람은 흐르는 거니까요." 기엘이 적당하게 결론을 내었다. 이리야 역시 더 이상 묻지 않고 기엘이 말한 것을 곰곰하게 되씹어 보는 눈치였다. "그리고 앞으로 같이 여행을 하다보면 또 알게 되겠지요." "아! 다 되었다. 기엘. 밥팅이 불러." "밥팅이?" 기엘은 로운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상한 단어에 눈썹을 치켜 올렸 다. "지난번에 자기가 그러던데? 자길 밥팅이로는 생각하지 말라고. 아 마도 그쪽 언어로 밥을 많이 먹는 사람, 또는 밥에 집착하는 인간 뭐 이런 의미인 것 같던데?" "그래도 그렇게 부르는 건 좀…." "사실이잖아." "…………." 휴우-하고 기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부분에서 고집을 피우는 것이 그의 친구 로운이다. "알았어." 기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큰 소리로 시안의 이름을 불렀다. "시안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어서오세요!!" 때마침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흘러갔다. "시안님!!!!" 멀리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밥팅이라서 밥이라고 하니까 대뜸 대답을 하는 군." 로운이 뒤에 한마디 덧붙여 씹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안님~~~~!" "그만 불러!! 귀 안먹었어!! 그리고 로운!! 한번만 더 밥팅이라고 부르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귀한번 밝군." "시끄러!!" 어느새 두다다다 바람과 함께 뛰어온 시안이 씩씩 대면서 자리에 앉았다. "밥 줘!!" "…………." "아…." 투덜거리는 시안의 뒤에 훤칠한 장신의 남자가 얼쩡거리고 있는 것 을 발견하고 기엘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나케인." "오늘 부터는 케인이야. 세나케인도 너무 길어. 부르기 힘들어." "누구 맘대로?" 세나케인이 눈을 부라리면서 시안을 쏘아보았다. "도대체 처음부터 왜 남의 이름을 가지고 왈가 불가 하는거냐 넌?" "부르기 쉬운게 짱이야. 어쨌든 난 내 멋대로 부를 거니까." 대답하는 시안의 손에 로운이 스튜가 가득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여하튼 인간이란 자기 멋대로군." "그러니까 인간이지." 시안은 맛있는 스튜를 글자 그대로 입속으로 퍼부으면서도 지지않 고 대꾸했다. "드…시겠습니까?" "뭘?" 기엘은 들고 있던 작은 그릇을 어찌하지도 못하고 절절 매었다. "아아. 음식이라는 거군. 고맙지만 별로…. 인간의 음식은 입에 맞 는 편이 아니거든." "쳇. 인간이 아니라면서 웬 입맛? 구라치고 있네." "…………." 상대방은 나름대로는 바람의 신의 화신일지도 모르는 존재건만 그 주인이라고 하는 대단한 꼬마는 전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 모 양이다. 그 증거는 저 버르장머리없는 말대꾸.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과연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기엘은 속으로 시안이 왠지 모르게 로운의 성격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하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쓸데없는 이상한데서 저렇게 제멋대로인지 몰라. 정말이 지.' "밥 먹어!! 밥!! 머리굴리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시안님." 기엘은 잠시 세나케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묵묵히 '스튜'를 먹기 시 작했다. 세나케인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부 드럽게 주위로 사라락 소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흐르는 바람처럼. 계속. (역시 찔끔 찔끔. ...오타는...자..자동 수정해주시길..쿨럭)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2. 트러블 메이커 시안 "으아아아-- 온 몸이 뻐근해. 정말 저기 넘어가면 마을이 있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시안님." "으으. 간만에 좀 다리 뻗고 누워 잘 수 있겠군. 왠 이게 팔자에 없는 하드 트레이닝이람." 시안은 뻐근한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앞장서서 걸어갔다. 눈으로는 빤히 보이던 평야는 생각보다는 멀어서 그들이 폐이요 트를 벗어나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우. 재미없군. 이거. 정말 앞으로 내내 이렇게 심심하게 여행 을 해야하는 거야?" "예?" 시안이 너무나 평온하기만 한 푸른색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했 다.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여행을 하는 목적은 두루두루 견문을 익히라는 거지 말썽거리 속으로 뛰어들라는 소리가 아니 야." "그냥 하는 말이지!!! 누가 사고같은 거에 휘말리고 싶데? 도대 체 무슨 말을 못……어, 어라?" 시안은 로운을 향해서 항의를 하다말고 몸을 돌려 후다다닥하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 시안님!! 어디 가십니까!!" "사람 소리야!!" "예?" 기엘은 귀를 의심했다. 사람소리가 나면 그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바람술사들이 의례 그렇듯, 기엘 역시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귀가 밝은 편이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 소리라니요?" 기엘이 시안에게 답변을 듣기도 전에 시안은 벌써 저 앞으로 달 려 나가고 있었다. "쳇. 할 수 없군." 조금 뒤쳐서 걷고 있던 로운이 허리춤에 매달린 라이트와 짊어지 고 있던 몇 개 안되는 가재도구(?)와 짐들을 고쳐 매었다. "이리야!" "알았어. 알았다구. 참나. 무슨 강아지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 고. 저녀석이 원하면 정말이지 하늘에 떠있는 달이라도 따다 바 칠 양반들이구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엘이 시안의 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 다. 그 뒤를 나머지 두 남자가 덜그럭 소리와 함께 달려가기 시작한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람 소리가 분명히 났는데….' 한참을 뛰어 왔는데도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자 시안은 불안해지기 시 작했다. 분명 귀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또 달려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보이지 않 으니 불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괜시리 또 혼자서 단독 행동을 했다고 로운에게 잔소리 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시안의 등골이 오싹해져 왔 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 중 하나를 들으라면 아마도 그것은 잔소 리일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 누나의 잔소리 그리고 선생님의 잔소리 기타등 등. 이곳에 와서 그런 소리를 안 듣게 되나 싶었지만 그 잔소리 대장 의 역할은 로운이라는 녀석이 고대로 담당하고 있는 중이다. '젠장!! 분명히 들렸다구!!' 시안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사실 시안은 몰랐지만 현재 시안의 귀는 보통 사람들보다는 몇배 나 더 민감해져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렇다기 보다는 그가 가진 바람 술의 탓이긴 하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실려오는 소리를 민감하게 캐취하는 것이 다. 단지 시안에게 문제가 있다면 본인이 그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 기 때문에 그 능력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리 없는 시안은 혹 자기가 환청을 들은 것이 아 닌가 싶어서 불안해하는 것이다. 「조금 더 앞쪽이다. 저 언덕 아래.」 "어? 케인?" 「…………세나케인이다.」 잠깐의 간격을 두고 화가 난듯한 세나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아.」 "고마워. 우악!!" 대답을 하다가 그만 앞에 있던 돌부리를 미쳐보지 못한 시안이 넘어질뻔 했다. 몸이 앞으로 화악 쏠리면서 맨땅에 해딩을 하기 직전 그의 몸이 공중에 턱-하고 멈추었다. "좀 조심해서 앞 좀 보고 다녀!" "으악!!!"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안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좀 소리 좀 내고 오면 안 돼?" "쉿- 조용히 해!!" 쿠욱-하고 기껏 멈추었던 얼굴이 땅바닥에 코를 박기 직전까지 내리눌러졌다. "왜. 왜이러는데!!" 한껏 소리를 죽여 항의 하지만 머리를 누르고 있는 로운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좀 놓고 말해!" "시끄럽다고 했지!!" 로운은 바둥거리는 시안은 거들떠도 보지않고 시안이 뛰어가던 방향을 향해서 눈을 크게 떴다. 몇 명의 사람들이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기엘과 이리야도 가까이 다가와서 로운의 옆에서 낮게 몸 을 숙였다. "이리 내놔!! 이 꼬맹이!!" "싫어!!! 이건 내꺼야!!" "웃기지마! 산적이면 산적질을 해야지 어디서 도둑질을 해가지고 와서는!" "그래도 내꺼야!!! 이건 내꺼라구!!" "이게---!!" 소년하나가 꽤 두툼한 보퉁이를 가슴에 안은 채 발악을 하고 있 었다. 주위에 있는 덩치 좋은 몇 명의 남자들은 팔짱을 킨채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한명이 대표인 듯, 소년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도와줘야 할까?" "글세? 산적인 것 같은데… 어지간하면 개입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아." 바람에 실려온 그들의 대화를 들은 로운이 기엘에게 대답했다. 로운의 눈에 몇사람의 남자들이 그들의 옆에서 한가하게 앉아있 는 것이 보였다. 그들 이외에도 조금 떨어진 곳에 덩치가 꽤 좋은 남자들이 몇 명 빙글 빙글 웃으면서 앉아있었다. "그래도 어린애 하나를…." 어린애라는 소리에 로운의 팔에 눌려서 오징어포처럼 납작하게 있던 시안이 로운의 팔을 순식간에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달려갔 다. "시, 시안님!!" "…저게!!" 튀어나가는 시안을 잡으려다가 실패한 로운이 땅바닥을 내리쳤 다. "젠장 저 말썽꾸러기!!!!" 특별한 위험이 없는 한 움직이지 않으려 했던 로운이 혀를 찼다. 정말 저 꼬마는 어떻게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너!! 거기서!!!" 이번에는 로운이 정말 열을 받았는지 기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휴… 둘다 똑같은 주재에." 기엘은 한숨을 쉬면서 뒤를 따라갔다. 이리야 역시 그런 세 사람을 보고서 또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 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기엘과 로운과는 달리 일단 허리춤에 묶어 놓았던 자신의 레이피어를 꺼내들었다. "여하튼. 저 골치덩이 삼총사는 가만히 못있는다니까. 참나." "당장 놔줘!!!!" 시안은 바람처럼 달려가서 소리를 쳤다. 휘익-하고 그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시안쪽으로 향했다. 번쩍이는 수십개의 눈들이 자신쪽으로 일시에 향하자 시안이 움 찔했다. '아차!! 사, 사람들이 많잖아!!' 시안은 치켜 올렸던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왜그랬을까? 어째서 갑자기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것처럼 저 어린애를 보자마자 뛰어 나왔는지 시안 자신도 잘 이해가 가 지 않았다. '젠장. 똥 밟았다.' "휘익----."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멋진데. 아가씨?" 뒤쪽에서 들려오는 감탄사 아닌 감탄사 소리. 그 소리에 순간 시 안의 이성이 휘익-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누가 아가씨라는 거야!!! 니들은 눈이 모조리 삐었냐?" "시안!!" 시안이 신경질을 부리면서 소리를 지르는 순간 뒤에서 로운이 시 안의 몸을 잡아 당겼다. "시안님!!" 난데없이 백금발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뛰어드는 바람에 조금 쯤은 얼덜떨해 있던 산적 일행(?)은 그녀의 뒤를 이어 나타난 두 남자, 아니 세 남자를 보는 순간 철컹 철컹 소리들을 내면서 일 어났다. 로운과 기엘 역시 전광석화처럼 라이트를 뽑아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 "……………." 어느쪽도 단 한마디 꺼낼 수 없었다. 스윽하고 로운이 살며시 시안을 자신의 등뒤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러자 산적 일당의 두목인 듯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뭐냐?" "……………." 로운은 급히 기엘에게 살짝 말을 건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기는…." "거기!! 속닥 속닥 거리지 말고 있는 거 다 내려놓고 조용히 꺼 지지 그래?" 들려오는 말은 미메이라의 언어와는 그리 틀리지 않았지만 제국 특유의 엑센트가 섞인 거센 제국어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름 대로는 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로운과 기엘이 알아 듣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을 정도의 상당한 사투리. "말이 안들리나본데…." 손가락으로 까닥 까닥 두목이 신호를 하자 뒤의 남자들이 손에 들은 각자의 무기를 고쳐 들었다. "잠깐." 로운이 손을 들었다. "우린 단지 지나가던 사람들일 뿐, 뭐 별로 당신들과 쓸데없이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안소. 그냥 우릴 보내주었으면 하는데?" 로운은 눈으로 남자들의 수를 세었다. 두목을 포함해서 모두 14명. "푸하하하하." 두목이 입을 열어 파안대소를 하자 뒤를 이어서 뒤의 남자들도 박장대소를 하면서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 군. 우리 소문을 못들어 봤나본데 페이요트 의 칼바람이라고 말이야." 두목이 어깨를 으스대면서 말을 하는 순간 로운의 등뒤에 숨어 있던 시안이 푸학-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크, 쿠하하하핫. 칼바람이래∼ 칼바람. 무슨 깡패 똘마니 집단 도 아니고 왠 칼바람? 푸하하하핫." 호리호리하고 예쁘기가 그지없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갑자기 웃음 을 터트리자 그때까지 박장대소를 하고 있는 남자들의 눈이 험악 해졌다. "지금 우리가 농담을 하고 있는 줄 아나?" "잠깐 잠깐!! 저기 시안님께서는 그냥 단순하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기엘이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뭐. 지나가던 사람들을 기습하는게 우리 취미지만 뭐 어때? 얘 들아!!" 우람한 체격의 남자가 팔을 들었다. 우와!! 하면서 남자들이 일제히 시안의 일행을 향해 뛰어오기 시 작했다. "기엘!! 시안을 보호해!!" 손에 잡히는데로 시안의 목덜미를 잡아 기엘에게 던지면서 로운 이 소리쳤다. 기엘은 가슴에 퍼억하고 던져지는 시안을 감싸안고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시안은 그런 기엘을 밀치면서 옆으로 비켜섰 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싸워!! 젠장!! 누굴 여자라고 씨부렁 거리 는 거야!! 저 십탱이들!" "시안님!!" "괜찮아. 나도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 케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휘리릭하고 세나케인의 모습이 나타났 다. "케인이 아니라고 했지!!!" "시끄러워!! 눈이 달렸으면 저 골빈 산적놈들좀 어떻게 해!!!" "내가 왜!!" "날 보호해야 할 것 아냐!!" "하나도 위험하지 않은데 뭐하러? 내가 그렇게 한가해보이냐?" "당근!! 넌 맨날 내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잖아!! 너를 하나 옮기는데 얼마나 힘든줄 알아!!"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두 남자가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이유로 말다툼을 하는 동안 로운 과 기엘 그리고 이리야는 물밀 듯이 몰아 닥치는 산적들을 향해 각자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에잇---!!" "가만히 물건만 좋고 가면 보내주려고 했는데, 말귀를 못알아 듣 는 놈들이군." 로운은 오른쪽에서 높이 무기를 치켜들고 덤비는 남자를 피하면 서 라이트를 가볍게 일직선으로 뻗었다. "크헉!!!!" 비명소리가 들렸다. 시안은 세나케인과 말다툼을 하다 말고 소리를 질렀다. "로운! 죽이면 안돼!!" "시끄러워!!" 로운은 머리에 핏대가 올랐다. 도대체!! 도대체 왜 자신이 이렇게 쓸대없이 라이트를 휘둘러야 한단 말인가. 성스럽다고 일컬어지는 자랑스런(?) 기사의 검 라이트를 이런곳 에서 이렇게 휘둘러야 한다는 사실에 너무나 화가 났다. 아니 정 확하게는 쓸데없이 산적들끼리 노닥이고 있는 데 불쑥 튀어들은 시안에게 화가 났다. "뭘 그러고 있어 바람술로 화악!! 쓸어 버려!!" 로운은 뒤에서 응원 아닌 응원을 하고 있는 시안을 산적놈들을 쓸어버린 즉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꽁꽁 동여매서 한 30바퀴쯤 굴려 버리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로운이 이렇게 딴 생각을 하며 라이트를 휘두르는 동안에도 기엘 은 다수의 남자들을 자신의 라이트가 닿는 정확한 반경 속으로 끌어들여 상대하고 있었다. 슈악-- "욱--!" 라이트가 휘둘러지는 선을 따라서 붉은 색의 피가 흩어졌다. "젠장!! 죽이면 가만 안 둘꺼야!!!! 케인 뭐해!!" 시안은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생각없이 순간적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 결국 문제의 발단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무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 이 뛰어드는 바람에 결국, 이런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일인 벌어진일, 엎지러져 버린 물은 도로 담 을 수도 없다. '으윽---. 난 죽었어. 로운한테 주---욱었어!!' 시안은 남자들이 업치락 뒤치락하고 있는 장소를 조금 빙돌아서 아까의 그 어린애를 찾았다. 어차피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은 그 애였다. 시안은 어렵지 않게 그애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 소년은 조금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보퉁이를 소중하게 꼭 끌어 안고 있었다. "케인. 도와 주기가 그러면 저애라도 좀 이쪽으로 끌어다 줄 수 있어?" "그 정도는 네가 해." "어떻게 하는지 모른단 말이야." 다급한 시안의 말에 세나케인이 코웃음 쳤다. "참나. 이런게 바람의 계승자라니. 한심해서 말이 안나오는 군. 따라해." "빨리!!!" 세나케인이 한 손을 내밀자 시안도 따라서 손을 내밀었다. "나 말고 저 꼬마를 향해야지. 넌 눈도 없냐?" "그래!!! 없어!!" 불쑥 세나케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던 시안의 얼굴이 빨개졌다. "로. 조하. 아슈레이. 유우라 (움직이는 바람)" "로. 조하. 아슈레이. 유우라." "그냥 단순하게 따라하지 말고 공기를 움직인다고 생각해." 세나케인이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시안은 뜨금해서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하고 주문을 외웠다. "로. 조하. 아슈레이. 유우라-." 꿈틀하고 시안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손가락 끝에 있던 공기 가 힘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으로 화한 그 힘은 천천히 소년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시안님!!!" 한참 정신을 팔고 있는 시안의 뒤로 쓰러졌던 남자가 달려들었 다. 기엘은 자신을 향해 거대한 메이스를 휘두르는 사내의 손목을 라 이트의 등으로 쳐내고 그를 발로 차버리고는 황급하게 시안쪽으 로 오려했다. 하지만 시안에게 달려드는 남자는 뭔지 모를 힘에 휘익- 뒤로 밀 려서 엉덩방아를 찌으며 넘어졌다. "별 것도 아닌게." 세나케인이 내뱉듯이 말했다. 그의 눈짓 한번으로 남자의 몸이 무형의 힘에 밀려 넘어진 것이 었다. 기엘은 그 무형의 힘이 세나케인에게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안심을 하고는 다시 이리야와 로운이 힘겹게 움직이고 있는 난장판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세명…인가?' 로운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대는 난잡한 검술을 쓰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실전으로 통해 배 운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상대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그 냥 이전처럼 손쉽게 상대를 할 수가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더더 욱 힘이 들었다. 죽이지 않고, 최소한 도로 힘을 억제해서 싸운다는 것은 아무리 기사인 로운이라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것은 이리야나 기엘도 마찬가지여서 별것 아니라고 생 각했던 싸움은 로운의 생각보다 훨씬 시간을 잡아 먹고 있었다. "빌어먹을 시안 녀석.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남아 있는 사람은 처음에 로운을 상대했던 두목이외에 두명. 아 니 한명이다. 이리야는 넘어진 한 남자의 허벅지에서 날카로운 레이피어를 뽑 아내면서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 레이피어라고 얕보지 말라고 했잖아? 응?" 이리야를 얕보고 덤벼들었던 남자는 살벌한 표정의 그를 보고 마 지막까지 손에 들고 있던 해머를 놓치고 말았다. 두목은 주위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부하이며 동료들을 보고 얼굴 색이 싹 변했다. 모두 검을 들고 있던 상대였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단 세명의 상대에게 이런식으로 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 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로운의 라이트 끝에 스쳐 볼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자신의 바 스타드를 고쳐드는데 순간 날카로운 번쩍임이 그의 턱 끝에 닿았 다. "흐헉!!----" "거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대로 끝이야." 싸늘한 기엘의 음성. 두목은 목의 급소에 정확하게 닿아 있는 기엘의 검신을 피하려고 했지만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두목은 몰랐지만 그의 몸은 이미 기엘의 포박술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항복하겠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빈정대는 목소리로 이리야가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는데 로운은 이미 자신의 라이트를 닦에서 검집에 밀어 넣고 있었다. "적당히 해둬. 안 그러면 저 녀석 또 날뛸 거 아니야." 로운이 손가락으로 시안을 가리켰다. 그동안 시안은 주문으로 바들 바들 떨고 있던 소년을 자신의 쪽 으로 끌어 당겨놓고 있었다. 꿀꺽하고 두목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침이 넘어가는 순간 날카로운 라이트의 끝이 목을 찔렀다. 기엘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두목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 항복하지…." "좋아." 후우-하고 숨을 내쉬면서 기엘이 팽팽하게 당겨 있던 신경을 풀 었다. "머리가 좋군. 기엘을 화나게 하면 곤란하거든." 로운은 기엘의 어깨를 툭하고 치면서 말했다. 엉뚱하게 시작된 활극 하나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계속. 올리는 파일은..--;; 최종 수정은 거치지 않은, 따라서 버그도 야~~~악간 있을 수도 있는 미수정본입니다. --;; 최종수정은 나중에 하기 때문에...... 으윽. 발등에 불 떨어 졌습니다. --;; 하아...마..마감....마감...마가~~아암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5) ◇◆◇ "물!!!" "넵!!" 날쌔게 생긴 남자 하나가 재빨리 어디론가 뛰어 갔다. 이름하야 페이요트의 칼바람이라는 거창하지만 어딘가 우스꽝스 러운 이름의 산적단 두목 한스는 뛰어가는 토우의 뒷 모습을 바 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페이요트 산맥의 요소요소에서 산적질을 해왔지만 이런 상대는 정말 처음이었다. 다른 곳에 있는 동료들과는 연락이 아직 되지 않으니 상황을 뒤 엎을 수도 없었다. 몰래 사람이라도 살짝 내보내려고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기엘이 나 로운이 바람처럼 나타나서 난리를 피웠던 것이다. 그는 정말 똥물을 뒤집어 썼다고 한탄을 하면서 속으로 투덜 거 리고 있었다. 난장판이 되고 자신과 토우를 제외하면 단 한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다들 부상은 입었지만 죽은 사람 은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 그나마 불행중의 다행이랄까? 하지만 현재 한스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고 있었다. '제발∼ 제발 마을에서 어서 떠나가라구!!!!' 현재 시안의 일행이 잠시 머물고 있는 곳은 어제의 그 난장판의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은 페이요트 산맥을 주름잡고 있는-나름대로는-칼바람 산 적단의 일종의 아지트같은 곳이었다. 마을의 남자들은 농한기가 되면 이렇게 몇 명씩 조를 짜서 산적 아닌 산적이 되어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혹여 영주군이 산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출정이라도 하면 모두들 얌전히 농사짓는 얌전한 영민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 마을이 산적단의 소굴이라는 것을 눈치채인적은 없었 다. 하지만 지금, 온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제일 큰 한스의 집에 머물고 있는 네명이 언제쯤 마을을 떠나줄까 가슴을 졸이면서 하 룻밤을 꼬박 지새운 후 벌개진 눈을 하고 그들의 시중을 들고 있 는 중이다. "물 가져오라고 했는데 어째서 아직 소식이 없는 거야!!" "지금 갑니다!!!" 멀리서 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엘은 잔뜩 심술을 부리고 있는 로운의 옆에서 쓴웃음을 지으면 서 앉아있었다. "적당히 해둬. 그렇지 않아도 벌벌 기고 있는데 왠 그리 신경질 이야." "시끄러워. 성질이 나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니까 좀 냅두라구." 기엘은 꼭 어린아이처럼 대꾸를 하는 로운을 보고 어쩔 수 없다 는 얼굴을 했다. 사실 기엘은 로운이 이렇게나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을 몇 번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운은 저 페이요트에서 신관의 증표인 목걸이를 자신의 손으로 끊어낸 뒤로 예전에 기엘이 알고 있던 그로 돌아가 있었다. 신관으로 지낼 때는 나름대로는 상당히 성질을 죽이면서 지냈었 는데 파계(?)선언을 한 뒤로는 왠지 스스로를 자제하는 것이 조 금 힘들어졌던 것이다. 신관으로써 사람과 상황을 보는 눈과 기사로써 사람과 상황을 보 는 눈을 다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상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열이 받치고 또 받치는 시안이 었다. "어디간 거야. 이 말썽꾸러기 꼬마는?" "글세?" 기엘은 어제부터 절대로 로운의 곁 20렌(1렌은 1미터 50센티 정 도) 근방으로는 발도 디디지 않던 시안의 얼굴을 기억해내고는 웃음을 지었다. 나름대로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듯 시안은 찍소리도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안님께서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화 풀어. 게다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잖아. 그 하셰카 사람 들이 따라올지도 모르고."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아. 반성하는 정도로는!!!" 로운이 텅-하고 탁자를 치면서 소리쳤다. 그 바람에 커다란 물병에 물을 가득 담아서 들어오던 토우가 화 들짝 놀라서 비틀거리는 바람에 들고 있던 물병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파샥-소리와 함께 바닥은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떠와!!" "네…." 비틀 비틀 걸어가는 토우의 뒷모습이 안쓰럽게 비쳐졌다. 구석에서 조용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이리야는 아무소리 않 고 옆에 놓여 있던 싸구려 포도주를 벌컥 벌컥 들이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여하튼 하나 같이 똑같은 주제에. 정말이지.' "저, 저기 돌아가지 않으셔도 되나요? 시안님?" "님은 뭐가 님이야? 그냥 맘대로 부르라고 했잖아. 아니면 형이 라고 부르던지." "그래도…." 소년은 힐끔 힐끔 시안의 뒤쪽에서 눈을 감은채 서 있는 이상한 남자를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덕에 누나에게 생일선물을 주기 위해 어른들도 이틀이 상 걸리는 성까지 가서 훔쳐 온 옷은 멀쩡할 수 있었다. 사실 마 을의 규칙상 외부에서 들어온 것은 모두 공동분배를 하게 되어 있지만 누나에게 줄 선물만은 혼자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그 방법이 도둑질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짓을 한 여파는 지금 어마무지하게 커져서 마을을 덥치고 있었다. 12명이나 되는 이웃 아저씨들이 저 예쁘장한 시안이라는 사람이 데리고 온 그 무시무시한 아저씨들 때문에 마을의 어른들이 많이 다치고 말았다. 결국 원인은 자신이라는 소리가 된다. 어쩌다보니 시안과 세나케인은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지만 여하 튼 두려운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었기 때문에 소년의 가슴은 두근 반 세근반 하고 있었다. "야, 너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네?" "이름말이야. 이름." "베이인데요." "그래. 베이. 너 가서 말이야. 저기- 나랑 같이 온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 좀 알아다 봐줄래? 특히 시커먼 머리에 눈이 부리부 리하게 생겨서 성질 팍팍 부리고 있는 아저씨 얼굴이 어떻게 하 고 있는지 말이야." 베이는 곧 한스아저씨네 머물고 있는-사실은 거의 강짜를 놓으면 서 그 집을 점령해버린-사람들을 떠올렸다. 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안님." "형이라고 하라고 했잖아!" "네. …형." 움찔 움찔 하면서 벤이 문가로 가려던 참이었다. "잠깐. 꼬마. 거기서." "예?" 그때까지 눈을 감고 자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졸고 있던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던 백색의 남자가 벤을 불렀다. "알아오는 것은 둘째고 올 때 먹을 것 있으면 좀 챙겨가지고 와. 이 녀석은 배고프면 신경질적이 되니까." "예. 알겠습니다." 벤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인간답지 않아 보이는 이상한 남자, 즉 세나케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시안은 꼬마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닫히자 대뜸 세나케인에게 화를 냈다. "뭐야!! 케인마져도 나를 밥팅이라고 보는 거야?" "밥팅이라? 재미있는 단어군." "시끄러워!! 무슨 뜻인줄 다아는 주제에."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세나케인이라는 존재가 역시 자 신과 어딘지 모르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시안으로써는 저렇게 딴청을 피우고 있는 세나케인이 몹시나 밉살스러웠다. 물론, 세나케인이 말이 거의 100% 사실이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났음에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쳇. 정말이지. 꼭 내 잘못이라고 보기도 그렇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한차례의 칼부림이 끝나자 마자 자신을 호출하는 로운을 피해온 시안은 시안 나름대로는 화가 나있었다. 물론 자신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마구 뛰어 들은 것은 인정한 다. 하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 아 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만 화를 내고 있는 로운을 시 안은 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안이 이해를 하고 안하고는 두 번째 문제다. 결국 시안 이 혼을 나느냐 마느냐는 로운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젠장. 기엘이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그렇고 왜 케인은 안사라지고 졸졸 따라다니는 거야? 나와 있는거 힘든거 아니었어?" "……………." 혼자 투덜 거리고 있던 시안을 그냥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던 케 인이 조금 기가막힌 표정을 했다. 이전에 분명 자신이 실체화 되어 있는 것이 큰 문제가 없다고 말 을 해둔 것을 이 시안이라는 녀석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 로운이라는 기사가 화를 내는 이유가 이해가 안 가는게 아 니군. 도통 생각이 있어야…."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시안이 화를 내려는 찰라 밖에서 기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님!!!" "어? 기엘이다!!!" "시안님. 출발하셔야죠!!" 기엘은 옆에서 겁을 먹은 눈을 하고 있는 베이를 보면서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안님 시중을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 사실 줄게 없어서…. 이 거라도 받아줄래?' 기엘은 유사시에 쓰기 위해 작은 주머니에 가득 넣어 놓았던 하 야시 한알을 꺼내서 베이에게 내밀었다. 베이는 기엘의 손바닥위에 놓인 반짝이는 보석을 보고 눈이 휘둥 그래졌다. "아. 아니요… 괘. 괜찮은데요. 기사님." 하지만 기엘은 베이의 손을 끌어 당겨서 그 위에 우격다짐으로 하야시를 얹어주었다. "받아주면 좋겠다. 시안님도 괜찮다고 하실거야." "그. 그래도…." 베이는 안절 부절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자신이 어떤 몰골이 될 지 뻔했기 때문에 가슴을 졸이고 있는 차다. 그런 마당에 이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받으면 뺏길 것은 거의 자 명하지 않은가. 물론 그것을 팔아서 나오는 이득금을 조금쯤은 받을 수도 있겠지 만 그래도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 기엘. 로운 화 풀렸어?" 꼼하게 낡은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그 사이에서 시안의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기엘은 그런 시안의 얼굴을 보면서 조금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 다. "아니요. 아직…." "그럼 안가!!" 쾅-하고 다시 문이 닫혔다. "시안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무슨 소리야. 안가겠다니." 불쑥 뒤에서 덩치 좋은 남자가 하나 나타났다. 베이는 재빨리 보석을 받은 손을 주머니속으로 쑥- 넣었다. 기엘이라는 남자와는 달리 저 로운이라는 남자는 너무너무 무서 웠기 때문이다. "빨리 안나와? 이 골치덩이 밥팅이!!" "싫어!!" 문 안쪽에서 발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운의 이마에 빠직하면서 힘줄이 올라왔다. 로운은 저벅 저벅 발소리도 요란하게 베이의 집 문앞으로 걸어갔 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음 소리도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당장 안 나오면 앞으로 3일 동안 한끼도 안 먹이고 둘둘 묶어서 어깨에 얹고 다닐테다!!" "…………." "…………." 침묵이 작은 오두막을 감쌌다. 베이는 너무나도 황당한 로운의 협박(?)에 할말을 잃고 멍청하게 로운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셋을 셀 동안 안 나오면 일주일로 늘인다. 하나--. 두울---." --끼이이이익. 셋을 세기 직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 "…안 때릴 거지?" "…………." "…화 안낼 거지?"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가 빼꼼하게 열린 문틈 사이에서 새어나왔 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기엘의 뒤에 서 있던 이리야가 자지러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 크하하하하하핫." "왜 웃으십니까." 기엘이 눈치 없이 웃는다고 이리야의 허리를 쿡 찔렀지만 이리야 는 여기저기 자신들을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이 상관도 없다 는 듯 미친 듯이 웃어댔다. "푸하하핫. 화를 내는 로운이나. 화낸다고 얼굴도 못 내놓는 시 안이나 똑같아. 푸하하하하." "이리야씨!" "빨리 안나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시안과 로운. 결국 로운이 참지 못하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화내지 말란 말이야!!!!! 이 아저씨 얼굴!!" 벌컥하고 문이 열렸다. -콰앙!!! "크흑---." 로운의 눈앞이 새까매졌다. 덤으로 주위에는 대낮인데도 반짝 반짝하는 별이 몇 개나 맴돌았 다. "우. 우앗!!!" 벌컥하고 문을 열고 튀어나오다 만 시안이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된것인고 하니 시안이 문을 열고 나오는데 문에 너무 가 까이 서 있던 로운이 열리는 문에 정통으로 얼굴을 얻어맞아 버 린 것이다. "미. 미안. 그렇게 가까이 서 있는 줄 몰랐어." "너어-----." "우악!!! 기엘 살려줘!!!!! 로운이 사람 죽여!!!" 시안은 눈치를 보다가 기엘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째빨리 줄행랑 을 치기 시작했다. "너 거기 안서!!!" "싫어!! 서라고 누가 서냐!!!" 일행이 떠난 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집앞 으로 나와 있다가 시안이 달려가자 옆으로 갈라져서 길을 내주었 다. "시안님!!!"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기엘이 그 뒤를 따랐다. 이리야는 배꼽을 잡고 웃다가 아직도 이마를 잡은채 웅크리고 있 는 로운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툭툭 치면서 위로를 했다. "그러니까 화 내지 말라고 기사양반이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로운은 간신히 띵한 머리를 들어올렸다. 손으로 몇 번이나 문질렀지만 이마 한가운데에 불룩- 혹이 솟아 나온 것이 만져졌다. "저녀석을 잡기만 하면…." "큭큭큭. 시안 오늘 식사는 다 했군." "젠장!!!" 로운이 소리를 지르자 옆에 있던 사람들 몇이 움칠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헤치고 마을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한스가 앞으로 걸 어 나왔다. "여하튼. 마을을 떠나주어서 고맙소." 정말 눈물나게 고마운 마음의 한스는 나름대로는 그럭저럭 진심 을 담아서 말했다. "…………." 로운은 아무말 하지 않고 한스의 얼굴을 잠시 쳐다본 다음 발걸 음을 돌렸다. 자신이 생각보다 상당히 버릇없이(?) 굴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사과를 할 마음도 그럴 생각도 없다. 로운이 짐을 들고 걷기 시작하자 이리야가 붙임성 좋게 한스를 향해 말했다. "아아. 이 기사양반은 좀 성질이 그래서 말입니다. 여하튼 좋은 경험 했수. 그러니까 앞으로는 사람을 좀 골라서 하라구요. 자. 신세 잘 졌습니다." 넉살좋게 말하는 이리야. 하지만 그것을 듣는 한스의 마음은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아니 이가 부드득 하고 갈릴 지경이다. 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이 하룻밤동안 이 마을에 억지로 머 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는지 모른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이리야는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 두 남자는 아무리 봐도 기사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영주군이 산적 토벌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내보냈다는 소식은 아직 접한 적이 없다. 그런데 혹시 이 일행이 진짜 기사라면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당신들 기사야? 라고 물을 수도 없 는 일. 그러니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한스는 이제 저 멀리 걸어 가고 있는 로운의 뒷 모습만을 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잠깐." 로운이 뚜벅 뚜벅 걸어가다 말고 발을 멈추더니 뒤돌아서 한스를 불렀다. "당신이 이 마을 책임자 인가?" "그렇소…."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 인가 싶어서 한스는 가슴을 졸였다. "누가 와서 물어도 절대로 우리 일행을 봤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소." "………?" "약속해준다면…." 로운은 말을 하다 말고 짐 보퉁이 한구석에 손을 쑥 집어넣고 무 엇인가를 뒤져서 꺼냈다. 그것은 얼마전 자신이 끊어버린 신관의 증표인 목걸이에 달려있 던 하이시중 몇 개였다. "약속해준다면 이걸 주겠소. 대신 절대로 우리 일행에 대해서는 이 마을 사람 전체한테 함구하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 한스는 로운이 내민 보석을 재빨리 어보았다. 눈에 익은 보석은 아니었지만 척 봐도 상당히 고가의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나름대로는 이 아르바이트성 산적질로 뼈가 굵은 몸이다. "약속하겠소." 한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 그 보석을 받아 들었다. "대답이 간단해서 좋군." 그 말을 끝으로 로운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한스의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역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모두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이어이. 그런걸 막 줘도 되는 거야? 보석만 꿀꺽하고 다 불어 버리면?" "그건 그 사람 양심에 달렸지. 그리고 혹 누군가에게 우리를 봤 다는 소리를 하더라도 그걸 가지고 있는 이상은 대충 내가 알 수 있으니까." 로운이 대답하자 이리야가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로운역시 그런 가능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한스에게 건내준 것은 나름대로는 상당히 고가의 물품. 게다가 그것은 자신이 몇 년동안이나 목에 걸고 다녔던 물건이다. 신관의 증표로 신관 하나하나에게 주어지는 목걸이는 대신관의 힘이 조금씩 깃들어 있는 물건이다. 말하자면 그것으로 대신관이 원하면 언제든 신관들의 상태를 체크해볼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끊어져서 대신관에게까지는 영향이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 도 그 소유주였던 로운이라면 그 보석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심 리적으로 커다란 동요가 있다면 그 흐름을 되집어서 알아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은 남아 있는 것이다. 설명은 조금 길었지만 로운의 설명을 들은 이리야가 흐응-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그 친구가 혹시 그걸 누구한테 넘기지 않는 이상. 그 걸 들고 거짓말이라도 하면 적당하게 알아 낼수 있다. 이런 소린 가?" "대충. 거리가 너무 멀어지지만 않으면 가능해." "나름대로는 참 편리하구만 그거." "여하튼 영향권을 벗어나기 전까지만이라도 우리에 대해서 함구 해주면 다행이니까." 로운의 머리에 그 검은 암살단 하셰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페이요트 산맥의 그 험한 골짜기 까지 따라 왔던 끈질긴 존재다. 언제 어디서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 올지 모르는 상황. 그것을 잠깐이나마 늦출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 로운의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이 친구들은 어디까지 간 거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그건 나도 알지만. 그렇지 전에 했던 말. 시안녀석의 힘을 좀 이리저리 잘 묶어놓아야 할텐데?" "그것도 해야지."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아직 갈길도 멀다. 로운은 또다시 아파져 오는 이마를 붙들고 인상을 썼다. 아무래 도 두통이 지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져 들기 시작했다. "아뭏든 당분간은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로운이 기원이라도 하듯, 중얼 거렸다. 그 말을 들은 이리야 역 시 제발 아무일 없기를 하고 마음속으로 바라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기원이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속.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6) ◇◆◇ "정의감은 좋아. 하지만 앞으로 신상에 위험이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나나 기엘이 먼저 판단하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말 것." "알았어." "무슨 일이든지 먼저 나나 기엘에게 보고한 후 행동할 것." "알았다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개별 행동은 절대 피할 것." "알았다고 말했잖아." 시안은 입을 부루퉁 정도가 아니라 한발쯤 내밀고서는 로운이 말 하는 것에 하나하나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이리야가 재미있다는 듯이 시안이 대답을 할 때 마 다 운을 띄워주면서 시안의 성질을 긁고 있었다. "그런 얼굴…." 아무리 말을 해도 시큰둥한 얼굴의 시안을 보다말고 로운이 위협 하는 듯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알았어. 이래도 로운이 옳고 저래도 로운이 옳아. 그러니까 이 제 좀 밥 좀 먹게 해주면 안돼? 자고로 사람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 가장 좋은 방법중의 하나는 앞에다가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것일 것이다. 지금 시아는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맛있어보이는 통구이 하나와 작은 그릇에서 끓고 있는 스튜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 중. "이제 밥 먹어도 돼?" "……………." 힐끔. 하고 이리야가 로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운의 얼굴에는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냅두면 바비큐는 타고 스튜는 식을 텐데…." 해는 중천. 시안의 일행은 이제 본격적으로 가이칸 제국령으로 접어들고 있 었다. 지루하도록 펼쳐진 평원을 정말 지루한 기분으로 터덜 터덜 걸어 오던 시안의 주장에 따라 로운이 힘을 써서 식사를 만들기는 했 지만 그것을 한입도 먹지 못하고 있는 시안의 기분은 그렇게 좋 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시안의 신경을 긁고 있는 상대는 바로 로운이었다. 마을을 떠난지 이제 이틀째이건만 로운은 내내 이마를 쓰다듬으 면서 으르렁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시안도 로운의 이마를 볼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 그것을 가지고 식사전마다 씹히다보니 이제 신물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먹어." 로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안이 와악-하고 음식에 달려 들었다. 하지만 로운은 스윽- 푸른색의 멍이 걸출하게 들어있는 이마를 한번 더 쓰다듬고는 기엘을 바라보았다. "뭔가 좀 이상해." "…혹시 그 한스라는 남자가 누군가에게 불어버리기라도 한 거야 ?" 이리야가 로운에게 물었다. 어제 밤부터 로운의 기분이 상당히 나빠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제 로운은 깨작 깨작 신경을 갉아 들어오는 듯한 느낌 때문에 어제 밤을 거의 꼬박 샜다. 피곤함이 몸을 속박해오는 것을 깨닫고 나름대로는 몸을 추스르 려고 했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많은 않았다. "안먹어 다들?" 휘익-하고 3명의 남자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밥팅이는 입다물고 밥이나 먹어." 로운의 대답에 시안은 토라져 버렸다. 도대체 밥 먹겠다고 하는게 뭐가 나쁘단 소린지…. 여하튼 시안이 우걱 우걱하고 비어버린 배를 채우는 동안에도 나 머지 남자들은 입에 뭐하나 댈 생각도 하지 않은채 로운의 옆에 모여들었다. "정말 난감하군." "왜 그래? 좀 정확하게 말해봐." "아무래도 좀 걸려서. 어제부터 계속 그 촌장 같은 녀석을 짚어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말을 한 것 같아. 상태가 별로 안 좋아." "하셰카가 다시 따라붙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닐걸?" 이리야가 단호하게 말을 하자 로운과 기엘이 이리야를 바라보았 다. "하셰카는 그렇게 대놓고 활동하지는 않아. 물론 우리를 습격하 던 꼴을 봐서는 하셰카치고는 좀 방법이 웃기긴 했지.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대놓고 누구누구를 보았느냐고 묻고 다닐 놈들은 아 니거든." "흐응." 기엘은 딱 잘라 말하는 이리야를 보고 조금 의구심이 생겼다. 이전에 이리야가 자신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분명 평범한 농사꾼 이라고 했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뒤로 억지로 물의 술을 배우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배웠다고는 해도 너무 자세하게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은 것이다. 결국 기엘은 의구심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꽤… 자세하게 알고 계시는 군요." "아. 그게. 사실은…." 기엘이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이리야는 머리를 긁으면서 대답했다. 어차피 같이 여행을 하는 처지니 그정도는 말해둬도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도 저도 안되면 하셰카라도 들어가 볼까 해서 나름대 로 열심히 알아봤거든." "네?" "제국에서는 계속 나를 쫓아오고. 기분나쁜 녀석 밑에서 일을 하 느니 차라리 완전히 나 자신을 숨기고 사는게 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서 말이야. 결국 그만두어 버리긴 했지만 적 어도 거긴 입단하는데 큰 조건은 없거든. 과거 불명이라도 상관 없구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그건 좀 심한데요. 암살단에 들어가실 생각을 했 었다니." "그러니까 생각이었다고 하잖아. 참나. 가서 그런 끔찍한 꼴을 당하는 것은 정말 사양이야. 여하튼 그런 것 뿐이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기사양반." "제 이름은 기엘입니다. 이리야씨." "물론 알고 있다구. 참나. 하나하나 토달지 말아줘." "말버릇처럼 하시다가 입에 붙어 버리면 곤란합니다. 나중에 혹 도시나 성에서 실수라도 하시게되면." "잠깐. 조용히 해봐. 기엘." 그때까지 묵묵하게 가만히 앉아 있던 로운이 고개를 높이 들면서 말했다. "응?" "누군가 따라 붙은 것 같아." 나직한 로운의 말에 정신없이 고기를 뜯고 있던 시안도 눈을 크 게 뜨고는 로운을 바라보았다. "따라 붙어?" "가만히 앉아서 좀 느껴봐. 이전에는 우리보다 훨씬 먼저 느꼈잖 아." "흐응--." 시안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물론 이전에 누구보다 먼저 자신들을 노리는 하세카를 감지해내 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시안이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시안의 감각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로운과 기엘, 그리고 이리야는 그런 시안을 무시한채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주위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 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시안은 갑자기 부아가 났다. 역시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 만큼 화가 나는 일은 없다. "케인-." 세나케인을 부르는 것 역시 자신의 능력 부족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였지만 지금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 3사람만큼 행동하기 위해 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시안은 낮은 목소리로 세나케인을 불렀다. "케인. 어디서 누가 오고 있는지 알겠어?"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안은 자신의 몸에서 살며시 바람이 빠 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세나케인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후우---." 문득 시안의 머릿속에 짐더미 어디엔가 챙겨져 있을 바람술서와 암기장이 떠올랐다. "맞아. 그게 있었지." 앞으로는 지루하게 걷는 내내 주문이라도 외워야겠다고 생각했 다. '뭐 몇일만에 그 지루한 것도 다 외웠는데 주문정도야 가뿐하지. ' 시안은 남은 국물을 후루루룩 마시다 말고 손가락하나가 좀 뻐근 하다는 생각이들어서 자신의 손을 들어 보았다. 희미하지만 그 손가락으로부터 무엇인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케인 쪽으로 흘러가는 건가?' 미세하지만 지속적으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을 자각하 는 순간 갑자기 시안의 시야가 확하고 트였다. '어--?' 드넓은 평원이 시안의 눈앞으로 화악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그 위를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케인이 보고 있는 건가?' 평원에 넓게 펼쳐져 자라고 있는 작은 잎새 위를 물 흐르듯이 흘 러간다. 시안은 그 환상적인 그 광경에 넋을 잃었다. 이곳에 온후 그가 보고 느끼는 것은 모두 새로운 것들 뿐이다. 하물며 그중에서도 이런 체험은 정말 신기하다고 밖에 할 수 없 는 노릇. 시안은 정신없이 세나케인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원스럽게 날아가던 세나케인의 시선이 순간 멈칫하고 멈추었 다. 시안역시 몸을 움칠하면서 멈추었다. 멀리 사람들이 웅성 웅성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 스윽하고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멀리 말을 타고 있는 기사들이 있었다. "기사들…." 자신도 모르게 시안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기사들이야.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제각기 어디에선가 전해지는 감각을 잡아내기위해서 주문을 시전 하고 있던 일행들이 시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시안님?" 기엘이 제일 먼저 시안쪽으로 다가왔다. 시안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기엘은 그런 시안의 옆 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조용하게 물었다. "기사들이라구요?" "말을 타고, 그리고…."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다." "몰라." "입고 있는 옷이나 가슴에 문장이라던가, 그런 것이 보이십니까 ?" "다른 것은 말고 가슴이나 칼 같은 것이 보이면 말해봐." 로운도 재빨리 시안에게 물었다. 시안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더듬 거리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 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꽤 선명하기는 했지만 가슴의 문장같은 것이 보일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조금 더 아래로….' 시안의 명령에 따라서 쓰윽하고 세나케인이 좀더 가까이 다가가 는 느낌이 났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윤님. 이쪽인 듯 싶은데요.」 「그런가? 그럼 요하엘로 들어가려 하는 것 같군.」 기윤이라고 불린 남자는 다른 사람들 보다 계급이 높은 듯 반짝 반짝하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시안은 그 남자가 들고 있는 방패를 보았다. 양각으로 문장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사자랑 비슷하게 생긴 정말 안생긴 동물이…." "사자?" "갈기가 나 있는 짐승이야. 그리고 검이 세 개." "레돈일거야. 갈기가 나 있고 문장으로 쓰일 정도의 짐승이라면 …. 그정도면 됐어. 시안보고 그만하라고 해. 그렇게 위험한 상 대는 아니니까." 조용하게 시안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이리야가 한숨 놓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상대가 아니라구요?" "레돈에 검이 세 개면 슈히튼 공작의 문장이지. 그런데 그게 검 에 있어? 아니면 가슴에?" "방패인 것 같은데?" "됐어. 그럼." "방패를 가진 남자와 7명 정도." "자자 그만하라구." 터억-하고 이리야가 시안의 등을 쳤다. "우악!!" 몸이 흔들리는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시안은 몇 번 눈을 깜박 깜박했다. "노, 놀랬다." "이리야씨. 위험하지 않습니까!!" 기엘이 이리야의 거친행동에 항의하자 시안은 괜찮다면서 기엘을 말렸다. "괜찮아. 이정도는. 뭐 좀 놀래긴 했지만." "그래도 술을 쓰는 중에 그런식으로 방해를 받게되면 좋지 않습 니다. 어디 이상한 곳은 없으신지요." "괜찮다니까. 기엘. 그리고 이리야. 정말 문제 없는 거야?" "물론. 슈히튼 공작의 기사라면 우릴 따라올 이유가 전혀 없다 구. 문제가 되는 것은 그놈의 하셰카 놈들이지 무슨 이유가 있어 서 기사들이 우릴 따라오느냐구." "하지만 그래도, 좀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이리야는 이미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린 듯 슬슬 본격적으로 음식 물에 뛰어 들기 시작했다. "뭐. 혹시나 만나게 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슈히튼 공작 은 호전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꽤나 강직한 사람이라고 들었거든. 자신이 자청해서 변방의 영지를 하사 받아서 온 사람이야. 뭐. 궁극적인 목적이 뭐든간에 세파에 찌든 인물은 아니라는 소리지. 슈히튼 공작의 기사라면 저 기엘처럼 앞뒤가 좀 막히긴 했어도 누구한테 폐를 끼칠 인물들은 아닐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밥이나 먹자구." "흐응." 로운은 그래도 안심이 안되는지 기억을 더듬어서 슈히튼이라는 남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에 보고 받은 자료에 의하면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임에는 틀 림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조건적으로 마음을 놓기에는 좀…." "생각보다 이리야씨의 지식이 많이 도움이 되는 군요." 기엘이 다행이라는 듯이 말하자 이리야가 멋쩍어 하면서 대답했 다. "쿨럭, 뭘. 그런 것을 가지고. 이런식으로라도 도움이 되니 내쪽 에서도 어느정도는 당신들한테 붙어 있어도 된다 라는 느낌이니 까." "하하하." "암튼. 저 시안만 말썽을 안피우면 된다. 이거지." "어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어쨌다구!!" "그냥 하는 소리니까 신경 쓰지마." "어떻게 신경을 안쓰냐? 그럼 내가 그 꼬마를 못 본척 했어야 했 어?" "어차피 한 마을 사람이었잖아. 게다가 그 꼬마는 정확하게 말하 면 마을의 규칙을 어긴거라구." "정말이지!!" 시안은 발끈해버렸다. 물론 자신 때문에 일이 커진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몸 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구 다른 사람을 못 본척 할 수는 없다. 이전에 학교를 다니면서 괴롭힘을 당하던 애들을 볼때마다 기분 이 이상했던 적이 있었다. 힘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 심정을 이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마져 들었다. 이전처럼 평범한 그런 고등학생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 보다는 훨 씬 좋은 또는 높은 '능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지금, 아무렇 지도 않게 그런 사람들을 지나칠 수는 없다. '젠장. 기회주의자라고 해도 좋고, 내 멋대로라고 해도 좋아. 여 기 있는 한은 절대로 어려운 사람들을 지나치지는 않겠어.' 힘이 있을 때는 당당해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얌전히 있는다라는 생각이 그렇게 옳은 것만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 안은 적어도 힘이 있는 동안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것이 아주 작은 자신에 대한 일말의 보상심리에서 나온것이라 해도 좋았다. '말썽을 좀 피우면 어떻고, 문제가 생기면 좀 어때? 해결하면 되 잖아. 해결하면!!' "시안님 이거 좀 더 드시지 않겠습니까?" 기엘이 좀 화가 난듯한 시안에게 스튜한그릇을 더 내밀었다. 시안은 그 그릇을 낚아채듯이 받아들었다. "쳇. 이거나 먹고 입다물라는 소리야?"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구요. 시안님." "아니야. 됐어. 입다물게. 다 내가 잘 못했고. 다 내 탓이지. 뭐 든간에." '젠장. 정말이지 빨리 좀 돌아 갔으면 좋겠어.' 바람이 거세게 불어 오기 시작했다. 평원의 바람은 무섭다. 집안 같은데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세기지만 이런 허허 벌판에 서 받는 바람은 사뭇 그 느낌이 틀린 것이다. "자. 다들 먹었으면 이제 일어서지. 수통에 남은 물도 얼마 없 고. 이대로 꼬박 걸어서 다음 마을에 도착 할 때까지는 식사고 뭐고 없어." "에엑." 시안이 바지에 묻어있던 먼지를 털다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대로 된 말 몇 필을 구하려면 요하엘성까지는 가야겠지만 뭐 …." "차라리 그 기사들을 기다렸다가 태워 달라고 하면 안될까? 요하 엘 까지는 꽤 멀다면서." "……………." "……………." 순간 조용해지는 기엘과 로운을 보면서 시안은 움찔 움찔 하면서 말을 했다. "왜? 내,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 "말은 싫다며? 말을 타면 어쩌겠다고 했던 것이 얼마 안된 것 같 은데?" "으윽---." "남자는 한입으로 두말하면 안된다고 했던게 또 누구더라?" "마,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마!! 빠. 빨리 가면 좋다고 말했을 뿐이야!! 말 이야기를 먼저 꺼낸거는 로운이잖아!!" "흐응." "새. 생각이 변할 수도 있는거지 뭘 그런걸 가지고 쫀쫀하게." 시안은 얼굴이 새빨개진채 열심히 항변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로운과 기엘은 빙긋 웃을뿐 더 이상 아무말 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시안이 조금전에 했던 말이 현실로 일어날 것이라 고는 절대 상상하지 못했다. 계속. 격려 메일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네. 열심히 쓰겠습니다. 문제는....이상하게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만.. (쿨럭...) --; 지금 감기 걸리면 끝장인데.. 감기 걸리지 말라고..염원이라도...좀...... (쿨럭 쿨럭 쿨럭.) 감기 걸리지 마시고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7) 3. 요하엘 성에 가다 "후우- 온도가 내려가는 군." 기윤은 툭툭 자신의 애마인 에셀의 목을 쳐주었다. "서두르면 내일 쯤에는 요하엘로 돌아 갈 수 있겠지. 자. 서두르 자고!!" 기윤은 먼저 말을 재촉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뒤의 남자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를 따랐다. 근 한달간 기윤은 페이요트 산맥의 산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여 행을 했던 차였다. 페이요트 산맥이 워낙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산맥이기에 그 산맥 전체를 돌아 볼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슈히튼 공작령에 해당 하는 지역은 나름대로는 철저하게 훑어왔다. 그 성과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슈히튼 공작령 내에 사는 영민들이 슈히튼 공작이 영민의 사소한 생활까지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 이유는 기윤이라는 기사가 슈히튼 공작의 기사들중에서도 아 주 촉망을 받는 인재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슈히튼 공작의 아주 가까운 친 인척이라는 이유가 더 더욱 컸다. 슈히튼 공작이 이런 제국 변방의 영지를 자청해서 하사받은 것이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 5년 동안 그는 나름대로 영지 여기저기에서 들끓고 있던 많은 산적들을 소탕했고 영민들의 복 지를 위해서도 상당히 노력을 해왔으며 그 성과는 변방지역임에 도 불구하고 농한기가 거의 다 지나가는 지금까지 난민다운 난민 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라는 사실로 즈증명되고 있었다. "기윤님. 앞쪽에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 "네." 정찰을 나갔던 수하하나가 돌아와서 보고 했다. "그럼 잠시 들렀다 갈까? 피곤하기도 하고. 이녀석들에게 물이라 도 실컷 마시게 해줄 수 있겠군." 기사들이라고 하지만 지금 현재 그들의 몰골은 그리 깔끔하지만 은 않았다. 그 이유야 당연하게 한달 내내 산이며 들이며 닥치는데로 노숙을 하고 때로는 칼부림도 하는 등 거친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요? 하루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물론 이대 로 달리면 내일 모레면 요하엘에 도착하겠습니다만 저희도 많이 지쳤고…." 기윤은 너털 웃음을 지으면서 옆으로 다가온 견습기사의 어깨를 두둑여주었다. "많이 힘들지? 암튼 이제 다 끝나가니까 힘내라구. 일단 저 마을 에서 쉬는 것은 마을 에 들어가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너무 작은 마을이면 우리가 머 무는 것이 좀 부담스러울테니까." 기윤이 말하자 견습기사의 얼굴에 조금 생기가 돌았다. 사실 기윤이 이번에 데리고 나온 7명의 기사는 전부 견습생들이 었다. 실력으로는 로열 가드에 뒤지지 않는 기사들이지만 아직 실전이 라고는 하나도 해보지 못한 햇병아리들이었던 것이다. 이런식으로 베테랑 기사 한명과 견습기사들을 함께 변방 산적 토 벌 같은 명목을 붙여서 내보내는 것이 슈히튼 공작의 기사 수련 법이었다. 한번도 실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기사들은 노련한 한명의 일반 병 사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 합해서 8기밖에 안되는 일행이라 전면전은 힘들지만 적 어도 탐색전까지는 가능한 인원인 것이다. 때문에 비록 정식 전 투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적어도 산적 토벌이라는 명목하에 긴 시 간동안 그럭저럭 실전을 경험하다보면 혈기에 가득찼던 견습 기 사들이 상당히 성숙해져 돌아오게 된다. "저 앞입니다." 견습기사들중에서도 가장 성질이 급해서 한달간 기윤의 속을 무 지하게 끓였던 기사하나가 앞장서서 마을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군." 기윤은 멀리 고개를 들어서 마을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작은 집들을 보아서는 그저 그런 작은 마을인 듯 싶었다. "모두 말에서 내리도록." 꽤 오랫동안 견십생들을 데리고 이런 여행을 해왔던 그로써는 이 런 작은 마을에는 그들의 일행이 오래 머물기에는 좀 무리가 있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 전부가 영주의 기사라고 하면 움츠려 들어서 도통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는 위압감 때문에 모두 무서움에 떨어서 원래의 생활을 하는데 상당한 장애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을의 대 표자인듯한 남자가 그들을 맞았다. 기윤은 먼저 그 남자에게로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요하엘의 기사 기욘이라고 합니다. 잠시동안 마 을에 머물고 싶습니다만." 기윤이 들고 있던 방패를 살짝 들어서 문장이 보이도록 했다. "아… 예." 로운일행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한차례의 기사 무리가 온다는 보고를 받은 한스는 가슴을 졸이고 있던 차였다.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들에게 줄 물과 잠시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만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물론. 요하엘의 기사님들이신데요. 얼마든지 도와 드려야지요. 그런데 여행중이십니까?" "아.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이라는 생각에 기윤은 굳이 이들에게 자신 들이 산적 토벌단이라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자. 이쪽입니다." 웅성 웅성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행은 마을 안으로 들 어 섰다. "그럼. 신세 많이 졌습니다." "네. 저기 기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예?" 마을의 대표자라고 하는 한스라는 남자는 그들이 머무는 시간동 안 아주 친절하게 그들을 대접했다. 때문에 기윤은 아주 기분이 좋아져 있는 상태. 기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자세를 바로 하고 정색을 했 다. "그게 어제 이마을을 스처 지나간 사람들이 있어서 그러는데 어 딘가 좀 수상해서 기사님들께서 좀…." "예?"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이었기에 아무말 없이 넘어가려 했던 기윤 은 한스가 주저주저 하는 말에 조금 당황했다. "그러니까 꽤 완력이 좋아보이는 남자 세사람이 예쁜 아가씨 한 분을 데리고 지나갔는데 그게 여자분이 상당히 겁에 질려 있는 듯 했습니다. 사실 저희가 어떻게 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실 력도 없고…." 한스는 적당하게 어제의 사실을 부풀려서 자기 멋대로 지어낸 이 야기를 줄줄 기윤에게 하기 시작했다. 물론 입막음의 대가를 받기는 했지만 열이 받는 것은 받는 것. 이 순진해 보이는 기사에게 슬쩍 흘리기만해도 그 일행이 상당히 곤욕을 치루지 않을까하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들이 정말 아무 거리낌없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이렇게 말하 는 정도로 다치거나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은발의 정말 예쁜 아가씨였는데 안타깝더라구요." 순진해 보이는 한스의 말에 기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져갔다. 기억을 되짚어 보건데 이 지역은 요하엘에서 상당히 가까운 지역 임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산적들의 출몰이 있다는 보고가 있는 지 역이였다. 그것도 상당히 조직적이라서 농한기가 되어서 영민들의 생활이 어려워 질 때쯤이면 간간히 출몰을 하고 어떤 정보라인이라도 가 지고 있는 건지 번번이 수색망을 빠져나가기 일수 였다. 다행인 것은 이 지역의 산적들은 인명피해를 그리 내지 않는 다 는 것이지만 이 한스라는 남자가 말하는 것처럼 '겁에 질린 묘령 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데리고 있다면 문제가 틀려진다. "그들의 인상착의를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기사님." 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줄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를 기 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되록 자세히. 정말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기윤님. 이쪽인 듯 싶은데요." "그런가? 그럼 요하엘로 들어가려 하는 것 같군." "요하엘로 들어가기 전에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기윤은 턱을 괴면서 생각에 잠겼다. 흔적으로 보아서는 이들은 거의 일직선으로 요하엘로 향하고 있 었다. "혹 노예로 팔려는 것이라면 요하엘로 가서는 소용이 없을 텐데. " 기윤이 아는 한 요하엘에는 노예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몰라도 노예시장만큼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슈 히튼 공작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 남자가 불쑥 말했다. "하지만 마리에 거리(사창가)는 있으니까 그쪽에 넘기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 말에 기윤을 비롯한 다른 견습기사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 다. 사실 사창가는 어느 곳에나 있다. 아무리 슈히튼 공작이 힘을 써도 요하엘에도 역시 사창가는 있 다. 요하엘의 사창가는 예전의 전설적인(?) 한 유녀의 이름을 따 서 마리에의 거리라고 불릴 뿐 사실 다른곳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곳이 아니다. 특히 노예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요하엘 성에서는 암암리에 노예시장까지 겸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드는 곳이다. "서둘러야 겠군. 요하엘에 들어가기 전에 연행을 해야겠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아무말 없이 기윤의 뒤를 따라 박차 를 가했다. 모름지기 기사의 로망은 아름다운 아가씨를 구출하는 것, 그래서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어쩌구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한스라는 마을 대표의 말에 의하면 그런 미녀는 두 번 다시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환상적인 미소녀. 꼭 그렇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다들 나름대로는 지루한 일정에 실 증을 내고 있던 차였다. 그런 와중에 '미소녀 구출작전'은 그들 에게 오아시스아닌 오아시스로 다가왔다. "그리 많이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모두들 조금만 더 힘을 내도 록!!" "예!!" 너른 평원에 말굽소리가 울려 퍼져나갔다. ◇◆◇ "거기! 모두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들어라!!" "에?" "……………." 두두두. 몇기의 말이 달려와서 일행을 빙 둘러 감쌌다. 갑작스러운 말발굽 소리에 놀란 시안이 멍청해진 표정으로 들고 있던 주문 암기장(?)을 툭하고 떨어뜨렸다. "여기 떨어뜨리셨군요. 아름다운 레이디." "에엑--?" 시안이 떨어뜨린 암기장을 한 남자가 황급하게 말에서 뛰어내리 더니 공손하게 집어서 다시 시안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시안은 그가 지껄인 '아름다운 레이디'라는 말에 속이 뒤 집히는 중이라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푸르르르-하고 고개를 흔드는 말 때문에 흠칫하고 뒤로 피한 시 안의 모습을 보자마자 다들 기수를 옆으로 약간씩 돌렸지만 일행 에게 겨누어진 창끝과 검끝은 치워지지 않았다. "저… 저희는 단지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디만." 로운이 기분이 나쁘다는 투로 조용하게 말했다. 기윤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조사를 해보면 알게 되겠지. 당신들이 저 아가씨를 무력 으로 자유를 속박해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 스윽하고 기엘과 로운, 이리야의 시선이 방금들은 단어에 몸을 뒤틀면서 괴로워 하고 있는 시안 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시안은 남자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물론 시안의 키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저 판판 한 가슴이 어디가 여자로 보인다는 말인가. "역시. 그 자식이 불었군." 로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부터 뭔가 기분이 찜찜해서 조 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괜히 말타고 가고 싶다고 했나봐. 기엘." 시안도 조금 기분이 그런지 벅벅 머리를 긁으면서 기엘에게 말했 다. 기엘은 뭐라고 말하기도 그래서 그냥 시안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저기. 기사님들 맞죠? 저 이사람들한테 끌려가는거 아니거든요. 아니. 끌려간다는 소 리가 맞긴 맞는건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시안은 대답을 하다말고 맞아. 끌려온거긴 해. 라는 소리를 중얼 중얼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이리야는 어이쿠-하면서 눈을 가려버렸고 로운은 뭐라 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말고 포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을 둘러싼 기윤이나 그 외 견습 기사들이 눈 이 번쩍!해서 로운과 기엘과 이리야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강제로 끌고 온 것이 아니라면 레이디께서 저렇게 말씀하실 리 가 없지 않은가!! 당장 무기를 내려놓지못할까!!" "하아--." 기엘은 이번만큼은 시안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끌려온 것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사 실이 그렇다고 해도 지금 그렇게 말할 타임은 아니지 않는가 말 이다. "로운. 어떻게 하지?" 기엘은 미메이라 어로 로운에게 속삭였다. "글세. 이런데서 요하엘의 기사들과 부딧혀서 좋을 것은 없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어차피 요하엘로 가던 길이었으니까 천천히 설명해도 좋지 않을 까?" "여하튼 정말 말썽이 많군." "뭐라고 자꾸 떠드는 거지?" 견습 기사중 하나가 짜증이 난다는 듯이 로운을 향해 겨눈 창을 위협적이게 움직였다. "아아. 말하는데로 할테니 이건 좀 치워 주겠소?" 일단 결정을 하고 나자 기엘과 로운은 재빨리 들고 있던 무기를 풀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런 상태에서 뭐라고 말다툼을 해보았자 이로울 것은 하자도 없 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기엘과 로운이 무기를 내려놓자 이리야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한마디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젠장. 이러다가 나만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 아름다운 레이디께선 이리로." 기윤은 그들이 무기를 순순히 내려놓자 안심을 하고 시안에게 손 을 내밀었다. 시안은 그말에 결국 불끈해서 그 손을 탁- 하고 쳐버렸다. "뭐야!! 누굴 자꾸 아름다운 레이디라고 하는거야. 기분나쁘게. 으윽 닭살이야." 그러자 로운이 재빨리 미메이라 어로 시안에게 속삭였다. "그냥 여자인척 해. 그쪽이 좀더 안전할지도 몰라." "뭐?" "거기 뭐라고 하는 건가!!" 응-하면서 시안이 이상한 얼굴을 했다. 왜 아까부터 저 기사인지 나부랭이 인지는 로운이 말만하면 뭐라고 하느냐고 소리를 지르 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기. 지금 말하는거 저사람한테도 들린거 아니야?" "뭐?" "그런데 저 인간은 왜 못 알아 듣는 척을 하는거지?" 이번에는 로운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못알아 듣는게 당연하잖아. 난 미메이라 어로 말했으니까." "나한테는 다 똑같이 들리는데?" 순간 로운은 아-하고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잊고 있었지만 시안이 자신들의 언어를 알아듣고 말하는 것이 배 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건 네가 특이 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입다물고 아름다운 레 이디인척이나 하라구." "……………." "그리고 혹 만약의 상황이 되면 세나케인님을 불러서 어떻게든 도망쳐." "지금도 미메이라어?" 계속 둘이서 속삭이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이 한 사 람이 끼어들었다. "자. 그만. 자꾸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면 강제적으로 연행하겠 다." "아아. 알았습니다. 그만하지요." 로운이 손을 들면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살짝. 시안의 손에 작은 주머니를 건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일행의 경비가 모조리 들은 작은 주머니로 하이시가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조심해." 잠시 숨을 고른후 로운이 기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이니까 시안님께는 해가 가지 않도록 해주었으면 합니다만 ?" 기윤은 그렇게 말하는 로운을 잠시 쳐다보았다. 일단 수상하다는 제보를 들었기 때문에 그들을 연행하고는 있지 만 저 로운이라는 사람의 당당한 태도로 봐서는 산적의 끄나풀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는 옆의 기엘이라 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자신이 로열 가드는 아니지만 슈 히튼 공작과 함께 몇 번이나 수도인 카드미엘에 함께 갔었던 그 로써는 나름대로 사람을 재는 잣대가 있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두남자 만큼은 충분하게 교육을 받은 기사출신이 아닌 가 해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기윤의 태도도 조금 달라졌다. 만일 이들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다면 지금 자신들이 그들을 대하 는 태도는 상당히 실례가 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제보를 들은 이상 당신들을 무단으로 풀어 줄 수는 없습니 다." "이해하겠습니다." 기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을 했다. 기윤의 명령에 따라서 그들의 무기와 몇 개 안되는 짐은 견습 기 사들의 말에 실렸다. 요하엘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 상의를 거쳐 시안을 포함한 4명 모두를 되도록 빨리 요하엘로 데리고 가디로 결정했 다. 다행히 그들의 말이 먼저 그 마을에서 휴식을 취한 상태라 상태 가 좋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시안은 '레이디'로 대접받아서 기윤의 말에 함께 타기로 결정되 었다. 물론 그 레이디로 불리는 시안은 잔뜩 화가나서 폭발하기 일보직 전이었지만 기윤을 비롯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로운과 기엘과 이리야를 제외하고 말이다. 계속 ..시간이 없어서 정리를 못한 상태에서 올리고 말았습니다. ..오타가 좀 보이시더라도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메일 보내주신 분.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8) ◇◆◇ "끄응∼" 어디선가 똥마려운 강아지 한 마리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으응∼" 그 소리는 끊어질 줄 모르는지 벌써 한 시간여나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 끙끙 소리의 주인공인 은발미소녀(?) 양은 앞에 놓인 하늘하 늘한 드레스를 보면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이건 어디서부터 뒤집어 써야하는거냐구. 정말." 툭-하고 옷을 쳐보지만 역시 어디서부터 입어야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에휴. 그러니까 그냥 남자라고 하면 될 것은 왜 여자라고 해서 이 고생이냐구 정말. 쳇." "그건 대우가 틀리기 때문이지." "우, 우악--!!!" "왜 그렇게 놀라는데?" 멀뚱 멀뚱 세나케인이 시안을 쳐다보았다. "가, 갑자기 나타나지 말란 말이야!!! 놀라잖아!!" 헉헉헉 하고 시안이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자라는 것이 들통 날까봐 목욕도 혼자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들려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 가!! "진짜 여자도 아니면서 뭘… 아니면 여자쪽이 더 좋은 거야?" 히죽하고 세나케인이 웃자 시안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데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시끄러워!! 이 변태야!!!" 이곳은 슈히튼 공작령, 그곳에도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요하엘 성이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주인공 시안이 투덜거리며 앉아있는 곳은 요 하엘의 기사 기윤 제나이드 슈히튼의 사가. 기엘과 로운, 그리고 이리야는 어디론가 연행되었지만 시안만은 기윤의 배려로 그의 집으로 안내되었던 것이다. 몸을 씻으라고 깨끗한 물이 들은 욕조가 들어온 것도 좋았고, 배 고프겠다며 맛있는 음식을 준 것도 좋았지만 역시 옷만큼은 용서 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미메이라에서의 옷들은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기본적으 로는 깔끔한 디자인이었는데다가 시안의 상식으로는 마치 옛날 그리이스의 복장 같은 느낌이라서 그렇게 거부감이 일지는 않았 다. 무엇보다 그때는 진짜로 여자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 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했다. 제국의 일반적인 귀족 여성이 입는 일상복임에 틀림이 없다라고 옷을 건내준 하녀가 말을 해줬지만 시안은 도통 믿을 수가 없었 다. 여기도 너풀. 저기도 너풀. 온통 너풀거리는 레이스며 장식이 한껏 달려있는 옷은 중세의 무 슨 무슨 스타일 이라고 하는 옷보다 훨씬 너절했기 때문이다. "젠장 어디부터 입는 줄 알아야 적당히 걸치기라도 하지. 빌어먹 을." "입이 험하군. 귀족집 아가씨가." 큭큭큭 하고 웃어대는 세나케인을 보면서 시안은 더더욱 화가 치 밀어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기엘하고 로운녀석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사람을 이런 데다 처박아 놓고." "흐응." "흐응은 뭐가 흐응이야." "뭐. 시간이 해결하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조금 수를 써두어야 겠군." "응?" 갑자기 세나케인이 뜻 모를 소리를 하자 시안은 어리둥절한 얼굴 로 세나케인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어봐." "……………." 스윽- 세나케인의 손이 시안의 머리위로 올라갔다. 뭔가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처럼 세나케인의 눈이 감겼지만 딱히 세나케인의 입술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하기사 세나케인이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을 특별하게 본적은 없으니까.' 기엘과 로운과는 달리 세나케인은 정말 그가 말하는 것처럼 바람 그 자체인지 바람술을 쓸 때 특별한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지 못 했다. 단지 그는 그냥 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세나케인의 손이 한차례 시안의 머리 위를 살짝 휘졌다가 다시 내려왔다. 눈을 뜬 세나케인은 시안에게 물었다. "어때?" "뭐가?" "…………." 대답없는 세나케인에게 시안이 다시 물었다. "뭐가 어떠냐니?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정말 둔하군. 젠장." 화가 났다는 표정을 마지막으로 세나케인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 다. "어--- 케인 그냥 사라지면 어떻게 해!!!" 다시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젠장할!!! 바보같은 케인!!! 그래!! 너 잘 났다!!!" ◇◆◇ "그럼 단순한 여행객이라는 이야긴가?" "그렇습니…어?" 대답을 하다 말고 로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기엘도 마찬가지로 앉아있던 의자가 밀려서 덜컹 소리를 내며 넘어질 정도였다. 쿠당탕탕---- "사라졌어." "어떻게 된 거야. 방금전까지 그렇게 생생하게…." 기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로운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잠깐. 당신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지? 다시 자리 에 앉아!" "여행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더 뭐가 필요하다는 겁 니까? 우리 짐도 이미 다 검사했을텐데. 뭐든 말해줄테니까 우리 와 함께 있던 시안님을 만나게 해주시오. 지금 당장!" "이봐!!" 쾅-하고 험상굳게 생긴 남자가 탁자를 쳤다. "지금 당신들 조사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은데 말이 야! 그래. 짐 검사를 했는데 수상한게 한둘이 아니야. 특히 저 검 두 자루." 3명을 앉혀놓고 조사를 하고 있는 남자는 요하엘의 경비대장이었 다. 기윤으로 부터 3사람을 인도 받아서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명을 받은 그는 그들의 짐을 검사하다가 몇가지 수상한 물건을 발견했 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희안한 문장이 박혀있는 검 두자루와 역시 이상한 문양이 잔뜩 그려져 있는 커다란 책이었다. 그들의 검은 한눈에 봐도 상당한 고가품이었고, 책은 아무런 장치도 되 어 있지 않은데도 아무리 애를 써도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요상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이 의심스러울 수 밖 에 없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는 일. 물론 기윤에게 이들을 인수인계 받으면서 혹시나 모르니 되도록 정중하게 대하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의심이 가는 것 은 어쩔 수 없었다. 산적일지도 모른다 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더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경비대장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기엘은 점점 몰려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초조해져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래도 좀더 안전하겠지 싶어서 기윤에게 시안을 맡겼던 것인데 조금 전, 바로 조금 전 시안으로부터 전해 져 오던 엘의 파장이 순식간에 끊어져 버렸다. 아니 끊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생생하게 전해져오는 시안 의 파장을 느끼면서 나름대로는 안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건.' 기엘은 이를 꾹 악물며 힘줄이 돋아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시안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을 절대로 용서 할 수 없 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딱딱한 경비대장의 표정을 본 기엘은 이를 으드득 갈면서 천천히 말했다.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대답해주겠소. 그러니까 당장 시안님이 잘 계신지 알아다봐 줄 수 있겠소? 시안님께서 안전하게 계시다 는 것만 증명해준다면 뭐든 말해 줄테니까. 그때까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소." "……시안님?" "기윤님께서 모시고 가신 아가씨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아가씨와는 무슨 사이요?" "저는 그분을 모시는 사람일 뿐입니다." 경비대장은 지금 이 앞에 있는 사람들처럼 취조하기 힘든 사람들 을 만난 적이 없었다. 요하엘이라는 커다란 성의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그가 경험해보 지 못한 유형의 사람은 없다고 나름대로는 자신하고 있었지만 이 세사람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아무리 말을 시켜도 대답하지 않았고, 한사람은 무슨 말이든 물어보면 무엇에든 대답했지만 어딘가 미심적었고 나머지 한사람인 이 기엘이라는 사람은 무슨 말이든 물어보면 다 대답하 겠다고 하면서 시안이라는 여자만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골치가 아팠다. 이상하다면 한없이 이상하고 이상하지 않다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하엘의 영주인 슈히튼 공작의 조카이자 기사인 기윤이 직접 취조를 부탁하고 간 사람들을 무작정 놓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후우---." 경비대장은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붙들고 있어보았자 더 이상 이들이 입을 열 것 같지도 않으니 그 냥 다시 기윤을 부르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람을 불러서 일단 이들을 구금해놓도록 하고 기윤에게 연 락을 넣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에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세 사람은 모두 경비대의 한쪽, 반 지하에 만들어진 감옥 아닌 감옥에 잠시 갇혀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젠장. 이렇게 깨끗하게 사라질 리가 없는데." 잠시 눈을 감고 멀리까지 시안의 흔적을 따라가던 로운 역시 굳 은 얼굴을 한 채 기엘을 바라보았다. 기엘은 한쪽에 앉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초 조해 하고 있었다. "세나케인님이 같이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괜찮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기는 했지만 로운도 뭐라고 정확하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느껴지지 않았다면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젠 그 기윤이라는 기사가 어떻게 손을 써주길 기다려 보는 수 밖에. 일단 그를 다시 부르는 것 같았으니까 그가 와서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어둡기를 기다려서…." "도망쳐야지." "아이고오. 이런 무대포인 인간들이 있나." 그때까지 아무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리야가 난처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는 레카같은 곳이 아니야. 왜 그걸 이해를 못하는 거지?" "레카같은 곳이나 그렇지 않은 곳이나 우리에게는 큰 상관없어. 단지 하세카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을 따랐을 뿐, 계 속 우리를 이런 식으로 가두어 놓는다면 이쪽에서도 강경하게 나 갈 수 밖에." "그러니까 무대포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차라리 대놓고 말해 버리면 되잖아. 미메이라 사람들이라고." 이리야의 말에 로운이 대답을 했다. "여행의 목적은 우리가 여기있다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필요 하다면 밝힐 수도 있어야지. 당신들이 무슨 죄라도 지었어?" "그렇지만 미메이라의 차기 수장이 달랑 수행원 3명과 함께 가이 칸 제국을 유람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보았자 좋을 것 하나 없어." "누가 수장이라고 하래? 나한테 처음에 말 한 것처럼 그냥 귀족 집 아가씨의 외유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면 되잖아."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지 최선의 수단은 아니야. 하나를 말하면 또 하나를 말해야하니까. 당신의 경우처럼." "참나. 말 한번 안 통하네." 세 사람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동안 시안은 시안 나름대로 또 한 곤경을 겪고 있었다. "아가씨. 나이트 기윤님께서 식사를 청하십니다." "그 아가씨라는 말은 좀 뺄 수 없어요? 그냥 시안이라고 부르라 니까." "주인님의 손님인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딱딱한 느낌의 하녀는 마치 저 키리엔의 라헬을 생각나게 하는 하녀였다. 시안은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어디나 하녀들은 비슷한가보다 하 고 중얼 거렸다. "젠장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일단 먹고 봐야하는 걸까?" 그의 머릿속에는 로운 일행이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자신과는 달리 칼을 들은 기사들에게 줄줄 끌려갔던 그들이었다. "후우. 좋아. 일단 그 기윤이라는 기사를 만나보면 뭔가 알게 되 겠지. 알았어요. 식사라고 했죠? 가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름다우시군요. 레이디." 느끼느끼한 버터를 잔뜩 처발른 듯한 대사. 시안은 속으로 으웩---이라고 몇 번이나 되뇌였다. 얼굴 근육에 는 이제 경련이 일을 정도다. '게엑---, 밥도 안 넘어가겠다.' 기엘과 로운이 들으면 왠일이냐고 할만만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 게 궁시렁 거린 시안은 기윤이 이끄는데로 멋들어지게 차려진 식 탁 한쪽 자리에 안내되었다. "변변치 않지만 부디…. 레이디." "아아. 그. 시안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그런 칭호는 익숙하지 가 않아서." "그러십니까? 하지만 그래도." "서로 피차 편한게 좋잖아요. 나도 기윤님이라고 부를테니까 부 디 시안이라고 불러주세요." 방긋하고 애원하듯하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과연 그 표정은 그럭 저럭 효과가 있었는지 기윤은 어쩔수 없다 는 듯이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대답했다. "그럼 시안님." "좋아요." 쌩긋하고 나름대로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시안이 웃으면서 대답했 다. '두고 봐라. 나중에는 네녀석의 뒤통수를 있는대로 힘껏 쌔려주 겠어!!" "그나저나 제 일행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데요. 오해가 풀 렸으면 하는데." "아. 그게," "저희들은 단순하게 여행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도대체 무슨 제 보를 들으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코 앞에서 무럭 무럭 맛있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기는 했지만 시안은 꾸욱 참으면서 기윤에게 물었다. 일단은 우아한 아가씨 역할을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였다. 우아한 아가씨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이 있다고 해서 우걱 우걱 거리고 먹기만 해서야 의심을 살 것 같아서 였다. 다행히 오자마자 약간의 요기를 한터라 시안은 그럭 저럭 참을 만 했다. "레이디께서 몇 명의 남자들에게 협박을 당하시면서 끌려가고 있 다는…." "그게 무슨 소리예요? 협박이라니. 물론 가끔 얌전하게 행동하라 고 혼은 나고 있지만 협박이라니 말도 안됩니다." '우욱- 입이 썩는 것 같아.' 기윤은 조금은 정색을 하고 있는 시안을 보면서 아무래도 실수를 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를 보호해주고 있는 사람들이예요. 물론 아까는 너무 트러블이 생길까 싶어서 얌전이 따라왔지만 이런식으로 나오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 사람들 아마도 절 무척 걱정하고 있을 겁니 다. 그들을 만나고 싶어요." "곧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몇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일단은 경비대쪽으로 보냈습니다만." "궁금한게 뭔데요? 제가 말씀을 드릴테니 풀어주세요." 나름대로는 최대한 노력을 해서 귀족집안 아가씨처럼(?) 대답을 하는 시안. 시안은 스스로도 상당히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귀족 아가 씨 노릇에 빠져 들어갔다. "그들이 없으면 전 불안해져서…. 부디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정말 불안한듯한 표정까지 지어보인 시안은 기윤이 정 말 안타깝다는 얼굴을 해보이자 성공이다!! 라고 속으로 소리쳤 다. '나이스- 넘어오는군. 역시 구라가 짱이야. 연기대상이 다 뭐냐. 이정도면 오스카 상 받아도 될걸? 돌아가면 연기자나 해볼까봐.' 마지막 확인도장으로 너풀너풀한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 까지 하자 기윤이 오히려 안절 부절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기윤은 눈앞에 있는 애절해 보이는 소녀(?)에게 사실은 거의 홀 딱 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사후에 제가 직접가서 그분들을 모셔오도록 하지요. 그럼 되 겠습니까?" "네. 정말 감사합니다." 생긋 웃는 아름 다운 얼굴. 그 얼굴에 취할 것 같이 되어 버린 기윤은 감격했다. 역시 기사의 로망은 아름다운 아가씨를 돕는 것이다. 계속. 쿨럭 쿨럭.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 "흐음. 수상하긴 하군." 경비대장의 보고를 받은 기윤은 그가 작성한 보고서를 한번 쓰윽 훑어본후 그의 감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기윤은 저녁시간이 넘어 까실까실하게 수염이 돋아난 턱을 몇 번 이나 쓰다듬었다. 난처할 때만 의례 그런 손짓을 한다는 것은 그의 주위 사람들이 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그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바로 시안이라는 아름다운 아가씨의 소원을 당장 들어주기에는 약간의 미심적은 구석이 있다는 것 때문이다. 시안에게는 당장이라도 나머지 3사람을 데리고 올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양은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물론 모든 가문의 문장을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특이 한 느낌의 문장이라면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였다. 모양은 사실 그렇게 특이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바스타드 소 드의 길이를 하고 있는 두자루의 검은 생긴 것 보다는 훨씬 무게 가 가벼우면서도 단단했다. 오랫동안 검을 만져온 기윤으로써는 한눈에 봐도 정말 좋은 명검 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물건이었다. 무슨 무슨 전설이 깃든 그런 명검은 아니더라도 제국의 로열 가드나 만져볼 수 있을 듯 한 검인 것이다. 날렵하게 생긴 손잡이 부분은 단단했고 마모된 것은 아니지만 오 랫동안 사용한 듯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었다. 적어도 장식품으로 들고 다닌 검은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그중에서도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은 문장 비슷한 것이 블레이드 (칼날)의 윗부분에 음각으로 얕게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둥근 원형의 구와 원형의 구에서 시작되는 작은 회오리선이 몇 개, 그 구를 감싸듯이 새겨져 있는 독특한 문양. "흐응. 도감이라도 뒤져 보아야 하나?" 분명 시안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그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시종내 지는 기사쯤 될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기억 못하는 지방 귀족이 아닐까 하고 그는 생 각했다. "아니지. 일단 만나보면…." 시안과 약속을 한 이상 오늘 내로 그들을 시안에게 대려다줘야 한다고 생각한 기윤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수상한 점이 있다면 이후 조사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후우---." 어둑어둑 해지던 옥사에 횃불하나가 들어왔다. 타오르는 횃불은 일렁 일렁이면서 시시각각 벽에 비추어지는 그 림자의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해가 떨어지자마자 차가운 돌바닥에서는 찬기가 올라오기 시작했 다. 이리야는 그 차가운 돌바닥을 피해 낮게 깔려 있는 침상-이라고 추정되는-에 올라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 았다. 무엇이 그리도 심각한지 두 사람은 말 한마디 하는 일 없이 뚫어 져라 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봐. 왜 그렇게 심각해. 아무리 파장이 끊어 졌다고 해도 일단 그 세나케인인지 뭔지가 항상 들러 붙어 있는 거잖아." "……………." 이리야의 말이 빈벽에 부딧혀 돌아온다. 그는 기껏 분위기를 바꾸어보기 위해서 말을 걸었지만 대답이 없 는 두사람에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둘다 퉁퉁 불어 있는 거야? 어차피 둘이서 알 아서 결정해서 이 지경에 온건데 응?" "심각할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럽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기엘이 조용히 말했다. 단 몇시간만에 3박 4일쯤은 밤을 샌 사람 같은 얼굴이 되어 버린 기엘은 피곤한 신경을 애써 추스르면서 다시 한번 시안을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이곳에 들어온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힘을 소모하고 있었 다. 몇 번이나 이 요하엘 성을 어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그가 찾는 상대는 잡히지 않았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내려 이제는 옷이다 축축해질 지경이다. "그 심각한 사정이 좀 뭔지나 들어보자구. 응?" 대답없는 기엘대신에 이번에는 로운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대 답했다. "시끄럽군." "시끄럽기는 뭐가 시끄러워. 젠장.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왜 저 양반이 계속 저러는지 이유나 알아야 협력을 해주든 말든 할거 아니야. 여하튼 일행이라고 한 이상. 나도 이렇게 계속 방관한 채로는 있을 수 없다구.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힐끗-. 로운이 이리야를 바라보았다. "물의 술을 배우면서 엘에 대한 것은 배웠겠지?" "그정도는 배웠지." "엘러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이 뭔지도 알겠고." "뭐. 그런 의미라면 역시 엘을 못쓰게 되었을 때아닌가? 신의 축 복은 신에게 돌아간다. 라고 하는말도 들은 것 같고 말이야." 이리야는 이전에 배웠던 몇구절을 읊어 보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엘러는 엘러로써의 힘이 다하면 그대로 자신이 타고난 엘로 돌아간다고들 하잖아. 뭐 나는 실제로 본적 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머리카락 한올 남지 않고 물의 상태로 돌아가겠지 뭐. 무덤조차 안 남는다는게 좀 기 분나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현재 시안의 엘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아," 짧은 감탄성과 함께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한 이리야의 표정이 로 운의 눈에 들어왔다. "시안은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한번 겪은 적이 있었어. 완전히 엘의 흐름이 막혀서 어떤 파장도 느껴지지 않았었지. 혹시나 녀 석이 혼자 바람술을 시험하다가 다시 그런 상태에 접어든 것이라 면…." "그런 소리는 입밖에 내지도 마!!!" 그때까지 정신을 집중한채 시안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기엘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두번다시 그 따위 소리 지껄이지마!! 절대 무사하실거야!! 절대 !!" 기엘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때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 린다. 그런 감각은 두 번다시 느끼고 싶지도. 그리고 보고 싶지도 않 다. 하지만 지금…. "만반의 준비를 해두자는 소리야. 기엘." "알아!!" 급박한 상황이 오자 기엘과 로운은 서로 정반대의 반응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침착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냉정했고 한 사람은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 부절하고 있다. "젠장… 어떻게 되신건지 알수만이라도 있다면…. 거기!! 거기 누구 없어!! 그 기윤이라는 기사를 당장 불러줘!!!" 철창에 매달려 기엘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텅빈 공간에 맴돌뿐. 누구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빌어먹을 누구라도 좀 나타 나란 말이야!!!" 콰앙----하고 철장이 울렸다. 기엘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기엘. 진정해." "로운. 나가자."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렇게나 찾아봤는데. 이정도 철장쯤 못 끊어내는 것도 아니고…." "어. 어이 이봐. 기사양반. 진정하라구." 이리야가 벌떡 일어나서 기엘의 팔을 잡았다. "지금 여기서 뛰어 나가면 우리도 움직이기가 힘들어지잖아. 조 금만 더 기다려보는 것이 어때? 응? 그 경비대장인지 뭔지가 그 기사한테 연락을 하겠다고 했잖아." 하지만 기엘은 이리야의 팔을 뿌리쳐 버렸다. "안가겠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어." "기엘!!!!!" 로운이 단호한 목소리로 기엘을 불렀다. 기엘은 그의 목소리에 움칠해서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어둠이 내려올때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으면 그때 움직이자. 그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기다려." "……………." 기엘 만큼이나 지친 기색의 로운은 그렇게 말하고 손으로 얼굴을 훑어내렸다. "어두워질때까지도 소식이 없으면, 요하엘의 성벽이라도 부숴줄 테니까 지금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구." "젠장!!!" 다시한번 철장이 쿠우웅 소리를 내면서 울렸다. 이리야는 벌어지는 광경에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그냥 입을 다물 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엘의 파장이 끊어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해본일이 없기 때문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 두 사람이 얼마나 피가 마른 상황에 처해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후우---- 진짜 미치겠군 이거."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호로스의 불길이여 눈앞에 모 습을 드러내라. 라이트." 낭낭한 목소리로 읊어지는 주문. 하지만 시안의 손끝에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세 사람이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피가 마를 지경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시안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배부르게 먹고, 쉬고 그리고 이제는 한가하게 바람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잖아? 이거. 너무 간만에 해서 그런가?" 손바닥을 탈탈탈 몇 번 털었다가 시안은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 작했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호로스의 불길이여 눈앞에 모 습을 드러내라. 라이트."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꽤나 정신을 집중해서 주문을 외웠다고 생 각했는데 역시 그의 손끝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한 구 체는커녕 불꽃 하나 반짝이지 않는 것이다. "흐으응… 이거 곤란한데. 어이 케인. 이거 어떻게 된지 알아?" 시안은 팔장을 끼고 세나케인을 불렀다. "어이 이봐? 자?" 시안은 손을 들어서 머리를 탁탁하고 치려다가 말고 멈칫했다. 아무리 자기 몸속에 들어 있다고는 해도 방금전에 자신이 하려던 행동은 멍청하기 그지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멍청한거를 알아채기라도 하니 다행이군.」 "어? 안 잤네?" 「내가 잠같은 것을 잘 리가 없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 "그럼 좀 나오봐. 이상하단 말야." "이상하기는 뭐가 이상해." 슈르르르-하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더니 시안의 앞에 희미한 형체가 생겼다. 그것이 조금후면 더 짙어지겠지하고 바라보고 있던 시안은 아무 리 기다려도 세나케인의 몸이 실체화 되지 않자 눈을 깜박이면서 항의 했다. "뭐야. 왠 유령이나구." "지금은 이정도로 족해." "아까는 괜찮았잖아." "둔치." "뭐가!!!!"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 엘-루하라고 하나? 그걸 해봐. 그럼 알 수 있을테니까." "응? 엘-루하? 그건 왜? 나 그거 잘 못해." "…………." "그거 말고 그거 뭐더라? 정화의 바람!! 그건 쉬우니까 그걸 할 게." 시안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엘-루하보다 몇배는 어려운 것이 정화의 술인데도 그것이 쉽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세나케인은 아무말도 하지않고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 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 하니다." 손을 가슴앞에 모으고 조용하게 주문을 외웠다. 원래대로라면 그 즉시 공기가 움직이면서 손 바닥 사이에 바람의 소용돌이 같은 것이 생겨나야 정상이건만 바람은커녕 아무런 느 낌도 들지 않았다. "어? 안되네?" "아직도 모르겠냐?"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시안을 세나케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느 세월이 되어야 저 바람의 계승자 는 바람의 술을 깨달을 수 있는 걸까? "네 엘의 파장은 지금 모조리 봉인되어 있는 상태다. 그걸 못느 끼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군." "봉인?" "그래. 봉인." "왜?" 멍청하기 이를 때 없는 질문이 다시 시안의 입에서 나오자 세나 케인은 마치 인간처럼, 머리를 쥐어 뜯었다. "이 멍청아!! 그 기사들도 없는데 혹시나 네가 바람의 계승자라 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어떻게 할래? 응!!" "아!! 그렇구나!!!" 손바닥을 펴서 타악--하고 시안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얼굴을 했 다. "그렇군!! 맞아. 로운이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어. 엘을 억제하 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겠다고." "으이그…." 그리고 몇 번이나 주문을 다시 외우면서 진짜 아무런 바람도 일 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시안은 다시 원래의 그 만족 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바람 술을 쓸 수 없는게 자신의 탓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마음 이 편해져버린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태평한 거지?" "그럼? 태평하지 않으면? 안달 복달이라도 할까? 어차피 이 요하 엘 성인지 뭔지에서 떠나면 다시 쓸 수 있을 거 아니야. 뭐. 다 시 돌아 갈수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럴 거면 마음편하게 있는 쪽이 좋아. 그게 정신건강에도 좋은 거라구."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위험할까봐 봉인을 해둔 것이라면 위험이 없어지면 다시 풀으면 그만이다. 게다가 그건 자신의 분신처럼 자신에게 들러 붙어 있 는 세나케인이 한 일이다. 세나케엔을 달달 볶아서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하면 그만인데 굳 이 자신이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 시안의 생각이었 다. "난 지금부터 잘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깨워줘." "내가 네 시종이라도 되냐?" "시종이고 아니고 뭐 어때? 어차피 잠 같은 거 안 잔다며. 그럼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시안은 푹신한 침대 한구석으로 파고 들어가 잠 을 청했다. 숫자같은 것을 셀 필요도 없이 시안은 그대로 고르르릉 소리를 내면서 잠에 골아 떨어져 버렸다. 자신이 이렇게 마음 편하게 있는 동안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지 고 있는지 까맣게 모른채 말이다. ◇◆◇ "이게 무슨 문장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시안님이 무사하신지 알고 싶소." "물론. 안전하게 제 사가에서 편히 쉬시고 계십니다."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었으면 합니다만?" "일단. 당신들에 대한 의문이 다 풀리지 않은 상태라 그것은 불 가합니다. 제가 묻는것에 그대로 답을 해주신다면 당장이라고 시 안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불끈하고 기엘이 주먹을 쥐고 일어서려는 것을 로운이 간신히 막 고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 의문점이라는 것을 풀어보지요." 기윤은 로운이 순순히 대답을 하자 안심했다는 듯이 자신도 건너 편의 비어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물론 실례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그냥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부디 양해해주시기 바 랍니다." "알겠습니다." 기윤이 손짓을 하자 몇 명의 병사들이 일행의 나머지 물건들을 가져와서 그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조사를 한 듯 대부분의 짐이 풀어 헤쳐져 있었지만 로운은 별반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래서 궁금한게 뭡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당신들이 어디 소속의 기사들인지 궁금하군 요." 기윤은 일부러 말을 골랐다. 산적이라는 제보를 듣기는 했지만 이미 시안의 말도 들었고 이들 이 산적이라는 생각은 거의 지워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윤의 질문을 받은 로운은 잠시 기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건 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사라고 하기는 뭐하고 그냥 검을 좀 쓸뿐입니다." "기사가 아니시라구요? 그럼 용병?" "용병은 아닙니다. 단지 그저 시안님을 모시고 여행을 하기위해 고용 되었을 뿐입니다. 시안님께서는 지금 처음 세상 구경을 하 시는 터라…." 기윤은 고개를 비스듬이 기울이고서 로운의 말을 듣고 있었다. 기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아무리 봐도 기사라는 것 이외에는 어울리는 이름이 없는 느낌의 사람들이다. "그럼 출신은?" "…………." 로운이 입을 다물자 옆에서 기엘이 대답했다. "미메이라입니다. 더 자세하게는 말씀 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 다. 되도록 조용하게 여행을 하라고 하신 당부가 계셔서." "…미메이라?" 그때까지 조금은 미심쩍다는 생각만을 하고 있던 기윤은 조금 전 기엘이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미메이라라고? 그 바람의 신국? 설마.' 기윤은 재빨리 그들의 외모를 다시 한번 살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많이 다른 그들의 머리색이 그 의 의심을 더욱 부채질 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미메이라 인들은 모두 은백색의 머리카락 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시안님께서는 은백색의 머리색을 가지고 계시죠. 미메이라 인이 라고 해서 모두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면 시안님이 그…엘러라는 소리입니까?" 잠시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엘러라는 존재는 사실 그렇게 흔한 존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한 명도 찾아 볼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법사의 존재만큼이나 그들 이 특이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엘러가 적은 제국에는 마법사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꽤 많기는 하다. 하지만 역시 순수한 엘러를 찾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제국출신도 아니고 신국 출신의 엘러라는 것은 평생을 가 도 한번 볼수 있을 까 말까한 존재. 기윤의 경우. 슈히튼 공작과 함께 황성을 방문했을 때 먼 발치에 서 그 엘러라고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을 뿐, 실제 그들과 마 주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신국인들은 기본적으로 힘을 타고 납니다. 그게 그 은백색의 머 리카락으로 증명이되지요. 하지만 시안님께서는 여자인 탓인지 그렇기 능력이 크시지는 않습니다. 그저 산들바람을 좀 일으킬 수 있을 정도뿐이라고 할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엘과 로운 을 보면서 이리야는 이런 인간들을 봤나하면서 속으로 혼자 궁 시렁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런 거짓말에 순순히 넘어 가고 있는 기윤을 비웃고 있었다. 아무리 신국인에 대한 것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해도 저렇 게 그대로 넘어가는 것이 너무 웃겼다. 물론 로운의 설명도 틀린 것은 아니다. 미메이라인의 대부분이 엘러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리고 로운의 말처럼 그들이 모두 은 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의 로운 이나 기엘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메이라인은 미메이라의 전국을 뒤져도 단 한사람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 제. 그러니까 다시말해서 로운은 지금 있는 말 없는 말을 마구 만들 어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설명으로 자신도 은그슬쩍 '능력이 없는 미메이라 인'으로 신분이 적당히 감추어 졌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거짓말이 다. "그렇군요…." 기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말을 전적으로 믿기 위해서는 이제 단 한가지 과정만 거치 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들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집 손님침실에 있는 그 아름다운 아가씨는 신비로운 미메이라의 엘러라는 소리가 된다. 진짜 엘러라면 그것을 증명해보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 만일 진짜 엘러가 아니라면 그때 다시 추궁하면 된다. "좋습니다. 당신들의 말을 믿기로 하지요. 물론 소속을 정확하게 밝혀주신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 로운이 다시 정색을 하고 말하려 하자 이번에는 기윤쪽에서 손을 들면서 그의 말을 막았다. "아닙니다.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수 있으니 이정도로 하지요." 그가 생각해도 만일 자신에게 금지옥엽같은 딸이 하나 있어서 몇 명의 수하를 붙여 여행을 내보낸다면 되도록 신분을 숨기고 다니 라고 할 것이다. 물론 위험한 순간이 오면 신분을 드러낼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일 이 벌어 질지 모르는 것이 여행길인 만큼 일단은 유괴나 기타등 등의 위험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신분을 숨기라고 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만큼 기윤은 더 이상은 추궁하지 않겠다는 쪽으 로 마음을 굳혔다. "일단. 본의아니게 실례를 하게 된 것을 사과드립니다." 기윤이 한 쪽 손을 내밀었다. 제국 식의 화해법인 모양이었다. 그 손을 로운이 맞잡자 기윤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함께 가시죠. 그렇지 않아도 시안님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 으니까요." 계속.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10) ◇◆◇ '도착했군.' 세나케인은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눈을 감고 뜨는 행위는 그리 의미가 없다. 눈을 감고 있으나 뜨고 있으나 그것은 그저 실체화 해놓은 그의 육체(?)가 그렇게 보여지는 것 일뿐. 실제 그가 느끼는 모든 감각은 그져 감각일 뿐이다. 인간처럼 오감을 가지고 느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시안은 아까부터 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생각해보면 시안이 이렇게 편한 침대에서 잠든 것은 아주 오랜만 의 일이었다. 페이요트 산맥을 넘으면서 침대처럼 생기긴 했으니 침대라고 봐 주기는 조금 문제가 있었던 그 라칸드라 사냥꾼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던 이후로는 단 한번도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잠들어 본적이 없었다. 시안이 잠들어 있는 동안 세나케인은 내내 시안을 보호하고 있었 다. 물론 아무도 눈치챌 수 없도록 말이다. '하기사 자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자체가 그대로 자연체라는 증 거일 지도 모르겠군. 여하튼 특이한 녀석이야. 아. 온다.' 스윽- 세나케인이 고개를 돌렸다.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안님?" '자. 그럼 나는 이만.' "시안님. 저희들입니다." 기엘의 목소리였다. "시안님?"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던 기엘이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시안님. 기엘입니다." 재차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엘의 얼굴에서 싸아악- 핏기가 사라졌다. "기엘. 잠깐." 그때까지 뒤에서 서 있던 로운이 기엘을 젖히고 문 손잡에 손을 대었다. 짙은 색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시안님!" 기윤을 포함한 4명의 남자가 우르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동시에 말을 잃었다. 하지만 말을 잃은 이유가 서로 달랐다. "이런. 주무시는군." "시안님!!" 기윤이 실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겸연쩍어 하면서 나가려는데 기 엘이 와락 침대로 뛰어갔다. "시안님. 정신 차리십시오. 로운!!!" 로운 역시 기엘에 못지 않은 속도로 시안에게 뛰어갔다. 기엘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는 시안의 어깨를 들어 올려서 빰을 찰싹-하고 때렸다. "비켜봐 기엘." 사색이 되어버린 두 남자를 보면서 기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 인가 싶어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불과 몇시간 전에도 자신과 함께 멀쩡한 얼굴로 식사를 했던 시 안인 것이다. 그는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들이 하는 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으응." "시안님!!" 재차 기엘이 시안의 어깨를 흔들었다. "시안님 정신이 드십니까?" "어……." "시안님!!!" 시안은 머엉한 표정으로 살며시 눈을 떴다. 어슴프레한 불빛에 비추어 기엘과 로운의 얼굴이 보였다. "어어. 왔어?" "어디 아프신건 아니십니까?" 로운이 살짝 기윤의 눈치를 보았다. 기윤이 없었다면 바로 정화술이라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에게는 자신들이 능력이 없는 미메이라인이라고 말해둔터라 어 떻게 손을 쓰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운은 일단 기윤이 눈치채지 못하게 시안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시안은 아직 잠에서 다 깬 건 아니지만 기엘과 로운이 이상한 얼 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뒤흔들면서 아직도 남아있는 수마를 쫓아냈다. "걱정했습니다. 혹 주문이라도 연습하시다가 어떻게 되신건 아닌 가 해서…." "아아 괜찮은데. 아무일도 없었어. 밥도 잘 먹었고." 사실 시안이 정신을 차리자 제일 마음을 놓은 것은 기윤이었다. 자신의 보호아래 있다가 만일 진짜 무슨 사고라도 있었으면 그것 은 자신이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시안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잠시 자신은 자리를 비 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입니다. 큰일이 아니라서. 일단 쉬십시오. 필요하시면 하녀 를 부르시구요. 먼저 방은 준비해두겠습니다. "아아…." 시안에게 정신이 팔린 두 남자를 대신해서 이리야가 기윤에게 고 맙다는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배려해주셔서." "아닙니다. 제가 결례를 범한 것도 있지 않습니까. 요하엘에 머 무시는 동안은 부디 저희집에 머물러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아니. 뭐 그정도까지는…." "그럼 저는 이만." "아. 예." 가볍게 목례를 하고 기윤이 살며시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로운이 정색을 하고 시안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화내지 마!! 사람은 걱정하면서 기다렸는데." "걱정은 무슨 걱정!!" "무. 물론 피, 피곤해서 좀 자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화낼 거는 없잖아." "시안님 진정하세요." 기엘이 막 말다툼을 시작하려는 두사람을 가로 막았다. "시안님. 지금 현재 시안님 상태가 이상한 것은 아시지요? 어떻 게 된겁니까?" "에? 뭐가 이상해?" 시안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기엘을 바라보았다. "한참전에 갑자기 시안님의 파장이 뚝하고 끊어졌습니다. 아니 아예 시안님의 기척을 느낄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 시안은 그제서야 아하! 하는 얼굴을 했다. 그는 히죽하고 웃으면 서 괜찮다는 듯이 기엘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아아. 그거? 괜찮아. 괜찮아. 케인이 알아서 봉인을 해뒀거든. 혹시나 싶었나보지 뭐." "예? 봉인…이라구요?" "응. 그렇게 말하던데? 어이 케인. 좀 나와봐." 기엘은 어안이 벙벙했다. 봉인이라는 소리에 기엘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로운도 마찬가 지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엘을 아예 봉인해버리는 경우는 거의 겪어 본 적이 없다. 거기다가 엘을 봉인 당하고 이렇게 멀쩡하게 있을 수 있다는 소리조차 들어 본적이 없는 것이다. 봉인이라고 하는 것은 미메이라에서는 범법자에게 행해지는 극형 중의 극형에 속한다. 엘을 봉인당한다는 것은 바람술사에게 있어 서 사형과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흐르고 또 흘러야할 엘을 봉인당한 술사는 곧 죽음에 이르게 되 는 것이 기본이다. 흐르는 엘 속에서 살아야 할 술사가 모든 생명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안은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봉인되었다는 소리를 하 고 있는 것이다. "어이!! 케인 왜 들은채 만 채 해. 좀 나와 보라니까." 짜증난다는 듯이 시안이 세나케인을 불러대자 세나케인 역시 짜 증난다는 듯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아까와 같이 반쯤은 빛을 투과해버리는 흐리멍텅한 모습으 로 말이다. "좀 설명해봐. 내가 설명을 하려고 해도 뭘 알아야 설명을 하든 말든하지. 그리고 그 흐리멍텅한 거 어떻게 좀 안 돼?" "봉인을 해놓아서 그렇다고 몇 번을 말해야하는거냐. 지금." 쳇하고 세나케인이 혀를 찼다. "내가 봉인을 해두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 "세…나케인님." 기엘은 세나케인이 나타자나 옆으로 살짝 물러났다. "너희들도 없는데 이녀석 혼자서 풀풀 엘을 흘리고 다니다가 혹 시나 위험에 빠질수도 있어서 봉인 했을 뿐인데." "그래도 봉인까지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까?" "뭐. 여차하면 내가 나오면 그만인걸. 게다가 말이 봉인이지 그 냥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니까. 별 신 경 쓸 필요없어. 이녀석이 능력을 못쓰는 것 뿐이니까." 세나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세사람은 그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능력을 쓸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봉인을 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도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시안님의 몸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 각합니다." 기엘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를 세나케인을 향해 말했다. "뭐 오래되서 좋을 것은 없지. 좋아. 일단 보호자들이 돌아 왔으 니 원래대로 돌려놓아야겠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나케인은 시안의 머리 위쪽으로 손을 뻗었 다. 그의 손짓은 아주 간단했다. 단순하게 시안의 머리를 살짝 건드렸을 뿐. 하지만 그 순간 세 사람은 막힌 둑이 삽시간에 터져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웃!!" "…큭!" "우악!!!"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당했던 시안의 엘이 순식간에 강력한 바람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시안역시 자신의 힘을 견디지 못해서 눈을 질끈감았다. 온 몸이 갈기 갈기 찢겨져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우엑-----!!!!' 시안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한곳에 고여있던 시안의 엘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이리야는 처음으로 느끼는 이상한 감각에 당황했다. '뭐, 뭐지? 이건?' 이리야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에는 절대 보일 수 없는 바람의 엘의 힘을 담은 투명한 자락이 한가득 비추어 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면서 이리야의 온 몸에 감겨들고 있었다. 이리야는 그 경이로운 감각 속에서 시안의 주는 순수한 엘의 힘 을 온 몸으로 받아 들였다. "우, 우웃. 놀랬잖아!!!! 케인 너 죽을래?" 방안을 가득 채웠던 바람의 엘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한 순간 시안이 다짜고짜 세나케인에게 달려들었다. "젠장!! 말을 해야할 것 아니야!! 말을!!!!" "흥--." 시안의 힘이 해방됨과 동시에 원래대로 생생한 모습으로 돌아온 세나케인이 가볍게 시안의 주먹을 피했다. "때린다고 내가 아픈 것도 아니니까 쓸데없는데 힘을 쓰진 말라 구." "시끄러워!! 꺼져!!! 젠장!! 하등 도움되는게 없어!!!" 시안이 세나케인에게 화를 내고 있는 동안 세 사람은 놀란 가슴 을 진정 시키기 위해서 깊은 호흡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리야와는 달리 기엘과 로운은 다른 의미에서 놀라고 있었다. 봉인 되었던 엘이 다시 해방되는 것을 처음으로 겪어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느껴보았던 어떤 힘보다 강력했고 또한 놀라웠다. '짐작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세나케인이 나타났을 때부터 시안의 힘이 평균 수준을 넘어섰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로운도 그것을 직접 경험해보자 눈앞이 새카매져 올 정도였다. '대단하군. 정말….' 세나케인이 결국 시안과 싸우다가 말고 사라져버릴 때까지 로운 은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채 시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사람 놀래키는데는 정말 뭐 있다니까. 에이--." 3사람을 놀라게 만든 장본인인 시안은 온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고 비틀어보더니 털썩하고 다시 침대에 주저 앉았다. "젠장 온 몸이 우라지게 아프잖아. 두 번다시 그 봉인인지 뭔지 하기만 해봐!! 가만히 안둘거야 케인!!"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시안은 나름대로는 세나케인이 알아들 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시안님?" "절대 괜찮지 않아!! 아프단 말이야!" "……………." 기엘은 그런 시안 앞에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봉인을 당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시안이 지금 어떤 상태인 지는 알수 없었지만 봉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두려움 때문인 지 왠지 시안의 심정이 이해가 갔기 문이다. "치유술을 써드릴까요?" "됐어. 어차피 그것도 바람술이잖아. 으윽 피곤해. 나 잘래." 왠지 나날히 어린애 같아져 간다는 생각이 문득 시안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자아. 이제 문제도 해결되었고 우리도 좀 쉬는게 어때 ?" "그러는게 좋겠습니다." 제일 걱정하고 있던 문제가 사라지자 갑자기 온몸에 피곤이 몰려 왔다. 기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안님께서도 좀 쉬십시오. 다행히 그 기윤이라는 기사가 꽤 친 절한 듯 하니 몸이 정상으로 회복 될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러도 좋을 것 같으니까요." "머물긴 뭘 머물러. 내일 당장 출발해!!" "예?" 시안이 볼맨소리로 대답했다. "계속 자꾸 머물면 언제 중간지댄지 뭔지하는데를 가느냐구. 최 종 목표는 거기잖아. 젠장. 이렇게 가다가는 한달이 뭐야. 두달, 세달 지나도 못가. 그러니까 내일 출발이야." "하지만 시안님 몸 상태가…." "이따위 근육통은 하루면 나아. 괜찮아." 그 말을 끝으로 시안은 한쪽으로 밀쳐저 있던 이불을 뒤집어 쓰 고 누워 버렸다. 말은 근육통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말 온몸이 쑤시고 아팠기 때 문이다. "로운. 어떻게 할까?" "글세. 일단은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겠지. 저녀석 말대로 우리도 좀 쉬자구." "그래." 로운은 다시 한번 시안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시안의 상태를 살폈다. 시원스럽게 돌아나오는 파장이 그의 몸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하군. 이건.' 느끼려고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끝이 짜릿 해져올 정도로 강력한 파장이 시안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단은 뭔가 수를 강구해야겠어." "그럼 시안님 주무십시오." 기엘은 뭔가 더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 두어 버렸다. 뭔가 더 말을 하기에는 그 역시 신경이 너덜 너덜 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아. 그럼." 세 남자는 시안과는 원인은 다르지만 나름대로는 욱씬거리는 몸 을 추스르면서 방을 빠져나왔다. ◇◆◇ "으아--- 개운하군." 이른 아침. 제일 먼저 눈을 뜬 것은 이리야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고는 상쾌한 기분으로 기지개를 한번 더 켰다. 그는 다른 날과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개운한 몸에 기분이 좋아졌 다. "역시 어제의 그 영향인가?" "…후우. 머리가 멍하군." 그다음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로운. 그리고 기엘이 차례로 잠에 서 깨어났다. "어이. 잘났어? 다들?" "아. 예." 기엘은 조금은 노곤하기는 하지만 몸상태가 상당히 좋다는 것을 깨닫고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푹 잔건가 하고 생각했다. "어제는 피곤해서 꿈도 꾸지않고 잔 것 같아 로운. 넌 어때?" "아. 나도 뭐…." 로운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제의 피로함과는 달리 그 역시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기 때문이 다. "흐음… 역시 어제 그것 때문인가?" 로운이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하다가 불쑥 말하자 이리야 가 그에 반응했다. "어? 로운도 그런가? 나는 나만 그런줄 알았는데." "예?" 이리야는 기엘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얼굴을 하자 씨익-하고 웃 으면서 대답했다. "아 왜 어제. 시안의 봉인이 해체되는 순간 왜 방안 가득하게 그 녀석의 엘이 흘러나왔잖아. 그게 이상하게 뭐랄까? 나한테까지 영향을 주는 기분이었거든. 감각은 되게 묘했지만 으음∼ 뭐랄까 ? 그 구불 구불하고 다가오는 엘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기분이 었거든." 이리야는 방안 한구석에 있던 물병의 물을 가벼운 손짓하나로 끌 어내서 자신의 몸 주위로 빙글 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그게 굉장히 신기했거든. 기본적으로 성향이 아주 다른 힘인데 도 그 힘이 그대로 내 몸속에 차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난 내가 물의 술사라서 그런가보다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그렇…습니까?" 기엘은 이리야의 말을 듣고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워낙 어제는 정신이 없었던 터라 사실 세세한 것에는 신경을 쓰 지 못했었다. 이리야의 말을 듣고 보니 기엘도 현재의 자신의 몸 상태가 굉장 히 좋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어제 오후시간 내내 기엘은 시안을 찾아내느라 있는 힘 없 는 힘을 모조리 쥐어짜냈었다. 물론 그 정도로 나가떨어질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만에 피곤이 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며칠 푹 요양이라도 한 사람 같은 상태인 것이 다. "나도 마찬가지야." 로운도 간단하게 이리야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말은 안했지만 그 역시 어제 이리야와 같은 경험을 했던 것이다. "사실 난 굉장히 놀라워. 같은 바람술사인 자네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물의 술사니까. 뭐 여하튼 기 분 좋군. 이런 느낌." 가뿐한 몸으로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고 있는 물을 가 지고 놀던 이리야는 기분좋게 말했다. "그럼 이제 아침 식사나 하고 틀림없이 늦잠을 자고 있을 시안이 나 깨워서 어서 출발이나 하자구." "식사가 입에 맞지 않습니까? 시안님?" 조용한 아침 식탁 앞. 기윤은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안의 얼굴을 살폈다. 시안은 마치 무슨 똥이라도 씹은 얼굴을 한 채 접시 위에 담긴 요리를 꾹꾹꾹 찌르다말고 벌떡 고개를 들었다. 우두두둑---- "끄억----!!" 시안이 고개를 드는 순간 정말이지 인간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 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소리가 시안의 목에서 나왔다. 시안은 그 소리가 남과 동시에 목덜미를 부여잡고 부들 부들 떨 었다. "시안님!!!" 다들 그 소리에 놀라서 잠시 얼이 빠져있는데 기엘이 급하게 자 리에서 일어났다. "으윽. 아파. 건드리지마…." 기엘의 손가락 끝이 시안의 몸에 닿는 순간 다시 시안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아, 아프다니까." 기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 부절했다. "어제의 후유증인가보군." 로운이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했다. 아무리 세나케인이 아무일도 없다는 듯 이야기를 했지만 역시 힘 을 봉인당한다는 것 자체는 시안의 몸에 엄청난 무리를 주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아무래도 식사는 무리셨던 모양이군요. 일단은 다시 방으로…." "아. 아니예요. 괜찮아요. 기윤님." 기윤이 나서려는데 시안이 끄으윽-하는 전혀 아가씨답지 않은 신 음소리를 내면서 대답을 했다. "좀 급해서요. 바로 떠나려고 하거든요. 아. 아야야야야." 시안은 온통 욱신거리면서 쑤셔오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마치 어디서 한 삼박사일은 굴러떨어진 기분이다. 하지만 시안은 몸이 아픈 것쯤이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엘. 로운. 이리야씨. 괜찮으면 바로 출발하죠?" 온 몸이 쪼개질정도로 아팠지만 나름대로는 정신은 있어서 시안 은 얌전하고 여자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저 시안이라는 아가씨의 몸상태가 그렇게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기윤은 기엘과 로운 그리고 이리야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어떻게든 해보라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그의 상상과는 전혀 틀린 대답이었 다. "어쩔 수 없군요." 로운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저희 아가씨께서 원하시는데로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프시긴 하지만 긴장이 좀 풀어 지셔 서 그런 것 같으니 아마도 곧 회복 되실겁니다. 아무래도 어제 많이 놀라신 모양이십니다." 시안은 몸을 구부리고 끙끙 앓다말고 로운의 그 점잔 빼는 말을 듣고 속으로 푸학!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것이 웬 새빨간 거짓말이란 말인가. '우우. 역시 저런 소리를 계속 듣느니 한시라도 빨리 여길 떠나 는게 좋겠어." "일단 출발하시면 다시 몸이 긴장되실테고 또 원래 여행하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니 곧 회복 되실 겁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워낙 오랫동안 모셔온 분이라 시안님의 상태는 저희들이 잘 알 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완곡한 거절이었지만 사실은 거의 기윤을 무시하다시피하는 말이 었다. 기윤은 좀더 말을 하려다 말고 웬지 자신을 쏘아보는 듯한 기엘 의 얼굴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엘러라고 해서 공작님께 말씀을 드려 저녁 만찬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말은 안 했지만 사실 엘러가 그리 흔한 존재만은 아니기에 기윤 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던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그리 능력이 큰 엘러도 아니다. 하물며 남자도 아니다. '뭐. 괜찮겠지.' 숙부인 슈히튼 공작에게서 이전에 황태자인 로렌황자께서 엘러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제국인이 아닌 다음에야 사실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겠습니다. 곧 출발하실 수 있도록 손을 써드리겠습니다. 혹 필요하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일이 이렇게 된데는 제 책임이 막중하니까요." "아. 그렇다면…." 로운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럼 말을 세필정도 급하게 구해주실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 대금은 드리겠습니다." 말 세필이면 상당한 가격을 주어야 한다. 아무리 기윤이 배려를 해준다고 해도 말 세필을 그냥 내어줄수는 없는 것이다. 기윤역시 그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물론 기사이긴 하지만 갑작스럽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에게 무상으로 말을 제궁해 줄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구해보도록 하지요. 여행하기에 적당 한 말들로." "감사합니다." "아니요. 별말씀을." 그리고 기윤은 잠시 실례를 고하고 바로 일어서 식당을 빠져나갔 다. "기엘. 시안님을…." "우, 우우욱. 사, 살살해…." 기엘이 다가와서 시안을 조심스럽게 부축하는데 시안은 아니나 다를까 있는 엄살 없는 엄살을 잔뜩 부리면서 일어섰다. "정말 오늘 떠나셔야 겠습니까?" 기엘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번 시안에게 물 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절대적으로 강경했다. "간다면 가는 거야! 남자는 한 입으로 두 말 안해!!" 물론 마지막 말은 하녀를 불러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던 기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 "꾸엑!!! 죽겠다." "정말 자꾸 그런 이상한 소리 낼래?" "시끄러워!! 아파 죽겠다면 죽겠다는 줄 알아!! 우어어어어. 팔 이야. 다리야 어깨야. 허리야." 말이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시안은 꾸악! 끄엑!! 꿰엑! 하는 요 상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고전하고 있었다. 기엘은 말고삐를 잡은 손까지 동원해서 시안의 몸을 어떻게 해서 든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중과부족이었다. 기윤의 사가를 떠나오기 직전 혹 시안의 몸을 회복시킬 수 있을 까 싶어 3명이 번갈아 주문을 읊어댔지만 아무래도 봉인해제의 영향인지 시안의 몸은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아아악. 좀 조심하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기엘은 시안이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하면서 고삐를 고쳐 쥐었 다. "아야야야야야. 정말 미치겠네. 이거. 젠장 케인 이거 어떻게 안 돼?" 「글세?」 "좀 어떻게든 해봐. 미치겠단 말이야." 「나도 별로 생각해본 문제가 아니라 말이야. 봉인이 신체에 그 런 영향을 미칠거라고는 상상도 안해봐서 일단 고민해보도록 하 지.」 "그걸 말이라고 해?" 기엘은 갑자기 시안이 혼자서 중얼 거리기 시작하자 움찔했지만 예의 그 세나케인과 대화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무말없 이 사람이 없는 쪽을 꼴라서 말을 몰았다. "바람의 세나케인이라며. 엘에 대한 것은 누구보다 잘 알텐데 그 런거를 생각해본적없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쩔 수 없지. 내겐 너같은 육체는 없으니까 그것까지 내가 알 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젠장!! 으햐아악---!!" 화가나서 주먹을 꽉 쥐는 순간 주먹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시안의 등에서 몽골 몽골 식은땀이 솟아나왔다. "으윽. 뭐든 좋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좀 생각해봐. 진짜 진짜 죽을 맛이란 말야." "그렇게 안 좋으시면 역시 쉬시다 가시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시끄러워 기엘!! 자꾸 똑같은 소리 하지마. 피곤하단말야." "예…. 알겠습니다." 기엘은 멋쩍은 듯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유가 뭐든, 그리고 어찌되었든 간에 이미 출발을 해버린 것이 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얼굴이 새카맣게 되었군. 기윤." "인사드립니다. 슈히튼 공작님." 기윤이 막 몸을 굽히려던 순간이었다. "아니. 인사는 되었네. 간만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나를 찾을 줄 알았더니 말이야. 어찌된건가." 인사를 하려는 기윤을 만류하고 슈히튼 공작은 기윤을 자리에 앉 으라는 손짓을 했다. 기윤은 그래도 인사는 해야한다며 정식으로 슈히튼 공작에게 예 를 올리고는 비로서 자리에 앉았다. 기윤은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뜻하지 않은 일이 좀 있어서 처리를 좀 하느라고 …." "아아 보고는 들었다. 왠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고 들었는데. 아 주 아름다운 레이디와 함께 말이다." "아하하하. 아닙니다. 여행객인데 제가 좀 오해를 해서요. 공작 님." "공작은 무슨. 사적인 자리에서는 숙부님이라는 호칭이 더 마음 에 든다고 해두었을텐데?" "죄송합니다. 숙부님. 아무래도 간만이다 보니…." "그래. 수고가 많았네. 고생이 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이번 기수의 견습생들은 상당히 교관들의 애를 였다는 이야기도 전 해들었고 말이야." "매번 비슷한 느낌입니다. 저는." 슈히튼 공작의 치하에 기윤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실제가 그랬다. 언제나 혈기에 가득찬 견습생들을 데리고 나서면 일단은 고생이지만 돌아올 때 쯤이면 그럭 저럭 자제력들이 생겨 서 수월해지는 것이다. 아직 이 일을 시작한지 햇수로는 3년 밖 에 되지 않았지만 1년에 한번 있는 이 여행이 그에게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뭐 이번에는 약간 결례를 하게된 분들이 있어서 조금은 고민을 했습니다만 다행히 일은 잘 처리 되어서 안심을 하는 중입니다. 숙부님." 기윤은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자신의 숙부에게 기윤은 나름 대로는 자신에게 이런일을 맡겨준 것에 대해서 상당히 고마워 하 고 있었다. 올해 40세에 접어든 슈히튼 공작은 어떻게 보면 그 지위가 나이 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세운 뛰어난 공 적은 아무리 그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공작의 칭호라고 해도 절대 부끄럽지 않을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올해 27에 접어든 요하엘의 기사 기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슈히튼 공작의 오른팔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실 그와 같은 실력의 기사라면 로열 가드에서도 상위를 차지할 수도 있겠지만 기윤의 경우 그 신분에 약간의 핸디캡이 있었다. 슈히튼 공작의 나이차가 많이 나는 큰 형님의 첫째 아들인 기윤 은 사실 서자였다. 변방의 전쟁터에서 일찍 타계한 전대 슈히튼 공작의 유일한 핏줄 이긴 했지만 서자라는 신분은 로열가드가 되기에는 치명적인 결 함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윤은 나름대로는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었다. 비 록 로열 가드는 아니지만 로열 가드에 비할 때없는 실력자라는 칭호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두 자신을 기꺼히 거두 어준 슈히튼 공작의 은덕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이야기를 듣다 말은 것 같군. 그래. 그 집안에 고이 모셨다던 그 아름다운 레이디는 어찌 된건가?" "아. 예. 사실은 알고 보니 바람의 신국 미메이라의 귀족 집안 영양이었던 것 같습니다." "뭐라고?" 혹여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조카에게 늦은 봄 바람이라도 불어 온게 아닌가 생각하며 느긋하게 기윤의 말을 듣고 있던 슈히튼 공작의 귀가 버뜩 트였다. "페이요트에서 내려오던중에 그 끝자락에 자리잡은 마을에서 제 보를 받았었습니다. 그들에 말에 의하면 좀 이상한 사람들이 그 마을을 막 지나갔다고 하더군요. 일단 제보를 받은 이상은 그들 이 혹 산적이 아닌가 해서 일단 연행을 했습니만. 알고 보니 미 메이라에서 나온 여행객이었습니다." "그걸 증명하는 것은?" "예. 일단은 그 아가씨의 그 은빛 머리카락이었습니다." "엘러인가?" 슈히튼 공작의 눈빛이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워졌다. 그것을 눈치챈것인지 아닌지 기윤은 나름대로는 성실하게 슈히튼 공작이 묻는대로 소상하게 답변을 하고 있었다. "엘러라고 하기는 하는데 여자이기에 능력은 별로 없다고 하더군 요. 일단 그들을 따르는 기사처럼 보이는 인물이 세명이 있었습 니다만 그들은 은빛 머리카락이 아닌 검은색과 갈색의 머리카락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슈히튼 공작은 기윤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가늠을 해보았 다. "그래서 아직 그 일행은 자네 사가에 머물고 있겠지?" "아닙니다. 일정을 서둘러야 한다면서 오늘 아침에 제가 이곳에 오기 바로전에 제 집을 떠났습니다." "뭐?" "무슨… 문제라도…." 슈히튼 공작의 언성이 높아지자 순간 기윤이 움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온화해보 이는 숙부지만 그는 숙부가 화 가 났을 때 얼마나 무서워지고 또한 날카로워지는지 잘 알고 있 었다. "엘러라고 했는데도 붙잡아두지 못하다니…." "무, 물론 저도 그 점을 염두에 두기는 했습니다만…." 기윤은 혹시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해서 이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얼마전에 혹 요하엘에서 혹 엘러가 발견되면 바로 그들을 카드미엘로 보내라는 기밀서를 받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엘 러면서 동시에 제국인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제국인이었으면 물론 무슨 수를 써도라도 제 사가에 머 물게 했겠습니다만 일단은 신국인이기에 떠나는 것을 허가해주었 습니다." "통행증도 발급했나?" "예. 일단 요하엘 성문을 빠져나갈 수 있는 통행증은 발급했습니 다." "그런가? 일단 아직 성문은 빠져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겠군. 일 단 그들을 발견하면 다시 데리고 오라고 해. 일단은 알아봐야 할 일이 있어." "예? 하지만…." "이런. 내 영지내에서 엘러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걸 몰랐다 니." "……………." 기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들을 보낸 것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후회를 하는 것은 아 니다. 단지 그가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슨 억지를 써서 라도 일단은 그들을 붙잡아 두었어야 했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일단 자신의 숙부가 이렇게나 신경을 쓰는 일인 줄 진작 알았다면 좀더 신중했을 것이다. "자네가 계속 성에 있었다면 며칠전에 내려온 명령에 대해서도 알려둘 수 있었을텐데 어떻게 보면 내 불찰일수도 있으니 너무 마음은 쓰지 말게나." "죄송합니다. 숙부님." "아니야. 아직 수습할 시간은 있고 일단은 신국인이라고 하니 조 금 더 두고보지. 그전에 일단 그것을 보여주는 쪽이 좋겠군." 슈히튼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윤도 같이 일어섰지만 슈히튼 공작은 그에게 그대로 앉 아있으라고 손짓을 한뒤에 손수 서랍을 열어 붉은 양초로 봉인되 어있었던 명령서를 꺼냈다. 그것은 기윤이 보기에도 상당히 두꺼운 명령서였다. "일단은 기밀이 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슈히튼 공작이 기윤에게 그 명령서를 건내주었다. 기윤은 두손으로 그 명령서를 받은 후에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쳐 보았다. 어떻게 보면 칙명임에 틀림이 없는 로렌 황자의 인이 찍혀있는 기밀서를 이렇게 자신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황송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가 숙부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소리도 된다. 기윤은 조용하게 그 명령서를 읽었다. 한참을 읽어내려가던 기윤은 그 마지막장 정도에 해당하는 장에 서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이리야 노운?" "뭔가?" "설마…." 기윤은 다시 한번 그 명령서를 읽었다. 그 명령서에는 상당히 자세하고 길게 엘러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장은 현재 지명수배를 하고 있는 몇 명의 엘러에 관한 내용이었다. 불과 바람과 물과 대지의 엘러. 그리고 엘러들의 특징.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국 내에서 엘러들을 발견하는 경우 즉시 카 드미엘로 이송할 것과 신국인인 경우에도 일단은 그들의 신병을 확보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기윤의 시선을 붙잡은 부분은 맨 마지막장의 제일 아랫줄. 그 줄에는 현재 지명 수배중인 몇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리야. 이리야 노운." "혹 이번 일행에 있었던 건가?" "예. 성은 몰랐지만 그들이 이리야라고 불렀던 남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미메이라 인이라고 했는데 여기는 물의 술을 쓰는 엘러라고…." 기윤은 다시 한번 그 이름을 확인 했다. 사실 이리야라는 이름은 그렇게 흔한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흔 하지는 않더라도 제국인의 이름으로는 그럭 저럭 많이 쓰이는 평 범한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엘러라는 사실과 그가 만 났던 이리야라는 남자가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일단은 엘러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연관성이 없다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상황. 절대로 수상한 조합인 것이다. 기윤은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명령서를 접어 다시 슈히튼 공작에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아닐세. 워낙 기밀이기도 했고. 일단은 보통 엘러들이나 신국인 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 자체가 적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이해하네." "아닙니다. 완벽한 제 실수입니다. 설사 그들이 동일 인물은 아 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더 조사를 하지 않은 제 불찰이 큽니다. " 순식간에 숙부에서 조카의 관계에서 주군과 기사의 관계로 돌아 간 두 사람. 슈히튼 공작은 엄숙한 얼굴로 자신의 기사에게 명령을 했다. "일단 최단 시일내에 그들의 신병을 확보하도록. 나는 곧 카드미 엘로 연락을 넣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기윤은 두손을 가슴 앞에 모아 칼을 받드는 모양으로 인사를 하 고 곧 서재에서 나갔다. ◇◆◇ "결국 하루 머무른게 되는 군. 요하엘에서는." "그러게. 저녀석이 고집만 피우지 않았으면 며칠은 좀더 쉬면서 이것저것 좀더 준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막 성문을 통과하여 작은 언덕에 올라선 일행이 요하엘 성의 성 벽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안은 여전히 아프다고 깽깽대고 있었고 그런 시안을 달래는데 낮 시간 내내 고생한 기엘은 시안 못지않게 지쳐있었다. 생생한 것은 로운과 이리야로 그들은 전혀 지친기색 하나 없이 팔팔한 그대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제는 어디로 갈 생각이지?" "일단은 슈히튼까지 갈 생각인데…." "슈히튼?" "카드미엘로 가는 일직선 상이나 마찬가지니까. 일단은 여기까지 왔는데도 하세카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니 일단은 예정대로 가려 고. 그러나 저러나 이상하군." "뭐가? 로운?" 시안에게 신경을 쓰느라 이제는 머리가 다 빠질 지경인 기엘이 간신히 한숨을 돌리고는 로운에게 물었다. 오후 내내 말등 위에서 아프다고 난리를 치던 시안은 제풀에 지 친것인지 방금전 그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말 위에서 골아 떨어졌 던 것이다. 그런 시안을 재주좋게 안아서 자신의 몸에 단단하게 매버리고 나 자 기엘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오로프가 돌아 올 때가 지났어…." "아… 그렇군." "무슨 일이 있는건가?" "글세? 특별한 일이 없으니까 그런게 아닐까?" "하지만 일단 보고를 하면 적어도 의례적으로라도 돌아와야 하잖 아." "그건 그렇지." "일단은 이곳에서 하나더 날려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어디보자…. " 기엘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성문에서 그리 멀지않은 대로 라서 그런지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좀 곤란하겠군." "아직 어두워지기에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조금 더 가서 여관을 찾아보는 것은 어때? 대로를 따라가면 그래도 마을이 꽤 많이 있 다고 하지 않았어?" 성문을 나오기 전에 케슈튼까지 가는 여정을 알아 봤던 로운은 기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은 가야지. 이녀석이 고집한데로 한게 잘 한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뭐." "응. 이리야씨 출발하시죠." "아. 아아…." 그때까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이리야가 퍼뜩 고개를 들 었다. "그렇군 케슈튼이라…." "왜. 케슈튼에 혹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거야?" 왠지 반응이 이상한 이리야를 보고 로운이 물었다. 이리야는 잠시 망설이다 말고 결국 결심한 듯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고향 근처라고 해야하나?" "고향?" "게다가 케슈튼 영주한테는 사감이 좀 많아서 말이야. 그쪽으로 가더라도 되도록이면 케슈튼 성에는 안가면 안될까?" "뭐. 굳이 꼭 들러야 할 필요성은 없는거니까 그렇게 하지." 이전에 이리야가 했던 말을 기억해내면서 로운이 대답했다. 로운의 눈에 그 문제의 노예인장이 있는 어깨를 어루만지는 이리 야의 모습이 비췄다. "미안.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서 말이야." "뭐 그 정도야. 자 그럼 출발하지." "좋아." "꼬마는 자는건가?" "아. 응 주무시는 군. 상태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아." "뭐 할 수 없잖아." 그리고 네 사람과 세 마리의 말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그 뒤를 기윤이 눈에 불을 켜고 따라오기 시작한 것은 전혀 모른 채…. 계속. 쿨럭. 죄송합니다. -_-;; 눈이 너무 아파서...올리기 전 교정은...쿨럭 쿨럭. 오타가 많아,,괴로우셨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감에 치이다보니 --;; 교정 보는 것이 마구마구 귀찮아 진다 는........ 으윽.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11) 4. 고향 "미메이라 인이라고? 그게 정말인가?" "정확하게 확인 된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본인들 스스로가 미메 이라인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신분까지 확인 된 것은 아니지 만 일단은 그들 일행 중 한명은 엘러가 분명합니다. 그 증거로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흐응. 흥미롭군. 미메이라 인이라." 톡톡톡. 넓은 탁자 위에 펼쳐있는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던 로렌 황자는 얼굴 전체에 웃음을 머금었다. "게다가 굉장한 미녀라고 하더군요." 그는 혹 황태자가 흥미가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살짝 덧붙 였다. "미녀?" "슈히튼 공작의 조카가 처음 그들을 발견했는데 그녀의 미모에 완전히 반하는 바람에 약간의 실수를 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오 랫동안 외지에 나가 있던 탓도 있어서 엘러들에 대한 지시까지는 받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고 합니다." "뭐 그런 것을 가지고 슈히튼 공작이 마음쓸 필요는 없다고 전하 도록 하게. 그리고 되도록 그들의 신병을 확보해서 꼭 내게 보내 주었으면 한다고도 덧붙여주면 좋겠어. 아. 그렇지. 엘러중에서 추적술에 능한 사람이 있던가? 한두명 딸려 보내도록 해. 엘러는 엘러들이 찾기 쉽다고 하지 않았나?" "예. 알겠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로렌 황자는 비로서 자리에서 일어났 다. 황태자라는 자리가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역시 한곳에 머물러 있 는 것은 그의 성미에는 맞지 않았다. 이렇게 답답하게 수도에 꼭 틀여 박혀 있는 것 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넓은 대지를, 자신의 땅보다도 더 넓은 아슈레이 대륙 곳곳 을 누비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불공평하군. 신의 축복을 듬뿍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 은데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자들이 더 많다는 것은 말도 안돼." 그는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나 엘러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기억 을 더듬었다. "역시 그때였나?" 아주 오래 전. 그가 아직도 어린 아이였을 시절이 떠올랐다. 아마도 당시 황태자였던 제 1황자의 결혼식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 화려했던 결혼식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었 다. 그 자리에는 4개의 신국에서 온 사절들도 섞여 있었다. "그렇지 그 사람도 눈부신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 역 시 미메이라 인이었군. 화려하긴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지루할 수 밖에 없는 결혼식자 리를 빠져나와서 궁을 돌아다니던 그의 앞에 눈을 뜰 수 없을 정 도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나타났었다. 뺨을 간지르는 부드러운 바람속에서 한없이 긴 머리카락을 휘날 리고 있던 그녀.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첫 사랑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 다.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가득 불어오던 바람이 일순간에 멈 추었었다.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사라락 소리를 내면서 내려오던 장면을 그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가 미메이라 인이라…." 그는 벽에 걸린 아슈레이 전도를 바라보았다. 제국에서 가장 가까운 신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 만치 제국과는 교류가 없는 미지의 나라. 그곳이 바로 미메이라였다. "흐르는 바람처럼… 인가?" ◇◆◇ "정확하게는 이런 느낌입니다. 주위로 퍼져나가는 힘을 안으로 갈무리 한다고 할까요? 흐르도록 그대로 두기는 하지만 그것을 의지의 힘으로 방향을 조절해주는 것이지요. 이제 한번 해보십시 오." "응." 시안은 기엘이 시키는데로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 에서 끝. 라인-티리쉬." 낭낭한 목소리에 힘이 실려 시안의 흐름을 교묘하게 뒤흔들었다. "좋습니다. 시안님. 가볍게 성공하셨네요." 기엘은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시안을 칭찬했다. 정말이지 처음 시안에게 힘을 개방하는 법을 가르쳤던 때와 비교 한다면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해도 아무도 비웃을 수가 없을 것 이다. "웃챠! 역시 인간은 하면 된다니까." 시안 역시 이렇게나 자신이 가볍게 주문을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 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조금 전 시안에게 기엘이 가르친 주문은 힘을 감추는 아주 간단 한 주문이었다. 하지만 그 주문의 성공은 시안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발전이었다. 그 이유는 시안의 힘이 워낙 다른 엘러들과는 달리 활성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인이 거는 라인-티리쉬는 거의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잊을 만 하면 한번씩 이 주문을 시전해 주십시오." "어? 왜? 한번하면 그것으로 끝 아니야?" "그렇지가 않습니다. 시안님." 의아해하는 시안에게 기엘이 설명을 해주었다. 바람의 힘은 다른 것보다 훨씬 그 유동성이 강한 편이다. 그것은 나름대로는 장점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상당한 단점 으로도 작용한다. 유동성이 강한 만큼 주문의 지속 시간도 짧아 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한번 주문을 시전하면 이 삼일쯤은 문제가 없 을 겁니다. 하지만 시안님의 경우는 일단 몸에서 흘러나오는 파 장이 다른 사람들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게 주문이 오 래 지속되지는 못합니다. 물론 시안님께서 시전하신 주문이니까 어느정도는 괜찮겠습니다만 그대로 일단은 조심하시는 쪽이 좋다 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아아. 알았어. 설명 한번 기네. 그런데 궁금한게 하나 더 있는 데. 그럼 다른 엘러들의 힘을 느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지? 이 런 주문이 있는 이유는 다른 엘러들한테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 으려고 하는거 잖아 결국." "물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주문보다는 자연스럽게 느끼는 부 분에 속합니다." "그런데 왜 나는 안돼?" "글쎄요? 그것까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안님 께서도 일단 못느끼시고 계시는 것은 아니실 겁니다. 실제 지난 번에 그 검은 암살단이 습격을 해왔을 때 저희들보다 훨씬 먼저 느끼셨잖아요." "에헤…. 그런가?"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능력이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시안은 기분이 좋아졌다. '헤헤헤. 생각보다 재미있잖아. 이거.' "오늘 하루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어." "응?" 시안에게 열심히 바람술을 가르치고 있던 기엘에게 로운이 말했 다. 로운은 창 밖을 바라보다가 말고 결심을 한듯했다. "왜? 오후에 출발하기로 했었잖아. 로운." 시안도 이상하다는 듯이 로운에게 말을 했다. "그렇게 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이리야가…." 조금 전 이리야가 말을 손질한 후 그대로 그 말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로운은 아무래도 그에게 조금이라도 시 간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고향 근처라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곳에 잠깐이라도 가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원한다면 가라고 했더니 조금전에 출발한 모양 이야." "아무말 없이 간건가?" "뭐. 나름대로는 좀 그런 모양이지. 뭐. 여하튼 기다려 준다고는 했으니 내일 정도까지는 기다려줘야지." "어이어이어이!!! 그런 것을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하고 결정했단 말이야?" 시안이 화가 나서 로운에게 시비를 걸었다. 물론 이리야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일행인데 도 불구 그에 대해서 일언 반구 듣지 못했다는 것은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왠지 자신만 모든 중요한 일에서 제외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자 신이 이 일행의 중심에 있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로운은 시안이 항의를 하는데도 힐끔하고 그의 얼굴을 잠깐 돌아 다 보았을 뿐,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뭐야!! 이제는 인간 취급도 안하냐?" "대답할 필요가 없으니까." "로운 말이 심하잖아." 기엘이 황급하게 로운을 말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운은 절 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결국 시안은 화가 나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래!! 잘났다. 너만 인간이고 나는 아주 똥이라 이거지!! 젠장 ! 기사 좋아하네! 순 사기야 사기!!" "시안님 어디 가십니까!!" "시장 구경!!! 내가 어디가든 찾아 낼 수 있잖아. 좀 냅둬!!" 젠장!!하고 소리를 치는 것이 여관의 복도를 타고 울려왔다. 기엘은 로운에게 좀 적당히 하지 왜 그랬느냐며 타박을 했다. "기분이 이상해." "응?" "굉장히 신경에 거슬리는 게 있어. 아주 이상해." "그럼 더더욱 조심해야지. 저런식으로 쓸데없이 시안님을 화나게 해서 좋을 것 하나 없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다 가 위험요소는 얼마든지 있는 거라구." "그거랑은 좀 틀려. 너도 알거라고 생각하지만…." "……………." " 여하튼 신경쓰게 해서 미안하다." 그리고 다시 로운은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는 로운의 입이 열리지 않자 기엘은 화가 났다. "젠장. 시안님이나 따라가 보아야 겠군." 보기 드물게 기엘의 입에서 욕과 비슷한 말이 튀어 나왔다. 어지간히 화가 나지 않은 이상 기엘은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로운은 그것을 듣고 잠시 흠칫 몸을 굳혔지만 역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나도 미치겠어. 기엘. 정말이지. 이런 느낌일 줄은 몰랐어.' 기엘이 황급하게 시안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2층, 로운이 앉아 있는 창가에서 보였다. "뭔가 아주 안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군." 말로는 설명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뭔가 논리정연하게 설명을 할 수 있는 느낌이라면 그쪽이 나을 것 이라는 생각조차 드는 것이다. 오랫동안 일해왔던 신관으로써의 느낌이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 다. "위화감인가…." 솔직하게 말하면 로운은 자신이 이렇게 초조해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니 깨닫고 있었다. 이 땅에서는 미메이라에서 언제나 느꼈던 갓 태어난 바람의 느낌 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갓 태어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문제가 있을 지는 몰라도 여 하튼, 미메이라에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그는 매일 아침 받고 있었다. 미메이라에 있을 때는 언제나 아침에 깨어나면 가장 신선한 공기 를 들이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었다. 생명력이 가득차있는 살아 있는 바람이 언제나 일년 내내 쉬지 않고 불어 왔던 곳. 하지만 이곳은 답답하다. 바람이 부는 것은 똑같았지만 전혀 틀린 느낌. 그것 때문에 신경이 이렇게나 날카로와진다고 말하기에는 그렇지 만 영향을 미치치 않다고 보기엔 문제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실제 기엘의 몸 상태도 그렇게 좋은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이미 그는 느끼고 있었다. "걱정했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군 결국." 계승로에 따라나선 기사와 신관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 하다는 것 쯤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그들이 살아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확하게 그 이유 가 무엇인지는 아는 사람도 적다. 중간지대에서 풍환을 얻어온 수장과 가까스로 살아남아 수장과 함께 돌아왔던 몇 명 안되는 기사와 신관만이 알고 있는 비밀 아 닌 비밀. 그렇게나 자유로움을 타고난 미메이라인이 미메이라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신국인은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오랫동안 벗어나 있을 수가 없 다. 신의 축복은 그대로 신의 저주와도 일맥상통 할지도 모른다. 너무도 과한 축복은 그만큼의 행동 제약을 가져 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미메이라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신국인이 라면 누구나 해당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찍부터 시작되면 곤란한데…." 해가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내다보는 작은 마을의 풍경은 어지러운 로운의 마음과 는 달리 한산하기만 했다. "향수병일까? 이런 것도?" 로운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 중얼, 자신의 고향인 미메이라의 노 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흐르는 바람과도 같은 느낌의 노래였다. 계속. 4장을 시작했습니다. 왠지 우울하게 시작해버린 것같아 저도 기분이 좀.....그렇다는 느낌 이랄까요? 휴우. 그나마 고생좀 덜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 주인공들을 고생시킬 생각을 하면 저도 암담...합니다. 아자 아자! 갈길은 멀다. 하지만 빨리 가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12) ◇◆◇ '그리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치 몇 년 만에 온 기분이군.' 이리야는 높은 언덕에서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작은 마을, 로켄을 바라보았다. 사실 고향에 오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굴뚝같았던 그였다. 하지만 쫓기는 입장이다보니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미친 짓이지. 이정도면.' 이것으로 만족하고 이제 돌아갈까하는 마음과 여기까지 왔 는데 그래도 먼 발치에서나마 가족을 보고 싶다는 두 개의 마음사이에서 그는 갈등했다. '어떻게 할까….' 이리야는 바람에 솔솔 나부끼는 그의 머리카락을 추스렸다. 문득 손에 걸린 머리카락의 색을 보던 그는 마음을 굳혔다. 적어도 쉽게 적(?)의 눈에 들통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던 것이다. '페이요트 산맥을 넘어 케슈튼 근처까지 오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일이 일어날리는 없었는데 설마 이 제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이리야는 고개를 들어 이제 슬슬 저물기 시작하는 해를 바 라보았다. 아주 어릴적 기억에 있는 광경과 똑같은 광경, 똑같은 공 기, 똑같은 냄새. 그리고 똑같은 사람들. 멀지 않은 곳에 그와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 오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돌아가는 시간은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른다. 이리야는 말머리를 돌리며 힘껏 박차를 가했다. 조금만 더 서두르면 시간내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아주 잠깐만….' "형?" "…………." 흠칫하고 이리야의 어깨가 굳었다. 설마하는 생각이 이리야의 뇌리를 스쳤지만 다음 순간 들려 온 목소리에 이리야는 고개를 들고 말았다. "이리야 형 맞지?" "쿨럭 쿨럭." "형. 돌아 보지 말고. 그대로 집쪽으로 가. 뒤에 숲에서 기 다릴게. 응? 꼭 와." 이리야의 집은 마을 외곽쪽이다. 그 때문에 인기척이 다른 곳에 비하면 적은 곳. 이리야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혹시 나 때문에 문제라도 생기면 ….' 자신이 거의 강제 징병되다 시피해서 케슈튼으로 끌려간 후 그들의 가족에게 보상금 비슷한 것이 전해졌다는 소리는 들 었다. 하지만 그 말은 동시에 그의 입장에서는 그의 가족이 인질 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렇게 때문에 이리야는 그 모진 훈련들을 견디어 냈던 것 이다. 그리고 그들이 더 이상은 그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때 탈출을 했다. 마음속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리야의 발길은 자 신도 모르게 그의 집쪽을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라고 물어도 그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형. 어떻게 된 거야. 연락도 없고. 게다가 머리색은 그게 도대체…." "그냥 바꿨어. 너무 눈에 띄어서. 부모님은 잘 계시고?" "형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몸은 괜찮아?" 5살 연하의 동생은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자신과 거의 똑 같이 생겼다. "미안하다 갑자기 찾아와서. 그만 가볼게. 아… 참." 만나자 마자 동생을 얼싸안지도 못했지만 이리야는 말고삐 를 잡고 일어섰다. "형. 아버지라도 만나고 가. 어머닌 지금 하슈 아줌마 댁에 가셔서 안 계시지만 아버지는 계시단말이야." "안 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거든.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올게. 미안하다. 이거 받아." 이리야는 짐속을 뒤져서 로운으로부터 비상금으로 받은 하 이시 주머니를 꺼내 그의 동생에게 건내 주었다. "이게 뭐야?" "그냥 가지고 있던 비상금 같은 거야. 얼마나 될지는 나도 모르지만 상당히 고가에 팔릴 테니까 되도록 케슈튼 같은 곳에 가서 팔아서 써라." "형. 아버지 만나고 가라니까."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생은 이리 야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머리색까지 바뀐 형의 모습을 보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아니.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원래는 마을까지 내려올 생 각도 아닌데, 일단 와서 보니까…." "그러니까 이왕 온 거 잖아. 자고 가라고도 안 할게. 아버 지라도 만나고 가." "이시야. 널 만난 것만으로도 난 족해. 그만 갈게. 어서 들 어가고. 부모님 잘 모시고 있어." "형!!" 이시야가 형을 붙들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부모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다시 떠나가게 하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짜식. 머리색도 바꾸었는데 어떻게 알아 봤냐?" 팔을 붙드는 동생의 머리를 몇 번이나 부벼주던 이리야가 동생을 꼬옥 끌어 안았다. "미안하다. 아무 말도 못해줘서." "아니야. 형." 동생을 품에 안은 채 이리야는 잠시 감상에 빠졌다. 그냥 이대로 다시 마을로 돌아 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 "형. 정말 아버지 안 보고 갈 꺼야?" "미안……." 이렇게 동생을 안고 있으니 왠지 아주 어린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정말 미안하다." 잘 쓰지도 못하는 물의 술을 써서 이 동생을 놀려 먹은 것 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그를 너무 따랐었다. "일이 잘 되면 돌아 올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부 모님 잘 모시고 있어……어?!!" 순간 이리야는 어디선가 이상한 느낌이 전해져오는 것을 깨 달았다. 살기였다. "형 왜그래?" 동생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시야." "응?" 이리야는 동생의 귀에 속삭였다. "내가 널 놓으면 그대로 집으로 뛰어가라. 뒤돌아 보지 말 고." "형?" "쉿---." "셋을 셀테니까 바로 집으로 뛰어. 알겠지?" 살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 살기는 이전에 경험했던 그 어떤 것과 아주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짙으면서도 끈적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살기. '하셰카인가 설마….' 그동안 시안일행들과 여행을 하면서 그들에게 배운 덕에 이 리야의 감각은 더욱 더 예민하게 갈고 닦아져 있었다. 이전이라면 이렇게 빨리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 느낌은 이제 점점 가까워져 날카로운 침처럼 이리야의 몸을 찌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꼭 끌어 안고 있던 동생을 밀쳐내고 이리야는 그 살기가 뿜 어져 나오고 있는 숲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숲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뛰어 올랐다. 이리야의 오른손이 허리춤에 매달아 놓았던 날카로운 검을 뽑아들었다. "형---!!" "뛰어!!" 달려드는 남자의 움직임이 마치 느릿 느릿 흘러가는 거대한 대하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휘이익-----. 새카만 인영이 높이 치솟았다. "하앗----!!" 사선으로 배어낸 검흔에서 붉은 피가 솟아 올랐다. "이리야 노운. 카라스!!!" 솟아오르던 피가 분수처럼 위로 솟구쳤다. 쏴아아아아------- 분홍빛의 물기가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 녹색의 안개와 합쳐져 두터운 장벽이 되어 높이 치솟아 올랐던 남자의 몸 을 두동강 냈다. "큭---!!" 외마디 비명이 붉은 피를 뒤집어쓴 이리야의 귀에 들려왔 다. '남은 것은 셋? 아니 넷?' "형!! 위험해!!" 이시야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크헉---." 눈앞의 적에 눈이 팔려 있던 이리야의 뒤쪽으로 돌아와있던 남자가 날카로운 비수를 날렸다. 그 비수는 이리야의 허벅지에 정확하게 박혔다. "젠장!!"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이리야는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이리야 노운. 마헨---!!!" 고함과도 같은 주문과 함께 이리야는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놓았다. 이리야의 손에서 놓여난 레이피어가 순간 춤을 추 는 것처럼 허공을 날기 시작했다. "내가 왜 레이피어를 가지고 다니는지 보여주지. 마헨- 슬 레드!!" "------!!!" 방금전에 이리야의 다리에 비수를 던진 남자가 비명조차 지 르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엎어졌다. 허공을 춤추던 레이피어에서 튕겨져 나온 작은 핏방울이 그 의 심장을 정확하게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작을 핏방울들을 무수하게 뿌려댄 레이피어는 다시 다음의 적을 찾아서 저절로 움직였다. 흩여져 있던 물방울들과 핏방울들이 다닥 다닥 날으는 레이 피어에 붙어가는 광경에 남은 두 암살자들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암살자면 암살자답게 차라리 자는 것을 덥쳐 보란 말이야! !" 이리야의 절규 아닌 절규가 레이피어에 힘을 가한 듯 이제 거의 바스타드 소드만큼이나 커진 칼날이 힘차게 휘둘러 졌 다. "쿨럭----!" 살아 움직이는 레이피어의 칼날에 가슴을 배인 남자가 무릎 을 꿇고 쓰러졌다. 이리야가 손을 내밀자 움직이던 레이피어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슈르륵 이리야의 손으로 날아왔다. 피에 흠뻑 젖은 검신을 들은 이리야는 마지막 남자에게 칼 날을 겨누며 말했다. "돌아가. 그리고 두 번 다시 이곳에는 나타나지마. 나도 두 번 다시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온통 검은 천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그에게서 보이는 것은 반짝이는 두 개의 눈뿐. 그 눈의 반짝임이 순간 사라졌다. "돌아가!!!" 이리야의 절규와는 달리 남자는 가슴에 품고 있던 비수를 꺼내들고 이리야에게 덥쳐왔다. 이리야는 이를 악물고 그 남자의 가슴에 레이피어를 찔러 넣었다. "…크윽." 깊숙하게 박힌 검신을 따라 올라오는 비릿한 피의 향기. 그리고 뼈와 근육을 관통한 충격이 주는 떨림. 미세하게 흔들리며 흩어지는 생명의 느낌. 그 모든 것이 이리야의 눈앞을 새카맣게 덮어왔다. "이리야 노운 코나타, 네이 라인…." 슈욱하면서 새카만 물방울 같은 것이 이리야의 상처에서 흘 러나왔다. 이리야는 벅벅벅 천조각으로 그 물방울을 닦아내고는 상처 를 묶었다. "어서 들어가라. 위험하다. 일단 내가 마을을 벗어 날때까 지만 조심해. 아마도 내가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알면 저들 도 더 이상 이곳에서 날 기다리거나 하지는 않을테니까. 다 른 놈들이면 몰라도 저 놈들은 나 외엔 노리는게 없으니까. 너나 아버지랑 어머닌 안전할 꺼야." "형…." "이런 상처는 괜찮아. 봤잖아. 아까 내가 쓰는 거. 독은 다 제거했어." "가서 그런 거 배운 거야?" 동생의 눈에는 약간의 경외와 두려움과 안쓰러움이 겹쳐져 있다. 이리야는 그런 이시야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긴 했지만 여하튼 그는 살인자 인 것 이다. 시체는 이미 이리야가 주문으로 처리를 했지만 그들이 흘린 피에서 풍겨 나오는 비릿한 피냄새는 아직까지 여기저기 곳 곳에 남아있었다. "갈게." "형." "…………." 이리야는 말에 훌쩍 올라탔다. "들어가. 간다. ---하앗!!!" 마구를 들고 말의 엉덩이를 힘껐쳤다. 조금이라도 빨리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처를 마악 치료한 직후부터 그는 다시 새카맣게 몰려오는 하세카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두번 다시 돌아 올 수 없다고 해도….' 상처가 욱씬 욱씬 쑤셔왔지만 그때문인지 머리는 맑았다. '아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어. 저 놈들이 살아 있는 한.' 나부끼는 바람이 그의 정신을 더더욱 맑아지게 했다. "어디까지든 따라와 보라구!!!! 젠장!!" ◇◆◇ 계속. 중반이 넘어가니...마구 달리는 군요..쿨럭. 올리기엔 약간 양이 적다는 생각도 안한것은 아닙니다만. 단락이 나뉘는 바람에..그냥...... 주인공들에게는 계속 안 좋은 일들만 생길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마구 드는 중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는 좋은 일들만 가득 가득 일어나시길 빕니다. uni 이었습니다. PS-가끔 다른 통신망이나 인터넷의 다른 홈에 퍼가도 되냐 고 물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 통신망의 경우 하이텔의 환동에만. 그리고 인터넷의 경우 라니안 홈피에만 연재를 할 생각입니 다. (사정은...여러모로 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13) ◇◆◇ "우우. 잊어먹었다. 결국." 시안은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다가 결국 포기를 해버렸다. 아무리 봐도 구분 가지 않는 길들. 비슷 비슷하게 생긴 사 람들과 정말 똑같이 생긴 것처럼 보이는 말들. 외국에 나가면 외국사람이라면 전부 똑같이 보인다는 소리 가 맞기는 맞는 것 같다고 시안은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 중국 사람까지는 구분 할 수 있지 만 영국 사람, 미국 사람, 프랑스 사람, 독일 사람을 구분 해 낼 재주는 없다. 물론 서양인들은 그들끼리는 잘도 구분해 낸다고 하지만 말 이다. 그 말은 그대로 이곳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완전히 서양인이라고 보기에는 꽤나 동양인적인 요소를 가 지고 있는 얼굴들이지만 역시나 이곳은 시안에게는 완전히 모르는 제 3세계나 마찬가지. 아무리 눈여겨 보아도 그 얼굴이 다 그 얼굴로 보이는 것은 어느 누구도 탓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가게며 집이며 길들도 모조리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일 것이다. 케슈튼에서 멀지 않은 이 마을은 도시나 성으로 불리지는 못했지만 케슈튼 성이라고 하는 꽤나 큰 성으로 가는 길목 같은 곳에 있는 곳이라 상당히 번성한 마을이었다. "우우 이게 어디가 도시도 성도 아니란 말야. 우라지게 큰 데…." 모처럼 잔소리를 하는 로운도 없겠다. 시안은 마구마구 험 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말 조심하라는 소리를 로운 에게 끊임없이 들어왔었다. "간만에 혼자 다니니까 좋기는 좋지만…. 아. 참." 시안은 문득 하늘을 보았다.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아마도 조금 기울기 시작했는지 그림자가 길어지는게 보였다. "으흠. 일단은…." 시안은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들의 통행이 조금 적은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심호흡을 한뒤에 오늘 아침에 배웠던 주문을 외웠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가 아니라…." 주문을 외우다 말고 시안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귀찮은데 이거 어떻게 좀 강력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없을까?" 기엘이 말하기를 생각 날 때마다 주문을 외워 두라고 했는 데 그 생각 날 때 마다라는게 과연 얼마에 한번씩인지 사실 시안은 도대체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문득 생각 날 때마다 외우고는 있지만 그게 상당히 귀찮은 것이다. 물론 시안은 이 주문의 기본 효력이 대충 하루정도 된다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상태. 결국 고민을 하던 시안은 씨익- 웃으면서 주문을 외우기 시 작했다. 이전에 라이트 주문을 외우면서 자신의 원래 이름을 썼을 때 만들어냈던 그 커다란 불덩이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 다. "그거라면 잘 될지도 모르지. 좋아. 박경하.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라인-티리쉬."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위의 공기들이 쏴아아아 소리를 내면서 시안의 몸 주위로 몰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실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안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우…우웃. 놀랬다. 헉헉." 손바닥을 뻗어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면서 혹 이상이 없는지 살펴 보았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괜…찮겠지? 으으음." 시안은 잠시 고민을 했지만 고민을 해보았자 자신 스스로가 스스로의 상태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고민을 그만두어버렸다. 지금 고민할 문제는 그게 아니다. 과연 시안은 이제 그가 머물던 여관으로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그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여기는 아닌 거 같고, 그럼 일단은 다시 중앙 광장 으로 가서…." 성질이 나서 뛰어나오기는 했지만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아무것도 안들고 나왔던게 문제였다. 비상금이라고 기엘이 쥐어준 약간의 돈이 있기는 했기 때문 에 다행하게 굶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것이 다. 이 넒은 아슈레이 대륙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기엘 과 로운과 이리야, 그리고 미메이라 사람들뿐이다. 그중에서도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엘과 로운뿐. 그런데 시안은 지금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 날땐 나더라도 기엘이라도 데리고 나오는 건데 말이 야. 앞으로는 뛰어 나오더라도 조심을 해야지. 쳇." 투덜 거리면서 시안은 다시 중앙 광장이라고 생각되는 곳으 로 걸어 갔다. 아까부터 이 부근을 몇 번이나 돌았기 때문에 이곳까지는 눈에 익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관 이름이라도 알아 둘걸." 자신이 이렇게 주의성이 없는 사람이었나 고민하면서 시안 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아름다운 아가씨. 어디 누굴 찾으시나?" "…………" "원한다면 내가 아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데 말 이야." "그럼 그렇고 말고." 키득 대는 소리가 들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나 어째서 건달들은 하는 말이 저 렇게 천편일률적이냐구. 진짜 짜증난다.' 시안의 눈앞에는 한눈에 봐도 나는 건달입니다 하는 남자 세명이 서서 그를 요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시안을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부터 이 광장을 몇 번이나 빙빙빙, 혼 자 돌아 다니고 있는 시안이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화려한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평범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얼 굴 때문에 섣부르게 손을 대지 못했을 뿐, 시안을 노리고 있던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지금 시안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남자들은 이곳 에서도 꽤나 유명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망나니 중에 망나니들. "난 여자가 아니야. 그러니까 시비 걸지 말고 꺼져." 시안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킥킥킥. 여자가 아니라니. 그럼 남장 여자쯤 되는건가?" "푸하하하핫." 한칼에 시안의 주장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여자가 아니라면 아닌 줄 알지. 왜 여기서 벗어볼까?" "호오. 화끈한걸 아가씨?" 휘익하고 휘파함을 부는 소리가 났다. '으윽. 이럴 때 로운이나 기엘이 있음 간단하게 끝나는 건 데 젠장할!!!!! 도대체 이 인간들은 나 안 찾고 뭐하는 거 야!!!" 이렇게 시안이 기엘과 로운을 찾고 있는 동안, 기엘은 기엘 나름대로 부지런히 시안의 행적을 뒤쫓고 있었다. "도대체 어딜 가신거지?" 식사조차 제대로 못한 기엘은 오전 내내, 그리고 해가 중천 을 넘어가기 시작한 지금까지도 뱅뱅뱅 마을을 이잡듯이 뒤 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말이 마을이지 거의 중간급의 도시에 해당하는 곳이라 기엘 은 쉽게 시안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침에 가르쳐준 주문을 너무나 잘 외우고 다니는지 좀처럼 시안의 파장을 잡아 낼 수가 없다는 것이 일단 큰 문제였다. "가르쳐 드려도 너무 잘 가르쳐드린건가." 분명 여관에서 뛰어 나갈 때만 해도 다른 엘러들은 몰라도 기엘이나 로운이라면 쉽게 잡아낼 수 있을 정도의 파장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생각 날 때 한번씩 하시라고 했더니 설마 시간마다 줄창 외우시며 다니신것은 아니겠지?" 기엘이 문득 내뱉은 그대로 시안이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았다면 아마도 기엘은 머리를 쥐어 뜯을 지도 모른다. "어서 찾아야 할텐데… 저녁 식사 시간도 다 된데다가 가진 돈도 얼마 없으신데…." 기엘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면 시안을 찾아 낼수 있을까? "…어?" 발걸음을 멈춘 순간 잠깐, 아주 잠깐 북쪽 가까운 곳에서 엘러의 느낌이 났다. "시안님이신가?" 두 번 생각 할 것도 없이 기엘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뛰 기 시작했다. "찾으면 두 번 다시 혼자 내보내는 일은 없을 거야. 하아-. " "이거 놔!!!" "조용히 하라구 아가씨. 좋으면서 왜 이래? 응?" "놓으라고 했지!!! 좋은 말 할 때 놓으라구!!" "그 말 그대로다. 당장 손을 놓고 꺼져." "어??" 어디선가 들려온 아주 익숙한 목소리. 아니 아주 익숙한 것 은 아니지만 여하튼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다. 시안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뒤에서 불쑥 긴 롱 소드가 뻗 어나왔다. "이분은 너희들이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다." 남자의 말에 주춤 주춤 건달들이 뒷 걸음질을 쳤다. "괜찮으십니까 시안님?" "…기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시안님." 굵은 팔이 시안의 어깨를 감쌌다. 차마 저리 치우라는 소리도 못하고 시안이 이러지도, 저러 지도 못하는 사이 기윤의 서슬에 눌려 건달들은 멀리 도망 을 가버렸다. "아. 아하…호호호. 안녕하세요." 시안이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시안님." "도,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그럼 이만." 시안은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는 재빨리 내빼는 것이 상책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진짜 여자로 믿고 있는 상대다. 오히려 건달들보다 나빴으면 나빴지 좋을 것 하나 없는 것이다. "찾았습니다. 시안님." "어? 그럼 기엘이랑 로운이 어디 있는 줄 아세요?" "……물론입니다." 자신의 말에 반색을 하는 시안의 얼굴을 보고 기윤은 거짓 말을 했다. "정말이요? 후아--- 다행이다. 잊어버린줄 알고 당황하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시안은 기윤의 말을 듣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신경을 늦추 었다. 몇 년이나 쌓였던 체증이 갑자기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만일 제대로 찾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서 사실은 굉장히 고 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엘님과 로운님은 저희들 일행과 함께 계십니다. 시안님 을 찾으시던 중인데 아무래도 저희가 인원이 많아 저희들이 도와 드린다고…." "아아. 알겠어요. 가죠. 그럼." 힐끔. 기윤의 뒤를 보니 정말 몇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시안은 슬슬 배도 고픈 참에 잘 되었다는 생각에 반색을 하 며, 대뜸 기윤이 내미는 손을 잡고 그의 말에 올랐다. "저기요. 물어 볼게 있는데. 혹시 기엘이나 로운이 많이 화 안났던가요?"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천진난만해 보이는 시안의 얼굴을 보면서 기윤은 가슴 한곳 이 조금씩 저려오기 시작했지만 무시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칙명을 지키는 일. 잠시 잠깐의 양심 따위 저버려도 된다. 절대 이 아름다운 아가씨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들었다. 목표는 그 이리야라는 남자가 정말 그 문제의 엘러 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애써 자신을 정당화 하려 했다. "이리야는 돌아 왔어요?" "…물론입니다. 가실까요?" "네!" 시안은 방긋 웃으면서 기윤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하지 만 기윤은 방긋 웃는 시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출발한다." "네!!" "예!!" 뒤에 늘어서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기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이 아닌가?" 기윤은 잠시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분명히 맞았는데…." 얼마전부터 감각이 조금씩 둔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깨 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안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 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기엘은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넓다고는 하지만 하루종일 뒤지다 시피 했는데 시안의 머리 카락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시 뭔가 수상했던 것 이다. 게다가 순간 순간 기척이 느껴져서 뒤쫓아가면 엉뚱한 곳에 서 그 기척이 사라져 버린 것이 몇 번째. 결국 기엘은 시장을 관통해서 여관에서 멀지 않은 넓은 광 장까지 다시 돌아왔다. "후우… 이거 곤란하군." 탐문이라고 하고 다니지 않는 이상 아무래도 시안을 찾을 방법은 없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리고 기엘은 광장 한구석, 행상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슬쩍 물어 보았다. 일단은 지나다니는 사람들 보다는 한군데 머물러 있는 사람 들이 시안을 보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 게다가 시안이 그 시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리가 없 다.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힐끔- 하고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가 기엘을 바라보았다. 기엘은 그녀를 향해 활짝 웃어보이면서 말을 꺼냈다. "혹시 부근에서 머리카락이 은색인 한 17-8세 되는 소년을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눈을 껌벅 껌벅이는 여자는 잠시 기엘의 모습을 머리끝에서 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약간 푸른 색이 도는 옷을 입고 있는데 말입니다…." "당신도 그 일행이우?" "예?" "그 아가씨. 아까 나슈 패거리한테 걸려서 곤욕을 치뤘지." "나슈 패거리요?" "아아. 이 거리의 골치덩이지." "그런데요?" 처음 물어 본 상대에게서 뜻하지 않게 시안의 행방을 알게 되자 기엘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왠 기사양반들이 바람같이 나타나서 구해갔수. 더 이상 헤매지 않아도 되겠어. 그건 그렇고 이거 하나 안 사 실라우?" "아,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기사…들이라뇨?" 기뻐하다말고 기엘은 순간 심각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기사들이라니?" "검들고 있음 다들 기사분들 아니신감?" "어느쪽으로 갔습니까?" "모르지 그거야." "분명 백금발 머리의 소년이었습니까?" "예쁘장하게 생긴게 영락없는 아가씨더만 남자였나?" 기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한 후 재빨리 주위를 둘러 보았다. 문제가 심각했다. '기사들이라구? 한명이 아니라 여러명?' 한명이라고 한다면 로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다. 분명 저 여자는 기사들이라고 표현을 했다. "혹시 조금전에 기사분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 까?" "아아 저리로 갔는데. 지나간지 한참 되었수." "어디의 기사인지 아십니까?" "그런 것을 알 리가 있나." 기엘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가까운 곳에 있는 성은 케슈튼 뿐이다. 이 마을의 주민들이라면 적어도 케슈튼성의 병사들이나 기 사들을 못알아 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굴 따라간 거지?' 어리벙벙해 보여도 나름대로는 시안이 꽤나 조심스러운 성 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 시안이 아무나 막 따라 갈리는 없다. '뭔가, 뭔가 이상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한번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기엘은 오늘 자신이 문득 문득 느꼈던 그 기척이 시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한번 의심을 하게 되면 뭐든지 의심을 하게 되는 법이다. '시안님이었다면 그렇게 순간 순간 기척을 느끼게 될 리가 없어. 특히 몇 번이나 주문을 중복해서 시전했다면 절대 불 가능해.'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자 하나 하나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기엘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꼭꼭 묶어 두었던 그의 능력 을 해방시키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긴급 상황인 것이다. 풀어헤쳐진 감각은 실날 같이 흩어져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 기 시작했다. '찾을 수 있어. 몇 번이나 느꼈으니까.' 기엘은 눈을 감고 감각으로 주위의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했 다. 사람들의 기척과 동물들의 기척. 심지어는 바닥을 기어다니 는 벌레한마리까지 그의 감감은 그 모든 것을 샅샅이 어 나가기 시작했다. 바람과 함께 퍼져나가는 감각. 기엘이 번쩍 눈을 떴다. '찾았다!!' 다음 순간 기엘은 허리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에 손을 대고 뛰기 시작했다. '멀지 않아….' "뭐라구?" "목적지는 케슈튼. 이미 출발 한 것 같아." "바보 같은 녀석!!!!" 퍼억--하고 로운이 앞에 널부러진 남자를 걷어찼다. 그 남자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로운의 발길질에도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기엘은 그런 로운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불찰이다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순간 순간 느껴지던 기척을 그는 시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까? 기엘이 온 감각을 동원해 찾아낸 남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바람의 술사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미메이라인이 아닌 제국인이었다. 기엘의 인정사정 없는 공격에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남자는 처음에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불고 말았다. 기엘은 별로 쓰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입을 열지 않는 바람에 남자에게 정신계쪽의 주문을 써서 모든 것을 말하게 했던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남자는 지금 정신을 잃고 있었다. "이리야씨의 말을 좀더 자세히 들어 둘 것을 그랬나봐." "그럼 시안을 데려간 건 그들인가?" "아니. 그 남자야. 요하엘의 기사 기윤 제나이드 슈히튼." "기윤?" 기엘이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우리가 요하엘을 떠나온 뒤로 계속 우리 뒤를 추적해 온 것 같아. 이 남자는 달리 개별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는 기윤 제나이드의 명령을 받았던 것 같 아." "미치겠군." "찾는 즉시 카드미엘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일단 첫 번째 목적지는 케슈튼이라고 하더군." "더 말할 필요도 없군. 출발하자 기엘." 로운은 이제 널부러져 있는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군 데군데 흩어져 있는 짐들을 간단하게 챙기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짐은 모두 제외하고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만이 그 짐들 속으로 들어갔다. "이리야씨는?" "연락을 남기고 가는 정도면 되겠지. 이런 때에 그까지 챙 겨줄 만한 여유는 없잖아. 돌아와서 마음이 동한다면 따라 오겠지." 기엘은 로운의 말에 동감했다. 이미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지 오래다. 기엘이 이 남자를 잡는데 시간을 너무 지체 해버린 것이다. "지금부터 서두르면 케슈튼까지는 어떻게든 따라 갈 수 있 을 거야. 카드미엘에 가기 전에 시안을 찾아야 돼." "…………" 어느새 깔끔하게 짐을 챙겨 들고 로운이 기엘을 바라보았 다. "괜찮아 기엘?" 짐을 챙겨들고 있던 로운은 기엘에게서 퍼져 나오는 파장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엘에게 물 었다. 그러나 기엘은 아무 대답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남 자에게 다가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행동. 절대로 시안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줘." "…………" "아시면 굉장히 화를 내실테니까. 아니 두 번다시 날 안보 려하실지도 모르지." "기엘…." 로운은 기엘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직감했다. "너도 못 본 척해 줘. 지금 내 상태로는… 이게 최선이야." 기엘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기엘 그건…." "어쩔 수 없잖아!! 난 오늘 시안님도 찾아내지 못했어!!!" 버럭 기엘이 소리를 질렀다. 안타까움과 자괴감이 섞인 목 소리였다. 그 역시 자신의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최근 들어 더더욱 확실하게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나마 그들이 제 상태를 유지 할 수 있던 것은 모조리 시 안의 힘 때문이었다. 시안은 몰랐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은 남달랐는데다가 그 자신이 바람의 매개체이며 바람 그 자체이기도 했다. 때문 에 로운이나 기엘은 알게 모르게 시안의 영향을 받고 있었 다. 그랬던 것이 지금 시안이 사라지자 마자 급속하게 그들의 감각이 둔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감각이 둔해진다는 것은 곧바로 그들의 능력이 급속하게 약 해져간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기엘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시안의 생사였다. 물론 그들이 시안에게 어떤 큰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 라는 생각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시안에게 무슨 일 이 생길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시안님의 명령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시안님이 존재하 지 않는다면 명령도 존재하지 않는 것.' 기엘은 쓰러져 있는 남자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안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쓰러져 있는 남자의 몸 위에 손을 뻗었다. 그 남자가 바람술사인 것이 천운이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 기로 했다. "…말을 하지 말라고?" "…………" "그렇다면 공범자가 되는 쪽이 좋겠지." "…로운." "공범자가 되면 절대 말을 할 수 없을 것 아니야."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시전해야 할 주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석이 알게 되면 절대 용서할 리가 없겠지만…." 기엘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망설임 따위가 차지할 시간 같 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 조하 아슈레이.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바람의 축복 미슈파트를 얻은자, 미슈파트의 영광에서 아라 페르의 끝으로 이어지리니…." 똑 같은 단어가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긴 주문을 말하는 기엘의 목소리가 순간 떨렸다. "마웨트-차일." "마웨트-차일." 아주 약간의 차이를 두고 마지막 시동어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주문은 서서히 바람으로 화하여 쓰러져 있는 남자 의 몸을 휘돌며 감싸기 시작했다. 내밀어진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었 다. 그 바람은 곧 작은 소용돌이가 되어 쓰러진 남자의 몸을 공 중으로 서서히 들어올렸다. 질끈--- 기엘이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눈앞에서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찢겨져 나갈 것처럼 강한 바람. 그 바람속에 있는 남자의 몸이 바람이 세지면 세질수록 점 점 투명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바람은 그대로 순수한 바람의 엘이 되어 강 하게 소용돌이 치면서 천천히 두 사람의 손가락과 손바닥쪽 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힘과 육체가 순수한 생명력, 순수한 엘 그 자체로 변해 두 사람의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구석 구석 펴져나가는 다른 사람의 생명. 그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느낌이 두 사람의 감각을 마비시켰 다. "뭐해?" "아니…아무것도." 기엘은 정결의 바람을 불러 일으켜 자신들의 흔적을 깨끗하 게 사라지게 한 여관방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그들이 남겨둔 약간의 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 다. 낯선 사람의 흔적 같은 것은 아무데도 찾아볼 수 없다. "마음쓰지마. 잊어버려." "응." 하지만 그는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로운도 마찬가지. 절대 절명의 순간이 아닌 바에야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을 주문이었다. 아니 절대 절명의 순간이 와도 쓰지 말아야 했을 주문이었 을지도 모른다. "기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타악---- 문이 닫혔다. 뚜벅 뚜벅하는 걸음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남은 것은 오직 아무도 없는 방안에 남은 약하디 약한 정결 의 바람뿐. 그 바람은 잠시 방안을 맴돌다가 활짝 열려진 창쪽으로 날 아가며 공기중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쿨럭---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14) 5. 추격 "저어. 기윤님?" "예?" "정말 기엘과 로운, 그리고 이리야가 케슈튼으로 먼저 출발 했나 요?" "물론입니다." 어차피 이미 거짓말의 강에 푸욱 빠진지 오래. 기윤은 딱딱하게 대답했다. 기윤의 대답을 들은 시안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마차 안 에서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있어보았자 눈앞에 들어오는 것은 변하지 않는 마차 천정뿐이다. 조그맣게 나있는 창으로 보이는 광경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안은 불안했다. '무슨 일이 생긴게 틀림이 없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기윤의 말을 진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기엘이나 로운이 자신을 두고 먼저 길을 떠날 리가 없다. 이리야 야 어차피 중간에 끼어든 사람이기에 뭐라고 할 수가 없지만 기 엘과 로운이라면 문제가 틀리다. 적어도 두 사람은 자신을 혼자 두는 일 따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물며 먼저 떠났다는 것은 절대 말이 안된다. '물론 내가 먼저 뛰어나오기는 했지만.' 한번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이라 아무 의심없이 믿어 버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의심없이 따라갔었지만 기윤이 여관이 아니라 시안을 지금 타고 있는 이 마차에 밀어 넣는 순간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하여 아예 자신들이 머물던 마을이 라고 보기는 크고 도시라고 보긴 작은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한 순간 '아뿔싸'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기윤은 자신이 뭐라고 물으면 바로바로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을 한다. 마치 그는 자신은 정말 옳은 일을 하 고 있다라는 표정이다. 그 얼굴에 대고 '당신 거짓말 하는 거 아니야!!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라고 물을 수는 없어서 시안은 그대로 마차 안에 앉아서 골머리를 썩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바보 기사들은 도대체 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마차 속에서 양반다리를 처억-하고 앉아 있는 시안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자신이 이렇게 밤이 깊은 시간까지 돌아가지 않았는데도 태평하게 있을 리가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기엘 쪽은 자신이 뛰어 나오자 마자 따라나왔을 것 임에 틀림이 없을 인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나절 내내 자 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렇게 시안 이 어디론 가 끌려(?)가고 있는 데도 그 머리카락하나 볼 수가 없는 것이 다. '설마 이 사람들이 기엘들한테도 무슨 짓을 한 게 아닐까?' 생각을 하다 말고 시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다고 몇 번이나 시안은 되뇌었다. "이런 인간들한테 잡힐 만큼 호락 호락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들던 하셰카도 모조리 처리한 인간들이다. 적어도 시안의 입장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일당백의 능력을 가진 최고의 실력자들. "아! 그렇지!!" 기엘과 로운이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던 시안은 순간 번쩍하고 떠 오른 생각에 무릎을 타악-쳤다. "아, 아야야. 아우 아파라…." 시안은 재빨리 양쪽으로 난 창문을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았다. 몇 명의 기사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중무장을 한 채 굳은 얼굴을 한 채 앞만 보고 가고 있었다. '좋아. 이봐. 케인. 들려?' 밖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시안은 머릿속으로 세나케인을 불 렀다. 「물론.」 '젠장. 듣고 있으면서 왜 모른척했어? 난 몰랐잖아!' 「별로 네게 위해를 가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저들중 어느 누 구도 특별히 네게 살기를 품고 있지는 않아.」 '그래도 그렇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무슨 상관이야? 여차하면 튀면 되는데.」 '그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참나. 여하튼 넌 믿을게 못돼. 지난번에도 아무소리 없이 봉인인지 뭔지를 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잖아.' 「몰랐다고 했잖아.」 '너도 모르는게 있어?' 「인간에 대해서라면….」 '아니 되었으니까 기엘이나 로운에게 어떻게 연락 할 방법 없어 ?' 「물론 있지.」 '그럼 빨리 해봐.' 「쓸데없는 주문이나 걸어서 참나….」 '쓸데없는 주문이라니?' 「가만히 있어.」 퉁명하게 들려오는 세나케인의 목소리에 시안은 움찔하면서 몸을 굳혔다. 왠지 화를 낼 상대는 자기였는데 상황이 묘하게 역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최대한 긴장을 풀어. 쓸데없이 왜 주문을 이중 삼중으로 걸어 놓은거야. 나도 움직이기 피곤하게.」 '기엘이 그렇게 하라고 하는거 들었잖아.' 「새겨들어 좀.」 '쳇.'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엇인가 시안의 몸 속에서 작은 폭발 비 슷한 것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아주 작아서 짧은 시안의 머리카 락이 아주 잠시 한순간 휘날리는 정도였다. '지금 뭐…한 거야?' 시안은 갑자기 가뿐해진 몸을 이리저리 몇 번 뒤흔들었다. 「속박을 풀었을 뿐이야. 이중 삼중으로 해 놓았으니 몸이 이상 할 수 밖에. 방법은 알고 있을테니 해봐.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 '주문은?' 「넌 내가 주문 같은 것 쓰는 거 본적 있냐?」 '하지만….' 「입다물고 해봐. 도와줄테니까.」 시안은 세나케인이 도통 어떻게 하라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 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그에게 다시 세나케인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눈을 떠.」 감각이 달라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가 다음 순간 눈앞에 확트인 공간이 나 타났다. '에?' 「흐름을 느끼는 거다. 돌아온 길을 그대로 더듬어 올라가서 그 들을 찾아라. 익숙한 느낌을 잡아내는 거야. 넌 할 수 있어.」 '말은 쉽지만….' 휴우-하고 세나케인이 한숨을 내쉬는 듯한 느낌이 났다. 「바람은 네 모든 것이다. 감각으로 느끼라는 것도 그저 말로 표 현한 것 뿐이다. 바람 자체가 네 감각이다. 그걸 깨달으면 돼.」 하늘거리는 머리카락도 얕은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도, 처음에 는 느껴졌지만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확트인 시야. 하지만 작은 구릉들과 숲만이 간간히 보일뿐. 자신 이 떠나온 마을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얼마나 멀리 온 거지?' 어둠속인데도 모든 것이 환하게 보였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응?' 혼이 빠져나간듯한 시안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이리야?' 멀리 검은 기운에 섞여 물의 느낌이 전해져왔다. '이리야다, 돌아오고 있구나.' 하지만 그의 뒤를 쫓아오는 기운은 심상치가 않았다. 시안도 그 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하리만치 새카만 살기. '도와 줄 수 있을까? 케인?' 「네 입장이나 생각해.」 '하지만 그래도….' 시안은 좀더 이리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고 맘을 먹자마자 더더욱 생생하게 이리 야의 느낌이 전해져왔다. '다쳤어. 그것도 아주 많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모든 상황이 시안의 머릿속 으로 파고 들었다.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이리야는 필사적으로 말등에 매달려 있었다. 다른 상처는 없어보였는데도 이상하게 시안은 이리야가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야는 무언가 주문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 았다. 사방에서 솟아오른 작은 물방울들이 이리야쪽으로 수도없이 몰려 드는 광경이 시안에게 보였다. 시안은 소리쳤다. '케인!' 「후우. 할 수 없군. 좋아. 그냥 두고 갈 것 같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이상태로 네 힘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까 너무 무리하면 안 돼.」 '무리를 하려고 해도 어떻게 하는 줄도 몰라!' 「네 힘을 저 친구한테 준다고 생각해봐.」 '하지만 난 바람술사고 이리야는 물의 술사인데 불가능하잖아.' 도와준다고 했을 때 시안은 미메이라에 있었을 때처럼 회오리 바 람이라도 만들어내서 뒤에서 쫓아오는 검은 기운을 밀어 버리려 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과는 전혀 다른 소리를 세나케인이 하자 어리둥절했다. 「엘은 모두 다르면서도 같은 것. 어서 빨리!! 시간이 없어.」 시안의 눈에도 물방울들이 붉게 물들어가며 작은 물고기로 변하 는 모습이 보였다. '…에, 아. 알았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안은 손을 앞을 모았다. 아니 모은다 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했는지도 몰랐지만 시안은 자연스럽게 손을 앞으로 모 았다가 앞으로 뻗었다. 자신의 힘이 이리야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 "되살아났어. 느꼈어 로운?" "물론. 가자!!!!" 힘껏 박차를 가하면서 로운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기엘도 뒤질세라 로운의 뒤를 따라붙었다.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케슈튼 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따라서 미친 듯이 말 을 달리고 있던 두 사람은 순간 시안의 파장이 생생하게 밀려오 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막혀있던 둑이 터진 것처럼 강하고 힘차게 밀려왔다. 바람을 따라 전해진 시안의 흔적.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할 사이도 없이 말을 달리고 또 달렸다. "크흑---." 붉은 피가 혈관을 따라 역류한다. '독이 남아 있었나.' 급하게 응급처치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젠장!!! 지독하게도 따라오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목적지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벌써 말을 달린지 한참이다. "크. 쿨럭--." 뒤를 돌아다보기 위해 잠깐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울컥하면서 목 구멍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나왔다. 흩날리는 갈기에 새빨간 핏방울이 한두방을 스며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독이 온 몸을 돌기 시 작했다는 소리다. '멀지 않았는데….' 필사의 힘을 그러모아 자신의 몸과 말을 감싸고 있던 쉴드가 점 점 엷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리야는 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리야는 달리고 있었다. 적어도 로운이나 기엘이 있는 곳, 아니 시안이 있는 곳 가까이라 도 가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려지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뜨면서 이리야는 젖먹던 힘까 지 짜냈다.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힘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고 있었다. "류. 타인 아슈레이. 물의 이름 나유의 근원과 흐름. 생명을 유 지하는 모든 라하트여…." 이리야의 입에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주문이 흘러나오 자 그가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모든 대지와 바람에 섞여있던 습기들이 몽글 몽글 뭉쳐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쏴아아--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이리야와 말을 둘러싸고 있 던 쉴드마져 이리야의 뒤를 따르던 작은 물방울쪽으로 흡수되었 다. "…엘-다그(물고기)…." 붉은 피와 함께 이리야의 입에서 첫 번째 시동어가 흘러나왔다. 피의 진홍빛 향과 함께, 이리야의 뒤를 따르던 무수한 물방울들 이 하나씩 둘씩 투명한 물고기 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에드(calamity)." 마지막 시동어는 그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단어. 재난을 알리는 나유어가 물로 이루어진 작은 물고기때로 흘러드 는 순간 수를 셀수 없는 꼬리들이 파르르 흔들렸다. '이것으로 끝이야….' 간신히 다잡고 있던 정신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쿠르르르르르------ 그의 뒤에서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수없이 많은 물고기 하나하나가 거센 폭포수와 같은 힘으로 그를 뒤쫓아 오던 자들을 덥쳤다. "…크흑!!" 말 고삐를 잡고 있던 손에서 그의 엘과 함께 모든 힘이 빠져나가 기 시작했다. 아니 온 몸에서 힘이 썰물빠지듯이 순식간에 빠져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누구…?'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너무 나 익숙한 시선. 그 시선의 끝에서 작은 기원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야….' '시안? 설마.' '이리야.' 뒤쪽에서는 계속 폭음이 들려왔다. 그 폭음이 들려 올 때마다 그의 신경이 조금씩 마비되어 갔다. 이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바람을 타고 오는 시안의 목소리가 들리 는 쪽으로 떨리는 손을 천천히 치켜올렸다. 그의 손 끝에 청량한 감촉의 바람이 닿았다. 휘리리릭하는 바람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손가락 끝으로 밀려온 회오리바람이 그의 팔을 타고 순식간에 올 라와 그의 몸을 감쌌다. 실날 같은 바람이 그의 몸을 바늘처럼 파고 들었다. '시안-----!' 생생하게 온 몸으로 스며드는 순수한 엘. 콰르르르, 콰앙---!! 콰아앙! 날라드는 돌조각도, 풀잎도, 그리고 알지못하는 어느 누군가의 핏방울, 그 어느하나도 이리야의 몸을 침범하지 못했다. 이리야의 몸은 순수한 힘이 실린 엘의 바람에 감싸여 살아나기 시작했다. '시안….' 몸 구석 구석에서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나는 느낌이 전해져왔 다. "하앗---!!!" 이리야의 손이 놓쳤던 말고삐를 다시 굳게 잡았다. '고맙다. 시안.' 어떻게 된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절대 절명의 순간 시안이 어떤 방법 을 통해 그를 구원했다는 것 뿐이다. 힐끗 뒤돌아본 뒤쪽은 그의 공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있었다. "네가 도와 주었으니까 설마 타박하지는 않겠지?" 아무도 듣는 것 같지 않았지만 이리야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달려!!! 죽을 뻔 한 것을 살려주었잖아!" 그는 타고 있던 말의 엉덩이를 힘껏 때렸다. 히이잉-하는 말울음 소리와 함께 그가 더욱 힘차기 달리기 시작 했다. "이건…?" 정신없이 말을 달리던 기엘이 문득 전해져오는 이상한 파장에 고 개를 돌렸다. "워어어----!" 급하게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면서 말이 멈추어 섰다. "로운!!" 로운도 그것을 느꼈는지 어느새 말을 멈추고 기엘에게 다가왔다. "방향이 틀려. 분명히 시안님이 계신 쪽은 이쪽인데." "하지만 뭔가 느낌이 좀 이상한게…." "어떻게 된 거지?" 시안의 기척이 전해져오는 방향은 분명 케슈튼 성이 있는 방향인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전 아주 반짝하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시안의 힘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동시에 피부에 닿을 것처럼 느 낄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이었다. 그들이 잠시 갈등하고 있는데 바로 그 문제의 방향에서 화악--- 하고 바람이 밀려왔다. "우웃--." 펄럭이는 망토를 붙잡아 얼굴을 가리려는 순간, 기엘과 로운의 귀에 목소리와 같은 것이 들려왔다. '기엘, 로운.' "시안님?!!" '멀지 않…은 곳에 이리야가 있…어. 다쳤으니까….' "시안님!!! 도대체 이게!!" 들려 오는 것은 시안의 목소리였지만 시안은 기엘의 목소리를 듣 지 못하는 것 같았다. "꼬마!! 들리는 거냐? 어디냐!!" '이리야의 상태가 좋지 않은, 않은 것 같아서… 만나서 찾으… 러.' 시안의 목소리는 순간 순간 끊어졌다가 다시 들려왔다. '목적…지는 케…슈튼…. 날 찾으러……와.' 마지막 소리는 바람소리에 휘말려 잘 들리지 않았다. 기엘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시안의 목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시안님!!" "시안--!!!" 두 남자의 목소리만이 아무도 없는 공허한 대로 위에 퍼져나갔 다. "젠장!! 무슨 일이 생긴 거야!!" "…………." 챙하고 기엘이 집어던진 라이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운은 그런 기엘에게 아무말 하지 않고 말에서 내려 기엘이 집 어던진 라이트를 다시 들어올렸다. "가자. 기엘. 이젠 확실해졌으니까…." 로운이 내미는 라이트를 다시 받아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 기엘에 게 로운이 다시 말했다. "이리야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했으니 일단은 그를 찾아서 가 자구.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 데…." "네가 찾아와. 난 먼저 케슈튼으로 가겠어." 거친 손놀림으로 로운이 건내주는 라이트를 다시 받아든 기엘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기엘!!" "시끄러." "정신차려!!! 네 녀석이 그렇게 바라는 녀석이 말한거잖아." "………." "이리야를 찾아서. 그 다음에 케슈튼으로 간다. 문제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시안은 안전할꺼야. 제국이 엘러를 원해서 시안을 데려간 것이라면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거야. 알겠어?" 기엘은 힐끔 로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로운은 그런 기엘을 바라보면서 짜증이 난다는 듯이 말했다. "얌전한 녀석이 화가 나면 무섭다더니. 젠장…. 그 성질 좀 고쳐 !!" "미안하다." "시안이 이런 네 모습을 보면 기절 초풍 할거다." "…그렇겠지." "그렇겠지는 뭐가 그렇겠지야. 젠장." 훌쩍, 로운이 다시 말위로 뛰어 올랐다. "감이 온다. 이리야가 있는 곳, 그렇게 멀지는 않은 곳이야. 합 류하는데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다급해하지 마." "알았어." 기엘은 두터운 장갑을 끼고 있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힘껏 쳤 다. 짝-하는 소리가 나고 기엘은 얼굴을 좌우로 몇 번이나 흔들었다. 머리를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하자고 그는 생각했다. 위험하지 않다. 아직은 위험하지 않다고 시안님은 절대 위험하지 않다고 그는 자기 자신을 세뇌했다. 그렇게 세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고 폭발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가 알아? 기껏 찾아냈더니 등따시고 배부르게 먹고 저번처럼 넋놓고 좋아하면서 제국의 엘러가 되겠다고 할지?" "………" 기엘이 무섭게 로운을 노려보자 로운은 머쓱한 표정을 짖고 말았 다. "알았어. 농담도 못하겠군. 미안." 로운이 깨끗하게 사과를 하자 기엘이 한숨을 파악 내쉬었다. "다행이야. 이리야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 것 같아. 너도 느껴 지지." "응." 짧게 대답하고 기엘은 말고삐를 당겼다. 이대로라면 조금만 방향을 틀어 가다보면 이리야와 마주칠 것이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먼저 가지마. 임마!!" 기엘의 뒤를 로운이 따라오면서 소리쳤다. "시끄러!! 빨리 따라와!!" "임마!! 기엘!!!" 풀뿌리가 말굽에 걸려 하늘로 날아 올랐다. 기엘과 로운은 그렇게 이리야를 찾아서 출발했다. 계속., 머리가 머엉 합니다. 웬지...저 기엘 녀석이 미쳐가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서 스스로도 쓰면서 흠칫 흠칫하고 놀라고 있는 중이랄까요...쿨럭. ....시안을 만나면 좀 제정신으로 돌아가려나...하고 기대중입니 다. 후우---- ...여하튼 계속됩니다. 고지는 저기다!! 아자아자!! (...시간이 없어..그냥장 퍼억--하고 올렸습니다. 다소의 오타.....는 너그럽게 봐주시길..) uin이었습니다.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우당탕--쿵. "으윽--." 시안은 아픈 머리를 감싸안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눈이 핑핑 돌아버릴 정도로 빠른 속 도로 움직이다가 찾아낸 기엘과 로운. 그들에게 말을 전하다 말고 순식간에 다시 그의 원래 몸으로 돌 아온 시안은 돌아오는 순간 그만 깜빡 정신을 잃고 흔들리는 마 차 안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아야야…." 쿠웅--하고 마차가 움직이자 다시 시안의 몸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혔다. "큭!!" 움직이고 싶었지만 왠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온 몸이 나른했다. "뭐…야 이건."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시끄러워…" "시안님?" 마차 밖에서 기윤이 쿠당탕 소리가 들려오자 이상하게 생각해서 시안을 불렀다. 마차 바닥에 얼굴을 쳐박은 꼴사나운 폼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 은 없었지만 시안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내가…말했지 무리고 뭐고 뭐가 뭔지 모른다구…." 그 말을 끝으로 시안은 의식을 잃었다. "시안님!!" 기윤은 혹시나 싶어서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가 그만 사색이 되어 버렸다. "멈춰!!" 기윤은 팔을 들어서 마차를 멈추게 했다. 초반에 마차에 태웠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였는데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시안의 얼굴색은 말이 아니었다. 새하얗게 변해 버린 시안의 얼굴을 보고 기윤은 급하게 마차 안 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안님!! 시안님 정신 차리십시오!!" 설마 마차가 몇 번 흔들렸다고 이렇게 될리는 없다. 문득 기윤은 시안을 따르고 있는 그 남자들이 시안의 몸 상태를 굉장히 걱정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뭔가 역시 지병이 있는 건가?"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들 일행에는 의사가 있을 리가 없다. 기윤은 정신을 잃은 시안을 안고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그 들이 있는 곳은 이제 케슈튼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 약간만 무 리를 한다면 오늘 새벽쯤에는 하마임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기윤은 마차 안에서 시안을 안아 내렸다. "마차는 여기에 버리고 간다." 그렇지 않아도 마차로도 더 이상은 힘들 정도로 속도를 내왔다. 하지만 마차로는 더 이상의 속도를 내는 것은 무리기에 기윤은 그렇게 결정을 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정신을 잃은 시안을 말에 태운 기윤은 그녀(?)를 단 단히 자신의 몸에 묶었다. 그는 두터운 망토로 시안의 몸을 둘러 감쌌다. 시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앝은 숨이 뜨겁게 느껴졌다. '상태가 나쁘군.' 그렇지 않아도 거짓말을 해서 그녀를 이렇게 무단으로 거의 납 치하다시피한 사실에 기윤은 상당히 힘들어 하고 있었다. 비록 명령이라고는 하나 지금까지 나름대로는 기사라는 이름에 명예를 걸고 행동해왔던 그였다. '아니.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자. 일단 지금은 내게 주어진 주 군의 임무를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았다. '나머지는…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 시안은 하늘을 나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되어서 넓은 대륙위를 시원하네 나르고 있었다. '기분 좋군.'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마치 작은 풀처럼 보이는 숲들도 재 미있기만 했다. '으음. 저거는 마쉬멜로우처럼 보이는데….' 먹어본적은 없지만 맛있게 생긴 구름하나가 지나갔다. 입맛을 쩝쩝다시면서 다시 하늘을 나르고 있는데 조그만 물고기 들이 한 마리 두 마리씩 그의 옆에 나타났다. '안녕?' '아…안녕?' 투명해서 건너편이 다 보이는 물고기가 인사를 건내왔다. '안녕? 안녕? 안녕?' '그, 그래 안녕?' 갑자기 시안의 주위에 한가득 물고기들이 빽빽하게 나타났다. 하늘을 나르던 시안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물고기들에 둘러쌓여 서 어쩔 줄 몰랐다.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물고기들의 눈이 새빨게 지기 시작했다. 새빨게 진 눈에서 핏빛의 향내가 풍겨나왔다. '고마워? 뭐가?'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가득 들어찬 물고기들이 입을 뻐금거리면서 말을 했다. '뭐, 뭐야. 너희들은?' '고마워.' 물고기들이 점점 커졌다. '뭐가 고맙냐니까!!' '고마워.'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앞에 검은 구름이 나타난 것을 보고 시안은 몸을 돌리려고 했 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버둥거려도 피할 수가 없었다. 검은 구름은 자꾸만 커지더니 커다란 사람모양으로 변하기 시작 했다. '우, 우욱---.' 기분나쁘게 자꾸만 부풀어가는 검은 구름이 흉악한 웃음을 씨익 지어보이더니 시안쪽으로 다가왔다. '오. 오지마!!!!!' '기분나빠?' 물고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기분나빠!!' '우리가 죽여 줄게.' '우리가 죽여 줄게.' '우리가 죽여 줄게.' 합창을 하는 것처럼 일제히 물고기들이 중얼 거리가 시작했다. '뭐?' 그리고 시안이 채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시안의 주위에 가득 들 어 찼던 물고기들이 일제히 머리를 검은 구름을 향해 돌리고 돌 진했다. 펑하고 소리가 나면서 물고기 한 마리가 터지자 검은 구름에 구 멍이 생겼다. '뭐, 뭐하는거야 너희들!!' '기분 나쁘잖아. 우리가 죽여줄게. 없어질거야.' '아. 안 돼!!' 또 한마리가 펑하고 터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수만마리의 물고기들이 한번에 몰려가서 굉음을 내면서 폭발해버렸다. 뻥-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검은 구름. 그 검은 구름의 얼굴, 그 눈에서 새빨간색의 눈물이 흘러나왔 다. '아파---.' '하지마!!!' '아파---!' '하지 말라니까!!!!!' 시안이 아무리 소리를 쳐도 물고기들은 자꾸만 그 검은 구름에 돌진해서 펑소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아파-----!!!' '하지마!!!' "헉-----!!" 시안은 숨을 헐떡였다. "헉. 헉. 헉…." 꿈을 꾼 것 같았다. '꾸…꿈이야?' 가슴이 들썩 들썩했다. 시안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내면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긴 어디지?" 좁은 공간이었다. "케인…?" 문득 두려움에 휩싸인 시안이 조용하게 세나케인의 이름을 불렀 다. "케…인?" 「왜?」 "아, 이, 있구나." 세나케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어디야?" 「배 안. 선실이라고 부르는 곳.」 "배?" 「그래?」 "그렇구나 배안이었군. 젠장 기분 나쁜 꿈을 꿨어." 「꿈?」 "내 안에 있으면서도 그런 것도 몰라?" 「나는 잠들지 않으니까.」 메마르게 들려오는 케인의 목소리에 시안은 순간 오싹함을 느꼈 다. 항상 자신의 안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웬지 새삼스럽 게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은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 면 더욱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굉장히 기분 나쁜 꿈이었어. 새카만 어둠 같은 것이 몰려오는 데 이상한 물고기 모양의 것들이 가서 펑펑 터져…서……." 무서운 꿈을 꾼 어린애처럼 시안은 세나케인에게 하소연 비슷한 것을 하려다말고 멈추었다. "터져서…." 시안의 눈앞이 새카매졌다. "터져서……, 그가, 그러니까 이리야가…." 말하면 말할수록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시안은 깨달아갔 다. "이리야가 다쳐서 도와주려고 했던 것인데…." 「그건 꿈이 아니잖아.」 차갑게 들려오는 세나케인의 목소리. 그 순간 시안은 숨이 턱턱 막혀오기 시작했다. 새빨갛게 몰려가던 그 물고기들, 굉음과 비명소리. 시안은 귀를 막았다. "난…난 도와주려 했을 뿐이야." 「네가 죽인게 아니니까. 고민할 필요없다. 그 주문을 시전한 건 그 물의 술사일뿐. 무리한 주문을 사용해서 죽어가던 그의 생명을 구했을 뿐이다.」 세나케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시안에게 설명하고 있었지만 시안 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도와주려 했을 뿐인데…."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생각하고 할 틈 같은 것도 없이 그를 보자마자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에게 힘을 주었다. 그에게 준 힘이 또다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 되었다.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에 미메이라를 떠나기 직전 만났 던 예언자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앞으로 그대에게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 것을 이겨내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난. 난 그런 각오 같은 거 필요 없어!!!!" 왜.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걸까? 시안은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각오 따위 필요 없었단 말이야!!!!" 벌컥---- "시안님?" "내가 한게 아니야----!!" "시안님!!" 기윤은 작은 선실 안에서 시안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 황 급하게 문을 열었다가 시안이 좁은 침대 위에 앉아서 어깨를 부 들 부들 떨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시안님. 괜찮으십니까?" "내가 한게 아니야. 난 도와주려 했을 뿐이야!!" "시안님. 정신을 차려보십시오. 기윤입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 기윤의 목소리 따위는 시안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시안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온 몸으로 느껴지던 이름모를 사람들 의 비명소리와 폭음뿐. 귀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시안의 몸에 기윤이 손을 대는 순간 그의 손가락 에 칼날 같은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아앗!!" 황급하게 시안의 몸에서 손을 떼었지만 새빨간 핏방울 몇 개가 그의 손가락에서 떨어졌다. "아아아-----악!!!" "시안님!"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시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시 안의 움직임이 뚝하고 끊어졌다. "시안…님?" 다시 한번 살며시 조심스럽게 기윤이 시안의 어깨를 만졌다. 아까와 같은 이상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안님?" 기윤이 조금 힘을 주어 시안의 어깨를 미는 순간 시안의 몸은 마치 인형처럼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게 그 엘러의 힘이라는 건가?' 기윤은 혼절한 시안을 다시 좁은 침대 위에 뉘어놓고 갑판으로 나와있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해줄 수도 없었기에 기윤의 마음은 착찹하기만 했다. 차라리 무엇인가라도 해줄 수 있었다면 이렇게 까지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무 력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말을 달려서 도착한 하마임 강에 배를 띄운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대로 바람이 분다면 아마도 내일 오전안에 케 슈튼 성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대하 나하르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지류라고 할 수 있는 하 마임강은 이렇게 정기연락선을 띄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강 이다. 나름대로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는 배 위에서 기윤 은 갈갈이 찢겨진 자신의 손을 보면서 한숨을 내어 쉬고 있었 다. 엘러라고 해도 사실 엘러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리 없었 던 그였다. 하지만 조금 전 왠지 제정신이 아닌 듯한 시안에게 다가갔다가 그는 이렇게 피를 본 것이다. 여리디 여려 보이는 시안이 이런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게다가 그녀의 상태가 시시각각으로 안 좋아지는 것을 지금 계 속 지켜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한 것이다. 단지 자신은 명령을 받은대로 행동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나름 대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안을 볼 때마다 자꾸만 마음이 약해 질 뿐만 아니라 왠지 가치관까지 흔들려 버린다. "난감해. 너무 난감해…." 차라리 견습생들과 거칠게 들판이나 누비거나 아니면 변방에서 야만족이라 일컬어 지는 나칸들과 싸우는 쪽이 그에게는 훨씬 마음이 편한 일이라는 생각마져 들었다. 27년을 살아 오면서 자신이 기사가 된 것이나 또는 기사라는 자 신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가져 본 적은 없다. 자신을 거두어준 숙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 해왔다. 숙부를 위해 자신의 모든 명예와 생명을 걸 수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는…. '이런 일을 하는게 과연 기사의 명예에 합당한 것일까?' 자신은 웬지 죽어도 로열 가드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로열 가드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거부할 것이라는 생각마져 들었던 것이다. "하아----." 고요하지만 빠르게 흐르는 강물. 그 강물에 그의 한숨이 함께 흘러갔다. ◇◆◇ "현재 케슈튼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곧 카드미엘까지 이송할 예 정이라고 하더군요." "케슈튼에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있던가?" "제가 알기론 이동 마법까지 구사 할 수 있는 마법사는 케슈튼 에 없습니다. 보낼까요?" "그렇게 하도록 해. 궁정 마법사 중에서 이동 마법을 쓸 수 있 는 자가 두명정도 있을 것이다. 내 부탁이라고 해서 잠시 다녀 오라고 해줘." "네." 막 전해진 보고를 받은 로렌황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메이라인이 이제 공 자신의 성이 될 이 카드미엘에 오는 것은 어린 시절 큰 형님의 결혼식 이후로는 처음이다. "미녀라고 했는데 기왕이면 내 취향이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는 나름대로 미메이라인의 피에도 흥미가 있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그들의 능력은 혈통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았 다. 새롭게 미메이라의 수장이 된 신 수장이 여성이라는 것도 그의 관심을 끌었다. "차라리 수장이 남자고 그에게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야. 안그런가?" "신국인과 혼인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때까지 조용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가 불쑥 로렌황자 에게 말했다. 그는 로렌황자의 심복인 미타남작으로 일찍부터 로렌황자의 오 른팔로 일해왔던 남자였다. "뭐 괜찮지 않을까? 국혼으로 마법사의 힘을 능가하는 신국인들 로 구성된 부대같은 것이 혼수로 달려온다면 말이야." "역사 이래 신국과 국혼이 이루어졌던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 다. 폐하." "아아. 그 칭호는 아직 이르다고 했잖아. 아직은 황제페하께서 건재하시니까 말이야." "죄송합니다. 전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렌황자는 그리 기분나빠하지는 않았다. 실제 그의 아버지인 라이너드 7세는 병석에 누운지 오래로 현재 의 국정은 모두 그가 도맡아하고 있는 실정이다. 말이 황태자이 지 황제와 다름 없는 것이다. "단 한번도 없었다면 처음이 되면 되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 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만 신국을 그렇게 호락 호락하게 보시면 곤란합니다." 미타남작은 자신보다 9살 아래인 이 혈기 왕성한 황태자를 보면 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로렌 황태자는 호색한이었던 몇몇 형들과는 달리 아직까지 약혼 자도 없었고 구설수에 오르는 영양도 없었고, 심지어는 애첨 하 나 없었다. 그런 황태자에게 남색가가 아니냐는 소문조차 돌지 않았던 이유는 오로지 그의 관심이 완전히 다른쪽에 쏠려 있다 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황태자가 선택할만한 황비의 재목은 결국 그의 황권을 더 욱 강화시켜줄 수 있을 만한 확실한 세력가의 딸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그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은 힘들었다가 아니라 불가능했다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신국인을 황비로 들인다면 다른 귀족들의 반대가 극심할 것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한 장 혼기에 있는 딸들을 가지고 있을만한 몇 몇 중앙 귀족들이나 제후들은 아마도 대놓고 반대를 해버릴지도 모른다. "이봐. 카스핀. 난 아직 신국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소리 는 안 했어. 단지 그러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을 뿐이라구." "죄송합니다. 전하."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미타남작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 다. "카스핀." "예." "불가능이라는 것은 말이야 해보지도 않고서 입에 올릴만한 단 어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 "불가능했다면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지. 아무도 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처음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야." "전하." "난 처음이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해.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 록 그건 더 더욱 가치가 생기지." 저 젊은 황태자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미타남작은 활짝 웃음을 짖고 있는 황태자의 얼굴을 보면서 고 민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랄 만큼 진보적인가 하면 한순간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 를 보인다. 또한 너무 유하다 싶을 때도 있고 반대로 더 이상은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할 때도 있었다. 몇 년이나 그의 곁에서 그를 보좌 하고 있었지만 이럴 때면 그 는 로렌황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 었던 것이다. "처음이라는 단어에는 모험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거야. 그 모험이 성공일지 실패일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는 …." "…………" "그래도 처음이라는 단어가 좋네. 비록 실패로 끝날지라도 처음 시도를 해봤다는 자체가 날 아주 즐겁게 하니까 말일세." 사실은 저 황자는 단지 즐거움을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 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즐겁지 않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실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까?" "물론, 즐겁지 않다면 이 세상에 살 가치조차 없는 거야. 의미 가 없는 생은 필요가 없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어딘가 사악함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로렌. 그의 미소를 보면서 미타 남작은 살며시 몸을 떨었다. 그 미소 는 그가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면 당장에라도 그를 내칠 것 같은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 "바람이 케슈튼에 도착했다. 바람은 곧 카드미엘로 불게 된다. 그 전에 일을 처리해야해." "…일의 처리는 좋습니다만. 이렇게까지 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반백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남자에게 의문을 표시했다. "이미 저희가 예상한 피해 이상을 입었습니다. 아무리 하셰카의 명예를 생각한다고 해도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그러니까 처리해야하는 것이야. 이런 일도 처리하지 못한다면 하셰카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걸세." 단호하게 말하는 반백의 남자가 말하자 주위가 침묵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맨 끝자리에 있는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명예를 지킨다고 해도 명예를 지킬 자가 없어진다면 소 용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시도를 마지막으로 그 것의 결과가 어찌되었든 손을 떼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 다." 장로들 중 제일 말석에 있는 자이긴 했지만 모두 그의 말에 조 금은 동감하는 듯, 특별히 이의를 표시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 장로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반백의 남자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이 일은 표결에 붙이도록 하지." 검은색 일색의 사람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이런 것은 필요없어." "하, 하지만…." 시안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벽쪽을 바라 본 채 말을 하고 있 었다. "하지만, 일단 지금 입고 계신 옷은 너무…." "필요없다고 했어. 나가." "아가씨." "입 닥치고 나가란 말이야. 내 말이 안 들려?" 말은 험했지만 시안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 았다.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말고 하녀 둘은 결국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시안은 침대가에 앉아있다가 하녀들이 나가자 주르륵 침대에서 미끌어져 내려갔다. "젠장." 가만히 앉아있어도 짜증이 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것은 지독한 자기 혐오. 그런 시안에게 세나케인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렇게 의기 소침할 필요는 없어. 왜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 이 있다고 생각하지? 더군다나 넌 의도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네가 한 일도 아니다.」 "너도 시끄러워. 그리고 머리 아프니까 머릿속에서 웅웅 대지마 !" 「……………」 시안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한 장면만이 되풀이되어 돌아가 고 있었다. 핏빛의 물고기들과 사방 팔방으로 튀어나오는 조각들. 귀를 찌르는 비명소리와 폭음. 그것이 반복되어 돌아가면 갈수록 시안의 기분은 끊임없이 가라 앉고 있었다. "재미있군. 어째서 저들은 널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걸까 ?" 어느새 세나케인이 실체화 되어 나타나 침대위에 늘어놓은 옷가 지 하나를 집어들며 말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 침대가에 앉았다. 끼익--하고 약한 소리가 났다. 시안은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갑자기 세나케인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 "인간들이란 정말 이상해. 어째서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 는 걸까? 아니 들어보기도 전에 자기들 멋대로 판단하는 거지?" "…………" "너도 마찬가지야. 다른 사람, 아니 난 사람이라고 하기는 그렇 군. 왜 내 말은 듣지 않고 혼자 멋대로 판단하는 거지?" "…………" "조금쯤은 다른 말도 들어주어야 할텐데 말이야." "내가 알게 뭐야." "하기사 인간들은 언제나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 나와 함께 시 간을 보냈던 그 인간도 그랬었지." '오래 전? 인간?' 문득 들려온 세나케인의 푸념과도 같은 말에 시안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그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었어. 결국은 난 그를 잃었지. 아 니 그가 날 잃은 것일지도 몰라." "무슨…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내가 훨씬 오랜 시간을 보고, 느끼고, 또 표현이 맞다면 살아 왔다라는 의미겠지." 시안은 세나케인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도통 감이 잡 히지 않았다. 단지 그가 알수 있는 것은 세나케인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서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는 것 뿐. "늙은이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난 원래 이래. 그리고 냅두면 알아서 회복되니까 좀 우울해하게 냅둬도 되잖아. 아무리 내가 별 생각없이 사는 인간이라고 해도 나도 '고민'이라는 것 정도 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단 말이야." "뭐. 인간이니까 하는 고민이겠지."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바람처럼 들려왔다. "맞아. 고민이라는 것도 할 수 있을 때 해두는 게 좋아. 너무 머리가 굳으면 고민따위는 못할테니까." 순간 시안의 몸이 부웅-하고 공중으로 떴다. "뭐, 뭐야아!!" 공중에서 시안은 몸을 지탱할 곳이 없어 버둥 버둥 댔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푹신한 침대에 그대로 떨어졌다. "우앗!! 뭐- 뭐하는 거야!! 케인!!" "자." "뭐어---?"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좀 자둬." "왜?" "넌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네 기사들이 올 때까지 체력 을 길러두어야지. 그들이 오면 정신없이 도망을 가야할텐데 그 들의 짐이 돼서는 안되지." 휘리리릭하고 얇은 시트가 바람에 휘날리다가 춤을 추듯이 흔들 리면서 시안의 몸 위로 내려왔다. "네가 지금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다시 힘을 쓸 수 있도록 쉬 는 일이야. 알았어?" "…………" "그럼. 잘 자라구. 정신없는 바람의 주인씨." "정신이 없기는 뭐가 없어." 살랑. 이마 언저리로 내려왔던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따스한 바 람에 말려 올라간다. "그럼 있나?" "당연 있…." 시안은 채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세나케인이 수면을 유도하는 바람을 만들어 불게 했다는 것을 시안은 눈치채지 못했다. 시안이 눈을 감자 마자 세나케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스르륵---그의 몸이 점점 투명하게 변하더니 사방으로 퍼져나갔 다. 「네가 잠을 자야. 나도 쉴 수 있으니까. 나의 주인님.」 시안의 뺨을 스치는 바람이 마치 미소를 짖고 있는 듯 했다. "어서오십시오. 요하엘의 기윤 제나이드 슈히튼이라합니다." 기윤은 가슴 앞에 검은 받들어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하유르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백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는 기윤과 인사를 나눈 후 기윤의 뒤에 있는 풍채가 좋은 남 자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잘 오셨소. 이런 일에까지 일일이 손을 쓰시다니 뜻밖입니다." "저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남자는 케슈튼의 영주였다. 황태자의 칙명이라는 이유로 협조는 하고 있었지만 그는 사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지금 자신의 성에 조금 전 도착한 하유르라는 이름의 마법사가 상당히 불쾌했다. 물론 자신의 성에 궁정 마법사 같은 마스터급에 속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 서 직접 궁정 마법사가 자신의 성에 왔다는 사실이 기분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그들을 상대하는 것조차 짜증이 났다. "아무튼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쉬시고 내일 출발하시죠. 늦은 시간이라 저는 이만." 누가 봐도 상당히 불쾌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만 큼,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계속 3장도 막바지로 접어는 군요. 휴우...... 머엉..합니다. 머리속에 있는 것을 마구 끄집어 내는 느낌이랄까요? ^^;;;; 하하하하하 마감하고 나면 왠지 머리속이 텅 비어 버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뭐 어찌되었든 간에. 안녕히 주무십시오. (이 글을 쓴 시간이 오전 5시 48분이라...쿨럭)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16) "여기서 정기 연락선을 타시고 가시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 니다." "어떻게 할까? 기엘?" "그게 가장 빠르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다음 연락선은 언제 출발합니까?" "내일 아침입니다." 남자의 대답을 듣자마자 기엘이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 이봐 기엘!!! 어디가는 거야?" "내일 아침 까지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다는 거야? 차라리 다른 배를 수배해서 타고 가든가 해야할 것 아니야." 차갑게 내뱉는 기엘. 그런 기엘의 뒤를 로운과 이리야가 허둥 지둥하면서 쫓아갔 다. "이 늦은 시간에는 불가능해. 기엘. 차라리 오늘은 연락선 이 올때까지 좀 휴식을 취하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구. " 로운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기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기엘을 보면서 로운은 짜증을 낼 수도 없어서 속만 끓 였다. 기엘은 평소에는 절대로 감정적이 되지 않는다. 자신 보다 도 더욱. 모르는 사람은 기엘이 기사치고는 너무나 유한 성 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라 고 해도 기엘이 그 부드러운 인상 뒤에 이렇게나 막무가네 식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기엘보다는 오히려 성격이 급하고 제멋대로 보이는 것은 로 운쪽. 실제 평소 행동은 그렇지만 로운은 일이 꼬이면 꼬일 수록 더더욱 차갑게 가라앉는 성격인 반면 기엘은 일단 한 번 뭔가 어긋 나기 시작해서 고집을 부리게 되면 그것이 해 결되기 전에는 절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로운은 지금 기엘의 이런 모습을 그를 알게 된 후 딱 두 번 째로 보고 있었다. 한번은 그가 신관이 되겠다고 했었을 때다. 기엘이 시안을 그만큼 믿고 따르고, 그리고 그를 소중히 여 긴다는 것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물론 표현은 안 했지만 자신도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시안을 인정하고 있기는 하 다. 혹 시안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대체 기엘이 어 떻게 반응할지 로운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빠지면 곤란해. 아무리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했다고 해도. 그 녀석은 언젠가 떠날 녀석이니….' 그렇게 생각은 해도 기엘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로운은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뒤헝클었다. "젠장. 정말이지 피곤하군." "이리야씨. 어떻게 안될까요?" "뭐가?" 이리야는 불쑥 기엘이 자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 다. "물의 술사이니. 이 밤중이라고 해도 우리들 세명정도는 어 떻게 안될까 하고 묻는 중입니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일단은…." 이리야는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은 나도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아서 말이야." "처음에 저보다 더욱 서두른 분은 이리야씨였던 것으로 기 억 합니다만?" 싸늘한 기엘의 은회색 눈이 자신을 쳐다본다. 그 눈빛에 이리야는 섬칫한 느낌을 받았다. "무, 물론 그렇지만." 이리야는 왠지 추궁을 당하는 듯한 느낌에 로운에게 도움의 눈길을 요청했지만 로운은 왠지 저런 기엘에게 아주 익숙해 져 있는 듯했다. 아니면 사실은 질려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는 생각했다. 사실 반 죽음 상태에서 간신히 살아나 이들과 극적으로 만 났을 때는 정말 하늘이 장밋빛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시안을 만나게 되면 정말이지 삼일 밤낮쯤은 시안이 해달라 는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었던 심정의 그에게 시안이 납치 되었다는 소식은 정말 청천벽력 같았었다. 그런 사정이 있는데도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는 사 실에 이리야는 더욱 감동을 했었다. 그래서 기엘 보다도 훨 씬 미친 듯이 말을 달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피곤한 것은 피곤한 것이고 로운의 추측대로 그들이 시안에게 특정한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면 잠깐, 아주 잠깐쯤은 피곤한 몸을 쉬게 하고 싶었다. 이리야는 기엘의 눈을 피해서 로운에게 살짝 귓속말을 했 다. "그런데 말이야. 저 기사양반은 원래 저래?"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특수 상황이나 보니까. " "저 기사양반 친구인 자네도 불쌍하구만." "…………." "살짝 뒤로 돌아가서 뒤통수를 파악-쳐서 기절 시키면 안될 까? 그래서 그김에 내쳐자면…." 사실 이리야의 눈에도 기엘이 제 정신은 아닌 상태로 보이 고 있는 것은 사실. "그랬다가는 녀석이 깨어났을 때 누가 감당할 건데?" "역시 안 되나. 하아--." "바람 술사는 귀가 밝습니다. 그런 궁리를 할 시간이라면 저는 어떻게 해서든 오늘 밤 내로 이 강을 건널 방법을 찾 겠습니만?" "으으---." 이리야는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이다. "좋아. 좋아. 알았어. 알았다구!! 젠장 요 며칠사이 무슨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배우고도 써먹을 데가 없어서 못 쓰던 주문은 전부 동원하게 되는 군. 참나. 따라와!!" 결국 항복을 한 이리야는 투덜 거리면서 앞장서서 걷기 시 작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불가능 한 것도 아니다. 단지 힘들이 든다는 것이 문제 일뿐. "강 건너고 나서 녹초가 된 날 알아서 끌고 갈 수 있으면 가봐. 아참. 말은 안 돼. 세사람까지야 어떻게든 하겠지만 말까지 건네라고 하면 차라리 이 자리에 그냥 드러누워서 아침까지 기다리겠어." "말이야 다시 구하면 됩니다." "으휴. 대답이나 못하면…." "말을 넘길 곳부터 먼저 찾아야겠군." "참나. 결국 이렇게 되는 군. 그 녀석은 왜 쓸데없이 납치 가 되어 가지고는…." "시안님의 탓이 아닙니다. 이리야씨." "…………." "시안님이 원해서 납치를 당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제 탓입니다. 다아-- 제 탓이죠." 기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자신이 억지를 부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억지를 부 린탓에 다른 두 사람에게 상당한 무리를 주고 있다는 것 역 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도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었다. 이성은 진 정하라고 하지만 그의 감정은 끝임없이 불안에 떨면서 자신 을 궁지로 내몬다. '시안님. 제발 무사하십시오.'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저와 로운이 도착할 때까지 부디….' ◇◆◇ "하아. 하아. 하아." 옷깃 사이로 가쁜 숨이 스며나왔다. 어두움에 감싸인 성벽 위 한구석. 어둠 속이라고 하지만 그 의 눈에는 그가 목표로 하고 있는 장소가 너무나 잘 보였 다. 화르르륵- 그의 손가락에 붉은 기운이 타올랐다. 그는 움찔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순간 타올랐던 불빛 이 사그라들었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에 얼핏 광기가 스쳐지나간다. '조금 더….' 기윤은 피곤한 어깨를 주무르며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 가던 중이었다. 원하던 것은 아니지만 며칠 사이에 요하엘 성을 떠나 이곳 까지 정말 정신없이 달려왔다. 뜻하지 않게 이제 카드미엘 까지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피곤한 그의 몸을 더더욱 눌러왔다. 물론, 내일 아침이 되면 자신은 그대로 요하엘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는 카드미엘 까지는 가고 싶었다 일말의 양심이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데 까지는 시안의 곁에 있으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명령에 따라 야 하는 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난?" 사실은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기윤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다 말고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멈추었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안의 방 쪽 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시안의 방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이런…." 이곳에 도착한 이후 내내 거의 매 시간 그는 시안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늦어도 상당히 늦은 시간이다. '혹…시. 악몽이라도 꾸고 계신 것이 아닐까?' 잠시 그는 갈등했다. 기윤은 살짝 귀를 문에 가져다 대었다. 혹, 시안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곧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다. "…………" 그리 두텁지는 않은 문 안쪽에서는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 았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그는 스스로 조금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피식 웃으면서 걸 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끼익-- '응? 이건 무슨 소리지?' 문득 들려온 아주 미세한 소리. 하지만 그 소리는 뭔가 수 상했다. 그는 발꿈치를 들은 발을 그대로 소리 없이 살짝 바닥에 밀 착 시켰다. 툭--- 어둠 속에서 민감해진 오감이 아주 잠깐 들려온 소리를 감 지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소리였다.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반응하는 것은 소리이외에 그것보다 훨씬 강한, 그의 신경을 침범하는 살기. 시안의 방 문 앞에 서 있던 기윤의 신경이 서서히 팽팽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시안. 일어나라.」 "우웅…." 「일어나!!」 "시끄여어, 자라 때느 어제거(시끄러. 자랄 때는 언제고)." 「일어나. 네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도 힘을 쓸 수 없어.」 "왜 그러는데…." 시안은 단잠을 자고 있는데 자꾸만 세나케인이 구찮게 굴자 눈을 살짝 떴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한 둘이 아니다.」 "에? 그냥 이 성 사람들 아니야?" 시안은 눈을 비볐다. 「너도 느낄 수 있을거다. 잠 투정 부리지 말고 눈을 떠.」 "일 생기면 그냥 네가 알아서 하면 되잖아." 「네가 제 정신이 아니면 내 행동은 그만큼의 제약을 받는 다.」 "허--. 그, 그럼 내가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리면 무, 무방 비라는 소리 아니야?" 시안은 듣던 중 정말 황당한 소리를 들어버렸다는 듯이 입 을 쩍 벌리고 세나케인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세나케인이 있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라고 나름 대로는 속으로 우쭐 하고 있었던 그 였다. 그런데 자신이 쉬고 있으면 행동의 제약을 받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나 싶 은 심정인것이다. "그런게 어디 있어!" 「무방비는 아니야. 단지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적당히 조 절해서 움직이는게 힘들뿐이야. 누가 뭐래든 넌 나와 연결 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쉿. 자는 척 해.」 부스럭 부스럭. 시안은 세나케인이 시키는 데로 이불속으로 파고 들었다.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처음에는 조그맣 게 시작 되었다가 점점 커져서 이제는 시안의 가슴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꿀꺽--하고 침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젠장 자다말고 왠 날벼락이야?'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자 시안에게도 무엇인가 위화감 같 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참 절벽인 창 밖에서부터 전해져오고 있었다. '밖에서 오고 있는 거 맞아?' 「그래.」 '에휴. 난 가지도 별로 없는데 정말 바람 잘 날 없군. 객지 에 나오면 고생이라더니. 왠 생고생이야 맨날.' 「…………」 "아. 세나케인 미리 말해두지만 죽이진 말아. 알았어?" 조금은 밝게 느껴졌던 시안의 목소리에 말로 표현할 수 어 떤 감정의 자락 같은 것이 느껴진다는 것을 세나케인은 깨 달았다. "절대로. 절대로 죽이지 말아." 새빨간 눈이 은색의 달 빛을 받아 기요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깍아지른 절벽 같은 벽을 올려다보았다. 높기는 하지만 못 올라갈 정도는 아니다. 아니 평범한 인간 은 힘들겠지만 그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테론.' 작게 주문을 외우는 순간 그의 몸이 히미하게 붉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붉은 거미처럼 가파른 벽을 기어올라가고 있 었다. 「시안!!!」 세나케인의 다급한 목소리에 시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우-우앗!! 저게 뭐야!!" 시안이 몸을 일으키려는 그 순간 열린 창 밖에서 검붉으스 름한 형체가 갑자기 슈욱- 하고 시안쪽으로 날아들었다. 쾅--!!! "누구냐!!" 기윤이 들이닥친 것과 시안에게 그 형체가 날아든 것은 거 의 동시. 어둠속에서 기윤의 검에 희미한 붉은 빛이 반사되었다. 시안의 앞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가로막고 섰다. "기…기윤." "시안님 몸을 피하십시오!" "어…." 나름대로는 잔뜩 긴장을 해서 기다리고 있던 시안은 갑작스 럽게 기윤이 끼어들자 놀라서 그 자리에서 옴짝 달싹도 하 지 못한 채 얼어붙어버렸다. 웅얼 웅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동 검은 색으로 몸을 둘러싼 사람은 광기어린 눈빛을 뿌 리면서 손을 휘둘렀다. 시뻘건 불덩이가 시안과 기윤의 앞으로 날라들었다. "하앗---!!"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그 불덩어리가 둘로 갈라져 시안 의 눈앞에서 폭발했다. "으악!!" "쳇--."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기윤!! 저 사람 엘러야!!" "네?" 시안이 기윤에게 소리를 질렀다. '엘러라고?' 검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엘러와 싸워 본 적은 없다. 물론 시안이 엘러라는 것은 알 고 있었지만 방금전에 자신이 목격한 그 시뻘건 불덩이의 정체가 마법이 아니라 엘러의 공격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그 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검이라면 어느정도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엘러와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그는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미 뽑은 검 을 내던질 수도, 그리고 그것이외에는 싸울 만한 무기를 가 지고 있지 않은 그로써는 그대로 검을 들고 팽팽하게 대치 할 수 밖에 없었다. "목적이 뭔가. 이곳에는 당신이 원하는 것은 없을 텐데?" 무조건 공격을 해온 것을 보면 도둑은 아니다. 남은 것은 지금 이 방의 원 주인 즉 시안을 노린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당신에게는 볼일이 없어. 꺼져." 가슴을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입을 가린 천 아래에서 흘 러나왔다. "내가 필요한 것은 저 바람 술사 뿐이다. 얌전히 사라진다 면 저 바람술사에게서 엘을 흡수한 후 얌전히 사라져 주겠 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시안은 왠지 그가 씨익-하고 사악한 웃음을 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흡…수라구?" 시안은 머리가 멍해져서 그가 말한 단어를 되풀이 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힘뿐이다." 「시안 위험하다. 저 화염 술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파장이 뒤틀릴데로 뒤틀렸다.」 세나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데." 「…죽여야 해. 저 정도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안 돼!!" 차갑게 들려오는 세나케인의 말에 시안은 몸을 떨며 그의 말을 강렬하게 거부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혼 라히 아슈레이. 불의 이름 호로스의 불꽃과…." 시안이 세나케인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화염 술사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갑자기 혼자서 미친 듯이 떠들어대는 시안 때문에 잠시 신 경이 흐트러졌던 기윤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법사라면 상대해 본적이 있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울 때는 무방비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다. "…소멸의 불꽃 에쉬…." "하아---앗!!" 강렬한 기합소리와 함께 기윤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 다. "헬-다라크(불의 화살)" "기윤!! 안 돼!!!!" 기윤의 검과 정체불명의 화염술사가 주문을 마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화악-하는 거대한 불꽃이 그의 앞에 타오르는 순간 기윤의 검이 좌우를 갈랐다. 콰과광---!!! "기윤!!!" 쿠당탕-- 폭발음과 함께 기윤의 몸이 새카맣게 그을린 채 굴러왔다. "기윤!!!" "크헉---." 기윤은 폭발에 밀려 뒤로 굴러왔다 검으로 간신히 몸을 지 탱하며 일어서려 했지만 쿨럭하는 소리와 함께 입가에서 주 르륵 피를 흘렸다. 「저 기사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입가에 흘러내린 피가 간신히 멈출 사이도 없이 다시 주문 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나서지 않으면 안 돼!!」 "감히…" 싸늘하고도 차가운 불빛이 화염술사의 기윤을 태워버릴 것 같았다. 피를 흘리긴 했지만 기윤은 나름대로 회심의 미소를 짖고 있었다. 멀쩡해보이지만 분명 자신의 검에는 확실하게 베는 감촉이 느껴졌었다. 그 증거로 그의 검날이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웃기는 소리. 네 놈 한 놈 정도야 나로도 충분하다." 기윤이 검을 다시 들었다. 그러나 기윤은 그 들은 검을 두 번 다시 휘두를 수 없었다. 콰아앙-----!! 검은 색의 연기와 함께 조금 전 보다도 더욱 커다란 폭음이 조용하던 케슈튼 성을 뒤흔들었다. 단잠에 빠져있던 케슈튼의 영주 옥튼은 성을 뒤흔드는 폭음 에 눈을 번쩍떴다. "밖에 누구 없나!!! 이게 지금 무슨 소란인가!!!" "별전에서 들리는 소리입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다다다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가 그의 귀 에도 들려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찾아입기 시작했다. 이 소란에도 그의 곁에 누워 있는 여자는 깊이도 잠들었는 지 미동 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는 상관도 없다는 듯, 옷을 다 갖추어 입자 언제 나 곁에서 떼지 않는 검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콜록. 콜록. 콜록." 시안은 기침을 몇 번이나 하면서 눈을 비볐다. 시커먼 연기가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우웃--." 시안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다 말고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어?" 부스스한 머리가 시안의 이마를 찔렀다. "무사…하십니까?" 말과 함께 붉은 색의 액체가 주루룩 흘러내린다. "…기윤?" "무사 하셔서 다행…입니다." 스르륵. 자신을 감싸고 있던 육체가 흘러내렸다. 시안은 얼결에 그의 머리를 받쳐들었다가 손가락을 가득히 적셔오는 끈적한 액체에 기절할 듯이 소리를 질렸다. "기윤!! 기윤!!!" 검은 색의 안개가 걷혀가고 있었다. "기윤 정신차려!!"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부여잡고 시안은 그의 이름을 불렀 다. "선수를 친게 누군가 했더니. 미메이라의 아가씨. 적이 많 군요." 차가운 목소리가 안개 사이를 뚫고와 시안을 찔렀다. 시안이 놀라 고개를 들자 검은 안개 사이로 몇몇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발 밑에는 조금전 그들을 습격했던 화염 술사가 쓰 려져 있었다. "미안하지만 도주도, 반항도 여기까지오." 툭하고 그 남자가 발로 쓰러져 있는 화염 술사의 몸을 찼 다. 그의 몸이 뒤집히면서 그의 배에 꽂혀있는 몇 개의 단검이 시안의 눈에 들어왔다. 단검의 자루가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케슈튼 성의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에 파르르 하고 떨리고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소란을 부리는가! !" 열려져 있던 문으로 세슈튼 성의 병사들이 들이 닥쳤다. "소란 스러워지는 군. 처리해." 중앙에 서 있던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뒤에 있던 몇 명의 흑색인들이 튀어 올랐다. 슈칵--- 챙하고 검이 부딧히는 소리가 났다. 휘익--- 우르르 몰려 왔던 몇 명의 병사들은 변변찮은 대항도 하지 못하고 그들의 단검과 검에 희생되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겠군." "흑색의… 그리고 이 검은 안개. 하셰카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우리의 정체를 너무 드러냈군. 하기사 이런 것은 우 리 방식이 아니지. 어서 일을 마쳐야……????" 중앙에 서 있던 남자가 말을 하다 말고 문득 입을 다물었 다. 이상한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기이한 붉은 광채가 새카만 천에 얼룩을 만들어내기 시작했 다. "뭐…뭐야 저건!!" 공격을 하던 사람도, 그 공격을 맞고 쓰러지던 사람도, 그 리고 두려움에 뒷 걸음을 치던 사람들도 모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기이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쓰려져 있던 화염 술사의 몸이 타오르고 있었다. "………." 그 화염은 주위와는 상관없이 새빨갛고 선명한 선홍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사. 사람이 타올랐다!! 으아아악!!" 시안은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가 입고 있던 검은 색이 천은 하나도 상하지 않은채 그 화염술사의 몸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 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 사이로 보이던 눈커풀이 점점 투명 해지기 시작했다. 뜨거움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불꽃. 그 불꽃은 화염술사의 몸을 원래의 엘로 화하게 하고 있었 다. 쨍강. 쨍강. 쨍강. 그의 몸에 박혔던 검은 색의 단검과 천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명하게 변해가던 몸은 이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남은 것은 모두의 얼굴을 붉게 밝히고 있는 차가운 불꽃, 아니 화염뿐. 그 화염에 넋을 읽고 있는 동안 시안의 손에 흘러내리던 피 는 점점 굳어져 이제는 차가운 액체가 시안의 손을 가득 덮 고 있었다. "세나…케인." 말로는 들었지만 엘러가 죽는 것을 처음 목격한 시안은 너 무나도 강한 충격을 받았다. "케인…." 굳어있는 손에서 기윤의 머리가 흘러내렸다. 털썩----. 반쯤은 새카맣게 타버린 육체가 붉게 변한 시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느 누구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적막과도 같은 침묵. "세나케인." 그 침묵을 깨고 입을 열은 것은 시안. 시안의 눈동자가 눈부신 은백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 "어떻게 된 일인지 보고해!!" "그. 그게. 그 요하엘의 기사가 모시고온…." 말끝을 흐리는 부관의 얼굴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옥튼은 그를 제치고 시안의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경비대는 뭘 하는 건가? 이상한 자들이 내 성에 들 어와서 난동을 부리는것도 몰랐다는 말인가!!" "그게 경비대에서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부관이 그의 뒤를 따르면서 열심히 변명했지만 사실 그 역 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였기 때문에 뭐라고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경비대의 보고로는 갑작스럽게 성의 한 방에서부터 화염이 비쳤다고 한다. 옥튼이 머무르는 곳과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별관으 로 사람들이 몰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한차례 소동이 끝났는지 적막만이 맴돌고 있 었다. "아. 카드미엘에서 오신 마법사님께서 동행을 원하시는데 …." "마음대로 하라고 해." 옥튼을 위시한 사람들이 시안의 방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모든 소동이 가라앉은 듯 적마만이 감돌고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열려진 문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이상한 피비린내에 그 곳은 적막보다 더한 침묵만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옥튼은 여기저기에 정신을 잃고 쓰려져 있는 경비대원들과 몇몇 기사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와!!" 쓰려져 있는 사람들을 갈무리하던 병사들에게 옥튼은 신경 질 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막상 시안이 머물던 방문 앞에 도착한 옥튼은 그의 눈앞에 벌어져 있는 끔찍한 광경에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단순한 소동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그의 눈에 벌어져 있는 광경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우욱---." 그를 따라왔던 몇 명이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 다. 코를 질러 마비시켜버리는 지독한 피비린내. 그리고 바닥을 질펀하게 적시다 못해서 거의 웅덩이를 만들 고 있는 붉은 색의 액체 그 군데군데, 분명 인간이었음에 분명한 무더기들이 갈갈이 찢겨져 흩어져 있었다. "…………" 옥튼은 검붉게 젖은 천 조각을 집어 올렸다. "위, 위험니다." 식어버려 진득해진 피가 그 조각에서 뚝뚝 떨어졌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 그를 덥쳤다. 그는 그 피의 웅덩이에 한발자국 발을 디뎠다. 그의 뒤를 궁정마법사인 하유르가 따랐다. 그들은 안으로 몇발자국 들어가다 말고 우뚝 멈추어 섰다. 아니 멈추어 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은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이상한 힘이 그들을 가로 막고 있었 다. 밖에서는 들리지 안았던 기묘한 바람소리가 그들의 귀를 멍 멍하게 했다. 싸아아아 하면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한 사람이 그 피의 웅덩이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자락이 간신히 몸을 감싸고 있는 그는 길고 긴 머리카락을 사방으로 날리며 서 있었다. 사방에 피가 미친 듯이 튀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피에 젖 어있는 그의 몸과는 달리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에는 피한방 울 묻어있지 않았다. 쏴아아----- 이상한 광경이었다. 뒤돌아 있어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의 주위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것도 형체가 있는 빛나는 바람이…. 그것은 투명했고 그러면서도 은빛으로 환하게 반짝이며 시 안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엘러입니다. 그것도 바람의 술사." 나직한 하유르의 말. 그 말이 정신을 잃고 서 있던 시안의 귀를 때렸다. 시안의 굳어 있던 몸이 움찔했다. 순간 팽팽하게 그들의 움직임을 막고 있던 그 은빛의 살아 있는 바람이 휘리릭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시안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옥튼도, 그리고 하유르도 그저 멍 하게 그 광경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시안의 몸 속으로 빨려가던 몸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니 만 멈추어서 그의 몸 전체를 감싸 희미하게 빛을 낸 후 사 라졌다. 바람에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한올씩 한올씩 내려앉기 시작 했다. 옥튼이 무너지는 시안의 몸을 감싸안은 것은 바로 그 직후 였다. 계속. 간신히 한 파트가 끝났군요 --;;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랄까. 주인공이 제정신이 아니면 이상하게 저도 제정신이 아닌 기 분이 됩니다. 으윽. 부디 밥팅이로 돌아와줘 시안------으흑 다음은 3장의 마지막 파트 입니다. 꾸벅 uin 이었습니다. PS 에또...가끔. 다른 홈페이지로 퍼가도 되냐는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만. 현재로는 일단 인터넷 홈페이지는 라니안에만 올릴 생각입니다. 죄송합니다.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17) 6. 제국의 수도에 가다 "도착 했다고?" "예. 전하." "수고했네." 로렌은 방금전까지 자신과 대련을 하던 기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로렌의 검을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다른 견습기사가 공손하게 받아 들었다. 아침 일과중의 하나인 대련은 로렌이 상당히 즐기는 일 중에 하나였다. 그것을 방해 받는 것을 그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그가 순순하게 검을 내려 놓는 것을 보았다면 아마도 기절 초풍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이렇게도 순순하게 검을 내려놓은 사정은 사실 달리 있었다. 그의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가지." 흘러내린 땀을 닦아주려는 시녀의 손을 거절하고 로렌은 앞장 섰다. "아. 전하 그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미타 남작은 활짝 웃으면서 걸어가려던 로렌황자를 막으며 말했다. "무슨?" "이런 곳에서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좋아. 일단 사실로 가지." "예 전하." "뭐라구?" "보신 데로입니다. 전하." "믿을 수가… 없군." "하지만 사실입니다." 로렌은 방금전 자신이 받은 보고서를 읽다가 말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미타남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경황은 알 수 없지만 사실입니다. 그녀를 요하엘에서 케슈튼까지 호휘 했던 기사가 사망했고, 그녀를 습격했던 자들도 모조리 사실된 듯합니다." "흐응…." "심각한 것은 그녀를 습격 했던 자들의 정체가 검은 암살단 하셰카라는 것 입니다." "하셰카?" "그렇습니다." "흐응." 하셰카라는 단어가 미타남작의 입에서 나오자 수려한 로렌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하셰카라는 단어에 그리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실패를 했다는 이야긴데 앞으로도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군." "네." "이름이 뭐라고 하지?" "그것이… 현재로써는 시안이라는 이름 하나 밖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하께서 만나보시면 곧 아실 수 있습니다." 미타남작은 더 이상 설명하는 것은 포기를 했다. 일단 로렌이 시안을 만나게되면 곧 알게 될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흐응. 좋아. 자네말대로 일단 만나보지. 그리고 그 다음 일을 생각하자구. 한번에 하나씩. 그렇지 않은가?" 가볍게 말하는 로렌황태자를 보면서 미타 남작은 절대 그 말이 맞지 않는다는 쪽에 자신의 목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앞의 이 젊은 황태자는 한번에 하나는커녕, 한번에 서너가지 일은 충분하게 해내는 천재였기 때문이었다. ◇◆◇ "뭔가 이상해." "뭐가?" 이리야는 털썩하고 주저앉아서 두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그놈의 강을 건너느라고 새빠지게 고생을 한데다가 한숨도 쉬지 못한 채 그대로 거의 질질질 이곳 케슈튼까지 오느라 이리야는 지쳐서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느껴지지가 않아." 거의 새벽녘인데도 불구하고 환하게 붉을 밝히고 있는 케슈튼 성을 올려다 보면서 기엘이 말하자 로운도 거기에 동감을 표했다. "대신. 그 세나케인이 느껴졌었는데. 이제 그것마져도 사라졌군." "뭐? 그, 그러면 큰일이잖아!!" "정확하게 말해서 사라졌다기 보다는 순식간에 멀어졌어." 너무나 황당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제 냉정하다 못해서 거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듯한 두사람의 분위기에 이리야는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입만 뻥긋 뻥긋 했다. "동쪽. 아니 동북쪽인가." "젠장. 정말 젖먹던 힘까지 다 빼서 따라왔는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이리야는 그만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왔지만 정말 손가락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거야. 이건. 정말 카드미엘로 간 것 같은데." "…………." 로운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황에서 순식간에 멀어진 시안의 느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의 머리에는 한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리야." "왜." "카드미엘에 갔을 때 혹 마법사들을 본적이 있나?" "본적은 있지. 희멀건 천을 머리부터 푹 눌러쓴 녀석들이 몇 있었어. 우리들을 아주 눈엣가지처럼 여겼었지. 흥." "그중에서 혹 순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나?" "순간 이동?" "이곳에서 사라져 카드미엘쪽에서 바로 나타났다면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다. 케슈튼에 그런 마법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드미엘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글세? 궁정에는 마법사들이 꽤 있으니까. 수석 마법사 정도라면 가능 할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꽤 힘든 일이 아닌가 싶은데…." "이리야씨가 느끼기에, 그들이 엘러들에 보이는 집착, 이라고 해야하나요? 그런게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그야. 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했잖아. 남김없이 색출해라. 그런 느낌이야. 지독해." "그렇다면 가능하겠군. 방법이 없어. 로운. 출발하자." "…………" 간신히 한숨을 돌릴까 하다가말고 이리야는 기엘의 말에 뒤집어지고 말았다. "이봐!! 기사 양반. 당신 미쳤어? 여기까지 오는데도 목숨걸고 왔다구.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당신 자기 얼굴 좀 보라구. 인간처럼 보이는 줄 알아?" 물론 이리야 자신도 시안을 찾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기엘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니 실제가 그렇다. 이유가 어쨌든, 그리고 방법이 어쨌든 간에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시안이 있었기에 지금 자신이 이곳에 있고, 또한 숨을 쉬며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시안이 위험에 빠졌다면 기엘이 못지않게 자신역시 그에게 받은 목숨. 그에게 돌려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꼴로 꾸역 꾸역 찾아가서 그 앞에 쓰러지기라도 할래? 따라왔습니다. 무사하셨군요. 라고 하면서 쓰려져봐. 그 자식이 어떤 얼굴을 할거라고 생각하지? 걱정하는 것도 알아. 걱정이 돼서 잠 한숨 잘 수 없고, 잠깐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 것도 알겠지만 그래서는 안 돼. 내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 알아듣냐구 이 꽉막힌 기사양반아!!" 이리야의 거센 질책에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로운 당신도 마찬가지야. 말릴 마음이 별로 없다는 것은 알지만 당신 얼굴은 멀쩡한 줄 알아? 적어도 이 친구보다 이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쉬자구. 응? 좀 쉬잔말야!!" 두사람 보두 대답이 없다. 결국 이리야는 버럭 버럭 화를 내다 말고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젠장!! 마음대로 해!! 가서 죽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라구!! 하지만 날 두고는 절대로 못가!! 이래뵈도 시안이 살려놓은 놈이야. 날 버리고 가면 그녀석이 가만이 안 있을걸? 그리고 난 지금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꺼야. 좀 쉬고. 먹을 것도 좀 먹고. 카드미엘 까지 갈 방법을 심 사숙고해서 결정해서 그리고 난 후 출발할거라구. 케슈튼에서 카드미 엘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벌렁 드러누운 이리야의 몸 위로 기엘과 로운, 두사람의 시선이 교차 했다. 구구절절, 이리야의 말이 맞다는 것 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털썩--. 로운이 먼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미안하군." "알면 다행이지." "기엘." 로운이 아직까지도 자신의 라이트를 꼭 쥐고 있는 기엘을 바라보며 부 드럽게 말을 꺼냈다. "기엘…." "…………." "적어도 만났을 때,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시안을 야단치든 뭘 하든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알았어." 짧게, 기엘의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내일 아침엔 출발해야해." "그래. 갈 길이 머니까." "젠장. 기껏 기어나온 카드미엘에 내 발로 걸어들어야 한다니 정말 속 뒤집히는 군." "안 가셔도 좋습니다." 천천히 기엘이 그때까지 쥐고 있던 라이트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누가 안 간다고 했어!!! 속 뒤집힌다고 했지!! 아으--- 짜증나. 이봐 로운. 저 기사양반 좀 어떻게 안될까?" "가능하면 그렇게 했겠지. 안그래?" "으으. 내 팔자야. 참나." "그래도 평소에는 상당히 얌전하니까 좀 바줘. 임시 특별상황이니까." "하아… 그렇긴 그렇지." 새조차도 울부짖지 않는 새카만 새벽. 세 남자는 고요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긴장되었던 신경을 하나씩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만큼 강행된 일정으로 인한 피로와 허탈 함과 그리고 불안감이 그들의 마음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멀고 먼 카드미엘. 그곳에 가는데 또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게 될지, 세사람 중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계속.. ..오..올리고나서...세어보니 몇줄 안되는 군요.. 오늘은 새벽부터 불타 올라버려서..머엉----- --;; 꾸벅. 내일이면 3장 끝까지는 올라올겁니다. ....움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슈레이 제 3장 가이칸 제국 (18) ◇◆◇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단조로운 발자국 소리가 이어졌다. 오른쪽으로 저벅 저벅 저벅. 다음에는 왼쪽으로 저벅 저벅 저벅. 그리고 다시 반복. 미타 남작은 자신의 앞에서 지금 수십번을 왔다 갔다하고 있는 로렌에게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그들이 와 있는 곳은 예의 그 문제의 엘러가 있는 곳, 바로 문 앞이었다. 하지만 신이 나서 펄펄 날아온 로렌황자는 올 때의 그 가벼운 걸 음과는 달리 바로 문 앞에서 이렇게 수십번씩 걸어다니며 망설이 고 있는 것이다. "흐음.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만나시지 마십시오. 전하." "하지만 그래도 직접 보고 싶은걸."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상대가 황태자이니 누가 화를 낼 수 있을까? 이런 미타 남작의 심정은 아까부터 그 문제의 문을 단단하게 지키고 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들어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 내려주지 않는다면 계속 이렇게 긴장한 채로 있어야한다. "흐응…." 미타 남작은 로렌이 왜 이렇게나 갈등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사실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고, 그리고 며칠이 나 두근거리며 기다려 온 상대인 것이다. "전하 시간이 흐릅니다." "아아…." 턱에 손을 대고 초조한 느낌으로 뚜벅 뚜벅 걸어다니던 로렌이 미타 남작의 말에 간신히 그 걸음을 멈추었다. "뭐. 좋아. 만나지. 만나고 나서 그리고 결정하겠어." 도대체 무엇을 결정하겠다는 것인지 도통 짐작은 가지 않았지만 여하튼 남작은 로렌이 결정을 내려준 것만으로 고마웠다. 미타 남작의 손짓에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경비병들이 문을 열 었다. "에메렌? 에메렌이 여기 있었나?" "전하." 풍부한 갈색머리의 여자가 로렌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뿐히 뛰어 와 그의 앞에 몸을 숙였다. "아니 고개를 들어도 좋소. 에메렌에게까지 예의를 요구하고 싶 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에메렌이 여기에 있다니." "결례인줄 알면서도 제가 부탁을 드렸습니다." "간만입니다. 전하. 많이 자라셨군요." "아아. 뭐어…." 시안을 만나러 왔지만 로렌은 뜻밖의 상대가 자신을 맞이하는 바 람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에메렌. 그녀는 올해 24이 막 된, 아직도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 직하고 있는 고아한 여성으로 로렌 황태자를 6살 때까지 기르다 시피 한 유모의 친딸이며 일종의 젖형제라는, 특별하지는 않아도 꽤나 독특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18세가 되자마자 고향의 지방 귀족과 결혼을 하여 궁을 떠나 있 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다시 입궐을 해있는 것이다. "너무 그렇게 일을 많이 하시면 안됩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 요." 이렇게 로렌에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이 궁에는 그녀 밖에는 없었다. 형제와 자매가 많기는 하지만 사실 거의 모두 배 다른 형제 자매였기 때문에 오히려 로렌의 입장에서는 젖형제 처 럼 자란 유모의 딸인 에메렌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뭐어…. 에메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 그런데 그녀는?" 에메렌을 보고 잠시 당황했던 로렌은 곧 정신을 차리고 본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후훗--. 나이가 들으니 전하의 여러 가지 얼굴을 보게 되는 군 요." "에메렌!!" "아닙니다. 전하. 이쪽으로." 왠지 살며시 짓궂은 미소를 짖고 있는 듯한 그녀의 안내로 로렌 은 안으로 들어섰다. 상쾌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아직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사정을 들으니 아주 안 좋은 일을 겪었다고 하더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의 눈치로 보아서 아마도 정확한 사실은 잘 모르는 듯 싶었 다. 에메렌은 살짝 물러나 침대가로 다가갔다. 투명하고 하얗게 드리워진 기다란 천이 사라락 소리를 내면서 양 옆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어떤 보석보다도 투명하고, 어떤 천보다 부 드러우며 긴, 아름다운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한 소녀가 드 러났다. 꿈을 꾸는 듯한 두 눈이 새하얗고 투명한 눈꺼풀에 덮혀 있다가 나타났다. 반짝이면서고 깊은 색조를 가진 은회색의 눈동자가 신비한 빛을 발했다. "…………" 무의식중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이 살아 있는 것처럼 하늘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이 보았다면 섬칫 할 만한 그 광경 을, 로렌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보다도 더 새하얀 눈썹. 새하얀 이마. 폐를 가득 채우는 청량한 공기의 끝. 그 시작점에 그녀가 있었 다. "…이름은 시안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이름을 부르면 반응을 하 지요." 안쓰럽다는 듯 에메렌이 말했다. 로렌은 마치 그 상쾌한 공기의 내음에 취한 사람처럼 천천히 시 안에게 다가갔다. "시안…?" 로렌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순간 잔잔하게 흐르던 공기의 흐름 이 멈칫했다. 그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름이 불리자 투명한 은회색 눈동자가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부 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녀의 몸에 서 잔잔한 바람이 불어 나왔다. "…………." 시안의 손이 가만히 로렌의 얼굴쪽으로 올라왔다. 로렌은 그 손을 살며시 잡고 말했다. "로렌. 로렌 네세크 카루인 라이너드입니다." "로…렌." 로렌이 희고 고운 시안의 손에 살짝 입을 맞추자 시안이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맞아요. 로렌입니다." "그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이례적인 일이라고 황태자궁의 시녀들이 입을 모으 고 있다고 하더군요." 황성에는 난데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도통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알려져있던 황태자가 갑자기 어 디선가 데려온 이상한 여자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소문은 삽 시간에 화성 곳곳으로 펴져나갔다. 물론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소문이 100% 사실은 아니라 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 만도 없 었다. 실제로 로렌 황태자가 '그녀'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 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전하.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슥슥슥, 로렌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서류에 사인을 했다. "이것으로 끝인가?" 나이가 지긋한 반백의 노인 하나가 건너편에 서 있었다. 로렌은 그를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가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 아래에 또 다른 서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그 서류를 집어 올렸다. "걱정은 적당히 해도 좋습니다. 뭐. 그녀를 후궁으로 들이겠다거 나 하는 것은 아니니까." "……………." 애첩정도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그는 차마 그것을 입에 올리지는 못했다. "소문을 들으니 그…, 그분께서는 정상이 아니시라던데…." 감히 황태자인 로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황태자 의 숙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 황제의 마지막 동생이자 로렌의 후견인 자격으로 당당하게 이 황성에 머물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인척중의 하나인 그는 요즘 들려오는 이런 저런 소문을 확인하고 자 이렇게 로렌을 방문했다. 도통 여자들에게는 눈길하나 주지 않아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들려오는 소문은 나름대로는 반가운 소문이었지만 그 뒤편 으로 들려온 사실은 그렇게 유쾌한 사실은 아니었다. "어떤자들이 숙부님께 그런 소리를 함부로 전했는지는 모르겠습 니다만. 그리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드럽게 자신을 바라보던 로렌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지는 것 을 느낀 베로쉬는 남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 늙은이는 섭하군요." "…………." 로렌은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하다말고 멈칫 그의 손을 멈추었 다. 소문과 소문. 그리고 또 소문. 이 궁에는 입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 함구령을 내릴 수도 없는 일. 로렌은 나름대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하루 날을 잡아 숙부님 내외를 제 궁으로 초대하겠습니다. 그럼 궁금증이 풀리시겠는지요."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시군요." 간단하게 대답하는 숙부를 보고 로렌은 쓴 웃음을 지었다. "황태자비를 들이는 것은 좀 더 심사숙고할 문제라고 생각합니 다. 설마 제가 황비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씀드릴 리가 없지 않 습니까? 걱정은 접어두십시오." 베로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로렌은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 숙부가 자신을 방문 할 때면 꼭 한 마디에서 두 마디, 때로는 끊없이 설교를 늘어 놓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만일 로렌 자신이 제 일 황자였다면 저런 문제는 재고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삼황자였고 어느 누구도 그가 뒤늦 게 정통 계승자인 일 황자를 제치고 황태자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도 않았었다. 권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어야 당연했던 삼황자에게 어느 귀족 이 자신의 금지옥엽을 내어 주었을까? 그 때문에 로렌에게는 위 의 두 형님과는 달리 혼약자가 없었다. "황태자비는 제가 직접 고를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버님께도 이 미 허락을 얻었습니다. 일단 아버님의 병환도 있고, 조금 더 시 간을 가지고 싶은 것이 제 마음입니다.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권력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그의 숙부를 무시할 수는 없기에 로렌은 짜증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후우--- 숙부님 보다는 차라리 시안과 얼굴을 마주대는 편이 좋 은데 말이야." 마음은 이미 저 멀리 콩밭에 가있는 로렌. 그는 남은 일이 무엇이 있나 곰곰이 생각을 했다. "자아. 그럼 이만 이 늙은이는 물러 날까 합니다." "아. 예. 숙부님." 다행이 눈치 있게 일어나주는 숙부에게 로렌은 마음속으로 감사 를 표했다. "다음번에는 좀더 좋은 소식이 제게 들려왔으면 합니다." 새빨간 장미가 한 가득 피어나 있는 화려한 정원. 그 한구석에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듯 보이는 희고 빛나는 존재 가 앉아있었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그대로 한 몸에 받으며 하염없이 미세 하게 흔들리는 장미 봉오리만을 바라보고 있는 은회색 눈. 그 눈에는 조금의 생기도 없었다. "시안님.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 에메렌이 다가와 그녀를 불렀지만 시안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반응이라고는 그녀대신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뿐. 에메렌은 갑작스럽게 불려와 자신이 돌보고 있는 이 신비한 아가 씨의 주위에 이렇게 늘 불고 있는 바람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전 혀 내색은 하고 있지 않았다. "로렌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로렌?" 그나마 이 아가씨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다른이가 아닌 로렌 황태자라는 것에 조금 안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고, 아무리 좋게 보아주어도 결코 제정신 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시안이 반응하는 상대는 현재로써는 로렌 뿐이었다. 가끔 검을 들고 있는 기사들을 보면 흠칫 흠칫 놀라기 는 하지만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상대는 그뿐인 것이다. "네. 로렌 전하께서 시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메렌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시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당겼 다. "나중에 로렌전하께서 돌아가시면 다시 나오시면 됩니다."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시안이 좋아하는 것은 이것 뿐이다. 쉴새 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이 화려한 정원의 한가운데 넋을 놓 고 앉아있는 것. 그녀는 적어도 시안이 제정신으로 돌아 올 때까지는 책임지고 그 녀를 돌보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어떤 끔찍한 일을 겪었기에 이런 상태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보호본능을 불러 일 으키는 시안에게 에메렌은 로렌 못지않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 다. "자. 따라오세요." 시안의 눈이 자신의 빰을 스치는 바람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보이는 시안을 바라보던 에메렌이 말했다. "바람이 좋으신가요?" "…………." 시안이 손을 들자 지나가던 바람이 그 손가락 사이를 맴돌아 빠 져나간다. 에메렌이 다시 시안의 한쪽 손을 당겼다. 그 손에 이끌리어 시안 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메. 하니다." 앞으로 길게 뻗은 기엘의 두 손바닥 사이에 작은 바람이 일렁였 다. 그 아래와 위로 로운의 손이 더해졌다. "메. 하니다." 똑같은 주문이 로운의 입에서도 흘러나오자 작은 바람은 이제 소 용돌이 되어 손바닥 사이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로 실날 같지만 강한 힘을 가진 바람이 새어나온다. 그 바람은 밖으로 힘을 뻗는 동시에 두 사람의 손바닥을 뚫고 안 으로 안으로 파고 들었다. 피곤해진 신경과 근육을 두드려 깨우 면서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정화의 바람. 정화의 바람이 신경 끝에까지 이르는 것을 느낀 두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하나의 주문이 흘러나와 완성되었다. "로운 디 로크레슈.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 엘-메타모르 포시스 오프( (el-metamorphosis off)." "기엘 디 하라스다인.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 엘-메타모 르포시스 오프( (el-metamorphosis off)." 주문이 완성되는 순간 화악-하고 그들의 손에서 은백색의 빛이 뿜어나왔다. 그 빛은 손끝에서 시작되어 팔을 타고 올라가 온 몸으로 감겨들 었다. 이리야는 이전에도 한번 목격했던 그 광경을 경이롭다는 눈빛으 로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후 두 사람이 원래의 은백색 머리카락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이리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제와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지? 위험하지 않을까?" 가볍게 숨을 고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이리야는 갈색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나름대로 자신의 그 짙푸른 머리카락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지 않고 여 러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들 었다. "쓸데없는 곳에 힘을 쓸 여유는 없으니까." "현재로써는 하셰카로부터의 위협도 거의 사라진 것 같은데 굳이 머리색 같은 것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리야에게는 더 이상 설명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기엘이 대답했다. 물론 속 사정은 다르다. 시안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 도 없다. 머리카락에 걸은 변환술을 유지하는데 사용되는 엘이 비록 미미할 지라도 현재로써는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곳에 사용 되는 힘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싶은 것이 그의 심정이었던 것이 다. "머리색 연연이라기 보다는 그 머리로 카드미엘을 활보하는 건, 제발 저 좀 잡아가 주십쇼…라구." "가리고 다닐 거야. 기엘. 머리카락 좀 잘라줄래?" "아…." 그렇게 긴 머리는 아니지만 어깨선에서 간당간당하는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만져보던 로운이 말했다. "내 솜씨가 별로인 것은 알지?" "물론. 절대로 최악인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잖아." 상당히 불만이라는 듯이 로운이 말했다. 칼솜씨(?)가 좋기는 좋지만 그것은 검술에 한해서이다. 사람에게 는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것이 못하는 것이 있는 법. "참 재미있단 말야. 겉으로 보기엔 꽤나 잘 할 것 같은데. 이리 줘봐." 주춤거리며 기엘이 날이 새파랗게 선 단도를 들고 있는데 이리야 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나도 솜씨는 별로지만 이 기사양반 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머리카락 유지하는 힘까지 쓸모 없다고 하 는 건 좀 그렇잖아?" "으음. 일종의 정신 통일을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리야씨. 바람 술을 쓸 때면 왠지 원래의 색이 아니면 기분이 이상해서요. 이리야씨는 혹 그런 기분 드실 때 없으셨는지요?" "난 그런 거 없어. 여하튼 핑계는 좋군." 사락 사락 소리를 내면서 은색의 머리카락이 잘려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기엘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리야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바라보고 있다가 기엘의 손에 오 로프의 새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말했다. "연락도 안 온다면서 부지런히도 보내는 군." "연락이 없으니까…." 시안과 떨어진 이후로 두사람은 번갈아서 미메이라로 연락을 넣 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이틀이면 돌아오던 답신이 이상하게도 돌아오지를 않고 있는 것이었다. "별일 없으니까 연락 안하는거 아닌가?" "그럴 리가 없잖아. 시안님이 납치되었다고 연락을 넣었는데…." "에헤-- 우. 우악!!!!!" "이리야!!" 후두둑 하고 피가 떨어졌다. 한눈을 팔고 있던 이리야가 그만 손 가락을 서걱하고 베어 버린 것이다. "아야야야야----!!" "엄살 떨지마!! 이런 정도로." "우아- 이리야 죽는다." "시끄럽다니까!!" "이리야씨 손을 이리로."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세사람은 작은 일에도 시끄럽게 소란 을 떨었다. "우어-- 젠장. 이 놈의 칼을…." "그러니까 가위라도 구했으면 좋잖아. 로운." "그런거 구할 시간있으면 빨리 가지고 한게 누군데." "하지만…." "이리야 시끄럽게 굴지말고 엄살 떨 기운이있으면 회복 주문이라 도 읊어!" "매정하구만!" "매정하기는. 치유술쪽으로는 나보다 훨씬 솜씨가 있다는 거 알 아." "오호-- 말 잘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일에 정신 을 팔면 조금쯤 안정이 될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그 들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대하 나하를 타고 북상하기로 마음먹음. 육로로는 시간이 걸린다 고 판단. 바람과 물의 엘러인 자신들의 힘을 십분 활용, 미메이라에서는 소식이 없다. ◇◆◇ "대신관님!!!" "이게 무슨 소란인가." 대신관 카류는 조용한 아침 명상시간, 갑작스럽게 중앙 홀로 뛰 어든 견습사제에게 반 질책의 눈초리를 보내며 말했다. "대신관님. 기, 기사님들께서…." "………?" "시, 신전이 포위 되었습니다." "뭐?" 카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하게 뛰어나간 대신관의 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라스다인 장로…." "일이 그렇게 되었소." "………."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류는 고개를 들어서 몇 명의 얼굴을 확인 하다 말고 흠칫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미메이라의 전 수장. 레이죠 장로가 저 멀리 한가운데에 고즈넉 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 했기 때문이다. "레이죠 장로님…." 카류와 눈이 마주치가 레이죠 장로쪽에서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 다. "얌전히 따라준다면 무력 행사는 하지 않겠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제게 설명을 해주실 분 안 계십니까?" 카류의 손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과 도 같은 일인가. 명색이 전 수장이라는 사람과 방위사로 수장을 지극으로 섬겨야 마땅한 사람이 신관을 무력으로 봉쇄했다는 것은 명백히 반역이 었다. "이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문들 들려온 목소리에 카류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로크레슈 장로였다. "로크레슈 장로님. 당신까지…." "인간의 일은 원래 예측을 못하는 법입니다." 하라스다인 장로가 레이죠 장로와 함께 나타났을 때 카류는 직감 적으로 시안일행을 노리고 있는 검은 암살단을 사주한 자들이 그 들임을 직감했었다. 그러나 로크레슈 장로가 나타나는 순간 카류 의 머릿속에는 혼돈의 바람 밖에 불지 않았다. '틀림없이 하라스다인 장로쪽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레이죠 장로께서….' 불만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이유에서든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카류는 혼란한 와중에서도 재빨리 신전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나이트 사아르로 궁정기사단 세아트 소속의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한 둘정도는 나이트 사아르 소 속의 기사들을 지휘할 만한 자들이 있어야함에도 불고 단 한명도 눈에 띄지 않는 다는 것은 하라드다인이 신국 방위사임에도 불구 하고 군부를 전부 장악하지는 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물론 미메 이라에는 사실상 군부라고 부를 대상이 특별히 많지는 않다. 얼 마 안되는 세아트 소속의 기사들과 나이트 사아르들. 그들이 결 국은 중심 세력인 것이다. 그는 강직하기로 소문난 궁정기사단 단장 모데스 디 크로운의 얼 굴을 떠올렸다. 왠지 그가 무사하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 올랐다. 당장이라도 손짓한번만 하면 신전소속의 성기사단 소속의 기사들 이 전부 죽음을 불사하고 그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 의 숫자는 지금 신전을 포위하고 있는 나이트 사아르들과 병사들 에 대항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황. 평화로 점철되어 있는 미메이라에 있어서 성기사단이라는 것은 식전 의례의 의미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비록 그들이 실력에 있 어서는 나이트 세아트에 뒤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들어갑시다." 두명의 장로가 카류를 재촉했다. 미메이라를 두 손안에 넣고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최고 권력에 있 는 두사람. 결국 카류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날 부로 미메이라의 바람의 대신전은 나이트 사아르에 의해서 무력 봉쇄되었다는 소식이 전 미메이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식은 뒤늦게 저 멀리 계승로에 나선 두 사람의 기사 에게도 전해졌다. "이대로 대하 나하르까지 최단 거리를 잡아서 가는 거지. 그리고 거기서 배를 구해서 북상을 하는 거야. 카드미엘에 들어가는 길 로는 일단 이게 제일 빨라." "…배를 타고 북상을 해? 이봐 이봐. 아무리 내가 물의 술사라고 해도 거슬러 올라가는게 쉬운 줄 알아?" "이리야씨 힘을 빌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 세명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시켜놓은 음식과 음료수들은 뒷전으로 한 채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제국을 중심으로 작성된 지도였다. 그곳에는 그들이 현재 있는 곳과 앞으로 가야할 목적지가 표시되 어 있었다. "말을 타고 가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조금은 힘들더라도 빠른 길을 선택 할 수 밖 에 없지요." "그러니까 내말이 그말이잖아. 배를 타고 북상을 한다는게 그게 쉬운 일인 줄 아느냐구. 게다가 나하르는 아슈레이 최대의 대하 라구. 흐름을 타고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올라가자구? 웃기지마. 난 안해." "당신더러 하라는 거 아니니까 안심해." 이리야가 말도 안된다고 하면서 손을 내 젖는데 로운이 묵필을 들고서 이리야의 시선을 끌었다. "지도를 봐봐." "보는 중이야." "그럼…." "여기가 카드미엘이고, 여기가 미메이라의 키리엔이지." 새카만 점하나가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한 곳에 찍혔다. 미메이라의 남단이다. "우리식으로 설명하자면, 미메이라의 바람의 흐름은 이곳 키리엔 에서부터 소용돌이처럼 해서 불어나가." 그렇게 말하면서 로운은 쓱쓱 미메이라를 중심으로 해서 휘어진 화살 표를 몇 개나 그렸다. "그건 미메이라의 경우잖아. 그걸 나한테 설명해서 뭐하는데?" "미메이라에 한정해서라면 설명할 필요가 없지. 그런데 이 흐름 이 그대로 대륙 전체에 해당한다면?" "에?"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바람은 이렇게 불어. 반시계방 향으로." 로운은 미메이라에 그려놓았던 화살표를 연장하여 제국쪽으로 길 게 그려 넣었다. 길게 이어지는 화살표중 하나가 나하르의 위를 통과하여 카드미 엘 쪽으로 올라갔다. "흐응." "보통사람이 느끼는 것과 우리가 느끼는 바람은 틀리지.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람이 꼭 그렇게 부는 것은 아니지만 대 륙 전체에 퍼져있는 바람의 엘은 이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거야. 물론 아직 시안님께서 제대로 의식을 다 거치시지 않았기 때문에 안정되어 있지는 않아도 이정도면 나와 기엘 둘이서 그 흐름의 힘을 빌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일단 나하르에도 분명 정기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하나를 탄 후에 대기의 흐름을 조정한다면 강을 거슬러 올라 가는 것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허어. 당신들 정말 무모한 인간들이라는 거 알아?" 뭔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설명들 뿐이다. 엘의 흐름이 어떻고 대기의 흐름이 어떻고 하는 것은 그들이 전 문가니까 그렇다고 해주겠지만 그것을 조정해서 어쩌구 저쩌구하 는 것 만큼은 아무리 이해를 해주려고 해도 무리였다. 하기사 어떤 사람이 이런 말들을 이해해줄까? 그나마 이만큼이나 알아 듣고 있는 것도 자신이 엘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반 사 람들은 이 인간들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것인지 그 자 체도 이해를 못할 것이다. "그렇게 무모한게 아닙니다. 이경우에는 저희가 대기의 흐름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단지 그 힘을 빌리면서 조금 증폭시키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놀랠 필요없어." "그거나 그거나잖아!! 에잇!" 설명을 들으나 마나 했다고 생각하면서 이리야는 지도를 걷어치 워 버렸다. "알았으니 밥이나 먹자구. 으…, 정말이지 일행을 잘 못 만나도 진짜 잘 못 만났어. 평생을 후회 할 거라구. 젠장할!" 김이 다 빠져가는 맥주를 벌컥 벌컥 들이마시며 이리야는 타는 속을 달랬다. 그나마 지난 번의 그 폭주 이후로 나름대로는 꽤 얌전하다 싶었 던 두 사람이 알고 보니 뒤로 호박씨를 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맥주한잔 추가!!" "…추가라는 소리 아주 오랜 만에 듣는 기분이군." "…………." "이봐!! 둘 다 우울해지지마. 무슨 소리를 못하겠어. 참나." 아닌 척하고 있지만 기엘이나 로운, 그리고 이리야 모두 식사를 할 때가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울해진다. 다른 때는 몰라도 식사시간만큼은 정확하게 챙기던 사람이 없어 지자 일행의 식사시간은 불규칙해졌다. 게다가 이렇게 가끔 음식 을 먹기 위해 주점 같은 곳에 오게 되면 왠지 '추가'라는 단어가 금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먹자구. 먹어. 일단 인간은 먹어야 사는 거야. 아니 살기 위해 먹던가? 아니면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특히 그녀석 은 그러고도 남아." 그녀석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굳이 설명 할 것도 없다. 기엘이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계실지 걱정되는 군." "어떻게 알아낼 방법없어?" "현재로는 불가능해. 지금 상태로는 어디에 있다 정도 밖에는 안 느껴지니까. 상태를 알려면 좀더 가까이 가야…어?" 로운이 말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기엘도 마찬가지 였다. "…오로프다." "주인장. 여기 제일 높은 곳이 어디죠?" "아아. 위층으로 올라가보쇼. 제일 높지는 않아도 우리 여관 지 붕도 꽤 높으니까.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되는데 갑자기 왜그려 슈?"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리야가 말릴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닥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연락이 끊어진 것이 벌써 오래전이다. 폐이요트 산맥의 초입에서 의례적인 답신을 받은 것이 마지막. 그리고 첫 답신인 것이다. "지붕으로 올라가." "알았어." 3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간 로운에게 기엘이 말했다. 그들은 활 짝 열려져 있는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주문을 외워 가볍게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갔다. "로운 디 로크레슈. 나이트 로운의 명령이다. 오로프의 새여--- 그대의 모습을 드러내어 주인의 말을 전하라. 아샨." 로운이 팔을 뻗어 높이 쳐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 이상한데. 분명히 오로프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내가 해볼게 혹시 모르니까. 기엘 디 하라스다인 나이트 기엘의 명령이다. 오로프의 새여--- 그대의 모습을 드러내어 주인의 말 을 전하라. 아샨." 일반적으로 연락은 대신관이 로운에게 전해왔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그 수령자가 틀린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기엘의 손 끝에 희미한 새의 형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쩐 일이지? 내가 아니라 너라니." "모르지." 흐릿하게 나타난 새의 형체가 날개짓을 몇 번 연거푸했다. 그리 고 희미한 광체를 내면서 빛나더니 곧 이어 투명하게 변하여 기 엘의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 "누구야? 대신관님?" "이게 무슨…. 단장님께서 구금되셨다니…." 오로프의 새가 전하는 말은 그 수신자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거짓 없는 진실 그대로를 전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단장님이라면 궁정기사단장을 말하는 건가?" "…………." 기엘은 할 말을 잃었다. 방금전에 자신이 전해 받은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기 문이다. "도대체 뭐야!! 좀 말을 해봐." "신전이 봉쇄되었데. 연락은… 로엔 한 거야." "로엔?" "내 수석 비서관이었는데…." 로운은 이미 로엔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엘의 팔을 붙을고 거칠게 물었다. "정확하게 말해봐." "며칠전에… 며칠전에 갑작스럽게 로열나이트 전체와 궁정 기사 단, 나이트 사아르. 그리고 수련원에까지 전부 근신 명령이 떨어 졌었는데. 그리고 나서 하루만에 신전히 봉쇄되었다는 소식을 들 었데. 연유는 알 수 없지만 나이트 사아르가 전부 동원되었고 궁 정기사단장님께서는 구금되셨다는 군…." "그게 말이나 돼!!! 대신관님께서는 뭘 하신 거야!" "로엔 역시 현재 수련원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상태 이고. 로열 나이트들도 대부분 자택에 연금되어 있는 것이나 마 찬가지라고 하는 군. 신전에 대한 것은 그 외에는 어떤 소식도 없어." "그럼. 시안님이 납치 되셨다는 소식도 못들으신거 아니야?" "그럴 가망성도 있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당연히 있어야 할 답신이 없는 것에서부터 기엘과 로운은 나름대 로 염려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떠나있는 동은 그들의 아버지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아 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 줄 누가 상상 할 수 있 었을까? "설마 아버님인가?" 로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니. 우리 아버님 이실 가능성이 더 많아." "하지만 왜? 지금 왜 그러시느냐구." "내가 어떻게 알아!! 화 내지마!!" "화를 내는게 아니야!!" 작은 나라이지만 나름대로는 내전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는 아니 다. 무엇보다 실력이 우선시 되었던 신국이기에 더더욱.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수장 계승자가 계승로에 있는 동안 반란 이 일어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다름 아닌 대신전의 무력 봉쇄. 수장 위가 비어 있는 동안 수장 대리의 임무를 맡는 것은 다름 아닌 대신관이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 로운이 화를 내고 있는 동안 기엘은 한쪽으로 물러나 주문을 외 웠다. "나이트 기엘의 명령이다. 로엔 튜프레온에게 전하라. 상세한 정 보를 청한다. 오로프-." 연락의 새가 날개짓을 하며 사라지자 기엘이 로운에게 냉정한 목 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시안님부터 찾는다. 그리고 나머지는 연락이 오면 그때 생각하자구. 진정해 로운.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잖 아." "제길!! 아버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시는 거야." "…………." "시안이 돌아가서 라면 또 몰라." "누가 주체인지도 모르잖아." "누가 알아!! 하셰카에 의뢰한 것이 아버님일 수도 있어!!" "설마. 네가 있는데." "그 인간은 그러고도 남아." "로운!!"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왠지 자제심을 곧장 잃곤하던 로운을 자주 보아왔던 기엘이다. 기엘은 단호한 어조로 로운에게 말했다. "지금은 확인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 게다가 키리엔에서는 우리 가 이런 연락을 받았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거다. 설사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대신관님께 어떤 위해가 가해 지지는 않을 거야. 뭐니뭐니해도 대신관님이다. 무슨 말인지 알 지?" "…………." "네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 머릿속에는 키리엔에 대한 것보다는 시안님에 대한 생각밖에 없어. 그리고 그게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고. 그건 너한테도 해당되는 말이다." "…젠장." "나더러 머리를 식히고 정신을 차리라고 했지. 이번에는 그말을 너에게 돌려주지. 머리 식히고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날 제어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로써는 너 밖에 없어. 너마저 흥분을 해버 린다면 난 내 자신을 제어할 만한 자신이 없다구." 자신이 현재 시안이외에 어떤 것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기엘은 잘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은 더더욱 로운에게 진심으 로 와 닿았다. 로운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는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다." "좋아." "후우---. 참. 별일 다 일어나는 군." "예언의 현자 마샤님이 아닌 이상. 일어날 일을 누가 예측 할 수 있겠어?" "그렇겠지." "내려가자. 이리야씨가 기다릴 거야. 둘다 미친 사람처럼 뛰어 나왔으니." "그 자식은 좀 혼자 놔둬도 되. 내려가고 싶으면 먼저 내려가라. 나는 좀더 머리를 식히고 내려 갈테니까." 로운은 털썩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자살 희망자로 보이지 않게 적당히 내려와." "흥. 3층 지붕에서 뛰어 내린다고 누가 죽겠어?" "그러니까 소란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럼 먼저 내려갈게." 그 말을 끝으로 기엘이 먼저 훌쩍 뛰어 내렸다. 뒤에 남은 로운은 그런 기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녁 하늘의 붉은 색이 그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말 예측 불허의 일들만 일어 나는 군.' 흐르는 바람과 함께 그의 상념은 미메이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결국 그는 미메이라 인인 것이다. '언제쯤 돌아 갈 수 있을까? 아니 돌아 갈 수나 있을까?' ◇◆◇ ◇◆◇ "또 올라 가셨다구?" "예. 말리려고 했습니다만. 워낙 막무가내셔서." 서슬 퍼런 에메렌의 앞에서 시녀들이 변명을 하면서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제도 그러다가 쓰러지시지 않았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려 야지!!" "하지만…." 에메렌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시안을 말리지 못하는 그녀들의 심정을 어쩔 수 없이 이해해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현재 카드미엘의 황태자궁에서 시 안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로렌이 아침 저녁으로 시안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꼭꼭 그녀의 방에 드나든다. 그녀의 방에서 밤을 지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그것이 어떻게 비칠지는 눈에 보일 듯 하다. '휴우. 조금씩 정신을 차려가시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그것 말고도 시녀들이 차마 시안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이유가 또하나 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 이 궁에 왔을 때, 아직 말 한마디 제대로 하 지 못했을 때의 일이다. 조금만 시안이 싫어할 만한 일을 시키거나 억지로 그녀의 행동을 막으려하면 바로 그녀의 몸에서 이상한 바람이 불어 나왔던 것이 다. 그 바람은 결코 누구에게 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보통 사람 의 입장에서는, 온 몸에서 수시로 불규칙적한 바람을 마구 뿜어 대는 시안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일 리가 없다. 에메렌과 로렌의 엄중한 명령에 의해서 그런 사실에 대해 함구령 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거짓이 되지는 않는 다. 에메렌 역시 그런 시안이 두렵기는 했지만, 아무데도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아가씨라는 생각을 하면서 두려움을 삭히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그런 기이한 것이 의외로 영향을 많이 받 는 타입이 아니었다는 것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다. "내가 올라가 볼테니 혹 전하께서 오시면 또 시안님께서 탑에 올 라가셨다고 전하도록 하게." "예. 에메렌님." 일단 탑 꼭대기에 올라간 이상 쓰러지거나 아니면 스스로 피곤해 서 내려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녀를 거기서 끌어 내려 올 사람 은 단 한사람 로렌밖에 없었다. 어째서 시안이 다른 사람은 말은 절대로 듣지 않으면서 로렌의 말은 듣는 것인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시 안은 로렌의 말만큼은 들어주었던 것이다. 시안이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 그녀가 이 궁에 도착 한지 나흘째였다. 그전까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말 한마디 하지 않다가 그나마 배 가 고프다던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의사표시를 하기 시작했던 것 이다. 문제는 그녀가 조금 정신을 차린 후 부터는 어떻게 알았는지 눈 을 떼기만 하면, 또는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못하면 그녀가 바로 황태자궁의 제일 높은 탑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안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그녀가 탑에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 벌써 삼일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어서 쓰러질 때 까지, 그녀는 하루종일 그저 넋을 놓고 바람을 맞으며 먼 곳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안님." "…………." 에메렌이 살며시 시안을 불렀지만 아니나 다를까 시안은 고개조 차 돌리지 않는다. "시안님. 몸에 좋지 않습니다. 저와 함께 내려가시지요." "…………." 살며시 시안의 팔을 잡으며 에메렌이 다시 말했다. 손 끝에 잡힌 시안의 몸이 차갑게 식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에메 렌이 그녀의 몸을 당겼지만 시안은 그런 에메렌의 팔을 가볍게 쳐내버렸다. "누군가 기다리시는 건가요?"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시안을 아래로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삼 일동안 처절하게 깨닫고 있던 에메렌이 포기한 듯이 물었지만 시 안에게는 역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후우….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또 걱정을 하실 겁니다. 시안님." 그녀는 들고 있던 두터운 쇼올을 시안의 몸에 둘러 주었다. 햇살은 따스하지만 이렇게 높은 탑에 불어오는 바람은 상당히 차 가웠다. 흘러내리는 쇼올을 몇 번이나 시안의 어깨에 고쳐서 둘러주던 에 메렌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 상태면 로렌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계속 이러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키시면 언제든 내려와주세요. 시안님." 하염없이 먼 곳만을 바라보고 있는 시안 옆에 마냥 있으려고 해 도 에메렌은 그것이 자신에게는 약간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 다. 처음에는 혹시나 뛰어 내릴까 걱정해서 몇 명의 시녀를 포함해서 교대로 지키고 있었지만 그럴 위험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마냥 그녀를 혼자 두고 있는 형편이다. 무엇보다 시녀 들이 시안의 옆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 이유도 있었다. "잠시 후에 식사를 가지고 다시 오겠습니다." "…………." 에메렌이 사라지고 나서도 시안은 멀고 먼 곳에 눈을 고정 시킨 채 그 자리에 굳어버린 석상처럼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휘이이이잉--- 한참을 그러고 있는 시안의 주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 왔다. 흐린 시안의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바로 앞쪽에 둥글게 소용돌이 치면서 희미 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시안의 몸에서도 은백색의 광채와 함께 바람이 스며나왔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형체로 굳어지면서 점점 색체를 띄어가기 시작했다. 얼굴과 목, 가슴과 다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백색의 머리카락까 지…. 마치 거울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거의 흡사한 인간의 형체가 바람과 함께 시안의 앞과 뒤에 나타났다. "…케인."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안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내 이름은 유린이다." 시안의 앞쪽.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나타난 존재가 미소를 지으 면서 대답했다. "유…린?" 시안의 뒤쪽에 형체를 드러낸 세나케인이 앞쪽으로 다가와 시안 의 몸을 감쌌다. "왜 나타났지?" 순간 유린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형체가 일렁였다. "바람의 힘, 바람의 의지 세나케인이여." "…………." "시간이 없다. 이런 곳에 머물 이유도 없다." "유린, 그대가 나타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아직 시간은 많을텐 데?" "아니. 시간이 부족하다." "…………" "세나케인 그대가 각성할 정도의 힘이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를 부른 것은 바로 그. 바람의 계승자다." 유린의 시선이 시안과 마주쳤다. "그렇지. 내가 각성했으니 유린 그대도 각성을 할 수 있었겠지 …." 세나케인의 형체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시안의 의지를 받아가도 좋아. 하지만 시안의 수호자는 나다." "인정한다. 바람의 계승자의 수호자인 그대가 허락하였으니, 나 바람의……는……." 불어오던 바람이 더더욱 거세졌다. 그 바람은 이제 윙윙 하는 거 대한 신음소리가 되어 시안이 서 있는 탑 전체를 맴돌기 시작했 다. 유린의 마지막 말이 그 바람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려왔다. "계승자의 의지를 받아……." 휘이이이잉----- 세나케인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유린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 작했다. 시안은 무의식중에 천천히 그의 팔을 높이 치켜올렸다. 거센 바람의 한 자락이 그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날 카드미엘에는 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돌풍이 불었다. 그리고 그 돌풍이 불었던 바로 그때, 길고 긴 드래곤의 형상을 한 은빛의 바람이 카드미엘의 황태자 궁 상공에서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온 카드미엘에 펴져 나갔다. (4장에서 계속됩니다.) 3장이 끝났습니다. 쿨럭. 으음. 4장역시 가이칸 제국 이야기가 계속 될듯 합니다. 가이칸 제국 (하) 라고 넣어야 하나...(머어엉) 일단 한동안 조금 쉬다가. 재 충전을 하고. 다시 4장에 들어가려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올리는 방식이라고 해야하나.....타이틀이라고 해야하나...^^;; 출판쪽에 맞추어서 ..조금 수정해서 올립니다. 4권..분량이 되겠죠?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 7장 카드미엘의 바람 "자아. 쌉니다 싸요!! 여행자들의 필수품. 아 거기 아저씨. 잠깐 좀 보고 가라니까. 이게 물건이라구. 방수. 방한. 방열. 뭐든 가 능하지. 게다가… 어이. 어이 이봐!!" 힐끗하고 왠지 물건을 살 것만 같았던 남자들을 보고 열을 올렸 던 장사치는 그들이 눈길하지 제대로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스쳐 지나가자 투덜 투덜 거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망토를 내려 놓았 다. "참나. 안 살 거면 쳐다 보지도 말 것이지 말이야. 목 아프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방금전,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간 세명의 여행자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오랫 동안 장사를 하다보면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일년 열 두달 내내 여행자들이 바글 바글 한 카드미엘의 상인인 그 역시 사람 보는데는 단연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전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간 여행자들처럼 묘한 느낌 을 주는 자들은 없었다. "헤에…. 설마 기사들이었나?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제국의 수도이니 만큼, 기사들의 숫자도 상인들의 숫자만큼이나 잔뜩인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기억속에 있는 기사들의 옷차림과는 상당히 먼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는 기사들이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것이다. "뭐. 기사들이야 카드미엘에는 널리고 널리고 또 널려 있으니까 …."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다음 손님을 찾아 눈을 돌리기 시작했 다. "쌉니다! 오늘 아니면 오지 않는 기회!!! 카드미엘에서 최고로 좋은 망토!!! 이것만 두르면 궁정기사단도 무섭지 않아요! 쌉니 다---!" 활기찬 사람들의 숨소리가 가득 차 있는 거대한 성읍 카드미엘. 카드미엘은 아슈레이 대륙 남동쪽, 기름진 평야의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는 거대한 제국 가이칸의 수도다. 수많은 제후국들로 이루어진 이 가이칸 제국의 여러 성읍중에서 도 단연코 첫 번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성. 도시와도 같은 카드미엘의 중심지에는 거대한 성이 웅장하게 자 리 잡고 있었다. "크군…." "그러게. 생각보다 훨씬." 바람에 수십여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성벽을 멀리서 바라보 며 로운과 기엘이 번갈아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메이라에서 항상, 아니 거의 매일 같이 미메이 라에서 제일 크다는 키리엔을 보아왔던 그들이지만 카드미엘에 비한다면 키리엔은 황성 한구석의 별궁 크기밖에 되지 않았기 때 문이다. 하지만 뭐랄까? 그들이 작은 소리로 내뱉은 감탄사에는 순수한 감탄보다는 다른 의미가 더 많이 담겨 있었다. "대단해. 정말. 키리엔의 몇배 이상은 되겠어." "아무래도 제국의 수도니까." "어이. 이봐." 그때까지 기엘과 로운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이리야가 조금은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그렇게 두리번 거리지 마. 우리는 저 촌 구석에서 올 라왔습니다. 카드미엘은 초행이요-하고 광고하고 다닐 일 있어?" 팡팡-하고 이리야가 두사람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여기서는 몸을 숨기고 다녀야 할 판인데 이 건 아주 우리들은 의심서러운 일행입니다라고 선전하고 다니는 것과 진배 없다구."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이리야씨." "뭐가 그런게 아니라고 하는 거야? 기사양반?" "일단 크다, 라고 말할 때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 닙니다. 궁이 큰 만큼, 그리고 제국의 수도인만큼 경비대의 수도 훨씬 많을 것이라는 의미랄까요?" "그런 당연한 소리는 하지도 마! 에잉-- 정말이지." 투덜 투덜 하면서 이리야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어쨌든 도착하자마자 궁으로 쳐들어 가겠다거나 하지 는 않을 테니 일단은 작전이나 짜보자구." "물론. 기엘이 아무리 무대포로 움직인다고 해도 계획도 세우지 않고 덤벼들리는 없으니까. 어디 아는 데라도 있는 건가?" 로운이 들고 있던 보퉁이를 정리해서 어깨위로 올렸다. "안다고 하기는 그렇고. 사실 나도 잘 몰라. 이곳에 있는 동안은 내내 갇혀지냈었으니까." 문득 말을 하다 말고 이리야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럭 저럭 잊어가고 있던 기억들이 순간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것인지 못 챈 것인지 알리는 없지만 로운이 그런 이리야를 향해 말했다. "아무튼 고마워. 이곳까지 오는 길도 상당히 먼 길이었는데…." "고맙긴. 둘이서 휘까닥 하고 돌아서 여기까지 훌렁 훌렁 온건 데. 내가 뭔 한일이 있다고…. 아 맞다!!! 거기. 기사양반!!!" "네? 이리야씨?" 앞장서서 걷다말고 이리야가 핑글하고 몸을 돌려서 저벅 저벅 기 엘의 앞으로 다가왔다. "충고해 두건데. 한길가에서 경비대 수가 어쨌느니 방어가 어쨌 느니 기사들이 어쨌느니 하는 어벙한 소리 지껄이지 마. 알겠어 ?" "하하하." "하하하!가 아니야. 알아 들었어?"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괜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저. 되다만 신관 양반한데는 이런 소리 안 해. 문제는 당신이야 당신!!" 쿡쿡-. 이리야의 가슴을 찔러 가면서 이리야는 설교를 했다. 일이 어떻게 되었든 이미 그들은 카드미엘에 도착을 했다. 하지 만 이리야는 저 대하 나하르의 위를 달리는 거대한 정기 연락선 위에서 저 두사람이 한 행동을 뇌리에 똑똑하게 기억시키고 있었 다. 정말이지 두 번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무대포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야. 이전에는 몰라서 그랬다치 고, 앞으로 두 번다시 시안 빼고는 눈에 뵈는 거 없다는 듯이 행 동하면 가만 안 두겠어. 알겠어? 첫 번째도 단체 행동!! 두 번째 도 단체 행동!!!" "하하하. 알겠습니다." "웃지마!! 난 심각해!!" 이리야의 말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로운은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사실 뭐라고 끼어들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로운 역시 자신들이 계획했던, 바람의 엘의 흐름을 이용한다고 하는 누가 들으면 기절 초풍할 만한 짓이 무모했다는 것은 잘 알 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모한 짓에 자신이 동조를 하는 바람에 까닥하면 기 엘의 생명이 위험할 뻔했다는 것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나하르를 거슬러 올라 오면서 낮에는 이리야의 물의 술로, 밤에 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기엘과 로운이 바람의 술을 행했다. 그것만으로도 세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능력 한계를 시험하 는 강행군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운과 이리야 몰래 기엘은 그 이상의 행동을 남몰래 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면 문제. 엘러의 생명 그 자체인 생명의 엘과, 대자연의 살아 있는 엘이 하나로 합쳐지는 장면은 장관중의 장관이었지만 왠지 이리야에게 는 소름끼치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이리야의 눈에는 그들이 마치 자신의 생명조차도 포기하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일. 앞으로 지난 번에 했던 것처럼. 로운이나 나 몰래 혼자서 뭔짓을 했다가는 나중에 전부!! 시안녀석에게 모조리 일러 줄테 니까 알아서 해!!" 마치 어린애를 타이르듯, 이리야는 몇 번이고 기엘에게 다짐을 하게 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죠." 그렇게 말하는 기엘의 손이 허리에 매달려 있는 라이트의 손잡이 를 꼬옥 붙들고 있는 것을 로운은 알 수 있었다. "조오--아!! 그럼." 이제 되었다는 듯 이리야가 허리에 손을 얹고는 기합을 넣었다. "이제부터는 저놈의 무시무시한 궁에 들어갈 방법을 궁리해보자 구." -------------------------------------------------- 계속 안녕하십니까. 김우인 입니다. 많이 늦었습니다.--;;;;;; 여러모로 죄송하다고 밖에는...(쿨럭) 아프다고 하는 글에 여러분들께서 격려메일 보내주셔서.. 정말 많이 감동했습니다. 네. 많이 나았습니다. ^^;;; 아직까지는 해열 진통제에 의존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정도까지는 회복이 되었답니다. 걱정해 주신 여러분들, 메일 주신 분들,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네요. 앞으로는 열심히!!! 매일 매일 올릴 계획입니다. 기다려주신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그리고 부탁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께서 개인적으로 화일을 간직하시고. 그리고 필요한 분께 드리시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 하지만 제게 T_T 화일 달라고... 메일은 주시는 것은 좀...) 다만. 다른 웹사이트에 불펌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얼마전에 어떤 분께서 아슈레이 1-3권 분량이 어느 판타지 홈에 불펌되어 올라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부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부탁 드립니다.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 "시안은?" 조금은 피곤한 기색이 묻어 있지만 활달한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은 하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 고 몸을 굳혔다. "에메렌. 시안은 어디 있는 거지?" "…탑에 올라가 계십니다." "또?" 로렌의 수려한 이마에 주름이 갔다. "죄송합니다. 차마…." 변명을 하려는 에메렌을 로렌은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어차피 에메렌이 어떻게 할 수 있을 사항은 아니라는 것 을 그도 나름대로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내가 올라가도록 하지." 로렌은 가볍게 대답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로렌 네세크 카루인 라이너드. 황족만이 가질 수 있는 3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이름을 가 진 그는 명실 상부한 가이칸제국의 최고의 권력자중 하나 였다. 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는 하나 가이칸 제국은 그 덩 치에 어울리지 않게 나름대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 로 운영되고 있는 나라다. 그 정점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제국의 황제. 그리고 현재 는 거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로렌 황태자다. 황태자의 하루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바쁘다. 이른 아침 개인적인 훈련부터 시작, 처리하고 또 처리해 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서류들, 그리고 그를 알현하기 위 해 몇날 몇일전부터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루종일 그를 놓 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로렌은 왠지 제국의 제 1 실력자 답지 않게 초초하게 단 한명의 시종만을 거느린 채 좁고 어두운 계 단을 타닥 타닥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뭐. 별로." 가볍게 대답하면서 로렌은 닫혀 있는 문앞에 멈추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미타 남작이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마자 시원한 바람이 문틈에서부터 살며시 미타 남작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들어왔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것 때문인지 미 타 남작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역시… 좀처럼 적응이 안되는 군.' 경쾌한 발걸음으로 탁트인 공간으로 발을 내딛는 로렌과 는 달리 미타 남작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시안." 로렌이 시안을 불렀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로렌에게 있어서 시안이라는 존 재는 정말 '신기함' 그 자체였다. 저녁 햇살이 그대로 투과해버릴 듯 투명하게 반짝이는 은 발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살아있는 인형. 하지만 그 인형은 숨을 쉬고 있는 인간이다. "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해둔 것 같습 니다만?" "………." 미타남작은 로렌과는 달리 멀찍이서 시안을 바라보고 있 었다. 새로찾은 장난감을 신기해하다 못해서 애지중지하고 있는 로렌과는 달리 미타남작은 시안이 께름직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바람이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밖에 오래 있으면 몸에 좋 지 않습니다." 걱정이 한껏 묻어 나오는 목소리. "시안?" 궁에 있는 어느 누구도 저렇게 부드러운 로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만으로도 황태자궁에 자자한 핑크빛 소문이 100% 사 실 무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사실은 없는 것이다. 물론 미타 남작은 로렌의 시안에 대한 감정이 소문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 부터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쌓여 커온 사람이다. 그건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 할수 있는 사람은 일반 적인 사람일 수가 없었다. 로렌의 흥미를 끌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단 하나. '특이 한 사람'일 것. 그런 부분에 있어서 시안은 로렌이 흥미를 가질 만한 완 벽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전하. 어서 내려가셔야 합니다." "아아. 잠깐만." 로렌은 그런 미타 남작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팔짱을 끼고 시안을 글자 그대로 감상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과는 또 다른 바람이 언제나 시안의 몸 주 위를 맴돌고 있었다. "신기하지 않나?" "………." "분명 인간인데 말이야. 신국인이라는 존재는 다 이런 걸 까?" "글쎄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로렌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다는 것을 미타 남작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시안은 일종의 골치 덩어리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아주- 흥미로와. …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짖고 있던 로렌이 갑자기 한쪽 팔을 내밀었다. "………바람이…." 로렌이 올라와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던 시안이 갑자기 눈을 뜨고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전하!!" "쉬--잇!!" 미동조차 하지 않던 손이 공중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 시안의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살아 숨쉬며 바람에 나부끼 기 시작했다. "바람이… 바람이 불어 온다." 시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바람?" "바람이 불어와…." 미소를 짖고 있는 시안에게 로렌이 다가갔다. "시안!!" 그는 거칠게 시안의 내밀어진 팔을 당겼다. 왜 그러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시안이 물끄러미 로렌을 바 라보았다. "………." 로렌은 뭐라고 설명 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미타!! 경비대장을 불러라. 지금 당장." "예?"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어서!!" "예." 로렌은 풍성한 시안의 드레스 자락과 함께 시안을 안아 올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불쾌감이 로렌의 가슴을 맴 돌고 있었다. '도대체 이 기분은 뭐지?' ----------------------------계속. 말 할 수 없을 만큼. 짧군요..... --;;;; 지금의 몸상태라는 것이... ...고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1층부터 20층까지.. 하루종일 쉬지않고 오르락 내리락 오르락 내리락 한 딱- 그 상태입니다. (..네. 저희 집은 20층...입니다.) --;; 벼..변명..일지도.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3 "흐음." "이 지도 정말 정확한 겁니까?" "이봐. 사람이 애써 구해왔는데. 그렇게 타박하고 그럴거야?" "하지만…." 세 사람 앞에 있는 것은 명실 상부 아슈레이 최강국인 가이칸 제국의 황제의 황제궁 지도. 잠시 나갔다가 오겠다고 말하고 사라졌던 이리야가 반나절의 시간 후에 돌아와 내민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지도는 아주 세세한 것은 아니었지만 궁의 대략적인 건물 배치를 알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로운과 기엘은 둘다 뭐라고 할 말도 없어서 눈만 껌벅 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걸 도대체 어디서 구해온 거지?" 로운이 조금은 의심스러워 하며 물었다. "…묻지마." 이리야는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살살 긁으면서 로운과 기엘의 시선을 외면했다. "분명 얼마전까지만해도 농사일을 했다고 들었는데… 적응력 이 빠르다고 해야하는 건지." "그거 욕이야?" "칭찬으로 들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트집 잡지마. 여하튼 구해왔으면 된 거지. 뭘 더 바래?" "하지만 이게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는 것 아닙니까." "정확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아예 모르는 것 보다는 나을 것 아니야!!! 그냥 화악--- 돌려 줄까?" 나름대로는 신경을 쓴답시고 구해온 지도를 왠지 로운과 기엘 이 둘다 타박을 해대자 이리야는 좀 심술이 났다. 하지만 로운과 기엘은 그들 대로 할 말이 있었다. 사실, 정밀도가 보장 되지 않는 이상은 이런 지도는 특별하게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출처조차 알 수 없 는 의문의 지도를 믿고 그대로 움직 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한가지 더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리야씨. 그거 아십니까?" 기엘은 이리야가 내밀었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금 은 어색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러니까… 사실 이정도의 지도라면 바람술로 알아 낼 수가 있습니다." "…쿨럭 쿨럭." 로운의 헛기침 소리. 순간 이리야는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고함을 쳤다. "뭐라구-------웃!!! 그런 것은 미리 말을 했어야지!! 이 얼 간이 들아!!!" "얼간이라니! 대뜸 말도 안하고 맘대로 행동한 거는 너잖아! !" 로운이 질새라 같이 맞고함을 쳤다. "그럼 누가 하룻밤 내내 한숨을 쉬면서 멀뚱 멀떵 궁만 바라 보래?" "그럴만 하니까 그러는 거지!!" 두 사람이 핏대를 올리며 싸우기 시작하자 웬일로 기엘이 두 사람을 말리기 시작했다. "좋은 뜻으로 한 거니까. 그만해 로운." "이봐!! 기사 양반!! 당신 말이 더 기분 나빠. 당신이 내가 이거 구해오는데 뭐 보태준거 있어!!" "하. 하하하." "기엘이 보태준건 아니더라도 일단 여비는 내가 준 것 같은데 ?" "이…이……!!!!" 콧김을 풍풍 내뿜으며 이리야가 팔뚝을 걷었다. "잠깐요!!" "왜!!" 기엘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 들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이게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지는 이야기 를 해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리야씨. 일단 구해 오신건데 저희도 이게 제대로 쓰이면 좋겠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로 운. 나름대로는 힘들게 구해오신 듯 한데 그러지 말라구. 이 러는 동안에도 시안님께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건데…." "………." 로운은 기엘의 말을 듣고 피시식 식어서 제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좋아. 좋다구. 일단은 계획을 짜야겠지. 누가 뭐래도 여긴 제국의 중심부니까." "고맙다. 로운." "쳇. 뭐가 이렇게 시시해?" "예? 이리야씨. 무슨 말씀 이십니까?" "그러니까…." 이리야는 자신이 구해온 지도를 쓱쓱 다시 펴서 앞에 놓으면 서 궁시렁 거렸다. 사실 그의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로운과 기엘이 무지막지하게 강행군을 해온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카드미엘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궁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닐까 했던 것이다. "난 둘이서 카드미엘에 도착하자마자 무대포로 돌격 앞으로!! 라고 할줄 알았다구." "하하하." "참나." 이리야는 웃음을 터트리는 로운에게 삐죽-하고 입술을 내밀어 보였다. "우리도 그랬으면 딱 좋겠지만 불행이도 여긴 제국이니까." "맞습니다. 이리야씨. 여긴 제국이고, 또한 우리가 특별히 드 러내놓고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시안님의 신분을 생각 해야하니까요." "하이고- 많이 양반 되셨어. 펄펄 뛰던 것은 언제고." "………." 기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리야의 말대로 앞뒤 재보지도 않고 펄펄 뛰었던 것 만큼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리야의 예측이 완벽하게 빗나간 것 만은 아니다. 실제 그렇게 할 생각을 바로 어제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카드미엘에 도착한 순간 기엘은 이상하리 만치 차갑게 자신의 이성이 진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 다. 그것이 단순하게 시안이 있는 곳에 가까이 다가섰기 때문이지 아니면 적어도 뭔가를 할 수 있는 곳까지 따라와서 인지, 아 니면 시안의 영향권 내로 들어왔기 때문인지는 알리 없었지만 여하튼, 기엘은 한 발자국 물러서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일단은 가장 안전한, 그리고 정확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해.'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3명의 남자들은 각기 하나씩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 위에 이리야가 자신이 구해온 지도를 펼쳐 놓았다. "사실 이건 별거 아니야. 시장거리를 배회하다가 잡화상 하나 를 발견했는데 지도같은 것들이 많아서 한번 뒤져봤지. 아마 도 궁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심심풀이로 그린 것을 재미삼아 서 이렇게 만들었나봐. 그 증거로. 여기랑, 여기…." 이리야가 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짚었다. "이런데는 그냥 뭉텅 뭉텅 적당히 그림이 그려져 있잖아." "흐음… 위치상으로는 대충 후원 정도 되지 않을까요?" "정확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있는 지명이나 이름들을 미루어 보면 표시가 되지 않은 곳은 별궁들하고…." "지금 느껴지는 대로라면 시안님은 이쯤…에 계실겁니다." "응? 그걸 어떻게… 아아. 참. 기사 양반은 시안 탐지기였었 지. 잊고 있었어." "정확한 위치는 좀더 가까이 가봐야 하겠습니다만. 일단은 이 부근입니다." "하지만 지금 방금 생각났는데 말이야." "네?" 문득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던 이리야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궁에는 마법사들의 특수한 바리어 같은게 있 다고 들었어. 혹시나 모를 사건들을 대비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도 그 투시…인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거야?" "해보면 알겠죠." "맞아." "이리야씨도 방법만 배우시면 가능 할 지도 모릅니다." 기엘의 말에 이리야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바람이 어디에서나 불 듯이 물도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아마 도 흐르는 물이 있는 곳이면 이리야씨도 훤하게 투시를 하실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헤에…." 처음 알았다는 듯 이리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자. 그럼 일단은 로운과 제가 있는 힘을 다해볼테니. 이리야 씨는 잠시 기다려주세요. 로운." 기엘이 로운에게 손짓했다. "좋아. 여하튼 해보자구. 그 바리언지 뭔지를 뚫을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말이야." "하세카라고 했었지?" "네?" 로렌은 이마에 손을 얹고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입을 열 었다. "하세카가 그녀를 습격했었다고 했잖아." "그렇습니다." "흐음." 과연 저 총명한 황태자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생각이 돌아 가 고 있을까? 그를 지켜보고 있는 몇 명의 남자들은 한참동인이나 침묵하고 있던 로렌이 입을 열자 바짝 긴장했다. "궁내 경비는?" "말씀하신대로 평소의 1.5배…." "두배! 아니 두배도 모자라. 있는 잉여 병력은 모조리 가동시 켜." 조금은 신경질적인 로렌의 목소리가 계속 되었다. 그들은 지금 나름대로는 로렌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서재 겸 집무실이라 불리는 곳에 모여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로렌의 호출에 모여든 사람들은 한 명을 제외 하고는 모두 궁의 실무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히난." "네." 구석진 곳에 조용하게 앉아있던 남자가 로렌의 부름에 즉각 대답을 했다. "지난 번에 일러둔 것은 어떻게 되었나?" "그것이 아직…." 히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우물 쭈물하면서 대답했다. 사실 그는 로렌황자의 사실에 불려올 만큼의 지위를 가진 사 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나름대로 당당하게 로 렌의 집무실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얼마 안되는 제국인 엘러였기 때문이다. 그가 담당하고 있는 것은 로렌의 명에 따라서 제국 여기 저기 에서 잠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엘러들을 모아 만든 일명 그림자 부대. 아직은 그 규모가 미미하긴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로렌의 주 의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부대였다. "말씀하신대로 예의 그분의 행적을 뒤따라 조사하고 있습니다 만. 밝혀진 사실은 없습니다." "그녀와 함께 있었다고 했던 나머지 일행들의 행정도 묘연하 다는 건가?" "예. 요하엘까지 가서 수소문을 했으나 예의 사건을 전후로 그들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혹여 카드미엘에 잠입했을 가능성은?" "………설마." "설마라고 말하지 말고 철저하게 대응하도록. 있는 모든 수단 과 방법을 동원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쉴세 없이 로렌 황태자가 명령을 내렸다. "요하엘까지가 아니라 그들이 요하엘에 도착하기전에 어디에 있었나 철저하게 조사해서 보고 하도록." "…………." 로렌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어제 처음으로 보았던 그 시안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밤새도록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시안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하엘을 지나서 어디까지든 따라가보란 말이야. 미메이라까 지도!!" 시안이라는 존재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 는 굳이 알려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현재 시안이 자신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것을 쉽게 놓아줄 성격이 아니었다. '바람이 불어 온다… 라고 했어.' 몇날 며칠을 시안은 그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오는 탑 위에 하염없이 앉아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거칠게 손으로 쓸어 올렸다. 아직 초초해 할 것은 없다고 그는 자기 자신을 세뇌했다. 눈에 보이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녀가 한 말 한마 디가 전부다. 시간을 들여서 충분히 조사하고 대비한다면 아무일도 없을 것 이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곰곰이 잠시 더 생각에 잠겼던 그는 입밖에는 내기 싫었던 명 령하나를 마지막으로 내렸다. "하셰카의 잔당을 찾아내." "하셰카…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그 어둠의 암살단을…." "이유는 불문. 하세카의 잔당을 하나라도 찾아내. 누구의 이 름을 쓰든지 상관하지 않겠다. 의뢰를 하겠다고 해도 좋고, 방법이 거칠어도 상관없어. 찾아내." 그 배경을 알 수 없는 시안은 분명 하셰카의 습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하셰카의 수뇌라면 시안이 어떤 사람 인지,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지 알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런 로렌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명령을 들은 몇몇은 착잡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하지만 전하. 하셰카라고 하면 아무래도…." 그렇게 말한 남자를 로렌은 날카로운 눈으로 일별했다. "과거는 과거. 현재 필요한 것은 이용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 나? 나는 과거에 연연해서 현재를 놓치지는 않아." "…………." 고요함이 그들을 감쌌다. 로렌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과거를 잊지는 않지." 로렌은 손을 활짝 펴서 넓은 책상위에 힘있게 내리쳤다. 쾅-하는 소리가 넓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이제 모든 것은 내 손 아래에 있다. 겁낼 필요가 없어. 주춤 댈 시간도 없다.' 암살단 같은 것은 두렵지 않다고 그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설사 그들이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과거의 일.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데 도움 이 된다면 그는 얼마든지 그들을 이용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뭘 꾸물거리나. 당장 실시하도록!!" 힘있는 목소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 다. --------------------------------------------계속 눈 앞은 캄캄. 때로는 노~랗게 뜨는 나날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가끔은 별도 반짝 반짝. (....쿨럭..이..이러다가 죽는 것이 아닐까....) -_-;;;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4 희미한 기척과 불투명한 감각.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아가는 것 보다 더 느린 흐름의 끝에 닿는 것은 불확실한 파장뿐이었다. 기엘은 정신을 집중해서 익숙한 파장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희미해서 과연 그것이 시 안의 파장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희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너무나도 강력해서 그의 엘이 튕겨져 나올 정도의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세나케인인가…." 휘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든 고요한 방안. 눈을 감고 있던 기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찾았어?" 두근 두근하는 마음으로 로운과 기엘이 힘을 합쳐 주문을 시전하 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리야가 물었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 쉬는 로운을 두고 기엘이 뚜벅 뚜벅 탁자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필을 집어 지도 위에다가 뭔가를 쓱 쓱 그리고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이. 이봐. 말 좀 해봐. 응? 무사해? 찾은 거야?" 앞에서 알짱 알짱대는 이리야에게 기엘은 눈길 조차 주지 않았 다. "이봐. 기사 양반!!" "찾기는 했으니까. 적당히 해둬." 로운이 화를 내려는 이리야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저녀석 기분이 좀 나쁠테니까 자극하지 말고. 잠깐 나갈까?" "뭐야. 도대체. 사람이 말을 거는데 저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 씨근덕 거리면서 이리야는 발에 걸리적 거리는 돌멩이를 거칠게 차냈다. "…………." "대답좀 해봐. 사람을 데리고 나왔으면 할 말이 있을 것 아냐." "어렵게 어." "뭐가?" "시안의 상태가 좀 이상해." "이상하다구?"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전보다 더욱 약해졌다고 해야하나?" "그럼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야?" 대답을 듣자마자 몸을 돌려서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는 이리야를 로운이 잽싸게 붙들었다. "그런게 아니야. 끝까지 들어." 이리야는 점점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로운을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시안에게 문제가 없는 경우. 벌써 나와 기엘의 기척 을 느끼고 그쪽에서 우리에게 연락을 해 와야 해.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 거기다가 세나케인이 오히려 우리를 밀어내는 기분이었다구."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정확하게는 모르겠고. 굳이 단어로 표현하자면 시안의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는 소리야." "뭐?"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로운은 걷다가 말고 제자리에 서서 턱을 매만졌다. "사실 우리로써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좀 난감해." 로운은 머리를 쓸어 올리려다가 머리카락이 짧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해하며 손을 내렸다. "좀더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어." "그럼 도대체 날 데리고 나온 이유가 뭐야? 셋이서 같이 머리를 싸매도 모자랄 판이잖아." "이럴 때는 기엘을 혼자 두는 쪽이 좋아." 로운은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저 태자 궁쪽도 좀더 알아봐야 겠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로운은 태자궁이 서 있는 쪽을 날카로운 눈빛으 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투시한 대로라면 시안은 태자궁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그들이 알아낸 그대로라면 더욱 문제가 심각했다. 로운은 여행의 초반, 레카에서 만났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에게 들은 말과 함께 지금 바로 그의 옆에 서 있는 이리야에게 서 들었던 사실들이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과연 시안이 태자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걸까? 시안이 단순하게 궁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시안은 태자궁에 있었고 그것은 뭔가 아 무래도 그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이 야기가 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남자'라면 태자궁에 상주한다 는 것이 어떻게 보면 어불성설이 된다. 그것은 미메이라의 키리엔을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갈만한 일 이다. 궁의 외곽을 지키는 것은 남자들, 즉 병사들이지만 궁 내부에 있 는 것은 여자들, 여관들이다. 그런 와중에 남자인 시안이 태자궁에 있다는 것은…. "젠장. 그 녀석은 정말 골치덩이라니까." 고요한 밤. 세 남자는 잠자는 것도 있고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 다. "경비가 늘었어. 전체적으로. 여기 도착했을 때 봤던 것보다 일 단은 배 이상은 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 "………." "일단 경비가 집중된 곳은 여기. 태자궁쪽." 로운이 태자궁이라고 쓰여진 부분에 검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흐음--." 이리야는 팔짱을 끼고 그 부분을 노려보았다. "혹시 이곳에 가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이리야아 지도를 노려보는 것을 보고 기엘이 물었다. "설마. 나는 궁이라고 해봐야. 여기 외곽 부분에 잠깐 머물렀던 것 뿐이야. 내가 뭐라고 태자궁씩이나 가볼 수 있었겠어?" "그 황태자를 직접 본 일은 혹시 있으십니까?" "아니. 왔었다는 소리를 먼 발치에서 들었을 뿐이야. 사실 그림 자 부대. 그러니까 엘러로 이루어진 부대를 말하는 건데, 그걸 만들라고 한게 그 로렌 황태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일일이 부대원들을 만나보기나 할 것 같 아?"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후우-." 로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이리야가 이곳 카드미엘에 머물렀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리야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그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경비가 늘어난 것은 역시 이해가 안가. 설마 그쪽에서 우리가 시안을 찾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챌리는 없을텐 데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경비가 삼험해진걸까?"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적어도 짐작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기엘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댜. "하지만 하필이면 우리가 도착한 바로 후에 경비가 늘어난거지?" "………." 질문은 많았지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세 사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채 그저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이리야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화악- 뛰어 들어서 들쳐업고 냉큼 도망가면 안될까?" 이리야가 하는 말을 듣고 두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 라보았다. "왜!!" "지금까지 하는 말을 전혀 안들었군." 로운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전에도 한번 말했잖아." "뭘!!" "여기는 제국의 수도고 우리가 목표로 하는 곳은 제국의 황성. 그것도 차기 황제가 될 사람이 머물고 있는 궁이야. 혹시라도 만 의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는 경우. 그게 어떻게 불거질지 상상할 수 있어?" "그. 그러니까 살그머니 들어가서 난짝 들어 내오면…." 꾸사리 아닌 꾸사리를 먹어 조금은 기가 죽은 이리야는 그래도 끝까지 궁시렁 거렸다.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일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리 야씨. 로운의 말대로 만의 하나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 그것은 국가간의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걸 숨기면 되는 거잖아." "이리야씨!!" "에이!! 알았어. 알았다구. 입 다물고 있지. 무식한 농사꾼은 입 다물고 있겠다고." 이리야는 두 손을 들어 항복을 하는 것처럼 하며 조금 뒤로 물러 섰다. 사실 이리야로써는 이들이 그렇게까지 국가간의 알력이니 뭐니 하는거에 신경쓰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사실인데 뭐가 어떠냐는 것이 그 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확실히 자라온 배경이나 생활해온 반경이 틀 리기 때문에 벌어지는 언쟁이었다. 지금은 이러고 있지만 이리야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농부였었던 것이다. 수장이니 기사니, 신관이니 황제니 하는 단어는 전혀 들을 필요 없었던 평범한 생활을 해왔던 것이 바로 이리야였다. "…무슨 말을 못하겠군. 그럼 이건 어때?" "……?" 또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하려는 것이냐는 듯 로운과 기엘 이 그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도둑질을 하는 거야." "………이리야씨." 그래도 뭔가 기발한 의견을 내놓아 주는 것이 아닐까 해서 이리 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기엘은 짜증이 났다. "아니 아니. 아까 말한 것처럼 무식한 방법이 아니라. 전문가들 의 도움을 받는 거야. 확실하잖아? 적어도 전문가들이라면 이 지 도보다는 훨씬 상세한 지도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고 일단 숨 어 드는 것에도 전문가일테니까." "전문가라면?" "…흐흐흐. 바로 도둑씨들에게 의뢰를 하는 거야!" 두 팔을 허리에 걸치고 의기 양양하게 웃어댔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기엘과 로운은 이게 도대체 무슨 희안 한 소린가 싶어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상인 길드처럼 이런데는 도둑 길드도 있다구. 내가 살던 지방에 도 조금만 큰 도시에 나가면 도둑 길드쯤은 있다고 들었어. 하물 머 여긴 카드미엘. 제국의 수도라도. 적어도 가이칸의 도둑길드 원조쯤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안해?" "………." "그쪽에다가 의뢰를 하는 거야. 보수는 뭐 들고온 이런 저런 귀 중품을 내놓으면 되는 거잖아? 그 하이시라고 했나? 그거 생각보 다 엄청 비싼 거던데. 그거 아직 많이 남았지?" "이리야씨…." "이리야." 로운과 기엘 두사람이 동시에 이리야를 불렀다. "왜? 멋진 생각 같지 않아? 적어도 도둑들이라면 경비가 삼엄하 든 삼엄하지 않은 별로 상관없을 거 아니야. 게다가 태자궁이라 면 덤으로 이것 저것 훔쳐 올수 도 있을 테니까 일석 이조의 장 사지." "하지만…." 뭔가 타박할 기회도 놓쳐버린 로운은 갑자기 긴장이 풀려 버렸는 지 손을 내져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도대체 그 도둑 길드인지 뭔지랑 어떻게 연락을 하겠다는 거지?" "……아."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설명하던 이리야가 아차! 하는 얼굴을 했 다. 하지만 그는 곧 푸하하하고 웃으면서 순간 자신이 멈칫한 것을 무마하기 위해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 그거야. 사람 많은데나 에또…. 그렇지!!! 이전에 어디선가 동료한테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술집이 있다고 들었거든. 어때? 괜찮지 않아?" 조금도 기죽지 않는 이리야를 보면서 기엘은 로운과 눈빛을 주고 받았다. 단순하게 엉뚱한 소리로 넘기려했지만 웬지 뭔가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정말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 소립니까?" "당연하지!! 뭐 잘은 모르지만 분명히 도둑 길드에게는 담도, 성 벽도 문제가 없다고 들었거든." "소문 같은 것을 믿을 만큼 우리는 여유가 있는게 아닙니다. 이 리야씨." "맞아. 정확하고 확실하지 않은 것에 희망을 걸 수는 없으니까." "그, 그럼 이런 방법 말고 도대체 당신들이 생각하는게 뭔데?" 나름대로는 엄청나게 좋은 방법이라고 의견을 내놓았는데 두 사 람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이리야는 화가 났다. '암튼 머리에 이것 저것 너무 많이 들은 인간들이란….' "말을 해봐. 생각한게 있으면." "그러니까 어제 돌아다니면서 생각해본건데 태자궁의 사용인 같 은 것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데?" "사용인?" "일단은 경비대쪽도 있고, 나도 검이라면 기엘에게 뒤지지는 않 으니까. 경비대 모집이라던가 그런쪽으로…." "말도 안 돼!!" 이번에는 아까와는 정반대로 이리야가 큰 소리를 쳤다. "궁의 경비대를 누가 당신 같은 사람을 뽑아? 설사 실력이 있어 도 그렇지. 신원도 불확실한 사람을 누가 경비대에 넣어서 태자 궁 같은데 배치를 하나? 게다가 신참이 그런 일을 맡게 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야. 젠장. 나보다도 더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하는 구만."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 그런 상 식적인 걸 정말 모르는 거야?" "키리엔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리야에게 상식 운운하는 소리를 들어버린 로운은 그만 그 자리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당신이 살던 그 미메이라인지 뭔지하는 데서는 신원보증같은 것 도 안하고 마구 사람을 들여?" "그야. 우리들은… 그런게 필요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로운은 애써 어색함을 무마하려 했다. 사실이 그랬다. 처음 그들이 이리야를 만났을 때도 별다른 말이 필요없었다. 그 들에게 있어서 능력이라는 것은 그대로 그들의 신원 보증 그자체 가 된다. 혹여 불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는 그대로 문전 박대를 당하는 것이다. "……여기는 미메이라가 아니잖아. 로운." 기엘이 쓴 웃음을 지으면서 로운을 달랬다. "여긴 키리엔이 아니고 카드미엘이지." "맞아. 여긴 카드미엘이야. 우리같은 엘러들이 득실한 곳이 아니 라구."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최대한 물의를 빗지 않는 선에서라… 어렵군." 로운이 머리를 긁적였다. "흐응." 기엘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뭔가 생각을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리야씨." "왜?" "경비대는 불가능 하지만 그쪽은 되지 않을 까요?" "그쪽이 뭔데?" "이리야씨가 소속되어 있던 그 엘러들을 훈련시켰다는 그 그림자 부대 말씀입니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제국에서 엘러들을 탐내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씀 하셨지 않습 니까." "그건 그렇지만 기엘. 그건 좀…." 로운이 당황해서 기엘을 말리려 들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제국인들의 엘러에 대한 감정은 좋은 것이 아 니었었다. "엘러들을 색출해내려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죠?" "맞아." "저나 로운 정도의 엘러가 있었습니까?" "아니." 대답은 간단했지만 이리야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이리야는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엘에 그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는 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인지 잘 알고나 하는 소리야?" "물론입니다." "이봐 기사 양반!!!" "이리야씨. 어차피 긴급 상황입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말아!!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데. 두 번다시 빠져나오기 힘들지도 몰라. 거기다가 운이 나쁘면 나같이 이따위 인장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구!!" 그러면서 이리야는 거칠게 자신의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기엘의 눈앞에 간만에 보는 이리야의 그 노예의 인장이 드러났 다. 하지만 기엘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보다 더욱 빠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 다. 엘러라면 신원 보증 따로 필요 없겠죠? 능력이 중요한 것이 니까요. 게다가 이리야씨도 빠져나올수 있던 곳입니다. 제게 불 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만 있던 로운이 불쑥 맞장구를 쳤다. "어이! 로운까지 합세하면 어쪄자는 거야!!" "확실히 무모한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당당하게 활 동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 "그곳에도 엘러는 있어. 만일 그들이 시험을 하려들면 어쩌겠다 는 거지?" "하지만 우리 같은 신국인은 없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훈련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감출 수도 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는 이리야의 표정에 기엘이 보충 설명을 했다. "음… 일반적인 바람술사나, 아니 정정해서 엘러들이라면 저나 로운이라면 속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이러고 있습니다 만 일단은 키리엔의 로열 나이트입니다." 당당한 눈빛. 이리야는 기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너무나 간만에 보는 맑디 맑은, 그리고 자신에 찬 기엘의 눈빛이 었다. 이리야는 기엘을 처음 만났던 그 때를 떠올렸다. "그래.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해도, 나 역시 기엘에게 뒤지지는 않 아. 적어도…." 원래의 시안의 약혼녀가 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가지고 있다 라는 말은 로운의 입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좀 엉뚱한 방법이긴 해도 기엘이 말한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고 로운은 이미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시안님 정도의 능력자가 있다면 불가능 하겠습니다만…." 철컹- 스르르릉. 갑자기 기엘이 자신의 라이트를 들었다. "라이트는 최고의 기사의 증거입니다. 그 검에 맹세코 호락 호락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리야씨." 당당한 기엘의 언동. 그를 노려보고 있던 이리야는 결국 두손을 들고 말았다. 완벽하 게. "좋아. 알았어. 그러니까 그 시퍼런 검 따위는 집어치워. 젠장 할." 투덜 투덜 거리면서 이리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왠지 얌전하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를 무모하다고 몰아 붙일 때 알아 봤어야 했다. 결국 제일 무모한 것은 기엘과 로운 두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문제야!! 문제!!! 이 무대포 바보 멍청이 같은 기사들 같으니라구!! 하지만 나는 절대 안가. 당신들이 알 아서 해!!" 포기한 듯 말하는 이리야에게 로운이 쓴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말 했다. "물론 거기까지 같이 가달라는 소리는 안 해. 당신은 밖에서 도 주로를 확보해 달라고. 이전에도 한번 해봤으니까 두 번째는 더 욱 쉽겠지?" 얄밉게도 말하는 로운을 이리야는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았다. "말은 정말 쉽게 하는 군. 말은 쉽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건줄 알아?! 게다가 그 얼굴은 어쩔 건데. 우리 얼굴 정도는 다 알고 있을 거라고. 당신들이야 말로 그 놈들을 호락 호락 하게 보면 안돼." "얼굴정도야 조금만 힘을 쓰면 조금쯤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 다." "그러니까!!! 무대포라는 소리야!! 아아악----!!!" "잘될겁니다." 기엘이 화르륵 불타오르는 이리야를 위로(?)하려 했다. "부탁드립니다. 이리야씨." "몰라!!!!" "이리야씨를 믿습니다. 잘 해주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니까요." "시끄러워!! 죽으면 가만히 안 둘 거야!!" "설마. 이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아?" "으윽!! 말이나 못하면!!!!!" 밉살스럽게 말하는 로운을 향해 이리야는 결국 들고 있던 묵필을 집어 던지고 말았다. ♧ "당신들 지금 뭐라고 말했소?"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제대로 찾아 왔다면 말입니다." "…………." "레카에서 이곳에서 파견되어 나오신 분을 뵈었었습니다. 제대로 찾아 온 건가요?" 남자의 얼굴에는 경악이라는 두 글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혹시나 실수한 것이 있는가 싶어서 기엘과 로운은 조금 움칠했지 만 당당하게 행동했다. 루카인. 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자신의 눈과 귀를 동시에 의 심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의 앞에 있는 두 남자는 너무나도 선명한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이. 일단은…." 그는 조금 허둥대고 있었다. 이렇게나 당당하게 이곳을 찾아온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그를 더욱 당황하게 하고 있었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이곳, 즉 카드미엘의 황궁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이 작은 건물로 찾아오는, 아니 끌려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문도 모른채 끌려오곤 했었다. "당신들 정말 엘러입니까?" "물론입니다." 기엘과 로운은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그들의 방법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판명되기 직전이었다. 혼비 백산하여 그들을 안으로 인도한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기엘과 로운 두사람만이 썰렁한 공간에 앉아 있었다. "로운." "응?"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적어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죽지는 않겠지." "…후우." 이렇게나 무모한(?) 방법을 생각해낸 사람답지 않게 기엘이 긴장 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로운은 살며시 그의 친구의 어깨를 두들 겨 주었다. 생각해보니 이런 음험한 방식은 왠지 그의 친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엘은 원래부터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누군가 온다." 로운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 났다. 긴장하고 있던 로운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쪽으로 다가오고 있 는, 문 밖의 사람들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화염술사…로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이 사람들인가?"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기엘과 로운을 안내한 남 자를 향해 묻고 있었다. 키는 로운보다 약간 작았고 로운의 말대로 타는 듯한 붉은 머리 를 가지고 있었다. 화염 술사였다. 그는 기엘과 로운에게 시선을 주고는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히난 코게스요." "로운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친구인 기엘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밝힌 상대에게 로운은 나름대로는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 를 했다. "바람술사군." "그렇습니다." 히난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 역시 뜻밖의 상황에 조금은 긴장해서 정말 바람처럼 날라왔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로렌의 명령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그로써 는 조금의 돌발상황에도 신경질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소? 여긴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 인데?" "레카에서 우연히 이곳에서 파견되었다고 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뭔가 신빙성이 없어 응하지 않았습니다만. 카드미엘에 도 착해서보니 그분 말씀대로 이곳에 엘러들이 모여있더군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히난은 곧 로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 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로운의 말은 자신의 능력으로 카드미엘에서 엘러들이 모여 있는 이곳을 찾아냈다는 소리였다. 능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이곳을 자신의 발로 찾아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디 출신이요?" "바람의 나라. 미메이라입니다." 가볍게 로운이 대답했다. "뭐라고?" 이번에는 정말로 히난이 놀랄 차례였다. 아주 가볍게 물었던 그 의 의도와는 달리 들려온 대답은 정말 뒤통수를 때리는 대답이었 기 때문이다. "미. 미메이라?"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그저… 당신들이 너무나 정확한 제국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원래부터 그렇게 위엄이 있는 타입이 아니었던 히난은 너무 경박 하게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물 어물하면서 놀람을 감추 기 위해 노력했다. "신국인이 어째서 이런 곳까지…." 그는 간신히 자신을 가다듬으면서 말했지만 그 질문은 기엘과 로 운에게는 한심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기엘과 로운이 가장 기다렸던 질문이기도 했다. "레카에서 만난 분이 그러시더군요. 이곳에 오면 출세할 수 있다 고." 로운이 말하는 뒤에 이어서 기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미메이라에 있으면 우린 그냥 농사나 짖고 살 팔자니까 말입니 다." "…………." "부디 그분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씨익-하고 웃으면서 로운이 말했다. 그 시간. 로운과 기엘이 출세하겠다고 하며 히난을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태자궁의 가장 높은 탑위에서는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하나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바람에 흩날리면서…. "바람이 스며들고 있어…" ----------------------------------------------계속 일단은 7장은 이게 마지막. --;;; 다음회는 8장으로 이어집니다.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5 8장 녹색의 검. "이렌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루라고 했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도착 하셔서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만 …." "젠장할!!" 드물게 로렌이 거친말을 입에 올리자 곁에 있던 시녀들과 몇몇 시종들이 움칠했다. 정말, 진심으로 화가 나지 않은한 그들의 황태자는 절대로 저런 거친 말을 입에 올리는 법이 없다. "카스핀. 카스핀은 어디 있는 거지?" "미타 남작님께서는 아직 입궁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사 옵니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구." 로렌은 초조했다. 그가 이렇게나 초조해 한 적은 근래 정말 드물었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서류더미나 처리하고 앉아있으려니 정말 짜증이 나 는 군.'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애써 숨을 고르며 평정심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렸했다. 아무리 싫다고 생각해봐도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지시한 것은 많았지만 아직 어느 하나도 그의 앞에 놓여진 결과물은 없었다. 하지만 지시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산더미 같은 일들이 그의 앞에 있었다. '좋아. 하나씩. 하나씩 하자구. 앞으로도 할 일이 태산 같 은데 벌써부터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황자라고 해도, 그리고 주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천재 적인 재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일단 그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야망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장대했지만 아직 그 야망을 펼치기엔 그의 앞에 놓여진 장애물이 너무 도 많다. "일단은 이렌 후작을 이쪽으로 모셔오도록. 그리고…." 미타 남작이 있었으면 이런 자질 구레한 일쯤은 알아서 처 리해 주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하나하나 재빨리 머 리를 돌려 지시를 내렸다. '빨리 돌아오라구. 카스핀. 더 이상은 못 기다려!' "미메이라 인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건가?" 미타 남작은 히난의 안내에따라 좁은 복도를 걸으면서 몇 번씩 확인을 했다. 일에 치여서 짜증을 내고 있는 로렌황자가 기다리고 또 기 다리고 있는 이 남자는 현재 그 짜증을 불같이 쏟아내며 일 을 하고 있는 로렌황자가 직접 지시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궁밖으로 나와 있었다. 물론 정확하게 표현해서 완전히 궁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 다. 엄연히 이곳은 별궁의 별궁의 또 별궁에 속하는 여하튼 황 궁의 한 구석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직접 시험을 해봤습니다만 일단 믿을 수 있는 자들입 니다." "흐음…." 약간 뒤쪽에서 걷고 있는 남자를 100% 신임하는 것은 아니 었다. 하지만 그는 엘러라는 이유만으로 이상하리만치 로렌의 신 임을 받고 있는 남자였다.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엘러에 집착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시키는 대로 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머리를 돌려 생각해봐도 이해 할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 대표적인 대상이 바로 엘러 라는 존재와 현재 로렌의 궁 에 머물고있는 시안이라는 소녀다. "제 주제넘은 판단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지난 번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긴 하지." 직접 눈으로 본적은 없지만 미타 남작은 히난이 화염술사라 는 소리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미메이라 인이라면 당연하게 바람술사가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일단 직접 보시면 한눈에 알아 보실 수 있으 실 겁니다." 그런 것 따위 알아 볼 리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며 미타 남작은 잠자코 히난이 안내하는데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정상인인 것이다. 그는 힐끗하고 히난이라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화염술사라 고 하는 말을 증명하듯이 그의 머리는 불타는 듯한 붉은색. 실제로 그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본적은 없지만 일단은 화염술사라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신경을 쓰는 것은 이 화염술사가 혹시라도 로렌 에게 어떤 위험요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 뿐이다. 그는 이틀전 로렌이 자신에게 아무말도 없이 히난을 태자궁 으로 불러 들였던 것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시안을 걱정하고 있던 로렌이 혹시라도 같은 엘러 라면 시안이 조금이라도 반응해주지 않을까 해서 히난을 불 러 들었던 것이었다. 물론 소득은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로 렌의 역정을 자아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같은 바람술사이니 아무래도 저보다는 그분께…." "됐네. 일단 만나보도록 하지." 화악 트인 밝은 실내로 미타 남작이 걸어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두 남자가 재빨리 일어서 는 것이 보였다. 장신의 남자 두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타 남작은 재빨리 그들을 어 보았다. 20대 초반의 외모로 보이는 그들은 히난의 말대로 눈이 부 실 정도의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시안과 똑 같이 말이다. '외모 하나는 확실 한 것 같군….' 한 남자는 건강한 체격에 다른 한 남자보다 약간 키다 더 컸고 짧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다른 한 남자는 그보다는 좀 호리호리 했지만 역시 꽤나 단단한 몸집을 하 고 있었고 마치 여자처럼 어깨를 훨씬 넘긴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분은 로렌 황태자님의 측근이신 미타 남작님이시다." 히난이 그를 먼저 소개했다. 미타 남작은 그가 언급한 '측근'이라는 단어에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로운이라고 합니다." "기엘입니다." 짧게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며 미타 남작은 그들에게 앉으라 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미타 남작이 반대편 의자에 앉을 때까지 기 다렸다가 자리에 앉았다. 적어도 예의 범절을 모르는 사람 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 미메이라 인이라 들었소만…." "그렇습니다." 빙긋하고 웃으면서 로운이 대답을 했다. 로운은 나름대로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는 보통 때 보다 훨씬 더 유들 유들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사실 로운은 이 미타 남작이라고 소개된 남자가 그들앞에 나타 나는 순간 히난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신경 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일이 급하게 되어 내가 이곳까지 왔소만…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을 해주었으면 하오." "물론입니다." 그쪽은? 이라고 하는 듯 미타 남작의 눈이 기엘에게 향해졌 다. 기엘은 대답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말이 없는 편인가 보군.' 미타 남작은 약간 피곤한 머리를 살짝 돌리면서 입을 열었 다. "그럼 먼저 카드미엘에 오게된 이유를 들어 볼까?" "전하. 자꾸 그리하시면…." 에메렌은 조금 전부터 눈앞에서 왔다가 갔다가 쉬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있는 로렌을 보다가 마지 못해서 입을 열었 다. 하지만 웬지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살짝 어려있었다. 잠시도 앉아 있지 못하고 자꾸만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저렇게 걸어 당기는 버릇은 로렌이 아주 초조할 때 무의식 중에 나오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어린 시절 종종 보던 것을 이렇게 장성한 후에도 무의식적 으로 되풀이 하는 것이 에메렌에게는 나름대로는 감개무량 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저렇게나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로렌이 얼마나 초조해 하고 있는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에메렌은 더욱 신경이 쓸 수 밖에 없었다. "역시 너무 성급했던 건가…." 로렌은 마지막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림자 부대의 장인 히난으로부터 미메이라 출신이 바람술 사 둘에 대한 보고를 받자마자 미타 남작을 보내 그들을 시 안을 위해 태자궁으로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 바로 어젯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인 지, 아니면 틀린것인지 고민을 했던 것이다. 시안을 염려하는 마음에 반색을 하며 부르긴 했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불러 혹 시안의 상태가 더욱 악화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 그의 고민거리였다.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히난의 보고에 의하면 엘러들은 엘러들만의 신원확인법이 있다고 했고 적어도 그들은 믿을 수는 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다. 게다가 히난처럼 화염술 사도 아니고 제국 출신의 엘러도 아닌 시안과 같은 미메이 라 인이라는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좀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엘러는 아니지만 자라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던 로 렌이다. 적어도 사람들을 판별 할 수 있는 능력은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일단은 한번 더 심사숙고를 해야하 지 않을까 또 한번 고민을 했다. "전하. 미타 남작님께서 도착하셨다 하옵니다." 문 밖에서 미타 남작의 소식을 전하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순간 그의 발걸음이 뚝-하고 멈추었다. 로렌이 미친 듯이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그의 고민거리 대상들인 기엘과 로운역시 로엔 못지않게 초조한 마음을 감 추면서 미타 남작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미타 남작에게 들리지 않게 바람술을 이용하여 은밀 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무 일이 잘 풀리는 것 아니야?」 「글세?」 「뭔가 불안해. 로운.」 「그래도 이제와서 뒤로 내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게다 가 그 히난이라는 남자의 말이나 저 사람의 말대로라면 틀 림없이 시안에게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건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기엘은 웬지 일이 너무나도 쉽게 풀려나가고 있는 것이 이 상하게만 여져겼다. 그것은 꼭 일신상의 위험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아주 이상하게 머릿속 한 구석에서 누군가 경종을 울리고 있었 다. 본능적인, 아주 원초적인, 인간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사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기엘은 받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로운과 기엘은 나름 대로는 일종의 도주로(?)를 확보하면서 계속 미타 남작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그의 뒤를 따르는데 문득 미타 남작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지금에 와서야 말하지만…." 미타 남작은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보는 것이나 알게 되는 사실들은 모두 일종의 기 밀에 속하는 것일세. 사실 나로써는 자네들이 필요 없기를 바라지만 말이야." 미타 남작이 웬지 자신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다는 것 쯤은 로운이나 기엘 두 사람다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 겠지만 이 남자는 엘러라는 존재에 뭔가 거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은 굳이 다른 방법을 쓰지 않아도 그의 언동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제국에 왜 엘러들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참…." 고개를 돌리는 미타남작의 입에서는 혼잣말과도 같은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밝게 꾸며진 태자궁의 중심부에서도 한참을 위로 올라가자 드디어 그들의 앞에 육중한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미타 남작이 손짓을 하자 문 앞에 있던 시종이 안에 기별을 했다. "전하 미타 남작님께서 도착 하셨습니다." 들어오라는 아주 짧은 목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문이 소리도 없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계속 .....유구무언 쿨럭. (저혈압..증상 아시는 분 계십니까....?)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6 "결국 혼자로구만." 사람들이 바글 바글한 중앙 시장 한 복판에서 이리야 는 한숨을 푸욱- 내어 쉬고 있었다. "한심해. 한심해. 너무너무 한심해." 귀가 따갑도록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여왔지만 이리야 는 그저 멍청하게 앉아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수도 없이 그의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쳇…. 정말이지 기분 나쁘다니까." 그는 이틀전 로운과 기엘이 변환술로 얼굴을 약간 바 꾼 후 궁으로 향하면서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때가 되면 연락을 할테니까 언제나 대기하고 있어. 뭐 시간은 좀 걸릴 지도 모르지만….' "때 좋아하시네." 이리야는 손을 들어서 손목 부근에 묶어 두었던 천 조 각을 풀어 내었다. 그곳에는 희미한 흰색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저희들의 연락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 다. 오로프가 가까이 오면 이것으로 금방 아실 수 있 습니다. 그러면….' 기엘이 신중하게 심어 놓은 주문을 잠시 바라보던 이 리야는 피식-하고 웃으면서 손목에 다시 천을 묶었다. "기분 한번 정말 지나치게 더럽군." 그는 투덜 거리고 있었다. 혼자 남겨진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역 시 계획에서 들러리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된 것에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해서 쭐래 쭐래 로운이나 기엘처 럼 얼굴을 바꾸고 따라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쳇. 여하튼 더럽게 잘난 녀석들이니 내가 뭐라고 하 겠어." 너무나 당당하게 '속일 수'있다고 말한 그들은 그들의 말대로 무사하게 '속여 넘긴' 것인지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혹시나 자신들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의 계획을 들키면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이름하야 무대포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무사하게 잠 입을 한 모양이다. "흐응. 실패 하기만 해봐." 그는 고개를 들어서 장엄하게 세워져 있는 황궁을 바 라보았다. 어제도 그는 이렇게 황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위험을 감수 하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그렇다고 했잖아." "시안님께서 이리야씨를 도와 드린 것은 시안님께서 그저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목 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이리야씨가…." "이봐. 기사 양반." 이리야는 아까부터 자꾸만 자신을 멀리 떼놓으려고 수 작을 부리는 기엘에게 조금 짜증이 나 있었다. 일이 위험하다느니, 다칠 수도 있다느니, 자칫 잘못하 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느니 하면서 손을 떼라는 식 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위험한 거 몰라? 위험한 거로 치면 내가 이놈의 카드미엘에 발을 디딘거 자체가 엄청나게 위험한 거라 구. 당신들만 각오한 줄 알아? 나도 그정도 각오 정도 는 했어." "기엘의 말은 그게 아니야."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운이 끼어들었다. "단순하게 말해서. 나나 기엘은 시안을 구해야할 절대 적인 이유가 있지. 하지만 당신은 그런게 아니니까. 더 위험해지기 전에 손을 떼라는 소리…."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버럭하고 이리야가 화를 냈다. "그럼. 이유가 있나?" "당연!! 나 역시 그 꼬마한테 내 목숨을 구원 받았어. 그것으로 족하다구. 내 목숨을 구한 사람을 돕겠다는 데 왜 난리야!" "그냥 갈 곳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순간 이리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꾹 쥐고 있던 주먹을 로운에게 날렸다. 로운은 날카롭게 날아오는 이리야의 주먹을 공중에서 저지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던, 네가 시안에게 불손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아마 훨씬 이전에 널 처리했을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대로 둔 것 뿐이지. 하지만 앞으로는 틀려. 우린 목숨을 걸고 시안을 구해내서 반드시 이루어야할 사명이 있지만 넌 그렇지 않아. 적당한 때 손을 뗀다고 해서 널 겁쟁이 라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 말 한번 거창하게 하는 군." 이리야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로운의 손을 떨쳐 내면서 소리쳤다. "목적? 사명? 그래. 난 그런 잘난 단어는 몰라. 니들 말대로 난 무식하게 농사를 짖던 농군이었을 뿐이고, 지금은 갈데도 없지. 당신들이 말하는대로 난 대의명 분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아. 그냥 하루하루 목숨 이 붙어 있기만 해도 상관없을 정도지. 하지만 이것만 은 똑똑히 해두겠어!!!" 하아하아하는 거친 숨소리가 이리야의 입에서 새어나 왔다. "목적이 없는 생활에서 간신히 찾아냈어. 그 계기가 단순한 녀석의 친절에서 우러났으면 좀 어때? 한 순간 손을 내민 것 뿐이지만 나한테는 의미가 커. 녀석을 내가 살아가는 의미로 삼아도 될 만큼." 이리야는 주먹을 꾹 쥐었다. "나는 기사도 아니고, 신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 야. 하지만 내가 정한 목표를 그대로 관철시킬만한 의 지를 가지고 있고, 난 내가 정한대로 시안을 위해서라 면 뭐든 할 수 있어. 아니 하겠어." "………." 이리야의 마음속에서 불안정하게 움직이던 엘이 그가 말을 하는 와중에 하나로 모여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 는 것을 로운과 기엘은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거창한 단어로 포장하지 않아도 그 마음은 로운이나 기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좋습니다." 결국 기엘이 먼저 항복을 했다.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이리야씨가 시안님을 위해 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신 이상 저 역시 이리야 씨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만의 하나, 시안님께 어떤 위해가 가해지는 상황이되거나, 혹…."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기엘의 눈빛을 이리야는 당당하 게 받으며 서 있었다. "혹 이리야씨의 존재가 시안님께 위험을 초래하게 된 다면…." "그런 상황이 되면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이리야는 기엘의 말을 잘랐다. "기사양반 하는 꼴은 지금까지 정말 질리도록 봤으니 새삼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없어. 자. 이제 됐나?" 이리야는 두 손을 펼쳐보이면서 로운과 기엘의 동의를 구했다. 로운과 기엘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럼 상세한 계획을 짜보도록 하지요." "젠장. 지금 생각하니 정말 닭살이 돋는 군." 혼자 앉아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얼굴이 달아오 르는 기분이 들은 이리야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는 그만 흥분하는 바람에 있는대로 지껄여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모두 진실이었다. "하이고… 내 팔자야. 하기사. 그 기사양반이 무슨 맹 세니 뭐니 그런거 하라고 안한게 다행일지도 모르지." 이리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우두둑-하고 허리에서 소리가 났다. 아마도 너무 한자 리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었기 때문인듯했다. "으라차차. 자아. 그럼 나도 슬슬 움직여 봐야겠지?" 이리야는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거대한 황궁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 -----------------------------------------계속 ...늦었습니다. ^^;; 음. ..다음 회정도에선.... 만나게 되겠죠?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7 ♧ 아무도 없는 듯한 고요함. 숨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주위에는 고요함이 맴돌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정 자세로 서 있는 두 남자. 로렌은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두 사람의 남자를 바라보 고 있었다. 로운과 기엘을 아래위로 샅샅이 어보며 시간을 끌던 로렌이 한순간 짧게 숨을 내쉬었다. "흐음…." 까닥-하고 로렌의 고개가 어린 아이처럼 옆으로 기울었 다. 삐딱한 시선의 끝에 서 있는 두 남자. "뭔가 너무 일반적이군." "예?" 미타 남작이 순간 당황해서 대답했다. "은색의 머리카락은 그녀를 하도 봐서 인지 그리 신기하 지도 않고 말이야. 바람 술사라고 해서 비슷하지 않을까 했는데 너무 멀쩡하잖아 카스핀." "………." 정확하게 말하면 저 시안이라는 여자가 정상이 아닌겁니 다!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카스핀은 울컥 올라오는 말 을 꼭꼭 안으로 삼켰다. "그래. 미메이라 출신이라고?" "그렇습니다." "이름은?" "로운입니다." 그쪽은? 하는 눈빛으로 로렌이 기엘을 바라보자 기엘은 마지못해서 입을 열었다. "기엘이라고 합니다." "이름뿐?" "뭐 천한 농군이라서 말입니다." 씨익하고 로운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본 로렌의 한쪽눈썹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묘하게 겁이 없는 자들이군.' 말로 표현할 것도 없이 자신은 아슈레이에서도 가장 커 다란 세력을 떨치고 있는 가이칸 제국의 황태자다. 그런 자신의 앞에 서면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눈앞에 있는 로운이라는 남자는 주눅이 들기는 커녕, 오히려 간덩이라도 퉁퉁 부운 사람처럼 유들 유들 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로는 농군이라고 하지만 뭔가 다른 것이 있다라고 로 렌은 결론 지었다. '마음에 드신 듯 모양인데.' 아주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던 로렌의 표정이 갑자기 살아나자 카스핀은 이내 눈치를 챘다. 그의 군주는 이상하리 만치 냉정하고 차분한 반면, 의외 의 부분에서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면을 보여주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공식적인 일이 아닌 부분에서는 너무나 정확하게 그의 감정을 얼굴에 저렇게 바로바로 드러내는 것이다. '곤란해….' 미타 남작은 언젠가 로렌에게 진지하게 이런 부분에 대 해서 한번쯤 말을 해두어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여하튼, 그래도 마음에 들어하시는 쪽이 나을지도 몰 라.' "내가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들었나?" 로렌은 그때까지 찜찜해하고 있던 기분이 말끔하게 사라 지자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걸음 걸이로 걸어가 털썩- 의자에 앉았다. "들었겠지만 시안은, 아. 오늘부터 자네들이 돌봐야할 여성은 말이야 현재는 조금 상태가 좋지 않아. 내 힘으 로나 어의들의 힘으로 어떻게 처리될 부분이 아니라서 말이지." 로렌의 가벼운 어조를 듣고 있던 기엘이 순간 미세하게 몸을 굳혔다.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로렌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내 스스로가 엘러가 아닌 이상 엘러들이 어떤 존 재인지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내가 아는 것 은 엘러 역시 인간이라는 거야. 그렇지 않은가?" 손을 앞으로 모으고, 여유있는 자세로 앉아있는 로렌을 보면서 기엘은 속으로 하나, 둘 숫자를 세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남자는 얼마나 더 자신들을 기다리게 해야 시안을 만 나게 해주는 걸까?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아니 이미 이 태자궁에 발을 디딘 순간 기엘은 시안의 기운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전과는 말도 못하게 다른 이질적인 느 낌으로 변해 있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한발자국 한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초조함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들에게서 시안을 데려가버린 그 장본인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앞에서 여유잡고 말을 하고 있는 로렌이라 는 남자는 저리 밀어버리고 시안에게 뛰어들어가고 싶었 다. 그심정은 로운도 크게 다를 바가 아니어서 겉으로는 아 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로운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안을 만난이후로 로운과 기엘이 이렇게나 오래 시안의 곁에서 떨어져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네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말이야." 말을 하던 로렌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짙은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로운과 기엘에게 향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가 본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있도록 노력해달라는 것이지." 그 말을 끝으로 로렌은 할말을 마쳤다는 듯이 가벼운 몸 짓으로 일어났다. "어떤…분입니까?"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기엘이 조심스럽게 말했 다. "글세? 나도 잘 모르겠군. 아는 것이라고는 자네들같은 미메이라 출신이라는 것 뿐이야. 그것도 사실 정확한지 는 모르겠어. 자, 그럼 가지." 로렌이 앞장을 섰다. 로운과 기엘은 그의 뒤를 따르면서 로렌의 등 너머에 보 이는 흰색의 휘장을 바라보았다. 산들바람에 하늘 하늘 휘날리고 있는 휘장이 눈부시도록 빛나고 있었다. '시안님….' 로렌이 가까이 다가서자 시녀들이 일제히 길게 늘어져 있는 휘장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수십 겹이나 되는 휘장들이 마치 물이 갈라지는 것처럼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 안으로 한발자국 나아 갈 때마다 온 몸을 씻어내는 듯한 맑은 공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요하엘에서 헤어진 이후로 단 한순간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 없었던 시안. "전하…." "에메렌. 그녀는 어떤가?" "조금전에 기침하셨사옵니다. 전하." 눈매가 부드러운 여자가 그들을 맞았다. 그녀는 로렌에게 허리를 굽혀보이고는 조용히 옆에 길게 늘어져 있는 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스르르륵-하고 바람과 함께 길고 긴 휘장이 갈라지기 시 작했다. 조금은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와 그들의 몸을 감쌌다. "로렌……." 새하얀 흰손이 로렌에게 향해졌다. 로렌은 그 손을 붙들 고 그녀를 소개했다. "시안이라고 하네." 초점없는 눈동자가 천천히 기엘과 로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아름다운 바람의 여신이지." 로렌이 그녀의 손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 ------------------------------계속 마..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짧군요...쿨럭....T_T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8 ♧ "믿을 수가 없어.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신 거지?" "……………." "이런… 이런 일이…." 할 수만 있었다면, 기엘은 그 자리에서 시안에게 달려들었 을 것이다. 흐리고 초점없는 눈동자가 그들을 맞이한 순간 로운과 기엘 은 시안의 파장이 그렇게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알 아챘다. 길고 긴 머리카락과 조금 윤곽이 변해 있는 얼굴. 어느 것도 로운과 기엘의 기억속에 있는 시안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시안이면서 시안이 아닌 그런 존재였다. "난감하군…." 퍼억--- 기엘의 거센 발길질에 육중한 의자가 밀려났다. 로운은 아무말 없이 그런 기엘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 다. 목숨을 걸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는 드디어 만날 수 있다고 생각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시안님… 어떻게…."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을 기엘은 몇 번씩 허공을 향해 불렀 다. "기엘 진정해." "시안님." 털썩하고 기엘의 무릎이 꺽여졌다. "그래도 시안님을 만난거잖아. 진정하고 방법을 강구해보 자." "…………." 그들은 태자궁 한쪽에 마련된 사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 다. 늦은 시간이기에 간단하게 대면을 한후 그들은 이곳에 머물 것을 명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잠 을 이룰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미소 아닌 미소를 지어 보이던 시안을 보고 두사 람다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나 힘들게 이곳까지 왔건만 그들을 반갑게 맞아줄 것 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기엘. 네가 도와줘야해." 로운은 바닥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는 기엘의 어깨에 손 을 얹었다. "이러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세나케인." "응?" "그를 불러내겠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엘이 순간 덥썩 로운의 손을 잡았다. "세나케인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 갑자기 생기를 찾은 듯한 친구에게 로운은 다른 말을 할 수 가 없었다. "힘들지 않을까? 기엘?" "아니. 가능할 거야. 그는 시안님의 보호자니까." "어떻게 불러야 할지 이거 난감하긴 한데…."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 일단은 그의 파장 도 느낄 수 있는 상태니까 오히려 더 편할지도 모르지." 기엘이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위에 로운의 손이 더해 졌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런 식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슈욱하는 소리와 함께 기엘의 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힘 이 사방으로 퍼져나왔다. "티리쉬 오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지금까지 다른 엘러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주문을 해제시키는 주문이었다. "그렇군." 로운 역시 같은 주문을 외우고 그의 힘을 개방했다. 억제되어 있던 엘의 흐름이 활발하게 퍼져나가면서 생생한 엘의 흐름이 그들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머리 위를 맴돌던 바람은 천천히 밖으로 흘러나가기 시작했 다. '시안님이 눈치를 채신다면….' 인식은 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중에 엘의 파장을 느끼면 반 응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기엘의 생각이었다. '다른 엘러들이 눈치 채기 전에 제발 시안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만큼 위험을 초래할 수 있 다. '세나케인….' 시안이 있는 쪽으로 의식을 날려보내 면서 기엘은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세나케인의 이름을 불렀다. '바람의 힘, 바람의 의지, 바람의 세나케인….' 가닥 가닥 흩어지던 엘이 천천히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 다. 그리고 그 끝에… '세나케인.' 「서투르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나케인님!!" 「인간이란 것은 참으로 귀찮은 존재야.」 그말과 함께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 기엘과 로운의 앞에 드러났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나타난 그는 이전보다 훨씬 흐리긴 했지만 확실한 인간의 모습을 띤 채 공중에 떠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다짜고짜 로운이 세나케인에게 물었다. "당신이 같이 있으면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때까지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로운이 기엘보다도 훨씬 먼 저 세나케인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이곳에서 너무 오랜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세나케인은 기엘의 질문은 들은척도 안하고 다른 소 리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힐끗- 하고 세나케인이 기엘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달라진 그의 말투에 세나케인은 재미있다는 표정 을 했다. "어째서 저런 모습을 하고 계신거죠? 저건 도대체…." "게다가 저희들을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는 인간 세상의 법칙은 그리 신경쓰지 않지.」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하는 기엘에게 세나케인 이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법칙을 크게 거스를 생각은 하지 않아.」 "………." 무엇인가 항변을 하려는 기엘을 로운이 막았다. 괜시리 여기서 세나케인의 말을 끊는 것은 더 좋지 않을 것 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기엘과 로운이 다그칠때는 제대로 대 답도 안 하다가 그들이 조금 공손한 태도로 나오자 입을 열 기 시작한 세나케인이다. 「포로가 되었을 경우,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훨씬 살아 남 기 쉽다고 예전에 누군가 그러더군.」 싱긋-하고 웃어보이는 세나케인의 얼굴에 로운은 웬지 한방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당신은 시안님의 보호자가 아닙니까." 「보호자? 시안의 보호자는 내가 아니라 그대들이었던 같은 데. 아닌가?」 "로운. 가만히 있어봐. 세나케인님. 그럼 지금 하시는 말씀 은 시안님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저런 모습으로 변화를 시켰 다는 소리입니까?" 마치 인간처럼 세나케인은 턱을 괸 모습을 한 채 기엘의 말 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어째서 시안님이 저 런…." 「그녀석은 마음을 닫아 버렸어.」 "예?" 「요하엘에서 이곳에 오는 도중에 호로스의 시종하나가 그 녀석에게 달려들었지, 그러다가 기사가 하나 그의 목숨을 바쳤을 뿐. 별일도 아니야.」 세나케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기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것 같았다. "죽었…다구요?" 「뭐. 적당히. 그 기사가 죽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약간 손을 썼지.」 너무나 인간다운 말투, 그러나 그가 하는 말들은 인간적인 감정들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현재 저녀석은 자신의 몸도 컨 트롤 하지 못해서 쉴새 없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지. 그리고 …」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세나케인은 입을 다물었다. "시안님이… 시안님이 하지 못하시면 당신이 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기엘!!" 주먹을 쥐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기엘이 격하게 소리쳤 다. "당신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아니 아슈레이에서 시안님이 의지할 존재라고는 당신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그런 능력을 가지고도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무방비하게 시안님을 내동댕이 칠 수 있는 겁니까! !" "기엘 그만해!!" 로운이 기엘의 몸을 뒤에서 안고 그를 말렸다. 그냥 두면 당장이라도 세나케인에게 달려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달려들어 봤자 실체가 아닌 그에게는 소용도 없었을 것이 다. "시안님은 생명을 중시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눈앞 에서 죽음을 목격했다면…." 「하나말해두지.」 "…………." 「나는, 시안이 자각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내 마음대로 힘 을 쓸 수 없어. 인간계에 미치는 내 힘은 너희들의 지각으 로는 이해할 수도, 그리고 측정할 수도 없다. 의지가 없는 힘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 을 다해서 바람의 계승자를 지켰다.」 그 말과 함께 세나케인은 나타날 때 처럼 소리도 없이 두 사람의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젠장!!" "기엘!!"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기엘의 절망이 맞다아있는 피부에서부터 생생하게 로운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 절망감은 피부가 시리도록 강렬하게 전해져왔다. ---------------------------------------계속 ....머엉..-_-;;;;;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9 "시안님." "…………." "시안님?" 사라락 소리와 함께 어깨에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조금 반응한다 싶었던 시안은 이 내 흥미를 잃어버린 듯, 다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집어 들었다. "부르면 반응은 하시지만 현재로써는…." 곁에 있던 에메렌이 설명을 했다. 이른 아침. 로렌의 호출을 받은 로운과 기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시안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시안님. 저는 기엘이라고 합니다." 참을성 있게 기엘이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말하며 시 안의 주위를 끌었다. 하지만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 았다. 시안은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던져 버리고 눈을 감았 다. 마치 노래하는 듯이 바람이 시안의 몸에서부터 불 어 나왔다. "저건 도대체 뭘 하는 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로렌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던 로운은 적당히 말을 꾸며서 대답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일종의 자기 치유가 아닐까 생각합 니다. 저희도 이런 경우는 접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뭐 라고 말씀 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그런 맥락으로 볼수 밖에요." "흐음." "로운. 정화술은 어떨까?" 시안의 상태를 잠시 지켜보던 기엘이 제안했다.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해봐야겠지." 에메렌과 로렌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시안에게는 가까 이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일단 정화술은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기 때문에 로운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화술을 써볼까 합니다. 엘러들에게는 일단 제일 기 초적이고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좋아." 로렌이 가볍게 허락을 내렸다. "일단 정화술을 쓰려면 시안님께 저희들이 가까이 가야 합니다." "으음…." 조금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로렌이 시안 의 곁에서 일어섰다. 로렌의 움직임에 맞추어 기엘과 로운은 시안의 곁에 가 까이 다가갔다. "조금 떨어져 주십시오. 어떤 영향이 갈지도 모릅니다. " 무뚝뚝한 기엘의 말투에 에메렌이 시안과 로렌의 사이 로 움직였다. "전하. 조금 더 떨어져주세요." "위험하지는 않은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문이 피 시술자이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영향일 끼칠지는 저희도 잘 모르 겠습니다." 로운이 나름대로는 상냥하게 설명을 하면서 주위를 물 렸다. 사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같은 엘러라면 정화술의 주문 이 주는 영향이 나쁘게 작용할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 만 그 대상이 엘러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면 경우가 틀 리다. 그 이외에도 한가지 더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혹시라 도 그들이 시전하는 주문을 누군가 듣지 않을까 해서였 다. 바람술의 주문은 대부분 시전자 자신의 이름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혹여 귀담아 듣게 되는 경우에는 곤란 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사람들이 물러서자 로운과 기엘은 최대한 목소리를 죽 여 조용하게 주문을 외웠다. 주위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귀에 들린 것은 정화술 의 시동어뿐. "…메 하니다." "…메 하니다." 두 사람의 주문이 시동어와 함께 손끝에서부터 피어올 랐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청명한 바람의 엘이 시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에 섞여 들어 갔다. 하나로 섞여진 바 람은 시안의 몸쪽으로 불어가며 길게 늘어진 휘장을 펄 럭이게 했다. "바람이…." 넋을 읽고 바라보던 에메렌은 그 묘하고도 신비한 광경 에 감탄사를 자아냈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어느 누구도 이전에 이런 광경을 목격했던 자는 없었다. 심지어는 화염술사인 히난까지 도 그들이 시전한 주문의 힘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었 다. 살아 숨쉬는 것 같은 흰색의 휘장과 그 안에서 펄럭거 리는 시안의 은백색의 머리카락. 폐 안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 오는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 신비하다면 신비하지만, 또한 현실과는 괴리된 그 무엇 인가가 그들의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감탄하고 있는 동안 기엘과 로운은 그들 과는 정 반대로 말 할 수 없이 당혹해하고 있었다. 정화의 바람은 정결하지 못한 것을 사라지게 하는 바람 의 술. 그러나 그들이 일으킨 정화술은 시안의 몸 안으로 자연 스럽게 스며들뿐, 걸리적 거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아니 자연스럽다기보다는 마치 아무 것도 들어 있 지 않은 물병에 거침없이 물이 차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주문의 잔향이 사라지려는 순간 그때까지 눈을 감고 미 동조차 하지 않고 있던 시안이 살며시 손을 들었다. "…………." 인간의 움직임 같지 않은 시안의 몸 놀림에 기엘과 로 운은 마치 마비라도 된 듯 멍하게 시안이 하는 양을 바 라보고만 있었다. 얇은 휘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시안의 손이 멈칫하고 공중에 걸렸다. "…섞여 있어." "………?" "다른 것이 섞여 있어." 불분명한 발음이긴 하지만 시안의 말은 너무나도 또렷 하게 기엘과 로운의 귀로 파고 들었다. 스윽-하고 시안의 손이 휘장 건너편에서 앞으로 내밀어 지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것을 저지했다. "그만!" 흠칫하고 시안에게 손을 내미려던 기엘이 황급하게 몸 을 돌렸다. 소리를 지른 것은 로렌. 그의 반응에 사람들이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로렌은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한 채 시안을 한번 노려보더니 그대로 아무말없이 나가버렸다. 그의 뒤를 미타 남작을 포함한 일련의 시녀들이 따랐다. "두분께서는 일단 쉬시지요. 전하께서 다시 부르실 겁 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여러분들게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가차없는 에메렌의 말에 기엘과 로운은 뭐라고 항의도 하지 못한 채 시안의 방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로렌은 시녀가 내미는 겉옷을 획하고 가로채어 집어들 고는 뚜벅 뚜벅 걸어갔다. 그는 가슴속에서 끌어 오르는 이상한 감정에 당혹해 하 고 있었다. '뭐지 이건?' 처음으로 경험, 아니 목격해본 바람술. 물론 이전에 히 난의 안내에 따라 그가 양성하고 있는 엘러들이 시전하 는 바람술이나 화염술, 물의 술등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 보았던 것들과 조금 전 그가 바로 가까이서 목격한 바람술은 판이하게 달랐다.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야.' 로렌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놀라움은 두 번째 문제였다. 그가 조금전 느낀 것은 단 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전하.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니야." 혹시나 로렌의 바람술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여 미타 남작이 물었지만 로렌은 절대 아니라고 못을 박았 다. "시안의 일은 조금 미루어두지." "네. 전하." 로렌은 머리가 복잡했다. 생각하는 것이 곤혹스러울 만 큼. 그러나 마냥 곤혹스러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는 황태자였고, 그리고 그의 명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 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조금 밀어두는게 좋겠지.' 로렌은 손에 들고 있던 겉옷을 다시 시녀에게 건네주었 다. 그리고 산뜻해진 얼굴로 미타 남작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없어서 밀린 일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그렇습니다. 전하." 미타 남작은 순식간에 로렌의 표정이 바뀐 것을 보고 속으로 다행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원래의, 있는 그대로의 로렌으로 돌아온 것 같았 기 때문이었다. ------------------------------------------계속 --;;; 또 늦고 말았습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 그. 그만 홈피...에 정신을 팔아 버리는 바람에 이틀 밤 낮을 홈피 만드는데 불태우고 말았습니다. __;;;;;;; 제 홈페이지가 생겼습니다. 아직은 도메인 등록이 안 끝나서 ^^;; 올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내일 이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 각중입니다. ^^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0 "뭐하고 있어? 기엘?" 로운은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엘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기엘은 두 손을 모두 펴서 손바닥을 들여보았다가 다시 주 먹을 쥐고, 그리고 다시 펴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조금 걸리는 것이 있어서." "걸리는 것?" "오전에 시안님이 말씀하신 것 말이야." "아―." 로운이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엘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쓰고 있던 것이었다. "섞여 있다고 했지." "분명 지금은 지각이 있는 상태가 아니신 것 같은데, 무슨 뜻일지 생각해봤어 로운?" "……………." "글세. 짐작은 가긴 하지만 사실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역시 하지 말았어야 했…겠지?" "설마. 그런 것이 구분 될리는 없잖아." 두 사람 모두 주어를 생략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차 마 입에 올리기도, 그리고 기억해내기도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팔을 올려서 조그맣게 주문 을 외웠다. "엘-루하." 익숙하고 또 익숙한 바람술의 수련법. 자연스럽게 엘이 공기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기엘은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차분하면서도 차갑게, 이성이 돌아온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렇지 로운?" ♧ "그 두사람에 대해서 더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없는가?" "현재로써는 그들이 말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정보는 없 습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할 가망성은 정말 없는 건가?" 아무말 없이 앉아 있는 로렌의 곁에서 미타 남작이 히난에 게 묻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첫째도 로렌의 안전이고, 둘째도 로렌의 안전이었다. 때문에 출신 성분도 알 수 없는 바람 술사 두사람이 신경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시다시피 불가능 한 일입니다. 만일 그들이 거짓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자동적으로 알게 된다. 이말인가?" "그렇습니다." "잠깐." 묵묵하게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로렌이 고개도 들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그외에 내가 지시한 것들의 결과는 아직도 멀었나 카스핀 ?" "예. 죄송합니다만. 아직은…." 로렌은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머릿속 어디에선가 무엇인가 걸리는 것 하나가 있었다. 시안과 함께 있었다는 세 남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라진 세 사람.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미메이라 출신이라는 두 남자. "뭔가 의심스럽기는 한데 물증이 없어." "하지만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걸 확신할 수 있나? 자네의 목을 걸고도?" "그런…." 대답할 하던 희난의 얼굴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확신이 필요하다는 말일세." 미타 남작의 말에 히난이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천 천히 대답했다. "그들이 저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자가 아닌 바에는 절대 그 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보다 뛰어난 엘러도 아닙 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만일 그들이 힘을 숨기고 있다면?"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들은 아닙니다. 아무리 신국인이 라고 해도 신국의 귀족들이나 기사들 왕족이 아닌 바에야 그런 힘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됐어. 카스핀. 너무 신경질 적일 필요는 없네." "하지만 전하. 저는…." "그만." 로렌이 한손을 들어 미타 남작의 말을 막았다. "나는 두 번 말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겠지? 히난 이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혹여,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비관론자는 아니었지만 로렌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 다. 최선을 다했고,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다 취해도 되 지 않는 일이라면 결국 그정도의 일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 이었다. 할 수 없는 것에 들일 시간같은 것은 그에게 허용되지 않는 다. "할 수 있는 일들을 최단 시간내에 하도록. 무슨 말인지 알 았나?" "알겠습니다." "시안의 상태는? 설마 또 탑 위에 올라가 있는 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두분이 오신 뒤로는 신기하게도 탑 위로 올라가는 일이 없어셨습니다." 휘익- 하고 로렌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져 올라갔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저도 연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에메렌은 로렌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아차 싶어서 말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로렌의 표정은 변할데로 변해서 원래의 얼굴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해서 시안님께서 그분들을 찾으시거나 하시는 일 은 전혀 없습니다. 전하." "흐응…." 사실 로렌은 곤란해 하고 있었다. 일단은 급한 마음에 기엘과 로운을 불러 들이긴 했지만 그 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냥 방치를 해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 는데도 시안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해 버렸다. 너무 확실하 게 말이다. "확실히 영향이 있었던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 정 화술인가 하는 것이 말입니다." 에메렌이 조심스럽게 로렌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시안님을 만나 보시고 가시겠습니까 전하?" 로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터벅 터벅 걸어가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까지 내가 시간과 감정을 소비해야할 필요성이 그 녀에게 있는 걸까?' 바쁜 일정에 따라 움직이면서 그는 계속 같은 것을 되풀이 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의 틈만 나면 시안의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후우--." 언제까지나 그녀를 이렇게 태자 궁 한구석에 머물게 할 수 도 없는 노릇이다. 아직은 아니라고 해도 곧, 아주 근 시일 내로 그는 가이칸의 주인이 된다. 현재와 같은 대리인이 아 닌 진정한 가이칸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비어 있는 황비의 자리. 그리고 자신에게 딸을 주고 싶어하 는, 황비든 후궁이든 첩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의 곁에 머물 게 하려하는 수많은 귀족들. 아직도 건재한 그의 형들과 동생들의 세력. 아무리 태자이고, 차대 황제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 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건가….' "시안님. 전하께서 납시었사옵니다." "시안님 위험하세요!!" "안 된다고 몇 번을 말씀…어머나 전하!" 시비하나가 시안을 팔을 잡아 당기다 말고 로렌의 모습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 물러났다. "무슨 일인가?" "저어- 시안님께서 자꾸 발코니로 나가셔서…." 말리는 사람이 없자 시안은 어느새 타박 타박 맨발로 걸어 발코니로 향하고 있었다. 열려진 문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시안의 은백색 머리 카락을 휘날렸다. "바람이라는 것이 원래 인간의 마음대로 부는 법은 아니지. " 로렌은 왠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저희는 잠시 자리를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메렌이 재빠르게 자리를 수습해서 시비들과 함께 물러났 다. 로렌은 잠시 바람을 쐬며 서 있는 시안의 뒷 모습을 바라보 았다. 어디를 봐도 시안에게서는 인간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실상은 시안이라는 소녀는 정말로 바람의 정 같은 것이 아 닐까?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잠시, 그저 아주 잠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인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정말 바람처럼 자유로와 잡아둘 수 없는, 지금이라도 금방 바람으로 변화하여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안." 이름을 부르자 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로렌을 발견한 시안 은 자연스럽게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로렌에게는 왠지 그런 시안의 미소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 게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안에 게 다가가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작은 검을 꺼내들었다. "시안." "………?" "이걸 받아주었으면 좋겠소."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시안에게 연한 녹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검을 건내주었다. 그것은 일반적 인 검과 비교할 때 검신이 반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정확하게 는 단도에 가까울 정도의 검이었다. 단도처럼 보이는 그것 이 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도라고 보기엔 마치 일반적인 검의 축소형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언제이든, 어디서든, 그 어떤 곳에서도 이 녹색의 검은 나 로렌 네세크 카루인 라이너드의 뜻으로 통합니다." "……………." 새하얀 손에 녹색의 검이 놓여졌다. 시안은 그것을 손에 들고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만지작 거리 기 시작했다. "위험할 때 그것이 당신을 지켜줄 수 있기를…." 연한 녹색의,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알 수 없는 검이 시 안의 은백색의 머리카락에 휩싸였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휘말려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 8장 마침 --------- 9장으로 이어집니다. --;;;;;; 닭살.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1 9장 탈출 "황태자가 시안님을 방문하는 것은 하루에 두차례 정 도, 아침시간과 저녁 시간이라는 소리군. 그렇다면 역 시 한밤중을 노리는 것이 좋은 것 같은데." "그렇겠지. 낮보다야 훨씬 눈이 적으니까." "밤이라고 해도 경비는 무시 못해. 현재 상황으로는 이 방에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흐음." 기엘과 로운은 작은 소리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시안을 구하기 위해 황태자궁에 들어온 것이 오늘로 4 일째였지만 사실 그들이 얻은 정보는 거의 없었다. 일단은 시안 이상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시안에게 어떤 위험이 생 기지 않을까 걱정을 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4일째에 접어들자 두 사람은 서서히 주위를 살 펴 탈출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오래 끌면 끌수록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기 때 문이다. "이리야씨는 괜찮을까 모르겠군." "글세.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카드미엘에 한번은 더 왔 던 사람이니까 나름대로는 잘 하고 있겠지." "그렇다고 해도 그 역시 허겁 지겁 도망친 것 같던데 ?" "자신이 있으니까 할 수 있다고 한 걸꺼야. 지금 상태 에서는 믿을 수 밖에 없는 거지. 최대한 단 시간내에 카드미엘에서 벗어나야 하니…어? 이건…." "오로프다!!! 키리엔에서 온 거야." 기엘이 벌떡 일어나서 창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머 물고 있는 곳은 시안의 사실에서 가까운 곳으로 상당 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을 여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오로프를 불러 올 수 있는 곳이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나이트 기엘의 명령이다. 오로 프의 새여--- 그대의 모습을 드러내어 주인의 말을 전 하라. 아샨." 기엘의 손 끝에 나타난 연락의 새는 꽤 오랜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전언을 전했다. 오로프가 사라지고 나 서도 기엘은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창밖으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로운은 걱정되는 마음에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기엘. 역시 로엔인가?" "응. 생각보다는 별 소식이 없어. 여전히 자택 연금상 태고 이 오로프도 간신히 보낸 것 같아. 누구에게 들 키지 않았을지 걱정되는군." "대신관님께서는?" "잘은 모르지만 대신전은 여전히 폐쇄 되어 있는 모양 이야. 나가는 것도,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 할 것이라 는 군.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어. 단지 변한 것이 하 나 있다면…." "그게 뭔데?" 기엘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도대체 미메이라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는다. "레이죠 장로님께서 전면으로 나서신 것 같아." "뭐어--?" "믿을 수가 없어. 차라리 아버님이나 로운 네 아버님 이라면 몰라도 어째서 레이죠 장로님이신 거지?" "…………." "골치가 아파." 기엘은 눈을 가린 채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앞날이라는 것이 보 이지 않는다. 시안은 자신들에게서 격리되어 있는 상 태로 하루에 얼굴 한두번 보는게 고작이다. 거기다가 본국의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 는 것이다. 복잡한 것은 모두 잊고 일단 눈앞의 문제를 처리해보 자고 다짐을 해도 좀처럼 머리가 맑아지지 않는다. 모 든 것에 앞서 시안을 제 일순위로 생각하고 있는 기엘 에게 있어서 본국의 상황은 왠지 시안에게 위험해지기 만 하는 것이다. "기엘." "응?" "너무 신경쓰지마." "…………." "사실 지금의 상황도 버거워. 본국의 일도, 우리들이 돌아 갈 때 쯤이면 어떤 방향으로든 정리 되어 있지 않을까?" "시안님이 위험해 지실 수도 있어." "뭔가 방법이 있겠지." "낙천적인 쪽은 내 쪽인줄 알았는데 로운." "그러게나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침묵으로 이어졌다. 사방이 막혀 있는 작은 내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제 각기 머릿속에 가득찬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 다.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2 ♧ "이크!!" 이리야는 황급하게 몸을 숨겼다.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분명히 레카에 있었는데….' 어둠이 어슴프래 내려 앉기 시작한 초 저녁. 혹시라도 기엘이나 로운의 연락이 있을까 싶어 황태자 궁 부근을 어슬렁 거리던 이리야는 눈에 익은 남자의 얼굴을 발견했다. '레카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어째 서….' 먼 발치에서 본 얼굴이지만 잘 못 봤을리는 없다. 왜냐 하면 그가 본 남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어깨에 노예의 인장을 찍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메로스. 저 녀석이 여기 있다는 것은… 설마!!' 이리야의 시선이 높이 치솟아 있는 황태자궁으로 향했 다. '위험하다.' 이리야는 순간 땅을 치고 후회를 했다. '젠장할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녀석들하고 연락할 방법 을 뭔가 더 준비해두었어야 하는데 이를 어쩌지?' 그는 먼 발치에서 황태자궁으로 입궁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잘 못 봤기를 바랬지만 역시나 그는 메로스 케이룬이었다. 그 성격 때문에 몇 명의 엘러들 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좌천되 었던 남자. 그는 황태자 직속의 엘러 부대 사실상의 총 책임자였었다. 그런 그가 좌천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이 꼬이는 거야. 일이 꼬이는 거라구!!' "이쪽입니다." "고맙소." 메로스는 아무도 모르게 입가를 당겨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와보는 황태자 궁이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도착했군." "네. 전하. 신 케이룬 인사드립니다." "격식같은 것은 필요없네. 그래. 그곳에서 반성 좀 했 나?" "반성이랄 것 까지 있겠습니까?" 미타 남작은 메로스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 무리해도 그는 메로스 같은 타입이 마음에 들지 않았 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나 름대로 그런 부류의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그였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 는 것이다. 메로스 케이룬이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충성심은 인 정하고 있지만 역시 조금은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고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생각보다는 빨리 도착했군." "아닙니다. 전하께서 부르시는데 제가 어찌 한시라도 지체할 수 있었겠사옵니까." 입에 바른듯한 말들이 메로스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 다. 로렌은 그런 메로스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피식 웃 었다. "뭐 좋네. 그대의 노고에 대한 치하는 나중으로 좀 미 루고, 일단은 내가 지시한 것들에 대한 보고를 받았으 면 하는데?" "물론입니다. 전하." 그는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온 서류들을 로렌에게 건냈 다. 로렌이 그것을 받아들고 첫 번째 장을 넘기는 것을 본 그는 입을 열어 자신이 보고 듣고, 그리고 조사한 것들 을 보고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메로스 케이룬이 황태자궁에서 로렌에게 자신이 조사해온 결과들을 보고 하고 있던 그 시간 황태자궁의 또 다른 곳에서는 조그맣게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 었다. 에메렌은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루에 얼마 먹지도 않는 시안이지만 끼니를 거르게 할 수는 없는 터라 그 녀는 매 식사시간마다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면서도 부 지런히 시안의 식사를 챙기고 있었다. 정말이지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부분은 이런 사소 한 면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드실지 걱정되는 구나." "이렇게 준비할 필요가 있을 까요 에메렌님?" "드시지 않더라도 준비는 해야하지 않겠니." 시도때도 없이 몸에서 바람을 내 뿜어대는 것 만으로도 시안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누구나 느끼고 있다. 하지만 시안이 하루에 먹는 것은 물 조금과 아주 약간의 과일뿐이다. 어떻게 그것만을 먹고도 아무렇지 도 않은 것인지 신기할 뿐이다. "자아 준비가 다 되었구나. 따라오너라." "예." 음식을 차린 쟁반을 든 시녀를 데리고 에메렌은 시안의 침실로 걸어갔다. 다른 시녀들은 좀처럼 시안의 침실까지 들어가려고 하 지 않았기 때문에 침실에 들어갈때는 어쩔 수 없이 그 녀 혼자 들어가야 했다. "이리 주렴." "예." "시안님. 저녁식사입니다." 듣고 있는 것인지 구분도 가지 않았지만 에메렌은 언제 나처럼 공손한 목소리로 고한뒤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스며나왔다. "시안님." 열린 문으로 들어서며 에메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 는 얼굴을 한 채 시안이 있을 침대쪽을 바라보았다. "……………!!!!!" 순간 그녀는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그릇들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시. 시안님." 기이한 광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눈을 시리게 하는 차가운 바람. 눈에 보일 것 같은 바 람의 자락이 그녀의 단정하게 묶여진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보이는 이상한 형체가 그녀의 눈 앞에,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시안의 몸 위에 떠있었 다.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비늘 같은 것이 하나하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움직였다. 소리없는 바람의 속삭임이 에메 렌의 귓가를 지나 열려진 문틈으로 지나갔다. "…이. 이런. 시안…님." 섬뜩하도록 차가운 공기에 밀려 그녀는 조금씩 뒷걸음 질을 쳤다. 슈르르 소리와 함께 움직인 것은 비늘이 덮 힌 길고 긴 몸체. 순간. 그녀의 눈과 그 기이한 형체의 시선이 마주쳤다. "꺄아아아악!!!!!"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3 "로운. 느껴져?" "그래." 하루종일 방에 감금되다 시피 한 채 갇혀 있던 로운과 기엘은 순간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났다. "이 기운은 세나케인의 것인데." "시안님께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로운!!" 짧은 순간. 기엘과 로운의 시선이 교차했다. 말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도, 기회를 엿보는 것도 숨을 막히게 하는 것 들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나케인이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몇날 며칠을 기다리고 있었던 순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순한 기 회였을 뿐. 실행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바로 이 순간은 머리를 돌려 이성적으로 판단할 것도 없이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 그 자체. 탈출의 순간이 온 것이다. "이리야씨를 대기시켜야겠어." 로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기엘은 그 자리에서 주문 을 외웠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 시작에서 끝. 아샨." 순식간에 기엘의 앞에 연락의 새 오로프가 모습을 드 러냈다. 기엘은 거기에 이리야에게 전할 말을 불어넣 고 시동어를 외쳤다. "오로프!" 열린 창문으로 쏜살 같이 오로프가 사라지는 순간 굳 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 당장 시안님의 내실로 와주세요!"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새파 랗게 질린 얼굴을 한 시녀가 서 있었다. 뜻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세나케인의 기척을 느낀 두 사람은 바람 술로 문을 부수어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어서!! 어서 와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시안님께서, 이. 이상한…." 차마 말을 하지 못한채 새파랗게 질려 더듬거리는 시 녀를 뒤로하고 기엘과 로운이 달려나갔다. "허억----." 에메렌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듯한 은백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건 뭐지?' 넘실거리며 움직이는 이 기이한 형체는 점점 더 에메 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서. 어서 그분들을 불러라!!" 그녀는 가까스로 소리를 질렀다. 뒤에서 까악 까악 소리를 내면서 도망을 치던 시녀들 에게 그녀의 말이 전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 뿐. 온 몸이 그대로 굳어버려 손가락 하나 까딱 할수 없 다. "아악----!" 그녀의 비명소리에 눈앞의 형체가 순간 흐릿해지는 것 이 느껴졌다. 흐릿한 공기와 바람에 휩싸여 온 몸이 갈기 갈기 찢어 지는 감각. 에메렌은 눈을 꼭 감았다. 그때였다. "시안님!! "시안!!" 쾅- 소리와 함께 바람과도 같이 두 남자가 내실로 들 어섰다. "시안님!!"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기엘과 로운 두사람이었다. 그들은 들어오자 마자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세나 케인을 목격할 수 있었다. 쐐엑--하는 파공성이 나면서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나 왔다. "기엘!!" 로운은 재빨리 쓰려져 있는 에메렌의 팔을 잡아당겨 그녀를 밖으로 밀어냈다. 「느리군.」 비웃는 듯한 세나케인의 말이 기엘과 로운의 귀에 들 려왔다. 「더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 기엘은 세나케인의 말을 한귀로 흘리고는 재빨리 시안 에게 뛰어갔다. "시안님!! 시안님 정신차리십시오!!" "기엘. 그럴 시간 없어!!" 「잘 따라오도록!」 기엘이 시안의 몸을 안아올리는 순간 세나케인의 목소 리가 그의 머릿속에 진동하듯 들려왔다. "세나케인님. 시안님은 왜 이런…." 「그녀석이 깨어있으면 방해가 된다. 자아. 그럼.」 넘실거리는 세나케인의 형체가 더더욱 빠르게 움직였 다. 파라락 소리를 내며 찢어져 나가는 긴 휘장들이 열려 진 창 밖으로 산산조각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뛰어내리자." 시안을 단단히 안은 기엘이 로운에게 소리를 쳤다. "너무 위험해."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야!" 기엘의 말에 부응하듯 반투명한 세나케인의 형체가 세 찬 바람소리와 함께 열려진 발코니쪽으로 이동하기 시 작했다. 그 뒤를 기엘과 로운이 따랐다. "젠장. 계획이고 뭐고 없잖아!!" "로운 조심해!!" 뿌드득----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로운이 본 것은 세나케인이 일으키는 바람을 이기지 못해서 떨어져 나가는 난간.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 난간위에 기엘이 한발, 발을 내 딛었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피. 하이로트." 낭낭한 기엘의 주문이 세나케인이 일으킨 바람속으로 스며들었다. 부웅하고 그들의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로운 디 로크레슈. 피. 하이로트!!" 카드미엘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발코니. 그 발코 니의 난간이 바람에 휩싸여 떨어지는 순간 두 남자의 발도 동시에 떨어졌다. ----------------------------------계속. ..허걱...짜..짧군요..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4 ♧ "뭐. 그정도면 되었네. 확실히 그 도망친 엘러도 레카 까지 갔다면 승산이 없을 수도 있겠군." "아무래도 신국이 가까운 곳들이라 엘러들이 종종 눈 에 띄는 곳이긴 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불찰을…." "인연이 없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겠지. 아. 그렇 지. 혹시 레카에 있는 동안 미메이라 출신의 남자들과 여자 한명이 낀 일행을 보지 못했나?" 메로스 케이룬의 길고 긴 보고를 받은 로렌은 혹시 하 는 생각에 문득 떠오른 것을 그에게 물었다. "일행…말씀이십니까?" "그래. 일행. 미메이라 출신의 여자하나와 검은 머리 카락을 가진 남자 2명 그리고 갈색…이었던가? 카스핀 ?" "그렇습니다. 전하." "그런 일행은 본적이 없습니다만." 메로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미 타 남작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기억에 있을지도 모르겠군. 혹. 그 곳에서 미메이라 출신의 남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가?" "예?" 미타 남작은 말을 꺼낸 뒤 설명은 알아서 하라는 듯 히난을 쳐다보았다. 메로스의 뒤쪽에 서 있던 히난은 그제서야 '아아'하는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얼마전에 레카에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미메이 라 출신의 두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일단은 의삼할 여 지가 없어서 받아들였습니다." "남자 둘?" "예. 농군출신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능력은 저희 부대 에 속해있는 어떤 바람술사보다도 뛰어났습니다. 현재 는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레카에서 말입니까? 남자 둘?" "분명 레카에서 말을 듣고 왔다고 했습니다만 뭔가 이 상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남자. 둘… 둘이라. 분명 제국인이 아니겠지요?" "네. 의시할바가 없을 정도로 확연한 신국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흐음…."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소?" "아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뭔가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좀 갑작스러워서. 분명 미메이라라고 말씀하셨 지요?" "그렇습니다." "분명 레카에는 신국인들이 아주 드물게 눈에 띕니다 만 미메이라 인을 만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메로스는 머릿속의 기억을 샅샅이 더듬었다. 뭔가 걸 리는 것이 있었다. 단지 지금 혼란스러운 것은 갑작스럽게 한꺼번에 기억 을 해내려 하기 때문일뿐이다. "설마… 일행이라고 하면 거기다 미메이라인…아!!!" 메로스가 짧은 감탄성을 지르자 순간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메로스의 얼굴로 향했 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타 남작은 거의 메로스를 잡 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분명. 있었습니다. 기억이 났어요. 미메이라 출신에 엄청난 미소녀 한명과 그 수행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두명." "두명?" "그중 한명과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꽤나 완강하게 거절을 해서…." 순간 미타 남작과 로렌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엇인가 어긋나는게 있었다. "정확하게 말해보게. 그 남자를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단순하게 어디 출신인지 확 인을 해서 혹, 여지가 있다면 엘러부대에 편입을 시켜 볼까 타진을 해봤을 뿐입니다. 되도록 설득을 해보려 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는지 그대로 달 아나 버리긴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것을 물으시는 지?" "잠깐 기다리게." 미타 남작이 메로스에게 묻고있는 것을 로렌이 가로 막았다. 그는 그때까지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서 메로스에 게로 뚜벅 뚜벅 다가왔다. "분명히 미메이라 인을 만났다는 것은 사실이겠지?" "물론입니다." "확실하게 미메이라 인이었나?" "미메이라 인이 아니고서는 그런 머리카락과 눈빛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정말 분명한가?" "네. 신 메로스 케이룬. 맹세코 전하께 거짓을 아뢸리 없사옵니다." "좋네." 순식간에 로렌의 얼굴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카스핀. 내가 실수를 했군." 로렌의 목소리 역시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는 몇마디 묻지도 않았지만 메로스가 한 몇마디 말을 듣는 순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정리되지 않고 찝찝하게 남아 있던 기 억의 편린들이 하나하나 맞아 떨어져가는 기분이었다. '설마 설마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호랑이들을 불러 들 였어. 아니 쥐새끼라고 해야하나?' 두 사람과 세 사람이라는 차이 때문에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한명의 인원수 차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메로스가 만났다고 하는 신국인. 그리고 미소녀 한명 과 두 사람의 남자. 시안과 여행을 했다고 하는 세 명의 남자.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었지만 로렌은 이미 마음속으로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콰과광-----!! "무슨 일인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둔탁한 파괴음이 미세한 떨림으로 전해져왔다. 하지만 그들이 그 소리에 놀랄 사이도 없이 시녀 하나 가 로렌의 집무실로 뛰어 들었다. "전하…전하!!" "무슨일인가?" "전하… 크. 큰일 났사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는가." "시, 시안님께서… 시안님께서…." "어찌된 연유인지 소상히 아뢰라!" "전하. 이. 이상한… 이상한 것이…." 미타 남작이 쓰러질듯하는 시녀의 팔을 잡았지만 그녀 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전하려던 말은 다른 방법으로 그들에게 전해졌다. 뚜우우우------ 멀리서 경비대 전체를 호출하는 뿔 나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로렌이 먼저 창쪽으로 다가 가 굳게 닫혀져 있는 미닫이 창을 벌컥 열어제쳤다. 창문이 열리는 순간 엄청난 바람이 안으로 불어닥쳤 다. "크윽!!" 타다닥 소리와 함께 자잘한 무엇인가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로렌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급하게 몸을 숙였다. "전하! 위험합니다!!" 그 바람은 너무나도 세서 로렌의 몸을 넘어서 집무실 의 집기까지 휘날릴정도로 몰아닥쳤다. "전하!!" 칼날 같은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무거운 책상에 흠집 을 내며 불고 있었다. 바람에 휘말려 바닥에서 떠오른 작은 물건들이 회오리 바람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암기 가 되어 사람들을 덥쳤다. "전하!! 몸을 숙이십시…크윽!!" "카스핀!!" 쨍그랑 거리는 소리와 물건들이 서로 부딧치며 부서지 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는 가운데 로렌의 귀에는 그것과는 거리가 먼, 엄청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드. 드래곤이다!!!" "우아아아악-----!!!" "신이, 신이 노하신게야-." "드래곤이 나타났다!!" -----------------------------------계속 이런데서 짜르면......맞아..죽을지도...쿨럭 하..하지만..--;; 잠을 자야..또 쓰....게 될겁니다.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5 "저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로운은 세나케인이 일으킨 바람덕에 온통 난장판이 되 어 가고 있는 광경을 보며 말했다. "눈을 끌겠다는 의미겠지. 로운. 시간이 없어. 곧 경 비병들이 들이 닥칠거야." "빌어먹을,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군." "쉬우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로운. 보호막을 조금 약하게 해줘." 쉴세없이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들의 주위에는 로운이 만들어낸 보호막이 둥글게 퍼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무사히 이 궁을 벗어나느냐 하는 것 뿐. "왼쪽이다 기엘. 그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후원이 있 어." "그래." 축 늘어지는 시안의 몸을 어깨 위에 얹은 기엘이 로운 에게 손짓을 했다. 로운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조금전보다 훨씬 더 크게,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람의 용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황 태자궁의 꼭대기에서 둥글게 맴돌고 있었다. "정말로 드래곤이군…." 반투명한 몸체가 황태자궁의 둘레를 감싸고 슈르르르 소리를 내면서 움직인다. 며칠전 황태자궁 상공에서 목격되었던 희미한 드래곤의 형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말 살아 있는 듯한 드래곤의 포효. 바람의 힘, 바람의 의지 세나케인의 목소리가 바람의 형태가 되어 황태자궁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전하!!" "물러서라!!" 헉헉-하고 숨을 몰아 내쉰다. 단숨에 넓은 로비와 복도를 지나 시안이 머물던 방까 지 뛰어 올라온 로렌은 문을 열자 마자 엉망이 되어 있는 내부를 보고 할말을 잃었다. "이런…." 미타 남작은 로렌의 뒤를 따라 같이 올라왔다가 역시 할말을 잃었다.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옆에 쓰러 져 있던 에메렌을 부축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미세하게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바닥 이 진동을 하고 있었다. 와장창--- 로렌의 발길질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물병이 산산조각 이 나버렸다. 로렌은 활짝 열려 카드미엘의 정경이 한눈에 보이는 발코니를 노려보았다. 순간 순간 그곳에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 순간의 찰나,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 사람의 인영 이 지나갔다. 은빛으로 빛나던 머리카락과 끊임없이 불어 나오던 바 람,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신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기이한 현상. "설마 그녀인가…." "전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로렌은 고개를 돌렸 다. 반쯤 정신을 잃었던 에메렌이 조금이나마 몸을 추 스르고는 그를 부르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말해줄수 있나 에메렌?" 부들 부들 떨리는 에메렌의 어깨를 보면서도 로렌은 위로의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식사를…식사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상 한 형체가 내실 가득히…." "그리고?" "놀라서 사람들을 불렀는데 그분들이 뛰어들어왔습니 다." "그들이 시안을 데리고 도망쳤나?" "잘…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미처…." 에메렌이 몸을 숙이며 용서를 구했지만 로렌은 이미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내 이성을 찾았는지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저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안은 아직 궁을 빠져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찾아내." 바람과도 같은 드래곤의 형상. 그것이 아직 그의 궁 위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한 시 안은 아직 자신의 궁 안에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인했 다. "히난. 엘러들을 모두 불러들여라." 아직 기회는 있다고, 그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저쪽이다!!" 바로 앞쪽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엘!! 조심…." "크헉----!" 로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경 비병의 복부에 기엘의 주먹이 전광석화처럼 날아갔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며 쓰러지는 상대의 목덜미에 다시 한번 일 격을 가하고 기엘은 로운에게 손짓했다. "이쪽은 안되겠어. 로운." "젠장. 생각보다 훨씬 대처가 빨라." 조그만 모퉁이에 두 사람은 주저앉았다. 거친숨을 몰 아 내쉬면서 그들은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여전히 세나케인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그렇 게 심한 바람이 불어오지는 않았다. "참나. 고민한 것도, 계획을 세운 것도 말짱 헛것이 되었어.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이리야가 한말이 왠 지 그대로 실현된 거 같지 않아 기엘?" "그럴지도 모르지." 기엘은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이리야가 했던 말이 정말이지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같은 상황인 것이다. 더도 말고 덜 도 말고 정말로 시안을 난짝 들고서 그대로 무대포로 도망을 치고 있으니 말이다. "원래 계획은 이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생각대로 그대로 되었다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지 도 않을테지." 기엘은 품에 앉은 시안을 다시 한번 내려다 보았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아주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정말 이상한 느낌이야.' "기엘. 저길 넘어서면 얼마 안가서 바로 성벽이 있다. 물론 카드미엘을 벗어날때까지는 긴장을 늦추면 안되 겠지만 일단은 저게 일차 관문이야." "그래. 세나케인이 저렇게 눈길을 끌고 있는 동안 어 떻게 해서든 여기서 빠져 나가야지. 분명 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거야. 봐. 아까보다 훨씬 형체 가 옅어지고 있어." "단숨에 돌파 하자구. 젠장 이럴 때 라이트라도 있었 으면 좋았으련만." "아쉽지만 이거라도 써. 밖으로 나가면 분명 이리야씨 가 라이트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기엘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손 에서 긴 스피어를 빼앗아 로운에게 건냈다. 로운은 그것을 받아 두세 바퀴 휙휙 돌려보더니 좋은 자리를 잡아 꽉 쥐었다. "젠장. 저녀석 정신 차리기만 해봐. 정말이지 가만 두 지 않겠어!!" ♧ =======================================계속. 저야 말로... 시안녀석 정신 차리면. 뒤통수를 한대 힘껏. 때려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6 ♧ "우와. 사고한번 더럽게도 크게 쳤구만." 이리야는 바람에 휘날려 벗겨지려는 모자를 손으로 꾸 욱 누른 채 황태자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어두워지 기는 했지만 하늘이 새카매져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느 누구든 황태자궁 위에 떠 있는 정체불명의 형체를 목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다마 불행중 다행인 것은 그래도 꽤나 어두워져 있 던 탓에 궁 근처에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는 것일 것이 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이리야에게 오로프가 날 라온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다. 연락을 받자 마자 은 거하고 있던 곳에서 뛰쳐나온 이리야는 두 개의 검과 자신의 레이피어까지 챙겨들고 이렇게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쳇 나한테는 무식한 소리 하지 말라더니. 분명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무대포로 난리를 치고 있는게 틀 림없다니까." 힐끗하고 바라본 궁에는 여기저기서 횟불이 넘실거리 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분명 비상이 걸린 상태일 것이다. "계획 계획하길래 또 살그머니 훔쳐서 나올줄 알았더 니만 저게 뭐하는 짓이람. 나보다 더하잖아." 그는 꽤 끔찍했던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현재의 상 황에 비교하면 그건 정말로 사건도 아니었다. "슬슬 다시 연락 올 때가 되었는데."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전의 연 락은 이미 시작이 되었으니 황태자궁 부근에 대기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빨리 빨리 나오라고. 시간을 지체하면 정말이지 곤란 해. 이 멍청한 무대포 기사양반들아." "후원쪽입니다. 그쪽으로 올 것입니다." 백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 로 방향을 지시했다. "틀림없나?" "그렇습니다. 저 위에 있는 드래곤의 형체에서도 바람 의 엘이 느껴집니다. 그들의 소행임에 틀림이 없습니 다." 히난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역시 신 국인들은 틀리군요." 메로스가 한마디 했다. "역시 제대로된 엘러 부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국인 들을 영입하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눈 초리를 받으면서도 메로스는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았 다.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얼마나 되나. 히난." "…그, 그들의 힘에 대항 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20명 아니 25명 정도입니다." "생각보다 터무니 없이 부족하군." 로렌은 히난의 보고를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 보다도 훨씬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그의 신 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들의 능력이 저희들을 상회한다고 하더라도 연합공 격에는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조금전 시안일행의 행적을 감지했던 남자가 무뚝뚝하 게 말했다. 히난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가까스로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아직 그는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늘에야말로 너희들이 그동안 갈고 닦아온 실력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만전에 만전을 기하도 록. 비록 너희들이 그들의 능력에 못 미친다하더라도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의 손짓에 몇 명의 엘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확실히 이곳으로 오도록 유인하라." 넓게 펼쳐진 지도에 히난의 손가락이 내리꽂혔다. "젠장. 제국에 이렇게 엘러들이 많을 줄이야." "이리야씨가 말한 예의 '그들'이겠지." 로운이 숨을 몰아내쉬었다. 조금전의 기척으로 짐작해볼 때 이미 그들의 위치는 발각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방에서 그들을 포위해오 고 있다는 것 쯤은 이미 기엘도 느끼고 있었다. "젠장 점점 더 수세로 몰리는 것 같다. 기엘." "…………." 기엘은 불안한 마음에 하늘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이 제 세나케인의 형체는 거의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사 라져가고 있었다. '시안님이라도 정신을 차려주셨으면 좋을텐데.' 하지만 정작 시안은 완전히 정신을 잃고 그의 팔에 힘 없이 늘어져 있다. '아니야. 시안님을 지켜야하는 것은 나다. 의지할 생 각따위를 하다니. 정신차려. 기엘!!' 그는 속으로 다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안을 이곳에서 탈출시켜야한다.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다면…." "그런 경우라면 원하는대로 해줘야지." 씨익-하고 로운이 웃는 것을 보며 기엘도 덩달아 미소 를 지었다. "그러기 위해 노력해온 거 아니야?" "그렇지." 로렌의 발걸음이 더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오른쪽 왼쪽으로 쉴새없이 오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 는 자들도 덩달아 초초한 마음을 감주치 못해서 안절 부절했다. 로렌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민하면 서 미타 남작은 그의 발걸음을 눈으로 뒤쫓고 있었다. "곧, 나타날 것입니다. 전하." 로렌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 기사가 그의 손에 검을 건냈다. "전하. 직접 손을 쓰시는 것은." "단순하게 내 몸을 지키고자 하는 것 뿐일세. 카스핀. " 그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카스핀은 입 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히난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그러자 히난은 손짓을 해서 몇 명의 엘러들을 움직였 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몇 개의 인영이 휘익하고 담을 넘어갔다. 담 너머에서 푸학--하는 소리와 함께 잘려진 풀들이 공중으로 날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로운 디 로크레슈. 엘-카치르!!!"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한남 자의 목에서 피가 솟아 올랐다. 그 피는 바람을 타고 기엘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시안 의 옷자락에 점점히 붉은 얼룩을 남겼다. "기엘! 그쪽은 위험해!!" 기엘의 뒤쪽으로 몸을 날리면서 로운이 소리쳤다. "쉴드를 쳐. 나햐트를 쓴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쉴드 라이헨(증폭주문)." "로운 디 로크레슈.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 서 끝." 숨을 쉴 틈도 없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로운의 주문이 이 끝을 맺기도 전에 그의 주위에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반짝이는 실날 같은 바람이 불기 시 작했다. "나햐트!!" 로운의 팔과 함께 그 은빛으로 빛나는 바람의 칼날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으응." "시. 시안님?" 증폭주문으로 더욱 강화된 쉴드안에서 로운의 공격을 바라보고 있던 기엘은 시안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깜짝 놀랐다. "시안님. 정신이 드십니까?" 그는 급히 어깨에 어지듯하고 있던 시안의 몸을 끌 어 내렸다. "시안님!!" "…………." 시선이 맞지 않는 멍한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들어 주위를 확인하니 로운의 주문이 꽤나 위력 이 있었던 듯 주위에 몇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들 어왔다. 그는 급하게 쉴드를 풀고 로운에게 외쳤다. "시안님이 정신을 차리시는 것 같다." "젠장. 기왕 정신을 차릴 거면 나중에 차릴 것이지. 차라리 한방 먹여서 기절 시켜!!" "그럴 상황이 아니야." 기엘은 이제 거의 정신을 차려가는 시안의 몸에 팔을 둘렀다. "그냥 이대로 간다. 로운. 엄호해줘." "알았어." 초토화된 후원을 둘러보며 잠시 몸을 숙이고 있던 로 운이 손짓을 하자 기엘이 먼저 몸을 날렸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피. 하이로트!" 바람과 함께 몸이 떠오르는 순간 시안의 눈이 크게 떠 졌다. "…섞여 있어." 불분명하게 들려오는 시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엘과 로운은 함께 담을 넘었다. ---------------------------------------계속 미치겠....다..--;; 어째서 새벽 4시만 넘으면 원고가 되는 걸까.....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7 "나타났다. 마이스!!!" 히난의 명령에 따라 마이스라고 불린 남자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그 뒤 에 있었던 엘러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웠다. 그 주문은 순식간에 커다란 엘의 장벽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시안의 일행을 가로막았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경비병들이 일제히 그들이 추락한 곳으로 달려가기 시 작했다. "기다려!!" 그들의 모습을 본 로렌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저지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시안의 일행은 경비병들의 사이에 파 묻혔을지도 몰랐다. 일단의 경비병들에게 둘러쌓이기 직전, 로운은 들고 있던 창을 길게 겨눈채 우뚝 섰다. '제길. 이곳에 모두 모여있었군.' 이제 마지막 이라고 생각했던 로운은 혀를 찼다. 그들을 저지한 것은 한두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엘과 그가 일반적인 엘러들의 상회하는 능력 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수많은 술사들이 만들어낸 장 벽을 뚫고 지나는 것은 쉽지 않다. 꿀걱-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그의 귀에 들려왔다. "섞여 있어…." 어느누구도 숨소리하나 내지 않는 상황속에서 갸날픈 목소리 하나만이 그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여기까지다." 그들의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로렌이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도망칠 수 있었는지 참으로 신기하 긴 하지만 이제 그만 포기하는게 좋아." 로렌의 표정은 그가 이전에 보았던, 그런 표정이 아니 었다. 냉랭한, 지배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엄과 힘이 역력히 드러나는 그런 얼굴이었다. "다른 요구는 하지 않겠소. 더 이상은 우리도 쓸데없 는 살생은 하고 싶지 않으니 이대로 조용히 우리들을 보내주면 좋겠소." "훗…." "…………." "자네들. 정체가 도대체 무언가. 그리고 그녀는 도대 체 어떻게 된 거지?" "대답할 의무는 없소." 「기엘. 시안님 상태가 이상해!!」 로렌과 팽팽하게 대처하고 있는 로운의 귀에 기엘의 전언이 들려왔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봐!」 로운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동안에도 기엘은 시시 각각 변해가는 시안의 상태에 초긴장을 하고 있었다. "시안님…."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기엘은 온 몸의 신경이 손끝까지 타들어가는 듯한 기 분을 맛보고 있었다. "섞여 있어서는 안 돼…." 시안의 손이 천천히 기엘의 이마쪽으로 올라왔다. 기엘이 그것을 저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무 엇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시안은 기엘이 저지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쪽으로 점점 손을 뻗혀왔다. "그녀는 내 보호아래 있었는데 그것을 이런식으로 도 둑맞을 수는 없지." 로렌이 손을 들자 뒤에 포진하고 있던 엘러들이 일제 히 앞으로 나왔다. "무력으로 나온다면 무력으로 맞설 수밖에." 로렌의 표정이 얼음인형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당신들이 아무리 뛰어난 엘러라고 해도 이들을 모두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오." 로운은 이를 악물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그는 남아 있는 힘을 모조리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기엘. 각오해.」 "섞여 있어서는 안 돼…." 시안의 하얀 손가락이 기엘의 이마에 닿는 순간이었 다. "로운. 시안님이…." 기엘의 목소리는 다음 순간 시안의 손가락에서 시작된 눈부신 은빛에 휘말려들어갔다. "우웃----!!!" "크윽---." 그것은 아주 순간이었다. 눈을 깜빡이기에도 모자른 아주 찰나의 순간. 시안의 손가락에서, 그리고 몸에서 순수하고도 강력한 바람의 엘이 뿜어져나왔다. 그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동공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우윽----." 시안 일행을 둘러싸듯 포진해 있던 엘러들이 일제히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득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 시안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바람의 엘이 기엘과 로운 의 몸을 직격했다. '크헉---!!' 피를 토할 것만 같은 고통이 기엘의 몸 안에서 끓어올 랐다. 동시에 로운 역시 허리를 곧추세울수 없을 정도 의 격통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움 속에서 시안의 몸이 빛나며 사방으로 그 빛을 뿌렸다. 순백의, 투명한 은빛의 엘이 시안의 몸을 감싸고, 기 엘과 로운의 몸을 감쌌다. 너무나도 강력한 엘을 견디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자들이 하나 둘씩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정신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은 시안을 중심으로 시 작된 바람에 뒤로 지익- 소리를 내며 밀려갔다. "으아아악!!!" "크으윽!!" 신경 하나 하나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격통이 온몸 구석 구석에서 타올랐다. 도망치려해도 도망칠수 없는,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 도, 손가락 하나도 가딱할 수 없는 무력감이 기엘과 로운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이게 뭐지?" 높은 황태자궁의 성벽밖에 서 있던 이리야는 순간 이 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분명 시안의 파장인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높은 성벽너머에서 하늘까지 치솟는 빛의 기둥이 똑똑 하게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털썩---하는 소리가 기엘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 소리 는 마치 멀고 먼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직도 온 몸이 미칠 듯이 아파왔지만 오히려 그것이 급속도로 그의 머리를 깨우고 있었다. 그것은 로운도 마찬가지여서 두사람은 곧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 시. 시안님!!!" 비명과도 같은 기엘의 목소리에 꿈틀하고 시안이 반응 했다. 그는 사람들의 한가운데 초점이 흐트러진 얼굴 그대로 조용하게 서 있었다. "시안님 괜찮으십니까?" 시안에게 정신을 파느라 기엘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 다. 하지만 로운은 일단 시안이 무사한 것을 보고 안 심을 하자마자 곧 스스로 자신의 몸이 어딘가 모르게 변해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걸었던 변환술도, 미약했던 주문도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그는 기엘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궁에 들어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라진 것 이 있었다. "기엘." "………?" "변환술이 풀렸다." "………뭐?" "느껴봐."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기엘도 자신의 몸이 전과 달 라진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한 외모의 변화뿐이 아니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너무나도 생생한 바람 의 엘이 서로에게서 강력한 파장을 뿌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미메이라에 있었던 바로 그때 보다 더더 욱 깨끗하고 맑은 그리고 강력한 바람의 엘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시안님…의 힘이군." "그래." 그들의 서로 자신들의 상태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주위에 쓰려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으윽." 그들중 몇 명이 몸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시안의 능력이 폭주하는 사이 바람에 휘말 리는 바람에 그만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붉은색."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이었다. "붉은 색의 피…." 순간 두사람은 시안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 지는 것을 느꼈다. "피………." 가까스로 진정되어가던 시안의 상태가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머리 위에서 불고 있던 세나케인의 바람이 다 시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세나케인?' 순간 무엇인가가 로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나케인의 힘이….' 희미해지던 세나케인의 형체가 점점 더 뚜렸해지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정확하게 시안의 향 해서. 「나는, 시안이 자각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내 마음대 로 힘을 쓸 수 없어. 인간계에 미치는 내 힘은 너희들 의 지각으로는 이해할 수도, 그리고 측정할 수도 없 다. 의지가 없는 힘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서 바람의 계승자를 지켰 다.」 세나케인이 그들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기엘!! 세나케인이 폭주한다." "뭐?" 로운은 다짜고짜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정신차려!!! 시안!!! 우리들은 다치지 않았다. 정신 차려!!!" "시안님!!!" "어느 누구도 죽지 않았다. 지금 네가 여기서 폭주하 면 모두 죽는다. 정신차려!!!!!" "…안 돼. 붉은… 안…돼." "아무도 다치지 않아. 네가 정신을 차리면 된다. 눈을 떠!!!" "기엘, 로운… 세나케인." 흔들리는 시안의 눈동자를 보며 로운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렸다. "정신차려!!! 제기랄!! 우린 죽지 않는다. 너도 죽지 않아!!!" 짜악----- 시안의 얼굴이 돌아갔다. 로운이 있는 힘껏 시안의 뺨 을 날려버린 것이다. "제발. 제발 정신차리란 말이야--!" "…세나케인." "아무도 죽지 않았다구!! 빌어먹을!!" "죽지 않아?" "그래!!" "시안님!!!"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습니다.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시안님. 제 발." "…죽지 않아도 돼?" 반짝하고 흐릿한 눈동자가 한순간 하나로 합쳐졌다.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래. 아무도, 아무도 죽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표정없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돌아왔다. "시안님!!" "다행이야 세나케인…." 시안의 입에서 세나케인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공기중 에 흩어져 있던 바람의 엘이 순식간에 하나로 합쳐서 시안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중에 떠있던 세나케인의 형체 역시 순식간에 사라지 며 한줄기 바람으로 변해 시안쪽으로 불어왔다. "아무도… 아무도 죽어선 안 돼." 마지막 한줄기의 바람이 시안에게 흡수되는 순간 시안 의 몸이 희미하게 빛을 뿜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엘과 로운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세나케인의 힘이 완벽하게 시안의 몸 속으 로 갈무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시안의 몸이 원 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했다. 어딘가 흐릿했던 인상이 순식간에 또렷하게 바뀌어졌 다. 원래의, 로운과 기엘이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스르륵, 시안의 몸이 로운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계속 얼씨구 지화자~~ 좋고~~~~ ^^;; 다음 편이...아마도 9장의 마지막 화가 될것 같습니 다. 쿨럭.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8 ♧ "전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 주위에서는 웅성 웅성 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로렌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깊은 생각 에 빠져 있었다. 시안 일행이 정말 단 한순간 가볍게 뛰어넘어버린 높 은 성벽만이 그의 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결국에는 도망가 버렸군.' 이해할 수 없는 충격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 을 때, 시안 일행은 성벽을 넘기 직전이었다. 명령을 내려도 그의 말을 듣고 그들을 저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엘러들은 무슨 공격을 받은 것인지 거의 대부분이 정신을 잃거나 반수이상이 제대 로 자신의 몸도 추리지 못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 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 우왕 좌왕 하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로렌 자신도 그가 겪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십명의 엘러들과 수십명의 병사들이 그의 눈앞에 널 려 있었다. 하지만 그 인원을 가지고도 그는 시안을,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바람술사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 밀고 나가야 겠군.' 그는 마음속으로 한가지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전하. 추격대를 내보낼까요?" "물론. 엘러들을 전부 동원해서라도 쫓아가." 사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엘러들이 그들을 다시 잡아올 수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호락 호락 포기할 수는 없었다. "카스핀 보았나?" "네. 전하." "막강해. 일당 백 정도가 아니야. 제대로 된 엘러만 있다면 내 꿈도 그렇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 하네." "…………." 미타 남작 역시 두사람의 바람술사와 시안이 보여준 그 끝을 알 수 없는 막강한 위력에 적이 놀라고 있었 다. 로렌이 그렇게나 엘러에 집착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 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역시 바람이라는 것은 한 곳에 붙들어 둘 수 없었던 것 같네 카스핀. 안그런가?" "………." "너무나 자유로워서, 그것을 가두어 두면 더 이상 바 람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람이 야."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그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로렌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군. 아까 나타났던 그 바람의 드래곤과 같은 형 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설명을 해주어야 하지 않 겠나. 지난 번처럼 그냥 본 사람도 몇사람 안되어 뜬 소문이 되지 않도록 하게." "예. 전하." "카드미엘은 바람의 신의 축복을 받았다 라고 조금 덧 붙여도 좋아." "…………." "아주 특별한. 바람의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 라고 말 이야."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다시 만나니 좋군요." "뭘 그렇게 새삼스러워 하는 거야 기사양반." "아닙니다. 이리야씨." "그건 그렇고 저녀석은 이상 없는 거야?" "예. 원래대로 돌아오신 듯 싶습니다. 나머지는…." "나머지는?" "미메이라의 뜻에 맞겨야겠죠." "얼씨구리 갑자기 뭔소리래?" "기엘." 이리야와 기엘이 며칠만에 만나게 되어 회포(?)를 풀 고 있는 동안 로운은 그동안 몸에서 떨어뜨려 놓았던 라이트가 그리웠다는 듯이 자신의 라이트를 손질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 황태자는 추격대를 보내올거야. 이제 출발 하는게 좋을 듯 싶다. 기엘." "그렇지. 하지만 시안님의 상태를 좀 두고 보고 싶은 데." "괜찮을 거야. 파장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으니까. 쳇. 깨어나기만 해봐라." "하하하. 아직도 그 소리야? 결국 시안님 덕에 해결이 된건데." "무슨 소리야. 애초에 이녀석이 빨빨 거리고 혼자 돌 아다니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투덜 거리고는 있었지만 로운의 기분은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로운을 보면서 기엘은 아주 간만에 아주 안정된 웃음을 보여주었다. "일어나시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교육을 시켜 드려 야겠어. 그동안 얼마 안되는 시간동안 너무 많은 일들 이 일어나서 몸을 지킬만한 어떤 바람술도 제대로 못 가르쳐 드렸으니 말이야." "그건 그렇지." "자아. 이리야씨. 여기서부터는 이리야씨의 안내가 필 요합니다." "물론. 맡겨두라고. 확실히 준비했으니까." 이리야가 엄지 손가락을 처억 들어보이며 자신 만만하 게 말했다. 그는 시안을 찾아온 뒤 두명의 바람술사들이 굉장히 차분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제일 궁극 목표는 시안이 아니었던가. 사실 그것은 이리야도 다르지 않아서 시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초초하고 불안했던 것이 싸악 씻겨 내려갔 다. "뭐 기운도 팔팔 한 것 같은데 또 한바탕 치러야지." "좋습니다." "자아. 출발해볼까?" 새카맣게 더더욱 어둠이 짙게 내리는 카드미엘의 한 밤. 네 사람의 인영이 그 짙은 어둠 속으로 살며시 묻혀 들어갔다. 그들의 뒤를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조용히, 고요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9장 마침 10장. 쫓는자와 쫓기는자로 이어집니다. --;; 단락이 나뉘어서.....잘라 올렸는데..짧군요.. 앞에 붙였으면 좋았으련만.... ==;; 휴우. 한시름 놓았습니다.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19 10장 쫓기는 자와 쫓는 자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 개별 행동은 허락하지 않겠 다." "………." "왜 대답이 없어!!" 콰앙하고 로운의 주먹이 널따란 탁자위에 작열한다. 분명 손이 얼얼할텐데도 로운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 고 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게 내탓이야?" "너어------!!"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는 부루퉁하게 불어 있는 시안에게 로운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 다. '이 자식이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제국 수도 카드미엘을 벗어나 부근 마을에 잠시 은거 중인 일행은 나름대로 꽤나 험했던 카드미엘에서의 피 곤을 풀고있었다. 카드미엘에서 벗어나자 마자 정신을 차린 시안은 한동 안 멍한 상태에 있었지만 다행히도 금세 원래의 기운 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기엘과 로운이 예상한 그대로 요하엘에서부터의 기억은 거의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 았다. 물론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카드미엘에 서 황태자궁에 머물렀던 기억만큼은 전혀 존재하지 않 는 모양이었다. 그 대표적인 증거로 치렁 치렁한 드레 스를 입고 있는 자신에게 정말 무식하리만치 화를 퍼 부었다. 어디까지 기억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것을 물어볼수가 없어서 기엘과 로운은 나름대로 속을 끓이고 있었다. "기엘 적당히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적당히는 어디까지가 적당한 것이지?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수도 있다고." "그래도…." "어이어이. 로운. 그정도로 해둬. 저녀석도 지금 정신 이 없는 모양인데 자꾸 자네가 그러면 오히려 청개구 리처럼 반대로 나갈 수도 있단 말이야. 안 그런래 시 안?" "흥." 시안은 그렇게 능글맞게 말하는 이리야도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실 시안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퉁퉁 불어 마치 여 자애처럼 토라져 있다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기는 했 다. 하지만 한번 생각을 해보라. 어느날 갑자기 눈을 번쩍 떳는데 머리카락은 치렁 치 렁, 옷은 아무리봐도 여자들이나 입는 길고 나풀거리 는 드레스에다가 기억에는 없는 이상한 곳에 퉁-하고 도착해 있다고 말이다. 기엘도 로운도, 그리고 심지어는 이리야까지도 시안에 게 아무말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나는 부 분이었다. 뭔가 감추고 살살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보는 것도 꺼려지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그런 행동을 막고 있는 기분이었 다. 세나케인을 불러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이상하게 내키지가 않았다. 물어보면 뻔하게 답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러 지를 못하는 것이다. '어휴… 왜 이렇게 쫌생이 같이 되어 버린건지 이해가 안가.' "여하튼 그래서 오늘부터는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바람술의 연마에 들어갈테니 이를 악물고 따라올 각오 를 해. 알았어?" 로운이 아주 고압적인 자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시안도 그에 질세라 눈을 크게 뜨고 같이 노려봐주었 다. "쳇. 내 책들이나 내놔." "…………." "내 책 어쨌어!! 설마 잊어버렸어?" "하. 아하하하하하." 갑자기 기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당근이지!!" "당근?" "당연하다고!! 젠장 대충 의미로 좀 알아 들어라. 흥! !" 투덜 투덜 하는 시안에게 기엘이 웃으면서 단단하게 봉인되어 있는 책을 내밀었다. 길고 긴 여정속에서도 그가 조심스럽게 그리고 소중하 게 간직한 바람술서였다. 그것을 시안에게 내미는 기엘은 정말 새삼스럽게 감격 스러워 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드리긴 합니다만. 아직 그 바람술서에 있는 주문들은 시안님이 쓰시기에는 힘들지도 모릅니다." "……………." 기엘의 말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바람술서의 책장을 가볍게 넘기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번에는 기엘이 말을 잃을 차례였다. 기엘은 자연스럽게 책장을 휘리릭 넘기는 시안을 보고 너무나 기가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바람술서 에는 분명 역대 대신관들의 봉인주문이 걸려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책장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 고 있는 것이다. "시안님…."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게스리." 기엘은 시안을 보며 싱긋웃었다. 어차피 그의 주군은 자신의 기준으로는 잴 수 없는 사 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로운." 잠시 책을 보는듯하던 시안이 문득 고개를 들고 로운 을 불렀다. "왜?" "……밥 안줘?" 순간 이리야와 기엘, 그리고 로운까지 모두 웃음을 터 트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 "왜 웃어!!"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안님." "맞아. 암것-도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라구." "하하하하하." 끝까지 배꼽을 잡고 웃는 로운을 시안은 마구 노려봐 주었다. 로운은 시안이 노려보든 말든 마음것 웃어제꼈다. 시 안 때문에 웃음을 잠시 멈추었던 기엘도, 이리야도 덩 달아 다시 웃음보를 터뜨렸다. 얼마만에 듣는 밥타령-시안의 표현-일까? 정말로 원래대로 돌아 온 것이라는 안도감이 그들을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었다. "푸하하하하핫" "젠장 그만 웃고 밥이나 달란 말이야!!! 배도 안고파 ?" "하하하하하하." "밥 줘!! 밥!!!!!" -----------------------------------------계속. -_-;;;;;; 왜 제정신이 돌아오자마자...밥 타령 부터 하는거냐!! 라고 해봤자.. ...그 성격이 어디 가겠습니까..--;; 아아 배고파... 저녀석이 저러면 저도 항상 배가 고픕니다..훌쩍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0 ♧ "아니야… 내가 그런 것이 아니야…." "…………." "싫어…. 내가. 내가…." "…………?" 곤히 잠을 청하던 로운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목 소리와 신음 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아니야. 난…." "뭐지?" "…으흑. 으. 으으…."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시안의 건너편에서 잠들어 있던 기엘 역시 깨어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흐윽…. 으…."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시안이었다. 덮고 있는 천을 꾸욱 쥔 손이 달빛에 하얗게 빛이나고 있었다. 이마에서 솟아나온 땀방울들이 그들의 눈에 선명하게 비추었다. 로운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이. 이봐." 투욱-하고 시안의 몸을 건드려보았지만 시안은 눈을 뜰줄 몰랐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짙은 신음소리를 내 기 시작했다. "시안님. 일어나십시오. 시안님?" "이봐. 꼬마. 일어나!!" 찰싹 찰싹-하고 로운이 시안의 얼굴을 때렸다. "…으. 으아. 아…아?" 번쩍-하고 시안의 눈이 떠지고 동시에 그가 몸을 일으 켰다. "괜찮으십니까?" 기엘이 옆에 놓았던 물컵을 시안의 손에 쥐어 주며 물 었다. "…아. 아니야. 꿈을 좀 꾸었을 뿐이야." 후우-하고 깊게 내쉬는 숨소리가 기엘과 로운에게 들 려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 게 아니었던 것이다. 자다가 헛소리를 할 정도로, 시안은 지쳐있었던 것이 다. "주무십시오. 시안님. 아무런 일도 안 일어 날겁니다. " "아. 으응." "…………." 마치 어린아이라도 달래는 것처럼 기엘이 시안의 등을 토닥 토닥였다. 하지만 시안은 왠지 쑥스러운지 그런 기엘을 스윽 밀쳐내고 말했다. "괜찮아. 그냥 악몽 비슷한 것을 꾸었을 뿐인걸. 잘 께." 아득한 이마를 짚으며 시안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눈을 뜨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던 악몽과도 같은 광경 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실 기억도 나질 않는다. 하 지만 굉장히, 아주 많이 끔찍한 광경이었다는 인식은 남아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로 운과 기엘의 모습이 보였다. 손끝에서부터 작은 안도 감이 밀려 올라온다. 하지만…. 역시 잠드는 것은 무서웠다. 칫-하고 시안은 혼자 중얼 거렸다. 나이살이나 먹어서 악몽을 꾸고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다니 정말 웃긴 일 이다. 만일 형이 이 사실을 알면 삼일 밤낮을 놀려 먹 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형이 보고 싶어지다니. 정말 감상적이 된 모양이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시안 역시 자신이 기억을 잃을 정도의 사건을 겪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처럼 눈을 감고 있으면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춤을 추었다. '하아---.' 달력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인지 얼 마만큼이나 기억을 잃고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다. 단지 자신이 아는 것은 카드미엘이라는 곳에서 자 신이 꽤나 오랫동안 있었다라는 정도뿐. 시안은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것은 따스한 체온을 가진 인간의 몸이다. 하지만 왠지 그것이 너무 낯설게만 생각되었 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억나는 것은 자신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던 그 기사- 이름따위 기억하고 싶지 않다-가 붉은 피를 잔뜩 흘리 며 자신을 보호하려다 죽었던 그때까지다. 그 이후로는 그저 흐릿하게 뭔가를 하고 있었다라는 기억 뿐이다. 꾸욱-하고 주먹을 쥐었다. 시안은 고개를 흔들며 감상 적이 되어버린 기분을 떨쳐내보려고 노력했다. '아니. 괜찮을 거야. 뭐든 잘 될 거야….' 시안은 눈을 감았다. 기엘은 잠들지 못하고 자꾸만 뒤척이는 시안을 바라보 다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뒤척이더만 간신히 다시 잠이 들은 모양이었 다. 시안의 몸에 덮혀있는 천이 아래 위로 고르게 움 직인다. "…시안님." 천천히 그는 팔을 올려 시안 쪽으로 향했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나직한 주문이 그의 입에서 시작되었다. "미르마, 메 하니다.(정결과 숙면의 주문)" 그의 손끝에서 주문이 실체화되어 시안의 몸 위에 덥 혀 나갔다. 잠시 후 기엘은 시안이 고른 숨을 내어쉬는 것을 확인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 을 이리야와 교대를 하기 위해서였다. 시안은 꿈을 꾸었다. 산을 오르는 아버지와, 약수를 들고 활짝 웃으시는 어 머니. 잠을 잘 때면 요상한 방법으로 자신을 깨우러 오는 형.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누 나들.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교복을 입고 학교 를 갔다. 활짝 웃는 친구들과 하품을 하며 일찍부터 잠을 청하 는 녀석들. 그리고 지루한 수업. 모든 것이 지루했지만 평온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기억을 잃을 만한 사건도 없다. 오랜만에 시안은 너무나 행복하게 꿈을 꾸었다. ♧ ------------------------------------- 계속 데굴 데굴 데굴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1 "역시 대도시를 따라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차피 이 쪽의 사정도 대충 알려져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대 도시를 따라 가는 게 좋다고 본다." "역시 그쪽이 좋을까?" "이봐 이봐. 가이칸 제국을 너무 과소 평가 하지는 말라고. 이렇게 넓은 땅에 얼마나 많은 영주들이 있는 줄 알아? 그 리고 그 영주들이 얼마나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아냐 고. 그런 영주들이 하나같이 카드미엘을 바라보고 살아. 위 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만 하면 우릴 찾아내는 것 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대도시는 무슨 대도시!! 이대로 그냥 나 하르를 따라서 북상하는 것이 좋아. 절대로!!" 이른 아침 세 남자는 머리를 맞대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 다. 오늘의 토론 주제는 도주(?)로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었다. 시안이 늦잠을 자느라고 여전히 코를 골고 있는 동안 세 남 자는 번갈아서 의견을 내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미메이라에서 단 한발자국도 안나왔 다고 해도 제국의 사정에 그리 어두 운 것은 아니니까요. 이리야씨." 기엘의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이리야가 눈으로 물었 다. 기엘은 이리야에게 차근 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첩자들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을 겁니 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보내는 정보가 미메이라로 간다 는 사실도 잘 모를테니까요." "헤에? 그게 가능해?"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이니 사실 저도 그 시작이 어 찌 된 것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여하튼 각지에 있는 첩 자들이 모은 정보는 그 나름대로의 루트를 따라서 일정기간 에 한번씩 미메이라로 모여듭니다. 그렇게 신속하지는 않다 고 해도 적어도 제국의 정세에 둔감하게 되지는 않지요." "헤에. 신기하군. 그거." "자신들이 어디로 정보를 보내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나름 대로는 상당히 객관적인 정보들이 수집됩니다. 그들은 자신 들이 모으는 정보가 연합국이나 제국 자체로나, 아니면 어 딘가에 있을 비밀결사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겁니다.." "그 정도로 해둬. 기엘. 뭘 그런 것을 설명하고 있어." "아아. 그냥." 터억-하고 기엘이 지도 위에 손바닥을 쳤다. "탁상공론은 그만 하자구. 어차피 이쪽의 얼굴도 다 알고 있는 판에 도시는 무슨 도시. 일단은 되는데로 가보자. 산 이 되면 산이고 강이 되면 강인 거야. 가다가 성이 나타나 면 적당히 눈치를 봐서 들리고. 그럼 되잖아." 「상당히 무모하군.」 "우. 우악!!!!!"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이리야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세나케인!!" 「세나케인님이라고 불러라.」 그 말과 함께 정말 간만에 뚜렷하게 세나케인의 모습이 그 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 건방진 녀석은 어쩔 수 없지 참아주지만, 어찌 인간들 이라는 것이 쯧." "세나케인님." 기엘은 너무 반갑다는 듯이 세나케인을 향해 활짝 웃어 보 였다. 마치 인간처럼, 세나케인은 그런 기엘의 어깨를 툭툭 치면 서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팔짱을 끼고, 그리고 양반다리 를 한 세나케인은 정말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멀리도 돌아가게 되는 군." "원래 여행의 성격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사실 그렇게 돌 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전에는 아슈레이 전 대륙횡단을 하셨던 분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거야 옛날 일이지. 지금은 불가능해. 그런 걸 했다가는 계승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거야." "…………." "…………." 기엘과 로운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짐 작이 갔기 때문이다. "에? 어이. 세나케인씨. 그게 무슨 소리유?" "무슨 소리? 그것도 모르면서 물의 술사라고 할 수 있는 건 가? 아! 하기사 자네는 선택된 자들의 후예가 아니니까 그 럴 수도 있겠군." 세나케인은 잘난척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이 대륙 전체에 골고루 엘이, 즉 신들의 힘이 미 쳐 있었지. 뭐 몇 백년 전까지만해도 그랬는데 말이야. 요 즘은 그렇지 않거든. 여하튼 계승자들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모자른 것들이어서…." "그 정도로 되었습니다. 세나케인님." 무뚝뚝하게 로운이 세나케인의 말을 잘랐다. "신들의 시대와 현재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잘난 척 하지 말아. 이 얼치기 미메이라의 시종같으니라 구. 네가 저 멍청한 녀석이 없으면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 을 것 같아?" "세나케인님!"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이리야는 자신이 뭔가 실 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해서 쭈빗쭈빗하면서 중재에 나섰다. "아하하하. 그, 그러니까 뭐 알았으니까 넘어가자구. 응? 이봐요. 세나케인씨?" 찌릿-하고 세나케인이 이리야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뭐하고 있는 거야?" "아. 시안님. 일어나셨습니까?" 팽팽해지던 분위기가 긴장감 없는 시안의 목소리로 인해서 원래대로 돌아왔다. "흥." 세나케인은 팔짱을 터억끼고 기분나쁘다는 듯이 고개를 돌 렸다. "얼라? 케인?" "세나케인이다." "귀찮다고 했잖아. 어째서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거야? 기 엘. 나. 물." "아!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아침 밥도 줘!!" "풋--." 여지없는 밥타령 소리에 이리야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다음에 나올 것은 '너는 눈만뜨면 밥이냐!'라는 밥타령에 대한 로운의 답가. 하지만 대답을 한 것은 로운이 아니라 의외의 인물. 바로 세나케인이었다. "이봐." "왜?" "너는 잠에서 깨어나 나를 봤으면 뭐라고 말을 해야하는 거 아니냐?" "……………." 잠에서 덜깬 시안의 눈이 멀뚱 멀뚱 세나케인을 바라본다. "아직도 꿈속이야?" "…잘 잤어? 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거야?" 콰앙--- "왜 때려!!!!" 시안은 아픈 머리를 감싸안으며 항의했다. "여하튼. 너 같은 녀석이 어째서 바람의 계승자씩이나 되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무식하게 사람 패지 말고 말로 해 말로!! 아후∼ 아파라." 로운은 자신이 할 행동과 말을 대신해주고 있는 세나케인을 보면서 조금 머쓱한지 조용하게 시안이 원하는 아침밥(?)을 하러 갔다. "젠장. 바보같은 녀석!! 바람의 어쩌구리 좋아하시네!! 이 잔소리꾼 영감탱이야!!" "시키는데로도 못하는 멍청한 녀석." "그래 나 멍청하다 네가 보태준 거 있어?" "이녀석이----." 아마 세나케인이 인간이었다면, 속이 새카맣에 타 버렸을지 도 모를 노릇이었다. "어라? 이건 뭐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길을 떠나기 위해 짐을 정리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며 이것 저것 기웃 거리고 있던 시안은 이상 한 물건을 발견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이 입고 있던 옷무더기 사이에서 연 한 녹색으로 빛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여자옷이라며 질 색 팔색을 하며 벗어던진 옷이긴 했지만 꽤나 비싼 옷감과 여러 가지 보석으로 꾸며진 옷이기 때문에 적당한 곳에서 팔자!!라고 결정된 터였다. 그 꾸러미 속에서 삐죽하게 내밀어져 있던 것을 시안은 쑤 욱 잡아당겼다. "뭐야? 이건?" 손안에 들은 것은 그리 크지 않은 칼이었다. "단도인가?" 반짝이는 재질로 된 집에서 빼어들자 스르릉 소리가 났다. "헤에?" "카나린이군." "카나린?" 세나케인이 아는 척을 했다. "그 검의 이름이다." "에? 이게 검이야? 단도 같은데?" "작긴 해도 일단은 검이야." 그것은 로운이나 기엘이 가지고 있는 라이트보다는 훨씬 작 은 크기다. 언젠가 시안이 만화책에서 보던 소도보다도 훨 씬 작은데 그것을 보고 검이라고 하는 세나케인에게 시안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어디서 난 거야?"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시안은 더 물어보려다말고 문득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기억을 잃고 있는 동안에 생긴 물건 같았기 때문이다. '젠장. 더 물어보기도 곤란하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의 몸 속에 있었을 세나케인이라면 알고 있었을텐데도 대답을 안해주는 것을 보면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이라고 시안은 생각했다.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알 려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어떻게 이 검 이름이 카나린이라고 하는건데?" "카나린의 검이었으니까." "헤에?"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검이다. 처음에 그걸 소유했던 인 간의 이름이 카나린이었지 그래서 카나린이라고 불리는 거 야." "흐음. 그런데 이거 왠지 좀…." 녹색의 검 카나린을 만지작 거리고 있던 시안은 조금 이상 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검에서 엘의 파장 이 미미하게나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를 채는 것을 보니 좀 성장을 하긴 한 것 같군." "…무슨 소린지 모를 이야기만 하지 말고 설명을 좀 해봐."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처음에는 등한시 하고 있던 일행들이 하나 둘씩 그들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역시 궁금한 것은 매 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시안님 뭔가 이상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엘이 느껴져. 이 검에서." "예?" "당연한 거다. 그 검은 말하자면 엘을 모아 응집시켜 실체 화시킨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우와. 그런게 가능해?" "가능했었지." 세나케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그런 것이 지금까지 무사하게 보관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될테니 잘 챙겨둬." 그것을 끝으로 세나케인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야!! 케인. 그걸로 끝이야? 이거에 얽힌 옛날 이야기 같은 게 있었던 거 아니야?" 「오래전 일이다. 지금은 그리 의미도 없는…」 "젠장. 저 녀석은 꼭 말을 하다가 만다니까. 있으나 마나, 절대 도움이 안 돼!!" 그렇게 투덜 거리면서도 시안은 세나케인의 말대로 녹색의 검 카나린을 자신의 짐 한쪽에 얌전히 챙겨 넣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세나케인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말겠다 고 속으로 다짐을 하고 있었다. ♧ "지금쯤이라면 아마 추격대가 따라왔다고 해도 저희들보다 훨씬 앞서 있을 것입니다." 야트막한 구릉성이를 지나면서 기엘이 시안에게 설명했다. 추격대를 피하기 위해서 냅다 줄행랑을 치는 대신 여유를 두고 숨어 있다가 천천히 출발을 했다. "그런데 도대체 뭔 추격대야? 설마 그 시커먼 녀석들이 아 직도 쫓아오는 거야?" 도망을 친다고 말을 했지만 도대체 누구로부터 도망을 치는 지 궁금했던 시안이 아무런 생각없이 말을 하자 로운이 시 안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그들은 아슈레이 내에서라면 어디든 쫓아온다. 어쩔 수 없 는 거야." "도대체 왜 노리는지 이유라도 알면 좋겠군. 참나.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왜 맨날 이렇게 도망을 다녀야 하지? 정말 짜 증난다구." "그래서 계승로가 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안님." 기엘이 시안을 위로하면서 말했다. "사실 신국인이라는 존재가 제국 내에서는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요." "우웅. 있어 보이니까 쫓아온다 뭐 그런 건가? 하기사 내가 생각해도 기엘이나 로운. 그리고 저 이리야씨 같은 사람들 을 보면 잡고 싶을 거 같다. 뭐니뭐니해도 엘러 잖아. 이전 에 레카에서의 일도 있었고." "그렇습니다. 시안님. 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국에는 마법사들이 있다면서. 왜 엘러들에게 그 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 물론 보통 사람들 입장에서야 신기 하긴 하겠지만 엘러들이 하는 만큼 마법사도 할 수 있다면 서."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마법사들이 있다 고 해도 그들 역시 수도없이 많은 인원은 아닐겁니다. 미메 이라에서는 엘러가 아닌 사람들이 드뭅니다만 제국은…." "제국은 그렇지 않다. 라는 거지? 알았어. 하지만 말이야. 기엘." "네?" "그 우리보다 앞서 같을 것이라는 추측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아." "무슨 말이지?" 뒤쪽에서 따라오던 로운이 시안의 말을 듣자마자 앞으로 달 려나왔다. 그가 타고 있는 말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푸덕였다. "아무래도 우리 발각 된 것 같거든?" "………?" "설마. 기척도 느낄 수 없을 텐데." "설마가 사람을 잡을 때도 있지. 엘의 파장을 따라온 것 같 지는 않고 여기 저기 길목을 지키고 있었게 아닐까 싶어. 저기 멀리…." 그러면서 시안이 손을 들어 가리켜 보인 곳은 구릉을 넘어 몇 개의 민가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시안의 손짓이 방아쇠가 된 듯 와아-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 들이, 기병들과 보병들이 새카맣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으악!!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리야가 버럭 화를 냈다. "어라? 정면으로 들켰네." "지금 그게 할 소리냐 시안!!" "내 탓이 아니잖아!!!" 시안의 말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그들은 엘러인 시안일행의 파장을 감지 해 따라온 엘러들이 아니라 요소 요소 길목마 다 매복해서 기다리고 있던 황제군의 한 무리였던 것이다. "정말 정면 대결을 해야하는 군." 로운이 오랜만에 자신의 라이트를 빼들었다. 기엘도 마찬가 지로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라이트에 손을 대었다. "시안님. 저나 로운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아이고…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래." "세나케인님. 시안님을 부탁 드립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시안을 부탁하며 기엘은 앞으로 나섰다. 벌써 적들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카악---- 번쩍이는 검날이 서로 부딧히며 불꽃을 만들어 냈다. 갑옷을 입은 병정들과 말들이 한 대 얽혀 아수라장을 만들 고 있는 와중에 시안은 어쩔 줄몰라했던 이전과는 달리 요 상하리만치 차분한 얼굴을 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 다. 엘러들이 습격을 해왔으면 모를까 그들을 덥친 추격대는 숫 자는 많았지만 기엘이나 로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리야 노운. 카라스!!!" 푸학하는 소리와 함께 풀잎에 맺혀있던 물방울들이 일직선 으로 솟아올랐다. "크헉!!!" "젠장!!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말 안 해도 알아!!" 시안의 잔소리를 듣고 이리야는 급하게 주문을 거두어 들였 다. 하지만 이미 그의 주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잔뜩 생겨나 있었다. '젠장. 이기고 나서도 한소리 듣겠군.' 자신이 왜 그렇게 시안의 '명령'에 집착하는지 깨닫기도 전 에 이리야는 시안의 말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공격은 하되 죽일 만큼의 상처는 입히지 않는다라는 것을 머릿속에 꼬옥 박고서 말이다. "하앗-!!!!" 옆에서 달려드는 남자를 검신으로 후려쳐 기절시킨 기엘이 소리를 쳤다. "시안님. 쉴드를!!!" "알았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안은 재빨리 주문을 외워 자신의 몸 둘레에 쉴드를 쳤다. 다음 순간 기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 바람의 시작과 끝. 미르마. 라이헨!!" 라이헨으로 증폭된 주문이 거대한 흐름이 되어 사람들을 덥 쳤다. 병장기를 든 사람들이 소리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가기 시작 했다. "우. 우아아아악!!!!" "마. 마법이다!!!!" "마법사다!!!!" 기엘의 주문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남자들이 갑자기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주문을 쓴 거야?" "수면 주문입니다. 시안님. 죽지는 않을 겁니다." 휴우하고 시안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자칫 잘못하면 대량 유혈사태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름대로는 가슴을 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있었다. '왜 이렇게 나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4명밖에 되지 않는 일행이 당해내기엔 훨씬 많은 숫자의 적 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위기감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 았다. 시안은 고개를 돌려 기엘과 로운, 그리고 이리야를 바라보 았다. 피가 묻은 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몸에서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 순간 시안은 깨달았다. 자신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 를 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살기가 없었어.' 언제부터 살기를 느끼게 된 것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분명 바로 지금 이순간 그들을 덥친 적들은 분명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살기를 띄고 있지 않았던 것 이다. 시안은 알수 없었지믄 그것은 다름 아닌 로렌 황태자의 안 배였다. 그는 시안을 되찾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안 이외의 일행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어디까지 생 포를 명령했고 절대로 그들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 다. 그것을 알리 없는 시안이었지만 여하튼 안도의 한 숨을 내 쉬고 있었다. "그만해!! 뒤 쫓지마!!!" 도망가는 몇 명의 적들을 따라가려던 일행들을 저지하면서 시안은 말고삐를 움켜 잡았다. "따라오기는 해도 그렇게 위험은 없어." "하지만 시안!!" "괜찮을 거라고 하잖아!!! 내 말 들어!!!" "시안님! 이상 없으십니까?" "응. 아무렇지도 않아. 다들 다친데 없어?" 우르르 적들이 몰려왔던 것에 비교하면 적들과의 조우는 너 무나 싱겁게 끝이 나버렸다. "이상하네. 죽이려고 덤비는게 아닌 것을 보면 그 시커먼 하셰카인지 뭔지가 아닌 모양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시안이 말에서 뛰어 내렸다. 적어도 20여명의 사람들이 기엘의 주문에 당해 잠들어 있었 다. 시안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들 사이 에서 방패하나를 집어 올렸다. "이건 무슨 문장이지?" 두 마리의 드래곤이 검과 함께 그려져 있는 문장을 가르키 며 묻자 이리야가 대답했다. "무슨 문장이겠어. 그건 가이칸의 황제군의 문장이다." "황제?" "그래. 가이칸에서 그런 문장을 달수 있는 것은 제국의 로 열 가드 뿐이지." "그럼 이 남자가 제국의 기사란 말이야? 의외로 싱겁네?" "검으로 싸웠으면 위험했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기엘이나 로운이 당해내기 힘들 만큼?" "글쎄요?" 빙긋-하고 기엘이 웃었다. "암튼. 다행이네. 이 사람들이 죽자 살자 덤볐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까마득하잖아. 젠장.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라는 말이 너무나 잘 들어 맞는 군. 으라차차차." 까치발로 뛰면서 시안이 사람들 무리에서 빠져 나왔다." "이 사람들 깨어 나려면 얼마나 걸려?" "글쎄요. 오늘 하루 정도는 못 일어 날 겁니다. 증폭 주문 을 썼으니까요." "암튼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 하셰칸지 뭔지도 피곤한데 왠 황제군이래? 앗!!! 설마 이거…." "…………??" "으악- 황제군하고 맞서 싸웠으니 이제는 제국의 공적이 된 거 아니야?" "시끄러워. 다시 말이나 타. 이곳을 벗어난다." 시안이 막 패닉에 빠져들으려는 순간 로운이 주위를 환기 시켰다. 로운은 널부러져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다가 시안의 옆으로 다가왔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서 제국군에까지 쫓기는 몸이 되야 했을 까? 물론 그 답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역시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 시안을 다시 한번 쳐다봤 다. '이계에서 왔기 때문일까?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만 일어나는 게 아닐 까?' 그들의 신은, 바람의 신 미메이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의심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은 절대적 인 그들의 신. 하지만 지금 이순간 만큼은 의심을 해보고 싶어졌다. "어이. 로운. 아무래도 우리의 진짜 적이 나타난 것 같아." 로운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리야가 그의 레이피어를 까닥 까닥 흔들면서 말했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사람들도 이리 야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엘러의 존재가 아주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 저 사람 바람술사잖아." "그렇군요. 시안님." 긴장을 하고 시안의 곁에 바짝 다가선 기엘이 얼굴을 굳히 며 말했다. 조금전의 아수라장을 조금 벗어나 앞으로 나온 그들의 앞에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 람이 나타났다. 침묵이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마론이라고 합니다." 다짜고짜 공격을 해올 줄 알았던 상대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소개를 하자 시안은 깜짝 놀랐다. "우. 우앗- 노. 놀랐다." 그들의 사이에는 약 5렌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 "당신이…." 마론이라고 이름을 밝힌 바람 술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람의 계승자입니까?" "뭐 일단은 그렇다고 대답해두죠." 스윽-하고 로운의 팔이 시안의 앞을 가로 막았다. "저는 제국의 엘러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안다고 시안은 속으로 중얼거렸 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굵직한 로운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로운의 팔을 타고 시안 에게까지 전해진다. 그 목소리에서는 경계심과 긴장이 한껏 묻어 나왔다. 기엘은 열심히 탐색을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자신의 파장을 숨긴 것이 아닌 이상 자신이나 로 운이 당해내지 못할 상대는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사실 문제 는 그것이 아니다. 눈앞의 한 사람은 괜찮지만 그 사람이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 엘러들을 불러들이는 것이 진짜 로 문제인 것이다. 그때, 이틀전에 시안이 했던 것처럼, 다시 그 위기상황을 똑같이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가 없다. "저는 제국을 섬기는 몸입니다, 당신들을 저지하고 생포하 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시안 일행은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그래서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시안이 입을 열었다. 휘이이이이잉----- 바람이 그들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당신들을 발견하는 즉시 제 동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시안은 속으로 답답함을 토로하며 남자를 힘껏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단지 말을 할 뿐, 시안 일행쪽으로 다가오려하 지도, 공격을 준비하는 기미도 없다. "하지만 바람의 계승자인 당신을 공격하고 싶지는 않습니 다." "…………!!" '뭐. 뭐라구? 저 사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자신들을 공격해야 마땅한 사람이 하는 이상한 소리에 순간 네 남자는 얼이 빠져 버렸다. 「답답하군. 인간이면서 어째서 인간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스르륵. 세나케인의 형체가 시안의 앞에 나타났다. 소리도 없이. "………!!" 세나케인이 나타나자 마론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고 있는 것이 시안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저 녀석은 너에게 위해를 가하고 싶지가 않은 거다." 세나케인이 시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이 어서 말했다. "바람 술사는 바람의 계승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법이 지." "저 사람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시안은 뜻밖의 사실에 놀랐다. 그런 불문율이 있을 줄은 몰 랐던 것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의 의지가 곧 바람술사의 의지인 것이야. 그가 바람술사가 아니라면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 는 것이고, 그리고 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물론 개중에는 더 큰 힘에 현혹 되어 몸을 그르치는 자들 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을 그대로 두고 가면 당신에게 위험이 미칠텐데 그래 도 괜찮습니까?" 굳은 얼굴이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기엘은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그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 던 라이트를 내려 놓았다. "시안. 네 뜻에 맡기겠다. 어떻게 하고 싶나." "어? 나, 나말야?" "그래." 갑작스럽게 세나케인이 자신을 지목하자 시안이 당황해하며 팔을 내저었다. "내, 내가 뭘!!" "저 사람을 그대로 두고 가면 명령 불복종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세나케인의 말은 사실인 듯 마론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순식 간에 흑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더러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고." "흐응." 세나케인이 팔짱을 끼고 시안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늉을 했 다. 그러자 일행 전부가 어떻게 할 것이냐고 시안을 바라보 기 시작했다. "젠장!! 왜 다들 날 보는 건데!!! 케인 마음 대로 하면 되 잖아. 잠깐동안 저 사람의 능력을 봉인 해 놓던지. 아니면 기절을 시키던지!! 마음대로 해!!" "알았다." 시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나케인이 마론을 돌아다보 았다. "잠깐 동안이라면 문제가 없을 테니." 세나케인이 팔을 한번 휘두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남자가 풀썩 하고 자리에서 쓰러졌다. "으. 으악!!! 무슨 짓을 한 거야!! 난 죽이라고는 말 안했 어!!!" "누가 죽였다고 하는 거냐!!!" "하지만!!" 말하지도 않았지만 시안은 세나케인이 무슨 짓을 했다는 것 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파장이 순식간에 싸악 사라졌기 때문이다. "에잇!!" 풀썩-. 시안이 말에서 뛰어 내려가 남자에게 달려갔다. "시안님! 위험합니다." 기엘이 뒤를 이어 말에서 뛰어 내리자 나머지들도 역시 똑 같이 시안의 뒤를 따랐다. "사, 살아 있다." "잠시 그의 능력을 봉인 했을 뿐이다. 한두시간만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설마. 이전에 나한테 했던 그런 방식으로 엘을 봉인한건가 ?" "맞아." "이봐!!! 이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이렇게 무식하게 하면 어떻게 해!!" "난 인간의 기준 따윈 모른다고 했을텐데?" "이… 이--- 무식한 케인!!!!"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에는 이전에 세나케인이 자신의 능력 을 봉인했다가 풀어주었을 때의 그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왠지 굉장히 허탈해." "나도 동감." 터덜 터덜 말을 타고 가면서 시안이 중얼거리자 이리야가 거기에 동감을 표했다. "차라리 뭔 활극이라도 벌어졌으면 시원했을 같은데 더 진 이 빠지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이리야. 괜한 소리는 하지 말 아." "어이 이봐. 로운. 그러는 자네도 마찬가지로 허탈해 하면 서 아닌척 하지 말아." "하지만 그래도 큰 위험없이 빠져나오게 되었으니 잘 된 거 아닙니까. 이리야씨." "거야 기사양반 생각이고. 나는 허탈하고 힘빠진다구." "맞아. 맞아."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쯤은 풀렸을까?" "예?" "아아. 세나케인이 해놓았다는 봉인. 그거 풀리면 엄청나게 아픈데 괜찮을까 몰라." "죽지는 않겠죠." "그전에 그 사람 동료들이 발견을 해야할텐데." "이미 발견했을 겁니다. 시안님." "에라!! 나도 모르겠다. 가자!! 얼른 가자구. 배고파!!! 다 음 마을은 어디지?" "아무래도 배를 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로운. 어때?" 기엘은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돌려 로운에게 다가갔다. "나쁘지 않겠지. 저 녀석이 먹을 것 타령만 하지 않으면." "내가 뭘 어쨌다구!! 인간은 먹어야 사는 거야. 자꾸 그거 가지고 시비 걸지마 로운!!" 버럭하고 화내는 시안의 뒤를 세 남자가 쭐래 쭐래 따라갔 다. 아직도 멀고 먼 여행길이 그들의 앞에 길게 펼쳐져 있었다. ----------------------------------------계속 10장이 끝났습니다. 후우.... 하룻밤을 꼬박...새는 군요... 다음은 11장 변화의 바람으로 이어 집니다.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2 11장 변화의 바람 "바람이 바뀌는 군. 벌써 시간이 꽤 늦어 버렸는 데. 예정대로라면 오늘 내로 카르모니아에 도착 을 했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상태라니." 투덜 투덜. 바람이 잔잔해진 뱃전에 앉아있던 이 리야가 기엘이 가져다준 차를 받으며 말했다. "이게 다 그놈의 바보같은 황제군들 때문이니, 어디가서 탓도 못하겠어." "아무래도, 쉽지는 않은 상대니 어쩔수 없지 않 습니까? 이리야씨." 이리야의 옆에 기엘역시 털썩 주저앉았다. 카드미엘에서 도망쳐나온지 오늘로 벌써 이주일 째. 간간히 그들을 따라잡은 추격대를 이런 저런 방 법으로 뿌리치며 열심히 도망을 쳤지만 그들의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잡아먹고 있 었다. "그 황태자 변태 아니야?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째서 저 녀석한테 그렇게 집착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시안님을 여성으로 알고 있으니 무리는 아니죠. " 순간 이리야는 벙찐 얼굴을 했다. "뭐. 뭐라구-우?" 펄쩍 뛰는 이리야를 보고 기엘은 아차하고 혀를 찼다. 별 생각없이 있다가 그만 말을 해버린 것 이다. 나름대로는 로운과 둘이서 비밀로 해두자 고 약속을 했던 것이다. '이거 시안님이 아시면 화를 내시겠군.' 그는 재빨리 이리야에게 변명 또는 설명을 하려 고 했다. "세상에-- 그런 사정이 있었단 말이야? 어이. 어 이!! 이봐. 시안!!" "이리야씨!!!" 기엘이 잠시 망설이고 있는 동안 이리야는 자리 를 떠 시안에게 팔을 휘져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이리야씨!! 잠시만요!!" "이봐!! 시안. 그게 정말이야?" "므으(뭐가?)" 입안 가득 훈제고기를 우물거리며 먹고 있던 시 안이 왠 호들갑을 떠느냐며 이리야를 보았다. "그게 정말이야? 가이칸의 황태자가 널 여자로 알고 있다는게?" "------!!" "이리야씨!!!!!" "쿨럭- 쿨럭- 케에-----엑!!!" 기엘이 후다다닥 달려와 이리야의 팔을 잡는 순 간 시안이 혼신의 힘을 다해 구역질을 하기 시작 했다. "우에에----엑!!!" "시. 시안님!! 괜찮으십니까?" 입에 물었던 것은 물론이요, 조금전까지 열심히 우걱 우걱 먹던 것들이 온통 시안의 목구멍을 타 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쿨럭!!" "시안님-." 어쩔줄 몰라하는 기엘의 목소리는 시안의 구역질 소리에 그만 묻혀버렸다. "말해!!!" "…………." "말하라니까!!!" 기엘과 로운은 서로 눈을 주고 받았다. 역시나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아예 처음부 터 말해줄걸 괜시리 감추었다고 둘은 무지무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빨랑 말 안해!! 그게 무슨 소리야!!" 나름대로는 성대하게 벌이던 저녁식사를 완벽하 게 방해받은 시안은 시시각각으로 팍팍 쑤셔오는 위통을 간신히 참으며 이마에 핏대를 올렸다. "얼굴도 모르는 미친 황태자 놈이 날 여자로 알 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저어. 시안님 일단 설명을 좀 들으시고." "됐어. 기엘. 어차피 알아두어야 할 지도 모르는 데 굳이 포장할 필요 없어. 그래. 가이칸의 황태 자는 분명 널 여자로 알고 있다. 어차피 너도 눈 치 채고 있었던거 아니야? 정신이 돌아 왔을 때 치렁 치렁한 여자옷을 입고 있었으면서 왜 새삼 스럽게 이렇게 소란을 피워?" 화악-하고 시안의 얼굴이 달아 올랐다. '젠장!!! 저 녀석!!' "여자로 오해받은게 한두번도 아닌데, 안 그래? 그 오해한 사람들 목록에 한사람쯤 더 추가 된다 고 해서 뭐가 문제냐고." "그. 그래도 그게 아니잖아!! 지금은!!" 시안은 등골에서부터 싸늘한 기운이 솟아오르자 부르르하고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누군지도 모를 황태자라는 녀 석이 날 여자로 알고 쫓아오는 거였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이제는 아예 오한이 몸을 덥쳐 온다. '말도 안 돼----!!' "여자로 오해 좀 받았다고 해서 하루 이틀도 아 니니 이제 그정도로 해둬. 우리는 네 신경질을 무한정 받아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아 도 신경쓸일이 산더미인데…."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구!!" '으윽- 도대체 난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한거야!!' "귀찮으니까 간단히 설명을 해주지. 네 녀석이 여자로 오해받은 것은 우리 탓이 아니다. 순전히 네 탓이야. 네 녀석이 혼자서 쭐래 쭐래 나갔다 가 납치되었고, 네 녀석이 맘대로 폭주를 해서 정신을 잃은 것이고, 그래서 세나케인님이 널 어 떻게든 보호하려고 여자로 만들었던거다. 굳이 탓을 하고 싶으면 세나케인님을 탓하라구. 절대 로 우리탓이 아니니까." "뭐라구?" "하지만 세나케인님을 너무 탓할 것도 없어. 세 나케인님이 널 여자로 변화시켜 놓았던 탓에 네 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황태자 궁에서 고이고 이 보살핌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지금 여기 에 이렇게 무사히 있을 수 있는 거니까." 부글 부글하고 머릿속이 끓어 오른다. 머리끝까지 받은 열 때문에 시야가 벌겋게 변화 하기 시작한 시안은 부들 부들 온몸을 떨면서 고 함을 쳤다. "케이----인!!!!" 누가 보면 발악을 하다 하다 못해서 드디어 혼자 서 개 발악을 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다. "케이--인!! 이 망할 바보 녀석!! 당장 못나와!! !" 그런 시안의 모습을 세 남자는 멀뚱 멀뚱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남자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고, 한남자는 한숨을 내쉬 고 있었고 나머지 한사람은 배꼽을 잡고 웃어대 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빨랑 안나와!! 이 망할 바람의 떨거지 같으니라구! 아아악!!" 드디어는 혼자서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한 시안 을 보고 이리야는 미친 듯이 끊임없이 웃어댔다. "젠장할!!!! 으아아아------악!!" 그런 시안을 보면서 로운은 가볍게 딱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봤자, 그 황태자가 안 따라올 것도 아닌데 뭘 저렇게 난리를 치는지…." ♧ 여하튼 그래서 또 계속.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3 ♧ "그래. 돌아가겠다고?" "예. 전하." 로렌은 한쪽팔로 얼굴을 괴고는 그의 앞에 몸을 숙이 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을 깊숙하게 숙이고는 정성을 다해 로렌에게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무엇에 대한 사죄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로렌은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전적으로 시안을 돌보는 일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를 '도둑'맞아버린 일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항력이었을 뿐이니 너무 마음쓰지 말게." "전하…." "에메렌이 어찌했다고 해서 그들이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을리도 없지 않은가. 그대를 탓할 수는 없으니 너 무 마음쓰지 말게."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로렌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자의 눈물을 보는 것은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기왕 입궁한 것, 조금 더 머물다 가게." "전하." "그대의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조 금, 며칠이라도 좋으니 푸욱 쉬다가 가게. 이대로 에 메렌을 보냈다가는 내가 그댈 박하게 대했다는 소리를 숙부님으로부터 들어야 할지도 몰라."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 로렌은 후우-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렇다. 시안이 사라진 것은 에메렌의 탓이 아니다. 그것은 시안의 탓도 아니고 그녀를 데려간 자들의 탓 도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있을 지도 모른다. "전하. 담소중에 죄송합니다만…." "카스핀."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아버님께서?" 잠시 긴장을 늦추고 있던 로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며칠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그의 아버 지 즉 라이너드 7세가 그를 부른 다는 것에는 모종의 의미가 있다. "서두르십시오." '묘하게 맞아 떨이지는 군.' 시안이 궁에 들어왔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던 황제가 시안이 떠나곤 난 후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행운의 여신인지도 모르겠어.' "가세." "아버님." 길게 늘어진 휘장 사이로 나온 손에 살짝 입을 맞추고 무릎을 꿇었다. "로렌이냐." "예." 오랜 시간 듣지 못했던 황제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아 직도 힘이 실려 있었다. 34세에 황제의 위에 올라 35년간 가이칸 제국의 황제 로서 그의 넓은 영토를 다스렸던 남자. 이제는 자신의 내밀어진 손 하나 거두지 못하는 초라한 늙은이 였지 만 아직 그에게는 황제의 위엄이 남아있었다. "어둡구나." "불을 좀더 밝혀드릴까요 아버님?" 길고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황제는 꽤나 또렷한 목 소리로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아니 되었다. 지나치면 눈이 부신 법이니." "기요른. 이제 그만 나가보게나." "폐하." "이때쯤 되면 한계라는 것이 보이게 되지. 걱정하지 말고 나가게나." 약 1년전 자리에 눕게 된 뒤로 항상 황제의 곁에서 그 를 보필해왔던 어의를 물리고 나자 라이너드 7세의 목 소리는 한층 더 낮게 잦아들었다. "너의 형들과 동생들도 불렀다." "…………." "비록 부족한 형제들이라고 해도 이 세상에 그들보다 너와 가까운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비교적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있던 라이너드 7세는 나 름대로는 평온한 삶을 살아 왔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지워져 있던 황위라는 무거운 책임을 그의 아들에게 넘겨주려 하고 있었다. "내가 널 황태자로 지목한 것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말이 많아지게 된다라는 말을 라이너드 7세는 온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래. 어떤 이들은 네가 황제가 되면 피바람이 불것 이라고도 이야기를 했었지 하지만 나는 널 황태자로 삼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로렌은 그의 아버지의 옆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의 아버지 라이너드 7세에게는 3명의 황비가 있었고 그녀들에게서 4명의 아들을 얻었다. 첫 번째 황비는 셋째 아들을 낳다가 그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로렌의 어머니와 혼인하여 로렌을 얻었지만 비 운의 사고로 그녀마저 잃었다. 나름대로는 운이 없었 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늘그막에 귀족들의 성화 에 못이겨 30여년이나 차이나는 어린 황비를 맞아 막 내 아들을 낳았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셋째였던 로렌이 황 태자가 되었다. "가트는 불만이 많을 게다." 황제는 그의 첫째아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이야 둘째이고 또한 막내이니 불만이 있 어도 어찌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가트는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게다." 그건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사실 첫째 아들인데 다가 4명의 황자들중에는 가장 거대한 세력을 등에 엎 고 있는 것이 일 황자 가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로 렌이 황제가 되는데 가장 위협적인 세력인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거라. 아무리 가트가 네게 위협이 된다 하더라도, 그가 네 형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는 이제 황제가 되겠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이름뿐인 지 위다. 너는 승자이고 그는 패자인 것이지." 간단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컸다. "기쁨이 생기면 반드시 함께 나누고, 어려운 일이 생 기도 언제나 함께 하거라. 불만이 있는 듯 싶으면 다 독이고… 쿨럭." 차분 차분히 말을 하던 라이너드 7세가 답답한 듯 기 침을 연거퍼 했다. "그만 하십시오. 아버님. 몸에 좋지 않습니다." "늙은이의 말은 새겨 듣는 것이다. 로렌." "예." "죽을 때가 된 늙은이의 하소연이라 생각하지 말아라. "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쿨럭. 쿨럭. 쿨럭." 괴로운 듯한 기침소리가 말이 이어지는 것을 막았다. 로렌은 황급히 어의를 불렀다. "밖에 누구 없느냐!! 기요른!!" 그의 목소리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의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황제는 실날 같이 남아 있던 생명의 끈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명심…하거라." 생명을 앗아가는 소리가 황제의 목에서 끓어올랐다. "세상에 너와 가장 가까운 것은…." "…………." "가까운 것은…." 기침소리가 멈추었다. 죽음의 침묵이 그들의 위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다음날. 가이칸 제국의 수도 카드미엘의 황제궁 꼭대 기에는 흰색의 깃발이 걸렸다. 라이너드 7세의 붕어 소식은 넓은 가이칸 제국의 곳곳 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 "폐하!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말이 되지 않다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감히 황제의 앞에서 저렇게 무엄한 말을 할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에게 진심으 로 화를 내며 말을 하고 있는 남자는 로렌이 아직 아 무런 힘도 없는 황제의 세 번째 아들에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그의 옆에서 전심 전력으로 그를 보필해 온, 오른팔과 다름 없는 남자였다. "절대로 귀족원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 아 니 폐하." "아직 대관식도 올리지 않았으니 폐하라는 단어는 좀 접어두게. 국장도 아직 끝나지 않았지 않나."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카스핀." "……………." "일은 한번에 하나씩 하세. 난 지금 당장 내 말을 실 천에 옮기겠다고는 하지 않았어. 단지 그렇게 하겠다 고 내 희망을 말한 것이네." "하지만 불가능 합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내 특기가 아니던 가." 미타 남작은 푸욱하고 눈에 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그런 말이 새어나가 기라도 한다면 겉잡을 수 없을 겁니다. 폐하. 지금도 연일 난리도 아닌 상황인데…." "그거야 그들이 그것 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지." 로렌은 들고 있던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일단은 먼저 국장부터 마치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대관식을 올리고, 그리고나서 생각하면 안될까?" "대관식을 황비의 자리를 비운 채 치루실 예정이십니 까?" "좀 비어 있으면 어떤가?" "폐하!!" "그것보다는 라기크 백작의 영지에 가있는 내 형님의 소식이 궁금한 참인데 무슨 움직임은 없나?" "폐하." 미타 남작은 재빨리 말을 돌려버리는 로렌을 원망스러 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화제를 돌려버렸 다. 다시 원래의 화제를 꺼내보았자 아무런 소득이 없 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의 주군은 상당한 고집쟁이에 제멋대로의 천재였다 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가끔은 로렌이 조금은 둔감해주었으면, 또는 아주 조 금만이라도 머리 회전이 느려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아버님의 유지는 되도록 지켜드리고 싶지만 자꾸 이 렇게 나오면 곤란해." 로렌은 한쪽 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가이 칸 제국의 지도를 보며 말했다. 그가 눈여겨 보고 있 는 곳은 그의 큰 형님인 가트의 장인이 되는 라기크 백작의 영지다. 벌써 일년이상 가트는 라기크 백작의 영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라기크 백작이야 일년의 대부분을 카드미엘에 있는 저택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가 눈여겨보고 있는 상대는 라기크 백작이 아니다. 굳이 머리를 돌려 고민하지 않아도 가트가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는지는 눈에 보이듯 뻔했다. 가이칸에서 라기크 백작령을 따라 올 만한 영지는 없 다. 카드미엘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의 영지 는 비옥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이칸 제국의 수많은 제후들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라기크 백작령을 최고의 자 리에 올려놓는 이유였다. "기왕이면 대관식 전에 일을 마쳐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폐하. 말이 씨가 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분명 형님은 아버 님의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미명하에 군대를 움직일게 야." 가만히 있는 다면 그것은 가트가 아니라고 로렌은 생 각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야 로렌이 가장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 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물론 성격만 을 볼 때는 로렌이 호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 만 그것은 '적극적'이라는 단어가 조금 변형된 표현일 뿐이다. 라이너드 7세의 맏아들인 가트는 불같은 성격에 지는 것을 싫어하고 거기다가 금상첨화로 성격까지 급했다. 그는 자신을 제치고 그의 아버지가 로렌을 황태자로 책봉한 것에 강력하게 항의했던 인물이다. "두고 보게. 늦어도 내일 모레면, 형님의 소식이 들려 올 것이야." "……………." "히난에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나?" "네." "뭐 실제 상황이 되면 군의 지휘권은 자네에게 맡기겠 지만, 적어도 형님에게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도록."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엘러 부대의 진가를 볼 수 있을 게야." 로렌이 히난에게 전하라고 한 말은 다른 것이 아니었 다. 시안을 뒤쫓기 위해 파견했던 엘러부대원들을 전부 모 조리 황성으로 불러들여 만약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하 라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엔 다른 명령도 하나 포함되 어 있긴 했다. "이제 마지막 과제는 로열 나이트 들인가." 로렌은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군대의 조직력도 무기도 보급도 최상의 상태다. 그가 라이너드 7세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게되었을 때부터 그는 황제군의 육성에 주력했다. 단순한 식전부대가 아닌 실제 전투에 투입되었을 때 가장 효과적인 성과를 거두게 하기 위해 그가 만든 것 은 중장기병대대.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지만 마지막 하나가 아직 그의 앞에 장애물로 남아 있었다. "문제는 로열 나이트들이 내 말에 따라 수족처럼 움직 여줄 것인가 하는 것인데…." 그를 따르는 신흥 귀족출신의 기사들은 문제가 없다. 그들은 평화로운 문치주의 정치를 해왔던 선황제보다 는 야망을 불태우며 눈을 반짝이는 황태자를 더 마음 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열 나이트에는 젊은 기사들만이 있는 것이다. 아니다. 오랫동안 선황제의 칙명을 받아 봉직해온 강직한 기사 들이 훨씬 더 많다. "대관식을 마치고 나면 말이야. 카스핀." "……?" "대대적으로 로열 나이트 선발 대회같은 것을 열면 어 떨까? 신분. 지위 나이 성별을 막론하고 능력을 가진 자라면 어느 누구든 참가 할 수 있는 그런 대회말일 세." "좋은 의견이십니다. 폐하." "그래. 그건 일단 나중 일이고. 제일 먼저 라카들을 만나봐야겠군." 라카라는 것은 각기 2000명 정도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명칭이다. 그들은 모두 로열 가드들이다. "현재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나?" "지금 당장 이라고 말씀하시면 그리 많지는 않을 겁니 다." "뭐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숫자 도 장비도 조직도 아니야." 로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너드 7세가 서거한 이후로 하루 수면시간이 2시간 도 되지 않았지만 로렌의 얼굴에서 피곤함을 찾아보기 란 힘들었다. "중요한 것은 사기(士氣)지." "…………." "자아 그러면 고리타분한 늙은 기사들에게 사기를 불 어 넣으러 가볼까. 카스핀?"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4 ♧ "아무래도 철수를 한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에도 그래. 꽤나 끈질기게 들러 붙더니 만 요 이삼일은 깨끗하잖아." "다행입니다. 시안님께서 숨바꼭질에 좀 지치신 것 같았는데 이 상태라면 카르모니아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다." "그런데 시안은 뭐해?" "로운이 바람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면서 몇시 간째 씨름중이신데요." "어? 그건 자네 몫 아니었어?" "하하. 로운도 신관이 되기 전에는 최고의 기사 였습니다. 바람 술에 있어서는 저보다 훨씬 정교 하죠." "그래?" 이리야는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 면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바람술이나 물의 술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 다. 타고난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 는 데에는 결국 당사자의 성격이 많이 작용을 한 다. 단순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확실히 그들의 엘 을 사용하는데도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확실하고 명백한 주문을 쓰게 된다. 반대로 차분하고 세심 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좀더 정교하고 세심한 주 위가 필요한 복작한 주문을 쓰게 되기 마련인 것 이다. 똑같은 주문을 써도 그 운용에 있어서 차 이가 날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엔 확실히 그 덜떨어진 신관양반이 무식해 보이는데 알고 보면 꽤 자상하단 말이야. " "하하. 이리야씨. 로운이 그 말을 들으면 화를 낼겁니다." "뭘. 바빠서 내 말 들을 시간도 없을 텐데." "이미 들었어." "우악-----!" 뒤에서 들려오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 "그래. 그 덜떨어진 신관 양반한테서 치유술을 배우는 것은 누구 였더라?" "아. 아하하하하하. 이봐. 로운. 그러니까 말이 야 내말은…." 이리야는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렸다. "아아. 그렇지!! 카르모니아에 가면 내가 한턱 낼게. 응?" "어차피 그 돈이 그 돈인데 무슨." "이봐!! 무시하지마. 나도 비상금정도는 있다구. " 말을 흘린 이리야는 나름대로 그 뒷수습을 하느 라 땀을 뻘뻘 흘렸다. "원하는 것은 다 사줄게? 응? 신관양반. 화내지 말라구." "……………." "아!! 정정하지. 미메이라 최고의 엘리트 로열 나이트 로운님. 부디 고정하시고 미천한 물의 술 사 말좀 들어주쇼." "………정말이지 대꾸하기에도 아까워." "로운 시안님은?" "지쳐서 쓰러졌어." "어?" "뭔가 잘 안 되는 것 같아. 지난 번 사건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이전에는 좀 가닥을 잡는다 싶 었는데 이상한가봐. 일단 자신의 힘을 컨트롤 하 지 못하는 것 같기는 한데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 겠다." "흐음." "사실 그녀석 파장이 또 묘하게 바뀌어서 말이 야." "그건 그렇지만." 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의 카드미엘에서 의 폭주(?) 이후로 시안의 엘이 또 미묘하게 그 느낌이 달라진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주문을 쓰는데 그렇게 영향을 미칠 것이 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고민 되는군." "그래." "일단은 천천히 이유를 알아봐야지 뭐. 일단 중 간지대에 가면 상황이 또 틀리질 수도 있으니까. 짜증은 안내셔?" "그정도는 기본이지. 그녀석이 짜증 안내는 거 봤어. 요즘은 거의 매일 같이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는 모양이다." 로운이 혀를 찼다. 사실 다른 것 보다도 현재 제 일 문제가 되는 것은 시안의 상태였다. 시안 역시 자신이 짜증을 무지막지하게 내고 있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도 스스로 자제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안님께 가볼게." "그래." "시안님. 괜찮으십니까?" "…………." 방문을 두드리며 시안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시안님. 이제 곧 떠나야 합니다. 시안님?" 재차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 았다. 기엘은 잠시 고민을 했다. 이대로 짐을 싸서 바로 출발하면 오늘 내로 카르 모니아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것 은 어디까지나 지체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전제했 을 때의 일이다. "시안님?" 기엘이 문을 밀자 낡은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 순간 기엘은 말을 잃었다. 몸이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이 그의 몸을 덥쳤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바람처럼 그의 몸을 휙 -하고 통과해 지나갔다. 순간적인 충격에서 해방된 그는 로운들을 불렀 다. "로운!!! 이리야씨!!!!" 그의 급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왔 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다가온 그들 역시 방안의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 다. "이게 도대체…." 방안의 광경은 마치 기엘과 로운이 카드미엘에서 보았던 그때의 그 광경과 너무나 흡사했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세나케인의 형체가 시안의 몸 주위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그때와 틀린 것이 있다면 그때는 시안이 정신을 잃고 있었고 지금 은 시안이 눈을 뜨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하고 있다는 것과 세나케인의 형체가 상당히 작다는 것 뿐이었다. 세 사람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시안 이 그들의 기척을 느낀 것 같았다. 시안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은 원래의 시안의 얼굴이 주는 느낌과는 달리 어딘 가 모르게 낯선 느낌이었다. 시선이 돌아오고 시안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조금씩 떠올랐다. 시안은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상태로 세나케인의 보호를 받으며 순수한 엘의 바람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호로스의…." 시안의 입이 벌어졌다. "불꽃의 주인이 바뀌었다." "-----!" "새로운 후계자가 불꽃을 계승 받았다." 그 말을 끝으로 시안의 눈이 감겼다. 다음 순간 공중에 떠있던 시안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 싶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시안!" 로운이 몸을 날려 떨어지는 시안의 몸을 받아냈 다. "시안님!" "이게 도대체 무슨 사건이야?" 로운은 받아든 시안의 몸을 추슬러 침대 위에 내 려놓았다. 다행히도 시안은 얼마가지 않아 정신 을 차렸다. "시안님?" "………." 잠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던 시안은 눈을 껌벅이면서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안의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었 다. 벌떡-----하고 시안이 몸을 일으켰다. "…………."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지?" 세 사람이 동시에 질문을 했지만 시안에게는 들 리지 않는 모양이다. 시안은 수차례 눈을 깜박이 더니 갑자기 고개를 양 옆으로 힘차게 흔들었다. "빌어먹을---- 세나케인!!!!!" 시안은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러더니 자신을 걱 정스럽게 바라보는 기엘들을 젖히고 그대로 일어 나서 밖으로 달려나갔다. "시안님!! 어디 가십니까!!!" "젠장!! 빌어먹을!!!! 세나케인!! 도대체 이게 뭐야!!!!" 밖으로 뛰어 나간 시안은 공중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머물고 있던 마을이 워낙 작은 탓에 주위 에 사람들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그따위 것 보여주지 말란 말이야!!!"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시안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시안은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도대체 그건 뭐냐구!!" 이전과는 달리 생생하게 의식이 살아 있던 시안 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시안은 조금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로운에게 주문을 배우다가 잘 되지 않아서 짜증 을 부리고는 지쳐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었다. 그리고 혼자서 마구 화풀이를 하는데 갑자기 몸 이 이상해졌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어떤 이상한 힘이 그 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세나케인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그를 보호하듯 주위를 맴돌았 다.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지더니 다음 순간 불꽃의 나라. 호로스의 레나텐 수장의 모습의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시안에게 보여지는 광경은 실제의 상황이라기 보다는 어떤 이미지 같은 흐릿한 광경이었다. 호로스의 레나텐 수장과 그의 후계자인 은 화 염술사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졌 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은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불꽃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이상해. 절대 이상해!!"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그런 느낌. 그것은 신기함보다는 거대한 공포가 되어 시안을 덥쳤다. "젠장!!!!! 나는 나란 말이야!!!" 시안을 걱정하며 뒤따라온 남자들은 시안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있는 것을 뒤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을 지배하지 말아 세나케인!!!!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주먹을 쥐고 아무도 없는 공중을 향해 휘두른다. "나는 내 의지에 따라서 움직일 거야!!! 그런 것 따위 나한테 보여주지 말란 말이야!!! 나는 그런 것 보고 싶지 않아!!!" 레나켄 수장과 불꽃의 후계자가 사라지는 순간, 그 마지막에 보인 광경이 자꾸만 시안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런 것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시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호로스의 수장 레나 텐이 천천히, 아주 서서히 불꽃의 엘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5 ♧ "그래. 형님은 어떻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해 할 일은 아니네. 카스핀." 로렌은 마시고 있던 차가 갑자기 쓰게 느껴지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기분좋게 일어나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겠다는 그의 생 각은 이른 아침부터 전해져온 비보로 산산조각이 나버 렸다. "나는 불효자식이 되는 군. 아버님의 마지막 유지도 지켜드리지 못했으니…." "폐하." 로렌은 내려놓았던 찻잔을 몇 번이나 돌려가며 만지작 거렸다. "라기크 백작의 뒤처리는 자네에게 맡기겠네 카스핀." 손안에 있는 찻잔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것과 동시에 순간 울컥했던 감정이 차차 히 가라앉았다. 로렌이 예상했던 그대로 그의 형인 일황자 가트는 자 신의 장인 라기크 공작과 함께 황위의 정통성을 주장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반란은 정확하게 삼일만에 실패로 돌아갔 다. 그것은 이미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짜놓았던 로렌의 계 획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실현된 것이었다. 계획에 서 어긋난 것이 있다면 생포될 줄 알았던 가트가 반란 이 실패했다는 것을 닫자 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 다는 사실이었다. 가트가 자살을 하자 라기트 백작은 곧 항복의 뜻을 비 추어 왔다. 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빨리 카드미엘에 모여있던 가이 칸 제국의 수많은 제후들에게 전해 졌다. 가트의 패배는 사실상 단순한 패배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제위를 받게될 로렌이 그가 지배하게 될 제 후들에게 그의 능력을 얼마나 확고하게 인식시켰던가 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황제 대리로 실권을 받은지 이제 갓 일년이 되었을 뿐 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제후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가이칸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혀왔던 라 기크의 군대를 인원도 얼마 되지 않는 황제군만으로 효과적으로 물리쳤던 것이다. 아직 즉위식도 치루지 않은 예비 황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제국의 로열 나이트들의 신임을 거의 완벽하게 받고 있었다. 로열 나이트들의 신임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제국의 경우 로열 나이트의 반수 이상이 여타 크 고 작은 영지를 가진 영주들 자신이거나 그들의 상속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말이 로열 나이트이지 실제적으로는 이미 제국의 반 이상을 그의 손아귀 아래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라기크 백작과 일황 자 가트의 반란이 실폐로 돌아간 것은 나름대로는 여 러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일단 제국 1위를 달리던 라기크 백작령이 황제령으로 복속되는 것은 시간 문제. 다시 말하면 로렌은 지금까 지의 어떤 가이칸 제국 황제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일황자였던 가트의 죽음은 나머지 그의 형 제들을 일깨우는 강력한 자극제가 된다. 혹여 그들을 내세워 로렌이 황위에 즉위하는 것을 반대하려 했던 세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 사건을 통해서 그런 야심 은 저 강건너 멀리 떨쳐버릴 수밖에 없다. 그 이외의 것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카스핀." "네. 폐하." "처벌은 라기크 백작에게만 돌렸으면 하네. 적어도 형 님만큼은…." "………." "형님마저 반란군으로 몰아버리면 아버님께서 좋아하 시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라기크 백작령에는 아직 몇몇 식솔들이 남아 있습니다." "적당히 처리하자구. 아직 어린 조카를 사지로 내모는 냉혹한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아. 라기크 백작령을 몰 수하게 되더라도 작은 영지를 따로 떼서 형님의 가족 들이 머물도록 해주게. 뭐 적당한 작위를 내리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귀족들의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 "혈육의 정을 나 몰라라 하는 비정한 황제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나?" 딱떨어지는 로렌의 말. 하지만 카스핀은 속으로 남몰 래 한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방금 한 로렌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길 그는 바랬다. "…………." "가트 형님의 가족들에게는 특별히 신경쓰도록. 힘들 겠지만 부탁하네."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로렌은, 카스핀 리우 미타 남작이 아는한 그의 군주인 로렌은 그렇게 자상한 남자가 아니다. 한없이 냉정하 고 또 냉정하고 냉정한 남자인 것이다. 그는 아마도 가트가 그의 눈앞에서 목숨을 끊는다 하더라도 절대 손하나 까닥이지 않았을 것이다. 무자비하지는 않지만 냉혹한 그의 군주는 길고 모양좋 게 뻗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영지는 대충 페이요트 산맥의 아랫자락 정도면 딱 좋겠군." 가이칸 제국 가말 35년. 35년간 평화롭게 지속되던 가이칸 제국의 평화는 가말 이라는 연호로 황제의 위에 등극했던 라이너드 7세의 죽음과 함께 그 끝을 맺었다. 라이너드 7세의 황자들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고 가장 진취적이라 평가받던 삼황자 로렌은 정통계승자임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형이자 일황자였던 가 트황자의 반란을 단 3일만에 진압하고, 진정한 가이칸 제국의 황제로써 새롭게 아슈레이 대륙의 역사에 등장 했다. 가이칸 제국의 어떤 황제보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수년 간 아슈레이 대륙을 전란으로 몰고 갔던 로렌, 아니 라이너드 8세의 길고 긴 역사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 고 있었다. ♧ "……로써 폐하의 뜻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이른 아침. 황제의 뜻에 따라 소집된 귀족원의 원로 회. 일반적인 어전회의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분위기는 어전회의 이상으로 냉랭했다. "황비의 자리는 결코 오래 비워서는 아니 될 것으로 아룁니다." 미타 남작의 말이 끝나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귀족 들의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지금 그들이 들은 말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충 격적인 것이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입조심하시오. 어느 안전이라고." "…………." 날카로운 미타 남작의 말에 입을 열었던 늙은 제후가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놀랍기도 하겠지. 흐응--.' 그런 광경을 나름대로 즐기며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바로 이틀전 라이너드 7세의 국장을 완벽하게 치르고 난 후 즉위식만 올리지 않았지 사실상의 가이칸 제국 의 황제로 등극한 라이너드 8세. 즉 로렌이었다. 가이칸 제국의 역사상 두번째로 황비의 자리를 공석으 로 한 채 등극하는 두 번째 황제가 될 그가 처음으로 소집한-사실 따지고 보면 처음은 아니다.-귀족 원로회 앞에서 내놓은 의견이자 명령은 나름대로 상당히 과격 한 안건이었다. 국장에서부터 반란 진압, 그리고 기타 자질구레한 일 까지 눈이 돌아갈 만큼 바쁜 일정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처리해온 라이너드 8세의 행동은 사실적으로 여 러 제후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젊은 오기로밖에 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을 오기로 밖에 치부할 수 없는 마음도 이해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 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새로운 황제, 라이너드 8세는 무 서운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훤칠한 키의 잘생긴 미남자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수만가지 의 생각들과 계획들이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국 장에 참석하겠다는 명목하에 반란을 일으킨 가트를 눈 깜짝사이에 진압한 것도, 그들의 가족에게 특령을 내 려 사면하는 척 하면서 먼 오지로 유배를 보내버린 것 이나 황제로 등극한지 하루도 안되어 내궁의 정리를 거의 완벽하게 해치우는 것 모두가 귀족들에게 있어서 라이너드 8세의 실세를 눈앞에 확인시켜준 증거들이었 다. 물론 이런 사실의 물밑에는 라이너드 7세의 생전에 이 미 계획적으로 주변정리를 시작해왔던 로렌의 영악하 기까지한 두뇌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달랐다. 로렌 아니 라이너드 8세가 공식적으로 내린 첫 명령은 오랫동안 제국의 불문율처럼 내려온 신국 경원의 법칙 을 깨고 비어있는 황비의 자리에 제국의 어떤 귀족의 딸 대신에 신국인을 맞이하겠다는 것이다. 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말이 되지 않는 이 야기 인 것이다. "폐하 신 로폐이즈. 무엄하다 하실지 모르오나 한 말 씀 아뢰옵니다." "무엄하다고 생각되면 입을 열지 마십시오." "………!!!" 웅성거리던 좌중의 위로 충격이 달렸다. 미타 남작은 남몰래 한 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그의 군주는 조금 짜증이 나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신 하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저렇게 단칼로 잘라버릴 정 도의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폐하. 때로는 쓴 약이 몸에 좋을 때가 있습니다." 미타 남작은 로렌이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독재자 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 하들의 말이리 저리 뒤흔들리는 줏대없는 황제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폐하. 신국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계시옵니까?" 미타 남작이 중재를 하고 나서자 가까스로 로페이즈가 말을 꺼냈다. "개국이래 신국인을 황비로 맞이한 전례는 없었사옵니 다." "전례가 없으면 어떻소? 어차피 전례라는 것도 누군가 시도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생긱것이 아닙니까?" "전례가 없다는 사실에는 그럴 만한 보편 타당한 이유 가 있는 법입니다. 폐하." "그렇다면 전례가 없는 일을 제가 원하는 데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소?" 짜증이 나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미타 남작의 짐작 은 그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역시 전례를 따지고 드는 군. 답답해.' 전례를 따르면 국장이 있은 후 3개월 후에나 즉위식이 열릴 수 있다. 그말은 다시 해석하면 현재 옥좌에 앉 아있는 로렌은 황제이면서 동시에 아직은 황제가 아닌 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폐하라 불리우지만 아직 은 당신은 정식 황제가 아니라는 그런 느낌을 로렌은 받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해도 실제 그런 입장에 처해보니 이만 저만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카리스마로 로열 나이트의 신임을 얻는데는 성 공했지만 확실하게 국정을 휘어잡기 위해서는 능구렁 이 같은 대소 신료들이외에도 별다른 직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곳곳에 그들의 세력을 펼치고 있는 이 귀족 원로회까지 신경을 써야한다. "전통이나 전례를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그렇게 해야할 필요성이 있으니 그대들에게 이렇게 먼 저 의견을 묻는 것이니 심사숙고 해주기 바라오. 미타 남작. 예의 것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네." "네. 폐하." 미타 남작은 로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짓을 해서 누군가를 그들의 앞에 불러 들었다. 조용하게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온 사람을 보자마자 몇 몇 사람은 눈에 띄게 불편함을 표시했다. "이번에 새롭게 결성된 제 14 라카드의 라카 히난 코 게스입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가 히끗 히끗한 머리카락들 사이 에서 불타듯이 반짝였다. "아직 규모는 작은 라카드입니다만 이미 그 활약상을 전해들은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 겠지만 이 라카드는…." 잠시 시간을 두고 미타 남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 14 라카드는 인원은 많지 않지만 전원이 엘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엘러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이들을 활용한다면 오랜 숙 원중 하나인 폐이요트 산맥 서쪽지대. 즉 예전의 폴리 카르까지의 국경선을 회복하는 것도 단순한 시간문제 라 사료됩니다." 순간 충격의 물결이 그들을 덥쳤다. 로렌이 호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익히들 알고 있었지만 아직 즉위식도 치루지 않은 그가 이렇 게 강대한 야망을 가지고 일찍부터 그것을 펼치리라고 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겨우 백명도 되지 않는 라카드의 존재가 이럴진대 저 신국의 그 무수한 엘러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웅성거리는 소리가 삽시간에 줄어들고 그위에는 침묵 만이 감돌았다. "신국인을 황비로 맞이하는 것이 나름대로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소리오." 그 위에 로렌의 목소리가 쐐기와 같이 박혀들어갔다. "그래도 그렇지 신국인을 황비로 맞이하시겠다니 뜻은 이해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들군." "폐하께서도 오랜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하시고 결정하 신 일입니다. 폐하께서 일찍부터 엘러에 지대한 관심 을 가지고 계셨던 것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건 나도 알겠네." 제국 수상인 카레아 리우 메헤른은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폐하께서는 너무 앞서가시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항상 그러시는 분 아니셨습니까?" 미타 남작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른 아침부터 머리가 굳은 여러 원로 귀족들을 앞에 놓고 로렌이 던진 폭탄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 다. 로렌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새로운 외척으로 등장 하고자 기대했던 귀족들에게는 로렌의 의지는 폭탄정 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폭탄을 맞았다고 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차라리 황비가 어느 귀족의 딸도 아닌 신국인이 되는 것을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할 권력이라면 남도 가지지 못 하게 하겠다는 심보였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어딜 생각하시는 건가?" "일단은 국경선을 마주대고 있는 나라가 유리하겠지 요." "미메이라와 바라스인가." "호로스까지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하기사 나유는 너무 멀고, 그리고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니 힘이 들겠구만." 사람들이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도 일 은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렇게 된 바에 야 3개월 후에 열릴 즉위식 때 까지 어떻게 해서든 황 비를 간택해보자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즉위식전에 혼인을 해야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저 그때까지 약조를 받아두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이 다. 국가와 국가간의 그것도 가이칸 제국 황제의 결혼 식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 닌 것이다. "그들이 제국으로 공주들을 시집보내려 할지 그것도 문제가 되겠구만." "볼모로 보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 수장의 딸까지는 힘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귀족들의 영양은 문 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귀족 영양이라니. 국혼이 아닌가." "신국의 수장은 대를 이어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 니다. 왕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물 론 그들의 능력이라는 것이 혈통과 상당히 밀접한 관 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대로 수장을 배출한 집안 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상황이니 그들중 가장 세력 이 강한 귀족 또는 수장의 딸이 황녀와 다름 없는 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군." "폐하께서는 되도록 빨리 이 일이 진행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메헤른은 굳은 얼굴을 한 채 미타 남작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아마도 미타 남작은 머지않아 자 신을 이어 제국의 수상이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남작이라는 신분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야 새롭게 작위를 내리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 위를 새로 받는 것 정도야 이전에 전례가 얼마든지 있 던 일이었다. '나도 확실히 나이가 들었군.' 메헤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젊고 혈기에 가득찬 황제 를 보필하기엔 아무래도 기력이 딸리는 모양이다.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미메이라를 마음에 두시겠군요.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메헤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미타 남작은 알았다 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라는 것은 단순한 소문일 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타 남작은 로렌이 아직도 시안 에게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입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 "좀더 돌더라도 국경선을 넘어 리사다임까지 가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같다." "아무래도. 국경선을 넘는 것도 큰일이니…" 카드미엘에서 시작된 라이너드 8세가 일으킨 변화의 바람은 시안일행이 머물고 있는 카르모니아까지 불어 왔다. 새로운 황제가 이전과는 참 많이 틀린 사람이라는 것 은 길거리를 지나가는 어린아이도 알정도로 가이칸 제 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변화의 바람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렌이 보낸 추격대를 견디지 못한 일행은 가이칸 제 국을 벗어나 바로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산악국가 나 메스로 가려고 했었으나 그 계획을 수정했다. 갑작스런 전 황제의 서거는 다행스럽게도 시안 일행의 숨통을 트이게 한 것이다. "그놈의 지긋 지긋하던 녀석들이 안 따라붙으니 정말 시원- 하구만. 참나 때맞추어서 라이너드 7세가 죽을 줄 누가 알았냐구." "세상일은 사람의 생각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나 저 나 시안님이 걱정입니다." 시안은 기엘의 분위기 메이커라도 되는 모양이다. 시 안이 팔팔하면 기엘도 팔팔해지고, 시안이 우울해 하 면 기엘도 우울해 한다. 현재 기엘의 얼굴은 혈색이 나빠보이고 표정도 상당히 어두운 상태. 다시 말하자면 시안의 얼굴 상태가 따악 - 기엘의 얼굴 상태라는 소리다. "한가지 근심이 가면 또 다른 근심이 다가오는 법이 지." "좀 더 먹어." "싫어." 마치 토라진 어린 아이처럼. 시안은 로운이 내미는 접 시를 밀어냈다. "후우- 언제는 안 준다고 아귀처럼 난리를 떨더니만 왜 이러는 거야?" "상관하지마. 내 문제니까." "…………." 자신의 동생쯤 된다면 이럴 때 뒤통수라도 한 대 퍼억 쥐어패고 싶은 심정이다. "알았다. 여하튼 짐이나 챙겨. 곧 떠난다." "준비는 다 되었어." "그래. 그만 하도록 하지." 로운은 뭔가 더 잔소리를 하려다 말고 포기해 버렸다. 이런 상태의 시안에게 뭐라고 해보았자 하나도 들어먹 히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로운이 자신이 남긴 음식 접시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 던 시안은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후우-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케인." 그는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케인. 듣고 있어?" 「듣고 있다.」 "…………."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내 생각 읽을 수 있잖아."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그걸 원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 아슈레이 중간지대에 가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 는 거야?" 「………….」 시안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굳이 고민하고 알아보려 발악할 필요 도 없다. 시안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아닌 것 같아. 아니. 이건 내가 아니야." 「너는 바람의 계승자다.」 "그래. 바람의 계승자이고, 미메이라의 시안인 거지. 박경하가 아니야." 어디에도 박경하라는 이름은 남아있지 않은 기분이었 다. 그것이 시안에게 너무나 커다란 공포로 다가오는 것이다. 세나케인이 시안의 몸 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화하여 시안의 앞에 섰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인가?" "부인? 난 그렇게 어려운 단어는 몰라."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너의 마 음 전체가 암울하다." 시안은 세나케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널 부인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글세?" "사라지는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넌 바람의 계승자가 되 었고 바람은 이미 흐르기 시작했다. 결정된 것이 바뀌 는 일은 없어." "내가 뭐라고 해도?" "그래." "지금도 이런데 중간지대로 들어가서 그 풍환인지 뭔 지를 받게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알려줘 세나케인." "별로 달라 질 것은 없어. 단지 너는 완전한 바람의 계승자로 각성하게 될 뿐이다." "각성?" "그래. 각성." 세나케인은 시안에게 또 한가지 다른 일이 일어날 지 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시안의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 다. 사실 시안이 느끼는 공포는 세나케인이 느끼고 있 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는 시안이 얼마 전 불꽃이 새로운 계승자에게 전해 지는 것을 감지해내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알고 있던 아주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신들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접어들 때 있었던 아 주 오래된 기억을 말이다. "각성이란 것을 하게 되면 나는 박경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직 겪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어 시안." "나는 겪어본 일이 아니지만 너는? 바람의 의지라고 했지? 그러는 너는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 거야?" "…………."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야!! 대답을 해봐!! 어떤 경 험을 한 거지? 그 전대 수장이었다는 그 사람도 이랬 던 거야?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을 거 아니 야!!" "그는 나를 각성시키지 못했다. 그러니 너와는 다를 수 밖에 없지." "어째서 나냐구!! 왜 각성을 한 거야 세나케인!!" "나도 알 수 없다. 이계인이 바람의 계승자가 되었던 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나를 각성시킬 수 있었던 자 는 없었으니까." "젠장!! 그만둬!!!" 시안은 벌컥 화를 내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머릿속이 혼란해진다. "사라져버려!!" 시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나케인의 모습은 정말 로 사라져 버렸다. 적막감이 시안의 몸을 감쌌다. 「모든 것은 네가 유린의 땅에 도착하면, 그곳에 도착 하여 새로운 진정한 바람의 계승자로 인정받게 되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을, 바람의 계승자로 써 알아야할, 그리고 바람의 계승자에게 전해져 내려 온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신경끝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세나케인의 목소리. 그것 은 몸을 울리고 머릿속까지 파고 들었다. 그 감각에 시안은 몸서리를 쳤다. "시끄러워. 아무말도 하지마 케인." 처음으로 시안은 원래의 세계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 어졌다. 그곳으로 돌아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하 고, 시험을 보고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아버지와 함께 산을 오르고, 그렇게 평온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 다. ----------------------------------------------------계속 11장...마쳤습니다. --;; 헥헥 지친다.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6 12장 <외전> 녹색의 검 카나린 신들은 인간에게 의지를 가진 힘을 남겼다. 그것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희망이 되었다. 하지만 신 들은 그 거대한 힘과 함께 경고의 말을 남겼다. 힘을 계승할 인간들에게… 「의지를 가진 힘을 다스리는 것은 일족 중 가장 뛰어 난 자에게만 허락될 것이니 그대들은 그 힘을 지속하 고 유지시키되 그 힘에 귀속되지 말지니라.」 - 미메이라의 오래된 구전에서… "카나린--!!" "히즈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아. 아버님께서 몸이 조금 안 좋으셔서 약초라도 구해볼까 해서 나왔어." "카나린." 히즈키는 조금 마음이 상했는지 정색을 하고 카나린을 불렀다. "그런 일은 미리미리 내게 말을 해주면 좋잖아." "하지만, 미안하니까…." 그리 미인은 아니지만 단아한 미모를 가진 카나린은 올해 셰샨(백합의 달-5월)의 달이 되면 18살이 된다. 그리고 폐리(열매의 달-9월)의 달이 되면 그녀의 눈 앞에 서 있는 히즈키의 아내가 되기로 약속을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치유술 만큼은 너에게 뒤지지 않는 다구." "그래도 히즈키는 치유술을 쓰고 나면, 훈련가는 것 힘들어 하니까…."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장차 내 장인 어른이 될 분인데 내가 치료를 해드려야지 누구한테 맡겨!" 히즈키는 화가 난 듯 카나린의 팔을 잡아당겼다. "히즈키!! 아파!! 이거 좀 놓고가!!" 카나린이 뒤에서 호소했지만 히즈키는 영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히즈키∼." 때는 아직 아슈레이가 신들의 땅이라 불러던 시대에서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은 평화로운 시대였다. 아슈레이 대륙에서도 험준하기로 소문난 산맥에 둘러 쌓여 있던 중간 지대에 모여 살던 인간들이 차차로 넓 은 땅으로 이주를 하고 미메이라, 바라스, 호로스, 그 리고 나유의 계승자들을 중심으로 4개의 신국이 간신 히 기틀을 잡아나가던 때. 사람들은 이제 조금씩 신들이 떠난 땅에서 희망을 찾 아 아슈레이의 넓고 넓은 대지로 뻗어나갔고 4개의 신 국이외에도 여기저기 작은 소국들이 세워지기 시작했 다. 바야흐로 인간의 시대가 아슈레이 대륙의 새로운 역사 로 기억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하지만 아직 4개의 신국만큼 기틀이 잡혀진 나라는 없 었고 나머지는 단순한 부족국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아버님!! 저 왔습니다." "히즈키!! 아파!!" "아프다면서요." 활기차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에 누워 있던 남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히즈키. 여전히 소란스럽구나." "아버지. 괜찮으세요?" 카나린의 아버지는 올해 60이 넘은 남자로 젊었을 때 는 미메이라 신전의 성기사로 봉직했던 강직한 인물이 었다. 하지만 성기사라고 하여 세월의 힘을 이길 방법이 따 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늙고 약해져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딸에 의지한 채 하루 하루 힘겹게 생명을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인간이 늙으면 대자연의 엘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쓸데없이 신이 주신 축복을 연장하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아버님 적어도 카나린이 화려한 셰샨의 신부 가 되시는 것은 보셔야죠. 예쁘고 귀여운 손자들도 보 시구요." "말은 잘하는 구나. 히즈키." "하하하. 저야. 뭐 다른 재주가 없어서요." 히즈키는 호탕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은 왔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제 말씀을 좀 들어 주셔야겠습니다." 씨익-웃으면서 히즈키가 침대로 다가가자 카나린 역시 그의 약혼자의 역성을 들었다. "그래요 아버지. 건강하셔야 해요. 저는 아버님이 오 래오래 살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하나밖에 없는 딸의 애원에는 질 수밖에 없는 듯 결국 그는 두손을 들었다. "자아 그럼." 건강한 몸에서 느껴지는 활발하고 깨끗한 엘의 파장. 히즈키의 엘이 주문과 함께 천천히 늙은 기사의 몸으 로 흘러 들어갔다. "왠지 오늘은 아버님 생각이 나." "응?" "우리 아버님도 카나린 네 아버님처럼 기사셨잖아. 뭐 어쩌다보니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지만 가끔은 네 아버 님이 우리 아버님과 겹쳐지는 일이 종종 있어." "히즈키." "우리 혼인하면 꼭 아버님 같이 모시고 살자. 뭐 내 동생들이 좀 소란스럽게 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기왕 이면 시끌 시끌하게 함께 살아가면 좋잖아. 내가 성기 사가 되면 생활하는데도 문제가 없을 테고."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이는 히즈키를 보면서 카나린은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히즈키가 하는 말이 꼭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히즈키 역시 퇴직한 성기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기사가 되고 싶어했다. 그 리고 주위 사람들 역시 히즈키 정도의 능력이라면 주 신전의 성기사가 되고도 남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려주 고 있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히즈키랑 같이 둘이서 함께 기사가 되었을텐데." "무슨 소리야. 카나린. 네가 남자면 어떻게 해. 아앗- -!!"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하는 히 즈키를 보면서 카나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 설마 카나린 나랑 혼인하는게 싫은 거야?" "하하하. 아니야. 히즈키. 난 세상에서 히즈키를 제일 사랑하는 걸." 환하게 웃어보이는 아름다운 카나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히즈키역시 활짝 웃어보였다. 카나린만 옆에 있어준다면 세상에서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카나린의 어깨를 안고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 를 했다. "오래 오래 함께 살아가자. 카나린. 아버님도 모시고, 시끄러운 내 말썽쟁이 동생들과 널 닮은 딸하고 나를 닮은 아들을 나서 말이야." "응…." 수줍게 기대오는 카나린이 어깨는 갸날프기만 하다. 히즈키는 그런 카나린의 어깨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이 갸날픈 어깨를 지켜주기 위해서 그는 무엇이든 하 겠다고 다짐했다. 카나린이 웃는 모습을 평생, 그의 목숨을 걸고 지켜주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 다. ♧ 히즈키는 늦은 오후, 산중턱 어귀를 돌아오며 꺾은 야 생화를 팔에 한아름 안고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일을 하고, 그리고 짬을 내어 훈련소까지 다 녀오기는 했지만 이제부터 카나린을 만나러 갈 생각하 면 피곤이 다 가셨다. 기분이 좋은 탓인지 절로 휘파람이 다 났다. '카나린한테 이웃마을 축제에 놀러가 보자고 할까?' 히즈키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말고 씨익-하고 혼자 웃어버렸다. 왠지 카나린 생각만 해도 너무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 래도 자신은 조금은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하 고 그는 머리를 긁었다. "뭐 바보가 좀 되면 어떻겠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 히즈키는 어둠이 아직 어슴프 레하게 내려앉는 시간에 무사히 카나린의 집에 도착했 다. 카나린의 곁에, 그리고 카나린의 집에서는 항상 향긋 한 꽃냄새 비슷한 것이 났다. 그는 들고 있던 야생화 다발을 다시 한번 고쳐들고는 문을 두들겼다. "카나린. 나야. 히즈키." 똑똑하고 문을 두들겼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 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자신이 뜰안에 들어서기가 무 섭게 먼저 문을 열며 반겨주던 카나린인데 오늘은 뭔 가 좀 이상했다. "카나린!!" 혹시 집을 비웠다 하더라도 집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있어야 했다. "아버님이 계시면 대답이라도 하실텐데…." 순간 카나린의 아버지에 생각이 미친 히즈키는 설마하 고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카나린!! 나 히즈키야!! 들어간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안에서는 분명 인기척이 느껴졌 다. "아버님 안 계세요?" 그는 천천히 카나린의 아버지가 누워 있는 침실의 문 을 열었다. "아버님 저 히즈키입니……." 그는 문을 열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섰다. 그가 들고 있던 한아름이나 되는 꽃들이 우수수 그의 발밑에 떨어졌다. "카나린………." 어두운 침실에는 죽음의 냄새가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 다. 히즈키의 목소리를 들은 카나린은 눈물로 가득한 얼굴 을 천천히 들고 히즈키를 바라보았다. "히즈키… 아버님이 아버님이……. 흐흑…." "카나린!!" 히즈키의 품에 카나린이 안겨 들었다. 작은 어깨가 격렬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님이…." "……………." 필시 오후 내내 울었음이 틀림없을텐데도 카나란은 히 즈키의 품에 안기자마자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흑…." "카나린…." 히즈키는 작은 카나린의 어깨를 꼬옥 끌어 안았다. 입에서는 어떤 위로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카나린을, 그의 하나밖에 없는 가 장 사랑스러운 사람을 꼭 안아주는 것 뿐이었다. "그만 울어. 카나린." 이제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끊임없이 투명한 눈물 을 흘리고 있는 카나린에게 히즈키가 말했다. "네가 너무 울면 아버님이 더 슬퍼하실거야." 그녀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지만 그 녀의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또 흘러나왔다. 그녀는 물끄러미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꽃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바라보았 다, 마을의 풍습대로 그녀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높 은, 그리고 가장 바람이 잘 불어오는 언덕에 뉘어져 있었다. 꽃들에 둘러쌓인 그녀의 아버지는 벌써 반쯤 투명해져 있었다. "봐. 아주 평온하게 돌아가신 거야. 사람들이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말이야." "흑…." 순간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카나린은 손을 들어 막았 다. 미메이라인들은 죽으면 태어날 때 받은 신의 축복을 모두 대 자연으로 돌려주게 된다. 행복하고 평온하게 그 순간을 맞이한 사람일수록 저렇 게 투명하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엘로 변화해간다. 고통스럽게 갑작스런 사고로 죽거나, 평온하게 죽지 못하면 죽는 그 순간 바로 엘로 돌아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저렇게 사람들의 마지막 인사를 받을 수 있다 는 것은 충실하게 행복한 삶을 살고 평온하게 삶을 마 쳤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카나린 그만 울어." 하루종일 그녀의 아버지의 옆자리를 지킨 카나린과 히 즈키는 어둑 어둑하게 어둠이 내려오기 시작했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춥지 않니?" 고개를 살래 살래 흔드는 카나린. 히즈키는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어깨 위에 자신의 겉 옷을 걸쳐주었다. 그때 뒤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누군가 카나린의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뒤늦 게 온 것인가 해서 히즈키는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그 들에게 인사를 했다. "친구분들이신…어?" 인사를 하다가 말고 히즈키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만 말을 끝맺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마 지막 인사를 하러온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흰색의 군장을 갖춘 신전의 성기사들과 분명 높은 지 위에 있는 것이 분명한 신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기 때 문이다. 히즈키가 말을 하다 말고 멍해있자 카나린이 무슨 일 인가 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30여명이 넘는 신관들과 성기사들의 일행이 일제 히 그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모시러 왔습니다. 새로운 바람의 계승자여…." ♧ ---------------------------------계속 갑작스럽습니다만.... 예정된 외전입니다. 녹색의 검 카나린에 얽힌 이야기......랄까요.. ^^;; (제목이 너무 확연하군..)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7 ♧ "마…말도 안 돼. 어떻게 카나린이…." 히즈키는 기가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엄하오. 어찌 바람의 계승자가 되실 분에게…." 기사 하나가 히즈키의 언행을 지적하려는데 대신관이 라 자신의 신분을 밝힌 사람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만류 했다. "조용히 하도록 하게. 오랜 친구분이니 그정도의 사정 은 봐드려도 좋지 않은가." "하지만 대신관님." "나는 친구가 아니야!! 카나린의 약혼자라구!!" 평소의 히즈키 였다면 나름대로 어마어마한 신분을 가 진 사람들앞에서 이렇게나 되바라진 행동을 하지는 않 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진정을 하려고 해 도 진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진정을 해주십 시오." "히즈키. 그만해." "뭘 그만하긴 그만하라는 거야 카나린!! 그럼 넌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가겠다는거야? 난 반대야!! 절대로!!" "히즈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째서 카나린이 바람의 계승자 라는 거죠? 말도 안 돼!!" "큐에란 수장님께서 카나린님을 지목 하셨습니다. 새 로운 바람의 계승자로써." "그러니까 근거가 뭐냐구요!! 카나린은 치유술 하나도 제대로 못합니다." "때로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지요. " 밤을 꼬박 새어가며 히즈키는 대신관의 앞에서 항의를 하고 있었다. 아니 말이 항의지 사실은 거의 난동을 피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카나린의 아버지가 완전히 엘로 돌아가시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카나린은 아직도 울먹이고 있다구 요. 대신관님이시라면서 이렇게 실례를 해도 되는겁니 까?" "나름대로는 긴급한 상황입니다. 카나린님?" 길길이 날뛰기만 하는 히즈키를 상대하는데 지쳤는지 대신관이 카나린을 불렀다. 카나린은 히즈키의 뒤에 숨어 있다가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저희는 카나린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부디 저희와 함 께 키리엔으로 가주십시오." "…………." "온 미메이라의 신민들이 새로운 바람의 계승자를 고 대해왔습니다. 카나린님." "안 돼!! 절대 안 돼!!!" "계승자는 우리들 미천한 인간의 뜻으로 결정되는 것 이 아니오. 모든 것은 우리의 신 미메이라님의 뜻입니 다." "히즈키-이." 울먹이는 카나린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괜찮아 카나린. 절대로 널 보내지 않겠어." 등 뒤로 손을 뻗어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 그 손에서 부터 카나린의 불안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돌아가 주십시오. 카나린은 가지 않습니다." 단호한 어조였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반응하지 않았 다. 팽팽한 대치가 계속 이어졌다. 데려가겠다는 사람들과 보내지 않겠다는 사람이 서로 를 노려보며 밤을 지새우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대신관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조용하게 처리를 하고 싶었는데." "……대신관님!!" 늙은 대신관의 손이 천천히 그의 긴 옷자락 사이에서 나타났다. "카나린님 이런 방법을 택한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 니다." 눈에 보일락 말락 하는 작은 움직임. 그 위로 대신관 의 낮은 주문소리가 이어졌다. 다음 순간, 카나린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리고 히즈 키의 몸 역시 그대로 힘을 잃고 쓰려졌다. "형. 일어나." "혀어엉." 어린 동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히즈키는 묵묵무 답이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잡은 작은 손을 내뿌리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젠장. 젠장 젠자-----앙!!!' 이불끝을 잡은 손가락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힘줄이 새햐얗게 떠오를 때까지 그는 주먹을 쥐고 있 었다. '카나린이 새로운 수장님이 되신다며?' '이야. 우리 마을에서 수장님이 나올줄 몰랐어.' '하기사 카나린은 미즈베님의 딸이었으니까 그리 놀랄 일만도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수장님한테 아드님이 하나 있지 않았 나? 어째서 카나린이 선택된건지 신기하기만 하구만.' '뭐 그 아드님이 카나린과 혼인을 하게 된다지 않나. 세상일은 모르는 거야.' '어이. 이보게 말 조심해. 이제는 카나린 수장님이 아 니신가.' 눈을 감고 있어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 았다. 아니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눈초리가, 동정과 연민 이 뒤섞인 눈들이 그를 책망하고 또 책망하고 있었다. '카나린….' 카나린은 떠나버렸다. 끌려가 버렸다. 그녀가 대신관들의 손에 의해 마을을 떠난후 히즈키는 거의 폐인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 카나린의 이름을 꺼내면 막무가내로 달려든 것 이 벌써 수차례였다. 처음에는 불쌍하다며 그를 동정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고, 천애 고아가 된 카나린이 잘 된 것을 배아파하는 것이 아니 냐며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혀어엉. 배고파. 응?" 잠시 잠깐 혼란속으로 빠져들어가던 히즈키를 동생의 목소리가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혀어엉. 형 일어나∼." 어린 동생의 애원에 못이겨 결국 히즈키는 몸을 일으 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그는 멍한 눈으로 그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히루." "형." "히루." "응?" "카나린이 혼인을 한데." "누구랑? 아참!! 형이랑 하는 거였지." 커다란 눈이 자신을 바라본다.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형말고 다른 사람이랑 해." "왜? 카나린 누나는 형의 신부라고 했잖아." "아니 이제는 아니야. 히루. 카나린 누나는 다른 사람 의 신부가 될 거야." 히즈키는 질끈하고 눈을 감았다. "형. 어디 아파?" "아아……," "어디가 아픈 거야? 히루가 고쳐줄게." 더듬 더듬 작은 손이 그의 팔을 어루만진다. 히즈키는 히루의 손을 꼬옥 쥐어 그의 가슴에 대었다. "히루. 형은 가슴이 아파." "형?" "가슴이 아파……." "………혀어엉." 히즈키의 목소리가 떨리자 히루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 작했다.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히루. 너무, 너무너무 아파서…." "혀어…우아아아앙." 히루가 울음을 터트렸다. "형 죽지마--아아앙." "히루." 작은 동생의 몸을 품에 안았다. 히루의 작은 어깨는 너무나도 쏙 그의 품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히루만큼이나 작은 어깨를 가졌던 그녀를 떠올렸 다. "죽을 것 같아…." 울음소리가 그의 귀를 메웠다. ♧ "축하하네. 자네 같은 인재가 궁정기사단에 들어와주 니 기쁘기 그지없군." "감사합니다." 히즈키는 새롭게 받은 라이트를 받아들며 예를 표했 다. "호로스에 가셨던 수장님께서 내일이면 키리엔으로 돌 아오신다는 전갈이 왔지. 운이 좋군. 자네는." "아닙니다. 별말씀을." 대답하는 히즈키의 얼굴에는 표정이라고는 하나도 찾 아 볼 수 없었다. 히즈키는 궁정기사가 되었다. 사실 그의 희망은 그의 아버지와 같은 성기사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궁정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했 을 때 그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물론 히즈키가 현 수장인 카나린의 전 약혼자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야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나린이 떠난 이후로 한동안 폐 인이 되다시피했던 그가 갑자기 다시 검을 연마하고 바람술을 수련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지인들인 갑작스 럽게 변해버린 그를 보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카나린 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모두 떨쳐버렸다고 생각했 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궁정기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는 모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는 성기사와는 달리 궁정기사 는 아직까지는 그저 수장의 개인 사병의 의미밖에는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실력 있는 젊은이가 궁정기사단으로 들어 와준 것에 대해서 궁정기사단 단장인 하라크는 반가움을 표시했다. "들었냐? 어제 새로 들어온 녀석 중에서 하나가 훈련 소에서 최고점을 기록했던 녀석이었다며?" "아. 나도 알아. 그 이름이 히즈키라고 했나?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게 생긴 놈이더라. 역시 엘리트는 다르 더라구." "하아. 별 녀석 다 보겠군. 궁정기사단이야. 성기사단 에 비하면 2류인데 최고점을 받은 녀석이 어째서 여기 를 온 건지." "모르지 뭐." "어이. 야!! 임마. 입다물어." "왜? 나는 말 좀 하면 안 돼? 이상한 녀석이 들어왔 …." 히즈키는 문가에 기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기사를 아무말 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꿀꺽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하하하. 히. 히즈키. 궁정기사단에 입단한 거 축하 해. 나는…." "감사합니다. 선배님." 싸늘한 표정의 히즈키가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하자 두 기사는 어쩔줄을 몰라했다. 아마도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전부 들었음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이런. 이 조금 촐싹대는 녀석은 쥬온이라고 해." "…………." 철컥거리는 갑옷이 조금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면서 히즈키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덥지 않은 것들이 기사랍시고….' 역시 궁정기사단 따위는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나하고 히즈키는 잠시 후회를 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련 같은 것은 가지지 말자. 나는 지금 여기 에 있는 거야.' "잠시 후면 수장님께서 돌아오신다. 전원 경계를 늦추 지 말고 만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한다." "네--!!" 우렁찬 대답소리가 바람을 타고 널리 펴져나갔다. "하이고, 결국 돌아오시는 구만." "그러게 한동안 좀 편안하게 지내는가 싶더니." "휴가 아닌 휴가였지 뭐. 어이 히즈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네가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는 날이 되겠구 나." "그렇게 되겠지요." "하아. 운 더럽게 좋군. 내가 궁정기사단에 들어왔을 때만해도 아직 수장님께서 계승로에 올라계셨을 터라 굉장히 기다렸었거든." "맞아. 나도 그랬었어. 우리에 비하면 넌 굉장히 운이 좋은 거야." "운이 좋은…거라구요?" "당연하지. 입단하자마자 바로 수장님께 서임을 받게 된 거라구. 우리처럼 한두달씩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서 어정쩡하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지내지 않아도 되는 걸 다행으로 알라구." 뚜우-------- 뚜우-------- "어엇! 신호 나팔 소리다. 수장님께서 돌아오셨다." "……………." 신호 나팔소리 같은 것을 굳이 듣지 않아도 히즈키는 그들의 수장이 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이미 느 끼고 있었다. 지난 2년간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던 너무나 익 숙한 파장. 그 파장이 수천명의 사람들 너머에서 천천히 그를 향 해 다가오고 있었다. 수도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녀의 파장을 구분해 낼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 '카나린……….'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석상처럼 굳어버린 그 의 주위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고 갔다. '카나린. 내가 왔어.' ♧ ------------------------------------쿨럭 라스트 스퍼트!!!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8 ♧ "여전하시다고?" "그렇습니다. 호로스에서도 계속 그러셔서…." "정말 곤란하군. 오늘은 새로운 기사 서임식까지 동반 하게 되는데…. 호로스에는 다른 사신을 대리로 보낼 것을 그랬어. 아무리 그쪽에서 수장님께서 직접 참석 하길 바랬다 하더라도…." "…………." 미메이라의 대신관 가라츠는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몇 번이나 짚었다. "세나케인님이 일단 함께 계시니 큰 문제는 생기지 않 을테지만 사실 또 그게 문제가 안 된다고 할 수도 없 고." "그래도 키리엔으로 돌아오시는 동안에 안정을 좀 찾 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야겠지. 여하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말을 하다 말고 대신관 가라츠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 피 말을 한다고 해서 사정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을 그는 지난 이년동안 내내 질리도록 깨닫고 또 깨닫 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로써는 가유님이 어서 성장하시길 기다리는 수밖 에 없다니. 참으로 힘들군.' "대신관님. 수장님께서 키리엔으로 입성하셨다 하옵니 다." 밖에서 누군가 연락을 전해왔다. "그래. 알겠다. 곧 가겠다고 전하라." "네." "영원한 미메이라의 축복이 그대의 어깨 위에 내리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엄숙한 분위기의 기사 서임식. 선임기사들은 후배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그리고 신임 기사들은 새롭게 출발하는 희망참으로 서임식을 맞았 다. 대신관과 수장의 축복을 차례대로 받는 것으로 미메이 라의 기사 서임은 아주 간단하게 끝맺음 된다. 먼저 대신전의 성기사들이, 그리고 다음으로는 궁정기사들 의 순으로 이루어지는 서임식은 이제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여 단상 위에 있는, 아 름다운 그들의 여 수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례대로 기사들이 아름다운 수장의 축복을 한 몸에 받고 감격에 가득차서 단상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아?" 뒤에 서있던 기사 하나가 소근 거리며 말을 걸어 왔 다. 하지만 히즈키는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단상 위 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그녀가 있었다. '카나린.'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는 은빛의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에 뒤지지 않는 하얀피부, 인간같지 않은 성 스러움이 그녀에게서 배어나왔다. 그녀의 곁에는 미메이라의 수호신이라 불리우는 존재 가 서 있었다. 타닌이라 불리우는 바람의 드래곤이다. 100년만에 각성한 바람의 드래곤. 그의 존재는 현 수 장인 카나린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신들로부터 받은 의지를 가진 바람의 힘,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형체와 아름다움을 가 진 존재.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선대 바람의 계승자들 의 곁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가면 서 그를 실체화 시킬 수 있을 정도의 계승자가 나타나 지 않는 바람에 벌써 근 100년간 미메이라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바람의 드래곤 타닌이었다. "저기 보이지? 바람의 드래곤 타닌." "응. 정말 대단해. 여기서도 느껴질 정도로 정말 강력 한 파장이다." "뭐니뭐니 해도 미메이라의 수호신이니까." "어이. 야!! 뭐해. 히즈키 네 차례잖아." "아. 으응." 그때까지 카나린에게 넋을 팔고 있던 히즈키는 헛기침 을 하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 는 타닌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시선을 사로 잡는 것은 오로지 단 한명 카나린 뿐이다. 그리고 바로 지 금 드디어, 카나린을 가까이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귓가까지 울려온다. "그대는 미메이라의 기사로써 기사에게 주어지는 임무 를 그대의 열과 성의와 진심과 이름과, 그리고 그대가 받은 기사의 증거를 걸고 충실히 이행 것을 서약하는 가?" "서약합니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카나린과 마 찬가지로 단 한번도 잊어본적이 없는 인물, 바로 대신 관이다. "그대에게는 앞으로 어떤 역경이 있을지라도 바람의 계승자의 이름을 따라 충실히 그대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리니 영원한 미메이라의 축복이 그대의 어깨 위에 내리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대신관의 손이 그의 어깨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다. 이제 그는 한걸음 옮겨 수장의 앞에 무릎을 꿇었 다. 고개를 들어 카나린의 얼굴을 볼 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카나린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히즈키는 너 무나 궁금했다. "영원한 미메이라의 축복이 그대의 어깨 위에 내리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고개숙인 그의 위에서 미메이라의 수장 카나린이 축복 의 말을 내렸다. 곧이어 그녀의 손이 천천히 히즈키의 어깨에 닿았다. '…………?!' 아주 한순간이었다. 카나린의 손이 히즈키의 어깨에 닿았던 것은 바람이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것보다 더욱 짧은 아주 찰나의 순간. 히즈키는 자신의 어깨에 닿았던 카나린의 손이 주는 너무나도 생경한 감각에 감짝 놀랐다. '카나린?' 할 수만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 카나린의 얼굴을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 가능한 일. 히즈키는 어쩔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동들이 이끄 는데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 느낌은 뭐지?' 단상에서 내려오자 마자 그는 고개를 돌려 카나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카나린의 곁에 서있던 타닌의 얼굴이었다. "…………!!"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과도 같은 눈동자가 자 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무한의 공포감을 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큭."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뭐. 뭐야. 이건.'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가 후 들 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히즈키. 뭐해? 이쪽으로 와." "…………." "히즈키!!" 자신의 앞에 있던 기사가 그를 재촉했지만 그는 발걸 음을 뗄 수가 없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은 불과 몇십초에 불과했지만 히즈키가 자신의 뜻대로 몸을 움직이게 된 것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타닌의 시선이 거두어진 후였다. 고대했던 카나린과의 첫만남. 2년이나 가슴을 두근거 리며 기대했던 재회는 그렇게 덧없이 끝나버렸다. ♧ "히즈키 호출이다." "응?" "어서. 서둘러. 이봐. 일어나!!"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한 기사 하나가 깊이 잠에 취해있 던 히즈키와 그의 동료들을 깨웠다. "어? 왜그러세요." "어서 일어나라. 긴급상황이다." 잠에서 덜깨어 헤롱거리고 있던 기사들이 긴급상황이 라는 말에 순식간에 눈이 동그랗게 떴다. 히즈키 역시 몰려오는 잠을 억지로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질문은 나중에 받는다. 되도록 빨리 모두 제 4 구역 으로 모이도록." 그말을 끝으로 그들을 깨우러 온 선배 기사는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도대체 무슨일이길래 이 한밤중에 갑자기 깨우는 것인 지 다들 어리둥절해 했지만 나름대로는 하늘같은 선배 기사의 말이기에 투덜거리면서도 부지런히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중간지대에서 몬스터라도 튀어 나온 건가?" "설마. 몬스터 퇴치 같은 것은 벌써 몇 년전에 끝났다 구."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래?" 다들 긴급상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하 지만 그들의 그런 궁금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아서 풀 려버렸다. 그것도 아주 정면으로 대놓고 그들이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기사들이 우르르르 한꺼번에 숙소에서 몰려나오는 순 간 그들은 눈도 뜨기 힘들 만큼 거센강풍에 발목이 붙 들었다. "우- 우아악!! 이, 이게 뭐야!!" 기사단에 입단한 뒤로 키리엔에 이런 강풍이 불었다는 소리를 들어 본적 없는 신임기사들은 저마다 이 기이 한 현상에 놀라버렸다. 뭐니뭐니해도 이곳은 바람의 나라 미메이라. 그것도 미메이라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키리엔이다. 그런 곳에 이런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강풍이 분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키리엔에서는 그 어떤 사람 도 바람에 의해 피해를 받지 않는데 말이다. "이정도 바람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 않는가. 모두 들 서둘러라!!" "하. 하지만…." 분명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이런 강풍을 경험해 본적없는 신입 기사들은 어쩔줄을 몰라했다. 아니러니 컬 하지만 바람을 조정할 수 있기에 이렇게 대책없이 불어 닥치는 강풍이나 돌풍에는 익숙치않았던 것이다. "허억---- 하. 하늘을 봐!" 누군가가 소리치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 거세게 몰아닥치는 바람이 시야를 흐리게 했지만 하늘 을 올려다 본 기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전부 할말을 잃었다. "저, 저건…." "놀랄 것 없다. 다들 따라와!!" "하지만 저것은…." 바람 속에 기이한 형체가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공포를 자아내는 신의 빛이 바람과 함께 기사들의 눈속으로 파고 들었다. "설마 저것이 그 바람의 드래곤 타닌?" "그래!! 그러니 무서워 할 것 없다. 일단은 막아야 해 !!!" "예?" "입닥치고 당장 따라와!!! 시간이 없다!!" 신입기사들은 당황해버렸다. 막아야한다니 도대체 뭘 막아야 한다는 소리일까? 저 바람의 드래곤 타닌을? 무서워 할 것이 없다면서 그걸 막아야 한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서 다들 어리둥절해했다. "저걸 어떻게 막는 다는 겁니까?" "다 방법이 있으니까 토달지 말아." 선배기사들의 우격다짐에 결국 신입기사들은 우왕좌앙 하면서도 줄줄줄 목적지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히즈키. 증폭주문 쓸 수 있나?" "물론입니다." "그럼. 저쪽에서 단장님이 신호하시면 바로 증폭주문 을 준비했다가 발동시켜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시키는대로 따라오긴 했지만 히즈키 역시 이런 갑작스 런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는 다른 신입들과 별반 다르 지 않았다. "설명은 나중에 한다. 지금 당장은 시키는 데로 해!!" "…………." 도대체 무엇을 막아야 한다는 걸까? 지금 키리엔의 수장궁 주위에 불고 있는 이 광풍은 분 명 저 하늘에 떠 있는 바람의 드래곤 타닌이 일으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미메이라의 수호신 과 같은 존재. 그런데 어째서 '저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인지 그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드래곤이 내뿜고 있는 강력한 바람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맞고 있는 것 조차 다리가 후들 거릴 정도로 압도적이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제 1열!! 회복주문과 함께 정화주문을 준비한다. 2열 ! 1열의 뒤를 이버 바로 증폭주문을 발동한다. 한치의 어긋남없이 실시해야하니 주의 하라!!" "네!" 단장과 선임기사들에게서 풍겨나오는 것은 살벌하게만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 그들은 도대체 누굴 타겟으 로 하고 있는 걸까? "목표는 주탑이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 들려오는 것은 카랑 카랑한 단장의 목소리뿐. 히즈키는 마치 최면이라도 당한 것처럼 단장의 말에 따라서 주탑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설마." 어지러웠던 정신이 삽시간에 돌아온다. "…설마 카나린?" "한치의 어긋남도 혀용하지 않겠다. 이를 악물고 죽을 각오로 임하라!!" '어떻게….' 수십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문. 그것은 몰아닥치는 바람에 휩쌓여 점점 하나로 모아진다. "카나린!!!!" "이탈하지 마라! 그 자리에서 서!!!" "카나린!!" 어느새 히즈키는 달려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에 게 보이는 것은 주탑위에 홀로 서 있는 카나린의 모습 뿐.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카나린!!!!" "멍청한!! 자기 열에서 이탈하다니!! 어서 돌아가!!" "이거 놔!!" 팔을 잡는 사람을 후려치고 히즈키는 그 자리에서 뛰 어 올랐다.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은 그에게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카나린!!" 미친 사람처럼 주탑을 향해 뛰어 올라가는 히즈키를 따라왔던 기사 단장 하라크는 들고 있던 검을 땅바닥 에 내리쳤다. "젠장!!" 신입들이 들어오면 반드시라고 할만큼 문제가 발생한 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렇게까지 무식하게 돌진하는 녀석은 단 한녀석도 없었 다. "저녀석은 포기한다. 제 1열!!!" 우렁찬 목소리. 수십명의 기사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주문이 서서히 발동되기 시작했다. ♧ -----------------------------------계속. 갑작스럽게 다른 이야기가 나와서... 어라? 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쿨럭 ..카나린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생각은 해 놓고 있었지 만....이 타이밍에 들어갈 것이라곤...저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하튼.... 카나린의 이야기는...녹색의 검에 얽힌..이야기 이긴 하지만...그 이외에도..아슈레이의..설정에 관한 것들 중.....본편에서는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는..것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머엉.... 이것도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쿨럭.. --;; 아아.......정말로..지치는 기분입니다. 꿀꿀한 이야기는 쓰기 싫어~~~~~~~~~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29 ♧ "……흐윽." 꿈틀하고 은색의 머리카락이 흩어진다. "…카나린!!!!" 벌떡-하고 누워있던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잠에서 깨 어났다. "헉-헉." 히즈키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 았다.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에는 식은 땀만이 흥건하 게 배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꿈을 꾼 건가.' 악몽이라면 그런 악몽도 없을 것이다. "젠장…카나린." 땀으로 흥건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는 도대체 무 슨 꿈을 꾼걸까?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히즈키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로 어제 그에게 기사 서임을 내리고 축복 을 내려주었던 대신관이 앉아있었다. "…………!!" "어제는 깜짝 놀랐네. 설마 자네가 궁정기사단에 들어 와 있을 줄이나 누가 알았겠나." 히즈키는 으드득하고 이를 악물었다.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상대다. "대신관님을 보려고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아아. 진정하게. 그래도 자네가 들어와 준 것을 나는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내말을 끝까지 들어주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정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다른 기사들의 주문에 같 이 휘말려 들어가서 자네 상당히 위험했었네." '뭐라고? 지금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돌아오시자 마자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으니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순간 히즈키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꿈이…아니었던가?' "다행히도 수장님께서 순간적으로 자네를 알아 보신 모양일세. 그래서 자넨 목숨을 건진게야." 찌릿-하고 히즈키의 시선이 험악해졌다. 대신관은 그 런 히즈키의 시선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대로 말을 이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네."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히즈키는 최대한 자제심을 발동해 울컥하는 마음을 억 눌렀다. 그런 히즈키를 보면서 대신관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 다. "설명이고 뭐고 보면 알게 될 걸세. 카이트." "예. 대신관님." 그는 뒤에 서 있있던 신관의 이름을 불러 밖에 대기하 고 있던 사람을 불러 들였다. "…………." 보면 알게 될 것이라니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 까? 히즈키는 잔뜩 긴장을 한 채 천천히 열리는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다음 순간 그 문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카나린?"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히즈키도, 대신관도 그리고 카나린도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카나린을 가까이서 보면 틀림없이 하고싶었던 말이 있 었을텐데도 히즈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내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하겠나." 그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대신관이 먼저 입을 열 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네." "당신들은…." "………." "당신들은 도대체 카나린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 "………."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앉아있는 카나린. 그녀는 히즈키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히즈키가 흥분하여 대신관에게 대들고 있는 것을 보다 가 조용히 말했다. "저 사람은 누구지?" 그 질문은 히즈키에게도, 대신관에게도 향해진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앞 에 바람의 드래곤 타닌의 모습이 나타나 대답을 했다. "잃어버린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 "기억……." 히즈키는 경악했다. '잃어버린? 정말로?' "저 가도 되나요? 대신관님?" 그래도 대신관이라는 사람은 인식을 하고 있는지 카나 린이 대신관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대신관은 괜찮다 고 대답하면서 그녀를 내보냈다. 하나도 아닌 두 개의 충격적인 사실에 놀란 히즈키는 그녀가 나간다고 할 때도, 그리고 그녀가 히즈키에게 는 아무런 언질조차 하지 않고 나가버렸을때도 아무말 도 할 수 없었다. '저건 카나린이 아니야.'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그녀가 처음 들어왔을 때, 그리고 그의 앞에 앉았을때 부터 그는 이미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카나린의 얼굴에 카나린의 파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낯설기 만 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대체 카나 린은 무슨 일을 겪은 걸까? 기억을 잃어버린 것 까지 는 그렇다고 해도 그가 방금 본 카나린의 모습은 정말 로 이해할 수 없었다. 생명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유 리알 같은 눈동자와 표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생물로 느껴졌던 것이다. "이런 말은 뭐하지만 내 실수네." 놀라서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히즈키게에 대신관이 괴로운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녀를 이곳에 대려왔을 때는 괜찮았지. 하지만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계승의식을 거부 했어. 하지만 우린… 방법이 없었네. 누군든지 되도록 빨리, 그것도 계승의식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자가 필요했네. 그래서…." "그래서 카나린을 저꼴로 만들었다는 겁니까!!!" "흥분하지 말게. 이야기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으니 까. 수장님의 곁에 있는 그를 보았나?" 히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100년 만에 나타났네. 100년만 에 각성을 한거지. 하지만 그것은 수장님의 능력이 그 를 각성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해서가 아니야." "그렇다면?" "계승의식을 위해서 우리는 그녀의 기억을 아주 잠깐, 정말 잠깐 봉인했지. 계승의식을 마치고 나면, 다시 돌려놓을 생각으로 말일세." 대신관은 당시의 기억을 되돌렸다. 비인간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그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그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한 것처 럼,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상황이 되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카나린이 계승의식을 통해 풍옥을 받아들 이는 순간 그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억을 잃고 인형처럼 변해버린 계승자. 그 계승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런 의지도 없는 상태로 풍옥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네. 미메이 라의 수호신이 눈을 뜨기 전까지는 말일세. 기억도, 의지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인간은 바람의 힘 앞에 서는 무용지물과 같았다네. 그녀는 힘을 받았지만, 그 것을 제어 할 수 있는 의지가 없었다. 때문에 그녀의 힘과는 상관없이 수호신님께서 눈을 뜨신 거야." "그렇다면…." "그래. 현재 카나린님께서는 가끔은 정신을 차려 조금 은 원래의 상태에 가깝게 돌아오시긴 하지만 보통 때 는 단순한 꼭두각시 일 뿐이네. 아주 기본적인 욕구만 이 남아서 카나린을 움직이고 있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어제의 그 소동은 때때로 일어나는 일이지. 카나린님 대신에 바람의 수호신님께서 그녀의 몸을 움직이는 거 야. 카나린님께 남은 의지는 단 하나 뿐이네…." "그게 뭡니까?" "……………."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거대한 힘을 받아들인 인간 이 무엇을 원하게 될 것 같나?" 이번에는 히즈키가 할말을 잃을 차례였다. "카나린님은 힘을 원하시고 있네. 바람의 힘을, 아주 원초적인 신의 힘을….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하 시는 것이 없어. 그래서 아까와 같은 일이 종종 일어 나고 있지." "그럼 어째서… 어째서 제게 이런 이야기를 다 해주시 는 겁니까? 카나린은 절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지 않습 니까? 그런데 절 알아봤다구요?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그것이 우리도 신기하게 여기는 점이고, 이렇게 자네 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 닌가." "도움이라니!!"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카나린을 그런 꼴로 만들어놓고, 그리고 자신에 게서 빼앗아간 주제에 자신에게 도움을 구한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순간적이긴 하지만, 정말 순간적이긴 하지만 분명 수 장님께서는 자네를 알아 보았네. 그래서 마지막의 순 간에 힘을 거두어 들이신 게야.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 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어." "그만 하십시오. 전 이럴려고 기사가 된게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궁정기사단에 들어왔나? 수장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도 대체 뭐지?" "이…." "원하는대로 해주겠네. 아침 저녁으로 아니 하루종일 수장님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조처를 해줄테니 수장 님의 기억을 되살려보게. 자네를 계속 옆에 두고 계시 다보면 어느 한순간 기억이 돌아 올지도 모르니. 부탁 이네." "싫습니다. 절대로 싫어요!!" 자신을 알아 보지도 못하는 카나린의 곁에 있는 것은 고문이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 정도의 고 문. "그럼 이대로 수장님이 점점 바람의 힘에 잠식되어 가 는 것을 두고 보기만 할텐가? 미메이라는 지금 아주 중요한 기로에 서 있네. 아슈레이엔 벌써부터 여기저 기 크고 작은 나라들이 생겨나고 있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일세. 지금까지 힘들게 고생해오며 지켜온 땅이야.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어. " "그러니까 결국 당신들의 잇속을 차리겠다는 소리잖아 !! 나는 그런 일에는 절대 협조할 수 없어!!" "내 자신의 이기심에의 발로라고 생각해도 좋네. 내가 어떻게 설명을 하든 자네에게는 고깝게 들리겠지. 하 지만…." "하지 않겠다니까!!" "자네는 하게 될 걸세. 자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 ♧ "수장님. 취침하실 시간입니다."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카나린. 이제 그만 들어가자." "…………." 그녀의 이름이 불리자 카나린은 아주 잠깐 히즈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 눈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카나린." 결국 히즈키는 어제처럼 그녀를 안아 올렸다. 반항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그는 하고 있었다.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며칠이나 고집을 피웠던 히즈키 지만 결국 그는 대신관의 말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카 나린의 옆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냥 두면 식사를 하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어버 리고 마냥 하루종일 바람만 맞고 있는 그녀를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가지는 아주 최소한의 욕구마저 그녀에게는 남 아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바람의 힘이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움직이고 있다는 타닌에게 말을 걸어 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사람, 카나린의 말에만 반응을 할 뿐, 히즈키의 말에는 절대로 따라주지 않았 다. 그렇게 히즈키가 카나린의 시중을 들게 된 것이 벌써 석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카나린이 비록 히즈키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자신의 시중 을 들기 시작한 이후로는 혹여 카나린이 폭주를 하기 시작하다가도 히즈키의 목소리에 진정을 했다는 것이 었다. 결국 히즈키가 온 뒤로 그녀는 단 한번도 이전 과 같은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바라스." "응? 왜 그래? 카나린?" 여느날과 다름없이 하염없이 바람을 쐬고 있던 카나린 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바라스의 땅의 계승자…." "…………?" 순간 히즈키는 그녀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는 것을 목 격했다. "카나린?……우아악!!!"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흐릿하게 변한 카나린의 몸에서 마치 그녀의 생명력이 모조리 빠져나오는 것처럼 한줄기 바람이 흘러나오더 니 곧장 바람의 드래곤으로 화하여 확대되기 시작했 다. "안 돼!! 카나린!! 정신차려!!" 히즈키가 다가가 그녀의 몸을 붙들었지만 소용없었다. "땅의 계승자가 힘을 잃었다." '뭐라고?' "주인이 없는, 의지를 잃은 힘이……."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카나린!! 바라스는 너와 상 관이 없어!!" 타닌이 일으키는 바람이 카나린의 옷자락을 펄럭거리 게 했다. 그녀의 몸이 바람과 함께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카나린!!!! 안 돼!!" 히즈키는 그녀의 옷자락을 거칠게 움켜쥐고는 주문을 외웠다. 정화 주문의 기운이 그녀의 옷자락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히즈키의 주문은 소용이 없었다. 찌이익---하고 거친 소리가 나며 히즈키가 잡고 있던 카나란의 옷자락이 찢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벌컥 문이 열리며 시종들이 뛰어 들어왔다. 히즈키는 고함을 질렀다. "어서!! 어서 대신관님을!!" "예?" "빨리!!! 수장님께서 위험하다!!" "하. 하지만." "어서 대신관님을 불러. 이번에는 내 힘으로는 안 돼! !!" 후다닥, 시종들이 뛰어나갔다. 그러는 동안에 카나린은 이미 열려진 창문으로 빠져나 가서 벌써 궁의 위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히즈키는 이를 악물고 창가로 뛰어 올라갔다. '절대로, 절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겠어.' 카나린이 이상해질 때마다 그녀에게서 단 한순간도 떨 어지지 않았던 히즈키가 정결과 정화의 주문으로 그녀 를 잠재웠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도 통하지를 않 은 것이다. 왜 그런 것인지 히즈키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인가!!" "수장님께서 조금 전부터…." 헐래벌떡 뛰어온 대신관은 제일 먼저 히즈키를 찾았 다. 타닌이 일으키는 바람은 이전보다 훨씬 거세게 수 장궁을 뒤덮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갑자기 바라스의 주인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하시더 니 곧…." "뭐라고? 설마!!!" 히즈키의 말을 들은 대신관이 뻘쩍 뛰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도 안돼. 설마. 수장님께서…." "무슨 말이나고 묻지 않습니까?" "당장 모든 기사와, 그렇지 신전으로 연락을 넣어 모 든 기사들과 신관들을 불러라!!" "대신관님!!" 히즈키가 대신관에게 달려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모르는 사실이 또 있 는겁니까? 당장 말하십시오!!!" "…………." "말씀해주십시오!!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수장님께서는 힘을 원하시는 걸세." "그말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바람술사로써는 한계에 다다랐어. 하지 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다른 힘까지 원하는 거야. 힘의 균형이 어긋나는 것은 이미 느끼고 있었네. 시간 이 흐르면 얼마든지 이런 일이 발생하지. 계승자라고 해도 영원히 살수는 없지.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바로 그때, 이전 계승자에게서 다른 계승자에게 넘어 가는 시기. 그녀는 그것을 느끼고 계승자를 잃은 땅의 힘을 불러오려 하고 있는 거야." "그…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 "가능하냐고 묻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아야지." 굳게 결심한 듯한 대신관의 얼굴. 하지만 히즈키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지난 석달동안 그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혹시라도,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대하면서 …. "이것도 저것도 되지 않는 다면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 는 수 밖에 없네. 각오해주게." "그런…." "자네는 물러나 있게." 그리고 대신관은 기사단장과 몇몇 다른 신관들과 함께 어디론가 급히 사라져 버렸다. 히즈키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하늘로 날 아올라 끊임없이 그녀의 힘을 방출하고 있는 카나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힘을 다해 쉴드를 친다. 한 순간이라도 정신이 흩어져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히즈키. 자네도 함께 힘써주게." "…………."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일세. 자네의 힘이 필 요해."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습니까?" "있을지 없을 지는 모르지. 우리는 시키는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일세." 카나린의 막기위해 대신관이 고안한 방법은 아주 단순 한 것이었다. 힘을 개방하고 주인을 잃은 힘을 키리엔 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카나린의 주위에 거대한 쉴드를 쳐 그녀를 격리시는 것이다. 모든 것들로부터…. 그것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 지만 그 어느 누구도 대신관이 내린 명령에 거부하는 자는 없었다. 히즈키 역시 결국 그 대열에 동참했다. 거대한 바람의 힘앞에, 카나린의 힘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 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키리엔에는 역사 이래 기록된 적 없 는, 최대의 강풍이 몰아닥쳤다. ♧ ------------------------------------계속 지금 시간은 오전 5시 18분. 벌써 창밖은 훤히 밝아버렸습니다. 새벽 바람을 좋아하는 저 입니다만 --;; 매일 같이 새벽 바람을 맞는 기분은 ...참..죽이는 군 요. --;;;;;;;;;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30 ♧ "폐허라는게 이런 건가…." "그렇겠지." 부서진 건물들 틈 사이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 니고 있었다. "기가막히는 군." 몇몇 기사들은 거의 기진맥진하여 아무렇게나 널부러 져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수장궁이었지만-사실 궁 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지금 그 수장 궁은 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 폐허의 한 가운데에서 몇몇의 기사다 대화를 나누 고 있었다. "신전은 아무런 이상 없을까?" "글세. 여기는 엉망이지만…." "괜찮을 거야. 궁은 엉망이지만 궁 밖으로 한발자국만 나가면 아무이상 없어." "어? 정말이야?" "그래. 조금전에 가서 확인해보고 왔어." "젠장. 무슨 미메이라의 수호신이야. 수호신은. 궁을 이렇게 박살을 내놓는게…." "쉬잇. 입조심해." "시끄러워. 이제와서 입조심 할게 어디가 있어? 그정 도의 소란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전 에야 그럭 저럭 어떻게는 눈속임을 할수 있었다고 해 도 이번에는 불가능해. 수장궁이 박살이 났는데 그걸 그저 단순한 타닌님이 이러 저러하게 우리를 지키기위 해 어쩌고 저쩌고 하셨습니다라는 말로 감출 수 있다 고 생각해? 이전에는 가능했어도 이젠 안 돼. 젠장. 궁정기사단 따위에 들어오는게 아니었어." "그런 뜻으로 한말이 아니야. 저기 저녀석 때문이지." 그러면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면박을 주던 기사가 손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주위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사들과 몇몇 시녀들과 시종들의 눈이 한꺼번에 그곳으로 몰려 갔다. 그가 가리켜 보인 곳에는 수장궁을 완전히 폐허로 만 들어놓은 장본인과 한명의 기사가 앉아있었다. 바로 이 궁의 주인이자 미메이라의 수장이라고 불리우 는 카나린과 그녀의 기사인 히즈키였다. "………." "저렇게 보면 멀쩡해보이는데… 저녀석도 미쳤어." "미쳤을 수 밖에. 들었어? 저녀석, 원래 수장님의 약 혼자였다는 거." "그래? 처음 듣는 군. 어쩐지 싶더라니." "나름대로는 권력의 희생잔 거야. 젠장. 더럽다." "카나린." 히즈키는 카나린의 앞에 앉아있었다. 밤새도록 키리엔을 박살내놓은 장본인. 하지만 히즈키 는 그런 그녀가 두렵기는커녕 한 없이 안쓰럽기만 했 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걸까? "카나린. 괜찮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지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막같은 것이 그녀 의 주위에 쳐 있었다. 밤새도록 최선을 다한 기사들의 노력은 온데간데 없었 다. 히즈키의 눈앞에 앉아있는 카나린의 모습은 단 하 룻밤 사이에 크게 변해있었다. 은백색으로 빛나던 머리카락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황 금색이 군데 군데 섞여 들어있었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구나 카나린. 만족해?" 그녀는 듣고 있지 않았지만 히즈키는 무슨 말이든 하 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막았지만 결국 카나린은 잠시 주인을 잃은 바라스의, 땅의 힘을 불러 들였다. 그리고 그때의 부작용으로 수 장궁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녀가 땅의 힘을 불러들이지 못하 게 기사들과 신관들이 친 쉴드가 오히려 그녀가 폭주 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힘은 기사들과 신관들이 친 쉴드에 막혀서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그 안의, 즉 수장궁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카나린의 몸 주위에서는 바람의 힘과 함께 땅의 힘이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고 있었다. 옅은 힘의 보호막 안에 앉아있는 카나린은 이전보다 더욱더 인간미를 잃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 의 앞에서 히즈키는 한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앉아있었다. "카나린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돌아오지 않는 대답.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어?" 무기력감이 히즈키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 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해줘 카나린." 눈물이 흘러나오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히즈키는 흐 느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안타까움의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히즈키.」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울지마 히즈키….」 환각인줄 알았던 목소리가 재차 들려오자 히즈키는 눈 을 번쩍 떴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카나린의 모 습은 조금전과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카나…린?" 「히즈키….」 목소리는 들려왔지만 그녀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지 않 았다. "카나린!!!" 번뜩 정신이 들었다. "카나린! 정신이 들어? 응? 나야 히즈키!!!" 윙윙하면서 그녀의 몸 주위로 두 개의, 은백색과 황금 색의 빛줄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카나린의 목소리는 두 번다시 들려오지 않았 다. "반대합니다!! 그녀는 분명 의식이 살아 있습니다." "증거가 있소?" "…………." "현재로써는 어쩔 방도가 없소. 당신이 수장님의 전 약혼자였다는 것은 알고 있소만, 당신이 착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분명 이 귀로 똑똑하게 들 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무슨 방법이라도 알고 있습니까?" 어두운 한밤중. 어둠이 까맣게 폐허가된 수장궁을 뒤 덥고 있었다. 그 폐허의 한쪽에서는 대신관을 비롯 여러 장로들이 히즈키를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미메이라의 수장이라고 부를 수 없을 지 경까지 왔소. 어젠 수장궁으로 끝났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오. 그것을 당신 혼자서 저 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주었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소. 이제 나머지 처리는 우리들이 할 일이니 이 제 그만 물러나주었으면 하오." 상황은 이제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카나린은 이미 수장으로써의 자격을 상실한 거나 다름 없었다. 미메이라를 지켜야 할 그녀가 지금은 미메이 라를 강력하게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바라스에서도 이미 이 상황을 인지했을 겁니다. 더 늦기 전에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야 합니다." 대신관의 말에 모여있던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는 것은…." 대신관의 목소리같은 것은 더 이상 히즈키의 귀에 들 려오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는 것이 히즈키를 절망감에 휩쌓이게 했다. 그는 분명 카나린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단 한 순간뿐. 그것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것이 이렇게나 절망적 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온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수장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뭐라고?" "히즈키님께서 그 뒤를 따르고 계십니다만 워낙 이동 속도가 빠르셔서…." "여러분들.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이 다가온 것 같소." 신관의 보고를 다 듣기도 전에 대신관이 먼저 입을 열 었다. 그의 말에 주위에 앉아있던 장로들이 일제히 자 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일이 일어난데 대한 책임은 일이 모두 끝난 후 에 다시…." "지금은 일단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 겠죠. 출발합시다. 수장님께서는 분명 중간지대로 가 실 겁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끝이오." "그렇소. 균형이라는 것은 단 한순간도 무너져서는 안 되는 것이니…." 대신관이 앞장을 섰다. 그는 앞장서서 카나린의 뒤를 추적하면서도 내내 생각 에 잠겨 있었다. '바라스… 어째서 하필이면 바라스인 건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바람의 힘은 불의 힘과 훨씬 가까운 것이 사실. 그런데도 그들의 수장은 땅의 힘을 받아들였다. 그것부터가 문제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힘의 균형은 언제나 지켜져야 하는 것. 바라스의 계 승자가 힘을 잃었다면 불꽃이나, 물의 계승자도 얼마 남지 않았겠군.'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마치 불문율처 럼 되어 있는 것이다. 4신의 계승자중 어느 누군가가 늙거나 기타등등의 사고로 힘을 잃으면 1-2년 이내 다 른 계승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10여년 이 내로 모든 힘이 새로운 계승자에게 이양된다. '불꽃의 계승자, 호로스의 수장이 바뀔 날도 멀지 않 았어. 서둘러야 한다.' -------------------------------------계속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31 ♧ 날고 있는 것인지 걷고 있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걸음 걸이. 금색과 은색의 형체가 그녀를 감싸듯이 그녀의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다.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가는 카나린의 뒤를, 히즈키는 정신없이 뒤쫓고 있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짙은 어둠 은 그녀에게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언덕과 강을 건너 며 그녀는 점점 더 그 속도를 더해가기만 한다. 히즈키는 벌써 한시간 넘게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 었다. 정신없이 그녀의 뒤를 따르던 히즈키는 어느새 한무리의 신관들과 기사들이 자신의 뒤를 추적하고 있 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저지할 수 있는 거지?' 그는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누가 설 명해준 것도 아니지만 그녀를 막지 못하면 거대한 불 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막을 방법이 그에게는 없었다. '누구라도 좋아. 제발… 제발 카나린을 구해 줘!!' "헉, 헉--." 히즈키는 숨을 몰아내쉬었다. 얼마를 쫓아 온 걸까? 하늘은 벌써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도록 바람 술을 써가며 카나린을 따라가던 그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눈앞이 깜깜해져올 지경이었다. '더이상은 못 따라가겠어.' 카나린의 모습은 이미 그의 시야에서 자취를 감춘 뒤 었다. 그가 망연자실해서 앉아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의 이 름을 불렀다. "히즈키!!" "…다. 단장님? 어떻게…." "자네가 따라왔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은 없지. 수장님 을 막아야 한다. 협조해." "…………." "대신관님의 말로는 수장님께서 중간지대로 들어가시 기전에 막아야 한다고 하더군. 힘들겠지만…네 도움이 필요하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수장님을 멈추어주면 되네." "대신관님…." 히즈키의 눈앞에 대신관을 비롯 여러명의 장로들이 한 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가능합니다. 이젠 아무리해도…." "단 한순간이라도 좋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붙잡아."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억지는 그만 쓰십시오. 붙잡을 수 있었으면 예전에 붙잡았을 겁니다." "그래도 해보게. 지금은 억지라도 필요한 때야." 대신관의 팔이 히즈키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그녀의 기억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좋아.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단 한순간만, 정말 순 간이라도 좋으니 멈추어보게. 그 뒤는 우리에게 맡기 고."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 "그녀를… 카나린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그가 아는 한 대신관은 이렇게까지 불가능 한 일을 우 격다짐으로 시키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일을 벌이려 한다는 뜻이다. "수장 계승 의식이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나?" "………?" "그건 바로 대신관의 몫일세.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녀 를 멈추게 한다면 그녀의 몸에서 억지로 풍옥을 빼낼 수 있는 주문이 있네." "뭐라고요!!" "강제적인 방법인데다가 위험성이 있어 지금까지 망설 여 왔지만 그녀가-바람의 수장이며 이미 땅의 힘까지 받아들인 그녀가 중간지대로 들어가 땅의 힘까지 계승 해 버리면 그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어." "…………." "나는 내 목숨을 걸고 그 주문을 쓰기로 마음먹었네. 자네에게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지만 내게는 미메이라 의 존속이 가장 중요해. 미메이라의 존속은 곧 이 아 슈레이의 존속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 그렇게 말하는 대신관의 눈에는 어떤 강렬한 결의 같 은 것이 느껴졌다. "아슈레이를 위한다는 거창한 말은 하지 않겠네. 하지 만 나는 꼭 그 주문을 성공시킬것이라 약속하지." "…그런." 히즈키가 그에 대답하기도 전에 대신관은 이미 다음 행동에 들어가고 있었다. "하라크 기사단장. 이동주문을 준비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이동주문으로 자네를 수장님이 계신 곳으로 보낼 걸 세. 최선을 다해주게." '뭐라고 말해야하는 걸까. 카나린.' 휙휙-눈앞의 풍경이 쏜살같이 바뀌어 가는 와중에도 히즈키는 고민을 했다. '나는 널 멈출 수 있을까?' 이동주문에 의해서 날아가는 동안 히즈키는 점점 더 카나린의 기운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순식간에 그 느낌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몸이 찌릿 찌릿해질 정도로 가까워졌 다. '저기다!!' 히즈키의 의식이 카나린의 위치를 잡아내는 순간 그의 몸이 순식간에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이 움직였 다. 다음 순간 히즈키는 카나린의 앞에 서있었다. "크윽---."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무리하게 밤새도록 카나린의 뒤를 따른데다가 타인의 힘에 의해 먼 곳까지 순식간에 이동했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었다. '안 돼. 정신차려 히즈키-.' 고개를 들었다. 카나린의 모습이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카나린."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카나린. 부탁이야. 제발 멈추어 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부탁이니까 멈추어줘." 주문 같은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룻밤 내내 보아온 그녀의 신비하도록 빛나는 머리카 락이 점점 가까워진다. "날 기억해내줘. 내 이름을 불렀잖…크윽." 그녀가 가까워져 갈수록 강력한 파장이 히즈키의 몸을 압박해왔다. 가만히 서 있어도 그녀의 힘에 밀려 지지 직-하고 발이 끌렸다. "카나…린. 나를 기억해내. 내 이름을 기억해내. 다시 한번……." 유리알보다도 더 투명한 눈동자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 다. "다시 한번만 내 이름을 불러 줘." 투명한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비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히즈키는 점점 더 자신의 몸을 압박해오는 그녀의 강 력한 힘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널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살갗이, 신경이 타오르며 그의 몸 안으로 고통이 스며 들었다. 너무나도 강력한 카나린의 힘은 보통 사람이 당해낼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선지 오래. "지금도, 지금도 널 사랑해…." 순간 유리알 같은 카나린의 눈동자가 화악-하고 타올 랐다.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널 사랑해…카나린." 풀썩- 히즈키의 무릎이 꺽였다. 카나린의 힘에 의해 뒤로 밀려나가면서 그의 무릎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히…즈키.」 소리가 아닌 목소리가 히즈키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 바람의 시작과 끝. 바 람의 영광. 미슈파트. 그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신의 힘을 대신하는 자여 계승자의 몸에서 떠나 그대의 자 리로 돌아오라." 대신관의 손끝에서 은백색의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것 은 쏜살같이 날아가 카나린에게로 향했다. 「히즈키…」 덜컥하고 카나린의 몸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것 은 마치 무엇에라도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몸 주위를 헤매던 금색과 은색의 바람이 순간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카나린…?" 「히즈키….」 거센 바람이 카나린과 히즈키의 주위에 불기 시작했 다. 그것은 카나린의 몸에서 시작되어 주위를 온통 휩 쓸어 버릴 것 같은 강력한 회오리 바람이었다. 그 바 람과 함께 땅이, 그리고 그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흔 들리기 시작했다. 히즈키의 무릎이 닿아있는 땅이 순간 쩌억-하고 갈라 졌다. "으아---악!!" 갈라진 땅 사이로 떨어지려는 순간 히즈키의 손이 그 끝에 걸렸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주문을 외웠다. "…피. 하이로트." 하지만 그의 주문은 강력한 바람에 휘말려 사라져버렸 다. '끝…인 건가.' 매달려있는 손끝에서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팔 이 부들 부들 떨렸다. "히즈키----이!!" '이 목소리는… 카나린인가.' 강렬한 바람은 이제 그의 의식까지 가져가려 하고 있 었다. "히즈키!! 안 돼!!" 무엇인가 다가와서 그의 손끝을 붙잡았다. "히즈키!!!!" 유리알 같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은빛으 로 빛을 발하는 두 개의 눈동자가 히즈키를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나린!!!" "히즈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공중으로 들려 올라갔다가 급속 하게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헉--." "히즈키!!" 가느다란 팔이 그리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온통 히즈 키 시야에 들어왔다. "히즈키. 히즈키… 미안해. 미안해…." "카나린." "미안해. 내 잘못이야. 내가…," "정신을 차렸구나. 다행이다. 카나린." "히즈키."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져내렸다. "다행이야 카나린. 나는…." 히즈키는 손을 들어 그녀의 빰에 손을 댔다. 파지직하 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우웃---." 히즈키의 손에 날카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히즈키 부탁이 있어." 윙윙하는 시끄러운 바람소리와 함께 카나린의 뒤에 두 개의 형체가 생겨났다. 하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바람 속에서 하나는 카 나린이 딛고 서 있는 땅의 그림자에서…. "히즈키 나는…." 카나린의 눈물이 토옥하고 땅으로 떨어져내리다가 말 고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좀더 크기를 더하여 은색과 금색으로 눈부시게 반짝였 다. 그와 동시에 카나린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기 시 작했다. "카나린?" 「그것은 카나린이 가진 당신에 대한 기억이다.」 타닌이라 이름 붙여진 존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카나린이 가진 모든 기억과 그녀의 생명이 하나로 뭉쳐진 것. 그것을 잡아라.」 히즈키는 마치 무엇이라도 홀린 사람처럼 그 빛 덩어 리에 손을 댔다. 손을 대자 그것은 길죽한 모양으로 뭉쳐지면서 히즈키의 손에 무수한 상처가 생겨났다. "크흑---." 히즈키의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람에 휘날렸다. 피 를 머금은 바람은 그대로 카나린의 쪽으로 불어갔다. 「계승자가 원하는 것, 그것은 당신만이 이룰수 있다. 」 「땅의 계승자가 원하는 것…」 「바람의 계승자가 원하는 것…」 금빛으로 빛나는 존재와 은빛으로 빛나는 존재가 동시 에 입을 열었다. "안 돼!! 난, 난 못해!!!" 「계승자가 원하는 것이다.」 「계승자가 원하는 것이다.」 "난 절대로 할 수 없어. 난 할 수 없어 카나린." 「나는 바람의 타닌. 인간의 의지로 존재하는 자. 그 녀의 마음이 나를 각성시켰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 엇이든 이루어져야 한다.」 타닌의 팔이 움직였다. 그것은 그대로 히즈키에게도 전해져 히즈키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팔이 천천히 하늘로 치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람의 계승자 카나린이 원하는데로, 타닌은 이제 새로운 의지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 "카나…린." 히즈키의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눈물이 그의 눈앞을 가렸다. 「계승자의 의지대로…」 그 다음의 말은 바람소리에 휘말려 히즈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살며시 카나린이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나타났던 두 개의 형상이 흐릿해지더니 곧 사라졌다. 남은 것은 카나린과 히즈키 단 두 사람뿐. 히즈키는 눈을 감았다. 「히즈키 나를 해방시켜줘.」 속삭이듯 귓가에 카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사랑의 속삭임처럼 히즈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히즈키의 감겨진 눈에서 굵은 눈물이,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안됩니다. 히즈키님. 어째서 미메이라를 떠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당신은 새로운 계승자가 아닙니까?" "계승자? 흥. 나는 계승 의식 같은 것 거부하겠어." 히즈키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의 어깨에 있는 것은 아주 간단한 소지품만이 담긴 작은 꾸러미였다. 그의 뒤를 몇몇 신관이 따라왔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뚜벅 뚜벅 걸어가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따르 던 사람들 쪽으로 몸을 핑글 돌렸다. "힘을 원하나?" "……………." "제어할 수 도 없는 그런 힘을 원해?" 히즈키는 피식 웃음을 날렸다. "제어 할 수 없는 힘은 무용지물이다." 히즈키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작은 검을 꾹 쥐었다. 이것은 그 힘에 희생된 가엾은 그의 연인의 생명이다. "원한다면 내 능력따위 모조리 주겠어. 하지만 나는 계승자가 되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괴로운 기억을 떠올렸다. 카나린이 남겨준 검에 손을 대면 그것은 언제나 바로 전에 일어난 것처럼 그의 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눈을 감은 카나린. 생명을 놓아버린, 포기해버린 카나 린. 그리고 엘로 화하여 사라져 버린 카나린. "날 이 땅에 붙들어 놓을 수 있을 만한 이유가 있나?" "하지만 대 신관님께서…." "내가 사라지면 나를 대신할 자가 나타나겠지." 그는 몸을 돌렸다. 두 번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곳 이다. "히즈키님!!" 그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두 번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고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히즈키님 가시면 안됩니다." "히즈키님!!" 바람이 불어왔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뒤를 바라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내 려놓았다. "이것으로 끝이군." 그는 허리춤에 매달아 놓았던 작은 검처럼 생긴 이상 한 칼을 꺼내들었다. "카나린." 그의 입에서는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것을 들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겨쥐었다. 파 사삭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실날 같은 바람에 잘려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연녹색의 검이 빛을 받아 반짝여 그의 눈을 부시게 했 다. 그것은 순수한 엘로 만들어진 이상한 검이었다. 바람 의 계승자이면서도 땅의 힘까지 받아들인 탓인지 카나 린이 남긴 그 검은 은백색도, 황금색도 아닌 이상한 연녹색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그 작은 검을 들고 또박 또박, 천천히 한 단어씩 말을 만들어냈다. "나는 이 검, 카나린에 맹세코 두 번다시 이땅으로 돌 아오지 않겠다. 절대로 두 번 다시 나의 능력을 사용 하지 않겠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그리고 절대로…." 바람이 불어왔다. "절대로 이땅을 용서하지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그의 작은 검을 자신의 짐 속으 로 깊숙하게 집어넣었다. 그는 그의 말대로 두 번다시 그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 았고 두 번다시 그의 나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의 이름은 가이칸 히즈키. 후일 그의 후예가 되는 가이칸 아드리안 로체스가 가 이칸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운 것은 아주 오랜 시간 이 흐른 뒤었다. ----------------------------------------계속. 12장 마칩니다. ...유구무언. 다음은 4권 마지막. 13장. 유린의 땅으로.....입니다. 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32 13장 변화 "도대체 이 검은 정체가 뭐야 케인?" 「카나린이라고 했지 않나.」 "그러니까 그런 이름이 붙은 연유가 있을 것 아냐."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 검의 첫 번째 소유자이자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붙었을 뿐.」 "흐응." "시안님. 곧 카브리스에 도착합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아." 기엘은 시안이 녹색의 검을 들고 상당히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도 그걸 들고 고민하십니까?" "기억이 없던 때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궁금한 것은 당연하잖아. 정말 뭐 아는 거 없어?" "글쎄요. 저희가 시안님을 구하러 갔을 때는 이미 가지고 계셨던 것이라 뭐라고 드릴 말이 없습니다." "쳇. 케인한테 물어봐도 내가 정신없을 때라 자신도 느끼지 못했다는 헛소리나 지껄이고. 세 상에는 왜 내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지 모르겠어. 으윽." "인연이 있는 것이라면 분명 그에 얽힌 인연 때문에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이거 역시 굉장히 이상한 거 같아. 물론 생각보다 날도 잘 들고 크기도 작아서 나 름대로 쓸모는 있지만 정체를 몰라서야." 결국 시안의 궁금증은 그냥 단순한 궁금증에서 끝나 버렸다. "하아…." 터덜 터덜, 말이 움직일 때마다 몸이 흔들린다. 처음 아슈레이에 왔을 때, 마차에 타는 것도 말에 올라가는 것도 죽을 만큼 싫어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정 말 잘도 적응했다고 시안은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는 말에 태우면 절대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바락 바락 악을 쓴적도 있었다. 그것에 비하 면 지금은 너무나도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시안은 조금 쪽팔리지만 스스로를 칭찬했다. 기 왕이면 스스로 를 칭찬하고 사는 쪽이 훨씬 좋지 않은가! "그런데 기엘." "네. 시안님 왜 그러십니까?" "그 중간지댄이 뭔지하는 데 말이야."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뭔가 아는 것이 있을까 싶어서 물어보려다 말고 시안은 그만 포기해버렸다. 왠지 중간지대 에 대해서 묻 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가만 그러고 보니 케인은 중간지대라고 안하고 뭐라고 했더라? 어이? 케인. 뭐라고 했었 지? 유-뭐시기 라고 한 거 같은데. 기억이 안나.' 「…유린의 땅이다. 건망증의 천재.」 "아!! 맞아 유린의 땅이라고 했었지." "시안님?" "아,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케인이랑 잠깐- 아주 잠깐 이야기를 나눴어. 기엘은 그냥 기엘 갈 길을 가라 구. 난 상관하지 말고." 어떻게 상관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기엘은 속으로 조금 섭섭해했 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세나케인의 존재는 조금 껄그러운 것이 사실이다. 기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 문제의 세나케인은 시안과 말도 안되는 말싸움을 하 고 있었다. '케인 너 죽었어∼내가 어디가 건망증의 천재냐? 어디서 이상한 말만 배워가지고.'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 뿐이다. 거짓말은 할 줄 모르거든.」 '웃기지마!!' 혼자서 울그락 불그락해지는 시안의 얼굴을 보면서 기엘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카르모니아에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계속 시안의 어두운 얼굴만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하루 이틀 정도야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사실 시안의 그 꽤나 우울한 상태는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던 것이 요 며칠전부터 조금씩 호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뭐 그래도 저만큼 기운을 회복하셨으니 다행이다.' "기엘!!" "아. 왜 로운?" "어떻게 할까? 이대로 좀 속력을 내서 카브리스까지 가볼까? 아니면 천천히 그냥 근처에서 하루 묵고 갈 까? 어느쪽이 놓을 것 같냐?" "글세. 시안님 상태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두르는 것 보다는 좀 천천히 가자구." "그럴까?" 힐끗-하고 로운이 시안의 상태를 살폈다. 시안은 아직도 세나케인과 말싸움을 하는 중이라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기운은 좀 난 것 같은데 표정이 좀 그렇군." "세나케인님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시래. 꽤 즐거워 하시는 거 같지 않아?" "무슨 자가치유를 하는 그런 느낌이군." "저런 식으로라도 기분 전환을 하실 수만 있다면야 바랄 것 없지." "그건 그렇지." 로운은 기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역시 옆에서 보면 좀 우습지만 그래도 시안이 기운이 있어주는 쪽이 훨씬 좋았다. 가만 이 냅두어도 하 루에 몇 번씩 로운에게 대들던 그가 온통 침울해져서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꼴은 정말 보 기 싫었다. "천천히 간다고 해도 확실히 예정보다는 여정이 짧아지겠어 로운. 사실 키리엔을 떠나올 때 는 정말 일년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데말이야." "그 말이 맞아. 사실 그때 저 녀석 말대로 딱 삼개월은 안되더라도 사오개월이면 충분할지 도 모르겠어." "하기사… 꽤 오래된 것 같은데, 가만히 세어보면 키리엔을 떠난지 이제 겨우 3개월 남짓밖 에 되지 않았 으니." 그나마 그 3개월이 다 되어 간다라는 것도 카르모니아에서부터 이제 도착할 카브리스까지 꽤나 늦장을 부리며 마을이란 마을은 다 들리고 시안이 더 있자고 하면 더 머물고 하면서 온 덕에 걸린 시간을 포함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을 길게 느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간을 상당히 힘들게 보내왔다는 뜻이다. "흐음. 로운 이건 어떨까? 시안님께 의향을 여쭈어보고 나메스로 넘어가서 조금 여기저기 둘러서 가는 것은?" "그건 반대야. 뭐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지금 여유가 생기고 위험이 줄었다 고 해도 남아있는 문제점은 여전히 많아. 되도록 무사하게, 온전한 몸으로 돌아가는 쪽이 훨 씬 좋다고 생 각해." 고려의 여지도 주지 않고 로운은 기엘의 의견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나름대로 여행 자체는 상당히 즐기시는데 좀 아쉬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거야. 목숨을 위협받으며 다니는 여행따위는 이제 질색이라고. 물론 위험이 다 없어졌다고 말은 못하겠지만." 로운의 말을 들으며 기엘은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런 심정은 기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응?" "저녀석한테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사실은 키리엔이 걱정 되." "…………."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도 없고.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이 들어서." "…그렇긴 하군." 조금 좋아지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렸다. 두 사람이 조금 우울해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녁 때 다 되어가는데 어떻게 하는 거야--." "아. 시안님. 오늘은 근처 마을에서 잠시 머물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당연하지." 씨익-하고 시안이 웃는 얼굴을 보자 기엘은 순간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로운 도 별반 다르 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리야씨는 왜 안보여?" "글쎄요. 잠시 먼저 '정찰'을 나가보겠다고 해서 특별히는…." "흐응. 확실히 멀지 않은 곳에 있기는 하지만 계속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걸. 그게 정찰인 가?" "어디 계신지 아시겠습니까?" 시안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확실히 이상하긴 이상해. 굳이 느끼려 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감지가 된단 말이야. 얼마전까지만 해도 알려고 해야 간신히 느껴지고는 했는데…" "그러십니까?" 시안은 이상하다고 하고 있었지만 기엘은 속으로 조금은 안도하고 있었다. 시안에게는 생소 하고 이상한 일로 다가왔겠지만 사실 제대로된 바람술사에게는 굳이 느끼려하지 않아도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계내 에서는 자동적으로 감지를 해내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말 이상해. 에라이 모르겠다. 올 때 되면 오겠지. 가자! 가자! 가자! 아자---!" "이상한 구호로군요." "아아. 내가 사는 곳의 뭐 파이팅 구호라고 해야하나. 아. 이걸 설명하려면 일단은 파이팅도 설명해야하 는 건가? 우웅. 영어를 설명하려면 일단 여기에서는 어떻게…우우우 귀찮구만. 쳇." "뭐 의미는 알겠습니다. 시안님." "이봐. 꼬마 그만 떠들고 좀 서둘러. 네가 좋아하는 그 저녁밥을 푸짐하게 먹고 싶으면." 간만에 조금은 무게를 잡아보려 했던 시안은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버린 남자를 노려 보기 시작했 다. "쳇. 정말이지." 역시 로운은 분위기 깨는데는 분명히 천재일 것이라고 시안은 믿어 의심치 않기로 했다. 바 로 지금 이 순 간부터!! "어째서 자꾸 그런식으로 말하는 거야? 난 밥탱이가 아니라고 했잖아!" "……흥." "로운. 이 시안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는데 잘 들어둬. 인간은 살기 위해 먹어. 응? 알았어? 먹기 위해 사는 게 아니야. 나 역시 살기 위해 먹는 거라구. 절대로 먹는 것 때문에 사사롭게 목숨을 걸거나 하지는 않아. 알았어?" "……………." "……………." "나는 살기 위해서 열심히 밥을 챙겨 먹는 것 뿐이야!" 할 말을 잃은 두 남자를 보면서 시안은 이겼다라고 생각하고 흐뭇하게 말을 달리기 시작했 다. 하지만, 그 는 뒤에 남은 두 남자가 사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흐뭇하게 웃 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경우엔 그 말이 맞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먹기 위해 사는 것 같던데….' ♧ 아슈레이 4 가이칸 제국 (하) 33 마지막 편 ♧ "…허억!!"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시안은 번쩍 눈을 떴다. "…………." 새카만 천장에 있는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꿈…을 꾼 건가?' "시안. 어디가 또 안 좋은 거냐?" "아, 아무것도 아니야 로운." "…………." "그냥 좀 목이 말라서."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던 광경. 꿈속에서 시안은 누군지 모를 사람으로 변해 있었 다. 그 얼굴은 시안의 얼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원래 시안의 얼굴, 즉 경하의 얼굴도 아니었다. 기억에도 없는 곳을 걸어다가 문득, 아주 문득 옆을 본 것이 화근이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걷다가 순간 옆을 돌아보자 거기에는 그의 얼굴이, 전신이 비춰지고 있었 다. 처음으로 보는 얼굴. 온 몸에 소름이 돋았었다. '후우… 별 이상한 꿈을 다 꾸는 군.' 눈을 감기가 싫다. 시안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자고 싶어서 환장해본적은 있어도 자기 싫어서 발 악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악몽을 꾸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안은 고개를 돌려 로운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이리야가 누워 있다. 기엘이 없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불침번을 서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사… 저들은 나보다 훨씬 못자고 있는데 이런걸로 우는 소리 하는 것도 우습단 말이 야.' 자신이 악몽에서 깰 때마다 반드시 누군가 한명이, 때로는 두명이 동시에 깨어나 버린다. 그 런때면 정말 자신이 어린애처럼 느껴져서 자괴감 마져 드는 것이다. '케인….' 「왜?」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악몽을 꾸지 않게 해달라는 소리는 하지마. 그렇게 까지는….」 '그런건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내가 깰 때마다 저들이 자꾸 깨니까 미안해. 신경쓰이게 하 는 것 같고.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방법 없을까?' 「소리를 차단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 그럼 부탁해.' 「너는 네가 원하면 내가 뭐든지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안해주면 또 어쩔건데. 괜한 심통부리지 말고 해줘.' 「………….」 '그럼 부탁해. 난 잔다 케인.' 그리고 시안은 그대로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부디 악몽을 꾸지 않기를 바라면서…. "헤에…." "화려하군요." 시안은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여기 저기 눈을 돌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축제야?" "아아 조금 전에 알아보니 카브리스의 어떤 성인을 기리는 기념제라고 하더군요." "성인? 여기는 별거를 다 가지고 축제를 하는 군." 하기사 생각해보면 자신이 살던 세계에도 이렇게 성인을 기리는 축제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 다. "뭐. 내가 살던 데서는 이상한 것도 있었어. 성 발렌타인 데이라고 초코렛 냄새가 진동하는 날." "초코렛이요?" "그런게 있어. 새카만데 엄청 단 거." "…………." "흐응. 하지만 여기 사람들 정말 결사적으로 놀고 있는 것 같아. 일하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글쎄요? 뭐 축제라고 하는 것이 쉬고, 또 놀기 위해 있는 거니까.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 겠지요. 키리 엔에도 일년에 몇 번씩 축제가 열린답니다." "뭐 한가해서 좋긴한데…." 온 몸이 나른했다. 따스한 햇빛이 온 몸으로 쏟아지고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장식들이 된 거리를 보고 있 노라면 왠지 잠이라도 더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운이랑 이리야씨는 꽤 멀리 있는 거 같은데 뭘 하는 거야?" "이것 저것 필요한 것이 있어서 구하러 갔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큰 성이라 물건도 다양 하게 많으니까 요." "그래?" "아직은 시간이 꽤 있으니 조금 더 거리를 둘러보시겠습니까? 기왕 여행하는 건데 기분은 내셔야죠." "뭐 어차피 요 며칠은 그런 기분으로 다니고 있어." 기엘이 이끄는데로 시안은 끙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햇빛이 내리쬐는 곳에 앉아있으려니 늙은이가 된 기분도 조금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늙은이가 아니라 햇빛쬐는 고양이 쪽이 나을지도 몰라. 흐음.' 화려한 치장을 일행들이 시안의 주위에 우르르 몰려왔다. '고양이 팔자는 상 팔자라던데… 역시 고양이가 되는 쪽이 좋았을지도 몰라. 그러면 이런데 불려오지도 않았을테고." 뒤를 돌아다보자 기엘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게 보인다. 뭐 일단은 잔소리만 늘어 놓는 로 운이나, 보호 자는 커녕 자신보다 훨씬 놀기를 좋아하는 이리야보다는 기엘쪽이 훨씬 편하긴 하다. '아아. 무슨 거시기한 신분이라고 24시간 보디가드를 달고 다녀야하는 건지 참나.' "기엘!! 중심가로 더 가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괜찮을 겁니다." "오케이∼." "같은 가이칸 제국이라고 해도 확실히 넓기는 넓은 땅인가봐." "뭐니뭐니해도 아슈레이 최고의 국가이니까요." "흐응. 이런 말은 뭐하지만 이 카브리스 성이 키리엔보다는 훨씬 큰 것 같아." 시안은 씨-익하고 웃어보이면서 살짝 기엘을 도발해봤다. 보나마나 뻔할 뻔자 그래도 키리 엔이 크다고 우길 것이다. "규모는 큽니다." "에?" 기엘이 간단하게 인정을 해버리자 시안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싶었다. 아무리 실제로 작 다고 해도 기 본적으로 자신의 나라에 대해 애착을 좀 느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어이. 이봐. 로운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거야." "아닙니다. 사실인데 어째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확실히 규모로보나 상주 인구로 보나 키 리엔은 이 카 브리스를 따라 올 수는 없습니다." '하이고. 지금 그런 소리를 하는게 아닌데 말이야.' 사실은 이 기엘이라고 하는 기사는 보기보다 상당히 고지식한게 아닐까 싶다. 물론 좀 고지 식한 것은 알 고 있었지만 생가보다, 그리고 상상보다 훨씬, 아주 많이 고지식한데다가 가끔은 답답한 인 간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기사 그러니까 그러고 무작정 쫓아왔겠지.' 그러고보니 이리야한테 들은 말이 있었다. 자신이 카드미엘로 끌려갔을 때 기엘과 로운이 얼마나 무지막 지한 방법으로 열심히 따라왔는지를 말이다. 스윽-하고 시안은 기엘을 다시한번 쳐다보았다. 그러자 기엘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무슨일 이십니까!!하 는 표정을 해보인다. "하이고∼ 차라리 강아지를 키우는게 낳을 것 같네." "네? 시안님?" "아무것도 아니야. 기엘. 어라?" 기엘에게 대답을 하다 말고 시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돌아오고 있어." "로운들 말씀이십니까?" "응. 좀 이상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편해. 그건 그렇고 이젠 돌아가 봐야하는 거 아니야? 숙 소에 돌아와서 나랑 기엘이 없는 것을 알면 좀 걱정을 할테니까. 칫. 어차피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거 다 느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르죠. 시안님." "그럼 얼렁가자구. 늦으면 또 로운이 도끼눈을 뜨고 잔소리를 퍼부을게 틀림이 없어." "하하하하하." 그리고 시안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길을 다 외운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오는 내내 큰 길을따라서 일 직선으로 왔기 때문에 길을 잊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으으으-정말 사람 많다." 마치 이전에 현실 세계에 있을 때, 주말에 친구들과 어울려 종로나 명동 같은곳에 갔던 때 가 생각날 정도 다. 눈을 제대로 뜨지 않으면 금새 어깨가 부딧혀버리고 만다. '죽이는 군. 여기 와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보기는 처음인 것 같아.' 좀 답답하고 힘들긴 하지만 시안은 왠지 즐거워졌다. "으음. 여기 축제가 끝날 때 까지 머물면 안 될까? 기엘?" "끝날 때 까지는 힘들어도 이틀 정도는 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에엑- 이 축제가 그렇게 길게 하는거야?" "지나가던 사람들의 말로는 8일 동안 계속 된다고 하더군요." "우와--- 그렇게 놀면 이 사람들은 뭐한--우악!!" "아앗.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인지 기엘과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을 파고 있던 시안은 앞에서 오던 작 은 소년과 부 딧혔던 것이다. 소년의 머리는 꽤나 단단했던지 부딧힌 팔이 아릿했다. 하지만 시안은 부딧힌 곳을 문지르 면서 대답했 다. "아. 괘, 괜찮은데요." 언 듯 보기에도 한 대 때리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얼굴을 하고 있는 고아소년 같았다. "죄송합니다." 울먹하는 얼굴이 푸욱 숙여지더니 다음 순간 소년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헤에∼." "괜찮으십니까?" "그정도 가지고 그말 안해도 돼. 도대체 기엘은 그 말을 하루에 몇 번하는 줄알아? 세보지 는 않았지만 하 루에 10번은 더할 거다! 10번은!! 으응?" 말을 하다 말고 시안이 갑자기 자신의 허리춤을 몇 번이나 투둑 투둑 하고 쳤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몸위를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시안님??" "…………." "저어…." "도.둑……." "예?" "제---엔장. 카나린을 도둑맞았다구----! 열받아!!" "네에?" "아까!! 그녀석!! 그녀석이 소매치기였어!!!! 크아악. 젠장 그렇게 흔한 방법에 속아 넘어가다 니~ 아아아 악----!!" "시, 시안님." "잡아낼 거야!!!!" 시안은 버럭 버럭 화를 냈다. 차마 기엘에게 설명은 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가 이렇게 화 를 내는데는 나 름대로 이유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뭔고하니 사실 시안은 흥분해서 소리를 치는 내용 그대로 아까 자신에게 부디혀 온 소년이 카나 린을 훔쳐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그 카나린에서 항상 느껴지던 희미한 엘 의 파장이 자 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서야 도둑맞은 것을 꺼달았던 것이다. "으윽!!! 한심해!! 한심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시안은 그 자리에서 검의 파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면서 손을 뻗었다. 슈우우우우----- 순간 시안의 손에서 한줄기의 바람이 쏟아져나왔다. 그것은 시안의 몸에서 흘러나오자마자 마치 살아 있 는 뱀 같은 현상이 되어 사람들의 사이로 파고 들었다. "우, 우아악!!!" "시안님?" 기엘은 시안이 화를 버럭 버럭 내면서 몸을 돌리다가 말고 갑자기 자기의 손을 움켜쥐면서 비명을 지르 자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두근 두근 두근. 시안은 방금 전에 눈앞에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허--헉." 하지만, 다음 순간 시안은 그의 눈앞에 두둥--하고 나타난 카나린을 보고는 귀가 터질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 "혹시 세나케인님이 하신 것은 아닙니까?" 도리도리도리도리. "그 말이 정말이야?" 도리도리도리도리. "그래도 난 그 세나케인씨가 의심스러운데 말이야."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저 녀석이 혼자 한 거야.」 시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세나케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게 정말인건가?" "그렇다니까!!!" 시안이 두근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소리를 쳤다. "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케인!!" 「………….」 "설명을 해봐!!"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떠는군.」 "좀 떨면 어때!!" 핏-하고 세나케인이 웃었지만 4사람중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 웃지는 못했다. 말이 호들갑이지 사실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난리를 떨면 호들갑을 떤다고 하는 법이다. 바람술을 자연스럽게 쓰게 된 것 뿐이잖나.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이. 이게 어디가 자연스럽게 쓰는 건데!!" 「넌, 내가 바람술을 쓸 때 주문을 외우는 것을 봤나?」 "…아, 아니." 「스스로의 능력을 자각해 나가고 있는 것 뿐이다. 어차피 이제 유린의 세력권 안에 들어섰 으니 그 정도 의 자각이라도 해주지 않는 다면 그쪽이 더 이상해.」 "하. 하지만 이건…." 아무도 세나케엔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단 한 명, 시안을 제외하면 말이다. 「원래 바람술이란 것은, 아니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힘을 쓰는 것 뿐이지. 너는 네 팔을 움직일 때 팔을 위로 올려서 저 앞에 있는 물건을 손가락을 잡아 올려서 입가로 가져와라고 명령을 하지 는 않는다. 왜냐하면 굳이 말로 해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시안은 세나케인이 설명을 하는 동안 눈만 말똥 말똥하게 뜨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너는 바람의 계승자다. 바람정도는 네 수족을 부리는 것과 같이 부릴 수 있어야 해. 물론 익숙해질 때 까지는 사고를 좀 치겠지만….」 "그, 그러니까 결국 그게 문제잖아!!! 네가 말하기도 전에 사고를 쳤다구!!!" 시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까 그거!! 그걸 도로 가져오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맘대로 바람이 일어나더니 가서 가져온 것 까지는 좋 다 이거야. 하지만 갑자기 그러면 사람이 놀라잖아!! 놀라는 바람에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 는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들의 주위로 휘잉-하고 찬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너무나 멋진 소리로 뻐꾸기 비슷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 다.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주위에서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마져 들려왔다. "너무 놀라서 주위를 모조리 날려버렸잖아!!! 이 바보 멍청이 케인!!" 「그게 어째서 내 잘못이지? 네가 잘 제어하지 못해서지 않나.」 그렇다. 카브리스에서 열리는 축제 한가운데에서 카나린이 마치 살아 있는 것 처럼-동양적으로 이 야기하면 거의 어검술의 경지였다.-둥둥 떠서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그만 놀라서 자폭(?)을 해버렸던 것이 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안 본인이 말이다. 결국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기엘이 시안을 냅다 안고 도망을 쳤고 얼결에 로운과 이리야도 함께 도망을 쳐나왔다. "결국 큰 문제는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군." 로운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결론을 내렸다. 시안과 세나케인은 아직 대치 중이긴 하지만 어차피 저 팀은 허구헌날 저러는게 일상 생활 이다. "나온 것은 좋은데 너무 급하게 나와서 결국 노숙이야." "할 수 없지 뭐. 로운. 그래도 시안님이 무사하시니 다행이잖아." "무사? 흐응 앞으로는 저 녀석한테 누가 덤빌 수나 있겠어?" "그렇지!! 앞으로는 저 녀석한테 손도 못대겠군. 화나서 화악-하고 바람술을 써버리면 끝장 이잖아." "이리야씨!! 그렇게 말씀하시면 시안님이 섭섭하실 겁니다." "섭섭해도 사실은 사실이라구." 시안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나름대로는 그 황당한 일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동안 시안과 세나 케인은 여전히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주문 외우는 것 꽤 싫어하더니 잘 된 거 아니야?」 "잘 되긴 뭐가 잘 되! 나름대로 주문을 외우는 것도 멋지구리 한데 이게 뭐냐구!" 「어차피 쓸 수 있는 주문도 몇 개 없었던 주제에 기뻐할 것이지.」 "시끄러워!!" 시안은 울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름대로는 우울한데 왠지 우울해질 거리가 또 하나 늘어나 버린 것이다. 역시 이 세계엔 자신이 이해 못할 것들이 너무 너무나 많다. '으으. 난 상식적인 인간이었다구.' 우울하고 또 우울하고 또 우울하다. "으으윽!! 돌아가고 싶어!!!!!" 결국 시안의 화풀이는 다른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돌아 갈 거라구!! 돌아 갈 거야!! 이놈의 바람술이고 뭐고 다 필요없으니까 돌아갈래!!!" 팔을 내저으며 발을 구른다. "아악!! 돌아갈 꺼야!! 꼭! 돌아갈 거라구!! 그런 시안의 모습을 보면서 세나케인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 돌아가야지. 하지만… 일단은 먼저 유린의 땅에 가는게 급선무라구.」 오밀조밀, 새카만 밤하늘 밑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일행들. 그들의 뒤로 멀리 높은 산맥의 산자락이 쭈욱 삐져나와 검게 비춰지고 있었다. 그곳은 그들이 가야할 곳, 즉 아슈레이 중간지대-유린의 땅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 가이칸 제국 (하) 마침. 가이칸 제국의 마지막 편이었습니다. 헉헉..가이칸 제국 이야기...정말로 두권을 채우는 군요. --; 사실은 한권 반..정도 에정이었답 니다. 가이 칸 제국 이야기는.....헥헥헥. 여하튼. 그래도 이제 유린의 땅 대문까지 왔으니...후후후 반절은 넘은 거다..라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이제......4권도 마감했으니..당분간은 좀 쉬고(하트) 심기일전!!해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전지충전(잠자기)하러...쿨럭 [아슈레이] 제 5권 유린의 땅 (1)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1장 편안한 길, 험한 길 구름이 덮인 산등성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타닥 타닥 소리와 함께 산자락을 적시는 비는 깨끗하고 투명한 물방울들이었지만 그 물방울들이 가득 떨어진 지면은 산을 오르 는 여행자의 발을 자꾸만 붙들어 버리는 장애물이었다. 아슈레이 대륙의 동북쪽에 위치한 험준한 산맥들보다도 훨씬 더 악명을 떨치고 있는 라치온 산맥. 그 산맥은 마치 아슈레이의 중 간지대를 감싸는 듯 중간지대 둘레에 형성되어 있는 산맥이다.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고, 혹 안으로 들어간 그 어느 누구도 돌아 올 수 없게 하는 마의 산맥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바로 이 라치온 산맥이다. 그러나 지금 그 라치온 산맥, 가이칸 제국쪽의 한 자락으로 4사람이 열심히 발걸음을 재촉하며 오르고 있었다. "우- 질척 질척해. 로운. 좀 어디서 비를 피하면서 쉬다 가면 안 돼?" "이 빗속에서 어디서 쉬겠다는 거야?" 차가운 대답이 얼굴을 때리는 비와 함께 돌아왔다. 시안은 말이라도 좀 곱게 해주면 얼마나 좋아라고 궁시렁 거리면 서 발을 옮겼다. 시안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비는 주룩 주룩 내 리고 있고 비에 젖은 산등성이는 미끄럽고 질척거리고 거기다가 으슬으슬 한기까지 뿜어대고 있는 형편이다. "에이!! 그러니까 내가 좀더 리튜나스에서 쉬다가 비가 그치면 가자고 했잖아!! 그렇지 않아도 험한 길인데 조금 쉬다가 가면 어디가 어때서!!!" "시안님. 자꾸 소리를 치시면 더 지치십니다." "시끄러워!!!" 때리는 누구보다도 말리는 누가 더 밉다고 시안은 기엘에게 분통 을 떠드렸다. 시안의 호통을 듣고 조금 뻘쭘해진 기엘에게 이리야가 다가왔다. "어이 이봐. 괜시리 뭐라고 하지 말고 그냥 가. 하기사 나도 기 왕이면 우기는 피하고 싶었다구. 당신들이 바쁘다고 서둘지만 않 았으면 말이야." "뭐. 사정이라는게 그렇게 저희 형편에 맞추어 주는 것은 아니니 까 어쩔 수 없지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까지는 없고, 저 녀석이야 냅두면 알아서 가잖아. 쓸 데없이 찔러서 잔소리 듣지 마." "하하하하." "이리야!!! 당신마저 기엘이랑 로운 편을 들어버리면 어떻게 해! !" "뭐 어쩌긴. 그렇다고 갈 길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기왕이면 협력해서 얼렁 얼렁 가는 쪽이 좋지." "에이. 정말이지 비 오는데 산행이라니." 얼굴을 적시는 빗방울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빗사이로 스며드 는 풀잎과 흙 냄새.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것들 이다. 비에 젖은 바위를 보자 아지랑이 사이로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 떠올랐다. '경하야. 조심하지 않으면 미끌어진다.' '하하. 이정도는 껌인데…우악!!' '거봐라. 어른 말을 무시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에이. 아버지도 참.' 순간 물을 머금어 진흙상태가 되어 있는 곳에 발을 디디는 바람 에 주르르륵 시안의 몸이 미끌어졌다. "…우아악!!" "위험해!!" 이리야가 재빨리 달려와 팔을 잡았다. "나 참. 어딜 보고 걷는 거야." "……미안." 시안이 순순하게 사과를 하자 이리야는 왠지 뻘쭘해져서 옆으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 다. 보통 때라면 사람이 넘어질 수도 있지! 라고 하면서 펄펄 뛰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어디 다쳤어?" "아니 별로." 그렇게 말하면서 시안은 이리야의 얼굴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바라보자 이리야는 주춤 주춤 하 면서 슬그머니 눈을 피하려했다. "이리야." "으…으응?" "당신 물의 술사잖아." "그, 그래서?" 반짝 반짝 빛나는 시안의 눈. "비를 그치게 해달라고는 말 안 할 테니까 이거 안 맞게 해줄 수 없어?" "뭐어?" 시안의 발언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있던 남자들의 몸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쉴드 같은 거 써서. 몸에는 비가 안 맞게. 응?" "…………." "이렇게 몸 둘레에 경계선이 생기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 야. 응? 생각하고 보니 정말 멋진 방법이잖아? 왜 이런 것을 지 금 생각해낸 거지?" 시안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둘레에 사람 모양을 그려 보이며 즐겁게 말했다. "………저기 시안님." "뭐 늦었다고 해도 정말 천재적인 방법이로운. 역시 난 생각보다 는 훨씬 머리가 좋은 진짜 천재일지도 몰라." "시안님…." "응? 이리야. 얼렁 해줘." 혼자서 자화자찬을 하던 시안은 아무래도 주위 공기가 조금 이상 한 것을 느끼고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느 누구도 미소를 띄 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 아하하하하. 아. 안 되는 거야? 설마?" "설마는 무슨! 당연히 안 돼." 단호한 목소리로 로운이 대답한다. "너 편하라고 쓰잘데없이 그렇게 힘을 낭비한다는게 말이나 돼?" "하. 하지만…." "좀 조용하다 싶었더니만 어디서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말이다. 요 며칠간 나와 기엘이 가르친 것은 어디로 들은 거지?" "아하하하하.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한테 가르쳐준 건 바람술이지 물의 술은 아니잖…." "기본은 같아!!" 벼락같은 로운의 노성. 결국 시안은 갱하고 꼬리를 내릴 수 밖 에 없었다. 그러나 시안은 절대로 깨끗하게 승복하지는 않았다. "안 되면 그냥 안 된다고 하지. 뭘 그렇게 샐쭉한 여자애들처럼 화를 내고 그래. 역시 로운에게는 멸치 볶음을 먹여야 한다니까. " "……너…." "칼슘이 부족하면 화를 잘 낸다고 하더라구. 아. 칼슘이 뭔지 모 르나? 으음. 그럼 비슷한 것을 찾아봐…우악!!" 불끈하고 로운의 이마에 솟아오른 힘줄을 보자마자 시안이 후다 닥 뛰어가기 시작했다.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로운은 주먹을 꾸욱 쥐고는 그 뒤를 쫓아갔다. 그런 로운을 돌아 보며 시안은 냅다 뛰어 도망간다. "가까이 오지마!! 따라오지마!!" 후두둑 비가 떨어져 갈색의 옷자락을 적신다. "으악----기엘 살려줘어!!!" 시안의 비명아닌 비명이 비에 젖은 산등성이에 길고 길게 늘어지 며 퍼져나갔다. ----------------------------------------------계속 ....음...정리 작업이 쉽지는 않군요. -_-; 오프닝에는 언제나 시간이 좀.... 쿨럭. 늦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매일 매일 부지런히 올리겠습니다. ^^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 1장 편안한 길, 험한 길 (2) *** "……우리에게 당신의 개가 되라는 말을 하고 있는건가?" "무엄하오." 불끈하며 한 사람이 달려들려 하자 로렌이 손을 들어 그것을 막 았다. "폐하." "황제의 개가 좀 되면 어떻소. 최고의 사냥개가 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의 말을 막고 로렌은 직접,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냈다. "………." 검은색 일색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네 사람의 남자는 뻣뻣하 게 서서 로렌을 바라보았다. 광택없는 검은색의 옷감은 마치 주 위의 빛을 흡수하고 있는 듯해서 그들이 서 있는 주위는 이상하 리 만치 어둡기만 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씨익하고 로렌의 입가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중앙 지부가 박살이 났다고 하던데. 그것뿐만이 아니라 최근 몇 개의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고 들었소. 이런 상태에서 내 지원을 받아 재정비 를 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겠소." 그의 말에 제일 뒤쪽에 서있던 남자의 옷깃이 눈에 띌 만큼 흔들 렸다. 로렌의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꾸 미고 있는, 왠지 존재감이 흐린 사람들이었다. "하셰카에 별로 좋은 기억은 없지만, 난 과거를 문제 삼을 생각 은 없소." "……………." "간단하게 말하지. 필요에 의한 계약정도가 어떻겠소? 당신들이 충실하게 황제의 개가 되어 움직인다면 나는 충실한 개에게 과할 정도의 보답을 하겠소." 로렌의 차가운 말에 마치 주위가 얼어 붙는 것 같았다. 그 옆 한쪽에 서 있던 카스핀 리우 미타 남작은 상황을 지켜보며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머지는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그가 눈길을 주는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메로스 케이룬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미타남작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메 로스 같은 종류의 인종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충분히 알고 있 었다. "맡겨주십시오. 폐하." 조용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옮기는 로렌의 뒤를 따랐다. "중간지대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역시 중간지대로 들어가는 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이대로라면 곧장 중간지대로 진입할 테고 그러면 더 이상의 추격은 불가능 하오." 두런 두런 몇 사람의 남자들이 커다란 수경 앞에 있는 사람의 주 위에서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새카만 두건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이것이 황제의 입김이 들어간 일이라는 것은 역시…." "가이칸 황제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해도 원래부터 우리가 해야했 어야 할 일이 아니오. 어차피 우리에게는 일석 이조의 일. 망설 일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3장로인 엘핀 수페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원래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말살이 아니었습니까? 이렇 게 되면 계약 파기가 되는 겁니다." "계약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이득이 있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비록 계약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우리 하셰카의 불문율이자 제 1원칙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그들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할 만 큼 했습니다. 지난번 그 성에서의 사건으로 두사람의 장로를 잃 지 않았소이까." 엘핀 수페스의 말에 반박하던 제 7장로는 할말을 잃었다. 계약 완수는 틀림없이 그들 하셰카의 절대 명제이긴 하다. 하지 만 그들은 암살단이다. 대륙 최대의 조직. 검은 암살단 하셰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명예도 그 무엇도 아니다. "이전의 계약은 이미 파기되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지난날에 연연 하고 있어서는 아무런 발전도 없습니다. 같은 목적으로 두가지의 이익을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황제의 개가 되는 것은 또 어 떻습니까? 황제의 개가 되든, 누구의 개가 되든 우리가 하셰카임 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황제의……." "언제 누가 진심으로 황제의 수족이 되자고 했습니까?" 엘핀 수페스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황제 역시 우리에게 계약이라는 단어를 내걸었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조건에 따라 계약을 맺어 그것을 이행 할 뿐입니다." 조용한 침묵이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엘핀 수페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황제와의 첫 번째 계약. 그것을 실험과 제로 생각합시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황제에게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 미묘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엘핀 수페스는 거대한 수경과 그 수경을 관장하고 있는 또 한 명 의 장로에게 다가갔다. "우리의 목표는 곧 우리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질지도 모릅 니다. 결단을 하기 위한 시간은 짧습니다. 바람은 기다려주지 않 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는 투명한 수경에 비친 4사람의 인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심사숙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 "시안님 그 열매에는 독이 있습니다." 살며시 나무열매를 향해 손을 뻗던 시안은 흠칫하고 손을 당겼 다. "정말?" "네. 미지륜이라고 하는데 치명적이진 않지만 먹으면 몸이 마비 되는 증상을 유발합니다." 기엘이 다가와서 시안의 손을 살폈다. "에헤." 시안은 화려한 붉은 색으로 반짝이는 사과 비슷한 열매를 바라보 았다. 중간지대에 가까워져가면 갈수록 다른데서는 보지 못했던 희안한 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식물뿐만이 아니었다. 가끔 눈에 띄는 동물들도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그건 그렇고 로운은 어디 간 거야?" 시안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교적 꽤나 평평한 평지가 있는 곳에 도착한 그들은 하룻밤을 노숙하고 조금 전 일어난 차였다. "사냥을 하러 갔습니다. 이리야씨는 마실 물을 모으고 계시구요. " "흐음. 뭔가 굉장히 멋지네. 흐흐흐." 시안은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어서 히죽 히죽 웃으면서 기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 있는 남자는 아마도 자신의 보디가드(?) 격으로 남은 것일 것이다. 기엘과 로운이 번갈아 식량을 구해오고 이리야는 주로 마실 것이 나 땔감을 조달한다. 사실 가끔은 현재의 일행 중에서 자신이 제일 쓸모 없는 인간으 로 생각되곤 했지만 그런 것쯤은 모르는 척 얼버무리고 만다. '일단 내가 제일 중요한 인물이라구. 후후후후.' "멋지다구요?" "응. 상당히 멋진 파티잖아. 각기 알아서 자기 일들을 하는… 어 ?" 말을 하다 말고 시안은 귀를 쫑긋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소리 안들려?" "소리요?" 기엘이 고개를 돌리며 귀를 기울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로 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기엘---- 조심해!!! 타큘라가 그쪽으로 간다." "타큘라가 뭐야?" "네? 타큘라요?" "응." "타큘라는 검은색의 털이 난 몸집이 커다란 돼지와 비슷한 짐승 입니다. 하지만 상당히 난폭해서 사냥하기가 쉽지 않은 동물입니 다. 그런데 갑자기 타큘라는 왜…." "그게… 아무래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아." "뭐라고?" 심혈을 기울여 물방울(?)들을 모으고 있던 이리야가 시안의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차르릉 소리와 함께 기엘이 자신의 라이트를 뽑아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로운의 날카로운 고함소리는 이제 기엘의 귀에 도 똑똑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시안님 나무 위로 올라가십시오!!" "에?" "어서요!!!" "우악!! 도대체 이게 무슨 소동이야!!" 고요한 아침의 정적을 깨고 로운의 목소리와 함께 두두두 땅을 울리며 한 마리의 동물이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 다. 그 동물은 시안의 눈에는 마치 멧돼지와 비슷하게 보였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시안이 아니는 멧돼지가 갈색의 털을 가지고 있는 반면 타큘라는 전신이 검은 색의 털로 덥혀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멧돼지보다도 훨씬 더, 흉폭하게 생겼다. "케엑------!!!!" 타큘라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느끼하지 않고 맛있는 살집을 가지 고 있지만, 그것은 죽은 다음이 이야기다. 살아있을 때의 타큘라 는 어지간한 사냥꾼이 아닌 이상 절대로 손을 대지 않은 엄청나 게 흉폭한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저런 걸 잡으려는 거야!!" 시안이 우아아아하고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멀리서부터 일직선으로 뛰어오고 있는 그 짐승은 다리께에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이미 반쯤은 정신이 나가있는 듯 거품을 내뿜으 며 앞도 보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흉흉하게 콧김을 내뿜고 있는 타큘라를 피해서 시안은 열심히 나 무에 올라가려고 했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언제 뒤를 덮칠지 모르는 저 시커먼 동물이 주는 위압감도 만만 치 않았다. 주르륵하고 시안의 발이 몇 번이나 미끌어지는 동안 타큘라는 점 점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쿠르르르르륵--- 귓가에까지 생생하게 울려오는 울음소리. "끄아아아악!! 빨랑 잡아!!!" "피해!!" 그것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시안을 향해 곧바로 달려갔다. 타 큘라가 다가오는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던 시안은 냅다 비명을 질 렀다. "우악!! 왜 나한테 오는 거야-!" 징그러- 징그러- 징그러------. 속으로 마구 비명을 지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직선으로 달려오 던 타큘라가 방향을 바꾸어 줄리는 만무. 타큘라는 막무가네로 시안이 열심히 올라가려고 하는 나무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으악!!! 빨랑 잡아!!!!" 슈칵--- 기엘의 라이트가 빛을 발했지만 그것은 타큘라의 진행방향을 아 주 조금 바꾸었을 뿐, 그 짐승은 방향을 약간 틀어서 이리야쪽으 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아아악----- 왜 내쪽이야!!!! 젠장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미친 짐승을 본 이리야가 황급하게 손을 들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리야 노운…." "주문은 안 돼!!!" 뒤늦게 달려온 로운이 뒤에서 이리야에게 소리를 쳤다. "그.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주문은 안 돼!" 그렇게 말하며 로운은 등에서 재빨리 남은 두 대의 화살을 꺼내 활 시위에 걸었다. "빨리!!!!" 두두두두두. 흉흉한 콧김을 내며 달려오는 시뻘건 눈의 타큘라. 이리야는 이제 도망가는 것도 잊은채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으아악!!!" 휘이이잉--------- 날카로운 바람과 함께 화살이 날랐다. 꿰에에엑. 꿱---엑!! 타큘라의 비명소리가 시안이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를 찢어놓듯이 들려온다. "기엘!! 지금이야!!!" 단단한 화살을 다리에 맞은 타큘라가 휘청하는 그 찰나의 순간 기엘의 라이트가 다시 한번 위에서 아래로 날카롭게 내리그어졌 다. 꿰에에에엑-------- 단말마의 비명(?)소리. 그렇게 이른 아침의 소동은 가까스로 끝을 맺었다. --------------------------------------------계속 덥습니다. --; 왜 이리 더운 걸까요? 쿨럭...--;;; 더우면.....능률이..반 땅 이하로 떨어지는 전...이 새벽. 에어컨을 킬까...말까..고민하는 중입니다.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1장 편안한 길, 험한 길 (3) "정말이지 돼지 멱따는 소리가 따로 없군." 시안은 아직도 귀에 타큘라의 비명소리가 늘어 붙어있는 것 같아 서 몸서리를 쳤다.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모닥불에는 엄청나게 큰 사이즈의 멧돼지 비스무르한 동물이 통째로 구워지고 있다. "꼭 이렇게 통째로 구워야해?" "훈제를 해놓으면 당분간 식량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구수한 냄세가 풍겨나오는 거대한 통구이를 한번 더 돌리면서 기 엘이 대답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무슨 사철탕용 개를 잡은 것도 아니고…." "사철탕이요?" "응. 그건 개를 잡아서 불에 그슬려서 만들거든." "불에 그슬린다라… 통구이와는 다른 겁니까?" "조금 달라. 뭐. 별로 유쾌하지는 않지만 먹을 만은 해. 내가 있 던 곳에서는 여름에 이열치열이니 하면서 먹어." 이열치열이 무슨 말인지 알리는 없었지만 기엘은 그냥 고개를 끄 덕였다. 시안이 가끔 말하는 이상한 단어들에는 이미 면역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러나. 설마 여기 저런 것들이 우글 우글 한 곳이야?" 잠시 잠깐의 순간이긴 했지만 시안은 이젠 앞에서 먹음직스러운 통구이로 변해있는 짐승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곳이라 다른 곳보다 는 훨씬 산짐승들이 많은 곳입니다. 가끔은 몬스터조차 출현을 하기 때문에…." "모, 몬스터?" "네." 놀란 토끼눈을 한 시안에게 기엘이 설명을 했다. 사람 얼굴모양의 혹이 등에 있어서 흐릿한 안개속에서 사람을 유 혹해서 잡아먹는 다고 하는 게이륜이라던가 돼지 비슷한 얼굴에 거대한 인체형의 체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바쿠, 거대한 도마 뱀처럼 생겼지만 이빨과 몸에 나있는 돌기에 독을 가지고 있다는 괴물 루카츠등등 기엘이 줄줄 읊어대는 몬스터 리스트는 끝이나 지 않는다. "그. 그만!!! 우어. 밥 맛 버렸다." "무슨 소리야? 네가 밥 맛을 버릴 리가 없잖아. 안그래?" 이리야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딴지를 건다. 그에 맞추어 로운 역 시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지 밥벌레라고 해야하나? 밥 벌레가 밥을 안 먹으면 뭘 먹 겠어?" "이봐 로운!!!" 가만히 들어주기엔 역시나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을 해오는 로운에 게 시안은 쌍심지를 켜고 대꾸한다. "왜?" "내가 어디가 밥 벌레냐!!!" "음. 요즘에는 좀 덜 먹긴 하지만 원래부터 밥 벌레 아니었어?" "말 다했어?" "그래. 다 먹었으면 이리야에게 대충 맡겨놓고 너는 이리와." "사과해!!!" "바람 술 안 배울거야?" 살랑 살랑. 로운이 시안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인다. "말꼬리 돌리지 말란 말이야!!!" "말꼬리는 무슨. 가르쳐 달라고 한 건 너야." 씨익- 웃어보이는 로운을 향해 시안은 뭐라고 더 이상 말도 못하 고 속을 부글 부글 끓였다. '젠장. 나중에 진짜로 바람술을 마스터하기만 해봐. 제일 먼저 한방 쳐주겠어!!!" 하지만 그것은 시안의 생각일뿐. 시안의 바람술이 로운을 따라가 려면 아직도 멀고 먼 이야기다. "시안님. 조금 더 드시겠습니까?" "냅 둬!! 나중에 먹을 거야!!" "안 먹는 다는 소리는 절대로 안 하는 군." "……………." "뭐해? 빨리 따라와." 으드득-하고 주먹을 쥐고 시안은 마치 성난 짐승처럼 로운의 뒤 를 따라갔다. 그 뒤에서 이리야와 기엘이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요상한 표정을 짖고 있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 "안 돼?" "으음." 시안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를 썼다. 왜 이렇게 안 되는 걸까하며 머리를 굴려보지만 스스로 깨닫기에 는 아는 것이 너무 없다. 물론 짐작을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을 입밖으로 내고 싶지는 않다. "힘들군." "…………." 시안이 안 되는 것을 어떻게든 하려고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 만 역시나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으로는 답답하기 이를데 없다. "분명 할 수 있었는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냥 단순하게 느끼란 말이야." "하지만…." 매사 조금은 장난스러운 시안이지만 바람술을 배울때만큼은 상당 히 진지하다. 하지만 그 진지함에 비하여 시안이 배우는 속도는 완전 반 비례. 그나마 이전에 할 줄 알았던 몇가지 바람술마져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시안은 울상을 지었다. "안 되는 것을 가지고 너무 애를 쓸 필요는 없어." 왠일인지 로운이 툭툭하고 시안의 어깨를 두들겨 준다. 하지만 시안은 로운의 손길은 아랑곳 하지 않고 몇 번이나 다시 주문을 외워댔다. "좀 쉬어라." "…………." 어린애처럼 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완전 토라진 어린애같은 시안. 그런 시안을 두고 로운은 자리에 서 일어섰다. 왠지 시안이 이렇게나 주문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 은 아무래도 시안 자신의 탓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부르면 와." "알았어." 로운이 자신의 뒷 모습을 몇 번이나 돌아보면서 가는 것을 아는 지 모르는지 시안은 골똘히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 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주문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문은 능력을 쓰지 못하는 만큼, 아니 그것을 상쉐하기라고 하듯 로운이 가르쳐 주는 족족 모조리 외워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람술을, 정확하게 는 엘을 쓸수가 없었던 것이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기사인 기엘과 파계했다고는 하나 신관이자 기사인 로운, 그리고 얼결에 동료가 되긴 했지만 그럭 저럭 믿음직한 이리야까지 자신 의 일행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시안 자신은 정말이지 아무런데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는 주제에 호강하는 꼴이 되버린다는 생각이 시안의 머리를 지배했 다. 한참을 그 자세로 앉아있던 시안이 문득 세나케인을 불렀다. "케인." 「왜?」 "내 탓이야?" 「반은 네 탓이고 반은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지.」 "외부적?" "이곳은 일종의 완충지역이다." 머리를 울리던 세나케인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눈앞에서 들러왔 다. "유린의 땅을 둘러 싸고 있는 이 산맥은 일종의 결계와도 같은 거야. 그렇게 때문에 네가 힘을 쓰기 힘든거다." "그렇다면 문제 없는…거야?" 조금 뜸을 들여가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 네 의지의 부족일 수도 있으니까. 그 예로 너를 제외한 네 시종들은 모두 자신들의 능력을 십분 활 용하고 있지 않나." "그. 그건 그렇지만…." 매몰찬 세나케인의 말에 시안의 목소리가 잦아들어간다. "하지만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때가 되면…." "그러니까 그 때가 언제인데!!! 나는 답답하다구.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면 뭘해. 하나도 쓸 줄 모르는 걸. 그나마 좀 알겠다 싶어서 안심이 되었었는데 그나마 그것도 안되고 정말이지…." 화를 내는 것도 신경질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답답할 뿐이 다. 겉으로는 가벼운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하고 있지만 시안 의 마음속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왠지 목숨까지 버려가 며 충성을 할 것 같은 기엘과 이유는 모르겠지만 빈정대면서도 어느새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로운, 그리고 이리야.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발목을 잡아끄는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았다. 쉬운 길은 아니었었다.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길 역시 험했으면 험했지 마냥 유람을 하는 것처럼 편안한 길도 아니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 신의 몸은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이다. 「조급해하는 마음이 더 큰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는 법. 인간에 게는 때를 기다린다고 하는 말이 있지.」 "때를 기다리라구? 참나. 우리 아버지 같은 말을 하는군." 「아버지라…. 좋은 단어지.」 세나케인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서 멀어져 마음속에서부터 울리 기 시작한다. "쳇. 무슨 성인 군자도 아닌 주제에 말은 잘한다니까." 그것이 세나케인에 대한 불평인지 아닌지 구분은 할수 없었다. -----------------------------------------------계숙 간밤........카운터가 영 안보이더만... 결국...아침에 해보니..-_-;; 간밤의 카운터는 하나도....쿨럭 뭐..다시 돌아가니 다행입니다만...^^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1장 편안한 길, 험한 길 (4) *** "우악!!!" 주르륵 미끌어지려는 것을 뒤에서 이리야가 거칠게 잡아챘다. "으아. 살았다." 자신 대신에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몇 개의 돌멩이. 그 돌멩이들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계곡 아래로 소리없이 떨어지 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괜찮은 거야?" 앞서가던 로운이 뒤를 돌아보며 확인했다. "이상 무." "조심해. 최대한. 까닥하면 끝장이니까." "조심하라고 해도…." 이리야의 팔에 철썩 들러붙은 시안은 그 팔을 꾸욱 쥐고는 버럭 소리를 쳤다. "낭떠러지의 절벽에 붙어서 어떻게 더 조심을 하란 말이야!!!!" 말이야. 말이야 하는 메아리가 들려왔다. 그 메아리의 끝에는 휘이잉--하고 바람소리가 딸려온다. "도대체가!!! 이제 다 왔다면서 꼭꼭 이렇게 위험한 길만 골라서 가는 이유가 뭐야!!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탈진해서 죽겠다." "시안님. 소리를 지르시면 더 피곤해집니다." "소리지르는게 뭐 어때서? 어차피 피곤한 거는 똑같은데 입까지 다물고 있으려면 짜증이 치솟는다구. 차라리 있는데로 없는데로 지껄여 버리는 쪽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해. 다친 사람이 아 픈건 당연하잖아. 보는 사람도 뻔히 아플거리는 것도 알고. 그래 도 아프다고 엄살을 떠는게 사람이야. 아프다고 입으로라도 떠들 어야 왠지 덜 아픈 것 같아진단 말이야." "정말길게도 떠드는 군." 한숨을 내쉬며 로운은 좁은 절벽의 틈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사실 그로서도 뒤에서 계속 비맞은 중처렁 궁시렁 궁시렁, 중얼 중얼거리는 시안에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에게는 이렇게 힘들고 험한 길만을 골라서 가고 있는 이유가 있 었다. 곤두선 신경의 끝에 무엇인가 아주 불쾌한 감각이 걸려든다. '정말이지 잘도 따라오는 군.' 그것은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일행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 오늘까지 해서 라치온 산맥에 들어온지 일주일째. 그나마 일직선 으로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리 꼬불, 저리 꼬불거리며 이리저 리 빙빙 돌아서 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주파한 거리는 그렇게 길지 않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좀더 북상한 후에 라치온으로 들 어오는 건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운은 시안의 고집대로 좀더 편안한 길로 돌아올걸 그랬다고 후회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운은 자 신이 무슨 생각을 했나 싶어서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삼일전부터 그들에게 따라붙는 자들이 생겼다. 그들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라치온 산맥에 들어온 뒤부터, 정확하게는 얼마전 조금 이상한 상태에 빠졌던 그때부터 왠지 감각이 둔해진 시안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초조하군.' 차리리 한바탕 일을 치루어버리면 속이 시원할텐데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이 그를 더욱 답답하게 한다. 그것은 마치 폭풍전의 고 요처럼 불안감마저 일으키고 있다. "얼마나 더 가면 돼?" "이 절벽을 벗어나려면 아직 좀더 가야해." "그 '좀 더'가 얼마나 되는데?" "몰라." 시안이 시시때때로 묻는 질문에 열심히도 대답해가며 그는 계속 몸을 움직였다. 습격해오지 않는 이상은 어떻게 할 방법도 없다. 그저 이렇게 그들의 추격을 조금이라도 따돌리기 위해 최대한 험 한 길을 골라서 가는 것 밖에. 어떻게 생각하면 차라리 그나마 편안한 길을 골라서 단 시간내에 주파해버리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이곳이 라치온 산맥이 아 니라면 벌써 이전에 추격자들을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면 한번 상의를 해보아야겠군. 하지만 어 느쪽이 되든 간에 위험부담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밑도 끝도 없는 절벽에 매달려 있는 것이 더 위험한 것인지, 왠 지 정체와 그 목적도 잘 알 수 없는 미지의 적들이 더 위험한 것 인지 그 둘 사이에서 로운은 갈등하기 시작했다. *** "추격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 이상은 우리에게 점점 불리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눈치를 채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습격을 해도 모 자르는 판에…." "지금까지는 하셰카의 일반적인 암술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써왔 습니다. 그들이 엘러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그러나 그런 변칙적 인 방법은 소용이 없었으니 이번에는 정진법을 써봅시다." 머리를 맞대고 모의를 하는 남자들은 모두 흑색의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람이 불지 않는 어두 침침한 곳에 모여있었다. "일단 현재 그들의 진행경로를 보았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지점은 이곳과, 이곳, 그리고…." 남자 하나가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켜 보였다. "계곡?" "이 지점은 상당히 위험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통과를 못하는 곳은 아닙니다. 현재 그들의 행적을 보아할 때 이 계곡을 통과할 확률은 아주 큽니다." "그렇군." 그는 앞에 있는 남자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 는 서로이지만 같은 하셰카라는 것 만으로 믿을 수 밖에 없는, 그리고 믿을 수 있는 남자인 것이다. "일단 일행을 지금의 셋에서 넷으로 나누어 나머지는 현재의 상 태를 유지하고 나머지 하나가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흐음." 세사람이 모여있지만 한 사람은 거의 말이 없다. 실제 그들은 특 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렇게 떼를(?) 지어 행동하지도 않는다. 오 히려 말이 없는 쪽이 훨씬 일반적인 하셰카의 단원에 가까운 것 이다. "하지만. 이곳은 지나칠 정도로 중간지대와 가까운 것 같은데…. " "그렇긴 합니다만 어느정도의 위험은 감수 할 수 밖에 없다고 봅 니다." "…………." 숨쉬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 침묵. 이윽고 그때까지 말한마디 없이 옆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천천 히,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곡에서의 암습은 내가 담당하겠소." "우와---- 죽인다. 온통 붉은 색이잖아?" 시안이 한 나무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시안이 보고 있는 나무는 마치 단풍나무처럼 생겼지만 빨간 것은 나뭇잎이 아니라 가지가지 마다 열려있는 작은 나무 열매들이다. 그것이 내뿜는 새빨간 색채는 온 나무를 붉게 물들여 마치 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스요린이군." 그게 뭔데? 하는 시안의 표정을 보고 기엘이 조금 설명을 했다. "약으로 쓰이는 나무열매입니다. 이 열매를 따서 즙을 내서 상처 에 바르면 고통이 줄어들죠. 미메이라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무성하게 열매를 열고 있는 것은 저도 처음 보지만 말이죠." "에헤." 이리야가 설명을 듣고는 손을 뻗어서 그 열매를 따려하자 로운이 말렸다. "손대지 마!!" "에에---엑." "잎사귀나 열매 겉 껍질에는 독성이 있어서 그냥 만지면 안 돼." "그런 거는 빨리 말을 해야지." "손을 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칫." "그보다는 조금 더 걸음을 서둘렀으면 좋겠는데. 다들 괜찮나?" 로운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고쳐 매면서 말했다. 그는 주 위의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며칠동안의 강행군으로 나름대로는 모두들 꽤 지쳐있는 기색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 분명 시안이 반박을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 하던 로운은 의외로 얌전히 가만히 있는 시안을 보고 고개를 갸 우뚱했다. "이제 얼마나 더 가면 중간지대야?" "글세? 정확하게는 모르겠고. 얼마 남지는 않았어. 앞으로 이틀 정도." "으음. 그럼 그냥 가지 뭐. 어차피 쉰다고 해서 앞길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로운은 시안이 기특한(?)소리를 하자 웬일인가 싶어서 그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사실 시안은 내심 한 이틀 어디에서든 푹 쉬고 싶었다. 그러나 방금 자신이 한 말처럼 쉰다고 해서 일정이 줄어들거나, 길이 좀 더 수월해지는 것도 아니기에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싫다고 해봐야 어차피 끌고 갈텐데. 괜시리 분란을 일으킬 것도 없지 뭐.' 사실 산행이 힘들기는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람을 맞는 산행은 아니지만 왠지 마음 이 가라앉는 것이다. 복잡했던 생각도, 어지럽기만 했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 낌. 그 느낌이 왠지 너무나 변해있던 자신을 원래대로 돌려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 세나케인이 했던 말이 묘하게 시안을 흥 분시키고 있었다. 중간지대로 가면, 그가 유린의 땅이라고 표현 하는 곳에 가게되면 모든 것을-진짜 모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깨달을 수 있다고 한 말이 계속 시안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 다. 마음대로 능력을 쓸 수는 없었지만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한발짝 한발짝씩 유린의 땅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온 몸의 감각이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두워 질때까지는 부지런히 가야지. 어서 가자." "…………." 어딘가 모르게 어른스러워진 시안의 언동에 나머지 3사람은 조금 위화감마저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여행에 이제 하나의 전환점이 다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태풍.... ......태풍이 오는 군요......머어어엉.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1장 편안한 길, 험한 길 (5) *** "우에… 또 비가 오잖아? 여긴 왜 이렇게 비가 오는 거야?" "글세? 날씨라는 것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니까. 나한테 묻진 말 아."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을 타고 전해오는 물기는 비에서 느껴지는 내음과는 또 다른 느낌. "이렇게 비가 오는데 계곡 쪽은 위험하지 않을까?" 산행의 철칙중 하나. '비가 올 때는 물가로 가지 않는다'를 떠올 리며 시안이 말했다. "비라고 해야 보슬비 정도잖아. 이쪽이 일단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단거리야." 로운이 보충 설명을 하며 앞장선다. "그래도 위험할텐데…." "물이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나 사전에 물이 위험하는 단어는 없어." 불쑥 뒤에서 이리야가 나타나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아… 그렇지. 물의 술사가 있었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위험한 것이 맞겠지만 여기는 일반 적인 기준이 통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득 시안의 뇌리를 때렸다. '그래. 위험해봐야 얼마나 위험하겠어.' "자아. 그럼 고고고!! 렛츠 고!!!" 쏴아아 하는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마치 폭포수라도 흘러내리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 비 때문에 물 이 불어서인지 계곡에는 넘실거리는 물줄기가 가득하다. "설마 이걸 건너겠다고 하지는 않을꺼지?" "무슨. 당연히 건너야지." "으윽---." 투둑 투둑 내리는 빗방울 때문에 이미 온 몸은 젖을 대로 젖어 있는 상태. 시안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망설임없이 계곡 쪽으로 발걸음 을 옮기고 있었다. '역시 뭔가 꺼려져….'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시안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자꾸만 발걸음이 쳐졌다. 시안은 잠시 멈추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암괴석과 이름모를 나무와 풀들. 그리고 정적. 시끄러운 물소 리마저 정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설마. 아니겠지?' 라치온 산맥에 들어온 뒤로는 자신의 감각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일에 뭔가 수상한 존재 가 있다면 나머지 세사람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시안은 앞서가는 두사람과 뒤에서 따라오는 한사람을 차례 차례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그들을 믿으면 되는 것이 다. 진심으로. "일단은 이걸 날려서 저쪽 나무에다가 걸어보지." "음. 그것밖에는 역시 방법이 없는 걸까?" "물살이 너무 세서 물의 술을 쓴다고 해도 걸어서 지나가기엔 무 리가 있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로운이 곁에 떨어져 있던 나무를 들어서 적당하게 잔가지를 잘라 냈다. 빗물과 습기를 잔뜩 먹은 나무토막은 제법 묵직하게 손에 들어왔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도구에는 힘들게 운반해온 탄탄한 밧줄이 단 단하게 매듭지어졌다. 몇 번이나 강도를 확인해보던 로운은 한참 을 뜸들인 이후에야 나무토막을 들고 일어섰다. "다 됐어?" "그래." "이제는 밧줄타고 계곡 건너기까지 해야하는건가? 정말이지 여기 와서 별걸 다해본다니까. 극기 훈련에서 비슷한 것을 해보기는 했지만." "이런…걸 해본적이 있다고?" "응. 그때야 아래다가 안전망 같은 것을 걸고 한거지만 해본적은 있어." "그럼 다행이군." 로운은 왠지 뜻밖이라는 얼굴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저쪽으로 비켜서." 시안을 뒤로 물리고 로운은 나무토막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붕붕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나무는 로운의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저 멀리 계곡 건너편으로 쏜살 같이 날아갔다. "어떻게 할까? 기엘. 내가 먼저 가는 쪽이 역시 나을까?" "음. 뭐 누가 먼저 가든 상관은 없으니까." 기엘과 로운이 몇 번씩 확인을 하며 힘껏 고정시킨 밧줄을 보며 시안은 한숨을 푹 내어쉬었다. 말로는 일단 겁내지 않는 척을 하 느라 해본적이 있다느니 어쨌다느니 지껄였지만 사실 겁이 안 나 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했던 극기 훈련은 바닥에서 몇 미터 떨어져 있지도 않았 고 안전하게 보호된 환경이었다. 이렇게 몇미터 아래로 거세게 물살이 흐르고 있는 계곡을 건너는 데 겁이 나지 않는 다면 거짓 말이다. 꿀꺽---.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하지만 자신은 멋진 대한의 남아!!(?)다. 이런 것에 부들 부들 떨 수는 없다. '우씨---떨어져 죽으면 도대체 누가 책임을 지느냐구.' 옆의 나무가 끼익- 소리를 냈다. 로운의 체중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조심해!!!" 자신도 모르게 로운을 걱정하는 말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것을 들은 로운의 눈이 시안의 시선과 맞부디쳤다. "걱정하지 마." 싱긋하고 웃는 로운의 얼굴이 되돌아왔다. 순간 시안은 뭔가 엄 청 쑥쓰러워져버렸다. "괜찮을 겁니다. 시안님. 저희들은 여러 가지 훈련을 받으니까 요." "그. 그렇…겠지?" 세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약간 경사가 지도록 묶어진 밧줄을 타 고 로운이 점점 건너편 기슭으로 움직였다. 숨을 죽이고 그것을 지켜보던 시안은 로운의 발이 건너편에 닿는 순간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후우- 다행이다." 물살이 내는 소리 때문에 건너편에서 뭐라고 말하는 로운의 말이 들리진 않았지만 아마도 기엘과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시안은 기엘과 로운이 시선을 나누는 것을 보면서 꼼질 꼼질 손 과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엔 시안님이 가셔야 합니다." "아. 아아." 굳게 다짐을 했지만 역시 겁이 나기는 한다. "우움. 저. 저기 말이야. 혹시 이거 지난 번에 했던 비행주문 같 은 것으로 뛰어 넘어면 안될까?" 자신도 모르게 약한 소리가 나오자 시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했을 겁니다. 하지만 역시 이곳은 조금…." 그제서야 시안은 세나케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 그렇지. 대충 능력을 쓰기는 써도 여긴 역시… 안 되는 곳 인 건가?' "응응. 알아. 그냥 해본 소리야. 그게 되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 겠지." 쿨럭 하고 기침을 하고는 시안은 바위에 손을 대었다. "되도록이면 제가 같이 가고 싶습니다만…." "아니야. 이 굵기로 봐서는 한사람 정도가 딱 좋은거 같은걸. 나 도 할 수 있어." "일단 이걸 허리에…." 시안이 멀뚱하게 서 있는데 기엘이 와서 척척 그의 허리에 밧줄 을 묶어 주었다. "만약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제가 꼭 시안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그렇게 비장감 있게 말하지 마.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걸." 허리에 묶은 밧줄의 한 끝을 굳게 잡고 있는 기엘의 손. 그걸 한번 바라본 시안은 바위 위로 올라갔다. "절대 아래를 보지 마시고 건너가세요. 힘드시면 신호를 하시구 요." "알았다니까. 후우웃!!" 숨을 들이마시고 시안은 밧줄에 손을 댔다. 두꺼운 장갑을 낀 손아래 느껴지는 밧줄의 감각은 왠지 생경하기 만 하다. '여기서 얼쩡거릴 수는 없어.' 집중을 하자 시끄러운 물소리조차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 시안은 심호흡을 하고 밧줄에 매달렸다. 그 순간이었다. 피잉-------- "우악!!!!" 손에 잡았던 탄탄한 밧줄이 순간 힘을 잃었다. "시안님!!!!" "으아악----!!" 힘주어 기대고 있던 밧줄이 휘리릭 소리를 내면서 시안쪽으로 날 려오는 순간 무엇인가가 바위에서 쑤욱 올라와 시안의 발목을 붙 들었다. "기에---엘!!!" 소름이 발목에서부터 몸으로 다리를 타고 쭈욱 기어오른다. 생소 하면서도 낯선, 그러나 분명 알고 있는 감각. 새카맣게 몰려오는 감정에 시안은 휘청였다. "시안님!!!" 기엘과 이리야가 검을 꺼내드는데 쏴아아 소리가 들리면서 일제 히 화살이 날려왔다. 기엘은 날아드는 화살을 라이트로 쳐내면서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밧줄 끝을 당겼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끊어져버린지 오래. 기엘이 시안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그의 발목역시 땅에서 솟아나 온 손에 붙들렸다. "하앗!!!!" 기엘이 고함을 지르며 바닥에 검을 박아 넣는 순간이었다. "기엘!!! 위험해!!!!" 시안의 비명소리에 고개를 드는 순간 눈앞으로 또다른 사람의 몸 이 솟아올랐다. "케이----인!!!!" 바위위에서 옴쌀 달싹도 할수 없는 시안은 세나케인을 불렀다. "젠장!!! 케인!! 어째서 안 나온 거야!!!" 순간 미끌어지는 몸을 누군가 받쳐들었다. 흥건한 피가 발밑에 퍼져나갔다. "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안의 몸을 안아들은 세나케인이 바위 아래로 가볍게 내리서면 서 말했다. "그래도 주의라도 주면 좋잖아!!!" 화를 낼 사이도 없이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 들었다. 끊어진 밧줄 저 너머에 있는 로운이 라이트를 들고 고함을 치고 있었고, 눈앞에는 기엘과 이리야가 정신없이 그들에게 몰아 닥치 는 남자들의 검을 피하며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시안님! 몸을 피하십시오!!!!" 챙강--- 검끼리 부딪혀 일어나는 불꽃의 사이로 검은색의 암기가 날아들 었다. 눈앞은 아수라장이 되어간다. "이리야!!! 뒤!!!" 기엘의 귀에 다급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어째서 하셰카가 이제와서….' 기엘은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며 눈앞에 달려드는 남자를 가로로 길게 배어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갑자기 옆구리가 뜨끈해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암기….' 기엘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기에-----엘!!!!!" -----------------------------------------1장 마침. 2장으로 이어집니다.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2장 선택 (6) "어떻게든 좀 해봐!!!! 응?" "…………." 다급하게 발을 구르며 눈앞의 참상에 안달을 한다. 흥건하게 피에 젖어버린 땅과 빗방울에 맞아 분홍빛으로 흐르는 핏줄기가 시안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어떻게든 해보란 말야!! 케인!!!" "네가 제정신이 아니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텐데? 흥분하지 마 라." "흥분 안 하게 되었어!!!!" 시안이 이를 악물고 세나케인에게 대들었다. "언제든 머리를 차갑게 하고 그리고 눈을 들어.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무엇도 할 수 없다." "빨리!!!!!!" 세나케인의 말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허리에 암기를 맞고 쓰러진 기엘과 힘겹게 하세카의 암살범을 상 대하고 있는 이리야가 쏟아지는 빗줄기와 화살 아래 서 있다. 발을 옮기고 싶지만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시안 은 자신의 몸을 붙들고 있는 세나케인에게 화를 퍼부었다. "죽는 단 말이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죽어!!!!!" 순간 시커먼 인영이 시안의 앞을 가렸다. 잘려진 손목에서 붉은 피를 뿜고 있는 남자였다. "젠장!!!! 도대체 왜야!!! 왜!!!!" 시안의 앞으로 세나케인의 팔이 올라갔다. 그의 팔에서 거센 바람이 뿜어져 나와 시안에게 달려들던 남자는 멀리 날아가버렸다. 세나케인은 그의 시야를 막고 있던 남자를 물리친 후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는 건너편에서는 로운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하며 서 있었다. '설마… 단 한사람이라도 줄어들을 때를 기다린건가….' 그는 땅을 치며 후회를 하고 있었다. 뒤를 따라오는 살기에만 신 경을 쓰느라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던 것이다. 바위에서 솟아 나온 손이 시안의 발에 얽혀들을 때 그의 심장은 얼어붙는 것 만 같았다. 기엘이 쓰러지는 것을 두 번다시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던 그였다. 그런데도…. 콰악---- 옆에 있던 거대한 암석이 둘로 깨끗하게 나뉘어 반쪽으로 쪼개졌 다. 비에 젖은 암석에서 튀는 불꽃이 그의 분노를 그대로 드러냈다. "크흑…." 그 사이 이리야는 악을 쓰면서 레이피어를 휘두르고 있었다. "제길!! 비가 오는데 나한테 덤볐다 이거지?" 붉은색의 피가 튀어 있는 그의 얼굴에서 물방울이 후두두둑 떨어 져내린다. 그것이 그의 땀인지 비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시커먼 복면을 한 남자들 뿐이다. 땅바닥에서 튀어 나온 그들은 하나둘씩 숫자를 더해 이제는 눈앞 전체가 시커멓게 보일 정도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주문을 외우고 싶었지만 그들은 이리야에게 주문을 외울만한 시 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단 한순간…, 정말 단 한순간뿐이면 된다. "비올 때의 이 이리야 노운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보여주겠어! !!!!" 왼쪽에서 날아드는 스피어를 피해 몸을 날리며 레이피어를 휘둘 러 다가오는 남자의 검을 튕겨냈다. 나뒹구는 사람들. 그 순간의 찰라, 이리야는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이리야 노운. 카라이얀!!!!" 치켜올린 레이피어의 끝에서부터 그의 엘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 다. 그의 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푸른빛의 엘과 함께 하늘 로 떠올랐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일제히 이리야의 엘에 반응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카셰---- 해츠!!!!!!(떨어지는 화살)" 떨리는 목소리가 날카로운 시동어가 되어 푸른색의 엘로 파고 들 었다. 순간 굵어진 빗방울들이 쏜살같이 아래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그것은 그들을 덮치고 있던 화살의 비보다 더욱 더 강력한 힘으 로 쏟아져 내렸다. 물의 화살촉이 된 빗방울들이 검은 천을 뚫고 들어가 그대로 땅바닥으로 박혀들어갔다. "크아아악!!!!" "허억!!!!" 수천 수만개의 빗방울들이 새빨갛게 변해 아래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조용했다. 굵어진 빗방울이 바위와 땅에 떨어지는 소리도, 더욱 더 거세진 물살의 소리도…, 그 어느것도 그 침묵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하아. 하아. 하아." 레이피어에 의지에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은 조금전 자신의 모든 힘을 써버린 물의 술사. 그의 앞에는 몇 구의 시체가 붉은 색의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 다. 타박 타박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신경이 얼어붙어 버린 다. 하지만 그 발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또 다른 한 사람 에게 향해 있었다. "기엘. 괜찮아?" 옆구리를 잡은 채 꼼짝도 하지 못하는 기엘을 부축하며 시안이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엘의 얼굴은 이미 입술까지 새파랗게 질려있었 다. "뭔가 하셰카의 독과는 인연이 있는 모양입니다." "말 하지마." 시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항상 이런 결말이 되어 버리는 걸까? 어째서… 어째서 자신의 길 앞에 이렇게 장애물이 생기게 되는 걸까?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데…." 어느새 이리야가 숨을 고르며 시안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 는 그렇게 시안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기엘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안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대신 그는 기엘의 상처에 손을 대었다. 숨을 쉬기 힘들만큼 지쳐 있었지만 무엇이든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 참아봐. 적어도 독은 제거해 줄 수 있을 거야." 낮게 잦아드는 이리야의 목소리에 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이리야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양을 그 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기도 싫었다. "케인." "…………." "우릴 저쪽 기슭으로 데려다 줘." 이리야의 주문으로 조금씩 기엘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할 수 있지? 우릴 저쪽으로 보내 줘." 시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어서 빨리." *** 시안은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그 뒤를 마치 그림자처럼 세나케인이 따랐다. 하지만 시안은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로운의 넓은 등뿐이다. 그러나 시안에게는 그 등이 왠지 너무나 왜소하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아.' 일행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결국 자신이라는 것을 시안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몇 번이나 누차말했던 것을 지키지 못했다라는 자괴감이 그들의 일행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물론 화도 났다.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던 이리야와 기엘에게 무어라 형용 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 저기… 꽤 어두워 지는데 슬슬 노숙 할 곳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 이리야의 목소리가 불쑥 시안의 상념 속으로 뛰어 든다. 생각의 흐름을 방해받자 시안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를 돌아보 았다. "…아아. 그러니까. 피곤하지 않아? 충분히 쉬면서 가는 것도 좋 은 일이니까 말이야." "이리야의 말이 맞아. 조금 쉬다가 가자." "그렇습니다. 시안님 조금 쉬다 가시죠." "피곤한 것은 내가 아니잖아." 자신도 모르게 퉁명한 대답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상 힘든 것은 자신 보다는 부상을 당하고도 강행군을 해온 기엘과 완충지역에서 능력을 써버려 몸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이리야 다. 그리고 이 두사람의 상태 때문에 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로 운도 슬슬 한계에 다달았을 것이다. 시안은 왠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세 사람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결국 손을 들었다. "알았어. 대충 찾아서 쉬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인데도 세 사람이 자신에게 이 렇게 신경을 쓰는 것은 정말이지 부담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안의 태도는 퉁명스럽다못해서 냉랭한 한기 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스럽고, 짜증이 나도 화가 나기만 했다. "세나케인 근처에 쉴 곳이 있을까?" 시안이 세나케인에게 물었다. 세 사람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쪽으로 조금 더 가면 꽤 큰 동굴이 있다." "그래? 위험한 것은 없고?" "별로." "그럼 가자." *** ---------------------------------------------계속 MSN....메신져 서비스가 안되는 군요.. 우우우!!! 열받아!!! 쿨럭 ICQ를 써야하나....쿨럭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2장 선택 (7) *** "실패한 것 같습니다." "보고는 정확하게 하게 메로스." "네. 폐하.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흥." 로렌은 깍지를 껴서 머리 뒤로 돌리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 다. "대륙 최고의 암살단이라고 하면서 한심하군." "뭐 그들은 기본적으로 암살단이니 생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지도 모르지요." 어슴프레한 저녁노을이 지는 사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노오란 햇살이 로렌의 옆 얼굴을 비춘다. 노란 저녁 노을을 받고 있는 황제의 얼굴은 마치 청동의 동상처럼 단단하게 굳어 표정의 변화 를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 쉽게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일도 있는 것 이겠지." "…………." "그들에게 전해라. 당분간은 근신하라고 말이야. 뭐. 내 말을 들 을 위인들인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도 전열을 정비할 정 도의 시간은 필요하겠지." "예. 전하. 말씀하신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카스핀. 어떻게 생각하나?" "…………."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지만 미타 남작은 그의 주군이 무엇을 언급 하고 있는 것인지 곧 알아 챌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말 을 돌렸다. "미메이라에서는 아직 사자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그래도 계 속 진행할까요?" "말을 돌리는군 카스핀." "제가 뭐라고 말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미타남작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는 것을 로렌은 놓치지 않았다.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대 정도지." 왠지 차갑게 들리는 로렌의 말에 미타 남작은 흠칫하고 몸을 떨 었다. 저것은 일종의 경고다. "아니. 아니야. 그래…. 그렇게 말해주는 존재가 하나쯤 있는 것 은 나쁜 일이 아니겠지. 그리고 미메이라 건은…." "…………." "일단은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게. 기왕이면 이라는 생각이니까 말일세." "예. 알겠습니다. 폐하." "그녀가 없어지니…." "예?" "왠지 바람이 적어진 것 같아." 로렌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훤히 트인 시야에 불꽃이 다채롭게 퍼져있는 밤거리가 눈에 들어 온다. 하지만 왠지 그것은 고요하기만 할 뿐이다. "내 궁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 미타 남작은 그제서야 로렌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 다. *** "정말 가까워져 가는 것 같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면서 시안이 말했다. "네. 시안님도 느끼실 수 있으시죠?" "응. 이정도로 강한데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바보겠지. 공기가 틀린 걸." 기엘이 조심스럽게 한 말에 시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 다. 하지만 실제가 그랬다. 숨을 쉬고 있는 공기가 웬지 어딘가 모르게 밀도가 짙어진듯한 기분이 들고 있는 것이다. 계곡을 건넜던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다. 뭔가 한마디 할 줄 알았던 시안은 의외로 한잠 자고 일어나더니 마치 아무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을 하고 있다. 시안은 자신의 일행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 였다.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일종의 불안감과 안도 감을 동시에 주는 행동이었다. "이래서 보통 사람은 못 들어간다는 거야 케인?"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은 힘들지. 아니 보통사람들보다는 어중간 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더더욱 힘들어 하게 되어 있어. 이곳에는 다른 곳에 흐르는 자연적인 엘보다 훨씬 많은 양의 엘이 가득차 있으니까." 케인의 설명에 로운이 조금 덧붙였다. "보통 사람의 경우 웬지 몸이 무겁다 정도로만 느끼고 쉽게 지치 는 정도지만 어떤 한계 이하의 술사들의 경우 마치 물을 가득 채 워놓은 호수에서 헤엄치는 느낌을 받는 다고 하더군." "흐응…." 결국 살아 숨쉬는 대자연의 엘이 가득 차 있는 곳에 뛰어 들게 된다는 뜻이다. "그럼 다들 괜찮은거야?" 아직 진짜로 중간지대에 발을 디딘 것은 아니지만 시안은 웬지 걱정이 되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진짜는 아니지만 가까이 다가 갈수록 온 몸으로 그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어 있는 이상 평소와 같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어때 케인? 난 알 수 있지 않아?" "…………." 힐끔하고 세나케인이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큰 걱정은 없겠군. 사실 인간이라면 어느 누가 들어가든 힘들게 되어 있다. 들어가려고 마음 먹은 경우라면 감수하는 수밖에 없 겠지." "맞아. 맞아. 사실 이런 경험 두 번 하겠어? 나도 이런 곳에 내 가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았으니까. 좀 힘들다 고 해도 거절할 생각은 없다구." 이리야가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말 그대로다. 언제 누가 자신이 아슈레이의 중간지대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엘러들에게 있어서 거의 성지와도 마찬가 지지만 또한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중간지대다. 지나치게 농도가 높은 엘이 가득 들어차 있는 아슈레이 대륙의 심장부와도 같은 곳. 일설에 의하면 웬만한 엘러가 들어갔다만 나와도 그 능력이 향상된다고 하는 정도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거지 케인?" "그래." 후우- 하고 시안이 심호흡을 했다. 이제 서서히 선택을, 결정을 할 때가 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세나케인과 로운, 기엘 그리고 이리야. 그리고 박경하이자 시안이라는 이름으로 이 길을 걷고 있는 자 신. 눈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풍환이라 불리우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 시안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 과연 누구라고 명명할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박경하라는 이름을 가진 평범했던 한 고등학생이었는지, 아니면 시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로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격을 가 진 자인지, 그것도 아니면 시안이라는 이름은 쓰고 있지만 이것 도 저것도 아닌 존재인지…. 이곳에 오자마자 시안이라는 소녀의 얼굴로, 그리고 여자의 몸으 로 변했을 때는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안이라는 소녀의 대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리다. 현재의 자신의 얼굴은 본래의 박경하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 때 도, 시안이라는 소녀의 얼굴도 아니다. 빛을 통과시키는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은회색의 눈동자. 그리고 본래의 자신의 얼굴에 한없이 가깝지만 또 다른 현재의 얼굴.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냥 처음처럼 로운이 바꾸어 놓았던 그 시안의 얼굴이었 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길은 계속 되고 시안의 상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제 목적지는 시안의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계속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2장 선택 (8) "우와---죽인다." 산 꼭대기의 바위 위에 올라가 선 시안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무슨 그림 같은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잃고 있었다. 새파랗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숲의 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곳보다도 훨씬 울 창한 숲이 가득한 수해였다. "열심히 산행한 보람이 있네." 후욱-하고 마치 산 밑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엘의 파장이 불어 올라온다. 비단 시안 뿐만이 아니라 모두 느낄 수 있을 정 도로 강한 것이었다. "저 안에 들어가면 진짜로 엘의 바다에서 헤엄이라도 치는 기분 일지도 모르겠어." 뭐가 신이 나는지 시안은 연신 떠들어댔다. 바위 위에 철퍼덕 주저 앉은 시안은 수해를 바라보며 빙글 빙글 웃기 시작했다. "간만에 진짜로 뭔가를 해낸 기분이네.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 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거 알아? 저게 나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 "…………." "투명한 점액같은 거 있잖아. 아주 투명한, 그런데 질감은 있는 그런게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여. 어떻게 생각하면 좀 호러틱하 지만 뭐… 나름대로는 엄청난 광경이야." 주저 앉은 시안의 옆으로 일행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눈앞에 앉아있는 시안의 미묘한 변화를 보며 감 탄하고 있었다. 저 수해를 바라보며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안의 외견이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색의 투명한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마치 바람을 맞은 것처럼 휘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바 람이 아닌 순수한 엘의 바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넋놓고 앉아있던 시안이 몸을 일으킨 것은 해가 살며시 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좋아. 여기까지 왔으니까." 폴짝하고 시안이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시안님 조심하세요." "아아. 알아. 알아." 언제나처럼 기엘이 한마디를 하면서 시안을 걱정한다. 시안은 터억- 양쪽 손을 허리에 올리고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모두들 돌아가 줘." 그것은 마치 아주 쉽게 자아. 이제부터 잘 곳을 찾자. 라는 말투 였다. "…………." "…………?" "시…안님?" 기엘은 방금전에 시안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 해 버렸다. "여기까지 같이 오느라고 수고 많았어. 정말로 아주 많이." "너…." 세나케인마저 황당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하려 했다. 하 지만 시안이 그것을 저지하고 말을 이었다. "케인 넌 입 다물고 있어. 으음. 그러니까 난 좀 쑥스러움을 타 거든. 그러니까 한번만 말할게." 저물어 가는 태양빛은 붉은색이었다. 그것은 시안의 투명하리만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통과하여 모두 의 얼굴에 붉은색의 광채를 더했다. "먼저 이리야. 당신이 날 여기까지 따라와서 고생하면서 날 지켜 줘서 정말 고마워. 어떻게 보면 진짜 그냥 지나다 만난 건데… 그렇게 까지 날 위해줘서 정말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 정말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아. 저기 나는…." 갑자기 퍼부어진 찬사에 이리야가 어쩔 줄을 몰라한다. 하지만 시안은 그의 말은 듣지 않는 듯 이번에는 로운을 바라보 았다. 로운의 짙은 회색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시안은 왠지 모르게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로운에게는 여러모로 미안한게 많아. 뭐… 아저씨 얼굴이라고 맨날 놀리기도 했고. 하지만 맹세코 뭐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는 아니야. 처음 여기 왔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나 때문에 고 생도 무진장했으니까. 그래서…." 꿀꺽하고 타액이 목구멍을 넘어간다. 그것은 왠지 보통때보다 훨씬 뜨겁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말하는 건데 더 이상 로운을 고생시키는게 굉장히 미안 해." "이봐.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내 이야기 끝까지 들어. 로운." 단호하게 말하는 시안의 어조에 로운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엘. 으음. 사실 로운에게도 진짜 신세를 많이 졌지만 기엘에게는 특히 미안한게 많아. 몇 번이나 죽을 고 비도 넘겼고… 바로 조금 전에도." 벅벅벅하고 시안이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왠지 점점 더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이다. "사실 난 기사라던가, 신관이라던가 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 이전에 이런 저런 소설책이나 만화책 같은 것을 보면 나오는 기사도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냥 그렇구나…하 고 읽으면서 넘겨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진짜로 기사라는 것에 대해서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봤어." "시안님…." "난…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하다보니 이런데 까지 와서 기엘이나 로운이나 그리고 이리야의 도움을 받아서 이 렇게 여기까지 왔지만, 그래도 난 평범한 그냥 고등학생에 지나 지 않아." "…………." "로운이나, 기엘이 했던 그 기사의 맹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 몇 번이나 생각해봤어." 어느새 시안의 상념은 여행의 초기, 즉 세나케인을 만나 몸이 변 하고 그리고 기엘과 로운 기사의 맹세를 받았던 그 때로 돌아가 있었다. 『로열 나이트 기엘 디 하라스다인. 시안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 행할 것을 서약합니다. 기사의 증표인 이 라이트와 하라스다인의 이름과 생명과, 미메이라의 이름을 걸고.』 『로열 나이트 로운 디 로크레슈. 시안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 할 것을 서약합니다. 기사의 증표인 이 라이트와 하라스다인의 이름과 생명과, 미메이라의 이름을 걸고.』 굳은 얼굴과 의지가 가득한 눈. 그리고 생기로 가득차 반짝이던 눈빛.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 눈빛을 받을 만한 자격은 자신에게 없 었다. "여행을 떠나기전에 그… 예언자인지 하는 사람이 말한걸 나는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더해진다는 걸 그냥 정말 단순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지. 그래서 기엘이나 로운이나 이리야씨한테 절대로 사람의 목숨만은 해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거면 되었다고, 그것으로 충 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것 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해야할까? 난 말주변이 없어서 잘 설명 은 못하겠지만…." "시안님. 맹세코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시안님 탓이 아닙니다." "아니. 내 탓이야.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기서…." 시안의 시선이 끊없이 펼쳐져 있는 수해로 향한다. 그곳을 향해 시안은 손을 들었다. "저기서 날 부르는, 날 기다리는 그 어떤 존재 탓이야." 시안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 그곳에서 그 무엇인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시안은 느끼고 있었다. 어서 오라고, 어서 한시라도 빨리 자신에게 오라고 그것이 부르 고 있었다. "풍환…이든 유린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존재이든, 난 잘 몰 라. 여하튼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 지." "그래서 결론이 우리더러 돌아가라는 거냐?" 상당히 불쾌해진듯한 로운의 말이 시안의 귀를 때린다. "응. 그러니까 돌아가줘. 여기까지 내 말을, 그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면서 와줘서, 내 목숨을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 진짜로 죽 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야."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말을 하려 했던 로운 조차 입을 다문 채 묵묵하게 시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를 뚫어지도록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 꼬마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이성이라는 것이 차 갑게 식어간다. "분명 위험하겠지만 이제는 괜찮아. 여기 세나케인도 있고…." "그건 우리가 필요없다는 의미인가?" 차갑게 가라앉은 로운의 말. 그말에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야. 더 이상은 나 때문에 다치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여기서 미메이라는 멀지 않지? 그러니까 돌아가 서 날 기다려 줘. 그 대신관 할아버지 말대로 풍환인지 뭔지를 받아서 돌아갈테니까. 그럼 끝이잖아?" 나름대로는 열심히 설명했다고 시안은 생각했다. 조금만 더 말주변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하고 시안은 혀를 찼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자신은 그저 정말로 평범한, 그런 존재다. 더 이상 거창하게 말할 수도 없다. "이리야씨도 기엘이나 로운을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 뭐 도움을 많이 주었으니까… 아마 대신관 할아버지가 잘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뭔가 더 할말을 찾던 시안은 이내 포기를 해버렸다. "그러니까 여하튼 그렇다고. 그럼…." 시안이 자리에서 툭툭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케인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 즉각 알려줘. 알았지?" 시안은 되도록 세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 그들 의 얼굴을 보아버리면 왠지 너무나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보지 않아도 세 사람의 감정이 아프도록 전해져온다. 그 것은 눈앞에 둔 유린의 땅에서 풍겨나오는 그 강력한 엘의 영향 인지도 모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사람의 엘이 그들의 감정을 남김없이 담은 엘의 파장이 느껴지는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호락 호락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나?" "………?" 철그렁----. 바위 위에 로운의 검이 내동댕이쳐졌다.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시안은 갑자기 자신의 발앞에 던져진 로운 의 라이트를 보고 흠칫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렇게 말하면. 모든게 네 마음대로 된다고 생각한 거냐!!" "…난. 나는…." 철그렁-----챙강. 로운의 라이트 위에 기엘의 라이트가 포개진다. 그것은 이제 마지막 햇살을 내뿜고 있는 붉은 태양빛을 받아 눈 이 부시도록 빛나기 시작했다. "넌 우리를 뭐라고 생각해 온 거지? 단순하게 네 경호원쯤으로 생각 한 건가?" 로운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화를 낸다고 하 는 단순한 단어로는 표현되기 힘든 감정, 분노였다. "기엘이 한 기사의 맹세, 내가 한 맹세가 너에겐 그렇게 밖에 이 해가 되지 않았나?" 감정을 주채 하지 못한 로운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시안은, 눈 앞에서 이렇게 눈만 말똥 말똥 뜨고 있는 바보같은 녀석은 도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고 했던 것일까? "우리는, 나는!!!!! 기사다." 불같이 화를 내뿜는 로운과 냉랭하게 표정이 얼어버린 기엘. 그 들은 서로 상반된 방법으로 시안에게 분노를 하고 있었다. "기사는 주군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시안님." "난 진짜 시안이 아니야. 기엘." 처연한 표정으로 시안이 대답한다. "내 진짜 이름은 박경하다. 난 시안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제 주인입니다. 기사인 저, 기에 디 하라스다인 의 단 하나밖에 없는 주군이십니다." "아니야. 기엘은 내가 아니라 시안이라는 여자의 기사가 되었어 야해." 그리고 시안은 천천히 로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로운도 마찬가지야. 로운이 날 볼 때마다… 사실은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그렇지 않아?" "…………." 불끈 쥐었던 주먹에서 붉은 색의 액체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로운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너는…." 말을 하려했지만 감정에 겨워 목이 막힌다. 로운은 발치에 있던 라이트를 거칠게 차냈다. "이름이 중요합니까?" 기엘은 말을 하지 못하는 로운대신 기엘이 조용하게, 그러나 무 겁게 말했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그럼 제가 지금까지 받들어왔 던 시안님은 아무데도 없는 겁니까?" "…기엘." "저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당신을 제 주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허상이었다고,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 시는 겁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훨씬 격렬하게 반응할 줄 알았던 기엘이 너무나도 차분하게 말을 하자 시안은 당황해버렸다. 보통때의 행동으로 보아서 로운은 냉 정하게 따지고, 기엘이 기사도를 운운하며 따질 것이라고 생각했 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밝고, 긍정적이고, 그리고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지 금까지 오셨던 당신이 제게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다 거짓이 고, 제가 잘못 선택했고, 잘못된 주군을 모셔왔다고 그렇게, 정 말 그렇게 말하시는 겁니까?" "…기엘의 말대로다. 지금 네 행동은 모든 것을 다 부정하는 거 다." "저기. 나는 말이야…." 그때까지 아무말도 못하고 있던 이리야가 살며시 끼어들었다. "나는 사실 기사란게 뭔지 잘 알지도 못하고, 그리고 신관이라는 것도 뭔지 잘 몰라. 하지만 시안 네가 하는 말은 확실히…." "제 선택이 틀렸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시면…." 털썩-하고 기엘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더 이상 살 의미를 잃었다고 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절 이 곳에서 버리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제 목을 치시고 가십시오." "기엘!!!!!" "기사는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습니다. 그 명예는 저 자신을 위 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제가 섬기는 제 주군을 향해, 주인을 향한 것입니다." "나는 그런 소리가 아니라…." "주군을 잃은 기사에게는 아무런 삶의 목표도, 목적도 없습니다. " 눈을 감고 조용하게 입을 다문다. 이를 악물어 떨리는 턱이 기엘의 감정을 그대로 시안에게 한눈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기사란 것은 단순히 명예라는 것을 존중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단지 기사라는 이름에 얽매어 있었다. 하지만, 시안을 만나고 나서 그 명예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던가를 깨달았다. 그 명예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제 목을 치실 때까지, 전 단 한 발자국도 떼지 않겠습니다. 이 대로 가시겠다면 천년이든 만년이든 이 자리에서…." "기엘……." "넌 사람을 잘 못 봤어." "로운!!" 로운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시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 분명. 대놓고 말하지. 네 얼굴에서 시안의 얼굴을 봤다. 그게 잘못이야? 그녀는 내게 있어서 단순한 연민의 대상이다. 그 리고 널 불러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어. 그녀와 닮은 네 얼굴을 보면서 잠시 감상에 빠진게 그렇게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난 너와 일년도 같이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나와 십 년을 넘게 함께 있었다. 잠시 잠깐의 연민이 그렇게도 잘 못 된 거야? 이 자리에서 내 모든 존재를 거부당할 만큼?" 로운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년이 너무나도 확연하게 느 껴진다. 지금도 그는 자신을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것 이다. 그는 시안을 향해, 아니 경하를 향해 기사의 맹세를 했다. 솔직 하게 말해, 그것이 기엘의 감정에 조금쯤은, 아주 조금쯤은 휩쓸 렸던 결과라는 것 역시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 순간, 그는 시안에게 뭐라 표현하지 못할 감정들을 느껴왔다. 살아가는 것이, 숨쉬는 것이 그저 권태롭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정말 살아 있다는 감정을 느끼며 살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그의 앞에 서 있던 존재였다. 저 가슴 속 깊숙이에서 부터 진정한 사모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 다 해도, 지금의 그에게 있어서 모든 생의 의미는 시안에게서부 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기엘과는 사뭇 느끼고 있는 감정이 다를 지도 모른다. 그는 기엘 처럼 시안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왔었다. 하지만 그 래도 시안은 그의 삶의 의미였다. 그는 나름대로의 가장 타당한 이유로 시안을, 경하를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 다. "네가 여기서 날 돌아가라고 한다면…." 그제서야 로운은 눈을 떴다.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결정했던 것이다. "난 기사를 폐업하겠다. 두 번다시 미메이라로 돌아가지 않겠어. " "로운!!!" "난 미메이라 인이지만, 미메이라엔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 왔다. 신관? 그런 것은 그저 미련의 발로였을 뿐이다. 두 번다시 미메이라로 돌아가지 못한다해도 상관없어." 휘이이이잉------ 산밑에서부터 바람이, 엘의 기운을 담뿍 담은 바람이 그들의 주 위를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진짜 바람인지 단순한 엘의 바람인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 았다. 그것은 단지 바람이 되어 모두를 감싸고 그리고 사라졌다. "그럼…, 그럼 나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시안이 절규한다. "더이상은 보고 싶지 않아!!! 어느 누구도 나 때문에 죽는 건 싫 어!! 하지만 내 이기심 때문에 로운이나 기엘이나 이리야가 다치 는 것도 싫단 말이야!!"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었던 이율배반. 어느 누구의 목숨도 자신의 길에 더해지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로운들이 피를 흘리는 것도 싫 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희생도 없게 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부탁이 실제 그들에게는 명령과도 다름없다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명령이었다는 것 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채 했었다. 자신이 모른 채하면 그것은 그저 그들의 책임이 되는 것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기 엘과 로운과 이리야가 멋대로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 었다. 하지만…. "난 이기적이야!!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어. 기엘과 로운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안 보려고 했단 말야!! !!"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서있을 힘조차 그의 무릎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부들 부들 떨리는 몸, 그리고 꺾여지는 무릎. "로운이 나 때문에 다치는 것도, 기엘이 나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도, 이리야가 나 때문에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도,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어가는 것도… 모두 다 싫어." 다리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온 몸을 파고든다.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어. 기엘과 로운의 주인이 될 자격 같 은 것은 없어. 그리고 세나케인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깨닫지 못한 척 하려 했지만 그의 의식 저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말들을 시안은 무시하려했었다. 의식을 잃었던 것을 빙자해서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들 조차 모조리 없었던 일로 취급했었다. 누구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것은 자신이었다. "…돌아가고 싶어." 목소리가 떨렸다. 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 다. "돌아가고 싶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처음으로 시안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배어나왔다. 이곳에 와서 단 한번도 시안은 소리내어 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시안은 울음보다 더한 감정에 휩싸여 어깨를 떨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 "시안님께서 원하신다면 돌려 보내드리겠습니다." 떨리는 시안의 어깨 위로 기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원하시는 것이라면 뭐든지, 제 목숨을 다해서 이뤄 드리겠습니 다." 어느새 기엘은 시안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로운 역시 기엘의 뒤에 서서 어깨를 떨며 울고 있는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안의 어깨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리고 미메이라는 도대체 이 소년에게 무엇을 맡긴 것 일까? 아무것도 모르던, 이계의 소년에게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보장하겠다. 모든 일이 끝나면 반드시 널 돌려보내주겠어. 그때까지는 절대 기사 폐업을 하지 않겠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모실겁니다. 시안님." "…………." 소리없는 울음이 대답대신 들려온다. "그러니 저희에게 돌아가라는 말씀은 두 번다시 하지 말아주십시 오. 그것이 제 단 하나뿐인 소원입니다." "네 존재가 나와 기엘이, 그리고 어쩌면 이리야의 삶의 목적일지 도 몰라. 그것을 네게 말하는 것도 넌 부담이라고 생각할지 모르 지만…." 말로 하는 것이 이렇게나 부족한 것이라는 것을 로운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말이라면 뭐든지 다 표현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해왔 었다. "부담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너를 이곳에 불러온 우리의, 아니 어쩌면 미메이라의 그리고 아슈레이의 모든 것들이 네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해 줘." 로운은 마치 시안을 타이르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실 상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의무가, 자신의 일생을 거처 찾고 있 던 삶의 의미가 바로 지금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원하는 것이 없었던 그의 인생. 하지만 반대로 바라는 것도 많았 던 것이 그였다. 모든 바램이 하나로 모아질 때 그가 바라던 것 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던 예언의 현자가 떠올랐다. '마샤님께서 말한 것이 이런 것일까?' 자신이 깨달은 것이 진짜이든 그렇지 않든 그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현재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을 하면 된다. 그것을 하는 동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가장 자신이 바라던 것이었다. --------------------------------------------------------계속 ........머어엉.. 닭살스럽군요..-_-;;;; 쿨럭... (연애 소설도 아니건만...=+= )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2장 선택 (9) *** 길고 긴 복도, 그 복도를 차분한 걸음으로 걷고 있는 사람이 하 나 있었다. 어슴프레하게 새벽의 햇살이 활짝 열려진 창으로 스며드는 시간. 그 고요함의 사이에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은 전 미메이라 의 수장이며 현 장로인 레이죠였다. 그는 왠지 조금 조급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인건가….' 새벽잠을 설치다말고 잠에서 깬 레이죠 장로는 차분한 걸음걸이 긴 하지만 상당히 급하게 어디론가 열심히 가고 있었다. "장로님. 마차를 준비할까요?" "그래. 말보다는 그쪽이… 으음."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심장께가 아파왔다. "자. 장로님 괜찮으십니까?" "아무일도 아니네." 허억 허억 하고 레이죠 장로는 숨을 토해냈다. 이상하리 만치 뜨 거운 기운이 그의 심장에서 온 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설마….' 생각을 하다 말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서 마차를 준비해주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네." "네. 레이죠 장로님." 그를 부축하려던 남자가 재빨리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사라지자 레이죠 장로는 붙들고 있던 옷자락을 천천히 놓으 면서 몸을 곧추세웠다. '아직은 괜찮은 거다.' 레이죠 장로는 마음속에서 번저오는 불안감을 애써 지우려했다. "어서 가세…." "이 새벽에 어인 일이십니까 레이죠 장로님." "………잠을 깨운건가." "아닙니다. 늙으면 잠이 없어지는 군요." "미안하군. 이렇게 불편하게 해서." "아닙니다." 머리위에서 호로스의 불꽃이 작게 빛을 뿌리며 흔들리고 있는 작 은 사실에서 레이죠 장로는 대신관인 카류와 무릎을 마주대고 있 었다. 한동안 신전 한구석에 억류되어 있었던 카류 장로의 얼굴은 보통 때보다 훨씬 마르고 지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건강해 보 이는 것을 보고 레이죠 장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이곳에 오고 싶어지더군." 레이죠 장로는 얼굴에 부드럽게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간에 말을 하고 싶었다. 대화가 아니다. 그저 뭔가를 말하고,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 했던 것 같았다. 그것이 어째서 이 대신관 카류인지, 그것도 신전에 유폐하다시피 한 이 사람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여러모로 미안하네 카류." "아닙니다. 이런 일에도 모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실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네. 내가 왜 그들에게 협력을 한 것인지 말일세." "……………." 카류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왠지 레이죠 장로 가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뭔가 해보고 싶었다네. 왠지 덧 없이 느껴졌거든." 카류는 입을 열은 레이죠 장로는 두고 조용히 일어나 차를 준비 했다. 손수 차를 끓여본지 오래였지만 이곳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 그는 스스로 차를 준비했었다. 앞에 내밀어진 따스한 차가 담겨 있는 차를 레이죠 장로는 조용 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무엇을 해온 것인지 잘 모르겠네." "……레이죠 장로님." "내가 수장으로 있을 시절, 모든 것은 평화로웠지. 로크레슈와 하라스다인이 조금씩 서로를 이간질하는 것도 그냥 보고만 있었 지." "시안님이 계셨으니까요." "그래. 그때는 참……." 늙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다는 것이 참으로 이런 기분이 들게 할 줄은 몰랐어." "글쎄요. 저는 자식을 본 일이 없으니…." "그것도 그렇구만." 허허허하고 레이죠 장로는 한숨과도 같은 웃어버렸다. "후회하고 있네…." "……………."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좀더 시안을 자유롭게 해줄 것을 그랬어." "그래도 시안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셨지 않습니까? 너무 가슴 아파 하지는 마십시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자넨 모를 거야. 그애는……." 레이죠 장로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시안이 엘로 화하여 사라졌던 그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래도 그애의 장례는 치루게 될 줄 알았 었는데 말이야." "……………." "어차피 그리 된다면 그애의 마지막이라도 단둘이서 곁을 지켜주 고 싶었네." 카류는 조용히, 레이죠 장로의 앞에서 그에게서 뿜어나오는 흐릿 한 감정을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쯤은 카류도 잘 알고 있었 다. 단지 레이죠 장로는 그에게 푸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수 없 는 상황에 대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자신에게서 느끼는 감 정을 말이다. "왠지 될데로 되라는 심정이었네. 그게 자네에게 이렇게 영향이 갈 줄은 몰랐네만…." "모든 일이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 그렇지…." 김이 모락 모락 피어 오르던 찻잔이 어느새 식어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예?" 갑작스럽게 레이죠 장로가 물어오자 카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자네도 알겠지?" "…………." 문득 카류는 레이죠 장로의 말을 듣고 깨닫는 게 있었다. 그는 급히 카류가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살며시 그의 엘을 움직였다. "…………!!!!" 순간 카류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것을 눈치 채었는지 못채었는지 레이죠 장로는 다른 말을 이어 갔다. "죽기 전에 뭐든 해보고 싶었네. 과연 내가 선택한 것이 잘한 일 인지 잘 못한 일인지는 나중에 미메이라께서 알려주시겠지." "레이죠 장로님." "이런 수장의 모습은 싫은가?" "…아. 아닙니다." 카류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는 방금전 레이죠장로에 게서 느낀 '그것' 때문에 당황해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표정에 드러내면 안 된다고 그는 속으로 몇 번씩 다짐을 했다. 건강해보였기 때문에 방심을 하고 있었다. 비록 풍옥과 풍환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잃었다고 하나 버젓한 미 메이라의 수장이었던 사람이다. 기록에서도 풍옥을 잃은 수장이 새로운 계승자에게 그 임무를 모 두 이행하고도 몇 년정도는 정정하게 살아 있었다. 개개인에 따 라 차이는 있었지만 레이죠 장로가 힘을 잃은지 일년도 채 안되 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다고 카류는 아주 단순하게 생 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도대체….' 물론 힘을 잃고 계승자에게 풍옥을 넘겨주고 바로 숨을 거둔 수 장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정정했던 레이죠 장로 의 파장이 이렇게나 약해져 있을 것이라고는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자네에게 뭔가 푸념을 잔뜩 늘어 놓은 기분이군." "아닙니다." "뭔가 내 손으로 마무리를 짖고 싶었던 것이야. 내 선택으로 인 해서 변해가는 그 무엇인가를 지켜보고 싶었나 보네." 레이죠 장로는 이제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에 손을 대고는 쓸쓸하 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선택이 옳기를 바랄 뿐이네. 그대의 말대로 모든 것에는 의 미가 있고, 모든 것은 미메이라의 뜻대로 이루어 진다해도 내가 한 선택이 그 일부분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네." "……………."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몇모금 마신 레이죠 장로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미안하네. 새벽부터." "언제든… 원하시면 찾아주십시오. 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닙니 다만." "그러도록 하지." 유폐되어 있던 자신보다 훨씬, 지친 표정을 하고 있는 레이죠 장 로를 배웅하며 카류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의 전 수장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는 걸까? 그 시간내에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새로운 바람의 계승자가 돌아 와 줄지 의문스러웠다. 돌아온다 해도 무슨 일이 생길지 그는 전혀 예측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카류는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랬다. '부디. 레이죠 장로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돌아와주시기 바랍 니다.'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다. '미메이라의 모든 것은 당신의 뜻에….' "아침부터 어디에 행차하셨습니까?" "아. 그저 바람을 좀 쐬러…." 궁으로 마악 돌아오는 레이죠 장로를 맞은 것은 얼마전까지는 자 신의 자택에 연금되어 있던 기사 단장 크로운이었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며칠전부터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그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로크레슈와 하라스다인 장로와 무슨 암묵적인 말들이 오고 갔는 지는 알 수 없다. "크로운…." "예." "자네는…." "예?" "아. 아닐세." 레이죠 장로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들어가지.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몸을 돌리던 레이죠 장로의 몸이 순간 휘청했다. "……레이죠 장로님!!!!!!" 크로운이 놀라서 황급하게 레이죠 장로의 몸을 부축했다. "장로님!!!" 휘청했던 레이죠 장로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장로님!! 정신 차리십시오!!!" 멀리서 크로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물 가물하게 감겨가는 눈꺼풀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드는 것 을 느끼며 그는 정신을 잃었다. *** "어?" 조심스럽게 미끄러운 바위 위를 기어 내려가면서 시안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시안님?" "아……." 뭔가 화살 같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그. 그러니까…." 시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로 조금 전 무엇인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시안이 그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던 것이 다. '뭐. 뭐였지?' "시안님?" "아. 아무것도 아닌가봐. 뭐 여기는 워낙 엘의 파장이 이상하게 강해서…." 평소의 수십배나 자신의 감각이 민감해져 있다는 것을 시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인데도 잘 모르겠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별것이 아닌 것이라고 시안은 생각했다. "그냥 갑자기 머릿속에 뭔가 신호같은게 왔는데, 뭔지를 모르겠 어. 지금은 사라졌거든." "신호요?" "응. 왜 머리를 땅-하고 때리는 듯한 느낌 있잖아. 그런 기분이 순간 들었거든." "피곤하신 것은 아니구요?" "그럼 조금 쉬었다 가는게 좋겠어." 대뜸 로운이 주르륵 미끌어 내리기 직전의 시안을 끌어 올려서 바위 위에 억지로 앉혔다. "아니라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피곤하면 느끼지 않아도 될 것들을 느끼는 법이야. 하물며 이 중간지대에서는…." 로운은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시안에게 말했다. 심한 것은 아니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어딘가 몸이 점 점 무거워 지는 듯한 느낌을 그는 확실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것은 기엘이나 이리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이리야는 숨까지 점점 가빠져오는 바람에 꽤나 힘들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 다. "그래. 잘 생각했어. 조금 쉬다 가자구." 털썩하고 이리야는 소리도 요란하게 주저앉았다. 차마 자존심이 상해서 힘들다는 소리는 못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가 없는 노릇이었다. 나름대로는 유린의 땅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통과하고 있기는 했지만 기엘이나 로운이 비해서 어느 정도는 그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스스로가 이곳에 와서 용케도 경계를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처지였다. "정말이지. 생각보다는 꽤 힘들잖아. 이거." 아직 그들이 내려가야 할 거리는 저 발밑으로 까마득하다. 이리야는 뭐라고 더 말도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과연 자신은 저 아래에 내려서는 순간 멀쩡하게 두 다리로 서 있 을 수 있을까? 이리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그의 팔에 시안의 손이 닿았다. "많이 힘들어?" "아. 아. 아니야…." 한바탕 펑펑 울어제낀 시안의 얼굴은 아직도 좀 퉁퉁 불어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표정은 꽤 밝다. 하지만 지금 시안의 얼굴에는 걱정의 기운이 어려있다. "으음… 아마 이렇게 하면." 그렇게 말하면서 시안이 조용히 자신의 엘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약한 바람처럼 시안의 몸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이리야의 몸 주위를 감싸 안았다가 사라졌다. "어때?" "에?" 순간 몸이 가뿐해지는 것을 느낀 이리야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 다. "이야… 너." "왜? 아무렇지도 않아?" "너. 여기 오니까 상당히 쓸모가 있어졌구나." "…………." "흐응. 생각보다 상당히 괜찮은데 이거." 이리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보았다. "흐흐흐흐. 앞으로 잘 부탁할게." "…왠지 칭찬으로 안 들리는 것 같은데." "칭찬이야. 칭찬. 고마워." 시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 거린다. 그런 모습을 기엘과 로운은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고 있었다. '좀. 기운을 차리신 것 같지? 로운?' '그래. 다행이다.' 두 사람은 서로 눈길을 주고 받으며 간만에, 아주 간만에 흐뭇하 게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좀 쉬었으면 서두르자고." "응." 시안은 일어나서 기지개를 활짝 폈다.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시선이 푸른 수해를 향한다. 저 수해의 저편에서 자신을 부르는 것이 있다. '정말로 이제 곧……….'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시안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 2장 마침. 3장으로 이 어집니다. 쿠~~ 비~~~~~~~~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3장 유린의 땅 (10) "으아. 이 습기… 진짜로 죽이는데? 숨쉬기가 힘들 정도야." 시안이 투덜 투덜 하면서 앞장을 서고 있었다. 뿌득하고 시안의 발에 밟힌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시안님. 너무 그렇게…." 중간지대의 수해로 접어든 이후 보통 때와는 달리 로운 대신에 시안이 앞장을 서 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가야할 길을 너무나 도 잘 알고 있다는 느낌으로 주욱 앞으로 나가아고 있었던 것이 다. "쳇. 숲의 초입에서는 엄청 춥더니만 도대체 여기는 왜 이모양인 거야?" 뭔가 아슈레이의 중간지대라고 하는 이름이 시안에게 있더는 일 종의 파라다이스라는 느낌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어딘가 에 있다는 유토피아같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 백미터를 가는 동안 벌써 두 번이나 주위 환경이 완전히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뭔가 굉장히 멋진 곳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쎄요. 기록에는 중간지대에 대해서는 그리 언급되어 있지 않 으니 저희도 왜 이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안님." "그건 이곳에 평형이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문득 얌전히 시안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세나케인이 대답했다. "응?" "평소엔 이곳은 4개의 신국과 비슷하게 일정하게 4개의 계절같은 것이 번갈아서 바뀌곤 했지. 하지만 현재는 그 평형이 무너져 있 기 때문에 그래." "에에? 평형이 무너져?" "일단 너는 아직 계승자 일뿐. 진정한 바람의 주인이 되지 못했 으니까." "그. 그렇게 되는 건가? 그럼 내가 그 풍환이라는 것을 받아오게 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일단은 그렇지." 시안이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임무'에 대한 것을 언급하자 세나 케인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거참. 살기 피곤하게 되어 있는 곳이네. 여기도." 시안은 누가 듣던 말던 한숨을 내쉬면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자신이 살던 현실의 세계가 인간이 살아가기엔 더 편한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든 자신이 속한 곳이 제일 편하게 느껴지는 법일지 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아니 인간의 힘 으로 좌지 우지 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지금의 현실 은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풍환을 받아들이면 원래대로 돌아간다라….' 하지만 거기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얼마전에 목격했던 호로스의 새로운 계승자는 과연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레나텐의 모든 엘을 흡수한 그의 얼굴은 희미하긴 해도 시안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세나케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물론, 새롭게 호로스의 계승자가 된 그 남자 역시 자신과 똑같이 이 중간지대로 와서 바람의 풍환 대신 불꽃의 무언가를 받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혼자서 골똘히 생각을 하던 시안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바람의 결정체가 풍환이라면 그럼 불꽃의 결정체는 뭐라고 불러 ?" "화륜이라고 한다더군요." 기엘은 시안이 왜 갑자기 호로스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지 이상하 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대답을 해주었다. "헤에." "그런데 갑자기 그것은 왜 묻는 거지?" 로운 역시 기엘과 마찬가지로 좀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아. 근 시일내에 나 말고도 불꽃의 계승자가 이 땅에 오지 않 을까 해서." "뭐?" "지난 번에 봤어. 불꽃의 계승자가 바뀐 거 말이야." "서…설마." 로운과 기엘은 서로의 얼굴을 몇 번이나 다시 바라보면서 놀라움 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진실일까? "진짜야. 나도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였어. 분명하게." 새로운 불꽃의 계승자에게 호로스의 수장인 레나텐의 엘이 모조 리 흡수되었다는 소리는 차마 할 수 없는 시안은 그냥 말을 얼버 무리고 말았다. 왠지 그 사실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시안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왠지 레나텐의 얼굴을 떠올 리면 자꾸만 우울해진다. "그쪽도 나처럼 여기 저기 여행을 다니고 그러는 거야? 아아. 그 러면 상당히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겠군 기왕이면 같이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 "설마. 호로스의 계승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들었는데…." "어. 아니야. 꽤 나이가 들은 남자였는데? 그러니까 대충 로운 정도는 되 보이는 키에다가 체격도…."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다 말고 시안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입을 막았다. 왠지 금기를 말해버린 기분이다. "시안님?" "그런 것까지 본 수 있는 건가?" "아. 아아. 그게. 그게 말이지. 그러니까…." "흐음. 각 신국의 계승자나 수장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는 건가?" "어디서도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없어. 로 운." 놀라서 입을 막은 시안과는 달리 기엘과 로운은 다른 의미에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외에 혹 다른 신국에 대해서는 느껴지는 것이 없어?" 로운이 시안의 앞으로 다가와서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에? 아. 아니. 그런건 없는데?" "흐음. 설마. 교체기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인가?" "글세?" 갑자기 뭔가 학구적인 분위기가 되어 버리자 시안은 이번에는 어 리둥절해져버렸다. "그. 그런게 중요한거야?" "으음. 중요하다고 보기도, 그렇지 않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말씀 드릴 수 있달까요? 수백년이상이나 유지되어온 신국이지만 아직 저희들은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실제 역대 수장 계승자마다 오셨던 이 중간지대에 대해서도 거의 전무하다라고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가 없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시안님." "벼.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기엘과 로운의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무슨 정보 탐색의 대가들이 모여 정보전이라고 하고 있는 기분이 든 다. '설마. 다른 신국과의 관계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닌가? 하지만 호로스에는 직접 인사까지 가라고 해놓구….' 시안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나중에 케인한테 좀 물어 봐야 겠어. 아무래도 그쪽은 나보다 케인이 잘 아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결정하고 시안은 고개를 들었다. "일단은 좀 쉬다가자. 아직 갈 길이 좀 되는 것 같아. 내가 느끼 기에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철 조각처럼, 미세한 힘으로 자신을 부르 는 존재가 분명히 저 멀리 존재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한발자국씩 가는 것은 그렇게 두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렵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희망과 불안이 동시에 존재하는 느낌이랄까? 손을 내밀면 아주 가까이 닿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와 함 께 절대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해있다. '모르겠어. 정말.' 나무로 빽빽하게 덮혀 잘 보이지 않는 하늘을 애써 바라본다.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고 싶어….' *** "우카아악---!!! 저. 저리가앗----!!" 퍼엉-소리와 함께 앞에서 폭발 같은 것이 일었다. 다음 순간 휘익하며 바람을 가리고 자신을 향해 무엇인가 달려들 었다. "크헉!!" 옆구리에 느껴지는 것은 둔탁한 통증. 시안은 몸을 접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젠장!! 기엘!! 이 녀석 좀 잡아!!" 얼결에 놀라서 자신의 바람으로 상처를 입힌 것이 잘못이었던 듯 싶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거친 로운의 고함소리와 함께 그의 라이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가 난다. "죽이진 말아!!" "죽이라고 해도 안 죽여!!!" 로운은 화를 버럭 버럭 내면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어미를 칼등으 로 거칠게 내리쳤다. "캬아아아옹!!!" 로운의 일결을 맞아서 비명을 지르며 내동댕이 쳐진 어미는 곧장 일어나서 자신의 새끼를 물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아이고오∼ 아파라."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말을 안들어!!" "그. 그냥 귀여워 보이는데다가 사람을 잘 따르는 것 같았단 말 이야." 시안은 어미의 헤드펀치에 당한 옆구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에잇. 무슨 몬스터도 아니고 들고양이한테 당하다니. 정말 한심 하구만." "다음부터는 절대로 손대지 마. 넌 사람이 말하는 것도 못알아 듣냐? 이 멍청한…." 재차 시안을 씹어대기 시작하는 로운. 그런 로운을 보면서 기엘은 웬일인지 말리려하지도 않고 아무소 리 없이 시안의 옷에 묻은 흙먼지들을 떨어내주기만 했다. "그래! 나 못 알아 듣는다. 그래서 뭐 보태준 거 있어?" "당연하지!! 네 녀석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항상 나잖아!! 넌 그 것도 모르냐?" 목소리를 높이며 어린애처럼 싸워 대는 것이 왠지 기엘에게는 마 음이 놓이는 광경이었다. 무엇인지 모를 것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서 침묵과 함께 나아가는 것 보다는 옥신 각신하며 평소처럼 꾸물거리며 가는 것이 훨씬 안도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건 다른 세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항상 시안은 일을 저지르고, 로운은 그걸 처리하고, 나랑 기사양반은 맨날 그걸 말리고. 좋은 관계로구만." "이봐----이리얏!! 당신 말 다했어!!!" 시안의 화살이 이리야를 향하려는 순간 이리야는 혀를 쑤욱 내어 빼고는 도망을 친다. "어째서 하나같이 다들 어린애 같은 건지." 기엘이 뒤에서 3 남자를 전부 5-6살 먹은 어린애 취급을 하고 있 다는 사실은 아마도 아무도 모를 지도 모른다. ----------------------------------------------- 계속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3장 유린의 땅 (11) 꿀꺽-- 시안이 타액을 삼키는 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울창한 숲자락 끝의 넓은 강. "설마. 우리 이거 건너가야 하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우어-- 배도 없잖아!!!" "대신 당신이 있지. 이리야." 세 사람의 얼굴이 한꺼번에 이리야에게 향하자 이리야는 갑자기 사색이 된다. "그. 그러니까 말이야. 그것도 일단 배가 있어야 어떻게 되는게 아닐까? 응?" "뭘요. 어느 정도는 이리야씨의 힘으로 될 겁니다. 이곳에 오셔 서 확실히 주문을 쓰는게 쉬워 지시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실제 기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바깥 세상의 엘러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그대로, 아슈레이 의 중간지대에 들어온 이리야는 자신의 능력이 현저하게 상승되 어가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어? 진짜?" 멍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는 강물만 바라보던 시안의 귀가 솔깃해 진다. "이곳은 워낙 자연적인 엘의 힘이 강한 곳이기 때문에 자연적으 로 술사의 능력이 올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안님. 물론 그만 큼의 부담이 있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한동안 지내게 된다면 확실 하게 능력의 향상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역대 수장 계승자를 호위했던 기사들이나 신관의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돌아왔던 예가 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수장 계승자를 보호하다가 비명에 간 기사들이나 신관 도 부지기수이긴 하지만 말이다. "흐음. 난 별로 세진 것 같지도 않은데. 물론 바람술을 좀 쓰게 되기는 했지만." "글쎄요. 그 차이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안님." "흐응. 여하튼 각설해서 말이야. 이리야의 능력으로 된다는 소리 야?" "그럴 수도 있습니다." 세사람의 기대에 찬 눈빛. 그 눈빛을 잠시 받고 있던 이리야는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알았어. 알았다구. 해보지. 하지만 그 전에 어디서든 좋으니까 큰 나무나 하나 좀 잘라서 띄워줘. 뭔가 매계체가 있는 쪽이 훨 씬 물의 술을 쓰는데 도움이 되니까." "물론. 그 정도는 간단합니다." 목적지에 가까워갈수록 그들의 앞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이상하 리 만치 척척 제거된다. 시안은 그것이 좋은 징조인 것인지 나쁜 징조인 것인지 잘 구분 이 가지 않았다. "시안님. 좀 물러서 계십시오." 기엘은 사람들을 물러서게 한뒤 이리야가 말한대로 큼직한 아름 드리 나무 하나를 골랐다. "후우…." 라이트를 꺼내들고 그는 심호흡을 했다. "어이 로운. 설마 기엘이 저걸로 나무를 자르겠다는 소리는 아니 겠지?" "바로 그 설마야." "꿰엑-- 진짜?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해!! 말도 안 되잖아!!" "그냥 내리친다면 당연히 불가능하지. 하지만 잘 봐 둬. 저녀석 이 바람술을 완력으로 변화 시켜 사용하는 것을 말이야." 시안의 어깨를 잡고 로운이 설명을 했다. "저녀석의 바람술은 정교하거나 세밀한대신에 저런 쪽으로는 거 의 천재적이거든." "뭔가 내가 생각한거랑 틀려도 엄청 틀리네."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시안 은 기엘의 자신의 엘을 검으로 갈무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안은 날카로운 기엘의 기합소리와 함께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 가 소리도 없이 베어지는 것을 그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넘어간다---!!!" 오히려 시끄러운 것은 그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과 작은 동물들. 쿠구구구구궁---소리를 내면서 나무가 아래로 아래로 넘어져 내 렸다. "후우… 힘들다." 땀이 비오듯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시안은 손으로 닦아내면서 허리를 폈다. "여기까지다. 시안." "아. 으으응." 세나케인의 말에 시안이 뒤를 돌아다본다. 기엘과 이리야의 합작으로 무사히 강을 건넌 시안은 마치 신이 들린 사람처럼 산을 올라왔다. 사실 그동안 며칠이 흘렀는지 시안은 세어보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 것 인지 흐르지 않는 것인지도 구별이 가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아무리 산을 올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것은 키가 작은 나무들과 돌들과 가끔 눈에 띄는 작 은 시내정도. 그냥 정신없이 오르다가 해가 지면 노숙을 하고 다시 태양이 뜨 면 발걸음을 옮기고 그것을 며칠이나 반복해왔다. 오늘도 시안은 정신없이 산을 올랐던 것이다. 그러던 시안이 마치 스위치가 들어간 사람처럼 문득 정신을 차린 것이다. 눈을 감고 시안은 불어 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았다. 때라는 것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걸까? 시안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 나머지 일행들이 올라오길 기다렸다. 얼마나 열심히 산을 올랐는지 이리야같은 경우는 저 아래 뒤 처 진 상태였다. 그들이 모두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시안이 아주 밝은 얼굴로 말 했다. "여기서 기다려 줘. 금방 돌아올게." "시안님?" 시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세나케인이 시안을 대신하여 말 했다. "이곳에서 기다려라. 이제부터는 이녀석 혼자 가야하는 길이다." "세나케인님. 그렇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괜찮을 거야. 기엘. 그리고 로운이랑 이리야." 스스로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도 신기했다. 마치 무엇엔가 최면이라도 당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것이라고는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시안의 머릿속에서는 이제부터 는 시안 혼자 가야할, 그리고 시안 혼자 감당해야할 길이 남아있 다고 알리는 것이다. "기다려줘. 무사히 돌아 올 테니까. 누가 알아? 갔다오면 갑자기 수퍼맨 비슷한 것이 되어 있을지." 세 사람 모두 시안의 얼굴만을 바라볼뿐 누구하나 입을 떼지 않 았다. 그런 그들에게 시안은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손을 흔들었다. "다른데 가지 말고 꼭 여기에 있어. 되도록 빨리 돌아올게." "얼마나 걸리는 거지?" "글세?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자아. 그럼." 툭툭 옷에 묻은 먼지들을 떨어내고 시안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시안의 몸은 지는 석양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빛을 반사하고 있 었다. "갔다올게." *** "왜 우울해하지?" 조용하게 걷고 있는 시안의 뒤에서 문득 세나케인이 말을 걸었 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기분이 가라 앉아." "흐응." "케인은 기분 좋지? 고향 같은 곳에 돌아 온 거 아니야?" "특별히 그렇지는 않다. 이곳은 유린의 영역이니까." 세나케인이 대답하자 시안은 머릿속에서 뭔가 반짝하고 떠오르는 것이 생각났다. "맞다. 전부터 궁금햇는데. 왠지 다른 사람들이 있을때는 물어보 기가 좀 곤란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어. 그 유린이라는게 도대체 누구야? 세나케인 같은 그런 존재?" "같다면 같고 틀리다면 틀린 존재랄까." "같다면 같고, 틀리다면 틀린 존재라. 그런 것도 있을 수 있나?" "물론. 아. 이제부터는 내려간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야는 그렇게 밝지가 못했다. 시안은 세나케인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아래쪽을 향해 걷기 시작 했다. "대충 느끼기에는 여기 무슨 분지 비슷한 것 같은데…." 높은 산을 몇날 며칠을 들여 올라와서 내려간다고 하지만 세나케 인의 태도로 보아 올라온 만큼 다시 미친 듯이 내려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온 몸의 감각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정말. 저 세사람이 따라왔으면 무척 힘들었을 것 같아." 시안이 손을 들어서 눈앞을 가로막는 투명한 엘의 자락을 걷어냈 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짙어지는 바람의 엘. 그것은 이제 주위에 완전하게 들어차서 시안의 눈에는 마치 엘로 된 젤리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처럼 비추어졌던 것이 다. 하지만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것이 그럴 뿐. 시안의 몸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야해?" "이제 곧 이다." "그. 레이죠 장로라는 분도 케인이 인도했어?" "그렇지는 않다. 그는 날 각성 시킬 정도의 능력자는 되지 못했 다." "그럼?" "그저 몸 안에 있는 내 존재가 자연스럽게 유린의 땅으로 인도했 을 뿐이지." "칫. 그게 그거잖아." 시안은 끊임없이 뭔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다. 침묵이라는 것이 두려웠다. "유린을 만나면 어떻게 돼?" "만나면 알게 돼." "언제 만나게 되는 건데?" "곧."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안의 시야가 확 트였다. 널따란 평지가 그의 앞에 무섭도록 넓게 펼쳐있었다. 그리고 그 평지의 저 한 끝에 마치 거대한 산을 축소해놓은 듯한 느낌의 성이 서 있었다. 시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왜 그것을 성이라고 느낀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아니야. 저건 성이 아니라….'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건축물이 시안의 눈앞에 멀리 바라다 보 였다. 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무릎 높이 까지 자라 걸음을 방해하는 풀들과 이름 모를 꽃들. 그리고 빛을 발하며 날아다니는 곤충들. 그 사이로 시안은 멀리 보이는 성에서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걸어나갔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성은 점점 더 그 위용을 자랑하며 다가선다. 풀이 돋아나있는 벽들이 시안의 키를 몇배나 넘기며 위풍당당하 게 서 있었다. '이건 성이 아니라… 신전이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렇게 자신의 시야를 가리던 엘의 바람이 하나 둘씩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가자 물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얼마전에 들었던 강물 소리와는 전혀 다른, 마치 폭포 수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이 소리는 뭐야? 케인?" 질문을 했지만 이미 세나케인의 자취는 사라진 듯, 대답이 들려 오지 않았다. 갑자기 시안의 주위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그런 감각이 전해져왔다. '무서워….' 입밖으로는 낼 수 없었지만 시안의 오감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 다. '하지만….'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에서 태고의 신전이 시안을 부르고 있었다. *** ----------------------------------------------------계속 헥헥..... 여름이여~~ 빨리 지나가라.....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3장 유린의 땅 (12) *** 쏴아아아---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물이 떨어지는 소리뿐. 시안은 물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서 걸어갔다. 걸음을 멈추고 싶었지만 등불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날아드는 벌레들처럼 시안 은 그 소리를 향해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시안의 앞에 그 물소리의 정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건…." 거대한 기둥의 사이로 세차게 물줄기라 내리치고 있었다. 희안한 것은 위에서 떨어진 물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여길 밟으면 아슈레이보다 더 이상한데로 떨어져버리는 것 은 아닐까?' 두려움이 시안의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한지는 오래. 벌써 등쪽이 축축할 정도 다. '제길. 여기까지 왔는데 뭘 이렇게 무서워 하는 거야.' 시안은 이를 악물고 그 작은 폭포쪽으로 다가섰다. 쏴아아아아아---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데도 시안에게 물한방울 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이건…." 시안은 두려워하면서도 손을 뻗었다. 왠지 그렇게 해야할 것 만 같았기 때문이다.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손가락이 떨어지는 물줄기에 닿는 순간 시안은 깜짝 놀라서 손을 거두었다. "으악!!!!! 뜨. 뜨겁잖아!!" 수증기조차 나지 않는데도 물줄기는 뜨거웠다. 하지만 그 뜨거운 것에 놀라기도 전에 시안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일이 일어났 다. 떨어지던 물줄기가 순식간에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 우아아앗!!!"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던 시안은 다리가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노. 놀…놀랐잖아." 말을 하지 않고는 못배길 정도로, 다리가 덜덜덜 떨려온다. 뚝-하고 시안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물줄기가 갈라지고 나타난 것은 검은 밤 하늘 보다도 더욱 새카 만 암흑. 깊은 어둠이 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은 갈등했다. '저기로 들어오라는 건가?' 뭔가 거대한 외부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던 시안은 안으로 들어서 면 무진장 화려한 그 무엇이 기다릴 것이라고 나름대로는 상상하 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여긴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상상대로 이루어지는게 하나도 없어!" 결국 시안은 투덜 투덜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것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 시안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쳇. 죽게 되면 죽는 거고…." 시안은 질끈 눈을 감고 그 어둠속으로 한 발을 디뎠다. "시안님… 무사 하실까?" "무사히 돌아오겠지. 그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는 거니까." "위험…한거냐?" 이리야는 왠지 비장감을 온 몸으로 내뿜고 있는 두 사람을 힐끗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차마 뭐라고 위로하기도 뭐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 몸둘바를 모 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글세. 풍환을 받기 위해 이곳에 왔던 분들이 죽었다는 기록은 없긴 해." "아. 아아." 후우---하고 이리야가 안도의 한 숨을 내쉰다. "다행이구만. 하도 뭔가 심각해서 되게 걱정했잖아." "하지만 걱정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에에엥?" "저는 이렇게 손을 놓고 기다려야하는데 시안님께 무슨 일이 일 어날지…." "기엘.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마. 그 녀석의 그런 태평한 성격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나 하겠어? 무사하게 나올 거야. 지난 번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멀쩡하게 살아났잖아." "그래도 아무것도 못해드린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괴로워." 기엘은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무릎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다. "어이. 이봐. 기사 양반. 너무 그러지 말라고. 댁이 그러니까 그 녀석이 자꾸만 걱정을 하는 거잖아." "…………." "그건 그렇고. 그 시안의 집은 도대체 어디야? 그때 이야기 할 때 엄청 궁금했는데…." "먼 곳입니다." "먼 곳?" "예. 저희들은 갈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먼 곳이죠." "엥?" "할 수 만 있다면 같이 가드리고 싶을 정도로요. 절대 불가능 하 겠지만." "기엘. 푸념은 그만해." 로운이 기엘의 말을 막았다. 그냥 두면 이런 저런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버릴 것 같은 분위기 였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다른 소리를 했다. "생각해보니까 그녀석. 밥을 안 먹여 보냈군." "어? 진짜 그러네. 어쩐지 아까부터 뭔가 자꾸 생각나더라니만. 끼니를 걸른 거잖아. 역시 그녀석이 없으니 먹는데 소홀해지는 군." "그건 그렇지. 기엘. 뭐라도 먹을래?" "아니… 시안님도 못드실지 모르는데." "그래도 먹어두는게 좋아." "하지만 로운." "그 녀석이 먹는 거를 매번 챙겨서 꼬박 꼬박 먹어대는 건 배가 고파서라기 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많으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 요 없어." 로운이 그렇게 말하면서 주섬 주섬 며칠 전에 잡아서 훈제를 해 놓은 고기 덩어리를 짐 속에서 꺼냈다. 그는 고깃덩어리를 손질하면서 말을 이었다. "어딘가 물이랑 땔감 같은 것을 구해보자.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데 이렇게 넋놓고 앉아있을 수 많은 없잖아? 어이 이리야. 부탁 해." "아아. 알았어." 이리야가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하면서 두리번 두리번 거리더 니 어딘가 방향을 정하고는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로운이 기엘을 쳐다보았다. "난 시안이 매번 밥, 밥 하는게 사실은 난 일종의 생존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기엘." "생존 본능?" "응. 단순하게 배가 고파서 그런다고 보기에는 뭔가 부자연스럽 지 너무 지나치거든." 기엘은 로운이 조금 큰 돌덩이들을 주워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 았다. 로운은 몇 개의 돌을 모아 불을 필 자리를 만들면서 피식하고 웃 었다. "사실이 그렇잖아. 믿을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상한 곳에 혼 자서 뚝하고 떨어졌어. 잘곳도 있고 입을 것도 있고 먹을 것도 있지만. 그래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거야. 그러니까 그 불 안감이 먹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그는 옆에서 작은 나뭇가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고프지 않아도 끼니때가 되면 여지없이 챙기는 거 알잖아. 그나마 열심히 먹고 있어야 안심이 되었던 것 인지도 모르지. 실제로 바람술에 조금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부 터는 좀 덜해졌잖아." "……그렇기는 하군." 기억을 더듬어보면 로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엘은 시안이 그만큼이나 불안했던가를 생각하니 오히려 우울해진다. "너무 신경을 쓰면 오히려 눈치를 채지 못하는 법이지." "응." "사실. 나도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야. 기엘." 그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의 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년 동안이나 서로를 보며 함께 웃고 함께 배우고 함께 일했던 친우 다. 그가 자신을 잘 알고 있다면. 자신 역시 그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엘. 나는 그 녀석을 믿고 싶어. 아니. 시안님을 믿어 드리고 싶어." "…응. 믿어야지." 지금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불러온 이계의 소년, 그의 어깨 위에 걸린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설사 그 스스로가 모른다고 해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다. "그래. 믿고 있어." 기엘은 스스로 다짐하듯 몇 번이나 그 말을 되 뇌이었다. 멀리서 이리야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이. 이리야. 빨리 오라구." 휘휘 손을 흔드는 이리야의 모습. 기엘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에또. 그러니까…." 내민 손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 그 암흑 속으로 시안은 천천히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젠장. 불이라도 좀 켜 놓으면 어디가 덧나냔 말이야." 이상하게도 세나케인을 부를 마음이 나지 않는게 신기했다. 분명 불안한데, 누군가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면서도 시안에게는 그런 마음이 들지를 않았다. 그저 앞으로 천천히 나아갈 뿐이다. "후우. 도대체 어디까지 걸어오라는 건지…." 빛이 없으면 시간 감각도 공간 감각도 잘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얼마를 걸은 것인지, 얼마나 지난 것인지 시안은 잘 알 수가 없 었다. "저어… 여기 누구 없어요?" 용기를 내어 소리를 질러보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다. 시안은 손가락을 들어 콧잔등을 몇 번 긁었다. "누구 없냐구요!!" 순간 썸뜩하도록 차갑고도 뜨거운 기운이 목덜미를 스친다. "우앗!!!!" 시안은 목덜미를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누, 누구야!" 덜덜덜, 온 몸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누구야!!! 장난 치지 말고 나와!!!"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젠장!! 나와 보란 말이야!! 사람을 불렀으면 나와야 하는게 예 의잖아!!!" 존대말 같은 것은 어디론가 집어치워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두 려움과 오기뿐. 무섭지만 무섭지 않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었지만 다 거짓말이다. 정말로 무섭다. 입술이 덜덜 떨려 올 정도로. "나오라고 했잖아---!!" 두려움과 공포와 오기가 겹쳐진 시안의 절규가 아무것도 없는 암 흑 속으로 길고 길게 퍼져나갔다. 그 끝에 돌아오는 것은 한없는 적막과 어두움. 시안은 그 자리에 앉아 망연자실 해버렸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걸.' 목덜미를 감쌌던 손을 풀어 왠지 모르게 썰렁한 어깨를 감싸안는 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시안은 생각에 잠겼다. '풍환이라는 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지?' 고요한 암흑은 한가운데에 한참을 앉아있으려니 왠지 두려움도 공포도 마비되어 가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사람을 암흑속에 소리도 없는 곳에 가두어 놓으면 미친다고 하던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시안은 뭔가 오싹해져서 뒤를 돌아다 보았 다. 적어도 자신이 들어온 곳에서부터는 빛이 새어들어올 것이라 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돌아다본 곳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바늘끝만한 빛도 말이다. 꿀꺽---- '괘. 괜찮…겠지?' 이제는 실실실 웃음이 나온다. '괜찮을 거야. 아암. 괜찮고 말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시안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쑤욱하고 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우. 우아아아아아악!!!! 뭐. 뭐야!!" 순식간이 눈을 뜰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이 시안에게 달려들었 다. "제기랄!! 어째서 여긴 이렇게 맨날 떨어지기만 하는거냐구!! 좀 참신하게 부웅 떠오르는 것도 없냐!!!!" 강렬한 바람에 시안의 옷자락이 파라라락 하고 떨렸다. 시안은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속으로 하나 둘 셋하고 숫 자를 세다가 눈을 번쩍 떴다. 아래에서 넓고 넓은 수해가 시안의 얼굴로 미친듯한 속도로 달려 들고 있었다. "우. 우아아악!!!!"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은 이미 바람에 날려 사라진지 오래다. '다. 당황하지 말자. 그. 그래… 머. 멈춘다고 생각을 하면….' 맨날 뚝뚝 떨어지다보면 어느새 적응이라는 것을 하게 마련이다. 시안은 새파랗게 질려가는 손가락을 꾹 쥐면서 속으로 간절하게 바랬다. '멈춰. 제발. 제바∼알 멈추라구우--.' ------------------------------------------ 계속 더위야~~ 제~~발 멈춰라~~~~~~~ 쿨럭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3장 유린의 땅 (13) 불어오는 바람이 시안의 살을 에이듯이 파고들었다. 들리는 것은 바람이 일으키는 날카로운 파공성뿐. 시안은 속으로 빌고 빌고 또 빌었다. '멈추라니까-----!!!! 제길 난 바람의 계승자란 말이야!!!! 멈추 라면 멈춰!!!' 시안이 절규를 하는 순간 덜컥하고 시안의 몸이 공중에 마치 어 딘가에 걸린 것처럼 멈추어섰다. "어라?" 빠르게 흘러가던 영상이 중간에 뚝하고 멈추어진 것처럼 시안의 눈앞을 흘러가던 광경역시 덜컥하고 멈추어 버렸다. "머. 멈췄다. 하. 아하하하하하. 하. 하…." 공중에 걸린채로 시안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 광경은 자신이 이 유린의 땅에 들어오기 직전에 보았던 광경 과 아주 흡사했다. "아아. 흡사한게 아니라. 같은 곳이구나…." 문득 정신이 들으니 그것은 확연하게 느껴졌다. 시안은 볼성사납게 엉거주춤 멈추어 있는 몸을 끌어당겼다. 공중 을 아릅답게 유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안이 어느 부분엔가 내려 서는 순간, 그 곳에서부터 마치 물의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시 안의 발끝에서 동심원으로 엘의 파문이 일어나 퍼져나갔다. 구불 구불하게 외곡 되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가 시안이 몸을 움직이면 다시 파문이 생겨났다. 몇 번이나 질리지도 않고 그것을 반복하던 시안은 언제나처럼 그 부분에 털썩하고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버렸다. 적응이 빠르다고 해야할지 포기가 빠르다고 해야할지 알수는 없 지만 말이다. "여긴… 중간지대의 상공쯤 되는 건가?" 「…아닙니다.」 "…………." 갑작스럽게 목덜미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안의 솜털이 삐쭉삐 죽 일어섰다. '유, 유령인가….'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실체이며 허상. 허상이며 실체인 것…. 」 시안이 앉아있던 곳에서 시작된 파문이 갑자기 한곳으로 몰려가 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무형의 파동에서 유형을 파 동으로 그리고 투명한 형체로 모습을 바꾸어 나갔다. 마치 생명의 탄생을 보는 기분으로 시안은 그것을 넋놓고 바라보 았다. 실바람의 틈을 타고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완전한 인간의 형체를 닮은, 정확하게 말하면 세나케인의 흡사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잠시 시안과 시선을 마주치다가 마치 물결처럼 밀려오는 느 낌으로 입을 열었다. 「바람의 계승자여. 신들의 의지가 남아있는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시안은 눈을 껌벅 껌벅 몇 번이나 감았다가 떴다. 역시 눈앞의 형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손을 잡아서 볼을 당겨보지만 아프기만 할뿐 잠에서 깨지도 않는 다. "역시 꿈꾸는 것은 아닌 것 같네. 하기사 이게 꿈이면…." 시안은 한숨을 푸욱 내 쉬었다. "만나기 참 어렵네요. 당신 뭐라고 부르면 되죠? 그. 유린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저의 이름입니다. 바람의 계승자여.」 "왜 뜸을 들인 거죠? 그냥 적당히 나타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 거렸다. 앞으로 닥칠 미지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일종의 자기 보호일지도 모른다. "무슨 큰 시험을 하는 것도 아니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도 아 니고…." 「그 대신 당신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덜컹-하고 시안의 심장이 내려앉는다. '설마 이거. 내가 욕한 것 까지 다 문제가 있다고 따지지는 않겠 지?' 「그대는 의지가 강한 분이시더군요. 그대와 같은 계승자를 기다 려왔습니다. 아마 세나케인도 저와 같은 마음일 겁니다.」 반투명한 인간의 상이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눈에 보이는 것 보다는 그로부터 시작되어 시안에게 와 닿는 엘의 파장에서 더욱 짙게 느껴진다. "쿨럭. 쿨럭." 시안은 왠지 얼굴이 빨게 지는 것 같아서 기침을 했다. 몇 번 그렇게 기침을 하던 시안은 똑바로 정면으로 유린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여하튼 시키는데로 난 여기 왔고, 뭐 내가 뜻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도 만났고 이제 남은 일은 내가 그 풍환인지 뭔지 하는 것을 받아가는 것만 남은 거죠?"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 그럼 다른거라도 있나요?" 「글쎄요?」 후후훗하고 웃는 상대를 향해 시안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 는 표정으로 마주서있다. "아. 그. 그러니까 구. 궁금한게 있는데." 난처해지자 시안은 뭔가 다른 할말을 생각해내었다. 「궁금한 것?」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난번에 아주 잠깐이긴 한데 이거…." 시안은 타닥 타닥 바지춤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이걸 손에 쥐는데 뭔가 이상한게 느껴졌어요. 케인에게 물었지 만 제대로 대답해주지도 않고 그래서…." 그러면서 시안이 손이 들어보인 것은 녹색의 검 카나린이었다. 「카나린이군요.」 그는 그것을 보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마치 세나케인과 같은 반 무표정으로 가볍게 말했다. "그러니까!! 카나린이라는 것 말고 뭐 없어요?" 「말 그래도입니다. 그것은 카나린입니다.」 '제길 말이 안 통해. 말이!!' 결국 시안은 투덜 투덜 궁시렁 거리고 말았다.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어차피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을 생각 인 거 같은데 하나만 더 묻죠. 도대체 왜 나죠?" 「………….」 "어째서 그 수많은 사람들중에 내가 이곳에 불려온 거죠?" 다른 말로 포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 결국 자신이 가장 알고 싶 었던 것은 그것이다. 왜 자신이어야 했을까? 좀더 괜찮고, 좀더 나이가 많고, 좀더 사리분별이 강하고, 좀더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을 수 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신일 까? "도대체 왜 나라는 사람이냐구요? 나는 이곳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구요." 「당신은 가장 바람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왜냐니까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나요?」 "당연하죠!!" 「하지만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 을 깨닫고 있죠.」 "젠장!! 모를 소리만 하지 말란 말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말에 결국 시안은 화를 벌컥 내고 말았다. 세나케인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와서 유린을 만나면 새로운 진정 한 바람의 계승자로 인정받고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 다. 하지만 그 유린이라는 상대는 계속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으 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당신의 의지에 좌우됩니다.」 "……………." 「그것이 당신이 선택된 이유입니다.」 "젠장!! 돌아가겠어!!" 「당신은 알아야합니다.」 "돌아가겠다니까!!!" 「제 임무는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구!!!" 「…………….」 팽팽하게 시안과 유린의 감정이 대립한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는 상대를 유린은 잠시 바라 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신들은 이 땅에 힘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아슈레이를 만들고 또한 유지해온 힘.」 그의 두 손이 가슴 앞에 모아진다. 「그러나 그것은 신들의 의지를 떠난 힘. 그래서 그것에 의지를 더 할 자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선택된 계승자의 의무.」 유린의 가슴 앞에서 모아진 손바닥 사이에서 바람과, 불꽃과, 물 과, 땅의 빛과 어둠이 나타났다. 「나는 신들이 남긴 의지의 조각. 그리고 그대는 새로운 의지입 니다.」 유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가슴 앞에 만들어진 빛과 어 둠이 순식간에 하늘을 덮었다가 시안에게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며 그들의 신을 위해서 무엇인 가를 하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건.' 흔들리는 땅과 그 땅을 덮치는 물과 바람과 불꽃. 그 사이에 혼란에 빠진 인간들의 모습이 시안의 앞을 차례 차례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에 보인 것은 너무나 평화로운 땅. 아슈레이의 정경. 그 한곳으로 시안의 의식이 날았다. '저건… 미메이라?' 눈에 익숙한 복장을 한 남자들이 일제히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들이 모여 무언가 기원을 하자 그들의 앞에 이상한 형체가 나 타났다. '세나…케인?' 시안이 지켜보는 앞에서 세나케인과 똑같은 형체를 한 것이 하나 의 점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어떤 사람의 몸 안으로 흡수되 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부터 온 미메이라와 온 땅에 가득차게 강한 바람의 엘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퍼져나가는 건가….' 시안이 뭔가 깨닫기도 전에 시안이 바라보고 있는 정경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여자와 그 여자 옆에서 그녀를 달래는 남자들. 그리고 차례 차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람들. '왜. 이런 것이 나한테 보여지는 거지?' 이유도 모른 채 방관자의 입장에 서있는 시안의 앞에 이번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람들에게 끌려 신전으로 인도되고 있 었다. 시안은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울고 있는게 가슴이 아팠 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어요. 그의 곁으로…."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시안에게 있어서 보든 것은 마치 환영과도 같아서 다가 갈 수는 있어도 나타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도 시간의 흐름은 지나가는 것 같았다. 울고 있던 여자가 억지로 계승식을 마치고 났을 때, 시안은 마치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았다. '이건… 설마. 카나린?' 영화처럼 지나가던 영상인데도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화면은 지나가고 시안은 그녀를 찾아온 남자를 만났다. 의지를 잃고, 모든 희망을 잃고 폭주한 카나린과 그녀의 연인이 시안의 앞에서 절규하고 있었다. 시안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손안에 있는 카나린의 정체를 말이다. 그리고 그 카나린의 옆에 무표정으로 서 있는 세나케인, 아니 타 닌이라 불리우던 존재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만….' 가슴이 아팠다. 시안은 세나케인과, 카나린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 던 것이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누군 가에 의해 지켜보아진 미메이라의 기억. 그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존재는 바로 세나케인이었다. 그 기억속에서 세나케인은 아무것도 아니던 존재에서 인간의 형 제를 가진 존대로 다음에는 타닌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지체로 변 해가고 있었다. 이것이 누구의 기억이든, 시안은 그 이상 보는 것이 괴로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억지로 머리에 집어넣어지는 듯한 감각. 이해하려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마치 물처럼, 바람처럼 그대로 시안의 안으로 파고 들어와 흡수되었다. 손과 발, 다리와 팔, 그리고 몸. 눈과 코와 입과 머리카락. 몸 안의 신경, 그 하나하나에 기억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나의 의지를 주겠어. 타닌." 그 기억의 한 귀퉁이에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피를 흘 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는 온통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폐허. 그 한가운데에 남자와 세나케인이 서 있었다. "내 의지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그리고 살아가고…." 숨을 헐떡이는 남자는 정말 괴로워 보였지만 그가 세나케인을 바 라보는 눈은 행복한 것 같았다. "난 그저. 내 가족과 내가 사는 이곳을 좀더 평화롭게……." 그리고 이어지는 기억의 잔상은 시안의 눈앞에서 흐릿해지며 사 라졌다. 시안은 멍해진 머리로 아무것도 없는 무한의 공간에 홀로 유영하 고 있었다. '왜 이런 것을 보여주는 거야?' 그에게 보여진 것은 때로는 수장들의 것이었고 때로는 세나케인 자신의 것이었고 또 때로는…. '무엇을 느끼라고 하는 거지? 이런 것을 본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잖아. 이미 벌어진 일이야. 지나간 일이라 구.' 흐릿한 공간이 하나둘씩 색채를 띄어가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푸른색의 하늘. 그리고 그 위에 점점이 나 무와 풀과 산과 들과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과거야 어찌 되었든 나는 지금 현실의 사람이야.' 「당신은 바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문득 귓가로 유린이라고 하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몰라. 당신들이 말하는 바람이 뭔지 난 몰라….' 「당신에게 있어 바람은 무엇이죠?」 남자의 목소리도 아니고 여자의 목소리도 아닌 마음속에서부터 울려오는 생각. '내가 아는 것은 그냥 공기의 흐름이라는 것 뿐이야. 공기는 사 람들에게 필요한 거고, 없으면 살수 없는 것이라는 거, 그 외에 는 정말 그냥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 뿐이야.' 유린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안 은 알 길이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 지나가버린 탓일지도 모 른다. 「당신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내 의지?' 「네. 당신의 의지. 신의 의지를 대신하는 인간의 의지…. 의지 가 없는 힘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 나여야 하죠? 아니 왜 그것이 한사람이어야 하는 거죠?' 문득 시안의 머릿속에 한사람의 희생해야한다는 사실이 억울해지 기 시작했다. 「의지를 잃은자가 바람의 주인이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 지는 이미 보셨지 않습니까?」 '인간의 의지가 필요하다면 나 말고도 여기 아슈레이에 있는 사 람들도 얼마든지 있잖아요!' 「미메이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 아슈레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의 희생이 아닙니다.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것, 당신이 느끼는 것, 당신이 바라보는 것,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 '아니. 난 잘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의지가 어떻게 필요하다는 것인지 알수 가 없다. '난 아는게 없어. 내가 아는 바람과 이곳의 바람은 틀려.' 「서로 다르며 또한 서로 같습니다.」 '아니야. 달라… 내가 아는 것은….' 시안의 마음이, 감정이 가라 앉는다. 과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은 무엇일까? 「아는 것은?」 마음속에서 다시 그가 질문을 해온다. '나는 그냥…….' 어려운 말을 이해할 머리는 없다. 자신의 의지가 어떻게 사용이 되는 것인지 알 수도 없다. '바람….' 귓가에 바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날린다. 마음속의 생각조차 날려 버릴 것 만 같은 바람이 시안의 안으로 불어 들어온다. 그것은 이제 시안의 세포 하나하나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의 일부분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난… 그냥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야.' 불리우는 이름이 무엇이 되든, 그리고 무엇을 하게되든, 그는 그 일 뿐이다. 언젠가 이곳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을 기다리는… 아주 평범 한 아슈레이의 이계인일 뿐이다. '그래 난 그냥 바람 부는 것을 좋아할 뿐이야.'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람의 계승자여.」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당신의 의지가 이제 바람의 의지입니다. 바람의 주인이여….」 불어오는 바람은 더욱더 강해져 시안의 몸을 어디론가 날려보내 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내 뜻대로?' 「당신은 모든 것을 깨달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내가? 어떻게?' 「당신의 의지로….」 사르륵하며 목소리가 시안의 안으로 갈무리 된다. 시안은 사라지기 시작하는 그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지만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귀에는 점점 더 거세 져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거친 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어. 어라.." 시안은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칠흙같던 암흑도 세나케인의 모습을 닮았던 유린의 모습도 모두 사라져버린 곳에 시안만이 홀로 서 있었다. 시안은 너무나 황당해서 그냥 눈만 껌뻑 댈뿐. 이러지도 저러지 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도. 도대체 이게 뭐지?" "그래. 유린을 만났나?" "아앗!!! 케인!!!!"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글세?" "우씨--- 이게 뭐야!!!! 아무것도 변한게 없잖아. 뭐가 각성이냐 !!!!" "…………???" "케인. 그런 얼굴 하지 말고 그 유린인지 뭔지하는 작자나 좀 다 시 불러봐. 잊어버리고 안 받은 것은 좀 받아야겠어." "변한게 없어? 게다가 잊어버리고 안 받은게 있다구?" "그래!!!" "그거 이상한데?" "그 유린이란 작자도 이상하고 시시껄렁한 소리만 지껄이고 그냥 사라져 버렸어!! 뭐 내가 바람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것으로 되 었다고 하면서 사라져 버려…." "그거면 된 거잖아." "뭐어----!!!! 그게 뭐야!! 난 뭔가 거창한 뭔가라도 생기는 줄 알았단 말야!!!" "흐응?" "풍환인지 뭔지를 받아야 한다며!!!!!" "…………받았잖아." "어디가!!!!" "그가 네게 바람의 주인이라는 말을 했을 텐데?" "그게 뭐!!" "널 인정했다는 뜻이잖아." "……………!!" "바람의 주인에게 풍옥이든 풍환이든 너희들 인간이 부르는 그게 무슨 상관이지?" "뭐?" "답답하군." 세나케인은 정말이지 답답해도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는 표정 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네가." 쿠욱-하고 세나케인이 시안의 가슴을 찔렀다. "네가 바람의 주인이다. 알겠어? 이전대의 수장들이야. 나나 유 린을 각성시킬 정도의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이곳에 와서 자 신의 힘을 길러서 돌아갔을 뿐이었지 하지만 넌 달라. 나를 불러 냈고, 유린을 불러 내었고, 신의 의지를 대신하게 되었어. 이제 네가 바람의 주인이다." "…주인?" "그래. 바람을 좋아한다고 했지? 그리고 넌 이제 바람의 주인이 된 거야." 쿠욱-하고 가슴을 찔러 들어오는 세나케인의 손가락이 너무나 리 얼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 시안의 몸에서 화악-하고 바람이 불어 나왔다. '내가 주인…, 그리고 나는 바람을 좋아한다…라고?' 시안의 몸에서 시작된 바람은 그칠줄 모르고 사방으로 불어나가 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돌풍처럼, 태풍처럼 모든 것을 지나 퍼져나갔다. '나의 의지가 바람의 의지. 나는…….' 주위가 온통 시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가 운데 마치 태풍의 눈 안에 서 있는 것처럼 고요한 그 곳에 시안 이 서 있었다. "우. 우앗!! 갑자기 왠 돌풍이지?" 로운이 갑작스럽게 산 위에서 불어내려오는 바람에 놀라 얼굴을 가리면서 주위에 늘어 놓았던 짐들을 부여잡았다. "기엘!! 조심해!!!" "아. 그. 그래!!!" "어떻게 된 거지? 이거? 설마… 그 녀석이." "그 설마 인 듯 한데." 이리야가 왠지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런가?" 갑자기 세 사람은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분과는 달리 주위는 이제 그 돌풍에 의해서 초토화가 되어 가는 중이다. 결국 세 사람은 나무에 찰싹 들러붙을 수 밖에 없었다. 작은 돌맹이들이 날아다니고 나뭇잎들이 바람을 받아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시안님….' 기엘은 나무에 들러붙어서 산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불어 나오는 바람이 진심으로 시안의 바람이길 빌며, 그 바람을 온 몸으로 맞이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람. 그리고 나 자신….' 한참을 불어 나가던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래. 결국 그런 건가?' 시안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몸 안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손바닥위로 흘러나온다. 그것은 빛과 어둠과 그 무엇가로 만들어진 것.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시안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시안은 그것을 하늘로 들어올렸다. '언제나 존재하고, 그리고 필요한 것, 그래. 그런 존재가 되면 되는 거야….' 의지가 담겨진 바람이 시안의 손에서부터 천천히 공기중으로 퍼 져나간다. 그것은 실체가 아닌 순수한 시안의 의지가 담겨진 것 이었다. '바로 내 스스로가…….' 바람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시안의 주위에 연한 은빛의 실루 엣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안의 각성을 축하하는 세나케인의 바람이었다. *** "뭐야. 이거. 완전히 초토화 되었잖아." "그러니까 네 탓이라니까." "어디가!!!!" "네 녀석이 일으킨 바람 때문이다." "모. 몰라!! 그런거!!!" 시뻘겋게 된 얼굴로 시안이 세나케인에게 항변을 했다. "내가 알고 그랬으면 몰라도 모르고 그런거잖아!!" "그래도 네가 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 "너어- 자꾸 갈굴거야?" 울그락 불그락 하는 시안을 보면서 기엘이 시안의 편을 들어주었 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세나케인님. 정말 모르시고 한 일이신 듯 싶은데요. 뭐 크게 다친 사람도 없고…." 그렇게 말하면서 기엘이 자신의 빰을 쓱쓱 문질렀다. 시안이 일으킨 바람에 돌멩이 들이 날아드는 통에 생긴 상처가 조금 쓰라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그렇게 말하는 기엘을 보면서 더욱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편들지마!! 더 얄미워!!!" "하. 하하하하." 얼굴은 쓰라렸지만 기엘은 기분이 좋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가뿐한 표정으로 돌아온 시 안이 돌아오는 순간 그의 근심 걱정은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그 것은 이리야나 로운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모두들 기분 좋은 얼 굴을 하고 있었다. "어이. 꼬마. 그래서 풍환은 잘 받아 온 거야?" "응?" "목적 달성을 했느냐구." "아아. 그거?" "그래." "나도 잘 몰라." 그렇게 대답하며 씨익-하고 시안은 웃어버렸다. "뭔가 되게 많이 보고 되게 많이 느낀 것 같기는 한데…." 그리고는 시안은 멀리 높은 산 너머에 있을 미메이라를 바라보았 다. "다 잊어먹었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의지가 남긴 것들 이다. "다--- 잊어먹었다구." "그. 그게 말이나 돼?" "응. 돼." "정말이지…." 로운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기껏 홀가분한 얼굴로 돌아온걸 보고 기뻐했더니만 당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정도이긴 했다. 너무나 강렬하지만 주위의 모든 것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는 시안의 엘을 어떻게 느껴야할지도 당황스러운 것이다. "바람이란게 그런 거잖아. 휘익- 불어왔다가 휘익- 사라지는 거. " "정말이지 머리가 아프군." "자아. 자아. 얼렁 가자니까. 이제 남은 것은 미메이라로 돌아가 서…." 시안의 말에 모두들 그를 돌아다본다. "미메이라로 돌아간 다음에 그 다음에 내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기엘? 로운?" "…………." "그렇습니다. 시안님." 시안은 마음이 편했다. 미메이라에서 이제 그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OK∼. Let's Go∼ Go∼." 기분이 좋아지면 시안이 의례 중얼거리는 이계의 언어. 이상한 언어기는 했지만 모두들 그것을 기분좋게 받아들였다. "으라차차차차∼." 단. 가끔 좀 이상해서 역시나 좀 껄끄럽기는 해도 말이다. -------------------------------------- 3장 마침. 4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뭔 소리를 쓴건지.... 더워서..모르겠다는...쿨럭..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4장 바람의 땅으로 (14) 콰앙---- 머리가 욱씬할 정도로 지잉- 울려온다. 시안은 머리를 부여잡고는 잠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부들 부들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라치온 산맥의 끝자락이 쩌렁 쩌렁 울릴 정도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왜 때려!" 너무나 세게 얻어맞아서인지 머리는 빙글 빙글 돌고 눈앞은 노랗 다. "왜 때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구!!" "때릴 만 하니까 때리는 거다." "로, 로운." "뭐가 때릴 만해.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 니잖아!!" "맞아 로운. 시안님이 일부러 그러신 것은 아니잖아. 뭐 결과가 좀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기엘이 스윽 눈을 돌렸다. 동시에 범인 1(?)과 증인 2명의 눈이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길고 깊게 패어있는 계곡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 계곡은 꽤 나 깊어서 돌을 던지면 바닥까지 닿는데 꽤나 시간이 걸릴 만한 그런 계곡이었다. 게다가 경사면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한번 떨어 지면 다시 올라오기 힘들 정도였다. "하룻밤사이에 이런 계곡이 생겼다고 하면 아마도 사람들은 절대 로 안 믿을 겁니다. 시안님." "그. 그러니까 내가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잘못은 잘못이야." "그건 그렇지. 아무리 고의가 아니라고 해도 저 정도라면…." 이리야가 로운의 말에 동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뭐라고 말도 못하고 울상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스 스로도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는 것이 아마도 정확한 표현일 것이 다. 시안은 잠시 전에 눈으로 확인했던 그 문제의 계곡을 실눈으로 바 라보았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게 저렇게 되는 거래?' 시안은 단지 그냥 아주 쉬운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난 그냥 시원-하게 바람이나 좀 불게 하려고 했던 건데 말이야.' 그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시원하게 바람이나 한번 멋지게-사실 바람의 주인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어떤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불어보게 해보자하고 있는 힘껏도 아니고 적당히 멋지구리한 포즈로 글자 그대로 '바람 아 불어라∼.'를 외쳤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 스스로의 힘 조절에 실패를 하는 바람에 이건 바람이 아니라 거의 100% 천재지변을 일으키고 말았다. 시안이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자 결국 기엘이 먼저 위로의 말을 건 냈다.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원래 바람술의 운용은 쉬운 것이 아니 니까요. 물론 바람술 뿐만은 아니겠습니다만. 차차 연습을 하시면 훨씬 좋아지실 겁니다." 그말은 진심의 진심을 담은 말이다. 물론 시안이 기엘 자신의 힘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이 무조건 기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기엘의 입장에 서는 왠지 시안이 점점 성장을 해 나갈때마다 자신이 필요 없어지 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조금씩 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주인의 성장은 기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럴까?" "네. 시안님." 기엘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시안의 표정이 조금 밝게 돌아왔다. 하지만, 로운과 이리야는 여지 없이 시안의 심장에 대못을 박는 말을 하고 있었다. "연습을 해보았자 본바탕이 어디 가겠어? 계승식 때도 주체를 못 해서 고생을 해 놓고 말이야. 바람술을 쓰다가 옆에 있는 우리에 게 피해나 안 주게 되길 바랄 뿐이야." "그건 그럴지도 몰라. 확실히…. 앞으로 시안이 힘을 쓰면 적당히 피하거나 바리어를 치는 것도 고려를 해봐야겠어. 그렇지 로운? 안그랬다가는 저 멀리 멀리 미메이라를 넘어서 가이칸까지 날아갈 지도 모르잖아." "맞는 소리야." 로운이 사악하게 미소지으며 이리야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이봐!! 사람이 모처럼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꼭 그런 말을 해야 겠어?" 일단 약간 회복이 된 상태에서는 무작정 대못에 박혔다고 피를 질 질 흘리고 있을 리가 없는 시안이다. "당연하지. 나도 내 목숨은 아까우니까. 안 그래 기엘?" 로운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기엘의 심장이 덜컹 하고 내려 앉았 다. "……………." 사실은, 정말이지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기엘도 이리야의 말에 동 조를 해버린 것이다. 기엘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로운이 의기양양하게 시안을 내 려다본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좀 많이 조심해 주면 좋겠다. 알았어?" 씨익-하고 웃으며 시안을 보는 사람이 하나, 소리내서 웃지 못하 고 몸을 반으로 접은 채 킬킬대며 웃고 있는 사람이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웃어야 될지 울어야될지 어쩔줄 몰라 하고 있는 사람 이 하나. 시안은 부들 부들 부들 떨면서 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가운데 손가락. 가운데 손가락. 가운데 손가락. 가운데 손가락. 가운데 손가락. 가운데 손가락. 가운데 손가락!!!!!' *** "하아. 이제 오늘 밤엔 잘하면 발 뻗고 누워서 잠이나 신나게 퍼 잘 수 있게 된 거구나. 흐흐흐." 낮게 조리는 시안의 목소리가 앞장선 기엘의 귀에 들려온다. "하지만 미메이라로 돌아가면 역시나 그 달고 달고 또 달은 그것 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건 싫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이리야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시안에게 궁금한 얼굴을 해보인 다. "아아. 그런게 있어. 그건 정말이지 말로 설명해서는 절대로 안되 거든? 가서 먹어봐. 내 말이 무슨 말인지 금방 알게 될걸? 그것만 아니면 키리엔도 상당히 살만한 곳일지도 모른다구." 시안은 시종일관 밝은 목소리로 떠들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두사람은 나름대로는 꽤나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 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미메이라가 눈앞에 다가왔다 는 것 자체가 이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았던 여행이 끝나가고 있 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끝내고 무사하게 미메이라에 돌아가게 된 것은 정말이지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행이 끝났다는 것은 이제 곧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그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군. 잘 하면 이제 금방…." 말을 하다 말고 시안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지껄여대는 것이 특기인 시안이긴 하지만 이 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 그렇구나. 돌아가게 되는 거군.' 아무렇지도 않게 미메이라로 돌아오게 된 것만을 좋아라했지만 현 재의 상황을 반대로 뒤집어 보면 이제 곧 기엘이나 로운 그리고 이리야와 헤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우울해졌다. 분명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시안이라는 가짜 이 름대신에 박경하라는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곳에 돌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좋아서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만, 그 반대급부가 만 만치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엄청 억울하잖아. 기껏 고생 고생해서 별일 다 당하 면서 바람의 주인인지 뭐시기가 된 건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수는 없다. 무엇보다 시안이, 아니 경하가 원했던 것이 원래세계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었던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엄청 간사하구만. 힘들 때는 집에 가겠다고 질질 운 주제에 좀 편해지니까 아쉽다니….' 시안은 왠지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버렸다. "키리엔 까지는 좀 시간이 걸릴 겁니다. 시안님." "그렇지. 이 산을 넘어서도 한참을 내려가야 하니까…." 마치 시안이 하는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기엘과 로운이 말을 꺼냈다. "어? 그, 그래?" 문득 생각에 잠겨 있던 시안이 얼결에 대답하자 이리야가 끼어 들 었다. "얼마나 걸리는데?" "글세? 말을 구할 수 있다면 좀 단축되겠지만 서두를 것은 없으니 까 꽤 걸릴 거야." "흐응." 의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로운은 시안 대신 이리야가 있는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로운의 마음도 시안 못지 않게 어지럽기만 했다. 미메이라를 떠나올 때만 해도 돌아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소원한 일이었기 때문에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내왔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뭔가 고민스럽군….' 실제 돌아가면 자신이 파계를 해버린 것쯤은 누구나 알게 되버린 다. 그것은 무척 커다란 문제이지만 자신에게는 그리 큰일이 되지 않는다. 그런 것 쯤은 이전에 포기한지 오래다. 단 걱정되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와 기타 그 이외의 상황들이다. '분명 쉽지 않을텐데. 걱정이야.' 로운은 기엘을 바라보았다. 기엘 스스로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 다. 그의 보람은 자신이 주인으로 삼은 시안의 바램을 있는 그대 로 이루어주는 것일뿐이다. 하지만 그 역시 그가 바라는 그대로만 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것이다. "휴우."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을 해봐야 어쩔수 없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고민은 된다. "어차피 오늘 내로 저 산을 넘기는 힘드니 여기서 야영을 하자. 어때?" "에엑- 아직 초저녁인데?" "그래도 이쪽이 잠자리를 찾기 편해. 어이 이리야. 가서 물이나 찾아봐." "흐음. 역시 난 물 담당밖에 안 되는 건가?" "그럼. 물의 술사한데 물을 찾아오라는 것 만큼 걸맞는 말이 어디 있겠어?" "앗. 나도 같이 가. 항상 궁금했거든. 로운이 물을 찾아오라고 하 면 바로바로 어디선가 물을 길어오는게 말이야." "그거야. 이 몸이 물의 술사니까지." 조금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순식간 떠들썩해진다. "그럼 갔다오지. 어이. 시안. 가자. 이건 네가 들어." "앗!!!! 나같이 여리여리한 사람에게 그런 것을 시키다니 너무해 요옹∼." "…………." 순간 주위가 썰렁, 영하의 절대기온이 된다. "…너. 가끔 그렇게 우리를 얼려야겠냐? 으응?" "아. 아하하하하핫." 시안이 웃으면서 이리야의 손을 피했다. 고민은 있었지만 여하튼 즐거운 기분인 것은 어쩔수 없으니 말이 다. -----------------------------------------계속 비가 오지 않으면 덥군요...-_-;;;; ...우어~~ 가을이여 빨리 오라.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4장 바람의 땅으로 (15) 늦은 밤. 달빛대신에 새벽별이 빛나기 시작한 시간에 넓고 넓은 침대에서 한숨을 푸욱 내쉬며 잠을 깬 사람이 있었다. "거기 누가 있는가." 그는 잠에서 깨어 목이 마른지 사람을 찾았다. 얼마 가지 않아 낮고 조용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장로님. 부르셨습니까?" "늦은 시간이 미안하네. 시원한 물을 좀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 "네. 장로님." 머리가 지끈 지끈 아픈 것을 보니 역시 잠을 잘 자지 못한 모양 이었다. 레이죠 장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어서 아침이 오기를 바 랬다. 며칠을 이렇게 누워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몸의 이상을 느낀 것이 벌써 며칠전일까? 그는 심장 고동소리에 맞추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그 자세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찌 이리 무력한 것인가….' 침대에서 몸 하나를 움직이는 데도 무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시안…….' 문득 딸에 대한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차오른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얼굴과 단호한 결의로 굳어진 얼굴들이 하나 하나 떠올랐다. 아기 때의 얼굴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얼굴 까지 차례대로 눈앞을 지나갔다. '어째서 네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구나. 시안.' 순간 지끈하고 가슴께가 저려온다. 똑똑--- "장로님. 여기 물을 가져왔습니다." "고맙네." 어느새 식은땀이 흘러내렸는지 물잔이 손가락 사이로 미끌어졌 다. 그것을 몇 번씩 고쳐 잡으면서 그는 물을 마셨다. 차갑게 식은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마셔서 비워진 물잔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레이죠 장로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장로님!!!!" 벌떡----- 얇긴 하지만 따스한 망토를 젖히며 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경악의 표정이 시안의 얼굴에 퍼져나간다. "설마…." 망연하게 밤하늘을 보다말고 시안이 옆에 자고 있던 기엘과 로운 을 두들겨 깨우기 시작했다. "일어나봐!! 둘다!!!! 어이 이리야!! 빨랑!! 일어나!!!" 흔들어서 로운을 깨우던 시안은 성이 안 차는지 벌떡 일어나서 로운과 기엘들을 걷어차버렸다. "좀 일어나 보란 말야!!!!!! 젠장할 평소에는 내가 일어나기만 해도 깨는 주제에!!!!" "시…안님?" "이리야 깨워!! 기엘."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일어나!! 출발이야. 지금 당장. 미메이라로 가야겠어." 시안이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로운이 그제서야 잠에서 깨서 약간 멍한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깨우고." "지금 바로 출발을 하셔야겠다는데 도통 나도 뭔지…." "제길. 왜 이리야는 안 일어나는 거야!!!! 어이 이리야!! 이 잠 탱이 빨리 안일어나!!" 이미 깨어난 두 사람 모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도 시안은 설 명하나 없이 이리야를 닦달해서 깨워버렸다. "짐 싸. 그리고 최대한 빨리 미메이라, 아니 키리엔으로 가야해. " "어우. 좀 이유나 알고 그러자구. 참나. 늘어지게 잘 자고 있는 데 왠 난리야." "시안님." 미메이라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모두들 안도하고 잠들어서 인지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했다. 하지만 시안은 일언반구 없이 세사람을 노려보기만 했다. "잔말 말고 일어나. 가면 알게 될 거야." "도대체…." 로운이 인상을 썼다. 시안이 저렇게 우기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표정을 보아서는 절대로 예 삿일은 아닐 것이리라. 십중 팔구 안 좋은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알았어. 알았다구. 기엘 준비하자." "아. 으응." 결국 로운이 손을 들었다. "시안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갈 수 있 지?" "바람술을 쓴다고 해도 좀 무리가 있을 겁니다. 아직 갈길이 머 니." "그럼 일단 이 산 정도는 어떻게든 무슨 주문을 이용해도 좋으니 까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 미메이라에 도착하면 마차를 타든 말을 타든 하면 되잖아." "그렇죠. 이곳은 아직 중간지대에 속하는 곳이니까. 도움이 될 겁니다." "게다가 이곳에 와서 아무래도 꽤나 주문을 쓰기 편해진 것 같으 니까…." 이리야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했다. 시안이 옷차림을 가다듬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이 황급하게 짐을 꾸렸다. 사실 짐이라고 해봐야 늘어놓았던 물건 몇 개가 전부다. 미메이라가 멀지 않았기에 자질 구레한 것들은 대충 포기를 했 다. 시안은 마음이 급했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는 절대로 안 되요. 바보 할아버지 같으니라 구.' 곤히 잠을 자던 시안을 이렇게 서둘게 만든 것은 다름이 아니었 다. 실날 같이 가늘어지며 금방이라도 끊어져 버릴 것 같은 레이죠 장로의 파장, 바로 그것이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절대로 살아 있어 달라구요!!' *** "비상금이란 비상금은 전부 털게 되는 군." 로운이 투덜거리면서 거의 비어버린 비상금 주머니를 만지작 거 렸다. "식사 하시고 출발하시겠습니까? 시안님?" "아니. 그냥 갈래." "하지만 좀 뭐라도 드시는 쪽이 좋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안은 먹을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한시가 급했다. 금방이라도 레이죠 장로가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시안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기엘은 그런 시안이 걱정스러워졌다. "적당히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걸 대충 사와. 기엘. 가다가 배 고프면 먹을 테니까." 고집을 피우는 시안 때문에 사실 세 사람 전부 아침이며 점심이 며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바람술로 라치온 산맥의 마지막 자락을 통과해서 미메이라에 도 착한 것이 늦은 아침 시간. 서두르는 시안을 진정시켜서 말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잠깐, 아주 잠깐 쉬게 한 것이다. 사실 거듭 주문을 써가면서 산을 넘은 덕 에 모두들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시안을 제외 한 세 사람 모두 그 문제의 중간지대 효과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덜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로운. 말은 언제 되는 거지?" "금방 된다고 했어. 마구를 제대로 된 것을 구하지 못해서 좀 찜 찜해. 꼬박 4-5일은 달려야 할텐데." 미메이라로 나오기 전 만해도 위치를 정확하게 잡을 수가 없어 키리엔까지 걸리는 시간을 짐작할 수 없었다. "여기서 키리엔까지는 꽤 멀지." 기엘이 동감을 표했다. 사실 키리엔까지의 거리가 멀다는 것도 시안의 짜증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키리엔이 그렇게 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이다. "뭐가 이렇게 시간이 걸려!!" "시안." 시안이 계속 짜증을 부리자 결국 로운이 참지 못하고 시안에게 한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네가 그러는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만큼 의 시간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아무리 네가 뭐라고 해봐야. 걸 리는 시간이 단축되거나 하지는 않아." "급하다구 했잖아!!" "그럼 그 급한 이유라도 이야기를 해봐. 그렇게 네 멋대로 하면 우리는 마음이 편한 줄 알아? 라치온 산맥을 넘는 것도 그래. 고 집을 피울 것을 피워야지. 네가 하자는대로 그대로 해서 여기까 지 헐레벌떡 왔잖아. 뭘 더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 시안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레이죠 장로가 죽어간다는 소리 만큼은 절대로 하 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은 자신이 레이죠 장로의 죽음의 전조 때문에 고민하 고 괴로워하는 동안 다른 한가지의 나쁜 징조를 알아차리지 못했 다. 그것은 시안이 서두르는 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나머지 세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주위를 돌아 볼 틈도 없는 것이다. "이유는 키리엔에 도착하면 알아." "…………." 고집을 피우며 입을 다무는 시안에게 뭐라고 더 말을 하려던 로 운역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입을 열 것 같 지는 않았다. "최대한 노력을 한다고 해도 꼬박 사 오일은 걸린다. 각오해." "알았어." 시안이 물러서지 않는 이상 방법은 없다. 그저 최대한 시안을 쉬 게 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키리엔에 도착하는게 상책인 것이다. "일단 여기서 테리온까지는 말로 가고. 그곳에서 역마차를 수배 해보자. 잠은 자야하니까." 로운과 시안이 대치하는 동안 지도를 보면서 키리엔으로 돌아가 는 길을 점검하고 있던 기엘이 말했다. "이곳에서 테리온까지 출발하는 역마차는 이미 새벽에 출발을 했 다고 하니까. 그게 아마도 가장 좋은 방법일거야." "그래. 기엘. 일단은…." 머리를 식히자라고 로운은 생각했다. 시안이 말하는데로 이유는 키리엔에 도착하면 알 수 있다고 한 다. 물론 키리엔에 도착한다고 해서 바로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 다. 로운은 차마 시안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키리엔의 상황에 대해서 말해야할지 말하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신전이 유폐되다시피하고 다른 기사들이나 기타 궁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사실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나마 자신이나 기엘은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시안의 경우 정 말 최악의 경우에는 키리엔에 도착하자마자 궁에 그대로 반 연금 당해버릴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젠장. 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인지….' 그나마 한 두번 오고갔던 기엘의 보좌관의 연락도 끊어진지 오래 다. '역시 말해두는 것이 좋겠지?' 로운은 일단 기엘과 상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나마나 현재 궁의 실세는 자신의 아버지와 기엘의 아버지 손에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최악의 상황에 닥치게 되더라도 기 엘이나 자신의 힘으로 시안을 지킬 수는 있을 것이라는게 로운의 생각인 것이다. '젠장 어떻게든 되겠지.' 가망성이 있을 때는 거기에 끝까지 매달리지만 과부하가 걸려버 리면 포기해버리는 것이 로운의 성격이다. 지금은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정보가 없다. 그렇다면 일단 시안의 말대로 키 리엔에 하루빨리 도착하는게 가장 나은 방법이 되는 것이다. 가 서 자유를 빼앗긴다고 해도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이다라는게 로 운의 마지막 결정이었다. *** "레이죠 장로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하라스다인 장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레이죠 장로에게 물었다. "……괜찮네." "저는 곧. 가이칸으로 떠나게 됩니다. 가기전에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꼭 가야겠나?" "곧 돌아 올 겁니다." 하라스다인 장로가 비록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마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레이죠 장로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지금 이런 시점에서 궁을 비우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그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엘의 파장에서 미 세하게나마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돌아왔을 때 건강한 모습을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말이 거짓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루 이틀, 시간 이 지날 때마다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가는 레이죠 장로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거짓이라고 매몰차게 몰아 붙일 수도 없다. 그저 안부의 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정말 그대로 할건가?"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주어는 생략한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좋은 방법이라…." 레이죠 장로의 입장에서는 하라스다인을 말릴 수도 없다. "시유님을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레이죠 장로가 피하던 이름을 언급하는 하라스다인. 레이죠 장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라스다인 장로를 바라 보았다. "자네…."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만하게." 결국 레이죠 장로는 역정을 내고 말았다. 그런 그를 잠시 지켜보 고 서 있던 하라스다인 장로는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 다. "죄송합니다. 레이죠 장로님. 그럼 몸조리 잘 하십시오. 저는 이 만 물러나겠습니다." 품위 있는 인사도 눈에 안 차는 듯, 레이죠 장로는 눈을 감고 고 개를 돌려 버렸다. 희망이라는 희망은 모조리 잃고, 이제 꺼져가는 희미한 생명의 가는 선 위에 서 있는 전 수장이라는 입장이 너무나 싫었다. '신이여…….' 수장의 위에서 물러난 뒤 그는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그의 신을 불렀다. '신이여. 미메이라를, 나의 하나 남은 딸을 보호하소서…….' *** --------------------------------------------- 계속 ........아아..신이시여....이 마감 좀 끝내주소서.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4장 바람의 땅으로 (16) *** "기엘.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입에 잔뜩 배어물은 훈제고기를 우물 우물 거리면서 시안이 말했 다. "예?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아. 아니야. 뭐 그냥…." 시안이 말꼬리를 흐린다. 사실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것을 설명하기가 조금 곤란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위를 흐르는 바람에서 느낀 것이기 때문이 다. 말로 표현하기 곤란할정도로 아주 미세한 것이 그 바람에 섞 여 있었다. 마치 깨끗한 물에 단 한방울의 잉크를 떨어트린 느낌이랄까? 아무런 영향도 없어보이지만 분명 불순물이 조금 섞인 그런 기분 이었다. "뭔가 기분이 안좋으십니까?" 시안이 말꼬리를 흐릴때면 대부분의 경우 말로 표현하기가 좀 그 런 경우라는 것을 기엘은 슬슬 느끼고 있었다. 시안의 성격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대부분 시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분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냥 거슬려서." 역시 레이죠 장로 때문인가 싶어서 시안은 그만 말하겠다는 의미 로 앞에 놓여진 접시를 집중 공략하기 시작했다. "많이 드세요. 시안님." "아. 응응." 밥도 제대로 안먹고 열심히 달려온 탓인지 결국 시안은 자신의 식욕에 항복을 한 상태였다. 처음 고집할 때는 마차를 타고 가면 서 안에서 먹겠다고 했지만 워낙 흔들리는 말에 하루 밤 낮을 꼬 박 시달려서 인지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런 시안을 오랜만에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기엘은 로운이 좀 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리야는 생전 처음으로 와본 미메이라가 신기한지 잠깐 구경을 하러 나간다는 명목으로 나갔고 로운은 역마차를 수배하러 나간 참이었다. 일단 예상대로라면 오늘 새벽정도에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좀 늦는데 이거….' 로운이 나간지 한참 되었기 때문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여비는 타고 온 말을 팔아서 준비하기로 이야기가 끝나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말을 파는데 애를 먹고 있 다는 소리도 된다. '일단 이리야씨도 돌아와야할텐데….' 새벽정도에 출발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까지 안 돌아올지 도 모르는 터라 기엘은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안을 돌보는데 여념이 없다. "조금 더 드시겠어요?" "아. 아니. 이정도면 충분해." 꺼억--하고 시끄럽지는 않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소리가 시안의 입에서 세어나온다. 시안은 시안 나름대로 조금이나마 안정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계속 불안정하게 느껴지던 레이죠 장로의 파장이 아주 약간이나 마 안정이 되어 있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메이라라는 것 이 한 몸에 느껴지는 장소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행이 머물고 있는 곳은 미메이라의 중반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물론 크기에 비해서는 가이칸 제국의 작은 성에도 비교 할 것이 못되지만 여하튼 인적도 없는 산골짜기와는 상당한 차이 가 있다. 그중에서도 시안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눈앞을 지나다니 는 거의 모든 사람들 -대충 열에 아홉정도-이 자신과 같은 은백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푸른머리의 이리야가 눈에 띌 정도다. "역시 돌아오니 좋기는 하네. 외국에 나갔다가 한국에 귀국한 사 람 심정이야." "예?" "아.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고. 돌아오니까 기엘도 좋지?" "물론입니다." 기엘 역시 미메이라로 돌아온 덕에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 넒 은 가이칸 제국을 여행하는 동안 불안해졌던 정신이 거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는 상태인 것이다. 몸으로 느끼는 것도 남다르 다. 제국 어느 곳에 있어도 미메이라에 있는 것처럼 몸이 편하지 는 않다. 그것은 미메이라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하는 문제도 있긴 했 지만 무엇보다 미메이라에 있을 때, 완전한 미메이라인으로써 존 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지금 걱정이 되는 것은 시안이 말한 '키리엔에 돌아가면 알 게 되는' 그 무엇이다. 시안과 기엘이 노닥 노닥 하면서 거의 식사를 끝내갈 무렵 벌컥 하고 문이 열리면서 로운과 이리야가 동시에 뛰어 들어왔다. "기엘!!!!" "로운?" 보기 드물게 흥분상태에 있는 로운을 보고 기엘이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젠장할!!!!!!!" 로운은 들어오자 마자 허리에 차고 있던 라이트를 풀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왜 그래?" "단지 몇 달인데 왜 이렇게 물가가 뛰었나 몰라. 말을 파는데 원 래 가격은 꿈도 안꿨지만 지나치게 깍아 내리더라구." "로운이 펄펄 뛰고 있길래 뜯어 말리느라고 고생했어. 나는." 이리야가 질렸다는 듯이 팔을 내젖는다. "뭔가 키리엔에서 일이 있는 것 같아. 키리엔에서 문제가 있으니 까 아무래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도 하고…." 털썩하고 로운은 기엘이 일어난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는 그리고는 아무말 없이 앞에 놓여져 있는 음식들을 먹어치우 기 시작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싶어서 그가 먹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 아무말 없이 남은 음식들을 거의 해치운 로운은 입을 쓱쓱 닥고 는 옆에 있던 시안의 물잔을 빼앗아서 벌컥 벌컥 들이켰다. "후우---." 전광석화처럼 음식을 해치운 로운이 한숨을 푸욱 내쉬자 모두들 로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긴장을 한 채 그를 지켜보 았다. "역시 고민을 해봤는데 말을 해두는 편이 좋겠다." "………." 로운의 말을 듣고 기엘은 직감적으로 그가 키리엔에서 벌어진 일 들을 말하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안과 이리야 몰래 조금씩 논의를 해오고 있었지만 과연 이야기 를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 둘다 결정을 못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에 놀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시안." 로운은 제일 먼저 시안에게 당부를 했다. "그리고 이리야, 당신은…."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국가 기밀(?)에 속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 다. 그것을 이리야에게도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그는 마지 막으로 고민했다. "아니지. 지금까지 같이 보고 들은 것도 많으니까 말해두는 편이 좋겠어. 괜찮겠지 기엘?" "뭐…. 이리야씨 도움을 많이 받았기도 하고…." 기엘 역시 이리야의 문제는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미 이리야가 알고 있는 시안에 대한 것들만 해도 충분 히 많은 비밀들을 공유하는 사이인 것을 생각해볼 때 이리야를 제외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결심하고 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로운이 세 사람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일단 뭐랄까…." 말을 고르고 또 골라도 역시 제일 충격을 받을 상대는 시안이다. "아니. 말하기 전에 시안…." "응?" 갑자기 불안하게 로운이 왜 그러는 것인지 시안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내가 말한 것은 지키겠다. 그러니까 믿어주었으면 좋겠어. 나, 그리고 기엘을 말이야." "그야. 물론 믿고 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라고 말하잖아." "믿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하라고? 궁금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이 야기를 해봐. 뭔지 들어야 믿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 뜸을 들여보아야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결국 로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키리엔에 돌아가더라도 널 바로 보내주게 될지 안될지 미지수 다." "뭐?" 시안의 눈이 동그래진다. "일단 널 보내줄 사람은 이세상에 한분 밖에 없어. 바로 대신관 님이지. 그런데 그 대신관님이 지금 아무래도 신전에 유페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안님 사실입니다. 사실은 말씀을 못드렸었는데, 저희들이 키 리엔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엇인가 키리엔에서 사건이 있 었던 모양입니다." 로운이 말을 잊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기엘이 대신 설명을 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초반에는 대신관님과 계속 연락을 하고 있 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연락이 되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하 고 있었던 차에 기엘의 보좌관이었던 기사가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그 다음은 말하기 힘든 부분이었지만 꽤나 굳게 결심을 한 듯 로운은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대로 내 아버님과 기엘의 아버님이 뭔가 일을 꾸미신 것 같 다.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신관님이 현재 자유로운 몸이 아니신 것 만은 틀림이 없어." "…로운.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설마 그 로운의 아버지랑 기엘의 아버지랑 쿠데타라도 일으켰다는 소리야?" "말하자면 비슷해." "…………!!!" "수장의 자리가 새로운 계승자에게 넘어가는 동안, 즉 시안님께 서 계승로에 계시는 동안 모든 실권은 잠시나마 대신관님께 이양 됩니다. 임시라도 현재는 시안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대신관 님께서 수장대리역을 하시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관님 께서 억류되어 계시다는 것은 분명 키리엔에 큰 이변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말도 안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러니까 우리도 믿기 힘들다고 하는 거다. 정확한 사정은 역시 돌아가야 알 수 있겠지만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야. 미리 말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을 하지만 충격을 받지는 않 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미 시안은 패닉 상태에 빠져버리고 있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자신을 이곳에 불러온 사람이 바로 대신관이다. 그런데 대신관이 억류되어 있다면 도대체 자신은 어떻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시안은 뱅글 뱅글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이리야가 황당한 얼굴로 로운에게 물었다. "설마 이거 정말로 진짜로 굉장히 심각한 상황은 아니겠지?" "…………." 이리야의 입장에서는 시안을 도와 주었다는 명목으로 미메이라에 서 호의 호식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기대하 는 것이 있기도 했다. 설사 키리엔이라는 곳에 가자마자 얼마 되 지 않아서 미메이라를 떠나게 되더라도 적어도 시안의 곁에 있을 수 있을 만큼은 있고 싶은게 그의 심정이었다. 중간지대에서 있었던 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곁에서 지켜본 그 의 입장에서는 시안이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시안이 그를 필요로 할 때까 지는 곁에 있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키리엔에 도착하면 아무래도 이리야 당신은 고향이든 어디로든 돌아가는 쪽이 좋을 지도 몰라. 자칫 잘못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 다." 실제 제일 위험한 것이 시안이라는 것까지는 로운도 말하지 못했 다. 그것을 말했을 때 벌어질 상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리야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싫어." "뭐?" "싫다고 했어. 위험하다면 더더욱 저 녀석 옆에 있겠어.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고 나는 그다지 내가 결정한 일을 번복할 생각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리야씨 아무래도…." "어차피 시안이나 당신들이나 전부 위험한 것은 기정사실인 것 같은데 나 혼자서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도망 갈 생각 같은 것은 없어. 날 그런 의리도 없는 사람으로 본거야? 그럴 거면 아예 시 안을 따라오지도 않았어. 지난 번에 분명히 말했을텐데?" "하지만 사정이 좀 다릅니다. 의리의 문제도 아니구요." 기엘이 이리야를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이리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끄러워. 상황이 어떻데 되든 간에 저 녀석이 가고 싶은 곳으 로 갈때까지는 난 시안 옆에 있을 거야. 말 했잖아? 어차피 난 갈 때도 없다고 말이야." "잠깐!!!!" 이리야와 기엘이 말다툼을 하고 있는동안 시안이 무슨 생각을 했 는지 말을 막았다. "잠깐 기다려봐!!!!" "네. 시안님." "그러니까 지금 들은 말을 뒤집어 보면 돌아가도 내가 언제 돌아 갈 수 있을지 절대로 미지수라는 소리야?" "…………." "정말이야?" "정확한 것은 모른다. 일단 도착을 해봐야겠지." 침통한 얼굴로 로운이 말했다. 더 이상은 어떻게도 말해줄 수 없 는 현실에 로운도 조금은 절망하고 있었다. 이미 인연을 끊겠다 고 생각한 부모님이긴 하지만 역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는 없 다. 과연 그의 아버님은 무슨 짓을 벌인 것일까? 눈앞이 캄캄해져 온다. "풍환을 받아오면 돌려보내준다고 했잖아!" "돌려 보내 준다. 그것은 확실해. 내가 보장하겠어."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날 원래대로 보내줄수 있는 사람은 대 신관 할아버지 밖에 없다면서!!" "………돌아가면 아마도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거야. 일단은 누구 도 널 건드릴 수는 없을…." "닥쳐!!!" 시안이 탁자를 콰앙하고 내리쳤다. "젠장!! 왜 이렇게 되는 게 없는 거야. 정말이지. 아아악---." "시안님.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되었어?" "그래도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시안님꼐서는 …." "내가 바람의 계승자니 뭐니 수장 계승자니 뭐니한다고 해도 실 권이 있는 것도 아니야. 하!!! 웃겨 정말. 내가 떠나자 마자 일 이 터졌다구? 어차피 내가 거기 있을 때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잖아. 그런데 돌아가면 일이 어떻게 될 수도 있 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해봐야 내가 믿을 것 같아." "그럼. 돌아가지 않으면 어쩌려구?" "………!" 순간 시안의 말이 막혔다. "사실이 그렇잖아. 미리 말한 것은 도착했을 때 네가 충격 받지 않도록,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던간에 각오를 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가 이렇게 날뛰라고 한 소리가 아니야." "그게 그거잖아!!! 알고 가나 모르고 가나 내가 할 수 있는게 뭐 가 있다구!!" 시안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내리 눌렀다. 말 대답은 했지만 역시 방법이 없기는 시안도 매 한가지다. 아무 리 난리를 쳐봐야 시안은 어쩔 수 없이 키리엔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정말이지 모르는 것 투성이야!!" 그렇게 말하고 시안은 성큼 성큼 걸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시안이 나가고 난 뒤는 세 남자가 둘러앉은 썰렁한 탁자 위에 감 도는 냉기 뿐이다. "후우…." 시안의 말대로 말을 해보아야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시 괜히 말을 꺼낸건가?" 로운이 이마를 짚으며 말하자 기엘이 그의 어깨에 손을 대고 위 로했다. "아니야. 로운. 어차피 알게 될거니 그곳에서 당황해 하는 것 보 다야 이쪽이 나아." "…………." "시안님도 곧 돌아오실 거다. 일단 급선무는 어떻게 되었든 키리 엔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말이야." "그렇긴 하지…." 왜 이렇게도 무력한 것일까? 로운과 기엘은 똑같은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쉰다. 과연 그들을 기다리는 진실이 무엇일지 그들은 도통 짐작을 할수 없었다. "케인." 한편 뛰어나간 시안은 갈 데가 없자 결국 묵고 있는 여관에서 멀 지 않은 한적한 언덕 위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케인…." 「…………….」 "도대체 내가 바람의 주인이 된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바람이 주인이 된 것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뭔가 도움이 되는 건 없잖아. 사실 난 곧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안 그래?" 「………….」 "설마 내가 돌아가더라도 그곳에서도 바람의 주인일리는 없을 거 아니야." 바람이 주인이니 뭐니 할 때는 일단 '좋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도움되는 것은 없다. 그것이 시안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은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분명, 이계의 인간인 네가 바람 의 주인이 된데는 반드시 의미가 있을 거다.」 "하아……."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한 한숨이 새어나온다. "정말이지. 이러다가 한숨만 팍팍 내쉬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 다." 차라리 바람술이나 팍팍 쓰면서 한판 활극을 벌이던지 하는게 훨 씬 나을 것이라고 시안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머리로 고민하는 것 따위는 정말로 하기 싫다는 것이 정말이지 솔직한 심정이었다. *** ------------------------------------------------계속 아자!!!! 오늘 4장 마지막이 올라갈겁니다.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4장 바람의 땅으로 (17) "으음…." 키리엔에서 멀지 않은 숲에 네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 숲은 넓 게 수도 키리엔을 둘러싸게 만들어진 인조림으로 키가 알맞게 자 란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는 곳이다. "역시 무슨 일이 있던 간에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로운."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통 알 수가 없잖아." 원래대로라면, 아니 정해진 대로라면 일단은 대신전으로 계승로 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보고를 하러 가야하지만 네 사람은 대신전 대신에 백색궁 키리엔이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 모여 있었다. 기엘과 로운이 어떤 방식으로 키리엔에 들어가느냐를 놓고 고민 을 하는 동안 시안은 다른 것으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시안은 처음 느꼈을 때보다는 다소 여유를 가지고 백색궁을 바라 보고 있다. 레이죠 장로가 죽어가는 이유에 대해서 세나케인으로 부터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다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좀 있지만, 그것이 레이죠 장로가 가지고 태어난 원래대로의 수명이라는 소 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가슴은 아프지만 견디지 못할 정 도는 아니었다. 풍옥을 잃었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타고난 수명대로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풍옥을 잃은 것이다라는 것이 세나케인의 말이었 다. 사실 말장난 같은 말로 결국 엎어치나 메치나 매한가지이긴 했지만 그대로 두 가지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히 다르기 때 문인지 시안은 처음 레이죠 장로의 죽음을 직감했을 때보다는 훨 씬 마음을 놓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을 무시한 채 멍하게 키리엔을 바라보고 있던 시안 은 결국 결심했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들어갈 건지 빨리 결정해 줘. 시간이 별로 없어." "예?" "뭐. 이미 도착도 했으니 나도 말할게. 그 레이죠 장로님 말이 야." "레이죠 장로님?" "응. 그 분. 이제 그분 얼마 못 사실 거야. 사실은 그것 때문에 서두르자고 한 거야." 마치 오늘은 북풍이 불거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안은 아무렇지 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가져온 파장은 만만치가 않았다. 기엘은 너무나 놀라서 입을 벌린 채 말도 하지 못했고 로운은 도 대체 시안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눈을 껌뻑 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걸 알 수 있느냐고는 묻지마. 나도 모르니까. 여하 튼… 그렇다는 이야기니까. 이것으로 내 말은 끝." 뭐라고 시안에게 묻고 싶었지만 도대체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랐 다. 기엘과 로운은 둘 다 조금 전에 들은 사실에 놀랐다기보다는 충 격을 받았던 것이다. "저어. 그러니까 시안님…." "…………." "아참.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었는데. 키리엔에는 얌전히 들 어가겠지만 여장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사양하겠어. 이제와서 뭘 더 어쩌겠어? 안 그래?" "무. 물론 그렇습니다만…." 사실은 전혀 아니올시다지만 시안이 한 말에 충격을 받은 기엘은 그냥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좀 가보고 오지." 갑작스럽게 벌떡 로운이 일어나서 성큼 성큼 걸어 나갔다. 그는 시안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일단 키리엔 주변이라도 돌아보고 올 테니 이곳에서 기다려." "………." "조심해 로운." "그래." 휭하게 로운이 사라져 버렸다. 기엘은 의논을 하던 상대를 잃고 난 후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났 다가 주변을 서성였다가하면서 계속 불안해했다.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 레이죠 장로에 비한 비보가 아니었 다. 그가 순간 충격을 받은 것은 오히려 시안에 대해서였다. 그는 저 중간지대에서 시안이 자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서 밤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않고 달려온 시간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예지 능력이 생기신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예지 능력 에 대한 댓가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 은 단순하게 예연의 현자 마샤를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고쳤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증거로 시안은 레이죠 장로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을 뿐 다른 상황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 있다가 다른 사람의 죽음을 감지해낸다는 것 자체가 시안에게 얼마나 충격을 주는 일이었을까? 그제서야 기엘은 시안이 그리도 불안해하던 이유를 정말 일목요 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곤란해….'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안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곤란한 일은 정작 다른데 있다는 것을 그가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넓고 넒은 그러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신전 깊숙한 곳에서 수염을 하얗게 기른 노인이 꿇고 있던 무릎을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옷자락이 그의 발 걸음에 따라 함께 움직였다. '드디어 돌아오신 건가….' 희미한 미소가 그의 주름투성이 얼굴에 퍼져나간다. 몇날 며칠을 금식하며 지내왔던 그지만 얼굴에는 묘한 화색이 번 져 나간다. '레이죠 장로.' 보이지 않는 하늘이건만 그는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당신의 바램이 어찌 이루어질지….' 로운은 숨을 죽인 채 인적이 드문 곳을 돌아 성 가까이에 접근하 고 있었다.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생각보다 성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 크기 때문에 섣부르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물론 목숨의 위험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보다는 시안 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조심에 조심을 더 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역시 시안의 말 대로 하는 쪽이 좋은 걸까?' 분명 무엇인가 변화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안에 들어가보지 않는 이상 알아내기 힘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많은 경비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가이칸 제국의 카드미엘 성보다, 몇 안 되는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이 키리엔이 훨씬 부담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내 얼굴을 알아 볼 수 있는 기사들이 너무 많아.'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곤란하군…. 어?' 로운은 한숨을 내쉬다 말고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는 황급하게 자신의 몸에 걸어두었던 티리쉬의 주문을 한번 더 전환시키며 혹여 누가 자신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나도 좀 곤란해지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이 그의 파장을 느끼지 못하게하는 티리쉬의 주문을 강 화시키면 그 역시 타인의 파장을 느낄 수 없게된다. '아까 그 파장은 분명….' "최대한 서두를 예정이니 아마도 다음달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게 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부인." "하지만 그리 오래 미메이라를 떠나 계신다면…."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떤 수단을 써서든 돌아오겠소." 하라스다인 장로는 좀처럼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배웅하 고 있는 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부디 조심하세요." 곱게 나이를 먹어 아직도 한껏 우아함을 가지고 있는 그의 아내 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가 두 주 이상 미메이라를 떠나있었던 적은 없었다. "알겠소. 이만 들어가시게." 하라스다인 장로는 키리엔 외곽까지 따라나오겠다는 아내를 우격 다짐하여 돌려보냈다. 역시 아내의 눈물을 보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다. "먼길을 눈물로 시작한다면 좋은 징조가 아니겠지." 딱히 누가 대답하는 것도 아닌데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언제 기엘과 그가 돌아올지 모르니 더 더욱 서둘러야 겠어.' 마지막 말은 소리가 되는 대신 그의 머릿속에서만 울려 퍼졌다. '저 사람은 분명 하라스다인 장로님인데.' 먼발치에서 스치듯 지나간 일행을 보며 로운은 반쯤은 경악하고 있었다. 이미 시안 때문에 한번은 충격을 받은 머리는 너무나 혼 란스러워 지고 있었다. '하라스다인 장로님이 어째서….' 하라스다인 장로를 보았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다고 의심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너무나게 확연하게 기억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제국의 병사들이다. 길고 긴 메이스와 제국의 문장이 양각된 방패들. 그리고 제국의 기사가 아니면 가지지 못하는 문장이 새겨진 망토가 로운의 시야 를 가득 메웠다. '어째서 제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설마 하라스다인 장로님께 서 무슨 일이라도 벌이신건가?' 머리를 숙이고 혼란스러운 머리를 억지로 가동시켜본다. 하지만 정보는 적고,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정말이지 곤란……어, 설마?' 로운은 생각을 이어가다 말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흐름을 명백하리만치 가로 막는 강력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티리쉬를 이용해 파장을 가로 막아도 시안의 강력한 파장 은 전해져온다. 그만큼 시안의 파장은 일반적인 기준을 훨씬 상 회한다. "서. 설마. 시안 이 바보 녀석이!!!!!" 그는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것도 모1조리 잊어버린 채 빠르 게 이동하고 있는 시안의 파장이 전해져오는 쪽으로 뛰어가기 시 작했다. "기엘. 이 바보녀석!!! 어째서 막지 못한 거야!" "시안님 안 됩니다!! 로운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우리가 뭐 죄라도 졌어? 왜 쥐새끼 마냥 염탐을 해!! 시간이 없어 난 갈 거야!!" "시안님!!!" 막무가내로 시안이 키리엔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기엘은 사색이 되어 시안을 붙들었다. "놔!!!" "시안님. 절대로 안됩니다. 시안님 말씀대로 더 이상은 여장도 하지 않으시겠다고 한 이상 위험은 보통 때의 수배, 아니 수백배 이상 됩니다." "위험은 무슨 위험이야. 여하튼 날 죽일 수는 없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놔." "시안님!!!!" '위험하다구요! 정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라고 소리치고 싶었 지만 그 말만큼은 차마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알았어. 알았다구!! 젠장!!." 순간 시안의 몸을 은백색의 빛이 휘감았다. 기엘이 놀라서 손을 떼는 것과 시안의 머리카락에서 눈부신 은백 색의 머리카락이 자라나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굳어진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섬뜩하리 만치 차갑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젠장--- 컨트롤이 안 돼 컨트롤이!!! 어깨 정도까지만 하려고 했는데." 기엘이 놀라움을 수습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시안의 불평소리가 머리카락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도대체가 맘에 안 든다니까. 여하튼 간에. 이 정도는 내 맘대로 좀 되면 좋잖아." "시, 시안님." 시안은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정리했다. 조금 지저분한 곳도 있 지만 옷은 멀쩡하다. 그는 문제의 길게 자라서 다시 허리를 넘어 무릎 정도의 길이까 지 자란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았다. "줘." "예?" 머리카락을 하나로 부여잡고는 시안은 기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엘은 갑자기 시안이 뭘 달라고 하는 건지 몰라서 멀뚱 그 손바 닥을 바라보았다. "달라구. 머리 묶을 거. 그런 거 잘 가지고 다녔잖아." "아. 그. 그것이…." 기엘은 화-악 얼굴이 붉어져서 열심히 주섬 주섬 몸을 뒤지다가 결국은 손목에 비끌어 매 놓았던 천을 풀어냈다. "죄송합니다. 이런 것 밖에는 없어서." "됐어." 시안은 기엘의 손에서 천을 잡아채 머리를 묶었다. 아니 정확하 게는 시도했다. 하지만 손에 설어서인지 몇 번이나 시안의 손은 천 조각을 놓쳤다. 결국 그것을 보다 못한 기엘이 다가가서 척척 끈을 돌려 머리를 묶어주었다. "고마워. 여하튼 이 정도면 되었지? 나도 많이 양보한 거니까. 더 이상 방해하지마. 알았어?" 잠시 눈앞에서 흐르는 머리카락에 정신을 팔고 있던 기엘과 이리 야가 뭐라고 더 말도 하기 전에 시안은 몸을 돌려서 뛰어가기 시 작했다. "아. 아앗!!! 시안님!" "뭐해! 따라가야지." 이리야가 기엘의 어깨를 툭 치고 시안을 따라가며 말했다. "어차피 저 녀석 고집 이긴 적도 없으면서 뭘 그래. 저 놈 말대 로 어떻게든 되겠지. 안 그래?" "하지만 그래도…." 결국 기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시안을 따라갔다. 로운이 퍼렇게 역정을 내는 얼굴이 그의 뇌리 속에 떠오른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4장 마침니다. 5장 시안의 바람으로 이어집니다. 좀 늦었습니다. ^^;; 더..더워서..--;;;;;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5장 시안의 바람 (18) 키리엔의 수비대원 중 한 사람인 구노는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 었다. 일일 3교대로 바뀐 근무를 하다보면 때로는 아침 나절에, 때로는 오후 늦게, 때로는 한밤에 이렇게 성문 앞에 서 있게 된다. 밤에는 사실 큰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럭 저럭 한가하지만 낮, 그 것도 아침나절 근무에 걸리게 되면 상당히 바쁘다. 거기에 오늘 같은 날은 하루 종일 정신이 없다. 수비대원이 되려면 사실 다른 능력보드는 바람술에 능통해야한 다. 완력보다는 바람술에 능통해야 성안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검 문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교대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피곤한 몸으로 몇시간 을 버티려고 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제국의 기사까지 드나드는 바람에 상당히 신경을 곤두 세 우고 있었기 때문인지 더더욱 힘들고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중. 뭐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어느 누구하나 말단 수비대원에게 그런 정보를 줄리는 없다. 결국 그는 그냥 수비대원이고, 수비대원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 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후우. 어이. 라킨. 잠시 좀 다녀올게." "아아. 그래." "역시 아침에 너무 많이 먹은 것 같기고 하고, 속이 더부룩하단 말이야." 엄한 군율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그게 융통성이 없지는 않다. 그는 잠시 볼일을 보기 위해 자신의 근무 파트너에게 언질을 주 고는 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그가 원하는데로 '볼 일'을 본 것은 그 뒤 한참 후 였다. "어?" 성문 안으로 막 들어서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휘잉-하고 맑고 맑 은 바람이 불어왔다. "어라? 왠 일이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미메이라 그것도 키리엔에는 항상 살랑 살 랑 하는 하늬바람 같은 바람이 분다. 그런데 지금 그 바람이 한 순간에 화악하고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주 잠시 잠깐의 일. 그는 화장실을 가다말고 놀래서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대고는 놀 라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뛰어 나왔다. 바람이, 맑고 시원하고 거센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누군가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은색의 머리카락이 내리 쬐는 빛을 반사해서 그것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광원같이 보였다. "누…구지?" 갑작스럽게 바람이 바뀐 것을 느낀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수비대원들 역시 뭔가 이상해진 공기를 느꼈고, 막 성문안 으로 들어 서려던 몇 명의 관인들도 놀라서 그 빛의 덩어리를 멍 하게 보고 있었다. "시안님! 좀 천천히 가시라니까요." "시끄러워!! 한 시가 급해!!" 기엘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얼마만에 돌아오는 거리인지 모르지만 그 익숙한 거리가 그의 눈 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안은 점점 더 발걸음을 빨리 하고 있었다. 그렇게 뛰어 왔으면 숨이 찰만도 한데 이상하리 만치 숨이 차지 않았다. 언제나 상쾌한 공기가 폐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런 기 분. '이상해 뭔가. 여기 돌아오니까….' 달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상쾌한 기분으로 기분 좋게 달려본적은 없는 것 같다. '마치 집에 돌아온 그런 기분이야.' 내 집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익숙한 곳에 돌아온다는 것이 이렇 게 사람을 기분좋게 하는 것인지는 정말 몰랐다. "어이- 아저씨들 안녀어엉--." 기세도 좋게 커다란 목소리로 시안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 는 수비대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 뒤를 바람같은 빠르기로 훤칠한 키의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 다. 수비대원인 구노는 너무나 놀라서 긴 은발 머리를 휘날리며 바람 처럼 성문을 통과한 시안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어? 저, 저분은…."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저 얼굴은 많이 봤 던 얼굴이었다. 만일 그가 시안의 측근에서 그녀를 돌보았던 시녀들이라면 분명 같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겠지만 멀리서 만 보았던 사람이기에 그 미묘한 차이를 발견 할 수는 없었던 것 이다. "서… 설마 시안님?" 얼결에 그의 입에서 바람의 나라 미메이라의 차대 수장의 이름이 튀어 나오자 주위로 술렁 거림이 퍼져 나갔다. "시안님이 돌아오셨다." "시안님이?" "새로운 수장님이 돌아오신거야?" 시안이 돌아왔다는 놀람이 가라 안기도 전에 시안의 뒤를 열심히 따라 달려왔던 기엘이 마악 구노의 앞을 지나갔다. 그를 붙잡으려는 구노의 손놀림을 날렵하게 피하면서 기엘이 소 리쳤다. "나이트 기엘이다. 시안님이 돌아오셨으니 모두에게 알려줘!" "에에엑---- 나이트 기엘!" 그리고 기엘은 바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문을 통과했다. 두 사람이 변변찮은 검문도 받지 않고 성문을 통과 했지만 다음 사람은 그들과는 사정이 달랐다. "거기 멈추시오!!!" 구노의 목소리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순간 한쪽으로 쏠렸 다. 다음 순간 그들의 눈동자는 그들이 기억하는한 가장 커다랗 게 확대가 되어 버렸다. 처음으로 보는 신비한 머리카락의 사람이 그들의 앞으로 뛰어 들 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아… 앗차차차." 이리야는 아무 생각없이 기엘의 뒤를 따라서 달려오다가-사실은 먼저 출발했지만 어느사이 뒤쳐졌다.-수비대원들의 저지를 받고 난감해졌다. "누구냐!!" 그저 평범한 미메이라 인이라면 이런 취급은 받지 않았겠지만 짙 푸른 머리색을 가진 이상한 남자는 목 끝까지 들어오는 칼끝을 피할 수 없었다. "아. 그러니까 나는 시안님하고 같이 여행을…." "제가 보증하는 사람입니다. 괜찮으니 통과 시켜 주시죠." 스윽-하고 이리야의 목에 겨누어졌던 검날이 옆으로 미루어졌다. "예?" "로운 디 로크레슈입니다. 시안님께서 방금 전에 들어가셨죠?" 로운은 시안의 낌새를 눈치채고 열심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는 헉헉하고 가쁜 숨을 잠시 고르고는 물었다. "나이트 기엘님께서도 같이 오셨습니까?" "아. 예. 물론입니다만…." 구노는 당황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시안이 돌아온 것도 사건이라면 사건인데 거기에 짙 푸른 머리색을 가진 이방인이 등장해버린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어떻게든 하겠는데 문제는 그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 분명 시안과 함께 계승로를 떠났던 신관 로운임에는 틀림이 없지 만 뭔가 떠날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틀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관님. 아무리 신관님께서 보증을 하신다고 해도 성문 안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방인을 들여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일 단 요즈음의 시국도 문제가 있는 판에…." "제가 보증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신전으로 가야했겠지 만 시안님께서 일단 궁에 들리셔야 한다고 하셔서 먼저 이곳에 온 것입니다." "신관님께서도 제 입장을 조금만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무리 이 사람이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지킬 것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구노는 고집스럽게 말을 되풀이 했다. 어떻게 보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임무인 것이다. 설상 아무런 해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리야 는 이방인인 것이다. "후우-." "아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들어가봐. 뭐. 여기까지 왔으 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기다릴테니까 말이야." "이리야." 로운이 난감해하면서도 안절 부절 하며 자꾸만 성을 바라보는 모 습을 보고 이리야는 한발 양보를 했다. 모든 일에는 예외라는 것이 있지만 예외가 있으려면 기본이라는 것도 동시에 존재해야한다. 로운이 아무리 차대 수장-이젠 거의 수장이지만-인 시안의 측근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기본을 무조건 적으로 파해시킬 수는 없을 노릇인 것이다. "이분의 신변은 저희가 보호하겠습니다. 신관님."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합니다. 이리야. 잠시 기다려주면." "알았어. 갔다오라구. 시안님이 걱정되서 그러는 거 알아." 같은 미메이라인은 아니지만 몇 번이나 고비를 넘기며 함께 해와 서인지 왠지 이런곳에서 두고 혼자 들어가는 것이 망설여진다. 하지만 시안에 대한 걱정이 큰 로운은 이리야의 손을 한번 굳게 잡아주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리야는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역시 바람이란게 좋기는 하구만. 여기는 원래 이렇게 바람이 시 원∼하게 붑니까?" 씨익웃으며 구노에게 이리야가 넉살좋게 말을 걸었다. 여기 저기 도망다니며 떠올어다녀서인지 이리야에게는 붙임성이라는 것이 많이 생겨 있는 터였다. 구노는 왠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리야에게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했다. "아마도 시안님께서 돌아오셨기 때문이겠지요. 시안님의 바람이 말입니다." "그렇군. 시안님의 바람이라…. 그거 듣던 중 좋은 말인데." 이리야는 팔장을 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머리색보다도 훨씬 파랗게 보이는 하늘에 시안과 함께 찾 아온 바람이 불고 있었다. *** ........................................... 계속. ...시원한 바람 좀 불어줬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군요... 아아. 더워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5장 시안의 바람 (19) *** '어디지? 어디야?' 타닥 타닥 하는 경쾌한 소리가 여기저기 퍼져 벽에 부딪혀 다시 돌아온다. 경쾌한 시안의 발자국 소리는 시안의 바람을 타고 궁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누가 전하지 않아도 미메이라 인이라면 누구든 느낄 수 있는 시 원한 바람이었다. '오른쪽….' 마치 스스로의 몸에 탐지기라도 달은 것처럼 시안은 거침없이 나 아갔다. '에잇. 더럽게 많이도 들어가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마치 끌려가듯 시안은 백색궁 키리엔의 깊은 곳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우쓰. 할아버지 제발 죽지 말고 좀 기다려요∼.' 비록 세나케인이 말을 듣기는 했지만 천수를 다해서 죽는다고 해 도 시안은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아! 여기다.' 궁 곳곳으로 퍼져나가던 시안의 발걸음 소리가 굳게 닫혀진 어떤 문 앞에서 뚝-하고 끊어졌다. 문 앞에서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를 하고 있던 여관하나가 시안 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은 시안의 뒤에서 한 남자가 등장한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 시. 시안님!!!" "아아. 안녕하세요. 레이죠 장로님 안에 계시죠?" 방긋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보인 시안은 문에 손을 대고는 밀 려고 했다. 그 순간. 뒤에서 나타난 남자가 시안의 손목을 잡았다. "레이죠 장로님은 지금 몹시 편찮으셔서 면회가 불가능합니다. 시안님." "어라?" 시안은 자신의 팔을 붙을은 남자의 팔을 따라서 천천히 눈을 돌 렸다. 짙은 회색빛의 눈과 희끗 희끗하게 바랜 은발을 가진 남자가 그 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인물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설마, 로운…." 시안이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로운의 애비가 됩니다." 분명 이런 저런 일로 얼굴을 몇 번 봤던 사람이지만 특별하게 기 억을 하고 있지 않았던 사람이다. "아. 예. 안녕하세요." "돌아오신 줄 몰랐군요. 먼저 신전으로 오실 줄 알았는데." "아아 그럴려고 했는데 좀 사정이 있어서 말이예요. 그런데 이것 좀 놓아주실래요?" 시안이 찡그리면서 말을 했지만 왠지 로크레슈 장로는 시안의 손 목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많이 피곤하실텐데 일단은 여독을 좀 푸시고 후일 만나 뵙는게 어떻겠습니까? 레이죠 장로님께서는 워낙 몸이 약해지신 상태라 서 말입니다." "알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만나야 되요."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파바바박 불꽃을 일으키며 일어난다. 시안은 노려보고, 로크레슈 장로는 입을 꾹 다문 채 서로 한 발 자국도 양보하지 않는다. "이거 놔 주시죠?" "…………." 원래의 시안이라면 펄펄 뛰면서 난리를 피웠을지도 모르는 상황 인데도 왠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눈앞에서 자신의 팔을 꼭 쥐고 있는 남자에게서 풍기는 뭔지 모를 압력 때문이라 기 보다는 시안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인가 시안의 마음속에서 이 사람은 위험하다라고 말하고 있 었던 것이다. "난. 이제 수장이죠?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요." 시안의 입에서 뜻밖이 말이 튀어나온다. '어. 어라. 이렇게 말하려던 것은 아닌데….' 시안도 그렇게 말해놓고는 조금 당황해 버렸다. 하지만 그 말은 효과가 있었던 듯, 로크레슈 장로의 표정이 아주 조금 일그러지는 것이 시안에게 보였다. 그것이 시안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키리엔에서 수장이 들어가지 못할 곳은 없지 않은가요?" "…………." "로크레슈 장로님." "좋습니다…." 시안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위엄 같은 것이 결국 로크레슈 장로의 고집을 꺾었다. 그것은 위엄일 수도 있고, 시안의 몸에 어려있는 강력한 힘의 영향일 수도 있다. 여하튼 그 위엄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확실하게 작용을 한 모양이다. 로크레슈 장로는 마지못해 시안의 팔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마 음 같아서는 넌 대리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옆에 있는 여 관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 이라고 눈앞에서 코웃음이라고 쳐주고 싶은 기분이 된 시안 은 로크레슈 장로를 한번 빤히 쳐다보고는 굳게 닫혀진 문에 손 을 댔다. 끼기기긱 하는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케인.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줘.' 「원한다면…. 」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대답소리가 시안의 마음속에서 울려나온 다. 그와 동시에 시안이 몸에서 은빛의 연기 같은 것이 한줄기 빠져나와 그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시안은 눈을 들어서 넓고 넓은 방의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죽음의 냄새가 짙게 풍겨나오는 그곳에는 오로지 단 한 사람, 레 이죠 장로가 홀로 잠들어 있었다. 시안은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약하디 약한 생명의 파장이 시안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후우…아직 늦지는 않았구나." 안도감 같은 것이 시안의 마음속에 가득 들어찬다. "어이. 이봐요. 레이죠 장로님." 마치 어제 보았던 이웃집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기분으로 시안이 입을 열었다. "레이죠 장로님. 눈 좀 떠봐요." 푹신한 침대 한가운데에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인다. 꿀꺽-하고 시안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타액의 소리가 온 방안에 울려 퍼진다. 마치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고요함. "레이죠 장로님?" 시안은 한번도, 박경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때에도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물론 이번 여행에서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긴 했지만 늙어서 죽 는다는, 그런 것은 본 일이 없다. 뭐라고 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시안의 몸을 둘러싸기 시작했 다. "좀 일어나 봐요. 당신 딸이 왔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시안은 잠시 멈칫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시안과 닮기는 했지만 완전한 시안의 얼굴이 라고 하기엔 무리인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슬쩍 보는 사람들은 시안이라고 해도 믿겠지만 그녀의 얼굴 을 제일 잘 알고 있을 사람중 하나인 레이죠 장로의 기준에는 못 미칠 것이다. '아아. 귀찮네. 정말로.' "케인. 내 얼굴만 시안의 얼굴로, 원래의 시안의 얼굴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네 스스로 그렇게 하고 싶다면 가능하지. 널 보는 사람들의 눈 을 속이는 일은 쉬운 일이다.」 "뭔가 속이는 것도 그렇긴 한데…." 벅벅하고 시안이 손가락을 콧잔등을 긁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생각나는 것도 아니다. "뭐 도로 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정도 서비스는 해주지 뭐." 시안은 두 손을 자신의 얼굴에 대고 마음속으로 바랬다. 부디 자신의 얼굴을 레이죠 장로가 원래의 시안으로 봐주길 바라 면서…. "으음. 변화가 좀 있는 것 같아?" 「글세?」 "쳇 거울이라도 좀 있었으면 좋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이봐 요. 레이죠 장로님 좀 일어나봐요. 예?" "…………." 굳게 닫혀져 있던 눈꺼풀이 살며시 열렸다. 그 눈동자는 원래부터도 흐린 회색의 눈동자였지만 열에 들떠 본 래의 색보다 훨씬 더 혼탁해져 있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만 시안은 꾹 눌러 참았다. '쳇. 남자가 우는 건 태어날때랑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뿐이라 구.'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서 불쑥 속담하나 가 튀어나온다. "레이죠 장로님 돌아왔어요." "……시안."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말라있는 레이죠 장로의 입술에서 시안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시안은 그것을 보고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맡에 병자 를 위해 준비된 물병과 컵이 보인다. 그는 그것을 조금 따라서 침대가로 다가가 레이죠 장로의 상체를 안아올리고 입사이로 조 금 흘려 넣어주었다. "뭐예요. 멀쩡하더니만. 정말이지." 투덜거림인지 아니면 한숨인지 모를 말들을 시안은 자꾸만 했다. 사실은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군… 너는 시안이 아니야."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레이죠 장로가 눈을 껌벅였다. "순간 시안이 돌아온 줄 알았네." "……………." "무사히 돌아왔군." "당연하죠. 내가 누군데. 시키는 것도 잘 받아왔고, 원하는데로 다 해줬으니까 이제 장로님이랑 신관 할아버지 일만 남았어요. 아시죠?" "………." 어딘가 모르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시안은 레이죠 장로를 다 시 침대에 눕혔다. "미안하구나." "뭐가요?" "모든 것이…." 털썩- 시안은 침대 가에 주저 앉았다. 세 사람쯤 함께 뒹굴거려도 충분하게 넓은 침대였다. "미안할 거는 없어요. 레이죠 장로님이 이렇게 된 건 누구 탓도 아니니까. 하지만 전 그냥은 못있겠어요." 시안이 과연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레이죠 장로는 그 말뜻을 헤 아리려고 했다. 곁에 다가온 것 만으로도 시안에게서 느껴지는 파장은 자신이 아 는 어느 누구보다 강력하고 맑고 깨끗하다. 그것으로 레이죠 장로는 시안이 바라던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리라고 해도 어느 누구보다 나았다는 건가….' 어느새 그는 시안의 말 뜻을 헤아리기 보다는 감상에 젖어버리기 시작했다. "저더러 하라는 일은 다 했으니까. 이제 돌려 보내주셔야죠? 그 리고 그걸 위해서는…." 거기까지 말하고 시안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하려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다시 한번 생각하기 위해 서이다. '케인. 괜찮은 걸까?' 「글세…. 하지만 네가 힘을 쓴다고 해도 그에게 허락된 시간인 그렇게 많지 않을 거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에는 한계가 있으 니까.」 '그런 건 난 몰라. 난 그냥….' 시안은 주름 투성이의 앙상한 노인의 손을 잡아 올렸다. '난 그냥 내가 떠날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하는 것 뿐이야.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아.' 그리고 시안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에서부터 눈부신 백색의 빛이 새어나와 순식간에 시안의 몸으로 퍼져나갔다.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의 영광. 그 바람의 시작과 끝." 이미 바람의 주인이 된 시안에게는 필요 없는 주문이었지만 너무 나도 자연스럽게 그 주문이 시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안의 몸 속에 있는 생명의 순수한 엘이 바람소리와 함께, 시안 이 만들어낸 빛과 함께, 바람의 주인에게서 그가 잡고 있는 늙어 앙상해진 손을 따라서 생명의 끝자락에 걸려있는 노인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가장 순수한 생명의 엘의 흐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도 시안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그 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그저 단순한 바램. 그 바램의 끝에서 시안의 힘이, 그의 생명의 흐름이, 신의 축복 을 받은 자들의 생명의 힘 미슈파트가 소리도 없이 폭발했다. *** "여긴가? 시안님께서 계시다는 곳이." "당장 열어줘요!!" "………좀 진정하십시오." "진정은 무슨 진정이죠? 제게는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잠시 의식을 잃었던 시안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어라 잠들었었나?" 콰앙----- "우앗! 깜짝이야." 시안이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들기는 소 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몇 번이나 연거푸 온 방안을 울릴 정도로 부딪혀 들려왔 다. "아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머리가 다 울리잖아." 시안은 머리를 흔들면서 얼굴을 손으로 비볐다. 마치 3일 정도 미친 듯이 운동장을 뺑뺑 돈 것 같이 몸이 피곤했 다. 솜이 물먹은 것처럼 온 몸이 노곤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의 몸 상태. "아이고오 죽겠다." 콰앙--- "안에 계십니까? 시안님!! 레이죠 장로님!!!"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시안과 레이죠 장로를 부르자 시안은 그제 서야 자신이 케인에게 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아. 그렇지…. 케인. 괜찮아. 이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엇인가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콰앙-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안으로 나 뒹굴었다. "아앗!!" "시안님!!!" "아아아…. 저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잠깐…." 정신을 차리고 침대가에서 일어나는데 누군가 남자들의 사이로 바람과 같이 뛰어 들었다. "…언니!!!!!" "우아아악!!!!" 은색의 단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소녀가 시안의 가슴에 덜컥 안겨들었다. "언니. 시안 언니…." "…어. 어라?" 가슴에 찰싹 달라붙은 소녀를 보고 시안은 어쩔 줄을 몰라서 당 황해버렸다. 맹세코 누나들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외간여자(?)에게 덥썩 안겨 본 경험은 없다. "우. 우앗!! 누구라도 좋으니까 이것 좀 떼줘요!!" "언니…." 가슴에 안긴 소녀는 몇 번이나 언니라고 시안을 부르다가 말고 울음을 터트렸다. "언니… 으흐흐흑." "…저. 저기. 저어… 나는요."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오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주위에서는 얼굴이 달아오른 시안과 울고 있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볼뿐 아무도 말리려고 들지 않는다. '우우. 젠장 어떻게 하란 말이야∼.' 살포시 다아오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코를 간지른다. 그리고 떨 려오는 몸은 더할 나위 없이… "시유. 그만 놓거라. 사람들의 눈도 생각하여야 하지 않느냐." 시안이 출혈사태(?)에 직면하기 직전 굵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구원의 손길을 던졌다. "하지만 아버님. 언니가…." "시유." 흑흑거리면서 작은 소녀의 몸에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그녀의 작은 어깨를 살포시 감싸면서 레이죠 장로가 말했 다. "그만 울거라. 이 애비도 몸이 많이 나아졌구나. 내 두 딸들의 모습을 보니 말이다." "레이죠 장로님!!!!" 누군가 레이죠 장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부르 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경악 과도 같은 외침이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어제 오늘 하면서 앓고 있던 레이죠 장로가 혈색도 좋게 곧추 서 있는 것을 보고 안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술렁 거리기 시작했다. 시안의 당황도, 시유의 울음도, 모두 그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 렸다. 그런 모습을 둘러보던 레이죠 장로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대 답했다. "간만에 제 딸들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있던 병도 날아가 버린 것 같군요." *** 한사람이 넓은 서재의 두꺼운 양탄자 위에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뭐가 불만인지 끊임없이 중얼 중얼 거리면서 애꿎은 양탄자 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단 한 사람. 지금 서성거리면서 화를 내고 있는 남자와 아주 흡사한 얼굴을 가졌지만 훨씬 젊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버님. 그만 하시죠." "로운!" "네." "너라는 녀석은…." "벌써 아침부터 그 말씀밖에 안하시는 군요. 그 뒤를 이으실 생 각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서 쉬겠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앉아라!!" 버럭-하고 로크레슈 장로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모든 것이 못 마땅했다. 마치 일부러라도 그런 것처럼 모든 것이 너무 한꺼번에 일어나 버렸다. 일을 하는 것은 그의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일이 일어나버리면 역시 벅차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룻밤을 꼬박샜어도 피곤한 기색은 없다. 그도 그럴 것 이 머리가 너무나 복잡해서 자기는커녕 하룻밤 내내 어떻게 이 사태를 처리해야할지 골머리를 썩었던 것이다. 해결된 일은 하나 도 없고 오히려 앞으로의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만 가는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하루 일찍, 아니 반나절이라도 일찍 돌아오지 못한 거냐." 그는 애꿎은 로운을 앞에 두고 계속 역정을 내고 있었다. 시안이 도착한 것은 하라스다인 장로가 키리엔을 떠나 가이칸 제 국으로 떠난 직후였다. 거기다가 오늘 내일 하며 죽기 직전이던 레이죠 장로가 갑자기 쾌차해버렸다. "일이라는 것이 사람 마음되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 님." "하지만 일에는 순서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 순서라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두 사람 모두 단 한 마디도 지는 법이 없다.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이렇게도 딱 들어맞는 부자도 없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은 비록 틀릴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기본적 으로 사고의 패턴이 같은 것이다. 똑같은 눈빛과 똑같은 얼굴 표정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예?" "그 라이트 말이다." "아아…." 로운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라이트를 들어보였다. 그의 아버지도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를 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나이트 였다. 굳이 물어 볼 것도 없이 검의 상태만을 보아도-그것은 아 주 미묘한 차이다-그 검이 기사의 검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 볼만한 눈은 가지고 있을 터였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미메이라의 가호보다 이 라이트가 필요했달 까요?" "…………." 로크레슈 장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들의 성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로운의 말은 해석해보자면 사정은 있으나 아버지께 는 말 못하겠소∼라는 의미. 그는 자신을 비롯 집안의 어른들이 한달 내내 설득해도 로운이 신관이 되겠다는 고집을 꺽지 않은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 다. 그런 로운이 너무나 가볍게 파계를 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 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는 난감해 하고 있었 다. "복직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거냐?"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기사에서 신관으로 다시 기사 로서 봉직한 예는 아직 까지 찾아 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로크레슈 장로에게 로운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대답했다. "시안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너라는 녀석은… 그 아이가 대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텐데." "대리라고는 하나 현재는 분명 수장 계승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수장을 섬기는 기사일 뿐입니다. 아버님." "…………." 로크레슈 장로는 단호하게 말하는 아들이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서재의 탁자 위에 있던 물건을 퍼억하고 쳐내버렸다. 투두두둑-- 몇장의 종이와 펜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나가라. 당분간은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구나."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역정을 잔뜩 들을 각오를 하고 있던 로운은 의외로 자 신을 내쳐버리는 로크레슈장로의 태도에 내심 놀라며 대답을 했 다. '역시 내가 모를 무슨 일인가가 있었던 거야. 이건.' 인사는 바르게, 하지만 그는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기로 로크레슈 장로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그의 아버지 만큼이나 그 역시 마음이 복잡했다. 아들을 내보낸 아버지, 로크레슈 장로는 로운이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 무거운 몸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는 야망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야망은 저 망나 니 같은 아들 때문에 모두 포기를 해버렸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의 아들은 또 다른 형태로 그의 또다른 야망을 방해할지도 모 르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도대체가… 내 자식의 마음조차 알 수 없으니. 과연 무엇을 알 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한탄을 했다. 하라스다인 장로는 이미 자리를 비우고 가이칸으로 떠났다. 이미 벌어진 일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것도 당신의 뜻입니까? 미메이라여…." 그는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의 신, 그들을 존재시켜주는 신의 이름을. *** --------------------------------- 계속 .......하늘한번 보고. 땅한번 보기.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5장 시안의 바람 (20) ***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내가 만나겠다는데." "죄송합니다. 시안님. 하지만 하라스다인 장로님과 로크레슈 장 로님께서…." 여관하나가 시안의 앞에서 쩔쩔 매면서 대답을 했다. 그녀는 주위의 난장판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쉴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원망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봐. 당신!!" 돌아온 시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말을 한다. 도대체 그녀가 진짜로 시안 그녀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말이다. 여관들을 내치는 솜씨도 훨씬 업그레이드 했는지 돌아온 시안은 시녀들이 뭐라고 하려고 할라치면 길길이 날뛰면서 모조리 내쳐 버린다. 여행을 하면 다 이렇게 되는 것인가 생각하며 그녀는 시안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라헬입니다. 시안님. 잊으셨습니까?" "아아. 라헬. 좋아. 좋다구. 지금 당신이 좀 간과하는게 있나본 데…." 거기까지 말하고 시안은 한 템포 쉬었다. "지금 이 미메이라의 수장이 누구라고 생각해?" 건방지다면 건방지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시안의 말투. 그 말투가 하나도 거슬리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 라헬도 놀라울 뿐이다. "시안님이십니다." "잘 알고 있네. 그렇다면 나 보다 로크레슈 장로님이나 하라스다 인 장로님의 말이 우선 순위가 된다는게 좀 문제있게 생각되지 않아?" "………." 순간 라헬은 말이 막혔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까? "나는 여하튼 간에 수장이고 이 내가 나이트 기엘과 로운을 만나 겠다는데 도대체 안된다고 할 만한 근거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시, 시안님께서는…." "내가 뭘?" 라헬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듯한 이 시안에게 이렇게 말 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키리엔의 여관장이자 지금까지 수장을 모셔온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 "시안님께서는 아직 진실의 수장님이 아니십니다. 어디까지나 수 장 계승자 이십니다. 신전에서 대신관님께 정식으로 인가를 받으 시기 전에는 수장 계승자 이실 뿐입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여하튼 안 됩니다." "시끄러워!!" 시안은 다시 옆에 있는 커다란 물병을 집어들었다. "…꺄악!!!" 누구랄 것도 없이 라헬의 뒤에 서 있던 여관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그만 시안이 움찔 해 버렸다. "안 깼어! 아직. 젠장할!!!" 콰앙 소리가 나게 물병을 내려놓으며 시안은 화를 냈다. 도대체 아무것도 그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만나게 해달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만날 수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단 한가지도 할 수가 없었다. 오랜 만에 돌아온 키리엔은 시안이 느끼기에도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기엘이나 로운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리야가 무사한가 모르겠네….' 왠지 익숙한 곳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곳에 와 있는 느낌이다. 여행을 할 때도 이렇게 불편함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치우겠습니다. 시안님." "냅둬!!!" "시안님." "치우면 또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테니까. 그냥 나가." 자신의 행동이 다분히 어린애 같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답 답함이 하늘을 찌르고 짜증이 땅 밑까지 솟구쳐 내려간다. 누구 에게라도 분풀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시안님." 시안이 그런 마음이라면 라헬도 만만치 않다. 라헬에게는 라헬 나름대로의 해야할 일과 그것을 지키는 고집이 있는 것이다. "치우겠습니다." 다시 어지럽혀서 또 치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 난장판을 방관할 생각은 그녀에게 전혀 없었다. "이런. 한참 치워야겠군." "어머나… 레이죠 장로님." 갑자기 여관들이 소란을 떨었다. 시안이야 워낙 버릇없이 굴고 있으니까 그렇다쳐도 다른 사람에 게 이 난장판을 보인다는 것은 여관들이 게으름(?)을 피고 있다 는 것으로 밖에 비치지 않을 것이다. "시안님께서는 마음이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군." "장로님. 장로님께서 좀…." 라헬이 레이죠 장로에게 찰싹 들러붙다시피 하며 하소연했다. "자리를 좀 비켜주겠나 다들?" "예?"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말일세." "아. 예." 라헬은 황급히 다른 여관들에게 눈짓을 했다. 누구든이라도 좋았 다. 시안을 진정 시켜 줄 수 있다면 말이다. 여관들이 한무더기가 되어서 썰물빠져나가 듯 나가자 갑자기 시 안의 넓고 넓은 방이 고요해졌다. "시안님." "…………."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데도 레이죠 장로는 하나도 불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것이 시안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때문인지, 아니면 시안 이 어떻든 간에 그의 딸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느끼는 것은 왠지 눈앞에 퉁퉁 불어서 있는 대 로 자신은 화가 나 있다고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소년이 너무 나도 안되보이고, 조금은 귀엽게마져 보인다는 것이었다.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번의 일, 경황이 없어 감사의 인사도 못드렸군요." "……………." "시유에 대해서도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언니를 만나지 못했던 아이라…." "갑자기 존대할 필요 없어요. 그런거 찾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이제 미메이라의 수장이 아닙니까? 제가 당신께 존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어떻게보면 비꼬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순간 레이 죠 장로는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레이죠 장 로의 마음은 그가 시안에게 마음편하게 개방하고 있는 그의 엘의 파장에서도 너무나도 확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시안은 그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다가 그제서야 살짝 고개 를 돌렸다. "그래서 하시고 싶으신 말이 뭔데요? 장로님을 살린건, 아니 뭐 랄까. 여하튼 어떻게든 한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거니까 특별 히 고마워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상대편이 정중하게 나오자 왠지 시안의 말투도 조금 바뀌었다. "잠시, 앉아도 좋을까요?" 레이죠 장로는 왠지 유쾌해져서 시안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시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는 의자를 잠시 보더니 직접 손으로 쓱 쓱 자신이 어지럽힌 물건들은 적당히 치우기 시작했다. "앉으세요. 별로 앉을 만한 곳은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레이죠 장로는 창을 통에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이는 시안의 머리 카락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 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지만 투명한 시안의 머리카락을 통과하며 순해져서인지 환하게 주위를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 다. 그것을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레이죠 장로는 천천히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그는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결심을 하고 시안을 찾아 왔다. 시안이 대신관도, 기엘도, 로운도 만나지 못해 안절부절 하고 있 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그런 상황이 되어 있는 지도 모조리 다 알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인 것이다. "답답하시죠?" "…………." "원하신다면 사람을 딸려서 여기저기 산책이라도 하시도록 해드 리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그보다도…." "예. 말씀하십시오." 도대체 왜 레이죠 장로가 자신을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것인지 시안은 알 바가 없었지만 나름대로는 궁금한 점이 있었 다. "저기. 그. 시유…라고 했나?" "아. 시안의 동생입니다. 물론 당신이 아니라." "그런 것 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단지…." 시안은 사실 그것이 궁금했다. 어째서, 왜, 수장의 딸인 시유를 자신이 단 한번도 보지 못했을 까? 이전에 이 궁에 있는 동안도 상당한 기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왔 다. 그런 기간동안 단 한번도 자신에게 시유라는 시안의 동생에 대해서 언급한 사람은 없었다. 같은 궁에 사는 이상은 분명 한번이라도 시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했다. 아니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이인 것이다. "궁금하신가 보군요. 하기사 그럴만도 하지요." 시안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레이죠 장로는 직감적으로 알아 차 렸다. "어차피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할 예정이었으니 뭐 먼저 말씀 드려도 괜찮겠군요. 그전에…." 레이죠 장로는 자신이 할 말을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을 원하지 않 았다. "말은 바람을 타고 새어나가는 법이죠." 그는 주문을 외우기 전에 시안에게 싱긋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시안이 먼저 알았다는 듯이 손가락을 딱-하고 울리며 한마디했다. "케인." 레이죠 장로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궁금하다는 표정을 했 지만 다음 순간 그것이 무슨 의미의 행동과 말이었는지 알아챘 다. 쉴드 바헬의 기운이 그의 몸 주위와 온 방안에 순식간에 들어찼 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창을 통해 들어오던 빛과 바람과 새소 리 마져 차단시켜버리고 있었다. 레이죠 장로는 내심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그것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거의 죽어가던 자신을 살려 놓기까지 한 것 이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시안이 아니던가. "많이 성장하셨군요." "아아. 내가 하는 거 아니예요. 케인. 잠깐 나와봐." 시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나케인을 불렀다. 이곳에 와서는 특별하게 세나케인을 부른적이 없다. 그만큼 급박 한 상황이 없었기도 했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어쩐지 아무에게 나 케인을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부려먹다가 지친 거냐?」 어딘지 모르게 투덜거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 여하튼 시안에게 있어서 세나케인의 목소리는 그렇게 들렸다. "투덜대지말고 나와." 시안이 누구를 향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레이죠 장로는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마 시안이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를 고용 하기라도 한건가 해서 그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이 방안에는 자신과 시안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눈앞에 다음 순간 어떤 인간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형체는 뚜렷하게 보일정도로 생성이 되었다. "소개할께요. 바람의 세나케인이라고 그 뭐더라? 아. 풍옥이라고 했나? 여하튼 그거의 본체인 듯 한데 사실은 잘 모르겠어서." "이제는 그냥 막 나가나는 군." "서. 설마… 시안님. 이분은…." 시안은 가볍게 소개했지만 레이죠 장로는 정말이지 심장이라도 튀어나올것처럼 놀라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전대 수장이었던 인물이다. 세나케인의 존재를 모를리 없는 사람이다. 그는 세나케인을 한번 보았다가 다시 한번 시안의 시큰둥해하는 얼굴을 번걸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소년은 어떤 경험을 하고 도대체 얼마만큼의 힘을 가 졌다는 이야기 일까? 자신 역시 풍옥을 계승받을 때 나름대로는 세나케인을 각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기대를 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 대의 몇 명의 수장처럼, 세나케인을 각성시키지 못한 그저 그런 평범한 수장이었었다. "미메이라의 수호신…." 그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감격스러웠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몇백년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전설 속의 수호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 레이죠. 미메이라의 수호신께 인사드립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방안 침대 한구석에 누워 있던 기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났다. 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면서 너무나 반가운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는 좀 했어?" "로운!!" "식사도 제대로 안한 모양이구나." "시안님은 만나 어?" "좀 진정해." 로운은 단 이틀 사이에 핼쓱할 정도로 얼굴이 변한 친우를 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기엘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시안을 보지 않고는 제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이 너무나도 딱 맞아떨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것 좀 먹고, 기운 좀 차려라." "로운." 기엘은 로운이 가져온 음식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틀동안 물 밖에 먹은 것이 없었지만 머리는 맑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먹을 것도 편히 쉴곳도 아니다. 오로지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시안의 안전이었다. "괜찮아. 시안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안전하게 잘 있는 것 같 으니까." "………." 기엘은 로운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 다. 털썩-하고 마른 침대에서 먼지가 인다. "너무 그러지 마. 여하튼 아직은 시안에게 어느 누구도 위해를 가할 수는 없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아버님은 가이칸으로 가셨다 고 하는데 어머님 조차 아무 말씀 해주시지 않고 있고, 이 저택 에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도 없고, 시안님을 만나뵙게 해달라 고 해도 아무도…." 입을 열자 기엘의 입에서는 쉬지 않고 말이 흘러 나온다. "나도 여기 오느라고 좀 고생을 했어.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너 랑 잠시 얼굴만 보겠다고 아버님을 설득했지." 툭툭하고 기엘의 어깨를 쳐주면서 로운은 그를 위로 했다. "조금만 더 설득하면 될 것 같아. 그러니까 좀 기다려보자."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라도 있었으면 정말 좋겠 어." 퍼억하고 기엘이 자신의 옆자리를 주먹으로 내려친다. "어떻게 되든, 시안도 호락 호락 당하지는 않을거야.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얌전히 기다려 보자구." 어떤 위로의 말도 기엘을 안정시킬 수 없다는 것을 로운은 잘 깨 닫고 있는 중이다. 단지 시안이 눈앞에 없어진 것 만으로도 제정신이 잠시 외출을 해버리는 것을 벌써 몇 번을 보아온 것이다. 그는 시안이 이계로 돌아가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걱 정스러워질 정도였다. '과연, 돌려보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는 군.' 로운은 맥을 잃고 있는 기엘을 보며 지금쯤 시안은 어떻게 하고 있을지를 생각했다. "말하자면, 가이칸 제국과는 좀 틀리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 장은 수장일 뿐, 황제나 왕은 아니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법은 너무한 거 아 닙니까?" 레이죠 장로는 또 다른 의미에서 펄펄 뛰고 있는 시안을 진정시 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중이었다. 그는 시안에게 그가 이전에 단 한번도 시유를 보지 못했던 이유 를 설명했던 것이다. 미메이라의 수장은 확실히 타국가의 황제나 왕과는 개념이 틀리 다. 수장은 미메이라의 심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그 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수장이라는 위치가 피로 연 결되는 세습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 더욱 그런 것이다. 물론 수장의 아들이나 딸이 다음대의 수장이 되는 일은 지금까지 꽤나 빈번하게 일어났었다. 하지만 때로는 전 수장과는 전혀 다 른 곳에서 새로운 계승자를 발견하는 경우도 다분히 일어났었다. 그 때문에 생긴 규칙이 바로 다름이 아닌 수장 계승자가 아닌 이 상 10세가 넘으면 수장의 아들이나 딸이라고 해도 키리엔을 떠나 사저에서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장의 아들이나 딸이지만 미메이라의 공주나 왕자는 아 닌 것이다. 시안과 시유의 경우 시안이 다음대의 계승자로 지목되자 마자 시 유를 사저로 내보냈었다. "나름대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니 너무 역정은 내지 마십시오." 그는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열을 내고 있는 시안은 왠지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문제를 이 이계에서 온 소년은 정말로 화 를 내면서 항의를 해주고 있다. "시유도 그것을 잘 알고 있고 또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해 차원이 아니라구요. 아무리 수장이고 뭐고 한다고해서 가 족과 일부러 떨어뜨려놓다니. 정말이지 이해를 못하겠다니까. 이 놈의 나라는." "허허허허." 그는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더 설명을 해도 시안은 누 구에랄 것 도 없이 화를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저는 더욱 안심이 됩니다. 시안님." "정말이지…." "자아. 그럼 그 시유의 이야기를 포함해서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요?" "………?"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시안 님." "그럼요?" "…………." 레이죠 장로는 말을 꺼내기전에 잠시, 그의 딸의 얼굴을 하고 있 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텐데 도 왠지 그가 원래의 시안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레이죠 장로 자신을 위해서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다 듣고 나실 때까지는 절대 역정을 내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역정? 제가 왜 화를 낼 만한 이야기인가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왜 사람들은 꼭 그렇게 말하는 걸까? 내 말을 들으면 화낼 지도 모르지만 들어라라던가, 내 말을 다 들을 때까지는 화내지 말아달라 라던가 하는 말 말이다. 시안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아저씨는 무슨 말을, 그것도 자신이 듣고 나면 분명 화를 낼 만한 이야기라고 한다, 하려는 걸까? "시안님…." "…………." 자신을 부르고는 있으나 그가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 이었기 때문에 시안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시안님께서 이계로 돌아가시는 날이 조금 멀어 질 듯 합니다." "…………." "부디 이해를 해주시면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 '나.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대답 대신에 시안은 눈만 멀뚱 멀뚱 뜬 채 레이죠 장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사정이 조금 생겼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정말 외 람되게 생각합니다만…." "…………." "로크레슈 장로와 하라스다인 장로가 시안님을 가이칸 제국의 황 제의 비로 보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 너무 놀라운 사실을 들으면 오히려 사람들은 말이 없어진다고 한 다. 시안은 연거푸 자신에게 들이 부어지는 강한 충격에 할말을 잃은 정도가 아니었다. 머리가 띵해져온다. "시안님께서 돌아오시면, 당신의 능력을 시유나, 또는 기엘에게 이양시킨 후 당신을 제 딸로 가이칸 제국의 황비로 보내려고 이 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시안님을 암살하려던 계획이 무산 되었기 때문에…." "자. 잠깐!!!!!" "…………." 시안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라고 했죠?" "아. 누가 날 죽이려고 했다구요?" "…로크레슈와 하라스다인 장로가 처음에 그리 하려고 했습니다. "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 "그리고 또 뭐요? 날 가이칸으로 시집을 보내?" "………."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간신히 시안의 머릿속으로 레이죠 장로가 한 말들이 접수가 되기 시작했다. 몇가지 어지럽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것들이 차차 정리된다. "날 죽이려고 했다구요? 설마 그 하셰카를 고용해서 우리를 뒤 쫓은게…." "그들은 이계인에게 수장의 위를 잠시라도 대신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요!! 그것 때문에 로운과 기엘이 죽 을 고비를 얼마나 넘긴 줄 알아요? 말도 안 돼!! 자기들 아들들 이 같이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 "세상에 말도 안 돼!! 절대로 용서 할 수 없어!!!!" 시안의 눈이 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세상이 붉게 보이는 기분. 열을 내던 시안은 문득, 한가지 결론에 도출했다. "…설마. 잠깐. 그걸 알고 있다는 건…." 시안의 눈이 차분하게 앉아있는 레이죠 장로에게 돌려졌다. 그는 마치 시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 겸허하게, 그리고 조금은 초라하게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저도, 모든 사실을 다 알면서도 묵인했습니다." 너무나 황당하도록 화가 나면 오히려 사람이 냉정해지는 법. 시안의 붉게 타오르던 눈이 첨첨 차가워져 갔다. 그것은 시린 얼음보다도 더욱 더 차게, 레이죠 장로의 가슴을 에 리도록 식어 내렸다. "모조리 다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날 돌려보내준다는 것도… 전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대신관 카류 만큼은 믿으셔도 좋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사람을 가지고 놀아놓고!" "그가 당신을 돌려보내 줄 겁니다." "…………." 휘익-하고 시안의 몸이 바람과 함께 문가로 향했다. "케인! 쉴드 풀어 줘." "시안님 어디 가십니까!!" 황급하게 레이죠 장로가 시안의 뒤를 따른다. "가긴 어딜가긴요. 대신전으로 갈겁니다." "시안님!!" "당신들하고는 단 한 일분도 같이 있기 싫어요. 케인!!!" 시안이 재차 세나케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치 막혀 있던 둑 이 퍼억하고 터지는 것처럼 강력하게 처져 있던 쉴드의 주문이 풀어졌다. 슈욱--소리와 함께 공기가, 소리와 함께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이젠 단 한마디도 당신들 말은 믿지 않을 겁니다." 날카로운 은빛의 칼날 보다도 더한 아픔으로 시안의 목소리가 레 이죠 장로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절대로." ---------------------------------------------5장 마칩니다. 6장으로 이어집니다.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6장 돌아 나오는 바람 (21) "아버님이 가이칸으로 가셨다는게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로 운." "글세…. 그 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우리 아버님도 함구를 하신 상태라 도움이 안 돼."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알 아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전무. 그들은 대화는 나누고 있으나 방법을 찾지 못하고 갈팡 질팡 하 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가이칸 제국이 연류되어 있다는 제일 걸 려." 톡톡-하고 로운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무엇보다 가이칸 제국에는 바로 그 사람이 있다고." "누구?" "누구기는." 그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떠 올랐다. "로렌 황제인가?" 기엘이 마치 굉장히 혐오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입에 올린다는 얼 굴로 로렌의 이름을 언급했다. 입에 올리기도 싫다라는 것이 그 의 정확한 심정일 것이다. "너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아? 그는 시안이 미메이라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 "…………." "분명 아버님들 사이에서 뭔가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지. 거기에 다가 가이칸의 황제가 연류되어 있고, 다음으로 대신전은 봉쇄 …." "거기에 그 황제는 엘러에 대해서 상당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데 다가 시안님마저 노리고 있다라는 건가?" 조각을 하나씩 모아간다. 하지만 그 조각들의 중심에 과연 무엇이 있는 걸까? "미메이라와 가이칸 간의 정치적 협상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 어. 무엇보다 미메이라인은…." 로운은 기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들이 미메이라를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겪어야 했던 그 무 엇. 그것이 그들의 앞을 새까맣게 가리고 있다. "미메이라의 제국으로의 진출은 절대적으로 무리다." "…………" 조각들이 맞춰지다가 순간 흩어지고 만다. "골치 아파." 진지하게 대화를 하다 말고 로운이 벌렁 기엘의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젠장. 아버지라고 하는 인간을 이렇게도 이해할 수 없다니. 정 말이지." 똑같은 의미의 말을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로운이 투덜 거렸다. "그건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아. 그렇군. 한가지 말 하지 않은 것이 있어." "뭐?" 로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기엘을 향해 말했다.] "시유님이 궁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뭐? 시유님이라면…." "응. 시안님의 동생이잖아. 명목상으로는 레이죠 장로님의 병환 때문이라고 하는데 글쎄? 그 말을 곧이 믿어주어야 할지는 의문 이지." "역시 생각한 데로인가." "뭐. 원래 대로라면 시유님이 입궁을 한게 무리도 아니지. 하지 만 현실은 조금 다르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건가…." "응." 기엘과 로운이 들은 대로라면 시안이 풍환을 가지고 돌아오면-물 론 진짜 시안이 아니다.-그것을 제 3자에게 이양시킨 후 시안을 이계로 되돌려 보낼 예정이었다. 물론 그곳은 풍옥과 풍환의 주인이 된 시안의 의사와 그것을 이 양 받을 시유의 의사가 동일하게 한 선으로 겹쳐질 때의 일이다. 하지만 시안의 경우, 계승로를 떠났던 자체가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힘을 이양시키는데에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시유도 마찬가지다. 원래의 시안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그녀밖에 대상이 없다고 한다 면 그것을 거부할 미메이라인은 없다. 단지 문제는…. "시유님께서 이양 받는 다면 현 시점에서는 아무 무리가 없지. 하지만 레이죠 장로님께서 병환중이시라는 것이 가장 문제가 되 는게 아닐까?" "병환중도 아니셔. 쾌차 하셨다." "뭐?" "그 녀석이 어떻게 손을 쓴 모양이야. 이해는 잘 안가지만. 그 사건으로 궁안이 떠들썩해. 그 녀석이 돌아오자 마자 레이죠 장 로님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셨다고 말이야." "흐응…." 기엘은 왠지 시안의 행동이 수긍이 갔다. 저 라치온 산맥에서 레이죠 장로의 죽음을 감지하자마자 미친 듯 이 키리엔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시안이다. 그 시안이 돌아오자 마자 무슨 수를 써서 죽어가던 레이죠 장로 를 살려 냈다면 어떻게 보면 시안의 성격으로는 당연한 것이다. "여하튼. 사건 투성이야. 투성이." 로운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눈을 감았다. 이틀 동안 머리만 미친 듯이 굴렸기 때문인지 피곤함이 온 몸을 파고 들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태어난 집 이라고 해도 그곳은 그에게 결코 편안한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 려 기엘과 보냈던 기사 양성소의 숙사나 신전이 훨씬 마음이 편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집이라는 것은, 그저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 니가 살고 있는 장소일 뿐이다. '정말이지 차라리 그 녀석과 그 밑도 끝도 없어 보이던 여행을 했던 때가 더 좋았어.' 로운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던 순간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바람의 종들이여.」 "…………." 「바람의 종들이여.」 잠시 멀뚱 멀뚱하게 누워 있던 로운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기엘. 무슨 소리 안 들려?" 「바람의 종들이여.」 그것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울림. "설마. 세나케인님?" 로운이 설마 설마 했던 것처럼, 기엘 역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세나케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몸을 잔뜩 긴장 시켰다. "설마 시안님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 「바람의 주인이 그대들을 원하고 있다.」 "세나케인?" "로운. 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기엘이 방 한구석에 풀어 놓았던 라이트를 들고서 로운을 재촉했다. 그리고 로운이 그에게 화답하기도 전에 방을 뛰쳐나갔다. "어. 어어, 이거…." 잠시 잠깐, 돌아가는 상황에 너무나 얼이 빠져버려있던 로운은 타악-하고 그의 이마를 쳤다. "빌어먹을. 정말 타이밍 한번 죽이는 군." "로운----!!" 밖에서 기엘이 다른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다 말고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간다! 가!!!" 시안과, 기엘과, 이리야와 함께 있었던 것이 편했다고 말한 것은 절대로 취소라고 그는 몇 번이나 속으로 투덜거렸다. "얼마든지 같이 가주지." 그러나 그는 너무나 경쾌하게, 이곳에 올때와는 전혀 다른 발걸 음 소리로 기엘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의 발걸음 끝에 생기가 맴돌았다. *** "시안님 기다리십시오!!" "따라오지 말라고 했죠!! 케인!! 이리야는 어디 있지?" 「성밖. 가까운 곳이다.」 달리고 있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발걸음으로 시안 은 빠른 속도로 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뒤로는 사색이 된 레이죠 장로가 미친 듯이 뒤따라 오고 있었 다. "가실 땐 가시더라도 제 말을 끝까지 듣고 가십시오." "안 듣는다고 했잖아!! 아무 말도 안 믿어!!!" 어느새 시안의 말투는 반말이 되어 버린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라는 생각만이 그의 온 마음을 지배한다. "시안님!!!!" "안 듣는 다고 했잖아!!!!" 버럭 하고 소리를 치며 모서리를 돌아가는데 누군가 눈앞으로 달 려 들었다. "우아앗!!" "꺄앗!!!" 콰앙-----하고 그 사람이 시안과 정통으로 부딪혀 버렸다. "아으윽. 골이야." 핑핑 머리가 돌아가고 눈앞이 노∼래진다. "아우--. 젠장. 가뜩이나 열 받아 죽겠는데 누구야!!!" 그의 말에 누군가 앞에서 흠칫하고 얼어 붙는 것이 느껴졌다. "…………." 고개를 들은 시안의 눈에 보인 것은 새하얀 은발과 반짝이는 눈 동자를 가진 소녀. "…언니." "…………!!!!" 시안의 동생인 시유였다. "아버님. 언니, 도대체 무슨 일로." 난생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앞에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바라보자 화르륵 타오르던 시안의 기분 이 거짓말처럼 누그러들어 버렸다. 이전의 자신의 얼굴에도 멍청하게 반해버렸던 그였지만 눈앞에서 살아 숨쉬는 미소녀와 거울 속에 비친 거짓의 얼굴과는 천양지차 이가 있는 법이다. 물론,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눈 앞에 있는 소녀의 앞에서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있 을 뿐이다. "아버님 몸은 괜찮으세요? 그리고…." 순진한 듯한 소녀의 눈동자가 자신의 앞에 머무른다. '아아. 정말 미치겠네. 이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앞에서 뭐라고 지랄 발광을 떨수도 없는 노 릇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누가 뭐라고 하던 간에 한번쯤은 말을 걸어 보고 싶을 정도로 눈이 튀어나오게 예쁘게 생긴 소녀가 아 닌가. 시안은 마음속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현실을 마음껏 저주하 기 시작했다. '운이 없어도 정말 더럽게 없지. 세상에는 내 맘데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니까. 이것도, 저것도!!!!' 마음은 시끄러웠지만 결국 시안은 입을 꾹 다물고 시유의 앞을 지나치려고 했다. 그때였다. "-----!!" 덥썩하고 시안의 팔이 레이죠 장로의 손에 붙들렸다. "뭐. 뭐야!!" "시안님. 제 하나 남은 딸을 부탁드립니다." "…………." "…………." 잠시 이유모를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맴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새된 비명과 같은 소리가 은발 머리 카락을 가진 두 사람의 목에 서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뭐라구요!!!!!" "아버님!!!" "부탁 드립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시유를 살려주십 시오." "아버님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시안이 뭐라고 대답도 하지 못하는 동안 레이죠 장로는 빠른 속 도로 말을 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도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시안이 연장시켜주었다고 하나 자신은 이제 사라져야할 사람중의 하나다. 그리고, 지금 말하지 않으면 두 번다시 말할 기회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시안과 자신이 궁의 복도를 미친 듯이 뛰어 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바로 이 순간 그들을 방해할 자가 나타날지도 모른 다. 레이죠 장로는 자신의 손을 뿌리치려는 시안의 팔을 꾸욱 부여잡 고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가이칸에서 미메이라의 공녀를 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공손한 부탁 정도였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습니다. 아십니까? 미메이라와 가이칸 제국의 국경에 가이칸 제국군이 모여들고 있 습니다." "…뭐라구요?"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 소리에 놀란 것은 비단 시안 뿐만이 아니다. 놀라서 옆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시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미메이라의 바람술사 들입니다. 그들은 그 들의 거대한 군사력으로 못 할 짓이 없습니다. 그들은 미메이라 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왜 필요하느냐고 버럭 소리를 질러 주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대신전을 봉쇄하고 있는 것은 저희들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분 명 저와 하라스다인, 로크레슈의 계획이었지만 하라스다인 장로 가 변심을 했습니다." 지끈하고 시안의 심장이 울려온다. '하라스다인 이라면….' "그는 지금 당신을 제국의 황비로 보내기 위한 협상을 하기 위해 서 가이칸으로 떠났습니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당신의 힘이 필 요합니다. 대신전은 현재 마법사들의 결계로 완전 봉쇄가 되어 버렸습니다." "……겨. 결계 같은 것은 내가 다 없애 버리면 되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레이죠 장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기준으로 는 담아 올릴 수 없는 엄청난 이야기들 뿐이다. 시안으로써는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하는지, 그리고 자 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 해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 그는 이기적이 되어 버린다. 모든 어지러운 상황들을 젖혀두고 바람의 주인이라는 자신의 힘 으로 신전의 결계를 깨어버리면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돌아가자고, 원래대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서로 약속했 던 대로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도 현실이야.' 그 생각을 하자마자 시안은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약해지면 안 된다고 그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러나 한번 터져나온 비밀은 터진 둑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막 을 길이 없었다. 레이죠 장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 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비가 되는 공녀는 볼모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 고 전. 미메이라의 기사들이 제국을 위해 신의 힘을 쓰게 할 수 는 없습니다. 또한 미메이라의 어느 누구도, 제국 황제의 노리개 로 보낼 수 없습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시안은 차마 그렇 게 말하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미메이라인은 몇 되지 않는다. 자신의 기사라고 하는 기엘과, 로운과 몇 명의 사람들뿐. 단지 그뿐인데도 미메이라와 전혀 상관이 없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시안의 이기심은 결국 그의 이성을 누르며 비집고 나온 다. "그래서? 당신의 딸을 보낼 수 없으니 나더러 대신 가라는 건가 요? 하!! 웃기는 소리 하지 마요." "당신을 보내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시안님. 아니……." 그는 잠시 말을 멈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딸의 이름 대신 눈앞에 있는 사람을 진심을 담아 불렀다. "경하님의… 경하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입니다." "아버님? 지금 무슨 말씀을?" 시유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그녀의 아버지를 불렀지만 그의 눈에는 이미 시유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입에 담기 위해 마지막으 로 굳게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그것을 아십니까? 경하님?" "…………." 긴박감이 뚜욱 멈추고 비장감이 맴돌기 시작한다. "시유는, 아니 미메이라의 기사들은, 그리고 사람들은 미메이라 를 떠나서는 결코 오래 살 수 없습니다." "…………!" "그것이 신의 축복을 받은 대가, 축복의 족쇄입니다." 마치 사형을 언도하는 죽음의 사신처럼, 레이죠 장로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는 기사일세!! 정신을 차려!!" "시안님이 부르고 계십니다.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기엘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몇 명의 기사들 에게 말했다. 그 뒤에는 로운이 역시 기엘 못지 않게 굳은 표정을 한 채 팔짱 을 끼고 서 있었다. 세나케인의 목소리에 따라 시안을 찾아왔건만 물리적인 방해물이 너무 많았다. "나이트 기엘님과 프리스트 로운님께는 당분간 궁의 출입이 금지 되어 있습니다." "…………." 순간 불끈 치밀어 오르는 화를 기엘은 꾹꾹 내리 눌렀다. 자신의 나라의, 자신이 일해왔던 궁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일까? 그를 가로 막는 것은 나이트 사아르 소속의 기사. 어떻게 말하면 월권일수 도 있겠지만 그가 만일 그의 아버지나, 로크레슈 장로 의 명을 받은 것이라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이 월권이지 사실 현재 기엘이나 로운에게는 정식 직함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수장 계승자와 계승로를 함께한 신관과 기사에게는 후일 그들의 노고에 알맞은 직책이 주어지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정식으로 대신전의 인가도 받지 못한 지금은 더 더욱 말이다. 기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뒤에서 묵묵하게 말이 없이 시위만 하고 있던 로운이 기엘의 앞으로 나섰다. "출입금지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누구로부터 내려온 명령입니까?" "…아, 그 하라스다인 장로님의 명령입니다만." 기엘의 기색을 살피면서 기사가 대답했다. 기엘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로운은 이렇다 표현하기도 힘든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라스다인 장로님의 명령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 순간 주위가 얼어붙는다. 사실 그들로서도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유는 모릅니다. 저희는 내려진 명령을 지킬 뿐입니다. 프리스 트 로운." "그 프리스트 라는 말도 거슬리는 군. 참나." 벅벅하고 로운이 머리를 긁는다. "따악- 한마디만 합시다." "로운?" 기엘은 로운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기대를 해본다. "미안하다 기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다 책임을 지겠 어. 어차피 지금은 기사도, 신관도 아닌걸." "로운." 로운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할지를 정했다. 어차피 이미 정형에서 벗어난 일 투성이다. 잠시 잠깐 그 정형을 더 벗어난다고 해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더 일어날지 두려워 할 것도 없었다. 로운은 허리춤에서 그의 라이트를 빼어들었다. 스르릉-하고 검신이 내는 맑은 소리가 그들의 주위로 퍼져나갔 다. 그가 검에 손을 대는 순간 앞에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기사들 이 일제히 검을 뽑아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계속 우리 앞을 막아 서겠다면 실력 행사를 하겠소." "프리스트 로운!!!" "막을 수 있다면 막아보시지." 씨익하고 로운이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기엘도 마음을 굳히고 자신의 라이트를 뽑아들었다. 이판 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앞에서 각자의 검을 뽑아들은 기사들의 얼굴이 순식간 에 굳어가기 시작했다. 나이트 기엘과 프리스트 로운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기사들은 없다. 특히, 신관이 되었다고는 하나 현역 기사 시절의 로운의 실력은 모두들 혀를 내두를 정도였던 것이다. 그것은 기엘도 크게 다르 지 않아서 그의 앞에 있는 기사들중 반은 기엘의 지도하에 훈련 소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다. 기엘의 실력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두 사람 모두 미메이라 최고의 로열 나이트들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검과는 달리 예리한 은빛을 뿌리고 있는 라이트. 그 라이트의 빛이 그들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라이트는 로열 나이트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검이다. 그 재질이 나 만들어진 방법도 일반검과는 다른 특별한 검이 바로 라이트 다. 2대 5의 상황이지만 숫자적 열세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자아. 어떻게 하겠소?" 마지막으로 로운의 경고가 그들의 앞을 막아선 기사들에게 내려 졌다. *** --------------------------------------------- 계속 헥헥헥...--;;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6장 돌아 나오는 바람 (22) *** 시안은 갈등하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아무것도 못 듣고 아무것도 몰라. 난 이계인일 뿐이고, 여기엔 당신들이 불러서 왔을 뿐이야." 입에서는 생각하지도 않은 말들이 줄줄 흘러나온다. 그것을 듣고 시유가 놀라서 기절하기 일분전인 것도 시안의 눈에 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 순간 시안은 거짓이름을 가진 시안이 아니라 박경하 그 자신 이 되어 있었다. "난 돌아갈 거야. 내가 할 일은 다 했어. 하라는 데로 다 했다구 요." "경하님." "나더러 도대체 뭘 하라는 거야!!!" "언니…가 아닌 거예요?" 떨리는 시유의 목소리. 하지만 그것은 시안, 아니 경하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몰아세우는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시끄러워!! 넌 입 좀 닥치고 있어!!" "………!" 마음에도 없는 말이 마구 입에서 튀어나온다. '도대체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고 하는 거야. 정말!! 무슨 구국 영웅이라도 되라는 소리냐구!!' "신전으로 가서. 그 마법의 결곈지 뭔지를 깨버리겠어." "경하님…." 경하가 무슨 말을 해도 레이죠 장로는 그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그것은 한번 들려 올 때마다 천근 만근으로 경하를 짖눌러 왔다. 이곳에서의 그의 이름은 박경하가 아닌 시안이었다. 진짜가 아닌 가짜, 대리로서 쓰던 이름이 시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박경하라는 이름과 시안이라는 두 개의 이름이 주는 무게를 한번에 받고 있는 것이다. "난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내가 할 일은 돌아가는 것 뿐이라구! !!"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말은 틀리다. '미메이라를 떠나서는 오래 살수가 없다고?' 모든 것이 경하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뿐이다. 아니 원래는 알 필요도 없었던 일이다. '신의 축복, 축복의 한계가 그것이라구?' 대가가 없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미메이라인들에게 내려진 그 거대한 신의 축복은 그 이면 에 너무나도 잔혹한 진실을 내재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경하에게는 큰 상관이 없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하는 미친 듯이 요동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람의 주인이 되어버린 그의 몸 속에 잠들어 있는 신의 힘 때문인지 아닌지 구별할 만한 여유도 없다. '내가!! 왜!!!!! 얼굴도 모르는 미메이라 인들을 위해서….' 하지만 그 미메이라 인들에게는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 이 속해있다. 자신이 여기서 돌아가 버리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지금 그의 앞에서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이 시 유라는 소녀는 어떻게 될까? 마법으로 봉쇄되어 있는 대신전에 갇힌 대 신관 카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너무나도 부드럽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빛으로 이루어져 있 는 이곳은 어떻게 될까?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차례 차례 경하의 마음속으로 천천히 파 고든다. 자신의 투정을 모조리 들어주며 시중을 들어주던 여관장 라헬과 그녀의 뒤에 언제나 열을 지어 서 있는 예쁜 시녀들., 자신의 입 맞에 맞추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던 요리장들, 그리고……. 넓은 단위에 올라가서 하늘로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그 순간이 경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런 근심도 없어 보이는,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기뻐했던 사람들. 감상적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그저 떠오르는 것이다. 차례 차례, 아주 자연스럽게. 슈육---- 날카로운 검신이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로운은 몸을 뒤로 빼면서 들고 있던 라이트를 가볍게 그러나 빠 르게 휘둘렀다. 라이트를 들고 베는 것이 아닌, 그저 검신으로 상대방을 무력시 키는 전투는 쉬운 것이 아니다. "비키란 말이야!!!" 고함을 지르며 로운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라이트로 막았 다. 파각------ 불꽃이 튀었다. 끼기기긱. 검날이 부딛끼며 귀에 거슬리는 금속의 마찰음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 우아앗!!" 있는 힘껏 맞닿은 검을 밀어내면서 로운은 오른발을 들어 상대방 의 복부를 걷어차려했다. 하지만 그 발은 허공을 맴돌고 그는 중 심을 잃었다. "헉!" 황급히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바닥을 짚은 손목에 무거운 충격이 온다. 타다닥--- 빠른 걸음으로 그는 로운의 라이트 사정거리에서 조금 멀어진다. 로운은 몸을 일으키고 눈 앞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엘이 열심히 교육을 시켰나 보군.' 검술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그 만큼 체술까지 완벽하게 마스터를 하고 있는 친우를 떠올린다. 숨을 몰아 내쉬고는 있지만 로열 나이트인 자신에게 이만큼이나 따라오는 기사는 흔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시험관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생각과 함께 몸이 흘러간다. 손바닥에서 조금씩 땀이 배어 나온다. 로운은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살며시 미소를 지 었다. 무엇인가 좋은 생각이 나곤 할 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정 도의 미소. 라이트의 손잡이를 고쳐잡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 검신이 은백 색으로 반짝였다. 콰지직--- 크게 호를 그리며 바닥을 긁는 블레이드. 돌 조각이 튀면서 로운의 라이트가 바닥에 흠집을 만들어냈다. 튀어오른 돌조각이 로운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주르르륵- 흐르는 붉은 색의 피. 그것이 로운의 몸속을 흐르는 기사의 피를 자각시킨다. 머리는 차갑게 그러나 라이트는 바람과도 같이 빠르게, 그리고 뜨겁게. 아래로부터 튀어 오르는 로운의 검에 상대의 검이 카앙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크윽---." 막기는 했지만 불안정한 자세로는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로운의 힘에 밀려 검을 놓으며 쓰러졌다. 쨍그랑. 그가 놓친 바스타드 소드가 바닥을 뒹굴었다. 등에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이 강하게, 그리고 약하게 연거푸 그 의 몸을 강타했다. 그리고, 로운의 무거운 킥이 쓰러진 그에게 작열했다. "커억--." "후우…." 라이트가 반사하는 빛보다 더욱 반짝이는 빛이 로운의 이마를 흐 르는 땀방울을 비춘다. '두명….' 숨을 몰아 내쉬면서 로운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자신이 두 명을 감당해내는 동안 기엘 역시 자신과 똑같이 상대 방을 때려 눕힌 뒤었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기엘!" 스윽---. 로운의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엘이 싸늘하게 식은 표정 으로 자신의 라이트를 남은 한 사람의 목에 겨누었다. "나이트 기엘…." 압도적인 힘과 기술. 그는 자신이 이 두 명의 기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더 뼈 져리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검신을 세우지도 않고 이미 4명의 기사가 뻗어버린 것이다. 그들이 피우는 소란에 달려온 나머지 경비병들은 아예 그들의 싸 움에 뛰어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 검은 좀 내려놓아주면 좋겠어." "…………." 그는 이를 악물었다. 분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명령을 지키지 못한데서 오는 분함 보다는 단 두사람에게 쓰러져 버릴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 동료 들에 대한 분함이었다. 쨍그렁하고 그가 검을 내려 놓는 소리가 로운과 기엘의 귀에 동 시에 들려왔다. 그가 검을 내려놓자 마자 기엘 역시 그의 목을 겨누었던 라이트 를 거두어 들였다. "모든 책임 전가는 내게 돌리도록 하게." 그 말을 마치고 기엘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자네들 탓이 아니니까." 그는 방금전 검을 바닥에 떨어뜨린 기사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 다. "훌륭했네. 자네 검술." 싱긋 웃음을 날리면서 기엘은 몸을 돌렸다. "로운. 서두르자." "그래. 하지만 싸우면서까지 교관이 되지는 말아." "하하하하."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기분이 더러워질수도 있건만 기엘은 의외 로 기분이 상쾌했다. 목적없이 검을 휘두르는 것 보다 훨씬 더, 보람찬 기분이다. '시안님….' 그는 수없이 느껴지는 파장중에서 시안의 파장을 찾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머지 않은 곳에서 시안의 파장이 전해져왔다. 시안이 아니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강력하고 맑은 엘의 파장이 었다. ------------------------------------------계속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6장 돌아 나오는 바람 (23) *** 웅성 웅성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는지 고함소리 비슷한 것까지 들려오고 있다. "경하님." "그만 좀 불러요!!" 아무리 화를 내려하지 않아도 한숨이 자꾸 나오는 것 만은 어쩔 수 없다. 경하는 점점 수세에 몰려가는 기분이었다. 마음의 한쪽은 나 몰라라하고 그대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고 다른 한쪽은 그 반대. 그는 그 기로에 서서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정말이지…." 태어나서 이렇게 이런 문제로 갈등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세상에 무슨 구국 영웅도 아니고 사실은 뭘 해야하는 것인지도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경하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깨닫지 못했다. 푸욱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하늘을 바라보는 동작을 몇 번이나 반 복했을까? 그러고 있는데 경하가 가려고 하던 방향쪽에서 사람들의 소란스 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시안님!!" 웅성거림과 함께 나타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기사인 기엘과 로운이었다. "기엘!! 로운!!!" "무사하셨습니까? 시안님?" "아. 아아. 그럭 저럭." 이상하리 만치,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기엘이랑 로운은? 아. 혹시 이리야 소식 알아?" "무사히 잘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했 습니다. 세나케인님이 부르시는 바람에…." "어. 별일은 무지 많아. 듣고 뒤로 나자빠질 정도로." "기엘." "네." "로운." "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로운의 태도는 기엘의 그것과 다 르지 않게 공손했다. "사실은… 아니 아니야. 여기서 이야기 할 것도 아니고. 일단은 말이야." 시안은, 아니 경하는 잠시 잠깐 다시 생각에 빠졌다. 결단을 내려야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리기 위한 각오가 필요했다. 정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후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신이 가장 바라 는 일이 될지를. "케인."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바람의 세나케인을 불렀다. 그것에 대답하듯 경하 주위의 공기가 살짝 움직인다. "내가 하고싶은데로 하는게 과연 옳은 걸까?" 「바람은 원래 제멋대로인 법이다. 그것이 바람에게는 옳은 일이 다.」 "풋--." 갑자기 경하가 웃어버리자 주위가 어리둥절 해졌다. "좋아. 결정했다. 뭐 무엇부터 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 야." 경하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데 되었든 간에 일단은 닥친 일부터 하자! 라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는 잠시 레이죠 장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레이죠 장로님. 당신이 바라는데로 할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 요. 난 내가 원하는데로 할거니까…." "부디 당신의 뜻대로…." 두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기엘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세나케인이 불러서 부랴부랴 어렵게 달려왔건만 왠지 분위기는 화기애매모호하기만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제일 먼저 할 일은." 그렇게 말하고는 경하는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시유 가 있었다. 경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덥썩-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하튼 넌 여기 있으면 위험할 것 같으니까. 같이 가자." "에?" "그럼 되겠죠? 레이죠 장로님?" "네. 부디, 잘 부탁 드립니다." "그럼. 로운의 아버님이 와서 난리를 피우시기 전에 빨랑 튀자 구." "예?" "일단은 대신전으로 처들어가자구. 어서!!!" 시유의 손목을 잡고 경하가 뛰기 시작했다. "시안님!!!" "지금 이순간 부터는 시안이 아니야 기엘!!!" "뭐?" 로운의 표정이 변했다. "내 이름으로 돌아 갈거야. 오늘부터는 내 멋대로 할 거니까." 뛰어가는 경하의 뒤로 어느사이엔가 몰려온 기사들과 경비병들이 따라붙었다. 그 멀리 뒤에 로운의 아버지인 로크레슈장로의 모습이 얼핏 비쳤 다. 궁의 거대한 기둥을 돌아 뛰어나가자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기사 들과 경비경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자들의 숫자보다 훨씬 많 이 눈에 들어왔다. "아으--- 귀찮아. 케인!!!!" 「도대체 왜. 네가 할 수 있으면서 일일이 시시콜콜 나를 불러대 는 거지?」 뭔가 불만 스러운 듯한 세나케인의 목소리가 시안의 안에서 울려 퍼졌다. "내가 하는 것 보단 훨씬 나으니까. 실수해서 키리엔을 날려버리 기 라도 하면 곤란하다구." 「말은 잘하는 군. 연습할 생각은 안하고.」 "내가 연습을 하느니. 널 시켜 먹는 쪽이 훨씬 좋아." "저기. 이. 이거 좀 놔주세요." 경하에게 끌려 마지못해 따라오는 소녀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 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해했다. 하지만 그 말에 멈출 만한 상황은 절대로 아니다. "기엘. 로운. 미안하지만 부탁해." 눈 앞에서 제각각 검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산. 그것을 바라보며 경하는 씨익- 시원하게 웃어버렸다. "자아. 기왕하는 거 화려하게 서비스를 해줘 세/나/케/인." 「…………원한다면.」 잠시의 망설임인지, 아니면 경하의 의도를 파악하기 시간인지 모 를 짧은 여운뒤에 시원한 세나케인의 대답이 들려왔다. 후욱하고 경하의 몸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세나케인이 일으키는 바람소리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한 강풍이 주위를 휩쓸었다. "저. 저건---!!!" 사람들의 경악의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려한 은백색으로 이루어진 드래곤의 형상이 키리엔을 둘러싸고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쐐에에엑 하는 파공성과 함께 그것은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강 풍을 불러 일으키며 꿈틀댔다. 그것은 얼마 전, 가이칸의 수도인 카드미엘에서 나타난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화려한, 그리고 장대한 세나케인의 바람이었다. 비늘 하나 하나가 투명한 바람의 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불어나갔 다. 쿠르르르르----- 공기가 떨리는 소리가 모든 사람들의 귀에 파고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형상이 미메이라의 수호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바람으로 전해져왔던 세나케인의 전설. 그것이 그들의 앞에 현실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키리엔에서는 소동 아닌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흐흐흐흐흐. 역시 효과 짱이야." 사람들이 놀라서 패닉에 빠진 사이를 틈타 경하는 궁 밖으로 달 려나갔다. 세나케인을 보기 위해 자꾸만 뒤로 쳐지는 시유를 끌어 당기면서 …. "기엘. 로운! 이리야를 찾아줘!" "알겠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모르나 기엘은 힘차게 대답했다. 그의 주인이 하는 일이다. 분명 그것은 옳은 일이고, 반드시 이 유가 있는 일일 것이다. "케인! 적당히 하고 대신전으로 가자!! 경하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이 꼬리를 몇몇 올 려치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케이∼ 렛츠고우!!!!" 키리엔에서 벌어진 소동 아닌 소동은 전설이 현실화되어 나타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서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 퍼져 나갔다. 키리엔에 나타난 전설의 현신은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서 대신전 으로 향했고, 대신전은 그날 강한 폭풍과도 같은 바람에 휩싸였 다.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세나케인의 바람은 순수한 엘의 폭풍이 되어 대신전을 덥쳐 대신전의 주위에 걸려있던 마법의 결계를 단 한순간에 파괴해버렸다. 사람들에게 그것은 미메이라의 축복이 키리엔과 대신전에 충만하 게 내려졌다고 기억되었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나라 미메이라에 몇백년 만에 나타난 바람의 주인의 소행이라는 것은 전혀 알려지 지 않았지는 않은 채…. ------------------------------------------ 계속 다음은 5권 마지막 장입니다. 머어엉...하고 하늘을 한번 바라보는 중이랄까요. 으으으..마감은 눈앞에 다가오고 있기는 한것 같은데. -_-; 왜 경하는 날이 갈수록 개그 캐릭터가 되어 가는 건지.. 흐흐흐흐가 뭡니까? 흐흐흐흐가? 주인공이면 하하하하하 정도는 되야지. (자신이 써놓고 타박하는 중) 하지만 말입니다. 저놈이 저렇게 웃겠다고 했습니다. 맹세코. (진짭니다.) .......흐흐흐흐흐흐.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7장 그리고 떠나는 사람들 (24) "흐음. 미메이라에서 사신이 온다고?" "네. 신국 방위사라고 하더군요." "일종의 방위 사령관과 같은 맥락인가?" 곧 제국의 황제가 될, 그러나 현재로도 충분히 그 위력을 만천하 에 떨치고 있는 남자 로렌. 그는 지금 꽤나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아슈레이 전도에는 청색의 깃발들이 여기저 기 널려 있다. 로렌은 그 중에서 미메이라 근처에 있던 청색 깃발들을 하나 둘 씩 빼내기 시작했다. "무력 시위라는 것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단 말이야. 안 그런가? 카스핀." "하지만 그 때문에 파생된 국경 근처의 긴장 강화, 군의 사기, 보급선 문제등은 만만치 않습니다. 무슨 일이 진짜로 일어났다면 모를까, 지휘관들 중에서도 불만을 가진 자가 나올 수도 있습니 다." 미타 남작의 말에 로렌의 표정이 변한다. 그것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손에 들은 어린아이의 표정 과도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쪽이 좋은 건가?" "물론 아닙니다." 로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타 남작의 대답이 돌아온다. 일이 일어나는 쪽이 좋다니 어불성설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릴 정도다. "지금 하신 말씀, 농담으로 듣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좋은데 말이야. 카스핀." 부들 부들. 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 눈에 띄게 떨리는 것을 보며 로렌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아직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좋아. 카스핀. 아직 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 하루에 몇 번씩 그의 군주는 그의 심장을 들어올렸다 내려놓았다 를 반복한다. 역시 오래 살기는 글렀다고 미타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짐작을 할 수 없는 분이니, 몇 년을 지켜보았지만 정말 이지….' 그는 보고서를 넘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갈색의 양피지가 몇장이나 그의 손에 들려있다. 아직 그는 이 보고서를 로렌에게 넘기지 않았다. '이걸 보시게 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정말 걱정되는 군.' 할 수만 있다면 말하지 않고 넘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꼭 미메이라의 엘러들이 필요하신겁니까? 지금부터 준비를 한다 면, 몇 년 이내로 우리 제국의 힘만으로도…." "카스핀." 미타 남작의 말을 로렌이 뚝, 끊어 버린다. "그에 대한 것들은 오래전에 모두 끝낸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것보다는 말이야 카스핀." "……?" "그들의 능력이 궁금하단 말이야. 아주 흥미 진진해." "…………." "생각만해도 즐겁지 않나?"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폐하." "독은 적절히 쓰면 가장 좋은 영약이 된다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문제는 걱정할 것이 없어." "하지만… 아무리 황비로 간택된다해도…." "그러니까 볼모라고 말하는 거다. 멋지지 않나? 제국 최고의 여 성이 되는 거지. 하지만 동시에 최고의 볼모가 되는 거지." "하지만 폐하. 신국의 기사들에 대한 개념은 우리들과 틀릴 가망 성이 큽니다. 그들의 왕제나 기사 제도가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는 절대 생각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사는 기사지." 그렇게 말하면서 로렌은 얼마전의 사건을 떠올렸다. 시안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녀를 구하러 온 사 람들은 한 눈에 보아도 기사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능력만으로도 이미 한번, 충분하리만치 놀랐던 그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놀라움의 경지를 지나 일종의 욕심으로 바뀌 어 가고 있다. 그런 기사들을 자신의 수하로 부릴 수만 있다면……. 만족스러운 미소가 로렌의 얼굴위로 떠오른다. "그런데 카스핀." "예?" "내가 생각할 때는 말이야. 아직 그대가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 그의 주군은 지나치게 감이 빠르다. 정말 너무나도 지나치게…. 미타 남작은 후우 하고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올 것이 온 것이다. "전 수장의 영양, 우리 감각으로는 공주라고 해야겠지만 그들에 게는 어디까지나 전 수장의 영양이라고 하더군요. 그 전 수장에 게 두 명의 딸이 있는데…." "있는데?" "쿨럭." 미타 남작의 헛기침이 들려온다. 로렌의 귀가 솔깃하면서 미타 남작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 었다. "전 수장의 큰 딸을 물망에 올리고 있는 듯합니다. 올해 열 여덟 이고…." "가지고 있는 능력은 어떻지?" "…그것까지는 보고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단지?" 자꾸만 말을 끊고 있는 미타 남작을 로렌은 조금 짜증난다는 듯 이 독촉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결국 미타 남작은 포기해 버렸다. 어차피. 신국에서 사자가 오면 모두 알게 되는 것이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놓는 쪽이 좋을 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름은 시안 리에 하로이옌 디 미메이라라고 합니다. 원 래는 새로운 수장 계승자였다고 하더군요." "시…안?" 뒤의 말은 로렌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 들린 것은 오직 한 단어. 시안이라는 이름, 단 두 마디로 이루어진 그 이름 뿐이었다. *** "경하라고 불러. 내 이름은 박경하야." 얼굴은 좀 빨개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당한 목소리. 그러나 얼굴은 어제와 별 다름이 없다. 어디까지나 아직은 시안 의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하. 너무나 우아(?)하고 고상한 언니의 얼굴에서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터져나 오는 거친 말투에 시유는 상당히 당황을 하고 있었 다. 네, 라고 대답해야할지, 응, 이라고 대답을 해야할지도 갈팡 질 팡 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이라도 달랐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얼굴은 시유의 기억 속 에 있는 시안의 얼굴 그대로 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경하는 어떠냐하면 자신의 얼굴이 시안의 얼굴 그대로라는 것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로 그나마 빼던 점잖마저도 모조리 세나케인 의 바람으로 멀리 멀리 날리고 난 후이다. 그런 두 사람을 그것을 보면서 기엘과 로운, 그리고 이리야는 킥 킥 하고 스며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을 하 고 있었다. "하. 하지만 저는…." 시유가 뭔가 대답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지만 경하의 목소리가 그것을 방해한다. "으으 젠장. 정말이지 되는 일 없구만." 부르르하고 경하가 주먹을 떨었다. "우쓰. 내가 정말 왜 이러고 있어야 하냐구우-!" 버럭 버럭. 경하가 소리를 지른다. 사실 지금 뿐만이 아니다. 벌써 반나절 이상 경하의 절규는 계속 되고 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미친 거야!!" "시…경하님. 이미 벌어진 일인데." "시끄러워!! 기엘. 내가 미쳤다면 미친 거야! 정말이지 내가 무 슨 호구라도 된다고 그 난리를 떨었는지. 젠장." 나머지 4사람은 얌전하고 조용히 앉아 있건만 경하만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아악---." 갑자기 경하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 황제 변태 아니야? 혹시? 도대체가…." "그때 경하님은 여…." "스토옵----!!!!" 기엘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경하가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기 엘의 입을 막았다. "그건 절대로 비밀이야. 알았어? 기엘이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도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일급 비밀. 특급 비밀이야." 경하의 회색빛 눈동자가 기엘의 눈 바로 앞까지 다가와 번뜩였 다. 혼신의 힘을 다한 위협(?)이다. 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하가 간신히 기엘의 입에서 손을 뗐다. "알겠습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만." "됐어!! 누가 진짜 그러래? 말은 좀 새겨들어!" "적당해 해 둬. 둘 다." 로운이 보다 못해서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기엘 너도 너지만. 이제 발광하는 것은 적당해 해두는 게 어때 ?" 뒤의 말은 경하를 향한 것이다. "뭘!!!" "나도. 지금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충분하게 알고는 있지만 말이야. 사실 네가 뭘 그렇게 난리를 치는 것인지 정확하 게는 알지 못해. 그러니까 난리를 떨고 싶으면 좀 설명이라도 해 달라구." 사실이 그랬다. 경하와 세나케인이 키리엔과 대신전을 한번 홀라당 뒤집은 뒤 경 하가 직접 대신관 카류를 만나긴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잠 시 잠깐의 일. 그 뒤로 시유가 가세한 5사람의 일행은 정말이지 꽁지가 빠져라 줄행랑 쳤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아슈레이의 중간지대를 감싸고 형성되어 있 는 거대한 라치온 산맥의 한자락, 미메이라와 호로스의 국경을 구분 짖고 있는 산맥에 풍덩(?)하고 뛰어든 상태다. 어른 어른 하는 모닥불의 불꽃이 그들이 모여있는 동굴 안을 여 기저기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타오르고 있다. "일단은 네가 하자는 대로 하긴 했지만, 물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따랐지만 이제는 설명을 좀 해주었으 면 좋겠다." 로운은 어조도 딱딱하게 말했다. 그것은 경하에게 설명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경하는 그런 로운의 말을 듣고서 망설일 것도 없이 단번에 대답 했다. "이기주의자에 비겁자는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경하의 상념은 대신전에 유폐되어 있던 카류와 만났던 그 때로 날아갔다. ------------------------------------------------- 계속 라스트. 장 시작합니다. 헉헉헉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7장 그리고 떠나는 사람들 (25) "당신이셨군요." 나지막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당신'의 주인공은 상당히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왠지 까딱하면 입에서 욕이라도 튀어나올 기세다. "…대신관님." 그런 경하 대신 로운이 앞으로 나섰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군. 로운." "아닙니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카류의 눈동자가 로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리고 굳이 로운의 목에 신관의 증표가 걸려 있 지 않아도 카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대답했다. "보기가 좋군." 뭔가 한소리라도 들을 줄 알았던 로운은 카류의 간결한 말에 조 금 어리둥절해진다. "그래. 로운 보다야 시안님께서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군요." 경하의 눈동자가 커지며 미간이 찌푸러진다. "이봐요 할아버지. 자꾸만 그런 말투로 이야기하면 입을…." 말을 하다 말고 경하는 속으로 참을 인자를 끊임없이 떠올렸다. '참자. 참아. 여기서 살인내서 좋을게 뭐가 있냐. 그래. 장유유 서에 군신예…앗 이건 아니고 여하튼 그거 비슷한 뭐시기다. 어 른한테는 일단 잘하고 보는 거야. 암암 그래야 하고 말고.' 경하가 필사적으로 화를 눌러 참고 있다는 것을 카류는 느낄 수 있었다. 정말이지 가만히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있어도 마치 자신의 감정 처럼 경하의 감정이 생상하게 전해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그가 대신관이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놀랐습니다. 부족한 제가 어찌하지 못한 이단의 술을 그렇게 쉽 게 깨어버리시다니 말입니다." "제가 한 것도 아니니까 칭찬들을 이유도 없어요. 그건 그렇고 …." 경하는 이것저것 마구 물어보려고 하다가말고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이 사람에게 물어 보았자 별로 돌아오는 대답이 신통치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로운. 기엘. 자리 좀 피해줄래?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어지간하면 다들 있는 자리에서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 는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까지 카류에게 따져버리게 될 것 같았다. "빨리. 시간이 없어." "예. 알겠습니다 경하님." 기엘이 경하를 부르는 호칭을 듣고 카류가 의외라는 표정을 했 다. 경하를 제외한 4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경하는 대뜸 세나케인을 불렀다. "케인. 강력하게 아주아주 강력하게 쉴드를 쳐줘. 밖에 있는 사 람들은 절대 듣지 못하게." 「또냐?」 "불만이 있으면 나중에 이야기해. 지금은 좀 내가 하자는 데로 해줘." 「알았다.」 사실 세나케인에게 있어서는 불만이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단지, 기분상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두 사람, 정확하게는 한 사람과 한 존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카류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라고 있었다. "설마…시안님." "시안이라는 이름은 집어치워요. 할아버지. 나 사실 지금 기분이 별로니까. 무슨 소리를 지껄일지 모른다구요." "……………." 자신과 경하의 몸 주위로 쳐지는 강력한 바람의 쉴드. 카류는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하고 경탄하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사태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거 예상하고 있 었습니까?" "어떤?" "뭐가 어떤은 어떤이에요. 답답하게 굴지말고 대답이나 해줘요." "글쎄. 어떤 부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고 어떤 부분은 어느 정 도는 예상했던 것이라고 답해둡시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카류는 경하의 이마 혈관이 빠직하고 튀어나 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거… 곤란하군.' "말해두지만 지금 난 엄청 열 받아 있어요. 대신관 할.아.버.지. " 스스로 아직도 열심히 존칭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그냥 성질 같아서는 콰악-----!'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라는 생각마저 들을 정도다. 기엘과 로운을 떼어놓고 대신관을 협박(?)해서 이대로 돌아가버 리는 방법도 있다. 돌아가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끝난다. 팔자에 없는 이상한 나라에서 죽을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고, 괜 시리 이상한 바람의 어쩌구리인지 뭔지한테 구박도 안 받아도 되 고, 쓸데없이 신경쓰며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맞아. 내가 무슨 영웅이라도 되냐구. 능력도 쥐뿔도 없는걸.' 소설이나 영화 속의 영웅들은 언제나 대단했다. 빛나는 카리스마 로 사람들을 이끌며 자신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 난 능력으로 모두를 대신하여 앞장선다. '거기다가 성격마저도 우라지게 좋지. 암암.'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 평범하다. 아무리 봐도 카리스마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성격 도 나쁘고, 능력도 별로다. '뭐 바람술은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지만 그래도 말이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경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몇 번만 더하면 골백번쯤 될 거야." "시안… 아니 경하님." "왜요?" 표독스러워도 그렇게 표독스러울 수 없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할아버지한테서까지 죄송하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지금도 갈등 여러모로 때리고 있는 중이니까." "맹세코. 상황이 이렇게까지 변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습니다." "…………." "단지 위험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정도였죠." "한가지 더 묻고 싶은게 있는데요." "예." "혹시. 기엘과 로운의 아버님이 날 죽이라고 하셰카를 보낸 사실 을 알고 있었나요?" "…………." 이번에는 카류가 놀랄 차례였다. 그 두사람이 무슨 수를 썼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설마 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다치고, 날 보호하려고 드는 두 사람이 당할 수 있다 는 거 그 두 사람 정말로 간과하고 있었던 건가요?" "그말, 사실입니까?" "당연!! 사실이죠!!! 젠장!!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요?" "……………." "기엘은 하세칸지 뭔지 한테 당해서 두 번이나 죽을 뻔 했지. 이 리야씨도 죽을 뻔했지. 로운도 다칠뻔한게 몇 번인지 아냐구요! 그 지독하게 끈질기던 그 인간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지금도 치 가 떨릴 지경이라구요!" "진정하십시오. 경하님." "만일 그걸 할아버지가 알고 있었다면…." "몰랐습니다." 경하가 뭐라고 더 하기도 전에 카류는 얼른 말을 잘랐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면 적어도 자신이 눈치까지는 채고 있었다 고 아니 거의 짐작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킬 수도 있다. "어느정도 무슨 계획은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경하님께 서 돌아온 이후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설마 그렇게 까지 했을 줄은 진정 몰랐습니다." 시치미를 떼는 것이 상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말이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경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정확하게 짐작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기엘이나 로운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훨씬…. "앞으로 기엘이나 로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그 사람들 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전해줘요." "알겠습니다." 훨씬 각별한 모양이다. "권력도 좋고 야망도 좋지만 자신들의 아들들까지 이용해서 죽든 말든 신경도 안쓰는 인간들이라면 그럴 자격도 없어요." "…………." "젠장." 한바탕 열을 내고 나니 왠지 경하는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이건 마치 자신이 기엘이나 로운을 무지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아무리 쪽팔려도 그 사실만은 절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 이다. 그 두사람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키려 했는 가를 말이다. 언젠가 그런 영화를 본적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닥치는 위험을 그 주인공은 단 한사람 자신의 딸을 위해 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막았다. '하아… 정말 팔자에 없는 노릇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요?!" "…………." 설마 어떤 해결방안도 가지지 안은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일을 벌였다는 것일까? 카류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왔다. "지금 경하님께서 하신 일이 뭔지 아십니까?" "지금?" "이 대신전에 봉쇄하고 있던 결계는 제국의 마스터급 마법사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요?" "그것을 단번에 파괴 해버리셨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순간 심장이 두근 하고 내려앉는다. 아니 간이 떨어질까 말까 덜컥 덜컥 내려앉는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지 결정을 하신 것 아닙니까?" "…………." "제국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을 한 것입니다. 경하님이 한 행동 은." 커헉---하고 경하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온다. 이를 어째? 하는 경하의 표정에 카류가 혀를 찼다. '역시나….' 생각이 있다고 해야할지 없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 "아. 그. 그러니까. 지금 그 제국에 갔다고 하는 기엘의 아버지 를 슬그머니 가서 화악 데리고 오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은 대답이지만 경하의 입에서는 그런 소 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정말로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신 겁니까?"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경하는 애매 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단순 무식한 소리였다. "후우…."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죠?" "일단…." 카류는 곰곰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미메이라에서도 가장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하라스다인 가문에서 벌인 일이다. 아무리 해도 쉽게 끝날 문제는 아니다. 신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제국과 미메이라가 병합된다 면 그것은 커다란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다. '힘의 불균형인가.' 비단 그것은 미메이라의 문제로 국한 될 수 없는 일. "호로스로 가십시오." "호로스?" "네. 호로스는 역사이래, 미메이라와 가장 인접해 있으면서 미메 이라와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온 나라입니다. 가서 불꽃의 수장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경하의 머릿속에 문득, 새롭게 호로스의 수장이 된 남자의 얼굴 이 떠올랐다. 희미하긴 하지만 전 수장이었던 레나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가 지고 있던 남자. "호로스라…." "그곳에 가셔서, 불꽃의 수장에게 도움을 청하시면 분명 좋은 해 답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슈욱하고 다시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의 이야기가 끝을 맺었음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하아… 내 팔자야." '국가간의 알력 따위 내가 알게 뭐냐구.'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국가간의 알력 싸움이었다면 경하는 아마도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자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사실은 몰랐다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옳겠지 만-일을 더 크게 만들어 버린 장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경하는 가이칸 제국의 예비 황제가 자신에게 상당히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스스로 저지른 일에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 문득 아버지의 말이 떠오른다. '정말이지 타이밍 죽이는군. 왜 이럴 때만 아버지 생각이 나는 거지?' 하지만 적어도 경하의 아버지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경하를 희 생시키려하거나 하지는 않을 분이다. 「키리엔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어?" 「얼마 후면 도착 할거다.」 자동 반응 레이더처럼, 세나케인이 경하에게 경계 경보를 울렸 다. "알았어. 출발해야겠네." "경하님." "뭐. 할아버질 유폐 시켜놓은 것을 보면 죽일 것 같지는 않으니 까 재주껏 잘 살아 남으세요. 되도록 빨리 돌아 올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어디 가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요." "물론입니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돌아 올 테니까. 그때는 정말로…." "………." "정말로 돌려보내줘요." "약속드리겠습니다. 경하님." 「시간이 없어.」 "알았다니까 케인!!" 몸을 돌려 뛰어나가려는 경하를 카류가 잠시 붙들었다.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당분간의 여비는 될 겁니다." "아. 고마워요." 카류가 내미는 작은 주머니를 집어들고는 경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뛰어나왔다. 뒤에서 카류가 자신을 향해 미메이라의 축복이 내리기를 축원 하 는 것을 경하는 절대로 알지 못했다. ---------------------------------------- 계속.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7장 그리고 떠나는 사람들 (26) "물론 나는 도덕 군자도 아니고 영웅심리에 미친 사람도 아니야. " 경하의 목소리가 바위에 부딪혀 다시 그의 귀로 돌아온다. "하지만 앞에 닥친 일을 돌아보지도 않고 나 몰라라 도망쳐버릴 정도의 위인도 아니야." 그것은 진심이었다. "게다가 내가 저지른 일이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어버 렸으니까." "그건 그렇지." 누가 봐도 경하가 한 일은 놀랄만 한 일뿐이다. 물론 그것이 경하가 직접했다기 보다는 경하의 분신이나 다름없 는 세나케인이 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아. 그게 말이야…."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경하는 고민했다. 무엇을 설명하고 무엇을 살짝 감추어야 희번득하고 눈을 부라리 고 있는 로운을 설득(?) 할 수 있을까? "음. 그러니까 말이야. 간단히 설명해서. 우리가 없는 동안에 기 엘의 아버님이, 아 미안 기엘. 하지만 사실이니까…." "괜찮습니다 말씀 하십시오. 경하님." "그러니까 기엘의 아버님과 로운의 아버님이 뭔가 일을 벌이신 것 같아. 일단 가이칸 제국이 황제가 미메이라의 공주라고 해야 하나? 뭐 여하튼 그 비슷한 뭐겠지만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을 제국의 황비로 내놓으라고 한 것 같아. 그래서 그것을 빌미로 두 분이 반대 급부같은 것을 생각하시고 있나봐." "뭐?" 로운이 끼어들으려는 것을 기엘이 뜯어말린다. "그래서 생각한게 내가 돌아오면 어떻게 해서든 여기 시유…라고 했지? 여하튼 시유에게 내 힘을 계승 시켜서 수장으로 만들고 나 를 가이칸으로 속여서 보내려고 계획을 꾸민 것 같아. 만일 그게 안되면 시유라도 보내고 나는 다른 방법으로 처리를 했겠지." "…………." "…………." 너무나 간단한 설명이지만 그 내용에는 많은 사실이 함축되어 있 다. 설명하는 경하도 모를 만한 엄청난 사실들이. "그래서 레이죠 장로님이 일단은 시유를 어떻게 해서든 도망치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아. 기엘의 아버님은 이미 가이칸으로 떠났고, 그리고…." 그 부분에서 경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사실은 그 사실에 대해서 경하는 기엘과 로운에게 묻고 싶은 것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는 누가 되었든 간에 미메이라의 공주를 볼 모로 삼고 그 대신 미메이라의 기사들 또는 바람술사의 개념이겠 지만 여하튼 그런 것을 요구할 모양인 듯 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군. 그 능구렁이 황제." 방금 들은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그들 자신이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 가이칸 황제가 모아놓은 엘러 부대의 존재를 목격 했고, 거기다 일행 중 한명은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인 것이 다. "도대체 그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정말이지… 신국 에 손을 댈 생각을 감히 하다니!!" 누구보다 화를 내는 사람은 로운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부분에 대해서 기엘과 로운에게도 묻고 싶은게 있는데 말이야." "예?" 기엘이 갑작스럽게 진지해지는 경하를 보며 의아해했다. "미메이라인이 미메이라를 떠나서는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이 사 실이야?" "…………!!!" "………아." "뭐라구?" 세 남자가 동시에 경하의 말에 반응을 한다. 그러나 그 반응은 제각기 틀렸다. 한명은 놀란 얼굴로 침묵을 했고 한명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한명인 이리야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것이 지 금 사실이냐고 눈으로 되 묻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 "경하님. 저희는…." "알고 있었군." 푸욱---하고 경하가 한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다리에서 힘이 풀려 버렸다. "여행하는 정도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기엘은 애써 변명했다. 만일 경하가 자신이 하는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 그 는 당황하고 있었다. 경하가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은 실제 더 큰 파장을 가진 진실. 이라는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나와 로운이 그런 지경에까지 다달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 시면….' 기엘은 기억하고 싶지는 않으나 뇌리속에서 언제나 떠나지 않는 기억이 다시금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반 적인 미메이라 인이라면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길게는 몇 년도 그들은 미메이라를 떠나서 살 수 있다. 하지만 바람술사, 그것도 엘-사인 이상의 바람술사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미메이라의 바람 술사는 그 능력에 따라서 대략 5단계로 구분이 된다. 엘-다인. 엘-유린. 엘-사인. 엘-라사, 그리고 엘-세지의 단계. 그중에서도 기사나 신관이 되는 미메이라인의 대부분이 엘 -사인 이상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이다. 로운과 그는 엘-라사의 단계에 있지만 현재는 다분히 엘-세지의 단계에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 '지난 번에는 겨우 몇 달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에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경하의 눈길을 피해 기엘은 로운과 서로 눈빛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의 생각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두사람의 귀로 경하의 낮은, 그리고 괴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그럴 만한 상황도, 그리고 굳이 그런 사항을 이야기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기밀에 가까운 것이니 까." 로운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정도라면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 어도 이상하지 않은 거잖아." "대부분의 경우, 몸의 이상을 느끼는 것이 그렇기 급작스럽기는 않기 때문이지. 잠시 잠깐. 미메이라를 떠나 대륙으로 떠나는 사 람이라고 해야 그렇게 많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래도 신국인은 대 륙에서는 여러모로 특이한 존재니까 말이야. 여하튼 떠났던 사람 들이라고 해도 대부분 이상을 느끼기 전에 자연스럽게 미메이라 로 돌아오게 되니 보통은 모르고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도 그렇지…." 경하가 조금이라도 기엘이나 로운의 안색을 살폈다면 그들이 뭔 가 한가지 더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챘을 지도 모른다. 거기 에 한가지 더, 레이죠 장로가 언급했던 것이 '기사들'이라는 것 을 시안이 간과하고 있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경하는 지금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동굴안의 불빛은 둘러 앉은 사람들의 표정을 숨겨 주는데 일가견을 하고 있었다. 울렁거리는 모닥불. 그것은 경하의 어지러운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럼. 얼마나 되는 시간인거야? 그게?" "사람마다 다르니 특별하게 어느정도까지라고는…." "다른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야." 경하의 눈이 붉은 모닥불의 빛을 담아 붉은 광채를 띄었다. "기엘과 로운 그리고…." 그 붉은 눈빛이 구석에 앉아있는 소녀에게로 향한다. "저. 시유…의 경우를 묻고 있는 거야." "…………." 기엘과 로운은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몰려 어떻게 해야할지 당 황하고 있는 시유를 바라보았다. 시유는 뭐니뭐니해도 전 수장의 딸이다. 시안이 수장 계승 후보자였던 만큼, 시유도 전 수장인 레이죠 장 로의 피를 짙게 이어받았을 가망성이 농후하다. '적어도 엘-사인 이상은 될텐데….' 로운은 기억을 더듬었다. 어렸을 적, 시안과 시유는 크게 차이가 나이 않았었다. 단지 지금 차이가 난다면 그것을 갈고 닦았던 시안에 비해 비교 적 평범하게 자란 시유가 스스로 얼마만큼 바람술에 집착하고 있 었는가가 된다. '느껴지는 데로라면 역시 엘-사인과 엘-라사의 중간 정도가 되는 걸까?'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는 일을 하는 동 안엔 문제가 없을 거다." 로운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경하가 곁에 있다면 그 한계선을 꽤 길게 잡아볼 수 있는 것이다. 경하의 곁을 떠나지만 않는 다면 시유가 조금 이상해진다해도 쉽 게 들키지 않을 수 있다. 자신들의 경우라면 어떻게 해서든 간에 경하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위장할 수 있다. '하물며 호로스에서의 체제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곳에 서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바람의 엘에 가장 가까운 것이 불꽃의 엘이다. "그말 정말이지?" "물론." 자신 만만해 보이는 로운의 대답에 경하는 조금 안도했다. "만일 거짓이라면…." 하지만 확인은 잊지 않는다. "거짓일 리가 없잖아? 게다가 한마디 해두지." "…………."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는 경하에게 로운은 한가지 정도는 밝혀 주자고 생각하고 말 했다. "적어도 네가 옆에 계속 있다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다." "나?"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보이면서 경하가 의아해했다. '내가 있으면 괜찮다고?' "넌 미메이라의 수장이다. 풍옥과 풍환을 손에 넣었지? 그것만으 로도 충분한 거야." "…헤에." 거기에 한가지 더 로운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경하는 이미 바람의 계승자이자 주인이며 의지가 되어 있는 상 태. 어렴풋이나마 그 생각을 하고 있던 경하에게 있어 로운의 말은 뭔가 가슴 뭉클한 감각으로 경하에게 다가왔다. 어떤 식으로 말해지든,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의미가 깊은 일이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이든 간에. '간만에 좀 도움 된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조용한 가운데 모닥불의 장작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만이 맴돌았 다. '그런 소리를 들으니 좀 낫군. 다행이다.' 경하는 처음으로, 자신이 바람의 주인이 된 의미를 깨달은 듯한 기분이었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그 정도만이라도 좋아.' "말씀하시는데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도 궁금한게 있는데요." 그때까지 조용하게 입을 다문 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소녀가 침 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행사이에서 입을 열었다. "얼덜결에 이곳까지 함께 했습니다만. 그리고 여러 가지 사정도 들었습니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설명해 주 실 수 있나요?" 이전의 시안과, 그리고 현재의 경하의 얼굴과 흡사하지만 표정은 전혀 다른 시유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결심이라도 한 듯 말하고 있었다. "…시유." "로운 오라버니, 간만에 뵈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드렸었군요." 꽤나 굳게 결심해서 비장감이 서려있기는 하나 소녀는 아주 예의 바르게 로운에게 인사를 했다. "나이트 기엘님은 전 이렇게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인사드립니다. 시유님. 나이트 기엘 디 …하라스다인입니다." 성을 말하는 부분에서 그는 잠시 주춤한다. "네.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이분은 아무래도 물의 술사이신듯 한데요." 그녀는 소개를 원한다는 듯이 이리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리야는 그때까지 멍하게 시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사실은 그는 지금까지 계속, 시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상'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시유는 그의 '관상용 미녀'의 조건에 아주 부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말로 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아. 아하하하하. 미안하구만. 경황이 없어서 말이야."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시유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의 술사인 이리야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버릇이 어디 갈까. 어딘가 능글 맞은 대사가 그의 입에서 줄줄 거리낌없이 흘러나온다. 기엘은 고개를 돌리고 로운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 다. "시유라고 합니다. 시유 디 레이죠라고 하죠." 시유의 자기 소개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경하가 문득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잠깐. 시안의 이름은 다르잖아. 왜 성이 틀리지?" 경하의 입에서 시안의 이름이 나오자 시유의 시선이 경하에게로 급격하게 돌아간다. "그건 언니가 수장 계승 후보자이며 계승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계승자에겐 그들에게 계승되는 이름이 있으니까요." "헤에. 그게 시안 리에 하로이옌 디 어쩌구하는 긴 이름이라는 건가?" "함부로 부르지 말아주세요." 자신의 언니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가 '그녀'가 아닌 '그'라는 것은 이미 눈치 챈지 오래다. 어째서 저 사람은 저렇게 함부로 자신의 언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지 시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아. 미안. 사과할게." 자신보다 시유가 어려서인지 경하는 조금 어려워하면서도 시유에 게 말을 놓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나이가 어리면 무조건 누님, 또는 형님에게 복종(?)하라는 교육을 받고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 다. 물론 부모님에게서가 아니라 누나들과 형에게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얼굴도…." 경하가 식구들을 떠올리며 조금 유쾌해진 반면, 시유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때 없다. "…아. 아아. 이 얼굴은." 생각해보니 더 이상은 그 얼굴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경 하는 그제서야 달았다. "미안. 바꿀게. 금방." 그렇게 말하자마자 경하가 눈을 감았다.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을 감았을 뿐이다. 은색의 빛이 경하의 머리카락과 얼굴에 아주 잠깐 감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경하의 얼굴은 시안의 얼굴과 흡사하고 원래의 경하의 얼굴에도 흡사한 또 다른 얼굴로 변해버렸다. 그 광경을 한두번 목격했던 기엘과 로운이나 심지어는 이리야까 지도 그 장면은 신기하기 이를데 없었다. "…………." 차마 입도 다물지 못하는 것은 그 광경을 처음 목격한 시유. 그녀는 너무나 놀라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됐지?" 씨익-하고 경하가 웃어보였지만 시유에게는 그것은 절대로 웃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덜덜덜 떨며 손가락으로 경하를 가리켰다. "다. 당신은…." "응?"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 순간. 파사사삭 소리를 내며 모닥불의 마지막 장작이 부서져 내렸다. *** ---------------------------------------- 계속. 으윽 속쓰려. 아슈레이 5 유린의 땅 7장 그리고 떠나는 사람들 (27) *** "흐흑." 흑흑흑하는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등뒤에서 들려온다. 경하는 몸둘바를 몰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그 울음소리의 주인 옆을 맴돌았지만 결코 말을 걸지는 못했다. 결국 경하는 로운에게 속삭였다. '좀 어떻게든 해봐. 미치겠어.' '뭘 어떻게 해.' '울고 있잖아. 그것도 하루 죙일, 계속, 쉬지 않고. 저 울음소리 때문에 난 머리털이 빠지기 직전이라구.'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참아.' '로운!!!!'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해?" 두 사람이 속삭이고 있는데 불쑥, 짙푸른 색의 머리카락이 두사 람의 얼굴 사이로 끼어들었다. "쿠악---." "………." 옆으로 물러서자 이리야가 대뜸 묻는다. "무슨 비밀 이야기야?" "좀. 조심해. 이리야." "할일 없으면 가서 시유 좀 돌봐 줘." 하지만 질문을 받은 두 사람은 그가 묻는 말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고 각기 다른 말을 한다. "……저 앨 젤 잘아는게 자네라며. 자네가 돌봐야지 왜 내가…." 라고 말하는 순간 이리야의 옆을 시유가 흐느껴 울면서 지나갔 다. 키리엔을 떠나온지 이틀째. 그들은 라치온 산맥의 또 다른 자락을 열심히 오르고 있었다. 나름대로는 몸에 밴 산행인지라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단 한 사람, 일행중 유일하게 진짜 '여자'인 시유만은 사정이 달랐다. 어젯밤, 로운과 기엘로부터 번갈아 짤막하게나마 경하에 대해 설 명을 듣고난 그녀는 그 직후부터 지금까지 정말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끝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대면서도 뒤처지지 않고 일행을 따라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저렇게 울어대다가는 곧 탈수증에 시달릴 텐데 말이야.' 아무래도 시유가 제일 신경 쓰일 수 밖에 없는 경하는 가끔식 그 녀에게 다가가 수통을 내밀고는 했지만 시유는 고집스럽게 경하 의 손길을 거부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그녀가 원망할 수 밖에 없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경하인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냉혹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유는 그 진실의 냉혹함을 한 몸에 받고 망연자실 해 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나마 시유를 제일 잘 이 해해주고 위로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로운이 의외로 그녀곁 에 다가가지도 않는 다는 것이 나름대로는 문제라면 문제. 마치 오래된 상처가 덧난 것 같은 기분 때문인지 로운은 누가 뭐 라고 해도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면서 시유를 달래는 것을 거부했 던 것이다. 로운 스스로가 그랬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처는 자기 스스로 가 치유할 수 밖에 없는 것, 특히 누군가를 잃었을 때 받는 상처 는 자신이 아니면 치유할 수 없다. 냉랭한 로운과 차마 뭐라고 말할 수 없어서 시유를 피하는 기엘, 그리고 위로는 해주고 싶지만 당사자가 거부해서 곁에 다가가지 도 못하는 경하는 결국 떨떠름하게 그녀를 멀리 둘러싸고 앞으로 전진할 뿐이었다. 결국 남는 사람이 누군고 하니 바로 유일하게 일행과는 출신성분 (?)이 다른 물의 술사 이리야였다. 슬금 슬금, 경하는 이리야쪽으로 다가갔다. "이리야." "응?" "좀 달래. 책임지고." "내. 내가 왜!!!!" "여자들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면서? 이번에 힘 좀 써봐." "이. 이봐…." "부/탁/해!" 이리야는 울상이 되어버렸다. '도대체가 도움이 안 돼!! 이 일행은!!!!!' 소리치고 싶지만 소리치지 못하는 슬픈 이리야였다. *** "여기서 부터가 호로스다." "생각보다는 훨씬 빨리 왔군." "맞아." "다시 봐도 참 뭐랄까…." 각기각각 호로스를 보는 눈길은 틀렸다. "후우… 정말 곤란하다니까." 호로스의 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경하는 길고 길게 한숨을 내리 쉬었다. 이제부터인 것이다. 그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모양 좋은 손가락하나가 쑤욱- 앞으로 나아간다. 살짝, 경하는 마치 허공에 무엇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댔 다. 그곳에서부터 동심원으로 공기의 결이 둥글고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살짝 일그러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마치 물결과도 같은 파장. 그 파장에는 붉은 색과 빛나는 은빛이 섞여 있었다. 미메이라보다 훨씬 짙은 색으로 이루어진 풍경이 일행의 눈을 부 시게 했다. "불꽃의 계승자…." 마치 예언의 현자처럼, 경하의 입에서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른 느 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꽃의 계승자가 돌아와 있다." 비슷한 시각. 불꽃의 나라 호로스의 수도 나카리안에서는 한 남자가 높은 탑 위에 서서 어느 한곳을 지긋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어제 아슈레이의 중간지대에서 돌아와 명실 상부한 불 꽃의 계승자로써 호로스의 수장이 된 남자였다. 어느 누구보다 강력한, 심지어는 강력한 힘을 가졌었다고 전해지 는 전 수장 레나텐을 능가하는 능력을 가진 새로운 수장. 그는 지금 단 이틀간의 짧은 계승로를 마치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단 이틀의 계승로 일정, 그것은 전대미문의 일로 호로스 내에서 도 그 일로 상당히 떠들썩해하고 있었다. "바람의 계승자인가…." 그는 화려한 붉은 색의 액체가 담긴 잔을 높이 치켜올렸다. "레나텐, 당신이 만났던 그 계승자를 나도 보게 되었소." 쿡쿡쿡하는 웃음소리에 투명한 유리잔에 잠긴 액체가 흔들린다. 그보다도 새빨간 머리카락이 주인의 움직임에 따라 화려하게 춤 을 추기 시작했다. "바람이라는 것은 원래 이렇게 갑작스럽게 불어오는 거지." 그는 높이 치켜올렸던 붉은 액체를 천천히 공기중에 쏟아부었다. "당신을 위한 진혼의 바람이오. 레나텐." ---------------------------------------- 5권 마침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후우...5권이 끝났습니다. ....버릇대로 잠시 휴식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나름대로 그동안 미루어 왔던 다른 일들을 열심히 해치운 다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쿨럭. 에에....물론 너무 오래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번 마감때문에 -_-; 심장이 벌렁 벌렁 거려서인지 가슴이 지끈 지끈한 병이 발생!!! 과연 이 병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딩동뎅. 정답은 마감병입니다. 하지만..하나가 끝났으니 좀 호전을 보이길..바라는 중입니다. 6권. 바람의 궤적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슈레이 6 바람의 궤적 1장 호로스의 수장 (1) "키햐----조오타---." 털푸덕 소리와 함께 화려한 은빛의 실이 붉은 색의 시트 위에 흩어졌 다. "경하님." "…………." "경하님." 기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렀으면 말을 해 말을. 피곤하다구." 기엘이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순간 멈칫했다. 그러자 로운이 끼 어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충분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로운…. 난 말이지." 침대위에 벌렁 드러누었던 경하는 손가락하나 움직이기 싫은지 고개만 삐딱하게 로운 쪽으로 향했다. "기엘한데 말했어. 로운 네가 아니라." "기엘이 듣고 싶은 대답은 나 역시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상관없 잖아?" "그래서? 뭐가 듣고 싶은 거야? 피곤한데 좀 자자구. 내일 이야기 해 도 되는 거잖아. 내가 어디 도망가?" "이봐." 조금은 신경질이 난 것인지 로운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러니까 왜!!!!" "어떻게 할 작정이냐." "뭘?" 어리둥절해하는 경하의 대답이 돌아온다. "그걸 지금 대답이라고 하는 거냐--!!" "로운!!!" 기엘이 주먹을 불끈쥐며 일어서는 로운에게 달려들었다. "로운 진정해!! 진정하라구." "지금 진정하게 되었어!! 저 자식 말하는 것, 너도 같이 들었잖아!!" "그러니까 좀 진정하고 이야기 하자고. 응? 로운." "하모 하모. 인간은 냉정하게 생각해야 답이 나오는 법이지. 로운처럼 뭐라고 말만하면 발끈해버리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너어---!!" "경하님도 그만 하십시오. 저나 로운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 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시끄러우니까 데리고 나가 줘. 기엘." "경하님!" "하아---." 경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쳇. 결국 일어나게 만드는 군. 잠이나 좀 자려고 했더니만." 벅벅 머리를 긁으면서 경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운은 그런 경하의 모습을 보고서 간신히 진정해 자리에 앉았다. 그런 로운을 보면서 경하는 아무래도 '처리'를 하고 난 후예야 잠이라 도 편히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듣고 싶은게 정확하게 뭐야?" 팔짱을 터억 끼고 경하가 로운과 기엘을 바라보았다. "경하님 저희 들이 듣고 싶은 것은…." 열린 창으로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미메이라에서 부는 바람과는 조금 틀린, 열기가 섞인 듯한 바람. 그 바람에 섞인 투명하고 붉은 기운이 경하의 은빛 머리카락을 붉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불꽃의 나라 호로스. 아슈레이 대륙을 지탱하고 있는 4가지 신의 은총 중 하나인 불꽃을 이 어나가는 자들이 살고 있는 나라. 바로 이웃해 있는 바람의 나라 미메이라보다는 약간 작은 나라이긴 하 지만 그 대신 주인이 없는 거대한 사막, 타카인 사막을 끼고 있기 때 문에 아슈레이 대륙에 끼치는 영향이 남달리 커다란 나라이기도 하나. 하지만 국경선의 대부분이 타카인 사막과 접해 있기 때문에 미메이라 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른 나라들과 교류가 거의 없기도 한 것이 바로 호로스다. 경하 일행이 불꽃의 나라 호로스를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지난 번과는 달리 호로스와 미메이라의 경계선이 되는 라치온 산맥을 넘어 수도인 나카리안에 도착한 것은 예상보다 늦어, 라치온 산맥을 넘은지 이틀 후의 한밤중이었다. 미메이라에 도착해서 며칠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이웃 나라에 오게된 데는 나름대로 어쩔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기껏 집으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기뻐 할 사이도 없이 경하의 앞에는 사건에 사건이 계속 이어져 버렸던 것이다. 경하를 원래의 세계로 돌려보내 줄 장본인인 카류는 대신전에 유폐되 어 있었고, 레이죠 장로는 죽음의 목전에 있었고, 설상 가상으로 로운 과 기엘의 아버지는 각기 다른 생각을 품은채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 이다. 그뿐이었을까? '시안'은 볼모로써 제국에 시집을 가야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결국 시안은 경하라는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시안이 아닌 경하로써 선택을 했다. 대신전의 결계를 파괴해버리고, 그리고 자신대신 제국으로 보내질지도 모르는 시유를 대리고 줄행랑을 쳐버렸던 것이다. 영웅심리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경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의 선택을 한 것이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경하님." "뭘 어떻게 해?" "무작정 호로스로 오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왠지 경하는 기엘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그런 경하를 보면서 로운은 역시나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경험해온 것을 토대로 생각해볼 때, 일단 호로스에 여차 저 차해서 도착하긴 했지만 경하가 뭔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곰곰이 해두 었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기사. 네가 뭔가 생각해두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지만 말 이야." "뭐야. 왜 싸움을 걸고 그래?" 퉁명스럽게 경하가 대답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급작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여긴 미메이라가 아닌 호로스다. 지금 넌 경하라고 불리고 싶어하지만, 이곳에서는 널 아직 시안으로 알고 있 어. 적어도 그 부분만이라도 생각해둔 바는 없는 거냐?" "…………." "경하님. 대신관님께는 어떤 말씀을 들은 겁니까?" "별말 없었어. 그냥. 호로스로 가라고 했거든." "그뿐입니까?" "응. 호로스로 가서 호로스의 수장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어. 오랫동 안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왔던 나라니까, 도움을 청하면 분명 좋은 해답을 줄 거라고 말이야." "……흐음." "어딘가 모르게 대신관님 다운 말씀이군. 앞 뒤 옆, 정확하게 딱 딱 잘라내서 듣는 사람이 이해 할 수 있는 것만 말씀하시는 게." 로운의 말에 경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하는 끄덕이다 말고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며 멈추어버렸다. "잠깐. 그거…." "뭐?" "그거. 지금 나 비웃는 소리였지?" "설마." "뭐가 설마야!!" "아니. 대신관님 다운 말씀이라고 했을 뿐인데. 듣는 네가 뭔가 스스 로 께름직했던 것 아니야? 나는 그저 진. 실.을 말했을 뿐이다." "로--오---우--운!!"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던 경하의 머리 위에서 모락 모락 '열받았다는 표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기엘이 얼른 두 사람 사이에 뛰어 들었다. "그만하자 로운. 경하님. 죄송했습니다.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으니 오 늘은 편히 쉬십시오. 어차피 호로스의 수장님과는 내일 아침이나 되야 만나실 수 있을 테니."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내일 이야기 하자구. 쳇."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넌!! 좀 자각을 해봐. 과거엔 어땠을지 몰 라도 키리안을 떠나왔을 때부터 넌 네 뜻대로 움직여 온 거다. 알겠어 ? 우리나, 대신관님이 시킨게 아니야. 네가 원한 거라구!!" 로운이 말투는 거칠었지만 진실이 담겨있었기에 경하는 조금전처럼 장 난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경하는 입을 꾹 다물고 로운의 시선을 피했다. "누가 뭐라고 했어?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적당히 해줘. 그 렇지 않아도 복잡하단 말이야." "…………." "자. 됐지? 로운. 우리도 경하님께 시간을 좀 드려야하잖겠어? 좀 쉬 실 시간도 드리고."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경하의 몸이 옆으로 툭하고 쓰러졌다. 그런 경하에게 기엘이 다가가 말했다. "좀 쉬십시오. 아무래도 며칠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하는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기엘이 로운을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한숨소리가 새어나온다. "정말이지. 로운은 꼭 그런 소리만 골라 해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니까… 쳇." 경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커다란 공간. 그 공간으로 고요하게 바람이 스며든다. 연한 붉은색 톤으로 꾸며진 화려한 침실을 둘러보며 경하는 조금은 투 덜거리고 싶은 마음이 되어 버렸다. "왠지… 3일정도 이방에 갇혀 있으면 돌아 버릴 지도 모르겠어. 뭐 그 렇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지만." 경하는 거대한 침대 위로 팔 다리를 쭈욱 뻗었다. 바람이 들어오고 있지만 춥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눕자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쏟아진다. '뭔가 생각해야할 것이 굉장히 많았는데….' 스르륵. 눈꺼풀이 덮히고 곧 경하는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위로 투명한 은색의 실과 같은 것이 떠올랐다. 경하의 머리카락과는 전혀 다른 은빛을 띤 그것은 경하를 보호하기 위 해 모습을 드러낸 세나케인이었다. *** --------------------------------------------------- 계속 ...좀 늦었습니다. ^^;;;; 마음이 정리가 안되서 그런지...글도 정리가 잘 안되더군요. 시간도 얼마 남지 않고. ...후우. 힘내겠습니다. (일단. 덥지 않아서 좋군요. 시워----언 합니다. ^^;;)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1장 호로스의 수장 (2) ***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세계사 책이나 뭐 그런 것이라도 많이 읽어 둘걸."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나절, 경하는 조그만 소리로 궁시렁 거리 며 화려한 응접실 같은 곳에 앉아있었다. 사실 말이 응접실이지 경하의 감각으로는 무슨 영화에라도 나와야 적 당할 것 같은 연회장같은 곳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정말이지 곤란하단 말이야.' 눈앞에는 그야말로 진수 성찬이 펼쳐져 있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모래요, 씹히는 것은 질긴 소가죽이라도 되는 기분이다. 어제는 일단 피곤한 김에 글자그대로 골아 떨어져 자버렸지만 아침이 되기 무섭게 눈이 뻔쩍 뜨였다. '차라리 여기가 한국이라도 되고 이웃나라는 일본이니, 미국이니 하면 어디선가 듣던 풍월이라도 읊어대지. 잘 알지도 못하는 데서 웬 외교 사절 노릇이래 이게.' 답답한 기분에 옆에 놓여진 물컵을 벌컥 벌컥 들이켰지만 시원하기는 커녕 왠지 미지근하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 불꽃의 나라답게 가 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땀이 송글 송글 배어나올 정도로 더웠기 때문이 다. '후우 덥다.'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다말고 경하는 문득 고개를 번뜩 쳐들었다. '맞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리고는 히죽하고 허공을 향해 웃어보인다. 다음 순간 시안의 몸 주위에서 조용하게 산들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 다. '헤헤헤. 이러면 되는 걸 가지고. 역시 인간은 머리를 쓰고 살아야해. 아암. 그렇고 말고.' 잔잔하게 바람을 불러일으키자 찌는 듯이 더웠던 주위가 조금씩 시원 해져 간다. 머리부분이 시원해져가자 기분도 조금 나아진 경하는 그제서야 눈앞에 놓인 진수성찬에 달려 들기 시작했다. "시안님." 아까부터 혼자서 이런 표정 저런 표정으로 쉴세 없이 얼굴표정을 바꾸 어 가는 경하를 보고 있던 로운이 참다못해서 경하를 불렀다. 물론 공 식적인 이름으로 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응?" 후루루룹하고 국수 비슷한 것을 입으로 쓸어 넣고 있던 경하는 음식물 을 입에 문채 고개를 돌렸다. 후두둑-- 국수 가락들이 떨어진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들이 일제히 경하에게 모아졌다. 로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하늘이 깜깜하군.' 누가 뭐라고 하든 경하의 대외적인 신분은 일단 미메이라의 수장이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신하되는 사람(?)이 묻는다고 입에 먹을 것 을 가득 물고 후두두둑 떨어뜨리면서 고개를 돌리다니 정말이지 말이 되지 않는다. 보통때라면 버럭-하고 소리를 질러버렸겠지만 로운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주먹을 꾸욱 쥐고는 아주아주 간신히 '평상시'처럼 말을 했다. "……다 드시고 대답해주십시오." 로운이 말을 하기 무섭게 경하의 시선이 음식들이 놓여진 테이블로 향 한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호로스의 수장님과는 저녁 만찬 전에 만나기로 되어 있다. 알겠 어?" "아아. 알아. 아까 나도 같이 들었잖아." "그렇다면 좀 긴장이라도 해봐.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있는 거지?" "로운. 적당히 해. 경하님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실 것 아니야." "………." 순간 로운과 기엘의 시선이 동시에 경하에게 향한다. 오똑한 의자 위에 다리를 접어 올려 그야말로 오똑하게 앉아있던 경하 는 순간 배시시시하고 웃어보인다. "나 별생각 없는데?" "…………." "…………." 순간 로운이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것을 기엘이 뒤에서 뜯어말린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내가 무슨 외교 사절도 아니고, 이 나이에 무슨 외교니 정치니 하는 것을 공부했겠어? 저쪽에서도 그다지 신경쓰 지 않을거야. 쉽게 생각하자구. 쉽게." 나름대로는 경하도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참을, 그것도 오전내내 고민을 했지만 결론이랄 만한 것이 나올 리 가 없었다. 그나마 내린 결론이 '대신관의 말을 믿어보자.' 라는 것. 도움을 구하면 어떻게 해서든 호로스의 수장이 도움을 줄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경하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저녀석이 알아서 할 수 있으면 내가 걱정 따위 할 리가 없 잖아. 기엘. 이거 놔!!" "로운!!" "젠장할!!!" 버럭--하고 그만 로운이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나마 기엘이 주문으로 방안의 소리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어서 다행일뿐이다. "그렇게 화내지마. 화낸다고 해서, 그리고 화가나서 날 몇 대 팬다고 해서 없던 방법이 갑자기 두둥하고 떠오를 리도 없다구."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나몰라라 할수 있는 거냐. 이해가 안가!!" "이해가 안가도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그만 떠들어. 머리아파." 뻔뻔하게 경하가 대답했다. 내심 로운이 저러는 것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앞에서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것도 못할 노 릇이다. "뭐, 일단은 호로스의 수장이 도움을 줄지 안 줄지부터 알아봐야 하잖 아. 다른 것은 그때까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어차피 기엘의 아버님이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아니야. 아무리 최단 거리로 움직인다고 해도 말이야." "…………." 뭔가 말을 하려던 기엘이 하라스다인 장로에 대한 말이 나오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충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기엘의 아버님이 수도에 도착 할때까지?" "글쎄요. 정말 최단거리를 잡아서 간다고 해도 이주일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직선거리를 주파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다가 일단 일종의 사신의 입장이니 파발마라도 띄운 속도로 말을 달릴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주일 이상 걸릴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봐. 로운. 아직 시간은 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열내지마. 나는 그 것 보다는 다른게 신경 쓰이는 중이니까." "그게 뭔데?" "묻지마. 말하기 곤란한 거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경하는 오똑하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확트인 정경이 경하의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일단 그게 아니라구.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호로스의 수장 얼굴을 봐야할지 그게 고민이란 말이야.' 경하가 후우-하고 깊게 숨을 내쉬는 것을 로운과 기엘은 그저 잠자코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그들에게 있는 걸까? 그리고 경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믿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 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사건들. 그 사건들이 하나하나 그물처럼 엮어들어간다. 그리고 그 그물 어딘가에 걸려있는 사람들. 그들 중 하나인 자신들. 기엘과 로운이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하는 경하데로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 사람 얼굴을 보면 과연 무슨 말이 튀어 나올지….' 앞뒤 상황까지는 모른다. 경하가 목격했던 것은 단지 한가지, 전 수장 레나텐의 힘을 현 수장이 모조리 흡수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경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설사 경하가 보았던 광경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 해도 눈앞에 그 문제의 사람이 나타났을 때 경하 스스로가 어떤 반 응을 보이게 될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눈 앞에 닥쳐있는 문제들도 심각했지만 무엇보다 경하를 괴롭히고 있 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러고보니….' 기우뚱하고 경하의 얼굴이 옆으로 기운다. '다른 사람의 엘을 흡수하는게 가능하다는 건가? 결국은?" 경하의 시선이 어느새 기엘과 로운에게 향해진다. '엘러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소리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전에 일어났던 한두가지 일도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경하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그리 먼 과거의 일도 아닌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혼미하게 흐려져 있는 기억의 한 자락속에 아주 꺼 름직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자신 때문에 죽어버렸던, 그를 보호하기 위에 몸을 던졌던 사람과 그 의 목숨을 노리다가 죽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아무리 해도 기억나지 않는 기엘과 로운에 관한 일들이 차례 차례 머릿속에서 되살아 난다.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으니. 단지 뭔가 있었다.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구.' 웬지 머리를 감싸안고 데굴 데굴 굴러버리고 싶었다. '아아. 정말이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어쩔 수 없는 경하의 딜레마였다. *** ...계속. 같이 일하시는 분이 감기에 걸렸습니다. ..과연 이 감기가 제게 옮을 것인가 말것인가.....-_- ...감기에 엄청 약합니다.... ...지금은 약간 몸이 이상한 상태. 우어~~ 감기야 옮지마라.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1장 호로스의 수장 (3) *** "폐하.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산처럼 쌓인 양피지 더미 사이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곧 제국의 황제가 될 남자, 로렌이었다. "그렇군, 벌써 어두워졌어." "일은 쉬시면서 하시는 쪽이 좋습니다. 폐하께서 항상 제가 그렇게 말 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카스핀. 물론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 로렌은 양피지 더미에서 걸어나오면서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가끔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네." "뭔가 즐거우신 것 같군요. 요즘." "무슨 말이 하고픈 건가 카스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입을 꾹 다문 남자를 보며 로렌은 약간 기분이 상한 듯 이마를 찌푸려 보인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그다지 감정표현을 얼굴로 보여주는 타입이 아니 기에 미타 남작은 자신이 실수를 했나 싶어 당혹스러웠다. "그렇군. 얼굴에까지 나타나는 건가? 아니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묘하게 주어가 생략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그 둘 사이에서 이상한 공기가 맴돌았다. "가끔은 나도 숨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네. 그때는 조금 기대가 되고, 조금은 그리워 지는 거지." "…………." "그건 그렇고. 문득 생각이 났는데 말이야." 저벅 저벅, 로렌이 미타 남작 쪽으로 걸어왔다. "그 일은 어찌 되었나?" "예?" "미메이라와의 국경 부근으로 전진 배치 시켰던…." "아. 예. 일단은 8곳에는 철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나머지 3곳은 일 단 대기 중입니다.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아니야. 아니야. 그 정도면 되었네. 자세한 것은 자네한테 일임한 상 태니까." 로렌이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미타 남작이 눈치를 못챌리는 없었다. 저런 그의 주군의 태도는 말하자면 엄청나게 궁금하지만 나도 채통이 있으니 이정도로 하겠네라는 의미인 것이다. 미타 남작은 로렌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잘한 보고서를 슬쩍 그의 침전에 가져다 두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때로는 약간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군 그래. 카스핀. 자네가 생각하 기에 미메이라에서 우리에게 요구할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글쎄요?" 정확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으로는 보여지지 않겠기에 미타 남작은 슬 쩍 말을 흐렸다. "일단 영토를 요구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과거의 기록을 검토해보아도 기본적으로 신국이라는 나 라는 영토 확장에는 그다지 열성적인 나라들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굳 이 영토 확장을 해야할 필요성을 못느낄테니까요." "그다지 교류도 없고, 특별한 물적 지원도 필요하지 않다라고 하면 도 대체 뭘 반대 급부로 제공을 해야할지 그것도 나름대로는 난감하군." "그러니까 신국은 어려운 상대라는 겁니다. 폐하." 혹시나 마음 한구석에서라도 미메이라인을 황비로 맞이하는 것에 일말 의 불안감같은 것이 로렌에게 생겨나주지 않을까하며 미타 남작은 조 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도 어차피 사람들이 아닌가. 인간이라는 것은 아무리 만 족스러워도 또 뭔가를 원하게 되어 있어. 이쪽의 요구에 그쪽이 반응 한다는 것은 역시 우리에게 뭔가 요구할 것이 있다는 소리가 되. 안그 런가?" "…………." "원하는 것을 들어보고, 충분하게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반정도만 들어주는 것이지. 그정도로 족해. 뭐니 뭐니해도 우리는 그쪽에서 얻 을 것이 있으니까 말이야." 만족스러워하는 로렌의 얼굴을 보면서 미타 남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과연 로렌이 만족스러워 하는 대상이 그가 말하는대로 미메이라의 기 사들 때문이라면 그리 걱정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로렌이 저렇게 며칠을 군소리없이 미타 남작이 가져오는 모든 일들 해치우는 것을 보았을 때 맹세코 그 한가지의 이득 때문만이 아 니라고 미타 남작은 생각했다. 미메이라의 바람술사들의 뒤에 있는 단 한명의 존재.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로렌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어슴프레 날이 저물고 있는 시각. 경하는 홀로 어둑 어둑 해지는 정원에 나와 앉아있었다. 앞에 놓여진 뭔지 모를 것으로 끓여진 차는 냄새는 향기로웠지만 맛은 영 아니었기 때문에 경하는 딱 한 모금만 마신체 손도 대지 않고 있었 다. '차라리 물이나 주지.' 삐딱하게 의자에 기대앉아서 그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기화 요초들이 경하가 일으키는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날리 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데서 보자는 거야? 정말.' 주위에는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무슨 비밀 정상회담이라도 하자는 걸지도 모르겠어.' 벅벅벅. 경하는 버릇처럼 은빛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속에 손가락을 넣 어 머리를 긁는다. 기엘이나 로운이 보면 제발 체통을 지키는 행동을 해달라고 애원할 만 한 행동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경하는 애매하게 손을 내렸다. 그리고 여기 저기 혹시나 그것을 본 사람이 없을까 돌아다본다. 아무 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후우… 정말이지 난감해. 난감하다구.' 내리쬐던 햇빛은 저녁이 되자 광도가 약해서 주위를 온통 붉게 물들이 고 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경하의 머리카락 조차 붉게 보일 지경이다. 조용하고 시원한 정원의 한구석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있다보니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우우. 졸면 안되는데….' 이상한 일이지만 요즘은 가만히 혼자 앉아있기만 하면 졸음이 몰려오 곤 한다. 아무리 천하태평으로 일관하고 있는 경하이긴 하지만 나름대로는 일생 일대의 '비밀 정상 회담'장에 나와 있는 경하는 애써 졸음을 쫓았다. 휘리리릭--- 경하가 졸음을 쫓기 위해 머리를 흔들자 은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 려 주위를 가득 채웠다. '…어?' 한참을 그리고 있던 경하는 순간 뭔가가 자신의 뒤쪽에서 다가오는 것 을 느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던 머리카락들이 순식간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간다. '설마. 그 사람…이겠지?' 다가오고 있는 파장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단번에 그 정체를 알 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불꽃의 엘이 내뿜는 것. 경하는 조용히 그 강력한 불꽃의 엘을 가진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렸 다. 그가 다가오면 다가 올수록 확연하게 공기가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 다. 경하의 주위를 가득 매우고 있던 바람의 엘이 하나둘씩 불꽃의 엘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경하의 바로 앞에 불꽃의 엘의 강력한 파장을 내뿜는 남자가 우뚝섰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로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호로스의 수장 로이드린 에쉬 라히 호로스입니다." 화려한 불꽃의 머리카락과 불꽃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환하게 웃으 며 인사를 건내왔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불꽃과 대비되는 정반대의 새하얀 피부를 가지 고 있었다. 경하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레나텐과 닮은 점이라곤 그 불꽃과도 같은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뿐. 경하는 잠시 그의 그 살아있는 불꽃같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 다. 일렁이는 불꽃위로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 지고 있었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입니다." *** "하아. 정말 걱정되는데. 어째서 시간이 이렇게 걸리는 거지?" 기엘은 초초하게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성큼 문가로 걸아갔다. 하지만 닫혀진 문을 열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처음에는 경하에게 모든 것을 맡겨보자고 했던 기엘이지만 막상 경하 가 홀홀 단신으로 호로스의 수장을 만나러 자리를 비우자 바로 그 순 간부터 불안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역시 단 둘이서 보자고 했을 때 고집을 피워서라도 동석을 했어야 했 어." "역시 그러는 쪽이 좋았겠지?" 자신이 하는 말에 기엘이 맞장구를 치자 로운은 조금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친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할 거면 좀 일찍부터 내쪽에 가세해주면 좋았잖아. 여하튼 네 녀석은." "아……. 하, 하지만…." 왠지 겸연쩍어진 기엘이 할말을 찾지못해서 말을 더듬자 로운이 퉁명 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때에 따라서 내 말을 좀 따라줘. 젠장 영 불안해 서 견딜수가 없군." 경하가 호로스의 수장인 로이드린과 마주 서 있을 무렵. 경하의 두 신변 보호인(?)은 불안감에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 다. 그도 그럴 것이 경하를 혼자 두기만 하면 반드시라고 할만튼 사건이 터져나왔던 것을 두사람은 머무나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로스의 수장이 경하와 홀로 만나겠다고 하는 전언을 들었을 때 로운 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날뛰지는 않았지만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호로스고 호로스에 있는 이상은 호로스의 수 장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기에 이렇게 둘이 덩그머니 대기하는 상태 가 되어 있었다. 불안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경하님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세나케인님도 있 고 하니까." "누가 그녀석 몸을 걱정한데? 쳇." "로운." 툭하고 내뱉은 말에 기엘이 정색을 하고 로운을 바라본다. 그런 기엘의 무언의 항의에 로운은 간단히 실언을 했다며 항복했다. "미안. 실언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농담으로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 "잘못했다니까. 초초해서 그래." 드물게 솔직하게 대답하는 로운을 보며 기엘은 자신역시 초초함이 극 에 달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음을 깨닫고 로운에게 말했다. "미안. 좀 날카로워져 있었나봐." "아니. 그럴만 했으니까. 괜찮아. 그나저나 어떻게 소식이라도 들었으 면 좋겠는데." "그러게.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게 아닌가 싶다." 두 남자는 같은 자리에 있지 않는 한 사람에게 서로의 신경을 집중하 며 그렇게 시간을 죽였다. 분명히 아무일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고 또 세외하면서…. "이렇게 시안님과 한자리에 있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 예에. 아. 하하하하." 삐질 삐질.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경하는 앞에서 빙글 빙글 웃고 있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 라서 당황하고 있었다. 차라리 대뜸 무슨 일로 오신겁니까? 라고 물어준다면 이렇고 저렇고 이래서 이렇습니다하고 장광설이라도 늘어 놓겠지만 그런 상황도 아닌 것이다. 마치 무슨 소개팅(?)이라고 하는 사람들처럼 통성명을 하고 이런 저런 시덥잖은 대화만이 테이블 위를 오가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며칠전에야 나카리안에 돌아온 참 이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시안님을 오래 기다리게 했을 뻔했습니다." "예. 뭐. 힘드실텐데 이렇게 직접, 뵐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경하의 말에 로이드린의 표정이 살짝 변한다. 물론 로이드린의 입장에서는 재미있군 이라는 반응이었지만 경하는 자 신이 혹시 말실수라도 한게 아닌가 싶어서 바짝 긴장을 해버렸다. "계승로라는 것이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것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시안님께서는 얼마전 이곳을 다녀가신 일이 있으시지요?" "예. 그때는…." "그때는 제가 아니라 전 수장이신 레나텐님께서 시안님을 맞으셨겠지 요." "그. 그렇습니다." 순간 경하의 머릿속에 레나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경하의 얼굴빛에 그림자가 비쳤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지만 로이드린은 대뜸 말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제가 계승로에 오르기 전에 미메이라에 들렸어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러질 못했군요. 조만간 미메이라로 찾아 뵙겠 습니다." "…………." 경하는 로이드린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머리를 갸우뚱했다 가 곧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미메이라와 호로스의 오랜 친분에 따르면 사실 로이드린이 계승로를 떠나기 전에 미메이라에 기별을 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한 실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자라고 성문화 시킨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오랜 암묵적인 계약을 어긴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뭐라고 대답을 해여할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경하는 간신히 답을 찾 아냈다. 따지고 보면 그가 계승로를 떠나기전에 미메이라에 갔었다고 해도 경 하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던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아. 뭐. 저도 자리를 비우고 있었으니까 그런 것은 크게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것은 후일을 기약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스스로 말해놓고도 뭔가 멋지다 싶어서 경하는 씨익-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아. 난 역시 천재인가봐.' "그렇…습니까?" "그렇겠죠?" 그리고 둘은 마주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웃… 천재는 둘째치고, 닭살이 돋아서 죽을 것 같아.' 경하는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벅벅벅, 옷속의 손바닥이며 손등을 긁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계속. 감기야 물렀거라. 훠이 훠이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1장 호로스의 수장 (4) "그러니까… 현재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군요." "예. 제국의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조리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려운 문제가 되겠군요." "예. 그저 단순하게 정략 결혼을 원하시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돌파구 를 찾아보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물론 그에 따른 반대 급부가 만만치 않겠지요." 손가락을 펴 깍지를 끼며 로이드린이 의자 깊숙이 앉았다. 로이드린은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을 똘망 똘망 바라보고 있는 시안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길고 긴 은발의 머리카락과 옅은 회색빛의 눈동자, 어딘지 모르게 중 성적인 외모가 확연하게 눈길을 끈다. 하지만 본인은 그것을 눈치채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도통 알 수가 없 다. 상당히 공손하고 예의 바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풀어진 듯한 자유 분방함. 완벽한 언밸런스함이 시안에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이건 또…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까?' 미메이라 부근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하 는 쪽이 맞을 것이다. 아무리 타 국가에 대한 정보가 중요하지 않은 신국이라고 해도 일반적 인 수준이상의 정보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메이라 국경 부근으로 집결되던 제국군의 소식은 그가 계승로에 들 어가지 전에 이미 접했던 사실이다. 사실 계승로를 이토록 빨리 마친 이유에 미메이라와 제국의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런 문제를 들고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로이드린님." "일단 어떤 도움을 제가 드릴 수 있을지는 조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시안님." "가, 감사합니다." 되도록 착하고 예쁘게(?) 보이자라는 명제아래 경하는 열심히 웃어보 였다. 사실 조금전에 경하가 로이드린에게 이런 저런 미메이라의 사정에 대 해 설명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모든 것은 전부 다 이야기 한 것은 아 니다.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몇가지 만큼은 제외를 하고 말을 했다. 예를 들면 제국으로 이미 미메이라에서 사신이 떠났다는 이야기라던 가, 미메이라의 신전을 봉쇄하고 있던 마법의 결계를 자신이 깨버렸다 든가 하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차마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에서 미메이라의 수뇌부(?)가 둘로 갈려 있 다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일을 크게 만들은 장본인이 자신이 라는 소리는 정말 입이 삐뚤어져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경하가 속으로 약간 뜨끔 뜨끔 찔리고 있는데 로이드린이 갑자기 톤을 바꿔 맑은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그것보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예?" 로이드린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경하는 화들짝 놀라서 눈 이 동그랗게 되었다. "저와 마찬가지로 시안님께서도 계승로를 마치신지 얼마 안된 것으로 압니다." "그, 그렇습니다. 일주일도 채 안되었으니까." 하루 이틀 사흘, 하고 경하는 속으로 날짜를 세어보았다. 워낙 정신이 없기도 했었고 도대체 언제를 마지막으로 잡아야 할지 모 르는 상태라 정확하게 날짜를 세는 것은 불가능 했다. 풍환을 얻은 날을 기점으로 해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미메이라 땅으로 돌아온 날을 기점으로 해야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식으로 키리엔 으로 돌아왔던 날인지 경하로써는 알 수 가 없었다. 실제로는 아슈레이의 중간지대에 돌아와 키리엔에서 정식으로 즉위식 을 올리기 전날까지이긴 하지만 사실적으로 경하는 정식으로 즉위식을 올린 상태도 아닌 것이다. 즉위식은커녕 오히려 일만 잔뜩 벌여놓고는 그대로 줄행랑을 친 것이 다. "그런데 그것은 왜?" "…………." 뚫어지게 경하를 바라보는 로이드린의 눈동자. 그것이 점점 더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저렇게 느끼하게 뚫어져라 보는 거지?' 경하는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자신이 무슨 죄라도 지었나 싶어서 지 지않고 로이드린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기운과도 같은 그것은 로이드린의 몸에서 퍼져나와 그의 몸 둘레 를 맴돌고 있었다. '이건 파장…인가?' 자신이 이전에 호로스에 와서 레나텐을 만났을때까 생각났다. 그때는 레나텐이 가진 아주 강력한 불꽃의 엘의 파장에 상당히 긴장했 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건… 이 사람이 설마 레나텐보다 약한 건가? 아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로이드린이 레나텐 보다 더 강력한 화 염술사라는 것을 경하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레나텐님 때보다 거부감같은게 안 느껴지는 건지 모르 겠어.'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레나텐의 파장을 차단해 기엘과 로운을 도왔던 적이 있는 경하로써는 그게 제일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이었다. 그것이 스스로의 능력이 좀더 강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경하는 이상 하게도 눈치 채지 못했다. "로이드린님?" 아무래도 로이드린이 입을 열 것 같지 않자 경하는 그의 이름을 불러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제사야 로이드린은 마치 참고 있던 숨이라도 내쉬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안님." 로이드린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속사정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가 강력한 능력을, 누구보다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미 수장 계승자가 되기 이전, 자신의 고모가 되는 레나텐 보다 훨씬 강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받았던 그였다. 거기에 레나텐의 허락하에 그녀의 엘까지 흡수한 그는 누구보다도 강 한 화염술사로 인식되었었고 그 스스로도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 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시안, 즉 경하의 능력은 아무리 가늠해 보려고 해도 그 끝을 알 수가 없을 정도다. 처음 경하가 호로스의 경계선에 발을 디뎠을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실제 경하를 만나기 위해 이 정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강 렬한 바람의 엘의 파장을 느꼈던 것이다. '정말로 놀라워. 저 정도라면 이미 바람술사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 아 닐까?' 아주 오랜 옛날, 초기의 수장들은 자신들이 맡고 있는 각각의 신의 힘 에 더해 나머지 3가지 신의 힘까지 자유 자제로 쓸수 있을 만큼 강력 한 술사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소녀(?)가 그들에 필적하는게 아닐 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많이 늦었습니다. 벌써 별이 떠오르고 있군요." "아. 예. 그렇네요." 경하를 직접 만나 그가 내뿜고 있는 바람의 엘을 직접 경험한 그는 속 으로는 당장이라도 기절해버릴 만큼 놀라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경하에게 팔을 내밀었다. "제게 부디 아름다운 수장님을 모시고 같이 저녁만찬을 할 수 있는 영 광을 주시겠습니까?" "아. 예. 무, 물론이죠." 내밀어진 팔에 경하가 얌전히 손을 올렸다. '케엑------. 닭살 돋아서 닭이 되고 말지!!! 우에에에엑---.' 경하의 웃고 있는 얼굴 한쪽에 눈이 보이지 않는 경련이 일어나기 시 작했다. 로이드린은 경하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대 로 경하를 에스코트하여 정원을 떠났다. *** "로이드린님. 무슨 염려라도 있으십니까?" 매끄럽게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로이드린이 침소에 들고도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앉아서 날 을 세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글세 염려라면 염려고, 우려라면 우려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면 그 렇게 여겨질 수도 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이드린은 경하와 저녁 만찬을 마친 뒤 계속 한 가지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역시 힘의 불균형이 문제가 되는 걸까?' 미메이라에서 불어온, 급작스럽게 불어온 경하의 바람은 왠지 온통 불 길한 것 뿐이다. 경하가 가져온 소식이 그랬고 실제 경하의 몸에서 풍겨나오던 그 무시 무시한 바람의 엘의 파장이 그랬다. 경하가 가져온 소식은 사실 미메이라와 제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사건의 겉만을 보자면 단순히 미메이라와 제국에 한정되는 나름 대로는 단순하고 깔금해서 그다지 심각하게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제국에서 이례적으로 신국에 사신을 보내 황비로 누군가를 보내주길 요청한 것이다. 물론 외교적인 기타 반대급부들이 양 측에 오고 가겠 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국을 기타 다른 나라들과 같은 선상에서 생각할 때 의 경우다. 문제는 미메이라가, 그리고 아슈레이의 신국들이 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국가에서도 신국과 정략결혼을 통해 우호조약이니 하는 것을 맺은 적이 없었다. 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슈레이 대륙에서 가장 커다랗고 비옥한 영 토를 차지 하고 있는 만큼, 그들의 프라이드는 대단했고 그들에게 있 어서 신국 같은 것은 그저 주변의 자잘한 소국보다 못한 존재였던 것 이다. 신국은 언제나 경원시 당해왔고 신국에 사는 사람들과 자신과 같은 역 대 수장들 역시 그다지 신국의 영토외에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리지 않 았던 것이다. '만일 미메이라와 제국이 혼인으로 맺어지게 된다면 역시….' 로이드린은 머리를 식히며 곰곰이 생각했다. '미메이라에는 큰 영향이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국이 미메이라 의 그 기사들을 요구해서 그것을 관철시킨다면….' 그렇지 않아도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다. 그나마 하나스를 중심으로 하는 셰비 통산 연합국이라던가 저 북쪽의 광대하고 거친 영토를 차지 하고 있는 나메스가 있어 그럭 저럭 균형 을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국경 근처의 자잘한 분쟁 같은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역시 페이요트를 넘어갈 생각인 건가….' 그다지 타국가의 영토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 호로스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대륙에 변화가 오면 그에 따른 기타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니야. 그 이전에 또다른 차원의 힘의 불균형이 일어날 수 도 있다. ' 그리고 그는 시안을, 정확하게는 시안의 이름을 쓰고 있는 경하를 머 릿속에 떠올렸다. 사실 로이드린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경하의 파장이 가져온 이상하리 만치 강렬한 느낌을 몸에서 떨쳐내버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푹신한 침대에 앉아있어도 나카리안 어딘가에 있는 경하의 파 장이 손에 잡힐 듯 전해져오는 것이다. 숨쉬고 있는 동안 폐안에 가득 경하의 바람의 엘이 들어차는 것 같은 기분. 이성적으로는 경하의 파장이 아니라 경하가 가져온 소식에 좀더 신경 을 쓰고 고민하고 고찰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을 따라 전해져오는 경하의 파장을 더듬어 나가 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니. 이게 아니야.' 손가락이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다. 이틀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초초함이 그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시안이라는, 바람의 수장이 이땅에 들어온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때와 지금은 전혀 상황이 틀렸다. 화염을 다스리는 불꽃의 수장 로이드린. 그에게도 나름대로 야망이라 는 것이 있었다. 장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직은 생명의 선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레나텐의 엘을 흡수해버릴 정도로 그는 그의 야망을 위해 달리고 있었 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눈앞에서 바람을 맞은 등불처럼 위태하게 흔들리 고있는 것을 그는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강력하고, 너무나 깨끗해.'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아났다. '힘의 불균형이란 것은 역시 막을 수가 없는 건가? 아니…….' "로이드린님 이만 주무시지요. 나머지는 내일 생각하도록 하세요." 문득 그의 상념을 여자의 목소리가 가로막는다. "아아. 그러지." 온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순식간에 풀러나갔다.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내 스스 로가 그렇듯이….'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하지만 그 빈 공간에 바람이, 공기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고, 또한 누구나 잊고 있는 사실이다. 그 빈공간에서 불꽃의 엘이 한올, 한들한들 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 "으아아아아∼. 뻐근하다." "어이 잘 못잤나봐?" "아 이리야!!! 이틀만이네." "그래. 이제야 내가 보이는 가보군. 어제는 저--쪽에서 열심히 아는 척을 해도 돌아다보지도 않더니만 말이야." 이리야가 조금은 심술이 났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경하에게 시비를 건다. "아하하하 미안. 어제는 좀 긴장을 했는지 눈에 뵈는게 없더라구. 잘 지냈지? 뭐 이상없고?" 나름대로는 이것 저것 아무런 조건도 붙이지 않고 경하를 따르고 있는 이 남자는 단순한 경하의 '안부'를 묻는 말에도 기분이 좋아져 버렸 다. "물론이지. 이 이리야를 어떻게 보는 거야? 처음에는 좀 느낌이 이상 하긴 했지만 그것도 하루 지나니 가뿐하던데?" "그럼 다행이고. 걱정이 좀 되었었거든." 경하는 이리저리 이리야를 살펴보았다. 잠도 잘 잤는지 혈색도 좋고, 밥도 열심히 먹었는지 피부도 탱탱해보 인다. 역시 이상 무(無)!! "생각보다는 다들 멀쩡한가봐. 지난번에는 조금씩 다들 안좋아져서 걱 정 많이 했…아!! 그렇지." 휘익-하고 경하의 시선이 이리야를 지나 옆에 서 있는 기엘과 로운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왠지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경하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 는다. 혹시나 싶어 다시한번 둘러보았지만 결과는 역시나. "우웅… 로운. 그 저기 말이야……." "말을 하고 싶으면 똑바로 해." "알았어!! 그 시유는 어떻게 된거야?" "피곤한지 아직 자리에 있는 모양이다. 여독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지 친 것 같기도 하고." "그것뿐?" "그것 이외에 그럼 무슨 이유가 있겠어?" 로운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경하를 바라본 다. "정말?" "그렇다니까." "진짜 몸에 다른 이상 없데? 왜 지난 번에는 로운이나 기엘이나 이리 야나 다들 조금씩 이상했잖아." "글세? 이번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물론, 불꽃의 엘이 좀 부담스러 울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긴 하지만……아!!" 말을 하다말고 로운이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짧은 신음소리를 냈 다. 스스로가 그리고 기엘이나 이리야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있었기에 방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불꽃의 엘의 영향을 받고 있는 건가?" "맞습니다. 어째서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이런…." 기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어두워진다. 오로지 이리야만이 뭔소리인가 싶어서 눈을 껌벅였다. 그런 이리야를 보고 경하가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정도 말을 하면 좀 눈치를 채야지. 어째 본인들이 이상이 없다고 그렇게 눈치가 둔치들이 된 거야? 정말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 다더니만. 쳇." "아무래도 몸의 상태가 안 좋을텐데 그 경우면 더더욱 이곳의 강력한 불꽃의 파장에 영향을 받고 있을 거야." "거기다가 한가지 더, 다들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지난번의 그 레 나텐님 때보다 훨씬 강해. 지금의 수장은." "………." "………!!" "……에?" 경하의 말에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얼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그 아슈레이의 중간지대에서 다들 조금씩은 변한 것 같은 데, 왜 그렇게 눈치를 못채는 거야? 힘이 좀더 세졌으면 좀더 섬세하 게 느껴야 할 것 아니야.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가서 쉴드라도 쳐주던 가!!" 간만에 경하가 잘난척을 하면서 '명령'을 내렸다. 그 모습이 좀 아니꼽기는 하지만 꽤나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잘못도 있어서 로운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미있는 사실은 역시 경하가 제일 먼저 민감하게 사실을 짚어냈다는 것에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경하가 일행중에서 제일 둔한 축에 속해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이런 경우면 차라리 경하님께서 가시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일단 누 구보다 시유에게 경하님이 도움이 될겁니다." "내가 가면 싫어하잖아. 괜시리 미움 사고 싶지 않아." 경하가 팔장을 끼고 팩하고 돌아섰다. "아아 배고파!! 왜 여기는 시간 맞춰서 밥을 안 먹여주는 거야!!!!" "딴청피우지마. 너." "시끄러워 로운!! 내가 배가 고프면 고픈게 맞아!! 그리고 내가 배가 고프면 밥 먹을 시간이 되는 거야!! 알겠어?" "………." 억지를 쓰는 경하를 보고 로운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했다. 그나마 밥타령이 조금 줄었다 싶었더니만 이제는 생때를 쓰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밥!!!" "기다려." "배고파!!!" "기다리라니까!!! 그리고 기엘 시유님께 좀 갔다와." 경하와 똑같은 포즈를 하고 로운이 인상을 파악 썼다. "가서 어떻게든 해서 데리고 나와. 언제까지나 시유님이 저녀석을 안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아. 아아 알았어." 기엘이 똑같은 포즈로 서로 등을 대고 서있는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 는 동안 이리야는 옆에서 정말로 웃기다는 감정을 온 몸으로 표현해내 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이리야!! 왜 웃어!!" 데굴 데굴 구르며 웃어대는 이리야를 향해 경하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경하가 소리를 지르던 말던 이리야는 신경도 쓰지 않고 웃어제 꼈다. "하하하하. 여하튼 똑같은 주제에 둘이 신경전 하는 것 보면 웃기지도 않아. 푸하하하하." "이리야!! 안 멈추면 밟아버릴 거야!!" "밟고 싶으면 밟아. 그래도 웃긴거는 웃긴거니까. 크하하하하하." "이상한 걸로 웃지 말란말이야!! 저거랑 나랑 어디가 똑같아!!!" 순간 이리야가 웃는 것을 참고 있었던 로운의 신경이 툭-하고 끊어졌 다. "내가 어째서 '저거'지?" "…………." 문을 닫고 나가던 기엘이 로운의 말을 듣자마자 푸웃-하고 웃음을 터 뜨렸다. "어째서 내가 '저거'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나구!!!" 로운이 목소리를 높이는 소리에 기엘이 문을 닫고 웃어대는 소리가 들 려왔다. *** 경하 일행이 밥을 둘러싼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나카리안의 다른 쪽에 서는 심각한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앙에는 희끗 희끗한 색이 섞여있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노인하나가 서 있었고, 둘레에는 각기 명도나 채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모두 붉은 색을 주로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이 둘러 앉아있었다. 그 조금 상단쪽에는 로이드린이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장로들의 이야기 를 듣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놈의 원로회는 예나 지금이나 탁상공론이군.' "이대로라면 아슈레이 대륙의 미묘한 군사적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습 니다." "하지만 어차피 아슈레이 대륙에서 무시못할 군사력을 가진 것은 가이 칸 제국 뿐이오. 괜시리 개입을 했다가 경이라도 치게되면…." "그러니 더더욱 그런 가능성은 사전에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가이칸 제국이 무시못할 가장 강력한 군사 대국임에는 틀림없습 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치적인 것이 아닙니까? 비록 가이칸이 제국이라하나 아직 새로운 황제가 정식으로 등극한 것은 아닙니다. 어 린 황제가 제대로 가이칸 제국을 장악하는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황제가 하라는대로 할만큼 제국의 제후들은 호락 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황제의 권한이 거대해지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 야한다고 봅니다. 미메이라와 제국이 혼약으로 맺어진다고 가정해봅시 다. 그렇다면 황비의, 즉 미메이라의 군사력은 그대로 제국 황제의 것 이 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제국의 힘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한다는 파와, 제국과 관련되어 좋은 일이 있을리 없다며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파, 그리고 그것을 조용히 듣고 있는 로이드린과 같은 생각을 가진 비 주류파까지…. 워낙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돌고 도는, 결코 끝나지 않는 공방. 그것을 로이드린은 지겨움을 참으며 조용히 듣고 있었다. 화염술사라는 자들이 의례히 그렇고, 호로스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인정하는 그들의 호전성. 그렇게나 호전적인 사람들이 꽤나 조심스럽 게, 그러나 격렬하게 토론을 하고 있다. 사실 로이드린도 호전적이고 격한 성격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말이다. "자. 그만 합시다." 그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는 순간 주위가 조용하게 일순간에 가 라앉았다. "결론을 내려봅시다. 의견 교환은 이 정도면 되었지 않습니까?" *** "일단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뭔데 기엘?" "되도록이면 시유님은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드려 이곳에 머물수 있 도록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흐음." 로운이 기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이제부터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코, 위험 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 내일 당장이라도 제국으로 뛰 어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혼자 이곳에 있게하면 그것도 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지금도 별로 몸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이리야가 슬그머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것은 쌓인 피로 때문에 심해보이는 것이지 일단 기력을 회복하시고 나면 스스로도 어느정도는 통제가 가능할겁니다. 무엇보다도 시유님 역시 바람술사이시고 특별하게 호로스의 수장과 대면하지 않는 다던가 하면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겁니다." "흐음…." 로운이 턱을 괴고는 생각에 빠진다. 나름대로 기엘의 말에 동감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나는 생각이 틀려." 경하가 나섰다. "물론. 시유를 위해서는 그쪽이 좋을 수도 있지만. 여기다 시유를 남 겨두고 가면 혹시나 나중에 제국 황제나 기타 다른 사람들이 시유를 노려서 이곳에 올 수도 있잖아? 아무리 도움을 청한다고 해도 말이야. 그건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거지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위험을 불사해서 까지 도와 줄 수 있다고는 난 생각하지 않아."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시유가 남겠다고 하면 뭐 일단 부탁은 해보겠지만 역시… 내 생각에 는 좀 위험할지 몰라도 차라리 같이 행동하는게 좋을 것 같아. 뭘 하 든 간에 말이야." "………흐음." "일단 같이 생각해보면 좋은 결론이 나올겁니다. 시안님. 시유님의 의 견도 들어야하고 뭐니뭐니해도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에는 호로스 측의 답변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것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겁니다. 물론, 호로스측에서 좀더 답 변을 빨리 준다면 좋겠지만요." "응. 그렇게 하자." 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가 이렇게 뭔가 진지하고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가슴이 남몰래 뿌듯해질 지경이다. '아아. 정말로 뭔가 진짜로 굉장히!! 필요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기분 이란 말이야.' 물론 이런 것을 로운이 들었다면 분명 무엇인가 한소리 할 것이라는 생각도 같이 하고 있는 경하였다. -------------------------계속. 2장으로 넘어갑니다.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2장 진실&거짓 (5) "일단 제가, 그리고 우리 호로스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미메이라의 대표이신 시안님을 후원하겠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시원스럽게 말하는 로이드린, 그의 앞에는 현재는 시안 노릇을 하고 있는 경하를 비롯 경하의 일행 모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른 아침. 불의 나라라고는 해도 아침 이슬이 없을리는 없다. 그 아침이슬이 풀잎에 매달렸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토독 토독하고 열 려진 창문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듯한 눈을 하고 있던 경하도 로이드린이 하는 말에 눈을 번쩍떴다. "하지만." '으잉?' 경하가 눈을 번쩍 뜨기 무섭게 로이드린의 입에서 하지만이라는 단어 가 나오자 경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그런 경하의 표정을 보며 로이드린이 조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전적으로 시안님을 후원해드리겠습니다만. 일단 저희도 외부적 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일단은 관망하시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로이드린의 말을 기엘이 살짝 자르고 들어갔다. 그가 웬지 알맞은 단어를 고르는 듯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이 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단은 외부적으로 들어나지 않게 라는 의미라고 할까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드리되, 최악의 상황이 오기전까지는 대외적으로 호 로스가 미메이라와 가이칸 제국간의 분쟁, 아. 분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하튼, 그 분쟁간에 전적으로 개 입했다는 증거는 남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흐음." 경하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방금 들은 말을 나름대 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왠지 지끈 지끈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결국 도와는 주겠지만 우리가 도와주었다는 소리는 어디가서 도 하지 말아달라라는 뜻인 거다. 물론 경하의 해석이지만. "신국이 대대적으로 가이칸 제국으로 적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물 론 서로간에 어느정도는 암묵적인 불가침 조약이 성립되어 있는 것이 나 마찬가지겠습니다만 현재 미메이라와 가이칸 제국간의 상황을 보았 을 때 과연 그 불가침 조약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빙성을 주는지 조금 은 의구심이 들지 않습니까?" 로이드린은 웃으면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가 하고픈 말은 하나 다. 신국으로써의 의리는 지키겠으나 제국의 적이 되기는 싫다라는 것이 다. "대신. 저는 다른 쪽으로 정보를 드릴까 합니다." "다른 쪽?" 침묵을 지키고 있는 로운을 대신해 기엘이 로이드린에게 말하자 그의 시선이 기엘에게 돌려졌다. '뭔가 재미있는 조합이군. 이 일행.'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자리가 자리이니 만큼은 그는 호기심은 일단 접 어두기로 했다. "예. 예부터 호로스는 가이칸 제국 보다는 하나스와 교류를 해왔습니 다. 현재 벌어지는 일은 아무래도 호로스보다는 하나스와 하나스를 포 함해 그 밑의 아셀 제국쪽까지, 즉 셰비 통산 연합국이라 불리는 4나 라가 훨씬 더 귀가 솔깃해할만한 것들입니다. 무엇보다 현재 가이칸 제국의 황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향방이 결 정되겠습디만, 그래도 하나스나 아셀은 가이칸과 국경을 마주대고 있 는 만큼 결코 미메이라와 가이칸 제국간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무 시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지금 저보고 하나스와 아셀제국…으로 가란 소리인가요?" "아.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이상의 말은 하지 않겠다는 듯 로이드린이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해석은 시안님께서 직접 하시는 쪽이 좋겠지요?" 마치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할 수 있는 것이잖아? 하는 말투. 순간 삐죽하고 입이 나올 것 같았지만 경하는 억지로 그것을 참았다. 어린애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쳇. 결국 도움은커녕 네가 하고 싶은데로 알아서 하라는 소리잖아. 쳇. 도대체 대신관할아버지는 여기 뭐하러 가라고 한 건지.' 투덜 투덜. 불평이 튀어나오기 직전이다. '으으. 역시 외교며 정치며 하는 것은 내가 건드릴 수 있는 분야가 아 니라구. 으윽.' "자아. 그럼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여러분들을 청했으니 이만 늦은 아 침식사라도 함께 할까요?" 마치 가벼운 환담이라도 마쳤다는 듯, 로이드린이 식사를 청했다. 모두들 마지못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여러분들이 원하실때까지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 시면서 차후 행방에 대해서 논의해보셔도 좋겠지요." "아. 아아. 그렇겠죠." '그리고 당신은 쏙- 빠지고 말이야. 치잇-- 역시 첫인상이 나쁘더니 만.' 로이드린의 뒤를 따라가며 경하는 마음껏 로이드린의 뒷통수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 "쳇. 결과적으로 알아서 하라는 소리잖아. 이건." "뭐, 직접적으로 뛰어들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이러면 여기까지 힘들여 온 보람이 없다구. 역시 그 할아버지 말은 믿을게 못 돼. 못된다구!!" "그 정도로 해둬. 어차피 호로스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는 생 각하지 않았으니까. 이정도로 우리 일행을 받아준 것도 이쪽에서는 어 떤 면에서는 충분히 위험을 감수하고 한 행동이다. 국가와 국가간의 일이 그렇게 네 생각대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딱딱한 말투로 로운이 경하의 투덜거림을 막아 버린다. 그 역시 말 그대로 호로스에 커다란 기대를 하고 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차가운 반응에 조금은 열이 받아 있는 것도 사 실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하루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좋아. 하라스다인 장 로님은 조만간 가이칸의 수도 카드미엘에 도착 하실테고 아마도 그분 이 돌아오시기 전에 너나 시유님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이 가이칸에 전해질 거다. 그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해." "모든 일?" 경하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런 경하의 표정을 본 로운이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숙해서 그런 건지 무지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머리가 나쁜 건가 이녀석은.' "한숨 같은 거 내쉬지 말고 설명을 해. 설명을." 결코 멍청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어렴풋하게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이 좀더 확연하게 손에 들어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하가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이 많지 않다고 하지만 눈에 확 연하게 들어오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할리는 없다. 로운은 조금 한발자국 물러 서기로 했다.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경하가 아니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어쩌다보니 경하가 돌아가는 상황들에 시발점, 또는 매개체가 되어 버 려 그 안에 단단하게 끼어들어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답답해서 시종일관 경하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이것은 아마 도 경하가 이 자리에 없었더라도 충분히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다. "기엘. 모두를 모아줘. 어차피 한번정도는 설명이라고 해야할까? 여하 튼 앞으로는 방향을 결정해야하니까 기왕이면 같이 머리를 맞대보자 고." "그래. 시유님을 불러오도록 하지." 로운의 말에 기엘이 재빨리 자리를 비웠다. '칫-. 결국은 멋있는 역은 혼자 다 맡아 하잖아.' 어린애처럼 경하는 조금 토라져 버렸다. '후우. 어렵다 어려워. 역시 어려워.' "로이드린님. 결국 그들에게 하나스행을 권고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세? 나는 그저 단서를 제공할 뿐이다. 그들에게 내가 이래라 저래 라 할 수는 없지." "흐음. 제국의 황태자가 호전적이다 하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정식으 로 황제로 등극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이 터지는 군요." 희끗한 색이 섞여 붉은 머리카락을 연하게 물들이고 있는 특이한 색의 머리를 가진 남자가 조심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를 로이드린에 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은 신전에서 보내져온 것입니다." "아아. 준비가 다 된 건가?" "예. 내일 모레, 준비는 완벽하다고 합니다." "생각보다는 빠르군." 사실 따지고 보면 로이드린 역시 아직 호로스의 수장으로 정식으로 등 극한 것은 아니다. 계승로를 마치고 돌아온지 이제 겨우 이삼일 밖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 다. 그가 이례적으로 전통을 따르지 않고 수개월이 걸리는 계승로를 단 이 틀로 줄여 돌아온 것은 역시 전대 미문의 사건. 하지만 그 배경에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주변 정세가 있었기에 로 이드린의 행동은 현재 한시적으로나마 용납받고 있는 상태였다. 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나 천하 태평으로 수장의 자리 를 비워 놀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변화의 바람이라도 불기 시작한 기분이다." "예?" "그렇지 않은가? 미메이라의 수장이 바뀌고, 그 뒤를 잊는 것처럼 제 국의 황제가 바뀌었지, 그리고 우리 역시…."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관성이라도 있어 보일 정도로 그것들은 차 례 차례 일어나고 있다. "물의 나유, 땅의 바라스 역시 비슷한 일을 겪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는 확신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선례를 봐도 알 수 있네. 완전히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 야. 하나의 신국의 계승자가 새롭게 수장이 되면 다른 신국들도 비슷 하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수장이 갈려나간다 이말이야." "로이드린님 그런 말씀은." "아아. 이런 예전의 말투가 나왔나? 미안하군." 씨익-하고 로이드린이 웃어보였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넘어가주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로이드린님." "여하튼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야." "그럼 또 무슨……." "뭐라고 이름 짖기는 어려워. 여하튼 그런 것이 있다라고만 알아두면 되네." 로이드린은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로 다가갔다. 아주 조금밖에 열리지 않았는데도 그곳으로 스며들어오는 바람은 끊기 지 않고 쉴세없이 그가 서 있는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문제는 수장이 갈리거나 제국의 황제가 죽거나 새로 옹립되거나하는 정도가 아니다.' 손을 뻗어 창문에 대고 힘을 준다. 그리 힘을 주지 않았지만 곧 창문은 굳게 닫혔다. 새어 들어오던 바람은 멈추었지만 굳게 닫힌 창 사이로 여전히 햇살과 공기가 스며들고 있다는 것쯤은 그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미메이라의 새 수장은 그 끝을 알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 다. 이 내가 앞에 나아가도 전혀 기죽지 않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그 녀의 일행을 보고 하고 있었지.' 그 뿐만이 아니다. 굳이 힘을 써서 가늠해보려 하지 않아도, 가만히 서있기만해도 경하가 있는 곳을 그대로 짚어낼 수 있을 정도다. 그것은 너무나 강력해서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는 항성과도 같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너무나 강력하다. 그것이 문제야.' 힘의 불균형이라는 것은 비단 국가간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아슈레이 대륙을 지탱하는 4신의 힘은 결고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예전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야하는 것. '어째서 그렇게까지 강한 힘을 가질수 있는 것일까.' 정의감과 전혀 다른 감정으로 로이드린은 경하를 질투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강력한 힘을…….' *** 계속. 혹시. 읽으시는 분들중. 버그를 발견하시면 좀 알려주십시오.--;;; 쿨럭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2장 진실&거짓 (6) *** "이곳에… 남으라는 말씀이신가요?" "꼭 그러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찌될지 모릅 니다. 되도록 안전한한곳에 계시는 쪽이…." "그쪽이 당신들한테 편/하/기 때문이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시유님." 단정한 단발머리를 곱게 빗은 소녀가 입술을 깨물고 앉아있었다. 어디까지나 가짜로 여자행세를 하고 있는 경하와는 달리 아무리 봐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목소리하나, 행동거지 하나를 봐도 15-6세 소녀 다운 시유. 머리카락 색은 경하와 같지만 역시 경하가 연기하고 있는 어설픈 '여 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와 4명의 남자. 그들은 한자리에 마주앉아 머리를 맞대고 실갱이를 하고 있었다. "기엘. 설득할 필요 없어." "하지만 역시 내 생각에는 이곳에 머무는 쪽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 "하지만 본인이 싫은 모양이잖아. 안그런가요 시유님?" "…………." 로운의 말에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시유가 로운을 쏘아본다. 왠지 강렬한 그 눈빛에 로운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시유님이라는 호칭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로운 오라버니. 그냥 시유 라고 불러주세요." "………."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를 합당하게 제게 설명해주신다면 그리 하겠습 니다. 하지만 제가 납득할 수 없다면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시유는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미 다 들었잖아. 뭘 더 설명하라는 거야?" 시유의 말에 경하가 불쑥 끼어든다. 하지만 금새 경하는 깨갱하고 꼬리를 말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전 다른 분들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을 듣겠다는 것이 아 닙니다." "어어, 이봐. 차별하지마." "너는 가만히 있어." 꾸욱-하고 이리야가 의자 뒤에서 경하의 머리를 내리 눌렀다. "네가 끼어들어 봤자 저 아가씨 성질돋구는 것 밖에 안돼." "쳇. 알아!! 이거 놔!!" 시유 못지않게 경하도 얼굴을 굳히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젠장. 말이 안 통해 말이!!! 무슨 애가 저러냐?' "시유님. 어떤 설명을 더 해달라는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나이트 기엘님도 제게 말을 높이지 말아주세요. 불편합니다." "…………." '그러는 너 때문에 우리가 더 불편해!!!' 경하는 차마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불평을 속으로 늘어 놓는다. '정말이지 이러다가는 매사에 불평 불만자가 될 것 같아. 으으으. 열 받는다.' "저희들은 이제부터 얼마나 오래 이곳 저곳을 떠돌아야 할지 모릅니 다.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로운의 소집령 아래 모인 5명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뒤늦게 합류한 셈인 시유는 한발 물러서 있기는 했 지만 말이다. 5명이 모여 내린 결론은 결국 어떻게 보면 로이드린이 말한 그대로를 따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기본적으로 아슈레이 대륙의 세력을 반분하고 있는 것이 가이칸 제국 이다. 대륙의 삼분지 일, 그중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가이칸이다. 하지만 가이칸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대륙의 패자 로 군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셰비 통산 연합국이라고 불리 우는 4국 연합이 바로 그것이었다. 제국과 국경을 마주대고 있는 하나스와 하나스 못지않게 대륙과의 사 이에 오랜 영토분쟁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셀 제국이 일단 제국의 막 강한 군사력에 도전하고 있는 나라다. 아셀 제국은 스스로 제국이라 칭하고 있으니 기본적으로 가이칸제국의 입장에서는 제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나라다. 아셀과 하나스 두 나라 역시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 다. 대하 폴리카르를 두고 격심한 영토분쟁에 휘말렸던 일도 한두번이 아 닌 것이다. 그런 나라들임에도 불구 가이칸 제국이라는 커다란 나라가 적이 되면 단번에 하나로 똘똘 뭉쳐버린다. 그들을 지원하는 나라는 하나스 옆의 바에사와 아셀 못지 않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케리타 왕국. 가이칸이 페이요트 산맥을 넘어 서진을 해오면 결국 그 영향은 하나스 와 아셀제국 옆의 케리타와 바에사에까지 미친다. 결국 그들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가이칸 제국에 한해서는 하나로 뭉 쳐 거대한 연합국가를 형성하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힘은 제국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것이 4개나 모이면 사정은 틀려진다. 결국 결론은 가이칸 제국을 위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저 4개의 나 라 즉 셰비 통산 연합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힘을 빌어올 수 밖에 없다 는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저희들은 하나스와 아셀까지 여행을 해야할겁니다. 저 나 로운은 훈련을 받은 기사이고 이리야 역시 남다른 훈련을 받아 충 분히 그 험난한 일정을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유님은 다릅니다. " "………." 기엘은 설명을 하다말고 로운에게 도와달라는 시늉을 했지만 로운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후우. 어렵군.' 기엘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있는 소녀 앞에서 쩔쩔 매고 있었다. 경하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상대에게 그는 애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 시유를 설득해 주었으면 하고 기엘은 간절 히 바라고 있었다. 거칠고 제멋대로인 수련생들을 교육하는 것은 쉽지만 이렇게 얌전하게 있는 소녀를 설득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줄은 기엘은 꿈에도 생각 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하면 얌전하게 남아 줄 것이라고 사실 내심 생 각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자신 대신 로운이나 경하가 말을 해줬으면 했지만 로운은 의외로 그것은 시유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기엘에게 책임을 미루어 버 렸고 경하의 경우에는 시유가 아예 상대를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외가 되러 버렸다. 결국 기엘은 슬그머니 이리야에게 눈을 돌렸다. "이리야씨. 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어. 어라. 왜 날 불러. 난 몰라. 난 일단은 논외자라구. 난 이녀석 경호야. 이녀석 따라온 거라구." "이리야씨이∼." "애절하게 불러도 난 몰라. 모른다고." "기엘. 그만하자." "로운!!" 로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이곳에 남겨두고 가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우리가 시유를 데리고 가는 쪽이 훨씬 나아. 적 어도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면 보호하기도 더 쉬우니까." "하지만 로운. 우린 경하님을…." 기엘은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기엘의 입장에서는 사실 경하를 경호하고 보호하는데도 힘이 달릴 지 경이다. 하지만 그것은 입밖에 내서는 안될 말이다. 그것은 로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시유님. 지금 제 말은…."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몰라 기엘이 당황한다. 그러자 시유가 물끄러미 기엘을 바라본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저도 현실적으로 생각할 줄아는 머리가 있습니다. 저보다는 저 사람이 여러분께는 더 중요한 사람이라 는 의미겠지요. 실제로도 그런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유님. 저는…." "시유님이라고 부르는 것. 저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잠깐." 고집스럽게 시유가 말을 하자 그때까지 딴청을 하고 있던 경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자 듣자 하니까 너 말이야." 허리에 손을 얹고 경하는 진심으로 시유를 노려보았다. "어리광은 그만 둬." "당신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 "싫다고 했습니다." "고집 피우지 말아!!!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줄 알아? 그래!! 까놓 고 말해서 사실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뭐가 위 험하고 뭐가 중요하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 정도는 알아. 누구는 좋아 서 여기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누구는 좋아서 여기까지 널 끌고 나온 줄 아느냐구!!" "경하님. 그만…." 경하의 말이 격해지자 기엘이 중재를 하려했다. 하지만 그의 중재는 단칼에 잘려나가 버렸다. 경하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기엘!! 기엘은 좀 가만히 있어. 나름대로는 나도 저앨 생각해준다고 가만히 있었지만 더 이상은 못 참아 주겠어. 사실 나도 저애가 없으면 훨씬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해. 그래서 기엘의 생각에 동조할 생 각도 있다고. 하지만 반면에 저앨 여기다 두고 갔다가 어떻게 될지 그 것도 걱정이 되." "걱정같은 것은 안하셔도 됩니다. 저도 제 한몸 지킬 힘은 있습니다." "지금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게 아니야 이 바보 멍청아!!!" 버럭 하고 경하가 소리쳤다. "지금 누가 여기서 네가 땡깡부리는 거 듣고 싶은줄 알아? 나름대로 난 진지해. 젠장할!! 내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이런 꼴로 앉아있는게 다 누구때문인줄 알아? 원래는 네 언니가 해야할 일이라구." "싫으시면 안하면 되잖아요!!" "웃기는 소리 하지마!!!" 철썩--- 경하를 노려보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한쪽으로 돌아가버렸다. 시유의 빰을 경하가 날려버린 것이다. "경하님!!!" 기엘이 달려들어 경하의 손목을 붙들었다. "진정하십시오." "지금 진정하게 어!! 저애 때문에 분위기까지 썰렁해지잖아. 가뜩이 나 머리 복잡한데!! 왜 저녀석 때문에 기엘이나 로운이 눈치를 보고 설설 기어야해!!" "경하님!!" "기엘은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어!! 명령이야!!" "………." 경하는 기엘이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는 앞에 놓여있던 의자를 힘껏 걷어찼다. 콰앙---!!!! 육중한 의자가 나뒹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콰앙!! 콰앙!! 몇 번이나 의자를 걷어차며 성질을 부리는 모습을 네사람은 말없이 지 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혼자 난리를 치던 경하는 숨을 헉헉 내쉬더니 척척척, 시유 앞으로 걸어왔다. "너. 한번만 말 할 때니까 귀 씻고 똑바로 들어. 나도!!! 네가 여자애 라는 것쯤은 잘 알아. 그래! 내 빌어먹을 누나들이 언제나 그러지. 여 자한테는 잘해주라고." 흥분했던 탓에 어느새 경하의 몸에서 바람의 줄기들이 새어나오고 있 었다. 그 바람의 줄기들이 시유의 얼굴쪽으로 하나 둘씩 흘러갔다. "날 미워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미워해도 좋아. 네 언니가 죽은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구. 하지만 쓸데없이 떼를 쓰거나 고집피우지는 말아. 그렇지 않아도 나는 머리가 터져서 죽고 싶은 심정이야. 알아듣겠어? 나는 사실은 여기에 있을 사 람이 아니야. 전혀! 미메이라니 아슈레이니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구. 그런데 나는 내 의지로 여기 이렇게 서 있어." 경하의 몸에서 스며나오는 바람에는 격하게 격양된 경하의 감정이 섞 여 있었다. 그것을 시유는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유 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둘러선 로운과 기엘, 이리야에게도 그 것은 전해져왔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나름대로는 잘해보겠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런 데 너는 당사자야. 네가 살고 있는 나라의 일이고 네 언니가 해야했어 야 하는 일이야. 기엘과 로운도 뭐 잘나서 저러고 있는 것 같아? 그렇 지 않아!! 이리야가 무슨 호승심이나 영웅심에서 날 따라다니는 줄 알 아? 그것도 아니야!!" 헉헉하고 경하는 숨을 몰아내쉬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나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까? 화를 내고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향해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그는 잊어버렸다. "따라오고 싶으면 얼마든지 따라와.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뭐 가 되는지 해. 하지만 기엘이나 로운을 힘들게 하지마. 알겠어? 걸리 적 거리지마. 어린애처럼 굴지 말아. 나를 미워하는 것은 네 자유지만 절대로, 쓸데없는 일에 고집같은 거 피우지마.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 ?" "…………." "알아 들었으면 대답을 해!!!" "경하님. 이제 그만." "그래. 적당해 해라. 보기 좋지 않다." 입술을 깨물며 경하를 바라보고 있는 시유를 보며 기엘과 로운이 경하 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해두면 시유도 알아 들었을 거야." 하지만 경하는 기엘과 로운의 말 같은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 양이었다. 그들의 말에도 불과하고 경하는 시유를 다그쳤다. "대답을 해야할 것 아니야!! 넌 입도 없냐?" "그만하라니까!!" 로운이 경하에게 다가가는 순간 그때까지 입술하나 꼼짝하지 않고 있 던 시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바람처럼 문쪽으로 달려갔다. 콰아앙---- 방안 모두가 흔들릴 정도로 크게 문을 닫으며 그녀는 그대로 달아나버 렸다. "…………." "젠장!!!!" 퍼억--하고 경하가 시유가 앉아있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아아악-----!! 열받아!!!!" 긴 머리카락을 헝크러 트리며 경하가 혼자서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열받아!!!!!!" "………." "후우- 무슨 폭풍이라도 친 것 같구만. 참나." "그렇군요. 이리야씨." 로운이 발악하고 있는 경하를 말리기 시작했지만 기엘과 이리야는 혼 이라도 빠진 사람처럼 멀리 떨어져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 다. "여하튼 저녀석은 허구헌날 멍하게 있나 싶은데 가끔은 진짜 속을 쿡 쿡 찌르는 말만 골라서 한단 말이야." "경하님이까요. 분명 말은 거칠으셨지만 경하님의 진심은 시유님께 전 해졌을 겁니다." "헹. 절대로 아니올시다. 기사 양반." "예?" "여자들은 섬세해. 아주∼ 섬세하다고. 구구절절 저녀석이 옳은 말을 했다고 해도 여자한테 저런 태도로 말을 하면 미움 받는 다고." "하하하하하." "하기사 미워 할려면 자길 미워하라고 했으니 별 상관 없는 건가?"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넋놓고 있으려니 어느새 로운이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경하가 완전히 얌전해져서 로운의 앞에서 꾸중(?)을 듣고 있는 모습이 기엘의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난다고 해서 그걸 다 풀었다가는 될 일도 안 돼. 너야말로 무슨 말인지 알아 듣겠어?" "…………."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 날지 모른다. 그런것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행 동하다보면 될일 도 안 돼. 알았어?" "………." 끄덕 끄덕. 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경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딴생각 을 하고 있었다. '우우…. 어떻게 하지. 여자애한테 엄청나게 화를 내버렸어. 으윽.' 사실은 따지고 보면 경하 만한 페미니스트도 없다. 물론 그것이 스스로 타고났다기 보다는 위에 있는 누나들에게 다년간 주입식 교육을 받은 탓이라고 해도 말이다. 열이 받아 퍼부어 버렸지만 내용은 둘째치고 단순하게 여자애에게 그 렇게 마구 몰아붙이며 화를 내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가 경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으윽. 적당히 하는 건데. 아아아아. 미치겠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성격이다. "듣고 있는 거야?" "아. 듣고 있어. 로운. 머리 아프니까 적당히 해줘." 서서히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아주 심각하게 화를 내고 나면 항상 이런 두통이 뒤를 따랐 었다. 경하의 형이나 누나들은 그런 경하를 보고 사실은 성격이 나빠 서 그런 것이라며 놀려댔었다. "경하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안 괜찮아. 머릿속에서 해머로 여기저기를 마구 쳐대는 것 같 아. 으윽."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경하가 앞에 서 있는 로운에게 몸을 기댔다. "으윽…." "후우. 정말이지 손이 일일이 가게 만드는 군." 로운이 정말이지 정떨어진다는 표정으로 경하의 머리에 손을 댔다.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 바람의 시작에서 끝. 메 하니다(정결케 하는 바람)" 부웅-하고 로운의 손에서 희미한 빛과 함께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경하가 쥐어뜯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가 경하의 머 리를 감쌌다. 하늘거리며 머리카락이 로운의 엘에 반응하여 흔들리기 시작했다. "후우…. 좀 괜찮냐?" 정말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는 있지만 말속에 로운의 걱정이 듬뿍 배어 나온다. "응."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려니 로운의 힘이 자신의 몸 속을 돌아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완전히 가뿐해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견딜수 없을 만큼 괴롭던 두통 이 차츰 가라 않는다. "저기. 이리야." "어. 왜?" "시유한테 좀 가봐줄래?" 두통이 가라앉자 문득 시유가 걱정된 경하는 이리야에게 부탁했다. "가서. 괜찮나 좀 봐죠. 혹시 그… 울고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건 직접 가지. 왜 날 시켜." "이리야가 가는 쪽이 제일 낫잖아. 내가 가면 또 화를 낼걸?" "그래도…." "부탁이야." "…………." "그렇게 하시죠. 이리야씨. 아무래도 시유님 입장에서는 이리야씨가 제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건 또 무슨 의미야?" "그러니까 적어도 미워할 사람으로는 안 느껴진다랄까요?" "쳇. 정말이지. 왜 마지막에는 항상 나한테 미루는 거야." "뭐, 좋지 않습니까? 관상용 미소녀." 씨익-하고 기엘이 웃어보였다. "뭐. 뭐야!! 그 웃음은. 젠장 그런 소리는 좀 잊어버리라구."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루 이틀 들었던 소리도 아닌걸 요." "알았어! 알았다구!! 가면 될 것 아니야!!" 투덜 투덜 거리며 이리야가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봐. 너!!" "왜?" 로운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던 경하가 살짝 실눈을 뜬다. 기본적으로 이리야가 '너'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경하일 때가 많다. "닭살 돋으니까 그만 떨어져." "…………?"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경하는 이리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본적으로 아직도 내 관상용 미녀는 너라구." "………!!!!!!!" "그럼. 나는 이만 분부하신 것을 이행하러∼!." 소리도 없이 문이 닫힌다. 그 닫혀진 문을 통해 경하의 울부 짓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야∼당신 주--욱었어!!!!!!" *** '결국. 알고 싶었던 것은 단 하나도 얻어내지 못한 채 보내게 된 건가 ?' 호로스의 수장궁 나카리안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한필의 말이 여유롭 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 말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한 남자가 서있었 다. 그는 내일이면 정식으로 호로스의 수장이 될 사람이었다. "레나텐. 당신은 지금의 저 바람의 계승자를 보면 무슨 말을 했을까?" 버릇처럼 그는 전 수장인 레나텐의 이름을 불렀다. 혼잣말을 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불가사의라고 해야할까?' 멀리 바람의 계승자를 포함한 일행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바람의 계승자는 굳이 모습을 확인하지 않아도 온 몸의 감 각으로 느낄 수가 있다. 로이드린에게 있어서 경하와의 만남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적어도 어떤 계승자도 자신의 힘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자만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실제로 그는 자만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자라고 말이다. 하지마 그것은 아무리 짚어보려고 해도 짚어볼수 없는 무한한 경하의 능력과 비교한다면 왠지 그 발끝에도 못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로이드린은 사실 어떤 귀족의 핏줄을 타고 난 사람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의 출생 배경. 그는 그저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나 마음껏 자신의 세상을 살아가던 평 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 순간 그의 능력에 눈을 떠버렸던 것이다. 대부분의 능력자가 보통은 태어났을 때 이미 가려진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나이가 들어서 신의 은총을 더욱 받아 그 능력을 깨우치는 사람들이 있다. 로이드린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한순간에 눈떠버린 능력은 누구보다도 강대하여 심지어는 당대의 수장 의 힘을 훌쩍 뛰어 넘어버렸다. 레나텐은 그가 힘에 눈뜬 순간 그 사실을 알아차렸고 차대 불꽃의 계 승자로써 그를 수장궁으로 불러들였다. 그것은 불과 얼마전의 일. 미미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화염술사에 불과했던 그는 자신의 힘을 자각한 뒤로 점점 더, 자신의 능력에 심취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직 불꽃의 계승자로써 힘을 가지고 있던 레나텐의 몸에서 계승자의 증거인 화륜을 빼앗아 흡수해버렸던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며 그대로 로이드린에게 힘을 이양해버린 레나 텐은 슬프게 미소지으며 현실을 받아 들였었다. "도대체 무엇이 신의 뜻이란 말인가…." 허무함이 로이드린의 심장을 파고든다. 꾸욱 쥔 주먹에서부터 붉은색의 화염이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신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어야 하는 건가? 레나텐?" 그는 자신의 몸 속에 깃들어있는 레나텐의 엘에 질문을 해본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는 화염이 피어오르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람에도 영향 받지 않는 순수한 엘의 불꽃이다. "설사 저 바람의 계승자가 신의 힘을 그대로 부여 받았다고 해도…." 손에서부터 시작된 화염이 점점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머리카락이 화염과 함께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붉게, 그리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었으나 그것은 머리카락 한올 태 우지 않는다. "그리하여 저 바람의 계승자가 모든 것에 변화의 바람을 불게 한다해 도 나는 승복하지 않겠어." *** "아. 그러고 보니 잊어버렸다." "예? 경하님?" 말을 타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가던 경하가 문득 생각 났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방금 떠나온 수장궁 나카리안을 바라보았다. "잊으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응. 저 불꽃의 계승자를 만나면 꼭 물어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거든. " 경하의 말이 어느덧 발길을 멈추었다. "무슨?" "…………." 불꽃속에서 보이던 환영이 경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대체 로이드린과 레나텐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또하나, 경하는 로이드린을 만날 때마다 그의 모습위에 어른 거리던 붉은 기운을 떠올렸다. "그 사람. 끝까지 자각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화륜이라는 것 말이야." "예?" "무슨 일이지?" 앞장서 가던 로운이 기엘과 경하가 따라오지 않자 말을 돌려 돌아와 물었다. "로이드린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화륜 말이야." "그게 어째서?" "그거. 눈을 뜨고 있었어." "뭐?" "그러니까 내 몸에 있는 세나케인처럼 말이야. 아니 세나케인 처럼이 라고 하면 좀 무리가 있는 건가?" "설마, 호로스의 수장도?"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머리를 긁으며 고심하던 경하가 순간 손가락을 울렸다. "그렇다!! 케인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아마 나보다는 설명 잘할지도 몰라." 「어째서 그런 것에만 날 부르는 것이지?」 "오오. 말 안 해도 듣고 있었잖아. 기왕이면 설명해 줘." 「귀찮아.」 "뭐. 뭐야!! 그 지나치게 인간다운 반응은." 혼자서 마치 유령하고라도 대화하는 듯한 경하의 모습은 로운이나 기 엘등에 있어서는 그리 생소한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멀리 있던 시유에게는 생소한 정도가 아니라 혹시 경하가 미치 기라도 한게 아닐까 생각되고 있었다. "네게서 배웠다. 네가 귀찮으면 언제나 날 부르지 않았나?" "에엑---!!! 너무해!!" 불쑥 인간의 형체가 경하의 옆에 떠올랐다. 둥둥둥-- 정말로 유령처럼 경하의 옆에 아무런 지지대도 없이 떠있는 세나케인의 모습을 보고 시유는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전에 세나케인의 모습을 목격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 은 어디까지나 '미메이라의 수호신'으로써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귀찮아도 설명 좀 해봐. 알기는 알겠는데 난 설명을 못하겠어."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 머리가 나쁜게 아니야?" "시끄러워!! 시키는 거나 제대로 해." "…………." 푸욱-하고 세나케인이 정말 인간처럼 한숨을 내쉰다. "그의 화륜은 말하자면 활성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가진 능력은 분명 일반적인 경우를 훨씬 뛰어 넘지. 그러나 너와 같이 각성을 시킬 정도는 아니야. 중간에 애매한 위치에 걸려있는 거다. 아마도 그가 자 신의 생각을 바꾸기 전에는 절대로 화륜을, 불꽃의 에사라를 깨울 수 는 없을 것이다." "불꽃의 에사라?" "그래. 내가 바람의 세나케인이듯." "헤에…." "그는 불꽃의 힘을 순수하게 자기 자신만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 없지." "그것으로 끝?" "그래. 끝." "흐음. 그렇지만 역시 그건 이해가 안가는 건데." 끝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나케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르르 사라져갔 다. 「그것에 신경쓰지 말아라. 불꽃의 계승자가 또다른 계승자에게 그렇 게 되는 것을 허락 했을 뿐이니까.」 경하가 무엇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눈치채고 있는 세나케인이 경하를 위로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런 설명을 들어도 경하가 보았던 그 환상과도 같은 것을 무조 건 이해할 수는 없었다. 생리적인 거부감 같은 것이 작용하는 탓일지도 모른다. 「불꽃의 계승자는 다가오는 무엇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지. 그것은 너를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가 불꽃의 계승자로써 미래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는 이미 바람의 주인이 되 었으니까.」 '그건 무슨 소리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경하는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이 신의 은총이라 부르는 힘에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고 균 형이라는 것이 있다. 그녀는 그것을 걱정했을지도….」 '균형?' 「그래. 균형. 그녀의 힘으로 그리고 새로운 계승자가 가진 힘만으로 는 네가 가진 힘을 감당하기는 힘들었을것이라고 생각한 그녀의 궁여 지책이었을 것이다.」 그것으로 세나케인에게서 전해져오던 소리는 끊어졌다. 경하는 조용히 말고삐를 당겼다. '균형…이라고?' 새로운 의문이 경하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무엇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또한 진실이 아닌걸까? '균형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소리가 되는 건가. 이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로 나 때문에?' 그 바람은 온 아슈레이에서 단 하나. 다른 세계의 존재인 경하의 곁을 지나 다시 원래대로 자신의 길을 찾아 흘러가고 있었다. ---------계속. 3장으로 이어집니다. ...^^;;;;;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3장 하나스의 기사 (7) 불같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언덕. 그 언덕 위에 수십명의 남자들이 때를 지어 삽질을 하고 있었다. 해를 피할 곳은 단 한군데도 없어 모두들 땀을 비처럼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가끔 바람이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은 잠시, 끝임 없는 작 업으로 그들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어이!! 거기 손이 쉬면 어떻게 하나? 머리는 쉬어도 손이 쉬면 곤란 해!!" "예! 시정하겠습니다!!" "대답할 기운이 있으면 됐네!! 손이나 움직여!!" "알겠습니다. 룬님!!"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나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웃통을 벗고 흙투성 이가 되어 여기 저기를 뛰어 다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의 발에 채였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삽질(?)을 했고 어 떤이는 주먹으로 얻어 맞은 뒤 너털 웃음을 지으며 다시 일을 시작하 기도 했다. 꽤나 거칠게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얼굴에서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룬님!! 알리아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멀리서 누군가 바람에 짧은 앞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누군가 싶어서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던 그는 미간에 파악 주름을 잡았다. "어. 어어어∼ 이거 곤란한데." "룬님. 이것이라도 걸치시죠." 누군가 남자에게 천쪼가리 같은 것을 건냈지만 그는 손을 저었다. "그런 거 걸쳐보았자 저녀석은 안 속아." "그래도 일단은 뭐라도 걸치셔야…." "눈가리고 아웅해 봤자라니까. 지난 번에 봤잖아." 그렇게 룬이라고 불린 사람과 다른 이들이 실갱이를 하고 있는 동안 그 문제의 '저녀석'이라 불린 남자가 등성이를 기어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룬을 보는 순간 기어올라오던 그 자세로 얼어 붙 어버렸다. "세. 세상에 룬님!!" "아. 왔어? 카일." 남자는 손에 든 양피지를 들고서 부들 부들 몸을 떨었다. 양피지 끝이 그에 따라서 함께 파들 파들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너무 흥분하지마. 흥분은 몸에 안 좋다고." 하지만 카일은 룬의 말은 귓바퀴에도 차지 않는지 손가락으로 룬을 가 르키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세상에 룬님께서!!! 왜 도대체 제 말을 안 들어주시는 겁니까! 또 이런 몰골로!" "세상에 룬님은 또 뭐야? 일하면 다 이렇게 되." "말도 안됩니다!!! 기사의, 로열 가드의 체면은 다 어디에 던져버리고 이런…." "이봐. 이봐. 이봐아---!!" 당황하는 룬의 뒤에서 룬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던 병사들이 히죽 히죽 거리며 진을 치기 시작했다.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런 병사들과 함께 웃통을 벗으시고 막일을 하시다니…. 아아. 고향에 계신 백작님의 얼굴을 어찌 뵐지. 리첼 가 문의 모든 식솔들이 땅을 치고 통곡을 할겁니다. 룬님." "시끄러워!! 어이 모두들!! 전직 로열 가드는 땀흘리고 삽질하지 말라 는 법이라도 있나?" 속사포 같은 카일의 수다 공격에 침몰 직전인 룬이 주위에 도움을 청 한다. "없습니다!!!!" 구리빛 피부를 한 병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룬의 말에 대답했 다. 삐이익하고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까지 들려온다. "봐. 없다잖아." "룬님!!!" "하하하하하 흥분하지 말라구." 껄껄걸 하는 웃음소리가 야트막한 등성 위로 퍼져나갔다. "룬님!!!!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길고 긴, 카일의 비명소리가 웃음소리의 꼬리를 부여잡고 늘어졌다. 시원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손을 내밀자 보송 보송한 천이 그 위에 올려진다. 힘차게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닦아낸 룬은 한쪽 구석에서 훌쩍 훌쩍 거리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만 좀 훌쩍 거리게나. 도대체 왜 그렇게 훌쩍거리는 건지 정말." "으흑. 흑. 어찌하여 리첼가문의 룬님께서 이리도…." "이봐. 여기는 변방이다. 변방. 내가 아무리 전직 로열 가드라고 해도 모두들 힘들게 작업을 하는데 명령을 내린 내가 나 몰라라 하며 번쩍 거리는 갑옷을 입고서 팔짱끼고 있을 수는 없어. 무엇보다 갑옷 같은 거 입고 있으면 통째로 구이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껄?" "그래도 룬님!!" "그러니까!!! 좀 그렇게 찔찔 짜지 좀 말아! 당장 그치지 않으면 걷어 차서 내 아버리겠다." "크흡. 룬님!!" 자신의 나이는 배는 충분히 먹은 남자지만 그에게 하는 말은 거칠다. 룬은 햇빛에 바래 연한 갈색이 되어 버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적당히 하고 서신을 가져왔다고 했지? 그것이나 주게." "아. 예엣!! 룬님." 허둥 지둥 카일이 들고 있던 서신을 그의 주인에게 내밀었다. 그는 서신을 내밀고는 룬의 옆에 멀찍이 떨어져 서서 그를 지켜보았 다. 그의 주인인 룬은 건장한 체격에 실력도 일류, 수도의 귀족집안 아가 씨들이 수도 없이 연서를 보내올 정도로 호남이다. 거기에다가 수도 알리아에서는 알아주는 기사 가문인 리첼가 출신의 로열 가드였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로열 가드 였었다. '후우. 어쩌다가 이런 변방으로 오시게 되어 이런 고생을….' 그 생각을 하니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다시 눈에 눈물이 고인다. 룬은 그에게 언제나 남자가 너무 눈물이 헤프다면서 투덜 거렸지만 이 렇게 감격을 잘하거나 또는 감정적이 되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 릇이다. 카일이 그의 주인의 불운한(?) 사정에 가슴 아파하며 눈에 고이는 눈 물을 룬이 모르게 열심히 훔쳐내고 있는 동안 룬은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들은 서신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흐응…. 어서어서 멀리 꺼져버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정말이지 제멋 대로라니까.' 받은 서신을 읽어내리면서 룬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 다. 그가 전해 받은 것은 귀환 명령서. 1년간의 변방 근무를 마치고 수도 알리아로 귀환하라는 명령서였다. 그는 오전 내내 흙더미 속에서 뒹군 탓에 몸 여기 저기에 말라붙어 있 는 진흙을 떨어내면서 코방귀를 뀌었다. '쳇. 이곳에 있는 쪽이 훨씬 좋은데 말이야.' 수도에 있으면 언제나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의례용 갑옷을 꼭꼭 껴 입고 있어야한다. 물론 그것이 매일 매일은 아니라고 해도 별일 없는 왕궁에서 별 위험 도 없어 보이는 그의 군주를 하루종일 보좌하고 있다거나, 졸리고 하 품만 나오는 회의에 하루에 두 번씩 꼭꼭 참여한다거나 하는 일은 정 말이지 심심하기 그지 없는 일인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카일이 듣는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펄펄 뛰겠지 만 말이다. '차라리 나보다 카일이 기사인쪽이 훨씬 좋았을텐데. 쯧쯧. 나보다 훨 씬 공명심과 정의감에 가득차서 하루종일이라도 서 있을 수 있겠지.' 유명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이런 저런 훈련을 받고 기 사로 서임받기까지 그는 자신이 기사이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 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의외로 기사가 되고 보니 그는 이상하리만치 그 기사라는 것이 자신의 성격에는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들 그에게 멋진 기사라며, 집안을 빛냈다며 칭찬을 했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작년, 나름대로는 꽤나 커다란 사건을 일으켜 거의 좌천되다 시피해서 이런 변경 성으로 발령 받아왔을 때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 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몸으로 직접, 병사들과 함께 야트박한 산등성이에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성벽을 다시 구축하고, 같이 흙 밭에서 뒹굴며 훈련을 시키는 쪽이 훨씬 그의 적성에 맞았다. 나름대로는 그렇게 즐겁게 지내왔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끝인 모양이 다. 수도 알리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다시 로열 가드의 일일지, 아니면 다행스럽게 어느 한 기사단에 소속되어 열심히 말을 달리게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아… 수도로 돌아가야하는 건가 크흐." 그에게 있어서는 나름대로 아쉬움의 감탄사 였지만 카일은 그것을 감 격의 감탄사로 들어버렸다. "아앗!!! 룬님. 드디어 수도로 돌아가시게 되는 것입니까!! 이 카일!! 너무도 감격스럽습니다. 크흑!!" "울지마!!! 울지말라구!!!" "크흡. 너무나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울지 말라고 했잖나!!" 바깥에서 웅성 웅성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지휘관인 룬과 그 보좌관이지만 왠지 시종 분 위기를 풍기고 있는 카일의 이런 세리프는 거의 매일매일 듣는 일종의 일례행사. 한쪽은 울지 말라고 소리치고 한쪽은 상사의, 그의 주인(?)의 명령은 완전 무시한 채 한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훌쩍 훌쩍 또는 엉엉 울 어댄다. "그만 좀 하라고 하지 않았나! 으아아--- 돌아버리겠어 정말." 전직 로열 가드라고 해서 나름대로는 바짝 긴장하며 그들의 새로운 지 휘관을 기다렸던 이 성의 병사들에게 있어서 룬은 참으로 색다른 지휘 관이었다. "하아. 골아파. 정말이지. 밖에 누구 없나!!!!" "예!!!" "들어와서 카일 좀 끌어내!!" "예! 알겠습니다!" 어느날과 다름 없이 병사 둘이 들어와 질질 울고 있는 카일을 끌어내 기 시작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카일님!" 일년동안 하루 두 번 정도 벌어지는 행사. 하지만 그날이 마지막이었음을 그들은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 "으으. 엉덩이 아파. 허리 아파. 등 아파. 팔 아파…." "………저건 여전하군. 여자가 있으면 멋이라도 부리느라 덜할 줄 알 았더니만." 이리야가 여전히 엄살을 피우고 있는 경하를 보며 키득 키득 거렸다. 호로스의 수도인 나카리안에서부터 지금까지, 며칠을 계속 말을 타고 여행해 온 탓에 사실 모두들 어느 정도는 지쳐 있었다. 중간 중간, 나름대로는 휴식을 취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강행군. "아픈 것은 아픈 거야!! 누굴 철골로 알아? 나는 기엘이나 로운과는 다르다고." "그렇게 말하지만 저기 시유양을 봐. 찍소리 하나 안하고 견디고 있단 말이야. 누구랑은 다르게." "내. 내가 알게 뭐야!!" 파악-하고 얼굴에 피가 몰린다. 솔직히 쪽팔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제 이리야의 말대로 시유는 나카리안에서 한번, 경하의 폭주를 그대 로 경험한 이후로는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절대로 불만을 말하지 않 았다. 사실은 오히려 그것이 더 부담스럽다고 시유를 제외한 멤버 전원이 입 을 모을 지경이다. '으으. 여자들 토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건가. 크흑.' 경하는 계속 흔들리는 말 위에서 후회막급이라며 열심히 땅을 팠다. "아. 그러고보니…." "왜 그래?" 앞장을 선 기엘 대신 로운이 대답을 했다. "궁금한게 하나 있거든." "뭐가?" "그. 왜 하나스랑, 아셀, 케리타, 바에사 이렇게 4국 연합의 이름이 셰비인거지? 보통은 종주국이 되는 나라 이름 쓰고 그러지 않나?" "………." 머리가 좀 정리되고 끊임없이 열심히 말을 달리다보니 머릿속에 떠오 르는 것은 이런 저런 잡 생각들이다. 현재 그들의 목표는 제일 가까운 나라인 하나스. 그 하나스 중에서도 수도인 알리아다. "사실 그렇잖아. 엉뚱하게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모르는 이름이 4 국 연합의 이름이라니 이상하지 않아?" "꼭 그렇지도 않다. 4국 연합의 성명이 체결된 곳이 현재 아셀의 영토 로 되어 있는 셰비라는 성이기 때문이지." 뭘 그런 것을 궁금해 하냐면서 로운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에헤?" 그가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질문이 아니라면 로운은 상당히 친절하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곤 한다. "셰비는 폴리카르와 그 옆의 지류 사이에 껴 있는 성이지, 예전부터 각각의 나라에 가이칸 까지 더해서 분쟁이 심각했던 곳이다. 결국 70 년 전이었던가? 아셀이 셰비를 차지한 이후로는 그럭 저럭 조용해졌 지. 여하튼 그 셰비라는 성에서 나름대로는 역사적인 4국 연합체가 탄 생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불리우는 거다." "흐응… 하기사 내가 있던 곳에서도 뭔가 중요한 협의나 그런게 있으 면 그 지역 이름을 붙였던 것 같기는 해. 세계사 책에서 봤던 것 같기 도 하고." 떠올려보면 사실 그렇게 희안한 일도 아니다. 별것은 아니지만 궁금했던 것을 해결하자 경하는 단순하게도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아아. 정말로 왠 팔자에 없는 여행인가 몰라. 여기서는 매번 이리 저 리 돌아다닌 일 뿐이니." "할 수 없는 일이지." "이봐 로운." 털썩-하고 말등에 엎어진 경하가 애원하듯 로운을 불렀다. "좀 쉬었다가 가면 안될까?" "…………." "내가 힘든데 저 앤 더 힘들 거 아니야. 찍소리도 안 하니 뭐라고 하 기도 그렇고 적당히 쉬어가면서 가는게 어때? 응?" "서두르자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네가 아니었나?"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충분히 쉴 만큼은 쉬어야 앞으로의 일정에 영 향이 없을 것 아니야." "필요하다면 회복 주문이라도 걸어주지."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사실 따지고 보면 급해도 여간 저간 급한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역시나 몸이 피곤하다보니 정신도 조금은 헤이해지는 것이다. "어차피 하나스의 수도 알리아는 멀었다구. 좀 쉰다고 해서 하나스의 국왕이 어디로 도망 쳐버리는 것도 아니고, 알리아가 망해버리는 것도 아니잖아?" "…………." 5필의 말의 발굽이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하는 말등에 기댄채 너편에서 묵묵히 앞을 보며 가고 있는 시유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말을 하지 않을 뿐,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차 창백해 보일 지경이다. 사실 그동안은 숲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고 마을에 들어가 쉰다고 해도 한밤중 늦게 숙소를 잡아 새벽같이 다시 출발하는 등 상당히 빡빡한 일정으로 움직여왔다. 사실 이 일행중 누구보다 피곤하고 힘든 사람은 시유일 것이다. 그녀가 밤새 깜박 잠이 들면 로운과 이리야가 번갈아 회복 주문 같은 것을 시전해 주었지만 피로는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축적되고 있었다. "더도 말고 하룻밤만, 따악- 하룻밤만 좀 느긋하게 쉬면 안 돼?" "…시끄럽군. 알았다. 해가 지기전에 마을에 도착하게되면 그렇게 하 지." "그런게 어디있어!!" "그정도면 족해. 어?" 경하와 언쟁을 벌이고 있던 로운은 멀찍이 앞장서서 가던 기엘이 기수 를 돌려 그들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지? 하아!!" 로운이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달려오고 있는 기엘쪽으로 다가갔다. "기엘? 무슨 일이야?" "앞쪽에 하나스의 기사와 병사들이라고 짐작되는 무리가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웅성 웅성 농성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기엘이 있는 그대로 자신이 본 것을 보고했다. 로운의 뒤를 이어 기엘의 주위로 모인 일행들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운다. "왜그래? 기엘?" 경하가 드물게 약간 흥분한 상태인 기엘에게 질문을 했다. "그것이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저 앞쪽으로 하나스의 기사와 병사들 로 짐작되는 무리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거의 한 부대라고 봐도 좋 을 정도의 인원입니다. 물론 저희들과는 상관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수가 많은 데다가…." "하나스의 기사?" "예. 두 개의 검과 방패, 그리고 그 위에 그려진 문장으로 봤을 때 하 나스의 기사가 틀림 없습니다." "흐응…." 언제나 기사인 기엘과 로운과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경하이긴 하지만 역 시 '기사'라는 단어는 웬지 가슴을 두근 거리게 한다. 기엘과 로운은 오히려 너무 가까이 있어서인지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 는 기사에 대한 신비감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사라… 위험한걸까? 그 사람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일단은 마주치게 되면 저희들에게 호 기심을 가질 수도 있게되고…." 어떻게 할까? 라는 표정으로 기엘이 로운의 의견을 구한다. 하지만 로운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경하가 가볍게 결정을 내려 버렸다. "뭐 상관없잖아. 우리들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은 하나스의 국왕을 만나러 가는 사신 일행이라구. 조금 모양새는 우 스울지 몰라도." "글세.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로운의 신중론. 하지만 역시 경하의 귀에는 로운의 신중론 따위는 차지도 않는 모양이 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뭐 죄라도 지었어? 물론 조금 캥기는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뭐 어때?" 지난 번의 꽤나 지독한 경험 이후로 사실은 누군가와 연관되는 것이 상당히 꺼려졌던 경하지만 그저 '구경'만 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틀리 다. 부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인원을 거느린 기사, 그것도 처음 보는 새로운 나라의 기사다. 그런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경하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는 꿈에도 알 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냥 가자고. 떳떳하게 행동하면 뭐라고 하겠어? 와서 딴지를 걸으면 여행중이라고 하면 되잖아. 이전에 가이칸을 지나 갈 때처럼."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않을까? 사실 나는 이리 저리 숨어 당기는 거 질린 사람이라구." 이리야가 경하의 편을 들고 나오자 결국 기엘과 로운도 양보를 하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경계를 할 필요는 없다고 그들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대로 가도록 하죠. 단 경하님…." "응?"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은 절대로 하지 말아주십시오." "………뭐? 그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단순한 당부의 말씀입니다." "내가 할 말을 기엘 네가 대신 하다니 웬일이야?" "이봐!! 둘다!! 무슨 의미야 그건!!" "하하하하. 글세 로운. 가끔은 네 고민도 함께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랄까?" "기엘!!!! 그게 무슨 의미냐니까!!" 뒤에서 아우성치는 경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로운과 기엘이 사이좋게 앞장을 서서 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시유가 남몰래 미소를 짖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말이다. *** -------------------------계속.. 오타...만발 어영차 디야~~~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3장 하나스의 기사 (8) "대장님. 정말 떠나시는 겁니까?" "그래." "저희들을 두고 가시다니요. 저희들도 같이 가겠습니다." "웃기는 소리들 하지 말고 모두 돌아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나!!" "룬님!!!" "대장님!!" "가지마세요." "대장님이 가시면 저희들은…." 산만한 덩치의 남자가 갑자기 철푸덕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으허--엉. 대장님 저희들을 버리고 가시면 안됩니다." 뚝뚝뚝, 손뚜껑만한 손등위에 눈물이 떨어진다. 그 한심하고 또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며 룬이 입을 쩍 벌리는 순간 주 위에 늘어서 있던 사내들마져 그 자리에 하나둘씩 주저앉기 시작했다. "저희들을 데리고 가신다고 말씀하실때까지 절대로 보내드리지 않겠습 니다." "옳소!!!!" "맞아! 죽어도 따라갈거야!" 이리저리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난무한다. 그걸을 바라보며 룬은 입을 쩍 벌리다 못해서 넋이 빠져버릴 지경이 되어 버렸다. "으윽. 눈물은 여자 눈물이 제일인데 웬 사내 녀석들이 이 모양이냐." 수도 알리아에서 서신이 전해져 온 후 3일째 되는 날. 룬은 주변 정리를 하고 수도로 떠나려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룬의 생각이었다. 룬은 카일과 함께 짐을 매고(?) 이고 싣고 나름대로는 최대한 배려한 답시고 몰래 관사를 빠져나왔지만 어떻게들 알았는지 그를 따르던 일 부 병사들이 제각기 보퉁이를 하나씩 지고 그의 뒤를 밟아 따라왔던 것이다. "하이고오. 내 팔자야." 아름다운 여성들이 줄줄이 따라 나서준다면야 싫다고 할 것도 없겠지 만 어디서 덜렁 덜렁하고 고만 고만한 오합지졸 비스무리한 사내녀석 들이 줄줄이 따라나와버렸다. 물론 일년 내내 새빠지게 훈련시켜 이제는 좀 병사들 티라고 하는게 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 "당장들 돌아가!! 너!! 린슨. 어머님은 어쩌고 따라나왔어!!" "어머니께서 크흑. 룬님을 따라 큰 성에 가서 기사가 되라고 하시며 …." 라며 린슨이라 불린 사내가 울음소리로 말을 흐린다. 그가 말을 하자 마자 다른 사내들역시 비슷한 말들을 줄줄 외우며 같 이 엉엉대며 룬에게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룬님. 어서 서두르셔야 할텐데요." 카일이 옆에서 훈수를 두자 룬이 빽하고 소리쳤다. "그러니까 다 네탓이잖나!! 내가 입 꾹다물고 찍소리 하지 말라고 했 는데 어째서!!!" "그야 모두들 룬님에 인사라도 하고 싶다고 하니 제가 어찌 말릴 수 있었겠습니다." "에라이!! 천하에 도움 안되는 놈." 성질 같아서는 걷어차버리고 싶지만 룬은 꾹꾹 눌러 참았다. 카일을 걷어 찾다가는 아마도 카일이 몸이 나을 때까지 꼼짝도 못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휴. 이걸 정말… 애초에 왜 내가 카일을 데리고 왔는지 으으 후회 된다 후회되.' 질질 짜고 있는 산같은 덩치의 남자들. 그리고 어쩔줄을 몰라 앞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는 카일을 보며 룬은 한숨을 내쉬고 또 내쉬었다. 그때였다. "역시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지?" "그러게 말이야. 뭔 줄초상이라도 났나." 목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나 좀… 멀리 돌아서 가는 편이 좋았을까?" "이미 늦었어." 소근 소근 말하는 듯 하지만 왠지 그중 한 사람의 목소리 만큼은 룬의 귀에 쏙쏙 파고든다. 눈을 들어 그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려 했지만 왠지 내리쬐는 밝은 햇살이 그것을 방해했다. 뭔가 머리에라도 쓰고 있는 듯 싶었다. 그것에 햇빛이 반사하고 있었다. '뭐…지 저건?' 따각 따각 거리는 말 발굽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왠지 울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경하는 살짝 아주 살짝 최소한도로 그의 바람을 날려보냈다. 멀리 날아 갔던 바람이 돌아오며 그 울음소리 비슷한 것이 상당히 많 은 사람들이 모여 한꺼번에 엉엉, 흑흑 대며 반쯤은 통곡하고 있는 소 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문제는 경하가 바람을 날려보낼 때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소리까지 한 꺼번에 그것에 실어 날려 보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지 못하는 데 있었다.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닐까? 저기?" "글세. 특별한 게 아니라면 굳이…." "가봐야 하지 않을까? 로운?" "…가볼 필요없다고 말하고 싶지 로운?" "당연하지." 세 사람의 말이 교묘하게 이어져 결론을 도출해낸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 할 계지가 아니다." "그래도 엉엉 울고 있는 걸. 덩치가 산만한 아저씨들이. 참견 차원이 아니라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어서." 손가락으로 남자들이 옹기 종기(?) 모여 앉아있는 곳을 경하가 가르켰 다. 사실은 궁금증보다는 조금쯤이라도 가까이 가서 '구경'을 하고 싶은게 경하의 솔직한 심정이다. 며칠동안 쭈욱 5명이서 시유가 가끔씩 내뿜는 심인성 찬바람을 맞으며 썰렁하게 여행한 탓에 꽤나 심심했었다는 이유도 있다. "뭐 꼭 도와 주겠다는 것은 아니구." 로운이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자 얼른 경하는 말을 돌린다. "여하튼간에 호기심은…." "헤헤헤헤."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가는 말들 덕에 일행은 어느덧 그 문제의 산만한 아저씨들이 잔뜩 옹기 종기 웅크리고 앉아서 통곡을 하고 있는 현장에 도착했다. 경하는 로운의 눈치를 보며 말의 고삐를 당길까 말까 고민을 했다. '우웅. 대뜸 멈춰서버리면 분명 잔소리를 해댈텐데….' 한쪽 눈으로는 로운의 눈치를 보며, 다른 한쪽 눈으로는 사람들이 있 는 쪽을 살피는데 순간 경하의 시선이 한 남자와 따악 마주쳤다. 그는 엉엉 울고 있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꽤나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 었다. 무엇보다 그가 경하의 시선을 끌은 것은 그의 손에 허리에 검 매달려 있는 검과 그의 옆에 내려져 있는 멋들어진 조각이 세워져 있는 방패 였다. 경하의 시선은 어느덧 그의 허리를 지나 바닥에 놓여진 방패로 향하고 있었다. "……은백의, 순은(純銀)의 여신인가…." 중앙에 군계일학처럼 우뚝 서 있던 남자가 그 덩치에 알맞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워." 경하가 한창 방패에 시선이 팔려있는데 그 옆에서 덜렁 덜렁 움직이고 있던 검이 천천히 경하의 눈앞에 확대되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은백색 상아…." 경하가 자신과 눈이 마주친 남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그가 남자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경하 일행과 상당히 가까워졌을 때 였다. '뭐야 저 남자는?' 어딘가 시선을 빼앗겨 정신이 홀라당 나가버린 듯한 그 남자는 뭔가 상당히 황홀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정말로 아름다워." "에?" 경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다가 말고 경하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렇지…." 휘익-- 경하의 고개가 시유에게 향했다. 경하의 바로 옆에 있던 시유는 왜 자신을 보느냐며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턱선을 지나 목덜미를 덥고 있던 새하얀 머리카락이 시유의 얼굴에 찰 랑거리며 달라 붙는다. '하기사 시유…가 좀 예쁘긴 하지만.' 이러 저러한 사정으로 그다지 좋은 사이로 지내지는 못하지만 경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경하의 입장에서 아슈레이 인들, 그중에서도 미메이라 인들은 동서양 의 중간 정도의 골격을 가진 인종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동 서양의 미의 기준은 같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여하튼 간에 시유는 경하의 눈으로 봐도 상당한 미인인 것이다. 이런 특이한 사정만 없었다면 정말이지 슬슬 기회를 봐서 대쉬라도 해 보고 싶은 그런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맞아. 좀 예쁜게 아니라 확실히 예쁘기는 해.' 뚜렷한 이목구비에 깔끔하게 정리된 은백의 머리카락, 어딜 봐도 군살 하나 없어 보이는 몸매. 가느다란 목과 날씬한 팔 예쁜 손가락. 한참을 봐도 싫증나지 않을 미소녀인 것이다. '거기다가 성격이 좋으면 금상 첨화겠지만….' 경하는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었다. 며칠밖에 함께 있지 않았지만 외모에 비해 시유의 성격은 생각보다 상 당히 거친(?)편이다. 물론 경하에 한해서. 그 외의 경우라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미인인 시유. '쳇. 차라리 저 남자의 입장이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경하는 시유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에 불쑥 손 하나가 달려들었다. "우. 우앗!!!!" 그 손은 아주 가볍게 길게 늘어져 있는 경하의 머리카락을 몇가닥 집 어 올렸다. "아름다운 레이디." "……………." "당신의 이름을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 그는 손가락에 경하의 머리카락을 휘감아 입술에 대며 다시 한번 말했 다. "정말로… 당신과 같은 여성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싸악- 핏기가 내려가는 소리가 경하의 귀에 들려온다. "…………." 주위가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했다. 울고 있던 남자들은 울음을 멈추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넋 을 일어버렸다. 멋들어진 목소리와 연갈색 머리카락의 기사. 은백색의 머리를 허리보다 더 길게 길러 늘어뜨리고, 아름다운 암말( ?)에 아름다운 자태(?)로 앉아있는 아름다운 요정같은 소녀. 음유시인이라도 있었다면 너무나 로맨틱한 광경이라며 시를 읊어 노래 를 부를 것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 자식이 누굴 보고 레이디라는 거야! 넌 눈이 엉덩이에 달렸냐!!" 퍼억---- 아름다운 레이디가 우아한 발로 우악스럽게,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멋진 미사여구를 준비하고 있던 기사의 턱을 차내버렸다. 꼬르르륵 소리를 내며 기사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남자들이 그의 뒤로 달려들었다. "우앗!! 룬님!!!!" "룬님!!!" 그와 동시에 아름다운 레이디(?)의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해동 되어 각자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경하님!!!" "푸하하하하하! 죽인다!! 내가 본 것 중에서 제일로 웃겨!! 나보다 더 느끼해. 백만배는 더 느끼해." "큭. 큭큭큭." "푸훗---." "아악--- 웃지마!!!! 이리야!! 로운!!! 시유!!" 아름다운 레이디는 한순간 얼음보다 더 차가운 얼음의 여신이 되어 차 가운 냉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이리야!! 한 마디라도 더하면 죽여버릴 거야!!!" "푸하하하하. 진짜로 느끼해.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니, 영광이라니!!" "이리야!!" "큭…." 로운 마저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물론, 그 레이디의 주인공은 경하가 예상하던 시유가 아닌 바로 자신 이었다. *** "하이고오… 리첼 백작님이 아시면 땅을 치시고 통곡하실 겁니다. 영 광스러운, 영광에 가득차야할 로열 가드인 룬님께서 여자 문제로 이런 곳에까지 좌천되시고, 이제는 여자도 모자라서 남자분께 손을 뻗으시 다니…." "…………." "하이고오오오오. 돌아가신 리첼 가문의 선조님들이 이일을 아시게 되 면 무덤 속에서 벌떡 벌떡 일어나실 겁니다." "키득 키득 키득." 여기저기서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꾹 감고 기절한 척 하고 있던 룬은 귓가에 대고 카일이 곡을 하 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떠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리털이 빠지도록 고 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알리아에서는 자태도 고우신 우르카신의 영예께서 상대이셨건 만, 어찌하여 남자에게 눈을 돌리신 겁니까. 이 카일, 절대로 그것만 은 용납해드릴 수 없습니다." 어지간하면 눈을 뜨고 싶지만 카일이 떠들어대는 내용을 계속 정신을 차린 직후부터 듣고 있던 룬은 너무나 무서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돌겠군. 돌겠어.' 누워 있는 바닥이 차지 않고 보송보송 푹신푹신한 것으로 보아 아까의 그 장소는 아닌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카일의 목소리가 나름대로 쩌렁 쩌렁 울리는 것으로 봤을 때 그리 넓지는 않은 장소다. 하지만 자신이 지내던 관사의 침실정도로 작은 공간도 아님에 틀림이 없다. 작은 장소라고 보기에는 카일의 목소리가 너무 울리고 있는 것이다. "오오. 신이시여. 룬님을 룬님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룬님은 본인이 무슨 착각을 일으켜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 쩌렁 쩌렁한 카일의 목소리 뒤로 숨죽여 웃어대고 있는 소리들이 들린 다. 결국 카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번쩍 떴다. "크흡--. 리첼 백작님. 룬님을 제가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입니…우 앗!!!" 건장한 체격의 룬이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자 카일이 곡을 하다말고 비명성(?)을 질렀다. "아앗!!! 룬님 정신 차리셨습니까?" "………." "네 놈이 내 귀에 대고 곡을 그렇게 해대는데 정신 못차릴 위인이 세 상에 어디 있겠어." "크흑. 룬님. 우. 우웁!!!" 룬은 손으로 뭔가를 또 떠들어대려고 하는 카일의 입을 막았다. "말해두겠는데 거기서 한마디만 더 떠들면 다시는 내 뒤를 못따라다니 게 여기서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서 목에다 사슬 채워서 묶어놓고 떠날 테다." "읍. 읍. 읍." "알았어?" 살벌함이 뚝뚝 떨어지는 룬의 표정과 말에 카일이 기가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번 떠들거나 그러기만 해봐. 절대 용서 하지 않을테니." "으읍. 읍읍." 부들 부들 카일의 몸이 룬이 뿜어내는 살기에 반응해 떨리기 시작했 다. 몇 번이나 카일의 끄덕임을 보며 다짐을 받은 룬은 그제서야 간신히 손을 내려놓았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두리번거리지만 왠지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턱 봐서는 어딘가의 조그만 여관같은 분위기이긴 하다. 작은 몇 개의 탁자와 그저 보통의 집으로 보긴 어려운 크기 때문이다. "카일." "………!!" "여긴 어디지?" 카일은 룬의 질문을 듣자 당황해서는 손가락으로 뭔가를 마구 바닥에 그린다. "…………." "카일!!! 말로 해 말!!!" 룬의 말이 카일이 울상을 지어 보이며 손으로 목을 귿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휴. 저거 혹시 바보 아니야.' 룬이 골치가 아파 다시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 되려는 찰나 사람 하나 가 안쪽에서 나왔다. "일어 나셨군요. 손님. 어떻게 오늘 묵고 가시겠어요?" "여기 어딥니까?" "호호호. 어디긴요. 로리타의 민박집이랍니다." "………." 30이 조금 넘어보이는 꽤나 미인형의 그녀는 예쁘게 웃어보였지만 왠 지 표정이 수상하다. 눈치 빠른 룬은 곧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짖고 있는지 알아 차렸다. '젠장. 카일. 그냥 두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턱이 얼얼해져왔다. 사실 지금까지도 아팠던 것이겠지만 그제서야 자각을 한 것이다. "어휴. 아파라." "찬 수건이라도 해드릴까요? 찜질을 하셔야 할텐데요." "부탁드립니다." 얼얼한 턱을 매만지며 룬은 반쯤 빼곰하게 열린 문을 열고 나갔다. 분명 보지 않아도 턱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음에 틀림이 없다. 문을 열고 나가자 마자 여기 저기서 휘파람 소리와 함께 환호성 비슷 한 것이 들려왔다. "대장님. 정말 멋들어지게 넘어지셨습니다." "휘익--- 멋집니다. 대장님. 저 그런 거 처음 봤습니다." "대장님 사실은 알리아에서도 비슷한 일 있으셨다면서요." "시끄러워!!!" 바람이나 좀 맞아가며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나 좀 곱씹어 보려고 하 던 룬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단 한 놈도 데려 갈 수 없으니 모조리 돌아가!! 나중에 알리아에서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지금 안 돌아가는 놈들은 기억해 두었다가 절대로 알리아로 부를 때 빼버리겠다!!" 순간 웅성거리며 모여있던 남자들의 얼굴이 울상이 되어 버린다. 그것을 본척 만척하며 룬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젠장!!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정말이지 턱이 떨어져 버릴 것처럼 욱신 욱신 거렸다. "뭐야. 로운! 어째서 우리가 아까의 그 변태 같은 인간하고 여기에 같 이 묵어야 해?"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경하는 열 대신 바람을 푹푹 내뿜고 있 다. 연유는 어찌 되었든 간에 그 문제의 기사양반으로부터 시유라는 멀쩡 한(?) 여자대신 열렬한 애정 고백 비슷한 것을 받아버린 경하는 온 몸 에 두드러기가 돋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혐오감에 치를 떨고 있었 다. 과거 이리야가 자신에게 했던 짓 정도야 실제 여장을 하고 있었기 때 문이라고 생각해 넘어가 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기본이 틀리다. 기본이. "말도 안 돼!! 당장 떠나!!" "쉬자고 했었던 것은 너였다. 괜시리 토달지 마." "그래도 저렇게 기분 나쁜 녀석하고는 한 지붕 밑에 있기 싫어!!" 부들 부들 부들 경하의 손가락이 떨린다. 경하는 룬이 입을 맞추었던 부분의 머리카락을 들고서는 기분나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젠장 길게 하는 것은 자동으로 되는데 짧게 하는 건 왜 자동으로 안 되는 거야! 기엘 가위 좀 찾아줘!" "후우…." 마치 처음 경하가 미메이라로 소환되었을 때 보이던 반응과 비슷하다. 로운은 그것을 떠올리고는 남몰래 쓴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일들뿐이었다. "소란은 적당히 떨어. 잘못은 그쪽에 있는게 아니라 너에게 있는 것이 나 다름 없으니까." "어째서!!!" 기엘이 여관 주인에게 가위를 빌리러 가자마자 로운이 경하를 질책한 다. "비록 그게 네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어떻게 보면 헷갈릴 수 도 있으니까." "시유가 있잖아!! 시유가!! 왜 나냐구." 사실이 그렇다. 비록 경하가 머리카락 정리하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장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로 오인 받을 정도의 얼굴은 아니다. "아으. 열받아. 내 탓이 아니야!! 그놈 탓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경하는 화르륵 분노의 바람을 피워 올린다. "그러니까 저런 놈하고 한 지붕 밑에 있기 싫어!!" "그 저런 놈은 생각보다는 쓸모가 있을 듯 한데? 그러니까 네 의견은 각하한다." "뭐야!!!" 로운은 이제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는 중이다. 경하의 반응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야도 사실은 로운과 거의 같은 아니 로운 보다 훨씬 이번 일을 즐 기고 있는 중이라 찍소리도 하지 않고 경하가 펄펄 뛰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어이 그렇게 화를 내진 말라구. 그 친구도 지금쯤은 정신 차리고 자 신의 실수를 눈치 챘을 걸?" "거기다가 그의 시종의 말을 들어보자면 그는 하나스의 수도 알리아로 갈 예정이라더군. 금상첨화로 알리아의 전직 로열 가드 출신에 꽤나 유명한 기사 가문의 자식인듯해."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직도 룬이 입을 맞추었던 머리카락를 더럽다는 듯이 들고 있는 경 하. 그는 아주 불만 스러운 얼굴로 로운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알리아까지는 꽤 먼길이다. 물론 일이 일이니 만큼, 서둘러야 하겠지 만 그보다는 너나 시유의 안전이 내가 볼 때는 훨씬 중요해." "그 안전 어쩌구하는 소리는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이상한 놈하고 같은 지붕 아래서 잠드는 것과는 상관없는 거 아니야?" "어이 어이. 그렇지가 않지. 로운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 단 말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어." 이리야가 웬 바보 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끼어 들었다. "적어도 하나스의 로열 가드 출신이라구. 좀 기분은 나빠도 말이야 하 나스의 수도 알리아로 들어갈 때 유력한 기사 가문의 아들이 신변 보 호인이 되어 준다면 정말로 걱정할 것 하나 없지 않겠어?" "케엑-- 저런 놈이?" 경하가 우엑-하고 속이 뒤집힌다는 표정을 해보인다. "정확한 것은 그가 정신을 차린후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아야겠지만 그 의 신분이 확실한 경우 굳이 우리의 사정을 다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알리아에 도착해 하나스의 국왕을 만날때도 분명 어떤 식으로든 도움 을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좀 기분이 나쁘더라도 참아 주어야 겠어." 로운이 곰곰하게 생각해 정리한 것을 경하에게 설명했다. 실제 그는 정말로 저 기사가 되도록 이면 유서 깊은 가문의 기사이기 를 바라고 있었다. 하나하나 쌓이는 일의 부담감이 만만치 않은 이 시점에서 저런 줄하나 를 잡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언제 어떻게 튀는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경하가 있기에 더더욱. 하지만 그런 로운의 깊은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하는 입술을 쭈욱 빼고 야박한 소리를 해댄다. "……기회주의자." "뭐. 그렇게 불러도 좋다." "얍삽해." "…어쩔 수 없잖아?" "남의 사정은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는 파렴치한." "그건 용납못해." "해삼. 말미잘. 멍게!! 3일쯤은 바닥에 팽기쳐둔 썩은 우유. 일주일 묵은 미끈덩거리는 줄 미역! 곰팡내 잔뜩 핀 식빵, 달아서 입이 썩을 것 같은 루유를 삼박 사일 썩혀서 꿀을 있는데로 부은 거!" "…………." 그건 도대체 무슨 비유일까? "씹다가 퉤 뱉어놓은 바나나!! 말 발굽으로 석달 열흘동인 짓뭉갠 호 박, 삼백년쯤 골아빠진 사과, 오백년쯤 접시에 코 밖아서 한강에 수장 시켜도 속시원하지 않을 바보 멍청이!!!" "너…." 뭔소린지 모를 소리들이라 그냥 들어주고 있었지만 말하는 꼴을 보아 하니 역시 욕인 듯 싶다. 듣다 듣다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달한 로운이 손에서 따닥 따닥 소리를 내며 불끈 쥐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경하님. 이분께서 직접 머리를 잘라주신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직접 하시는 것 보다는…어? 무슨 일이야?" 왠지 분위기가 썰렁해진 방안 풍경을 보며 기엘이 어리둥절해 한다. "기엘." "응?" "너는 도대체 저녀석의 어디를 보고 기사의 맹세따위를 해버린거야!!" "…에?" "얼결에 넘어간 내가 바보지. 흐으." "저어. 경하님 무슨 일이십니까?" "몰라!! 머리나 잘라 줘!!!" 머리를 자를 가위를 빌려달라는 말에 직접 잘라주겠다며 가위를 들고 함께 올라온 여관 주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손님의 사정은 어디까지나 손님의 사정.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열을 팍팍 내고 있는 경하에게 다가와서 경 하가 들고 있는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어느 정도까지 잘라 드릴까요?" *** "그렇다면 이대로 알리아까지 여행을 하신다는 겁니까?" "알리아 까지라기보다는 알리아로라는 표현이 더 맞겠지요." 기엘이 룬이 말한 단어 하나를 정정했다. "알리아까지가 아니라 알리아로라…. 묘하게 차이가 나는군요." 씨익-하고 룬이 기엘과 로운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단단하고 커다란 체구에 그다지 머리를 쓸 것 처럼 보이지 않는 남자지만 생각보다 훨씬 속이 깊은 사람이 아닐까 로운은 짐작했다. 적어도 로열 가드였다는 소리는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될 수 있는 한 신원 확인을 해 놓아야겠지.' 로운은 밖에 있는 남자들에게 일종의 정보수집을 해오라고 파견을 보 낸 이리야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길 바랬다. "자아. 음식입니다." 여관 주인이 음식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별이 내려 앉기 어두운 밤하늘에 내려앉기 시작한 시간. 경하와 이리야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로리타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 힌 여관 주인의 환대를 받으며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끼어든 것이 바로 룬이었다. 물론 룬의 꼬랑지 카일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 화려한 식탁은 아니나 나름대로는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음식을 둘러 앉아 먹으며 그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룬의 입장에서 보면 로운 일행은 상당히 특이한 여행객이었다. 일단 생김 생김부터가 그가 일찍이 알고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동 떨 어져 있다. 그럭 저럭 호로스와의 국경 지대에 있던 탓에 붉은 머리카락과 암적색 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은 꽤 많이 접해왔었다. 많지는 않아도 어느정도는 여행객이라던가 상인들이라든가 하는 사람 들이 심심치 않게 그가 부임해 있는 곳을 지나다녔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부임해 왔을때는 사실, 호로스의 사람들이 너무나 신기해서 몇날 며칠 멍청하게 그 붉은 머리의 사람들을 넉놓고 바라만 보고 있 었던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과는 또 다 른, 별개의 사람들이었다. 도저히 저것이 사람의 머리카락인가 의심스러운 정도다. 순 은백색, 아니 그렇게 표현하기도 민망스러운 투명한 은색의 머리카 락. 거기에 푸른 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다. 나이들어 생기는 백발과는 전혀 다르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 얼굴이 비쳐보이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 져 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러니 머리에 뭘 쓰고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군.' 열심히 입으로는 음식을 집어 넣으며 눈으로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머리카락 색을 감상한다. 눈의 색도 요주의 점. 연한 은회색의 눈동자와 조금은 짙은 회색의 눈동자가 주류다. '살다보니 정말 이렇게 희안하게 생긴 사람들도 보게 되는 구만.' 정렬적인 붉은 색이 온 몸에서 발해지는 호로스 인들과는 전혀 틀리 다. 색채는 흐리지만 반짝거린다. 가만히만 있어도 반짝 반짝거리며 존재 감을 형성하고 있다. "신기하십니까?" "아. 이. 이런 죄송합니다." 룬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넉을 놓고 바라보는 것을 보며 로운이 장난 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룬은 조금 쑥스러운듯하면서도 꽤나 대담하게 물어왔다. "미메이라 인이십니까? 역시?"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말은 들은 적은 있다. 바람의 신국 미메이라의 사람들이 이런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을 말이다. "예. 이런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 보군요." "아아 아닙니다. 단지 호로스의 근처에 있다보니 생경하지 않은 정도 라고 할까요?" 너털 웃음을 지으며 룬이 대답했다. "사실 처음에 호로스인들의 그 루비를 녹인 것 같은 머리카락을 봤을 때도 상당히 신선했는데 당신들 미메이라인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정말 신선한 머리색을 가지고 있는 듯 싶군요." 어떻게 보면 무례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태도는 싹싹하고 기분 나쁘 지 않다. 성격이 좋은 남자 같았다. 기엘은 왠지 룬이 주는 느낌이 그의 친우인 로운에게서부터 느끼는 것 과 꽤나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둘 다 말투는 꽤나 거칠지만 말 하나는 매끄럽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표현하는 법은 틀려도 둘 다 사심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가 좀 실례를 했던 분은 자리에 안 계시는 것 같군요. " "아. 예에. 몸이 좀 안 좋으신지 쉬시고 계십니다." 라고 기엘이 둘러댄다. 사실을 말하자면 절대로 미친(?) 변태 놈하고는 절대로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싶지 않다는 경하의 고집에 기엘이 두 손들 들어버린 것이 다. 하지만 그런 기엘의 둘러댐에 도움은 못될망정 묵묵하게 수저를 놀리 고 있던 이리야가 그만 푸훗-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어버렸다. "이리야씨." 이리야의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스위치라도 되었는지 나름대로는 멀 쩡한척하며 식사를 하고 있던 룬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 다. 정말 눈 감짝할 사이였다. "푸훗.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결국 이리야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파안대소를 해버렸다. "푸하하하하. 좀 실례…라구. 크하하하하!" "이리야씨. 실례입니다. 그렇게 웃으…시는 건." "크하하하하하하! 크크크크극." 나름대로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것이 더더욱 우 스운지 이리야는 웃음을 그칠줄 모른다. "죄송합니다. 그…." 기엘이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데 이마까지 빨개진 얼굴로 룬이 헛기침을 대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실수는 실수니까 괜찮습니다. 웃으셔도 할 말은 없는 거지 요. 그 사과라도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뵐 수 없을 까요?" "그것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것이 왠지 더 실례가 되는 것 같아 차마 말할 수 없는 기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온다. 바로 그때. 마치 식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처 럼 위층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엘!!! 나 배고파!!" "…………." "…………." 순간 식탁 위가 썰렁해진다. "배고프다니까-----!!" 아마도 식탁에서부터, 또는 주방에서부터 음식냄새가 풍겨 갔을 것이 다. 나름대로는 일행중 최고의 대식가인 경하가 그것을 참아 낼수는 없었 을 것이라고 로운은 고개를 저었다. 로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가서 데리고 나오지." "…괜찮을까? 로운?" "안 괜찮으면? 걱정마. 배가 고파서 냅두면 저절로 내려 올 거야." 로운의 말에 이리야가 너무 웃어서 눈꼬리에 흘러나온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물었다. "그냥 내려 올 때까지 기다리지 뭘 데리러 올라가." "아니. 저 괴성을 들어가면서는 도저히 음식이 목으로 안넘어갈 것 같 으니까." "그것도 그렇군." 이리야가 로운의 말에 동감을 표하는 순간 위에서 정말로 괴성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 배고프다니까 기---엘---!" *** "그만 투덜거리고 먹어." "…………." 우걱 우걱 우걱. 그리고 투덜 투덜 투덜. 한 입 먹고 투덜. 두 입 먹고 투덜 투덜. 세입 먹고 투덜 투덜 투덜. 로운의 조금은 짜증스럽다는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 식탁 위. 분위기는 요상하고, 둘러 앉은 사람들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 하면서 열심히 음식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푸하하핫 하고 웃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죽어도 내려가지 않겠다고 난리를 치는 경하를 거의 질질 소라도 끌어 내는 것처럼 끌고내려온 장본인인 로운은 나름대로 책임을 지기 위해 서 계속 작은 소리로 투덜 거리고 있는 경하에게 이런 저런 잔소리를 했지만 경하의 투덜 거림은 끝이 나지 않았다. "쳇. 정말이지. 내 의견은 손 톱 만큼도 반영을 안해."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의견을 반영해서 오늘은 느긋하게 쉬/어/ 주고 있잖아." "웃기지 마." 말은 그렇게 해도 먹을 것을 입으로 찾아 넣는 손은 절대로 멈추지 않 는다. 배가 그렇게 고프지만 않았어도 로운이 끌어 낸다고 해서 이렇게 질질 끌려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자리도 룬이 앉아있는 정면. 고개를 들면 바로 그 남자가 보인다. '젠장 재수도 더럽게 없지.' 경하는 한껏 불만을 담아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한편 경하의 정면에 앉아있는 룬은 룬데로 웬지 바늘 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좀 전, 정확하게는 혼신의 발차기에 맞아 기절하기 직전 자신의 눈에 그리도 아름다운 소녀로 비추어졌던 인물이 지금 바로 앞에 앉아있는 것이다. 허리를 넘게 늘어져 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동강하고 등에 찰랑 찰랑 할정도로 잘려 있었다. '아깝군.' 잠시 힐끔 힐끔 경하를 바라보고 있던 룬은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그때는 햇살과 저 투명한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가져온 환상에 좀 젖었 던 것이겠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상대방은 확실히 남자의 얼굴이 다. 물론 언뜻 봤을 때 남자가 아닌 여자로 착각 할 정도의 요소는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찬찬히 보면 분명히 여자보다는 남자로 보이는 얼굴이지만 아무래도 저 머리카락이 판단을 흐리게 한다. 좀더 자라서 골격이 지금 옆에 앉아있는 세 남자 정도의 나이가 되면 확실하게 남자로 보이겠지만 아직은 덜 자란, 소년과 청년의 중간사이 에 걸려있는 경하는 조금 쯤은 보는 이들을 착각에 빠지게 하는 그런 외모인 것이다. '하아. 아깝다. 아까워.' 신나게 카일의 비아냥거림을 듣기는 했지만 역시 룬은 여자를 좋아한 다. 기왕이면 아름답고, 기왕이면 우아한 그런 여자 말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어째서 자신이 그렇게 까지 혼동을 해버렸는지 스스 로에게 자문을 하게 되어 버린다. '역시 너무 오랫동안 시골 구석에 박혀 있었기 때문일 거다. 역시 알 리아로 돌아가서….' 룬이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경하의 투덜거림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덕택에 역시나 저녁 식사는 썰렁 썰렁 절대 기온 영하로 곤두박질 중. 룬은 결국 굳게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 그러니까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워낙 머리가 길으셔서 제가 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나름대로는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를 한다. "워낙 거친 녀석들 사이에 둘러 쌓여있다 보니, 가끔은 판단력이 흐려 질 때가 있더군요. 죄송했습니다." "………." 달칵하고 식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금방 그 소리는 다시 찹찹찹 하는 소리로 뒤바뀌었다. "때로 이런 변방에 있다보면 신기한 것들을 보게 되는데 그저 그런 탓 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라며 룬은 다시 한번 이런 저런 변명을 덧붙여 본다. 입이 삐뚤어져도 당신 그때는 정말로 여자로 보였어!! 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물론, 절대 여자가 좋아 파인 자신이 남자를 보고 여자로 착각해서 이 런 저런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었다는 것 역시 어서어서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 "저어 경하님. 사과를 해오시는데 그만 화를 푸시는게 어떠신지요." 기엘이 조심스럽게 경하를 건드려본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기는커녕 먹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을 뿐. "맞아. 애초에 헷갈리게 머리같은 거 기르고 다닌게 잘못이라구. 그렇 게 싫으면 자르면 그만인 것을." "그도 그렇군요." 기엘이 나름대로는 신경쓴답시고 한마디했지만 그것은 그대로 경하의 귀로 쏘옥 파고들어 버렸다. "그도…그렇군요?" 쓰윽- 숙여졌던 고개가 슬로우모션으로 일으켜진다. 눈빛은 흉흉. 목소리에서는 찬기운이 팽팽 돈다. "그도 그렇다? 그래서 지금 기엘도 내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거야?" "서. 설마요. 경하님." "하아. 그렇다 이거지. 말은 그렇게 해도 다들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 하고 있는 거잖아!!" "어린애처럼 굴지마라. 왠 땡깡이야?" 더 이상은 피곤해서 상대하기도 싫은지 로운의 말이 조금 격해졌다. "어린애는 무슨! 로운이 당해봐!! 기분 좋은가!! 착각이고 자시고 간 에 그 이전의 문제라구. 로운이 당했어봐라 그 자리에서 라이트를 휘 둘러서 저 사람 목은 지금쯤 땅에 떨어져서 굴러당기고 있을걸!!" "…………." "그러니까!! 내가 투덜거리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마! 애초에 머리 기르고 있던 것도 내 탓이 아니었어. 귀찮으니까 그대로 두는 것 뿐이 야. 알겠어? 땡깡이 아니야. 아니라구!!" 콰앙---하고 경하가 결국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진심으로. 기분이 나쁜 거 표현하면 다 어린 애야? 이렇게해서라도 안풀면 더 쌓여서 더 기분이 나빠진다구. 성질 이 나니까 성질을 부리는 거야!! 알겠어?" 소리를 질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로운의 얼굴을 보던 경하는 결 국 있는데로 성질을 부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쿵쾅거리며 위층으로 올 라가버렸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지잉--하고 귀에서 울리는 경하의 고함소리가 주 는 여운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었다. "역시 어린애잖아." 툭하고 로운이 한마디 한다. "그럼 그럼 어린애지 아직." "그래도 저렇게 행동하신다고 해도, 뒤끝은 없습니다. 정말로요. 오해 는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룬씨." 기엘이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변명을 한다. 그러나 그 변명은 룬의 한마디에 땅바닥으로 뚝하고 떨어져 버렸다. "저 친구 도대체 몇 살입니까?" 그리고 이리야의 못 견디겠다는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계속 ....3장 마치고 4장으로 넘어갑니다. 원래 예정은 개그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아아아아아아. 쿨럭.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4장 기사와 기사 (9) 펄럭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저녁 무렵이 되어 방향이 바뀐 강바람이 거대한 폴리카르 강 위를 떠내려가고 있는 배의 돛을 울리게 해 나는 소리다. 꽤나 넓은 갑판 한가운데 하루 내내 앉아 명상 아닌 명상을 하고 있던 한 남자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 어났다. 시끄러운 것도 좋아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조용히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명상하는 것을 그는 즐긴다. 그렇게 있다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생각이 정리되고 그리고 긴장 했던 몸이 조금씩 풀어져 편안한 기분을 들게 한다. 땀내 나는 병사들의 고함 소리 대신 유유히 흐르는 강물소리를 듣는 기분. "후우… 역시 가끔은 이런 시간도 필요했었어." 그는 간만에 가지는 혼자만의 시간에 만족을 느끼면서 여기저기 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 냈다. 하루 내내 앉아있었기 때문인지 옷깃에서 물냄새가 풍겨 나왔다. "하아. 시원하구만. 역시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시원해지 는건 사실이야." 아무도 듣고 있지 않겠지만 그는 혼자서도 중얼 중얼 잘도 지껼 였다. 혼자서도 잘 지껄이고 있는 바로 다름 아닌 하나스 왕국의 기사 인 룬 데 리첼. 일년의 변방 요새 겸의 작은 성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수도로 귀 환중인 전직 로열 가드다. "물소리도 좋오-고." 하나스는 아셀이나 가이칸처럼 바다에 접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 에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스를 종단하고 있는 이 폴리카르 강이 유일한 수산 자원이 된다. 무엇보다 호로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탓에 북쪽으로 갈수록 기 온이 비약적으로 올라가는 탓에 이 폴리카르강 주변에는 많은 인 구가 모여 산다. 가만히 이렇게 갑판 위에 있다보면 물소리에 섞여 사람들의 소리 도 희미하게 섞여들어온다. 그것마저도 왠지 자연의 소리 같아서 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짖 고 있었다. "어? 그런데 이 소리는 어디서 들리는 거지?" 귀를 기울이며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를 즐기던 룬은 그 속에서 꽤나 강하게 느껴지는 인기척을 발견했다. 가까운 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이상하게도 눈에 보이는 곳에는 아무도 없다. 조금은 날나리이긴 하지만 기사로서의 감각은 일품. 분명히 생생하게 아주 가까운 곳인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흐음. 분명히 이쯤인데…." 라며 눈을 돌린 곳은 배의 거대한 미스트. 그것을 따라서 천천히 시선을 올리던 그는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룬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내실이었지만 경하는 바람의 변화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불다가 좀더 어두워지면 멈추어 버리는 건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불어오는 바람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경하에 게 변화의 향방을 알려주고 있었다. 경하는 열심히 반대했지만 결국 일행은 하나스의 기사인 룬과 합 류하여 동행을 하고 있었다. 그의 권유대로 조금 더 빠르게, 그리고 조금 더 편하게 알리아로 가기 위해서 그들은 꽤나 비싼 돈을 주고 폴리카르 강 위를 오가 는 거대한 정기선에 몸을 실었다. 하나스의 수도 알리아가 폴리카르 강에서 하루정도 거리에 위치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정기 연락선에는 꽤나 많은 사람 들이 승선 하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대부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생각보다 쌀쌀해지기 때문이다. "저기 로운.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오면 안 될까?" 보기보다 상당히 과보호 성향을 가진 남자에게 경하가 조심스럽 게 물었다. "왜?" "그냥 바람 좀 쐐려고. 답답하잖아." "…………." 로운이 가만히 실눈을 뜨고 경하를 바라본다. "이리야와 기엘이 돌아오면 같이 나가. 둘다 금방 돌아올테니까. " 둘은 지금 혼자 작은 선실을 쓰고 있는 시유에게 가 있는 중이 다. 아무래도 일행중에 혼자 여자이다 보니 홀로 외롭게 있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름대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뭐 어린애야? 별일도 없을 텐데 뭘 달고 다녀. 귀찮게. 금 방 돌아올게." 그리고 경하는 로운이 말릴 새도 없이 밖으로 튀쳐자갔다. 따라나라려 하던 로운은 설마하는 생각에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뭐. 굳이 같이 가지 않더라도 문제는 없을테니까.' 스스로도 경하를 과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사실 특별히 자신이나 기엘등이 보호하지 않아도 위험한 상황이 되면 오히려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도 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왠지 경하가 눈에 안 보이면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그대로 딱딱한 침대에 드러누워 경하가 내뿜은 엘의 파장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굳이 같이 나가지 않더라도 이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경하를 지켜 볼 수 있다. '역시 과보호…일지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보자. 사람들이 별로 없는 데가….'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이 없는 곳을 찾는다. 결국 경하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알맞은 자리를 발견하고 기 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낑낑거리며 기어올라간 곳은 바닥에서 그리 높지 않은 미 스트의 중간 부분. 그곳에 서서 경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전에 가이칸에서 보았던 그 커다란 대하 나하르만큼이나 넒은 강이다. '조금만 더 넓었으면 수평선이 생길지도 모르겠네. 강이라고 하 기엔 정말이지….' 사실 경하의 경험상 한강 빼고는 이렇게 넓은 강은 본적이 없었 다. 때로는 너무나 넓어서 호수처럼 보이는 강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 것을 실제로 보고, 또 그 위를 배를 타고 지나는 것은 상당히 다 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후우… 역시 밖으로 나오니까 좋다.' 답답한 곳은 딱 질색인 경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서서 강바람을 즐겼다. 풀어헤쳐 둔 머리카락이 바람의 방향으로 흩날린다. 사실, 처음에는 이 길다란 머리가 아주 아주 싫었다. 일단은 여자처럼 보이는데다가 색깔마저도 흰색에 가까워서 왠지 할아버지라도 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길었다가 짧았다가 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컨트롤 할 수 있게되자 그 길고 긴 머리카락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한때 생각했던 것처럼 어차피 돌아가면 원래대로 검은색의 스포 츠 머리로 돌아가야 할테고 평생 이렇게 긴 머리카락을 마음대로 휘날리며 살 일은 평생 없을 테니 그냥 잠시동안 즐기자고 말이 다. 누나들이 언제나 머리카락 끝이 갈라진다며 계란 팩을 해달라, 마요네즈 팩을 해달라고 하면서 내밀던 머리카락보다도 훨씬 길 고, 그리고 경하의 눈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머리카락인 것이다. '이런걸 좀 즐긴다고 해서 변태라고 할 인간은 없겠지?' 투명하도록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내리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바꾸어 놓는다. '으음. 역시 조금은 변태스러운가….' 역풍을 받으며 경하는 어두워져 가는 수면 위를 머리카락을 통해 바라보았다. 하나의 강줄기가 수천 수만 가닥이 되어 흘러간다. '뭐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한동안 인걸.' 그리고 경하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앞으로 돌아섰다. 얼굴로 바람의 가닥이 희미하게 스쳐지나간다.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손가락사이에서부터 바람의 엘이 가시화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오로지 경하의 눈에만 보이는 바람의 엘. '조금쯤은 장난…을 쳐도 되겠지?' 손 전체가 윙윙거리는 바람의 엘로 가득 차 흔들린다. 바람의 주인이라는 것이 된 뒤로 경하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바 람의 술도 다 쓸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단지 그것을 잘 쓰지 않는 것은 그 강대한 힘을 스스로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왠지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곤한 다. "로. 조하 아슈레이. 미메이라 바람의 시작과 끝…." 이미 주문은 필요하지 않지만 언제나처럼 바람술을 쓸때면 자연 스럽게 주문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뒤에 이어지는 주문은 통상적인 것과는 틀린, 경하의 머릿속에서 주문보다 더욱 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미메이라의 의지를 이어가는 자…." 흘러가던 바람들이 경하의 엘에 반응한다. 투명한 실오라기들이 하나둘씩, 경하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작은 회오리 바람같은 것이 경하의 팔에서 웅웅거리며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오른팔을 들어 자연스럽게 뒤로 돌려 바람을 불러 모은다. "그대에게 의지를 부여하는 자가 명한다. 바람의 세나케인---!!" 온 몸의 힘을 팔로 모아 앞으로 내리쳤다. 경하가 서 있던 그 자리에서부터 바람이 시작되었다. 거세고 힘찬, 그러나 의지를 부여받아 살아 숨쉬는 바람이…. 쏴아아아아아---- 멍하게 경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룬은 뒤로 밀려 나갈 정도 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경악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는 경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게 반짝이며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을 멍하게 감상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경하의 손이 한번, 단 한번 뒤에서 앞으로 휘저어 지는 순간 너무나 강대한 강풍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이건 뭐지?' 갑작스럽게 불기 시작한 강풍보다도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경하였다. 그가 목격한 그대로, 이 바람은 경하가 불게 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의 손놀림과 함께 시작되어버린 강풍. 룬의 힘으로도 감당 할 수 없는 그 바람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경하는 어깨 죽지 하나 움츠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의 어깨에서부터, 몸에서부터 바람이 불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마법사…인가.' 떠오르던 생각을 황급히 지워버린다. '아니 아니야. 그래!!! 저녀석 미메이라인이었다. 바람의 신국 미메이라인.' 순간 모든 것이 이해가 되버리는 기분이었다. '바람술을 쓰는 엘러라는 것인가 이것이.' 호로스와의 국경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아주 가끔 호로스인들이 불을 피우기 위해 그들의 능력을 쓰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모닥불에 불씨를 당기는 정도였을 뿐. '이런 능력을 가진 엘러가 있다는 소리는 단 한번도 듣지 못했 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강대한 힘. 공포라는 감정이 그의 가슴속에서 피어오른다. 순간 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바람 속에서 무엇인가가 그의 눈에 비쳐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 이다. 그것은 투명하지만 은빛으로 빛나는 비늘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 다. '뭐. 뭐야. 저건….' 공포로 다리가 오그라들고 솜털이 곤두서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살아 있는 것처럼 그 투명한 은빛이 형체가 꿈틀대자 더욱 더 거 센 바람이 그의 몸을 위협하듯 불어왔다. 공포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이 눈을 통해 생생하게 그에게 전해졌다. 투명한 형체가 강풍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더니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경하의 뒤쪽에서 글자 그대로 달려들었다. '위. 위험해!!!!'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을 벌릴 수 조차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너무나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뒤에서부터 덥치든 경하에게 달려들던 그 은빛의 형상이 마치 경 하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 이다. "…………." 허억 허억하고 그는 가뿐 숨을 몰아내쉬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헤헤헤헤." 경하는 자신이 한 행동이 만족스러운지 어딘가 모자르는 듯한 웃 음소리를 만들어냈다. 어느새 바람의 방향이 다시 바뀌어 있었다. "으음 좋아. 좋아." 손바닥에 주먹을 타악 치고는 경하는 기분좋게 말했다. "잘했어 케인." 「뭐가 잘했다는 거냐?」 "그냥. 흐흐흐." 자랑스럽게 양손을 허리에 대고 경하는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강 위에는 어둠이 내려 앉아있었다. "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잘 되겠지." 「그건. 자만심 같은 것인가?」 "그런 단어는 또 어디서 배웠어? 그냥 하는 소리야. 기왕이면 잘 되라. 잘 되는게 장땡. 안그래? 케세라세라는 딱 질색이라구." 「언제나 될데로 되라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세나케인이 심술 굳은 투로 경하에게 말한다. "심술 부리지마. 그런적 없어. 쿨럭 쿨럭." 멋쩍은듯 그에게 대답하는 말에는 헛기침이 따라붙는다. "헤헤. 바람의 방향도 바꾸어 놓았으니 가서 저녁이나 먹어야지. 아마 기엘이랑 이리야가 시유를 데리고 왔을 테니까." 혼잣말처럼 들리는 말을 줄줄줄 쉬지도 않고 늘어놓으며 경하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간만에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 "바람이 잘 불어서 생각보다 더 빨리 메이아스에 도착할 듯 싶군 요." 룬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에 주저앉아서 훈제고기 조각을 열심히 뜯어(?)먹고 있는 경하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남은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앞으로 하루에서 하루 반 정도가 될겁니다. 바람이 잘만 불어 준다면 말이죠." 약간은 의미 심장한 어조로 말하지만 왠지 그 당사자인 경하는 전혀 눈치를 안 채준다. "그렇습니까?" "예. 로운씨." 오히려 경하의 보호자로 보이는 3명의 남자들의 오묘한 경계선만 더욱더 강해진 것 같았다. 어쩌다가 룬이 경하에게 가까이 가서 뭐라고 말을 할려치면 은그 슬쩍 눈치채지못하게 경하를 데려간 것이 벌써 한두번이 아닌 것 이다. 말로는 룬씨와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하는 기엘이 라고 하는 남자도 마찬가지. 룬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기엘은 절대로 경하의 옆에서 일정 거리이상을 떨어지지를 않는다. 항상 언제나 룬이 살갗이 따끔 거릴 정도로 꽤나 살벌한 기를 내 뿜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열받은 경하가 룬에게 뭔가 실수라고 할까봐 기엘 이 경하를 경계하느라 그러는 것으로 착각했었지만 그럭 착각 같 은 것은 같이 일행이 되어 여행을 시작한지 반나절도 안되어 깨 져버렸다. 경하를 경계하기는커녕 룬을 경계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흐음 분명 꽤나 괜찮은 실력을 가진 기사임에 틀림이 없는 데 말이야.' 기사들이 어느 누구나 그렇듯, 그 역시 기엘이나 로운이 자신과 동류라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 상대방이 뭔가 자세한 것을 밝히는데 상당히 인색하다는 것을 깨 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아주아주 수상해.' 결국 그는 그렇게 총체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보니 여행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뭐 특별한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겁니까? 사실 여행객으로 보기에는…." 슬금 떠보기 위해서 말을 걸어본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습니다. 뭐 세상구경 정도로 해두지요." 하지만 역시 수확은 없다. "룬씨께서 보시기엔 확실히 특이하다고 생각되시겠지만 뭐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저희들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수확보다는 오히려 뭔가 때가 되면 말해줄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는 느낌의 말. 룬은 혀를 찼다. 사실은 궁금한게 산더미처럼 많은데 물어볼수 없다는 것도, 그것 도 완곡하게 거절당하고 있다는 것도 상당히 짜증이 나는 일이 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 다섯 사람의 관계였다. 아무리 봐도 짐작을 할 수 없는 다섯 사람의 관계에는 독특한 위 계질서 같은 것이 성립되어 있었다. 일단 로운과 기엘이라는 남자는 틀림없는 기사 출신으로 짐작이 맡는다면 동갑내기의 친구이다. 그리고 서로 흡사한 외모를 지니 고 있는 경하와 시유는 친남매이거나 친척등으로 혈연관계가 있 을 것이라는 것이 룬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남는 것이 이리야라는 남자. 그 남자가 일단 첫 번째 의문점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외모부터 네 사람과 전혀 다르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 강물처럼 짙푸 른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가 나머지 네 사람에게 모두 편하게 말을 한다. 두 번째 의문점은 로운과 기엘 두사람이 친구인데 한사람은 경하 에게 절대적으로 존대를 하고 한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 물론 기엘은 일행 모두에게 존대를 하는, 그중 제일 예의발라보 이는 남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저 경하라는 소년이다. 분명 혈연 관계같은데도 이름도 틀리고, 무엇보다 시유라는 소녀 와 전혀, 단 한번도 웃으며 대화를 하지 않는다. 물론 시유라는 소녀가 전적으로 무시를 하고 있는 듯 하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경하는 일행중 나이가 어린축에 속했음에도 불구 누구에 게나 반 반말조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다. '역시 뭔가 상당히 이상해.' 이대로 이들을 알리아까지 인도해주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는 고 심하고 있었다. "흐음. 역시 이건 평범한 칼처럼 휘두르기에는 문제가 있군." 경하는 예의 축소형 검 카나린을 들고 이리저리 휘둘러보고 찔러 보고 하면서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말이 여가시간이지 사실은 시간 죽이기다. 혼자서 이상한 녹색의 단도 비슷한 것을 만지는 것을 보고 있던 룬은 옆에 서 있던 기엘에게 정중하게 요청을 했다. "기엘씨." "예?" "저 소년과 좀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휘익--하고 기엘의 눈썹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 온다. "뭐… 특별히 제게 물어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대답이 돌아온다. '역시 무식하게 대쉬하는 것 보다는 이쪽이 이 남자한테는 정공 법이 되는 것이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룬은 기엘에세 살짝 목례를 하고는 경하에 게 다가갔다. "어이--." 룬의 뒤에 기엘이 단 한번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 역시 그는 잘 느낄수 있었다. "………." 경하라는 소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게 보였다. '당신 뭐야?'라는 말보다 훨씬 더 일목 요연하게 룬에 대한 감정 을 옅볼수 있다. "단도는 그렇게 휘두르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말이 지." 씨익 씨익- 되도록 인상좋은 아저씨처럼 보이려고 룬은 열심히 웃었다. "경하라고 불러도 될까? 주위에서 그렇게 부르던데." 그렇게 말하며 룬은 경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룬이라고 불러줘." "…………." 하지만 좀처럼 소년은 입을 열지 않는다. "아직도 내가 여자로 착각해서 화가 나 있는 거야?" "…………." 당연하잖아!! 라는 얼굴. 룬은 너털 웃음을 지었다. "적당히 해줘. 사실 엄청나게 내 부관한테 혼이 났거든. 하도 떠 들어대는 탓에 함구령에다가 금구령 비슷하게 내려놓기까지 했 지. 그녀석이 워낙 잘 떠들어대서 일단 입을 열면 장난이 아니게 시끄러워."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 그는 열심히 노력한다. "아. 일단 내 소개를 좀더 해주지." "…기사라는 것은 알고 있어." 그제서야 소년의 입이 트인다. "그럼 전직 로열 가드라는 것도 알아?" "…로열 가드?" "그래. 내가 원래 하나스의 국왕직속 기사였다 이거야." "로열 나이트랑 같은 말인가?" "오오. 뭔가 좀 아는 걸!" 흥-하고 경하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러니까 말이지. 검술에 있어서는 누구한테도 안진다 이거야." "그래서?" 경하는 귀찮다는 듯이 적당히 대꾸를 했다. 아무래도 생리적인 혐오감이 스물 스물 피어 올라 상대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수였다고는 해도 말이다. "원한다면 단검술 가르쳐줄까?" 그렇게 말한 룬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대신 다리춤을 죽죽 걷 어올리더니 경하에게 이것을 보라는 듯 다리를 쳐보였다. 힐긋하고 경하의 시선이 룬의 다리 쪽으로 향했다. 혐오감은 혐오감, 호기심은 호기심이다. 아무래도 호기심쪽이 혐오감을 누른 모양인지 경하는 어느새 귀 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건 아무래도 단검이라고 하긴 조금 크던데 말이야." "휘두를 만한 건 아니야. 장식품 같은 거랑 비슷하니까." 돌아오는 경하의 대답을 듣고 룬은 그제서야 허리를 폈다. 성공했다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년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 게 하는 것이다. 그것부터 시작하자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왠지 이 소년은 사람의 눈길을 끌어 들인다. 그것은 단순한 외모의 탓 때문 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외모라면 같이 있는 일행 전부가 특이하다. 경하가 룬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와 긴장감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룬이 목격했던 그 이상한 현상까지. "그럼 내 것을 하나 줄까? 이래뵈도 손질은 잘해두거든." "…………." 경하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왜 이남자가 이렇게 자신에게 친절하게 구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자 여기." 경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다리에 고정 시켜두었던 단검중 하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비싼 값이 드는 군. 맘에 들던 거였는데.' 그의 단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단검으로 보이지만 그 래도 하나스 최고의 대장장이라고 하는 자가 만든 명품 중의 명 품이다. "자아. 받아. 선물이야." "…………." "그러지 말고 받아줘. 미안했다는 사과의 선물 같은 것이니까 부 담스러워 하지말고." 스윽하고 룬이 단검을 내민다. 경하는 몇 번이나 갈등을 하다가 결국 그 단검을 받아들였다. 단검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지만 일단 호기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쫌스러운 남자라고 보이기가 싫었던 탓도 있었다. "좋아. 사과 받아드린거지?" "그. 그래." 소년이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하하하하. 원한다면 우리 집안에 전해져내려오는 명 단검술도 가르쳐주지. 화해 기념이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그의 아버지인 리첼 백작이 들었다면 기절 초풍해 할말을 그는 아무런 사심없이 내뱉고 있었다. 별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했지만 사실 리첼 가문의 고유 검술은 상당히 유명한 것으로 그것을 배우고 싶어하는 자들은 수없이 많 다. 하지만 그것을 전수 받는 것은 결국 리첼 가문의 장자와 몇몇 수 제자들 뿐이다. 장검술이 아닌 단검술이라고 해도 아무런 뒷배경도 알 수 없는 소년에게 룬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름대로는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룬은 진심으로 경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탐색을 위해서였지만 몇 마디 말을 나누는 동안 그만 진심이 되어 버렸다. "가르쳐 줄게. 원한다면. 어때?" "…………." "물론 저기, 네 보호자들이 허락해준다면 말이야." "괘, 괜찮아. 내가 하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으니까." 경하의 반응에 왠지 룬은 뿌듯해졌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는 친구로 지내자구. 좋지?" "…………." "남자가 말이야 쩨쩨하게 굴지 말고 대답 좀 해봐. 시원 시원하 게." "좋아." 룬은 경하의 대답에 아주 기쁘게 웃었다. 룬 스스로도 그것을 눈치채고 있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뭐야? 어느새 저렇게 친해진거지." "조금 전부터."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리야는 경하가 룬과 사이좋게(?) 무엇인가 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버렸다. "에헤… 저친구 수완 좋구만. 그렇게 퉁퉁 불어 있던 녀석을 저 정도로 움직이게 하다니 말이야." "단순한 사람들이니까 단순한데서 뭔가 친해질 만한 것이 있을 지도 몰라." "하하하하." 이리야는 어딘가 모르게 상당히 퉁명스러워져 있는 로운을 보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이 어이. 기사양반. 무슨 표정이 그래? 꼭 애인이라도 뺏긴 남자 같다구." "예? 아, 아닙니다. 이리야씨." 로운 못지않게 멍하게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기엘 이 열심히 표정을 감춘다. "흐흐흐흐. 질투구만 질투. 크하하하 재미있어." "이리야씨." "역시나 재미있다니까. 너희들."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리야 역시 왠지 질투심같은 것이 가슴속에 서 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세사람 중 어느 누구도 저렇게 단 시간내에 경하와 친해진 사람은 없었다. "뭐.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주시니 다행일 뿐입니다.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으니까요." 기엘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듯한 말을 하자 이리야는 그런 기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힘들겠어. 기사양반. 기사양반만큼 저녀석 생각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 아참 거기 돌팔이 신관양반도 마찬가지." "………." 세사람이 자신들을 열심히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 모 르는지 경하는 열심히 룬이 하라는 대로 따라하면서 열중해있었 다. "여하튼 재미있는 녀석이라까 저녀석." 이리야가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지었다. *** ----------------계속. ...음음. .개그 커플....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4장 기사와 기사 (10) 하나스의 수도 알리아. 셰비 통산 연합국중 두 번째로 작은 나라인 하나스는 그 국토의 면적 과는 상관없이 연합국 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그것은 가이칸 제국과의 오랜 영토분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때문에 왕국 전체가 완벽에 가까운 전제정치로 다스려 지고 있다. 실제 하나스 국왕 단 한사람에게 있는 실권은 제국의 황제에 필적한다 고 평하는 사가도 있을 정도다. 제국은 황제라 해도 지방 제후들의 세력을 무시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스는 셰비 통산 연합국내에서도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하나스는 군사력이 강한 나라인 만큼 다른 나라와는 조금 다른 관료제 도와 군사제도로도 유명하다. 특히 그중에서도 국왕의 친위대로 알려져 있는 로열 가드라는 것이 있 는데 그들은 최고 귀족의 자제들이나 특급 기사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국왕 직속으로써 군부와는 전혀 다른 세력권을 하나스 내에 가지고 있 다. 그들은 국왕직속의 기사로써 각자의 부대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특별 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국왕 직속이기에 각자의 부대라고 해도 결국 국왕 직속의 부대로 결국 왕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이었다. 로열 가드의 경우 대부분이 국왕과 혈연이 있는 집안의 아들들이 주류 를 이루는데 그중에는 몇 대를 내려오면서 쭈욱 로열 가드로써만 봉사 해왔던 집안도 상당수 있었다. "헤에. 여기 신기하네." "뭐가 그렇게 신기해?" "아니. 그 뭐라고 할까. 그…." 경하는 처음으로 보는 하나스의 수도 알리아의 거대한 성문을 바라보 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아슈레이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한 경하는 어딜를 가든 무엇을 보 든 모조리 신기한 것 뿐이긴 하다. "뭐랄까. 성 전체가 무슨 요새 같아." "원래 왕성보다는 군사적 요충지에 지어진 요새였었지. 65년전에 이곳 으로 천도를 해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헤에." "하나스는 아슈레이의 국가들중에서도 특이한 나라입니다. 경하님. 어 떻게 말하면 나라 전체가 하나의 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하죠." "맞는 말이야. 하나스에서는 3살만 되면 검을 휘두르며 놀거든." 룬이 왠지 자랑스러운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아. 그럼. 어떻게 할건가 모두들. 여기서 헤어질까? 아니면 내가 말한데로 즐거운 우리집에 가서 묵을 건가?" 수도 알리아로 들어가는 대로에서 룬이 팔짱을 끼고는 모두의 앞에 우 뚝 섰다. 며칠밖에 안되는 나름대로는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을 해오는 동 안 룬은 나름대로 경하 일행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일행에게 있어서는 정공법이 최고. 무엇이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쪽이 가장 대답을 받기 용이하다. 룬의 말에 기엘이 로운과 시선을 교환했다. 룬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들은 바람술로 어젯 밤 밤새도록 두사람이 의논하던 모종의 방법에 대해 마지막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역시. 이 사람을 이용하는 쪽이 가장 좋은 방법일거야.」 「그래. 로운. 아무래도 이 난공 불낙의 요새같은 성에서는 저사람의 도움이 필요 불가결할테니 말이야.」 끄덕. 하고 로운의 고개가 움직였다. "실례가 안된다면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자네의 집에 머물러도 될까?" 로운이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룬이 대답했다.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자 카일. 금구령은 풀어 줄테니 어서 뛰어 가. 어머니께 불초 아들이 돌아왔다고 알려줘." 룬이 묵묵히 입을 꾸욱 다물고 있던 남자의 어깨를 퍼엉 소리가 나도 록 쳤다. 순간 마치 얼어붙었던 입이 순식간에 해동 된 사람처럼 쨍쨍 울리는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강렬하게 울려퍼졌다. "푸아------!!! 가. 감사합니다!!! 신 카일! 전광석화와 같은 빠르기 로 저택으로 날아가 백작님과 마님께 이 소식을 알리겠습니다. 아참. 룬님. 절대로 중간에 다른곳으로 눈길을 주시면 안됩니다. 바로!! 바 로 저택으로 곧장 와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 꼭 부탁 드립니다. 절 대로 룬님을 놓치시지 마시고 곧장 저택으로 가도록 종용해주십시오. 까닥 잘못하면 분명히 어디론가 도망치시고 남을 분입니다. 그럼 저는 최대한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 여러분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 다. 아! 이 말 제가 그대로 타고 가도 되겠죠? 아참 룬님. 통행증을 주셔야죠. 예. 그리고 이쪽이 룬님의 것이니까 그럼 요것만 가지고 가 면 되겠군요. 자아 이만 먼저 가겠습니다----아!!"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며칠 동안 하지 못한 말을 미친 듯이 떠들 어댄 카일은 말을 마치마자 정말로 쏜살같이 알리아의 거대한 성문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 "……………." 뒤에 남은 사람들은 카일이 던지고 간 말의 홍수에 휩쓸려 이리저리 방황하느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저분, 당신의 부관이 아니었나?" "아아. 말이 부관이지 사실은 저택의 집사야. 따라오겠다고 해서 부관 겸해서 데러갔을 뿐이지. 으으 여하튼 며칠만에 들으니 더더욱 시끄럽 군. 골이 다 띵해." "헤에… 저렇게 숨도 안 쉬고 말하는 사람 간만이네. 진짜로 숨이나 쉬고 말하는 건가 모르겠어." "뭐 특이한 분이시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기엘도 질렸는지 멀리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 며 한마디 했다. "저어. 저분, 기왕이면 앞으로 며칠 간 금구령을 더 길게 연장해주시 는 것, 고려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하하하하하. 뭘 저정도 가지고 그러는 거야 기사양반? 내가 아는 사람중에서는 쉬지도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떠드는데 온 힘을 다쓰 는 인간도 있었다구. 자아 여하튼 오늘은 좀 편히 쉬겠어. 아무리 여 유가 있어도 배위라는 것은 힘든 공간이거든." "이리야는 물의 술사인데도 배위가 불편한가?" "물 속이 아니거든 배 위는." 이리야가 눈을 찡긋하며 경하에게 대답했다. 룬은 그런 경하를 잠시 바라보다가 기엘과 로운에게 말했다. "자아 그럼. 그 허리춤에 있는 소드들을 풀어서 내 짐쪽으로 넣어둬."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엘이 전직 현직 기사답게 제일 먼저 반응한다. 전전직 기사에 전직 신관 현직 파계신관이며 기사인 로운은 그 다음으로 밀려버렸다. "성문 통과 때문인가?" "맞아. 알리아는 수도지만 아직도 현직 요새거든. 다른 사람들도 아니 고 자네들은 너무 눈에 띄어. 게다가 기사입네하고 증명하다시피하는 그 번쩍거리는 검들은 우리를 일단 구류해서 조사해주십시오라고 하는 소리밖에 안 돼. 그런면에서 내가 당신을 무기를 아예 몰아서 들고가 는 쪽이 훨씬 통과하는데 수월하지." "흐음." 왠지 기엘이 내키지 않는 다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로운은 묵묵히 허리에 차고 있던 라이트를 풀어내 룬에게 내밀 었다. "자네가 융통성이 더 있었지." "필요하고, 쓸만한 것은 이용을 하는 쪽이 이쪽이 수고를 더니까." 비슷하면서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말하나 하는데도지지 않 고 대꾸를 해가며 설전을 벌인다. "흐응. 이용이란 말인가? 만일 내가 이 검을 들고 그대로 튀어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하지?" "그때는 정식으로 절도혐의자로 몰고 도둑잡기를 해야겠지." "흐으응. 아! 거기 이리야씨도 마찬가지. 레이피어를 풀어 줘야겠어." "그. 내 단검은?" "그 정도는 괜찮아. 아참. 아름다운 아가씨 당신 것도 풀어 줘야겠어. " 순간 경하가 몸을 움칠한다. 물론 그 말이 자신이 아니라 이번에는 정말로 시유를 향한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제 검도 말입니까?" "물론." 평소에는 입하나 뻥긋하지 않던 시유지만 이번에는 희안하게도 대답을 했다. "그럼 성문을 통과하신 후 바로 돌려주신다고 약속해주세요." "물론이지. 성문을 통과하고 나서 문제가 없어지면 바로 돌려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구." 씨익--하고 정말로 바람둥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룬에게 시유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건냈다. 그리 크지 않은 쇼트 스워드지만 나름대로 마음의 의지로 삼았던 물건 이다. "꼭 돌려주세요." "물론이라니까." 기엘이 그런 시유의 뒤에 서 있다가 마지막으로 라이트를 풀어 룬에게 건냈다. 나머지 사람들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아 그럼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주방장의 멋들어진 요리로 성대하게 먹겠어. 어이. 경하. 뭔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있어?" "달지만 않으면 뭐든지 좋아." "알았어. 그렇게 전해두지. 그럼 이제 들어가 볼까?" 모두에게서 받은 검을 말의 한쪽에 열심히 묶어 고정시킨 룬이 앞장을 섰다. 경하는 그런 룬의 뒤를 따라가며 품속에 넣어둔 단검을 살짝 어루만졌 다. 천하태평인 표정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불안감 때문에 손이 떨리고 있 었던 것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있던 불안요소가 경하에게는 있었다. '그도… 그 사람도 기사였었어.' 경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룬의 존재였다. '요하엘의 기사 기윤 제나이드 슈히튼.' 경하는 이곳에 와서 자신을 위해 죽었던 첫 번째의 기사를 머리에 떠 올리고 있었다. 경하에게 있어 룬은 마치 기윤이 다른 모습과 다른 성격으로 다시 태 어나 눈앞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와 지금, 상황은 조금 다르면서, 또한 너무나 똑같다. '저 사람은 괜찮을까?'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경하와 관계를 맺으면 서 위험에 빠져버린다. 기엘이 그랬고 로운이 그랬고, 이리야가 그랬다. 그리고 기윤은 그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했다. '그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믿지?' 경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앞에 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경하는 놀라서 두리번 거리며 룬의 모습을 찾았다. "경하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말하나 건너편, 시유의 뒤에서 기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 바로 옆에 룬의 모습이 보이자 경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르다. 분명히 다르다. 경하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괜찮을 거야. 저사람은 기윤이 아니니까.' 경하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다짐을 했다. 적어도 위트와 장난기가 가득한 룬은 그렇게까지 맹목적이 되어 버리 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어느덧 경하의 말이 모두의 말을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래. 그럴 거라고 믿자.' 이곳은 가이칸이 아니고 그리고 요하엘도 아니고, 룬은 기윤이 아니 다. 경하는 몇 번이나 그것을 외우고 또 외웠다. *** "그래. 1년간 고생이 많았구나 룬." "아니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아버님. 그러고 보니 그동안 많이 늙으셨 네요." "예끼 이놈!!!" 시끌 시끌한 환영의 저녁 만찬을 마치고난 룬은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리첼 백작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가 예상한대로 카일은 믿을 수 없는 빠르기로 저택으로 돌아와 거의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직 로열 가드답게 성문 통과도 문제없이 이루어졌고 집으로 돌아오 는 동안에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카일이 믿을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 보아하니 특이한 손님들과 함께 왔던데 그 사람들은 어찌 된 연유로 같이 오게 된것이냐." "아아. 뭐… 재미있어서 말입니다." 싱긋하고 웃어 보이며 아들이 대답하자 리첼 백작은 하얗게 새기 시작 한 눈썹을 활처럼 구부렸다. 이 아들은 실력도 좋고, 배짱도 두둑하고 다 좋지만 성격만큼은 어떻 게 해도 감당해 낼수가 없다. "그렇게 눈썹 구부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님. 특별히 위험한 친구 들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확실히 특이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감당은 못해도 파악은 잘 하고 있는 것이 리첼 백작이다. "네 입에서 특이하다라는 소리가 나오다니 정말 이상한 사람들인 모양 이구나." "뭐 이상하다면 이상하고 특이하다면 특이한 거죠." "행색을 보아하니 미메이라 인들인 듯 싶은데?" "어? 아버님도 미메이라 인들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본적은 있지. 아무래도…. 그런데 어째서 미메이라인들이 저렇게 널 따라 온거냐." "여행을 한다고 하더군요. 뭐. 아무래 봐도 여행 이외의 목적도 있어 보이지만요." "여행 이외의 목적?" "예. 꽤나 비밀 주의 친구들이라 말입니다." "그런." 리첼 백작은 아들의 저 부주의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태평함에 질려버렸다. 당당하게 여행 이외의 목적을 가진 비밀스런 사람들이라 평가하는 사 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택까지 불러드린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위험하지는 않아요. 여차하면 제어할수 있는 약점도 찾아놓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제가 생각하기엔 늦어도 오늘 밤이나 내 일 일찍, 절 따라서 여기까지 온 이유를 그들이 스스로 말하게 될거라 고 봅니다." "태평하구나." "하하하하. 원래부터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 대범함을 다른 쪽에다 좀 쏟아부어주었으면 좋겠구나." "할수 없어요.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말이예요. 아 어머님 주무실 까요? 아까보니 건강상태가 그리 좋으시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 다." "네녀석이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훨씬 오래 살거다. 부디 이번에 는 이웃집 유부녀에게 손대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다오." "하하하하하." 리첼 공작은 지끈 지끈 아파오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아들에게 한소리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영광에 빛나는 로열 가드의 리첼 백작 가문에 저런 성격의 기사가 나 오다니 나름대로는 참 한심한 일이다. 물론 그 아들을 키운 것이 자신이라는 것이 리첼 백작의 두통의 원인 이기에 아들을 원망할 수도 없다. "괜찮다니까요. 이번에는 재미있는 거리를 아예 만들어서 가져왔잖습 니까." "재미있는 거리? 골칫덩이가 아니고?" "예. 재미있는 문제거리죠. 아주 많이요." 리첼 백작은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가서 쉬거라. 먼길 오느라 고생했을텐데. 그리고…." 인사를 하며 일어나려는 아들에게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저들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네가 알아서 처리하기 전에 꼭 내 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구나." 적어도 아들이 사고를 치면 수습할 방도라도 생각해놓아야겠다고 그는 결심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아버님." 룬은 일년사이 관자놀이의 백발이 훨씬 늘은 그의 아버지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그것이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가지는 그의 마음에의 표현이었다. "생각보다는 거물인 듯 싶군요." "그러게. 이 성안에 이정도의 저택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로 저 한량같 은 기사가 로열 가드였다는게 말이 되는 걸지도 몰라." 사실 기엘이나 로운이 제국어의 방언과도 같은 하나스 어를 모르는 것 은 아니지만 그들이 가이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에 비해 하나스에 대한 것은 거의 전무에 가까울 정도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계승로라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가이칸을 종 횡단하는 일이 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전에 이리야를 만났을 당시 이리야가 알고 있는 하나스에 대한 정보와 그리 별다를 것이 없었다. 룬이 하나스의 기사라는 것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지만 룬의 가문인 리첼 백작가가 하나스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는 전혀 파악을 할 수 없었다. "뭐 상관없잖아. 일단 정말로 룬이 로열 가드였다면 하나스의 국왕을 만나는 것도 그렇게 힘겹지 않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나름대로 이리야가 간만에 정확하게 그의 의견을 피력했다. "…………." "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신관양반?" "아니 간만에 옳은 소리를 한다 싶어서." "쳇. 싱겁기는." "그러고보니 시유는?" "하녀들의 안내를 받아서 먼저 쉬겠다고 했으니 지금쯤은 잠이 들었을 거야." "흐음. 로운. 가서 괜찮은지 봐주지 않겠어?" "미움 받는 것 치고는 잘 챙기는 군." 로운이 뜻밖이라는 듯이 경하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챙기는 게 당연하잖아. 나보다 어린데다가 여 하튼 시유의 신변보호를 레이죠 장로님께 인계받은 것은 다름 아닌 나 라구." "호오." "호오가 아니야 호오가. 그러니까 가서 좀 봐줘. 아무래도 로운을 나 름대로는 편하게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 같으니까." "역시 기엘 말대로 호로스에 남겨 놓고 오는 쪽이 좋지 않았을까 싶 군." 왠지 걸리적 거리는 듯한 인상을 떨쳐버리지 못한 로운이 문득 한마디 한다. "이미 어쩔 수 없는 거잖아. 휜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갔다와." "알았어. 그럼 지금 부터는 분부하신데로 하지요. 수장님."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앞 뒤가 틀려!! 앞 뒤가!!!" 로운으로부터 너무나 간만에 존대어와 함께 처음으로 수장님이라는 칭 호를 듣자 경하는 온 몸이 간질 간질해졌다. 하지만 로운은 피식 거리고 웃기는커녕 완전한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아니 틀리지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 부터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오늘 이나 내일 내로 우리들의 목적을 룬 리첼에게 밝히고 하나스의 국왕과 밀담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로운… 닭살 돋아." "다시 말하면 지금 부터는 당신은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즉, 미메이라의 수장으로써 행동하셔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주의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을 마치고 로운은 정식에 정식을 갖추어 경하에게 예를 올리 고 나가버렸다. 남은 기엘과 이리야와 방금 전에 로운으로부터 수장직을 명받은 경하 는 벙찐 얼굴을 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우우. 젠장할!!!! 로운은 왜 항상 저 모양이야! 날 괴롭히고 싶어서 환장한거야!! 정말로!!"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시/안/님." "오오 맞습니다. 괴롭히기는요. 모든게 다 시안님을 위한 일인데요. 암암. 아! 그렇지 이 야심한 밤에 저희들이 여수장님 곁에 있으면 안 되겠지요? 그럼 나이트 기엘. 이만 우리는 나가봅시다. "하하하하하. 그럴까요?" "모조리 짜고 좀 놀리지 말아! 아으으으윽." "놀리는게 아닙니다. 경하님." 경하가 온 몸을 벅벅 긁는 시늉을 할 정도로 괴로워하자 마악 문에 손 을 댔던 기엘이 멈추어서서 말했다. "위험은 이제부터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 "그러니까 저더러 위험부담을 최소한도로 하기 위한 연결고리가 되어 달라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흐트러진 갈색머리와 제대로 여미지도 못한 옷과 부스스한 얼굴. 하지만 반대편에 앉아있는 두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믿을 수 없 을 정도로 말쑥한 차림을 하고 있다. "흐음. 그런 교두보 역할을 해주는 댓가는?" "귀국의 안전. 그리고…." "말은 쉽군. 후우…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으니 잠시 격식은 치워 두 자구." 조금전까지 어깨를 꼿꼿하게 굳히고 있던 룬은 피시식하고 김이 빠져 버린 사람처럼 옆에 있는 커다란 쿠션을 집어 멀리 집어 던졌다. "죄송합니다. 이런 이른 시간에." "아니. 뭐 대충 이때쯤이다라고 생각은 해왔으니까."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올 것이 왔구나하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룬 에게 기엘이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뭐.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하고 있었으니까 내쪽도 뭐 잘한 것은 없다 고 생각해. 하지만 이런 시각은 너무하잖아. 아직 잠도 제대로 못잤다 구." "그것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아…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일 줄은 몰랐는데." 이른 새벽시간. 아직 리첼 백작가의 가솔들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한참 단잠을 자 던 룬은 급습을 받았다. 바로 미메이라의 기사라고 자신들의 신분을 밝힌 남자 두명에 의해서 말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깔끔한 백색의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들 을 보자마자 머리에서 떠날줄 모르고 있던 졸음 같은 것은 모조리 사 라져버렸다. 나름대로는 그들의 장단에 맞추어 대꾸를 하고 있었지만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리자 연극을 하는 것은 포기를 해버렸다. 어제까지 이 친구니 저 친구니 하면서 그럭 저럭 친밀하게 지내던 사 람들에게 그런식으로 말하는 것은 역시 그의 성격에는 맞지 않았던 것 이다. "하기사 날 귀환시키는데는 어느 정도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 지만 그런 것이 원인일 줄은 몰랐어. 참나. 제국 황제도 이제는 별별 생각을 다 하는 군. 뭐 이쪽은 가이칸의 병력 이동 때문이었을테지만. " 로운의 설명은 간단했다. 제국 황제가 무엇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과 부연 설명까지. 제국으로 볼모가 되어 시집을 가야할지도 모르는 시유와 그것을 막으 려하는 자신들에 대해서 대해서 말이다. 물론 약간의 진실은 은폐한 채로. "제국의 황제는 엘러들이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어 줄 것 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흐음."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황제가 원하는 정도의 엘러는 미메 이라 뿐 아니라 각 신국에서도 기사나 신관 이상급의 신분을 가진 사 람이어야 합니다." "라는 이야기는 자네들이 바로 그 정도 되는 능력을 가진 엘러라는 소 리가 되겠지." 대뜸 룬은 핵심을 파고든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모종의, 내게 말 못하는 이유도 있을테고 말이야."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해력이었다. 과연 룬은 며칠동안 경하 일행과 지내며 무엇을 어디까지 파악해버린 것인지 궁금해지는 두 사람이었다. "뭐 미안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목격한게 있거든." "예?" "무엇을?" "그쪽의 도련님 말이야." "경하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푸욱-하고 룬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이 정확하게는 몰라도 꽤나 중요한 인물인 거지?"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맞잡고 있던 기엘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목격했다고 했잖아. 사실 아무리 바람이 잘 불고 유속이 좋다고 해도 폴리카르를 오가는 정기선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알리아로 내려올 수 는 없어. 그녀석이 뭔가 수를 썼다는 것 정도 눈치 못채는 쪽이 바보 라구. 게다가 그 녀석의 장난은 도가 좀 지나쳤거든." "이런…." "뭐. 상당히 생경한 경험이었지 놀랍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며 룬은 처음으로 목격했던 그 기적에 가까웠던 그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말로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었어. 그런 정도의 엘러가 제국 쪽으로 넘어간다면 확실히 하나스는……." 몇가지의 단서로 룬은 가볍게 핵심에 도달해버렸다. "그래. 굳이 내 협력에 대한 개인적인 댓가를 바랄 것도 없는 일이었 어." "…………." "말이 통하니 편하군." 나름대로는 긴장하고 있었던 로운이 피곤한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신국에 손을 대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에 가깝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 는 그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아. 직접적인 위협이 없었다면 신국은 제 국의 수작에 응할 용의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가 미메 이라에 그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면 다른 신국에까지 그 손을 뻗히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그전에 그것을 막아야 한다." "후우… 뭔가 내 능력 밖의 문제가 많군." 룬은 그렇게 말하며 눈꼽을 떼어낸다. 말과 행동의 묘한 언벨런스함이 왠지 더욱더 긴장감을 가져온다. "일이 급하군. 일단은…." "당신은 중간까지의 역할만 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들이…." "아니." 룬은 손을 들어 기엘의 말을 막았다. "나는 중간 역할을 하기에는 줄이 너무 없어. 비록 내가 로열 가드였 다고는 해도 그건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 나보다는 우리 아버지 쪽이 훨씬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될 거야. 아버지라면 우리 젊은 전하와 직 접 만나게 해줄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뭐 그런 의미에서 사람하나는 잘 골랐군. 사람 보는 눈이 좋아 둘 다." 룬은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뭐라고 더 이상 감추거나 꼬아서 말을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는 재미있다는 이유하나로 경하의 일행을 데리고 왔지만 문제 는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진실은 재미를 훨씬 뛰어 넘는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아아. 역시 아버지 말대로 난 뭔가 일을 벌이는데 선수가 되어버린 것 같군. 후우. 참나." 룬은 얼굴을 들고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백의 머리카락과 짙은 은회색의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뭔가 신의 대리인이게 질책이라도 받는 기분이군. 그런 눈으로 보지 는 말아. 아. 하나만 대답해 줄 수 있겠어?" "무엇을 원하십니까?" "당신들 정확하게 정체가 뭐야?" "…………." "미메이라의 비밀스런 사신이라는 헛소리하면 한 대 때려주겠어. 미메 이라의 기사? 단순한 단어로는 난 용납할 수 없어. 그런것 말고 원래 뭐하는 인간인지 그거나 말해봐. 그 녀석에 대해서까지 모조리. 그것 이 내가 협력하는 댓가라고 생각해줘" 룬은 우두둑 소리가 나는 허리를 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려다 보던 은회색의 눈동자가 이제 거의 정면으로 바라다 보인다. "나는 룬 디 리첼, 하나스의 기사다 물론 지금은 그다지 실권은 없지 만말이야. 자아, 당신들은?" 대답을 재촉하는 룬의 말. 그 말에 로운이 천천히 대답했다. "……로운 디 로크레슈. 미메이라의 로열 나이트. 글자 그대로 기사일 뿐이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입니다. 로운과 마찬가지로 로열 나이트입니다." "그리고 그 녀석은 현 수장 계승자로 우리는 그의 보호자의 역할을 수 행중이다." "………!!" 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조금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던 그는 뜻밖의 사실에 당혹해버렸다. "그녀석이 수장 계승자?" "뭐 믿든 믿지 못하든 사실이다." 로운의 말에 기엘이 정색을 하며 덧붙였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 그분은 신의 이름을 잇는 바람의 계승자이며 저희들의 유일한 주인입니다." *** "거창해. 너무 거창해." 투덜 투덜 룬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길고 긴 식탁을 넘어 경하의 귀 에까지 들려왔다. 룬의 투덜 거림은 마치 얼마전의 경하의 그것과도 같아서 투덜거림이 그대로 경하에게서 룬으로 옮아간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지나치게 거창하다구." 그말에는 이상한 울림이 포함되어 있었다. 룬 디 리첼. 그는 기사였다. 분명 기사였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한 사람과 두사람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확 인과도 같은 것이 왠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이다. 스스로 왕국의 기사 따위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뭔가 틀린 점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똑같은 기사와 기사인데 말이야.' 그는 포크를 놀리며 건너편의 경하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가져온 소식은 물론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룬이 원래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말이다. 하지만 그 경악과는 또다른 낭패감이 룬의 사고를 가득 채워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저게 어디가 봐서 수장이니 뭐니 하는 것으로 보이냐구.' 미메이라의 수장이라는 것은 룬의 감각으로는 하나스의 국왕과 같은 느낌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경하에게서는 국왕이라는 느낌이 오질 않는다. 그러나……. '주인이라고 했나….' 어느 기사가 그가 아는 어느 기사가 감히 그들의 국왕을 향해 그런 말 을 할수 있을까? 명예라는 것도, 그 스스로 국왕을 향해 가지고 있던 어렴풋한 경외심 도 모조리 의미가 없는 단어로 느껴진다. '기사와 기사야. 같은….' 그가 경하에게서 느꼈던 이상한, 그리고 지금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 인력 같은 것의 정체가 무엇일지 그는 궁금해졌다. '같은 기사인데 어디가 틀린 걸까?' 분명 맛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그것이 지금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인지 코로 넘어가는 것인지 감각이 없다. '무엇이 어떻게 틀린 것이기에 이런 감정을 맛보아야 하는 거지?' 끊임없이 룬의 상념이 흘러내린다.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에게 의문점과 함께 당혹감으로 다가오 기 시작했다. 그것은 룬에게 있어 하나스에 닥친 가이칸 제국의 위협보다도 더 큰 또 다른 위협이었다. -----------------------------------계속. ...--;; 중간에...장 제목을 잘못 올린것을 발견하고 고쳤습니다. 쿨럭 국왕과 기사는 다음 장 입니다. T_T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5장 국왕과 기사 (11) 높고 견고해 보이는 성이었다. 가이칸의 왠지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황제궁과는 다른, 필요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되고 구획지어진 요새와도 같은 성. 어둠에 둘러쌓이면 마치 그 어두움의 한 부분이 된 것 마냥 그 윤곽선 을 알아보기 조차 힘들다. '헤에…뭔가 참 거시기한 성이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 경하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스펙터클한 액션무비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전히 반대의 뭔가 침울하고 고요하고 그리고 암울한 느낌이 경하에게 전해져오고 있었다. '우울하고 암울해서 절대로 채널 돌려 머리고 싶은 중세 영화 같다구. ' 평소 같았으면 머리라도 벅벅 긁어가며 분위기를 깨버리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 더더욱 짜증이 났다. '하아. 정말이지 팔자에 없는 일은 그만하고 싶다.' 경하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어두운 성안으로 조용히 걸어들어가며 경하는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 렸다. "정말, 룬을 믿을 수 있을까?" "현재로써는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 진다면 모두 저희들 탓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하루종일 방안에 갇혀있다보면 의례 좀이 쑤시기 마련이다. 차라리 타의에 의한 것이라면 그 사람을 원망이라도 하겠지만 현재의 상황은 반은 타의 나머지 반은 자의에 의한 것이다. "하아… 그렇다고 해도 기다리는 거 엄청 지루하네." "연락을 받은 쪽도 편한 심정은 아닐 겁니다." 지루해서 아까부터 침대위를 데굴 데굴 굴러다니고 있는 경하에게 기 엘이 위로아닌 위로를 해본다. "그것으로 위로를 하라는 뜻이야?" "위로가 된다면요. 경하님." "하기사 이 사람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기분이겠지. 벌써 이틀 째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뭐…." 로운과 기엘이 룬에게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청한 것이 벌써 어제 새 벽이다. 그 뒤로 경하일행은 룬과 룬의 아버지 리첼 백작은 코빼기도 볼수가 없었다. 시간이 되면 하녀들이와서 식사시간을 알리는 정도뿐.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미메이라의 정보력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하 나스의 정보력은 만만하게 볼 수가 없으니까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변경지역에 부임하고 있던 룬씨를 다시 수도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나름대로는 하 나스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더 이상 지체하면 아무래도 아셀까지 가는데 무 리가 있어. 역시 너무 늦장을 부렸나." 초초해진 로운이 드물에 손가락 마디를 잘근 잘근 깨물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경하가 조금은 놀랬다는 듯이 말했다. "로운…도 초초해?" "초초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헤에…." 왠지 쓰윽 하고 경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로운은 언제나 여유가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가 저렇게 간단하게 스스로의 초초함을 인정했다라는게 신기했기 때문이다. "일정이 어긋나지 않고,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면 장로님께서 이미 카 드미엘에 도착하셨을수도 있어." 로운이 맞잡고 있는 손이 경하의 눈앞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경하의 눈에 순간 이상한 광경이 비쳤다. '어? 뭔가 나 이상해….' 두근 두근 하는 심장 소리가 몸 안에서 귀로, 그리고 머리로 확대된 다. 육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 갖혀있던 의식이 개방되어 심장소리와 함께 고동치며 퍼져나갔다. "경하님?" 기엘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건… 이전과 비슷한 그런 감각이야.' 오감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뇌에 다이렉트로 전해지는 듯한 초 감각. 경하의 의식이 순식간에 알리아에서 폐이요트 산맥을 너머 가이칸의 넓은 대지로 향한다. 바람을 타고 흘러가던 의식이 무엇인가를 찾는 듯 여기 저기 잠시 머 물고 그때마다 경하에게는 낯익은, 그리고 낯선 광경이 교차해서 슬라 이드 필름처럼 스쳐지나갔다. '푸른 색, 아니야… 이건 좀더 의식에 가까운 것인가?' 오감을 버린 경하의 감각은 지나가는 바람에 담겨있는 인간의 사념마 져 그대로 느껴버린다. 어딘가를 헤메고 있었다. 마치 넓은 광장에서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한 기분. 경하는 그 무엇인가를 향해 마구 달리고 있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내가 보고 싶어하는 건….' 의식의 한구석에서 이제는 무리라고 돌아오라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아니 조금 더… 조금만 더.' 머릿속에 익숙한 물의 색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것은 기억속에 있는 대하 나하르의 색. 그리고 한순간 경하의 의식 속에서 은백색의 점 같은 것이 눈이 부시도록 빛나며 폭발해버렸다. "경하님!!" 감각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제일 먼저 느낄 수 있던 것은 자신의 팔을 거칠게 붙들어 흔들어대고 있는 로운의 팔. 다음은 귓가가 윙윙 울릴 정도로 소리치고 있는 기엘의 목소리. 그리고 시력이 회복 되기 시작했다. "아이고. 죽겠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화내지 마. 아직 제대로 안 돌아왔단 말이야." 감각은 돌아왔지만 몸을 움직일 만한 힘은 돌아오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멍청하게 천장을 보며 누워 있던 경하는 옆에 서 있는 기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 안해도 돼. 이상한 짓 한거 아니니까. 그냥 보고 싶다고, 알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멋대로 움직여 버려서." "무엇인가 보신 겁니까?" "응." 기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카르…모니아 였던가?" 한번 의식이 몸을 떠났던 탓인지 왠지 팔다리가 자신의 것으로 생각되 지 않는다. "우우. 좀더 내가 컨트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거 상당히 힘 드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에 억지로 힘을 넣어 경하는 상체를 일으켰 다. "뭔가 좀더 힘을 덜 소모하고 찾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무지 막지해. 내가 생각해도." "……………." 말을 하다말은 경하를 기엘과 로운이 말없이 바라본다. 그런 두사람을 보고 경하는 체념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괜찮아. 아직 카르모니아에 있으니까.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거 기 이상한 그 뭐더라? 암튼 기억에 남아있는 풍경이 있는데 그게 보였 거든. 거기에 있어." "카르모니아에?" "응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그이상은 나도 모름. 끝이야." 경하의 말을 듣고 로운은 생각에 잠겼다. 카르모니아는 제국의 수도 카드미엘에서 대하 나하르로 연결되어 있는 북쪽 도시의 이름이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울 거리다. "약간의 시간은 있는 것이겠군." 생각보다 하라스다인 장로는 훨씬 더 카드미엘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카르모니아에 머물고 있는 것이면 아직 늦은 것은 아니라고 그 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똑똑---- "………." "나야. 룬." "아아."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렀다. 갈색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무엇인가의 정복같은 것을 입은 룬이 문 밖에 서 있었다. "두 사람. 그이상은 불가능해." "…………." "어서 준비해 줘. 시간이 없다." '후우….' 경하는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쪽에는 비슷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는 룬이 보인다. '기엘이 걱정 많이 하고 있겠군.' 룬의 말에 의하면 원래 하나스의 국왕 가놋 2세가 만나보겠다고 한 것 은 바로 다름아닌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 단 한사람 뿐이었다고 한 다. 그것을 룬이 어떻게 손을 써서 한사람더 그를 알현하는 것을 허락 받 았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경하와 함께 가놋 2세를 만나는 것은 로운으로 결정되었다. 기엘 역시 같이 행동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했지만 로운의 설득으로 어 렵게 포기를 시켰다. 끝까지 성 앞까지라도 같이 가면 안되겠느냐고 애원아닌 애원을 하던 기엘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일단 누군가와 만나 협상을 하는 것은 자신보다는 로운이 훨씬 낫다며 스스로 양보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경하의 옆에서 떨어져야 한다 는 사실을 쉽게 받아 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은 경하도 못내 불안했다. 로운을 못 믿는 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로운을 비롯 일행과 떨어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심리적인 불안감 같은 것. 머리보다는 몸이 느끼는 그런 위화감 같은 것이 있었다. '기엘한테 아무 일도 없겠지?' 주먹을 꾹 쥐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래 아무일도 없을거야. 아무일도….' ***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로운."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딱딱한 대답이 들려온다. 아마도 뒤에 서 있는 리첼 백작의 귀를 의식해서 일 것이다. 그들을 성 안까지 안내해온 룬은 리첼 백작에게 그들의 신병을 인도한 후에 그대로 돌아가버린 듯했다. 로운과 경하가 안내된 곳은 궁 안 꽤 깊숙한 곳에 있는 일종의 안전실 같은 곳이었다. 들어오며 경하가 느낀 것은 아주 가벼운 위화감 같은 것. 아마도 뭔가 바리어 같은 것이 쳐져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경하는 생각 했다. 실제 그곳에는 하나스의 궁정 마법사가 차음력(遮波力)을 가진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중에 물어볼게 별 것 아니니까." 문득 이제 만나게될 하나스의 국왕 가놋 2세에 대해 미리 이것 저것 물어둘 것이라며 경하는 뒤늦게 후회를 했다. 아무리 밀사 비슷한 입장에서 만난다고 해도 역시 만나야 할 상대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은 불안하기 그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후우…." 약하게 빛나고 있는 불빛이 어른 어른 거리며 꽤 넓어보이는 공간에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키리엔이었다면 저런 약한 등불대신 라이트 구를 만들어 띄워 올려놓 았을 것이다. '등잔이니까 오히려 더 으슬 으슬 하군. 쳇.' 머엉하게 불꽃이 만들어 내고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사이로 조금은 왜소한 몸집의 사람이 나타났다. '저 사람인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서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 왜소한 몸집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풍채 좋은 남자가 한 명 더 안으로 들어섰 다. "전하." 풍채 좋은 남자를 향해 옆에 서 있던 리첼 백작이 말했다. "그래. 리첼인가." 살찐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왠지 거미의 발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듯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게에… 몸매는 40댄데 얼굴은 왜 20대인 거냐.' 하나스의 국왕 가놋 2세를 본 첫인상에 경하는 마이너스 점수를 주고 있었다.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라 들었는데…." 반지를 낀 손가락이 톡톡 대리석으로 된 탁자를 두들기고 있었다. 반지가 대리석에 가끔 부딧힐 때마다 차음력결계로 보호되고 있는 방 안에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시안 리에 디 하로이옌 미메이라입니다." "내 눈앞에서 증명해 보일 수 있소?" 대답대신 돌아오는 것은 조금은 퉁명스러운 질문이다. "머리카락과 눈의 색으로는 당신이 미메이라인인 것은 증명할 수 있으 나 수장계승자임은 증명할수 없지." "어떤 식으로 증명 해 보이길 원하십니까?" 증명서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내가 알기로는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는 상당한 수준의 엘러라 들었 소." "………." 도대체 뭘 어떻게 증명해 보이라는 걸까? 앞에서 거창하게 바람의 술 을 써보란 소리일까? 경하는 잠시 속으로 망설였다. 옆에 앉아 있는 로운 역시 경하에게 어떤 어드바이스를 주어야 할 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자청해서 경하의 보좌를 맡은 인물이다. 그는 경하에게 어드바이스를 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뭐. 원하신다면야 뭐든 해 보일 수 있지만. 여긴 장소가 좀 곤란스럽 군요. 하지만 그 전에…." "그 전에?" "제가 전하께 가놋 2세가 맞느냐고 묻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런 무례한!!" 왜소한 몸집의 남자가 불쑥 무슨 실례냐면서 질책한다. 하지만 로운은 주눅이 드기는커녕 당당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같은 말을 돌려드리고 싶군요. 시안님께 수장계승자가 맞느냐고 물으 셨으니 말입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으으. 로운 무슨 생각이야.' 가능하다면 옆구리라도 쿡 찔러보고 싶지만 넓은 탁자가 그것을 방해 한다. 경하는 남몰래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적성에 안 맞아. 적성에.' 경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가놋 2세와 눈이 마주쳤다. 다음 순간 경하는 가놋 2세의 표정이 희안하게 풀어지는 것을 목격했 다. "믿으라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하. 하하하하하하." 통통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들이 웃음짓고 있는 가놋 2세의 얼굴을 가린다. "재미있군. 아하하하하. 간만이야. 이렇게 재미있는 일은." '뭔가 성격이 이상하게 룬하고 비슷하잖아.' 경하는 끊임없이 웃어대고 있는 가놋 2세를 바라보며 궁시렁 거린다. "뭐 좋소. 어찌되었든 믿어보는 것으로 하지. 믿지 않는 다면 아무것 도 성립할수 없는 것이 이런 관계가 아니겠소." "감사합니다." 바짝 긴장했던 로운의 어깨가 눈에띄게 풀어지는 것이 보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 로운을 보고 있던 경하는 순간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뭐. 이정도는 괜찮겠지?' 슬그머니 탁자 아래에 있던 손을 들어올렸다. 경하가 무슨 일을 하려나 싶은지 그곳에 모여있는 나머지 4사람의 시 선이 경하의 손에 집중되었다. "라이트 온(light on)." 짧은 시동어와 함께 경하의 손바닥 위해 눈부시게 빛나는 구체가 떠올 랐다. "………!!" "올라가." 마치 애완동물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경하는 가볍게 그 구체에게 명령 했다. 그러자 명령을 받은 구체가 마치 대답을 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가 볍게 떨리더니 둥실 둥실 그 크기를 더해가며 천정으로 올라가기 시작 했다. 끝까지 올라간 구체는 조금 더 크기를 더하더니 환하게 대낮처럼 내실 을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헤헷. 일석이조다.' 밝아지기 시작하자 눈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 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한 왠지 침침하던 시야가 밝아지자 기분도 함 께 밝아졌다. "그냥. 어두워서요." 아무말도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놋 2세에게 경하가 생긋 웃 으며 말했다. *** "미메이라에서 사신이라고?" "예. 공식적인 것은 아니나 꼭 전하를 알현하길 원하고 있사옵니다." "흐음." 하나스의 국왕 가놋 2세는 품안에서 놀고 있던 흰색의 털을 가진 동물 을 살짝 밀어냈다. 고양이와 비슷하게 생긴 그 동물은 잠시 가놋 2세를 원망스러운 눈초 리로 바라보더니 이네 체념이라도 했는지 꼬리를 말고서 어디론가 사 라져 버렸다. "사신이라… 이례적인 일이로군. 그래 용건은 무엇이라 하는가." "가이칸 제국의 행방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가이칸 제국? 신국에서 가이칸 제국에 대해서라고?" "얼마전 제국의 병력이 미메이라와의 국경 부근으로 이동한 일이 있었 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인 듯 싶습니다." "흐음…." 가이칸과 국경을 마주대고 있는 하나스로써는 항상 가이칸 제국의 병 력 이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물론 전대의 황제가 평화로운 문치주의를 제창하고 있었기에 국경 근 처의 긴장은 완화되어 있었지만 몇 년전부터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황 태자에 대한 정보는 하나스가 단 한순간도 가이칸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었다. 글자그대로 호전적이라 평가받는 황태자 로렌. 그는 아직 정식으로 황제가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그의 군사를 심 상치 않게 여지저기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제국의 전황제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지 마자 하나스는 긴장상태에 돌입했다. "신국이라고 하니 조금은 당혹스럽군." "정확한 것은 전하를 직접 뵙고 의논을 해보고 싶다고…." "정확한 것이라고 해봐야 별것 있겠나. 하지만 흥미롭기는 하군. 좋아 만나보겠네." 환하게 반짝이는 빛의 구를 보며 잠시, 가놋 2세는 자신이 뭔가 가볍 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생각보다는 심각한 일이 아니었을까하는 후회 에 빠졌다. 그에게도 직속 마법사쯤은 있다. 마스터급은 얼마 없다고 해도 궁정 마법사 따위 찾으면 발에 채일 정 도로 많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렇게 가볍게 마법-실제로는 마법이 아니겠지만- 을 쓰는 자를 본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간단한 시동어만으로 말이다. 눈앞에 있는 저 시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메이라의 수장은 분명 바람 의 술을 쓰는 엘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것은 바람술 대신 가벼운 마법의 여흥.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재미있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가놋 2세는 가볍게 대화를 진행시키며 긴장을 풀었다. 자신이 이런 어린 아이에 불과한 상대 앞에서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설사 이들이 가져온 소식이 믿을 수 없는 소식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 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분명 가이칸의 그 얼간이 황태자가 하는 일에 대한 것이라 전해들었소만." "…………." 로운이 살짝, 경하의 눈치를 살핀다. 자신이 먼저 나서도 될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다. 가놋 2세의 질문에 경하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다. '후우… 일단은 내가 말하는 쪽이 좋겠지.' "가이칸이 미메이라와 합병될 수도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로운이 입을 마악 열려는 순간 경하가 너무나 단도직입적으로 가놋 2 세에게 질문을 해버렸다. "합병?" "예. 합병이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질문은 간단했지만 대답은 간단하게 돌아오지 않는다. "합병이라고 말했소?" "예. 합병이라는 단어 모르세요? 1더하기 1은 2. 간단하잖아요." 한나라의 국왕에게 무슨 실례되는 말을 하고 있는지 경하는 과연 알고 있을까? 로운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심정이 되어 말하는 폭탄이 되어 가고 있는 경하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다. "국가간의 이야기라면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3이나 4가 될 수도 있 다라고 대답해드리면 만족하겠소?" "아하하. 말이 통하네요." 경하는 뭔가 자신이 전달하려던 이미지가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손뼉을 따악치며 기뻐했다. "저… 어, 로운. 내가 저사람 뭐라고 부르면 돼?" 주위의 눈은 아랑곳 하지 않고 경하가 멋대로 로운에게 질문을 했다. "예? 그게 그러니까." 로운은 순간 당황해버렸다. 과연 미메이라의 수장이 하나스의 국왕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한단 말 인가. 경하가 똘망 똘망한 눈으로 로운을 쳐다봤지만 좀처럼 대답을 돌려줄 수가 없었다. 그때 가놋 2세가 도움의 손길을 뻗혔다. "그렇군. 수장과 국왕이라…. 이렇게 하면 어떻소 미메이라의 수장." "………???" "짐의 이름은 이제라그. 이제라그라고 불러주면 좋겠네. 대등한 관계 에서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대등?" "친구라고 표현하면 되겠나?" "전하!! 그런 말씀을." "가만히 있게 리첼 백작." "하나스와 미메이라의 비공식 정상회담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 요?" 경하는 얼마전부터 생각해오던 단어를 살짝 입에 올려보았다. 물론 회담내용은 책임질 수 없지만 말이다. "물론." "그럼 좋아요. 이제라그." "………." 한나라의 국왕의 이름을 뻔뻔하게 불러 제낄수 있는 것은 역시 경하가 이세계의 인이기 때문이 가능한 만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인에게서 허락받은 건데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고 경하는 가 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죠. 가이칸 제국의 황제가 내 동생 시유를 볼모로 달 라고 하고 있습니다. 시유랑 결혼해서 지참금으로 미메이라의 엘러들 을 요구하고 있어요." "……………." "나는 시유를 그 느끼한 황제에게 시집보낼 생각은 전혀 없고, 내 기 사들을 다른 사람에게 줄 생각도 전혀 없어요." 사실 시유보다는 경하 스스로가 대상이지만 그말만큼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경하는 열심히 시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으음…." 경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우우. 차라리 머리를 총으로 맞는게 낫지. 진짜 단어가 달리는 구만 단어가!!' 그의 기분은 지금 대통령 앞에서 앞으로의 정세에 대해 논평해보라는 명령을 받은 기분이다. 돌아가면 책이라도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경하는 일단 다짐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야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제국의 군사력에 미메이라의 힘이 더해진다라고 가정하면 어떻게 하 시겠어요?" "더해진다라…." "그것 뿐만이 아니죠. 제국이 미메이라에 손을 댄다는 소리는 다른 신 국에게도 똑같은 짓을 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됩니다. 으음. 현재 아슈 레이는 가이칸 제국과 다른 나라들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평화 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세력의 균형에 틈이 생길수 있다는 소리예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너무나 어려운 말을 너무나 가볍게 경하는 설명해나가고 있었다. "가이칸 제국이 미메이라에 뻗은 손을 거둘수 있도록, 하나스에서 지 원해주세요." "그래서 하나스가 미메이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뭔가?" 적잖게 놀라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라그는 여유를 잃지 않는 표정으로 경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난 정보라면 엄청난 정보다. 그동안 제국내에서 이상하게 연속적으로 일어나던 잦은 군사이동의 원 인이 가닥가닥 손가락에 잡히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또한 확인 불명으로 의심하고 있던 몇가지의 정보가 왠지 하나 하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신국인에 의해서.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경하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하지만 당당하게 그는 이제라그에게 협력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의 국왕으로써, 국왕이라 이름 붙진 않았으나 미메이라의 국왕 과도 다름 없는 인물에게 이렇게 까지 솔직한 말을 듣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아. 정말이지 룬과 똑같은 소리를 하네…." 이제라그가 솔직한 심정으로 경하에게 감탄하고 있는 동안 경하는 투 덜 투덜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다들 똑같아."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어야한다는 진리라고 말해두지." "…………." "그렇지 않은가?"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겠다면요?" "협상 결렬." "…………." 로운이 눈을 감았다. 물론 수습할 시간은 아직 있다. 하지만 역시, 경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무래 도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대로 돌아가서 내 동생을 가이칸 제국에 시집보내고 우리 기사들을 전부 가이칸 황제한테 보내면 만족하시겠어요 이제라그?" "…………!!!"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못하니까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못 도와주겠다면 차라리 저쪽에 협력해 버리는게 몸에 좋으니까 어쩔 수 없잖습니까? 발악하다가 죽느니 시유한테 가서 제국의 황비로 화려 하게 살라고 해도 되고."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로운은 버럭 소리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부르르르 떨면서 참는다. "과격하군." 이제라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경하는 한마디도 지지않고 오히려 그만 흥분해버렸다. "당신이 짜증나게 나오잖아. 이쪽에서는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 거야. 대가? 제국이 하나스를 침공해올 판인데 무슨 대가는 대가!" "…………." "아악. 그냥 확 쓸어버리면 소원이 없겠네. 로운 가자!! 에라이. 그러 니까 정치적 협상이니 뭐니하는 것은 나랑 안맞아. 그냥 내 식대로 하 는 게 좋지. 이판 사판 팝이 육판이야. 어떻게든 발악하면 안될 것도 없어." "진정하십시오 시안님." 로운이 벌컥 벌컥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경하를 뜯어 말린 다. "이거 놔!! 로운!! 돌아갈래. 차라리 제국으로 가서 단판을 지어버리 는 쪽이 빠르겠어. 협상은 무슨 협상이고 자시고야." "시안님!!" "그대의 주인은 상당히 과격하군. 로운이라고 했나? 미메이라의 기사 여." "………." "맘대로 로운 이름 부르지마. 이제라그." 그러는 자신은 남의 나라 국왕의 이름을 마음대로 불러 제끼고 있다. "맘대로 부르지 말란 말이야!! 이녀석은 내 꺼야!! 내 기사라구! 이제 라그 당신은 룬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나 잘 챙겨!!" 엉뚱한데 화풀이를 하기 시작하는 경하. 조용하던 내실이 순식간에 술렁 술렁 거리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물고 '정상회담'을 지켜보던 리첵 백작과 또 한사람, 미루 네 후작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놀라 이번에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엉망진창이 되기 직전, 흥미로운 눈으로 경하를 지켜보고 있던 이제라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어린아이같이 솔직한 경하에게 이제 경탄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 다. 자신도 누군가를 향해 저렇게 솔직하게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말을 들어줄 기사에 그에게 있을까? 저 방약무도하도록 강대한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아. 흥분하지 말게나. 그대의 기사를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시안." "…………."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가? 그래. 그건 우리 하나 스도 마찬가지겠지. 협력이 아니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까.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사과를 하지. 내 실수였어." 깔끔하게 이제라그가 사과를 해온다. 이번에는 그의 신하들이 턱이 빠지게 놀라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진정하고 좀더 자세하게 내게 이야기를 해줄 수 없을까? 한 나라와…." 그의 눈이 자신의 신하들과 로운의 사이를 맴돈다. "신하들과, 그리고 기사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으로써…." 마지막 말은 이제라그의 진심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한마디였다. ------------------------------------계속. 이번 장은 좀 짧습니다. *_* 이벤트. 성원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시면 좋겠네요. ..뭔가 특이한 사연들이 한두가지.. ...즐겁습니다.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6장 마음속에 묻는 질문 (12) "기사라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기사요?" "그래. 기사." "으음. 검을 쓰고, 그리고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살고, 시합 같은 것의 승리는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뭐 이런 거 아닌가 싶은데요." "………하하하하. 걸작이군." 웃음을 터트리는 이제라그를 보며 경하는 이사람이 뭔가 잘 못 먹었나 하는 얼굴을 해보였다. 기사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해서 대충 생각나는데로 대답해 줬더 니만 사람의 얼굴에 대고 저렇게 국왕이라는 사람이 체통도 없이 웃어 재끼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그렇게 생각한다면 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군." "그런 말?" "그래. 로운이라도 했던가? 그대의 기사 말이야." "아아. 로운이요? 로운 말고 하나 더 있어요. 기엘이라고." "흐음." "아. 그런데 이거 하나 더 먹어도 되요?" "맛있는가?" "생각보다 입에 잘 맞아요. 배도 고프긴 했지만." 밖에 복도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로운은 생각나지도 않는지 경하는 열심히 눈앞에 차려진 진수 성찬을 집어 먹느라 정신이 없었 다. 신나게 이제라그에게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퍼부은 후, 경하는 요 이 삼일동안 긴장해 있느라 제대로 못먹었던 것을 보충이라도 하는 듯 싶 었다. 경하를 재미있게 여긴 이제라그가 시간이 괜찮다면 자신과 식사라도 한끼 해달라고 권하는 바람에 야심한 시각에 그 둘은 마주앉아서 야참 을 먹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리첼 백작의 집에서 이제나 저제나 경하를 기다리고 있는 기엘 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삼백미터 정도는 족히 뛰어 오 를지도 모른다. 사실 멀리 기엘에게 갈 것도 없이 문 밖에 리첼 백작과 그의 아들인 룬과 함께 서 있는 로운은 애가 타다 못해서 끊어질 지경이었지만 문 안의 두 사람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로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아까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요 이제라그." "뭐가 궁금한가?" "몇살이에요?" "하하하하하. 그러는 시안은 몇 살이냐고 물어도 실례가 안될까?" "열 입곱. 곧 열 여덟이 되요." 그렇게 말하고 경하는 눈앞에 있는 커다란 훈제 고기 덩어리 하나를 입에 꾹꾹 밀어넣었다. 실로 경탄한 만한 식욕이었다. "나는 몇 살로 보이지?" "목아래는 40대. 목위는 20대." "이런. 신랄하군." "살 좀 빼세요. 중년도 안되었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찌면 성인병걸려 요." "하하하하하." 세상에 어느 누가 국왕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정말 정확하게 몇 살이예요." "그대보다 딱 12년 위." "헤에……." "국왕이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힘들어서 말이야. 먹을 것이라도 이것 저것 먹지못하면 신경이 버티질 못하지. 그러다보니 이렇게 되었네." "스트레스 성으로 먹는 거면 더 나빠요. 운동을 하세요 차라리. 아니 면 룬한테 검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던가. 생각보다 운동이 많이 되더라구요." "호오…." "그 아저씨같은 반응부터 좀 집어 치워요. 아직 30대도 안되었는데 왠 할아버지들처럼." 그리고 벌컥 벌컥 벌컥 물을 마셔대는 경하. "아. 아하하하하.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녕 그대밖에 없을 것이 야. 하하하하." 이제라그가 배꼽을 쥐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런 말투가 점점 더 할아버지 같이 보이게 하는 거라구요. 이제라그." 그러면서 또 한입. 경하는 앞에 놓인 고기 한점을 더 집어 먹었다. "날이 밝아오는 군." "그러게요. 슬슬 졸리기도 하고. 아마 기다릴 거예요." "누가?" "기엘이랑, 이리야랑. 시유랑. 그리고 로운도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이제라그는 경하에게 이것 저것 물어가며 내 내 웃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행이 많군." "뭐.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그 기엘이라는 사람은 그대의 기사라고 했고 하나는 동생. 그럼 이리 야라고 했나? 그는 어떻게 되는 사이지?" 이제라그가 하나하나 짚어가며 묻는다. "뭐 그냥 친구라면 친구고 그 사람이야 말로 어쪄다보니 일행이 되었 는데 따라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죠. 달리 갈데도 없는 사람 같고. " "어째서?" "제국에서 엘러들을 모아서 좀 이상한 훈련을 시키면서 혹독하게 당한 모양이더라구요. 도망치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났어요." "우연히라…." "예. 우연히. 뭐 그런 것 치고는 길게 지속되고는 있죠." "그대에게는 우연이라는게 행운인가보군. 시안." "글쎄요. 하하하하." 이제라그는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일까? 경하는 어딘가 모르게 생각에 잠긴 이제라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 았다. 자신처럼 대리가 아니라 진짜로 국왕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느낌은 어딘가 모르게 이전에 보았던 그 로렌이라고 하는 제국의 황제 와 비슷한 느낌이다. 물론 로렌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국왕이라는 거 힘들죠?" "그렇게 보이나?" "스트레스로 그렇게 살이 찐다면 확실히 힘들어 하는 것으로 밖에는 안보여요. 그리고 나도 비슷하게 하고는 있는데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특히 기엘이나 로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내가 정말 이러고 있어도 되는가 싶기도 하고." "그들은 그대에게 충성을 다하는 좋은 기사인 듯 싶던데?" "그러니까 더 힘들죠. 차라리 그냥 지나치는 사람 같으면 힘들기는커 녕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더 편하게 대할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그 렇지가 못해요. 뭐 이리야도 조금은." "어떤 점이 그렇게 힘들다는 건가?" "으음…." 단둘이고, 그리고 한밤중의 고요함 속에서 대화를 나누어서 인지 경하 의 이제라그에 대한 경계심은 많이 완화되어 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유는. "말끝마다…는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사람들, 아마 목숨이라 도 내놓을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실제로도 그렇고. 그런 느낌 알고 있 나요?" "어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이 차례 차례 더해지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요." "때로는 그런 운명을 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지." "난 그런 거 부담스러워요. 가능하다면 도망치고 싶을 만큼." "그럼 도망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는 이제라그는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자기도 모르게 경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경하의 표정을 가려준다. "무슨 이유에서든, 그 사람들은 날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테고, 나는 그에 부응 할 수 밖에 없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 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런 자리에 있는 것도 굉장히 부담스럽죠. 기 왕이면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요. 자신도 없고." "……………."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그들이 바라는데로 하고 있는 거예요. 정말이 지 그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눈을 보고 있으면 안하고는 못배기죠. 하 하하하." "그것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들이 멋대로 그대에게 충 성을 하고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을 해주기 바란다니 너무 이기적이네." "그렇지 않죠. 그들은 정말로 진심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요. 모두를 위해서. 나 역시 로운이나 기엘이나 이리야가 좋고, 기 왕이면 그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해주고 싶어요.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헤헤헤헤." "자네는 행복해보이는 군." "그런가요?" "그래.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행복해보여." "하하하하. 로운이 그말을 들으면 웃어버릴 걸요? 맨날 나더러 투덜 거린다고 하니까. 아 맞아." 로운을 떠올리자 문득 경하는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나 이제라그 당신으로부터는 제대로된 약속 하나도 받 아내지 못한 것 같은데 어쩔거예요? 도와줄건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원하지?" "다 설명했잖아요. 제국이 미메이라에 손대지 않도록 도와달라구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원하냐고 묻는 걸세." "…………." 경하는 생각에 잠겼다. 로운이라면, 기엘이라면 과연 이럴 때 어떤 대답을 할까? "구체적이라고 하면 설명하기 힘든가?" "…아니요. 으음. 그러니까 무력지원이라고 하면 되는 건가 싶은데." "무력지원이라." "가이칸의 황제가 미메이라에 무력 행사를 하려고 할 때 도와주세요. 뭐 실제로 전쟁같은 것이 안 일어났으면 하는 심정이니까. 이제라그 당신이 우리는 미메이라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겠다 라고 입장 표명을 해주는 정도로도 족하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말하는 건가?" "글쎄요. 하하하. 아마 로운이나 기엘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라는 생 각이 들어서요." "그대는 좋은 군주군." "하하하. 기엘은 몰라도 로운은 절대로 그말 안 믿을 걸요?" 아마 절대로 안 믿을 거라고 경하는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아. 뭐…. 어느 정도는.' *** "그게 정말입니까?" "응. 힘들겠지만 최대한 돕겠다고 했어." "…………." "…………." "재주 하나 좋군." 입을 다문 두 사람의 기사대신 이리야가 간단하게 논평을 끝낸다. "여하튼 이로써 하나스에서의 용무는 끝. 다음은 아셀 제국인가?" "너무 쉽게 해치우니까 맥이 빠지잖아.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 떠나자 구. 내일." 벌러덩. 이리야가 널따란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젠장!! 밤새도록 무슨 일이 있을까 초 긴장을 하고 기다렸더니 온 몸 이 쑤셔온다구. 죽어도 오늘 출발 못하니까 내일 가. 내일!!" 이리야가 소리치기 무섭게 기엘도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후우…." "기엘 어디 아파?" "하. 하하하 아닙니다. 이리야의 말에 동감을 표하고 싶을 뿐입니다. 경하님." "뭘 그래. 나도 한다면 한다구." "한다면 뭘 하긴 해. 정말이지. 그때 기엘 너도 봤어야 했어. 하나스 의 국왕 앞에서 무식하게 소리를 지르는데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 다. 십년 감수 했어." 밤이 새도록 경하가 이제라그와 대화를 하는 동안 내리 잠 한숨 못자 고 경하를 기다렸던 남자는 기엘이나 이리야와는 또 다른 허탈감에 몸 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애가 타서 끊어질 것 같은데 희미한 바람 줄기를 타고 들려오는 웃음 소리에 깜짝 깜짝 놀라며 기다리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마에 핏대 가 오를 지경이다. "뭐야 다들. 남이 애써서 밤새도록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스왕의 무력 지원인지 뭔지를 약속 받아왔는데." "과정이 너무나 비정상적이다." "뭐가!!" "어떻게 그따위로 협박을 할 수가 있어!! 하나스의 국왕이 그나마 마 음이 넓어보였으니 다행이지. 정말이지 생각만해도 아찔하다구." 로운이 치가 떨린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이 그랬다. 속알맹이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경하는 신국 미메이라의 대표. 그런 인물이 그렇게 '저속한' 언어들을 하나스의 국왕과 리첼 백작앞 에서 마구 퍼부었으니 사실은 눈이 깜깜할 지경인 것이다. 그나마 경하나 어떤 짓을 어떻게 했는지 결과물 하나는 멋들어지게 나 왔으니 안심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결과물이 좋으면 된거지 뭐. 과정을 떠올리는 것은 생략해줘 로운. 흐흐흐흐흐." 사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경하로 써는 결과물이 좋으면 다 좋다! 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사실 나도 엄청 졸리니까 이만 보고는 끝. 이제 잘래. 떠나는 것은 내일로 하자." 그렇게 말하고는 경하는 이리야가 드러누워 버린 침대대신 널따란 의 자로 가서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말은 안했지만 경하역시 만만치 않게 긴장했던 탓에 온 몸의 뼈가 자 주 독립을 외치고 근육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제라그가 아셀 제국의 황태자와 아는 사이라고 했어. 그에게 소개 장을 써준다고 했으니까." "………!!" 그것이 정말이냐고 기엘이 로운에게 물었다. "로운 정말이야?" "내가 알게 뭐야. 저 녀석이 들은 건데." "내일 아침에 인편으로 보낸다고 했어. 그럼 난 잔다." "경하님." "잔다니까. 나. 다들 나가."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경하는 그대로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다. "하아. 정말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수가 없군요." "그러게 말이야." "경하님. 침대로 가서 주무십시오." "…………." 그나마 기엘이 경하를 걱정해 말을 걸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경하님?" "일어나지 못할 거야. 그대로 자게 해둬. 밤새도록 하나스의 국왕과 이야기를 했으니 졸리기도 하겠지. 어이 이리야! 일어나!!" 로운이 한숨을 내쉬며 이리야를 발로 차서 일으켰다. "뭐야!! 나는 잠도 못자나." "저녀석의 침대잖아. 기엘 이쪽으로 옮겨줘. 그런데서 자면 틀림없이 있다가 일어나서 아프다고 아우성을 칠테니까 옮겨두는게 좋을 거야." "그래." 기엘은 조심스럽게 의자위에 몸을 새우처럼 오그린 채로 잠이 들어버 린 경하를 조심스럽게 안아올렸다. 긴 은색의 머리카락이 얼굴에서부터 아래로 흘러내린다. "과정이야 어쨌든 간에 큰일을 해내신것이로군." "그래. 머리가 아찔해지도록 놀라울 따름이지." "하하하. 경하님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로운." "두번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기엘. 네가 직접 그걸 봤어야 해." "그래?" "그렇다니까. 하나스의 국왕 앞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시유를 제국으로 시집보내고 미메이라의 기사들을 전부 제국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 을 했다구 그녀석." "……그건 좀 심하군." "그뿐인줄 알아? 그말이 안먹히는 것 같으니까 가서 그냥 제국의 황제 와 담판을 내던가 확 쓸어버리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까지 서슴치 않고 했어."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런데 했다니까." "재주도 좋아. 역시. 그렇게 말하고도 지원을 약속받아 오다니." "…………." 세사람이 자신의 행적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경하는 들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기엘이 자신을 안 아올려 침대에 눕힐 때도 손까락 하나 까 닥하지 못할정도로 골아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하는 오후 늦게 룬이 뜻밖의 소식과 함께 그들을 찾아올때까 지 단 한번도 깨지않고 깊은 숙면을 취했다. ***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룬씨?" "뭐라고 하기는. 아셀까지 동행하겠다고 했어." "룬씨. 설명을 해주십시오." 기엘이 방금 들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룬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일단 이것부터. 자." 룬이 경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전하의 친서." "헤에." "인을 뜯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소중하게 간직하래." "아아. 이제라그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꿈틀. 순간 룬이 몸을 경직 시킨다. 아버지인 리첼 백작에게서 전해듣기는 했으나 실제로 경하의 입에서 그가 섬기는 하나스의 국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는 것은 역시 충 격이지 않을 수 없다. "전하의 아명을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거다. " "경하님을 너. 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지요." 따끔하게 기엘이 한마디 충고를 한다. "하하하.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는 친구야, 친구. 사적인 자리에서는 말이야." "친서를 전해주시는 것은 정말 감사드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룬씨께서 저희와 함께 아셀까지 동행하셔야 할 이유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반쯤은 경계의 의미일 것이다. 기엘은 룬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재차 물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구. 기엘. 이건 어디까지나 명령이다." "명령?" "그래. 전하께서 너희들 일행을 호위해서 아셀까지 가라고 직접 내게 칙명을 내리셨다 이말씀." "호위라고 했나 지금?" 로운이 룬이 한 말중에서 마음에 걸리는 한 단어를 집어 내었다. "뭐 표현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냥 전하의 마음 씀씀이라고 생각해주 는 쪽이 좋아. 사실 나도 그런 심정이고." "마음 씀씀이라구요?" "그래. 아무리 당신들이 유능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곳은 미메이라 가 아니라 하나스야. 뭐니 뭐니해도 당신들은 이방인이지. 그 눈에 띄 는 머리색이나 피부색, 그리고 분명 유창하긴 하지만 외국인인 정도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하나스어. 어떤 것도 자네들한테는 유리한게 없어." 사실 그말은 사실이다. 실제 이리야는 하나스로 들어와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분명 이런 저런 지방 말을 잘도 알아듣긴 하지만 하나스어에까지는 손 을 뻗혔을 리가 없는 것이다. 기엘이나 로운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하나스어라는 것이 가이칸 제국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고는 하나 그대로 엄연히 구분되는 또 하나의 언어. 시유에게까지 가면 아예 생각할 거리도 없다. 그녀는 제국어조차 할수 없으니까. 경하만큼은 예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풍옥을 받아 들인 뒤부터는 어떤 언어도 문 제없이, 그리고 어떤 문자도 문제없이 읽어내고 말 할 수 있는 상태. 하나스에서는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지만 아셀제국에 도착하게 되면 문제가 틀려진다. 일행중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는 사람은 단 한사람. 경하뿐이게 된 다. "그렇다면 룬 자네가 아셀 제국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라는 의미로 받 아들여도 되는건가?" "물론 아셀의 카트린어 정도는 문제 없어. 물론 하나스 억양이겠지만 말이야." 사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스에서는 기사 수업을 할 때 의무적으로 아셀과 케리타 그리고 바에사까지 3국의 언어정도는 모두 배우게 되어 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철저하게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의 하나, 제국과 전면전이 벌어져 4국 연합 군대라도 조직이 되었을 때 언어 때문에 연합 작전이 수행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말도 안되는 일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길 안내에서부터 통역까지 무엇이든 맡겨 주십시오. 라는 소리지." "하아. 또 일행이 늘어나는 거야? 이제는 우글 우글 해지겠네." "경하. 너는 입좀 다물고 있어!!" 로운이 짜증난다는 듯이 한소리 했다. 하지만 그것에 굴복할 경하가 아니다. "웃기지마!! 내가 왜 입을 다물고 있어. 나도 할말은 할거야." "전하께서 이미 아셀쪽으로는 어떻게든 연락을 해두신다고 했으니 걱 정말라고. 저녀석이 안전할 수 있도록 전하께서 최대한 안배를 해둘 거야." 그 말에 모두의 눈이 경하에게 쏠린다. 과연 경하가 하나스의 국왕을 어떻게 구워 삶아 요리를 마치고 온 것 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도대체 저녀석 정말로 무슨 짓을 어떻게 하고 온 거야?"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리야가 대표로 정확하게 집어주었다. "어. 난 별말 안했어. 그냥 그냥…." 차마 이제라그에게 하소연을 하고 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경하는 말을 얼버무린다. "그리고 전하의 또 다른 전언은 말이지. 어이!! 제이린. 그것 좀 가지 고 들어와!!" 그가 문가를 향해 소리치자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하녀 하나가 커 다란 보퉁이를 들고 들어왔다. "고마워 제이린." 그녀는 들어 왔을 때처럼 나갈 때도 소리 없이 얌전히 사라졌다. "이건 뭔데?" "풀어봐."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경하가 얼른 그 보퉁이 앞으로 달려갔 다. 그리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단단하게 묶어진 보퉁이를 풀어 해쳤다. 그 안에서 몇 개의 가발과 옷가지 등등이 쏟아져나왔다. "이건 뭐야?" 새카만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가발을 들고 경하가 물었다. 그것은 여자용의 가발인 듯 여기저기 머리 장신구가 조금씩 붙어 있었 다. "뭐긴 가발이지. 너희들 머리색은 너무 눈에 튄다구. 조금쯤은 자각을 해줘." "…………." "그리고 나머지는 변장용의 옷들이야." "변장…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도 몰라. 어디까지나 전하께서 직접 보내주신거니까. 물론 보기에 는 좀 그럴지 몰라도 여하튼 직접 받아 온 거니까 알아서들 해. 그리 고 너희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명령을 받은 이상 너희들을 따라간다. 뭐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럼 된거지?" "그런데 룬. 우리들 별로 가발은 필요 없어." "뭐?" "그 정도는 그냥 돼. 나만 빼고. 기엘 보여줘. 룬한테." "………." "뭘 그러고 있어. 보여주라니까." "후우-. 알겠습니다." 경하가 의기 양양하게 명령을 내리자 기엘은 곧 그에 따랐다. 약간은 씁슬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정확한 미메이라의 발음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외워 주문을 시작했 다. "엘-메타모르포시스(el-metamorphosis). 리케어--." 벌어진 손끝에서부터 은빛의 엘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곧 단정하게 빗어내린 기엘의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 들어가 그 색을 점점 더 어둡게 변환시키기 시작했다. 언제보아도 신기한 광경을 경하는 마음껏 즐기며 바라보았다. 스스로 바람술을 쓰게 된 되로는 오히려 정교하게 조작을 해야하는 주 문과는 왠지 거리가 멀어진 경하에게 있어서 저런 것들은 부럽기 그지 없는 일들이 되어버렸다. 휘이이이이-----잉 변형을 끝내자 바람소리가 조용히 사라져간다. 기엘의 변형술은 그의 투명한 은백색 머리카락을 짙은 갈색의 그것으 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얼마나 철저한지 눈썹의 색마져 변해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경하님." "응. 좋아." 경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룬. 저 정도면 된 거지?" "…………." 룬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들은 마술사라도 되는 걸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떠억--하고 턱이 저절로 벌어진다. "엘러라는 것은 마법을 자유자제로 쓰는 인간을 말하는 건가." "그저 단순한 변형술입니다. 룬씨." 기엘이 너무나 멍청한 표정을 짖고 있는 룬을 향해서 말했다. 아무리 해도 보통의 인간에게 엘러들을 단번에 이해하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 그게 그렇게 단순하다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거야? 참나." 룬이 기가막히다는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세상에. 정말이지 안 되는 것 없겠구만. 너희들은. 아니 말을 정정하 지 세상에 못할 짓 없겠어." 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은 그가 생 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이상한 사람들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 다. 룬에게 있어서는 이해 한계 범위의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경하가 폴리카르의 배 위에서 그에게 보여주었던-정 확하게는 그가 목격했던-그 이상한 현상 자체가 그의 지각 범위를 벗 어난 일이었다. 그는 잠시 기엘의 짙은 갈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 았다. '사실은.' 어디로 보나 자연스러운 갈색의 머리카락 그대로다. 어색함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수 없는. '사실은 이 녀석들 정말로 위험한 인간들일 지도 몰라.'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다. "로운. 이리야하고 시유의 머리색 적당하게 바꾸어 줘. 그리고 으음." 룬이 경악으로 굳어져 있는 동안 경하는 이것 저것 뒤적이면서 사람들 에게 옷가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문제는 나인데 말이야. 후우." "너는 왜?" "으응. 내 머리카락은 말이지." 경하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면서 난처한 표정을 해보였다. "내 머리카락에는 절대적인 반대자 하나가 붙어 있어서 말이야." 경하는 이전에 세나케인이 경하의 머리색이 바뀌는 것에 질색 팔색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세나케인은 경하의 머리색이 변하는 것을 참 아줄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녀석하고 한바탕 하기 전에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구. 우우 어떻게 하지."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고민에 빠지는 경하를 보고 로운이 한마디 했다. "고민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 너는 거기 있는 그 검은 머리 가발을 뒤 집어 쓰면 되잖아?" "…………." 그렇게 말하며 로운이 떨어져 있던 여성용의 가발을 집어들어 경하의 머리위에 털썩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솜씨도 좋게 주물 주물 가발 모양을 잡아주기 시작했다. 역시 이런 쪽의 손놀림은 기엘보다는 로운 쪽이 훨씬 좋다. "자아. 다 됐다. 이 정도면 완벽해. 안 그래 기엘?" 씨익--하고 로운이 웃어보인다. 하지만 왠지 그 웃음속에는 사악함이 서려 있다는 것을 경하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 로운. 완벽하군. 쿡쿡." 그것은 완벽하다고 말하면서 쿡쿡 웃어대기 시작한 기엘의 표정에서도 정확하게 잡아낼수 있었다. "로-오-운!!" "왜?" "어째서 하필이면 여자 가발이야!! 저기 남자용도 있잖아!!" "그러면 넌 네 머리카락이 이 짧은 가발로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 "그래도 그렇지!!!!" 경하가 뒤에서 떠들든 말든 로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야에게 다가 가 가볍게 주문을 외워 그의 머리카락 색을 바꾸어 놓았다. 시유는 로운이 손을 대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머리색을 바꾸려고 했 다. 단지 조금 실패는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짙은 색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빗바랜 붉은 머리가 되어 버렸다. 경하 일행이 떠들썩하게 준비를 하는 동안 잊혀진 사람이 되어 버린 룬은 한쪽구석에서 계속 한가지 생각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위험한 정도가 아니다. 실제로 미메이라의 다른 기사들이 이들 정도 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심각해.' 기엘과 로운이 그들이 가진 능력의 단편을 보여준 것 뿐이지만 이해가 빠른 룬은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경하의 능력을 이미 본 후다. 기엘이나 로운, 그리고 이리야가 경하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가정한다해도, 이들의 위험성은 충분할 정도로 느 껴지는 것이다. 하나스의 국왕 리제라그, 즉 가놋 2세가 단 하루 경하와 만난 정도로 이들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것 역시 무리가 아니었다. 미메이라가 가이칸 제국에 편입된다는, 그 가정을 해보았을 때 파생되 는 효과, 즉 영향력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단순히 그저 가이칸 제국의 병력 이동에도 하나스는 비상이 걸려버린 다. 대 제국 가이칸. 그리고 그 가이칸의 새로운 황제 로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미메이라에 그의 세력을 뻗히고 있는 것일지 룬은 도저 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단지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경하의 말처럼, 미메이라가 가이칸 제국의 속국이라도 되는 날에는 결코 돌이킬수 없는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는 엄청난 사실뿐이었다. ----------------계속.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6장 마음속에 묻는 질문 (13) *** "여기, 바람이 원래 이렇게 안 불어?" 거대한 상선이 폴리카르강 위에 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꽤나 거상의 배로 보일 정도로 그 규모가 남달리 큰 배였 다. 그것은 폴리카르 위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정기선과는 달리 개인 사유 로써 하나스의 수도 알리아와 아셀제국과 하나스의 국경부근에 있는 도시 유탄을 잊는 무역선중 하나였다. "그래. 이쪽은 바람이라고는 손톱 만큼도 잘 안 불어. 이전에 이곳에 도착 할때가 신기하게 바람이 많이 불었던 거야." 혹시나 경하가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어 룬은 슬쩍 경하를 떠봤지만 경하는 룬이 무슨 의도로 말을 하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한 모양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앞에 떠 있는 커다란 상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척의 배를 봐왔지만 실제 이렇게 커다란 배를 보게 된 것은 처음 이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큰 배가 용케 강 위를 오가는 군." "뭐 뭐니 뭐니해도 폴리카르는 아슈레이에서 최고로 거대한 두 개의 강중 하나니까요. 유속이나 강 자체의 깊이 등 저만한 배도 능히 뜰 수 있습니다." 경하의 옆에 서 있는 것은 보통때와 다름없이 기사인 기엘 디 하라스 다인. 그는 경하의 옆에서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기엘을 두고 로운은 함께 그들이 타고 내려가게 될 배를 선장의 허락을 얻어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었다. 이리야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시유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언제나처럼 말이다. "그런데 저런 배를 타고 가도 되는 거야? 정말?" "물론. 저 배의 선주는 비공식적이지만 바로 이 나라의 국왕전하시거 든." "에엑---." "저것 뿐만이 아니야. 전하 소유의 상선은 얼마든지 있다. 국왕이라고 해서 장사꾼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 "그래도 그렇지 한나라의 국왕이 대놓고 저래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 비공식적인 것이라도 했잖아. 실제 소유는 전하의 동생이신 이젤리아 대공이시지." "하이고 형제간에 짜고 고스톱 친다는 소리잖아. 에잇." "에헤. 그것은 또 무슨 소리야." "아아. 그러니까 경하님께서는 가끔 특이한 비유를 쓰시고는 하는데 별로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주의하라고 몇 번씩 말해두지만, 사실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 을 기엘은 잘 알고 있다. "그보다는 어서 출발 준비를 서둘러야 겠습니다. 저희들 말고 이미 다 른 쪽은 출발을 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아. 그렇지. 기왕이면 박자를 맞추어 줘야하니까."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스의 국왕은 생각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치밀한 남자였다. 그는 경하 일행을 변장시켜 자신의 소유의 상선에 태워 일단 아셀 제 국으로 가는 제일 빠른 루트를 선택해 그들을 보내려 했다. 그리고 하나의 안배를 더 준비해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짜 일행을 만들어 육로로 미리 출발을 시켜놓았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경하의 물음에 룬은 한 마디 로 일축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라고 말이다. 이제라그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물론, 경하에게 전적으로 협력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한나라의 국왕이라고 해도 그가 원하는 것 자체가 하나스라는 나라 전체가 원하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가 완벽에 가까운 전제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해도 왕궁에는 나 름대로의 세력이라는 것도 있어서 일이 어디서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바로 가짜 시안 일행이었다. "일단 이곳에서부터 셰비 근처의 항구까지 가게 됩니다." 지도위에 셰비라고 쓰여진 곳에 선장의 손가락이 닿아있다. "이곳에서는 또 다른 배로 갈아타시게 됩니다. 일단 제가 명령을 받은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무슨 별말씀을요." 로운과 상선의 선장이 대화를 나누고 막 돌아서려는데 배위로 경하가 뛰어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아. 로운은 저기 있는데? 로운--- 로운----!!!" "무슨 소란이야." "저기 이 배 이름 뭐라고 한데?" "라트커스라고 합니다. 하나스의 역사에 빛나는 용맹한 장군님의 이름 을 따서 지어졌지요." "헤에. 원래 배는, 여자 이름을 붙이는 거 아닌가?" "하하하. 잘 아시는 군요. 말 씀대로 라트커스는 아름다운 여성의 이 름입니다. 장군님이라고 해도." "정말요?" 활달한 경하의 말투에 라트커스의 선장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직접 경 하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아주 오래전, 하나스의 국왕 폐하에게 아름다운 공주님이 한분 계셨 습니다. 그분은 아름다움과 용맹을 함께 가지신 분으로…." 아마도 라트커스의 선장은 옛날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는지 경하에 게 신나게 라트커스라는 이름의 유례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것을 듣고 있는 경하의 얼굴도 선장의 기분을 고양시켜주는 양념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네들, 심심하지는 않겠어." "예?" "무슨 소리지?" 경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라트커스의 선장을 보며 룬이 한마디 했 다. "어디로 튈지 도통 짐작도 가지 않는 저녀석을 보호하려면 말이야 나 는 눈이 네 개쯤 되도 부족할 것 같아." "하하하하." 기엘이 동조한다는 의미로 웃어버린다. 하지만 로운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 다. "네개라고? 여섯 개나 되지만 항상 모자라서 쩔쩔 매고 있어." "그런가? 그럼 이제는 여덟 개라고 해줘. 그정도면 어떻게든 제어불능 의 저녀석을 조금쯤은 제어할 수 있게 될지 모르니까." '저녀석'이라는 단어에 기엘이 인상을 찌푸린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도 할수 없는 룬의 말버릇. 사실 로운도 심심치 않게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여하튼 이 사람들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왠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남자 두명을 바 라보며 기엘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우웅…." "역시 안 되는 건가?" "시끄러워 정신 집중 안 되니까. 조용히 있어봐 이리야." "아아. 알겠습니다. 알겠다구요." 경하는 두 손을 물에 담그고는 그 투명한 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편한, 지난번의 여행보다 훨씬 편안한 여행을 하고 있던 경 하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시작한 모종의 일이 현재의 경하가 하고 있는 일이다. "우우우우우우우--------." 마치 물에다가 저주라도 퍼붇고 있는 듯한 소리다. 지금 경하가 하고 있는 것은 물의 술사인 이리야가 시킨 말하자면 물 의 술을 쓰기 위한 기본 수련법중의 하나였다. 작은 그릇에 물을 떠놓고 그안에 손을 담그고는 물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물에 술사의 엘을 전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방법은 직접 접촉하는 것이다. 이미 그 정도의 경지는 뛰어 넘은지 오래인 이리야는 자신이 처음 물 의 술을 깨우칠 때 쓰던 방법 그대로 경하를 가르치고 있었다. 평소 물의 술에 관심을 보이던 경하가 조금이라도 보람되는 일이 하고 싶다며 이리야에게 직접 물의 술을 가르쳐줄 것을 부탁해왔던 것이다. 바람 술을 쓰는데는 제어가 잘 안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는 해도 여하튼 바람술사로서 최고봉에 닿아있는 경하지만 이상하게 다른 것을 하는데는 역시 어려움이 많았다. 이론대로라면 경하정도의 바람술사 즉 거의 엘-세지 단계를 뛰어 넘어 있는 사람이라면 자유 자제로 어느정도의 레벨로 다른 신들의 힘, 즉 물이나 땅, 불의 술을 쓸수 있어야 한다. 라이트 온 정도의 가벼운 화염술정도는 쓰고 있는 경하지만 역시 다른 술을 쓰는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무엇보다 바람술과는 미묘하게 다른 운용법이 경하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묘하게도 최고의 경지에 다다라있는 바람술의 운영에 완전하게 적응해 있는 감각이 왠지 다른 술에 대한 감각을 둔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웅 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잘 안된단 말이야.' 있는데로 인상을 쓰고 있는 경하는 아무리 해도 움직이지 않는 물을 노려보며 한껏 신경질을 퍼부었다. "아니야. 그렇게 힘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 너는 어차피 바람 술 사라구. 물의 술을 네 마음대로 쓸수는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하라구." "너 화염술을 쓸 때는 어떻게 하지?" "화염술?" "그래. 너 라이트 온정도는 가볍게 시동어만으로 발동시키잖아." "뭐 그건 쉬우니까. 게다가 내가 아는 대로라면 바람술하고 화염술은 아주 연관성이 많다고 들었거든." "화염술을 쓸수 있으면 다른 것도 어느 정도는 할수 있을 거야. 기초 적인 거라면 얼마든지. 초조해 하지말고 조심스럽게 해보라구." "그렇게 말해도 말처럼 쉬운게 아니야. 이리야." "하아." 좀처럼 기초적인 운용술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하를 보고 있으려니 이리야는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내가 처음 배울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자. 아주 자연스럽게 해봐. 네가 화염술을 쓸 때처럼 말이지. 바람 술을 쓰는 것처럼 그냥 똑같이 자연스럽게 천천히." 불쑥 이리야의 손이 경하의 손이 담겨져 있는 그릇으로 다가와 경하의 손을 마주 잡았다. "기본은 같아. 시동어도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 "우웅." "부담감 같은 것은 가지지 말라고. 그냥 주문을 따라서 하면서 자연스 럽게…." 경하의 손가락이 마주 닿아 있는 부분에서 살짝, 물의 엘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넌 소질이 있어. 그러니까 믿고 해봐." 이리야는 경하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래. 따라해봐. 이번에는 될 거야." "응." "류. 타인 아슈레이." "류. 타인 아슈레이." "물의 이름 나유의 근원과 흐름." "물의 이름 나유의 근원과 흐름." "그냥 말만 따라하지마. 엘을 느껴보란 말이야. 봐. 내 손에서부터 가 득, 물의 엘이 움직이고 있다고. 눈을 감고…." "그렇게 말해도…." "말했잖아. 바람의 엘을 느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의 흐름도 느껴 봐. 물의 엘을 느껴보라구. 알겠어? 자아 따라해. 류. 타인 아슈레이. " 눈을 질끈 감고 경하는 물속에 담겨진 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류. 타인 아슈레이." "물의 이름 나유의 근원과 흐름. 생명을 유지하는 모든 라하트여…." "물의 이름 나유의 근원과 흐름. 생명을 유지하는 모든 라하트여…." 순간 물이 찰랑거리며 수면에 동심원이 생겨났다. 이리야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물에서 손을 빼내며 시동어를 외웠다. "라 유리아." 그가 외운 주문은 물의 술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술사의 능력 에따라 얼마든지 그 위력이 달라지는 주문으로 직접적으로 물을 움직 이는 주문이었다. "……라 유리아." 이리야의 손이 물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경하의 목소리가 마지막 시동 어가 되어 울려퍼졌다. 휘리릭 하고 물에 담긴 손가락 사이로 무엇인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 다. "그대로 정신을 집중하고…." "…………." "물에 네 의지를 불어 넣는 거야. 숨을 쉬도록, 생명을 부여한다고 그 렇게 생각하면 되." 간질 간질 거리며 손바닥 아래서 움직이던 것이 순간 빠르게 경하의 손등위로 기어올랐다. '이거… 정말로 움직이는 거야?' 놀라서 경하가 손가락을 꿈틀 하는 순간 작은 그릇에서 물방울이 솟구 쳐올랐다. 쏴아아아------- 그것은 마치 분수처럼 솟아 올라 경하의 주위에는 온통 작은 물방울들 이 가득 들어찼다. "하하하. 그봐 금방 되잖아." 타악-하고 이리야가 경하의 등을 치는 순간 경하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수천개의 물방울들이 떠있는 것이 보였다. 장관이었다. "우와아아아---- 죽인다!!" "그렇지?" "이야야--- 성공했다. 아하하하하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하가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우하하하하!! 된다. 할 수 있어!! 이리야!!" "그래. 그래." 수천개의 물방울들 하나하나에 물의 엘이 담겨 공중에 떠있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분수처럼 위로 솟구쳤던 물방울들은 힘을 담고 있어 결코 바닥으로 떨 어지지 않고 경하의 주위에 맴돌았다. "하하하… 으하하하 난 역시 천재라니까." "하이고 꼭 말 한 마디를 더한다니까 넌." 이리야도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인지 경하의 우쭐거림을 너그럽게 봐주 었다. "하기사 뭐 아무렴 어떠냐. 하하하하…하." 기분이 좋아진 경하가 들떠서 물방울들에게 마악 힘을 주려는 순간 이 리야가 뚝하고 웃음을 멈추었다. "우하하하하. 이야호!!" 경하의 목소리와 함께 수천개의 물방울이 일제히 하늘 높이 치솟아 올 라가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봐!!" "응? 갑자기 왜 그래 이리야?" 쏴아아아아하고 순간 물방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순간 물방울들에 집중되었던 경하의 신경이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리야?" 비처럼 쏟아지는 물방울들을 맞으며 경하가 이상하다는 듯이 이리야의 이름을 불렀다. "못 느끼겠어?" 심각해져있는 이리야의 표정을 보고 경하도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벌 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경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순간 바람의 엘을 사방으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에 담겼던 어설픈 힘과는 전혀 다른 강력한 바람의 힘. 경하가 서있는 자리에서부터 동심원으로 바람의 엘이 퍼져나갔다. "기엘." "아. 로운…나도 느꼈어." 황급히 풀어 두었던 라이트를 집어드는 두사람을 본 룬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누군가 배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숫자가 많아." "뭐라고?" 순간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꼭꼭 닫혀있던 선실들의 창문과 문이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활 짝 열려버린 것이다. 쾅--- 콰앙---- 기엘과 로운이 앉아있던 선실의 문이 열리고 멀리 있는 다른 창문들과 문이 열리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경하님의 힘이다." "그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명 좀 해봐!" "누군가 이배를 노리고 있어!!" *** 이산 가너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너무나도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는 배가 눈앞을 지나고 있 다. '정말이지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이 배를….' 그는 하나스의 로열 가드중에 한 사람으로 정말은 가놋 2세의 직속 기 사였지만 실제 그는 가놋 2세의 기사라기 보다는 가놋 2세의 동생인 미루네 후작의 심복이었다. 물론 미루네 후작에게 이산을 보낸 것은 가놋 2세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산은 어젯밤 미루네 후작으로부터 명령 받은 모종의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급하게 자신의 병사들을 모아서 폴리카르로 달려왔다. "전하께서는 그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 시안이라는 인물에게 어떤 의 미에서는 매료라도 되신 것 같네. 그렇지 않고서는 신료들과 상의 한 마디 없이 그런 행동을 하실수 없어." "……흐음." "물론 전하의 말씀에 거역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번만큼은 나는 형님과 생각이 달라." 미루네 후작은 바로 다름이 아닌, 경하가 가놋 2세와 만나는 자리에 동석했던 남자로 국왕의 동생이자 왕국의 부 재상으로 봉직하고 있는 남자였다. 물론 다분히 국왕의 동생이라는 신분이 작용한 인사이긴 했지만 무엇 보다 그는 다른 국왕의 인척들과는 달리 철저하게 일반 귀족적인 마인 드를 가지고 있는 남자로 나름대로는 하나스의 귀족들 사이에서 암암 리에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전하의 의중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그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게 하면 곤란하다. 만의 하나 제국의 황제에게 내밀 마지막 카 드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쪽이 이쪽에 유리해. 그들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일이든 할수 있 다. 꼭 전쟁이 일어난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나."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물론, 최소의 희생은 각오하겠지요." "그렇다네. 그러니 그들 일행중에서 시안이라는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 자와 그 동생이라는 시유라는 아가씨는 꼭 생포해서 알리아로 데려오 게."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일단 수장 계승자라고 하는 그만 큼은 반드시 생포하고, 그리고 미리 말해두겠는데 그들은 엘러네, 확 인 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실력을 가졌을 거야. 구체적으로 어떤 능 력을 가졌을지는… 미지수이긴 하네만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문제 없을게야. 하지만 조심하고 또 조심하게." "알겠습니다." "꼭 성공하길 바라네. 하나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믿어주십시오." *** "40여명정도…." "뭐라구?" "40명이 좀 넘을 거야. 포위되어 있어." "말도 안 돼!!" "뭐가 안 돼. 물 속에서도 얼마든지 잠복할수 있는 거야. 젠장!!" 경하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사념을 온 몸으로 느끼며 허리에 묶어 놓았던 단검을 빼어들었다. "기엘과 로운은?" "경하님!!!" 경하가 그들을 찾자마자 마치 멀리서 미리 듣고 달려오기라도 한 것처 럼 그들이 나타났다. "시유는? 시유는 어디에 있지?" "선실 안에 있습니다. 일단…." "둘중 하나는 시유에게 가줘." "룬씨가 일단 시유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로는 안 되잖아!!" "이 배의 선원들중 반이 검을 다룰 줄 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안 돼!! 기엘!! 어서 가." "경하님." "젠장!!!" 아무리 해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기엘과 로운을 보고 경하는 욕설 을 내뱉으며 선실 쪽으로 달렸다. 결국 자신이 가면 해결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 남자가 일제히 우르르 경하의 뒤를 따라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도 중요하지만 시유도 중요해. 나는 레이죠 장로로부터 직접 부탁 을 받았다구!!' 경하의 신변을 걱정하는 남자들을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때로는 부담감으로 느껴질때도 많다. "시유!!!!" "우아악----!!!" 경하가 시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금속끼리 부딧히는 차가운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 오기 시작 했다. "기습이다!!!!" "와아악----!!!" 타다닥 갑판을 뛰어가는 소리들과 아래서부터 선원들이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교차했다. "나도 중요하지만 시유를 철저하게 지켜줘!! 알겠어?" 뒤에서 뛰어오던 로운을 붙들고 경하가 말했다. "시유를 나라고 생각하고, 지켜줘. 부탁이야." "……그래." "고마워 로운." 시유가 있는 곳은 선실 중에서도 제일 안쪽에 있는 작은 곳이다. 로운은 기엘의 어깨를 한번 굳게 치고는 안으로 뛰어 들었다. 갑판에서 선실들이 모여있는 쪽으로들어가는 길은 몇 개가 있다. 그중에서도 시유가 있는 선실로 통하는 마지막 복도까지 로운은 숨한 번 쉬기 않고 뛰어갔다. 좁은 복도다. '이곳은 검을 휘두르기에 마땅하지 않아.' 사람이 다니기에는 그럭 저럭 편하지만 전투에는 그것도 일대일의 칼 부림에는 부족한 공간이다. 막 마지막 복도에 도착한 로운의 눈앞에 검을 들고 살벌한 눈빛으로 서 있는 룬이 있었다. "뭐야. 적인줄 알았잖아." "시유는?" "안쪽에 있어. 밖으로 나오겠다는 것을 말렸다." "이쪽은 내가 맡겠다 밖으로 나가서 경하를 지켜줘." "뭐?" "이쪽에는 내가 바리어를 칠 거야. 어서!!" "알았어." 길이가 긴 롱 소드를 들고 있던 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밖으로 뛰 어나갔다. 그것을 확인한 로운은 일단 안으로 들어가 시유가 잘 있는지 확인했 다. 벌컥 문이 열리자 안에서 붉은 머리의 소녀가 뛰어나왔다. "꼼짝 말고 있어." "로운 오라버니!!" "쉴드를 칠 거다. 안에서 네가 그것을 유지해야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로운은 재빨리 그녀 를 문 안으로 우겨 넣었다. 피부가 따끔 따끔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선다. 경하의 부탁을 받고 들어오긴 했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에 두근 두근 심장이 울린다. "젠장. 정말이지 곤란하다니까." 가만히 있어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기척이 난다. "로. 조하 아슈레이.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카이드, 키리쉬…." 바닥에 꽂은 검에서부터 로운의 몸으로 선명한 바람의 엘의 선이 생겨 난다. 문 안쪽에서부터 시유의 엘이 활성화 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로운은 입을 열었다. "헤데르." 로운의 입에서 시동어가 발동되는 순간 뿌연색으로 변한 그것은 둥글 게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강력한 방벽으로 보호되는 밀실처럼 시유가 있는 내실을 중심으로 동 심원으로 펴져나간 그것은 곧 단단한 벽으로 가시화되었다. "경하님!! 피하십시오." "시끄러워! 앞이나 조심해!!!" 슈욱--- 바람과 함께 검이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재빨리 무릎을 굽혀 검끝을 피한 기엘은 들고 있던 라이트를 머리위로 처올렸다. 카아앙--- 부르르르 떨리는 검신을 통해 상대방이 강한 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을 느낄수 있었다. "하앗----!!!" 힘을 주어 그것을 밀쳐내고는 그대로 사선으로 내리쳤다. 피가 뿜어져 나오며 검을 들고 있던 팔이 옆으로 튀어 올랐다. 후두두둑---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위험해!!!' 옆쪽에서 또다른 남자가 검과 함께 달려들었다. 옆구리를 노리며 달려드는 검을 피해 몸을 옆으로 뺀 기엘은 아슬 아 슬하게 스치는 검끝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후 몸을 날렸다. '훈련 받은 병사들이다.' 몸 놀림은 절도가 있고 그들이 휘두르는 검은 빨랐다. 움직이는 배 위에서도 전혀 지장받지 않고 그들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 다. 그들의 뒤로 엄호라도 하듯, 화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강으로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케인!!!" 뒤에서 경하가 세나케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쉴드!!!!!" 머리카락이 온통 날려 시야를 가리는 순간 세찬 바람이 등뒤에서부터 불어왔다. 그 바람에 기엘에게 달려들던 남자가 주춤 뒤로 밀려났다. 기엘은 그 기회를 틈타 깊숙하게 검을 찔렀다. 검 끝에서 부터 인간의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감각이 그대로 검신을 타고 전해져왔다. 눈앞에 있던 남자를 처리한 기엘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경하가 만들어낸 쉴드가 온 배로 퍼져 어느새인가 그들이 타고 있는 라트너스를 포위한 작은 배들에서부터 날라 오는 화살을 막아내 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람술을 제대로 쓸 수가 없어 기엘!!!!" "그대로 계십시오. 경하님!!" 정신없이 날라오던 화살의 비가 멈추자 선실쪽으로 후퇴하고 있던 선 원들이 일제히 검을 들고 달려나갔다. '괜찮아. 승산은 있다.' 기엘은 손안의 라이트를 다시 한번 고쳐 쥐고 다음의 목표를 찾았다. '지휘관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비슷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적들 사이로 종횡무진 뛰고 다니고 있 는 룬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는 로열 가드라는 이름에 걸맞는 화려한 검 술로 주위를 초토화 시켜가고 있었다. "이리야씨!!! 주위의 배들을 어떻게 할수 없습니까?" "저녀석의 쉴드 때문에 아무것도 할수 없어. 엄호해주면 쉴드 밖으로 뛰어나가 강으로 뛰어 들 수 있어." "알겠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주위에서 쏟아지고 있는 화살의 비는 어느정도 멈추었지만 대신, 배들 이 직접 라트너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작은 배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리야씨!!! 이쪽으로!!" 갑판을 가로질러 뛰어가며 기엘이 소리쳤다. 달려드는 남자를 한 손에 든 라이트로 가볍게 젖히고 기엘이 길을 뚫 었다. 이리야 역시 그의 레이피어를 손에 쥐고 일직선으로 뛰었다. 갑판이 이렇게나 넓은 곳이었나를 뼈져리게 느끼면서……. "젠장.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난장판이 되어 가는 갑판을 보며 경하는 발을 굴렀다. 세나케인의 힘으로 쉴드를 쳐 비처럼 쏟아지던 활은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이미 정체모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있는 갑판위에서 벌어지 는 난장판에는 어떻게도 손을 쓸수 없었다. "케인. 쉴드 그대로 유지해 줄 수 있어?" 「물론이다.」 갑판에 있는 사람들이 적뿐이라면 가볍게 바람으로 날라버릴 수도 있 지만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난장판인 상태에서는 불가능 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경하의 눈에 한쪽으로 뛰어가는 두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엘과 이리야였다. '뭘 하려는 거지?' 그들은 달려드는 남자들을 공격한다기 보다는 피하면서 그대로 배의 가장자리로 뛰어가고 있었다. '아!! 그렇다. 내 쉴드 때문에 이리야가 물의 술을 쓸수가 없는 거야. ' 막 갑판 끝에 도착한 기엘이 등뒤로 돌아서 그들을 쫓아온 남자들과 마주섰다. 그 다음 순간 이리야가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 내렸다. "케인!!!"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경하의 사고를 그대로 전달받은 세나케인은 이 리야가 뛰어 내리는 순간 아주 잠깐 쉴드를 풀었다. 풍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았어!!!!" "경하!! 몸을 숙여!!" "우악!!!!" 이리야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데 어디선가 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한발을 축으로 해서 몸을 돌려서 그대로 찔러!!!" 휘이익----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일순간 흐릿하게 지나간다. 슈욱-----!!!!!! 룬의 목소리가 시키는대로 며칠이나 룬의 훈련을 열심히 받은 경하의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했다. 힘껏 뻗은 팔에 끝에는 룬이 선물한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있었다. "……………." 주르르륵. 새빨간 피가 단검의 날을 타고 흘러내려 경하이 손목을 적시고 옷깃을 적셨다. "………." 콰아아앙!!!! 퍼어엉---- 그 뒤로 물소리와 함께 폭발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것은 이리야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발동한 폭발 주문이라는 것을 경하 는 눈치채지 못했다. 라트너스를 둘러싸고 있던 몇척의 배가 물의 칼날에 의해 조각 조각 부셔져 주위의 강물 위를 가득 채웠다. "…………." "경하님!!!!!!" 새빨갛게 변한 팔 위로 남자의 몸이 덥쳐왔다. "경하!!!!!" 룬과 기엘이 경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후두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그중 한 방울이 경하의 커다랗게 뜬 눈 속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이리야의 힘이 그대로 배어있는 물방울이었다. 흐릿해진 눈에 은백으로 빛나고 있는 세나케인의 형체가 들어왔다. '케인….' 쿠욱--- 무게 때문에 단검의 날이 주는 감각이 생생하게, 손끝으로 파 고들었다. '세나케인…….' 주르르륵--- 눈동자에 떨어졌던 물방울이 분홍빛 눈물이 되어 경하의 눈에서 흘러 나왔다. ---------------------------------------------계속 다음은 마지막 장입니다.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7장 바람이 지나간 자리 (14) 바람이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라면, 그때 그들은 경하의 몸에서 흘 러나오는 바람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확실한 파문과도 같이 공기의 결을 만들어 멀리 멀 리 펴져나갔다. 한 사람 한사람의 몸 속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 같이…. 그것이 바람인 동시에 감촉이 있는 그리고 살아 있는 감정이었다. 공포인지, 아니면 단순한 두려움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슬픔인지, 몸에 닿는 그 미세한 느낌만으로는 깨닫지 못한 자도 있었다. 갑판 위에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과, 그리고 몸을 움직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아가던 사람들과, 조용히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가던 사람들까지, 그 감정은 한 순간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때? 그 녀석은?" "아아. 아직 그대로다." "뭘 그런 것을 가지고 저러는 거야. 나는 그보다 더한 일도 얼마 든지 있었다고. 마음이 약해서 그래. 마음이 약해서." 왠지 기분이 언짢아진 룬은 들고 있던 검을 몇 번 휘둘러 검날에 묻어 있던 붉은 색의 액체를 털어내버렸다. 점점 더 기분이 가라앉는다. "우리들은 이런 일을 해도 멀쩡하다구. 그런 것 하나 견디지 못해…우 앗!!!" 파앙--- 룬의 몸이 뱃전에 내 팽개쳐졌다. "무. 무슨 짓이야." 하고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룬이 항의 했다. 로운이 말 한마디 없이 룬에게 주먹질을 한 탓이었다. "………!" 퍼득하고 치켜 떠진 룬의 눈에 무서운 표정을 한 로운의 얼굴이 보였 다. "그만해. 로운. 그저 단순하게 생각이 다를 뿐이니까." 의외로 기엘이 로운을 말리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기엘은 로운의 다른 손에 아직도 들려져 있던 검을 빼앗아서는 깨끗하 게 닦아 로운에게 돌려주었다. "머리를 식혀. 경하님은 네가 그러는 것도 좋아하시지 않을 테니까." 의외로 냉정하게 기엘은 반응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미스트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경하를 바라보았다. '또… 상처를 입힌 걸까.' 끔찍하리만큼, 경하는 기엘 자신과 로운과 이리야, 그리고 그 이외 자 신에게 관련된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싫어한다. 아니 죽고 싶을 만큼 혐오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온 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것만큼은 경하의 성역이라도 되는 지, 아무리 해도 경하의 그 지독한 혐오감에 만큼은 기엘도 로운도 아 무도 위로를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자신의 눈앞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을 목격해버린 것이다. 바로 그 자신의 손으로 상처 입힌 사람을. 차라리 다른 사람이 한 일을 단순하게 목격한 것이라면 또 어떻게든 손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게 더더욱 힘들어.' 기엘은 눈이 부신 하늘과 하나가 되어 있는 듯한 경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중 다행이라면 그나마 경하가 다치게 한 사람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문인지 지난번에 경하가 납치되었다가 다시 찾아냈을 때처럼 정신을 읽거나 혼미해져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엘에게 있어서 경하의 현재 상태는 더욱 더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정신을 잃어버리면 그 지독하게 쓴 '현실'이라는 것을 몇 번이 고 곱씹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잊어버리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맨 정신인 상태에서는 끔찍했던 기억은 몇 번 이나 되살아나고 또 되살아나 상처입기 쉬운 맨몸과도 같은 정신을 갉 아 먹는다. 경하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파장에는 경하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들 이 더해서 기엘도 그것을 자신의 감정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슬픔과 함께 묘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의지에 대한 분노같은 것. 어떻게도 표현 할 수 없는 상반된 두가지의 감정이었다. 높은 곳에서는 먼 곳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산이든, 바다근처이든, 높은 건물위든 별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강위를 유유히 달리고 있는 배의 미스트 꼭대기위라고 해도 말 이다. 주변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앉아있는 경하는 저 멀리 사람 들이 한둘씩 움직이고 있는 넓은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했어. 분명히.' 시퍼렇게 빛나던 검신, 그것을 들은 남자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움직이라는 룬의 고함 소리에 경하는 추호의 망설임 없이 그대로 자동 반응 인형처럼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몸을 돌리고, 그리고 팔을 높이 치켜올렸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생각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전과 같은. 그래도 몸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그 끔찍한 감각 만큼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엘이랑 로운이랑 이리야는 언제든 그런 일을 하고 있어. 나라고 못 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나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그 책임 역시 내가 지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경하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혐오감이 치밀어 오른다. 눈을 돌리고,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한 짓에 대해 마음을 닫으 려고 했다.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니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경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손으로 누군 가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그보다 좀더 깊은,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있는 이기심. 지금까지 '경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타인'을 희생시켜온 사람들 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다. '더러워….'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내 자신이 너무나 더러워, 최저야.' 스스로는 깨끗하다고 마음속 어디선가 그렇게 우기고 있었다. 자신이 한 짓이 아니니까 하지 말아달라고 하면, 그렇게 부탁하고 주 장하고 있으면 자신 만큼은 깨끗한 것이라고…. '사실은 내가 제일… 제일 최저의 인간이었어.' *** "아무래도 미메이라인들이 다른 수를 쓰고 있는 듯 합니다." "듯 하다. 라고?" "정정하겠습니다. 폐하. 현재 확인 된 정보에 의하면 미메이라 인으로 보이는 일행이 하나스의 국왕 가놋 2세와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어떤 의견이 오갔는 것 까지는 알 수 없지만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 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이외의 정보는…." "흐으응." 어둠 속에 앉아있던 남자의 얼굴이 창으로 비쳐 들어온 달빛에 비추어 보인다. "미메이라의 사신은?" "현재 카르모니아에 잠시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그쪽역시 미메이라 에서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듯, 이곳으로는 일정을 조금 미루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카스핀." "네. 폐하." "반대했던 것 치고는 열심히군." "…………." 미타 남작은 어둠 속에서 로렌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 다. 하나하나 보고를 할 때마다 그의 군주의 표정은 묘하게 재미있어하는 얼굴로 바뀐다. "일단 겉으로는 안심을 시켜놓고 물밑 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군. 하기사 그쪽에도 신국이라는 자존심이 있는 것이겠지." "…………." "물 밑에서 음모를 꾸미고 그물을 치는 것은 자네의 특기였지." 로렌의 시선이 미타 남작의 눈동자로 향한다. "부탁하네." "진심이십니까?" "뭐, 약간 우회해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은가." "우회라고 하셨습니까?" 미타 남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의 군주는 한번 결정한 일은 지나치게 몰아 붙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을까? 준비는 완벽해야하는 법이다. 물론, 그가 생각해도 준비는 완벽에 가깝다. 하지만 아직 준비작업은 그 과정 중에 있을 뿐이다. 가깝다고 표현되 는 일은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카르모니아의 그에게 말을 해두는 것도 좋겠지. 대관식은 그리 멀지 않았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예?" 대답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려는 미타 남작을 불러 세운 로렌은 예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의 특기에 나는 아주 많은 기대를 하고 있네." "…………." "그물을 칠 때는 확실히 치는게 좋아. 나는 그 그물에 걸릴 물고기가 아주 마음에 들것 같으니까." *** 시유는 축축해진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손으로 다듬다가 결국 포기해 버렸다. 보통때라면 미메이라의 사람들이 의례히 그러듯 가볍게 바람 술을 써 서 말려버렸겠지만 기엘과 로운의 부탁으로 바람술을 쓰는 것을 최대 한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바람은 시원 하지만 때로는 견딜수 없을 만큼 축축해져서 기분마저 울적하게 해버린다. "정말이지 티리쉬의 주문 같은 것 쓰고 싶지 않다구." 눅눅한 머리는 어떻게 해도 원래처럼 가지런해지지 않는다. 결국 방법은 내실에서 나와 갑판쪽에서 햇빛을 쐬는 것 뿐이다. "하지만 역시 나가고 싶지 않은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녀는 작게 불평을 했다. "어째서 항상 밖에 나와 있는 거지 그 사람은?" 문제의 습격의 범인은 결국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못했다. 단지, 누군가 경하와 가놋 2세 사이에서 오갔던 내용에 동조하지 못하 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실 배 위에서는 그것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 다. 그 이유는 이미 가놋 2세가 룬에게 '아마도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언질을 준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뒤늣게야 그것을 알게된 기엘과 로운에게 갖은 구박을 다 당하고 있음은 굳이 밝힐 필요도 없다. 가놋 2세야 경하에게 친서를 보낼 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 지 않은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쯤은 가놋 2세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배후가 누군지 정도는 이미 대략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 그 때문에 습격을 받아서 반쯤은 엉망진창이 되었던 라트커스는 다음 날 오전에는 벌써 아무일 없었다는 듯한 분위기로 완전히 일소되어 있 었다. 단 하나 변한 것이 있다면… "경하님은?" "아아. 저 위에 있어." "또 입니까?" "뭐 밥 먹으라고 하면 기어내려 오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기사양 반." 이리야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기엘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저러실지…." 이리야는 툭툭- 자신이 옆자리를 치며 기엘에게 권했다. 그곳은 미스트에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경하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로 요 이삼일 4명의 남자가 번갈아 가면서 낙낙하게 햇빛을 쬐고 있는 자 리기도 했다. 단지 다른 사람이 보면 등치도 좋은 4명의 남자가 번갈아서 궁상맞기 그지 없는 포즈로 앉아있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라면 문제 일 것이다. "몸에 안 좋으실 듯 한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저 정도로 끝나준게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건 그렇습니다만." 기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스트 위에 있던 경하와 그를 덥치고 있던 남자를 발겼했을 때, 정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마치 피 같았던 경하의 눈물. 기엘은 경하가 다시 이전의 상태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 로운이 어디 있는 지 아십니까?" "어? 신관양반은 선장하고 있어. 내일 오전이면 셰비에 도착한다고 해 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러 간 것 같아." "내일 오전이요?" "그래. 저녀석 힘이지. 생각보다 역시 빨랐거든. 사실 폴리카르의 유 속으로는 하루정도는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 저녀석의 힘이라고 이리야가 말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경하의 바람을 말하는 것이다. 경하는 사건이 잊은후 계속, 저렇게 미스트 위에 앉아서 바람을 부르 고 있었다. 끊임없이. 로운이나 기엘이 바람술을 쓰는 것은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경 하는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쓰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이다. 실제 경하가 지금 일으키는 바람은 아주 미세한 것으로 그저 자연스럽 게 불고 있는 바람에 아주 약간의 힘을 더한 것으로 바람술을 쓰고 있 다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시유를 비롯 나머지 사람들이 티리쉬로 그들의 힘을 억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음이 정리되면 내려 올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그러시겠죠. 하지만 말입니다." "응?" "뭔가 서두르고 있다는 생각은 안드십니까?" "서두르다니 뭘?" "경하님께서… 이 일정을 굉장히 서둘러서 어떻게 해서든 빨리 해결을 하시고 싶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 "적어도 제게는, 지금의 경하님이 하시는 행동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역시 안 되겠어.' 내실에 앉아서 머리카락만 만지작 거리던 시유는 결심을 하고 일어섰 다. '햇빛이라도 쬐어야지 여기 앉아있다가는 정말 곰팡이라도 쓸어버릴 것 같아.' 경하 따위는 신경쓰지 않으면 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어차피 그녀가 어딜 가든 아무도 시유에게 뭐라고 말 한마디 거는 사 람은 없다고 그녀는 조금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믿고 의지하고 있던 로운이 쉴드를 거두자마자 밖으로 뛰어나 갔던 것을 직접 목격했던 후로는 더욱 그런 마음이 강해진다. 시유에게 괜찮으냐는 말 한마디 아무도 건내주지 않았다. '누가 나한테 신경쓰겠어? 모두 경하님 경하님 하면서 그사람에게 밖 에 신경쓰지 않는 걸.'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시유는 그런 경하에게 질투심 마져 느끼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런 녀석따위. 정말 싫어.' 동요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최대한 냉정한척 하지만 그녀는 아 직 1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언니였다면 저런 약한 모습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거야.' 결국 그녀는 시안을 떠올리고 말았다.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불쌍한 자신의 언니를 말이다. “시안언니.” 갑판으로 나가겠다는 생각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그녀는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언니......” 눈물이 촉촉하게 그녀의 뺨을 적시기 시작했다. *** ------------------후우.....늦었습니다. 아슈레이 6 바람의 궤적 7장 바람이 지나간 자리 (15) ***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한밤중,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 밑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흙같은 어둠이 몸을 감싸는 시간, 시유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선실에서 나왔 다. '이 시간이면 아무도 없겠지?' 물론 만약의 일을 대비해 보초를 서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생각 하지 않기로 했다. 낮에 햇빛을 쐬려고 마음먹었다가 그만 시안의 일이 생각나서 그대로 주저앉았던 시유는 한밤중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하아 시원하다." 바람의 나라 미메이라의 사람답게 시유도 바람을 좋아했다. 그것은 천성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녀는 천성이상으로 바람을 즐기는 소 녀였다. 언니인 시안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미메이라의 들판을 뛰어 다니며 자랐던 그녀다. 수장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만큼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일반적인 미 메이라인의 기준보다는 훨씬 강력하다. 단지 그것을 쓸만한 환경이 아니기에 세밀한 바람술의 운용이 서투를 뿐이다. '역시 바람이 좋…어?" 뱃전에 기대에 불어오는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기분 좋게 서있는데 문 득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려는데 그 중간에 한구석에 기대어 앉아있 는 형체가 보였다. "………." 차마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흠칫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누. 누구지?' 깜깜한 가운데 그 형체는 희무끄레하게 보여 소름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미메이라의 인의 은발 머리카락을 못 알아 볼리는 없는 그녀다. 그리 길지 않은 머리카락과 웅크리고는 있으나 단단한 어깨는 눈에 익 다. '로운 오라버니….' 그는 피곤에 절은 듯 몸을 웅크리고 선잠에 빠져있었다. '깨워서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하는 쪽이 낫겠지?' 시유는 로운에게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모르게 이상한 기운이 시유에게 다가와 그녀의 발을 묶었다. "…이, 이건…." "그냥 둬. 지금 깨우면 못잘 거야." "…………!!!!" 시유를 붙잡은 것은 경하 였다. 그것도 손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의 엘이 담긴 바람의 줄기가 그녀의 발을 묶었던 것이다. "이건…놓아주세요." "벌써 풀었어." "…………." "이틀 정도 안 잤을 거야. 로운은. 그러니까 그냥 둬." 그렇게 말하면서 경하는 들고 있던 두터운 망토를 로운의 어깨에 살짝 덮어주었다. 그것은 저녁 무렵 기엘이 가지고 올라와 경하의 어깨에 둘러주었던 것 이다. 로운은 꽤나 피곤한지 경하가 곁에 다가가도 깨어나지 않았다. "왜 안 자고 나왔어?" "…………." "아. 잠깐…." 경하는 그대로 로운의 앞에 서서 그의 손을 로운의 이마 부근에 가까이 대었다. "세나케인, 로운을 좀 깊이 잠들게 해주고 싶어." "………." 시유가 지켜보는 가운데 경하의 몸에서 희미한 형체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로운의 이마에서부터 발끝까지 한차례 맴돌더니 다시 경하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직, 바람술을 잘 못써서…." 시유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자 경하가 변명하듯 말한다. "보통 때라면 너나 내가 다가가는 것만으로 깰텐데 굉장히 피곤한가봐. " "…어차피 다 당신 때문이야." "으응?" "다 당신 때문이라구. 로운 오라버니가 이렇게 피곤해하는 것은." "…………." 이번에는 경하가 꾸욱 입을 다물었다. "자비로운척, 착한척,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주는 척, 배려하는 척 하지 마. 모든게 당신 탓이야." "…………." "당신만 없었으면… 당신이 아니라 시안 언니가 있었다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는 없었겠지." 쓴 물이라도 삼킨 것처럼 경하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래!! 당신만 없으면 되는데. 왜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시안 언니가 아니라!!" "나도 몰라." "어째서!! 어째서!! 여기에 당신이 있는 거야!" "모른 다고 했잖아." 단어가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비고 들어온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수도 없다. 아니 사실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뭔가 말을 하기 위해 시유는 입을 벌였다가 다물어 버린다. 더 이상 말을 했다가는 왠지 다른 말을 들어 버릴 것 같다. 시유는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선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시유가 고개를 돌릴 때 눈가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이는게 보였다. 하지만 경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후우… 어렵구나. 어려워." 시유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리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많이 컸네. 그런 말도 하고." "무슨 소리야? 이리야." "어라? 로운은 잠들은 거야? 이런 소란을 피우는데?" "피곤 한 것 같아서 내가 재웠어. 정확하게는 세나케인이 한거지만." "흐으응…." "그러는 이리야는?" "아아. 나는 원기 보충." "원기 보충?" 그러고보니 이리야는 전신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지난 번에 한번 폭주를 했더니 몸이 영 말을 안 들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이리야는 여기 저기 우드드득 소리가 나는 몸을 몇 번 흔들어 보인다. "역시 원기 보충에는 물 속이 최고거든." "…………." "좀 둥둥 떠내려가다보면 물고기가 된 기분도 들지 나름대로는 괜찮아. " "몸이 많이… 안 좋은가요?" "그냥. 피곤한 정도야. 신경쓰지마." 하지만 경하는 왠지 뒷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이리야에게 다가가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다음의 말이 흘러나온다. "………케인." 다음 순간 이리야는 온 몸 속으로 상쾌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 경하로부터 힘을 받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 경험을 했던 것이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지만 케인을 불러 엘을 전달 하는 경하의 표정에는 적이 놀란다. "이봐." "응?" "너……." "뭐요?" "시유…에게 뭐라고 한마디 더해주지 그랬어?" "뭐라고 해줄까요? 나도 너 밉다. 뭐 그렇게요?" "그런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시유가 너를 그렇게 미워할 이유도 없 다고 보거든 나는…." "괜찮아요. 그 정도는." 경하는 그대로 로운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로운은 정말 깊게 잠들었는지 미동도차 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경하와 로운의 머리카락. 그것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이리야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다. "…………." "미워할 사람이라도 있으면, 미워하면서라도 기운이 날거라고 봐요. 증 오하고 싶으면 증오하라고 할거고, 무조건 난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니까." "너…." "미워할 대상마져 사라지면 허탈할테니까. 미운짓을 해서라도 미워하라 고… 뭐 그런 심정." "…………." "좀 미움 받아도 어쩔수 없죠. 게다가 헤헤헤." "헤헤헤?" "시유 미인이잖아요. 뭐 미인한테 미움 좀 받아도 괜찮으니까. 하하하 하하." "에라이!!" 퍼억-하고 이리야가 장난스럽게 경하의 어깨를 쳤다. 그 어깨가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리야의 위로가 전해져여 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경하는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을 소녀를 생각 했다. *** "예? 배를 갈아타지 않는다구요?"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이대로 이 배를 타시고 유탄까지 가신 후 그곳 에서 육로로 자노아로 가시도록 하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라트커스의 선장은 손에 들은 양피지를 로운에게 내밀었다. 룬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 배말고, 육로로 따로 출발시켰던 일행도 습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원래대로의 일정을 따르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일정을 바꾸 었습니다. 셰비에는 잠시 보급만을 받기 위해 들렀다가 그대로 출발 할 생각입니다." "흐음." "약간 돌아가는 일정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하니까." "경하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엘이 경하를 돌아보며 의견을 구했다. "어차피… 뭐. 어떻게든 가야하는 거잖아." "어차피라고 하지만 그래도 육로로 가는 것과 수로로 가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시간적인 문제보다는…. 아니 분명 시간 문제도 있지만." 로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지도를 노려보았다. 탁자 위에 있는 것은 하나스와 아셀을 중점으로 제작된 지도로 미메이 라는 그냥 한쪽 구석만 조그맣게 보이는 지도였다. "하나스는 문제가 없었지만 아셀은 틀려. 솔직하게 고백해서 아셀에 대 해서는 나도, 기엘도 아는 바가 없다. 아무리 룬 당신이 잘 알고 있다 고 해도, 기본적으로 우리는…." "아아. 알아. 알아. 믿음직하지 못해서 고민이라는 거. 하지만 좀 믿어 달라구. 당신들한테 미운털 박힌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룬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룬이 경하에게 가르친 단검술과 그가 사건 직후 한말에 대한 것이다. 그 두가지 덕에 지금 로운은 로운을 비롯 나머지 두 남자에게 눈총을 받느라 경하 옆에는 접근도 못하는 중이다. 생각해보면 웃기는 노릇이었지만 로운들에게 있어서는 그는 일종의 위 험 분자였던 것이다. "로운. 어떻게 해서든 가야하는 거 맞지?" "………." 로운이 룬과 약간식 신경전을 벌이자 경하가 로운에게 말했다. "그리고 시간 단축이 된다면 더욱 더 좋은 것이고." "그렇다. 기엘의 아버님이 언제 카드미엘이 도착하실지 모르는 일이야. " "흐음. 그렇다면…." 경하는 말을 하다말고 지도를 내려다 보았다. 폴리카르 강은 셰비를 중심으로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유탄을 지나서 아셀 제국의 동부를 흘러 바다로 빠져나가고 또 하나는 서부를 지나 수도인 자노아 곁을 지난다.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현재의 위치에서 자노아를 가는 직통길은 폴리카 르의 서쪽 라인을 타고 가는 것이다. 또하나, 현재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경하는 두 개의 강 줄기를 포함한 아셀 제국의 지도를 다시한번 바라보 았다. '미메이라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너무 많이.' 그리고 경하는 조용히 기엘과 로운과 시유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직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미메이라에서 너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 더더욱. 그가 들은 미메이라 인들의 약점. 특히 바람술의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 록 영향을 받는 다는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아셀 제국은 미메이라에서도 상당히 먼 곳이다. 오히려 넓은 제국 땅들보다도. 이리야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을지 모르지만 이리야는 물의 술사다. 무엇보다 물 가까이 있는 것이 그의 몸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의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이리야는 역시 물 위에, 또는 속에 있는 것이 낫다. "이렇게 하죠." 경하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반듯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제라그가 준비해준 많은 것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도 움이 있었으니까 그럭 저럭 여기까지 빨리, 그리고 그나마 안전하게 도 착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룬을 보내준 것도. 하지만 이것은 우리 일 이고, 그리고 우리가 가야하는 길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룬이 뭔가 심상치 않은 경하의 기색을 발견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끼리 가겠어요. 말이야. 뭐 어떻게든 내가 해결하면 되는 거고,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룬이나 이제라그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가진 돈으로 다른 배를 빌려서, 아니면 정기선 에 살짝 숨어타는 쪽도 나쁘지 않구요." "이봐!! 너---!" 항의하려는 룬의 입을 막는 경하. 경하는 지도를 들어올려 룬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아셀에 가야해. 방해하지마. 안전한 것도 중요하 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나한테는 아니 우리한테는 있어." "그래도!!!" "그래도가 아니야. 이건 내 일이야.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당신이 대 신 해줄수 없는 일이야. 당신도, 이제라그도 아닌 내가 할 일이라구." 경하는 룬의 얼굴에 들이 댔던 지도를 탁자 위에 내동댕이쳤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가겠어." "그런 말도 안되는!! 나는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은 이제라그에게 당신이 받은거지 내가 받은게 아니야." "이봐!!" 룬이 흥분해서 말하려 했지만 경하는 들은 척도 안했다. "기엘. 로운. 배를 구해 줘. 작은 것도 상관없어." "경하님." "그리고 시유. 너는 힘들겠지만 아무말 없이 따라와 줬으면 좋겠고 몸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나에게 이야기 해줘." "…………." "그리고 기엘. 로운. 나… 티리쉬 주문은 해제 할 거야. 최대한 빨리 자노아에 도착 하고 싶어. 이리야씨도…." "응?" "이리야씨는 날 도와줘. 좀 무리한 주문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힘을 합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 "잠깐 기다리십시오. 저희들은, 저희 나름대로 명령을 받은 것이 있습 니다." "선장님 신세는 많이 졌어요. 하지만 지난 번에 보셨죠? 우린 우리 몸 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사람들이 많으면 오히려 힘들어요. 여러 분들까지 보호해야하니까." "……그런."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난, 이 사람들이 더 이상 상처 받거나 하 는 것은 싫어요. 그러니까 최소한도로 인원을 줄여서 최대한 빨리 가고 싶어요." "………." 그 말에 결국 선장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할거니까. " 휘이잉---- 바람이 경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경하가 불러온, 폴리카르 위를 흐르는 바람. "모두들 내 말을 들어줘. 부탁이야." ***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니?" "하나스에서 약간 술수를 부렸더군요. 가놋 2세가 전적으로 그들을 지 원한 것 같습니다. 두패로 갈라져 알리아를 출발했는데 현재로써는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로렌이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기는 소리 하지마. 그곳에서는 택할 수 있는 길이 뻔하다. 폴리카르 를 빼고는 없잖아. 그것을 왜 못 찾는 다는 거야!!" 로렌은 역정을 냈지만 미타 남작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작은 일에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상황에 한탄을 할 뿐이다. 물론 작은 일이라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바람 술사들을 골라서 보내. 마법진이 그 근처 어딘가에 있지? 최대한 빨리 보내서 그들을 찾아내." "하나스는 불가능 합니다. 하나스에는 마법사들이 있어서 결계로 보호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가능한 곳이 어디야! 안대면 마법사들에게 폐이요트 산맥에 다라도 이동 마법진을 만들라고 해!" "…………." "보내서 찾아내. 그들은 충분이 찾아낼 수 있지 않나." "역정을 내지는 마십시오. 유탄쪽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럼 그리로 보내면 되잖아!!!" "하지만 폐하. 이쪽에 그렇게 시간을 들일 필요는…." "필요한 만큼.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들이라고 나는 명령했다." "폐하." "카스핀." "………." "나는 완벽한게 좋다. 피라미들이 끼어 들어 조금이라도 일을 그르치는 것은 질색이야. 미메이라의 사신이 곧 도착한다고 들었다. 그전에 그들 을 해치워. 미메이라가 둘로 갈라져 있다면 내가 원하는 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은 없애버리면 된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번득이는 눈빛속에서 그것이 로렌의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미타 남작은 잠시 무언으로 항변을 하려다가 그만 포기해버렸다. 어차피 그의 군주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폐하." "유탄으로 바람 술사들을 모조리 골라 보내라. 생포가 가능하다면 생포 를 시도해라. 회유도 좋고 뭐든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고 제시해도 좋 아. 불가능 하다면 제거해." "예. 폐하." "아. 그렇군." 명령을 내리던 로렌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하셰카를 써먹을 수도 있겠어. 아셀 쪽에 있는 지부는 거의 손상이 없 을 터, 그들에게 연락해서 미리 찾아보라고 해. 그들도 기회라고 생각 할 것이다." "……하세카를…." 미타 남작은 로렌의 말을 듣자마자 그때까지 잊고 있었던 자들에 대해 생각이 났다. 로렌의 말 그대로나. 하나스나, 제국쪽의 검은 암살단 하셰카의 지부는 상당히 피해를 입은 상태로 아직 제기불가능, 그러나 아셀쪽은 틀리다. "카스핀." "예?" "바람이 불고 나면 무엇이 남는 줄 아나?" "…………."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말일세." "아무…것도 남지 않을 듯 싶습니다만." "아니.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아쉬움이 남네." "…………." "난 그런 것은 질색이다. 나는 바람을 내 손안에 넣어보겠다." 로렌이 활짝 창을 열였다. 순간 바람이 몰려들어와 주변의 것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바람의 흔적따위, 나는 원하지 않아. 그 자리에 머물러 아쉬움 따위를 곱씹고 싶지는 않다." 로렌의 등뒤에서 강렬한 햇빛이 비친다. "아슈레이에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어. 그것을 잡아서 내 손안에 넣어 그 주인이 될 것이다." "…………." "반드시." *** "도대체 당신은 왜 따라온 거야?" "그야. 당신들이 아셀제국에 잘 도착할때까지 도와주라는 명령을 받았 으니까." "하아. 정말 말이 안통하는 인간이구먼." 이리야가 룬을 향해 투덜 거렸다. "그러니까 저녀석이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고집도 세지." "그러는 당신도 이유없이 저녀석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룬이 반격했다. 결국 경하가 주장한데로 셰비에서 다른 배를 구해 옮겨탄 그들은 현재 셰비를 떠나 한창 강을 따라 내려가는 중이었다. 한가지 경하의 생각되로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룬의 존재였다. 그는 알리아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그대로 경하 일행과 같이 가겠 다고 고집을 피워 버린 것이다. "난 이유가 있으니까 따라다니는 거야." "뭔데?" "저녀석 내 생명의 은인이거든." "뭐?" "경하가 내 생명을 구해줬다 이말씀이야. 어차피 죽을 건가 해서 멋대 로 살았는데 기왕 저녀석이 구해준거 저녀석을 위해 써도 되겠다 싶어 서." "잉여의 삶이라는 거냐?" "잉여면 어떻고, 저녀석이 새로 만들어줬음 어떻겠어. 말장난 하고 싶 은 마음은 없어. 내가 가고 싶어서 따라가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야." "당신은 당신네 나라 국왕이 있잖아. 왜 딴짓을 하는 거야?" "나는 하나스의 기사다. 분명 하나스의 기사지. 하지만…." "하지만이 거기서 왜 붙어?" "하지만 난 국왕폐하의 기사는 아니야." "에엥?" "하나사의 기사이긴 하지만 하나스의 국왕의 기사는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 그것을 알기 위해 가는 거다. 저 남자들이 무엇을 보고 있 는 건지,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그러면서 그는 손으로 기엘과 로운을 가르켜보였다. "난 전하를 위해서 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생각은 해본적도 없다. 아 니 오히려 기사라는게 거추장 스러웠어. 그런데 저들은 틀려." "틀리긴 틀리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저 경하라는 소년에게 있는 그 무엇인가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 "하이고…." 이리야는 이마를 짚었다. 뭔가 상당히 이상한 놈을 데리고 와버린 것 같았다. "뭔가 저녀석한테 홀라당 간놈이 하나 또 나온 것 같은데 이걸 좋다고 해야할지. 나쁘지도 해야할지." "그게 무슨 말이야?" "넘어가. 나도 잘몰라." "이리야!!!" "어. 왜 불러?" "준비해줘." "아. 아아 알았다. 그럼 난 이만. 저녀석이 뭔가를 시켜서 말이야." 이리야가 룬에게 손을 팔랑 팔랑 흔들어보이면서 경하에게로 걸어갔다. 룬은 그 뒤에서서 경하에게 다가 갈수록 표정이 변하고 있는 이리야를 지켜보았다. 그는 이리야에게 두 남자를 보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리야 역시 그 가 눈여겨 보고 있는 남자 였다. 말하는 것을 봐서는 그는 절대로 기사가 아니다. 하물며 경하와 같은 바람술사도 아니다. '분명 뭔가가 있어. 저녀석에게는.' 룬이 바라보고 있는 인물인 경하는 그때 배의 앞쪽에 꼿꼿하게 서 있었 다. 경하는 그때까지 의식적으로 열심히 속으로만 갈무리하던 힘을 천천히 개방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외워 간신히 막아둔 티리쉬의 주문을 한순간에 해제해버린 다. 주문이 해제되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울렁하는 느낌이 들었다. "세나케인 뿐만 아니라 내 엘도 쓸거야. 다들 어딜 붙들고 있던가 아니 면 안에 들어가 있어." 로운이 구해온 배는 지난 번의 라트커스만큼 큰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작은 배도 아니기에 작은 선실정도는 있 다. 그 안에 시유가 있었고 경하는 룬에게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을 종용했 다. "싫어. 내 몸 하나는 지탱할수 있다구. 네 녀석의 바람 때문에 흔들릴 정도면 따라오지도 않았다." 경하에게 그렇게 대답한 룬은 자신의 몸을 돛대에 꾹꾹 밧줄로 묵기 시 작했다. "어디 맘대로 해봐." "…………." 그런 룬을 보면서 경하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케인…." 작은 목소리로 경하가 케인을 부르자 그 형체가 순식간에 배를 둘러쌌 다. "제어가 안될지도 모르니까 넌 배를 부탁해." 「알기는 아는 군. 의지 박약의 산물이다.」 "지나치게 인간다운 말투는 그만두랬지? 왠지 너 말하는 투가 우리 형 을 점점 더 닮아가. 쓸데없니 문장쓰는 거 하며." 「네 옆에 있다보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세나케인은 절대로 한마디도지지 않고 시비를 걸었다. "시끄러워. 산만해." 「하아. 분부대로 합죠.」 정말로 인간처럼, 세나케인의 대답이 들어온다. 그것을 듣고 경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형이라도 옆에 붙어 있는 기분. "그럼 시작할게. 다들 잘 부탁해." 경하는 조용히, 배 앞머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몸 주위를 지나는 세나케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세나케인의 형체가, 그 바람의 드래곤이 온 배를 감싸안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온 몸의 감각으로 전해져온다. '부탁해. 케인.' 두 팔을 벌리고 몸안에 있는, 그리고 대기에 있는 엘을 찾아 숨쉬기 시 작한다. 경하의 몸 속에 있는 무한대의 바람의 엘이 공기속의 엘과 공명하여 박 동이 시작되었다. 휘이이이이이잉------- 쏴아아아아아아--- 바람 소리에 물결이 밀려와 함께 합창이라도 하듯 울어댄다. 손가락 끝에 자신의 엘과 공기중의 엘이 하나로 합쳐져 걸린다. 그 순간 경하는 눈을 떴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확트인 시야…. 앞에 보이는 것은 수천 수만개의 가닥으로 길게 이어진 바람의 엘. 그 끝에는 경하 자신의 마음이 있다. 경하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다. 진심을 담아, 모두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뒤를 세찬 바람소리가 뒤 따랐다. ----------------------본편 라스트 다음은 짧은 외전입니다. 8장 이제라그의 하루 - 외전 "전하. 기침하실 시간이옵니다." 두터운 휘장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푹신한 이불 속에 감겨 곤히 자던 이제라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꼼 지락 꼼지락 거리며 눈을 떴다. "…………." "전하. 기침 하셨습니까?" "아아. 그래." 대답을 하자 휘장 뒤에 비치던 인영이 재빨리 사라진다. 아마도 그가 일어난 것을 알리러 나갔을 것이다. '아아. 또 하루가 시작되는 건가.' 손으로 더듬어 그는 몸에 감겨 있던 이불을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어제 밤 늦도록 이것 저것 손을 댄 탓인지 왠지 몸이 더 무거운 느낌이 었다. "후우… 힘들군." 기분이 나빠지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이것 저것 먹어대는 버릇 때 문인지 고민이 있었던 다음 날이 되면 얼굴이나 손가락이 훨씬 퉁퉁 부 는 느낌이다. "역시 그 친구 말대로 살이나 좀 빼야하는 건가?" 그는 며칠전 만났던 아름다운 은발머리의 사람을 떠올린다. 한눈에 봐도 아름 답다고 밖에 표현 할 수 없었던 사람. "흐음. 그런 것은 타고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고개를 내려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를 바라본다. 물론 남자이니 임신따위 했을 리가 없다. 순수하게 자신의 '살'이다. "푸우…. 역시 빼볼까?" 뜨금 뜨금 가슴께가 따갑다. 경하가 한 말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목 아래는 40대. 목 위는 20대.」 *** "전하. 입에 맞지 안으십니까?" 언제나와 같은 아침. 하지만 이제라그의 시녀들에게는 그날 아침은 악몽같았다. 보통때와 다름 없이 이제라그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상위에 올려놓 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왕은 그 음식들에 아주 조금 손을 대었을뿐 대부분의 음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평소 이제라그가 먹는 양이 아니다. "아아. 그냥 조금 덜 먹었을 뿐이다. 아. 그리고 말이야. 으음." "예? 전하?" "으음. 지금 이시간에 궁에 있는 로열 가드가 누군지 알고 있나?" "아. 예. 이 시간이라면…." 시중을 들던 시녀는 자신이 아침에 봤던 기사의 이름을 열심히 떠올린 다. "파기엘님께서 대기중이십니다." "그럼 파기엘을 불러주겠나? 오전 회의가 끝나면?"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파기엘을 부르는 것은 비밀리에…." "예?" "비밀리에 불러주게. 후원 쪽으로…." "…………?" "알겠지?" "예. 잘 알겠습니다. 전하." 꼬르르르륵--하고 배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제라그는 애써 맛있는 음식들의 유혹을 참았다. '나는 왕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왕이라구.' 그는 불끈하고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이 파이 한 조각 먹는다고 해서… 특별히 영향은 없지 않을까?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따악 한 입-다른 사람한테는 세입-의 파이를 맛 있게 우물 우물 먹어치웠다. 이제라그의 하루는 길다. 오전에는 어전회의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시시껄렁한 회의. 그리고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나면 산더미 같은 양피지 더미에 휩싸여 이 런 저런 일을 열심히 봐야한다. 그리고 나면 금방 점심시간. 그러면 그는 오전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 내려는 듯 열심히 식탁 위를 비운다. 점심 식사를 하면 아주 잠깐 오수를 즐긴다. 낮잠은 그의 삶의 활력소.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왠지 하루종일 기분이 좋다. 그렇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해가 중천에 떠오른다. 그러면 그의 왕비랑 약속한데로 궁을 한바퀴 시찰. 아무대로 살을 빼라는 속셈인 듯 싶지만 사실은 반쯤은 건성이다. 궁을 한바퀴 시찰하고 나면 이제부터는 내내 사람들을 만난다. '왕이라는 것은 역시 참으로 귀찮단 말이야.' 라고 그는 간단하게 논평한다. 싫어하는 사람도 만나야하고,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가끔 은 봐야한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단 싫어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나이가 지긋한 정도가 아니라 어서 빨리 관으로 들어가 주었으면 하는 궁의 대소 신료들 중에서도 엄청 늙 은 장로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주로 그의 혈족들로, 제일 위로는 그의 친 어머니인 대비, 제일 아래로는 그의 3명의 후궁들이 낳은 공주와 왕자 들이다. 이상하리 만치 그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했다. 왜냐고? '왕은 고독해야하니까.' 그는 스스로에게 대답한다. *** "예에?" "뭘 그렇게 놀라는 건가. 짐의 말이 이상하기라도 한 건가?" "아. 아닙니다. 전하. 그냥 단지…." "단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는 로열 가드 중의 하나인 파기 엘. 그는 지금 이제라그가 방금 전에 한 말에 너무나 놀라 할말을 잃은 상 태다. "검술 훈련을 그만둔지 꽤 되었지만 그래도 소시적에는 꽤 열심히 했었 지. 그대가 잘 가르쳐주었으면 하네." "아. 예에. 하지만 그, 저보다는 훨씬 더 전하께 검을 가르쳐드릴 분들 이……." "되었네. 그쪽으로가면 너무 복잡해져. 귀찮으니까 자네가 가르쳐달라 는 게야." "그렇긴 합니다만… 그것이." "싫은가?" "아. 아닙니다!!!!" "그럼 좋네. 오늘부터 매일 이시간에 이곳에서 보자고. 알았나? 로열 가드 파기엘." "예…… 전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파기엘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파기엘은 생전 처음, 그의 국왕에게 검술 연습을 시킨다는 무지막지한 정신 노동을 해야했다. "아이고. 허리야… 그래. 거기를 좀 두드리게."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아. 괜찮아. 그리고 그 아래 다리도 좀 주무르고." 14살에 이제라그에 시집와서 왕자 하나를 낳은 아름다운 이제라그의 왕 비 오로트. 그녀는 왕비가 된 후 처음으로 육체 노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넓고 넓은 이제라그의 허리와 다리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던 것 이다. "아니 거기가 아니라. 좀더 아래." "…………." "이제 좀 살 것 같군." 순간 꼬르르르륵--하는 점잖치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라그의 배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전하 시녀들을 시켜 무엇이든 좀 가져오라 할까요?" "……………." 꼬르르륵---- 대답대신 이제라그의 뱃속에서 환영의 소리가 들린다. "……………." "…전하?" "흠흠. 가, 가져오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기왕이면…." "예?" "기왕이면 양고기 스튜 가득." "예. 가득." 생긋하고 그녀가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이 이제라그에게는 천사의 미소로 비추어진다. 그 날밤 이제라그는 아침에 다짐했던 모종의 결심은 까마득하게 잊어버 린채 좋아하는 양고기 스튜를 열심히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이제라그에 묻는 다면 아마도 그는 서슴치 않고 대답할 것이다. 양고기 스튜라고 말이다. 세상에 낙이 하나 있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 는 하나스의 국왕 이제라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 6권 마침 [아슈레이 7] 1장 균열 (1) 이 글은...그러니까 미 수정본입니다. 문의는 사절..... 아슈레이 7 폭풍 1장 균열 (1) 시원한 바람의 한 가운데로 왠지 모를 따스한 기운이 섞여든다. 아직 강의 양쪽 기슭에 보이는 것은 갈대와 간간히 눈에 띄는 짙푸른 나무 들 뿐이지만 조금은 싸늘하던 바람이 따스해진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점점 더 남쪽으로 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 갑판에 앉아있던 사람 하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엇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한번 눈을 깜박여 그가 본 것을 확인한 후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렁찬 목소리가 작은 배 안을 쩌렁 쩌렁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한 둘씩 여기 저기에서 갑판쪽으로 걸어나왔다. 그리 크지 않은 배였기 때문인지 일행이 모이는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행들을 불러 모은 사람의 시선이 멀리 나타나기 시작한 성벽으로 향했다. "헤에…. 크긴 크구나." "이름 값은 하지. 저래뵈도 하나스의 두 번째 가는 커다란 성이거든." "의외로 알리아가 훨씬 수수해 보이는 군요." "그거야 저 성은 하나스의 다른 성과는 좀 달라. 남방양식이 잔뜩 가미된… 에에. 그걸 뭐라고 하더라? 에잇. 기억이 안나는 군. 여하튼 남방양식으로 건축된 성이니까. 다른 하나스의 성들과는 같은 수가 없어." "그렇습니까?"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는 남자는 조금 전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룬 디 리첼. 그는 현재 그의 국왕의 밀명을 받고 모종의 사람 들을 아셀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는 그의 손가락에는 오랜 시간동안 검을 잡아온 증거가 가득했다. "맨 처음 저곳을 요새로 만든 나라는 케리타였다고 하더군. 그 뒤로 셀수 없을 만큼 자주 성의 주인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케리타에서 아셀로 아셀 에서 가이칸으로 그리고 가이칸에서 하나스로, 가끔은 기억도 안 나는 작은 왕국이 들어서기도 했었지." "흐음" "케리타가 다진 토대 위에 아셀이 만든 주성(main castle)에다가 가이칸이 만든 도로, 그리고 하나스가 만든 견고한 성벽이 모아져서 지금의 형태가 완성된 거다." 조금은 씁쓸한 표정이 섞여 있긴 했지만 룬은 꽤나 자랑스럽다는 듯이 설명 을 했다. "뭐니 뭐니해도 이 대하 폴리카르의 중심지니까." 과거는 어찌 되었든 간에 현재 저 셰비의 주인은 하나스라는 의미였다. 셰비는 아슈레이 대륙의 거대한 두 지류중 하나인 폴리카르의 중간정도에 위치판 성읍이다. 무엇보다 셰비가 폴리카르의 중심지라고 불리는 까닥은 수많은 작은 지류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폴리카르가 다시 두 개의 가닥으로 나뉘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셰비까지 흘러오는 폴리카르의 유속은 셰비에서 둘로 나뉘면서 현저하게 떨 어진다. 하지만 그만큼 주위에서 흘러 들어오는 다른 수원을 받아들여 가이 칸을 둘로 나누는 대하 나하르에 버금가는 강이 된다. 그 풍부한 수원은 그대로 물자가 되기도 하고 대륙을 종단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여러가지 요건 때문에 셰비는 수도 없이 이름이 바뀌고 또 바뀌고 바 뀌어 왔다. 폴리카르의 중심지라는 말 속에는 바로 전략적 요충지라는 의미가 숨어있는 것이다. "룬씨는 셰비에 가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짙은 갈색머리의 남자가 룬에게 질문을 했다. "물론, 일년에 두차례 정도. 말로만 제 2의 성이 아니니까. 기엘. 그건 그 렇고 말이야." "예?" "그 머리카락 보기보다 되게 거슬려." "제 머리카락이 왜 거슬리시는지요?" "…………." 하지만 대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룬은 오후가 되어 꽤나 삐죽 삐죽 삐져나오기 시작한 수염을 손바닥으로 문 질렀다. 까칠한 감각이 손바닥에서 느껴진다. "그게 뭐랄까. 갈색이나 검은색이라는 색과 자네들은 전/혀 안어울린다고 해야할까?" 룬의 말에 옆에 서 있던 검은색 머리의 남자가 피식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바꾸라고 한 것은 그쪽이야. 우리한테 불만을 토로하지는 말아 달라구." "뭐. 그쪽이 훨씬 안전하긴 하지만." 아쉽다는 듯 룬은 입맛을 다셨다. 바로 그때였다. 닫혀있던 선실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배고파-----! 밥 줘!" 그것은 그들이 타고 있는 배와 그 배가 떠있는 강의 고요함을 한순간에 깨 버리는 소리였다. *** 흐르는 강물소리만이 들려오는 고요한 갑판. 그위에는 살얼음하고는 조금 거리가 멀지 모르지만 여하튼 간에 조용하지만 상당히 살벌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한 남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마치 재판관처럼 엄숙한 표정을 짖고 있는 그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 다. "우리가 네게 굶으라고 한적 있나?" "없는데." "그럼 조금만 먹으라고 구박한 적은?" "으음. 그것도 없는 것 같기고 하고…." "이상한 것을 줘서 못 먹고 배를 곪은 적은?" "뭐, 그건 있을지도…." "딴청 피우지마!!" "왜 소리질러!!" 버럭-하고 소리를 지르는 로운에게 경하도 질세라 맞 고함을 치며 대들었 다. "딴청은 무슨 딴청이야. 물어보니까 대답했지. 왜 소리를 질러." "지금 내가 그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있을 텐데?" "…………." "도대체가 매번 똑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 군. 정말이지." 로운의 말에 경하는 자신도 모르게 꾸욱 입을 다물었다. 일행들이 나름대로는 룬의 설명을 들으며 멀리 보이기 시작한 셰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경하는 혼자서 작은 선실 한구석에서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 로운과 기엘이 말리는 것도 듣지않고 연일 이리야를 독촉해가며, 그리고 이 리야가 지쳐 떨어지자 혼자서 계속 바람술을 써온 후유증 때문이었다. 식사시간이 되어 기엘이 깨우러가도 음식냄새를 옆에서 열심히 피워봐도 눈 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깨워도 안 일어난 건 모조리 네 탓이다. 짚고 넘어갈 것은 넘어가자고." "누가 뭐래? 그러니까 일어나서 밥 달라고 하는 거잖아. 내가 뭐 틀렸어?" 전혀 거리낌없이 말하는 경하를 모두들 한숨을 쉬며 외면해 버렸다.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경하의 얼굴밑에 달려있는 동글 동글한 벌레 몸통. 이름하야 밥 벌레. 순간 경하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다 좋으니까 뭔가 먹을 것 좀 줘. 배고프단 말이야." "후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경하님." 결국 항복(?)을 한 것은 최근 룬에게서 '엄마'라는 놀림을 받기 시작한 기 엘이었다. "주긴 뭘 줘. 기엘. 저녀석 보고 식사시간까지 기다리라고 해." 로운이 한껏 불만을 담아 기엘을 붙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드신 거잖아. 괜시리 아무것도 안 드렸다가 바람 뿜는 드래곤이라도 되면 곤란하지 않겠어?" 찡긋하고 윙크를 해보이면서 기엘이 유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와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일행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실제 그들은 배가 고파서 난리 법석을 떠는 경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기엘!!!" "아니요. 식사를 드린다는 소리입니다만." "토를 달지 말아야지 토를!!!" "………죄송합니다." "아아. 젠장. 정말이지 밥 한끼 얻어먹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투덜 투덜 경하는 아직도 그를 보며 웃어대고 있는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 확트인 갑판으로 걸어나갔다. 햇살이 반짝이는 경하의 머리카락위로 쏟아져내렸다. "아아.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었으면 진짜 소원이 없겠다." 기지개를 켜며 경하는 또 한번 그의 작은 소망을 바람 사이로 흘려보냈다. ***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여하튼 시작...입니다. ...아자아자아자아자아자 [아슈레이 7] 1장 균열 (2) 아슈레이 7 폭풍 1장 균열 (2) *** "정말 희안하게 생겼네." 경하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높게 솟아있는 첨탑을 보며 경탄을 했다. '그 뭐더라. 영국이나 독일의 성처럼 생기기는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긴 하 네.' 룬의 설명을 듣지 않은 탓에 경하는 셰비의 그 특이한 건물들과 좀처럼 어 울리지 못하고 서로 언밸런스하게 늘어져 있는 건물들이 이상하게만 보였 다. '성은 독일의 그것 같고, 집들은 무슨 스위스의 산장처럼 생기고, 길은 로 마의 마차 길 같고… 성벽은 만리장성쯤 되려나.' 멋대로 주워 넘기며 경하는 열심히 주위 광경을 둘러보았다. 물론 입은 꼬옥 다물고 말이다. 기엘과 로운에게 부지런히 잔소리를 들은 탓에 경하는 되도록 입조심을 하 고 있는 중이다. 사실 하고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 거리가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까? 하지만 불만을 토로하기에는 너무나 주의를 많이 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 다. 경하 스스로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쪽이 좋다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고 있는 것이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 예정이었지만 경하의 반대로 그 계획은 무산 되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다고 우긴 것이다. 하지만 지금 경하는 셰비 성에서 멀지 않은 장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경하는 입을 삐죽이며 로운의 말을 떠올렸다. "돌아다니지 말고, 배 안에 머물러 있어. 식료품을 구하는데는 그렇게 시간 이 걸리지 않아." "구경 좀 하면 안 돼?" "안 돼." "왜 안 되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또 납치같은 것이 되거나 하면 곤란하니 까 얌전히…." 말을 하다 말고 로운이 슬며시 말꼬리를 흐렸다. 순간 로운은 아차 싶었다. '이런 말실수를 했군.' 암묵적으로 기엘과 로운, 그리고 이리야는 되도록이면 지난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경하가 사라졌던 그 시간, 무슨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무엇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경하는 아직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걱정은 집어치워. 혼자 안 나가면 되잖아. 그리고 변장도 했고, 걱정 할 것은 없다고 봐." 그렇게 말하며 경하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머리가 긴 여자 가발은 아니지만 두건을 둘러 적당하게 머리색을 숨기고 있 었던 것이다. "후우,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단독 행동은 안 됩니다. 경하님. 저희들을 따라오세요. 룬씨도 있고 하니 그쪽이 더 안심이 됩니다." "기엘." 조르는 듯이 말을 해보지만 기엘은 단호했다. "시장에 가는 거니 나름대로는 이런 저런 구경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상을 바라시는 것이라면 절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에게 미메이 라로 돌아가자고 말하시는 쪽이 더 나을 겁니다." "그럼. 그럼 기사양반 말 한번 잘하는 구만." 박수를 치며 이리야가 기엘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자자. 그럼 결정 된 거지? 나랑 저기 아가씨는 얌전히 배에서 기다리고 있 을테니까 잘들 다녀오라구. 대신 늦지는 말아. 저녁이 되기 전에 출발하는 쪽이 좋으니까." 이리야는 아직 선실문 앞에 서있는 시유를 손으로 가리키며 사람좋게 웃었 다. 이리야의 지원 사격을 받은 경하는 의기양양하게 기엘을 보며 말했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여하튼 가는 건 가는 거니까. 알았어. 따라갈께." "그래주시면 감사하지요." '역시 따라나오길 잘했어.' 과정은 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결과는 마음에 들었다. 간만에 흔들리는 배 대신 탄탄하고 움직이지 않은 맨땅을 밟은 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경하는 주먹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그 감동을 온 몸으로 만끽했다. 어린애처럼 때를 서서 따라오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역시 난 해군 되기는 글렀어. 육군이 좋다니까. 육군이." 혼자 멀뚱 멀뚱 건물들을 바라보며 히죽 거리고 있는 경하를 보며 기엘과 로운은 뒤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기엘 넌 너무 물러." "무르기는." 로운은 기엘에게 불만스럽게 말했지만 기엘은 그것을 가볍게 넘겨 버렸다. "그래도 내 눈앞에 계시는 쪽이 안심이 돼. 우습다고 해도 말이야." "저녀석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가 아니야." "어린애는 아니지." 들고 있는 짐이 묵직하게 어깨를 내리누르기 시작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것 도 아니다. 기엘은 시종일관 단 한순간도 경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수가 없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는걸." "긴장을 늦추라는 소리는 아니야. 기엘." "그래. 로운." 툭툭 자신의 어깨를 치는 친우역시 그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다. 기엘은 가 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짊어진 짐을 다시 한번 고쳐 매었다. "그나저나 이리야씨가 혼자서 괜찮을지 모르겠어. 우리가 전부 나와버렸으 니." "괜찮을 거야. 시유도 자기 몸은 혼자서 지킬줄 알고, 게다가 무엇보다 강 위라구." "그건 그렇지." "자아 그럼 서둘러볼까? 어이. 너무 멀리 가지 마!!"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신기한 표정을 짖고 있는 경하를 로운이 소리높여 부 른다. "알았어!!!" 경하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젖고 있었지만 로운이나 기엘과의 거리만큼은 착실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룬씨는?" "저쪽-." 손가락으로 로운은 마치 이 셰비에서 몇 년은 살아 온 듯한 여유를 부리며 물건값을 흥정하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이봐요 아저씨. 이건 너무 비싸잖아. 알리아에서도 이렇게 비싸진 않아. 하물며 여긴 셰비인데. 앙?" "그. 그래도…." "그러니까 나도 무조건 깍아 달라는 소리는 안 한다니까. 그저 저거랑 이거 랑 요거랑 좀더 껴달라는 소리지. 그 정도는 괜찮을텐데?" 말이 깍는 거지 반쯤은 협박이다. 룬은 얼굴은 싱긋 싱긋 웃고 있지만 이두박근 삼두박근, 탄탄한 근육들은 불끈 용솟음을 치며 호리호리하고 나이들은 베테랑 장사꾼의 얼굴에 그림자 를 드리운다. 결국 장사꾼은 룬의 협박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에라. 가져 가쇼. 가져가. 내참. 기껏 몇푸대 사면서 그러는 사람은 처음 봤소!!" 애써 태연한 척 말하는 장사꾼. 하지만 어서어서 되도록 빨리 룬을 보내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광경을 보며 기엘과 룬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을 수 밖에 없었 다. "고맙소." 씨이익--- 룬은 승리의 미소를 얼굴 만면에 띄우고 있었다. *** 필요한 물자들을 조달하는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일단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이 룬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 엘이나 로운이 하나스 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 나스 북부의 표준어일뿐. 셰비 이하의 남쪽 지방의 방언까지 섭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음식물에서부터 피복까지 자질구레한 것들을 대략 구하고나자 나직한 언덕 너머로 해가 뉘엿 뉘엿 기우는 저녁시간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생각보다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걸렸군요. 룬씨. 서두릅시다." "그러게.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배로 돌아 갈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수군. 이러다가 또 저 녀석이 날뛰는 거 아닌가 몰라." 룬은 그렇게 말하면서 뒤에서 아직도 목을 빼고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는 경하를 가리켰다. 물론 본인은 자신이 거론되었는지 아닌지 전혀 알 리가 없다. "으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위험하겠지요." 그럭 저럭 룬하고도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기엘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필요한 것은 다 구한건가? 로운?" "대충. 옷가지야 어떻게든 될 테고, 돌아가는 길에…." 필요 목록을 꼼꼼하게 체크하던 로운의 순간 손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그애는 생각지도 못했군.'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시유의 얼굴. 여행이 계속되는 동안 피곤함에 지쳐도 말 한마디 없이 꿋꿋이 견디고 있는 그녀를 떠올린 로운은 뭔가 그녀를 위해 준비할 것이 없는가 고민했다. "기엘! 로운! 루---운!!!" 뒤쪽에 처져있던 경하가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뛰어왔다. "비가 올 것 같아." "예?" "저기." 경하는 손으로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정말로 구물 구물 눈에 보일 정도의 빠른 속도로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 정말이네?" 룬이 신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비가 올 듯한 징조는 없었는데…." 기엘은 경하가 가리키는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서 몰려오는 구름을 보며 중 얼 거렸다. "나도 전혀 못 느끼고 있었어. 그런데 순식간에 몰려 오더라구." 나름대로는 바람의 흐름으로 대략적으로나마 날씨를 짐작할 수 있던 경하도 이번만큼은 굉장히 의아해 하고 있었다. 정확한 시점까지는 모르더라도 왠지 비가 올 것 같다라던가, 오늘은 바람이 좀 심하게 불거다 라던가 정도는 마치 일기예보 비슷하게 해오던 경하였다. 경하는 순식간에 구물 구물 밀려오는 먹구름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굉장히 기분 나쁜 구름이잖아. 꼭. 구렁이가 기어오는 것 같다.' 살아 있는 것처럼 점점 밀려오던 구름은 어느새 경하 일행이 서 있는 곳 바 로 앞까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햇빛이 구름에 가려 한줄씩 두줄씩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비구름이다. 서둘러야겠어." 커다란 자루를 몇 번이나 고쳐메면서 룬은 일행을 독촉했다. 셰비는 생각보다 훨씬 큰 성이다. 그들의 배가 있는 선착장까지 가려면 그래도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 이다. "꾸물거리다가는 기껏 산 식료품은 물론이고 우리까지 홀라당 젖어 버릴 거 야. 어서!!" "알겠습니다. 룬씨." 벌써 축축한 기운이 경하가 서 있는 곳 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서둘러 앞장서 가는 룬의 뒤를 따라가면서 경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보 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보통은 소나기라고 해도 대충은 알 수 있었는데. 안 그래 케인?' 「보통은 그렇지.」 배 위에서라면 소리내어 세나케인을 불렀겠지만 이곳은 엄연히 '밖'이다. '저 정도로 먹구름이 밀려오는데 아무것도 느낄수가 없었어.' 「나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네가 아무리 바람의 주인이라고 해도 모든 대기의 흐름을 매번 낱낱이 느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그렇지만.' 경하가 자꾸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걸음이 지체되자 로운이 달려와 경하의 팔을 붙들고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뭐하고 있는 거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소리 못 들었어?" "아. 미안. 그냥 좀 이상해서 확인을 해볼까 해서." "확인은 나중에 배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 후두두두둑. 순간 경하의 얼굴위로 물방울들이 떨어졌다. "어라?" "이런." 짧게 혀를 차며 로운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굵은 빗방울들이 하늘에서 앞다투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자질구레한 것은 포기한다. 어서 배로 돌아가자." 어깨에 맨 커다란 자루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앞장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리고 경하는 로운의 팔에 붙들려 질질,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들의 소리와 함께 허둥 지둥 좌판을 거두기 시작하 는 장사치들의 소란스러움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 때문이었을까? 앞다투어 달려가는 사람들의 홍수 속에 섞인 일행은 먼 발치에서 그들의 뒤 를 따르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 "하아. 한가하구만." 경하 일행이 시장에서 옥신 각신 흥정을 벌이는 룬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 는 동안 이리야는 한가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바람은 따스하고, 햇살은 적당하게 내리쬐고, 그리고 강물 소리는 평온하게 지속되는 정말 한가한 오후. 매일 같이 경하의 독촉에 물의 술을 쓰느라 지쳐있던 이리야에게 있어서 이 런 시간은 아주 꿈결같은 시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소란스러운 녀석이 없으니 아주 한가하구만." 끄덕 끄덕, 스스로도 멋진 말을 했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혀 멋지진 않지만 말이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후 그는 갑판 위에 대자로 쭈욱 몸을 펴고 벌렁 드러 누었다. 갑갑한 선실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 보다는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기 때문이 다. 잠깐 눈을 붙일까 말까 고민하던 그는 온 몸이 닿아있는 갑판의 나무바닥이 미세하지만 삐걱 삐걱 소리를 내는 것을 눈치챘다. "어이 아가씨. 괜찮으니까 좀 밖으로 나와서 햇빛 좀 쐐. 맨날 그 안에 있 으면 갑갑하지 않아?" "괘, 괜찮습니다." 살며시 선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던 시유는 화들짝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나름대로는 조심한다고 한 것인데 귀신처럼 자신의 기척 을 알아차린 이리야를 원망하면서 말이다. "뭐 어때? 그녀석도 없잖아." "…………." "그녀석이 있건 없건 말이야. 나오고 싶으면 원하는대로 나와 있어. 아가씨 가 더 피하니까 그녀석이 더 함부로 굴 수도 있다고." 일단 당사자가 없기 때문인지 이리야는 꽤나 대담(?)하게 시유에게 말을 걸 었다.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시고 시유라고 불러주세요." 거리낌 없는 이리야의 태도에 왠지 마음이 놓인 시유는 조용하게 이리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야가 갑판에 아무런 긴장감 없이 벌렁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 른다. "그랬다가는 기사양반한테 혼날걸? 내가 그녀석을 마구 불러대는 것도 간신 히 참아주고 있다구." "괜찮습니다. 저는 수장 계승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단호하게 굳어져 있는 시유의 표정을 보며 이리야는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 정말로 예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기사양반은 꼭꼭 님자를 붙여서 부르는 걸. 안 그래?" "기엘님은 원래 그러신 분이니까요." "그렇지 기사양반은 앞뒤가 꽉꽉 막혀서 구워도 삶아도 어떻게 안되는 인종 이니까." "…풋." 이리야의 말에 시유가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표정이 풀어진 시유는 나이에 걸맞는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다고 이리야는 생각했다. "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에에 그러니까 사실 난 말을 잘 못해. 날 때부 터 기사고, 신관인 누구들하곤 상당히 틀리거든.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 벌렁 누워 있던 이리야는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툭툭 자신의 옆자리를 두들기며 시유에게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시유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씩 이리야의 옆으로 다가갔다. "물론 시유의 입장에서는 그녀석이 못 마땅하겠지." 그녀석이라는 단어에 시유의 표정이 다시 얼어 붙는다. "하지만 나름대로 녀석도 고생을 많이 했어. 그렇군. 내가 그녀석을 따라 다니는 이유, 말한적이 있던가?" "…………." "해도 될까?" "별로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소리만 안하면 어." 넉살좋은 이리야는 그 정도면 다고 생각하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이 예쁜 얼굴의 소녀가 가끔이라도 웃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더라. 여하튼 꽤 되었네. 생각보다는." 이리야는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로 절세 미녀인줄 알았지. 정말로 하늘 하늘 한데다 가 진짜로 인형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거든. 물론 지금도 나쁘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런 절세 미녀한테 꽉막힌 기사양반이랑 신관양반이 붙어 있더라구. 말한번 걸었다가 아주 바보 될번했었어. 한마디 더했거나 했으면 아마 지금쯤 내 목은 여기 안 붙어 있을지도 몰라." 이리야는 툭툭 하고 자신의 목을 쳐보였다. "그냥 그렇게 예쁜, 엘러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나랑 같이 여기 저 기 숨어다니고 쫓기는 신세더라구. 나름대로는 반가웠지." 조용히 이리야의 말을 듣고 있던 시유가 뭔가를 물으려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어 버렸다. 이리야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언질을 주었다. "궁금한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도 좋아." "…………." "궁금한거 있지?" "왜… 쫓기는 신세셨나요?" "아아 그거. 뭐 별거 아니야. 난 원래 제국인이거든. 가이칸의. 제국 황태 자가 넓은 제국 전역에서 초보 엘러들을 모아서 부대를 만들었는데 그게 싫 어서 도망을 쳤어. 한참을 쫓겨다녔지. 그러다가 간신히 좀 숨을 돌리나 했 는데 세상에 내가 지긋 지긋하게 싫어하던 남자가 내가 숨어들은 도시까지 쫓아왔지 뭐야……." 따라다니는 이유를 말해준다며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덧 이리야의 무용담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유는 아무말 없이 조용하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료하게 답답한 선실에서 보내던 때보다 훨씬 몸도 마음도 자유롭다. 탁트 힌 시야가 꼭 닫혀있던 마음을 열어주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높은 성벽을 훌쩍 뛰어 넘는 것에 홀라당 반했지 뭐야. 사실 나 야 고만 고만한 물의 술사였을 뿐이니 정말 놀랄 수 밖에 없는 일이었어." 이리야의 이야기는 계속 되어 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줄줄줄 이어나가는 이리야의 이야기는 때로는 건성 건 성 떼먹고 때로는 마치 지금 바로 그 현장에 있는 듯 착각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계속 ......오타인가.......그저 미스 타이핑인가...-_-;;; [아슈레이 7] 1장 균열 (3) 아슈레이 7 폭풍 1장 균열 (3) "우왓!!! 새카매졌잖아." "한밤중이나 진배없군요. 괜찮으십니까? 경하님." "난 괜찮아. 완전 물에 젖은 생쥐가 되긴 했지만." 물의 술이나 바람술을 써 비를 막는다는 생각같은 것은 할 생각도 없 이 일행은 완전히 물에 빠진 몰골이 되어 있었다. 꽤나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선착장까지 오는 길은 나무도 멀찍 멀찍 하게 서 있는 대로다. 게다가 그 대로에 깔려 있는 돌들이 내리꽂는 물들을 사방으로 튀기며 흐르게 하고 있는 통에 그나마 따스하게 느끼 던 날씨도 왠지 온몸이 오싹 해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에이쒸∼. 왜 이렇게 먼 거야!! 추워 죽겠다." 괜찮다고 한지가 방금이건만 경하는 한껏 몸을 떨면서 투덜 거리기 시 작했다. 주륵 주륵 내리는 정도를 지나쳐 이제는 마치 장대처럼 퍼붙기 시작한 비는 폭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얼굴을 들면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며 눈으로 튀어 들고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물론 너무나 홀딱 젖어 스며들어 봤자긴 했지만 말이다. "망토라도 가지고 왔어야 하는데." 기엘은 혹시 경하가 감기에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자신을 책 망했다. "아까 전에 망토를 가지고 나왔으면 걸리적 거렸을 거야. 괜찮으니까 기엘 그냥 가자구. 빨랑. 으으--- 왜 이렇게 내리는 거야. 정말이지! !" 장대처럼 내리붙는 하늘은 마치 구멍이라도 뚫린 것 처럼 비를 퍼부어 댔다. 설상 가상으로 정말 폭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번개와 천둥이 그들의 머 리 위에서 으르렁 거리며 번쩍였다. "배는 괜찮을까 모르겠군." 로운이 한마디 하자 룬이 대뜸 대답했다. "괜찮을 거다. 일단은 이리야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비가 오면 마 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는 사람이지 않았어?"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로운도, 기엘이나 경하도 마음이 놓였다. 실제 비가 오는 날엔 이리야가 훨씬 더 기운이 나 펄펄 뛰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경하님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그렇게 걱정 안해도 되. 단지 폭삭 젖어서 기분이 나쁠 뿐이지 어디 안좋은 건 아니야. 적당히 해줘."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지 말라구!!" "예. 죄송합니다." "으이그…."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경하와 기엘의 실랑이는 끊임없다. 우르르릉 콰아앙---- "우앗--!" 흠칫하고 경하는 어깨를 움츠렸다. 바로 머리 위에서 벼락이 내리꽂는 듯한 느낌. 경하는 너무나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추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몇 번이나 장마라든가 태풍 같은 것을 겪어 봤지만 이렇게 실감나게 머리위에서 느껴 본적은 처음이다. 게다가 경하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곳에서는 무의식중에까진 아니더 라도 원하는 한도내에서는 이른바 '예측'이라는 것이 가능했었다.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눈앞에 가득 들어왔지만 왠지 눈을 감고 싶은 생 각이 들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하늘이 검다.' 맑은 하늘이 순식간에 저렇게까지 검어질 수는 없다. 마치 칠흙처럼, 빛이라고는 한 가닥도 찾아볼 수 없는 새카만 하늘. 눈으로 스며들어오는 빗물이 너무나도 차갑다. 그 차가운 빗물은 몸뿐만이 아니라 경하의 감각마저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데도, 그래서 그것에 손을 대었는대도 아무것도 손가락에 닿지 않는 듯한 이상한 느낌. 얼굴에 차가운 물방울이 아프도록 내리꽂히는데도 마치 환영을 보고, 환영속에 있는 듯한 감각. "뭘 하는 거야. 서둘러야 한다고 오는 내내 귀가 아프도록 들었을텐 데." "아. 아아." 로운이 독촉했지만 경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알 듯 말 듯한 그 기묘한 느낌. 느끼려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뭔가 느껴지는 모순된 상황. 경하는 손을 들었다. 하늘 높이. 빗줄기는 이제 더욱 더 거세져서 마치 폭포밑에 서 있는 듯한 상황이 되었다. 그 아래서 경하는 다른 일행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렇게 그 자세로 얼어붙은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빗소리가 들리는 귀가,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하늘을 바라보는 눈이, 쐐기처럼 내리 퍼붓는 빗줄기를 받고 있는 손과 얼굴의 감각이 하나 둘씩 마비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경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경하님!!!!" 우뚝, 마치 동상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던 경하의 몸이 그 자리에 스르륵 무너진 것은 바로 직후였다. "경하님!" "뭐야. 어떻게 된거야?" 룬이 놀라서 기엘에게 물었지만 기엘은 아무런 대답도 할수 없었다. 로운의 얼굴을 봐도 마찬가지 였다. "정말 황당하잖아. 이녀석 어디 아팠던 것은 아니야?" 룬은 경하가 어제까지만 해도 피곤해서 하루종일 기절하듯 잠들어 있 던 것을 기억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룬의 말은 기엘의 귀에도 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모양 이었다. 찰싹 찰싹 몇 번이나 로운이 경하의 뺨을 때리며 이름을 불렀지만 부 릅뜬 경하의 눈은 꼼짝할줄 몰랐다. 마치 그대로 온 몸이 굳어져 버린 듯했다. "여기서는 안 되겠다. 일단 배로 돌아가서…." 너무나 충격을 받아 경하를 안은채 꼼짝하지 않는 기엘의 팔에서 로운 은 경하를 빼앗았다. 손으로 부릅뜬 눈을 감기고, 가슴에 귀를 대어보았다. 두근 두근…. 시끄러운 빗소리 사이에 섞여 들리는 낮은 심장소리가 로운의 귓가에 들려왔다. "괜찮아. 기엘. 언제나처럼 아주 잠깐 이상한 것 뿐일 거야. 알겠어?" 멍한 얼굴의 기엘에게 다시 한번 말한다. "항상 그랬잖아. 아주 가끔씩.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그랬던 것. 잊 지 않았겠지?" "…………." 언제나 그래왔다. 아주 멀쩡하게 있다가 순식간에 경하는 마치 자신 혼자서만 딴 세상에 빠져 버린 사람처럼 이상한 표정을 짖고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들곤 했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 "한 두 번이 아니라니. 뭔가 지병이라도 있는 거야?" 왠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는 룬의 말소리가 오히려 기엘의 신경을 아주 조금, 제 자리에 돌려놓는다. "경하님껜 병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가까스로 제정신으로 돌아온 기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뭐라고 설명을 할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른 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 실이 기엘을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다. "기엘. 괜찮아 질 거다. 알겠어?" "…그래." 로운의 말소리에 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비, 그리고 천둥과 번개. 그리고 경하. 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비가 퍼붓는 넓은 대로 위를 있는 힘껏 가로질러가기 시작했다. 비 따위는 그들의 앞을 막을 수 없다고 증명하는 것처럼. *** 눈앞이 흐려왔었다. 귓가에 시끄럽게 들리던 소리들이 점점 멀어지고, 그리고 손가락사이 를 파고들던 쐐기 같은 물줄기가 언제부터인가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마치 흐릿한 안개에라도 갇혀있는 느낌. 경하는 세나케인을 불렀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케인.' 입을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 단지 그냥 부르고 있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케인. 케인….' 「…………」 대답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분명 이 경하의 아주 바로 옆, 아니 경하의 안에 존재하고 있어야하는데도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느끼…는 게 뭐지?' 느낀다는 것이 무얼까. 느낀다는건 무엇으로 느끼는 걸까?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그런 것으로 느끼는 것일까? 하지만… 세나케인이, 그리고 바람이, 아니 바람의 힘이 의지가 그런 것으로 느낄수 있었던 것일까? 경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젖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아무것도.' 어느덧 경하는 세나케인을 부르던 것을 멈추어 버렸다. 느끼지 못하는 것인데 왜 불러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 버렸다. '힘들었잖아. 그러니까 느끼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되. 그 것이 가장 편한 거야. 그냥 계속 언제까지나, 영원히….' 감각 없는 눈꺼풀이 눈앞을 가리고 시야는 새카매졌다. 그 어둠이 가져온 공포. 순간 경하는 위화감을 느꼈다. '누구지? 그렇게 말한 건? 내가 아니야. 나는 아니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었다. 하지만 공포가 가져온 위화감. 그것은 감각이었다.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순간 경하는 깨달았다. '누군가 내 감각을, 오감을 막고 있어. 아니, 느끼지 못하게 막고 있 다.' 주위를 돌아볼 것도 없이 경하는 세나케인을 불렀다. '케인.' 분명히 존재한다. 그 자리에, 경하의 주위에, 경하의 몸 속에…. 그 존재하는, 분명히 존재하는 그를 부른다. "케인!!!!" 이번에는 그의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로…. 쏴아아아아아----------- "히야… 죽이는 군. 이런 비는 정말 오랜만…." 말을 마치려다 말고 이리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정도의 비라면 분명 그의 기억속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기억속에 있던 어떤 비와도 틀린 것을 보면 역시 이렇게 미친 듯이 비가 내리는 것은 아무래도 처음인 듯 싶었다.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이군." 그는 선실안에서 손을 뻗어서 내리는 비를 손바닥에 받았다. "읏- 차거." 탈탈탈 손을 털어내며 그는 얼른 옷에 젖은 손을 비볐다. 이렇게 섬뜩하도록 비가 차갑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다. 그가 물의 술사라고 해도 비를 매번 따스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물 의 술사인만큼 자연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그것이 인간의 잣대 로 잴수 없는 엄청난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좋지도 않구만." 이리야는 딱 한마디로 지금 내리고 있는 비를 결론 지었다. "정말 엄청난 비야. 폭우라고 해도 좋겠어." 말을 하고 있지만 비가 내리는 소리에 스스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다. 정말 오감이 마비라도 되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그는 그 엄청나게 내리는 폭우에 사로잡혀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 를 듣지 못했다. 아주 커다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안고 가던 경하의 몸에서 순간 냉기 같은 것이 온몸에서 발산되었다. 경하를 품에 안고 있던 로운은 순간 놀라 경하를 떨어뜨릴 뻔 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경하를 안은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로운!!!" 뒤에서 로운의 등을 보며 달리던 기엘이 무슨일인가 해서 다급하게 물 었다. "로운 무슨 일이야?" "이녀석이…." 로운이 미쳐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것은 기엘의 앞에 나타났다. "우왓----!!" 눈앞으로 다가드는 거대한 형상. 기엘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경하를 안고 있던 로운 역시 알 수 없는 강대한 힘에 뒤로 밀려나며 팔에 안고 있던 경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힘은 앞장서서 달리던 룬에게까지 덥쳐와 룬이 발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그를 멀리 앞으로 강제적으로 밀어 버렸다. "으아아아악!!!!" 바람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오면 이렇게 될까? 풍선 가득히 공기를 불어 넣었다가 순간 터뜨려 버린 것처럼 바람의 엘이 순식간에 경하의 몸 속에서 밖으로 미친 듯이 터져나왔다. 비의 폭풍대신 바람의 엘의 폭풍을 맞고 있는 세 사람은 그것이 정말 단 한순간의 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엘의 흐름이….」 시끄러운 빗소리 대신 머리를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통한 것이 아닌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신의 목소리와도 같은 것. 그 소리는 잠시 어디론가 날아 갔던 기엘의 정신을 다시 제자리에 돌 려놓았다. "세나케인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고 기엘은 경외감마저 어린 목소리로 그 대상의 이름을 불렀다. 인간의 형상이 아닌 신의 대리자로써의 형상, 바람의 드래곤. 눈을 반쯤 뜨고 있는 경하의 몸을 중심으로 그의 형상이 바람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로운의 시선은 오히려 세나케인보다는 그 중 심에 있는 경하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의 이 현상은, 세나케인이 나타난 것은 과연 경하의 의지일까 아 니면 바람의 의지일까? 로운은 그것이 궁금했다. "예의 그것이로군." 기엘 못지않게 경외감에 가득차 있긴 하지만 룬은 엉뚱하게 '그것'이 라고 표현해버렸다. 순간 흐릿하게 나타났던 세나케인의 형상이 순식간에 인간의 형상이 되어 룬의 코 앞에 몰려왔다. "무례하다. 굉장히." "우, 우앗---!" 코앞으로 나타난 세나케인에 놀란 룬이 그만 엉덩방아를 쪄버렸다. "아이쿠-." "무례하기 정말 짝이 없어. 이러니까 인간들이란." 투덜 투덜, 진짜 인간처럼 세나케인이 투덜 거린다. 그 모습을 룬은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건지 나한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 질문은 던졌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다. ---------------------계속 [아슈레이 7] 1장 균열 (4) 아슈레이 7 폭풍 1장 균열 (4) "경하님 정신이 드십니까?" "…으응." "아무렇지도 않다. 그 녀석은 단지 멍청하게 바보처럼 있다가 정통으 로 걸려든 것 뿐이다." "예?" 기엘이 놀라 세나케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나케인은 방금 전에 말한 것은 아주 잊었다는 표정으로 대뜸 경하를 향해 말했다. "이젠 느낄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응." 아직 반쯤은 무엇인가에 취해있는 듯한 경하였지만 세나케인의 말은 들리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방해를 하고 있어." "그래." 세나케인은 다행이라는 듯 얼굴표정을 바꾼다. "네가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이상은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알 수가 없 다.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려. 언제나 내가 네 대신 모든 것을 먼저 알아내고 너를 인도할 수는 없다." 경하는 고개를 들고 세나케인을 바라보았다. 세나케인의 주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엘의 흐름이 경하의 눈에 천 천히 인식되었다. "언제부터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무엇인가 방해를 하고 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아직도 머리를 때리고 어깨를 때리고 온 몸을 적시고 있는 비. 그것이 신경을 분산시켰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비와 함께 누군가 불러온 거다. 아무 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치 경하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투로 세나케인이 말했지만 경하는 주 먹을 꾸욱, 살갗이 아프도록 쥐고 있었다.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 구름이, 먹구름이 몰려오던 그 시점에서.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일이 터진 뒤에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언제 나 후회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 투욱-- "…………?!" 경하의 어깨에 젖은 손이 내려왔다. "그런데 정말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알려줄 수 없을까? 문외한이라고 너무 무시하지 말아 줬음 좋겠어." 기엘과 로운은 아무말 없이 경하와 세나케인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 룬에게 설명을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결국 룬이 물어 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뿐이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많이 와서?" 번쩍--- 어둡게 보이던 경하의 머리카락이 순간 번개에 비쳐 은백색으로 빛난 다. 우르르릉 콰광--- 은백색의 젖은 머리카락 위로 천둥소리가 흐른다. 처연함이 가득한 얼굴. 룬은 섬뜩한 추위에 몸을 떨었다. "케인은, 세나케인이라고 해. 그는 바람의…." 주위는 온통 축축한데 입안은 바싹 바싹 타오른다. "형체를 가진 바람이라고 해야하나. 의지를 가진 바람이라고 해야할 까." "그리고?" 다그치듯, 룬이 경하를 재촉한다. 경하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그의 눈빛이 점점 살아 나는 것을 보 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있어. 그래서 강한 비와 바람과 구름을 조정해 서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마비?" "엘에 의한 것이 아니야. 이런 현상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 시켜서 우 리가 느끼지 못하도록, 아무것도 알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서…." 거기까지 말하던 경하의 눈이 순간 커다랗게 떠졌다. '우리의 눈과, 귀와 감각을 막았다. 하지만 우리를, 날 노린게 아니 야. 그렇다면…." 경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지는 못해도 그것을 알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과, 묻는 사람들. 로운과 기엘. 그리고 룬.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은….' 느끼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이리야와 무표정하지만 항상 화나있는 그러 나 아름다운 얼굴의 시유가 생각났다. "케인. 먼저 가봐. 나 대신 그들을 도와줘." "불가능하다." "어째서!!!" 경하는 고함을 질렀다. 이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조금전까지 가고 있던 목적지를 향 해 뛰고 있었다. "이것은 광범위하게 그러나 한 지점으로 귀결되고 있는 일종의…" "일종의 뭐!!" 가슴속으로 절규하며 묻는다. "그래. 인간들의 언어를 빌린다면, 마법이라고 하는 종류다." 인간이었다면 아주 비통했을 그런 목소리로 세나케인이 말했다. "우리의 아니 네 행동 반경을 현저하게 제한해버린 마법이다. 그것도 금지된 어둠의 마법." *** 이리야는 지금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인지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는 무력감이 그의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언제나 그의 편이었던 물이 오히려 그를 속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엘과는 그가 평소 느끼던 자연의 엘과는 전혀 속성이 다른 물의 엘이. 하늘에서 내리던 비가 한곳에 모여 이리야의 다리와 팔과 손과 얼굴을 족쇄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시유가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그는 그저 눈을 뜨고 쳐 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 일까? 이제 그의 눈앞에 내리는 비는 새카만 색으로 변해 흉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은 비가 아니었다. 몸 안으로 스며든 비가 폐부를 찌르며 그의 호흡을 방해했다. "크흑----." 단어를 말할 수 없는 입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순간 붉은 색의 기운이 파악--하고 그의 시야를 가렸다. 새카만 줄기가 되어 내리던 비가 그의 눈앞에 쓰려져 있는 시유의 몸 을 덥치고 있었다. '안 돼.' 한줄기 한줄기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시유의 몸에 감겨 들어간 다. 그것을 그는 붉게 변한 눈으로 보고 있을 수밖에,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악물어도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지?' 무력감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찌른다. '…………!?' 그 고통으로 치켜뜬 눈에 이상한 형상이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검게 변한 빗줄기들이 시유의 몸을 속박하고 나자 그 다음에는 뚝뚝, 마치 보이지 않는 병이라고 있는 듯 한곳으로 모여 그대로 천천히 그 보이지 않는 병 안으로 보여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르는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그 인간의 형체는 곧이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리야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발자국씩 발을 땔 때마다 그것의 표면은 꿈틀 꿈틀 하며 변하기 시 작해 이윽고 이리야의 앞쪽에 우뚝 섰을때는 거의 완전한 인간의 형상 으로 바뀌어 있었다. "괴로운가?" 마치 지옥에서라도 기어 나온 듯한 끔찍한 목소리. "그렇지 괴롭겠지. 하지만 그대가 죽인 내 형제들은 더 더더욱 괴롭게 죽어갔다."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그는 천 아래에서 입술을 움직이며 그 끔찍한 목소리를 계속 힘겹게 만들어 나간다. "하지만 나는 너를 이 정도로 죽게 하진 않겠어. 너는… 시작일뿐이 다." 새카만 손가락이 이리야의 가슴 바로 앞으로 떠올랐다. "너는 모든 복수의 시작이 될 것이다. 저기 누워 있는 네 주인과 함 께."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이리야의 마비되어 가는 귀로 흘러들어온다. '내 주인? 누구를 말하는 거지?' "앞선 실패는 오늘을 위한 거다." "쿨럭--." 피가 튀어 그의 새카만 손가락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하 지 않고 그 피가 묻은 손가락을 그대로 이리야의 가슴에 대었다. "똑똑히 기억하라. 너는 지금 이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가 다른 개들에게 전하라. 네 주인을 찾고 싶으면, 그럴 수 있으면 한번 찾아 보라고." 쿠욱----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지독한 고통. "커헉---!!" 눈동자가 뒤집혔다. 새하얗게 뜬 이리야의 눈동자는 그가 받고 있는 고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하셰카는 아직 죽지 않았다. 아니 사라진 자 들은 모조리 쓸데없는 가지였을 뿐. 하셰카는 언제까지나 기억할 것이 다. 그것을 기억하라." "……커헉. 헉." 새빨간 피가 이리야의 입에서 쿨럭 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상처 입은 그의 가슴께로 흘러내려 검은 빗줄기와 섞여 들어갔 다. 한 방울 두 방울씩 흘러내린 피들이 이리야의 발 밑에 피의 웅덩이를 천천히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형제들을 죽인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말을 마치고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자는 뒤로 물러섰다. 그는 팔을 올리는 듯 하더니 그대로 흐릿해지며 다시 검은 물의 형태 로 돌아가버렸다. 흐릿한 눈으로 이리야는 이를 악물고 피를 흘리며 그것을 지켜보았다. 검은 물에 감싸여 사라지는 시유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던 물 의 형제가 커다란 구체가 되어 부풀어 오르는 것을…. 그것은 이전에 그가 보았던 어떤 형태와 아주 비슷했다. '안 돼… 나는, 나는 아…직….' 점점 더 부풀어 올라 이리야와, 이리야가 타고 있는 배를 전부 덥쳐 버릴 것처럼 되어버린 구체가 순간 부르르르하고 떨었다. '나는 아직… 아무도 구해주지 못했…어.' 다음 순간 그는 눈앞에서 커다란 소리와 함께 그 검은 구체가 폭발했 다. *** 털썩-----. 누군가 그대로 주저앉는 소리였다. "이. 이건…." 비가 멈추고, 어두운 구름이 걷혀가면서 햇살이 다시 대지와 넓은 폴 리카르의 수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햇빛이 비추는 광경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던 선착장은 그곳이 과연 선착장인지, 아니면 낡고 오래된 배들이 부셔져 만들어진 배들의 무덤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난생처음 목격하는 참혹한 현장. 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쟁을 겪어보았던 그였다. 하지만 어떤 전쟁도, 어떤 전투가 벌어졌 던 곳도 이곳처럼 참혹한 상태는 아니었다. 부서진 배 사이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이 팔이 보였 다. 그것들은 제각기 움직이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어떤 힘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거지?" 룬이 너무나 충격적인 광경에 혼란스러워 하는 동안 기엘은 주위를 둘 러보고 있었다. 그 역시 룬 못지 않게 충격을 받았지만 그것을 드러낼수는 없었다. "기엘. 배는? 우리 배는?" 그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호되게 내리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운. 찾았어?" 그것은 로운에게도 다르지 않게 들려서 그 역시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 러보고 있었다. "어디 있는 거지?" 경하는 빗물로 젖은 머리카락을 잡고 신경질적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 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아무리 감각을 개방해보아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찾는 사람들의 기척을 말이다. '이리야도, 시유도 느껴지지 않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쳤다면 다친 대로 그들이 가진 파장이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마치 깨끗하게 지워 버린 것 마냥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는 것이다. 깨어 물고 있던 입술에 이젠 피가 맺히고 있었다. "찾았다." 미친 듯이 부서진 선착장 위를 뛰어 다니던 로운이 손을 뻗어 멀리 떨 어진 한 배를 가리켰다. 그 배는 다른 배들 못지 않게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금방이라도 물 속 으로 가라 앉아버릴 것 같이 위태롭게 강물 위에 떠 있었다. "로운!! 기엘!!"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기도 전에 경하가 먼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경하는 세나케인의 도움도 없이 그저 자신의 감각으로 그대로 하늘로 뛰어오른 것이다. 언제나 경하의 몸 주위에 머무는 엘들이 고형화 되어 경하의 몸을 아 무것도 없는 공중에 머무르도록 했다. 경하는 몇 번이나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박차고 도약해 멀리 떨어져 있던 배 위로 뛰어 갔다. "경하님 조심하세요.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 "알고 있어!!" 경하는 무의식적으로 바람의 엘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그것은 기우뚱 거리며 언제든 가라 앉을 듯한 배에 다닥 다닥 붙기 시 작했다. 투명한 젤같은 것이 온 배에 달라붙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경하는 그대 로 배로 뛰어 내렸다. "이리야!!! 시유!!!" 부르는 소리는 절규에 가깝다. "이리야 어디 있는거야!! 시유!! 대답해!!" 바람이 경하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바람에 실려오는 소리는 없다. "시유!!!! 이리야!!!" 경하의 목소리에 더해지는 것은 로운과 기엘의 목소리뿐.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리야---!!" 선실안으로 뛰어 들었던 로운의 목소리가 순간 높아진 것을 경하는 눈 치챘다. 저것은 찾기위해 부른 이름이 아니었다. 경하는 몸을 돌려 좁은 선실안으로 뛰어갔다. 아니 거의 바람처럼 날 아갔다. 철퍽---- '어? 이건 뭐지?' 선실안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경하는 발 밑에 뭔가 끈적한 것이 밟힌 다는 것을 알아챘다. "로운? 이리야?" 어두운 선실은 원래보다도 더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지만 시력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이리야?" 순간 경하는 숨을 들이마실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독한 냄새가 그의 폐에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우욱---." 갑자기 뒤에서 팔이 쑤욱 뻗어나와 경하의 얼굴을 가렸다. "왜. 왜그래!!" 욕지기를 하다말고 경하가 그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경하님 밖으로 나가십시오." 들려온 목소리는 기엘. "싫어! 이거 놔!!" "로운이 이리야를 밖으로 데리고 나올겁니다." "싫어!! 놓으라고 했지!!" 버럭 화를 내며 경하가 기엘의 팔을 뿌리쳤다. 그것은 손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바람의 엘을 뿜어냈기 때문 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경하는 그 숨막히는 냄새의 정체를 알수 있었다. "이…리야." 어둠속에서 해방된 경하의 눈에 이리야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냄새는 다름이 아닌 지독한 피비린내. 이리야가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것에 묶여 벽에 고정되어 있는 곳에서 경하의 발치까지 짙게 변색되어 버린 피의 연못이 흘러와 있었다. "이리야? 살아…있는 거 맞지?" 어느덧 경하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여들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거 맞지? 그렇지?" 살아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경하는 이리야의 파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리야? 이리야!!" 앞으로 다가서려는 경하를 다시 기엘이 붙들었다. "경하님 진정하십시오." "이리야!!" 경하의 눈물이 피웅덩이에 떨어지려는 찰나 로운이 한마디를 무겁게 내뱉었다. "살아 있다. 하지만… 아주 위험한 상태야." "어떻게 된 거야? 정말 살아 있는 거야? 그런데 왜 파장을 느낄 수가 없는 거지?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시유는?"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 같은데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로운은 이리야를 벽에서 떼어내는 것 만으로도 굉장히 힘들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기엘은 기엘대로 불 안정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경하를 저지하는 것 만으로도 힘들어 하고 있었다. "로운!! 대답을 해봐!!" 상처입은, 거의 피로 온 몸을 물들이고 있는 이리야의 옆에 꿇어앉아 있는 로운에게 경하가 소리를 질렀다. "로운!!" "…………." "젠장!!! 대답을 해보라니까! 빌어먹을!! 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야!! 놔 기엘!" "경하님." "케인 네가 말해봐!! 도대체 이리야가 어떻게 된 거지? 너라면 알 수 있잖아!!" 「내가 알 수 있다면 너도 알 수 있다. 냉정하게 대해라.」 정말로 냉정하게 들러오는 세나케인의 목소리에 경하는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가 온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내가 냉정 할 수 있으면 너한테 물어보지도 않아. 잘난척 하지말고 빨리 말해. 진짜로 화나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몰라 케인!" 「……………」 어디선가 바람의 한숨이 들려온다. 그 한숨소리의 끝에서부터 이번에는 인간다움이 한껏 묻어나 있는 목 소리가 그 목소리를 내는 형체와 함께 나타났다. "인간이라는 건 불편한 거군. 감정에 너무 많이 좌우된다.." "시끄러워 세나케인." 드물게 경하가 세나케인을 케인이 아니라 세나케인이라고 부르자 세나 케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는 이미 눈치를 챘겠지. 그래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거다." 세나케인은 로운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로운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 어졌다. "왜. 아무 말도 못하는 건데?" "그를 살릴 수 없으니까." "어째서?" "경하님. 제발 그만 하십시오. 이제." 기엘이 경하의 어깨를 당겼다. 하지만 경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 세 나케인에게 물었다. 아니 절규했다. "어째서 살릴 수 없는데. 아직 살아 있잖아. 아직 살아 있다구. 살아 있다고 나한테 말했잖아!" "어둠의 마법으로 인해 그의 모든 엘이 완전히 봉인 당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그의 온 몸을 흐르는 엘의 흐름이 막혀 있는 것이다. 엘을 쓰는 술사로써 그 흐름이 완전히 막혔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진지 이해할 수 있겠지?" "------!!" 경하는 아무말도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경하를 보고 기엘도 아무말 하지 못했다. 그는 로운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지금 이리야가 처해있는 상황, 그와 똑같은 상황을 로운은 그대로 겪 었던 경험이 있다. 현재의 경하가 처음 이 아슈레이의 세계에 왔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위험에 빠져 자동 발동 주문의 영향으로 이리야와 똑같이 엘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로운은 자신의 모든 엘을 이끌어내어 그 순수한 엘의 힘으로 경 하의 파장을 끌어냈다. 목숨을 걸고. 기엘은 아마도 경하가 로운에게 이리야를 살려내라고 요구한다면 이전 에 그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니 로운이 아니더라도 그 역시 경하가 원한다면 진심으로 원한다고 한 다면 기꺼히 행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로운. 이리야씨에겐 그 방법은 불가능해." 적어도 경하에겐 외상이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잠재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리야는 그렇지 않다. "…이리야씨는 상처를 너무 입었어. 로운. 견딜 수 없을 거다." "기엘…." 돌아보는 로운의 얼굴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이어 올라온 로운의 손에 가려져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일까? 그 무력감이 가져온 공포심 때문일까? 로운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이리야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경하님." "이리야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겠어. 하지만…그래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어. 그리고 시유도." 눈앞에 있는 이리야의 상태가 극도로 나쁜 탓에 잠시 잊혀져 있던 시 유에게 생각이 미치자 로운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기엘. 일단 이리야를 육지로 옮기도록 하자. 이곳은 너무 위험하고 …." 그리고 나면 어떻게 해야할까. 항상 똑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한다. 언제나. 어떻게 해야하냐는 질문에 과연 누가 답변을 주는 것일까. 과연 누가. 로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옮기고… 그리고 시유가 어디로 갔을지…." "가만히 있어. 로운. 이 배는 괜찮아. 내가 괜찮은 한은." 로운의 말을 경하가 가로 막았다. 로운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하에게 닿았다. "이리야는 죽지 않아. 죽지 않게 하겠어. 그래. 시유가 어떻게 되었는 지 이리야는 알 거야. 그러니까 제일 먼저 이리야를 살리겠어." "하지만 어떻게…." 로운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는 경하에게 갈구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저떻게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런 표정하지마. 이리야는 아직 죽지 않았어. 알겠어?" "하지만 죽어가고 있다." "그런 말 하지말라고 했지. 그래 이리야는 죽어가고 있다고 쳐. 죽어 가고 있으면, 그럼 살리면 되는 거야. 살리고 나서, 그리고 어떻게 되 었는지 듣고, 그리고 결정할거야. 누가 데려갔든 찾아오면 되는 거야. 알겠어 로운?" "…………." "대답해 로운." 명령하듯, 단호하게 들려오는 경하의 목소리에 로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래." 왜 그랬는지는 알수 없다. 단지 경하는 대답하라고 했고, 그리고 로운은 대답을 했을 뿐이다. "기엘. 로운이랑 함께 이리야를 부탁해. 나는 이리야를 옮길때까지 이 배를 유지시켜 야 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경하님." 경하의 말에 기엘이 먼저 움직였다. 어떻게든 하면 된다. 경하는 몇 번이고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일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벌어진다. 그럼 자신은 그 일을 해결하면 된 다. 만일 해결하지 못한다 해도 빗겨나가든 정면으로 맞서든 무엇이든 지 하면 된다. 그것이 무엇이 되든 간에…. ------------------------------------- 1장을 마칩니다. 2장으로 .....쿨럭 [아슈레이 7] 2장 갈림길 (5) 아슈레이 7 폭풍 2장 갈림길 (5)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두 개의 길을 놓고, 그리고 고민한다. 어느쪽이든 성공 가능성 이 있기에 더더욱 말이다. 이쪽도 좋을 것 같고 저쪽도 좋을 것 같고. 하지만 지금 경하는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한쪽으로만 치달아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손을 놓으면 끝이라는 강박 관념이 경하의 어깨를 짓눌러왔다. 왜라고 물을 사이도 없었다. 너무나 충격을 받았기에 어째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 누구에게 어떻게 무엇을 한건지 그 과정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상처 입은 사람 뿐. 그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명제가, 반드시 해야하는 그리고 하지 않으면 안될 명제 경하의 눈앞에 누워 있었다. "회복 주문 같은 것도 안 될까?" 질문을 하지만 딱히 답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있는 것이 너무나 싫을 뿐이 다.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사람들의 신음 소리 뿐. 그것이 경하에게는 침묵으로 다가왔다. 이리야의 상태는 이루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몸 전체를 무엇인가 자잘한 것으로 수없이 타격 당한 듯 피가 흐르는 작은 생채기들이 온 몸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 피 웅덩이를 이룰 정도의 출혈을 가능하게 만든 상처는 오 로지 두 개 뿐이었다. 가슴과 이마의 상처. 굵은 못에라도 박았다가 빼낸 듯이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기엘과 로운이 되도록 경하가 보지 못하도록 옷으로 가려 두었었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는 피는 결국 경하의 눈에 띄고 말았던 것 이다. 피는 덮어두었던 옷가지를 적시고 지금은 선착장 근처에 서 있는 작은 집의 방 한쪽 구석을 적시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피가 마치 이리야의 생명이라도 되는 양 경하는 애써 흐르 는 피를 모아보려고 했다. 순식간에 경하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경하의 피투성이 손을 닦아줄 수가 없었다. 반 쇼크상태에 빠진 경하가 자신에게 손을 대기라도 하면 미친 듯이 비명 아닌 비명을 온 몸으로 질러 댔기 때문이다. 기엘과 로운은 안타까움 반, 괴로움 반인 상태가 되어 이리야와 경하 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조금 전까지는 망연자실하게 선착장 앞 에 무릎 꿇고 앉아있던 룬으로 그는 무엇을 하는지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 상태였다. "저. 여러분…이거라도 좀 드시지 않겠어요?" 빼꼼하게 문이 열렸다. 십 이삼세 밖에 안되어 보이는 작은 소녀가 손 에 꽤나 커다란 그릇 하나를 들고 있었다. 다친 사람이 있으니 잠시 방을 빌려달라는 청에 두말없이 집을 빌려준 집 주인은 나름대로의 호의로 음식을 만들어 들여보낸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기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그릇을 받아 들었다. 커다란 그릇에는 무엇인지 모를 재료로 끓여진 스튜가 가득 들어있었 다. 물고기라도 들어 있는 걸까? 약간의 비린내 비슷한 것이 기엘의 코를 질렀다. 순간 시장기가 돌았 다. '그렇군. 오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기엘이 그릇을 받아들고는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소녀가 작은 목소 리로 물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가져다 드릴께요." "아. 아니 아닙니다. 잠시 생각을 하느라. 정말 감사 드립니다." 집을 빌려달라고 하며 내민 돈 때문만은 아니니라. 이런 작은 정성은. "저분. 좀 차도가 있으신 건가요?" "조금요. 그럼."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투로 기엘이 돌아 섰다. 일단 경하부터 조금이라도 먹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과연 경하가 이 음식을 먹으려고 들까? "아. 잠깐 실례." 마악 닫히려던 문으로 누군가가 커다란 몸짓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룬 이었다. "여기 천을 좀 구해왔다. 지금 이 근처 전체가 엉망이라 제대로 된 약 같은 것을 구하기는 힘들 것 같아. "아." 로운이 그 천을 받아 들었다. 룬이 내민 천은 상처를 감싸기 좋은 보 드랍고 깨끗한 천이었다. 그는 밖에 나가서 무슨 막일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온 통 지저분했 다. "아주 엉망이야. 다행히 죽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워낙 이 주변이 사람들이 바글 바글 한곳이라 다친 사람이 좀 많아. 부셔진 집 하나를 좀 정리해줬더니 그걸 쓰라도 주더군." 룬은 그렇게 말하며 털썩 주저 앉았다. 꽤나 지저분한 바닥이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먹을 거잖아? 왜 안 먹고 그렇게 멀뚱하게 서 있는 거야? 배고프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룬이 말을 이었지만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 다. 하지만 룬역시 특별히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 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거의 시체나 진배없이 보이는 이리야를 보았을 때부 터 말이다. "어때? 저녀석은?" "……………." 아무말 없이 계속 이리야를 바라보고 있는 경하에게 묻고싶은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 하지만 그 질문을 받은 나머지 두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젠장… 답답해서. 그 스튜나 내놔. 뭐든 먹어야 겠어. 난." 그는 벌떡 일어나서 기엘이 들고 있던 그릇을 빼앗았다. 먹어야 산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면, 그리고 눈앞에 먹을 것이 있다면 먹어야 하 지 않는가. 그는 전우의 시체를 바로 옆에 놓고 그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마른 빵 을 집어 먹었던 남자다. "그러고 앉아 있는다고 이리야가 벌떡 일어나는 것은 아니야. 일단 우 리가 먹고 기운을 내야 그 놈을 살리던 말던, 누군지 모를 놈들을 쫓 던 말던 할 것 아니야. 응?" "…러." "뭐?" 룬이 계속 떠들어 대는데 뭔가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한거야?" "시끄럽다고." "이봐. 경하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다들 이러고 있는 거잖아. 너 먹는 거 빼놓으면 시체 아니었어? 그러니까 일단 먹고. 그놈을 살릴 방안을 고민해보자구. 지금 도시쪽에서 의사들이 오고 있기는 한데. 순번이 돌아오려면 좀 시간이 걸릴 지도 몰라. 하지만 일단은 부탁은 해 놓고 왔으니까…." "시끄럽다고 했지!!! 입닥쳐!!!" 룬의 말을 경하가 소리질러 막았다. "입 다물고 있어!! 조용히 하란 말야!!" 히스테리틱한 경하의 목소리. 하지만 룬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내가 입이 막혔냐? 입닥치고 있게?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내게 그렇게 명령을 하고 싶으면 네 능력으로 그놈을 살려 봐. 멀뚱 멀뚱 쳐다본다고 이리야가 벌떡 일어나서 오오~ 살려줘서 고 마워. 뭐 이럴 것 같아?" 경하의 눈이 룬에게 향했다. "살려 낼 거야!! 살려 낼 거라고!!" "의사가 올 테니까 지금은 이거나 먹고 있으라고. 기다리면 되. 알겠 어? 네 놈의 그 미친 놈 같은 행동 때문에 다들 힘든 거 알기나 해?" "내가 할거야." 어린 아이처럼 경하가 우긴다. "하긴 뭘해!" "한다고 했잖아!!" 마지막에는 결국 비명처럼 울리는 경하의 목소리에 룬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소용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 군주의 자격이 있는 건가? 부하 하나 하나의 목숨 같은 것은 군주에겐 왕에겐 그저 게임에 쓰이는 말 같은 것이다. 기껏 한 둘이 죽어 나간다고 질질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 인간은 왕이 될 자격이 없어!' 룬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길. 난 무엇을 보고 여기까지 따라왔지? 무엇을 확인하려고? 저 녀 석이 정말로 기사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따라와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미친 듯이 스쳐 지나갔다. 공황상태에 빠져버리기 직전의 룬에게 울음이 섞인 경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책임이야. 내가 무리하게 강행해서, 내가 자리를 비워서, 그래서 생긴 일이야. 그러니까 내 책임이고, 내 책임이니까 내가 살려 낼 거 야. 알겠어? 내가 할거라고." "웃기는 소리." 그것은 누구를 향한 조롱이었을까? 룬은 그 말을 하고는 다시 주저 앉아버렸다. 앞이 캄캄했다. "젠장.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앉아 있는 거지?" "웃고 싶으면 웃어도 좋아. 내겐 나만의 방법이 있고, 나 만의 생각이 있어. 이런데서 이리야가 죽을 수는 없어. 알겠어?" "시끄러워!!" 이번에는 룬이 소리를 쳤다. 무엇에 실망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무엇인 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룬이 앉아있는 자리에서부터 절망감 비슷한 기운이 스믈 스믈 경하에 게 전해져왔다. 경하는 이미 터져버린 입술을 또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살 수 있는 걸까? 이리야는? 아니 조금이라도 살수 있는 이리야 를 내가 손을 대서 금방 죽게 하는 것은 아닐까?' 살리고 싶었지만 정말 살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힘을 믿을 수가 없었 다. 과연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 아무도 확인을 해주지 않는다. '내 힘으로… 정말로 살릴 수 있을까?' 경하는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리야를 봤을 때부터 지금 까지 계 속. '정말로… 살릴 수 있을까?' 누군가 옆에 있다면, 도와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매달리고 싶었다. 이리야를 살려준다고 말하면 누구에게든 매달려 애원할 수 있었다. '케인….' 경하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애원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단 한 존재라도 더 더욱 스스로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케인 내가 할 수 있을까?' 「너는 바람의 주인이다.」 '하지만……… 내게 정말 그런 힘이 있는 걸까? 실패하면? 실패해서 이대로 이리야가 죽어 버린다면?' 「………너는, 주인이라고 하는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 해 답은 이미 알고 있다.」 '………….' 「선택은 네 몫이다. 그를 살릴지, 죽일지.」 '…살리고 싶어.' 「그렇다면 살리면 된다. 네가 가진 모든 힘으로, 그리고 네 옆의 모 든….」 세나케인이 말을 막 마치기 직전. 경하의 몸에서는 묘한 변화가 일어 났다. '나는 살리고 싶어….' 희미한 언제나 그가 바람 술을 쓸 때면 나타나던 희미한 은빛이 경하 의 몸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 희미한 빛에 감싸인 손이 천천히 이리야의 가슴위로 내려왔다. "로 조하 아슈레이.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과 끝." 주문과 함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피부로 느낄수 없는 엘 의 흐름. "혼 라히 아슈레이. 불의 이름 호로스의 불꽃." 뒤를 이은 주문은 바람의 주문이 아니었다. 주문이 마치기 무섭게 방안에 타오르고 있던 작은 램프의 불꽃이 순식 간에 부풀어올랐다. "라 데온 아슈레이. 땅의 이름 바라스의 생명." 배우지도 않았던, 아니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주문이 경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경하마저도 스스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문 에 놀라고 있었다. '이 주문은 뭐지? 난 이런 주문은….' 발이 닿아있는 마루바닥 밑, 차가운 기운이 맴도는 땅에서부터 희미한 금색의 빛이, 금색의 엘이 스며 올라왔다. "류 타인 아슈레이. 물의 이름 나유의 근원과 흐름." 경하의 의지와는 또 달리, 경하의 입은 계속 4번째의 주문을 소리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주문은 정신을 읽고 있는 이리야의, 물의 주문. 갑자기 이리야의 몸이 꿈틀 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경하님." "…이런." 멍하게 앉아있던 세 남자의 눈앞에 투명하지만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은색의 엘과 불꽃같은 엘, 그리고 금색과 푸른색의 엘이 하나로 모여 들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보통 사람인 룬은 말할 것도 없이 바람술사인 기엘이나 로운도 그런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四)신의 힘을 모두 부르는 것은 지금 까지 단 한번도 목격해본적이 없다. 아니 절대 불가능 한 일이다. 드물게 두 개의 술을 한번에 쓰는 경우는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 지나 그것이 융합 될 수 있는 낮은 레벨의 주문들뿐. 하지만 지금 그들이 보는 것은 가장 기초적이지만 가장 강한 본연의 힘과 같은 것이었다. '뭔가 달라….' 금색과 은색과 푸른색과 붉은색의 기운이 하나로 뭉쳐 들어간다. 그것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이리야의 몸 속에서부터 그의 생 명을 이끌어 낸다. 그의 기원이 되는 물의 엘에서부터, 생명을 유지시 키며 끝내는 땅의 엘, 그것에 자유로움을 의지를 주는 바람의 엘, 그 리고 그 에너지가 되는 불꽃의 엘이 차례 차례 이리야의 물과 같은 피 속으로 흡수되었다. '일어나. 이리야.' 경하는 마음 속으로 이리야의 이름을 불렀다. 이유도 없이 이리야가 죽는 것을 바라볼 수는 없다. 살아야 한다고, 꼬옥 살아 남아야 한다고 경하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 기원은 하나의 단어가 되어 경하의 머릿속에서 공기중으로 흘러나 왔다. "후프샤-히르.(해제-치료)" 단어와 엘의 흐름이 하나가 된다. 그것은 봉인되어 차단된 막혀 있던 생명의 흐름을 다시 열어주는 해방 의 주문. 실날처럼 남아 있던 이리야의 생명의 엘이 경하가 불러낸 신 들의 힘에 반응하여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흐르는 엘이 신의 힘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조율자의 의지를 따라 새로 운 흐름이 되었다. 생명의 흐름. 신의 축복. 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의 생명. 신의 힘. 미슈파트. 바람과, 불과 땅과 물의 엘, 그것 모두가 신의 힘 미슈파트가 된다. 막혀있던 이리야의 엘이 해방되고 그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점점이 맺혀 있던 핏방울들과 옷과 경하의 손가락을 적셨던 핏자국이 하나하나 엘의 가닥으로 되살아난다. 불꽃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땅이 되어 살아나는 엘이 천천히 이리야의 몸으로 돌아갈 때마다 갈라졌던 피부가 다시 연결되고 피가 고여 있던 가슴을 상처가 메워져나갔다. 슈우우우우우------ 바람 속에 불꽃이 흩날리며 물방울이 튀고 금속의 반짝임이 섞여 작은 방을 가득 메웠다. 그것은 마치 폭풍 같았다. 하지만 그 폭풍은 파괴가 아닌 재생의, 생 명의 폭풍이었다. *** -----------------------------------------계속 정리되는 대로 올리고는 있는데... ..--;; 왜 오타는 계속 보이는 건지..... [아슈레이 7] 2장 갈림길 (6) 아슈레이 7 폭풍 2장 갈림길 (6) *** "기억이 모두 나는 것은 아니야. 마치 꿈속 같았기 때문에." 이리야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검은 색 이 아니었다. 경하의 힘 덕에 재생되며 원래의 바다와 같은 짙푸른색 으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비가 하도 내려서 잘 내린다 하면서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게 한순간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고." 그것은 경하가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다. 다른 오감을 모두 사로잡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고도의 마법. 이리야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누워 있었던 작은 침대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힘을 쓴 후 완전히 녹초가 되어 혼절해 버린 경하가 누워 있 었다. "물은 모두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끔찍했지. 그것이 내 몸을 옮아매 고 그리고 검게 변해서 그것이 되었다." 그것이라는 단어에 섞이는 이리야의 감정은 공포와 혐오감이다. "…그것이라뇨?" 그것이라는 단어에 섞인 이리야의 감정을 읽어낸 것은 아니지만 기엘 은 그와 흡사한 느낌을 받았다. "검은색이라고 하면 당연하게 떠오르는 그것." "…………." 로운의 눈빛이 짙어졌다. "설마 아직도 하셰카가? 이젠 끝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지. 이번에는. 둘도 아니야. 하나였다. 그건…." 머리보다는 몸이 기억을 하고 있는 탓일까? 이리야의 어깨가 눈에 띄 게 흔들렸다. 이리야는 부들 부들 떨리는 손을 억지로 깍지를 껴 잡고 떨림을 멈추 려고 노력했다. "그건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싫어. 하늘에서 내린 비가 검은 색으로 변 해 그놈으로 변했어. 사실 무슨 짓을 한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아니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붉은 색의 …." 깍지를 잡았던 손을 풀어 눈앞에 가져간다. 눈을 가리고 그때의 기억을 억지로 불러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기에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몸으로 고통을 겪는 것 보다 더더 욱 힘들었다. "하셰카의 잔당이 아직도. 아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로운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세카는 범 아슈레이적인 단체다. 그가 알고 있는 한. 하지만 지난 번에 그들과 대치한 이후로 하셰카라고 생각되는 존재들 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었다. 로운이 하셰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데 이리야가 말을 계속 이 어갔다. "세상이 온통 검붉은 색으로 변했어. 그리고 시유가 쓰러졌다." "시유님이?" 기엘이 되물었다. 제일 궁금했던 두 가지의 사실이 밝혀지는 중이다. 누가라는 질문에는 하셰카라는 그들의 적중 하나. 시유는? 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제 이리야의 입에서 밝혀지려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썼는지 그대로 주저 앉아 버렸다.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상태였지 않을까 싶지만, 쓰러지고는 움직이지 못했어. 비가, 검은 색 의 비가 그녀를 그대로 속박했으니까." "어째서 시유님을…." 기엘은 혼란스러웠다. 납치를 해간 인물이 경하라면 이해가 된다 오히려. 제국의 황제가 경하를 여자로 생각해서 계속 뒤를 쫓았던 것이 바로 얼마전이다. 때문에 경하를 보호하는데 그렇게나 신경을 썼던 것이다. 그런게 경하가 아닌 시유라니, 아무래도 이상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 다. "아무래도 시유를 저녀석으로 착각 한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이리야는 혼절해 있다시피한 경하를 가리켰다. "시유를 내 주인 이라고 말을 하더군.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린가 했지 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의미였던 거지." 더듬어가던 기억을 확인해가며 이리야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녀석이 여기에…." 눈을 가렸던 손을 가슴에 대고 심장이 있는 위치를 짚었다. "끔찍했어. 그대로 죽어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질끈하고 눈을 감고 마치 해치워 버리듯 이리야가 말했다. 이상하며 고통스럽고, 그리고 끔찍했던 감각이었다. 생살을 뚫고 들어오던 그것은 인간의 감촉이 아니었다. 마치 차가운 얼음 송곳 같은 것으로 그의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하셰카는 아직 죽지 않았다. 아니 사라진 자들은 모조리 쓸데없는 가지였을 뿐. 하셰카는 언제까지나 기억할 것 이다.」라고 말이야." 말을 하던 이리야는 순간 오한을 느꼈다. 그대의 고통을 되살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검은 하셰카의 그가 말 과 함께 내뿜던 지독한 증오심 때문인지는 알수 없다. "덧붙인 말이 걸작이었어." "뭐라고 한겁니까?" "「나는 내 형제들을 죽인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예?" "하셰카의 그때까지의 실수는 뭐라고 하더라? 여하튼 앞으로 열심히 복수하겠다는 소리로 밖에는 안 들렸어." 섬뜩하도록 등골로 한기가 달린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 차가워진 등뒤에서 죽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서 좋아하네. 그럼 나는 가만 둘 줄 알아? 감히 시유를 데려가다 니." "경하님!!!" "괜찮은 거냐?" "괜찮아?" "살아 난 거야?" 네 남자가 일제히 경하에게 달려 들었다. 말의 내용은 꽤나 당당했지만 몸은 아직 그렇지 않은 듯 경하는 손가 락 하나 까닥 하는 것도 힘들어 했다. "젠장 누굴 떡으로 아나. 그쪽도 우리한테 입힌 피해가 얼만데. 빌어 먹을. 다음번에 만나면 가만 두지 않겠어." 잘 움직이도 않는 손가락이 모아지고 주먹이 된다. 그것은 부르르 떨리며 경하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젠장. 하나 해결했다 싶었더니. 또 잖아. 빌어먹을 시유는 또 어디서 어떻게 찾아와야 하는 거지?' 눈앞에 쓰려져 있던 이리야에 신경 쓰느라 잠시 시유는 잊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경하는 시유에게 더욱 더 미안한 감정이 일었다. '젠장 정말 내 자신이 싫군.' 한 순간, 경하에게 이리야와 시유중 누굴 살릴 거냐고 묻는 다면 자신 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진짜 싫어. 정말로.' 경하가 자신을 비하하고 있는 동안 이리야는 그런 경하의 얼굴을 바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 하지 않다. 경하가 무슨 생각을 하던 간에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것도 이번에 두 번째. 이렇게 혼절하여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자신을 위해 힘을 써준 것이다. "고맙다. 이번으로 두 번째군." "됐어. 간지러우니까 공치사는 안 들을래. 어차피 내가 당할 수도 있 던 거니까." 이리야의 말에 경하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생각 같아서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온 몸에 무거운 추라도 달은 것처럼 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고개를 돌린채로 경하가 물었다. "그리고 뒤에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했길래 배가 그 지경이 된 거지 ? 정확하게 시유는 누가 데려간 건지 말해줘." "아아. 그건."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멈추어 졌던 이야기를 이리야가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석이 시유를 어디론가 사라지게 했어." "누가 온 게 아니고?" "그래. 그 이상한 놈 혼자서 모든 일을 벌인 거야. 그리고는 그다음에 는 원래대로 검은색의 물의 덩어리로 변했다. 덩어리로 변하고 나더니 그 다음에는 마구 부풀어서…." 부르르르- 이야기만 해도 몸이 떨린다. "터져 버렸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끝이야." "터져?" "그래. 화약덩이처럼. 푸악--하고." 그 소리를 듣고 로운은 이전 페이요트 산맥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비슷한 결말. "그렇다면 그 폭발 때문에 이 부근이 완전 엉망이 된 건가?" 마치 강한 산에라도 녹은 듯한 자국이 만연해 있던 배의 상태가 이제 야 이해가 간다. 단지 틀리다면 이전보다 훨씬 위력이 강했다는 것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선착장 부근 전체가 피해를 입었으니 말이다. "그뒤는 나도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말대로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리야씨를 발견한건 선실 안이었는데 그 안에서 폭발을 했다면 배 전체 가 부셔져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야. 난 갑판 쪽에 있었어." "하지만 분명 이리야씨는 선실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분명 벽에서 뭉쳐져 있던 엘을 깬후 데리고 나왔으니까." 기엘의 말에 로운이 덧붙여서 설명했다. "그럼… 그 뒤에 이동이 된 거겠지. 난 분명 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시유는 선실안에… 젠장. 뭐가 뒤죽 박죽이군." 말을 하다 말고 이리야가 얼굴을 찡그렸다. "앞뒤가 안 맞는 것도 아니죠. 실제 정신을 잃은 뒤에 이리야씨를 옮 겼을 수도 있으니까. 순간의 찰나라고 해도 그 문제의 하셰카의 마법 사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리야씨를 우리에게 발견 되게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 이리야씨는 지금 제 앞에 있지 않 습니까?" "그렇지. 말을 전하라고 했으니까." "쳇. 말을 전하라고 해놓고 그렇게 죽을 지경에 만들어 놓으면 어쩌자 는 거야. 그 미친 자식은." 경하가 못지않게 과격한 말투로 중얼 거렸다. "젠장. 그 하셰카라는 거. 자기들은 그렇게 맘대로 행동하면서 우리보 고 뭐가 어쩌고 어째? 그쪽이야말로 농담하지 말라고 해주고 싶다. 진 짜로. 게다가 눈이 삐었어? 왜 나대신 시유를 데려가? 착각 좋아하네. 그녀석들한테 내가 그렇게 호락 호락 당할줄 알다니. 바보 멍청이 같 은 녀석들." "경하님." "말이 웃기잖아. 말이!!! 으윽." 화를 내던 경하가 가슴을 부여 잡는다. "아우. 아파 죽겠다." 기엘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한다. "경하님!" "큰소리로 머리 위에서 그러지마. 머리 울려." "정말 괜찮으신겁니까 경하님?" "어디 이상이 있는 거냐?" 기엘과 로운이 번갈아 가며 경하의 상태를 확인한다. "죽을 만큼 몸이 무겁고 아플 뿐이야. 됐어?" "그러니까 무리를 하니까 그렇지. 앞으로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 무 리는 아무 때나 하는게 아니야." "시끄러워. 아무 때는 뭐가 아무 때야. 비상 사태였잖아." "그러면 너는 비상사태가 되면 언제나 그렇게 네 목숨을 걸거냐? 네 목숨은 열댓개는 돼?" "누가 그래." "이번에는 어떻게든 되었지만 다음번에도 그렇게 괜찮을 거라고는 아 무도 보장 못해." 로운이 가슴을 쓸어 내리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봤던 것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번 겪는 일들이지만 겪을 때마다 심장이 아릴 정도로 충격적이다. 잊을 수 없는 광경이 자꾸만 늘어 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 고 그는 생각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앞이 새카매지고 호흡이 멈추 어 버릴 것 같은 긴장감은 되도록 겪고 싶지 않은 것이다. 로운은 눈앞에 널브러져 누워 있는 경하의 팔을 잡았다. 조금전, 경하가 이리야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을 어떻게 한 건지는 아 마도 아무도 모를지 모른다. 실제로 로운 역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다 만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경하가 자신의 가지고 있는 바람의 엘 뿐만 아니라. 사신(四神)의 힘을 모조리 불러 그 엘로 이리야의 몸을 회복 시켰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간단하지만 사실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많은 않다. 만일 경하가 이리야를 고치기 위해 물의 엘을 응용했다면 또 모른다.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하는 이리야에게 물의 엘을 쓰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우고 있었고 경하가 쓴 엘의 대상이 물의 술사였기 때문 에 가능했을 방법이랄까? 그러나 4신의 힘을 전부 불러 치료한다는 것은 생전 처음으로 목격하 는 일. 어떤 바람 술사도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는 기록은 없다. 아주 오래전, 초대 수장들만이 가능했을 경지인 것이다. '순간적인 힘인지. 아니면 이미 그런 경지에 도달해 있는 건지 알 수 가 없군.' "잔소리 하지 말아 로운. 정말 아프단 말이야. 그거 놔." "이 정도로 아프다고?" 그러면서 로운은 꾸욱하고 경하의 팔을 쥐었다. 경하가 순간 발악을 했다. "우아아아악---- 로운이 사람 잡아 기엘--!! 살려줘!!" "그만해 로운." "감각은 살아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온 몸이 아프다니까!! 내말을 뭘로 알아 듣는 거야." 투덜 거리던 경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룬을 찾는다. "룬은? 어디 있는 거야?" "왜?" 뒷전에 조금 쳐져있던 룬이 경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이젠 내가 뭐한다고 할 때 토달지 마." "……………하?" "하는 뭐가 하야!! 웃기는 소리 한다고 했잖아!!!!" "…………." "앞으로 그런 소리하면 가만히 안 두겠어. 알겠어?" "떼쓰는 어린애 같군." "말꼬리 잡고 돌리지 마. 이리야가 살았으면 되는 거잖아." "문제는 이리야를 살린 것 만으로 끝나는게 아니지 않아?" 뭐라고 말을 할까 고민하던 룬이 툭-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순간 경하를 비롯한 모두의 머리 위에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것처럼 조 용해졌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젠장 실수 했군.' 룬이 고개를 돌린다. '실수했잖아. 실수. 간신히 좀 밝아졌다 생각했는데.' 이리야의 눈이 룬을 나무란다. '실수 하셨습니다.' 기엘이 룬을 쏘아보았다. '또다시 그런 소리 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협박하는 로운의 눈빛이 번쩍인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룬을 질책하는데 경하가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하셰카라고 했지?" "예." 기엘이 얼른 경하를 부축하면서 말했다. "그 점은 내 잘 못이다. 내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그렇게 쉽 게 시유를…." 이리야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질책할 수 없었다. 경하는 잠시 그런 이리야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였다. "시유를 나로 착각해서 데려갔다면 가능성은 두 개야. 하나는…." 자신을 노릴 상대라면 경하가 아는 한 둘이다. "하나는, 일단 하셰카의 잔당들이지. 안그래? 복수 어쩌고 하는 꼴을 보니 말이야.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가이칸의 그 이상한 놈이야." "가이칸의 이상한 놈이라니?" 룬이 무슨 말인가 싶어 물었다. "가이칸의 빌어먹을 그 황태자인지 황제인지 그놈." "그렇군." 로운이 경하의 추측에 동의를 표했다. "사실은 그 황제녀석이 더 의심스러워. 하셰카의 단독 행동이라면 그 자리에서 죽이면 죽였지 가지고 놀거나 데려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 상처하나 없이 납치를 한 거라면…." 경하의 말을 받아 로운이 말을 이었다. "적어도 목숨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도 되는 군. 가이칸의 황 제라면." "어째서?" 룬이 또 끼어든다. 그러자 기엘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듯 룬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럴 사정이 있는 모양이니까, 자세한 건 나도 모르고 있으니 묻지 마. 여하튼 생각보다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그런 거 창한 마법을 써서 우리를 붙잡아 두진 않았을 테니까." "마법이라…." 경하가 한말을 룬이 되풀이 한다. "내가 볼 때는 너희들이 쓰는 그 바람의 술이니 하는 것도 다 마법으 로 보이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차이가 나." "무슨 차이가 나냐는 거야. 어차피 너희들이나 마법사나 두쪽 모두 평 범한 인간이 할 수 없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아. 적어도 보통사람인 내게는 말이지. 내 눈에는 너희들 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 는 없어 보이거든." "그런 기분나쁜 소리 하지마. 나랑 그 시커먼 놈하고 동급이라고 생각 하니 먹었던게 다 넘어온다." 이리야가 굉장히 기분 나쁘다는 투로 말했다. "물을 쓴다는 점에서는 나와 별다를 게 없겠지만 속성이 틀려 속성이. 우리들은 엘이라 부르는 걸 그들은 마나라 불러. 4신의 힘 대신에 고 대신의 힘을 이용하지. 우리와 그들이 결정 적으로 틀린건…." "틀린 건?" "으음. 그러니까…, 뭐라고 설명을 해야하지 경하?" 설명을 하다 말고 말이 막히자 이리야가 대뜸 경하를 쳐다본다. 하지만 경하도 뭔가 개념적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몰라. 힘의 기원이, 엘의 기원이 틀리다는 것 밖에는. 내가 알게 뭐 야. 난 마법사도 아닌데." "결국 비슷 하다는 소리구만." 룬이 결과적으로는 자기 말이 맞다는 듯이 뻐긴다. "어디가 비슷해!!!" 라고 경하와 기엘, 로운과 이리야가 입을 모았다. "그러니까 내가 볼 때는 비슷하다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보던가." "시끄러워!!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 자체가 아주아주 실례다. 룬." "실례는 무슨 실례." "실례라면 실례라는 줄 알아!!" 결국 언쟁은 룬과 이리야의 차지가 되었다. 경하는 끙끙 거리며 그들이 싸우는 것을 듣고 있다가 다시 벌렁 누워 버렸다. 온 몸이 지끈 거리며 아팠다. 기엘이 경하가 눕자 얇긴 하지만 그래도 형태를 갖추고 있는 이불을 그에게 덮어주었다. "일단은 좀 쉬십시오. 무리하게 힘을 쓰신 탓일 겁니다." "응." 이불을 덮어주는데 경하가 기엘에게 눈짖을 한다. "예?" "로운… 또 화난 거야?" 소근 소근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저 걱정을 했을 뿐입니다. 경하님." 싱긋 웃으며 대답하고 기엘은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경하님은 좀 쉬셔야 하니 우리는 자리를 좀 피하죠. 식사도 못했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아직도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그 문제의 그릇-스 튜가 담긴-을 바라보았다. "식사를 좀 하고, 그 이외에도 할 일이 많습니다." 기엘의 말에 아직도 계속 핏대를 높이며 똑같은 말로 싸우고 있던 이 리야와 룬을 로운이 질질 끌고 나갔다. 기엘은 한숨을 푸욱 내쉰뒤 스튜 그릇을 가지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잠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줄 알았던 경하가 마악 문을 닫으려는데 그것 을 저지했다. "예?" "그거 먹을 거지!!" "예?" "먹을 거잖아!! 왜 가지고 나가!!" "……………." 이불을 목까지 끌어다 덮은 탓에 경하는 정말 '그것'처럼 보였다. "경하님." "왜!! 배고픈데." "저. 그 이불 조금 내려주시겠습니까?" 웃음을 참으며 기엘이 한마디 했다. 이불을 목까지 덥고 꿈틀 거리고 있는 경하는 왠지, 역시나, 경하의 머리를 달은 벌레, 밥벌레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말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야." 이리야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의 가슴팍이며 몸을 살 펴보고 있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분명 거의 회복 불능이 아닐까 할 정도로 상처를 입었던 그였다. 무엇보다도 심장까지 뚫고 들어오던 그 끔찍한 손가락 의 감촉이 아직도 피부 위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끝인가 했는데…." 그런데 지금 그는 너무나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 뻥 뚫렸던 가슴에는 상흔은커녕 불그스름한 자국도 없었다. 기엘은 자신의 몸을 보며 감탄보다는 경이로움이 섞인 표정을 하고 있 는 이리야를 말없이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야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스 스로는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기엘과 로운은 그의 능력이 어딘 가 모르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파장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경하님의 힘이 어떻게 작용을 한건지 정말 알수가 없군.' 기엘은 조심스럽게 이리야를 탐색하던 신경을 늦추었다. 부럽다거나, 질투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느끼는 것은 일종 의 경의로움이랄까? 그는 경하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게 있는데. 나 어떤 상태였던 거야? 물론 거의 죽 기 직전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거든. " 이리야의 질문에 잠시 시선을 피하던 로운이 결국 입을 열었다. 아무리 해도 설명해 줄수 있는 사람은 로운과 기엘뿐이고 기엘은 왠지 말을 하고 싶지 않은지 로운의 옆구리를 꾹꾹 지르며 종요했기 때문이 었다. "바람의 술에는 마웨트(죽음)계의 주문이 있다." "마웨트?" "그래. 보통의 경우에는 거의 사용 되지 않지만 드물게, 그러니까 아 주 오래전 아직 전쟁이 만연하던 때에는 당연하게 사용되던 공격주문 이다." "그런데 그게… 설마 내가 당한게 그런 종류?" 이리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실제 자신이 당한 주문이 그런 종류가 아니라면 굳이 로운이 그런 주 문에 대한 언급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종류는 틀리겠지만 같은 류라고 생각한다. 바람술에서 마웨트 계는 확실히 다른 어떤 주문보다 강력한 힘을 발위하지. 원래의 바람의 속 성과도 연관성이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리야 자네가 쓰는 물의 술은 치료와 방어계 쪽의 주문이 훨씬 막강한 거야. 화염술은 말할 것 도 없고." "흐음. 하지만 날 습격한 녀석은 아무래도 물을 이용한 것 같은데." "마법이 된 이상, 그게 어떻게 달라질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눈에 보 이는 것을 가지고 추측을 해볼 수 밖에." 로운은 고민을 했다.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야할까? 이리야뿐이라면 모르겠지만 옆에는 룬이 있다. 사실 자리를 피해 달라 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 "벽에 고정된 방식은 사실 크게 우리가 쓰는 주문들과 다르지는 않았 어. 단지 아주 강력했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해제시키는게 힘들었 던 건…." "이리야씨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것이 이리야씨 자신의 엘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입니다." "뭐? 그게 가능해?" 이리야의 눈이 둥그래졌다. "저희들도 실제로 보았으니까 말씀 드리는 것 뿐입니다. 이리야씨." "하-- 그래서 결국 난 내 힘으로 꼼짝없이 당했다는 뜻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무언가 그들의 힘에는 엘의 흐름을 방해하 고 억제하는 그런 작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면 … 굳혀놓았다고 해야하나."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주문이 시전자가 피시전자의 엘을 이용해 그 의 엘을 통제하고 차단한다는 건 어지간한 단계의 술사에겐 불가능과 가까워. 상급 능력자에게도 마찬가지지. 결국 가능한건 마법 뿐이다." "세나케인님께서는 검은, 검은 마법이라고 말씀 하셨죠. 확실히 마법 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법이란게 그렇게 강한 건 줄 몰랐는데." "사용되는 범위와 방법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리야 씨." 이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스스로 겪었던 그 고통을 생각하면 마법사에 대한 두려움이 뭉클 뭉클 생겨난다. "젠장. 다 내가 너무…." 능력이 약해서 그렇다고 그는 괴로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중, 가장 능력이 약한 그다. 발을 잡아끄는 일 밖에 하고 있지않 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할 건 없어. 이번엔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경하마져도 뒤늦게야 눈치를 챈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시유를 지키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야." 이리야가 머리를 감싸며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스스로가 약하고 작은 존재라고 생각된 것은. "녀석의 말을 들었잖나. 시유는 위험하지 않을 거다. 적어도 시유가 경하로 오인되고 있는 동안에는, 오히려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적이 아니야." 로운이 잠시 뒷전으로 미루어 놓았던 사실을 끄집어 내었다. 그의 말에 기엘이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얼굴을 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사실. "그녀의 능력은 기엘이나 나에게는 못미친다. 하지만 확실히 한사람의 바람술사로소 제몫을 할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되. 이미 미메이라를 떠나온지 꽤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 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되찾지 않으면, 경하의 곁에서 오래 떨어져 있 으면 있을수록 위험할거야." 머리를 감싸고 있던 이리야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자괴감 같은 것은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다. 충격이 그를 제 정신으 로 돌려놓았다. "그렇다면 어서 시유를 찾아야하지 않아? 이렇게 앉아있을 시간이 없 잖아." "하지만 일단 우리에겐 기본적으로 해야할 일이 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시유 한사람을 위해서 대의를 포기 할 수는 없다. 그것 역시 넓게는 미메이라의 모든 바람술사들을 위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이를 위해 시유 한사람을 포기하는 것도 할 수 없다. 그걸을 깨닫는 순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쪽도 포기할 수 없는 양 갈래길에 그들은 서 있었다. "……………." 로운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경하는 살며시 문을 닫았다. 아직 몸은 욱신거리며 아파왔지만 잠결에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그 만 깨어버렸던 것이다. '젠장. 정말이지. 몸이 두 개가 되었으면 좋겠어.' 아니. 두 개라도 모자른다고 경하는 생각했다. 이리야를 살리고, 시유를 구하고, 그리고 다음 일을 하면 된다고 말했 던 스스로가 이렇게 비참 할 수가 없었다. '룬의 말이 맞아. 나는 결국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제멋대로 한다고 말해놓고 제대로 만든 건 하나도 없는 거라구.' "저어. 저기…." "으. 으응?" 경하는 갑작스럽게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낡은 담요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밤에는 추워 져요. 그렇게 얇게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릴거예요. 그 러니까 이걸…." "아. 고, 고마워." 경하는 여자아이가 내미는 담요를 받아 들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럴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언니는 공주님?" "에. 에엑?" "저기 멋있는 아저씨들이 많이 걱정하니까…." "그. 그게 말이지 꼬마야. 난 난 공주님이 아닌데. 봐. 남자걸랑?" 팡팡- 하고 경하가 자신의 가슴을 쳐보였다. '정말 절망이야. 젠장. 이런 꼬마한테까지.' "흐음." "그. 그렇지?" "하지만 머리카락이 반짝 반짝 예쁜데." "너도 예뻐." 그러면서 경하는 소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물기에 젖은 소녀의 머리카락은 그리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왠지 경하 는 그것이 자신의 머리카락보다 100배는 부드럽게 느껴졌다. "봐. 나처럼 흐리멍텅한 색이 아니라. 예쁜 갈색인걸. 그렇지? 그런데 이름이 뭐야?" "…카라." "그래. 카라. 아주 예쁜 이름이다. 그리고 나는 공주님이 아니라 그냥 오빠라고 해. 알았지?" "오빠?" "응. 난 너같은 여동생이 없거든. 내 여동생 할래?" 도리도리. 카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카라에겐 다른 오빠랑 언니가 있어." "그. 그렇구나." "오빠한테도 동생이 있다면서. 저기 아저씨가 그러던데. 그 동생은 어 디 간거야?" "아. 그게…." 도대체 어느 '아저씨'에게서 들은 건지는 모른다. 그져 지나가다가 시 유에 대해 들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이 말해주는 시유의 존재는 왠지 이상하리만치 그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다. "지금은 잠깐 어딜 갔어. 이제 찾으러 가야지." "흐응." "카라는 아무데도 가지마. 어디 가면… 카라 오빠랑, 언니들이 찾을거 다. 아주 많이." "응. 아무데도 안가." 분명 열 두세살은 되어보이는데도 카라는 아주 어린아이처럼 느껴진 다. '동생이란게 그런건가.' 사실 시유가 동생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했 지만 말이다. '시안이 살아 있었다면….' 아주 오랜만에 경하의 머리에 시안의 존재가 떠올랐다. '시안이 살아 있었으면 지금쯤 아마 다른 것은 다 재쳐둔채로 시유를 찾으러 갔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경하는 왠지 진짜 시안이라면 정 반대의 행동 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이런 상황에서 시안이라면 만사를 재쳐 두고 먼저 아셀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군.' 마치 시안이 옆에 있다가 나라면 이렇게 했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할까?' 경하는 카라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어주며 생각에 잠겼다. *** "경하님?"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야?" "경하님----!!" 룬의 질문은 듣지도 못했는지 기엘이 룬의 앞을 휘익 하고 지나가 버 렸다. "경하님. 어디 계십니까!!" "뭐가 어떻게 된거야? 어이 이봐. 로운." "자리에 없어." "누가? 그녀석이?" "그래." 퉁명스럽게 룬의 질문에 대답한고나서 로운은 기엘과 마찬가지로 룬의 앞을 휘익 하고 스쳐 지나갔다. "아침부터 정말 이게 왠 소란이야.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널부러져 있 던 놈인데 도대체." 불현 듯 룬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피어오른다. 자신들이 자는 사이, 경하마져도 납치되는 불길한 상상. "아니야. 설마." 푸르르 고개를 흔들며 불길한 상상을 지워 버린다. "그런데 이 새벽부터 저녀석은 어딜 간거지?" 다음 순간 룬도 아침 새벽부터 경하 찾기 수색대에 몸을 던지고 있었 다. 물론 그는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쪽에도 안계셔?" "………." 대답대신 로운이 고개를 끄덕인다. 로운의 대답에 기엘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간다. "젠장. 움직이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위를 소홀히 했던 탓이 야." " 부른 상상은 그만둬. 분명 주위 어딘가에 있을…"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로운의 얼굴이 휘익- 어떤 방향으로 끌려 갔 다. 기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무엇인가의 부름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그들은 몸을 돌려 한 방향 으로 나아갔다.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있어 그들을 부르는 것처럼 그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 뭘 그렇게 봐? 지붕에 뭐라도 있…." 막 문을 열고 나오던 룬과 그 뒤를 이어 이리야가 로운과 기엘의 시선 을 따라서 지붕위로 눈을 돌렸다. "어엇!!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저런데 올라가 있다니." 룬이 경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화를 버럭 버럭 내기 시작했다. "야! 임마. 그런데 올라가 있으면 감기 걸려!! 그것도 그 차림이 뭐 야. 누가 보면 널 우리가 구박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응? 얼른 안 내 려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룬을 누군가 팔을 내밀어 저지했다. "왜 왜그래? 제일 찾아다닌 사람이." 그는 다름 아닌 기엘. 기엘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잠시 놀랐을 뿐입니다. 경하님의 파장을 잡을 수가 없어서." "뭐?" 룬이 눈을 크게 떴다. 어제부터 무슨 파장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 를 건성을 들었던 그가 아니다. 그게 뭔지는 아직 정확하게는 모르겠 지만 여하튼 그게 안 느껴지면 위험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잡지 못한게 아니라 그 파장이, 가득 차 있었던 겁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얼덜떨한 룬은 도대체 이 남자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고 개를 갸우뚱했다. "아마 룬씨도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시면 조금은 느끼실수 있을 겁니 다. 경하님의 파장을…. 이 포근하고, 따스한… 바람을 말입니다." "에?" 기엘은 룬의 팔을 잡은채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지붕 위에는 경하가 우뚝 서 있었다. 그 위에 서서 경하는 두 팔을 쳐들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렴풋이 구름사이로 아침햇살이 비쳐 경하의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희미한 그림자는 조금 기운 십자 모양. 경하는 아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인. 찾았지?' 「그래.」 '다행이다. 무사해서.' 경하는 세나케인의 감각에 동조하여 정신을 잃고는 있지만 무사한 시 유의 모습을 막 찾아낸 참이었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자신이 해야할, 시안이라면 당연히 했 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새벽이 어슴프레 밝아오던 그때 경하는 조용히 일어나 이 집의 지붕위 로 가볍게 뛰어 올랐다. 어느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스스로, 단지 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케인 부탁해. 네 힘이 필요해.' 경하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기 시작했다. '시유에게 전해줘. 내 말과, 모두의 생각과, 그리고….' 경하는 눈을 감고 수평으로 벌렸던 팔을 하늘위로 치켜올렸다. 주위에 가득 차 있던, 그가 불러들인 바람의 엘이 일제히 하늘로 치솟 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의 엘을 가득….'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새벽의 차가움과, 부드러움이 함께 담긴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그것은 지붕위에 서 있는 경하의 몸을 돌아서 하늘로 불어 올랐다. 강하지만 부드러운 바람이 밑에 있는 일행에게도 불어왔다. 사방에서 소용돌이 치듯 불어온 바람은 경하의 의지에 따라 멀리 시유 가 있는 곳 까지 불어갈 것이다. 경하의 생각과, 경하의 마음과 함께. 바람은 한참동안 불었다. 그것은 경하가 팔을 내리고 확인이라도 하듯 눈을 깜박였을 때까지도 쉬지않고 불고 있었다. '고마워 케인.'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는 순간 경하의 몸이 스르륵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우. 우앗!! 저녀석!!!" 룬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경하의 엘에 동화되어 잠시 그 감각이 둔해져 있는 동 안 모든 것을 눈과 피부로만 느끼고 있던 룬이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이 었다. 털썩--- 경하가 룬의 품에 무사히(?) 떨어졌다. "이봐!! 정신이 있어 없어? 너 자꾸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할래?" "헤헤헤헤." 룬의 걱정과는 달리 경하는 금새 눈을 떴다. 기엘과 룬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룬이 안고 있는 경하에게 달려들 었다. "헤헤. 미안. 하지만 시유를 좀 찾아보느라." "…………." 기엘과 룬은 할말을 잃었다. 이리야도 마찬가지였다. "시유는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되 케인을 보냈으니까. 앞으로도 한 동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수 있을거야. 내가 바람의 엘을 가득…." 그렇게 말하는 경하는 그대로 꾸벅 꾸벅 졸기 시작했다. "미안. 케인이 금방 돌아올 거니까. 나도 괜찮을 거…."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경하는 그대로 고개를 푹 꺾고는 코를 골기 시작 했다. 이리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젠장. 난. 이녀석한테 못 이겨."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고봐라 평생 쫓아 다녀주지. 죽을 때까지 쫓아다녀 줄 꺼다. 내 가 족과 물의 나유에 맹세하지. 진짜야. 정말로 저놈이 죽을 때까지 쫓아 다닐 거야."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로운이 너털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던진다. "시끄러워!! 그러는 네 놈도 감동한 주제에. 누가 모를 줄알아!! 파계 신관 양반?" "…흠. 흠흠." 로운이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하는 것을 보면서 룬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하핫." 기절할 듯이 웃어대는 룬에게서 경하를 받아든 기엘은 룬에게 조용히 한마디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희들 목숨을 걸어서 모시고 싶은 분이지만 경하님은 그렇게 놔두시 질 않죠. 하지만 그래서 더 더욱,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다고 그렇 게 생각이 되는 겁니다." "…하. 하하………." 룬의 웃음소리가 잦아든다. "룬씨는 어떠신지요. 이런 경하님이 말입니다." 그리고 기엘은 의미있는 웃음을 룬에게 지어 보인 후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서 룬이 어떤 표정을 짖고 있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 "정했어. 그러니까 다들 힘들겠지만 아무말 않고 따라와 줬으면 좋겠 어." 경하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날 오후 늦은 시간 하지만 아무도 경하에 게 늦잠 꾸러기라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물론 경하가 일어나 자 마자 '바압---'하고 소리를 질렀을 때도 아무도 밥벌레하는 농담도 하지 않았다. 룬이 '설마 저녀석이 저렇게 먹어대는게 혹시 바람술을 그렇게 써대서 그런거 아니야?'라고 말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모르는 사실은 아니었기도 하다. 단지 매번 식사 시간만 되면 무 섭게 찾아대는 경하의 성격 때문이었을 뿐. 때문에 식충이니 뭐니 하면서도 꼭꼭 먹을 것을 챙겨다 잔뜩 먹여줬던 것이다. "그. 그러니까 시유는 괜찮아. 앞으로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적어도. " 단정을 지었다가 황급히 말을 조금 바꾼다. "으음. 그러니까 일단은 시유는 위험하지 않을테니까. 아셀에서의 일 을 후다다닥 해치운다음에 시유를 따라서 제국으로 가자. 그게 제일 빠른 길이야." "알겠습니다." 간단히 기엘이 동의를 표한다. "뭐. 우리야 싫다고 할게 있나. 그렇지?" 이리야가 툭-하고 룬을 건드리며 말했다. 룬은 멍청히 딴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꿈틀하면서 반응했다. "아. 그. 그야 나는 전하의 명령으로 뭐…." "그럼 결정 되었군. 서두르자. 일단 이 주위에서 배란 배는 전부 부서 져서 육로로 갈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은 내가 구해오지. 마굿간이 부셔져서 어쩔 줄 몰라하는 마상들을 봤거든. 아마 아직 그너에 있을 거야." "그럼 부탁 하지." 굳이 여비를 내미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물론 룬역시 준다고 받을 사 람도 아니다. "모두들… 나더러 야박하고도 안해?" 막 자리를 뜨려는데 경하가 그들의 뒤에 대고 한마디를 했다. "왜?"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째서?" "그럴 리가 없잖아." 제각기 한마디씩 한다. "시유를…먼저 구하자고 안하고 멋대로…." "시유가 멀쩡하고 괜찮다고 한건 너다. 우린 네 말을 믿을 뿐이야. 알 겠어? 아니면 네가 한말을 믿지 말라는 소린가?" 로운이 진지한 얼굴로 경하에게 물었다. "그. 그런건 아니야! 난 단지…." "네가 무사하다고 했으면 우린 믿고, 네가 가자고 하면 가는 거다. 그 게 내게는 그리고 기엘에게도 가장 최선의 선택이다." "로운…." 뜻박의 말에 이번에는 경하가 당황했다. "우린 어디까지나 네 녀석의 기………." "뭐?" "아니야. 서두르자. 기엘. 룬. 그 마상들이 어디 있는거지? 나도 같이 가지." "아. 아아. 멀지 않아," "잠깐!! 로운!! 말을 하다 말았잖아. 뭐라고 한거야. 지금." "못들었으면 그만이다." "그런게 어디있어!!" "시끄러워. 투덜 거릴 시간있으면 짐이라도 챙기고 잊어버린 식량이나 보충하러 다녀. 알겠어?" "로운!!" "내 귀는 안 막혔어. 소리 지르지마." "에잇-- 음흉한 아저씨 얼굴!!!" "오랜만에 듣는 소리군." "그건 또 뭐야?" 룬이 로운에게 히죽 거리며 묻는다. "신경꺼." "괜히 부끄러워서 그러지?" "신경 끄라고 했지." 뒤에서 펄펄 뛰기 시작한 경하를 기엘이 달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녀석한테 똑바로 말하기가 그래서 얼버무린거 누가 모를 줄 알아?" "넘어가지." "솔직하지 못하구만." "넘어가자니까." 로운은 어서 이 상황을 넘기고 싶었다. '쳇. 말실수 했어.' "너무 그러지마. 난 부러울 뿐이니까." "뭐?" "우리 전하는 저녀석 같지 않으니까. 그거 알아? 내가 굳이 왜 이 일 행을 따라오는 일에 자원을 했는지." "…………." "궁금했거든. 저 기엘이라는 작자와 이리야라던가. 그리고 당신도 포 함해서." "궁금하다니 뭐가? 우리가 엘러라는 것이?" "설마. 난 당신같은 남자들이 왜 저런 녀석에게 목을 매는건지 그게 궁금했어. 그리고 지금은 뭐랄까. 조금은 알 것 같달까…." "………쓸데없는 궁금증이다." "그래서 부럽다 이말씀이지." "부러울 것도 참 없군." "부러운건 부러운거지. 하하하하." "시덥잖게 웃지마." "푸하하하핫." 룬의 웃음소리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인지 로운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예전에는 그랬지. 무엇인가 갈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으니 까.' 그는 오래전-벌써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 예언의 현자의 말을 떠올렸 다. '원하는 것이 하나가 될 때라….' 예언의 현자는 정확하게 예언을 했다. '그래. 원하는 것이 하나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를 받을 수 있는거였 어.' 아직도 지치지 않고 웃어대는 룬의 옆에서 로운은 슬며시 미소를 짖고 있었다. 그는 팔을 올려 룬의 어깨를 짚었다. 그도 언젠가 원하는 하나를 이룰 때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계속 2장을 손보다가...버그를 발견... 쿠궁..내려 앉는 심장... T-T 크흡 전 바보더군요...... ....여하튼 2장 마치고...3장으로 넘어갑니다. 헥헥 [아슈레이 7] 3장 손님 (7) 아슈레이 7 폭풍 3장 손님 (7) "후덥덥하다." "그래. 후덥덥하지." "어이. 이리야. 이거 어떻게 안 돼? 더워 죽을 것 같아." 말 위에 늘어져 있던 경하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소나기까지는 안 바랄 테니까. 좀 어떻게 해줘." 헥헥거리며 경하가 이리야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이리야는 경하 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바람을 좀 불게 하면 되잖아. 나도 힘드니까." "바람을 불게해도 습하다구. 게다가 내가 바람술을 쓰면 로운한테 혼 나는 걸." "그러는 나는 안 혼날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처럼 참아." 추욱---이리야가 대답을 하자마자 경하와 마찬가지로 말등위에 늘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경하처럼 축 늘어져 있지 못하고 다음 순간 벌떡 - 하고 일어나 버렸다. "우엑-- 말 냄새. 더우니까. 이 냄새도 죽이는 구만." 그러면서 이리야는 경하를 바라보았다. 경하는 말등에 기대는 것은 물론이요 말갈기에 코를 박은채 잠들기 직 전이다. "몸을 세우고 가는 거보다야 훨 낫지." "둘다 그만 중얼거릴수 없나? 도대체가…." 로운이 조금 걸음을 빨리에 앞으로 불쑥 나왔다. "그런 로운에게 이리야가 덥썩 매달렸다. "이봐. 신관양반. 부탁이니까 저녀석한테 바람좀 불게 시키면 안될까 ?" "위험해. 놓지 그래?" "응? 아니면 내가 여기 습기라도 좀 없애게 해주던가." "위험하다고 했을 텐데?" 툭툭툭, 로운은 이리야의 팔을 떼내며 한눈으로는 경하의 말을 점검했 다. 습한 날씨에 좀 지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악의 상태는 아니다. "이봐아. 신관양반. 덥다니까아…. 아니면 이 제한 주문이나 좀 풀면 안될까?" "그걸 풀어서 그 검은 마법사한테 코투리를 잡히는 쪽이 낫다는 뜻인 가?" 희번득하고 로운의 눈이 번쩍였다. 이리야는 그의 눈빛에 그만 깨갱- 하고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하 일행은 지금 마악 아셀 제국의 국경을 넘은 참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라는 명목 하에 수풀이 무성한 지대를 지나서 간신히 평지로 나왔지만 대신 숲을-그것도 말을 끌고서!-헤치고 나오 느라 지친 데다가 날씨까지 후덥덥한 바람에 모두들 상당히 지쳐버렸 던 것이다. 사실 평소라면 간단히 숲을 지나거나 바람술을 써서 조금이라도 쉽게 왔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문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셰카의 마법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마법사가 이들이 경하일행이 엘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언제 어디서 그들에게 들킬지는 상상도 안가는 것이다. 그래서 취한 방법이 결국 같은 엘러들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라인-티 리쉬, 즉 그들의 힘을, 파장을 감추게 하는 주문을 쓰는 것이었다. 그 덕택에 바람 한점 불지 않는 이 널따란 대지를 그대로 받아가며 걷 고 있는 중이다. "해가 조금 더 나면, 이런 공기중의 습기정도는 말라 버릴 거다. 온도 자체는 그렇게 놓은 것이 아니니까. 조금씩들 참아. 방법이 없으니 투 덜 거리지 말고." 라고 로운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멀쩡하게 말등위에 기대고 있는 줄 알았던 경하가 주르륵 미끌어져 내렸다. "우앗---!!" "로운!! 어서!!" 아슬 아슬하게 경하 몸에 묶어 놓았던 끈을 잡아챈 로운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경하는 깨지도 않고 끈에 매달린 채로 드르렁 드러렁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매달아 두길 잘했군. 어제처럼 굴러 떨어져 버리면 곤란하니." 로운이 혀를 차며 경하를 다시 말 위에 얹은 다음 다른 줄을 이용해 꾹꾹 경하의 몸을 안장에 매달았다. "그래도 너무 하구만. 이래도 안 깬다니." 이리야는 그런 경하를 보면서 부럽다는 듯 한마디를 덧 붙였다. "나도 저렇게 신경 안 쓰고 좀 잤으면 좋겠다. 으아-----." "힘들군. 서둘러야 할텐데." "경하님의 상태도 결코 좋지는 않은 것 같아. 이대로라면." "아무래도…." 경하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기엘은 걱정하고 있었다. 라인-티리쉬를 쓰고 있는 상태인데도 경하는 무리를 해가며 시유의 동 정을 계속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힘보다는 세나케인의 힘을 이용하여 최대한 그들 을 찾고 있는 누군가의 눈을 피해 편법을 쓰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사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경하이외의 멤버들도 눈에 띄게 피로가 쌓여 가는 중이었다. 기본적으로 티리쉬 주문은 시전자에게 그 주문 자체로 인한 피로감을 주진 않지만 바람의 술을 쓰는 것을 제한한 만큼 신경이 곤두 서버리 기 때문에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다. 그나마 가장 상태가 괜찮은 사람은 기엘이나 룬처럼 엘러가 아닌 남 자. 바로 룬 한명이었다. "그나저나 룬씨가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걱정이군." 기엘이 고개를 빼고 혹여 룬의 기척이 없는지 살폈다. 그때였다. 풀이 무성한 너머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순간 기엘의 신경이 한곳으로 몰렸다. '뭐지?' 허리의 라이트에 손을 얹고 언제든 뽑을 준비를 한다. 숨을 죽이며 기엘은 몸을 숨겼다. 바스락--- 풀이 다시 한번 움직이고 그 사이로 갈색의 조그만 동물이 풀쩍 튀어 나왔다. "…………!" 동물이 튀어나오는 순간 기엘의 몸도 앞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한창 하 고 있다가 순간 긴장이 풀렸다. "후우…." 식은땀이 한방울 이마에서 떨어진다. 그는 삼분의 일쯤 뽑았던 라이트를 다시 검집에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의 길이 만만치 않겠어.' "어이. 기사양반." "아. 룬씨." 부르는 호칭이 어느새 이리야와 같아져 버린 룬은 기엘을 부를 때는 꼭꼭 기사양반-이라고 이리야처럼 독특한 억양을 넣어 부르고 있었다. 어차피 같은 기사가 아니냐며 만류하던 기엘은 이리야와 룬이 죽이 맞 아서 번갈아 불러대는 통에 그만 항복을 해버렸다. "건너편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는데, 어때? 들릴까?" "마을에 들리는 것은 되도록 자제를 해야죠. 어떤 경우라도 우리들의 행적이 노출 되지 않게 하는 쪽이 경하님께 좋습니다." 기엘은 아직도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경하를 돌아다보며 대답했다. "하이고. 정말 잘 자는 구만. 또 자냐?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정말이 지 지치지도 않아." 기엘은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건만 룬의 평가는 사뭇 틀리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숨어서 가야겠어? 차라리 내 생각에는 말이야. 들킬때는 들키더라도 있는 능력 없는 능력 다 써가면서 가는 쪽이 좋 을 것 같은데? 안그래? 시간이 없다고 했잖아.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 도 솔직히 말해서 자네들 실력이나 저녀석이나 한 엘러 한다며." "…그 표현은 뭐지?" 로운이 이마를 찌푸린다. "아니 뭐. 그렇다는 거니까 적당히 넘어가라구. 여하튼 그런데 굳이 이렇게 숨어다닐 필요가 있냐는 거야." "위험한 것은 최대한 피해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다." "그럼 시간은? 사실은 반쯤은 시간 싸움이라고 이런 건." "……………." 로운은 룬의 말을 들으며 그 말도 맞다고 생각했다. 실제 기엘의 아버지는 이제 거의 제국의 수도 카드미엘에 도착했을 것 이다. 그리고 지금쯤엔 키리엔에서의 변화도 알아차렸을 지도 모른다. 거기에 한가지 더 변수가 있다. 바로 납치된 시유. 무사하다는 것은 알고 있고, 그녀가 한창 제국의 수도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심사 숙고를 해보자고. 응?" "그러지. 일단 이녀석이 깨어나면…." 하루의 반 이상 아니 거의 삼분의 이는 꿈나라에서 보내는 중인 경하 를 로운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미메이라의 사신이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내일 오후엔 카드미엘로 들어온다고 하는 군요." 미타 남작은 로렌에게 가벼운 말투로 보고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서신은 예의 남자에게서부터 온 것입니다." 그는 검은 양초로 밀봉된 서신은 로렌의 앞에 내밀었다. "흐응…. 서신이라. 그쪽도 재미있는 방법을 쓰는 군." "매번 사람을 보낼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읽어 보게." "예. 알겠습니다. 폐하." 미타남작은 로렌몰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로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타 남작은 로렌만큼 하셰카를 믿고 있지는 않았 다. 혹시나 그 속을 알 수 없는 일당이 이 밀봉 서신에 무슨 짓을 해 놓았 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로렌에게 위험이 닥치게 하느니 자신이 당하는 게 낫다고 그는 당연하 게 생각하고 있었다. 바스락-- 검은색의 양초는 떨어지기가 무섭게 치익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우웃--." 고약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그는 얼른 코를 막은 후 재빨리 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냄새를 순간 씻어내 버렸다. "취미도 고약하군요." "다 좋으니 읽어보게." "문제의 바람을 생포하였음." "뭐?" "그뿐입니다." 로렌은 손을 내밀었다. 미타 남작은 주저하다가 결국 새카만 그 서신 을 로렌에게 내밀었다. "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폐하." "문제의 바람을 생포하였음?" 퍼뜩- 로렌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설마?"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 말고 그는 다시 깊숙하게 의자 안으로 몸을 들여 앉았다. 생포라고 했다. 그것도 문제의 '바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말이다. 하지만 과연 이 말이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생포했다는 소리 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미메이라도 아닌 가이칸 북부쪽에서 행방 불명이 되어 버렸다. "이 서신이 어디서 전해져 온 건지 알 수 있나?" "하나스 쪽입니다." "하나스?" 그렇다면 더더욱 미심쩍다. 가이칸 북부에서부터 하나스까지 라면 보 통 거리가 아닌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슈레이 대륙을 종 횡단하여 하나스까지 가는 것 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매일 매일 말을 달리지 않고서는 말이다. '아니야. 꼭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다. 하나스는 미메이라와 아주 가 까워. 그리고 그들이 나메스로 들어가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미메이라 로 잠행했다면 이 기간내에 충분히 하나스에 도착할 수도 있을 거야. 게다가 하나스에는 폴리카르가 있다.' 아슈레이의 지도를 떠올리며 로렌은 거리를 계산했다. 수로를 이용한 다면 무리가 아닌 거리다. '그렇지 오히려 여유가 있을 수도 있겠어. 하지만….' 로렌은 다시 한번 그 서신을 읽어내렸다. 너무나 간단한 문장에 설명 조차 없다. '어째서 하나스지? 그들이 어딘가에 동맹을 요청한다면 같은 신국 밖 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이 틀렸다는 건가?' 그는 며칠전 보고 받았던 하나스에 대한 문서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문서에서 보이는 하나스의 병력이동은 눈에 불을 켜듯 뻔한 그런 움직임이었다. 제국이 미메이라 근처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을 보고 약간의 시위를 하는 그 정도에 그쳤었다. '호로스는 예전부터 호전적인 불의 민족, 만일 움직인다면 호로스쪽이 라고 생각했는데.' 미타남작은 로렌이 생각에 빠지자 조용히 옆으로 물러났다. 저렇게 한번 고민이나, 생각에 잠긴 로렌을 방해 했다가는 꽤나 호되 게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로렌에게 보고하지 못한 몇가지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조그 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하셰카를 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을 다시 한번 드려볼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른 인원을 파견할 수도 있는 노릇이건만 굳 이 암살단에 손을 대서 혹시나 쓸데없는 흠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 사르르륵--- 그의 손에서 몇 개의 서류가 흘러내렸다. 미타 남작이 그것을 주으려고 허리를 굽히는데 갑자기 로렌이 자리에 서 일어나 뚜벅 뚜벅 벽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곳으로 가서 길게 늘어져 있던 휘장을 젖혔다. 촤악--- 로렌은 휘장 뒤에서 나타난 커다란 그림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쉴새없이 무엇인가를 중얼 거렸다. 휘장 뒤에 있는 그림은 바로 얼마 전에 새로 완성하여 장식된 아슈레 이의 전도. 하지만 그것은 전략적인 전도라기 보다는 감상용 비슷하게 그려진 화려한 지도였다.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대던 로렌이 이윽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카스핀. 하나스와 아셀, 그 이외 서쪽 방면의 나라들의 움직임을 앞 으로 낱낱이 매주 보고하도록 하게. 아니 매일이 좋겠어." "예?" 그것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지 않느냐고 막 말을 하려는데 로렌이 그것 을 막고 말했다. "이전처럼 형식적인게 아니라 좀더 확실하게, 그쪽의 왕실이며 군부며 뭐든 좋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알아내서 샅샅이 보고하라고 하게."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다만 폐하." '이전에도 형식적인 것만은 아니었건만….' 그의 황제는 언제나 한번 움직이면 따라가기 힘에 겨울 정도다. "뭔가." 로렌의 화살 같은 눈초리가 미타 남작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설마 신국과 셰비 연합국이 어떤 연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 까?" "글세? 그건 두고 봐야겠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남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는 못하지 않을까?" 로렌이 중점을 두고 생각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의 계획은 나름대로 참신했다. 성문화되지 않은 불가침 조약, 그런 것은 유명무실 하다고 생각해왔 다. 그래서 성공할 것이라고 당연히,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꼭 자신만이 그런 생각 을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이례적이라고 해도, 그리고 전례가 없었다고 해서 남들도 그렇지 않 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무엇보다 내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닌가? 게다가 이미 미메이라쪽으로는 손을 뻗은 상태다. 아무도 상관하고 있 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가 움직였기 때문에 따라서 신경을 쓰고 그리고 또 다른 반대 급부를 내밀어 유혹을 할 수도 있다고 보내. 그러니까." 타악- 로렌의 신발 굽 뒤축이 부딪히며 조용한 내실을 울린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평소와는 다른 움직임을 잡아내는 걸세. 그것 이 단순한 정보이든, 정말 기밀한 정보가 되든. 그리고 몇가지 더 자 네에게 특별히 지시 할 것이 있네." "하셰카에 관한 것입니까?" "한 두가지는 그렇지. 일단 그 하셰카에서 생포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 하게 누구인지, 그리고 그 대상을 우리에게 넘기겠다는 뜻인지 아니 면, 우리와 그것을 담보로 또 다른 계약을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반대급부로 계약을 파기 하겠다는 건지 알아보게. 무엇이 되든 상관없지만 되도록 인수를 받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문제의 사람이 설사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말이야. 그리고 또 하나는." 로렌이 미타 남작을 손짓하여 가까이 불러 들였다. "예. 폐하." 미타 남작을 가까이 부른 로렌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무엇인가 지 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 로렌은 의자에 깊숙이 앉아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눈을 감고 있었 다. 생각이 많아지면 수면을 취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사소한 것들을 포기하라고? 대의를 위해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수도 없이 많은 사건들과 함 께.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 이것이 그저 아주 개인적인 욕심 으로 치부되어 대의라는 명목을 위해 잊혀져야 한다면….'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눈이 부신 새벽 햇살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 다. 공기마저도 순식간에 바뀌어 진 듯, 숨을 쉴 때의 느낌도 사뭇 다르 다. 그는 살짝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새벽 햇살은 밤을 샌 그의 어두운 눈에는 아직 너무나 밝았다. '아니, 나는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이룰 것이다. 결코 포 기 하지 않아.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또한 아무리 커다란 것이라 도. 원하는 것이라면 대의 명분을 만들어 이루면 되. 내가 원하는 것 을 모두가 원하게 만들면 되는 거야.'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군. 모두가 원하는 것이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내비치는 새벽의 햇살. 그는 어두운 내실을 밝히는 그 빛 을 따라 창가로 걸어갔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는 그 햇살의 한가운데를 지나 해가 비쳐 들어오 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햇살 밑에서 빛나는 그의 성과 성읍은 햇살 만큼이나 황금색으로 빛난 다. '하지만 반드시 내 손안에 넣고 싶은 것이 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마도 그가 아직도 내실에 있는지 확인을 하러 온 여관들일 것이다. "뭔가." 로렌의 하명을 기다리는 여관들에게 그는 짧게 물었다. "폐하. 조반을 올릴까요. 아니면…." 조심스러운 목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렌은 약간 짜증이 났다. "……………." 그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 그녀가 생각나는 이유는 뭐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은색의 머리를 가진,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바 람의 여인. 차라리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시안이었다면 의문을 가지진 않을 것이 다. '아니. 결국 같은 건가. 시안 역시 그 정체를 모르기는 마찬 가지였으 니.' 그는 하셰카가 생포했다고 한 그 문제의 인물이 시안이기를 바라고 있 을 지도 모른다. "폐하. 어찌할까요?" "…잠시 쉬고 싶네." "그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누군가의 체온이 필요하다고 말하기엔 아직 로렌은 자존심이 셌다. 그 상대가 누가 되든,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가 원하는 것은 아주 잠시 쉴 수 있는… 따스한 체온을 가진 여인의 품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 "흐음 역시 이상하단 말이야."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샘을 찾아 목을 축이던 이리야는 물기가 있는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이며 혼잣말을 했다. 마치 정해진 것처럼 일행의 식수 조달을 책임지는 것은 이리야이기 때 문에 그는 오늘도 일찌 감치 일어나서 식수를 찾으러 나왔다. "으흥…." 다시 손을 물속에 넣고 그는 눈을 감았다. 굳이 신경을 집중하지 않아도 지금 손이 잠겨 있는 샘의 물이 가지고 있는 엘이 그의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손으로 스며드는 엘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어떤 길을 지나왔는 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촤악-- 그는 다시 물에서 손을 빼냈다. 오늘 이 샘을 찾는 데도 그는 두리번거리거나 찾는데 많은 시간을 소 비하지 않았다. 그저 노숙을 하고 있던 나무 밑에서 가죽 주머니를 들고 아무생각없이 발을 옮겼는데 어느새 이 샘 앞에 다달아 있었다. '마치 물이 나를 부르는 느낌이 들어.' 이런 변화가 언제부터 였는지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물의 술사 이기에 물을 찾는데는 그다지 고생을 해본 적이 없다. 그가 원한 다면 어디서든 그는 심지어는 사막 한가운데서도-물론 사막 에 가본 적은 없지만-찾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요 며칠과 같이 아무생각없이 몸을 움직이는데 어느새 물가로 인도되는 그런 일은 좀처럼 없었던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굳이 고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 각하면 되니 말이다. '뭔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있는데.' 고개를 갸우뚱 해보지만 도통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 다. "그 달라진 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쳇." 결국 그는 고민을 포기해 버렸다. "끄응-- 역시나 무겁구만." 그는 가죽 주머니를 어깨에 매고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아침부터 먹고 보자고, 그리고 자신보다는 그래도 엘에 대해서 는 잘 알고 있는 로운이나 기엘에게 물어보자고 결정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수로로 가야지. 그게 제일 빠른 길이라면. 지난번에 야 어쩔수 없었다고 치고,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잖아. 좀 위험 하면 어때?" "하지만 경하님. 그 위험이라는 것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곤 란합니다. 일단은 이리야씨의 전적도 있고…." "좀더 조심하면 되잖아. 왜. 자신 없어?" 당돌하게 경하가 기엘에게 되 물었다. "로운이랑 기엘은 자신이 없어서 지금 피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는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경하는 스스로 깨닫고 있을까? 로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지난 번에게 설마 그럴 줄 몰랐으니까 속수 무책이었지만 이젠 그렇 지 않잖아.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유는 계속 카드미엘로 향 하고 있고, 하라스다인 장로님도 마찬 가지라며. 그렇다면 방법은 하 나 밖에 없지. 최대한 빨리 아셀의 왕 아니, 황제라고 했나? 여하튼 그 사람을 만난 후 제국으로 가는 것. 안 그래?" 다섯 사람은 지금 지난 번에 룬이 제안한 좀 위험이 있더라도 수로를 통해 최대한 빨리 아셀의 수도 자노아에 가는 쪽이 좋겠다는 의견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사실 적으로 룬의 말이 백번 옳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단지 거리껴지는 것은 지난 번과 같은 일이 두 번다시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인데 누구보다도 기엘이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결국 선택을 하는 것은 경하에게 넘어왔는데 경하는 의외로 간단하게 룬의 의견에 찬성을 표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서두르고 또 서두르는게 좋다는 것이 경 하의 생각이었다. "최대한 빨리 폴리카르쪽으로 가서." "류이카르. 라고 한다. 폴리카르의 서쪽 지류의 이름은." 룬이 정정을 했다. "폴리카르든 류이카르든 뭔 상관이야. 배만 뜰 수 있음 되지." 경하는 이름 따위가 무슨 대수냐며 가볍게 룬의 말을 넘겨버렸다. "가서 최대한 빨리 조각 배도 좋고 여객선도 좋고 뭐든 좋으니까 속도 가 빠른 것으로 골라 타자구. 아셀의 황제도 혹시나 알아? 우리를 목 놓아 기다리고 있을지?" "……………." 그런 일은 없지 않을까요? 라고 기엘이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로운은 경하가 정한 일에 웬일로 한마디의 이견도 내놓지 않고 묵묵히 일어나 주위에 늘어져 있던 짐들을 하나로 꾸리기 시작했다. 사실 로운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했다는 것은 경하를 제외한 다른 사람 들은 어느 정도는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로운은 사사건건 경하의 의견에 트집을 잡던 버릇을 순식간에 버린 듯 싶었다. 물론 이전에도 트집을 잡다가도 결국엔 경하의 의견에 따라주고는 했 지만 사뭇 틀려진 것이다. 그것은 경하의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며 줄 줄 따라가는 기엘의 반응과도 조금 틀렸다. "준비는 다 되었나? 어서 출발하지?" 경하가 무슨 말을 하면 묵묵히 듣고 있다가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답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하가 서두르자! 라고 하면 제일 먼저 짐을 챙기고 어서 출발하자고 마구 서둘러 대는 것이다. 그런 로운의 변화를 기엘은 왠지 따스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굳이 말을 꺼내 친구의 자존심을 괜시리 건드리고 싶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런 로운이 여느때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이 신관양반." "…………." 한참 앞장 서서 말을 달리는데 뒤쪽에 조금 쳐져 있던 이리야가 말을 달려 로운에게 다가왔다. "이봐 좀 천천히 가자구. 서두르는 것은 좋은데 어차피 지리를 그렇게 잘 아는 것도 아니잖아. 방향이라면 내가 정확하게 잡아 줄테니까 말 이야." 이리야는 그렇게 말하면서 로운의 긴 망토자락을 잡아 당겼다. "무슨 일이지?" "그럼 그렇게 나와야지. 이 몸이 부르시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나?" "아.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나 말이지 좀 이상하지 않아?" "무엇이?" "그러니까 나도 정확하게 모르겠어서 묻는 거야. 이런 건 나 자신 보 다는 오히려 옆 사람이 더 잘 느껴주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어떤 것을 말하는 거지?" "모르겠어?" "뭘?"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듯한 로운의 표정에 이리야는 푸욱 한 숨을 내쉬었다. "꼭 설명을 해야해? 그러니까 다른게 아니라. 자아… 느껴보면 알 걸 ?" 그렇게 말하며 이리야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로운은 도대체 이 남자가 무엇을 하라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멀 뚱 멀뚱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말고 좀 잡아봐." "남자 손을 뭐가 좋아서." "농담 할래?" 쯔읏--하고 이리야가 혀를 찼다. "자아. 어서." 로운은 마지 못해서 말고삐를 잡고 있던 한 손을 들어 이리야가 내민 손에 살짝 자신의 손을 올렸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손바닥 밑에서 느껴지는 것은 보통의 손이 주는 평범한 그런 감촉이 다. "그렇게 대충 말고, 왜 나를 가르칠 때처럼. 그렇게 해봐. 왜 그렇게 둔해." 이리야의 재촉을 받고 로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티리쉬의 주문을 쓰고 있는데 도대체 뭘 하라는 거야." 결국 로운은 손을 내려버렸다. "아… 그런가." 깜박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을 지적 받지 이리야는 아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의 변화를 기엘이나 로운이라면 금방 느낄 줄 알 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어차피 그 주문은 관두기로 한 거 아니야. 조금 빨리 주문을 해제하 면 어때서. 좀 봐봐. 나한테는 꽤 중요한 일이니까. 그렇군 나도 일단 해제 주문을…." "…………." 로운은 이리야가 천천히 또박 또박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고는 입속으 로 가볍게 해제의 주문을 시전했다. 그 순간이었다. 지잉------ 무엇인가 몸을 통과해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이. 이건 뭐지?' 차가운 물의 느낌이 이리야가 내민 손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해져 왔 다. 로운은 아무말 없이 다시 손을 들어 이리야가 내민 손위에 손을 얹었 다. 똑---- 환청일까? 로운의 귀에 마치 조용한 연못 위에 이슬이 한 방울 떨어지는 듯한 소 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광활하게 넓은, 물의 이미지. 머릿속에서부터 몸 바깥으로, 그것은 마치 물이 퍼지는 것처럼 동그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왔다. '이것은?' 로운의 눈이 커졌다. 적어도 이리야는 이정도로 강력한 파장을 뿌리는 엘러가 아니었었다. 물론 현재 이리야에게 느껴지는 파장이 경하 같은 엘-세지 이상의 술 사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엘-사인의 단계정도는 가볍 게 넘어 엘-라사의 단계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 다. "이상하지?" "…………." "이걸 물어보고 싶었거든. 티리쉬 주문 때문에 못 느끼고 있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군. 정말 나라는 녀석은…." 하루 두 번씩 꼬박 꼬박 스스로에게 라인-티리쉬의 주문을 시전하여 엘의 흐름을 갈무리해두고 있었다. 그러니 못 느낄 만도 했다고 이리야는 나름대로 납득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느낀 거지?" 로운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사실 이리야는 신국 출신의 엘러가 아니다. 신국 외 출신의 엘러들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의 술사 가 있다는 사실은 본적도 없고 들어보지도 못했었다. 하물며, 이리야의 능력을 손바닥의 눈금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던 것 이 바로 로운이다. 그가 가르치기도 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바로 옆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에 보일 듯 훤히 알고 있던 이리야의 파장이 이렇게 순식간에 뒤바 뀌었다면 분명 무엇인가 이상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이리야에 대해서 생각하다말고 로운은 조금전으로 머리를 다시 돌렸 다.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키워드를 그냥 스치고 지나 간 것 같았기 때문 이다. "어떻게 된 건지 나한테 설명해 줄 수 있겠어? 너무나 급작스러워서 잘 이해가 안가는 걸." 이리야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로운을 바라보았다. 사실 능력이 자꾸만 발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다. 실제 이리야의 경우 경하 일행을 만난 후 아슈레이 중간 지대까지 갔다온 덕에 제국 출신의 엘러로써는 상당한 단계까지 발전해온 터다. '이상…이라. 이상. 이상….' 로운은 같은 단어를 몇 번씩 되뇌었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영상. "그렇군. 그것 때문인가?" "어? 뭔가 알겠어?" "………경하 탓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될 것 같군. 이건 기엘과도 좀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지만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녀석 탓이라니?" "네가 다쳤을 때. 경하가 치료를 했지 그 때…." 그때는 그저 경하가 온 힘을 다해 치료를 했다고 가볍게 언급을 하고 넘어갔던 일이다. 사실 로운도, 기엘도 정확하게 설명을 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 다. 룬은 아예 논외. "아니 이럴 것이 아니라. 경하에게 직접 물어보는 쪽이 좋을 것 같다.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뿐이야. 당신의 능력이 비약적 으로 향상되었다고 해야할까?" "뭐?" "스스로 느끼지 못하나? 주위의 엘이 반응하고 있잖아. 그렇게 질질 흘리지 말라고. 하앗--!!"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로운은 말머리를 돌렸다. 정확한 것은 경하보다는 경하 안에 있는 존재. 세나케인이 더 잘 설명 을 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이 이봐. 같이 가!!" 이리야가 허둥 지둥 말머리를 돌려 로운의 뒤꽁무늬를 쫓아갔다. '능력이 향상되었다구? 아니 새롭게 구성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자꾸만 생겨난다. '도대체 난 어떻게 된 거지?' *** "설명할 것도 없지 않아?" 퉁명스럽게 세나케인이 무슨 시덥잖은 것을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케인 설명 좀 해줘." 경하는 자신이 일이 아니라는 듯 옆으로 비켜서는 한가롭게 누워 세나 케인을 재촉했다. 말을 달리고 또 달려서 폴리카류의 또다른 갈래인 류이카르의 근처에 도착한 일행은 오늘 하루는 마지막으로 푹 쉬자고 동의한 후 마을을 찾아 들어온 차였다. 단지 문제는 마을은 마을인데 워낙 작은 마을이라 여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덕택에 일행은 노숙보다는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결 국에 노숙과 비슷하게 짚을 잔뜩 쌓아둔 창고 한구석에 둘러 앉아있었 다. "이정도는 네가 좀 알아서 설명을 해주면 좋을텐데 어째서 날 귀찮게 하는 거지?" 세나케인의 말에 경하의 눈초리가 휘익--하고 치켜올라갔다. "지나치게 인간 답게 굴지 말라고 했지. 에잇. 정말이지." 이번에는 경하가 투덜 투덜 댔다. "그렇게 서로 미루지만 마시고 대답을 해주십시오. 아무래도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면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겁니다." 기엘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말에 경하가 조금은 뻘쭘한 표정을 했다. 왠지 찔렸기 때문이다. 경하도 이전에 이것과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한계가 어떤 것인 지, 그리고 세나케인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를 때, 경하는 계속 불 안하기만 했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아주 혼 란스러웠었다. '젠장 귀찮게 스리.' 하지만 경하는 로운의 두터운 망토를 빼앗아서 둘둘 두르고는 옆으로 누워 버렸다. 개구리 올챙잇적 시절 생각 못한다고 밖에는 표현이 안될 행동. 하지만 이전의 그런 불안했던 때를 떠올리는 게 이상하게도 싫었다. 스스로의 행동이 너무나 어린애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싫 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경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난 모르니까 케인에게 물어. 케인이 다 대답해 줄 거야."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설명할 재주가 없다는 게 사실은 정확한 대답일 지도 모른다. 알고는 있지만 설명을 못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물론 진실은 정말 어렴풋이 대강 짐작이 갈 뿐 사실은 정확하게 어떻 게 된건지는 모른다는 것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 "……피곤하십니까 경하님?" "그래. 엄청 졸려." 핑계를 대고는 경하는 꾸물꾸물 몸을 움츠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모두의 눈초리는 팔짱을 끼고 아주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세나케인에게 향했다. 그는 현재 조금은 반투명한 형체였지만 경하가 눈을 감기 무섭게 아주 뚜렷한 실체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땅에 발을 대고 '서' 있었다. "정말 귀찮은 녀석이군." 털썩--- 경하가 그러는 것처럼 세나케인이 자리에 주저 앉았다. '똑같구만.' '비슷해.' '닮았어.' '경하님과 똑같아.' 다들 마음속으로만 생각할뿐 감히 입을 열어 그것을 단어로 옮기는 못 했다. "불을 보듯 뻔한 것인데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뜸 세나케인이 한마디 했다. "예?" 당사자인 이리야는 입을 꾸욱 다물고 세나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두 근 두근 하며 기다렸다. "생명의 흐름이 끊어져서 자연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그것을 원래대로 돌려 놓으려고 하니 저녀석의 힘만으로는 부족할 수 밖에." "에?" 빈사 상태긴 했지만 자신이 그렇게 심한 상태인 것은 몰랐던 이리야가 넋을 놓고 세나케인의 얼굴을 보았다. "엘이 흩어지기 시작한 이상은 치유의 주문 정도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어." 설명을 하고는 있지만 도통 못알아 듣는 표정을 하고 있는 일행들을 보고 세나케인은 인간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저녀석과 별다를 것 없군. 물론 인간이라는 것이…." "거. 자꾸 인간 인간 하는데 듣는 인간은 아주 불쾌해. 그러는 당신은 결국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거잖아. 안 그래?" 불쑥. 룬이 한마디를 해버렸다. 그런 룬의 말에 기엘이 끼어들어 그만 하라고 하려는 순간 세나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재미있는 인간이군. 그댄." "칭찬 고마워. 당신도 생각보다는 훨씬 인간 흉내를 잘 내는데?" 룬은 세나케인과 똑같은 포즈를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로운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저 남자의 반응은 언제나 상식을 초월하는 군.' 로운의 논평과는 상관없이 케인은 룬을 향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흩어지기 시작한 엘을 다시 불러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생명의 흐름에 동참하지는 못해. 그러니 살리는 방법은 하나지." "아까부터 하나라고 하는데 그게 도대체 뭐야?" 오히려 당사자 보다 룬이 더 흥미진진한 표정을 하고 있다. "재구성하는 것." 딱 떨어지게 세나케인이 말했다. "너와는 달리 저녀석이나…." 세나케인은 잠자는 척(?)을 하는 경하를 가리켰다가 기엘과 로운등을 가리켰다. "이쪽의 경우는 엘의 영향을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훨씬 더 많이 받지." "그래서 그 재구성이 뭔데? 빙빙 돌리지 말고 말을 해봐." "이미 선을 넘겨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엘을 다시 인간의 틀에 집어 넣으려면 그냥은 안되니 결국 인간의 몸과 엘이 하나가 되도록, 인간 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4가지의 엘을 모두 활성화 시켜야한다. 그래서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이지." 너무나 훌륭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한 세나케인은 스스로 만족하여 고개 를 끄덕 끄덕 한다. "……………." 하지만 당사자인 이리야를 비롯 어느 누구도 만족할만한 얼굴이 아니 다.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한 건가?" 뻘쭘해진 세나케인이 말하자 모두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나케인은 이리야를 가리키며 말했다. "더이상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한데?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넌 바람의 주인의 힘으로, 라기보다는 단순하게 불러온 것 뿐이지만 여하튼 말이 지 다시 태어난 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래보다 훨씬 엘의 흐름을 다루기 쉬워 졌다면 그것도 모조리 저녀석의 탓이다. 새롭게 만들어 놓은 사람 솜씨가 좋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오호. 그렇군." 손바닥에 주먹을 타악- 치며 룬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한 다. 하지만 룬을 제외하면 모두 과연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나 싶어 서 눈만 껌벅 껌벅이고 있었다. 말은 이해 되지만 그 말에 담겨 있는 의미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나케인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룬을 보며 왠지 흐뭇해하 고 있었다. "알아 듣는 인간이 있어서 편하군." "음 내가 원래 이해력이 좀 좋지."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까지 얌전히 자는 척을 하며 세나케인이 하는 말을 한 귀로 열심히 듣던 경하는 그만 참 지 못하고 일어나 버렸다. 왠지 세나케인의 말대로라면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인 것이다. "이봐 룬!! 뭐가 그렇군은 그렇군이야!! 그리고 케인 넌 왜 그렇게 기 분 나쁘게 웃는 건데? 참나. 설명을 하라고 했더니 룬하고 죽이 맞아 가지고는. 정말 별일이다. 별일!!" "설명을 하라고 시킨 건 내가 아닌데?" 바로 네가 아니냐며 세나케인이 반발했다. 하지만 경하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소리쳤다. "시끄러워 케인. 아아악-- 돌겠다. 젠장 갑자기 뭔가 심각한 이야기라 고 해서 좀 심각하게 있어줄려고 했는데 왜 둘이서 개그를 하는 거야 응?" "별로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룬 역시 경하에게 왜 그런 반응을 보이냐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 다. "그런 얼굴도 하지마!! 이리야. 궁금하긴 뭐가 궁금해. 인간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 의례 버전업 아니다. 여하튼 능력이 좀더 좋아질 수도 있는 거고 그런 거지 뭘 그런 것 가지고 난리를 피우는 거야. 그냥 그 런가 보다 하고서 살면 되지. 안 그래?" 경하의 말에 이리야가 또다른 의미로 벙찐 얼굴을 했다. "능력 좋아지면 좋지 뭘. 그걸로 뭐 나쁘게 되는 거라도 있어?"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잖아. 뭘 그렇게 시시콜콜 따지기는. 손에 안 익어서 그런거 면 연습하면 되고. 어차피 티리쉬 주문이고 뭐고 다 팽기치기로 했으 니까 상관없잖아." "물론. 그렇지." "그럼 끝난 거니까. 그만 자자구. 응? 내일부터는 버전업된 능력만큼 마구 부려먹어 줄테니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란 말야. 그리고!!" 얼떨덜한 표정을 짖고 있는 이리야에게 경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 다. "나라고 그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사과는 안 해. 어쩌다보니까 그렇 게 된 건데 사과하는 것도 난 우습다고 생각해. 다만…." "…………." "다치게 된데는 내 책임이 있으니까. 그게 미안할 뿐이야. 그럼 난 잔 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경하는 다시 망토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케인 쓸데없는 헛소리하면 가만 안 둘 거야. 특히 룬하고 죽 이 맞아서 떠들어대면 발로 차버릴 거야." "………발로 차다니. 내가 네가 차대던 의자나 침대나 그런 종류인줄 아는 건 아니겠지?" "농담 따먹기 하지마 케인!! 시끄러우니까 빨랑들 자! 어서!!" 그렇게 말은 하지만 잘 준비가 된 사람은 오로지 경하 뿐이었다. "먼저 주무십시오. 경하님. 저희들은 주위를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 다." "………." "로운. 나가지. 이리야씨. 같이 가시겠습니까?" "어이. 나랑 이녀석만 놓고 가는 거야? 위험하지 않아?" "세나케인님이 모처럼 나와 계시니까 괜찮을 겁니다. 룬씨." 옆에 내려놓았던 라이트를 들고 기엘이 일어나자 로운과 이리야도 주 춤 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탁 드립니다. 세나케인님." 라이트를 들고 세나케인에게 예를 갖춘 기엘은 아직도 얼떨덜한 표정 을 짖고 있는 이리야를 독촉해서 창고 밖으로 나갔다. "로운. 뭐해." "아. 그. 그래." 결국 로운도 나가고 뒤에는 세나케인과 룬만이 망토를 뒤집어쓴 경하 만이 남았다. 경하는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둘이 떠들면 둘 다 죽어." *** "뭔가 상당히 충격적인데 이거." 이리야는 바람이 휭휭 부는 강가에 앉아서 스스로에게 또는 기엘과 로 운에게 말했다. 사실은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죽을 고비 라고 해야하나 아니 거의 죽은거나 진배없었다는 거잖아." 다른 것보다는 바로 그점이 이리야에게 상당한 충격을 가져왔다. 물론 굉장히 위독했다 라는 것은 로운이나 기엘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 다. 거의 시체였다고 하는 룬의 논평도 이미 들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세나케인의 설명을 듣고 터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저도 상당히 놀랍습니다. 전 단지, 치료 과정중에 경하님의 엘에 반 응을 한 탓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쓰윽-- 이리야는 서늘한 어깨를 감싸안았다. "참. 지금 심정을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런 이리야에게 위로를 하기도 그런 기엘은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로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운. 너무 말이 없다." "아. 아아." 로운은 로운대로 뭔가 고민을 하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로운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전 세나케인이 경하가 한일에 대해 설 명을 할 때 이미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걱정…이 되는 것이 생겨서." "무슨?" "겉에서만 보면 단순하지. 이번 일은. 하지만 티리쉬로 억제를 하고 있는데도 시유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알아보는 것도 그렇고, 이리야를 저렇게 고쳐놓은 것도 그렇고." "놀랍긴 하지만, 결과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아?"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라니까. 기엘. 탁 까놓고 말해서 생각을 해봐. 아니 기억을 해보라고. 우리가 아는 어떤 바람술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지? 과거의 기록을 되짚어 보아도 4신의 힘을 그렇게 사용할 수 있었던 수장은 없었다. 있었다면 아주 고대의 일이겠지." "…………." 그제서야 기엘은 로운이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그가 이제야 알아차린 것은 단지 겉으로 벌어진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탓이었다. . "단지 저 녀석이 일반적인 수장 계승자와는 틀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엔 그 차이가 너무 커." "그렇지, 어떤 바람술사도, 어떤 수장도…." "죽어가던 사람을 살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과는 전혀 문제가 틀리다고 본다. 물론 나쁘다는 것은 아 니지만 왠지 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려워." 기엘의 어깨가 움칠했다. 그의 친우의 입에서 두렵다는 단어가 나온 것이 얼마만 일까? 아니 기 엘이 기억하는 한 로운이 기엘의 앞에서 두렵다라는 단어를 대놓고 말 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런 단어를 쓸 정도로 로운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로운이 말 하고 있는 것이 얼마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무조건 경하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감탄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리야 당신도 앞으로는 조금 조심하는 게 좋을 듯 싶어." "으으응?" 갑자기 자신에게 로운의 화살이 돌아오자 이리야가 화들짝 놀랐다. "신국 출신의 엘러와 타지역 출신의 엘러가 얼마만큼 차이가 있는 것 인지는 솔직히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하지만 지난번에 제국에서 만났 던 엘러들과 이전의 당신의 능력을 생각해본다면 확실히 신국 출신에 는 못 미치지. 그것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고 본다." "뭐… 그건 나도 인정하지만. 그게 이제 와서 무슨?" "현재 당신의 능력은 나나, 기엘에 굉장히 가까워. 물론 숙련도라는 부분이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좌우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에. 그렇게나…." 이리야가 벅벅 머리를 긁었다. 내색은 한적 없지만 그에게 있어서 경하는 완전히 범위 밖의 인간이 었기에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기엘이나 로운의 경우 나 름대로는 조금은 질투의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전에는 시유에게도 못 미쳤지." "음. 으음."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상황이 되었고, 따라서…." 로운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말이 맞을지 맞지 않을지 사실 그도 자신이 없다. "일단 설명을 좀 해두어야 겠군. 다른 신국은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미메이라에서는 바람술사의 단계를 다섯 단계로 나눠. 엘-다인. 엘-유 린. 엘-사인. 엘-라사, 그리고 엘-세지라고 하지. 제일 낮은 것이 엘- 다인. 미메이라의 대부분이 사람들이 엘-다인 정도의 바람술사다, 그 리고 나와 기엘은 엘-세지 직전이 아닐까 라고 생각중이고. 물론 경하 는 엘-세지의 단계를 넘긴지 오래지." "그럼 현재의 나는 어떤 단계지?" "엘-사인의 단계는 넘어섰다고 보고 제대로 훈련을 받는다면 충분히 엘 라사의 단계는 되지 않을까 짐작중이다." "에엑---." 이리야는 깜짝 놀랐다. 분명 이전의 자신의 능력보다는 한 단계 위라 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훈련을 하면 스스로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자신이 정확하게 판 단 할 수 있게 될 거다. 그리고 바람술을 기본으로 이야기 하자면 일 단 자신의 엘을 얼마만큼 정교하게 다스릴수 있는지도 중요한 부분이 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야." 기엘은 로운이 능력의 단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그가 무슨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경하가 매일 매일 하루의 삼분지 이를 잠으로 보내면서도 애를 쓰며 하고 있는 일과도 관계가 있다. "그런 단계에 도달해 있는 엘러가, 비록 신국 이외의 출신이라고 해도 과연 제약을 받지 않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뭐?" "이전에 들었을 텐데? 신국인은 오랜 시간 신국을 떠나 있을 수 없다 는 말." "그런…." 순간 이리야의 안색이 새하얗게 되었다. "신의 축복이자. 저주라고 누군가는 말하기도 해. 물론 이렇게 말해버 리면 경하는 펄펄 뛰겠지." "아마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또 화를 내시걸?" 기엘도 쓴웃음을 지으며 로운의 말에 동감을 표현했다. "어이. 지난 번에 말한 거 그게 다가 아니야 설마?" "뭐 기본은 같습니다. 단지 경하님께 말씀드린 것 보다는…." "보다는?" "그 기한이 생각보다 훨씬 짧다는 겁니다. 특히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 날수록. 물론 경하님은 제외입니다." "설마…." "물론 경하님곁에 있으면 그 기한이 얼마가 될지 모른다고 하는 부분 은 사실입니다. 경하님이 옆에 계시는 한은 확실히 문제가 없을 겁니 다. 경하님께서 바람의 근원이나 다름 없는 그런 상태니까." "하지만 나는…." 이리야는 떨리는 손을 맞잡아 동요를 억누르려 했다. "지난번에 경험하셨던 것처럼 일단은 이리야씨도 경하님 곁에 계시는 동안은 특별한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이리야 님은 경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뭐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로운은 떨리는 이리야의 두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만약의 경우에는 나유로 가면 되니까 문제는 없어. 그렇게 쉽게 끝이 날리 없잖아. 지금까지도 그래왔는데." "…………." "그렇죠. 아마도 대륙의 어느누구보다 파란만장한 몇 달을 보내오지 않으셨습니까."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직접 몸으로 겪는게 이렇게 틀릴 줄 몰랐어. 솔직히 이야기해서 난 그저 기사양반이랑 신관양반이 부러울 뿐이었거 든. 그 부러움에 이런 함정이 있을 줄 몰랐다. 정말로." "뭐 숙명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함정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실 저희도 여행을 떠나기전에야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축복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축복을 받은 대가가 되죠." 씨익--하고 기엘이 웃어 보였다.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하고 웃을 수 있 는지 이리야는 이해가 갈 듯 하면서도 가지 않았다. "좋은 것만은 아니군. 확실히." "그것 때문에 저녀석이 저렇게 뛰는 거야. 어느 누가 그런 상황이 될 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 "……………." 로운은 이리야의 손을 꾸욱 쥐었다가 놓았다. 그것은 몇 마디 격려의 말보다 훨씬 더 이리야에게 도움이 되었다. "아참. 그리고 문제가 하나더 있군." "뭐가?" 이리야가 안도를 하다말고 로운의 말에 다시 긴장을 했다. "사실은 내가 당신한테 가르칠수 있는 것은 거의 다 가르쳤거든. 엘- 사인 이상되는 물의 술사에게 내가 더 가르칠수 있는 건 없어." "에엑--." "다시 말해서 현재 자네가 능력을 갈고 닦고 싶어도 그걸 해줄만한 스 승이 전혀 없다라는 뜻이야." "우욱. 그게 더 나쁘잖아. 현실적인 문제라구."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날 원망하지는 말아 줘." "우어--- 큰일났잖아. 이거." 현실적인 문제가 닥쳐오자 이리야는 순식간에 다른 문제들을 잊어버렸 다. 아니 사실은 무의식중에 잊어버리려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젠장. 이 일을 어쩌지. 정말 나유까지 빌빌거리며 가야하나." 이리야는 꽤나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리야씨.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런 저런 다양한 주 문은 나중에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습득하실수 있을테니까요. 기본적 인 것은 언제나 같은 법입니다. 무엇이든 기초가 중요한 법이라고 하 지 않습니까?" "어. 그건 그렇지만." "맞아. 기초는 중요한 법이지." 로운은 말을 마치고 벌렁 축축한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었다. "그리고 내일 부터는 그 알고 있는 기초 몇가지로 아마도 경하에게 혹 사를 당할테니 각오해두는 것이 좋아." "으윽. 그런가." 이리야 역시 로운과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하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리야는 왠지 저 새카만 하늘이 앞으로 요 며칠간 그가 계속 보게될 하늘이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움하하하하하하. 역시 짱이야. 쾌속선이 따로 없구만." 히죽 히죽. 뒤에서 봐도 경하가 히죽 거리는 것은 명백하다. 마치 온 몸으로 히죽 거리며 웃고 있는 듯 해서 일행중 어느 누구도 경하의 옆에 다가가지 않았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히죽 거림이 옮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일행은 그리 크지 않은 조그만 배에 옹기 종이 모여 앉아있었다. 선착장이 있는 커다란 마을도 아닌 이상 그들이 살수 있는 배는 이정 도가 한계였다. 그 배에서 현재 제일 막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리야였 다. "어이. 이봐. 좀 쉬면 안될까? 나도 사람인데." "무슨 소리야. 버전업 되었다며. 그럼 지속시간도 버전업이 되어야지. " "그 버전업이란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어제부터 같은 소리를 하고 있 는데 도통 이해 할 수가 없잖아." 이리야가 투덜 투덜 거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기엘에게 들었는데 엘-라사단계의 물의 술사가 되었다며. 낮은 단계 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걸 버전업이라고 하지. 흐흐흐흐. 여하튼 올라간건 간거니까. 힘내." 마치 악덕 공장주라도 된 기분으로 경하는 히죽 거렸다. "흐흐흐흐 좋잖아. 역시." "그 기분나쁜 웃음은 좀 안해줬으면 좋겠다. 왠지 얼굴하고 안 맞아." 룬이 경하의 웃음 소리를 듣고는 핀잔을 주었다. "뭔 상관이야! 내가 웃겠다는데. 좀 흐흐 하고 웃으면 어떻고 헤헤헤 하고 웃으면 어때." 룬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뭐래? 단지 내가 말하는 건 말이야. 기왕이면 겉보기 등급하고 비슷한 행동을 보여달라 뭐 이런거야." "그래서 지금 불만이라는 소리…어?" 제일 먼저 눈치 챈 것은 역시 경하였다. 라인-티리쉬의 억제도 받지 않고 있는 경하의 감은 지금 아주 예민해 져 있는 상태. 그리고 다음으로 차례 차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 둘씩 경하가 느낀 바로 그것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적의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주 낯설은 그 무엇인가가 그들을 향해 오고 있었다. "뭐지… 이런 느낌은 처음인데." 경하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이리야에게 가까이 갔다. 그것은 배의 뒤편에서 배를 따라 아주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기해. 아주." 경하는 '그것'이 다가오는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가운 감촉이 경하의 손가락을 시리게 했다. '마치 물…과 같은 엘.' 시린 손가락 끝에 살아 있는 엘의 감촉이 느껴졌다. 경하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왔다." 그말과 동시에 배 뒤편에서 물줄기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 강물과 뒤섞인 차가운 엘은 공중에 자유롭게 맴도는 물줄기와 섞여 어 떤 형상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래지 않아 인간의 형체와 비슷한 상태가 되더니 곧이어 천천 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설마. 케인 너랑 비슷한 상대인거야?" 그 변하는 모습이 케인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경하는 세나케인을 불렀다. 「틀려.」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 썰렁한 단 한단어. "그럼 도대체." 색깔을 갖추고 그리고 이번에는 점점 진해지더니 다음 순간 그것은 인 간의 모습이 되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아직도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살며시 눈을 떴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 그. 뭐 놀라긴 했지만 별로 죄송할 것은 없는데요?" 당돌하게 경하가 대답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물로 된 형상이 생긋하고 미소를 지었다. "상냥하신 분이군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 더 놀랄 것도 없다 싶어서 경하는 대놓고 물었다. 뭔가 좀 건방지다 싶었지만 적의라고는 단 한 옴큼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례.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물의 신국 나유의 딸. 라마이드라고 합니다." 물방울과 함께 그녀의 고개가 까닥하고 숙여졌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녀의 인사는 분명 경하가 아닌, 이리야를 향한 것이었다. "당신을 찾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이국의 물의 술사여." "에에?" "그대가 물과 가까이 있어서 이렇듯 찾기 쉬었습니다." "어……." 어제보다 배는 더 어리둥절한 상태로 이리야는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상체는 분명 보이지만 그 아래부터는 역시나 출렁 출렁 거리는 물의 상태. 과연 이 사람(?)은 누구인걸까? "당신을 만나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의 술사여." 후두두둑 물방울이 떨어졌다. 상체만 만들어졌던 형체에서 팔과 같은 형체가 이리야의 앞으로 내밀어지고 있었다. "나유의 축인을 받지 못한 불쌍한 물의 아들." 물로 만들어진 손가락이 이리야의 굳은 이마에 살짝 닿았다. 반짝이는 물방울이 이리야의 이마에 남았다. "곧 당신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 "나유의 축복이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기를…." 그말과 함께 라마이드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물의 형체는 순식간 에 다시 강물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이틀째 너무나도 황당한 일을 겪어버린 이리야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 고 입만 물고기처럼 뻐끔 뻐끔 거릴 수밖에 없었다. "에엑---- 저러고 끝이야? 시시 하잖아!" 경하는 그런 이리야를 보며 투덜 거리며 말했다. "이상한 손님이었잖아. 이름만 밝히고는 그대로 사라지다니." 하지만 그렇게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단 하나. 다른 일행은 모두, 이리야와 별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다들 왜 그래? 응? 으응?" 경하 하나뿐이었다. -----------------------------------------계속 누가 우리 버그양을 못보셨습니까? 아름다운 자태의 우리 버그양... 네 버그양은 예쁘고 멋집니다. (....반어법인거 아시죠?) ...쿨럭.. ...으윽. 버그가 싫다....오타는 더 싫다...(그런데 오타쟁이) [아슈레이 7] 4장 뒤돌아서는 사람들 (8) 아슈레이 7 4장 뒤돌아 서는 사람들 (8) "그러니까 누차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경하님께서는 낯선 사람을 조심하 라는 교육도 받지 못했던 겁니까? 저와 로운이 항상 경계를 하는 것 만으로 는 부족합니다. 경하님께서 스스로 주의해주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아시겠 습니까." "…………." "비록 적의가 없다고는 해도, 그 상대가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왔는 지 아무도 모릅니다. 상대는 적의가 아닌 행동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무의 식중에 경하님께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겁니다." "………응응." "지금 건성으로 말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경하님." "알았다니까 기엘. 적당히 해. 무슨 말인지 알아. 여하튼 결과적으로는 아 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응?" 경하는 드물게 머리에 핏대를 세우고 잔소리를 하는 기엘의 앞에 조신하게 앉아있었다. '세나케인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제 와서 뭐가 더 새롭고 이상하겠어. 적의 가 없다 싶으면 그걸로 된 거지.' 다들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걸랑 오직 한사람 경하만이 멀쩡했 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그게 뭐가 대수냐는 표정을 짖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처음에는 조금만 이상해도 가슴이 벌렁 벌렁 할정도로 놀라 서 정신을 못차렸지만 그것도 이제는 슬슬 면역이 되어 가는 중이다. 세나케인까지 갈 것도 없다. 따지고 보면 경하 자신이 이 아슈레이의 세계 에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모든 이상함의 경계선을 넘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경하는 묘하게 침착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아슈레이에 있어서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게 가능하다면, 뭐가 안되겠어?' 「상당히 낙천적이 되었군. 이상하다면서 엉엉 울었던게 어제 같은데?」 천하태평인 경하에게 세나케인이 한마디 던졌다. 순간 경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봐! 그럴 때는 좀 오오 많이 컸군. 정도로 끝내는 거야. 꼬기는 왜 꽈!' 「넌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아량이 필요 할 것이다. 내가 네게 하고픈 말은 그것 뿐이야.」 그말에 경하는 눈치를 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다들 반쯤은 얼이 빠진 얼굴들이다. 물론 로운은 얼이 빠졌다기보다는 뭔가 화를 내고 싶은 것을 상당히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쳇.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로운. 그런 이상한 표정하지 말고." "………." "로운. 하고 싶은 말 있잖아." "없는데?" "그럼 왜 그런 얼굴이야?" "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매도 차라리 가서 먼저, 알아서 맞는게 좋다는 생각에 경하는 로운에게 꼬 치 꼬치 캐물었다. "뭐랄까 설명하자면 말이야. 아으. 저놈 한 대 때려주면 딱 좋겠는데 구실 이 없어서 못때리겠군. 하지만 정말 정말 참기 힘들잖아. 아우 성질나. 라 는 표정." "…………." '맞겠군.'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예언을 한다. '한데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이리야도 눈을 찔끔 감을 준비를 한다. '아. 말려야겠지?' 지례 짐작으로 말리기 위해 만전의 준비를 하고 있는 기엘. 그 사이에 로운과 경하가 서로의 눈을 팽팽하게 노려보며 앉아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길이 없다. 다만 자그마한 배에서 보이 는 바깥 풍경이 아주 조금이나마 변해다는 것으로 짐작을 할 수 있을 뿐. "…후우." 들려오는 강물 소리가 마악 변하려는 찰나 로운의 깊은 한숨 소리가 새어나 왔다. "화난 것은 없다. 단지 묻고 싶은게 있을 뿐이지." "묻고 싶은 것?" "그래. 네 말대로 아까 나타났던 그…." "라마이드." "그래. 그 라마이드. 그녀가 나타났을 때 아무리 적의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태평하게 반응한 이유가 뭐지? 네 태도는 마치 당연하게 나타날 것 을 알고 있는 듯한 그런 태도였다. 난 그것이 이해가 안 돼." 아--하는 짧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미쳐 눈치 채지 못했던 점을 로운은 지적하고 있었다. "우리야 이미 네 말대로 세나케인을 눈앞에서 보았고 이런 저런 이상한 것 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라마이드라는 여자를 보고 놀라지 않는다고 치 자. 하지만 난 네 태도가 이해가 안가." "에. 에. 그, 그건…."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태평한 표정으로 있던 경하도 로운이 말을 던지자 마자 표정이 변해버렸다. "그건 말이지. 그러니까…." '어째서 그랬던 거지?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도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다. 질문에 대답을 하다 말고 경하는 생각에 잠겨버렸다. '나타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고 내가? 설마 나라는 녀석 모르는 사이에 뭔가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생긴건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역시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대답은 끝까지 해." 로운이 다그친다. "…모, 모르겠는데." 내리깔았던 눈을 살그머니 뜨며 경하가 배시시 웃었다. "그. 세.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일도 많으니까." "대답이 안 돼." "하지만 정말 모르겠는걸. 그냥 나타났으니 그런가보다 했던 것 같은데." "…………." 소리 없는 한숨이 로운의 품에서 새어나온다. '자각이 없는 거야 역시.' 무엇에 대한 자각인지 로운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경하 가 뭔가 자신의 이해의 범주를 훌쩍 뛰어 넘어있다는 것을 로운은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민을 로운은 가슴속 깊이에서 하고 있었다. *** 며칠 밤낮이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어두운 공간. 그 안에서 한 소녀가 살며 시 눈을 떴다. '여긴 어디?'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도….' 눈을 뜰 때마다 계속 어디론가 그녀는 이동되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여기 저기 부딪힌 몸이 자꾸만 아파 왔다. 무슨 약이라도 먹였는지 그녀는 어두운 공간에 있는 동안 계속 잠을 자고 있었다. 아주 가끔 눈을 떴다가도 곧 쏟아져오는 수마 때문에 정신을 잃는 것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약효가 떨어진 듯, 조금씩 정신이 돌아 오고 있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조금이라도 몸을 가누려 했지만 왠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마차 같았다. 밖에서는 계속 말 발굽소리가 들려왔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사람의 목소리 도 들려왔다. '시안언니 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단 하나. 억수같이 내리 는 비 뿐.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 어두운 마차 안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시유는 고개를 들었다. "하아…." 고개를 숙이고 몸을 오그리고 시유는 눈을 감았다. 눈을 떠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이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 한참을 그러고 있던 시유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어두운 공간에 한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이건 바람의…." 어디서 불어오는 걸까? 시유는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그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이라기 보다는 바람의 엘 그 자체와도 같은 것. 그 바람의 엘속에서 시유는 다시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불안감 대 신 포근함과 따스함을 느끼면서. *** "정말 여기가 맡는 거야?" "그렇다니까." "그런데 왜…." "나도 모르니까 잠시 기다려. 어차피 처음 계획하던 것과는 시간차이도 났 고, 아직 아셀의 황제는 우리들이 도착한 줄도 모르고 있을 것 아니야." 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경하 일행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아셀의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그 마한 성이었다. 하나스의 국왕의 호의로 아셀의 그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을 잔뜩 기대하고 있던 경하에게는 어째서 이런 조그마한 성 한구석에 이렇게 또아리를 틀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성의 주인은 이전에 하나스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훼인 후작부인의 성이 다. 어차피 전하의 서신도 훼인 후작부인의 손을 거쳐 전달이 되었을테니 이제 남은 것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 뿐이지." 룬은 일단은 자신이 맡은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강조하며 말을 끝맺었 다. 그들이 하나스를 출발해 이곳 아셀 까지 오는데는 열흘하고도 삼일의 날을 허비했다. 원래의 예정 대로라면 열흘 이내로 도착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중간에 있었던 이런 저런 사건들을 생각하면 사실 아주 늦어진 것도 아니 다. "느긋하게 라니. 우리가 뭐하러 힘들여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지 않아도 여기까지 오는데 며칠이 걸렸는데. 젠장. 비행기는 두 번째고 차라도 있었 으면 정말 좋겠네." "차…라니?" "아아 됐어 됐다구! 내가 무슨 말을 못해. 으이그…." "룬씨." 옆에서 기엘과 로운이 룬을 불렀다. 룬은 그들에게 잠시 눈짓을 해 알았다는 뜻을 밝히고는 경하에게 말했다.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인들에게 시키면 되니까 되도록 느긋하게 쉬라 구. 자아 그럼 나는 이만." "저희들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경하님. 모처럼이니 오늘은 푸욱 쉬십시 오. 내일 일은 저희들이 걱정하겠습니다." "말은 쉽지." 경하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기엘의 말을 듣고는 침대 위로 기어 올 라갔다. 생각해보면 이런 침대에서 잠을 자보는 것도 아주 오랜만의 일이다. 하나스 에서 룬의 집에 머물렀던 때 이후로는 처음이다. '하아. 정말이지 이런 떠돌이 생활을 할 줄 누가 알았겠냐구.' "훼인 후작 부인은 어떤 분입니까?" "에?" "어느정도는 저희들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스의 호의에 는 정말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만. 아직 이 성의 주인도 만나뵙지 못한 상태 라…." "아아. 그거. 뭐 별거 아니야. 훼인 후작 부인은 그러니까 말이지." 팔장을 끼고는 손가락을 빙글 빙글 돌리면서 룬은 말꼬리를 늘였다. "전하께서 직접 서신을 부탁할 수 있을 정도의 여자 라고 하면 되려나?" "…………." 룬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아셀 황제의 넷째 부인의 아홉 번째 딸인데 훼인 후작이라는 늙은이랑 결 혼 했다가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미망인이 되었어. 그리고 나서 이리저리 팔자 좋게 유람을 다니다가 하나스까지 흘러들어왔지. 뭐 그 다음은 대충 상상에 맡겨두겠어." 기엘이 어색하게 기침을 몇 번 했다. 결국 말하자면 일종의 '핫'라인인 것이다. 로운은 경하의 표현을 빌어 목 위는 30대요 목 아래는 40대인 하나스의 국 왕 이제라그를 떠올렸다. 말이 유람이지 그 뒤에 숨어있는 진실이 어떤 것인지는 오직 본인들과 양 나라의 국왕과 황제만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전하는 미인한테 상당히 약하거든." 룬은 윙크를 해보이면서 너털 웃음을 지어 버렸다. "…………." 하지만 기엘이나 로운, 그리고 이리야는 그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왠지 참 묘하게 들리는 말이군.' 로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하튼 내가 맡은 것은 여기까지고 이제는 훼인 후작 부인의 재량에 맡길 수 밖에 없어. 뭐 불운이라면 후작부인이 성을 비우고 있다는 것이겠지만 곧 돌아온다고 했으니 기다리자구." "믿을 수 있는 분이시겠죠?" "못 믿으면? 이제와서 어쩔건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룬씨." "어이어이 내 일이 아니라니. 적어도 내 조국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이 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룬은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기엘은 생각하고 있 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쉽시다. 오늘은. 으으… 완전 강행군이었 다구. 나름대로는." "………후우." 룬은 기엘의 등을 밀며 종용했다. 몇발자국 아무말 없이 걷고 있는데 갑자기 룬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불 쑥 입을 열었다. "그렇지!!" "예?" "……?" "뭔데?" "미안. 잊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 말이야." 벅벅벅 미안하다는 듯이 룬이 머리를 긁는다. "빨리 말을 해봐. 당신 말대로 아∼주 편하게 발 뻗고 자고 싶다고 나는." 이리야가 투덜 투덜 거린다. 하지만 룬은 왠지 말을 하기를 자꾸만 미루었다. "그. 그. 듣고 너무 놀라지는 말아. 나도 숨기려고 한건 아니고 말이야. 상 황이 상황이니 만큼 괜히 말을 하면 좀 이상해 질 것 같고 그래서 말이야." "그래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룬씨." 기엘이 정색을 하고 룬의 앞에 바로 섰다. "그… 훼인 후작 부인은 말이야." "…………." "사실은 마법…사야." 순간 그들이 서있는 어두운 복도의 온도가 영하로 떨어져 버렸다. 휘이이이잉---- 룬의 앞으로 찬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뭐어-----?" 이리야의 기가 차다는 외침이 어두운 복도의 끝까지 지잉지잉 울리며 퍼져 나갔다. *** 마법사는 어떻게 생겼을까? 경하는 예전에 봤던 책들에 묘사되었던 마법사들의 외양을 떠올려보았다. 흑마법사들은 대부분 시커먼 로브를 입고 왠지 쪼글 쪼글한 마른 손을 가지 고 있는 늙은 할아버지들이 많다. 아니면 아예 새파랗게 어서 절대 늙지 않는 괴물이던가. 반대로 백마법사는 새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인자한, 또는 조금은 성질 나빠보이는 할아버지의 이미지랄까? 가끔은 로브가 없어도 마 법사를 주장하는 파가 있기 때문에 마법 검사니 뭐니 하는 것도 많았던 것 같다. "흐응." 하지만 이 아슈레이의 마법사를 본일이 없는 경하로써는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경하의 입장에서는 바람술사인 자신도 꽤나 훌륭한 마법사로 인식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흐음." 역시 마법사 하면 떠오르는 아더왕의 멀린이 최고가 아닐까? 기왕이면 다홍 치마라고 왠지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르륵- 로브를 끌고 나타나주면 좋 겠다고 경하는 생각하고 있었다. "으음." 말을 하는 대신 계속 이상한 소리만 연발하고 있는 경하를 로운은 아무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하에게는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 는 바람에 말이 많아 졌었지만 요즘은 그런 것도 왠지 시들해서 로운은 특 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똥마려운 강아지 같네. 내 폼이." 불쑥- 경하가 말을 했다. "비유 한번 멋지군." 드물게 로운이 경하의 말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경하는 왠일인지 그런 로운에게 반발을 하기는커녕 파악-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재미없어.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그래봐야 아직 점심식사 시간도 안 되었다." "할일이 없잖아. 기다리는 것 밖에는 그럼 기왕이면 빨리 와주면 좋겠다구. 하아아암." 그러면서 경하는 입이 찢어저라 하품을 했다. 그 하품은 전염성이 강한지 그 옆에 줄줄이 사탕으로 늘어져 있는 이리야와 룬도 연달아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따라하지마." 눈가에 흘러나온 하품 눈물을 닦으며 경하가 말하자 이리야역시 똑같이 눈 물을 닦다가 말고 경하를 쳐다봤다. 눈이 빨겠다. "따라한 것 아니야. 피곤해서 그럴 뿐이지." 이리야가 궁시렁 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어제 룬이 '마법사'인 훼인 후작 부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거의 새벽에나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덕택에 경하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은 전부 수면 부족 상태. 왜 말하지 않았냐는 세 남자의 추궁에 시달린 룬은 사실 거의 꾸벅 꾸벅 졸 고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실 자명했다. 마법사한테 그렇게 당한 뒤인데 지금부터 만나러 가는 사람이 마법사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들이 얌전히 이곳까지 올 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실제 룬은 당한 당사자인 이리야가 제일 펄펄 뛸 줄 알았지만 오히려 이리 야보다는 아무말없이 묵묵히 있던 로운의 반발이 상당했었다. 마법사의 도움 같은 것은 절대 받을 생각이 없다며 당장에라도 뛰쳐나가려 는 것을 결국 룬은 몸으로 막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덕택에 한잠 자고 일어난 지금도 로운은 룬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중 이다. "아. 한가하다." "그렇군요." "흐음. 저어. 여기요." 널따란 의자위에서 데굴 데굴 구르기 직전인 경하가 음료를 내오던 하녀에 게 말을 걸었다. "예." "후작 부인은 언제 돌아오시죠?"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 곧 돌아오실 겁니다는 아침 식사때부터 들어왔는데…." "글쎄요. 하지만 정말로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으니 곧 돌아오실겁니다." 방글 방글. 예쁘게 웃으며 대답하는데 거기다 대고 짜증을 낼 수는 없는 노 릇이라 경하는 포기해 버렸다. 아침부터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다. '곧 돌아오실 거예요.' 라는 대답뿐. 경하는 하녀가 자리를 비울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쭈욱 팔 다리를 뻗었다. "으으. 몇시간만 더 이러고 있으면 완전히 돌아버릴 것 같아. 이집 주인은 어째서 손님이 왔는데 코빼기도 안 내비치는 거야. 진짜." 팔 다리를 뻗는 타이밍과 묘하게 맞추어 그들이 앉아있는 커다란 방의 탁자 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어. 어라. 내가 안그랬는데?" 뒤를 이어 경하가 앉아있는 의자와 집기들이 제각각 덜컹 덜컹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으. 으앗!!! 귀신집인가봐." 놀란 경하가 벌떡 일어나 옆에 있는 로운에게 매달렸다. 기엘도 긴장을 하고 일어나 라이트에 손을 대었다. "으허… 뭐든 다 좋지만 유령이나 귀신은 싫다구!!!!" 경하의 발악이 마악 시작되려는 순간 온 집안의 울림이 순간 뚝 그쳐 버렸 다. "에엥?" 발작 비슷한 것을 시작하려던 경하는 멍청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지고 뻘쭘해진 경하는 꼬옥 붙들고 있던 로운의 옷자락에서 손을 때었다. "후우…." 로운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싶어서 살짝 쳐다봤지만 로운은 혹시나 하는 마 음에 주위를 경계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 지, 지진 같은게 아니었을까?" "지진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놀라게 했군요."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사람들이 눈이 순식간에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 다. "…마법 게이트가 가끔은 이런 소동을 벌이곤 합니다. 모두 제 불찰이지요. " 그들의 앞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짖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단 얼굴과는 매치가 안 되는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는 게 흠이라면 흠. 경하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색의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지만 정말로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아름답 게 생긴 여자가 경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라그 전하께서 부탁하신 분들이군요.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입상하고는 조금 안 어울리지만 긴 드레스를 입었을 때처럼 형식을 갖추어 인사를 하는 여자 앞에서 경하는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제 소개라도 거창하게 하고 다과라도 하고 싶지만 오늘은 불가능하겠군요. " 그러면서 예쁘게 웃어 보인 훼인 후작 부인은 경하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급하게 하녀들을 불렀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지금 당장 떠나실 준비를 해주셔야 겠습 니다." "예에?" 경하의 목소리가 거실을 가로지른다. "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 그런… 전 전. 아셀의…." "쉬잇---" 훼인 후작 부인은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시녀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이곳을 정리하고 손님들께서 곧 출발하실테니 깨끗이 치우도록 해라. 흔적 없이." "예. 알겠습니다. 마님." 시녀장인 듯한 여자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 뒤 따라 들어온 시녀들에게 이 것저것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짐은 많지 않으시겠죠? 많으시다면 최대한 간소하게 추리신 후 이곳으로 와 주십시오. 어서 빨리." "저어. 부인. 죄송합니다만 저희들은 여기 까지 온 이유가 있기 때문에…." 로운이 나서서 말을 해보려 했지만 후작 부인은 막무가내였다. "짐을 꾸려 오실 때까지는 한마디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어서 서둘러 주세 요." "…………." 로운은 아름답지만 단호한 표정을 하고 있는 훼인 후작 부인의 얼굴을 뚫어 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도 지지 않고 로운과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결국 로운은 그런 그녀의 기개에 한발 뒤로 물러섰다. "기엘. 내가 여기 있을 테니 짐을…." "알겠어. 룬씨. 이리야씨. 짐을 꾸려오도록 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웃고 있지만 훼인 후작부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로운 은 그 순간 깨달았다. *** -------------------------------------------------------계속 하고픈말 1 ...헥헥헥.. 야이. 주인공 놈들아!! 할일이....할 일들이 많은 놈들인데....으헉... 왜 꾸물렁 거리고 있는 거냐 너희들!!! 하고픈말 2 ..아름다운 우리 오타양과 버그양..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오타양과 버그양..... ....그대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사랑하고싶지는 않아...크흡... 하고픈말 3 ....아름다우신 담당님....... ...부디 ...요..용서를.....흐으... 저는 잠팅임니다...--;;; [아슈레이 7] 4장 뒤돌아서는 사람들 (9) 아슈레이 7 4장 뒤돌아 서는 사람들 (9) *** "제가 보내드릴 수 있는 곳은 세 곳입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조그만 선 착장이 있는 마을과 또 하나는 제가 하나스로 갈 때 사용하는 마법진이 있 는 유탄, 마지막으로 페이요트 산맥의 끝자락에 있는 조그마한 항구가 있는 쿠이즈. 선택하세요." "…마법진으로 갈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이곳까지 오는데도 힘을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제가 과연 무 사히 보내드릴 수 있을지 사실은 걱정입니다. 하지만 이제라그 전하의 부탁 인 만큼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서든 원하시는 곳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제대로 못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경하가 꽤나 의심스럽다는 물었다. 그말에 앞장서서 걸어가던 훼인 후작 부인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웃고있는 것인지 아니면 울고 있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는 경하에게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으로 돌아온 의 미가 없으니까요." 결의에 찬 표정에 경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차마 그녀의 앞에서 마법사는 뭔가 의심스러워서 그랬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경하는 그저 그녀의 뒤를 얌전히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어울리지 않은 차림을 하고 나타나, 갑작스럽게 경하 일행에게 짐을 꾸리도 록 종용했던 훼인 후작 부인은 그후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문 채 기엘들이 돌아올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훼 인 후작 부인은 그들이 돌아오고 나서도 그녀를 따라 어디론가 이동을 하기 시작한 후에야 간신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워서 놀라셨겠죠.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사과는 하고 있으나 왠지 위로는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도 제게는 커다란 모험이었습니다. 물론 무사히 돌아 오게 되어 기쁘긴 하지만요. 이쪽입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끼이익 소리를 내는 거대한 문을 힘겹게 밀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던 룬등이 재빨리 그녀를 도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왠지 퀘퀘한 먼지 냄새가 코를 질렀다. 무엇보다 어두웠 다. "라이트 온--!" 낭낭한 경하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울리며 다시 돌아왔다. 화악 하고 밝아진 시야. 그들은 그리 넒지 않은 지하 동굴 비슷한 곳에 들어와 있었다. "감사합니다. 친절하시군요." "에. 에에. 뭐 어두우니까." 어두웠던 공간을 밝게 만든 것이 경하인 것을 알아챈 후작부인이 인사를 하 자 경하는 얼굴을 붉혔다. 역시 미인은 미인이라고 경하는 생각하고 있었 다. 하지만 경하가 후작부인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다른 일행들은 무엇인 가를 발견하고 웅성웅성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에… 저건." 바닥에 무엇인가 희무끄레한 것들이 주욱 그려져 있었다. "아직 가까이 가지는 마세요." 그말에 그 희무끄레한 것에 손을 대어 보려던 이리야가 흠칫하고 손을 치웠 다. "마법진… 인가요?" "예. 이동 마법진입니다. 제가 만든 것이라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대 로 쓸모가 있지요. 물론 제가 돌아온 마법진은 다른 것입니다. 그들도 제가 그 마법진을 사용해 돌아온 것을 이젠 눈치 챘을 겁니다." "헤에. 이건 모래잖아." "예. 하지만 그냥 모래가 아니라 마법의 모래죠." 이리야는 후작부인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법진에 코를 박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는 무시하고 로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후작부인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럽게 저희들에게 짐을 꾸리 고, 그리고 이런 곳으로 데리온 이유를 말입니다." "…………." "로운." 조금은 무례하다고 생각하며 기엘이 로운에게 주의를 주려 했지만 로운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무례는 이미 후작 부인 쪽에서 먼저 해버 렸다. "저희들을 이 마법진으로 어디론가 보내주신다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이유도 없이 무조건 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렇죠. 설명이 필요하겠죠. 이중에서 이제라그 전하의 명을 받아 온 분 은 그래요. 당신이군요." 후작부인의 시선이 룬의 앞에서 머물렀다. 그러자 룬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후작부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 룬 디 리첼. 전하의 명을 받아 이분들을 이곳까지 호위해왔습니다. 훼 인 후작 부인. 그리고 이것은…." 룬은 품에서 부스럭 부스럭 무엇인가를 꺼냈다. "전하께서 부인께 직접 전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리첼 경." 룬의 갑작스런 돌변(?)에 경하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리첼 경? 어디가 경인 거야. 저 건달 아저씨가.' "전하께 제가 감사히 받았다고 전해주십시오." 생긋 웃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간단하게나마 그 이유를 설명 드려야 겠군요." 훼인 후작 부인은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내쉬었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는 것 같았다. "룩스 오라버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님과 룩스 오라버니는 아주 사이가 좋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아버님도 나이가 들으셨던 탓에 어쩔 수 없었죠. 룩스 오라버니께서는 이제라그 전하 와 친분이 있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충분히 도울 수 있었을 겁니다. 그 래서 제게 여러분들을 도와달라 부탁을 하셨죠. 하지만…. 이젠 문제가 틀 려요." 그리고 이어지는 후작부인의 말은 자못 충격적인 이야기들 뿐이었다. 황제의 장자이자 황태자였던 '룩스'가 바로 어젯밤 시해되었다는 것이었다. 반 제국파인 룩스와 친 제국파인 두 번째 왕비의 첫째 아들인 귈트는 사사 건건 충돌을 했었는데 결국 어제 황태자인 룩스가 시해되면서 귈트가 전면 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친 가이칸 제국파였던 귈트는 황태자 룩스의 반 가이칸 정책에 상 당히 반발을 하는 터였고 따라서 그가 마음을 돌려 경하 일행을 도울 가능 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 후작부인의 설명이었다. "조금 더 여러분께 빨리 연락을 드리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했습 니다. 룩스 오라버님의 식솔들을 피신시키는 것이 워낙 급선무였기 때문에. " 그래서 였을 것이다. 그녀의 옷차림이 후작 부인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던 것은. "더 자세한 것은 말씀 드릴 수가 없군요. 그 이상의 것은 제가 태어난 이 나라의 묻혀질 비밀이 될테니까요. 그리고 지금 제가 여러분들을 보내드리 려 하는 것은…."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작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제라그 전하의 마음에 제가 보답을 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 택하세요. 어디로 가시길 원하시죠?" "잠깐. 잠깐!!! 잠깐만요. 후작 부인." 경하는 그때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결국 불쑥, 끼어들고 말았 다. 정확하게는 뭔가 엄숙해지던 분위기를 와장창하고 박살을 내버렸다.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는데요. 기왕 보답을 원하시면 그 귈트 황자인지 왕자님인지 하는 분께 어떻게 연락 할 수 없을 까요? 당신들 사정은 이해하 지만 우리들도 나름대로는 우리의 사정이 있다구요. 무슨 생각으로 그 정신 나간 제국편을 드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설명을 들으면 이해해줄 거라 고 보거든요? 예?" "…………." "그런 표정 하지 말고 좀 어떻게 해주심 안 될까요? 가이칸 제국은 이곳 아 셀도 그냥 두진 않을 거예요. 그 이상한 황제라면…." 후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해를 못하시는 군요. 귈트 오라버니는 아셀을 위해서라면 어느 나라라고 해도, 심지어는 어둠의 신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내말이 그말이잖아요. 어둠의 신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가이 칸 따위하고는 손을 잡아선 안되요." "제가 말을 잘못 했군요. 아셀을 위한다라는 말은 귈트 오라버니께는 자신 이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위해서라는 뜻이 됩니다. 아마 귈트 오라버니를 직접 만나보시면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실 수 있겠습니다 만. 그렇게 했다가는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모두 억류되어 가이칸으로 보내 질 거예요. 자아.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선택해주세요." "이봐요! 아줌--우웁!!!! 웁웁웁." 뭐라고 더 반론을 제기하려는 경하를 로운이 막았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와 주신다고 하니 기꺼히 그 도움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단지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저희들이 의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어디로 갈지 저희들은 정하질 못했습니다." "좋습니다. 이 이동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면 조금은 수리를 해주어야 할테니 까요. 하지만 정말 잠깐 뿐입니다. 이미 제가 이곳으로 온 것을 알아챘을 겁니다. 곧 따라올 거예요. 귈트 오라버니 곁에는 제 사제가 있습니다. 저 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마법사가."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기엘. 이리야." 로운이 발악하는 경하의 입을 꾸욱 막은 채 기엘과 이리야를 불렀다. "어이. 난 왜 빼는 거야." "당신은 이제 당신의 임무를 다했소. 룬 디 리첼. 후작부인에게 부탁해서 하나스로 돌아가십시오. 당신에게도 감사를 표현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사 정이 되질 않는 군요." "자. 잠깐. 어째서. 갑자기 나더러 돌아가라는 거야 지금?" 하지만 로운은 룬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기엘에게 의견을 물 었다. "어떻게 할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제국으로 하루라도 빨리 가는 쪽이 좋 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겠지. 시유님도 제국으로 향하시고 계시다고 했으니. 하지만 안전을 생각하면 하나스로 가서 그곳에서 제국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뭐니 뭐니해도 폐이요트 산맥의 끝 자락이라면 제국의 수도 까지 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려."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경하님을 놔드려. 경하님의 의견도 중요하니까." "시끄러울 것 같은데." "그래도." "……………." 심정 같아서는 눈과 귀를 꾸욱 막아서 일단 안전한 곳에 갈 때까지 꽁꽁 묶 어두고 싶어었지만 결국 로운은 경하의 입을 막았던 손을 놓아주었다. "푸아아아아-----" 숨이 막혔던 건지 경하는 헥헥거리면서 로운의 품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 고 로운이 예상했던 그대로 버럭--하고 소리를 질렀다. "로운!! 두 번 다시 내가 말을 하는데 입을 막아봐!! 가만 안 둘 거야!!!" 퍼억--- 경하의 로우킥이 작열--하려다 말고 공중에서 불발이 되어버린다. "미안하지만 별로 차일 일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아." "시끄러워!! 좀 맞아!! 맞으라구!! 아악------ 왜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건데 !!" 일이 안된다 싶으면 바로 발악하는 경하의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정말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뒤겠네. 룩슨지 뭔지하는 사람은 왜 죽은 건데!!! 어째서 죽은 건데 그 사람 옆에는 보디가드도 없데? 귈튼지 뭔지 하는 놈은 피도 인정도 없어? 왜 자기 형을 죽이고 난리야. 아아악---!!!!" 경하가 글자그대로 '발광'을 하는 동안 곁에서는 훼인 후작 부인이 경하가 난리를 치는 것을 듣는지 마는지 작업을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흰색의 모래를 공중으로 뿌리며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들을 계속 나열했 다. 공중으로 뿌려진 모래는 하나의 선이 되어 그녀의 앞에 그려져있는 복잡한 도형위에 사르륵 사르륵 쌓여갔다. 그때였다. 쿠웅---- 발밑의 땅이 순간 내려앉는 느낌이 나더니 벽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스스 소리를 내며 돌가루들이 일제히 흘러내렸다. "마법진이…." 후작 부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이 따라왔어요. 어서!! 어서 이 위로 올라오세요. 샌디-라인 마크(san dy-line mark)!" 마법의 스펠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법진은 이제 고정되었습니다. 서두르세요. 어디로 가실거죠?" 기엘과 로운이 동시에 경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마구 허공에 발길질을 하 며 화를 내던 경하는 그런 기엘과 로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정을 내려야했다.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것은 멀리서부터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 철컹거리는 병기들의 소리가 섞여 그 소리는 더욱 더 커지고 있었다. "스며드는 어둠은 빛의 방패에 가려지나니, 너는 네 주인의 땅을 지키리라. 쉴드 클로우징---!!(shield closing)" 날카로운 후작부인의 마법 스펠이 그녀의 손짓과 함께 열려있던 문으로 날 아갔다. 희뿌연 연기가 쏜살같이 날아가 거대한 문에 작열했다. 끼이이익-----쿠웅. 육중한 문이 마법의 힘으로 닫혀지고 철컹 소리와 함께 굳게 잠겼다. "마법사가 따라왔을 겁니다. 저것이 얼마나 더 버틸수 있을지 몰라요. 어서 !!!" 후작부인의 재촉에 경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상황이 이렇다고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돌아선 사람의 마음을 돌려 놓기에는 시간도, 그리고 상황도 경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경하는 마음을 정했다. 남은 것은 경하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으로 하는 것. 이런 상황이 되면 왠지 마음이 가라앉고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간다. 아셀제국이 가이칸 제국과 손을 잡는다면 더 이상 아셀 제국에 머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오직 하나다. 바로 가이칸 제국. '내 판단이 맞는 거야. 그렇게 믿자.' 경하는 굳은 발걸음으로 후작부인이 만들어 놓은 마법진으로 걸어갔다. "밟아도 되는 건가요?" "이미 고정되었으니 괜찮아요." "기엘. 로운. 그리고 이리야. 우리는 폐이요트 산맥 아래 어디라고 했지? 여하튼 거기로 가자. 그곳이 제국에서 가장 가까우니까. 그리고 룬." 기엘등이 경하의 말에 따라 마법진 위로 이동하는 동안 경하는 룬을 불렀 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룬은 이제 이제라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고맙다 는 말을 전해줬음 좋겠어. 정말로 도와준다고 해서 고마웠고 감사한다고. 그리고 룬을 여기까지 보내줘서 진짜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이봐. 나는…." "여기부터는 우리가, 아니 내가 할 일이야. 룬과는 관계가 없어." "관계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쿠웅----- 닫혀진 문이 요란한 소리로 울렸다. 그 문을 경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길고 긴 주문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 그 이미지 를 떠올리며 경하는 정신을 집중했다. "쉴드---." 바람이 경하의 몸에서 빠져나와 소리도 없이 거대한 문에 부딛혔다. 쿠웅 하는 울림이 재차 전해져 왔지만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경하의 힘은 물리적인 힘과 함께 공기의 흐름까지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 관계는 있어. 하지만 룬은 하나스의 기사잖아? 하나스에 돌아가서 할 일이 있을 거야. 저분의 말대로라면 제일 위험한 건 어쩌면 미메이라가 아니라 하나스일지 몰라. 아셀과 가이칸이 손을 잡는다면 필시 제일 먼저 하나스를 노릴 것이라고 생각해. 안 그래?" 룬은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것을 이제라그에게 전하는게 당신 임무야. 그리고 저기 있는 후작 부인 도 부탁해. 우리를 보낸 것을 알면 후작부인도 무사하지 않을 지도 모르니 까. 내가 만든 쉴드는 적어도 당분간은 견딜 수 있을 거야. 우리가 가고 난 뒤, 당신은 하나스로 돌아가. 그곳이 당신이 돌아갈 곳이야." 경하의 말은 한군데도 틀린 곳이 없었다. 룬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돌아가서 당신의 일을 해.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후작 부인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께요." "말씀. 감사합니다. 그 말씀대로 저는 이 나라에 남아 아셀을 위한 일을 할 겁니다. 마치 도망치려는 절 꾸짖어주신 것 같군요." 후작부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닌데." "자아. 그럼 시작할까요?" "잠깐요." 경하는 마지막 주문을 외우려는 후작부인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 다. "물어 보고싶은 것이 있어요. 대답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당신이 쓰는 마법과, 제가 쓰는 이 바람의 엘이, 그러니까 바람술이 어떻 게 차이가 나는 건지 아시나요?" "그건 간단한 이치입니다." "…………." 생긋- 눈물을 닦으며 후작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은 자연의 엘과 공존합니다. 그것과 함께 태어나고 숨쉬고 생활을 하죠. 하지만 우리는 엘을 불러모아 이용합니다. 엘러는 타고난다고 하죠. 하지만 마법사는 그렇지 않아요. 물론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대부 분이긴 하지만 말이죠. 자아. 대답이 되었나요?" "…………."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곰곰이 조금만 생각해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당신들은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로운이 대답한다. "그 축복의 차이라고 해두지요. 자아. 그럼. 시작합니다. 조금 흔들릴 지도 몰라요. 그곳의 마법진은 동굴 속에 있으니까 도착 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시길 바래요. 저도 그곳에 마지막으로 갔던 것은 벌써 3년전이랍니다." 그말을 마치자 후작 부인은 손에 들고 있던 마법의 모래를 허공에 높이 뿌 렸다. 그 모래는 반짝 반짝 빛을 내며 마법진의 마지막 한곳을 향해 천천히 내려 오기 시작했다. "룬씨.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엘이 빛나는 마법진을 넘어 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룬은 무슨 생각인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떠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 다. 그에게 경하는 한마디를 더 남겼다. "룬. 당신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절대로 죽지 말아. 죽으면 손해야." "무. 무슨 불길한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나름대로는 상념에 잠겨 조금은 멋진척(?)을 하고 있던 룬이 갑작스런 경하 의 말에 화를 버럭냈다. "이 자식들!! 사람을 실컷 고생시키더니 이젠 너희들만 지옥으로 뛰어드는 거냐!!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그래 맘대로 고생해봐라. 진흙밭을 뒹굴면 서 어디 싸워 봐!!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지. 그리고 멀쩡하게 죽지 말고 살아 돌아와!! 알겠어? 니들이 안 오겠다면 내가 미메이라로 갈 테니까 이 바보 멍청이들아." 화를 내는 룬에게 경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룬의 목소리 때문에 후작 부인의 주문소리는 잘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그 보다는 발동되기 시작한 이동 마법진의 영향 탓이었으리라. "알겠어? 너희들이나 죽지마!! 이 재수 더럽게 없는 놈들아!!!" 말을 마치기 무섭게 룬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검을 높이 쳐들었다가 자신의 가슴에 가지런히 대고 경하를 바라보았 다. 자신의 왕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에 대한 예를, 그는 마지막으로 경하에게 보내고 싶었다. 모래에서부터 빛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반짝이는 모래들이 소용돌이치며 그 빛을 따라 올라갔다. 경하 일행 의 모습이 점점 그 빛과 모래의 소용돌이에 가려 흐려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후작부인의 시동어와 함께 지면이 흔들렸다. 모든 공기가 순식간에 마법진으로 빨려들었다. 룬은 두 발을 땅에 굳게 대고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빛과 모래로 만들어진 소용돌이 사이로 은백색으로 빛나는 경하의 머리카락 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룬은 눈을 비볐다. 경하의 머리카락 사이로 은색의 투명한 비늘 같은 것이 스르륵 지나가는 것 같았다. '젠장. 절대 죽지마라 너희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것은 운명의 신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영원 히 만나지 못할 수도, 그리고 웃으며 다시 만날 수도 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룬은 그들이 떠나는 마지막 바람이 자신의 말을 그들에게 전해주길 진심으 로 바랬다. 밝았던 공간이 점점 어두워졌다. 경하가 남겨놓았던 라이트 온의 불빛이 주인이 사라짐에 따라 서서히 수그 러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룬의 앞으로 새카만 어둠이 덮쳐왔다. *** "아셀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폐하." "빠르군." 뜻밖이라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로렌은 나름대로의 놀라움을 담아 대답했다. "그곳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망성이라는 단어를 심어두었기 때문이죠. 귈 트 황태자는 자신이 조종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눈치 채도 별로 상관은 없다. 그의 성격으로는 아마도 우리를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철저히 이용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테니." 로렌은 너털 웃음을 지었다. 귈트는 어린 시절 볼모로써 가이칸 제국의 수도에서 9년여를 지냈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를 몇 번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던 로렌은 기억속의 그를 떠올렸다. 영악하고 머리가 좋지만 뭔가 골똘하게되면 귀가 얇아지는 사람이었다. 주위의 말에 쉽게 넘어가는 그런 유형의 사람. 장점이라면 한번 정한 것을 밀고 나가는 탁월한 행동력이랄까? "풋---." 그것이 지금 이렇게 이용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그는 생각지 않았다. "자아 그럼 무대는 대충 준비되었고. 이제는 모자른 몇가지만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리고 충실하게 채워 나가면 되겠군." "그러고 보니, 그 아셀 왕에게는 마법사인 자식들이 몇 있다고 들었는데?" "기본적으로 아셀 왕의 가계에는 마법사의 혈통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합니 다. 특출난 마스터 급의 마법사는 별로 배출 된 적이 없지만 사실 귈트 왕 자만 해도 스스로 가벼운 마법을 쓸 수 있는 초급 마법사이니 말입니다." "그건 그랬지." "그들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눈을 끄는 마법사들은 귈 트 왕자가 이미 포섭을 하거나 제거한 듯 합니다." "흐응…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데." "방해가 되면 방해가 되는데로. 그의 역량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계기입니 다. 혹여 실패를 하더라도, 아셀은 당분간은 제국에 대항할 수 없을 겁니 다. 아셀의 '왕'은 이미 노쇄하여 실권은 거의 룩스 왕자에게 넘어가 있다 시피 했는데 그것이 순식간에 다시 뒤바뀐 것이니 귈트 왕자가 실권을 쥐는 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하튼 수고했네." "별말씀을. 제가 한일은 별로 없습니다. 폐하." "원하는 것이라면 당분간은 충분하게 지원 해주도록하게. 그건 그렇고 이번 에는 하세카가 일을 제대로 해낸 것 같군." "그렇습니다." 로렌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왠지 더욱더 하세카가 마음에 들어가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기고만장하게 해서는 안 돼. 포상은 적절히. 하지만 그들이 절대 이전과 같은 세력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되네."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 "적당히라는 것이 원래 어려운 법이긴 하지." 과하지도 모자르지도 않게. 로렌은 그 말을 머릿속에, 가슴속에 새겨넣었다. *** 어슴프레하게 불빛이 비치고 있는 어두운 지하. 그 불빛에 의지해 훼인 후작 부인은 자신의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을 가닥 가닥 아래로 늘어 뜨렸다. 그녀는 늘어뜨렸던 머리를 다시 둘로 나누어 단단하게 고정을 했다. 후우---하고 숨을 내쉰 그녀는 룬에게 말했다. "혹시 단검이 있으신가요?" "예?" "있으시겠죠?" "물론 있습니다만." "잠시만 제게 빌려주시겠어요?" "…………." 룬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검을 빌려서 무엇을 하겠다는 걸까? "설마. 제가 자해를 할 리가 있나요. 아까 그분의 말씀을 아주 가슴에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룬은 다리에 묶어 놓았던 단검을 하나 풀어 그녀에게 건냈다. "궁금한게 한가지 있는데요. 저도." "말씀하십시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것이라면 얼마든지 대답해 드리겠습 니다."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리첼경. 제가 궁금한건 제가 조금전 쿠 이즈로 보내드린 그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하는 거랍니다." "예?" 룬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설마… 전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안전해주신건가?' "물론 아주 귀한 분들이라고 이제라그 전하의 서신을 받았습니다만. 머리색 을 보아하니 바람의 신국에서 오신 분들 같은데… 제가 들어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확인해주세요." "아. 그. 그게…." '도대체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거야. 이런 일을 부탁 하면서 자 초지종도 설명하지 않으시다니.' "힘드신가요?" "절대 아닙니다. 그. 그들은 바람의 신국에서 온 사람들이 맞습니다." "그렇군요." "귀한 분들이라고 해서 저는 무슨 일인가 상당히 궁금했답니다. 말씀을 하 시는 것으로 보아 가이칸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그렇게 추측을 하고 있 을 수 밖에 없었죠." "연관이야 많습니다. 제국이 바람의 신국 미메이라에 손을 뻗고 있습니다. 하나스와 아셀, 그리고 전 아슈레이 대륙에…." "……………." "그래서 도움을 청하러 왔는데 뭔가 상황이 힘들어 졌군요." "저는 귈트 오라버니가 걱정되는 군요." 울고 싶은 심정일지도 모른다. 몇마디 듣지는 않았지만 뭔가 가닥이 잡혀가는 기분이었다. 훼인 후작 부인은 그녀의 묘한 위치와 하나스 국왕의 관계 때문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느 정도 정치라든가 외교라든가 하는 부분에 관여되어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그녀가 들은 단편적인 정보는 상황을 이해하는 커다란 열 쇠가 되었다. "…………." 룬은 혹시 후작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울어버리는 건가 해서 안절 부절 했 다. 하지만 그녀는 울기는커녕 눈물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룬에게서 건내받은 단검을 단단하게 쥐고는 아까부터 그녀가 마음속 에 정해두었던 행동을 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우. 우앗----!!" 파스스--- 잘려진 머리카락이 몇가닥 바닥으로 흩어졌다. "부. 부인 어째서!!" "이것을 이제라그 전하께 전해주세요. 리첼 경." 그녀는 단칼에 잘라낸 머리카락중 한쪽을 룬에게 내밀었다. "제 마음이라고… 두 번다시 만나지 못할지 모르니 이것으로 저를 기억해달 라고 그렇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후작부인…." "이 한쪽은 돌아가신 오라버니께 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 모르겠네요."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의 남은 가닥을 손수건으로 꼬옥 묶었다. "부인. 저와 함께… 하나스로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기꺼히 부인을 보호해주실 겁니다." 룬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래 살래 흔들었다. "그분의 말씀을 새겨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 남 아. 아셀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머리카락은 오라버니께 드리고 싶네요." "부인." "서둘러 주세요. 그분의 바람술도… 이제 효력이 다해가는 것 같습니다. 자 아 이 단검을." 그녀는 하얀손으로 룬의 단검을 내밀었다. "그것은 부인께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머리카락을 전하께 전해드리겠습니 다. 무사하시다고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신다는 말씀과 함께." "감사합니다." 룬이 마법진의 한가운데에 올라가자 그녀는 흐트려져 있던 마법의 모래에 그녀의 마나를 마지막까지 불어넣었다. "그럼." 룬이 검을 들고 예를 올리기가 무섭게 마법의 모래가 공중으로 치솟기 시작 했다. 그녀는 이동 마법진에 담겨져 있던 마나까지 모조리 불러 내며 이동 주문의 스펠을 영창했다. 그 순간 닫혀져 있던 문쪽에서 퍼엉소리가 나며 경하의 주문이 사라지고 그 녀의 주문이 파괴되었다. 그녀의 주문소리는 역시 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경하가 남긴 마지막 바람 소리였다. -------------------------------------------------------계속 배고....프군요.... 크흡..... .....오타와 띄어쓰기는...기냥 기냥..넘어주시얍!!!! (....--;;) [아슈레이 7] 5장 하나인 마음, 갈라지는 마음 (10) 아슈레이 7 -폭풍- 5장 하나인 마음, 갈라지는 마음. (10) 눈앞이 빛과 함께 흐려졌다. 모래가 혹시 눈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걱정은 순식간에 사 라져 버렸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에 마악 눈이 적응하려는 찰라 그들은 공중에서 물 속으로 어처구니없이 떨어져 내렸다. 첨벙첨벙하는 소리가 정확하게 4개 하고도 작은 첨벙소리가 한 두어개 들려왔다. "우앗--- 이. 이건 뭐야." "이리야 노운. 라 유리아---!" 경하의 귀에 이리야의 목소리가 꼬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다음 순간 경하 일행이 풍덩--하고 빠졌던 물이 쏴아아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이트 온!" 기엘의 목소리가 뒤를 이어 들려왔다. 철푸덕-- 젖은 땅에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하는 마지막까지 물에 잠겨 있다가 물줄기가 마악 빠져나가는 순간 로운에게 구출(?)되었다. "어디 다친데는?" "어, 없어." 물에 푸욱 젖은 생쥐 꼴이 된 경하는 푸르르 하고 머리를 털었다. 뺨을 흘러내리던 물기가 입안으로 들어오며 짠기를 한껏 풍겼다. "우엑---짜. 바닷물인잖아." "그렇군요. 밀물때인가 봅니다." "하이고. 그 후작 부인인가 하는 여자. 기왕 보내줄 거면 좀 곱게 보 내주지." "그런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나름대로 어렵게 손을 써주신 분인데." 기엘이 이리야에게 한마디했다. 나름대로 그녀는 각오를 하고 그들을 여기까지 보내준 것이다. "우리들을 이리로 보낸 덕에 어떤 대가를 치루실지 모르는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도 부족한 판에…." "아이고 알았습니다. 선생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리야가 꾸벅 꾸벅 기엘에게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 태도는 정말 잠깐뿐 다음 순간 그는 젖어있는 바닥에 그대로 철푸덕 주저 앉아버렸 다. "치잇. 뭐라고 말을 못하겠어. 참나. 그건 그렇고 내가 물의 술사니 괜찮았지 다른 사람이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데다 만들어 놓은 거지?"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그런 것이겠지. 아마도 밀물때만 물이 들어 오는 해변가의 동굴인 모양인데. 그만 투덜거리고 거기 있는 짐들이나 모아서 이 자리를 뜨자." 로운은 물에서 건져낸 경하를 내려놓고는 경하에게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장기라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적당히 먹는게 좋겠어. 들어올리는데 도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뭐어?" 물에 푸욱 절어서 상당히 기분이 나빠진 경하는 찌릿--하고 로운의 말 에 정전기 반응을 일으켰다. "뭐가 어쩌고 저째! 내가 크고 찌는데 뭐 보태준 거 있어?" "당연 많지. 먹을 것 사주고 만들어주고 챙겨주고." "………으읏." 부들 부들 떨면서도 절대 반격을 하지 못하는 경하는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그렇지 않아도 꽁지에 불붙은 닭처럼 도망쳐 나온 길이다. "그. 그래 그랬다고 쳐도. 로운 말대로 성장기라고 난. 그런데 그런 것도 배려못해주면 어떻게 해. 갓난애기가 화장실에서 실례 못한다고 화내는 꼴이라고." "그러니까 배려하고 있잖아. 게다가 넌 말귀를 못알아 듣는 갓난 아이 가 아니야. 적당히 먹으라고." "그게 배려야? 왜 사람 속을 벅벅 긁어!!!" 지잉 지잉---경하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서 귀가 아프도록 크게 들렸다. "시끄럽군." 로운은 물건을 들고있는 오른손은 포기했지만 왼손으로 자신의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말하자면 시위다. "시끄러우니까 여기서는 짖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 이런데서 젖은 채 로 있으면 몸에 안 좋아. 기엘. 이리야. 그쪽이 떨어진 것도 있다." "아. 그래. 로운. 이쪽은 내가 알아서하지. 경하님을 모시고 먼저 가. " 기엘이 떨어진 짐들을 주어 올렸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리야가 주문으로 물을 밀어내긴 했지만 왠지 밖으로 나가는 길은 가 슴까지 차오르는 바닷물 상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경하는 망연자실하게 그 넘실대는 바닷물을 보다가 처량하게 이리야를 바라봤다. "이리야. 이거 어떻게 안될까?" "그런걸 하나하나 다 주문으로 처리하려면 더 귀찮아. 그냥 헤엄쳐." "그래도…." 상당히 체격이 좋은 로운이나 기엘, 그리고 이미 성년이 된 이리야에 겐 그럭 저럭 버틸 수 있는 깊이지만 말마따나 '성장기'라 아직 키가 조금 작은 경하에게는 파도가 밀려온다면 꽤나 부담이 되는 깊이다. "파도가 와 봤자 나한테 먼저 올 테니 넌 뒤를 따라와. 꼬마." "…로오---운!!! 나한테 뭐 원수 진 거 있어!!!!!" 크아아악---하고 발작상태로 들어가기 직전의 경하는 로운의 뒤를 따 라 가슴높이까지 차는 차가운 바닷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리야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주문의 힘을 끊어버렸다. 다시 바닷물이 몰려와 기엘과 이리야의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단 그것 은 세차게 올라온 것이 아닌, 천천히 마치 수조에 물이 올라오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지 않아도 꽤 힘들텐데 저녀석. 신관양반은 어째서 저렇게 성 질을 긁는 거야. 나같으면 어깨라도 두들겨 주고 싶을 텐데." 이리야는 자꾸만 경하를 자극하는 로운이 못마땅했다. "일부러 그러는 걸 겁니다. 이리야씨." "에엥? 일부러? 그럼 더 질이 나쁘다구. 신관양반. 에이. 못쓰겠어. 인간이." 투덜 투덜, 그리고 철벙 철벙 소리를 내며 이리야가 몸을 움직이기 시 작했다. 그뒤를 기엘이 따랐다. 기엘이 움직이자 그가 만들어낸 빛의 구가 천천히 기엘의 앞으로 움직 여 가기 시작했다. 저 앞에서는 로운이 어느새 만들어낸 빛의 구가 그들의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기엘은 그것을 보고는 피식-하고 웃었다. 이리야와는 달리 기엘에겐 로운의 경하를 향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 기 때문이다. "나름대로는 정말 신경을 쓰는 겁니다. 방법은 항상 좀 거칠긴 하지만 저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경하님은 땅이라도 파려고 드실 겁니다. 이 런 일이 생길 때마다 왠지 자신의 탓이 아닐까 해서 항상 부담감을 느 끼시는 분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리야는 이곳으로 이동되기 전 경하가 마구 발광하던 모습이 기억났 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감이 쌓인 데다가 연일 이동해왔던 탓에 피로도 누적되어 계실 겁니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매일 같이 시유님께 신경 을 쓰느라 정신적인 피로감도 상당하실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또 오 늘 비보를 듣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갑작스런…." 그렇다 아셀의 황태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그들을 이곳까지 오게 했다. "급작스럽긴 하지만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걸 곰 곰이 생각하게 되면 경하님은 혹시나 또 자신 탓이 아닐까 해서 절망 하실 지도 모르죠. 그런 것에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분이니 까요." 철썩---하고 파도가 밀려왔다. "쌓여있던 불안감과 처음으로 경험해본 이동 마법진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상황이 상황인터라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룬씨에 대한 걱정까지. 지금 경하님이 감당하셔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야. 나도 마법이라면 치가 떨린다고." 차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이리야는 아까 마법진에 올라 갈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벌벌 떨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던 것 이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이리야씨?" "…………?" "이리야씨도 결국은 아무말 안 하셨지 않습니까. 경하님이 걱정할까 봐." "그야. 저 녀석은 조금 그런 문제에는 지나치게 감성…적이니까." 결국 그도 경하를 걱정하고 보고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리야는 말을 하다 말고 어딘가 모르게 근질 근질 해졌다. 왠지 기엘 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상당히 쑥스럽다. "경하님을 따라 다니시는 이유를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 이리야씨. 로운은 그런 말을 하는 것보다는 저렇게 경하님이 다른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겁니다. 비록 본인이 미움을 받 더라도 말입니다." "쳇.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 중에 제일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건 저 신 관양반이란 뜻이군." "본인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아아. 알아. 분명 턱에 멍이 생기도록 얻어맞겠지." 철벅 철벅. 가슴까지 차 오르던 바닷물은 걸을 때자마자 가슴에서 배로, 배에서 허리로 그리고 무릎께로 점점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파도가 치고 있는 작은 모래톱에 무 사히 도착했다. "으아… 진 빠진다. 점심도 못 먹고 이게 웬 극기 훈련이냐구." "그래도 밝은 곳으로 나오니 훨씬 좋군요. 로운. 나는 근처에서 몸을 말릴 만한 곳을 찾아보지." "기엘!! 혼자 가지 말고 같이가. 차라리 헤메고 있는 쪽이 덜 춥겠어. 으으…." 별로 추운 날씨는 아닌데도 찬 바닷물에 푸욱 젖은 탓인지 온몸이 덜 덜 떨려왔다. 경하는 두 팔로 어깨를 감싸고는 옆에 서 있는 로운을 힐긋 쳐다보았 다. '으으. 밉살스러.' 하지만 로운은 그런 시선은 얼마든지 받아왔다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또 한마디를 던졌다. "허약해서 그래. 그러니까 기엘이 주는 건 뭐든 골고루 먹으라고." "고만해!!! 에잇." 퍽퍽퍽--- 젖은 모래를 마구 짓이기며 경하는 기엘을 따라갔다. 뒤에서 로운과 이리야가 아무말 없이 뒤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제길 누굴 애로 아나.' 맞서서 대꾸하며 화를 내는 척을 하고 있지만 경하도 로운이 일부러 그런 다는 것을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아주 예전부터 로운은 이런 때 가 되면 꼭 그랬었다. 로운의 그런 마음 씀씀이에 경하는 왠지 눈물이 나는 듯했다. "후에취!!!" 재채기로 훌쩍거림을 날려버린 경하는 고개를 들었다. 시간을 들여 아셀에 갔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아셀은 아셀 내부의 일 때문에 제국에 협조는커녕 아무것도 못하고 끝날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름대로는 위안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은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일행들. '그래. 아직은 진 게 아니야. 그리고 끝나지도 않았어.' 힘차게 걸어가다 말고 경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슈레이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기억속 에 있는 어떤 바다보다도 훨씬 파란 아름다운 바다가. "아자아자아자 내가 왔다!!! 움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마치 개그만화의 한 장면처럼, 경하는 허리에 손을 얹고 웃어대기 시 작했다. "와하하하하하하하하." *** "그렇군." "예. 전하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어떻게 해서든 모 셔올 수 있었을 텐데 제 불찰입니다." 무릎을 굽히고 최대한의 예를 올리고 있는 남자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갑옷은 하나스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최고의 기사들만 이 입을 수 있는 것으로 하나스의 남자라면 누구든 어린 시절 한번쯤 은 꿈꾸어 봤을 물건이었다. "그녀는 그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지. 만일 그녀가 원하기만 했다 면 그런 힘든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일세." 이제라그는 손안에 들은 머리카락을 잠시 매만졌다. 슬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감정이 메마른 건가 생각하지만 마음 속에 남아있는 여인에 대한 감정 에는 거짓이 없다. 단지 가슴 한쪽이 메어올 뿐이다. "수고 많았네. 어려운 일을 그대에게 맡겼던 셈이 되었군."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하." "그럼 이제 더 좋은 일을 해주지 않겠나?" "예. 전하." 이제라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말에 답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이 순간 든다. "…………."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입밖에 내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내가 믿어야… 믿어야 그는 나의 신하가 된다.' 이제라그는 룬에게 하명했다. "그대에게 내 곁에 머물러 있으라 하면 그댄 불만이 많아지겠지."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하하하하. 나는 솔직한 게 좋네. 좋아. 그래서 자네를 위해 준비한 것이 있네. 듣자하니 변방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들을 솜씨 좋게 훈련시켰다던데." 이제라그는 커다란 배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멀리 있는 창가로 걸어갔다. "이리오게." "네. 전하." 이제라그의 손짓에 길게 드리워져 있던 휘장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빛 이 들어왔다. "저곳을 보게." 룬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여러개의 건물이 한꺼번에 비쳤다. "저중에 하나는, 이번에 신설된 새로운 기사 양성 전문 학원이라고 해 야할까?" "……………." "뭐 그런 것을 새로 만들기로 했네. 이런 자리에 있다보면 가끔은 선 견지명이라는 것이 좀 생기지. 아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들이 모든 것을 재정비하는데도 시간이 걸릴 게야. 그럼 우리는 그동안 시 간을 버는 것이지. 그 시간 동안 자네가 할 일이 바로 저곳에서 새로 운 기사들을 키워 내는 것이네." "예에?" "꼭 기사가 아니더라도 좋아. 하나스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자네가 직접 훈련시키는 걸세. 평민이든, 귀족이든 원하는 사람은 누 구든지…. 자네에게 일임을 할 테이니 원하는 대로 훈련을 시켜보게." "전하…." "사실은 굉장히 힘들지도 모르지. 평민과 귀족을 한자리에서 훈련을 시키려면. 하지만 자네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안 그런가? 물론 저곳이 싫다면…." "아닙니다. 전하. 하겠습니다." 절대로 화려한 갑옷을 입고 의장대로 하루에 몇 번씩 궁을 도는 것은 질색이다. 룬은 이제라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허락을 해서 '도장'을 찍어 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라그가 명한 저 문제의 기사 양성 전문 어쩌구리하는 곳이 결코 쉬워보여서는 아니다. 오히려 엄청 골치가 아픈 곳이 될 가망성 이 다분하다. '뭐. 역시 현장에서 뒹구는 쪽이 마음에 드니까… 그런 생활도 나쁘지 는 않을 거야.' "고맙네." 씨익--하고 이제라그가 웃었다. 왠지 그 웃음에 넘어간 듯한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룬은 등뒤로 식은땀이 몇 줄기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아아. 난감하다. 여기서 카드미엘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가야하는 거 야. 젠장." 휘이이이잉----- 바닷바람이 경하의 머리카락 사이로 불어 들어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머리카락이 사방 팔방으로 멋대로 춤을 춘다. "으아아아아. 끈적 끈적해. 얼른 떠나야지." "역시 제일 빠른 건 말입니다만." "그렇기는 한데…. 으으. 경하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지긋 지긋해. 배도 말도…. 도대체 얼마나 더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 아 다녀야하는 거냐구.' 요 몇 달간 여행한 것를 생각하면 정말 평생 할 여행은 지금 다 하고 있는 듯 싶다. 현실로 돌아가면 당분간은 아니 앞으로 몇 년간은 여행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하는 다짐했다. "그래서 방법은 역시 말이라는 건가…." "다 좋으니까 빨리 결정해주면 좋겠는데." 로운이 팔짱을 터억 끼고는 경하를 바라본다. 그것도 아주 가득, '어 서 결정하지 못해.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어.'라는 오라를 품고서 말이다. "말을 타고 가면 얼마나 걸릴까?" "글쎄요. 줄잡아서… 직선 거리를 선택한다고 해도 15일 넘게 걸릴 겁 니다. 물론 중간에 아무런 일이 없다면 말입니다." 기엘은 대충 거리를 계산해보았다. 그들이 현재 있는 곳은 페이요트 산맥 밑의 작은 항구 쿠이즈. 가이칸과 아셀의 국경지대라고는 해도 가이칸 제국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완전히 구석중의 구석, 서남단 끝인 것이다. "으음." "15일보다는 더 걸려. 거리를 생각해야지 거리를. 셰비에서 자노아 까 지 가는데도 열흘이 넘게 걸렸어." 로운이 기엘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말에 경하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설마 한달 내내 말을 달려야 한다는 끔찍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 생각만해도 모골이 송연해질정도로 끔찍하다. '내가 전생에 말하고 무슨 원수라도 졌나. 으으윽---.' 경하는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렸다. "한달이라. 그렇게 걸릴 수도 있지." "으아아아악----!" 경하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젠장. 그렇게 걸리면 안되잖아. 하라스다인 장로님은 이미 카드미엘 에 도착 했을텐데. 급하다구. 뭔가 방법을 생각해봐. 이동 마법진 덕 에 여기까지는 쉽게 왔는데. 하아… 어라?" 말을 하다 말고 경하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마법진이라….' 마법에 대한 인식은 안 좋았지만 적어도 이동 마법진의 편함은 이미 몸으로 느낀 상태다.게다가 마법사라고 꼭 나쁜 사람만 있을리는 없 다. 아셀에서 그들을 도와준 후작 부인만 해도 그렇다. '흐음. 나쁘지 않잖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생각하는 경하를 다들 갑자기 '왜 저렇게 조용 한 거야? 설마 정말로 폭주하는 거 아니야?'라는 얼굴로 바라본다. "좋았어!!!!" 경하는 무릎을 타악 치고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로운을 바라보았다. "카드미엘까지 빨리 갈 방법이 생각났어." "어떤?" "이동 마법진을 쓰는 거야!" "……………." 로운 이하 경하를 제외한 일동이 모두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괜찮지 않아? 여기 아슈레이에서의 마법이란 게 뭔지 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후작 부인만 해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사람이 었잖아. 그러니까 괜찮은 마법사도 있을 거라구. 그리고 이동 마법진 은 벌써 한번 경험을 해본 거니까 부담감도 덜하고. 안 그래?" "……급하면 원래 이상한 생각이 잘 드는 법이지. 기엘. 난 말이든 뭐 든 구해볼 테니까.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으라구. 어이 이리야! 같이 가지." 로운은 마치 세상에서 그런 소리는 듣던 중 처음이라는 얼굴을 하고는 이리야를 불어 일으켰다. "왜!! 마법진이 어때서! 급하잖아. 일단은 빨리 가는게 급선무야. 지 금 더운밥 찬밥 가리게 생겼어? 이용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든 이용하 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 나쁜 것도 아니잖아." 생각하면 할수록 마법진을 이용하는 것은 좋은 생각인 듯 싶다. 경하는 열심히 로운을 설득했다. "응? 그렇게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봐. 카 드미엘까지 단숨에 갈수만 있다면 훨씬 문제가 쉽게 풀릴지도 몰라. 시유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기 엘의 아버님도 막을 수 있을 거야. 마법진을 이용한다면." 흥분해서 눈을 빛내며 말하는 경하. 그런 경하의 어깨에 터억--- 로운의 두 손이 내려앉았다. "말은 좋은데 말이지." "으으응?" "마법진을 이용하자는 생각은 그래. 아주 참신하다고 인정해주지. 하 지만 마법진으로 누가 이 아셀에서 카드미엘까지 보내줄 거라고 생각 해?" "…에?" 기엘도 로운의 의견에는 동감을 표했다. "이동 마법진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를 구하는 것은 일단 두 번째 문제입니다. 현재 같은 상황 아래에선 이 아셀에서 제국으로 가 는 이동 마법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제국 내에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어… 그러니까." 경하는 생각지도 않고 있던 문제에 봉착하자 머리가 어질어질 해져 버 렸다. '겨. 결국 말을 타야하는 거야?' 말을 타는 것 자체도 고민스럽지만 이젠 그보다도 다른 일들이 더더욱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다. 로운과 기엘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한 심정은 그들도 마찬가지 일 수밖 에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데 무작정 파고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한정되어 있는 수단과 방법이 이렇게도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저기. 나도 한 마디쯤은 하고 싶은데 말이야." 머리위에 먹구름 같은 것이 새카맣게끼고 있는 분위기에 이리야가 슬 쩍- 구름을 헤치며 입을 열었다. 휘익--- 세 남자의 눈길이 그에게 향한다. "으음. 뭐 나도 별로 마법에는 좋은 감정은 없어. 알다시피 죽었다 살 았잖아? 하지만 그 효용성만큼은 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 래서 말인데." "서론이 길어.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말해." 시덥잖은 소리를 하면 가만히 두지 않았다는 듯 로운이 딱 잘라 말했 다. "아. 알았다구 알았어. 누가 급한 거 모르나." 몸은 말랐지만 아직 머리카락은 축축하다. 거기에 바닷바람이 합세해 서 왠지 끈적해지는 기분. "말대로 이곳에서 제국으로 가는 건 불가능 하지만 제국내에서 제국내 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할거야. 잘은 모르지만 그… 조금 규모가 큰 성 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공식적으로 운영되는 일종의 마법길드 비슷한 것이 있다고 들었거든. 일반적인 길드보다는 거의 학교 비슷한 형태이 긴 하지만 말이야. 실제 제국엔 마법사들이 꽤 있으니까 분명 규모가 되는 성에는 이동 마법진 정도는 설치가 되어 있을 거야. 물론 돈이 얼마가 들고, 나는 몰라도 너희들 같은 외국인들도 사용이 가능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 "…………." "움하하하 이리야 땡스. 크흡-- 역시 제국 일은 이리야가 잘 안다니 까. 오 마이 가드. 땡스가 배리 망칩니다. 저 지긋지긋한 말타기가 좀 줄을 것 같아요. 으흐흐흑---!" 희극 배우처럼 경하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하늘을 바라본다. "아흐흐흑.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크흡--!" 경하가 혼자서 연기인지 연극인지를 과장되게 하는 것을 로운은 왠지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하기사 질릴만도 하겠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경하가 원래 아슈레이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후우….' "그것 정확한 겁니까? 이리야씨?" 기엘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리야에게 묻는다. "뭐. 꽤. 단지 어디에 있는지 까지는 몰라. 하지만 돈이 있음 뭐든 못 하겠어? 안그래?" "그건 그렇지." 로운이 말을 받았다. "그럼 일단 가이칸 제국까지는 어떻게든 가서 제일 가까운 커다란 도 시나 성을 찾아보도록 하지. 그리고 이리야 당신 말대로 마법길드인지 뭔지 조합 인지하는 것을 수소문해서 최대한 빨리 카드미엘로 들어가 도록 하자고. 되었나 이제?" "응!!!" "그럼 두말하지 말고 말 타는 거다." "알았다니까. 사나이가 한번 말했으면 그건 지켜!!" "…………." 아직도 한참 나는 키차이. 로운은 경하를 내려다보고 경하는 로운을 올려다 본다. "왜? 불만이야?" "아니." 피익---하고 김이 빠지는 소리가 난다. "남은 여행경비나 생각을 해봐야겠다. 하나스에서 받은 것이 꽤 도움 이 될지도 모르겠어. 우리도 남은 돈이 별로 없으니까." 로운은 이제 좀더 현실 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 --------------------------------------------- ....그러고보니.....이 친구들 상당한 부르조아 여행을 해왔다는 생각이... .......-_-;;;;; 오타는 못 본척해주시길.....T_T [아슈레이 7] 5장 하나인 마음, 갈라지는 마음 (11) 에또..여기 올려지는 원고는 1차본입니다... 오타 나 기타..등등은...자주 해석 부탁드립니다. ...아마도..이 5장은 소제목도 변환이 있을지도.....(..먼산..) 아슈레이 7 -폭풍- 5장 하나인 마음, 갈라지는 마음. (11) *** 길고 화려한 복도에는 자주빛의 양탄자가 그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깔려 있다. 그 길고 긴 복도 양쪽에는 세월과 함께 차례 차례 변화해온 제국의 기 사단 갑옷들이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주욱 늘어져 있었다.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폭신한 양탄자 위로 수많은 사람들 이 지나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저 멀리에서부터 인기척이 들려왔다. 폭신한 양탄자위를 조심스럽게 걷고 있던 시녀는 그 인기척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궁에 입궐한지 이제 두달도 못된 초보 시녀인 라나. 그녀가 처음 이 궁에 들어와 배운 것은 다름 아닌 눈도 귀도 모두 닫는 일이었다. 본 것도 보지 못 한 척, 들은 것도 듣지 못한 척하는 것이 그녀의 일. 황급히 몸을 숨긴 그녀의 앞으로 일련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 화려한 머리색을 한 남자들과 함께 얼굴이 눈에 익은 한 남자가 그녀 의 앞을 조용히 지나쳤다. 라나는 그들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야 기둥 뒤에서 살며시 걸어나왔다. '…은발?' 빛나는 은발머리카락이 그녀의 주위를 끌었다. 나이와는 전혀 상관 없이, 번쩍 번쩍 빛나는 은색의 갑옷들보다 더 생 기 있게 반짝이는 은발머리를 가진 남자들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 닌 듯 한 신비함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지?' 의문 따위는 가져서는 안되지만 라나의 가슴속에는 이상한 감정이 피 어올랐다. '저런 분들의 시중을 드는 거라면 삼일 밤낮을 자지 못해도 좋을 것 같아.' 그들이 남기고 간 은색의 잔향이 그녀의 가슴을 두근 거리게 했다. '아차. 이렇게 있다가는 시녀장님께 혼이 날텐데 어서….' 실날 같은 바람이 깔끔하게 묶여 올려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하며 스쳐지나갔다. 그 바람은 방금전 지나간 남자들처럼 조용하고 아 주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폐하. 미메이라에서 사신일행이 도착 하였습니다." "그래. 드디어 도착했군." "원하신다면 지금도 만나실 수 있도록 조치를 하겠습니다." "흐음." 로렌은 그 수려한 이마를 살짝 좁혔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다리던 일행이었다. 하지만 서두르는 인상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일단 일이 착수되면 가장 빨리 서둘러야 하는 일중에 하나이긴 하다. "저녁 시간을 내도록 하지. 실례가 되지 않도록 극진히 대접하도록." "알겠습니다." 이른 아침, 그에겐 이미 예정 된 일이 기다리고 있다. 천천히, 순서대로 해도 결코 늦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의 조급한 마음을 다독 거렸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된 것이다. 스위치를 넣는 일쯤은 아주 잠깐 지체되어도 된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 "봤니?" "봤어?" "당연히 봤지." "정말 굉장하지 않아?" "응응!!" 분주하게 시녀들이 움직이고 있는 시녀들이 얼굴을 스쳐지나가며 묻는 질문들은 모두 똑같았다. "난 멀리서 봤는데. 그런 사람들은 처음 봤어." "난 이전에 본적이 있었지만 정말이지 그 사람들은 격이 틀리더라구 격이." "맞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 머리카락." "내가 그런 머리카락을 가질 수 있다면 이런 머리카락 같은 것은 모조 리 다 밀어버려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맞아. 게다가 그 얼굴은 어떻고. 너무나 하얗지 않아?" "나는 봤어. 속 눈썹도 굉장히 하예." "응! 맞아. 눈동자는 어떻고. 꿈꾸는 안개색이야." 그들은 모두 오늘 태자궁의 귀빈실인 푸른 공작의 방에 들어온 손님들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정말 모두 미남이던걸?" "응응!! 거기 제일 나이 많아 보이던 그분도 너무나 멋지게 생겼어. 나 오늘 잠 못잘 것 같아." "그런데 푸른 공작의 방 담당은 누가 된데?" "몰라. 지금은." "너무너무너무 보고 싶어." "까아아아."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로 누군가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어째서 이렇게 소란 스러운 겁니까." 쩌렁 쩌렁. 벽이 울릴 정도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곳이었나요 여긴? 여러분들이 이곳에 들어와 처음 배운 것을 모두 잊은 모양이군요." 딸깍 딸깍하는 특유의 발소리와 함께 '그녀'가 등장했다. "오늘은 귀한 손님들이 도착한 날입니다. 이런 소리가 궁안까지 흘러 들어가면 우리 폐하의 체면이 어떻게 됩니까? 모두들 자중해주세요." 궁에 들어온지 40년, 관자놀이가 희끗 희끗해진 지금도 어떤 시녀들보 다 활발한 활동력으로 온 궁을 주름잡고 다니는 시녀장이 바로 저 쩌 렁 쩌렁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소란 스럽다니. 정말이지 부끄러워서…." 말은 부끄럽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녀의 목소리가 제일 클지도 모른다. "오늘 오신 분들은 아주 중요한 손님들입니다. 그분들을 대접하는데 있어서는 한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음을 명심해 주세요." 그녀는 트레이드 마크인 조그만 막대기를 탁탁 손바닥에 치면서 주위 를 둘러보았다. 빠르게 걸어가면서도 그녀는 사소한 잘못을 놓치지 않는다. 비단 커텐에 두 개의 주름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다림질을 하던 시녀를 야단치고 차곡 차곡 비단 시트를 정리하고 있던 시녀에겐 조금더 반듯 하게 접으라고 주의를 준다. 그것뿐이 아니다. 반짝 반짝 은식기를 닦고 있던 시녀들에게는 손자국 이 나면 끝까지 밝혀내서 치도곤을 칠터이니 절대 주의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모두들 목소리를 죽이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분명 '그 말'을 하기 위해 들어왔음이 틀림이 없을테니까 말이다. "폐하께서 오늘 손님들과 함께 저녁을 하실겁니다. 간소하면서도 깔끔 하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요리를 준비해야합니다. 모든 준비에 각별히 주의하여 절대 실수가 없도록 하세요." "네. 시녀장님." 요리장인 시녀가 허리를 조아린다. 말이 시녀장이지 이 궁에서 그녀의 말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 있는 사 람은 거의 전무하다. 이 거대한 궁의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는 엄청난 (?) 지위에 있는 여인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태자궁의 일만을 맡고 있었지만 아직 즉위식이 올려지지 않은 탓에 본궁의 시녀장보다 훨씬더 권세아닌 권세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푸른 공작의 방과 아마란스의 방, 그리고 유리의 방. 이렇게 셋은 오 늘부터…." 시녀장이 눈으로 사람을 찾는다. 모두들 자신이 하던 일을 아주 잠깐 놓고 그녀의 발표를 기다린다. "게틀린드. 당신에게 위임을 하겠습니다. 필요한 일손은 모두 당신이 알아서 조달을 하고 제게 보고를 해주세요. 오늘부터 세 귀빈실의 모 든 책임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시녀장보다는 조금 나이가 아래지만 생긴것도 비슷, 분위기도 비슷한 한 여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케엑. 게틀린드님이라니. 너무해.' '시녀장님보다 더했으면 더하지 덜하지 않을 텐데. 우린 죽었어.' 궁에서 오래 일하다보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표본인 고참 시녀들 이 몇명있다. 그녀들 중 하나인 게틀린드. 과연 그녀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그것은 아마도 시녀들의 신이 있다면 그 신만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황태자가 서두르는 듯 싶군." "아무래도 그런 듯 하군요. 이쪽도 나름대로는 시간을 끌며 도착을 했 습니다만. 도착하자마자 저녁 만찬이라고 하니…." "모르는 일이지. 오늘은 정말로 순수한 저녁 만찬일수도 있지 않은가. " 하라스다인 장로는 피곤한 몸을 푹신한 의자에 깊이 맡겼다. 아주 오래전 그는 이 가이칸 제국의 넓은 대륙을 여행했던 적이 있었 다. 바로 다음이 아닌 레이죠 장로를 따라서 말이다. '이런 식으로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건만. 신의 뜻은 언제나 인간의 이해범주를 넘나드는 것인가.' "장로님." "뭔가." 하라스다인 장로는 감았던 눈을 잠시 떴다. "오면서도 계속 생각해왔습니다만. 저 황태자는 도대체 무슨 뜻을 가 지고 있는건지 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국에서 우리 나라 출신 의 황비를 맞는다는 건, 아무리 해도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반대 급부들을 생각하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이 나라는 황제 한명의 나 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뜻을 알아보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는 측근이라고 생각한 기사 셋과 동행했지만 하라스다인 장로 는 이 카드미엘로 오는 여정중에는 어떤 실마리도 그들에게 던져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제국의 황제가 미메이라의 공주를 신부로 '요구'했으며 그에 대한 '의논'을 하기위해 그들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 뿐이다. 사실 그 이외에의 사실이 있을 수는 없다. 전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진심들은 어느누구도 내보이지 않고 있 는 것이다. "많이 피곤하시죠? 저희들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장로님." "아닐세. 그대들은 괜찮은가? 여행이 길었는데." "괜찮습니다. 장로님. 걱정해주셔서 정말 감사 드릴 뿐입니다." 하라스다인 장로가 대동해온 3명의 기사는 2명이 로열 나이트고 나머 지 한명은 나이트 사아르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하라스다인 장로의 신 임을 받고 있는 젊은 기사였다. 그들을 고른 것은 물론 하라스다인 장로 본인으로 자신의 안전을 생각 하는 동시에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그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선택 했던 것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자네들을 골랐을지 알게 된다면 날 원망할 지도 모르겠군.' "그럼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미메이라의 가호를…." 눈을 감은 하라스다인 장로 앞에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는 기사들 이 물러갔다. 피곤함이 순간 온 몸에 덮쳐온다. '나도 이제 늙었군.' 세명의 기사들은 사실 두 번째다. 그는 스스로 자원하여 이곳에 왔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첫 실험물로 삼고 있는 셈이었다. '미메이라여. 우리를 보호 하소서. 당신의 나라를… 그리고 당신의 백 성들을….' 그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그 기원하는 마음은 그의 진심에 진심이 더해진, 간절한 고백과도 같 은 것이었다. *** "내가 인어 공주냐? 줄줄 울어서 보석을 만들게?" "누가 울라고 했어?." "하지만… 하지만 내가 무슨 인어 공주도 아니고…." 장소는 가이칸 제국의 남단. 카롯트라는 요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항구 도시. 그 중에서도 꽤나 허름한 작은 여관 이층에 있는 방이다. 침대가 둘밖에 없는 조그마한 방에 건장한 체격의 청년 3명과 어딘지 모르게 하늘하늘해보이는 소녀인지 소년인지 잘 구분가지 않는 긴 머 리카락의 인물까지 총 4명이 옹기 종기 모여앉아있다. 거기에 조금전에 나타난 세나케인까지 합해서 총 5명. 작은 방이 꽉 찰 지경이다. "인어공주는 눈물이나 흘려서 진주를 만든다지만 내가 무슨 진주 조개 야?" "그럼 어쩔 건데?" "……………." 히죽 히죽 웃고 있는 세나케인은 간만에 경하를 골려줄 수 있다는 생 각 때문인지 꽤나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고 있는 중이다. "케인 네가 하면 되잖아."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핑계야!!!" 버럭---하고 경하의 특기가 나온다. "젠장. 정말 내가 진주조개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이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게다가 이 계획은 네가 세운 것이니 네가 책 임을 져야지." "무슨 수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일단 어떻게든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돈들과…." 기엘이 화를 내기 시작한 경하를 나름대로는 위로하고 싶어 끼여들었 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이미 가진 전재산을 탈탈 털고 타고 온 말까지 나름대로는 비싼 값에 팔아 넘겼지만 그래도 턱없이 모자르다는 사실을 모두 인식하고 있으 니 말이다. "으아아- 정말 돌겠네." 경하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이 이 카롯트에 도착한 것은 어제밤 늦은 시간이었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달려 이 항구에 도착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 마법진이 있다는 정보를 오는 길에 우연치 않게 얻을 수 있었 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되도록 카드미엘에 가깝게 카드미엘까지 가는 직선로 를 선택했을 것이다. 다행이 어디가도 안 빠지는 넉살을 가지고 있는 이리야가 상인들을 발 견하고 그쪽에서 이런 저런 잡일을 도와주면서 정보를 얻어왔다. 가이칸 제국이라고 해도 마법진을 설치해서 그것을 공공연하게 운영을 하는 곳은 사실 그렇게 흔치 않다고 한다. 다만 이런 저런 특수 목적에 의해서 설치되어 이용되는데 그중 하나가 이 카롯트라는 항구 도시였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급한 서신이 오갈 때 주로 사용하는 마법길드 소 유의 이동 마법진이 이 카롯트에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된 후 경하는 앞장서서 이곳까지 아주 단숨에, 단 한마디 의 불평도 하지 않고 도착했다. 그것이 어젯밤의 일. 아침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로운은 이리야를 데리고 그 문제의 '마법 진'에 대해 알아본다며 자리를 떴다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아 금새 숙 소로 돌아왔다. "어? 빨리 돌아왔네.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아아. 생각보다는 시간이 안 걸렸어. 이 항구 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 었는걸." 이리야는 툭툭툭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며 안으로 들어왔다. 경하는 그때까지 게으름을 부리며 침대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번 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됐습니까?" 기엘이 궁금한 얼굴로 이리야에게 물었다. "자세한 것은 신관양반에게 들어. 아이고오 힘들다. 안 떨던 애교를 떨었더니." 이리야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가 자리에 눕자마 자 로운이 덜컹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로운. 수고 했어." "아아." "어떻게? 어떻게 되었어? 진짜 있어? 응? 응?" 경하가 보기 드물게 호들갑을 떨며 로운에게 매달렸다. 로운은 그런 경하를 보고는 한숨을 파악- 내쉬며 삐걱거리는 침대 한 쪽에 앉았다. "어떻게 되었냐니까. 말을 해봐. 설마 없는 거야? 이런 젠장--. 그 장 사꾼 말을 믿는게 아니었는데, 우어. 이제는 어떻게 하지. 괜히 이리 왔나? 우어어어어어." "좀 조용히 해봐. 있을 건 있었으니까." 휘익--- 호들갑을 떨며 방안을 서성이던 경하의 눈과 몸이 순식간에 부동자세 가 되더니 다음 순간 두다다다 로운의 앞으로 달려와 털썩 주저 앉았 다. 번쩍 번쩍 기대에 찬 경하의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로운은 입을 열었 다. "일단 알아 둘 것은 있기는 있다는 거야." "그래서?" "이것 저것 알아 봤는데. 제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이렇게 설치된 이동 마법진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해. 아주 커다란 성이나 왕래하기 힘든 지역까지 합쳐서 기껏해야 이십여개. 정도라고 하더군. 이쪽은 항구인 데다가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서 상인 길드에서 요청을 해서 만들어진 마법진이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하더군. 주위 상인들이 알고 있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든 해. 나름대로는 꽤나 운이 좋았던 거지. 우리는." "에헤. 그럼 우리 모두 한꺼번에 가는건 문제 없겠군. 오케이-- 성공 이다!" "끝까지 들어." "아. 으응." 로운은 들고 있던 두장의 양피지를 기엘에게 건냈다. 기엘은 그것을 받아서 바닥에 경하도 볼 수 있게 펼쳤다. 그것은 현재 제국내에서 상인들이나 일반 제국민들도 사용할 수 있다 고 하는 몇 개의 마법진이 설치된 곳을 표시한 간락한 지도였다. 조악한 지도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 저럭 위치는 알아 볼수 있었다. 경하는 얼른 지도에 달려들어서 목적지인 카드미엘을 찾아보았다. "…………우웅?" 하지만 이상했다. 눈씻고 찾아봐도 '카드미엘'이라고 쓰인 곳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하는 이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표정 으로 침대에 앉아있는 로운을 바라보았다. 로운은 그제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에는 제국 나름대로의 법이 있는 모양이야. 규약에 의해서 카드 미엘에서 인접한 지역에는 공용으로 쓰는 이동 마법진은 설치가 불가 능하다고 하더군." "에엑----- 그런게 어디 있어!!" "그러면 아무한테나 마법진을 이용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제 발 소리지르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봐." 로운에게 꾸중을 들은 경하는 깨갱하고 꼬리를 내렸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일단 상당히 대형이기 때문에 우리 말고도 같이 여러 사람들과 짐들 이 한번에 이동이 된다고 해. 단, 마법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 문에 하루에 두 번 정도 밖에는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 일단 우 리가 갈 수 있는 곳을 꼽아보면 이곳과 이곳. 그리고 여기야." 로운이 바닥으로 내려와 지도에서 세군데를 차례 차례 짚어보였다. "카리스, 렉신, 그리고…." 로운이 가르킨 곳의 지명을 차례 차례 읽던 경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 다. "케슈튼 이군요." 마지막 지명은 기엘이 읽었다. 잠시 세명은 말을 잃었다. 케슈튼에는 나름대로의 기억이 있다. 추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두운 기억이…. 경하가 시안의 이름을 쓰고 있을 때 요하엘의 기사 기윤과 함께 도착 했던 곳이 바로 케슈튼이었다. 그리고…. "난 거기로는 안가." 경하가 딱 잘라서 거부의 말을 해버렸다. "절대로 거긴 안가. 가자고 해도 안 갈 거야." "어디로가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거다." "그래도 안 간다니까!!" 장난스러웠던 경하의 목소리에 진지함이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안가. 차라리 말을 타고 가겠어." 로운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지도를 보고 설명을 듣는 순간 이미 예견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케슈 튼이 구미에 당기는 것은 어쩔수 없다. 나머지 두곳은 케슈튼 보다 카 드미엘에서 멀었고 그리고 하마임강이나 나하르에서도 멀었다. 일단 도착한 뒤에는 무조건 역마차를 수배하거나 말을 타고 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케슈튼의 경우는 하마임 강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수로를 이 용하기 쉽고 또한 다른 어떤 곳보다도 카드미엘에 인접해 있는 곳이 다. "젠장. 어째서 카드미엘로 바로 들어갈 수는 없는 거야." 경하는 결국 불만을 터트렸다.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야. 하루 두 번이라고 했지? 나머지 두곳은 앞으로 각각 3일과 5일을 기다려야 갈 수 있어. 케슈튼은 오늘 오후면 바로 출발 할 수 있지. 3일씩 기다릴 수는 없어. 케슈튼으로 가고 싶 지 않아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네가 잘 알텐데?" "……………." 로운이 설득을 하려 했지만 경하는 뒷짐을 지고 앉아서 고개를 돌리지 도 않는다. "케슈튼이라고 해도 도착 하자 마자 바로 출발을 해야합다. 오래 머물 지도 않을 겁니다. 경하님." "………." 기엘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여전히 묵묵 무답. "네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묶어서 끌고 갈 거다. 마법진을 이용하자고 한 건 네 의견이었고 우린 그에 따랐어. 우리가 말없이 따랐으니 너도 양보를 해줘야 겠어." "경하님…." 기엘은 어떻게 해서든 경하를 설득하려고 하는데 로운은 말하지 않았 던 마지막 폭탄을 경하에게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난관이 있다.." "또?" 경하는 이제 거의 평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계획 대로라면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케슈튼은 싫다. 하지만 자신이 싫다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그런 데 또 문제가 있다고? "비용이 너무 들어. 우리 4명이 케슈튼 까지 가는데는 여비가 턱없이 부족해." "여비가 부족하다니…." 그제서야 그때까지 아무말 하지 않고 있던 이리야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나. 나름대로는 돈은 궁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을 했었는데 벌써 그 밑천이 떨어질줄은 몰랐어." "그런… 그래도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엘은 계산을 해보았다. 사실 미메이라를 떠나올 때 너무나 급작스럽게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돈이 될만한 것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이전에는 미메이라의 특산품 인 보석 하이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 다. "중간에 배를 구하는데도 꽤나 많은 돈을 썼다. 그나마 중간의 그 배 가 온전했다면 몰랐을텐데 그것도 잃었고, 사실은 쿠이즈에서 여기까 지 오는데 샀던 말이 거의 전재산이나 다름이 없어. 다행이 이곳에는 말이 귀해서 비싸게 팔 수 있었지만 그것가지고는 부족해." "…………."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경하님." 경하가 아직도 똑같은 자세로 있는 것을 보고 기엘은 경하가 자기 탓 으로 생각해서 자책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경하를 위로했다. "어째서 그렇게 비싼 건데?" 뒤돌아 앉은게 경하가 물었다. "원래 상당히 비쌌기도 했고 무엇보다 우리가 갑작스럽게 뛰어든 상황 이라 웃돈을 요구하더구만. 돈을 쥐어주고 싶어도 그럴 돈이 있어야 쥐어 주지.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 하고 와버렸지. 일단 말은 해놓고 왔으니 돈만 있으면 돼." "후우…." 경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이고 돌겠다.' 어린아이처럼 계속 토라져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케슈튼으로 가지 않겠다고 해봐야 질질 끌려가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일. 그것에 괜시리 더 토를 달아 봤자 자신의 손해다. "결국. 돈 문제라는 거야?" "그래." 경하가 그나마 입을 열자 기엘은 마음이 놓였다. "팔 것은 더 없어?" "보석이 몇 개 남아 있긴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해." "아후. 돌겠다." 쪼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감싸는 포즈가 너무나 궁상맞았지만 경하는 그 포즈를 한 채 머리를 쿵쿵 침대에 부딧히며 괴로워 했다. 궁상이 문제가 아니다 이번엔. "젠장. 미메이라에서 나올 때 그놈의 하이신지 뭔지나 더 들고 나올 걸." 경하의 머리속에 시안의 화장대에 가득 늘어져 있던 그 보석 나부랭이 들이 어른 어른 거린다. "저어 경하님 이제 그만 하시죠." 경하가 자꾸만 쿵쿵 머리를 찧자 기엘이 불쑥 경하의 머리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기우뚱 기우는 경하의 머리가 기엘의 손에 닿는다. "치워 기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경하님." "젠장. 머리카락이나 줄줄 만들어 내서 팔아 볼까." 하늘 하늘한 은색의 머리카락이라면 비싸게 팔리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생각마져 든다. 그때였다. 「고민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만들면 되잖아?」 "뭘!!"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세나케인의 목소리에 경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 다. 「만들라니까.」 "뭘 어떻게 하라구?" "경하님. 왜 그러시는지…." 경하가 혼잣말을 할때면 의례히 세나케인과 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 는 일행이지만 혼자서 머리를 마구 찍어대다가 갑자기 퉁명스럽게 혼 잣말을 헤대는 것을 보자니 상당히 괴로웠다. 마치 미치기 직전의 사람이라도 보는 기분인 것이다. "나와 케인. 나 미친 사람 만들지 말고." 경하는 이리야의 황당하다는 표정을 본 모양이다. 이리야가 쿨럭 거리면서 고개를 돌린다. 잠시 후 세나케인은 반쯤은 투명한 모습으로 네사람 앞에 나타났다. "고민은 무슨 고민을 그렇게 궁상 맞게 하는거야? 필요하면 만들면 되 는 것을." "그러니까 도대체 뭘 만들라는 소리야? 정말로 내 머리카락이라도 줄 줄 길러서 가져다 팔라는 소리야?" "…농담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누가 네 머리카락 같은 것을 산다고." 뭔가 조금은 개그판이 되어 버린 상황이지만 아무도 웃지를 못하고 있 다. "그런 것 말고 만들란 말이야. 네 힘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세나케인님." 보다 못한 기엘이 세나케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긴. 하이시지." 팔짱을 낀 세나케인이 아주 가볍게 말했다. 그 순간 경하가 벌떡 일어나서 세나케엔에게 소리쳤다. "내가 인어공주냐? 줄줄 울어서 보석을 만들게?" 하도 기가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경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누가 울라고 했어?." "하지만… 하지만 내가 무슨 인어 공주도 아니고 인어공주는 눈물이나 흘려서 진주를 만든다지만 내가 무슨 진주 조개야?" "그럼 어쩔 건데?" "……………." "여하튼 돈이 필요하다며.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십분 활용을 해야할 것 아니야. 제가 날 활용해 먹듯이." "넌 보석이 아니잖아. 케인." "그러니까 필요한 보석을 만들어 네 능력으로." 두사람이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있던 기엘이 순간 아--하고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로운도 마찬가지였다. 두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가능 할수도 있겠어." "그렇지." 이제 경하는 세나케인에다가 기엘과 로운까지 이 인간들이 미쳤나--하 는 표정으로 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 능력으로 만들라니." "불가능한 소리는 아닙니다. 경하님. 실제 하이시는… 로운 남은 것을 줘봐." "그래." 로운은 허리띠 안쪽에 숨겨 두었던 마지막 몇 개의 보석을 꺼내 기엘 에게 내밀었다. 투명하지만 연한 푸른 빛으로 빛나는 하이시는 미메이라의 특산물. "이건 다른 보석들처럼 땅에서 캐는 것이 아닙니다. 경하님. 미메이라 에서도 가장 바람이 많이 부는 계곡에서 자연 발생하는 보석이니까요. 말이 보석이지 실제는 바람의 결정체 같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미 메이라의 외부로는 유출을 많이 시키지 않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더 더욱 제국에서는 비싸게 팔리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하이시를 경하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말이잖아.' 이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봤기 때문에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인식을 하 고 보니 확실히 그것은 일반적인 보석이 아니었다. "이거…." 경하는 하이시를 받아들다가 말고 흠칫 몸을 움츠렸다. '살아 있는 엘이 담긴 것이 아니야.' 받아드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인식을 하고 바라보니 너무나 똑똑하게 하이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 다. 하이시는 다름이 아니라 그 수명을 다한, 바람의 엘이 눈에보이는 형체가 되고 고체화 되어 단단해진 그런 것이었다. "난. 난 이런 거 못 만들어." 경하는 들고 있던 하이시를 도로 기엘에게 건내주었다. 하이시를 건내 주는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기엘은 금새 알 수 있었다. "경하님?" "난 이런 거 못 만들어 케인!! 이런 것을 어떻게 만들라는 거야." "흥분할 필요 없어. 그것은 어차피 수명을 다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 로 모여 마지막 시간을 사는 거지. 새롭게 다시 살아있는 생명이 될 때까지." 엄숙하게 세나케인의 목소리가 경하에게 와닿았다. "그러니까 그런 반응을 보일 것도 없다. 바람의 엘들은 제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하이시를 네 앞에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그러고 싶지 않아." 경하는 화를 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그리고 스스로에게. "바람의 엘을 사람들처럼 동물들처럼 살아 숨쉬는 것은 아니야. 그러 니까 네가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게 아니다. 하이시가 된다고 해서 끝 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 그것들은 다시 바람이 될 수 있어." "하지만 단축시키는 것은 마찬가지잖아." "경하님. 저는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 지." 경하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는지 기엘이 경하에게 이유를 물 었다. "하이시는 그냥 바람의 결정체 같은 게 아니야. 힘을 다한 바람의 엘 이 그렇게 고체화되는 거지. 젠장. 미메이라 인들은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바람의 백성이라면서?" "……………." 경하의 말에는 기엘도 로운도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하게 바람의 결정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 밖에 그들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제가 바람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자 시간이 없어. 선택해라." 세나케인은 놀랄만큼 냉정하게 경하를 몰아 붙였다. 그의 의식은 경하와는 다르지만 경하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 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젠장." 짧고 거칠게 경하의 감정이 표현된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경하는 카드미엘로 가야했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할 수밖에 없었다. 경하는 기엘의 손에서 하이시를 다시 받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세나케인에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계속... ....으음...6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제 딱 두장 남았군요....헥헥... [아슈레이 7] 6장 암행 (12) 아슈레이 7 폭풍 6장 암행 (12)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엘러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살아가게 만드는 바람의 엘. 그리고 죽을 때 엘 러는 바람의 엘로 돌아간다. 신의 축복을 받아 태어나는 엘러. 그리고 신의 축복의 증거인 엘. 과연 진실로 살아있는 것은 어느 쪽일까? 인간? 바람의 엘? "경하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 여기 이거 받아." 경하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손가락을 펼치자 연한 푸른빛의 투명한 보석이 후두둑 그의 손에서 기엘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아. 하이시군요. 또 만들어내신 겁니까?" "응. 조금은 더 필요하잖아." 기엘은 경하가 건낸 하이시를 로운에게 넘겨주었다. "새삼스럽지만 역시 이 카드미엘 말이야 이상하게 바람이 잘 불어." 멀리 가이칸 제국의 수도 카드미엘의 성벽이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서서 경하는 무표정한 표정 그대로 카드미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꼭 미메이라 처럼." 바람이 경하의 주위를 반갑다는 듯이 맴돌고 있었다. 약한 산들바람은 경하 의 주위를 스치며 조금은 세찬 바람이 되어 경하의 긴 망토를 펄럭 거리며 날린 후 다시 먼길을 떠났다. 은색의 머리카락은 바람과 함께 나부끼며 마치 살아 있는, 그리고 눈에 보 이는 바람처럼 넘실거린다. 조금이라도 한끝, 멀어지면 그대로 바람이 되어 버릴 것처럼 경하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시유도 곧 도착할거야." "예. 제게도 시유님의 파장이 느껴집니다. 저희와 비슷한 시간에 카드미엘 에 도착하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 "후우…." 로운은 한숨을 내쉬는 경하를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 다. 항구도시 쿠이즈에서 여비가 되고도 남을 만큼의 하이시를 만들어 낸 뒤로 경하는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곧 회복하고 밝게 웃던 경하인 만큼 무표정하고 말이 없 는 경하는 다른 어느 누가 화를 내고 있는 것 보다 더욱, 대하기가 어려웠 다. '긴장을 하고 있는 거겠지.' 억지로라도 이유를 붙여 납득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다. 그것은 기엘이 나 이리야도 마찬가지였다. "기엘." "예. 경하님." "아버님을 만나면 뭐라고 말하고 싶어?" "……………."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만나면 정작 무슨 말을 해 야할지 잘 모르게 될 것 같아." "그런 것을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응." "전… 아버님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인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다 른 사람들은 모르는 많은 사실을 모두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신 분이 어 째서 이곳까지 오실 수 있었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틀리다면 맞서야 겠지요." "…………." 어떻게? 라는 질문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경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경하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바람이 경하 와 기엘의 사이로 불어들어왔다. 입술에 닿는 바람은 차가운 습기를 담고 있었다.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 거지? 목적지는 바로 앞이다." 로운이 바람으로 장벽을 쌓은 채 침묵하고 있는 경하를 부른다. "경하." "…………."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경하는 얼굴을 들고 똑바로 로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기엘과 이리야도 함께. "믿고 따라와 줄 수 있어?" "물론." "물론입니다. 경하님." "당연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결정이 맞다고, 그렇게 진심으로 믿고 행동해 줄 수 있어?" "맹세를 원하면. 얼마든지." 경하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던 로운은 펄럭이며 행동을 방해하는 망토 를 한쪽으로 치워버리고는 자신의 라이트에 손을 대었다. "나는 기사 였고, 그리고 신관이었고 이제 다시 기사가 되었다. 내 의지로 …." "의례 같은 것은 필요 없어." 경하는 로운이 라이트를 뽑으려 하는 것을 보고 차갑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될까? 기사의 증표가 되는 이 검 대신, 다시 한번 기 사가, 네 기사가 되기로 맹세한 내 마음과, 내 생명과, 그리고…." 진심이 가득 담긴 눈빛과 함께 로운은 경하의 앞에 우뚝 섰다. "내 생에 내가 만날 수 있는 단 한명인 바람의 계승자인 네 이름을 걸고…. " 뚜벅 뚜벅.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기엘과 이리야가 나란히 로운의 옆에 섰다. "제 모든 것의 주인이신 경하님께, 제 모든 것과 당신의 이름과 생명을 걸 고." "난 멋진 말은 몰라. 하지만 네가 옳다고 하면 그건 옳은 거라고 믿는다. 네가 나에게 부여한 새로운 시간을 사는 동안…." 공기에 맺혀있던 습기가 이슬이 되어 내려 앉는다. 그리고 가벼워진 공기는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다시 하늘로 솟아오른다. "…고마워. 하지만 자신의 생명은 소중히 해줘. 무슨 일이 있어도." 경하는 자신보다 훨씬 큰 세 남자의 얼굴을 차례 차례 올려다보고는 다시 멀리 있는 카드미엘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으면…." 경하는 푸르르 고개를 흔드는 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갈까?" 무표정했던 경하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온다. 그것은 무엇인가 단단히 결심을 한 어린 소년의 얼굴이 아닌 한 남자의 얼 굴. 경하는 이제 꽤나 숙련된 솜씨로 말 위로 뛰어 올랐다. "제국의 황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기다리지 않더라 도…."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경하는 짧은 외침으로 말을 출발 시켰다. 그뒤를 3마리의 말이 제각각 경하를 놓칠세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였을 것이다. 그들이 앞장서 가는 경하의 얼굴에 비친, 몇 개의 물 방울을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은 바람에 나부끼는 은색의 머리카락이 그들의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을 보며 굳게 다짐을 하고 있었다. *** "아주 의외 였다고 말씀을 드리죠." "그렇게 의외였습니까?" 당연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미타 남작은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을 꾸욱 눌 러 참았다. 절대로 의외일 수 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찬성한 자신도 뭔가 빌미가 있 기만 한다면 바로 결사 반대하고 싶은 마음일 정도로 말이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연배에 맞는 품위와 무게를 가지고 있는 하라스다인 장로는 조용히 입을 열 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미타 남작은 하라스다인 장로가 제국의 어떤 귀족보다 도 훨씬 귀족적인 품위를 지녔으며 이 대제국 가이칸의 황제인 로렌의 앞에 서도 당당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우. 저런 귀족이 몇 명만 더 있었다면 가이칸은 지금 당장이라도 아슈레 이의 패자가 될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아십니까? 미메이라에는 제국과 같이 특별히 귀족 계급이나 왕족이 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현 수장의 가족과 혈연 관계를 맺는다해서 그들이 왕족이 될 수는 없지요. 만일 미메이라의 수장이 바뀐다 면… 그때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굳은 표정의 하라스다인 장로가 하는 말을 로렌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하라스다인 장로의 눈이 그를 한뼘 한뼘 가늠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는 다음 순간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먼 이야기를 하시는 군요.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를 말하는 겁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 "미메이라의 현 수장은 올해 계승을 받은 아직 어린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로렌이 말했지만 하라스다인 장로도 호락 호락 넘어갈 수는 없었다. "새로운 수장님의 혈연이라고 해도 미메이라에서는 평범한 일게 신민에 불 과합니다. 그런데도 굳이 신국에서 황비를 맞이 하시길 원하시는 겁니까?" "일게 신민이라 해도 수장의 혈연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그게 문제가 된다 면 그 새로운 수장을 제 황비로 보내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순간 차가운 기가 방안을 가득채운다. "그런 무례…." 하라스다인 장로의 곁에 서 있던 기사가 막 입을 여는 순간 하라스다인 장 로가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농담으로 듣겠습니다." "…뭐 별로 농담은 아니었습니다만." 지끈하고 심장이 울린다. 하라스다인장로는 젊게만 보이는 이 젊은 황제가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얕잡아 본적은 없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저 젊은 황제가 이 가이칸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그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로 미메이라인을 황비 로 맡기 위한 물밑 작업을 했다는 것쯤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리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 역시 거센 반발을 물리치고 왔으니 말이다. 그만큼 지금 가이칸의 황제와 자신이 하려는 일은 금기에 가깝다. 팽팽해져가는 공기를 느낀 듯 로렌이 너털웃음을 짖는다. "미메이라의 수장이라고 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안 그 렇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비록 미메이라에 왕족은 없다고 하나 분명 수장 이 될 만한 인재가 태어나는 명문가는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당신의 가문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은 냉랭하게 하라스다인 장로를 바라본다. "저는 황비가 필요한 겁니다. 후원을 지킬 후궁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을 유념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깊이, 심사숙고 하겠습니다." 대화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로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좀처럼 입에 담지 않았고 하라스다인 장로 역시 로렌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자신도 언급을 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을 하라스다인 장로는 가볍게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저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농담을 할수 있다니요.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농담이며, 또한 진담이네." 농담이라 말하며 눈을 빛내던 로렌의 얼굴을 하라스다인 장로는 뇌리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원하는 걸까? 하라스다인 장로는 문득,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새로운 수장계승자, 즉 이 계의 소년을 떠올렸다. 다분히 그가 이런 일에 발을 디딘 것은 그 소년의 존재가 커다란 작용을 했 다. '내가 선택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자신에게 동의를 했던 레이죠 장로와 로크레슈 장로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 른다. 그들은 과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에 동참을 한 것인지가 새삼스 럽게 의문점이 되어 나타난다. "피곤하군." 하라스다인 장로는 지끈 지끈 울려오는 관자놀이를 몇 번이나 손으로 누르 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곳까지 온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발을 디딘 이상 끝까지 가야한다. 하라스다인 장로는 이계의 소년과 여행을 떠난 그의 아들, 기엘의 얼굴을 떠올렸다. *** "이쪽으로 오십시오." "…………." 시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키리엔과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성의 실루엣이 어슴프레하게 시유의 눈 에 들어온다. "자아 어서. 이쪽 마차로." 시유를 대하는 묘령의 여성은 너무나 공손하다. 마치 그녀는 자신이 공주라 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말은 정말 아주 조금밖에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시유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난 어디로 가게되는 걸까?'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가이칸 제국이라 는 것쯤은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이 제국어 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유가 알고 있는 제국어는 아주 기초적인 몇마 디 뿐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불안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알아 들을 수 없다면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을 지도 모른 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국어를 좀더 배워둘걸.' "여기는 어디죠? 전 어디로 가는 거죠?"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그녀는 자신의 시중을 드는 여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다. 시유는 결국 그녀가 종용하는데로 새롭게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마차의 내부는 시유가 지금까지 타고 있었던 마차와는 판이하게 틀렸다.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은 어 쩔 수 없었다. 불안감이 가득, 그녀의 안에서 흘러나온다. '부탁이야. 누구든 도와줘.' 손가락사이로 눈물이 한방울, 두방울 흘러내린다. '언니. 도와줘요. 제발.' "하아… 난감하다." 경하는 어둠에 잠겨 가는 황궁을 보며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오기는 왔는데 역시나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카드미엘이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도착하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라는 마 음이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경하님. 일단 저녁을 드시죠." "아. 으응." 기엘의 부름에 경하는 걸텨 앉아있던 창가에서 일어났다. "후우…."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는 경하는 심호흡을 했다. 초초해 해봤자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는 것쯤이야 이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티리쉬 주문으로 자신의 파장을 억제해놓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든 자신이나 다른 일행의 존재가 발각 날리는 없었지만 경하는 조심에 또 조심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보았을 때 경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람술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루어 지는 것인지를 스스로가 설명할 수 있었으 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전혀 그렇기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것이다. "오오. 이게 며칠만의 진수 성찬이냐. 하하하." 들뜬척하는 이리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이리야의 목소리가 경하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리야만해도 그렇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살려놓기는 했지만 경하역시 세 나케인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리야를 원래의 상태 로 돌려놓았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이리야가 살아났다고는 해도 도통 믿기지가 않는다. "어이 이리야." "왜?" 우물 우물 입에다가 먹을 것을 잔뜩 넣고 이리야가 대답을 한다. "다 먹고 대답해. 튀잖아." "좀 튀면 어때?" 우물 우물 꿀꺽. "돼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은데?" "돼지. 먹보." "그러니까 너한테는 듣기 싫다니까." 벌컥 벌컥 벌컥. 이리야의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는게 보인다. "그런 거를 그 사람이 보면 정나미가 떨어질지도 몰라. 매사에 좀 우아하게 행동해봐. 기엘이나 로운처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이리야가 경하를 바라본다. "그 있잖아. 이리야를 찾아오겠다고 하던 라마이드라는 여자." "에?" 문득 잊고 있었던 것을 경하가 상기시키자 열심히 걸신들린 듯 먹고 있던 이리야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하. 하지만, 그 여자가 누군지 내가 알리도 없고. 도대체 무슨 수로 날 찾 아온다는 건지도 모르겠는걸." "나유의 딸이라고 했잖아." "그래도 내가 알게 뭐야." "찾아올 거야. 아마도. 정확하게."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희번득하고 이리야의 눈동자가 빛났다. 정말이지 경하가 그런 것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게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그런 곳에까지 와서 인사를 하고 가 면서 찾아오겠다 라고 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안 그래? 그렇지 기 엘?" "글세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들이 먼 곳이 있는 바람술사들의 파 장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분도 나름대로는 같은 맥락에서 이리야씨가 어디 있는지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기엘의 설명에 이리야가 순간 '아'하는 표정을 했다. 사실 이리야의 경우 자신보다 능력이 훨씬 나은 물의 술사를 만나 본 적은 거의 없는 셈이다. 카드미엘에서 엘러로 훈련받을 때도 그를 가르치던 물의 술사라고 해봐야 그와 비슷하거나 아주 약간 나을 정도의 엘러뿐. "그렇구나. 사실 난 생각도 안해봤는데." 아주 뻔한 사실인데도 이리야는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맞아. 내가 물의 술사니 다른 물의 술사가 어디 있는 것 정도는 원한다면 알아낼 수도 있는 것이군.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 "특히 현재의 이리야씨라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 남습니다." "에헤…." 식사를 하다말고 뭔가 새로운 세계로 빠져버린 이리야. 그틈을 타서 이번에 는 경하가 식탁에 달려들었다. "흐음. 간은 별로지만 이거 생각보다 맛이 있네." 오랜만에 정력적으로(?) 식탁에 달라붙고 있는 경하를 보자 기엘은 왠지 안 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기엘의 입장에서 보면 경하는 아직 어리다. 게다가 아슈레이와 미메이라와 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계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하는 너무나 깊숙하게 이 세계와 미메이라에 관련을 맺어가고 있는 중이다. 길다고 하면 길지 모르겠지만 일년도 안 되는 짧은 사이에 경하가 겪은 일 들은 웬만한 사람들의 일생분의 사건에 맞먹는다. 처음 미메이라에서 바람술 하나 배우는데도 앉은자리에서 졸아 버릴 정도였 던 경하가 지금은 바람의 주인이 되어 있다. 그것 하나만을 보아도 지금 기 엘의 앞에 앉아있는 이 소년이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해왔는지 모른다.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가도 순간 순간 깜짝 놀랄 만큼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 을 보여준다. 지금처럼 말이다. "왜 그렇게 쳐다봐 기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 더 드시겠습니까?" "어? 아니 이것부터 다 먹고. 이거 생각보다 맛있네." 무엇인가의 볶음 요리 비슷한 것을 경하는 열심히 입에 우겨 넣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경하가 집에서 먹던 어머니가 끓여주신 김치찌개를 그 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아. 정말 시원--한 김치 국물이나 좀 먹어봤음 좋겠어.' 오래간만에 경하는 집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 다. ***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하라스다인 장로는 양손을 깍지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앞에는 조금전에 미타 남작이라는 가이칸 황제의 오른팔인 듯한 인물 이 두고 간 한 장의 양피지가 있었다. 고급스런 양피지에는 유려한 문체로 이른바 '지참금'으로 요구하는 그 무엇 인가의 목록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라이트 온--." 곁에 있던 기사가 가물거리는 양초를 꺼버리고 라이트 온의 주문으로 주위 를 밝혔다. 환하게 주위가 밝아지면서 양피지에 써있던 글자들이 더더욱 도드라져 보였 다. 벌써 두차례, 로렌과 만찬을 가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이렇다할 대화 는 오고가지 못했다. 만날때마다 왠지 신경전 비슷한 것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나름대로는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참에 미타 남작이 위의 서신을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서신 아닌 서신에 담긴 내용은 하라스다인 장로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정말 무례하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미메이라를 거의…." 합병하여 흡수해버리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지라고 하라스다인은 속으로 중얼 거렸다. 서신의 내용대로라면 현 수장 계승자를 자신의 황비로 달라고 했던 그의 말 이 사실적으로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메이라의 기사단이라니… 그것도 이 인원수라면 현 궁정기사단에 나이트 사아르 소속 전원을 포함해도 모자릅니다. 아니. 모자르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이트 헤스튼." "네. 장로님." 미타 남작이 가져온 문서를 보며 막 열을 올리려던 기사에게 하라스다인 장 로는 자중하라며 말했다. "일단은 앉게.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니 말이야. 모든 일에는 협상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 이것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우리가 해 야할 일은, 아니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서로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일세. 알겠나?" "물론 장로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식이라 면 협상이고 뭐고, 처음부터 서로 너무 다른 기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 닙니까?" "그것을 이해시켜야 겠지. 그래서… 외교라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 이네. 우리가 제국의 언어를 읽고 쓸수 있다해도 우리가 제국의 모든 문화 를 알수 없는 것처럼 저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물며 저들은 우리의 글과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 않는가. 세상에 어떤 제국인이 신국어를 배우려 할까 ? 안 그런가?" "…………." "모른다고 하면 가르쳐주고, 그리고 이해시키면 되네. 협상은 그 다음부터 야." 톡톡 탁자를 치고 있던 하라스다인 장로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이해할 생각이 없다면 단호히 돌아갈 수 밖에 없겠지만 저쪽도 어느 정도 는 우리 미메이라를 이해해줄 수 밖에 없을 걸세. 하물며 미메이라인을 황 비로 맞겠다는 황제를 보게. 그는 다른 사람과는 생각이 달라. 보는 눈이 틀리지. 그것에 거는 수 밖에 없어." "장로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저희들은…." 말을 하다말고 나이트 헤스튼을 비롯해 나머지 두 기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 어섰다. 덜컹--- 황급히 일어난 탓에 육중한 의자들이 제각각 소리를 내며 넘어지거나 기우 뚱거렸다. "장로님. 이건…." "………." 하라스다인 장로 역시 같은 것을 느낀 듯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런 곳에 어째서…." 그는 천천히 앞에 놓인 양피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양피지 때문이 아니었다. "카드미엘에 들어올때부터 느꼈던 그들이 파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잘한 제국의 엘러들의 파장과는 판이하게 틀립니다. 장로님." "…………." 어느새 하라스다인 장로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는 아무말 없이 눈을 감고 자신의 감각을 개방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넓게 퍼지는 감각이 하나의 사실을 네 사람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 미메이라인의 그것도 엘-사인 이상의 능력을 가진 바람술사입 니다." 먼저 파장을 감지해낸 나이트 헤스튼이 자신이 느낀 대로 말을 했다. 눈은 감고 있지만 열려진 감각은 넓고 넓은 카드미엘의 황궁 구석 구석까지 퍼져나갔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파장이었다. 구석 구석까지 퍼져나가던 하라스다인 장로의 감각은 어느덧 한곳으로 자신 의 모든 신경을 날려보내고 있었다. 그 끝에 그가 찾는 인물이 있었다. 콰앙------- "당장. 지금 당장 황제를 만나야겠다고 일러주게." "예. 장로님." "어서. 당장!!!" 파르르르--- 하라스다인 장로의 흰수염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다른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하라스다인 장로가 느낀 바람의 엘의 파장. 그것은 그에게 아주 가까우면서 또한 낯설은 하지만 분명 기억에 있는 것이다. 나이는 들었다 해도 한때 최고의 로열 나이트였던 그다. 그런 그가 한번 기 억에 담았던 파장을 잊을리는 없다. 평생을 함께 해왔던 수장과 아주 가까운, 그러나 그보다는 약한 바람의 엘 의 파장. 그것은 전 수장인 레이죠 장로의 딸 시유의 것이었다. '어떻게 시유님이 이곳에….' 다른 수행원없이 오직 홀로,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바람의 엘의 파장 을 흩뿌리고 있었다. 절대 이곳 카드미엘에 있을리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사람의 파장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 ---------------------------------------------------- 계속 .....한밤중. 새벽의 시간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이 새벽시간의 동반자는 지상최대최고의 미녀 미스 오타와 미스 버그. (뭔가..외국 이름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미스 미스타이핑(.....이건...) 미스 오류...(이것도..좀..) 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전 미녀. 가 좋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슈레이에는 여자들이 큰 역할을 안하느냐고. 어째서 경하에게는 애인(?)하나 안 만들어 주느냐고 말씀하시는 분이... ...그거야..저도 애인이 없는데 경하나 기타등등의 녀석들에게 애인을 만들어 줄리가 없지 않습니까!! (버럭!!) 기껏해야 뗄려고 해도 절대 안떨어지는 질긴 미스 오타와 미스 버그뿐. 그것도 한둘이 아닙니다. 아흐흐흐흑(울음소리는 리얼하게) ....물론.농담인거 아시리라 믿쑴...니다. ..아니 이 인간이 왜 글은 안쓰고 헛소리냐고 하시는 분들. 마감때가 되면 인간은 맛이 가는 법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아는가...." [아슈레이 7] 6장 암행 (13) 아슈레이 7 폭풍 6장 암행 (13) "폐하. 그분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런 시간에?" 마악 침소로 발을 옮기려던 로렌은 우뚝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말을 전하러 온 자는 다름 아닌 메로스 케이룬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알려드릴까 했습니다만 폐하께서 손꼽아 기다리셨던 것이 기억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이 시간에 달려왔사옵니다." 어딘가 모르게 야비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에게 로렌은 어떤 표정을 보일지 고민했다. 분명 손꼽아 기다려오던 상대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눈에 보이는 메로스 케이룬의 행동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지 않나. 일단 지시한대로 하고 그녀와는 내일 아침에 만 나겠네."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폐하."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다하는 남자에게 로렌은 약간의 짜증을 느꼈 다. "그럼 가보게." "예. 황송하옵니다. 폐하." 입 끝에 미소의 여지를 남기며 메로스 케이룬이 사라졌다. '짜증이 나는 군. 정말. 저 남자는.' 미타남작이 꺼려하는 것도 이해가 갈 정도다. 하지만 저런 인간도 필 요한 구석이 있는 법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을 했다. 저런 인간보다 훨씬 더한 인간도 그는 자신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 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줄수 있다. '하지만 그 쓰임새가 다하면…. 그때는 카스핀의 원대로 해주어도 나 쁘지 않겠어.' 로렌은 메로스 케이룬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고 덜하지 않는 의미 심 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의외야. 지난 번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잠이고 뭐고 다 팽기치며 활기 차게 오실줄 알았는데 말일세." "매번 그러나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메로스의 말에 히난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는?" "지난번에 계시던 곳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흐음…." "단지 조금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만." "뭔가?" 메로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이전에 그녀의 시중을 들던 시 녀들이 그대로 그녀를 맞았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얼굴을 기억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전혀?" "예. 물론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 뭔가 조금 이상한 것이…." 지난번과는 일단 일자체가 틀리기에 히난은 문제의 '그녀'를 가까이서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짧아진 것 이외에도 지난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단 엘의 파장이 아주 비슷하긴 한데 뭔가 틀리단 말이야.' 의식적으로 느끼려고 했기 때문에 그는 지난번의 그 파장을 어렴풋하 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파장과 지금 태자궁 한쪽 거처에 앉아있을 그녀의 파장은 똑같다고 말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정도가 아니었지. 그걸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었나?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우리의 황제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원래의 자리에 다시 잡아다 놓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 "…………." "이번일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게 아니야." 메로스가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우며 히난에게 말했다. "예?" "그녀를 다시 잡아온게 우리가 아니라는 점이지." "…………." 이번에는 히난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그녀를 다시 납치해오는 것은 그와 그의 부대에게 맡겨졌던 일이 었다. "하셰카가 한 점 벌었어. 그게 문제야." "………." "아주 재미없어진 거야. 아주." 투덜 투덜. 하지만 표정은 묘하게 웃고 있는 메로스는 뚜벅 뚜벅 어두 운 복도를 걸어갔다. 과정이야 어쨌든 간에 일단 그녀는 돌아왔고, 황제는 그를 신임하게 될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 "아아. 도둑 고양이가 된 것 같다." 교대로 지나가는 경비단의 발걸음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높은 성벽아래 몸을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던 경하는 빼곰히 밖을 내다 보았다. 그걸 보자마자 이리야가 황급히 경하의 몸을 끌어 당겼다. "뭐하는 짓이야!!" 말은 거칠지만 소리는 소근 소근. "괜찮아. 멀리 갔는걸." "첫번째도 조심. 두 번째도 조심. 세 번째도 조심인 거 몰라? 정말이 지." "뭐… 들키면 또 어쩌겠어. 파앙- 퍼엉-- 한바탕 하고 쳐들어가지 뭐. " "…………농담으로 듣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로운이 꾸욱, 경하의 어깨를 내리 누르며 말 했다. "하라스다인 장로님이 정확히 어디 계신지 알려면 주문을 해제해야 할 텐데 정말 곤란하군." 티리쉬로 자신의 파장을 억눌러 놓은 만큼 다른 사람의 파장도 느끼기 어렵다. 하물며 혹시나 있을 불상사를 위해 몇겹이나 단단하게 주문을 걸어 놓 은 일행은 지금 반쯤은 까막눈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다. "정말 불편하잖아." 털썩. 좁은 구석에 경하는 주저앉아버렸다. 일단은 급한대로 황궁에 잠입(?)중이지만 앞날이 아니, 앞이 캄캄하 다. '하아… 뭐라고 해서 이걸 수습하나.' 까닥하면 제국으로 시집갈 판인 경하는 나름대로는 이번일은 발등의 불을 끄는일이 된다. 물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런 저런 이유가 있긴 하지만 일단 경하에게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그리고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하라스다인 장로가 자신을 '여자'인채 황제에게 시집을 보내겠다는 계획뿐이다. '어떻게든 막아야해. 내가 이나이 먹고 이꼴로 장가도 아닌 "시집"을 가게 생겼어?'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역시 신경쓰이는 것 은 어쩔 수 없다. 일단 목적은 하라스다인 장로를 설득해서 황제와 하라스다인장로 또는 황제와 미메이라간에 아직 협상되지 않는 그놈의 '황비' 어쩌구리한 이야기를 백지로 돌리는 것이다. '젠장. 어떻게든 되겠지. 쳇-. 안되면 하라스다인 장로님을 난짝 없고 도망치면…으음. 그건 안되려나. 국제 문제가 될지도 모르고….' 끙끙대며 앉은 자리에서 홀로 고민하는 경하를 보고 기엘이 안심을 시 키려는 듯 말을 걸었다. "경하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세히 천천히 설명을 하면 아버님 께서 마음을 돌려주실 겁니다. 그리고 미메이라의 비밀…을 발설하는 것은 내키지 않습니다만 그에 대한 언급을 황제에게 하면 아마도 그는 미메이라에 대한 야심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사실이 그렇다. 누가 시한부의 기사단을 원할까? 언 듯 강력해 보이지만,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것일뿐,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면 황제는 절대로 미메이라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믿는 것은 그 하나의 사실뿐이었다. "이 시간에? 나를 만나고 싶다고?" 늦은 시간 한 잔의 붉은 포도주를 앞에 놓고 느긋하게 내일의 만남을 기대하며 흐믓해 하고 있던 로렌에게는 미타 남작이 가져온 소식이 아 주 불쾌한 것이었다. "이 시간에 어째서 나를 만나겠다고 하는 건가?" "그것이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 폐하를 만나 야겠다고 지금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거절하게." "폐하." "이유도 말하지 않았으면서 이 밤중에 내 사실에까지 처들어오는 상대 를 내가 왜 만나야 하는 거지?" "만나시지 않겠다면 지금 당장 미메이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 로렌은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눈치를 챈 것은 아닐까요?" "뭘?" "오늘 도착한 '그녀'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로렌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녀가 지금 이 궁에 있다는 것은 그와 미타 남작과 예의 메로스 케이룬밖에 모르는 일이 다. 그녀를 시중드는 시녀들조차도 그곳에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말이 새 어나갈 리가 없다. 하물며 이런 시간에 말이다. 적어도 내일쯤이 되었다면 그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었으리라. 궁에는 말을 전하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 있으니 말이다.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로렌에게 미타 남작이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잊으셨습니까? 그들은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녀가 이곳에 도착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 알아낸 게 아닐까 사료됩니다." "…………." "폐하."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로렌에게 미타 남작은 포기하라는 듯 재 촉했다. 벌떡- 로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팔을 내밀어 시녀들이 내미는 겉옷을 걸치고는 조금을 풀어해친 머리카락에 다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한심스럽군." "폐하. 어찌할까요." "입 닥치고 좀 기다려!!" 드물게 로렌이 거친 단어를 쓴다. 화가 났다는 의미다. '한심스러워. 아주-- 한심스러워. 하는 짓거리가 이렇게 한심스럽다 니.' 그는 메로스를 책망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곁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희난을 책망하고 있었다. '알고 있을 정도라면 사전에 조치를 취해야 할 것 아닌가. 멍청한 것 같으니라구.'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집착이 가져온 실수의 한 끝. 그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붉은 액체를 단숨에 들이 마셨다. 포도주의 향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휘익--- 포도주가 담겼던 잔이 벽을 향해 날아갔다. 파삭--- 얇은 유리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두터운 양탄자에 반짝이는 가루와 함께 부셔져 내린다. "잠시 후로 하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로렌이 대답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들어주겠다고 해." "알겠습니다. 폐하." 미타 남작은 허리를 굽히고 자리를 피했다. 그는 제발 이 밤이 빨리 지나가길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별빛 하나 없는 이 어두운밤은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을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방법이 없어. 주문을 해제하고 최대한 빨리 하라스다인 장로님을 찾 아가자." 어둠속에서 경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몇차례 이런 저런 방법에 대한 논의를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봐도 뚜렷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경하는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어차피 가까이 가서 만나려면 방법이 없잖아. 1분 후에 알게되나 10 분 후에 알게되나 거기서 거기라구." "후우…." 로운은 아무말없이 자신의 허리춤에 매어놓은 라이트를 매만지며 상태 를 점검했다. 만일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되도록 이 라이트만큼은 사용되지 않기를 그는 기원했다. 그것은 기엘도 마찬가지였다. 손 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냉기. 그것이 가슴을 시리게 하는 냉기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준비되었지?" 경하의 목소리가 그들의 주의를 모았다. "주문을 해제해." "기엘 디 하라스다인. 티리쉬 오프--." "로운 디 로크레슈. 티리쉬 오프--." "이리야 노운. 티리쉬 오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문을 해제할 때마다 그들의 주위로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 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바람이 불어오고, 그리고 사사삭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그들의 엘이 해방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경하가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티리쉬…." 주문을 외우며 자신들의 얼굴을 돌아다보는 경하의 얼굴에는 묘한 감 정이 섞여 있는 것을 로운과 기엘, 그리고 이리야는 깨달을 수 있었 다. "오프--." 막혀 있던 둑이 한번에 터지듯, 경하의 그 맑고 깨끗한, 강력한 바람 의 엘이 만들어내는 파장이 풀려났다. "우웃--." 가만히 서 있으려 해도 저절로 그 파장에 몸이 반응한다. 바닷가 한쪽에 서 있다가 파도를 맞은 사람들처럼 그들의 몸이 흔들렸 다. 그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바람과는 전혀 틀렸다. 눈에 보이지도, 느낄 수도 없지만 주위에 가득찬 경하의 맑은 파장이 사방으로 펴져나가는 것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순간. 황태자궁의 꼭대기에 있던 한 소녀도, 한밤중 어두운 황태자궁 한구석 에서 황제와 밀담을 나누기 위해 대면하고 있는 남자들에게도, 그리고 궁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있는 제국의 엘러들에게도 그 파장은 동시에 전해지고 있었다. "해명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무엇…에 대한 해명을 바라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군요." "농담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궁에…………??!!!"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하라스다인 장로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 "무슨 일이십니까?" 하라스다인 장로를 수행하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경악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로렌과 미타 남작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하나같이 이 상한 반응에 의아해할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이상이라도?" "이럴 수가…." 로렌의 앞에서는 단 한순간도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던 하라스다인 장로가 입을 벌린채 멍하게 서 있다. '이것은… 프리스트 로운? 그리고 기…엘?' 수년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아들의 파장이 하라스다인 장로에게 전해지 고 있었다. "장로님. 이 파장은…." 사색이 된 나이트 헤스튼은 하라스다인 장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 지만 그 역시 자신과 똑같은 얼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을 뿐 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또다른 강력한 파장이 전해져오는 것을 느끼 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파아--하고 몸을 스쳐지나간다. 몸과 머리, 손끝과 머리카락 끝까지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그러나 맑 고 깨끗한 바람의 파장. 강력하게 전해져오는 그 파장은 분명 바람의 엘이다. 하지만 누가 이런 파장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전대 수장이었던 레이죠 장로도 이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라스다인은 생 각했다. 그가 만났던 어느 누구도 이런 강력한 파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냐. 누구이길래!!' 바람의 파장이 다시한번 그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설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설마… 이런 일이." 몸을 스치는 강력한 엘의 파장의 폭풍이 잠잠해지고 하라스다인 장로 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어찌하여! 어찌하여!!" 아무도 그의 물음에 대답해 줄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흔들리는 불빛. 불안하게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하라스다인 장로는 눈을 감았다. "이리야와 기엘에겐 시유를 부탁할게. 나는 일단 하라스다인 장로님이 계신 곳으로 로운과 곧바로 갈 테니까. 둘은 시유를 찾아서 내게 와 줘." "경하님 저는…." "잔말말고 시키는 데로 해. 어차피 곧 만나게 될 거잖아." 기엘을 보내는 이유를 로운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경하는 기엘이 자신의 아버지인 하라스다인 장로에게 해를 끼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하는 것이다. "기엘. 걱정마. 경하…님은 내가 지킬 테니." 믿음직스러운 친우의 말에 기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것은 주어진 일을 그대로 행하는 것뿐이다. 그 결과는 잠시 후에 그들의 앞에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조급해 할 필요가 없었다. "자아. 그럼 출발해!!" 조용한 밤하늘에 경하의 목소리가 그의 파장과 함께 펴져나간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경하는 로운에게 시선을 돌 렸다. "우리도 가자." "………." 소리없이 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대답이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미타 남작이 조금은 신경질적이 되어 하라스다인 장로에게 물었다. 조금전 뭔가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보여주었던 하라스다인 장로 는 그 뒤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있었다. 미타 남작과 로렌이 번갈아 추궁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라스다인 장로. 당신이 원해서 이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소. 할말이 없다면 나는 돌아가겠소. 카스핀!" 그렇지 않아도 짜증이 나 있던 로렌은 미타 남작에게 돌아가겠다는 신 호를 했다. 그 순간 하라스다인 장로가 손을 들었다. "기다리시오." "…………." "이유를 말한다면 얼마든지 기다려주겠소." "이유? 이유라. 그런 것을 내가 말해줄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드리지. 하지만 지금은 이 자리를 지켜주시오." "…………." 어딘가 모르게 무게감 있는 하라스다인 장로의 말에 미타 남작이 움찔 했다. 그의 표정은 처연하다 못해서 무엇인가 각오를 한 듯 심각한 표정이었 다. "굳이 우리가 움직이지 않아도 곧 찾아올 터이니. 그냥 기다립시다. 그쪽이 훨씬. 나을 것이요."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겠소?" 로렌이 팔짱을 끼며 하라스다인 장로에게 물었다. 하라스다인 장로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뒤에 우뚝 서 있는 세 기 사도 입을 열지 않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 세명의 기사는 눈에 띄게 표정이 변해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지만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곧 알게 될터인데 굳이 내가 입에 담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라스다인 장로는 쓴물이라도 삼키는 것처럼 천천히 침을 삼켰다. 입이 바짝 바짝 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걸까? 지금쯤 그들은 미메이라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떠나왔다. '바람은 잡을 수 없다는 것인가.' 로크레슈 장로가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다할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 쯤 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제국 땅에 발을 디디도록 방치할리 는 없을 줄 알았다. '그래. 본인이 있는 자리가 차라리 나을지도 몰라.'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그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성밖에서부터 높은 성벽을 넘어 한걸음씩, 그러나 빠르게 그들이 다가 오고 있었다. "후우…." 바람술을 이용해 높은 성벽을 뛰어 넘은 경하는 하늘을 찌르듯 높이 솟아있는 탑을 바라다보았다. 기억에 있는 탑이다. "흐음. 설마 황제랑 마주치지는 않겠지 로운?" "글세." "되도록이면 그 사람이랑은 안 만났으면 좋겠는데. 왠지 기분이 나쁘 단말이야." "…………." 로운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뭐라고 말을 해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경하의 곁에서 멀어져 있는 동안, 또한 경하가 기억을 잃고 이 황태자궁의 저 높은 탑에 갇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 지 누가 알까? "으음… 뭐 만난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지만." "서두르지." "아. 으응." 뚜벅 뚜벅 어두운 복도를 로운은 앞장서서 걸어갔다. 인기척을 피한다고 피했지만 앞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로." 로운은 경하의 손을 잡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우. 우앗!!" 마악 소리를 지르려는 경하의 입을 막고 그는 그리 크지 않은 창쪽으 로 훌쩍 뛰어 올랐다. 파라라락 하며 옷깃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올라간다. 꽉 잡아!!"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의 팔에 감겨 있는 경하의 팔에 힘이 들 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로운은 그대로 창을 힘차게 디디며 뛰어 올랐다. *** 콰앙----- 굳게 닫혀져 있던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로운 디 로크레슈. 라 마이케시스." 막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려던 기사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그것은 이전에 경하가 한번 목격한 적이 있었던 포박술의 일종이었다. 입술조차 옴짝 달싹하지 못하게된 기사는 눈빛을 번득이며 경하와 로 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미안해요. 뭐. 그래도 죽지는 않을테니까. 이대로 잠깐만 기 다려 달라구." 툭툭- 경하는 기사의 어깨를 몇 번 쳐주고는 일어섰다. 뒤에서는 로운이 막 다른 경비경에게도 같은 주문을 쓰고 있던 참이었 다. 경악에 가득 찬 표정을 한 채로 굳어져 버린 경비병은 손에 시퍼런 검 을 빼어들고 있었다. "위험하잖아. 아저씨." 조심스럽게 손에서 검을 빼앗아서는 그의 옆에 얌전히 내려놓는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으니까. 그리고 주문에 좀 당했다고 해서 죽는 것 도 아니니까 야~암전히 기다리시라구." "그대로 들어갈까?" "아니. 이리야랑 기엘이 곧 올 거야." 그말을 하기 무섭게 저쪽 어두운 복도쪽에서 챙강 하는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하게 그쪽으로 뛰어가려는 로운을 경하가 말렸다. "괜찮아." 그말이 그대로 맞은 듯 잠시 후에 소리가 들렸던 방향에서부터 기엘의 파장이 전해져왔다. 기엘의 뒤에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시유의 짧은 머리카락이 언 듯 보였다. "후우……." 경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기엘이 시유와 함께 가까이 오기를 기 다렸다. "수고했어. 기엘." "아니.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경하님." "어이. 나도 있어." 한바탕 난리라도 치룬 듯, 이리야는 약간 흐트러진 옷차림을 하고 있 었다. "시녀 아줌마들이 놈 난리를 떨어서 재우고 오느라구 말이야." "이리야도 수고했어. 자아 그럼… 들어가볼까?" "물론." 닫혀있던 문에 로운의 커다란 손이 닿았다. 끼이이이---하는 듣기 싫 은 소리가 들려온다.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문틈에서 따스한 공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눈을 크게 뜬 채 그 자리에 못박혀 있을 뿐이다. 미타 남작은 할말을 잃은 상태였고 로렌은 자신의 눈앞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놀라 입을 벙긋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남자들은….' 두명의 남자는 분명 기억속에 있는 남자들이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목격한 강력한 미메이라의 기사들. 시안을 그에게서 훔쳐 달아난 사람들이었다. 또 한 명의 남자는 기억에는 없지만 그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는 키가 조금 작은 두 사람은 조금 문제가 틀렸 다. 하나는 분명 자신의 기억에 있는 누군가와 얼굴이 흡사했지만 무엇인 가 느낌이 틀렸다. 짧은 머리카락 탓만은 아닐 것이다. '시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과 그녀는 매치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머지 한사람. 허리를 넘는 길고 긴 은백색의 머리카락은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그것 과 동일했다. 바람이 불지않는 곳인데도 은백색의 긴 머리카락은 마치 산들바람을 맞은 것처럼 아주 미세하게 공기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키도, 느낌도 얼굴 생김 생김도 기억속의 그녀와 너무나 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로렌 네세크 카루인 라이너드. 가이칸의 황제." 길고 긴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로렌이었다. 그는 가슴에 손을 대고 그 자신의 이름을, 그가 이어받은 이름을 또박 또박 천천히 말했다. 미타 남작이 미쳐 말리기도 전에 로렌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의 발자국 소리는 발자국 소리는 두터운 양탄자에 가려져 들리지 않 는다. 앞으로 걸어나온 로렌은 경하의 앞에 와서야 그 발걸음을 멈추었다. 꿈틀하고 기엘과 로운의 몸이 움직이려했지만 다음 순간 들려온 로렌 의 말에 그대로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내 기억속의 그녀와 너무나도 닮았군." 로렌은 손을 뻗어 하늘거리고 있는 경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몇 가닥 집어 올렸다. "당신이 누구이든… 내 성에 온 것을 환영하오." 그는 집어 올린 머리카락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계속 에브리바리~~ 투게더 '우억----' ...--;;; 저놈은 알고 그러는 건가. 모르고 그러는건가. 아는 거면 저건 시위다. 시위. 바보 작가에게 하는.... ....에라이.. -_-;;;;;; 자아. 과연 우리의 황제님 로렌씨는 누구와 골인을? (시위 하지마 이놈아!! 예쁜 짝 만들어 주면 될거 아니야!!) ....(쿨럭 쿨럭.....) 다음이 7권의 마지막 장이 되겠습니다. [아슈레이 7] 7장 폭풍 (14) 아슈레이 7 폭풍 7장 폭풍 (14) 퍼억---- 배운 것은 아니지만 멋진 어퍼컷이 순간 작열했다. "폐. 폐하!!!!" 어퍼컷을 날린 장본인은 다름 아닌 경하. "헉. 헉. 이…이………." 씩씩거리며 막 달려들려는 경하를 뒤에서 황급히 로운과 기엘이 붙들었다. "이거 놔!! 안 놔?!!!" "폐하. 괘. 괜찮으십니까?" 미타남작이 황급히 달려와 로렌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빨랑 놔!! 저걸 그냥 당장!!!" 로운은 눈을 감아버렸다. 앞날이 감감해져 왔기 때문이다. 저런 반응을 일으킬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순간 경하를 막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심정은 기엘도 마찬가지였다. 바둥 바둥 대면서 그냥 두면 당장에라도 발길질을 해버릴 듯 한 경하를 두 사람은 몸을 던져 막고 있었다. 경하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은 지금까지 몇 번, 목격한 적이 있는 그들이기에 더더욱 있느 힘껏 말이다. "이런 무례한!! 이곳에 들이닥친 것만 해도 당신들은…." 항의를 하려는 미타남작의 팔을 로렌이 잡아당기며 끼여들었다. "아니. 아니 괜찮아. 미처 피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는 것이고. 안 그런가? 그리고 무엇보다 무례를 범한 것은 내 쪽이 먼저이니 말일세." 로렌은 얼얼한 턱을 문지르며 경하에게 눈짓을 했다. "실례했소." "조, 조심하란 말야!!" 잔뜩 긴장했던 실내가 로렌과 경하의 합작 공연으로 인해 갑자기 긴장이 풀 어져 버렸다. "일단은 내 소개를 했으니 그쪽도 자신의 소개를 해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 까?" 미간에 주름이 가득 잡힌 미타남작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로렌은 자신이 앉 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어디까지나 여유로운 '황제'만의 걸음걸이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로렌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황제의 얼굴을 정면으로 때리고도 무사할 수 있는 녀석은 이 녀석 밖 에 없을 거야.' 로운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왔다. "요란스러운 등장이군. 오랜만이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하라스다인 장로가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 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님." "그래." "자아. 부자상봉도 좋지만 역시나 나는 왜 당신들이 이 시간에 이곳까지 찾 아왔는지가 궁금하군." 한쪽 팔을 팔걸이에 걸친 로렌은 턱을 괸 포즈로 재미있다는 듯 경하 일행 을 바라보았다. 그의 그런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로운은 먼저 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로운 디 로크레슈. 미메이라의 기사입니다." 휘익--. 로렌의 눈썹이 치켜올라간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마찬가지로 미메이라의 기사입니다." "에또… 나는 적당히 생략." 이리야가 뻔뻔스럽게 말하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미타 남작의 얼굴이 더더욱 험상궂게 변했다. 이리야의 옆에 서 있던 시유는 사람들의 눈이 자신에게 주목되자 움칠하면 서 이리야의 뒤로 숨었다. 그런 시유를 보고 있다가 경하가 대신 그녀를 소개했다. "그러니까 이쪽은 시유라고 제 동생벌 되는데. 이쪽에 실례한 건 나중에 말 을 하죠." "아아. 모쪼록." 분명 납치임에 틀림이 없건만 로렌은 얄미울 정도로 태평했다. 그 태평한 얼굴을 보고 있던 경하는 아까전에 로운과 기엘을 뿌리치고 한 열댓번쯤 발길질을 해줄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은 인사 타임! "그리고 나는… 으음. 로운. 기엘. 난 뭐라고 소개를 하면 되는 거야?" 엉뚱하게 질문을 하는 경하덕에 이번에는 로운과 기엘이 헛기침을 할 차례 다. 하지만 경하는 여전히 말뚱 말뚱 기엘과 로운에게 눈으로 질문을 하고 있다. 결국 기엘이 항복을 하며 대답했다. "원하시는데로, 있는그대로 답하시면 됩니다. 경하님." 기엘의 말에 경하는 일단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역시 이 런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쑥스러운 자리다. "뭐. 이름은 경하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것보다는 지금은 현재 으음…. 미메 이라의 수장 대리라고 해두죠. 그게 정확할테니까." "수장 대리?" "예. 수장 대리." 로렌의 질문에 경하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군더더기 없는 진실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좋아. 일단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쪽에 앉도록 하지. 그리고나서 이렇 게 갑작스럽게 날 찾은 이유를 말해 주었으면 하는데." 로렌의 말에 하라스다인 장로가 나섰다. "폐하. 이것은 저희 미메이라인들만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하라스다인 장로의 나름대로의 배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경하는 갑자기 뒤로 돌아 소근 소근 거리며 기엘과 로운에게 질문을 했다. "황제가 있는 쪽이 낫지 않아?" 소곤거렸지만 그 목소리는 조용한 실내에서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다. 덕택에 이번에야말로 미타 남작은 폭팔 일보직전이 되었다. "무례한 언동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어디까지나…." "카스핀." 로렌이 날카롭게 미타남작을 불렀다. "예. 전하." "지금부터. 내가 지시할 때까지는 부디 함구해 주길 바라네." "폐하. 하지만…." "수장 대리라고 하지 않은가. 저 친구와는 동격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네." "그러나 폐하. 이런 일은…." "카스핀. 함구하라 했네." "…………." 말하고 싶은 것은 산더미 같지만 결국 미타 남작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 다. 로렌이 저런 단어를 이용하여 함구하라 할때는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된 다는 것을 그는 경험상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장난기가 가득해보이지만 머릿속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 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여기까지 찾아온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겠지. 물론 나는 그 이외 에 다른 것을 저 친구들에게 묻고 싶지만 그것은 조금 미루어 두도록 하지. 자아…." 로렌이 비어 있는 자리를 경하에게 권했다. 경하는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일단 마음 같아서는 로렌의 근처에는 가고 싶지도 않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 른 것이다. 힘들여 이곳까지 온 목적을 이룰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자리다. "경하님." 기엘이 경하의 등을 살짝 밀었다. "아. 으응." 경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 자리로 걸어갔다. 그 뒤를 로운등이 조용히 따랐다.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어두운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그러니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에는 나름대로의 사 정이 있으니 미메이라에서 황비를 맡겠다고 하는 이야기는 철회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가설명은 쏘옥 빼고 경하는 로렌에게 말했다. 하지만 역시 로렌은 그 부가 설명을 원하는 것 같았다. "흐음. 하지만 이유도 없이, 그리고 비록 자네가 미메이라의 수장 대리라고 하나 내가 그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들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이렇게 미메이라의 사신께서 내 앞에 앉아 계신데 말이야." 찌익--하고 경하의 눈초리가 하라스다인의 장로에게 돌아갔다. '사실은 저 아저씨가 모조리 원흉이라고 원흉.' 실상은 조금 달랐지만 경하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하라스다인 장로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거죠? 나를 시…." 시집이라는 말을 하려다 말고 경하는 입을 다물었다. 일단은 지금 경하는 어디까지나 시안이 아닌 경하 본인이기 때문이다. 차마 본인의 입으로 나는 여장을 하고 있었소 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유나 여하튼 미메이라의 사람을 황비로 보내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요." 경하는 단도직입적으로 하라스다인 장로에게 물었다. 하라스다인 장로에게 좌중의 시선이 집중된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경하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입다물고 있어보았자 되는 건 하나도 없어요. 말씀해주세요." "말씀해주십시오. 아버님. 아버님께서야 말로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지 않 습니까? 어째서 이런…." "기엘. 내가 묻고 있잖아." "죄송합니다. 경하님." 기엘이 고개를 숙인다. "흐음. 내가 자리를 피해야할 듯 한데." 하라스다인 장로가 입을 다문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로렌이 슬며시 나름 대로는 신경을 써서 말을 했다. 하지만 하라스다인 장로도, 경하도 그런 로 렌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실 말한 장본인인 로렌도 진심으로 말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자네에게 대답해야할 이유를 모르겠네." 한참을 뜸을 들인 하라스다인 장로가 결국 입을 열었지만 그의 대답은 경하 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방향이 틀렸다. "이것 봐요. 아저씨. 그래도 기엘의 아버지고 해서 나도 엄청나게 참아가면 서 말을 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화가 나면 일단 안면몰수가 기본인 경하가 탁자를 콰앙하고 쳤다. "사람을 그렇게 힘들게 했으면, 이정도 쯤에선 아저씨도 좀 양보를 해야할 것 아니예요. 내가 무슨 팔자가 좋아서 여기까지 끌려와서 이러고 있느냐구 요. 다 아저씨랑 신관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안 그 래요?" 생각 같아서는 하라스다인 장로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어버리고 싶은 심정 이다. "팔자가 그러려니 하고 사람이 참고 있는데 그런식으로 말하는 되는 겁니까 ? 네!?" "그런 것은 아니니 걱정 말게. 난 단지, 현재의 미메이라와 제국간의 관계 에 있어 자네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뿐이니까. 그리고 말이 나와 서 하는 말이지만 자네가 내게 말을 해라 마라 할 자격이 어디 있는가. 자 넨 그저 임시방편인 대리인일 뿐이네. 그것을 잊지 말게나." 타앙-- 경하는 주먹으로 육중한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섰다. 생각을 해도 해도,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다. "자격? 지금 어떤 자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경하님." "말리지마! 기엘 진짜로 열 받았으니까. 정말이지 기가 막혀서." 경하는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힘들여, 고생하며, 애를 태우며 이곳까지 왔다. 그래도, 희망이 있기를 바라며….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제국의 황제라면 이런 기분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라스다인 장로가 말하는데로 어떻게 보면 경하는 관련이 하나도 없는 사 람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경하는 자신이 믿고, 좋아하고 그리고 아끼 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것을 송두리째 거부당한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는데 벼랑에서 등떠밀려 내몰린 그런 기분이다. "…케인." 하라스다인 장로를 노려보며 경하는 차가운 목소리로 세나케인을 불렀다. "바람의 주인이 명한다. 모습을 드러내라 세/나/케/인." 경하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경하를 중심으로 차가운 바람이 소용돌이 치며 불어 나왔다. "…………!!" 경하의 긴 머리카락이 사방에 흩날리고 내실 여기저기에 놓여있던 작은 장 식품들과 벽에서 타오르며 붉을 밝히던 횃불까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 다. 불어나온 바람은 로렌의 기억속에 있는 그것과 동일 한 것이었다. 흩날리는 은백의 머리카락과 은회색의 눈동자.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기억을 잃은 시안이라는 아름다운 바람의 여 신의 얼굴. 하지만 그의 앞에는 지금 기억속의 그녀와 꼭 닮은 한 소년이 있다.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 걸까?' 로렌은 눈가를 스치는 바람에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무거워진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봐야 하는 거지?' 흔들리던 횃불이 마악 꺼지려는 찰나 소용돌이치며 불어 나오던 바람이 순 식간에 한자리로 모여들며 뚝하고 끊어져 버렸다. 그것은 폭풍이 불다가 순간 잠잠해진 것처럼 기묘한 고요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자리로 모여들은 바람이 천천히 인간의 형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얼굴과 팔과 다리, 그리고 짧은 머리카락 한올 한올까지, 바람이 정형화되 어가는 과정이 그들의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로렌은 그 바람의 형상화 장면을 두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저것은……." 잠시 후 그들의 앞에 반투명한 인간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세나케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확인한 경하는 한자 한자 발음을 끊어가며 하라스다인 장로를 향해 말했다. "장로님이시라면 아시겠죠? 세/나/케/인이 누구인지." "…………." 묵묵무답으로 일관하던 하라스다인 장로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바람의 세나케인이 제게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바람의 백성들이 사 는 미메이라에 제가 연관이 없다는 소리는 하실 수 없을 겁니다. 안 그런가 요?" 경하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하라스다인 장로의 눈은 세나케 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바람의, 미메이라의 수호신 세나케인." 떨리는 하라스다인 장로의 목소리가 세나케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재미있군." 정말로 재미있다는 목소리로 로렌이 말했다. 그는 바람과 함께 나타났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세나케인의 존재에 강한 호 기심을 가지고 있는 듯 경하에게 몇차례나 세나케인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렌에게는 이상한 거리감을 가지고있는 경하는 로렌이 하는 말에 건성 건성 대답을 할 뿐이다. 세나케인이 모습을 드러낸 후 하라스다인 장로의 경하에 대한 태도는 눈에 띄게 변해있었다. 그것은 경하를 수장 계승자라기 보다는 바람의 주인으로 써 인식을 한 까닭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마치 자신의 부하에게 말하듯 경하를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말씀해주시겠어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별다른 뜻은 없네." "뜻이 없으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건가요? 기엘은 장로님의 아들이예 요. 뿐만 아니라 미메이라의 모든 기사들이, 신관들이 모두 누군가의 아들 이고 딸이고 그리고 아버지라구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사지로 내몰 수 있죠?" "누가 사지라고 말했는가. 나는 내 아들을 사지로 몰아 넣은 적이 없네." "아아. 알았어요. 폐이요트 산맥이랑 여기저기서 그놈의 하셰카로 고생해서 기엘이랑 로운이랑 이리야가 죽을 뻔한 것 정도는 지나간 이니까 넘어가 죠." 경하가 말을 하는 동안 하라스다인 장로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 것을 눈치챈 기엘은 가슴속 한구석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이 국혼인지 뭔지를 깨 놀거니까." "아. 여기서 잠깐." 그때까지 연신 웃음을 띄우고 경하와 하라스다인 장로가 언쟁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로렌이 경하의 말을 막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척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들고는 경하에게 물었다. "다른 것들은 일단 젖혀두지. 나중에 들으면 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자네가 일단 국혼을 깨놓느니 말을 하는 이상 나도 번외자는 아니야. 지금부터는 나도 자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좀 알아야겠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 록 설명해 줄 수 있나?" "그전에 내가 먼저 하나 물어도 될까요?" "물론.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로렌이 두팔을 벌려 보이며 아량있게 이야기한다. "단도 직입적으로 묻죠. 미메이라에 원하는 게 뭐죠? 구체적으로?" "…………." "원하는게 뭐냐구요. 말이 국혼이지 미메이라인을 황비로 삼고 그리고 뭘 요구할건가요?" "…무엇을 요구할지 그게 궁금한가?" "물론이죠. 그리고 하라스다인 장로님께도 묻고 싶어요. 시안을 아니면 시 유를 황비로 보내고 제국에 원하시는게 뭐죠?" 고요함이 아닌 침묵이 순간 감돈다. "말씀해주세요." 질문을 받은 두사람에게 경하는 다그쳤다. "…흐음. 정말로 단도 직입적으로 묻는 군."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역시 로렌이었다. "좋아. 그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으니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지. 이 미 이쪽에는 서신을 전달한 터였지만." "서신?" "뭐. 간단해. 황비의 지참금으로 미메이라의 전 기사단을 원하네. 가능하다 면 신전 기사단 까지 전부." 번쩍이는 로렌의 눈빛. 모든 사람이 숨을 들이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며 그들은 놀라움을 어떻게든 감추려 노력했다. "그래서. 하라스다인 장로님. 장로님이 원하시는 반대급부는 뭡니까?" 그 안에서 놀라지 않고 끝까지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던 것은 경하뿐이었다. "…제국으로의 진출." 경하의 질문에 하라스다인 장로는 잘 열리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어 대답했 다. "…………." "뭐 내가 원하는 지참금을 내어 준다면 미메이라의 남쪽 지대. 가이칸의 북 서부 지방정도는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내어주지." "당신더러 대답하라고 하지 않았어!!!" 경하가 로렌에게 소리쳤다. "내거는 조건에 답을 한 것 뿐이네." "입다물고 있으란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너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지? 무엇을 알고 있기에 이렇기 방약무도 하게 나서는 건가? 모르고 있으면 입을 다물라고? 그렇지 않아. 나는 알기 를 원해." 격한 경하의 말에 맞추어 로렌의 말도 격해진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엘러들의 힘을. 신의 축복으로 내려진 타고난 힘을 왜 사용하지 않는 거지? 그만큼 축복을 타고 태어났으면서 어찌 저 작 은 땅에 안주는 건가? 왜!!" "할 수 없으니까!!" 로렌의 항의에 경하는 악을 쓰듯 소리를 쳤다. 그때였다. "할 수 없기에 더더욱 원하는 걸세." 격한 두사람의 목소리 사이로 낮고 어두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신의 축복? 그래 우리는 축복을 받고 태어났지. 미메이라의 한없는 은총 을. 그런데 어찌해서 우리는 한 발자국도 신의 땅에서 나갈 수 없는 건가? 누가! 누가 그것을 정했지? 신의 품을 떠나 인간의 땅에 발을 디디지 말라 고 누가 명령한 건가. 어쩔 수 없는 축복의 속박에 매어 평생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좁은 땅에 갇혀 안주하라고 누가 명령한 것인가!?" "……아버님." 하라스다인 장로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져 간다. "할 수 없으니 원하는 걸세. 더욱 더. 나는 내 아들에게 그리고 미메이라의 축복받은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어." 높아져가는 목소리는 공기에 실려 그의 감정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 전해진 다. "넓은 땅과 자유롭게 바람이 부는 대지로 내 아이들을 내보내고 싶었을 뿐 이다. 이 땅을 보게. 끝도 없는 대지와 끊없는 바다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 는데 어찌해서 일생을 한곳에 갇혀 살아야 하나. 죽음? 그것이 무슨 장애물 이 되지? 설사 내일 죽으면 어떠한가. 한 순간이라도 자유롭게 숨쉬고 싶었 을 뿐이야. 단 한순간이라도!!" 그것은 노기에 가득찬 목소리가 아니었다. 평생을 미메이라에서 살아온 한 바람술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바람의 백성으로 태어났기에 죽음을 넘어선 자유를 갈망하는 바람의 민족의 갈망이었다. "아버님. 이제 그만 하세요." 기엘이 그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하세요." 털썩. 하라스다인 장로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경하는 하라스다인 장로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아버님의 마음. 잘 압니다." 기엘은 그런 경하대신 자신의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 역시 바람 술사이기에 하라스다인 장로의 심정을 가슴 아프도록 생생히 느낄수 있었다. 축복이자 동시에 신의 족쇄나 다름 없는 그들의 능력. 그것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내가 모르는 진실이 있는가 보군." 로렌은 격정을 쏟아낸 뒤 눈에 띄게 기운을 잃어버린 하라스다인 장로대신 경하에게 그가 궁금한 사실을 질문했다. 시간은 넘치도록 흐르고 있지만 아무도 자리를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 다. "그게 무엇이지?" "말해준다면. 당신의 계획을 철회할 건가요?"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라면." 하라스다인 장로의 말에서 여렴풋하게 윤곽을 잡을 수는 있었지만 로렌은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가 모르는, 바람의 백성들에 대한 진실을. "미메이라인은…." "…………." "아니. 모든 신국인이라고 해야 옳겠죠. 신국인은 신의 축복을 받은 땅에서 오랜 시간 동안 떠나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과 지참금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지." "당신-- 귀먹었어? 왜 말을 못 알아 들어!" 간신히 진정되는가 했더니만 이번에는 경하가 하라스다인 장로의 뒤를 이어 흥분을 해버렸다. "말이 심하시오!!" "당신은 입 닥치고 있으라고 이 사람이 말했잖아!!!" 미타남작에 지지 않고 경하가 서슬이 퍼런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입 닥치고 있으라면 좀 꾸겨져 있어! 젠장!!" 성질이 나면 으레 그러듯 경하는 육중한 탁자의 다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 다. 그런 경하를 로렌은 의외로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가 아는 한 자신을 제외하고 미타 남작을 단 몇 마디로 제압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빙긋 빙긋 웃고 있는 로렌에게 경하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지 뭘 그렇게 꼬치 꼬치 캐물 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 들었잖아. 미메이라의 기사단? 그래 엘러로 이루어진 기사단은 당신이 보기엔 대단할지 몰라. 실제 내가 봐도 대단하니까. 하지만 시한부의 기사 단을 어디다 쓸 거지?" "시한부의 기사단?" "그래. 미메이라인은 미메이라를 떠나면 오래 살수 없어. 능력이 좋으면 좋 은 바람술사 일수록." "…………." "당신 계획은 말짱 헛거야. 꿈 깨. 그리고 미메이라에 손대지 말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단 말이야." "그래. 그렇군." 로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그것은 로렌 스스로도 의문점으로 여겼던 부분이었다. 아무리 신국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자그마한-물론 로렌의 입장에서 볼때-신국에서 단 한발자국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아슈레이 대륙에 신국이 4개나 있는데도 대륙에선 신국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행하는 자들조차도 드물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더, 로렌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제 마악 생겨난, 경하를 본 후에 떠오른 궁금증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예외가 있는 듯 한데?" "예외?" "그래. 바로…." 로렌은 손가락으로 경하를 가리켰다. "너와 네 기사들은 어떻게 된 거지? 카스핀의 보고로는 너희들은 적어도 상 당한 기간동안 아슈레이 대륙의 곳곳을 여행했다. 안 그런가?" "에? 그. 그거야…." 경하는 자신이 바람의 주인이기 때문에라는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이 남자 앞에서는. '그렇게 말했다가는 당장에라도 내 발목이라도 분질러서 여기다 가두어 버 릴 것 같단 말이야. 이 남자.' "그거야, 중간에 미메이라에 들렀었으니까… 어떻게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정도면 좋을 듯 한데? 나는." "…………." 빙긋 거리고 있는 로렌은 왠지 하나도 납득한 얼굴이 아니다. "당신 지금까지 내가 한말 어디로 들어먹었어?" "물론. 귀 씻고 잘 들었는데?" "그런데 아직도 그 소리야?" "장시간 여행후에 잠시 미메이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 네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닌가?" 아뿔사-- 경하의 얼굴이 흑빛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웬 꼬투리를 이렇게 잡아. 이 인간.' "그점은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경하님의 경우엔 아직 수장 계승자가 되 신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나이도 어리시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 훨씬 그 회복속도가 빠를 뿐입니다. 실제 경하님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 저희들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미메이라를 떠나 있으면 몸의 부담 을 견디기 힘들 정도니까요." 경하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는데 로운이 적절하게 로렌에게 대답을 했 다. 그러자 로렌은 언제 자네에게 물었나 하는 표정으로 로운을 바라보았다. "흐응…." "무엇보다 폐하께서 미메이라 인 중 누군가를 황비로 맞으신다면 황비의 위 치에 오른 이상은 함부로 궁을 비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황비를 일년에 몇 번씩이라도 미메이라로 돌려보내실 수 있으십니까? 하물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회복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기는 하군." 끄덕 끄덕. 로렌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는 건지 경하는 의심이 갔다. 하지만 의심이 가더라도, 경하는 이 황제를 이해시켜야 했다. "하라스다인 장로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난, 기엘이나 로운이 미메이라 아닌 다른 곳에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 고 싸우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그러니까…." 그말은 황제보다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그의 기사들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포기해 줘." 감히 황제에게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세상에 단 한사람 경 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면?" "포기하지 않겠다면 갖은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제국에 대항할 수밖에." "방금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미메이라의 기사들은 오랜 시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싸우진 않아도 스스로를 위해서는 싸울 수 있으니 까." "…………." "그리고 나 또한." 경하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쪽이 훨씬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케인." 굳이 명령을 내리진 않았다. 단지 한마디. 세나케인을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족하다. 세나케인은 곧 경하의 마음속에 담긴 뜻 그대로를 따라 조금전과는 전혀 다 른 양상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빼곰하게 열려있던 창으로 바람이 새어나갔나 싶은 순간 화려하게 꾸며진 창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거센 바람이 창으로 새어 들어왔다. 휘이이이이----잉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그 창에서부터 안으로 거세게 밀려들어왔다. 슈르르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단단하게 지어진 황궁 전체가 무엇인가에 부대끼는 소리같은 것이 들려왔다. 로렌은 소란스러운 바람소리에도 동요 없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그 작은 창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두움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무엇.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거니까." "…………." 로렌의 앞에 앉아있는 인간과 이 내실에 모여 있는 정체 불명의 인간 같지 도 않은 저 미메이라 인들이 미치도록 싫은 미타 남작이었지만 지금 그는 그의 황제 앞에 앉아 반 강제로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경하의 말 하 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애초에 미메이라인을 황비로 맡겠다고 하신 폐하께 잘못이 있는 것일지도. ' 그는 감히 불경스럽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로렌이 황비로 미메이라인을 맞이하겠다는 소리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늦은 밤에 이런 장소에서 저런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대고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하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 경하라는 소년과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황제는 위엄이나 체통 같은 것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있는 것이다. 로렌은 미타 남작이 상대가 아니라면 자신을 향해 나, 또는 내라는 대명사 를 쓰지 않는다. 거의 모든 공식석상을 포함해 시녀들이 단 한명이라도 곁을 지킬 때는 어디 까지나 '짐'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런 그가 경하라는 저 소년과 이야기 할 때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저 소년을 환영해야 하는 것인지, 당장에라도 궁 밖으로 내쫓아야 할지 정 말 판단이 서지 않는군.' 힐끔. 그는 먹과 같은 짙은 어둠에 잠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의 한귀퉁이에 은빛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스쳐지나가고 있 었다. 순간 미타 남작은 소름이 온 몸에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러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는 황급히 황제의 앞에 앉아있는 소년, 경하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앉아있지만 누구보다,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 인 간답지 않은 인물이 바로 그다. 미타 남작은 조금이라도 빨리 저 소년을 로렌에게서 떼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로렌은 그런 미타 남작의 심정은 하나도 생각해주지 않는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아." "……에?" "이렇게 하지." "…………." 흠칫 흠칫하며 경하는 로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도대체 이 인간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지?' "앞으로 내가 떠나도 좋다고 할 때까지. 그대는 이 궁에 머물러주게." "에엑---?" 갑자기 등에 닿아있는 푹신한 의자의 쿠션이 따끔 따끔한 바늘 쿠션으로 변 하는 기분이든다. "자. 잠깐요. 내,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아! 그리고 그렇 지. 저기 저 시유는 왜 납치를 해다가 여기 가둬 준 겁니까?" 이번에는 로렌이 입을 다물 차례다. 그러나 경하의 그런 예상과는 전혀 다 르게 로렌은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시간에 우리 경비병과 기사를 몇 명이나 다치게 하고 이런 곳까지 쳐 들어 온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할건가?" "다치게 한적 없어요! 그냥 잠재웠을 뿐인데." "그래도 이 궁에 무단 침입을 한 것은 틀림 없을 텐데?" "…………." 말싸움에 있어서 왠지 경하는 로렌의 상대가 안 된다는 생각이 그 둘을 지 켜보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스믈 스믈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자아. 이렇게 합시다." 그때까지 시종일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빙긋 빙긋 웃어대던 로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폈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올린 그는 조금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 다. 그의 표정은 제국 황제의 바로 그것. "나는 이제 피곤해 좀 쉬었으면 하는데. 그대들은 어떠한지?" "………."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경하는 이제 로렌의 뻔뻔스러움에 경악에 경악을 더해가는 중이다. "그대들이 궁에 무단 침입을 한 사실은 내가 저 소녀를 다른 어떤 인물로 착각하여 이곳까지 데려온 것에 대한 사과로 눈감아 주겠소." '그게 말이 돼!! 당신 잘못이잖아 당신!!!' 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경하는 돌아올 그의 말이 두려워 차마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내게서 미메이라를 포기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다면…." 로렌은 몸을 돌리며 한쪽눈으로 경하를 바라보았다. "도망치지 말고 자네가 이 궁에 내가 원하는 동안 머물러 있는 방법 뿐이 야. 아. 그전에 저 밖에서 시끄럽게 불고 있는 바람 좀 어떻게 해주지 않겠 나? 카드미엘의 모든 사람들이 폭풍이 온다고 착각하면 곤란 하거든." "……이봐 당신." "물론 어떻게 보면 자네 존재 자체가 내겐 폭풍과도 같았다고 해두지. 그리 고 또 하나. 내 이름은 당신이 아니야. 로렌이라고 불러주게. 카스핀." "네. 폐하." "부족함없이 '미메이라'의 사신 일행을 접대하라 이르게. 자아 그럼. 여러 분. 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로렌은 미타 남작을 뒤에 남기고 총총히 사라져 버렸 다. 자리에 남은 남자들은 미타 남작의 그 완전히 일그러져 험상궂어진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 쉴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여러분들이 쉬실 장소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미타 남작의 말은 이를 박박 갈고 싶지만 참는 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말을 마치고 미타 남작은 경하 일행이 들어왔던 바로 그 문을 열고 사라 져 버렸다. 경하는 그때까지도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주먹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분을 참고 있었다. 미타 남작이 막 사라진 직후 경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람이 미친 듯 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작은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창문을 열고는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케인. 사람들 집 빼고 이놈의 궁 구석 구석 정원이고 뭐고 다 날려버려!!! ! 젠장!!! 엉망 진창 난장판을 만들어도 좋으니까 마구 날뛰라구!!!" "…………." "…………." 그 뒤에서 기엘과 로운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채 경하를 바라 볼 수밖에 없 었다. 그들의 옆에서 이리야는 한숨을 파악 내쉬기 시작했다. *** "가시는 겁니까?" "그렇네. 굳이 이제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버님." "………." 다음 날 이른 아침. 하라스다인 장로는 자신이 대동해온 기사들과 함께 먼길을 떠날 차비를 하 고 있었다. "황제는 그 아이가 맘에 든 것 같더군." 과연 어떤 의미에서 마음에 들어하는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 지만 로렌이 경하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말한 만큼,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엘. 너는 묘한 수장을 만난 모양이구나." "아무래도요. 아버님." "늙었나보다. 벌써." 하룻밤사이 갑작스럽게 표정이 변해버린 그의 아버지를 기엘은 안타까운 눈 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여전하다. 기엘. 설사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너 와 네 아이들이 넓은 세상을 보며 살았으면 한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압니다."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지않아." "경하님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겁니다." "………정말로 같이 돌아가지 않겠느냐?" "시유님을 부탁 드립니다. 아무래도 레이죠 장로님께서 너무 걱정을 하셨던 터라." "그것도 내 잘못이라는 소리로 들리는 구나." 하라스다인 장로는 자신의 아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뜯어보았다. 조금 마르긴 했지만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이전처럼 생기에 가득 차 있지 만 무엇인가 의미가 전혀 다른 생생함이 그의 아들의 얼굴에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 경하라는 소년." "예. 아버지." "정말로 바람의 계승자가 된 것이냐?" "아버님께서 직접 목격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굳이 보지 않으셔도 느낄 수 있지 않으세요? 이렇게…." 기엘이 손을 펴 들어올렸다. "이렇게 의식만해도 손가락 끝이 아릴 정도의 파장을 말입니다." "…………." "저를 경하님의 수행기사로 보내주신 아버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가 추천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결국 허락해주셨지 않습니까." 하라스다인 장로는 마지막 짐을 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기 무섭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로운이 나타났다. "하라스다인 장로님. 준비 마치셨는지요." "그래. 프리스트 로운." "이제는 프리스트가 아닙니다." "아. 아아 그랬지." "………." 로운은 자리를 비켜 하라스다인 장로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하라스다인 장로는 앞장서서 걸어가며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엘을 잘 부탁하네. 저 녀석은 다 좋지만 너무 외골일 때가 있어." "잘 알고 있습니다. 친구니까요." "아버님 무슨 말씀을." 복도를 지나 한참을 걸어가자 갑자기 눈앞이 화악- 트이면서 넓은 그러나 상당히 지/저/분/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단하구나." "막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로운이 스스로를 책망하며 말한다. 그냥 엉망인게 아니다. 수령이 수십년은 물론 백년이 넘어보이는 나무들까 지도 전부 뿌리채 뽑혀 넓은 궁 여기 저기에 쓰러져 있었고, 전통양식을 따 라 일류 기술자가 화려하게 꾸며 놓았던 정원과 아름다운 정자같은 것들은 그 흔적도 없이 완전 싹쓸이 상태가 되어 있었다. "정말로 어젯밤 폭풍이 불었구나. 그래. 그 폭풍의 진원지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게냐."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아직." "그래. 이정도의 폭풍을 일으켰으니 쉬어야지." 하라스다인 장로는 너무나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새 카드미엘의 상공에서 불었대던 바람덕에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어 맑 고 깨끗했다. "연락을 해야겠구나. 키리엔에…." 그 하늘의 한쪽 구석이 조금 물들어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키리엔으로 돌아간다고…." *** "정말로 그곳을 내어주라고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카스핀." "하지만 폐하. 그곳은…." "알아. 하지만 당분간만 바꾸어 두면 되는 것 아닌가?" "폐하." 두 사람이 옥신 각신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경하 일행에게 이전에 '시안'이 머물렀던 그 탑 바로 아래의 내실을 내어주라는 명령 때문이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디가지나 탑의 방은 후궁전 쪽에 가깝지 않습니까? 아무리 폐하의 사저로 쓰셨다해도." "…………." 미타 남작은 결코 양보할 수가 없었다. "저도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들 일행을 궁에 붙들어 두시겠다고 했을때도 반대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안했다기보다는 못한 것이지만. "또한 그들을 환대하라 하셔서 환대했습니다. 그러니까 폐하께서도 한부분 에서 쯤은 물러나주십시오. 적어도 시녀들과 경비병들이 눈이라도 생각해달 라는 뜻입니다. 폐하." "시끄럽네 카스핀." "폐하!!!" "알았네 알았어. 자네가 마음데로 하게. 하지만 절대로 가까이 두게. 멀리 두어서는 안 돼." "감사합니다. 폐하." 미타 남작은 오랜만에 미간에 잡았던 주름을 펴며 미소를 지었다. "좋겠어. 자네는." "예?" 이번에는 로렌이 미타 남작의 그런 환한 웃는 얼굴에 조금더 기름칠을 해줄 차례다. "자네가 원하는데로 미메이라인 황비는 포기하게 되었으니 말이야." "……폐하." "하지만 조금은 내가 원하는 유희를 즐기게 해주게나." 로렌은 궁이 훤히 보이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폭풍을 만났는데 이정도면 양호하군."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는 궁이 그의 수려한 얼굴에 요상한 미소를 만들 어 낸다. "미메이라를 포기한다고 해서 내 야망이 꺾이는 것은 아니야. 물론 지체는 될지 모르지. 하지만…." 그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두 팔을 뻗었다. 손가락을 꼬옥 붙여도 바람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그 미세한 틈으로 비 집고 들어온다. "막으려해도 막을 수 없는 이 바람처럼… 나는 아슈레이 전체에 바람을 물 게 할걸세." "…………."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바람을…." *** "그러니까아----!!!! 내가 왜 저 능글맞고 이상하고 비열하고 야비하고 뻔 뻔한 놈의 말을 들어줘야 하냐구우!" "…그거야 네가 저 능글맞고 이상하고 비열하고 야비하고 뻔뻔한 황제의 요 구에 응했으니까." "내가 언제!!" "미메이라를 포기시키려면 남아라 했는데 지금 궁에 앉아있는 건 그럼 누구 야?" "………그, 그건…." "그게 그거야. 그러니까 좀 입을 다물고 있어." "그래. 한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잠시 잠깐 이곳에 머문다고 해서 뭐 문제 될 것은 없을 거다. 하라스다인 장로님이 키리엔에 도착 하실때까지는 시간도 넉넉하고 시유도 돌려보냈으니 더 고생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래도!! 저 황제가 싫다고 황제가!!" "황제는 우리도 싫어." 물론 그 뒤에 싫은 이유는 굳이 밝히지는 않는다. "아아악---- 미치겠네 정말." 늦은 아침. 경하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에서 데굴 데굴 구르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흐흐흐흑. 이제 끝난거잖아. 우어--- 이젠 돌아가고 싶어. 으으으으." 같은 비명소리를 다 만들어 내며 경하는 침대위를 벌써 30여번째 데굴 데굴 돌아가며 구르고 있다. 평화로웠다.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도, 넓어서 4번을 굴러도 떨어지지 않는 넒은 침대 도, 세명정도가 같이 들어가도 괜찮을 욕조에서 혼자 첨벙거리는 것도, 어 느것 하나 조용하고 평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도 로렌 녀석은 싫어." 라는 경하의 볼맨 소리만 없다면 말이다. 폭풍후의 고요함에 경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한번 데굴 데굴 침대 위를 굴렀다. 부디 이 고요가 폭풍전의 고요함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정말 마지막이길 바라며…. ------------------------------------------------------- 에또..일단. 7권은 마감이옵니다. ...(하늘 한번 본다.) ...자아 그럼 저는 8권에 들어가기 전에 겨울잠을 자러갑니다. ^^;;; 좋은 겨울 되세요. [아슈레이 8] 1장 나유에서 온 사신 (1) 아슈레이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가이칸 제국. 그 가이칸 제국의 황제가 사는 제국의 수도 카드미엘의 한 가운데에는 제국 의 황제가 일년의 대부분을 머무는 웅장한 황제궁이 서 있다. 황제궁은 가이칸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은 아니었지만 대신 가장 웅장하고 규모있는 성이라 일컬음을 받고 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어느 누구든지 코를 하늘로 쳐들고 우쭐거려도 수 도에 사는 사람에게라면 절대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가이칸내에서도 제국의 황제가 기거하는 성에서 일한다는 것 만큼 영광스러 운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들이 모시는 대상은 최고의 핏줄을 타고 내려온 신의 대리자와도 같은 하 늘같은 황제와 그의 식솔들, 그리고 황제를 보좌하는 최고의 귀족들. 그것에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태자궁에서 일하고 있는 몇몇 사용인들에게 그런 자부심을 과 연 가져도 될지 고민하게 만드는 대상이 따악--한 명 그 궁에 존재하고 있 었다. 정식으로 등극은 하지 않았으니 명실 상부한 제국의 황제인 로렌이 기거하 는 태자궁이다. 그런 태자궁이건만, 문제의 사람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태자궁이라는 것을 거의 무시하고 있는 듯 싶은 것이다. 그는 덕분에 눈이 보양이 되는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하루 태자 궁에서 일하는 모든 여관들의 공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으. 따땃해서 조오타--." 쭈욱 기지개를 켜며 경하는 햇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흰색의 대리석 위에 드 러누웠다. 한가하다라는 말이 너무나 잘 들어 맞을 정도로 이 커다란 궁은 조용했다. 사실은 궁이 한가 한 것이 아니라, 그 커다란 궁에서 한가할 정도로 일이 없는 유일한 인물중 하나가 경하였기 때문이었지만 경하가 그런 것에 신경 을 쓸 인물은 아니다. 느즈막하게 일어나 누군가 차려다주는 식사를 먹고 한가하게 화원을 돌아다 보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햇빛을 받으며 낮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하는게 요 며칠간 경하가 한 일의 전부였다. "하아. 역시 여기가 제일 좋다니까. 바람도 잘 불고." 물론 거의 매일, 또는 거의 매번 그것을 방해하는 인물이 있어서 탈이긴 하 지만 말이다. "찬 대리석 위에 누워 계시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경하님." "시끄러워. 그러니까 햇빛으로 데워 지면 와서 눕는 거잖아. 온돌같다니까. " "그렇다고 해도, 공기가 찹니다. 경하님." "안 차다니까. 이 정도는 끄덕 없어." 경하는 잔소리를 해대는 기엘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사실이 그랬다. 지금까지 노숙을 해야했던 밤을 세어보면 두 손 두발의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모자를 정도다. 심지어는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가운데 차가운 기가 만연해 있는 동굴에서 잔 적도 있었고 바닥이 축축한 골짜기 어디에선가 드러누워 선잠을 청했던 적도 있다. '아아. 기엘만 없으면 정말 늘어지게 잘 수 있을 텐데.' 따위를 생각하며 경하는 잠을 청했다. 일생에 어디서 이런 호화 사치스러운 호텔 타입의 궁에서 이렇게 늘어지게 휴양을 할 수 있을까? '으음. 평생을 가봐라. 신혼여행 같은걸 가더라도 이런데서 묵지는 못할걸 ?' 경하는 씨익 웃으며 햇빛에 간질거리는 콧 잔등을 쓰다듬었다. 적어도 주어진 기회는 두 번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모르니 일단은 즐기고 보 자! 라는 것이 경하의 지론이었다. "경하님 그럼 이것이라도 덮으세요." "괜찮다니까." "그러다가 한기라도 들으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기엘이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의 어깨에 둘러져 있는 망토를 벗어 경하에게 덮어주려 실랭이를 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어김없군. 시간 하나는 잘 지키는데?" 기엘은 막 망토를 덮어주려다 말고 그 목소리에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경하가 호화 사치스러운 호텔 타입의 궁이 라고 부르고 있는 태자궁의 주인인 로렌이었다. 그의 옆에는 기엘이 경하에게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찰싹 붙어 있는 것처럼, 로렌의 오른팔인 미타 남작이 서 있었다. "…………." 말 대신 가벼운 목례로 예를 표한 기엘은 멋쩍은 표정하며 옆으로 비켜섰 다. "그리고 자네도 여전하군." 로렌이 기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기엘은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사신으로 왔던 하라스다인 장로의 아들인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정도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남에다가 최고 귀족 출신의 로열 나 이트. 하지만 그가 하는 양을 보면 정말로 그가 로열 나이트인가 싶을 정도로 경 하의 옆에서 시시콜콜 하나하나 수발을 들고 있는 것이다. 경하의 개인 시종이라고 해도 주위 여관들이 믿을 정도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기엘은 지금 로렌의 바로 옆에서 도끼눈 을 뜨고 있는 카스핀, 즉 미타 남작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미타 남작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남작'이라는 지위에다가 명실 상부한 로 렌의 오른팔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의 지위 정도는 가볍게 그 손아귀에 쥘, 그리고 현재로써는 실질적인 제국의 재상으로 여겨질 정도의 남자인 것 이다. 그러나 그런 미타 남작은 로렌이 늦게 잠들면 늦게 잔다고 잔소리를 하고, 피곤해 보이면 쉬라고 잔소리를 하고, 식사를 거르기라도 하면 침전까지 쫓 아와 몸이 상한다고 잔소리를 해대는 사람이다. '겉보기 등급은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건가?' 로렌이 기엘과 미타 남작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미타 남작이 알았다면 아마도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렌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일 뿐 입 밖으로 나올 리는 전혀 없기 때문에 미타 남작은 어디까지나 로렌의 곁에서 위엄(?)을 지키며 뻣뻣하게 서 있을 뿐이다. "어라…." 곧 제국의 황제로써 등극할 남자가 자신을 바라 보고 있건만 경하의 태도는 주위에서 몰래 그들을 훔쳐 보고 있는 여관들이 모조리 까무라쳐 버릴 정도 로 오만 불손하다. "뭐야- 당신. 또 방해야?" "방해라니 그럴리는 없지. 내 궁에 머무는 손님이 불편하게 지내는 것은 아 닌가 하는 걱정이 돼서 말이야." 여기 저기서 조그맣게 털썩- 털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미타 남 작의 신경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는 여관들의 출입을 전부 통제 시켜야 할지도 모르겠군. 저 사람 은 정말이지. 골칫덩이야.' 그는 로렌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경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타 남작의 입장에서는 저 경하라는 소년과 그의 곁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남자들이 아주 껄끄러울 수 밖에 없다. 이런 저런, 비밀을 다 듣고 났으니 이제 당신들에게는 볼일 없소---하고 보 내버리면 그만이건만, 그의 주군은 왠지 이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만이 아니다. 눈을 떼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다분히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좀 그만 두어 주셨으면 좋으련만.' 경하의 일행이 궁에 들어와 그와 그의 주군인 로렌의 앞에서 밝힌 진실들은 사뭇 충격적인 내용들이었다. 분명 보통이 아닌, 절대 일반적인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이 살고 있는 나라 신국. 마음만 먹으면 이 가이칸 제국의 수도 카드미엘 정도는 하루 아침에 쓸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슈레이 중간지대를 둘러싼 그 작은 나라에 그저 안주만 하고 있는 이유를 세상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했 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신국인들이 받은 축복이 그들에게 반대 급부로 요구하 는 속박. 현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비 신국인은 미타 남작과 로렌뿐이다. 틀림없이 충격적인 사실이긴 하지만 조금 입장이 다른 미타 남작에게 있어 그 진실은 그저 한순간 '그런--.'하고 혀를 몇 번 찰 정도밖에 안 되는 일 이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신국인들의 그 신비한 힘에 집착하는 로렌 때문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제국 내의 엘러들을 샅샅이 뒤져 찾아내라고 하는가 하면 미메이라인을 황 비로 맞겠다고 억지를 부렸을 정도다. 하루하루 위가 쓰릴 정도로 고민해오던 일들이 그 비밀을 듣는 순간 한순간 에 해결 되어 버렸다. '그래. 정말 억지라고 밖에는 말 할 수 없는 일이었지.'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황비의 일도 더 이상은 추진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기껏 시집와서 몇 년 살지도 못할텐데 제 아무리 로렌이라고 해도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다. '잘 된 일이고 말고.' 미타 남작은 고개를 들어 로렌이 하는 말을 하나하나 되받아 치며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경하를 바라보았다. 저 안하무인의 미메이라인의 언행정도는 미타 남작의 골칫거리들을 해결해 준 반대 급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힘을 쓰는 엘러들의 힘을 빌 필요는 없다. 제국의 일 은 제국인들의 힘으로도 충분히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신국인들 따위. 제국에는 필요 없어.' 묘한 감정이 미타 남작의 마음에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아 정말 귀찮단 말이야. 저 녀석." 한참 동안이나 경하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해가며 괴롭(?)히던 로렌이 돌아가 는 모습을 바라보며 경하가 투덜 거렸다. 물론 그 한참 동안 주위 여기 저기 숨어 있던 여관들이 얼마나 초토화가 되 었는지는 신만이 아는 일일 것이다. 경하의 투덜 거림을 듣고 기엘이 쓴 웃음을 지었다. "저분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경하님 뿐일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뭔가 약간 기엘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경하가 그에게 물었다. "예? 아. 그러니까. 저분도 경하님 못지않게 신경을 쓰고 있다 랄까요?" "무슨 소리야 그게. 난 저 자식이 귀찮다구." "그렇게 귀찮다고 하면서 계속 여기서 그렇게 죽치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뭐지?" 어디선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등장한 로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 했다. "매일 같이 '귀찮아. 신경쓰여. 피곤해'라는 세 단어로 일관하는 주제에 가 자는 소리는 절대로 안 한다는 사실이 제일 이상해." "에?" 갑자기 의표를 찌르는 로운의 말에 경하는 심장에 직격을 당해 풀썩 쓰러진 다. "…………." "그렇지 않아 기엘?" "그러고 보니. 그렇군." 로운의 말에 기엘이 동조했다. 일단은 편한(?)김에 긴장을 좀 풀고 있었던 탓에 무심코 넘겼던 사실이 있 는 것이다. "에헤헤. 그게 말이야. 로운. 기엘." 너무나 수상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향해 시선을 모으는 남자들에게 경하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 그러니까 편…편하잖아." "…………." "그런 이유로는 설명이 충분히 되지 않아. 평소의 네 성격을 알고 있는 우 리로써는 말이지." 로운의 눈초리가 원래의 그것보다 더욱 삐죽 위로 치켜 올라간다. 시인이 될 생각은 없지만, 여하튼 이제 어려운 일들은 대부분 처리했다. 물 론 여기 저기 산재한 작은 일들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각국의 사 정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제 길고 길었던 여정의 막이 내려야 할 시간. 그런데 그 서사시(?)의 주인공인 경하가 도통 그 막을 내릴 생각을 안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름대로는 껄끄러울 수 밖에 없는 제국의 수도 한가운데 떡하고 버티고 앉아있는 것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 좀 편하면 어때!!" 뭔가 난처해질 듯 하자 경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창 고생하고, 죽을까봐 심장 두근 두근 하고 산전 수전 다 겪느라 허리 가 다 휠 뻔 했는 걸. 조금 등 따시게 누워서 부른 배 좀 두들기고 있으면 어때! 손가락 까닥하면 먹을 것 같다주고, 아! 그래 무엇보다 여기 이 궁의 요리사가 하는 음식은 아주 먹을 만 하다구!" 무엇보다도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라고 경하의 심각한 표정이 주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편하잖아. 물론 저 황젠지 황태잔지 하는 놈이 조금 갈구긴 하지만 그것도 하루 한 두번 뿐이고. 여하튼 지내기 나쁘지 않아." 로운은 이마를 짚었다. 아프지도 않던 머리가 갑자기 아파오는 기분이다. "그래… 괜한 것을 물었군." "로운." 기엘은 로운에게 동정을 금하지 못했다. 물론 자신의 기분도 로운과 별다를 바가 없긴 하지만 자기보다는 왠지 로운이 더 속을 끓이고 있는 듯 했기 때 문이다. "뭐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을테니까 안달하지마 로운." 좀 미안한 기분이 들어버린 경하는 로운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안달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걸. 지금까지 너무 급하게 지내온 거니까. 이제부터 는 천천히 하자구. 어차피 앞으로 남은 일이라고 해봐야 내가 돌아가는 거 밖에 더 있겠어?" 경하가 가볍게 입에 담은 말에 순간 기엘과 로운은 그 자리에 얼어 붙어 버 렸다. "………." "………." 갑작스런 침묵이 세 사람의 주위를 감돌았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것이 경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사실이되어 다가온다.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것과, 그것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것 사이에서 생 기는 괴리감. 그것이 침묵의 원인이었다. 순간 기엘과 로운의 표정이 얼어 붙자 경하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천천히 하자. 기왕이라고 해야하나. 천천히 놀 시간이 생긴 건 처음이잖 아. 그렇지?" "…………." "자아. 나는 이제부터 낮잠을 잘 테니까. 방해하지마. 알겠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경하는 그대로 아까 누웠던 대리석위에 벌렁 드러 누웠다. 이번에는 기엘이 내밀었던 망토를 둘둘 몸에 마는 것을 잊지 않는다. '쳇, 말하다 보니까 실수 했잖아.' 경하는 얼굴을 보이기 싫었다. 망토를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경하는 몸을 움츠렸다. 몸은 편하다. 하지만… 나름대로 찬찬히 가라앉아있던 머릿속에 갑자기 파문이 일기 시작 하는 것을 경하는 느낄 수 있었다. '하아… 기왕이면 늦게 왔으면 좋겠어.' 누굴 향한 바램인지 모를 소리를 경하는 중얼 거렸다. 머리끝까지 덮어쓴 망토에서 따스한 햇살의 온기가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 ---------------------------------------------------------계속 늦었습니다. 에또...나름대로는...이상하지만. 감개 무량...중입니다. 기다려주신분들께는....정말 죄송하다는 말씀과 그리고 기다려주셔서 감사 하다는 말을 동시에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라스트 권에 접어 들었습니다. ...흐음....원래는 6권 정도 예정이었는데..(쿨럭) ^^;;; 라스트까지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신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아자아자아자아자-----!! [아슈레이 8] 1장 나유에서 온 사신 (2) "에엑----- 연회?" "네. 연회입니다." 경하 일행들을 담당하고 있는 부시녀장 게틀린드는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원래 그녀는 미메이라에서 온 사신들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사신들의 일행이 하라스다인 장로에서 경하 일행으로 바뀌어지는 것과 발 맞추 어 자연스럽게 그들을 담당하는 일을 맞고 있었다. "연회는 삼일 뒤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한 준비는 모두 제 소관이오니 제 말에 따라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손바닥을 탁탁 쳤다. 그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뒤쪽에서 우르르 시녀들이 제각각 손에 가득 가득 물건들을 들고 들어 왔다. "오늘 가봉을 한 후에 기타 연회 예절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사감도 없었지만 그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 물고 듣고 있던 경하는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우리를 시골 뜨기 취급하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입이 삐죽 나온다. 물론 경하 자신이야 키리엔이니 이곳 가이칸이니 어느쪽의 연회 예절 도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다. 궁정의례 어쩌구 저쩌구를 열심히 수능 공부하듯 외우긴 했지만 그런 것이 지금까지 머리에 남아 있을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자존심이 상한다. 스스로 미메이라인이라고 생각해본적이 없음에도 불구 하고 말이다. "로운. 하라스다인 장로님이 돌아 가실 때 뭐 이것 저것 놓고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습니다만." 경하가 아무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로운은 갑자기 경하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가 해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중에 의례용 복장 정도는 들어 있겠지?" "그 정도는…." 며칠 전 하나하나 확인해보던 품목들을 머리 위에 떠올리면서 로운이 대답했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건가 해서 걱정이 앞섯던 로운은 한박자 늦 게 경하의 의도를 알아챘다. 과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 미묘하고 껄그러운 감정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과 기엘은 미메이라인이지만 경하는 본디 미메이라 인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기대 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 다. "가서 전해요. 우린 가이칸 제국에 미메이라의 사신으로, 이 궁의 손 님으로 와 있다고." "…………." "미메이라인으로서 최고의 예로 연회에 참여하겠다고 말이죠." "…………." "대답이 안 들리는데."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경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신 만만한 미소였다.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을 전해 올리겠습니다." 게틀린드는 시녀장답게 안면의 표정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뒤 의 다른 시녀들은 조금 사정이 틀렸다.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녀들의 표정을 보며 완벽하게 한방을 먹였다고 생각한 경하는 더욱 더 의기 양양해졌다. "자아 그럼 그 너저분한 것들은 좀 치워 주시겠습니까?" "…………." 머리를 틀어 올린 시녀장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는 시녀들에 게 손짓을 했다. 일제히 시녀들이 물러갔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공간에 묘한 여운과도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의기 양양해진 경하의 얼굴을 감격했다는 듯 쳐다보는 기엘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뭔가 상당히 경하에게 호의적인 침묵을 깨버린 것은 미메이라인 도, 가이칸 인이지만 가이칸 인이라고 하기도 뭐한 남자였다. "…그런데 말이지 뭔가 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는 듯 해. 너--." "……내. 내가 뭘?"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정확하게 겨누고 있는 이리야를 보며 경하는 흠 칫해서 뒤로 물러섰다. "네가 미메이라의 그 예절인지 뭔지 알 턱이 없잖아." "……그. 그런 것쯤 모르면 어때. 어차피 가이칸 사람들이 알 리가 없 는 걸." "하이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이. 기엘. 로운. 큰일 났다. 여기 사 람들 모두 이녀석이 하는 행동을 미메이라의 최고 예절인지 뭔지로 알 게 되겠어." "그러면 그렇지…." 잠시 경하의 언동에 감격 비슷한 것을 하고 있던 로운이 눈을 감으며 얼굴을 감쌌다. "말은 그럴싸 했는데 말이야." 터억--하고 이리야가 경하의 어깨를 쳤다. "고생 좀 하겠다." "……그. 그게 내 의도는 말이야." 삐질 삐질 식은 땀을 흘리며 경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엘과 로운의 얼굴을 피해 도망을 치려고 굼질 굼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덥썩--- 덥썩--- 양쪽에서 두 남자가 경하의 팔을 힘껏 잡아챘다.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경하님." "가르쳐 주지. 확실하게." "우웃!!" "시간이 없군. 삼일이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경하님." 웃고는 있지만 왠지 절대적으로 무서운 표정의 로운과 기엘. 경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제 꾀에 제가 빠졌잖아." 이리야가 옆에서 배꼽을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가 웃어대기 무섭게 로운이 기엘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기엘이 전광 석화 같은 빠르기로 경하의 한쪽팔을 로운에게 넘기고는 이리야 에게 훌쩍 다가갔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리야씨. 확실하게 배워 주셔야 겠습니다." "우. 내, 내가 왜!! 왜 나한테 화살이 돌아오는 건데!!" "어차피 우리들, 같은 일행이지 않습니까?" 씨익---- 기엘이 로운처럼 웃음을 지었다. 이리야의 얼굴이 경하처럼 새하얗게 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 았다. *** "하아. 죽겠다." "동감." "우리 이러다 죽지 않을까?" "설마. 죽기야 하겠어." "아냐. 죽기 일보 직전 까지는 충분히 갈걸?" "그런가?" "그렇다니까." "그럼 사과하지. 어제 겔겔 대고 웃은 거." "용서해줄게." 하아---하고 한숨을 쉬면서 사과해오는 상대에게 넉넉한 인품을 보여 준다. "그러니까 왜 이런데 있는 머물러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냐구." "………." 화사하게 푸른 하늘 밑, 그리고 풀잎의 향기가 주위에 가득한 화원한 가운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돌침대(?)에 정수리를 맞대고 정 반대의 방향으로 누워 있는 두사람. 그들은 서로 동병상련을 앓고 있는 사이였지만 결국 한 사람이 상대방 에게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망을 받은 사람은 그에 합당한 대답을 하는 대신 투덜 투덜 거리기 시작했다. "쳇. 기엘은 그래도 좀 봐주는 타입이었는데 로운한테 옮았어." "…그런가?" "그래. 키리엔에 있을 때는 내가 졸아도 봐줬다구. 로운은 가차 없이 뒤통수를 후려쳤지만." "그래도 기사 양반은 뒷통수는 안치잖아. 그정도면 되었지." "으윽--!! 되기는 뭐가 되!" 경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시어머니보다 더하게 잔소리를 해대잖아. 이러면 안됩니다. 저러면 안됩니다!!" "그건 그렇지 그것도 안되 저것도 안되 요것도 안되. 체엣-- 어째서 나한테 까지 그러는 거냐구. 나정도는 빠져도 되는 거 아니야? 실제로 난 미메이라 인이 아니니까. 미메이라의 예절을 배울 필요도 없고 말 이야. 어이. 기사양반이랑들한테 말좀 해주면 안될까? 나는 좀 빼달라 구." "흐응. 이제 와서 난 가이칸 인이유--라고 해봐. 그 로렌이라는 녀석 이 당장에 이리야 당신을 여기 붙들어 매려고 할걸?" "앗. 그건 사양이지." "그럼 군소리 말아. 우어----죽겠다." 이틀 내내 로운과 기엘의 이른바 군대식(?) 예절 훈련을 받은 두 사람 은 심신이 모두 너덜 너덜 해져 있었다. 더 이상은 '다리는 똑바로 펴시고 시선은 우아하게 약간 위쪽으로.' 라고 말하는 기엘의 목소리 따위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팔은 가볍게 내리고….' 따위의 잠꼬대를 지 껄일 정도다. "하아---- 죽겄다." 한팔을 쭈욱 펴고는 기지개를 켰다. 노곤한 몸 여기저기서 우둑 우둑 뼈들이 자주 독립을 외친다. "아고 아프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경하는 가볍게 주문을 외워 자신의 몸에 바람의 기운을 한차례 돌렸따. 많이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곧 무겁게 내려 앉던 몸이 조금쯤은 가뿐해 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경하가 마악 불어 일으켰던 바람을 갈무리 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인기 척이 들렸다. "……흠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올 사람은….' 경하는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오늘따라 항상 옆에 들러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미타 남작도 거느리지 않은 로렌이 홀로 서 있었다. "아. 아하하하." 경하는 애매하게 웃어버렸다. 그 주위로 경하가 가볍게 일으켰던 바람의 기운으로 날리던 머리카락 이 하나 둘씩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로렌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경하는 황급 히 바람을 불러 들었다. "………." "또 무슨 일이죠?" 경하가 정원에 나오기만 하면 귀신처럼 눈치를 채고 따라 나오는 로렌 은 항상 경하에게 이런 저런 시비를 건다. 오늘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경하는 어깨를 잔뜩 굳히며 긴장 을 하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이리야가 자연스럽게 경하와 로렌 사이로 끼어 들었다. "황제페하께서는 아주 한가하시군요." 조롱과는 조금 다른, 경계의 의미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이리야의 목 에서 흘러나왔다. "하루에 한번정도는 황제도 쉬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난 아직 황제 페하는 아니니까." "본인이 아니라고 해봐야 주변 사람들이 모조리 폐하라고 부르는걸요 뭐." 경하는 로렌의 말에 반론을 폈다. 사실이 그랬다. 황제의 자리는 비워져 있다고 하나 얼마후면 황제의 위에 등극할 남자 가 바로 로렌이다. "다 좋으니까 언제쯤 대충 우리를 보내줄건지나 좀 말해보시죠?" 앞을 막아선 이리야의 옆으로 돌아가며 경하가 말했다. "왜? 벌써 이 궁에서의 생활에 질력이 났나? 이제 겨우 일주일하고 하 루가 지났을 뿐인데?"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매여 있는 것과 자주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니까요." "호오. 그렇다면 내가 굳이 이곳에 머무르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린 가?" "붙잡지 않아도 며칠 정도는 여기서 개겨… 아니 그러니까 지낼 생각 정도는 있죠." 말을 막 하다 말고 경하는 식은 땀을 흘리며 단어를 정정했다. '로운이 들었으면 분명 뒤통수를 한 대 후려 팼겠어." "그건 듣던중 반가운 소리군." 로렌의 표정이 갑자기 화악--하고 풀어 졌다. 상당히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지만 저렇게 웃으니 그나마 좀 봐줄만 하 다고 경하는 생각했다. 물론 다음과 같이 투덜 거렸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자가 봐줄만 해서 어디다 쓴담. 치잇----.' 잘생긴 거로 치면 오히려 자신의 옆에 언제나 들러 붙어 다니는 기엘 이나 로운 쪽이 한수 위라고 경하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 그렇다면 원한다면 언제까지라도 좋으니 내 성에 머물러주게. 이러면 되겠나?" "헤에. 갑자기 왜?" "좋은 말을 들었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나. 믿어준다면 그것 으로 족해." "……황제가 될거라면서 당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그렇게 없어요?" 미타 남작이 곁에 있었다면 바로 불같이 화를 낼 말을 경하는 아무 스 스럼없이 입에 올린다. "나는 믿어 주었으면 하는데 왠지 다들 나를 꺼려서 믿어주는 척 하는 게 아닌가 싶거든. 자네는 그렇게 생각해본적 없나?" "에헤…." 얼굴표정이나 행동거지는 어디까지나 당당하고 황제다운 로렌이건만 왠지 경하는 그에게 조그만 연민같은게 느껴졌다. 언젠가 읽었던 만화의 한구절이 생각났다. 군주란 고독한 것이라는 말이 말이다. 위로를 해주려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지만 경하는 왠지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어줍잖게 그를 위로하는 일 따위 자신은 할 수 없다. "…………." 말을 잃은 경하 대신 먼저 나직하게 말을 걸어온 것은 로렌이었다. "그걸 다시 한번 보여 주지 않겠나?" "에? 무엇을?" "아까처럼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것 말일세." "…………." "기왕이면 산들 바람이면 좋겠어." 왜 라고 질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경하는 잠시 머뭇 머뭇 하다가 조용히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내미는 동작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탓 인지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케인---." 경하의 목소리에 경하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바람의 세나케인이 반응 했다. 소리없이, 그리고 형제도 없이 세나케인이 경하의 몸속에서 불어 나왔 다. 그것은 경하가 잡아당긴 바람의 자락에 살포시 엉겨들어갔다. 쏴아아아아--------- 한차례 강한 바람이 경하의 몸을 휘감았다가 사라지고 그 뒤를 산들거 리는 작은 바람의 결들이 나타나 경하의 주위로 흘러나갔다. 불어 나오는 바람에 경하의 머리카락들이 한올 한올 살아나 그 바람에 맞추어 흩날렸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은 바람의 휘날리며 빛나는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리는 머리카락을 로렌은 아무말 없이 지켜보고 있 었다. 기억 속에 있던 것처럼 길지는 않았지만 반짝이며 흩날리는 모습은 그 의 뇌리에 박혀 있던 그 신비한 광경과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다. 그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는 것을 경하는 눈치챘지만 그것은 단지, 로 렌의 작은 신세 한탄의 한숨일 것이라 지래 짐작해버렸다. 물론 그 한숨에 담긴 진실은 로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비밀이었다. *** ------------------------------------------------------계속 .....줄거리 물어보시는 분... 그러시면 아니 되세염..<-통신체를 써서 귀엽(우억---)게 ^^;;;;;;; [아슈레이 8] 1장 나유에서 온 사신 (3) "이 옷 굉장히 불편해. 이런게 어디가 기사의 예복이야?" 경하는 어깨에서부터 길게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을 신경질적으로 당기 며 불평을 해댔다. 하라스다인 장로이하, 미메이라의 사신 일행이 전부 남자이며 기사들 이었기 때문에 경하 일행이 예복을 갖추어 입는데는 그다지 문제가 없 었다. 그나마 문제라면 기본적으로 기엘이나 로운보다는 몸집이 작은 편인 경하에게 옷이 좀 큰듯하다는 것뿐. 여행을 하면서 계속 성장을 해온 덕에 크다고는 해도 누군가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인상은 풍기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시안이었을 때처럼 치렁 치렁 흰색의 반투명한 천들이 휘날리는 드레 스는 아니었지만 그 못지 않게 지금 경하가 입고 있는 옷도 꽤나 치렁 치렁 했다. "걷는데 걸리적 거려." "춤을 추는 것도 아닌데 좀 참으시죠." 라고 로운이 옆에서 묵직하게 무게를 담아 말했다. 말은 존대말이지만 내용은 '시끄러우니 좀 입다물고있어!!'의 분위기 다. "쳇---." 경하는 턱을 괴려고 슬그머니 팔을 들어 올렸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로 운이 타악-하고 경하의 팔을 쳐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 게. '우우웃---- 젠장 연회장에서는 팔도 못 괴냐----!!' 연회장만 아니라면 바람 뿜는 고질라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으. 내 팔자야.' 경하는 마치 무슨 매스게임이라도 보는 기분으로 넓디 넓은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영화에서나 봤던 장면이 실제로 경하의 눈앞에 펼쳐 지고 있었다.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옷자락과 그뒤를 따르는 휘앙찬란한 여성들의 머리장식이 경하의 눈앞에서 쉴세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구만.' 처음에는 이 연회장에 발을 디딜 때는 사실은 상당히 얼어있었다. 비슷한 상황에는 처해본적이 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연회' 라는 이름을 가진 자리에 서게 된 것은 거의 전무 후무 하기 때문이 다. 하지만 쫄아 있던 것은 아주 잠시, 그 후부터는 왠지 실사 영화 촬영 이라도 구경하고 있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명목이야 미메이라에서 온 사신 일행 환영 축하 연회였지만 그것에 전 혀 신경쓰지 않는 경하에게 있어선 그것이 축하 연회든, 그냥 보통 연 회든 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야?" "기본적으로는 가이칸의 황위 계승자께서 자리를 떠나신 후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게 어디 있어.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있는 것도 피곤하다고." 투덜거리는데 순간 경하의 앞으로 로렌이 휘익하고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화들짝 놀라 경하가 고개를 들자 경하의 앞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로렌이 한 여성의 손을 잡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경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웃으면서 솜씨 좋게 여성의 허리를 한바퀴 돌려 제자리로 당겼다. 역시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의 부드러운 움직임이다. "저런 거 안 시키니 정말 다행이군." 어느새 경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중얼 거리고 있었다. 쯔읏하며 로운이 슬며시 경하가 괴고 있는 손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 다. "자세를 바로 해 주십시오." "아. 으응. 알았어. 알았다구." 그순간 저 멀리 서 있던 어떤 젊은 귀족 아가씨가 경하의 일행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사뿐 사뿐 걸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경하가 그녀가 한발자국씩 가까이 올때마다 굳어 가고 있는 데, 그녀는 경하에겐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로운에게 다가 갔다. "원래대로라면 제가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한곡 부탁 드립니다. 로크레슈경." 흰색 공단에 레이스가 달린 장갑을 끼고 있는 데도 그녀의 손가락은 아주 가늘다. "………." 조금 당황해버린 로운은 쿨럭하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대답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아요. 가르쳐드릴께요." 방긋-하고 그녀가 웃어 보였다. 거절 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승낙할 수도 없어 로운은 난감해져 버렸 다. 실제 가이칸 제국의 궁에서 유행하는 댄스를 그가 알 리가 없다. 하지 만 그런 그의 고민은 다음순간 나타난 이 궁의 주인에 의해 가볍게 해 결(?)되어 버렸다. "류드란 공작 영양의 부탁인데 거절하면 짐의 체면이 서지 않소. 그녀 라면 좋은 선생이 되어 줄거요." 방금전까지 저 멀리서 춤을 추고 있었을 로렌이 어느새 불쑥- 튀어나 와 말을 하고 있었다. "………." 반짝 반짝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녀와 로렌의 그 묘한 표정을 번갈아 보던 로운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사실, 카드미엘에서 어느 나라의 사신이든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는 것 자체가 상당히 드문일이다. 자타공인 아슈레이의 패자나 마찬가지인 가이칸 제국이 굳이 한 나라 의 왕이나 수상도 아닌 사신 일행을 연회까지 열어 환영한다는 것 자 체가 희안한 일이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곧 황제가 될 로렌의 의중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물며 그런 자리에서 공작 영양의 청에 로렌이 저렇게까지 말을 해오 는 이상 거절을 했다가는 국가간의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 되는 것이다. 결국 로운은 승낙의 말을 입에 담았다. "알겠습니다." 흰색의 옷자락을 날리며 로운이 가볍게 플로어에 내려서서 류드란 공 작 영양의 흰장갑게 감싸인 손을 잡았다. "……노, 놀라워." 놀란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경하는 있는 힘껏, 마음껏 놀라고 있었다. 평소 바위 위나 언덕 위를 사뿐사뿐(?) 소리도 나지 않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역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역시나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리 놀라실 것은 없습니다. 경하님. 저래 뵈도 한때는 키리엔의 모 든 여성들이 함께 춤을 추고 싶어하는 최고의 로열 나이트였던 적도 있으니까요." 경하가 놀라는 모습을 보며 기엘은 쿡쿡 웃음을 지었다. 경하가 지금까지 보아온 로운과 자신은 이런 연회장에는 절대 어울리 지 않는 모습뿐. 하지만 사실 그들 역시 미메이라의 수장궁 키리엔에 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다. 춤의 형태는 달라도 기본기가 탄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설마. 기엘도 저렇게 출 수 있다는 소리?" "글쎄요. 어느 정도까지는 이랄까요?" "…………." 춤이라면 당연 힙합밖에 떠오르지 않는 경하로써는 새삼스럽게 기엘과 로운에게 놀랄 일이다. "재미있군. 역시 귀족은 귀족이라는 건가…." 그때까지 조금은 뻘쭘하게 앉아 있던 이리야가 한마디 했다. 어디까지나 평민출신일 수 밖에 없는 그로써는 어찌되었든 간에 별로 기분 좋은 자리는 아니다. "미메이라에 귀족은 없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구 기사양반. 기사가 귀족이 아니고 또 뭔데?" "하지만 어느 누구든 능력이 있으면 기사가 될 수 있으니 꼭 귀족이라 고 말하긴 힘듭니다." "그 중에서도 명문가라는 것은 있게 마련 아니야? 기사 양반만 해도, 그 아버지인 장로님인지 뭔지하는 사람이 요직에 있는 거고." "……뭐. 그런 경우도 있긴 합니다." 뭔가 분위기가 조금은 썰렁해지려 하는데 두눈을 번쩍뜨고 플로어에서 가볍게 춤을 추고 있는 로운을 바라보고 있던 경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하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기엘이 깜짝 놀라서 경하에게 다가서려는데 그 순간 경하의 몸에서 바 람이 흘러나왔다. "…………." "경하님?" "오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경하의 눈은 플로어가 아닌 먼 곳을 향해 있었다. "경하님 무슨 말씀을…." 당황해서 경하를 자리에 앉히려던 기엘과 이리야는 순간 손을 멈추었 다. 경하가 이렇게 뜻모를 행동을 할 때면 뭔가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 는 그 무엇인가를 느끼거나 보고 있는 경우라는 것이 생각 났기 때문 이다. 춤을 추고 있는 와중에도 계속 경하를 주시하고 있던 로운도 뭔가 이 상을 느꼈는지 정중하게 실례를 고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그것이 좀…." 초점을 멀리한 경하의 눈동자에 순간 푸른색이 감돌더니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다. "경하님?" 기엘이 얼른 무슨 일이냐는 어조로 경하의 이름을 불렀다. "별건 아니야. 기다리는 사람이 드디어 도착 할 것 같아서. 아마도 한 밤중일 것 같은데. 이 연회 언제 끝나지?" "기다리시는 분이요?" "기다리는 사람이라니?" 동시에 기엘과 로운이 물었다. "그게. 나도 잘은 모르니까. 에헤헤헤." 굳이 설명을 하라면 할 수 있었지만 경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나름대로는 카드미엘에서 강제적이든 아니든 이렇게 비비고 있는 이유 였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도 정확하게는 설명하기가 힘들고." 단정하게 빗어내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경하는 털썩 주저앉았다. 다들 경하가 무슨 말이든 더 해주길 바랬지만 경하는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그런 경하를 로운은 더욱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바라 볼 수 밖에 없었 다. *** ------------------------------------------------------계속 헉---짧다..... (....이 일을 어쩐다냐......) 쿨럭 쿨럭 [아슈레이 8] 1장 나유에서 온 사신 (4) "이 궁안에서 제일 물이 많이 있는 데가 어디죠?" "그런 것은 왜 묻지?"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연회는 늦은 밤이 되어가는데도 로렌이 자 리를 뜨지 않은 탓인지 나른하게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할지 몰라 경하는 우물 쭈물 거렸다. '우웅. 이제 곧 도착 할 것 같은데….' 감각적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기에 경하는 조금씩 초 조해져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 궁에서는 경하일행은 일단은 손님이며 결국은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일을 처리 하려면 로렌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한번 더 고민을 한후 경하는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연회는 언제 끝나는 거죠?" "뭐. 내가 자리를 뜨면 일까?" "그럼 일단 밖으로 나가죠." "호오. 일대일 대화가 필요한가?" 로렌은 뜻밖이라는 듯 미소를 짖는다. "아니 기엘이랑, 로운이랑 이리야도 같이요." "뭐. 좋아. 그쪽에서 나와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는 건데 내가 싫 다고 할 리가 없지." 경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간에 로렌이 들어 주겠다고 하는 것이 다행일 뿐이다. "여긴 어디죠?" 경하는 꽤나 조용한 정원을 둘러보며 로렌에게 물었다. "이쪽은 내 후원이지. 정면의 정원과는 달리 말하자면…." 찡긋하고 로렌이 윙크를 한다. "원래는 금남의 지역. 나를 제외하고는 남자들은 원래 못 들어오 는 곳이다." 로렌의 설명에 경하는 순간 아-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궁에서 금남의 지역이라면 결국 황비나 후궁들이 있는 곳이다. "뭐 조용해서 좋으니 별 상관은 없지만 우리가 이렇게 들어와도 되는 건가요? 혹시…."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아직 단 한명의 후 궁도 애첩도 없으니 안심하게. 이정도면 되었나?" "아. 그, 그러면 별로 상관은 없지만…." 조금은 말하기가 뭐해 빙빙 돌려 말하려던 경하는 의외로 로렌이 대놓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뻘쭘해져 버렸다. '체엣. 무슨 말을 하든간에 저렇다니까.' 경하가 로렌과 말을 할 때면 항상 뭔가 껄끄러움 같은 것을 느껴 온 것도 그때문인지 모른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말투. 그것에 이상한 거부감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얼굴을 마주보기 싫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같이 말을 하다보면 왠지 로렌에게 무엇이든 말해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쪽에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작은 못이 있으니까. 물이 많이 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본궁의 정원까지 가야하지만 일단 그 곳은 아직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니 그 다음은 여기뿐이거든. 자 아 그럼 이제 할 말이 뭔지 들어볼까?" 로렌의 말은 그 이외에도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모두 묻고 싶은 말이다. 경하는 주위에 있는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로렌과 로렌의 그림자 같은 미타 남작. 그리고 자신의 일행들이다. 후욱---하고 경하는 심호흡을 했다. "손님이 한 명 더, 올 거야." 지나가는 말이라도 하듯, 경하가 기엘과 로운을 향해 말했다. "정확한 것은 그 손님이 도착해야 하니까." 말을 마치는 경하의 눈이 어느덧 이리야에게 머문다. 이리야는 경하가 왜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손님?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일 먼저 반응을 한 것은 미타 남작이었다. 사실이 그렇다. 한밤중의 태자궁의 후원에 대체 어떤 손님이 어 떻게 올 수 있다는 말일까? 하지만 경하는 미타 남작보다는 로렌에게 대답을 했다. "기왕이면 이쪽에서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궁은 당신의 궁 이니까…." "그건 고맙군. 내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모르면 안되지. 그 래서 그 음은?" 로렌은 경하를 재촉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사실 로렌 당신이나 가이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지금 오고 있는 손님도 그렇구요." 말을 마친 경하는 먼저 로렌이 말했던 작은 못이 있는 곳으로 향 했다. 그 뒤를 남자들이 줄줄 따라갔다. 로렌은 못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못은 지하수를 인공적으로 끌 어당겨 만들어 놓은 인공 연못같은 곳이라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다. 끌어 올려진 물들은 온 후원 전체로 작은 시내를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경하는 연못가에 반듯이 서서 잠시 그 깨끗한 물 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리야." "어? 나?" 일행의 제일 뒤에 떨어져 있던 이리야가 깜짝 놀라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경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갑자기 나를 부르는 건데?" 이리야가 의아해하며 앞으로 나왔다. "그게 그러니까 그 손님은 이리야를 보러 오는 거니까." "…………?" "그렇게 그냥 있지 말고, 자꾸 차단하려 하지 말고 느껴봐. 그럼 알 수 있으니까." 드물정도로 경하는 농담 한마디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경하는 어느때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경하의 손이 이리야의 어깨에 닿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에 대해서는 이리야가 나보다 훨씬 더 잘 느낄수 있을거야." 경하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엘이 이리야의 감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리야는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능력을 숨겨야 했던 현실적인 상황 때문. 하지만 경하의 완전히 개방된 엘이 이리야에게 닿자 그것에 반응 한 이리야의 엘이 닫혀있던 물고를 트고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 의아한 표정을 짖고 있었던 이리야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것은 경악도, 놀람도 아닌 깨달음과도 같은 것. "느낄 수 있지? 그녀가 오고 있다는 걸."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닿아 있는 손에서부터 이리야의 감 정이 전해져왔다. 그는 이미 경하가 느끼고 있던 그녀의 파장을 감지하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그러나 확실히 가까워져오고 있는, 물의 흐름같은 빠르기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는 물의 엘의 그 순수한 파장. 이리야의 눈이 살며시 감겼다가 다시 떠지는 순간, 잔잔하던 연 못에 파문이 일어나며 물 줄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파앗----- 인공적인 분수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물줄기. 그 물줄기는 신비한 푸른색을 담고 있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분수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물줄기에서 푸른색의 빛과 같은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린다. 높이 치솟았던 물은 두줄기로 갈라져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 직인다. 바람소리와도 같은 물소리가 경하의 바람과 함께 공중에 흩날리 고 또 하나의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우앗----." 이리야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 고 말았다. 바로 그 앞에 솟구쳐 올랐던 물줄기가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 사방으로 튀어야 마땅할 물줄기는 이상하게도 내리꽂혀진 그 자 리에 그대로 멈추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물병 같은 것이라도 있는 것 마냥 물은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이리야는 눈앞에 나타나는 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리야는 그보다도 더욱, 그 물줄 기에서 풍겨나오는 파장에 사로잡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쏴아아 소리를 내며 보이지 않는 물병속으로 내리꽂히던 물은 이 내 멈추고 푸른빛을 띄고 있는 물의 형체는 천천히 형태를 갖춘 그 무엇이 되어갔다. "……저건 물의 여신이라도 되는 건가?" 뒷전에 서 있던 로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은 순식간에 인 간의 형태가 되어 그들의 앞에 고개를 들었다. "…………." 물방울은 머금은 청명한 푸른색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앞에 넘어 져 있는 남자의 그것과 완전히 같은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놀라게 해드렸군요." "…………." 푸른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물처럼 흘러내린다. 우아한 옷자락 역시 머리카락 색 못지않은 푸른색이다. 그녀는 옷자락을 갈무리 하더니 시선을 얌전히 돌렸다. 머리카락의 출렁거림이 멈추는 순간 그녀는 경하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나유의 딸. 새로운 나유의 계승자. 라 마이드 메로유 타인 나유입니다. 미메이라의 계승자를 만나게 되 어 영광입니다." 나긋 나긋한 몸짓으로 그녀는 허리를 굽혔다. 그런 그녀에게 경하 역시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이렇게 낯선 곳에서 저를 기다려주신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에? 아 뭐…, 벼, 별로 그런 것은 아닌데…." "지금까지는 지나치도록 이동 속도가 빨라 짐작 조차 할 수 없었 습니다만, 당신의 배려로 이곳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물론, 경 황이 없이 이렇게 저 혼자만 인사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저어." 왠지 경하는 오른쪽 뺨이 따끔 따끔 거리는 것을 느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기엘과 로운이, 특히 로운이 도끼눈을 하 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일단은 늦었으니까 안으로 들어가죠? 저기 로렌. 부탁해도 될까요?" "아아… 아 물론. 내 성에 온 손님은 내가 직접 맞이해야겠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던 로렌은 경하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분명 자신의 지각으로는, 너무나 일반적일 수 밖에 없는 그의 감 각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짙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서있다. 물기를 머금었으나 전혀 젖지 않은…. "카드미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 소개는 차차하도록 하고 가실까요? 아름다운 나유의 사신이여." 로렌이 내민 손위에 새하얗고 우아한 손이 살포시 올라갔다. "기꺼히 부탁 드리겠습니다." 이슬이 굴러 떨어질 것 만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 다. ------------------------------------------------------계속 ...... 에또..변명이로 들리시겠습니다만.... 정말이지...늦는 이유는 고양이(숫놈. 나이 약 2살 반, 검정 잡고양이. 이름 까마) 때문입니다. -_-;;;; 뒷발을 똑---분질러 들어와 지금 깁스를 하고 뒤에 누워 있는 저희 작업실 고양이 때문입니다. (전치 20일입니다.) ....보고 있으면 불쌍해서 죽겠습니다. 크흡 [아슈레이 8] 1장 나유에서 온 사신 (5) "미메이라의 계승자께선 외유가 길으시군요. 물론 물의 의지를 이은 자와 함께 계신다는 것도 저로서는 놀라운 일입니다만." "뭐. 사정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놀랄 정도로 정중한 라마이드의 말투 덕에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들 모두, 보통때와는 전혀 다른 정중한 분위기로 돌변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로렌에게 놀라움 비슷한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처음 경하 일행을 만난뒤로 지금까지 저 일행이 이렇게까지나 뭔 가 공식적인 분위기를 잔뜩 풍기고 앉아있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묘한 관계 역시 지금은 완벽하게 미메이라의 계승자와 그 의 신하들로 비추어지고 있을 정도다. 일단은 제 삼자인 로렌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유의 계승자이신 분께서 어찌 이리 먼 길을 오셨는지 제가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그나마 일단은 제일 점잖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로운이 조심스 럽게 라마이드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라마이드는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우아함이 그녀의 미소에서 풍겨나온다. "미메이라의 계승자께서도 정식으로 계승을 받기 위해서는 한두 가지 필요한 사항이 있으시겠죠?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일입니다. " 라마이드의 시선이 어느새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리야에게 닿았 다. "나유의 계승자가 되기 위해 계승 후보자는 한가지 일을 해야합 니다. 그것은 바로…."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리야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라마이드의 시선이 너무나 부 담스러웠다. "저기 계신 분처럼, 잃어버린 아이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입니 다." "잃어버린 아이들?" 로운이 되물었다. "드문 일입니다만, 이런 시기가 되면 꼬옥 저분처럼 당연하게 나 유에서 태어났어야 할 물의 술사들이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는 하 지요. 불가항력적인 일이라고 장로님들께서 말씀 하시기는 합니 다만…." 모두의 시선이 이리야에게 향했다. "하하하. 난 아이들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좀 들었는데?" 왠지 자신에게 시선이 향하자 어색해진 이리야가 억지웃음을 지 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리야 노운이라고 하셨죠? 당신과 같이 나유로 돌아와야만 하 는 분들을 찾아내고, 또한 안내하는 것이 제가 해야할 일입니다. " "하지만 그렇게 갑작스럽…." 대답 아닌 대답을 하던 이리야의 머릿속에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였던 건가?' 분명 이제쯤엔 미메이라로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피워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람이 바로 경하다. 아무리 가이칸의 황제가, 로렌이 붙 들었다고는 하나 이유없이 카드미엘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투덜 거리면서도 내일이라도 당장 도망을 치자고도 하지 않았었 다. "그래서…였나." 순간적으로 가라앉은 이리야의 목소리가 경하의 앞으로 싸늘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이곳에서 기다린 건가." 싸늘해진 이리야의 목소리는 더더욱 가라앉았다. 비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참하지 않 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런 기분은 무엇이라 설명해야할까? 이리야는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에 할말을 잃었다. "이리야…." 경하는 차갑게 식은 표정의 이리야 앞에서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분명 아무말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저런 목 소리로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기 나는…." "더 이상 말하지마." 이리야는 경하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따스하다고 느껴왔던 공기가 갑자기 차갑게 이리야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었다. 시리도록…. "이리야."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도 어딘가 다른, 먼 곳에서부터 들 려오는 소리 같았다. ------------------------------------------------------계속 원래는 4와..같이 올라 갔어야 하는 분량이건만... -_-;; 죄송합니다. 2장으로 넘어갑니다. [아슈레이 8] 2장 멈춤, 그리고 흐름 (6) "뭔가 저곳만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듯 하지 않나?" "………." 멀리 화원을 내려다 보며 로렌이 물었지만 특별히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타 남작은 로렌의 시선을 따라가 그가 보고 있던 곳을 바라보 았다. 하늘 보다 더 투명한 은색과 물보다 더 짙은 푸른색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주위의 풍경에 비추어볼 때 너무나 도드라져 보이는 색이다. 그 색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오히려 너무나 인공적으로 보일 정도다. "아무래도 정상적이진 않겠지요." "카스핀. 말은 그렇게 하는게 아니야." "죄송합니다. 폐하. 본의 아니게…." 즉시 물러서는 미타 남작을 보고 로렌은 눈살을 찌푸렸다. "본의가 아니기는. 자네가 못마땅해 하는 정도는 알고 있네. 하 지만 무조건 그렇게 부정적이게 보지 말게. 생각을 해봐. 제국의 어떤 역대 황제가 신국과 이렇게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 나? 안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로렌은 슬며시 입가를 끌어당겼다. 그런 로렌의 표정을 보고 있는 미타 남작은 왠지 뒷골이 조금 당 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그의 군주는 그의 그 특이한 야망을 포기한 것 같지 않 은 것 같다. "포기하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포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신국인들이 기본적으로 그런 형편이라면 어떻게…." 항의하려는 미타남작의 입을 로렌이 박력있는 미소로 막아버렸 다. "발상의 전환이라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고 보내.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나도 가능하지. 자네도 보지 않았나. 어제의 그 기적과 도 같은 일을." "…………." 로렌은 어젯밤에 보았던 그 환상적인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늘로 치솟던 물줄기와 그 물줄기가 한자리에 모여 인간의 형상 이 되어 가는 광경을 그는 직접 목격했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그런 일이다. 하지만 그는 직접 보았고, 그래서 믿을 수 밖에 없다. "직접 본 사실인데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나. 그녀를 보게 홀 홀 단신으로 아슈레이의 서쪽끝에서 여기까지 왔네. 물의 계승자 라는 그녀가 가능한 일이라면 미메이라의 그 누군가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폐하. 그것은…." "부딪혀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일세.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 천천히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피는 동작을 하며 로렌이 말했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동작 하나 하나에서 자신감이라는 단어가 배어 나온다. "포기하기에는 상당히 아깝지 않은가." 그의 눈이 다시 짙푸른색과 은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화원의 한 곳으로 향했다.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러." *** "이곳은 생각보다 아주 소란스럽군요." 라마이드의 목소리는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경하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뭐, 사람이 많으니까요. 확실히." 그녀의 옆에서 경하는 턱을 괜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 다니는 게 보인다. 사실 마구 두다다다 뛰어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그리고 궁의 시녀들 및 각각의 사용인들이 저렇게 바쁘게 뛰어 다니고 있는 이유는 바로 다름아닌 경하와 그의 옆에 있는 라마 이드 때문이다. 공식적이지는 않다고 하나 일단은 4개의 신국 중 둘이나 되는 나 라의 계승자가 머물고 있는 것이다. 바쁘지 않다면 절대로 그쪽이 이상할지도 모른다. "저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데…." 혼잣말처럼 경하가 중얼 거렸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때로는 필요할때도 있지 않을까요? 미메이 라의 계승자님?" "그렇게 부르지 말아주세요. 엄연히 경하라는 이름이 있으니까." "특이한 이름이군요." 말 끝에 물의 흐름보다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따라 붙었다. 왠지 그런 라마이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경하는 귀 끝이 빨 갛게 물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특이한 타입이라니까 이 사람은.' 라마이드는 경하가 만났던 어떤 여자와도 다른 타입이었다. 미모로 말한다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라는 단어는 부적합할지 도 모르지만 독특한 타입의 미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정도라면 그래도 일반이라는 단어의 범주안에 어떻게든 집 어넣을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오히려 인간 같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는 물이라는 표현이 너무나도 들어 맞는 그런 느낌. '어라. 정수기 선전 같잖아.' 줄줄 연상되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경하는 그만 혼자서 피식 웃어버렸다. "………??"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나서." 혼자 키득 키득 웃다말고 경하는 그만 푸하하하 하고 파안대소를 해버렸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바람을 만들어내거나 그것을 정화할 수 있듯 이 라마이드도 물을 정화하는 능력정도는 기본으로 가지고있을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것이야 말로 틀림 없는 정수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하. 하하하하하하하하---!" 혼자서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는 경하를 보며 라마이드는 어쩔줄 몰라했다. 적어도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버릇없이(?) 웃어대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여러모로 특이한 분이시군요. 당신의 기사들의 말이 딱 들 어 맞는 것 같습니다." "에. 에헤헤." 눈가에 흘러나온 눈물을 쓱쓱 닦으며 경하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 다. "에또. 특이하다고 한다면 라마이드 당신도 못지 않아요. 당신같 은 미인은 처음 보니까." 사심없이, 경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라마이드의 외모에 대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런 경하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 라마이드도 산뜻한 웃음 으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경하님도 제 눈에 호화로운 미남이신걸요." "에엣--- 케엑 쿨럭 쿨럭 쿨럭." "물론. 아직은 조금더 자라셔야 하겠지만요. 틀림없이 몇 년 뒤 가 되면…." "쿨럭 쿨럭." 경하는 손을 내저으면서 기침을 해댔다. '듣던중 정말이지 괴로운 소리야.'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말을 나누기 편한 분이군요. 아주 마음이 놓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죠. 사실은 아주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물어도 될까요?" "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그…." 막 질문을 하려다 말고 경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오른쪽 왼쪽으로 바삐 오가는 사람들 투성이다. 물론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고 해도 어떻게든 들으려 한다면 경하와 라마이드의 대화를 들을 수도 있는 거리다. 그리고 또하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세 사람의 파장을 봐서는 세사람 역시 자신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 는 곳에 있음에 틀림이 없다. "뭐. 별로 상관없겠지." 일단 결정을 내리자 경하의 표정은 단호해졌다. "이리야 같은 경우가 많이 있나요?" "예?" "그러니까 신국이 아닌 곳에서 태어나는 엘러-라고 해야하나? 아 무튼 그런 경우가 많이 발생하는지 궁금해서요." "많이는 아닙니다. 경하님도 느끼실 수 있을 텐데요." "흐음." "어제도 잠시 언급했었지만 이런 시기가 되면 신국이 아닌 곳에 서 종종 능력자가 태어나곤 합니다." 라마이드의 말에 경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깐. 그 이런 시기라는 말부터 좀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만." "미메이라에서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 건가요?" "그러니까 그런이니 이런이니 하는 애매모호한 단어 말고 정확하 게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계승자가 되기에는 좀 뭐랄까 지식적인 면으로는 많이 부족한 편이니까요. " "흐음.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자못 진지한 표정의 경하를 보며 라마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하다.'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될 수도 있는 것 이라는 생각마져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계승자로서 교육 받아온 그녀와는 달리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는 어딘가 모르게 틀린 점이 많았다. 굳이 지식적인 면을 따져 볼 필요도 없다. 몸으로, 감각으로 느껴지는 경하의 파장은 자신이 아는 어떤 능 력자와도 견줄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계승자로서 교육 받아온 그녀는 장소와 상대에 따라 말할 것을 구분지어 가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새로운 나유의 수장 계승자이듯, 당신도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제 마악 수장의 위를 계승받으셨구요." "뭐 정식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그말도 맞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할 일을 마치고 나유로 돌아가면 정 식으로 수장의 위를 계승 받게 됩니다." 라마이드는 하나하나 천천히 경하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호로스 역시 비슷한 시기에 계승자가 바뀌었거나, 또는 바뀔겁니다. 바라스도 마찬가지고요." "헤에. 그러고보니 호로스는 수장 계승이 완전히 끝나있기는 했 지만…." "그렇습니까? 대략적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빨랐군 요. 여하튼 이정도 말씀드리면 대충 짐작가시는 사실이 하나 있 으시겠죠?" 라마이드는 살짝, 경하에게 힌트를 주었다. "호로스가 바뀌었고, 미메이라와 나유가 바뀌었습니다. 바라스도 이미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비슷한 시기에 수장이 교체가 된다라는 의미인가요?" "맞습니다." 방긋-하고 라마이드가 예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느 나라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계승 자가 태어나고 또한 성장하고 바뀌는 것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 입니다. 그 이유를 굳이 들자면 각 계승자가 이어 받아야할 신들 의 힘의 균형 때문이겠죠."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다. 4개의 힘이 평형을 이루어 지탱되고 있는 것이 이 아슈레이 대륙 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하나가 새롭게 바뀐다면 나머지도 새롭게 바뀔수 있다 는 의미도 된다. 이상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이 말이다. "평형을 이루던 것이 어느 한부분에서부터 바뀌어 나갑니다. 하 나씩 하나씩." 라마이드의 하얀 손이 경하의 눈앞에 들어올려졌다.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듯, 하나가 변하면 그 옆의 것도 영향을 받게 되지요." 그녀의 손은 둥그렇게 원을 그려보였다. "수장 교체의 시기가 되면 각국에서는 새로운 수장 계승자를 탄 생합니다. 그것은 대대로 수장이나 신관을 배출해온 집안에서 일 수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심심치않게 있지요. 그런 과정에서 미묘하지만 균형이 맞지 않은 때가 조금씩 생기게 됩니다." 원을 그려보였던 손이 한쪽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면 어긋남을 어떻게든 보완하기 위해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신국이 아닌 곳에서 엘러가 태어나는 원인이란 뜻인가요 ?" 라마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제자(?)는 그녀가 하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꼭 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럴 것이라고 저희들 은 미루어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타지역 엘러들은 굳이 신국이 아니더라도 무리 없이 살 수 있다고 하던데요." "네. 그들이 태어난 곳이 신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니까 요. 하지만 정말 드물게 형편이 좋지 않게 태어나는 특이한 엘러 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리야씨처럼요." "하지만 이리야는…." 라마이드의 말은 확실히 이해했지만 조금 틀린 것이 있다. 이리야는 원래부터 특이한 엘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저도 의문입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크게 그분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죠. 순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저는 단순하게 어 디선가 강한 힘을 가진 물의 술사가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게 뭐 으음…." 어떻게든 설명을 하려 했지만 왠지 입에 담아서는 안될 기분이 들었다. 경하는 한참을 우물 쭈물 거린후에야 간신히 대답을 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런 경 우라고 해야할까요? 죽을 고비를 한 두 번 넘기더니 그렇게 되었 습니다." "나름대로는 납득이 가는 군요." "사실 이리야는 물의 술사라고 해도 상급 주문 같은 것은 전혀 몰라요. 알고있는 것은 제국에서 고만 고만한 물의 술사들에게 배운 기본적인 주문 뿐이죠. 게다가 스스로 계속 억제하면서 살 아 왔기 때문에 당신이 온다는 것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으니까 요." "그것은 이해가 갑니다. 제국에서 물의 술사로서 살아가긴 쉽지 않다고 들었으니." "그말 그대로죠." 이해했다는 표정을 하고 라마이드는 말했다. "다만, 이리야씨께서는 경하님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 이신듯해서 걱정이 되는 군요. 제가 이렇게 불쑥 나타난 것도 달갑지 않으신 듯 하고,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이국의 물의 술사들은 거의 전부 어린 아이들이라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입니다." 그말에 경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뭐… 지금 당장은 화를 낼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이리야도 언제까지나 나를 따라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자 경하는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라마이드의 존재를 느낀 이후부터 혼자서 주욱,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왔고, 이리야 스스로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번쯤은 나유에 가보고 싶다고 한 말도 가슴속 에 담아두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를 것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을 뿐이 다. 이리야가 느끼는 당혹감은 경하가 느끼는 그것과 비슷하면 비슷 했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후우---." 경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마이드가 도착했고, 이리야에 대한 일들은 어떻게든 결말이 날 것이다. 그럼 남은 것은……. '이제 슬슬 떠나야 할 때가 되었어.' 오늘 밤에는 로렌에게 그 말을 해야겠다고 경하는 결심했다.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군."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리야는 기둥뒤에 숨어 라마이드와 경하가 나누는 이야기를 내 내 듣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이리야와 아주 비슷한 포즈로 기엘과 로운이 앉아있 었다. 숨어서 듣는 것은 절대 취미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하고 있다. "경하님은 나름대로 이리야씨의 거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오 신 듯 합니다." "누가 언제 그런 것을 생각해 달라고 한 적 있어?" 기엘의 말에 이리야가 거칠게 대꾸했다. 기엘은 그런 이리야에게 달래듯이 말했다. "하지만 생각지 않는 쪽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시끄러워. 기사양반." "이리야씨." "그래! 언젠가는 내 스스로도 나유에 한번쯤은 가보고 싶다고 생 각해왔지. 하지만 왜 그게 지금이어야 하지? 저런 정체도 모를 사람 같지도않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와 함께 나유로 갑시 다하는데 무조건 따라가라구? 말도 안 돼!!" 이리야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어제 어디선가 바람처럼 툭 하고 튀어 들어온 한 여자가 이리야 의 신경을 바짝 태우다 못해 툭툭 끊어내고 있다. 고집을 피우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경하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조금이라도, 가능한한 경하의 곁에 있고 싶었다. 적어도 경하가 이 아슈레이의 세계에 머물 수 있는 동안 만큼은.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았다. 경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을 수 없다. 그 대가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모두 경하에게 주어도 그것이 오 히려 영광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경하는 틀림없이 화를 내겠지만 말이다. "나유의 수장 계승자가 오고 있다는 것을 못 느낀 것은 내 책임 일지몰라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모 조리 그 녀석의 책임이다." 심지어는 배신감마져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생사고락을 함께해왔다고, 그만큼 친밀하고 또한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라고 그는 여기고 있었다. 차마 경하에게 자신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실망시키고, 배신할 수 있느냐고 따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이 감정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다. "경하님은 아마도 계속 생각을 해오셨을 겁니다. 이리야씨. 제발 …."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엘도 잘 알고 있었 지만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다. "로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아……." 그때까지 아무말 없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로운은 기 엘의 말을 듣고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뭔가 할말을 찾았지만 할말이 없는 것은 기엘과 마찬가지다. 결국 그는 두손을 들어 버렸다. "당사자끼리 이야기해. 나는 전혀 모르겠으니." "로운!!" 로운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뭐라고 말해도 이리야 당신의 맘이 당장 풀어 질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고 당사자가 아닌 내가 경하에게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섭섭한 것이 있으면 가서 직접 이야기해. 왜 그랬는 지, 어째서 그랬는지. 어차피 이제와서 이리야 당신이 경하가 시 키는대로 할리도 없을테니까." "…………." 로운은 이리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하고싶은지 정확하게 그녀석에게 말해." 바람이 그들의 주위를 돌아 불어 나간다. 서늘한 그 바람은 경하가 어느새 만들어낸 순수한 엘이 가득 담 겨진 바람이었다. "…이 바람처럼 사라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모두 그 녀석에게 말하라구." ------------------------------------------------------계속 필사적으로 졸음을 참고 있습니다. -_-;;;;; 요즘 오후 9시만 되면 그대로 골아떨어지곤 했습니다. 이유요? 글쎄요..... 그리고는 새벽 5-6시면 눈이 번쩍 떠지곤 했다...는..--;;;; 그 사이클을 바꾸어서 원래대로 새벽 6시쯤 자서 오전 11시 오후 12시쯤 일어나볼까........라는..=0=;;; 성공하길 빌어주십시오. 쿨럭. 그래야...T_T 하루 연재량을 고수할수 있습니다. 크흡--- [아슈레이 8] 2장 멈춤, 그리고 흐름 (7) "돌아가겠다고?" "네. 뭐 많이 신세를 지기도 했고, 슬슬 돌아가야죠." 경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웃기는커녕 상당히 표정이 심각하다. "금제를 풀자마자 바로…라는 건가?"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기다리던 사람도 만났고 더 이상은 시간을 지 체할 필요가 없는 걸요." 상대방의 반응이 약간 심상치 않은 것 같자 경하는 조금 더 길게 설명 을 했다. "원래 길게 머물려던 것도 아니고, 당신이 스스로말하듯 이 궁의 주인 은 당신이잖아요? 당신이 이 궁을 오래 비울수 없든 저 역시 돌아가야 합니다." "로렌." "예?" "로렌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당신이라니, 그런 딱딱한 호칭따위 치워 버려." 곧 황제가 될 로렌에게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상당한 무례인데도 로 렌은 고집을 피웠다. 상황은 좀 다르다고하나 두사람 모두 한 나라를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 에 로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하에게 만큼은 조금의 격식도 원하지 않았다. "하아… 여하튼 그래서 돌아갈테니까 보내주시죠." "싫은데." 어린아이처럼 로렌이 대답한다. "이봐!!" "간다니까!! 갈거야!! 갈거라구!!" 경하는 울컥하고 치미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만큼 피곤한 것도 없다. "우씨--- 왕 짜증이야 정말." "그건 좋군." "뭐가---!" 버럭 버럭 화를 내도 모자른 판국에 로렌은 빙글 빙글 웃어가며 경하 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격의 없이 대해주기를 바랬는데 넌 화가 나야만 내게 그런 식으로 말 을 해주는 것 같달까?" "그거야 로렌 당신한테 말을 함부로하면 그 카스핀인지 뭔지하는 남자 가 도끼눈을 뜨기 때문이잖아!" "카스핀에겐 내가 주의를 주도록 하지." 빙글 빙글을 넘어서 능글맞아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경하 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어이구 내 팔자야. 제국 황제한테 반말이나 지껄여야 되다니. 정말이 지 내일이라도 암살자들한테 목이나 안 따지면 다행이지." "걱정말게. 이 궁의 보안은 장담할 수 있어." 그 말에 경하는 코웃음을 쳤다. "흥. 보안은 무슨. 나도 멀쩡하게 걸어 들어왔고 라마이드도 아무런 거침없이 걸어 들어온 궁인데." "그거야 너와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나. 암살자들은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보통 사람이야." "모르는 소리하지마. 하셰카 같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빗물 처럼 녹아서 아무데서나 나타난다구." "………뭐라고 했나 지금?" 빙글거리며 농담하듯 경하와 말을 주고 받던 로렌의 목소리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뭐라고 하긴. 덕분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젠장 생각하기도 싫어." "빗물처럼 녹는다구?" "그뿐아니야. 어떤 사람은 그대로 시커먼 덩이가 되어 터지질 않나. 장난이 아니라구. 로운이나 기엘의 말로는 흑마술을 쓴다고 했지만 그 게 어느정도가 한계인지도 모르겠고, 여하튼 어지간하면 하셰카랑은 상관도 하고 싶지 않아. 물론…." 말을 하다보니 경하는 아차 싶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나 뭔가 잊어버리고 있었어….' 시유를 납치 해갔던 것은 어디까지나 검은 암살단 하셰카. 아니 이제 는 암살단이라 부르기에도 한계가 있는 그들이다. 여하튼 그들이 납치해간 시유는 결국 카드미엘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렇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배후에 로렌이 있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제길 걱정했던 문제가 해결되는 바람에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 '저 사람은 친구가 아니야.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눈앞의 사람은 기엘이나 로운이나 이리야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는 얼마전까지는 적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순간 경하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로렌." "………."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정확하게 대답해 줄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주지. 내게 격의 없이 대해주는 것에 대 한 보답으로." "검은 암살단 하셰카… 그들에게 시유를 납치하라고, 수단 방법을 가 지리 않고 시유를 데려오라고 명령한게 당신이야?" 순간 로렌은 대답을 망설였다. 일이 스무스하게 진행되버리는 바람에 잠시 잊고있었던 일이다. 시간 간격을 조금 두고 로렌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흐음. 그것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대답을 하고 싶군." "똑바로 말해. 명령했어?" "명령했다와 의뢰했다는 상당히 어감이 틀리지." "로렌!!!" 다음 순간 경하는 로렌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힘껏 벽에 몰아 붙이고 경하는 이를 악문채 물었다. "로렌 당신이었어?" "분명 내가 원하는 사람들 데려와 달라고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 나 거래였다." "그게 그말이잖아!" "그들이 네게 무슨 짖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암살 같은 것은 그 들에게 의뢰한적 없어." 로렌은 경하의 꽉 틀어쥔 손을 풀으려고 했지만 분노로 눈앞이 새빨게 져있는 경하의 손은 풀어낼 수가 없었다. "의뢰한 것은 사실이란 소리잖아!" "하지만 네게 위해를 가하라고 한 적은 없어!"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지막지한 암살단이라구!!" 파앗--! 순간 로렌이 경하의 팔을 떨쳐내었다. 털썩--. 경하의 몸이 푹신한 의자위에 떨어졌다. "머리를 식히고 다시 이야기하지." "로렌 당신하고 하고 싶은 말은 더 이상 없어." 그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경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로렌이 막아섰다. "이야기는 끝까지 하도록 하지." "싫다고 했지!" 팽팽하게 서로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불과 30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좁은 공간을 두고 경하와 로렌의 눈동자 가 불꽃을 튀기며 대치했다. "비켜!!" "이야기를 끝까지 마칠때까지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싫다고 했지!!" "싫어도 안 돼!" "당신하고는 절대 앞으로도 두 번 다시 말하기 싫어. 얼굴도 보고 싶 지 않아!" "두번 다시 내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해도 이야기는 끝까지 듣고 나 가." 강력하게 말해오는 로렌의 말투에 경하는 순간 망설였다. 이 사람을 다시 한번 믿어도 되는 걸까 하는 마음이 절대 이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 동시에 경하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좋아. 무슨 말이든지 해봐. 하지만 명심해." "…………." 경하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어떤 말을 하던간에, 어떤 이유가 있었던 간에 당신이 의뢰를 했기 때문에 시유가 그런 가혹한 경험을 하고 이리야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것만큼은 명심해주었으면 해." "기억해두도록 하지. 그럼 이만 자리에 앉아주게." 털썩 주저 앉은 의자는 푹신했지만 조금도 푹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얼음 위에 앉아있는 기분. 화가 한번 났다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머리가 미칠 듯이 차갑게 식어내 린다. 몸에 한기가 들을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은 경하는 조용히, 그러나 단 호한 표정을 지은채 로렌을 올려다보았다. 경하의 그런 시선과 눈이 마주친 로렌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발걸음을 옮겨 한쪽 옆에 늘어져 있는 줄을 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카스핀을 불러오게. 그리고… 와인도 한병." "술같은 것은 마시고 싶지 않아." 경하가 한마디 했다. "자네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야." 로렌은 경하의 항의를 일축하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대 지급이라 전해. 무엇을 하고 있든지 당장 출두하라고 말이야." "예. 폐하." 시녀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카스핀이 올 때까지는…." 시녀가 나간 것을 확인한후 로렌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 무로 된 벽장 쪽으로다가갔다. 한참을 그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그는 이윽고 오른쪽 제일 밑 의 선반에서 두툼한 양피지 더미 하나를 꺼냈다. 털썩--- 로렌은 그 양피지 더미를 경하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셰카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다." "…………." "그것을 일단 읽어. 그리고 나서 이야기하지. 일대 일로, 가이칸과 미 메이라의 황제며, 수장으로써, 그리고…." "그리고?" "남자 대 남자로 말이야." *** "하아…." 피곤해진 눈을 비비며 경하는 자신의 숙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카스핀과 로렌의 앞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탓인지 피곤함이 온 몸을 침식해오고 있다. "후우. 죽겠다." 뻑뻑한 어깨를 두들기며 경하가 마악 문에 손을 대려는 손간 안쪽에서 부터 문이 벌컥 열렸다. "경하님 돌아오셨습니까!" 화들짝 놀라기는커녕 경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엘과 열린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경하님?" "피곤해. 내일 하자구 내일." "하지만 저어…." 머리가 빙빙 돌정도로 피곤해진 경하는 그대로 침대에 가서 쓰러지려 고 했다. "그렇게 피하지만 말고 이젠 적당히 이야기를 해보지." 로운이 침대에 픽하고 쓰려지려는 경하를 불렀다. 그 순간 경하의 머리에 핏대하 하나 툭하고 불거져 나왔다. "으윽--- 이야기는 질색이야. 제발 오늘은 좀 나 좀 내비둬죠. 골이 아프니까." "그러니까 그 황제와는 상대하지 말라고 했지 않았나." "미안 잘못했어. 다 내 탓이야. 이놈의 성에 머무른것도 결국 내 잘못 이구, 그놈의 황제랑 이마 맡대고 싸운것도 다 내탓이고, 시유가 납치 된것도 내탓이고, 그덕에 이리야가 다친것도 내 탓이고…." "그래. 다 네탓이니 나와 이야기 좀 하자." "에?" 혼자서 투덜 투덜 하며 침대만을 오매불망 바라보고 있던 경하는 갑작 스럽게 들려온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긴장을 해버렸다. "눈치 못채게 살살 피해도 소용없어. 나는 하루종일 여기서 널 기다렸 으니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리야. 경하는 끄응--하고 신음소리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부탁이니까 내일 이야기 하면 안 돼?" "황제와는 하루종일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네 파장이 저녁 내내 불 규칙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이리야와는 또 다른 용건으로 로운이 경하를 다그쳤다. '아이고. 죽겠다.' 경하는 그만 손을 들어버렸다. 이번에는 다른 방면으로 말이다. "케인. 모두를 내보내고 문을 닫아버려."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경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든 내실에 폭풍과도 같 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다음 순간 경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서있던 그자세로, 혹은 앉 아있던 의자와 함께 방밖으로 내몰려져 쾅소리와 함께 닫혀진 문을 바 라보고 서 있었다. "…………!" "경하님!!" "이녀석이…!" 세남자는 너무나 황당해하며 문에 매달렸다. "야!!! 너!! 말좀 하자니까 이게 무슨 짓이야!!"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경하님! 말씀을 해보세요!!" "이녀석!! 당장 열지 못해!!" 로운이 쾅 쾅하고 문을 두들겼지만 이상하게 문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 았다. 세나케인이 소리를 차단해버린 듯했다. 화가 난 로운이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찼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 이제는 별짓 다하는 군." 로운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황제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운에게 말했다. "그에게 물어 보는 쪽이 낫지 않을까?" "이 시간에? 게다가 그런 개인적인 용건으로 면담을 요청하는 것 따위 달갑지 않아. 차라리 저녀석을 끌어내서 물어보는 쪽이 훨씬 나아." "하지만." 기엘은 그렇게 말하다 말고 문득 아무말 없이 문을 바라보고 있는 이 리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리야씨." "아. 아아." 뭔가 할말은 많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이리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기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계속 피하고 싶은 모양이야." "글쎄요." "하기사 나도 대놓고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어서." 멋쩍은듯 머리에 손을 얹은 그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는 시늉을 했다. "할 수 없지 뭐. 녀석 말대로 하룻밤 자고 내일 이야기 하는 수 밖에 내일은 일어나기 전에 와서 진을 치면 되지 않을까?" 이리야의 말에 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런 상태라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어쩔 수 없겠 지. 일단은 쉬고 내일 확실하게 의논을 해보고 결정을 하자. 기엘." "그래." 기엘도 그에 동감을 표했다. 이야기 할 것은 많다. 이렇게 밖에 서서 경하를 불러 보았자 고집을 피운채 문을 닫아 버린 경하가 다시 나올리는 없는 노릇. 결국 세 남자는 조용히 경하의 방문 앞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하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니까 그런 것이다. 인간들이란." "말끝마다 그 인간들이란 이라는 소리는 좀 빼줄래 케인?" "네 녀석이 하는 말을 군소리 없이 들어 주었으니 내 말투에는 신경쓰 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시끄러워 케인." 경하는 침대에 엎어진 자세 그대로 세나케인에게 대답했다. 그는 지금 눈에 보이는 형체가 되어 경하의 침대 한쪽 구석에 둥둥, 마치 유령처럼 떠 있었다. "흐음……." 그는 마치 한 삼일 밤낮으로 고민을 하는 사람같은 얼굴을 하고는 경 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엇에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수 없군." "이해 안 해도 되.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경하는 보들 보들한 시트 사이에 코를 박은 채 대답했다. 세나케인에게 말한 그대로 경하 스스로도 무엇에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쳇. 로렌이라는 녀석." "그가 하는 말에는 일리가 있었지. 게다가 그에게 이제와서 책임전가 를 할 수도 없지않나?" "알고 있어. 그것에 대해 보상해 달라고 하는 것도 웃기다는 것도 안 다고. 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잖아." 경하가 로렌에게 들은 하셰카에 대한 이야기들은 국가 기밀에 속할 정 도의 이야기들뿐이었다. 하셰카가 단순한 암살 집단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어느 정도의 상대인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 다. 경하에게 있어 하셰카는 이 미메이라에 온 뒤로 어떤 연유였는지도 모 른채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혀온 상대일 뿐이다. 원인은 작은 것이었지만 이미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그들에게 거창하게 복수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기엘도 로운도 이리야도 시유도 그리고 자신도 모두 이렇 게 멀쩡하게 살아 있다. 그것으로 족하다고, 더 이상 부딧히지만 않는 다면 그것으로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지금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생각. 하셰카가 생각보다는 광범위하지만 또한 의외로 소수 집단이라는 것 따위 경하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사실은 암살자라기 보다는 흑마술사들의 모임이라는 것도 경하 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경하가 이 아슈레이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전재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하튼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에 바람의 계승자…라는 건가. " 잊으려고 하면 모든 것을 덮어두고 그대로 떠나면 된다. 경하가 해야할 일들은 모두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리 뿐. 하지만 무엇인가가 아주 꺼림직한 무엇인가가 경하의 마음속에서 떠나 지 않았다. 그 꺼림직한 것을 로렌은 아주 손쉽게 경하의 눈앞에 드러내보였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로렌이 알려준 몇가지의 사실이 지금 경하 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모여 실체화 되고 있었다. 암살자들과 흑마술사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경하일행에게 드러내보인 노골적인 적의, 그리고 아셀과 하나스와 가이칸, 신국들…. "으윽. 짜증나." 아슈레이는 변화를 격는 중이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신국의 계승자들이 교체되고 있다. 그리고 가이칸에는 로렌이라는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아셀 역시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다. "시계 방향이네." "무엇이?" "그러니까 대충 말이야. 중간지대에서 미메이라, 그뒤에 호로스와 나 유, 내가 느끼기엔 바라스도 새로운 계승자가 나타났거든. 그 다음에 는 가이칸에서 아셀. 모르긴 몰라도 다른 나라에도 어떤 변화가 있을 지 몰라. 그게 딱 시계 방향이라 이거지. 뭐 더 자세하게 따지면 시계 방향의 소용돌이 쯤 될까?" "균형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하나가 바뀌면 다른 것도 그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원래 그랬던 거야?" "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 그 물의 계승자가 말한 그대로다. 한날 한시에 시작된 일이다. 그러니 그 교체도 비슷한 시기에 일어날 수 밖에 없어." "그런건가…." 슬슬 눈이 감겨오기 시작했다. 경하는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면서 한가지 궁금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케인에게 물었다. "케인. 그거 나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말하는 거냐." "라마이드처럼, 물을 매개로 이동하는 거 말이야. 내 경우는 그 매개 체가 바람이 되겠지만." "가능하다.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가볍게 수긍해주는 세나케인의 말에 경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해봐야 하나도 꿀리지 않 아.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알지 못하고는 발상의 전환도 할 수가 없는 거라구."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히려 넌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해내는 일들이 있지." "그런건가?"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야." "칫- 비행기 태웠다가 테러해서 떨어트리지 말아." 눈커풀이 무겁게 눈을 덮어왔다. 경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숫자를 셀틈도 없이 수마가 몰 려들었다. 몰려드는 수마를 그대로 맞으며 경하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했 다. 잠깐 잠깐의 잔상이 새카매지는 의식사이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 ------------------------------------------------------계속 필사적으로 졸음을 또 참고 있습니다. -_-;;;;; 잠깐.아주 잠깐 ...중간 부분을 생각하는 순간 고개가 툭--- (어이 어이 자면 안 돼 -0-) ...여러분. 안녕히 주무십시오. [아슈레이 8] 2장 멈춤, 그리고 흐름 (8)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시녀의 얼굴이 그녀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 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주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고있을 정도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기엔 그녀가 말한 내용이 너무나 황당하 다. 기엘은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로운이 재빨리 그녀에게 물었다.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까?" "폐하께는 이미 알렸습니다." "늦었군." 로운은 황급히 곁에 있던 겉옷을 들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꽤나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시녀들이 많은 것을 보니 모두 소문을 들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가는 로운의 뒤로 기엘이 미친 듯이 따 라갔다. 거대한 기둥을 돌아 아직 해가 뜨는 중인 새벽 하늘 밑으로 뛰어 나가는 순간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싸안았다. "………!!" "………!!" 하늘로 올라가는 바람이 두 사람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하늘로 향 하게 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태자궁에서도 가장 높은 탑, 그리고 그 탑에서 도 가장 높은 곳에 아슬 아슬 하게 서 있는 경하가 있었다. "미치겠군." 로운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기엘은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경하를 바 라볼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올라간걸까? 물론 바람술을 사용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도대체 어째서 왜! 저런 곳에 올라가 있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올라가서 데리고 내려와야겠어." 로운이 막 주문을 외우려고 하는데 기엘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 겼다. "소용없어. 자세히 봐. 쉴드가 있다." 뚫어져라 경하를 바라보고 있던 기엘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로운 에게 알려주었다. 그 말에 로운이 신경을 집중하고 위를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바람의 쉴드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언 듯 봐서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엷지만 확실한 쉴드였다. "무슨 생각이지 저 녀석." 로운은 혀를 찼다. 위험하지는 않다는 판단에 마음은 놓였지만 상황은 그렇지가 못 하다. 경하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까무라쳐 기절하는 시녀가 있는 가 하 면 벌써 몇 명이 웅성웅성 거리면서 멀리서 경하를 지켜보고 있 었다. 물론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궁에서 일하 는 시녀들이나 사용인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시 바람이 잘 불지 케인?" 로운과 기엘을 비롯 많은 사람들을 놀라 자빠지게 만들고 있는 당사자는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은 어둑한 카드미엘 의 성 이곳 저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 다. 「이곳은 일종의 길목과 같은 곳이다. 바람 뿐만이 아니지. 신국 이 아닌 곳에서 이정도의 장소는 드물다.」 "뭔가 재미있는 곳이야." 경하가 불러들인 바람덕에 펄럭 거리고 있는 깃발의 길다랗고 두 터운 봉에 팔을 감고 경하는 멀리 성벽의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살며시 지평선의 너머에서 기어오고 있었다. 지평선 노란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이리야…화 많이 난 것 같지?" 「화를 내는 특별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것 같더군.」 "뭐 화를 내도 어쩔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쪽이 좋다고 생각했 거든." "그것은 그도 아는 일이지만 네가 아무말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 를 내는 듯 싶던데?" "뭐야. 갑자기 불쑥." "인간과 대화할 때는 이쪽이 좀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다 고 판단했을 뿐이다." 세나케인의 말에 경하는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났긴 했지만 공중부양상태의 그는 역시나 인간 같지 않다. 피식하고 경하는 웃어버렸다. "웃기지마. 그러고 둥둥 떠있는게 어디가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 한 상대냐?" "그러는 너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모르나?" "상관없어. 나는."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왠지 경하는 세나케인의 그런 마음 씀씀이 가 고마웠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지만 또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마 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적인 그런 마음이 경하를 더욱 더 답답하게 하고 있었 다. 그렇기 때문에 세나케인의 존재가 경하는 너무나 고마웠다. "바라는 대로만 해결 된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그것은 누구나 하는 말이지." "이리야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 "어차피… 돌아갈 날도 멀지 않은 걸. 굳이 그를 데리고 미메이 라로 돌아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거잖아. 그러느니 라마이드에게 이리야를 데려가라고 하는 쪽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그것은 그의 일이다. 네가 상관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니까. 기엘이나 로운과는 달리 그는 …." "어차피 아무것이 없어도 살아 왔던 사람이다."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내가 끼어들어 온통 휘저어 놓은 것이니 까. 아! 그렇다. 로렌에게 부탁해서 이리야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할까? 그래.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뭔가 또 잊어버리고 있군." 줄줄 혼자서 이런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경하에게 세나케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찬물을 끼얹었다. "아. 아아 그렇지, 돌아갈수 없을 지도 모르지. 그것도 결국 내 탓이 되는 건가?" 타고난 능력을 상회해버리도록 재구성 되어 버린 이리야의 능력 에 대한 소리다. 경하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찝찝해. 모든게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끼어들어야 할 운명이라면 곧 닥치겠지." "그런건가?" "생각보다 싫은 기분이야. 그런게 느껴진다는 건." 경하의 머릿속에 오래전에 만났던-아니 사실은 그렇게 오래 되지 도 않았지만-예언의 현자가 떠올랐다. "그는 항상 이런 기분을 느끼고 살아가겠지?" "그렇겠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불안해." "그래서 더욱 더 그를 보내고 싶은 것인가?" "그래." "그렇다면 저 아래서 목이 빠져라 너를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은 ?" 세나케인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경하는 아래쪽의 두사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고 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하하하. 나도 잘 몰라. 왠지 저 두사람은 내가 뭐라고 하든간에 죽자 사자 따라올 것 만 같거든. 뭐 이리야도 같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피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어. 한 사람 이라도." "불공평하다고 할 것이다." "응." "그러니까 네가 잘못한 거다." "알고 있어.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그리고 어떻게 해야할지도."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경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조금 더 강하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실처럼 늘어 져 있던 아침 해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 작했다. 곧이어 눈부신 햇살이 경하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라마이드?" 실눈을 뜬채 해를 바라보고 있던 경하는 문득 나유의 계승자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아직은 다 정리 되지 않은 태자궁의 화원 한가운데 그녀가 처음 나타났던 작은 연못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연못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물결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물결로 순수한 물의 엘이 만들어 내는 동심원이었다. "…아름다워." 경하는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그에 화답하듯 조용히 서 있던 라마이드의 팔이 위로 들러올려졌 다. 쏴아----하는 물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작은 연못이 물들이 일제히 그녀의 엘에, 그녀의 힘에 반응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화려한 물방울들은 비쳐오기 시작한 황금빛 의 빛을 받아 황금보다도 더욱 반짝이며 그녀의 파장이 닿는 모 든 곳에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변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마치 선고라도 하는 듯한, 세나케인의 낮은 목소리가 경하의 귓 가에 들려왔다. 어느새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경하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 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경하의 사방에서 느낄 수 있다. "변하는 것?" 「네 힘은 전대 미문의 것, 너의 힘이 다른 계승자에게까지 미치 고 있다.」 "……………." 하늘로 솟아오르는 물방울들에서 그녀의 파장이 경하에게까지 밀 려왔다. 그것에 반응한 경하의 엘이 그녀가 흩뿌려 올린 금색으로 반짝이 는 물방울들을 온 카드미엘의 하늘로 바람과 함께 날리기 시작했 다.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건가? 바람도, 물도, 불도, 땅도 …." 경하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갔다. *** 이른 새벽 태자궁에서 일어난 소동은 결국 어찌되었는지 쉬쉬하 며 끝나고 말았다. 말이 세어나가는 것을 꺼려한 미타 남작의 빠른 조치 때문이었 다. 여하튼 그렇게 쉬쉬하면서 수습은 되었지만 그 일을 일으킨 당사 자는 쉬쉬는커녕 대놓고 혼쭐이 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도 조금쯤은 신경써 주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전혀 고려하지 않으실수가 있습니까?" "미안." "놀라서 혼절한 시녀가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나마 새벽이 니 망정이지 한창 대낮이었으면 어쩔번했습니까!" "잘못했어. 기엘. 그러니까 그만 화내. 로운도 가만히 있잖아." "가만히 있고 싶어서 가만히 있는게 아니다. 기엘이 내 대신 화 를 내고 있으니 참고 있을 뿐이지." "로운 너무해." "경하님!!" 웃으면서 어떻게든 기엘의 화를 피해보려 하지만 그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매사에 조심을 하셔야 합니다. 이곳은 미메이라가 아닙니다." "응. 조심한다니까." "말로만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정말 조심할게. 이제 그만하고 아침먹으면 안될까? 기엘? 나 배 고픈데." "절대로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신다면요." 로운은 기엘이 경하를 혼내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가 마지막의 말을 듣는 순간 삐끗하고 미끌어졌다. '…참나. 결국은 저 말을 하고 싶었던거군.' 오랜만에 자신대신에 잘도 혼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로운은 그 만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알았어. 약속할게. 그러니까 식사하자구. 오늘은 이런 저런 할 일도 많단 말이야." 혼내보았자 매번 말짱 도루묵이 되는 상대라는 것쯤은 로운이 더 잘 알고 있다. "밥벌레에게 밥을 못 먹게 하면 바람 뿜는 괴물이 되어 버릴 거 다. 기엘. 그만하지. 이리야는?" "이봐. 로운!" "설마 그 나유의 수장 계승자분께 가 있는 건가?" 기엘이 하는 말은 거들 한쪽귀로 흘리면서 로운은 자리에서 일어 섰다. "아 로운. 식사하고 나서 할말이 있으니까 이리야 좀 찾아봐줘." 그말에 로운의 한쪽 눈썹이 휘로 휘익-- 치켜올라갔다. "어제는 세명을 다 한꺼번에 몰아 내놓고 오늘은 찾아오라고?" "응. 할말이 있으니까." "제 멋대로인 녀석." "헤헤. 미안." 기엘이 혼내는 소리를 한쪽으로 들으며 경하는 로운에게 부탁을 했다. "알았다. 찾아내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니 그렇 게 하지." "고마워." "기엘. 그 정도로 해둬. 식사 하기도 전에 체하겠어." 문을 닫기 직전 로운은 기엘에게 한마디 더 하는 것을 잊지 않았 다. "시키는걸 제대로 할 줄 아는 똑똑한 녀석이었으면 우리가 지금 까지 고생을 했을 리가 없잖아?"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경하쪽에서 무엇인가가 휘잉 날라왔다. 로운은 얼른 문을 잡아당겼다. 둔탁한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에 로운은 웃음을 터트렸다. *** "삼일 후." "삼일 후요? 어째서 삼일 후입니까? 마음을 먹으셨다면 지금 당 장에라도…." "다른 사람들 눈을 생각하라고 한 건 기엘이잖아. 어제 가겠다고 황제, 아니 로렌에게 말했거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로운이 물었다. "뭐 특별하다기보다는 연회를 열고 싶데. 환송회라든가 하는 명 목으로 말이야. 그냥 보내면 자신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 "그녀석 체면을 세워주고 싶은 마음은 나도 사실 별로 없어. 그 재수없는 자식을 뭐하러 생각해 줘? 하지만 뭐 일단은 신세도 졌 으니까 합의를 봤어. 일주일 뒤에 떠나라고 하는걸 그렇게까진 할 수 없다고 해서 삼일 후로 결정을 봤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연회라고 해도 거창한 거는 아니고, 정식으로 만찬정도 라고 해 야하나. 뭐 그런 거리고 하니까 그렇게 부담 느낄 필요도 없는 것 같고." 경하는 세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리야와 시선이 마주친 경하는 살짝 눈을 내리 깔았다. 사실은 입을 여는게 쉽지는 않다. 라마이드가 도착한 이후로 경하는 반쯤은 고의로 그리고 나머지 반쯤은 우연치 않게 이리야를 피해오고 있었다. 왜 그런 것인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채로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물러날 곳도, 피할 곳도 없다. "저어. 이리야." "…………." 이리야는 마주친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침묵이 넓은 테이블 위로 흐른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경하와 그 앞에서 고개를 돌린채 입을 다물 고 있는 이리야. 그 사이에서 기엘과 로운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누군가 입을 열 기를 기다렸다. 경하는 입술을 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쉽게 말이 되어 나 오지 않는다. "…………." 숨을 한번 들이쉬면서 경하는 두 주먹을 무릎 위에서 꼬옥 쥐었 다. 결심은 어제부터 해왔던 일이다. 실행만 하면 된다. "미안. 아무 말 하지 않아서. 하지만 맹세코 이리야를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니야. 나는 단지…." 남자답게 이야기하자고 생각했지만 왠지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지, 나는… 나는 돌아가야 할 사람이고, 결과적으로는 이리야 에게 그쪽이 좋다고 생각했어. 단지 그것 뿐이야." "네 생각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테데?" "그러니까 미안해." 꾸벅하고 경하는 고개를 숙였다. "내 생각이 짧았어." "…………." "미안." 경하가 말하는 짧은 단어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이리야에게 흘러 간다.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채 묵묵하게 경하의 사과를 받은 이리야 는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미안해." "정말이지 할말 없게 만드는 군." 순간 팽팽하게 긴장했던 공기가 풀어진다. 어깨를 굳히고 있던 경하는 이리야의 말에 조금씩 조심스럽게 어 깨를 내렸다. "그대로 그 라마이든지 뭔지 하는 물귀신 같은 여자를 따라가라 고 했다면 그대로 쥐어 패려고 했었다." 꿈틀하고 경하가 다시 어깨를 굳히려는 순간이었다. "그렇게까지 깔끔하게 사과를 해버리면 고민해왔던 이쪽이 바보 가 되잖냐. 젠장. 정말이지 고단수라니까." "미안. 이리야." "됐다. 됐어. 어차피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호락 호락 네말 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널 따라 다니고는 있지만 난 기사양반이나 파계 신관양반처럼 네 부하같은게 아니라고. 알 고 있어?" "응." 경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미묘한 차이였다. 세 사람 모두에게 같은 믿음을 가지고있지만 이리야에게는 조금 은 다른 감정이 섞여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엘이나 로운을 쉽게 생각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 "네 말대로 너는 언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고, 네가 돌아갈 때까지는 네 옆에 있겠다. 그 뒤의 행로는 내가 결정하겠 어. 무슨 말인지 알지?" 이리야는 하고싶은 말을 마치고 나니 천년 묵은 체증이라도 내려 간 듯 시원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경하에게 다가갔다. "우어. 쳇 이렇게 싱겁게 끝날 일을 몇날 며칠을 고민했는지 정 말 바보같구만. 나중엔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야. 알겠어? 이 바보 꼬마녀석. 네 말대로 내가 목숨부지라도 하려면 어떻게 해 서든 기어서라도 가야한다구. 그러니까!!!" 꿀꺽--- 경하는 침을 삼켰다. "앞으로 또다시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을 줄 알아. 알겠어-?!" "으. 으응." "그래 착하다." 이리야는 슥슥슥 경하의 은발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에. 헝크러져!! 하지마. 기엘이 빗어준거란 말이야. "사내 자식이 머리카락 같은거로 그딴 소리 하지마. 소름돋아!" "헝크러지면 나중에 기엘이 다시 빗으면 따갑단 말야 그게 얼마 나 아픈데!!" "웃기는 소리 하지마!!" 푸하하하 하고 웃으며 이리야는 더욱 더 경하의 머리카락을 흐트 러 트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꼭 닫혀있던 창 두 개가 동시에 벌컥 열리더니 차가운 공기가 순 식간에 안으로 불어들어왔다. "…우앗!! 뭐야 이거." 경하가 곁에 있는 한 이런 돌풍같은 무례한 바람은 일어나지 않 는다. 경하 스스로가 불러오지 않는 이상. "로운. 그쪽을 닫아 줘……우앗!!!" 경하를 돌아볼틈도 없이 붉은 색의 기운 같은 것이 기엘을 덥쳤 다. "기엘!!!" 로운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은 기엘에게 상처를 주기는커녕 기엘의 몸을 스쳐 지 나가 경하에게로 향했다. "경하님!!!" 그 붉은 기운을 따라가던 기엘의 눈이 순간 크게 벌어졌다. "…………!!!!" 타오르는 듯한 기운이 온통 경하의 몸 둘레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타오르고 있었지만 경하의 머리카락 하나, 손가락 하나 그을린 자국같은 것은 없었다. "저건 도대체 무슨…?!"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데 불꽃 같은 기운 안에 갇혀 있 던 경하가 입을 열었다. 「호로스의 불꽃이… 변하고 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 들기 시작했 다. 창가에 있던 기엘이 경하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그것은 완전히 사 라졌고 경하는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지도 못할정도의 멍한 얼굴 로 눈만 껌벅였다. "………괜찮은 거냐?" 로운이 경하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경하님? 괜찮으십니까?" "아. 괘. 괜찮아." 헉헉 댈 정도는 아니었지만 경하는 꽤나 숨을 가쁘게 몰아내쉬고 있었다. "노…놀랐다." 숨을 몰아내쉬며 경하는 다시한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가끔 당하는 이상한 경험이지만 역시 몇 번을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게 그러니까." 뭐라고 설명을 해야할지 모르는 경하가 말을 고르는 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누가 대답하기도 전에 커다란 문이 벌컥 열렸다. "뭐. 뭐야!!" 문이 열리기 무섭게 로렌이 뒤에다가 미타 남작을 달고 뛰어 들 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어째서 이들에게!" "시끄럽다. 카스핀. 내가 결정할 문제다. 왈가 불가 하지마!" "폐하!" 두 사람이 시끄럽게 언쟁을 하는 것을 네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 서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나 싶어 심장을 벌렁 거리고 있는데 다 음 순간 황제가 뛰어 들어왔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식사중이었나? 식사를 방해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타앙-----하고 로렌이 양피지 한 장을 경하의 앞에 내려놓았다. 탁자의 울림소리에 비어있는 그릇들이 일제히 달그락 거린다. "뭐. 뭔데 이건?" 새빨간 글자들이 양피지를 가득 매우고 있는 것이 경하의 눈에 들어왔다. 경하는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싶어 로렌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 다. 로렌은 그런 경하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파악 내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호로스와 아셀이 결탁했다. 아니, 셰비 통산 연합국에 속한 모 든 나라가…." "뭐?" 로운의 눈동자가 순간 분노로 달아오르는 것이 경하의 눈에 보였 다. 파르르르 떨리는 로렌의 손이 그의 감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호로스가, 불꽃의 신국이 아셀과 손을 잡았다." ------------------------------------------------------ 2장 마침 3장으로 들어갑니다. 앗싸라비야~~~ 2장이 끝났다. 만쉐이----!! 만쉐이-----! 역시 정신없는 쪽이 좋습니다. 신경전 따위 질색이야!!! (반쯤 돌았음) 오라이~~ 삐약 삐약~~~크르르르르르 ......문제는....머리속에 이리저리 담아두고 있던 다른 녀석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사실. 어디까지나 아슈레이가 먼저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천방지축 기사 양반 하나가 머리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습니다. 정식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주제에.......(속으로 놈을 비웃고 있음) 졸리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겁니다!! (당당) 하지만...음음....경하가 먼저죠. 당연히. (이쪽도 당당) 그렇지만 머리속에서 뛰어 댕기는 놈을 잡기는 좀....(역시 당 당) (뭐하는 거냐----버럭!!!!!) 휘이잉-----------파악!!! 털썩 (날아온 돌을 맞고 기절.) 안녕히 주무십시오. [아슈레이 8] 3장 검게 타오르는 불꽃 (9) "그러니까 지금 전쟁 준비를 하겠다는 거야?!" "당연하지. 내 앞마당에 흙발을 디디겠다는데 그럼 그것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너무 성급하잖아!! 좀더 알아본 뒤에 해도…." "불가능해." "로렌!!" 경하의 목소리가 하늘높이 올라갔다. 그런 경하를 미타 남작이 뒤에서 시퍼런 눈을 하고 노려보고 있 었다. 둘은 머리에 핏대를 올리며 말싸움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유치하게 싸우고 있는 두사람을 다른 사람들은 말리 지도 못한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쪽에서 쳐들어 온다고 이쪽에서도 전쟁 준비를 해버리면 둘이 똑같은 거 아니야!" "그럼 네네. 감사합니다. 하고 당하고 있을까? 차라리 목을 내어 놓고 잠을 자버리는 쪽이 좋을 지도 모르겠군." 이죽거리는데는 로렌이 한 수 위다. "그럼 도대체 뭐하러 나한테 알리러 온 건데!" 경하가 소리를 지르자 로렌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사실 이 질문을 바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호로스가 아셀과 손을 잡았다." "그래서!!" "아셀쯤이야 가볍게 받아줄수 있지만 호로스는 솔직히 말해서 어 떻게 될지 몰라. 미메이라에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순간 경하는 입이 막혔다. "…그. 그건." "내 경험상 엘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엘러뿐이다. 이제와서 모 른다고 하면 곤란해." "…………."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라도 좋아. 자아. 카스핀 돌아간다.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을 파악해서 보고하고, 아 그렇지… 최우선 사항으로 최대한 빨리 각 기사단장, 군단장을 모조리! 불러 모을 수 있는 녀석들은 다 불러들여. 마법진을 사 용해도 무방하다." "알겠습니다. 폐하." "최대한 정보를 끌어 모아! 각지에 보내둔 마법사든 뭐든 상관하 지 말고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이용해. 최대한 빨리. 시 간을 다투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있겠지?" "물론입니다. 벌써 이오카 쪽에서 보고가 도착해 있습니다." "알겠네. 카스핀. 그럼 자넨 나중에 보지." "………."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경하의 인사 같은 것은 상관 하지도 않고 그대로 로렌은 휭하고 사라져 버렸다. *** "골치 아파. 골치 아파---- 골치 아파!!!!" 세 남자의 앞에서 이리 저리 갈곳을 모르며 헤매던 걸음이 중간 이 우뚝 멈추어 서더니 다음 순간 어딘가 모르게 인간답지 않은 비명으로 이어진다. "아아아아. 정말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뛰겠네." 머리를 쥐어뜯으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물론이다. "정말이지 그 자식은 왜 그 난리인 거야. 진짜 미치겠잖아." 세 남자는 벌써 한 시간 째 내내 반쯤은 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있는 경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로렌의 전해준 그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바로 저 런 상태가 되어 버린 경하는 아무리 말려도 발악을 그만 두지 않 았다. "젠장할. 다 그 놈들 탓이야. 그 놈들 탓이라구!!" "그러니까 도대체 그 놈들이라는 게 누구를 말하는 건데?" "아아아아악-----!!!" 다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는 경하. 그것을 보며 로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물어도 경하는 같 은 동작을 되풀이 할 뿐이다. "피곤하군." 로운은 발광중인 경하에게 상관하지 않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하 고 이미 한참전에 포기한 이리야에게 걸어갔다. 그는 예의 널따란 탁자 위에 아슈레이 지도 하나를 펼쳐놓고 유 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유심히 보는 거지?" "아. 뭐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가만히 있는 것도 불안해서." 그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로운이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호로스와 아셀 제국에 검은색의 동 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건 내가 그린 거야. 사실 내가 그런쪽으로는 문외한이라고 해 도 말이야. 호로스와 아셀이라면 별로 궁합이 좋지 못하다고 본 다구. 가운데에 끼어 있는 하나스도 그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 르는 일 아니야?" "하나스는 일단은 미메이라측에 지원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 상태 이긴 하지만…." "약속이라고 하지만 문서화 된적도 없는 개인 대 개인의 약속인 이상, 하나스가 전적으로 주위의 다른 연합국들을 무시하고 무조 건적으로 미메이라를 지원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마지막까지 경하 옆에 있던 기엘도 어느새 이리야와 로운 가까이 에 다가와 있었다. "셰비 통산 연합국은 말이 연합국이지 사실은 별개의 나라나 다 름 없어. 하지만 상대가 가이칸이라면 말이 틀려지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으니까. 어쩔 수 없는 영토분쟁의 문제가 되어 버 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게다가 가이칸은 요 근래 계속 군비 확장을 해온 것이 사실이니까." "참나. 그렇지 않아도 넓은데 뭘 여기서 뭘 어떻게 더하겠다는 거야." 이리야가 툭툭툭 지도위의 가이칸을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같은 가이칸 인이라도 생각은 다르다는 건가?" 로운의 말에 이리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이칸 인이면 다 똑같다고 생각하진 말아 줘. 나는 원래 그런 쪽으로는 별로 감각이 없는 사람이니까." "문제는 하나스로군." 로운과 이리야가 쓸데없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기엘은 진 지한 얼굴을 한 채 예의 지도를 보고있었던 모양이다. "하나스가 왜 문제가 되는데. 괜찮아. 거긴 룬도 있고, 하나스의 국왕은 먹을 걸 좀 밝히기는 해도 약속을 어기거나 할 사람이 아 니라구." 모두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발광하고 있던 경하가 어느 사이엔가 제정신(?)으로 돌아 와 있었다. "하지만 경하님. 하나스의 국왕이 비록 경하님과의 약속을 지키 고 싶은 마음이 있다해도 외부적인 상황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진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도 위에서 하나스의 옆에 있는 나라들을 가리켜 보였다. "아셀과 호로스만으로도 하나스는 중간에 끼어있는 셈이 됩니다. 그 옆의 케리타는 기본적으로 가이칸과 하나스 모두에게 적대적 이긴 합니다만 이런 경우 당연히 하나스를 끌어 들이려고 할겁니 다. 하나스는 그 크기로는 케리타에 뒤지지만 군사력은 뒤지지 않습니다. 아셀과 거의 맞먹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아셀과 1:1의 문제라면 어떻게든 희망이 있겠습니다만 케리타와 아셀이 손을 잡고 하나스에 셰비에서 이루어졌던 조약을 들고 강요한다면 하 나스로써는 그에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셰비 연합국은 모두 비 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세력관계속에서 그 균형을 유지하며 지탱해온 나라들입니다. 아셀이 뛰어 들은 이상, 하나스 역시 본 의든 본의가 아니든 가이칸에 대항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설사 미 메이라가 가이칸 제국의 편에 선다해도 말입니다." "……………." 경하는 이를 악물었다. 정치니 외교니 국가간의 알력이니 하는 것은 잘 알지 못하지만 기엘이 하는 말에 코웃음을 칠 수 있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간단한 역학 관계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국은 지금까지 대륙의 전쟁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관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 지금까지는." 기엘의 설명에 로운이 한번 더 확인을 해준다. "그런데 이번에는 틀리다 이건가?" 호로스에 그려놓은 검은색 동그라미가 더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경하는 얼굴을 찡그리며 콕콕, 그 검은 동그마리 안에 펜으로 새 까만 점을 늘려나갔다. "후우…." 쿠욱--하고 무의식중에 펜으로 점을 그리는데 펜대에 묻어있던 커다란 잉크방울 하나가 아래로 주루룩 미뜰어 떨어졌다. "…아차." "이런. 경하님 조심하시지…." 새카만 잉크가 하필이면 호로스가 그려져 있는 자리에 떨어지는 바람에 지도의 호로스는 반이상 시커먼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 했다. "…………." 천천히 붉은 땅을 잠식해들어가는 검은 잉크. 순간 경하의 눈동자가 호로스에서 아셀로 급격히 선회했다. "…아셀. 황제가 암살 당했었지. 그리고…." 주욱-- 손가락으로 호로스와 아셀 사이에 선을 그었다. 미쳐 마르지 않은 잉크가 그래도 검은 줄이 되어 두 나라를 연결 했다. "호로스의 수장은…." 만났을 때의 그 꺼림직한 감각은 지금도 생생하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경하의 감은 호로스의 수장 로이드린이 뭔가를 가슴속에 품고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려니 하고 모른척 하고 있었을 뿐이 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하가 호로스의 수장 로이드린에게 호감을 가지지 못했던 결정 적 이유는 아마도 그가 환상속에서 보았던 전 수장 레나텐과 그 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케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상황과 때에 따라서 라고 해두지.」 제대로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 세나케인은 알아서 대답을 했다. "역시 하셰카가 뒤에 있는 걸까?" 자신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해왔지만 이럴때면 왠지 역시나 자신 이 이곳에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하님 혹시 무슨…?" 경하가 혼자서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기엘이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 일단은 일이 이렇게 된이상 제일 우선시 되는 것은 미메이라로 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경하는 돌아가기는커녕 지도를 보 면서 뭔가 계속 중얼거리기만 하는 것이다. "호로스… 호로스의 수장은 안심할 수 없어. 틀림 없이 미메이라 쪽으로 올거야. 아니, 내가 이곳에 있다면 분명 일직선으로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올 거야." "너를 향해서?" "왜냐고는 묻지마. 나도 모르니까. 젠장. 도대체 어디까지 뭘 어 떻게 했는지 알 수가 있나. 로렌에게 더 물어봐야 하나." "그쪽은 미메이라가 호로스의 대항할 비밀 병기가 되어 준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 이상은 더 이상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을 거다. " 로운은 팔짱을 끼고 있다가 경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그 정보를 듣고 바로 이쪽으로 온 것은 그런 연유라고 밖 에는 해석이 되지 않아. 누구보다 엘러들이 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황제다. 자신이 아무리 해봐야 호로스의 화염술사들에게 대 항 할 수 없다는 정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지만…."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들어 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지. 네 말대로라면 미메이라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 다. 물론 제가 돌아간다는 전제하에서지만." "돌아가지 않으면 되잖아." "돌아가지 않는다면 무고한 가이칸 인이 너로 인해 죽을 수 있 지." 순간 경하가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로운! 그만해!!" 무감동한 어조로 계속 말을 하고 있는 로운에게 기엘이 한소리 했다. 가뜩이나 기운이 빠져 있는 경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하 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굳이 그렇게 설명을 해야할 필요는 없어. 로운." "하지만 사실이야. 게다가 사실 그 예비 황제는 희열에 들떠 어 쩔줄 몰라하고 있지. 아마도 조금은 이를지 몰라도 절호의 기회 라고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모조리 긁어모아서 그대로 뛰쳐나갈지 도 몰라." "그는 그럴 사람이…." 왠지 로렌의 변호를 해야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지만 구구절절 로운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 경하는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입 을 다물어 버렸다. 호전적인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단순한 대화속에서도 느낄 수 있 었다. 무엇보다 제국내에 자자한 그의 평판이 그것을 뒷받침 해준다. 조금전에 병력을 점검해보라는 명령을 내릴 때의 그는 지금까지 봤던 어느 때의 그보다도 생기발랄했었다. "아으윽-----골아파. 젠장. 왜 갑자기 도매급으로 한꺼번에 넘어 가야 하는 거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앞으로는 시간을 다투는 일이 될 것 같 다. 이미 아버님이나 대신관께서도 알고 계실지도 몰라." "하아…." 경하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차례 차례 머릿속에서 생각의 단편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진 다. 하나하나 이어지는 기억의 단편들. 그리고 맞물려 돌아가며 얼기설키 얽혀 하나의 그림으로 짜맞추 어진다. "설마. 이걸 예상하고 로렌이 내게 하셰카의 정보를 모두 보여준 건가…." 경하가 혼자 말처럼 하는 말에 세 남자가 일시에 경직해버렸다. "하셰카…." "설마." "설마랄 것도 없군. 아셀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어." 로운이 혀를 차며 단정짓듯이 말했다. "정말로 휘말려들어가게 생겼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 로운은 씁쓸하게 기엘을 돌아보았 다. "기엘. 너와 나 둘 중에 하나는 대지급으로 미메이라에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경하가 로운의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호로스의 화염술사를 제국의 기사들이 당해낼리 없어." 호로스의 기사들은 모조리 화염술사일 수 밖에 없다. 미메이라의 기사들이 모두 그렇듯. 무엇보다 화염술사는 가장 살상력이 높은 주문을 가지고 있다. "그 누구의 말 처럼 앉아서 당할 수는 없으니까." 웃는 얼굴인지 화를 내는 얼굴인지 모를 묘한 표정이 로운의 얼 굴 위를 스쳐지나갔다. ------------------------------------------------------계속 아무래도 오타가 많은 듯 싶습니다만.... --;;;;;; 눈이 삐었는지 도통 안보입니다. 부디.....읽으시며 자체 오타수정을 ...쿨럭. 3장 검게 타오르는 불꽃(10) "돌아가지 않으시겠다구요?" "그렇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의무를 다 하듯, 저도 제 의무를 다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경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앞에 앉아있는 것은 나유의 수장 계승자 라마이드. 나름대로는 자초지종을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건만 그녀는 경하의 말을 이해하는 듯 하면서도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앞으로 한동안은 꽤나 위험할지 몰라요. 물론 로렌은 라마이드님 정도야 알아서 보호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해야 할 일을 버려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이리야씨는 지금 경하님의 영향하에 있기 때문에 그다지 영향을 받고 계시지 않습 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걱정스러움이 앞선다. 자신의 결정 때문에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 결코 좋 다고만 은 할 수 없는 영향을 말이다. "이리야는 때가 되면… 나유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자유 의지이고,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예요. 보내고 싶기는 합니다만…." "경하님." "네?" 라마이드는 그녀의 짙푸른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는 바람을 얼굴 가득히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때를 기다려볼까 합니다. 그건 안될까요?" "…………." 라마이드가 머무는 곳에서는 언제나 청량한 물의 내음이 난다. 지금도 경하는 그 물의 내음을 그래도 맡고 있었다. "부득이 하게 저 혼자 이곳에 있습니다만 당신의 수행원들 같이 제게 도 수행원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지요. 그들 이 오면 아마도 전 꽤나 잔소리를 들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웃어보인 라마이드는 왠지 조금전과는 틀리게 나이 어 린 귀여운 소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말 깜짝 놀랐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리야씨를 확인하 고 싶었지요. 그덕에 지금 전 이곳에 홀로 있게 되었습니다." "에? 그. 그런…." 왠지 자신 못지않게 라마이드는 그녀의 수행기사들에게 꽤나 골칫거리 가 아닐까 하는 착각 마져 든다. "돌아가면 저는 정식으로 나유의 수장이 됩니다. 그러면 한동안 이 넓 은 대지의 습기를 느낄 수 없겠지요. 가능하다면 허락 되어 있는 시간 동안 제가 원하는 것을 보고, 원하는 사람을 만나고, 원하는 것을 느 끼고 싶어요." 경하는 조금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라마이드를 보면서 왠지 잘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자신이 지금 대신하고 있는 자리에 원래 있었어야 할 시안. 그녀가 만 일 원래대로의 길을 걸었다면 라마이드와 비슷한 웃음을 짖고 있지 않 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경하는 라마이드에게 더 이상 돌아가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호로스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호로스의 수장이 그런 행동을 하는데에 는 모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역시 아직 수장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죠." "네. 제가 키리엔에 들른 직후였으니까." 경하는 고개를 숙였다. 왠지 자신이 호로스의 수장 로이드린을 그때 만났던 것이 후회가 되었 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왠지 요 이틀간은 무슨 일어나기만 하면 모두 자신의 탓처럼 여겨진다. 괜한 생각이라며 로운과 기엘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지만 생각의 흐름 은 원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멈추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사고를 마음대로 변환시킬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겠지.' 왠지 자조적인 생각마저도 든다. '이렇게 땅을 파고 있는 걸 알면 분명 기엘이나 로운이나 구박을 해댈 텐데.' 경하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그러고보니 한분이 안 계시는 군요." 라마이드는 한쪽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이리야와 기엘을 보고는 로운이 없어진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예? 아아. 조금 일이 생겨서…." 왠지 끝말을 맺는 것이 어색했다. 남이 지적을 해주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다. 언제나 곁에 있었기에 더 더욱. "급한 일이 있으셨나 보군요." "아참. 서둘러 가게 되는 바람에 인사도 하지 못하고 간다고 실례하게 되었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로운은." "그렇군요. 그분이 아니계시는 군요." "아…." 말을 하다보니 왠지 조금 경하가 말하는 것과 라마이드가 말하는 것이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저기… 누가 누군지 모르셨나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새벽에 갑자기 파장이 사라져 조금 놀랐었 을 뿐이죠." "아아." 그제서야 경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누군가 하나가 어디론가 갔다는 것은 알고 있 었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로운이라는 것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경하는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아도 로운이나 기엘 그리고 이리야 정도는 눈감고도 누가 누군지 파장만으로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 "갑자기 파장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많이 놀랐었답니다." "그야 로렌이 주선해준 덕에…." 말을 하다 말고 경하는 입을 자신의 손으로 타악 막았다. 황태자 궁안에 마법진이 있다는 소리는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고 몇 번 이나 주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아하하하하." 경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라마이드는 그 일 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한 나라의 수장이나 다름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시는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군요." "물론 로운은 언제나 멋지게 해내는 걸요." "믿을 수 있는 분들이 주위에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경하의 웃는 얼굴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던 기엘은 왠지 마음 한쪽이 쓰라려왔다. 아침부터 침울하게 있던 것을 지금까지 계속 곁에서 지켜보아 왔기 때 문이다. "저녀석 무리하게 웃고 있군." 바로 옆에서 똑같이 경하를 지켜보고 있던 이리야역시 기엘과 같은 마 음인 모양이었다. "애써 저렇게 웃지 않아도 될텐데 말이야." "마음이 편하시지는 않을 것이라 봅니다. 역시 제가 갔어야 하는데…. " "아이고, 그런 소리 하지말라고 어차피 누가 가나 결과는 마찬가지야. 기사양반이 갔으면 제대로 거기서 일이나 할 수 있겠어? 저녀석 걱정 에." "…………." "물론 로운도 마찬가지긴 하겠지만 기사양반 보다야 그 양반이 조금 더 여유가 있어보였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괜시리 이상한 생각 하지말고 로운 몫까지 정신차리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신신당부하고 간 사항들이 하나둘이 아니니 말이야." "그건 그렇죠. 역시 저보다 로운이 훨씬 더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 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기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아무리 해도 뭔가 외골수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에 빠져버리면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 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로운은 기엘에 비해 훨씬 여유를 가지고 있다. 그 역시 경하를 걱정하는 마음은 기엘과 같지만 그 이외에 그는 동시에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할 줄을 아는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습니다. 로운이 신관이 되지 않았다면 제가 수련원을 맡는 대신 로운이 그 자리에 있었을 겁니다. 뭐랄까 사람들을 부리는 데 상당히 능숙한 친구랄까요? 모의 전투에서도 그의 통솔력을 따라올 기사는 없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소한 것에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섬세함이 있습니다. 게다가 필요할 때는 상당히 대범하구요." "칭찬이란 칭찬은 다 하는 구만. 친구라고 더 띄워주는 거 아니야?" "하하. 아닙니다. 같은 기수의 수련생들은 그런 로운의 재질을 모두 인정했으니까요. 타고난 타입이지요." "내가 보기엔 기사양반도 상당히 훌륭한 기사라고. 너무 자기 비하는 하지마." "자기 비하는 아닙니다. 단지, 재질의 차이정도는 잘 알고 있다 라는 정도입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의 파계 신관양반은 가서 잘 하고 있나 모르겠어." "물론. 잘 하고 있을 겁니다. 보지 못해도 그정도는 충분이 알 수 있 습니다." "친구 칭찬은 그만 하라니까." "하하하. 예." 이리야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라마이드와 담소를 마친 경하가 그들을 불렀다. "기엘. 이리야." "예. 경하님." "라마이드님께서도 우리랑 같이 동행을 하신다고 하시는데. 괜찮을까 ?" 그 말에 기엘이 깜짝 놀라 라마이드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라마이드님. 저희는 아직 어찌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만…." "물로 앞날의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만 일단 지금 현재는 이 궁에 머무 르고 계시지 않나요? 일단 이곳에 계시는 동안 만이라도 부디 저를 부 외자로 만들지는 말아주세요." "설마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습니다." "설마라뇨. 이미 한 분이 떠나셨는데 저는 조금 전에야 들었는 걸요." "죄,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경하가 다시 당황해 할 차례다. 로운의 인사를 전해주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라마이드는 경하와는 달리 이 궁에서 변변하게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는 외톨이인 것이다. "이 궁에서 전 혼자입니다. 여러분들게 따돌림을 당하면 어디 호소할 곳도 없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경하가 열심히 라마이드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라마이드는 그러지 말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저도 이곳에 있는 동안 여러분들의 일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물론 사정을 설명 해주셔야겠지만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라마이드는 은근히 자신에게도 자초지종을 설명해달라 는 눈치를 보였다. "으음. 기엘… 괜찮겠지?" "작금의 일이 저희들만의 일은 아니니 설명해드리는 쪽이 옳다고 봅니 다. 경하님." "으음. 그렇긴 하지만…." "이미 호로스와 미메이라가 얽혀 들어갔으니 나유나 바라스까지 영향 이 미치지 않으리라고 볼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냥 말씀 드려." 이리야도 나름대로는 생각을 해왔는지 기엘의 의견에 동감을 표했다. "후우… 그래. 그쪽이 맞는 거겠지. 그럼… 기엘. 이리야 설명좀 부탁 해." "에엣!! 이봐 너 자신의 일을 남에게 밀면 어떻게 해." "뭐가?! 내일이 이리야의 일이고, 내일이 기엘의 일인걸. 그렇지 기엘 ?" "아. 물론입니다. 경하님." 방글 웃으보이는 경하의 얼굴에 기엘은 얼른 긍정적인 대답으로 답한 다. 그러자 이리야가 입을 한발이나 내밀고 기엘에게 쪽을 주기 시작 했다. "이봐 기사양반!! 당신이 그러니까 저녀석이 맨날 저렇잖아. 아앙--!! 로운이 저녀석 응석 받아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간 것 잊었어? 아 직 하루도 안 지났다구!" "자아 그럼 부탁해 나는 잠시 볼일이 있어서. 라마이드님 죄송하지만 기엘과 이리야에게 들어주세요." 경하는 이리야에게 쭈욱 혀를 내밀어 보인 다음 그대로 줄행랑을 쳤 다. "이봐!! 너! 그게 라마이드님 앞에서 할 짓이야!!" "몰라. 안 들려!" 경하는 재빨리 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서둘러야 해.' 한발 한발 발을 내딜 때 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달라진다. 분명 흰색의 대리석이어야 할 바닥이 사라지고 광활한 언덕으로 변해 간다. 경하는 그저 감각에 의지하여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전, 로운을 떠올린 순간부터 의식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경하의 감각은 변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으로 원했던 것이 점점 의식적인 바램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경하의 발걸음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태자궁의 중정이 훤히 보이는 발코니에 다다랐다. '…로운.' 팔을 휘두르는 순간 경하의 앞에는 탁트인 하늘이 나타났다. 경하의 정신은 어느새 강과 언덕을 넘어 미메이라로 날아가고 있었다. *** ------------------------------------------------------계속 좀 많이 짧습니다만.... 기다리시는 분들을 위해..조금 올려놓고....(헥헥) 그리고 다시 일하러 갑니다. 에또..아래글은 ...그러니까 덧글은 가끔 질문하시는 것들에 대한 것 들입니다. [아슈레이 8] 3장 검게 타오르는 불꽃 (11) "가이칸 북부쪽에 분포 배치되어 있는 병력들이 레카에 집결하는데까 지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미 이전에 한차례 경험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특별한 보급선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 이동 속도는 빠를 수 밖에 없습니다." 검은 깃발이 지도 위에 하나씩 늘어간다. 로운은 조심스럽게 그 위에 하나를 더했다. "가이칸의 황제는 삼일 후까지 레카에 변방 주둔군을 포함, 부근 영주 군까지 4개 사단을 레카인근까지 레카로 집결시키겠다고 했습니다." "4개 사단이라 하면 제대로 쓸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는 건가. 말이 주둔군이지 어중 떠중이들을 모아 병사랍시고 보내면 어떻게 할건가?" 신중한 목소리가 주위에 반향을 불어 일으킨다. 그도 그럴 것이 미메이라 근방은 제국에서도 한창 변방에 속하며 어떤 영지에는 황제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 있지 않을 정도다. "황제역시 지방 영주군들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 지만 그가 말하는 변방 주둔군이라는 것은 확실히 믿을수 있다고 말했 습니다." "흐음…." 로운은 하나스와 호로스의 사이에 각기 빨간 깃발과 흰색의 깃발을 꽂 았다. "실제 하나스의 병력과 맞 부딪히게 되는 것은 제국군입니다. 우리가 상대해야할 것은 바로…." 빨갓 깃발에 로운의 지휘봉이 살짝 닿았다. "호로스에서 파견될 것이라 짐작되는 화염술사들입니다." "…………." "흐음." "으음." 둘러 앉은 장로들의 반응들은 천차만별로 다르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이게 무슨 청천병력이냐며 좀처럼 안정하지 못하는 사람. 말세가 왔다며 미메이라를 부르짓는 소 리마져 들려온다. 그중에서도 신국 방위사를 맡고 있는 기엘의 아버지 즉, 다란 디 하라 스다인은 꽤나 진지하게 로운에게 질문을 해왔다. "반드시 그들이 출전을 해 올 것이라 짐작하고 있는 건가."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중을 기해야 하네. 그저 가능성이 높다하여 무조건적으로 가이칸과 셰비 연합국들과의 전쟁에 휘말려 들을 수는 없어. 호로스가 확실히 그들에게 전면 협조를 하는 경우라면 또 모르지만 직접적으로 미메이 라에 위해가 없는 이상, 출전을 위한 명분이 확실해야하네." "그렇지. 확실한 명분, 또는 호로스가 아셀과 손을 잡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한 기사단을 내보낼수는 없다." 로운과 흡사한 목소리지만 훨씬 더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운의 아버지 로크레슈 장로였다. "증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증거. 그리고 또 하나…." 모든 장로들의 눈이 로크레슈 장로에게로 집중되었다. "미메이라의 기사단은 병력은 제국에 비교할 바가 못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사단을 원하는 이유는…." "미메이라의 기사 전원이 바람 술사이기 때문이겠지요. 제국내에서 황 제이상으로 '엘러'에 대해 잘 아는 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겠구나." 로크레슈 장로의 말투는 어느새 자신의 아들을 서슴없이 대하는 그런 말투가 되어 있다. "출전에 관해서는 합당한 반대급부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 다." "구두약속 같은 것은 필요 없어." "구두는 아닙니다. 확실히." "…………." 찌릿 찌릿하게 긴장된 공기가 넓은 회의실에 가득 들어찬다. "그리고 호로스 건은…." 로운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사실 처음부터 자신의 말 정도로 원로원이 호락 호락 출병을 허락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같은 신국끼리 싸울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들을 설득 시킬 사람은 자신이 아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그의 귀에 한 가득 들어찬다. 눈을 감고있으니 주위의 소리는 더욱더 증폭되어 로운의 귀로 흘러들 어왔다. 소소하게 말을 주고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한숨을 깊이 내 어쉬는 그의 아버지의 숨소리, 하라스다인 장로의 신음소리까지…. "로운 디 로크레슈.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로운의 낭랑한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장로들의 머리위로 울려퍼졌다.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흔들림없이 말해지는 자신의 이름과 미메이라의 이름. '내가 필요할 때 주문을 외워. 거창한 것은 필요없어. 내가 단박에 로 운을 찾아낼수 있으니까.' 떠나오기 직전, 자신의 앞에서 경하가 한말을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로 오늘 새벽의 일이기에 그런 것 만은 아니다. 믿음직스럽지 않게 보일지 몰라도, 경하의 말 만큼은 끝까지 전심전력 을 다해 믿겠다고 그는 맹세했었다. 바로 바람의 계승자의 이름을 걸 고. '그리고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경하의 목소리가 바로 눈앞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 그의 귀에는 장로들의 웅성거림 대신, 바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바람소리에 섞여 장로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사방이 막혀있던 회의실의 모든 창과 문이 순식간에 활짝 열렸다. 귀를 때리는 소음과 함께 그것을 잠식해 들어가는 거센 바람소리. 그리고 그것을 상회하는 살아 있는 바람의 엘의 소리가 모든이들의 귓 속으로, 눈속으로 온 몸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번쩍! 로운은 눈을 떴다. 눈앞에 앉아있어야 마땅한 장로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흐려지고 있었 다. 아마도 다른 장로들도 비슷한 체험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 다. 장로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사라질때마다 그곳에는 환영과도 같은 풍경 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막과 함께 풍부한 색채를 가진 숲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리고 그 뒤 로 붉은색의 기운이 어른거리는 호로스의 수도 나카리안이 보였다. '……………!!!'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호로스의 수장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의 앞에 나타났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무엇인가를 역설하며 연설하고 있는 로이드린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 그의 앞에는 수백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하고 있 었다. 로운은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바로 지금 호로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맡겨달라고 하더니 방법한번 과격하군.' 로운의 얼굴이 미소아닌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한 경하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식 으로 나타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단지 경하가 모종의 방법을 써 이 자리에 그의 의견을 전할 것이 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이렇게 생생한 환영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다. '여전히 무모하군.' 로운은 간단하게 자신의 기분을 두단어로 나타냈다.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던 환영은 잠시후 나타났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사방에서 불어 들어온 바람뿐. 그 바람으로부터 환영보다 더욱 생생하게 한사람의 의지가 전해져왔 다. 「지금까지 보신대로였습니다. 그러니까 로운 말을 믿어주세요∼오. 꽉막힌 할아버지들.」 "푸. 푸하하하하하하하!" 점잖치 못한 웃음소리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하하하하하!!" 또 하나의 웃음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모두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서 입도 하나 뻥긋하지 못하고 있 는데 과연 누가 저렇게 점잖지 못하게 웃어대는 걸까? "아하하하하하." 그 웃음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로운이었다. 조금전까지는 엄청 엄숙한 얼굴을 한 채 딱딱한 어조로 장로들에게 상 황 설명을 하고 있던 바로 그 나이트 로운. 그가 지금 배를 부여잡고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릴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를 이은 웃음소리는 놀랍게도 그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던 대신관 카류였다. "하. 하하하하. 믿으라고 하더니. 저 얼토당토 않은 뒷말은 도대체." 웃음을 멈추려고 했지만 도저히 멈추어지지 않는다. 로운은 허리를 굽히고 어깨를 떨며 웃음소리를 죽이려고 애썼다. 그런 그의 모습을 로운의 아버지 로크레슈 장로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저렇게 극렬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그는 거 의 보지 못했다. "하. 하하. 큭큭큭." 간신히 웃음을 참고 로운이 몸을 일으키는데 그때까지도 호탕하게 웃 고 있던 카류가 그에게 한마디를 했다. "대단한 수장을 만들었나보군. 나이트 로운." "하.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래. 타고 난 것이겠지. 하하하하." 웃음을 교환하는 두사람을 보면서 다른 장로들은 웃어야 할지 웃지말 라고 호통을 쳐야할지 난감해졌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그런 환영을 보여줄 정도로 경하가 확실 하게 수장 계승자로써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굳이 경하의 마지막 말을 듣지 않아도 모두의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있었다. "잠시 실례했습니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힌 로운은 어느새 엄숙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보신 바와 같은 이유로 궁정기사단과 나이트 사아르 2개단 출정을 허 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로운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 다. "또한 가이칸 제국군과 합류할 원정 기사단장은 미메이라의 새로운 수 장인 경하님의 명을 받은 사르트 루하 로운 디 로크레슈, 제가 맡겠습 니다." *** ------------------------------------------------------계속 --;; 이..이런....중간에 모니터에 머리박고 자버렸습니다. 이런....이런...이런 일이.....!!!! 쿨럭 --;;;; 네. 두손 들고 반성중입니다. [아슈레이 8] 3장 검게 타오르는 불꽃 (12) "기엘. 나 물 한잔만." 경하는 흐물 흐물 거리며 걸어가 널따란 침대 위에 픽하고 쓰러 졌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경하님." "어이? 이봐 저 녀석 얼굴이 왜 저 모양이야?" 이리야는 뭔가 심상치 않은 경하의 얼굴을 보고 기엘에게 물었 다. 경하의 뒤를 바로 따라 들어온 기엘은 얼른 손에 들었던 물건들 을 이리야에게 넘기고 물한잔을 따르러 탁자로 갔다. "뭔 일이여? 황제씨가 불렀다면서? 가서 고문이라도 당했어?" "설마 그럴리가요. 그저 회의가 좀 길었을 뿐입니다. 그곳에서 내내 아무말 없이 앉아계셨거든요." "에헤." 하지만 그 정도로 경하의 얼굴이 엉망일리는 없다. 지루한 것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만 만나기 싫은 사람을 보게되어 기분이 많이 울적하신 듯 싶 습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 그게 누군데?" "일단 첫 번째는 메로스라는 사람입니다. 이전에 만났던 사람인 데 그 분을 상당히 싫어하시더군요." "흐음." "그 사람 뿐 만이 아니야!!" 침대에 픽 쓰러져 있던 경하가 고개를 벌떡 들고 항의했다. "그 인간 뿐만이라 아니라구. 젠장할 두 번다시 그놈의 원탁 회 의니 뭐니에 부르기만 해봐라. 로렌. 발로 걷어차주겠어!" 그 말을 마치고 경하는 다시 침대에 푹하고 고개를 박았다. "우씨---." 이리야는 영문을 몰라서 기엘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고 눈짓 으로 물었다. 그러자 기엘은 얼른 침대가에 물잔을 놓고서 경하 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경하님." "맘대로 해. 난 잘 거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이리야씨." 기엘은 이리야에게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뭐라고?" "그냥 회의실에 들어가실 때까지는 괜찮으셨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죠." "그 다음?" "메로스씨가 등장했을때부터 기분이 많이 상해 계셨는데 그 다음 으로 줄줄, 아마도 이쪽의 원로원 같은 것이겠습니다만. 그중에 한 분이 슈히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어라? 슈히튼라면…." "그 기사분의 이름이 기윤 제나이드 슈히튼이었죠." "하이고오. 기분이 팍 상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땅파고 드러누 워도 이상하지 않겠구만. 저녀석 성격에." "예. 아무래도요." 기엘의 시선이 닫혀져 있는 작은 문으로 향한다. 그 안에는 상처 입은 소년이 웅크리고 앉아 그의 다친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곁에 있지 않아도, 의식하려 하지 않아도 경하의 파장에서 그의 감정이 전해져온다. "저 닫혀진 문처럼. 마음을 닫는 일은 없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동작이 그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걱정스러움과 안스러움 그리고 안타까움. 끊임없이 이어지려는 상념에 이리야는 무뚝뚝하게 제동을 걸어버렸다. "괜찮을 거야." "예?" "괜찮을 거야. 저녀석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그렇습니다. 강해지시려고 노력하시죠." "그런게 아니야. 그렇게 끔찍하게 저녀석을 위하면서 왜 그런 소 리를 하지? 저녀석을 보라구. 한번 마음을 닫아서 무슨 일이 일 어났었는지 본인이 똑똑히 알고 있어. 그래서 저렇게 노력하고 있는 거야. 만일 정말로 그런 일들로 마음을 닫아버릴 정도의 녀 석이라면 지금 이런 곳에서 있지는 않을 거야. 대충 정리가 된 이상 이제 그만 떠나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 굳이 나를 걱정해서 라마이드님을 불러 들일 필요도 없었어. 그냥 떠나면 더 이상 상처 받을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다칠 필요도 없지. 하 지만 저 녀석은 남았고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안 그래?" 이리야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기엘에게 털어 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래. 굳이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지. 저녀 석이 배려해준 대로 그냥 나유로 떠나면 그만이야. 가이칸과 미 메이라가 전쟁터가 되더라도 나유와는 별로 상관없을테니까. 하 지만 난 저녀석이 걱정 돼." "이리야씨." "저녀석이 걱정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도움 을 주고 싶어서 여기에 있는 거다." 씨익하고 이리야가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좀 믿어주라고. 기사양반." "……제가 이리야씨게 배울점이 많은가 봅니다." "어어. 그렇게 나오지 말라구 기사양반." "그럼 로운이 없으니 이리야씨가 잔소리를 한다고 해드릴까요?" 어두워 졌던 기엘의 얼굴이 어느새 다시 밝아졌다. 이리야의 말 대로였다. 기엘 자신이 너무나 고민하다가 그만 간과해 버렸던 것, 그것을 이리야는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 경하님은 물러서지도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걱정은 그만 하라구 기사양반. 저녀석은 그냥 조금 어리광을 부 리는 거야. 어리광." "경하님이 들으시면 화내실겁니다." 이리야의 우스개 소리에 기엘은 가볍게 동조한다. "쯔쯔. 저녀석이 얼마나 어리광이 심한데. 그걸 기사양반이랑 신 관양반이랑 아니지 이젠 파계 신관에 현직 기사양반인가? 여하튼 둘이 저 경하 하는 걸 받아주는 걸 보자면 말이야 얼마나 눈꼴이 신지. 말도 못한다니까." "이리야씨도 만만치 않게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에엣. 내가 언제!" "결국 라마이드님에 관한 건에 대해선 화도 한번 제대로 못내셨 지 않습니까?" "그. 그거야… 저녀석이 날 걱정해서 그렇다고…." "그러니까 결국 같다는 거죠." 카운터 펀치를 날린 기엘은 의기 양양하게 이리야를 향해 웃어보 였다. "이봐 기사양반. 그렇게 웃지 말라고." "뭐. 웃기는 제가 언제요." "칫. 여하튼 간에 말을 하면 안된다니까. 말을. 그만 하지 그만 하자고." "하하하하." "그건 그렇고, 회인지 뭔지에선 뭔가 다른 말은 없었던 건가?" 기엘의 웃음이 그칠 줄 모르자 이리야는 어떻게 해서든 화제를 돌리려고 노렸했다. 물론 넘어 올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않았지 만 웬걸, 기엘은 이리야의 화제 전환에 쉽게 말려들어 버렸다. "아. 생각보다는 여러 가지 수확이 있었습니다." "수확?"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 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는 인색하지 않더군요. 일단 제국의 서부지역에 대한 정보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에헤?" "우리에게 알려진 이상, 미메이라로도 그 정보가 갈 수 있다는 것쯤은 황제나, 이쪽의 수뇌부에서도 각오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경하님께서 일어나시면 잠시 의논을 해보고 미메이라로 소식을 띄워 볼까 합니다." "흐음. 그게 도움이 될까?" "적어도 모르는 것보다는 많이 알고 있는 쪽이 훨씬 유리하니까 요. 정보란 것은 중요합니다. 이리야씨."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제국의 정보보다는 적의 정보가 아닐 까 싶은데. 아셀이라던가, 호로스라던가." "아무리 아셀과 호로스, 그리고 하나스의 병력에 대해 꿰고 있다 고 해도 그것에 대항할 이쪽의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말짱 헛고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쪽의 현황을 파악 할 수 있는 데까 지 파악한 후에야 적에 대한 정보가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 "으음. 쉽고도 어려운 말이로구만." "그래서 더더욱 어렵지요. 일단은 몇가지 기본적인 것들을 설명 해드리겠습니다. 이리야씨도 앞으로 운신하시는데 도움이 되실지 도 모르니까요." "아아 좋아. 그것은 환영." 기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전 그들이 살그머니 닫고 나온 침실 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소리없이 안에서 두툼한 양피지 뭉치를 들고 나왔다. 물론 조심스럽게 다시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것을 좀 받아 주십……." 말을 하다 말고 기엘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것은…." 익숙한 파장이, 매일 같이 느껴왔던 것이지만 지금은 곁에 없는 파장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로운입니다. 로운의 오로프가…!" 이리야에게 내밀던 양피지를 거의 던지다시피 하고 기엘은 창가 쪽으로 뛰어 갔다. 활짝 열려진 창밖으로 몸을 내민 그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도 않 고 불어오는 연락의 바람을 한껏 맞아들였다. "기엘 디 하라스다인. 나이트 기엘의 명령이다. 오로프의 새여-- - 그대의 모습을 드러내어 주인의 말을 전하라. 아샨." 오랜만에 들려오는 주문 소리에 이리야는 미소를 지었다. 주문을 외우는 기엘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 보인다. '하기사…. 저 둘은 떨어져 있었던 적이 거의 없기는 했었지.' 창 밖에서 거두어 들인 두 손안에 바람의 새의 형체가 날개를 파 닥이며 안겨있었다. 주문과 함께 주인의 말을 전해오는 새를 보며 두 사람은 지금은 멀리 있는 로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동 명령인지 출전 명령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군. 이 일사분 란함은 하루 이틀의 훈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야." "말로는 몇 년 후라고 하지만 기본적인 준비는 끝나있었다는 것 이겠죠." 로운은 옆에 서 있는 선배 기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그는 부대의 참모로써 기본적으로는 로운의 지휘하에 있지만 개 인적으로 로운의 몇 년차 선배인 탓에 사석에서는 말을 놓고 있 었다. "지난 번의 그 부대 이동이 그저 시위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겠 어." "시위라뇨." 로운이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그 황제가 하는 일에는 시위같은 것은 없습니다. 직접 만나보게 되시면 아마 금세 느끼실수 있을 걸요?" "하하하. 로운. 가이칸의 새 황제가 네 맘에 드는 모양이구나." "예에?" 갑작스런 말에 로운이 화들짝 놀랐다. 마음에 들다니, 절대 그럴일은 없다. "설마요. 단지 그의 역량이나,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의 통솔 력이 대단하다고 느낄뿐입니다. 로운의 7년차 선배인 그는 나름대로 로운에 대해서 알만큼은 아 는 사람이었다. 굳이 친척 지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시간 알고 지내오면서 자연스럽게 로운의 행동패턴이나 사고 의 패턴을 알게된 경우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네게서 그정도의 평가를 들었다는 것 자 체가 중요한 거지." "카시아 형님…." "어어. 반칙. 어디까지나 여기선 내가 네 부하다." 손가락을 살래 살래 흔들어 보이는 나이트 카시아를 보며 이번에 는 로운이 실소를 터트렸따. "반칙을 먼저 하신 것은 형님입니다. 일단 참모가 부대의 대장에 게 그렇게 말을 하진 않는 다구요." "하. 하하하하하. 정말이지 계승로가 너를 많이 바꾸어 놓았구 나." "형님!!" "이전의 너라면 누구에 대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예 언급 을 하지 않았지. 주변에 네 행동과 사고의 원안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아예 눈 밖이었다." "…………." "다행이야. 시안님과 같이 간다고 해서 걱정이 앞섰었는데. 너를 보니 시안님을 뵐 날이 기대되는 구나." "그러…신가요?" "당연하지! 너라면 궁금하지 않겠어? 기다려지지 않겠냐구." 보통의 경우라면 당연 기다려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오랫동안 나라를 비운 수장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 수장의 능력이 남다르게 각별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면 그를 만나는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여하튼 놀랄일 뿐이다. 로운. 자아. 이제 사설은 그만하고 일로 돌아가지." "언제나 전환이 빠르시군요." 실컷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리를 해버린 카시아는 재빨리 눈앞에 늘어 놓았던 기밀 서류들은 자신의 쪽으로 끌어 당긴다. "전환? 그게 뭔데. 자아 단장님. 일단은 우리 기사단에 대한 논 의부터 합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 뭐라고 말을 한마디 더 하려던 로운은 허리에 손은 얹은채 망연 자실하게 그의 참모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이. 단장님 시간이 갑니다." "…알겠습니다." 로운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번쩍, 눈을 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이 연상의 선배를 이길 수있을 리가 없다. 어릴때부터 남다르게 로운의 비위를 맞추며 슬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는데 선수였던 사람이다. 단장을 자신으로 하는 대신 나이트 카시아를 참모로 인선한 그의 아버지와 궁정 기사단장 크로운의 저의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걱정이 많으신 분들이군.' 로운은 카시아가 내미는 양피지를 집어들었다. '그래. 지금은 다른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일단은 눈앞에 닥 친 일이 훨씬 더 심각하고, 촉박하다.' 정신을 차리고 그는 다시 일에 몰두했다. 출전할 나이트 사아르를 인선하는데도 벌써 삼일이 걸렸다. 그들의 적은 이미 인선따위는 오래전에 마쳤을 것이다. 이미 국경선 가까이에 포진해 있을 지도 모른다. 경하가 그에게 전해 준대로라면 호로스의 기사들은 이미 출전준 비를 마친 셈이 된다. 「지금까지 보신대로였습니다. 그러니까 로운 말을 믿어주세요∼ 오. 꽉막힌 할아버지들.」 문득 경하가 전해온 말이 로운의 머릿속에 생각났다. 그 덕에 로운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여하튼 간에 무슨 짓을 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 녀석이라니까.' 새삼스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른 새벽, 카드미엘의 태자궁 지하에 설치된 마법진으로 레카로 떠나던 때 느닷없이 로운을 배웅하던 경하의 그 진지한 얼굴이 동시에 떠오른다. 막 마법진에 오르려던 그에게 달려들어 라이트를 빼들고는 어디 서 배웠는지 로운을 무릎꿇게 해놓고 새로운 사르트 루하로 임명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던 것이다.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일단은 대답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자신 이 뭐라 뒷말을 하지 못할 때를 기다렸던 것이 틀림 없었다. 그 전이었다면 형식이 어쨌느니, 이럴 때가 아니라느니 하는 잔 소리를 틀림없이 했을 상황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인데 막상 사르트 루하라는 이름이 도움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원로원 앞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입에 담은 사르트 루하의 이름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경하가 보여준 환영 탓도 있겠지만 사르트 루하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결국 로운은 그 바로 다음날 옆에 서 있는 카시아와 함께 원정기 사단 단장으로써 이렇게 서게 된 것이다. "로운. 이대로라면 인원이 채 이백명도 안 돼. 이정도로는 부족 할텐데." 생각에 잠겼던 로운을 카시아가 다시 현실로 불러들인다. "아…. 하지만 그 이상의 인원을 차출해낼수는 없습니다. 키리엔 에 어느정도 잔존하는 기사들이 있어야 합니다. 키리엔을 비워 둘수는 없어요." "어차피 수장도 없는 빈성이야. 굳이 그 빈성을 방어할 병력을 확보한다는 것도 우습잖아." "인원이 많다고 유리하지는 않을 겁니다. 모자르는 인원은 기사 개개인의 능력으로 보완할 겁니다.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선발해 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로열 나이트로 구성 할겁니다. " "흐음." 미메이라에는 가이칸 같은 일반 보병이 거의 전무하다 시피 하 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전쟁이 없는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가이칸 식의 일반 보병이라면 그저 각지의 성에서 개별적으로 선 발한 수비대 형식이 고작. 그들을 원정대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 방법은 키리엔에 주둔하고 있는 일반 기사들, 즉 나이트 사아르 와 각지에 흩어져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다수의 로열 나이 트 뿐이다. 우습지만 미메이라는 어느 나라보다 로열 나이트의 숫자가 많다. '그것이 이런식으로 도움이 될줄은 몰랐어.' 로운은 리스트에 주욱 기재되어 있는 로열 나이트의 이름을 천천 히 하나하나 눈여겨 보았다. 적어도 로열 나이트 정도가 되면 일을 진행하는데 차질은 없다. "동원할 수 있는 로열 나이트는 최대한 소환해야 합니다. 한사람 이라도 로열 나이트가 많은 쪽이 유리하니까요." "일단은 궁정기사단의 삼분지 이는 참가시키게 되겠군." "사분의 삼까지입니다." "흐음."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가이칸이나 하나스의 병력이 아닙니 다. 가이칸의 황제 역시 우리에게 그런 것을 원하시는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할 적은 모두 호로스의 화염술사들입니다." 카시아는 진지한 표정의 로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열 나이트는 최대한 차출을 해보지. 그리고 나이트 사아르중 에서는 단 몇가지라도 물의 술에 능한 사람들을 골라내보겠어. 기왕이면 그쪽이 더 도움이 될테니까." "예. 그렇게 해주십시오. 일단 저는 지금까지의 전황을 가이칸에 알려야 겠습니다." "그래. 일단 기본작업은 나와 로엔이 하도록 하지 나이트 사아르 쪽이라면 나이트 로엔이 잘 알고 있는 듯 하니까." "네. 기엘의 말에 의하면 로엔은 꽤나 오랫동안 수련원의 보좌관 으로 있었으니까요." "그럼." "부탁 드립니다." 정자세를 하고, 로운은 나이트 카시아에게 예를 표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상관이라고 해도 선배 기사에게 예를 표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맡겨두라구."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카시아는 믿음직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두들겨 보였다. *** "단지 삼일이 지났을 뿐인데, 역시 가이칸이로군요. 대부분의 병 력이 이미 준비를 마치고 이동중이라고 합니다." "흐음." 기엘은 로운으로부터 전해 받은 정보를 모두 경하에게 보고 했 다. "키리엔에서 일단 인선을 마치면 바로 레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로열 나이트 이하 나이트 사아르까지 집결 시키겠다고 합니다. 최대한 필요한 시간은 앞으로 삼일. 그동안 아무일이 없어야 할 텐데요." "삼일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네." "하지만 그것도 최대한 서두른 일자입니다. 이런 말씀은 죄송합 니다만, 미메이라의 병력이 대부분 기사급이라고 해도 기본적으 로 그들에게는 실전경험이라던가, 이런 대규모의 전투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것에는 참여해본 경험이 전무합니다. 그것이 걱정 되는 군요." "그건 기엘이나 로운도 마찬가지 였어." "그렇긴 합니다만." "기엘과 로운이 할 수 있었다면 키리엔과 신전에 있던 그 수많은 기사들 역시 할 수 있을것 아니야?" "…………." "열심히 노력해서 로열 나이트가 되고 나이트 사아르가 된 사람 들이잖아. 기엘과 로운이 특별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일단 은 계승로를 위해 선발 되기도 했으니까. 기엘과 로운보다 선배 인 기사들도 있을 테고, 그중에는 실전 경험은 많지 않다고 해도 훨씬 오랫동안 기사를 해온 경험 많은 기사들도 있을 거야. 믿을 수 밖에 없어. 그리고 믿어야 하고, 나는 믿어." 가볍게 말하는 경하를 보며 기엘은 조금은 반성을 할 수 밖에 없 었다. 자신은 불안해 하는데 경하는 그렇지 않다. "기엘과 로운이 해냈는데 그들이 못해낼리 없잖아. 닥치면 인간 은 뭐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게 되어 있으니까. 믿어 보자. 로운도 투덜 대긴 했지만 잘 하고 있는 것 같은 걸." "그에겐 원래 타고난 통솔력과 지휘관으로써의 매력이 있으니까 요." "그건 카리스마라고 하는 거야." 씨익-- 하고 경하가 웃었다. "기엘에게 기엘 나름대로의 카리스마가 있는 것처럼. 로운에게는 로운 나름대로의 카리스마가 있어. 뭐. 로렌도 생각보다는 상당 히 괜찮은 황제 인 듯 싶은걸." 경하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구." 경하는 타악하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지도를 쳤다. 그 위에는 오늘 아침 있었던 회의에서 있었던 내용들이 기재되어 있다. "과연 뭘 할 수 있을 지는 나도 좀 고민이 되지만 말이야. 헤헤 헤헤." 히죽 히죽 웃어 보이던 경하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으음. 이거…."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표정이 변한 경하를 보고 기엘은 무슨 일인가 싶어 신경 을 긴장 시켰다. "타이밍이 엄청 좋아."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경하는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경하의 주위로 바람이 몰려들었다. 이럴때면 경하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못한다. 바람은 경하의 주위로 몰려들어 신비한 그의 엘에 반응하며 희미 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기엘과 이리야는 몇 번이나 이런 광경을 목격했었다는 사실을 기 억해냈다. "뭔가 보고 있는 거야." 이리야가 신비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이럴때는 그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그들은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 경하의 주위를 둘러싼 빛은 얼마 지나 사라지기 시작했 다. 두사람은 경하가 어떤 환영을 보았을지, 어떤 미래를 보았을지 궁금했다. 본인은 예지 능력은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다. 단지 그저 아주 조금 보인다 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예지의 능력이 섞여 있다는 것을 그 들은 알고 있었다. "경하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의 경하가 눈을 뜨자 기엘이 가까이 다가 갔 다. "괜찮으십니까?" "으응." 두 손을 들어올리고 있던 경하의 몸에는 아직 희미한 바람의 엘 이 그대로 남아 빛을 내고 있다. "로렌에게 가야겠어." "예?" 경하는 황급히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지도에 달려들었다. 그의 손이 일단 레카에 머무른다. "한쪽은 레카." 그리고 손가락은 아래로 주욱 폐이요트 산맥을 따라 움직였다. "여긴… 뭐가 있지?" 경하는 자신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을 기엘에게 물었다. 기엘은 잠시 그곳을 들여다보다가 다른 지도 하나를 찾아내서 경 하에게 내밀었다. "갈리아 계곡입니다. 회의에서도 한 두번 언급되었던 곳이죠. 폐 이요트 산맥에 있는 계곡들 중에서도 상당히 험준한 곳입니다. 설마 그런 곳으로…?" "그 설마가 맞아. 로렌에게 알려야 해." "곧 알현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어. 삼일이면 늦을지도 몰라. 아셀은 이미 이동을 시 작했으니까."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경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박차며 뛰어나갔다. 그 뒤를 기엘과 이리야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계속 3장을 마치고 4장으로 넘어갑니다. 쿨럭. --;; 잠시 집의 폭사한 컴을 살리러 갔다오는 바람에 늦었네요. --;; (결과는 참담) 우어~~ 하지만 좋은 일도 하나 있습니다. 훗훗 키보드를 새로 하나 장만했습니다. 검은색의 메커니컬 키보드. 감촉도 좋고 소리도 좋고 행복하군요. 여러분도 행복하시길. [아슈레이 8] 4장 갈리아 계곡의 바람 (13) "사르트 루하. 로운 디 로크레슈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 다." "가이칸 제 15 기사단장 스토우 린첼입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은색의 갑옷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이트 로크레슈." 린첼은 두터운 가죽 장갑을 벗은 손을 로운에게 내밀었다. 그것이 제국식의 친밀한 이사표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로운 은 가볍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른 시간에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어젯밤 이곳으로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기다렸던 참 입니다. 오시는 길에는 다른 애로 사항은 없으셨습니까?"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심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딱딱한 의례의 말들이 그들의 사이에서 몇차례 오간 후 린첼은 로운에게 자리를 권했다. "오시기 직전에 카드미엘에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명령서겠죠. 저희 역시 조금 전 전갈을 전해 받았습니다. 레카 와 갈리아로 나뉘는 듯 하더군요." 로운의 말에 린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자신이 조금전에 받은 기밀 명령서의 내용을 정확히 말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내색하는 대신 가볍게 받아쳤 다. "다행히도 하나스의 병력은 대단치는 않을 듯 합니다. 문제는 호 로스의 화염 술사들이 될것이라고 하더군요." "하나스의 병력을 맡아주신다면 이쪽에서는 화염 술사를 맡겠습 니다. 기본적으로 저희들이 이곳에 온 까닥이 그것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다만 문제시 되는 것이 있는데…." 가이칸의 제 15 기사단장인 스토우 린첼은 레카에 집결된 모든 가이칸 제국 병력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물론 파견된 기사 단은 15 기사단 이외에 3개 기사단이 더 있었지만 총대장의 임무 는 그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명령서를 로운의 앞에 내민후 자신의 참모 및 부관들을 호출했다. 그가 받은 명령서에 의하면 그들은 곧 하나스와 호로스의 연합 부대와 마주치게 된다. 이제부터 이루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전회의. "긴 하루가 될 듯 하군요." "부디 끝나지 않는 하루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린첼의 말에 로운 역시 가볍게 응수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느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 하지 않는다. 직감적으로 로운은 이 남자라면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 다. '제국의 황제는 역시 사람을 고르는 능력이 있어.' 레카에 집결되어 있는 병력의 배치, 하나스군과 호로스의 부대의 이동 경로와 그에 대한 대응책등등, 논의할 일들은 수없이 많다. "그럼. 시작할까요?" 로운은 작전지도가 펼쳐진 탁자 위에 가볍게 손을 내려놓았다. *** "히에---- 엄청난 시골이잖아 여기." "어쩔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폐이요트 산맥은 가이칸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니까요. 하나스와 아셀과의 국경선이라고 해도 국경수비대가 필요 없을 정도로 폐이요트 산맥은 험난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몇 개의 통행로가 사람이나 물자가 통과하기 쉬운 지점 들을 골라 위치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곳 갈리아 계곡은 계곡이라 고 해도 그런 곳과는 조금 거리가 멉니다." "흐음." 경하는 로렌이 머물고 있는 막사의 한쪽 끝에서 험난한 폐이요트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산등성이들이 몇 개씩이나 겹쳐 장관을 이루 고 있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계곡과 구름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 는 높은 산. 분명 산과 계곡이 있다는 점에서는 경하가 존재하던 현실과 다른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익숙한 개념들이 너무나 낯설게 다가온다. "분명 이전에 저위쪽으로 폐이요트 산맥을 지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곳과 별다를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같은 산맥이니까. 그 런데 생각보다 풍경이 상당히 틀리군요." "아슈레이 대륙의 남쪽 지대를 둘로 나누는 거대하고 긴 산맥입 니다. 위도에 따라서 그 풍경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하지만 비슷한 고도의 산이라면 기본적으로 비슷할텐데 뭐가 틀 린거지? 일단은 멋있기는 하지만." 연신 감탄사를 지어내고 있는 경하에게 꼬박 꼬박 대꾸를 하고 있는 것은 기엘도, 이리야도 아닌 가이칸의 로열 나이트 중 한 명으로 로렌이 경하의 신변 보호를 위해 붙여둔 사람이었다. "아무리 봐도 틀려. 확실하게." 문득 아버지의 말이 떠오른다. 같은 산과 물과 바다라도 보는 곳 이 틀려지면 틀린 산과 물과 바다가 된다는 말을 말이다. 「가까운 중국에만 가도 말이다. 산의 모양이 어쩌면 그리 다르 던지 놀랄 수 밖에 없더구나. 그뿐이냐? 바로 옆나라인 일본만 해도 전혀 다르지.」 아버지의 흥분한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하기사 중국이니 일본이니 하는 곳과는 천지차이로 먼곳이니까 이정도로 달라보일 수도 있겠구나.' 경하는 한가로운 마음으로 턱을 괸채 하염없이 막사 너머로 보이 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풍경 속에는 원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들이 하나 둘씩 생겨 나고 있었다. 경하의 거처로 준비된 막사만큼은 아니지만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게 눈에 보였다. 이틀전, 경하의 예지로 아셀이 가이칸으로 침입할 경로가 이곳 갈리아 계곡이라는 것을 알게된 로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 한의 빠르기로 병력을 모아 이곳 갈리아로 달려왔다. 의외로 병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하의 충고는 한귀 로 흘린채 말이다. 덕택에 현재 주변에는 수백개가 넘는 막사들이 마치 중간급의 도 시크기 정도로 여기 저기 구획을 지어 세워져 있는 상태다. "휴우. 나만 한가한 것 같군." 경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정말 그분의 말씀을 이렇게 완벽히 믿어도 되는 걸까요?" "…………." 새하얀 시녀의 손 대신에 조금은 투박한 남자의 손이 차를 따른 다. "고맙네." "폐하." "그럼 믿지 않으면?" 향기로운 차를 한모금 마시며 로렌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믿지 않으면 또 어쩌겠나. 카스핀. 어차피 이곳도 우리의 예상 지점중 하나였어. 좀 빠르게 움직였다 정도로 생각하게나." "하지만 그분의 말씀에 일언 반구도 없이 이런 곳으로 폐하께서 몸소 발걸음을 옮기신 것은 아무래도 성급한 판단인 듯 싶습니 다." 뒤처리를 하느라 조금전에 도착한 카스핀은 보고를 들을 틈도 없 이 제일 먼저 로렌의 막사에 들은 참이다. 너무나 서두른 까닭에 누락된 것이 한둘이 아니다. 빈틈없이 로 렌이 준비해왔던 덕에 병력의 이동은 빨랐지만 그 이외의 것은 아직 해결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덕택에 머리털이 빠질 지경이 된 것은 미타 남작 이하, 로렌휘하 의 젊은 귀족들과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차마 로렌에겐 하지 못한 하소연을 줄줄이 미타 남작에게 해왔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다. 아무리 경하와 그의 일행이 보통 인간이 가지지 못한 기이한 힘 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들은 갈리아 계곡을 넘어올 거예요.'라고 하는 경하의 말 한마디에 이곳까지 수많은 병력을 움직였다는 것 자체가 미타 남작은 불만일 수 밖에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도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이런 곳까지 오게되었는지 그 영문도 모릅니다." "모르면 어떤가?" "폐하!!" "너무 걱정말게." 로렌은 반쯤 차가 남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옆에 있던 시종하나 가 그것을 공손이 받아들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뭔가 인간의 힘이 아닌 것이 이 런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당연하지요. 그분들은 보통 인간이 아니니까요." 있는 힘껏, 보이지 않는 심술을 담아 카스핀이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로렌이 그만 킥킥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그래. 보통인간이 아니지. 그리고 그 보통 인간이 아닌 소년의 예지로 이곳까지 오지 않았나?" "분명히 후회하실겁니다." "후회하게 되어도 좋아." 로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발걸음도 가볍게 미타 남작의 앞을 지나 막사의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미타 남작이 따랐다. 로렌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갈리아 계곡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우리는 굉장한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네. 인간이 아닌, 인간을 능가하는 신들의 전쟁을 말이야." "…예?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 사건의 뒤에는 인간이 아닌 자들이 있다 라는 소리일까? 물론 이런 소리를 그에게 하면 화를 낼테지만 말이야." 경하의 얼굴을 떠올리며 로렌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바람을 다스리는 바람의 신국과 물을 다스리는 물의 신국이 불 을 다스리는 불의 신국과 맞붙는 걸세.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 생 각하지?" "그것을 신들의 전쟁이라고 말씀하시면 비약이 큽니다."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미타 남작의 말에 로렌이 그만 파안 대소 를 해버린다. "하하하.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카스핀. 비공식적이라 고는 하나, 가이칸이 처음으로 신국인 미메이라와 공동 연합전선 을 폈내. 이것 만으로도 이번일은 가치가 있어. 그것이 실패로 끝나든, 성공으로 끝나든 말일세. 물론 나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 을 것이라는 쪽에 내기를 걸 수도 있어." "폐하."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모르네. 하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 어. 지금 내가 이곳에 있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평생 후회할 굉 장한 그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말이지. 내 머리 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그렇게 말하고 있네." 말을 마친 로렌은 그의 뒤를 따르던 시종들에게 가볍게 몇마디를 했다. 그들중 하나가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이 미타 남작의 눈에 들어왔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게야. 자아 그럼 나는 이만 미메이라와 나 유의 수장들과 '작전'회의를 하러가겠네." "폐하. 아직도 그런 말씀을." "카스핀." "네. 폐하." "나는 무조건 농담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게 아니다." "…………," 순간 진지해진 로렌의 목소리에 미타 남작은 남모를 전율같은 것 을 느꼈다. 진지한 목소리는 많이 들어왔지만 이번엔 무엇인가 달랐다. "지나가는 투정이나, 가벼운 항의나 그대가 가질 수 있는 불만 같은 것에는 관대할 수 있어. 하지만…." 로렌은 그의 곁에 서 있는 미타 남작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아래부터 위로, 그리고 다시 아래로 훑어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 심장이 찌르르 아파온다. 숨을 쉬는 것에 장애 를 느낀다. "내가 진심으로 옳다고 믿는 일에 함부로 제동을 걸려 한다면 설 사 그 대상이 카스핀 자네라고 해도 절대 용서하지 않아. 그 대 상이 누가 된다 할지라도." 미타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순간 그는 한발, 너무 안쪽으로 디뎠던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려왔다. 그는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로렌을 배웅했다. 천천히 메마른 바위를 위를 걸어가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숙인 머리위에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 ------------------------------------------------------계속 간염 예방주사 추가 접종을 맞았습니다. ...생각보다 -_-;;아프군요. 열이 계속 나는 것이 영......(물론 열난다는 것도 알고 있기는 했습니다만........쿨럭. 그런데 왜 맞았냐고 말씀하신다면..그 러니까...-_-;;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예방주사는 미리미리 맞아야 합니다.(..뭔가. 캠패인 틱 하군) 미리미리 안 맞으면 이런 중요한 시기에 우짤수 없이 맞게되는 그런 비극을 겪에 되옵니다. 끙끙 -_-;;;;;;;; (아으..) [아슈레이 8] 4장 갈리아 계곡의 바람 (14) 산속에서의 아침은 차가운 공기와 이슬과 함께 시작된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기도 전, 밤새 좁은 막사에서 억지로 잠 을 청하던 병사하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뭐야. 벌써?" "서둘러. 1차 수색정찰대가 돌아왔다. 이번엔 우리 차례야." 끄응-하고 그는 몸을 돌렸다. 잘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해 잔 탓인지 머리가 무거웠다. "눈코 뜰새도 없이 돌아가는 군. 위에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는 투덜 투덜 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병사 하나가 내미는 접시 를 받아들었다. 아침식사였다.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알면 뭐하겠어. 우리는 시키는 대 로 움직이면 되. 그러다 보면 전쟁이란 어느새 끝나는 거라구." "하이고. 카스. 네 말만 들으면 무슨 역전의 용사쯤은 되는 걸로 보인 다." "역전의 용사는 무슨. 그것이 다 간접 경험이라고 하는 게야." 키득 키득 웃어넘기는 동료의 어깨를 발로 한번 걷어찬 그는 우물 우 물거리며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친 그는 당번병으로부터 마른 육포를 넘겨 받아 허리춤의 주 머니에 챙겨 넣었다. 물과 함께 이것은 그의 하루 기본 식량이 된다. 말린 육포는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른데다가 체력 보존에도 용이하다. 거기에 보존도 간편, 무게도 별로 나가지 않는다. "정찰병이라고 그래도 잘 챙겨주는데?" "밤 늦게나 돌아오게 될테니 잘 챙겨두세요." 나이 어린 병사가 그에게 가죽으로 된 물주머니를 내주었다. 그리 크 지 않기 때문에 이 물이 다 떨어지면 자급 자족을 해야한다. 그는 물주머니를 몇 번 흔들어보고는 물이 가득 차있는 것을 확인했 다. "그럼 잘 나갔다 오라구. 네이든." "알았어. 나 없는 동안 내자리나 노리지마." 네이든이라 불린 남자는 히죽 히죽 웃으며 자신이 누워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정찰병으로 나가서 재수없게 죽지나 말라구." "재수없게 그런 소리 하지마." 정찰 수색대이기에 중장비는 지참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몸을 가볍 게, 최소한의 장비만을 가지고 나가게 된다. 몇 개 안 되는 장비를 다시 한번 점검한 그는 몸을 돌려 집합 장소로 출발했다. "자아 그럼 가볼까?" 기분은 여유로왔다. 갑작스런 마법진에 의한 이동은 전쟁에 대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기 보다는 언제나 있었던 기동 훈련정도의 긴장감 밖에 주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광활한 대지 대신, 그리 크지 않은 골짜기에 옹기 종기 막사를 치고 진을 칫 탓도 무시할 수는 없다. 1차 정찰 수색대는 무사히 아무런 수확없이 돌아왔고 그 때문에 2차 정찰 수색대 역시 여유로운 마음으로 임무에 임하고 있었다. 인원은 총 10명. 경험 많은 10인대장의 지휘하에 그들은 폐이요트 산맥의 한 자락을 조 심스럽게 기어오르고 있었다. 툭툭---- 앞서가던 네이든은 뒤에서 따라오던 동료의 손짓에 뒤를 돌아보았다. 대장이 휴식을 취한다는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후욱--하고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는 힘이 드는 군.' 가이칸 제국의 축복받은 드넓은 대지가 조금은 미워지는 순간이다. 넓 고 광활한 평지에 익숙해져 있던 병사들은 고도가 높은 이 폐이요트 산맥에서는 쉽게 지치고 만다. 몇날 몇일을 자지 않고 강행군을 해온것도 아닌데 말이다. 해는 벌써 중천. '얼마나 들어 온 걸까.' 자신들의 위치를 아는 것은 현재 그들의 대장 뿐이다. 나머지 병사들 은 단지 그들이 지금까지 이동해온 거리와 방향으로 적당히 그들의 위 치를 짐작할 수 밖에 없다. '어서 끝이 났으면 좋겠군.' 약한 소리는 잘 하지 않는 그였지만 왠지 오늘의 정찰은 그의 첫 번째 정찰인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시 쉬며 숨을 돌리는데 대장의 수신호가 다시 보였다. 앞으로 전진.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 "아흐흐흐흑. 찌뿌둥해." "……………." "우오오오오오옹." "…………." 기지개를 켜며 이상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경하를 기엘과 이리야는 정 말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봐. 너 기왕 기지개를 켜는 거 좀 점잖게 하면 안되냐?" "뭐가?"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그게 소리가 좀…." "남이 기지개 켜는데 토달 시간이 있으면 가서 먹을 거나 좀 가져다 줘. 아아 배고프다." "저녁을 드신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기엘이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머물고 있는 곳이 산속이라 그런지, 어둠은 평지에서보다 훨 씬 빨리 내려와 주위는 벌써 새카만 어둠에 휩쌓여 있었다. "오늘은 그냥 일찍 잠자리에 드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앞으로 어떤 일 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쉴 수 있을 때 쉬는 편이 좋습니다. 경하님." "우움. 나도 그냥 자면 좋겠다고는 생각하는데 몸이 좀 이상해서…." 그렇게 말하며 경하는 상체를 이쪽 저쪽으로 돌려보았다. "이상하단 말이야. 찌뿌뚱한 것이."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신지요?" 기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경하에게 다가갔다. "그다지 고도가 높은 곳도 아니니 고산병 같은 것 일리는 없는데. 몸 이 마디마디 저린다고 해야하나. 회복 주문도 써봤지만 별로 소용이 없어." "흐음. 경하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응." 기엘은 경하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온다. 하지만 그것은 열을 재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경하의 상태를 조금이나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한 행동이다. 평소 강력한 파장을 가지고 있는 탓에 경하의 파장은 오히려 잘 느껴 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눈에 보이듯 훤히 알기 위해서는 이런 최소한의 접촉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 이마에 닿아있는 손바닥에서부터 경하의 맑고 강력한 파장이 기엘의 신경을 그대로 타고 들어온다. 흔들림이 없어야 할 그 파장 속에서 기엘은 무엇인가 미묘한 빈틈을 발견해냈다. 아무런 생각없이 접촉해서는 절대 알아 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하 지만 발견을 해냈을 뿐 그 빈틈이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다. "뭔가…조금." "어? 이상한 게 있어?" "경하님 스스로는 어떤 이상을 느끼시는 것인지 조금이라도 자세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모른다니까. 그냥 힘이 좀 빠지는 듯 한 느낌이 든 달까?" 경하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기엘은 그 말에 뒷덜미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힘이 빠진다?' 그리고 완벽해야할 파장에 이유모를 빈틈이 있다. "경하님. 주문을 한번 외워 보시겠습니까?" "무슨 주문?" "어떤 주문도 좋습니다. 경하님의 몸에서 나오는 파장을 눈에 보이게 할수 있는 것이라면요." "흐음." 경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 했다. 새삼스럽게 저렇게 지적을 해버리면 어떻게 해야할지 오히려 생각이 나지 않는 법이다. "아! 그렇지." 간신히 생각이 난 듯 경하가 살짝 눈을 감았다. "엘-루하." 아주 기본적인, 경하로써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던 바람술의 기초적인 주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바람술의 기초 운용술로 기엘의 경우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 어나 제일 먼저 정신통을 하며 외우는 그런 주문이었다. 주문이 경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경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투 명하지만 입체감을 가진 엘의 바람이 수백, 수천개가 일제히 나타났 다. "…………." 경하가 처음 만들어 장로들의 앞에서 해보였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 을 정도로 빽빽하게 경하의 시야 앞에 가득 들어차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감탄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경하가 눈을 껌벅 껌벅하면서 기엘의 하는 양을 바라보는 동안 기엘은 온 신경과 감각을 동원하여 그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분명 흐트러짐은 없다. 하지만 이 이상한 느낌은….' 이리야나 기엘 자신은 항상 경하의 곁에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자잘한 흐름정도는 금방 구분해낼수 있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투명한, 하지만 분명 그들의 눈에는 보이는 엘의 가닥. 그 하나하나에 자신의 감각을 모두 열어 집중하고 있는 기엘의 감각이 순간 이상한 흐름을 감지했다. '…흐르고 있다? 아니야 이건… 어디론가 흘러서 사라지고 있는 거야. ' 분명 엘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생성되고, 흘 러가 자연의 엘과 융합된다. 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것은 그 살아 있는 엘중의 아주 미세한 몇가 닥이 어디론가 흘러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흘러가는 것을 따라가려 해도 이상하게 기엘의 감각은 앞으 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것을 억제라고 하고 있는 듯, 아무것도 없는데도 벽같은 것 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경하님." 한참을 경하의 엘 속에 서 있던 기엘이 간신히 눈을 뜨고 말했다. "아. 으응." "어이 기사양반 괜찮은 건가?" "예. 괜찮습니다." 눈에 띄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기엘에게 이리야가 걱정스러운 듯 말 을 건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생각보다는 힘이 좀 들었을 뿐입니다.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사이도 없이 기엘은 경하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하님." "응?"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시고 감각을 되살려 보십시오." "에?" "경하님의 엘이 어디론가 흘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에에 설마. 그런걸 내가 모를 리가 없을텐데?" 눈동자를 데굴 데굴 굴리며 경하가 대답했다. 그다지 민감한 타입은 아니지만 설마 자신의 몸에서 나가는 힘을 감지 못할리는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 그건 느낌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기분 같은 것이기에 간과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하님께서 직접, 찾아내셔야 합니다. 도대체 왜, 어디로, 누가 그것을 불러내어 사라지게 하는 건지." "…………." "그게 가능한 거야 기사양반?" "뭔가 아주 미묘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경하님의 말씀을 듣고 감이 왔달까요? 분명 고의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눈치 채지 못할 정도 로 미세하지만 영향력은 있었다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구 난." "나도 잘 모르겠어 기엘. 분명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내 스스로가 눈치 채지 못한다는게 말이나 돼?" 기엘이 설명을 했지만 이리야도 경하도 아무리 머리를 돌려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고의적으로 경하의 엘을 사라지게 한다는 걸 까? 아니 사라지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누군가가 경하님의 엘을 억지로 유도해내 다른 것 으로 변형을 시키고 있는 겁니다." "무엇으로?" "그 누군가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사람 그 자신의 엘로 말입니다. 다른 성질의 힘이라면 가능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신경을 써서 감지 해내지 않는 한 못느낄 정도로요." "…………." 경하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눈치를 못챘다해도 이런 경우 세나케인이 주의를 줄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인. 듣고 있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봐.' 「이상을 느끼는 것과, 그것이 어째서 그런 건지를 아는 것에는 차이 가 있지.」 마음속으로의 질문에 세나케인의 엉뚱한 대답이 돌아온다. "뭐야 케인. 모르는 거면 모른다고 해!! 정말이지." "나 역시 이상은 느꼈지만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것이 아닌 이 상 괜시리 네게 고민거리를 안겨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세나케인님." 간만에 그의 눈앞에 나타난 세나케인에게 기엘은 다짜고짜 질문부터 했다. "언제부터인지라도 알 수 있을까요?" "이곳에 도착한 직후부터." 기다릴 것도 없이 세나케인이 대답했다. "경하님께서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오전부터인 듯 한데…." "이상을 느낀다고 해도, 실제적인 영향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특별히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고." 왠지 세명으로부터 원망의 눈초리를 받는 시작하자 세나케인이 얼른 변명을 했다. "하지만 당사자보다는 다른 인간이 보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해주지. 네 감각을 통해 느껴보니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분명 누군가 있어. 이녀석의 파장을 어디론가 유도해내는 존재가." 세나케인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던 경하는 왠지 자신이 너무나 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신의 상태는 스스 로가 제일 먼저 알게 되는 법이다. "후우. 결국 내 실수라는 소리가 되네." "경하님." "아니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건데…. 이전에도 이런 경험 이 있었잖아. 분명 이상이 있는데 알아채지 못했던 때가." 경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아셀의 황제가 암살되고 새로운 황제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되었 다. 호로스의 수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그런 아셀과 손을 잡 았고, 아셀과 같은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나라들은 그에 동참하기 시 작했다. 그리고 그것에 가이칸 제국과 미메이라가 손을 잡아 대항하고 있는 것 이다. 글자 그대로 영화 속에나 생길만한 일들이 경하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지금 이순간에도…. '전면전은 되지 않겠지. 어차피 가이칸이나 아셀이나 하나스나 전쟁을 할만한 이유는 찾으면 찾는대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어느쪽이나 전면전을 할 수 있을 상황이 아니야. 이건 말하자면 일종 의 시위가 되는 거지. 하지만 시위라고 해서 어물 어물 넘어가 줄 생 각은 없다. 절대로.' 로렌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려 퍼진다. 그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너무 믿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때.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그래서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은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래서 몰랐던 것 같아." 순간 기엘과 이리야는 '아--.'하는 표정을 해보였다. 상대가 그들 즉, 하세카의 마법사들이라면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꼭 그탓만은 아니야. 사실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이쪽에 서 군대가 나서면 저쪽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말이야. 로렌이 말했던 것을 간과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황제가 뭐라고 했는데?" 이리야가 너무나 진지해 보이는 경하에게 왠지 거부감 비슷한 것을 느 끼며 물었다. 경하가 이렇게 나올 때면 뭔가 꼭 일이 생긴다는 것을 그는 경험적으 로 잘 알고 있었다. "아셀의 뒤에 하셰카가 있다는 소리." "…………." "이번엔 어떤 전투가 벌어져도 전면전 같은 것이 될 리가 없다는 소리 도 했지. 이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역사의 전초전이라고 했었거든. 너 무 거창하고 황당해서 대꾸도 안했었는데 그게 이런식이 될 줄은 몰랐 어. 자아 그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질끈 묶으며 경하가 말했다. "케인 도와줄래? 아직은 늦지 않은 것 같으니까." 세나케인은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며 경하는 활짝 웃 어보였다. "아셀과 저들의 뒤에 하세카가 있다면 미메이라와 가이칸의 뒤에는 내 가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하지 않겠어?" "…………." 순간 세나케인과 마찬가지로 경하의 뒤를 따르던 기엘과 이리야가 삐 긋하며 그 자리에서 휘청였다. "이. 이봐 그건 좀…." "…………."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수작 부리는 놈 정도는 잡아내겠어." "마지막 말만 하지 않았다면 100점을 주었을 거다." 세나케인이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헤헤헤." 긴장되어 가는 감정이 늘어지고 찌뿌둥했떤 몸을 다시 잡아당겨 긴장 상태로 만든다. 파라라락--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져 있는 막사의 자락이 바람에 휘날 렸다. 경하는 힘들이지 않고 막사를 빠져나왔다. 하늘을 보자 새카만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나치게 날이 맑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케인!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경하는 케인의 이름을 부르며 동시에 눈을 감았다. 바람이…. 그 청명한 밤하늘에 불어오기 시작했다. 경하의 몸은 천천히 그 자리에서 떠올라 곁에 우뚝 서 있는 나무위로 천천히 이동을 했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닌 탓에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보초를 서던 병사들 에서부터 그의 동료들에게, 막사에서 막사로 펴져나갔다. "………." 감고 있는 눈 주위로 묶어놓았던 머리가 풀려 휘날리는 것이 피부를 통해 느껴져 오기 시작했다. 그 바람이 순식간에 경하의 몸쪽으로 불어와 멈추는 순간, 경하는 눈 을 번쩍 떴다. 파아앗------!!!! 거센바람이 그들의 머리위로 불어오기 시작했다. "우앗!! 왠 바람이 갑자기!!" "으아앗!! 그거 날아간다! 잡아!!!" 쏴아아아---하며 나뭇잎들과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멀리… 될 수 있는 한 멀리까지.' 소리없는 경하의 목소리가 세나케인에게 전해지고, 경하의 눈속으로는 결코 한눈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의 별이 순식간에 아래로 쏟아져내 리기 시작했다. ------------------------------------------------------계속 간염 예방주사 추가 접종의 위력..생각보다 대단하군요. 약 1.2도의 미열이 지속적으로 발생중. 끙----- 차라리 하루정도 대놓고 아파버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_-;;; 이틀 내내 끙끙이라니...안면팔려서...... (그걸 내리 꼬다리에 쓰는 이유가 뭔데!!!) T_T 그러니까 인간은 부지런하게 미리미리 맞아야 할것은 맞아야 하는 건가 봅니다. [아슈레이 8] 4장 갈리아 계곡의 바람 (15) 달빛이 구부린 등위로 빛을 비추고 있었다. 고요함은 앞서 걸어가는 사람의 숨소리마저 삼켜버릴 정도로 짙게 깔 려있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바람에 구르는 작은 낙엽 과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소리뿐이다.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그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산봉우리를 넘었는지 …. '앞으로 몇 개의 언덕을 넘으면 되는 걸까?' 돌아가면 그래도 한숨을 돌리고 편한 잠을 잘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 발을 디디던 그의 발 밑에 단단한 바위대신 물컹한 것이 밟혔다. "…………."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그는 바위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언덕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발 1밑에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도 물컹한 것일까? "어이. 네이든. 왜 안가는 거야?" 작은 목소리 등뒤에서 들려왔다. 이것은 현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아직 눈을 뜨고 있다고, 아 직 그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네이든 너…." 들려오는 목소리가 사방으로 갈라진다. 어둠에 섞인 붉은 기운. 눈앞에 퍼져나가는 비현실적인 색채. 털썩---- 무릎이 꺾였다. 순식간에 낮아진 시야에는 어느새 사라졌던 동료의 믿음직스러운 등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손을 뻗어 그 동료의 등에 손을 대었다. 순간 그의 손이 무엇으론가 흠뻑 젖어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동료의 몸은 앞으로 고꾸라져 두 번다지 움 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에 손을 대고 있는 그 역시, 더 이상 팔을 움직일수 없었 다. "……네이든!!" 분명 귓가에서 부르는 목소리인데 그 소리가 멀리서, 저 멀리서 부르 는 소리처럼 아득해져가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작은 점 하나를 중심으로 전후 좌우.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시선이 확대해 나간다.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동심원으로 확대해하는 초감각. 사람들의 숨소리가, 그들의 웃음소리가 그들이 만들어내는 살아있다는 신호가 몰려들어온다. 계곡을 건너 숲의 수많은 작은 동물들이, 작은 시내에 살고 있는 조그 마한 물고기들이 발하는 생명의 신호들이 경하의 감각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빠른속도로 그 살아 있는 것들이 내뿜는 생명의 신호들을 지나는 순간 다시 인간이 발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동료가 쓰러진 줄도 모르고 앞으로 발을 내미는 또다른 사람,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쓰러지는 사람. 멀리 확장된 감각의 끝에서부터 사람들의 절규가 살아있는 화살이 되 어 날아오기 시작했다. "…케인!!!!" 부릅뜨고 있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내리고 있던 팔을 들어올리며 경하는 주문을 외웠다. "로. 조하. 아슈레이…." 더 이상 주문을 외울 필요가 없는데도 경하는 자신도 모르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유우라----!!" 머리 위에서 교차되었던 팔이 넓게 퍼지는 순간 강한 바람과도 같은 엘이 경하의 몸과 함께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적들의 위치가 드러났습니다. 폐하." "정찰 수색대가 돌아온 건가?" "아닙니다. 미메이라의 그분께서 찾아내셨다고 합니다." "…………." 미타남작의 말에 로렌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나." "바로 조금전에 갑자기 막사에서 뛰어나오더니 이상한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무에서 내려와 위치를 알려왔다고 하더군 요." 왠지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미타 남작의 얼굴을 보고 로 렌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버렸다.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묘한 곳에도 도움을 주는 군. 그래서 준비는?" "폐하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좋아. 그럼…." 로렌은 막사를 나섰다. 그 앞에는 어느새 기사단장들과 기사들이 병사들과 함께 모여 있었다. 어느 누구나 기대에 가득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챙강챙강하는 병장기 소리마져 로렌이 앞으로 나서자 어느새 잦아들었 다. "우리는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승리를 위한 북돋음도, 그렇다고 해서 사기를 불러일으키는 말도 아닌 단어가 로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군더더기도 없는 그저 일상생활과도 같은 어조. 그럼에도 불가하고 그가 입을 여는 순간 그의 앞에 늘어져 있던 수많 은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여버렸다. "영광의 승리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로렌의 목소리는 마치 바람처럼 깨끗하게 구석 구석으로 전해진다. "단지." 말을 하다말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로렌은 자신의 바로 앞에서부터 저 끝, 눈동자조차 보이지 않은 먼곳에까지 시선을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황제의 위가 아주 잠시 비었다며 멋도 모르고 도발을 해오는 버릇없 는 그 누군가에게 버릇을 가르쳐주려는 것 뿐이다." 건방지다고 생각하면 상당히 건방진 대사였지만 로렌의 여유로움은 오 히려 자신만만함으로 비쳐졌다. 정말로 자신의 앞마당에 불법 침입한 건달이라도 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두번 다시 어리석은 생각을 품지 않도록 철저하게 응징하라!" 자신 만만한 로렌의 표정하나가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일장 연설따위 로렌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제국군들에 있어서는 로렌의 존재자체가, 그리고 곧 황제의 위에 오를 황태자가 이런곳까지 그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겨왔다는 사실이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것이다. "그대들과, 이 가이칸 제국에 영광이 있으리라!!!" 말을 마치기 무섭게 로렌의 팔이 하늘로 곧게 뻗어 올라가는 순간 병 사들이 손에 손에 들은 병장기를 높이 쳐들며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 다. 우렁한 고함소리들은 점점 하나로 뭉쳐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계곡을 넘어 밤하늘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이동주문을 역으로 자신에게 걸은 경하는 그가 불러온 바람과 함께 밤 하늘을 날고 있었다. 자신에게 화살처럼 전해져온 그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목표로 경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가고 있었다. '멀지 않아.' 산행을 했다면 몇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경하의 이동 속도는 인간적 으로 감당할 수 있는 속도는 아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경하는 자신이 목표로 했던 지점을 찾아내고 하늘에 서부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땅에 내려서기 직전 경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뭐지? 저건?" 땅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확인해도 마찬가지. 바위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보이지 않는 자들의 발을 옮 아매고 있었다. 전신을 새카맣게 감싼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채 당 황하며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악!!!!" "으아아!!"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소리가 경하의 귀를 때렸다. 다음 순간 경하의 눈에는 이상하다 못해서 소름끼치는 광경이 생생이 비쳐졌다. "쿠억!!!!" 바닥에서부터 몇 개의 돌과 흙덩이가 떠오르더니 그대로 검은 복면을 한 일련의 무리들에게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크학!!" 화살처럼 쏟아져내린 돌맹이들과 흙덩이는 그대로 그들의 몸을 통과하 여 새빨간 피를 머금은 채 다시 바닥으로 돌아갔다. "크아아악!!!" 몸을 일으키다 만 복면인들이 땅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경하의 몸이 그 곁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경하는 놀라움에 미쳐 눈치 채지못한 사실 하나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 경하가 몰고 온 바람이 진동하는 피냄새를 한꺼풀 씻어내자 주위에는 고요함만이 맴돌았다. 신음소리들이 간간히 들려오는 가운데 사람들이 쓰러져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사람의 인영이 움직이는 것이 경하의 눈에 들어왔다. "땅의 술사?" 처음이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 단어 가 경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본의 아니게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었군요." 어둠속에서 한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장님. 이렇게 갑작스럽스럽게…." 어둠속에 있던 인영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마치 땅에서부터 떨어져나온 듯한 느 낌을 주며 세 사람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달빛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들중에서 제일 먼저 경하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는 어깨위에서 흔들 리는 금발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미소지었다. "저희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대지의 바라스. 바라스의 축복을 받은 대 지의 술사라고 말입니다." 갓 스물을 넘겼을까? 경하의 눈으로 봐서는 아무리 나이가 많게 보아도 스물정도가 한계였 다. 황금의 머리카락은 뒤로 단정하게 묶여 있었지만 오른쪽에 몇가닥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듯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남자들은 그처럼 화려한 금발은 아니었지만 그와 거의 같은 빛깔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비로소 그의 눈동자가 경하의 시선 안으로 들어 왔다. 황금색의 머리카락 때문에 당연히 푸른 눈동자라고 생각했던 경하에게 비춘 것은 의외로 심연보다 더더욱 짙은 검은색, 밤하늘보다도 더욱 짙은 검은색이었다. 그 검은색 눈동자는 그러나 어두움보다는 포근한 깊이를 가지고 있었 다.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딘가 모르게 흔들리고 있던 경하의 감정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경하는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며 그를 맞이했다. "바라스의 수장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바라스의 수장, 아야사나 데렌 힐트 바라스입니다."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입니다. 경하라고 불러주세요." 정식으로 이름을 건낸 아야사나와는 달리 경하는 가볍게 자신의 소개 를 끝냈다. 속으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름이 여자 같잖아….' "조금 더 서두르려 했는데 이런 상황에 뵙게 되어 참으로 난처하군요. " "아니요. 도와주신…것 같은데 감사드려야지요." "아아. 이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실은 아무말없이 지나가려 했습 니다만. 너무 일방적으로 당하는 데다가 이들의 수법이 아무래도 좀 걸려서 그만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해보였다. 아무래도 가이칸 제국군의 정찰병들을 도운 것이 의도적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검은 마법을 쓰는 자들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활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있는 동안 그의 부하인듯한 남자들은 분주히 뛰어 다니며 부상자를 찾아냈다. 10명의 정찰대중 살아 남은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수장님. 치료를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 신음소리를 흘리는 세 사람을 추려내는 동안 경하는 멍하게 아야사나 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런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을지에 대한 물음 따위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불이 나타났고 물이 나타났고 혹시나 땅, 그의 말을 빌어 대지의 계승 자도 나타날것이라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심하군." 부상자를 잠시 살펴보던 바라스의 수장은 그의 어깨에 둘러져 있던 망 토를 건내 부상자의 몸을 살며시 덮었다. "살려 낼 수 있을지…." "일단은 제가 머물던 곳으로 가지요. 그곳에는 라마이드님도 계시니 까. 어렵지 않게 치료를 할수 있을 겁니다." 경하는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는 대신 일단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 자고 생각했다. 더 이상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도 싫었고 눈앞에서 피흘 흘리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도 싫었다. "좋습니다." 가벼운 차림이 된 아야사나는 경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경하는 얼결에 그처럼 손을 내밀었다. 아야사나는 경하의 손을 맞잡고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곁에 오니 비로서 확실히 알겠습니다." "예?" "제가 이곳에 오게된 이유, 그리고 호로스의 수장이 당신을 바라는 이 유." "…………." 경하는 잡힌 손을 빼려고 했지만 굳게 잡힌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알고 계십니까? 당신으로 인해서 우리들 계승자 모두가 변해가고 있 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야사나의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변하…는 건 자연스러운거 아닌가요?" 경하는 애써 태연하려 노력했다. "당신의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말입니다 경하님. 당신의 힘으로 인해 제가 가지고 있는 엘의 파장이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전 그것을 확인 하러 왔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얼마나 변화시킬지, 그것을 제 눈으로 보기 위해."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와 가이칸을 외치는 자들의 소리는 바람에 움직이는 나뭇잎들이 내는 소리를 순식간에 삼켜가고 있었다. ------------------------------------------------------계속 5장으로 넘어갑니다. 헥헥... [아슈레이 8] 5장 바람과 불꽃과 물과 대지와…(16) "역시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만, 저희들보다는 산악전에 훨씬 익숙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정찰 수색대중 삼분의 2 가 전멸. 간신히 돌아온 사람들도 생사가 불투명할 정도입니다." "정상적인 무기를 사용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화살에 맞은 정도라고 생각하고 간신히 돌아온 병사 하나가 온몸이 부풀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현황보고에 로렌은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사방으로 내보냈던 정찰 수색대는 정보다운 정보라고는 제대로 건져온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해봐야 그들이 몸으로 직접 다쳐온 탓에 그들의 적들 중에 경하가 말한대로 어둠의 마법을 쓰는 자들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 전부라면 전부. 부대내에 암울한 소문이 퍼져나간 통에 정찰 수색대를 내보내는 것이 조금씩 힘겨워 간다는 보고조차 있다. 아직도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만 소리 소문없이 그들의 위에 어 둠의 그림자가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로렌은 느낄 수 있었다. '가이칸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단어를 나열해보지만 왠지 그 한구석이 어 둡게 변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카스핀. 잠시 자리를 비울터이니 자네가 일단 이곳을 맡도록 하게." "예. 폐하."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긴 했지만 미타 남작은 단정한 자 세로 로렌에게 예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막사를 나와 다시 어슴프레 날이 밝아오는 언덕빼기를 바 라보았다. 그 바로 아래, 그가 가려는 목적지가 있었다. "류 타인 아슈레이. 하라이스." 낭낭한 목소리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고통의 신음소리를 흘리던 환자는 그녀의 목소리에 위로를 받고 그녀 의 목소리에 이끌려 잠이 들었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어쉰 라마이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었다. 그녀가 머무는 막사는 어느새 부상병 수용소가 되어있었다. "조금 쉬시지요."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와 라마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이리야가 그녀 에게 흰색의 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라마이드는 그것을 받아들며 미소 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요." 부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 밤. 그 뒤로 그녀는 단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부상자의 대다수는 수색을 나갔던 병사들이다. 상처가 작은 줄 알고 그냥 붕대를 감고 있다가 새벽에 실려온 병사들 부터 시작해서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 마져 있다. "치유가 안 되는 겁니까?" 작은 상처 인데도 좀처럼 라마이드가 완치를 시키지 못하는 것을 본 이리야가 이상해하며 물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조금 시간을 두고 보는 겁니다. 어떤 영향을 미 칠지 제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다른 부상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듯 해서요." 말은 부드럽지만 왠지 이리야는 그녀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경하가 들으면 당장에라도 화를 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고통에 계속 잠도 이루지 못하는데…." "이리야씨." "예?"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는 것은 보시면 아시겠죠? 단순히 병장기 때문 에 만들어진 상처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고쳐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 상처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예요. 겉으로 멀쩡해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 내일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온 몸으로 이미 독이 퍼져 버렸을 수도 있구요." "그냥 독을 다 정화 시켜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이건 그냥 일반적인 독이 아닙니다. 일종의…." 설명을 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 왠지 여유가 없어보인다는 것을 이리 야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일종의 주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설마…." 라마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작정 정화시키려다가 환자에게 더 무리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조 금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치유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 볼겁니다." 이리야는 그제서야 이전에 경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하셰카의 그 정체모를 마법사가 쓰는 마법은 엘러들이 쓰는 주문과는 다른 것이라 는 사실이 말이다. 같은 엘을 쓴다고는 하지만 어딘지 그 기본이 틀린 것이다. '이거 참 곤란해. 정말 곤란해.' "이리야. 여기 있어?"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이리야가 막 경하의 일을 떠올리는데 막사 안으로 불쑥 경하가 들어왔다. "그래. 늦었는데 왜 안자고 나온 거야?" 막 타박을 하려는데 경하의 뒤를 따르는 남자들이 이리야의 눈에 들어 왔다. 이리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꼭두새벽부터. 좀더 쉬어야 한다구." "아아. 조금 볼일이 있어서…." 한밤중, 갑자기 어디론가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던 경하는 몇시간 뒤에 엉뚱한 일행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덕택에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던 기엘과 이리야는 그만 기운이 빠져버렸 었다. 경하가 대동하고 온 일행들은 바로 다름 아닌 땅의 신국, 그들의 발을 빌어 바라스의 수장일행들이었다. 경하와 함께라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일단 이런 곳까지 아무렇 지도 않게 찾아온 그들에게 기엘과 이리야는 경악해하고 있던 차였다. "이봐 기사양반. 재워야할 것 아니야. 당신도 따라다니면 어떻게 해?" "………." 대답 없이 곤혹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기엘에게 이리야는 결국 동 정의 눈빛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보나마나 저 문제덩어리 경하가 고집을 피웠을 것이 틀림이 없었을 테 니 말이다. "사람들 소리가 들려서 신경이 자꾸 쓰이는 걸." "경하님께서 움직이시길래 저도 잠시 일어났습니다. 너무 책망하진 마 시기 바랍니다." 바라스의 수장인 아야사나가 경하의 역성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이리 야는 그만 기분이 나빠졌다. '젠장 저 기생오래비처럼 생긴 금발머리 자식은 도대체….' 라마이드가 아직은 수장 계승자의 신분인 탓에 상당히 겸손한 것에 비 해 아야사나는 이미 수장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인지 묘하게 태도가 틀 렸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그것이 이리야의 신경을 묘하게 긁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리야와 기엘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저 바라스의 수장인 아야사나가 경하의 일거수 일투족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어째서 치유가 안 되는 거죠?" 경하는 그런 기엘과 이리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음하고 있는 병사의 옆으로가 그의 환부에 손을 올렸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정화를 시켜 치료해드리고 싶지만 이리 야씨께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것은 단순한 상처가 아닙니다. 일종의 마 법이죠. 무리하게 주문을 해제시키면 무리가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라구요?" 라마이드는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경하는 이리야 의 짐작대로 미간에 주름을 가득 잡아버렸다. "그렇다고 아파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를 해요?" '그러면 그렇지.' 이리야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경하는 자신의 눈앞에 서 사람들이 다친채 있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인 것이다. 경하는 경하대로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무리가 간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고통에 겨워하고 있는 환자 를 그대로 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두명도 아니다. 막사 가득 누워 있는 사람들이 내어뿜는 고통의 기운 가운데 서 있는 라마이드가 싫어질 정도였다. "무리가 되든 말든 무엇이라도 해봐야 하잖아! 당신은 나유의 수장이 될 사람이니까 안심하고 맡겼는데 도대체…!" 경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 기껏 그녀의 진심을 받아들여 이곳까지 동행했다. 무엇보다 최고의 물의 술사임에 틀림없을 그녀가 있으면 적어도 부상 자의 구제만큼은 확실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남은 초초해 죽겠는데 무슨….' 경하는 척척 부상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검게 부어오른 환부와 새카맣게 변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얼굴색. 그리고 죽음의 경계선상에 있는 인간의 표정. 하나 하나가 차례대로 경하의 눈에 들어왔다. "모른다고 무조건 그러고 있지 말아요!!" 경하는 라마이드의 옆으로 걸어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직접 부딪히면 되잖아요. 손을 대지 않고 어떻게 그걸 알게된다는 거 죠?" "경하님." 기엘은 경하가 흥분을 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그 옆으로 뛰어갔 지만 그보다 경하의 행동이 한발 빨랐다. "주문을 외워요. 정화의 주문이든 치료의 주문이든. 최선을 다해서 당 신의 있는 힘을 다해서!!" 강한 경하의 눈빛에 라마이드는 흠칫 놀랐지만 경하의 손을 뿌리치지 는 못했다. 환자의 환부에 닿아있는 손가락 끝에서 온 몸을 얼릴 것 같은 차가운 한기가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치료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류 타인 아슈레이. 로훼스. 메이크린---!" 물의 흔들림 같은 파장이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퍼져나왔다. 그 위에 경하의 주문이 더해진다. "로 조하 아슈레이. 메 하니다." 경하가 알고있는 가장 기초적인 정결의 주문은 바람의 형태가 되어 물 의 파장에 그대로 더해졌다. 바람에 일렁이는 물의 파문. "…으읏." 의식이 있는 부상병들 한둘이 눈을 뜨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기위에 몸을 일으키는 순간. 두 사람이 만들어낸 주문의 힘은 지금 그 들의 손이 닿아있는 부상병 뿐만 아니라 주위에 누워있는 환자들에게 까지 폭포수처럼, 폭풍처럼 밀어 닥치기 시작했다. "폐하. 아무래도 좀 심상치 않습니다." "뭔가." 로렌은 앞서가선 병사가 뒤로 돌아오자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되물었 다. "부상병들이 누워 있는 막사가…." 그 다음은 굳이 보고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의 눈에 명백하게 기이한 현상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져 있는 막사들이 일제히 일렁거리고 있었다. 바람에 일렁 거리는 것일까? 아니면 물에 일렁 거리는 것일까? 분명 막사는 야트막한 언덕 바로 아래에 있건만 마치 물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뿐 만이 아니다. 물결 사이 사이에 거칠다면 거친 바람의 흔적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저건…."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슴푸례한 진지 한쪽에서부터 푸르름으로 번쩍 이는 물결과 은색으로 빛나는 바람이 휘몰아쳐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것이군." 두 사람의 주문이 하나로 모아져 만들어내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바라스의 수장 아야사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채 그대로 무엇인가 작 은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앞으로 내민 손에서 금색의 엘이 빛을 내며 뿜어져 나온다. 기엘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 것인지 알수없었다. 분명 단순한 치료의 주문이며, 정결의 주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이해할수 없는 현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들이 만들어낸 물과 바람의 엘은 부상병 하나하나에게 미쳐 그들의 몸속에 스며든 어둠의 기운과 정면으로 맡닥드리고 있었다. 한명 한명의 몸에서 새카만 기운 같은 것이 밀려나오는 것이 그의 눈 에 똑똑히 들어왔다. "……저것은." 그 검은 기운은 다음 순간. 황금빛의 엘에 붙들려 그 자리에서 땅속으 로 끌려들 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야사나의 화려한 금발머리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그의 몸에서 시 작된 주문은 경하와 라마이드의 주문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기 힘들정도로 강력한 파장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으읏." 의식이 없는 환자들의 몸에서도 비슷한 검은 기운이 솟아오르기 무섭 게 황금의 엘이 그것들을 끌어당겼다. 기엘은 그것을 그의 두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개의 주문이 하나로 작용하고 있는건가?' 언제나 그는 경하가 기적과도 같은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아왔다. 아주 조그마한 주문이라도, 경하가 사용하면 그 위력이 틀리다. 하물며 경하의 힘에 더해진 주문이 수장급의 주문이라면 어떨까? 순간 기엘의 눈에 이상한 것이 목격되었다. 그가 이전에 보았던 그 미묘한 흔들림. 경하에게서 흘러나온 은빛으로 빛나는 투명한 엘의 가닥이 어디론가 흘러 사라지던 그 광경이 오버랩되었다. 두 세가닥으로 갈라져 나온 그 흐름은 하나는 라마이드에게 또하나는 아야사나에게 흘러가 그들의 엘에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기엘은 바라스의 수장이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저것은…….' 경하에게서 흘러나온 아주 적은 엘의 흐름은 다른 두사람의 계승자에 게 흘러가 그들의 힘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곁에 있기에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곤두선 머리카락 한올 한올로, 긴장된 솜털 하나하나로 그리고 드러난 피부로 떨릴 듯한 그들의 강력한 엘이 느껴졌다. 그것은 기엘뿐만이 아니라 아야사나의 뒤를 따라왔던 수행기사들도 마 찬가지였다. 정확하게는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사람의 주문이 발휘하는 위력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변화하고 있다. 경하님의 엘에 반응해 나머지 두 사람의 힘이….' *** ------------------------------------------------------계속 --;;; 늦어서 죄송합니다. 무엇보다. 담당자님..... 죽여주세요. 5장 바람과 불꽃과 물과 대지와… 역시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만, 저희들보다는 산악전에 훨씬 익숙하 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정찰 수색대중 삼분의 2가 전멸. 간 신히 돌아온 사람들도 생사가 불투명할 정도입니다. 정상적인 무기를 사용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화살에 맞은 정도 라고 생각하고 간신히 돌아온 병사 하나가 온몸이 부풀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현황보고에 로렌은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사방으로 내보냈던 정찰 수색대는 정보다운 정보라고는 제대로 건져온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해봐야 그들이 몸으로 직접 다쳐온 탓에 그들의 적들 중에 경하가 말한대로 어둠의 마법을 쓰는 자들이 섞여있 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 전부라면 전부. 부대내에 암울한 소문이 퍼져나간 통에 정찰 수색대를 내보내는 것이 조금 씩 힘겨워 간다는 보고조차 있다. 아직도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만 소리 소문없이 그들의 위에 어둠의 그림자가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로렌은 느낄 수 있었다. '가이칸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단어를 나열해보지만 왠지 그 한구석이 어둡게 변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카스핀. 잠시 자리를 비울터이니 자네가 일단 이곳을 맡도록 하게. 예. 폐하.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긴 했지만 미타 남작은 단정한 자세로 로렌에게 예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막사를 나와 다시 어슴프레 날이 밝아오는 언덕빼기를 바라보 았다. 그 바로 아래, 그가 가려는 목적지가 있었다. 류 타인 아슈레이. 하라이스. 낭낭한 목소리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고통의 신음소리를 흘리던 환자는 그녀의 목소리에 위로를 받고 그녀의 목 소리에 이끌려 잠이 들었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어쉰 라마이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었 다. 그녀가 머무는 막사는 어느새 부상병 수용소가 되어있었다. 조금 쉬시지요.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와 라마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이리야가 그녀에게 흰색의 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라마이드는 그것을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요. 부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 밤. 그 뒤로 그녀는 단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부상자의 대다수는 수색을 나갔던 병사들이다. 상처가 작은 줄 알고 그냥 붕대를 감고 있다가 새벽에 실려온 병사들부터 시작해서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 마져 있 다. 치유가 안 되는 겁니까? 작은 상처 인데도 좀처럼 라마이드가 완치를 시키지 못하는 것을 본 이리야 가 이상해하며 물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조금 시간을 두고 보는 겁니다.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제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다른 부상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듯 해 서요. 말은 부드럽지만 왠지 이리야는 그녀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경하가 들으면 당장에라도 화를 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고통에 계속 잠도 이루지 못하는데…. 이리야씨. 예?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는 것은 보시면 아시겠죠? 단순히 병장기 때문에 만 들어진 상처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고쳐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 상처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예요. 겉으로 멀쩡해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 내일 어떻 게 될지 모릅니다. 온 몸으로 이미 독이 퍼져 버렸을 수도 있구요. 그냥 독을 다 정화 시켜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이건 그냥 일반적인 독이 아닙니다. 일종의…. 설명을 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 왠지 여유가 없어보인다는 것을 이리야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일종의 주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설마…. 라마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작정 정화시키려다가 환자에게 더 무리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조금 시 간을 두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치유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볼겁니다. 이리야는 그제서야 이전에 경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하셰카의 그 정체모 를 마법사가 쓰는 마법은 엘러들이 쓰는 주문과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말 이다. 같은 엘을 쓴다고는 하지만 어딘지 그 기본이 틀린 것이다. '이거 참 곤란해. 정말 곤란해.' 이리야. 여기 있어?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이리야가 막 경하의 일을 떠올리는데 막사 안으 로 불쑥 경하가 들어왔다. 그래. 늦었는데 왜 안자고 나온 거야? 막 타박을 하려는데 경하의 뒤를 따르는 남자들이 이리야의 눈에 들어왔다. 이리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꼭두새벽부터. 좀더 쉬어야 한다구. 아아. 조금 볼일이 있어서…. 한밤중, 갑자기 어디론가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던 경하는 몇시간 뒤에 엉뚱 한 일행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덕택에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던 기엘과 이리야는 그만 기운이 빠져버렸었다. 경하가 대동하고 온 일행들은 바로 다름 아닌 땅의 신국, 그들의 말을 빈다 면 대지의 신국 바라스의 수장일행들이었다. 경하와 함께라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일단 이런 곳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온 그들에게 기엘과 이리야는 경악해하고 있던 차였다. 이봐 기사양반. 재워야할 것 아니야. 당신도 따라다니면 어떻게 해? ………. 대답 없이 곤혹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기엘에게 이리야는 결국 동정의 눈빛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보나마나 저 문제덩어리 경하가 고집을 피웠을 것이 틀림이 없었을 테니 말 이다. 사람들 소리가 들려서 신경이 자꾸 쓰이는 걸. 경하님께서 움직이시길래 저도 잠시 일어났습니다. 너무 책망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바라스의 수장인 아야사나가 경하의 역성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이리야는 그만 기분이 나빠졌다. '젠장 저 기생오래비처럼 생긴 금발머리 자식은 도대체….' 라마이드가 아직은 수장 계승자의 신분인 탓에 상당히 겸손한 것에 비해 아 야사나는 이미 수장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인지 묘하게 태도가 틀렸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그것이 이리야의 신경을 묘하게 긁고 있었다. '저 가이칸의 황제보다 덜하다면 덜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뭔가 좀 거슬려.' 그리고 무엇보다 이리야와 기엘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은 저 바라스의 수장 인 아야사나가 경하의 일거수 일투족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 일지도 모른다. 어째서 치유가 안 되는 거죠? 경하는 그런 기엘과 이리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음하고 있는 병사 의 옆으로가 그의 환부에 손을 올렸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정화를 시켜 치료해드리고 싶지만 이리야씨께 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것은 단순한 상처가 아닙니다. 일종의 마법이죠. 무리 하게 주문을 해제시키면 무리가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라구요? 라마이드는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경하는 이리야의 짐 작대로 미간에 주름을 가득 잡아버렸다. 그렇다고 아파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를 해요? '그러면 그렇지.' 이리야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경하는 자신의 눈앞에서 사 람들이 다친채 있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인 것이다. 이상하게도 안도감 같은 것이 든다. 하지만 그런 이리야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경하는 경하답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무리가 간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고통에 겨워하고 있는 환자를 그 대로 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두명도 아니다. 막사 가득 누워 있는 사람들이 내어뿜는 고통의 기운 가운데 서 있는 라마 이드가 싫어질 정도였다. 무리가 되든 말든 무엇이라도 해봐야 하잖아! 당신은 나유의 수장이 될 사 람이니까 안심하고 맡겼는데 도대체…! 경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 기껏 그녀의 진심을 받아들여 이곳까지 동행했다. 무엇보다 최고의 물의 술사임에 틀림없을 그녀가 있으면 적어도 부상자의 구제만큼은 확실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남은 초초해 죽겠는데 무슨….' 경하는 척척 부상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검게 부어오른 환부와 새카맣게 변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얼굴 색. 그리고 죽음의 경계선상에 있는 인간의 표정. 하나 하나가 차례대로 경하의 눈에 들어왔다. 모른다고 무조건 그러고 있지 말아요!! 경하는 라마이드의 옆으로 걸어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직접 부딪히면 되잖아요. 손을 대지 않고 어떻게 그걸 알게된다는 거죠? 경하님. 기엘은 경하가 흥분을 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그 옆으로 뛰어갔지만 그보다 경하의 행동이 한발 빨랐다. 주문을 외워요. 정화의 주문이든 치료의 주문이든.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있는 힘을 다해서!! 강한 경하의 눈빛에 라마이드는 흠칫 놀랐지만 경하의 손을 뿌리치지는 못 했다. 환자의 환부에 닿아있는 손가락 끝에서 온 몸을 얼릴 것 같은 차가운 한기 가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치료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류 타인 아슈레이. 로훼스…. 메이크린---! 물의 흔들림 같은 파장이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퍼져나왔다. 그 위에 경하의 주문이 더해진다. 로 조하 아슈레이. 메 하니다. 경하가 알고있는 가장 기초적인 정결의 주문은 바람의 형태가 되어 물의 파 장에 그대로 더해졌다. 바람에 일렁이는 물의 파문. …으읏. 의식이 있는 부상병들 한둘이 눈을 뜨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기 위 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두 사람이 만들어낸 주문의 힘은 지금 그들의 손이 닿아있는 부상병 뿐만 아니라 주위에 누워있는 환자들에게까지 폭포수처럼, 폭풍처럼 밀어 닥치기 시작했다. 폐하. 아무래도 좀 심상치 않습니다. 뭔가. 로렌은 앞서가선 병사가 뒤로 돌아오자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부상병들이 누워 있는 막사가…. 그 다음은 굳이 보고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의 눈에 명백하게 기이한 현상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져 있는 막사들이 일제히 일렁거리고 있었다. 바람에 일렁 거리는 것일까? 아니면 물에 일렁 거리는 것일까? 분명 막사는 야트막한 언덕 바로 아래에 있건만 마치 물 속 깊은 곳에 가라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결 사이사이에 거칠다면 거친 바람의 흔적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저건….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슴푸레한 진지 한쪽에서부터 푸르름으로 번쩍이는 물결과 은색으로 빛나는 바람이 휘몰아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것이군. 두 사람의 주문이 하나로 모아져 만들어내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바라스의 수장 아야사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무엇인가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앞으로 내민 손에서 금색의 엘이 빛을 내며 뿜어져 나온다. 기엘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단순한 치료의 주문이며, 정결의 주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들이 만들어낸 물과 바람의 엘은 부상병 하나 하나에게 미쳐 그들의 몸 속에 스며들어있던 어둠의 기운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있었다. 한명 한명의 몸에서 새카만 기운 같은 것이 밀려나오는 것이 그의 눈에 똑 똑히 들어왔다. ……저것은. 그 검은 기운은 다음 순간. 황금빛의 엘에 붙들려 그 자리에서 땅속으로 끌 려들 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야사나의 화려한 금발머리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그의 몸에서 시작된 주문은 경하와 라마이드의 주문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파장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 었다. 으읏. 의식이 없는 환자들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오르기 무섭게 황금의 엘이 그것들을 끌어당겼다. 기엘은 그것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개의 주문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건가?' 언제나 그는 경하가 기적과도 같은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아왔다. 아주 조그마한 주문이라도, 경하가 사용하면 그 위력이 틀리다. 하물며 경하의 힘에 더해진 주문이 수장급의 주문이라면 어떨까? 순간 기엘의 눈에 이상한 것이 목격되었다. 그가 이전에 보았던 그 미묘한 흔들림. 경하에게서 흘러나온 은빛으로 빛나는 투명한 엘의 가닥이 어디론가 흘러 사라지던 그 광경이 오버랩되었다. 두 세가닥으로 갈라져 나온 그 흐름은 하나는 라마이드에게 또 하나는 아야 사나에게 흘러가 그들의 엘에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기엘은 바라스의 수장이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저것은…….' 경하에게서 흘러나온 아주 적은 엘의 흐름은 다른 두사람의 계승자에게 흘 러가 그들의 힘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경하의 엘이 이끌어내고 있는 그들의 잠재되어 있던 힘. 곁에 있기에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곤두선 머리카락 한올 한올로, 긴장된 솜털 하나 하나로, 그리고 드러난 피 부로 떨릴 듯한 그들의 강력한 엘의 파장이 느껴졌다. 그것은 기엘뿐만이 아니라 아야사나의 뒤를 따라왔던 수행기사들도 마찬가 지였다. 정확하게는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사람의 주문이 발휘 하는 위력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변화하고 있다. 경하님의 엘에 반응해 나머지 두 사람의 힘이….' *** 기척을 느낄 수가 없군. 아무래도 저희들이 가이칸에 가담하고 있다는 정보는 입수했을 터인데 너 무 신중합니다. 흐음. 나이트 카시아는 수려한 이마에 잔뜩 주름을 잡고 있었다. 하나스와 국경선에서 대치한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갈리아로 이동한 제국군이나 경하에게서는 아직 이렇다할 소식도 없었다. 그나마 정찰을 나갔던 제국군이 하나스군과 마주쳐 약간의 분란이 일어났을 뿐. 정작 그들이 상대해야 할 것이라 생각되는 호로스의 화염술사들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먼저 우리들의 존재를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 고.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일겁니다. 로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이트 기엘로부터 다른 연락은 없었나? 아…, 그러고 보니. 이쪽 전황과는 상관이 없겠습니다만. 바라스의 수장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바라스? 네. 바라스의 수장이 수행원 몇을 대동하고 갈리아 계곡 쪽으로 직접 찾아 왔다고 하더군요. 아직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거 참. 재미있군. 예? 나이트 카시아의 말에 로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메이라의 수장 계승자에, 나유의 수장 계승자. 그리고 거기에 바라스의 수장까지 모였있는 것이지. 아슈레이의 중심이 갈리아 계곡으로 이동한 것 같지 않나? 하지만 호로스의 수장은 이쪽에 있지요. 로운이 씁슬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데 순간 나이트 카시아의 머리위로 무 엇인가 스치고 지나갔다. 로운. 예? 나이트 카시아의 시선이 벽에 걸린 거대한 지도로 옮겨간다. 사실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아니 착각이 아니라 속고 있는 것일 지도… 몰라. …………. 제국의 황제는 갈리아에 있지. 굳이 이곳에 올 필요는 없었고 말이야. 그는 갈리아 계곡에 꽂혀있는 작은 깃발을 지적했다. 이번 일의 중심에는 아셀이 있어. 물론 그 뒤를 움직인 것이 하셰카라고 해도 그들이 중심으로 내세운 것은 아셀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해. 하나스는 어쩔 수 없는 외압에 시늉만 좀 하고 있을 뿐이야. 그것은 국경선 너머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하나스군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들은 아셀의 움직임을 기 다리고 있는 거니까. 주도한 세력이 아닌 이상 눈치를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어. 안 그래?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호로스의 수장이 중심 세력인 아셀군이 있는 갈리아를 두고 별 의미도 없는 이곳 레카를 노리고 있을까? 아니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 설마. 그는 호로스를 의미하는 붉은 깃발을 뽑아 갈리아쪽으로 가져갔다. 호로스의 수장과 그의 기사들이 모조리 갈리아로 가있다면 어떨까? …그런. 호로스의 화염술사들과 우리들이 붙어보았자. 오십보 백보. 하지만 그들이 일반 제국군들을 상대하면 상황이 틀려져. 순간 로운의 머릿속에 무서운 상상이 떠올랐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쪽도 마찬가지로 하나스군을 상대하는데는 부담 이 없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어차피 하나스는 여간하면 움직이지 않아. 이 쪽은 그져 모양새가 필요할 뿐이야. 눈길을 끌어 병력을 분산시키고…. 나이트 카시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로운이 잘라 말했다. 오로프를 날려보내야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우린 괜스레 이곳에 또아리틀고 있을 필요가 없어. 호로스의 화염술사들이 이곳에 있든 없든. 있다면 그들과 싸우면 되고, 없으면 없는 대로 또한 우리들은 효용성이 있다. 차라리 우리가 치고 들어가는 것도 나 쁘지 않아. 좋아! 타악-하고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서로 부딪쳤다. 전 기사들에게 연락해서 티리쉬 주문을 해제하고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 지. 네. 그렇게 해주십시오. 저는 기엘에게 연락을 해야겠습니다. 좋아. 그럼. 그들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고 행동에 옮기려는 데 누군가 거친 발걸음으 로 그들이 있는 막사로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하나스가…. ……………. 하나스가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제국군쪽에서 어서 지휘본부로 와주십사하 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하나스가 먼저? 어째서?라는 질문이 두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랐다. 도대체…. 지금까지 이리저리 짜맞추어보던 시나리오가 갑자기 흐트러진다. 그리고 그 흐트러진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한줄기 이질적인 파장. 순간 초점을 잡을 수 없는 저 멀리로 두 사람의 시선이 날아간다. …화염 술사다!! 누구랄 것도 없이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는 같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어 올랐던 자신의 얼굴이나 손, 피부등을 신기한 듯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신음하던 자들의 얼굴에서 고통이 사라지고 평온함이 맴돌기 시작한 것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이었군. 기엘은 눈앞에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에 대해 간단하게 결론을 지었다. 설명할 것도 없었다. 명백하게 눈앞에 드러난 진실. 조금전과는 전혀 다른 평온한 기운이 막사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건. 손가락 끝에 감도는 순수한 엘의 기운에 놀란 이리야는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훨씬 상승한 그의 능력덕에 이리야는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 난 일에 더욱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경하님의 힘이 다른 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겁니다. 4신의 힘은 언 제나 평형을 이룬다고 하지요. 그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경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엘과 이리야가 하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영향이라. 그건 결국 이런거였나?' 「그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 경하는 마음속으로 세나케인과 대화를 나누며 생각에 빠졌다. 영향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측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증거는 지금 자신들에게 일어난 현상에 도취되어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는 라마이드와 아야사나다. 특히 바라스의 수장 아야사나는 이런 일을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 다. '후우. 정말이지.' 경하 스스로, 상상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 케인이 영향을 줄거라고 했을 때 부터, 그리고 스스로가 그 영향을 주는 주체가 되어 있다고 느꼈을 때부터 어떻게든 그것이 가시화 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그리고 주위에도 경하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파장을 가져오는 것 이었다. 방법은 역시 재빨리 해치우는 건가…. 「네 생각에 내가 찬성할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무슨 소리야 케인 뜬금없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래? 「시치미 뗄 것 없다. 네가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내가 느낄 수 있으니까. 굳이 네가 차단하지 않는 이상.」 ……………. 갑자기 혼잣말을 해대는 경하를 기엘과 이리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경하는 그것을 나몰라라 무시해버렸다. 이전부터 겪어왔던 것이기에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면 나중에 방해하진 말아 줘. 케인. 아무 말 없었다는 것 은 내 의견에 따를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 그렇지 케인? 혼잣말을 하는 경하의 목소리가 왠지 잦아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줘. 「…모든 것은 바람의 주인인 네 뜻대로.」 함축된 의미의 말이 경하의 흔들리는 마음을 위로하듯이 다가왔다. 경하는 주먹을 꼬옥 쥐었다. 모든 것은 케인의 말대로다. 경하의 일은 결국 경하의 뜻대로 풀어나갈 수 없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의 뜻대로…. 서둘러야겠어. 기엘. 이리야! 경하가 결심한 듯 기엘과 이리야를 부르는 순간, 꼭 닫혀있던 막사의 입구 가 거친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진지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출정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자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갑옷 과 무기들을 들고 뛰어나오는 병사들로 복잡해져가기 시작했다. 폐하! 여기 계셨군요. 부상병들의 막사 앞에 시종들과 함께 서있던 로렌은 헐레벌떡 뛰어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미타남작을 발견했다. 무슨 소란인가? 갑자기 아셀의 녀석들이 우르르 떼거지로 나타나기라도 한 건가? 피식 웃으며 말하는 로렌에게 미타남작은 얼굴을 굳힌 채 대답했다.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 서둘러 주십시오. 폐하께선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가주셔야 합니다. 이곳 은 언제…. 막 그를 설득하려는 미타남작의 말을 막았다. 아니. 됐네. 여기까지 와서 안전지대에서 또아리나 틀고 앉아서 뒷짐진 채 전황을 보고 받을 생각은 없어. 그럴 생각이라면 카드미엘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 게야. 하지만 폐하!! 카스핀. 저걸 보게. 로렌은 손을 들어 아직도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부상병 막사를 가리켰다. 예? 부상병들이 있는 막사가 아닙니까? 그것은 맞지. 하지만 지금 저곳에는 부상명 말고도 다른 존재가 있어. ………무슨?! 기왕이면 승리의 여신이면 좋겠지만, 그거야 어떻게든 포장하면 그만 아닌 가? 순간 로렌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미타 남작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 랐다. 이곳에서의 '사·소·한 국·경·분·쟁'은 결국 우리 가이칸 제국의 승리 로 끝날거야. 저들의 뒤에 암흑의 신이 도사리고 있다해도, 결국 승리의 신 은 우리와 함께 할걸세. *** 승리의 신이 함께 하긴 뭐가 함께 한다는 거야. 젠장…. 털썩--. 미타 남작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아무렇게나 집 어 던졌다. 어차피 의례용이나 다름없는 검이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의 검을 바라다보았다. 겉모양은 번드르르 하지만 실제 저 검으로 사람을 베어본적은 없다. '지금의 현실과 별다를 것도 없군.' 미타남작은 혀를 찼다. 아셀도 가이칸도 분명 서로 서로의 병력이나 이동상태를 뻔히 꿰고 있다. 그런데도 전황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교착 상태. 산발적인 접촉은 계속 보고 되고 있지만 어느쪽도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는 중이다. 비록 아셀이 먼저 이 페이요트 산맥으로 진입해왔다고 해도, 먼저 선제공격을 해오지 않는 이상 그것은 아셀의 책임이 되지 않는다. 양측 모두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절대로 기선제압을 해야한다. 앞으로의 가이칸을 위해. 폐하를 위해.' 미타남작의 수려한 이마에 주름이 늘어갔다. '저들이 원하는 것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 하지만 단 한가지 다른 것이 있 다.' 검은 암살단 하셰카가 아셀의 뒤에 있는 것은 거의 틀림이 없다고 판명된지 오래다. 그들은 시유라는 미메이라의 수장의 혈족을 다른 인물로 착각해 카드미엘로 보낸 후 연락이 두절 되었다. 실제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 정 도의 관계. 오히려 로렌이 그들과 모종의 계약을 맺었던 것이 후일 악영향을 끼치지 않 을까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닌 것이다. 다른 것이라면 역시 하셰카 뿐. 그렇다면 결국 미끼가 필요하다는 소리인 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 고민해봐야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한가지 결론밖 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로렌에게 해야할지 그는 고민하 고 있었다. 그 미끼를 이용하는데 있어 걸림돌은 그 미끼의 옆에서 언제나 눈을 뻔득이 는 기사 나부랭이나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를 부랑자도 아니다.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그의 군주인 로렌. 과연 폐하께서 내 의견을 들어주실지…. 다른 방법은 없다. 결국 남은 것은 로렌을 설득하는 일뿐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분명 화염술사들의 파장을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분명,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기색을 감추었던지, 아니면 전 선에서 완전히 빠져나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 스토우 린첼은 뭐라 할 말이 없어 인상을 썼다.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 뿐이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수를 써도 도통 그의 말에 따라 움직여 주질 않았다. 저는 보통 사람입니다. 때문에 호로스의 화염술사들에 대해서는 당신들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호로스가 저 하나스 의 병력에 합류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지 않습 니까? 오늘부터 당장 전선에 합류해주십오. 린첼의 말에 로운은 난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 숫자도 알수 없을뿐더러 그들은 아직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 지 않지 않았습니다. 실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는 말아주시죠. 그러니까 당신들이 나서면 그들을 유인해 낼 수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 다!! 없으면 나타나지 않을테고 있으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낼 게 아닙니 까!! 파앙---하고 린첼에 탁자를 쳤다. 서로 충분히 사전에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사항입니다. 린첼이 말을 화를 내려는 순간 막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콰아아앙!! 무슨 일인가!! 상대편에 마법사가 있는 듯합니다!!! 막사밖에 서 있는 기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시한번 커다란 굉음이 땅을 뒤흔들었다. 불덩어리가 막사 바로 앞쪽에 떨어진 듯 주위는 온통 불바다로 변해가기 시 작했다. 마법사다----!!! 밖에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린첼은 눈에 힘을 주며 로운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이라고 하는 소리 들으셨겠죠? ……하지만 호로스의 기사들은 아닙니다. 그들의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 습니다. 호로스의 기사든, 그냥 마법사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보통사람들과는 틀린 당신들이 아닙니까!!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 없습니다. …………. 린첼은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당신들의 차례입니다. 그는 로운에게 선고하듯 말했다. *** 뭔가 되게 이상하잖아…. 경하는 로렌에게 이끌리어 올라간 높은 언덕배기에 서서 그리 넓지 않은 계 곡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여긴 왜 끌고 온 거야? 순간 뒤에서 거품을 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다. 경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로렌을 대하는 소리를 들은 한 병사의 신음소리였 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전투가, 아니 전쟁이라고 해둘까? 뭐 어느쪽이든 상관은 없으니 넘어가지. 그 전투가 시작될테니까 잘 봐두라고. …………. 로렌은 팔짱을 끼고 경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표정은 웃는 표정은 아 니었지만 왠지 입꼬리가 살며시 위로 올라가 있다. 지루하게 시간을 끌어보았자 서로 이득이 있을 리가 없지. 오늘내로 이 짧 고 지겨운 전초전을 완벽하게 끝낼 생각이야. 어떻게? 경하는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대뜸 경하를 질질 끌어다가 언덕빼기에 턱-하니 올려놓고는 한다는 말이 오 늘내로 이 상황을 종료한다는 것이다. 미끼를 던져서. …………? 정예 기사단을 차출해 적진을 흔들어 이곳으로 유인하라고 했다. 에에? 너무나 단순한 로렌의 말에 경하는 놀라고 말았다. 지나가던 미타 남작의 말로는 가이칸은 절대로 먼저 선공을 하지 않을 것이 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가 먼저 공격을 한다고 해도 말이야. 결국 역사란 이긴쪽에서 서술하 게 되어 있는 법. 우리가 선제 공격을 해서 그들을 끌어낸 후, 전멸을 시켜 버리면 그만이야. 그리고 우리는 단지 그들이 침입을 해와서 제국의 영토를 지켰을 뿐이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지. ………!! 너무나도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로렌의 말에 경하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두고보게. 내일이면 카드미엘로 돌아가 두다리를 쭈욱 뻗고 편히 쉴수 있 을테니까. 로렌의 말은 왠지 정말 진심으로 밖에는 들려오지 않는다. 경하는 그래도 그동안 이 로렌이라는 남자의 성격이나 머리구조를 조금이나 마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경하의 앞에 있는 남자는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속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인상의 남자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로렌은 그렇게 말을 하며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니 소년 이라고 하기엔 조금 크고 청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어린 경하를…, 그리고 그의 은빛 머리카락을. '그리고 또 하나. 그 미끼들 속에 다른 것을 하나 끼워 놓았지.' 바람이 그의 짧은 머리카락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미끼가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적을…내 눈앞에 드러내 줄 것이다.' 그는 은빛의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고 있는 경하와 그의 수행원을 바라보 았다.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그들의 머리카락이 반사해내는 태양빛은 마치 어 두운 바다의 등대처럼 눈에 띨 것이다. '틀림없이 우리 앞에 그들은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반드시!!' 로. 조하 아슈레이. 바람의 이름 미메이라의 시작에서 끝. 가디언 루프--- -!!! 비처럼 쏟아지는 불덩이들이 가득 메운 하늘을 향해 로운은 있는 힘을 다해 주문을 영창했다. 쏴아아아 하는 바람소리가 나기 무섭게 쏟아져내리던 불덩이들이 보이지 않 는 장벽에 일제히 내려꽂혔다. 지면을 까맣게 불태우는 화이어 볼의 비는 쉴새없이 쏟아져내려 주위에는 매캐한 연기와 불길이 가득했다. 그 사이사이에 은색의 머리카락들이 휘날리며 지나가고 그들이 만들어낸 바 람의 장벽 아래로 손에 손에 무기를 들은 흉흉한 얼굴의 병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소리와 여전히 적의 진지 뒤쪽에서 날아오는 불덩이 들이 지면을 가득 메우는 사람들과 어울려 아수라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려꽂히는 불덩이들을 막아낼수는 있지만 그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저들은 절대 화염술사가 아니야.' 마법사라고 말했던 어느 병사의 말이 글자 그대로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 로 들어맞았던 것이다. 로운이 만들어낸 바람의 장벽에 부딪혀 오는 화이어 볼과 공중에서 산산이 분해되어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화이어 볼의 잔해는 이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불의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바람이 가진 속성이 물보다는 불에 가까운 것이기에 더더욱 힘이 들었다. 바람을 맞은 불은 꺼지기보다는 더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것이 원리. '곤란해. 정말로….' 뒷전에 앉아 손가락만 움직이며 명령을 하는 것은 로운의 성격에 맞지 않은 탓에 직접 진두지휘를 맡아 뛰쳐나왔지만 어느 것도, 그의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미메이라의 기사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마법사들과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경험 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커다란 문제였다. 어떻게는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적을 공격할 방법을 찾아야 했지만 그것은 결국 이론적인 고민일 뿐 아무런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로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어느새 그는 전열에서 벗어나 누구보다도 앞쪽으로 삐죽 튀어 나와 있었다. '돌아가야겠어.' 린첼의 명령대로라면 그는 일단은 뒤쪽에서 후방지원을 해야할 입장이다. 고개를 돌리는 그의 앞으로 하나스의 병사가 하나 뛰어들어왔다. 우아아아아-----!!! 높이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올리는 남자의 옆으로 피하며 로운은 자신도 모 르게 손에 들고 있던 라이트를 거칠게 휘둘렀다. 앞의 남자가 쓰러지기 무섭게 또 다른 병사가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아니 달려왔다는 표현은 맞지 않았다. 이미 사방에는 하나스와 가이칸의 병 사들이 뒤섞여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로운은 주문을 외우려다 말고 그가 사방으로 내뿜고있던 엘의 흐름을 다시 끌어당겼다. 엘러가 아닌자들에게 바람술을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하의 말이 바람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명심해. 절대로 엘러가 아니면, 바람술을 쓰지마. 로운뿐만이 아니라 다 른 기사들에게도 꼭 다짐을 시켜야 해. 알겠지?」 젠장. 꼭 그렇게 힘든 약속만 시킨단 말이야. 그녀석은. 그는 뽑아들었던 라이트를 양손에 쥐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의 검을 있는 힘을 다해 막아섰다. 고함소리 때문에 귀가 멍멍해진 지는 오래다. 앞도 뒤도 구분되지 않았다. 있는 것은 자신과 눈앞의 적들뿐. 로운은 라이트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닥치는 대로 그를 향해 달려드는 적을 베어 넘기며 그는 그때마다 검신에서 전해져오는 떨림에 몸서리를 쳤다. '제발….' 무엇이든 이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의 손이라도 잡고 싶다는 마음이 로운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무서워서도,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혼돈이 그의 주위에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무엇이라도 좋아. 누구라도 좋아. 어떻게든….' 마악 한 남자를 베어 넘기고 고개를 들은 로운의 시야에 한 남자의 등이 나 타났다. 몇 사람이나 건너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신영은 로운의 시 선을 끌고 있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옆으로 기회를 잡아 달려드는 남자를 거칠게 발로 차버리 고는 뒤로 거칠게 돌아섰다. 순간 그와 로운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 ……………!!!! 크헉----! 마주쳤던 시선이 순식간에 옆으로 비껴 내리고 피의 분수가 로운의 라이트 를 적셨다. 눈이 마주쳤던 사람의 피는 아니었지만 로운의 라이트를 적신 피는 천근 만 근 로운의 라이트에 무게를 더했다. 미메이라여………. 모든 미메이라인들이 입에 담는 그들의 신의 이름이 로운의 입에서 흘러나 왔다. 그와 눈이 마주쳤던 남자는 고개를 돌리고 어떻게 해서든 로운의 곁에서 멀 어지기 위해 거칠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전까지만해도 시간을 함께 공유했던 남자, 하나스의 기사 룬 디 리첼이었다. ……미메이라여. 쉴세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로운의 눈은 멀어져가는 룬의 등에 못 박 혀있었다. 부릅뜬 그의 눈에 물방울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그것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폭우가 되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조그만 분지와 언덕 전체에 널려 있었던 막사들은 어느새 모두 철거되어 사 라져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분포되어 있던 나무들이 잘려 나간 탓에 그 자리는 몸을 숨길 은폐물하나 제대로 없는, 마치 평지 같은 곳이 되어 있었다. 지금 그 평지와도 다름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갖가지 소리들 이 가득 차 사방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온통 뒤섞여 있었다. 누가 아군인지, 누가 적군인지 구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로렌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미끼 작전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맞아 들었다. 아셀은 마치 제국의 선공을 기다렸다는 듯이 미끼들의 뒤를 따라 꼬리를 물 고 물밀 듯이 밀려왔다. 아무리 대규모의 병력이 아니라고 해도, 경하의 눈에 그것은 충분히 두려울 정도의 숫자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봉에 선 커다란 덩치의 기사가 칼을 높이 쳐들고 진격명령을 내리는 소리 는 병사들의 고함소리에 묻혀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가 뭐라고 말을 하고 있 는지 정도는 짐작 할 수 있었다. 밀려오는 아셀 군을 맞아들이는 가이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의 사이로 쓰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일으킬 겨를도 없이 그들의 사이로, 혹은 그들의 시체를 밟고 앞으로 뛰어 나가는 사람들. 경하는 굳은 얼굴을 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막을 수 있다면 그리했겠지만 왠지 경하의 눈을 통해 그의 뇌속을 전부 채 워 버리고 있는 광경은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이건만 이상하게도 경하는 그 것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형화면을 통해 중세의 영화를 보고 있었던 그때가 더, 현실 같았 다. '왜…….' 귀를 찢어버릴 듯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어째서 그것이 현실로 느껴 지지 않는 것인지 경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작전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묻어나지 않는 혼전. 그들은 그저 서로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의 미가 있는 것인지, 서로 싸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은 과연 알고 있 을까? 굳이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누구에게 랄 것도 없이 경하는 질문을 했다. 애초에 저렇게 싸워야할 이유는 없는 건데….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계기는 무엇이 되도 상관없다. 원초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인간은 어떻게 든 그들이 가진 파괴욕구를 발산하고 싶어하지. 나는 그것을 발산하게 해주 는 역할을 맡은 인간일 뿐이다. 역할에는 또한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수반되 는 법. …………. 로렌은 멍하니 앉아 아래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경하의 뒤에서 팔짱 을 낀 채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런 그에게 경하는 불만에 가득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짓말 하지마. 이런 핑계를 대고 저런 핑계를 대봤자 결국은 로렌 당신의 욕망에 충실한거 아니야? 아슈레이 대륙의 통일이니 뭐니하는 거. 훗--. 포장을 하긴 했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말이지 굳이 내가 아 니더라도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어. 언제가 되든. 아니 아주 가 까운 시일내에 이보다 더한 전쟁이 시작될 거다. 전초전이니 하는 소리는 하지도 마!! 이랬든 저랬든 사람이 죽는 것은 똑 같잖아!! 저렇게 싸울 필요는 없잖아. 그냥 내가…. 네가? 뭘? 홀홀 단신으로 아셀로 들어가 아셀의 왕을 죽이기라도 할건가? 아니면 그들을 뒤에서 움직이는 저 음흉한 하셰카의 마법사를 찾아내서 죽 일 건가?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슈 레이 대륙의 통일은 분명 내 야망이지. 하지만 그 통일을 위한 전쟁이 틀리 다고 누가 말할 수 있지? 네가? 이 상태로 평화를 유지하는게 후일 더 좋다 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미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미래가 되어야만 알 수 있다. 거기에 다수의 목숨은 아깝고 소수의 목숨은 아깝지 않다는 소리 따 위는 하지마. 인간의 목숨은 하나이든 둘이든 결국 거기서 거기. 운명을 거 스를 순 없어. 어린아이 같은 투정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아. 로렌의 시니컬하다못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에 경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리다고 말할 수도 옳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이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거지. …………. 뭐. 가끔은 나 같은 인간도 더러 태어나는게 그 운명선의 선에 약간의 변 화를 가져올지도 모르지만…. 로렌은 한 걸음 경하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속에서 네가 할 일은, 정상적인 흐름을 타지 않고 음흉하게 뒤에 틀어 앉아서 검은 오오라를 풍기며 제멋대로 뒤흔들어 놓고 있는 존재를 찾아내 는 거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닌가? 난 널 이곳에 끌고 온 적 없어. 네가 가자고 해서 나는 이곳까지 온 거다. …………. 그리고 내게는 누군지 모를 인간 하나의 죽음에 슬퍼할 시간도, 주눅 들 시간도 없다. 슬퍼하는 건 다른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내가 할 일을, 그리 고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 뿐이다. 그게 황제라는 이름을 가진 내 권리이자 의무다. 한 걸음 내걸은 로렌의 발 위에 순간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순간 조용한 수면처럼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화살을 맞은 살얼음처럼 깨져나 갔다. 비…인가? 로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세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산악지형에 익숙하지 않은데 비까지 내리면 곤란해. 비……. 로렌이 퍼붓는 말에 거의 침몰되다 시피 하던 경하는 순간 얼굴을 때리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맞고 정신을 차렸다. 이건…. 차가운 빗방울이었다. 몇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다음 순간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거세게 내리 퍼붙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레카에 내리기 시작한 비와 동일한 것임을 어느 누가 알 수있을까? 카스핀. 비가 더 퍼붓기 전에 끝을 봐야겠다. 기엘. 이리야. 비가 오기 시작했어…. 경하의 귀에 로렌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와 똑같은 비다. 이리야가 경하의 말에 답을 해왔다. 경하님. 이곳은 위험합니다. 아무래도…. 기엘이 경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는데 순간 경하의 몸에서 파도와 같은 거센 파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경하님? 경하는 이를 악물었다. 비를 떠올리면 악몽 같은 광경이 눈앞에 재현된다. 눈앞에서 혼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의 얼굴을 어리둥절하게 쳐다 보는 사람들도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빗물로 얼룩진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잊어버리려 해도 잊어버릴 수 없던 끔 찍한 장면들뿐. 젖은 손끝에서부터 한기가 심장으로 파고 들어왔다. 순간 경하는 온몸에서 빗물을 털어내며 있는 힘껏, 눈에 보이지 않는 곳 까 지 감각을 개방하여 펼쳐나갔다. '무섭지 않아. 두렵지 않아!!' 자신에게 주문이라도 거는 것처럼 경하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읊 조렸다. 경하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사방으로 바람과도 같은 엘의 파장이 넓게 퍼져 나갔다. '절대. 무섭지 않아.' 경하의 의지는 그의 몸에서부터 불어나가는 바람에 실려 멀리, 경하의 시선 이 닿지 않는 곳까지 흘러가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바라스의 수장 아야사나는 급히 후송되어 오는 부상병 들을 돌보는 라마이드의 옆에서 그녀를 돕다말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손은 이미 피로 얼룩진지 오래. 정화술과 치료술로 라마이드를 돕고 있었지만 소매가 피에 젖는 것 만큼은 그도 막을 수 없었다. 이 파장은…. 깨끗한 파장이 마치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아야사나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경하에게서 나왔음에 틀림이 없는 그 파장은 마치 아야사나가 조금의 어두 운 마음이라도 가졌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 다. 그의 옆에서 역시 라마이드를 돕고 있던 아야사나의 수행기사들 역시 같은 것을 느꼈는지 일손을 멈추고 그들의 수장을 바라보았다. 아야사나는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역시 놀라워. 그는 누군가가 내미는 새하얀 천에 더러워진 손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바라스의 수장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야. 수장님. 아야사나는 자신에게 수건을 내민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 얼굴 하지 않아도 좋아. 자기 비하를 하는 것은 아니야. 그저 단지…. 단지 무엇입니까? 뒷말을 흐리는 아야사나의 앞으로 흰옷의 여인이 다가왔다. 나유의 수장 계 승자 라마이드였다. 아야사나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디, 아무 일 없이 이번 일이 끝나길 바랄 뿐입 니다. 동감입니다. 가실까요?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변변치 않은 우리들이라도 그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요.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아야사나는 깨끗해진 손을 라마이드에게 내밀었다. 겸손이라니요.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아야사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경하가 반쯤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그의 감각을 온 사방으로 퍼트리고 있 는 와중, 언덕 아래의 전쟁터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퍼부어 내렸고 언덕 위에 있는 로렌을 비롯 모든 사람들은 그 비를 그대로 맞으며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하나 비를 피하려는 행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뚫어져라 아래를 지켜보고 있던 로렌은 순간 무엇인가 자신의 시선을 끌어 다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저것은? 그가 그 이상한 차림의 누군가를 발견하고 입을 여는 것과, 무아지경에 빠 져있던 경하가 눈을 뜬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건 불꽃의 엘? 눈을 뻔쩍 뜬 경하의 표정은 마치 못볼것이라도 본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아니. 아니야… 이건 불꽃의 엘이긴 하지만. 무엇인가…. 경하는 혼란스러웠다. 비가 미친 듯이 내리기 때문에 혹여 잘못 느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져 들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서 그의 파장이 느껴지는 거지? 경하님? 왜 그러십니까? 기엘 느껴지지 않아? 이 파장은…. 경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들고 있는 기엘의 팔을 뿌리치고 좀더 전장이 잘 보이는 곳으로 뛰어갔다. 절대로 비 때문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그는, 그는 레카에 있어야 하잖아!! 순간 경하의 얼굴은 새하얀 만년설보다도 더욱 더 새하얗게, 아니 그보다 더하게 새파랗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기엘이 무엇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경하는 몸을 돌려 번개처럼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하님!!! 그 뒤를 앞서가는 경하의 뒷 모습을 놓칠세라 기엘과 이리야가 미친 듯이 뒤따라갔다. *** 보통때라면 그렇게 가까이 오기전에 느꼈을 것이다.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파장인데도 경하가 그것을 느 끼는데 시간이 걸린 까닥은 역시 머리카락을 흠뻑 적시고, 옷자락에서 물줄 기가 흐를 정도로 내리고 있는 비 때문이었다. 한방울 한방울, 보통 사람이 보기엔 그저 단순한 폭풍우같은 비에 불과했지 만 엘러들에게 있어 그 비는 예민한 감각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방해물이었 다. 헉. 헉헉. 헉 헉. 한발 한발 달려나갈 때마다 빗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그가 틀림없어.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분명 레카에 있 었어. 분명히.' 가쁘게 숨을 내쉬기 위해 벌린 입으로 얼음장 같은 빗물이 내리 쳐들어왔 다. 그것을 뱉을 시간도 없이 경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그의 뒤에서는 기엘과 이리야가 경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달려오고 있었지만 경하는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경하가 가지고 있는 온 몸의 신경과 감각은 지금 단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 다. 어렴풋하게 솟아오르고 있는 붉은 연기와도 같은 엘의 장벽이 경하의 목적 지였다. 발에 걸리는 돌부리도, 발목을 감아오는 들풀들도 경하의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맑은 정신이었다면 이런 질척거리는 진창 정도는 바람술로 가볍게 뛰어 넘 었을 텐데도 그런 단순한 것조차 경하의 머릿속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를 달린 걸까? 우앗---!! 무엇인가 발을 붙드는 바람에 경하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뭐, 뭐야!! 경하는 아직도 발목에 감겨 있는 그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 다가 흠칫했다. 어느편의 병사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한 사람이 신음소리를 내며 경하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사, 살려줘…. …………!! 피에 젖은 병사의 손은, 이미 비에 젖어 차갑게 얼어버릴 것 같은 경하의 피부보다 더더욱 더 차서 그 닿은 부분에서부터 심장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 가 스며 올라왔다. …마, 마법사가……. 마법…사? 턱이 떨려왔다. 그 순간 머리위쪽에서 무엇인가가 공기를 찢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 다. 경하는 주저앉은 그대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붉은 색의 선이 눈에 보이는 하늘위로 수십 가닥 지나가고 있었다. 이미 부릅뜬 눈동자의 홍채가 순간 붉게 물들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던 붉은 색의 선은 다음 순간 빗줄기를 뚫고 아래로 곧장 화살처럼 지상으로 미친듯이 내리꽂았다.   우아아아악-----!!!!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주위로 정체를 모를 무엇인가 가 파바바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퍼엉--- 귓가에 마치 포탄이 떨어진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를 뒤따라 가깝고 먼 곳에서 비슷한 소리들이 줄을 이었다. 귀가 멍멍하도록 이어지는 충격음, 앉아있는 땅이 그 충격에 떨리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그 충격에 흩날린 흙덩이들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경하의 몸 위로 떨어졌 다. '이, 이건 뭐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팔 사이에서 드러낸 경하는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어 버린 주위를 보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경하의 발목을 잡고 있던 손에서는 힘이 빠져 있었다. 반쯤, 흙더미에 파묻혀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경하는 숨을 들이켰다. '어째서 그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건만 경하는 지금 일어난 일이 누가 저지른 것인지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에 그의 이전 모습이 떠오른다. 분명 경하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아니었 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해 할 수 없어.' 현실과는 완전히 격리된 듯한 감각. 숨을 쉬고 있지만 그 숨을 쉬는 공기는 다른세계에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경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욱하게 일어나려던 흙먼지는 내리는 비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대신 경하의 앞에는 굵은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오르고 있는 불 꽃의 조각들과, 쓰러져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흘리는 신음소리와, 붉은 안 개처럼 타오르는 불꽃의 엘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방사선으로 길게 나있는 흔적은 한지점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아니 실상은 그 한지점에서부터 뻗어 나온 것이리라. …불꽃의 엘…. 경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선을 따라가며 중얼 거렸다. 분명히 불꽃의 엘의 파장이 분명하건만 그것에는 생소한 것이 섞여 들어 있 었다. …로이드린 에쉬 라히 …호로스.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거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불꽃의 엘의 장벽을 향해 걷고 있었다. 타오 르고 있는 불꽃의 엘 때문에 경하의 은회색 눈동자에는 붉은 기가 맴돌고 있었다. 이미 경하의 눈에는 단 한 사람의 인영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문이었을까? 단 한사람밖에는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하는 자신의 옆과 뒤에서 어 떤 것이 다가오는지 느낄 수 없었다. 경하님!!!! 위험합니다!! 멀리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위험해!!! 알고 있는 목소리인데도, 분명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일텐데도 경하에 게는 꿈결처럼 저 먼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경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누구?' 눈에 비치는 영상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경하의 눈에 비추어졌다.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사람들, 그 중에 젖은 은색의 머리카락이, 젖은 짙 푸른빛의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사물이 한 눈 안으로 뛰어들었다. 경하가 몸을 돌린 오른쪽 어떤곳에서부터 검은색의 장벽같은 것이 경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주문을 영창하며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기엘의 얼굴에는 다급함과 경악의 표정이 서려있었고, 팔을 휘둘러 빗방울들을 내치며 뛰어오는 이리야의 얼 굴에서는 절망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그 검은색의 장벽이 그들이 뛰어오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경 하의 앞으로 덥쳐들어왔다. 콰아아앙-----! 퍼엉----!!!! 눈으로 폭발음을 느낄 수 있었다면 경하가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는 그것 이었을 것이다. 경하의 부릅뜬 눈동자의 안으로 암흑이 덥쳐오는 순간, 그 사이로 무엇인가 가 뛰어들었다. 우아아-----악!! 경하는 귀가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크흑------. 누군가의 목에서부터 심장을 긁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뒤이어 들려오는 소리는 쿨럭 거리며 피를 뱉어내는 소리. 경하님. 무사…하십…쿨럭 쿨럭. 경하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실날처럼 벌어진 시야안으로 한남자 의 모습이 들어왔다. ………기엘. 비에 젖어 회색이 되어 버린 머리카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주르륵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기엘!!!! 급하게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경하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 괜찮습니다. 충격을 받긴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예요. 기엘의 옆에 몸을 숙이고 있던 라마이드는 얼른 경하에게 기엘의 상태를 알 려주었다. 경하의 몸을 부축하고 감싸고 있는 것은 바라스의 수장 아야사나와 이리야. ……정말. 괜찮은건가요? 입술이 떨려왔다. 라마이드는 그런 경하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제서야 경하는 자신이 눈을 감은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달을 수 있었다. 기엘이 두 무릎을 붙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로 뒤편에 흙과 얼음으로 된 장벽같은 것이 높이 솟아있었다. 경하의 키를 휠씬 넘긴 그것은 경하 일행을 보호하듯이 경하쪽으로 기울어 져 있었다. 기엘님께서 쉴드를 미리 펼쳐주신덕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주문을 외우기 위해 조금 뒤에 쳐져있던 탓에 기엘은 충격을 입은 것 같았 다. 라마이드의 말대로 기엘은 검붉은 피를 토해내긴 했지만 무사한 듯, 고개를 들고 경하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몸위로 라마이드는 치료술을 펼 치고 있었다. 우리의 적은 호로스의 수장이 아닌 저 사람인 듯 합니다. 경하를 부축해 일으키며 아야사나는 그 장벽의 한쪽에서 음산하게 미소 짖 고 있는 한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검은 두건을 반쯤 뒤로 젖힌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다음 순간 그 자리에서 물처럼 녹아 사라졌다. …………!!!! 기회였는데. 아쉽군요. 어둠속에서 기어올라온 듯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경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검은 두건의 남자는 어느새 자리를 옮겨 경하가 바라보고 있던 호로스의 수 장 옆에 서 있었다. …하셰카…. 맞습니다. 그것이 저의 이름이지요. 살아 있는 사람같이 않은 피부색을 지닌 남자는 경하의 말에 긍정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경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느낄수 있었다. 하셰카라는 건 암살단의 이름이 아니었습니까? 아야사나는 그 검은 두건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아야사나의 말에 피식 실소를 하며 대답했다. 어느쪽이든 상관이 없을텐데요. 암살단이든 아니든. 경하님 위험합니다. 뒤쪽에 있던 기엘이 경하의 앞으로 다가와 그를 몸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셰카라는 남자는 눈에 띠일 정도로 고개를 저 으며 말했다. 이것 참, 분수를 모르는 군요. 저자는 암흑의 마법을 쓰고 있습니다. 경하님. 아무래도…. 기엘의 말을 들은 하셰카는 이번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신들이 4신의 힘을 쓰듯. 전 암흑의 신 아타라세스님의 힘 을 쓰고 있지요. 그는 자신의 검은 로브를 펼쳐보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경하는 기엘의 옆으로 나와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리고 로이드린 당신!!!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지? 그 엘은 뭐야?!!! 경하 자신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분노가 섞여 나오 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로이드린을 데려 온 거야! 결국 아셀의 전왕을 죽인 것도 당신 아니야? 분노에 가득찬 경하의 질문에 하셰카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이유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간단히 설명한다면 바로 저 멀리 있는 저 남자와 같은 이유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가리켜 보인 사람은 가이칸의 황제가 될 남자, 로렌이 었다. 그는 카스핀의 저지로 더 이상 가까이 오지는 못한채 먼곳에서 그들 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렌과 같아…? 그는 아슈레이를 통일해 통일 제국을 세우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는 이번에는 로이드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남자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이용해 4신의 힘을 모두 자신의 의지하에 두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전…. 하셰카는 그부분에서 잠깐 시간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4신의 힘을 자신의 손에 넣고 싶어하는 호로스의 수장님을 보좌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거짓말 하지마!!!! 로이드린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잖아!! 그것도 당신 짓 이지!! 정신을 차린 후부터 경하는 로이드린이 어떤 상태인지 한눈에 깨달을 수 있 었다. 그는 자신의 힘에 빠져 평정을 잃고 있었다. 순수해야할 불꽃의 엘에 어둠의 기운이 스며들어있었다. 그것이 그의 불꽃 의 엘이 검붉은 색을 띄는 이유었다. 푸훗--. 하셰카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 저는 그의 야망에 살짝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옆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 있는 로이드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손을 대도 로이드린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경하를 바라보고 있었 다. 역사의 뒤 켠에 앉아 아슈레이 전역을 주름잡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저 역시 인간이에게 한번쯤은, 제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 인간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실마리만 있으면 그대로 움직여 버리죠.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당신한테 사람들의 목숨을 마음대로 뺏을 수 있는 자유는 없어!! 무슨 상관입니까? 다른 사람의 목숨이? 그러고보니 그쪽은 이미 이세상 사 람이 아닌줄 알았는데 용케도 살아 있군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이리야를 가리켜보았다. 제가 손에 인정을 좀 남겨 두었나 봅니다. 그는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원래의 색보다 더더욱 회색빛으로 변했다. 눈에서 검은 오오라가 풍겨나오는 것 같았다. 네 놈 역시 이전에 죽어버려야 했지. 일찍 내가 손을 썼다면 내 아이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네놈의 손에 죽진 않았을 것이다. 네 놈 역시 마찬가지다! ! ------!!! 순간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경하를 기엘은 온 힘을 다해 붙들었다. 경하님.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이거 놔 기엘!! 푸하하하하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는 가면처럼 드리웠던 정중한 태도는 걷어치운채 노골적인 악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호오. 그래서 지금 날 어찌 하겠다는 소리지? 그렇보았자 네놈 역시 나와 마찬가지다. 네가 원하는 바를 위해서는 나를 어떻게 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는 그런 것을 바라는게 아니야! 경하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게 아니야! 사람을 가지고 놀지마! 당신의 말은 모두 틀렸어. 그래! 인간은 약해. 자기가 바라는 것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헌신 짝처럼 취급할 수도 있고, 때로는 그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 하지 만 당신처럼 악의에 가득차 고의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 글쎄? 살다보면 이런 일들도 일어날 수 있고, 저런 일들도 일어날 수 있어. 하지 만 그것을 마음대로 손가락 하나로 조정할 수는 없는 거야. 사람을 가지고 노는게 그렇게 즐거워? 사람을 죽이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자신의 마음대 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아무나 마구 죽이라는 법은 없어!! 경하는 주위를 가리키며 그에게 소리쳤다. 그래서 지금,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이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의지로 살리겠다는 소리라고 하고 싶은건가? 구세주라도 되고 싶은 모양이 군. 그것 참 멋진 생각이야. 악의로 가득 찬 그의 말은 경하의 뇌리를 뚫고 들어와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자아… 어떻게 할건가? 이 자리에서 내 목에 칼이라도 들이댈텐가 ?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목을 드러내 보였다. 나를 죽이면 돼. 그럼 모든 것이 끝난다. 어둠이 스며들어 모든 것을 지배 할 것이다. 어서!!! 경하는 그렇게 말하는 하셰카라는 사람의 눈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움 을 느꼈다. 그것은 그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점점 불어나 물밀 듯이 경하 게에 밀려오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그 눈에서부터 흘러나와 경하를 사로 잡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서 그를 죽인다면 결국 경하 자신 역 시 자신의 생각을 위해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걸지도 모른 다. 다수의 생명과 소수의 생명을 맞바꾸는, 경하 스스로가 제일 혐오하는 말을 그대로 실행해버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아니야……. ………….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피어오르는 어둠의 엘, 그것이 가득한 죽음의 계곡. 그 암울한 계곡 한가운데에서 경하는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어두운 생각을 떨쳐냈다. 난 아직 어린애에 불과해. 게다가 이곳의 인간도 아니야. 당신의 말이 틀 리다고 해도 무엇이 옳은지 대답할 수도 없어. 하지만…. 경하의 뇌리에 문득, 로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 을 하는 거지.」 나는 내가 왜 이런 곳으로 불러들여져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몰라. 무엇이 절대 진리인지도 몰라. 하지만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다 운명 이라고 생각하고 체념할 생각은 없어. 비록 그 운명이 절대 불변의 진리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도,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야. 인간은…, 인간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살아나가는 거니까. 그 말과 동시에 경하의 몸에서 소용돌이 같은 바람이 휘몰아쳐 나오기 시작 했다. 세나케인!!!!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경하의 바람에 밀려 나가고 그 자리에는 경하 가 불러낸 바람의 세나케인이 자리잡았다. 그것 때문에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 가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경하는 눈을 감았다. '딱 한번 뿐이야. 세나케인.'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불어 경하의 몸을 공중으로 띄워 올리기 시작했다. '딱…한번.' 경하의 감은 눈에서 빗물이 아닌 따스한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간절한 바램이, 경하의 간절한 소원이 힘이 되어 바람의 엘로 화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한다는 자각은 없었다.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경하의 바램. 바람 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거센 바람의 소용돌이는 모두의 머리위 로 떨어지는 비를 사방으로 밀어내며 점점 더 넓게 펴져나갔다. 경하가 만들어낸 바람은 세나케인의 형체를 점점 더 크게 만들어 나가며 곁 에 서 있던 바라스의 수장과 나유의 수장 계승자 나유에게까지 영향을 끼치 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서 곧 황금빛의 엘과, 푸른색의 엘이 경하 못지 않은 세기로 흘 러나왔다. 공중으로 떠오른 경하의 주위에는 은백색으로 빛나는 드래곤의 형상이 떠오 르고 그 안에서 경하는 눈물이 흐르는 눈을 떴다.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깊은 하늘과 길게 늘어서 있는 초록색과 황 색의 땅. 내리던 비는 어느새 라마이드의 힘에 의해 비 대신 물의 장막이 되어 땅에 서 솟아오르는 황금빛의 엘의 폭풍과 하나로 겹쳐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경하는 검붉게 변한 불꽃의 엘을 피워 올리고 있는 호로스의 수 장 로이드린의 파장을 발견했다. 이전에 보았을 때는 분명 선홍색으로 피어오르던 파장이었다. 경하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미메이라의 힘, 바람의 세나케인!!!! 경하의 입에서 바람의 힘 세나케인의 이름이 불리웠다. 경하는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개방했다. 쏴아아아아아--------. 귀를 울리는 바람의 폭풍. 은백색의 드래곤이 만들어내는 바람이 경하의 머리카락을 높이 말아 올렸 다. 아래에서 검은 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하셰카가 손을 올려 검은 엘을 피워 올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경하는 그러나 그를 보는 대신 비를 불러모아 물의 장벽을 만들어 내고 있 는 라마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푸른색의 엘이 눈앞을 푸르게 물들인다. 그 안에서 경하는 그가 찾는 존재의 이름을 읽어냈다. …나유의 힘. 손을 내밀어 하늘위로 높이 치켜올렸다. 그대의 이름을 부르니 눈을 떠라. 물의 헤메트----!! 순간 물의 장벽은 경하의 손짓에 푸른빛을 사방으로 뿌리는 드래곤의 형상 이 되어 하늘로 솟아올랐다. 감겨 있던 헤메트의 눈이 경하의 부름에 따라 각성하고 그 눈을 떴다. 강렬한 푸른빛은 황금빛의 엘로 대지를 흔들고 있던 아야사나에게까지 미쳤 다. 바라스의 힘. 낭낭한 경하의 목소리가 그 위에 울려 퍼졌다. 암흑의 주문을 외우고 있는 하세카의 목소리가 그 아래 눌려 암흑의 엘이 멈칫하는 찰나 경하는 대지의 수호신을 불러냈다. 대지의 하나르. 순간 흔들리던 대지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환영이 모두의 앞에 펼쳐졌 다. 누워 있던 페이요트 산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 충격에 쓰러지고 흔들리던 나무들이 다음 순간 제자리를 찾으려는 사이 어 느새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의 드래곤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 러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모두 아는 사람은 극 소수였지만 주위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자리에 일어나 하늘에 떠있는 세 개의 형상을 바 라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어나고 땅이 움직이는 환상이 그들의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 순수한 신의 힘에 둘러 쌓인 세 사람은 이제 마지막 남은 신의 힘들 불 러내려 하고 있었다. '어둠에 물들어 있어선 안 돼.' 경하는 손을 뻗었다. 아직도 바닥에 두 발을 붙인 채 서있는 남자가 그 손이 가리키는 곳에 있었 다. 어둠에 붙들린 불꽃의 엘. 그 안에서 경하는 혼란에 가득차 있는 불꽃의 이름을 불렀다. 가르쳐주는 존재도 없다. 단지 그 눈에 보일 뿐이다. 호로스의 힘. 어둠속에 잠겨 있는 존재에게 경하의 목소리가 흘러갔다. 경하의 목소리는 혼탁한 검은 엘의 속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선명한 선홍색 의 불꽃을 두들겨 깨웠다. 불꽃의 에사라…. 화르르륵 하는 불꽃의 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비명성과 같은 울림이 페 이요트 산맥을 뒤흔들었다. '눈을 떠, 에사라. 불꽃의….' 누구의 기원이랄 것도 없는 기원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가고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다. 기엘은 눈앞에서 기적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검붉게 변한 엘을 가득 뿜어내고 있던 로이드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크윽---. 선홍색의 피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검붉게 그의 몸을 덥고 있던 엘의 장막 한가운데에서 새빨간 색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로이드린의 입에서 비명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피 어오르던 한줄기 불꽃의 엘은 드래곤의 형상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눈을 뜨고 있는 자는 누구든 목격할 수 있었다. 은색과 금색과 푸른색과 붉은색의 드래곤이 하늘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사방을 검게 물들이고 있던 물방울들이 순간 검은 수증기가 되어 땅에서 분 리되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휘몰아 치는 엘의 바람 속에서 기엘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몸에서 은백색의 흐름이 흘러나와 불어닥치는 바람에 섞여 들어갔다. 기엘의 곁에 있던 이리야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 시간, 가이칸의 서북부 레카에서 하나스의 기사 룬과 그의 검을 마 주대고 있던 로운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주위에 흩어져 있던 모든 미메이라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숨을 죽이고 있던 호로스의 기사들도, 먼 땅에 있는 바라스와 나유 의 사람들도, 아니 아슈레이의 대륙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신의 축복을 받 은 존재가 그들의 본질을 불러내는 목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슈레이를 지탱하는 4신의 힘을 모두 불러낸 경하는 그들에게 둘러 쌓여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세나케인, 헤메트, 하나르, 에사라….' 이름이 불리 우는 순간 그들의 형상은 더욱더 커져 갈리아 계곡의 하늘에 빼곡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하는 그 순간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그래. 그것이 당신들의 이름이었어.' 경하의 사고는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가 신들의 땅이라 불리는 아슈레이 중간지대에서 신들의 남겨진 의지라고 하는 자를 만났던 그때로. '아슈레이를 만든 신의 의지. 그리고 이 땅에 남겨진 신의 힘. 그것에 남아 있는 신들의 의지의 조각의 이름….' 경하의 눈앞에 그동안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현실의 세계에 남아있는 가족들과 처음 이곳에 와서 만났던 대신관과 시녀 들, 그리고 여행중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지금 바로 아래서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 기엘과 이리야, 먼곳에서 경하의 존재를 느끼고 있을 로운까지 …. '유린…….' 경하가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4개로 나뉘어 있던 신들의 힘이 하나로 합쳐 지기 시작했다. 빛마져 흡수해버릴 듯한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4신의 힘이 몰려들어갔다. 어느새 경하는 현실도, 환상도 아닌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유린. 결국 당신은 살아 있는 아슈레이의 이름이었던 건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살아 있는 모든 아슈레이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 결국 아슈레이는 살아 남 기 위해서 나를 부른 거야….' 다른 세계의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사람의 의지가 가지는 무게는 하나의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그 의 지. 아슈레이에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 역시 마찬가지. '살아 갈 수 있는 의지를 전해 받기 위해서, 그리고 그 자신의 의지로 스스 로 살아나가기 위해서….' 밑바닥에 깔려 있는 어둠마저도 결국 하나의 존재. 경하는 그 속에서 스스로 숨을 쉬고 있는 살아 있는 아슈레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실제하는 소리가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옮겨지는 의지의 목소리. 살아있다는, 숨을 쉬고 있다는 자각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새롭게 바뀌어나가는 의지. 그래서 더욱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새로 운 의지. 그 안에서 경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나는 살아 있어. 그렇지? 케인?' 하나로 합쳐졌던 존재속에서 가장 익숙한 이름을 불러내는 순간 그것은 다 시 개별적인 존재로 조각 조각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흔들리지 말자. 내가 살아있는 것은 모두의 의지이자 또한 내 의지. 절망 에 물들어선 안돼.' 세나케인이 만들어내는 바람의 흐름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이 희망이야….' 따스한 불꽃의 엘과 포근한 대지의 엘, 시원한 물의 엘이 다시 원래의 흐름 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새로운 의지로 충만하게 채워진 그것은 원래보다도 더욱 더 풍부하게, 그리 고 깊게 아슈레이 곳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원래 대로 돌아가기 위한, 모두를 위한 희망.' 흔들리던 대지가 멈추고 폭풍처럼 몰아치던 바람과 비가 그쳤다. 그 위에 내리는 것은 포근함을 가득 담은 따사로운 햇살.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경하의 시선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 이곳에서 그냥 돌아가실 예정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이미 알 게된 기분입니다. 어차피 그 하셰카란 이름의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 고… 사실 도움이 된건지도 잘 모르겠군요. 아야사나는 왠지 쑥스러운 듯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호로스의 수장님과 경하님은 눈을 뜨지 못하신 듯 한데 깨어나면 인 사를 전해주십시오. 조금 더 기다리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기엘은 아야사나에게 슬쩍 권하듯 말을 했지만 아야사나는 고개를 흔들었 다. 모든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합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바라스를 비울 수 는 없으니 어서 돌아가야지요. 나유의 수장 계승자님께서는 이미 떠나신 것 으로 아는데요. 네. 오늘 새벽, 도착한 수행원들과 함께 떠나셨습니다. 호로스의 기사들은 로이드린님께서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그대로 호로스로 복귀하겠다고 전해왔 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더 머물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 그분께 전해주십시오. 귀한 경험을 했다고.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게 해주 신 것에 이 아야사나가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입니다. 사실, 제 눈으로 바라스의 수호신의 모습을 보게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사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야사나는 기엘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모두가 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갈리아 계곡은 사실상 거의 폐허가 되다 시피 했지만 아야사나와 라마이드 의 힘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거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기적이라 칭송했지만 실상 진실 된 기적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미타남작은 로렌의 명령을 받아 병사들을 지휘해 카드메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이리야는 기엘에게 한마디 했다. 왠지 말이지. 기사양반. 예? 이전보다 몸이 가뿐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으음. 그 내가 죽었다가 깨어났던 그때부터 뭔가 몸이 멀쩡해지 긴 했는데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아왔었거든. 그런데 그 느낌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이거야. 기사양반도 느낄 수 있지 않아? 이리야의 말에 기엘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군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느끼지 못했나봅니다. 기엘은 팔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민 팔과 손과, 손가락 사이로 바람의 엘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기엘에게는 똑똑하게 보이고 있었다. 금제가 풀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잉? 신국인들도 어쩌면, 이전보다 조금? [아슈레이 8] 6장 되살아 나는 미메이라의 미풍 6장 되살아 나는 미메이라의 미풍 어. 어째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야!!! 경하는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무례하게도 손 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누, 누가 당신더러 따라오라고 했는데!!!! 기엘이야? 아니면 이리야야!! 경하님. 설마….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려다가 기엘은 불쌍하게도 손가락질 을 당하고 있는 남자를 생각해 참기로 했다. 그래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진심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경하보다는 겉치 례 하나 만큼은 완벽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처음이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마음에 드는 군. 안그런가 카스핀? 상당히 거만한 어조의 목소리가 경하의 앞으로 넘실 넘실 밀려온다. 그러니까!! 로렌 어째서 따라온 거냐니까!! 자꾸 딴소리할래? …………. 로렌은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른 경하의 앞으로 다가가 아직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작은 경하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자랐군. 뭐. 뭐야. 언제 내 키 크는데 보태준거라도 있어? 물론 있지. 편안한 잠자리 제공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산해진미를 해 올리 라고 일러두었었지. 그러고도 제대로 크지 않았다면 네 탓이야. …………. 게다가 레카까지 오는데 궁정 수석 마법사까지 동원해 줬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지? 그. 그러니까…. 꽤나 잘 떠드는 경하이건만 도통 로렌의 앞에서는 신통치가 못하다. 곁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앞에 펼쳐지고 있는 진귀한 광경을 보느라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기엘이나 이리야, 그리고 카스핀은 몇 번이나 봐온 광경이기에 면역력이 생 겨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면역력은커녕, 예방주사도 맞지 않은 탓에 입 떡 벌린채 구경(?)중일 뿐이었다.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미타 남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기엘과 이리야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경하가 로렌에게 존대를 하지 않고 바락 바락 대드는 것을 못마땅 해 해온 대표적인 남자가 바로 미타 남작이었기 때문이다. ………….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는 듯한 이리야의 얼굴에 미타 남작이 여유있는 웃음 을 지어보였다. 물론, 대관식마저 미루신 채 이곳으로 오신 것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일단은…. 미타 남작의 눈이 아직도 옥신각신 거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향한다. 평생을 통해 저렇게 대하실 수 있는 분은 저분 한 분 뿐인 듯 하니, 이정 도의 여유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이제와서!!' 기엘과 이리야는 남몰래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타 남작은 물론,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는 로렌이 경하를 저렇게 허물없이 대하는 것에 약간 감정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 자는 주의의 남자였기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껄그러움을 의식적으로 몰아 내버렸다. 황제란 고독한 자리다. 그런 고독한 황제에게 아무리 자신과 같은 신하가 많아진다고 해도 자신과 같은 존재는 어디까지나 신하일 수 밖에 없다. 평 생 충성을 바친다해도 그는 로렌의 친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 그렇기에 그는 로렌이 경하를 저렇게 허물없이 대하는 것 약간은 질투의 감 정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경하를 로렌의 친구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신 에너지를 소비 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경하가 로렌의 단 하나뿐인 일생의 친구 같은 존재가 되어준다면 인정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광경을 직접 목격했는데 새삼스럽게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것도 좀 우스워져서 말입니다. 그런… 광경이요?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믿지 못했을 지도 모르지요. 그만큼 그 경험은 평생을 통해 한번 있을까 말까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지옥같던 광경이 떠오른다. 그 아비규환같은 장소의 한가운데 있었던 경하일행은 오히려 전체를 보지 못했기에 행복했을 것이라 는 생각이 들을 정도인 것이다. 경하의 순수한 힘으로 인해 사라지던 검은 하셰카의 마법사를 그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저 친구 인해서 가장 껄끄럽던 하셰카 문제가 해결 된 것이 니 그 공로를 인정할 수 밖에 없지 않겠어?' 미타 남작은 나름대로 경하에게 점수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대관식을 마치고 나면, 어차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겁니다. 지금도 뭐 바쁘지 않다면 거짓이겠습니다만. 미타 남작이 막 말을 마치려는 순간 그때까지도 로렌과 옥신각신 하고 있던 경하가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이봐요. 당신 왜 이 사람을 데리고 카드미엘로 가지 않은 건데!! …카스핀은 날 카드미엘로 데리고 갈 권리는 없는데? 로렌 당신은 입 좀 다물고 있어!! 이봐요 카스핀. 당장 이 남자 좀 내 앞 에서 치워 줄래요? 제겐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미타 남작이 따악 시치미를 뗀다. 그의 말에 경하는 결국 자폭해버렸다. 우아아악----. 왜 이렇게 되는 게 없는 거야. 기엘!! 로운 소식은? 왜 로 운이 오지 않는 거야. 로운이 와야 미메이라로 돌아가든 말든 할거 아니야. 당장 로운 불러와!!! 하도 소리를 지른탓에 목이 쉴까 말까 하지만 경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마 구 폭발해버렸다. 로운 불러오란 말야!! 기엘!! 이리야! 당장 가서 로운 좀 찾아와!! 굼벵이 처럼 뭘 하느라 꾸물 꾸물 안 오는 건데! 다 끝났잖아!! 젠장. 어디 한군데 다쳐서 오기만 해봐라. 가만 안둘거다. 그러니까 빨리 불러오란 말이야! 돌 아갈 거야 돌아갈거라구! 아아아악----!! 배고파. 경하가 혼자서 마구 폭발하는 것을 정감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하의 마지막 대사에 그만 그대로 푸핫--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하!!!! 푸훗--- 하하하하. 큭큭. 왜 웃어!! 내가 배고픈데 보태준거 있어? 여긴 왜 그렇게 서비스가 나빠? 식사 때가 되었으면 꼬박 꼬박 밥을 가져다 줘야 할거 아니야. 숙박객을 왜 그렇게 괄시하는 건데. 이봐 다 당신 때문이야. 로렌. 당신이 까다롭게 굴 어서 그런거 아니야? 황제같은게 이런 시골까지 오니까 사람들이 다 놀라잖 아. 그러니까 배가 고프잖아! 당장 카드미엘로 돌아간 말이야. 도통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에 사람들은 더더욱 폭소를 터트렸다. 쿡쿡. 오랜만에 들으니 저것도 상당히 듣기 좋군요. 어이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기사양반. 기엘과 경하는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이른바 경하의 밥 타령에 계속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하는 계속 있는 그대로 입에서 나오는데로 떠들 며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로운은 발걸음을 빨리 하고 있었다. 옆에서 그를 따라오던 가이칸의 제 15기사단장 스토우 린첼역시 그에게 뒤 질세라 발걸음에 피치를 올렸다. 레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뒤처리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단 이전처럼 홀몸이 아닌(?) 탓에 나이트 카시아와 함께 뒷마무리를 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소비할 수 밖에 없었다. 경하와 로렌 일행이 레카에 도착했다는 전갈은 이미 기엘에게 받았지만 그 소식에 서둘다가 그만 더 더욱 늦어버린 것이다. 상당히 소란스럽군. 로렌과 경하 일행이 머물고 있는 레카의 시장관사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 는 먼저 따악 한마디 감상을 토로했다. 아직 건물 안으로 발도 디디지 않았는데 3층 부근의 열린 창문에서부터 익 히 아는 목소리가 마구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이 무슨 소란인지. 어지럽혀진 전장을 정리하고 뒤처리를 하느라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빼고 있는데 로렌 일행이 레카로 왔다는 소식에 놀라 헐레벌떡 뛰어온 스토우 린 첼은 시끄러운 소리에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뭐.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가고 있긴 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로운이 먼저 안으로 할 발자국 디디려는 순간이었다. 머리위쪽에서 시끄럽게 들려오던 소리가 갑자기 뚜욱 멈추었다. 그리고 대신 이번에는 뒤쪽에서 경비병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위. 위험해!!! 우악----! 으아아아악-----. 무슨 난리인가 하며 로운과 린첼이 뒤로 돌아서는 순간 로운의 머리위에서 무엇인가가 번쩍 번쩍 빛을 발하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위, 위험해!!!!!! 라고 비명을 채 다 지르기도 전에 그것은 3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그것은 소리 지른 사람들이 모두 민망해져버릴 정도로 아주 사뿐하게 바닥에 착지 했다. 아싸! 착지! 10점 만점!! 스스로도 가뿐하게 착지한 것이 만족스러운 듯 뛰어내린 사람은 두팔을 들 어올리며 산뜻하게 소리쳤다. 로운------!! 얼굴에 가득 희색을 띄운 일명 '삼층에서 뛰어내린 그것'이 두다다다 하고 로운쪽으로 달려왔다. 로운은 화를 내려다말고 그만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왠지 이런 것이 더 경하 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다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경하의 얼굴엔 어두움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 아볼수가 없었다. 멀쩡해보이는 경하를 보니 왠지 로운은 안심이 되었다. 로운! 가만히 있어봐. 로운의 앞까지 달려온 경하는 타다닥 탁탁하며 로운의 몸을 여기저기 두들 기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로운의 앞뒤로 돌아가며 두들겨본 경하는 그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로운에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멀쩡하네. 다행이야. 그럼요. 다친곳 하나 없이 말짱합니다. 대뜸 로운이 경어체를 써오자 잠깐 멈칫 했던 경하는 그의 곁에 서 있던 린 첼의 눈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배는 좀 고프지만. 멀쩡하니까 됐어. 역시 앞뒤 안 맞는 말을 해댔지만 로운은 굳이 경하를 밥벌레니 하는 소리 로 구박하지는 않았다. 왠지 경하의 웃는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안도감이 온 몸에 가득 찾기 때문 이다. 밥 타령 정도는 앞으로 천년 만년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 다. 그는 경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사르트 루하. 로운 디 로크레슈. 경하님의 명을 무사히 수행하고 돌아왔습 니다. *** 미메이라로 함께 가시겠다구요? 그러면 안될 이유라도 있나? …………. 저녁 만찬 시간. 원형의 탁자에 스스럼없이 둘러 앉은 남자들은 로렌이 방 금전에 한 말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나온 것인지 의심했다. 대관식을 미루고 레카까지 온 것 까지는 그럭 저럭 이해한다고 쳐도 굳이 경하를 따라 미메이라까지 가겠다는 말 만큼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로렌의 옆에서 얌전하게 식사를 하고 있던 미타 남작 마저 처음 듣는 소리 라는 얼굴을 한채 멍하게 로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왕 이곳 까지 왔는데 미메이라까지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 카 스핀. 그것 포크에서 떨어질 것 같은데. 로렌의 지적에 미타 남작은 놀라 그만 포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앗. 이런. 살아 생전 이런 실수는 처음이라는 듯 미타 남작은 허둥 지둥 떨어진 포크 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것을 왠지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로렌은 여유롭게 말했다. 바라스나 호로스까지는 몰라도 미메이라는 어느 신국보다 가이칸에 인접해 있는 나라가 아닌가.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라고 할까. 도대체 뭐가---- 하는 표정이 모두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기. 기엘 나 뭔가 되게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 피곤해서 그런가봐. 이. 이만 가서 나는 쉴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구.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이상한 소리인가? 로렌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로렌의 선언은 경하가 먹던 맛난 음식을 반도 먹지 않고 물린다는 이 례적인 일을 하며 물러간다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새벽쯤에 떠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리야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마이드가 그의 수행원과 함께 떠나면서 이리야에게 괜찮다면 함께 가지는 말을 했었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레카까지 경하와 동행한 이리야는 기엘의 말을 듣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괜찮다고 한다면 나도 미메이라까지는 같이 하고 싶은데. 그러면 안될 까? 여행하는데 특별한 문제도 없는 이상 그정도 돌아가는 것은 괜찮을 것 같은데. 그리고 뭐. 사정이 허락한다면 미메이라도 좀 구경해보고 싶고, 다 른데로 돌아서 멀리 가느니 중간 지대를 통과해서 나유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어서 말이야. 다른 사람과는 달리 중간지대를 한번 멀쩡히 통과했던 경험이 있는 탓인지 이리야는 가볍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로운 어떨까? 특별한 문제는 없겠지. 이제와서 뭘 어쩌겠어. 당신들하곤 달리 나는 입장이 좀 뭐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녀석이 이곳에 있는 동안이라도 같이 있어주고 싶단 말이야. 이리야가 하는 말에 기엘과 로운이 순간 표정을 굳혔다. 결국 기엘은 로운과 시선을 나눈뒤 이리야게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이리야씨. 그건 그렇고, 여행하는데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지? 로운이 조용하게 이리야가 한말을 되씹다가 기엘에게 물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경하님이 갈리아 계곡에서 하 신 일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 흐음. 로운이 이미 골아 떨어져 잠들어 있는 경하를 돌아다 보았다. 역시……. 로운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막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내리던 비가 멈추면서 일어난 하늘의 변화 를 로운도 똑똑히 목격했다. 물론 이후 기엘의 오로프를 받고 모든 일을 마치 자신의 눈으로 보듯 전해 받은 탓도 있을 지도 모른다. 정확한 것은 경하님도 모르는 듯 해서. 기왕이면 세나케인님께 들었으면 하는데 그럴 기회도 없이 이곳에 오게 되는 바람에 나도 자세하게는 설명하 지 못하겠어. 흐음. 설명을 들어 볼수 있을지도 몰라. 로운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경하에게 다시 머문다. 그는 잠시 망설인 다음 입을 열었다. 세나케인님. 만일 듣고 계신다면 잠시 모습을 나타내주실 수 없을까요? 로운은 잠들어 있는 경하를 향해 말했다. 세나케인님. 꽤나 피곤했는지 나직하게 코까지 골며 자는 경하는 왠지 미동도 하지 않는 다. 세나케인님? 로운은 다시한번 세나케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경하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역시 안되는 건가? 로운이 마악 포기를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경하 주변의 공기가 순간 일렁거 렸다. ……로운. 응? 기엘의 목소리에 반쯤 돌렸던 고개가 다시 경하에게 향한다. 인간들이란 여하튼 중얼 중얼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군. 세나케인님!!! 기엘의 목소리에 기쁨이 담긴다. 그들의 눈앞에 희미하긴 하지만 세나케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귀찮기 짝이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은 없다. 인간들이란 언제나 그러니까. 투덜 투덜, 자신이 마치 인간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세나케인이 느끼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 이녀석의 탓이니 그렇다고 해두지. 그래 궁금한 것은 그뿐인가? 뭐. 궁금한 것은 많습니다만. 간단하게 대답하지. 세나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국인들에게 지워져 있는 축복의 반대급부, 자네들은 그렇게 표현했지? 여하튼 그 반대급부는 한시적이긴 하지만 당분간은 걱정할 정도는 아닐거 다. 예? 말을 못알아 듣는 군. 원한다면 너희들이 아슈레이 대륙을 마음껏 지칠때 까지 돌아다녀도 이상이 없을 것이란 소리다. 그런데 한시적이라고 하심은…. 기엘이 세나케인이 한말 중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이녀석이 갈리아 계곡에서 한 짓은 결국 우리들, 하나하나의 의지이자 하 나의 의지인 우리들의 힘을 대륙 전체에 쏟아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랬 기 때문에 그 어둠의 마법사가 가진 어둠마저 정화가 되어 버린 것이지. 덕 택에 나는 이런 꼴이지만 말이야.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저희들은 어찌하라는 소리죠? 세나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양쪽에서 또다른 형체가 모습을 드러 냈다. 환상적인 푸른빛이 갑자기 온 방안을 채웠다. …………. ……이건. 뭐. 뭐야. 저건. 이리야의 말에 조금전 나타난 푸른빛의 여인이 쫘악하고 이리야를 노려보았 다. 무례하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길게 늘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젖혔다. 차라라락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과 푸른 빛을 발하는 피부는 너무나 환상적일 정도 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로운등을 놀라게 한 것은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세나케인의 곁에는 황금의 고수머리를 반짝이는 남성과 불꽃을 피워 올리는 아름다운 여성의 형체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 꾸, 꿈이지 이건. 이리야는 자신의 뺨을 꾸욱 집에 당겼다가 놓았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아 픔. 분명 자신이 보는 것은 현실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 경하님은.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기엘이었다. 물론. 이분은 바람의 주인이십니다만. 우리들을 각성시킨 분이기도 하지 요. 적어도 이분이 이곳에 계시는 동안 우리들의 주인은 이분이십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불꽃의 여인이 말했다. 그렇지. 인간들은 이럴 때 소개라는 것을 하는 법이지. 이쪽은 물의 헤메 트. 대지의 하나르. 불꽃의 에사라. ………. 세사람은 말을 잃었다. 물론 이전 만큼의 힘은 없다. 이녀석이 모조리 아슈레이에 쏟아 부어 버렸 으니까. 그것이 상당한 불만이라는 듯 세나케인이 중얼 거렸다. 뭐, 특별히 불만이랄 것도 없지 않습니까? 바람의 세나케인? 예전으로 돌 아간 것 뿐이니까요. 대지의 하나르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우리들의 주인이 단 한사람이라는 것이 조금 문제긴 하겠습니다만 그 것은 시간이 해결하겠지요. 인간들은 제쳐두고 4신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들이 서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후우. 그것이 문제라는 소리지. 각성시킨 존재가 하나다 보니 나타나는 성 격마져 비슷하잖아. 상관없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모두 하나의 존재나 다름 없으니까요. 어차피 우린 엘 그자체보다도 그 위에 부여된 의지이니까. 소속은 분명히 합시다. 불꽃의 에사라는 투덜거리는 세나케인이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세나케인은 왠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아 질문은 끝났나? 예? 특별히 더 질문이 없다면 우리들은 다시 이녀석의 안으로 돌아가겠어. 당 분간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나마 이녀석이니까 이 정도도 가능한거야. 자아 그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타났을 때보다 더욱 더 빠르게 4개의 신형이 순식간 에 사라져 버렸다. 아주 잠깐의 꿈이라도 꾼 것처럼 세 사람은 할말을 잃은채 곤하게 잠들어 있는 경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놀랄 일들 뿐이군. 그, 그러게나 말입니다.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세 사람은 각기 한마디씩 논평아닌 논평을 늘어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뜯하지 않게 이런 저런 것을 보아버린 탓인지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내일 일찍 출발하는데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래. 부디 무사히. 방안 천장 아래서 빛나고 있던 라이트를 불러 들이며 로운이 말했다. 부디 더 이상 아무 일 없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랬다. …누가 말했어. 당장 불어!! 아무도 말한 적 없습니다. 경하님. 그런데 왜 저 인간이 또 여기 있는 건데!!! 새벽같이 제일 먼저 일어나 세사람을 두들겨 깨워 출발하자며 난리를 떨던 경하는 짐을 싸들고-사실은 이제 짐이랄 것도 없다-밖으로 나오자 마자 앞 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만 화들짝 놀라버렸다. 로렌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수행원들까지 전원, 경하의 일행 앞에 완전히 여행준비를 마친 차림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누구냐니까!! 로운!! 애꿎은 전 부르지 마십시오. 로운이 시치미를 뚝 뗐다. 아니 사실은 시치미를 뗄 것도 없었다. 실제 그 는 정말로 로렌이 이런 방법으로 따라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지 그랬나. 그러지 않았으면 느긋하게 시장이 제공하는 조식을 마친후 편하게 떠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여유잡고 말은 하고 있지만 기엘은 그만 그런 로렌에게서 그 무엇인가를 발 견하고 말았다. 말은 느긋하게 하지만 분명 엄청나게 서두른 티가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띈 것은 애써 얼버무리긴 했지만 아직도 조금은 삐죽-하고 뻗쳐 있는 로렌의 뒷 머리카락이었다. 우우우. 씨--! 되는 일이 없다니까. 그말을 하자 마자 경하는 로운의 한쪽 팔을 끌어 당겼다. …경하님? 가자니까. 로렌이 있으면 될 일도 안 된단 말야. 하지만…. 아직은 뭐가 아직이야. 가자니까. 겨. 경하님. 무례하게도 황제일행 앞에서 로운의 팔을 질질 끌고 도망(?)을 하려는 경하 에게 로렌이 뚜벅 뚜벅 발걸음도 경쾌하게 다가왔다. 뭐. 뭐야----!! 갑자기 로렌이 경하의 앞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대었다. 이봐. 왜!! 내가 준 녹색의 검은 잘 가지고 있겠지? 물론? 에? 갑작스런 질문에 경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그게 당신이 준 거였어? 라고 말하는 순간 로운이 경하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로운과 기엘과 이리야의 얼굴에서 핏기가 쫘아악 소리를 내며 사라지기 시 작했다. 우. 우웁---!! 버둥대는 경하를 향해 방긋 웃어 보인 로렌이 고개를 들어 세 남자의 얼굴 을 확인했다. 그는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물론, 천천히 사정을 들어줄 귀와 시간은 얼마든지 있네. ……우. 우웁. 경하가 영문을 모른채 로운의 팔에서 파닥이는 동안 로운과 기엘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 모두 함께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한 후 떠나볼까? 얄밉게 웃어 보이는 로렌에게 세 남자는 결국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 참 뭔가 굉장히 기분이 이상해. 오랜만에 맨 얼굴로 받는 미메이라의 바람. 경하는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그냥 색이 흐려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뭐랄까. 경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할말을 골랐다. 아주 부드럽고 은은하고 따스하다고 해야할까? 그런 느낌이 들어. 백색으로 빛나는 수장궁 키리엔. 그 궁의 한가운데에 서서 경하는 감격 아닌 감격을 만끽하고 있었다. 키리엔으로 돌아온 것은 어제 오후. 출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사단의 뒤꼬리에 살짝 매달려 돌아온 시간은 경 하의 예상보다도 훨씬 늦은 시간이었다. 화려한 환영회는 무사히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돌아온 기사단의 몫으로 돌리고 조용히 키리엔으로 입성한 경하 일행은 휴식을 취하며 미메이라로 돌아온 첫날밤을 조용히 보냈다. 경하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세 남자와 함께 서 있었다. 그건 그렇고 신관 할아버지는 언제 만날 수 있지? 예. 저녁 즈음해서 입궁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흐음. 불청객 일행은? 일단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기에 특별한 일정은 짜여져 있지 않습니다. 오 찬을 마친 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연락을 할까요? 기엘이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대답했다. 에? 아. 아니야. 아니야. 절대 연락하지마. 절대로, 절대로 연락할 필요 없… 으악. 저 인간은 누가 안 잡아가는 거야 정말!!!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으윽.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히는 중간 경하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로렌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제발 귀신이라도 있음 잡아가면 좋겠어. 진짜로 싫어. 정말로 싫어. 으허 헝. 그렇다고 자리를 떠나 도망(?)을 가는 것도 여의치가 못하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찐드기 같은 인간하고 자꾸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건데. 여기 와서 만난 사람들중에서 제일 최악은 바 로 저 인간이야. 저놈의 인간이라구. 젠장할 우우. 소름 돋잖아. 경하는 벅벅벅 자신의 팔과 손등을 연신 긁어대었다. 이렇게 경하가 발작적으로 난리를 떠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다. 레카를 떠나오며 경하가 그만 로렌의 유도 심문에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결 국, 로운과 기엘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말을 들은 직후부터 경하는 로렌이라면 아주 질색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사건의 중간에는 로운도 기엘도 모르고 경하 자 신도 모르는 잃어버린 시간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로렌이 그에 대해서 말이라도 할라치면 경하는 귀를 막고 그대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절대 절대 절대 죽을 때까지 듣고 싶지 않아!!! 라는 절규와 함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리엔 까지 와서 나름대로는 아직까지 수장 대리(?) 랑 비슷한 입장에 있는 경하가 무조건적으로 로렌을 피해 다닐 수 많은 없 는 노릇이다. 이곳은 생각보다 훨씬 공기가 맑아. 역시 바람의 신국이라 그런 것인가? 내가 알게 뭐야? 이런 토라져 있군. 아침부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지 물어도 될까? 묻지마. 대답할 생각없어. 아주 노골적으로 로렌의 시선을 피하는 것을 탓할 수도 없는 로운은 경하대 신 대답을 했다.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키리엔에서의 첫날밤은 잘 보내셨 는지요. 그래도 나름대로는 이런 저런 예절을 경하보다 훨씬 더 잘배운 로운은 그럭 저럭 표정 관리를 해내는 중이다. 물론. 아주 푸욱 잘 쉬었네. 뭔가 휴가라도 지내는 기분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높이 솟아 있는 키리엔을 둘러보았다. 카드미엘과 비교하긴 그렇지만 이 궁은 정말로 아름답군. 이 궁을 설계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을 정도야. 그런게 있을 게 뭐야. 오래전 사람일텐데. 말 한마디 말 한마디 트집을 잡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경하는 여전히 투덜 투덜. 로운. 기엘. 이리야. 대신관 할아버지한테 서둘러서 키리엔으로 올 필요는 없다고 전해줘. 오후에 내가 신전으로 가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좀 더 잘 거니까 나 깨우지마. 아참. 시유한테 연락을 할 수 있으면 시유한테도 좀 연락을 부탁해. 말을 하다 말고 경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으음. 그리고…. 경하의 머릿속에 이런 저런 설명하기에도 복잡한 것들이 마구 떠올랐다. '아니야 하나씩 하자. 하나씩. 일단은….' 고민의 초입에서 사고를 멈추고, 경하는 말을 이었다. 로크레슈 장로님이랑 하라스다인 장로님. 그리고 레이죠 장로님도 같이 신 전으로 오후에 와달라도 해주면 좋겠어. 아주 중대한 일이라고 꼭 내가 만 나고 싶더라고 해줘. 그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하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후다다닥 달려가 버 렸다. 무의식중에 바람술을 쓰는지 주위로 바람이 일렁거리는 것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경하는 머리카락을 날리며 아주 가볍게 뛰어 가버렸다. 죄송합니다. 아니 특별히 그럴 것은 없네. 익히 알던 바니까. 저쪽이 좀더 살아 있는 느낌을 주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면 이해 하겠나? 로렌의 말에 세 남자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전의 자아를 잃고 있던 경하를 말하는 것 같 았기 때문이었다. 훗. 그대들이 염려할 만한 일은 없었네. 오히려 그때의 그는… 아니 그녀 라고 해야하나? 잘 모르겠군. 로렌은 기억속의 경하, 아니 시안을 떠올렸다. 왠지 현실 같지 않았던 그때, 그는 꿈을 꾸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절대 현실화 시킬수 없는 꿈을 말이다. 마치 살아 있지 않은 바람의 정 같은 그런 존재였네. 붙잡아 두지 않으면 그대로 바람으로 화해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지. 평생동안 잊지 못할 기억의 편린을 그는 조용히 접었다. 그것보다야 저렇게 활발하게 말하고 웃고, 화를 내주는 쪽이 훨씬 맘에 드 네. 평생 옆에 두고 잘 먹여서 기르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하하하하하. 로렌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 다. 앞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의 '기르고 싶을'이라는 단어에 아연 실색해 버렸기 때문이다. 로렌의 뒤에서 미타 남작은 '제발 폐하. 그만 두어 주십시오.'하고 매달리 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곳에 머무는 건. 내 평생의 단 며칠이겠지만…. 로렌은 가볍게 숨을 쉬어냈다. 가이칸이 아닌 전혀 다른 나라에, 그것도 신국이라는 곳에 와 있기 때문일 까? 로렌은 어느때보다도 더욱 더 여유라는 단어가 온 몸으로 느껴지고 있 었다. 내 일생에 최고의 휴가가 되길 바랄 뿐이야. …………. 그러기 위해서는 일생을 건 연애라도 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진지해졌던 로렌이 갑자기 고개를 휘익하고 미메이라의 기사 두사람에게 돌 린다.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혹시 자네들 누님이나 여동생 없나? 순간 미타 남작은 얼굴을 손으로 가려버렸고 이리야는 뒤로 돌아가 기둥 뒤 에 숨어서 소리를 죽이며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 사촌도 좋아. 대뜸 없는 누님과 여동생 또는 있을 지도 모르는 사촌을 찾아야 할지도 모 르게 된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만 깜박일 수 밖에 없었다. *** 팔을 뻗어 흘러오는 바람을 느낀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바람. 진짜 좋∼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바람을 맞으며 경하는 감탄의 소리를 자아냈다. 언제나 바람을 맞는 것이 경하는 아주 좋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면 더더욱, 바람의 소리 하나하나가 들리는 듯 해서 경하는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다. 아무도 없는 신전의 꼭대기 위. 그곳에서 경하는 홀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눈을 감고 경하는 바람의 흐름을 느꼈다. 아니 바람이라기 보다는 엘의 흐름을…. 이전과 같으면서도 또한 전혀 다른 바람의 흐름은 경하의 기분을 말끔하게 가라앉혀 주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넓게 펴져 나가는 바람의 엘이 그대로 느껴진다. 산으로 흘러가는 바람, 강으로 흘러가는 바람, 평지를 넘나드는 바람, 폭풍 같은 바람과 산들 바람, 온 갖 종류의 바람이 모두 경하에게 신호를 보내온 다. 한참을 그렇게 바람을 맞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경하는 그제서야 꼭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대신관 할아버지. 그렇게 서있지만 마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경하님. 나직한 목소리가 경하가 부른 이름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 시켜준다. 대신관 카류는 왠지 보지 못한 사이 더욱 나이를 먹은 듯이 보였다. 맘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아니다. 이곳은 경하님을 위한 곳. 언제든 자유롭게 오셔도 좋습니다. 카류는 잔잔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몇시간 전, 경하는 갑작스럽게 키리엔에서부터 이곳에 홀로 도착했다. 말을 탄것도, 마차를 단것도, 그렇다고 해서 걸어서 온것도 아닌 글자그대로 갑 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경하가 내뿜는 엄청난 기운의 파장 때문에 그가 도착 했다는 것을 카류는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챘지만 왠지 홀로 있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해서 그 는 지금까지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기엘과 로운이 곧 도착 할거예요. 거의 다 온 것 같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장로님들이랑이 도착하면 하지요. 그렇게 말하고 경하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는 경하의 은색 머리카락이 카류의 시선을 가득 메운 다. '많이 성장 하셨군.' 조용하게 느껴지는 경하의 파장에서 그는 많은 것들을 읽어내렸다. 단순한 기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같은 것이지만 처음과는 판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틀렸다. 갑자기 날아와서 놀라셨죠? 아닙니다. 하하하. 경하는 소리내어 웃었다. 왠지 질문 같은 것은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 카류는 그런 경하를 잠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경하가 청했던 사람들의 파장이 가까 이 오는 것을 느끼고 그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경하가 무엇인가를 하려 한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위한 사람들을 경하는 불러온 것이리라.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도대체 경하가 무엇을 하려는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불러서 정말 죄송해요. 해실 해실 웃으며 경하가 말하자 장로들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물론 경하가 아무리해도 진짜 수장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 만 경하가 가진 바람의 엘의 파장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그런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분들이니까 꼭 뵙고 싶었습니다. 경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을 바라보는 세명의 장로와 한명의 대신관쪽 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중에서도 레이죠 장로의 앞으로 가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건강해지셨네요. 모두 경하님의 덕입니다. 그는 엄숙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구보다도 그는 경하의 능력을 몸소 체험한 바 그대로 잘 알고 있는 사람 이다. 그렇게 고개 숙이지 마세요. 제가 쑥스럽잖아요. 그말 그대로다.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사실 경하 자신에게 극존대를 하 는 것 자체가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 것이다. 여기 아시죠? 제가 처음 아슈레이로 소환된 곳. 경하가 말을 하기 무섭게 기엘이 경하에게 달려들 듯이 말했다. 설마 경하님 지금 당장 돌아…. 아아 아니야. 아니야. 오늘은 다른 일이니까. 흥분하지마. 사실 난 돌아가 는 방법도 모르는 걸.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기엘은 입술을 씹으며 뒤로 물러났다. 스스로가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한 것 에 놀라면서. 그러지 말라니까. 기엘이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몸둘바를 모르겠단 말이 야. 그냥 로운처럼만 해. 로운처럼 만. 여하튼 그건 그거고…. 돌아가시는 문제가 아니라면 갑자기 저희들을 왜 이곳으로 부르셨는지…. 대신관 카류는 경하가 도착한 이후부터 계속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 었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길고 길었던 계승로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미 기엘을 통해 충분히 보고 받은 뒤이기에 카류는 더더욱 경하의 의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아. 그러니까 뭐랄까. 마지막으로 해야할 일이 생각나서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경하는 헤헤 웃었다. 뭔가 분위기 잡는 것은 역시 몸 어딘가가 간질 간질 거리는 것 같아서 성미 에 맞지 않는다. 뭐라고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좀 느낀게 있어요. 갈리아 계곡에서의 일 때 문만은 아니지만 여하튼 제가 여기 온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또 그 런 역할을 아슈레이에 있어서는 이계인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라던가, 제 가 어째서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하는 것들이요. 웃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왠지 얼굴 근육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기분이 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사실 저도 성공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어요. 가능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무슨…? …………. 레이죠 장로의 물음에 경하는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 실패하더라도 부디 용서해주세요. 경하님 도대체 어째서…. 더 이상 설명하는 것도 왠지 마땅치가 않았다. 경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경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에는 별로 없는 곳이다. 실제 자신은 이곳 에 오자마자 정신을 잃었으니 말이다. 신전에 와서 이곳으로 바로 온 것은 오로지 감 하나에 의존해서였다. 처음 자신이 이 아슈레이라는 대지에 발을 디딘 그 곳. 경하는 그 중심으로 걸어나갔다. 그때와 비슷하죠? 저와, 로운과, 레이죠 장로님과 대신관님. 팔을 뻗어 한번 가볍게 휘두르는 순간 바람이 일어난다. 뭐 그때와는 다른 사람들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바람에 사람들의 긴 로브 자락이 나부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경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그 중심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건, 내가 이곳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마지막 기적일거야. 내가 이계인 이기에 가능할지도 모르는.'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이제 자신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뿐. 두 팔을 벌린 경하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슈레이의 모든 생명을 주관하는 자들의 이름. 화악--하고 경하의 몸에서 강렬한 엘이 뿜어져 나온다.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자 모든 것의 이름. 유린의 의지를 따르는 자, 바람 의 세나케인! 경하의 부름에 바람의 세나케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지의 하나르, 물의 헤메트, 그리고 불꽃의 에사라. 차례 차례, 사신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이 경하의 주위 사방에 나타나기 시 작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마치 신상과도 같은 형체. 경하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자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쳐나갔다. 그대들에게 명하니, 하나의 의지를 따르는 엘의 흐름을 그대들의 앞으로 불러 오라. 흩어져 있는 그녀의 자취를 따라…. 스스로가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경하는 분간할수 없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경하의 생각의 흐름과도 같은 것. 그 흐름을 따라 경하만의 강력한 엘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죽지 않았어. 강한 의지의 소유자. 그녀는 나를 이곳에 불러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람의 엘로 변화 시켰다. 그러니까 불러 올 수 있 어.' 마음속에서부터 간절하게 경하는 그를 이곳에 불러온 사람의 이름을 불렀 다. '시안------!' 기엘과 로운은 자신들의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뿐만은 아니다. 그저 부르는데로 따라온 이리야와 자리에 동참할 것을 명받은 장로들과 대 신관 역시 그들의 앞에 펼쳐지는, 감히 그들의 눈으로 엿볼수 없을 4신의 강력한 힘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체험하고 있었다. 하나로 섞여 가는 은색과 금색, 푸른색  그리고 붉은색의 엘. 모든 것은 하나로 모여 빛을 만들어내고 빛은 어두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은 다시 4개의 선으로 나뉘어 경하의 몸 주위에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개로 갈라졌던 엘의 자락 하나가 카류와 로운에게 다가왔을 때도 그들은 놀라 뒷걸음지기는커녕, 그 자락에서 풍겨오는 강력한 엘에 취해버 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지 모르는 와중. 하늘로 용솟음 쳐 오르던 수백가닥의 엘이 다시 천천히 경하에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경하님. 기엘의 입에서 경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경탄과 감격의 이미지가 섞인 부름.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경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수천 수백개의 엘이 사방으로 펴져나갔다가 다시 경하에게 돌아오는 그 광 경은 죽을 때가지도 잊을 수 없을 장관이었다. 그 광경을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경하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시안, 눈을 떠요. 나를 이곳에 불러온 자. 당신이 필요해요.' 경하의 감겼던 눈이 순간 번쩍 빛을 발하며 뜨였다. 그의 눈앞에 눈이 부시는 엘의 덩어리가 만들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그 눈부신 엘의 덩어리는 점점 인간의 형체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 ----! 입은 벌어졌지만 감탄사 조차 나오지 않는 기적이 그들의 앞에 펼쳐지고 있 었다. 두눈으로 바라보기에도 벅차던 빛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빛과 함께 경하가 불러낸 4개의 신형도 조금씩 투명해져 가기 시작했다. 경하의 앞에 온 몸에 빛나는 은빛의 실을 몸에 감은 여성의 모습이 드러나 고 있었다. 감겨 있는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고 있는 속눈썹, 희게 빛나는 나신은 마치 여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점점 사라져가며 그녀의 얼굴이 나타나는 순간, 어디선가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시안-------!!!!! 남아있던 빛이 사그러져가기 시작했다. 경하는 자신을 향해 서 있는 시안에게 다가갔다. 시안. 그는 손을 들어 살짝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파르 르 떨리며 열렸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여긴. 공중에 떠있던 그녀의 몸을 가볍게 안아 내리며 경하는 미소지었다. 여긴 대신전이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누구? 당신이 미메이라를 위해, 아슈레이를 위해 불러온 사람이요. 시안은 눈을 깜박이며 흐릿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에 한 사람의 얼굴이 똑똑하게 비치기 시작했 다. 그녀와 비슷한 얼굴이지만 또한 전혀 다른 남자의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꿈을 꾼 것 같아요. 맞아요. 오랜 꿈이었죠.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이를 날아다니며…. 경하는 그녀가 말하는 것에 소근 소근 대답해주며 기엘과 로운에게 눈짓을 했다. 아…. 문득 정신이 들은 로운이 얼른 망토를 벗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내밀었 다. 경하는 로운의 망토로 시안의 몸을 감싸며 미소지었다. 왠지, 내가 처음 왔을 때 로운이 이렇게 했을 것 같아. 로운? 경하의 목소리에 시안이 반응했다. 그래요 로운도 있고요.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도 와 있어요. 경하는 조심스럽게 시안의 몸을 로운에게 내밀었다. 로운은 기꺼이 그녀의 몸을 받아들어 가볍게 안아 올렸다.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라스다인 장로와 로크레슈 장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기적에 당혹감마 져 들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있던 레이죠 장로는 아무말없이 그의 딸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한번, 경하의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당신들은 저녀석의 가능성이라는 걸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거야. 이리야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죽을뻔하다가 두 번이나 살아 났다구. 물론 그렇다고 저녀석이 무슨 일이든 다 할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게 시안님을…. 하라스다인 장로는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레이죠 장로가 그의 딸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말 대신 울음이 먼저 흘러나오는 것을 그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울음에 섞여 레이죠 장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뒤로 하고 경하는 또다른 두명의 장로와 카류에게 다가가 말을 건냈 다. 오늘 일은 비밀이예요. 어디까지나 계승로에서 돌아온건, 그러니까 일단은 시안으로 해두자구요. …경하님. 기억이나 그런 것에 조금 문제가 일어날지 모르겠네요. 살려냈다고는 하지 만 얼마나 완벽하게 그걸 해냈는지에 대한 자신은 없어요. 내가 한 건 그냥 흩어졌던 그녀의 엘을 다시 불러 모은 거니까. 그런…. 이미 사라진 것은 어떻게도 할 수 없었…. 말짱하듯 말을 하던 경하가 순간 뒤로 휘청했다. 우앗!! 이리야가 막 달려들으려는데 어디선가 서 있던 기엘이 쏜살같이 달려와 쓰 러지는 경하의 몸을 받아들었다. 경하님? 정신 차리십시오. 경하님. 그런 기엘의 모습을 보며 이리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하튼 이녀석의 일이라면 기사양반은 죽었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뛰어 오 겠구만. 경하님? 경하님!! 그냥 둬. 저 여자를 살려냈잖아. 나한텐 갈리아 계곡에서의 일보다 지금 더 경이로울 정도야. 이리야씨. 당분간은 안 깨어날지도 모르지. 그동안 우리 세명이 둘러앉아 경하 얼굴 이나 실컷 보자구. 시안을 안고 있는 로운의 시선이 어느새 경하에게 가 머물렀다. 그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심정으로 경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른 새벽 잠에서 깬 로렌은 차가운 공기에 살짝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종일 나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한편으로는 느긋 해서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 아니기에 약간의 불편 함도 느끼는 그였다. 이런 너무 일찍 일어나 버렸군. 언제나 방안 가득 시녀들이나 시동들에 둘러 쌓여 살던 생활을 하던 로렌에 게 있어 키리엔에서의 생활은 조금은 불편했다. 가이칸의 카드미엘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키리엔. 그 속에서 로렌은 자유와 함께 약간의 이질감을 맛보고 있었다. 새벽 산책이나 해볼까? 한 명의 시녀도 거느리지 않고 그는 밖으로 나왔다. 사실 거느리고 나올 시녀조차 없다. 언제나 그의 곁에 있는 미타 남작역시 아직은 수면중일 것이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그는 왠지 슬금 슬금 기어나오는 웃음을 조금씩 흘리며 중정이 바라다보이 는 테라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시원해. 새벽의 바람이 그의 곁으로 몰려왔다. 마치 카드미엘에 있는 것 같군. 테라스에 기대어 그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카드미엘을 떠나와 이곳에 머물다보니 왠지 그곳에 향수감 같은 것이 느껴 진다. 그는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뭔가 조금 쑥스러워졌다. 아직 나도 어린애인가 보군.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곳이라 생각했기에 카드미엘을 감옥처럼 느꼈던 때도 있었다는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으응? 저건 뭐지? 먼곳을 바라보고 있던 로렌은 중정 한곳에서 새벽 별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 간소한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중정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람이 아니었다. 공기가 움직이고 있었다. 흔들리며, 때로는 속삭이고, 그리고 나부끼는 공기. 그 가운데 서 있는 사람. 로렌은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희미한 발자국 소리를 들은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리는 순간 로렌은 심장 한구석에 강한 충격같은 것을 느꼈다. …………. 움직이는 공기 속에 바닥까지 닿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던 그녀가 살 짝 미소를 흘렸다. 당신은……. 마치 자석에라도 끌려가는 것처럼 로렌은 그녀의 곁으로 자신도 모르게 움 직이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던 환상이 다시금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 다. 폐를 가득 채우는 시릴정도로 청량한 공기. 그 공기의 중심에 서 있는 여인.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새어나왔다. 시안…. 움직이던 공기가 순간 멈칫했다가 다시 돌아갔다.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로렌의 시선을 가득 메우는 순간 그는 그  움직이는 머리카락 하나를 잡아 입술에 대었다. 저는 로렌, 로렌 네세크 카루인 라이너드입니다. …………. 희미하게 미소짖은 얼굴을 로렌은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아슈레이 8] 7장 귀환 & 에필로그 (완) 길게 줄을 지어 앉아있던 장로들 사이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앞줄에 그리고 모든 장로들의 앞에 서 있던 카류는 간간히 들려오는 대화와 신음소리 또는 감탄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웅성웅성하던 홀이 고요해졌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카류는 입을 열었다. 그럼, 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방법은 언제나와 같이. 카류가 신호를 하자 맨 앞에 있던 장로가 그의 앞에 있던 작은 단지를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 들러올린 단지에 그는 무엇인가를 집어 넣고 옆 사람에게 단지를 전해주었다. 천천히 연한 녹색의 단지가 순서대로 돌아 다시 카류 앞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것을 받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명의 신관에게 건냈다. 두 명의 신관이 집계를 하는 손위에 장로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단지 안에 들어 있는 작은 돌들이 차례 차례 장로들의 앞에 공개되었다. 푸 른돌의 행렬이 이어졌다. 잠시 후 모두의 앞에 투표 결과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투명한 유리 단지로 옮겨진 푸른색돌. 그 옆의 또다른 단지에는 단하나의 붉은 돌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것을 보고 카류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럼. 만장 일치로 이번 안건이 통과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차후의 일에 관해서는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의논해보도록 합시다. 카류의 선언과 동시에 홀이 웅성거림으로 소란 스러워졌다. 그것을 보며 카류는 조용히 홀에서 퇴장했다. 오늘도 안 깨어나시는 건가? 글세.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경하의 옆에서 기엘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 다. 이리야는 그런 기엘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말했다. 괜찮을 거라구. 그런 기적을 만들어 낸 녀석이야. 이런 일로 어떻게 될 리 가 없잖아. 하지만 걱정이 됩니다. 세나케인님도 불러 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로 며칠째지? 로운이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19일째. 이틀만 지나면 꼬박 3주가 되겠군. 갈리아 때는 5일뿐이었다고 했지 않아? 그래. 역시 걱정 돼…. 걱정할 것은 그게 아니야. 아마도 깨어나면 이녀석 머리를 쥐어 뜯는 정도 가 아니라 화를 내며 성질을 부리면서 키리엔을 온통 박살을 낼지도 모른다 고. 설마 장로회의의 결정이 난 건가? 그래. ……역시. 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하가 시안을 엘의 흐름에서부터 불러들여 다시 살려낸 직후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 벌써 19일째다. 그동안 장로회에서는 모종의 안건이 상정되어 연일,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경하가 깨어나 그 소식을 듣기라도 하면 정말로 기절 초풍을 해서 그 자리 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질 만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 남자는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혼절하듯 잠들어 있는 경하의 얼굴을 조 용히 지켜보았다. 이렇게 얼굴만 보며 지내는 것도 나름대로는 고역이었다. 걱정스러움과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교차하는 것이다. 혹시나 몰라 곁에서 번갈아 정화의 주문과 치료의 주문을 걸어주기까지 했 다. 하지만 경하는 요지부동, 굳게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혼절하듯 눈을 감았던 경하가 눈을 뜬 것은 그 다음날 정확하게 20일을 채 운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밥. 일어나서 경하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여긴 어디야? 도 어떻게 된 거야? 도 기엘이나 이리야나 로운의 이름도 아닌 저 한 단어였다. 그바람에 그만 자리에서 침몰해버린 세 사람은 경하가 우걱 우걱 거리며 식 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간신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수 있었다. 뭐야. 내가 뭐 먹는 거 처음 봐? …………후우. 먹는데 앞에서 한 숨 쉬지마. 로운이 한숨을 내쉬자 경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지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 저것 하나만큼은 변하지를 않았군. 그러게 말이야. 너무 그러지는 말아. 20일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못한 건데. 오오 맞아. 기엘. 고마워. 그런 의미에서 이거 한 접시만 더 달라고 말해 줄래? 알겠습니다. 경하님 하지만 좀 천천히 드세요. 우걱 우걱 입에 들었던게 약간 흘러나오려는 찰라 경하는 얼른 입을 다물었 다. 역시 음식은 가이칸에서 먹었던 게 제일 나은 거 같아. 미메이라의 음식은 정말이지 총체적 난국일 정도로 달단 말이야. 그래서 깨어나자 마자 한 말이 밥이냐? 그만 하라고 했잖아. 배고픈 건 장사도 못 당한다는 속담이 있다고. 그 말을 하며 경하는 마지막 남은 고기 조각을 꿀꺽 삼켰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경하는 손에 들은 식기를 절대 내려놓지 않는다. 정말이지. 할말이 없군. 하아. 너무 자서 그런가 온 몸이 삐걱 삐걱 하는 것 같아. 치료주문이라도 걸어줄까?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니까 신경 쓰지마. 고개를 저으며 경하는 무엇을 더 먹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적당히 먹었으면 이제부터는 밀린 일을 좀 처리 했으면 하는데. 일? 과일 접시에 있는 사과 비슷한 것을 집어 한입 베어 먹으려던 경하는 어느 새 안으로 들어온 시녀가 내민 접시에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 내가 할거는 다 했는데 뭐가 또 일이… 아참.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라 고민을 하던 경하는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 가락을 딱 울렸다. 맞아. 한가지가 더 남았었지. 뭐 그것도 대충 해결 된 거니까. 음음 설명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은채 경하는 혼자 말하고 혼자 납득을 해 버린다. 로운은 그런 경하에게 도대체 무엇부터 이야기를 해야할지 고민스러웠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로운은 일단 다른 것은 대신관 카류에게 그 역할을 넘 기자고 판단했다. 일단, 제일 먼저 알려줄 소식은…. 경하를 보던 로운의 시선이 왠지 기엘과 이리야쪽으로 돌아선다. 말을 했으면 끝을 맺어. 왜 기엘이랑 이리야 얼굴을 보는 건데? 일단 들어도 너무 놀라지 말고 듣는게 좋겠다. 입에 들은 것은 삼키고. 로운의 말에 경하는 입에 들은 음식을 꼭꼭 씹어서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건데?' 자 다 삼켰어. 할 말이 뭐야? 일단 네 힘으로 살아나신 시안님이 거의 아무 이상 없이 무사하다는 것부 터 알려야 겠군. 헤에. 그건 다행이네. 사실은 좀 걱정이 되었거든. 그리고 그 시안님께서…. 로운의 말을 들으며 경하는 입을 삐죽거렸다. '저 존칭어 바뀌는 거 봐라. 쳇.' 시안님께서 내일 가이칸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아아. 로운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 끄덕하며 듣던 경하는 순간 멈칫했다. 에? 내일 가이칸으로 떠나신다고 말했어. ……………. 로운이 미리 입에 들은 것을 다 삼키라고 말한 것이 다행일 지도 모른다. ………지금 뭐라고 했어? 정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다 못한 기엘이 끼어들었다. 가이칸의 황제, 아니 정확하게는 아직 황태자 겠습니다만. 그 황태자인 로 렌님과 함께 가이칸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출발은 내일 아침이구요.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것이 뭐라고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경하님께서 잠들어 계시는 동안 두 분 사이에서 이런 저런 말이 오간 것 같습니다. 무슨 이런 저런 말이야. 간단하게 말하지. 이리야가 투덜 투덜 거렸다. 다시 말해서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둘이 한눈에 반해서 짝짝꿍이 되어서 함께 가이칸으로 가게 되었다 이말이야. 그녀석이 바란대로 신국인 황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말씀. …………. 쨍그랑------. 경하는 들고 있던 포크를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그게 정말이야? 그래. 어제 장로회의 인가까지 전부 받았으니 문제 될 것은 없지. 레이죠 장로님이 허락할리 없잖아. 허락 하셨다. 딸이 바래서 가겠다고 하는데 반대할 아버지는 없지. 뭐 속 사정은 어떨지 모르지만 전대미문의 혼처 자리지 않겠어? 아슈레이 제일 가 는 가이칸 제국의 황비가 되는건데. 그. 그래도 그렇지. 뻐끔 뻐끔. 입은 갈팡 질팡.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마, 말도 안 돼. 우욱. 내, 내가 왜 힘들여서 열심히 되살려 놨는데. 그런 법은 없어!!!! 결국 경하는 그때까지도 찰싹 들러 붙어 있던 탁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있어! 로렌이랑 시안은. 아니지. 굳이 물을 것도 없잖아. 젠장!! 사 람이 목숨을 걸어서 살려 놨더니만 왠 난리야 이게 으아아악!!!! 글자 그대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광을 하는 경하를 보며 세 남자는 역시 나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제에----ㄴ장!!!! 경하는 머리를 쥐어 뜯다 말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왜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건데!!!!! 길고 긴 복도를 울리는 경하의 목소리가 그가 뛰어나간 문을 통해 세 사람 에게 들려왔다. 역시나로군. 경하의 길고 긴 비명소리를 들으며 로운이 한마디 했다. 그러게나 말이야. 실수라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실수? 제국 황제의 얼굴에 물이라도 끼얹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리야는 두 사람이 대치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상상하며 말했다. 이봐요!! 시안----! 복도를 미친 듯이 뛰어 경하가 도착한 곳은 정확하게 시안이 있는 장소였 다. 하지만 그 안에는 시안이외에 한 명 더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오. 깨어났군. 얼굴을 보지 못하고 떠나면 섭섭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카드미엘에서 있을 우리들의 혼인식에 참석해주겠지? 여유로운 로렌의 얼굴. 이봐!!!! 경하는 다짜고짜 로렌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도대체 당신 무슨 생각이야!!! 이런 이런 이건 좀 놓고 말하지. 아름다운 레이디의 앞인데 말이야. 시끄러워!!! 다 당신이 문제야. 젠장할. 이봐요 시안!! 당신 나 좀 봐!! ……………. 간신히 로렌의 멱살을 놓은 경하가 이번에는 시안의 손을 덥썩 잡고 당기기 시작했다. 경하. 그건 실례야.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입 닥치고 있으라고 했지 로렌!!!! 엄청나게 무례하게 경하는 로렌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시안의 팔을 잡아당겼 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걱정하실 것은 없어요. 시안이 잔잔히 미소지으며 로렌에게 말했다. 흐음.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경하가 이끄는 대로 따라나섰다. 그 뒤에서 로렌은 아주아주아주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나요? 당연하죠!! 아무도 없는 키리엔의 가장 높은 탑 위에서 경하는 있는 불만 없는 불만을 가득 얼굴에 담아 투덜거렸다. 도대체가. 사람이 잠들어 있는 동안 뭐가 어떻게 된거냐구요! 나름대로의 일이 있었다고 밖에는 말씀드리지 못하겠군요. 묘하게 침착한 시안의 말에 경하는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왠지 말하는게 누구랑 똑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아버님도 많이 놀라셨고, 제 이런 결정이 모든 분들게 폐를 끼쳤습니다.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 경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렇게 까지 말을 해오면 갑자기 할말이 없어 지는 법이다. 처음에는 저도 결심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로운으로부터 이런 저런 이 야기들을 듣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요? 지나온 이야기들이지요. 시안은 생긋하고 경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경하는 왠지 아슈레이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았던 때 가 기억났다. 거울에 비친 저 얼굴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던 것 마저. '으으. 죽겠네….' 눈앞에 있는 시안은 이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그녀의 얼굴보다도 훨씬 성숙 하고 아름다웠다. 거기에 경하와는 전혀 다른 우아함과 고상함이 배어 있는 것이다. 아이고 머리 아파. 장로님들께서 허락해주지 않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다행히도 경 하님께서 계신 탓에 쉽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경하님께 감 사를 드립니다. 그래도 그렇지. 자신의 일생을 그렇게 쉽게 결정하면 어떻게 해요. 저 사 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잖아요. 자신은 분명 험하게 마구 대하고 있지만 경하는 로렌이 가이칸이라는 커다 란 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나름대로는 실감하고 있었다. 과연 그것을 그녀는 짐작이라고 하고 있는 것인지 경하는 곤혹스러웠다. 그런 경하의 생각이 얼굴에라도 드러났는지 시안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 다. 어떤 걱정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걸 아시는지요. 저는 이곳 미메 이라, 바람의 신국을 이어받을 수장 계승자로써 태어나서 지금까지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 크기는 많이 차이 날지 모르지만 로렌님의 외로움을 저는 잘 이해 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 그분은 저를 순수하게 한사람의 여성으로 대해주시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정말로 로렌의 곁에 머물기로 한 것이 기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굳이 그녀의 입으로 듣지 않아도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바람의 엘이 모 든 것을 경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경하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하아…. 그건 그렇지만…. 경하는 갑자기 힘이 빠져버렸다. 미메이라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죠? 그리고…. …………. 그리고 당신, 정말로 미메이라를 떠나서 살 수 있어요? 당신이 목숨을 바 쳐서까지 지키려 했던 나라잖아요. 다른 사람은 어쨌든 간에 그녀 만큼 미메이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 다. 그것을 경하는 잘 알고 있었다. 미메이라를 사랑하는 만큼 그분도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미메이라는 저보 다 더 믿음직스러운 분께서 지켜주실테니 저는 안심하고 있답니다. 아이고 머리 아파. 알았어요. 알았어. 대관식에 참석해주시겠죠? …………. 경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꼭 참석해주시리라 믿어요, 로렌님께서 경하님과 나머지 세분만큼은 책임 지고 대관식에 초청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후우. 며칠 자고 일어나니 천지가 개벽이라도 했나…, 머리 아파. 경하는 시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택에 그가 한가지 시안의 말을 귀로 흘려 들어버린 것은 전혀 깨닫지 못 한 채. 조금 더 쉬세요. 대관식을 미루었던 탓에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더군요.. 푸욱 쉬시고 꼬옥 카드미엘로 와주세요. 오가는데는 큰 무리가 없으실겁니 다. 레카에서 카드미엘까지 곧장 가실수 있도록 로렌님께서 준비 해놓으신 다고 하셨으니까요. 그건 알아요. 알았어요. 알았어. 갈테니까. 경하는 손을 내저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경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시안이 그렇게 제국으로 가버리면 도대체 누 구에게 미메이라의 수장자리를 맡기느냐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그 생각이 드는 통에 경하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줄줄 가고 있는 거니까….' 그럼. 이만 내려갈까요? 먼저 내려가요. 나는 생각할 것이 조금 있으니까. 경하는 털썩하고 맨바닥에 그냥 주저앉아버렸다. 그럼 부디. 몸 조심하시구요. 조신하게 인사를 하는 시안을 본척 만척 손을 흔들어 보이고 경하는 그대로 고민에 빠져버렸다. '흐으. 기엘은 택도 없을 사람이고, 로운은 어떨까? 우웅. 하지만 로운은 성격이 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리고 다시 저었다가 하며 경하는 생각에 잠기기 시작 했다. 그 위로 미메이라의 깨끗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온 키리엔을 감싸며 다음 순간 세상으로 불 어 나가는 미메이라의 바람 아래에서 경하는 밤이 새는 것도 모른 채 그렇 게 앉아있었다. *** 가이칸은 바야흐로 새로운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랜 라이너드 7세의 병환으로 침체되어 있던 와중에 젊고 패기에 가득찬 새로운 황제에 대한 기대는 가이칸 제국 전체를 달아 올리고 있을 정도였 다. 내정되었던 대관식이 미루어 지는 탓에 로렌의 건강이 혹 좋지 않은게 아니 냐라던가, 갈리아 계곡에서의 분쟁 때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냐는 억측, 또 한 다른 황자가 대관식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냐는 억측이 있었다. 하지만 로렌이 아름다운 미메이라의 여인과 함께 카드미엘로 돌아온 순간, 그런 소문들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공식적으로 대관식이 미루어진 까 닭은 아셀과 하나스와의 작은 분쟁 탓이라는 발표도 이루어진 탓도 있었지 만 말이다. 신국인 황비라는 이례적인 정도가 아니라 전대미문의 스캔들도 로렌이 정식 으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기 전에 벌어진 아셀과 하나스의 분쟁에서 승리 했다는 기쁨에 그만 묻혀 버리고 말았다. 나름대로는 자신의 딸을 황비로 만들려고 하던 몇몇 귀족들은 로렌이 데려 온 신비스러운 미메이라의 왕녀(?)를 본 순간 모두 할말을 잃어버렸다. 고아함과 우아함, 아름다움과 귀족적인 화려함까지 모두 갖춘 완벽한 여성 이 그들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어느 누가 보아도 로렌이 주변의 눈을 반쯤은 의식하지 않 을 정도로 그녀에게 푸욱 빠져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 이다. 물론 모종의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로렌이 결국 잊어버렸던 시안을 다 시 찾아온 줄 로만 알기도 했다. 뭐니뭐니해도 이전의 '시안'과 지금의 '시 안'은 외모도 비슷한데다가 이름까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이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단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황제 자신과, 그의 오른팔인 미타 남작이었기 때문이다. 카드미엘로 화려하게 입성한 로렌의 정식 황제 대관식은 그로부터 3주 후. 그리고 그날은 가이칸의 황제 로렌과 미메이라의 공녀인 시안 디 레이죠의 혼인날로 기록된다. 저건 누구 머리에서 나 온 거야? 마치 가짜 나이트들의 가장행렬 같잖아. 어쩔 수 없습니다. 진행과정은 상당히 변칙적이라고 해도 국혼은 국혼이니 까요. 경하는 높은 연단 위에서 미메이라로부터 긴급히 차출되어온 바람의 기사들 이 시안과 로렌의 혼인 행렬의 뒤를 따르는 것을 못 마땅한 눈으로 쳐다보 고 있었다. 결국엔 아버님들의 소원이 성취된 것이지. 치잇. 미메이라의 누군가를 황제의 비로 보내 제국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했던 것이 결국에는 성취된 것인 셈이다. 어쩐지 쉽게 허락해줬다 했다더니. 장로님들 하나같이 속이 다 시커매. 겉으로 보기엔 로렌이 단순하게 시안에게 반해 청혼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 뒤에는 양국간에 서로 치밀하게 이익관계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인 지도 모른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 난리를 떨었던 건지 진짜 모르겠네. 혼신을 다해서 살려 놨더니 냉큼 제국으로 시집이나 와버리고. 도움이 안되잖아. 도움이!! …………. 풋. 경하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젠장…. 도대체 왜 살려놨는지. 경하가 투덜 투덜거리자 기엘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시안님을 되살려 내신 것을 후회 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경 하님. 그, 그건…. 투덜 거리던 경하의 얼굴에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모. 몰라! 내가 알게 뭐야! 아으. 신경질 난다. 경하는 투덜거리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하는 일은 왜 다 이모양인 거야? 경하님 어디 가십니까!! 먹으러가. 경하님 잠시,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기엘이 허둥 지둥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끄러워 거기 가만히 있어. 명령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경하는 성큼 성큼 걸어 나갔다. 뭔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얼굴이군. 화려한 의례복을 손에 들은 시종들이 로렌의 어깨에 의례복을 사뿐히 올려 놓는다. 로렌은 익숙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경하를 바라보았다. 물론,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노골적인 시선은 좀 곤란 하다고. 그러니까 그게 다 당신 탓이야.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은 없어. 경하의 말투에 눈이 화등잔보다 커져 도끼눈이 되기 직전인 시종들을 로렌 은 손짓으로 내보냈다. 아무리 로렌이 스스럼없이 대하고는 있다고 해도, 자신이 경하와 이렇게 대 화를 하는 것을 많은 이들에게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원한 것을 최선을 다해 얻으려 노력할 뿐이지. 그래서, 결국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돼서 기뻐? 물론. 치잇-. 꽤나 편한 의자이지만 경하는 그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로렌을 바라보았다. 여유 만만해 보이는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왠지 자신이 자꾸만 조그맣게 오 그라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네가 없었으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 투성이였지. 그렇게 말하며 로렌은 싱긋 웃었다. 신은 내게 여신 대신에 널 보내준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말이야. ……………. 왠지 경하는 얼굴이 간질 간질 거리는 것 같았다. '짜식 말은 잘하는 군.' 로렌은 경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는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이런 저 런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제대로 해결된 것은 없어. 대관식에 아셀은 축하 사절도 보내 오지 않았으니까. 그건 당연하잖아. 얼마전에 싸웠던 나라한테 그런 거 보내고 싶겠어? 당신 은? 나는 보내. 그건 어디까지나 의례로라도 필요한 것이니까. 말하자면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아슈레이가 가이칸의 이름으로 움직일 때까지…. 물론 네가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지. 그렇게 말하는 로렌은 정말 자신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다 진심이라는 표정 을 하고 있었다. 물론 경하도 그가 정말로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사람은 절대 자신이 말하는 것에 있어 거짓을 흘리는 경우는 없는 것이 다. 그 앞에서 경하는 푸욱-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헛소리하지마. 나는 당신 편 들어줄 생각 없어. -----? 앞으로는 알아서 하란 말이야. 당신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폴짝하고 경하는 쪼그리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뛰어 내렸다. 그렇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 는 건 기분이 좋을 수 밖에 없는 사실. 입으로는 투덜거리고 있지만 왠지 경하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 었다. '어때. 누가 저 로렌 앞에서 투덜거리고 우쭐거리겠어? 내가 해야지. 훗훗 훗.' 역시 인간은 누구에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우쭐 거릴 수 있을 때 희열을 느 끼나보다고 경하는 생각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닌 저 가이칸의 황제가 상대라면 더더욱.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 글자 그대로지. 앞으로는 내 도움 받을 일 없을 거라는 소리 야. 난 곧 여길 떠날 거니까.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미메이라로 곧 돌아갈 예정일테니. 돌아가는 편은 준비해줄테니 걱정말고 천천히 쉬다가게. 싫어. 내 힘으로도 갈 수 있어. 당신 도움은 더 안 받아. 히죽--하고 경하가 웃어 보인다. 로렌은 왠지 그런 경하의 표정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지금 돌아갈 거니까. 시안한테 잘해줘. 그녀는 정말 당신 하나만 보 고 여기에 온거니까. 몸 상태가 이상해진다 싶으면 바로바로 미메이라로 돌 려 보내주고. 아아. 나는 모르지만 기엘이랑 로운들이 미메이라로 가겠다고 하면 그쪽은 좀 부탁해. 아마도 헐레벌떡 찾아올 테니까. 아참. 그리고. 말을 하면서 뚜벅 뚜벅 걸어 나가던 경하가 몸을 휘익 돌려 다시 로렌에게 다가갔다. 잊어버릴 뻔했군. …………. 경하는 주섬주섬 허리춤에 매달아 놓았던 것을 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찬란한 빛으로 반짝이는 녹색의 검을 불쑥 로렌에게 내밀었 다. 이거. …이건 내가 이미 네게 준 것인데? 그러니까 받으라고. 어차피 돌아갈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걸. …………. 게다가 이건 내가 아니라 당신 손에, 아니 가이칸 제국의 황제가 가지고 있는게 옳아. 그거 알아? 경하가 묻지만 로렌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가이칸 제국의 초대 황제, 아니 그때는 왕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여하 튼 그가 사실은 미메이라 인이었다는 거 말이야. 무슨……!! 그가 연인을 잃고 미메이라를 나갈 때 들고 나온 유일한 유품이 이거야. 그러니까 이곳에 있어야 해. 뭐 지금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터억-하고 경하는 녹색의 검 카나린을 로렌의 손에 올려놓았다. 굳이 누군가를 주고 싶으면 나말고 진짜 시안에게 주던가. 그녀에겐 도움 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봐!! 자아 그럼 나는 이만 퇴장.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경하에게 로렌이 황급히 물었다. 붙잡지 않으면 두 번다시 경하를 보지 못할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그는 전 율과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히히. 섭섭해? …………. 하지만 가는 곳은 비---밀. 너…. 당신하고 만나서, 나쁜 일도 많았지만 말이야. 나름대로는 좋은 경험도 많 이 한 것 같아. 그 카스핀인지 하는 사람 속 너무 많이 썩이지 말고, 시안 을 두고 바람 피지 말고, 알았지? 시안을 두고 바람이라도 펴봐. 미메이라 에서 말도 못할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박살을 낼 걸? 그건 맡겨두지. 자아. 그럼. 마치 내일이라도 만날 사람처럼 경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고 있 었다. 그를 잡을 수도 없는 로렌은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경하가 걸어 나가는 것 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거대한 문이 닫힌다. 자, 잠깐!! 황급히 긴 옷자락을 끌며 경하의 뒤를 따라 급하게 닫힌 문을 밀고 나갔다. …………!!!! 문을 여는 순간 그의 앞에는 이유 모를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답답함을 한번에 날려 버릴 듯한 바람.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경하? 아무도 없는 공간을 향해 이름을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것 역시 가슴을 시리 게 하는 바람뿐이다. 그는 그 바람이 잠시 머무는 공간에 서서 사라져 버린 경하의 이름을 몇 번 이고, 몇 번이고 부르고 있었다. *** 지금쯤 기엘이 펄펄 뛰고 있겠지? 「그걸 알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네 저의를 모르겠군.」 세나케인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지만 경하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뭐 로렌에게 가서 닥달을 해서라도 돌아 올테니 걱정 같은 건 안 해. 그보 다는 기엘이랑 로운이랑 이리야가 오기 전에 해결해야할 일이 있어. 「정말 그녀를 선택하겠다는 건가?」 왜 안될 이유라도 있어? 어차피 지금은 능력이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원 하면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받을 사람이 받아들이면 끝. 안 그래 ? 「그렇긴 하지만….」 너무 그러지 마 케인. 그애가 섭섭해 할지도 모르잖아. 우아---- 시원하 다. 역시 카드미엘 보다는 이쪽이 좋구나. 돌아가면 여기 바람이 제일 그리 울 것 같아. 경하는 온 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감상에 잠긴다. 경하가 지금 앉아있는 곳은 키리엔의 제일 꼭대기,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탑의 지붕 위. 도무지 인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안가는 곳이다. 바람 그 자체로 화하여 이곳 키리엔에 도착한지 이제 몇 시간이 지났건만 경하는 그 위에 앉아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역시 내가 생각해도 여기서의 나는 너무…. 「너무?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끄으응. 춥기는 춥다. 여기. 곧 다들 돌아올테니까 서둘러야 겠어. 경하는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높은 탑 위에서 뛰어 내렸다. 경하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누가 말했지? 너 또한 번 그래봐!! 가만히 안 둘 거야. 어디 나랑 한번 붙어볼래? 이리야가 제일 씩씩대면서 경하에게 달려들었다. 미안 미안. 하지만 할 일이 생각났는걸. 그리고 모두들 금방 따라왔잖아. 응? 그래도 너무 하십니다 경하님. 기엘 말이 맞아. 히이잉---하고 경하가 로운을 돌아보았지만 로운은 냉정하게 잘라 말하며 기엘이 편을 들었다. 아무리 네가 어디 있든  에 우리가 알아 낼 수 있다고는 해도, 아무런 말 이 없이 그곳에서 사라지면 우리 입장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어? 미안하다니까. 로운. 벅벅벅 머리를 긁으며 경하는 앉아있는 의자 위에서 점점 조그맣게 쪼그라 들었다. '우우. 다들 진짜 화났네.' 정말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두 번 다시 안 그럴게. 용서해 줘. 자신의 방식대로 경하는 두손을 모아 들ㄹ고 고개를 꾸욱 숙여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경하는 빼꼼하게 눈을 뜨고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들어주십시오. 경하님. 에…. 저희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기엘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저희는 경하님이 고개를 숙일 상대가 아닙니다. 미안…. 그런 기엘의 반밖에 보이지 않는 표정에 경하는 가슴이 아팠다. 눈앞의 일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 행동에 상처 받는 사람들이 있 다. '나는 이 사람들을 두고 갈 수 있을까?' 스스로 자신에게 묻는다.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꼭, 같이 행동할게? 응?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묻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 잘못했어. 좋아.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혼자 훌쩍 돌아와야 했는지 그 이유나 들어 보지. 로운이 조금 이상해지려는 분위기를 돌리려 말을 꺼냈다. 아아. 그건. 시안이 로렌과 결혼해 버렸으니까. 시안을 대신할 사람을 찾 아야 했거든. 경하는 가볍게-나름대로는-말했지만 그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곰곰히 생각해 봤어. 기엘도 생각해 봤지만 절대로 안될 것 같고, 로운에 게 부탁했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는 사람이 많 지도 않은데 아무한테나 맡길수도 없는 걸. 그것을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응. 나는 시안에게 그대로 넘길 생각이었는데 그게 생각데로 안되었으니 까. 책임을 지고 다음 사람을 찾아야지. 경하님. 잠깐. 기엘이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데 로운이 그것을 막았다. 경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 해서 로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누구지? 어어. 그러니까. 그녀의 이름을 말하면 다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경하는 문득 두려워졌다. 스스로의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말이다. 누구? 그게… 시안의 동생. 차가운 기운이 순간 네 사람의 사이로 지나갔다. 무리다. 무립니다. 에에--- 그 어린애? 세 남자의 반응은 한템포씩 늦었지만 곧장 나타났다. 왜? 시안의 동생이고 전 수장인 레이죠 장로님의 딸이잖아. 그애 말고는 더 괜찮은 사람이 생각나질 않아. 그리고 시유는 생각해보겠다고 했는걸. 장로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로운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째서!! 장로회에서는…. 말을 하다 말고 로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말해도 좋을까 하는 의심이 그의 마음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빠르든 늦든 결국엔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 장로회에서는 경하 네가 그대로 남아주길 바래. 에에엑-----!!! 시안은 이미 제국의 황비가 되었고, 별달리 후보자도 없다. 처음에는 어땟 는지 모르지만 장로회에서 전원만장일치로 통과가 되었다. 더 빨리 말해주 려고는 했지만…. 그. 그건 말도 안 돼. 내가 왜…. 말이 안되다니요. 지금 상황에서 누가 그럼 미메이라의 수장이 될 수 있습 니까? 경하님께서는 미메이라의 수장 자격을 모두 갖추고 계십니다. 누가 경하님 대신 바람의 주인으로써 남을 수 있습니까? 기엘이 경하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경하는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 웃기는 소리하지마. 처음에는 날 죽이려고까지 했잖아. 대신관님은 어디계 시지? 말을 하다말고 경하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했다. 대신관님은 이미 수장 계승에 관한 모든 책임에서 물러 나셨다. 더 이상은 이 일에 관여하실 수 없어. 이미 넌…. 로운은 자리를 뜨려는 경하의 손목을 붙들었다. 넌 미메이라의 수장이니까. 이거 놔!! 경하는 거칠게 로운의 손을 뿌리쳤다. 누구 맘대로 그런걸 정해? 어쩐지…. 살아난 시안이 제국으로 간다고 해도 아무말 안한다 싶더니만 그런걸 꾸미고 있었던 거군. 기가 막혀서! 경하님!! 어딜 가십니까? 따라오지 마!! 경하님!! 사람을 멋대로 가지고 놀지 말란 말이야!!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이 무색하게 경하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 다. 어디든 함께 하자는 말 따위 경하가 사라진 자리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어디로 가신걸까. 대신관이나, 아니면 내 아버님이나 기엘 너희 아버님께겠지. …………. 그러니까 애초에 무리라고 했잖아. 이리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지만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찾으러 가겠어. 그리고 내가 설득하겠어. 기엘이 경하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봐!! 무리라니까. 이리야가 말렸지만 그의 뒤를 이어 로운역시 굳은 얼굴을 한 채 따라 나갔 다. 무리라니까!!! 이봐!!!! 내 말 안 들려!!! 이리야는 그 뒤에서 고함을 질렀다. '바보들 같으니라구….' 기엘의 앞에서 사라진 경하는 어디론가 내쳐 달리고 있었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제멋대로야.' 발 밑을 스치는 낮은 풀들과 그 풀에 맺혀있던 물기가 발목을 적신다. '내게도, 내게도 그런 마음은 있단 말이야!!!' 달려도 달려도 경하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 제발 자신을 붙들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경하가 남긴 발자 국 하나하나에 남겨진다. '하지만 안 돼…, 나는 남을 수 없어. 남고 싶어도 남을 수 없단 말이야.' 가슴에서 울리는 울음 소리 같은 것이 갈길을 찾지 못하고 맴돈다. 경하에게도 그런 마음은 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여행. 그 여행을 함께 해오고 그동안 만났고, 또한 헤어지고,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과 헤어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을 기다릴 사람들이 그리워 진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누나들과 형들, 친구들, 그리고 원래 자신이 속해 있던 그 세상과 그 시간이…. '돌아가야 한다구!!' 아무리 뛰어도 숨은 가빠오지 않는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경하의 몸이 공기중으로 다시 사라졌다. '나는 돌아갈 수 밖에 없어….' *** 오늘로 삼일째군. 도무지 어디 있는지 짐작을 할 수 없으니. 나타났다 하면 사라지고 이번에 는 붙잡는가 하면 또 사라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 파장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고 또 드러냈다가 사라지 곤 하는 경하를 추적하는 일을 삼일 내내 해온 두 기사는 이제 반쯤은 포기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곁에는 일찌감치 두 기사가 하는 일을 포기해버린 남자가 위로를 한 답시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끝마다 돌아가야 한다고 했었잖아. 그만 포기해. 저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리야씨. 가능성이 있는 한. 하지만 얼굴도 볼 수 없는 녀석을 어떻게 설득할 건데? 돌아오실 겁니다. 하시고 싶은 일을 마치시면. 기엘은 팔을 내밀었다. 이렇게… 느끼려고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경하님의 파장을 느낄 수 있습니 다. 어딘가 가까운 곳에 계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엘이 하다 말은 말을 로운이 이어 받는다. 어차피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결국 어디든 돌아 올 수밖에 없으니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바람이 휘이이잉 소리를 내며 불어온다. 상황은 나쁘지도, 그렇다고 좋지도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경하가 남긴 흔적을 따라 요 삼일간 수도 키리엔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두 기사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경하는 자신이 아는 한 모든 장로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가서 그들에게 자신은 돌아가야 한다고 일일이 설득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 다. 물론, 어느 누구도 경하에게 그러마 하고 대답을 한 장로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의견을 모아 결정을 했고 그것을 번복할 의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하는 아마도 그들에게 계속 설득을 당하고 있는 듯 했다. 경하를 만났다고 하는 장로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모두 똑같았기 때문 이다. '몇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화를 버럭 내시고는 사라지셨네.' 라며 모두들 인 상을 찌푸렸던 것이다. 후우. 대신관님께서는 대신전에 칩거 해버리셨고…. 이상한 것은 경하님께서 다른 장로님들은 어떻게 해서든 만나보시면서 대 신관님께만큼은 아직 찾아가지 않으셨다는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신관님의 말에는 당할 수 없어서일지도 모르지. 설마. 그녀석이 그러겠어? 두 기사의 말에 이리야가 툭하고 끼어 들어 찬물을 끼얹었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미안 미안. 상당히 날카로와져 있는 두 사람에게 한마디 하려던 이리야는 깨깽하고 물 러났다. '여하튼 무슨 말을 못하겠어. 쳇.' 이리야는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렇지 나도 이젠 슬슬 거취를 결정해야하는 시기가 오는 군.' 결말이 어떻게 나든,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은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 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예. 들어오십시오.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기엘이 대답을 하자 문이 조용하게 열리고 여관하나 가 들어왔다. 세분을 찾으십니다. 어느분이 저희를 찾으신다는 겁니까? 경하님께서…. 말을 전하려 그들을 찾은 것은 경하의 이름을 아는 얼마되지 않는 여관중 하나였다.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들은 바람처럼 여관을 제치고 달려나갔다. 삼일만에, 그들 대신 경하가 먼저 그들을 찾고 있었다. 저희들은 경하님께서 이곳에 남아주시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첫 의도와는 다르다고 하나, 이미 운명은 그렇게 결정 된 것. 저희 들은 운명에 기꺼히 따르려 하는 것일 뿐입니다. 경하님께서 가진 능력은 이미 저희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수장의 위를 이으실 충분한 자격이 있으십니다. 계속 이어지는 낮은 할아버지(?)들의 목소리에 경하는 슬슬 짜증이 나고 있 었다. 이대로라면 간신히 마음을 굳히고 경하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시유에게 미안해질 뿐이다. '머리가 아파.' 미메이라의 이곳 저곳을 다니 한명 한명 장로들을 설득해보려 한 시도는 결 국 실패로 끝났다. 말많은 장로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야기 해보아야 별 소용이 없을 것이 라는 생각 끝에 벌인 일이었지만 결국 결과는 마찬가지. 경하가 수장궁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장로들에 둘러 쌓 여 경하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꼭 오토리버스 해 논 테이프 같다구.' 뚜웅하게 입을 내밀고 잠자코 듣고 있는 이유는 경하가 무슨말을 해도 소용 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 이삼일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 이럴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냥 한자리에 모이라고 할… 아 왔다!!! 그때까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장로들의 말을 듣고 있던 경하가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엘!! 로운! 이리야! 반갑게 경하는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부탁이니까. 이 할아버지들 모조리 돌려 보내줘. 응? 잠시 두 기사의 눈초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경하는 애써 무시했다. 부탁이야. 경하의 애원에 결국 두 사람은 항복하고 말았다. 저희들이 경하님과 잘 이야기를 해볼터이니 장로님들께서는 이만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로운이 의례를 취하고 하는 말에 장로들이 하나둘, 그들을 돌아본다. 설득은 저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말은 하지 않지만 꽤나 못마땅해 하는 눈초리가 그들에게 화살처럼 박혀온 다. 하지만 자신들이 앉아서 설득을 해봐야 씨알도 안먹힌다는 것을 이미 눈치를 챈 것인지 장로들은 두 사람에게 조용하게 한두마디씩을 하고 자리 를 뜨기 시작했다. 맡기겠네. 부탁하네. 그럼. 비슷 비슷한 말이 계속 그들에게 들려온다. 과연 경하는 그런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 두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 다. 후우-- 시끄러워서 죽을 뻔했어. 여기 시유는 보이지도 않는지. 참나. 경하님. 미안. 마음이 급해서 그런거니까. 이해해줘. 아무리 급하셔도. 그래도 멀리 간 건 아니잖아. 내가 돌아 다녀봤자 미메이라 내에서 다람쥐 쳇 바퀴 돌은 것 뿐인걸. 두사람 모두 내가 갔던데를 하나하나 다 따라 다 녀서 알잖아.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는 경하가 왠지 미워지는 순 간이다. 그럼 저희들이 무슨 말을 할지도 아시겠군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털썩하고 경하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똑같은 소리만 계속 들었더니 머리가 다 마비되는 것 같아. 무슨 세뇌를 시키는 것도 아니고. 경하는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사뭇 무겁다. 안 앉을 거야? 꾹꾹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지끈 지끈하는 머리를 어떻게든 해보려는 경하에 게 이리야는 아무말없이 정화술을 걸어주었다. 이리야 노운. 가나리아스--. 화아--하고 물의 기운이 경하의 머리를 쓸어 내린다. 어. 새 주문이네? 그래. 나유의 수장계승자씨한테 배웠지. 어때? 좀 괜찮아 졌어. 고마워. 히죽하고 경하가 이리야에게 웃어보였다. 이리야는 그런 경하의 어깨를 툭 툭 치고는 그의 옆에 주저 앉았다. 정말 그렇게 서 있을 거야? 나한테는 기엘이랑 로운이랑 그리고 이리야밖 에 아군이 없는 걸.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을 해보자. 탁탁하고 경하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켜보였다. 아아. 미안. 시유. 너도 앉아. 새초롬하게 경하의 뒤에 서 있던 시유가 그제서야 경하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런 시유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면 기엘은 한숨을 내 쉬 었다. 경하님. 응. 앉으라니까. 정말 돌아가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응. 잠시 잠깐의 망설임. 그것을 기엘은 놓치지 않았다. 꼭 돌아가셔야 합니까? …………. 같은 말 자꾸하게 하지마. 알고 있잖아. 저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잖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왠지 기엘이 하는 말에 경하는 자꾸만 마음이 움츠려 들었다. 태연한척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심장이 떨려온다. 그럼 우린 어떤 뜻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로운이 나직하게 가라 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정식으로 말하지. 이런 내 태도도 네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도 있으니까. 말을 마치기 무섭게 로운이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경하를 향해 얼굴 을 들었다. 무슨 의미로 저희들이 받아들였으리라 생각하신겁니까 경하님? 왜. 왜 그래 로운. 그의 옆에 기엘이 똑같은 포즈로 무릎을 꿇었다. 둘다 일어나. 왜 그래. 당황스럽게. 로운이 저런 말투로 나오면 꼭, 무섭도록 진지해지는 걸, 경하는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그러지마. 나 부담스러워. 그리고 이미 처음에 왔을 때 부터의 조건이라는 것 다른 어떤 사람보다 두사람이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내게 맡겨진 일을 해내면, 돌려 보내준다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버리시고요? 그 말을 하는 기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 람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공기가 기엘의 마음을 반영하듯 떨리고 있었다. 그런게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두 사람의 태도는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또 왜 나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곳 에 와서 많은 경험을 했어. 로운이랑 기엘도 만났고, 이리야도 만났고, 바 람술이라는 것도 써보고, 바람의 주인인지 하는 내 분수에 넘치는 존재도 되었고, 내 손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이런 저런 일들 을 당했었어. 잊으려고 해도 절대 잊지는 못할 거야. 특히 여기 있는 사람 들은 말이야. 그럼 부디 이곳에 남아주십시오. 경하님. 기엘이 고개를 숙인다. 기엘.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자신의 기사인 기엘을 바라보는 경하는 가슴이 메어 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보다도 충실했던 사람이다. 진심으로 부탁 드립니다. 이곳에 남아주십시오. 기엘과 똑같은 마음으로 로운이 간청한다. 로운의 반말조가 훨씬 익숙한 경하이지만 저렇게 존칭을 써 자신에게 말을 해오는 로운역시 그가 아는 로운이다. 제가 부탁 드려도 아니되겠습니까? 나, 로운의 속 많이 썩였잖아. 내가 있으면 로운 얼마 못살걸? 속이 타서 ? 경하님!! 그런 두 사람의 기사를 보며 경하는 가슴아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시유가 있어. 어려운 결정이지만 시유도 받아주었고, 나는 시유한테 내가 줄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줄 거야. 물론 세나케인까지는 어떻게 될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시유는 좋은 수장이 될 거라고 생각해. 뭐 로 운이랑 기엘은 좋은 선생님 이니까. 나를 가르치는 것 보다는 시유를 가르 치는건 더 쉽지 않겠어? 적어도 나처럼 졸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는 일 은 없을 거 아니야. 경하가 애써 농담을 해보지만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 무서우리만치 어색한 침묵속에서 경하는 말을 이었다. 시유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미메이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 잖아. 시유는 좋은 수장이 될 거야. 부탁해. …………. 내 마지막 부탁이자…. 경하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두사람에게 가장 잘 이해를 시킬 수 있 고, 그리고 두사람이 가장 거절하기 어려운 단어를. 내 마지막 부탁이자 명령이야. 시유의 기사가 되어 줘. …………!! …………!! 나를 옆에서 돌봐주고, 가르쳐주고, 아껴주고… 계속 지켜준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에 경하의 진심이 묻어 나온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해오고, 바람술을 가르쳐주고 언제나 함께 하고,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경하를 지켜주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진실중의 진실. 시유의 곁에서…. 내게 해주었던 그대로…. ………다. 고개를 숙인 기엘의 입에서 흐느낌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할 수 없습니다. 기엘…. 할수 없습니다. 절대로 할수 없습니다. 경하님께 하던 그대로라니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기엘!! 저는 경하님 단 한분의 기사입니다!! 절대로 그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 고개숙인 기엘의 목에서 울음섞인 목소리가 피처럼 짙게 흘러나왔다. 절대로, 제 목에 칼을 대신다 해도 따를 수 없습니다! 기엘… 나, 나는. 제가 한 맹세는, 저희들이 한 맹세는 모두 경하님의 이름을 걸고, 경하님 단 한분을 위해 한 맹세입니다. 그 맹세를 깰 생각은 제 목숨을 모두 달라 고 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러니까 내 부탁이라고 하잖아. 내가 하는 말은 그대로 믿어준다고 했잖 아. 응? 내가 하는 것은 다 믿어준다고 했잖아. 그래도 그것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물기. 그 물기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기엘은 거칠게 자신의 라이트를 뽑아 경하 의 앞에서 깊이 바닥에 내리 찍었다. 쿠웅--하고 울리는 소리가, 쩌억 하고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마치 기엘의 가슴에 나는 상처 소리와도 같았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는 기사로써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마지막 말은 정말로 울음에 뒤섞여 잘 들리지 않는다. 경하의 꼭 다문 입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쿠우웅----.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던 경하의 귀에 또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로운?! 다물은 입에선 단어라 할수 있는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단지 로운은 기엘과 마찬가지로 그의 라이트를 뽑아 기엘과 나란히 바닥에 내리 꽂았을 뿐이었다. 파르르 하고 라이트의 빛나는 검신이 흔들린다. 마치 경하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대변하듯…. 이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경하님. 로운은 한마디 한마디, 흔들리고 있는 그의 마음이 행여 흘러나올까 두려운 듯 천천히, 그리고 바닥에 깔릴 듯이 말했다. ……안 돼. 그정도면 되었어. 두사람이 저렇게 말하고 있어도 누구보다도 널 잘 알고 있는 걸. 이해할거야. 아니야. 이리야…. 그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울먹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던 경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려고 했었다. 적어도 이들에게 만큼은…. 기엘, 로운. 나도 두사람과 헤어지기 싫어. 내가 현실의 세계에 있었다면 두 사람같은 사람은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거야. 이리야도 마찬가지야. 그 러니까 헤어지기 싫어. 목소리는 또렸했지만 어느새 꼭 쥔 경하의 주먹 위에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 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어. 느낄 수 있지 않아? 내가 이런 힘을 가지고 싶어서 가지게 된 건 아니지만, 내게는 세나케인이 있고, 헤메 트가 있고 하나르가 있고 에사라까지 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교차한다. 하지만 결국 선택의 여지는 없다. 경하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어느 한쪽을 그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경하에게 주어 졌다면 미 친 듯이 고민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을 해볼만한 여지도 경하에겐 주어져 있지 않았다. 어느 누가 가르쳐 준것도 아니었지만 경하는 알 고 있었던 것이다. 선택의 여지 따위 경하에게 허락된 단어가 아니었다. 차라리 고민을 할수 있었으면 하고 경하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었다. 내가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건 내가 이곳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야. 내가 이곳에 온건 시안 단 한사람의 의지도 아니고, 내 의지도 아니야. 내 가 이곳에 불려온 것은 바람의 의지와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모두의 의지가 부른 거야. 아슈레이의 모든 생명이…. 그러니까 기엘도, 로운도, 이리야도 그중의 하나야. 그리고 내가 할 일은 다 끝났어. 나는 이곳에 새로운 의지 를 부여했고, 그건 내가 다른 세계의 인간이기 때문이 할 수 있는 일이었 어. 그리고 난… 다른 세계의 인간이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어. 내가 원하더라도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단 말이야…. 뚝뚝뚝. 눈물이 떨어진다. 내가 이곳에 오래 있으면 오래 있을수록, 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 그 러니까 난 돌아가야 해. 경하님…. 내가 여기서 한일은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을 위해 한 거야. 아슈레이를 위해서라는 거창란 이유따위 난 사실 몰라. 로운이 여기에 존재하고, 기엘 이 여기에 존재하고, 또 이리야가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었을 뿐이야. 이 기적이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그것만큼은 진실이야. 내 진심이라고. 스윽--하고 물기가 묻어나는 얼굴을 이리야의 손이 감쌌다. 그만해. 이제. 이녀석도 힘들다고. 나는 진심으로 기엘과 로운과 이리야가 사는 세계를 지키고 싶었어…. 그래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 그러니까 …이젠 돌아가고 싶어…. 그만하라니까. 돌아가고 싶어……. 알았어. 돌아가. 네가 원하는대로 해줄게. 그만 울어. 네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 해줄게. 그러기위해 내가 살아 있는 거니까.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왠지 경하의 얼굴을 가린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리야는 그냥 그렇게 경하의 얼굴을 가리고 서 있었다. 경하를 바라보고 있는 두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두 폐업기사 양반도 마찬가지지? 원하는데로 해주자고. 그게 이녀석 에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이야. 손으로 가린 사이로 흘러나오는 눈물에 경하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닦아 줄 수도 없는, 닦아 낼 수도 없는 진실. 그 진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침묵속에서 네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 대신관님께서 칩거하시고는 그대로 아무도 만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으니. 참나. 힘들어. 그래. 경하의 앞에 그대로 자신들의 라이트를 내려놓은 두 남자는 어두운 밤, 대 신전의 앞에서 높이 솟아 있는 대신전의 탑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 었다. 설마 대신관님께서 마지막 걸림돌이 되실줄은 몰랐어. 그러게…. 경하님도 아시고 계시던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지 경하님을 돌려보낼 주문을 아시는 것은 대신관님 뿐이니. 어떻게 할까? 글세?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로운? 뭐…. 자신을 바라보는 기엘의 얼굴을 마주보며 로운은 쓴 웃음을 지었다. 바라는 것은 결국 하나뿐이다. 쳐들어가야지 뭐. 역시 그렇겠지?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이트를 빼놓고 온 거 잊었다. 왜? 협박이라도 하려고? 대신관님을? 로운의 말에 기엘이 농담조로 이야기해본다. 하지만 그 농담이 진담임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다. 정말로, 협박이라도 할 생각을 두사람은 모두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요하면 해야지. 응…. 이걸로 미메이라에서 추방을 당한다고 해도, 어쩔수 없잖아. 그래. 투욱 투욱 하고 그들은 서로의 주먹을 마주대었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장난을 치려고 마음 먹었을 때면 의례히 하던 행동 이다. 일이 끝나면 우리 술이나 한잔 하러 가자고. 응. 아직 그 술집 멀쩡하겠지? 물론 외상값도 있을지도 몰라. 후우--하고 기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둑 어둑한 하늘. 그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자락에 왠지 시선이 간다. 신전 꼭대기 위에서 이미 기다리고 계시잖아. 더 이상 그곳에 있으면 추위 로 고생하실거야.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 경하님은 건강하신걸. 그럼… 이제 가볼까? 좋아. 서로의 어깨를 마주대고 두 사람은 나란히, 신전의 입구로 걸어갔다. 굳게 닫혀 있는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절대 닫혀 있을 수 없는 문으로…. *** 결국 돌아가시는 군요. 말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두 사람 역시. 말릴 수 있었다면 우리들에게도 가능 했을 겁니다. 늙은 네 사람의 장로가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허허허허. 주문을 내주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을 기세였다고 제가 말 씀 드렸습니까? 하라스다인 장로. 하하하하. 그녀석이 그런 소리를 했다니, 혼쭐을 내야 겠군요. 감히 대신 관님앞에서. 이런, 그런 건 우리 아들의 전매 특허인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나 봅니 다. 기엘 녀석은 원래 얌전 해보이지만 화가나면 집안에서 아무도 그녀석을 말 릴 수가 없었지요. 그래. 시유님은 어떠십니까? 경하님과 아직까지 함께 계십니다. 대답은 시유의 아버지인 레이죠 장로의 입에서 나왔다. 돌아오시면 처음부터 시작을 해야겠지요. 어느새 그의 시유에 대한 존칭은 조심스럽게 바뀌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모두 기사직을 때려 치우겠다고 했으니 그것도 문제군. 도대체 누굴 또…. 그러게나 말입니다.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예요. 네 사람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신전 꼭대기에서부터 전해오는 생생한 파장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조용히… 그 파장이 사라지는 순간을. 고마워. 경하는 기엘이 내미는 얄팍한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경하에게 내미는 기엘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경하는 알수 있었지만 아무말 하지 않았다. 대신 경하는 기엘의 손을 잡아 그대로 당겼다. 키가 큰 기엘의 턱아래로 경하의 머리가 닿았다. 처음이네. 내가 기엘한테 이러는 거…. 글쎄요. 경하님. 수차례. 기엘은 경하를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경하를 감싸 안았던 적이 있 었다. 미안… 있어주지 못해서. 아닙니다. 정말 미안해. 토닥 토닥 하고 기엘은 경하의 어깨를 두들겼다. 두 번다시 이런 행동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유 잘 부탁해….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지킬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고집쟁이. 하하하. 기엘의 품을 벗어난 경하는 이리야에게 다가갔다. 이리야는 입꼬리를 올리고는 경하에게 장난을 치듯 말했다. 괜찮으신가요? 아름다운 아가씨? …………. 순간 닭살이 두두둑 솟아나는 걸 경하는 참고 또 참았다. 이리야. 끝까지 이럴꺼야? 뭐. 마지막이잖아. 처음은 마지막처럼, 마지막은 처음처럼 이랄까. 농담은 관둬. 잘가라. 건강하고. 응. 고맙다. 꾸욱 하고 이리야가 경하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마지막으로 경하는 로운의 앞에 가서 섰다. 왠지 항상, 기엘보다 로운쪽이 어렵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로운. 스윽--하고 로운의 손이 올라온다. 은색의 머리카락이 로운의 손에 닿았다. 처음에 이렇게 한건 로운이었는데…. 그렇지. 문득 경하는 무엇인가 생각이 났는지 로운의 손에 있던 머리카락을 잡아 당 겼다. 그다지 힘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경하의 손안에 있는 머리카락이 순간 바람을 일으키며 길게 자라났다. 다음 순간 그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잘리어 경하의 손에 남았다. 이건 좀 유치한거 같지만 난 이곳에 남기고 갈 수 있는게 없으니까. 잘라낸 머리카락을 경하는 불쑥 로운에게 내밀었다. 으음. 역시 유치한가. 짧아진 머리카락이 왠지 어색한 기분마져 들게 한다. 아니. 고맙게 받지. 로운은 경하의 손에서 은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받아들었다. 역시 로운은 그 말투가 좋아. 나한테 존대 같은 거 하면 로운 같지 않거 든. 그건 미안하군. 웃고 있지만 자신의 얼굴의 가면과도 같다는 것을 로운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으음 역시 머리카락은 너무 유치하다. 아! 그렇지. 그거 줘봐. 애써 로운이 받아들은 머리카락을 다시 받아들은 경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들리지 않는 주문을 외웠다. 길게 길은 머리카락이 경하의 손에서 떠올라 넓게 팔을 벌리는 경하의 손과 손 사이에 길에 늘어섰다. 하나에서 둘로, 다시 셋으로 늘어가는 빛과 바람의 가닥. 그 사이로 은색과 금색, 붉은색과 푸른색의 빛이 쉴세없이 오가는 것이 그 들의 눈에 환상적이게 비추어졌다.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 빛은 수그러 들고 그들의 앞에는 은색으로 찬란 하게 빛나는 길쭉한 물건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하나는 로운에게, 하나는 기엘에게… 그리고 이건 이리야에게…. 경하의 손짓을 따라 길쭉한 물건이 하나씩 호명되어진 사람의 앞으로 바람 에 실려날아갔다. 이건…. 눈앞에서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물건을 세 남자는 모두 동시에 받아들었 다. 그것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검이었다. 들었어. 라이트는 바람의 엘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뭐 이건 네가지의 힘을 모두 쓴 거니까 더 튼튼할 거야. 헤헤. 감사히 받겠습니다. 기엘은 그 검을 받들고 경하에게 예를 취해보였다. 고마워. 고맙군. 로운과 이리야도 같은 행동을 하며 경하에게 말을 건낸다. 그러지마. 내가 뭔가 대단한 거라도 준거 같잖아. 아아. 로운. 기엘좀 부 탁해. 기사 폐업이니 뭐라고 해도… 로운의 말이라면 들어 줄 거야. 명심하지. 자아 그럼…. 천천히 경하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 앞으로 바람의 엘이 귀환의 주문을 담은 양피지를 날아왔다.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은 경하는 잠시,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 다. 돌아가면… 이곳의 일을 모두 기억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가 어느새 경하의 손 위에서 바람의 엘로 화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이곳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남아 있을 수 있는 거라 면,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바람의 엘로 화한 양피지가 있던 자리에서부터 한줄씩 두 줄씩 바람의 엘이 만들어져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로운이랑 기엘도, 이리야도, 그리고 이곳도… 경하의 말소리가 순간 바람소리에 휘말려 가기 시작했다.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의 사이 사이로 바람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경하의 몸에서 시작된 굵은 빛 줄기 하나가 순간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어 디론가 멀리 사라졌다. 아마도 시유에게 가는 경하의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4개의 신형이 동 서 남 북 사방에 나타났다. 은빛으로 빛나는 바람의 세나케인이 남쪽에, 붉게 타오르고 있는 불꽃의 에 사라가 서쪽에, 출렁이는 물과 같은 물의 헤메트가 북쪽에, 그리고 금색으 로 반짝이는 대지의 하나르가 동쪽에 나타났다. 그 4개의 신형은 경하를 둘러싸고 마치 그를 보호하려는 듯 강력한 파장을 내뿜기 시작했다. 순수한 엘이 넘칠 듯이 경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밀려왔다. 그 파장은 그들 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만큼 강력한 순수한 신들의 힘이 담겨 있는 것. 그 안에서 고요하게 서 있는 경하는 마치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 았다. 눈에는 아직도 그를 배웅하는 남자들의 얼굴이 보인다. 「…절대로 잊지 않을게.」 소리대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경하의 인사말이 들려온다. 「그리고 고마워. 케인. 너도 절대 잊지 못할거야. 바람의…세나케인.」 그리고 경하가 눈을 감는 순간. 경하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소용돌이와도 같은 바람이 하늘로 높이 치솟아 올랐다. 눈을 뜰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바람이었지만 경하를 배웅하는 세 남자의 눈 에는 경하의 마지막 모습이 똑똑히 비추어지고 있었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검은 색으로 변해가는 것이 그들의 눈에 들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어두운 색으로 변하는 순간…. 사방을 둘러 싸고 있 던 4개의 빛이 동시에 하늘로 높이 경하의 뒤를 따르듯 솟아 올랐다가 동서 남북 사방으로 그대로 곧장 퍼져나갔다. 바람이 잦아들고 있었다.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하게 불어 올라가던 소용돌이는 멈추고 그 바 람이 치솟아 올라간 하늘 위에서는 양피지 한 장만이 그대로 고요히 바닥으 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것을 제일 먼저 집어든 것은 로운이었다. 남은 것은 결국 이것 뿐이군. 그는 조용히 양피지를 말아서 그의 뒤에 다가온 기엘에게 건냈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로운…. 그런 얼굴 하지마. 그녀석이 걱정할거다. …………. 내려가자.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 갈게. 얼굴을 들지 않는 친우의 어깨를 로운이 천천히 감싸 안는다. 그래…. 조금만 더 있다가…. 그래…. 더 있다가…. 기엘의 얼굴이 닿아 있는 어깨가 어느새 뜨겁게 젖어오고 있다는 것을 로운 은 느낄수 있었다. 그래. 조금 더 있다가 가자. 그대로 로운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리야 역시 그곳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 다. 조금 더 있다가… 이 바람이 잦아들면 그때 내려가자 기엘. 바람이…, 경하가 남기고 간 바람이 그 젖은 어깨를 모두 마르게 할 때까 지. 오래도록 그렇게 그들은 그 자리에서, 경하가 남기고 간 바람의 속에서 서 있었다. *** 정신이 드니 경하야? 어………. 여보!! 여보!! 경하가 정신이 드나봐요!! 경하야!!! 익숙하지만 왠지 낯설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힘들게 떴다. 경하야…. ……………. 잠깐. 아주 잠깐. 흐릿하게 비치던 시야가 다음 순간 맑아진다. 그 시선 안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들어찼다. 기엘? 로운…? 경하야!!!! 뜻 모를 단어들이 아들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울먹이던 여인의 목소리가 순 간 경하의 이름을 불렀다. 아. 엄마… 아빠. 그래!! 엄마다. 정신이 들어? 응? 순간 경하는 자신이 부른 이름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 엄마. 나…. 그래. 정신이 들어서 다행이다. 흐흑.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하나둘씩 늘어간다. 하나는 어머니의 또 다른 두 개는 누나들의 울음소리다. 그리고 또 하나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경하의 심장을 아프도록 죄어 왔다. '그래. 돌아왔어.' 주르륵---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돌아왔어. 잊어버리지 않고….' 어디 아프니? 응? 아. 아니야. 엄마. 괜찮아.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에 경하는 따스함을 느꼈다. 형은? 네 형은 금방 도착할거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리고 그 뒤로 누나들의 울음소리가 섞인 목 소리가 들려온다. 야이 X할 녀석!! 이 누나들은 안 찾고 경원이만 찾아!! 나쁜녀석. 그러고는 다시 통곡하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경하는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미안. 큰누나. 감각이 하나둘씩, 손가락 끝에서부터 살아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하는 눈을 깜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울지마. 난 괜찮으니까. 그래. 그래 내 새끼. 자신을 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어머니를 안고 경하는 식구들에게 미소를 지 어보였다. '정말로 잊지 않고 돌아왔어.' 눈물과 뒤섞인 웃음소리가 경하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잊지 않고……….' 후일. 신문에는 작은 기사가 났다. 관악산 기슭에서 실종되었던 고등학생이 한달 만에 아무런 이상없이 관악산 등산로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사였다. 단지 이상이 있다면 한달동안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뿐.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는 그저 그런, 신문의 작은 귀퉁이를 장식하는 평범한 기사였을 뿐,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얼마 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직 그 주인공인 경하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end- 에필로그 아직이냐? 몰라!! 입 좀 다물고 있어. 왜 따라와서 난리야. 시끄러 이 녀석!! 콰앙 하고 머리가 지이이이잉 울린다. 왜 때리는데!! 이 형님이 특별히 시간을 내서 함께 발표를 봐주러 왔는데 왜 난리야? 난 리는. 쪽팔리잖아!! 누가 이런걸 이렇게 직접 보러 오냐? 넌 옆에 잔뜩 깔려 있는 사람들이 눈에도 안보이냐? 멍청이. 누가 멍청인데!! 멍청이지. 그렇게 이 형님이 과외를 시켜 줬는데 기껏 온게 여기냐? 그래! 나 머리 나빠. 어쩔래!! 흥이다. 흥.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비의 거대한 유리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래도 찬바람은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다. 쳇. 이런건 전화로 문의 하면 되는데. 시끄러워. 직접 와서 보는 것도 공부가 되는 거야. 오래 기다리지 않아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두명이 길고 긴 명단을 가져와 게시판에 붙이는게 보였다. 어? 나왔다. 누군가가 하는 말에 우루루루루----하고 사람들이 일제히 그 자리로 몰려갔 다. 정말로 전화 한통, 컴퓨터에다가 마우스로 클릭 한번만 해도 되는 세상이건 만 직접 자신의 눈으로 합격 발표를 보러오는 사람은 아직도 많은 모양이 다. 우에. 사람 정말 많다. 너 여기 있어!!! 그말을 마치자 마자 경하의 형인 경원이 그 사람들 사이로 요리 조리 잘도 파고들며 사라져 버렸다. 하이고 행동은 되게 빨라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경하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같이 와준 형이 고맙기는 고마웠기 때문이다. '물론 형한테는 입이 삐뚤어져도 고맙다는 소리는 안하지 훗훗.' 나름대로는 소신있게 그리고 자신있게 지원한 학교이고 과이지만 합격 발표 라는 것은 심장을 떨리게 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한달간의 기억이 없는-사실은 아니지만- 경하를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책 상에 불러 앉혀서 공부를 시킨건 다름아닌 저 극성맞은 형이었다.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은 사실 가득하지만 왠지 형에게는 그 고맙다 는 말 한마디가 잘 안나온다. 후우. 춥기는 춥네. 합격 발표가 나는 날이지만 로비에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다. 사람들은 모조리 앞으로 몰려가고 뒤에 남아 있는 것은 경하처럼 뒤에 남겨 진 수험생들뿐. 모두들 소심해서인지, 엉거주춤 발끝을 들고 멀리를 바라볼 뿐이다. 주위 몇미터 안에는 아무도 없는 이른바 군중속의 고독이랄까? '헤에…. 시간이 걸리네.' 고개를 갸우뚱 하다 말고 경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살짝 눈을 감고 경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서부터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진동이 전해져오고, 웅성웅성하는 소리 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사이에서 경하는 고요하게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를 찾아내었다. 쉬이이이--- 또는 쏴아아아아 하는, 때로는 휘이이이----하는 바람소리들이 하나둘씩. 다른 소리들 대신에 경하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흐릿했지만 점점 경하의 귀에는 오로지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 바 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것 만은 남았구나.' 현실에서는 한달간의 시간, 그러나 경하가 보낸 그 실제의 시간동안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은 지금도 눈에 선할 정도. 그것은 지금 이렇게 문득 순간 순간 바람의 소리를 듣고 있을 때마다 다시 눈앞에 떠오르곤 한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것이 하나의 능력이라면 현실로 돌아온 경하에겐 그 능 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바로 그 아슈레이의 기억과 함께. '잊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뻐억------!!!! 야!! 왜 멀쩡히 서서 백일몽은 백일몽이냐? 우윽. 아프잖아!!! 이 바보 형아!!! 언제 나타났는지 멍하게 서서 바람소리를 듣던 경하의 뒷통수를 있는 힘껏 후려친 경원이 경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때려!!! 정신 놓고 있으니까 그렇지. 쯧. 가자!! 어딜!!! 어디긴 합격증 받으러 가자니까. 에? 붙었어 임마!! 활짝---하고 웃는 형의 얼굴이 경하를 바라본다. 정말? 그래!!!! 진짜지? 이 형한테 고마워 해!! 너한테 한 과외 남한테 해줬으면 지금쯤 난 부자 되었을 거다. 에에. 쩨쩨하다. 동생한테 과외 해줘 놓고. 대신 엄마가 이런거 저런거 많 이 사준거 다 알아!!! 시끄러 임마!!! 다시 퍼억--하고 경하의 등을 친다. 안 떨어지고 붙은 것도 다행으로 알아!! 그나마 1차는 떨어져서 내가 얼마 나 죽도록 혼났는 줄 알아? 헤헤헤헤.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경하는 그렇게 해실 해실 웃으며 형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그만 웃어 임마. 누가 너 보면 바보라고 하겠다. 헤헤헤헤. 귓가에는 드물게 들으려 노력하지도 않은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웃지마!! 히히히. 형. 왜?!! 고마워. …………. 히히. 에라이!!!!! 파악하고 경원이 달려들어 경하의 목을 졸랐다. 그걸 인제 알았냐!! 으아아악. 아파 아파 아파-----! 파다다닥 하며 경하는 힘들게 경원의 팔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냅다 형을 한 대 치고는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아프잖아!!!! 시끄러워 이녀석!! 경하의 형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쫓아갔다. 얼굴에 닥쳐오는 바람은 차가웠지만 경하는 마냥 신이 나서 내달렸다. 그뒤로 어느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는 않지만 몇줄기의 바람이 따라가고 있 었다. 마치 따라가는 것이 그들의 주인인 것 마냥. 스쳐지나가던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